번 호 : 1 / 83 등록일 : 1999년 06월 23일 04:46 등록자 : CHO1971 조 회 : 6262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1.( 2 회는 저 위에..^^;;)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신이 알파를 창조했을 때 탄생과 축복의 의미를 알았다. 신이 카오스를 창조했을 때 비로소 분노와 징벌의 의미를 배웠다. 제 1 장. 약속 "메디아 약속하거라." 거대한 블랙 드레곤의 나직한 음성이 조그만 인간 여자아이의 이름을 부르고 있 었다. 열세살의 어린 메디아는 자신을 부르는 드레곤 혼 케드리안의 커다란 검은 눈동자를 올려다 보았다. "살아있는 동안 내 아기를 돌봐주겠다고 약속해다오." 블랙 드레곤은 자신의 아랫배에 소중히 품고 있는 윤기나는 까만 알을 바라보며 말했고 메디아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상하다는 듯이 자신의 앞에 있는 드레곤을 보았다. "케드리안 저는 백년이면 죽게 될 인간인걸요." 드레곤의 입이 살짝 당겨지며 미소와도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백년이면 충분하단다. 너는 앞으로 강해질 거란다. 내 아기가 허물을 벗고 성년 이 될때까지 앞으로 백년간 돌봐줄 수 있는 자는 너밖에 없을거다. 내 아기를 지 켜주겠다고 약속해다오." 어린 메디아의 보라빛 눈동자가 블랙 드레곤의 심연과 같은 눈동자를 뚫어질듯 응 시했다. "당신이 있쟎아요. 케드리안이 돌봐주는데 제가 무슨 소용이 있나요?" "나의 어린 메디아. 모든 일이란 알 수 없는 것이란다. 확신하지 말고 믿지도 말 아야 한단다. 내 아기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해라. 내가 널 지켜주듯이......" 케드리안이 품고 있는 윤기가 흐르는 검은 알은 그 크기만 해도 메디아가 한꺼번 에 볼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몇달전 혼 케드리안이 알을 낳았을때 어린 메디아는 새까맣고 단단한 드레곤의 알에 온 정신을 빼앗겼고 날이 갈수록 정이 들어 이제 는 날마다 정성스럽게 알을 돌봐 주고 있을 정도였다. 메디아의 눈에 잠시 슬픈 그림자가 스쳐지나 갔고 그녀는 드레곤에게서 등을 돌렸 다. "싫어요. 당신의 알은 당신이 지켜요. 아기를 내게 떠넘기지 말아요." 메디아는 케드리안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거대한 공동을 빠져나와 자신이 항상 생 활하는 마법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메디아는 오년전 자신이 혼 케드리안에게 맡겨지던 날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도 그녀의 어머니 블러디나가 오늘처럼 케드리안에게 약속을 요구했 었다. "케드리안 약속해." 바싹 말라 썩어 가는 앙상한 뼈마디에 살조차 탈색되어 회색 빛으로 물든 처참한 모습으로 누워 있는 블러디나는 이제 겨우 여덟살이 되는 어린 딸 메디아와 자신 의 오랜 친구이며 강력한 동지였던 혼 케드리안을 강렬한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블러디나는 자신이 이제 죽을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메디아도 자신의 사랑 하는 어머니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흑마법의 정수를 터득했다는 마스터였으며 마녀의 피를 물려받은 블러디나가 마법 의 힘을 소멸 당한채 저주받아 죽어 가고 있는 것이었다. 메디아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고 존경했던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면서 가슴에서 치밀어 오르는 슬픔을 참아내고 있었다. "약속해 줘. 내 딸 메디아를 지켜준다고......" 힘겹게 말하는 블러디나에게 검은 머리가 출렁이는 케드리안이 조용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블러디나는 안심한 표정을 지으며 이제 남겨질 어린 딸 메디아를 미소띤 얼굴로 바라 보았고 메디아는 마녀로서 가장 강했던 자신의 어머니가 마지 막 순간까지 그 당당함을 잃지않는 모습을 조용하게 지켜보았다. "커억....컥...." 한순간 몸을 휘청이며 구토를 하는 블러디나의 입술에서 검은 피가 흘러내렸고 그 녀의 몸은 한층 더 오그라드는 듯했다. 그러나 메디아는 조금 물러선 자리에서 꼼 짝도 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냉정해 보일정도로 침착하게 어머니의 죽음을 초연한 모습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컥...흡후.. 메디아." 갑자기 품에서 짙푸른 등껍질을 가진 거북이를 꺼내 메디아에게 건네주며 손가락에 끼고 있던, 이제는 손에서 흘러내리는 마법의 반지를 빼내어 메디의 손가락에 끼워 준 블러디나는 지난날 아름다웠던 자신의 손가락이 타는듯이 썩어가는 것을 보면서 잠시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더니 그녀는 딸의 손목을 꼭 잡아 당기며 몸을 바싹 들 이대고 강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잘 들어라 메디아. 앞으로 케드리안이 너를 지켜 줄거란다. 내 앞에서 약속해라. 네가 강해질 때까지 절대로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고. 함부로 너를 드러내서도 안된다.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일들도 잊어라. 아무것도 다시 생각하지 말으렴. 너 자신이 마녀 블러디나의....나의..딸이란것만 잊지 말아다오. 알겠니?" 메디아는 잊드라고 말하는 어머니의 눈 앞에서 차마 거부의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네. 약속해요." 블러디나는 자신의 지난 시절 그녀의 친우였던 블랙 드레곤 혼 케드리안의 레어에 서 사흘을 고통속에 더 지내고 나서야 서른 여덟의 나이로 온몸이 쪼그라들면서 검은 액체화되어 한줌의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그녀의 어린 딸 앞에서 비참한 최 후를 맞이할 수 있었다. 그녀의 어린 메디아를 케드리안에게 부탁한채...... 오년이 지난 지금 메디아는 드레곤의 레어에서 일상이 되어버린 일을 하고 있었다. 자신보다도 몇 배가 더 큰 드레곤의 알을 적당히 굴려주고 반들반들 윤이 나도록 닦아내는 일은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였지만 메디아는 그 일을 즐겼고 알이 깨어 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알이 부화될 때까지 꼼짝도 못하고 알을 품고 있어야 하는 어미 드레곤은 벌써 일 곱달이 지나도록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고 틈만 나면 잠을 자곤 했다. 계절이 바뀌 고 시간이 흘러 봄이 왔지만 케드리안과 메디아가 기다리던 부화의 시기인데도 어 쩐 일인지 알은 꿈쩍도 안하고 날짜만 흘러가고 있었다. "메디아 약속해다오." 또 다시 케드리안의 엉뚱한 부탁이 들려오고 검은머리를 양갈래로 땋아 내리고 고 깔모자를 눌러 쓴 보라빛 눈의 메디아는 작은 몸을 일으키며 드레곤을 외면하며 다 른 말을 꺼냈다. "왜 알이 그대로죠? 이제 부화될 때가 되지 않았나요?" 조용한 목소리가 오가고 거대한 공간에는 언제나처럼 침묵의 공기가 휩싸이며 나 직한 드레곤의 숨소리만이 들렸다. 항상 그랬다. 메디아와 케드리안이 살고 있는 이곳은 언제나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어린 메디아는 오로지 마법의 방에서 마법을 공부하며 지내거나 연구를 했고 케드리안은 드레곤대로의 생활을 했다. 식사도 각 자 알아서 했고 잠도 따로 잤으며 생활도 달랐다. 그들이 함께 있는 시간은 오직 케드리안이 메디아에게 마법을 가르쳐주는 경우뿐이었다. 분명히 몇 달 전만 해도 그렇게 지냈었다. 하지만 메디아가 알을 돌보기 시작하면서는 거의 날마다 함께 지 내고 있었다. 그러나 어쩌다가 서로 말을 주고받아도 간단하게 몇 마디를 나눌뿐 여전히 케드리안과 메디아 사이는 조용하기만 했다. "블러디나도 너처럼 고집이 셌지." 외면했던 시선을 다시 케드리안에게 고정시키며 메디아는 오년 만에 어머니의 이야 기를 꺼내는 케드리안의 목소리를 들었다. "내가 블러디나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녀가 너처럼 어렸을 때란다. 조그만 꼬마 마 녀가 고집만 세어서 나에게 대들기 일쑤였지. 내가 블러디나를 좋아한 건 그녀의 그런 겁없는 자긍심과 고집 때문이였을거야." 문득, 케드리안은 메디아의 고집스런 외모를 보며 오년 전에 죽은 블러디나를 생 각햇다. 메디아는 시간이 지날수록 블러디나를 꼭 닮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성격 은 조금 달랐는데 메디아는 인간 여자아이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냉정하고 침착했 다. 블러디나가 다혈질에 천방지축이였던것에 비하면 많이 다르다고 할 수도 있었 지만 그 고집스러움과 자긍심에 있어서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케드리안, 알이 이상해요." "응?" 알 옆에 바싹 달라붙어 있던 메디아는 알에서 미세한 진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 을 금방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녀는 가슴이 두근두근 뛰는 것 같았다. '알이 부화하는 걸까?' 케드리안이 몸을 일으켜 긴 목을 굽어 알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까만 알이 제자 리에서 요동을 치더니 알 껍질에 작은 균열이 생겨나고 빠삭빠삭 깨지며 안에서 우는 듯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케드리안과 메디아는 숨을 죽인채 기다리고 있 었고 깨진 아릐 틈새로 검은 비늘이 덮힌 작은 몸체가 꿈틀거리며 밖으로 나오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두꺼운 알 껍질은 쉽게 벌어지지 않았고 그렇게 한참을 요 동치고 나서야 새까맣게 반짝이는 비늘로 온몸이 뒤덮힌 새끼 드레곤이 알에서 바 둥거리며 기어 나왔다. 새끼 드레곤은 힘겹게 알 껍질에서 기어 나오더니 한동안 눈을 뜨지 못하고 몸에 비해 너무 작아 보이는 날개를 퍼득 거리려고 애썼다. 새끼 드레곤의 몸은 거대한 케드리안의 몸체에 비하면 너무 작고 연약해 보였고 이제 겨우 뜨기 시작하는 붉은 눈동자는 믿을 수 없을만큼 크고 맑아 보였다.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몸을 몇번 바둥거려 일어난 새끼 드레곤은 꿈뻑이는 눈으로 제일 가까이에 있는 긴장한 메디 아를 보더니 자신의 몸을 꼬리로 감싸는 케드리안을 올려다 보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소리를 웅얼거리며 작은 몸집으로 어느 쪽으로 가야할지 갈팡질팡하는 모습이 우스꽁스러울 정도로 귀여워 보였다. 제자리에서 고개를 가누지 못하며 힘 들게 서있던 새끼 드레곤은 자신이 깨고 나온 알 껍질을 보더니 갑자기 생각난 듯 코를 박고 허겁지겁 먹어대기 시작했다. "배가 고픈가 보구나." 케드리안이 흐뭇한 웃음소리를 내며 방금 부화된 새끼를 사랑스러운 듯이 보았다. "에....원래 저걸 먹는 거예요?" 숨도 못 쉬고 있던 메디아는 조금 황당한 기분으로 새끼 드레곤을 보았다. 특별히 무얼 기대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뭔가 자신이 생각하던 것과는 많이 다른다는 느낌 이 드는 메디아였다. "그래. 알 껍질을 먹으면 영양보충이 된단다. 오랫동안 알속에서 지내다가 나오면 배도 고프고 몸도 허약하니까." "그래요?" 메디아는 게걸스러운 모습으로 먹고 있는 까만 새끼 드레곤을 보며 생각난듯 말했 다. "그나저나 레드 드레곤인줄은 미처 몰랐네요." "음? 뭐가 말이니?" "아버지 말이예요. 눈이 새빨간것이 맞죠?" 케드리안이 한동안 바람나서 돌아 다닐때도 신경쓰지 않던 메디아는 새끼 드레곤의 붉은 눈동자를 보며 그 상대가 레드 드레곤이라고 생각하게 된것이다. "호호...그래 맞아. 레드 드레곤였지. 킬리 화산에 살고 있는 드레곤이란다." 킬리 화산은 판타리아 대륙의 북동쪽으로 뻗어있는 레인보우 산맥 끝자락에 있는 화산으로 메디아와 케드리안이 살고 있는 여기 코카서스 화산과는 달리 지금도 왕 성히 활동중인 화산이였다. 코카서스는 휴화산으로 대륙의 서쪽 중앙을 가로지르는 크로노스 산맥의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는데 고요의 숲과 원시밀림이 있어서 인간 들이 접근하지 않는 곳이였다. 그러니까 케드리안이 한동안 바람나서 남자친구 만 나러 다닐때는 거의 대륙의 반을 가로질러 인간들이 세운 나라중 대륙 중앙에 자리 잡은 파라제국의 상공을 날마다 날아다닌 셈이였다. 드레곤이니까 가능한 일이였겠 지만 알 하나 낳자고 그렇게나 멀리 다녔다는 것이 메디아에게는 놀라울 따름이였 다. "그럼 이름은 뭐라고 할거예요?" 메디아의 질문을 받은 케드리안은 여태까지 보여주지 않았던 기괴한 표정을 지었는 데 상당히 당황한 것 같았다. "이런.... 여태까지 이름은 생각 안 해봤어." "뭐라고요?" '세상에 엄마 맞아?' "그럴수도 있지 그러니.... 나도 힘들단다. 저 녀석 때문에 꼼짜고 못하고 몇달동 안 지냈더니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어." 메디아의 힐난하는 표정에 애써 변명아닌 변명을 하는 케드리안이였다. "그나저나 이름을 뭐라고 하나? 메디아 네가 지어볼래? 네가 맘대로 지어봐." 새끼 드레곤은 사방으로 알 껍질을 흩뜨려 놓으며 엉성한 자세로 껍질들을 주워 먹고 있었는데 단단한 껍질 부서지는 소리가 메디아의 귀에는 상당히 시끄러웠다. "빠삭빠삭 아그작.....빠삭" '참 시끄럽게도 먹네' "이름요? 음..... 케드리안은 정말 생각해 둔 이름이 없어요?" "..... 생각해 본적이 없는데....." "그런데 쟤 남자예요? 여자예요?" 거대한 몸집의 케드리안은 그제서야 부랴부랴 먹고 있는 새끼의 몸을 살짝 굴려서 확인하기 시작했다. "수컷이구나." 예의상 차마 수컷암컷이라고 물어보지 못한 메디아에게 케드리안은 가볍게 수컷이 라고 대답해 주었다. ''혼'이라는 단어에 뭐라고 이름을 붙이지?' 드레곤의 이름은 그 들자 앞에 반드시 '혼'이라는 단어를 넣었는데 왜 그래야 하는 지는 드레곤 자신들조차 몰랐고 단지 드레곤들의 전통이였기에 그렇게 하는 것뿐이 었다. 판타리아 대륙의 동남쪽에 많이 살고 있는 엘프들도 이름을 그런식으로 지었 는데 그들은 '엘'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예를 들자면 엘 아트, 엘 마하 같은 식 이였다. "......" "......" "빠삭 빠삭.....아그작...쩝쩝..." 잠시 동안 레어에는 생각에 잠긴 두 여자의 침묵과 새끼 드레곤의 식사소리 외에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참을 골몰하던 메디아는 적당한 이름을 생각해낼 수 있었다. "저기....마드리시는 어떨까요? 혼 마드리시. 지금은 어리니까 그냥 마시라고 애칭 으로 부르면 되고요." "마시라구? 그래. 메디아 네가 맘대로 부르렴." 별로 생각도 안해보고 대답하는 케드리안에게 이름 따위는 그렇게 중요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저 사랑스럽다는 듯이 새끼를 보며 웃고 있을뿐이였다. 결국 이 제 막 부화되어 세상에 나온 새끼 드레곤의 이름은 이렇게 간단하게 지어졌다. - 계 속 - 번 호 : 10 / 83 등록일 : 1999년 06월 25일 06:43 등록자 : CHO1971 조 회 : 3203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수정T.T)- 2. 번 호 : 2 / 83 등록일 : 1999년 06월 23일 14:45 등록자 : CHO1971 조 회 : 3385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3.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신이 알파를 창조했을때 탄생과 축복의 의미를 알았다. 신이 카오스를 창조했을때 분노와 징벌의 의미를 배웠다. 제 3 장 불 멸. 새끼 드레곤 마시는 어느새 다섯번째 봄을 맞이하고 있었고 메디아는 열여덟의 소 녀가 되었을 때였다. 이제 제법 처녀티가 물씬나는 메디아는 예전보다 더 길어버 린 머리카락을 여전히 양갈래로 따아 내렸지만 항상 쓰고 다니던 고깔모자는 벗어 버린지 오래였고 요즘은 마법을 익히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중이었다. 시 간이 지나감에 따라 마시의 몸집도 전보다 더 커져서 말썽이 늘었지만 겨울만 지 나고 나면, 새끼 드레곤에게는 이해가 안가는 일이였지만 메디아의 마법실력이 향상 되는 바람에 더 많이 얻어맞는 형편이였다. 메디아의 마녀로서의 혈통과 마 법사로서의 자질은 평범한 인간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메디아와 마시는 나날이 평화로워 지는 생활속에서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서로에게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그들은 식사시간 만큼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는데 둘 모두 엄청난 양을 먹어대는 대식가였고 어쩌다가 케드리안이 구해 다 놓는 술은 그야말로 대단한 먹거리로 메디아와 마시가 정신 못차리고 앉아 먹 을 정도로 서로 좋아해서 술 마실때는 기분이 좋아서 서로 웃고 떠들정도였다. 그 렇게 평화로운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어미 드레곤 케드리안이 레어를 비우는 횟수 가 잦아지고 기간도 점점 길어지기 시작했다. "케드리안 또 나가요?" 무더운 한 여름중에 여행준비를 하던 케드리안이 뒤에 어색한 표정으로 서 있는 메디아를 돌아보았다. 무언가 말을 해줘야 할 것 같았다. "그래. 이번에는 금방 돌아올 수 없을거란다." 메디아가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왠지 케드리안의 잦은 외출이 마음에 걸렸다. 자신도 왜 그런지 몰랐지만 케드리안의 이번 여행이 불길하게 느껴졌다. "가지 말아요." 케드리안은 메디아의 입에서 절대로 나올수 없는 말을 들은 것처럼 불편해 했다. 평소의 메디아라면 가지 말라는 말같은 것은 하지 않았을것이다. 하지만 케드리 안은 지난 십년동안 미뤄오던 일을 하기위해 가야만 했다. "미안하구나." 케드리안은 지금 메디아와 함께 살고 있었지만 원래 블랙 드레곤은 유달리 누구와 함께 지내지 못하는 고독한 드레곤으로 알려져 있었고 실제로도 괴팎한 성격으로 뇌전을 부리며 주로 바위가 많은 지역이나 활동을 중지한 휴화산지역 분화구에서 무리를 짓지 않고 혼자 서식하는 드레곤이였는데 짝짓기를 끝내도 혼자 알을 낳 고 사는, 인간과의 교류가 없는것으로도 유명한 드레곤이였다. 심지어는 자신의 새끼도 잘 돌보지 않을정도로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하며 드레곤 중에서도 레드 드 레곤과 함께 수명도 가장 길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혼 케드리안에게 평생 에 단 한번 우연히 맺은 인연이 바로 메디아의 엄마이자 마녀였던 블러디나였다. 십년전 블러디나가 처참하게 죽어가는 몸으로 자신의 레어로 찾아 왔을때 케드리안 은 그 즉시 세상으로 나가 저주를 걸은 마법사를 죽이고 싶었다. 블러디나를 잃었 을때의 고통과 슬픔은 블랙 드레곤인 케드리안에게 엄청난 심적타격이 되었던 것 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지켜야할 종족의 의무가 남아있었고 케드리안은 아직 죽 기전 종족을 남겨야하는 드레곤의 의무를 행하지 않았는데다가 또 블러디나가 목 숨을 잃어가며 보호한 어린 메디아를 돌봐야만 했다. 혼 케드리안은 새끼를 낳기 위해 아직 종족의 의무를 행하지 않은 수컷 드레곤을 찾아다녔고 짝짓기에 성공해서 마시를 낳았다. 그리고 십년이 지난 지금 메디아 는 이미 어른이 되어 있었고 케드리안의 새끼를 돌봐줄 수 있을만큼의 능력과 힘 이 있었다. 케드리안은 강력한 마스터였던 블러디나를 죽음으로까지 몰고간 자들이 평범할것 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동안 그녀가 알아낸 사실들은 케드리안 자신 도 쉽게 생각할 수 없는 위험한 일이였다. 어쩌면 오랫동안 다시 돌아오지 못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메디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케드리안은 떠났고 알 수 없는 불안속에 메 디아는 그녀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한여름밤 사나운 폭풍이 치고 있었다. 마치 산을 깎아 내릴듯이 몰아치는 폭풍은 세찬 바람소리로 코카서스 분화구 전체가 흔들릴 정도였다. 희미하게 흔들리는 불빛 아래서 메디아는 점점 커지는 빗소리와 천둥소리를 듣고 있었다. 케드리안 이 레어를 떠난지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도 메디아는 몇년이 지난듯 까닭모를 절 망과 같은 불길함을 느끼고 있었다. 문득 그녀의 예민한 귀에 쿵 하는 소리가 레 어를 진동시킬만큼 커다랗게 들려왔다. 분명히 천둥소리는 아니였다. 그녀는 심장 이 내려앉는 기분으로 레어의 입구로 뛰어가며 불안한 심정을 달랬다. '바위가 굴러떨어진 걸거야. 그래 틀림없어.' 메디아가 레어에서 막 빠져 나왔을때 무섭게 몰아치는 빗줄기로 온몸이 다 젖어버 렸지만 그녀는 그것을 느낄수조차 없을만큼 충격적인 장면을 보고 있었다. 한 순간 번쩍이는 강렬한 빛이 어둠을 적랄하게 비추었고 그 순간 메디아는 볼 수 있었다. 어둠보다 더 칠흑같이 검은 커다란 블랙 드레곤의 몸체가 추락한 모습으 로 땅바닥에 내동대기쳐져 있는 것을..... 메디아는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 한채 케드리안을 향해 달려갔다. "....케...케드리안?" 애써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 짜내어 메디아는 겨우겨우 말할 수 있었다. 블랙 드레곤의 몸은 쉴 새없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엄청난 양의 피를 흘리고 있었 고 피는 빗물과 함께 개울을 이루며 땅바닥을 훑었다. 메디아는 급히 마법을 써서 케드리안의 몸을 보호했다. 그러나 아무리 치료마법을 써도 케드리안의 상처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녀의 힘으로는 도저히 가망없는 일이였다. "케..드리안 이게....어떻게...케드리안..흐흑흑......" 블러디나가 죽어갈때도 울지 않던 메디아였다. 그러나 지금은 가슴에서 복받치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마치 숨을 쉴수 없는 사람처럼 그녀는 온몸이 떨려왔 다. "...메....디아..." 실날같이 가는 목소리가 케드리안에게서 흘러나왔다. "케드리안!" "엄마-!" 메디아는 깜짝 놀라서 뒤를 보았다. 자고 있는 줄 알았던 새끼 드레곤 마시가 작 은 몸을 뒤뚱거리며 빗속을 뛰어오고 있었다. "메...디아..후훅.............하아" 숨찬 케드리안의 부름에 메디아는 얼굴로 흐르는 눈물과 비를 훔치며 케드리안의 어둡고 깊은 눈을 보았다. "네 케드리안. 저 여기 있어요. 괜찮을거예요. 틀림없이 괜찮을거예요. 드레곤이 쟎아요. 그렇죠. 괜찮을거예요. 아무일 없을거예요." 메디아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잘 몰랐지만 무슨 말이든 해야할것 같 았다. "메디아. 하아........후훅...이제 복수는 끝났단다." 메디아는 지금 케드리안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싶지도 않았고 그 의미가 무엇 을 말하는지도 알고 싶지 않았다. "케드리안! 지금 그런말 하지 말아요. 제발 그만 말해요. 이제 괜찮아 질거예요. 정말 괜찮을거에요. 기운내요. 제발...흐..흑..윽." 고집스럽게 괞찮아질거라는 말을 반복하는 메디아였다. "엄마앙~! 아앙..." 케드리안의 커다란 눈동자가 새끼 드레곤을 보며 잠시 반짝거리는것 같았다. "울지마라. 내 아가....후욱.......하아..... 언젠가 너도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 마시 네가 커서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되기를..헉...." "엄마..엄..마...아앙..훌쩍...." "메디아... 약...속해라. 저 아이..... 마시를 돌봐준다고. 성년이 될때까지 꼭 절대로 ......떠나지 않는다고.... 약속해다오." "싫어요. 당신이 돌봐요. 케드리안이 지키란 말이예요." 메디아의 눈에서는 쉴새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지난 십년간 어머니를 잃은 그녀를 돌봐주었던 혼 케드리안이 마치 십년전 그날처럼, 처참한 모습이였던 어머니와 같은 모습으로 그녀의 눈앞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메디아는 그때 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못 견딜정도로 비참했다. "메디아 어서 약속해다오. 시간이 없다." "어엄마...아앙앙...훌쩍." 훌쩍거리는 마시는 죽음이 뭔지 몰랐다. 단지 지금 상처입고 고통스러워하는 엄 마가 이해되지 않았고 무언지 모를 고통에 아플뿐이였다. 죽어가는 케드리안의 몸 을 붙잡고 울고 있는 새끼 드레곤의 모습은 너무나 애처로워 보였고 메디아에게 십년전 그날의 자신을 생각나게 했다. ".....알았어요. 약속할게요. 약속해요. 성년이 될때까지 ....목숨을 걸고 지키겠 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그제서야 편안한 눈빛으로 마시를 바라보는 케드리안의 몸에서 갑작스럽게 검은 빛이 나기 시작했다. 세찬 빗줄기가 튕기어 올라갈 정도로 강력한 기운을 내뿜던 검은 빛은 서서히 작아지며 메디아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메디아 받아라." 그것은 그저 검은 빛덩어리처럼 보였다. 그것을 어떻게 받으라는 것인지 메디아는 순간 알 수가 없었다. "뭐를......지금 뭐하려는 거예요?" 지금 케드리안은 자신의 모든 힘을 담아내어 메디아에게 주려는 것이었다. 드레 곤 하트라 불리우는 생명의 원천이자 힘의 원천을 고스란히 메디아에게 주기 위해 서 그녀는 마지막 남은 힘을 내었다. 블랙 드레곤의 검은 심장. 그 빛과 어둠의 힘을 허락되지 않은 어린 마녀에게 주려는 것이었다. "받아라." 메디아가 무엇이 어떻게 되어가는지도 모르는 사이 눈앞에 있던 검은 빛덩어리는 그대로 메디아의 몸으로 흡수되어 버렸다. 그러나 메디아의 몸에는 아무런 변화 도 없었다. "시간이 흘러.... 네가 감당할 수 있을때 그 힘은..... 온전히 너의 것이 되어줄 거란다." 눈부신 벼락이 치고 천둥소리가 고막을 찢을듯이 울리고 있었다. 그 속에서 케드 리안의 검은 몸체는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이미 드레곤 하트를 잃은 드레곤의 육 체와 존재는 사라지기 마련이었다. "내 아가 마시......를 부탁한다." "케드리안---------!" "엄마아아앙~~~~~~" 거세게 내려치는 폭풍우 속에 남겨진 것은 메디아와 어미를 잃은 새끼 드레곤 마 시뿐이였다. 이때 메디아는 열여덟살, 마시는 다섯살에 불과했다. - 계 속 - 번 호 : 3 / 83 등록일 : 1999년 06월 23일 15:09 등록자 : CHO1971 조 회 : 3006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4.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신이 알파를 창조했을때 탄생과 축복의 의미를 알았다. 신이 카오스를 창조했을때 분노와 징벌의 의미를 배웠다. 제 4 장 화려한 외출. 메디아는 혼 케드리안의 죽음이후 멍청하게 엄마만을 찾는 새끼 드레곤을 달래느 라 제대로 슬픔에 젖어있을 수도 없었다. 언제나 침울하게 징징짜는 다섯살짜리 새끼를 돌보는 일은, 오히려 말썽을 부리는 개구장이를 돌보는 것보다 더 어렵고 힘든 일이였다. 그나마 메디아가 마시의 울음을 그치게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녀 의 어머니가 반지와 함께 물려주었던 푸른 거북이 덕택이였다. 블루잉이라는 이름을 가진 등껍질이 짙푸른 거북이는 메디아보다 나이가 더 많았 고 약 이백년 전에는 작은 연못에서 살던 물의 요정이였다고 한다. 요정답지 않게 얌전하고 장난끼도 없던 블루잉이 어느날 갑자기 거북이 신세로 전락하게 된 것 은 순전히 술 때문이라고 한다. 어느날 누군가 블루잉의 연못에 술을 부었는데 그 술을 마시고 숲에 사는 대마법 사에게 술주정을 했던 일이 화근이 되어 저주를 받았다고 한다. 하루 아침에 요정 에서 거북이가 된 블루잉은 대마법사와 살게 되었는데 대마법사가 저주도 풀어주 지 않고 죽는 바람에 지금까지 저주속에 살게 된것이다. 블러디나가 스승으로부터 물려받은 거북이를 데리고 있을때는 아예 석고상처럼 정 지 마법까지 걸어서 삼십년도 넘게 자고 있는 상태였는데 얼마전에 메디아는 정지 마법에서 블루잉을 풀어주었던 것이다. 크기는 그릇을 엎어놓은 정도였는데 평소 에 움직일때는 느릿느릿하지만 메디아를 놀라게 할정도로 사냥개처럼 빠르게 움직 이기도 했다. 어쨌든 메디아는 블루잉 덕분에 새끼 드레곤의 울음을 그치게 되었다는 사실이 기 뻤고 케드리안의 빈자리를 조금이나마 의식할 수 없도록 해주는 거북이가 고맙기 까지 했다. 똑똑한 블루잉이 새끼 드레곤의 멍청함을 깨닫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 았고 마시도 신기한 거북이 한마리를 골려주는 재미에 점점 자신이 왜 울었는지도 모르는듯이 모든 것을 잊고 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시가 조그만 거북이를 맘대 로 가지고 놀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전직이 요정이었던 블루잉은 하급정령이 지만 물을 맘대로 이용하는데다 머리가 영리해서 새끼 드레곤에게 물먹이는 일이 종종 있었고 거북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정도로 빨리 움직여서 멀리 있으 면 마시가 잡을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해서 레어에는 다시금 소란스런 날들 이 시작되었고 끔찍한 악몽들은 조금씩 잊혀지게 되었다. 가을이 가고 다시 겨울이 찾아와 마시가 동면에 들어가면서 한층 외로움에 사무치 는 메디아였지만 점점 그 외로움에도 언제나처럼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서 떠들어 주는 블루잉도 도움이 되어 주었다. 메디아는 나날이 마법을 연구 하고 익히면서 자신의 육신이 변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은 쏘아진 화살보다 더 무섭게 흐르기 마련이었다. 코카서스 화산에 무섭게 내려치던 폭풍우가 있던 날로부터 이미 세월은 흐르는 물처럼 떠나와 구십여년의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이미 메디아가 백세를 지난지도 오래였다. 메디아는 이제 자신이 인간이라 부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드레곤 도 아니였지만 인간도 아니였다. 그녀의 심장은 이미 드레곤 하트였으며 백세가 넘은것도 벌써 십이년 전이였지만 메디아는 여전히 열여덟살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제 그녀에게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어쩌면 보이는 겉모습뿐일지도 몰랐 다. 이번 겨울에는 새끼 드레곤이 동면하는 동안 몰래 다니던 여행도 그동안 미뤄오던 대청소와 정리를 하느라 못 나갔던 메디아는 한겨울도 어느정도 지나고 1월 중순 이 되어서야 여유가 생길수 있었다. 오랫동안 방치해 두었던 레어를 치우는 일은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갔고 마법의 방과 약초를 말려두는 건조실, 그리고 여러 개의 창고들을 치우고 연구자료들을 정리하는 일이 오래 걸리는 바람에 그녀의 올 겨울 여행계획이 수정되어야만 했다. 처음에는 판타리아 대륙 남부에 있는 아르카디아의 베이시드를 거쳐 도리아 산맥을 지나고 미개발 지역으로 남아있는 유목민들이 살고 있다는 최서남단 사막까지 가 볼 생각이였다. 거의 네다섯달은 소요되는 거리였지만 마시의 동면기간이 길기 때 문에 나이가 들면서 기간이 좀 줄어드는것 같았지만, 어쨌든 별로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겨울도 이미 다 지나고 한달 뒤면 마시가 동면에서 깨어날 시기였기에 메 디아는 미개발지역에 가는 것은 포기해야 했다. 그래서 메디아는 가까운 서쪽 해안 에 나가 보기로 결정했다. 거의 십년도 더 전에 갔었던 서쪽 중앙에 자리잡은 부족 국가 페렌토의 바다가 생각났기 때문이였다. 왕복 거리가 한달정도 되니까 좀 서둘 러서 다녀오면 될것 같았다. 그녀는 혹시나 하는 걱정으로 여행갈 때마다 블루잉을 남겨두었는데 지금까지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었다. 메디아는 꼼꼼하게 여행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가죽으로 만든 특별한 가방에 세세 히 표시한 약초들과 마법의 가루주머니를 챙겨넣고 그동안의 여행경험으로 기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물건들과 보석들도 꼼꼼히 넣고 갈아입을 옷도 한벌 준비한 다음 그녀는 가뿐한 마음으로 떠나려고 했다. "벌써 1월 말이 되어가는데 어딜 가겠다고 그래? 마시가 수면에서 깰 날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걱정도 안되니? 저 녀석이 나 혼자 있으면 얼마나 구박을 하는지 알기나 하는거야? 이번에는 빨리 올 수 있어? 지난번에는 아슬아슬하게 돌아와서 내가 얼마나 조마조마 했다구." 블루잉이 딱딱한 등껍질에서 목을 길게 빼어 들떠있는 메디아의 옆에서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메디아는 탁자위에 있는, 큰 그릇을 엎어놓은 듯한 작은 거북이를 향 해 간단하게 말했다. "걱정마 블루잉. 페렌토는 여기서 가깝고 금방 올수 있는데쟎아. 그리고 너도 적당 히 마시 구박하는 재미에 살면서 그러니? 내가 있으나 없으나 너 구박받는것도 마 찬가지쟎아." "치....너 이번에는 바다까지 갈꺼지?." "응 그래. 작은 항구 마을 타미까지 갈꺼야. 거기서 보는 일몰이 아주 근사하거든. 괜히 인간들이 금해를 황금의 바다라고 부르겠니? 그 석양이 너무 예뻐서 그런거 지. 십년 전에 봤을때도 참 좋았어." "흥... 너만 좋지. 너 나가고 나면 마시는 잠만 자고 나는 너도 없이 심심할텐데.. 그리고 뭐... 금해가 황금의 바다라고 불리우는 건 다 저 인간들의 탐욕에서 나 오는 쓸데없는 이름일뿐이라구." 괜히 심술을 부려보는 블루잉이였다. "너 삐졌니? 마시가 잠만 자면 더 다행이지 뭘그래. 깨어 있으면 골치만 아프지 않겠니? 이제 저도 나이 들었다고 반항만 늘었는데...... " 그때였다. "이럴 줄 알았어. 내가 자는 동안에 내 흉을 보면서 어딜 가려구 짐을 싸는 거야?" 메디아는 순간 간이 떨이질만큼 놀랐다. 그녀는 자신이 너무 신경을 쓰다보니 환청 을 들은 것이 아닐까 의심하며 챙기던 가방에서 고개를 들어 시선을 앞으로 향했 다. 거기에는 부시시하게 덩어리 눈꼽을 떼어내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어린 드 레곤 한마리가 시커멓게 버티고 있었다. '이럴수가...... 내가 꿈을 꾸나? 왜...? 왜 벌써 일어났지? 지금이 1월이 맞는 걸까? 벌써 2월이 지나가 버렸나?' "블루잉....." 메디아는 멍하게 거북이를 불렀다. "..으...응?" 거북이도 황당한지 잠시 대답소리가 이상하게 들렸다. "지금 1월 맞니?" "응. 아마 그럴껄?" "확실해?" "......." 메디아와 블루잉의 당황스런 시선을 받고 있는 마시는 졸려서 죽을 지경이었지만 결심하고 또 결심했던 현장을 목격한 기쁨에 쏟아지는 졸음을 쫒을수 있었다. 마시는 매년 자신이 동면에서 깨어나면 어딘가 달라지는 메디아 때문에 적응이 되지 않았고 나중에는 자기 몰래 겨울동안 재미난 일을 하는것 같아 점점 더 불쾌 해졌다. 아무리 자신이 졸라도 여행은 커녕 바깥구경도 제대로 시켜주지 않는 메 디아에게 불만이 많았던 마시는 동면에 들어 가면서부터 일찍 일어나서 범죄(?) 현장을 보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해마다 수면 기간을 줄였고 이번에는 아주 성공적 으로 일찍 일어났던 것이다. 사실, 의지로 동면의 기간을 줄인것이 아니라 나이가 들어서 동면기간이 줄고 있었던 것이지만 그걸 알리 없는 마시는 자신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을뿐이었다. "흥.... 나만 놔두고 둘이서 어딜 가려구 했어?" 마시는 날개를 퍼덕거려 기지개를 펴며 상당히 열받은 것같은 표정을 지었다. '으..' 메디아는 여행이고 뭐고 이제는 덜미를 잡힌 심정이였다. 케드리안이 죽고나서 부쩍 투정과 떼쓰는것이 늘어난 마시는 한번 고집부리기 시작하면 대책이 안섰다. 1월인데도 불구하고 동면에? 깨어난 걸 봐도 뭔가 단단히 작정한것이 틀림없었다. '아... 저 번쩍거리는 눈동자 좀봐. 일 저지르겠군.' 마시의 붉은 눈동자가 반짝거리는 것을 본 메디아는 불길한 예감에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호호.....마시 일어났어? 일찍 나왔네..." 어울리지도 않는 어색한 웃음을 짓던 메디아는 문득 피곤해졌다. '여행은 물건너 갔고 저 녀석을 어떻게 달래나?' "푸하하하하하......." 갑자기 실없이 웃음을 터뜨리는 마시였다. "쟤가 왜 저러지 블루잉?" "메디아....아무래도 뭔가....." "이야호....... 나도 드디어 밖에 나가는거야.....후흣훗...힛힛히하하하" 마시의 히죽거리며 웃는 폼이 마치 징그러운 도마뱀같이 보였다. "뭐....뭘?...가?" 숨도 못 쉬고 묻는 메디아였다. "여행!" 그러나 제빠르게 당연하다듯이 말하는 마시를 보며 고개를 살래살래 젖는 블루잉 이였다. "안돼~~~~~~~!" 자신도 모르는새 비명처럼 소리를 버럭 질러버린 메디아는 순간 눈앞이 깜깜해지 는것 같았다. '여행이라니.....여행이라니.....' 상상만 해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말썽꾸러기 골칫덩이 고집쟁이 돌연변이 새끼 드레곤 한마리를 데리고 여행을 한다는것은 자기 목에 칼을 걸고 춤추는 것 보다 더 위험한 짓이였다. 틀림없이 수 없이 많은 사고를 저질러서 메디아의 수명 을 단축할것이 뻔했다. 실제로 수명이 줄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마시....후우후...." 일단 숨을 길게 들이내쉰 메디아는 침착하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지금은 일월이야. 밖에는 눈이 진짜 많이 내려 있다구. 너 추운거 싫어하지? 지 금 여행을 떠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야. 오늘은 더구나 눈도 엄청 많이 내리 고 있단다. 못 믿겠으면 한번 레어 밖으로 나가봐. 진짜 추울거야. 너 잠도 모자 르지 않니? 여행을 가면 길에서 잘때도 있고 음식도 제대로 못 먹는데다가 늦잠 자기도 힘들어." 살살 구슬르며 달래려는 메디아와는 상관없이 마시는 자기 말만 했다. "누가 오늘 간데? 내일 가야지. 오늘은 먹어야 돼. 그런데 내 밥 있어? 배고파 죽을것 같아. 메디아야. 먹을거 줘. 많이 많이 줘야 돼."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쿵쿵거리며 식당으로 달려가는 마시였다. "하-" 기운이 쭉 빠지는 메디아였다. '그래도 내일간다니 다행이군. 그동안 무슨 수를 쓰든 말려야지.' 그러나 메디아는 갖은 방법을 동원해도 고집쟁이 마시를 꺽을 수는 없었다. 결국 코카서스 화산에서 처음 나가게 된 멍청한 새끼 드레곤 한마리와 늙은(?) 마녀 메디아 그리고 거북이 블루잉은 1월이 끝나갈 무렵 문제투성이 여행을 떠나게 되 었다. - 계 속 - 번 호 : 4 / 83 등록일 : 1999년 06월 23일 21:03 등록자 : CHO1971 조 회 : 2865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5.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신이 알파를 창조했을때 탄생과 축복의 의미를 알았다. 신이 카오스를 창조했을때 분노와 징벌의 의미를 배웠다. 제 5 장 황금의 바다. 석양이 지고 있었다. 판타리아의 서쪽 금해를 황금빛으로 물들이며 오후의 태양이 수평선 아래로 몸을 담그고 있는 장관이 펼쳐지고 있었다. 수평선은 거대한 불 덩어리가 타는듯한 붉은 빛을 내뿜었고 바다는 금빛으로 찬란하게 반짝이며 뱃사 람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었다. 이곳 서쪽 해안이 황금의 바다라 이름지어진 이유는 저 불타는듯한 석양때문이기 도 했지만 그보다는 판타리아 대륙 서쪽 금해의 건너편에 있는 사마리아 대륙으 로 향하는 항로가 있는 바다였기 때문이였다. 수 많은 갤리선들이 그 날렵함을 자랑하며 물살을 가르고 항구에서 항구로, 이 대륙에서 저 대륙으로 그 돛을 펄 럭이고 일찌기 바다의 황금시대를 열며 막대한 부를 실어 나르며 검푸른 바다를 황금의 바다라 부르게한 것이다. 황금을 가득싣고 떠나는 상선과 질좋은 비단과 종이를 싣고 대륙을 향해 오던 수 많은 배들은 때로 사나운 폭풍속에 차가운 바 닷속으로 그 꿈과 희망을 간직한채 가라앉기도 했었다. 그래서 보물선을 꿈꾸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말그대로 황금의 바다이기도 한것이다. 지금 메디아는 황금의 바다를 눈앞에 두고 잔잔히 부서지는 파도와 불타오르는 석양을 보며 한숨을 짓고 있었다. 해변의 모래바닥을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는 마시를 보고 있자니 절로 짜증이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다. 그녀는 눈치없는 새끼 드레곤 때문에 여행내내 고생한 생각을 하던 중이였다. 즐거운 여행에 갑작스럽게 혹을 달게된 메디아는 코카서스 화산에서 스누강 하류 에 배를 타러 가기까지는 그나마 사람들이 없어 안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스누강 하류에서 만난 인심좋은 나룻배 주인이 문제였다. 아니 저 빌어먹을 새끼 드레 곤 마시가 문제였다. 나이가 꽤 들어 보였던 사공은 인정많아 보이는 얼굴을 하고 농부들이 흔히 입는 싸구려 옷감에 부족의 상징인듯한 길다란 귀고리를 하고 있었다. 사공의 눈에 아직 어린 남매가 늦은 겨울에 여행하는 것이 이상해 보였는지 마시에게 나이를 물었었다. 메디아는 그 때 아무 생각없이 뱃전에 앉아 있었는데 생전처음 나룻배 를 타보는 마시는 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건성으로 진짜 나이를 대답해 버렸었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았었다. 늙은 사공이 그냥 웃어 넘겼었으므로.... 그리고 메디아도 실없이 웃어 넘겼었다. 누가 믿을까 싶어서.... 친절한 사공이 또 마시에게 어디서 오는 길이냐고 웃으며 물었었다. 그런데 이 눈치코치 다 팔아먹어버린 새끼 드레곤이 코카서스 화산에서 오는 길이라며 수다 를 떨기 시작했다. '맙소사...' 태어나서 처음으로 배를 타는 일이며 바다를 보러 여행을 나왔다는둥, 그래서 겨 울잠을 자다 깼다는 둥, 그동안 고요의 숲에서 심심해 죽을뻔 했다는 둥...... 메디아는 그 순간 기가 찼으며 늙은 사공은 새끼 드레곤의 쉴새없이 쏟아져 나오 는 수다에 정신이 없는것 같았었다. 그녀는 마시의 뒷통수를 빗자루로 후려치며 사공에게 원래 남동생이 허풍이 심하다며 간신히 무마를 시켜야 했었다. 그런데 사태파악이 안된 마시가 왜 갑자기 때리냐며 바락바락 대들어 난리를 피우는 통 에 조그만 나룻배가 뒤집힐 뻔하기까지 했었다. 사공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메디아 가 마법을 사용해 겨우 물에 빠지는 사태를 모면했지만 메디아에게는 진땀나는 일 이였다. 그 이후로도 이 곳 페렌토의 작은 항구 타미마을까지 오는 동안 잔소리를 얼마 나 많이 했었던지 입이 아플지경이었다. 그나마 물건을 작게 만드는 마법을 걸어 놓은 마법의 빗자루를 심심찮게 새끼 드레곤 길들이는 일에 사용해서 이게 마법 의 빗자루인지 몽둥이인지 헷갈릴 지경이 되어서야 여기까지 무사히 왔다고 생각 하는 메디아였다. 아직은 추운 2월 중순이었다. 더구나 이곳의 바닷 바람은 북해에서 곧장 내려오는 북풍이라 대륙에 있는 것보다 훨씬 추웠다. "저 녀석이 춥다고 투덜대지 않으니 이상하군" 메디아가 혼자 중얼거렸다. "좋아서 추운줄 모를거야. 너는 겨울마다 여행을 했지만 저녀석은 난생처음 바다 를 보쟎아. 더구나 저렇게 근사하게 석양이 지고 있는 진짜 황금의 바다를 보는 데 춥다고 투덜거릴 정신이 있겠니? 사실 드레곤이 추위를, 춥다고 느낀다는 것 도 웃끼는 말이쟎아?" 메디아의 어깨에 앉아있는 거북이 블루잉이 푸른 눈을 태양에 물들이며 말하고 있었다. "하-. 당연히 웃끼지. 그럼 뭘하니? 저 녀석이 얼마나 엄살쟁인데... 춥지도 않 으면서 춥다고 집태워 먹을 녀석인걸......" 실제로 마시는 여행기간 내내 아직도 겨울이라 춥다면서 밤만 되면 불의 정령을 불러내어 툭하면 사고를 쳤었다. 지금 젖은 모래사장을 뛰어다니는 새끼 드레곤 마시는 그야말로 개구장이 사고뭉치 소년에 불과해 보였다. 그들이 그렇게 있는동안 서서히 해가 수평선 아래로 완전히 그 모습을 감추며 어 둠이 내려오고 두 개의 달 알파와 카오스가 선명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푸하~, 졸려...... 졸려......" '으.....골치야~' 마시의 칭얼거림에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메디아도 많이 지친데다 어서 쉬고 싶었 다. 그녀는 오늘 밤 쉴만한 곳을 찾기 시작했다. 마침 그럴듯해 보이는 여관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여관 이름이 '황금을 낚는 여관'이라 우스워 보였지만 제 법 맛있는 냄새가 나는 것이 식당을 겸하는 곳으로 괜찮을 것 같았다. 칭얼대던 마시도 어느새 음식 냄새를 맡았는지 잠타령은 그만두고 먹을타령을 시작했다. "배고파... 먹을거. 먹을거 줘 메디아야." 메디아는 입맛을 다시는 마시를 한번 째려보고는 자신도 배가 고픈지라 황금여관 으로 들어갔다. 해가 진 직후라 손님들이 꽤 많이 들어서 있었다. 그녀는 큰방 하나를 잡았다. 주인은 남매냐고 물어보고는 별말없이 방을 내주었 다. 마시가 워낙 어려보여서 둘이 한방을 쓴다고 이상하게 볼 사람은 없었다. 어 차피 메디아도 겨우 스무살 정도로 보였고 그 이상으로는 안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들에게 눈길을 끌만한 존재였다. 어려보이는 처녀는 까맣고 긴 머리에 어두운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긴망토를 입 었지만 사람들에게는 제법 날씬한 것같아 보이는 외모였다. 그녀의 등에 멘 가방 에는 빗자루인지 털이개인지 모를 이상한 막대기를 끼우고 있었고 어깨에 있는 푸른색 거북이는 굉장히 희귀해 보였다. 그 뒤에 그녀의 망토 끝자락을 쥐고 어 색한 모습으로 서 있는 사내아이도 검은색 짧은 머리에 붉은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는 이제 열서너살이나 되었을 하얀피부의 얼굴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신기한 듯이 식당내부를 훑어보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모습이 그 곳에 있는 취객들과는 전혀 안 어울려 보였다. 계집아이도 사내아이도 둘다 어린데다가 단정하고 소박해 보이지만 꽤 고급스러 운 가죽신발과 옷차림으로 사내아이는 오히려 여자보다 더 예뻤고 이런 여관에 단둘이 있기에는 위험에 보이기까지 했다. 사람들의 시선에는 신경도 쓰지 않으며 메디아는 주인에게 음식을 주문하고 식당 을 한번 둘러 보고는 구석에 빈자리를 찾아 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녀는 발걸음과 동시에 앞으로 고꾸라질뻔 했다. 뒤를 휙 돌아보니 그녀의 망토 자락을 쥐고 있는 마시가 보였다. 그녀가 째려보자 마시는 얼른 옷자락을 놓으 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절대 일부러 그런게 아니라는듯이...... "실수지?" 메디아는 최대한 화를 누르며 물었다. 예전에도 이런 일은 자주 있었고 그럴때마 다 화를 낼 수는 없었다. 한편 요즘 빗자루에 구타를 많이 당했던 새끼 드레곤은 메디아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까닥잘못하면 빗자루가 사정없이 날아올거라 생각했다. 메디아는 한숨을 쉬며 마시의 손을 붙잡아 끌고 구석에 있는 탁자에 가서 앉았 다. 그녀의 어깨에 앉아있던 블루잉은 덩달아 떨어질뻔하다가 겨우 메디아의 망 토모자에 매달려 있었다. 블루잉이 메디아와 새끼 드레곤을 향해 비난의 눈길을 보내며 우웅거렸다. "너어~...." 마시는 투덜대는 블루잉을 향해 한마디 하려다가 메디아의 째려보는 눈길이 심상 치않아 보여서 그만두었다. 마시는 잠시후 음식이 도착하자마자 먹는 것에 걸신들린 사람처럼 먹어대기 시작 했다. 메디아도 배가 고픈데다가 음식을 꽤 밝히는 편이어서 둘은 열심히 먹는 일에만 열중했다. 그들은 음식을 먹을때 절대로 서로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과 음 식을 아주 많이 먹는다는 사실에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에 이 순간만은 아주 조용 히 맛있게 먹는 소리만이 들리고 있었다. 미식가인 거북이 블루잉만이 우아한 모 습으로 음식을 조금 먹고 있을뿐이었다. 식당 종업원은 음식을 너무 많이 주문하는 것이 아닌가하고 걱정했는데 막상 날 씬한 처녀와 어린 소년이 먹어대는 음식의 양을 보고는 정말 놀랐다. 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술을 마시던 사람들도 예쁘장하고 어린 남녀가 계속해서 음식을 주 문해 먹는 모습을 믿기지 않는듯 힐끔거릴 정도였다. 많았던 음식들을 깨끗이 먹어 치우고 빈접시를 수북히 쌓아놓은 메디아가 종업원 을 불러 술을 주문했다. 젊은 여종업원은 잘 못들었다는듯이 다시 메디아에게 물었다. "뭐라구요?" "맥주 큰통으로 두개하구 작은거 한통 주세요" 메디아가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대꾸하자 여종업원이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 다. "그걸 혼자 다 마셔요?" 이 곳 페렌토의 타미에서 사용하는 술통은 다른 지역과 달리 좀 큰편이라 작은통 하나라도 왠만한 어른 남자가 충분히 마시고도 남을 수 있는 양이고 큰통 하나 면 두세명이 마셔도 되는 양이다. 그런데 여기 앉아있는 괴상한 차림의 여자와 어 린 남자아이가 어른 대여섯이 마실 수 있는 양의 술을 주문하니 황금여관에서 3 년째 종업원일을 하고 있는 경력으로도 이런 일은 처음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여종업원이였다. 더구나 저렇게나 많이 먹어놓고 또 어떻게 뭘 더 먹을 생각을 하고 있을까 싶었다. 까만색 긴머리를 양갈래로 길게 따아서 앞으로 늘어뜨린 여 자 손님이 그녀에게 다시 말하고 있었다. "나하고 내 남동생 그리고 내 거북이도 마실건데요." 여종업원이 이말이 진담일까 잠시 헷갈리는 표정으로 다시 일행을 보고 있을때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황당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메디아와 마시는 코카서스 화산에서 자라면서 어릴때부터 술을 마셔 왔었다. 둘 모두 술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만큼 술을 좋아해서 화산동굴에도 술통이 꽤 많이 저장되어 있는데다가 블루잉은 예전의 저주에도 불구하고 주인 잘 만난 덕 (?)에 술맛을 제법 즐기는 주당 거북이가 되어 있어서 술 마실 때는 꼭 블루잉도 끼워주어야 했다. "댁은 괜찮지만 어린아이에게는 술 안팔아요. 그 거.북.이.한테도요. 댁도 이제 겨우 스무살이나 되었나요?" 다른 나라에서는 열여섯살만 넘으면 술을 마셔도 상관이 없었지만 페렌토에서는 스무살이 되어야 술을 마실수 있는 나라였기 때문에 종업원이 손님에게 이런 말 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그러나 메디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엉뚱한 생각을 했다. 차라리 맥주 대신 쌀을 원료로 하는 독한 증류주 소주를 시켜버릴까 생각하는 그녀였다. 제일 좋기로는 포도주가 좋고 또 다른 과일주도 있지만 이곳 페렌토에서는 과일이 귀한데다가 주로 맥주와 소주만을 판매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소주를 마셨다 가는 갈증을 해소하는 차원을 넘어 블루잉의 술주정을 들어야 할지도 몰랐다. 블루잉은 이상하게도 맥주나 다른 술은 점쟎게 잘 마시면서 소주를 마시면 금새 취해서는 자신을 뭘로 착각하는건지 한마디로 고주망태가 되어서는 술주정을 고약하게 하곤 했다. 아마도 블루잉이 살던 연못에 부어진 술도 소주였을것이 틀림없을듯 싶었다. 그녀와 마시만 있을때야 그 술주정이 그리 큰 문제가 아니 지만 사람들이 북적대는 이런 곳에서 블루잉이 취해버리면 감당이 안되는 일이였 다. 수다떠는 거북이로도 모잘라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 제끼는 거북이라니.... 더구나 블루잉의 노래는 제정신 박힌 생물이라면 도저히 두 귀를 열고 들을만한 소리가 아니였는데 저주를 받아도 마땅할만한 끔찍한 소음이였다. 오죽하면 둔 하기가 바윗덩이보다 더한 마시조차도 블루잉이 소주에 취하면 도망을 갈까? 가끔 마시는 고요의 숲의 원흉이 블루잉이라고까지 했다. 그 많은 생물들이 소리 를 잃어버린 이유는 분명히 블루잉의 그 처절한 괴성때문이라는 논리였다. 물론 말도 안되는 괴변이였지만 그때마다 자신의 노래실력이 어때서 그러냐는 블루잉 의 열변을 들어야 하기도 했다. 메디아는 잠시 소주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며 아직도 옆에 서 있는 종업원에게 차 갑게 말했다. "이봐요. 나는 술 마실 나이가 이미 지났고 내 남동생은 내가 보호자니까 괜찮아 요.그런데 여기 타미마을에서는 거.북.이.는 술마시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나보 죠? 아니면 술 팔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나요? 줄거예요? 말거예요?" 메디아가 반쯤 화가 난 상태로 한쪽 손바닥을 탁자위에 올려 놓으며 종업원을 올 려다보았다. 이쯤되자 문 쪽에서 손님을 받고 있던 주인이 술을 가져다 주라는 손짓을 했다. 여종업원은 투덜거리며 그들의 탁자에 큰 술잔두개와 넓은 접시를 놓고 술통 세 개를 가져다 주었다. 벌써 음식을 다 먹은 마시는 술냄새를 맡자 꿀냄새를 맡은 곰새끼마냥 무거운 술통을 번쩍 들어 잔에 따르지도 않고 벌컥벌컥 마시려고 들 었다. 그러나 드레곤의 몸이였다면 술통이 통째로 입속으로 들어갔겠지만 인간의 몸을 하고 있는 지금은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운데다가 술이 옆으로 쏟아지기만 했다. 마시는 처음에는 당황하다가 메디아가 술잔을 가르키자 자신의 술잔에 술 통을 기울여 따르고는 열심히 쩝쩝 소리를 내며 마시기 시작했다. 메디아는 그런 마시의 이마를 딱 소리나게 빗자루로 두드렸다. "웁-" 술을 꿀꺽거리던 마시가 그녀를 쫙 째려보며 소리를 질렀다. 먹는데 때렸으니 당 연한 일이지만...... "이씨- 먹는데 왜 때려?" 메디아는 이 기회에 새끼 드레곤을 제대로 교육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며 조용조용 하게 말했다. "너 위아래도 모르냐? 너는 입이고 나는 주둥이냐? 왜 내 잔에 먼저 술 안따러?" 마시는 잠깐 자신의 술잔과 그녀의 술잔을 바라보고 헷갈리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야 되는거야?" "응. 내 잔 먼저야." 그녀는 딱 부러지게 대답했다. "왜?" "내가 나이가 더 많으니까" "?" "모르겠으면 나이 많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찬물도 위아래가 있다는 옛말이 있 는데 음식은 너 마음대로 먹어도 술은 내가 먼저 마셔야 되는 거야. 지금까지는 집에서 그냥 마셨으니까 괜찮았지만 밖에서까지 버릇없이 먼저 마시면 안돼. 그 리고 이젠 너도 나이가 들었으니까 예의를 제대로 지킬줄 알아야지. 알았지?" 마시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음....응 알았어." 마시는 뭐가 뭔지도 잘 모르면서 그냥 대답해 버렸다. 일단은 술을 마셔야지 그 런 어려운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다시 뭐라그러면 모른다 그러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마시였다. 둘은 그때부터 열심히 술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마시는 완전히 기분과 감정에 취하고 있었다. 난생처음 코카서스 화산을 벗어나 불타는 듯한 바다와 신기하고도 이상한 많은 인간들도 구경하고 그 동안은 야숙 을 했었기 때문에 이런 여관이나 식당에도 오늘 처음 들어와 보는데다가 배부르 게 먹고 술까지 마시니 그야말로 날고 있는 기분이였다. 메디아도 그런대로 기분이 괜찮았다. 시원한 술이 목구멍으로 흘러 들어가는 느 낌이 아주 좋았고 뱃속이 싸해지는 것이 이 집은 음식맛 만큼이나 술맛도 좋았다. 말썽꾸러기인데다 성질 급하고 버릇없이 대들고 눈치까지 둔해서 골치아픈 마시 때문에 신경이 곤두섰지만 어쨌든 지금까지는 별탈없이 무사했다. 이제 방에 올 라가 편안한 잠자리에 들면 겨울잠을 중간에 깨서 잠이 모자란 새끼 드레곤은 금 방 골아 떨어져서 죽은 듯이 얌전해질게 분명하고 오랜만에 마른 풀잎이 잘 깔려 있는 침대에서 자게 되었으니 내일 아침은 늦잠도 편히 잘 수 있을거라 생각하자 마음까지 흡족해지는 그녀였다. '느긋하게 술이나 마시면 되는거지 뭐' 메디아는 술 한잔에 그 동안의 피로와 짜증이 다 풀리는 듯했다. 그녀가 접시의 술을 핥아먹고 있는 블루잉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방에 올라갈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이였다. 갑자기 시끌벅적하던 술집 한구석에서 '와당탕' 소리가 나더니 왠 허연것이 휙 날아와 메디아와 마시가 앉아있는 탁자에 떨어져 버렸다. 탁자위의 술통이 박살 이 나고 내용물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메디아는 재빠르게 블루잉을 낚아채어 피했지만 술을 마시던 마시는 원래가 둔해 서인지 피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술 벼락을 맞고 말았다. - 계 속 - 번 호 : 5 / 83 등록일 : 1999년 06월 24일 00:14 등록자 : CHO1971 조 회 : 2745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6.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신이 알파를 창조했을때 탄생과 축복의 의미를 알았다. 신이 카오스를 창조했을때 분노와 징벌의 의미를 배웠다. 제 6 장 중요한건 술이였다. 어디선가 크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 왔다. "얌전히 구경이나 했어야지 쓸데없이 나서니 그꼴이 되지 않나? 크하하하....." 술집 저 쪽편에서 왠 털복숭이가 이 쪽 탁자위에 널부러져 있는 하얀상의를 입은 남자에게 소리를 지르며 조소를 날리고 있었다. 아마도 저 쪽에서 여기로 이 널 부러져 있는 남자를 집어 던진 모양이었다. 털복숭이 옆에는 서너명의 남자가 둘러 앉아 술을 마시는 것처럼 보였는데 모두 인상이 지저분한데다가 옆구리에 칼을 매달고 있는 모양새가 별볼일 없는 건달이 나 용병쯤 되어 보였다. 술집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아주 진부한 모습이였다. 털복숭이는 왼쪽 옆구리에 늘씬한 갈색머리 여자를 끼고 있었는데 아무리 보아도 여자는 그 자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소리를 지르며 바둥거리 다가 남자의 팔뚝을 물어 뜯어 버렸다. "아악-"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그제서야 여자를 쥐었던 팔을 들어올렸고 그 사이 여자가 제멋대로 엉킨 짧은 갈색 곱슬머리를 휘날리며 마시가 앉아있는 탁자로 달려와 커다란 푸른색 눈에 눈물을 찔끔거리며 널부러진 남자를 부축해 일으키려고 했다. "아네모스...... 괜찮아?" 하지만 그 여자가 아네모스라는 남자를 다 일으키기도 전에 그녀의 팔은 다시 털 복숭이에게 붙잡혀 있었다. "이년이 어딜 물고..있어..엇?" "이거 놧...어?" 털복숭이와 여자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털복숭이 남자가 여자를 잡아 채어당기기도 전에 누군가 뒤에서 털복숭이의 팔을 붙잡아 세웠기 때문이었다. "이봐. 여자에게 무슨짓이야?" 꽤 덩치가 커보이는 밤색 머리 남자가 그럴듯한 검을 허리에 매달고 짙은 밤색 눈을 찌푸리며 털복숭이의 팔뚝을 거머쥐고 있었다. 그는 특이하게도 머리에 붉 은 띠를 길게 두르고 있었는데 아마도 페렌토의 수 많은 부족민들중 하나인것 같 았다. 차림새가 제법 든든하고 여행자 티가 나는것이 떠돌이 부족민 같았는데 키 가 2미터는 되어보였다. "넌 뭐야? 너도...푸헙!?" 그러나 털복숭이의 말은 이번에도 끝까지 이어지지 못 했다. 지금까지 탁자에서 술을 뒤집어 쓰고 멍하니 앉아있던 마시가 술잔에 남아있던 술을 털복숭이에게 엎 어버렸기 때문이었다. 털복숭이 남자의 더벅머리에서부터 흘러내리는 술이 수염 을 타고 뚝뚝 떨어져내리기 시작했다. "미치겠네......" 메디아가 나직히 뇌까렸다. 간만에 편안히 쉬나 했더니 전혀 그럴 분위기가 아니 다. '이제 어쩌지?' 하는 고민이 그녀의 뇌리에 잠깐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대책은 없었다. 저 멍청한 남자는 마시의 술을 쏟았을뿐 아니라 그 술을 마시가 뒤집어 쓰게 한 것이다. 그리고 마녀 메디아는...... 말리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두고 보 자는 심산인것이다. 말렸다가는 며칠간 말렸다는 이유로 그 수다와 고집들을 들 어줘야 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위험할거란 생각은 손톱만큼도 하지 않는 그녀 였다. 단지 털복숭이 남자가 갑자기 불쌍해졌을뿐이다. 지금 털복숭이와 그 팔뚝을 잡고 있는 덩치 큰 사내와 울고 있던 여자, 그리고 술집의 다른 손님들과 엎어져 있던 아네모스라는 남자까지 정신을 차렸는지, 모 두가 일제히 연약해 보이는 예쁘장한 마시를 돌아보았고 그 순간 술집은 알 수 없는 정적에 휩싸이고 있었다. 그 정적을 깬것은 역시 눈치없는 마시였다. "야-. 너 내 술 물어내" 마시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식당으로 울려퍼졌다. 역시 먹는것은 중요했다. 블루잉이 메디아의 손에서 어깨로 올라와 그녀에게 속삯였다. "일난 것 같지?" "일은 벌써 났어" 그녀가 짧게 대답했다. 잠시간 조용했던 술집은 털복숭이의 괴성과 함께 난장판이 되었다. "우아악-" 털복숭이가 탁자를 뒤엎으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까지 앉아있던 그의 패거리들이 모두 일어나 이 쪽으로 걸어오며 킥킥거리는 웃음 소리가 사람들에게 들렸다. "푸하...하하하...이봐...... 술값을 물어달래는군 그래. 킥.." "야! 동전 좀 꺼내라. 저 꼬마 불쌍하쟎아." "우히힛...하하" 고함을 지른 털복숭이 사내가 마시에게 손을 뻗어올 때 이때까지도 팔뚝을 잡고 있던 밤색 머리 덩치 큰 남자가 상대를 확 밀어 버렸다. 밀쳐지는 바람에 넘어질 뻔 했던 털복숭이는 덩치를 노려보고 있다가 천천히 칼을 빼들며 음흉하게 웃었 다. 웃는 이빨사이로 빠진 앞이가 적랄하게 보여서 그 남자의 인상이 더 지저분 하게 보였다. 그리고 지저분한 목소리로 역시 지저분한 말을 짓껄이고 있었다. "너도 저 계집한테 관심있냐?" 덩치 큰 남자는 대답대신 검을 빼어 손에 쥐며 털복숭이를 향했다. "오늘 또 저녀석 사고 치는구만" 지켜보던 패거리 중 누군가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남자의 대치상태는 생각만큼 오래가지 않았다. 음흉하게 웃고 있던 털복숭이 가 먼저 덩치의 심장을 향해 검을 가로그었고 순간 덩치는 큰 몸집을 가볍게 움 직이며 털복숭이의 검을 피해 곧바로 상대방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며 바로 자 세를 잡고 그의 검을 재빠르게 회전시키며 털복숭이의 오른쪽 손목을 그대로 베 어버렸다. 털복숭이의 움직임이 둔하고 느린 반면 덩치 큰 사내는 그 큰 몸집에 도 불구하고 움직임이 가볍고 검을 다루는 모습이 유연해 보였는데 왠지 일반 검 사들이 검을 다루는 모습과 판이하게 다르다는 느낌을 주었다. 털복숭이는 자신 의 공격이 실패하고 다리에 걸려 넘어지면서 중심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그대로 손목이 잘리고 말았다. 터져나온 피가 사방으로 뿌려지면서 그의 손이 칼을 쥔 모양 그대로 칼과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우아악~" 일이 이렇게 되자 구경만 하던 털복숭이 패거리도 순식간에 일어난 사태에 당황 하며 밤색 머리의 덩치 큰 남자를 향해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털복숭이는 오른쪽 팔목을 움켜쥔채 흐르는 피를 막으려하고 있었다. 그는 오늘 희롱하던 여자에게 물려 생긴 이빨자국에다가 이제는 낯선 사내에게 아예 손까 지 잘리게 된셈이었다. 재수가 없어도 억세게 없는 날이였다. 그의 동료들이 손목을 베어버린 남자를 에워싸고 있었다. 다시 조용해진 술집에 서 들리는 소리는 남자들의 거친 숨소리 뿐이었다. 얼핏 보기에도 덩치 큰 남자 의 검술은 유연하고 꽤 빠른 움직임으로 보아 그는 아마 뛰어난 실력을 겸비한 경험많은 전사일런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 상대는 셋, 더구나 좁은 식당안에서 는 아무리 뛰어난 검사일지라도 불리할 것이 뻔했다. 피를 본 사람들은 점점 더 험악한 분위기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듯했다. 서로 섣불리 공격하지 못하고 있는 긴장된 상황에서 또 분위기 파악 못한 마시가 한발 나섰다. "야-, 너 내 술 물어내라니까!" 그 순간을 포착한 네 남자는 번개같은 움직임으로, 마시가 두 발을 내딪기도 전 에 상황을 끝내버렸다. 이번에는 어떻게 움직였는지 조차 제대로 볼 수 없을 정 도로 빨리 싸움이 끝나버려서 보는 사람들이 황당할 정도였다. 세 남자는 바닥에 칼을 떨어뜨리며 손목을 움켜쥐고 있었고 예사롭지 않아 보이던 덩치 큰 검사는 벌써 검을 검집에 넣고 있었다. 이번에는 손을 자르지 않고 단지 칼을 떨어뜨리 게 만든듯 했다. 대단히 빠르고 정교한 솜씨였으므로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그들 의 손을 모두 잘라버릴 수 있었을것 같았다. 모두가 눈을 크게 뜨고 앞으로의 일 을 지켜보고 있었다. "윽......" "으읏.. " 잠시 멍청하게 있던 남자들은 칼을 주워 들었다. 그러나 다시 덤벼 볼 생각을 하 는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은 털복숭이를 부축해 나가며 씹어뱉듯이 중얼거렸다. "으윽... 너 어디 두고 보자" 술집은 이제 안도의 숨소리가 들리는듯 했다. 그러나..... "야-! 술 물어내란 말이야. 내 말 안들려?" 마시는 이제 그 눈동자를 완전히 새빨갛게 물들이며 소리를 버럭 질러버렸다. 아 마도 엄청 열이 오른것 같았다. 벌써 세번째 소리치는 것이니 당연한 것이겠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혀 당연한 일이 아니였다. 검을 집어 넣고 돌아 보려던 검 사는 멈칫하며 기막힌 표정으로 마시를 보았고 나가려던 패거리들도 눈동자를 새 빨갛게 불태우며 열을 내고 있는 소년을 어이없이 바라보았다. "흠......" 메디아는 이 모든 상황을 한발 물러서서 구경하고 있었다. 난장판에 끼고 싶은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는 그녀였다. 그러나 저 패거리가 그냥 나가고 나면 쏟아져 버린 아까운 술값 물어줄 사람이 없어지는 것이므로 그녀한테도 절대 반갑지 않 은 일이었다. 어쨌든 마녀 메디아는 손해보고는 못사는, 더구나 먹을것이 걸린 일은 더욱 손해볼 수 없는, 거의 마시와 맞먹는 괴이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이 다. 더구나 여기서 열받은 마시가 사고를 치기 전에 그녀가 먼저 일을 해결하는 것이 훨씬 나을것 같았다. 까딱 방심하다간 여관이 홀랑 불타버릴지도 몰랐다. 여관이 불타는거야 상관이 없지만 잠잘 곳을 다시 찾아나서고 싶지는 않았다. 피 곤했다. 그녀는 침착한 걸음걸이로 문앞에 나가다가 황당한 표정으로 어정쩡하게 멈춰서 있는 패거리에게 다가가서 아주 천천히 우아하게 오른 손바닥을 펴서 내밀었다. '황금을 낚는 여관'이라는 이름의 식당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얼떨떨한 시선이 그녀의 손바닥으로 모아졌다. 이윽고, 그녀의 붉은 입술이 열리고 짧게 내뱉는 말소리가 들렸다. "술. 값." - 계 속 - 번 호 : 6 / 83 등록일 : 1999년 06월 24일 01:08 등록자 : CHO1971 조 회 : 2707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7.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신이 알파를 창조했을때 탄생과 축복의 의미를 알았다. 신이 카오스를 창조했을때 분노와 징벌의 의미를 배웠다. 제 7 장 새롭게 시작되는 여행. 지금 메디아와 마시는 쓸데없는 일에 정신을 소비한 관계로 목이 말랐고 그래서 마시다가 방해받은 술을 다시 주문해서 아주 달게 마시고 있었다. 물론, 술값은 아까 나간 멍청한 패거리한테서 받은 돈으로 냈다. 그들 패거리는 황당해하다가 쓴 표정을 짓더니 순순히 동전을 내어주고 지금 탁자에 앉아있는 일행들을, 아까는 제각각 서있었지만 한번 째려보고는 나가버렸다. 마치 그 얼굴 들을 하나하나 잊지않겠다는듯이...... 지금 이들과 함께 앉아있는 덩치 큰 남자는 여행을 하면서 용병일을 하고 있다는 알렉토라는 이름의 떠돌이 검사였는데 페렌토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모하비부 족의 전사라고 했다. 꼴사납게 엎어졌던 남자는 출장다니는 예술가로 아네모스라 는 이름이라고 했고 그 옆에 앉아서 눈을 빛내고 있는 갈색머리의 수다스러운 여 자를 자신의 여동생 에코라고 소개했다. 아네모스라는 예술가는 마시에게 자신들 때문에 술을 뒤집어 쓰게 해서 미안하다고 하며 제법 예의를 차렸지만 별로 그 에게는 신경도 쓰지않는 마시였다. 마시는 술에 젖어서 흩어진 짧은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넘기며 꿀꺽꿀꺽 술을 들 어 마셨고 메디아도 새로 가져와 시원한 맥주를 만족스럽게 마시고 있었으며 블 루잉도 접시의 술이 모자란듯 바닥까지 핥아먹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마치 신기 한 별종을 바라보듯이 식당의 모든 사람이 힐끔거리고 있었다. "술에 무슨 한맺혔나봐." 에코라는 짧은 곱슬머리의 활달해 보이는 여자가 속삭이듯이 아네모스에게 말했 다. 아네모스는 여동생을 잠깐 바라보고는 대답없이 떠돌이 전사에게 시선을 돌 려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통상적인 말을 하고 있었다. 알 렉토는 별거 아니라며 무표정하게 말했고 곧 메디아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요 아가씨, 남동생에게 조심하라고 하는게 좋겠소. 그렇게 겁없이 나서다가 는 큰일날거요." 사실 알렉토는 자기앞에 앉아있는 이 메디아라는 처녀도 미덮지 않아 보였지만 그래도 어린 소년에게 말하는 것보다는 그 누나에게 충고하는 편이 나아 보였기 에 무게를 실어 어른답게 말하는 중이였다. 알렉토는 올해 서른 둘이 되는 나이 였고 세상경험도 많아서 이렇게 어린 남매가 여행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 지 익히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진심어린 충고를 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린 처녀는 마시던 술잔을 내리고 소년을 힐끗 보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쟤는 조심하란다고 들을애가 아닌데요" 알렉토는 도대체가 걱정이나 불안함을 느낄 줄 모르는 것 같은 저 태도가 더 걱 정이 되었다. 유난히 부당한 일이나 어려운 일을 당하는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 치지 못하는 정의감이 남다른 성격인 알렉토였다. 겉으로는 무뚝뚝해 보여도 심 성이 착해서 도움이 필요하다 싶으면 언제나 누구든지 상관하지 않고 도와주는 우직한 그는 이렇게 어려보이는 남매가 단둘이 여행을 하는 중이라고 하니 은근 히 걱정도 되고 이들의 겁없는 행동이 불안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에게는 메디 아와 마시가 세상경험이 없어 무서운 것이 없는 부잣집의 철없는 남매로밖에 보 이지 않았다. "너희들 여행 중이면 다음은 어디로 갈거니?" 처음부터 다짜고짜 반말인 에코라는 여자때문에 메다아는 기분이 나빠지고 있었 다. "파라의 항구 노아" 메디아는 퉁명스럽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 순간 마시는 먹던 술을 내려놓고 큰 눈을 반짝거리며 그녀를 바라다 보았다. "정말? 정말이야?" 좋아서 팔짝팔짝 뛸듯 기대에 찬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철없는 새끼 드레곤 을 보면서 메디아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노아로 간다는 말은 그냥 눈가림으로 한 말에 불과할 뿐이었다. 당연히 그녀와 마시는 코카서스 화산으로 돌아가야 했다. 단지 거기로 간다고 하면 여기 있는 사람들이 미쳤냐고 할것이 뻔하기 때문에 그렇게 대충 둘러댄거였다. 코카서스 화산은 평화로운 휴화산이였지만 저 성질 더러운 새끼 드레곤 마시땜에 요 몇년 사이 주변 분화구에 작은 폭발이 있었고 고요의 숲이 있어서 위험한 금 지로 알려져 사람들이 가지 않는 땅이었다. 그런 곳에 간다고 해서 의심을 자초할 필요도 없고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노아로 간다고 말한것인데 멍청한 마시는 진짜인줄 알고 잔뜩 기대에 찬 눈초리를 보내고 있으니 한심했다. '어쩜 저렇게 눈치가 없을까?' "진짜야? 진짜?" 마시가 재차 확인 질문을 하고 있었고 에코라는 여자는 기쁜 표정으로 말하는 것 이었다. "어머나 잘 됐다. 우리도 해안을 따라서 노아에 들를거야. 국경을 넘어야 할텐데 같이 가자." '이런...' "정말 잘 됐네. 누나 같이 가자. 응? 응?.... 응?" 마시는 물만난 고기처럼 애교를 떨며 어디서 줏어들었는지 괴상한 누나라는 호칭 까지 사용하며 반짝반짝이는 눈으로 애원하듯이 메디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지금 본모습인 드레곤의 몸체였다면 꼬리까지 살랑살랑 흔들고 있을것이 분 명했다. 마치 개처럼...... '힉' 메디아는 누나라는 호칭에 질겁했다. '못살아 진짜...... 으이구 내 팔자야.' 그녀는 정말 난감해지기 시작했다. "아네모스, 괜찮지? 얘네들하고 같이 가면 심심하지 않을거야. 우리끼리 가면 무 슨 재미겠어? 어차피 길떠나는데 일행이 있어야지. 저기....알렉토는 어디로 가 세요? " 아네모스는 여동생의 호들갑에 그저 고개만 끄덕였고 알렉토는 마시와 메디아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가 동행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무럭무럭 피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차피 파라제국으로 가는 길이니 조금 돌아가더라도 상관 은 없었고 철없어 보이는 꼬마와 어린처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정말 걱정이 되었 던 것이다. "예... 저도 국경을 넘어 노아로 가려고 합니다만......" "이야~, 그럼 다 같이 가면 되겠네. 어차피 모두 국경을 넘을 사람들이쟎아." 에코는 알렉토의 대답에 금방 기쁜내색을 하며 말했다. 이때, 가만히 있던 메디아가 말을 꺼냈다. "저기 우리는 따로 가는게......" 그러나, "어머! 그게 무슨 말이니? 이렇게 험한 세상에 어떻게 너희들끼리 국경을 넘겠어? 함께 움직이는게 좋지. 더구나 이렇게 든든한 검사도 있고...그런 엉뚱한 생각말 고 여행준비나 잘 해두렴. 국경을 넘어서 가려면 먼 길이라 아무래도 위험하니까 만약을 대비해서 약초와 말도 준비해야하고 기타 필요한것들도 사야하니까. 그 런면에서도 여럿이서 가는것이 안전하고 비용도 줄이고 좋쟎아. 그리구 요즘 날 이 갈수록 도둑떼와 오크들이 극성이라고 하니까 더 조심해야지. 너희들처럼 어 린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것은 보는 사람들이 더 불안할뿐더러 다들 얕잡아 보기 때문에 봉변을 당할수도 있다구. 그러니까 다른 말 그만 하고 같이 가자. 그리구 네 동생도 같이 가고 싶다구 그러쟎아. 남동생이 그동안 단둘이만 다니는 여행 이 얼마나 무서웠으면 그러겠니? 너도 동생을 걱정한다면 우리랑 같이 가자. 내 가 보기엔 지금까지 별일없이 무사한것이 너무너무 신기할 지경이라니까." 에코의 정신없는 수다에 말을 빼앗긴 메디아는 이미 자신이 수습할 길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저 무서워하는 기색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마시를 걱정할뿐이었 다. 전혀 다른 이유로...... "그래.....그렇겠지...." 거의 체념하듯이 말하는 메디아의 말소리는 잘 들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앞이 캄 캄해 지는것을 느끼며 속으로 이 일행과 만난 것을 후회했다. 아니 이 일행과 합 석한 것을 후회했다. 이래 저래 사태 수습 후 그냥 자연스럽게 함께 앉아서 술을 마시게 된 것뿐이였는데...... 그저 작은 한숨을 삼킬뿐이었다. 반면, 새끼 드레곤 마시는 입이 귀까지 찢어지지 않을까 걱정 될 정도로 헤죽거 리며 웃고 있었다. 마시는 자신의 호기심과 심심함을 달래주는 이 즐겁고 유쾌한 여행이 아주아주 좋았다. 이렇게 즐거운 여행이 길어지고 더구나 인간 일행까지 끼어서 간다니 더 더욱 좋았다. 메디아의 더러운 성질도 인간들과 있을때는 폭 발하지 않는것 같았다. 지금도 꼼짝없이 수다스러운 인간 계집아이의 말에 대꾸 도 못하고 있지않은가. 평소 같았으면 벌써 뭔가 일이 벌어졌을텐데......역시 인간에게는 메디아가 약한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는 마시였다. 단지 탁자위에서 남은 술을 핥아먹으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블루잉만이 일행을 한번 둘러보고 메디아를 올려다보며 그녀가 불쌍하다는 생각을 아주 잠깐 했을 뿐이었다. 여관 밖은 하루를 시작하는 인간들의 움직임으로 소란스러웠다. 말발굽과 수레바 퀴가 길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는 아침부터 듣기에는 상당히 거북스러운 면이 있었 다. 떠오른지 한참이나 지난 해는 벌써 빛을 사방에 흩뿌리며 인간들을 바쁘게 재 촉하고 있었다. 그러나 메디아와 마시가 자고 있는 여관방은 바다쪽으로 방향이 트여 해가 뒤에 있어서인지 아직도 방안은 어둡기만 했다. 늦잠을 자기에는 정말 좋은 조건이었다. 하지만 그 늦잠을 방해하는 수 많은 소음은 메디아를 짜증나 게 만들고 결국은 일어나게 했다. 그 소음속에서도 여전히 끄덕없이 잘자고 있는 마시를 보자 괜히 심술이 터져나왔다. "우잇..." "우~~~우웅..." 쌕쌕거리며 자고 있던 블루잉도 어느새 눈꼽을 띠며 기지개를 켜고 세수를 하고 있었다. 메디아는 물이 가득한 대야에서 열심히 몸을 씻으며 귀엽게 발을 들어 발바닥 청소까지 하고 있는 블루잉을 가만히 바라보자 잠깐 일었던 짜증이 사라 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침대위에 앉은채 무릎위에 베개를 올려 그 위에 턱을 괴고 어제 있었던 일들을 곰곰히 되짚어보며 해결책을 생각했다. 그러나 해결책은 커녕 나오느니 한숨이요 골치가 아파올뿐이었다. 그녀가 이렇게 한숨만 내쉬며 머리를 붙잡고 혼자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블루잉은 세수를 마치고 메디아를 보았다. "으휴~" "야. 한숨 그만 쉬어. 방바닥 꺼지겠다." "어휴~~~" "너답지 않게 그만한 일로 왜 그러니? 평소엔 눈하나 깜짝 안하더니....." 블루잉은 메디아의 걱정을 이해는 했지만 지금 그녀의 반응은 좀 지나칠 정도라 고 생각하며 말했다. 그러나 메디아는 여전히 난감한 표정으로 옆에서 자고 있 는 마시를 보았다. "지금이 평소냐? 이 녀석이 여행이 길어지는 동안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벌써부 터 눈앞이 캄캄해지고 대책이 안선다." "너 정말 이상하다. 너 솔직히 지금까지 마시를 감당 못한적이 있냐?" 블루잉의 질문에 메디아는 무슨 웃기는 말이야라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없어." "그럼 너 마시가 무섭냐?" 이번에는 정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메디아가 블루잉을 바라보았다. "너 미쳤냐? 내가 마시가 무섭게? 그게 말이 되냐?" 블루잉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럼 도대체 뭐가 문제야? 그냥 편안하게 예전처럼 여행한다구 생각하면 되지. 단지 귀찮은 애 하나 맡아서 갈 뿐이지. 솔직히 마시가 일을 저질러 봐야 얼마 나 저지르겠니? 쪼끄만 새끼 드레곤인걸...... 잘만 구슬르면 애교도 떨줄알고 그런데로 괜찮쟎아. 거기다가 너한테 한 주먹거리밖에 더 되겠니? 어차피 이런 일도 올해가 마지막이 될텐데 그러니? 생각해봐 벌써 내년이면 마시도 성년이 되 어서 어른이 될 시기가 되었는걸. 좀 성질이 더러워서 그렇지 아직까지는 그저 힘없는 새끼 드레곤이쟎아? " 블루잉은 있는 그대로를 차근차근 설명하며 상황이 그리 나쁜것만은 아니라고 말 하고 있었다. 사실은 솔직히, '마시가 너보다 성질이 더 괴팎하겠냐?' 라고 덧붙여 말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무슨 보복을 당할지 모르므로 그 생각 은 차마 입밖으로 내지 않는 거북이였다. 곰곰히 블루잉의 말을 듣고 있던 메디아는 정말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마시의 나이가 아흔아홉살을 넘기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제 마시는 올해 13월이 지나고 판타리아의 기나긴 겨울동안 변태를 끝내면 완 전히 성년이 되어 지금까지의 어리고 나약한 몸도 더 이상 볼 수 없을테고 어느 종족보다 강한 불사의 육체와 강력한 마법의 힘을 갖게 될테고 그러면 더이상 그 녀의 보살핌과 간섭도 받지 않을것이다. 지금이 2월말이니 일년도 남지 않은 셈이였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으로 마시의 버릇을 고칠 기회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굳이 마시의 버릇을 메 디아가 힘겹게 고생하며 고칠필요가 있나 싶었다. 드레곤이 버릇이 없으면 어떻고 버릇이 있으면 뭐가 달라진다고. 그저 드레곤은 드레곤일뿐인데...... 아니 그래도 역시 그녀가 편하려면 마시를 제대로 교육시켜야겠다고 다시 생각하 는 메디아였다. 아주 이 기회를 활용하자는 긍정적인 전망까지 하게된 그녀는 길 어진 여행이 잘된것일지도 모른다고까지 생각했다. 이번 여행이 불편하고 신경이 쓰이겠지만 이런 일도 마지막이고 자신이 이렇게 걱정할 필요가 없는것 같았다. 더구나 아침부터 그런 걱정으로 하루를 망치고 싶 지도 않았다. 일은 이미 쏟아진 술이였고 다시 되돌릴 수 없었으므로 차라리 상 황을 받아들이고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아침 이 더 상쾌한 것같았다. "그래. 뭐... 지가 사고를 쳐봤자 내 손바닥 안이지. 아직까지는......" 메디아는 조용히 자신에게 말하며 블루잉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여간 기특한 거북이야......' "그래, 그래야 너답지." - 계 속 - 번 호 : 7 / 83 등록일 : 1999년 06월 24일 17:24 등록자 : CHO1971 조 회 : 2644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8.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신이 알파를 창조했을때 탄생과 축복의 의미를 알았다. 신이 카오스를 창조했을때 분노와 징벌의 의미를 배웠다. 제 8 장 다섯명의 여행자. 망토를 둘러 써 양갈래 머리와 얼굴의 대부분을 가린 메디아는 여전히 마법의 빗 자루를 끼워 넣은 가방을 등에 매고 검정색 말위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어깨에 는 작은 거북이 한마리가 푸른 눈을 반짝이며 올라앉아 흔들리고 있었지만 떨어 질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메디아는 돈이 넉넉했으므로 당연히 좋은 말을 샀 다. 지금 타고 있는 말도 타미마을에서 구할 수 있는 말 중에서는 가장 좋은 말 에 속했고 역시 마시에게도 좋은 말을 타게 해 주었다. 그들은 코카서스 화산에 서 말을 구할수 없었기 때문에 타미까지 걸어서 여행을 했었고 다시 코카서스로 돌아갈때도 말을 사용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일행도 생기고 국경을 넘 어 노아로 가게되어 말을 구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앞에는 붉은 빛이 많이 도는 건장한 갈색 말을 탄 짙은 밤색머리에 붉은 머리띠를 두른 건장한 몸집의 알렉토가 늠름한 뒷모습을 보이며 가고 있었는데 말과 사람이 색깔이나 분위기가 비슷해 보였다. 메디아의 옆에는 점쟎은 아네모스가 은은한 금색 단발 머리카락을 바람에 휘날 리며 푸른 눈동자로 역시 푸르른 하늘을 보며 흰색에 검은 점박이 말을 달리고 있었는데 가끔 낮은 소리로 노래를 읊조리는 듯 그에게서 듣기좋은 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바로 옆에서 아네모스의 여동생 에코가 그 오빠와 같은 푸른 눈동자를 행복하게 빛내며 손짓발짓까지 해가며 정신없이 수다를 떨고 있었다. 어떻게 말 위에서 발짓까지 하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알렉토와 같은 붉은 빛이 도는 조금 작은 갈색 말은 주인이 움직이거나 말거나 길을 잘 달리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수다를 떠는지도 모를정도로 끝이 없을것만 같은 그 수다에 질려버린 메디아는 아네모스의 반대편으로 슬그머니 자리를 옮긴지 오래였다. 메디아의 골치덩이 마시는 한번도 대해 본적이 없는 말이라는 동물에 맨 처음에 는 호기심, 그 다음은 두려움 비슷한 꺼림직함을 드러내더니 말을 타고 나서는 당황이라는 감정을 느끼는것 같았는데, 꼭 처음 인간의 몸이 되었을때의 모습과 비슷했다. 마시는 결국 날뛰는 말등에서 보란듯이 떨어져 버렸었다. 흙바닥에 떨어진 직후에는 무슨일이 벌어졌는지 제대로 파악을 못하더니 금방 벌떡 일어 나 말과의 사생결단을 낼듯 난리법석을 떨고 나서야 지금처럼 제대로 말위에 앉 아 있을 수 있었다. 물론, 난리법석이란 마시의 일방적인 마구잡이 구타로 불쌍한 말을 개패듯 두들 겨 팼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 난리법석은 말과 그에 필요한 물건을 파는 마구 상에 있는 말장사와 모든 사람들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말(馬)이 말(言)을 안들 으면 우선은 타이르고 결국엔 완력을 쓰게 되는건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연약해 보이는 마시가 엄청난 괴력을 발휘하며 커다란 말을 진짜 작은 개한마리 패듯 가볍게 구타하는 모습은 사람들을 정말 놀라게 했으며 한술 더떠 말을 치고 눌러 밟고 깔아 뭉게는 것도 모잘라 사정없이 두들기는 그 잔인함에 기겁을 하게 했던것이다. 완전히 겁에 질린 말이 마시의 손에서 겨우 구출된 것 은 순전히 알렉토의 불쌍한 것은 절대 두고 못 보는 그 정의감 때문이었다. 미끈하게 뻗은 다리와 전체적으로 훌륭한 회색빛 몸매에 하얀빛이 섞인 갈기를 가진 회색말은 그 멋진 모습이 무색하게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채 그 큰 눈을 껌 뻑거리며 콧김을 몰아쉴뿐이었다. 그리고 일행은 예쁘장한 소년의 모습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마시의 잔인함과 대단한 완력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어린 소년 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메디아는 간단하고 성의없는 그리고 말도 안되는 설명 한마디로 그들의 의구심을 일축해 버렸다. "저주를 받아서 그래" 사실, 아무리 새끼라지만 드레곤은 드레곤이였므로 일반 사람들보다 힘이 센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정령사들보다 쉽게 불의 정령을 부르거나 뇌전을 내릴 수 있 었고 맘만 먹으면 간단한 마법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마시는 마법을 전혀 사용할 줄 몰랐다. 아니 배울 기회조차 없었다. 메디아가 마녀임에 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녀는 마시가 마법을 배울 기회를 절대로 주지 않았다. 만 약 마시가 마법을 배우기 시작하면 수 많은 사고를 일으킬거라는 그녀의 이기적 인 생각에서였다. 마시에게도 마법서들은 그저 맛좋은 간식거리였을뿐 별로 마법 을 배우고자 하는 의욕이 없었으므로 그녀의 의도는 그런대로 성공했고 그래서 새끼 드레곤은 마법을 사용할 줄 몰랐다. 그래도 사는데 지장은 없었다. 어차피 성년이 지나면 마법은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인데다가 지금도 힘이 무식하 게 셌으므로...... 에코는 무슨 저주가 힘이 세지는 저주냐고 이상하다며 물었고 이번에도 간단한 한마디를 들을 수 있었다. "성질이 더럽쟎아." 모두들 입을 다물고 아직도 말을 노려보고 있는 마시를 의미심장하게 쳐다보고는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소동이 잠시 있은 다음 일행은 별탈없이 물건들을 사고 타미마을을 나와 길 을 떠날 수 있었다. 마구상에서 있었던 일은 벌써 다 까먹고 헤헤거리며 웃는 얼 굴로 시종일관 두리번 두리번 거리는 마시는 일행중 제일 뒤쳐져 따라오고 있었 다. 일행이 평화롭게 말을 달리며 타마마을을 벗어난지 한참이 지난후 저녁때가 아직 안되었을때였다. 타미마을에서 늦잠을 자는 마시때문에 아침을 늦께 시작한 일 행은 볼일을 다 보고 늦은 점심을 먹고 나서야 출발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저녁 무렵이 되었어도 아직 멀리까지 올 수 없었다. 그런데...... "메디아야 ... 나 배고파" '그러고 보니 진짜 배고프네' 마시와 메디아, 그들은 배가 고팠다. 제일 앞에서 일행을 이끌고 길을 가던 알렉토는 눈쌀을 살짝 찌푸렸다. '도대체 밥 먹은지 얼마나 됐다고?' 에코는 아예 신기하다는 듯이 마시를 돌아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어머. 너 대단하구나. 아까 점심때 고래찜을 혼자서 다 독차지하고 먹고도 생선 구이를 한 열접시쯤 먹고 타미에서 제일 푸짐하다는 문어요리까지 몇접시를 더 비웠지 아마? 그리고는 맥주까지 한통을 다 마셨는데 벌써 배가 고프다니 진짜 뭘 더 먹을 수는 있는거니? 그게 다 뱃속으로 들어가니?" "나도 배고픈데......" 이번에는 일제히 메디아를 바라보았다. 마시는 반갑게, 에코는 정말 신기하게, 아네모스는 진기한듯이, 알렉토는 한숨을 쉬며...... "어떻게 그렇게 잘 먹죠?" 메디아에게 아네모스가 낮은 목소리로 예의바르게 물어왔다. "원래 잘 먹어요." 메디아 특유의 짧고 간단하며 시큰둥하고 무성의한 대답이었다. 그녀는 솔직히 사람들한테 신경쓰고 상대할 여유가 없었고 있다고 해도 상대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마시 하나만 신경쓰고 상대하는 일도 귀찮았기 때문이었 다. 오로지 그냥 되는데로 대답하고 저러거나 말거나 자기들 맘대로였으면 좋겠 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한숨을 내쉬며 메디아를 바라보던 알렉토는 잠깐 서쪽 하늘을 바라보고 일행에 게, 정확히는 배고프다는 남매에게 말했다. "우리 조금만 더 가도록 하죠. 야숙할 장소를 찾아서 저녁을 먹는 것이 좋을겁니 다. 그러려면 해가 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움직여서 안전한 장소를 찾아야 해 요. 여기는 대로인데다가 은폐물도 없고 야숙하기에는 좋지 않습니다. 얼마 안가 서 작고 안전한 숲이 나오니 그곳에서 식사를 하죠." 정중하게 설명까지하는 알렉토는 저 철없는 남매가 고집을 부리지 않기를 바랬다. 남자아이는 불만스런 표정으로 뭔가 말하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그 누나가 할 수 없다는 듯이 그에게 대답했다. "그렇게 해요" '그나마 다행이군. 저 처녀라도 분별력이 있으니.....' "그럼. 계속 가죠" 일행은 말을 재촉해 안전하다는 숲에 해가 지기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네모스 와 알렉토가 주위에서 땔감을 주워오는 동안 에코가 법석을 떨며 큰 냄비와 그릇 들을 말에서 내려 늘어놓기 시작했고 메디아와 마시는 자신의 말에서 음식 재료 들을 꺼내고 있었다. 워낙에 많이 먹는 그들인지라 남들보다 그 음식 재료들도 몇 배나 많이 구입해서 말에 실었기 때문에 다른 일행들보다 짐이 많은 그들이었 다. 숲에 어둠이 내려앉고 일행이 불을 피우고 모두 둘러앉자 불위에 냄비가 올려지 면서 구수한 냄새가 숲에 퍼져 나가려하고 있었다. '흐음....냄새가 너무 좋네...... 위험한걸.' "윈드 브레이크(wind break)!" 메디아가 간단한 주문을 외쳤다. 순간, 주위를 맴돌던 구수하고 향긋한 음식냄새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전사인 알렉토와 감각이 남다른 아네모스는 바람의 흐름을 예민하게 느끼며 메디 아를 쳐다 보았다. 에코는 열심히 음식을 하느라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 다. 음식은 자신의 취미라며 손도 못대게 하고 수선을 떠는 중이었다. "마법...사...였습니..까?" 아네모스가 놀란 목소리를 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그제서야 돌아보는 에코였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네모스." "비슷해요." 여전히 간단명료한 대답. "대단한 실력이군요. 이토록 쉽게 마법을 걸다니....." 알렉토는 아무말도 않고 그저 연약해 보였던 남매가 의외의 특기를 가지고 있어 서 다행이었다. 하긴 여행 중이라고 했으니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었던 거겠지라고 생각했다. "오빠-. 무슨 말을 하는거야?" "너 이리와서 냄새 좀 맡아보렴." "에? 뭐야?...어.. 이상하다?" 에코는 냄비를 올려놓은 불가와 둘러앉은 자리를 잠깐 왔다갔다 하더니 평소에도 잘 짓던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냄비에서는 여전히 구수한 냄새가 나 고 있었고 불위에 올려 놓은 말린생선 냄새도 불가에서는 느낄 수 있었지만 몇 발짝도 안떨어져 있는 자리에서는 음식냄새가 전혀 나지 않고 있었다. "이거... 너가 이런거야?" 이번에는 대답도 안하는 메디아였다. 음식냄새를 맡고 찾아 올 들짐승을 방지하 기 위해서 마법을 사용했을 뿐이었다. 대로에서 가까운 작은 숲에서 위험한 짐승 은 별로 없겠지만 그래도 귀찮을지도 모를일을 미연에 없애고 싶었다. 먹는데 귀 찮은 일 생기는 것은 절대로 싫었다. "아네모스가 대단하다면 정말 대단한건데.....오빠는 조각가라서 마법에 대해서 도 아주 잘 알고 있거든. 뭐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야. 사 실, 조각가들은 아는게 많아야 하거든. 특히 마법사들이 조각품을 좋아해서 이것 저것 줏어 듣는게 많아. 그래봐야 까다로운 마법사들이 조각품을 가지고 감상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걸 가지고 이상한 짓거리들이나 하지만 말이야. 항상 이상한 실험이나 뭘 만들 궁리나 하는 사람들이고 도대체가 속을 알수 없는 괴상한 성 격에다가...." "에코야...음식 탄다." 아네모스가 다시 시작된 에코의 수다를 점쟎게 끊었다. "어머나!...아직은 안탔어 뭐. 메-" 잠깐 혓바닥을 내밀어 보인 에코는 음식이 완성되었다면서 자랑스런 표정으로 일 행의 그릇에 저마다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물론 대식가 남매는 특히 큰 그릇에 더 많이 주었고 블루잉에게도 모두에게처럼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적당히 음식이 나누어 지고 드디어 잘 구워진 생선을 덥석 깨물어 먹기 직전이었 다. 갑자기 들려온 음침한 소리로 메디아는 혀를 깨물어 버릴뻔했다. "여기들 있었군." 나뭇가지를 밟는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어두운 숲에서 몇몇의 사내들이 기 어나오기 시작했다. 그중에 네명은 어제 저녁에 보았던 얼간이들이였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낯선 세명의 인간들도 더 나타났다. 아니 두명의 인간과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짐승과 인간 중간쯤 되어 보이는 괴상한 몰골의 정체불명 의 종족 한마리였다. 메디아는 짜증이 났다. 너무나 고전적인 일이 아닌가? 어제 밤에 있었던 일때문에 복수를 하러 여기까지 따라와 남의 식사를 방해하다니......기껏 신경쓴다고 마 법까지 걸었는데 그게 저런 떨거지들한테는 소용이 없는 것인데다가 먹기 직전에 방해를 받았기 때문에 더 짜증이 났다. 그녀는 정말 배가 고팠다. 일행은 모두 천천히 일어서며 각자의 무기를 챙겨 들며 대비를 하고 있었다. 저 쪽도 제법 가까이 다가와서 이제는 그 모습이 다 보일 정도였다. "쩝쩝...쩝..." 그러나 마시는 꿈쩍도 않고 벌써 먹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은 거기 없다는 듯이 어느 식당에나 앉은 듯이...... 저쪽에서 오른쪽 손이 없는 털복숭이가 눈쌀을 있는데로 찌푸리며 마시를 노려보 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일행들은 그런 마시를 그저 잠깐 역시나 한심하다는 듯이 보고는 다시 눈앞에 나타난 불청객들을 바라보았다. "이 녀석들이 맞는가?" 낯선 인간들 중 키가 유난히 작은 남자의 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변성기 가 지나지 않은 소년의 목소리처럼 가늘고 소름이 돋을만큼 간지러운 목소리였다. "그래. 저기 덩치 큰 녀석이 내 손을 잘라 버렸어." 메디아는 그 가는 목소리를 들으며 바람을 원상태로 돌려놓았다. 이런 일이 있 을때는 바람이 전해주는 사소한 것들도 놓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사실 바람의 움직임이 정지되어 버리는 바람에 모하비 부족의 전사출신인 알렉토도 적들이 가 까이 다가올때까지 전혀 몰랐던 것이었다. 바람이 불자 메디아는 바로 알 수 있 었다. 희미하게 전해져 오는 유난히 코를 자극하는 냄새를...... 그것은 특정한 마법을 연구하고 습득하는 마법사들에게만 나는 특별한 냄새였다. 약초와도 같 은 그 향기는 왠만큼 마법을 익히는 자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독특한 것이었 다. '흑마법사로군' 털복숭이의 대답이 들려오고 마법사 옆에 서 있던 괴상스러웠던 녀석이 앞으로 나섰다. 밝은 불빛이 그 얼굴을 비추어 주었고 아네모스가 짧은 신음소리를 삼키 며 말했다. "저건... 고렘이야." 고렘은 흙으로 만든 인형이나 돌 조각품에 생명을 불어 넣어 움직이게 하는 일종 의 마법 인형이었다. 대부분의 고렘을 만드는 마법은 흑마법에 속했고 그래서 일 행은 저기 있는 인간이 흑마법사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지금 알렉토를 향해 다가 오고 있는 고렘은 인간과 사자의 중간쯤 되는 석조 조각품으로 만든것 같았다. 뒤에 달려 있는 꼬리는 사자꼬리였고 손도 마치 사자의 그것과 같았으며 그 머리 는 완전히 사자 모양이었다. 날카로운 이빨을 번뜩이며 다가오는 모습에 아네모 스와 에코는 뒤로 물러서며 얼굴이 창백해졌다. 알렉토는 검을 꺼내 쥐며 일행의 앞을 가로 막았다. "뒤로 물러서..." 그래도 마시는 꼼짝도 안했다. 잠깐동안 메디아는 자신도 앉아서 먹어볼까 생각 해 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흑마법사를 바라보며 그 생각을 접었다. 적어도 저 녀 석을 치우고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알렉토가 앞으로 한발 더 나서고 있었다. - 계 속 - 번 호 : 8 / 83 등록일 : 1999년 06월 25일 02:54 등록자 : CHO1971 조 회 : 2605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9.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신이 알파를 창조했을때 탄생과 축복의 의미를 알았다. 신이 카오스를 창조했을때 분노와 징벌의 의미를 배웠다. 제 9 장 소란스러운 밤. 흉칙한 고렘이 앞으로 나서자 그 뒤에 늘어서있던 무기를 든 털복숭이의 패거리 가 양손에 두개의 칼을 쥔 남자와 함께 불가로 다가왔고 털복숭이가 잘 만났다는 듯 말을 건네왔다. "이봐. 아가씨 다시 만나 반갑군. 어젯 저녁에는 섭섭하게 헤어졌지만 오늘은 섭 섭하지 않을 정도로 색다르게 해주지. 이런 숲에서 시체를 깔고 하는 것도 운치 가 있을거야" "그거 좋은 생각이군. 좋은 구경거리가 생겼는걸" "그런데 그 손으로 옷이나 제대로 벗기겠어? 내가 좀 도와 줄까?" "흐흐흣... " 알렉토는 이미 고렘을 상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행을 도와줄 여유가 없었다. 그 는 자신의 일행들이 그저 잘 도망쳐 주기를 바랄뿐이었다. 고렘도 고렘이였지만 저 뒤에 아직도 느긋하게 서있는 키작은 자가 신경이 쓰였을 뿐더러 어설픈 놈들 이야 상관이 없었지만 같이 다가오고 있는 양손잡이가 알렉토의 감각으로는 만만 치 않은것 같았다. 그로서도 이 일행이 무사할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알렉토의 검이 고렘에 부딪칠 때마다 번쩍이는 불꽃이 생겨났다가 사라졌다. 고 렘의 움직임은 돌덩이라서인지 둔했지만 알렉토에게는 그 둔한 움직임도 별도움 이 되지 않았다. 아무리 검을 휘둘러도 돌조각이 조금 떨어질 뿐이었다. 그러나 마법사는 그 모습에 조금 이채로운 표정을 지었다. 저런 고렘을 평범한 검으로 공격해서 흠집을 낸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닌데 돌조각들을 떨어뜨릴 정도면 힘이 대단한 자가 틀림없었다. 그러나 마법사가 걱정할 정도는 아니였다. 고렘은 완전히 깨지기 전까지는 계속 움직일 수 있었고 완전히 깨뜨려 버릴려면 최소한 소드에너지(sword-energy) 정도를 움직일 수 있는 검사여야 했고 이런 시 골 구석에 그런 검사가 나타날 일은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법사는 다 음 순간 눈을 부릅떠야만 했다. 한동안 고렘의 표면에 돌조각만 날리던 알렉토가 고렘에게서 떨어져 자세를 바꾸 더니 그의 검에서 희뿌연 빛, 바로 소드 에너지(sword-energy)가 뿜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후는 정말 간단하게 고렘의 목을 잘라내고 계속 움직이는 팔과 다 리를 이리저리 잘라서 흩어지게 했다. 알렉토의 검에서 빛이 사라지고 그는 곧 메 디아와 에코에게 다가오던 패거리중 두명을 막아섰다. 그 와중에 아네모스는 호신용으로 준비한 칼을 들고 에코를 향해 다가오던 털복 숭이를 막고 있었다. 털복숭이는 왼쪽손에 검을 들고 있었고 그 때문에 아네모스 에게도 쉽게 움직임이 막혀 버렸다. 원래 아네모스도 겉으로는 허약해 보여도 돌 을 다루는 조각가라서 근력도 제법 있었고 섬세한 면이 있어 어설픈 상대의 움직 임보다는 유리한 면이 있었다. 정상적이라면 아네모스가 상대하기는 벅찼겠지만 지금은 그런대로 상대가 되고 있었다. 그런데 진짜 의외는 에코였다. 소리를 빽빽 지르며 작은 돌덩이들을 들고 도망을 다니는데 그 피하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아네모스의 뒤로 털복숭이를 피하 고는 바로 뒤따라온 패거리중 한명에게 잡힐것 같더니 곧바로 유연하게 허리를 비틀며 그의 손아귀에서 비켜났던 것이다. 가끔 돌을 뒤로 던지며 남자들 사이를 교묘하게 도망 다녔는데 계속 비명을 지르면서도 어느 누구에게도 잡히지 않고 그 주위를 뱅뱅 돌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여럿이 춤이라도 추는 것처럼 보일정도 였다. 그녀의 직업이 춤추는 무희라더니 그말이 실감나는 메디아였다. 하지만 메 디아도 그리 한가하게 그 모습을 지켜볼 입장은 아니였다. 양손에 칼을 쥔 사내 가 한쪽으로 칼을 모아쥐더니 만만하게 보이는 그녀에게 다가오며 한손을 불쑥 내 밀며 불쾌한 냄새를 풍겼다. 아마도 여기 오기전에 한잔 한것 같았는데 지독한 술 냄새와 여러가지 음식냄새가 혼합된 쾌쾌한 냄새를 사정없이 뿜으며 내뱉는 말도 불쾌하기만 했다. "생각보다 따라 온 보람이 있겠는걸.... 너도 여기서 재미 좀 볼래?" 메디아는 식사때 방해 받아 배도 고픈데다가 저런 말까지 들으니 열이 확 올라왔 다. "윈드 해머 (wind hammer)!" 휘이익- 양칼잡이는 다가올 때만큼이나 빨리 무언가에 얻어 맞은 것처럼 공중으로 날아가 쿵소리와 함께 허무하게 떨어져 버렸다. 블루잉이 마시의 옆에서 한숨같은 울음소리를 내는 것이 어렴풋이 들렸다. "마법사로군" 흑마법사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리고 지금까지도 에코를 못잡아 식식거리던 남자 도 깜짝 놀라며 날아간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설마 애띤 처녀가 마법을 쓸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걱정하지 않았다. 적지 않은 돈을 들여 강하다고 소문난 흑마법사와 실력있는 검사를 데리고 왔었던 것이다. 마법사가 눈살을 가볍게 찌푸리며 메디아를 바라보았다. 이상했다. '왜 몰랐을까?'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 이유가 뭔지 알았다. '그래....냄새가 없군.' 메디아에게서는 마법사가 느낄수 있는 종류의 냄새가 전혀 없었다. 그것이 흑마 법사를 의문속에 빠지게 했다. 마법사가 자신의 체취를 아무리 숨겨도 그 특유의 마법향기를 없애기는 매우 힘든 일이다. 지금처럼 바람이 자유로운 움직임을 보 이고 있을때 완벽하게 마법의 향기를 숨길 수 있는 경지의 마법사는 매우 드물고 그 경우 나이가 스물살정도 밖에 안되는 경우는 있을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흑마법사의 앞에 버티고 선 어린 여자 마법사에게서는 전혀 마법의 향기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흑마법사는 그녀가 위험할 정도는 아니라고 판 단했다. 메디아는 매우 배가 고팠으므로 어서 끝장을 보고 싶었다. 그녀는 재수없어 보이 는 마법사를 바라보며 한마디 했다. "너 그냥 갈래? 죽을래?" "흐흐흐~" 흑마법사가 웃었다. 그리고 알렉토는 기가 막혔다. 도대체가 뭘 믿고 저러는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망이나 갈것이지 왜 쓸데없이 나서서 상황을 더 위험하게 만드는건지 화가 날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한가하게 화를 낼 상황이 아니였다. 두명의 얼간이 패거 리는 금방 해치웠지만 메디아의 마법에 날아갔던 양칼잡이가 일어나며 알렉토에 게 덤벼들었다. 이때 에코의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울렸다. 결국은 그녀가 짧은 머리채를 잡힌채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윈드 스톰(storm)!" 이번에도 그냥 바람이었다. 에코를 붙들고 있던 험악한 남자는 에코를 놓쳤고 알렉토에게 당한 남자들이 강 한 바람에 떠밀리며 돌풍에 휘말렸다. 돌풍은 남자들을 붕 떠올리더니 흑마법사 뒤로 날아가 떨어뜨렸다. 차곡차곡 싸여진 남자들이 억억대는 소리가 들렸다. 에 코가 쏜살같이 달려와 메디아에게 달라붙었다. 흑마법사가 얼어붙은 땅에서 메마른 흙을 줍더니 손바닥을 펴고 주문을 외웠다. 그는 저렇게 바람의 마법을 쉽게 사용하는 마법사를 처음 보았다. 정령사라면 이 해가 갔지만 여자는 정령을 부르지는 않았다. 아마도 저 조그만 계집은 바람계 마법만을 집중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것 같았고 우습게 볼 수 없는 수준이었으며 특히 마법의 향기가 없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그는 비교적 강하면서 확실한 작용을 하는 마법을 사용하려고 했다. 마법 사가 자신이 인정할 수 없는 마법사에게 진다는 것은 있을수도 없었고 매우 자존 심 상하는 일이였다. 그가 주문을 외치고나자 그의 손바닥에서 흙이 흩어지면서 주위로 퍼져나갔다. 에코가 두려운듯 메디아의 뒤로 몸을 옮기며 숨을 들이마셨다. "저거 뭐야? 무서운거니? 어떻게 좀 해봐. 저 시커먼게 자꾸 오쟎아." 여전히 입은 쉬지 않는 에코의 비명같은 말을 들으며 메디아는 코웃음이 나올것 같았다. 마법중에서도 자연을 매개물로 사용하는 마법은 고위마법은 아니였지만 강력한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대지의 흙을 사용하는 공격마법은 더 뛰어난 효과가 있었는데 흑마법일 경우 그 움직임의 흐름을 다루는 방법때문인지 좋지 않은 면도 있었다. 시술자는 물론 사정권 안에 있는 땅위에 있는 누구에게나 그 영향이 간다는 사실이였다. 아군이 몸을 보호할 능력이 충분히 되었을때 비로소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마법치고는 실용성이 없었다. 흩어지는 흙들이 윙윙거리는 소리를 내며 인간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자세 히 보니 그것은 이미 흙이 아니라 작은 곤충이였는데 날개가 달린 작은 개미나 무슨 모기처럼 생겼고 벌써 느긋한 흑마법사 바로 뒤에 엉켜있던 남자들은 그 곤 충들에게 둘러싸여 괴성을 지르며 땅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아네모스 와 아직도 실랑이를 벌이고 있던 털복숭이가 질린 표정을 지으며 흑마법사에게 소리를 질렀다. "이봐. 그게 무슨 짓이야? 미쳤어? 내 형제들을 어서 도와줘." 그러나 그도 다가오는 벌레들을 피하기 위해 뒤로 더 물러서고 있었다. "윈드 스톰" 메디아의 간단한 주문이 외쳐졌지만 바람은 그저 곤충들을 잠시 흩어놓았을뿐 아 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벌써 곤충들은 양칼잡이와 알렉토를 덮쳐가고 있었다. 알렉토는 양칼잡이를 몰아가며 상대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짧은 신음과 함께 서 로에게서 떨어져 곤충들을 막아야만 했다. 그들의 몸은 순식간에 시커멓게 휩싸 였다. 그러나 곤충들은 알렉토와 양칼잡이에게 쉽게 달라붙을 수는 없었다. 그들 의 검에서 내뿜어지는 빛 때문에 부딪치는 곤충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가거나 가 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많은 곤충들을 다 막기엔 빛의 범위가 너무 작았다. 알렉토의 살갗에서는 금방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피를 본 곤충 들이 더 요란한 소리를 내며 피에 달라붙는 것이 보였다. 알렉토보다 검의 빛이 약했던 양손잡이도 처절한 비명소리를 지르며 사방으로 곤충들을 떨어뜨리고 있 었다. 에코가 비명을 지르며 메디아의 망토를 잡아당겼다. "야-, 어떻게 좀 해봐. ...알렉토 좀 봐...어떡해....어떡해...어떡하지? 응?" 흑마법사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메디아를 향해 말했다. "내 주문에는 그런정도의 약속마법은 소용없단다. 애송이 아가씨." 메디아는 살짝 눈섭을 치켜떴다. '감히..... 애송이라구?' 여전히 불가에서 먹고 있는 마시의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블루잉이 동정의 눈길 로 흑마법사를 바라보았다. '이제 끝나겠군.' 메디아가 왼손을 들어 손바닥을 정면으로 향하며 나직히 소리쳤다. "태초의 빛 대지의 꿈을 이루는 힘이여 선한자들의 수호자로서 그대의 시작과 끝 이 나의 염원으로 이루어지리라....." 숲은 곤충들이 일으키는 바람소리와 인간들의 괴성소리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고 겁먹은 에코의 중얼거림과 비명으로 정신이 없을정도였다. 곤충들은 메디아와 에 코에게도 다가오고 있었다. 메디아가 주문을 낭송하자 윙윙거리던 소리를 내며 다가오던 곤충들이 순식간에 밝은 빛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 는 곤충들이 모두 눈부신 빛에 둘러 싸이고 귀를 울리던 소리가 점점 사라지더니 빛조차 곤충들과 함께 흔적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메마른 흙먼지만 날렸다. 마치 원래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숲은 다시 고요해졌다. 메디아의 주문은 뛰어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마법사들이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 하는 언령마법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었는데 간단한 마법의 약속어들을 외워서 사 용하는 약속마법과 마나의 힘을 조종하여 마법사 스스로가 그 성질을 결정하고 마법의 언어를 만들어 발동하는 주문마법이었다. 두 가지 모두 개인 각자의 마력 의 차이로 위력이 다르지만 두 번째 마법의 경우는 마법사의 능력이 특히 필요한 것으로 판타리아 전체에서도 주문마법을 스스로 만들어 쓸 수 있는 마법사는 매 우 드물었고 그 외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이미 만들어진 주문마법을 스승으로부터 전수 받기 때문에 그 위력도 점점 줄어 들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나마도 주문마 법을 전수 받았거나 알고있는 마법사도 많지 않았다. 그러나 메디아는 주문마법을 스스로 만들어 사용했으며 그녀의 마법은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알렉토는 휘휘 내젓던 팔을 겨우 내리고 피를 흘리며 주위를 둘러보았고, 정신없 이 뒹굴던 패거리는 아예 움직임이 멈춰버렸다. 아마도 숨이 멈춘것 같았다. 그 들의 온몸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고 눈동자는 작은 피웅덩이가 되어 있었다. 양칼잡이는 역시 상처입은 몸으로는 알렉토와의 일전이 승산이 없었는지 그 사이 슬금슬금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알렉토는 그를 그냥 보내줄 정도로 어리석 지는 않았기에 도망치는 자를 따라가 그와의 끝을 보았다. 흑마법사는 설마 메디 아가 주문마법을 알고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 했는지 그는 당황하며 도 망갈 주문을 외우려고 했다. 하지만 메디아는 더 이상 귀찮아지기가 싫었다. "지옥의 영원불멸한 고통의 불이여 내가 명하는대로 산 자와 죽은 자의 육신을 소 멸하는 힘이 되어오라." 도망가려는 흑마법사의 몸 중앙에서 작고 까만 구멍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것 은 어둡게 보이는 작은 동굴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시커먼 구멍 속에서 새빨간 불 길이 번져 오르고 마법사는 섬찟한 비명을 지르며 순식간에 불타기 시작했다. "으아악...살려줘~~~~~~~" 붉은 빛을 내뿜으며 활활 타오르던 불덩이는 바닥에 까만 재만 남기며 흔적도 없 이 사라졌고 동시에 바닥에 나뒹굴던 시체들까지도 모두 불타버렸다. 털복숭이는 완전히 겁에 질려 벌벌 떨더니 조금씩 뒷걸음질을 치며 숲을 향해 죽 어라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메디아는 이 사건의 발단이 된 그 지저분한 녀석을 순순히 곱게 돌려 보내줄 생각이 저기 휘날리는 재만큼도 없었다. "윈드 업 (wind up)!" 칼날같은 바람이 도망치는 그의 목을 훌고 지나갔다. 온 힘을 다해 뛰어가던 그 의 몸은 머리를 바닥에 떨어뜨린채 몇발짝을 더 가서 바닥에 쿵하고 쓰러졌다. 몸에서 불리된 채 굴러가던 머리가 낮은 나무뿌리에 걸려서 북실북실한 수염으로 피를 쏟아내고 있었고 가는 경련을 일으키던 그의 몸뚱이는 목에서 흘러내리는 피로 검붉은 작은 웅덩이를 만들어 내며 흘렀다. 역한 피비린내가 확 번져왔다. 모두들 넋을 잃은 표정으로 처참한 시체와 메디아를 번갈아 보았다. 메디아는 주위의 시선과는 상관없이 쓰러진 인간을 눈으로 확인하고는 그 소란스 러운 가운데도 잘 먹고 있는 마시의 옆으로 가려고 했다. 배가 고팠다. 그녀는 아직도 멍하니 자신의 망토 뒷자락을 꼭 쥐고 있는 에코의 손가락을 펴서 떼어놓 고 발걸음을 옮겨 불가에 자리를 잡고 아까 먹으려다가 못 먹고 놓아둔 생선구이 를 다시 잡고 아주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그녀는 금새 생선구이 몇 마리를 해치 우고 그릇에 담긴 감자와 고기를 넣은 다 식어버린 스프를 떠먹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제정신을 못차린 에코와 알렉토는 메디아의 강한 마법과 이 알싸한 시 체 탄 냄새와 비릿한 피냄새 사이에서 어떻게 금방 먹을수가 있는가?라는 의문으 로 인간 같지 않아 보이는 메디아와 마시를 멍하니 볼 뿐이었다. 블루잉은 메디아가 앉아서 먹기시작하자 자기도 식어버린 생선구이를 고민스럽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런 블루잉에게 처음에는 먹기에 급급해 신경도 쓰지 않던 메디아가 생선을 다시 불위에 얹어 데워 주었다. 블루잉은 거북이 주제에 식성 이 까다로와서 아무거나 먹지 않았고 맛없는 음식은 절대로 먹지도 않았다. 생선 도 싱싱하게 살아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예 잘 익혀서 비린내가 잘 나지 않아 야 먹었다. 식어서 비린내가 많이 나는 생선구이를 덮석 먹을만큼 입맛이 무덤덤 한 거북이는 아니었다. 다시 잘 익혀 준 생선을 뜯어먹는 거북이를 바라보며 그제서야 제정신을 차린 일 행이 불가로 다가왔다. 에코가 알렉토에게 다가가며 피가 흘러내리는 살갗을 보 고 소란을 떨었다. 말들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다행히도 곤충의 피해는 입지 않았고 조금 놀란듯 푸들거렸지만 에코가 약초와 천을 꺼내올 수 있었다. 아네모스는 털복숭이를 상대하느라 지친듯 보였지만 곤충들에게 조금 물린 상처 들과 약간의 타박상 이외에는 무사해 보였다. 하지만 알렉토는 에코가 정성스럽 게 약을 바르고 천으로 상처를 감쌌지만 워낙에 전신에 상처가 퍼져있어서 모두 천으로 감쌀 수가 없었다. "어떡하지.... 많이 아프죠?" 알렉토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 일행이 모두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생 각을 하고 있었다. 그가 모두 지켜낼 수 없었던데다가 상대는 생각보다 강했고 만약 메디아의 힘이 없었다면 그들은 모두 여기서 그 곤충떼에게 죽었을지도 몰 랐다. 아니 그랬을것이다. 곤충이란것이 물면 아픈것도 문제였지만 워낙에 작은 것들이 한꺼번에 몰려 들어 살갗을 깨물고 피를 빨기 때문에 차라리 칼이나 다른 무기에 상처가 나는 것보다 더 무서울 때도 있었다. 그러한 상처는 그 부위만 잘 치료하면 되지만 이 곤충이란것에 잘못 물리면 그 자리에서 죽거나 가려운데 다 상처를 쉽게 치료도 못하기 때문에 더 고통스럽게 죽을수도 있었다. 페렌토의 부족들 중에서는 곤충을 두려워해 오히려 숭상하는 부족들도 많았지만 모하비부족은 반대로 곤충을 악마의 씨앗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무섭고 악랄하기까지 한 곤충 들이 많았기 때문이였는데 마법으로 만들어진 것들의 독성과 지독함은 그런 곤충들 보다도 더 지독했다. 약바른다고 낫는 것도 아니고 덧나기도 쉬웠다. 알렉토는 새 삼스럽게 아직도 먹고 있는 메디아를 바라보았다. '치료해줘야 하나?' 메디아는 전신에 가늘게 피를 흘리며 자신을 보고 있는 알렉토를 보았다. '아고....내 팔자야....요즘 내가 한숨만 늘어가는군.' 왜 쓸데없이 인간들과 몰려다니게 되어서 이 고생인지 알 수 없는 메디아였다. 그저 얄미운 마시를 한번 노려보고 한숨을 내쉬며 생긴것만큼 미련하게 아픈거 참고 있는 알렉토에게 다가가 상처난 그의 몸에 손을 뻗어 치유약초를 뿌려주고 회복주문을 걸어 주었다. "메디아 약초는 발랐는데......" "그것보다는 이게 나으니까 그렇지. 이건 카란의 꽃잎가루야." 카란은 보통 해발 1800미터이상의 고산지대에서 자라는데 습도 80% 이상의 조건 에서 자생하고 재배가 불가능하며 그 수도 많지 않아서 귀한 식물로 알려져 있었 다. 10년에 한번씩 봄에 꽃을 피우며 3개월간 꽃이 피어있는데 꽃봉오리는 어린 이의 손바닥만한 크고 화려한 식물로 꽃을 둘러싼 큰잎은 붉은 색이고 꽃봉오리 가 초록색인 특이한 색채이며 향기도 매혹적인 꽃으로 왕족이나 귀족들이 좋아하 여 고가에 판매되는 향수의 재료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카란의 초록 꽃잎은 살 균과 재생의 효과가 탁월하여 귀한 약재가 되기도 하는데 부르는게 값이 될때도 있었다. "어머 그 귀한걸 어디서 구했니? 비쌀텐데 이렇게 많이 써도 되니?" "......" 알렉토는 당황하며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고 치료중인 메디아의 손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순진한 총각이 따로 없어 보일정도였다. "호호....정말 메디아는 대단하구나. 그런데 알렉토 왜 그렇게 얼굴이 빨게요? 아파요? 어? 더 빨갛네. 많이 아픈가봐." 은근히 당황하는 알렉토의 모습에 재미 있어하는 에코의 수다가 시작되고 있었다. 메디아는 얼른 치료를 해주고는 블루잉을 끌어다가 잠자리에 들어 버렸다. 에코 의 수다는 듣고 싶지 않았다. 불가에서 대충 약을 바르고 식사를 마친 아네모스는 잠들어 있는 메디아를 곰곰 히 바라보다가 하늘에 커다랗게 떠 있는 하얀 달 알파와 그 뒤에 또 하나 꿈의 그림자처럼 걸려있는 물빛 환상의 달 카오스를 올려다 보았다. 알파를 중심으로 돌고 있는 또 하나의 소행성이며 여기 판타리아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전설을 가 지고 있는 환상의 달 카오스를...... - 계 속 - =========================================================================== [ 판타리아의 세계 ] ◎ ⊙ ◑ ◑ 행성 : 태양 판타리아 알파(흰달) 카오스(환상의달) 크기 : ( 100 ) ( 5 ) ( 1 ) ( 1 ) 공전 : (태양중심) (지구중심)(알파중심) 공전주기: 1년(13개월) 한달 한달 (383일) ;알파와 카오스의 실제크기는 똑 같지만 카오스가 알파를 중심으로 돌고 있기 때문에 판타리아에서 보면 카오스의 크기가 매일 달라보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구에서 보는 달과는 달리 판타리아에서는 달이 아주 크고 가깝게 보입니다. 카오스가 가까이 다가오면 하늘에 큰 행성이 떠있는 것으로 보일정도랍니다. 그리고 판타리아의 일년은 13개월이고요. 일년이 383일로 짝수달은 30일 홀수 달은 29일까지 있답니다.(중요한 설정은 아니니 읽고 넘어가세요.) 그리고 판타리아인들의 평균 수명은 90~100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보다도 실제로는 몇십년 더 사는 거죠.(오래 살죠..^^) (하하~ 말도 안되는 설정이라구요? 내맘입니당.......^^;) p.s:추천을 보고 좋아 죽을뻔했습니다. 감사합니다. ^_^ *~ =========================================================================== 번 호 : 9 / 83 등록일 : 1999년 06월 25일 03:14 등록자 : CHO1971 조 회 : 2597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10.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신이 알파를 창조했을때 탄생과 축복의 의미를 알았다. 신이 카오스를 창조했을때 분노와 징벌의 의미를 배웠다. 제 10 장 엘프와 검은 마차. 타미에서 한번의 어설픈 사건을 제외하고는 너무나 평범하고 지루한 여행길이였 다. 그저 어쩌다가 숲속에서 짐승들을 만나는 것 외에는 별로 이렇다할 일도 없 이 일행은 노아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 흔하다는 오크떼조차 만나지 못한 일행 이었다. 겨울도 끝나가는 마당에 식량도 없을터인데 여행자들을 습격하지 않는것 인지 운이 좋은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모든 사람이 참 다행스런 일 이라고 생각하고 있을때 유일하게 마시가 그 평화로운 상태에 대해 불만을 터뜨 렸다. "심심해.... 무슨 여행이 이래?" 투덜거리는 마시를 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벌써 며칠째 저 소리를 듣게 되다보니 이제는 대꾸조차 안하게 되었다. 수다스런 에코도 같은 소리만 하는 마시에게는 질렸는지 쳐다보지도 않았다. 마시는 자신이 기대하던 근사하고 흥미진진한 여행이 이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 다. 처음 타미 마을을 떠나면서 있었던 조그만 일 말고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 으니 그야말로 심심해 죽을 지경이었다. 더구나 그 재미난 일이 생겼을때도 배가 고팠기 때문에 제대로 구경도 못해본 마시였다. 온갖 화려하고 멋진 여행을 기대 했는데 이런 재미없고 시시한 시간만 보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해봤다. 그는 슬슬 화가 날 지경이었다. 이 모든게 혹시 메디아의 계략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일부러 재밌는 일이 일어날 수 없게 무슨 음모를 꾸민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자 점점 더 의심이 되었다. 마시는 은근히 메디아를 살펴보았다. 메디아는 검은 말위에서 점심을 먹고 나서인지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다. 이건 졸 고 있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엉덩이를 길게 뒤로 빼고 엎드려 양팔을 늘어뜨린 자세로 자고 있었다. 그런 메디아의 앞에서 블루잉은 말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 살피고 있었다. 메디아는 망토의 모자를 눌러쓰고 머리와 얼굴까지 모두 덮어 가 린채 말등에서 편안히 흔들리며 오후의 햇살아래 평화롭게 자고 있었는데 뒤에서 따라가는 마시와 다른 사람들까지 졸리게 하기에 딱 알맞은 포즈였다. "치...." 마시는 투덜거리던 입을 다물고 앉은 자세를 고치며 자기도 자야겠다고 생각했 다. 어차피 배도 부른데다가 별로 더이상 신기한것도 없는 것 같았고 사실 겨울 잠이 모자라 항시 졸린 마시였다. 그는 금방 메디아와 같은 자세를 취하더니 고 삐마저 놓아버리고 양팔을 아래로 늘여뜨리고 잠들어 버렸다. 그 꼴을 보고 있던 에코가 기막힌듯이 마시의 고삐를 안장에 묶어주었다. "대단한 남매라니까. 먹고 자는 일에 관해서는 타의추종을 불허하는군 그래." "배짱도 대단한 사람들이지" 아네모스가 빙그레 웃으며 가볍게 말했다. 알렉토는 그 말을 듣자마자 무뚝뚝하 게 말했다. "내가 보기엔 배짱이 아니라 아예 겁을 상실한 수준 같은걸." 그렇게 말들과 사람이 부지런히 길을 가고 있을때 주위의 풍경이 서서히 바뀌며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원래 타미마을에서 노아로 가는 길이 대부분 대륙의 해 안을 따라 있다보니 이렇게 바다를 끼고 길을 가게 되는 일이 자주 있었다. 타미 마을을 떠나 온지도 팔일째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 해안만 지나고 나면 금방 국 경이 나타날 것이였다. 국경근처에는 쉬어 갈만한 마을이나 최소한 잘 만한 숙소 들이 있기 마련이었기에 일행은 오랜만에 지붕 아래서 잘 수 있을거라 생각하며 길을 재촉했다. 너무 늦은 시간에 국경에 도착하면 성문을 지날 수 없기 때문이 었다. 갑자기 빨라진 행보에도 불구하고 메디아와 마시는 여전히 잘 자고 있었다. 그들이 작은 성문에 도착했을때는 해가 수평선으로 기울고 막 가라앉기 시작할 때 였다. 다행히 국경을 넘을 수 있는 시각이였다. 성문을 지키고 있던 국경 수비대 가 그들을 멈춰세웠다. 일행은 말에서 내려 각자의 신분 증명서를 내밀었다. 대 륙 전체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소가죽으로 만든 신분증은 대륙의 동쪽에 위치 한 시투니아와 가이아를 제외하고 어디서나 통용되는 신분 증명서였다. "파라엔 무슨일로 가는겁니까?" "수도 오람에 있는 왕궁에서 건물수리를 한다고 들었습니다. 거기에서 제 여동생 과 일자리를 얻을까해서 가는길이지요" "당신은 석공이요? 그리고 오람에 간다면서 왜 노아로 갑니까?" "저는 조각가입니다. 그래서 특별한 연장이 필요한데 그 연장은 노아에서 구할 수 있지요." "노아로 가는 길이면 배를 타고 국경을 넘는것이 더 빨랐을텐데 왜 궂이 말을 타 고 가는 겁니까?" "제 직업이 조각가라 되도록이면 여행을 다니면서 좋은 재료나 소재를 찾기도 하 기때문에 배를 이용하는 것보다는 말을 이용하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아네모스의 대답에 수비병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여기 페렌토에서는 조각가나 예술가들이 그저 그런 직업중의 하나였고 별로 많지도 않았지만 파라나 아르카디 아 같은 나라에서는 예술가들을 아주 극진히 대접했고 대부분 신분이 높은 사람들 과 교제했기 때문에 예술가라고 하면 대부분 관대히 대해 주었다. 그 중에서도 조각가는 특히 귀했고 그 기술이 잘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수비병은 조각가라는 말에 별 시비를 걸지 않았다. 그 옆에 서 있는 그의 여동생에게도 간단한 질문을 한 다음 알렉토에게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하더니 그의 소지품을 살폈다. 대충 검사가 끝나고 이제 메디아와 마시가 신분증을 건네주고 기다리고 있었다. 마시 의 신분증은 건성으로 보고 돌려주더니 메디아에겐 소지품을 보여달라고 했다. 그 녀는 눈쌀을 찌푸렸지만 할 수 없다는 듯이 등에 메었던 가죽 가방을 내려서 속 을 볼 수 있게 매듭을 풀어 주었다. 하지만 꺼내보지는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꺼내면 왜 안되지?" "저주가 걸렸어요." 무심코 그 안을 들여다 보고 가방에 꽂아 있는 빗자루를 꺼내려던 젊은 수비병 은 그녀의 상냥한 어투의 설명에 깜짝 놀라며 빗자루를 도로 놓아버렸다. 꺼림 직한 표정으로 수비병이 물었다. "무슨 저주를 걸었는데? 네가 그런 마법도 하니?" 그녀가 어려보여서인지 거침없이 반말이 나오는 수비병이었다. "아니요. 저희 부모님 밑에서 일하는 마법사 선생님이 걸어주셨어요." "무슨 마법을 걸었니? 이거 ......만져 봐도 저주에 걸리나?" "음....저희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저 말고 다른 사람이 가방에서 뭘 꺼내면 저 기...그러니까.....말이죠.....털이 빠진데요." "털??" "머리카락도 빠지고 수염도 빠지고 에.....가슴털이나 다리털도.... 몽땅 다 없 어진다고 하시던데요. 남의 물건에 손을 대거나 훔치는 것은 나쁜거쟎아요? 그리 고...음.... 만지는건 어떻게 되는지 아직 한번도 겪어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는 데요." 메디아는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며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너무나 상냥하고 애띤 목소리로 아무런 사심도 없다는 듯 말했다.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병사는 퍼렇 게 질린 얼굴로 머리로 손을 가져가 머리카락이 괜찮은지 확인했다. 잡아 당겨도 이상없는 것이, 다행히도 저주에 걸리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대머리가 되 고 싶은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으므로 메디아의 가방에서 멀찍이 떨어지면서 그 만 가보라는 손짓을 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일행은 그녀의 그런 순진한 척 하는 행동에 입만 벌린 채 눈을 둥그렇게 뜨고는 메디아를 징그러운 괴생물체 바라보듯 했다. 그들이 메디아를 알고 나서 들어보는 최초의 긴 대답이자 상냥하기까지 한 대답이였지만 그 내용 은 전혀 상냥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들은 그 저주가 과연 그 선생님이라는 마법 사가 걸어주었을까 의심이 들었으며 아마도 메디아가 직접 시술해 놓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상상만해도 끔찍한 일이였다. 만약에 몸에 털이란 털이 모두 다 빠져 서 없다고 생각해 봐라. 이건 문어도 아니고 얼마나 징그럽고 끔찍한 모습일지... 그러면서 그들은 메디아의 가방에는 근처에도 가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들은 그렇게 작은 성문을 지나 반대편에 있는 또 다른 조금은 큰 파라의 성문 을 향해 말을 몰아갔다. 얼마 안가 맞은 편에 있는 성문에 도착했고 그곳에서도 똑같은 과정을 반복하고 나서야 국경을 건너 파라의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밤은 어둡게 변했고 하늘에는 수백만개의 빛의 조각들처럼 보이는 별들을 뒤로 이미 기울기 시작해 반으로 접혀진 흰 달 알파와 아직 둥그런 모양의 환상의 달 카오스가 그림처럼 둥실 떠있었다. 일행은 여행자 숙소에 자리를 잡고 숙소 앞마당에 타고 있는 모닥불 옆에 대충 놓여져 있는 어설픈 탁자들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 주위에서도 각자 자리를 잡고 식사를 하거나 술이나 차를 마시고 있는 인간들이 있었다. 가끔은 머리는 크지만 키가 작고 털이 북실북실 나있는 쭈글쭈글한 피부의 드워프족이나 그와 비 슷해보이지만 머리와 몸집의 균형이 맞아서 오히려 어린아이같은 검은 피부가 통 통하고 반질반질한 피그미들도 눈에 띄었다. 여기 저기 붉게 타며 온기를 전해주 는 모닥불 사이로 사람들이 떠드는 낮은 목소리가 들려오고 한쪽에서는 음유시인 이 악기를 연주하며 아득한 옛 이야기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바닷가에서는 짭짤한 소금끼가 섞인 바람이 불어와 불꽃을 흔들었으며 하늘에 걸린 두 개의 달 사이로 는 구름이 지나가고 있는 조용한 밤이었다. "후아~" 마시가 길게 하품을 했다. 그의 무릎위에 앉아서 거북이답지 않게 불을 쬐고 있 던 블루잉이 한심한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식사를 하면서도 끊임없이 입을 벌리며 졸리다고 중얼거리던 마시를 보고 있던 메디아가 말했다. "너, 들어가서 자" 낮에 말위에서 열심히 낮잠을 잤던 메디아와 마시였지만 마시는 여전히 졸렸고 메디아는 밤만되면 기운이 더 솟아나는 체질이였다. "후~아~~~~~~함." 찢어지도록 하품을 하며 일어나려던 마시가 갑자기 입을 다물고 눈을 가늘게 뜨 며 어두운 길쪽을 응시했다. 누군가 밤길을 달려오고 있는듯 했다. 거칠은 길바 닥에 마차바퀴가 굴러오는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리고 찬바람이 함께 불어 왔다. 숙소 앞마당에서 식사를 하던 모든 사람들이 지금 그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원래 가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여행자 숙소였기에 새로 누가 온다고 유달리 이상할 것 은 없었다. 하지만 새로 오는 누군가는 그냥 평법하게 오고 있는 것이 아니였다. 길위를 거칠게 달려오며 검은 마차를 몰고 있는 남자는 달빛에 유난히 눈부시게 빛나는 하얀 은발을 휘날리고 있는, 유리같이 투명한 눈동자에 작고 하얀 두개의 뿔을 가진 엘프였다. 그리고 그가 몰고 있는 검은 마차 주위는 붉은 안개가 마치 일행이라도 되는듯이 따라오고 있었다. 밤의 장막처럼 시커먼 마차를 둘러싼 붉은 안개와 그 마차를 몰고 있는 백설처럼 하얀 엘프. 2월의 차갑고 어두운 밤에 괴 기스럽고 오싹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한 모습이였다. 모든 사람이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을때 불길한 마차는 서서히 멈춰서고 있었다. 하얀김을 뿜어내며 숨을 몰아쉬는 말들이 멈춰서자 하얀엘프는 천천히 마차에서 내려 검은 마차의 뒷문을 열었다. 붉은 안개가 그의 움직임에 따라 흔 들리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가 마차에서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끌어내리는 소리가 끼긱대며 귀를 자극했고 드디어 내려진 물건이 사람들에게 보였다. 그것 은 칠흑처럼 새까만 관이였다. "헉!" "끄아...저게 뭐야?" 사람들이 숨죽이며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숙소는 갑자기 나타난 은빛엘프로 인해 순간 정적에 휩싸였고 공기마저 멈춘듯 했다. 엘프가 검은 관을 끌고 숙소로 들어서려고 하고 있었다. "이보시오. 미안하지만 그 관을 들여 놓을 수는 없소." 누군가 그를 막고 섰다. 엘프는 유리같이 투명한 눈동자로 그를 막아선 인간을 바라보았다. 감정없는 엘프 의 눈동자를 마주 보고 선 자는 갑자기 말을 더듬었다. "저..저기... 사람들이.. 그..그 관을 들여놓으면...어떻게 자겠소?" 엘프에게 말을 마친 그는 꺼림찍한 얼굴로 붉은 안개가 어른거리는 검은 관을 바 라보았다. 이 곳 국경을 건너는 여행자를 위한 숙소는 방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 라 그저 큰 창고같이 되어있어 군데군데 여러층으로 되어 있는 나무 침대가 놓여 져 있을뿐이었다. 그런 곳에 저런 관이 하나 놓여있으면 편히 쉴수가 없을것이 뻔했다. "걱정마시오. 우린 여기서 잠깐있다가 갈꺼요." 엘프의 말이 약간 이상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엘프의 뒤쪽 마차를 보았다. "일행이 또 있소?" 그러나 엘프는 잠시 관을 바라보았을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표정은 언뜻 슬퍼보였을 뿐이었다. 처음보다는 옅어졌지만 여전히 붉은 안개가 관주위 를 맴돌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와 엘프의 어깨를 감싼 투명하고 하얀 은발을 휘 날렸다. 하얀 피부, 하얀 머리카락, 하얀 뿔 그리고 새까만 관하나를 끌고 있는, 온통 하얀 그의 모습은 죽음을 떠메고 가는 천사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나의 아내요." 조용하게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는 바람에 실려오는듯 그렇게 들렸다. 아마도 관 속에 누워 있는 것은 하얀엘프의 부인이였나 보다. 엘프의 표정이 너무 슬퍼 보 여서 그랬는지, 아니면 죽은 아내를 마치 살아있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라고 말하 는 엘프 앞에서 할 말이 없어서 그랬는지, 문을 가로 막고 서있던 사람은 차마 더 막지 못하고 엘프를 그냥 놔 두었다. 엘프가 관을 들고 들어가자 사람들은 이내 관심을 돌려버렸다. 어차피 여행을 하 다보면 별의별 일을 다겪는 그들이였다. 그러나 마시는 연신 하품하며 졸리다고 투정하던 것을 잊은듯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뭔가 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기대하며 자리를 지켰다. 메디아는 마시의 속셈이 훤히 보였지만 별말없이 그냥 놔두었다. 그녀는 그 관을 따라가던 붉은 안개를 생각했다. 그것은 자연적인것 도 마법적인것도 아닌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녀 는 그 관안에 시체말고 뭔가 다른 것이 있을것이라고 확신했다. 단지 그게 무언 지 몰라서 궁금했다. '뭘까?' 그녀는 곰곰히 생각해 봤지만 무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알 수 없을수록 더 궁금해 지고 있었다. 그녀는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너 벌써 잘거니? 낮에 많이 자더니 아직도 피곤한거니?" 에코가 물었다. 그러나 눈치가 좀 빠른 아네모스는 다르게 물어왔다. "무슨 일이지요?" 그러나 그녀는 아무말도 없이 숙소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침 은발의 엘프가 다 시 나오고 있었는데 메디아는 망설이지 않고 다가가 그의 앞에 섰다. 일행은 메 디아가 왜 저러나 싶어서 쳐다보고 있었다. 엘프도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인간 처 녀가 왜 그러는지 궁금한듯 물었다. "왜 그러시오?" 메디아는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했다.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이...... "관 좀 보여주세요." 모두들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쟤 왜 저러니?" "모르겠는데요." 그저 흥미진진한 마시는 메디아를 보기에 바빠서 대충 대답해 버렸다. 알렉토는 슬픔에 잠긴 엘프에게 무슨 무례한 짓인가 싶어 메디아를 말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엘프는 불쾌하지 않은듯 투명한 유리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로 메디아를 뚫 어질 듯 바라보고 있었다. 메디아도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뿐이었다. "왜 그래야 합니까?" "궁금해서요." "뭐가 궁금하오?" "뭐가 들었나 해서요." "내 아내요." "아내가 뭔데요?" 이 마지막 질문 때문에 사람들은 완전히 헷갈리는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며 방 금 자신이 들은 말이 잘 못 들은 것이 아닌지 확인했다. 그러나 메디아는 전혀 꿈쩍도 안했고 정말 궁금한듯이 엘프를 보고만 있었다. 단지 엘프만이 진지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이제 이채로운 눈빛을 던지고 있을뿐이었다. "메디아.....쟤... 제 정신 맞을까? 아내가 뭐냐니? 아직까지 그런 것도 모르는 걸까?" 에코는 정말 황당한 듯이 내뱉았고 아네모스는 에코에게 다른 말을 했다. "아내가 무슨 뜻이냐고 물은게 아닌것 같아." "그럼?" 아네모스는 아직도 마주보고 서 있는 메디아와 엘프를 보았다. 엘프가 메디아에게 물었다. "이름을 알려주겠소?" 그녀가 상큼한 웃음을 지었다. "메디아. 당신은?" "엘 시드. 만나서 반갑소." 이제 사람들은 점점 더 헷갈리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저게 도대체 뭐하는 짓들이야? ' 사람들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한 동안 서로 미소를 짓고 있던 하얀 엘프와 괴상한 처녀는 나란히 숙소로 들어 가 버렸고 사람들은 무슨 수수께끼라도 되는듯이 의문에 휩싸였다. 메디아를 말 리려던 알렉토는 찌푸린 얼굴로 그들이 들어간 문을 보고 있을수 밖에 없었으며 마시는 무릎에 올려져 있던 블루잉이 떨어지던 말던 신경도 안쓰고 쏜살같이 숙 소로 따라 들어갔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먹을것을 손에 든채 따라 들어가지도 못하고 닫힌 문만 바라봤다. - 계 속 - 번 호 : 11 / 83 등록일 : 1999년 06월 26일 00:46 등록자 : CHO1971 조 회 : 2534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11.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신이 알파를 창조했을때 탄생과 축복의 의미를 알았다. 신이 카오스를 창조했을때 분노와 징벌의 의미를 배웠다. 제 11 장 지겨워 지겨워. 그날밤, 메디아는 관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결국에는 알아냈고 궁금한 것이 풀렸으므로 속 편하게 잘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안개가 어른거리는 검은관 때문 에 신경쓰여 잘 수가 없었으며 그녀와 엘프가 무슨 말을 한것인지 이해가 가지않 아 궁금해서 더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무 대답도 안하는 메디아였다. 그렇다고 메디아처럼 무턱대고 엘프에게 가서 물어볼 수는 없는 일이였다. 마시는 관 속을 들여다 보았지만 그게 뭔지 전혀 못 알아보았고 메디아도 신경쓰 지 말라며 마시에게 그만 가서 자라고만 했다. 마시는 많이 졸렸으므로 그녀를 조금 괴롭히고 착한아이처럼 물러나 잠을 잤다. 그 속으로야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엘 시드는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숙소에서 식사를 마치고는 얼마 안있어 사람들이 자고 있을때 검은 관을 다시 마차에 실고는 올때처럼 으스스한 모습으 로 떠나 버렸다. 또 다시 날이 밝아 길을 가게 된 일행은 출발하기가 무섭게 지난 밤의 사건에 대 해 제각각의 궁금증을 표시했다. "메디아 그게 뭐였어?" 마시가 물었다. "어제 저녁 얘기하는 거야? 나도 궁금한데.... 뭘 보여 달랬던 겁니까?" 아네모스가 잘 됐다는듯이 물었다. "메디아 그 엘프에게 심했던거 아니야? 죽은 아내를 보여달라고 하다니 말이야." 알렉토는 우회적으로 말했고, "메디아. 어제 너 왜 그랬던 거야? 관 속은 왜 보여달랬니? 아내가 뭐냐니 그건 무슨 말이였니? 너 아내가 뭔지 몰랐니? 응? 그 뿔달린 엘프랑 왜 갑자기 묘하 게 웃고 인사를 주고받고 그랬어? 안에 들어가서 관 속은 제대로 봤니? 안에 있 던 사람들이 그러던데 너네만 봤다면서? 진짜 그 안에 여자가 누워 있었어? 도대 체 뭘 봤니? 아내가 예뻤니? 도대체 그걸 왜 보자고 그랬어?" 숨도 쉬지 않고 어제부터 궁금하던 것들을 쏟아내는 에코였다. 마시가 보태어 껴들었다. "별거 없던데.... 그냥 예쁜 여자 하나 누워있었어. 그거 볼려고 그랬던거야? 별 로 대단하지도 않은 거였쟎아? 그거 뭐 다른거야 메디아? 그거 뭐였는데?" 죽은 사람을 '그거그거' 하면서 전혀 사람 취급도 안하는 마시였다. 아마도 살아 있는 사람이라도 '그거그거' 할것 같았다. 메디아는 묵묵부답이였다. 에코는 궁금해서 죽겠는데 대답도 안하는 메디아가 답답하고 얄미울뿐이었다. '좀 대답해 주면 안되냐?' 속으로만 궁시렁대는 에코였다. 그녀는 수다스런데다가 사교적이고 활달한 성격 이라서 누구나와 쉽게 친해지는 편이었다. 그런데도 자신보다 서너살은 더 어려 보이는 메디아는 왠지 함부로 대하거나 쉽게 친해지기 어려웠다. 에코는 지금까 지 그녀의 오빠가 제일 상대하기 까다로운 사람인줄 알고 살았는데 저 말없는 메 디아는 그녀의 오빠보다 몇 백배는 더 어렵고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똑같이 말이 없어도 나이 많은 알렉토는 편했는데 왜 어린 메디아는 더 무서운지 알다가도 모를일이였다. 에코는 비교적 상대하기 수월한 귀여운 마시에게 물었다. "어머! 예쁜 여자가 누워 있었어? 여자도 그 남자 엘프처럼 하얗게 생겼니?" "아니. 인간이던데...... 맞지? 인간맞지 메디아?....인간..이 아닌..가?" "무슨 소리야? 엘프가 아니였어? 근데 인간인지 아닌지 몰라? 뭐야? 헷갈리쟎아. 제대로 말해." "응...그게 너처럼 생겼는데...뿔도 없고...그럼 인간 맞지? 맞나?" "머리가 어떤데?" "머리?" "그래 그 엘프처럼 투명하든?" "아니 그냥 검정머리던데?" "그럼 인간일꺼야. 뿔 있는 엘프나 뿔 없는 엘프나 모든 엘프들은 머리가 다 투 명한 색깔이래. 푸른색이든 은색이든 다 그렇게 유리같다고 하더라. 나도 어제 처음 봤지만...... 내말이 맞지? 아네모스" "그래. 엘프는 아니였나 보구나." 아네모스는 둘의 수다를 듣다가 가만히 대답했다. "메디아야~. 어제 그거 인간 맞어? 그거 볼려구 그랬던거야?" 마시가 다시 메디아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메디아야~" 다섯마리의 말이 규칙적인 소리를 내며 달리는 가운데 마시의 끊임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한 궁금증이 남아있던 다른 사람들조차 질려버릴 지경이었다. 아침에 출발한 이후로 계속되는 질문은 점심때가 가까워질 때까지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질문의 내용도 똑 같았다. "메디아야~. 그게 뭐였어?" 그러나 메디아는 고래 힘줄이라도 되는듯이 고집스러운 마시의 질문에 한번도 입 을 열지 않았다. '하...지겨워서라도 대답하겠다.' 수다하면 뒤지지않는 에코조차도 마시의 끈질김에는 두 손을 다 들어버릴 지경이 었다. 하지만 그 대단한 마시에 못지 않은 메디아 때문에 더 미칠것 같았다. 메디아는 처음에는 귀찮아서 대답을 안했다. 원래가 시시콜콜 설명하는 성격도 아닌데다가 남얘기하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듣는것은 좋아했지 만..... 그런데 마시의 고집불통 호기심이 오늘은 그냥 끝날것 같지 않은 불길한 예감이 들더니 기어코 하루종일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꾹꾹 눌러 참고 기다리고 기다 려도 마시는 도대체가 낮잠 잘 생각도 안하고 뭘 집어 먹었는지 배고프다는 말조 차 안하고 같은 질문을 계속하고 있었다. 만약 메디아가 그 질문에 대답을 한다 고 하더라도 꼬리에 꼬리를 물듯이 또 질문할 것이 뻔한 마시를 알기에 입을 꾹 다물고 참고 있는 중이였다. 하지만 더 이상은 저 꼴을 볼 수 없었다. 아니 들 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주저리 주저리 떠들고 말지...... "메디아야~~ 그거...." "그만 불러!" 마시가 헤죽 미소를 지었다. 결국은 이겼구나라는 표정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 다. "헤헤~" "지겨워...지겨워. 정말 지겨워 죽겠어." "우리는 더 지겹다." 에코가 질린 목소리로 짜증을 냈다. 그래도 다시 묻는 마시. "메디아야~. 그거 뭐였어?" "뱀파이어" 다들 메디아를 훽 돌아다 보았다. "뭐?!" "끼악~... " 에코가 아네모스에게 화들짝 달려 들었다. 말타고도 떨어지지 않고 멀쩡하게 움 직일 수 있는 에코였기에 가능한 행동이였다. 그녀는 아네모스의 팔을 붙들고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더듬거렸다. "그그..게...그럼..어제 그..옆에서 우리가 잔 거야? 흡혈귀가 누워 있는 관 옆에서?" 비명을 채 삼키지 못 한 에코의 겁먹은 목소리는 애처롭게 들릴지경이었다. 그러 나 마시는 메디아의 입이 열렸다는 사실에 기쁜듯이 다시 물었다. "엘프가 뱀파이어랑 결혼한거야? 응? 그런거야? 엘프가 그런 거랑 결혼해도 되는 거야?" 메디아는 저 질문이 얼마나 갈까 가늠해 보았다. 아마도 마시의 표정으로 보아서 는 대답을 해줘야할것 같았다. 그녀는 어제 엘프에게 들었던 얘기들을 일행이 들 을 수 있도록 적당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 계 속 - ^^;; 좀 짧군요. 번 호 : 12 / 83 등록일 : 1999년 06월 26일 01:50 등록자 : CHO1971 조 회 : 2518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12.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신이 알파를 창조했을때 탄생과 축복의 의미를 알았다. 신이 카오스를 창조했을때 분노와 징벌의 의미를 배웠다. 제 12 장 시드와 카르멘. 페렌토 남서부에 있는 조그만 섬 사모스에는 백오십명 정도의 사람이 살고 있는 작은 부족마을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남자들이 뱃일을 하고 여자들은 농사를 짓 거나 갯벌에서 조개를 잡아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사모스섬에서는 작은 배들이 큰 새를 이용해 낚시하는 모습도 간간히 볼 수 있었는데 새의 목에는 물고기를 삼키지 못하도록 줄을 묶어 놓고 있었다. 섬의 어린 아이들은 새를 길들이는 일 을 하며 어른들의 일을 도왔다. 섬에는 조개껍질이 깨어져서 생기는 부드러운 백 사장이 있었고 주위로는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해안을 이루며 멋진 절경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 마을에서는 유난히 아름다운 처녀들이 잘 태어나곤 했는데 세금을 내는 대신 처녀가 열여덟살이 되면 전 부족을 다스리는 페렌토 족장에게 첩으로 보내지는 일이 많았다. 올 여름에도 열여덟살이 되는 아름다운 처녀가 둘 있었고 그 이름 이 카르멘과 페니아라고 했다. 카르멘은 검고 곱슬거리는 긴머리에 같은 색의 크 고 예쁜 눈을 가지고 있었는데 귀엽고 아름다운 미모로 벌써부터 그 이름이 족장 에게 보내질 것이라고 알려지고 있었다. 그런 카르멘의 생일이 두달 남짓 남은 6월 무렵에 사모스섬에는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사모스섬에는 육지에서 손님이 오는 일이 매우 드문 일이었다. 젊은 처녀가 족장 에게 보내질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육지에서 사람이 오는 일이 없다시피했던 것 이다. 그런 사모스섬에 사람들이 깜짝 놀랄만한 손님이 들어왔다. 6월의 따뜻한 바람을 타고 온 손님은 하얀 은발이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사이로 두개의 뿔이 있 는, 페렌토 본토에서도 보기드문 젊은 엘프 청년이였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 를 환영했고 반갑게 맞아들였다. 그의 이름은 엘 시드라고 했다. 그는 대륙의 금해(황금의 바다)에 있는 섬들의 생태를 조사중이라고 했다. 엘프 가 생태에 관심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였으므로 누구나 그를 머물러도 좋다고 했다. 그러나 사모스섬은 너무 작은 섬이였고 그래서 숙박할만한 마땅한 곳이 없 었으므로 마을에서 방이 남는 집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마침 카르멘의 집은 그녀 의 오빠가 육지로 나가 있어서 방이 남았으므로 엘 시드가 그녀의 집에서 생활하 게 되었다. 젊은 엘프청년은 고기는 먹지 않고 야채와 과일만 먹었다. 그래서 카 르멘의 집에서는 항상 싱싱한 야채를 준비해야 했고 그일은 젊은 처녀 카르멘의 몫이었다. 카르멘은 순수하고 맑은 영혼의 소유자였고 아직 젊고 아름다운 처녀였다. 그녀 와 젊은 청년 엘프가 사랑에 빠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였다. 그들이 서로 의 사랑으로 행복에 잠겨 있을때 그들은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이제 서로가 없 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러나 카르멘은 자신의 생일이 한달 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고 그러면 무슨 벌어질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사 랑하는 엘프에게 늦기전에 진실을 이야기해야만 했다. "시드...... 섬에서 도망가야 해요." "갑자기 무슨 말이지?" "아...시드...당신께 말하지 못한것이 있어요." "카르멘?" "저는...다음달이면 열여덟살이 되요. 그러면...그렇게 되면..." "그래 알고 있어. 다음달이 카르멘의 열여덟번째 생일이라는걸...그걸 말하고 싶 었던거요?" 엘 시드가 희미하게 미소짓는 것이 보였다. 카르멘은 심장이 바짝바짝 조여지는 것같은 느낌이였다. 그가 만약 그녀를 두고 떠나버리면 어떻게 해야할지 너무나 무서웠다. '시드가 날 이해해 줄까?' "시드...사랑해요. 알죠?" "나도 사랑하고 있소." 그가 그녀의 얼굴에서 잔머리를 걷어내며 이마에 가벼운 키스를 해주었다. 카르 멘은 엘 시드의 손을 잡으며 겨우 말하기 시작했다. "시드....저는....생일이 지나면 전.... 족장의 첩으로 가야되요." 카르멘은 고개도 들지 못 한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입술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카르멘!" 카르멘은 시드의 품으로 몸을 던지며 절박하게 속삯였다. "시드....우리 도망가요." 엘 시드도 사모스 섬의 풍습을 잘 알고 있었다. 카르멘의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 다고 했을때부터 알아채지 못 한것이 더 이상할 지경이었다. 마을에서 제일 아름 다운 카르멘이 열여덟살이 되는데 그 정도 예상을 하지 못한것이 실수였다. "맙소사" 그러나 엘 시드와 카르멘이 섬을 탈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였다. 섬에 서 사용하는 배는 모두 철저히 통제가 되었고 그나마도 열세척의 배만이 있을뿐 이었다. 육지에서 들어오는 배도 언제 있을지 몰랐고 거의 들어오는 일도 없었다. 엘 시드 혼자라면 몰라도 카르멘과 함께 나간다는 것은 있을수 없는 일이였다. 날짜는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고 마을사람들에게 솔직히 말한다고 해도 이미 명 단에 들어있는 카르멘을 뺄수는 없었다. 그것은 부족의 명예가 걸린 일이였다. 카르멘과 엘 시드는 며칠동안 고심한 끝에 방법을 생각해 냈다. 엘 시드가 먼저 섬을 떠나서 카르멘이 섬에 남아있는 동안 그가 육지에서 배를 구해 다시 사모스 섬으로 돌아와 그녀를 몰래 데리고 나가는 방법이었다. 서로 떨어져 있어야 했 지만 그 방법밖에는 없었다. 얼마후 엘 시드는 섭섭해 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불안에 떨고 있는 카르멘을 남겨둔채 사모스섬을 떠나 육지로 나갔다. 카르멘은 마을에 혼자 남아 이미 떠나버린 엘 시드를 애타게 기다렸다. 그러나 마을에서는 그녀가 육지로 나갈때 입을 옷과 장신구들을 만드느라 바빴고 또 카 르멘과 페니아를 데리러 오는 사람들을 맞을 준비로 분주한 섬에서 그녀의 생일 은 점점 다가오고만 있었다. 사람들은 페니아와 카르멘이 몇 십년만에 다시 보는 아름다운 처녀들이라면서 마냥 기뻐하기만 했다. 자신들의 삶을 소중히 여기는 순박한 부족민들 속에서 카르멘은 죄책감과 불안에 떨며 하루의 시간을 일년 인듯 느끼며 지냈다. 하루하루 날짜가 가고 카르멘의 생일이 이제 다가왔지만 시드에게서는 어떤 소식도 없었다. 카르멘은 날마다 밤이 되면 해변에 나가 시드를 기다렸지만 밀려오는 파도만이 그녀의 귓가를 어지럽혔을뿐 아무도 나타 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칠월의 장대비가 바다를 한번 휩쓸고 지나간 후였다. 이미 생일이 지난 페니아가 카르멘과 함께 해변을 거닐고 있는 저녁무렵이었다. 하얀거품을 거칠게 밀어올리는 파도에 휩쓸려 무언가가 밀려오고 있었다. "카르멘... 저게 뭐야?" 페니아의 시선을 따라가던 카르멘은 심장이 덜컥 내려 앉는것 같았다. 해마다 칠월에는 해안에 비가 많이 내렸고 그럴때마다 뱃사람들이 곤란을 겪었다. 아무 도 비가 내리는 성난 바다에 배를 띄우지 않았다. 그러나 간혹 비가 쏟아지는 바 다에 어리석은 사람들이 자연을 거역하고 배를 띄우기도 했는데 그러면 어김없이 그들은 돌아오지 못 했다. 해안은 며칠동안 비가 내려서 바닷물이 불어 있었고 아직도 간간히 비가 내려 파도도 평소보다 거세게 밀려오고 있었다. 카르멘은 눈 앞에 물결과 함께 밀려오고 있는 처참한 시체를 차마 두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너무나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그가 엘 시드가 아니기를 신에게 빌고 또 빌었다. "어서 가보자 페니아." "싫어. 사람들을 불러 오자. 무서워." "살아있을지도 몰라." 카르멘은 온힘을 다해 젖은 모래바닥에 발걸음을 옮겼다. 만약 엘 시드라면 어떻 게든 살려야만 했다. 그가 죽는다면 그녀도 살 수 없었다. "카르멘.. 저렇게 뒤틀린게 살았을것 같으니?" 페니아는 끔찍한듯이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차마 사람이라고 말하기가 무색하게 뒤틀려있는 뼈대와 다 찢겨진 살들이 헐렁한 옷사이를 비집고 피가 스며나오는 모습은 도저히 살아있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카르멘은 모래바닥에 떠밀려 있는 사람을 보다가 문득 긴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 의 사랑하는 엘프가 아니였다. 그녀가 사랑하는 엘 시드는 화려한 은발을 가졌지 만 지금 눈앞의 사람은 칙칙하게 엉켜있는 짙은 빨강머리였다. 날은 벌써 어두워 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안심할 수는 없었다. 어 쩌면 엘 시드와 함께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오던 뱃사람일지도 몰랐다. 카르멘은 용기를 내어 천천히 다가갔다. "으윽..." 카르멘과 페니아는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처참한 몰골의 시체나 다름없어 보이는 사람이 신음소리를 내며 움찔거렸다. 그는 시체가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 이었던 것이다. "힉...야.. 살아있나봐. 어떡하지?" "뭘 어떡해? 지금 사람들을 불러와. 페니아" "나 혼자? 싫어 같이 가자 이렇게 어두운데... 무서워." 카르멘은 페니아가 겁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분명히 혼자는 마을까지 못 갈것 같았다. 카르멘은 잠시 쓰러진 사람을 보다가 결국은 페니아를 따라 움 직였다. 혼자는 쓰러진 사람을 옮길 수도 없었을뿐더러 그녀도 무서웠다. 어차피 치료를 하려면 사람들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카르멘과 페니아가 마을 사람들과 다시 해변으로 나왔을때는 쓰러진 사람 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와 페니아는 사람들에게 정말이라고 말했 지만 마을 사람들이 주위를 한참 수색해도 무엇도 발견할 수 없었다. 카르멘과 페니아는 그렇게 많이 다친 사람이 어떻게 사라질 수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가 세찬 파도에 다시 쓸려 내려갔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런일이 있은 며칠후부터 사모스 섬에는 이상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가축들 이 이유없이 죽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도 이유를 몰랐다. 사람이 지키고 있어도 소용이 없었다. 지키고 있던 사람들마저 다음날이면 병이 들어 일어나지도 못 했 다. 마치 열병처럼 땀을 흘리며 침대에서 하얗게 탈색되어 피가 말라 죽어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알 수 없는 열병이 가축을 죽이고 사람들까지 덥치기 시작하더 니 급기야 전염병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칠월의 사나운 비바람이 그치지 않고 내리는 여름, 사모스섬의 얼마되지 않는 부 족민들은 서서히 밤이 되면 찾아오는 이름모를 열병으로 죽기 시작했고 곧 온 마 을이 원인도 모를 열병의 공포속에 사로잡혔다. 작은 사모스섬의 부족민들은 장작 가지를 쌓아놓고 천으로 시신을 둘둘말아 불에 태워 신에게 그 영혼을 보내는 풍 습이 있었다. 날마다 해변에서는 시체 태우는 냄새가 진동했고 시체를 하루라도 방치하는 날에는 어째서인지 시체가 없어지기도 했다. 마을에서는 신의 분노를 샀 다며 섬동굴 깊숙히 살고 있는 무당을 불러내어 신을 달래는 의식을 밤마다 열었 고 비가 내리는 날에도 타악기의 음산한 소리속에서 늙은 남자 무당의 나직하고도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노랫소리가 들리면, 몇십명의 부족민들이 한데 모여서 무당 의 영창소리에 맞추어 웅얼거리는 집단의 합창소리를 만들어 내며 맨몸을 드러내고 신을 경배하는 춤을 추었다. 그런 중에도 젊은 처녀 카르멘은 밤마다 비내리는 해변에서 엘 시드를 기다렸다. 엘 시드가 떠난지 한달이 되어갈 무렵 드디어 지겹게 내리던 비가 멈췄다. 이미 마을에는 살아남은 사람들보다 죽은자가 더 많을때였다. 이삼주일이 안되는 짧은 기간에 섬의 부족민중 삼분의 이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죽었고 팔월의 뜨거움 속 에서 아직도 계속 죽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카르멘이 그토록 기다리던 엘 시드가 조용한 밤, 장작더미가 여기저 기 불타고 있는 사모스섬의 해안으로 배를 타고 들어왔다. 그러나 붉은 불덩이가 일렁이는 해변에는 그가 사랑하던 아름답고 순수하던 카르멘은 더이상 없었다. 단지 뱀파이어 카르멘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을뿐이었다. - 계 속 - love는 어렵군요. ^^;;(닭살스러워서...) 번 호 : 13 / 83 등록일 : 1999년 06월 27일 04:36 등록자 : CHO1971 조 회 : 2489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13.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신이 알파를 창조했을때 탄생과 축복의 의미를 알았다. 신이 카오스를 창조했을때 분노와 징벌의 의미를 배웠다. 제 13 장 항구도시 노아. 메디아가 새끼 드레곤 마시를 데리고 코카서스 화산을 떠나 여행을 시작한 시간 도 한달이 훨씬 더 지나고 있었다. 한참 눈이 내리던 날 길을 떠났는데 어느덧 봄기운이 도는 3월이었다. 숲에는 군데군데 잔설이 남아 있었지만 길가에는 벌써 파릇파릇한 새싹이 돋고 있었고 앙상했던 나뭇가지도 연초록빛 새잎이 돋아날 준비를 했다. 겨울의 껍질을 비집고 봄이 기지개를 펴기 시작하는 3월의 여행은 일행에게도 편안하고 즐거운 여행길이었다. 타미를 떠난지 보름남짓 되었을 때 였다. 언덕위를 가고 있는 일행에게 저 멀리 항구도시 노아가 한폭의 그림처럼 내려다 보이기 시작했다. 노아는 대륙 최대의 항구이며 무역도시로 선착장에는 수 없이 많은 배들이 오전 의 햇살아래 정박해 있었고 지금까지 보아온 어떤 배보다도 크고 아름다운 상선 들과 갤리선이 파도위에 넘실거리고 있었다. 해안에는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움 직이고 있었고 언덕위에서도 확연히 느낄수 있을만큼 소란스러워 보였다. "우와~ 저게 배야? 왜 저렇게 다리가 많아?" "저건 갤리선이라고 하는거야. 배의 밑바닥에서 노예들이 노를 젓는 배인데 굉장 히 빨리 갈 수 있지. 그런데 노를 다리라고 부르다니 역시 너 답구나." 마시의 눈동자는 튀어 나갈듯이 노아의 시내를 내려다 보고 있었고 아네모스가 그 옆에서 마시의 궁금증을 채워 주고 있었다. 일행들은 여행하는 동안 마시가 세 상경험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그의 무지와 호기심을 너그럽게 보아줄 수 있었다.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어서 가지." 알렉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말을 재촉해 달려 나가는 마시였다. 일행들도 조 금은 들뜬 기분으로 노아를 향해 말을 힘차게 달렸다. 멀리서 보던것 이상으로 노아의 시내는 복잡하고 소란스러웠다. 쉴새없이 오가는 짐마차들은 그 어디에서도 보기 드문 진귀한 모습을 하고 있었고 특히 비단을 실은 마차와 나무를 실어나르는 커다란 수레를 끄는 코끼리가 시선을 끌고 있었 다. 화려하게 단장된 부유한 상인들의 마차는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작은 궁전처 럼 값비싼 보석들로 치장되어 있었고 눈보다 하얀빛깔의 백마들이 끌고 있는 사 륜마차들이 큰 길거리를 행진하듯이 거닐었다. 이제 막 노아로 들어선 일행의 꾀 재재한 몰골이 눈에 띄지 않는 이유는 오로지 길가에 돌아다니는 다양한 종족들 과 그에 못지 않은 수 많은 여행객들이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활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디를 둘러보나 잘 정돈된 건물들이 꽉 들어차 있었고 길거리는 다 듬어진 돌로 모두 깨끗하게 포장이 잘되어 있었다. "이 정도면 제국의 수도 오람이라고 해도 믿겠다." 알렉토나 아네모스에 비해 여행경험이 적었던 에코가 감탄의 목소리를 냈다. "수도에 안가본 모양이군. 오람은 이곳과는 많이 달라." 알렉토의 반응이었다. 그는 이미 이곳 항구도시 노아와 번화하기로 유명한 로스 코, 그리고 파라제국의 수도 오람을 모두 여러번 가본 경험이 있었다. 그에게 이 런 풍경은 매우 익숙한 것이었다. 일행이 적당히 쉴만한 숙소에 짐을 풀자 제일 먼저 아네모스가 연장을 구입한다 며 시내로 나갔고 그 뒤를 따라 쇼핑을 한다며 에코도 나가려 하고 있었다. 마 시가 에코를 따라 가고 싶어서 안달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메디아는 블루잉을 딸 려 보내어 주기로 했다. 무슨 일이 생겨도 블루잉이 잘 해결해 주리라 믿으며 세 상구경 좀 하겠다는 마시를 거리에 내보냈다. 메디아는 그들과 함께 나가기가 정 말 싫었다. 에코의 수다도 싫었고 마시의 뒤치닥꺼리도 싫었다. 그녀는 조용히 혼자 돌아 다니고 싶었다. 이렇게 따사로운 봄에 여행을 하는 일은 그녀도 몇십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의외로 알렉토가 에코와 마시의 쇼핑에 함께 나서 주었고 한결 안심이 된 메디아 는 가벼운 마음으로 숙소를 나와 길을 나설수 있었다. 찬란한 태양빛이 한낮의 바닷가를 따뜻하게 달구고 있는 노아의 항구에는 비릿한 생선냄새와 사마리아에서 실어온 향긋한 나무 냄새들로 가득차 있었다. 선착장에는 아름다운 배들이 매어져 있었고 길가에는 끈임없이 오가는 사람들과 마차, 그리고 말의 물결로 발디딜 틈을 찾기가 힘들만큼 복잡했다. 가끔 큰 통나 무를 운반하는 코끼리를 몰고가는 마후트(mahout)들도 볼 수 있었고 거의 벌거벗 은 근육질의 몸매를 드러내고 강한 뱃사람 특유의 분위기를 풍기며 배를 손질하는 건장한 남자들의 바쁜 손놀림은 땀흘리는 자의 보람이 묻어나올듯 신성해 보이기 까지 했다. 골목에는 구걸하는 지저분한 소년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여행객들이 눈에 띄었고 뚱뚱한 몸집을 바쁘게 움직이며 생선을 나르는 나이든 아낙네의 모습과 발목에 쇠사슬을 끌고 가는 사마리아 원주민 노예들도 많이 보였으며 윤기 흐르는 비단 옷을 입고 주렁주렁 매달린 보석으로 잔뜩 치장한 거만한 상인들이 늘씬하게 빠 진 사냥개들을 끌고 가는 모습도 간간히 볼 수 있었다. 거리는 활기에 차있었고 어디를 둘러보아도 사람과 물건들로 가득차 있는듯했다. 외지에서 여행온 사람들을 붙잡는 호객꾼들과 그들을 유혹하는 값진 물건들이 상 점들 사이로 눈부시게 진열되어 있었으며 노아의 거리는 마치 환상의 도시인양 많은 종족이 섞어 있었다. 그들중에는 자그마한 키와 북실북실한 털로 뒤덮힌 드 워프들이 길거리에 앉아 시투니아산 담배를 피우며 연기를 뿜어내기도 했고 그 옆에서는 투명한 푸른 머리를 늘어뜨린 엘프가 드워프와 함께 술을 마셨고 검은 피부의 난쟁이족 피그미들이 갤리선에서 비단을 실어나르는 모습과 원주민 노예 들이 커다란 목재들을 옮기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 사이사이를 거닐며 메디아는 모처럼의 평화를 맛보고 있었다. 거리에는 간간히 그녀의 발길을 멈춰 세우는 먹을거리들이 즐비했고 선선한 3월의 바람도 좋았으 며 무엇보다 신경쓸 사람이 없어서 좋았다. 그녀가 한참 여기저기 구경하며 군것질을 하고 있을때였다. 맛있게 구워진 주홍 색 큰 꽃게를 아그작아그작 씹어먹고 있던 메디아는 누군가가 그녀의 가방을 끌 어 내리고 있는 것도 몰랐다. 처음에는 부딪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저 당겨지는 거겠거니하고 가만히 먹고만 있었다. 그런데도 자꾸만 뒤에서 가방이 끌어내려지 고 있었다. '우잇...' "뭐야~?" 메디아가 손에 여전히 먹다만 게다리를 들고 돌아보자 그녀의 가죽가방을 당기던 조그만 손이 얼른 내려지고 있었다. 떼국물이 줄줄 흐르는 지저분한 꼬마 계집 아이가 새까맣게 물든 손바닥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언니....배고파요..." 큰눈을 꿈뻑이며 말하는 꼬마의 얼굴에는 수치심이 없었다. 메디아는 자신의 허 리에도 안오는 작은 꼬마의 지저분하게 엉켜있는 머리를 내려다 보았다. 소금끼 가 물씬 풍기는 바닷바람에 꼬마소녀의 몸에서 쾌쾌한 생선 비린내가 그대로 묻 어 나오고 있었다. 메디아는 열심히 씹어먹다 들고 있던 게다리를 다시 입속에 넣어 오물거리며 생각했다. '돈을 줄까?' 그러나 그 생각은 잠시 접어 두기로 했다. 어쩌면 이 꼬마는 그 돈을 누군가에게 가져다 주어야 하거나 빼앗길지도 몰랐다. 꼬마의 주인이 있다면 대개 이런 꼬 마에게는 그에 걸맞는 주인이 있기 마련이었지만, 돈을 주나마나 이 어린 소녀에 게는 도움이 안될것이 뻔했다. 그 소녀는 메디아가 씹고 있는 오동통한 게다리를 탐욕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쩝쩝..야...너 누구랑 사니?" 게다리를 보며 침을 삼키던 꼬마가 시선을 움직이지 않고 대답했다. "아저씨랑요." 메디아는 입맛을 다시는 꼬마에게 살이 많은 게 한마리를 집어 주었다. 꼬마는 한마리를 다 주는 그녀에게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거... 다 주는 거예요?" "음..뽀드득..쩝쩝...다 먹어...." 꼬마는 한참을 손바닥위에 놓여진 붉은 게를 바라보다가 꽉 움켜쥐더니 어딘가로 달려갈듯 돌아섰다. "야-." 꼬마가 다시 돌아섰다. 마치 빼앗길까봐 조심하듯이 큰 게를 움켜쥔 손을 뒤로 숨 기며 의아한듯이 메디아를 보았다. "너 여기서 먹어. 어디로 가지고 갈 생각은 하지도 마." "저...저...동생이 있는데요." "아저씨랑 산다며? ...쩝쩝...얼른 먹으면서 얘기해. 하나 더 줄께." 꼬마는 메디아와 게를 번갈아 보며 망설이더니 맛있게 먹고 있는 메디아를 한번 더 올려다 보고 먹기 시작했다. 뽀드득거리며 뼈째 씹어먹는 꼬마의 모습이 며 칠은 굶은것 같았다. 사실 메디아가 먹는 수준도 그와 비슷했다. "쩝쩝...오독..." "쩝쩝....뽀드득.....쩝..쩝..." 손가락까지 쪽쪽 빨아먹는 그들의 모습은 차림새만 좀 달라보였지 게장사 아줌마 한테는 거기서 거기로 보였다. "야...너 아저씨랑 산다며 동생도 있니?" "쩝쩝...우걱우걱...오도독..." "야-. 야." "쩝..쩝... 예?" "말 좀 하자." 꼬마는 손가락과 입술주위를 온통 양념으로 범벅한채 번들거리는 얼굴로 게걸스 럽게 먹다가 멍한 얼굴로 메디아를 보았다. "...... 그래. 다 먹고 얘기하자. 먹을때는 건들지 말기로 하지." "오도독...." 그들은 나란히 서서 게장사 아주머니의 커다란 게를 몇 마리나 뼈도 남기지 않은 채 알뜰이도 먹어치웠다. 꼬마의 이름은 포키였는데 여섯살때 친부모를 잃고 네살된 남동생 호야와 함께 친척집에서 살았었다고 한다. 그러나 가난했던 친척들은 포키와 호야를 돌볼 수 없었고 그래서 두 남매를 쉘다인이라는 남자에게 맡겼다고 하는데 그와 함께 여기 노아에서 살게 된것도 2년쯤되었다고 한다. 쉘다인이라는 남자는 직업이 없었는데 아이들의 친척들에게는 거짓말을 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원래 살던 곳에서도 멀리 떨어진 이곳 노아로 왔다고 한다. 쉘다인은 포키와 호야에게 구걸을 시켰고 아이 들이 돈을 구해오면 술을 마시거나 여자를 사서 움막으로 데리고 오는 일이 많았 다고 한다. 돈을 구하지 못하면 굶어야 했고 쉘다인이 여자를 데리고 오면 추운 겨울에도 밤새도록 밖에서 자야한다고 했다. 돈이 없어서 여자를 사지 못하면 어린 포키와 호키를 때리기도 하는것 같았다. 메디아는 포키가 어려서 제대로 설명하지는 못했지만 대충은 알아들을 수 있었고 그 쉘다인이라는 남자가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도 알 수 있었다. '이런 일은 알렉토가 제격인데....' 포키를 구슬러서 꼬마가 살고 있는 움막으로 가면서 메디아는 고민을 거듭했다. 그냥 두자니 신경이 쓰였고 아이들을 데려오자니 어디에 맡겨두어야 할지 대책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일단 꼬마를 따라가서 해결하자고 결론을 보았다. - 계 속 - 번 호 : 14 / 83 등록일 : 1999년 06월 27일 18:36 등록자 : CHO1971 조 회 : 2466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14.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신이 알파를 창조했을때 탄생과 축복의 의미를 알았다. 신이 카오스를 창조했을때 분노와 징벌의 의미를 배웠다. 제 14 장 꽃미남. 항구의 번화한 거리를 벗어나 숙박업소들이 즐비한 골목을 지나고 좁고 구불구불 한 길을 한참을 돌아서야 어두운 그늘에 쓰러질듯 세워져 있는 나무 움막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침침한 움막 안에는 이미 손님이 방문해 있었다. 메디아가 포키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자 하얀 망토를 입은 신관이 어린 남자아이를 손에 붙들고 안쪽 그림자 속에 앉아있는 남자와 이야기 중인것이 보였다. 그들이 들어가자 걸걸한 남자의 아첨 섞인듯한 목소리가 포키를 불렀다. "헤헤~~ 저기 여자아이가 오는군요. 저 아이도 같이 사실거죠? 포키야 어서 이리 와서 이분께 인사드려라. 너희를 데려 가겠다는구나. 네 동생이 이분 맘에 들었 던 모양이다. 후후흣...히힛... 저 아이는 이제 여덟살이나 되어서 뭐든지 시키 는데로 잘할겁니다." 쉘다인이라는 남자는 메디아가 뒤늦께 들어와서 그녀를 미처 보지 못하고 있었 다. 그는 어젯밤 마신 술로 숙취가 깨지 않아 늦께까지 움막에서 자고 있었는데 갑자기 왠 신관이 호야를 데려가겠다며 나타났다. 처음에는 웃끼는 소리말라며 신관에게서 돈을 훔칠까 생각했지만 신관을 잘못 건들면 두고두고 고생이기에 아이들을 핑계로 돈이나 우려 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신관이 말하 는 액수가 쉘다인이 거절하지 못 할만큼 많았다. 그는 호야와 포키를 한꺼번에 팔아 큰 돈을 벌어야겠다는 욕심이 생겨났고 그는 간사스럽게 웃으며 신관에게 호야는 누나가 있으며 그들을 떨어뜨려 놓을 수는 없다고 은근히 힘주어 말했다. 노아의 뒷골목에서 아이들이 벌어오는 푼돈으로 살아가는 쉘다인에게 이런 기회 는 흔한 것이 아니었고 그도 한몫 잡아서 구질구질한 생활을 청산하고 싶었다. 카란은 북쪽에 있는 빙설의 나라 라비론에서 파견나온 신관이었다. 그는 노아에 서 몇가지 조사를 하고 오람으로 떠날 예정이었는데 길가에서 자신의 주머니를 훔치는 꼬마를 만났고 그 꼬마의 이름이 호야였다. 신관의 신분으로 그런 꼬마아 이를 그냥 둘 수 없어서 움막까지 찾아 왔는데 쉘다인이라는 사내는 꽤 큰 돈에 도 불구하고 쉽게 아이를 내줄 태세가 아니였다. 더구나 호야에게 누나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카란은 처음부터 거절하지 못할 큰액수를 불렀던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한참 아이의 몸값으로 실갱이를 벌이고 있을때 사내아이의 누 나라는 여자아이가 들어왔다. 그런데 그 아이도 혼자가 아니였다. 쉘다인이 보지 못한 여자를 카란은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카란에게는 눈으로 잡을 수 있을만큼의 불쾌한 그녀의 감정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빛이 뒤에서 들어오고 있어서 모습을 정확히 볼 수는 없었지만 젊은 여자인것 같았 다. 카란에게 그녀의 짜랑짜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들을 사다가 어디에 쓰려고요?" 카란은 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신전에 맡길겁니다." 메디아는 그의 대답을 들으며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고민했던 일이 간단하게 해 결된 것이다. 아이들을 신전에 의탁하면 신전에서 잘 키워줄것이 분명했다. 진작 그 생각을 못한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그녀는 여기서 뜻밖에 만난 신관이 무척 반갑게 느껴졌다. "아니...넌 누구냐?" 탁하게 쉰 목소리가 쉘다인에게서 흘러나왔다. 게슴츠레하게 빛나는 그의 눈이 포 키를 데리고 온 메디아를 훑어보았다. "아~. 댁도 아이를 데려가고 싶소? 흐흣..." 메디아는 약삭빠르게 계산하고 있는 그의 머리속이 보이는듯 했다. "아니. 난 이 사람에게 맡길거야." 그녀는 쉘다인을 무시하고 카란에게 돌아서서 그에게 포키를 내밀었다. "잘 부탁해요." 메디아는 상냥하게 웃으며 나가려고 했다. "뭐라구? 아직 그 아이들은 내꺼야-. 아직 안 팔았어." 쉘다인이 일어나며 카란에게서 아이들을 훽 잡아채어 끌어 당겼다. "이것들은 아직 내꺼야." 음흉하게 웃고 있는 쉘다인의 눈이 사악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가려던 메디아는 잠시 멈추고 과연 저 신관이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나를 가늠해 보았다. 신관들은 일반 사람들과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모두가 같은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의관의 일을 하는 신관은 치료력이 뛰어났으나 기타 다른 신성마 법이 약했다. 그리고 제사관의 일을 하는 신관은 신성력이 뛰어났지만 신학을 연 구하는 신관들은 대부분이 마법보다는 학문에 관심이 많아서 거의 힘이 없어 약했 으며 전신관들만이 신성마법을 강도높게 수련해서 방어력과 공격력을 갖춘 마법 에 강했다. 특이하게 독심술을 발휘하는 신관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대개 고위급 신관이나 외교의 일을 하는 외교신관들로 흔히 만나볼 수 없었다. 신관들도 저마 다의 성격과 직책에 따라 신성력이 달랐고 하는 일도 각기 달랐다. 메디아는 과연 눈앞에 있는 신관이 어떻게 대처할지 궁금했다. 카란은 쉘다인의 속셈을 훤히 들여다 보고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는 고민스러웠다. 카란에게는 두 아이를 데려갈 만큼의 돈이 없었다. 처음에 그 는 쉘다인에게서 호야를 빨리 데려가기 위해서 일부러 큰 돈을 불렀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예상치 못했던 포키라는 여자아이를 데려가라며 욕심을 내는 쉘다 인의 변덕에 카란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쉘다인을 떠보았다. "지금 아이들을 주지 않으면 그냥 가겠소." 쉘다인은 잠깐 동안 당황하는 눈치더니 금새 베짱을 부렸다. "흥. 그냥 가시오." 카란은 쉘다인이 단단히 작정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돈을 더 내놓지 않으면 그는 정말 아이들을 내주지 않을 것이었다. 카란은 독심술을 할 수 있었지만 불 행이도 아직 경험이 부족했고 그에게는 공격 능력도 전혀 없었다. 만약 힘으로 빼앗아야 한다면 카란에게는 승산이 없었다. 스스로의 몸을 지킬 수 있는 방어력 은 있었지만 그것으로 누군가를 이길 수는 없었다. 카란은 난감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낼 수 있는 돈은 그게 전부요." 쉘다인은 의심스러운듯이 신관을 보다가 메디아를 건너다 보았다. "저기 아가씨가 더 낼 수 있을것 같군." 메디아는 가만히 오가는 이야기를 듣다가 카란의 태도로 그가 여기서 아이들을 무사히 데려갈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메디아는 귀찮은듯이 말했다. "하- 웃끼는 놈이네." 카란은 당돌한 메디아를 돌아 보았다. 목소리로 보아서는 나이가 많지 않았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뒤에 서있는 여자는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걸어가서 포키와 호야를 쉘다인의 손에서 잡아냈다. "히힛...아가씨가 뭘 좀 아나보군. 어어...돈 먼저 줘야지." 쉘다인은 아이들을 끈질기게 붙잡고 있었다. 메디아가 허리를 숙여 아이들을 잡다가 고개를 들며 나직히 말했다. "너 그냥 놓을래? 혼나볼래?" '에구.. 이런 말하는 것도 습관되겠네' "뭐? 이 계집이..." 메디아는 하얀손을 들어 쉘다인의 손에 가볍게 얹어 놓았다. 어벙벙한 그의 표정 이 코앞에 있었다. 그녀가 씩 웃었다. "얘들아. 저 사람 따라가렴." 메디아는 쉘다인에게서 쉽게 아이들을 빼내어 카란에게 밀어 놓고 일어 났다. 그 때까지도 쉘다인은 꼼짝않고 아이들을 잡았던 자세 그대로 있었다. 마치 조각품처 럼 멈춰진것 같았다. 메디아는 예전에 블루잉에게 걸려 있던 정지 마법을 쉘다인에게 걸었지만 주문도 없이 약간의 접촉만으로 거는 마법의 효과는 하루 이틀정도밖에 가지 않았고 의 식이 살아있어서 굳어버린 육체의 고통이 그대로 전해지는 벌의 의미와도 같은 수법이었다. "어? " 포키와 호야가 이상한듯이 그들의 아저씨 쉘다인을 보았지만 그는 움직이지도 않 고 그 눈동자만 사방으로 굴리며 안타깝게 메디아를 쳐다 보고 있었다. "자. 나가자." 카란이 아이들을 데리고 음침한 움막을 빠져 나갔고 메디아는 빙글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쉘다인을 돌아보았다. 두려움과 분노로 두 눈동자가 부릅떠지는 쉘다인 이였다. "이봐 잘 있어. 안녕." 그들이 밖으로 나오자 햇빛이 따사롭게 비추고 있었다. 그제서야 메디아와 포키 는 젊은 신관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포키가 감탄성을 지르며 카란의 옷 자락을 무의식적으로 붙잡았다. "예쁘다." 메디아가 보기에도 포키의 예쁘다는 말이 정확하게 어울리는 외모 같았다. 그녀 의 앞에 있는 신관은 정말 햇빛이 무색할만큼 예뻤다. 아니 아름다웠다.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고 해도 이토록 뛰어난 미모를 가지기 힘들것 같았다. 카란의 얼굴은 마치 잘 조각해 놓은 얼음조각처럼 희고 매끄러워 보였으며 촘촘하 게 그늘진 초록색 속눈섭에 둘러싸인 맑은 눈동자는 마치 숲속에 자리한 옹달샘 같았고 어깨에서 찰랑거리며 윤기가 흐르는 그의 머리카락도 짙은 초록색이었으며 입술은 과일처럼 붉게 물들어 있어 도발적으로 보일정도였다. 움막의 어둠속에 서는 미처 보이지 않았던 초록의 눈동자와 머리카락이 신비함을 넘어 야한 느낌 을 주고 있었다. '이거 남자 맞을까?' "남자입니다만......" "에?" 메디아는 묻지도 않은 그녀의 생각에 대답하는 카란을 의심스럽게 쳐다 보았다. "독심술을 하는 신관인가?" 메디아는 사람들에게 상냥하고 예의바르게 말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이렇게 반말 을 사용하는 예는 드물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자연스럽게 반말이 나왔다. 왜 그 런지는 몰랐지만 눈앞의 야한 신관이 맘에 들었다. 그녀가 반말을 해도 상대방 역시 신경쓰지 않는것 같았다. "예." 대답을 하고 유심히 메디아를 지켜보던 카란의 붉은 입술이 보기 좋은 모양의 곡 선을 그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자신의 독심술을 알고도 이렇듯 편하게 대하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 일반적으로 그의 독심술을 아는 사람들은 그를 피하거나 불 편해하곤 했다. 그가 일부러 능력을 드러내 보였는데도 여자의 얼굴에서는 불편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전 카란이라고 합니다." "그거 고산식물 이름이지 않나?" "예. 같은 이름입니다." "흐음. 알만하군. 카란꽃과 똑 같이 생겼어." 카란이 다시 미소지었다. 그는 악의없이 생각을 그대로 말하는 사람을 만나 본것 이 언제인지도 몰랐지만 지금 그런 사람을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이름은 메디아야. 만나서 반가웠어. 그럼 아이들 잘 부탁해." 메디아는 이제 여기서 더 볼일이 없었으므로 미련없이 발길을 돌려 항구로 향했 다. 한참을 걸어 좁은 골목을 빠져 나와 큰 거리에 나섰는데도 카란과 아이들이 그녀의 뒤에서 쫄랑쫄랑 따라오고 있었다. "왜 따라와?" "신전이 이쪽에 있어요." "그래? 어디 신전에 갈건데?" "트리톤 신전에 갈겁니다." 트리톤 신전은 해마다 뱃사람들을 위해 바다의 신 트리톤에게 제사를 지내고 배 가 항구를 떠날때마다 축원을 해주는 신전이었다. 바닷가의 큰 도시나 항구에는 어디나 있는 신전으로 뱃사람들에게는 꼭 필요한 신전이었다. 이 곳 노아에도 해안끝에 웅장하게 지어진 트리톤 신전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들이 해안으로 접어들어 헤어지고 있을때 갑자기 메디아의 발밑에 푸른색 거북 이가 나타나 거의 밟을뻔했다. "어? 블루잉?" 거북이는 껍질 바깥으로 목을 길게 빼더니 주위를 살피지도 않고 급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메디아 빨리 빨리!" "어? 거북이가 말을 한다." 카란의 뒤에서 포키의 손을 잡고 있던 호야가 신기한듯이 블루잉을 보았다. 포키 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블루잉을 만져보려고 했다. "뭐야? 마시가 사고 쳤어?" "지금 사고나기 직전이야. 도대체 어딨었니? 얼마나 찾아 다녔다구." "빨리 가기나 하자 어디야?" 다급한 목소리를 내며 불안한 마음으로 블루잉을 잡아 어깨위에 올려 놓은 메디 아는 긴망토를 걷어올려 움켜잡고 뛸 준비를 했다. '마시야 제발 조금만 참아줘라.' - 계 속 - 번 호 : 15 / 83 등록일 : 1999년 06월 29일 01:52 등록자 : CHO1971 조 회 : 2541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15.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신이 알파를 창조했을때 탄생과 축복의 의미를 알았다. 신이 카오스를 창조했을때 분노와 징벌의 의미를 배웠다. 제 15 장 저게 해결할 수준으로 보이냐? "무슨 일입니까? 도와 드릴까요?" 카란이 블루잉을 묘한 눈빛으로 보며 메디아에게 말했다. 그러나 메디아는 카란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고 그냥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망 토와 긴 양갈래 머리가 휘날리도록 달리고 또 달렸다. '아 내 팔자야.' 메디아는 제발 아무 일도 아직 일어나지 않았기를 바랬다. "도대체 에코는 그렇다 쳐도 알렉토는 뭐하느라 마시를 간수 못했니?" 블루잉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메디아를 꼭 잡고 대답했다. "알렉토 때문이야." "뭐?" "정의감. 그게 문제야." "하-. 상상이 간다." 그들이 정신없이 뛰어가 도착한 곳은 커다란 갤리선이 정박해 있는 곳이었다. 북 적 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흑인 노예들과 몇몇의 인간들이 둘러서 있는 가운데 알 렉토와 에코 그리고 위험 인물 마시가 보였다. "에? 뭐야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니쟎아. 저런 건 너 혼자서 해결 해야지. 겨우 인 간들 몇몇 있는 거 가지고 호들갑을 떨고 그랬니? 알렉토 정도면 충분하쟎아?" 메디아가 숨찬 목소리로 블루잉에게 투덜거렸다. 그러자 블루잉이 답답하다는 듯이 불만을 터뜨렸다. "야. 너 똑바로 좀 봐. 인간들이 문제가 아니라구. 마시를 좀 보란말이야. 니 눈 에는 저게 해결할 수준으로 보이냐?" "뭐?" 메디아는 다시 한번 시선을 들어 멀리 마시가 있는 곳을 자세히 보았다. 그녀의 표정이 차츰 구겨지기 시작했다. 갤리선 주위에 모여 있는 인파는 꽤 여럿이었다. 알렉토는 검을 빼들고 있었고 그의 앞에는 갤리선의 선원들로 보이는 대여섯명의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검집에 손을 얹고 있었으며 대장으로 보이는 사내 하나가 마시를 마주 보고 서 있었는데 표정이 아주 건방져 보였다. 자세히 보니 돌바닥 위에는 이미 시체가 몇구 굴러 다니고 있었으며 무언지 몰라도 좋은 분위기는 아 니였고 메디아는 다른 것보다는 마시가 걱정이였다. 지금 마시의 표정 상태라면 저기 있는 인간들은 고사하고 갤리선이 무사할것 같 지가 않았다. 그까짓 남의 갤리선이 어떻게 되든 메디아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 지만 파라에서나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큰 배를 파손 한다는 것은 사형이나 다름 없었다. 아무리 정상 참작을 한다고 해도 종신형을 받을것이 분명한 범죄였다. 살인조차도 잘 설명하고 몇가지 정상 참작만 되어도 사형을 면하고 벌금형에서 끝날 수도 있었지만 남의 배를 불태우거나 박살낼 경우는 절대 예외가 없었다. 바다로 둘러싸인 판타리아 대륙에서 배는 매우 중요한 재산이였고 귀중한 무역수 단이었다. 이 곳 노아의 영주가 어떤 인간인지는 몰라도 마시를 범죄자로 만들어 일을 꼬이게 할 수는 없었다. 메디아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을 수 있었다. 메디아의 보라빛 눈에 새끼 드레곤 마시의 검은 머리는 늦은 오후의 태양 아래 마치 붉게 타오르는 횃불 같아 보였고 한팔을 치켜 올린 채 손바닥을 쫙 펴서 하늘로 향하며 뭐라고 외치려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메디아는 앞뒤 볼 것 없이 뛰었다. 에코와 마시의 시장구경에 따라 나선 알렉토는 앞에서 정신없이 뛰어 다니는 마 시와 쉬지 않고 수다를 떠는 에코를 보며 괜히 따라 나왔다는 생각을 수 없이 하 고 있었다. 에코가 골목골목을 빠지지 않고 수색하듯이 뒤져서 구경하고 다니는 물건들이라는 것도 여인의 비단옷이나 장신구들로 한 가게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흥정을 하는지 알렉토는 지루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나이가 의심스러운 마시는 길거리 수레에서 파는 먹을거리에 정신이 팔려 툭하면 잃어버리기 일쑤였고 보다 못한 에코와 알렉토가 멈춰서 먹을라치면 한정없이 먹어대는 통에 억지로 끌고 다 녀야만 했다. 그럴때마다 메디아의 이상한 푸른 거북이는 알렉토의 머리 위에서 묘한 소리를 냈는데 꼭 약올리는 소리 같아서 알렉토는 기분이 나빴다. 여기저기 널려있는 상점들의 가판대를 지나 많은 인파를 헤치며 시장의 이곳 저 곳을 뒤지고 다닌 끝에 에코의 쇼핑이 어느정도 끝날무렵에는 알렉토도 지쳐서 짜증스런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좀 느긋한 마음으로 항구를 거닐던 알렉토는 갑자기 마시가 안보이자 다시 되돌아가 생선파이 만드는 수레 앞에서 열심히 파이를 집어 먹고 있는 마시를 찾을수 있었다. "이럴 줄 알았어." "어머머... 또 먹고 있네." "웁... 마디떠(맛있어)...우웁..." 파이를 한가득 입에 물고 말하는 마시의 대답은 잘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알렉 토는 마침 쉬게 되어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먹을때는 어디를 뛰어다니지 않는 마시였고 에코도 수다를 떨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옆에서 뒤돌아 서며 눈앞에 펼쳐진 바다의 전경을 보려고 했던 알렉토는 생각만큼 바다를 쉽게 볼 수 없었다. 앞에는 커다랗고 육중한 배들이 즐비했기 때문에 온통 그의 시야를 가 렸던 것이다. 갤리선에서 선착장으로 놓여져 있는 긴 나무판자에는 바쁘게 일하고 있는 사마리 아 원주민 노예들이 쉼없이 들락 거리고 있었고 선원들과 용병들, 그리고 가끔 기사로 보이는 무기를 휴대한 자들이 노예들 사이를 오가는 것도 보였다. 선착장 에서는 어떤 자가 채찍을 들고 짐을 나르던 노예들 중 한명을 가혹하게 다루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알렉토는 눈살이 찌푸려 졌지만 이곳에서 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사마리아에서 잡혀 온 노예들은 모두 그렇게 다스려지고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나서서 도와줄 수도 없었다. 선원들에게는 그 들 나름의 법칙이 있기 마련이었다. 알렉토는 불쾌한 심정을 가라 앉히며 애써 그 광경을 무시하려고 했다. "그만 가자." "웁..으...도..머억구(더 먹고).." 아직도 양손에 파이를 들고 있는 마시의 모습으로 보아서는 금방 자리를 뜰 수 없을것 같았다. 알렉토는 가까이에서 들리는 채찍소리에 신경이 바짝 곤두서고 있었다. 노예의 고통스런 신음소리가 끊임없이 귀를 자극하며 들렸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무심한 눈길로 힐끗 바라볼뿐이었다. 채찍을 사정없이 휘두르고 있는 남자는 왕성에 가면 수 많은 여자들을 울릴만한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의 귀족풍의 아주 잘생긴 미남자였는데 드러난 팔뚝은 근육질의 단단한 몸으로 그가 단련된 무사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힘 있게 내리뻗는 그의 팔뚝과 채찍은 힘없는 노예를 잔인하게 학대하고 있을뿐이었 고 검은 미남자의 얼굴은 마치 그것을 즐기는듯 했다. 살갗이 다 찢어져서 더 이 상 맞을수도 없을것처럼 보이는 노예는 울부짖으며 애원하던 몸짓조차 멈춘채 가 는 경련만을 일으키고 있었다. 채찍을 내리치던 사내는 이제 기절해서 움직이지 않는 노예를 발로 굴려보더니 뒤를 향해 소리쳤다. "이봐 거기. 바닷물 좀 퍼와" 이제 매질이 멈춰져서 안심하고 있던 알렉토는 순간 아찔해 졌다. '설마...저 자식...' 그러나 알렉토의 불길한 예감은 적중하고 있었다. 곧이어 물통이 누군가에 의해 날라져오고 사내는 피투성이 노예에게 차가운 바닷물을 부어 버렸다. "으아악...." 노예가 고통스럽게 온몸을 뒤틀며 꿈틀거렸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일제히 그쪽을 보았다. "어머머... 어쩜 저 남자..... 엄청 잘 생겼다." 에코는 노예의 비명 소리보다도 잘 생긴 남자에게 관심이 더 갔다. 그러나 미남 자는 아무래도 잔인한 성격인것 같았다. 이미 걸레처럼 엉망이 된 노예를 다시 매질하기 시작하는 그를 보며 잘 생긴 외모가 아깝다는 혼잣말을 하는 에코였다. "아깝다. 아까워. 알렉토가 저 만큼만 생겼어도 좋을텐데...호호호...어? 알렉 토? 화났어요? 에잇... 농담이야. 뭐 알렉토도 잘 생겼어요. 어? 알렉토?" 잔뜩 찌푸린 얼굴로 무섭게 에코를 째려보던 알렉토는 그대로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매맞고 있는 노예에게 다가갔다. 그의 머리에서는 블루잉이 계속 울어대고 있었고 그제야 눈치를 챈 에코가 때늦은 말을 하고 있었다. "에? ...알렉토 참아요." 성큼성큼 걸어가 검은 미남자의 맞은편에 선 알렉토는 말 몇마디로 뭔가를 해결 할 수 있을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문제를 힘으로 해결할 수도 없는 일 이였다. "그 노예를 내게 파시오." 채찍질을 하고 있던 사내가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린 쪽을 보았다. 포센의 앞에는 밤색 머리에 붉은 띠를 길게 두르고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커다란 덩치의 사 내가 서 있었다. 그러나 그의 머리 위에는 이상하게 생긴 거북이가 앉아 있었는데 진지한 사내의 얼굴과 모자만한 크기의 거북이가 기막힐 정도로 재미있어 보였 다. 포센은 날카로운 검은 눈동자로 잠시 알렉토를 황당하게 바라보고는 입술을 비틀어 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무리 보아도 비웃는 표정이었다. 포센은 채 찍을 말아 쥐더니 바닥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피투성이 노예를 발로 걷어 차며 말했다. "사겠단 말이지? 동정심인가?" "얼마면 되겠소?" "돈은 필요없어. 난 팔기 싫어." 간단명료한 대답. 사내와 알렉토의 눈이 공중에서 마주치며 금방이라도 불꽃이 튈것 같았다. 사내 가 흥미롭다는듯이 입술을 열어 나직히 말했다. "그래. 그러고 보니 검을 차고 있군. 과연 검을 소유할 만한 자인가?" 도전적인 눈빛으로 사내가 알렉토의 검을 보았고 알렉토를 향해 발을 내딪으며 유쾌한 미소를 지었다. "나를 이기면 이 노예를 풀어주지." 명백한 도발이였다. "좋아." 블루잉은 후다닥 알렉토의 머리 위에서 등을 타고 내려왔고 갑자기 흥미진진해진 사람들은 좋은 구경거리를 놓칠세라 꼬여 들기 시작 했으며 갤리선 주위에 흩어 져 있던 선원들과 용병도 모여들었다. 그들은 검은 머리의 미남자 포센이 시투니 아의 기사단에 속한 실력있는 기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상대방이 얼마나 빨 리 죽을지 내기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는 쉽게 이루어 지지 않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큰 덩치는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는 기이한 형태로 검을 움직였는데 어떻게 보면 검이 혼자 서 움직이는듯이 보이기도 했다. 그 기이한 검술은 포센과 검을 겨루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실력이었으며 포센이 소드에너지(sword-energy)를 사용하기 시작하 자 그도 소드에너지로 받아내기 시작했다. 고수들의 치열한 접전이 된 대결에서 어느 쪽도 우위를 차지하지 못한채 수십 차례의 화려한 검빛이 일렁였다. "너. 뭐하는 자냐?" "떠돌이일 뿐이다." "훗. 웃끼는군. 소드에너지(sword-energy)를 내뿜는 자가 떠돌이라....그런데 그 이상한 수법은 뭐지? 특별한 검인가? "우리 모하비부족 전사에게 검은 검일뿐이다." "그렇군. 알만해. 그 검을 다루는 기술은 물론 모하비들의 전통이겠지? 인정할만 하네.....햐핫.. 오호...이봐 천천히 하자구. 그렇게 덤비지 않아도 돼. 하하... 하여간 반갑군. 내 이름을 알 가치가 있어. 내 이름은 포센이라고 하지. 죽기전 에 잘 알아 두시지." "떠들지 말고 검이나 받아라." 그들이 그렇게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결전을 벌이고 있을때 마시는 든든하게 배 를 채우고 드디어 그렇게도 기다리고 기다리던 구경거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싸 움 구경이었다. 싸우고 있는 당사자가 일행이여서 더 흥미진진했고 칼에서 번쩍 번쩍 빛이 나는 것이 꽤 신났으며 더구나 배도 부르니 더이상 바랄것이 없었다. 처음에는 그저 재미있는 구경거리 일뿐이었다. 알렉토와 포센이라는 사내의 칼부림이 더 치열해지고 그들의 실력이 대단한 수준 이였으므로 사람들은 감탄과 질투의 눈으로 그들의 접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 나 갤리선의 용병들은 슬슬 앞으로 나서며 검에 손을 얹고 있었다. 빈정거리며 여유를 부리던 포센은 슬슬 밀리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상대는 어 디서 나타난지도 모르는 떠돌이였지만 검을 다루는 기술만큼은 탁월할 정도로 뛰 어나서 검과 사람이 하나가 되어 있는듯한 느낌을 받을만큼 순간순간 그를 찔러 오는 검에는 사람은 없고 검날만이 있는것처럼 보일정도였다. 포센은 시투니아의 뛰어난 기사들만으로 이루어진 천둥기사단의 일원으로 같은 기사단 소속에서도 이렇게까지 밀려 본적이 없었다. 그는 쉽게 물러설 성격도 아니였고 더구나 이름 도 모르는 떠돌이와의 싸움이라면 더 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내였다. 포센의 부하들이 싸움에 끼어 들어 알렉토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공격은 하나같이 악랄하고 거칠어서 그냥 물리치려해도 상처를 입히지 않을 수가 없었 다. 알렉토는 숨 쉴 사이 없이 몰아치는 칼날의 움직임 속에서 최대한 빨리 상대 를 제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육중한 덩치와 무거운 검들이 난무하는 사이로 사 내들의 기합 소리가 항구를 가득 채웠다. 포센은 알렉토가 부하들을 상대하는 사이 검을 올려 바닥에 엎드려 빌고 있던 노 예의 목을 단칼에 베어 버렸다. 노예의 숨넘어 가는 소리가 들리고 간간히 흘러 나오던 피투성이의 몸체에서 분수처럼 피가 튀어 올랐다. "뭐하는 짓이냐?" 갑자기 흥분한 알렉토가 포센에게 달려들며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의 움직임 은 그의 등뒤로 다가오는 검날 때문에 계속 이어질 수 없었다. "하하하.... 이 노예는 내것인데 무슨 상관이냐? 이 쓰레기가 그렇게도 중요한 가? 다른 노예를 상품으로 걸지. 어때? 다른 노예를 줄테니 계속하자구." 사악한 웃음이 잘생긴 포센의 얼굴사이로 지나갔고 알렉토는 그의 부하들을 상대 하면서 분개했다. 알렉토는 자신을 향해 사납게 찔러 오는 사내의 팔뚝 전체를 베어버리고 곧이어 다가오는 자의 머리를 통채로 날려 버렸다. 항구의 돌바닥에는 순식간에 피가 쏟아져 내려 돌틈 사이를 흘러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쪽에서 재미있게 구경하던 마시는 더 가까이에서 보려고 다가 갔다가 포센의 검에 튕겨 나온 노예의 머리통에 맞았고 뜨끈뜨끈한 피를 정통으로 뒤집 어 써야 했다. 억세게 재수 없는 마시였다. 아니면 억세게 몸이 둔한 건지도 몰 랐지만...... - 계 속 - 번 호 : 16 / 83 등록일 : 1999년 06월 30일 04:15 등록자 : CHO1971 조 회 : 2519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16.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신이 알파를 창조했을때 탄생과 축복의 의미를 알았다. 신이 카오스를 창조했을때 분노와 징벌의 의미를 배웠다. 제 16 장 첫키스. 블루잉은 순간 기가 막혀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얼마나 재수가 없으면, 하 필이면 저 머리통이 마시에게 날아가야만 했는지 도대체가 이해가 안되는 블루잉 이였다. 시뻘겋게 피를 뒤집어쓴 마시의 모습은 차마 두눈으로 보기 민망할 만큼 끔찍해 보였다. 오후의 햇살아래 적랄하게 반짝이는 붉은 핏방울이 허연 김을 내뿜으며 마시의 머리카락에서 흘러 내리고 있었고 그보다 더 붉게 타오르고 있 는 마시의 눈동자가 블루잉에게 불길한 예감을 주고 있었다. 블루잉은 망설이지 않고 뛰었다. 마시의 눈빛은 블루잉이 수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였다. 마시는 쪼그려 앉아 열심히 구경하던 자세에서 갑자기 날아온 머리통에 맞았고 뜨거운 피를 뒤집어 쓴 여파로 잠깐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얼굴을 타고 내려온 뜨끈한 피가 가슴을 적시면서 제 정신을 차렸고 유쾌하던 그의 기분은 한순간에 싹 날아가 버렸다. 불쾌한 비린내가 전신을 적시는 기분이 아주 더러웠다. 그는 이런 상황을 참을만큼 관대한 성격이 절대 아니였다. 그는 부글부글 끓어 오르는 심정으로 일어나, 피를 털어내며 싸움의 한가운데로 나아 갔다. 빈정거리며 흥분한 알렉토를 바라보던 포센은 갑자기 끼어드는 피를 뒤집어 쓴 사내아이를 보았다. 그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 꼬마야 괜찮니? 이거 미안한 걸. 크큭큭.." 마시는 한동안 새 빨갛게 물들은 모습으로 말없이 서 있었고 마시의 몰골에 주위 사람들은 키들 거리며 웃고 있었다. 알렉토가 걱정스러운듯 마시를 바라 보았지 만 가까이 다가갈 수는 없었다. 한참을 말없이 포센을 째려보던 마시는 한손을 들어 손바닥을 하늘로 향해 나직히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나의 종 사라만더여 명령에 따라 너의 모습을 드러내라." 마시의 중얼거림에 따라 그의 손에서 서서히 붉은 불덩어리가 떠오르더니, 그 속 에 희미한 빛으로 번쩍이는 형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도마뱀의 형상이었다. 불 속 에서 산다는 전설의 도마뱀, 불의 정령 사라만더가 마시의 손바닥 위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는 마시의 명령에 따라 손위의 불덩어리는 점점 거대해 지더니 뜨거운 열기를 사방으로 뿜어내며 앞으로 쏘아져 나가기 시작했다. 알렉 토를 공격하고 있던 포센의 부하들이 순식간에 활활 타는 불덩이에 휩싸여 처절한 비명소리를 울리며 항구 바닥을 뒹굴었다. 가까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황급히 뒤로 물러서게 할만큼 위력적인 열기와 힘을 내뿜던 불꽃은 비명소리가 완전히 멈 추고 그들의 육체가 새까맣게 타서 뼈가 드러나 보일정도가 되어서야 겨우 사그라 들었다. 그러나 마시는 멈추지 않았고 다시 손바닥을 들어 사라만더를 다시 불러내기 시 작했다. 그의 손바닥 위에 붉은 불꽃이 떠올랐고 마시는 자신을 꼬마라고 부르며 웃고 있던 자를 박살내기 위해 거대한 불덩이를 날렸다. 마시가 겨냥하고 있는 사정권에서는 커다란 갤리선도 무사할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마시는 잘 날아가던 불덩이가 갑자기 확하고 환상처럼 사라지는 환영을 보았고 불이 번쩍하는 느낌이 들며 머리가 깨질듯이 아파오는 것을 이해할 수 없 었다. "아욱!" 마시는 머리를 강타하는 아픔과 그 익숙한 느낌에 순간 기가 팍 죽었다. 메디아는 손에 들고 있는 빗자루로 마시의 머리를 강타하며, 때맞춰 마시의 정령 을 막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머리를 두손으로 감싸 쥐고 주저 앉았던 마시가 벌떡 일어나며 방어 태세를 취하는 것이 보였다. '방어?' "어쭈- 막아보겠다는 거냐?" 메디아는 사람들이 모여 보고 있다는 것도 개의치 않고 열네살 외모의 자신보다 조금 작은 키의 마시를 물소 가죽으로 만들어진 작은 빗자루 하나로 개패듯 패기 시작했다. 마시는 처음에는 피하려고 발버둥을 치며 반항했지만 한번 붙잡히고 나서는 거의 쭈끄려 앉아 몸을 웅크린채 사정없이 두들겨 맞고 있을수 밖에 없었 다. 정신없이 맞고 있던 마시가 메디아를 향해 울듯한 얼굴로 징징댔다. "퍽...퍼억...퍼벅..." "아악...아얏...내가 그런거 아니야 이잉~ . 나 좀 보란 말이야잉~." "그래서?" 메디아가 싸늘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마시가 한풀 죽은 목소리로 알렉토와 포센 을 힐끔거렸다. "저 자식이 먼저 잘못 했단 말이야." "그래?" 메디아는 여전히 냉담한 목소리를 내며 마시의 몰골을 다시 훑어보았다. 좀 불쌍 했다. '나라도 엄청 열받겠군' 메디아는 빗자루를 고쳐 쥐며 웅크리고 있는 마시에게 말했다. "너-." 메디아의 풀린 목소리를 들으며 마시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응?" 메디아는 조용하게 마시에게만 들리도록 얘기했다. "다시는 내가 없을때 그녀를 불러내지마." "그녀?" 메디아가 못 알아 듣는 마시를 째려보았다. 마시는 순간 고개를 움추렸다. "아무 여자도 안부르께..." "사라만더를 부르지 말란 말이야. 알았지? 너 자신이 위험하지 않으면 절대 부르 지마. 절대로." 마시가 불만스런 표정으로 머뭇머뭇 거렸다. "하지만...저기...음..." "하지만?" 메디아의 치켜 떠지는 눈을 보며 마시는 볼멘 소리를 냈다. "치잉~.... 알았어." 그들이 그렇게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어주고 있을때 포센은 이 황당한 사태보다 도 방금 나타나 사내 아이를 진짜 신나게 팬 여자에게 더 관심이 갔다. 자세히 보니 꽤 미인이였다. 길게 따아 내린 검은 머리를 풀어 헤치면 더 근사하고 매력 적일것 같았다. 포센은 여자를 좋아했다. 특히 활동적인 여자라면 더 좋아했다. 그는 그녀를 보는 순간 모든 다른 것에 대해 잊었다. "아가씨. 그녀석이 당신 애인이 아니라면 좋겠군." 마시를 타이르던 메디아는 갑자기 들리는 사내의 굵직한 음성에 고개를 돌렸고 거기에는 아주 잘 생긴 미남자가 서 있었다. 마시를 이꼴로 만들어 놓은 주인공 인것 같았다. 마시를 위해 뭔가 해줘야 할 것 같았지만 왠지 꺼림직했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 보기 시작했다. 가까이에는 알렉토가 머리의 붉은 띠를 바람에 나 풀거리며 여전히 검을 쥔채 서있었고 사람들 사이로 에코와 블루잉 그리고 아는 신관하나와 꼬마들이 보였으며 그외에는 칼든 용병들과 인간들 간혹 보이는 드워 프뿐이었다. 그녀는 시선을 돌려 그녀에게 꺼림직한 느낌을 주는 것이 무엇일까 계속 찾았다. 그리고 갤리선의 높은 갑판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는 낯선 얼굴을 찾을 수 있었다. 망토의 모자를 깊게 눌러 쓴 자가 석양을 등지고 메디아 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에게서 나오는 느낌은 언뜻 열렬한 느낌을 주기까지 했는데 문득 그의 모자가 벗겨지고 가볍게 날리는 하얀 머리카락이 보였다. 메디 아는 그에게서 풍겨오는 희미한 마법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애매모호한 향기 였다. 그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백마술과 흑마술을 함께 익힌 특이한 경우가 분명 했다. 포센은 눈 앞의 매력적인 여자가 그에게는 눈길만 잠깐 주고는 다시 반짝거리는 보라색 눈동자로 사방을 둘러보는 것을 불만스럽게 보았다. "이봐 아가씨?" 메디아에게 가까이 다가간 포센이 그녀에게 손을 뻗으며 말하고 있었다. "포센!" 포센의 손길이 공중에서 멈췄다. 그가 표정을 가볍게 굳히며 갤리선의 입구를 바 라 보았다. 거기에는 검은 기사복을 입은 금발 머리의 유약한 인상의 사내가 서 있었다. 알렉토는 그 사내의 검은 기사복이 어떤것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의 옷이 진짜라면 결코 그 인상처럼 유약할리가 없었다. 대륙 최대의 제국 파라에서도 일 곱명밖에 없다는 흑기사단의 기사복이었다. 파라제국에는 흑기사단과 붉은 기사 단 그리고 녹색 기사단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기사중의 기사만이 모였다는 흑기 사단은 일곱명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제국내에서도 가장 강한자들이였다. 파라제국 에서는 4년마다 한번씩 토너먼트를 열어 우수한 기사들을 선발했는데 알렉토도 스 무살 무렵에 출전해서 우수한 성적으로 붉은기사 작위를 받기도 했었다. 그러나 페렌토의 모하비부족 출신으로 더이상 기사단에 있을 의미를 못느껴 떠돌이 생활 을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그도 한때는 흑기사가 되기를 바란적이 있었지만 말이 다. 그런데 여기 흑기사 제복을 입고 있는 사내가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알렉토 는 그 사내를 잘 알고 있었다. 파라제국의 세도가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네토르가 의 장남이였으며 귀족기사의 대표적인 인물로 카드모라는 이름의 사내였다. "포센. 우리가 할 일을 잊지 않았다면 그만 두게" "오호...이런... 진짜 우리 정의의 심파자께서 오셨군. 그래" 포센이 카드모를 비꼬며 불만스러운듯이 손에 쥐고 있던 검을 검집에 넣었다. "하지만 카드모. 그대의 명령을 듣는것은 아니라네." "알고 있네." "후후....아가씨 다음에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메디아는 그때까지도 갑판 위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녀가 시선을 돌려 포센을 보고 다시 갑판위의 마법사를 보았다. '뭘까?' 예감이었다. 뭔지는 몰랐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법사에게서 무언가 강한 느낌 이 오고 있었다. 포센이 다시 메디아에게 손을 뻗었다. "아가씨? 뭘 보는 거지?" "이봐. 그녀에게서 물러나." 알렉토였다. 검은 검집에 넣은 상태였지만 언제라도 다시 뽑을 수는 있었다. 메 디아에게 접근하는 사내녀석이 제 정신이 아닌것처럼 보였다. 싸움 도중에 여자 에게 한눈 파는 상대는 난생처음이였다. "아하... 그렇군. 아직 자네 멀쩡했군." 능글스럽게 웃는 포센과 불쾌한 표정의 알렉토 사이로 흑기사가 걸어왔다. "노예 하나 때문에 더 이상의 소동이 필요하오? 저들은 문제삼지 않겠지만 더이상 문제가 커지면 나도 책임질 수 없소." 카드모가 쓰러져 있는 포센의 부하들을 보며 알렉토에게 말했다. 알렉토는 할말 이 없었다. 노예는 이미 죽었고 포센이라는 작자에게는 분했지만 노예의 원수를 갚아줄 명분도 없었을뿐더러 이미 네다섯명이나 마시와 알렉토의 손에 비참하게 죽었고 제국의 기사와 싸우고 싶지도 않았다. 더 이상 물고 늘어져야 사건만 커질 것이라는 것을 알렉토도 알고 있었다. 그는 안타깝지만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알렉토는 화가 나서 돌아서 버렸다. "크흐흣.... 역시 카드모 나리군." 포센의 빈정거림에도 불구하고 카드모는 메디아에게 말했다. "아가씨도 그만 가보시오." "잠깐 그 아가씨는 나하고 볼일이 남았는데....." 카드모는 난폭한 성질의 포센을 잘 알고 있었고 그의 여성에 대한 편집증적인 집 착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카드모는 지금 중요한 물건을 수도 오람으로 운반 해야 했고 중간에 불미스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랬다. 다른 일반의 여자라면 모르는척 넘어가 줄 수도 있었지만 이 여자는 마법사였다. 조금전에 잠깐 보았 던 실력대로라면 사내아이의 정령술도 대단했지만 그 정령을 한순간에 막아버린 여자의 마법이 더 위험해 보였다. 처음에는 포센의 일에 끼어들지 않으려던 카드 모가 나서게 된것도 갑판위에 있는 백발의 젊은 마법사 크란의 말때문이었다. 크 란은 여자 마법사의 순간적인 마력을 보자마자 열렬한 갈망으로 바라 보기 시작 했다. 크란은 마법에 관한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탐구적인 기질을 가진자 로 포센과 함께 시투니아에서 건너온 일행이었는데 고위마법사로 이번 임무에 절 대적으로 필요한 인물이었다. 여자를 건드리지 말라고 말하는 그의 표정으로 보 아서 카드모는 곤란한 일이 생기기 전에 포센을 막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앞뒤 가리지 않고 한번 찍은 여자는 끝까지 놓치지 않는 포센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포센은 단지 협력자일뿐이지 부하가 아니였기에 카드모는 더욱 난감해졌다. "제 일행에게 무슨 볼일이십니까? 저는 에레보스 신전의 신관입니다만...." 카드모는 갑자기 끼어 들어온 청아한 목소리에 의아해졌다. 여자 마법사의 옆으 로 다가서며 말하는 신관은 하얀색의 깨끗한 복장을 하고 있는 초록색 머리칼을 가진 신관이었는데 그는 놀라울 정도의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여자인지 남자인 지 언뜻 분간이 가지 않았는데 카드모는 여태까지 여자건 남자건 이토록 아름다 운 사람을 본적이 없었다. 신전에서 뽑는 아주 어린 신관들은 아름다운 미모를 보고 선발하기도 했지만 일반적으로는 나이가 들어서 신관이 되는 경우가 많았고 신앙심 때문에 신관이 되는 수 많은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운 외모를 갖는것은 아니였다. 카드모는 초록빛이 일렁이는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신관을 넋을 잃 고 보고 있었다. 카드모뿐만이 아니라 메디아에게 추근대던 포센까지도 카란을 놀란 눈으로 뚫어질듯이 보고 있었다. 카드모가 겨우 자신을 수습하며 말을 꺼냈 다. "아. 그러시군요." 카드모는 자신의 실태를 깨달으며 눈앞의 사람들이 수상한 일행으로 보이기 시작 했다. 정체불명의 소드에너지를 사용하는 뛰어난 검사도 그렇고 불의 정령을 불러 내던 사내아이며 그 사내아이를 말리던 여자 마법사, 이제는 에레보스 신전 소속 의 넋을 빼놓을 만큼 아름다운 신관이라니 이정도면 수상한 패거리였다. 그러나 신관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카란은 눈앞의 흑기사가 누군지 알고 있었으며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았다. "저희는 신전에서 필요한 특별한 물건을 찾으러 다니는 모험자들입니다." 카드모는 푸른 눈을 가늘게 뜨며 카란을 자세히 보았다. 모험자들이라면 이해가 갈만한 일행이였지만 그렇게까지 자신의 속이 보였나 싶었다. 그는 신관들 중에 드물지만 독심술을 쓰는 자를 왕궁에서 한번 만났었고 그때도 기분이 나빴다. 아무리 그가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더라도...... "포센. 그만 가세." 포센은 카란이 남자라는 사실에 금방 흥미를 잃었고 메디아를 아쉬운듯 끈질기게 보았지만 그도 해야할 일이 무언지 알고 있었으므로 결국은 카드모를 따라갔다. 그들이 자리를 뜨자 주위에 몰렸던 사람들도 하나둘 각자의 볼일을 보기 시작했고 노예들도 시체를 치우고 그들의 일을 시작했다. 메디아는 자신의 일에 느닷없이 끼어든 카란을 보았다. "카란. 뭐하러 남의 일에 끼고 그래? 그렇게 심심해?" "네?" "아이들이나 빨리 데려가라고." "예. 그래야죠. 저.. 메디아?" "응?" 어느덧 수평선에는 붉은 석양이 지고 있었고 항구에는 일몰을 보려는 사람들이 늘어서기 시작했으며 해안은 은은한 황금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카란은 깊어 보이 는 메디아의 보라빛 눈동자 속에 자신의 모습이 비춰지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기 뻤다. 그녀의 간단명료한 대답들이 좋았고 낭랑한 목소리도 좋았으며 솔직하고 꺼 리낌없는 태도가 좋았다. 이렇게 사람이 좋아보기는 처음인것 같았다. 어쩌면 그 녀가 그에게 행복을 줄것도 같았다. "왜 불러?" 메디아는 해안 가득 차오는 석양빛에 그늘진 흰 얼굴의 매혹적인 녹색 눈으로 자 신을 바라보고 있는 카란을 보며 정말 예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붉은 입술 은 향기로운 향내가 금방이라도 뿜어져 나올듯한 진짜 카란꽃처럼 보였고 얼굴을 감싼 초록색 머리카락도 마냥 신비스런 느낌이었다. 어떤 엘프나 님프보다도 아 름다워 보일정도였다. "메디아 우리 다음에 꼭 다시 만나요." "그래. 인연이 있다면......" 카란의 눈이 맑게 빛나며 미소를 지었고 그가 메디아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카란 은 손가락으로 메디아의 얼굴을 살며시 감싸더니 그녀의 입술에 살짝 키스하고는 역시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을 데리고 금방 사람들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메디아 는 멀뚱멀뚱 눈만 뜨고 카란이 완전히 사라질때까지 그대로 있었다. - 계 속 - 번 호 : 17 / 83 등록일 : 1999년 07월 02일 00:40 등록자 : CHO1971 조 회 : 2515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17.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신이 알파를 창조했을때 탄생과 축복의 의미를 알았다. 신이 카오스를 창조했을때 분노와 징벌의 의미를 배웠다. 제 17 장 마시야 삐졌니? 그동안 알렉토와 에코, 블루잉 그리고 마시는 꼼짝도 않고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 았다. 잠시 아무도 움직이지 못하고 말도 못했다. 그들은 망치로 얻어 맞은 것같 은 충격적인 장면을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에코가 침묵을 깨며 낮은 환성을 질렀다. "아....어쩜.... 너무 멋있다." '미...친놈...이었나?' 메디아는 몇번 눈을 꿈벅이며 생각했다. "이잉~~~ 힝잉~ " 갑자기 들려오는 마시의 칭얼거림 비슷한 소리가 들려 왔다. 마시는 피를 뒤집어 쓴 채 얻어 맞아서 더 엉망이 된 모양새로 불쌍하게 메디아를 보며 울듯이 서 있었다. "마시야 가자. 씻겨 줄께." "힝~. 메디아 미워....히잉....이게 뭐야....이잉~..." 알렉토는 마시가 쫄레쫄레 메디아를 따라 가며 내는 칭얼 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도저히 다큰 사내아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마시가 아무리 어리다고 쳐도 칭얼 거릴 나이는 분명히 아니었다. '도대체 정체가 뭘까?' 알렉토는 자신이 그들과 왜 같이 다니는지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오늘만해도 메디아와 마시의 능력을 보아서는 스스로를 충분히 지키고도 남을 것 같았다. 숙소로 돌아간 메디아는 칭얼거리는 마시를 씻기기 위해 큰 목욕통을 방으로 주 문해 놓았다. 알렉토와 아네모스 그리고 마시가 한방을 사용했고 메디아와 에코 가 한방을 사용해야 했는데, 절대로 에코와 단둘이 한방을 쓰지 않고 싶었던 메 디아는 방을 하나 더 얻고 싶었지만 인파가 득실대는 노아에서는 빈방 구하는 일 이 쉽지 않았다. 그나마 일행하고만 사용할 수 있는 방이라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인파가 더 많아지는 유월쯤이었다면 다른 사람들과 방을 같이 써야 했을지도 몰 랐다. 마시를 위한 목욕통이 이층에 있는 그들방까지 날라져 오고 나서 알렉토는 당황스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메디아. 설마... 직접 목욕 시키겠다는 것은 아니겠지?" "왜요?" "저기....그러니까...아무리 마시가 어려도 ...나이가 그러니까...내 말은...." 얼굴이 붉어지며 말을 잇지 못하는 알렉토는 에코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어머머... 메디아. 다 큰 사내애를 처녀가 어떻게 목욕을 시키니? 아무리 친남 동생이라지만 구별할 건 해야지. 남들이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설마 마시 가 혼자서 목욕을 못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러면 알렉토에게 부탁해도 되지 않겠 니?" "흠. 그래 맞아. 내가 해줄께." 모하비부족에서는 남녀의 신체를 보여준다는 것은 아기 일때나 아주 어렸을때 가 족에게만 허용될뿐이였고 특히 맨발바닥을 이성에게 보였을때는 그가 누구이든 반드시 결혼해야만 했다. 친족간의 결혼이 허락되는 모하비부족 사이에서는 설령 친남매일지라도 맨발바닥을 보여주는 것은 금기되어 있었다. 알렉토가 타민족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였지만 열서너살이나 된 남자아이를 그보다 몇살차 나지 않는 처녀가 목욕을 시킨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였다. "힝..... 메디아야 옷이 다 굳어 버렸어....너 미워...이게...뭐야~" 마시는 칭얼거리면서 메디아의 망토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머리나 감자. 빨리 와. 머리 감겨줄테니. 옷은 저기다 벗어 놓고....그리고... 알렉토가 물 좀 더 가져다 달라고 하세요. 에코는 나가 줘. 신경쓰지 말고." "저기...저...아휴..." 알렉토는 버벅거리며 나가 버렸고 에코도 냉담한 메디아의 말에 그냥 나가 버렸 다. 메디아는 마시가 목욕통에 들어가 있는 동안 열심히 비누질을 했다. 피가 덕 지덕지 엉겨 붙어 있는 머리는 그나마 짧아서 다행이었다. 솔직히 마시의 머리 감 겨주는 일이 귀찮아서 머리를 짧게 잘라 놓은 메디아였다. 그녀가 마시의 목욕을 시켜주는 것도 마시가 태어나서부터였으므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고 마시가 드 레곤의 몸이었을때는 커다란 작대기 솔로 비늘을 벅벅 밀어 씻겨 주기도 했었는 데 벌써 99년째 하고 있는 일중의 하나였으며 드레곤의 몸 좀 본다고 뭐 큰일날 것도 없었다. 여행중이라 인간의 몸을 하고 있었지만 어차피 메디아와 마시에게는 그런 개념 자체가 없었다. 아네모스는 저녁식사 때가 되어서야 돌아왔다. 일행이 모두 모이자 각자 여행의 목적지 이야기들로 부산했지만 알렉토는 그저 여행하면서 적당한 일거리를 찾는 중이어서 어디로 가든 별로 상관은 없었고 아네모스와 에코는 수도 오람으로 가 는 중이니 무역도시 로스코를 지나면 된다고 했다. 그들이 그렇게 여행 목적지를 두고 상의하는 가운데 메디아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 들었다. 오늘도 마시 때문에 놀랐었는데 앞으로 계속 여행을 할 수 있을지도 걱정이였고 그냥 돌아 가자니 마 시가 쉽게 따라 나설것 같지도 않았다. 지금은 일행들이 마시와 자신의 정체를 알 아도 모두 선량한 사람들이니 무슨 문제가 될것 같지도 않아 보였지만 그래도 앞 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쉽게 결정할 수가 없었다. 블루잉이 고민하는 메디아에게 약간의 충고를 해준 뒤 메디아도 수도 오람으로 가기로 했고 그래서 모두가 다음 목적지 로스코까지도 함께 움직이게 되었다. 모두가 이야기를 끝내고 둘러 앉아 식사를 하고 있을때 에코의 수다가 다시 시작 되었다. 오늘 있었던 일들을 시시콜콜 아네모스에게 얼마나 자세히 이야기 하던지 언제 그런걸 다 봐두었나 싶을 정도였다. 에코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알렉토가 중 간중간 인상을 일그러 뜨렸는데 대부분이 그 포센이라는 남자가 잘 생겼다고 말 하는 부분들이였다. "...........그래서 그 남자를 내가 봤는데 얼마나 잘 생겼는지 몰라. 빛나는 검 은 눈동자에 검은 머리, 거기다가 근육도 얼마나 멋졌다고 아마도 귀족이 아닐까 싶어. ... 그런데 성격이 정말 더럽더라구. 불쌍한 노예를 길거리에서 사정없이 채찍으로 때리는데 겁나더라....그때 알렉토가...했어. 하지만 정말 잘 생긴 남 자였어. 조금만 착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그래서..그랬는데..." 그녀는 먹는 것도 잊은채 자신의 이야기에 도취 되어 있었고 아네모스는 용케도 그녀의 수다를 들어 주며 중간중간 적절하게 대꾸까지 해주고 있었다. 식사가 끝나고 오랜만에 편안한 숙소에서의 저녁을 맞은 일행은 술까지 몇잔 마 시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이야기를 하던 에코는 결국은 카란과 메디아의 짧은 작 별 인사까지도 낭만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예쁜 사람은 처음 봤다니까. 아네모스가 봤으면 조각하자고 덤벼들었을 것이 분명해. 맞아. 그런 사람을 조각으로 남기면 정말 멋 질거야 아네모스. 어쩜.. 직접 못 봐서 어떡하지? 다시는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 을 보기 힘들텐데..... 참 그러고 보니 그 사람이 가면서 메디아에게 꼭 다시 만 나자고 했었어.... 호호...메디아 그 사람 누구니? 진짜 예쁜 사람이더라. 어디서 그렇게 다정한 사람을 만났어? 어떤 사이야?" 메디아는 에코에게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으면서 블루잉의 접시에 술만 따라주고 있었다. 그래도 에코는 포기하지 않고 이번에는 마시를 이용하기로 했다. 전에도 마시가 궁금증을 해결해 주었지 않은가? "마시도 궁금하지? 아까 그 신관 너무 이쁘지 않았니?" 메디아가 에코를 무섭게 째려 보았다. 에코는 덜컥 겁이 나기도 했지만 모른척 고 개를 돌려 버렸다. 메디아는 마시를 조심스럽게 쳐다 보았다. 그러나 마시는 의외로 조용하게 술만 마시고 있었다. 왠지 화가 난 모습이었다. 메디아는 거의 백년의 세월 동안 마시를 보면서 그의 저런 표정이 무엇을 뜻하는 지 잘 알고 있었다. 분명히 화가 났고 삐졌을때 하는 행동이었다. 오래가면 심각 한 현상들을 동반한다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뭐야? 아직도 삐졌나? 뭘 그거 맞은거 가지고 새삼스럽게 화를 내고 그러나?' "......." "마시야. 너 화났니? 삐졌어? 많이 아팠던 거야? 응?" 식탁에 앉아있던 다른 일행들이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메디아의 목소리는 마치 갓난 아기를 다루는 엄마들의 사랑스런 목소리처럼 상냥하고 부드럽게 울리 며 모두의 귀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세상에....저거... 메디아 맞어?" 그러나 마시는 꿈쩍도 안하며 술만 홀짝홀짝 마셨다. 메디아는 걱정스러웠다. 이 쯤되면 애교를 부릴만도 한데 마시는 반응이 없었다. '너무 많이 때렸나?' 그녀는 최후수단을 쓰기로 했다. "마시야. 빗자루 탈래?" 아직도 어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일행들은 메디아의 말에 정신이 나가는 것 같 았다. 메디아는 마시가 삐질때마다 빗자루를 태워 주었었다. 마시는 빗자루를 타는 것만 큼이나 잘 떨어져서 문제였지만 그런대로 익숙해지면 기분이 좋아져서 자신이 왜 화를 내고 있었는지도 잊어버리곤 했었던 것이다. '빗자루를 타?' "메디아? 너 괜찮니?" "설마 그거 마법의 빗자루인가요?" "에엑? " 그러나 일행들의 놀라는 소리에는 상관없이 마시는 술을 꿀꺽꿀꺽 마시다 말고 칭 얼대기 시작했다. "흐잉...." "왜 또~?" 메디아가 이유를 알 수 없어서 헤메고 있을때 마시는 칭얼칭얼 거리며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같은 눈으로 화났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뭐야 뭐야...나는 죽도록 빗자루로 때리구....누구한테는 키스도 해주구...메디 아 미워. 히잉.....엄마아...앙~" 새끼 드레곤 마시가 엄마를 찾기 시작하면 이건 밑도 끝도 없다는 뜻이였고 메디아 도 마시가 엄마를 찾기 시작하면 할 말이 없어졌다. 메디아는 기가 막혀 말도 안나 왔지만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지금 그것 때문에 저렇게 구슬프게 울고 있는 거란 말이야?' "야. 그게 내가 한거니 카란이 한거쟎아. 너도 봤지. 내가 안했어." 마시가 훌쩍이며 눈을 비비고 의심스럽다는듯이 메디아를 보았다. "정말이야? 왜 그렇게 친한 척하구 그래?" "너도 봤으면서 그러니? 그 미친놈이 한거야. 내가 한게 아니라구." "...메디아야." "응?" "메디아-." "왜?" "메디아야" "..........." '으..... 성질나 죽겠네...저게 왜 또 저러지?' 마시가 칭얼대느라 훌쩍거리던 얼굴을 심각하게 바꾸며 메디아를 보고 있었다. "너...... 그녀석이랑 같이 살거니?" "뭐어~?" "엄마....이잉~" "뭐야 뭐?...또 엄마야?.....미치겠네. 야 내가 그 녀석이랑 왜 살어~? 마시???" 하도 놀랍고 기가막힌 일을 많이 본 일행들도 메디아와 마시의 상상을 초월하는 대화와 행동에는 매번 놀랄수 밖에 없었고 이번에도 그들은 어이없는 심정이었다. 결국 메디아는 마시를 달래느라 그날 밤 한잠도 잘 수 없었다. - 계 속 - 번 호 : 18 / 83 등록일 : 1999년 07월 05일 06:33 등록자 : CHO1971 조 회 : 2494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18.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신이 알파를 창조했을때 탄생과 축복의 의미를 알았다. 신이 카오스를 창조했을때 분노와 징벌의 의미를 배웠다. 제 18 장 불길한 소문. 서쪽에서 동쪽으로 노아와 로스코를 잇는 대로는 언제나 사람들이 북적거리기 마 련이었다. 금해를 건너 사마리아에서 온 물건들이 모두 이 길을 통해서 거래되기 때문이었는데 수레를 이끌고 가는 상인들과 짐을 실은 코끼리를 몰고 가는 마후 트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로스코까지 물건을 나르고 거기서 다시 중간상 인들이 물건을 넘겨 받아 수도 오람으로 가거나, 북쪽에서 동남으로 흐르는 아이 니강을 타고 남하해서 남국의 아르카디아와 다마스코에 가기도 했다. 흔히 귀한 물건들을 나르기도 해서 도적들이 많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이런 상인 무리들에게는 그에 걸맞는 경호원이나 용병들을 고용해 동행하기 때문에 큰 손해를 보는 일은 드문 일이었고 설혹 고용한자들이 제몫을 못하더라도 상인길드 와 용병길드에서는 그에 보충하는 보상금을 주기 마련이었다. 해가 기울무렵 일행의 앞을 인도해 가던 알렉토는 고갯 길목에서 요란하게 들리는 소음에 잠시 가던길을 멋짓했다. "어? 이게 무슨 소리야?" 따뜻한 봄햇살에 꾸벅꾸벅 졸고 있던 마시도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소리를 들었는 지 말을 몰아 앞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이거... 싸우는 소리 아니야? 사람들이 꽤 많이 싸우는 것 같은데..." 일행은 천천히 말을 몰아 고갯길로 향했다. 그들이 막 올라선 곳에서는 그 바로 아래의 좁은 길에서 허둥대고 있는 짐마차 두대와 말위에서 검과 방패를 휘두르는 용병들이 그들을 몰아 부치고 있는 한무리의 도적떼로 보이는 사내들을 상대로 몸을 부딪치며 싸우는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도적들은 길의 오른편에 있는 언 덕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내려온듯, 언덕의 흙과 돌들이 어지럽게 떨어져 있었고 그 언덕위에는 아직도 몇명이 말을 타고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길의 왼편은 낭떠러지였는데 메디아의 일행이 싸움을 피해 가고 싶어도 돌아갈 길이 전혀 없 었다. "......피해..갈...길이 없네?" 날이 갈수록 능글스러워 지는 마시가 은근히 메디아를 돌아 보며 히죽 웃었다. "도와줄 거야 알렉토?" 에코가 상인의 무리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도적들에게 인원수에서 현저히 밀리고 있는 모습이 걱정스러운듯 알렉토를 향해 말했다. 알렉토는 한동안 뒤엉켜 싸우고 있는 무리들을 보더니 일행을 돌아 보았다. "어차피 이 길을 지나가야 하니까. 내가 갔다 오지....기다리고 있어." "뭐? 혼자 간다구? 싫어. 나도 갈래." 마시가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는 눈초리로 알렉토를 째려 봤다. "데려가 알렉토. 마시야 이거 가져 가서 잘 놀다와." 메디아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며 등에 멘 가방에서 빗자루를 꺼내어 마시에게 건 네주었다. 마시는 기쁜듯 빗자루를 잡아 들었다. 알렉토가 인상을 찌푸리며 메디 아를 향해 비난의 눈낄을 보냈다. "괜찮아. 쟤는 얼마쯤 맞아도 끄떡 없으니까 신경쓰지 말고 알렉토나 잘 놀다와." 알렉토의 이마에 잠깐 힘줄이 솟아나는 것처럼 보였다. "저기...메디아. 난 놀러가는 게 아니야." "그래? 그럼 잘 쉬다와. 나도 여기서 좀 쉬게. 말 때문에 엉덩이도 아픈데 마침 잘 되었군." 그러고는 말에서 내려 얕은 바위에 털석 앉아 버리는 메디아였다. "헤헤... 어서 가자" "......." 알렉토는 거의 체념한 몸짓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앞을 향해 말을 몰았고 그뒤를 신이난 마시가 뒤따라 달려 갔다. 힘차게 달려간 마시의 용감한 기합소리가 들리고 곧이어서 그의 짧은 비명 소리가 들렸다. "이야~~~~~~~핫.. 아야얏!" "메디아... 괜찮을까? 마시는 아직 어리쟎아... 어머.. 아프겠다." 에코가 내려다 보니 곰같은 사내가 커다란 주먹으로 마시의 얼굴을 정면으로 후려 갈기는 모양새가 그대로 보였다. "쯔쯧... 저렇게 둔해 터져서 어떻게 하나...." 그저 혀를 차며 느긋하게 시원한 바람속에 구경만하는 메디아였다. 따뜻한 봄날 언덕위의 하얀 들꽃이 소복하게 피어있는 길가의 바위에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은 편안해 보이기만 했다. 마시는 엄청난 타격에 입술이 이에 부딪혀 깨진것도 모른채 한대 맞은 여파로 동분 서주하며 날뛰기 시작했다. 마시의 안면을 강타하고 돌아 보지도 않던 사내는 쓰러 지지도 않고 다시 온몸을 부딪혀 오는 마시를 보지 못했고 그래서 마시의 무지막지 한 힘이 실린 빗자루를 피하지 못했다. "퍽!" "우햐햐... 어떠냐? 내 실력이...우히힛.." 빗자루질 한번에 나가 떨어져 정신 못차리는 사내를 자랑스러운듯이 쳐다보며 마 시가 제법 무서운 표정으로 언덕에 울릴정도의 큰소리를 질렀다. "야. 다 덤벼. 난 싸움이 취미니까." "저녀석...... 온갖 멋은 다 떠는군." 언덕에서 내려다 보고 있던 도적들과 두목은 난데없이 끼어들은 큰 덩치와 빗자루 를 들고 있는 날렵한 몸집의 어린 사내아이를 신경도 쓰지 않았었다. 어린 사내아 이는 기합소리만 요란하게 달려 오더니 부하의 주먹에 맞아서 입술이 터지더니 갑 자기 벌떡 일어나 빗자루를 휘둘렀는데 어설퍼 보이는 그 움직임에 곰같은 몸집을 가진 자신의 부하가 한방에 나가 떨어졌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붉은 띠 를 머리에서 휘날리는 덩치의 검에는 벌써 부하들이 여럿 상처를 입었고 벼랑으로 떨어지기까지 했다. 그렇게 한참이 흐르자 무지막지하게 휘둘러지는 사내아이의 빗자루는 무슨 빗자루인지 칼에 맞아도 끄떡없어 보였고 거기에 맞은 몇몇의 부하 들이 말에서 떨어져 정신을 못차리기까지 했으며 어쩌다가 사내아이에게 날아가는 칼은 여지없이 덩치에게 막혔고 상인들의 무리보다 훨씬 많아서 유리하던 싸움도 점점 불리해지기 시작했다. 언덕위에서 이제 곧 싸움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두목은 갑자기 끼어들은 정체불명의 두명을 기막힌 심정으로 보고 있었다. "저.... 놈들은 도대체 뭐냐?" "저기서 왔는데요." 부하 한명이 멍청하게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대답을 했다. 두목은 부하의 손가락 이 가르키는 방향을 보았다. 거기에는 세명의 남녀가 말에서 내려 길가에 앉아 느 긋한 모습으로 싸움을 구경하고 있었다. "저것들은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야?" 두목이 짜증스러운듯 말했다. "저기... 두목. 우리도 내려가야 할것 같아." 두목은 눈쌀을 찌푸리고 이미 불리해진 싸움을 지켜 보았다. "다 내려가서 저 두놈 박살내고 와. 그리고 너. 나 따라와." 두목은 한명의 부하를 데리고 세명의 남녀가 편안하게 쉬고 있는 곳으로 말을 달 렸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그의 부하들이 붉은 띠를 두른 남자를 상대하기에는 무 리가 있을것 같았고 힘만 무지막지하게 세보이는 사내아이도 문제가 있어 보였다. 그는 길가에서 구경만하고 있는 일행이 아주 만만해 보였고 그들을 잡는다면 싸 움도 유리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엄청난 착각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해 보 는 두목이였다. "아야야... 살살해잉~~~" 마시가 약을 발라주는 에코의 손을 붙잡으며 없는엄살 있는엄살을 몽땅 부렸다. "알았어... 살살 바르고 있쟎아. 이 엄살쟁이야." 마시가 자신의 입가에 약을 발라주는 에코의 손가락을 와락 물었다. "아얏... 무슨 짓이야?" 에코가 마시에게서 떨어졌다. "나 엄살쟁이 아니야. 진짜 아프단 말이야." "하-... 알았어. 알았다구. 물지마." 에코가 마시를 치료해주고 있을때 한쪽에서는 상인들과 그들의 용병이 알렉토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있었다. 이미 도둑들은 모두 도망가거나 죽은 상태였고 그들 의 두목도 메디아의 바람마법에 벼랑으로 떨어진지 오래였다. 상인들은 오람에서 노아로 가는 중이라고 했는데 알렉토 일행이 오람으로 간다는 말에 흥미로운 소식 을 알려주었다. 그것은 아주 비밀스럽게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이였지만 거의 사실로 알려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지금 파라의 동쪽 국경에 서는 시투니아와 전쟁이 한참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가 아무리 생각해도 트집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일반인들에게는 전쟁소식조차 알려지지 않았고 단지 몇몇의 여행자들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소문이라고만 했다. 판타리아 대륙의 동북쪽에 자리한 시투니아의 국왕 칼리오 2세에게는 한명의 왕비 와 열여섯명의 후궁이 있었는데 현재 세이렌 왕비도 후궁이였으나 전 왕비가 독살 당한후 왕비의 자리에 오른 여자였다. 그녀는 서른이 훨씬 넘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이십대로 보이는 여자로 시투니아 신전의 제사장직을 맡고 있으며 현재 자녀가 없음에도 나이든 칼리오 2세를 대신해 실제 권력의 행사자로서 막강한 통 치자로 굴림하고 있었고 영악한 마녀라는 소문까지 도는 여자였다. 그런데 세이렌이 파라의 국왕 히페리온의 후궁이자 세명의 공주를 낳은 아라크네 에게 그녀의 두째딸 로사리아 공주를 칼리오 2세의 후궁으로 보내달라는 요청을 했다고 한다. 아라크네는 불같은 성질을 가진 정열적인 성격으로 젊었던 히페리온 의 총애를 받았던 여자였는데 세이렌의 요청에 불같이 화를 내며 사신을 그자리에 서 죽여버리고 그 목을 상자에 담아 대답대신 보냈다고 한다. 아라크네에게는 세 딸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둘째딸 로사리아를 가장 사랑했고 더구나 로사리아는 열여섯살밖에 안된 앳된 소녀였다. 그랬기에 아라크네의 분노는 당연한 것이었고 반응또한 불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교활한 세이렌이 바랬던 일은 바로 아라크네 의 그런 불같은 반응이였던듯 기다렸다는듯이, 정중하게 보낸 사신을 함부로 죽였 다는 것은 시투니아에 대한 선전포고라며 파라와 근접한 국경을 공격했다고 한다. 이 놀라운 소문은 급속히 퍼져 나갔는데 전쟁이 나면 그에 따르는 막대한 피해가 있기 마련이었지만 상인들에게는 또 다른 이익의 기회이기도 했으며 모험자들에 게는 명성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기 때문이였다. 상인들이 전쟁소식을 전해주고 떠난후에 메디아는 마시를 바라보며 과연 이 여행 을 계속해도 되는지 다시한번 심사숙고 해야만 했다. 지금은 멀리 국경에서만 일 어나고 있는 작은 분쟁에 지나지 않았지만 언제 대륙 전체로 그 전쟁의 여파가 퍼져 올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마시는 전쟁소식을 듣자마자 혹시 메디아 가 돌아가자는 말을 할까봐 미리부터 전쟁난 곳이 어디냐며 거기로 가자고 생떼를 쓰기 시작했다. 마시에게 전쟁은 그저 재밌는 유희거리에 지나지 않았고 그런것 때문에 겨우 잡은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전쟁난 곳에 가고 싶기도 했지만 메디아가 그곳에 데려 갈리는 없을테니 돌아 가자는 말을 하기도 전에 미 리 떼를 썼다가 나중에 그냥 여행이라도 계속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랬다. "너 정말 전쟁이 뭔지 보고 싶니?" 마시의 눈이 열렬한 빛을 담아 메디아를 보았다. "응." 메디아는 한동안 말이 없었고 다른 일행들은 철없는 꼬마를 바라보며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수도에 가면 전쟁에 대한 다른 소식을 들을 수 있을거야. 우리 오람까지 가서 결 정하자." 그녀의 이 뜻밖의 대답에 가장 놀란것은 마시였다. "진짜? 안 돌아가는 거지?" "전쟁터에 가고 싶다며? 왜? 돌아가고 싶어?" 고개를 힘차게 절레절레 저으며 마시는 입을 다물었고 메디아가 다른 말이라도 할 까봐 얼른 앞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메디아 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오람까지 가서 뭘 결정하겠다는 거야?" 말안장에 앉아 있던 블루잉이 이상하다는듯이 말했다. 일행들은 노아에서 블루잉 이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나서 모두 입을 열지도 못할만큼 놀랐지만 이제 는 익숙해져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주고받을 정도였다. 날아갈듯 앞서가는 마시를 보며 메디아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전쟁이 무언지 마시가 알까? 그 인간들의 탐욕스런 살육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 헛된 탐욕에서 비롯되는 처참함을, 그 비극을, 그 허망함을... 저 어린 녀석이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 기회에 인간들의 가장 추하고 더러운 면들을 보며 어리석은 인간들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깨달을 수 있겠지. 아마도 잊지 못할 교훈이 되지 않을까?" 블루잉은 그저 아무말도 없이 마시를 보았고 에코는 소름이 끼친다는듯 몸을 사리 며 떽떽거리기 시작했다. "메디아 그렇게 말하지마. 무섭단 말이야. 너는 어째 그러니? 무슨 백살먹은 할 망구가 얘기를 해도 그렇게 무섭지는 않을거야. 전쟁은 금방 끝날거라고 사람들이 말하는 것도 못들었니? 국경에서만 작은 분란이 일어날 뿐이라쟎아. 아직은 크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시투니아에서도 조심스럽다고 하고. 설마 이렇게 큰 나라를 어떻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거야. 파라가 보통 큰 나라니? 판 타리아 대륙에서 제일 큰 제국이야. 바보가 아닌 이상 호전적인 시투니아에서도 함부로 하지는 못할거야. 틀림없어. 전쟁은 아닐꺼야. 그저 작은 화풀이라구. 메 디아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진짜 너무 무섭쟎아. 별일도 아닌거가지구 소름끼치게 말하고 그러니? 전쟁은 정말 싫다구. 사람들도 모두 아직은 괜찮다고.... 아무일 도 없을거라고 하쟎아. 전쟁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을거야. 어쩌면 이것도 모두 소 문에 불과할지 누가 알아? 여행자들만 쉬쉬 떠들고 다니는 것도 그래. 진짜 전쟁이 라면 군인들도 그렇고 아마 난리가 났을텐데 아무런 일도 없쟎아. 그렇지? 아네모 스 내말이 맞지?" "그래. 소문이 사실이래도 아직은 국경에서만 일어나는 일이고 시투니아에서도 에 코의 말대로 함부로 할수는 없겠지. 누가 뭐래도 파라는 대륙 최대의 제국이니까. 한동안 국경이 시끄러울뿐일 거라고 믿어야지." 아네모스의 말이 끝나자 안심했다는 듯이 불안한 눈빛을 거두는 에코였다. "거봐. 내말이 맞지. 이제 그런 불길한 말 하지마 메디아." 그러나 알렉토는 생각이 다른 것 같았다. "하지만.... 시투니아의 그 교활한 세이렌이 아무 대책없이 제국을 먼저 도발했 을리도 없겠지. 뭔가 바라는 것이 있을 거야. 어쩌면 이번 일.... 쉽게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어." 더이상 아무도 입을 열지 않은채 말을 달리며 그들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가운데, 인간들의 전쟁이 어디까지 커져서 무엇을 불러올지 불안한 심정뿐이었다. - 계 속 - ;취중에 올리는 글이라 오타가 있을지도...^^;;;; 윽..ㅠ.ㅠ( J&B 한병을 혼자 다 마셨어잉~거기다 칵테일까지..우윽...^ㅠ^;;) 번 호 : 19 / 83 등록일 : 1999년 07월 07일 03:24 등록자 : CHO1971 조 회 : 2413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19.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신이 알파를 창조했을때 탄생과 축복의 의미를 알았다. 신이 카오스를 창조했을때 분노와 징벌의 의미를 배웠다. 제 19 장 마녀 재판식. 일행이 들어선 곳은 상인들이 지나는 대로를 벗어나 있는 마을이였기에 비교적 한 적하고 작은 마을이였다. 밭과 집들이 들판을 사이에 두고 모여 있는 작은 마을은 영주의 성이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얼핏 평화로워 보이는 풍경이었는데 일행에게 편안한 휴식을 제공해 줄 것같았다. 그러나 메디아와 마시의 일행이 해질무렵 마을에 들어섰을때는 어쩐지 살벌한 분 위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마을의 입구를 지나 큰 길로 말을 끌고 들어섰지만 그들 을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에는 곱지 않은 경계의 눈빛이 가득했다. "왜들 저러는 거야?" 에코가 불안한 듯 한마디 했다. "마을에 무슨 일이 있는건가?" "저기 들어가서 방부터 잡고 물어보자구." 길가를 한참 지나자 노란색 등을 걸어놓은 2층짜리 소박한 통나무 여관이 보였다. "그래. 얼른 들어가자. 나 배고파 알렉토." 마시가 잡고 있던 말고삐는 신경도 쓰지 않고 그대로 놓아 버린채 저먼저 훌쩍 달 려서 여관으로 들어가 버렸다. 일행들도 각자 말을 끌고 여관의 마당으로 들어갔다. 여관안은 아담하고 깨끗한 분위기였는데 잘 정돈된 식탁들이 놓여져 있었고 한쪽 구석에는 근사해 보이는 바를 갖추어 놓았다. "끄억...." "우와... 잘 먹었다." 모두 허기진 배를 채우고 트림을 하며 느긋한 마음으로 의자에 기대 앉아 시원한 맥주로 목을 축였다. 메디아와 마시가 거북이를 식탁에 올려놓은 채 오래간만에 정신없이 술에 젖어 있 을때 아네모스가 바에 서서 컵을 닦고 있는 지긋한 나이의 대략 예순살은 넘었을 주인에게 마을에 대해 물었다. "이 마을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주인은 무심한 눈길로 아네모스와 일행들을 바라 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리며 한숨 섞인 대답을 했다. "아무일도 없소. 여행자인가 본데 남의 마을 일에 관심두지 마시오." "아저씨 그러지 말고 말씀 좀 해보세요. 혹시 알아요? 우리가 도와줄 수 있을지?" 에코의 생기 발랄한 목소리를 들은 주인은 에코의 푸른 눈동자와 적당히 그을려 있는 생동감있는 피부 그리고 예쁘장한 얼굴을 보았고 그 옆에 있는 메디아까지 다시 눈여겨 보는것 같았다. "아가씨들도 조심하시오. 이 마을에서는 젊은 처녀가 위험하다오." "예?" 모두가 주인을 보며 더 자세히 설명해 주기를 기다렸다. 주인은 바에서 나오더니 일행이 있는 자리로 와서 술을 한잔 들이키더니 마을 이 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 마을은 보다시피 아주 작은 곳이라 범죄도 없이 평화스러웠다오. 몇달 전에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주인은 목이 마른듯 연거푸 다시 술을 들어 마셨다. "몇달 전부터 마을의 처녀들이 실종되기 시작했소. 처음에는 그저 가출을 했거니 생각 했소. 처음 없어진 처녀가 워낙 이 마을을 떠나지 못해 안달하던 말괄량이 였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건 당연했지요. 그런데 ....후... 얼마후부터 다른 처 녀들도 이유없이 사라져서 돌아오지 않는 거요. 마을에서는 사라진 처녀들을 찾기 시작했소. 온 마을 사람들이 며칠 동안 이 근방을 샅샅이 뒤지며 찾아낸 것은 처 녀들의 피묻은 옷가지와 두구의 시신뿐이였는데 그 시신의 끔찍함은 이루 말할 수 가 없었다오. 우리는 모두 숲속에 새로운 괴물이 나타났다고 생각했소..." 주인은 군데군데 하얗게 쉰 머리카락에 주름진 얼굴을 심하게 찌푸리며 또 다시 술을 마셨다. "그래서요. 아저씨? 괴물을 못 잡아서 그러시는 거예요? " 에코는 아네모스의 옷소매를 붙들고 고개를 반쯤 숨긴채 눈을 반짝 거리며 호기심 을 드러내고 있었다. "괴물이 아니었소. 아무리 우리 딸들을 꼭꼭 숨겨 놓아도 어느사이 없어져 버리는 일들이 허다하게 일어났소. 그건 괴물이 아니라 악마의 짓이 틀림없었소. 우리는 영주님을 찾아 갔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소. 영주님도 진상을 조사 하시겠다고 했 지만 얼마후 돌아 가시고 그 따님도 없어져 버리고 말았소. 지금은 영주님의 아내 가브리엘님만 남아있는 상태지요. 마을에서는 처녀들이 더 없어질까봐 불안했고 그래서 처녀들을 멀리 친척집에 보내거나 해서 지금 이 마을에는 남아 있는 처녀 가 얼마 있지도 않은 상태요. 한 동안은 마을에 처녀가 없어서인지 아무일도 일어 나지 않았었소. 그런데 며칠 전에는..... 아직 열세살도 되지 않은 어린 소녀가 없어지고 말았소. 우리는 그 애의 시신을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산속에서 겨우 찾 을 수 있었소. 그 산은 20년 전부터 마녀가 살고 있다는 곳이였고 우리는 이제야 처녀들이 왜 그렇게 사라지는지 알 수 있었던 거요. 우리는 그 저주 받은 마녀가 처녀들을 악마에게 재물로 받치고 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소." 주인은 술잔에 남아 있는 술을 한번에 입속에 털어 넣었다. "그래서 마녀는 잡았어요? " 어느새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지 마시는 흥미진진한듯 얼굴을 들이대고 주인을 기 대에 차서 바라 보았다. 그러나 메디아는 마녀라는 말에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마녀를 그냥 잡으려다가 무슨 봉변을 당하려구 잡겠나. 우리는 영주님의 미망인 가브리엘님께 가서 도움을 청했소. 선한 마법사를 불러달라구. 아름다우신 가브 리엘님은 큰 돈을 들여 우리의 소원을 들어 주셔서 지금 마을에서는 마녀 재판식 을 준비하는 중이요. 내일 마법사와 영주님의 기사들을 앞 세우고 마을 사람들이 그 마녀를 잡으러 가게 될거요." "아하~. 그래서 마을이 이렇게 살벌한 분위기 였군요." "흐음..." 메디아는 시큰둥한 반응으로 코웃음을 쳤다. '요즘 시대에 처녀를 재물로 바치는 마녀가 도대체 어디 있다고 그런 구닥다리 생 각을 하고 있는거야? 그나 저나 그냥 있기엔 이건 명예 문제인데....어느 미친년 이 사고를 치고 있는 거지? 마녀 명예에 먹칠을 해도 유분수지 이게 무슨 해괴한 짓이야.' 그렇다. 메디아는 마녀였다. 완벽한 마녀의 혈통을 이어받은 메디아가 마녀 재판 식을 그냥 두고 본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였다. 일행들은 마을의 불행했던 사건이 이제 잘 해결될 수 있다는 말에 안심했고 알렉 토는 그일을 도와주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호기심 많은 마시가 가만 있을리 없었 고 에코도 겁나기는 했지만 함께할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했는지 자기들도 따라 가 자며 각자가 마을일에 끼어들고 싶어했다. 단지 메디아만이 그들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안했을 뿐이었다. 한밤중 모두가 방에서 곤한 잠에 빠져 있을때 메디아는 혼자 일어나 잠자리에서 조용히 빠져나와 간단히 가방을 챙겨들고 방을 나가려고 했다. "너 어디 가니?" 블루잉이 어두운 실내에서 두 눈을 빛내고 있었고 메디아는 나가려던 발걸음을 멈 추고 블루잉을 돌아 보았다. "볼일 있어." "무슨 볼일인데 가방까지 챙겨들고 가냐?" 블루잉이 삐딱하게 말했다. "잠깐 나갔다 올꺼야." "너~" 블루잉이 눈을 가늘게 뜨며 의심스런 눈초리로 메디아를 보기 시작했다. "나 뭐?" '무슨 소리를 할려구 저러는 거지?' "너 혹시...... 나랑 마시를 버리구 갈려는 거니?" "뭐?" 메디아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목소리를 낮추는 것도 잊어 버렸다. "우으..음... 뭐야? 메디아?" 옆 침대에서 자고 있던 에코가 부시시 일어나며 어둠속에 어슴푸레 보이는 메디아 를 향해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계속 자 에코." "아무것도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 밤중에 가방 챙겨들고 나가는데 아무것도 아니 라는거야?" 블루잉의 실랄한 목소리에 잠이 달아났는지 에코는 깜짝 놀란듯 일어나 메디아를 더듬어 붙들었다. "무슨 소리야 그게? 메디아 왜그래? 이 밤에 어디 갈려구? 동생은 옆방에 있는데.." "으.....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잠깐 나갔다가 오겠다는데 왜들 그래?" "어딜 갈건데?" "그냥 나갔다 온다니까." "그게 어디냐구?" 에코는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고 블루잉은 메디아를 뚫어지게 보더니 예리하게 물 었다. "메디아 너 설마... 마을사람들이 말하는 마녀가 있다는 그 산에 갈려구 그러니?" 에코는 블루잉을 돌아 보고는 메디아를 더 꽉 붙잡았다. 그러고는 옆방의 벽을 주 먹으로 쾅쾅 두드리며 다급하게 말했다. "미쳤니? 거길 이 밤에 왜 가?" "마을 사람들과 마법사가 가기 전에 내가 먼저 가서 봐야겠어." 알렉토와 아네모스가 옆방에서 부스스한 모습으로 바지만 입은채 달려 들어 왔다. "무슨 일이야? 괜찮아?" "오빠 메디아 좀 말려 봐. 이 한밤중에 마녀를 찾으러 가겠데." "뭐?" "다들 그냥 자. 나 혼자 잠깐 나갔다 오면 되니까." 알렉토가 방에 등을 밝히자 에코가 환한 불에 눈이 부신듯 눈을 깜박이며 붙들고 있던 메디아의 옷자락을 놓았다. "가야 한다면 나도 같이 가지." "에? 알렉토?" 말리지는 않고 덩달아 간다는 알렉토의 말에 에코가 김빠지는 소리를 냈다. "나도 가고 싶은데요." "오빠!" "그럼 다 같이 가보자 메디아. 에코는 가서 마시 좀 깨워서 데리고 와. 혼자 두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장담 할 수가 없는 녀석이니까. 아! 그리고 깨울때 조심해 물어뜯을지도 모르니까." 블루잉이 결론이 났다는듯 침대를 기어 나오며 모두를 향해 말했다. '도대체 내 맘대로 되는 게 없군.' 메디아는 속으로 투덜대며 한밤중에 소란스럽게 왔다갔다하는 일행들을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 계 속 - 번 호 : 20 / 83 등록일 : 1999년 07월 08일 00:18 등록자 : CHO1971 조 회 : 2472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20.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신이 알파를 창조했을때 탄생과 축복의 의미를 알았다. 신이 카오스를 창조했을때 분노와 징벌의 의미를 배웠다. 제 20 장 울보 드워프. 초봄의 따스한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어두운 산 속을 걸어 가는 일행들에게는 싸 늘한 한기만이 느껴지고 있었다. 여관주인에게 저녁에 들었던 대로 찾아 가는 일 은 쉬운 일이 아니였으나 그런대로 달빛이 밝아서 헤메지는 않아도 되었다. 어둠속에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 나무들과 얼기설기 얽혀져 있는 나무가지들의 기 묘한 그림자가 드리워진 숲속에는 낮게 울어대는 이름모를 밤새들의 울음 소리와 눈이 녹아서 흐르는 작은 시냇물의 졸졸 거리는 소리가 섞여 들렸고 그 사이로 일 행의 발자국소리가 바스락 거릴뿐이었다. 알렉토와 메디아가 앞서며 걸어 가는 동안 에코는 아네모스의 팔짱을 꼭 끼고 따 라 오고 있었고 마시는 자다가 깨서 거의 몽롱한 상태로 메디아의 손에 끌려 오다 시피 나왔지만 숲에 들어서자 잠이 깼는지 재미난 일이 생겼다는 에코의 말에 혹 했는지 하여간 흥분에 들떠서 혼자 뛰어 다니고 있었다.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산을 헤치고 다닌지 꽤 시간이 흘렀을때 그들은 자신들 이 올라가고 있는 산등성의 정상에 희미한 불빛이 어른거리는 것을 발견할 수 있 었다. "불빛이다." 불안에 떨던 에코가 반가운듯 소리쳤다. "조용히 해 에코." 알렉토가 즉시 돌아 보며 에코에게 낮은 소리로 손가락을 입술에 대보였다. 에코는 찔끔한 표정으로 아네모스의 소매 속으로 고개를 반쯤 묻었다. "가자." 메디아는 길을 재촉에 불빛을 향해 부지런히 걸으며 덫붙여 말했다. "아무도 나서지 마. 특히 알렉토." 모두가 일시적으로 길을 멈춘채 메디아만을 보았다. 그러나 메디아는 저만치 앞서 올라 가며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일행이 창과 문틈사이로 밝은 빛이 새어 나오는 자그마한 돌집에 도착해서 가뿐 숨을 돌리며 유심히 집을 살며 보는 사이, 메디아는 망설이지도 않고 벌컥 문부터 찾아 열으려고 했다. 알렉토가 화들짝 놀라 달려 오든 말든 상관없이...... 그러나 문은 잠겨 있었다. 하긴 깊은 산 정상이나 다름없는 곳에 살면서, 한밤에 문을 열어놓고 나 잡아가시오 하는 멍청한 자가 아니라면 잠겨있는 문이 정상이 였다. "마시." "응? 왜불러?"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메디아가 반가운지 마시가 쫄레쫄레 메디아의 옆으로 달려 갔다. "너 심심하지?" "왜?" "이 안에 재미있는 거 있어." "파지직..." 메디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시는 양손으로 힘껏 문을 밀어서 안쪽으로 엎어지 게 했다. 요란한 소리로 문짝이 떨어져 내리고 뽀얀 먼지들이 잠깐 휘날렸지만 순 간 안에서 밀려오는 더운 공기로 먼지들은 금방 흩어졌고 마시는 문짝 위로 걸어 들어 갔다. "메디아 어떻게 알았어? 이거 너무 재밌다." 안으로 들어간 마시의 명랑 쾌활한 목소리가 들리자, 메디아의 뒤를 따라 다른 일 행도 안으로 들어 갔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간 일행들은 고약한 냄새로 곧 코를 막아야 했다. 작은 돌집의 실내는 의외로 꽤 넓은 편이었는데 한쪽 벽면은 선반이 가득했고 또 다른 쪽은 벽난로와 주방기구들이 있었다. 천정에는 빨래줄처럼 긴막대가 여러개 걸쳐져 있 었는데 그 나무에는 수 없이 많은 것들이 걸려 있었다. 그것들은 선반에도 가득히 올려져 있는 색색의 병들을 끈으로 묶어서 걸어놓은 것이거나 빽빽히 걸어놓은 가죽주머니, 그리고 척 보아도 알수있는 것들이 있었는데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붉은 도마뱀의 허물껍질, 말린 지렁이, 독사의 내장, 두꺼비의 사지를 벌려놓은 껍질, 물고기의 비늘, 오크의 뼈다귀들, 까마귀의 깃털과 독수리의 발톱, 분명히 보름달이 뜨는 달밤에 채취했을만한 쐬기풀등이 걸려있었고 한쪽에는 고양이 눈 알로 보이는 둥그런 구체가 둥둥 떠다니는 대야가 있었으며 버섯의 일종으로 먹으 면 출혈이 멈추지 않는 검은 버섯 블랭을 널어 말리는 건조대등등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특이한것은 엄청나게 거대한 솥이었는데 작은 돼지 한마리는 족 히 넣을수 있을것처럼 컸다. 거기에는 지금 무언가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는데 하 얀국물에 건더기가 까맣게 둥둥 떠다녔고 냄새가 느끼하고 지독하게 역한 비린내 가 났다. 그러나 그 모든 풍경보다도 일행의 눈낄을 가장 먼저 끄는 것은 천정 중앙에 대롱 대롱 꺼꾸로 매달려서 마시가 이리저리 밀고 당기는대로 흔들리는 나이든 드워프 였다. "흑흐....우잉...앙...그만 해잉...어엉엉~" 드워프는 하얗게 쉰 수염과 머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복실복실 부드러운 감촉의 인 형처럼 포근해 보였다. 얼굴은 귀염성이 돋보이는 외모였는데 양볼은 술취한듯 분 홍빛이 감돌기까지 했지만 나이의 연륜을 속이지 못하듯 부드러워 보이는 피부사 이로 잔주름이 얼핏얼핏 보이고 있었고 드워프 특유의 굳은 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일행의 관심을 돌린것은 그 부드럽고 포근한 인상이 아니었다. 괴팎한 성 질에 드세기로 유명하고 작은 몸집에도 불구하고 오크를 때려 잡을 정도로 용감하 며 금속세공에 있어서 어느 종족보다 탁월한 능력을 자랑하는 자긍심 높은 종족중 의 하나인 드워프족이 지금 천정에 거꾸로 매달린채 눈물을 줄줄 흘리며 엉엉 울 고 있었던 것이다. "믿을 수 없어." "저거 드워프가 울고 있는거 맞아? 징징짜고 있는거 맞지? 응? 내가 잘 못 본거 아니지? " "내 생전에 드워프가 우는 꼴을 다 보다니..." 아네모스와 에코의 목소리가 들리자 드워프를 열심히 흔들며 놀고 있던 마시가 메 디아를 돌아보며 손가락을 입속에 넣어 핥으며 말했다. "메디아야. 이거 먹어도 되니? 나 배고파." 잠시의 침묵이 흐르는 사이 난쟁이 드워프가 눈을 몇번 껌벅이더니 다시금 더 크 게 울기 시작했다. "우아앙~~~~~~~~ 흑흑...흑..아앙...살려줘. 나 맛없쪄..." 일행이 생각하기에도 몇 시간 동안 캄캄한 산속을 올라왔으니 배가 고픈 것은 이 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저걸 먹어도 되냐니? 도대체 마시의 머릿속이 궁금해지는 그들이였다. 마시는 여행도중 오크나 인간을 절대로 잡아먹지 말라는 말을 메디아로부터 들었 지만 드워프도 먹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았으니까 먹어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너 맘대로 해." "메디아!" 블루잉이 메디아의 눌러쓴 모자에서 기어 나오며 소리쳤다. "마시 너 그거 먹으면 안돼. 메디아 왜 그러는 거야? 쟤 보구 지금 뭘 맘대로 하 라는 거야. 너 제정신이니?" 블루잉이 다급하게 마시에게 소리친 후 메디아의 머리카락을 잡아 당기며 잔소리 를 하기 시작했다. "너 오늘... 참 많이 귀찮게 한다. 블루잉. 그리고 머리 좀 그만 잡아 당겨." "내가 뭘 어쨌다구? 귀찮게 해? 너가 그럼 지금 잘 했다는거야? 마시 보구 먹을걸 먹으라 그래야지." "내가 언제 못 먹을걸 먹으랬어?" "방금 그랬쟎아." "방금 뭘 어쨌는데? 난 그냥 맘대로 하라고 했을뿐이야. 먹으라고는 안그랬어." "그게 그말이쟎아. 너는 배고픈 마시가 눈에 뵈는게 있을것 같냐?" "뭐 못 먹을것도 아니지." "너..너... 너~..." 말을 잇지 못하는 블루잉이었다. 그렇게 둘이 말장난하듯 실갱이를 벌이고 있을때, 마시는 메디아의 맘대로 하라는 말에 블루잉의 말은 신경도 안쓰고 오동통한 드 워프의 팔을 붙잡아 덥석 깨물어 버렸다. "우와앙~~~~~~~~~~. 살려줘... 잉..앙앙" 드워프의 울부짖음이 들리자 놀란 알렉토가 마시를 떼어 놓으며 드워프를 묶어 놓 은 밧줄을 끊어 내고 징징짜는 늙은 드워프를 바닥에 내려 놓았다. "메디아 봤지? 저게 올바른 모습이냐?" "흠.." 블루잉이 거보라는 듯이 말했고 메디아는 코웃음을 치며 모른척했다. 마시는 알렉토에게 툴툴 거렸지만 아네모스가 언제 챙겨 두었는지 자신의 짐에서 먹을것을 꺼내어 한아름 안겨 주었더니 금새 헤헤 거리며 아무데나 앉아서 먹기 시작했다. 양볼이 분홍빛으로 반들거리는 피부에 작은 코의 귀여운 얼굴을 가진, 약간 상식 을 벗어나는 드워프는 울어서 탱탱 부은 눈과 통통하고 작은 몸집을 가졌는데, 알 렉토가 내려 주자마자 어지러운지 몇번 넘어지더니 아예 주저 앉아 어린 아이들이 흙바닥에 앉아 우는 것처럼 양손을 눈에 대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다행히 마시 의 이빨에 큰 상처를 입지는 않은듯 팔뚝에는 빨갛게 부어오른 이빨자국만이 남았 을뿐 피가 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드워프가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자 하 얀 수염과 살짝 벗겨진 머리가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엉엉...어..엉..흐앙..." "어머머..... 울지 마세요." 에코가 동정심을 발휘하는 것인지 나이들은 드워프가 우는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 어서인지 가까이 다가가 옷자락으로 눈물을 닦아주며 토닥여 주었다. 다늙은 할아 버지를..... 한참을 징징짜며 눈물을 쏟아내던 드워프는 정성스럽게 달래주는 에코 때문인지 겨우 울음을 멈추고 일행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드워프 같지 않은 드워프는 자신을 볼비라고 소개했는데 볼비는 광산과 돌로 유명 한 아르카디아에서 보석 세공을 하는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고 한다. 아르카디아는 판타리아 대륙의 중부남서쪽에 있는 나라였는데 남쪽과 서쪽으로 땅 의 절반이 도리아 산맥에 속했고 나라 전체가 광산에서 나오는 보석과 각종 철이나 구리등, 신전이나 왕궁건축에 필요한 좋은 돌을 수출해서 먹고 사는 나라여서 드 워프가 어느 지방보다도 많이 사는 나라이기도 했다. 그런데 볼비는 보석은 커녕 돌하나 제대로 다듬을 수 없었다고 한다. 메디아는 마 시를 돌연변이라고 생각했지만 볼비도 정말 심각한 돌연변이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 우헨은 볼비 때문에 집안 망신이라며 어떻게든 볼비에게 세공기술을 전수해 주려고 몇 십년동안 노력했다고 한다. 그러나 볼비는 자신이 생각해도 도 저히 가망없는 일에 매달리고 있다는 생각을 저버릴 수가 없었고 실제로 기술이 나아지지도 않았다. 그에게는 또 한가지 그의 아버지를 절망하게 하는것이 있었는 데 볼비는 특유의 섬세한 감성과 나약한 마음 때문에 툭하면 울음보를 터뜨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점이 결정적으로 볼비를 강직한 드워프의 세계에서 따돌림 받게 하는 이유가 되었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엄청난 울보였던 볼비는 결국은 나이가 들었어도 독립 하지 못하고 아버지 밑에서 일을 거들게 되었는데 아버지는 왠일인지 항상 아버지 가 하시던 중요한 일을 자신에게 맡겼다는 것이다. 보석세공에 필요한 특별한 연 장을 구입하러 파라의 노아에 가는 일은 항상 아버지 우헨이 하던 일이였는데, 이 번에는 볼비에게 다녀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볼비는 아르카디아도 제대로 여행해 본적이 없었고 하물며 국경을 넘어 본적도 없었지만 우헨의 강경한 태도 때문에 못 간다는 말도 못하고 노아로 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볼비는 다행히 노아까 지 무사히 갈 수 있었고 연장을 구해서 돌아 오던 길이였다고 한다. 그런데 며칠전 길을 잃어 산속을 헤메고 있다가 갑자기 구덩이에 빠졌는데 깨어나 보니 자신이 천정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고 무서운 할망구가 커다란 솥에 무언가를 열심히 끓이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 할멈은 어디 있는데요?" "흑..훌쩍...응...아까 저거 끓이다가 뭐가 모자른다면서 나갔엉. 정말 무서운 할 망구야. 온갖 괴상한 뱀들하고 고양이를 잡아서...흑훌쩍... 고양이 눈알은 빼서 저 대야에다가 담아놓구. 킁..훌쩍... 발톱하구 꼬리는 잘라서 뱀껍질하고 저 솥 에다가 넣었엉. 흑....얼마나 무서웠다구. 아마 나두 저솥 속에 넣으려구 했었을 거야. " 얘기하는 도중에 계속 훌쩍 거리며 울던 드워프는 아직도 보글보글 끓고 있는 새 까만 솥을 짧은 팔을 들어 손가락으로 가르켰다. "혹시 처녀들은 못 봤습니까?" "훌쩍.. 그런건 없었엉. 할망구라니까-." 알렉토의 진지한 질문에 가벼운 짜증을 내는 드워프는 에코의 옷자락에 온통 눈물 을 닦아 놓고 있었다. 그는 에코의 한쪽 다리에 매달려 있기까지 했는데 저만큼 떨어져 있는 마시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들이 열어놓은 아니 부서 놓은 문에서는 쌀쌀한 산바람이 불어와 실내를 환기 시 켜주고 있었는데 집안에 가득하던 느끼한 냄새가 처음보다는 많이 사라진것 같았지 만 볼비의 얘기를 듣고 있던 에코는 비유가 상했는지, 코를 막고 입도 한손으로 가 리며 토하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때였다. 다늙어서 쉬어 터진 정말 듣기 거북한 목소리가 음침하게 들려 온것은 ...... "너희들 뭐지? 내 집에서 뭣들하는 거냐?" - 계 속 - 번 호 : 21 / 83 등록일 : 1999년 07월 10일 03:36 등록자 : CHO1971 조 회 : 2414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21.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달빛에 여울진 물 위에 너 자신을 비추어 보아라. 네가 무엇으로 보이더냐?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이더냐? 작은 파문에 흔들리는 너는 한낮 그림자에 불과하지 않더냐? 제 21 장 어설픈 마귀할멈. 일제히 살기등등한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돌아섰다. 볼비는 겁먹은 에코의 양 다리 사이로 고개를 밀고 두려운듯 몸을 움추렸으며 마시는 새로이 나타난 인물 이 얼마나 재미있는 소일거리가 될지 살피듯 보았고 알렉토는 경계의 몸짓으로 잔뜩 긴장한 채였으며 아네모스는 침착한 모습으로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메디 아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어둠을 배경으로 서있는 할망구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훑어 보았다. 검은 망토를 바닥에 질질 끌릴 정도로 늘어 뜨려 입은 할멈은 허리도 약간 굽은 데다가 얼굴은 하야면서도 쪼글쪼글 했고 눈은 깊게 들어 갔으며 손톱도 얼마나 안다듬었는지 보기 흉할정도로 길어서 보는 사람이 깨름직할 정도였다. 정확히 말 하면 어느 음유시인들의 노래에나 나올듯한 마귀할멈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은듯 했다. "너희들 내 집에서 지금 뭐하는 거냐?" 마귀할멈이 경계의 눈초리로 일행을 훑어 보며 문앞에서 들어 오지도 않은채 말했 다. 착각이 아니라면 약간은 겁먹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메디아는 마귀할멈의 모양새를 천천히 다 살펴보고 불쑥 물었다. "세상에.... 진짜 마녀였군. 할멈 어머니가 누구지?" "응?" "뭐?" "메디아?" 모두가 메디아를 보며 너 미쳤니? 라는 질문을 던지는것 같았다. 마귀할멈도 새파랗게 젊은 처녀가 지금 자신에게 무슨 질문을 했는지 제대로 들은 것인지 의심스러운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마귀할멈은 자신의 집에 문짝 을 부수고 들어온 무단 침입자들이 지금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무작정 품속에 손을 집어 넣었다. "어? 메디아 조심해." "메디아-" 알렉토가 소리치며 메디아의 앞을 향해 뛰어 왔다. 그 순간 녹색 가루가 실내에 확 퍼져 올랐고 그것은 메디아를 중심으로 일행이 있 는 곳으로 흩어졌다. 마귀할멈은 문밖에서 가루를 뿌리고는 도망가기 시작했다. 하 지만 알렉토가 튀어나가, 엉성하게 뛰어가는 할멈을 붙잡는 것은 쉬운 일이였다. "우아앗~~~ 아앙~~~ 잉" "우읏....이게...뭐..." "아야얏......메디아 좀 도와줘... 미치겠다" 볼비가 겨우 그친 울음보를 다시 터뜨리며 온 몸을 긁어대기 시작했고 에코도 울 상을 지으며 여기저기 손닿지 않는 곳까지 긁으려 애쓰고 있었다. 아네모스는 괴 로운 표정으로 가슴을 벅벅 긁고 있었는데 다행히 알렉토는 재빨리 밖으로 나가서 인지 가루의 영향을 덜 받은듯 한손으로 가볍게 긁으며 마귀할멈을 다른 손으로 붙잡고 있었다. 물론 메디아와 마시는 멀쩡했다. 마법의 힘을 가진 메디아와 드레 곤인 마시가 마력도 거의 느껴지지 않을만큼의 하찮은 수법에 당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였다. "메디아 나 좀 어떻게 해줘봐. 아얏..." 아프다면서도 연신 긁어서 피부가 새빨갛게 변한 에코가 메디아를 향해 말했다. '기가 막히군. 마녀가 저꼴이라니......' 그러나 메디아는 알렉토의 손에 잡혀 있는 겁먹어서 잔뜩 움추리고 있는 할멈을 한심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메디아~~~. 도와달란 말이야." "왜들 그래? 어디가 가려워? 그만 좀 긁어. 보기 흉해 에코." 마시가 에코와 볼비를 보며 눈을 찌푸렸다. "알렉토. 그 할멈 품속에 다른 주머니 좀 찾아서 에코한테 던져 줘." 알렉토가 할멈의 품속에서 열개는 됨직한 가죽주머니와 작은 병들을 꺼내서 할멈 에게 내밀며 어느 것이 해약인지 물었다. "제발... 살려줘. 겁이 나서 그랬어." 할멈은 애처롭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고는 해약이 들은 약병을 가르쳐 주었다. 알렉토는 약병의 액체를 할멈에게 먼저 발라보고 에코에게 던져 주었다. 에코가 요 란스럽게 자신의 피부 여기 저기에 물약을 바르고 볼비와 아네모스에게도 물약을 직접 발라주기 시작했다. "아야얏..하휴...이제야 시원하네...하후 시원해. 이봐요 할아버지 그만 울어요. " "훌쩍...흐이잉..." "여긴... 내 집이야. 너희들이 먼저 잘 못한거라구..." 여전히 알렉토에게 뒷덜미를 붙잡혀 있는 할멈이 가루 뿌린 잘못을 변명하며 눈치 를 보고 있었다. 메디아는 산속의 작은 돌집에 들어 와서도 진짜 마녀가 있을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왔을뿐이었다. 진짜 마녀라면 그렇게 마을에서 처녀 를 납치해서 살해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앞에 치렁치렁한 망토를 걸치고 있는 마귀할멈은 웃끼게도 진짜 마녀였다. 문제는 할멈이 누구의 혈통을 이어받은 마녀이길래 이렇게 한심한 마귀 꼴이 되었는가였다. 마녀는 혈통 으로만 이어진다. 절대로 일반인이 마법을 익힌다는 이유로 마녀라 불리지는 않는 것이다. 혈통으로만 이어지는 마녀들의 특성 때문인지 마력이 강한 마녀는 마법 의 향기가 없어도 다른 마녀들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판타리아의 최초의 마녀는 약 3000년전에 나타났었다고 한다. 그 당시 악마로부터 아기를 얻은 처녀가 있었는데 그녀는 결혼도 하지 않은 처녀가 임신했다는 이유 로 악마의 신부라 불리며 부족사회에서 쫓겼났었다. 그녀는 백일만에 딸을 낳았고 아기는 태어날 때부터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만큼의 마력을 타고나, 자라면서 엄청난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성장해서 자신 의 어머니를 쫓아낸 부족사회를 멸망시켰고 그후에도 미친 어머니의 영향으로 정상 적인 인간이기 보다는 사악한 모습으로 살아 갔는데 그녀는 언젠가부터 사람들에 게 마녀라 불리우기 시작했다. 그녀가 자신을 악마의 자식이라며 멸시하는 인간에 대한 저주와 복수의 일념으로 백여년을 살아 가는 동안, 사람들의 마녀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는 점점 커져만 갔다. 그러나 그녀는 후에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한 남자를 만났고 그로 인해 그 녀의 비뚤어진 마음도 인간적으로 바뀌게 되어 일곱명의 딸과 다섯명의 아들을 낳 을수 있었다. 그녀의 자손들 중에 마녀의 혈통은 일곱명의 딸들에게만 전해졌고 그녀는 거의 500년을 살다가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그녀는 죽음 직전에 자신의 힘을 모아 일곱개의 반지를 만들어 딸들에게만 증표로 물려 주었다고 한다. 그녀가 오랜 세월을 살았던 것처럼 그녀의 자손들도 오래 살았다고 하는데 2500년 의 세월이 지나면서 마녀들의 수명도 점차 줄어 들었고 혈통도 희석되어 마력의 힘도 줄게 되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에는 증표로 남아 있는 반지가 유실되어 세개의 반지만이 전해지고 있었지만, 일곱명의 딸로 이어지는 마녀의 혈통은 여전 히 강했고 그 피를 이어받은 수 많은 마녀가 판타리아게 생겨났다. 그리고 메디아는 세개의 반지 중 하나를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아 소유하고 있는 강 한 마녀중 하나였다. "당신 어머니가 누구지?" 마귀할멈은 이 처녀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가르쳐 달라는듯이 다른 일행들을 둘러 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고 에코만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을 뿐 이었다. 할멈은 다시 메디아에게 시선을 주었다. 갑자기 그녀의 눈동자에 심한 공포가 자리 를 잡더니 손가락을 심하게 떨며 더듬거렸다. "너 혹시.... 그...그가 보낸거냐?" "그? 누구를 말하는 건지는 몰라도 우리는 누구의 부탁으로 온 게 아니야." 메디아의 대답이 진실일까 의심스러운듯 살펴보던 마귀할멈은 다시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툭 던지듯 거칠게 말했다. "내 어머니는 잉그리거라고 한다. 넌 그런 걸 왜 묻는 거냐?" 할멈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메디아는 자신도 모르게 할멈에게 다가가서 멱살 을 확 낚아채듯 붙들었다. "뭐....라구? 누구?" "뭐..야? 왜그래? 너...너 ... 그가 보낸 거였어? 날... 속였구나.." "딴소리 하지 말고 다시 말해. 지금 잉그리거라고 했어?" "제발 ... 살려 줘... 그에게 날 데려 가지마... 난 아무 잘못이 없다구. 안돼..." 할멈은 갑자기 오한이 들기라도한듯 덜덜 떨며 헛소리를 짓꺼리기 시작했다. 메디 아는 할멈의 멱살을 바짝 끌어 당겨 흔들며 다그치듯 물었다. "이봐. 제대로 대답하란 말야-." 메디아의 돌발적인 행동은 다른 일행들을 상당히 놀라게 할 정도였다. "난.. 아무짓도 안했어. 내 잘못이 아니었다구...난...그녀하고 상관없어..제발 그에게 데려 가지마..... 안돼...부탁이야...." 메디아는 계속 헛소리를 떠드는 할멈을 거칠게 놓으며 혼자서 주먹을 꼭 쥐고 눈 을 감으며 쉼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눈을 뜨고 겁에 질려 있는 할멈을 다 시 보며 마음속의 놀라움을 감출수가 없었다. '맙소사... 믿을 수가 없어....' 모두들 메디아의 갑작스런 행동을 지켜 보는 동안, 메디아는 침착을 되찾으려는듯 방 건너쪽으로 걸어 가더니 의자를 찾아서 털썩 앉아 버렸다. 그러고는 한동안 아 무것도 안하고 멍한 눈동자로 천정을 보며 가만히 있었다. 공기조차 긴장된 분위기 를 반영하듯 실내에는 찬바람만이 불어오고 있었고 정신나간 듯한 할멈의 중얼거 림만이 들렸다. "..내가 그런게 아니야..... 그에게 가기 싫어. 제발 부탁이야. 데려가지 마...." 의자에 앉아 멍한 눈동자로 한참을 천정만 보고 있던 메디아가 할멈을 보며 힘빠 진듯 말했다. "그만 해...... 홀..링." 그녀의 뒷말은 잘 들리지도 않을만큼 미약했다. "제발...부탁해. 안돼 절대로..... 갈 수 없어..." 메디아의 목소리를 못 들은듯 할멈은 무릎을 꿇은 채 앞뒤로 몸을 흔들며 움추린 목을 한없이 숙이고 정신나간 사람처럼 있었다. "홀링... 그만하라니까.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난 아무 잘못도 없어....아무..뭐?" 계속 중얼거리던 할멈이 무언가를 깨달은듯 고개를 들었다. "홀...링." 메디아의 목소리는 슬픈 울림으로 작은 공간을 가르며 바람같이 퍼졌다. "너...... 누구야? 내 이름을..." 메디아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할멈이 무릎 꿇고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와 할 멈의 앞에 몸을 낮춰 앉았다. "나.... 메디아야 홀링... 오랜만..이지?" 할멈의 눈은 혼란스럽게 움직였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메디아? ......메디아라니..그게?... 설..마...설마 그럴리가..그럴리가 없어!" 늙은 홀링은 혀가 굳어 심하게 더듬 거리더니 갑자기 절규하듯 쉰소리를 냈다. 그 녀의 눈에는 걷잡을 수 없는 충격과 의심이 가득했다. "맙소사. 그럴리가... 메디아는... 메디아는 죽었어. 오래전에 죽었다구...." - 계 속 - 번 호 : 22 / 83 등록일 : 1999년 07월 13일 00:42 등록자 : CHO1971 조 회 : 2440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22.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달빛에 여울진 물 위에 너 자신을 비추어 보아라. 네가 무엇으로 보이더냐?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이더냐? 작은 파문에 흔들리는 너는 한낮 그림자에 불과하지 않더냐? 제 22 장 잔인한 추억. "넌 누구지? 그가... 이런 거짓말을 하라고 했어? 목적이... 뭐야?" 홀링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흔들며 메디아의 옷자락을 꼭 잡아 당기고 대들듯 메디 아의 보라빛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 보았다. "헉...." 홀링은 어둡게 빛나고 있는 메디아의 보라색 눈동자를 보며 짧은 숨을 들이켰다. "메디아일리가....없어. 메디아는.... 나보다 겨우 다섯살 어릴뿐이라구. 너처럼 젊을리가 없어. 하지만... 하지만 이 눈은... 이 보라빛은......" 홀링은 너무 떨려서 소매자락이 흔들거릴정도인 손을 들어 메디아의 얼굴을 장님 인듯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오... 신이여... 맙소사." 홀링은 메디아에게서 힘없이 떨어져 나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흐느끼듯 주저 앉았다. 메디아가 입술을 열어 무심한듯 나직히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예전에...... 그 현자의 나무 기억나? 그때는 잉그리거하고..... 우리 엄마, 그 리고.....로만이 함께 모여 있었쟎아. 그 여름... 나하고 커다란 나무 둘레를 뛰 어 다니며 웃던 일도...들판을 뒹굴던 일도...그거.. 기억나?" 메디아의 나직한 목소리가 밤공기를 가르며 들렸고 곧이어 홀링이 떨림을 멈추고 최면에 걸린 듯 낮고 쉰 목소리로 말을 잇기 시작했다. " 그래... 커다란 현자의 나무...... 햇살이 축복인양 내리고 우리는 마냥 즐거워 했었어. 그래... 기억하고 있어. 나... 하나도 잊지 않았어. 그 해 여름에 바베큐 를 먹었더랬지. 나는....다섯살 밖에 안된 메디아가 너무 많이 먹는다면서.... 크 면 살찔거라고 했었어. 그러면 블러디나가 내 머리를 만져 주곤 했어. 우리 예쁜 홀링이라고 하면서....우리 예쁜 홀링이라고......" 홀링의 주름진 눈가에 두줄기 맑은 눈물이 흘러 내리며 꿈꾸는 듯한 표정이 스쳐 지나 갔다. "그리고... 그도 있었지." "모모스를 말하는 거야? 맞아 그도 있었지. 하루종일 모모스를 따라 다니면서 그 를 꽤나 귀찮게 했었던것 같아." 메디아의 대답이 들리자 "그래.....그랬어..그랬더랬지. 흐윽. 흑..흐흑..흐욱..." 조용히 눈물을 흘리던 홀링은 갑자기 메디아의 품에 안겨 서럽게 흐느끼며 오열하 기 시작했다. 메디아의 표정은 온몸의 에너지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황량하기 그지 없었다. '이런... 건가? 이런 거였는가? 시간이 이토록 잔인한 것이었나?' 메디아는 한번도 자신이 나이 들었다는 사실을 실감해 본적이 없었다. 백여년간 코카서스 화산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새끼 드레곤 마시와 거북이 블루잉과 함 께 살아온 그녀에게 세월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계절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의 어 머니 블러디나가 유언한 대로, 메디아는 한번도 과거와 연결된 인간을 다시 만난 적도 없었고 그러기를 원한적도 없었다. 그러나 여기 이름모를 산속에서 메디아의 옛날 어린 시절을 공유했고 그녀의 과거 와 연결된 홀링을 다시 만나게 될줄은 상상도 못 했었던 그녀였다. 메디아는 이토록 허탈한 느낌일줄은 몰랐다. 자신은 아직도 열여덟살때의 모습 그 대로 멈추어 있었고 그 옛날 생기발랄했던 홀링은 지나간 백여년의 세월을 보여주 듯 늙고 추레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으윽..흑..흐윽. 어째서...어째서 너는... 그런 모습인거지? 어째서..?" 홀링의 흐느낌 속에서 목메인 질문이 터져 나왔다. ".........." 그러나 메디아의 귀에는 홀링의 끊어질듯한 쉰 목소리는 더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정신은 백년도 더 지난 해묵은 과거 속을 헤메고 있었다. "꺄아악....우웃...후하하하~~ 꺄야~" 귀여운 레이스 치마가 바람에 휘날리며 어린 아이의 투명한 웃음 소리가 들판에 울려 퍼졌다. 초록빛의 부드러운 풀밭을 뒹굴며 뛰노는 아이들의 발랄한 모습이 보이는 주위는 나무도 없이 온통 여린 풀들이 자라난 들판이였고 커다란 현자의 나무만이 들판의 주인인양 한가운데 우뚝 솟아 짙은 빛깔을 마음껏 뽐내며 눈부시 게 푸른 하늘을 향해 가지를 내밀고 있었다. 어른 열명이 달려 들어도 다 감싸지 못할것 같은 나무는 몇백년 아니 몇 천년은 서 있었던 것처럼 굳건하게 자리를 지 키며 땅위로 뻗어나와 있는 굵은 뿌리들을 사방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꺄악...꺄르르.... 그만... 그만....아하하..." 다섯살의 귀여운 메디아의 작은 몸을 간지르는 홀링의 머리카락에는 부드러운 풀 밭에 피어 있는 이름모를 야생화의 꽃잎들이 어지럽게 달라 붙어 있었고 메디아의 레이스 치마자락에도 흙과 풀잎들이 야생화와 함께 널려 있었다. "야아~~~꺄르르.... 홀링 그만해...꺄아아..어디 홀링도...하하하.." "우앗~...후하하하...꺄악....메디아 그만..후하하..우웃..그만해.. 안할께..하하." "후하하하....." "하하하하....." 메디아와 홀링은 서로 간지럽히는 것에 지친듯 웃음을 터뜨리며 들판에 몸을 쫙 펴고 하늘을 향해 누워 버렸다. 여름의 눈부신 하늘이 그들의 시야 한 가득히 들어왔다. 순결한 구름이 바람을 타 고 흘러 다녔고 어린 메디아와 홀링의 작은 몸에도 실바람은 불어 오고 있었다. 바람에 속삯이는 풀잎들의 흔들리는 소리를 들으며 아이들은 한동안 숨찬 호흡을 달래고 있었다. "홀링~ 메디아~!" "얘들아 어서 오지 않으면 양고기 하나도 남기지 않을거다." 커다란 현자의 나무 밑에서 잉그리거와 블러디나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메디아와 홀링은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벌떡 일어나서 뛰어가기 시작했다. "엄마아~ 내꺼는 남겨 주세요." 메디아가 작은 발로 열심히 뛰면서 앙증맞은 입술을 열어 소리쳤다. 메디아보다도 다섯살이나 더 많은 홀링은 메디아보다도 훨씬 앞서서 뛰어가고 있었다. 달리는 홀링의 눈에 현자의 나무 아래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모스와 그의 아버지 로만이 보였다. 블러디나와 잉그리거 그리고 로만은 오랜 친구사이였다. 로만은 블러디나와 어렸 을때부터 한마을에서 같이 자란 사이였고 잉그리거는 그녀의 어머니와 블러디나의 어머니가 같은 마녀들인데가 서로 왕래가 잦아서 어려서도 친하게 지냈었다. 로 만은 자신보다 일곱살이나 더 어린 블러디나와 함께 자라면서 마법공부를 꾸준히 했고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이더니 마흔도 되기전에 마스터가 되어 모두를 놀라게 했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는 그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지만 평범한 인간 으로서 오를 수 있는 경지를 넘어선 그에게 사람들은 경외감을 품고 있었다. 그러 나 애초부터 마녀의 혈통을 이어받은 블러디나는 그보다 먼저 마스터의 경지에 올 랐고 잉그리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은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들이였고 같은 길을 걷는 동료이자 친구였으며 동시에 경쟁자였다. 일년에 한번씩 마스터들 은 마법의 성에서 거주하는 마법사들의 방문을 받았는데 마법의 성에서는 마스터 들만이 터득한 마법의 지식을 공유하기를 원했고 마스터들은 그들의 일원으로서 마법의 발전을 도모할 의무가 있었다. 로만과 블러디나 그리고 잉그리거는 방문자 들을 언제나 함께 맞아 왔었다. 매년 마법사들의 방문을 받을때면, 흩어져서 각자의 생활을 하던 마법사 로만과 마녀 블러디나 그리고 같은 마녀였던 잉그리거가 한자리에 모였고 너무 바빠서 만 나지 못했던 그들은 오랜만에 친구들과 한때의 휴가를 보내듯 즐거운 시간을 가져 왔었다. 올해도 일년만에 다시 만나게 된 오랜 친구들은 자신들의 자녀와 함께 라비론의 수도 헤르시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이곳 현자의 나무밑에서 7월의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라비론은 판타리아 대륙의 서북쪽에 있는 설국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실제로 일년 내내 국토의 오분의 일이 눈과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도 여름은 있었고 그 여름은 다른 지방의 후덥지근한 여름보다 시원하고 쾌적했기 때문에 여행객들이 여름에 많이 찾아오기도 했다. 현자의 나무는 천년도 더 전에 골드 드레곤의 죽음으로 생겨난 나무였는데, 죄를 짓고도 거짓말을 하거나, 진위를 가릴 수 없는 일이 생겼을 경우에 이곳에 오면 현자의 나무가 진실을 알려준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현자의 나무 밑에서는 두세명의 시종들이 숯불 위에 바베큐를 굽고 있었는데 향긋한 향신료와 구수한 양고기의 냄새가 아이들의 식욕을 자극하고 있었다. 나 무 그늘의 한쪽에는 큰 식탁과 의자들이 여러개 놓여져 있었는데 이미 의자에는 잉그리거와 블러디나가 각자 자리를 잡아 달려오는 아이들을 기다렸고 모모스와 그의 아버지 로만은 나란히 앉아서 이야기를 하며 식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숨차 게 달려온 홀링이 자신보다 세살이 많은 모모스의 맞은 편이자 잉그리거의 옆자리 로 냉큼가서 앉았고 한참을 지나서 어린 메디아가 신발을 손에 든채 맨발로 식탁 앞으로 다가왔다. "이런...이런 메디아... 너 맨발로 다니면 어떡하니?" "배고팠단 말이예요. 내꺼 남았어요? 예?" "블러디나. 우리 귀여운 메디아를 평소에 얼마나 굶기는 거야? 애가 먹을때만 되 면 제정신이 아닌것 같쟎아." 잉그리거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굶기기는 누가 굶겼다고 그래 잉그리거. 애가 워낙에 잘 먹는 거지. 도대체 왜 이렇게 식탐이 많을까 나도 모르겠어. 누굴 닮아 그러는 건지 먹을거만 보면 다른 건 쳐다 보지도 않고 한정없이 먹기만 해. 메디아를 임신했을때도 내가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알지? 모두들 내가 쌍둥이를 낳을거라고 했었쟎아. 아니면 대단한 사내아이를 낳던지. 그런데 요렇게 조그만 여자아이가 태어났쟎아." "호하하... 너 임신했을때... 정말 가관이었어. 먹을걸 입에 달고 살았쟎아. 그때 의 너.... 못 봐줄 정도였다구. 심지어는 일년에 한번 마법의 성에서 파견나온 마 법사들을 만나는 자리에서도 너 계속 먹고 있었쟎아. 쿠쿡.... 그 황당해 하던 표 정들이라니.... 사실 황당해 할만도 했지. 권위있는 마스터이면서 멀쩡하게 생긴 여자가 아무리 임산부라지만 어떻게 두시간 내내 먹을 수가 있냐구? 그것도 닭요 리만 아홉접시를 비웠었지 아마? 그때 그 젊은 마법사들 표정 생각하면 지금도 웃 긴다니까. 쿠쿡쿡... 로만도 기억나지? 그날 너무 많이 먹는거 아니냐면서 블러디 나 좀 그만 먹게 하라고 그랬었쟎아...." "으윽.... 잉그리거 그때 얘기 꺼내지도 마. 그때 생각하면 나 자신도 신기할 지 경이야. 어쩜 그렇게도 닭요리가 먹고 싶은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니까. 먹어 도 먹어도 입에서는 땡기고 못 먹으면 죽을것 같았다구. 지금은 닭요리는 고사하 고 닭만 봐도 진짜 닭살이 돋는다니까." 블러디나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잉그리거가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들이 떠들고 있는 사이 메디아는 어느새 자리에 앉아 양고기를 작게 잘라서 열심히 먹고 있는 중이었다. "메디아는 크면 분명히 산만큼 뚱뚱해질 거에요. 블러디나." 홀링이 시종이 날라다 주는 음료를 마시며 메디아의 보라빛 눈과 고기를 먹고 있 는 모습을 보고 걱정스럽게 말하자 블러디나가 홀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예쁜 홀링이 메디아 걱정을 해주는 구나. 우리 예쁜 홀링 아가씨....."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는걸요." 올해 열세살이 되는 모모스가 조그만 손으로 서투르게 칼을 움직여 고기를 썰어 먹는 메디아의 모습을 보며 말했고 홀링은 모모스가 자신의 의견에 동감을 표시하 는 것을 기쁘게 바라 봤다. "그렇지? 모모스가 봐도 그래 보이지? 메디아는 너무 먹는 걸 좋아해. 저렇게 작은 애가 어떻게 저렇게 많이 먹는 거지?" 벌써 한덩이의 양고기를 게눈 감추듯 다 먹어 치운 메디아는 한 손에는 기름칠을 잔뜩 묻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작은 칼을 들고 접시를 두드리며 시종이 다시 구운 고기를 가져다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얘들아 그만 떠들고 먹어야지... 그러다 너희들 메디아에게 먹을거 모두 빼앗기 겠구나." 포도주잔을 들어 향을 음미하던 로만이 홀링과 모모스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로만! 지금 우리 메디아 흉보는 거야?" "하하하... 귀여운 메디아를 흉볼데가 어디 있다고 흉을 보겠어? 블러디나 무서워 서라도 흉은 못보지." "뭐라구?" "호호호..로만 말이 맞아. 너 무서워서 무슨 말을 하겠니? 쿠쿡... 우리 중에 너 만큼 성질 고약한 녀석은 없다구. 블러디나." "너~ . 그래 나를 요리 삼아 아주 잘도 먹는구나." "하하하..." "호호호..." 향기로운 바람을 타고 정다운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평화롭고 아름다 운 7월의 오후 한때.... 현자의 나무는 말없이 서 있을뿐이었다. - 계 속 - 번 호 : 23 / 83 등록일 : 1999년 07월 19일 14:59 등록자 : CHO1971 조 회 : 2368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23.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달빛에 여울진 물 위에 너 자신을 비추어 보아라. 네가 무엇으로 보이더냐?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이더냐? 작은 파문에 흔들리는 너는 한낮 그림자에 불과하지 않더냐? 제 23 장 배신과 믿음. 메디아는 상념에서 깨어나며 아직도 중얼거리고 있는 홀링을 보았다. "잉그리거는.... 어떻게 된거야? 너는 왜 이런 몰골을 하고 있는 거지? 잉그리거 는 어째서 너를 이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었던 거냐구?" 홀링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작은 돌집은 옛 전설에나 나오는 마녀의 집 같았고 그것도 자신의 마력이 없어서 음기를 모으기 위해 옛날의 어리석은 인 간 여자들이 하던 방법을 그대로 하고 있는듯이 보였다. 최초의 마녀가 낳았던 마녀의 피를 물려받지 못한 다섯 아들에게서 태어나던 여 자들은 자신들이 같지 못한 마녀의 힘을 욕심내어 깊은 산속에서 악마에게 제물을 받치고 원시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마력을 키워 나가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사람 들이 흔히 잘못 알고 있는 마녀의 모습이였고 지금 홀링의 모습이 바로 그러해 보였다. 마녀의 피를 물려받은 마녀일지라도 어려서부터 그 어미로부터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면 마법의 힘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경우도 가끔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마 녀이면서도 고아로 자라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지만, 이런 산속에서 풍문으로 들어온 마녀들의 생활을 그대로 따라 살고 있는 마녀들도 있었다. "죽었어." "나도 그녀가 살아 있을거라 생각하지는 않아." 마녀는 일반 인간들보다는 비교적 젊고 건강한 편이었으며 수명도 마력에 따라 삼십년정도까지 더 오래 살기도 했다. 그러나 인간들과 큰 차이는 없었고 인간처 럼 늙어 갔고 인간처럼 죽어 갔다. 메디아는 이미 백사십살은 훨씬 넘었을 잉그 리거가 아무리 마법의 반지를 물려받은 마스터 마녀였더라도 지금까지 살아 있을 거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메디아의 기억으로는 이미 홀링은 열살때도 마 력이 강해서 마녀로서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던 것으로 알고 있었다. 분명히 잉그리거가 잘 가르쳤다면 지금쯤 홀링은 대단한 마스터가 되고도 남아야 정상이 었다. 아무리 못해도 지금의 홀링의 모습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게 아냐. 그녀는...로만의 손에..... 죽었어." "...뭐? 무슨 소리야? 잉그리거까지 왜...어째서?" 홀링은 여전히 소녀처럼 매끄러운 메디아의 얼굴을 믿을 수 없다는 눈길로 보며 말했다. "네가... 죽은 줄 알고 있었어. 그때... 블러디나가 갑자기 사라지고 죽었다고 했을때 모두 네가 함께 죽었다고 생각 했어. 설마 그런일이 생길줄은 몰랐어. 그 리고 우리는 정말 왜 그런일이 일어났는지도 처음 몇년간은 알지도 못 했어. 정말 이야. 몇년이나 더 지나서야 알았다구. 어떻게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니? 우리는 모두 로만을 믿었어. 나도.... 나도 정말 믿었어. 처음 블러디나가 죽었다는 사 실을 알고 나서도 몇년 동안은 아무것도 모르고 지냈었더랬어. 하지만 어머니는 진실을 알아야겠다며 집요하게 조사하고 다니셨지. 그래서 결국은.... 진실을 알 아 버리신거야. 그리고 정말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으시고는 그대로 달려 가셨어. 너무 충격적이었겠지. 한순간도 의심해 보지 않았던 믿음에 대한 배신이었으니 까. 그리고 그걸로 끝이었어. 어머니는.... 다시 돌아오지 못 했어." 홀링은 마치 누군가가 쫓아올 것처럼 불안하게 떠들며 다시 오열했다. 메디아는 망연한 심정이었다. 설마 잉그리거까지도 희생되었을 줄은 몰랐다. "너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제대로 알고나 있는 거야 홀링? 어디까지 진실을 알고 있는 거지?" "마녀들 사이에서는 벌써 유명한 이야기야... 그일로 정말 엄청난 일들이 일어났 으니까. 너의 어머니...피의 저주를 받았다고 알려졌지. 마녀에게 가장 치명적인 도저히 벗어날 수 없다는 피의 저주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순식간에 퍼졌었어. 그 래.... 블러디나의 죽음은 우리에게 공포스럽기도 했어. 그 혈통을 이어받은 너의 실종도 죽음이라고 알려졌지. 그리고.... 몇년 뒤에 어머니도 죽었어. 마녀들 사 이에서 최고를 다투던 마스터들이 몇년을 사이에 두고 죽었으니까 화제가 될 수밖 에 없었어. 더구나 그 일....그때 그일은 ...." "그 일? 무슨 일을 말하는 거지? 도대체 무슨 일이 또 있었던 거야?" 메디아는 홀링의 모호한 이야기로 온통 혼란스럽기만 했다. "어머니가... 로만에게 죽고 삼년이 지났을 때였어. 블랙 드레곤 한마리가 나타 나서 로만의 여마법사를 죽이는 일이 벌어 졌지. 나중에 그 여자가 화이트 드레 곤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말이야. 그때 블랙 드레곤도 큰 상처를 입고 사라졌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어. 그리고.... 정말 모두를 놀라게 했던 것은 로만의 행동이였어. 그의 여마법사가 블랙 드레곤에게 죽은 그날 밤.... 그 때 그 자리에서... 로만이 자살을 해버렸어. 정말 모든게 너무나 허무하게 끝났던 거야....모두들 이제 끝났다고....더 이상의 비극은 없을거라고... 그렇 게 소문은 차차 사라져 갔었어." "그런..일이.....그런...." 메디아는 홀링의 너무나 충격적인 이야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녀의 머릿 속으로 하나의 잊혀지지 않는 영상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코카서스 화산으로 사납게 내려 치는 빗속에서 피투성이가 된채로 죽어가던 케드 리안이 메디아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귓가를 울리고 있었다. " 메디아.... 복수는 끝났단다." " .........복수는 끝났단다." ".........끝났단다." 구석에 있던 마시는 갑자기 늙은 마귀할멈과 딱붙어서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메 디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메디아는 멍하니 마귀할멈 앞에 쭈구리고 앉 아서 딴생각을 하는것 같았다. 알렉토는 눈앞에 있는 할멈이 마을에서 말하는 마녀가 아니라고 판단했고 지독한 냄새가 휘도는 자그만한 돌집 안에 있는것이 답답했으며 더구나 사적이 이야기 가 오가는 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아네모스와 에코 마시, 그리고 볼비까지 데리고 밖으로 나와 모닥불을 피웠다. 물론 호기심 많은 에코가 그냥 나올리는 없었지만 아네모스의 눈짓 한번으로 순순히 따라 나왔고 마시도 심각한 분위기가 싫었는지 아네모스가 들고 있는 먹을거리가 탐이 났는지 아네모스를 따라 밖으 로 나왔다. 어두컴컴한 산정상에 따뜻한 모닥불이 피워 지고 배가 고픈 일행들은 아네모스가 건네주는 간단한 간식으로 허전한 배를 채우고 있었다. "아까 그말 들었어? 응? 메디아가 그 마귀할멈보다 다섯살 밖에 안 어리다쟎아. 그럼 메디아가 대체 몇 살인거야? 설마 저 할머니가 20대의 처녀일리는 없고... 으윽..머리가 복잡하다. 저기 마시야?" "응?" "메디아가 몇 살이니?" "몰라. 나보다는 많아." 알렉토와 아네모스 그리고 에코의 시선이 한꺼번에 마시를 향했다. "에? 몰라? 너 누나 나이도 몰라?" "누나? 왜 자꾸 메디아 보구 누나래? " 타미마을에서는 잘도 누나라는 호칭을 써놓고는 이제와서 딴소리를 하는 마시였 다. 사실, 그도 누나가 뭔지는 잘 몰랐지만 사람들이 옆에서 떠드는 소리를 듣고 따라한 것뿐이였다. "으잉? 그게 무슨 소리야 또? 메디아가 너 누나니까 그렇지." "메디아가?" "응. 저.. 그러니까. 너네 부모님이 메디아를 먼저 낳고 너를 낳았으니까 메디아 가 누나인거지." "우리 부모님? 무슨 소리야 에코? 우리 엄마는 메디아 안 낳았어. 나뿐인데..." 알렉토가 숨 넘어갈듯 중얼거렸다. "뭐? 그럼 친남매가 아니란 말이야? 그런데 ... 그런데... 목욕을 시켜줬단 말이 야? 맙소사... 너네는... 너네는..." "그게 어때서? 나 태어나서부터 메디아가 나 돌봐줬어." "그래서 메디아가 몇 살인지 모른다는거야? 그럼 너랑 몇 년 살았는데? 13년? 14 년? 15년?... 아냐? 그럼 도대체 뭐야?" 손가락을 서너개씩 들어 보이던 에코가 계속해서 고개를 가로젓는 마시에게 짜증 을 냈다. "으음... 그러니까. 에...한 90년은 넘었는데... 얼마나 됐지? 우웅..잘 모르겠 다." "하-..." "힉...." "마시..야?" 에코가 다시 손가락 두개를 펴들어 마시에게 내밀었다. 노란 불빛에 그녀의 길다 란 손가락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이거.. 몇개로 보이니?" "응? 두개." "정신은 멀쩡한 것 같은데... 너 십년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나 있니?" 이번에는 마시가 얼굴을 찡그리고 대답을 안했다. '우잇.. 내가 뭐 바본줄 아나?' "하하..하하..하-" 마른 웃음을 털어내듯 알렉토가 쉰소리를 냈고 에코의 옆에 바싹 붙어 있던 귀여 운 드워프 할아버지 볼비는 마시를 유심히 들여다 보더니 점점 뒤로 물어나 앉기 시작했다. "혹시....혹시 저.. 드레..곤....이에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볼비가 중얼거리자 주위가 온통 고요해지는 느낌이였다. 모두가 긴장해서 마시를 쳐다 보고 있을때 마시의 붉은 눈동자가 반짝 빛나고 얼굴의 근육이 활짝 펴지며 발랄하게 말했다. 드디어 알아줘서 반갑다는듯이.... "에? 어떻게 알았어요?" "엄마야~~~" 제일 먼저 에코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지듯 물러나 앉았고 알렉토와 아네모 스는 기가 막혀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몰랐으며 볼비는 그자리에서 굳어 버렸는지 살모사 앞에 개구리마냥 그대로 얼어붙은듯 꼼짝도 못했다. "어? 왜그래? 에코." "어엄마~ 가까이 오지마...앙" 급기야 울음을 터뜨릴듯이 뛰어서 아네모스의 등뒤로 숨어버린 에코는 숨죽여 울 기 시작했다. "씨잉... 내가 뭘 어쨌다구잉....." 그러나 마시도 오히려 섭섭한듯 징징거릴 태세였다. 마시는 사람들이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든 말든 벌떡 일어서서 메디아를 찾았다. "메디아~ 메디아야~이잉" 마시의 징징대는 소리를 들었는지 메디아가 때마침 안에서 홀링을 데리고 나왔다. 그런데 홀링의 모습은 잠깐 전의 추레한 몰골과는 어딘가 많이 달라 보였다. 무 언지모를 자신감 같은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고 좀 젊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왜 찾아?" 메디아도 자신의 감정을 추스렸는지 평상시의 무뚝뚝한 모습으로 되돌아와 있었 다. "몰라잉... 나는 아무짓도 안했는데 모두 이상해~잉." 마시가 메디아의 소매 자락을 붙들고 징징거렸다. "너 그새 사고쳤니? 아니면 누가 너 울리든?" 메디아가 둘러 보자 마치 괴물을 눈앞에 두고 있는 사람들처럼 딱딱하게 굳어있 는 일행이 보였다. 메디아가 기이한 눈빛을 하자 더 긴장하는 일행이였다. "왜들 그래?" 그래도 알렉토가 자신을 수습하고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로 메디아를 향해 물었다. "마시가.... 드레곤인가?" 메디아가 자신의 소매를 붙들고 있는 마시를 홱 째려봤다. "너... 무슨 말을 한거야?" 그녀의 사나운 목소리를 듣자 자신은 아무죄도 없는데 왜 나만 같고 그러냐는듯 이 마시가 눈물을 찔끔거렸다. "힝... 난 드레곤이냐고 물어보길래... 어떻게 알았냐고...히잉..." "누가?" 마시가 손가락을 들어 아직도 딱딱하게 얼어있는 볼비를 가르켰다. 메디아가 한 숨을 푹푹 내쉬었다. '뭐... 어차피 알아도... 별 상관 없겠....지?' "다들 정신차려. 마시가 드레곤이면 어때서 그래? 이녀석이 어디로 봐서 누구를 잡아먹을것도 아니..고..." '음...이건 문제가 있는것 같군..' "뭐... 누구를 해칠것도...음....저 ...내말은... 적어도 알렉토, 아네모스, 에코 는 안 잡아먹고 안 해칠거야. 걱정마. 그럴 재주도 없는 녀석이니까. 이 녀석은 한마디로 보다시피 애라고.. 애! 알겠어? " 메디아의 날카로운 음성이 밤의 숲을 가르자 모두 일제히 '그럼 너는?' 이라는 표 정을 지었다. "나? 나는 드레곤 아니야." 딱 잘라 말하는 메디아에게 알렉토가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듯이 홀링을 가르키며 물었다. "90년도 넘게 사는 인간이 너 같을 수는 없어. 저렇게 되어야 정상이지." 메디아가 마시를 다시 한번 노려 보았다. '도대체 어디까지 얘기한 거야?' "그래? 그래도 나는 인간이야.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어. 내가 마시보다 더 위험할것 같아서 그래? 그렇게 겁이나면 우린 여기서 그만 헤어져야겠군?" 모두가 유심히 메디아와 마시를 살펴 보았다. 그러나 어떤 다른 말도 오가지 않았 다. 얼마동안의 침묵이 흐르자 아네모스가 천천히 일어서더니 마시에게 다가갔다. "많이 섭섭했니? 신경쓰지마 에코가 겁이 많아서 그랬던 거야. 네가 싫어서 그런게 아니야." 그리고는 마시가 찔끔거린 눈물을 닦아 주며 알렉토와 에코가 들으라는듯 말했다. "새삼 이들을 못 믿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귀여운 걸요. 메디아도... 못 믿을 이유가 없죠. 오히려... 우리에게 든든한 일행이 아닙니까?" 하얀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는 아네모스를 보며 에코도 알렉토도 안도 의 숨을 내쉬었고 언제나 그들을 놀래켜 왔던 남매를 새삼 다시 보며 이미 자신들 의 내면은 초자연적 존재인 그들을 받아드렸음을 느끼고 있었다. "훌쩍...그럼 저기...마을에서 말하는 마녀는 누구야? 그 할머니는 아닌거 같은 걸?" 기분전환이 빠르고 변덕이 심한 에코가 화제를 돌리듯 뜬금없이 내뱉는 그녀의 한마디가 모두의 관심을 환기시켰다. - 계 속 - 번 호 : 24 / 83 등록일 : 1999년 07월 22일 23:42 등록자 : CHO1971 조 회 : 2343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24.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달빛에 여울진 물 위에 너 자신을 비추어 보아라. 네가 무엇으로 보이더냐?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이더냐? 작은 파문에 흔들리는 너는 한낮 그림자에 불과하지 않더냐? 제 24 장 여자라는 이름. 마을로 돌아온 일행은 밤을 새운 여파로 모두 돌아오자마자 각자 잠을 자기에 바 빴다. 산정상의 외딴 집에서 혼자 살던 홀링은 메디아의 마법으로 결박되어 있던 마력 을 되찾았지만 잃어버린 반지를 돌려받기 위해 가야할 곳이 있다며 메디아를 떠 났고 일행은 울보 드워프 볼비만을 겨우 달래어서 데리고 산을 내려왔다. 늦은 오후가 되어 일행 모두가 잠에서 깨어 출발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을때였다. "볼비 할아버지는 우리랑 함께 떠나고 싶지 않아요?" 하얀 수염이 복스럽게 턱을 감싸고 있는 볼비는 붉은 색의 조끼를 오동통한 손가 락으로 만지작 거리며 마시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으응.. 저 나...그냥 갈래.." 그 눈치를 채지 못할 에코가 아니였다. "할아버지. 마시 무서워서 그래요?" 애꿎은 조끼만 잡아당기고 있던 볼비는 화들짝 놀라며 방의 한쪽벽으로 황급히 달 라 붙었다. "힉...아냐..." "어머나.... 정말 무서운가봐." 에코가 애처로운듯 볼비를 보다가 어떻게 설득좀 해보라는 눈길로 아네모스를 향 해 고개를 돌렸다. "저.... 마시는 아주 착해요. 걱정 안하셔도 되요. 저희랑 같이 가면, 아이니강에 서 배를 탈때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을겁니다. 어젯밤 같은 일도 안생길 거고요. 혼자 갈 자신 있으세요?" 벽에 반쯤은 들러붙어 있던 볼비가 아네모스의 부드러운 말이 들리자 두손을 꼼지 락대며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그러면 저희랑 같이 가요. 잘 지켜 드릴께요." '누가 들으면 아네모스가 지켜주는 걸로 알겠네.' 시원한 물이 담긴 대야에서 몸을 식히고 있던 블루잉은 단발머리의 부드러운 인상 을 하고 있는 아네모스를 가소롭게 바라 보았지만 그말을 입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어느정도 시간이 흐르자 에코와 아네모스는 정의감과 사명감 넘치는 알렉토까지 합 세하여 볼비를 함께 가자고 설득 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러니까 알렉토는 마을에 더 남아서 진상을 조사하고 싶다는 거지?" "그래." "알렉토... 정의감도 좋지만 아네모스하고 에코는 하루라도 빨리 수도에 가야되는 거 아니야? 왕궁 보수 작업이 아무리 몇년이 걸리는 일이라지만 늦께가서 좋을 건 없지 않겠어?" 메디아와 알렉토의 대화에 끼어든 블루잉은 시원한 물이 찰랑거리는 작은 대야에 서 푸른색의 머리를 길게 빼고 말했다. "아닙니다. 우린 괜찮습니다. 하루 이틀 늦어진다고 큰 일이 나는 것도 아니고요." "맞아. 우린 아무 이상없어. 나도 뭐 오빠 따라서 오람에 가면 일자리 하나 얻어 볼까하고 가는 거니까. 솔직히 페렌토에서는 나의 춤 실력을 알아주는 사람들이 없거든. 수도 오람에 가서 큰 무대에 서보는 게 내가 제일 바라는 일이기도 하고 마침 오빠가 간다고 해서 따라 나선건데 좀 늦어진다고 갑자기 내가 설 수 있는 무대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여기서 좀 머물러도 상관없어." 아네모스와 에코의 흔쾌한 대답이 들리자 알렉토가 메디아와 마시를 보았다. "메디아야. 우리 여기서 더 놀다 가자. 응?" 마시는 물론 재미있는 유희거리를 놓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래? 그럼 한번... 마녀 사냥이라는 것에 끼어 보도록 할까?" 메디아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찬성을 표시했지만 내심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진짜 마녀일리가 없지.' 그때 갑자기 그들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예? 영주부인이 우리를 초대했다고요? 저녁식사에?" 말을 전해주는 주인의 눈은 왠지 곱지 않으면서도 걱정하는듯한 상반되는 감정을 나타내고 있었다. 주인은 잠시 벽쪽에 있는 난쟁이 드워프를 바라보고는 다시 말 했다. "그렇소. 가브리엘님이 초대했소." "왜요?" "모르오. 마을에 손님이 있다는 말을 전해 들으신것 같소. 이 마을에 외부인이 들 어 온 것이 하도 오래전 일이라 그런 걸지도 모르겠소." "하지만 저기....에? 나갔네." 무뚝뚝하게 말을 전해준 주인은 급한 일이 있기라도 한듯 무언가 더 물어보기도 전에 방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사실 주인은 아침일찍 영주의 기사들과 마녀가 산다는 곳에 다녀 온 길이였다. 그 러나 그들이 간 곳에는 아무도 없는 텅빈 집과 누군가 불을 피운 흔적이 남아 있 었을뿐이여서 마을사람들과 기사들은 빈손으로 마을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그 는 마녀의 집앞에 남아있는 사람의 흔적 때문에, 한밤중에 나갔다 온 손님들을 의 심할 수 밖에 없었고 그는 자신의 생각을 기사들에게 말했다. 그리고는 성으로부터의 저녁식사 초대라는 전갈이 오후 늦께 도착했던 것이다. 주 인은 성으로부터의 전갈을 전해주면서도 자신의 집에 묶고 있는 손님들이 의심되 기도 했지만 혹시 자신이 넘겨 짚은것이 아닌가하고 불안하기도 하여 죄책감을 느 끼고 있었다. 메디아와 일행들은 주인이 성으로부터의 초대를 알려주고 나가자 갈피를 잡지 못 하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지 않아?" "이상하긴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알렉토? 좋은 일 아니야?" 알렉토의 신중한 말에 에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밤에 어디를 다녀왔는지 알고 있는듯 하쟎아?" "에? 그래서... 설마 우리가 마녀를 ...에...저..그러니까. 놓아준거네? 하지만 그 할머니는 아니라구 했쟎아?"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믿어줄리가 없겠지. 그들에겐 지금 분풀이 속죄양이라도 필요할 껄?" 에코의 당황스런 목소리에 메디아가 차갑게 대답했다. 그러자 한쪽 침대에 느슨하게 앉아있던 아네모스가 일어나며 말했다. "어쨌든 가봐야 할 것 같지 않습니까? 벌써 저녁시간이 다 되었어요. 그곳에 가면 왜 우리를 초대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 가자. 먹을 거 준다쟎아. 먹을 거-." 침대에서 뒹굴며 대화에는 끼어들지도 않던 마시가 메디아의 옷자락을 잡아당겨 일어나며 외쳤다. 일행이 언덕위에 있는 영주의 성을 향해 저녁무렵 마을 광장을 지나고 있을때였 다. 서쪽으로 태양이 기울고 하늘이 붉은 빛을 띠우기 시작하는 마을광장에는 정 성스럽게 잘 쌓아 올려진 장작더미가 을씬년스럽게 버티고 있었고 그 주위로는 살 벌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는 몇몇의 마을 사람들이 장작더미를 물끄러미 바라본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일행이 그들을 이상한듯 바라보자 일행을 안내해가던 병사가 묻지도 않은 말을 착 실히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저들은 딸들을 잃은 마을 사람들인데 장작더미가 세워지고는 거의 날마다 저러고 지낸답니다. 사정이야 안됐지만, 오늘 잡으려던 마녀가 어떻게 알았는지 도망을 치는 바람에 저들의 마음을 달래줄 수도 없게 되었지요. 여러분이 보기에도 참 불쌍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저렇게 있는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 니고 도망간 마녀를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지요. 하긴 잔인하게 찢어져 서 벌판에 버려진 딸을 보고 제정신 가질 부모가 몇이나 있겠습니까. 미쳐 날뛰는 사람도 여럿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러면서 병사는 일행을 의미심장하게 힐끗 돌아 보았다. 그러나 일행은 말없이 병사의 뒤를 따르며 마을 광장을 벗어날뿐이었다. 얕은 언덕에 자리 잡은 삼층구조로 되어있는 원형의 돌탑이 보이는 영주의 회색빛 성은 영주의 성이라고 하기에는 좀 작은 크기였는데 칙칙한 벽색깔과 낡은 구조 로 보아 오래된 흔적이 역력했지만, 제법 관리를 잘 한듯 대체로 깨끗하고 화려한 조각품이나 잘 손질된 정원도 볼 수 있었다. 성의 크기에 비해 머무르는 기사들 과 용병은 꽤 많은 듯 일행이 지나는 곳마다 기사와 용병들이 가끔 눈에 들어왔고 그럴때마다 일행을 바라보는 그들은 야릇한 눈빛을 띄고 있었다. 아내가 죽고 외롭게 홀로 딸 하나만을 키우던 늙은 영주에게 시집 온 가브리엘은 삼십대 후반의 아직도 아름다운 외모를 소유하고 있는 흑발의 여자였다. 그녀는 하얗고 말끔한 피부의 얄상한 얼굴형의 미인이였는데 일행이 다가가자 둥근 원형 의 홀에서 그들을 맞이하며 상냥한 미소를 던지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여러분... 이곳에 손님이 온지도 참 오랜만이군요. 더구나 이토록 아름다운 숙녀분들까지 오시다니 영광입니다." 가브리엘은 에코와 메디아를 바라보며 화사하게 웃었는데 잘 다듬어 올려놓은 검 은 머리에 휩싸인 얄상한 얼굴모양이 훨씬 아름답게 보였다. "오히려 지나는 여행자에 불과한 저희를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인." 귀족이나 신분이 높은 자를 오랫동안 경험한 아네모스가 적당한 예의를 갖추어 말 하자 영주부인은 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귀족이라면 의례히 그렇듯이, 식당은 몇십명이 들어가 식사를 할 수 있을정도로 넓고 고급스럽게 치장되어 있었다. 벽에는 오래된 벽화가 고풍스럽게 그려져 있 었고 창도 햇살이 잘 들어오도록 설계되어 있어서 석양빛이 은은히 비추는 식당은 그 넓이에도 불구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러나 일행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기사 두명은 전혀 아늑한 식당과는 어울리 지 않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는데 가브리엘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죽은 영주의 가신들로 오랫동안 영주를 위해 봉사했던 충직한 기사라는 것이었다. 한명은 하얀 턱수염을 적당히 기르고 있는 중후한 인상의 남자였는데 빵을 뜯어 먹으면서도 눈길은 조심스레 수다를 떨고 있는 에코와 아무말 없이 먹는데에 열중 하고 있는 메디아를 살피고 있었고 또 다른 젊은 기사 한명은 눈에 띌 정도의 위 험스런 눈빛으로 알렉토를 지켜보며 고기를 썰어 먹고 있었다. 알렉토 입장에서 는 젊은 기사가 덩치만 크고 힘만 셌지 실제로 전투력이 그다지 강해 보이지는 않 았다. 하지만 그는 식사시간 내내 위험스런 적대감을 뿜어내고 있는 자들 눈앞에 서 태연하게 잘 먹을 수 있을만큼 능청스럽지는 못 했다. 가브리엘은 시종일관 품위있고 친절한 주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하얀 피 부에 약간의 주근깨가 있어 보이는 그녀의 얄상한 얼굴에서는 식사시간 내내 미소 가 떠나지 않았다. 가브리엘은 소식주의자인지 약간의 채소와 과일만으로 식사를 하고 있었고 대화를 이끌어 나가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려고 애썼다. 그 러면서도 그녀의 내리 깔리는 속눈썹 아래의 푸른 눈동자는 예사롭지 않은 빛을 발하며 생동감 넘치는 에코를 유심히 훔쳐보고 있었다. - 계 속 - 23회는 오프로 인하여 늦어졌던 거예요. 죄송..^ㅠ^;;;; 다시는 안 그럴께요.^^;;(지킬 수 있을까? ㅠ.ㅠ) 무더운 여름 건강 조심하세요. 여러분... 방긋 방긋 * ^ㅛ^ * 번 호 : 25 / 83 등록일 : 1999년 07월 26일 00:18 등록자 : CHO1971 조 회 : 2339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25.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달빛에 여울진 물 위에 너 자신을 비추어 보아라. 네가 무엇으로 보이더냐?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이더냐? 작은 파문에 흔들리는 너는 한낮 그림자에 불과하지 않더냐? 제 25 장 사악한 욕망. 일행은 영주의 성에서 머물고 가라는 가브리엘의 정중한 부탁에 각자 화려한 방 에서 밤을 맞이하고 있었다. 깜깜한 어둠속에 메디아와 에코가 각자의 침대에서 잠들어 있는 방은 꽤 넓은 편 이었는데도 짙은 어둠으로 인해 답답해 보였고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여러 개의 창으로는 달빛이 들어오고 있었지만 크기가 작아 방안을 모두 비추지는 못 하고 있었다. 흰색의 깨끗한 침대에서 몸을 뒤척이는 에코는 무언가 웅얼거리는 소리를 잠시 내었을뿐 깊은 잠속에 빠져 있었다. 아침부터 하루 온 종일 낮잠을 잔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곤히 자는 모습이었다. 자정이 넘어갈무렵 무거운 나무와 쇠로 만들어진 방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는 소리 가 희미하게 들렸다. 메디아는 자신이 조심스럽게 설치해 놓은 마법진이 희미하게 진동하는 것을 느끼 며 선잠에서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꺼림낌 없이 방안에 들어온 세남자는 저녁식사를 함께 했던 젊은 기사와 병사들 로 보였다. "이봐, 조심해." 에코의 이불을 걷어내고 그녀의 머리를 한손으로 들어 올리던 남자가 반대편에서 메디아의 허리를 끌어올려 어깨에 짊어지는 남자에게 눈짓을 하며 조용하게 속 삭였다. "걱정할 것 없어. 어차피 수면제 때문에 벼락이 내리쳐도 모를걸..." "떠들지 말고 어서 옮겨라." 젊은 기사는 마치 장작을 나르는 병사들에게 말하듯 느긋하면서도 지루한 얼굴로 병사들의 앞장을 서며 지시했다. 그들은 메디아와 에코를 어깨에 짊어지더니 긴 복도를 지나 돌계단을 따라 지하 로 향했다. 지하의 쇠창살을 열고 들어간 방은 오래된 고문실처럼 보였는데 정면의 벽쪽에 욕 조로 보이는 커다란 통이 있었고 욕조의 한쪽끝에는 사람이 들어갈만한 크기의 커 다란 인형같은 형태의 조각이 세워져 있었다. 또다른 벽에는 쇠꼬챙이와 날카롭게 번쩍이는 도끼가 걸려 있었으며 푸른 곰팡이가 바닥부터 기어오른 벽에는 말라 붙은 핏자욱이 횃불아래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가브리엘. 어느 것 먼저 할래?" 젊은 기사가 방안에 하얀 나이트가운을 입고 있는 가브리엘을 향해 말했다. 흰색 나이트가운을 걸치고 욕조에 비스듬히 앉아 있던 가브리엘은 병사들이 탁자 위에 내려 놓는 에코와 메디아에게 다가와 에코의 드러난 살결을 손으로 쓸어내 리며 젊은 기사를 향해 대답했다. "이쪽이 좋겠어. 이 윤기나는 건강한 피부 좀 봐. 이런 건 정말 오랜만이야. 시 골구석의 촌스런 여자들과는 달라 보이지 않아 반키?" 젊은 기사 반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입술을 비틀어 올리는 웃음을 잠깐 지 어 보이고는 탁자 위에 구부려 누워 있는 에코를 한쪽 팔로 들어서 욕조에 세워 져 있는 인형모양의 조각품으로 다가갔다. 조각품은 양팔로 품을 안고 있는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그 쪽으로 다가간 젊은 기사는 인형의 한쪽을 열었다. 인형의 안쪽은 속이 텅비어 있었고 열려진 쪽 안에는 두꺼운 가시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그 안에 사람이 들어가면 온 몸 이 가시에 찔려 피를 흘리며 죽을것이 분명했다. 반키는 잠들어 있는 에코를 인형속으로 넣으려고 애를 썼지만 자꾸만 쓰러지는 여자의 몸이 쉽게 인형속에 고정되어 지지 않았다. "반키. 뭐하는 거야? 어서 하란 말이야." 가브리엘은 인형 아래의 욕조로 들어가며 기대에 찬 목소리를 냈다. "그런데 가브리엘. 당신은 정말 이게 젊어지는 방법이라고 생각해?" 반키가 자꾸만 자신의 어깨로 쓰러져 내리는 에코를 받쳐들며 말했다. "후후... 날 보고도 모르겠어? 그동안 내가 얼마나 아름다워 졌는지 보라구. 젊 은 여자들의 싱싱한 피가 내 피부를 더 하얗고 생생하게 해주었다구." 가브리엘은 자신의 팔을 들어 보이며 나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반키도 그래서 날 좋아하는거 아니야? 그 늙은 영주와 보기 싫은 딸을 나 대신 죽여준건 순전히 날 갖고 싶어서가 아니였냐구? 내가 계속 아름답기를 원한다면 내가 시키는대로 해. 그런데 반키 도대체 언제 목욕하게 해줄거야?" "기다려봐. 이 여자 좀 깨워야 할것 같은 걸... " "싫어. 깨워야 하려면 시간이 더 걸릴거야. 난 더 기다리기 싫어. 요즘은 피로 목 욕한지도 오래 되었단 말야. 거기에 넣지 말고 그냥 머리만 잘라서 예전처럼 반키 가 들고 있어도 되지 않아? 금방 끝내고 저 건방져 보이는 여자도 오늘 안에 해치 울테니까." 가브리엘은 식사시간 내내 자신의 말에는 대답도 안하고 꾸역꾸역 먹고만 있었던 메디아를 표독스럽게 보았다. "저 여자는 깨워서 서서히 피를 뽑아야 겠어. 호호호... 그럼 훨씬 즐거울것 같 아. 이봐 거기 너. 약제실에 가서 유란초를 가져와서 저 여자한테 먹여." 가브리엘은 한쪽에 지키고 서 있던 병사에게 손짓을 해서 명령을 하고 일어서더 니 도끼를 가져가서 반키에게 내밀었다. 반키는 도끼를 받아 들더니 에코를 돌려 안고 욕조로 그녀의 목을 내밀게 만들었 다. 메디아는 곤히 자는척 차가운 탁자위에 누워 있으면서 잠시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할까? 흐음... 저 반키라는 작자의 목을 자를까? 아냐... 그건 좀 시시 하고 저 녀석의 팔을 자르고 다리를 잘라서 저 인형속에 넣어 버릴까? 흠... 그 게 좋을것 같군. 저 여자는 남자의 피도 좋아할런지 모르겠네? 뭐...그거야 상관 할 일이 아니지 뭐. 이제부터 슬슬 놀아 볼까?' 반키는 왜 자신의 손이 내려오지 않고 그대로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반키? 뭐해? 어서 자르지 않고?" "큭..." 반키는 이마에 땀방울을 흘리며 있는 힘껏 도끼를 내리치고 있었지만 그의 팔은 조금도 움직여 지지 않았다. "이봐. 이리와서 내 팔 좀 잡아 당겨봐." 반키가 화가 바짝오른 음성으로 병사를 부르자 병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다가와 서 반키의 팔을 망설이며 붙잡아 내렸다. 그러나 위로 올려진 반키의 팔은 꿈쩍 도 하지 않았다. "뭐야? 반키?" 욕조에 앉아있던 가브리엘도 짜증을 내며 일어나서 반키의 움직이지 않는 팔을 붙잡아 당기기 시작했다. 둘이 달러붙어 낑낑대고 있는 사이 탁자에 누워있던 메 디아는 어느새 일어나 그들의 모습을 심각한척 바라 보았다. "쯔쯧... 그래서야 움직이겠어? 내가 보기엔 팔을 잘라야 될것 같은데?" 메디아의 걱정스러운듯한 목소리가 돌벽에 울려 퍼지자 모두가 화들짝 놀라며 메 디아를 돌아 보았다. 그들이 돌아보는 순간 메디아의 손이 앞으로 내밀어 지고 그녀의 입술은 무언가 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수비병의 몸이 떠밀리듯 날아가 벽에 뒷통수를 박고 기절했고 가브리엘의 얄상한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며 욕조로 떠밀려 들어가서 얕은 살얼음이 온 몸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으으윽.... 하악...이게 모...무..무.어....." 가브리엘의 입술은 순식간에 얼어 붙어서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메디아는 천천히 움직여서 수비병과 반키 그리고 가브리엘을 왔다갔다 하면서 혀 를 찼다. "쯔쯧...이런..이런..." 메디아는 에코를 반키에게 떼어내어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지게 두었다. 그리고 는 반키의 손에서 빛을 내고 있는 날선 도끼를 빼앗아 들어 빙글빙글 돌리며 이 죽거렸다. 반키의 코끝으로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떨어져 내리고 메디아는 그의 눈앞으로 바 짝 다가가 도끼날을 그의 눈동자앞에 보여 주었다. "어머나 손을 못 내려서 답답한 모양이네. 이봐 반키 팔 아프지?" 반키가 고개를 저었다. "쿠쿡... 난 인심이 좋아. 사양할 거 없다구." 그녀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반키의 들어 올려진 팔을 힘껏 내리쳤다. 그녀의 얼 굴로 뜨거운 피가 튀어 올라 턱으로 흘러 내리기 시작했다. 메디아는 혀를 내밀 어 피를 핥작거려 맛을 음미했다. "퉤-. 별로 내 취향은 아니군. 쿠쿡..." 메디아는 즐거운 일을 하는 어린아이처럼 입가에는 미소까지 띄우며 흥얼거리기 까지 했다. 그녀는 붉은 선혈이 흘러내리는 도끼를 가브리엘의 하얀 잠옷에 스윽 문질러 닦아 내었다. "흐음... 이제 좀 편해?" 반키는 부릅떠진 눈으로 두려운듯 메디아의 손에 들려진 도끼만을 바라보고 있었 다. "저런저런... 아직도 불편한가 보네. 그렇지?" 그녀는 마지막 질문을 던지고는 반키의 나머지 팔을 향해 도끼를 움직였다. 바닥 은 반키의 피로 흠뻑 젖어 들었고 바닥에 누워 있던 에코의 몸도 붉은 피에 절어 있었다. 메디아는 반키의 팔 없는 몸을 인형 조각품 속에 집어 넣고 의미있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봐. 가브리엘 이젠 투덜거리지 않아도 되겠지? 목욕을 하게 해줄테니 말이야. 아! 그런데 남자 피로도 목욕을 하나? 뭐 이번 기회에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기대되지 않아? 피부가 아주 녹아내릴듯 부드러워질거야." 가브리엘의 몸은 얇은 성애가 낀 상태로 굳은채 입술만이 희미한 떨림을 보이고 있었는데 그 두눈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메디아는 가브리엘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인형의 문을 닫았다. 끼긱 소리를 내며 쇠가시가 인간의 몸속으로 파고드는 소리가 적랄하게 들리고 인형의 안쪽에 서 주르륵 소리를 내며 흘러 내리는 액체가 진뜩하게 욕조안으로 퍼져 들어가며 가브리엘의 하얀 가운을 적셨다. 메디아는 욕조의 한쪽 끝에 서서 인형의 문을 힘껏 밀며 잔인한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 계 속 - ㅠ.ㅠ 죄송해요....히잉..잠꾸러기 뱀파..에잇..(스스로를 학대해 보자..--;;) 탗? 번 호 : 26 / 83 등록일 : 1999년 07월 29일 23:59 등록자 : CHO1971 조 회 : 2326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26.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달빛에 여울진 물 위에 너 자신을 비추어 보아라. 네가 무엇으로 보이더냐?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이더냐? 작은 파문에 흔들리는 너는 한낮 그림자에 불과하지 않더냐? 제 26 장 상실. 더운 피가 가브리엘의 얼어있는 몸을 적시기 시작하자 그녀의 두 눈에 고통의 빛 이 스며들고 그녀의 피부가 붉은 피와 함께 회색으로 녹아 내리기 시작했다. 한 기가 스며 있던 지하의 욕조에서는 하얀 수증기가 올라오고 있었고 붉고 진득한 액체가 가득한 욕조 속에 잠겨있는 흰빛의 가브리엘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있 었다. 그녀의 두 눈을 똑바로 보고 있는 메디아의 보라빛 눈동자에는 아무런 감 정도 담겨 있지 않았고 가브리엘에게는 그것이 더 무섭고 끔찍하게 느껴지고 있 었다. 인형속에서 끊임없이 흘러 내리던 피가 어느정도 졸졸 거리며 새어 나오자 메디 아는 인형의 문에서 손을 떼고 반키의 잘려진 팔을 들어 욕조속에 집어 넣었다. "어때 가브리엘? 살이 녹아 내리는 것처럼 부드러워 졌지? 참. 녹아 내리는 것처 럼이 아니라 녹아 내린 거지... 킥." 메디아는 비아냥거리며 한쪽 벽에 머리를 쳐박고 있는 병사의 몸을 끌어 내어 인 형의 몸속에 짓이겨진채 놓여 있는 반키의 흔적을 두 손으로 쓸어내고 그 안에 병사를 집어 넣어 다시 문을 닫았다. 다시금 비릿한 냄새를 풍기며 인형에서 피가 쏟아져 내렸고 반쯤만 피에 젖어 있 던 가브리엘의 몸이 점점 더 액체속으로 잠겨 들어가기 시작했다. 피냄새가 진동하고 메디아가 흥얼거리며 이쪽저쪽을 돌아 다니고 있었지만 에코 는 바닥에 누운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에코의 옷은 온통 바닥의 피와 뒤엉 켜 진득하게 젖어 있었고 머리카락도 피에 물들어 있었다. '흐음... 이만하면 된거 같고... 이젠 어떻게 하지?' 메디아는 지저분한 바닥에서 발길을 돌려 탁자에 올라가 쭈그려 앉아 고민하기 시 작했다. 지하의 계단을 누군가가 밟아 내려오는 소리가 메디아의 귀에 들려 왔다. 그러나 메디아는 쭈그려 앉은 상태 그대로 기다렸다. 쇠창살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저녁에 함께 식사를 했던 나이든 기사였다. 그는 실 내의 살벌한 풍경에 아연한듯 입을 잠깐 벌렸지만, 자주 보아온 풍경인지 냉정한 눈빛으로 사방을 둘러 보더니 메디아에게 물었다. "그대 짓이오?" 메디아는 탁자 위에 다리를 쭈그리고 있는 것이 불편해 다리를 피며 고개를 끄덕 여 보였다. 나이든 기사는 그대로 메디아에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고맙소." "에?" 메디아의 의아한 반응에 나이든 기사는 한탄스럽게 말했다. "모두 나의 탓이오. 저 사악한 여자가 마을 처녀들을 납치해 죽이는 것을 알고 있 었지만 차마 영주님께 보고를 올릴 수 없었고 반키와 눈이 맞아 영주님을 죽이고 그분의 따님까지 죽게 되었어도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었던 무능력한 사람이 바로 나요. 오늘도 당신들이 저 사악한 여자를 대신해서 마을사람들의 희생양이 될 것 을 알고 있었지만 그 조차도 방관하고 있을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소. 하지만.... 이번만은 막아 보고 싶었소. 그래서 이렇게 이곳으로 내려 온 거였는데..... 당신 이 저 놈들을 처리해 주어서 정말 고맙소." "당신.... 엄청 무능력한 기사네요." 메디아가 한마디 하자 나이든 기사는 얼굴을 붉혔다. "우욱... 할 말이 없소. 하지만 이곳의 기사와 용병들은 모두 반키의 손에 의해 죄우되는데다가 나에게는 실권이 없었소. 지금도 당신과 당신 일행들이 안전하지 는 않소. 이미 반키가 죽었으니 기사와 용병들은 내가 어떻게 해볼수 있지만 얼마 전에 이곳에 온 마법사는 저 여자의 동생이라고 했소. 어서 이곳을 도망가는것이 좋을거요." 메디아는 처음의 자세 그대로 있으면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당신의 일행들은 나의 수하들이 지키고 있어서 안전하지만 아가씨들이 이곳에 있 어서 데리러 온거요. 어서 이곳을 떠나시오." "우리를 구하러 당신 혼자 왔단 말예요?" 메디아가 의심스럽게 묻자 기사는 예상한듯 곧바로 말했다. "반키는 힘만 세지 멍청한 자요. 방심하게 만드는 것은 아주 쉽소." "흐음. 저기.... 마을사람들에게 가서 마녀는 없다고 말하세요. 저 여자가 미쳐서 그랬다고 말이예요. 그러면 마을에서 저 여자를 화형식에 처할거고 모든게 잘 해 결될 거예요." "방금 내말 못 들었소? 마법사 동생이 있단 말이요." "이봐요. 머리가 나쁜거예요? 나쁜척 하는 거예요? 지금 내가 어떻게 이렇게 만 들었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순간 나이든 기사는 당황스럽게 시선을 돌려 주위를 살폈다. 그는 헛기침을 내며 다시 얼굴을 붉혔다. 그는 선한 사람인지는 몰라도 약간은 우유부단하고 결단성 이 없는 사람인 모양이었다. "크흠. 미안하오. 내가 미처.... 그대도 마법사인가 보군." 메디아는 실소를 지으며 탁자에서 내려와 방을 나오며 뒤를 향해 말했다. "거기 나랑 같이 온 여자 좀 적당히 처리해 주세요. 그리고 욕조 안에 있는 영주 부인 죽은거 아니니까 잘 지켰다가 날이 밝으면 마을 사람들한테 인계 하세요." "처리라니?" 나이든 기사가 바닥에 피와 뒤섞여 있는 에코를 난감한듯 바라보며 묻자 계단을 올라서던 메디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아서 정돈해서 침대에 던져 놔 주세요." 지하계단에서는 더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태양이 하늘 높이 솟아 있는 마을 광장에는 붉은 불꽃이 검은 연기를 공중으로 뿜 어내며 타오르고 있었다. 뜨거운 열기가 공기를 달구며 사람들 사이를 휘돌았지만 사람들의 가슴은 차디차게 굳어 있을뿐이었다. 높게 솟아 있는 장대에 매달려 있는 가브리엘의 육체는 아직도 의식을 잃지 않은 듯 머리를 사방으로 흔들며 처참한 비명을 울리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순 식간에 없어져 버렸고 온몸은 진물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검게 타오르는 불길속 에서도 가브리엘의 차가운 눈빛은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가브리엘이 이미 딸까지 있는 늙은 영주에게 팔려오다시피 결혼한 때에는 스무살 의 어린 나이였다. 그녀는 처음 몇년간은 죽은 전처의 아기를 키우느라 정신이 없 었다. 그녀가 결혼한지 어느정도 세월이 지나자 영주의 딸은 예쁜 이목구비가 드 러나기 시작했고 가브리엘은 어느덧 나이가 들어 삼십대가 넘어서고 있었다. 갓 결혼했을때의 청초함은 그녀에게서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던 것이다. 그녀는 나날 이 아름답게 성숙해 가는 의붓 딸을 바라보며 자신도 알 수 없는 상실감을 느껴 가고 있었다. 늙은 영주는 가브리엘이 서른을 넘기 시작하자 다른 여자들에게 눈 을 돌렸고 그녀의 상실감은 더 커져만 갔다. 어느날인가 화창한 가을날 아침이였다. 가브리엘은 거울을 들여다 보며 그 속에 있는 낯선 여자의 얼굴을 당황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냐. 이건 내가 아냐..... 이럴수는 없어. 억울해. 이런게 나일리가 없어.' 어젯밤에도 늙은 영주는 새로 들어온 어린 하녀를 품었고 가브리엘은 늙은 남편 으로부터도 버림받은 자신이 못견디게 비참했다. 그녀는 충동적으로 가위를 들고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자신의 검은 머리카락을 사납게 잘라내기 시작했다. 그때 였다. 가브리엘의 창가로 싱그러운 바람과 함께 해맑은 처녀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뜰에서 열매를 따고 있는 젊은 하녀와 열일곱살이 되는 영주의 딸이였다. 그녀는 뜰로 나가며 가을햇살에 반짝거리는 젊은 처녀들의 눈부신 얼굴을 바라 보았다. 그녀의 가슴속으로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오며 주체할 수 없는 분노와 질투가 타 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손에 쥐고 있던 가위를 들어 젊은 하녀의 가슴을 찌르고 있었다. 선명하게 붉은 피가 가브리엘의 드러난 팔 위로 흘러 내렸다. 그녀는 홀린듯 자신 의 피부 위에서 미끄러지는 반짝이는 빛을 바라 보았다. 아름다웠다. 햇살아래 피 가 흘러내린 자리는 유난히 눈부시도록 희고 촉촉해 보였다. 가브리엘의 눈에 기 쁨이 물밀듯이 스며 들었다. 다시 아름다워 질 수 있었다. 다시 젊음을 찾을 수 있을것 같았다. 가브리엘은 드디어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하녀가 죽자 성안이 잠시 시끄러웠지만 그자리에 가까이 있던 젊은 기사 반키가 가브리엘을 도와 모든 일을 조용히 처리해 주었다. 영주의 딸도 히스테릭한 가브 리엘의 행동에 놀랐지만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귀족처녀로서 입을 다물고 모르는 척 해 주었다. 가브리엘은 그때부터 젊은 기사 반키를 유혹해 육체적 사랑을 나누며 다시 여자 로서의 삶을 살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마을에서 젊은 처녀들을 납치해 피의 목 욕을 즐기며 그녀는 점점 탐욕스런 광기에 젖어가고 있었다. 가브리엘은 자신이 왜 지금 타오르는 불길속에 있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 다. 단지 아름다워 지고 싶었을 뿐이었다. 잃어버린 자신의 젊음을 되찾고 싶었 을 뿐이었다. 왜 자신이 비난받아야 한단 말인가? "난 잘못한게 없어. 난 빼앗긴 걸 찾으려 한것 뿐이야!" 그러나 가브리엘의 절규는 분노한 마을 사람들의 외침속에 묻혀 버렸고 아무도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가브리엘은 이제 그녀가 그토록 집착하던 육체의 아름다움을 빼앗긴채 마을사람 들의 분노의 표적이 되어 타오르는 불길에 한줌의 재가 되어 사라져 가고 있을뿐 이었다. 마을의 외곽에서 불길을 구경하고 있던 에코가 툴툴 거리기 시작했다. "메디아 너 사람이 그럴수 있어? 아침에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에코는 메디아를 향해 씩씩 거리며 따지고 있었다. 그러나 메디아는 에코를 쳐다 보지도 않고 턱을 치켜들며 멀리 사라지는 연기를 볼뿐이었다. "치... 해도해도 정말 너무한다. 그 괴물같은 아저씨가 나를 들고 물통에 빠뜨렸 을때 내가 심장마비로 죽지 않은게 신기할 정도야. 메디아 너는 그렇게 위험한 나를 버려두고 잠이나 자러 갈 수가 있는 거니? 어? 이봐 메디아 말 좀 해보란 말 이야. 사람이 어떻게 그럴수가 있어?" 에코가 분한듯이 손가락질까지 하며 말을 몰아 메디아에게 다가가자 곁에 있던 아 네모스가 그녀를 붙잡아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오빠. 너무해.. 정말...흑..." "우웅...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마시는 아침부터 지금까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무슨 일이냐고 사방으로 물었지만 대답을 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도 그럴것이 메디아를 제외하고는 밤 새 잠만 잤던 일행이였기에 말을 해줄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에코는 자신이 당한 일을 제대로 알아야 겠다는 의지로 나이든 기사를 괴롭혀서 모든 일을 들 을 수 있었고 메디아를 향해 비난을 퍼붓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저 인정머리 없는 메디아에게 물어 봐 마시." 에코는 아네모스를 붙들고 있으면서도 신경질적으로 마시에게 말했다. 그제서야 에코를 돌아 보며 메디아가 한마디 했다. "에코. 누가 자고 있으랬어? 난 자는 사람 깨우는 취미 없어." 그러고는 말을 몰아 길을 가기 시작했다. 에코는 더 씩씩거렸고 마시는 고개를 갸 우뚱하며 에코를 붙들고 늘어졌다. "에코야 나한테 말 좀 해봐. 어제 모했어?" "우잇. 잠 잤다쟎아." - 계 속 - 번 호 : 27 / 83 등록일 : 1999년 08월 01일 23:40 등록자 : CHO1971 조 회 : 2349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27.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달빛에 여울진 물 위에 너 자신을 비추어 보아라. 네가 무엇으로 보이더냐?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이더냐? 작은 파문에 흔들리는 너는 한낮 그림자에 불과하지 않더냐? 제 27 장 도망자. 일행을 실은 배는 적당히 흔들리며 스누강 상류를 거슬러 무역도시 로스코를 향 해 올라가고 있었다. 차가운 강물이 도도하게 발밑으로 흘러가며 햇살에 반짝이 고 간간히 작은 배를 띄워 낚시를 하는 어부들의 모습도 보이고 있었다. 강가에는 바람이 스칠때마다 연초록빛 풀들이 무성하게 흔들렸다. 따뜻한 기운 이 온 대지를 깨우고 새순이 돛아나는 연두빛 나무들의 싱그러운 모습이 아름다 운 봄 강가를 이루고 있었다. "후아아~~ " 따뜻한 햇살과 살랑이는 바람에 졸고 있던 에코가 아네모스의 등에 기댄채 팔을 벌려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했다. "우웅~~~ 날씨가 너무 좋다." 물내음이 짙게 배인 바람을 깊게 호흡하며 에코는 반짝이는 푸른 눈을 한껏 뜨고 고양이처럼 나른한 몸짓을 해보였다. 에코가 움직이자 옆에서 바닥에 쭈그려 자 고 있던 볼비가 움찔하는 모양새가 보였다. 볼비는 홀링의 집을 떠나온 이후로 마시나 메디아가 움직일때면 지나칠 정도로 움츠려 들어서 항상 에코나 아네모스의 옆에 붙어 살다시피 했다. 멀리 풍경을 감상하던 아네모스가 볼비의 몸짓을 느꼈는지 손을 뻗어 볼비의 어깨를 감싸주 고 있었다. 알렉토는 갑판의 기둥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은채 움직이지 않았고 마시는 어느 새 젊은 여행객의 옆에 달라 붙어서 낚시를 방해하고 있었다. 결국은 여행객으로 부터 낚시대를 하나 얻어낸 마시는 시종일관 진지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고기 잡는 일에 열중했다. 그러나 젊은 여행객이 여러 마리의 물고기를 낚는 동안 단 한마리도 잡지 못한 마시는 슬슬 지루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블루잉이 마시의 옆에서 낚시를 구경하고 있었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자 마시를 무시하는 눈길로 한번 쳐다 보고는 발길을 돌려 느릿느릿 움직여 메디아가 엎어 져 자고 있는 곳으로 가기 시작했다. 블루잉은 메디아가 망토를 펼쳐서 햇살아래 그대로 누워서 자는 모습을 시큰둥하 게 바라 보았다. 다른 모든 일행들이 배의 구석구석에 자리를 잡은 것에 비해 메 디아는 햇살이 가장 잘 내리쬐는 중앙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거기에 누워서 자고 있었다. 블루잉은 속으로 욕을 하면서도 그녀의 등위에 올라가 자리를 잡고 눈을 감았다. 에코는 신선한 공기를 들여 마시고 사방을 한번 쭉 둘러 보고는 마시의 곁에 쭈 그리고 앉았다. "뭘 좀 잡았니?" 그러나 마시는 이마를 살짝 찡그리며 아무말도 하지 않고 고집스레 입을 다물어 보였다. 마시의 연약해 보이는 손에 들려 있는 기다란 낚시대에서는 아무런 반응 도 없었고 물결만이 유연하게 흐르고 있었다. 이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마시의 낚시대가 어느순간 힘차게 물속으로 당겨지 면서 마시의 몸도 휘청 거렸다. 서둘러 낚시대를 움켜 잡은 마시는 조용하던 배 위에서 떠나가라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야아... 물고기닷. 물고기야. 메디아야 나 좀 봐. 물고기를 잡았어..하핫. 에코 이거 아주 큰 놈인가 봐." 마시가 자랑스런 표정으로 에코를 돌아보자 에코도 신이 났는지 휘어진 낚시대를 같이 잡아 당겼다. 그러나 마시의 무지막지한 힘에도 세차게 흘러가는 물살에 잡힌 낚시대는 쉽게 물속에서 빠져 나오지 않고 거세게 당겨지고 있었다. "우잇. 굉장히 큰 물고기가 틀림없어. 햐앗!" 마시의 우렁찬 기합소리가 울리고 배위로 물방울을 사방으로 튕기며 낚시줄이 올 라왔다. 마시는 스스로의 힘을 감당 못해서 뒤로 벌렁 넘어졌고 손에는 부러져 버린 낚시대를 꼭 쥐고 있었다. 그는 만면에 우쭐한 표정을 떠올리며 벌떡 일어 나 소리쳤다. "야아. 내 물고기 크다. 저것들보다 훨씬 훨씬 크다. 후힛힛.." 마시는 헤벌쭉 웃으며 여행객이 잡은 물고기를 가르키고는 자랑스럽게 외쳤지만 주위 사람들은 썩은 벌레 씹은 표정으로 아연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뭐야? 왜 표정들이 그래?" "어헉.. 마시야... 저거...저거..." 에코가 말을 더듬으며 주춤거렸다. 갑판위에는 강물이 흥건하게 고였고 낚시줄에 매달린 아주 커다란 물고기(?)가 지저분한 수초와 함께 엉킨채로 누워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로 물고기일수 가 없었다. 오랜 여행으로 수 많은 경험과 신비한 일들을 들어왔던 사람들도 이때까지 물고 기가 옷을 입는다는 이야기는 듣지도 보지도 못 한 일이였다. 마시가 힘겹게 스누강에서 낚아 올린 것은 공교롭게도 물고기가 아니라 사람이였 다. 그것도 인간 남자로 아직도 살아 있는지 꿈틀거리고 있었다. 제일먼저 아네모스가 남자에게 다가가 이리 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수초에 엉켜 있는 남자는 옆구리에 화살을 맞은 상태였고 오랫동안 물속에 있었는지 엎드린 상태에서도 입으로 물을 토해내고 있었다. 봄이라지만 3월의 강물은 온몸을 얼려버릴 정도로 차가웠다. 그런 강물속에서 심 한 상처를 입어 피를 흘리면서도 오랜 시간을 견디고 살아 남았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였다. 아네모스는 급히 작은 칼을 꺼내어 약초를 바르고 남자의 옆구리에 깊게 박혀있 는 화살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검붉은 피가 주르륵 흘렀지만 이미 많은 피를 흘 렸는지 남자는 의식을 잃은채 작은 신음을 삼켰을뿐이었다. 바트는 왜 자신의 몸이 꼼짝도 안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현상금 사냥꾼들의 추적을 피해 스누강을 건너려던 그는 자신의 행적을 들켜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었다. 강물로 뛰어 들기 전 옆구리에 화살을 맞은 바트는 죽을 힘을 다해 헤 엄을 쳤지만 점점 심해지는 출혈로 정신이 혼미해 지고 있었고 다시 정신을 차려 보니 몸이 굳었는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도대체 여기는 어디지?' 바트는 자신의 몸이 무엇에 붙잡힌듯이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물속이 아니라는 것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움직이려고 몸을 틀자 고통이 옆구리를 사 정없이 찔러왔다. "으윽..." 그가 짧은 신음을 내지르자 바트의 귓가로 밝은 여자의 음성이 재잘거리듯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네모스. 여기 좀 봐. 이 사람 움직였어. 알렉토 잠깐 서 봐. 움직였다니까." 바트는 현재 온몸이 꽁꽁 묶여있는 상태로 바퀴가 달린 엉성한 들껏에 누워 알렉 토의 황갈색 말에 실려가는 중이었다. "신경쓰지 마. 마취 효과가 떨어져서 그런거니까. 로스코에 가면 좀 더 나은 치 료를 받을 수 있을거야." 아네모스가 실려가는 사내를 잠깐 바라보며 에코를 안심시켜 주었다. "너무 꽉 묶어 놓은거 아닐까?" "아냐. 상처도 심한데... 가다가 떨어지면 더 위험해 질거야. 적당히 묶어서 고 정을 시켜주는게 훨씬 안전하고 좋아." "그런데 저 사람 뭐하는 사람일까? 위험한 사람이면 어쩌지? 응? 화살을 맞고 강 바닥에 있던 사람인데 우리가 로스코까지 데리고 가도 괜찮을까? 혹시 죄짓고 도 망가는 사람 아닐까?" "위험한 자라도 할 수 없지. 이 근처에 버려두고 갈 수는 없쟎아. 어쨌든 마시가 끌어올렸는데...." 그러나 마시는 자신이 낚은 것이 물고기가 아니란 사실에 실망했을뿐, 끌어 올려 진 사람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졸지에 환자를 떠맞게 된것은 아네모스 와 알렉토일 뿐이었다. 메디아는 상관도 없는 사람을 치료해 주고 싶지 않다고 한마디로 거절하며 마법은 커녕 약초하나 주지 않았다. "그리고 도망자라면 로스코 수비병에게 넘기면 그만이지." "후아... 로스코까지 저렇게 끌고 가야 한다니....." 한숨같은 에코의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 앉는 사람도 있었다. 온 몸이 작은 수레에 고정되어서 움직일 수도 없는 바트는 로스코로 가고 있다는 말에 심장이 떨려오는 느낌이였다. 로스코를 겨우 탈출해서 빠져 나온지 며칠도 되지 않았는데 다시 그 곳으로 돌아가고 있다니 아찔해지는 기분이였다. 바트는 현상금 사냥꾼들과 도시의 수비병들의 눈을 피해 오람에서 이곳까지 도망 치는데도 몇번이나 목숨을 잃을뻔했다. 이미 그의 동료들중 상당수는 죽음을 당 했고 살아남은 자는 로스코에서 헤어져 각자 알아서 도망치기로 했었다. 그들을 쫓는 것은 비단 병사들과 현상금 사냥꾼만은 아니었고 킬러들까지도 그들 을 쫓고 있었다. 그런데 옴짝달싹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로스코까지 끌려가 고 있다는 사실에 바트는 어이없고 황당하기만 했다. 밤이 되어 야숙을 준비한 일행들은 모닷불 주위에 모여 따뜻한 차를 마시고 있었 다. "날씨가 훨씬 따뜻해 진거 같아." "응. 이제 며칠만 더 지나면 4월이야. 아마도 로스코를 떠나 아이니강을 건널때 면 4월이 되어 있을거 같아." "우~~웅... 그런데 저거는 왜 안 움직여?" 마시가 조그맣게 하품를 하더니 바트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아까 스프에 마취제를 좀 넣었어. 자꾸 헛소리를 하쟎아." "헛소리?" 아네모스가 에코의 말에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응. 자기를 두고 가라나? 저 몸을 해가지고 어딜 갈려고 하는지 몰라도 약간 정 신이 나간것 같아. 완전히 겁에 질린 표정을 하고는 자기는 갈데가 있다는 거야. 죽어도 로스코에는 못가니까 자기 좀 풀어 달라고 하쟎아. 아무리 바빠도 몸은 치료하고 가야지. 무슨일인지는 몰라도 죽는것보다는 며칠 늦어지는것이 훨씬 좋 은 일이라고 말해줘도 막무가내로 풀어 달라고 하길래 알았다고 하고는 마취제를 넣은 스프를 잔뜩 먹였어. 저 사람 진짜 도망자인 모양이야. 우리 로스코에 가 면 현상금 같은거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점점 의식이 가물가물 정신이 없는 바트는 필사적으로 도망가고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그의 다리는 꼼짝도 안하고 있었다. 그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흘러 내렸고 마음은 다급하기만 했다. 그를 쫓는 자들은 이미 그의 등뒤에 와 있는것 만 같았다. < 계 속 > 번 호 : 28 / 83 등록일 : 1999년 08월 04일 13:13 등록자 : CHO1971 조 회 : 2356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28.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달빛에 여울진 물 위에 너 자신을 비추어 보아라. 네가 무엇으로 보이더냐?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이더냐? 작은 파문에 흔들리는 너는 한낮 그림자에 불과하지 않더냐? 제 28 장 검은 그림자. 희미한 달빛조차 들지 않는 숲 속에는 일행이 피워놓은 불빛이 일렁였고 작은 벌 레들의 울음 소리만이 간간히 들려왔다. 오전 내내 스누강을 건너는 배 위에서 휴식을 취한 일행은 쉽게 잠이 오지 않고 있었다. 나직막한 돌에 앉아 차를 마시던 메디아가 가방을 뒤적뒤적 거리더니 넙 적하고 이상하게 생긴 솔 하나를 꺼내 들었다. "블루잉. 이리 와봐." 블루잉은 알렉토가 검을 닦고 있는 옆에서 검빛의 일렁임을 구경하고 있었다. 블 루잉이 메디아를 힐끗 보더니, 그녀가 들고 있는 작은 솔을 보고는 후다닥 달려 메디아의 무릎에 올라가 앉았다. 메디아는 가방에서 꺼낸 호리병에 솔을 담갔다가 꺼내더니, 무릎에 앉은 블루잉 의 짙은 푸른색 등껍질을 문질러 닦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등 청소 한지 오래된 거 같았어." 블루잉이 고개를 쭉 내밀어 메디아의 무릎에 기댔다. "반질 반질 윤나게 잘 닦아 줘." "알았어." 뭔가 하고 지켜보던 알렉토는 피식 웃으며 다시 자신의 검을 정성스럽게 손질하 기 시작했고 에코는 거북이 등껍질 청소하는 모습이 재미있는지 유심히 들여다 보았다. "그 호리병은 뭐야?" 에코가 솔질하는 메디아의 긴 손가락을 보며 물었다. "내 전용 목욕수." 기분이 좋은듯 눈을 감고 있던 블루잉이 금방 대답했다. "목욕수?" "응. 메디아가 특별히 만들어 준건데 이걸로 한번만 닦으면 몇 달동안 아주 편하 게 지낼 수 있어. 등이 가볍고 깨끗해 지는데다가 반짝반짝 윤도 나고 더 단단해 져서 안전하게 해줘. 그리고 아주 아주 시원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블루잉이 친절하게 설명했다. "가만히 좀 있어." 메디아가 자꾸만 움직이는 블루잉의 등을 잡아 고정 시키며 솔을 더 박박 문질렀 다. "으응..." 볼비는 아네모스와 에코의 사이에 끼어 앉아서 작고 오동통한 두 손으로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찻잔을 쥐고 조심스럽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볼비의 하얀 수염은 불빛에 반짝거리는 은빛 명주실처럼 보였는데 마시가 심심했던지 볼비에게 불쑥 다가가 그의 수염을 잡아 당겼다. "우아앗~~~" 화들짝 놀란 볼비는 비명을 지르며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붉은 볼을 더 빨 갛게 물들인 볼비는 수염을 마시에게 붙잡힌채 어쩔줄을 몰라 허둥대며 발버둥을 쳤다. '헤에.. 이거 재밌네.' 마시가 반색을 하며 하얀수염을 양옆으로 쭉 잡아 당겼다. 그러자 볼비의 얼굴이 옆으로 쫙 펴지며 핏기를 잃었다. 그때서야 황당하게 보고만 있던 아네모스가 마시의 손을 잡고 말리기 시작했다. 마시와 아네모스가 실갱이를 벌이는 동안 볼 비는 계속 징징 거렸고 조용하던 숲은 금방 시끌벅쩍하게 변해 버렸다. 바트의 가까이에 앉아서 검을 닦던 알렉토는 불빛에 검을 비춰 보고 있었는데 갑 자기 벌떡 일어나 검을 쥔 채 바트의 머리맡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두 다리를 벌리고 살벌한 눈길로 검을 당겨 전투 자세를 취했다. "어?" "알렉토?" "모두 조심해. 뭔가 위험한 것이 오고 있어." 볼비를 괴롭히고 있던 마시의 붉은 눈동자가 반짝하고 빛을 발했다. "정말?" 그러나 마시의 의문이 끝나기도 전에 어디선가 공기를 가르는 세찬 소리와 함께 알렉토를 향해 화살이 날아 들었다. 알렉토의 검이 허공을 향해 하얀 곡선을 그 렸고 화살이 튕겨지는 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튕겨진 화살은 검은 색으로 길이가 무척 길었고 무쇠로 만들어진듯 검에 맞아 튕 겨 날아 갔는데도 나무에 깊숙이 꽂혔다.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듯 그때부터 화살 은 계속해서 일행을 향해 쏟아지듯 날아오기 시작했고 대부분의 화살은 알렉토를 향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수십개의 화살이 빗발치듯 땅에 꽂혔고 마시는 넘어지며 아슬아슬하게 화살에 맞지 않았다. "제 자리에 있지 말고 모두 움직여." 알렉토가 큰소리로 외쳤고 에코와 볼비가 소리를 지르며 허둥지둥 움직였다. "꺄악." "에코 불을 꺼." 아네모스가 황급히 몸을 피하며 소리치자 에코는 찻물이 들어있던 통을 재빨리 들어 모닷불을 꺼버렸다. 하얀 연기가 잠깐 피어 올랐고 숲은 깊은 어둠에 잠겨 들었다. 불빛하나 없이 어둠이 내리깔린 숲은 한발 앞조차 제대로 볼 수 없을만 큼 깜깜했다. 무거운 고요가 주위를 휩싸며 잠시 동안 아무런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 나 일행이 어둠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 사이 위험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지고 있었다. 알렉토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그가 막아낸 화살들은 굉장한 힘으로 날 아 들었고 검으로 쳐내기엔 상당히 벅찬 것이었다. 알렉토는 짙은 살기의 목표가 자신이 아니라 누워 있는 자를 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뭐하는 놈들이지? 도대체 몇 명이나 되는 건가?' 알렉토는 많은 수의 적이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의 움직임을 모두 포 착할 수는 없었다. 고도의 훈련을 받은 자들만이 이토록 조심스럽고도 위험한 살 기를 뿜어낼 수 있었다. 어둠속에서 짧은 공기의 흔들림이 알렉토의 예민한 신경에 포착되었고 그는 망설 임 없이 그 쪽으로 한발을 내딪고 몸을 움직였다. "으윽." 지독하게 작은 신음이 들리고 알렉토의 검에는 검붉은 피가 뚝뚝 흘러 내렸다. 그러나 그는 순식간에 또 다른 자를 베어야 했다. 털썩. 검은 장막이 드리워진 공간에서는 알렉토의 검에 쓰러지는 자들의 짧고도 작은 신음과 땅바닥에 몸을 떨구는 소리만이 간간히 들려왔다. 메디아는 어둠속에서 무턱대고 움직이려는 마시를 붙잡아 데리고 있었다. - 조용히 해 마시. 입 다물고 있지 않으면 나중에 두고 볼 일 생길거야.- 반항하려는 마시의 머릿속으로 메디아의 소리없는 속삭임이 들려왔고 마시는 위 협적인그 내용에 잠시 화가 났지만 일단 조용히 있기로 했다. 메디아의 신경들이 경종을 울리며 위험하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신 중하게 눈을 감으며 적이 다가오는 것을 머릿속에 그려 넣었다. 둥글게 주위를 포위하며 다가 온 자들의 모습이 그녀의 눈앞에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이외의 더 많이 숨어 있는 자들은 벽에 가로막힌듯 희미하 게 느껴질뿐 잘 보이지 않았다. '너무 많아. 모두 느낄 수가 없어. 위험해. 뭐지? 이 알수 없는 장막은?' 메디아는 자신의 등 뒤로 접근하는 자에게 손을 뻗어 칼날같은 바람을 날리며 감 춰진 어둠 속에 숨은 적들에게 신경을 쏟고 있었다. "윈드 업(wind up)" 속삭이듯 외쳐지는 메디아의 마법에 피가 뿌려지는 소리가 들릴정도로 정확하게 맞은자는 비명도 지르지 않았다. 그때였다. 조심스럽게 움직이던 알렉토가 황급히 어둠 속의 일행이 있는 곳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이런!' "피해 에코-." 에코는 알렉토의 외침에 몸을 한껏 움츠리며 떨리는 손에 들고 있는 작은 단검을 힘껏 움켜 쥐었다. 그러나 그녀가 몸을 옮기기 위해 다리를 내딪기도 전에 그녀 의 등뒤로 서늘한 한기가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응?" 그녀가 미쳐 고통을 느끼지도 못하는 사이, 갈라진 어깨 사이에서 나온 피는 어 깨를 적시고 팔을 향해 끈적하게 내려왔다. "꺄아악~~~~" 그 순간 에코의 섬찟한 비명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탁'하 는 소리와 함께 환한 불꽃이 하늘을 향해 쏘아져 올라 갔다. 밝은 빛이 주위를 환하게 밝혔고 일행은 땅바닥에 엎드린채 쓰러져 있는 에코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에코의 등어깨 부분은 길게 갈라져 있었고 검붉은 핏물 이 그녀의 옅은 오렌지색 옷 위로 선명하게 젖어 들었다. 그 곁에는 볼비가 주저 앉아 하얀 수염에 붉은 피가 묻은지고 모르고 그녀의 옷자락을 쥐고 벌벌 떨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일행은 이미 지척에 다가와 있는 수십의 시커먼 그림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검은 옷에 검은 망토를 입은 똑같은 모습이였고 얼굴은 모두 검은 마스크에 덮여 있었다. 그들의 등에는 커다란 석궁과 화살들이 메어져 있었으며 손에는 희게 빛나는 일률적인 검이 쥐어져 있었다. 그들의 검은 특이하게도 끝이 두 갈래로 갈라져 있는 모양이였는데 왠지 섬찟한 느낌을 뿌리는 검이었다. 아니, 그들 자체가 섬찟한 하나의 무기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 계 속 > 연재 날짜... 약속 지키는거 무지 힘들군요...^^;;;; 이궁. 3일에 한번인데....역시 능력 부족인가..ㅠㅠ (얼렁 비축분이나 늘려야쥐...--;;) 번 호 : 29 / 83 등록일 : 1999년 08월 07일 23:49 등록자 : CHO1971 조 회 : 2330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29.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달빛에 여울진 물 위에 너 자신을 비추어 보아라. 네가 무엇으로 보이더냐?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이더냐? 작은 파문에 흔들리는 너는 한낮 그림자에 불과하지 않더냐? 제 29 장 쫒는자와 도망자. 캄캄한 어둠속에서 하늘로 쏘아진 빛에 갑작스럽게 모습이 드러난 그들은 하나같 이 짙은 살기를 내뿜으며 일행을 향해 서 있었다. 검은 그림자들은 쓰러진 자들까지 합하면 20명은 넘을것 같았다. 식은 땀이 흐르는 알렉토의 이마로 찬바람이 불고 지나갔다. '빌어먹을...' 너무 많았다. 그리고 알렉토의 뼈속까지 그들의 강함이 느껴져 오고 있었다. 메디아는 자신의 힘으로도 정확히 찾아낼 수 없었던 그들에게 의아함을 느꼈다. '뭐하는 놈들이지?' 마시가 그녀의 손에서 빠져 나가 주위를 둘러보며 히죽 웃는 모습이 보였다. 그 의 눈은 유난히 생기가 돌고 있었다. 메디아는 마시를 잠깐 보고 입술을 비틀어 보이며 아네모스가 무릎을 굽히고 에 코를 끌어앉는 모습을 불편한 심정으로 바라 보기 시작했다. 수십명의 사람들이 숲의 공터를 가득 차지하고 있었지만 벌레 한마리 기어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팽팽한 긴장속에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차가운 바람이 공중을 휘돌뿐이었다. 문득 검은 그림자 하나가 움직였고 알렉토를 향해 명령하듯 말했다. "넘겨라." "무슨 말이냐?" 알렉토의 목소리는 긴장한듯 나직하게 울려 퍼졌다. "그 자." 검은 팔이 들려지고 그는 알렉토의 발아래 누워 있는 바트를 가르켰다. "넘기면?" "살려 준다." 알렉토는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억제하며 담담히 말하려고 노력했다. "싫다면?" 정의감. 그게 문제였다. 알렉토는 이 위험한 상황속에서도 명백한 살의를 내보이는 자들에게 누군지도 모 르는 자였지만, 순순히 사람을 내어줄 수는 없었다. "죽는다." 나직하고 무감정한 목소리였지만 살의가 일행에게 정확히 전달되어 왔다. 아무도 더 이상의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알렉토는 일행을 둘러 보았다. 한달 남짓 한 기간을 함께 여행한 일행이였다. 그의 대답 한마디에 따라 여기서 죽을수도 있었다. 그러나 알렉토는 메디아와 마시를 오랫동안 바라 볼뿐이었다. '드레곤....'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흥미롭게 검은 옷의 사내를 훑어보고 있는 마시를 보며 알 렉토의 머릿속으로 그 존재에 대한 희미한 기대감이 피어 올랐다. 메디아는 알렉토의 눈에 떠오르는 희망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새끼 드레곤 마시의 보잘것 없는 힘을 믿고 있다면 그는 꽤나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메디아는 알렉토를 도와줘야 한다는 의무 따위는 느끼지 않고 있었다. "알렉토." 메디아의 선명한 목소리가 알렉토에게 정신이 번쩍 들게 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그의 생각이 틀렸다는 듯 차갑기만 했다. "어린애를 믿지마." "그럼?" 그의 눈은 메디아에게 묻고 있었다. 그녀를 믿어도 되냐고. 그녀에게 알렉토를 도와줄 마음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이 상황을 회피한다는 것 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메디아는 피식 웃었을뿐이었다. "대답해라." 가만히 기다리던 자가 대답을 재촉했다. 메디아의 웃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렉토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머리를 천천히 좌우로 움직였다. 그는 전사였고 약한 자를 지킬 의무가 있었다. "어려운 길을 가는군." 하늘로는 계속해서 불꽃이 날아 오르고 있었고 그 빛은 사방을 적랄하게 비춰 주 었다. 피가 튀고 있었다. 누구의 피인지도 모를 피들이 사방으로 뒤엉키며 공중을 장식하듯 뿌려지고 있었 다. 알렉토는 베고 또 베었지만 그들은 쉽게 쓰러지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상대 할때와는 또 다른 강함으로 다가오는 사내들은 쉽게 지치지도 않았고 알렉토를 상대로 무서운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소드에너지를 내뿜는 검에 부딪히는 일반 검은 부러져야 정상이였다. 그러나 그 들의 특이한 검은 아무 빛도 없이 알렉토의 검에 맞서도 부러지지 않았을뿐더러 강한 반탄력으로 알렉토를 당황시키고 있었다. 더구나 그의 발치에 꼼짝도 못하 고 누워있는 바트를 노리는 자들 때문에 알렉토는 바짝 신경을 곤두세운채 수비 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의기양양하게 서있던 마시에게 다가온 사내는 마시가 어린 소년이라는 것을 신경 도 쓰지 않는듯 사납게 검을 찔러 손을 회전시켰다. 멍청하고 둔하게 서있던 마 시는 순식간에 배부분을 찔렸고 포크처럼 갈라진 검이 회전하는 것에 따라 상처 는 더욱 치명적이 되고 말았다. 마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육신에 생긴 시뻘건 상처를 내려다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지었다. 순식간에 마시의 손에 푸른 빛이 감도는 붉은 불꽃이 피어 올랐다. 마시 곁에 다가섰던 사내들은 모두 새빨간 불길에 타들어 가며 고 통스런 비명을 내질렀다. 마시는 한손으로 배를 움켜쥔채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사방에 불꽃을 퍼뜨렸고 숲은 온통 불바다가 되어 가는듯 했다. 메디아가 에코를 향해 방어막을 완성하는 사이 무방비 상태였던 마시가 부상당하 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가 막아주기엔 너무 늦어 있었다. 그녀는 알렉토 에게 마시를 믿지 말라고 했지만 정작 마시를 믿고 있었던 것은 메디아였다. 그 러나 정령을 불러낸 상태에서의 마시에게 그녀가 섣불리 방어막을 형성해 주는 것은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다. 메디아는 마시의 주위로 뛰어드는 자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죽이기 시작했다. 마 시의 사나운 불꽃은 목표없이 터져 나갈뿐이었고 그에게 접근하는 날샌 사내들을 효과적으로 막아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도 메디아의 방어막이 희미한 빛을 발하는 주위로는 수십의 화살들이 난무하며 날아들고 있었지만 그 어떤 것도 빛 안으로 들어 가지는 못했다. 방어 막 안에는 에코를 끌어 안고 그녀의 벌어진 어깨를 감싸고 있는 아네모스와 훌쩍 이는 볼비가 불안스런 모습으로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 있었다. 숲은 달빛조차 들지 않는 무성한 나무들로 들어차 있었지만 주위는 온통 불꽃 축 제라도 되는양 빛과 붉은 피들이 난무하고 있었다. 메디아는 마시가 점점 지쳐가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떨 어져 있는 일행 각자와 마시를 동시에 봉쇄하며 마법 주문을 외쳤다. "대지여, 그대 위에 선 모든 자에게 재앙의 뿌리를 내리소서...." 서서히 두 발을 디디고 서 있는 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흙이 땅위로 올라 오려 는 것처럼 파헤쳐 지면서 주위의 모든 것을 땅속으로 끌어 당겼다. 방어막 안에 갇힌 일행들을 제외한 검은 옷의 사내들은 흙속으로 끌어 당겨지듯 파묻혔고 그들의 몸이 땅속으로 가라 앉자 그들은 몸부림을 치며 빠져 나오려고 두손을 올리고 땅을 긁어 댔다. 그러나 그들의 몸은 찰라의 순간같은 시간동안 허리와 목까지 잠겨 들어 갔고 몸속을 파고 드는 나무뿌리로 인해 섬짓하게 뼈부 러지는 소리가 땅 위에까지 울려 퍼져 왔다. 땅과 그들의 마스크 위로 피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이제 땅위에는 그들의 피투성이 손가락들과 가려진 검은 마스크의 얼굴만이 하늘 로 들려진채 두 눈을 부릎뜨고 있었다. 군데 군데 타오르는 불빛에 그들의 얼굴 은 땅바닥을 구르는 썩어 가는 해골처럼 비춰지기도 했다. 숨가쁘게 자신을 공격하던 모든 자들이 사라지자 알렉토는 피가 흐르는 허벅지와 옆구리를 감싸며 쓰러지듯 한쪽 무릎을 꿇었다. 마시는 탈진한듯 정신을 잃었고 메디아는 여전히 긴장한채 주위를 경계하며 마시 를 살폈다. 꽤 깊은 상처였다. 더구나 내장이 파열된듯 피와 함께 허연 내용물들 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메디아는 아랫입술에서 피가 나도록 이를 꽉 깨물었 다. 그녀는 자신의 부주의를 탓하며 두 손을 마시에게 얹고 순수한 마나를 응집 하여 방출했다. 마시의 몸에서 쉴새 없이 쏟아지던 피가 멈추고 상처의 깊이가 줄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완전히 그 상처를 치유할 수는 없었다. 그 어떤 강한 마법이라도 이토 록 심한 상처를 단번에 치료할 수는 없었다. 메디아가 아무리 드레곤 하트를 소 유하고 있는 마녀였지만 그녀는 아직 그 힘을 모두 발휘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마 시의 육체가 본체였다면 스스로의 회복력만으로 충분히 치유가 가능했겠지만 지 금 마시는 연약한 인간의 육신일뿐이었다. 그녀가 마시의 상처가 더 이상 악화되 지 않도록 조치하고 있을때였다. 메디아와 알렉토는 신경이 곤두서며 혈관이 팽창하는 느낌을 받았다. 숲 주위로 아직도 타오르고 있는 불꽃에 다시 여러명의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리 며 나타나고 있었다. 바로 메디아의 마법으로도 희미하게만 느껴질뿐 정확하게 포착할 수 없었던 자들이였다. 차림새는 이미 죽은 자들과 같이 온통 검은색 일 색이였지만 느껴지는 힘은 훨씬 위험스러운것 같았다. 알렉토는 찢은 헝겁으로 베어진 허벅지를 묶고 있던 손길을 잠시 멈추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헝겊을 힘껏 잡아 당겨 매듭을 짓고는 검을 세워 일어나 섰다. 새로이 나타난 자들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땅바닥 여기 저기에 머리를 쳐들고 딱딱하게 경직되어 가는 동료들의 시체를 잠시 둘러 보았을뿐이었다. 그 러나 그들의 드러난 눈동자에는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들의 짧은 검은 망토가 펄럭이고 주위로 맴도는 연기가 시야를 어지럽혔다. 메 디아는 눈 앞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그들의 존재가 마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 차렸다. 메디아의 이목을 방해할 정도의 마법을 사용하는 검사들이라니 그것도 한두명이 아니고 여러명이었다. 그녀는 이 믿을 수 없는 상황에 까닭모를 불길함을 느꼈다. 무언가가 메디아의 신경에 거슬리고 있었지만 메디아는 그 이유를 뚜렷하게 알 수 가 없었고 그것은 그녀의 신경세포들을 강렬하게 자극했다. '이 기분 나쁜 느낌은 도대체 뭐지?' < 계 속 > 흐움... 이제 30회가 눈앞인데... 제목이 여전히 신경 쓰이는군요. 히잉..^^;;; 번 호 : 30 / 83 등록일 : 1999년 08월 12일 15:23 등록자 : CHO1971 조 회 : 2355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30.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달빛에 여울진 물 위에 너 자신을 비추어 보아라. 네가 무엇으로 보이더냐?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이더냐? 작은 파문에 흔들리는 너는 한낮 그림자에 불과하지 않더냐? 제 30 장 붉은 나비. 혼미한 정신 상태에서 꿈속을 헤메는 바트는 수 없이 날아드는 화살과 검빛 무리 에 진땀을 흘리며 허부적 거렸다. 아무리 도망가려 해도 그의 몸은 마치 돌조각 인양 그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어느 순간 그는 세차게 날아온 불덩이가 자신의 옆구리를 꽤뚫으며 강타하는 것을 느꼈다. '헉!' 익숙한 아픔이 옆구리를 찌르며 바트는 잠에서 깨어났다. 바트는 자신이 지금 어 디에 있는지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금방 모든 것을 기억해 냈다. 그러나 그의 익숙한 감각이 서서히 돌아오며 위험신호가 그의 근육들을 긴장시켰 다. 바트는 주위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덩이와 그 불빛에 반사되어 어둠속에 빛나 는 차가운 눈동자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이 찾아온 것이다. 자신을 죽이러 온 사신의 일행이였다. '셰도우 아미.' 바트는 머리털이 쭈삣서는 공포를 애써 밀어내며 그들의 이름을 생각해 냈다. 왕실의 깊은 곳에서 왕조차도 모르게 숨어 지내는 최고의 검사이며 암살자들인 셰도우 아미. 그것이 저 검은 마스크의 주인들에게 붙여진 이름이였다. 바트는 자신과 함께 했던 수십명의 동료들이 얼마나 허무하게 죽어갔던가를 새삼 떠올렸다. 저항이란것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그러나 억울하게 삶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벌레처럼 숨어서 최대한 그들의 눈을 피해 도망가는 것이 유일한 살길이였었다. 그러나 그들은 귀신처럼 바트의 뒤를 따라 왔고 얼마남지 않았던 동료들까지 모 두 잃어야 했다. 어디서부터 일이 꼬였던 걸까? 오람에서 그 빌어먹을 왕자만 나타나지 않았어도 지금 이꼴이 되어있지는 않았을 거라고 바트는 헛되게 생각했다. 그는 자신들이 실패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실패의 결과도 참혹했다. 배신. 그것이 실패한 자신들을 기다리는 최후의 보답이였다. 그것은 주인으로부터 버림받은 개와 같았다. 바트는 자신을 짓누르는 공포속에서 도 분노가 피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바트는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었다. 그는 초인적인 인내력과 정신력을 발휘하며 희미하게 남아있는 마취제의 몽롱함을 물리치고 일어나려 안감힘을 썼다. "크흑.." 일제히 시선이 바트에게 쏠렸다. 검은 마스크의 사내들의 눈이 번들거렸다. 알렉토는 자신의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온몸을 이완시키며 검에 정신을 집중했다. 잠시간의 터질것 같았던 침묵과 긴장의 시간은 끝나고 모든 거리의 관 념이 사라졌다. 그 순간 바트를 향해 다가온 모든 검과 화살들은 알렉토가 만들 어낸 둥글고 거대한 빛의 진동에 부딪히며 빗껴가 버렸다. 눈 깜빡할 사이에 알 렉토의 주위로는 세찬 공기의 파동이 있기라도 한듯 흙이 앞으로 밀려나 있었고 그의 입술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알렉토의 정면에 몇몇의 사내들이 검을 쥔채 뒤로 밀려나 작은 신음을 흘려냈다. 바트는 움찔 놀라며 자신의 앞을 가로 막은 알렉토를 경이롭게 바라다 보았다. 알렉토의 허벅지에는 찢겨진 천이 단단히 묶여 있었지만 피가 젖어들어 있었고 옆구리 또한 심하게 다친 것이 바트의 눈에 확연히 보였다. 바트는 자신이 건강 한 상태라도 지금 알렉토가 보여준 무위를 흉내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앞에 버티고 선 사내는 진짜 검의 달인임이 분명했다. 그제서야 바트는 여기저기 널려 있는 마치 식물처럼 땅위로 머리와 손가락만을 내밀고 있는 시체들을 볼 수 있었다. 그의 머릿 속이 혼란해 졌다. 일행중에 마 법사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바트는 자신을 제외하고도 위험에 처한 일행들을 둘러 보았다. 한 여자가 쓰러져 있었고 그녀를 부축한 선이 고운 남자의 옆에 드워프 하나가 떨고 있었다. 그리 고 정신을 잃은 어린 소년 곁에 앉은 젊은 여자도 눈에 띄었다. 그러나 그들중 누가 마법사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셰도우 아미들을 상대로는 마법사들도 위험하다는 것을 바트는 알고 있었 다. '저 여자가 마법사인가?' 바트는 조심스럽게 가까이에 널린 시체들 사이에서 검을 주어 들고는 아네모스에 게 안겨 있는 에코를 보며 안타까운 심정으로 생각했다. 석궁에 화살이 매어지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공간을 휘저었다. 바트와 알렉토 가 숨돌릴 사이 없이 움직였고 메디아가 순간이동처럼 사라지며 에코의 곁에 마 시를 내려 놓고 방어막을 작동했다. 그 사이 주변의 흙이 물컹 내려 앉더니 갑자기 물줄기가 솟아 올라 알렉토와 바 트를 셰도우 아미들로부터 분리 시켰다. 물줄기에 다리를 휘청거리며 나가 떨어 진 사내들이 당황스럽게 메디아쪽을 바라 보았다. 푸른 빛덩이가 메디아의 머리위 공중에 떠 있는 것이 보였다. 거기에는 푸른 눈 이 광선처럼 빛나는 거북이 한마리가 물줄기를 움직이고 있었다. 물줄기는 거세게 땅에서 올라와 사방을 맴돌며 일행과 적들을 가로 막고 있었다. 밤의 숲에서 타오르던 불꽃들이 물방울에 붉은 그림자를 만들어 내고 물의 장막 은 폭포처럼 사람과 나무들을 밀쳐 내었다. 그때 메디아의 시선에 오직 한 사내의 검은 장갑 손등에 붉은 나비 문장이 그려 진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순간 그녀의 몸위로 전율이 흘러 내렸다. '붉은 나비...' 이미 잊었던 과거의 환영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파고 들며 희미한 떨림이 느껴졌 다. '단지 나비 문장일뿐이야. 신경쓸 필요 없어.' 메디아는 애써 자신의 심연을 사로잡는 생각들을 떨쳐 버렸다. 그러나 아까부터 그녀의 신경을 거슬리는 것이 그 나비문장에서 비롯 되었다는 것을 그녀는 무시 할 수가 없었다. 나비문장의 사내가 손을 들어 품안에서 둥근 원모양의 금속의 고리를 꺼내 들었 다. 그 고리를 보는 순간 메디아의 얼굴이 창백해지며 마시를 붙들고 있던 손을 놓치 며 주먹을 쥐었다. 그녀의 보라빛 눈동자가 새빨갛게 물들어 갔다. 사내가 고리를 들고 한쪽 손바닥을 정면으로 쫙 펴서 고리의 한가운데에 손을 올 리고 속삯였다. 그러자 고리 중앙에 위치한 손바닥에서 붉은 나비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엷은 빛을 품고 사방으로 날아 오르며 기묘한 그림자를 이루었다. 붉은 나비들이 물줄기를 가볍게 통과하며 블루잉을 향했다. 붉은 나비들이 날개짓을 하자 붉은 가루들이 퍼져 와서 메디아의 방어막을 제거 하고 블우잉에게 다가 왔다. 가루가 블루잉의 몸을 감싼 푸른 빛에 떨어지자 블 루잉은 바닥에 떨어지며 힘을 잃었고 거세게 휘몰아 치던 물줄기가 힘없이 땅바 닥으로 추락했다. 손바닥만한 붉은 나비가 메디아의 눈 앞으로 다가오며 화려한 날개짓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피의 잔재들....' 메디아는 온 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으며 심장이 떨려왔다. "지옥의 영원불멸한 고통의 불이여 나의 분노의 힘이 되어 소멸하는...." 붉은 나비 무리 사이로 작고 까만 공간이 열리며 새빨간 불길이 독사의 혓바닥처 럼 나비들을 집어 삼키며 후끈한 열기를 내뿜었다. 화르륵 거리며 나비가 타들어 재를 날리고 화염은 나비가 쏟아져 나오는 줄기를 따라가 나비문장의 손바닥까 지 뻗어 나갔다. 그러나 메디아는 힘을 거두어 들였고 화염은 사내의 팔만을 송 두리채 태워 재를 남겨 버렸다. "크아악~" 몇 마리의 나비가 불길에서 벗어나며 메디아에게 달려 들었다. 메디아의 눈이 차 갑게 빛나며 나비의 날개를 손으로 붙잡았다. 붉은 피가 그녀의 손으로 흘러 내 렸다. 메디아의 피였다. 나비가 버둥거리며 메디아의 손을 찢어내고 있었지만 그 녀는 신경쓰지 않았다. 메디아는 나비를 싫어했다. 그녀는 까막득한 옛날의 기억속에 악몽이 다시 살아 나는 것을 느꼈다. 어린시절 자신의 꿈속을 가득 채우며 두려움에 떨게 했던 붉 은 나비의 너울거림을 바라보며 메디아는 잊었던 과거가 선명한 현실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닳았다. 끝난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메디아의 손바닥에서 붉은 나비가 피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순수한 마녀의 피를 흡수한 나비는 짓이겨진 날개를 다시 펴며 회복되고 있었다. '피의 저주.' 메디아의 손가락이 나비의 힘에 서서히 펴지며 더욱 붉어진 나비가 날아 오르려 했다. '저주받은 피의 잔재.' 메디아는 다시 손가락을 움켜쥐며 나비를 입으로 가져가 입속에 넣어 씹어 먹으 며 생각했다. 입안에 피가 고여 들며 입가에도 피가 흘렀다. 그녀는 나비를 잘근 잘근 씹어서 천천히 삼켰다. 달콤한 피의 향기가 그녀의 입안을 가득 채웠다. 두 세마리 남은 나비를 더 붙잡아 먹어 버린 메디아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섬뜻 한 미소였다. 지금까지 냉정하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셰도우 아미들이 눈에 띄게 긴장하며 놀라는 것이 보였다. 붉은 나비. 그것은 셰도우 아미들을 절대적으로 강하게 하는 힘이었다. 어떤 마법사들도 붉 은 나비를 막은 적이 없었다. 인간의 피로 더 강해지는 마법의 생물은 그들에게 도 두려운 존재였었다. 그 누구도 지금까지 붉은 나비를 소멸할 수는 없었다. 더 구나 그것을 먹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알렉토와 바트는 붉은 나비와 상관없이 사라진 물의 장막에서 벗어나 방 심하고 있는 셰도우 아미들을 공격했다. 기회를 놓칠 그들이 아니였던 것이다. 또 다시 검과 검이 부딪히고 상처나는 육체를 가다듬으며 사내들은 숨가쁜 결전 을 벌였다. 마취제 기운이 남아있는 바트는 숨을 헐떡 거렸고 그의 다리는 불안 하게 흔들렸다. 잠시의 틈이 그의 어깨를 사정없이 갈라 놓았다. 알렉토도 필요 이상의 힘을 사용한데다가 여러명을 동시에 상대하는 일이 수월치 않았다. 그는 또 다시 가슴을 베었지만 휘청거리는 몸을 가누며 상대의 심장을 꾀뚫어 놓았 다. 알렉토의 귓가로 식식거리는 자신의 숨소리가 거칠게 들렸다. 일행과 셰도우 아미 사이에는 질척한 물과 진흙이 뒤엉켜 흐르고 희미하게 남아 있는 불씨들이 작은 빛을 이루며 어두운 그림자를 그리고 있었다. 메디아의 언어가 다시 숲속에 울려 퍼졌다. "대지여, 그대 위에 선 모든 자에게 재앙의 뿌리를 내리소서...." 땅이 흔들렸지만 헛되게 흙과 나무뿌리가 솟아 올랐을뿐 아무도 땅속으로 가라앉 지 않았다. 이미 셰도우 아미들이 땅에서 벗어나 나무에 기어 올라가 있었다. 그 들은 나무가지에 올라 앉아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이 나무에 올라 선 순간 메디아는 나무를 통채로 불살라 버렸다. 화려한 불덩이가 작렬하고 어둠 에 잠겨들던 숲은 다시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메디아의 번들거리는 눈빛이 살려둔 나비문장의 손을 가졌던 사내에게 향했다. 그 의 눈은 회의적인 불신이 가득했다. 메디아가 그를 향해 입술 끝을 올리며 미소 지었다. "넌 정확히 알고 있겠지?" '나비들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리고 메디아는 피가 흥건하게 고인 자신의 손바닥을 할짝 거렸다. 사내는 피부를 찌르는 감각에 난생처음으로 두려움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는 무 의식적으로 자신의 나머지 팔로 금속 고리를 다시 잡았다. 그러나 그는 나비를 불러낼 오른 손이 없다는 것을 이내 깨닳았다. 메디아의 보라빛 눈동자는 새빨갛게 타오르고 있었고 위험한 분위가 감돌고 있었 다. '잊으려고 했는데... 내 앞에 놓여진 이것을 외면해야 할까요? 어머니....' 메디아는 차가운 빛을 뿌리는 금속고리를 빼앗아 집어 들며 생각했다. - 계 속 - 늦어서 죄송합니다. 꾸벅...(^^)(__) 번 호 : 31 / 83 등록일 : 1999년 08월 17일 13:53 등록자 : CHO1971 조 회 : 2206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31.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달빛에 여울진 물 위에 너 자신을 비추어 보아라. 네가 무엇으로 보이더냐?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이더냐? 작은 파문에 흔들리는 너는 한낮 그림자에 불과하지 않더냐? 제 31 장 잔인한 햇살. 동쪽 하늘이 어느새 빛을 뿌리며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그들이 서있는 땅은 시커먼 재와 질퍽한 진흙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고 주위의 나 무들은 까맣게 타서 아직도 하얀 연기를 내뿜었다. 숲에는 바람이 불며 여기 저 기 남아있는 불꽃을 흔들고 있었다. 바닥에 주저 앉은 알렉토는 아직도 검을 쥐고 붉은 액체가 흐르는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 보았고 그의 옆에는 바트가 진흙탕에서 숨을 헐떡거리며 누워 있었다. 기절해 있던 에코가 희미한 신음소리를 내질렀다. 그녀의 한쪽팔이 완전히 피에 절은채 여기 저기 지저분한 진흙이 묻어 있었다. "젠장할..." 알렉토는 땀이 흘러 내리는 얼굴에 달라붙은 젖은 머리카락을 떼어내며 나직한 욕설을 내뱉았다. 그는 지친 몸을 억지로 일으켜 메디아에게 다가갔다. 질퍽거리 는 진흙이 그의 절뚝거리는 발걸음마다 달라 붙어 불쾌하게 끈적거렸다. "메디아." 알렉토가 메디아의 어깨에 지저분한 손을 얹으며 그녀를 불렀다. 그러나 메디아 는 여전히 금속 고리를 손에 쥐고 눈앞에 있는 사내를 잡아먹을듯 뱀처럼 노려보 며 꼼짝도 안했다. 메디아는 어깨에 올려지는 알렉토의 손에 눈앞의 사내에게서 시선을 돌려 천천히 알렉토를 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약간의 당혹과 의문이 담겨 있었다. "메디아?" 알렉토는 메디아의 낯선 눈빛에 당황스러웠다. 마치 자신을 처음보는듯한 눈빛이 었다. 메디아는 손에 쥔 금속 고리와 알렉토를 번갈아 보며 눈쌀을 찌푸렸다. 그녀는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은 사내가 누군지 잠시 기억할 수 없었다. 아주 오래전의 어느날 밤에 메디아는 춤추는 나비들의 그림자 안에서 허무하게 사라져 가는 마법들을 공포스럽게 바라 보고 있었다. 죽어가는 사람들의 고통스 런 비명이 울리고 둥근 금속 고리에서는 끝없이 붉은 나비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 었다. 끊임없이 메디아의 귓가를 어지럽히던 너울거리는 나비들의 날개짓 소리와 자신 의 작은 몸을 감싸던 소름끼치는 감각에 정신을 잃으며 그녀는 마지막으로 비명 같은 어머니의 외침소리를 들었다. 생생히 되살아 나는 붉은 나비에 대한 기억으로 메디아는 잠시 동안 현실을 잊었 다. 잊어야 했지만 절대로 잊을 수 없었던 과거의 시간들이 그녀를 혼란스럽게 했다. '여기가 어디지? 왜 이 사람은 내 이름을 부르는 거지?' 손가락에 차가운 금속의 서늘함이 느껴지며 그녀는 그것을 다시 뚫어지도록 바라 보았다. '아아... 그래. 붉은 나비...피의 잔재들......' "괜찮아?" 알렉토가 걱정스러운듯 다시 묻고 있었다. 메디아의 눈빛이 서서히 현실로 돌아왔다. 그녀의 머리에서 빠져나온 몇 가닥의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래.... 괜찮아." '정말 괜찮아. 이젠 아무것도 날 해칠 수 없어. 붉은 나비도...' 알렉토는 여전히 찌푸린 얼굴로 메디아에게 말했다. "에코를 치료해 줘 메디아. 더 이상 그냥 두면 죽을거야." 에코의 몸은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지나친 출혈로 체온이 내려가고 있는 것 이었다. 그녀는 작은 경련을 일으키며 심한 딸꾹질을 하고 있었다. 아네모스가 어느사이 깨끗한 천으로 피를 닦아내고 있었지만 한쪽 팔이 거의 잘려 나간 상태 여서 쉽게 피가 멈추지 않았다. 에코의 얼굴은 회칠한듯 창백하면서도 칙칙하게 굳은것처럼 보였는데 아네모스의 얼굴도 창백하게 질려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메디아는 에코를 잠시 바라 보았을뿐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메디아 는 바닥에 떨어져서 뒤집힌 거북이를 들어서 가슴에 앉았다. 블루잉의 팔다리는 굳은 것처럼 뻗뻗하게 등껍데기 바깥으로 노출되어 있었고 푸른색 머리도 목을 길게 빼어 내밀고 있었다. 메디아가 안아 들었지만 블루잉의 굳은 몸은 전혀 움 직이지 않았다. 메디아가 한손으로 블루잉을 붙잡고는 다른 손을 블루잉의 등에 얹어 놓자 흰 빛 이 흘러 나와 블루잉의 몸을 감싸며 돌기 시작했다. 그 빛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 점 붉은 빛으로 변해 갔고 메디아의 손으로 모여들며 흡수 되었다. 어느새 메디 아의 손이 새빨갛게 변해 갔지만 블루잉은 여전히 뻗뻗한 모습 그대로였다. 메디아는 블루잉을 적당히 바닥에 내려 두고는 두 손을 모아 눈을 감았다. 그녀 가 주문을 외우자 그녀의 몸 앞에 검은색의 작은 공간이 열렸고 메디아는 망설이 지 않고 붉게 변한 손을 그 안으로 집어 넣었다. 그녀의 두 눈이 꼭 감겨지고 넣 어진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블루잉의 몸에서 흡수한 붉은 나비가루의 독기는 스스로의 몸에서 분리시킬 수 없었고 그것을 태우는 도리 밖에 없었다. 메디아는 자신의 손이 불타는 감각에 정신이 아찔했다. 어느정도 마법으로 손을 보호하고 있었지만 완전히 보호해서는 안되었기 때문에 그녀는 지금 손끝에서 퍼져오는 고통에 온 몸이 저릿저릿 경직 되는 느낌이였다. 그녀의 코끝에 땀방울이 맺혀 떨어지고 메디아는 다른 손으로 팔을 움켜 잡아 움직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메디아가 헐떡이는 숨을 몰아쉬 며 팔을 잡아빼자 그녀의 손가락에 남아있는 불꽃이 화르륵 타오르며 꺼져 갔다. 메디아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았다. 그녀의 손가락들은 약간의 화상을 입은듯 했지만 대체로 멀쩡해 보였다. '역시... 드레곤 하트의 힘인가?' 메디아는 덜덜 떨리는 손가락들을 하나하나 접어보며 작은 안도감을 느꼈다. '그래... 이젠 두렵지 않아. 그것들이 날 해칠 수는 없어.' "이 팔 붙여야 돼?" 메디아의 차가운 목소리가 대기를 가르고 아네모스와 알렉토에게 전해졌다. "예?" 메디아가 에코의 너덜거리는 팔을 움켜 잡아 올려 보여 주며 다시 말했다. "이걸 붙여서 들고 다니게 할거냐고 묻고 있는거야 아네모스." 에코의 팔은 아직은 어깨에 매달려 있었지만 거의 떨어져 있는거나 다름이 없어 보였다. 뼈는 이미 허옇게 절단되어 있었고 등부분도 상당히 많이 베어져 있었 다. "하지만 메디아 마시는.... 마시는 치료했쟎습니까?" 아네모스는 무언가를 더 말하려 했지만 정확히 뭐라고 해야할지는 몰랐다. "드레곤하고 인간이 같을 수는 없어. 저 애는 자체 치유력이 강해서 어떻게 된 다지만 에코는 달라. 잘라진거나 다름없는 팔을 붙여 볼 수는 있겠지만 그게 정 상적인 상태나 그 비슷한 상태로 돌아가지는 않아. 앞으로 영영 움직이지도 못하 는 팔하나 붙이고 다니느니 차라리 없는 편이 이로울지도 몰라." "그래도 안돼요. 에코에게 팔 없이 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두꺼운 모포위에 누워있는 에코는 여전히 딸국질을 하며 심하게 떨고 있었고 헛 소리처럼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창백한 빰을 쓰다듬어 주는 아네모스의 손길에 작은 경기를 일으키며 그녀가 희미하게 눈을 뜨고 있었다. 그러나 에코의 푸른 눈동자는 몽롱하게 풀려 있었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볼비가 그녀 의 몸위로 망토를 덮어주어도 전혀 반응이 없었다. 메디아가 에코의 팔을 어깨에 고정시키는 동안 알렉토는 붉은 나비 문장이 있던 사내를 지켜보며 자신의 상처를 돌보고 있었다. 다행히 깊게 벤 상처는 몇 개 되지않아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치료될 수 있을만한 상처들뿐이었다. 알렉토는 자신의 짐에서 몇가지 물건들을 꺼내 상처를 소독하고 약초를 발라 깨끗한 천으 로 감싸 두었다. 진흙탕에 아무렇게나 누워있던 바트가 정신을 차려 일어 났을때는 해가 떠오르 려 하고 있을때였다. 그는 주위에 널린 시체들과 일행을 바라보며 믿을 수 없는 심정이였다. '살아있다. 내가 살아있어.' 바트는 자신의 두 손을 눈 앞으로 들어 보며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재차 확 인해 보았다. 그는 축축한 흙이 잔뜩 묻어 있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웃었다. "크큭..핫하.." 바트가 문득 핏발이 선 눈으로 알렉토의 앞에 조금 떨어진채 꼼짝도 못하고 있는 검은 망토의 사내를, 혼자 살아남은 셰도우 아미를 응시했다. 바트는 땅바닥을 집고 몇번이나 휘청이며 무거운 몸을 검에 지탱하고 일어섰다. 그가 힘겹게 걸어 가 마주 선곳은 검은 망토의 사내가 나무에 묶여있는 곳이었다. 검은 망토의 사 내가 바트에게 눈을 부릅떴다. "이봐. 뭐하는 거야?" 알렉토가 바트를 부르며 제지하려 했다. 그러나 바트는 상대에게 검을 찔러 넣으 려 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의 등뒤로 칼날처럼 날카로운 바람이 날아가 그의 몸 을 통채로 들어서 날려 버렸다. "건들지 마." 바트는 상처들이 터지는 고통에 움찔하며 바닥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멀찍 히 서있는 보라빛 눈의 여자가 얼음같은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 에는 표정이 없었지만 그 눈동자에는 감춰진 분노 같은 것이 녹아 흐르고 있다 고 바트는 어렴풋이 생각했다. 그녀의 눈빛이 자신의 몸을 관통하자 등줄기로 차 가운 한기가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바트는 몸을 떨어야 했다. "다시는 손대지마. 너에게도 물어 볼것이 있다는 걸 다행으로 여기는 것이 좋 아. 아니면 벌써 죽였을테니까." 메디아는 희미하게 화상이 남은 자신의 손을 거두며 끊어지듯 말했다. 그들이 위치한 숲 주변에는 성한 나무라고는 한그루도 남아있지 않았다. 땅바닥 에는 시체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었고 붉은 피가 흐르던 진흙탕은 검은색 잿가루 와 함께 솟아오르는 해에게 그 적랄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지친 일행의 피곤한 눈동자에 잔인한 햇살이 눈부시게 비 춰지고 있었다. 해가 완전히 그 모습을 드러내자 아네모스와 볼비는 바쁘게 움직 이며 에코를 나무그늘아래 누이고 알렉토와 바트를 도와주었다. 알렉토는 흥분한 말들을 진정시키며 풀을 뜯어먹을수 있는 곳에 자리를 옮겨 주었다. 메디아는 잠들어 있는 마시를 에코의 옆에 누이고 블루잉을 주워 땅에 구멍을 파 서 물을 채우고 그 안에 블루잉을 집어 넣었다. 작은 거북이의 팔다리는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있었지만 빛깔은 서서히 푸른색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볼비가 작은 몸을 뒤뚱거리며 부산하게 걸어다니더니 모닷불을 피우고 식사를 준 비하기 시작했다. 전쟁이라도 치룬듯한 자리에서 조금 벗어난 그들은 그늘에 다 시 자리를 잡고 제각기 앉아서 지친 육신을 쉬고 있었다. 메디아는 식사를 끝내고 바닥에 놓여진 둥근 금속고리를 내려다 보며 머릿속으로 는 복잡한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한참을 그러고 있는동안 검은 망토의 셰도우 아미 역시 불안하게 금속고리를 바라 보았다. 그의 입은 재갈이 물려 있 었고 몸은 앉은 자세로 단단하게 나무에 묶여 있어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 가 꼼지락거리며 몸을 비틀고 있을때 메디아의 시선이 그에게 못박혔다. 메디아 가 자신의 망토로 몸을 감싸며 사내의 앞으로 다가가 쭈그려 앉았다. 그녀의 손 에는 금속고리가 쥐어져 있었다. 메디아가 고리를 들어 사내의 눈앞으로 내밀었 다. "너는 알지?" 순간 사내는 자신의 등줄기로 뱀 한마리가 기어간다고 생각했다. 메디아는 사내에게 질문했지만 재갈을 풀어주지도 않았고 대답을 기대하는것 같 지도 않았다. 그녀는 불쑥 물어 놓고는 잠시 가만히 있었다. 사내의 눈동자가 메 디아의 차가운 눈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메디아는 잠시 그 눈을 마주했을뿐 다시 눈길을 돌려 건너편에서 알렉토 의 감시를 받고 있는 바트를 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바트가 먹던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메디아가 그에게 살짝 미소 지었다. 그러나 바트가 그 미소를 보았다고 느끼는 순간 그의 몸은 메디아의 코앞으로 끌려가 있었다. "헉! 어억.." "볼비." 메디아의 나직한 음성에 볼비가 깜짝 놀라며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말에서 밧줄을 가져다 줘." 메디아는 사내가 묶여있는 나무에 바트를 거꾸로 매달아 놓고 정지마법을 걸으 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검고 긴 망토로 여전히 몸을 감싼 그녀는 다시 사내 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메디아의 미소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고 하얀 얼굴에는 무표정이 자리를 잡았 다. 그녀의 손이 소매에서 나와 사내의 하나 남은 팔을 무심하게 붙잡았다. - 계 속 - 보시다가 이상한 버그 있으시면 버그 좀 잡아 주세요. *^^* 메모로 보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__) - 뱀파이어 - 번 호 : 32 / 83 등록일 : 1999년 08월 21일 19:07 등록자 : CHO1971 조 회 : 2157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32.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달빛에 여울진 물 위에 너 자신을 비추어 보아라. 네가 무엇으로 보이더냐?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이더냐? 작은 파문에 흔들리는 너는 한낮 그림자에 불과하지 않더냐? 제 32 장 나비의 주인. "으윽....으헉.." 사내의 억눌린 비명이 일행의 귓가를 섬찟하게 울리고 있었다. 바트는 나무에 거꾸로 매달린 채 자신의 정면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내를 떨리는 가슴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차라리 눈을 감고 싶었지만 그는 눈조차 감을 수가 없었다. 검은 머리의 외소한 여자는 손으로 사내의 여기저기를 만지거나 가르키면서 사내 의 육체를 난도질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자는 사내에게 왜 그러는지 이유를 말하 지 않았다. 처음에 뜬금없이 '알고 있냐'는 물음을 제외하고는 입을 꾹 다물고 다짜고짜 고문을 시작한 그녀였다. 사내는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도 말을 할 수 없는 상태로 결박되어 있었고 여자의 손이 다가올때마다 그의 팔다리는 무섭게 경련하고 있었다. 메디아의 손이 사내의 왼쪽 팔을 잡았다. 뚜두둑 거리며 그의 뼈들이 어긋나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쪽 관절이 살밖으로 툭 튀어 나왔다. 흰 뼈가 드러나고 검붉 은 피가 흘러 내렸다. 그녀의 손이 다시 그의 어깨에서 손목까지 훑어 내렸다. 메디아의 손에는 어느새 작고 날카로운 칼이 하나 들려 있었다. 사내의 어깨에서 손목까지의 피부가 가 죽처럼 쭉 갈라져 내렸다.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낸 메디아는 매듭을 풀어서 주머니 속의 녹색 가루들을 갈라진 사내의 피부로 정성스럽게 뿌리기 시작했다. 푸쉬식 소리가 들리며 사내의 피들이 순식간에 쫄아 붙으며 피부까지 타들어가 기 시작했다. 메디아는 꼼꼼하게 그의 피부 안쪽까지 일일히 확인하고 주머니를 다시 품속에 집어 넣었다. 사내의 눈에 핏줄이 솟아나며 눈동자가 확대되어 튀어 나올듯이 부릅떠졌다. 메디아는 작을 칼로 검은 옷의 앞섶을 잘라 가슴이 보이도록 했다. 단련된 사내 의 가슴 근육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메디아가 왼 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그의 갈비 뼈 부근을 따라 그림을 그리듯이 스치며 지나갔다. 사내의 갈비뼈들이 요동을 치 며 살밖으로 튀어 나올것처럼 움직이는 것이 눈으로 보일정도였다. 메디아가 갈 비뼈의 끝을 손가락으로 휘어 잡을듯이 손을 내밀자 그녀의 손안에 핏덩이 같은 것이 들려져 나왔다. 피범벅이 된 갈비뼈였다. 사내의 입가로 울컥 피가 쏟아져 나왔다. 메디아의 표정은 말그대로 무표정이었다. 그녀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어 떤 분노도 어떤 감정도 섞이지 않은 눈동자와 손길로 그녀는 지금 한사내를 죽음 보다 더한 고통속으로 몰아 넣고 있었다. 그녀의 손은 온통 사내의 피로 끈쩍거 렸고 땅바닥에는 방금 꺼낸 갈비뼈가 두개나 떨어져 있었다. 사내의 눈이 공포와 고통으로 뒤집어 질듯 팽창되자 메디아는 손을 멈추고 가만히 기다렸다. 알렉토와 아네모스는 메디아의 잔인한 행동에 아무말도 못하고 있었다. 알렉토가 메디아의 행동을 멈추려고 시도했다가 그녀의 표정에 질려서 그대로 물러난지 오래였다. 때로는 무표정이 그 어느 감정이 깃들은 얼굴보다 두려울 때도 있는 것이었다. 바트는 치를 떨며 밑에서 올라오는 역한 피비린내를 호흡하며 사내의 고통과 두 려움을 피부로 느낄수가 있었다. 그의 정면에는 여자의 뒷통수와 사내의 앞모습 이 고스란히 보이고 있었는데 여자의 흰손이 움직일때마다 바트 자신의 몸이 떨 려오는 것을 어쩔수가 없었다. 사내의 모습은 지금까지 그가 보아온 시체들과 별 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사내는 시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이였고 그 사실이 너무나 끔찍하게 느껴졌다. 한동안 사내를 걸레처럼 난도질하던 메디아가 천천히 사내의 입을 자유롭게 열어 주었다. "컥억...으읍.." 사내가 피를 토하며 입술을 떨었다. 그의 심신은 끔찍한 고통에 찌들어 피폐한 상태였다. 그러나 사내의 시선은 메디 아의 손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사내는 그녀의 손이 어떻게 움직일지 두려웠다. 그는 지금까지 사는 동안에 수 없이 많은 고통과 수난을 겪었지만 이토록 무서워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녀가 무언가를 질문했다면 이렇게까지 답답하고 두렵지는 않을것 같았다. 그러나 여자는 자신에게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고 단지 '알고 있 지'라고 했을 뿐이었다. 그것도 질문은 아니었고 확인의 의미로 밖에 들리지 않 았었다. 그녀가 무엇을 알고자 하는것이지 그는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입이 열리자 마자 다급하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는 몰랐지만 그는 지금 아무거라도 말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고통에서 벗 어나 편안한 죽음이라도 맞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말해야 했다. "크윽...무엇을 원하는 거냐? 커억....우리는 명령을 받는 군인..일 뿐.... 큭 흑...너희들을 찾아온 것이 아니다... 우린 저자를 따라.... 하악..저 자는... 저 자는 암살범이다." 사내는 공중에 매달린 바트를 올려다 보고는 강한 어조로 말했다. 멀찍이 떨어 져 시선을 외면하고 있던 알렉토와 아네모스가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암살범이 라니 놀라운 일이였다. 그러나 그 뒤에 이어져 나온 사내의 말은 더 엄청난 것 이었다. "저 자는....왕자를 암살한 놈으로 우리 말고도 뒤를 쫓는 자는 많다. 계속 함 께 다닌다면 오늘 같은 일이 또..흐윽..있을거다...허억...날 죽여라....이제 죽 여다오. 크허억..." 그는 말을 하면서도 연신 피를 토해 내고 있었다. 그러나 메디아는 그런것 따위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메디아의 입술이 갑작 스럽고도 무덤덤하게 열렸다. "주인을 말해." 사내의 눈이 혼란과 당황으로 물들었다. 무슨 말인지 그는 알아 들을 수가 없었 던 것이다. 메디아가 땅바닥에 놓아 두었던 둥근 금속고리를 들어 사내의 눈 앞으로 내밀어 보였다. 둥근 고리의 모양을 따라 햇빛이 반사되며 반짝거렸다. 그녀가 한자한자 에 힘을 주며 또박또박 말했다. "붉.은. 나.비.의. 주.인." 순간 사내의 눈이 확 좁아지고 의심스런 눈빛을 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까 지의 두려움과는 또 다른 두려움에 휩싸인듯 사내는 뒤로 주춤거렸다. "내가 이걸 본건 아주 옛날이었어. 그런데 말이야. 내가 알기로는 이걸 쓰는 사 람은 딱 한사람뿐이거든. 난 아직도 그가 살아있는지 확인하고 싶어. 너는 알고 있을거야. 그렇지? " 냉정하게 절제되었던 메디아의 얼굴에는 이제 또 다른 냉기가 감돌고 있었다. 사내는 햇살에 차가운 빛을 뿌리는 둥근 금속 고리를 바라 보았지만 정확히 그것 을 보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그 금속고리를 건네 주었던 사람의 소름끼치는 눈 빛을 기억했다. '어떻게 이 여자는 이것을 알고 있는거지?' 여자가 어떻게 붉은 나비에 대해 알고 있는지는 몰라도 사내는 그것의 주인을 말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죽음보다 더한 공포를 의미했다. 자신의 어린 아이들이 그의 손에 있다는 것을 사내는 한순간도 잊지 않았다. 사내 자신뿐만 아니라 셰도 우 아미들 모두의 가족이 볼모나 다름없이 붉은 나비의 주인의 손안에 있었다. 사내의 눈빛이 예리하게 번쩍이더니 그 자신의 혀를 깨물으려 했다. 그러나 메디 아의 손이 조금 더 빨리 움직였고 사내의 이빨들이 잇몸을 벗어나 으스러져 내렸 다. "으으읍.." 사내의 입에서 이빨과 빨간 핏물이 줄줄 흘러 내렸다. "자. 이름을 말하면 돼. 아주 쉬운 일이쟎아? 그의 이름이 뭐지? 너에게 이 고리 와 문신을 내려준 사람이 누구인지 말해 봐. 붉은 나비를 보내주는 사람말이야." 메디아의 눈동자에는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집요함이 깃들어 있었다. '만약 그가 살아있다면.... 만약...' 메디아의 상념으로 그의 이름이 떠돌아 다니며 아름다웠던 어머니의 영상이 함께 떠올랐다. 젊고 매력적이었으며 최고의 마스터였던 마녀 블러디나. 메디아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그녀에게 성역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사람이 살아있을지도 몰랐다. 더구나 그를 상징하는 붉은 나 비가 메디아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블러디나는 메디아에게 모든 것을 잊으라 고 말했지만 백년이나 지난 지금 메디아의 눈앞으로 다시 다가온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아니 잊을 수가 없었다. 애써 잊으려고 했을뿐이었다. 메디아의 상념이 혼돈스럽게 떠도는 사이에도 그녀의 손은 주인의 의지 없이도 충실히 움직이고 있었다. 사내의 양 다리뼈가 몸으로부터 분리되었고 사내의 한쪽 눈이 움푹 파이며 안으 로 타들어 갔다. 메디아의 손이 움직일때마다 사내의 피부가 얇게 벗겨졌고 그 위에 다시 옅은 녹색가루들이 뿌려졌다. 핏물이 부글부글 끓어 오르며 타 들어 가는 모습에 사내는 기절할 듯 헐떡거렸다. "허억...흐...주..겨여...죽여..줘. 으윽헉.." 그러나 메디아는 사내가 죽지 않도록 세심하게 신경쓰고 있었다. 쉽게 죽도록 내 버려 둘 수 없었다. "널 영원히 죽지 않게 해 줄수도 있어. 살려 달라고 해봐. 이대로 아무것도 말하 지 않으면 살려 줄테니까 그대로 있어도 좋겠지." 사내의 한쪽 남은 눈이 마치 지옥을 본듯 허우적거리며 떨고 있던 온 몸을 경직 시켰다. 차라리 죽이겠다고 했다면 그는 그대로 버틸 수 있었다. 죽여준다면 그에겐 더 이상 바랄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말하지 않으면 고통을 영원토 록 계속되게 하고도 남을것 같았다. 사내는 이빨이 없어 물컹거리는 잇몸으로 겨우 입을 열어 소리를 내어 보았다. "후웁...모...모모스.." "뭐?" "모모....스." "로만은?" 메디아의 성급한 목소리가 사내를 다그쳤다. 그러나 사내의 눈은 메디아의 눈을 공허롭게 헤메었다. "그런 건.... 모른다." 메디아는 그 순간 붙잡고 있던 사내의 숨을 놓아 버렸다. "모모스...라구?" 메디아는 그녀의 기억속에 존재하는 로만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였던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의 모모스를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어린시절을 함께 했던 언제나 침 착하게 자신을 바라보던 차가운 녹색눈의 소년을 그녀는 선명하게 기억했다. '그럴리가....붉은 나비는 그가 다룰 수 없어. 분명히 로만이 살아있는 거야.' 사내의 육신이 걸레조각처럼 해체되어 땅바닥에 널부러져 흩어져 있는 사이로 메 디아는 검은 망토를 두른채 일어서 있었다. 메디아가 문득 뒤돌아 거꾸로 매달린 바트의 얼굴을 마주 했다. 바트의 두 눈은 두려움으로 흐릿해져 있었다. "너라면 알고 있을까?" - 계 속 - 바닷가에 가니 사람들이 너무 많더군요. 어젯 밤에 잠깐 다녀 왔는데 시원하고 좋더라구요. 이제 여름도 끝나가는데 좋은 추억 하나 만드셨나요? ^^ P.S : 저기요. 이 아뒤요. CHO1971요. <- 이거 우리 오빠랑 같이 쓰거든요. 저랑 착각하셔서....곤란하신 분들...^^;;;;; 죄송해요. 오빠는 밤에만 가끔, 어쩌다가 아주 가끔 잠깐 들어 오니까..^^;;; 어쩌다 마주치시면 ^^;;;;;; 그러려니 하세요. 하하..^0^(웃음으로 무마를.--;;) 번 호 : 33 / 83 등록일 : 1999년 08월 24일 16:34 등록자 : CHO1971 조 회 : 2325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33.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달빛에 여울진 물 위에 너 자신을 비추어 보아라. 네가 무엇으로 보이더냐?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이더냐? 작은 파문에 흔들리는 너는 한낮 그림자에 불과하지 않더냐? 제 33 장 잊혀지지 않는 시간. 라비론의 드넓은 대지가 펼쳐진 풍경 뒤로 차가운 바다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검 푸른 바다에는 흰 유빙이 둥둥 떠다니며 새들의 휴식처가 되어 주고 바다가 보이 는 절벽 위로는 아슬아슬하게 아담한 성채 하나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성 주변 에는 듬성듬성 키가 작은 풀들이 자라나 옅은 초록빛이 감돌았다. 성채의 성벽은 작은 창들이 여러 개 뚫려 있어서 한눈에 밖을 내다 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세찬 북해의 파도소리가 성벽을 울리면 시끄러운 갈매기들의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 였다. 새파란 하늘과 멀리 하얗게 버티고 선 거대한 빙하가 보이는 성 주변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적막하고 아름답기만 했다. 그리고 그곳에 밤이 찾아오면, 새까만 하늘에서 쏟아질듯한 별들이 빙하로 흘러 내리는 것처럼 환상적인 분위기가 되고는 했다. 두 개의 큰 달에 감싸인 아담한 성채는 풍경에 녹아들어 그대로 자연속에 묻어날듯 했다. 성채의 깊은 안쪽으로 들어서면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전망이 좋고 넓은 방이 여 러개 있었는데 그중에서 제일 끝방에는 여덟살의 어린 소녀가 네개의 기둥이 달 린 침대에서 달콤한 잠에 빠져 있었다. 어린 메디아는 모모스가 자신을 향해 서 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깊이있는 녹색 의 눈동자가 메디아를 바라보며 걱정스럽게 변하는 것을 메디아는 보았다. 모모 스의 눈이 한순간 미소를 지었다. 그의 입술이 양 옆으로 올라가며 부드러운 곡 선을 그렸다. 이상했다. 모모스는 저토록 다정한 눈빛으로 자신을 볼리가 없었 다. 언제나 차갑게 빛나는 눈으로 우울하게 자신을 보던 그였다. 정말 이상했다. 그러나 기분은 좋았다. 열여섯살 모모스의 손에는 예쁘고 귀여운 홀링의 손이 붙들려 있었다. 그들은 사이좋게 웃으며 메디아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메디아도 한껏 미소지으며 그들에게 달려 갔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그들은 가까이 있는데 도 전혀 다가갈 수가 없었다. 아무리 달려가도 그들은 멀어지기만 할 뿐이었다. 홀링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고 모모스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메디아는 필사적 으로 멀어지는 그들을 붙잡으려 했다. "가지마~." 메디아는 자신의 커다란 침대에서 큰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이마로 차가 운 한기가 지나갔다. 창밖에서는 세찬 파도 소리가 요란했다. 너무나 조용한 밤 의 고요속에서 들리는 것은 오직 북해의 파도 소리뿐이었다. 정말 이상한 밤이었 다. 마치 성 자체가 잠들기라도 한듯 고요한 가운데도 무언가 혼잡한 느낌을 떨 쳐 버릴수가 없었다. '이상한 꿈이야.' 잠시 거친 숨을 가다듬은 메디아는 침대옆에 놓여 있는 물을 조금 마시고 푹신한 베개에 머리를 기대며 다시 누워 잠을 청했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감고 잠을 자 려해도 가슴 한구석이 두근 거리며 잠이 오지 않았다. '꿈 때문이야.' 메디아는 벌떡 일어나 이불을 재치고 잠옷을 입은 채 맨발로 차가운 돌바닥을 밟 았다. 그녀는 자신의 베개를 하나 집어들고 살금살금 방을 나서기 시작했다. 다 른 방에서 자고 있을 블러디나에게 가려는 것이었다. 차갑게 얼어있는 돌바닥을 맨발로 걸어가니 한기가 뼈속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 다. 어린 메디아는 종종 걸음으로 서둘러 걷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에 알파와 카 오스가 창밖으로 가득하게 차올라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잠시 멈춰서 하늘 을 가득 메울듯이 다가와 있는 물빛 카오스를 보라빛 눈동자로 숭배하듯이 바라 보았다. 순간순간 그 빛을 반사시키며 변화하는 카오스의 물빛은 판타리아 대륙 전체를 비추며 환히 빛나고 있었다. 메디아의 둥근런 보라색 눈동자에 만월의 카 오스와 그 그림자에 삼분의 이가 가리워진 흰 달 알파가 자리를 잡았다. 메디아 는 한참을 그렇게 복도에 선채 창밖의 하늘을 바라 보았다. "응?" 그녀가 창벽에 기대어 있을때 어디선가 커다란 나비가 날아와 성벽에 달라붙는 것이 보였다. 나비의 빛깔은 달빛에 보아도 선명한 붉은 색이 뚜렷하게 보일정도 였다. "에게?" 메디아는 나비의 크기와 빛깔에 정말 놀랐다. 자신의 두 손바닥을 활짝 펴야만 나비의 크기와 비슷해질 것 같았다. 북해까지 나비가 날아오다니 정말 이상한 일 이었다. 그녀가 나비를 붙잡으려고 성벽 밖으로 손을 내밀었을때였다. "꺄아악~~~~~~~~~~~" 한밤의 고요를 깨뜨리며 한줄기 비명이 공간을 가르고 메디아의 귓가로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것은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솜털이 쭈삣 일어나며 소름이 돋을만큼 끔찍하고 불길한 느낌을 주었다. 메디아는 품안에 있던 베개를 바닥에 떨어 뜨리고 달빛이 반사되고 있는 복도를 황급히 뛰어 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발걸음을 떼어 놓을 수 없었다. 어느새 그녀의 눈앞으로 붉은 파도가 밀려 오고 있었다. 그것은 창밖에서 거센 바람과 함께 밀려 들어 오는 수천마리의 붉은 나비떼였다. 순식간에 붉은 나비떼가 복도 를 가득 메우며 그녀를 향해 날개짓을 하고 있었다. 수천 마리의 나비의 날개가 퍼덕거리는 소리는 보통 요란한것이 아니었다. 그 소리는 밖에서 들리는 세찬 파 도 소리를 삼켜 버릴만큼 크게 들려 왔다. 메디아는 나비를 향해 마법의 주문을 외웠다. 메디아는 비록 어렸지만 그녀는 블러디나가 놀랄정도로 뛰어난 재질과 힘을 가지고 있었다. 메디아는 자신감을 가지고 밀려오는 나비떼를 똑바로 보며 손을 내밀었다. "워터 해머(water hammer)" 빈 공간에 물줄기가 나타나고 빨려 들어가듯 나비떼를 향해 거센 소리를 내며 다 가갔다. 물줄기가 거의 붉은 파도와 부딪히려 할때 메디아는 숨을 돌리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거세던 물줄기는 나비의 앞까지 다가 가서는 맥없이 힘을 잃고 소멸되어 버렸다. "워터 해머" 메디아는 당황하며 다시 한번 정신을 집중해 주문을 외웠다. 그러나 역시 물줄기 는 나비에게 다가 가서는 힘없이 사라져 버렸다. 메디아는 너무 놀라서 다른 마 법을 시전할 생각도 못하고 반대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가 돌아선 쪽에서도 붉은 파도는 밀려 오고 있었다. 그녀는 이때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공포를 느꼈다. 사방에서는 처음에 들려왔던 끔찍한 비명소리들이 끈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메디아는 시끄러운 나비의 날개 짓과 소름끼치는 비명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양손으로 귀를 막고 무작정 나비를 뚫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의 잠옷과 머리카락에는 이미 수 많은 붉은 나비들이 벌떼처럼 달라 붙어 그녀의 피부에 상처를 입히고 있었다. 그녀의 하 얀 피부에서 금새 피가 흘러 내렸다. 어린 메디아는 눈앞에 가득한 붉은 핏빛을 헤치며 넓은 홀까지 달려 나왔다. 홀 에는 나비의 공격을 피하려고 발버둥치는 하녀들과 시종이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질러 대고 있었다. 그들의 몸은 붉은 나비의 날개짓에서 떨어지는 가루에 붉게 변하며 딱딱하게 굳어갔다. 몇 명의 사내들이 횃불을 들고 나비를 쫓아 보려고 했지만 나비들은 불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사내들을 갈아 먹고 있었다. 홀의 높은 천정에서는 온통 나비들이 날아 다니며 너울거리는 춤을 추었고 고요 하던 성채는 끔찍한 지옥처럼 혼돈속에 빠져 버렸다. 메디아는 자신의 팔다리에 달라 붙은 나비들을 떼어내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아무 리 떼어내도 나비들은 수 없이 달려 들었다. "화이어 볼(fire-ball)" 메디아를 중심으로 거대한 불꽃이 넓은 홀의 중앙을 가로지르며 사방을 휘저었다. "윈드 스톰(wind-storm)" 그 뒤를 이어 홀의 사람들을 날려버릴 정도의 세찬 바람의 폭풍이 홀을 사정없이 휘갈겼지만 붉은 나비떼들에게는 전혀 소용이 없었다. 나비들의 날개짓에 조금만 다가가도 그것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메디아는 연속된 마법의 사용으로 지쳤고 나비들이 그녀의 피를 흡수하는 동안 공포에 젖어 블러디나를 외치고 있었다. 메디아는 두려움에 젖은 눈물을 흘렸고 그녀의 흐릿한 눈동자에 회색망토를 걸친 세 명의 마법사들이 공중에 떠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달빛에 번쩍거리고 있는 둥근 금속 고리를 손에 들고 있었는데 고리의 안에 위치한 손바닥에서 수백 마리의 나비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뇌리로 그 둥근 금속 고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스쳐 지나갔다. 일년전쯤 메디아는 차갑게 빛나고 있는 금속 고리를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어머니 블러디나의 친구이자 모모스의 아버지 로만의 것이었다. 로만은 그때 둥근 금속 고리는 자신이 몇년동안 길러온 특별한 마법생물을 위한 것이라고 했었다. 그리 고 그것은 오로지 자신만이 다룰수 있는 까다롭고도 위험한 마법생물로, 로만 자 신이 아니면 아무도 그것을 통제할 수 없다고 했었다. 메디아가 하얗게 빛나는 고리를 장난삼아 가지고 놀려고 했을때 로만은 단호히 건들지 못하게 했었다. 메디아는 회색 망토 사이로 뻗어나온 손가락에 쥐어져 있는 금속 고리를 넋을 놓 고 멍하게 바라 보았다. "로만....아저씨?" 어린 메디아의 눈동자에는 혼란과 공포가 뒤섞이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감정이 스 며들기 시작했다. '왜? 어...째서..?' 그녀는 머리속에 가득한 의문과 공포에 정신이 없었다. 어느새 그녀의 몸은 나비 에 완전히 둘러싸여 공중으로 날아 올라 회색망토의 마법사에게 안겨 있었다. 그녀의 몸으로 차가운 한기가 스며 들고 마치 피가 얼어 붙는 것같은 이질감이 심장부터 온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다. 메디아는 그 소름끼치는 감각에 몸 을 떨며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녀의 희미해지는 귓가로 어머니 블러디나의 비명같은 외침소리가 들려 왔다. "메디아--." 메디아는 온 힘을 쏟아 겨우 감겨지는 눈을 뜨고 블러디나가 주문마법으로 나비 들을 죽이는 것을 보았다. 블러디나의 몸에는 어쩐일인지 붉고 둥근 막이 형성되 어 있어서 그녀의 마법을 방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 주문마법은 통하는구나..' 메디아는 헝클어지는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린 메디아는 언령 마법 중에서도 약속마법은 구사할 수 있었지만 아직 주문마법을 구사할 능력이 되지 않았었다. 블러디나가 메디아에게 다가 오려고 필사적으로 마법의 벽을 헤치는 것을 보았 다. 그러나 블러디나의 앞으로 회색 망토를 두르고 긴 지팡이를 든 로만이 나타 나 그녀를 방해하고 있었다. "로....만 아저씨...왜....?" 메디아는 굳어가는 입술로 힘겹게 속삯이며 자신의 몸이 다른 마법사들에 의해 홀에서 벗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는 어머니의 애타는 음성을 마지막으 로 정신을 잃어갔다. '이건 꿈이야.... 꿈이야...꿈...' 어린 메디아는 멀어져가는 정신 속에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으음...흑....허..억!" 메디아는 식은땀을 흘리며 자고 있던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볼과 이마 로 젖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있었다. 메디아는 한동안 헐떡이는 숨을 내쉬며 멍 하니 앞만 바라 보았다. "꿈..." 메디아는 차갑고 오싹했던 꿈 속의 감각이 다시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오래 전 일인데....' 메디아는 이불을 너무 세게 꽉 쥐고 있어서 피가 통하지 않는 손을 내려다 보며 천천히 손가락을 펴서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눈부신 아침 햇살이 비집고 들어오는 창가에서 소란스런 도시의 움직임이 느껴지 고 있었다. 내다 보지 않아도 바깥에서 바쁘게 오가는 풍경을, 들리는 소리만으 로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메디아의 침대바닥에는 물이 가득 담긴 대야에 블루잉이 등껍질을 내밀고 물에 잠겨 있었는데 이삼일이 지나서인지 많이 좋아진 상태였다. 그러나 메디아의 옆 침대에 누워 있는 에코는 아직도 혼수상태에 빠져 잠들어 있 었다. 아마도 오후가 되면 정신을 차릴수 있을것 같았다. 메디아는 에코가 깨어 나면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조금은 난감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에코보다는 자신의 머리맡에 놓여있는 금속고리에 더 신경이 쓰였 다. '어머니....' "나... 약속 못 지켜 드릴것 같아요." 메디아의 나직한 음성은 그녀 혼자만이 들을 수 있었다. - 계 속 - 뱀파의 공지 : 고정 독자분 중에 한회분 나올때마다.. 어색하거나 이상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나오면 가차없이 말씀해 주실 분을 찾습니다. 비평도 좋고.. 감상도 좋고.. 버그를 찾아 주시면 더 좋고.. 한회분 마다 정기적으로 제게 메모나 메일 보내주실분을 찾습니다. (제발...부탁합니다. (^^)(__) ...) **** 여러분의 가슴마다 푸른 바다의 여유로움을 담으시기를.....^^ **** 번 호 : 34 / 83 등록일 : 1999년 09월 02일 19:19 등록자 : CHO1971 조 회 : 2077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34.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달빛에 여울진 물 위에 너 자신을 비추어 보아라. 네가 무엇으로 보이더냐?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이더냐? 작은 파문에 흔들리는 너는 한낮 그림자에 불과하지 않더냐? 제 34 장 만남. 일행은 밤이 늦어서야 로스코의 시내에 자리잡은 여관에서 쉴 수가 있었다. 거의 모든 일행이 부상을 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로스코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신전 에 들러 부상자의 치료를 받고 여관으로 왔기 때문이었다. 아침이 되자 알렉토는 양손이 묶인 상태의 바트를 끌고 나와 식사를 하기 시작했 다. 볼비가 양손이 묶인 바트에게 음식을 떠먹여 주어야 했다. 겁많은 볼비는 안전하게 자신을 보호해 줄 일행이 되어줄 거라던 아네모스를 은 근히 원망하고 있었다. 볼비가 일행을 따라 나선지 며칠 되지도 않아 벌써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제는 무서운 인상의 범죄자의 시중까지 들고 있었다. 더구나 드 레곤인 마시의 장난감이 되어 괴롭힘을 당하는 것도 그렇고 마시보다 더 공포감 을 조성하는 메디아의 살벌함에 볼비는 숨도 못 쉬고 살 것 같았다. 지금도 볼비 는 반대편에 앉아서 조용히 식사중인 메디아와 마시의 눈치를 보며 찍 소리도 못 하고 있었다. "이젠 어떻게 할겁니까?" 아네모스가 알렉토에게 물었다. 알렉토는 굳은 인상으로 바트를 바라보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로스코에 도착하기 전에 메디아의 잔인한 고문으로 바트가 털어 놓은 이 야기에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사실, 바트는 메디아가 고문을 하기도 전에 자포자기 심정으로 모든 일들을 고백 했다. 자신의 눈앞에서 처참하게 토막난 셰도우 아미의 시신도 두려웠지만 그것 보다 바트는 자신을 배신한 사람들에 대한 복수심에 더 이상 숨기고 싶은 것이 없었다. 바트는 본래 시투니아에서 어느 성주의 기사로 몇 년간 이름도 없이 봉사하고 있 었다. 그런 그가 어느날 주인의 눈에 들어 발탁된 것은 순전히 그의 궁술 실력이 뛰어나서 였다. 바트는 한동안 자신 말고도 함께 발탁된 동료들과 사냥과 활 쏘 는 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았고 몇 달이 지나 오람의 궁성에 잠입할 수 있었다. 그를 궁성까지 잠입하게 한 것은 셰도우 아미를 이끌고 있는 디살로바라는 자였 고 그들을 궁성에 머물도록 조치하고 있는 인물은 파라의 국왕 히페리온의 애첩 중 하나였다. 물론 셰도우 아미들과 바트의 동료들은 철저히 위장된 신분으로 궁 성에 머물고 있었다. 바트와 그의 동료들이 수행해야 할 비밀스런 임무는 국왕의 후계자이자 왕비 헬 레나의 장자인 헬리오스를 암살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겨울사냥을 즐기는 헬리오스 왕자의 취미를 기회로 삼아 일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몇 십명의 기사들과 수 백명의 병사들이 동원되는 대규모 사냥에서 왕 자를 암살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원거리 궁술을 익혀온 바트의 동료들에게 는 비교적 가장 이상적인 기회였다. 바트는 그날따라 사냥에 동원된 기사와 병사들이 유별나게 많다고 생각했다. 시 끄럽게 짖어대는 개들의 성난 소리로 겨울 숲속이 순식간에 요란스럽게 변했다. 바짝 긴장하고 있는 바트의 동료들은 미리 잠복한 장소에서 왕자의 일행이 숲속 으로 더 깊이 들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미리 포획해 놓은 멧돼지를 몇 마리 풀어서 왕자와 그의 기사들이 점점 떨어지도록 유인했다. 떨어져 나온 왕자의 몇 안되는 일행이 시선에 들어 왔을때 바트는 망설이지 않고 팽팽히 당겨 졌던 화살을 쏘았다. 화살은 왕가의 문장이 선명하게 보이는 푸른 망토를 두르고 있는 왕자의 심장을 정확히 관통시켰다. 하얗게 쌓여 있는 눈밭에 왕자의 몸이 굴러 떨어지고 하얀 눈에는 선홍색 피가 번져 나오기 시작했다. 바트는 추적을 따돌리고 동료들과 궁성으로 돌아와서 국왕의 후궁과 모든 일을 지휘했던 디살로바에게 보고를 하며 한치의 오차도 없이 성공했다고 믿었다. 디 살로바는 바트와 동료들이 안전하게 파라를 떠나 시투니아에서 편안한 여생을 보 낼 수 있을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았다. 그들이 보고를 끝낸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오람의 왕실이 발칵 뒤집혔다. 왕 자의 암살 소식이 순식간에 퍼져나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웃을 수 없었다. 바 트와 그의 동료들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던 것이다. 바트가 쏜 화살에 목숨을 잃은 것은 헬리오스 왕자가 아니라 그의 동생 리욘 왕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바트와 그의 동료들은 다시 암살을 시도할 수 없었고 계속 오람에 머무를 수도 없는 상태였다. 그들은 최대한 빨리 그곳을 탈출해야만 했다. 셰도우 아미 를 이끌고 있는 디살로바가 그들의 은신처와 탈출로를 알려주며 안전한 도주를 도와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을 위한 은신처임이 곧 드러났다. 바트는 오람을 떠나자 마자 수 많은 암살자들에게 시달리기 시작했고 그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바트의 동료들이 확보한 도주로에서 일행을 맞이했다. 암살자들은 다름아닌 셰도우 아미들이였던 것이다. 입막음을 위한 확실한 조처가 필요했던 것이다. 바트는 자신이 아끼던 동료와 부하들을 잃으며 복수를 생각하기도 했지만 누구에 게 어떤 복수를 할 것인지 그 자신도 알 수 없었고 설령 대상을 정한다고 해도 터무니 없는 일이였다. 그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일만큼 어리석은 생각이였 다. 그리고 바트는 복수를 생각하는 것보다도 살아남아야만 했다. 그는 죽을 고비를 정말 많이도 넘겼었지만 며칠 전 밤에는 정말 죽는줄로 알았 다. 터무니없이 강한 일행을 예기치 않게 만나서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 더구나 셰도우 아미들을 전멸시킬 줄은 상상도 하지 못 했던 일이었다. 지금 바트는 며칠 전 자신이 죽을 힘을 다해 도망쳤던 도시 로스코의 숙소에 머 무르고 있었다. 그것도 며칠 전에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따뜻한 잠자리와 음식 을 눈앞에 두고. 그러나 바트는 자신을 묶어 놓은 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고 있는 일행을 둘러 보며 아직도 자신이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도시의 수비병이나 현상금 사냥꾼들에게 넘겨진다고 해도 결국은 또 다른 암살자 들이 그의 입을 막기 위해 찾아올 것이 분명한 일이였다. 아네모스의 질문을 받은 알렉토는 바트를 도시 수비병에게 넘기기로 결정했다. 더 이상 그와 함께 있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라고 판단되었던 것이다. "안돼." 그러나 메디아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는 듯이 반대를 했다. "메디아, 너무 위험한 일이야. 저 자는 지금 그 셰도우 아미인지 뭔지 하는 녀석 들에게 쫓기는 중이라구. 까닥하다간 우리도 죽을 수 있는 문제야. 며칠 밖에 안 지난 일을 벌써 잊은 건 아니겠지? 더구나 왕자의 암살범을 우리가 직접 오람까 지 데리고 갈 필요는 없어. 이곳에 넘기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야." "난 저 사람이 필요해." 메디아는 완고하게 말했다. 그녀는 더 많은 셰도우 아미들이 그녀에게 찾아오기 를 바랬다. 그래서 로만의 생존 사실을 꼭 확인해야만 했다. 그녀는 힘없이 쳐져있는 블루잉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정리 되지 않은 자신의 복잡한 심정을 정리하려고 애썼다. 그가 만약 아직도 살아있다면 그는 저주의 댓가를 꼭 치뤄야만 한다. 메디아는 이제 과거를 묻어 두지 않기로 결심했고 지난 날의 원한을 청산하기를 원했다. "나도." 꾸역꾸역 고기를 뜯어 먹고 있던 마시가 진지하고도 낮은 어투로 메디아의 의견 에 동의를 했다. 그는 질긴 고기를 잘근잘근 씹으며 이를 갈고 있었고 마시의 붉 은 눈동자에는 광폭한 살기가 번뜩이고 있었다. 마시의 복부에 깊숙이 자리 잡았던 상처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가고 있었 다. 그러나 마시는 자신의 뱃속으로 들어오던 그 차가운 칼날의 섬짓하고도 끔찍 한 느낌을 절대로 잊을 수가 없었다. 이질적인 물질이 배를 가르고 들어와 부드 러운 내장을 휘저어 놓던 그 충격적인 느낌에 사로잡혀 마시는 정신을 잃었었다. 그 때 받은 충격은 아직도 그의 자존심을 거칠게 할퀴고 있었다. 마시와 메디아의 격렬하고도 차가운 반응에 알렉토는 쓴물이 목구멍으로 올라오 는 느낌이였다. 알렉토는 성질급하고 고집불통인 이 남매에게 더 이상의 말이 통 하지 않을 거라는 걸 그 동안의 경험으로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들은 무거운 침묵이 내리깔린 식탁에서 음식을 먹고 제각각 자신들의 볼 일로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아네모스는 볼비와 함께 삼층에 자리 잡은 방으로 올라 가서 바트에게 억지로 약을 먹여 침대에 재워 놓고 아직도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지 않는 여동생 에코를 돌보았다. 메디아는 블루잉을 품에 앉고 약초상이 즐비한 로스코의 복잡한 거리를 찾아 숙소를 나섰고 알렉토는 자신의 무기를 점검하기 위해 대장간을 찾아가는 길에 메디아에게서 마시를 떠맡게 되었다. 서쪽으로 길게 뻗은 스누강과 동남쪽으로 쭉 뻗어나간 아이니강 사이에 위치한 로스코는 크로노스 산맥이라는 거대한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대륙에서 가장 손꼽 히는 무역도시였다. 일년내내 대상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무역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로 스코는 일행이 지나온 노아보다도 더 크고 발달한 도시였다. 이국의 향기가 물씬 배어나는 이곳은 특히 라비론과 접한 국경과 가까워서 라비론이나 페렌토의 상 인들이 많이 드나 들었고 멀리 남부의 아르카디아와 다마스코의 상인들까지 아이 니강을 거슬러 올라와 상행위를 하는 거대한 무역의 중심지였다. 부족사회에 길들여졌던 알렉토에게는 이런 대도시가 언제나 편하게 느껴지지 않 았다. 그는 대 초원과 산을 배경으로, 커다란 목재로 지은 둥근 원형 움막에서 살던 자신의 어린 시절이 항상 그리웠다. 그곳에는 그를 떠나 보내며 눈물짓던 어린 누이와 그의 용맹스런 형과 남동생들이 터를 이루며 살고 있었다. 만약, 자 신이 아끼던 어린 누이를 두고 형제들끼리의 다툼만 없었다면 알렉토는 영원히 그곳을 떠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알렉토는 자신이 모하비 부족을 떠난 것을 한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형제들을 위해 알렉토 자신이 떠나 온 것이 그는 만족스러웠다. 그가 아무리 타지를 떠돌고 십년이 넘도록 용병의 생활 을 하고 있었지만, 그 자신이 모하비 전사라는 것을 잊지 것처럼, 그들의 가족도 그를 잊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믿었다. 알렉토는 대장간에 검을 맡기고 나오던 길에 고향이 생각나게 하는 여인의 모습 을 본 따서 만든 작은 조각품에 정신이 팔려, 자신의 앞에서 열심히 뛰어 다니던 마시가 어느 순간 작은 골목으로 사라지는 것을 미처 발견하지 못 했다. 마시는 먹을것으로 꽉 들어찬 경이로운 골목에 들어서 있었다. 마시는 태어나서 이토록 사방에 먹을것 천지인 곳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항구도시 노아에서 조차 이렇게 골목 전체가 음식으로 가득한 곳은 없었다. 길가는 온갖 과자와 쿠키가 진열되었고 아름다운 빛깔들을 자랑하는 봄 과일들은 상점들 사이로 보기좋게 쌓아져 있었다. 길가에 놓여진 커다란 솥에서는 무언지 모를 음식들이 보글보글 끓었고 방금 구워져 나온 바삭한 빵들과 강가에서 잡아 온 싱싱한 물고기들이 길거리에 즐비했다. 통채로 꼬챙이에 끼워 양념을 발라 구 워지고 있는 오리 구이와 발갛게 달구어진 석쇠위로 향긋한 향료가 가미된 송아 지 고기를 굽는 냄새가, 거리를 흘러다니며 식욕을 자극해 입안에 가득 침이 고 이게 했다. 거리는 마시의 모든 감각을 어지럽게 하는 맛있는 음식과 달콤한 향기가 진동하 고 있었다. 마시는 자신의 주머니에 있는 동전이 모두 동이 날때까지 먹고 또 먹 었다. 그의 미소년적인 아름다운 흰얼굴과 분홍색 입술에는 음식의 찌꺼기와 자 극적인 소스들이 잔뜩 묻었고 손에는 과자와 음식물들이 한움큼 쥐어져 있었다. "쩝쩝... 아줌마 저것도 주세요." 헤벌쭉거리는 그의 치아 사이로 과자 부스러기와 고기 살들이 여러가지 색깔을 드러내며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알렉토는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는 사이로 큰 덩치를 바쁘게 움직이며, 검은 머 리의 붉은 눈동자를 두리번 거리고 있을 마시를 찾아 헤메고 있었다. 그는 자신 의 경솔함과 부주의함을 탓하며 사방으로 뻗어나 있는 골목들을 정신없이 돌아 다녔다. 그러나 남들보다 훨씬 커서 그의 내려다 보는 시선에도 마시의 호리호리 한 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알렉토는 셔츠가 젖어서 등에 달라 붙은것도 모른채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걷고 또 걸었다. 그는 벌써 한 시간이 넘도록 헤메고 다녔지만 수 많은 사람들이 오가 는 미로같은 시장에서 마시를 찾을 수는 없었다. 그가 한 골목을 지치고 답답한 심정으로 막 빠져 나왔을때, 작은 구석에 보이지 않는 골목에서 들리는 둔탁한 소리를 들었다. 그 곳에서는 작은 비명소리도 들리 는 듯했다. 알렉토는 지체없이 발길을 움직였다. 소년은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자신의 뒤에는 골목의 한쪽 벽에 바짝 붙어서 바 들바들 떨고 있는 붉은 머리의 아름답고 어린 소녀가 겁에 질린 눈동자를 크게 뜨고 있었다. 소년은 자신의 눈앞에서 거친 코김을 뿜어내며 탐욕스런 욕망을 드 러내 보이는 청년들을 증오에 차서 노려보았다. 그들이 들고 있는 투박한 칼날에 엉켜붙어 있는 말라붙은 피딱지는 소년에게 두려움보다는 투지와 분노를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알렉토는 좁은 골목을 꽉꽉 메우고 있는 두 명의 낡은 차림의 청년과 그 앞에 버 티고 선 검은 머리의 소년을 한숨을 몰아쉬며 바라보았다. 소년은 호리호리했고 제멋대로 날리는 검은 머리가 조금씩 비춰드는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알렉토가 골목입구에 들어선 순간 청년들은 소년의 가는 손목에 쥐어진 검을 우 습게 보는듯이 덤벼 들고 있었다. 알렉토가 놀란 가슴을 채 진정 시키기 전이었 고 그는 짧은 숨을 들이켜야만 했다. "헉." 그러나 알렉토가 막힌 숨을 안은 채 달려가기도 전에 소년은 정말로 멋지게 청년 들의 거친 움직임을 세련되게 막아내고 있었다. 쇠의 부딪힘 소리가 심약한 소녀의 작은 어깨를 움찔움찔 떨리게 하고 있었다. 불타는 붉은 머리가 동그란 얼굴위로 흩어져 내려 있는 모습은 그녀가 대단한 미 인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었다. 검은 머리의 소년은 자신의 보호를 받고 있는 연약한 소녀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양다리에 힘을 주었다. 지킬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킨다. 굳은 결심으로 무장하며 소년은 자신을 노려보는 욕정에 사로잡힌 청년들에게 시 선을 고정시켰다. - 계 속 - --;;;;;;;;;;;;;;;;;;; 번 호 : 35 / 83 등록일 : 1999년 09월 05일 20:44 등록자 : CHO1971 조 회 : 2080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35.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달빛에 여울진 물 위에 너 자신을 비추어 보아라. 네가 무엇으로 보이더냐?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이더냐? 작은 파문에 흔들리는 너는 한낮 그림자에 불과하지 않더냐? 제 35 장 로스코에서의 하루. 마시는 자신을 노려보는 날카로운 눈빛에 어쩔줄을 몰랐다. 그의 자신만만함은 어디로 사라지고 점점 기가 죽어가고 있었다. "얼른 내지 못하겠어?" 짜랑짜랑하게 자신을 재촉하는 목소리에 마시는 두 손을 힘없이 내려다 보았다. "치.." 그러나 마시는 두 손을 비롯해 주머니 어디에도 동전 한푼 남아있지 않았다. 마시는 주머니가 비어가는 것도 모르고 이것저것 집어먹기만 했다. 결국 그는 빈 털털이가 되어서 먹은 쿠키의 값을 지불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인심좋아 보이던 빵집 아주머니는 순식간에 눈을 쭉 찢으며 마시를 잡아 먹을듯이 노려보기 시작 했다. 그러나 마시는 이럴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전혀 알수가 없었다. 단지 어정쩡 하게 길거리에 서서 아주머니가 내뱉는 욕을 고스란히 듣고 있어야 했다. "뭐? 돈이 없어? 돈이 없으면 먹지를 말아야지. 네 녀석이 지금 먹어치운 과자가 얼마나 많은줄이나 아는거냐, 응? 이런 싸가지 없는 녀석을 봤나 어서 냉큼 주 머니에 있는 것을 꺼내놓지 못하겠어?" 깡마른 몸집에 밀가루 얼룩이 묻어있는 앞치마를 걸치고 있는 아줌마는 손가락질 을 요란하게 하며 마시를 몰아 붙였다. "돈이 없으면 네 옷이라도 벗어서 내놔. 그것도 모자른 건줄 알아. 몸으로라도 값을 지불해야 된다구. 이 버릇없는 꼬마 녀석야." 사실 마시가 입고 있는 옷은 상당히 비싼 옷이었다. 그것을 잽싸게 알아챈 빵집 주인은 마시의 옷을 빼앗아 과자의 값을 배상하게 할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과자 의 값이 아무리 비싸도 마시의 옷과는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시 는 그런 것에 대해서 전혀 몰랐고 빵집주인의 말을 고스란히 믿고 있었다. "어서 벗으라니까. 너 혼 좀 나볼래?" 앞치마가 펄럭이도록 마시를 붙잡으며 나이든 여자는 거칠게 마시의 조끼를 벗겨 내려고 했다. 그러나 마시는 자신의 검정 조끼를 벗겨내는 여자의 손을 억지로 떼어냈다. 만약 옷을 빼앗긴다면 메디아가 화를 낼 것 같았기 때문이였다. "옷은 안된단 말예요." "뭐가 안돼? 그럼 돈을 내야 할거 아냐. 이 도둑놈 같으니라구. 어서 벗어." 순간 빵집 주인은 마시의 멱살을 잡아 당기며 밀가루와 과자의 부스러기가 잔뜩 묻은 손을 들어 마시의 뺨을 후려쳤다. "빨리 벗지 못하겠어?" 마시는 자신의 눈속에서 불이 번쩍 타오르는 화끈한 느낌에 당황했다. 눈앞에서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흔들고 있는 여자의 추한 얼굴이 보였다. 그제서야 마시는 자신이 뺨을 맞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맞은 뺨이 따끔거렸다. 감히 겁도 없이 추하기 짝이 없는 하찮은 인간이 자신의 뺨을 때렸다는 사실에 마시는 잠자고 있던 분노가 확 피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며칠 전에도 인간에게 얼마나 어처구니 없이 당했던가, 그리고 아직도 그의 상처난 자존심은 치유되지 않았다. 마시의 눈에 위험한 빛이 감돌았다. 그는 손을 들어 나이든 여자의 옷을 거칠게 움켜 잡고 잘 진열되어 있는 빵더미 위로 집어 던졌다. 안됐다는듯이 길거리에 서서 마시를 구경하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 다. 요란하게 진열대가 무너져 내리고 빵과 여자가 뒤엉켰다. 그러자 빵집에서 키가 작고 배가 나온 뚱뚱한 남자가 뛰어 나와 소리쳤다. "이게 무슨 일이야?" 마시는 씩씩 거리며 여자를 노려 볼 뿐이었다. "감히... 날 때렸어?" 마시는 두 손을 허리에 올려 놓으며 분노를 담아 나직하게 말했다. 그 모습은 어 찌보면 대단히 위엄있게 보이기도 했다. 빵집에서 뛰쳐 나온 남자와 그의 손에 간신히 일어나던 여자가 마시를 돌아 보았 다. 그들은 값비싼 옷을 잘 차려 입고 분노를 터뜨리는 예쁘장한 외모의 소년의 위엄있는 모습에 겁이 나기 시작했다. 혹시 귀족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였다. 처음에는 돈에만 생각이 미쳤던 나이든 여자는 소년을 자세히 보지 않은 것을 후 회하기 시작했다. '감히'라는 단어는 아무나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 다. "저....저...." 말을 더듬으며 어쩔줄을 몰라하는 여자의 태도는 조금전의 거칠고 겁었던 모습과 는 판이하게 달랐다. "핫하하하하......" 난장판이 되버린 가게 앞에 구경하던 사람들 속에서 돌연 유쾌하고 호탕한 웃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이 의아해서 돌아보자, 사람들 사이에서 매끈한 옷차림의 기사가 걸어 나왔다. 그는 여전히 웃으며 마시의 곁으로 다가섰 다. "이보게 소년, 아둔한 평민이 어쩌다가 실수한 것을 가지고 그리 화를 내면 되겠 나? 좀 참게나. 보아하니... 자네 돈도 없이 저 불쌍한 여인의 빵을 먹었나 본데 그 정도는 각오를 했어야지." 마시는 느닷없이 나타나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려 놓으며 친한 척하는 사내를 바 라다 보았다. 사내는 훤칠한 키에 깨끗하고 부드러운 옷감으로 만들어진 바지와 셔츠를 걸치고 가죽으로 덧댄 조끼와 부츠를 신고 있었는데 화려한 문양이 새겨 진 붉은 망토를 등뒤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는 입가에 웃음을 걸친채 갈색눈동 자를 친근하게 빛내고 있었다. 그가 겁먹은 가게 주인들에게 돌아서더니 말하기 시작했다. "자. 이 소년이 끼친 피해는 내가 보상하도록 하지. 이거면 충분하겠지? 앞으로 는 귀족에게 더 공손하게 행동하도록 하게나 여인이여." 사내는 손가락에서 금화를 몇 개 떨구어 빵집 여자의 손안에 쥐어 주었다. 그리 고는 마시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서더니 유쾌하게 말했다. "이보게, 소년. 난 자네가 맘에 드는군. 급한 일이 없다면 나랑 술이나 한잔 하 겠나?" 마시의 불타던 눈동자가 순식간에 반짝이는 루비빛으로 바뀌었다. "술?" 마시는 술이라는 마지막 말에 자신의 지금 상황과 방금 전의 분노를 잊어 버렸 다. 그리고 자신의 어깨를 두르고 있는 사내가 처음 만난 인간이라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 술말일세. 자네 술맛을 좀 아는 모양이군. 그 눈빛 정말 맘에 드는데!" 사내는 가게 앞에 모여들었던 사람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헤치며 마시와 어깨 동 무를 하고-사실은 키 차이가 많이 났지만- 술집을 향하기 시작했다. 소년은 잘 싸우고 있었다. 그것이 알렉토를 당황시켰다. 마시는 절대로 칼을 아 니 검을 다룰 줄 몰랐다. 그러나 소년은 틀림없이 상당한 기간동안 검을 수련한 흔적이 역력이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소년도 실전의 경험은 별로 없는듯 두명의 청년을 힘겹게 상대하고 있었다. 소년은 스승으로부터 검을 배울때 자만심에 빠졌던 자신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 었다. 길거리에서 만난 불량배조차도 물리칠 수 없다는 사실이 소년을 비참하게 했고 절망하게 했다. 두 청년들은 약이 바짝 올라 있었다. 그들은 한손으로는 칼날을 휘두르며 다른 손으로는 소년의 뒤에 있는 소녀를 낚아채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청년들이 소년의 양쪽으로 나누어 서며 서로 눈짓을 나누기 시작했다. 한 청년이 소년의 왼쪽으로 들어오며 소녀의 치맛자락을 잡아 당기려고 했다. 화들짝 놀란 소녀가 치마를 황급히 당기며 울음을 터뜨렸다. 소년은 청년의 팔을 향해 검을 휘둘러 보였다. 그러나 소년의 반대쪽에 있던 청년이 소년의 몸으로 달려 들어 소년은 앞으로 고꾸라 지고 말았다. 소년의 몸과 청년의 몸이 서로 뒤 엉켜서 땅바닥을 구르는 사이 소녀는 다른 청년에게 두 팔목을 잡힌채 강제로 안 겨 발버둥을 치며 비명을 질러댔다. 소년은 자신을 짓누르는 청년의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숨을 헐떡였다. 엉킨 다리 와 팔 사이로 짐승적인 힘이 느껴졌다. 거친 흙이 입속으로 들어와 까실거렸다. 소년은 온 힘을 쏟아 청년의 몸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썼다. 소녀의 옷자락이 거 칠게 찢어지는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소녀의 흐느끼는 비명이 그의 귀를 자 극하며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것 같았다. "놧! 놓아라 이놈들. 놓으란 말이야. 꺄아악...흑.." "안돼. 그녀를 놓아줘. 이 나쁜 놈들..아악...!" 소년은 땅바닥으로 얼굴을 쳐박으며 소리를 질렀다. 너무나도 분했다. 자신의 어 리석음과 나약함에 그는 미칠것만 같았다. 소녀가 자신의 눈앞에서 무너지는 것 을 볼 수가 없었다. 차라리 죽고 싶었다. 그는 눈을 감아 버렸다. 감은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려 달아오른 뺨을 젖시고 있었다. 소녀의 미친듯한 비명이 계속 들리는 사이 갑자기 둔탁한 소리가 들리고 남자의 단말마의 신음이 들려 왔다. 그리고 소년의 몸을 짓누르고 있던 무게감이 등뒤에 서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어서 들리는 나직한 톤의 남자의 음성이 들 려왔다. "이봐, 괜찮은가?" 소년은 얻어터져 부어오른 눈을 들어 오후의 햇살을 가리고 선 큰 덩치의 사내를 올려다 보았다. 알렉토는 자신을 올려다 보는 소년의 부어오른 눈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마시 가 아니였다. '이 녀석을 어디가서 찾아오지? 메디아가...후우..' 알렉토는 마시를 못 찾아 가면 메디아가 얼마나 화를 낼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사실, 메디아가 화를 내는 모습을 몇 번 본적이 있었지만 과연 마시를 잃어버렸 다고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걱정이 되었다. 알렉토는 메디아가 마시를 귀찮아 하면서도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였다. "오피온...흑흑.." 한쪽에서 찢어진 옷가지를 추스리던 소녀가 소년의 품으로 뛰어 들었다. "괜찮아. 이제 괜찮을거야, 로사리아." 알렉토는 부둥켜 안고 울음을 터뜨리는 어린 소년과 소녀를 바라보며 고민에 빠 졌다. 마시를 이끌고 술집에 들어간 사내는 자신을 제피로스라고 소개했다. 그는 시종 남자다운 기개와 웃음소리로 마시를 매료시켰고 유쾌한 이야기와 모험담을 늘어 놓으며 마시의 호감을 샀다. 한 동안 아늑한 술집에서 술을 부어라 마셔라 하던 그들은 은근히 취기가 올라 있었다. "이봐, 소년. 아참.. 마시라고 했지. 열 다섯살이라면서 술을 아주 잘 마시는군 그래. 아주 맘에 들었어. 척 보는 순간부터 자네가 아주 맘에 들었단 말야. 그런 데 남자란 술만 잘 마신다고 남자는 아니란 말이지. 남자란 자고로 여자를 알아 야 진짜 남자란 말이네. 여자에 대해 좀 아나, 마시?" 마시가 딸꾹질을 하며 흥미있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여자? 끅.." 무언가 새롭고도 대단한 이야기를 기대하고 있던 마시에게 그것은 약간은 의외의 말이었다. 마시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제피로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여자말이네. 하하하..하하... 그 표정을 보아하니 아직 배워야 할것이 어 지간히 많은게 아니로군. 자! 일어나세 소년이여." 제피로스는 탁자에서 억지로 마시를 일으키며 술집에서 끌고 나갔다. "오늘 자넨 운이 좋은 줄 알게나. 하하... 남자 중에 남자, 나 제피로스를 만났 으니 말이야." "끄윽... 남자?" "이제부터 자넨 진짜 남자가 되러 가는걸세. 어때? 좋지 않나, 소년?" 게슴치레한 눈빛으로 약간의 웃음기가 배인 얼굴로 제피로스는 마시의 어깨를 잡 고 비틀거리며 어둠이 내려 앉은 거리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꺼억..진짜...남자?" 마시는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밤의 불빛들을 황홀하게 바라보며 제피로스가 이끄 는대로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 계 속 - 번 호 : 36 / 83 등록일 : 1999년 09월 11일 07:53 등록자 : CHO1971 조 회 : 2015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36.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달빛에 여울진 물 위에 너 자신을 비추어 보아라. 네가 무엇으로 보이더냐?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이더냐? 작은 파문에 흔들리는 너는 한낮 그림자에 불과하지 않더냐? 제 36 장 여자는 안돼. 메디아는 거북이를 끌어안고 로스코 시내의 약재상이 즐비한 거리를 찾아서 십년 전에 들렀던 허름한 가게로 들어갔다. 그곳은 비밀스러운 약초를 많이 파는 곳으 로 마법사들이 많이 거래하는 곳이었는데 일반인들은 잘 알지 못하는 가게였다. 그곳에서 원하던 약초를 구한 메디아는 블루잉을 품에 안아 따뜻하게 보호하며 비단과 장신구등을 취급하는 복잡한 거리를 찾아 나섰다. 화려한 주단이 수 없이 걸려 있는 거리는 색색의 아름다운 천들이 가득하게 진열되어 나풀거리고 있었 는데 젊은 아가씨들이 짐꾼들과 함께 섞여 옷감을 고르고 있었다. 메디아는 완연한 봄기운을 느끼며 아직도 입고 있는 겨울 옷을 바꿔야겠다고 생 각했고 간단한 여행용 옷을 마련하기 위해 상점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녀에 게 필요한 옷은 화려하지 않고 실용성이 있는 여행용 복장이였기 때문에 좀 더 구석진 가게들을 찾아 다녀야 했다. 메디아는 한걸음 걸을때마다 부딪히는 수 많 은 아가씨들과 시종, 그리고 짐꾼들 때문에 서서히 짜증이 나고 있었다. 이상하 게도 거리에는 유난히 젊은 아가씨들이 평소보다 배는 더 많은 것 같았다. '무슨 옷을 사겠다고 이 난리들이야?' 그녀가 얼굴 가득 짜증을 표현하며 비교적 한산한 가게로 들어서자 주인은 반갑 게 그녀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요, 아가씨. 어떤 옷을 찾으십니까? 여긴 비단옷은 팔지 않는데요." "비단옷 따위는 필요없고 간단한 여행복이면 돼요. 열네다섯살 정도되는 사내아 이의 옷하고 제가 입을만한 걸로 좀 보여 주세요. 질이 좋은 걸로 부탁해요, 아 저씨. 최고로 좋은거였으면 좋겠네요. 가죽은 되도록 얇고 튼튼한게 좋겠어요." 메디아가 얼굴을 찌푸리며 간단하게 필요한 것들을 말하자 주인은 웃음을 지으며 물건들을 펼쳐놓기 시작했다. "아가씨는 오람에는 가지 않을 모양이구려. 보아하니 아가씨도 꽤 미인인듯한데..." 메디아는 주인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주인은 그녀의 표정을 보더니 간단하게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모든 아가씨들이 오람에서 열리는 오월의 미인대회에 참가하겠다고 난리들이지 않습니까. 아가씨는 그것도 몰랐소? 지금 밖에서 저 난리들인게 안보이는 모양이 구려. 너도나도 모두 오월의 미인대회에 참가해서 혹시라도 왕자의 배필이나 국 왕의 후궁으로라도 들어갈까 싶어서 들떠 있는데 말이오. 화려한 드레스들을 고 르려고 이 비단골목을 찾아 오는 아가씨들이 요즘 줄을 잇고 있는데 아가씨는 어 째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이구려." 그제서야 거리에 가득한 여자들의 행렬을 이해하게 된 메디아는 어처구니가 없었 다. 겨우 그런 대회에 나가자고 저 많은 여자들이 혈안이 되어 난리들이라니 도 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저씨, 이렇게 거칠은 거 말고 부드럽고 질긴 걸로 보여주세요. 제가 듣기로는 이 가게에서 최고급품을 많이 갖고 계시다고 들었는데요." 메디아는 미인대회이야기는 흘려들으며 주인이 내놓은 조끼와 셔츠등을 뒤적거리 며 냉정하게 그것들을 평가하고 있었다. "흐음. 아가씨 안목이 꽤 까다롭구려 그래. 이 정도상품도 어디가서 구하기 힘든 것들인데...." 주인은 그렇게 말하면서 메디아의 옷차림을 유심히 들여다 보기 시작했다. 그는 꼼꼼하게 바느질되어 있는 메디아의 질좋은 바지와 고급 가죽으로 만들어진 신발 에 눈낄을 주었다. 그의 눈으로 보기에도 그것들은 쉽게 구할 수 없는 고급품이 었다. 주인은 서둘러 보이지 않는 곳에 감춰 두었던 여러개의 상자를 꺼내기 시 작했다. 주인은 커다란 상자를 몇 개 끌고 나와 빈공간에 내려놓고 사슬을 풀어, 안의 내 용물들은 꺼내 보여주기 시작했다. "이건 정말 아끼던 물건인데... 아가씨가 물건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사람같아서 보여주는 거요. 이런 물건은 주인을 잘 만나야 빛이 나는 법이지요. 아가씨 맘에 들거요." 주인이 새로 꺼내놓는 물건들은 메디아가 보기에도 솜씨좋은 장인의 손길이 느껴 지는 훌륭한 것들이였다. 메디아는 꼼꼼하게 마무리된 바느질과 가죽의 질감을 확인하며 맘에 드는 옷가지들을 몇가지 골라내기 시작했다. 메디아는 빨간색 장식들이 적당히 검은 색과 어우러져 있는 바지와 흰색셔츠를 고른 뒤 마시가 입을만한 검은 조끼와 셔츠, 그리고 몇 가지 필요한 옷가지들을 몇 벌 더 골라내고 주인에게 물건값을 치뤘다. "아가씨, 물건 하나는 정말 잘 사가시는 건 줄 아시오. 어디가서 이런 물건 구하 기는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힘들거요." "아저씨, 이거 배달되죠?" "물론이요. 오늘 안에 보내드리죠. 그런데 어디로 보내 드리면 되겠소?" "광장에서 멀지 않은 여관인데요. 여기서 나가면...." 메디아는 상점 밖을 내다보며 길을 설명하다가 말을 뚝 끊었다. 멀리 보이는 골 목을 지나가는 어렴풋한 그림자가 그녀의 신경을 잡아 당겼다. 두 명의 남자가 어깨동무를 한채 비틀거리며 어딘가로 길을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너무 멀어 서 정확히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메디아가 보기에 그 중에 한 명은 틀림없는 마 시였다. '마시?' 알렉토의 커다란 덩치와 특이한 머리장식은 멀리에서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마시와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또 다른 그림자는 키가 크고 덩치가 있어 보였지만 알렉토는 아니었다. 메디아는 얼굴을 찌푸리며 유심히 그들을 살펴 보려고 했지만 그들은 금새 메디 아의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그녀는 서둘러 상점주인에게 묵고 있는 여관을 일러 주고는 방금 사라진 남자들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메디아의 시야에 잠깐 잡혔던 마시와 제피로스는 부지런히 길을 가로질러 어느 복잡한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이 걷고 있는 거리는 어둠이 내려왔는데도 불구하고 온갖 색색의 불빛들이 총천연색을 뽐내며 빛을 뿌리고 있었다. 좁은 골목 양쪽으로는 붉은 등이 밝혀져 있었고 시끄럽고 소란스러운 남녀의 웃음소리와 손님을 잡아끄는 우람한 덩치의 남자들이 지르는 고함으로 골목은 활기에 가득차 있었다. 제피로스는 적당히 술에 취한 마시를 이끌고 자신들을 잡아 당기는 사람들을 뿌 리치며 자주가던 단골집의 문을 열어 젖혔다. 그가 문을 열자 넓은 홀안에서 따 뜻한 불빛이 새어 나와 그들을 감싸안았다. 순간 여자들의 향수와 짙은 화장품 냄새가 코를 찔러 들어왔다. 마시는 어지러운 머리를 들어 사방에서 달려드는 여자들을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여자들의 유혹하는 코맹맹이 말소리와 짙은 향수냄새에 정신이 없었다. 옆 에서 마시를 지탱하고 있던 제피로스가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이봐, 소년. 정신차리라구. 이제부터 즐겨야지." "즐겨?" 마시가 어지러운 시선을 돌려 웃고 있는 제피로스에게 멍청하게 중얼거렸다. "어이 거기. 술 좀 가져와. 이봐 이봐. 거기 내말 안들려? 오늘 내가 아주 귀한 손님을 데려 왔다구. 오.. 이게 누구야? 엘라. 엘라, 이리와서 내 귀여운 친구 좀 대접해 주겠어?" 정신이 어지럽도록 시끄러운 홀은 그야말로 음악과 술과 여자들이 뒤섞여 묘한 분위기를 이루고 있었다. 제피로스는 그 분위기에 익숙한듯 성큼성큼 걸어가 자 리를 잡았고 마시는 여자들의 손에 이끌려 제피로스의 옆에 앉아 권해 주는 술 을 받아 마셨다. 여자들은 마시의 곱상한 외모와 하얀 피부를 보고 웃음을 터뜨 리기도 하고 부러운듯 쓰다듬기도 하며 서로 즐거운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어이 소년, 어떤가? 재밌지 않나? 오늘 밤 엘라가 자네를 진짜 남자로 만들어 줄거라네." 제피로스는 그의 옆에서 술을 따라주던 여자를 끌어 당겨 품에 안으며 마시에게 말했다. "어머. 이 손님 진짜 내 몫인가요?" 엘라라고 불리운 새빨간 머리의 여자는 푸른 눈동자를 빛내며 기대에 찬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는 제피로스의 품에서 재빨리 내려와 마시의 옆으로 자리를 옮 기고 다른 여자들의 손들을 치워 버렸다. "뭐야 엘라. 혼자서 차지하겠단 말야?" "저리 비켜. 이 손님은 내꺼야. 손대지 말라고." 마시를 두고 여자들이 약간의 실갱이를 하는 동안 제피로스는 호탕하게 웃으며 다른 여자를 끌어 당겨 키스를 하기 시작했고 마시는 멍청하게 앉아 제피로스와 엘라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엘라는 마시에게 치근거리는 다른 여자들을 억지로 물리치고 마시에게 술을 권하 며 과일과 안주를 먹여주는둥 신경을 쓰며 빨리 방으로 올라가자고 유혹했다. 엘라는 아름답고 순진한 소년을 어떻게 즐겁게 해줄지 생각하며 그녀답지 않게 얼굴을 붉히기도 하고 취한 마시의 입술에 가벼운 키스를 해주기도 했다.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듯한 얼굴의 순진한 마시를 보며 설레이는 심정을 달래고 있었 다. 한편 메디아는 마시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그녀가 막 좁고 밝은 골목에 들 어서자 여기저기서 여자들이 야유를 퍼붓기도 하고 남자들이 그녀를 이상한듯이 쳐다보며 은밀한 웃음을 짓기도 했다. "이봐, 아가씨. 여기는 여자는 못 들어와. 어서 나가." 메디아는 골목의 분위기를 보고 이곳이 어떤 곳인가는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 만 설마하는 심정으로 그녀의 앞을 가로막은 사내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딘데요?" "키킥... 아가씨 길을 잃었나 보군. 여긴 여자를 찾는 남자손님들만 오는 곳이 야. 자, 어서 여기서 나가라구." "여자라구요? 지금 몸 파는 여자들 말하는 거예요?" 고개를 끄덕이는 사내를 보며 메디아는 속이 메스꺼워지며 토할것만 같았다. 메디아의 앞을 가로막았던 남자는 메디아의 하얗게 질리는 얼굴을 흥미롭게 바라 다보며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그 주위에 나와있던 다른 여자들은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메디아를 노려 보기 시작했다. "저거 뭐야? 어디서 굴러 들어 온 게 여기서 함부로 말하는 거야?" "이봐, 너희들 조용히 해. 들어가서 장사나 하라구." 사내는 시끄러워지는 여자들에게 소리치고는 메디아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녀는 완전히 핏기가 가신 얼굴로 바닥을 쳐다보며 멍하게 서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쓰 러질 것처럼 보였다. "어이 이봐. 괜찮아?" 메디아는 사내의 걱정스런 목소리를 흘려 들으며 숨을 가다듬고 말하기 시작했다. "저기...저기...혹시 검은 머리 남자애하고 덩치 큰 사내가 같이 가는 거 못 봤 어요?" 메디아가 한껏 심각하게 묻자 사내는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 대고 의심스럽게 물 었다. "혹시 그 남자가 남편인가?" "아니요. 내 남동생이예요. 봤어요?" 사내는 굳었던 얼굴을 펴며 재미있다는듯 가볍게 대답했다. "보긴 봤는데.... 저기로 들어가더군. 이런데 들락거리는게 그렇게 충격적인가? 사내란 애나 어른이나 다 마찬가지지. 그것 가지고 누나가 너무 성가시게 굴면..." 사내는 한참을 더 떠들고 있었지만 메디아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 녀는 사내가 가리킨 건물을 뚫어질듯이 노려 보았다. '여자라구... 여자? 하! 미치겠군...' 메디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적진을 향해 가는 병사처럼 그곳을 향해 힘차게 걸 어갔다. 마치 살인을 할듯한 비장한 모습이였다. '여자는 안돼 마시. 젠장!' - 계 속 - 번 호 : 37 / 83 등록일 : 1999년 09월 18일 06:46 등록자 : CHO1971 조 회 : 2167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37.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달빛에 여울진 물 위에 너 자신을 비추어 보아라. 네가 무엇으로 보이더냐?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이더냐? 작은 파문에 흔들리는 너는 한낮 그림자에 불과하지 않더냐? 제 37 장 했니? 아직 안했니? 마시는 희미하게 불이 밝혀진 아늑한 침실에 있었다. 벽난로에서는 마른 장작과 향수로 쓰이는 풀잎이 불꽃을 튀기며 타고 있어 희미 한 나무냄새와 야릇한 향이 방안에 적당히 퍼져 있었다. 여자는 마시의 옷을 벗 겨서 젖은 수건으로 그의 몸을 깨끗하게 닦아 주는 중이었다. 화려하게 장식이 되어있는 침대위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알몸으로 누워있게 된 마시는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와중에도 마시는 자신의 앞에 노출이 심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를 뚫어질 듯이 관찰하고 있었다. 마시는 하얗게 출렁이는 여인의 윗가슴 부분을 집중적으로 보고 있었다. '저 게 뭘까? 왜 이상하게 출렁이는 거지?' 마시는 한 손을 뻗어 눈에 보이는 기이한 모양의 그것이 어떤것인지 확인하고 싶 었다. 하지만 마시는 손가락하나 까닥하기가 귀찮을 정도로 힘이 없었다. 분명히 몸에 열도 나고 왠지모를 느낌에 감각이 새록새록 깨어나고 있었지만 움직이기 는 싫었다. 여자는 마시의 심정을 알기라도 하는지 자신의 몸을 마시에게 가까이 밀어 부쳤다. "호호... 어때? 기분이 좋지? 이번이 처음인거야?" 엘라의 몸에서 달콤한 향기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우웅..?" 마시는 촛점이 잘 잡히지 않는 눈으로 여자의 나신을 보기위해 애써 시선을 맞추 려고 했다. 마시는 한번도 보지못한 여자의 알몸에 대해 무한한 호기심과 신기함 을 느끼고 있었다. 마시는 자신의 맨가슴에 올려놓는 여자의 손이 유난히 뜨겁다 고 생각했다. 마시는 여자가 왜 묘한 눈낄로 자신을 바라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엘라의 풀어헤친 머리카락에서 방금 씻은듯이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지만 그녀의 몸은 아주 따뜻했다. 그녀가 윗옷을 벗어 내리며 마시가 누워있는 침대로 함께 누울 듯이 몸을 한껏 기대왔다. 여자의 매끄러운 피부가 마시의 손끝에 그대로 만져졌다. 그것은 여태까지 마시 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느낌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엘라의 촉촉한 입술이 마시의 귓가에 다정한 속삯임을 중얼거리며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술은 마시의 귓가에서 하얀이마로 다시 붉은 입술로 움직였 다. 그녀가 술냄새가 은은히 풍겨오는 마시의 뜨거운 입술에 키스하며 손을 놀려 옷을 벗고 있을때였다. 그시간 메디아는 술집에 들어와 제피로스를 붙잡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제피로스는 자신에게 다짜고짜 다가와 소년을 내놓으라는 검은머리의 여자를 어 이없이 바라다 보았다. 평범한 여자가 이런 곳에 들어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해본 제피로스는 그녀가 몸을 파는 여자라고만 생각했다. "어이 이봐, 얼마면 되지? 그 소년보다는 내가 잘해줄 수 있는데......" 그러나 여자는 매력적인 입술을 비틀며 차가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소년을 내 놓으라고 했을뿐이었다. 그것도 아주 급하게. 제피로스는 소년에게 무슨 매력이 있어서 저렇게 애타게 찾는것일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자신도 꽤 매력적인 미남이라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자존심 이 상했다. 그러나 그는 굳이 다른 남자를 찾는 여자를 붙잡을만큼 속좁은 성격 도 아니었다. "그 소년은 지금 다른 여자랑 있는데..." 메디아는 급한 숨을 들이켰다. "여자랑?" "하핫.. 눈빛을 보니 한판 할 것 같은 분위기군. 엘라도 만만치 않을걸?" 그가 웃음을 터뜨리며 재밌어 할때 메디아는 기가 막혀 할말이 떠오르지도 않았 다. "이봐, 거기. 이 여자, 엘라방에 같이 들여보내 줘. 오늘 그 소년 호강하겠군, 그래." 여자들과 남자들이 호들갑스럽게 웃으며 메디아를 바라보았지만 메디아는 그런데 신경쓸만큼 느긋하지 못했다. 그녀는 서둘러 엘라라는 여자의 방을 찾았다. '젠장. 빌어먹을...왜 내가 이런일까지 해야 하지?' 메디아는 이층계단을 뛰어올라가며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새끼 드레곤은 알에서 깨어난후 백년간은 겨울이 되면 동면을 취하고 아무런 힘 도 발휘하지 못한다. 그리고 백살이 되어 성년이 될때까지는 절대로 동정을 지켜 야만 한다. 만약, 성년이 되기전에 동정을 잃어 버리게 되면 새끼 드레곤은 성년 이 되어도 변태를 할 수 없게 되고 변태를 하지 못하면 어른이 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드레곤에게 곧 죽음과 같은 의미였다. 메디아의 손에 문짝이 거칠게 부서져 나가 떨어졌다. 씩씩거리는 메디아의 눈에 침대위에서 벌거벗고 누워있는 마시와 여자의 모습이 적랄하게 드러났다. 메디아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설마... 설마, 벌써 저지른 거야?' 나른한 기분에 젖어있던 마시는 갑자기 쾅하는 소리와 함께 날아오른 문짝을 멍 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촛점없는 시선에 석고상처럼 굳어있는 메디아의 모습이 보였다. '엉? 메디아가 왜 저러고 있는거지?' 마시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제피로스와 마신 술기운에다가 사향이 가 득한 방안에서 오랫동안 있어서인지 그의 머릿속은 몽롱하기만 했다. 그는 무의 식중에 자신의 몸위에 있는 여자의 몸을 밀면서 일어나려고 했다. 무엇인지는 몰 라도 메디아가 이상해 보였다. 한동안 꼼짝도 안하고 서있던 메디아가 그에게 성큼성큼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 녀의 눈은 흡사 겁을 집어먹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마시는 애써 그 생 각을 떨쳐 버렸다. 설마 메디아가 겁을 먹다니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메디아는 이미 벌어졌을지도 모르는 일때문에 겁을 먹고 있었다. 마시가 동정을 잃어버렸다면.... 그런 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것은 심각한 수준 을 넘어 끔찍한 일이였다. 이제 일년만 아니, 그보다도 짧은 시간만 견디면 되는 일을 평생동안 아니, 영원이라는 시간동안 떠맣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메디아 에게 그것만큼 겁나는 일은 없었다. 메디아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온갖 불길한 생각들을 접으며 제발 아니기를 빌고 또 빌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목에 걸려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다.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겨우 밖으로 흘러나왔다. "마...시?" 마시는 풀려진 붉은 눈동자로 메디아의 창백한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왜 저러는 거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생각속으로 마시는 의문을 떠올렸다. 메디아는 손을 뻗어 마시의 어깨를 마구잡이로 흔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게 나 올 대답이 두려워 쉽게 질문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떨리는 손을 가까스로 마시 에게 뻗었을때였다. 갑자기 째질듯한 여자의 고함이 들렸다. "넌 뭐야? 왜 내방에 들어와 행패야?" 안그래도 신경이 날카로운 상태였던 메디아는 여자의 짧은 고함에 화들짝 놀라 엘라를 바라보았다. 메디아가 바라본 여자는 얼굴이 붉게 날아올라 있었지만 알 몸이 부끄러워 그런것은 아닌것 같았다. 그 여자는 메디아를 사납게 째려보고 있 었다. "이봐, 이 손님은 내꺼라구. 나가지 못 하겠어! 방해하지 말고 꺼지란 말야." "방...해?" 메디아의 눈에 실날같은 희망이 번쩍였다. '그래, 아직은 괜찮은 거야. 늦지 않은 거야. 설마 그럴리가 없지. 괜찮을 거 야.' 메디아는 안도의 숨을 내쉬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은 확실하지 않다. "마시." 이제 메디아의 목소리는 어느정도 안정을 찾아 정상적으로 들렸다. 아니 그보다 는 따뜻하고 다정하게 들렸다는 것이 정확할지도 몰랐다. 그녀는 최대한 상냥하 게 마시를 불렀던 것이다. 메디아는 반쯤은 정신이 나간듯한 마시의 붉은 눈동자를 뚫어질듯이 바라보았다. 순간그녀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무슨 말로 확인해야 할지 난감했던 것이다. 그 녀는 서서히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야, 너 내말 안들려. 당장 이 방에서 나가란 말야. 어디서 굴러먹다 들어 온 계 집이 남의 장사를 망치는 거야." 엘라는 악을 쓰며 메디아의 팔을 손가락으로 찔러 댔다. 눈 앞에 있는 건방진 여 자에게 자신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기라도 하듯이 그녀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대며 싸움을 걸었다. 메디아의 당황스러웠던 눈이 엘라에게로 향했다. '그래 이 여자에게 물어보면 되겠군.' 메디아의 손이 불쑥 여자의 노출된 목으로 향하더니 목줄기를 움켜 쥐었다. "꺄아악...커억..컥!" 손가락들이 강하게 조여지며 연약한 여자의 목을 파고 들었다. 엘라는 파닥거리며 그 손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어찌된 일인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사이 방문 앞에는 문짝 부서지는 소리와 엘라의 고함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몰려 들어 있었다. 술 집을 지키는 남자들 몇몇이 들어오려다가 제피로스의 제지를 받고 물러나 있었다. 제피로스는 흥미로운 소년과 여자가 벌 이는 일들이 아주 재미있었고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구경하는 중이었다. "한 가지만 물을께." 메디아는 얼음속에서 방금 건져낸것처럼 차갑고 딱딱하게 물었다. "너 저 녀석 건드렸니?" 모두가 바라보는 가운데 메디아는 눈썹하나 까닥하지 않고 엘라에게서 대답을 기 다렸다. 사람들은 저 어린 소년이 벌써부터 결혼을 한 모양이라고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의부증이 심하면 이런데까지 여자가 찾아와 직접 행패를 부릴까?" "여자가 수치도 모르는 모양이야. 저런 말을 뻔뻔하게 묻다니... 소년이 불쌍하 군, 그래." "연하의 남편을 꽤 좋아하는가 봐. 그래도 그렇지 좀 심하군." 뒤에서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메디아는 엘라의 대답이 나오기만을 기다렸 다. 그녀의 손가락에 좀 더 힘이 들어갔다. 사실, 메디아는 마법을 공부하고 익 히는 마녀였지만 그녀는 생각보다 꽤 힘이 센 편이었다. 그것은 오로지 마시와 살다보니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새끼 드레곤을 빗자루 하 나로 길들이다보니 어쩔수 없이 몸이 단련되었던 것이다. 엘라의 숨넘어가는 소리가 더 절박하게 들려왔다. "커억...이..놔.줘..으윽" 그녀의 눈동자가 문 저편에 있는 남자들을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이봐, 그러다가 그 여자 죽겠어. 그만 놔 주라구." 누군가가 메디아를 향해 장난끼 실린 어조로 소리쳤다. 메디아는 손에 약간의 힘을 빼며 다시 물었다. "했니, 했어? 아직 안한거야?" 엘라는 메디아의 손목을 떼어내려고 발버둥을 치며 겨우 중얼거렸다. "안...했어." 어지러운 머리를 겨우 가누고 있던 마시는 문에서 들어오는 차가운 밤바람에 서 서히 제정신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는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 에 잠시 헷갈리는 생각을 정리하려고 했다. 마시는 문앞에서 싱글거리고 있는 제 피로스를 발견하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를 따라 술을 마시고 요상한 여자와 함께 있었던 기억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알몸으로 자신에게 기대오던 여 자의 푸근한 느낌도 기억해 냈다. 그 여자는 지금 메디아에게 목을 붙잡힌채 부 들부들 떨고 있었다. 마시는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정말이야? 거짓말 아니지?" 메디아가 여자에게 확인하듯이 다시 물었다. 이건 정말 중요한 문제였다. "안 했어. 안 했다구!" 엘라가 조금 트인 숨통 사이로 거칠게 소리쳤다. 그러자 메디아는 안심했다는듯 이 엘라를 팽개치고 마시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눈은 처음의 겁먹었던 눈과 는 사뭇 달랐다. 마치 금방이라도 몰아칠 태풍의 전조처럼 섬뜻했다. "마시야." 마시는 메디아의 보라색 눈이 착 가라앉은 것을 보자 불길한 느낌에 등줄기로 서 늘한 바람이 부는것 같았다. 안그래도 벌거벗은 몸이 떨려왔다. "..왜?" 마시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면서 괜히 기가 죽었다. 그는 메디아가 저런 모습일때면 무서웠다. 뭔지는 몰라도 단단히 잘못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메 디아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옷은 어딨니? 옷 입고 가야지?" 역시 나직한 메디아의 목소리가 마시에게 들렸다. "응? 으응." 마시는 후다닥 일어나 건너편 의자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옷들을 찾아입기 시작했다. - 계 속 - 번 호 : 38 / 83 등록일 : 1999년 10월 04일 20:50 등록자 : CHO1971 조 회 : 1771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38.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달빛에 여울진 물 위에 너 자신을 비추어 보아라. 네가 무엇으로 보이더냐?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이더냐? 작은 파문에 흔들리는 너는 한낮 그림자에 불과하지 않더냐? 제 38 장 변화. 어둠의 장막이 내린 로스코의 밤거리는 햇살이 가득했던 대낮과는 또다른 모습의 활기를 비치고 있었다. 곳곳에 밝혀진 불빛 사이로 이국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현악기의 은은한 울림이 건물바깥으로 새어나오고 낮에는 한적했던 골목에서도 색 색의 불이 밝혀지며 사람들의 발걸음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둠의 시간이 로스코를 휘어감고 마법처럼 밤이 깨어났지만 마시를 찾지 못한 알 렉토는 소년과 소녀를 데리고 여관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마시가 여관 으로 돌아가 있기를 간절히 바랬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마시가 길을 찾아 여관 으로 돌아가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지치고 힘든 몸을 이끌고 여관으로 돌아온 알렉토는 마시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불안한 심정으로 식당에 앉아 소년과 소녀에게 음식을 시켜주었다. 그는 하루종일 마시를 찾아다니느라 심신이 몹시 피곤했지만 편하게 앉아 음식을 먹을수가 없었 다. 오피온과 로사리아는 며칠은 굶은듯 열심히 먹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들의 식사모습이 무척이나 우아하고 깔끔하게 보였다. 그러나 알렉토는 출입 구를 불안한 마음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나마 메디아가 아직 돌아오지 않아서 다행이였지만 언제 들이닥쳐 마시가 없어진 사실을 눈치챌지는 알 수 없는 일이 였다. 알렉토는 저녁도 먹는둥 마는둥 하고 다시 나가 마시를 찾을 궁리를 하기 시작했 다. 유난히 먹성이 좋은 마시가 저녁도 못 먹고 낯선 로스코의 거리를 헤멜 생각 을 하면 음식이 목으로 넘어가지를 않았다. 혹시라도 불량배나 노예상인을 만나 서 어느 골방에 갖혀 있는것이 아닐까하는 불길한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기 시작하자 알렉토는 더 이상 식당에 가만히 앉아 있을수가 없었다. 그리고 생각 하면 생각할수록 메디아의 반응이 어떨지 알렉토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어쩌면 이 여관이 통째로 박살나지 않을까?' 알렉토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살짝 떨었다. 그는 의자를 확 밀치며 벌떡 일어났 다. 그의 갑작스런 움직임에 의자가 뒤로 넘어졌고 알렉토의 맞은편에 앉아 식사 를 하던 오피온과 로사리아도 움찔 놀라며 먹던 손을 멈췄다. 오피온과 로사리아는 자신들을 구해준 덩치 큰 사내가 조용히 앉아 있다가 갑자 기 이상한 행동을 하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것저것 물어보는 알렉토 에게 거짓말을 해서 여기까지 따라온 참이었다. 그들은 알렉토에게 크로노스 산맥의 안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에서 친척들과 함께 살다가 이번에 부모님을 찾아 라비론으로 가던 길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낯선 도 시에서 가지고 있는 돈을 모두 잃어버리고 길도 몰라 헤메고 있던 중에 친절해 보 이는 남자들이 도와 주겠다며 그들을 으쓱한 골목으로 유인해 로사리아를 겁탈하 려고 했던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반만 진실이였고 나머지 반은 거짓으로 꾸며 낸 이야기였다. 사내는 친절하게 그가 묶는 여관에 데리고 와서 돈까지 잃은 그들에게 저녁까지 사주었던 것이다. 그들은 새삼스레 덩치 큰 사내를 다시 보며 나쁜 생각들을 애 써 밀어냈다. 그러나 이미 한번 세상인심의 쓴맛을 본 오피온은 쉽게 알렉토를 믿 을수가 없었다. 더구나 숙소까지 오는 길 내내 주위를 두리번 거리던 알렉토의 모 습이 오피온에게는 무척 불안스러워 보였다. 무언가를 찾는것인지 아니면 누가 쫓 아올까봐 두려워서 그런건지 시종 찌푸린 얼굴로 큰 몸집을 바삐 움직이던 것이 생각났던 것이다. 오피온은 먹던것도 멈추고 일어서있는 알렉토를 빤히 쳐다보았 다. 혹시 자신들을 어디에 팔아먹으려고 그러는것은 아닐가 슬슬 걱정이 되기 시 작했다. 로사리아도 커다란 덩치의 알렉토가 갑작스럽게 일어나자 겁이 났는지 오피온에 게 달라 붙으며 눈동자를 불안스럽게 움직였다. 오피온이 로사리아의 가녀린 손 을 잡아주며 조심스럽게 일어날 자세를 취했다. "저.... 식사를 하게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 저희는 이제 가봐야 할것 같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다음에 뵙게 되면 이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겠 습니다." "으응? 뭐라고? 이 밤에 어딜간다고?" 알렉토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소년과 소녀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오피온은 로사리아를 등뒤로 살짝 감추며 인사를 하고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 그때였다. "아야얏~~~~~~~ 놔아~~ 아얏!" 찢어질듯한 소년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넓은 홀 가득히 들려왔다. 문이 열리며 들려오는 그 소리는 모두의 관심을 돌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저기 이보시오. 그만 그 소년을 놓아주어도 되지 않겠소?"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시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출입구를 들어오는 이 들에게 쏠렸다. 출입구에는 한손을 휘적거리며 성난 발걸음으로 들어오는 처녀와 그녀의 다른 손에 귀를 잡혀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치는 소년이 끌려 들어오고 있는 중이었는데 그들의 뒤로 잘 차려입은 남자 한명도 따라오고 있었다. 알렉토는 그들을 보자 가슴에 얹혀있던 묵직한 돌덩이가 내려지는 기분이었다. 그 는 갑갑했던 숨을 한껏 내쉬며 쓰러진 의자를 일으켜 털썩 주저 앉아버렸다. 그리 고 지금까지 자신이 얼마나 목이 탔던지 그제서야 깨달은 사람처럼 앞에 놓여있는 큰 맥주잔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얏... 히잉...놓으란말야. 놔줘. 아퍼!!!" 마시는 메디아의 손에 찢어질듯 붙잡혀있는 귀가 아파 죽을것 같았다. 귀는 벌써 새빨갛게 달아 올라 있었고 얼굴도 붉게 상기되어 있는 상태였다. 마시는 사창 가에서 메디아를 따라 부랴부랴 나왔지만 나오자마자 메디아에게 배고프다고 말 하는 바람에 그대로 귀를 잡혀 끌려오는 중이었다. "이봐요, 소년이 그렇게 잘못한것도 아닌데 그만 용서해 주는 게 좋지 않겠소? 그 소년과 어떻게 되는 사인지 몰라도 동생이건 남편이건 그만한 일로 여자가 이 렇게 소란을 떨며 화를 내는 것도 보기 좋지 않은 법이라오." 제피로스는 마시가 메디아를 따라나서던 순간부터 호기심으로 그들을 따라오던 참이었다. 그는 소년을 사창가에 데려간 일말의 책임감도 느끼는지라 소년을 도 와줄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막무가내로 소년을 개끌다시피 끌고 가는 여자 의 기세에 눌려 아무말도 못하다가 여기까지 와서야 말을 붙여보는 중이였다. 그 순간 메디아는 뒤에서 줄곧 따라오며 귀찮게 하던 사내를 획 돌아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너 꺼져!" 제피로스는 순간 기가 막혀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자신보다도 훨씬 어려보이는, 그것도 여자가 자신에게 방금 꺼지라고 말했다는 것이 믿겨지지가 않았다. 제피로스는 입만 벌린채 소년을 끌고가 패대기치는 여자의 모습을 입구에 선채 멍하니 보았다. "하....하..하.." 제피로스의 입에서 헛웃음이 실실 새어나왔다. 그의 눈앞에는 빗자루로 소년을 사정없이 두들기고 있는 여자의 살벌한 모습이 보였지만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 "우아얏...우잉....그만 때려...잉..우와왕~~." 마시는 메디아에게 수없이 맞아왔지만 오늘처럼 인정사정없이 두들겨 맞기는 처 음이었다. 어느정도 야단을 치고 나면 용서해주던 메디아였는데 오늘은 마시가 아무리 비명을 지르고 울음을 터뜨려도 메디아는 꼼짝도 안했다. 그녀는 마시를 죽일듯이 노려보며 빗자루를 사정없이 휘두를 뿐이었다. "우와앙~~~ 아악~ 아퍼, 아퍼, 아프단말이야잉~~~." 마시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고 양볼은 눈물 범벅이 되어있었 다. 비명을 너무 질러서 탈진했는지 이제는 목소리까지 이상하게 들렸지만 메디 아는 숨을 몰아 쉬며 잠시 쉬었을뿐 다시 마시를 노려보며 분에 겨운듯 빗자루를 휘두르고 있었다. 한동안 긴장이 풀려 맥주로 목을 축이고 있던 알렉토도 메디아의 사정없는 매질 에 기가 질릴 정도였다. 마시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몰라도 자신이 제대로 데 리고 있지 못한 책임을 느끼는 알렉토는 메디아가 화를 낼수록 마치 자신이 죄를 지은것처럼 속이 편치 않았다. 알렉토는 위험을 무릅쓰고 메디아에게 다가가 그 녀의 빗자루를 붙잡아 세웠다. "저기... 메디아, 그만해. 그러다가 죽겠어." 알렉토가 어렵게 꺼낸 말에 다른 구경하던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이 계 속 맞았다가는 죽을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였다. 마시는 온몸을 웅크리고 얻어맞고 있다가 잠시 매질이 멈추자 알렉토에게 달려 들 어 그의 뒤로 숨어 엉엉 울었다. "그렇게 때리다가는 정말 사람하나 잡겠소. 이제 그만 화를 푸시구료, 아가씨. 저 소년을 데리고 간 내 책임도 있으니 그만 그를 용서하는게 어떻겠소." 제피로스는 말을 내뱉은 그 순간 사람의 눈빛에 죽을수도 있다는 것을 깨닳았다. 자신을 돌아다보는 여자의 눈빛은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로 살인적이었다. "그러니까, 저녀석을 덥썩 사창가에 데려갔다 그말이지? 당신이?" 메디아의 차가운 보라색 눈이 위험스럽게 반짝거렸다. 제피로스는 그녀의 분노의 화살이 이제 자신에게 돌려졌다고 생각했다. 그저 작은 빗자루 하나를 들고 있 을뿐인 여자가 자신을 노려본다는 사실이 그를 두렵게 했다. 제피로스는 필요이 상으로 긴장하고 있는 자신을 느끼며 피식 실소를 지었다. '겨우 빗자루 하나 들고 있는 여자에게 겁을 먹다니...이게 무슨 창피인가.' 그는 부하들이 이 모습을 보았다면 두고두고 놀렸을거라 생각하며 긴장을 풀고 메 디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조금전의 당황스러움은 사라지고 제법 기사로서의 당 당함이 엿보이는 모습이였다.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말아요, 아가씨. 저 소년도 즐길 권리가 있지 않겠소? 모 든 남자들이 그렇듯이 말이오." 제피로스는 여유를 찾으며 부드럽지만 굵은 목소리로 가볍게 말했다. 전형적인 사 내의 유들유들한 모습이였다. 그러나 메디아는 가볍게 농담처럼 말하는 제피로스 의 태도에 더 화가 나고 있었다. '목숨이 날아갈뻔한 마시에게 즐길 권리라고?' 그녀는 알렉토가 잠시 물러난 틈에 빗자루를 꼭 움켜 잡았다. 그리고는 알렉토의 뒤로 숨어서 나오지 않는 마시를 다시 노려 보았다. 그녀는 제피로스와 알렉토를 무시하고 성큼성큼 걸어가 마시의 옷자락을 휙 잡아 당겨 끌어내 다시 두들기기 시작했다. "즐길 권리라고? 그래, 즐기니 기분이 좋냐? 이 말썽꾸러기 같으니라구." "우아악...살려줘! 우아앙...앙앙.." 마시는 메디아의 다리에 양팔로 매달리며 애처롭게 울음을 터뜨렸다. "이잉잉... 아퍼, 아퍼, 아프단말야..히잉.." 메디아의 다리에 매달려서 훌쩍거리는 마시는 그 몸집에도 불구하고 너무 어리고 연약해 보였다. 마시의 하얀 피부가 빨갛고 파랗게 멍이 들었지만 메디아는 신 경도 쓰지 않았다. 제피로스는 그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자신과 함께 술을 마시고 사창가에 갔던 마시는 의젓하지는 않지만 제법 의기양양한 소년이였다. 그런데 낮에 제과점에서 말썽을 일으키고 있을때의 살벌하고 씩씩한 모습은 어디로 가고 지금은 엄마에 게 두드려 맞는 어린아이의 그것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 울음보를 터뜨리며 매달리는 덜자란 애가 있을뿐이었다. 제피로스는 과연 자신이 저 어린애를 데리 고 사창가에 갔었던가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그는 슬슬 마시의 나이가 의심스러 워 졌다. '설마...' 그는 내심 당황스러운 마음을 감추며 어쨌든 여자를 말려야 겠다고 생각했다. 더 맞았다가는 소년이 정말 죽을것 같아 보였다. 한동안 알렉토와 제피로스의 말류에도 불구하고 사정없이 얻어터지던 마시가 메 디아의 손에서 벗어난것은 아네모스가 식당으로 내려와서 마시의 처참함에 놀라 고도 한참뒤의 일이였다. "메디아, 무슨일인지는 몰라도 말로 해요. 그렇게 때린다고 알아들을 마시도 아 니쟎아요. 이제 다시는 안그런다고 하쟎아요, 메디아. 그렇지, 마시?" 아네모스가 진땀을 흘리며 하는 말에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릴정도로 끄덕거리 는 마시였다. "흑윽..힝.. 응. 다시는 안그래."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마시는 이기회를 놓칠세라 메디아를 향해 애원하다시피 대답했다. 마시는 태어나서 이렇게 많이 사정없이 두들겨 맞 아보기는 처음이었다. "뭘 잘못했는지는 아는거야?" 어디선가 들려오는 냉소적인 목소리에 알렉토와 아네모스는 벌레 씹은 표정을 지 었다. 겨우 진정의 기미를 보이는 메디아를 보며 안심하던 마시는 온 몸에 소름 이 쫘악 돋는것 같았다. 며칠동안 힘없이 먹여주는 음식만 겨우 먹던 블루잉이 메디아의 품에서 기어나와 마시를 쳐다 보고 있었다. "뭘 다시는 안그러겠다고 하는거야? 뭔지는 알고 말하는 거야?" 다시 블루잉의 얄미운 말소리가 들리자 마시의 지금까지의 죽을듯하던 표정이 순 식간에 사납게 바뀌었다. "너..너...너!" 바닥에서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던 마시가 벌떡 일어나 블루잉을 손가락질하며 표독스럽게 눈을 치떴다. "흥, 죽을것 같다더니 기운이 펄펄 나는가 보네." 블루잉은 마시의 사나운 눈빛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푸른 눈을 껌뻑거리며 메디아 의 품에 매달렸다. "너~~~ 블루잉!" - 계 속 - (^^)(__)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다음편은 빨리 올릴께요. 번 호 : 39 / 83 등록일 : 1999년 10월 07일 06:48 등록자 : CHO1971 조 회 : 1791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39.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달빛에 여울진 물 위에 너 자신을 비추어 보아라. 네가 무엇으로 보이더냐?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이더냐? 작은 파문에 흔들리는 너는 한낮 그림자에 불과하지 않더냐? 제 39 장 불타는 여관. 마시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얻어 맞아야 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단지 메디아가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화가 많이 났고 그것이 자신 때문이라 는 것을 알뿐이었다. 그래서 찍소리도 못하고 메디아의 불같은 성질을 고스란히 당하고 있던 마시는 이제야 겨우 아네모스 덕에 그녀의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 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골골거리던 블루잉이 끼어들어 메디아의 불같은 성미를 다시 건드리고 있었다. 오늘의 수난이 무사히 끝날수 있다고 믿 었던 마시는 심술가득한 블루잉의 말투를 곱게 들어줄 수가 없었다. 한동안 딱딱한 바닥에 주저앉아 등과 어깨는 물론 온몸이 욱씬거리도록 두드려 맞 은 마시는 새빨갛게 부어오른 팔뚝을 무시하고 블루잉을 향해 노골적인 적의를 드 러냈다. 지금 그에게는 아직도 씩씩거리며 빗자루를 들고 있는 메디아도 한순간 보이지 않았고 오로지 고약한 블루잉의 푸른 눈동자만이 보일뿐이었다. 다시 코카 서스 화산의 레어에 있던 시절로 돌아간듯 그들 사이에는 긴장된 불꽃이 튀기 시 작했다. 순식간에 혈기왕성해진 마시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블루잉을 향해 꾹꾹 눌러 참 고 있던 성질을 터뜨려 버렸다. "너-." 마시의 눈에는 메디아와 그 주변의 인물들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그는 전력 질주 로 부딪혀 가며 블루잉을 낚아 챌 생각뿐이었다. 두손으로 움켜 잡아 바닥에 내팽 겨쳐야 직성이 풀릴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온몸으로 돌격한 상대 블루잉은 메디 아의 품에 있었고 당연히 마시는 메디아와 사납게 충돌했다. 그사이 블루잉은 잽 싸게 메디아의 품에서 내려와 알렉토에게 달라 붙어 있었다. 한순간에 메디아와 마시의 몸은 식당의 바닥으로 의자들을 요란스럽게 밀치며 쓰 러졌고 순식간에 일어난 사태에 대비하지 못했던 메디아는 등을 자극하는 의자 다리와 바둥대는 마시 사이에 끼어서 겨우 수그러들던 화가 머리 끝까지 올라간 상태였다. "쯔쯧... 여전히 둔하기는..." 블루잉은 얌체처럼 재앙을 피해 도망간뒤 태연하게 엎어져 있는 마시를 비웃었 다. 언제 아파서 딱딱하게 굳어 있었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얄미운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블루잉은 그동안 얌전히 있었던 것을 보충할 심산인지 마시를 더 약올 리고 있었다. "얏!" 마시는 메디아를 무시하고 또 일어나 블루잉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며 법석을 떨 기 시작했다. 식당은 마시와 블루잉의 요란한 추격전 때문에 엉망이 되어 갔고 주위 사람들은 이 황당한 사태에 미처 대비도 못 한채 우두커니 서서 구경만 할 뿐이었다. 식당 주인은 사방으로 부서지고 넘어지는 집기들을 보며 고래고래 소 리를 질렀고 메디아를 달래던 알렉토와 아네모스 그리고 제피로스도 돌연한 사태 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마시는 성난 멧돼지마냥 사방을 난장판으로 만들었고 작은 거북이 블루잉은 날샌 고양이처럼 이리뛰고 저리 뛰며 마시를 데리고 장난을 치고 있었다. 블루잉도 그동안 보통 심심했던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후유증이 남아 정신이 약간 나간건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다면 넘어진 의자와 엉켜서 한쪽에 주저 않아 있는 메디아의 얼굴이 어떻게 변했는지 확인도 안하고 마시와 티겨태격하지는 않았을 블루잉이였다. 만약 평소의 블루잉이였다면 말이다. 사실 블루잉은 지금 배합된 약초를 먹고 기운을 차리기는 했지만 정신은 조금 불안한 상태였다. 블루잉은 주위상황은 무시한채 오로지 마시에게만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고 그것도 엉뚱한 방향으로 집중하고 있었다. 콧김까지 씩씩 뿜어가며 블루잉을 잡으려던 마시는 자신에게 휘둘러지는 메디아 의 빗자루에 세게 얻어 터지며 벽으로 나자빠졌다. 하지만 메디아가 옷자락을 펄 럭거리며 다가오는 모습에도 겁은 커녕 더 성질이 올랐는지 메디아에게까지 대들 며 육탄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마시-." 메디아가 소리를 빽 질렀고 그 순간에 작았던 빗자루는 원래의 크기대로 커지며 마시의 머리를 강타했다. 둔탁한 소리가 울리고 마시는 몸을 휘청거리며 바닥으 로 팽개쳐졌다. "그래 바로 그거야, 메디아." 블루잉은 상당히 기분이 고조되는지 신나게 소리치며 아네모스의 옷자락을 타고 올라가 그의 머리위에서 머리카락을 쥐어 뜯었다. "아얏 블루잉, 그만해. 왜 이러는거야?" 아네모스가 블루잉을 잡아 내리려 하자 블루잉은 끈질기게 그의 머리카락을 붙들 고 내려오지 않으려 했다. 그사이 쓰러진 마시는 붉은 눈을 활활 불태우며 누운채 천정을 노려 보았다. 이미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바닥을 짚고 힘겹게 일어나 자신의 머리를 강타한 너무나도 익숙했던 하지만 한동안 원래의 크기를 볼 수 없었던 빗자루를 보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아무생각도 없었다. 단지 무척 화가 나고 억울하고 분을 풀어야 만 했다. 사람들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채기도 전에 마시의 손에는 붉은 불덩이가 떠 올랐고 그것은 그대로 메디아를 향해 날아갔다. 뜨거운 불덩이가 넓은 홀을 확 밝히며 메디아에게 날아갔지만 불덩이는 산산히 부서져 애꿎은 사람들에게로 퍼져 나갔다. 여기저기 불이 붙었고 사람들은 비명 을 지르며 사방으로 뛰어 나가기 바빴다. 마치 메디아와 마시는 다시 코카서스 화산의 레어에서 치열하게 싸움을 하고 있 는것 같았다. 그들에게는 이제 아무것도 거리낄것이 없는듯 서로의 성질을 드러 내고 화풀이를 하는것만이 중요했다. 그 와중에도 주인과 종업원들은 불을 끄려고 물통을 나르며 홀안을 동분서주 했 다. 2층이나 3층에서 휴식을 취하던 손님들까지 소동에 놀라 모두 내려와 불길을 보고 대피하는 중이었다. 한편 제피로스는 자신이 관련된 조그만 사태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도무지 헷갈려 하며 불덩이를 내던진 마시를 기막힌 심정으로 쳐다 보았다. 꽤 넓고 쾌적했던 식당은 넘어진 탁자와 부서진 의자들로 어수선 했고 썰물처럼 사람들이 빠져 나가면서 더 어질러져 있었다. 여기저기 먹다남은 음식과 술이 쏟 아져 알싸한 남새를 풍겼고 바닥은 엉망진창이 되어 발디딜 틈이 남아 있지 않았 다. 남아있는 사람들도 불을 끄고 있거나 메디아와 마시 사이에 어쩔줄을 몰라했 다. 큰 소리에 놀라 삼층에서 급히 내려온 볼비는 타오르는 불길과 아직도 팽팽하게 서있는 마시와 메디아를 보고 숨을 죽여야만 했다. 볼비는 애꿎은 수염을 불안스 럽게 잡아뜯으며 서있다가 불길이 더 번지는 것을 보고 황급히 얼이 빠져 있는 아 네모스와 알렉토를 끌고 방으로 올라가 에코와 바트를 옮기기 시작했다. 그들이 일층으로 다시 내려왔을때는 주인과 종업원들도 겁을 집어먹고 밖으로 도 망간 후였다. 일층은 매쾌한 연기가 가득하게 퍼져 올라가 열기를 품고 있었지만 메디아와 마시는 그런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알렉토는 모든것을 포기하듯이 고개를 한번 절레절레 젖고는 등에 업은 바트와 아네모스와 에코, 그리고 볼비를 재촉해 밖으로 나와 버렸다. 그들이 시커먼 연기 를 뚫고 밖으로 나오자 안에서는 쿵광 거리는 움직임과 콰쾅 소리가 더 요란스럽 게 들리더니 이윽고 여관 여기저기가 뻥뻥 뚫리며 불길이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 다. 여관에 있던 손님들과 주위 건물에 있던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이 광경을 구경하 는 동안 여관은 점점 기괴한 모양으로 바뀌어 갔다. 화끈한 열기를 뿜어내는 불 꽃이 사방으로 혀를 낼름 거렸지만 바람이 불지 않아 그나마 다른 건물들이 무사 한 편이었다. 더구나 그들이 묶었던 여관은 규모가 매우 커서 여유공간이 꽤 넓은 편이었기 때문에 거리의 다른 건물에 피해가 없었다. 하지만 마굿간으로 옮겨가 는 불때문에 한동안 말과 사람들이 시끄럽게 소란을 피워야만 했다. "세상에......." 제피로스는 자신도 모르게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그는 이 모든 참사에 오로지 기 막히고 황당하다는 한가지 감정만을 느끼고 있었다. 스물아홉해를 살아오면서 이 처럼 당황스럽고 어처구니 없었던 적은 처음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처음부터 모든 일의 발단이 되었던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이일의 결과에 대해서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여러명의 아내를 둘 수 있는 파라제국에서 일반적인 여자들의 위치는 남자들에 비해 비천하고 낮은 것이었다. 그나마 마법사나 신관 혹은 의녀로 불리는 여자들 정도가 남자들과 동등하거나 나은 대접을 받는 편이었다. 이런 사회풍토에서 남 자가 사창가에 가서 창녀를 한번 안았다고 해서 그 일이 큰 흠이 되거나 비난받 을 일이 되지는 않았다. '이게 왠 날벼락이야?' 그의 눈앞에서는 여관이 활활 잘도 타고 있었고 야차같던 여자와 소년은 아직도 그안에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의 일행으로 보였던 덩치 큰 사내는 눈살을 찌푸리 고 투덜거리고 있을뿐 애통한 표정이라고는 손톱만큼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어쩌 면 그도 너무 당황해서 저 안에 있는 그들에 대한 생각을 못하고 있는게 아닐까 생각되었다. "정말 기가 막히는군." "화..황당하군요." 알렉토와 아네모스는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생각할 틈도 없이 붉게 타오르며 무너져 가는 여관을 바라보았다. 흙바닥에 뉘인 에코의 옆에서는 볼비가 훌쩍이 며 자신의 신세를 처량하게 한탄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커다란 폭발음이 밤하늘을 가르고 여관의 한쪽 벽면이 완전히 부서져 나가며 시 뻘건 불기둥 사이로 두개의 그림자가 제빨리 빠져 나왔다. 뜨거운 불길을 피해 여기저기 모여 불구경을 하던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물 러선 자리로 메디아와 마시가 연기를 풀풀 털어내며 떨어져 내렸다. 마시는 온몸 이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흙바닥에 쳐 박히듯 굴러 떨어졌고 사뿐하게 빗자루와 거 북이를 들고 내려선 메디아의 옷에는 매쾌한 연기가 배어 있었다. 블루잉은 아직 도 제정신이 아닌지 마시를 향해 계속 떠들어 대고 있었다. "거봐. 내가 더 큰 걸 던지라고 했쟎아 바보야." - 계 속 - 이제 40회가 눈앞이군요. ^^;;; 번 호 : 40 / 83 등록일 : 1999년 10월 10일 10:03 등록자 : CHO1971 조 회 : 1774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40.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달빛에 여울진 물 위에 너 자신을 비추어 보아라. 네가 무엇으로 보이더냐?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이더냐? 작은 파문에 흔들리는 너는 한낮 그림자에 불과하지 않더냐? 제 40 장 골칫덩이. 불타는 여관에서 밖으로 나온 메디아와 마시에게 화끈한 열기가 덤벼 들고 있었 지만 그들에게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다. 메디아의 왼손에 달랑 뒷다리 한쪽만 붙잡혀 있는 거북이는 다리를 사방으로 휘 저으며 움직이는 바람에 공중에서 흔들거리고 있었다. 블루잉은 거꾸로 매달린 상태에서도 바둥거리며 쉼없이 마시를 향해 입을 놀렸다. "마시, 너처럼 둔해터진 바보는 태어나서 처음본다니까." 마른 흙이 먼지를 일으키는 건조하고 딱딱한 땅바닥에 쳐박혔던 마시는 신랄한 블루잉의 목소리에 벌컥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터뜨리며 손안에 가득 쥐어지는 작은 돌덩이와 흙을 휙 내던졌다. 그러나 그것들은 약간의 먼지 바람을 일으키며 날아갔을뿐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캬하캬캿... 바보야, 더 큰거를 던지라고 했쟎아!" 블루잉의 히스테릭한 비웃음이 뜨거운 공기사이로 퍼져 나갔다. 문득 메디아가 손에 쥐고 있는 거북이의 뒷다리를 눈앞으로 끌어올려 눈동자를 뚫어지게 들여다 보았다. 블루잉의 이상하리만치 번쩍거리는 푸른 눈을 들여다보 는 메디아의 섬세한 눈매가 가볍게 찌푸려졌다. 그녀는 뭔가가 잘못되었다고 느 껴졌지만 그게 뭔지는 정확히 집어 낼 수 없었다. '뭔가...... 익숙한 느낌인데..?' 그러나 그녀의 그런 의구심도 잠시였다. 마시가 그녀가 서있는 땅바닥을 향해 거 대한 사라만더의 불꽃을 집어 던졌기 때문이었다. 구경꾼들이 다급한 비명소리를 지르는 사이 불꽃은 사납게 내리꽂히며 땅바닥을 헤집어 놓았다. 흙덩이와 불꽃 의 잔해가 이리저리 튀어 오르며 메디아의 망토에 달라 붙었지만 불꽃은 금방 사 그라 들었다. 메디아는 주위로 튀어오른 흙덩이와 먼지 때문에 짜증이 났다. 그녀는 손가락 끝 까지 짜릿하게 전해져오는 분노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지난날 마시가 그녀 의 아끼던 마법서를 몽땅 불태워 먹었을때와 같았다. 아니 이번에는 그때보다도 더 거친 분노가 위험한 수위까지 달아올라 있었다. 만약 새끼 드레곤 마시가 사 창가에서 창녀에게 동정을 잃어 버렸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그 뒤의 상황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메디아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을 만큼 충격적이었던 이번 사건을 결코 그냥 넘어 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마시는 그토록 위험천만한 사건을 일으켜 놓고서 반성 은 커녕 오히려 대들어, 그녀가 애써 꾹꾹 누르려던 성질을 박박 긁어 놓고 있었 다. 그리고 마시는 화려하게 흩뿌려 졌던 불꽃들이 허무하게 사라지자 더 씩씩거렸다. "그래, 계속 해보자 이거지." 그녀는 마시를 향해 길다란 빗자루를 똑바로 겨누며 내뱉었다. 그리고 마법의 시 동어를 외치려고 했다. 그때였다. 마시를 향하는 블루잉의 높고 째지는듯한 목소리가 다시 귀에 들렸다. "캬하핫... 겨우 그런 것밖에 못 던지냐? 더 해봐, 더 해보라니까. 캬하캿캬아... 흐흐흣..캬캿.." 그 순간 메디아는 입을 그대로 벌린채 아무말도 못하고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 녀의 시선이 아주 천천히 왼손에 들려 있는 블루잉에게로 향했다. 마치 못볼 것 을 보아야 하는 사람의 움직임 같았다. 그녀의 시선에 거북이의 길게 찢어진 입술이 히죽거리는 웃음을 짓는것이 보였다. 이윽고 해괴한 목소리가 나직히 들리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으면서도 아주 익숙한 느낌이 메디아의 피부를 자극하면서 소름이 오싹 돋았다. 메디아는 독사를 잘못 집어든 여인처럼, 화들짝 놀라며 블루잉을 사정 없이 손에서 떨쳐 버렸다. 흙바닥으로 내동댕이 쳐진 거북이는 머리와 다리를 껍질속에 집어 넣은채 떼굴떼 굴 굴러 갔지만, 곧 부러진 나뭇가지에 걸려 제자리에서 몇바퀴 돌더니 뒤집혀서 기우뚱거렸다. 머리와 다리를 쏙 집어넣고 있던 블루잉은 뒤집혀 흔들리는 상태 에서도 이내 파란색 머리를 쭉 내밀고 히죽거리기 시작했다. 불타는 건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환한 빛은 밤의 그림자에 선명한 명암이 드러난 메디아와 마시의 얼굴이 일순 창백하게 변하는 모습을 적랄하게 보여 주었다. 분노로 붉게 달아올랐던 마시의 얼굴도 어느새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그는 무의 식적으로 블루잉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엉성하게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엷은 하늘빛 줄무늬 배를 위로 향한채 바둥거리는 블루잉의 표정에는 정신나간듯 한 미소가 가득했고 그의 목에서는 점점 커지는 괴성이 들리고 있었다. 메디아는 마시와 드잡이질 하던 것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머리카락을 쥐어 뜯으며 신경질을 부렸다. "뭐야, 왜 저렇게 된거야?" 블루잉의 나직하던 목소리가 점차 커짐에 따라 주변에 서서 구경하던 모든 사람 들의 얼굴도 하얗게 질리기 시작하더니 모두 필사적으로 귀를 막기에 바빴다. "맙소사... 이 끔찍한 소리는 뭐야?" "으윽....." 바로 옆에서는 삼층 건물이 불타며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 지만 그 소리는 블루잉의 괴성에 묻혀 들리지도 않았다. "꺄아악... 제발 그만해-." 급기야 여자들이 귀를 붙잡고 비명까지 지르며 달아나기 시작했지만 블루잉의 목 소리는 더 높은 소리를 질러대며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우아악.... " 밤하늘에는 여관이 불타면서 솟아오르는 시커먼 연기와 불꽃이 가득했고 매쾌한 냄새가 거리에 진동하고 있었다. 마굿간에서 끌려 나온 말들이 불안에 떨며 달아나려고 있는힘껏 소리를 질러대고 발길질을 하고 있었지만 그 소리는 불구경 나왔던 사람들이 지르는 비명과 마찬 가지로 더 높고 처절한 블루잉의 괴성에 묻혀 희미하게 들릴 뿐이었다. 여관 주변 에 모여들었던 인파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 있었다. "야아, 그만하란 말야-!" 마시는 땅바닥에 허리를 구부리고 귀를 막았지만 블루잉의 괴성을 막는데에는 소 용이 없었는지 형편없이 구겨진 얼굴로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나 아직도 거꾸로 뒤지혀서 소리를 꽥꽥 질러대고 있는 블루잉에게는 마시의 표독스러운 표정이나 고함이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메디아는 블루잉의 괴성이 한단계 더 높아지며 날카롭게 들릴때마다 돋아오른 소 름이 가시지 않는듯 부르르 떨며 손가락을 머리카락 속에 쑤셔 넣고 욱신 거리는 머리를 눌러댔다. 그녀의 입에서 저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완전히 질렸다, 질렸어! 이 골칫덩이들." - 계 속 - 좀 짧죠? (사실 많이 짧은 거라는건 압니다. ^^;;; 죄송해요. ㅠ.ㅠ) 하여튼 이제 40회를 마쳤군요. 다음편도 기대해 주세요. (^^)(--)(__)(--)(^^) ..(*^_^*) 호홋... 드뎌...여울진 달빛이라는 문장도 바뀐답니다. 번 호 : 41 / 83 등록일 : 1999년 10월 12일 07:18 등록자 : CHO1971 조 회 : 1820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41.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사랑은 빗나간 화살이 되어 달의 심장을 가르고 선홍빛 눈물은 헛되이 타인의 가슴을 적시리라. 그것이 너희가 가는 길. 너희에게 주어진 삶인 동시에 너희가 선택한 운명이다. 제 41 장 오피온과 로사리아. '어쩌다 이 괴물들을 내가 떠 맡았지?' 손가락으로 거칠게 머리속을 헤집고 있던 메디아는 신경질적으로 생각했다. 메디아가 오래전에 떠 맡은 첫번째 괴물은 자신의 몸조차 제대로 돌볼 줄 모르면 서 성질은 불같아서 물불 못 가리는 철부지 새끼 드레곤 마시였다. 평소 메디아는 거부할 수 없는 약속에 묶여 책임감만으로 새끼 드레곤을 돌보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 그녀에게 마시가 성년이 되기까지의 시간은 너무나 성 가시고 귀찮은 일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세월은 그저 귀찮고 번거로 운 정도였을뿐 특별히 위험스럽다거나 투철하고 세심한 보호정신 따위가 필요했 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시와 그녀가 세상 밖으로 나와 여행을 떠난지 겨우 두달만에 마시는 보 잘것 없는 인간의 칼에 찔려 부상을 당해 아직도 희미한 흉터가 배위에 남아 있 었고 더구나 이젠 난데없이 성년도 되기 전에 사창가에 가서 어린 드레곤의 순결 한 육신의 동정을 잃어 버릴 뻔 하기까지 했다. 새끼 드레곤이 동정을 잃는다는 것은 매우 위험스런 일이었다. 그것은 생명이 위 험에 처하는 것과 하등 다를바가 없었다. 동정을 잃은 새끼 드레곤은 그가 영원 히 변태를 할 수 없게 되는 것이었고, 그것은 성년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강인한 불사의 육체와 영혼의 자유로움을 얻을 수 없게 된다는 의미였다. 그것은 그가 더이상 드레곤으로서 존재할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치 인간 이 영혼을 잃어버린 상태에서는 더 이상 인간이라 부를 수 없듯이, 변태하지 않 은 드레곤은 진정한 의미의 드레곤일 수가 없었다. 메디아는 오늘밤 얼마 안되는 시간이었지만 사창가에서 마시의 위험천만한 상황 을 알고나서부터 그의 무사함을 확인하기까지의 짧은 순간에 느꼈던, 위가 바짝 조여오는 듯했던 공포를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그 짧았던 순간의 시간이 그녀에게는 영원처럼 길고도 두려운 시간이었다. 새끼 드레곤이 육신의 순결을 망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그녀가 느낀 안도감이 얼마나 컸었는지는 두번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백년동안 동면하는 날들을 제외하고는 단 하루도 말썽없이 지나가는 날이 없었던 마시의 탁월한 능력에 단련된 메디아는 어떤 일에도 꿈쩍 안하는 초인이 되어 있었지만, 이번만은 메디아조차도 심장이 내려앉을 정도로 놀란 충격적이고 당황 스러운 사건이었다. 잠시나마 공포심에 사로잡혔던 메디아는 마시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철저히 감시하기 로 마음 먹었다. 물론 마시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준다는 것은 그를 죽지 않을 정 도로 패서 겁을 준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그녀가 애태우며 찾아낸 마시는 태연하게 배가 고프다고 말함으로써 메디 아의 속을 발칵 뒤집어 놓았었다. 긴장이 풀려 화를 내지 않았던 메디아의 머리 가 순간적으로 열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결국 메디아는 마시의 애원과 눈물도 무시한채 죽도록 빗자루를 휘둘렀다. 그렇 지만 아무리 화가 난다해도 마시를 때려 죽일 수는 없는 문제였다. 그녀는 정말 죽지 않을정도만 새끼 드레곤을 두들겨 패고 나서야 고집불통인 마시도 알아들을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녀 자신도 긴장했던 신경과 쉴새없이 움직인 근육의 피로로 지쳐가던 중에, 마 침 아네모스가 끼어 들었고 그녀도 무작정 마시를 패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화를 꾹꾹 눌러 참으며 마시에게 조용하면서도 확실하게 타일러 두려고 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블루잉이 끼어들어 마시의 제멋대로인 성질을 건드려, 진정되어 가던 메디아의 분노까지 일시에 불질러 놓았었던 것이다. 현명한 물의 요정으로서의 모습과 괴팎함으로 똘똘 뭉친 늙은 너구리 같은 모습 을 함께 지닌 저주받은 거북이 한마리. 그 이중인격자 같은 블루잉이 메디아가 어머니로부터 떠 맡은 두번째 괴물이었다. 정신나간듯한 블루잉이 신랄하게 한마디씩 내뱉은 덕에 바짝 약이 올라 대드는 마시와 한판 붙어야 했던 메디아는 머리가 지끈거려 왔다. 그리고 그 괴물로 인 해 붙었던 싸움도, 역시 블루잉 때문에 멈춰진 상태였다. 그녀는 가늘지만 높고 커다랗게 울려퍼지는 블루잉의 섬찟한 목소리에 치를 떨며 애꿎은 머리카락만 쥐 어 잡아 당겼다. "아읏, 짜증나!" 활활 타고 있는 노란 불빛에 비춰진 메디아의 얼굴은 까만 그을음이 묻어서 얼룩 덜룩 지저분한데다 엉망으로 삐져 나온 머리카락이 흩어져 있어서 매우 사납게 보였다. 그녀는 고막을 찢어내는 듯한 감각을 애써 무시하고 엎어져 바둥거리면서도 기운 차게 소리치는 블루잉에게 다가가 그 녀석을 발로 걷어차 버렸다. "캬캭캿~~랄라~~~ 커억! 아구구...." 시덥지 않은 멜로디로 소리를 꽥꽥 질러대던 거북이는 걷어채여서 땅바닥을 데구 르르 굴러가 돌뿌리에 부딪혔다. 그러나 재빨리 몸을 움추려 껍질속으로 들어간 거북이는 껍데기만 둔탁하게 충돌했을뿐이었다. 짙푸른 껍질속에서도 꽥꽥 거리 는 소리가 계속 흘러 나왔지만 그래도 처음보다는 훨씬 덜 자극적으로 들렸다. 메디아는 그런 거북이를 발바닥으로 사정없이 눌러 밟았다. 메디아는 얼굴로 흘러 내리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대충 쓸어 올리고 씁쓸하게 생각했다. '이런 걸 데리고 살아야 하나?'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 블러디나가 왜 블루잉에게 정지마법을 걸어 놓고 몇 십년 동안 내버려 두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메디아는 블루잉 자체를 돌덩이 처럼 딱딱하게 만들어 버리고는 주워 올려서 한참을 노려 보았다. 그러다가 고개 를 젖혀 밤하늘을 쳐다 보곤 긴 한숨을 토해 냈다. 그녀는 갑자기 들고 있던 거북이를 마시를 향해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네가 책임지고 들고 다녀." 멀찍이 거리를 두고 있던 마시는 엉겹결에 날아드는 거북이를 가까스로 붙잡았 다. 그러나 붙잡음과 동시에 그는 화들짝 놀라서 블루잉을 바닥에 팽개쳐 버렸다. "으왓, 싫어! 너꺼쟎아." 망토를 툭툭 털고 있던 메디아가 눈동자만 살짝 돌려 마시를 보았다. 그녀의 눈 동자가 불타는 건물 빛을 받아 유난히 번뜩 거렸다. "너, 오늘 나한테 진짜 죽어 싶어?"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싸늘한 한마디가 마시의 입을 꾹 다물게 했다. 이미 성질도 가라앉은 마시는 순간 기가 죽어서 땅바닥으로 눈을 내리 깔고 입술을 실 룩거리기만 했다. 지금 또 대들었다간 진짜 어떻게 될지 조금 걱정이 되었던 것 이다. 결국 그는 블루잉을 발로 툭 건드려 보더니 주섬주섬 거북이를 잡아당겨 손안에 집어 들고 불만스런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새까만 밤하늘의 한쪽 끝에는 길고 가늘게 휘어진 알파가 차갑게 빛나고 있었지 만 그 흰선의 아름다움도 불덩이가 되어 무너져 가는 화재의 현장에 가려져 보이 지 않았다. 한밤중에 일어난 소란으로 웅성거리며 모여 들었던 인파도 블루잉의 괴성에 놀라 모두 어디론가 도망가고 이제 불바람을 피워 올리는 여관 주변에는 얼마 안되는 사람들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때 우지직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쾅하며 건물이 통째로 무너져 내려서 불씨들 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맙소사.....' 제피로스는 오늘밤 자신이 겪은 일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이 사창가에 있고 창녀의 품에 술취해 누운채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피부로 다가오는 화끈한 열기를 환상이라고 생각할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현실속에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화려한 붉은 망토를 걸친 제피로스는 얼얼하고 멍멍한 귀를 만지작거리며 난장판 이 된 주변을 새삼스럽게 둘러 보았다. 그의 시선에 입벌리고 멍청하게 남아있는 낯선 구경꾼들과 마시의 일행으로 생각되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누워있는 여자와 남자 주변에 있었는데 바닥에 쭈그려 앉은 곱상한 남자 와 하얀 수염을 잡아뜯고 있는 드워프가 담요에 감싸여 눈도 뜨지 않는 여자 곁 에 있었다. 그리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겁에 질린듯 주저 앉아 무릎사이에 고개를 파묻고 있는 붉은 머리의 소녀도 보였다. 그녀를 품에 감싼 호리호리한 소년 뒤로는 덩치 큰 사내가 잔뜩 화난 얼굴로 서 있었다. 제피로스는 무심코 지나치던 시선을 황급히 붉은 머리 소녀를 감싸고 있는 소년 에게로 향했다. 그의 눈가가 가늘게 변하더니 점점 갈색 눈동자가 크게 확대되기 시작했다. "오 이런, 맙소사!" 그는 자신의 눈을 또 한번 의심해야 했다. '설마......' 이제 그에겐 더이상 주위의 비정상적인 상황도 중요하지 않았다. 제피로스는 시 선은 그대로 둔채 길쭉한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제피로스는 무너진 건물을 보고 있는 호리호리한 검은 머리의 소년을 뚫어지게 보며 숨을 들이켰다. 절대 잘 못 본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타오르는 불길과 마 찬가지로 새빨갛게 빛나고 있는 붉은 머리카락이 보이는 소녀. 제피로스는 잠시 머리가 아찔했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며 입을 열었다. "여...여기서 뭐하시는 겁니까? 오피온님." 제피로스의 어색하고 잠긴듯한 목소리가 들리자 검은 머리의 소년이 불타고 있는 건물의 잔해에서 시선을 돌렸다. 황금빛을 머금은 소년의 눈동자에는 잠시 반응 이 없었다. 그러나 눈동자가 금방 커지며 당황한 빛이 감돌았다. 제피로스는 그런 소년의 앞에서 등뒤로 걸려 있는 망토를 손으로 휙 치우더니 한 쪽 무릅을 꿇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 그런 제피로스를 오피온은 당 황한 표정으로 바라 보고만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피온님. 그런데.... 그 분... 대체 어느 공주님이십니까?" 제피로스는 시선으로 붉은 머리의 소녀를 가르키며 물었다. 그제서야 양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던 소녀가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의 황금 빛 눈동자가 고양이처럼 반짝 빛나더니 창백한 얼굴에 언뜩 반가운 표정이 떠올 랐다. "제피...로..스 경?" "맙소사, 로사리아 공주님!" - 계 속 - 작은 메모 1 : 드레곤의 변태에 대해서는 중반부에 좀 더 보충 설명 할 기회가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간단하게 넘어갑니다. 여기서 모두 나열하기는 문맥상 어 색하고 후에 다시 설명해야 하기때문이랍니다.^^; 작은 메모 2 : 이건 몇회전에 그냥 넘어갔던 이야기인데요. 메디아가 로만이 살 아있다고 철썩같이 믿는 이유에 대해서요. 잉그리거는 당연히 죽었다고 생각하면 서 그보다 나이가 많은 로만이 살아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상식밖이 죠. 그런데 제가 그 부분에 대해 설명을 안하고 그냥 넘어갔거든요. 이 부분에 대해서도 후에 간단하게 설명될 예정이오니 저의 부주의를 용서해 주세요. (에고.... 건망증이...^^;;;) 그리고 부탁 말씀 : ㅠ.ㅠ 감상 좀 보내주세요. 찰라의 순간처럼 사라지는 시간들을 놓치지 말고 즐기시기를....... 그리고 언제나 행복하세요. *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__) * - 뱀파이어 - 번 호 : 42 / 83 등록일 : 1999년 10월 15일 22:03 등록자 : CHO1971 조 회 : 1737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42.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사랑은 빗나간 화살이 되어 달의 심장을 가르고 선홍빛 눈물은 헛되이 타인의 가슴을 적시리라. 그것이 너희가 가는 길. 너희에게 주어진 삶인 동시에 너희가 선택한 운명이다. 제 42 장 이봐, 그건 내꺼야. 제피로스에게 공주님이라고 불리운 로사리아는 오피온의 품에서 살짝 빠져나오며 찢어져서 흩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오피온도 그제서야 제정신을 차렸는 지 어색하게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오피온의 얼굴은 건달들과 싸우다가 생긴 상처들이 어느새 파랗고 빨간 색으로 변해서 엉망이였다. 한쪽 눈은 너무 부어서 눈이 잘 떠지지 않을 정도였고 입가 는 터져서 붉은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하지만 특유의 귀족적인 선과 분위기는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자세를 가다듬고 옷을 매만지는 로사리아 공주와 오피온 왕자를 바라보는 제피로 스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도 못한채 황당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는 파라왕가의 혈통을 상징하는 칠흑같은 검은 머리와 황금색 눈동자를 그대로 타고난 왕의 막내 아들 오피온 왕자가 누군가에게 맞아서 저꼴이 되었다는 사실 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막막했다. "도대체... 두분 여기서 뭐하시는 겁니까? 더구나.. 그 몰.... 모습은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제피로스는 입밖으로 나올뻔한 '몰골'이라는 단어를 가까스로 막으며 물었다. 오피온은 로사리아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제피로스의 눈을 바라보지도 못 한 채 부끄러운듯 얼굴을 붉혔다. 차마 그의 입으로 불량배들에게 두드려 맞았노라고 말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흐흠... 경은 어째서 이런 곳에 있는거요?" 오피온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제피로스의 질문을 무시하며 말을 돌리기 위해 아무 렇게나 물었다. 제피로스의 눈이 가늘어 졌다. '뭘 감추시려는 거지?' 잠시 대답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던 제피로스는 마시를 손가락으로 가르켰다. "저 소년을 도와주려고 따라온 참이었습니다." 제피로스의 탐색하는 눈동자를 피해 시선을 한곳에 두지 못하던 오피온과 로사리 아는 동시에 제피로스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지금 저 소년을 말하는 거요, 제피로스경?" 오피온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컸지만 그 자신은 의식하지 못했다. 마시가 불덩이를 사방으로 집어 던지며 사납게 소리치던 것을 목격한 오피온과 로사리아는 제피로스를 미친사람 보듯 했다. "예, 그...렇습니다." 대답을 하는 제피로스의 입맛은 참으로 쓰디썼다. 메디아라는 여자가 강제로 마 시를 잡아 끌고 갈때 그는 소년을 위해 해명을 해주어야 겠다는 생각으로 따라 나섰었다. 그러나 해명은 고사하고 마시가 죽도록 얻어 터지는 것을 멀거니 구경만 한데다 가 급기야는 여관이 활활 타서 무너지는 꼴까지 보아야 했던 처지에 과연 자신이 뭘 도와주려고 따라 왔는지 스스로도 한심했다. 더구나 여관을 홀라당 태운 장 본인은 저 연약해 보이던 소년이 아닌가. 제피로스는 오늘 밤 그에게 생긴 모든 일이 마치 꿈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피 온과 로사리아의 눈빛을 고스란히 받으며 우두커니 서있을 뿐이었다. 한편, 오피온과 로사리아의 곁에 서있던 알렉토는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한마디 도 빼놓지 않고 다 듣고 있었다. 그는 성큼 제피로스의 앞으로 발을 내딛고 머릿속에 떠오른 말을 그대로 해버렸 다. "저 녀석을 당신이 책임질 수 있겠군." 오피온은 갑자기 등뒤에서 나타난 알렉토 때문에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짙은 밤색 머리카락을 짧게 등뒤로 묶은 덩치 큰 사내는 오피온과 로사리아에게 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대뜸 제피로스에게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던지고 있었다. "그는 왕자 암살범이오." 알렉토가 손가락으로 지목하고 있는 자는 약에 취해 누워있는 바트였다. 제피로스와 오피온의 눈동자가 동시에 바트에게로 향했다. 몇 달전에 리욘왕자가 숲속에서 사냥중에 암살당했다는 것은 그들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였다. 그리고 그 주범이 잡히지 않아서 왕비 헬레나가 몹시 상심해 있다는 이야기도 잘 알려 져 있었다. 죽은 리욘 왕자는 왕의 넷째 아들로 왕비 헬레나가 낳은 세번째 아들 이였던 것이다. 오피온은 자신의 이복 형이 갑자기 암살당했던 일이 아직도 생생했다. 심장에 화 살을 꽂은 채 넓은 홀에 놓여졌던 형 리욘 왕자의 시신에서는 마르지 않은 핏덩 이가 비릿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왕비 헬레나가 그 시신을 끌어안고 통곡하던 것을 오피온은 똑똑히 보았었다. "...확실하오?" 제피로스는 바트에게 다가가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며 알렉토에게 물었다. 바 트의 얼굴은 여기저기 생채기가 많았고 몸에는 흰천을 감아 놓았는데도 피가 배 어 나오는 것이 얼핏 보기에도 부상을 심하게 당한것 같았다. 알렉토도 비슷한 상처가 있었지만 바트는 메디아의 치료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상처가 더 심해 보였다. "그의 입으로 직접 들었오. 그가 화살을 쏘았다는 말과 함께...... 그가 깨어나 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물어 보시오. 순순히 대답해 줄테니까." 알렉토는 짐을 내려놓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였다. 앞으로 더 이상 암살자들 에게 시달릴 일은 없을것이라 생각하니 한결 가벼운 마음이 들었다. 더구나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들이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니 마시가 저질러 놓은 화재에 대해 서도 어쩌면 배상금을 지불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 지을수도 있을것 같았다. 평소 같았으면 이런 생각까지는 못 했을 알렉토였지만 메디아와 마시가 저질러 놓은 일은 단순히 돈이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데다가, 이제 비정 상적인 일행과의 여행도 어느정도 익숙해져서인지 상황을 받아 들이는 속도가 예 전에 비해 빨라졌기 때문이었다. 제피로스는 순순히 대답해 줄거라는 알렉토의 말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온 몸에 상처를 입고 있는 사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저들이 고문을 했을지도 모르지.' 제피로스가 바트를 더 자세히 보려고 한쪽 무릎을 꿇었을 때였다. 어디선가 병사들이 나타나 사방을 에워싸고 있었다. 화재가 발생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사람들이 놀라 달아날 정도의 소란을 떨었으니 치안병들이 중 무장을 하고 나타날만도 했다. 알렉토와 아네모스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듯이 메디아에 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메디아는 나타난 병사들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는듯 제 피로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알렉토는 순간적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오늘밤의 소란이 여기서 끝나지 않으면 어쩌지?' 망토와 옷을 대충 털고 머리카락을 손으로 정리하던 메디아가 바트에게 바싹 다 가 앉은 제피로스를 본 것은 우연이였다. 제피로스는 그녀의 싸늘한 눈빛을 감지하지 못했는지 바트를 살펴 보더니 병사들 을 향해 소리쳤다. "이봐 거기, 서성주의 병사들을 불러 오도록." 이곳 로스코는 다른 지역에 비해 커다란 도시였기에 각 네개의 성이 있었고 동서 남북으로 나누어진 지역을 네명의 성주들이 따로 관리하고 있었다. 지금 제피로 스가 머물고 있는 성은 서성으로 그의 절친한 친구가 성주로 임명되어 있었다.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병사들 사이로 말탄 중년인이 다가와 말에서 내려 천천히 걸어왔다. "저는 이곳 치안을 맡고 있는 치안 대장입니다. 신분를 밝혀 주시겠습니까?" 제피로스가 범상치 않아 보였는지 그는 정중하게 물었다. 제피로스는 오피온과 로사리아를 잠시 바라보더니 간단하게 대답했다. "나는 파라의 서쪽 달타성의 영주 흑기사 제피로스라고 한다." "아! 예. 성주의 손님으로 머물고 계시다는 소리는 익히 들었습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저스티스라고 합니다." 치안 대장은 감격했다는 듯이 지나칠정도로 정중하게 말했다. 일반 병사나 기사 들에게도 기사중의 최고라 칭해지는 흑기사를 만난다는 것은 굉장한 행운이었던 것이다. "저스티스, 이자를 성으로 옮겨 주게. 중죄인이니 각별하게 다뤄야 한다." 점잖고 절도있게 지시한 제피로스는 오피온과 로사리아를 향해 말했다. "일단 서성으로 가시죠. 서성주가 저의 절친한 친구이니 다른 걱정은 안하셔도 됩니다. 숨기고 싶으신 게 무언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로사리아는 불편한 얼굴로 오피온의 옷자락을 잡아 당겼다. 오 피온은 그런 로사리아를 난처한듯 바라보았지만 다른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 다. "알았소." 그때였다. "으어억~" 바트를 포박하고 있던 병사 두어명이 공중으로 밀쳐지며 당황한 비명을 질렀다. 그들이 날아간 반대편의 끝에 메디아의 빗자루가 똑바로 겨누워져 있었다. "이봐, 그건 내꺼야. 함부로 손 대지 마!" - 계 속 - 히잉... 독후감 좀 보내 주세요. ㅠ.ㅠ (한줄짜리도 좋은데...잉...) 번 호 : 43 / 83 등록일 : 1999년 10월 18일 23:55 등록자 : CHO1971 조 회 : 1746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43.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사랑은 빗나간 화살이 되어 달의 심장을 가르고 선홍빛 눈물은 헛되이 타인의 가슴을 적시리라. 그것이 너희가 가는 길. 너희에게 주어진 삶인 동시에 너희가 선택한 운명이다. 제 43 장 "또 뭐야?" 오피온과 이야기를 나누던 제피로스는 신음처럼 내뱉었다. 메디아는 빗자루를 들고 휘적거리며 걸어 오더니 바트를 한 발로 눌러 밟고 주위 를 향해 분명히 말했다. "이건 내꺼야." 알렉토는 한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끙소리를 냈다. '빌어먹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군. 이럴땐 어떻해야 하는거지? 하루라도 맘 편히 지낼 날이 없으니.... 한가지를 해결했다 싶으면 바로 문제를 일으키는 군.' "메디아." 알렉토는 최대한 감정을 억제하며 메디아를 나직하게 불렀다. 병사를 노려보고 있던 메디아가 알렉토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에 의문 이 떠올랐다. "잘 봐, 메디아. 주위를 보라구. 이만큼 일 저질렀으면 됐지, 또 얼마나 사고를 쳐야겠어?" 메디아는 새삼스럽게 주위를 둘러 보았다. 밤하늘로 까맣고 하얀 연기를 피워올 리는 무너진 건물이 아직도 벌겋게 타고 있었고 사방으로 부서진 건물의 잔해가 떨어져 있었다. 여기 저기 횃불을 들고 있는 도시의 수비병들은 중무장을 한채 그녀를 경계하고 있었고 금방이라도 덤벼들 태세였다. 그녀는 그제서야 이 사태 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조금 아주 조금 걱정되었다. 남의 집을 불태웠으니 당 연히 중벌이 내려질 터였다. '뭐..... 돈으로 해결해야지. 안되면..... 그때가서 생각하자. 휴우...마시 때문 에 이게 무슨 꼴이람.'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메디아는 별일 아니라는듯이 알렉토를 향해 말했다. "그래서?" "꼭 그 녀석을 데리고 오람까지 가야겠어? 내가 위험하다고 말했쟎아. 언제 어떻 게 될지 모르는 일이라구. 암살범이니까 이 사람들에게 넘기는게 옳은 일이라구, 메디아." "오늘 아침에 분명히 말했을텐데... 이 놈이 내게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았었나? 벌써 잊었어, 알렉토?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녀석을 넘겨 줄 수는 없어." '이 녀석이 있으면 계속해서 셰도우 아미들이 알아서 내게 찾아오겠지. 그 녀석 들은 로만에 대해 더 자세히 알테고..... 붉은 나비를 몰고 다니는 셰도우 아미 라..... 그래, 로만은 이제 카오스의 눈을 사용하고 있는 걸거야. 수 만년 전에 판타리아를 뒤덮은 재앙속에서 탄생한 카오스의 눈을 소유했을때부터 그가 원했 던 힘을, 이제는 얻었겠지." 그녀의 눈빛이 점차 가라앉고 있었지만 알렉토는 너무 흥분해서 눈치채지 못했다. "메디아, 그렇다고 사람을 저렇게 내팽겨치면 어쩌자는 거야? 그것도 병사를 말 이야.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먼저 말로 하면 되지, 무조건 사람 을 치고보자는 심보도 아니고 나이도 먹을만큼 먹었다는 사람이 왜 그러는거야?" 알렉토의 손가락이 바닥에 쓰러져 끙끙대는 병사들을 향했다. "알렉토 왜 그렇게 말이 많아 졌어?" "뭐?!. 말이 많다구? 그럼 내가 지금 입 다물고 있게 생겼어? 한 밤중에 남의 여 관을 통째로 날려보내고 그것도 모잘라 사람까지 날려 보낸 마당에 내가 지금 흥 분하지 않게 생겼냐구?" 알렉토는 그동안 쌓였던 감정을 쏟아내듯이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기까지 했다. 메디아가 얼굴을 살짝 찌푸리자 이마에 작은 주름살이 생겼다. "알렉토." "왜!" 심통난 얼굴로 알렉토가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왜 마시가 사창가에 갔었던 거지? 저 알지도 못하는 남자하고." 순간 알렉토의 얼굴이 확 붉어지더니 당황스럽게 눈동자를 피했다. "그...그게 그러니까..." 메디아는 표정의 변화도 없이 알렉토가 더듬거리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저...잠깐! 뭐? 사창가라구? 마시가 사창가에 있었단 말이야? 거기서 마시가 뭘 하고 있었던 거지?" "뭘하고 있었을것 같아?" 알렉토의 당황한 얼굴이 더 시뻘겋게 변했다. "어..억...저기..." 알렉토는 급히 옆에 있는 제피로스를 바라보았다. 그가 대답을 해주기라도 할듯 이. 옆에 있던 제피로스는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자 재빨리 끼어들었다. "괜찮다면 나와 함께 서성으로 가지 않겠소? 그곳에서 쉬면서 이야기를 나눕시다. 여기서 범인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은 현명치 못한 일이오. 그리고 저 소년은 내 가 데리고 다녔으니 그 책임은 내게 묻는것이 옳을 것이오." 그는 오피온과 로사리아를 생각해 알렉토 일행을 서성으로 초대했다. "이보시오. 현상금 때문에 이러는 거라면 내가 지불해 주겠소. 궁에서 찾는 범인 을 당신들이 찾았으니 포상금은 넉넉히 주리다." 제피로스는 얼굴에 거뭇거뭇 재를 묻히고 거만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를 향해 말했다. 아무리 봐도 맘에 안드는 여자였다. 그들은 제피로스 덕분에 일행 모두가 로스코의 서성으로 와 있었다. 묵고 있던 숙소가 다 타서 재만 날리고 있는 현장에서 밤이슬에 젖어가던 몸을 이끌고 다른 숙소를 찾을 일이 막막했던 일행에게는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더구나 아직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에코를 생각하면 더 잘된 일이였다. 알렉토는 아귀처럼 먹고 있는 메디아와 마시를 보며 피곤한 몸을 의자 깊숙히 묻 었다.메디아는 이곳에 오기 전에 딱 한마디를 함으로써 긴장한 모든 사람들의 기 운을 빠지게 만들었었다. - 그러고 보니 배가 고프군. - 그때 마시가 껴들었다. - 나도, 나도 배고파, 메디아. - 그래서 제피로스는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서성주에게 늦은 저녁을 부탁해야 했다. 길고 커다란 탁자가 놓여진 거대한 식당에는 촛불이 겹겹이 밝혀져 있었다. 이미 밤이 깊어 성안의 다른 곳은 조용했지만 느닷없이 들이닥친 불청객들로 인해 식 당은 사람들이 꽉 차있었다. "쩝쩝....쪽..쪽..." 손가락까지 핥아가며 먹어대는 마시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눈앞에 있는 오리구 이를 맛있게 해치우고 있었다. 그 맞은 편에서도 메디아가 갓요리한 송아지 고기 를 접시위에 올려 놓으며 칼질을 하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이미 식사를 했는 지 거의 손도 대지 않았다. 저녁을 거르다시피한 알렉토만이 조금 먹었을 뿐이었 다. 하지만 마시와 메디아가 먹는 것만으로 식탁위에 푸짐하게 차려졌던 음식들 은 이미 바닥이 나고 있었다. "여기 술 좀 더 줘요." 메디아가 불쑥 고기를 씹어 먹다가 자신의 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즉시 대기 하고 있던 하인들이 술을 더 날라왔다. 그들은 귀한 분들과 함께 온 이 괴상한 일행을 신기한듯이 훔쳐 보고 있었다. 메디아는 이제 어느정도 속을 채웠는지 음식을 밀어두고 술을 퍼마시기 시작했 다. 그녀는 배고픈 욕구를 채워서인지 이제 울컥울컥 울분이 치밀어 올라 왔다. 그녀는 오리다리를 뜯어 먹고 있는 마시를 노려 보았지만 마시는 먹는데 정신이 팔려 있어서 메디아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메디아는 초저녁에 창녀와 벌거벗은 알몸으로 침대위에 나란히 누워있던 마시를 생각하자 다시 몸서리가 쳐졌다. '아휴휴... 내가 이런 문제까지 떠맡아야 하다니....' 그녀는 술을 벌컥벌컥 들이키며 답답한 가슴 속을 가까스로 달랬다. 여전히 메디 아의 눈이 매섭게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마시는 입이 귀까지 찢어 져 헤헤 거리며 먹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붉은 눈동자에는 오직 음식밖에 보이지 않는것 같았다. 메디아는 신경질적으로 술잔을 탁 내려놓고 마시의 얼굴을 향해 닭다리를 집어 던졌다. "쩌쩝쩝...우왓왓..퇫퇫...이게 뭐야?! 이씨, 먹는데 왜 건드려-!" 마시가 먹던 고기로 탁자를 탁 내려치며 소리를 질렀다. 주위에 앉아 아무말없이 먹는 모습을 구경하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메디아와 마시를 번갈아 쳐다 보았다. 서성주는 절친한 친구 제피로스가 데리고 온 일행이 영 마땅치가 않았지만 군소리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 일행에는 오피온 왕자와 로사리아 공주가 끼어 있었던데 다가 왕족 암살범을 잡아 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의는 고사하고 사람을 무시하는듯한 메디아와 마시를 보고 있자니 점점 화가 나고 있었다. 자신의 성에서 이토록 무례한 행동을 하다니 참을수가 없었 다. 왕족이 합석하고 있는 식탁에서 감히 음식을 집어 던지고 큰 소리를 치다니 있을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자신의 성에서...... 성주가 은은한 노기를 담은 얼굴로 메디아를 향해 입을 열었을때였다. 제피로스 가 친구의 팔을 잡으며 오피온 왕자를 가리켰다. "왕자님이 가만히 계시지 않나, 참게나 친구. 원래 저 사람들이 상식이 부족한 것 같더군." 제피로스는 친구를 향해 가볍게 윙크를 하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에게는 메디 아와 마시가 참으로 흥미롭고 재미있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비록 여자가 너무 건 방져서 맘에 들지는 않았지만 하여튼 재밌는 일이라면 찾아가면서 즐기는 제피로 스에게 그들은 매우 반가운 존재였다. 그는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은근히 기 대하기까지 했다. '설마 또 불덩이를 집어 던지지는 않겠지....' 로스코 시내에서 있었던 일이 잠깐 떠올라 불안하기는 했지만 그는 일단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마시는 얌전하게 앉아서 먹고 있는데 왜 건드리냐는 눈으로 벌떡 일어나 메디아 를 노려 보았고 메디아는 술을 또 퍼 마시며 그를 무시해 버렸다. "이잇...." 마시는 뭔가 더 궁리하다가 자리에 앉아 다시 먹기로 했다. 그에겐 먹고자 하는 욕망이 더 컸던 것이다. 마시가 자리에 앉아 기름기가 자르르 도는 작은 새끼 돼 지의 다리를 입에 넣는 순간, 메디아는 다시 고기 뼈다귀를 마시의 가슴으로 던 졌다. 이번에는 마시도 가슴에 맞은 뼈다귀를 무시하고 먹기만 했다. '네가 날 무시해?' 메디아의 눈동자에 파란 불꽃이 번뜩이는것 같았다. 식탁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입만 벌린채 이 사태를 구경만 했다. 특히, 성주와 성주의 가신들의 놀라움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더 컸다. "이...이 무슨.." 노기를 참지 못한 가신중의 하나가 일어나려고 하자 서성주가 만류했다. 그는 제 피로스의 눈에 장난끼가 번뜩이는 것을 보았고 친구의 성격을 잘 아는지라 그냥 두고 보기로 했다. 그리고 로사리아 공주도 고양이 같은 눈동자로 마시와 메디아 를 재미있다는듯이 구경하고 있었기에 성주는 가만히 지켜 보기만 했다. "난 저런 사람들은 첨 봤어." 로사리아가 옆에 앉은 오피온에게 작은 소리로 소근거렸다. 입술이 욱신거리는 오피온은 대답은 하지 않고 화사한 옷으로 갈아입은 여동생 로사리아를 주위깊게 바라 보았다. '이제 충격에서 벗어난 건가? 이젠 제피로스경을 만났으니 궁궐로 돌아가야겠군.' 오피온은 낮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로사리아의 고집도 수그러 들었으니 궁궐로 돌아 갈 수 있겠지. 그때 어떻 게든 돌아갔어야 하는건데....' "뭐얏? 왜그래!?" 갑자기 들려온 마시의 고함소리로 오피온은 생각을 멈췄다. 마시는 또다시 얼굴에 날아온 고깃조각을 휙 떼어내며 화를 냈다. "너 나한테 할 말 없어?" "무슨 말?" "만약, 오늘같은 일이 또 있으면...." 메디아는 말을 멈추고 천천히 술잔을 들어 한모금 마셨다. 그리고 탁자 위에 손 을 올려 놓으며 한자 한자에 힘을 주어 내뱉었다. "여.자.는 어.떤. 일.이. 있.어.도. 가.까.이. 하.지.마. 특히, 옷 벗어 던지고 같이 있었다간 내 손으로 죽이고 말겠어." 그녀의 눈빛은 정말 사람을 죽이고도 남을것 같았다. "에?" "허헛..." 모두가 황당한 표정으로 메디아를 쳐다 보았지만 메디아는 진지하게 마시를 보고 있을뿐이었다. 메디아는 마시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할 방법을 찾을 수가 없 었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 그녀로서는 최선이었다. 마시는 메디아가 화난 게 그것 때문이라는 것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였지만 어쨌 든 지금은 대답을 해야 할것 같았다. 메디아의 눈빛으로 봐서는 장난이 아니었다. 마시는 괜히 주눅이 들었다. '겨우 고까짓것 가지고 먹지도 못하게 했단 말야?' 그는 속으로는 투덜투덜 거렸지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알았어. 다시는 안그럴께..... 이젠 먹어도 돼?" 메디아는 과연 마시의 저 대답이 얼마나 신뢰성이 있을지 가늠해 보았다. 다시 확인해 둘 필요가 있었다. "너 약속을 어겼다가는... 그땐 진짜 내 손에 죽는 날인줄 알어." "알았다니까!. 칫......맨날 나만 뭐라구 그래." 뒷말은 혼잣말로 중얼거린 마시가 다시 철퍽 앉아 돼지다리를 뜯기 시작했다. 그 는 여전히 배가 고팠다. 제피로스는 메디아를 기이하게 쳐다 보았다. '저 여자는 소년과 무슨 관계길래 저러지? 정말 아내인가? 그래도 그렇지, 아내 를 여러 명 거느리는 것이 일반화 된 풍습인데 왜 저렇게 난색한다지?' "우리 나라에서 저런 말을 태연히 하는 여자가 있다니.... 참으로 기괴하군, 그 래." 서성주가 제피로스에게 말을 건네자 제피로스도 웃음끼가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네. 쿠쿡... 이보게 내가 저 소년을 데리고 엘라의 집에 갔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뻔 했는지, 자네가 들으면 더 재밌어 할걸세. 하핫.." 친구가 웃음을 터뜨리며 떠드는 소리에 성주는 궁금한 듯이 물었다. "그래 무슨 일이 있었나? 그런데 자네는 정말 못 말리는 사람이군. 저 어린 소년 을 엘라의 집에 데려가다니... 생각이 있는 건가, 자네?" "아니라구.... 지금은 어려 보여도 아까 낮에 시장에서 싸울때는 훨씬 의젓해 보 였다네, 친구. 나랑 술도 한잔 마셨었는 걸.. 하긴 지금도 술은 잘 마시는 것 같 군." 제피로스가 서성주와 나누는 소리는 다른 사람들도 다 들릴정도였다. 메디아가 제피로스를 향해 짧막하게 말했다. "당신. 다시한번 마시에게 접근했다가는 그냥 두지 않겠어." 그러나 제피로스는 화사하게 미소지으며 메디아에게 말했다. "미안하게 됐소. 난 열 다섯살이라길래, 좋은 경험삼아 데리고 다닌 죄밖에 없소 이다. 하핫..그렇게 매서운 눈으로 볼 것 없지 않소. 그런데 말이오......" 그는 말을 잠깐 멈추며 정말 궁금 하다는듯 물었다. "저 소년..마시와는 무슨 사이요? 둘이 결혼이라도 한거요?" 능글거리는 제피로스의 얼굴을 무시한 메디아는 콧방귀를 뀌었을 뿐 이었지만 알 렉토는 마시던 술이 목구멍에 걸려 켁켁 거렸다. '저 자가 미쳤나?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긴 아는 거야?' - 계 속 - 번 호 : 44 / 83 등록일 : 1999년 10월 21일 05:44 등록자 : CHO1971 조 회 : 1881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44.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사랑은 빗나간 화살이 되어 달의 심장을 가르고 선홍빛 눈물은 헛되이 타인의 가슴을 적시리라. 그것이 너희가 가는 길. 너희에게 주어진 삶인 동시에 너희가 선택한 운명이다. 제 44 장 고통. 요란했던 식사도 끝나고 각자가 자신에게 배정된 방으로 돌아간 뒤였다. 제피로스는 조용하게 이야기를 나눌만한 넓은 방을 따로 마련해 준 성주의 배려 로 지금 편안히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오피온과 로사리아가 피곤한 듯 앉아 있었는데 서로의 눈을 피하며 차를 마시고 있던 그들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침묵을 지켰다. "후아함... 저... 그만 자고 싶어요, 제피로스경.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는 몰라도 내일 이야기 하면 안될까요? 어차피 이곳에 하루 더 머물 거라면서요?" 로사리아는 어설프게 하품하는 시늉을 하며 예의바르게 말했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피하지 마십시요, 로사리아님. 수행원도 없이 오피온님과 단둘이 여행중이었다고 말씀하지는 않으시겠지요? 더구나 왕성에서 이렇게나 먼 로스코까지 말입니다. 무슨 생각으로 두 분이 여기까지 와 계신 겁니까? 왕성에 서는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제피로스는 매우 정중하게 말했지만 질책의 어조를 피할 수는 없었다. 아직 나이 어린 왕자와 공주였지만 그들은 명실공히 왕족으로서 지켜야할 책임과 의무가 있 었다. 함부로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여서는 안되는 신분으로 잘못된 행동 하나가 중요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오피온은 자신과 동갑이지만 조금 늦께 태어나서 동생이 된 로사리아를 침울하게 바라 보았다. 그들은 히페리온 왕의 자식들로 어머니는 달랐지만 동갑이라는 나 이 때문인지 어려서부터 유난히 친하게 지내던 남매사이였다. 올해로 열여섯 살이 된 오피온과 로사리아에게 세상은 아직 장미빛의 아름다운 세상이였다. 자상한 아버지와 아름답고 매력적인 어머니들을 둔 그들은 언제나 사랑받는 왕궁의 보석들이였다. 비록 어머니는 서로 달랐지만, 다른 이복 형제 자매들과도 사이가 좋은 편이어서 형제들끼리 서로 어울리는 일이 많았다. 그런던 중 왕성으로 시투니아의 사신이 온 것은 겨울이 한창일 때였다. 시투니아의 새 왕비 세이렌이 보냈다는 사신은 어처구니 없는 요청을 해왔었다. 이제 열여섯 살 밖에 안되는 로사리아 공주를 시투니아의 늙은 왕의 후궁으로 보 내 달라는 이야기였다. 물론, 로사리아의 어머니 아라크네는 불같이 화를 내며 사신을 죽여버렸지만 그 여파로 전쟁이 일어 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자 로사 리아는 겁을 집어 먹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달도 지나지 않아 실제로 시투니아가 파라의 영토를 침입하기 시작했다. 왕실에서는 전면적인 전쟁을 치를것인지 아니면 로사리아를 보내 평화를 지킬것 인가에 대한 회의가 연일 계속되었지만 결론은 나지 않고 있었다. 아라크네는 전쟁론자의 편에서 로사리아를 보낼 수 없다는 강경론을 펼치고 있었 지만 전쟁의 피해를 우려하는 평화론자들의 주장도 만만치 않게 재기되고 있었다. 평화론자들이 융화론을 펴며 로사리아를 시투니아에 보내자고 할 때마다 로사리 아는 피가 바짝 말라가는 느낌이였다. 그녀는 봄이 오기 전에 왕성을 탈출하기로 마음먹을 수 밖에 없었다. 만약, 그녀가 왕성에서 사라진다면 더 이상 그녀를 시투니아에 보내자는 의견이 없을 거라는 생각에서 였다. 로사리아가 결심을 궂히고 짐을 꾸려 왕성을 떠나던 날, 우연히 그녀를 위로해 주기 위해 찾아 온 오피온에게 들켰지만 그녀의 고집에 오피온도 함께 왕성을 떠 나 왔던 것이었다. 오피온은 로사리아의 간곡한 부탁에 못 이겨 그녀를 따라 나 설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연약한 여동생을 험한 세상에 혼자 보낼 수도 없었 던 것이다. 지금 왕성에서는 그들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지만 공개적으로 왕족이 사라졌 다고 발표할 수는 없는 입장이여서 제피로스도 오피온과 로사리아를 발견하고 매 우 놀랄수 밖에 없었다. "제피로스경, 제발 우리를 못 봤다고 하면 안될까요? 그 늙은 시투니아의 호색한 왕에게 시집가기는 죽는 것보다 싫다구요." 제피로스는 백옥처럼 하얀 피부의 아름답지만 아직은 애띤 얼굴의 로사리아를 안 타깝게 생각했지만 그녀는 일반 처녀가 아니라 왕족이였다. 왕족은 그 태생으로 인한 무거운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해 합니다, 로사리아님. 하지만 왕족으로서의 옳은 행동은 아니셨습니다." 그녀의 눈에 희망의 빛이 감돌다가 곧 실망스럽게 변했다. "현재 시투니아와의 전쟁이 본격화 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제 아버님이신 라메 즈 경으로부터의 연락이 보름 전에 도착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달타성의 기사들 을 몇 명 데리고 오람으로 가는 중입니다. 여기 로스코의 서성에서 삼일간 휴식 을 취하는 중이었는데 운좋게 두분을 만나게 되어 다행이군요. 오피온님과 로사 리아님이 이런 때에 왕성에 계시지 않는다면 왕실에 큰 부담이 된다는 것을 아실 테지요? 저와 함께 오람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그리고 로사리아님, 최악의 경 우가 아닌한 시투니아로 가실 일은 없을것 같습니다. 이미 전쟁이 가속화 된 마 당에 새삼 회유책이 필요하지는 않을테니까요." "전쟁이 본격화 된다면 어느정도까지 확산될 거라는 뜻이요? 시투니아에 그만한 힘이 있소? 그들은 몇 백년 전에도 파라와의 전쟁에서 대패를 했는데 궂이 다시 전쟁을 일으키다니.... 더구나 많은 영토를 잃었었는데..." 오피온이 왕자답게 전쟁에 관심을 보이자 제피로스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어쩌면 구실을 만들어 국토를 되찾아 보겠다는 것일수도 있죠. 만약 그렇다면 동쪽의 영토는 이번 전쟁에서 무사하지 못 할겁니다. 지난날 그들이 전쟁에서 잃 은 땅 대부분이 라더스강 지역인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지요. 시투니아의 새 왕 비 세이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가 이번 전쟁의 열쇠라고들 하더군요." 벽난로가 타고 있는 한쪽 구석에서 따뜻한 빛이 흘러 나왔지만 제피로스는 심각 한 얼굴이였다. 이야기를 마친 그는 오피온과 로사리아를 바라보았지만 여전히 로사리아는 불안한 표정이었다. "밤이 깊었으니 이야기는 내일 계속 하시지요. 출발은 내일모레 아침 일찍이니 준비는 천천히 하십시요. 제가 연락병을 미리 왕성에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제피로스경."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려는 제피로스를 제지하며 오피온이 말했다. "예?" "그런데 정말.... 저 괴상한 사람들을 데리고 갈 참이오?" 오피온은 메디아일행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었다. 메디아가 끝까지 바트를 넘겨 줄 수 없다고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제피로스는 한 가지 절충안을 내놓았었다. 그들도 오람으로 가는 중이니 함께 가자는 의견이었 는데 메디아는 곰곰히 생각하더니 그 의견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더구나 제피로 스가 메디아와 마시가 태워버린 여관에 대한 책임을 배상금만으로 해결해 주겠다 고 했기에 불만을 표시할 수가 없었다. 결국 알렉토와 아네모스도 셰도우 아미를 걱정해서 제피로스와 함께 가는데 찬성했다. 적어도 한 성의 영주인데다가 흑기 사인 제피로스가 거느리고 떠날 기사와 병사들을 생각하면 매우 안전한 여행이 될 거라는 결론이었던 것이다. 식사가 끝날무렵에 그렇게 의견을 모은 일행은 로스코에서 하루 더 머물고 떠나 기로 결정을 보았다. 제피로스는 문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들은 어쨌든 중요한 죄인을 잡은 자들입니다. 궂이 죄인을 직접 데리고 가겠 다니 우리와 함께 가자고 할 수 밖에요. 그리고 능력이 뛰어난 자들로 보이니 방 해는 되지 않을듯 합니다. 걱정되십니까? 오피온님." "그들은 좀 정상이 아닌것 같아서 말이오." 오피온이 얼굴을 심각하게 궂히며 말하자 제피로스는 특유의 유쾌한 표정을 지었 다. "흥미로운 사람들이더군요. 원래 여행자들이라는 사람들이 대개 정상적이지는 않 답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과의 여행이 더 재미있을 수도 있는 법이지요. 그럼 두분, 편안한 밤 되십시요. 먼저 물러 가겠습니다. 하하핫..." 제피로스는 허리를 숙여 깊게 인사하고 즐거운 웃음을 터뜨리며 방을 나섰다. 3월의 마지막 아침이었다. 일교차가 커서인지 서성의 주변으로는 온통 하얀 안개가 꽉 들어차 있었고 넓은 목초지도 전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안개가 너무 심하게 내려 앉아서 바로 앞의 사물도 분간이 안될정도였다. "약초상에 좀 다녀올게. 블루잉의 약에 뭘 혼합해 넣었는지 알아봐야 겠어." '아무리 봐도 소주를 퍼 마신것처럼 날뛰던 블루잉이 이상하단 말야.' 메디아는 약초상에서 자신이 주문한 것 이외의 무엇을 더 넣어서 약을 제조했는 지 의심스러웠다. 만약 주문대로라면 블루잉이 그렇게 막무가내로 돌변할리가 없 었다. 분명히 생각해 준답시고 증류주를 조금 넣어서 약의 독성을 약화시켰던게 틀림 없었다. 그 때문에 블루잉이 무슨 짓을 할지는 조금도 몰랐겠지만 말이다. "아참, 주문한 옷이 있었는데....그것도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봐야 겠군. 여관이 다 타서 당황했겠는 걸...." 그렇게 말하며 메디아와 마시는 식사를 마치자 안개가 걷히기도 전인데 로스코 시내로 나가 버렸다. 알렉토는 성에 남아 내일 같이 출발할 제피로스와 바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내내 에코와 붙어 지내던 볼비도 오늘은 왠일인지 아네모스와 에코를 피해 알렉토를 따라 다녔다. 해가 뜨고도 한참이 지나 정오가 되어 갈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안개가 걷히고 푸른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일년중 봄,가을에만 잠깐 나타나는 판타리아 특 유의 무지개빛 구름이 흘러다니기 시작했다. 신비로운 무지개 구름이 하늘가득 펼쳐지고 연초록빛 풀들이 무성히 자라기 시작하는 넓은 목초지 뒤로 로스코 시 내의 복잡한 정경이 내려다 보였다. "우와... 너무 예뻐." "굉장한데.... 올 해엔 처음있는 현상이군." 모두들 성 꼭대기에 올라와 무지개 구름을 구경하며 감탄성을 터뜨렸다. "정말 아름답구나. 흔하지 않은 무지개빛 구름이 나타나다니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 될 것 같구나, 에코." 아네모스가 엷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지만 옆에 있는 에코는 멍한 얼굴로 푸 른 하늘에 짙은 색으로 깔린 구름을 무심하게 올려다 보았을 뿐이었다. 그녀는 며칠동안 혼수상태로 약해 취해 있었기 때문에 매우 체력이 약화된 상태였다. 식 사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얼굴은 지나치게 창백했고 입술을 꺼칠해 보였다. 그녀 가 마른 입술을 적시며 불안하게 중얼거렸다. "오빠, 이상해...." "응?" "내 팔이.... 내 팔이 안 움직여." 그녀는 오른팔로 왼쪽 어깨와 팔을 감싸며 절망적으로 말했다. 아네모스의 얼굴 에 순간 어두운 그림자가 덮혔다. "에코...." 아네모스는 따뜻한 담요를 뒤집어쓴 에코를 끌어 안으며 작게 속삯였다. "... 왜 그래? 뭐가 잘 못 된거지, 아네모스? 내 팔이 이상하단 말이야." 아네모스는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아직도 서늘하게 부는 바람을 의식하 며 에코를 일으켜 세웠다. "그만 내려가자. 찬바람을 오래 쐬면 몸에 안 좋아." 그는 에코의 곱슬머리에 다정하게 키스를 하며 생각했다. '이 아이에게 뭐라고 말한단 말인가? 춤추는 것을.. 세상의 무엇보다도 좋아하는 이 아이에게 무슨 말로 위로를 해줘야 하는 걸까? 이제 더 이상 무희로서의 삶은 살 수 없다는 말을 어떻게 내 입으로 한단 말이지. 나조차... 조각가로서 손을 잃었다면 목숨을 잃은 것보다 괴로워할 것을 아는데.... 아..에코야. 네가 과연 이 시련을 견딜 수 있을까?' 자리에서 일어서던 에코는 부자연스럽게 매달려 움직이지 않는 팔 때문에 휘청거 렸다. 그녀의 파란 눈에 공포스런 빛이 감돌았다. 그녀가 새파란 하늘빛 눈동자 를 아네모스에게 고정시켰다. "....뭐야? 이거 왜 이래? 뭐가 어떻게 된거야, 아네모스? ....응? 말 해봐. 내 팔이 안 움직인다구!" 작게 속삯이던 에코의 말소리는 점점 커져 급기야 고함소리로 변했다. 주위에서 하늘의 무지개 구름을 구경하던 사람들이 에코와 아네모스를 보기 시작했다. 에코는 오른 손으로 왼 팔의 손목을 잡아 어깨 높이로 올렸다가 놓았다. 그녀의 왼 팔이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마치 실에 매달린 인형의 팔이 힘없이 떨어지는 것처럼. "하...하....이...이게 어떻게 된 거지? 내 팔이 왜 이래? 응? 이게 뭐야? .... 일...일시적인 거지? 그렇지? 응, 아네모스? 그렇다고 말해. 말하란 말야!" 아네모스는 에코의 간절한 목소리를 외면하며 가볍게 고개를 하늘로 돌려 버렸다. 눈물이 차올라 왔지만 그는 애써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왜...왜 대답을 안해? 대답하란 말이야. 응? 제발 일시적인 거라고 말해 봐-!" 에코가 오른 손을 뻗어 아네모스를 흔들었지만 아네모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 았다. 그녀는 아네모스에게서 손을 떼고 몇 발짝 뒤로 걷더니 믿을 수 없다는듯 이 하늘을 쳐다보고 주위에 둘러선 사람들을 의미없이 한번 둘러 보았다. 그리고 는 바닥에 주저 앉았다. 아네모스가 에코에게 다가가 안아 주었지만 그녀는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한동안 그녀는 가슴이 크게 움직일정도로 힘겹게 숨을 몰아 쉬더니 바닥으로 숙 였던 머리를 쳐들었다. "...그래, 메디아. 그녀가 있었어.... 메디아는 어딨지?" 그녀는 아네모스를 거칠게 밀어 내며 소리쳤다. "메디아... 메디아라면 날 고쳐줄 수 있을 거야. 그런데 마시는 또 왜 안보이는 거야? 마시만 있어도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래... 오빠, 메디아는 어딨지? 응? 메디아는 왜 안보이는 거야? 설마.... 떠난 건 아니지? 이런 날 두고 그냥 떠나 버린 건 아니지? 아닐거야. 그래, 그럴리가 없어. 꼭 날 도와 줄거야." 에코는 미친사람처럼 혼자 중얼거리며 창백한 뺨을 실룩거렸다. - 계 속 - 제43장 제목을 안 올렸네요...하하..^^;;;;;; 힝...ㅠ.ㅠ(건망증이 점점...) - 관계 - 라고 했어야 했는데.....T.T 번 호 : 45 / 83 등록일 : 1999년 10월 25일 16:00 등록자 : CHO1971 조 회 : 1701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45.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사랑은 빗나간 화살이 되어 달의 심장을 가르고 선홍빛 눈물은 헛되이 타인의 가슴을 적시리라. 그것이 너희가 가는 길. 너희에게 주어진 삶인 동시에 너희가 선택한 운명이다. 제 45 장 눈물과 출발. 제피로스와 함께 지하 감옥에서 바트를 신문하고 올라오는 알렉토는 키가 큰편인 제피로스보다도 머리 하나쯤은 더 커 보였다. 두 남자는 성격이 달랐지만 둘 모 두 검을 다루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나름대로 서로에게 호감을 느꼈다. 알렉토는 진지하고 무던한 반면, 제피로스는 진지하면서도 유머가 있었고 좀더 호쾌한 느 낌의 남자였다. 높은 천정으로 발걸음 소리가 가볍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제피로스가 입을 열었 다. "부탁이 한가지 있오. 아니 꼭 지켜 줬으면 좋겠소. 오피온님과 로사리아님이 이 사실을 모르게 해 주시오. 리욘 왕자님의 암살에 그녀가 관계되었다는 사실을 비밀로 해줬으면 하오." 알렉토는 처음에는 무슨 이야기인지 몰라 옆에서 걸어가는 제피로스를 돌아 보았 다. "무슨....?" "만약 로사리아님이 이 사실을 안다면 충격을 받을거요. 어쩌면 궁으로 돌아가지 않으려 하실지도 모르고...... " 그래도 알렉토는 의문의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에겐 여전히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제피로스가 가볍게 이마를 찌푸렸다. '몰라서 저러는 걸까? 아니면 알고도 무신경한 건가?' 키가 큰 두 남자를 종종 걸음으로 뒤따라 걷던 볼비는 알렉토를 올려다 보며 제 피로스를 대신해 말했다. 그는 알렉토가 알아 차리지 못하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로사리아 공주님이 바로 그분의 딸이야." 그제서야 알렉토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난 미처... 몰랐소. 사실을 알게 되면 몹시 곤란하겠군요." "그렇소. 로사리아님은 충격으로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는 분이오. 오피온님도 알게 되어 좋을 게 없기는 마찬가지고..... 궁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아무도 발설 하지 않아 줬으면 합니다. 우리쪽은 문제가 없겠지만 당신 일행들은 모두가 사실 을 알고 있을테니 조심해 주시오." 제피로스 자신도 믿기 힘든 사실이였지만 범인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인 만큼 믿 지 않을 도리도 없었다. 더구나 암살 직후에 범인들이 궁성에서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던 것도 이제는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었다. '왕궁에 내통자가 있었을 거라는 것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지. 그래, 왕의 후궁이라면 더할나위 없이 좋은 피신처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필이면 왜... 그녀가 이런 위험을 자초하는 걸까? 그녀에게 과연 무슨 이득이 된단 말이지? 아들하나 없이 공주만 낳은 그녀가 무엇을 탐해 왕의 후계자를 죽이고 적국의 첩 자들을 들여 보호하고 있단 말인가? 어차피 왕자를 죽여도 이득 될 것이 없는 것 을...... 설마 여섯명의 왕자 모두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건 아니겠지?' 제피로스는 착잡한 심정으로 생각했다. '시투니아에서 왔다는 바트라는 자는 누구에 의해 이런 일이 이루어 졌는지 알고 있지 못 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바트는 이용물에 불과했던 건데.... 진짜 배 후는 누군가 따로 있을 것이다. 셰도우 아미라는 그자들이 이 열쇠를 쥐고 있는 건가? 그 누구도 모르게 파라로 침입해서 왕궁내의 암살자로 살아간다는 그들이?" 제피로스는 오래 전부터 셰도우 아미라는 존재가 왕실 내부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등골이 서늘한 느낌이였다. '얼마나 충격적인 사실인가? 그토록 오랫동안 왕실에 침입해 있었다니......' 리욘왕자의 암살범으로 인한 혼란은 왕실 전체를 뒤흔들어 놓은 만한 것이었다. '이 일이 오람에서 밝혀지면 어떤 피바람이 불지 생각만 해도 불쾌하군.' 평소 유쾌하기로 소문난 그도 바트를 신문하고 나오는 지금은 뜻모를 불안을 느 낄 뿐이었다. 그들이 긴 복도를 걸어 건물의 중앙에 해당하는 홀에 도착할 무렵이었다. 홀에서 여자의 비탄에 찬 절규가 들려 왔다. "제발, 제발 도와 줘. 도와 줘야 돼." 에코가 메디아에게 매달렸다. '젠장..' 메디아는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겉으로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난 그런 거 몰라." 메디아와 마시는 정오가 되어서야 로스코 시내에서 돌아올 수 있었다. 메디아가 약초상 주인을 만나 한바탕 소란을 피우느라 조금 늦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에 게 말도 안하고 멋대로 약에 술을 배합한 주인을 순순히 용서해 주지는 않았다. 메디아는 마시가 들고 있는 딱딱하게 굳어버린 거북이를 가리키며 성질을 부렸지 만 주인은 메디아가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이해하지 못 했다. 그래서 메디아는 약초상에 있는 약병들을 몽땅 소주로 바꿔 놓아 버렸다. 주인이 길길이 날뛰며 배상하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그녀는 주인의 목소리를 여자 목소리로 바꿔 버리고 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왔다. - 평생 그 목소리로 떠들며 살아 보라지 - 그들이 성에 도착하자 마시는 배가 고프다며 메디아를 제치고 식당으로 달려갔다. 메디아는 가지고 온 새옷들을 방에 가져다 놓고 내려오느라 뒤늦께 식당으로 가 려던 참이었다. 그녀가 홀을 가로 지르고 있을때였다. 갑자기 계단을 달려 내려온 에코가 메디아를 보더니 맡겨논 거라도 달라는 듯이 떼를 쓰기 시작했다. "모르다니.... 나더러 평생 이렇게 살라고? 응? 그런 건 아니지? 난 이렇겐 죽어 도 못 살아. 난 춤 추는 무희 에코라구. 알겠어? 이제 오람에 가면 큰 무대에 서 서 나를 보러와 준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출거야. 그래야 하는데...그래야 하는데 ..... 이럴 순 없어. 네가 꼭 도와줘야 돼. 너라면 내 팔쯤은 금방 고쳐 줄수 있 쟎아. 제발... 제발 메디아, 도와줘." "네 문제는 네가 해결하는 거야." 인간이란 참 이상한 존재였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존재가 옆에 있으면 언젠가 는 꼭 그에게 기대하고 무언가를 얻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가 만약 그것을 거절 했을때는 이유없는 증오를 품게 된다. 마치 당연히 해줘야 하는 것을 안 해준다 는듯이 욕을 하고 그를 비난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그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의 무도 없는데 말이다. 지금의 에코가 그랬다. 그녀는 메디아가 반드시 자신을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하 고 있었다. 그게 당연한 거라고 에코는 생각했다. 그러나 메디아는 에코에게 차 가운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에코의 가슴에서 이유모를 증오가 치솟았다. ".....뭐라구?! 그렇게 잘난척 하더니 겨우 이런 거 하나 못 고쳐준단 말야? 넌 도대체 뭐야? 뭐가 그렇게 잘나서 못 도와주겠다는 거지? 빨리 고쳐 줘!" 에코는 더 크게 소리치며 메디아에게 매달렸다. "왜 나만 안된다는 거야. 알렉토도 치료해 주고 마시도 치료해 주면서 왜 나는 안돼? 따지고 보면 이게 다 너희들 때문에 이렇게 된 거쟎아. 마시가 그때 그 이 상한 남자를 건져 올리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안 일어났어. 그래, 이건 다 너 희들 때문이야. 그러니까 메디아 네가 책임져야 돼, 책임지란 말이야!" "남에게 책임을 돌리려 하지마, 에코. 그건 너의 운일 뿐이야." "운? 하...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야. 이게 운명이라구? 너 ....너 어떻게 그렇 게 말할 수 있어? 네가 이렇게 되어도, 넌 네 운명이라구 말할 수 있을것 같아? 내 입장이 되도 그런 말 할 수 있느냐구!" 인간은 또 자신의 운명을 남의 탓으로 돌리기를 좋아하기도 했다. 필사적으로 이 유를 찾아서 타인을 증오하고 미워하는 것이다. "메디아 너..... 내가 이렇게 될 때 일부러 안도와 준 거지? 그렇지? 내가 그 숲 에서 죽던 말던 신경도 쓰지 않았던 거지? 나 같은 게 어떻게 되든 너한테는 아 무 상관도 없을테니까. 그날 네가 조금만 도와 줬어도 난 이렇게 안되었을지도 몰라. 그래,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이꼴이 된 거라구. 네가 책임져. 네가 고쳐 놓으란 말이야~!" 악을 쓰며 메디아를 붙잡고 늘어지는 에코의 눈에는 이미 이성이란 존재하지 않 는 것 같았다. 메디아는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에코의 절망스런 매달림에 짜증이 밀려 왔다. "어서 고쳐 놓으란 말이야!" "이게... 정말!" 메디아는 에코의 뺨을 힘껏 후려쳤다. "아악!" 에코가 바닥으로 거칠게 넘어졌다. '쫙악' 소리의 여운이 홀을 가득 메우며 공기를 차갑게 얼려 버리는 것 같았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정지된 화면처럼 메디아와 에코를 바라 보았다. "다신 날 귀찮게 하지 마." 메디아는 차갑게 말하고는 알렉토가 서 있는 곳을 지나쳐 홀에서 나가 버렸다. 에코는 오른손으로 뺨을 감싸고 푸른눈의 동공이 풀린채 멍하니 주저 앉아 그대 로 있었다. 홀에서 메디아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때까지 조용히 있던 에코에게선 낮은 흐 느낌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녀의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아 네모스는 아무말도 못하고 그런 에코를 안아 줄 뿐이었다. "허으흑!...흐흑흑..아흐흑흑......" 알렉토는 에코가 안타까웠지만 아무런 일도 할 수가 없었다. 메디아도 더 이상 그녀에게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알렉토는 가만히 그들을 지켜 볼 수 밖에 없었다. 볼비도 울고 있는 에코에게 다가가지는 못하고 알렉토 의 다리 뒤에 숨어 훌쩍이고 있었다. 제피로스는 무슨 일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메디아의 차가왔던 눈빛과 반 응은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아무리 오래 사귀어도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을것 같았다. 4월의 첫 아침이 밝았다. 오늘도 안개는 땅위에 내려 앉아 짙은 흰빛을 사방으로 뿌려 놓고 있었다. 촉촉한 대지와 공기중엔 말들의 울음소리와 사람들의 북적거림으로 인한 소리가 이른 아침부터 울려 퍼졌다. 제피로스는 여행 준비를 지휘하며 휘하의 기사들에게 오피온과 로사리아에 대한 당부를 하고 있었다. 파라의 서쪽 영토 달타성에서 아버지 라메즈로 부터 왕궁으 로 오라는 명령을 받고 출발했을 때는 가볍게 생각하고 출발한 여행길이었다. 그 래서 중간에 로스코에 머물면서도 여유롭게 즐기기까지 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이번 여행은 쉽지 않을 듯 했다. 좀 껄끄러운 일행들이 끼어 있어 서 더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중요한 암살범을 이송해야 하고 뜻하 지 않게 왕족을 모신데다가 자신의 명령을 받지 않는 여행자들. 그리고 암살범을 쫓는다는 셰도우 아미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의 공격도 대비해야 했다. 여행의 출발을 알리는 소리가 외쳐지자 수십마리의 말들이 짙은 안개속을 움직이 기 시작했다. "출~발!" - 계 속 - 결굴... 45회까지 왔습니다. 언제 이 글의 끝을 볼지 정말 걱정입니다. 아직도 갈 길은 먼데 여행길은 아직도 출발선이네요. 언제 도착하려나....에구..^^; 끝까지 동행해 주실거죠? *^^* (장거리 여행엔 동행이 많아야 좋은데....) 읽어 주시는 모든 분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__) 번 호 : 46 / 83 등록일 : 1999년 10월 27일 09:26 등록자 : CHO1971 조 회 : 1798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46.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사랑은 빗나간 화살이 되어 달의 심장을 가르고 선홍빛 눈물은 헛되이 타인의 가슴을 적시리라. 그것이 너희가 가는 길. 너희에게 주어진 삶인 동시에 너희가 선택한 운명이다. 제 46 장 증오, 슬픔 그리고 타인. 이른 아침의 길을 뚫고 나가는 30명이 넘는 일행의 행렬은 안개속에서 조용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앞에 가는 말의 희미한 그림자만이 보이는 파라 북부지방의 짙 은 안개는 묘한 감상을 불러 일으킬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행을 인도해가 는 제피로스와 그의 기사들에겐 촉촉하고 뿌연 안개의 감상보다는, 길을 방해하 는 안개의 거추장스러움만이 느껴지고 있었다. 거대한 크로노스 산맥을 가로질러 가야하는 여행길이었기에 중죄인임에도 불구하 고 바트는 네명의 감시병 사이로 말을 몰고 가고 있었다. 거칠은 산악 여행길에 서 죄인을 실은 수레는 방해가 될뿐만 아니라 끌고 산을 올라갈 수 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손목은 단단히 결박해 놓은 상태였지만 제피로스에게는 매우 신 경이 쓰이는 일이었다. '이런 안개속에서 추격전이라도 벌이게 된다면 큰 낭패가 되겠군.' "이봐, 저스티스. 밧줄을 항상 확인해 주게." 제피로스는 뒤따라 오는 감시병들 사이의 기사에게 소리쳤다. 저스티스는 로스코의 서성주 휘하의 기사였지만 제피로스의 요청에 착출되어 함 께 가게 된 기사였다. 저스티스는 자신과 바트의 허리를 묶어서 이어놓은 밧줄을 다시 확인하며 제피로스에게 안심하라고 대답해 주었다. 네명의 감시병 모두가 밧줄로 바트의 허리나 발목에 연결되어 있어 그를 탈출할 수 없게 하는 동시에 암살자들로부터 죄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기도 했다. 바트는 양쪽 발목과 허리가 각각 밧줄에 매달리고 양손이 묶인채 말위에 앉아 얌 전히 있었지만 채 아물지 못한 상처들로 여기저기가 욱씬거리고 있었다. 그를 가 장 고통스럽게 하는 상처는 셰도우 아미의 화살에 맞았던 옆구리였다. 관통상이 였기에 다른 상처들보다도 더 그의 몸을 괴롭히는 상처였다. 그러나 바트는 몸을 자극하는 상처보다도 그의 가족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더 아파왔다. 시투니아에 두고 온 두 아내와 어린 아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들 이 지금까지 살아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어쩌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고 바트보다도 더 고통받으며 살고 있을지도 몰랐다. 떠나올때 가족들을 돌봐주겠다 며 데려갔던 정체를 알 수 없던 회색망토의 사내들이 기억났다. 어린 아들이 아 버지가 영웅이라도 되는줄 알고 얼마나 좋아했었는지 그는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왜 나는 이토록 어리석은 짓을 했었던가? 가족을 그런 자들에게 맡기고 무엇을 얻겠다고 이 먼 타국까지 와서 이런 일을 겪는가? ...... 내가 무엇이었던가? 내 가 무엇이라고 내 아내와 내 아이를.... 그런 곳에 보냈단 말인가?' 그는 감정이 복받쳐 올라와 가슴이 뜨겁게 달구어 지는 것만 같았다. 눈부시게 하얀 눈이 겨울 숲을 온통 감쌌던 그날에 그는 죄없는 한 생명을 죽이고 배신당 했다. 그리고도 목숨을 부지하고자 부하들을 잃어가며 셰도우 아미를 피해 필사 적으로 도망쳤던 자신이 비참하기만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배신에 대한 댓가는 치루게 할것이다. 너희들이 그렇게 이루 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든...... 나는 너희들을 망가뜨리겠다.' 바트는 몇 달전 죽음을 매달고 탈출했던 오람으로 다시 향하는 말위에 앉아 배신 자들에 대한 증오를 곱씹으며 그를 괴롭히는 육신과 마음의 고통을 달래야만 했 다. 행렬의 꼬리에 붙어 따라가는 메디아 일행에겐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새벽부터 깨워서 잠투정을 하던 마시는 자신의 말에 블루잉을 매달고 가야 한다 는 사실에 몹시 불만스러워 했지만 메디아가 들은척도 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안장에 블루잉을 묶어 놓고 출발해야 했었다. 그런 마시를 앞에 세우고 가는 메디아는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머리가 지끈거 리며 가슴이 울렁거리는 느낌이였다. 그러나 그녀는 내색하지 않고 끊임없이 중 얼거리는 에코를 무시하려고 애섰다. 그녀의 옆에서 가고 있던 볼비가 메디아의 굳어지는 얼굴을 보며 불안스레 몸을 뒤척였지만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그도 에코의 중얼거림이 몹시도 신경쓰였던 것이다. 그는 몽딱한 손가락으로 고삐를 움켜쥐며 고개를 숙이고 조용하게 훌쩍 이기 시작했다. "흑..히잉..흑흑..훌쩍...흑...크흑..훌쩍..흐흑...." 에코는 오른 손으로 왼쪽의 손가락들을 하나하나 잡아서 구부려 보았다. 엄지 손 가락부터 새끼 손가락까지 천천히 구부리고 피고 구부리고 피고를 반복하는 중이 었다. 그러나 그녀의 손가락들은 제힘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이마에 서 굵은 땀방울이 송글송글 떨어져 내렸지만 그녀는 너무 몰두해 있어서 땀이 흐 르는 것도 몰랐다. "움직여 보는 거야. 너는 할 수 있어. 하..나...두울....하..나...둘... 해야 돼. 할 수 있어. 움직여, 움직이라구. 할 수 있다니까. 하..나..둘...다시 하나...다 시...한번만..한번만 움직여 줘. 하..나...다시..." 그녀의 왼쪽 손가락들이 파랗게 변해 피멍이 들도록 에코는 끈질기게 손가락 구 부리기 작업에 매달렸다. '아버지는 왜 나한테 이런 고생을 시키는 걸까?' 볼비는 자신을 아르카디아에서 파라의 노아로 떠밀다시피 내보냈던 아버지 우헨 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보석세공에 필요한 연장을 구입하러 노아에 다녀오는 일 은 항상 우헨 자신이 하던 일이였는데 왜 갑자기 아들인 볼비를 그 대신 보내어 이런 고생을 시키는지 볼비는 알 수가 없었다. 볼비가 얼마나 심약하고 겁이 많 은지 뻔히 아는 아버지가 다 늙도록 고향땅 조차 떠나보지 않았던 아들을 왜 멀 고도 먼 여행길로 떠다 밀었는지 볼비는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지금 드레곤이 끼어있는 일행사이에서 그가 얼마나 비참하고 무서우며 불 안한지, 그리고 얼마나 슬픈가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볼비는 무서워서 우는것이 아니라 에코 때문에 너무 슬퍼서 우는 것이었다. 그 특유의 섬세한 감 성과 따뜻한 마음으로 에코에 대한 동정에 저절로 눈물이 흘러 나왔다. "흑흑...엉엉..어엉...흐흑..훌~쩍.." 볼비는 너무 울어서 통통한 뺨과 분홍색 코가 아예 빨갛게 변해 있었다. 가지고 다디던 작은 수건도 흠뻑 젖어서 더이상 눈물과 콧물을 닦아 내지도 못 할것 같 았다. 메디아는 옆에서 울어대는 드워프 때문에 더 짜증이 났지만 별 뾰족한 수가 없었 으므로 옆뒤에서 나는 소리들을 무시해 버렸다. '나더러 어쩌라는 거냐? 너희들 일은 너희들이 알아서 해야지. 왜 나에게 기대하 는 거지? 난 신이 아니야...... 그래, 내가 할 수 없는 일에 더 이상 신경쓰지 말자. 저 건 나의 일이 아니다.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가장 뒤에서 일행의 후미를 지키며 따라가는 아네모스와 알렉토는 앞에서 들려오 는 볼비의 훌쩍이는 소리와 에코의 중얼거림을 고스란히 듣고 있었다. 아네모스 는 뺨에 촉촉히 부딪쳐 오는 물방울들이 마치 눈물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에코야...... 너에게 무슨 의미를 주어야 할까? 이제 네 삶에 무슨 의미를 주어 야 다시 너로 돌아갈 수 있겠니? 다시 네가 눈부시게 웃게 하기 위해 너에게 뭐 가 필요한 거니? 네 오빠인 나는 정말 알 수가 없구나. 네게 무엇을 주어야 하는 지...... 앞으로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나는 모르겠구나.' 풍경은 점점 변해 가고 있었다. 로스코에서 벗어나 한참이 지나자 떠오른 태양에 안개가 점점 사라지고 오람으로 향하는 대로가 숲 사이로 펼쳐졌다. 대로의 주변 으로는 멀리 낮은 산등성과 거대한 산맥의 줄기가 보이고 높다란 나무들이 즐비 하게 늘어서 있어서 일행은 좁은 대형으로 가야만 했다. "무지개 구름이군." "오늘은 어제보다 더 선명한데, 봄이긴 봄인가 봐." 누군가가 파랗게 개인 하늘에 떠 있는 일곱빛깔의 구름을 향해 말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안개가 걷히면서 드러난 하늘은 맑으면서도 아름다운 빛깔로 가득차 있었다. "흔하지 않은 구름인데.... 며칠간 계속 볼지도 모르겠군. 일교차가 이런 식으로 심하면 안개도 당분간 계속될 것 같지 않은가?" 먼 하늘을 응시하던 피부가 기이할정도록 새까만 무어족 기사 가프겐이 앞에 가 는 제피로스를 향해 말했다. "크로노스 산맥을 지날 때도 안개가 오늘처럼 끼었다가는 위험할걸세. 하필이면 이럴때 죄인을 후송하게 되다니 내 운이 안좋은 모양이야." 걱정하는듯 했지만 뒷말은 농담처럼 대답한 제피로스였다. "자네 운이야, 내가 잘 알지. 별로 걱정할 일도 아니로군." 가프겐은 제피로스의 능청에 가볍게 말해 주었다. 그는 피부가 검은 색인데다가 외모까지 투박하고 험상궂어 보여서 보는 사람들이 겁을 먹을만 했다. 제피로스가 처음 무어족의 사내 가프겐을 만난건 열다섯 살때였다. 아버지 라메 즈가 떠돌이였던 가프겐을 거두어 들여 가신으로 삼았던 것인데, 그때 스물한살 이었던 가프겐은 십여년이 더 지난 지금은 제피로스의 믿을만한 친구이자 가신이 되어 있었다. 제피로스와 가프겐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때 뒤쪽에서 말을 몰아 가까이 다가와 불평스럽게 말하는 이가 있었다. "오피온님이 왜 저렇게 침울한 거야? 자네는 뭘 좀 알고 있나? 불편해서 옆에 있 을 수가 없군." 오피온과 로사리아의 호위를 맡고 있던 딘은 아무리 옆에서 말을 붙여도 침울한 표정으로 대답도 안하는 오피온 때문에 투덜거렸다. 그러나 제피로스는 콧수염을 잘 길러 다듬어 놓은 기사를 바라보며 가라앉은 눈으로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글쎄......" 제피로스는 오피온을 로스코 시내에서 발견한 이후로 계속 의기소침해 보이는 이 유를 알 수가 없었다. 지금은 깨끗하게 치료했지만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얼 굴이 엉망진창으로 파랗게 멍들어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던 오피온이었다. 알렉토라는 사내는 분명히 그 이유를 알고 있는것 같 았는데 왕자와 마찬가지로 제피로스에게는 아무 대답도 해주지 않았었다. 밤이 되어 야영지를 물색하고 자리를 잡자, 병사들이 부산하게 움직여 저녁을 준 비하고 불을 피우며 한동안 숲의 정적을 깨고 있었다. 말들은 연한 풀이 듬성듬 성 자라는 곳에 매어 두었고 군인들과 메디아 일행은 조금 떨어져서 식사를 했다. 요리가 자신의 취미라며 여행하는 동안 계속 음식을 준비하던 에코는 이제 꼼짝 도 하지 않았다. 그녀 대신 볼비가 나서 음식을 준비했지만 일행에게는 그다지 즐거운 저녁시간이 되지 못했다. 그들이 식사를 마치고 찬바람을 피해 불가에 자리를 펴고 있을때였다. 군인들 사 이에서 제피로스가 걸어오더니 알렉토에게 말을 붙였다. "벌써 잠자기엔 이른 시간인데..... 괜찮다면 내 상대가 되어 주겠소? 내 대련 상대가 새하고 노닥거리느라 나를 매정하게 쫗아버렸다오." 제피로스는 함빡 웃음을 지어보이며 뒤로 고갯짓을 해보이며 말했다. 그가 가리 킨 방향에는 검은 피부의 기사가 콧수염을 기른 기사와 함께 불가에 앉아 작은 새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다. 어색한 분위기에 불편하게 앉아있던 알렉토는 잘되었다는듯 자리를 털고 일어나 공터로 먼저 발길을 돌렸다. 두 남자가 검을 차고 공터에 이르자 관심있는 몇몇 병사들이 모여 들었다. - 계 속 - 전투신이 멀지 않았군요. ^^;;; 번 호 : 47 / 83 등록일 : 1999년 10월 31일 14:09 등록자 : CHO1971 조 회 : 1683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47.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사랑은 빗나간 화살이 되어 달의 심장을 가르고 선홍빛 눈물은 헛되이 타인의 가슴을 적시리라. 그것이 너희가 가는 길. 너희에게 주어진 삶인 동시에 너희가 선택한 운명이다. 제 47 장 흰 그림자. 하늘은 금새 어둠속에 잠겨 들었지만 주위를 밝혀주는 모닥불과 횃불 때문에 두 사람이 움직이기엔 지장이 없었다. 제피로스는 언제나 입가에 달고 다니던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공터에 이르러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진지한 표정으로 돌변했다. 사방으로 낮 은 풀들만이 자라난 작은 공터에서 알렉토와 제피로스는 서로를 주시하며 예를 갖추어 보였다. "미리 말해두지만 난 좀 거칠은 편이라오." 먼저 제피로스가 굵은 목소리로 기선을 제압하듯이 말했지만 알렉토는 그의 말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히얏-" "핫-" 이윽고 두 사람의 검이 부딪치자, 쇳덩이들이 내는 거칠은 소음과 함께 화려한 불꽃이 튀어 올랐다. 제피로스의 검은 길고 좁은 편이었으며 알렉토의 검은 제피 로스의 검에 비해 짧고 넓었지만 검을 다루는 솜씨 때문인지 두 남자에게서 검신 의 차이를 느낄 수는 없었다. 제피로스는 검을 쥔 손아귀에 전해져 오는 강렬한 느낌에 오랜만에 이기고자 하 는 투지가 솟아났다. 그가 왕의 주관하에 열리는 파라의 전통적인 토너먼트전에 서 흑기사의 칭호를 받은 것은 이년 전이었다. 그 이후로는 마땅히 그의 상대가 될만한 사람을 만나보지 못한 제피로스에게 알렉토는 좋은 호적수가 되어 주고 있었다. 몇 차례 힘겨루기와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고 나서 제피로스는 자신이 힘으로는 알렉토를 제압할 수 없음을 확연히 깨닳아야 했다. 제피로스는 자신보다도 덩치 가 더 큰 알렉토를 새삼스럽게 바라 보았다. 처음 만났을때부터 범상치 않아 보 였지만 검을 나누어 보니 그에 대한 호감이 더 증폭되는 것 같았다. 제피로스는 그의 왼쪽에서 들어오는 상대의 움직임을 간파하고 재빨리 검을 쥔 손을 옆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어느새 상대의 검은 그의 뒤편으로 움직이고 있었 다. 당황한 제피로스가 급히 발을 움직여 몸을 회전시켜서야 겨우 알렉토의 검을 막을 수 있었다. 급하게 내지른 검신이 바르르 떨리며 미끄러져 내렸다. 그와 함께 뜨겁게 달구어진 검에서 불꽃이 튀었다. 찬 바람이 풀밭을 훑고 지나갔지만 그들의 얼굴에서는 굵은 땀방울이 흘러 내렸 다. 시간이 점점 흐르자 제피로스는 알렉토의 검에 조금씩 당황하기 시작했다. '뭔가, 이 자는? 듣도 보도 못한 검술로 나를 이토록 가볍게 상대하다니....' 일반적인 기사들이 검을 다루는 방식과는 판이하게 다른 알렉토의 검술에 제피로 스는 순간순간 깜짝 놀라고는 했다. 그가 머리로 대응하는 방식으로는 알렉토의 재빠르고 기괴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검을 막아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알렉토는 십년 전에 토너먼트전에서 붉은 기사 칭호를 받았었지만 그때는 아직 어릴때였고 지금은 경험과 실전의 차이를 확연히 알고 있는 나이였다. 그래서인 지 흑기사라도 아직은 실전이 부족한 제피로스를 상대함에 있어서 어려움을 느끼 지 않았다. 그러나 제피로스도 파라 최강의 기사라는 칭호에 부끄럽지 않은 실력 자였다. 그는 상대의 예측 불가능한 검술에도 몸이 빠른 적응을 하며 반사적으로 위기를 넘기고는 했다. '이대로는 안된다. 기선을 빼앗겼다면 다시 빼앗아야 한다.' 제피로스는 큰 몸집에도 불구하고 가볍게 움직이는 알렉토를 상대하며 단 한번의 역습을 노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둘의 대련은 병사들이 손에 땀을 쥐고 보아야 할 정도로 격렬해졌다. 새 에게 먹이를 주고 있던 가프겐과 딘도 병사들 틈에 섞여 자신들의 대장과 덩치 큰 사내의 대결을 지켜보았다. 밤이 깊어가고 두 사내의 거친 숨이 목까지 차올 랐지만 승부는 쉽게 판가름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 틈에 끼어 연신 하품을 하던 마시는 슬슬 지루해 하고 있었다. '치... 뭐야? 계속 똑 같은 짓만 반복하고 아무것도 안하쟎아.' 마시의 눈에는 제피로스와 알렉토의 화려한 검술도 그저 반복되는 움직임으로 밖 에는 보이지 않았다. 마시는 결국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일어나 불가로 자리를 옮겨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알렉토와 제피로스의 대련을 처음부터 지켜보던 오피온은 두 눈을 그들에 게서 떼지 못 하고 있었다. 어느덧 알렉토의 움직임이 미세하게 둔해지자 제피로스는 그 순간을 포착해 공격 해 들어갔다. 그의 검이 알렉토의 빈틈을 무서운 속도로 찾아 들자 알렉토가 황 급히 막아갔지만 이미 제피로스의 검이 알렉토의 옆구리를 가볍게 스친 다음이었 다. "으윽." "엇..이런." 피가 배어 나오는 알렉토의 옆구리를 보고 정작 더 당황한 것은 제피로스였다. 그는 지나치게 집중하다 보니 이것이 단순한 대련이라는 것을 잠시 잊어 버렸던 것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상대를 베어 버릴뻔 했다는 것을 깨닫고 가슴이 서 늘해 졌다. "이..런...정말 미안하오. 고의가 아니었소. 내가 너무 승부욕에 차 있었나 보오." 제피로스는 정말 미안해서 어쩔줄을 몰라 했다. "괜찮소. 이런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오. 신경쓸 것 없소." 알렉토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하고 옆구리를 가볍게 눌러 보았으나 지난번 상 처가 살짝이지만 다시 벌어진것 같았다. "이봐, 대장. 어떻게 된 거지? 그렇게까지 정신을 놓다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 었던 거야?" 말할때마다 콧수염이 멋드러지게 움직이는 딘은 장난스럽게 제피로스의 어깨를 툭 쳤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도 알렉토의 검술이 만만치 않았다는 것을 느끼 고 있었기에 제피로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당신 괜찮은 거요? 지켜보니 다른 상처가 있는 것 같던데...." 작은 불빛에 더 번들거려 보이는 검은 피부의 가프겐은 미미하지만 알렉토가 제 피로스를 상대하면서 옆구리를 사리던 것을 눈치 채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알렉 토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별거 아니오. 이젠 거의 보이지도 않는 상처요." "하지만 다시 벌어졌지 않소?" 알렉토는 딘을 바라 보았다. 딘의 얼굴에는 장난끼가 가득했다. 그는 제피로스를 곤란하게 하는 것이 재밌는 모양이었다. 평소 제피로스의 장난끼에 많이 당했던 딘은 모처럼 제피로스를 놀려 먹을 기회를 잡아서인지 시종 빙글거렸다. "진심으로 미안하오." 제피로스는 딘의 장난스런 말보다 알렉토의 옆구리가 더 신경쓰였다. 이런 실수 는 그도 처음 있는 일이라 어찌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알렉토 는 제피로스에게 짧은 목례를 하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마음쓰지 마시오. 하여튼.... 고마웠소." "아니오, 덕분에 내가 더 많이 배웠소. 오늘의 결과는 내가 진거나 다름 없소이다." 제피로스는 솔직히 시인했다. 그는 상대의 약점을 공격한 자신의 행동이 부끄럽 기까지 했다. 알렉토가 걷던 걸음을 멈추었다. "오늘 나는 분명히 당신에게 진 거요. 진것은 진것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 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검을 쥔 당신이 잘 알 거요. 한 순간의 방심이 목숨을 앗 아가는 것처럼 말이오." 알렉토가 어깨를 으쓱하고 돌아서 가버리자 제피로스는 더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이보시오, 당신 상처가 나으면 또 한번 정식으로 붙어 봅시다." "당연한 말을 하는군." 알렉토가 중얼거리 듯이 대답하자 제피로스는 가프겐을 향해 기분좋게 웃어 보였 다. "좋은 친구를 얻은 것 같지 않나?" 어둠이 내려앉은 숲에서는 옅은 안개의 축축함이 느껴졌고 희미한 달빛으로 물들 은 땅바닥은 나무 그림자가 손가락을 뻗은듯 드리워져 있었다. 봄을 알리는 이름 모를 산꽃의 은은한 분홍빛 향이 퍼지는 가운데, 바람에 흔들리는 연약한 나뭇잎 의 작은 속삯임 소리조차도 선명하게 들려오는 그런 밤이었다. 창조신 가니아가 만들어낸 세상의 모든 것이 밤의 시간안에서 조용하게 휴식하고 있었다. 야영지 둘레에 서있는 보초병의 뒷모습에는 노란색 불꽃의 그림자가 너울거렸고 모닥불 주변에는 불빛을 찾아 날아온 곤충들이 작은 그림자를 만들어 내고 있었 다. 어둠속에서 삼십여 마리의 군마들이 선채 잠들은 모습은 완벽한 조각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운 선을 연상 시켰으며 가끔 꼬리를 흔들어 모여드는 곤충 을 쫓아내는 힘찬 군마의 근육들이 유연하게 움직일때마다 희미한 빛속에서 명암 이 교차하며 윤기나는 털빛이 반짝였다. 따뜻한 불가에 둥들게 모포를 펴고 일행이 잠자리에 들었을 때였다. 에코의 손가락들은 한쪽이 시퍼렇게 변해 물집이 잡혀 있었으나 그녀는 고통조차 도 느낄 수 없었다. 그녀의 왼손에는 이제 감각이라는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 던 것이다. 자신을 짓누르는 절망감에 몸을 떨던 에코는 양팔을 감싸 안으며 자 리에 누웠다. "허엇." 그러나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아야 했다. 온 몸이 얼음처럼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 "내 팔이, 내 팔이 얼음같애." 에코가 조그만 소리로 속삯이듯 중얼거리자 아네모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 게 다가갔다. 아네모스가 에코의 팔에 손을 대어 보았을 때는 그녀의 팔이 정말 얼음짱처럼 싸늘하기만 했다. 아네모스는 가슴이 내려앉는 아픔을 느끼며 그녀를 품에 안아 주었지만 정작 어떻게 해주어야 할지는 알 수가 없었다. "혈액 순환이 되지 않으니까, 당연히 차갑지." 한쪽에서 돌아누워 있던 메디아가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그러게 잘라 버리는 게 나을 거라고 했쟎아.' 하지만 그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을것 같아 메디아는 그대로 눈을 감아 버렸다. 아네모스가 에코의 모포를 포근히 감싸주며 그녀를 억지로 자리에 눕혔다. "괜찮아질 거야. 어서 자렴. 아무생각도 하지 말고 눈을 감고 자는 거야." "추워, 내 팔이 너무 차가워." "곧 따뜻해질 거야." 에코는 그 싸늘하고 섬뜻한 느낌에 몸서리가 쳐졌다. 그것은 자신의 육신이 아니 라 마치 쇳덩이를 보듬어 안는 감촉 같았다. 매끄럽고 소름끼치게 싸늘한 느낌. 그건 살아있는 몸이 아니라 죽어서 굳어버린 시체를 안고 있는 느낌이었다. 온 몸의 잔털들이 일제히 일어나며 그녀의 가슴을 차갑게 식혀 버렸다. 무감각하게 식어있는 체온을 느끼며 그녀는 자신의 육체가 가련하고 서러워지기 시작했다. 한없이 움츠러드는 몸을 가까스로 부여잡으며 에코는 소리없는 눈물이 가슴을 적 신다고 생각했다. 뜨겁게 뺨을 적시는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그녀에게는 스쳐 지 나가는 바람의 차가움만이 생생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새벽녁이 되어 갈무렵에야 잠드는 에코의 뺨에는 눈물이 하얗게 말라붙어 있었다. 그녀가 몸을 움추리고 모포를 뒤집어 쓰고 잠들자 그녀의 뺨으로 투명하고 하얀 손이 다가와 잠시 머물렀다가 떠났다. 그리고는 사물이 그대로 투영되는 흰 얼 굴이 에코의 이마에 키스를 하자 에코의 얼굴에 흰 그림자가 겹쳐졌다. 이윽고 에코의 머리 위로 흰빛이 투영되는 그림자가 떠올랐다가 사라졌지만 그 그림자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멀리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낮게 들려오고 뿌연 안개의 환영이 수면가루처럼 모 두의 머리 위로 흘러 다닐 때 모닥불은 따뜻한 온기를 만들어 내며 타들어 가고 있었다.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그렇게 밤은 조용하게 흘러갔다. - 계 속 - 또 게으름을 피웠네요...--;;;; 번 호 : 48 / 83 등록일 : 1999년 11월 03일 21:35 등록자 : CHO1971 조 회 : 1692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48.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사랑은 빗나간 화살이 되어 달의 심장을 가르고 선홍빛 눈물은 헛되이 타인의 가슴을 적시리라. 그것이 너희가 가는 길. 너희에게 주어진 삶인 동시에 너희가 선택한 운명이다. 제 48 장 침입자. 삼십여마리의 군마가 행진하는 낮은 언덕에는 오전의 안개가 걷히면서 푸른 숲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숲은 온통 끝이 보이지 않을정도로 하늘 높이 똑바로 치솟은 만다니 나무로 가득했다. 이른 봄부터 과실이 매달리는 만다니 나무는 나 뭇가지가 전혀 없이 어른 팔보다 길은 잎사귀만 줄기줄기 커다랗게 뻗어 있었고 그 사이로 초록색이나 주황색, 또는 노란색의 어린 아이 머리만한 과일을 풍성하 게 매달고 있는 나무였다. 만다니 나무의 과실은 반들반들 윤이 흘렀고 그 속은 껍질과 같은 색이며 검은 색의 작은 씨들이 박혀 있는 시큼하고 달콤한 맛이 나 는 과일이었다. 초록색에서 노란색까지 나무마다 풍성하게 매달린 만다니에서는 달콤한 과일향이 진동하고 있었다. 그 사이로 일행은 말을 몰아 가며 손에 잡히는 과일을 따서 작은 단도로 쪼개어 먹기도 했다. 말들이 지나가는 길은 만다니 나무 자체가 나뭇가지도 없이 일자로 하늘로만 쭉 뻗어 있어서 숲이라도 그늘이 지지 않고 햇볕이 그대로 내리쬐는 중이었다. 판타리아 대륙에서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길이었지만 만다니 나무 숲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만다니 나무 자체가 자생력이 강하기도 했지만 이른 봄부터 초가을까지 끊임없이 과실이 계 속 열리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무리 많은 여행자들이 만다니 과실을 축내도 또 다시 그 만큼의 과실이 열려서 숲은 망가지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다. 햇볕이 제법 뜨겁게 느껴질 무렵, 만다니 숲을 벗어난 일행이 도착한 곳은 크로 노스 산맥의 초입부에 해당하는 산줄기로 얕은 계곡물이 흘러 내려오는 곳이었다. 주변은 거칠게 모가 난 돌과 바위들이 넓게 퍼져 있고 상류쪽으로는 간간히 수풀 이 자라 있었다. 푸른 산의 경치가 한눈에 올려다 보이는 곳으로 눈부신 햇살에 흐르는 계곡물은 반짝이는 보석의 물결 같았다. 사람들이 말에서 내려 잠시 흐르 는 땀을 식히는 동안 말들은 계곡에서 내려오는 신선한 물을 마시려 하고 있었다. 메디아가 자신의 검은 말을 이끌고 물가로 갔을 때였다. 그녀의 민감한 후각에 익숙하면서도 불쾌한 향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물을 마시려는 말의 고삐 를 잡아 당겼다. "거기, 말에게 물을 못 마시게 해요." 그녀가 물속에 발을 담그고 말을 씻어 주려는 제피로스에게 소리쳤다. "왜 그러는 거요?" "물에서 썩는 냄새가 나요." 제피로스가 이마를 살짝 찡그려 보였다. 그에게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고 물은 맑고 투명해 보이기만 했던 것이다.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제피로스가 물을 첨벙거리며 메디아에게 다가왔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수신호로 병사들에게 지시한 후 그도 말을 억지로 끌어낸 다음이었다. 마시가 덜렁대며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 다리를 적시며 말과 함께 물을 퍼 마시려 고 하자 메디아가 달려가 마시를 홱 잡아당겨 끌어냈다. "너, 내가 방금 한말 못 들었어? 얌전히 기다려 좀..." "뭐야? 시원하고 좋은데..... 알았어, 치..치.." 메디아가 한번 노려보자 마시는 투덜거리며 말안장에 매달린 물통에서 물을 꺼내 마셨다. 괜히 목이 더 마른 것 같았다. 알렉토가 볼비와 함께 메디아에게 다가왔다. "물에 독이라도 퍼져 있어?" "시체 냄새가 진동하고 있어. 아주 지독할 정도로......" 제피로스가 주름살이 더 깊어지도록 이마를 찡그렸다. "시체야 어디든지 있을 수 있지 않소." 그러나 알렉토는 메디아가 더 설명해 주기를 기다렸다. 그때였다. 상류쪽 수풀을 헤치고 누군가 말을 몰아 내려오며 메디아의 말을 뒤이어 주었다. "시체가 산 같이 쌓여 있습니다. 아직 상류에서 여기까지 떠밀려 오지는 않았지 만, 이 물은 이미 오염된 거나 다름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말 위에 앉아있는 사람에게로 향했다. 눈부신 햇살이 반사되는 얕은 물 위로 말을 몰아 오는 사람은 햇살을 옆으로 등 지고 있어서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찬란하게 빛나는 초록빛의 화 려한 머리카락은 너무나도 선명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가 말에서 내려 메디아 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이제 메디아는 그의 하얀 얼굴과 깊이 있는 초록색 눈동자를 알아 볼 수 있었다. 그는 메디아가 말고삐를 잡고 있는 상태로 서 있는 동안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와 붉은 입술로 짧은 입맞춤을 했다. "메디아, 결국 다시 만났군요." 메디아가 빤히 그를 쳐다 보고 있자 그의 매혹적인 입술이 활짝 미소를 지어 보 였다. "당신이 말했었죠. 인연이 있다면 다시 만날 거라고...." 그가 싱글거리며 메디아의 앞에서 미소를 짓고 있을때 갑자기 마시가 그의 옷자 락을 확 잡아 당겼다. "떨어져!" 메디아의 바로 옆에 서 있었던 알렉토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마시에게 옷자 락이 잡혀서 뒤로 물러난 남자를 당황스럽게 쳐다 보았으나 같이 서 있던 제피로 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주 재미있어 했다. "휘이~~" 그는 낮은 휘파람소리를 내며 마시를 붙잡아 당겼다. "이보라구, 마시. 그렇게 사람을 잡아 당기면 어쩌나. 둘이 오붓한 만남을 갖게 해줘야지." 그러나 제피로스가 휘파람을 불던 말던 메디아는 제피로스에게서 마시를 낚아채 어 떼어 놓았다. "마시 곁에 가까이 가지 말라 그랬죠?" 메디아는 퉁명스럽게 제피로스에게 쏘아 붙였다. 그녀는 로스코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제피로스와 마시가 가까이 있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거...참, 아직도 그것 땜에 화를 내는 거요? 그만 잊어 주시구려. 흐음...흠... 그런데 당신은 누구요?" 메디아가 곱지 않게 노려보자 어색해진 제피로스는 괜히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옷 자락을 정리한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그 남자는 제피로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메디아를 향해 다시 양손을 내밀었다. "다시 만나서 정말 반가워요, 메디아. 당신이 너무 그리웠어요." 그는 어깨에서 신비하게 찰랑거리는 초록색의 윤기나는 머리카락과 매혹적으로 빛나는 초록의 눈동자 그리고 아름답고 창백한 피부에 붉은 입술을 가진 마력적 인 외모의 카란이었다. 항구도시 노아에서 우연히 만났다가 헤어진 에레보스 신 전의 신관이라던 바로 그 카란이었다. 카란이 진심을 담아 하는 말에도 메디아의 보라빛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 가 내미는 손을 물끄러미 쳐다 본 그녀는 그냥 그 손을 무시했고 대신 메디아의 손에 잡혀 있던 마시가 카란의 손을 탁 쳐 버렸다. 마시의 붉은 눈동자에는 경계 의 빛이 가득했다. "왜 만날때 마다 키스를 하는 거지?" "당신이 좋아요, 메디아." "알았어,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다음에 나한테 키스할때는 미리 말하고 해. 한번만 더 맘대로 내 입술에 키스하면 용서하지 않겠어. 별로 유쾌한 기분이 아 니라구, 알겠어?" "그럼, 지금 또 해도 될까요?" "저리 가! 메디아한테 그러지 말란 말야." 메디아가 딱딱하게 거절의 말을 내뱉기도 전에 마시가 팔을 뻗어 카란을 메디아 에게서 밀어 냈다. 마시의 힘센 손에 조금 더 물러선 카란은 마시를 기이한 눈빛 으로 한참을 쳐다 보았다. 그러더니 뒤로 두발짝쯤 더 떨어졌다. 무척 놀란것 같 았다. "메디아, 어째서 당신이... 이런 존재와 함께인 거죠? 아직 성년도 지나지 않은 존재가 어떻게 세상을 돌아 다니는 겁니까? 아직....성년이 지나지 않은 거죠?" 카란의 독심술 능력을 기억하며 메디아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보였을 뿐이었다. 정상적이라면 성년도 지나지 않은 새끼 드레곤이 인간과 함께 세상을 돌아다닌다 는 것은 말도 안되는 위험스런 일이었겠지만 부모나 다름이 없는 메디아와 함께 마시가 돌아다니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어차피 메디아의 능력을 생 각한다면 마시가 드레곤 부모와 함께 있는 것과 별반 다를 것도 없었다. 그리고 사실, 마시의 고집을 생각해 본다면 케드리안이 살아있지만 따라나서지 않는다고 해도 자기 혼자서 세상밖으로 나가고도 남을 일이었다. 말들을 물가에서 억지로 밀어내고 있는 병사들을 향해 지시를 내리던 딘이 오피 온과 함께 그들에게 다가왔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제피로스에게 오피온이 물어오자 제피로스는 카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지 자세히 말해 주시겠소?" "상류에 무슨 일이 있는 건지 말해 봐. 냄새로 봐서는 심각한 것 같은데...." 메디아가 보태어 물어보자 밝았던 카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저도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단지 상류에서 백여명에 이르는 시체들을 발견했 을 뿐입니다." "맙소사. 백여명이라구?" 딘이 신음소리를 내며 소리쳤다. "네. 백여명은 족히 되고도 남아 보였습니다." "물에 독을 풀은 건가?" "절대 독은 아닙니다. 모두 무기에 의해 죽었고 간간히 마법에 의해 죽은 자들이 눈에 띄더군요." 카란은 독에 대한 상당한 지식이 있었고 독에 관한 것은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 였다. 그가 상류에서 발견한 시체들은 부패한 것도 있었지만 독에 당한 것은 아 니였다. "모두 크로노스 산 위에서 당한 시체들 같았습니다. 그리고....." "뭐지, 카란?" "제 생각으로는 지금 이 지역 전체에서 뭔가 일어 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이곳에 도착해서 상류를 조사하고 다닌지 벌써 여러날이 되었는데.... 이상하게 도 반대편에서 건너오는 사람들이 한 사람도 없더군요." 진지하게 듣고 있던 알렉토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산 반대편에서 한 사람도 오지 않았다는 이야기 입니까? 여기는 하 루에도 대상인들이 수십명씩 이끌고 지나다니는 곳인데?" "그게 이상합니다. 사실 로스코에서 이곳을 지나간 사람들은 몇 번 보았는데.... 산을 넘어 오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보지 못 했습니다. 거기다가..." 카란이 잠시 말을 멈추자 제피로스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또 뭡니까?" "거기다가.... 이곳을 지나가고 나서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시체로 떠내려 온 사 람도 보았습니다. 저 위에.... 무언가 침입자가 있는 것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카란은 계곡 너머로 펼쳐진 거대한 산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모두가 불길하게 버티고 선 산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치 그곳에서 소리없는 비명이 들려오는 듯 했다. - 계 속 - 번 호 : 49 / 83 등록일 : 1999년 11월 07일 20:05 등록자 : CHO1971 조 회 : 1627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49.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사랑은 빗나간 화살이 되어 달의 심장을 가르고 선홍빛 눈물은 헛되이 타인의 가슴을 적시리라. 그것이 너희가 가는 길. 너희에게 주어진 삶인 동시에 너희가 선택한 운명이다. 제 49 장 빨강머리. 시선이 닿는 곳, 어디를 둘러 보나 주위는 온통 산의 물결이였다. 산과 산의 능선이 끝없이 펼쳐진 곳. 그 거대한 규모와 장대함은 한낱 인간의 초람함을 느끼게 하고도 남았다. 주위 를 굴러다니는 돌만큼이나 작은 존재의 가벼움이 인간의 마음을 겸손하게 만들 었다. 일행의 말굽이 지나가는 계곡 사이로 바람과 바람이 만나 다시 흩어지면서 깊은 골짜기를 휘돌아 가는 소리가 절벽 위의 나뭇가지를 음산하게 흔들고 있었다. 하늘을 향해 힘차게 뻗어 나간 나무의 어두운 그늘에서는 축축한 흙내음과 잡초 향이 어우러져 특유의 산냄새가 가득했고 햇볕이 거미줄처럼 스며드는 공간에서 는 이름모를 산새들이 시끄러울 정도로 지저귀고 있었지만 산은 고요한 듯 자연 스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무슨 일인지 조사해 볼 필요가 있지 않습니까?" 계곡상류에 버려져 있는 수 많은 시신을 확인하고 수습한 뒤에 길을 떠나는 일행 의 마음은 불안한 중에도 깊은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오피온님. 아시다시피 죄인을 하루빨리 왕성으로 후송해야만 합니다. 안타깝지만 이 사건은 크로노스 산맥을 벗어난 후에 베르담 소속의 병사들에게 맡겨야 할 것 같습니다. 누가 그토록 잔인한 짓을 했는지는 몰라도 지금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 같군요." 베르담은 크로노스 산맥의 아래에 위치하는 도시로 그곳도 로스코와 마찬가지로 무역으로 번성한 도시였다. 수도 오람과 가까워서 여러가지 면으로 부유한 도시 였다. "하지만 베르담 영주가 직접 조사하려고 하지는 않을텐데....." 왕자의 옆에서 딘이 끼어들었다. "내가 알기로 베르담 영주는 상업에만 관심이 있는 인물이거든. 아마도 로스코로 이 일을 떠 넘길 가망성이 높지 않겠나?" "베르담 영주도 이번 일은 피해갈 수 없을걸세. 위치상으로 로스코가 더 가까워 도 우리가 지금 뒤로 길을 돌릴 수는 없으니까." "제 생각으로는 베르담에 도착하기 전에 이 일의 원인을 알게 될 것 같은데요." 갑자기 대화에 끼어드는 카란의 목소리에 오피온이 제일 먼저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뒤쪽에서 메디아와 함께 말을 몰고 있는 아름다운 신관의 모습에 오피온 은 괜히 얼굴이 붉어지는 느낌이었다. "무슨 말이요?"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겠지만 이 산을 무사히 넘어갈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최근 며칠 간 산을 넘어 온 자가 없는 것처럼, 산을 넘어 간 자도 없 을 거라는 말입니다." 카란의 말에 오피온의 옆에서 얌전히 있던 로사리아가 끼어 들었다. "어머, 그럼 우리도 위험할 거란 말이예요?" 로사리아는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카란을 뚫어지게 쳐다 보며 짐짓 겁먹은 것처 럼 말했다. 그녀는 신비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카란을 거의 정신을 빼놓고 쳐다 보다가 간간히 화들짝 놀라고는 했었다. "로사리아님,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저희가 있는데 위험할리가 없지 않습니까?" 딘이 붉은 머리의 로사리아를 향해 조금은 으시대며 말하자 제피로스가 쿠쿡 거 렸다. "걱정은 안하셔도 되겠는 걸요. 딘이 공주님을 아주 잘 지켜 드릴 겁니다." "그럼, 제피로스 경은 구경만 할 거란 뜻인가요?" 로사리아는 언제 겁을 집어먹었냐는 듯이 제피로스에게 맞장구를 치며 농담을 했 다. "아이쿠, 무슨 말씀을.... 저도 목숨을 다해 공주님을 지켜드리지요." "호호호.... 그럼 전 경만 믿으면 되겠군요." 로사리아는 대답은 제피로스에게 하면서도 흰 손으로 우아하게 입을 가리며 슬쩍 카란을 향해 웃어 보였다. 맑게 울려퍼지는 그녀의 웃음소리에 사람들의 불안감도 잠시 잊어 지는 듯 했다. 일행은 길에 따라 대형을 바꿔가며 점점 높이 솟은 산줄기 사이를 돌아 가고 있 었다. 하늘은 찬란할 정도로 푸르게 빛나고 있었고 그 아래 펼쳐진 크로노스 산 맥은 녹색의 산새를 마음껏 자랑하고 있었다. "이번 길은 정말 변수가 많은 것 같군." 제피로스의 중얼거림에 가프겐이 걱정스럽게 맞장구쳤다. "신관의 말대로 예감이 안좋네. 누가 그토록 잔인하게 여행자들을 살해 한 걸까? 자네는 짐작되는 게 없나?" "별로." "그렇게 태평하게 말하지 말고 뭔가 신중하게 대답 좀 해보게. 내가 보기엔 조직 적으로 훈련받은 자들에게 당한 것 같단 말이네. 더구나 그 마법에 당한 흔적도 보통 수준이 아니쟎은가, 제피로스." "날이 저물기 전에 크로노스 성에 도착할 수 있을걸세. 거기 가면 뭔가 더 알 수 있겠지. 그때까지는 이것저것 추측해 보았자 소용이 없다네, 가프겐. 안달하지 말고 조용히 좀 가세나." 크로노스 성은 산 속에 지어진 돌성곽으로 사람이 주거하지는 않지만 여행자들이 항시 끊이지 곳으로 큰 규모의 여행자 숙소나 다름이 없었다. 옛날에는 크로노 스 산맥 전반에 걸쳐 들끓던 오크떼로 부터 여행자들을 보호하는 구실을 하기도 했었지만 현재는 군대에 의해 오크가 모두 소탕된 상태여서 여행자들의 잠자리를 해결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에 불과한 곳이었다. 이제는 뒤쳐져서 카란의 옆에 달라 붙다시피한 공주 로사리아를 뒤돌아 보며 제 피로스는 표정을 가볍게 찌푸렸다. "그나저나 저 신관이라는 자는 남자인지 의심스럽군. 아까운 외모란 말이야." 날아가는 작은 새를 불러 손가락 위에 올려 놓은 가프겐이 검은 얼굴에 작은 미 소를 떠올렸다. "자네는 또 여자 생각인가? 진짜 못 말리는 친구라니까." "그러는 자네는 세상에 여자보다 더 대단한 존재가 없다는 걸 언제쯤 깨달으려 나? 이제는 결혼할 나이도 훨씬 지났지 않은가." 제피로스가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하며 물어보자 가프겐은 괜히 헛기침을 해댔다. 그 바람에 손가락에 앉아 있던 새가 후드득 날아가 버렸다. "흠...흠..." "새들에게 주는 관심을 조금만 여성들에게 돌려보게. 어울리지도 않게 매일 조그 만 새들에 둘러싸인 자네를 보는 것도 아주 지겹다구. 그 덩치에 새라니...." "내 새들이 자네에게 무슨 일을 했다고 타박인가?" 태어날 때부터 새와 가까이 지냈던 가프겐은 유난히 새를 사랑했기에 누가 그것 에 대해 말하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참, 알았네, 알았어. 자네 새들을 구박한 게 아니라구, 가프겐. 얼굴 좀 피게나. 험상궂은 얼굴이 더 쭈그러 들겠군." "제피로스." "하하하.." 제피로스와 가프겐이 한가하게 말을 주고 받는 사이 메디아 주위에서는 때아닌 실갱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만 떨어지라니까, 왜 자꾸 이쪽으로 오는 거야? 저리 가." 마시가 카란과 메디아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며 카란을 밀어내자 이번에는 로사리 아가 카란의 옆으로 들어서며 마시에게 야단을 쳤다. "어머머, 왜 사람을 미는 거지? 그런 예의없는 행동을 하다니 버릇이 없구나." "뭐? 나한테 하는 소리야?" "그럼, 너 아니면 누구한테 하는 소리겠니?" "저게-." "뭐라구? '저게?'라구 했어? 감히 누구한테 하는 소리야. 너 내가 누군지 알고 그러는 거냐?" "누구긴 누구야. 빨강머리 계집애지." "뭐...뭐..뭐라구? 저..저런..." 로사리아가 말문이 막혀 더듬대는 사이 오피온과 딘도 마시의 안하무인격인 행동 에 잠시 주춤하고 있었다. '세상에... 빨강머리 계집애라니...' 오피온도 로사리아와 마찬가지로 말문이 막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 다. 더구나 로스코에서 마시가 어떤 모습이였는지 떠올리자 더욱 난감한 기분이 었다. 메디아라는 여자한테 죽도록 얻어 터지며 울음을 펑펑 떠뜨리던 마시가 언 제 그랬냐 싶게 불덩이를 사방으로 집어 던져서 순식간에 여관하나를 풍지박산을 내놓았던 것을 똑똑히 목격한 오피온으로서는 마시가 정신나간 마법사쯤으로 생 각되었다. "무엄하다. 감히 뭐라고 떠드는 거냐?" 딘이 콧수염까지 부르르 떨며 분개했지만 마시는 뉘집 개가 짖느냐는 듯이 그를 쳐다 보지도 않았다. "빨강머리한테 빨강머리라고 했는데 뭐가 잘 못 됐어?" "너....너.."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로사리아가 여전히 삿대질을 하며 말을 못 잇고 있는데 마 시는 천연덕스럽게 지껄이기 시작했다. "어...너 혹시 그럼? 계집애가 아닌 거야? 그랬구나. 그래서 그렇게 화를 벌컥 내는 거구나. 알았어, 빨강머리. 앞으로는 계집애라고 안 그럴께. 사내 놈이 별 것도 아닌 거 가지고 화를 내네." "꺄아악~~~~ 너!" 결국 분에 못 이긴 로사리아는 소리를 질러대며 마시에게 달려들고 말았다. - 계 속 - 번 호 : 50 / 83 등록일 : 1999년 11월 10일 22:48 등록자 : CHO1971 조 회 : 1732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50.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사랑은 빗나간 화살이 되어 달의 심장을 가르고 선홍빛 눈물은 헛되이 타인의 가슴을 적시리라. 그것이 너희가 가는 길. 너희에게 주어진 삶인 동시에 너희가 선택한 운명이다. 제 50 장 정체가 뭐지? 몹시 흥분한 나머지 무작정 마시에게 몸을 던진 로사리아는 자신이 흔들리는 말 위에 있다는 것을 뒤늦께 깨달았다. 그녀가 몸을 옆으로 돌려 힘껏 마시의 팔뚝 에 손을 대는 순간 그녀의 몸은 중심을 잃었고 갑자기 바닥으로 몸이 쏠려 당황 한 로사리아는 마시를 향해 손을 버둥거리며 그를 더 꽉 붙잡았지만 급기야는 마 시와 함께 말위에서 사정없이 굴러 떨어지고야 말았다. "어어...어..아앗.." 다른 사람들이 미처 도와 줄 사이도 없이 그녀와 마시는 땅바닥에 비명을 지르며 떨어져 내렸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이 떨어진 자리는 모난 돌들이 수북히 굴러다 니는 곳이어서 로사리아와 마시가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꺄아악..아악.." "로사리아!" 깜짝 놀란 오피온이 말위에서 훌쩍 뛰어 내리며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그 보다 먼저 로사리아에게 달려간 딘은 마시와 뒤엉켜 있는 로사리아를 부축하려고 했지 만 비명소리에 놀란 말의 뒷발굽에 어깨를 채여서 저만치 날아가고 말았다. "아악.." 딘의 고통스런 비명소리까지 합세하자 앞에서 길을 가던 제피로스와 가프겐까지 달려왔다. 발길질을 하며 도망가려는 말들의 고삐를 힘겹게 잡은 알렉토가 말을 진정시키는 동안 가프겐이 기절한 딘의 뺨을 두드리며 괜찮은지 확인하고 있었다. 한편 로사리아와 마시는 서로가 뒤엉켜서 헤어나오지도 못한채 '끙끙' 거리기만 했다. 로사리아는 마시의 한쪽 다리에 깔려 정신을 못 차렸고 마시는 로사리의 엉덩이에 다른 다리를 끼워 넣은 채 낑낑 거렸다. 제피로스가 조심스럽게 마시의 다리에서 로사리아를 꺼내려 하자 로사리아는 낮 은 비명소리를 질러댔다. 그녀의 등쪽으로 날카롭고 작은 돌들이 수북했던 것이 다. 다행히 망토가 몸을 보호해 주어서 심한 상처가 나지는 않았지만 등에 멍이 들었을 것은 안봐도 뻔했다. "아아야..."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마시는 등과 머리쪽에 오는 뻐근한 진통에 신음소리를 내 며 투덜거렸다. "이씨... 아퍼." 카란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지켜보다가 공주에게 다가가 등쪽에 손을 대어 고 통을 덜어 주었다. 그의 손에서 희미한 빛이 잠시 어른거렸다가 사라지자 로사리 아는 한결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공주의 상태를 확인한 카란이 마시에게 눈을 돌리자 마시는 투덜투덜 거리면서도 바닥에서 손을 집고 일어나고 있었다. 그의 검은 머리에는 흙이 잔뜩 묻었고 작은 돌조각까지 달라 붙어 있었지만 다행히 다 치거나 상처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뭐야. 너-" 마시가 바짝 성이 난 음성으로 소리치자 로사리아도 정신을 차렸는지 제피로스의 손에서 빠져 나와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금새 신음소리를 내질렀지만 로사리아 는 어깨와 몸을 관통하는 뻐근함을 무시하고 마시를 향해 손가락을 들어 소리치 기 시작했다. "이 무뢰한 놈. 감히 나한테....." 로사리아가 마시에게 옷을 펄럭거리며 다가가 손가락으로 마시의 가슴을 쿡쿡 찌 르자 마시가 손을 들어 로사리아의 어깨를 떠다 밀어 버렸다. 그녀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양손을 바둥거렸지만 결국은 힘센 마시의 손에 떠밀려 돌바닥에 엉덩이 를 부딪히며 넘어지고 말았다. "꺄악.." 이쯤되자 제피로스가 엄격한 얼굴이 되더니 마시의 복부를 향해 험악한 주먹을 내질렀다. "허억.." "무뢰한 짓은 여기까지다. 다시는 공주님께 대들지 마라." 복부에 상당한 타격을 받은 마시는 휘청이며 쓰러졌지만 금방 일어나 제피로스에 게 달려 들어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돌진해 들어 오는 마시를 보며 어느정 도 대비하고 있던 제피로스는 마시의 엄청난 힘에 내심 당황했고 사람들은 둘의 드잡이질에 정신이 없었다. 엎치락 뒤치락 바닥을 뒹굴며 주먹질을 하던 제피로 스가 싸움경험이 더 많아서인지 마시를 더 많이 쥐어 박았고 마시의 손목을 가까 스로 붙잡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러나 마시의 힘이 워낙에 센지라 제피로스도 애를 먹어야 했다. 그가 마시를 힘겹게 뒤에서 끌어 안고 있는데 로사리아가 다 가와 마시의 뺨을 후려 치려고 했다. 하지만 로사리아는 마시의 뺨을 치지 못하 고 옆으로 내팽개쳐졌다. 그녀의 입에서 다시 한번 비명이 터져 나왔다. "무뢰한 짓은 여기까지." 메디아가 제피로스의 말을 그대로 흉내내어 내뱉었다. 그녀는 마시를 억지로 끌 어 안아 결박하고 있는 제피로스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내가 몇번을 말해야 하죠? 마시 곁에 가까이 가지 말라고." 그녀의 보라빛 눈은 얼음에 빛깔을 새겨 넣은 것처럼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제피로스는 천천히 마시를 자신의 품에서 풀어 주었다. 마시는 결박에서 풀리자 식식 거렸지만 메디아가 앞에서 지켜 보고 있어서인지 더 이상 흥분하지는 않았 다. "공주님께 무슨 짓이오?" "미리 말해 두죠. 그녀가 공주이던 왕자이던 나하고는 상관이 없다는 점, 마찬가 지로 마시하고도 상관이 없어요. 우리를 먼저 건들지만 않는다면 나도 조용히 지 내 주겠어요." 제피로스의 얼굴이 궂어지며 심각하게 변했다. "그건 왕권에 대한 도전이요. 반역자가 되고 싶소?" "난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고 더구나 파라의 백성도 아니죠. 그러니 그 깐일로 반역이라고 말할 수 없겠지요." 메디아의 아버지는 라비론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파라 사람이었지만 판타리아 대 륙의 북서쪽에 위치한 라비론에서 태어난 그녀는 여덟살 이후로는 어느 국가에도 포함되지 않는 코카서스 화산에서 쭉 살았기 때문에 국적이 어디라고 꼭 꼬집어 말 할 수 없었다. 언밀히 말하자면 그녀에게 국적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던 것 이다. "어쨌든 왕족에 대한 예의를 제대로 지켜주지 않는다면 그대는 반역의 무리와 다 를바가 없소." 둘의 대화가 점점 심각하게 나가자 주의사람들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병사들도 은근히 메디아 일행을 견제했고 가프겐은 검에 손을 올려 놓았다. 알렉토는 미묘 한 상황에 어느 편도 들지 못했지만 아네모스와 볼비의 곁으로 다가가 검을 잡았 다. 오피온이 로사리아를 일으키며 메디아를 못 마땅하게 바라 보았다.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지만 아무도 움직이는 자는 없었다. "훗." 메디아가 잠시 코웃음을 쳤다. "뭐가 우습소?" 알렉토의 물음에 오피온의 짙은 검은 머리와 황금빛 눈동자를 잠시 쳐다 본 메디 아가 대답했다. "여기, 당신의 국왕이자 저 아이의 아버지인 히페리온이 내 앞에 있었어도 당신 처럼 오만하게 나에게 대들지는 못 했을 거야." 그녀의 대답 한마디가 모두를 충격속에 몰아 넣었다. "뭐라구?" 제피로스가 어이없이 물어보는 사이, 메디아의 그 도전적이고 오만한 태도에 분 노를 느낀 몇몇이 병장기를 들고 한발 다가섰다. "그리고 케이론이 이 사실을 알아도 좋아하지는 않을 걸. 당신도 케이론이 누구 인지는 알겠지? 케이론은 마시가 누구한테 얻어 맞았다는 걸 알면 꽤 불쾌해 할 거야. 그가 왕족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케이론이라구?' 잠시 메디아의 입에서 흘러 나온 이름이 누군지 생각하던 제피로스는 그가 알고 있는 케이론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설마...' 케이론은 현왕 히페리온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자로 가니아 신전의 대신관이 자 예언자였다. 그의 말 한마디에 국왕이 바뀔 수도 있는 문제였지만 케이론은 권력이나 재력에 관심이 없었고 국사에 많이 참여하지도 않는 인물이었다. 케이 론은 현왕 히페리온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왕의 조언자였고 나라의 예언자로서 자 리하고 있었으며 제피로스의 아버지이자 세력가인 라메즈조차도 그 앞에서는 함 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 제피로스의 갈색 눈이 가늘어 지며 의심스럽게 물었다. "너희들... 정체가 뭐지?" 메디아는 제피로스의 질문을 무시하고 마시의 손을 잡아서 말쪽으로 이끌며 말했 다. "이 아이는 앞으로 건들지마. 나도 얘가 발광하기 시작하면 책임질 수 없으니까. 그리고 참고로 말해 두는데.... 케이론은 이 애를 끔찍히 아끼니까 다치지 않게 하는 게 좋을 거야. 당신도 그와 문제가 생기는 걸 바라지는 않겠지? 물론 왕도 그와 다투는 건 싫어 할테니까. 내가 알기로는 케이론이 왕의 곁에 남아있는 건 순전히 예의가 바르기 때문이거든." 더 더욱 알 수 없는 소리만 지껄이던 메디아는 제피로스가 미궁속에서 헤메던 말 던 신경도 쓰지 않고 마시를 말에 타게 했다. "메디아, 케이론이 누군데 날 아껴?" 마시가 어리둥절해서 물어보자 듣고 있던 제피로스는 더 머리가 복잡한 느낌이였 다. "네 친척이라고 해두자." "친척?" "...." "나 한테 그런 것도 있어?" 그녀는 더 이상 케이론에 대해 말하기 싫은지 마시를 타일렀다. "마시, 저런 인간 여자 아이랑 드잡이질 하는 게 넌 창피하지도 않니? 앞으로는 상대하지 말고 무시해 버려. 알겠어?" 메디아는 오피온의 팔에 매달려 있는 로사리아를 시선으로 가르키며 말했다. "저게 먼저 날 건드리쟎아." 마시가 짜증스럽게 투덜거리자 메디아가 마시의 귀를 가볍게 잡아 당겼다. "상대하지 말라면 말아. 먹을 때 건드린 것도 아닌데 왜 그러니, 명색이 있지 어 떻게 저런 애랑 싸울 생각을 하는 거야." "쳇. 알았어. 알았다구. 저까짓 거 상대 안하면 그만이지." 둘의 대화를 고스란히 듣고 있던 로사리아가 분에 겨운듯 소리를 질러대며 부들 부들 떨었지만 메디아와 마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한쪽에 서있던 제피로스도 있는대로 인상을 구겼지만 그는 메디아가 대신관 케이 론을 들먹거리지 않았어도 그녀와 마시의 능력을 볼때 자신이 그들을 제압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러웠다. 이때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던 카란이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제피로스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뭐라고 속닥여 주자 제피로스의 얼굴이 더 심하게 구겨졌다. "우라질..." 제피로스는 나직하게 욕설을 중얼거리며 자신의 말로 돌아 갈 수 밖에 없었다. 발악발악 소리를 지르며 마시를 못 잡아 먹어 기를 쓰던 로사리아도 카란이 다가 가 달래자 조용하게 수그러 들었다. 그녀는 흐트러진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웠는 지 얼굴을 붉히며 카란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조심스럽게 말에 올라탔지만 마 시를 노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뭐라고 했어?" 카란이 제피로스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궁금해진 메디아가 물었다.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줬어요." 오히려 의아해진 메디아가 되물었다. "내가 누군데?" 순간 카란의 초록색 눈동자에 푸른 하늘이 반사되며 반짝 거렸다. "국왕이 기다리는 손님이요." "또 내 생각을 읽었군." 메디아가 가볍게 이마를 찌푸려 보였다. 그녀는 국왕 히페리온의 외모를 빼다 박 은 듯이 닮은 오피온을 바라보며 잠시 옛날 생각을 떠올렸었다. "아주 오래 전 일 같던데요? 얘기해 줄 수 있어요?" 그건 사십년도 더 지난 일이었다. 메디아가 여행하는 동안 대신관 케이론을 만나 기 위해 오람에 갔을 때였다. - 계 속 - 번 호 : 51 / 83 등록일 : 1999년 11월 14일 18:28 등록자 : CHO1971 조 회 : 1608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51.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사랑은 빗나간 화살이 되어 달의 심장을 가르고 선홍빛 눈물은 헛되이 타인의 가슴을 적시리라. 그것이 너희가 가는 길. 너희에게 주어진 삶인 동시에 너희가 선택한 운명이다. 제 51 장 케이론과 어린 국왕. 코카서스 화산에서 조용한 겨울을 보내고 있던 메디아에게 한마리의 마조가 날아 든 것은 12월이 거의 끝나 갈무렵이었는데 메디아의 나이도 이제 예순이 훨씬 넘었을 때였다. 마조는 흔히 마법사들이 소식을 주고 받을때 사용하는 것으로 일 시적으로 생존했다가 상대방이 소식을 받으면 사라지는 새였다. 마조가 도착하고 며칠이 지난 후 메디아는 파라의 수도 오람으로의 길을 떠났다. "꽤 추웠을텐데 이런 날씨에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온 거지? 네 빗자루가 용케 얼 어 붙지는 않은 모양이구나." 열린 창으로 갑자기 빗자루를 타고 날아 들어온 여인의 등장이 전혀 놀랍지 않은 지 침착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인의 뒤로 커다란 창이 열려 있었고 그 창 밖으로는 함박눈이 흠뻑 내리며 대지를 감싸고 있었다. 드넓은 대지의 지평선 끝 에서부터 모든 땅 위의 것들이 온통 흰빛으로 가득한 날이었다. 멀리 낮은 산의 능선을 따라 하얗게 물들어 가는 아름답게 펼쳐진 13월의 풍경은 보는 이의 시선 에 맑게 투영되고 있었다. 밖은 매서운 겨울 바람과 내리는 눈으로 매우 싸늘했지만 넓은 실내의 한쪽 구석 에 자리 잡은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장작의 따뜻한 온기로 실내는 편안한 분위기 를 풍기고 있었다. 내부는 무척 넓은 방이었지만 몇 개의 의자와 작은 탁자 하나 가 놓여 있을뿐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이나 다름이 없어서 그 흔한 책한권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한 방이었다. 창을 등 지고 선 여인의 맞은 편에는 하얀 수염을 가슴까지 늘어뜨린 한 노인이 찻잔이 놓인 자그마한 탁자 앞에 편안하게 앉아서 담배를 태우고 있었는데 그의 얼굴에 퍼져 있는 표정이나 자연스런 주름이 다른 이로 하여금 현명한 노인이라 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해 보였다. "빗자루가 물도 아닌데 이 정도 날씨에 얼어 붙겠어요, 케이론." 망토에 촉촉하게 달라붙어 있는 흰눈을 대충 털어내며 메디아가 퉁명스레 대꾸했 다. "그야 그렇겠지만 메디아 네 녀석이 빗자루를 얼리고도 남을 만큼 차가운 놈이라 서 하는 말이다." 케이론은 말을 하면서도 담배 연기가 공중으로 흩어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안 본 사이 실없는 소리만 늘으셨나 보군요. 그런데 시투니아산 담배를 아직도 선호하시나 보네요." 시투니아산 담배는 시큼털털한 맛이 강해서 메디아가 매우 싫어하는 것이었만 케 이론음 매우 즐겨 피우는 담배였다. "그러는 너는 여전히 건방지구나, 메디아." "새삼스럽게 왜 그러세요. 십년만에 만나는데 심사가 뒤틀리시나 보죠?" 적당히 미소짓고 있던 케이론의 얼굴에 언쨚은 빛이 살짝 감돌며 앉아 있던 의자 에서 담배불을 끄고 천천히 일어났다. "네가 찾아오면 언제나 심사가 뒤틀리는구나. 그래, 이번엔 무슨 일로 날 찾아왔 지?" "여전하신 건 당신인 것 같군요, 케이론. 꼭 오라고 사정한 사람이 누군데 이제 와서 동문서답이세요?" 투명스런 메디아의 대꾸에 케이론은 할말이 없다는 듯이 마시의 안부를 물었다. "흠. 그래, 마시는 잘 있냐? 그 녀석이 잘 지내는지 궁금하구나." "잘 먹고 잘 자고 있으니 걱정마세요. 그것 때문에 절 부르신 건 아니겠죠?" "괘씸한 놈. 너의 그 버릇장머리는 언제쯤 고칠거냐? 나이도 먹을만큼 먹은 놈이 왜 아직까지 그 모양이야."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어도 케이론 당신을 따라 가겠어요?" "어린 녀석이 한마디도 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부터가 넌 마음에 안들어." "어련하시겠어요." 한동안 아옹다옹 말을 주고 받던 메디아가 방을 가로질러 걸어가 의자에 기대 앉 으며 물었다. "그나저나 왜 아직도 여기 계신 거예요? 지난 번에 만났을 때 그러셨쟎아요. 국 왕이 죽으면 대신관이고 뭐고 여기를 떠날 거라고요." 메디아가 말하는 지난 번이란 십 년전을 말하는 거였다. 그 당시 국왕은 현 국왕 히페리온의 부친이자 케이론이 보호를 약속했던 마리오스 였는데 바로 2년 전에 병사하고 유일한 아들 히페리온이 왕위를 계승했던 것이다. "나도 그럴려고 했지. 그런데 저 녀석이 꽤 예의가 바르더라구." 케이론은 창쪽으로 걸어가 창아래의 공터에서 눈이 내리는데도 기사들과 열심히 검술을 겨루고 있는 검은 머리의 소년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 새로 국왕이 된 저 애송이가 단지 예의가 바르기 때문에 여기 남는다는 게 핑계가 되요? 솔직히 말하시죠. 여기서 놀고 먹는 게 아주 편하시다구." "넌 내일에 왠 잔소리가 그렇게 심하냐, 메디아." "그렇게 인간들 틈에 섞여 나올 생각을 안하니까 케드리안한테 채인 거예요." 메디아가 케이론의 아픈 데를 찌르자 그의 얼굴에 남아있던 장난끼가 완전히 사 라져 버리며 어두운 빛으로 바뀌었다. 그에게 혼 케드리안은 아주 소중한 추억이 자 아픈 기억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 쓸데없는 이야기는 이쯤 하도록 하자. 널 부른데는 이유가 있어서니까." 그는 이제야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말씀하세요." "마시를 내게 맡기지 않겠느냐?" "무슨 말씀이죠?" 메디아의 목소리가 칼날처럼 날카롭게 나왔다. "그렇게 신경 곤두 세우지 말아라. 아무래도 머지않아 네게 중요한 일이 생길 것 같아서 하는 이야기이니까." "그렇게 핑계거리가 없으신가요? 아무리 당신이 케드리안을 사랑했고 마시를 특 별히 생각한다는 것을 잘 알지만 어디까지나 마시는 나의 책임하에 있고 앞으로 도 나의 보호하에 있을 겁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시는 건지는 몰라도 방 금 들은 말은 못 들은 걸로 하겠어요. 그것 때문에 날 부른거라면 쓸데없는 일을 하셨네요." 케이론은 무언가 더 말할 듯 하다가 메디아의 단호한 태도에 입을 다물어 버렸다. 단지 조심스럽게 더붙였을 뿐이다. "그렇게 말한다면 나도 할말이 없구나. 혼 케드리안이 너에게 위임한 일이니까. 하지만 메디아, 앞으로 조심하거라. 너도 알지 못 했던 운명이 언젠가 너를 집어 삼키게 될 거다. 그것이 언제 닥칠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결코 너를 피해가지 는 않을 것이란다." "피해가는 것이라면 애초에 운명이라 말할 수도 없지 않나요?" 메디아는 케이론의 예언을 덤덤하게 받아들이며 평소와 같은 무심함으로 대답했 다. "그래, 그렇지." "......" 그들의 대화가 그렇게 소강상태에 접어들 무렵 방문 밖에서 요란스럽게 뛰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힘차게 열리는 문과 함께 세찬 바람이 창과 열 린 문 사이를 통과했다. 활기찬 발걸음으로 케이론에게 걸어 온 고양이 같은 눈 의 소년은 케이론이 메디아와 함께 있는 모습에 잠시 멈칫했다. "케이론, 케이론 ... 엇?... 손님이 계셨군요." "예, 폐하. 무슨 일로 그리 급하게 뛰어 오셨는지요?" "아... 별건 아니고..." 케이론에게 폐하라 불리운 소년은 이미 붉게 상기된 얼굴이 더 붉어지는 듯 했 다. 그 동안 힘겹게만 느껴지던 기사 하나를 승복시킨 그는 그것을 자랑하기 위 해 달렸왔는데 생각 밖으로 젊은 여자가 케이론과 함께 있자 부끄러운 생각이 들 었던 것이다. 케이론은 히페리온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선왕 마리오스의 신하이자 동료였던 인물이었고 선왕이 죽은 지금에는 히페리온이 아버지처럼 생각하는 사 람이었다. "저... 그런데 누구입니까? 오늘 방문객이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 했는데...." 메디아는 문지기나 수비병을 통과하지 않고 곧장 빗자루를 탄채 성문을 넘었기 때문에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궁에서 알고 있을리가 없었다. 케이론이 머물 고 있는 이곳은 궁성의 열한개의 탑중 외각 북쪽으로 치우쳐 있는 탑으로 넓은 공터와 작은 숲을 끼고 있어서 조용하면서도 운치가 있는 곳이었다. 9층에 이르 는 내성을 둘러싸는 여섯개의 탑과 탑 사이가 연무장과 숲이 들어 설정도로 넓었 기 때문에 케이론이 겨울동안 잠시 거처로 삼고 있는 이탑도 궁성과 연결되어 있 어지만 한적하게 느껴졌다. "메디아라고 합니다. 내 손님이니 크게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폐하." 케이론은 국왕에게 폐하라고 존칭을 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왕 앞에서 절대로 낮 추어 부르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누구도 그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가 선왕조차 깍듯이 예의를 갖추어 대했던 신하였으며 가니아 신전의 대신관이 었기 때문이었다. 메디아는 케이론이 자신을 소개하자 왕이 자신을 바라보며 예를 갖추기를 기다린 다는 것도 전혀 모른다는 듯이 의자에 그대로 앉은 채 있었다. 그것도 히페리온을 빤히 쳐다 보면서...... 히페리온은 한참을 기다리는데도 상대가 전혀 반응이 없자 처음에는 당황스러웠 지만 슬며시 화가 치밀어 올라왔다. 분명히 케이론이 자신을 향해 '폐하'라고 칭 하는 것을 들었을텐데도 꼼짝도 하지 않는 메디아가 아주 못마땅 했다. 당연히 자리에서 일어나 왕을 배알하는 예를 취해야 함에도 그녀는 그럴 기미조차 보이 지 않았다. '내가 어리다고 허술히 보는 건가?' 짙은 검은 머리에 고양이 같은 황금빛 눈동자를 가진 히페리온은 선왕 마리오스 가 죽고 열다섯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기에 초기에는 대신들로부터 제대로 된 대접을 못 받기도 했었다. 그러나 충신들의 정성어린 보필과 히페리온의 노력 으로 지금은 어느정도 정상을 찾아가고 있었다. 거기에는 대신관 케이론의 입김 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었지만 말이다. 히페리온이 계속 메디아를 바라보며 인상을 찡그리자 케이론도 앉아 있는 메디아 를 쳐다 봤다. "왜 쳐다 보세요, 케이론." "내가 뭘?" "지금 얼굴에 써 있쟎아요. 싸가지 없는 놈이라고." "난 아무말도 안했는데 혼자 짐작해서 그러는구나. 네가 싸가지 없는 놈인 건 아 는 모양이지?" "내가 원래 싸가지 없는 거 모르셨어요?" "그거야 익히 알고 있었지." "그런데 왜 그런 눈으로 쳐다 보냔 말예요." "너 내얼굴을 봐서라도 최소한 예의를 지켜줘야 되지 않냐?" "케이론 얼굴이 뭐 보기 좋다고 봐주겠어요." 시큰둥한 메디아의 밉살스러운 대답에도 케이론은 화를 내지 않았다. "내 얼굴이 어때서 그러냐? 이만하면 잘 생겼지. 그리고 너도 이제 더 살다보면 알겠지만 세상은 네 고집대로만 살수는 없는 거다." "저도 살만큼 살아서 알아요. 하지만 케이론도 알고 있을텐데요. 누군가에게 고 개를 숙인다는 건 그가 그만큼의 가치가 있을 때예요." "지금 넌 내가 가치도 없는 일에 매달리고 있다는 말이냐? 그리고 살만큼 살기는 뭘 살만큼 살았냐? 살아봤자 그 놈의 화산속에서 나오지도 않았으면서...." 멀뚱이 서있는 히페리온은 평소에는 현명하고 온화하게 행동하던 케이론이 자기 앞에서 젊은 여자와 말다툼도 아니고 말장난을 하고 있자 조금은 놀라운 눈으로 그 둘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여자의 나이가 꽤 젊어 보이는데도 케이론과 말하는 투로 보아서는 거의 친구와 다름없이 느껴졌다. 그들의 말을 신기하게 듣고 있 던 히페리온은 메디아의 입에서 흘러나온 다음 말에 깜짝 놀랐다. "저 애송이가 그렇게 예의가 바르단 말이죠?" '설마 저게 내게 하는 말?' - 계 속 - ^^; 번 호 : 52 / 83 등록일 : 1999년 11월 16일 01:39 등록자 : CHO1971 조 회 : 1792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52.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사랑은 빗나간 화살이 되어 달의 심장을 가르고 선홍빛 눈물은 헛되이 타인의 가슴을 적시리라. 그것이 너희가 가는 길. 너희에게 주어진 삶인 동시에 너희가 선택한 운명이다. 제 52 장 어린 왕의 맹세. 흔히 13월은 창조신 가니아의 휴식을 위한 시간이라고 한다. 실제로 13월은 거의 한달간 눈이 끊임없이 내려서 온 세상이 하얀 침묵에 휩싸인 듯한 느낌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창밖으로 눈발이 더 거세게 쏟아지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것에 신경쓰지 않았다. 케이론과 메디아가 대화하는 중에도 히페리온은 기가 막혀서 끼어 들어 호통을 칠 정신도 없었다. 그가 눈만 크게 뜬 채 아무 말도 못 하는 사이 메디아는 자리 에서 일어나 빗자루를 집어 들더니 창가로 나가 버렸다. "어..어?" 그녀가 사라지자 케이론이 히페리온을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신경쓰지 마십시요, 폐하. 세상에 없는 녀석이라고 생각하시면 편하실 겁니다. 차 드시겠습니까?" 그러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히페리온에게 차를 권했다. "예?" 어벙벙한 상태로 자리에 끌려가 앉은 왕은 방금 전에 방안에 있었던 존재가 실제 로 있었는지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다음날 히페리온은 그 엉뚱한 얼굴을 다시 봐야 했다. 성 주변에 넓게 퍼 져있는 숲은 왕족들이 사냥하기에 적당했는데 그 날도 히페리온은 휘하의 기사들 몇 명과 간단한 무장만한채 말을 달리고 있었다. 정식으로 대규모 사냥이 벌어 질 때는 기사들과 수 많은 병사들이 모리꾼으로 따라 나서기 마련이었지만 히페 리온에게는 십여명의 기사들만을 대동한 채 재미삼아 사냥하는 것이 일반적이었 다. 사냥이 거의 끝나가고 있을 무렵 기사들을 먼저 성으로 돌려 보내고 몰래 옆 길로 샌 히페리온은 성의 외곽을 천천히 돌아보고 있는 중이었다. 오람의 궁성은 마법써클에 맞추어 설계 된 건축물이었는데 외성은 네개의 반원형 탑과 네개의 원형탑으로, 총 여덟개의 탑이 여섯개의 중성을 휩싸는 구도로 되 어 있었다. 또 여섯개의 중성은 중심부의 네개의 탑을 둘러싼 형태였는데 궁의 중심부에는 성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15층 규모의 탑이 자리 하고 있었다. 거대한 사각 모양을 기초로 이루어진 궁성은 세겹으로 겹쳐진 모양이었는데 사각 의 모서리는 모두 원형 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외성을 둘러 보는데만도 며칠이 걸린다는 대규모의 궁성은 지어진지 800년이 넘었다고 하지만 그 견고함을 자랑 하며 단 한번도 외부의 침입을 받지 않았다는 것으로도 꽤 유명한 성이었다. 히페리온이 거대한 외성을 돌아 보며 눈 내리는 하늘을 쳐다 보았을 때였다. 메디아는 오람을 떠나기 전에 다시 한번 케이론을 방문하기 위해 오람의 외성을 날아 들어 가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귀에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 왔다. 아래를 내려다 보니 말탄 소년이 그녀를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그녀는 무시하고 들어갈 까 하다가 마음을 바꿔 아래로 내려갔다. "날 불렀니?" 히페리온의 잘 생긴 미간이 불쾌하다는 감정을 듬뿍 담으며 찌푸려졌다. "넌 어째서 내게 그렇게 불손한 거지?" 메디아는 아직 소년티가 물씬 풍기는 어린 국왕을 바라보며 가소롭다는 듯 말했 다. "지금 나에게서 왕대접을 받고 싶다는 거냐?" "당연히 나는 왕이므로 너는 예를 다해야 하지 않느냐?" 어린 국왕이 당당하게 말하며 메디아를 쏘아 보았다. "그럼 나를 이겨 볼래? 네가 과연 나의 왕될 자격이 있는지 증명해 보란 말이야. 진정으로 내게서 왕대접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되면 기꺼이 너의 신하로서 예 를 다해 주겠어." 메디아는 자신 만만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왕을 향해 도전적으로 말했고 어 린 국왕은 더 언쨚은 표정을 지었다. "감히 나를 시험하겠다는 건가?" "시험이라고 하기는 우습고 내기를 하자. 만약 네가 이기면 너는 내게서 왕대접 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하지만?" "네가 질 경우엔 어떻게 할 거지?" "난 지지 않는다." 메디아는 자신 앞에서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는 소년을 바라보며 딱딱하게 말했다. "자만하지 말라는 교훈도 배우지 못했나, 어린 왕이여." "만약.... 내가 진다면 네가 원하는 것을 들어 주겠다." 어린 국왕 히페리온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단호하게 대답했다. "훗, 그렇게 말한다면 좋아. 내가 진다면 너에게 왕대접을 해주지. 물론 넌 나의 왕으로서 나의 충성도 받을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내가 이긴다면 너는 나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해. 어때, 자신있어?" "뭐라고? 왕인 내게 하찮은 여자를 상대로 충성을 맹세하라는 거냐?" "그래야 공평하지 않겠어? 너의 이름과 명예를 걸고 맹세하는 거다. 승패가 어떻 게 되든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없다면 너는 왕될 자격이 없는 자다. 아니면 그런 내기에 응할 용기조차 없다는 건가, 왕이여?" "... 좋다.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꼭 너를 굴복 시켜 내 앞에 무릎 꿇게 하 고 말겠다." 어린 국왕은 꼭 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담아서 결심하듯이 대답했다. "그거야, 두고 보아야 할 일이지." 메디아는 씩 웃어 보이며 말했다. 속으로는 저 어린 왕을 어떻게 요리 할까 생각 하면서..... "그럼, 너는 나와 무엇으로 승부를 겨루겠는가?" 히페리온의 물음에 메디아는 고민스러웠다. 잘 생각해 보니 자신은 마법사였고 상대는 국왕이라지만 기사랍시고 검을 다루는 자인데 무엇으로 승부를 내겠는가? 그렇다고 어린 애송이를 상대로 힘을 겨룰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흐음... 그건 공평하게 케이론에게 물어 보도록 하자." 어린 국왕 히페리온이 씩씩하고도 비장하게 다가오는 모습을 바라보는 케이론은 의아하기만 했다. 더구나 히페리온의 뒤에는 재미있다는 듯이 혹은 가상하다는 표정을 지은 메디아가 음침하게 따라오고 있었다. 그들이 케이론에게 다가와 대 뜸 한다는 말은 내기를 할건데 방법에 대해 의논을 하러 왔다는 거였다. 밑도끝 도 없이 내뱉는 히페리온의 두서없는 말을 들으며 케이론이 무슨 말이냐는 듯이 메디아를 쳐다보자 그녀는 멀뚱이 서있다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우린 지금 승부를 낼 만한 내기를 하기로 했는데, 그게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어서 찾아왔어요. 당신이라면 도와 줄 수 있겠죠?" "뭘 걸었는데?" "명예입니다." 옆에서 어린 국왕이 또박또박 대답했다. 케이론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 앞에 버티고 선 메디아와 히페리온을 바라보다가 무언가를 느꼈는지 신중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명예라면 아주 중요한 거지요." 두 사람에게서 아무 대답이 없자 케이론은 곧바로 말했다. "이렇게 하죠. 이제부터 내가 세가지 과제를 내면 그것을 해결하는 걸로 승부를 결정하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좋아요." 두 사람이 명쾌하게 동의하자 케이론은 잠시 창밖을 바라 보더니 몸을 돌려 급히 방을 나가기 시작했다. 영문을 모르는 메디아와 히페리온은 나가는 케이론의 뒤 를 따라 열심히 계단을 내려갔다. 복도 중간 중간에 서있는 병사들이 창을 들어 예를 표하던 말던 신경도 쓰지 않고 급히 내려간 그들은 눈이 하얗게 내리고 있 는 밖으로 나가 있었다. 케이론은 발이 푹푹 빠지는 눈을 밟아 보더니 시선에 들 어오는 병사를 불러 무언가를 가져 오라고 시켰다. 어디론가 달려갔던 병사가 서 너명의 동료와 함께 커다란 상자를 두개 가져오자 케이론은 병사에게 상자 가득 히 눈을 퍼 담으라고 지시했다. 병사가 열심히 눈을 퍼담자 상자에는 금새 눈이 가득 차게 되었다. "자, 이제 각자...... 이 상자 안에 있는 눈을 세어 보시지요." 가득 쌓여진 눈을 확인한 케이론이 뒤따라 온 메디아와 히페리온에게 첫번째 과 제를 말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케이론?" "이 상자 속의 눈을 세어 보라고 했습니다, 폐하." 히페리온은 어이가 없어서 입만 벌린채 상자 속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눈을 세어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는 생각지도 못 했던 과제에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며 두 상자를 뚫어지게 쳐다 보다가 한쪽에 시큰둥하게 서있는 메디아를 쳐다 보았다. '설마 저걸 세어 보겠다고는 못 하겠지.' "기권하겠습니다, 케이론." "오호, 생각보다 쉽게 포기하시는 군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에 매달리는 것처럼 미련한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포기는 빠를수록 현명한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옆에 서 있던 메디아는 내리는 눈을 맞으며 쓸데없이 발자국을 찍어 보더 니 말했다. "겨우 이게 첫번째 과제예요, 케이론?" "왜? 맘에 안드냐, 메디아." "너무 쉬어서 하는 말이죠. 지금 세면 되나요?" "쉬워? 셀 수 있으면 해봐라." 케이론의 대답이 끝나자 마자 메디아는 들고 있던 빗자루를 상자 위에 올려 놓으 며 주문을 외쳤는데 쌓여 있는 눈이 순식간에 녹아 내리기 시작했다. 메디아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히페리온은 녹아가는 눈을 쳐다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 정을 짓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다 세었는데요." 이제 상자 안에는 고여있는 물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 몇 개냐?" "하나요." 메디아의 대답을 들은 케이론은 히페리온을 향해 돌아서며 물었다. "이번 과제는 누가 이긴 것 같습니까, 폐하?" 히페리온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질 수 밖에 없었다. 그도 머리가 나쁘지 않았 기에 메디아가 왜 눈을 녹여 하나라고 대답했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간단한 방법을 생각하지 못 했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트집을 잡으 려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더 구차해지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졌습니다." 케이론은 히페리온의 순순한 대답에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메디아에게 보란 듯이 속삭였다. - 예의가 참 바르지 않냐? 건방진 네 녀석이랑은 비교가 안되는구나, 메디아. - 하지만 메디아는 케이론의 속삭임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머리와 어깨에 내리는 눈을 툭툭 털어내기만 했다. "이만 들어가죠. 두 번째 과제도 눈 속에 있어야 하는 건 아니겠죠?" 험한 산속 길을 가며 메디아의 지난 이야기를 한참 동안 귀 기울여 듣고 있던 카 란이 몹시도 궁금한지 불쑥 물었다. "메디아, 그럼 두번째 과제는 뭐였죠? 설마 검이나 마법으로 대결을 한 건 아니 었겠죠?" "설마 내가 그 꼬맹이하고 힘으로 대결했을만큼 한심한 줄 알아." "그럼 두 번째 과제가 뭐였습니까?" 메디아의 입술이 슬며시 벌어지며 미소를 짓더니 결국은 다시 생각해도 유쾌하다 는 듯이 웃어 제꼈다. "하하하...." 카란이 웃음을 터뜨리는 메디아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 거리고 있을때 그 곁에서 함께 가던 일행들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상대에게 한방 얻어 맞았을 때처럼 충격 적인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여태 여행하면서 메디아가 저토록 시원스럽고도 즐 겁게 웃는 것을 한번도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귀여운 왕비가 승자의 꽃다발을 안고 있었지." "예?" "그와 내가 도박을 건 상대는 왕비였거든." "...... 세상에 왕비에게 꽃을 받는 사람이 이기는 거라니!" "그래, 재밌는 내기였었어. 하하하.... 왕비에게 갖은 폼을 다 잡으며 꽃을 달라 고 하던 히페리온의 모습이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는군." - 계 속 - 첫눈이 언제 내릴지 너무 기다려 지네요. *^^* 번 호 : 53 / 83 등록일 : 1999년 11월 19일 16:22 등록자 : CHO1971 조 회 : 1833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53.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사랑은 빗나간 화살이 되어 달의 심장을 가르고 선홍빛 눈물은 헛되이 타인의 가슴을 적시리라. 그것이 너희가 가는 길. 너희에게 주어진 삶인 동시에 너희가 선택한 운명이다. 제 53 장 왕비 헬레나. 오람의 궁성에는 한겨울이어도 잘 가꾸어진 넓은 온실이 몇 개 있었다. 나라가 평안하였기에 왕실 마법사들이 궁성 가꾸는 일에 신경을 쏟고 있었기 때문이었 다. 거의 작은 들판이나 다름없는 온실정원은 어린 아이가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놀아도 별로 이상할 것이 없는 곳이었다. 그날도 그 정원에서는 여섯살 난 여자 아이가 화려한 비단치마를 걸친채 꽃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케이론이 제시한 두번째 과제는 뛰어 놀고 있는 그 어린 소녀에게서 누가 꽃을 받아올 수 있는가 였다. 그 과제에 펄쩍 뛰어 오르며 난색을 표한 사람은 다름아 닌 히페리온이였다. 어떻게 보면 히페리온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과제였는데도 그는 매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온실정원을 뛰어다니며 노는 소녀는 다름아닌 파라의 국왕 히페리온의 정식 아내이자 왕비 헬레나였다. 선왕 마리오스는 자신의 유일한 아들 히페리온이 열한살이 되던 해에 태어난 헬 레나를 왕비감으로 지목했다. 선왕이 죽고 히페리온이 열다섯의 어린나이에 왕위 에 오르자 네살짜리 꼬마 헬레나도 왕비가 되었지만 헬레나는 아직 유모가 필요 한 어린 애일 뿐이었다. 어린 왕비 헬레나의 나이는 겨우 네살에 불과했고 더구 나 그녀의 남편 히페리온은 열다섯살, 당연히 그 둘의 사이가 애틋하다거나 특별 히 애정이 있을리 만무했다. 선왕 마리오스에게는 히페리온 이외에는 전혀 자식이 없었다. 말년에 겨우 얻은 히페리온을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키웠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왕으로서의 교육을 받으며 외롭게 자란 히페리온에게 왕성에서 그 자 신보다 나이어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다못해 몸종까지도 그보다 세살이나 많았고 대부분 만나는 사람들은 중년이 지난 어른들이었다. 그런 히페리온이었기 에 그는 어린 아내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언제나 쭈 뼛거리며 가능하면 헬레나 곁에는 가지 않으려고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고 있었 고 헬레나 역시 히페리온이 곁에 있던 말던 유모의 보살핌 아래 자기만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부부생활은 고사하고 어쩌다 의무적으로 함께 산책한다는 명목하 에 만나게 되어도 헬레나 혼자 사방을 뛰어다니며 놀기 일쑤였고 히페리온은 어 색하게 서 있는 게 고작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왕과 왕비 사이는 전혀 변한 것이 없었다. "헬레나와 이 내기가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케이론." 히페리온이 곤란한 표정을 숨기며 불평스럽게 투덜거렸지만 케이론은 빙긋 웃으 며 대꾸했다. "그건 왕비님께 물어 보시면 알겁니다." "뭘 물어 보라는 겁니까?" "꽃을 달라고 하시면 왕비님이 분명히 무슨 이야기를 하실 겁니다, 폐하." 히페리온은 찌푸려 지지도 않는 이마를 열심히 찡그렸고 메디아도 나름대로 불만 을 토로했다. "어째 나한테 불리한 것 같네요." "그래서 불만이냐, 메디아?" "아니 뭐, 그렇다고 못 할 것도 없겠죠." "그렇지 못 할 것도 없지." 케이론은 그렇게 대답해 주면서도 메디아는 이번 과제를 해결하지 못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지금까지 알아 온 메디아가 달라지지 않았다면 어린 왕비 헬레나 에게서 꽃을 받아오지는 못 할 것 같았던 것이다. 하지만 케이론은 어린 왕과 왕 비를 위해서 조금은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며칠전인가 케이론은 우연히 복도에서 헬레나와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때 헬레 나는 정원에서 꽃을 가져오던 길이었는데 시녀에게 시키지 않고 직접 꽃을 한아 름 안고 있었다. 그녀의 유모와 시녀들은 헬레나가 바닥에 한 줌씩 흘리는 꽃들 을 열심히 주으며 뒤 따라 오느라고 제법 떨어져 걸어오고 있었다. 케이론은 고 개를 숙여 헬레나에게 찡긋 눈을 깜빡여 보이고는 작은 소리로 인사했었다. "안녕?" "어..어? 여기서 뭐하세요?" "어린 왕비님한테 인사하고 있지요." 케이론은 여섯살짜리 귀여운 왕비에게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그러자 헬레나는 큰 눈을 깜박거리며 자신과 눈높이를 맞추고 있는 하얀 수염을 기른 케이론을 쳐다 보며 입술을 달싹여 수줍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케이론은 한껏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꽃은 누구 주려고 하는 거지요? 그거 나한테 조금 나누어 주면 안될까요? 꽤 많아 보이는데......" 케이론이 부드럽게 부탁했지만 헬레나는 금새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섰 다. "안돼요, 케이론 할아버지. 이건 아주 특별한 사람한테 줄 거예요." "호오, 그래요? 그거 설마 남편되시는 히페리온 전하께 드릴 건가요?" "싫어요! 난...난... 에... " 얼결에 크게 대답해 놓고는 당황스러운지 헬레나는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남편을 언제나 존경하라고 배웠는데 자기도 모르게 불손하게 대답한 것 같았기 때문이 었다. "제 말은.. 그러니까... 히잉...." 결국은 울음보를 터뜨리는 헬레나를 보며 케이론이 오히려 의아해졌다. 유모가 놀라서 달려왔지만 케이론은 그녀와 시녀들을 억지로 물리쳤다. "자자... 착하지요? 울지 말아요. 울지 말고 이 할아버지한테 다 얘기 해 봐요. 우리 왕비님을 누가 울리는 거지?" "흑...힝..흑..훌쩍... 난...나는... 미워." "누가 밉다는 겁니까? 누가 왕비님을 괴롭히나요?" 헬레나는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도 없는지 확인했다. 그리고는 봇물이 터지듯 이 야기를 늘어 놓기 시작했다. 그녀가 울먹 거리며 하는 말은 대충 이러했다. 헬레 나는 히페리온이 매우 근사하고 좋은데 자기 남편은 전혀 자기를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는 거였다. 그리고 자기와는 놀아 주지도 않으면서 맨날 어른들이랑 칼싸 움이나 하고 다른 사람들한테는 잘 웃어 주면서 자기한테는 한번도 웃어주지도 않아서 너무 밉다고도 했다. 유모나 그녀의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그녀에게 남편 을 존경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하지만 얼굴도 자주 못 보는 남자하고 결혼해서 외 롭게 지내는 자기가 불행한 거 같다는 거였다. 헬레나는 첫눈에 황금빛 눈동자를 가진 자기 남편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남편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 너무 슬프다고도 했다. 어린 왕비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케이론은 조금 황당한 생각까지 들었다. 겨우 네살 때 얼굴을 봤으면서 첫눈에 반한다는 게 말이되나 싶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어린 꼬마가 내뱉는 말을 거짓말이라고 말하기도 뭐해서 그냥 듣고만 있었다. 한참을 혼자 떠들던 헬레나는 어느정도 울음이 그쳤는지 조심스럽게 케이론을 바 라 보았다. "저기요. 다른 사람한테는 비밀이예요. 내가 그 분 험담한 거 알면 혼난단 말이 예요." "예, 왕비님. 우리 둘이 비밀로 하지요. 손가락도 걸까요?" "헤.." 케이론이 울어서 발갛게 부어오른 눈가를 훔쳐주며 말하자 헬레나는 부끄러운 듯 웃었다. 그리고는 꽃을 가득 안은 팔을 힘껏 조이더니 작은 손을 겨우 내밀어 손가락을 펴보였다. 케이론과 손가락을 잠시 걸어 약속하자 어린 왕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 꽃은 미운 남편한테 줄 것이 아니면 누구한테 줄 건가요?" 순간 그녀의 통통하고 귀여운 뺨이 분홍색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들릴듯 말듯 케이론의 귓가에 살짝 속삭이고는 도망치듯 뛰어가 버렸었다. 지금 케이론은 온실 정원 입구에 서서 멀리 떨어져 있는 왕비를 바라보며 어떻게 해야할지 망설이고 있는 히페리온을 바라보고는 빙그레 미소지었다. '후후... 쉽지는 않겠지.' "케이론,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거예요?" 메디아가 미심쩍은 듯 물어오자 케이론은 시치미를 뗐다. "뭘 말이냐?" "그 음흉한 웃음은 뭐냔 말이예요?" "뭐? 음흉하다고? 나한테 하는 말이야?" 케이론은 괜시리 화난척 큰 소리를 냈다. "그런다고 내가 겁먹을 줄 알아요? 어쨌든 좋아요. 조그만 여자애하나 구슬르는 정도야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그게 네 녀석 생각만큼 쉬울 줄 아냐. 요놈아.' 케이론은 혼자만의 즐거운 상상을 하며 미소를 감추지도 않았다. 노란색의 프리지아와 보라색을 한껏 뽐내는 아이리스가 넓게 펼쳐져 있는 사이로 붉은 색 달리아가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며 활짝 피어 있었다. 헬레나는 꽃밭 에 서서 치마를 들어 올려 붉은 달리아를 치마 위에 펼져 놓고 있었는데 노란색 비단치마에는 얼룩덜룩한 꽃물이 들어 있었다. 히페리온이 쭈뼛거리며 다가 갔는 데도 헬레나는 미처 그를 발견하지 못 했다. "으흠." 히페리온이 기척소리를 내자 헬레나는 꽃을 꺽던 손을 움추리며 깜짝 놀란듯 고 개를 돌렸다. 국왕을 발견한 그녀는 큰 눈을 깜박거리며 한동안 가만히 서 있더 니 당황했는지 치마를 잡고 있던 손을 놓치며 얼떨결에 무릎을 굽혀 절을 했다. 그러자 그녀의 발밑으로 붉은 달리아의 꽃잎들이 흩어져 내렸다. 헬레나는 인사 를 하는 도중 꽃들을 주으려고 바닥으로 주저 앉았고 허둥지둥 꽃을 줍기 시작했 는데 히페리온의 신발 위에도 달리아가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 벌떡 일어난 헬레나는 어색하게 서 있는 히페리온을 빤히 쳐다 보며 조금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가 히페리온의 허리쯤에 있었는데 그녀를 내려다 보는 히페리온의 눈에는 곤혹스러움이 그대로 묻어나고 있었다. "저...흐음. 날씨가 참 좋지?" 목소리를 가다듬은 히페리온이 어렵게 말을 꺼냈지만 헬레나는 손안의 꽃을 꽉 끌어안았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미치겠군.' 순수하고 맑은 눈빛으로 자기를 올려다 보고 있는 어린 왕비를 내려다보는 히페 리온의 등뒤로 식은 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같이 걸을까?" 그래도 헬레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꽃 나 줄래?" 히페리온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버렸다. 더 이상 그녀와 서 있는 게 너무 갑갑 했던 것이다. 그 순간 헬레나의 눈빛이 적대적으로 뒤바뀌며 두어발짝 뒤로 물러 섰다. "싫엇!" "뭐?!" "싫어." '뭐야, 싫다구?' 히페리온은 아직도 정원 입구에 서 있는 케이론과 메디아를 돌아보며 험악한 표 정을 지었다. 그는 다시 심각한 어조로 헬레나에게 명령했다. "그 꽃을 어서 내게 줘." "흥." 헬레나는 새초롬하게 입술을 삐죽거리더니 마치 그가 없는 것처럼, 아직 줍지 못 한 꽃들을 주워 들기 시작했다. "좋아, 그 꽃을 나에게 주면 최고급 보석과 최고급 드레스를 선물할게." 멀리서 왕과 왕비를 흥미롭게 지켜보던 케이론이 결국 인상을 찡그리며 '끙'소리 를 냈다. "아무래도 저 어린 국왕은 예의가 바른지는 몰라도 좀 멍청한 것 같군요, 케이론." 케이론은 할말없다는 표정으로 입맛을 다실 수 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입이 쓴 모양이었다. '저 밥통은 차려 준 밥상도 못 먹는군.' 한참동안 여섯살짜리 왕비와 입씨름을 하던 히페리온은 나중에는 약이 바짝 올랐 다. "왜 안주겠다는 거야?" "싫어. 싫어. 싫단 말이야. 이 바보, 멍청이." 그러더니 헬레나는 누가 쫓아 올세라 히페리온을 피해서 다른 꽃밭으로 훌쩍 뛰 어가 버렸다. 히페리온은 헬레나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비난에 얼굴이 새빨게 져 서 미처 뒤따라 갈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금방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뒤를 따라갔는데 그의 걸음걸이에서는 전장을 향해 행군하는 병사의 단단 한 각오가 느껴질 정도였다. "감옥에 가고 싶지 않다면 당장 그 말 취소해." "흥." 히페리온의 성난 협박에도 조그만 헬레나는 전혀 겁먹는 기색이 아니었다. "이...이.." 결국 이성을 잃은 히페리온은 헬레나를 때릴 듯 한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러나 그는 멈짓멈짓 그 손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어린 여자 에 불과한 그녀를, 더구나 아내인 헬레나를 때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바보, 멍청이. 나한테는 인사도 안해 주고 웃어 주지도 않으면서, 나하고는 놀 아주지도 않고 맨날 나 혼자 있게 하면서....흑..바보..내가..내가 얼마나 좋아 하는데..흑..흐잉...아아앙...앙.." 눈하나 깜짝 않고 대들던 헬레나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자 화내던 히페리온은 어쩔줄을 몰라하며 우두커니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로서는 이 난국을 해결 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는데다가 헬레나가 그에게 던져 놓은 말 때문에 더 당황 스럽기만 했다. "아무래도 저 쪽은 그른 것 같네요." 메디아가 중얼거렸지만 케이론은 괜히 히죽거리기만 했다. "그래, 그런 것 같구나." "케이론, 도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뭘?" "정말 수상하네.... 뭐 어쨌든, 이젠 내가 가보지요." 정원에는 마법사들의 노력으로 선명한 빛깔을 품고 있는 갖가지 꽃들이 풍성하게 피어 있었지만 정원 밖에서는 음산한 바람소리를 동반한 세찬 눈보라가 지상을 뒤덮고 있었다. 메디아는 서럽게 울고 있는 여섯살짜리 아내를 달래려고 애쓰고 있는 히페리온을 안됐다는 듯이 쳐다 봤다. '하! 날씨 퍽이나 좋군.' 메디아는 한심하게 생각하며 울고 있는 어린 꼬마를 어떻게 사로잡아야 할지 잠 시 생각해 보았다. 그녀는 갑자기 생각난 듯 걸치고 있는 망토 안쪽에서 작은 유 리병을 꺼내 들더니 유리병을 기울여 액체를 쏟아내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유리병에서 흘러 나온 맑은색 액체는 노란색 빛을 내며 서서히 작은 고양이 같은 형상을 이루어 갔다. 빛이 사라지자 액체는 살아 움직이는 짙은 노란색 고양이 가 되어 있었다. "냐아옹~~" 작고 귀여운 노란색 고양이는 황금색 눈을 뜨자 마자 헬레나에게 뛰어 들었다. "흑흑...훌쩍...어머?!" 울고 있던 헬레나는 갑작스럽게 자신의 품으로 뛰어 들어 온 고양이에 놀라 금새 울음을 멈췄고 조심스럽게 고양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고양이는 헬레나 의 분홍빛 뺨에 머리를 비비며 아양을 떨기 시작했다. 순간, 눈물이 그렁그렁 맺 혀있던 헬레나의 눈에 기쁨이 스미더니 활짝 핀 미소가 떠올랐다. 헬레나가 울음을 그치고 웃기 시작하자 메디아도 씩 미소를 지었다. '쉽군.' 그녀는 잠시 고양이와 헬레나가 놀도록 내버려 뒀다가 고양이를 불러 들였다. 자신의 품에서 놀던 고양이가 메디아에게로 도망가 버리자 헬레나가 얼른 메디아 에게 다가왔다. "이 고양이하고 네가 가진 꽃하고 바꾸자, 꼬마야?" 고양이를 갖고 싶어 안달하는 헬레나에게 메디아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용건만 을 간단히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꽃을 받았나요?" 메디아의 이야기를 참을성있게 듣고 있던 카란이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물었다. "아니, 못 받았어." "그럼 아무도 꽃을 받지 못 했단 말입니까?" "아니, 케이론이 받았어." "예? 그게 무슨 말이예요? 왜 그렇게 됐죠?" "몰라. 만약 이번에 오람에 가서 그녀를 만나게 되면 물어 봐. 왜 그랬는지." '여섯살짜리 계집애가 무슨 놈의 고집이 그렇게 센지....' 메디아는 자기고집은 생각도 안하고 헬레나의 고집스러움만 기억했다. 그 당시 케이론이 마지막으로 두 사람에게 요구한 과제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제 각자 자신의 목숨을 맡겨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데리고 오십시요. 자신의 생명을 맡겨도 될만한 자들 말입니다." 케이론의 말이 떨어지자 히페리온은 평소 자신을 호위하는 기사단을 불러 들였지 만 메디아는 왠일인지 꼼짝도 안하고 원래 있던 자리에서 느긋하게 기다리기만 했다. "메디아, 기권인 거냐? 그게 아니라면 혼자인 이유를 설명해라." "나의 목숨을 다른 누군가에 맡길 일도 없을 뿐더러 설혹 그럴 일이 있다해도 나 는 내 목숨을 다른 이에게 맡기지 않을 겁니다, 케이론." "메디아, 너의 자신감 만큼이나 너 자신이 강하기 때문에 그 누구의 도움도 필요 하지 않다는 거냐? 아니면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거냐?" "내가 강하고 약하고의 문제가 아니예요, 케이론. 그리고 누구를 믿느냐 안 믿느 냐 하는 것은 더욱 상관없구요. 내 목숨은 오로지 나의 것이기 때문에 내가 나를 지킬 수 없다면 생명은 가치가 없는 것이지 않을까요? 내가 지킬 수 없는 목숨 을 다른 이의 손을 빌려 살고 싶은 생각 따위는 단 한번도 한적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남의 손을 빌려 살게 된다면 그건 온전한 나의 목숨이 아닐테니까 요. 만약 내게 나 자신조차 지킬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그때는 죽어도 상관 없어요. 그건 나의 힘과 상관없이 나의 의지이기 때문이예요, 케이론." 그녀의 대답이 끝나자 케이론은 국왕의 호위대를 물러가게 한후 히페리온을 향해 질문했다. "폐하, 한가지 묻겠습니다. 폐하는 방금 나간 저들의 목숨을 지켜줄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히페리온은 갑작스런 케이론의 엉뚱한 질문에 당황스러워 했다. 단 한번도 그는 자신이 누군가의 목숨을 지켜줘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폐하, 이것은 명예를 위한 내기라 말씀 하셨지요? 폐하께서는 한 나라의 국왕이 십니다. 만약 왕이 그 나라의 백성의 목숨을 지켜 줄 수 없다면 과연 명예롭다고 말 할 수 있을런지요? 저들도 이 나라의 백성입니다. 폐하께 충성을 맹세하고 목숨을 맡긴 자들이지요. 그들이 무엇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 있다고 생각하 십니까? 그건 폐하가 저들의 목숨을 지켜 줄 거라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얼핏 들으면 말도 안되는 이야기 같지만 모든 백성이 국왕에게 충성하는 것은 국왕을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 그 자신을 위해서인 겁니다. " 순간 어린 국왕의 얼굴에서 살짝 핏기가 가시더니 금방 부끄러운듯 다시 발갛게 물들고 있었다. "폐하의 본분이 무엇인지 그들을 통해 정확히 아셔야만 합니다. 이 세상에 거저 얻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저들의 충성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댓가가 비싼 것이랍니다. 폐하께서는 저들이 폐하를 지켜줄 거라 하셨지만 폐하 자신이 저들을 지켜줄 건지에 대해서는 대답을 못 하셨습니다. 그건 곧 그들의 충성도 그만큼 위험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폐하께 목숨을 바치듯이 폐하 자신도 그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저들이 없다면 스스로의 목숨을 지킬만한 힘과 자신이 있으신지요?" "......" "이번에도 메디아가 이긴 것 같군요. 혹시 이의가 있으신가요, 폐하?" ".....없소." 히페리온은 의기소침하게 중얼거릴 수 밖에 없었다. 그로서는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한 나라의 국왕으로서 케이론의 질문에 어떤 대답도 자신있 게 할 수 없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결국, "나...... 파라의 국왕 히페리온은 지금 이 순간부터 마녀 메디아에게 충성할 것 을, 나의 이름과 명예를 걸고...... 맹세한다. 이 맹세는 나의 생명이 다할 때까 지 유효할 것이며 창조신 가니아의 이름 앞에 영원히 신성할 것이다." "나 메디아는 파라의 국왕 히페리온의 충성을 약속 받았음에, 지금 이 순간부터 그의 맹세를 받아 들인다. 이 맹세는 나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유효할 것이며 창 조신 가니아의 이름 앞에 영원히 신성할 것이다." 궁성 내부에 있는 작은 신전에서 예식을 치루는 젊은 왕의 표정은 썩은 간을 삼 킨 것처럼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었는데 메디아의 표정도 그리 밝지만은 못 했다. 그녀는 시종일관 껄끄러운 표정으로 예식에 임하고 있었다. 사실, 메디아 의 입장에서도 애송이 왕의 충성을 받아서 뭐 특별히 좋을 것도 없었기 때문이었 다. 하찮은 내기에 이겨서 얻은 것이래 봐야 왕이라고 앞에서 깝죽대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지켜보며 증인을 서주는 대신관 케이론 은 이 웃지 못할 사태에도 전혀 내색하지 않고 진지하게 서약식을 진행해 주었다. 누군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거품을 물고 쓰러질 일이었지만 대신관 케이론은 전 혀 신경이 쓰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때 히페리온의 머릿속으로 스쳐간 생각은 간단한 것이었다. '이건 악몽이 틀림없어. 누가 꿈에서 날 좀 깨워 줘.' - 계 속 - 붉은 달리아의 꽃말 : 당신의 사랑이 나를 행복하게 합니다. 번 호 : 54 / 83 등록일 : 1999년 11월 26일 05:34 등록자 : CHO1971 조 회 : 1641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54.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사랑은 빗나간 화살이 되어 달의 심장을 가르고 선홍빛 눈물은 헛되이 타인의 가슴을 적시리라. 그것이 너희가 가는 길. 너희에게 주어진 삶인 동시에 너희가 선택한 운명이다. 제 54 장 진혼곡. - 꼭 다시 나를 방문해 주길 바랍니다. 비록 지금은 내가 그대에게 왕으로서의 인정을 받지 못 했지만, 난 맹세코 부끄럽지 않은 국왕이 될 겁니다. 그때가 되면 꼭 그대가 나를 찾아와 줄 거라 믿고 있겠습니다. 나는... 나는 당신에게 인정받는 왕이 되고 싶습니다. 당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겁니다, 메디아 - 히페리온은 떠나는 메디아에게 정중하게 부탁했고 메디아는 간단한 대답을 남기 며 설경이 펼쳐진 풍경 속으로 빗자루를 타고 성를 떠났다. - 너 좋을 대로. - '부끄럽지 않은 국왕이라..... 그는 그말의 의미를 그때 제대로 알고 있었을까?' 오래전 일을 회상하던 메디아는 어리고 순진했던 히페리온이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지 문득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분명히 어리지는 않을겁니다." 메디아를 바라보던 카란이 그녀의 생각을 읽은 듯 넌지시 말을 건네왔다. "...그렇겠지. 지금쯤은 허연 백발이 성성한 늙은 이가 되었을테니까." 애송이였던 히페리온도 어쩌면 여느 인간들처럼 탐욕스럽게 변해 있을지도 모른 다는 생각을 하자 다시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사라지는 메디아였다. "카란은 왕성에 간다고 했으니 그를 만나 보겠군." "예. 대신관이신 케이론님도 만나 뵐 예정이예요." 그러나 메디아는 더 이상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은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산속의 해는 빨리 저물기 마련이었다. 그들이 크로노스 성에 도착할 쯤에는 산줄 기 사이로 붉은 노을이 내려앉고 있을 무렵이었다. "안개가 또 내려 앉을 모양이군." 가프겐이 걱정스럽게 말하자 제피로스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기온이 급속히 내려가니까 당연한 거지." 정말 피부로 느낄 수 있을만큼 공기의 온도가 급격히 내려가고 있었다. 고지대로 올라와서인지 하얀 입김을 내쉴 때마다 싸늘한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말들이 콧김을 뿜어내며 가파른 길을 올라가고 있을 때였다. 맨 앞을 앞서가던 가프겐 이 갑작스러운 침음성을 내질렀다. "맙소사!" 낮은 돌담들이 군데군데 무너져 초라한 모습을 드러내는 크로노스 성 입구에 도 착한 일행들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 했다. 아니 코끝을 찌르는 고약한 냄새에 고개를 돌리며 코를 막아야만 했다. 비유가 약한 로사리아는 기절할 듯 창백해지 더니 구역질을 해댔고 몇몇 병사들도 헛구역질을 하며 신물을 쏟아냈다. 그들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어김없이 시체가 굴러 다니고 있었다. 썩어서 진물이 질질 흐르고 있는 시체에는 벌레가 득실 거렸고 죽은 지 얼마되지 않은 시체에 서는 아직도 끈적한 핏물이 흘러 내리고 있었는데 사방에 다양한 모양의 시체가 즐비했다. 머리만 남아서 몸은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는 것도 있었고 새까맣게 그을러서 잘 익은 고깃덩이만 남아 있는 장정의 넙적다리도 보였으며 칼을 땅바 닥에 꽂은 채 무릎을 꿇은 자세로 고개를 숙인 남자의 시신도 있었다. 그뿐이 아 니었다. 심지어 그들의 말들까지 모조리 죽은 채 비탈길에 엎어져 있었다. 일부 는 짐승들에게 물어 뜯긴 듯 뼈대만이 남아 있었고 나무에 묶인채 발버둥치다가 죽어간 것도 있었다. 대부분 상인으로 보이는 시체들과 여자들은 반항조차 못 하 고 죽은 흔적이 역력했고 얼마 되지 않는 호위 무사들도 어이없이 당한 듯 두려 움 속에 죽어 간 것처럼 보였다. 얼마나 처참하게 죽어 갔는지 주변에는 온통 검붉은 피의 흔적이 널려 있었고 도망가다가 등에 칼을 맞고 죽은 자도 있었는데 붉은 황혼의 빛이 산위를 비추며 적랄하게 그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제피로스와 기사들이 병사들을 이끌고 조심스럽게 성을 둘러 본 결과 근방에는 죽은 시체들만이 쓰러져 있을뿐 생존자는 단 한명도 없었다. 을씬년스럽게 버티 고 선 크로노스 성 주변은 저녁 바람 소리만이 스산하게 들릴 뿐이었다. 어둠이 내려 앉기 전에 백여구가 넘는 시체들을 대충 모아 불사르자 사방에 지독한 냄새 가 퍼져 나갔다. 성의 안쪽에 경계를 강화하고 성주변 돌담 안의 마당에 자리를 잡은 일행은 밤이 되어 간단한 식사를 끝낼 때까지 아무도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단지 무거운 침묵만이 일행을 감싸고 있었다. 성안은 시체들이 오랫동안 쌓여 있었기 때문에 냄새가 지독했고 핏자국이 그대로 있어서 들어가 쉴 생각은 하지도 않는 그들이 었다. 오히려 말들을 성안으로 들여 보내 놓고 사람은 마당에서 쉬고 있었다. "어떤 놈들인지 지독하군." 작대기로 모닥불을 뒤적이던 딘이 씹어뱉듯 중얼거렸지만 어느 누구도 대꾸하는 자는 없었다. 밤이 깊어갈 수록 일행을 사로잡는 긴장감은 손에 잡힐 듯 커져만 갔다. 깊고 깊은 산속인데도 불구하고 돌담으로 둘러싸인 크로노스 성 주변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금방이라도 무언가 튀어 나올 것 같은 분위기였다. 바트를 호송하는 책임을 맡은 저스티스는 음산한 분위기에 완전히 압도당하는 느 낌이었다. 로스코에서 수비병으로만 십년 동안 지내 온 그에게는 이런 위험한 일 은 처음이었다. 평소 흠모하던 파라 제국내에도 일곱명 뿐이라는 흑기사를 따라 가게 되어 은근히 자부심을 가졌던 그도 여행길을 따라 온 후 처음으로 후회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로스코에서 착출되어 따라 온 대여섯명의 병 사들도 후회하는 눈치가 역력히 보이고 있었다. 볼비는 완전히 겁에 질려 알렉토의 옆에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크로노스 산 만 무사히 지나면 아이니 강에 다다를 수 있었고 아이니 강에서 배를 타고 가면 볼비의 고향 아르카디아까지는 쉽게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볼비는 지금 크로노스 산에 있었고 아이니 강에 가려면 며칠은 더 산을 통과해야만 했다. 일행 모두가 긴장한 탓에 그들은 주위를 삼엄히 경계하면서도 일행중에 누가 어 떻게 움직이는 지는 미처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에코는 어제처럼 말을 타고 오는 내내 뭐라고 중얼거렸지만 울거나 소리를 지르지 않았고 비교적 얌전히 자 기생각에만 빠져 있었다. 밤이 되자 그녀의 몸 주위로 희뿌연 빛 같은 게 언뜻언 뜻 보이기도 했지만 그것을 눈치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시는 메디아의 옆에서 블루잉을 베개삼아 몸을 웅크리고 눕더니 제일 먼저 잠 이 들어 버렸고 알렉토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 때문인지 검을 손에서 놓치 않고 주위를 경계하며 밤을 지새고 있었다. 어느 틈에 메디아의 일행과 합류한 카란도 메디아 곁에서 컴컴한 숲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메디아는 품속에서 차가운 한기 를 느끼게 하는 금속고리를 만지작 거리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을뿐이었다. 급격히 내려 간 지표면의 기온 때문인지 주위로 옅은 안개가 내려앉고 있었다. 말라죽은 이끼가 가득한 성벽에서는 차가운 습기가 올라왔고 어두컴컴한 나무 사 이로 바람이 불어 왔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일행 사이로 따뜻한 모닥불이 피워 져 있었지만 고지대의 추위를 막을정도는 아니었다. 뼈속까지 스며드는 찬바람이 매섭게 땅바닥을 훑고 지나가며 축축한 대지에 가벼운 서리를 내렸다. 터질 것 같은 긴장속에 경계를 늦추지 않던 병사들이 하나 둘 지쳐갈 무렵 지축 을 가볍게 울리는 소리가 돌담을 타고 넘어와 들리기 시작했다. 너무 미세한 소 리여서 처음에는 몇 명만이 느낄 수 있었지만 곧 소리가 커지면서 잠들었던 병사 들까지 벌떡 일어날 정도였다. "어느 쪽이지?" "몰라, 사방에서 동시에 울리는 것 같아." 가프겐의 험악한 검은 얼굴에 긴장감이 서리며 딱딱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자네가 저스티스를 도와 주게. 범인이 죽는 일이 있어서는 안돼." 제피로스는 검을 뽑아 쥐며 바트를 지킬것을 가프겐에게 지시하고 자신은 오피온 과 로사리아를 보호하는 딘에게 다가가 등을 맞대고 섰다. 가볍게 지축을 울리던 소리는 점점 커져 이제는 성벽이 울려서 무너지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소리는 지척까지 다가왔지만 시야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이 병사들을 더 긴장하게 했다. 옅은 안개가 흐르는 가운데 정체 모를 소리가 점점 좁혀져 오고 있었다. 알렉토는 발밑을 진동시키며 다가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지만 정확히 어디에서 상대가 다가오는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그는 모든 감각을 동원해 주위를 살폈다. 발바닥을 울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알렉토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뒤로 훌 쩍 물러났다. "이봐, 땅속이야!" 그와 동시에 성을 둘러싼 낮은 담벽이 요란하게 무너져 내리며 땅바닥이 솟아 올 랐다. 흙이 뒤집어 엎어지며 그 사이로 올라온 것은 기괴한 모양의 껍질을 뒤집 어 쓰고 무기를 들고 있는 수 십명의 검은 그림자였다. 온몸이 검게 번들거리는 파충류 껍질로 뒤덮힌 그들은 마치 거대한 도마뱀처럼 보였다. 순식간에 검은 그 림자와 뒤엉킨 병사들이 고함을 질러대며 대응했지만 이미 그들의 반응은 너무 느린 것이었다. 검날이 스치는 곳에 병사의 목이 떨어져 땅바닥을 구르고 날카로 운 검이 겁에 질린 병사의 뱃속을 휘저었다. 짧은 순간 십여명의 병사가 목숨을 잃으며 비명을 질렀지만 검은 그림자는 전혀 흔들림 없이 또 다른 목표물을 찾고 있었다. 뒤늦께 정신을 차린 병사들이 제피로스가 내지르는 명령에 따라 움직이 기 시작했지만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겁을 먹은 뒤였다. 싸움이 벌어지자 재빨리 움직여 성의 안쪽으로 옮겨진 오피온과 로사리아는 메디 아 일행과 함께 성안으로 들어 갔다. 메디아는 마시를 발로 차 깨우고 급히 성의 안쪽으로 마시를 들여 보낸뒤 자신은 카란과 함께 문 밖에 남았고 알렉토 역시 에코와 볼비를 아네모스와 함께 성안으로 들여 보내고 문 앞을 가로 막았다. 마 시가 문을 두드리며 불평을 해댔지만 메디아는 들은척도 하지 않았다. 이미 메디 아의 전방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있었다. 싸늘한 한기가 가득한 안개속에서도 제피로스는 식은 땀을 흘리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피부를 스치는 차가운 검날의 감촉이 느껴질 때마다 섬찟한 죽음을 감 지하며 필사의 힘을 기울여야만 했다. 상대의 피에 젖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서 로를 죽이는 가운데 살점이 튀어오르고 붉은 피가 뿜어져 올랐다. 방금 쏟아져 나온 병사의 피에서는 더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 왔고 역한 피비린내가 하얗게 피 어오르며 코끝으로 스며 들었다. 삼십여명에 이르던 병사들중 절반 이상이 제대 로 반항조차 못하고 죽임을 당하고 겨우 버티고 있는 자들은 제피로스와 그의 기 사들 정도였다. 파충류 껍질을 갑옷처럼 걸친 상대는 고도로 절제되어 있으면서 도 날렵하게 움직였고 그만큼 망설임 없이 잔인한 검술을 보여 주고 있었다. 검 게 번들거리는 껍질만큼이나 그들의 표정에는 비인간적일 정도로 차가운 냉기가 흘렀다. 자신의 살이 베어지고 피가 뿜어져 나와도 그들의 눈동자에는 흔들림 없 는 고요함이 깃들어 있었다. 어느덧 싸움의 장소에서 점점 뒤로 밀려난 제피로스와 기사들은 메디아와 알렉토 가 버티고 선 문앞까지 물러나 있었다.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카란은 자신의 목에 걸고 있는 문자가 새겨진 펜던트를 손에 쥐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 자 그의 몸을 중심으로 푸른 빛이 퍼져 나가며 둥그런 돔이 형성되어 나갔다. 푸 른 빛이 다가오는 것을 본 제피로스가 떨어져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리 며 푸른 빛 안으로 들어왔다. 일행이 모두 빛안에 모여들자 카란의 방어막이 더 강렬한 빛을 발하기 시작하며 적들을 견제했다. 한동안 푸른 방어막을 헛되이 쳐 내던 적들이 서서히 방어막을 둘러싸면서 조금씩 떨어져 나가더니 조용히 지켜 보기 시작했다. "저 자식들이 뭐하는 거지?" "힘이 떨어질 때를 기다리는 건가?" 숨을 몰아쉬던 딘이 신경질을 부리며 적을 노려보자 가프겐도 근심스럽게 카란을 돌아보며 말했다. 기도를 하고 있는 카란의 몸에서는 푸른 빛이 강하게 퍼져 나 오고 있었지만 신력이라는 것을 무한정 믿고 있을 수는 없었다. "기다리고 있는 거야." 침착하게 들리는 메디아의 목소리가 들리자 알렉토가 그녀를 돌아 보았다. "설마...... 또 그놈들인가?" 하지만 검의 모양이 알렉토가 지난번에 상대했던 그들과는 달랐다. 석궁도 없었 고 괴상하게 큰 붉은 나비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그가 떠올리고 있는 것 은 바트와 그들을 공격했던 셰도우 아미였다. 곰곰히 생각해 보니 지금 눈앞에 버티고 있는 자들과 셰도우 아미 사이에 공통점이 있었다. 검은 옷과 검은 마스 크 그리고 그 이해할 수 없을정도로 차갑게 느껴지던 눈동자. 죽어가면서도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으려 하는 고도의 훈련을 받은 자들. 어쩌면 같은 자들일 수도 있었다. 저들은 붉은 나비를 불러낼 또 다른 동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지도 몰 랐다. 예전에도 블루잉의 방어막을 가볍게 해체시켰던 나비를 떠올린 알렉토의 표정이 뻣뻣해졌다. "저놈들을 알아?" 제피로스가 성급하게 물었지만 알렉토와 메디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엷 은 푸른빛 밖에서 조금의 미동도 없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적들을 쳐다 보며 메디아 또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쉼없이 망토 속에 있는 둥근 고리를 만지 작 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아직도 희미한 화상 자국이 남아 있었다. - 계 속 - 너무 늦어서 죄송해요. ^^;;; 날씨가 추워진다는데 모두 건강 조심하세요. ((.~;; 좋은 하루가 되시길...... 번 호 : 55 / 83 등록일 : 1999년 11월 30일 07:17 등록자 : CHO1971 조 회 : 1613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55.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사랑은 빗나간 화살이 되어 달의 심장을 가르고 선홍빛 눈물은 헛되이 타인의 가슴을 적시리라. 그것이 너희가 가는 길. 너희에게 주어진 삶인 동시에 너희가 선택한 운명이다. 제 55 장 코마지. "저 녀석들은 평범한 상인이 아니로군." 큼지막한 암석과 나무가 뒤섞여 있는 절벽위에서 단정적으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저게 어디 상인의 무리처럼 보이나? 내 보기엔 군대로구만." 말을 타고 있는 사내들은 크로노스 성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암석이 솟아있는 지형에서 한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 중 머리를 완전히 밀어 삭발한 사내는 특이하게 생긴 막대기 같은 것을 들고 있었는데 막대는 속이 비었고 중 간에 유리같은 것이 끼워져 있어서 그걸로 멀리 있는 크로노스 성을 자세히 들여 다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신경이 거슬리는 게 있던데, 자네도 보았나?" "보았어. 그 녀석이 끼어 있더군. 그 바보같은 녀석이 엉뚱한 놈을 죽이고 도망 가더니 왜 저기에 끼어 있는 건지 알 수가 없군." "멍청하게 잡혀버린 모양이지. 한꺼번에 죽여버리면 그만 아닌가. 그나저나 저 놈을 따라 갔던 녀석들은 뭘 했던 거지? 연락이 끊긴지 꽤 되었지, 아마? 자네가 직접 꽤 많은 인원의 셰도우 아미를 투입한 걸로 알고 있었는데 녀석들 솜씨가 별로였던 모양이야, 디살로바 대장." 키가 작지만 다부진 몸매를 가진 사내는 막대기를 들고 있는 중년의 삭발 사내에 게 말하면서 이죽거리기 시작했다. 디살로바는 상대의 말에 불쾌한 듯 입매를 일그러 뜨리더니 손가락 뼈마디를 소 리나게 구부리며 말의 고삐를 고쳐 쥐었다. 그들을 여기로 보낸 사람이 만약 그 놈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아주 싫어할 거라는 사실을 그도 잘 알고 있었 다. 이번 기회에는 확실히 그 놈의 목숨을 끊어 놓아야만 했다. 어차피 그들의 임무가 크로노스 산맥 일대에 살아있는 모든 것을 죽이는 것이었니까 특별히 할 일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었다. 해야 할 일을 하면 그뿐이었다. "그건 나중에 알아보도록 하지. 지금은 눈앞에 있는 일부터 처리하자고, 아자탄. 이 산에 들어온 지도 벌써 보름이 다 되어 가는군. 토끼같은 녀석들만 도살하는 것도 슬슬 지겨워 지던 참이었는데 괜찮은 사냥감이 들어와서 다행이야. 반항다 운 반항을 하는 사냥감을 만난 게 언제인지도 모르겠군. 어이! 이봐 코마지, 저 신관 녀석은 자네가 처리하게." 디살로바는 멀리 아래로 보이는 크로노스 성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는 푸른 색 방 어막을 가르키며 그들과 좀 떨어져 나무에 편안하게 기대 서있는 사내에게 소리 쳤다. 사내는 긴 회색의 망토를 깊게 눌러 쓰고 있었는데 온몸에서 기이한 분위기가 흐 르는 사람이었다. 짙은 회색 망토의 모자가 얼굴의 대부분을 가리고 있어서 겨우 입술과 코가 드러나 보일뿐이었지만 입술은 지나치게 길면서 가늘어 보였고 얼 굴은 코를 중심으로 한쪽 뺨은 어두운 푸른색이었으며 나머지 반쪽은 창백할 정 도로 하얀 색이라는 것을 알아 볼 수 있었다. 지금 그 반쪽의 흰 얼굴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고 있었다. "좋은 사냥감이군요, 대장."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기분나쁠 만큼 음산하고 거칠게 들렸는데 그 목소리에 디살로바와 아자탄도 눈을 찌푸릴 정도였다. 굳게 닫아 놓은 문안에서 문을 두드리며 불평을 쏟아내는 마시의 짜증스런 목소 리를 등뒤로 들으며 메디아는 푸른 방어막이 감싼 돔 밖에서 움직이지 않는 검은 껍질을 뒤집어 쓴 수 십명의 무리들을 지켜 보았다. 산 위에서인지 어딘선가 날 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짧게 들리자 검은 무리들이 서서히 방어막에서 더 물러서 기 시작했다. "기다리던 것이 왔나 보군." 제피로스가 씁쓸하게 중얼거릴 때 그들의 오른 쪽 정면으로 보이는 절벽으로 부 터 짙은 검은색 구름같은 것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짙은 뭉게 구름처럼 밑으로 내려 깔리는 검은 구름이 순식간에 그들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맙소사, 저게 뭐야?" 겁에 질린 듯한 병사가 작은 신음소리를 내질렀다. 방어막 바로 앞까지 다가온 검은 구름은 마치 살아있는 괴물처럼 시커멓게 움직이고 있었다. 검은 구름이 푸 른색 방어막에 부딪혀 오자 둥근 돔형태의 방어막이 요동을 치며 흔들리기 시작 했다. 카란의 기도소리가 더 커지고 그의 초록색 머리카락이 위로 솟아 오르며 얼굴로 흐르는 굵은 땀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카란은 공격 능력이 전혀 없었지만 그의 방어 능력은 매우 뛰어난 것이었다. 일반 마법사들이나 신관이 그의 방어 막을 깨고 들어올 확률은 극히 적었다. 재차 부딪혀 오는 검은 구름에도 방어막 이 깨어지지 않자 검은 구름이 서서히 물러나가며 완전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고지 1800미터가 넘는 산악지역의 넓은 공터에 지어진 크로노스 성 주변에서 칠 흑처럼 검은 구름이 사라지자 그 자리에 백여마리에 가까운 말들이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말위에는 일행을 공격하고 있던 사내들과 닮은 검은 마스크를 얼굴에 감싸고 있는 자들과 회색 망토를 입고 있는 두 명의 사내가 타고 있었다. 마치 검은 구름을 타고 산위에서 내려온 것처럼 그들은 한 순간에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었다. "역시 그놈들이군." 나타난 자들의 모습이 셰도우 아미인것을 확인한 알렉토가 허탈하다는 듯이 중얼 거렸지만 제피로스는 새벽의 찬공기가 등줄기를 훑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그는 절망스런 심정으로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그들에게 살아 남은 병사는 10명도 안 남아 있었고 성안에 피신시킨 왕자와 공주 일행을 지키고 있는 저스티스에게도 다섯명 정도의 병사만이 주어져 있을뿐이었다. 모두를 다 합친다고 해도 아군은 이십여명이 겨우 넘을 뿐이었고 그중에 전투 능력이 전혀 없는 공주와 여자도 있 었다. 제피로스에게 눈앞의 적은 너무 많은 숫자였고 명백히 불리한 상황이었다. 오로지 다행스러운 것은 지금도 버티고 있는 신관 카란의 방어막이었다. 그러나 그런 제피로스의 생각도 잠시 뿐이었다. 푸른 색의 얇은 막이 가로막은 사이로 날아오는 작은 무언가가 보였다. 그것들은 아무런 장애없이 카란의 방어막을 소멸시키고 붉은 날개를 펼치며 그들에게 다 가오고 있었다. 방어막이 소멸되는 순간 카란은 신음소리를 내지르며 펜던트에서 손을 떼어냈다. 그의 흰손으로 찌르르한 느낌이 전해져 오며 고통이 순간적으로 관통했던 것이다. 방어막이 사라지자 물러나있던 셰도우 아미들이 순식간에 거 리를 좁히며 일행을 덮쳐오기 시작했다. 카란은 다급히 펜던트에 다시 손을 올리 며 기도주문을 외웠고 병사들의 목이 떨어져 나가기 직전 그들은 모두 푸른 빛에 싸이며 한꺼번에 사라졌다. 일행은 눈부신 빛에 눈을 감았다 뜬 한순간 이미 성안쪽의 공주일행과 함께 서 있 었다. "어엇!" 놀란 일행들이 감탄성을 내지르는 동안 순간적인 공간이동으로 많은 사람을 동시 에 옮겨 놓은 카란의 얼굴은 핏기가 완전히 가신것처럼 창백해졌다. 갑자기 나타 난 사람들 때문에 실내에 있던 말들이 흥분해서 날뛰며 성안 여기저기로 흩어지 기 시작했지만 아무도 말까지 신경쓰지는 않았다. "어떻게 된겁니까?" 오피온의 곁에 있던 저스티스가 긴장한 얼굴로 제피로스에게 상황을 물어왔지만 제피로스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카란에게 시선을 줄 뿐이었다. "괜찮습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카란은 크게 숨을 몰아 쉬며 가슴의 펜던트를 쥐고 회복기도를 하고 있었지만 그 의 눈은 메디아와 마시를 향해 있었다. 마시는 갑자기 실내에 나타난 그들을 쳐다보더니 메디아를 향해 불만스런 눈초리 를 보냈다. 메디아의 손은 망토속에 있었고 얼굴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 했다. 그녀는 마시의 시선을 느낀 것처럼 보라빛 눈을 들어 마시를 쳐다 보았다. 그녀 가 마시에게 다가갔다. "거북이 어딨어?" "뭐?" "거북이 내놔." 마시의 붉은 눈동자가 의구심을 담고 메디아의 눈을 뚫어지게 쏘아 보았지만 그 는 곧 던져 두었던 딱딱한 거북이를 찾아 들고와 메디아에게 주었다. 메디아는 거북이를 받아 들어 블루잉에게 걸어 둔 정지마법을 해지했다. 블루잉이 감겨 있 던 푸른 눈을 서서히 뜨기 시작했다. 그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꿈벅거리기도 전 에 메디아의 신중한 목소리가 울렸다. "잘 들어, 블루잉. 지금부터 무조건 마시 곁에 있어. 다른 아무것도 지키거나 상 관하지 말고 마시 곁에만 있어야 돼. 내말 무슨 뜻인지 알아 듣지?" 마법에서 깨어나자 마자 들리는 메디아의 말에 블루잉은 뭐라고 불평을 해대고 싶었지만 그녀의 차가운 보라색 눈을 보자 아무말도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무슨 상황인지는 몰라도 자신을 깨워야 할만큼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을 느 낄 수 있었다. "뭐야? 왜 그녀석을 또 나한테 떠넘겨." 마시가 소리를 버럭 질러대며 항의를 했지만 메디아는 마시를 향해 다가가 그의 머리에 손을 올려놓았을 뿐이었다. "에?" 메디아는 마시의 검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하게 말했다. "마시, 그 녀석들 기억하지?" 어리둥절한 마시에게 메디아는 손가락으로 그의 배를 쿡 찔러 보였다. 그러자 마 시의 눈동자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활활 불타기 시작했다. "네가 하고 싶어하던 일을 하려면 블루잉을 꼭 데리고 있어. 알았지?" 심통스럽게 굳어 있던 마시의 얼굴이 알았다는 눈빛을 해보였다. 메디아가 이렇 게 자상스럽게 나오면 뭔지 모르게 엄마 생각이 났지만 지금은 그런 걸 곰곰히 생각해 보고 있을때가 아니었다. 그의 자존심에 오점을 남긴 용서할 수 없는 인 간들을 드디어 다시 만나게 된것이다. "좋아, 알았어." 메디아는 마시의 대답을 들으며 그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마시의 몸에 간단한 마법을 걸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제피로스와 기사들은 어떻게 이 상황을 빠져 나갈지 궁리를 하고 있 었다. 크로노스 성은 오크떼로 부터 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생긴 건축물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비밀통로가 있거나 잘 지어진 건물은 아니었다. 오크떼가 소탕된 지도 오래 되어서 성 자체가 이제는 낡아서 허물어진 곳도 있을만큼 허술했다. "정면돌파 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저 놈들은 오합지졸 산적이 아닐세. 정규군보다 더 잘 훈련된 괴물들이라고. 이 인원으로 정면돌파는 어림도 없어." "빌어먹을, 그럼 가만히 앉아서 시체꼴이 되자는 말이야." 그들의 말을 주의깊게 듣고 있던 로사리아 공주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있었다. 밖에서는 문을 사납게 후려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리고 돌바닥을 뛰어다니는 흥분한 말발굽소리도 시끄럽게 실내를 울리고 있었다. 잠시간 대화를 나누던 제피로스는 이제 펜던트에서 손을 떼고 문을 주시하고 있 는 카란에게 다가갔다. "어려운 부탁이지만 왕자님과 공주님을 이곳에서 멀리 보내줄 수 있겠습니까?" 카란의 눈동자가 제피로스의 신중한 갈색눈을 똑바로 쳐다 보았다. 그가 입을 열 어 대답을 하려는 순간 오피온의 목소리가 둘의 시선을 돌리게 했다. "싫소, 제피로스경. 나도 남겠소. 로사리아만 보내주시오." "안됩니다." "그대들만 남기고 나만 갈 수는 없소. 나도 남아 있겠소." 완강하게 오피온이 고집을 부리자 제피로스는 이마를 찡그려 보였다. "죄송하지만 두 분의 부탁은 들어 드릴 수 없습니다." 카란이 둘 사이에 끼어 들자 오피온과 제피로스는 동시에 카란을 바라 보았다. "로사리아만이라도 이곳을 벗어나게 할 수 없다는 겁니까?" 오피온의 물음에 카란은 차갑게 대답했다. "여기는 로사리아님 말고도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할 다른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 카란은 아네모스에게 안겨 있는 멍한 눈동자의 에코와 그 옆의 겁에 질려 있는 작 은 드워프족 볼비를 바라 보고 있었다. "내 힘으로 저들 모두를 이곳에서 무사히 벗어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로사리아님만이라면 가능하지 않겠소?" 제피로스는 카란의 의도를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그에겐 다른 것보다 왕족에 대 한 의무가 먼저였다. "제가 싫습니다. 저는 라비론 사람이며 또한 에레보스 소속의 신관입니다. 파라 의 왕족을 위해서 제가 억지로 부탁을 들어 드릴 필요는 없겠지요." "하지만 당신은 지금 오람의 왕성으로 가는 중이...." 제피로스는 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그는 끝까지 말을 마칠 수 없었다. 육중한 문짝이 산산조각나며 주위의 벽까지 무너져 들이쳤던 것이다. 넓은 실내에서 사 방으로 날뛰던 말들이 구석으로 몰려가며 실내에 있던 사람들을 헤집고 다녔다. 제피로스가 정면으로 뛰어들며 들어오려는 적들을 막으려 했지만 정작 부서진 문 으로 들어오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긴장한 손바닥으로 검을 쥐고 있던 다른 사 람들도 문을 향해 섰지만 문이 부서지고 한동안 조용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서로 의 눈빛으로 의아함을 물어보던 그들이 천천히 문앞으로 다가갈때였다. 건물전체 가 요란하게 흔들리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건물의 뻥뚫린 벽을 바라보며 기다리던 디살로바는 희죽거리고 있었다. 이제 곧 건물이 무너지면 놀란 토끼들처럼 뛰어나올 것을 생각하니 저절로 미소가 흘러 나왔다. 그의 머리 위쪽 사방으로 붉은 나비들이 날아다니고 있었지만 그는 나비 들을 가까이 오게 하지는 않았다. "코마지, 자네보다 그 신관녀석이 더 뛰어난 것 아닌가?" 검은 구름으로 방어막을 뚫으려다 실패한 것을 두고 이죽거리던 아자탄은 순간적 으로 보인 코마지의 날카로운 푸른 눈빛에 입을 꾹 다물었다. 코마지는 얼굴색이 극단적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그의 눈도 얼굴색과 마찬가지 로 이질적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왼쪽 눈동자는 뺨과 마찬가지로 어두운 푸른색 이었지만 오른쪽은 얼굴처럼 눈동자도 없이 흰자위만 있을뿐이어서 끔찍한 느낌 을 주기에 충분했다. 지금 코마지의 손은 앞으로 내밀어져 검은 연기 같은 것을 움직이며 크로노스 성 전체를 무너뜨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아름다운 것을 병적일만큼 혐오했다. 누군가 아름다운 것에 애착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꼭 빼앗아 부서뜨려야 직성이 풀리는 자였다. 그는 하얀 얼굴에 아름다운 초록빛 머리를 늘어뜨린 신관의 얼굴을 떠올리며 일그러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아름다운 얼굴을 짓이겨 버리고 머리카락을 태워버리면 어떤 기분일 까를 상상하며 그는 만족스런 기분을 느꼈다. 오늘의 사냥은 그에게 뜻밖의 즐거 움을 선사할 것 같았다. 그가 그동안 일그러뜨린 예쁘장한 여자들의 얼굴도 오늘 그가 망가뜨릴 아름다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잠시 보았던 신관의 미모 는 그가 지금까지 보았던 어떤 여인의 미보다도 매력적인 극치의 아름다움을 보 여주고 있었다. 코마지의 흰눈에 잠시 핏빛이 감도는 것 같더니 그의 얇은 입술 로 음흉한 표정이 깃들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서는 더 강력한 힘의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커다란 건물이 요란스럽게 흔들리며 먼지와 돌가루가 튀어올랐지만 안에 서 뛰어나오는 그림자는 없었다. 삼각형으로 지어진 지붕전체가 내려앉으며 폭발 하듯이 건물이 해체되어 쓰러지자 자욱한 먼지가 솟아 올랐다. 건물이 요란하게 부서져 내리는 소리에 수 십마리의 말들이 땅바닥을 차며 발길질을 해댔지만 까 만 밤하늘아래 서 있는 셰도우 아미의 그림자는 흔들림없이 말의 고삐를 붙잡으 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마스크 밖으로 들어난 눈동자에 뿌연 먼지 사이로 하얀 빛이 둥그렇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둥근 마법의 빛을 만들어 내고 있는 메디아의 손에는 은빛으로 빛나고 있는 고리 가 쥐어져 있었다. 마법의 빛에 둘러 싸인 그녀의 눈 아래로 서리가 내린 검은 땅과 백여명이 넘는 셰도우 아미가 버티고 있었지만 메디아의 보라색 눈은 푸른 색으로 보일정도로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금속 고리를 손안에 쥐고 있는 그녀의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이제 그녀가 저들에게서 무엇을 더 알아 낼 수 있을지 그녀 자신도 궁금했다. 솔직히 무엇을 알아내고 싶어하는지, 그리 고 알아내서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그녀 자신도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머니 블러디나를 죽인자, 만약 그 자가 살아있다면, 정말로 살아있다면 어떻게 해야할지, 또 자신이 원하는 것이 복수인지도 메디아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싶었다. 아니 알아야만 할 것 같았다. 손안에서 체온을 차갑게 하 는 금속 고리를 느끼며 그녀는 그런 생각을 했다. 고리가 그녀를 진실로 인도해 줄 것이라는 막연한 느낌으로 메디아는 발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 계 속 - 비평(감상)보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__)....((.~;; 앞으로도 종종 보내주세요. *^^* 번 호 : 56 / 83 등록일 : 1999년 12월 04일 06:01 등록자 : CHO1971 조 회 : 1877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56.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사랑은 빗나간 화살이 되어 달의 심장을 가르고 선홍빛 눈물은 헛되이 타인의 가슴을 적시리라. 그것이 너희가 가는 길. 너희에게 주어진 삶인 동시에 너희가 선택한 운명이다. 제 56 장 전투. 진한 분장이라도 하고있는 것처럼 보이는 코마지의 얼굴을 흰색과 푸른색으로 나 눈 경계선 부분이 살짝 좁아지며 그의 푸른눈과 흰눈이 동시에 가늘어 졌다. 그 의 전면에 보이는 밤하늘을 배경으로 둥근 보름달처럼 떠있는 방어막은 의외로 커다랗게 형성되어 있었다. 꽤 많은 인원을 동시에 수용하고 있는 구체는 성전체 가 폭삭 가라앉아 먼지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상공에 유유히 떠 있었는데 왠만 한 마법사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것이었다. 코마지는 음산한 얼굴위로 흥미로운 표정을 짓더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크큭... 재밌겠군. 오랜만에 괜찮은 상대를 만났어." 어둠의 전사들처럼 셰도우 아미는 밤의 대지위에서 금방이라도 살육을 벌일 듯 강렬한 힘을 뿜어내고 있었다. 피를 쏟아 내고 있는 시체 조각을 밟고 서있는 말 들의 숨결이 하얗게 부서지는 가운데 크로노스 성은 초토화 되어 이제 돌덩이들 만이 쌓여 있었다. 셰도우 아미는 마상 전투를 벌일듯 검을 뽑아 들었다. 어둠속에서도 희미한 빛을 받아 번쩍거리는 그들의 검신은 소름끼치도록 차가우면서도 아름다운 느낌을 불 러 일으켰다. 그 순간 정적속에 들리는 것은 흥분한 말들의 푸르륵 소리와 나비 의 날개짓 소리뿐이었다. 디살로바의 얼굴로 지리한 미소가 피어 올랐다. 마치 수없이 해오던 일을 다시 해야 할때의 표정과 같았다. 그의 밋밋한 머리는 온몸 을 감싼 검은 옷으로 인해 유난히 반짝거리고 있었다. 디살로바의 머리 위쪽에서 배회하며 날아다니던 붉은 나비들이 일제히 하얀 구체 로 쏘아져 나가기 시작했다. 활짝 펼친 손바닥보다 커보이는 수백마리의 붉은 나 비가 한꺼번에 날아가는 모습은 하얀 보름달을 향해 핏빛이 번져 오르는 듯한 장 관을 연출해 보였다. 나비의 핏빛과 투명한 흰빛이 공중에서 마주치고 있었다. 그 순간 하얀 방어막 안에서 불쑥 한줄기 검은 선이 악마의 손아귀처럼 뻗어 나 왔다. 칠흑 같이 검은 선은 그물처럼 활짝 펼쳐져 나오며 밤하늘을 모두 태워 버 릴만한 새파란 불꽃을 일으키며 붉은 나비들을 순식간에 삼켜 버리고 있었다. 화 끈한 열기가 까만 하늘을 가득 메우더니 얼어버린 대지에까지 그 후끈한 열기를 전하며 화르륵 타올랐다. 땅에서는 엄청난 열기에 놀란 말들이 화급히 뒤로 물러 나고 있었다. 순식간에 나타났던 불꽃은 나타날때 만큼 갑작스럽게 사라졌지만 이미 나비들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에 시종일관 느긋하던 디살로바의 얼굴이 경악스런 표정으 로 뒤바뀌더니 그의 주름진 눈가가 가늘어 지며 입술주변이 실룩거렸다. "주문마법을 쓰는 마법사가 왜 이곳에?" 판타리아 대륙전체를 통털어도 주문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마법사는 흔치 않았다. 더구나 마법생물로 만들어진 붉은 나비는 마법사나 마녀들의 피로 만들어졌기 때 문에 그만큼 붉은 나비의 생명력과 마력은 강력한 것이었다. 설혹 주문마법을 익 힌자가 있더라도 그 위력이 붉은 나비를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는 자를 만나기란 매우 힘든 일이었다. 디살로바의 심각한 어조의 말을 흘려 들으며 코마지는 전면에 내려서고 있는 긴 망토를 입은 여자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그의 본능은 그 여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길게 따아내린 검은 머리를 양갈래로 내리고 있는 그 녀는 일견 어려보이면서도 묘한 카리스마를 풍겨내고 있었다. 거리가 어느정도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코마지는 그녀의 얼굴의 눈동자 색깔까지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검은 속눈썹 아래 차가운 보라빛을 뿌리고 있었 다. 그리고 그녀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은 그에게도 익숙한 둥글게 휘여진 금속 고 리였다. 그녀의 후면에서도 이십여명의 사람들이 땅위에 내려서고 있었는데 치렁 치렁 늘어지는 하얀옷을 목에서 발끝까지 걸치고 있는 아름다운 초록빛의 머리카 락에 감싸인 신관의 창백한 얼굴도 눈에 띄었다. 그들을 살펴보던 코마지의 눈에 광기가 번들거리며 살기가 어른거렸다. 메디아의 머릿속은 아직도 감정을 정리하지 못해 복잡했지만 그녀는 잠시 생각을 접어 두었다. 그녀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행동이지 생각이 아니었다. 그녀는 금 속고리를 들어 전면에 보이는 셰도우 아미들을 고리속의 시선으로 담았다. 둥근 고리안에 포착된 자들 중에 회색망토를 걸친 두명의 괴이한 인상의 사내와 머리 카락을 깨끗이 밀어버린 사내가 들어 있었다. 그녀의 입가에 살며시 떠오른 미소 는 씁쓸하면서도 한숨같은 느낌이 섞여 있었지만 어떻게 보면 재미있는 일을 눈 앞에 둔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메디아는 자신의 온몸을 휘돌고 있는 마녀의 피가 지니고 있는 잔인한 본성이 이제 보게 될 전투와 붉은 피를 기대하며 은근한 희 열이 충족되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힘찬 말발굽이 땅바닥을 박차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메디아의 손에서 고 리를 통해 거대한 화염이 토해져 나갔다. 그러자 달려오는 말들을 통째로 삼키며 붉은 불덩이가 작렬했다. 수십마리의 말과 사람이 내지르는 처절한 비명소리가 크로노스 산맥 전체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메디아가 손에 쥐고 있는 금속고리 는 은은한 마력을 품고 있어서 마법을 시전하기에 아주 좋은 조건을 제공하고 있 었다. 그녀의 손앞에서 발생한 불꽃은 고리를 통과해 부채살처럼 퍼지며 붉은 혓 바닥을 날름거리며 사방을 질주하고 있었다. 코마지가 앞으로 내민 두 손에서 각각 흰 빛줄기와 푸른 빛줄기가 동시에 나타나 더니 두 빛은 서로 꼬이며 메디아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갑자기 몰아치는 힘에 의해 주위에 거센 바람이 일어났다. 두 빛이 엉겨있는 빛덩이가 메디아가 뿜어내 는 뜨거운 화염과 충돌하자 그 주변에 있던 모든 것이 강력한 힘에 의해 날아 올 라갔다. 그러나 빛은 사라지지 않았고 금새 화염을 뚫으며 그녀의 전면으로 달려 오고 있었다. 메디아의 눈빛에 이채가 떠오르더니 그녀의 손바닥이 작은 원을 그 려 나갔다. 짧은 주문을 뱉어낸 메디아의 손에서 강력한 마력을 동반한 빛이 쏘 아져 나가며 코마지의 빛덩이를 맞받아 나가기 시작했다. 메디아가 코마지를 상대하고 있는 사이 달려나온 셰도우 아미를 제피로스의 기사 들이 막아내며 치열한 난투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상에 앉아 있는 자 들을 맨몸으로 상대하는 일은 고역스러운 일이었다. 벌써 소수였던 병사들은 죽 기살기로 덤볐지만 상대의 검에 피를 토하며 죽어가고 있었고 미친듯이 검을 휘 두르던 저스티스도 두 명이 동시에 찔러온 검에 목과 등을 꾀뚫리며 차가운 땅바 닥에 얼굴을 쳐박고 있었다. 그의 눈은 부릅떠져 있었지만 그를 밟고 지나가는 거친 말발굽에도 그는 더이상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육중한 말의 몸이 지나갈 때 마다 그의 입술에서 꾸역꾸역 핏물이 흘러 나왔다. 알렉토의 검에서는 희뿌연 소드에너지가 쏟아져 나오며 사방으로 달려오는 말과 사람을 반토막내고 있었는데 그의 큰 덩치가 무색할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 었다. 사방에 적들이 득실되는 혼전속에서도 제피로스와 알렉토의 검에서 뿜어지 는 소드에너지의 활약은 단연 돋보이고 있었다. 전력을 다해 버티고 있는 제피로 스는 상대의 말을 베어 나가며 힘겹게 그들의 전진을 막으려 했지만 너무 많은 숫자의 적앞에서는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그의 곁에 있는 알렉토로 인해 겨우 밀리지 않고 있었다. 제피로스와 알렉토가 가장 앞서서 혼전을 벌이 고 있는 사이 가프겐과 딘은 후면으로 밀려드는 셰도우 아미들을 상대하고 있었 다. 그들의 얼굴에는 피로 얼룩진 땀이 흘러 내렸고 가프겐은 벌써 등과 어깨에 서너개의 길게 찢어진 상처가 생겨났다. 딘도 무사하지는 않아서 허벅지 바깥쪽 에 깊게 찔린 상처에서 뜨거운 피가 쉼없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 는 죽더라도 끝까지 버티다가 죽어야 한다는 결연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마시는 블루잉이 머리위에 앉아 있어서 매우 불만스러워 했지만 그는 이제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 마시의 한쪽 손에는 사라만더의 불꽃이 떠올라 있었 고 다른 손에는 메디아가 건네준 빗자루가 있었다. 메디아의 빗자루는 소드스틱 이 정교하게 숨겨져 있었기에 빗자루를 잡아 당기자 검게 빛나는 검신이 드러나 있었다. 마시는 앞으로 뛰어들며 마구잡이로 셰도우 아미에게 불꽃을 던져내더니 사방을 뛰어 다니며 가까이 있는 셰도우 아미에게 소드스틱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의 어설픈 휘둘림에 쉽게 당하는 자는 없었지만 무지막지하게 내려치는 마시의 힘에 밀려 당황하는 자들이 마시의 칼날아래 목숨을 내주어야 했다. 물론 노련한 셰 도우 아미가 마시에게 당하기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마시의 머리위에 앉아있는 블우잉은 어지럽게 흔들리는 가운데도 마시를 제대로 잘 보호하고 있었 다. 그러나 마시가 아무리 동분서주하며 사방을 헤집고 있어도 상대적으로 숫자 에서 현저히 밀리고 있는 싸움의 양상을 뒤바꾸기는 매우 어려웠다. 겁에 질려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있는 로사리아의 얼굴에는 핏기가 완전히 사라 져 있었고 볼비는 에코의 옷자락을 꼭 움켜 잡은채 몸을 떨고 있었다. 결박되어 있던 바트는 제피로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네모스가 풀어주어서 지금은 증오 서린 눈초리로 셰도우 아미를 노려 보고 있었다. 오피온과 아네모스는 각각 호신 용으로 들고 다니던 무기를 손에 쥐고 다가오려는 적들을 대비하고 있었지만 그 들은 카란이 만들어 내는 방어막으로 비교적 안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메디아와 코마지가 쏟아내는 마법의 여파로 흔들리는 공기의 파장을 그들도 고스란히 느 낄수 있었고 죽어가는 병사들의 처절한 비명소리도 섬뜩할 정도로 잘 들리고 있 었다. 갑자기 적들의 후면에서 지켜보기만 하던 회색망토를 두른 또 한명의 마법 사가 카란이 만들어 놓은 방어막을 향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펜던트를 쥐고 있는 카란의 손가락이 하얗게 변하며 방어막이 더욱 투명하면서도 두꺼워 지고 있었지만 바트를 발견한 셰도우 아미들은 방어막을 뚫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 었다. 거대한 크로노스 산맥을 이루는 겹겹이 겹친 산줄기 사이로 싸늘한 밤바람이 불 고 있었지만 산 중턱에 자리잡은 크로노스 성 주변의 드넓은 공터는 대낮처럼 밝 은 빛과 뜨거운 열기가 가득할 뿐이었다.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내지르는 고함소리와 말들의 비명소리가 짐승의 울부짖음처럼 어둑컴컴한 산줄기를 가르 며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갑자기 거대한 폭발음이 터지며 빛이 터져 나가고 그 주위에 있던 사람과 흙덩이 들이 사방으로 날려갔다. 메디아가 내뿜어 대는 마법을 상대하고 있던 코마지는 폭발과 함께 신음소리를 내지르며 말에서 붕 떠올라 땅바닥으로 추락했다. 그의 입에서 한줄기 선혈이 흘러 내렸다. 한순간에 공터의 주변이 돌풍에 휘말린듯 난 장판이 되었고 폭발을 피한 사람들의 입에서도 신음성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빌어먹을, 더럽게 강하군." 딘을 상대하고 있던 디살로바가 중얼거렸다. 그는 폭발이 일어난 곳에서 멀리 떨 어져 있었지만 피부로 느껴진 충격은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코마지를 흘깃 보았지만 코마지는 입가의 피를 쓱 문질러 닦아내며 히죽거리고 있었다. 디살로바는 피식 웃어 넘겼다. 그가 알고있는 코마지라면 절 대로 질리가 없었다. 그는 강했고 또한 강한만큼 미친 자였다. 그런 자를 이기기 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운 법이었다. 디살로바는 음침하고 소름끼치는 코마지 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능력은 믿고 있었다. 비록 지금 상황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디살로바는 그의 검을 부셔버릴듯 쳐내고 있는 콧수염을 기른 귀족풍의 사내에게 집중했다. 상대는 허벅지에 깊은 상처를 입고도 지나치게 많이 움직이고 있었다. 얼핏 보면 상대가 우세하게 보일지도 몰랐지만 디살로바는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적절히 상대의 검을 막으며 주위의 상황을 판단하고 있었다. 그의 눈살이 찌푸려지고 있었다. 이토록 많은 숫자로 밀어 붙이고 있는데도 적들 을 제대로 괴멸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정도였다. 한마디로 이 쪽의 피해는 엄청났지만 저쪽은 몇명의 조무래기들만이 당했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의 눈에 짙은 분노가 피어오르더니 딘의 검을 막아내는 검에 강한 살기가 실 리며 움직임이 빨라졌다. 딘은 갑작스럽게 변한 상대의 움직임에 헛바람을 토해냈다. 거의 눈으로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진 적은 조금전까지 상대하던 것과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딘의 가슴이 서늘해지며 등줄기로 땀방울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불편한 허벅지 의 고통조차 잊어버린 그의 머릿속으로 순간적으로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런 느낌은 아무리 빨라도 늦기 마련이었다. 시선 가득히 찔러 들어오 는 소드에너지를 품은 검을 보는 순간 그는 같은 빛을 뿌려대고 있는 자신의 검 으로 온 힘을 실어 그 검을 막아 나갔다. 그가 상대를 막았다고 생각한 순간, 상 대의 검은 어느새 그의 심장을 정확히 관통하고 있었다. 딘의 콧수염이 부르르 떨려왔다. 심장을 통해 전해져 오는 고통이 그의 뒷목을 타고 뇌에까지 찌르르 뻗어 올라왔다. 그의 눈이 검과 상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상대의 입술이 잔 인한 미소를 짓더니 딘의 몸에서 검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검이 완전히 뽑히자 딘의 심장에서 피가 솟구쳐 올랐다.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딘의 얼굴에서 눈빛이 서서히 촛점을 잃어가고 그의 몸 전체가 무너져 내렸다. - 계 속 - 제가 한동안 여행을 가게 되었습니다. ^^; 그래도 일주일 안에 돌아와 다음편 올릴께요. ^^ (아마도 목요일쯤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번 호 : 57 / 83 등록일 : 1999년 12월 12일 23:27 등록자 : CHO1971 조 회 : 1608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57.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사랑은 빗나간 화살이 되어 달의 심장을 가르고 선홍빛 눈물은 헛되이 타인의 가슴을 적시리라. 그것이 너희가 가는 길. 너희에게 주어진 삶인 동시에 너희가 선택한 운명이다. 제 57 장 반지의 주인. "안돼-!" 제피로스의 망막으로 피를 뿌리며 쓰러져 내리는 친구의 모습이 크게 확대되어 들어오고 있었다. 제피로스는 찢어질 듯 부릅떠진 눈을 딘에게 고정시킨채 그의 정수리를 내리찍어 오는 상대를 증오에 차서 노려 보았다. 달려가야 한다. 저기 바닥으로 쓰러져 내리는 딘에게 달려가야만 한다. 오로지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그것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앞에 버티고 선 적들이 그를 방해하고 있었다. 그의 검에서 소드에너지가 폭발하듯 강렬하게 뿜어지며 그의 주위로 강력한 힘의 파장이 퍼져 나갔다. 제피로스의 검은 정면에 있었던 셰도우 아미를 양단하고도 그 뒤의 두명까지도 순식간에 베어 버리고 있었다. 그들의 몸에서 끈적한 피가 튀어올라 그의 이마를 적시며 머리카락을 따라 흘러 내렸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눈물인지 핏물인지 미처 구별하지 못 했다. 그때 천천히 쓰러져 내리는 딘의 얼 굴이 얼어붙은 땅바닥에 쳐박히는 순간 그의 눈동자와 제피로스의 눈동자가 마주 쳤다. 이제 한발짝만, 한발만 더 가면 된다. 그의 몸을 차가운 땅바닥에서 일으켜야 한 다. 제피로스는 정면으로 다가오는 자의 머리를 단칼에 베어 넘기며 두근거리는 심장 으로 거칠게 앞으로 내달렸다. 깡! 갑자기 제피로스의 검에 부딪쳐오는 막강한 힘의 검에 그는 온몸이 휘청거림을 느꼈다. 그의 앞길을 막아선 자는 방금 딘의 심장에서 뽑아낸 시뻘건 검으로 제 피로스의 검을 내려치고 있었다. 검에서 흘러 내리는 뜨끈한 피가 제피로스의 손 가락을 적시고 있었다. 자신이 오랜시간을 함께 했던 목숨같은 친구의 심장에서 흘러 나온 피였다. 그의 눈에 핏발이 서고 얼굴 근육이 가늘게 경련하기 시작했 다. "이이..개자식!" 그의 잇새로 내뱉어지는 소리는 피를 토하는 절규처럼 들렸다. 싸늘한 바람이 휩쓸고 지날때마다 비릿한 피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메디아는 그녀의 마력에 밀려나 떨어져 나간 코마지를 가볍게 쳐다보고는 주위를 훑어 보았다. 어둠속에서 빛나는 칼날의 현란한 움직임들이 화려한 불꽃을 만들 어 내고 있었다. 검사들이 서로 베고 찔리는 숨가쁜 혈전에서 이미 많은 이들이 쓰러졌고 사방으로 울리는 거친 소리들은 피부를 찌를듯 했다. 서늘한 그녀의 시선속으로 동분서주하고 있는 마시의 활기찬 모습이 들어왔다. 뒤에서 그를 찔러가는 셰도우 아미의 존재도 모른채 앞으로 내달리고 있는 그의 모습이 불안스러울만도 했지만 메디아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마시의 등을 찔 러 가던 사내는 당황스러운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의 발밑에서 폭포수 같은 물줄 기가 갑자기 솟아 올라 그의 몸을 띄워 올려 내던졌기 때문이었다. 마시의 검은 머리위에 착 달라 붙어 있던 거북이의 입술이 쭉 찢어질듯 헤죽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건 마시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하여간 못말리 는 녀석들이라고 생각하며 메디아는 입가에 잠시나마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메디아의 눈은 다시 코마지를 향했다. 인간으로 보기 힘든 특이한 외모에 흑마술도 백마술도 아닌 신의 권능이 느껴지는 그의 힘에 메디아 는 흥미를 느꼈다. 메디아가 눈을 감고 활짝 핀 양손의 검지 손가락과 엄지 손가락을 맞대자 그녀를 중심으로 둥그런 불길이 땅에서 솟아올라 마법써클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순간 메디아의 감겨진 눈이 떠지고 그녀의 눈동자는 어느새 새파랗게 변해 있었다. 활 활 타오르는 원안에 둘러 싸인 메디아를 중심으로 여섯개의 모서리가 있는 별모 양이 새겨지며 그녀의 몸이 가볍게 떠올랐다. 메디아의 몸이 땅에서 일미터쯤 떠 올랐을때 그녀는 왼손에 끼고 있는 검은 반지에 마력을 집중했다. 그러자 사방으 로 바람이 휘몰아쳐 왔다. "태초의 어둠으로부터 태어난 자식들이여, 나는 마녀 메디아 너희의 권력자. 나 의 이름으로 너희를 부르노니 영겁의 세월보다 잔인한 굶주림의 먹이를 찾아 헤 메는 지옥의 욜파들이여. 나의 부름에 응하라. " 메디아의 주문과 함께 불타오르는 마법써클의 땅바닥에서 낮은 진동과 함께 푸르 스름한 빛으로 이루어진 얼굴들이 스물스물 나타나기 시작했다. 손아귀를 꺼내 올리며 천천히 지상으로 기어 올라 온 그것들은 희뿌연 푸른 빛으로 이루어진 수 십개의 꼬리를 남기며 빛살처럼 쏘아져 나가기 시작했다. 욜파들이 섬뜻한 이빨 을 드러내며 검은 입을 활짝 벌리자 끔찍한 괴성이 공기를 찢어 발겼다. 순식간 에 셰도우 아미의 살점을 뜯어 발기며 먹어치우는 굶주린 욜파들의 모습을 바라 보며 메디아의 눈빛은 사악하게 빛나고 있었다. 수 십마리의 욜파들은 반항하는 셰도우 아미의 몸부림에도 끈덕지게 달라붙어 살점을 깨물어 먹고 있었다. "마음껏 먹으렴. 지옥의 악귀들아." 메디아는 핏물로 흠뻑 젖어 가는 대지를 바라보며 달콤한 향기를 깊게 들이 마셔 보았다. 피의 향기. 아직도 열기로 뜨겁게 대지를 녹이고 있는 신선한 피였다. 그것은 그녀의 온몸을 휘도는 피의 본성을 날카롭게 깨우며 폐부를 가득채워 오 는 원시적이고 자극적인 유혹이었다. 처절한 비명소리가 크로노스의 깊은 산중을 뒤흔들고 있었지만 메디아의 입가에는 나른한 표정이 피어 올랐다. "마...맙소사." 억눌린 신음소리가 겨우 버티고 서있는 알렉토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가 상대하던 자는 이미 욜파들에게 뜯겨서 먹히고 너덜너덜한 옷자락이 조금 남아 있을뿐이었다. 아직도 그의 눈앞에서는 푸르스름한 욜파 덩어리가 셰도우 아미의 엉덩이를 뜯어 먹고 있었는데 살 찢어지는 소리가 소름끼치게 들려왔다. 괴성을 끊임없이 질러대는 욜파의 이빨 사이로는 핏덩이가 질질 흘러 내리고 있었다. 어느새 셰도우 아미조차 겁을 먹은 듯 뒤로 물러나고 있었지만 욜파의 굶주린 이 빨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일어나고 있던 코마지의 얼굴도 보기 흉하게 일그러지며 경악스런 외침을 터뜨렸다. "지옥의 욜파들...... 반..지의 마녀!" 믿을수가 없었다. 대륙에 현재 한두명만이 존재하고 있을 거라는 반지의 마녀라니...... 100년전만 해도 세개의 반지가 전해지고 있었지만 100여년전 세명의 마녀중 한명 의 마녀가 죽은 뒤 반지가 유실되고 또 한명의 마녀는 행방불명이 되었기 때문에 그녀의 반지도 행방이 묘연한 상태였다. 결국 전 대륙에 남아있는 반지의 마녀 라고 알려진 자는 단 한명만이 존재하는 셈이었다. 그러나 코마지가 알고 있기로 는 그 단하나의 반지를 소유하고 있는 마녀는 지금 사마리아 대륙에 있었다. 그 리고 코마지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행방불명된 반지의 주인이였던 마녀가 누구인 지도 잘 알고 있었다. 결론은 하나였다.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마녀는 100여년전 죽었다고 알려진, 그 의 사부가 평생동안 잊지 못하고 찾아다니던 바로 그 반지의 주인이 틀림없었다. 욜파들로부터 보호막을 치고 있던 그의 가느다란 입술이 엷은 떨림을 보이고 있 었다. "정말 존재하고 있었군. 드디어... 찾은 셈인가." 그의 호승심이 들끓고 있었지만 코마지는 자신을 조심스럽게 자제했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승부가 아니었다. 그의 사부가 평생에 걸쳐 집착하던 여인. 어쩌면 그 해답을 갖고 있을 반지의 주인을 만나게 된 것은 우연치고는 대단한 행운이었 다. 그는 자신의 욕심을 뒤로 미루고 지금은 물러나야 할 때라는 것을 알고 있었 다. 어차피 지금의 그는 그녀를 상대하기에 벅차다는 것을 확연히 깨닫고 있었다. 지옥의 악귀라 불리우는 욜파를 다스릴 수 있는 권력자. 최초의 마녀로부터 내 려오는 권능이자 반지의 주인이라도 함부로 행사할 수 없다는 위험한 능력. 그것 을 너무나도 쉽게 시전하고 있는 젊은 마녀라니 위험했다. 여기를 벗어나야만 했 다. 코마지는 디살로바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대장! 모두 철수해야 합니다." "도대체 저 괴물들은 뭐야?" 디살로바는 코마지의 힘으로 겨우 살아 남은 부하들 너머로 시체들 사이를 헤집 고 다니는 시퍼런 악귀들을 공포에 차서 노려 보았다. 핏덩이를 입안에 머금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는 욜파는 붉은 나비보다 더 괴기스러운 모습이었다. 코마지의 몸 주위로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욜파들에게 먹히고 살아 남아있는 셰도우 아미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셰도우 아미가 조 직된 이후로 최대의 위기 상황이었다. 짙은 먹빛을 품은 연기가 구름처럼 퍼지며 그들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러나 메디아는 그들이 그냥 여기를 벗어나게 할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냥 떠나면 곤란하지." 그녀는 게걸스럽게 시체를 뜯어먹고 있던 욜파들을 강제로 불러 들였다. 수 십마 리의 푸른 욜파들이 고함을 지르며 메디아의 사념이 명령하는 대로 코마지를 향 해 날아 올랐다. 검은 구름을 뚫지 못하고 튕겨져 나오는 욜파들이 분노에 찬 소 리를 질러 대자 메디아는 그들에게 좀 더 큰 힘을 낼 수 있도록 마법의 써클의 강도를 높였다. 그녀의 파랗게 변한 눈동자가 더욱 강렬한 빛으로 변해가고 서서 히 구름을 뚫고 들어가는 욜파들이 꼬리를 늘어뜨리며 셰도우 아미들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코마지는 다급하게 손을 내밀며 가장 가까이에 있는 디살로바를 중심으로 몇 명 의 사람들만을 공간의 이동로에 집어 넣었다. 조금만 더 늦으면 그녀의 손아귀에 잡힐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막 그곳을 벗어날 무렵 갑자기 채찍같은 공기가 몰려들더니 그들을 잡아 당기기 시작했다. 코마지는 망토에서 작은 구슬을 꺼내 손안에 쥐고 공간을 옥죄어 오는 힘을 향해 집어 던졌다. 구슬은 산산히 조각나 며 맞받아치는 힘을 분산시기 시작했다. 방해하던 힘으로부터 자유로와진 검은 연기는 순식간에 무엇엔가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사라져 갔고 그와 함께 셰도우 아미와 코마지도 사라져 갔다. 그러나 붉은 구슬 조각의 영향에서 벗어난 메디아 의 힘은 기어코 사라져 가는 셰도우 아미중 두어명을 사로 잡을 수 있었다. 메디아는 욜파들을 원래의 곳으로 돌려보내고 손끝으로 셰도우 아미를 끌어 당기 면서 사라져버린 검은 연기를 아쉽게 쳐다 보았다. 그 공간에는 이미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녀석을 너무 쉽게 봤군." 그녀가 나직히 중얼거릴때였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 쓰다시피한 마시가 투덜거리 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가쁜 숨소리로 미루어보아 꽤나 열심히 움직였나 보다. "뭐야? 뭐! 이제 놀만하니까 혼자서 재미보고." 아마도 욜파들 때문에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메디아는 마시에게 손을 내밀었다. "빗자루 내놔." "치." 마시는 꿍한 얼굴로 들고 있던 소드스틱을 메디아에게 건네 주었다. 사실 별로 그녀의 손에 있는 게 반갑지 않은 물건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이것도 가져가." 마시는 머리에 달라 붙어 있는 블루잉을 두 손으로 붙잡으며 말했다. 그러나 블 루잉이 그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늘어졌기 때문에 떨어뜨려 놓을 수가 없었다. "이잇...뭐야? 내려와 너. 그만 놓지 못해?! 따갑단 말이야. 놓지 못 하겠어. 이 꼴도 보기 싫은 거북이야." 그 순간 메디아는 물끄러미 블루잉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블루잉이 가장 싫어 하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자신을 거북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블루잉의 약간은 유쾌해 보였던 얼굴이 순간 무표정으로 뒤바뀌더니 곧이어 서서 히 일그러졌다. "버릇없는 도.마.뱀. 새끼 주제에 누구한테 거북이라는 거야?" 거북이 껍질을 붙잡고 머리에서 떼어 내려던 마시의 손짓이 멈짓했다. 그러더니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천천히 구겨지고 있었다. - 계 속 - 늦은데다가 양도 적군요. ㅠ.ㅠ 번 호 : 58 / 83 등록일 : 1999년 12월 19일 22:29 등록자 : CHO1971 조 회 : 1454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58.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사랑은 빗나간 화살이 되어 달의 심장을 가르고 선홍빛 눈물은 헛되이 타인의 가슴을 적시리라. 그것이 너희가 가는 길. 너희에게 주어진 삶인 동시에 너희가 선택한 운명이다. 제 58 장 봉인문자. 마시와 블루잉이 드잡이질하며 티격태격하는 사이 메디아는 그들을 방치하고는 겨우 잡을 수 있었던 셰도우 아미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그러나 메디아는 지난번 에 알아낸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기에 실망만 했을 뿐이었다. 그 녀는 괜시리 바트를 노려보았지만 바트 또한 그녀가 알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결국 메디아는 또다시 바트와 동행할 수 밖에 없었다. 마시는 블루잉이 머리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기에 바닥을 구르며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블루잉은 필사적으로 마시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늘어졌기에 나 중에는 마시의 검은 머리카락들이 그의 발가락에 엉켜 붙어 있을 정도였다. 하지 만 금방이라도 난리가 날 것처럼 날뛰던 마시도 밥먹자는 메디아의 말한마디에 블루잉이 머리위에 붙어있건 말건 모든 동작을 멈추고 메디아에게 달려 갔다. 마 구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파란 거북이 한마리가 두 눈을 번쩍거리며 앉아 있 는 모습이 그리 보기 좋지는 않았지만 마시에게는 그런 것보다 먹는게 훨씬 더 중요했다. 다른 사람들은 너무 지친데다가 이 와중에 먹을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지만 아침 이면 더 배가 고파지는 메디아와 마시는 꿎꿎하게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사방에 서 풍기는 비릿한 피냄새가 역겨울만도 했지만 그들에게는 그런것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요리할틈도 없이 메디아는 가방에 보관해 두었던 딱딱한 빵과 구운 고기를 꺼내서 먹었다. 마시에게도 똑 같은 것을 건네 주었지만 그것으로는 양이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마시는 게눈 감추듯 빵과 고기 를 먹고는 애처로운 눈으로 메디아를 바라보며 칭얼거렸다. "더 줘라, 메디아야. 나 배 고파." 메디아는 씹어먹고 있던 고기를 얼른 입속에 집어 넣으며 우물거렸다. "이제 없어." 구운 고기도 어제 요리한 것을 예비용으로 가방에 보관해 두었기 때문에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메디아가 타고 다니는 말에는 제법 먹을만한 것이 많았지만 말 들이 모두 무너진 성 밑에 깔려 버려서 이제는 먹을 것도 없었다. 그래도 마시는 끈질기게 메디아에게 매달렸다. "나 배 고프다구. 배 고프단 말이야. 치잉~~." "말고기라도 먹을래?" 그들이 식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신물을 토해내고 있던 로사리아의 얼굴이 더 하 얗게 질리고 있었다. 속이 불편한 듯 고개를 외면하고 있던 오피온과 다른 이들 도 설마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말고기라니? 설마 여기 널려있는 것들을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아니나 다를까. 메디아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마시를 보더니 사방에 피투성이가 되어있는 말 시체들 중에서 제법 먹을만한 것을 골라 내었다. 날걸로 먹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마시였지만 손가락과 옷에 피가 묻으면 귀찮게 되는 것은 메디아였기에 마 법으로 잘 구워서 주었다. 금방 헤헤거리며 게걸스럽게 말고기를 뜯어먹는 마시 의 모습이나 그것을 무표정하게 쳐다보는 메디아나 둘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도저 히 정상인 같아 보이지 않았다. 그들과 좀 떨어진 곳에 있어서 다행히 그 모습을 보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제피로스와 가프겐은 딘의 시체를 땅에 묻고 그의 무덤 앞에서 한동안 허탈한 심 정으로 주저 앉아 있었다. 이토록 허망하게 친구를 잃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전 쟁터도 아니고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뛰어난 기사였 던 딘을 잃고 로스코의 치안대장이었던 저스티스마저 잃었다. 더구나 병사들 수 십명이 하룻밤새 모두 죽고 겨우 두명만이 살아남아 있을 뿐이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제피로스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그 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허물없이 웃음을 나누던 친구가 지금은 차디찬 땅속에 누 워있게 된 것이다. 눈시울이 붉어진 것도 모른채 제피로스는 아침 안개속에서 오 랫동안 친구의 무덤을 바라보았다. 카란은 부상당한 병사와 가프겐을 치료하고 알렉토의 상처도 돌봐 주었다. 그리 고도 정신적 충격에 휩싸인 로사리아에게 축복을 내려주었는데 그 모습을 본 아 네모스가 에코를 한번 쳐다 보고는 카란에게 말했다. "많은 인원도 아니니 모두에게 축복식을 행해 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축복식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요." 하얀 신관의 복장을 한 카란이 맑은 물로 일일이 축복식을 행하기 시작했다. 그 는 검지와 중지를 모아 손가락에 물을 묻히고 사람들의 이마와 머리중앙에 대고 기도를 했다. 카란은 마시에게도 같은 방법으로 기도를 해주려 했지만 마시는 졸리다며 카란을 무시하고 앉아서 생각에 잠겨 있는 메디아의 무릎을 베고 누워 버렸다. 밤새도록 소란을 떨었으니 졸린 것도 당연했다. 카란은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드레곤에게 자신이 축복기도를 해주어봤자 도움이 될 리도 없었던 것이다. 그는 메디아에게 다가갔다. "제 기도를 받으시겠어요?" "맘대로 해." 메디아는 생각에 잠겨 아무렇게나 대답해 버렸다. 그녀는 한손으로 턱을 괴고 어렸을 때의 모모스를 떠올려 보고 있었다. 언제나 침착하고 내성적이었으며 차가운 초록색 눈을 가졌던 모모스가 지금은 어떤 모습 일지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지금 그가 무슨 일을 하고 있기에 셰도우 아미로 부터 그의 이름이 나오는지에 대한 물음을 던져 보았다. 과연 붉은 나비는 로만 이 아니라 모모스의 짓일까? 카란은 메디아의 이마를 물이 묻은 손가락으로 살짝 누르며 기도문을 외웠다. "어둠의 신 에레보스의 종이 당신께 기도하오니 메디아의....." 그러나 카란은 끝까지 기도를 마칠 수가 없었다. 그가 기도문을 외우는 순간 메 디아의 이마에서 빛이 새어 나오며 봉인문자가 보였던 것이다. 그것은 카란의 목 에 걸려 있는 펜던트에 새겨져 있는 문자와 같은 모양이었다. "어엇!" 그러나 메디아는 생각에 잠겨 있느라 카란이 놀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건......' - 계 속 - ^^; 번 호 : 59 / 83 등록일 : 1999년 12월 19일 22:39 등록자 : CHO1971 조 회 : 1693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59.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사랑은 빗나간 화살이 되어 달의 심장을 가르고 선홍빛 눈물은 헛되이 타인의 가슴을 적시리라. 그것이 너희가 가는 길. 너희에게 주어진 삶인 동시에 너희가 선택한 운명이다. 제 59 장 기억의 파편. 햇살이 길게 늘어짐에 따라 높은 담벽이 황금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드넓은 대지에 펼쳐진 도시의 전경을 바라다 볼 수 있는 탑의 지붕위에서 중년의 한 사내가 조용히 서있었다. 그의 길게 늘어진 회색머리카락 사이로는 은빛이 언뜻언뜻 보였고 가늘게 주름진 얼굴에는 저녁 햇빛이 따뜻하게 물들어 있었다. 백이십살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멀리 있는 도시를 향해 있는 그의 초록색 눈 동자만은 생생하면서도 냉정한 듯 고요해 보였다. 그의 입술이 뒤에 서 있는 두 사내를 향해 조용하게 열렸다. "반지의 마녀가 틀림없었느냐?" "예, 틀림없습니다. 제 눈으로 분명히 보았습니다." 성벽 위에 있는 사내의 뒤쪽에서 조금 떨어져 서있던 코마지의 목소리는 약간 긴 장한 듯 했다. 그는 회색의 긴 망토로 얼굴아래까지 깊게 가린 차림새였다. "......" 사내는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서쪽을 향해 묵묵히 서 있는 사내의 뒷모습은 오 래된 삼나무같은 느낌을 불러 일으켰다. 마치 그곳에 백년이라도 서 있을 것 같 은 분위기였다. 코마지의 옆에서 함께 서 있던 디살로바가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앞으로 한발 나섰다. "셰도우 아미를 너무 많이 잃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바트라는 그 녀석을 추적 했던 부하들까지 모두 죽은 듯 합니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 디살로바와 코마지는 크로노스 산맥에서 도망치듯 메디아에게서 벗어났지만 짧은 거리를 이동한 것에 불과 했었다. 그들은 며칠동안 쉬지도 않고 짧은 거리를 반 복 이동하면서 겨우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그러나 사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시투니아의 수도 판을 눈앞에 두고 그는 사라져 가는 붉은 석양빛을 응시할 뿐이 었다. 과거 판타리아 대륙의 절반에 해당하는 광활한 땅을 지배했던 시투니아가 300년 전의 전쟁으로 파라에게 국토의 절반을 내어 주었던 일은 아직도 시투니아인들에 게 치욕으로 기록되고 있었다. 여전히 호전적인 기질을 가진 시투니아의 왕족들 은 호시탐탐 파라를 넘보고 있었지만 파라제국의 힘은 이미 그들이 함부로 넘볼 수 없는 것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현재 시투니아에 굴림하고 있는 칼리오 2세의 왕비 세이렌은 야망이 큰 여자였다. 결코 북쪽으로 밀려나 조용히 웅크리고 있는 시투니아만으로는 만족하 지 못 할 여자였던 것이다. 그녀는 좀 더 많은 땅과 권력을 원했다. 그리고 세이 렌은 그럴만한 힘과 머리를 가진 여자였다. 세이렌이 가장 믿고 있는 힘중에 하 나가 바로 이 중년의 사내였다. 시투니아의 왕실 마법사이자 그녀의 말이라면 드 레곤의 심장이라도 기꺼이 가져다 줄 사람. 바로 모모스였다. 그는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크로노스 산맥으로는 계속 부하들을 보내게. 전쟁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셈 이지. 앞으로의 전쟁에서 파라를 묶어 두려면 그들의 무역로를 철저히 막아야 하 네. 아이니강으로도 계속 마법사들을 보내고 있으니까. 이제 시간이 지나면 파라 로 가는 모든 물자가 끊어지게 되겠지. 특히 아르카디아에서 생산되는 무기 보급 을 철저히 막도록 하게나. 서쪽 코사나 지방에서는 한달째 전쟁이 지지부진한 상 태지만 시간이 조금만 더 흐르면 우리 쪽이 유리해 질걸세. 그런 의미에서 아이 니 강은 매우 중요해. 그쪽으로는 디살로바 자네가 직접 가줬으면 좋겠군. "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던 사내는 다시 코마지를 향해 말했다. "코마지, 너는 그 반지의 주인을 은밀히 따라 가거라. 그리고 그 바트라는 녀석 은 죽여 없애버려. 아직은 왕성에 있는 그녀가 노출되어서는 곤란하니까." "알았습니다. 확실히 입을 막도록 하죠. 그런데 반지의 마녀는 그냥 따라 가기만 하면 됩니까? " 문득 사내는 코마지를 향해 돌아섰다. "설마 너는 직접 그녀를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냐?" 코마지의 얼굴에는 은근한 자신감과 함께 강렬한 호승심이 떠올라 있었다. "어리석구나, 반지의 주인들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너는 아직도 모르겠느 냐? 그녀라면...... 그녀가 틀림없다면 지옥의 욜파들을 다스리는 것쯤은 일도 아니지. 마음만 먹는다면 너 같은 건 쉽게 없앨 수 있을거다. 마치 장난처럼 말 이다." 코마지는 그럴리가 없다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스승의 말을 함부로 반박할 수는 없었다. 그의 스승은 어딘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해를 등지 고 있는 스승의 입술에서 혼잣말인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나직히 흘러 나왔다. "메디아...... 이제서야 너를 만나는구나. 이제야......" 메디아. 아름다운 마녀 블러디나의 분신 같았던 작고 귀여웠던 메디아. 평생 그의 아버지를 옭아매고 있던 그 이름들. 그리고 이제 그의 인생까지 지배하고 있는 이름이었다. 이제야 그는 100여년만에 그녀를 다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백여년전 그가 열세살때였다. 현자의 나무에 기대있는 모모스의 얼굴로 맑은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의 시 선속으로 들판에서 뛰어노는 두 어린 여자아이의 모습이 들어왔다. 귓가를 스치 는 맑은 웃음소리가 정겨웠지만 소년의 초록빛 눈동자는 슬퍼 보였다. "꺄아악....우웃...후하하... 꺄르르~" 레이스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숨이 넘어갈 듯 웃음을 터뜨리는 어린 메디아가 풀 밭을 뒹굴고 있었다. 싱그러운 바람이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을 희롱하며 지나갔 다. "꺄악...꺄르르.... 그만... 그만....아하하..." 메디아의 조그만 몸을 사정없이 간지르는 홀링의 분홍빛 뺨에 즐거움이 가득 묻 어나고 있었다. 소년의 시선이 이내 그들에게서 떨어져 나와 아버지에게로 향했다. 그가 너무나 존경하는 아버지이자 마스터인 로만. 그러나 그는 아무리 존경하고 사랑해도 아들인 자신을 단한번도 돌아보지 않는 냉정한 아버지였다. 그 아버지 가 지금 어린 메디아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왜 아버지는 그녀에게 집착하는 것일까? 왜 아버지는 아들인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지? 왜 아버지는 왜.....나보다 메디아를.... 메디아를 소중히 여기는 것일까? 소년의 머릿속에 가득한 것은 아버지 로만에 대한 사랑과 원망이었다. - 계 속 - 이제는 얼굴에 철판을 깔기로 했답니다. 예전처럼 글쓰는 게 즐겁지만은 않아서 머리도 아프고 소화불량에 불면증까지 괴롭히는 지경에 이르렀죠. 그래서 이젠 저 자신을 위해 글을 쓰기로 작정을 했지요.(처음처럼.) 쓰고 싶을때 쓰기로 말입니다. 억지로는 죽어도 못하겠어요. (내가 미쳤었지... 어쩌자고 연재 날짜를 공지했었을꼬.....) 그래도 여러분은 마음껏 돌을 던지십시요. 여러분은 이 글을 읽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권리가 있으십니다. 번 호 : 60 / 83 등록일 : 1999년 12월 29일 07:48 등록자 : CHO1971 조 회 : 1504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60.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사랑은 빗나간 화살이 되어 달의 심장을 가르고 선홍빛 눈물은 헛되이 타인의 가슴을 적시리라. 그것이 너희가 가는 길. 너희에게 주어진 삶인 동시에 너희가 선택한 운명이다. 제 60 장 사랑에 대한 질문. 크로노스 성이 무너지면서 말들이 모두 깔려 죽었기 때문에 메디아 일행은 부상 당한 몸이었지만 도보로 산을 지날 수 밖에 없었다. 모두 남루한 모습으로 고산 지대를 힘겹게 걸어가야만 했다. 공주 로사리아의 발은 온통 부르트고 심한 물집 이 잡혀서 날마다 카란이 돌봐주어야 했고 부상을 입은 병사들도 험한 산에서의 고된 강행군으로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그들은 짐도 거의 잃어버린 상태였고 식 량도 극히 적었기에 산속에서 사냥을 해서 식사를 해야 했다. 말을 타고 사나흘 이면 충분한 거리를 그들은 일주일이나 걸려서 산자락 밑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카란은 빗자루를 지팡이 삼아 비탈진 길을 내려가는 메디아의 모습을 유심히 바 라보았다. 그는 아직도 자신이 본 것을 메디아에게 정직하게 말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메디아의 이마에 순간적으로 나타났던 봉인문자는 어둠의 신 에레 보스를 섬기는 신관인 카란으로 인해서 모습을 잠깐 들어낸 것이었다. 그것은 부 분적으로 어떤 기억을 봉인한 흔적이 분명했다. 에레보스 신전 소속의 누군가가 메디아의 기억을 봉인한 사실을 같은 신을 섬기는 자신이 발설해도 될지 카란은 알 수가 없었다. 우선 그런 것보다는 메디아가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걱정이었다. 분명히 그녀 자신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고 안다 고 해도 봉인문자를 해지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로지 직접 봉인한 사람 만이 봉인문자를 해지 할 수 있었다. 누구일까? 누가 메디아의 기억을 봉인했을까? 그녀의 어떤 기억을 봉인한 것일까? 카란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았지만 그 자신이 메디아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으 므로 아무런 해답도 얻을 수 없었다. 그는 당분간 메디아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결심했다. 그녀는 지금도 충분히 복잡해 보였는데 거기다가 해 결할 수도 없는 문제를 더 추가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산을 내려오면 번화한 도시 베르담으로 향하는 길목에 대륙을 가로지르는 아이니 강을 만날 수 있었다. 아이니 강은 판타리아의 3대 운하중 하나에 속했는데 3대 운하가 속한 강들은 모두 대륙의 지붕이라 할 수 있는 다크 마운틴을 기점으로 시작했다. 서북쪽의 라비론에서 시작하여 파라의 서쪽을 통과해 페렌토를 가로질 러 황금의 바다로 흘러가는 스누강이 첫번째 대운하였다. 그리고 다크마운틴의 연장선인 크로노스 산맥의 상류에서 시작하는 아이니 강은 파라의 중앙을 가로질 러 사막과 작은 공국 다마스코를 거쳐 남국의 아르카디아까지 지나서 대해라 불 리우는 남쪽 흑해로 뻗어나갔다. 아이니강은 여러국가를 포함해 흐르기 때문에 무 역에 큰 영향을 주고 있는 두번째 대운하로 풍요와 부를 상징했다. 그리고 300여 년 전에는 시투니아의 영토에 속했지만 현재는 파라의 동쪽에 속하는 라더스 강 은 판타리아 대륙에서 가장 길은 대운하이기도 했고 오로지 파라의 국토에 속하 며 북에서 남쪽으로 흘러서 결국에는 아이니강과 합쳐져 흑해로 흐르는 강이었다. 일행이 아이니 강에 도착하자 볼비는 자신의 고향 아르카디아로 가기위해 일행 과 헤어져야만 했다. 그는 에코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한동안 눈물을 흘리며 말 을 잇지 못 했다. 아르카디아로 향하는 배에 승선한 볼비는 갑판위에서 마시에 게까지 오동통한 손을 흔들며 방울방울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볼비는 그동안 정들었던 사람들을 하나하나 쳐다보고 언젠가는 그들을 다시 만날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울먹일 수 밖에 없었다. 하얀 수염을 바람에 내맡기고 머리를 연신 흔들며 인사하는 볼비의 모습은 정 많고 섬세한 그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 배가 멀어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서 작별을 마친 일행은 아이니 강의 복잡한 선착장에서 유목민들이 야생마를 길들여 파는 말을 구해 다시 길 을 떠날 수 있었다. 그 동안의 남루한 복장을 걷어치우고 새옷을 입고 깔끔하게 단장한 일행은 며칠동안의 끔찍했던 모습에서 겨우 벗어났다. 부유한 도시 베르담에서 여장을 푼 제피로스는 베르담의 영주를 만나 크로노스 산맥의 상황을 설명하고 미리 왕궁으로 간단한 소식을 보내도록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공주를 위한 마차와 죄인을 수송하기 위한 수레를 빌려서 서둘러 길을 나 섰다. 베르담에서 수도 오람까지는 비교적 길이 잘 닦여져 있어서 서둘러 간다면 보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일행은 가능한 최대의 속도로 수도 오람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완연한 봄날씨를 자랑하듯 사방에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해 있었지만 급히 말을 몰아가는 일행에게 그것들은 그저 스쳐가는 화려한 색채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이 지나는 작은 마을마다 농부들이 들에 씨를 뿌리거나 밭을 갈고 있었다. 어쩌다 마주치는 해맑은 어린 아이들이 뛰어노는 풍경에는 노란 꽃잎이 흐드러지 게 피어 고운 빛깔을 자랑하는 개나리도 보였고 작은 언덕에 자라는 산갈나무에 서는 황록색 꽃이 피어 있었다. 10월이 되면 산갈나무의 열매로 도토리 묵을 해 먹을 수 있는데 겨울에는 앙상했던 가지가 오월이면 연녹색의 잎을 내밀기 시작 하는 나무로 껍질은 코르크재로 쓰이는 매우 유용한 식물이었다. 오람으로 향하는 말을 재촉하며 달리는 일행이 잠시 쉬어가게 된 마을에서는 때 마침 조촐한 결혼식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아침부터 점심무렵까지 쉬지 않고 채찍질을 가해 달려온 일행에게는 참으로 정겨운 풍경이었다. 신랑이 세번째 부 인을 맞이하는 것이기에 화려한 결혼식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마을은 축제 분위 기에 젖어 있는 것 같았다. 서른 정도 되어보이는 신랑의 옆에는 이제 열 일여덟 이나 되었을까 싶은 애띤 신부가 봄꽃으로 장식된 화관을 쓰고 행복한 표정으로 서약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제일먼저 신랑에게 사랑과 가정의 평화를 맹세하고 그의 첫째 부인과 둘째 부인에게도 같은 형식으로 믿음과 가정의 평화를 약속했 다. 어린 신부는 관습에 따라 세번째 부인이 된다는 것이 전혀 애석하거나 슬프 지 않은 모양이었다. 일부다처제로 살아간다는 것에 거부감이 없는 여인이 틀림 없었다. 어차피 판타리아 대륙 대부분의 나라가 그런 관례에 따라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니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마시의 시선에는 미묘한 호기심이 담겼다. "메디아야." 메디아는 가까이서 진행되는 낭만적인 결혼식 장면보다는 야외에 잘 차려져 있는 음식에만 시선을 고정시키고 열심히 먹는 중이었다. 남이야 결혼을 하건말건 그 녀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결혼식 덕분에 공짜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게 된것 이 흐뭇할 뿐. 그러나 마시는 난생처음보는 인간의 결혼이라는 관습에 꽤 많은 호기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양손으로 허겁지겁 음식을 집어 먹으면서도 그의 붉 은 눈동자는 줄곧 신랑신부에게 고정되었다. "인간들은 왜 결혼해?" "그런 건 왜 물어?" "제피로스가 그러는데 아기 낳을려고 결혼한다는 게 정말이야?" 메디아는 손가락으로 양념이 잘 스며있는 오리날개를 잘게 찢어서 입속에 넣다가 멈칫했다. 그녀는 탁자 끝에서 가프겐과 식사를 하고 있는 제피로스를 흘낏 노 려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시 교육상 전혀 도움이 안되는 인간이었다. 그나저나 뭐라고 대답을 하지? 메디아가 그렇게 망설이고 있을때 아네모스가 대신 대답했다. "사랑하니까 결혼하는 거야, 마시." "사랑?" "응." "그럼 저 남자는 세 여자 모두 사랑해서 결혼하는 거겠네?" "으음... 그럴꺼야." 아네모스는 대답을 조금 얼버무렸다. 솔직히 모든 인간이 사랑 때문에 결혼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이미 옛날에 알았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제피로스의 황당한 대 답이 더 진실에 가까운 지도 몰랐다. 합법적인 자기 후계자를 낳기 위해 결혼하 는 것. 그게 인간들이 결혼하는 진짜 이유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아네모스는 마 시에게 그렇게 말해 주고 싶지는 않았다. "사랑이 뭐야? 뭔데 다들 결혼해? 인간은 모두 다 사랑하게 되어 있는 거야? 그 래서 모두 결혼하는 거야?" 마시의 질문에 그런대로 대답을 잘해주던 아네모스도 이쯤되자 곤란해졌다. 자기 도 아직 모르는 걸 무슨 수로 대답할 수 있겠는가. 그때 메디아가 가시돋힌 어투로 마시에게 톡 쏘아 붙였다. "질문은 그만하고 먹기나 해. 나중에 배고프다고 투덜대지 말고." "사랑이 뭐냐니까?" 그러나 끈질긴 마시는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좋아하는 거하고 비슷한 거야." 아네모스는 그럴듯한 대답을 했다. 그러자 마시는 메디아를 향해 확인하듯 물었 다. "메디아야, 사랑이란 게 좋아하는 거랑 뭐가 달라?" "나도 잘 모르니까 나한테 묻지마." 의외로 마시는 메디아의 퉁명스런 대답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메디아는 손에 잡히는 음료를 마시며 눈을 가늘게 치켜떴다. "너 왜 고개를 끄덕이는 거니?" "이제 알았어. 메디아는 사랑이 뭔지 몰라서 결혼을 안하는 거구나." 메디아는 꿀꺽꿀꺽 잘 삼키던 딸기즙이 목에 걸려 잠시 숨을 골라야 했다. "뭐?!" 그러나 마시는 방금 자신이 한말에 대해서는 까먹고 다시 질문을 시작했다. "그런데 사랑하면 모두 결혼하게 되는 거야?" 메디아와 마시의 맞은편에 앉아 음식을 먹으며 신랑신부를 구경하고 있던 카란이 마시의 순진한 말에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사랑한다고 모두 결혼할 수 있는 건 아냐." 갑자기 굵직한 알렉토의 낮은 음성이 들리자 마시가 왼쪽 옆자리를 돌아 보았다. 알렉토는 약간 굳은 얼굴로 맥주를 들이키고 있었다. "사랑한다고 모두 결혼하는 게 아니야?" 알렉토는 아름답게 반짝거리고 있는 소년다운 마시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더니 다 시 시선을 술잔으로 돌렸다. "사랑이란 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질 수도 있고 사랑 하기 때문에 서로 미워하기도 한다. 그래서 사랑하면 괴롭기도 하지." "에? 그런 게 어딨어? 사랑이 뭔지는 몰라도 그게 좋아하는 거랑 비슷하다며? 좋 아하는데 왜 미워하고 괴로워한다는 거야?" 그러나 알렉토는 마시의 쏟아지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알렉토는 자신이 떠나온 고향과 그곳에 남아있는 형제들을 떠올리며 아릿한 아픔 을 느꼈다. 모하비 부족은 사랑하는 여자를 얻어야 할때 경쟁자가 많으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도 사랑하는 여인을 얻을 수 있다면 목숨이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는 남자였다. 그러나 그 여인을 얻기 위해 잃어야 하는 것 이 자신의 생명뿐이 아니었을 때 알렉토는 미련없이 사랑하는 여인과 고향을 떠 났다. 그가 사랑한 여인은 그의 하나밖에 없는 누이였고 그의 경쟁자 역시 목숨 보다 소중한 남동생이었기 때문이었다. 근친의 결혼이 자연스러운 모하비 부족사 이에서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알렉토는 차마 친동생과 목숨을 걸고 싸 울 수 없었기 때문에 조용히 그곳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떠나면서 그는 일생동안 그들을 잊지 못 하리라 생각했고 실제로 알렉토는 단 한순간도 잊은적이 없었다. 언젠가는 고향에 돌아가 그들을 보아도 고통스럽지 않을 날이 올것이라 생각하며 알렉토는 자신을 위로했다. "뭐야? 왜 대답을 안해? 사랑이 뭔지 제대로 말을 해줘야지. 그렇게 아리송하게 말하면 어떡해?" 마치 질문하는 것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도 되는 양 마시는 대답없는 알렉토를 향해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그때 가만히 지켜보던 카란이 진지한 눈빛으로 마시를 향해 말했다. "혹시라도 나중에 생명을 걸고 지켜주고 싶은 이가 생기면 그게 사랑일겁니다, 마시." "응?" 카란이 마시를 향해 조용히 일러준 말은 꽤 설득력 있게 들렸다. "그런 게 사랑이란 거야?" "아무도 사랑이 뭔지 정확히 설명해 줄 수는 없을겁니다. 그건 스스로 느껴야만 알 수 있는 감정이지요. 그리고 사람마다 사랑에 대한 생각은 모두 다르답니다. 어떤 이는 사랑 때문에 행복하지만 어떤 사람은 사랑 때문에 더 불행할 수도 있 습니다." "모두 다르다구? 뭐가 그렇게 어려워? 알렉토도 그렇고 인간들은 뭐든지 복잡하 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니깐." 마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기는 듯 했지만 저마다 다른 대답을 하는 사 람들 때문에 짜증이 치밀었는지 하얀 이마를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그 머리로 그걸 깨닫다니 놀랍군." 메디아가 앉아 있는 탁자 위에서 음식을 씹어먹고 있던 블루잉이 혼자 중얼거렸 지만 그말은 메디아만이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메디아는 마시를 향해 놀랍도록 차갑게 말했다. "사랑은 어리석은 거야, 마시. 너 자신을 망가뜨리고 상대방을 파멸시키는 위험 한 자기 집착의 감정일 뿐이야. 사랑 따위는 배우지 않아도 돼." 그녀의 얼음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어조에 마시는 눈만 멀뚱거렸지만 카란과 아 네모스는 메디아의 가면같은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네모스의 옆에서 며칠동안 시 선도 들지 않던 에코조차 기이한 표정으로 메디아를 올려다 보았을 정도였다. "사랑같은 건 모르면 모를수록 더 좋단다, 마시."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더 보탠 메디아는 식욕이 떨어졌는지 더 이상 음식에도 손 을 대지 않았다. 하지만 마시는 지금 나눈 이야기들을 꼭 배워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오래전 죽어가는 엄마가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한말이 뭐였더라? 그래. 감정을 느 끼라고 말했지. 그게 사랑을 말했던 것일까? 생각에 잠긴 마시의 붉은 눈동자에 미묘한 음영이 서리고 있었다. - 계 속 - 크리스 마스 즐겁게 보내셨는지...... 99년 마지막 한주를 멋지게 보내시고 새로 시작되는 천년을 근사하게 맞이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두 뜻하는 일 이루시고 행복하고 즐거운 일들만 있기를 기원합니다. * 새해 복 많이 많이 많이 받으세요. *^^* 번 호 : 61 / 83 등록일 : 1999년 12월 31일 09:20 등록자 : CHO1971 조 회 : 1491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61.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순수하게 까맣던 그 밤, 어둠 속에 함몰하는 별빛을 보았을 때 죽어간 영혼의 붉은 혈액은 슬픈 그대 눈물이 되었고 숨겨진 진실은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았다. 제 61 장 백치가 되버린 미끼. 오람으로의 길을 재촉하는 일행은 마을에서 하루를 묵고 해가 뜨자마자 간단한 식사를 한 후 서둘러 길을 나섰다. 메디아가 탄 말이 마을 후미를 지나 한적한 집 앞을 지날 때였다. 그녀의 시선 에 작은 마당을 배회하는 암닭무리에게 어린 소녀가 모이를 주고 있는 모습이 보 였다. 소녀의 앞치마에는 빵가루가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어린 소녀는 닭들이 그녀의 앞치마를 쪼아대자 소리를 질러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소녀의 아빠 인 듯한 남자가 나와 소녀를 뒤에서 번쩍 들어 올렸다. "꺄아아~ 아빠!" "우리 공주님, 닭들하고 뭐하고 있었어?" 남자는 어린 여자 아이를 빙빙 돌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밤사이 내린 이슬에 젖어있는 흙냄새가 메디아의 코끝으로 풋풋하게 풍겨왔다. 맑은 이슬방울을 머금은 풀잎은 신선한 초록으로 빛났고 어린 여자 아이의 귀여 운 목소리가 평화로운 아침을 깨우고 있었다. "암닭이 내 앞치마에 뛰어 올랐어요." "이런 앞치마에 빵가루가 잔뜩 묻어 있구나." 공중으로 들어 올려진 소녀의 앞치마를 쳐다보던 남자는 어린 딸에게 눈을 찡끗 해 보였다. 그러더니 조그만 아이를 어깨에 올려 놓으며 닭들을 닭장으로 몰아 넣기 시작했다. 아빠의 어깨에 올라앉아 맑게 웃으며 귀여운 손가락을 꼼지락거 리는 소녀와 그 딸과 함께 유쾌하게 웃는 남자의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정겨워 보였다. 메디아는 자신도 모르게 그 부녀의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에 무언지 모를 그리움 같은 것이 뭉클하게 피어 올랐다. 메디아는 순간 당황스러웠다. 왜 저 모습이 이리도 가슴 아프게 느껴지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머리를 가볍게 흔들며 자신도 모르게 멈췄던 말의 옆구리를 힘차게 두드렸다. 그녀의 뒤에서는 마치 그녀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느끼기라도 한듯 카란이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오람에 도착하기 이틀 전이었다. 갑자기 아침에 깨어난 바트가 음식을 토하며 경기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카란이 급히 바트를 치료하기 위해 다가왔지만 바트는 하얀 거품을 잔뜩 물고 눈을 하얗 게 치켜떴다. 바트의 손가락이 금새 파랗게 변하더니 손톱이 빠져나오며 악취나 는 피가 흘러 나왔다. 그의 손가락을 쳐다본 카란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독이야. 룬초를 먹은 게 틀림없어." 룬초는 독성이 강해서 해독을 한다고 해도 완치가 불가능했다. 그것도 해독제를 빨리 먹였을 때 겨우 생명을 건질 수 있었고 발작하기 시작한 시간으로부터 한 시간 안에 해독하지 못하면 끝이었다. "대체 누가?" 놀라 달려온 제피로스와 가프겐이 각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어제 저녁에 뭘 먹였지?" 모두가 아네모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볼비가 아르카디아로 떠난 후 바트에게 음 식을 먹여주는 사람은 아네모스였다. "그는 닭고기 스프와 양고기를 조금 먹었을 뿐입니다." 자신에게 몰려드는 의심스런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아네모스는 제피로스의 질문에 침착하게 대답했다. "해독은 가능하오?" 알렉토는 무엇보다 바트의 생사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카란은 고개를 저었 다. "룬초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그걸 구할 수 없을 거요." "룬초라구? 그건 독이쟎소?" "룬초의 꽃은 맹독이지만 그 뿌리는 해독제로 쓰이오." 룬초의 원산지는 시투니아 북부로 매우 희귀한 식물이었다. 6월에서 11월 사이에 볼 수 있는데 독기가 강한 8월에 체취하면 독의 성능이 더 뛰어났다. 룬초는 물 에서 자라는 식물로 뿌리는 물속에 있고 줄기는 수면 밖으로 자라는데 뿌리의 해 독 성분은 꽃잎과는 달리 11월에 체취해야 효능이 좋다고 알려져 있었다. 독과 해독의 성분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식물이었지만 그 효능을 사용하는 시기가 달 라서 룬초를 눈앞에 두고도 죽을 수 있었다. 더구나 희귀한 룬초의 뿌리를 11월 에 체취해서 신선한 상태로 가지고 다니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카란은 거품을 흘리며 온몸을 뻗뻗하게 경직시키는 바트를 낭패스럽게 쳐다보았 다. 그의 힘으로 독이 퍼지는 것을 늦추려 해도 룬초는 발작하기까지 시간이 상 당시간 걸리는 만큼 이미 독은 온 몸으로 퍼져있는 상태였다. 밤사이 독이 퍼져 이미 손 쓰기에는 너무 늦어 있었다. 해독제가 없다면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 는 상황이었다. 뒤늦께 부시시한 모습으로 문을 열고 들어온 메디아는 방안의 정경을 보고는 눈 을 찌푸렸다. 남자들이 묵고 있던 방안은 이미 바트가 토해놓은 음식물로 지저분 해져 있었고 그의 손가락에서는 악취나는 피가 계속 흘러 내렸다. "뭐야? 누가 이랬어?" 흘러내린 잔머리를 쓸어 올리는 메디아의 음성에 짜증이 배어 있었다. 발작하며 온몸을 부르르 떠는 바트에게 성큼 다가간 메디아는 그의 몸을 살펴보더니 혀를 끌끌 차올렸다. "어떤 놈인지 머리 좀 썼군. 룬초를 쓰다니......" 만약 다른 독을 썼다면 메디아가 알아차렸을지도 몰랐다. 독이나 약초를 다루는 마녀의 후각은 매우 민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향기도 없고 금방 발작하지도 않는 룬초라면 눈치채기 매우 힘들었다. 메디아는 사랃들을 헤집고 다시 옆방으 로 들어가더니 손에 무언가를 쥐고 들어왔다. 룬초의 뿌리였다. 새끼 손가락만한 작은 뿌리는 하얀색으로 잔뿌리 하나 없이 깨끗했고 금방 물에서 꺼낸 듯 싱싱 해 보였다. 메디아는 해독제를 들고 오더니 잠시 생각하다가 카란에게 내밀었다. "룬초의 뿌리야. 빨리 먹여." 퉁명스럽게 말하는 메디아의 시선은 이 소란 속에서도 이불을 뒤집어 쓰고 침대 속에 누워 자고있는 마시에게 향해 있었다. 사실, 그녀가 구하기도 어렵다는 룬 초의 뿌리를 신선한 상태로 가방 속에 넣고 다니는데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 다. 워낙에 아무거나 잘 집어먹는 마시를 백여년이나 돌보다보니 메디아도 어쩔 수 없이 여러 종류의 해독제를 항상 휴대하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어딘가 여행 을 떠났다가 좋은 약초나 해독제가 있으면 그걸 구해서 가방 속에 잘 보관하는 것이 이제는 습관이 되어 있을 정도였다. 룬초의 뿌리도 우연한 기회에 시투니아 에 갔다가 마침 11월이라 구해 놓은 것이었다. 그것을 이렇게 사용하게 될 줄은 그녀 자신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점이었다. 해독제를 건네받은 카란은 자신의 입 속에 룬초를 넣어 잘게 씹어서 즙을 내었다. 그런 후 바트의 입을 억지로 벌려 그의 입 속을 비우고 해독제를 먹이기 위해 입술을 겹쳤다. 곁에 있던 알렉토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지만 카란은 얼굴 색 하나 변하지 않고 바트의 입 속으로 약을 먹였다. 그제서야 알렉토는 메디아가 해독제를 카란에게 넘겨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해독제를 잘 넘기지 못하는 바 트에게 카란은 끈질기게 약을 삼킬 때까지 바트에게 달라 붙어 있었다. 잠시후 경기를 일으키던 바트의 몸이 점점 잦아들고 축 늘어졌다. 드디어 카란이 입술을 떼어내고 바트의 이마에 손을 올려놓으며 기도를 시작하자 새파랗던 바트의 피 부색도 제빛을 찾아갔다. 다른 사람들은 이제야 안심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메디 아의 표정은 벌레를 씹은 듯 불쾌해 보였다. 일단 룬초에 의해 중독이 되면 해독 을 한다해도 생명은 건질지언정 당사자는 거의 백치나 다름이 없게 된다. 뻔히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녀는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도대체 어떤 놈이 내 물건에 손을 댄 거지?" 메디아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내어 중얼거렸다. 찌푸린 그녀의 이마로 잠자다가 헝클어진 머리카락들이 삐죽하게 솟아나 있었지만 골똘히 생각에 잠긴 그녀는 주 위에서 쳐다보는 이상스런 시선도 느끼지 못 하고 있었다. 메디아는 미끼로 써먹던 놈이 백치가 되는 건 그리 크게 신경 쓸일이 아니었지만 그가 백치가 됨으로써 미끼로서의 가치가 없어진 건 아닌지 곰곰히 따져보기 시 작했다. 어떤 녀석이었든 일단 룬초를 사용했다면 해독이 되었다 하더라도 백치 가 된 바트가 입을 열어 그들의 음모를 발설할 염려는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메 디아는 바트가 이제 미끼로서의 가치를 상실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 는 더 이상 셰도우 아미라는 녀석들이 바트를 따라오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렇 지만 이대로 그녀가 찾을 수 있는 실마리를 순순히 포기할 수는 없었다. 메디아 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 그녀의 머리로 순간적으로 스 쳐가는 이름이 있었다. "그렇군. 그 여자, 후궁이라는 그 여자를 찾아가면 되겠군." 그녀의 또렷한 목소리는 방안에 있는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순간적으로 긴장한 사람은 다름아닌 제피로스였다. 메디아의 반응으로 보았을 때 '그 여자'라고 말 하는 것이 누구인지 눈치채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시선이 메디아의 뒤쪽에 서있 는 오피온과 로사리아를 향해 불안스럽게 움직였다. "이 자는 해독제를 먹었으니 이제 괜찮을 거요." 제피로스의 낮은 목소리에 은근한 경고가 담겨 있었지만 메디아는 그 경고를 가 볍게 무시했다. "이제 그 자는 입을 열지 못 해." 코웃음치는 메디아의 대답에 제피로스는 의혹에 찬 시선을 던졌다. "무슨 소리요?" "멍청이가 되었다는 뜻이지." 쌀쌀맞게 내뱉은 메디아는 바트를 짜증스럽게 한번 내려다보고는 눈앞에 내려오 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방에서 나가버렸다. 뒤에 남은 제피로스만이 급히 카 란을 향해 고개를 돌렸을 뿐이었다. 그의 시선을 받은 카란은 가만히 고개를 끄 덕여 보임으로써 메디아의 말을 긍정했다. "해독제를 먹였지만 이제 이 사람은 이지를 상실했을 겁니다. 룬초의 무서움은 비록 생명을 건질 수는 있어도 완벽히 해독이 되지 않는다는 것에 있습니다." 제피로스는 카란의 설명을 들으며 얼굴을 구기더니 급기야 욕설을 내뱉었다. 중 요한 증인을 잃어버린 것과 다름이 없었다. 왕실로 돌아가면 이 일을 어떻게 설 명해야 할지 난감했다. 증명할 수 없는 음모란 더 위험한 법이었다. 더구나 그 음모에 연류된 자가 왕실의 중요 인물일 때는 더더욱 그랬다. 제피로스는 착잡한 심정으로 의식을 잃은 바트를 노려 보다가 아네모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에게 음식을 먹인 건 당신이오." 비난이 서린 제피로스의 음성에 아네모스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알렉토가 나서서 그를 변호했다. "그는 아니오. 그가 우리와 처음부터 함께 있었던 동료이자 바트를 물속에서 건 져서 치료한 것도 우리라는 것을 잊었오?" "그럼 누구일 것 같소? 누가 저 자에게 독을 넣은 음식을 먹일 수 있단 말이요?" "음식에는 문제가 없었을 거요. 아네모스는 그와 같은 음식을 먹었소. 우리 중 유일하게 차를 시켜 먹은 사람이 바로 저 사람이요." 그랬다. 바트는 메디아 일행과 다니면서도 똑 같은 음식을 먹었는데 다른 이들이 시원한 술을 마시는 동안 그만이 항상 술 대신 꼭 차를 마시는 습관이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암살 교육을 받을 때 생긴 습관인 듯 어디를 가나 차를 마셨다. 누군가 그의 습관을 알고 있었다면 차에 독을 풀어 놓을 수도 있는 문제였다. 한동안 알렉토의 설명에도 가만히 버티고 서있던 제피로스는 결국 수긍했는지 화 가 난 듯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 계 속 - 뜻깊은 새해 첫날을 맞으시기를 바랍니다. *^_^* 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과 만날 수 있는 행운이 당신께 있기를...... 번 호 : 62 / 83 등록일 : 2000년 01월 06일 16:50 등록자 : 아랑페즈 조 회 : 1487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62.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순수하게 까맣던 그 밤, 어둠 속에 함몰하는 별빛을 보았을 때 죽어간 영혼의 붉은 혈액은 슬픈 그대 눈물이 되었고 숨겨진 진실은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았다. 제 62 장 암컷과 숫컷. "운이 좋은 놈이군." 투명한 유리구슬을 통해 메디아 일행을 훔쳐보고 있는 사내는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 전체에는 곰보자국이 넓게 퍼져 있어서 추한 모습 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허름한 옷차림에 지팡이를 들고 있는 그의 거뭇한 피부는 매우 거칠어 보였다. 그것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얼굴가면을 쓰고 있는 코마지의 모습으로 그는 모모스의 명령에 따라 메디아를 은밀히 감시하는 중이었다. 반지 의 마녀에게 가까이 접근해서 따라가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기 위해 코마지는 그 녀로부터 약 하루거리를 두고 조심스럽게 미행했다. 그리고 어젯밤에는 그들이 여관을 잡고 들어간 후 흑마술을 이용해 그 집 종업원을 불러내어 독초를 바트가 마실 차에 집어넣게 했었다. 오늘 아침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 했기에 그의 작 전은 성공적이었으나 애석하게도 해독제를 메디아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바트 를 죽이지는 못 했다. 하지만 바트가 깨어난다해도 그가 염려하는 사태는 일어나 지 않을 것을 알기에 코마지는 만족했다. 그의 스승은 오람의 왕성에 있는 한 여 인의 이름이 바트에 의해 거명되는 일이 없기를 바랬고 이제 그런 일은 영원히 발생하지 않게 되었다. 코마지는 파란 천위에 올려놓았던 유리구슬에서 손을 거둬들이며 신중하게 마력 을 조정했다. 한꺼번에 마력을 풀어 놓으면 위험할 수도 있었다. 스승은 그에게 반지의 마녀를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녀가 정말 뛰어난 마녀라면 아주 작은 마력의 움직임이라도 감지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뛰 어난 마녀라는 것은 그의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처럼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그 래서 코마지는 모든 일을 조심스럽게 처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유리구슬 속 에 비춰지는 메디아 일행의 모습을 지켜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섬찟한 광기가 숨 쉬고 있었다. 특히, 바트의 독을 해독하는 카란의 모습을 볼 때가 가장 심했다. 코마지는 자신의 추한 외모를 생각하며 입술을 비틀었다. 추한 외모에 대한 심한 모멸감과 경멸감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는 자신의 또 다른 얼굴마저 추하디 추한 곰보의 얼굴을 선택했다. 그에게 아름다움이란 가질 수 없는 것이었고 그랬기에 헛된 환상으로 자신을 괴롭히는 짓은 하지 않았다. 대신 코마지는 아름다운 것 에 대한 증오를 고집스럽게 키워 나갔다. 코마지를 따라온 아자탄은 코마지의 눈동자에 서린 광기를 바라보며 등골이 오싹 한 느낌이었다. 보기만 해도 먹은 것이 올라올 것 같은 추한 얼굴 가면을 쓰고 있는 코마지의 인상은 같은 동료라 해도 참아주기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아자 탄은 코마지의 괴상스런 취미를 알고 있었기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왕실 마법 사 모모스의 명령에 따라 그의 임무를 무사히 완수할 수 있다면 다른 건 전혀 상 관할 일이 아니었다. 그의 동료가 갑작스럽게 광기를 드러내지만 않는다면 아무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처음에는 추레한 떠돌이 거렁뱅이로 위장하고 메디아 일행을 미행하던 그들은 나 중에는 떠돌이 용병으로 위장해야만 했다. 크로노스 산맥에서 계속 느릿느릿 걸 어서 이동하던 일행이 아이니 강에서 말을 구한 뒤로는 전속력으로 이동하기 시 작했기 때문에 그들도 좋은 말을 구해 추척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자탄 과 코마지의 임무는 메디아를 뒤따르며 그녀에 대한 것을 모모스에게 신속하게 보고 하는 일뿐이었다. 더불어 제피로스와 바트의 동태도 파악해야 했지만 아자 탄과 코마지에게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자탄은 메디아를 미행해야 하 는 이유를 정확히 알고 있지는 못 했지만 무척 중요한 일이란 것을 코마지의 태 도를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자신감이 지나쳐 오만하기까지한 코마지가 조심스럽 고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을 보면 자신들이 미행하고 있는 인물이 평범하지 않다 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더구나 아자탄은 크로노스 산맥에서의 짧은 전투 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기에 메디아의 무서움을 잘 알았다. 그는 유리구슬 속에 비춰졌던 부스스한 검은 머리의 젊은 여자를 생각하며 이번 임무의 위험성을 다 시 되뇌었다. 햇살이 부서져 내리는 찬란한 봄의 풍경은 짙푸른 하늘의 눈부심만큼이나 아름다 웠다. 묵은 때를 벗어버린 듯 연한 속살을 드러내는 나무의 연두빛과 조화를 이 루는 수 많은 들꽃의 향연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찬탄이 흘러나오게 했다. 그 동안 쉴새없이 말을 달리던 일행도 오람이 가까워지자 마음이 조금씩 풀어져서인 지 주위의 풍경에 젖어 들고 있었다. 비록, 바트의 일로 신경이 곤두서있는 제피 로스가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비교적 일행은 편안한 표정이 되어가고 있었 다. "메디아야." 부드러운 바람이 부는 넓은 평원 사이 뚫린 길을 지나가며 좌우로 고개를 돌리며 구경하던 마시가 메디아를 불렀다. "왜?" "저거, 저기 보이는 저게 뭐야?" 마시는 메디아가 자신을 쳐다보자 손가락을 들어 언덕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가 르켜 보였다. 메디아는 말고삐를 잡은 손을 그대로 둔채 허리를 돌려 마시가 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바라보았다. 마시의 손가락이 향하는 곳에는 울타리가 쳐진 들판 위에서 풀을 뜯어 먹고 있는, 몸에 검은 반점이 얼룩덜룩한 모양으로 자리 잡은 가축이 떼지어 있었다. "젖소 말하는 거니?" "젖소?" 마시는 메디아의 말에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젖소라는 것도 있어?" 지금까지 인간들이 키우는 가축을 제대로 본적이 없는 마시에게 젖소라는 이상한 어감의 동물은 분명 생소한 것이었다. 그는 말이라는 가축도 타미에서 처음으로 접해 보았고 그 뒤로 개라는 신기한 애완동물에게는 가까이 다가가 구경하려다 가 사납게 짖어대는 큰 개에게 물리기까지 했었다. 물론, 그 불쌍한 개가 무사하 지는 않았지만 마시는 그 뒤로 가축에게 함부로 다가가지 않았다. "저건 인간들이 우유나 치즈를 얻기 위해 키우는 가축이야. 너도 우유는 먹어봐 서 알지?" "응. 그런데 진짜 저걸 잡으면 하얀 우유가 나온단 말이야? 피가 그렇게 고소한 동물이 있다는 말은 한번도 안했쟎아. 메디아야, 우리도 저거 가져가서 몇 마리 키우면 안될까? 나 우유 좋아해." 마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메디아는 새파란 하늘을 쳐다보며 한숨부터 내쉬었 다. 그러나 그녀가 마시의 기발한 생각을 고쳐주기도 전에 그녀의 가방에 매달려 있던 블루잉이 먼저 나섰다. "저걸 잡아서 죽이면 우유가 나오기는 커녕 새빨간 피밖에 안나와, 마시. 그리고 젖소의 고기는 맛도 없어." 블루잉은 미식가답게 젖소의 고기맛까지 마시에게 일러주었지만 마시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블루잉을 쳐다보며 태연스럽게 말했다. "너 나한테 거짓말 하는 거지? 네 말은 믿을 수가 없어. 우유가 젖소에서 나온다 면 분명히 잡아서 피를 받는 걸 거야. 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는 척하지마." 마시는 짐짓 블루잉을 무시하는 어조였다. "내가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는데 못 믿겠다구?"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던 로사리아는 마시의 무식함에 질릴정도였다. 지 난번에 있었던 일로 마시에게는 말도 붙이지 않던 로사리아가 결국 참견했다. 마 시를 놀려줄 좋은 기회였다. "야, 넌 젖소도 모르니? 어떻게 젖소를 모를수가 있어? 우유는 젖소를 잡아서 생 기는 게 아니라 젖소의 젖에서 짜는 거란 말이야. 그건 다섯살난 꼬마들도 다 알 고 있는 사실이라구. 너처럼 무식한 애는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본적이 없어. 너 혹시 바보아냐?" 로사리아는 열여섯살 먹은 여자가 입에 담기엔 부끄러운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 게 떠들며 붉은 머리카락을 건방진 자세로 뒤로 넘긴 뒤 비웃듯 말했다. 그러자 블루잉을 향해 있던 마시의 시선이 샐쭉해지며 로사리아를 향했다. "뭐?! 너 누구한테 바보라는 거야? 괴상하게 생긴 남자주제에." 마시는 '빨강머리 계집애'라고 했다가 흥분한 로사리아와 말에서 굴러 떨어졌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래서 생각해 준답시고 남자라고 말해주었지만 마시의 말이 끝나자 로사리아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 오르기 시작했다. "너...너 또.." 곁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알렉토와 오피온은 지난 번과 같은 사태가 벌어지 는 게 아닐까 덜컥 겁이 났다. 알렉토가 먼저 나서서 마시와 로사리아의 말사이 에 끼어 들었고 오피온은 로사리아의 옆으로 가며 그녀를 진정시키려고 했다. 맨 앞을 달려나가는 제피로스와 가프겐은 뒤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르는지 그대로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속도가 빠르지는 않아서 뒤에서 약간의 소란이 일어도 일 행이 뒤처지는 일은 없었다. "마시, 이분은 남자가 아니고 여자야." 알렉토가 마시의 오해를 정정해주었다. "에? 지난번엔 여자라고 했더니 막 화를 냈쟎아." 거뭇거뭇 수염이 돋아난 알렉토의 턱근육이 가볍게 실룩거렸다. "그건 네가 공주님께 계집애라고 해서 그래." "여자라며?" "그래도 공주님께 계집애라고 하는 건 무례한 짓이야" "메디아가 그러는데 어린 여자한테 계집애라고 하는 건 욕이 아니랬어. 암컷은 여자, 숫컷은 남자. 계집애도 여자. 나는 숫컷이니까 남자. 쟤는 어린 암컷이니 까 계집애. 그런데 뭐가 문제야?" 마시는 새끼 드레곤답게 암컷과 숫컷에 대해 열심히 떠들었지만 그말을 듣고 있 는 다른 인간들은 순간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알렉토는 마시와 대화를 하다보니 뭔가가 어긋난 것 같은 느낌에 가슴이 답답해 졌다. 그는 커다란 주먹으로 가슴을 퍽퍽 두드리고 싶은 심정을 가까스로 참으며 자신과 마시의 대화를 들으며 피식거리고 있는 메디아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메 디아는 한 술 더 뜨는 것이었다. "그 동안 똑똑해 졌구나, 마시. 옳은 말도 할 줄 알고." 오랜만에 메디아의 칭찬을 들은 마시의 붉은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이 나기 시작 했다. "그렇지? 나도 정말 내가 나날이 똑똑해 지는 것 같아." 그러자 스스로 흐뭇하게 웃는 마시를 향해 블루잉이 한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 다. "잘도 그렇겠다." 블우잉은 그 말뒤에 덧붙이고 싶은 말을 입속으로 살짝 삼켰다. '바보.' 블우잉의 빈정거림에도 마시는 헤죽거렸고 그 앞으로 폭발하기 직전인 로사리아 를 억지로 끌고 앞으로 달려 나가는 오피온의 기분은 끔찍했다. 오피온에게는 가 출한 로사리아와 단둘이 여행했던 것도 고생스럽고 힘든 경험이었지만 여러 사람 들과 함께 되돌아오는 여행도 그에 못지 않게 끔찍하고 괴로운 일이었다. 로스코 에서 별볼일 없는 건달들에게 무지막지하게 얻어 맞아서 자존심이 상처를 입었던 일과 크로노스 산맥에서의 공포스러웠던 전투의 기억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 았다. 그는 정신나간 사람들을 빠져나가 제정신 똑바로 박힌 사람들 속으로 가고 싶었다. 그는 듬직한 제피로스와 가프겐에게 다가가며 이 여행이 이제 며칠 남 지 않았다는 것을 신에게 감사드렸다. - 계 속 - 2000년 입니다. 새 천년을 즐거운 맘으로 보내고 계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모든 분들이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분쟁도 없고 재앙도 없고 단지 삶만이 존재하기를...... 그래서 그 누구도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새 천년에는 분단된 조국이 통일되어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모두가 평화로울 수 있기를, 정치한답시고 나라 말아먹는 인간도 태어나지 않기를, 저 혼자 잘 살겠다고 환경파괴하여 지구의 수명을 줄이는 바보들도 없어지기를, 그리고 장애인과 정상인을, 부자와 가난한자를, 인종과 남녀를 차별하지 않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래봅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남을 사랑할 줄 알고 배려할 줄 알고 이해하며 보듬어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 뱀파이어 - p.s. : 어쩐지.... 잘난척 한것 같군요. ^^;; 하여간 이제 오람으로의 입성이 코앞입니다. 기대해 주세요. ^^ 에.... 그리고 제 아뒤 cho1971은 일시/정지 상태라 친구 아뒤로 올립니다. ㅠ.ㅠ 번 호 : 63 / 83 등록일 : 2000년 01월 10일 07:25 등록자 : DEADSEA 조 회 : 1427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63.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순수하게 까맣던 그 밤, 어둠 속에 함몰하는 별빛을 보았을 때 죽어간 영혼의 붉은 혈액은 슬픈 그대 눈물이 되었고 숨겨진 진실은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았다. 제 63 장 드디어 오람에 도착하다. "그래서 결국, 증인으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뜻이냐?" 제피로스는 아버지 라메즈경을 향해 고개를 무겁게 끄덕여 보였다. 그의 일행들은 밤늦은 시간에야 오람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왕성 으로 직행하지 않고 오람시의 외곽에 자리잡고 있는 라메즈 성으로 발길을 돌렸 다. 어차피 모두가 왕성으로 들어갈 목적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지친 여독 을 풀 여유도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제피로스는 그의 아버지 라메즈와 단둘이 밤늦은 면담을 위해 성의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서재에 있었다. 서재는 그 주인의 성품을 보여주듯 매우 단조로운 실내장식으로 꾸며져 있었는데 벽면에 두개의 검이 걸려 있는 것을 제외한다면 일반 서재와 별다를바가 없었다. 라메즈는 두꺼운 사슴가죽이 덧대여져 있는 의자에 앉아 자신의 둘째 아들 제피 로스를 바라보며 사무적인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어차피 너의 서신을 통해 예상했던 일이니 그건 그렇다치고...... 왕자님과 공주 님은 아무 이상이 없겠지?" "예. 약간의 사소한 일들이 있었지만 다행히 큰 사고를 당하거나 하신 건 아닙니 다. 두 분 모두 건강하신 상태고 왕궁으로 돌아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책상 건너편에 앉아 있는 아버지를 향해 대답하는 제피로스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피곤함이 스며있었지만 그의 태도는 나무랄데 없이 정중하고 절도가 있었다. "알았다. 공주님께서는 궁으로 돌아가는 것을 며칠 뒤로 밀었으면 하시지만, 이 삼일 안에 바로 궁으로 모시고 출발하거라. 왕께는 내가 미리 말씀드렸으니 너의 보고를 기다리실 게다." 그렇게 말하는 쉰이 조금 넘은 라메즈는 턱주변으로 하얀 수염이 희끗희끗 솟아 있었지만 매우 강인한 인상을 풍기는 중년의 사내였다. 집안 대대로 왕의 충신이 었으며 그 자신도 젊은 시절 왕의 기사로서 그 능력을 인정받아 지금은 파라 최 대의 가문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특히, 기사가문에서는 보기 드물게 뛰어난 두뇌를 인정받아 내정에도 깊이 관여하는 라메즈는 현재 왕으로부터의 신임도 두터운 인물이였다. 그는 신중한 눈빛으로 아들 제피로스를 바라보며 이 번 사태에 대한 처리를 어떻게 해야할지 심각하게 고심하는 듯 했다. 한동안 말 이 없던 라메즈는 아들을 향해 불쑥 입을 열었다. "...... 그래, 넌 어떻게 이 상황을 풀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밑도끝도 없이 튀어나온 아버지의 질문에 제피로스는 의문의 눈빛을 던졌다. "그 죄수의 진술에 따르면 4왕자 리욘님의 암살에 왕의 아내가 관련되어 있다고 했다. 더구나 원래 목적이 왕의 후계자인 제1왕자 헬리오스님의 암살이라면 이 일의 심각성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 아니냐? 이젠 증인도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이 일을 또 무엇으로 증명할 것이며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넌 한번도 생 각해 보지 않았다는 말이냐?" 아버지 라메즈의 강직한 음성에는 약간의 질책이 섞여 있었다. 제피로스는 움찔 했지만 물러서지는 않았다. "왕의 아내가 관련되어 있는 문제입니다. 쉽게 속단할 수도 없고 물증이 없는 상 태에서 심증이 확실하다고 해도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너의 생각은?" 제피로스는 잠시 망설였지만 집요하게 자신을 압박하는 아버지의 시선에 조심스 럽게 입을 열었다. "일단은 그녀 주변을 감시하며 꼬리를 드러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합니 다." 아버지는 마치 시험을 통과시켜주듯이 제피로스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왕께 이미 간단한 보고는 하였지만 왕께서 이 일을 공식화하시지는 않을 게다. 만약 왕께서 네게 다른 지시를 하시더라도 그 분이 현명한 왕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아들아." "예." 잠시 말을 끊었던 라메즈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로사리아 공주님께서는 이 일을 모르도록 했겠지, 제피로스? 그런데 너와 함께 온 일행들은 믿을 수 있는 자들이냐?" 제피로스는 머뭇거리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덩치크고 정직한 알렉토 는 믿었지만 메디아와 다른 사람들의 입은 믿을 수 없었다. 그는 라메즈에게 그 들에 대해 알고 있는 그대로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케이론이라구?" "예, 아버지는 뭔가 알고 계십니까?" 제피로스는 메디아의 이야기를 들을 때 아버지의 표정에 깃들인 미묘한 변화를 놓치지 않고 질문했다. "며칠전 대신관 케이론이 나에게 엉뚱한 이야기를 하더구나. 위험한 손님이 찾아 올테니 조심하라고 하더군." "위험한 손님이라고요?" "그래.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이더구나." 라메즈의 입술이 재미있다는 듯 끝이 살짝 말려 올라갔다. "뭐라고 했는데요?" 제피로스는 아버지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음식을 넉넉히 준비하라고, 이왕이면 오크 한마리를 덤으로 준비하라더구나. 넌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냐?" 웃음끼를 담고 농담처럼 말하는 라메즈의 말에 제피로스는 미소짓지 않고 표정이 굳어 졌을 뿐이었다. 지독할 정도로 식탐이 많은 두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자 안 그래도 불편한 기분이 확 잡쳐버리는 것 같았다. 라메즈는 서서히 구겨지는 아들의 얼굴을 보면서 점점 더 궁금증이 늘어갔다. 며칠 전이었다. 아들의 급박한 서신을 받고 대략적인 내용을 파악한 뒤 왕과의 비밀 면담을 가졌 었다. 그때 그는 아들의 서신에 적힌 심각한 내용들에 대해 충분히 이해했다고 믿었던 자신이 착각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왕은 제피로스의 서 신을 보고 무척 놀란것 같았다. 그런데 정작 라메즈를 당황하게 한것은 왕이 자신 의 아내가 관련된 심각한 사태에서도 엉뚱한 곳에 관심을 두었다는 점이었다. - 지금 메디아라는 젊은 여자마법사라고 했소, 라메즈경? 오람으로 함께 오고 있다는 말이오? 그러니까 내말은 그녀가 이곳으로 오고 있는 게 확실하냔 말 이오. 아니, 언젠쯤 이곳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이요? 아냐, 그게 중요한 게 아 니고 그녀가 왕실에까지 오려고 할까? 그런데 정말 그녀가 맞는 걸까? - 라메즈는 처음에는 숨 쉴틈없이 질문을 퍼붓더니 곧 혼잣말을 하며 사방을 왔다 갔다하는 왕의 모습이 당황스럽기만 했다. 라메즈는 제피로스의 보고문에 추신으 로 붙어있는 일행에 대한 간단한 설명에 왕이 왜 그렇게 충격적인 반응을 보이는 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놓친 점이 무엇인지 그는 몇번이고 다시 제피로 스의 보고문을 살펴 보았지만 그 서안에는 별다른 내용이 담겨있지 않았었다. 그 저, 합류하게 된 일행중에 메디아라는 강한 여자마법사가 있어서 다행히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는 내용정도였다. 그런데 왕은 메디아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매 우 흥분해서 한동안 침착함을 잃어버린 듯 행동하는 것이었다. 그 시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하여간 라메즈는 왕이 그렇게 흥분한 모습은 처음이였었다. 더구나 면 담을 끝내고 나오다가 마주친 대신관 케이론이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대뜸 한다는 말이 집안이 시끄러워질 손님이 방문할테니 잘 대접하라는 것이였 다. 어쩐지 그는 케이론의 말이 왕의 반응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느낌을 떨쳐 버 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의 아들 또한 아주 기묘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아닌가? 자기가 끌고 들어 온 일행이면서 저 꺼리는 듯한 태도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는 찌푸린 둘째 아들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며 왕이 그 메디아라는 여자마법 사를 꼭 왕궁으로 데리고 오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아들에게 당분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제피로스의 표정으로 보건데 결코 달가와 하지 않을 것 같았다. 라메즈는 낙천적이고 사람좋아하는 제피로스로 하여금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게 만든 여자가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다. 더구나 제피로스는 여자라면 무조건 좋아 하고 예의바르게 대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말이다. 라메즈는 일그러진 아들의 얼 굴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날이 밝으면 그 일행들을 꼭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왕이 그토록 기다리는 사람이 과연 누구인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 계 속 - ^^; 점점 짧아지는 글에 대해 뭐라 변명할 수가 없군요. 그저 부족한 뱀파의 능력이겠거니 생각하시어요. .T^T. 번 호 : 64 / 83 등록일 : 2000년 01월 13일 04:18 등록자 : DEADSEA 조 회 : 1489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64.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순수하게 까맣던 그 밤, 어둠 속에 함몰하는 별빛을 보았을 때 죽어간 영혼의 붉은 혈액은 슬픈 그대 눈물이 되었고 숨겨진 진실은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았다. 제 64 장 비애의 정령 메를로. 환상의 달 카오스를 몰고 다니는 알파의 하얀 빛이, 오람의 외곽으로 광활한 영 지를 굽어보며 우뚝 솟아있는 라메즈 성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모두가 잠들은 고요한 성안에서는 쾌청한 4월의 밤바람 소리와 작은 풀벌레 소리가 들렸왔다. 이슬에 촉촉히 젖어들은 성벽의 푸른 이끼 냄새가 밤늦은 보초를 서며 졸고 있는 수비병의 호흡속으로 숨어 들고 공기는 서늘한 느낌으로 살갗에 부딪히고 있었 다. 메디아는 깊은 잠에 빠져 꿈을 꾸고 있었다. 무언가 따뜻하고 그리운 장면이 떠 올랐다가 점차 어둠이 밀려 들면서 따뜻함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공포가 엄습해 들어왔다. 그 순간 메디아는 침대에서 불편하게 뒤척이다가 서늘한 기류를 느끼 며 억지로 눈을 떠야만 했다. 눈을 뜨자 그녀는 번쩍거리고 있는 두 개의 푸른 눈동자과 마주쳤다. 블루잉이 메디아의 코앞에서 눈을 빛내며 그녀를 들여다 보 고 있었다. "일어나, 메디아." 메디아는 공기중에 감돌고 있는 희미한 기류를 무시하고 싶었다. "아흐흠... 블루잉, 이번에는 무시하고 자자." 메디아는 투덜거리며 조금 들었던 머리를 다시 베개에 파묻었다. "너도 느꼈지? 일어나. 그녀가 활동하고 있어." 메디아는 무슨 일이 일어나던 상관하고 싶지 않았지만 블루잉이 그녀의 가슴위에 서 앞발을 긁어대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야, 너 뭐하는 거야!" "일어나란 말이야." "내가 무슨 해결사야? 이 밤에 그 계집애가 무슨 일을 벌이든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쟎아." 블루잉은 입을 고집스러운 모습으로 꾹 다물더니 물끄러미 메디아를 쳐다보았다. 한참을 그러고있던 그는 다시 앞발을 긁어대기 시작했다. "블루잉! 당장 내 가슴에서 내려가." 그래도 블루잉은 요지부동이었다. 메디아는 신경질을 부렸다. "나한테 지금 항의하는 거야? 그렇게 신경쓰이면 네가 해결해. 어차피 너희 종족 일이쟎아." "나하고 그쪽은 전혀 다르다는 걸 알쟎아, 메디아." "전혀 다르다면서 잘도 알아차렸구나." 급기야 메디아는 투덜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차가운 돌바닥에 맨발 로 내려서자 정신이 번쩍드는 느낌이였다. 그녀는 졸린 눈을 비비며 창가의 하늘 을 내다 보았다. 달들의 위치를 보니 아직도 아침이 되려면 멀어 보였다. '아, 귀찮아 죽겠어.' 메디아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옷을 챙겨 입었다. 그래봐야 겉옷을 입고 잠들었기 때문에 망토만 걸치면 되었지만 밤늦은 시간에 일어나는 것은 고역스러운 일이었 다. 그녀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자신의 일행이 되어버린 골치아픈 사람들의 일을 해결하러 나섰다. 그녀가 방에서 무거운 문을 밀며 걸어 나왔지만 복도에는 경비병하나 서있지 않 았다. 메디아는 라메즈 성을 감돌고 있는 기이한 기류를 불쾌하게 느끼며 그 에 너지의 진원지라고 느껴지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복도에 뚫린 창을 내다보 니 무엇에 홀린듯이 마당을 가로 질러 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잠옷을 입 은 채 성벽으로 오를 수 있는 계단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는데 비통에 찬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마치, 아들의 시신을 눈앞에 두고 오열하는 부모의 얼굴이 저토 록 간절할까 싶을정도였다. 성안 여기저기에서는 그와 비슷한 모습이 계속 눈에 띄고 있었다. 메디아는 잠시 쓴 웃음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유쾌하게 웃고 싶은 비뚤린 심정이었다. 지금 보여지고 있는 상황은 메디아에게는 어느 유랑극단의 희극보다도 더 웃기는 일이었다. '인간이란 이렇게 나약한 존재인 건가? 이토록 쉽게 흔들리는 존재라니......' 그녀는 갑자기 몰려드는 생각에 하늘 가득 떠올라 있는 카오스와 알파를 바라보 았다. 인간이란 대체 무엇이지? 무엇이기에 이토록 나약하단 말인가? 신의 자녀들이라 불리는 인간은 그 어느 종족보다도 야만적이고 감정적이면서 또 그것으로 인해 나약하다. 도대체 인간에게 감정이라는 것이 왜 필요했던 것일까? 왜 그런 것이 주어진 거지? 잠시 달을 향했던 메디아의 시선은 다시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녀는 쓸데없는 생 각을 하는 자신의 머리를 흔들며 달빛에 물든 복도를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메디아가 걸어가는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가슴을 쥐어 뜯으며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메디아가 자신들의 숙소로 정해진 부속 건물을 벗어나 향나무가 길게 늘어선 마당을 지났을 때였다. 마당을 둘러싼 높은 성벽 위에는 사람들이 밑으로 떨어지려는지 위태롭게 서 있었고 자신의 심장을 향해 칼을 뽑아든 경비병들도 볼 수 있었다. 성안 곳곳에서 풍기는 짙은 슬픔의 냄새가 피부를 찌르는 듯 했다. 메디아가 서둘러 주건물의 복도에 들어서자 그곳에 이 모든 기류를 조종하고 있 는 인물이 있었다. 부서지는 달빛에 하얗게 투영되는 환영처럼 서있는 여인의 모습은 손끝에 묻어나 는 공기처럼 창백하고 애처로와 보였다. 그 주위로는 비통한 신들의 눈물이 금방 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투명한 그림자에 휩싸인 여인의 두 손은 달빛 을 받아들이 듯 양쪽으로 활짝 벌려진 채 하늘을 향해 있었고 그녀에게서 흘러 나오는 백색 기류가 성 전체로 퍼져 나가는 중이었다. "이봐, 메를로. 엔릴이라고 해도 너 같이 고약하지는 않아." 메디아의 선명한 목소리가 백색기류를 가르며 공기의 흐름을 흔들어 놓았다. 하 늘을 향해 슬며시 감겨 있던 하얀 여인의 두 눈이 깜짝 놀란 듯 뜨여지며 메디아 를 향해 돌아섰다. 그녀는 익히 메디아를 알고 있는 듯 잠시 움찔하는 기색이였 지만 그녀는 곧 듣기만해도 눈물이 날듯한 가녀린 목소리로 말했다. "엔릴이라고? 그와 나를 비교하는 건 나에 대한 모욕이지 않나요, 메디아? 나는 사람들을 공포 속으로 집어넣는 짓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메디아가 언급한 엔릴은 비애의 정령 메를로와 같은 정신계열 하급정령으로서 인 간에게 공포를 심어주는 존재였다. "그렇겠지. 사람들이 공포에 빠진다고 죽지는 않을테니까." 하지만 비애가 지나치면 나약한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것을 견디지 못하거나 자기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도 한다. 그래서 때로 인간은 자살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메디아는 백색기류가 움직임을 멈춘 것을 보며 비꼬는 음성으로 말을 이어나갔 다. "넌 지금 이 성안의 모든 인간을 위험스럽게 하고 있어. 사람들이 죽건 말건 내 가 알바가 아니지만 지금 내 처지로는 그저 방관할 수가 없어서 말이야. 메를로, 너는 이만 이곳에서 떠나 줘야겠어." "언제부터 마녀들이 인간에게 이토록 자비로와졌지요? 미안하지만 이 인간에게서 떠날 생각은 없습니다. 그대가 날 물리치고 싶거든 이 여자를 죽여야만 할 겁니 다." 메디아는 서늘한 시선으로 하얀 그림자에 뒤덮힌 에코를 바라보았다. 정령 메를 로가 에코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그들 일행이 크로노스 산맥에 접어들기 직전 무렵이였었다. 그 무렵 에코의 정신상태는 매우 불안정하고 비탄에 젖어 있을 때 였는데 그 틈을 비애의 정령 메를로가 놓치지 않은 게 분명했다. 물론, 메디아와 물의 요정이었던 블루잉이 그것을 모르고 있지는 않았지만 메를로가 본격적으로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기에 그저 모르는 척 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 , 지금까지 같이 있었던 일행중에 메를로에게 걸려들만큼 나약한 인물이 없었다 고 하는게 옳은 일인지도 몰랐지만 말이다. "그 방법 말고도 널 없앨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알고 있어. 어리석은 반항으 로 스스로를 위험하게 하려는가, 메를로여. 하급정령 주제에 감히 반지의 마녀에 게 지금 대항하겠다는 건가?" 순간 메디아를 바라보는 메를로의 몸체에 가느다란 떨림이 느껴졌다. 메디아의 말에 겁을 내는 것도 같았지만 정령은 위협하듯 대답했다. "이 여자를 다치게 할 셈인가요?" 메를로는 그동안 일행을 따라오면서 보아온 메디아가 인간을 다치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메디아의 대답은 차가웠다. "그래야만 한다면 난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어. 네가 말했다시피 마녀란 인간에 게 자비로운 존재가 아니다." 메를로의 그림자는 한동안 불안스럽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령은 다시 안정을 되찾으며 조용하게 말을 꺼냈다. "내가 인간들을 죽이는 것도 아니쟎아요. 난 그저 그들과 감정의 교감을 나누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에게 슬픔을 이끌어서 너의 에너지로 삼는 행위를 그렇게 말하는 것인가?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 좋아, 하지만 딴데 가서 알아봐. 내 주위에 서는 그 꼴 못 보니까 다른 곳에 가서 알아보라구." 메디아는 귀찮은 어린아이에게 말하는 것처럼 투명스럽게 대답했다. "내가 그들보고 죽으라고 하는 건 아니쟎아요." "넌 바보가 아닐텐데 어리석은 말을 하는구나.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알만큼 아 는 정령이 그런 말을 하다니 내가 웃어줘야 하나? 슬픔때문에 죽을 수 있는 아주 희안한 종족이 바로 인간이야. 그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 너는 그들의 감정을 극 한으로 이끌어 이용하고 있쟎아. 지금까지 수 많은 인간들을 보아오면서 그 사실 을 깨닫지 못 했다면 네가 비애의 정령이라 할 수도 없지 않겠어?" "그래요, 인간이 좀 바보같다는 걸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강한 자들은 슬픔을 이기고 살아 남지 않습니까. 자살하는 자들은 어차피 죽을 자들인데 무슨 상관이지요? 그들이 슬픔 때문에 죽는다고 생각하나요? 결국은 자기 스스로를 믿지 못 하거나 현실을 이기지 못 해서 자살하는 것일 뿐이지요. 그건 내 잘못도 아니고 슬픔 때문도 아니지요. 그들 스스로가 나약하고 자신에 대한 믿음도 없 는 자들일 뿐...... 그런 자들은 결국에는 무슨 핑계를 만들어서든 죽게 되어있 어요. 결코 슬픔 때문에 삶을 포기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메디아는 살짝 이마를 찡그려 보였다. 그녀는 하급정령과 인간에 대해 토론할만 큼 한가하지도 않았고 또 시간이 남아 돈다고 해도 비애의 정령과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가볍게 손사래를 쳐보 였다. "이제 할 말 다했어?" 메를로는 열띠게 떠들던 입을 다물었다. 입이 있는지 투명해서 잘 보이지도 않았 지만 어쨌든 흔들리던 그림자는 그대로 딱 멈추어섰다. "좋아요. 여기서는 아무짓도 안하고 얌전히 있겠어요." "아니, 에코에게서 아예 떠나줘." "그건 너무 심하쟎아요! 이 인간은 아주 오랫만에 찾은 것입니다. 에너지를 얻기 위해선 이 여자가 필요해요." "그거야 네 사정이고 빨리 떠나기나 해. 네 몰골 보는 것도 싫어." 그순간 메를로의 기운이 싸늘해졌다. "정령의 원한을 사고 싶은 겁니까? 그건 위험한 짓일텐데요. 당신이라도......" "지금 날 협박하는 건가? 하! 오늘 밤은 정말 가지가지로 웃끼는군. 하여튼 빨리 가. 너하고 떠드는 것도 지겨워. 밤에 말 많이 하는 것 만큼 싫은 것도 없는데 오늘은 지나치게 많이 떠들었어. 그리고 난 자야겠으니 곱게 물러나든가, 아니 면....." 메디아는 잠시 말을 끊더니 정색을 하며 손을 들어 올렸다. "소멸되던가...... 둘중의 하나만 결정해, 메를로." 메를로는 바보가 아니었다. 메를로는 메디아의 기세에서 한줌의 망설임이나 감정의 끄트머리도 느낄 수 없었 다. 에코라는 인간이 어떻게 되든 그녀는 신경도 쓰지 않을 것 같았다. 메를로는 하찮은 인간하나 때문에 존재의 소멸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다. 카오스의 달빛 아래 차갑게 빛나는 메디아의 눈빛은 무서우리만치 고요했다. 그 눈동자 속에서 메를로는 광폭한 마녀의 잔인함이 번뜩이는 것을 보았다. 언제였던가 분노에 사 로잡힌 반지의 마녀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를 본 적이 있었다. 그때도 이와 비슷 한 전율을 느꼈었다. 그리고 메를로는 조용히 물러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메를로의 창백하고 하얀 그림자가 서서히 에코의 몸에서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정령의 자취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와 함께 백색의 기류도 사라져 버리자 성 벽위에 올라섰던 사람들이 하나둘 정신을 차리며 당황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바라본 메디아는 망토를 휙 잡아당겨 몸에 두르며 투덜거렸다. "언젠가 히에로스를 다시 만나게 되면 한마디 해두던지 해야지. 아니면 계약을 맺어 버리던가." 히에로스는 메를로가 속한 정신계열의 최상급 정령으로서 정령왕이었다. 메디아 가 그와 계약을 한다면 메를로 같은 하급정령은 그녀 주위에 나타날 일도 없었다. "넌 정령과의 계약을 싫어 했쟎아." 블루잉이 메디아의 발걸음을 열심히 따라가며 말했다. 정령과의 계약을 아무나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녀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그녀들 몸 속에 흐르는 혈통은 악마로부터 왔다고 하지 않던가. "이렇게 귀찮은 일을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어차피 악마의 딸이라 불리는 마녀인데 무슨 상관이겠어? 내가 정령술사처럼 영혼을 저 당잡혀야 하는 것도 아닌데......" "그럼 메를로하고 계약하지 그랬어?" "블루잉, 너도 마시와 있다보니 머리가 굳어 버렸니? 메를로 같은 하급정령은 힘 이 없어서 이런 짓을 하고 돌아다닐정도인데 그런 약해 빠지고 쓸데도 없는 그녀 와 계약을 해서 뭘하란 말이야? 더 귀찮아 지지 않으면 다행이지." 그녀는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며 당황한 사람들이 북적거리기 시작하는 칙칙한 복 도를 터벅터벅 걸어갔다. 내일 왕궁으로 가는 동안 낮잠이라도 자야할 것 같았다. - 계 속 - 드디어 열일곱살이었던 국왕 히페리온과 메디아의 재회가 다가오네요....^^; 아... 그리고 deadsea가 제 아뒤어요. 닉네임은 핏빛새벽인데... 그냥 뱀파이어로 살아갈 겁니다. (어차피 그게 그거지만...^^;) 메일 메모 많이 주세요. *^_^* (독촉글이나 돌도 받아요. 이왕이면 비평이나 감상을 주시면 감사.*^^*) - 뱀파이어 - 번 호 : 65 / 83 등록일 : 2000년 01월 16일 07:40 등록자 : DEADSEA 조 회 : 1558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65.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순수하게 까맣던 그 밤, 어둠 속에 함몰하는 별빛을 보았을 때 죽어간 영혼의 붉은 혈액은 슬픈 그대 눈물이 되었고 숨겨진 진실은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았다. 제 65 장 왕이 미친 게 틀림 없어. 오람 시의 북쪽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는 왕성은 오람의 자랑거리이자 장관을 이 루는 건축물로써 매우 잘 알려져 있었다. 열한개의 첨탑으로 이루어진 왕성의 내 성은 9층으로 이루어진 주 건물과 그에 딸린 부속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건물 자체가 마법써클에 맞추어 설계되었기 때문에 매우 정교한 구조를 자랑하는 왕 성은 그 규모만도 엄청난 건물이었다. 여덟개의 거대한 탑을 주축으로 세워진 외 성의 둘레는 장장 몇 십킬로미터에 달할정도였고 왕궁 주위로는 빽빽히 키작은 나무가 들어서 있어서 대규모 사냥터로도 이용되었다. 그리고 넓은 들판이 왕궁 으로 가는 길의 전면풍경이 되어 주었다. 왕궁 내부는 대부분 흰색과 황금빛으로 칠해져 있었고 벽과 천정은 화려한 벽화 나 조각으로 가득했다. 멀리 아르카디아에서 조각가와 세공업자, 전문기술자들을 불러 왕궁의 정원과 분수대를 설치하고 보이는 곳곳에 아름다운 동상과 건축물 을 세워 놓았기에 오람의 왕성은 우아함과 화려함을 동시에 갖추고 있었다. 홀과 복도의 높이만해도 여느 건물들보다 세배는 더 올려다 보아야 할 정도였고 대 연회장은 천명이 동시에 들어가 춤을 추어도 될 정도였다. 하얀 아침 햇살이 왕궁의 서쪽 중앙을 가로지를 무렵 너무나 아름답고 섬세한 창 조신 가니아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복도를 숨차게 뛰어가는 그림자가 있었다. 왕실 수석마법사의 수제자로 있는 후마는 발바닥에 불이 날 정도로 내성의 복도 를 정신없이 뛰어가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주방에서 시간을 보내던 그녀의 작 은 발걸음은 자신의 스승이자 오람의 수석 마법사 아담의 연구실로 향하느라 급 하기만 했다. 무릎까지 오는 짧고 분홍색이 감도는 망토를 걸친 후마의 모습은 아직 귀여움이 남아있는 열일곱살의 애띤 모습이었다. 검은 색 바지를 입은 작은 키에 약간은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후마는 매우 건강하고 귀여운 소녀였다. 심하게 곱슬거리는 노란색 머리카락을 가까스로 묶어서 고정시켜 놓고 뛰어가는 그녀의 모양새가 방금 놀다나온 장난꾸러기 요정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후마는 두개의 휘어진 긴 복도를 지나 커다란 홀까지 단숨에 통과하며 작은 분수 가 여러개 설치되어 있는 정원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그녀가 뛰어가는 그림자 뒤로 작은 과자 부스러기들이 떨어지고 있었고 그 뒤를 이어 조그맣고 알록달록 한 새들이 내려앉아 먹이를 쪼아 먹었다. 아마도 후마의 주머니에는 주방에서 챙 긴 과자들이 들어 있었던 모양이지만 조심성없이 뛰고있는 그녀의 발걸음에 과자 들이 주머니에서 튀어 나오고 있는 듯 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경비병들이 웃음을 참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후마는 투명하고 맑은 아침 햇살이 비춰드 는 왕궁의 내성을 힘차게 내달렸다. 후마는 내성을 둘러싼 여섯개의 첨탑 중 하나를 찾아 6층에 위치한 스승의 연구 실까지 헐레벌떡 달려 올라갔다. 그녀의 얼굴은 약간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호흡 은 매우 거칠었다. 아담의 연구실 문을 벌컥 열은 그녀는 그 안에서 풍겨나오는 약초냄새와 책에서 나는 오래된 종이냄새를 힘껏 들이 마셔야만 했다. 그녀는 복 잡하게 어질러져 있는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숨도 고르지 않고 재채기를 하더니 숨 넘어갈 듯 소리쳤다. "스승님, 왕이 드디어 미쳤나봐요." 왕실의 수석마법사 아담의 연구실은 왕궁 내성의 서남쪽에 있는 첨탑으로 6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왕실 마법사들이 서남쪽 탑에 머물며 연구를 하고 있 었고 아담도 거의 연구실에서 살다시피 하는 편이었다. 아침이지만 그의 연구실은 옅은 어둠이 깔려 있었는데 창으로 조금 새어 들어오는 햇살이 오래된 고서들을 비추어 주었다. "후마야, 그 입 좀 조심하거라. 폐하께 그런 말을 하면 안된다고 몇 번이나 주의 를 주어야 하겠느냐?" 후마의 스승인 아담은 하얀 눈썹이 주름진 얼굴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전형적 인 마법사 같았다. 바닥에 살짝 닿을 듯한 연두색 망토를 걸치고 있는 모습도 그 랬고 깊게 가라앉아 연륜이 돋보이는 초록색 눈동자도 나이든 마법사로써 매우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아담은 이제 몇년 후면 백세를 바라보는 나이였지만 아 직도 건강하게 연구를 하고 있는 노장이었다. "그래, 이번에는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듣고 그러느냐?" 잠시 스승의 꾸중에 입을 다물었던 후마의 입술이 기다린 것처럼 열리며 흥분한 어조로 순식간에 떠들기 시작했다. "왕이 점심 식탁에 올려놓을 음식으로 뭘 주문했는지 아시면 스승님도 제 말이 맞다고 하실 걸요? 왕이 정신이 나간 게 틀림 없어요. 요 며칠 간 안그래도 수상 했쟎아요. 갑자기 쳐다보지도 않던 거울을 수십 번이나 쳐다보면서 옷을 몇 십벌 을 가져다가 입어보시지를 않나, 왕자님과 공주님들을 앉혀 놓고 이상한 질문을 하면서 헬레나 왕비님께 화를 내시기도 하고 훈련받는 기사들을 닥달하시면서 생 전 안하시던 고함을 질러 대기까지 하셨쟎아요. 어디 그뿐인가요? 거기다가 케이 론님의 방으로는 하루에도 수십번은 들락거리시며 대신관님을 귀찮게 하셨쟎아요." 대마법사라 불리는 아담은 인내심을 가지고 후마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이야기 가 끝날 때까지 참을성 있게 듣기만 했다. "얘야, 그래서 왕이 지금 미쳤다고 하는 게냐?" "아니요. 오늘 아침도 케이론님의 방에 세번쯤 방문하신 폐하께서 갑자기 주방 담당자를 부르셔서..... 세상에나...!" 노란 곱슬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릴정도로 후마는 과장되게 놀란 표정을 지으며 황 당하다는 듯이 손을 내저어 보였다. 그 뒷얘기는 감히 상상도 못 할 대단한 거라 는 듯이. "그래, 주방 담당자를 부르셨는데... 그게 무슨 문제냐?" "세상에 스승님! 폐하께서 오크를 요리하라고 명하셨데요." "뭐?!" 시종 침착하게 제자의 호들갑스런 이야기를 듣고 있던 우아한 왕실 마법사 아담 은 자신이 제대로 듣고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폐하께서 통통한 오크 한마리를 잡아다가 맛있게 요리해서 식탁에 통째로 올려 놓으라고 하셨다니까요." 아담의 하얀 눈썹이 찌푸려지는 일은 당연했다. 이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인간이 오크를 요리해서 뭘 어쩐단 말인가? 그 걸 설마 먹으려는 것도 아니고. 이 세상에서 오크를 먹을 수 있는 엽기적인 미각 을 가진 동물은 오직 드레곤 밖에 없었다. "정말 왕께서 그런 지시를 내리셨느냐? 또 어디서 잘 못 듣고 온거 아니냐, 후마 야?" 아담은 자신의 덜렁거리는 어린 제자를 지그시 내려다보며 물었다. "아니예요. 이번에는 제가 주방장한테 직접 들었단 말이어요, 스승님." 아담은 손에 들고 있던 마법서를 탁 소리가 나게 덮어 버렸다. 사실, 요즘 왕이 정상이 아니라는 소문은 공공연하게 떠돌고 있었다. 왕은 갑자기 미치기라도 했 는지 평소 하지도 않던 행동들을 하면서 시종들이나 주위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 가장 큰 괴롭힘을 당하는 대신관 케이론은 이상하게 도 왕의 행동에 전혀 문제가 없다는 듯이 웃으며 그 모습들을 바라보았고 왕비 헬레나조차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점심 식 탁에 오크를 요리해서 내오라는 명령은 좀 심한 것 같았다. 정말 왕이 미쳐버리 기라도 한걸까? 아담은 길게 늘어진 연두색 망토를 땅바닥에 살짝 끌며 연구실을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대신관 케이론을 찾아 가봐야 할 것 같다. 이 소란이 왜 시작되었으며 또 언제쯤 끝날지, 대신관 케이론이라면 대답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예언자이며 또 왕의 가장 가까운 조언자였으니까, 당연히 이 사태에 대해 뭔가 아는 것이 있을 것이다. 아담은 어둠이 살짝 깔린 복도로 나오며 자신의 뒤를 황급히 따라 나오는 어린 제자를 생각났다는 듯이 뒤돌아 보 았다. "후마야." "예, 스승님." 발랄하게 대답하는 후마의 눈에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 까 한껏 기대하는 눈치였다. "넌 좀 벌을 받아야 할 것 같구나." 후마의 귀엽고 장난스럽던 눈동자가 갑자기 동그랗게 커졌다. 그 순간 그녀의 머 리 위에 작은 먹구름이 생겨나더니 금새 주룩주룩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꺄아악~. 스승님!" "앞으로는 입을 조심하거라, 얘야." 아담은 제자의 꺅꺅거리는 비명소리를 귓등으로 들으며 긴 복도를 여유있게 걸어 나갔다. 그의 뒤로는 머리카락이 비에 젖어 울상을 짖고 있는 후마가 작은 분홍 색 우산을 펴드는 중이었다. "에구... 벌써 다 젖었네. 고약한 영감탱이 같으니라구. 눈치라도 주고 비를 뿌 려야지 홀딱 젖어 버렸쟎아." 스승의 모습이 복도에서 사라지자 후마는 투덜거렸다. 하지만, "후마! 요녀석." "힉!" 후마는 깜짝 놀라 자신의 입을 막았지만 어느새 그녀의 스승은 코앞에 다가와 있 었다. "하루면 끝내 줄려고 했더니 안되겠구나. 앞으로 일주일동안 비구름을 달고 다녀 봐라. 고약한 녀석아." "잘 못 했어요, 스승님. 다신 안그럴께요." 후마는 귀엽게 애교를 떨며 애원했지만 아담은 못 들은 척 했다. "나중에 보자꾸나, 제자야. 함부로 비구름을 없애면 더 심한 벌을 줄테니 알아서 조신하게 지내려무나." 그렇게 아담이 제자를 꾸짖는 중에도 후마의 머리 위에 자리 잡은 작은 먹구름에 서는 쉴새없이 비가 쏟아져 내렸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후마의 몸을 흠뻑 적시는 비는 계속 내렸지만 바닥에 흥건히 고여야 할 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었 다. 아담의 마법으로 만들어진 비구름은 그의 제자 후마를 적시고 있을 뿐이었다. 아담이 대신관 케이론을 찾아갔을 때는 이미 그가 자리에 없었고 왕의 점심식사 에 참석하라는 전갈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아담이 케이론을 찾아올 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대신관 케이론의 제자가 그에게 전갈을 전해 주었다. "케이론님께서 수석 마법사님이 오실 거라고 하시더군요. 오시면 전해 주라고 하 셨습니다." 그러나 왕실의 수석 마법사로써 점쟎고 선량한 아담은 막상 왕의 점심식탁에서 겪게 될 일을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았다. 길고 긴 식탁이 놓여있는 왕성의 식당 내부는 호화롭고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연한 분홍빛이 감도는 벽돌로 이루어진 내부에는 실내 장식으로 빙 둘러져 있는 섬세한 여신상의 조각품이 가득했고 군데군데 조그만 분수대와 이제 막 꽃봉오리 를 터뜨리기 시작하는 화려한 장미가 놓여 있었다. 식탁에서 가까운 열려진 커다 란 창문으로는 화사한 봄 정원이 넓게 펼쳐져 있어서 거의 완벽할 정도의 아름다 운 풍경을 자랑했다. 한낮의 태양이 왕궁의 차가운 돌벽들을 따뜻하게 달구고 있을 무렵 라메즈와 제 피로스 일행은 왕성의 식탁에 앉아 있을 수 있었다. 국왕 히페리온의 식사에 개 인적으로 초대 받아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은근히 자부심 이 들만도 했지만 그 식탁에 둘러 앉은 모든 사람들의 심사는 결코 편안하지 못 했다. 알렉토는 제피로스의 옆자리에 앉아 두 개의 빈자리를 불안하게 힐끔거렸 고 가출했던 오피온 왕자와 로사리아 공주도 아직 아무런 꾸지람도 듣지 않은 상 태로 식탁에 앉아 있었지만 그들의 아버지이자 국왕인 히페리온의 눈치를 보며 불안한 심정으로 조용히 기다리는 중이었다. 올해로 예순셋이 되었지만 아직도 팔팔한 기운을 내뿜는 국왕 히페리온은 못 마 땅한 표정으로 식탁을 둘러 보았다. 그 나이가 되어서도 흰머리가 가끔 있었지만 여전히 검은 머리와 황금빛 눈동자를 간직한 왕은 모두를 압도할만한 위엄을 보 이며 가장 상석의 자리에 꽂꽂하게 앉아 있었다. 그의 지시대로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진 오크 한마리가 향료냄새를 짙게 풍기며 거대한 식탁의 한가운데 보란듯이 통째로 누워 있었다. 오크의 듬성듬성한 털은 잘 밀어져서 반들반들한 살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얼굴 가운데에는 돼지처럼 큼지 막한 코가 천정을 향해 들려 있었다. 그리고 튀어나온 입술은 절묘하게 웃고 있 는 모습이었다. 우아하고 섬세해 보이는 식당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진풍경이 었다. 그런데 정작 그걸 준비하게 만든 장본인들은 이 자리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히페리온은 충신 라메즈와 그의 아들 제피로스를 향해 불만스런 시선을 던졌다. 도대체 메디아는 어디가고 달랑 덩치 큰 전사하나만 데리고 왔단 말인가? 제피로 스의 횡설수설하는 변명에 의하면 마시라는 소년이 갑자기 메디아의 빗자루를 가 지고 사라졌는데 메디아는 그 소년을 찾기위해 순식간에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왕궁이 아무리 넓어도 그들을 찾아오라고 명령한 게 언제인데 아직까지도 연락이 없는 것인지 히페리온은 약간은 초조함까지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게 우스운 일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저 옛날의 어리 석은 추억에 불과한 것을 지나치게 과대해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까지 하 며 히페리온은 요리되어 웃고 있는 오크의 얼굴이 그를 비웃고 있는 것만 같아서 심사가 점점 불편해 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수 십년전에 있었던 메디아와의 일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어 려운 일이 닥칠때마다 이상하게도 그는 그때의 일이 생생히 떠오르곤 했다. 국왕인 그에게 그녀가 말했었다. - 네가 과연 나의 왕될 자격이 있는지 증명해 봐. - 그리고 히페리온은 자신의 아들에게 똑 같은 것을 가르치고 있었다. - 왕이 되고 싶거든, 자신이 왕될 자격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아라, 아들아.- 그리고 아들은 어리석은 대답을 했었다. - 전 왕이신 폐하의 핏줄을 이어받은 적자입니다. 첫째 아들로써 마땅히 제가 후계자 자격이 있는 것 아닙니까? 제가 아버님의 아들임을 증명해야만 한다는 겁니까? - 하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 첫째 아들 헬리오스는 이제 왕의 자격을 제대로 갖추 어 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아들은 이제 정통 후계자로써 히페리온의 인정을 받고 있었다. 히페리온이 가만히 눈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쌩하는 소리가 들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울려퍼지는 다급한 비명소리와 당황스런 외침들이 히페리온의 귀를 자극하며 그의 몸이 붕 떠오르 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잠시 후에야 히페리온은 자신이 왜 의자에서 굴러 떨어 져 있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어디에서 날아들어 왔는지 몰라도 그의 가 슴 위에는 흠뻑 젖어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검은 머리의 소년이 올라 앉아 있었고 소년의 손에는 길다란 빗자루가 들려 있었다. "이씨-, 날고 있는데 그런 걸 던지면 어떻게 해. 죽을뻔 했쟎아!" 창가에서 갑자기 날아들어 온 소년은 자신의 밑에 누가 깔려 있는지는 신경도 쓰 지 않았다. 소년은 머리카락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털어내며 히페리온을 깔고 앉은 자세 그대로 뒤를 향해 매섭게 소리를 질렀다. 그에 대답하듯 카랑카랑한 젊은 여자의 화난 목소리가 정원이 위치한 창밖에서 들려왔다. "젠장! 마시." 곧이어 이어지는 그녀의 목소리는 상당히 짜증스러운 기운을 내포하고 있었다. "지금 누구한테 큰소리야. 당장 내 빗자루나 내놓지 못 하겠어? 안그러면 워터 해머(water hammer)보다 더 따끔한 맛을 보여주겠어, 이 나쁜 녀석!" 푸짐하다 못해 화려하기 그지없는 식탁위의 음식들을 그저 멀거니 쳐다보고만 있 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찢어질 듯 부릅떠지며 상석에 앉아있던 왕에게로 향했 다. 왕은 열서너살 먹은 소년과 뒤엉켜 바닥에 반쯤은 누워 있는 상태였는데 아 직도 정신이 없는지 그를 짖누르고 있는 의자와 소년을 밀어낼 생각도 못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놀란 경비병들도 순간적으로 너무 놀라 완전히 마비가 되었는지 아무도 움직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유일하게 고소한 웃음을 머금고 그 상황을 지켜 본 사람도 있었으니 얌전 히 앉아서 미소를 짓고 있는 붉은 머리의 로사리아 공주였다. '저 자식은 이제 죽었어.' - 계 속 - 드디어 후마와 아담까지 등장했군...에구 힘들어...^^;;; 번 호 : 66 / 83 등록일 : 2000년 01월 20일 13:08 등록자 : DEADSEA 조 회 : 1580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66.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순수하게 까맣던 그 밤, 어둠 속에 함몰하는 별빛을 보았을 때 죽어간 영혼의 붉은 혈액은 슬픈 그대 눈물이 되었고 숨겨진 진실은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았다. 제 66 장 왕과 그의 사랑스러운 왕비. 라메즈와 제피로스를 선두로 왕궁으로 들어선 일행은 두개의 거대한 성문을 지나 세번 째 아치형 대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두번째 성문까지 타고 온 말을 병사들 에게 맡기고 걷기 시작한 일행의 후미에서 따라들어가던 마시는 왕궁의 거대한 규모를 보며 입을 다물지 못 하고 있었다. 사방을 둘러싼 성벽의 견고함과 그 하 나하나의 벽돌의 크기는 어마어마한 규모로 감히 인간의 축조물이라 하기에는 믿 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우와~, 여기도 드레곤이 사나보네." 마시의 관점에서는 이렇게 큰 곳에 살고 있을만한 생물은 드레곤밖에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지금까지 보아 온 인간들의 거처는 메디아와 마 시가 살던 레어보다 훨씬 작았기 때문이었다. "여긴 왕이 사는 곳이야, 마시." 마시의 곱지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항상 메디아의 옆에서 떨어지지 않는 카란이 상냥한 목소리로 마시에게 말을 걸었지만 마시는 카란을 무시하고 메디아에게 물었다. "메디아야, 왕이 드레곤이야?" "아니." "그럼 몸집이 굉장히 큰가봐?" "아니." "그럼 왜 이렇게 큰 집에서 산데?" "몰라." 메디아의 대답을 들으면서 마시의 순진무구하던 눈동자가 서서히 불만을 품기 시 작했다. 마시는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고 건성건성 대답하면서 앞을 향해 걸어가 는 메디아의 발걸음을 멈추기 위해 손을 뻗었다. 마시는 그녀가 들고 있는 빗자 루를 붙잡아 세웠다. 갑작스런 마시의 손길에 발길을 멈춘 메디아가 마시를 돌아 보았다. "왜?" "대답이 왜그래?" "뭘?" 메디아의 시큰둥한 반응에 마시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이거 집 맞지?" "아니." "왕이 사는 곳이라며?" "왕궁이라고 하는 거야." "왕이 여러 명이야?" "아니." "혼자서 이렇게 큰 집에 살아?" "아니." "그럼, 누가 또 사는데?" 메디아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너 도대체 뭐가 궁금하니?" 마시는 괜스레 메디아의 빗자루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고개를 들어 사방을 둘러 싸고 있는 화려한 기둥과 풍경들을 쓱 훑어 보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정면을 가 득 채우고 있는 엄청난 크기의 내성의 외벽을 올려 본 후 생각했다. 저 너머엔 뭐가 있을까? 혹시 왕이라는 종족을 볼 수 있을까? 그는 메디아의 치켜올라간 눈을 힐끔 살펴보았다. 그녀에게 물어봤자 제대로 된 대답을 해줄 것 같지 않았다. 묻는 말에 '아니'라는 간단하고도 무성의한 대답만 을 하는 메디아에게는 더 물어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시선을 내려 자신의 손 으로 꽉 붙잡고 있는 그녀의 빗자루를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 그 순간 마시는 머릿속에 떠오른 어떤 생각에 다른 생각은 할 겨를도 없이 메디아에게서 빗자루 를 홱 낚아채었다. 그리고는 최대한 빨리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는 최대한 민첩하게 달려나가며 빗자루에 올라타고는 신나는 비행을 상상했다. 뒤에서 메디아가 소리를 지르던 말던 그건 전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마시의 입술이 저절로 쭉 찢어지고 달콤한 미소가 그의 얼굴을 뒤덮었다. 아.... 얼마만에 타보는 빗자루인가. 히힛. * * * 메디아의 마법을 직통으로 얻어맞고 빗자루를 끌어 앉은 채 식당으로 떨어져 들 어 온 마시는 축축하게 젖어버린 옷에서 물끼를 쭉 짜냈다. "쳇. 하필이면 물을 쏟아 부을게 뭐야." 마시는 투덜투덜 입을 삐쭉거렸지만 눈만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마음껏 날 아다녔더니 기분이 아주 좋았다. 짜릿했던 느낌에 그는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방금 그가 쏘아져 들어왔던 창가로 뒤따라 들어선 메디아의 시 선을 보니 그녀는 전혀 유쾌한 기분이 아닌 모양이었다. "조금 타고 날아다닌다고 빗자루가 닳아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이럴수가 있어? 잠깐 구경 좀 하려고 그랬을 뿐이란 말이야." 마시는 약간의 애교를 섞어 말하며 메디아를 힐끗 올려다 보았다. 사실, 날아다 니기만 했지 말썽을 부린 건 아니지 않은가? 한바탕 따끔한 맛을 보여주려던 메디아는 그녀의 마법으로 물을 흠뻑 뒤집어 쓴 마시의 귀여운 얼굴이 애교를 떠는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 이런일이 한두 번이었던가? 그때마다 화를 내다가는 내명에 못 살지. 그리고 체념하듯 중얼거렸 다. "마시, 밑에 깔려 있는 사람이 불쌍하지도 않니?" 메디아의 목소리로 보아 그녀의 화가 누그러졌음을 느낀 마시는 훨씬 좋아진 기 분으로 그제서야 자신의 밑에 깔려있는 인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바닥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시는 방긋 웃는 얼굴로 어울리지도 않는 말을 내뱉었다. "헤에, 괜찮으세요?" 전혀 괜찮지 않았다. 히페리온은 멍하니 생각했다. 60평생을 수 많은 일들을 겪으 면서 살아왔지만 지금 이 순간처럼 혀가 굳어 버릴만큼 당황스럽기는 처음이었다. 히페리온이 입고 있던 말끔한 비단옷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지만 그는 그런 것도 느끼지 못 했다. 그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메디아와 마시를 쳐다보며 혼란스 러울 뿐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왕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왕비 헬레나는 그 상황에서도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일어나서 왕을 부축해 일으켰다. 그녀의 꽉 다물어진 입술주위가 가늘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녀가 우아한 표정을 유지하려고 무척이나 애쓰고 있 다는 것이 역력했다. 놀란 신음을 삼키기 위해서인지 숨을 멈추고 있는 것 같았 다. 겨우 일어선 왕과 왕비가 서로 마주 서는 동안 실내에는 고요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저, 잠깐만...... 실례하겠어요." 왕과 잠깐 동안 나란히 서있던 헬레나는 꽉 잠긴 듯한 목소리로 순식간에 중얼거 리고는 황급히 드레스자락을 들어올리며 누가 말릴 사이도 없이 식당을 빠져나가 기 시작했다. 그녀는 식당을 나와 복도를 벗어나기도 전에 목까지 치켜 올라온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내뱉았다. 그리고는 어떻게 해볼 사이도 없이 발작하듯 웃 음이 터져나오고 말았다. 그녀의 통쾌한 웃음소리가 넓은 복도의 천정으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식당까지도 생생히 전해질 것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헬레나는 도저히 터져나오는 폭소를 멈출 수가 없었다. 이제 쉰살이 넘어 섰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자태와 우아함을 자랑하던 그녀는 배를 움켜잡으며 숨이 넘어 갈 듯 웃음을 터뜨렸다. 숨이 가빠서 가슴이 아플 때까지 웃고 또 웃었지만 한번 터져나온 웃음은 쉽사리 멈춰지지 않았다. 나중에는 너무 웃어서 아랫배가 끊어 지는 것처럼 땡겨왔지만 헬레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왕궁생활 40여년만에 이렇게 참을수 없을만큼 유쾌하게 웃어 본 것이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녀는 정말 즐거운 기분으로 마음껏 웃고 있었다. 그러나 복도밖에서 울려퍼져오는 왕비의 요란한 웃음소리를 듣고 있는 식당안의 사람들은 여전히 기묘한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장식용 분수대에서 샘물이 맑은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지만 사람들의 귀에는 숨 넘어가는 왕비의 웃음소리만이 크게 확대되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왕의 신하들은 얼굴이 완전히 새파랗게 질 린 상태로 감히 어느 누구도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그 고요한 침묵속에서도 여전히 사태파악을 못 하는 마시는 젖어있는 상의를 붙 잡고 두 손으로 물을 짜내고 있었다. 화려한 카펫이 깔려있는 바닥에 물방울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넓은 식탁 주변으로 놀라서 벌떡 일어나 있던 사람들은 마시의 등장과 왕비의 이 해할 수 없는 행동 중에 어느 것이 더 당황스러운 일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순식 간에 일어난 일련의 사태에 어쩔 줄을 몰라 할 뿐이었다. 그러나 경비병들은 뒤늦께 자신들이 해야할 일을 깨달은듯 마시를 향해 창을 겨 누며 왕을 호위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고요하던 식당이 소란스러워지며 여기저기 서 호통소리와 걱정하는 소리가 뒤섞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난리법석을 떨어대 는 신하들과 경비병들에 둘러싸인 히페리온은 복도에서 들려오는 왕비의 웃음소 리에 겨우 이성을 되찾았다. "모두 물러서라." 갑자기 들려온 왕의 위엄에 찬 웅장한 목소리에 소란스러웠던 실내가 일시에 조 용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복도에서 왕의 우렁찬 목소리를 들었는지 왕비 헬레나 의 웃음소리도 뚝 멈추어졌다. 잠시 후 식당으로 되돌아와 왕의 옆에 조용히 선 왕비의 얼굴에는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우아한 기품이 흘러 넘치고 있었다. 마 치, 방금전의 요란한 웃음소리는 결코 그녀의 것이 아니고 환청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였다. 왕은 자신의 주위로 몰려든 신하들을 손짓으로 물리치고 가까이에 서있는 메디아 와 마시를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의 얼굴에는 조금전까지의 당혹스러움이 씻은 듯이 사라지고 왕다운 표정만이 깃들어 있었다. 파라 왕가의 혈통을 보여주 듯 빛나는 황금색 눈동자에는 이제 침착함과 위엄이 담겨 있었다. 히페리온은 메디아를 뚫어질 듯 응시했다. 그 어느 겨울, 흰눈이 사방을 휩싸고 있었을 때 홀연히 그의 앞에 나타났던 그녀 가 틀림 없었다.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를 대충 땋아서 늘어뜨리고 신비 한 보라색 눈동자로 자신을 향해 있는 그녀의 모습은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전혀 변함이 없었다. 주름살 하나없이 깨끗한 젊은 처녀의 얼굴로 서있었지만 그녀에 게서 풍기는 분위기는 결코 젊은이의 그것이 아니었다. 예전에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던 오래된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유의 무언가가 그녀에게서 느껴졌다. 오래 전 창조신 가니아의 이름 앞에서 국왕 자신이 생명이 다할 때까지 지켜야 할 신성한 맹세를 약속했던 그녀였다. 그의 입술에서 확인하듯 그녀의 이름이 흘 러나왔다. "메디아." - 계 속 - 비평, 감상 좀 해주세요. *^^*(에... 한편에 대한 것도 환영!) 번 호 : 67 / 83 등록일 : 2000년 01월 25일 22:01 등록자 : DEADSEA 조 회 : 1641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67.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순수하게 까맣던 그 밤, 어둠 속에 함몰하는 별빛을 보았을 때 죽어간 영혼의 붉은 혈액은 슬픈 그대 눈물이 되었고 숨겨진 진실은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았다. 제 67 장 대재앙. 국왕 히페리온이 그녀의 이름을 나직히 불렀다. "메디아." 메디아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어린 왕. 애늙이라고 생각했던 열일곱살의 어린 국왕은 이제 정말 늙은이가 되어 있었다. 반짝반짝 윤이 나던 검은 머리에는 어느새 흰머리가 생겨 중후한 모습을 풍겼고 이마에도 세월의 흔적을 담아내듯 굵은 주름이 패여 있었다. 국왕은 약간은 늘씬 했던 소년의 모습에서 풍채좋은 어른의 모습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그의 굳게 다 물어진 입매에서는 지배자 특유의 고집스러움까지 느껴졌다. "그래, 그렇군." 메디아는 자신의 입술을 통해 무심히 흘러나오는 말을 의식하지 못 했다. 자신도 무슨 의미로 그렇게 말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이런 기분을 최근에도 느 꼈었다. 바로 한달여 전에 홀링을 만났던 순간도 지금과 같은 기분이었다. 시간 이라는 것의 잔인성이 너무나도 실감나게 느껴지는, 그 알 수 없는 나락에 빠진 기분. 아마도 성장한 자식이 세월에 빼앗겨 버린 부모를 생각할 때 느끼는 참담 함이 이러할 것 같았다. 메디아는 자신이 지금의 이 순간을 결코 바라지 않았다는 것을 뒤늦께 깨달았다. 성장한 히페리온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우연속에 장난스럽게 맺어진 인연이었지만 그 겨울의 기억이 퇴색되는 일이 없었으면 하고 바랬다는 것을 지 금에야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려 영원히 늙지 않을 아이 를 쳐다보았다. 성장한다하여도 결코 변하지 않을거라는 믿음이 가는 아이. "마시." 고급스런 카펫에 물을 죽죽 짜내고 있던 마시가 메디아의 부름에 고개를 쳐들었 다. "왜불러?" 때묻지 않은 마시의 눈을 마주보며 메디아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에 미소를 떠올 렸다. 그리고는 히페리온을 다시 안정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다시 냉철 한 메디아로 돌아왔다. "식사 중 아니었어? 그만 밥이나 먹었으면 좋겠는데......" 퉁명스런 메디아의 말투에 멀쓱해진 히페리온은 식어가고 있는 음식들을 향해 고 개를 돌렸다. 그는 어떻게 해야할지 잠시 알 수가 없었다. 그의 사고능력이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한다고 일러주지 않았다. 그는 메디아의 침착하게 가라앉은 눈 동자를 쳐다보며 자신의 흥분된 마음을 알아챘다. 아무래도 마음을 진정시킬 필 요가 있었다. "우와,우와.... 메디아야~." 그러나 히페리온의 생각은 마시의 환호성에 묻혀버렸다. "메디아야, 이거 먹어도 될까? 응?응?" 어색한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먹음직스럽게 요리된 오크를 바라보며 군침 을 삼키는 마시는 메디아가 여행을 떠나기 전에 오크를 잡아먹지 말라고 당부했 던 것을 잊지 않았는지 기대에 찬 눈초리를 던졌다. "얘야, 먹으라고 차려준건데 당연히 먹어야지. 어서 먹으려무나." 마시에게 흐뭇하게 대답을 한 것은 상석 가까이 서있던 흰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 이었다. 그는 가니아 신전의 대신관이자 왕의 조언자인 케이론이었다. 그의 눈에 는 마시를 향한 따스함이 물씬 담겨 있었다. "그런데 메디아, 마시를 항상 그렇게 구박하고 사는 거냐?" 넌지시 메디아에게 말을 건네는 케이론의 음성에서는 즐거움이 묻어나왔다. "구박요? 누가 누구를 구박을 해요?" 메디아는 정말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대꾸하며 케이론을 향해 몸을 돌렸다. 히페 리온과의 재회로 잠깐동안 서먹했던 주위 분위기가 일시에 뒤바뀌었다. "네가 마시를." "누가 저 녀석을 구박한다고 그러세요? 구박한다고 기가 죽기를 하나, 알아듣기 를 하나, 구박받는 티가 나기를 하나. 저 녀석 구박하다가 제 명에 못 죽을 일이 라도 있는 줄 아세요? 구박도 하는 보람이 있어야 하는 거지요, 케이론." 딱딱거리며 대답하는 메디아를 바라보는 케이론의 눈빛에 오랫만에 생동감이 넘 쳐 흘렀다. "넌 40년만에 만나는 나한테 그렇게 바락바락 대들고 싶으냐, 메디아?" "누가 40년만에 만나자마자 먼저 시비를 걸래요? 그렇게도 심심했어요?" "난 그냥 마시와의 생활이 어떤지 물어본 것 뿐이다, 메디아. 시비 건적 없어. 누가 보자마자 마시를 그렇게 패라고 하더냐?" "패긴 누가 팹니까? 참고 있었는데." "저렇게 홀딱 적셔놓고 모른다는 게냐?" "저게 팬 거예요? 그냥 가볍게 물에 젖었을 뿐이지." "가볍게? 평소엔 얼마나 못살게 굴길래 저게 가볍게냐?" "마시한테는 저건 그저 벌레물린 축에도 못낀다고요. 왜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지 시는 겁니까? 그새 또 다른 고약한 취미라도 생겼어요, 케이론?" "넌 어떻게 된놈이 만날때마다 어르신네 취미를 들먹거리며 트집이냐? 버릇없이. 그러니까 너한테는 말이 곱게 안나가지." 케이론을 슬쩍 흘겨보던 메디아는 낮은 한숨을 내쉬며 마시에게서 빗자루를 뺏어 들었다. 여기서 더 이상 노닥거려봐야 도움될 것이 하나도 없을 것 같았다. 더 구나 옆에 어정쩡하게 버티고 서있는 나이든 히페리온의 얼굴을 오래 보고 싶지 도 않았다. "자." 그녀는 큰 숨을 한번 들이켜고 마시에게 말했다. "마시. 저 분께 인사나 하렴. 널 끔찍히도 생각하는 노인네란다. 오크요리는 선 물인 모양이니까 먹든지 말든지 맘대로 해." 왕의 집무실에는 넓은 실내 중앙에 약 30여명이 둘러 앉을 수 있는 커다란 원탁 이 놓여 있었다. 단단한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바닥은 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었고 벽은 방음 때문인지 온통 가로막혀서 작은 창하나 없었다. 전면에는 판타리아의 지도가 왕가를 상징하는 사자의 문양과 함께 걸려 있었는데 벽을 따라 등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원탁의 중앙에도 벽에 걸려있는 것과 같은 것으로 보이는 지도가 한장 펼쳐져 있었는데 지도의 군데군데 군사적인 암호들이 표시되어 있 는 것이 보였다. "경의 보고에 따르면 크로노스 산맥의 무역로를 차단하고 있는 배후는 시투니아 라는 이야기군." "예, 그렇습니다. 폐하." 제피로스의 보고를 들은 왕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히페리온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기사들처럼 간단한 무장을 한 상태였다. 그는 제피로스의 보고를 들 으며 지도를 신중하게 검토했다. 지금은 전쟁중이다. 사소한 것이라도 놓칠 수 없는 중요한 시기인 것이다. 그는 라메즈 가문과 파라의 양대 세도가를 형성하고 있는 네토르를 향해 눈짓을 보냈다. 왕의 시선을 받은 하얗게 바래가는 금발머리를 짧게 자른 예순가량의 노인이 탁 자에서 일어났다. 그는 긴 막대를 들어 지도의 한부분을 지적해 보이며 설명을 시작했다. "현재 코사나 지방에서는 시투니아와 전쟁이 시작된지 벌써 석달이 지나고 있지 만 양쪽 모두 피해만 속출하고 있을뿐 아무런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입 니다. 만약 이대로 나간다면 양국 모두 군사적인 피해만 늘어나기 때문에 먼저 도발한 시투니아가 일찌감치 물러날 것이라고 지금까지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그 런데..." "지금은 달라졌다는 말입니까?" 잠시 말을 끊은 네토르에게 왕실 수석마법사 아담이 물었다. "그렇소." 네토르는 지도의 여러부분들을 가르켜보이며 설명을 계속했다. "최근 한달전부터 그 예상은 수정되어야 했습니다. 방금 제피로스경의 보고대로 파라의 중요 무역로인 크로노스 산맥의 대로가 끊어진 상태나 다름없습니다. 그 리고 최악의 상황은 무기수출국인 아르카디아와의 교역로인 아이니강이 잦은 습 격으로 현재 무기가 수송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또한 시투니아의 음모로 보여지지만 아직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그외에도 시투니아의 남부와 밀접해 있는 가이야의 오스마리아 여왕으로부터 며칠 전 도착한 서신에 따르면 그들이 가이 야의 바다를 침략해 오고 있다고 합니다. 만약 가이야가 무너진다면 우리로선 심 각한 상황에 봉착할 우려가 있습니다." 네토르의 대략적인 설명이 끝나자 왕이 원탁을 둘러보며 덧붙여 말했다. "현재 오스마리아 여왕은 요정의 숲에서 엘프들의 도움을 받아 시투니아 전투선 의 해상침투를 막고 있는 상태라고 하오. 하지만 언제 무너질지 알 수 없는 일이 지. 가이야는 평화의 나라로 자처하며 지금까지 군사력에는 아무 투자도 하지 않 았으니까 말이오. 요정의 숲을 믿고 너무 안일했던 것이 화근이라고 볼 수 있오." 네토르가 자리에 앉고 왕의 말이 끝나자 라메즈가 주위를 향해 말하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코사나 지방에서의 전투의 피해상황은 심각하지 않습니다. 양쪽모두 비슷한 전력으로 서로 견제하는 상태라고 판단하시면 될겁니다. 하지만 이제 앞 으로 한달뒤의 상황은 예측하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만약 코사나 지방의 병력이 무너진다면 어떻게 될 것 같소?" 왕이 라메즈에게 물었다. 라메즈의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왕과 주위를 향해 심각한 어조로 천천히 대답 했다. "파라의 본토는 완전히 전쟁에 휘말리게 될겁니다. 이미 시투니아에서는 항로를 통해 군사이동을 하고 있다는 정보까지 있습니다." "앞으로의 전쟁이 매우 불리해 질거라는 이야기요?" "아시다시피 시투니아는 지난 수백년간 전쟁준비로 많은 투자를 했지만 우리는 전쟁물자를 상당부분 아르카디아에 의존해 왔기 때문에 지금 상황은 아주 위험합 니다. 더구나 시투니아에서는 숨겨놓은 비밀무기가 있다는 첩자들의 조심스런 보 고도 있었습니다." 라메즈의 뒤를 이어 제피로스가 나섰다. "벌써 전 국토로 퍼져나가기 시작한 전쟁에 대한 소문으로 민심이 어지러워 지고 있습니다. 여행자들 사이에선 전쟁에 대한 소문이 더이상 숨겨진 이야기도 아닙 니다. 그런데다가 이대로 무역로가 차단된다면 그 뒤의 상황은 수습할 수 없을지 도 모릅니다, 폐하. 하루빨리 무역로를 다시 원상태로 돌려 놓아야 합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좌중의 분위기는 점점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메디아는 원탁에 앉지 않고 조금 물러선 위치에서 위엄에 찬 국왕의 모습을 조용 히 지켜보고 있었다. 신하를 대하는 그의 눈에서 나이든 자의 현명함과 망설임없 는 결단력이 번뜩이고 있었다. 메디아는 그에게서 아직도 지워지지 않았을 희미 한 예전의 모습을 찾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생김새는 비슷했지만 그외의 많은 것 이 달랐다. 저 눈이 예전에는 순수하게 빛났었다. 조금은 어리숙한 오만함도 깃들어서 적당 히 당당했고 영혼의 맑음을 투영하듯 그저 젊음으로 싱싱했던 것도 같았다. 그런 데 이젠 시간이 그 모든 걸 앗아간 것이다. 메디아는 씁쓸하게 생각하며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버렸다. 더이상 그를 바라보며 그의 옛모습을 찾아보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쓸데없는 미련일 뿐이야. 그만 잊어. 메디아는 자신에게 뇌까리듯 중얼거렸다. 인간과의 인연이 주는 덧없음을 그녀는 이제 막 깨달아 가고 있는 중이었다. 시간을 넘어서는 자들에게 그렇치 않은 자 들과의 만남은 그저 스쳐지나는 바람의 마음처럼 무심해야만 한다는 것을, 그래 야 상처받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메디아는 지금에야 알아가고 있었다. 무거운 침묵이 한동안 지속되자 조용히 있던 카란이 입을 열었다. "히페리온 폐하." "말해보시오. 그대가 대륙의 대신전에서 비밀문서를 가지고 왔다는 것을 전해 들 었오. 파샤께서 직접 내린 전갈이라는 것이 사실이오?" 히페리온이 언급하고 있는 대륙의 대신전은 판타리아 전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신 전의 모체라 할 수 있는 곳으로 헤르시 대신전을 말하는 것이었다. 라비론에 위 치한 헤르시 대신전은 모든 신들을 동시에 섬기는 곳으로 전 대륙의 신관이 수행 하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기도 했다. 파샤란 바로 헤르시 대신전의 대신관 을 일컫는 말로 신성한 임무를 수행하는 자라는 뜻이기도 했다. "예, 그렇습니다." "그것 참 이상하군. 나라간의 전쟁일뿐인데 파샤께서 직접 나선단 말이오?" "아닙니다. 그분께서 저를 보내신 이유는 전쟁때문이 아니라 라메즈 경께서 잠깐 언급하신 시투니아의 비밀무기 때문입니다." 카란의 말에 탁자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가볍게 술렁였다. "그렇다면 그대는 그 비밀무기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말이오?" "아닙니다, 폐하. 저도 아직 봉인문서를 보지 못 하였습니다. 파샤께서는 이번 일로 인해 대륙에 대재앙이 다시 초래될 수도 있다고 하셨을 뿐입니다." "대재앙이라고?!" 카란의 계속되는 말에 사람들의 술렁임은 더 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묵묵히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케이론은 익히 예상했던 일인듯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방 한쪽에 우뚝 서있는 메디아를 유심히 쳐다보았을 뿐이었다. '결국, 운명은 너를 피해 가지 않는구나, 메디아.' - 계 속 - 연재날짜를 이제 과감히 무시하고 있는 뱀파입니다. T^T 용서를...... 힝...ㅠ.ㅠ 번 호 : 68 / 83 등록일 : 2000년 02월 09일 06:10 등록자 : DEADSEA 조 회 : 1233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68.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순수하게 까맣던 그 밤, 어둠 속에 함몰하는 별빛을 보았을 때 죽어간 영혼의 붉은 혈액은 슬픈 그대 눈물이 되었고 숨겨진 진실은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았다. 제 68 장 아담의 기다림. 후마는 비가 죽죽 쏟아지고 있는 작은 먹구름을 원망스럽게 노려보았다. 그녀는 분홍색 우산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긴 복도를 걸었다. "이게 뭐야, 치... 겨우 삼일째인데 옷이 눅눅해져 버렸어." 그녀는 머리위에서 내리는 빗물 때문에 추적거리는 발걸음이 귀찮기만 했다. 들 고 있는 우산도 불편할 뿐더러 몸에 걸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습기를 머금고 있 어 무겁고 축축한 느낌이었다. 사방은 온통 나른한 햇살속에 화창하게 개어있었 지만 오로지 그녀만이 빗속에서 으슬으슬한 추위를 느끼고 있었다. 기분이 엉망 이였다. "스승님은 고약한 벌만 주신다니까. 일주일이라니 너무해....에이취!" 그녀는 터져나오는 재채기에 코를 훌쩍이며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투덜거렸다. 그러나 주위에서 들려오는 경비병들의 잡담을 듣는 순간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미쳐도 곱게 미쳐야지....쯔쯧.." "폐하께서 원래부터 그런 취향이었을까?" 후마가 유심히 살펴보니 세명의 경비병이 복도 귀퉁이에 있는 조각상 뒤에서 열 심히 떠들고 있었다. 지금 말을 주고 받는 사람은 귀밑까지 수염이 숭숭 돋아있 는 경비병과 한쪽 턱밑에 작은 보조개가 패여있는 경비병이였다. 안그래도 오람 전역에는 국왕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소문이 들끓었다. 설마, 국왕 이 미치기야 했겠느냐고 반신반의하던 사람들도 이번 결정은 미친짓이라고 수군 댔다. 올해 예순 셋이 된 국왕이 며칠 전부터 다섯명의 아내 모두와 한방을 쓰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이제 비밀도 아니었다. 대제국 파라의 제도가 일부다처제를 기준으로 삼고 있었지만 이토록 난잡한 사생활을 대놓고 즐기는 국왕의 전례는 일찌기 없었다. 젊은 기사들 못지 않은 힘을 과시하는 국왕이었지만 진짜 팔팔한 젊은이도 아니고 나이도 먹을만큼 먹어 중년을 넘어선 국왕치고는 상식을 뛰어 넘는 일이였다. 사람들은 아무리 국왕이 미쳤기로서니 이토록 낯부끄러운 일을 벌일수가 있을까 싶었다. "무슨 소리야! 말도 안되는 소리. 우리 국왕께서 그럴리가 없쟎아. 그분이 왕비 님을 극진히 위한다는 이야기는 내가 어렸을때부터 들었다구." 두 사람의 말을 들으며 열을 내는 사람은 비교적 나이가 많아 보이는 경비병이었 다. "그런 사람이 다섯명이나 되는 부인하고 한방에서 잔다는게 말이 되는가?" 그러자 구렛나루를 기르고 처음에 혀를 차던 사람이 맞장구를 쳤다. "그럼, 말이 안되고 말고." 순간 화를 내던 사람은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그도 두명의 부인이 있었지 만 한방에서 다같이 잔적은 한번도 없었다. 정말 왕이 미쳤을까? "더구나 그 나이를 생각하면 아주 위험한 일이라구." "이봐, 우리 국왕이 그리 늙은 건 아니야. 사실 여든이 넘어서 아내를 보는 사람 들도 많은 걸. 우리 아버지도 얼마전에 새 아내를 얻었는데 내 첫번째 아내보다 도 더 젊은 여자란 말일세." 세명의 남자들은 후마가 엿듣고 있는지도 모르고 아내들에 대한 이야기를 떠벌리 기 시작했지만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리며 그 자리를 떠났다. "국왕이 미쳤다고 말하는 사람이 나만 있는 것도 아닌데 이게 무슨 꼴이야." 오래된 책들이 빼곡히 들어선 아담의 연구실 한구석의 바닥에는 녹색과 붉은색의 선이 그려진 마법써클이 사방 여섯발짝 크기로 그려져 있었다. 그 안에서 아담 은 새로 발견한 마법주문을 시험하는 중이었다. 써클 안쪽에서는 하얀 안개같은 것이 피어 오르고 있었지만 연구실에는 전혀 영향을 주고 있지 않았다. 이 탑에 위치하는 모든 연구실 바닥에는 이와 같은 마법써클이 여러개 그려져 있어서 마 법사들은 마음놓고 실험을 할 수 있었다. 때때로 그려진 써클이 감당하기 힘들정 도의 마법을 사용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궁전 전체를 옳아매고 있는 설계 덕분에 지금까지 큰 사고는 한번도 일어난 적이 없었다. 아담이 미미하게 흔들리는 수염 을 가다듬으며 써클 밖으로 걸어 나올무렵 노란머리의 후마가 비구름을 머리에 얹은채 방안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스승님. 참 화창한 아침이네요." 후마는 음울한 빗속에서 화창하다는 말을 유난히 강조하며 인사했다. "그래, 참 날이 좋구나." 그러나 아담은 담담하게 후마의 은근한 압력을 무시했다. 마음이 약해질만도 했 지만 그는 제자의 조심성 없음을 확실히 고쳐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 었다. 이제 어린 제자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여러가지 중요한 일들을 맡겨야 했지만 그녀의 덤벙거림이 늘 말썽이었기 때문인 듯했다. 평소대로라면 이정도에서 화를 풀고 몇마디 잔소리 하는 걸로 벌을 풀어줄만도 한데 그녀의 스승이 본척도 하지 않자 후마는 풀이 죽었다. 그녀는 기대를 접어 두고 마조가 갖고 돌아온 소식이 담긴 구슬을 스승의 까만 물접시에 올려 놓았다. "소식이 왔어요, 스승님." 제자가 망토속에서 하얀 구슬을 꺼내어 놓자 아담의 초록색 눈빛이 흔들렸다. 그가 언제나 손꼽아 기다리던 소식이었다. 벌써 사십여년에 가까운 숨박꼭질이었 지만 지금까지는 좌절을 안겨주는 소식이기도 했다. 그는 이번에는 좋은 소식이 기를 바랬다. 더 이상의 기다림을 견딜만한 여력이 그에게 남아있을지도 의심스 러웠다. 그가 구슬 위로 떨리는 손바닥을 올리자 물이 구슬을 감싸며 희미하게 글자들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희미하던 글자들이 점점 선명해졌다. 물위로 떠오른 글자들 을 한글자도 빠짐없이 꼼꼼히 읽은 아담은 몹시 실망한 듯 한숨을 몰아쉬었다. "이번에도.... 이번에도 늦었단 말인가." 아담의 주름진 입술로 너무나도 슬프게 들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후마는 조심 스레 스승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꺼냈다. "걱정마세요. 꼭 찾으실 수 있을거예요, 스승님." 그녀의 스승은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을 찾고 있었다. 왕실 수석마법사가 된 이후 부터인지 그전부터인지는 몰라도 언제나 애타게 소식을 기다리는 스승을 지켜보 면서 후마는 찾는 이가 무척 소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후마는 스승의 눈에 언뜻 비치는 눈물을 보며 괜히 가슴이 아팠다. "그래도 이번에는 엉뚱한 사람을 찾은 건 아니었쟎아요. 분명히 찾으시는 분이 맞았을거예요. 살던 곳을 떠나셨다고 하지만 겨우 한달전이라고 했으니까 흔적을 찾기는 아주 쉬운 일이라구요." 아담은 후마가 애써 명랑한 목소리로 위로하는 소리를 들으며 글자들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그가 찾는 사람과 비슷한 사람이 살던 곳을 알아냈지만 이미 한 달여전에 그곳을 떠났다는 내용이었다. 사십여년만에 찾은 실날같은 희망이었지 만 언제 또다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였다. 그나마 그가 지금까지 들은 소식중에서 가장 가까이 근접해 있다는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었 다. 그 동안은 엉뚱한 사람을 찾아내거나 아니면 몇년이 지나서야 떠난 곳을 겨 우 찾아 헤메었기 때문이었다. 한달전. 그 정도의 시간차이라면 찾는 것이 어렵 지는 않을 것이라 믿었다. 그런 믿음이라도 있어야 끝도없는 긴 기다림의 시간을 견딜 수 있었다. '어머니.... 살아 계셨던 겁니까?' 그는 아슬아슬하게 놓쳐버린 어머니의 행방을 아쉬워하며 구슬에서 손을 거두었 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서늘한 눈빛을 지닌 마녀의 모습을 생각했다. 며칠전부 터 왕의 손님으로 왕궁에 머무르기 시작한 이상한 여자였다. 그 여자를 보면서 아담은 아주 오래전에 어머니로부터 들은 어린 마녀에 대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떠올렸었다. - 그 아이는 무언가 빼앗기는 것을 아주 싫어했어. 특히, 먹을것이라면 그 누구 에게도 나누어 주지 않았단다. 그럴리가 없겠지만.... 혹시라도 언젠가 그녀 를 만나게 된다면 식사중에는 절대 건들지 말아라. 성질머리가 아주 고약하단 다, 아들아. - - 혹시라고요? - - 너도 그녀를 만나면 아주 좋아했을거야. 무척이나 귀여운 아이였거든. - 어머니는 슬픈 어조로 말을 맺고는 언제나 먼 하늘을 응시했다. 마치 그곳에 그 리운 얼굴이 있는 것처럼...... "스승님? 스승님!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생각에 빠져있던 아담은 후마의 앙징스러운 눈이 자신을 올려다 보고 있음을 뒤 늦께 알아차렸다. "으응? 무슨 말을 했느냐?" 우산을 고쳐잡으며 후마가 문쪽을 가르켜 보였다. 그곳에는 어린 시녀가 서있었 다. "폐하의 전갈입니다. 오늘 밤 달이 떠오르는 시각에 중앙탑 꼭대기로 오시라는군 요." "중앙탑? 꼭대기라고 했느냐?" 중앙탑은 금지된 구역이었다. 왕과 대신관의 허락없이는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곳이었고 어쩌다가 출입이 허락되더라도 그 꼭대기는 절대 아니었다. 그곳은 가 장 위험한 장소였고 특히 마법을 아는 자가 그곳을 출입하려면 반드시 대신관 케 이론이 동행해야만 했다. 몇 십킬로미터에 해당하는 지상최대의 거대한 마법써클 이나 다름없는 왕성의 정중앙이었기 때문이었다. "예. 폐하께선 꼭대기라고 하셨습니다." 시녀는 전해야 할 말이 끝난는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는 뒤돌아섰다. 문득 나가 려던 그녀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후마를 향해 말했다. "아참! 제자분도 함께 오시랍니다." "에? 나요?" "예, 후마님 말입니다. 제자분이 또 있으신건 아니쟎아요." 시녀가 방긋 웃으며 나가자 후마가 설레이는 표정으로 스승을 향해 돌아섰다. 어 린 마법사에 불과한 그녀가 파라 왕성의 중앙탑에, 그것도 꼭대기에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기회였다. 그녀는 스승에게 어서 가자는 재촉을 담은 눈길을 던졌다. 그러나 아담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후마야, 밤이라지 않느냐. 지금은 아침이란다." "헤헤..." 후마는 살풋 웃음을 흘리며 괜히 재채기하는 시늉을 해댔다. 절묘하게 배치된 왕성의 모든 구조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중앙탑에는 달이 뜨 기도 전에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다. 그곳은 왕궁의 정중앙에 해당하기도 했고 가장 높은 성탑 꼭대기이기도 했다. 성탑 위에서 어두워지는 하늘을 쳐다보던 국왕 히페리온은 불편한 얼굴로 헬레나 를 응시했다. 그의 주위에서 요즘 나도는 소문을 그도 안들을래야 안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국왕으로써의 체면이 사정없이 구겨지고 있었지만 그 자신도 어쩔 수 없었다. 왕비 헬레나가 부득부득 우겨서 하는 일이니 그 고집을 누가 꺽겠는가 말이다. 어렸을때부터 그를 당황하게 하는데는 일가견이 있는 왕비였다. 어쩌자고 저 여인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아 이 지경이 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를일이 었다. 히페리온이 졸지에 왕비를 포함한 다섯명의 아내와 한방에서 지내게 된 것은 순 전히 왕비 헬레나의 입김 때문이었다. 헬레나는 그녀의 아들 리욘왕자가 죽은 뒤로 한동안 슬픔과 분노 사이에서 무척 괴로워 했었다. 제피로스가 왕궁으로 입성한 날, 리욘왕자의 죽음이 헬리오스왕 자의 암살기도 끝에 이루어진 일이었음을 알게 된 헬레나는 창백한 공포에 떨면 서 몸을 가누지 못할 뻔했다. 또 다시 아들을 잃는 경험을 하게 된다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일에 왕의 네번째 부인 아라크네 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녀는 또다른 충격에 휩싸였다. "그럴수가.... 그럴 수가!" 평소 왕비 헬레나는 왕의 모든 아내들에게 관대했고 애정을 가지고 보살폈다. 그 녀들이 낳은 왕자나 공주에게도 자신이 낳은 자식과 마찬가지로 공평한 사랑과 관심으로 그들을 대했다고 자신하는 헬레나였다. 그러나 이제 그녀의 마음속에는 그 동안의 친절과 애정이 무너져 내리며 그 자리에 분노와 증오가 들어서고 있 었다. 하지만 그녀의 분노를 표현할 길이 없었다. 증거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 다. "증인이 있다고 하지 않았소? 그대 귀로 직접 들었다고 하지 않았느냐 말이요!" "그는 이제 죽었습니다." 제피로스는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헬레나는 분통을 터뜨렸지만 그녀도 왕실의 법도를 알았다. 왕의 아내를 확실한 물증이나 증인도 없이 함부로 단죄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 설령 반역에 해당하는 일에 관련된 것이라 해도 말이다. 그때부터 신하들은 왕을 염려하기 시작했다. 왕실의 법도를 보자면 국왕은 의무 적으로 모든 아내를 정기적으로 방문하여야만 했고 그것은 침실에 드는 것을 의 미했다. 왕궁의 모든 장소들이 왕을 보호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했지만 왕의 침실 은 바깥에서의 침입에나 안전한 곳일뿐 그 안에서의 공격에는 취약한 장소였다. 더구나 침대를 함께 쓰는 아내를 대비하기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만약, 아라 크네가 왕을 암살하기로 마음먹는다면 단둘이 있는 침실은 매우 위험했다. 그렇 다고 대놓고 의심하여 일을 그르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법사와 신관들을 동 원해 묘안을 짜내려 해봐도 왕이 아내와 잠자리를 함께 하는 문제까지 어떻게 해 볼 방법은 없었다. 국왕 자신은 걱정할것 없다며 신하들의 걱정을 물리치려 했지 만 아무도 귀담아 듣지는 않았다. 그때 뜻밖에도 왕비 헬레나가 나섰다. "제게 좋은 방법이 있어요." 그리고 그녀는 태연하게도 왕이 모든 아내들과 함께 침실에 들면 된다고 했다. 그 말에 그 현명하기 이를데 없다는 케이론조차 입다물고 가만히 있을정도였다. "왕실의 법도에 따르면 어떤 아내든지 차별받지 않고 똑같이 대접받을 권리가 있 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모든 아내와 함께 동침하면 안된다는 법은 없답니다, 폐하." 대경실색하는 히페리온과 신하들 앞에서 왕비 헬레나는 눈하나 깜빡하지 않고 말 했다. 그게 무슨 해괴한 일인가 싶었지만 왕비의 단호한 결정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감히 누구도 그녀의 주장에 맞서지 못 했다. 심지어 히페리온 자신도 헬레나의 번쩍이는 눈동자 앞에 굴복하고 말았다. "제가 지켜드릴께요, 폐하." 그리고 그날, 왕비의 널찍한 방에는 여러 개의 침대가 새로 배치되었고 국왕은 울며겨자먹기로 모든 아내와 동침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 뒤의 소문들은 그도 예 상하지 못한 골칫거리였다. 그러나 왕비는 얼굴에 무슨 철판을 깔았는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소문들을 농담삼아 그를 괴롭혔다. "모든 아내와 잠자리에 드시니 아주 좋으시죠, 폐하? 참! 제 시녀가 그러는데 요 즘 오람시내에서는 폐하께서 무얼드시고 그리 정력이 좋은지 모두가 궁금해 한답 니다. 제가 폐하의 식사 메뉴판을 장거리에 내다 팔면 꽤 짭짤한 수입이 될 것 같더군요." 그녀의 말에 히페리온이 무섭게 노려보아도 그녀는 겁을 먹기는 커녕 그를 똑바 로 쳐다보며 말만 잘 했다. "그러게 아내를 고를 때는 잘 골랐어야 하지 않아요?" 헬레나의 화난 눈동자 속에 아들을 잃은 여자의 슬픔이 엿보일때면 히페리온은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로 인해 그녀가 슬퍼하는 건 원하지 않았다. 견고한 성벽을 따라 달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달의 표면이 희미하게 드러나는 하 얀 달 알파가 앞서 떠오르고 그 뒤를 이어 카오스의 거대한 물빛이 밤하늘을 가 득 채울듯 솟아 올랐다. - 계 속 - (^^)(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 (^^)(__)(^^)(__)(^^)(__)(^^) 죄송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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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스를 왜 환상의 달이라 부르는지 알고 있느냐?" 중앙탑 꼭대기에는 사람들이 떠오르는 달을 바라보며 제각각 편안하게 자리를 잡 고 있었다. 난간위로 느긋하게 걸터 앉아있던 케이론의 목소리는 나직하게 들렸 다. 그의 눈은 달을 향하고 있어서 특별히 누군가에게 대답을 바라고 있는 것 같 지는 않았다. 그러나 적당히 흥분해 있는 후마가 냉큼나서서 대답했다. "저기 하얀 달에 그림자처럼 붙어있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런것 아닐까요?" 후마의 귀여운 곱슬머리가 밤바람에 적당히 휘날리는 모습을 보면서 케이론이 빙 긋 미소를 지었다. 다른 사람들은 가벼운 망토를 대충 걸치고 있는 반면 그녀는 빗속에서 많이 추운지 두꺼운 담요를 두르고 있었다. "그런 점도 있겠지. 하지만 환상의 달이라 부르는 말은 굉장히 사실과 가깝단다. 저 카오스는 실체가 없거든." 후마의 눈이 동그래졌다. "실체가 없다니요?! 저렇게 잘 보이는데 왜 없어요?" 그녀의 놀란 음성에 대답을 해준 것은 그녀의 스승 아담이었다. "눈에 잘 보이지만 저건 빛의 장난일 뿐이란다." "예에?" 그녀가 스승을 향해 고개를 휙 돌리자 아담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너는 꽃의 향기나 공기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들을 없다고 할테냐?" 후마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너는 햇빛이 보인다고 그걸 만질 수 있다고 믿느냐?" 그녀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저 카오스도 그렇게 이해하면 된다. 단지 신비스런 힘의 덩어리일뿐 존재하는 형체가 있는 것은 아니란다."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매우 넓은 성탑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선명히 들 려왔다. 메디아는 적당히 벽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망토속 에서는 마시가 낮은 숨을 쌕쌕거리며 잠들어 있었다. 아무도 이야기에 끼어들지 는 않았지만 그들의 눈은 모두 카오스를 향하고 있었다. ....... ....... 무서운 징벌의 화살이 하늘에서 쏟아지니 그 불은 대지를 삼키고 다시 토해내어 흩어 놓더라 그리하여 찬란한 왕국은 대지를 적시는 피가 되고 신들의 권능은 대지의 숨결로 남아 그들을 희롱하더라 창조의 힘은 신에게 있고 멸망의 힘은 너희에게 주어지리니 ....... 신의 손을 보아라 한손에는 징벌의 화살을 또 다른 손에는 자비의 잔이 들려 있노라 너희에게 그것이 똑같이 주어지리니 파멸과 기적의 힘이 너희와 함께 하리라 ....... ....... 모두들 편안한 자세로 케이론의 제자이자 고대유적학자로 인정받는 크라메드가 읽어주는 문장들을 조용히 경청하고 있었다. 크라메드는 키가 크지만 아직 애띤 모습이 남아있는 소년으로 마시와 비슷한 나이 또래로 보였다. 소년의 머리는 짧 은 하늘색 단발머리였는데 특이한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얼굴은 믿을 수 없을만큼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소년의 목소리는 까맣게 빛나는 하늘을 배경으로 낭랑하게 퍼져 나갔다. 그의 손에 들린 얇은 파피루스(papyrus) 가 가볍게 흔들렸다. "이것은 옛 고왕국의 흔적에서 어렵게 찾아낸 글귀입니다. 중간 없어진 부분들도 많지만 이 부분은 완전한 싯구를 이루고 있죠. 이건 대재앙에서 살아남았던 고 대인들이 남긴 흔적인데 사실, 이 글의 정확한 의미를 아직 정확히 밝혀 내지는 못 했지만 몇 가지는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크라메드는 아주 희귀하고 연구가치가 충분한 기록을 설명하며 내심 자랑스러웠 다. 그자신이 애써 찾아내고 해독한 자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넓은 공간 여기저기 두서없이 제멋대로 앉아있는 사람들을 향해 계속해서 설명했다. "첫번째 문장들은 '대재앙'의 무서움을 표현한 것이고 두번째 문장은 그저 경고 의 문장으로 보여집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세번째 문장이지요." "그게 어떻다는 건가? 그건 모든 신들의 경전에도 나올법한 평범한 구절이 아닌 가?" 크라메드의 설명을 듣고 있던 히페리온이 질문했다. 그러나 소년은 당황하지 않 고 침착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예, 폐하. 그렇기야 하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첫번째 문장에서 언급된 징벌 의 화살입니다. 무서운 징벌의 화살이 쏟아졌다는 부분말입니다. 판타리아 대륙 은 모두가 알다시피 정상적이지는 않습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괴상한 정글 이나 원시적인 밀림이 그 증거이죠. 이곳 파라만해도 사계절을 지닌 대지 가운데 떡하니 사막이 있지 않습니까? 태양의 법칙을 거스르고 대륙의 최남단에 있는 사막의 경계선에 있는 빙하들은 어떻고요. 그게 모두 '대재앙'이 닥친 다음에 생 겨난 지역들이라는 것은 이미 학자들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것이 가장 유력한 학설로 떠오른 것도 이미 옛날일이고 이제는 정설로 굳어진 사실인 셈이 죠. 사실, 카오스의 막강한 힘이 아니라면 이런 자연환경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징벌의 화살이 사방으로 쏟아져서 판타리아에 영향을 주었다면 그것은 분명히 카 오스의 영향이라 볼 수 있을겁니다. 그러니까 이 문장에서 말하는 징벌의 화살이 란 카오스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죠." "그게 '재앙의 돌'과 무슨 상관이지?" 계속해서 히페리온이 물었다. "그래서 세번째 문장에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고 한겁니다. 이 문장은 '재앙의 돌'에 대해서 고대인들이 이미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폐하." 크라메드는 잠시 말을 쉬어 목을 가다듬고 모두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저에겐 고왕국의 흔적에 대한 것들을 찾아내는 취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전 에 한가지 흥미로운 자료를 발견했답니다. 그곳에 이런 글귀가 있더군요." 신의 눈이 대지의 숨결에 남았노라 그것을 취한자 신의 분노를 다루고 그 손에 멸망이 깃드니 또한 자비의 하얀 조각이 용서를 구하리라. 그는 글귀를 또박또박 한자한자 강조해 읽었다. 그리고 말했다. "극히 일부분에 해당하는 기록이어서 처음엔 무슨 내용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 죠. 하지만 저는 스승님으로부터 한가지 재밌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카오스의 눈'이라는 존재에 대해서요. 어쩐지 듣기만 해도 신의 눈과 카오스의 눈은 무언 가 일치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더구나 재앙의 돌에 대해 알려주신 파샤께서는 그 돌이 카오스의 파편이라고 하셨지요. 신의 분노를 지닌 신의 눈. 그리고 카오 스의 눈. 만약 '재앙의 돌'이 존재한다면 그건 틀림없이 '카오스의 눈'이라 불리 는 그것일겁니다, 여러분." "카오스의 눈이라구?!" 크라메드의 설명을 조용히 듣고 있던 아담이 갑자기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를 냈 다. "여러분이 지금 재앙의 돌이라 말하는 것 말입니다. '카오스의 눈'이라 부르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할 겁니다. 언밀히 말하면 그것은 돌이 아니니까요." 케이론이 조용히 끼어들었다. 그러자 아담이 다시 목소리가 크게 날까 두려운 듯 낮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카오스의 눈이라는 것이 돌이 아니라는 겁니까?" 케이론이 아담을 향해 돌아서더니 대답했다. "그것은 눈으로 볼 수도 있고 만질 수도 있으니 존재하는 물체이지만 돌은 아니 라네. 그리고 때론 보이지 않을 수도 있고 만질 수도 없으며 존재하지 않는 것이 기도 하지." 케이론은 마치 그의 설명을 이해할 시간을 주기라도 하듯 잠시 기다렸다가 말을 이었다. "그것은 공기위에 놓아둘 수도 있고 물위에 올려 놓아도 될만큼 가볍다고도 하지 만 물속 깊숙히 보관할 수 있을만큼 무겁기도 하다는군. 때로 그것이 자신의 의 지를 가지고 다른 형태로 변할수도 있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그것의 실체를 확인 한 자는 아무도 없다네." "케이론, 그런게 과연 존재한다는 건가요?" 히페리온의 옆에 조용히 서있던 헬레나의 질문에 케이론은 성벽위에 떠오른 맑고 투명하게 빛나는 달에게 시선을 주었다. "환상의 달이라 부르지요. 우리는 저 아름다운 물빛 달을 일컬어 환상이라 부르 지 않습니까? 근본이 바로 저 달이니 당연한 것 아닐지요. 실체가 없는 카오스의 조각이 무언가 다른 실체로써 나타날리가 없지 않습니까." 언제부터일까 저 물빛 달을 환상의 달이라 부른 것은...... 눈에 보이되 존재하지 아니하는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저 신비의 달을, 인식을 가진 모든 이들은 눈에 보이는 저것을 어느때인가 부터 환상의 달이라 불 렀다. 무한한 외경심과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판타리아의 혼돈. 그 무한한 힘의 근원이라 불리는 카오스. "말로써 저것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아니 그 어떤 것으로도 저것을 정확히 설 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마치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마음을 설명하려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케이론의 말이 끝나자마자 히페리온의 강경한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그럼 그것을 어떻게 막는단 말이오? 카오스의 힘이 이 대륙에 미치는 영향이 얼 마만한 것인지는 어린아이라도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오. 그렇게 엄청난 에너지 를 가지고 있는 무기를 무엇으로 막을 수 있다는 거지? 시투니아에서 그것을 가 지고 있다는 확증은 없지만 만약 그들이 소유히고 있다면 그 물건의 위험성을 생 각할때 지금의 전쟁은 모두의 파멸을 부르는 무모한 짓이오. 그런데도 그들이 전 쟁을 빌미삼아 그것을 사용한다면 대체 무엇으로 그것을 막겠소?" 국왕이 문제의 핵심을 찌르며 고뇌의 말을 꺼내기 시작하자 헬레나가 그의 무릎 에 손을 올려 놓았다. 왕의 목소리가 한결 가라앉았다. "그게 실체인지 아닌지는 이제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오. 실체가 없어도 그 힘이 있는 한. 그것은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니 말이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것을 막을만한 방법이요. 그래서 한밤 중에 이곳에 모인것이 아니오." 그때 한동안 입을 다물었던 크라메드가 입을 열었다. "자비의 잔이 있습니다, 폐하." "뭐라구?" "이 구절을 들어 보십시요. 한손에는 징벌의 화살을 또 다른 한손에는 자비의 잔 이 들려 있노라 하지 않습니까? 재앙의 돌이 있다면 분명히 '자비의 조각'도 이 땅에 존재하고 있을겁니다." "맙소사. 그런 황당한 말이 지금 무슨 소용이지? 설령 자비의 조각이 존재하더라 도 그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것이며 또 어떻게 찾을건가?" "대재앙의 끝나고 '카오스의 눈'은 누군가에 의해 사라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특별한 물건이 사람들의 손으로 전해졌습니다. 그것은 신들의 선물이라 하 기도 하고 대지의 축복이라 불리기도 하였는데 성스런 신들의 제단에 모셔졌다고 합니다." "그런게 있다는 말은 처음 듣는데?" 아담이 끼어들었다. "물론, 그것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적습니다, 아담님." "그런 것이 신전에 있다는 건가? 도대체 어느 신전이지?" "분명히 그것은 신전에 비밀스럽게 보관되어 있지만 어느 신전이라고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약 4300여년전에 그 신전은 지상에서 사라졌고 그 이후로는 아무 도 보았다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신전에 대해 구전되는 이야기는 비밀스런 신전 이라는 것과 오로지 성스런 의무를 지닌 자들만이 비밀의 신전에서 자비의 보석 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옛 유적에서 신전에 대한 기록이 아주 미미 하게 발견되기도 했지만 그 내용은 단순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한번 들어보시지 요." 크라메드는 또 다른 파피루스 조각을 들어서 낭독하기 시작했다. 이 땅에 증오의 씨앗이 자라리라 열매가 맺히면 그것은 그대로 썩어 악취를 풍기고 재앙을 불러드리니 그가 가진 것은 증오의 열매이되 너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자비의 보석이니라 ....... ....... ....... 검은 씨앗이 자라도 대지의 축복은 사라지지 않으리니 숨겨진 신의 제단을 아는자 빛과 어둠, 그 사이를 가르는 찰라의 시간이 영원히 머무는 그곳에서 기회를 얻으리라. "대지의 축복이라는 구절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장소에 대해서 명시되어 있지 요. '그곳에서 기회를 얻으리라' 바로 거기에 그 비밀의 신전이 있을겁니다." "그건 너무 애매하게 들리는군. 지금까지 신전에 대한 다른 자료는 발견되지 않 았는가?" "다른 문서에서 이 비슷한 경우를 발견했는데 아주 유용한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빛과 어둠, 그 사이를 가르는 찰라의 시간이 영원히 머무는 곳' 이라는 문장과 일치하는 기록이 있었습니다. 약 천년전에 헤르시 대신전의 신축공사에서 발견 된 오래된 돌조각에 새겨진 것이었는데 그것에 의하면 이 애매한 문장은 결계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신전은 결계안에 있겠군."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몇 천년동안 지속되는 결계라고? 비밀의 신전이라 불릴만한 곳이 영원히 발견되 지 않을만큼의 대단한 결계라면 범위가 상당히 좁아지는군요." 아담이 곰곰히 생각하며 말했다. "예. 판타리아 대륙과 사마리아 대륙을 통털어도 그런 결계가 존재하고 있는 곳 은 몇곳 되지 않습니다." 크라메드는 자신이 알아낸 사실이 몹시 만족스러운 듯 대답했다. "결국 '카오스의 눈'이라는 그 무시무시한 존재를 막으려면.... 결계 속으로 사 라진 신전에서 '자비의 보석'을 찾아와야 한다는 이야기로군." 히페리온이 결정되었다는 듯이 말하자 케이론도 간단히 동의했다. "간단히 말하면 그렇지요. 폐하께서는 이 임무에 누구를 보낼지 결정하시기만 하 면 됩니다." 케이론의 시선은 잠자고 있는 마시의 등을 토닥이고 있는 메디아에게 향해 있었 다. 그녀와 멀지 않은 곳에 카란과 후마도 서 있었지만 그들은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만 있을뿐 끼어들지는 않았다. 솔직히 카란의 관심은 이 중요한 이야기보다 는 메디아에게 집중된 것처럼 보일지경이었다. - 계 속 - 지루한 설명들이 많아서 읽기 불편하시겠지만 꼼꼼히 읽어두세요. ^^; 끄응... 복잡해...--; 번 호 : 70 / 83 등록일 : 2000년 02월 14일 04:33 등록자 : DEADSEA 조 회 : 1358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70.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순수하게 까맣던 그 밤, 어둠 속에 함몰하는 별빛을 보았을 때 죽어간 영혼의 붉은 혈액은 슬픈 그대 눈물이 되었고 숨겨진 진실은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았다. 제 70 장 숨겨진 진실. 케이론과 몇마디를 더 나눈 왕과 왕비가 중앙탑에서 내려가자 카란은 오람 궁성 의 중앙탑에서 내려다 보이는 전경을 천천히 둘러 보았다. 견고한 성벽들이 일정 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는 모습은 어느방향에서 보아도 일치되는 것으로 거대한 규모로 볼때 대단한 것이었다. "대단한 축조물이군요." 그의 입에서 저절로 감탄성이 흘러 나왔다. "당연하지. 이 건물을 설계하는데만도 오랜 시간이 걸렸으니까." 카란은 자신의 곁에 다가와 말하는 대신관을 돌아다보았다. 그는 얼굴 전체에 퍼 져 있는 주름조차도 자연스럽게 보이는 현명한 예언자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 았다. 케이론이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자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내 생각을 읽고 싶은가, 젊은이?" 카란이 유심히 그를 들여다보자 케이론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카란의 얼굴로 희 미한 홍조가 퍼졌다. 그의 생각을 일부러 들여다본 것은 아니지만 카란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습관적으로 케이론의 마음을 읽으려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도 몇백년이나 된 건물의 설계 과정을 본 것처럼 말하는 그의 음성 때문이었을 것이 다. "뭐가 보였지?" 카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하얀수염을 늘어뜨린 케이론으로부터 아 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그는 그저 평범한 말로 케이론의 물음에 대한 답을 대 신했다. "대신관님을 직접 뵐 날이 오게 되리라고는 생각 못 했습니다, 케이론님." "그래?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솔직히 생각보다 난 만나지 쉬운 사람이라네." 대신관이라는 지위에도 불구하고 케이론이 자신을 만나기 쉬운 사람이라고 말하 는 것은 어쩌면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인지도 몰랐다. 사실, 그의 나이는 헤아릴 수 없을정도로 많았고 그 오랜 시간만큼 그를 만날 기회도 많아지기 때문이었다. 한밤중이었지만 탑위에 밝혀진 여러개의 횃불로 인해 카란의 하얀 얼굴은 금방 알아볼 수 있을정도로 기이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의 눈은 케이론의 연 한 갈색 눈동자에 고정되어 움직일 줄을 몰랐다. 케이론은 그 아름다운 젊은 신 관이 의문에 휩싸여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문득, 그의 장난끼가 발동했다. 그는 서서히 생각을 개방해 나갔다. 그의 실체를 보여줄 수 만큼 천천히. 케이론의 깊숙한 눈동자를 응시하던 카란이 그에게서 성큼 뒤로 물러났다. 카란 의 초록색 눈동자에서 두려움이 스며나왔다. 카란은 케이론의 눈동자에서 보아서 는 안될 것을 보았다. "뭘 보았는가, 젊은이?" 케이론이 담배연기를 뱉어내면서 빙글거렸다. 그때 어디선가 키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케이론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넌 뭐가 그렇게 우습냐?" "또 잘난 척하고 싶은 거죠? 아직도 그렇게 어린애 같은 짓을 하시는군요." 메디아가 바닥에 주저 앉은 채로 그를 조롱하고 있었다. 케이론의 부드럽던 눈동 자에서 불꽃이 어른거렸다. 비교적 가까이 서있던 카란이 몇 발짝 더 뒤로 물러 섰다. "너 왜 시비냐?" "글쎄요. 내가 왜 이 자리에 있어야 했었는지 모르겠네요. 케이론은 알고 계세요?" 케이론은 그녀가 자신의 속셈을 알아차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번 일에 메디아 를 끌어들이려 한다는 것을 그녀는 벌써 눈치챈 모양이었다. 오늘밤의 비밀스런 모임에 메디아를 참석시킨 것에는 모두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 자리에 있는 인물들 모두가 그에 의해 선발된 사람들이었다. "눈치가 빠르구나." "역시 그런거였군요. 전 생각없으니 다른 사람을 찾아보세요. 오늘 보니 아주 유 능한 제자를 두신 것 같은데 그런 제자를 충분히 이용해 보시던가요." 메디아는 그들 곁으로 다가오고 있는 어려보이는 소년을 눈짓으로 가르켜 보이며 말했다. 오늘밤 내내 왕에게 고대인들의 유적에서 찾아낸 자료들을 설명하던 크 라메드라는 소년학자였다. "인간으로써는 보기드물게 머리가 좋은 녀석이야. 잊혀진 고대의 문자를 해독하 는 능력은 타고났어. 그런데 바보같이 굴때가 많아서 뭘 시킬수가 있어야지." "저 말이예요, 스승님? 제가 언제 바보같이 굴었다고 그러십니까?" 어느새 성큼 다가온 크라메드가 스승을 향해 반발했다. 그의 아름다운 하늘색 머 리카락이 불빛에 반짝꺼리고 있었다. "하핫~ 귀도 밝구나, 녀석. 벌써 들었냐?" "저 들으라고 한소리 아니었어요?" "네가 가끔 멍청하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자체가 바보같이 구는 거란다, 똑똑한 제자야." "그게 도대체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스승의 말이 진리라는 말도 모르냐?" "그런 말은 어느 문헌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스승님." "그럼, 내가 하나 만들어야 겠구나." "또 그 타령이십니까? '대신관 케이론의 잠언록'이라니 정말 어울리지도 않는 일 이라구요." 크라메드가 대답하는 사이 메디아는 잠자는 마시를 벽에 기대게 하고 망토를 벗 어 둘러주고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냐, 메디아?" "절 끌어들이지 말아주세요, 케이론. 그 어떤 문제에도요. 전 여기에 오래 머물 지 않을거예요." "내가 언제 너더러 머물러고 하더냐?" "아니라면 다행이고요." 그러면서 메디아는 탑 가장자리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깊은 어둠에 휩 싸인 왕궁은 조용하기만 했다. "몇년 전에 넌 운명을 피해가지는 않을거라고 하지 않았느냐?" 케이론의 목소리가 메디아의 뒷통수로 날아왔다. 그녀는 케이론을 향해 돌아섰다. 그녀의 뒤로 알파와 카오스의 빛이 내리비쳤다. "운명이라고요?" "그래, 이것은 네가 해결해야 할 일이란다." "케이론, 당신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요, 예나지금이나. 단지 운명이라는 이름 으로 등떠밀듯이 무언가를 내게 강요하려하지 마세요." 그녀는 씁쓸하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설령, 또다시 대재앙이 온다해도 궂이 내가 나서야 할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너에게 대재앙을 막으라고 하지는 않았다. 난 단지 네가 다시 '카오스의 눈'을 되찾기를 바랄뿐이야. 그건 어차피 너의 것이었으니까." 그랬다. '카오스의 눈'은 분명히 메디아가 가지고 있어야 마땅한 것이었다. 그러 나 메디아는 단 한번도 카오스의 눈을 소유한적이 없었고 그걸 바라지도 않았었 다. 메디아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케이론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너는 카오스의 눈을 누가 가지고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어. 그런데도 모른 척 하겠다는 것이냐? 내가 알기로는 지금 네가 그를 찾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역시 당신답군요. 내가 왜 여기에까지 와있는지 벌써 알고 계셨던가요?" "내 명색이 예언자 아니더냐, 그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지." 그가 천천이 걸어 메디아의 옆으로 다가와섰다. "무얼 주저하는 거지, 메디아? 넌 어차피 그에게 가야하고 그에겐 '카오스의 눈' 이 있어. 너도 알다시피 마법의 힘만으로는 그가 있는 곳에 갈 수 없을거야. 왕 의 신하들과 함께 움직인다면 네게도 도움이 될거란다. 너에겐 자비의 보석이 필 요 할테니까." 케이론의 말대로 메디아는 붉은 나비를 발견한 그날, 마법의 힘으로 그 근원이 존재하는 곳을 찾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실패였다. 카오스의 눈. 그 막대한 힘의 파장을 간파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에게는 자비의 보석이 필요했다.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건 아니죠. 왕의 그 네번째 부인이 있쟎아요. 그 여자라 면 알고 있지 않을까요?" 메디아의 대답에 케이론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녀가 단순히 이용당하는 입장이라면 넌 그녀에게서 별로 알아낼게 없을게다. 그런 모험을 하고 싶은 거니, 메디아?" 왕의 아내. 아라크네라는 그 여자가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녀는 셰도우 아미가 이용하는 붉은 나비에 대해 만족할만한 대답을 해줄 수 있을까? 과연 로만을 알 고 있을까? 메디아는 머릿속으로 질문해 보았지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케이론의 말이 맞았 다. 그러나 그녀는 쉽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야 알아봐야 하는 일이죠." "어리석게 굴지 말아라. 왕의 도움을 받아서 자비의 보석을 찾으러 떠나거라. 그 것만이 네가 원하는 곳에 이를수 있는 방법이야." 메디아는 예상하지 못한 케이론의 말에 오히려 질문을 되돌렸다. "내가 원하는 곳이라고요?" "그래." "나도 모르는 걸 당신은 확신하듯이 말하는군요, 케이론." "과거의 일을 그냥 덮어두려고 하는 건 너답지 않아. 너도 그러길 원하지 않을거 란 걸 잘 알고 있어. 이제 넌 블러디나와 로만의 진실을 똑바로 알 필요가 있단 다." 케이론의 마지막 말에 메디아의 음성이 높아졌다. "진실이라고요? 하.. 거기에 과연 진실이라는 이름이 가당키나 한가요?"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중앙탑에 남아있던 아담과 후마까지도 고개를 돌려 그 녀를 바라볼 정도였다. "흥분하지 말거라, 메디아." "그 무분별한 집착과 광기에 진실이라는 말은 어울리지도 않아요. 그건 단지 로 만의 욕심이었고 배신이었다구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존재하는 것처럼 말하지 마세요, 케이론." 메디아는 잠시 흥분한 목소리를 낮추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는 그걸 사랑이라 불렀었지요. 하지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가 저지른 일이 정당화 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로인해 어머니를 잃었어요. 그와 동시에 내 어린시절이 통째로 날아가 버렸죠. 더구나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케드리안이 어떻게 죽었는지 당신이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요?" 순간, 케이론의 얼굴로 낯선 고통의 감정이 나타났다. "그 일을 입다물고 있는다고 제가 영원히 모를줄 알았습니까? 더 이상의 진실따위 는 필요 없어요. 난 단지 로만이 살아있는지 확인하고 싶을뿐입니다, 케이론." 그녀는 어머니와 케드리안을 잃었을때 어떤 고통을 맛보았는지 떠올리자 새삼 상 실감이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그토록 알량한 사랑을 부르짖었으면서 내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았던 그 빌어먹 을 로만이....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있는지. 아직도 그 저주받은 붉은 나비들을 품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겁니다. 단지 그뿐이예요, 케이론. 아시겠어요?" 잇사이로 씹어뱃듯 말하는 메디아의 음성은 가는 떨림을 담고 있었다. "그래서 그 다음은 어쩔거냐?" 메디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단지 물을 찾는 사막의 여행자처럼 간절하게 한가지 사실만이라도 확인하고 싶을 뿐이었다. "네가 알고 있는 것만이 전부라 믿지 말아라.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 아니라 는 것을 너는 오래전에 깨닫지 않았느냐, 메디아. 이제 너는 운명을 통해 새로운 진실을 마주 볼 때가 된거야." 메디아는 그녀답지 않게 격한 감정에 휩싸인 자신을 추스리며 눈을 감았다. 케이 론이 그녀를 향해 들려주는 목소리는 또렷했지만 아주 먼 이야기처럼 들렸다. "그리고 네가 잃어버린 것 중에 한가지는 다시 찾을 수 있을게야. 네가 거부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케이론의 뜻밖의 말에 천천히 눈을 뜬 메디아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뜻인가요?" "그건 너 스스로 알아봐야지. 온전히 너의 몫으로 너에게 달린 일이니까 말이야. 그러려면 넌 '자비의 보석'을 먼저 찾아야 한다, 메디아." 마치, 중요한 예언이라도 되는 것처럼 케이론은 확신하듯 말했다. 메디아가 미처 뭐라고 대답하려는 사이, 벽쪽에 기대 자고 있던 마시가 '쿵' 하는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마시의 칭얼거림이 들리기 시작했다. - 계 속 - 60회에서 70회까지의 내용을 누구 비평감상해 주시면 안될까요? ^^; 부탁드려요. *^_^* - 뱀파이어 - p.s : go VAMPA 동에도 많이 놀러오시구요. 방 긋 *^___^* 번 호 : 71 / 83 등록일 : 2000년 02월 20일 09:44 등록자 : DEADSEA 조 회 : 1343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71.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순수하게 까맣던 그 밤, 어둠 속에 함몰하는 별빛을 보았을 때 죽어간 영혼의 붉은 혈액은 슬픈 그대 눈물이 되었고 숨겨진 진실은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았다. 제 71 장 아라크네. "이제 어떻게 하죠?" 왕궁의 동쪽에 있는 별궁은 왕의 아내들이 기거하는 곳이었다. 유난히 아름답게 꾸며진 별궁의 정원과 실내는 다른 곳과 확연히 구분될 정도로 여성스러운 분위 기가 흐르고 있었다. 원형탑으로 이루어진 별궁의 2층에 살고 있는 왕의 네번째 부인이자 공주 로사리아의 친모인 아라크네는 서른이 넘은데다가 세 공주를 낳았 는데도 여전히 화려한 미모를 자랑하는 매력적인 여자였다. 그녀는 지금 온통 자 주색과 흰색으로 꾸며진 침실에서 벽면에 세워져 있는 커다란 거울 앞에 앉아 말 하고 있었다. "그 놈이 모든 걸 말해 버렸어요." 아라크네의 초조한 목소리는 몹시도 긴장한 것처럼 들렸지만 넓은 침실에는 그녀 혼자 있을뿐이었다. "왕은 네게 무엇이라고 하더냐?" 그러나 놀랍게도 나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거울속에서 흘러나왔다. 전신을 비출수 있는 큰 거울에는 아름다운 아라크네의 모습은 전혀 비치지 않고 낯선 남자의 모습이 들어 있었다. 그는 마른 몸을 길게 늘어진 회색 망토로 감싸고 있는 은발 의 노인이었는데 깊고 어두운 녹색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아무말도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국왕이 모든 아내와 한방에서 동침하기 시작했 다구요. 밤만 되면 왕비의 방으로 가서 자야하는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 일인지 아세요? 일이 정말 어렵게 됐다구요. 도대체 할아버지는 바트라는 놈하나 처리하 지 못하고 뭐하신거죠? 그 놈 때문에 저는 위험에 처했단 말예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는 아라크네의 손이 가볍게 떨렸다. "그놈이 우리의 손을 빠져나갈 줄 미리 예상하지 못한 네 잘못도 크다, 아라크네. 그나마 그 녀석이 멀쩡하게 왕궁에 도착하지 못한것도 다행인줄 알아야 해." "하지만 할아버지, 왕이 모든 걸 알았으니 조만간 제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구요. 리욘왕자가 죽고 나서는 왕비 헬레나의 태도도 그리 편하지 않아요. 이젠 그녀도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을텐데 이제 전 어쩌면 좋죠?" 그러나 아라크네의 다급한 목소리에도 상대방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왕도 널 어쩌지 못 할테니 내가 지시할 때까지 태연하게 행동하거라. 그리고 한 가지 네가 알아둘게 있다, 아라크네." "뭐죠?" 무언가 유용한 정보라도 얻을까 싶어서 아라크네는 황급히 물었다. "왕궁에 며칠 전 여자 마법사 한명이 들어갔을 거다. 그녀를 조심하거라." "그녀가 누군데요?" "메디아라는 젊은 여자야. 그 여자에 대해서 알아낼 수 있는게 있거든 뭐든지 알 아내서 내게 보고 하거라. 하지만 그녀에 대해 물어 볼 때는 의심받지 않도록 조 심하고." "할아버지 제자들을 시키면 간단하지 않아요? 왕궁에 들어 와있는 크란에게 시켜 도 될텐데요. 어차피 계획이 어긋난 마당에 그가 할일도 없쟎아요." "그애들이 상대할 수 없는 사람이야. 그러니 너도 특별히 내 아이들을 잘 감춰두 란 말이다. 조금이라도 눈치채게 해선 안돼." 앉아있던 아라크네는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 서성이며 말했 다. "셰도우 아미를 아이들이라 부르시다니 그러기엔 너무 덩치가 크지 않나요? 이젠 그들을 숨겨주는 일도 쉽지 않다구요." 아라크네는 신경질을 부렸다. 그녀가 위험한 상황인데도 오직 그의 군대 걱정을 하고 있는 할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언제나 그래왔지만 새삼 서운한 감정이 격 하게 올라왔다. 상황이 이렇게 어렵게 되었는데도 걱정해주는 말은 한마디도 해 주지 않다니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얼굴에 불만스러움이 적랄하게 나타났다. 그러자 거울속의 노인은 아라크네의 표정을 보며 일침을 가했다. "아라크네, 네 언니였다면 좀 더 똑똑하게 행동하는 방법을 알았을거다." 순간, 아라크네의 서성이던 발걸음이 뚝 멈추고 입술이 꽉 다물어졌다. 그녀는 언니와 비교당하는 걸 아주 싫어했다. 어렸을 때부터 그녀의 언니는 그녀보다 뛰 어났었다. 외모는 누가 더 아름답다고 평가 할 수 없었지만 아라크네는 언니의 영리함이나 기지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할아버지인 모모스도 언니에게는 한없이 자상스럽고 좋은 스승이 되어 주었지만 아라크네에게는 눈길 한번 제대로 주지 않았다. "알았어요. 제가 알아서 하겠어요." 아라크네는 또다시 언니와 비교당하지 않기 위해서 이번 일은 혼자서 처리해야 함을 느꼈다. 언니라면 이 정도 일에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라크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애써 떨리는 심정을 꾹 눌러 참았다. 어차피 벌어진 일.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면, 설마 할아버지가 그녀를 버리지는 않을것 이라고 믿으며 그녀는 마음을 다잡아 먹었다. 아라크네의 대답을 듣고 만족했는지, 아니면 할말을 마쳐서인지 거울속의 모모스 는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저.. 할아버지! 잠깐만요." 사라지던 영상이 다시 또렷해졌다. "또 뭐냐, 아라크네?" "저... 아..아버지한테는 소식이 없었나요?" 잠시 망설이던 아라크네의 입에서 어렵게 나온 말은 아버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에 어디론가 떠나 한번도 소식이 없었지만 할아버지의 사랑이 언니에게만 향해서인지 아라크네는 나이가 들수록 사라진 아 버지에게 관심을 보였다. 아라크네의 질문에 대답없이 그녀를 바라보기만 하던 모모스가 입을 열었다. "이미 오래전에 떠난 녀석이 이제와 연락을 할리가 없지 않느냐. 그녀석 소식은 다시 묻지 말아라." 쌀쌀한 모모스의 대답에 아라크네는 한동안 멍하니 거울만 바라보았다. 이미 거 울속의 노인은 사라지고 거기에는 타는 듯한 붉은 머리와 매끄럽고 하얀피부를 가진 그녀 자신의 모습만이 비치고 있었다. 거울속의 여인은 방금 사라진 노인과 같은 녹색 눈동자였지만 좀더 밝은 색이어서 전혀 다른 빛으로 보이는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한참을 거울 앞에 서 있던 아라크네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다 보았다. 그녀의 몸종이었다. "무슨 일이냐?" 아라크네의 차가운 목소리에 시녀는 몸을 사리며 대답했다. "마법사 크란님이 오셨습니다. 지금 홀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았어. 지금 나가겠다고 해. 그리고 침실에는 내 허락 없이는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고 몇번을 얘기해야 하느냐?" "저.... 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으셔서..." 겁먹은 듯한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흘러나오자 아라크네는 표정을 풀었다. 아마도 생각에 빠져 소리를 듣지 못한것 같았다. "앞으로는 대답이 없거든 대답할 때까지 기다려. 알았느냐?" "예, 주의하겠습니다." "나가봐." 시녀가 조용히 방을 나가자 아라크네는 자주색과 분홍색으로 장식된 겉옷을 한번 살펴보고는 방을 나와 홀로 향했다. 둥근 원형의 기둥으로 감싸인 홀은 대리석 바닥에 페렌토에서 생산된 두꺼운 카 페트가 깔려 있어서 매우 화려한 색채가 돋보이는 장소였다. 국왕의 아내들이 생 활하는 모든 별궁은 같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각기 그녀들의 취향대로 꾸 며져 있어서 홀만 둘러보아도 왕의 아내가 어떤 성향을 가졌는지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원색적이고 화려한 것을 즐기는 아라크네의 취향이 반영된 홀은 웅장한 장식품과 원색의 천들로 꾸며져 있어서 편안하기 보다는 위압적인 느낌이 강하 게 들었다. 아라크네가 홀에 들어서자 홀 한쪽에 놓여진 붉은색 비단으로 장식된 긴 의자에 앉아 있던 은발의 젊은 남자가 일어나 가볍게 목례를 취했다. "방금 할아버지와 얘기를 나눴어요." 그녀는 크란의 맞은 편에 앉으며 말을 꺼냈다. "그런데 나한테 메디아라는 여자 마법사에 대해 말씀하시더군요. 당신은 그녀가 누군지 알아요, 크란?" 하얀 단발머리를 단정하게 늘어뜨리고 있는 젊은 마법사는 아라크네의 질문에 묘 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대단한 실력을 가진 마법사 같더군요." 크란의 말에 호기심을 느낀 아라크네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녀를 직접 보았나요?" "예, 어젯밤 중앙탑으로 올라가기 전에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쳤습니다." "한번 마주친 것만으로 그녀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었단 말인가요?" 아라크네가 감탄했다는 듯이 말했지만 크란은 다시 눈을 반짝이며 순진하게 웃어 보였다. 그의 얼굴은 묘하게도 순진한 구석이 있었는데 평소에는 그런 표정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 "아닙니다. 사실은 굉장한 우연이지만 그녀의 실력을 잠시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요? 그게 언제죠?" 크란은 아라크네에게 항구도시 노아에서 메디아와 마시라는 소년을 보았을 때 이 야기를 상세하게 들려주었다. 포센과 어떤 덩치 큰 사내가 시비가 붙어서 싸움이 났던 일에 대해 설명하며 크 란은 그 사내의 일행으로 보이는 정령술을 사용하던 소년을 묘사했다. 그리고는 그 소년을 저지했던 메디아라는 여마법사의 이야기에 이르자 갑자기 크란의 목소 리에 가벼운 열기가 더해졌다. "그녀의 순간적인 마법시동 능력은 정말 대단하더군요. 그 정도의 능력이라면 대 륙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만한 실력자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겨우 그 정도 가지고 그런 평가를 하기는 이르지 않을까요?" 아라크네는 겨우 정령술을 막은 것 가지고 대단한 평가를 하는 크란을 이해하지 못 했다. 그러나 크란은 생각이 다른지 가볍게 고개를 저어보였다. "그녀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알아보도록 하죠. 어차피 내일 저녁 왕가의 정찬모 임에 그들을 초대한다고 하니까 그때 보면 알게 되겠죠." 왕가에는 국왕과 왕비 이외에도 여러 아내와 그들이 낳은 왕자와 공주들로 대가 족을 이루기 때문에 다같이 모이는 자리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국왕은 매월 가 족 모두를 참석시키는 정찬모임을 열어서 그들과 대면하고는 했다. 그 자리에는 왕족 이외에는 아무도 참석할 수 없었지만 케이론은 어쩌다가 가끔 합석하는 경 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 경우처럼 외부인을 정식으로 초대하는 일은 처음이었 다. 아라크네는 언쨚은지 코를 찡긋해 보이고는 계속 말했다. "이번에 대륙의 대신전에서 가져왔다는 비밀문서에 대해서 얘기 좀 해봐요. 어젯 밤 비밀회동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 결과에 대해 뭘 좀 알아냈어요. 크 란?" 갑자기 변한 화제에도 크란은 당황하지 않고 곧장 대답했다. "어젯밤 중앙탑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는 전혀 알수가 없더군요. 역시 오람의 왕성답게 중앙탑의 보안을 뚫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네토르경으로부 터 비밀문서의 내용은 자세히 전해 들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문서엔 ' 재앙의 돌' 에 대한 파샤의 경고가 담겨 있었답니다." "재앙의 돌이라구요?" 이번에도 코를 가볍게 찡그려 보이며 말하는 아라크네에게 크란은 재앙의 돌에 대해 들은 내용을 그대로 설명해 주었다. "제 생각으로는 스승님이 가지고 계신 것 같은데 저도 확실히 알지는 못합니다. 그들은 그게 시투니아의 비밀무기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위험한 것을 할아버지가 가지고 있다고요?" "예, 모모스님께서 아주 위험하지만 대단히 특별하고 강한 물건을 소유하고 계시 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그걸 말하는 게 아닐까 합니다. 오늘 새벽 저도 스승님께 물어봤지만 자세한 대답은 안해주시더군요." 크란의 대답에 아라크네는 얼핏 머리를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어렸을 때였는데 언제인지는 확실히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할어버지 모모스가 언니에게 이야기하 던 물건이 생각났다. 원래 마녀들의 소유였지만 이젠 자신의 것이라고 하면서 그 것만 가지고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했던 것 같았다. "그럼, 국왕이 그것에 대해 어떤 대책을 세웠다던가요?" "국왕의 집무실에서 그것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오가지 않았답니다. 네토르경 의 말에 의하면 전쟁에 대한 이야기들이 오갔을 뿐입니다. 나중에 국왕과 대신관 케이론이 따로 자리를 가졌다고 하지만, 아시다시피 대신관이 있는 곳에서 일어 나는 일은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또 그자가 문제로군요." "케이론은 아주 조심해야 할 인물입니다, 아라크네님. 어쩌면 우리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있는게 아닐까 생각될 때도 있으니까요." "설마, 그럴리는 없을꺼예요. 알면서 모른척하다니... 말도 안돼요." "그만큼 조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벌써 알려진 것만으로도 백여년이 넘는 기간 동안 왕궁에서 지내는 기이한 인물이니까요. 그리고 앞으로 아라크네님께도 따로 감시자가 붙을 겁니다. 어쩌면 지금 있는 몸종이나 시녀들이 바뀔지도 모르니 더 조심하셔야 합니다. 사실, 원래 계획대로 나가기엔 문제가 많아졌으니까요." 원래 계획대로라면 아라크네는 크란과 포센이 사마리아 대륙에서 가져온 희귀한 선물을 각기 왕비와 왕자들에게 보낼 계획이었다. 선물에는 모두 정신계열 마법 이 걸려 있었고 만약 성공했다면 그들 모두를 꼭두각시로 만들수 있었겠지만 지 금은 그 계획을 실행하기엔 위험한 상황이었다. "바트라는 미꾸라지 한마리 때문에 일이 복잡해져 버렸군요." 아라크네는 굳은 얼굴로 바닥을 노려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참, 네토르경의 성에 보낸 감시자들에게선 특별한 연락이 없었나요?" "그자는 걱정하실것 없습니다. 야심이 보통이 아닌 인물이어서 우리가 약속한대 로 파라를 넘겨 주겠다고만 하면 무슨 짓이든 하려고 할테니까요. 아라크네님의 따님 중에 한분과 오피온 왕자를 결혼시킨다고 약속한 마당에 그자가 배신할 이 유는 없습니다." 아라크네가 파라의 양대 세도가로 이름이 알려진 네토르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 일 수 있었던 것은 네토르의 딸이 국왕의 다섯번째 아내였기 때문이었다. 야심이 큰 네토르는 자신과 비슷한 세력을 가진 라메즈 가문을 눈의 가시처럼 여기며 견제하고 있었지만 네명의 왕자를 낳은 왕비 헬레나의 친오빠인 라메즈 가문을 함부로 모함하거나 제거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딸이 왕의 아내로서 총애 를 받는다면 좋을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국왕과 왕비의 사이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었다. 그리고 국왕의 다섯번째 아내가 된 레데아가 왕의 막내 아들인 오피온 왕자를 낳 았지만 오피온 왕자의 앞날이라는 것이 그저 왕족으로서 풍족하게 사는 정도였고 욕심많은 네토르는 그런 힘없는 여섯번째 왕자의 외가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점을 눈치챈 아라크네가 접근해서 일이 성사된 후 자신의 딸들 중 한명 과 오피온 왕자를 결혼시켜 파라를 다스리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자 네토르는 아주 쉽게 넘어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 일로 그가 흔들리지 않을까요?" 아라크네의 걱정스런 말에도 크란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렇지 않을겁니다. 그도 증인이 없어진 마당에 아라크네님의 입지가 크게 흔들 리지 않을 걸 잘 아는데다가 지금에 와서 발을 빼기엔 이미 늦었죠. 그의 아들인 카드모가 우리 수중에 있는 상황에서는 그도 배신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을겁니 다." 카드모는 네토르의 첫째 아들로 서로의 약속을 확실히 하기 위해 서로 주고 받은 인질과 같았다. 아라크네는 자신의 딸 중 첫째 딸 사만다 공주를 네토르의 집에 보내 놓았고 네토르는 카드모의 하나밖에 없는 여섯살 된 아들 지니를 아라크네 의 수중에 넘겨 주었다. 그 때문에 카드모는 아버지의 강압에 못 이겨 그들의 일 을 돕고 있는 상태였다. "알았어요. 그런데 내 동생이라는 포센은 어떻게 지내고 있죠? 여전히 내 시녀들 꽁무니를 따라 다니고 있나요?" 포센은 시투니아에서 그녀를 도와주기 위해 와있는 기사였지만 왕궁에 머무르기 위해 그녀의 외가에서 온 동생으로 위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기질이 워낙에 거칠고 잔인해서 다루기가 여간 힘든게 아니었다. 더구나 여자와 도박을 무척 좋아해서 이곳 저곳에서 은근히 사고를 치고 다니기 일쑤였다. 그래서 아라크네 에게는 골칫거리였지만 모모스가 보낸 사람이라 간신히 참고 있는 중이었다. "솔직히 그가 시녀를 따라 다니기보다는 시녀들이 그를 따라 다닌다는 말이 맞을 겁니다. 오는 여자 마다하지 않는 포센이니까요." 정말 그랬다. 포센의 잘생긴 외모에 넘어 간 시녀가 벌써 한둘이 아니었다. 한달 도 안되는 사이에 네명의 시녀가 그의 수중으로 넘어간 것만 봐도 알만한 일이었 다. 어쩌면 그보다 많을지도 모른다고 아라크네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어디있나요? 또 경비병들과 도박판을 벌이고 있는 건 아니겠죠?" "그건 아닙니다만......" 크란의 미소섞였던 얼굴이 처음으로 심각하게 굳어졌다. "왜 그러죠?" "여자를 따라다니고 있는데... 상대가..." 아라크네의 눈에 걱정이 스쳐갔다. "혹시 공주라도 유혹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 왕에게는 6남 6녀가 있었는데 그중에 세 딸은 아라크네의 소생으로 모두 어렸고 나머지 공주들 중에는 올해 스물셋이 된 디아라는 공주와 스무살이 되어 물이 오 른 안느 공주가 있었다. 그들은 매우 여성스럽고 아름답기로도 유명했다. "아닙니다." 그러나 크란의 표정은 더욱 이상하게 변했을 뿐이었다. "그럼 누구를..?" 크란은 어제 복도에서 마주친 메디아의 차가운 얼굴을 떠올리고는 아주 걱정스럽 게 대답했다. "메디아라는 그 여자마법사요." - 계 속 - 독촉은 많이 해주시고....협박은 자제를...^^;; 번 호 : 72 / 83 등록일 : 2000년 02월 27일 04:03 등록자 : DEADSEA 조 회 : 1231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72.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순수하게 까맣던 그 밤, 어둠 속에 함몰하는 별빛을 보았을 때 죽어간 영혼의 붉은 혈액은 슬픈 그대 눈물이 되었고 숨겨진 진실은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았다. 제 72 장 메디아의 아침. 이른 아침 넓고 고급스런 침대에서 자고 있는 메디아의 나른한 잠을 맨 처음 방 해하기 시작한 것은 나이든 시녀였다. 작은 수조에서는 잠에서 막 깨어난 블루잉 이 간단히 몸을 닦고 수영을 하고 있던 참이었지만 메디아는 아직도 한밤중일 때 였다. "우웅... 뭐예요?" 잠에 취한 메디아는 옆에서 계속 뭐라고 떠들어대는 나이든 시녀를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어서 일어나시죠." "나중에 먹을테니 문 닫고 나가세요." "하지만..." 그러나 메디아는 눈을 감고 돌아 누워버렸다. 한참을 더 버티고 서 있던 시녀는 할 수 없다는 듯이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그리고나서 약간의 시간이 더 흐르 고난뒤 케이론이 마시와 같은 방에서 자고 있는 메디아를 깨우기 시작했다. "이씨.. 왜 그러세요?" 저쪽 침대에서 자고 있는 마시는 그냥두고 메디아를 흔들어 깨우며 성가시게 구 는 케이론에게 메디아는 투덜거렸다. 하지만 케이론은 흐뭇한 웃음을 지어 보였 다. "넌 아직도 자고 있으면 어떡하겠다는 거냐? 마시랑 같이 산책이나 하자꾸나. 날 씨도 좋은데 이런 날 늦잠을 자기엔 너무 아깝지 않냐?" "끄응...케이론, 마시나 깨워서 데리고 가든지 하세요. 나가고 싶으면 저 녀석이 나 깨우란 말이예요." 메디아는 퉁명스럽게 대답하고는 케이론의 손을 홱 걷어치워 버렸다. 그러자 케 이론은 메디아를 향해 눈을 찌푸려 보이고는 다시 마시에게 다가가 그를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잠자는 일에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마시의 불평섞 인 중얼거림이 들리기 시작했다. "이힝.. 흔들지 마. 뭐얏. 건들지 마...이잇!" 마시의 잠투정 소리가 몇 번 더 들리더니 갑자기 뭔가 퍽하고 얻어맞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케이론이 낮은 신음소리를 질러댔다. 아무래도 마시가 그 를 걷어찬게 틀림 없었다. 메디아는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잠을 청했다. 잠 시 후 케이론이 비실거리며 방을 나가는 것 같았다. 메디아와 마시는 그래도 연신 낮은 숨소리를 내며 잠을 잤다. 그러나 케이론이 나가고 얼마 되지도 않아 국왕의 시종이 왕이 찾는다며 방문을 두드렸을 때에는 메디아도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메디아는 시종도 나중에 오라며 쫓아보내고 억 지로 눈을 감으며 다시 침대에 누워버렸다. 그리고 잠이 들만하려니까 이번에는 카란이 문을 두드렸다. "뭐얏! 또..." 메디아의 신경질적인 대꾸에 화사한 미소를 짓던 카란이 놀란 것 같았다. "같이 시내구경을 갔으면 했는데.... 나중에 와야겠군요." "제발 그래줘. 잠 좀 자게 내버려 두라구." 그러고는 이불을 끌어다가 머리 끝까지 뒤집어 써버렸다. 물장구를 치고 있던 블 루잉은 멀쓱하게 서있는 카란을 불쌍하다는 눈초리로 쳐다 보았다. "에...저.. 그럼 잘 자요, 메디아." 카란이 시묵룩한 얼굴로 힘없이 나가자 메디아는 벌떡 일어나 방문을 잠가 버렸 다. 내일은 방문에다가 마법을 걸어놓고 잠들든지 해야겠다고 속으로 욕을 퍼부 으면서. 그래도 그때까지는 그럭저럭 메디아도 참으면서 침대에 다시 누울 수 있 었다. 하지만 카란이 나가고 나서 그녀가 눈을 감기도 전에 문을 부서뜨릴 듯이 두드리는 시끄러운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을 때는 그녀의 인내력도 한계를 드러냈 다. 그녀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이씨... 이놈의 왕궁에서 나가든지 해야지. 잠도 못자게 하다니 미치겠네." 그러면서 메디아는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 뜨리며 신경질을 부렸다. 문 밖에서는 여전히 누군가가 문이 부서져라 두드려 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침대에서 일어나 바닥에 발을 내려놓기도 전에 그 문은 와장창 부서지고 말았다. 국왕의 손님이 머무르는 방의 호화로운 방문이 얼마나 세게 두드려 댔으면 부서 지나 생각하기도 전에 메디아는 침대에서 내리던 발이 공중에 뜬 상태로 행동을 멈추었다.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에 서있는 얼굴은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또 너냐?" 메디아의 얼굴이 어이없다는 듯이 찌푸려졌다. "나 아니면 누구겠어?" 그리고 상대의 경쾌한 목소리를 들은 블루잉도 깜짝 놀랐는지 물속에서 철퍼덕거 리며 헛발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바둥거리며 물에서 기어나오려고 하는 걸 보니 꽤 놀란 모양이었다. 5월이 코앞에 다가오고 있었지만 아직은 쌀쌀한 기운이 남아있는 날씨였다. 하지 만 부서진 문앞에 서 있는 상대는 어깨와 목은 물론 허연 허벅지까지 과감하게 드러낸 하늘거리는 옷을 입고 있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얼핏 구별할 수 없는 모호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거기다가 눈은 고양이처럼 나른한 모양을 하고 있었 는데 노란빛이 적절히 섞여 있는 갈색머리카락은 구불거리며 어깨를 감싸고 있었 다. "너 요즘은 목숨 내놓고 사는 모양이지, 노미?" 어이없어 하던 눈빛이 살벌하게 변하는 메디아의 표정을 살피던 노미의 몸이 살 짝 굳어졌다. "설마, 문하나 부셨다고 날 죽이겠다는 거야?" "너 잊은 모양인데 난 잠 잘 때하고 먹을 때 건드리는 놈이 젤 싫어." 저 녀석은 기억력이 형편없는게 분명했다. 예전에도 잠자는 사람 들볶아서 깨우 는데는 일가견이 있던 녀석이었다. 하지만 결국엔 그것때문에 버려지기까지 했으 면서 아직도 그 버릇을 고치지 못했으니 기억력이 모자란 것이 틀림없었다. 메디 아는 속으로 궁시렁 거리며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녀석을 노려보았다. "이봐, 나 오래 기다렸다구. 처음엔 시녀, 그담엔 케이론, 그리고 시종 한사람, 거기다가 예쁜 신관이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도 봤단 말야. 이젠 잠이 깨지 않았 어?" "노미, 일부러 네가 들여 보냈지?" 물속에서 겨우 기어나온 블루잉이 노미에게 적대감을 드러내며 소리쳤다. "호호홋... 설마, 내가 그랬겠니?" 목소리가 높게 올라가며 말하는 걸 보니 노미도 블루잉을 보아서 기분이 언쨚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메디아는 살짝 입을 가리며 웃는 그의 폼이 영 수상쩍어 보 였다. 메디아는 불쾌하다는 표정을 감추지도 않고 쏘아붙였다. "노미, 그 얼굴에 어울리지도 않게 왠 여우같은 웃음이야. 집어치우고 나가." "어머나, 우리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렇게 매정하게 대할거야? 날 버릴때도 눈하 나 깜짝하지 않고 버려두고 가더니.... 너 정말 섭섭하다, 메디아." "버리긴 누가 버려? 얼싸구나 좋다구 남아있던 녀석이 누군데." 메디아대신 블루잉이 쌍심지를 돋우며 대답했다. 사실, 노미는 블러디나가 딸 메디아에게 거북이와 함께 남겨준 것들 중의 하나였 다. 블러디나가 거북이 블루잉을 대마법사로부터 받았을 때는 이미 그녀에게 대 대로 내려오는 고양이 노미가 있을 때였다. 그런데 블루잉이 그 고양이와 날마다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하자 블러디나는 거북이에게 정지마법을 걸어 버렸다. 하 지만 메디아는 묘하게도 고양이 노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블러디나 가 죽고나서는 액체로 만들어 병속에 넣고 다니며 필요할 때만 불러내고는 했다. 가끔 노미가 자유롭게 풀려날 때는 블루잉과 마시의 티격거림도 노미의 심심풀이 장난거리로 전락했다. 그만큼 노미는 노련했고 그런 이유로 블루잉과 마시는 노 미를 싫어했다. 하지만 메디아가 노미를 일부러 버릴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그 렇다고 사심이 섞여있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없었지만 말이다. 오래전 어린 국왕이었던 히페리온과의 내기에서 그를 이용하긴 했지만 별로 성과 를 얻지 못 했었다. 그리고 노미가 왕궁을 무척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아서 메디 아는 그를 그냥 두고 떠나버렸었다. 간다는 말도 없이. 그래도 어린 왕비 헬레나 가 노미를 몹시도 잘 대해 주었는데다가 그의 취향에도 메디아보다는 왕비곁에 사는 것이 더 좋아서인지 노미도 왕궁에 남아있는 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러니 블루잉이 노미의 버려졌다는 말에 발끈하는 것도 이해할만한 일이었다. 그리고 블루잉과 세상에서 가장 사이가 나쁜 이를 꼽으라면 주저없이 저 노미를 첫째로 꼽았을테니 말이다. 메디아가 보기에 고양이와 거북이가 왜 그렇게 싸워 대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노미의 고약한 버릇은 잘 알고 있었다. 사람 못 살 게 구는데는 거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고양이였으니까. 더구나 고양이 주제 에 사람행색을 하는 것도 좋아했다. 노미는 블루잉에게는 대꾸도 안하고 메디아에게만 말했다. "이쯤되면 잠도 달아났을텐데 그만 일어나, 메디아.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들도 생각을 해줘야지. 불쌍하쟎니....." "기다리는 사람들이라고?" "응. 거기 다들 들어와요. 메디아가 일어났어요." 노미는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문밖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차례대로 얼굴을 드러내는 사람들. 처음엔 수염을 쓰다듬으며 케이론이 점쟎은 폼을 잡으며 들어왔다. 그 뒤를 이어 아름다운 카란이 상냥한 표정을 지으며 들어왔고 시종과 시녀도 조심스럽게 걸 어왔다. 거기다가 맨 마지막으로 어딘지 낯이 익숙한 사내까지 한명 따라들어 오 고 있었다. 메디아는 완전히 포기했다는 듯이 침대에 한번 드러누워 천장을 노려 보았다. 그 리고 문 부서지는 소리에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있던 마시도 멍한 얼굴로 노미 를 쳐다보다가 그 뒤를 이어 들어오는 사람들을 향해 늘어진 하품을 해 보였다. "뭐야, 뭐야. 아침부터 왜 이방에서 난리들이야? 후아함~~." 마시의 목소리는 아직도 잠에 취해서인지 약간은 쉬어있었다. 누가 들어왔는지 미처 확인하지 못 한 것은 그래서였을 것이다. 아침 식사를 마친 메디아가 국왕 히페리온을 만나기 위해서 긴 복도를 걷고 있었 다. 그 옆을 마시가 뒤를 힐끔 노려보며 터벅터벅 따라 걸었다. 그리고 케이론도 마시의 옆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붙어서 걸었으며 그를 이어서 카란과 노미 가 걷고 있었다. 맨 뒤에는 검은 머리의 잘생긴 사내가 싱글거리며 그 뒤를 따라 가고 있었다. 메디아는 차가운 손바닥으로 잠시 얼굴 쓸어 내렸다. 열이 슬금슬금 올라오는 것 이 피가 끓는 것 같았다. 그녀는 휙 뒤를 돌아다 보았다. 그녀를 따라다니는 마 시는 그렇다치고 그 마시를 이뻐죽겠다는 얼굴로 따라다니는 케이론과 또 그 옆 에 나란히 붙어다니는 카란과 노미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저 작자는 왜 아침부터 재수없게 문 앞에서부터 나타나더니 그림자마냥 따라다니는지 도대 체 알 수가 없었다. 더구나 그녀의 눈이 마주칠 때마다 허우대 멀쩡한 얼굴로 비 실비실 웃는 폼이 영 못마땅했다. 멀리서 메디아에게 다가가고 있던 알렉토는 그 모습을 보면서 희미하게 미소지었 다. 메디아의 모습은 마치 병아리 무리를 몰고 다니는 어미닭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녀의 뒤를 열심히 따라다니는 사람들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 했다. 알렉토는 메디아의 주변에는 의외로 항상 사람이 모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반갑게 그들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오람에 처음 도착한 날 메디아 일행과 헤어지려던 알렉토가 왕궁에 남아있게 된 데에는 제피로스의 영향이 컸다. 어차피 돈을 받으며 일해주는 용병으로서 떠돌 거라면 왕궁을 위해 일해보는 것이 어떠냐는 제의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알렉토 도 일행과 헤어지면 코사나 지방으로 이동해 전쟁에 참가할까 하고 생각하던 중 이어서 제피로스의 제의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왕궁에 들어온 첫날부터 정신없게 만들던 메디아와 마시는 고위대신들과 국왕의 회의에 참석하고 그와 제 피로스는 난데없는 임무들을 부여받아 움직여야 했다. 알렉토는 현재 왕궁의 보수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곳에서 공사를 지위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아네모스도 일을 하고 있었는데 탑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거대 한 조각상들의 보수에 동원되는 조각가들 중의 하나였다. 조각상들은 모두 열두 개의 신상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수십명이 동원되어야 겨우 하나를 옮겨 놓을 수 있을정도의 커다란 규모였다. 현장에는 각 지방에서 지원해 온 목수나 석공들로 북적였고 조각가들과 인부들까지 합해서 수백명이 움직이고 있었다. 제 피로스와 알렉토가 갑자기 공사현장을 감독하게 된 이유는 바로 그곳이 최근 유 일하게 외부인들이 가장 많이 들어 온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몇달에 걸쳐 진행되 고 있는 보수공사로 아직도 오랜 시간이 걸려야 모두 착공될 것 같았다. 만약, 누군가 왕궁에 비밀스런 군대를 숨기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그곳만큼 적절한 곳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요즘 알렉토는 공사현장에서 돌가루를 들이마시며 수상 한 자들이 있는지 은밀히 조사하느라 매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알렉토가 메디아가 걸어가고 있는 복도에 막 들어섰을 때 그는 살짝 눈을 찌푸릴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잠시 자신의 눈을 의심했지만 잘 못 본 게 아니었다. 너 무 멀어서 못 알아 보았는데 가까이에 다가갈수록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자였 다. 노아에서 노예를 잔인하게 죽이던 사내. 그 자가 메디아의 꽁무니를 열심히 따라가는 무리에 끼어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 계 속 - 갑자기 감기가 들어서 머리가 몽롱하네요.ㅠ.ㅠ;; 여러분 감기 조심하세요. ((.~;; - 뱀파이어 - 번 호 : 73 / 83 등록일 : 2000년 03월 04일 10:12 등록자 : DEADSEA 조 회 : 1320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73.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순수하게 까맣던 그 밤, 어둠 속에 함몰하는 별빛을 보았을 때 죽어간 영혼의 붉은 혈액은 슬픈 그대 눈물이 되었고 숨겨진 진실은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았다. 제 73 장 사냥. 마시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침의 달콤한 잠을 방해 받아서가 아니다. 그렇다고 식사를 조금 밖에 못 먹어 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오늘 나와 승마를 하지 않겠어?" 바로 이거였다. 아침부터 마시의 기분을 망치는 것은 메디아를 쫓아다니는 저 사내 때문이었다. 적당히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멋을 내는 저 놈의 말투부터도 마음에 들지 않았 다. 마시는 메디아의 옷자락을 더 꽉 움켜 잡으며 그녀에게 달라붙었다. "그런데 아가씨, 이름은 언제 가르쳐 줄거지?" 사내는 그녀의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었지만 시치미를 떼며 물었다. 그녀에게 찰 싹 달라붙어 있는 소년이 적의를 품고 있건 말건 그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마시는 울컥울컥 치솟는 화를 참으며 따라오는 사내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사내 는 마시의 치명적인 시선을 못 본 듯 끈질기게 그들의 뒤를 쫓아다녔다. 메디아 가 아무대꾸도 없이 계속 그를 무시하자 성질급한 사내는 성큼 앞으로 걸어가 길 을 막아섰다. "이봐, 그렇게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쟎아. 나 처럼 매력적인 남자를 왜 거들떠 도 안보는 거지?" 그 잘난척 하는 말 한마디에 드디어 메디아도 발걸음을 뚝 멈추어 섰다. 그리고 는 앞을 가로막은 사내의 몸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새삼스레 쭉 훑어 보는 것이었 다. 사내의 검은 머리카락과 어두운 눈동자는 길들이지 않은 야수를 떠올리게 했다. 거기다가 강인한 턱선과 약간 휘어진 콧등은 몹시도 거칠고 남성적인 인상을 과 시하고 있었는데 그의 뺨 한쪽에 보일듯 말듯 살짝 패여있는 보조개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아서 더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두터운 옷으로 감싸인 사내의 가슴과 팔 근육은 굳이 보지 않아도 잘 단련되어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고 그 의 큰 키도 위압적인 그의 외모를 한층 돋보이게 했다. 메디아의 집요한 눈동자는 냉정하고 꼼꼼하게 사내의 겉모습을 쭉 뜯어 보았다. 굉장히 노골적인 시선이었다. 사내는 순간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가는 피식 웃 어 버렸다. 여자의 시선이 그토록 당당하고 노골적인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그녀의 매력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메디아의 시선이 그의 발끝에서 다시 위로 올라와 그의 눈동자에 머물렀을때 사내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평가는 끝났나?" 확실히 잘난척 할만큼 잘 생긴 얼굴이긴 하다. 하지만 그 뿐이다. 그 정도 외모 는 수 십년을 살아온 메디아에게 그리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그녀는 무심 하게 중얼거리듯 그에게 물었다. "당신, 이름이 뭐라고 했었지?" "포센이라고 불러. 설마 아가씨, 날 기억 못 하는 건 아니겠지?" 포센은 입술 끝을 살짝 말아올리며 재미있는 놀이를 하는 어린 아이처럼 미소를 띄웠다. 그러면서 그는 한발을 더 내밀어 메디아와의 거리를 좁혔다. 만약 한발 만 더 가까이 다가서면 그와 메디아의 가슴이 맞닿을 거리였다. 그의 키가 메디 아보다 훨씬 컸기에 메디아는 고개를 들어야만 그의 눈을 마주 올려다 볼 수 있 었다. "원하는게 뭐야?" 메디아는 마치 원하는 건 뭐든지 말만해 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상당히 대 담한 느낌을 주는 어조였다. "하하하하핫..." 포센은 그녀의 도전적인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정말 끝내주는 여자라고 생각하 며 그는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야물론 아가씨를 원하지." 아침부터 괜히 그녀를 따라다닌 것은 아니었다. "그래?" 메디아는 손바닥을 들어 포센의 심장이 위치하는 곳에 올려 놓았다. 힘차게 율동 하는 살아있는 심장의 고동이 확연히 느껴졌다. "원하는 것에는 반드시 댓가가 따르기 마련이라는 걸 알겠지?" "댓가?" 메디아의 보라색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짙은 청색으로 변했다. 그녀는 그의 가슴 에 올려 놓은 손바닥을 움켜쥐듯이 손을 오므렸다. "당신 심장이면 어떨까?" 포센은 두터운 옷감 사이로 차가운 한기가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것이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잠시 움찔 했을뿐 이내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 다. "내 마음은 이미 당신꺼야." 그 유들유들한 대답에 뒤에서 따라오던 케이론과 노미가 동시에 혀를 내둘렀다. 메디아를 유혹하려는 정신나간 인간이 있다는 것이 노미로서는 그저 신기할 뿐이 었다. 인간이라는 종족은 아무리 오래 살펴봐도 이해불능의 존재였다. 꽤 똑똑하 고 현명한 종족인가 하면 저렇게 눈에 보이는 위험도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바보 스러우니 말이다. 메디아라는 존재가 얼마나 위험한지는 조금만 유심히 살펴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더구나 그녀의 온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협적인 냄새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조금이라도 지각이 있는 자라면 절대로 그녀를 도발하지는 않을 것이다. 저 사내는 아무래도 뭔가가 모자란 인간인 모양이었다. 노미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 대면서 이 흥미로운 사태를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포센이 자신의 가슴에 얹어져 있는 그녀의 손을 꽉 잡아 당겼다. 그러나 포센은 거센 어깨에 떠밀려 그 손을 놓아야 했다. 마시였다. "어디다가 손을 대는 거야?" 메디아와 포센 사이에 끼어들어 씩씩거리는 마시의 붉은 눈동자가 불안스럽게 흔 들렸다. 이런 일은 난생 처음있는 일이었다. 카란이 메디아에게 난데없는 키스를 했을때도 이렇게 화가 나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누군가 했더니 그때 그 소년이군. 그 눈동자를 보니 확실히 알겠어. 그러고 보 니 그 때 했던 내 질문에 아직도 답을 해주지 않았군, 아가씨." 갑자기 끼어든 마시에게 시선을 주던 포센의 눈동자가 장난스럽게 반짝였다. "무슨 질문이었나, 젊은이?" 여태까지 가만히 지켜보던 케이론이 불쑥 끼어들었다. "이 녀석이 당신 애인이야?" 메디아는 작게 실소를 터뜨렸다. 그리고 엉뚱하게도 그를 제피로스하고 붙여놓으 면 딱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제피로스가 뭐라고 했더라? 아.. 맞아, 결혼했냐고 했었지.' 봄바람이 부드럽게 그녀의 목덜미를 지나갔다. 향기로운 내음이 듬뿍 담겨있는 바람때문인지 메디아는 지금까지의 짜증을 일시에 잊어버렸다. 그리고 그녀는 무 심히 복도 왼편에 펼쳐진 정원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얀 햇살이 분수대에서 쏟아지는 물줄기에 부딪혀 은빛으로 부서지고 숨을 들이 쉴때마다 감미로운 꽃내음이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여전히 메디아의 코앞에서는 마시가 포센을 향해 씩씩거렸고 사내는 싱글거리고 있었지만 그녀에게 그런 것 들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남의 일 같았다. 문득,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최근 며 칠 동안 느꼈던 혼란과 피곤함이 싹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마시와 코카서스 화산을 떠나오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녀의 뜻대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물론, 그녀가 누군가에 끌려서 하기 싫은 일을 할 성격은 아니었 다. 솔직히, 타미에서 에코의 정신없는 수다에 떠밀려 그들과 동행이 되었을때도 그녀의 내부에서는 은근히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때만해도 메디아는 지루 했고 권태로움에 지쳐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새로운 뭔가가 필요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건 지나쳤다. 여행을 하는 동안에 그녀에게 닥 친 일들은 전혀 예상 밖의 일이었다. 어쩌면 그녀 생애 가장 최악의 경험으로 큰 고통과 좌절을 겪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최근 그녀의 감정은 스스로도 통 제할 수 없는 지경었다. 미칠듯한 분노에 사로잡히기도 했고 어떨 때는 끝없는 궁금증만을 느꼈다. 그리고 때로는 너무나 혼란스러워서 이 모든 것을 무시해야 한다고 마음먹기도 했다. 하지만 결론은 언제나 하나였다. 그녀는 무엇이든 끝까 지 알아내야만 했다. 그것을 거부한다면 앞으로 살아가는 내내 후회할 것만 같았 다. 케이론의 말이 맞았다. 그녀는 운명을 피해가지 않을 것이다. 메디아는 산뜻하게 피어나는 풍경 한가운데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해시계를 바 라보며 시간을 되돌리고 있었다. 블러디나가 살아있던 그때로. 그리고 이제 그 과거를 제대로 청산해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디아? 메디아야?"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메디아는 혼자만의 생각에서 겨우 벗어났다. 마시 가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재촉했다. "빨리 안가고 뭐해?" 메디아는 불만에 찬 마시의 눈동자를 보자 그냥 미소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그녀 는 그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흐트려 놓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앞으로 가야지. 멈추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겠지." 그녀의 혼잣말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케이론뿐이었다. "내 질문에 왜 대답을 안하는 거지? 이봐 아가씨. 난 당신한테 관심이 많다구. 그 어린 녀석은 떼어버리고 얘기 좀 할 수 없어? 정말 이 녀석이 애인은 아니겠 지?" 변함없이 포센을 무시하고 있는 메디아의 태도에 그도 짜증이 나는지 말끝마다 약간의 신경질이 묻어나고 있었다. "메디아는 내꺼야!" 마시의 입에서 거침없이 튀어나온 한마디가 모두의 시선을 그에게 불러 모았다. 케이론은 아주 의외라는 표정이었고 카란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제 가까이 다가온 알렉토도 마시의 목소리를 듣고는 내딪던 발을 주춤 멈춰 세웠다. 그리고 메디아는 멀뚱이 마시를 바라보며 이게 무슨 뜻일까? 잠시 고민했다. 어 쩌면 마시의 말이 아주 틀린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어쨌든 그가 성년이 되기까지 그의 보호자로서 그의 곁에 반드시 있어야 했으니까. "설마, 둘이 결혼한 사이?" 거기서 메디아의 생각은 중단되었다. 이 사내는 확실히 제피로스와 닮았다. 그런 데 왜 복도에 늘어서서 이런 대화를 나눠야 하는지 메디아는 알 수가 없었다. 복 도 저편에 서있는 경비병들도 이쪽을 관심있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복도에 서서 이런 실랑이를 하고 싶지 않았다. 메디아는 앞을 가로막고 있는 포 센을 가르키며 마시에게 명령했다. "마시, 밀어버려." 마시는 즉시 실행했다. 어지간한 남자 셋이 덤벼들어도 꼼짝 않을 포센이었지만 그는 마시의 무지막지한 힘에 떠밀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가 미처 균형을 잡기도 전에 메디아와 마시는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맨 마지막 그의 다리사 이를 유유히 빠져나가는 노란색 고양이 한마리가 비웃듯 야옹거렸지만 포센은 지 척에 다가온 알렉토 때문에 그것을 미처 의식하지 못했다. 알렉토는 푸른색으로 말끔하게 차려입은 포센을 뚫어지게 바라보았지만 입을 열 어 말을 걸지는 않았다. 알렉토를 아는 척 하며 다가온 것은 카란이었다. "알렉토, 당신도 호출 받은 모양이죠?" 알렉토는 여전히 포센에게 눈길을 주며 카란에게 대답했다. "아, 국왕의 전갈을 받고 오는 길이오." "아무래도 오래 쉴 수는 없을 것 같군요." 사실, 알렉토는 쉴 사이도 없었지만 메디아와 다른 일행들은 왕궁에서 매우 편하 게 지내고 있었다. 그렇다고 알렉토가 중노동을 하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무슨 뜻이오?" "가면 알게 될 겁니다. 어서 가죠, 알렉토." 카란은 포센이 있어서인지 더 이상의 긴 이야기를 꺼내 놓지는 않았다. 알렉토도 포센이 곁에 있어서인지 마음이 불편했다. 그러나 포센은 잠시간 알렉토를 눈여 겨 쳐다 보았을뿐 이내 관심을 멀어져 가는 메디아에게 돌렸다. 그는 한번 결심 한 목표는 절대로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설령, 유부녀라고 해도 그에겐 상관이 없는 문제였다. 의외의 장애물이 버티고 있었지만 그것조차도 그에겐 즐거운 유 흥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예전의 그는 목숨을 걸어가며 여자를 뺏어온 적도 있었 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이 포센의 투지를 더 불러 일으켰고 여자에 대 한 가치를 높여 준다고 생각했다. 그는 최근의 왕궁생활에 실증을 느끼고 있던 참이라 메디아의 등장이 더없이 반가운 입장이었다. 포센은 입가에 묘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메디아 일행을 따라 걸었다. 그의 눈빛은 사냥감을 쫓는 야수를 떠 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 계 속 - 점점 연재 속도가 느려져서 죄송합니다. ^^;; 번 호 : 74 / 83 등록일 : 2000년 03월 16일 18:40 등록자 : DEADSEA 조 회 : 1240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74.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순수하게 까맣던 그 밤, 어둠 속에 함몰하는 별빛을 보았을 때 죽어간 영혼의 붉은 혈액은 슬픈 그대 눈물이 되었고 숨겨진 진실은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았다. 제 74 장 결계. 메디아 일행이 시종의 뒤를 따라 걸어간 복도의 끝에는 몇 명이 서성거리며 그들 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담의 옆에는 사일째 비구름을 달고 다니는 후마가 변함없 이 우산을 들고 서 있었고 그녀의 뒤쪽에서는 크라메드가 오래된 파피루스를 열 심히 들여다 보고 있었다. 그들의 맞은 편으로는 흑기사 제피로스가 정복을 차려 입고 검을 시종에게 내어주고 있었는데 왕을 만나기 위해 무장을 해제하고 있는 중이었다. 뒤늦께 도착한 알렉토를 발견하고 제피로스가 반갑게 인사를 했다. 알렉토는 붉 은 색 기사단의 옷을 입고 있었다. 알렉토가 기사복을 입게 된 것은 제피로스와 함께 있는 알렉토를 우연히 보게 된 붉은 기사단의 단장이 알렉토가 오래 전에 왕실 토너먼트 전에서 붉은 기사단의 자격을 수여 받았던 것을 기억해 냈기 때문 이었다. 파라 제국에서 4년마다 열리는 토너먼트는 매우 경쟁이 치열했고 거기에서 실력 을 인정받는다는 것은 검사로서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알렉토가 용병이기는 했지만 왕실을 위해서 고용되는 입장이라면 그의 실력에 걸맞는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붉은 기사단장이 제피로스에게 주장한 내용이었다. 제피로스도 알렉 토가 아무 직위없이 일하는 것보다는 기사단으로써 일해주는 것이 편했기에 그를 기사단에 편입시켜버렸던 것이다. 알렉토가 입고 있는 붉은 기사복은 하얀색 셔츠와 검은색 장식들을 제외하고는 망토와 가죽까지 모두 붉은색으로 되어 있었다. 더구나 어깨까지 오는 알렉토의 밤색 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붉은색 머리띠도 차림에 썩 잘 어울려서 매우 근사하 게 보였다. "여어, 제복이 아주 잘 어울리는군, 알렉토." 제피로스가 빙글거리며 알렉토의 옷 맵시를 칭찬했다. 그러나 온통 검은 색으로 치장된 제피로스의 제복도 알렉토에 못지 않은 멋이 풍겨나왔다. 두 덩치 큰 젊 은이가 사내다운 맵시를 자랑하며 서 있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이 흘러 나오게 할 정도였다. 알렉토는 제피로스의 너스레에 가볍게 미소로 답하고 검을 풀러 시종에게 건네주기 시작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나까지 호출된 거지?" 알렉토의 입장에서는 지금은 기사단에 복속되었지만 일개 용병에 불과한 자신이 국왕의 호출까지 받아야 할일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기에 당연한 질문이었다. "나도 정확히는 모른다네. 어쩌면 왕성을 떠나는 임무를 부여받을 것 같지만...." 제피로스는 알렉토에게 대답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신관 케이론에게 다가가 이야기하는 하늘색 머리의 소년이 심각한 표정으로 파 피루스 종잇조각을 들이밀고 있었다. 그들과 함께 있는 마법사 아담은 깊은 눈동 자로 이마를 찡그려 보이고 있었는데 그의 시선은 노란 곱슬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잡아당기고 있는 후마를 향해 있었다. 그의 시선에는 걱정이 한가득 담겨 보였 다. 거기다가 그들 사이로 왔다갔다하는 마시의 모습을 보자 제피로스의 관심은 메디아로 흘러갔다. 메디아는 묘한 매력을 발산하는 카란이라는 신관과 서서 마 시를 관찰하고 있었는데 제피로스는 아무리 둘러봐도 여기 있는 사람들의 공통점 을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일로 국왕이 그들을 불렀는지는 일단 들어가 보아야 알 것 같았다. 그런데 그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에는 메디아의 관심을 돌리 려는 듯 말을 걸고 있는 낯선 사내가 있었다. '그런데 저자는 뭐지?' "알렉토, 저자는 뭔가?" 제피로스가 나직히 알렉토에게만 들리도록 이야기했다. 알렉토는 눈살을 찌푸리 며 묵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그게 궁금하다네." 그의 대답에 제피로스는 시선을 알렉토에게 돌렸다. 그의 목소리에 서린 확실한 적대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제피로스는 의문을 담아 알렉토를 바라보았지만 더 이상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들 곁으로 또다른 흑기사 제복의 사내가 걸어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이군, 제피로스." "아... 이게 누구야, 카드모. 정말 오랜만이오." 연하고 아름다운 금발머리를 단정하게 빗어내린 푸른 눈의 유약한 사내가 위압적 인 검은 기사복을 입고 있는 모습은 특이하고 인상적인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그는 제피로스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는 맑은 푸른색 눈으로 주위를 둘러 보더 니 케이론과 아담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목례를 했다. 그러나 카드모의 시선은 곧 메디아와 알렉토에게 향했고 제피로스와 친밀해 보이는 알렉토를 향해 시선을 고정시키며 물었다. "누군가?" 제피로스는 카드모의 시선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았지만 가볍게 대답했다. "아, 이번에 붉은 기사단에 새로이 편입된 알렉토라고 하오. 실력이 아주 뛰어난 기사라오." "그의 실력이라면 나도 본적이 있지. 다시 만나 반갑소, 알렉토." 그는 상대를 살펴보는 눈빛으로 알렉토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 서로 아는 사이였나?" "조금." 제피로스의 놀란 물음에 알렉토는 카드모의 손을 맞잡으며 간단히 대답했다. "다시 만날 줄 몰랐군. 하긴 저자가 여기 있으니 당연한 일인가?" 알렉토는 카드모의 시선을 받으며 메디아의 뒤를 따라 지금까지 함께 서있는 포 센을 가르켜 보였다. 카드모는 포센을 발견하자 불편해 하는 눈길이었지만 곧 그 를 무시해버렸다. 별로 아는 척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았는데 포센도 그의 눈 길에 일부러 아는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그저 비웃는 웃음을 잠깐 지어보였을 뿐 이었다. "상당한 인연이군. 나도 그 이야기 좀 들을 수 있을까?" 제피로스가 관심을 보였지만 카드모는 별로 그 관심이 달갑지 않은 모양이었다. "별로.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네. 굳이 자네가 궁금해 할 것까지는 없어, 제피로 스." "흠, 그런가? 하지만, 그렇게 말하니 더 궁금한 걸...." 그러나 그들의 대화는 더 이상 계속되지 않았다. 어느새 시종이 나와서 그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일행이 모두 왕의 집무실로 사라지자 포센은 벽에 기대며 생각에 빠져 들었다. 메디아를 아침부터 따라다니고 있었지만 지금 본 장면은 의외의 수확이었다. 무 엇인가가 벌어지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대신관 케이론과 왕실 수석 마법사 아담에다가 흑기사까지 불러 모을만한 일이란 것은 매우 중대한 일이 벌어졌음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포센은 곰곰히 생각에 빠지면서도 그 자리를 쉽게 벗어나지 는 않았다. 어쨌든 그의 최대 관심사는 메디아라는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발밑에서 노란색 고양이가 꼬리를 흔들며 왔다갔다 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관심 을 끌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는 고양이를 한손으로 번쩍 들어 올려 품에 안고 고양이의 연한 목아래를 쓰다듬었다. 포센은 고양이를 안아들고 천천히 벽에서 물러나 걸음을 옮겼다. 마법사 크란을 찾아가봐야 할 것 같았다. 왕의 집무실은 두개의 공간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한쪽은 커다란 원탁이 놓여 있었고 다른 한쪽은 잘 장식되어 있는 몇 개의 의자와 테이블이 놓여진 깔끔한 모양의 거실이었다. 일행이 안내되어 들어간 곳은 바로 아득한 거실이었다. 국왕 은 중앙에 위치한 커다란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있었는데 그들이 들 어가자 잠시 일어나 케이론과 다른 사람들에게 자리를 권했다. "어서들 앉으시오." 각자 적당한 자리에 자리를 잡자 왕은 케이론에게 시선을 주었고 케이론은 기사 들을 위해서 '카오스의 눈'과 '자비의 보석'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다른 이들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알렉토는 물론 흑기사인 카드모와 제 피로스도 전혀 몰랐던 이야기였다. 그들의 놀람이 잠시 있은 후 국왕 히페리온이 입을 열었다. "결계를 찾는 작업은 어떻게 진행하고 있소?" 결계는 '빛과 어둠, 그 사이를 가르는 찰라의 시간이 영원히 머무는 그 곳'이라 는 의미도 되었다. 결계라는 것은 흔히 공간을 나누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같은 공간에 두 개의 세계가 공존할 수 있는 것을 의미했다. 예를 들자면, 결계 의 바깥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흔한 길이 될 수 있지만 결계의 안에는 전혀 다 른 공간이 존재할 수도 있는 것이다. 결계의 밖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결계 밖에 있는 길을 걸어다닐수 있지만 결계 안의 모습을 볼 수 있거나 느낄 수는 없고 들어갈 수도 없다. 마찬가지로 결계의 안에 있는 사람들도 밖에 존재하는 길을 걸을 수는 없는 일인 것이다. 그것은 마치 한 공간을 칼로 뚝 잘라서 벌려 놓은 다음, 벌려진 공간에 결계라는 다른 공간을 집어넣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하지 만 잘라진 단면에 다른 공간이 들어서더라도 서로 떨어져 버린 공간들은 여전히 연결되어 있고 잘려진 공간에 들어선 결계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결 계라는 공간을 결계의 밖에서 찾아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설령, 두 그루의 나무 사이에 결계가 들어 서 있다는 확실한 사실을 알아내더라도 결계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평범한 사람이 나무 사이를 아무리 왔다갔다해도 결계 로 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은 빛과 어둠이 갈라지는 공간을 찾으려는 것 과 같고 수평선과 지평선을 손에 잡으려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평범한 공간에 결계를 만드는 작업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고 단순히 마법만으로 그런 공간을 만들 수는 없었다. 마법사들이 일시적으로 작은 공간을 열수는 있었 지만 그것을 오랜시간 지속시키거나 공간을 무한대로 늘일 수는 없었다. 비밀의 신전이라 불릴만한 규모의 신전이 들어 설 정도의 결계라면 평범한 수준의 결계 는 절대 될 수 없었다. "결계를 찾는 작업은 현재 왕궁 마법사들과 고위 신관들이 함께 참여하고 있습니 다." "신관들?" 히페리온이 이해를 구하듯 물었다. "비밀의 신전을 감추고 있는 결계라면 마법을 벗어난 신력이 개입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폐하." "그럼 시간은 얼마나 걸릴 것 같소?" "지금으로 봐선 확신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보름 안에 그 결과를 알 수 있을것 이라고 봅니다. 대륙이 아무리 넓어도 그 정도의 결계가 존재할 수 있는 곳은 많 지 않습니다." 아담은 왕성의 모든 마법사들을 동원해 결계를 찾고 있는 중이었다. 더구나 결계 가 어디쯤에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의 작업이어서 위험을 무릎쓰고 왕궁 의 마법써글을 동원하고 있는 중이었다. 오람의 왕성은 마법써클 때문에 유명하 기도 했지만 라비론이나 가이야 같은 다른 나라에서는 오람의 왕성에서 마법써클 을 가동하는 것을 금지하기를 바랬고 다른 나라와의 평화를 위해 파라에서도 그 에 동의하고 있었다. 만약, 지금 그 써클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국 제적으로 불편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보름이라... 그 정도면 준비할 시간은 충분하겠군." 히페리온은 생각에 잠긴듯 턱에 고인 손가락으로 뺨을 살짝 두드렸다. 그러더니 그는 카드모와 제피로스에게 시선을 돌려 말을 이어나갔다. "자네들은 왜 이자리에 불려 왔는지 아는가?" "모릅니다, 폐하." 카드모가 나서 대답했다. "자네 부친이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던가?" 카드모의 부친이라면 네코르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카드모는 아버지 네토르 로부터 이번 일에 대한 이야기는 어떤 말도 듣지 못했다. "예." 카드모가 대답하자 히페리온은 그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제피로스에게 시선을 돌 렸다. "라메즈 경도 아무말이 없던가?" "예, 폐하." 파라의 세도가를 형성하는 두 가문의 수장은 라메즈와 네토르였다. 둘 사이가 그 리 매끄럽지 못하다는 것은 히페리온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을 지 난밤의 회합에 빠지게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 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이 국왕의 권력을 튼튼히 하는 세력이기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국왕의 세력을 위협하는 존재들이기도 했기에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히페리온의 그들의 젊은 아들들을 이번 일에서 제외시킬 수는 없었다. 그들은 모두 뛰어난 기사였고 더구나 카드모는 흑 기사단을 이끄는 기사단장으로써 제국의 촉망받는 귀족 젊은이였다. 제피로스도 수도 오람을 떠나 자신의 영지 달타지방에 물러가 있었지만 근위 기사단을 이끌 던 뛰어난 흑기사였다. 히페리온은 신하를 거느린 모든 권력자들의 고민처럼 신 하를 믿지 못하지만 또한 신하로써의 그들을 믿어야만 하는 문제점에 봉착해 있 는 것이었다. 그는 뜻을 헤아릴 수 없는 황금빛 눈동자로 눈앞에 있는 두 기사를 바라보며 나직히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까지 설명한 이야기를 잘 들었겠지? 만약, 그 '자비의 보석'이라는 것을 찾 지 못한다면 우리는 시투니아와의 전쟁에서 패배할 뿐 아니라 최악의 경우, 판타 리아 대륙이 다시한번 대재앙의 불길속에 빠질수도 있어. 자네들은 앞으로 대륙 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임무를 수행하게 될 걸세." 히페리온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일어나 카드모와 제피로스의 앞으로 걸어갔다. 카 드모와 제피로스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국왕의 앞에 섰다. "그대들의 임무는 모든 일에 우선하고 다른 어떤 것에도 좌우되지 않을 중요한 일이다. 나 국왕 히페리온은 그대들에게 지금 이 순간부터 나 이외의 그 누구의 명령에도 설혹, 그대들의 부친인 네토르 경과 라메즈 경의 명이라 할지라도 복종 할 필요가 없음을 명한다. 가서'자비의 보석'을 찾아오라. 무슨 일이 있어도 그 것을 꼭 찾아 오도록 하라. 이것이 그대들이 목숨을 걸고 수행해야 할 임무다." 카드모와 제피로스는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왕을 응시하며 무릎을 꿇고 그 앞에 복종했다. "폐하의 명이라면 목숨을 걸고 수행하겠습니다." "기사의 명예를 걸고 충성을 다해 수행하겠습니다." "좋아. 그대들을 믿겠다." 잠시 침묵이 흐르자 크라메드가 국왕의 관심을 조심스럽게 돌렸다. "폐하." "왜 그러는가?" 다시 자리에 앉으며 히페리온은 다리를 다른쪽 무릎에 올려 놓았다. "기록에 의하면 '자비의 보석'을 얻으려는 자는 시험을 치뤄야 합니다." "시험이라구?" "예." 일시적으로 히페리온이 이마를 찡그렸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장애물이었다. 그는 하늘색 머리와 곱상한 미모의 소년이 특이하게 생긴 장식품을 여기저기 매 달고 있는 모습에도 전혀 신경쓰지 않고 소년의 진지한 눈동자에만 시선을 주었 다. 소년은 낭랑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파피루스 종잇조각을 쥐어 올려보였다. "설명해보게." "4300년전에 사라진 비밀의 신전에 대해서 발견된 기록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기록들에서 공통된 한가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기록들에서 발견된 바에 의하면 신들의 선물이라 불려졌던 '자비의 보석'이 비밀스런 신전의 제단에 모 셔졌지만 그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성스런 의무를 지닌 자들이라는 겁니 다." "성스런 의무라니 어떤 의무를 말하는 것인가?" "불행히도 성스런 의무가 무엇을 뜻하는가에 대한 언급은 지금까지도 전혀 발견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시험에 대한 언급은 있었습니다, 폐하." "그것이 무엇인가?" "그건 제가 설명드리지요." 모두의 시선이 케이론에게 향했다. "마법의 성에 그 시험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마법의 성이라면 저 대륙의 북쪽에 자리한 마법의 섬 말이요?" 히페리온은 마법의 성이 마법의 섬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법의 섬은 마법사들만이 거주하는 곳으로 마법을 연구하고 마법사를 길러내는 곳이었다. 판 타리아 대륙의 중앙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법의 섬은 바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산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곳을 섬이라 불렀다. 그리고 마법의 섬이 위치한 지역은 위치상 파라의 영토에 속했다. "예, 그렇습니다." 케이론의 대답하자 옆에서 지켜보던 카란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질문했다. "하지만, 대신관님. 마법의 성은 비밀의 신전보다 훨씬 뒤에 생겨났는데요. 제가 알기로도 마법의 성의 역사는 2000년이 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4300년전 에 사라진 신전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지요?" "자네 말이 맞네. 하지만 나는 그곳에 시험이 존재하고 있다고 했을뿐이지, 마법 의 성 자체가 그 시험을 뜻하는 것이라고 하지는 않았다네." "아... " 그러나 아담의 의문은 또 다른 것이었다. "난 그건 이야기는 금시 초문입니다. 마법의 성에서 그런 이야기는 한번도 들어 보지 못 했군요, 케이론." "나도 최근에 알게 되었다네, 아담." "그 시험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오가는 이야기가 자신의 임무와 관계가 있으리라는 제피로스의 생각은 당연 한 것이었다. 그는 시험을 치뤄야하는 당사자가 자신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 다.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라네." 케이론은 대답하면서 제피로스를 비롯해 그 자리에 있는 카드모와 알렉토 그리고 카란과 후마에 이어 메디아까지 차례대로 응시했다. 카드모나 제피로스처럼 대단한 가문의 세력을 가지지도 못한 떠돌이였던 알렉토 가 이 자리에 있게 된데에는 케이론의 예언때문이었다. 케이론은 예언을 통해서 이 임무에 반드시 모하비부족의 전사가 필요하다고 했던 것이다. 케이론은 그가 시험을 통과하는 자들중의 하나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설마, 나도 그 일 때문에 부른 건가요, 케이론?" 그러나 메디아의 퉁명스런 물음에 대답한 사람은 히페리온이었다. "그렇소, 메디아. 당신 또한 '자비의 보석'을 찾아야만 하지 않소?" 히페리온은 메디아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케이론에게 쓰는 말투를 그대로 적용했 지만 메디아는 그런 것에는 전혀 무감각한지 히페리온에게 대뜸 반말로 대답했다. "지금 나더러 보석 찾으러 가달라는 거야?" 그러자 히페리온은 쓰게 입술을 일그러 뜨리는 웃음을 지었을 뿐이지만 다른 사 람들은 놀란 숨을 황급히 들이마셔야만 했다. 특히, 카드모의 놀라움은 이 자리 에 있는 그 누구보다 커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을 정도였다. 하지만 히페리온은 그를 손으로 제지 시켜며 메디아와 같은 말투로 대답했다. "당신이 이 일을 맡아 준다면 나로선 더 이상 바랄게 없어." 그러나 메디아는 히페리온의 시선을 외면해 버렸다. "싫어." "왜 싫다는 거지?" "난 몰려다는 거 딱 질색이야." 메디아가 건방진 말투를 구사하며 히페리온과 대화를 나눌때마다 카드모와 제피 로스의 몸이 움찔거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잘 몰려왔다면서." 제피로스에게서 메디아와 동행했던 이야기를 비교적 아주 상세하게 전해들은 히 페리온은 거리낌없이 말했지만 메디아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싫어." 그녀의 막무가내 거절에 조금 마음이 상한 히페리온의 어조에 감정이 실려 나왔 다. "메디아, 내가 부탁하는데 그렇게 싫다고 딱 잘라 말하는 건 너무하지 않아?" "히페리온, 당신이 나한테 특별한 사람이라도 되는줄 아는 거야?" "적어도 난 당신에게 중요한 사람인줄 알았어." 그들은 마치 예전에 만났을때처럼 대화하고 있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무척이나 낯설고 기가 막힌 모습이었다. 특히, 위엄에 찬 모습으로만 비춰지던 국왕의 낯 선 모습에 카드모와 제피로스는 물론 다른 이들까지 멍하니 입을 벌릴정도였다. "어쩌다가 그런 착각을 했을까." 메디아는 코웃음을 쳤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굵은 주름이 잡혀 있는 히페 리온의 이마에 핏대가 올라가는 것이 보였지만 나이 든 히페리온의 얼굴을 마주 보며 이야기하는 것은 메디아에게도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우린 맹세로 묶인 사람들이야. 이 일은 꼭 당신이 도와줘야 돼. 아니, 당신이 해야되는 일이지." 이제 히페리온은 성급한 젊은이처럼 보일지경이었다. "메디아, 넌 히페리온 폐하를 도와줘야 할 의무가 있지 않냐?" 이때 조용히 있던 케이론이 서둘러 끼어들었다. 점점 둘이 하는 짓이 고집스런 처녀와 성질급한 젊은이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럴때는 한쪽 편을 들어주는 것이 상책이었다. 더구나 이번에는 메디아를 꼭 설득해야만 했다. "의무라니, 또 무슨 엉뚱한 소리예요?" "넌 신성한 맹세를 하지 않았느냐? 그러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지. 그렇치 않 냐?" 케이론의 은근한 목소리에 메디아가 보라색 눈을 마주 들이대며 그에게 주장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 내기에서는 분명히 내가 이겼었는데 왜 내가 히페리온을 도와줘야 한다는 겁니까, 케이론?" 그러나 케이론은 메디아의 어투를 그대로 흉내내 되받아 쳤다. "너 설마 모른다는 거냐? 자고로 신하를 가진 주군은 신하의 어려움을 모른척 하 면 안되는 법이다. 그런 것도 모른다면, 넌 그 내기에서 이겼다고 큰 소리칠 자 격도 없지 않겠느냐? 그리고 내 기억이 맞다면, 그 내기에서는 분명히 서로 충성 을 맹세했었는데 왜 너는 충성의 댓가를 모른척 하는 거냐, 메디아?" 역시, 그런 하찮은 내기를 해서 이겨봤자 특별히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 했던 것이 들어맞다고 메디아는 생각했다. 그나마 왕이랍시고 앞에서 깝죽대지 않는 것을 다행이라고 안심했던 메디아였는데 이런 덤태기를 쓸 줄은 몰랐던 것 이다. 메디아는 남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케이론은 메디아를 더 몰아붙여야겠다고 결심한 사람처럼 떠들었다. "솔직히, 너의 물건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 아니냐, 메디아? 당연히 네가 챔임을 지고 해결해야지." 메디아는 울컥 반발하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사실, 케이론의 말이 아주 틀 린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문제의 발단이 되고 있는 '카오스의 눈' 은 최초의 마녀가 소유했던 것이다. 메디아가 어머니로부터 전해들은 말로는 그 것이 최초의 마녀를 있게 했던 여인의 뱃속에서 함께 나왔다고 했다. 최초의 마 녀와 '카오스의 눈'은 여인의 뱃속에서 함께 태어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 이 어떻게 여인의 뱃속에 있었는지는 여인 자신도 몰랐지만 말이다. 어쨌든 '카 오스의 눈'은 그렇게 최초의 마녀의 소유가 되었고 그녀가 죽고 나서는 일곱 명 의 딸들 중에서 첫째 딸에게 전해졌다. 그 이후로도 첫번째 태어나는 마녀에게 대대로 전해졌는데 가장 최근 소유하고 있던 마녀가 바로 메디아의 어머니 블러 디나였다. 정상적이라면 '카오스의 눈'은 블러디나의 유일한 딸인 바로 메디아의 소유가 되어있어야 마땅한 것이었다. "알았어요. 그 자비의 보석을 찾으러 함께 가주겠어요. 하지만 성스런 의무를 수 행하는 자의 시험을 통과할 생각은 없어요. 결계를 찾으면 알려주세요, 케이론. 그러면 곧장 그곳으로 떠나겠습니다." "안됐지만 시험이 곧 결계를 여는 열쇠란다, 메디아. 넌 시험을 찾아 가야돼." "뭐라고요?" "너도 알고 있겠지만 결계가 존재하는 곳에 간다고 해서 결계를 아무나 열 수 있 는 것은 아니다. 결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 비밀의 신전이 존재하는 결계를 여는 열쇠는 바로 그 시험과 열견된다는 의미란다. 그러니 너 도 마법의 성으로 가거라." 메디아는 인상을 찡그렸지만 더 이상의 불평은 하지 않았다. 케이론이 반드시 필 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면 그런 것일테니까 더 이상의 말은 해봤자 입만 아플 일이었다. '뭐가 이렇게 복잡한 거지.' 그러나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다른 사람들은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국왕과 메디아 그리고 케이론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기에 호기심은 더욱 컸다. - 계 속 - 너무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 p.s : 그리고 판타리아동(go vampa)에 있는 케이론. 내 사진 당장 지워줘~! -_-;;;;; 번 호 : 75 / 83 등록일 : 2000년 03월 29일 04:12 등록자 : DEADSEA 조 회 : 887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75.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순수하게 까맣던 그 밤, 어둠 속에 함몰하는 별빛을 보았을 때 죽어간 영혼의 붉은 혈액은 슬픈 그대 눈물이 되었고 숨겨진 진실은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았다. 제 75 장 어린 공주. 알렉토는 왕의 집무실을 빠져 나와 그의 근무처로 서둘러 돌아갔다. 새로운 임 무 때문에 지금하고 있는 일에 대한 보고서를 급히 작성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알렉토가 하루종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곳에는 거대한 성벽이 일부 해체되 어 있어서 집채만한 돌덩이들이 사방에 깔려 있었고 수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 리며 움직이는 소리와 돌을 두드리는 소리로 여간 소란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뿌옇게 일어나는 돌먼지 사이로 알렉토가 망토를 휘날리며 작업장을 한눈에 내 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로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마침, 커다란 조각상 꼭대기 에서 밧줄에 매달려 있던 아네모스가 알렉토를 발견하고 줄을 내리기 시작했다. "알렉토!" 아네모스는 목청껏 알렉토를 향해 소리를 질렀지만 워낙에 주위가 시끄러워서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네모스는 줄에 매달린 판자에서 내려오 자마자 알렉토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알렉토, 잠깐 이야기 좀 해요." "어?! 아네모스." "혹시 메디아를 만나고 오는 길인가요?" 뿌연 먼지가 가득한 작업장 한가운데에서 아네모스는 머리의 돌가루를 털어내며 물었다. 알렉토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는 먼지 가득한 주위를 새삼스럽게 둘 러 보았다. 그의 눈길을 따라가던 아네모스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말했다. "수상한 사람들이 많죠?" 알렉토는 아네모스의 어조에 시선을 그에게 다시 돌렸다. "자네도 알아챘군." "당연한 것 아닙니까? 당신이 제피로스 경과 이곳에서 살다시피 하는데..... 이 런 작업장에 유능한 기사가 둘이나 와있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죠." 이번에도 알렉토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육중한 바윗돌을 옮기고 있는 몇 명 의 사내들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사내들은 얼핏 평범해 보였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상한 점이 한두군데가 아니 었다. 일단 그들은 신체 조건이 너무 좋아 보였다. 힘을 쓰는 일꾼이 당연히 신 체 조건이 좋아야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건강한 것과 신체조건이 좋은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일단 남자가 신체조건이 좋고 근육이 잘 발달하게 될 경우 그 들은 평범한 일꾼이 되기 보다는 삼류라도 검사가 되기를 원하게 되고 실제로 그렇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이런 작업장에서 돌이나 나르며 일을 하 는 일꾼들은 근육이 발달하고 건강하더라도 결코 신체조건이 뛰어나다거나 균형 잘 잡힌 몸을 유지하기가 힘든 법이었다. 그리고 알렉토가 유심히 살피고 있는 사내들은 얼굴 표정도 평범하지 않았는데 애써 땀흘리며 태연한척 하고 있었지 만 그들의 눈빛은 주위의 다른 일꾼들이 일을 하며 일에서 느끼는 성취감과 뿌 듯함을 드러내는 것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었다. 최근 며칠 간 알렉토가 이곳 작업장에서 그런 묘한 눈빛의 사내들을 발견한 것 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워낙에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는 곳이어서 지금은 조심스레 관찰만 하는 입장이었다. 아마도 며칠 내로 이곳을 떠나게 되 겠지만 지금까지 발견한 수상한 자들만 세어보아도 수십명이 넘는 것 같았다. 알렉토는 무거운 표정으로 그들을 살펴보다가 다시 아네모스에게 주의를 기울였 다. "일은 잘돼가?" 그는 아네모스가 줄을 타고 내려온 거대한 규모의 조각상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여신상 다루기는 무척 까다롭지만 나름대로 즐거운 일입니다. 힘들지만 완성되 고 나면 그만큼의 기쁨을 맛보게 해주니까요. 차가운 돌을 섬세하게 다듬어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도록 만드는게 제 일인걸요." 왕성의 북동쪽 탑 전체를 보수하고 새로이 단장하는 일은 벌써 몇 달에 걸쳐 이 루어지고 있었지만 아직도 끝날 기미를 보이고 있지 않았다. 어쩌면 몇년이 걸 릴지도 모르는 대규모 보수 공사였기 때문에 지금도 기초를 다시 세우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그리고 탑 안쪽에 안치되어 있는 열두개의 거대한 신상을 보수하고 그 주위의 조각상들을 새롭게 만드는 작업에 동원된 조각가만도 수 십명이 동원되고 있었 지만 그 중에서도 아네모스는 꽤 유능한 조각가여서 여신상의 머리쪽을 조각하 고 있었다. "그렇군. 난 조각에 대해 별로 아는게 없어서....." 갑자기 바람이 불어서 돌먼지가 휙 지나가자 어색하게 말을 잇던 알렉토는 눈을 한껏 찌푸리며 망토로 바람을 피했다. "후욱... 이런! 바람이 너무 심하군." "봄이라 바람이 더 많이 부는거죠." 아네모스도 손으로 눈을 가려 먼지가 들어가지 않게 하며 대꾸했다. 포장을 모 두 벗겨내서 붉은 흙바닥이 드러난 작업장의 사방으로 먼지가 휘돌며 공중을 떠 돌았다. 한동안 시끄럽게 울리는 주위의 소음에 젖어 있던 알렉토가 내내 마음에 걸렸던 문제를 꺼내어 물었다. "저... 에코는 잘 지내나?" 아네모스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 그가 알렉토를 부른 이유도 에코 때문이었 다. 아네모스와 에코는 오람에 도착한 다음날로 그들이 오랫동안 머무를만한 여 관을 구해서 장기 투숙을 하고 있었다. 여관은 왕궁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어 서 주위 환경이 매우 좋은 편이었지만 에코는 숙소에서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으 며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밤에는 악몽에 시달리다가 땀에 흠뻑 젖어 깨 어나기 일쑤였고 한번은 한밤중에 일어나 자신의 팔을 칼로 그으며 비명을 질러 대기도 했었다. 에코는 완전히 정신이 나간 여자처럼 굴었다. 예전 같으면 아네 모스의 다독거림에 어느정도 진정의 기미를 보이던 에코였지만 요즘은 그것도 한계에 부딪쳐 있었다. "사실은 그것때문에 물어볼게 있습니다, 알렉토." "나한테?" "예. 대신관 케이론님을 만나게 해주실 수 없을까요? 그분이 매우 신비로운 분 이라 들었습니다. 어디서 들었는지 에코가 그분을 만나게 해달라고 막무가내로 매달리는데 저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군요." "나도 그분을 잘 모르는데... 그건 메디아에게 부탁해 보는 게 좋을것 같군." "하지만 저는 메디아를 만날 기회가 없어서요. 말을 전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알렉토는 오늘 만났던 메디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는 기분이 별로 좋아보이 지 않았었다. 페렌토의 타미에서 여기 파라의 오람까지 동행하는 동안 그녀의 기분이 좋아 보였던 적이 별로 없었지만 어쨌든 요즘은 더 안좋은 것 같았다. 그러나 잠깐 생각에 잠겼던 알렉토는 아네모스에게 희망적인 대답을 해주었다. "메디아에게 전해주는 일은 어렵지 않을거야. 아마도 그 대신관이라는 케이론님 은 에코를 만나주실 것 같아." 알렉토는 마시에게 유난히 다정하게 굴던 나이든 신관의 모습을 기억하며 긍정 적인 태도로 말했다. "그런데 그분은 뭐하러 만나겠다는 거지?" "에코는 다시 정상인이 되고 싶어합니다, 알렉토." "그게 대신관하고 무슨 상관이야?" "에코는 그분이 무언가 방법을 일러주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알렉토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에코의 심정을 모르지 않았기에 실날같은 가 능성에라도 매달리고 싶어하는 그녀의 바램을 이해했다. "오늘 안에 틈이 나면 메디아에게 말을 전해주지. 그럼 난 이만 가봐야겠어, 아 네모스. 저녁에 다시 보자구." 알렉토는 멀리서 자신을 소리쳐 부르며 손짓하고 있는 제피로스의 모습에 아네 모스를 뒤로 하고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길에 가라앉았던 먼지가 뿌옇 게 일어났다가 사라져 갔다. 4월의 막바지에 들어선 왕궁의 정원은 부드러운 햇살에 휩싸여 봄의 온기로 가 득했다. 화려한 정원의 한귀퉁이에 위치한 흰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분수에서는 끊임없이 맑고 깨끗한 지하수가 시원하게 쏟아졌고 진한 향기를 마음껏 내뿜고 있는 라일락의 보라빛 향기도 봄날의 화창함을 한층 더해주고 있었다. 정원 곳곳에 깔려 있는 넓적하고 네모난 돌바닥에는 조각가의 섬세한 손놀림이 짐작되는 작은 음각 무늬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한낮의 햇볕에 잘 달구어진 촘촘 한 돌바닥은 매우 따뜻했다. 그래서인지 정원의 한구석에서는 조각상을 받침대 삼아 바닥에 엉거주춤 누운 자세로 낮잠을 즐기는 두 사람이 있었다. 그들의 주 위에서는 작은 카나리아가 꽃과 나무 사이를 날아다니며 기분좋은 노랫소리를 재잘거렸다. 그것은 편안한 오후를 그린 한폭의 그림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풍경이었다. 가끔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얼핏 그들의 모습에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는 미소를 머금을 정도였다. 메디아는 따스한 햇살을 이불삼아 마시를 안고 자면서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오전부터 잠도 못자게 방해하던 해방꾼들이 내내 따라다녀서 귀찮았더 메디아 와 마시가 그들을 겨우 따돌리고 피해서 찾아온 곳은 바로 왕비가 아끼는 정원 의 한구석이었다. 마침 햇살도 좋고 돌바닥도 따뜻해서 메디아와 마시가 뒹글고 자기엔 딱 좋아 보였던 것이다. 일단 한번 누우니 귓가를 스치는 물소리와 새소리도 좋았고 향 긋한 꽃향기도 그녀의 모자른 잠을 보충해 주는 장소로는 그만이었다. 막 오후로 넘어가는 눈부신 햇살 속에서 늘어지는 하품을 하며 깨어난 메디아는 두손을 번쩍 들어 기지개를 폈다. 그런데 실눈을 살짝 떠보니 작은 그림자 하나 가 눈앞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순간 메디아는 눈을 비비고 깜빡거리며 자신이 쳐다 보고 있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 "어?" 작고 예쁜 여자아이였다. 햇빛에 불타는 듯한 붉은 머리를 늘어뜨린 소녀는 순 진하게 보이는 갈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바닥에 반쯤 누워있는 메디아와 마시를 바라보는 소녀의 눈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러나 정작 메디아가 당황한 것은 소녀의 눈빛 때문이 아니라 그 아이의 외모 때문이였다. 어딘가 눈에 익은 것이 매우 낯익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 각해 봐도 이렇게 어린 소녀를 최근에 본 일은 없었다. 메디아는 한동안 값비싼 비단 치마를 입은 소녀를 유심히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어 버렸다. 그리 고는 소녀의 시선을 무시한채 무릎에 누워서 침을 흘리고 있는 마시를 흔들기 시작했다. 메디아가 잠에서 완전히 깨어난 듯 하자 소녀가 그녀에게 말을 걸어왔다. "넌 누구야? 왜 여기서 잠을 자는 거지?" 이제 열살이나 되었을까 의심되는 소녀는 거리낌없이 반말을 하고 있었다. 메디 아는 마시를 흔들던 손길을 일순 멈추며 눈을 살짝 치켜서 버릇없는 소녀를 노 려 보았다. "너 어디서 그런 말버릇을 배웠냐?" 메디아가 어이없다는 듯 톡 쏘아 되묻자 소녀는 오히려 한걸음 물러서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나..난... 난 공주야. 넌 그렇게 말하면 안되는 거야." 소녀는 제법 오만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지만 메디아의 태도에 약간은 겁을 먹 은 것 같았다. '공주라서 그런가? 아닌데...' 메디아는 소녀의 외모가 낯설지 않은 이유가 히페리온이나 헬레나를 닮아서 그 런가 생각해 보았지만 전혀 그렇치가 않았다. 그러나 메디아는 생각하던 것을 멈추고 마시를 흔드는 손길에 더 힘을 가했다. 거칠은 메디아의 손길에 마시가 움찔거리며 깨어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마시는 아직도 졸린지 몸을 움츠리며 메디아에게 더 달라붙었다. "난 왕보다 더 높은 사람이니까 네가 나한테 절을 해야지. 버릇없는 꼬마 공주 야." 메디아의 무시하는 어조에 어린 공주는 분개한듯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지만 자 리를 떠나지는 않았다. 그녀는 작은 주먹을 움켜쥐고 좌우로 왔다갔다하며 어쩔 줄을 몰라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메디아는 어린 공주가 열받아서 오락가락 하던말던 신경도 쓰지 않고 벌 떡 일어나 버렸다. 그 바람에 그녀에게 매달려 있던 마시가 바닥으로 쿵 떨어졌 다. "아야얏! 뭐얏?!" 잠에서 순식간에 깨어난 마시가 어벙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멍한 표정 을 지었다. "일어나, 마시. 밥 먹으러 가자. 배고프다." 커다랗고 붉은 눈을 몇 번 꿈뻑거리던 마시가 정신을 차렸는지 부딪힌 머리를 긁 적이며 투덜거렸다. "아파." "빨리 일어나. 밥 먹지 않을거야?" 메디아의 돌발적인 행동에 깜짝 놀라 뒤로 더 물러섰던 어린 공주는 일어서 버 린 메디아와 주저 앉아있는 마시를 번갈아 쳐다보며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 었다. 하지만 곧 메디아를 바라보면서 그녀는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나..난 피네공주라고 해. 너..너는 나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되는 거야. 어서 잘못 했다고 말해." 마시는 멀뚱이 조그만 여자아이를 쳐다보았고 메디아는 피네라는 어린 공주를 무시하며 마시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화들짝 놀라는 공주를 휙 지나쳐 식 당으로 향했다. 이미 점심시간은 한참 지났고 저녁을 먹기엔 이른 시간이었지만 그녀가 배고프 다고 하면 궁중 요리사는 기꺼이 한상 푸짐하게 차려줄게 분명했다. 메디아는 식당으로 휘적휘적 걸어들어가 지나가는 시녀 한사람을 붙잡아 배고프다고 말 했다. 그리고 얼마후 메디아와 마시는 푸짐한 식탁 앞에 앉을 수 있었다. 그들을 조 심스럽게 뒤따라온 어린 피네가 신기한 물건 쳐다보듯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지 만 시녀들만이 공손히 피네에게 인사를 했을뿐 메디아와 마시 중 누구 한사람 그녀에게 신경쓰지 않았다. 단지 눈앞에 있는 음식들을 정신없이 먹어치울 뿐 이었다. 메디아가 삼인분 정도의 음식을 먹어치울 무렵이었다. 한동안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듯 먹는 모습을 보고 있기만 하던 공주가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그렇게 먹다가는 돼지처럼 뚱뚱해질 걸." 그 순간 메디아는 손으로 가져가던 오동통한 토끼다리를 툭 놓쳐버렸다. 이제야 생각났다. 메디아는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멍하니 피네라는 어린 공주를 쳐다보았다. 메디아는 그 어린 공주가 낯설지 않았던 이유를 그제서야 알아 차 렸다. - 계 속 - 속도를 좀 올려 볼까요? 호호..^^ 잠시간 여행도 다녀오고 휴식도 취하니 행복하네요. 여러분도 행복한 날들 되시길... *^__^* - 뱀파 - 번 호 : 76 / 83 등록일 : 2000년 03월 31일 06:09 등록자 : DEADSEA 조 회 : 797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76.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순수하게 까맣던 그 밤, 어둠 속에 함몰하는 별빛을 보았을 때 죽어간 영혼의 붉은 혈액은 슬픈 그대 눈물이 되었고 숨겨진 진실은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았다. 제 76 장 단지 우연일까? 닮았다. 너무나 닮아서 쉽게 기억하지 못했던게 이상할 지경이었다. 붉은 머리카락 갈색의 유순한 눈동자 귀염성 있는 저 얼굴도... 어쩌면 저렇게도 닮았을까? 메디아는 식탁 너머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어린 공주를 무엇에 홀린듯 이 쳐다보며 멍하니 생각했다. 열살쯤 되어 보이는 피네라는 어린 공주는 갑작스런 메디아의 반응에 잔뜩 긴 장한 얼굴이 되었다. "난 저기... 뚱뚱한 돼지 같다고 하지는 않았어.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한 것 뿐이야." 그녀는 갑자기 자신을 뚫어질듯 응시하는 메디아 때문에 당황한 것 같았다. 통 통한 볼이 살짝 홍조로 물드는 모습이 너무나 귀엽게 보였다. "너 이름이 뭐라고 했었지?" 갑자기 진지해진 메디아의 분위기 때문이였는지 피네는 그녀의 말투 따위는 전 혀 의식하지 못 한채 얼떨결에 대답했다. "피네라고 해." "공주라고?" "응." "엄마가 누구니?" "우리 어머님 이름은 아라크네라고 해. 폐하의 네번째 부인이지만 큰어머님들 보다 훨씬 예뻐." 피네의 목소리에는 은근히 자랑스러움이 배여 있었다. 메디아의 눈가가 살짝 찡 그려졌다. 피네의 대답에 메디아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왕의 네번째 부인이라구?' 피네의 순진한 갈색 눈동자를 보면서 메디아가 떠올리는 얼굴은 그녀의 옛 친 구의 모습이였다. 어린 공주는 친구의 열살때 모습과 몹시 닮아 있어서 메디아 가 순간적으로 친구를 마주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그런데 저 어린 소녀는 분명히 자신이 공주이며 왕의 네번째 부인의 딸이라고 하니 정말로 이상했다. 더구나 그 수상한 아라크네의 딸이라니. '홀링? 이건 도대체 무슨 뜻이지? 그냥 우연일까?' 메디아는 자신도 모르게 옛친구의 이름을 되뇌이며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질문 을 던졌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만큼 홀링의 어릴적 모습 과 피네라는 공주의 얼굴은 판에 박은 듯 했다. 피네의 등장은 메디아에게 어린 홀링이 되돌아 온 것과 같은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였다. 홀링과 아라크네 사이에는 그녀가 모르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우연에 불과한가? 메디아는 한꺼번에 많은 의문들이 몰려 들어서 잠시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 녀는 가볍게 머리를 한번 휘젓고는 다시 현실로 되돌아왔다. 그녀의 앞에는 여 전히 어린 홀링과 겹쳐지는 얼굴을 가진 여자아이가 불안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메디아, 그거 안 먹을거야? 내가 먹어도 돼?" 마시의 또렷한 음성이 피네에게 집중된 메디아의 주의를 흐트렸다. 마시는 메디아가 먹으려다가 접시위에 떨어 뜨린 토끼다리에 군침을 삼키는 중 이었다. 그는 이미 자신의 몫으로 돌아간 요리를 다 먹어 버린 모양이었다. "너 먹어." 어느정도 배도 채운데다가 이미 입맛이 싹 달아난 메디아는 먹을 것을 선선히 양보했다. 평소에는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어서인지 마시는 잽싸게 토끼다리 를 낚아채어 입속으로 구겨넣었다. "네 엄마가 아라크네라고?" 그러나 이번에는 피네도 정신을 차렸는지 다시 오만한 표정이 되어서 메디아의 물음에 토를 달았다. "함부로 말하지마. 난 공주란 말이야!" 조금 전까지와는 다르게 더듬거리지도 않으면서 제법 쌀쌀맞게 대꾸하는 피네 였다. 그러나 당차게 대답하는 그 모습에 메디아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오만한 어린 공주를 놀려주고 싶은 심술끼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얘가 참.... 난 네 아버지보다 높은 사람이라니까." 피네의 양볼이 씰룩거리며 툭 불거져 나왔다. "말도 안돼." "야, 너 몇살이냐?" 이번에는 '야'라는 새로운 호칭에 화가난 피네가 급기야 눈물까지 글썽거리기 시작했다. 굉장히 분한 얼굴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훔치는 폼이 꽤 볼만했다. 홀링이 울면 저런 표정이 되었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저 어린 공주는 무척이나 귀여워 보였다. 얼마 전에 만났던 마귀할멈 같은 몰골의 홀링과는 전혀 연결지어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분명히 홀링도 수 십년 전에는 저토록 귀엽고 발랄한 모습이였다. 그리 고 그 모습은 지금의 저 소녀와 쌍둥이처럼 닮은 모습이었다. 메디아는 가만히 어린 공주를 바라보다가 옆에 놓인 수건으로 음식에서 묻어난 기름기를 손에서 닦아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시, 다 먹었으면 그만 가자." "응? 술은?" 마시가 말을 꺼내자 마침 시종이 찬 맥주를 들고 식당으로 들어섰다. "저녁 때 달라그래. 대낮부터 술 마실 궁리하지 말고 빨리 따라와." "대낮은 무슨 대낮이야? 저기 해 지는 거 안보여?" 투덜대는 마시의 말대로 서서히 해가 내려 앉으며 은은한 노을빛이 창가로 스 며들었다. 그들이 있는 식당이 왕궁의 서쪽에 있어서인지 붉으스레한 석양이 더욱 선명해 보였다. 그러나 메디아는 힐끗 시선을 주었을뿐 이내 걸음을 옮겼 다. "군소리 그만하고 따라와. 오랜만에 네가 좋아하는 간식도 구경할 수 있을테니 까." "간식? 구경이라구?" 마시가 눈빛을 반짝이며 되묻는 동안 피네는 불끈 주먹을 쥐며 메디아를 향해 소리쳤다. "이봐, 너. 당장 나한테 사과해. 안그러면 병사들을 불러서 혼내줄거야." 그러나 메디아는 유유히 등을 돌려 식당문을 빠져 나갔다. 마시도 거품이 올라 오는 찬 맥주를 잠시 쳐다보다가 이내 메디아를 따라나섰다. 그는 술도 좋아했 지만 간식에 대한 호기심이 더 강했다. 식당을 빠져 나온 메디아의 발길은 케이론의 연구실로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케이론이 새로운 의문에 대한 해답을 알고 있기를 기대했다. "아.... 저기 메디아도 오는군." 복도 중간에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던 케이론이 막 복도끝을 돌아나오는 메디 아와 마시를 발견했다. 그는 메디아를 찾아오던 알렉토와 아네모스를 복도에서 마주치는 바람에 잠시 멈춰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아네모스가 여기는 왠일이야?" 그들곁으로 다가온 메디아가 반가운 표정을 짓고 있는 아네모스에게 말을 건넸 다. "메디아, 잘 있었어요?" "뭐.... 그럭저럭. 헤어진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그렇군요. 며칠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무척 오래된 것 같아서요." 아네모스는 그답지 않게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일행과 헤어져 그와 단 둘이 남게된 에코는 점점 상태가 나빠져서 이제는 그 성질을 다 받아줄 수 없을 정도였다. 아네모스는 그런 에코로 인해서 최근 매우 힘든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며칠간이라는 짧은 시간이 너무나도 길게 느껴질만큼의 나날이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아네모스의 얼굴빛은 어두워 보였다. "아직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양이군." 메디아는 아네모스의 헬쓱해진 얼굴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굳이 듣지 않 아도 아네모스의 상황이 어떨지 알만했다. 메디아는 팔이 망가지고 나서 에코가 보여준 행동들을 생각하자 새삼 짜증스러 움을 느끼기까지 했다. 그녀의 처지가 그렇게 된 것은 충분히 동정이 가는 일 이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불쌍하다고 봐줄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고통 은 자신이 감당해야만 하는 것이지 그것을 다른 이가 대신 짊어질 수는 없는 일이다. 에코처럼 타인을 원망하거나 현실을 부정한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지거 나 나아지는 상황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어디로 가던 참이냐? 나한테 오던 길이냐?" 케이론은 메디아에게 묻고 있었지만 시종 마시를 쳐다보며 말했다. "예. 뭐 좀 물어보고 싶은게 있어서요. 바쁘지 않으면 저하고 얘기 좀 할 수 있겠죠, 케이론?" 메디아는 에코에 대한 생각을 접으며 자신의 용건을 상기했다. 그녀에게 중요 한 건 에코가 아니었다. "네 표정을 보니 바쁘다고 해도 소용이 없겠구나. 복도에서 말할게 아니라면 따라와라. 자네들도 나한테 볼일이 있는 것 같은데 할말 있으면 같이 따라오게 나." 케이론은 알렉토과 아네모스까지 이끌고 자신의 연구실로 향했다. - 계 속 - 뱀파도 날마다 연재하는 성실 작가가 되고 싶은데 그게 쉬운 일은 아니군요. 이래저래 일도 많이 생기고 글도 쉽게 나오지 않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글을 올리는 분들이 새삼 존경스러워 지네요. 그러나 일단 새롭게 마음을 다잡아 먹었으니 저도 열심히 노력해 보겠습니다. 오늘은 글이 짧지만... 점점 나아지기를 기대하면서... - 뱀파이어 - 번 호 : 77 / 83 등록일 : 2000년 03월 31일 23:07 등록자 : DEADSEA 조 회 : 739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77.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순수하게 까맣던 그 밤, 어둠 속에 함몰하는 별빛을 보았을 때 죽어간 영혼의 붉은 혈액은 슬픈 그대 눈물이 되었고 숨겨진 진실은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았다. 제 77 장 마시의 간식. 연구실에 들어서자 케이론의 제자이자 고대유적학자이며 천체연구가로 불리는 열네살의 크라메드가 두꺼운 고서를 뒤적거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카란이 넓은 연구실 사방을 가득 채우고 있 는 책들을 이것저것 꺼내어 살펴보는 중이었다. 노을이 가라앉으며 어렴풋이 어둠이 밀려오기 시작하자 연구실 이곳저곳에 불 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케이론과 메디아 등이 실내로 들어서자 크라메드가 콧 노래를 멈추며 벌떡 일어났고 책을 꺼내들던 카란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돌 아섰다. "메디아." 미모의 카란이 불빛아래 화사한 웃음을 지어보이자 케이론이 수염을 만지작거 리며 한마디 내뱉었다. "자네는 메디아한테만 웃음을 헤프게 흘리는군." 뒤쪽에서 따라 들어오던 알렉토와 아네모스는 케이론의 말을 농담정도로 받아 들였지만 카란은 곧 웃음을 거두어 들였다. 카란이 평소 메디아와 거의 붙어 있다시피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항상 웃고 있는 얼굴로 보였지만 자세히 관찰 해 보면 그의 웃음은 오직 메디아에게만 향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이외에는 대개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편이었는데 케이론이 그것을 정 확히 지적했던 것이다. "자네같은 인간은 속이 얼음처럼 차갑지." 케이론의 이어지는 말에 알렉토는 의아한 눈빛을 지었다. 항상 메디아와 함께 있는 따뜻한 모습의 카란만을 보아온 알렉토와 아네모스로서는 케이론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치 않은가, 자네? 아름답고 젊은 신관이 냉소적인 속을 감추고 겉으로 평 화로운 미소를 짓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 하지만 자넨 재미있는 구석이 있군. 인간을 경멸하면서도 스스로 인간성을 잃을까 겁내고 있다니 아 주 흥미로와. 더구나 자네의 그 맹목적인 태도는 너무 단순한 이유 같아 보이 는군. 위험하다고 생각지 않나?" 케이론은 메디아를 향한 카란의 맹목적인 감정을 뚫어보며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인간 의 마음을 읽기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저 스스로 인간의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을 선택한거니까요. 저는 인간을 혐오하지만 동시 에 제가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벗어날까 두렵습니다. 당신께서는 저에대해 말씀 하시지만 진실로 인간을 이해하지는 못 하시겠지요? 인간을 아는자만이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겁니다. 저의 맹목적인 태도라 말씀 하셨습니까? 그것이 제가 발견한 유일한 제 삶의 빛이라고 한다면 이해하실 수 있겠는지요, 케이론님? " 아른거리는 불빛 그림자에 휩싸인 카란의 나직한 목소리의 울림이 케이론을 향 했다. 그러나 케이론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채 묵묵히 카란의 초록색 눈동자 를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겉모습에 감추워진 그 속의 얼어버린 영혼이 위선에 찬 인간을 증오하며 스스로의 본질을 의심하는 눈동자였다. 상처받은 눈동자. 위로받고 싶어하는 눈동자. 그리고 어렴풋한 희망을 붙들으려는 눈동자였다. 실내에는 침묵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들의 의미를 알 수 없는 대화로인해 분위 기는 점점 무겁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였다. "어어? 이봐, 너 거기서 뭐하는 거야?!" 갑작스럽게 크라메드의 다급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그 바람에 실내의 무겁던 공기는 순식간에 달라졌다. 크라메드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입을 멍하니 벌리고 있는 동안 케이론도 마 시를 쳐다보고는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저....저 메디아?" 어떻게 된거냐? 저 애가 왜 저러는 거지? 라는 무언의 질문이 내포된 어조였다. 자신을 향해 설명을 요구하는 케이론의 음성을 들으며 메디아는 히죽 웃음을 지어보였다. 모두의 시선을 한몸에 받고 있는 마시는 사방 벽을 빽빽히 둘어싼 책장의 틈에 서 책을 꺼내들고 북북 찢어 입속으로 넣어 얌얌 맛있게 씹어대고 있는 중이었 다. 침을 질질 흘려가며 행복하게 웃는 폼이 세상에서 제일 달콤한 음식을 먹 는 어린 아이 같았다. 마시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코를 벌름거리며 책들의 향기를 들이마셨 다. 사방을 둘러싼 책장에 가득 꽂혀있는 마법의 책에서 스며나오는 달콤한 향 기가 콧속으로 스며들자 입속에 저절로 침이 고였다. 그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 더니 다른 이들이 대화에 빠져있는 사이 오랫동안 맛볼 수 없었던 맛있는 간식 을 행복하게 먹어대기 시작했던 것이다. "흐으..맛있쪄. 우물우물.." 벌써 그의 발밑에는 두세권의 오래된 책들이 껍질만 너덜너덜 해진채 뒹굴었다. "야-! 너 그게 얼마나 귀한건 줄 알아? 뭐하는 짓이야." 한동안 너무나 놀라 입만 뻐끔거리고 있던 크라메드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마 시에게서 책을 뺏어들려고 했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쉽게 될리 만무했다. 마 시는 옆에서 파리처럼 왔다갔다하는 크라메드를 손으로 휙 떨쳐내 버리고는 다 시 책을 씹어먹는 일에 몰두했다. "설명해 봐라, 메디아. 저 애가 왜 저런 걸 먹는 거냐?" 케이론이 화를 내며 메디아를 다그쳤다.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마법서 먹는 걸 지상최대의 행복으로 알고 있는 돌 연변이 녀석인걸...." 메디아는 종이를 뜯어 먹으면서 헤헤 거리고 있는 드레곤 새끼를 바라보며 한 심스럽게 대답했다. ".... 얘야, 그런건 그만 먹으렴. 배가 고픈거냐, 마시? 다른 걸 주랴?" 케이론이 걱정 가득한 음성으로 마시에게 말을 걸었지만 마시는 뉘집 개가 짖 는지 들은척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먹는데 열중하느라 케이론의 말을 정말 못 들었는지도 몰랐다. 마시는 잘 씹히지도 않는 질긴 종이를 오물오물 씹어대며 손가락으로는 쉼없이 종이를 찢어내어 입속으로 구겨넣고 있었다. 마시의 입술이 양쪽으로 쭉 벌어 지며 멍청한 웃음을 지었다. 지난날 메디아의 아끼는 마법서를 몰래 집어 먹을 때의 바로 그 표정이었다. 그는 향긋한 마법의 향기와 종이 특유의 구수한 맛 이 입안을 가득채워서 황홀할 지경이었다. 일반 책이나 음식에서는 절대로 맛 볼 수 없는 마법의 책만의 독특한 맛이었다. "그만 두세요, 케이론. 그애한테 그거 말고 다른 걸 먹일 수 있는 방법이 있었 다면 제가 옛날에 써먹었을겁니다." "그럼 옛날부터 저런 걸 먹었단 말이냐?" 케이론이 펄쩍 뛸듯이 물었다. "먹는 정도가 아니라 남아 나지를 않았다니까요. 뭐 이방에 있는 책들도 몇권 없어진다고 큰일 나지는 않겠지만 그대로 두면 몇 권정도로 끝나지는 않을껄요." 메디아의 말이 없었어도 케이론은 벌써 여러 권의 책이 마시의 입속으로 사라 지는 것을 쳐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 습관적으로 주머니 에서 담배를 꺼내 물며 손을 휘 내저었다. 그러자 사방의 벽을 가득 채우고 있 던 책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마시의 손에 들려 있는 것과 발밑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몇 권의 책의 잔해를 제외하고는 어디에도 책은 남아있지 않았다. 간식이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자 깜짝 놀란 마시가 눈을 깜빡거리며 고개를 이쪽저쪽으로 돌려보기 시작했다. 이제 넓은 실내에는 작은 탁자 하나와 의자 몇 개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한쪽 구석에 있는 벽난로에는 타다만 재가 조금 흩어져 있었고 사방은 밋밋한 벽뿐이었다. "크라메드." "예...에? 예, 스승님." 아직도 어벙벙한 얼굴로 있던 크라메드가 케이론 쪽으로 몸을 돌렸다. 윤기가 흐르는 하늘색 머리카락이 찰랑거리며 그의 하얀 빰에 부딪쳤다. 약간은 마르 고 키가 큰 그의 몸짓은 마시를 바라보느라 약간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보였 다. "가서 차를 준비해 오라고 일러라. 그리고 문밖에 있는 공주님들을 불러다 주 겠느냐?" "예? 공주님요?" "나가보면 알게다. 꾸물거리지 말고 그만 나가봐라." 케이론은 크라메드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몇 개 되지 않는 의자 중 하나에 앉으며 하얀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앉아라, 메디아. 할 얘기가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 계 속 - 졸려요. =.=;; 번 호 : 78 / 83 등록일 : 2000년 04월 01일 21:10 등록자 : DEADSEA 조 회 : 797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78.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순수하게 까맣던 그 밤, 어둠 속에 함몰하는 별빛을 보았을 때 죽어간 영혼의 붉은 혈액은 슬픈 그대 눈물이 되었고 숨겨진 진실은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았다. 제 78 장 인연의 실타래. 케이론의 연구실 밖에서 허리를 굽히고 문에 바짝 붙어서있던 로사리아 공주와 피네 공주는 안에서 크라메드가 나오자 화들짝 놀라며 딴청을 부렸다. 크라메드는 두 공주를 잠시 놀란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 다. "안으로 들어오시랍니다." "에?" 로사리아 공주와 피네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누구를?" "두 분 모두요." "아.. " 로사리아의 양볼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가출사건때문에 현재 근신중이었지 만 시녀들을 따돌리고 몰래 빠져나와 카란을 찾아서 여기까지 왔다가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 하고 밖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동생 피네 공주 가 나타나는 바람에 안그래도 망설이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는 동생과 크라메드를 번갈아 보고는 동생의 손을 잡았다. "들어가자." "응." 피네는 언니의 손에 이끌려 안으로 들어가면서 크라메드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 다. 피네는 병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사람들에게 매달리는 경향이 있었는데 메 디아와 마시에게 관심을 보였던 것도 마시의 외모 때문이였고 예쁜 미소년 크 라메드도 그녀의 관심을 받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들이 안으로 들어가자 케이론과 메디아를 제외하고 모두가 가볍게 목례를 하 며 예를 취했다. 물론, 한쪽 구석에서 책쪼가리를 씹고 있던 마시는 누가 들어 오는지 전혀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로사리아의 시선은 아름다운 카란에게 곧장 날아갔고 피네는 마시를 쳐다보며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에 뵙는구료, 두 공주님 모두." "안녕하세요, 대신관 케이론님." "안녕하세요, 케이론님." 어머니 아라크네를 닮아 붉은 머리카락의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두 공주는 치 맛자락을 살짝 들어 인사를 했다. "날 찾아온 거라면 안으로 들어오지 왜 밖에 서 계셨소?" 공주들은 대답을 하지 못 하고 서로 눈치만 살폈다. "일단 거기 좀 앉으시오." 케이론은 살짝 웃음을 삼키며 메디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메디아는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천장에서 비추는 은은한 노란 불빛 아래 사람들은 조용히 앉아 있었다. 침묵은 크라메드와 시녀들이 뜨거운 차를 내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너답지 않게 뭘 망설이는 거냐, 메디아." "저 아이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생각에 잠겨 있던 메디아는 불쑥 마시 곁에 쭈구리고 앉아서 그를 구경하고 있 는 피네를 가르키며 입을 열었다. "응?" 케이론이 의문스런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메디아는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녀는 왕의 막내 딸로 피네 공주란다. 그걸 묻고 싶은 거냐?" "왕의 친딸이 분명한가요?" 메디아의 평이하고 무감정한 어조가 딱딱하게 들렸다. 로사리아가 그 말을 듣 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엄하다. 감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원래부터 메디아의 안하무인격인 태도에 어느정도 익숙해져 있던 로사리아도 이번만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분노를 터뜨렸다. 마시와 피네가 갑작스런 로사 리아의 목소리에 이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러나 메디아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고요히 케이론의 대답을 기다렸다. 오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케이론의 투명한 눈빛이 그녀의 집요한 눈빛과 마주쳤다. "가서 병사들을 불러와라. 무얼하고 있는 게냐!" 로사리아는 밖에 대기하고 있는 시녀들을 향해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럴 거 없소, 로사리아 공주." 케이론이 공주를 제지하며 안으로 들어선 두 시녀를 물리쳤다. 시녀들은 공주 와 대신관 사이에 어찌해야 할지 갈팡거리다가 크라메드의 인도로 밖으로 나 갔다. "케이론님!" "앉으시오. 흥분할 것 없습니다. 자, 메디아. 네가 뭘 묻고 있는 건지 정확히 알고 싶구나." 공주를 진정시킨 케이론은 메디아에게 질문했다. "방금 한말 그대로입니다." "그녀는 왕의 친딸이 분명하다, 메디아. 왜 그런 걸 묻느냐?" 메디아는 피네 공주가 아라크네의 친딸인지도 확인하려 했었지만 로사리아 공 주와 한 핏줄이라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이 닮은 것을 보고는 그 질문은 하 지 않았다. 진작에 로사리아 공주의 모습을 홀링과 연결지어 생각하지 못 한 것은 그녀의 나이가 어렸을 때의 홀링과 차이가 날 뿐더러 분위기가 너무 달 랐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아라크네는 누구입니까? 그녀의 정체가 뭐죠?" 이번에도 어머니의 이름이 아무렇치도 않게 언급되자 로사리아의 두 손이 불끈 쥐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대화를 끝까지 듣기 위해 애써 눌러 참았다. 그제서야 케이론은 메디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시선을 외면했다. "네가 알고 있는 것 이외에는 나도 모른다." "거짓말을 하시려거든 다른 인간들에게나 하시죠." 메디아의 음성이 차가워졌다. 그가 분명히 알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케이론은 메디아를 가만히 주시하다가 시선을 돌려 크라메드를 불러 뭐라고 지 시했다. 그러자 크라메드는 고개를 끄덕였고 케이론은 자리에서 일어나 메디아 에게 손짓했다. 그녀가 케이론을 따라 일어나자 그들은 다른 이들이 눈깜짝할 사이에 방안에서 사라져 버렸다. 메디아가 케이론과 함께 사라져 나타난 곳은 어둡지만 실내가 잘 보이는 이상 한 공간이었다. 그녀는 이것이 마법으로 만들어진 일시적인 공간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마도 케이론은 그들의 대화를 다른 이들이 듣는 것을 원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케이론이 빈 공간으로 손을 내밀자 그곳에 의자가 나타났다. 그는 편안하게 앉 으며 다시 말을 꺼냈다. "메디아, 나는 예언자일뿐이지 모든 걸 알고 있는 전능한 자가 아니란다." "전능한 자가 아니라면서 당신 마음대로 판단해서 제게 사실을 숨기시는군요." 케이론은 굵은 담배를 손가락으로 돌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입에서 연기 가 흩어져 나왔다. "얘야, 난..."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전 어린애가 아닙니다. 무얼 숨기려고 그러는 거죠?" "난 숨기려는게 아니다. 그건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자연히 알게 될 일을 내게서 굳이 알아내려 하지 말아라, 메디아." 메디아는 조용히 케이론을 바라보았다. "저로선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그게 그렇게 숨겨야 할만큼 중요한 일입니까?" 그녀는 피네가 홀링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지 알려고 한 것 뿐이었는데 케이 론의 반응은 의외였다. 아라크네라는 왕의 아내가 홀링과 어떤 관계로 묶여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케이론이 메디아에게까지 숨겨야 할만큼의 의미가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길잡이로써 지팡이가 되어줄 뿐 그 몸이 되어 줄 수는 없다. 물론, 네게 말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단다. 하지만 너의 삶의 행로에 내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고 생각한다." "점점 알 수 없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간단한 의문하나 해결해 준다고 내 인생 이 달라지지는 않을텐데요?" "네 삶의 과정의 한 부분을 내가 망쳐 놓을 수는 없지 않겠느냐, 메디아. 그리 고 그건 네 몫이라기보다는 그들의 몫이란다." "그들이라고요?" 케이론은 공간 건너편에 보이는 피네와 로사리아 공주를 쳐다봄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제가 직접 알아보기를 원하시나 본데 그녀에게 직접 물어볼까요?" 아라크네를 직접 만나서 물어보겠다는 의미였다. "그러지 말아라, 메디아. 그녀도 대답할 수 없는 일이란다." 메디아의 눈썹이 올라가며 하얀 이마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그게 말이 돼요?" "장담하건데 그녀도 정말 모르고 있단다. 네가 가서 물어본다고 해서 알아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뭐... 어쨌든 좋아요. 당신의 말을 들어보니 일단 저 어린 공주의 외모가 단 지 우연은 아닌 모양이군요." 메디아는 케이론의 맞은편 의자 등받이에 깊숙히 몸을 기대며 기묘한 듯 그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참 이상하군요. 나는 그저 저 어린 공주가 홀링의 핏줄인지 알려 고 했을뿐인데 당신은 꽤 자세히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 같아 보이니까 말이죠. 예언자이자 본질을 꽤뚫어 본다는 당신의 능력이라도 지나칠만큼의 통찰력이군 요." 날카로운 보라빛 눈동자가 케이론을 꿰뚫을 듯이 응시했다. 그러나 케이론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담배를 비벼끄며 평이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말하지 않았었느냐. 운명이라고. 이것도 복잡하게 얽혀있는 수 많은 인 연의 실타래 중의 하나라고 해두자꾸나. 어차피 네가 가야할 길은 하나이겠지 만 그것을 따라가다보면 모든 의문은 저절로 풀릴 거란다." "대답이 궁색해지면 언제나 운명을 들먹이는군요, 케이론. 아무래도 이번일에 홀링이 연관되어 있는 모양이죠?" "교묘하게 또 질문을 시작하는구나, 메디아." "......" '젠장, 뭐가 이렇게 꼬여있는 거지? 로만과 모모스의 일로도 충분히 머리가 아플 지경인데 왜 여기서 홀링의 존재까지 끼어들어서 날 복잡하게 만들지?' 메디아는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그녀는 머릿속이 온통 알수 없는 진흙탕에 빠진 기분이었다. 붉은 나비의 흔적을 따라 여기까지 이른 것은 그녀의 의지였다. 그리고 로만의 아들 모모스를 어떤식으로든 알고 있을 아라크네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홀링의 핏줄로 보이는 피네라는 아이가 아라크네의 딸이 라면, 이것은 대체 어떤 식으로 해석해야 하는 일인걸까? 모모스와 메디아, 그리고 홀링. 모든 것이 과거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메디아는 자신도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려 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쩌면 나는 이미 예정되어 있는 길로 한발한발 내딪고 있는 것이 아닐까.' - 계 속 - ^^;; 번 호 : 79 / 83 등록일 : 2000년 04월 03일 09:08 등록자 : DEADSEA 조 회 : 872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79.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순수하게 까맣던 그 밤, 어둠 속에 함몰하는 별빛을 보았을 때 죽어간 영혼의 붉은 혈액은 슬픈 그대 눈물이 되었고 숨겨진 진실은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았다. 제 79 장 위험한 여자. "그렇게 할 일이 없어? 외교담당 신관이라면서 왜 맨날 우리만 따라다녀?" 왕성에서 빠져나와 오람시로 향하는 말위에서 마시는 카란을 향해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결계를 찾을 때까지는 저도 별로 할 일이 없는 걸요. 파샤께서 지시하신 문서 전달 임무도 무사히 마친데다가 왕께서도 비밀의 신전을 찾을 때까지는 오람에 서 편히 쉬면서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더구나 오늘은 오월의 첫날이어서 시 내에 가면 구경할 것이 많을텐데 이 기회를 놓칠 수야 없죠." 정면으로 시선을 고정한채 말을 몰아가던 카란의 대답은 마시를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메디아를 향한 설명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메디아는 한마디 말 도 없이 주위의 풍경에만 관심을 두었다. "맞아요. 매월 1일이 되면 오람시에서 볼거리들이 많이 벌어져요. 특히, 5월과 13월에는 더 성대한 행사들이 많이 열리는데 그걸 보려고 각지에서 찾아오는 여행객들이 얼마나 많다구요. 그런 걸 놓치면 두고두고 후회할 거예요. 이번 5월에는 특히나 미인대회까지 열리니까 사람들이 더 많이 올거라구요." 길안내 자격으로 따라나오게 된 후마가 친절하게 설명했다. 그녀는 오늘 아침 에서야 지긋지긋한 비구름에서 해방될 수가 있었다. 아직 이틀정도는 더 스승 의 벌을 받아야 했지만 오늘 손님을 모시고 외출하게 된다는 핑계로 아담에게 사정사정해서 얻어낸 결과였다. 그래서인지 후마는 평소보다 더 명랑한 얼굴이 였다. 어쩌면 봄바람이 아직 어린 처녀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일지도 몰랐지 만 말이다. "미인대회가 오늘입니까?" 카란도 여행도중 오람으로 향하는 미인대회 참가자들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었다. 동쪽 지역에서는 전쟁중이였지만 초기엔 아주 작은 분쟁이였기에 아직 평민들에게는 공식적으로 알리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귀족들이 소문으로 나돌고 있는 전쟁에 대한 소문을 무마시키고 민심을 안정시키면서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것이 이 미인대회였다. 카란은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나쁜 일보다는 좋은 일에 매달리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래서 불안한 민심을 가라앉히기 위한 이 미인대회라는 착상이 그럴듯하게 생각 되었다. "아니요. 그건 5월 5일에나 열린다고 해요. 그때도 만약 왕성에 계시게 된다면 구경할 수 있을거예요. 그런데..... 정말 화창한 날씨네요." 며칠동안을 빗속에서 지내야만 했던 후마에게는 참으로 근사한 날씨가 아닐 수 없었다. 주위는 온통 향긋한 봄의 향기들로 가득했다. 엷은 분홍빛을 머금은 복사꽃이 만발한 얕은 언덕에는 작은 수풀 사이로 보라색과 흰색의 이름모를 들꽃도 피어 있었다. 거기다 양 길가에 늘어선 플라타나스 나무의 새로 돋아난 잎새의 싱그러운 냄새도 만족스러웠고 찬란하게 빛나는 푸른 하늘을 유영하는 흰구름과 새들의 날개짓도 평화롭기만 했다. 후마는 나름대로 날씨에 감탄하고 있었지만 메디아는 오랫만에 크게 숨을 들이 쉬며 복잡한 생각들을 떨쳐버리는 중이었다. 마시는 어땠는지 몰라도 왕성에서 의 생활이 메디아에게는 매우 답답하고 불편했다. 그녀는 어디에서나 마주치는 시녀들이나 경비병도 신경에 거슬렸고 날마다 불러내어 심각한 문제들만 늘어 놓는 히페리온이나 케이론도 귀찮았을 뿐더러 어제부터 줄기차게 쫓아다니는 포센 때문에 영 심사가 뒤집히던 참이었다. 포센은 오늘 아침도 그녀의 문가에 나타나 아침 식사를 같이 하자며 끈적한 시 선을 보내더니 결국 식당까지 따라와 기어코 아침을 같이 먹었다. 그 뒤로도 그는 지치지도 않는지 두 시간 가량이나 더 끈질기게 메디아를 졸졸 따라다녔 다. 그런데다가 현재는 왕비의 고양이가 되버린 노미까지 찾아와 그녀를 약올 렸을 때에는 참을 수가 없었다. "냐오옹.... 냐옹오옹..." 노미의 노란 눈동자가 메디아를 보며 흥미롭다는 듯이 반짝거렸다. 다른 사람 들은 고양이 노미의 말을 알아 들을 수 없었지만 메디아는 정확히 그 말의 의 미를 알아 들었다. - 안 본 사이에 바람둥이가 되었네, 메디아. 그 예쁜 신관은 안데리고 다녀? 하긴 둘 모두를 데리고 다니기엔 좀 벅차겠지? - 도도하게 머리를 번쩍들고 날씬한 몸으로 쭉쭉 걸어가는 노미의 꼬리가 눈앞 에서 살랑거렸다. 메디아는 부글거리는 심정으로 노미를 노려 보았다. "당신은 내가 만난 어떤 여자들보다 나를 흥분시키는군. 그렇게 차가운 눈동 자를 가진 여자가 더 뜨거워지고는 하거든." 거기다가 화를 북돋으며 곁에서 추근대는 포센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급기야 메디아의 성질이 폭발하고 말았다. 그녀는 생각이고 뭐고 할 겨를도 없이 그냥 지팡이를 들고는 가차없이 휘둘러 포센의 어깻죽지를 강타해 버렸다. "허억!" 전혀 예상하지 못 했던 그녀의 공격에 포센은 헛바람을 들이켰다. 하지만 그는 노련한 기사답게 간발의 차로 메디아의 지팡이를 피해낼 수 있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장난스럽게 빛났다. "이런! 화가 난 거요, 메디아? 내가 너무 직접적으로 말했나? 난 그대가 내숭 떠는 여자인 줄은 미처 몰랐는 걸? 설마 수줍어서 그러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능글거리는 그의 대꾸도 신경에 거슬렸지만 정작 메디아를 더 흥분시킨 것은 노미였다. "냐옹...냐오오옹" - 메디아, 꽤 정열적인 고백인데 받아주지 그래? 누가 널 저렇게 따라다니겠 냐? 저 정도 바보나 되니까 가능한 일이지. - 메디아는 지팡이를 움켜쥐며 부들부들 떨었다. 가까이서 지켜보던 블루잉은 노 미의 사람 괴롭히는 고약스런 버릇이 또다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했지 만 메디아는 속수무책으로 고양이의 심술에 노출된 상황이 기가 막힐 뿐이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살아있을 때 너무나 애지중지 했기 때문에 차마 어떻게 하지도 못 하는 고양이였다. 메디아는 이런 상황을 연출하게 만든 포센을 새삼스레 다시 노려보았다. 그의 몸놀림으로 보아 어영부영 검사가 된 자는 아니었다. 그녀가 아무리 지팡이를 잘 휘둘러도 능숙한 검사를 지팡이 하나로 상대할 수는 없는 일이였다. 그러나 그녀는 검을 다루는 검사가 아니라 마녀였다. 마녀에게는 마녀만의 방법이 있 는 것이다. 메디아의 흥분했던 얼굴이 천천히 차갑게 가라앉았다. 블루잉이 불 안스럽게 메디아를 올려다 보는 순간 그녀의 오른 손이 앞으로 쭉 뻗어 나가듯 움직였다. 포센은 그녀의 눈빛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경계하는 얼굴로 뒤로 물러서려고 했 다. 그러나 메디아는 씨익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녀의 손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물들더니 눈깜짝할 사이에 그의 왼쪽 가슴에 달라붙었다. 포센은 그녀를 피하려고 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몸이 그녀에게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에게 달라붙은 새빨간 그녀의 손은 서서히 그의 옷감을 태우더니 살속으로 파고 들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볼 사이도 없이 그의 가슴에서 치직 거리며 살타는 냄새가 올라왔다. "으윽..." 포센은 타는 듯한 고통에 반사적으로 그녀의 어깨를 확 떠다밀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녀의 몸은 강철이라도 되는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의 손에 만져 지는 그녀의 몸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조각상처럼 딱딱한 촉감이었다. 그는 그제서야 자신이 너무 조심성이 없었음을 깨달았다. 그때 조용한 그녀의 음성 이 그의 고막을 울렸다. "당신 말이 맞아, 나같은 여자는 화가 나면 아주 뜨거워지지." 그녀는 말을 하면서도 손에 힘을 더 강하게 주고 있었다. 그러자 포센의 가슴 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가까이 다가오면 열기에 심장이 완전히 타버릴 수도 있어. 이렇게 말이야." 포센은 아찔한 고통에 뒷머리가 핑 도는 느낌이었다. 서서히 조여오는 그녀의 손아귀에서 불덩이 같은 열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그는 마법사 크란의 경고가 그제서야 확연히 떠올랐다. - 그녀는 안됩니다, 포센. 스승님께서 가까이 접근하는 것을 피하라고 하셨을 정도라구요. 지금까지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그녀는 강할뿐만 아니라 무서울 정 도로 잔인하기까지 하더군요. 그녀는 지나치게 위험한 존재입니다. 가까이 접근 하는 건 너무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 - 계 속 - 연재를 자주 하려다 보니....(핑계가 될 수도 있겠지만...^^;;;;) 연재량이 점점 짧아지는군요. 79편은 더 길게 쓰려다가 그냥 이 정도로 끝내기로 했어요. ^^; 다음편도 기대해 주세요. *^___^* - 뱀파이어 - 번 호 : 80 / 83 등록일 : 2000년 04월 05일 22:35 등록자 : DEADSEA 조 회 : 889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80.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순수하게 까맣던 그 밤, 어둠 속에 함몰하는 별빛을 보았을 때 죽어간 영혼의 붉은 혈액은 슬픈 그대 눈물이 되었고 숨겨진 진실은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았다. 제 80 장 짝짓기. 오람시는 지금까지 마시가 지나온 여느 마을이나 도시와는 확연히 달랐다. 노 아나 로스코에서 주로 보았던 목조 건물이나 사각으로 지어진 단순한 석조 건 물들은 이곳에서는 거의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지나는 거리마다 온통 둥근 돔 으로 이루어진 하얀 궁전식의 예쁜 집과 어마어마한 규모의 건물로 가득 들어 차 있었다. 주위에 빽빽히 들어서 있는 사치스런 하얀색 대리석 건물의 우아함 과 단단함은 보는 사람들을 압도하며 감탄하게 만들었다. "아이참, 그렇게 눈을 허공에만 두고 있으면 길을 잃어버리쟎아. 건물은 저기 언덕에 올라가면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으니까 그만 좀 올려다 봐." 마시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건물들의 지붕을 올려다보는 동안 후마가 그를 잃어버릴까봐 한마디 중얼거렸다. 넓직하게 뻗어나간 시가지의 길은 정교한 거 미줄처럼 복잡하고도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오람을 처음 방문하는 이방인 들은 미로처럼 얽힌 길에서 헤메게 되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모든 길은 도시 의 중앙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몇 시간을 안으로 걷다 보면 결국은 도시의 중앙 으로 모일 수 있는 구조이기도 했다. 그들이 한참 말을 몰아가고 있을때였다. 조금씩 주위 경관도 변하고 여기저기 높지만 소박한 건물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하늘을 빼곡히 감출듯이 솟아오 른 고층건물들 사이에 원색으로 짜여진 천들이 화려하게 걸려 있었다. 거리에 들어서자 흥겨운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현란한 북소리와 작은 방울들이 서로 부딪치는 경쾌한 음악이였다. 매우 이국적이면서도 자극적인 그 음률은 일행이 앞으로 전진할수록 더 크게 들렸다. "세상에! 정말 운이 좋군요. 달디안 부족의 짝짓기 축제가 틀림없어요." 일행을 안내해 가던 후마가 갑자기 앞으로 내달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오람에는 각 나라에서 흘러들어와 사는 많은 외국인들과 수 많은 부족민들이 각기 자신들의 문화를 지키며 살아가는 지역이 많았다. 머리가 검고 피부색이 흑갈색을 띠는 달디안 부족은 주로 귀족들의 집에서 허 드렛일을 하거나 수공예품을 만들며 생활하는 사람들이었다. 지금 메디아와 마 시가 지나는 거리도 달디안 부족의 거주 지역으로 유명한 곳인데 부족의 이름 을 따서 달디아니 라고 불리는 거리였다. "달디안 부족의 짝짓기 축제는 정기적이지 않아서 견식할 기회가 많지 않답니 다. 어서 가요. 어쩌면 끝나가는 것일지도 모른다고요." "소리만 듣고 짝짓기 축제인지 어떻게 알죠?" 카란이 후마의 유난스러움에 호기심을 갖고 물었다. "저도 몇 년전에 한번 구경한적이 있거든요. 노랫소리가 인상적이어서 금방 알 수 있어요. 저 특이한 남자들의 노랫소리 들리죠? 마치, 관악기소리처럼 들리 쟎아요. 어서 가보자구요." 일행이 음악소리가 들리는 곳에 도착하자 주위는 온통 화려하게 치장한 달디안 부족의 남자들과 여자들로 발 디딜틈이 없어 보였다. 거리의 한쪽 그들만의 작 은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즐거운 흥분과 엄숙함으로 들떠있는 듯 했다. 그들만의 가장 정성스럽고 화려하게 만든 옷을 입고 있는 젊은 남자들은 얼굴 에 색색으로 무늬를 그려넣고 머리는 온갖 장신구로 갖은 멋을 낸 상태였다. 그들은 집단으로 둥그렇게 원을 만들어 다함께 춤추고 박수를 치며 방울로 장 식한 맨발로 바닥을 맴돌았다. 원 안에는 여러명의 처녀가 망사베일로 얼굴을 가린채 수줍게 남자들의 맵시를 살피고 있었다. 각국의 나라가 일부다처제를 유지하며 대부분 여자의 지위가 낮음에도 불구하 고 달디안 부족은 여자만이 배우자를 선택할 수 있는 특권이 있는 부족이였다. 원을 이루며 자신이 선택되기를 기다리는 달디안 부족의 남자들은 거의 한시간 동안을 노래하며 춤추는 중이었다. 자신이 가장 아름다운 신부에게 선택되기를 기다리면서. 마시는 그들의 낯선 의식에 넋을 잃으며 메디아에게 물었다. "저게 짝짓기라는 거야? 결혼식하고는 뭐가 달라?" 얼마전에 우연히 목격했던 파라인들의 일반적인 결혼식과 너무도 달라보이는 모습에 마시는 잠시 헷갈려 하는 것 같았다. "다른 건 없어. 그저 형식이 조금씩 다를뿐이지. 뭐라고 부르든 결과는 비슷한 거지만......" "전 달디안 부족의 짝짓기 축제가 무척 낭만적으로 보여요." 후마가 살짝 볼을 붉히며 끼어들었다. "사실, 우리 나라에서는 여자가 남자를 맘대로 선택하는 일이 쉽지는 않쟎아요. 그런 면에서 보면 달디안 부족의 여자들은 축복받은 거죠." "하지만 그렇게 낭만적인 것만은 아닌가 보군요. 저기 보세요. 저 남자는 아무 래도 자기를 선택한 처녀가 맘에 들지 않는 모양입니다." 카란의 손가락이 가르키고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젊고 단정해 보이는 남 자가 매우 섭섭한 얼굴로 신부를 바라보다가 다른 처녀에게 눈을 돌리고 있었 다. 그러나 그는 체념한 듯 고개를 숙이며 자신을 선택해 준 여자를 따라갔다. "어느 곳에서나 한쪽 사람에게만 선택권이 주어지는 것은 불공평한 일이지요. 그것이 남자이든 여자이든......" "정말 너무하시네요. 이렇게 즐거운 분위기인데 꼭 그렇게 제 기분을 망쳐놓아 야 하시나요?" 후마가 카란을 향해 뿌루퉁한 얼굴을 돌렸다. 그러나 카란은 메디아를 향해 말 하는 중이어서 그녀의 얼굴 표정을 보지 못했다. 후마는 카란의 무관심에 화가 났지만 그녀도 그에게 큰 관심이 없었으므로 역시 무시해 버렸다. 그녀는 금새 카란의 말을 잊어버리고 다시 흥겨운 달디안 부족의 분위기에 휩쓸렸다. "메디아는 달디안 부족의 축제를 벌써 본 적이 있죠?" "뻔히 알면서 왜 물어?" 메디아는 달디안 부족의 짝짓기 축제를 페렌토 남부에서도 몇 번 본적이 있었 다. 달디안 부족의 원래 고향이랄 수 있는 곳도 바로 페렌토였다. 지금도 수 많은 달디안 부족민들이 페렌토의 각 지방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본토에서 열 리는 짝짓기 축제는 지금 달디아니 거리에서 보는 것보다 더 화려하고 원시적 인 느낌이 훨씬 강했다. 카란은 메디아가 회상하는 예전에 보았던 달디안 부족의 축제 영상을 뚜렷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계속 말이 없는 메디아에게 조금이라도 말을 시켜볼 의 향이었던 카란은 조용히 대답했다. "오늘 유난히 말이 없군요, 메디아." 주위의 소음에 긴장했는지 메디아가 탄 말이 불안스런 움직임을 보였다. 메디 아는 손바닥으로 말의 갈기를 쓰다듬어 말을 진정시켰다. "오전 일 때문에 화가 난겁니까?" 카란은 오늘 오전에 메디아가 죽일뻔한 포센을 간발의 차이로 구해낼 수 있었 다. 그녀가 포센을 왕성에서 그대로 죽였다면 문제가 커질게 분명했으므로 그 로서는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명목상이라도 포센이 아라크네의 동 생으로 왕성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메디아가 그를 죽이게 되면 왕의 처남을 살해하게 되는 셈이었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대신관 케이론은 물론 왕인 히페리온도 매우 난감한 처지에 몰리게 될 게 분명했다. 그나마 카란이 그 현장에 나타나서 메디아를 말릴 수 있었던 게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별로......" 메디아는 정말로 언쨚은 기색이 아니었다. 카란은 묘한 눈길로 메디아를 바라 보았지만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것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단지 오싹 한 한기 같은 것을 느꼈을 뿐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항상 숨김없이 무방비 상태로 생각을 보여주던 메디아의 생각을 전혀 읽어 낼 수 없게 되자 카란은 알 수 없는 불안함을 느꼈다. 아니, 캄캄한 어둠속에 버 려진 느낌까지 들었다. 달디안 부족의 짝짓기 축제는 이제 막바지에 들어서고 있었다. 짝을 찾은 여러 쌍의 젊은이들이 서로 어울려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고 북소리는 점점 강렬해 져 갔다. 그들의 몸에 달린 작은 방울의 울림이 길가의 건물벽을 따라 공명하 는 것 같았다. 사방은 따사로운 봄바람에 휩싸였고 휘날리는 각가지 빛깔의 천 들은 무지개처럼 머리위에서 펄럭였다. 알 수 없는 이국의 노랫소리에 맞추어 짤랑거리는 방울소리가 카란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그는 마음을 닫아 버려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는 메디아의 곁으로 다가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서늘한 뺨에 입을 맞추었다. ".....?" 메디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당신은 붙잡을 사이도 없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가버릴 것만 같아요. 영원히 잡을 수 없는 시간처럼......" 카란의 대꾸에 메디아의 이마가 살풋 찡그려졌다. "봄바람에 정신이 나갔어? 그런 이상한 소리 할거면 다른데 가서 해. 카란까지 날 귀찮게 하지 말라구. 그리고 내가 얘기 한 거 잊었어? 나한테 키스 함부로 하지 말라 그랬쟎아." 후마와 앞쪽에 서있느라 미처 카란의 행동을 보지 못 했던 마시가 메디아의 목 소리에 고개를 휙 돌렸다. "뭐?! 키스? 또 했단 말이야?" 마시의 호기심 가득했던 눈동자가 순식간에 활활 타올랐다. 그는 누가 뭐라고 할 사이도 없이 메디아와 카란 사이로 끼어들어서 카란이 메디아에게서 떨어지 게 만들었다. "방금 건 키스가 아닙니다, 메디아." 그는 말의 고삐를 홱 잡아당기며 후마의 앞을 가로질러 가며 소리쳤다. 그의 얼굴은 싱긋 웃고 있었다. 카란은 일시적으로 찾아왔던 불안감이 그에게서 흔 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오늘은 행사가 많다는데 여기서 너무 오래 지체하면 볼거리를 놓칠지 도 모릅니다. 어서 가요. 그 유명한 꽃의 광장도 봐야죠." 그는 선두에서 인파를 헤쳐가며 말했다. "천천히 가요. 그러다가 길 잃어버리면 나도 책임 못진다구요." 후마가 앞서가는 카란의 뒤통수에 소리쳤지만 순간 터져나온 달디안 부족의 함 성에 묻혀 버렸다. 이제 요란했던 짝짓기 축제가 끝나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밤이 될때까지 음식을 나누며 새로운 부부에게 축복의 의식을 치루어 줄 것이다. 후마와 마시 그리고 메디아가 서둘러 카란의 뒤를 따라 달디아니 거리를 빠져 나갈 무렵이었다. 멀리서 그들의 모습을 세세히 관찰하는 세 쌍의 눈동자가 번 뜩이고 있었다. - 계 속 - 정말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 자꾸 짧아지네요. ^^;;;;;; 번 호 : 81 / 83 등록일 : 2000년 04월 12일 06:28 등록자 : DEADSEA 조 회 : 915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81.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그대를 가장 뜨겁게 타오르게 했던 사랑이 그대를 가장 차가운 증오속에 던질 것이며 그대를 가장 행복하게 했던 순간이 그대를 가장 고통스럽게 할 것이다. 제 81 장 메디아의 꿈. "여기에 있는 아카시아 나무들은 가이야에서 수입한 나무들인데 심은지 30년 정도 되었데요. 일반적인 아카시아 나무는 잎이 많고 키가 크지만 이것들은 모 두 개량이 되어서 키도 작고 꽃이 많이 핀답니다." 후마는 새파란 하늘아래 펼쳐진 수 천평에 달하는 공원 입구에 들어서면서 설 명했다. "가이야에 사는 엘프들이 식물을 개량한다는 이야기는 저도 들었는데 그걸 수 출하기도 하는 모양이군요." 후마의 설명을 들으며 카란은 주위의 아카시아 나무를 다시 한번 유심히 살폈 다. 일행은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는 적당히 빈자리를 찾아 말을 매어두고 그늘 로 이동해 왕궁에서 준비해 온 간식을 먹으며 화창한 봄날씨를 즐겼다. 키가 작고 유난히 잎보다 꽃이 많은 아카시아 나무사이로 화사하게 꾸미고 나 온 젊은 처녀들의 싱그러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 사이로 남자들의 호 탕한 목소리가 간간히 들려오는 거리는 활짝 핀 꽃구경을 나온 젊은 연인들로 가득했다. 넓은 공원에는 아카시아 말고도 여러가지 빛깔의 꽃들이 총 천연색 으로 피어있었고 길 한쪽에는 귀족들이 타고 나온 비싼 마차가 수십대씩 늘어 서서 말과 마부들이 북적거리는가 하면 다른 쪽에서는 고운 양산으로 햇빛을 가린 나이 든 노부부가 작은 꽃밭 사이를 거니는 정겨운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메디아가 바라보는 가운데 마시는 아카시아 꽃잎들이 눈처럼 휘날리는 사이로 무슨 재미있는 놀이라도 되는양 꽃잎을 잡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놀았다. 그의 뒤를 쫓아다니며 같은 행동을 하는 후마도 노란곱슬 머리카락을 마구 흐 트러 뜨린채 웃음을 터뜨렸다. 서로 꽃잎을 더 많이 잡겠다고 난리였는데 일부 러 나무를 흔들어 꽃잎을 떨어뜨리기까지 했다. 작은 꿀벌들이 그들의 소란스 러움에 일제히 날아올라 다른 나무로 옮겨가는 모습이 보였다. "완전히 애들 같군요." 카란이 어이가 없는지 그들을 멀뚱하게 쳐다보며 중얼거리자 메디아의 망토속 에 있던 블루잉이 기어나오며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그럼, 마시가 어린애지 어른인 줄 알았어?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어도 드레곤 은 변태를 하기 전까지는 어린 아이와 같아. 겉모습이나 나이에 현혹되지 말라 구." 블루잉은 설교하듯이 말을 늘어놓았지만 카란은 아무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긴 저 후마라는 아가씨는 꽤 실력있는 마법사라고 들었는데 전혀 그렇게 보 이지를 않네. 열 일곱살이 맞기는 한걸까?" "어쩌면 열일곱살이 아닐지도 모르지." 블루잉이 의아하게 쳐다보자 카란은 짧게 대답했다. "저 어린 아가씨는 아담이 버려진 아기를 데려다 키운 거라고 하더군." "그럼 고아란 말이야?" "응. 그런 셈이야. 하지만 블루잉이 보기에도 저 아가씬 밝고 그늘없는 모습이 지?" "그늘은 고사하고 굉장히 말괄량이 같은 아가씨쟎아." 그들이 후마를 두고 얘기하는 사이 그녀는 마시와 나무사이를 뛰어다니느라 미 처 뒤에 서있는 키가 멀쓱하게 큰 남자를 발견하지 못해서 그와 세게 부딪쳐 엉덩방아를 찧고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가무잡잡한 얼굴 에서 웃음을 거두지 못한채 사과를 하고 있었다. 상대도 기분이 상하지 않은 듯 미소를 지으며 귀엽고 사랑스러운 후마에게 괜찮다는 시늉을 해보이며 손을 내밀어 그녀를 일으켜 주고 있었다. 사방 가득히 달콤한 아카시아 향기가 꿀같이 흐르고 유쾌한 사람들의 웃음소리 가 음악처럼 울려 퍼졌다. 한낮의 고운 햇살이 눈부시게 스며드는 나무 그늘에 앉아서 메디아는 오랫만에 평화로운 여유를 즐겼다. 한가로운 그늘에서 잠시 앉아있던 메디아는 나무기둥에 편안히 등을 기대며 눈 을 감았다. 이윽고 그녀가 낮은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자 카란이 그녀의 몸이 흔들리지 않도록 옆에서 어깨를 빌려주었다. 메디아는 한겨울 새벽처럼 차가운 숲속 한가운데 홀로 서있었다. 주변은 온통 두꺼운 안개에 휩싸여 있어서 어디가 어디인지 알아 볼 수 없을정도였다. 앙상 한 나무들 사이로 하얀 잠옷만 걸친 메디아는 맨발로 길을 헤매기 시작했다. 문득, 희미한 안개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디아, .....메디아.' "누구세요?" 그러나 차가운 한기가 피부를 스치듯 목소리는 저 멀리 안개너머에서 들려 올 뿐이었다. '메디아. 나...의 딸아.' 슬픔에 젖은 목소리는 작은 흐느낌을 동반한 채 메디아를 부르고 있었다. "어디 있는 거죠? 모습을 보여요." 메디아는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뛰었다. 그러나 그녀의 작은 발은 생각만 큼 빠르게 달려주지 않았다. 그녀는 의아해서 자신의 몸을 내려다 보았다. 그 녀의 몸은 아주 작고 여려 보였다. 여덟살 때의 메디아였다. 그녀가 당황스런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을때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디아, 돌아가렴. 이 곳에 오지 말아라.' "누구세요?" '나의 사랑스러운 딸.... 가여운 내 딸아.' 메디아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나무 그림자 뒤로 누군가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 이기 시작했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무언지 모를 그리움이 치밀어 올라 왔다. '가거라, 메디아. 나를 보아서는 안된다. 어서.... 돌아가거라.' 고통스런 아픔이 담긴 그 음성에 메디아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가지 마세요. 가지 말아요." 그림자가 보이는 곳으로 그녀가 열심히 달려갔지만 어느덧 그의 모습은 더 멀 리 사라져 가고 있었다. '사랑한다.... 메디아. 내 딸아....' "안돼요. 가지 말아요-!" 그녀는 급히 손을 내밀며 외쳤지만 주위는 갑작스런 어둠에 휩싸였다. "메디아?" 카란은 조용히 자고 있던 메디아가 식은 땀을 흘리며 신음을 내지르자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악몽을 꾸는지 자그맣게 헛소리까지 하고 있었다. "아..안돼. 가면 안..." "메디아, 일어나요. 메디아?!" 카란은 좀 더 세게 메디아를 흔들었다. 그녀의 이마에서 봉인의 문자가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봉인된 기억이 열리는 것일까?' 봉인문자를 보고 있느라 카란이 잠시 손을 멈추자 블루잉이 그를 재촉했다. "카란, 어서 그녀를 깨우지 않고 뭐해?" 블루잉은 그녀의 무릎 위로 기어올라가 메디아의 다리를 흔들었다. "아아... 안돼, 가지 말아요-!" 그 순간 메디아가 갑작스럽게 손을 내밀며 번쩍 눈을 떴고 그녀의 이마에서 빛 을 발하던 문자도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하아..아...."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메디아? 괜찮아요?" 걱정스러운 카란의 목소리에 메디아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헛소리를 하던데.... 악몽을 꾸었나요?" 멍하던 메디아의 눈동자에 천천히 생기가 돌아왔다. "아아... 아니야. 아니, 모르겠어. 기억나지 않아." 정말로 메디아는 아무것도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그저 아득한 그리움 같은 것이 느껴질 뿐이었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 메디아!" 메디아의 눈물에 블루잉이 당황해서 소리쳤다. 그러나 블루잉의 음성에 정작 놀란 것은 그녀였다. "으응?" 그녀는 자신의 뺨을 적시고 있는 물기를 손가락으로 훔치며 중얼거렸다. "이...이게 뭐지?" "울고 있쟎아요, 메디아." 카란이 재빨리 작은 수건을 꺼내어 그녀의 뺨을 조심스럽게 닦아주며 말했다. "아냐. 이..건 눈물일리가 없어." 그녀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진정해요, 메디아. 꿈을 꾼 거예요." "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한 거지?" 신경질적인 그녀의 어조에 카란은 더 근심어린 표정이 되었다.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얼굴이 창백해 보여요, 메디아." 블루잉도 메디아의 모습에 적쟎이 충격을 받았는지 그녀의 눈을 올려다보며 걱 정스럽게 말했다. "그래, 메디아. 너 쉬어야 될 것 같아." 향긋한 바람이 불어와 메디아의 땀에 젖은 얼굴을 감싸안았다. 멀리 떨어진 곳 에서는 사람들 사이를 휘젖고 다니는 마시와 후마가 아카시아 꽃을 따서 먹는 모습이 보였는데 어느덧 시간이 많이 흘렀는지 태양이 제법 많이 기울어 있었 다. '뭐였지?' 메디아는 희미한 안개속에서 무언가를 보았던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지 기억 할 수가 없었다. 그냥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아련한 슬픔만이 뚜렷히 느껴졌다. 그녀는 골똘히 생각에 봤지만 여전히 알 수 없는 꿈이었다. 그녀는 흔들리는 마음의 혼돈을 애써 떨치려 했지만 꿈속에서의 진한 감정은 쉽게 지워지지 않 았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 것 같았다. "메디아야, 밥 먹으러 가자. 나 배고프다." 숨차게 뛰어온 마시가 생각에 잠겨있던 메디아의 소매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녀 가 쳐다보니 마시의 입속에는 아직도 아카시아 꽃잎이 잔뜩 들어 있었고 이빨 에는 푸르고 하얀 조각이 듬성듬성 끼어 있는 상태였다. 그가 말을 할때마다 입에서 달콤한 아카시아 향내가 풍겨나왔다. "마시...." 메디아가 부르자 마시가 금방 대답했다. "응?" "너 말이야, 종이도 모자라서 풀 뜯어먹는 게 그렇게도 좋니?" 메디아가 무미건조하게 말하자 마시의 붉은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풀?" 그러나 메디아는 마시의 대답이 필요없는지 무릎에 있는 거북이를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탁탁 털어내며 마시를 뒤따라 달려 온 후마에게 말 을 걸었다. "어디 들어가서 뭐 좀 먹을데 없을까?" 메디아의 물음에 후마는 살짝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흐흠... 오늘은 왕궁으로 들어가서 저녁먹어야 하는데요. 잊었어요? 오늘 왕 가의 정찬모임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쟎아요." "저녁은 저녁이고 지금은 지금이지. 지금 배고프쟎아. 아직 해가 지지도 않았는 데 벌써부터 저녁먹을 걸 생각해서 굶으라는 말이니?" "저 하지만...." 후마는 망설이면서 카란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카란은 이제 얼굴빛이 정 상으로 돌아온 메디아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어서 후마의 시선을 미처 못 봤 다.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돌려서 후마에게 말했다. "간단하게 허기를 채울 수 있는 곳으로 가죠. 왕궁으로 돌아 갈 시간은 아직 충 분하니까, 괜찮죠?" 조금 망설이던 후마도 하도 뛰어다녀서인지 약간은 출출하던 참이어서 오래 생 각할 것도 없이 일행을 이끌고 공원을 빠져나와 오람시내에서도 제법 유명한 식당으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말고삐를 손에 쥐고 천천히 걸어 후마를 따라 작은 시냇가에 놓인 다리 를 건너고 있었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시냇물 위로 놓여진 다리는 하얀 석조 다리로 둥글게 휜 모양이었는데 양쪽 난간에는 커다란 사자모양의 조각이 각각 열 마리씩 새겨져 있었다. 다리는 폭이 좁은 편이어서 마차 한대가 지나가면 딱 알맞은 크기였다. 공교롭게도 후마와 메디아가 다리위를 건너기 시작했을때 맞은 편에서 커다란 마차가 다리로 다가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먼저 다리를 건너기 시작한 후마는 아무런 망설임없이 계속 걸어갔다. 하지만 상대편 마부는 이쪽을 보고도 마차 를 세우지 않고 계속 말을 몰아 다리위로 올라왔다. "어..어?" 후마가 마부를 쳐다보았지만 마부는 그들의 코앞까지 마차를 들이댔다. 결국, 메디아와 후마는 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 계 속 - 호홋...^^;;;;; 늦어서 죄송하와요. 그래도.... 감상 좀 부탁드려요. *^^* 번 호 : 82 / 83 등록일 : 2000년 04월 22일 23:35 등록자 : DEADSEA 조 회 : 682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82.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그대를 가장 뜨겁게 타오르게 했던 사랑이 그대를 가장 차가운 증오속에 던질 것이며 그대를 가장 행복하게 했던 순간이 그대를 가장 고통스럽게 할 것이다. 제 82 장 마법사. "아저씨, 뭐하는 거예요?" 말의 콧김이 느껴질 정도로 사륜마차가 위협적으로 다가서자 뒤로 물러 선 후 마가 마부에게 소리쳤다. "아가씨야 말로 길 비켜서지 않고 뭐하는 건가?" "이보세요, 아저씨. 우리가 먼저 건너기 시작했쟎아요." 그러나 마부는 코웃음을 칠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웃음을 흘리며 느물 스럽게 대꾸할 뿐이었다. "내가 먼저 왔는데 무슨 소린가? 꾸물대지 말고 길이나 비켜주게." 마부의 말에 한동안 황당해서 입만 뻐끔거리던 후마가 분개해서 외쳤다. "이 아저씨가 점점! 우리가 먼저 왔쟎아요." "그래서 어쩌라구? 벌써 이렇게 반이나 왔는데 나더러 돌아가라는 얘기야? "당연하쟎아요." 후마가 빽 소리를 쳤지만 마부는 당당하기만 했다. "이 좁은 다리에서 날더러 비키란 말인가? 그러지 말고 말을 끌고 있는 아가씨 일행들이 길을 양보하는 게 훨씬 낫지 않아?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봐도 분명히 아가씨 일행이 비켜야 한다고 말할 걸. 이렇게 큰 마차를 어떻게 뒤로 돌리겠 나?" 그제서야 후마는 마부의 속셈을 눈치챌 수 있었다. 이 마부는 후마 일행이 각 자 말을 끌고 다리를 건너고 있으니까 무조건 마차를 들이대면 당연히 그녀 일 행이 비킬 수 밖에 없으리라 생각한 것이 틀림 없었다. "기...기가 막혀서....." 아직 나이 어린 후마는 세상물정에 어두워 이럴 경우에는 어떻게 대처 해야할지 감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뒤에 서있는 메디아와 카란을 의식하면서 더욱 난감해 했다. 왕의 귀한 손님을 모시고 나왔는데 길거리에서 이런 무례한 일을 당하니 어떻게 해야할지 갈팡질팡한 마음뿐이었다. 생각같아서는 마법으로 상 대방을 혼내주고 싶었지만 도시 안에서 함부로 마법을 사용하면 경비대에 불려 가서 번거로운 일을 겪어야 할뿐더러 스승인 아담의 잔소리도 만만치 않을게 분 명했다. 그렇다고 말을 끌고 다리를 되돌아가자니 손님들에게 못할 짓이었고 그 녀의 자존심이 허락하지를 않았다. 그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채 말고삐를 잡은 손에 쓸데없이 힘만 주고 있었다. "어허 참... 이봐, 아가씨. 이러다가 해 지겠어. 어서 비키라구." 다시 느청스런 마부의 목소리가 들리자 후마가 분한듯이 그를 노려보며 뭐라고 한마디 톡 쏘아주려고 했다. "분명히 우리가 먼저 왔는데 무슨 말으...."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뒤쪽에서 성큼 앞으로 다 가온 마시가 버럭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었다. "뭐야, 왜 안가고 서서 난리야? 배고파 죽겠단 말이야. 빨리 안가!" 마시가 벌건 눈으로 후마와 마부를 동시에 째려보자 메디아도 한마디 보탰다. "그러고 보니 후마도 명색이 정식 왕실 마법사지?" 후마에게 메디아의 한마디는 명색이 왕실 마법사면서 이런 일 하나 해결하지 못 하냐? 라는 뜻으로 들렸다. 후마의 얼굴이 순식간에 발갛게 물들었다. 그녀의 자존심이 사정없이 땅바닥으로 곤두박질 치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비록 나이도 어리고 아직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입장이었지만 명 색이 정식으로 인정받은 왕실 마법사였다. 이미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은데다가 다른 왕실 마법사들을 웃도는 능력인 후마는 스스로도 자부심이 대단했었다. 하지만 뛰어난 마법사라고 해서 이런 일에 능숙하게 대처하는 능력까지 겸비하 고 있다는 말은 절대 아니었다. 더구나 지금 일은 마법으로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닐뿐더러 설령, 이 상황을 마법으로 해결한다고해서 그게 간단 한 일이 될지도 의심스러웠다. 오히려 복잡하게 꼬일가망성이 농후했다. 한편 메디아는 후마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을때 흥 미롭게 마차를 관찰하는 중이었다. 메디아가 들으라는 듯이 왕실을 들먹여가며 이야기한 것은 후마보다는 마부 때문이었다. 그런데 마부는 조금 움찍했을뿐 왕실 마법사라는 말에도 끄떡하지 않았다. 메디아의 코끝으로 희미하고도 특별한 향기가 마차에서부터 지속적으로 퍼져나 왔다. 마법의 향기였다. 후마에게서 풍기는 상쾌한 마법향기와는 전혀 다른 차 원의 향기. 어딘지 모르게 음습함이 짙게 배여나는 무거운 마법의 향기였다. 후마가 미처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희미하게 풍기는 향기였지만 메디아는 마차 안에 흑마법의 전수자가 타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마법사라....' 마법사는 타고난 재능과 능력이 있어야만 될 수 있었다. 그리고 훌륭한 스승 밑에서 교육을 받아야 고위 마법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았다. 아무리 좋 은 재능을 타고 났어도 그 재능을 제대로 키워줄 스승이 없다면 그저그런 마법 사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래서 마법적 재능이 있다고 판 단되면 모두 마법의 섬으로 가서 적당한 스승을 만나 마법을 수련하는 것이 일 반적이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마법사가 될 자질을 갖고 태어나는 사람도 극소 수였지만 그렇게 태어난다고 해도 그 재능에 알맞은 좋은 스승을 만나게 될 확 률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아무리 마법의 섬이라는 특수한 곳이 존재한다고 해도 말이다. 그래서 제법 실력있는 마법사를 만나게 되는 일이란 그리 흔한 상황이 아니었 다. 그나마 수도 오람은 왕궁에서 일하는 수 십명의 왕실 마법사들과 수련생 들이 있어서 다른 도시나 마을보다는 마법사를 접할 기회가 많은 곳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길가에서 아무 때나 마법사를 만날 정도로 흔하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었다. 더구나 흑마법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인식이 좋지 않아서 흑 마법사를 만나게 되는 일은 더욱 드문 일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메디아 일행을 가로막고 있는 마차안에는 마법사가 타고 있 고 그 마법사는 흑마법을 익힌자 같았다. 메디아는 이번 일이 우연인지 고의인 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재밌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메디아의 나직한 목소리에 카란이 메디아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카란은 그녀에게서 아무런 생각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그도 최근 들어 서는 그녀의 생각을 좀처럼 쉽게 읽어낼 수 없었다. "재밌긴 뭐가 재밌어? 배고파 죽겠는데...." 신경질적인 마시의 투덜거림에 마부가 맞장구치듯 말했다. "보아하니 식사를 하러가는 모양인데, 어서 길을 비켜서 서로 갈 길을 가는 것 이 좋겠군. 어린 소년이 배가 고파서 죽어서야 쓰겠나?" 깡말라서 쭈글쭈글한 마부가 비비꼬아 지껄이는 말에 마시의 눈초리가 홱 올라 갔다. 비웃음 가득한 속 뜻을 알아서가 아니라 마부의 말투가 마시의 성질을 돋운 것 같았다. "뭐야, 저건?" 새파란 소년처럼 보이는 마시가 대뜸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르키자 마부는 어이 없는 숨소리를 냈다. "허어..!" 마부의 강퍅해 보이는 이마로 파란 힘줄이 불끈 솟아올랐다. "이런 버릇없는 꼬마같으니라구." 그러면서 그는 손에 들고 있는 가죽채찍을 사정없이 휘둘러 마시의 팔뚝에 생 채기를 내놓았다. 마시의 하얀 살결위로 붉은 채찍자국이 선명하게 그려지자 마시가 따끔한 느낌에 팔을 화들짝 들어올렸다. 그와 동시에 마시의 얼굴이 울 그락붉으락 색깔이 변하기 시작하며 그의 눈동자가 빨갛게 불타올랐다. 메디아는 그런 마시를 쳐다보며 그가 확실히 모계를 닮기 보다는 부계를 닮은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말이없고 우아하던 혼 케드리안과는 전혀 다른 마시였다. 마시가 툭하면 습관적으로 불러내는 정령도 블랙 드레곤의 속 성에 해당하는 번개의 정령 라이오너가 아니라 레드 드레곤의 성질을 그대로 보여주는 불의 정령 사라만더였고 그의 단순과격하고 급한 성격도 레드 일족으 로부터 물려받은 것들 중의 하나인 것이 분명했다. 앞뒤분간없이 순식간에 타 오르는 다혈질적인 면도 그랬다. 메디아는 마시의 아버지를 보지 않아도 그가 어떤 드레곤일지 뻔히 알 것 같았다. 그나물에 그 밥 아니겠는가 말이다. 메디아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때 역시나 더러운 성격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마시는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마부가 고삐를 쥐고 있는 사륜마차의 맨 앞에 있는 말의 목덜미를 거세게 휘어잡았다. 민감한 말이 마시의 거친 행 동에 반항의 움직임을 보였지만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 종마는 마시에 의해 손쉽게 붕떠서 다리 바깥으로 떨어져 버렸다. 그렇게되자 줄줄이 엮여있 는 그 뒤의 말들까지 첫번째 말에 뒤엉켜 시냇물쪽으로 빠졌고 그에따라 마차 까지 기우뚱 기울며 요란하게 물 속으로 빠지게 되었다. 그들이 멈춰 서있던 다리 양쪽의 길가에는 봄나들이를 나온 사람들로 적지 않 은 인파가 오가는 중었고 다리를 건너려는 사람들도 비단 그들뿐만은 아니었다. 그런데 갑작스런 마시의 행동으로 일어난 사태 때문에 주위 사람들은 모두 입을 벌리고 구경하기에 바빴다. 서로 고삐가 뒹엉켜 물에서 버둥대는 네 마리의 멋 진 종마의 모습이나 값비싼 마차가 꼴사납게 쓰러져 반쯤은 물속에서 뒹구는 모습은 어디가서 돈주고도 하지 못할 진귀한 구경거리였다. 기세등등하던 마부는 물에 빠진 생쥐꼴로 허우적거리며 차가운 물에서 기어나 왔는데 입술을 부들거리며 씩씩거리는 폼이 장난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살 기등등한 눈초리에도 일행들 중 겁먹은 자는 한명도 없었다. 오히려 후마는 속 시원한 표정으로 마시를 놀랍다는 듯이 곁눈질할 뿐이었다. 메디아 일행과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높은 종탑 위에서 그들을 몰래 관찰 하고 있던 무리도 다리 위에서의 소란을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어떻게 된 녀석들이 가는 곳마다 사고를 치는군." 두꺼운 모자를 덮어쓴 코마지가 중얼거리는 사이 아자탄도 망원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잘 못 본 게 아니라면 방금 저 꼬마녀석이 사륜마차를 맨손으로 뒤엎어 버린 게 맞나?" "그렇군요. 양손으로 그냥 엎어 버렸네요." 놀랍다는 듯 감탄성을 터뜨리는 크란의 대답을 들으며 아자탄은 더 자세히 보 려는 듯 근육이 단단하게 붙은 한쪽 팔뚝으로 몸을 지탱하며 탑벽에 더 바짝 다가섰다. "저 꼬마녀석은 정령술사 같다면서 저렇게 힘이 셀 수도 있는 건가? " "글쎄요. 단순히 근력을 강화시켜주는 마법으로는 저렇게까지 힘을 쓸 수는 없 겠지만 특수한 약을 사용해서 일시적으로 힘을 강화시켜 줄 수는 있습니다." "아니면, 마법을 익힌 마법사이거나....." 그러나 그들의 대화에 끼어든 코마지의 대꾸에 크란은 어림없다는 표정을 지 었다. "하지만 소년에게서는 마법의 향기를 전혀 느낄 수 없었어. 방금도 마력을 이 용해서 그런게 아니라구. 저 마시라는 소년도 연구해볼만한 대상이군." 크란의 관심어린 목소리에 코마지는 흉한 모양의 입술을 일그러뜨려 보였다. 그러나 코마지는 크란의 관심사에 대해 간섭하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는 메 디아에게 상처를 입어서 치료중인 포센의 상태를 묻는 것으로 화제를 돌렸을 뿐이었다. "그의 상처는 어떻게 되었지?" "열기가 그의 갈비뼈까지 침투했더군. 솔직히 주문도 없이 그런 위력적인 마 법을 구사하다니 믿을 수가 없을정도였어. 조금만 더 늦었어도 심장까지 타들 어 갔을거야." 코마지가 멀리 보이는 다리 위쪽의 메디아에게 시선을 돌리며 눈빛을 빛냈지만 크란은 상관없이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코마지, 네가 직접 봤으면 굉장히 놀랐을 걸. 그의 몸에 아직도 손바닥 자국 이 선명하게 남아있으니까 나중에 보여달라고 해보게. 흥미로울거야." "확실히 저 여자는 내가 생각하던 마법사들과는 차원이 달라. 마녀라는 존재 자체가 모두 그런 걸까?" 힘에 있어서 투지가 강한 코마지의 관심과는 달리 크란은 좀 더 학문적으로 메 디아에게 관심을 나타냈다. "글쎄, 나도 마녀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지만 원래가 마녀들이라는 존재들 자 체가 만나기도 힘든데다가 더구나 반지의 마녀를 직접 접하게 된 건 나도 이 번이 처음이라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겠지. 처음 만났을 때는 그녀가 마녀인 지도 몰랐거든. 스승님께서 그토록 찾고 싶어했던 이유가 뭔지는 몰라도 지금 은 저 여자의 능력이 어디까지 가능할지 궁금해서 미칠것 같아." "또 그 병이 도졌군? 이번에는 납치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할 거지?" 크란은 호기심이 대단한 마법사였는데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 었다. 그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 있으면 무슨 수를 써서든 알아내고야 마는 사람이었다. 크란은 마법에 관한 것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무엇이든지 연구하고 관찰하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는데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 심이 도를 지나쳐서 심할 때는 자기 몸을 가지고 실험을 할 정도였다. 그의 마 법에 대한 열성과 집착은 그의 스승인 모모스조차 감탄하게 만들었다. "훗. 언젠간 좋은 방법이 생각나겠지, 안그래? 지금까지 그래 왔쟎아. 내가 뭘 포기하는 거 봤어?" "함부로 덤벼서 심장이 날아갈뻔한 그도 문제지만 너란 녀석도 저 여자한테 완 전히 정신이 나갔군." 코마지가 메디아에게 관심을 보이는 포센과 크란을 두고 이죽거리자 크란도 지 지않고 그를 비꼬았다. "그러는 너도 저 신관녀석한테 관심이 많은 걸로 아는데...." 그러자 코마지는 멀리 보이는 카란을 새삼스럽게 살펴보았다. 멀리서도 그의 아름다운 초록색 머리카락이 햇볕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모습을 확실히 알아 볼 수 있었다. 크란이 학문적으로 집착이 강하다면 그에반해 코마지는 아름다운 것에 광적인 집착을 보이는 괴벽이 있었다. 본래 코마지는 신관 출신이었지만 흑마법에 심 취해 모모스의 제자가 되었는데 크란과 그는 동료로서 서로의 관심사가 극단적 으로 다르면서도 집착적인 면에서 묘한 동질감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있었다. 코마지는 올해 스무살이었고 크란은 그보다 세살이 많았는데 동료인 그들은 상 대방을 어떤 면에서는 매우 잘 이해했지만 그렇다고 결코 호의적인 관계가 되 지는 못 했다. 그렇게 된데에는 크란의 외모가 매우 수려한 것도 한몫했지만 근본적으로 두 사람은 성격이 너무 달랐다. 코마지가 음습한 어둠이라면 크란 은 은은한 달빛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어라?! 저건 또 뭐지?" 열심히 망원경을 들여다 보고 있던 아자탄의 물음에 코마지와 크란은 동시에 시선을 다리 위로 돌렸다. 메디아의 예상대로 마차안에는 마법사가 타고 있었다. 그러나 마시가 물로 추 락시킨 마차에서 마법사가 걸어나온 것은 아니었다. 마법사는 마차가 물속으로 뒤집어짐과 동시에 다리의 맞으편에 홀연히 나타났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 리에 서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일반 사람들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지만 메디아 일행들은 마시만 빼고 모두 그가 마차에서 갑자기 빠져 나왔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중년의 마법사 뒤에는 하얀 망토를 머리까지 뒤집어 쓴 사람이 조용히 서있었 고 그의 양옆에는 커다랗고 시커먼 개 두마리가 버티고 있었다. 칠흑처럼 어둡 고 매끄러운 털빛의 개들은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일행을 향해 사납게 으르렁 댔다. 그러나 개들은 흐뭇하게 손바닥을 탁탁 털고 있던 마시의 붉은 눈동자와 마주 치자 깨갱거리며 뒷걸음을 치기 시작했다. 개들을 바라보던 마시가 혓바닥을 내밀어 붉은 입술을 한번 할짝거리자 이빨을 들어내던 사나운 개들은 서로 먼 저 주인의 뒤로 모습을 감추며 머리를 조아렸다. "왜 남의 가는 길을 방해하는 거냐?" 따뜻한 햇살아래 짙은 자주색 옷으로 온 몸을 가리다시피한 마법사는 소매 밖 으로 나온 창백한 손가락으로 커다란 개를 쓰다듬으며 말을 내뱉었다. "이보세요. 아까도 말했지만 다리를 먼저 건너기 시작한 건 우리 쪽이라니까요. 당신네 마부가 억지로 우리더러 비키라고 했던 거란 말이예요. 오히려 가는 길 방해한 건 그쪽이구요." 후마는 상대가 마법사인 것을 알아보았지만 거리낌없이 대했다. "내 이름은 토오조라고 한단다. 마법의 섬에서 너같이 어린 마법사들이 어떤 대접을 받는지 모르나보구나. 특히, 어린 여자마법사가 말이다." 마법사의 나직한 목소리는 은근한 협박과 노기를 담고 있었다. "흥! 나이 많다고 실력이 좋은 건 아닐텐데요. 요즘 마법의 섬에서는 실력보다 는 나이순으로 대접을 해주는 모양이죠? 마법의 섬에 있는 성안에서 나이 가지 고 어린 마법사들을 구박하는 노인네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아직도 그런 노인네가 있는지는 미처 몰랐네요." 조금전 마부에게 제대로 말도 못한 후마는 지금이라도 당한 것을 만회하려는지 말로는 한치도 지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후마가 상대편 마법사와 팽팽하게 말다툼을 벌이는 사이 카란은 마법사 뒤에 얌전히 서있는 자를 바라보며 온 몸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상대를 유심히 관찰하던 카란의 맑은 눈동자로 서서히 차가운 빛이 스며들었다. 순간 그 빛은 그의 눈에서 따뜻한 기운을 모조리 빼앗아갔다. 카란은 온 몸의 피들이 싸늘하 게 식는 느낌에 몸서리를 쳤다. 그는 피할 수 없는 거대한 아가리가 자신을 삼 키고 끝없는 수렁으로 끌고 들어간다고 생각했다. 먼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 계 속 - 역시, 난 게으른 뱀파였어...힝.. ㅠ.ㅠ; 번 호 : 83 / 83 등록일 : 2000년 04월 30일 23:55 등록자 : DEADSEA 조 회 : 478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83.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그대를 가장 뜨겁게 타오르게 했던 사랑이 그대를 가장 차가운 증오속에 던질 것이며 그대를 가장 행복하게 했던 순간이 그대를 가장 고통스럽게 할 것이다. 제 83 장 시험의 순간. "카란, 손님이야." 아름다운 여인이 그에게 말했다. 카란은 무감각하게 여인의 하얀 손을 잡고 그 녀가 이끄는대로 따라갔다. 이런 일은 언제나 있었던 일이었다. 여인을 따라간 작은 방에서 그를 기다리는 손님은 남자였다. 이상한 일도 아니 었다. 어차피 그에겐 자주 있는 일이었으니까. 카란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라 고 생각했다. 단지, 익숙한 역거움이 몰려왔을 뿐이었다. "아름다운 카란......"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의 끈적하고 더운 입김이 카란의 섬세한 목덜미를 훑어 내렸다. 몸서리 처지게 싫은 감각이었지만 카란은 입술을 꽉 다물고 참을성있 게 버텼다. "하아... 정말 아름답구나." 사내의 손이 그의 갸날픈 허리를 매만지며 흥분으로 떨리고 있는 것을 카란은 희미하게 느낄 수 있었다. 카란은 사내가 제발 빨리 끝내주기를 빌며 이 모든 것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일을 겪을때마다 그는 자신에게 일 어나는 일에대해 생각하기를 거부하는 방법을 하나씩 배워나가야만 했다. 라비론의 한 시골에서 살던 그가 사창가에 팔려 온 것은 3년 전이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동생들을 돌봐야했던 그가 술주정뱅이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사창가에 팔렸을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열세살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어머니 를 항상 화냥년이라 불렀고 신비로울 정도로 아름다운 아들 카란을 자신의 아 들이 아니라며 떠벌리고 다녔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단한번도 그 사실에 대 해 변명하려 하지 않았었다. 이제 카란은 자신이 누구의 아들인지 따위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고 신경쓰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이 지옥같은 사창가에서 벗어 나고 싶을뿐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선명한 아름다움을 풍기는 카란을 찾 는 손님들은 점점 많아졌고 그에따라 카란의 생활은 더 지옥같은 나날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잘 차려입은 귀족남자가 그를 그 지옥에서 꺼내준 것은 차가운 눈보라가 조용 히 휘날리는 날이었다. 그 남자는 서른 중반쯤 되는 귀족으로 매우 고결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다시 팔려가는 카란의 마음은 그 남자의 겉모습에 쉽게 감명받지 않았고 별반 기대하는 마음도 없었다. 하지만 그 남자는 카란에게 개인 교사를 붙여주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 고 사교생활을 위한 예의범절도 익히도록 돌봐주었다. 항상 미소를 잃지 않고 품위를 지켰던 남자는 카란에게도 귀족적인 몸가짐을 가지도록 요구했다. 그리 고 그는 가끔 카란을 서재로 불러 여러가지 고대 신화와 수학에 관계된 이야기 를 들려주었는데 언제나 카란을 예의바르게 대했다. 그러나 그 남자는 그 모든 친절을 베풀면서도 카란의 예상과는 달리, 단 한번도 카란을 탐하려 하지 않 았다. 카란은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속에서 점점 남자에게 마음을 열었고 그를 진심 으로 믿고 존경하게 되었다. 카란이 밝은 미소와 함께 진심으로 남자를 따르 기 시작했을때 그 남자는 가끔씩 미묘한 미소를 카란에게 되돌려주고는 했다. "녹색의 숲보다 더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간직한 카란. 너는 아름다움을 뛰어 넘어 좀 더 깊이 있는 인간이 되기를 바란다. 나를 위해 그렇게 할 수 있겠지?" "예, 꼭 그러겠어요." 카란은 남자를 진심으로 신뢰했고 믿었다. 그래서 그를 실망시키지 않기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모든 학문에 능통한 남자를 따라잡기 위해 카란은 열 심히 공부했고 귀족의 몸가짐을 가지기위해 한없이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그리고... 카란이 평화를 누리며 살기시작한지 1년의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그가 자신 조차 사창가에서 지내던 비천한 신분이라는 사실 자체를 잊어가고 있을무렵이 었다. 하루는 저택에서 성대한 파티가 열렸고 그 연회가 끝났을 무렵에는 남 자의 절친한 친구들만이 작은 접대실에 남아 늦은 뒤풀이를 하고 있었다. "하핫... 이봐, 자네가 특별한 유흥거리가 있다고 해서 왔는데 그건 언제 보 여줄 셈이지?" 한 친구가 남자에게 말했고 남자는 말없이 빙긋이 웃기만했다. 남자의 전갈을 듣고 불려온 카란이 긴 커튼이 드리워진 방안으로 조용히 들어서던 순간에도 그들의 대화는 계속되고 있었다. "표정을 보니 굉장한 걸 숨겨놓은 모양이군. 이번 물건에는 꽤 정성을 들였다 면서?" "자네가 데려오는 아이들은 하나같이 최상급인데 보는 것밖에 즐길 수 없다니 자네도 참 안타깝겠어." "어허... 저 친구 가슴아프게 그런 말은 왜 하고 그러나. 하고 싶어도 못하는 몸인걸...." 킬킬거리며 나직히 말하는 소리에도 남자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자네의 취미는 벌써 널리 알려진 일이지만 이번에는 어떤 것일지 기대되는군. 몇 년전에 데려왔던 녀석은 바로 다음 날 내다버렸다면서? 내가 달라고 그렇게 부탁을 했었는데 그냥 버리다니 아깝군." 모두들 술에 취해 붉어진 얼굴로 한마디씩 했는데 분위기 또한 상당히 퇴폐적 인 냄새를 짙게 풍기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커튼 뒤에서 걸어나 가던 카란은 그들을 보면서 잊었던 사창가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것 을 막을 길이 없었다. 순간, 카란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도리 질을 치며 강하게 엄습하는 의심을 부인했다. 절대로 그럴리 없다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카란은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곳에서 오가는 이야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그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가 자신을 안심시켜 주기를 바랬다. 하지만 남자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그 기묘한 미소를 되돌려 주었다. 그리고 그의 눈빛을 보는 순간 카란은 절망 을 느꼈다. 아니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남자는 성불구자였다. 하지만 기묘한 취미로 채울 수 없는 쾌락을 대신하는 사 람이였다. 어리고 아름다운 소년소녀들을 사서 적당히 아름답게 치장한 뒤에 친구들에게 향응을 제공하는 것이 그의 즐거움이었다. 물론, 그 장면을 함께 즐기는 것이 그의 가장 큰 목적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는 이내 실증을 느 꼈고 새로운 방법들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바로 소년소녀들이 그를 사랑하게 하는 방법이었다. 남자는 돈을 주고 사온 소년소녀에게 품위있는 교육을 시켜 주었으며 다정한 태도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그들이 남자를 진 심으로 믿고 따르기 시작하면 그는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남자의 철저한 이중적인 얼굴에 속았던 그들의 감정적 고통을 즐기면서 남자는 더 할 수 없 는 정복욕과 쾌락을 즐겼왔던 것이다. 남자는 카란의 표정을 하나하나 즐겼다. 그 자신의 친구들에 의해 더럽혀지는 카란의 육신과 영혼의 모습을 남자는 희열에 들뜬 눈을 번들거리며 지켜보았 다. 그의 배신에 완전히 정신이 나간 듯한 카란을 바라보며 그는 더없이 만족 스런 표정을 지었다. 거대한 어둠이 카란을 삼키고 갈가리 찢어내었다. 그의 영혼 구석구석에서 처 절한 피가 넘쳐났다. 그러나 그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비명도 지르지 않았 으며 반항도 하지 않았다. 악몽같은 그 날 밤이 지나고 서러운 눈발이 휘날리 는 어두운 새벽에 카란은 길거리에 벌거벗은 몸으로 버려졌다. 차가운 눈밭에서 웅크리고 엎드려 있는 카란의 육신은 그대로 꽁꽁 얼어붙어 서서히 생명의 기운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깊은 초록색 눈동자에는 이미 어떠 한 빛도 없었고 눈은 그저 멍하게 탈색된 구멍처럼 보일뿐이었다. 온 대지가 하얀 눈으로 뒤덮힌 땅에 천천히 여명이 밝아오고 어둠이 물러가자 눈부신 햇살이 찬란하게 밝아왔다. 카란의 감겨지는 시선속으로 너무나 눈이 부셔 눈으로 똑바로 발라볼 수조차 없는 햇살속에서 희미한 그림자가 천천히 걸어왔다. 점점 가까이 다가온 그림자는 고귀한 빛으로 가득한 것 같았다. 이 윽고 그림자가 멈추었을 때 카란은 차가운 육체가 따뜻해지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죽음을 눈앞에 두었던 카란를 구한 것은 고난의 여행을 떠나는 한 수도자였 다. 그 날 이후 카란은 고행의 수도자와 함께 판타리아 대륙을 떠돌기 시작 했다. 그것은 카란이 맛볼 수 있는 또 다른 새인생이 열리는 일이었다. 수도 자를 따라 무수한 인간의 삶과 죽음을 돌아보며 카란은 실로 많은 것을 배워 나갔다. 그는 수 많은 시간을 알 수 없는 오지의 숲과 황량한 벌판에서 보냈 고 뼈속까지 스미는 추위와 배고픔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막에서 죽 을 것 같은 갈증의 고통을 받으며 그는 비로소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카란은 자신을 괴롭혀오던 모든 생 각으로부터 조금이나마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언제인가 폐허가 되어 오래도록 아무도 찾지 않았던 옛 신전에 이르러 보낸 어느 날 밤이었다. 어둠의 신 에레보스의 신전은 검은 하늘 가득히 은색 으로 떨어지는 별빛 아래에서 신비롭게 그를 부르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카란 은 그곳에 이르러서야 오랫동안의 여로에서 얻을 수 있었던 깨달음에 대한 해 답을 찾았다. 그는 진심으로 신에게 복종하는 마음을 가짐이 되었던 것이다. 육신의 고통을 뛰어넘어 기도와 고행으로 계속되는 수행의 길에서 카란은 영 원히 변하지 않을 사랑과 신뢰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깨지지 않을 영원한 믿음을 믿으며 어둠의 신에게 자신을 맡기고 복종을 약속했다. 그리고 마침내 카란은 자신을 괴롭히던 모든 것으로부터 안식을 얻을 수 있었다. 메디아는 앞을 가로막고 있던 육중한 마차가 치워지자 시원하게 뚫린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후마와 대치한채 시비를 따지고 있는 마법사를 바라보았 다. 그리고는 가볍게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상대가 무슨 생각으로 길을 막 아섰던 그녀는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다리를 건너야겠다는 생각뿐이었 다. "에?" 상대편 마법사의 눈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며 대치하고 있던 후마는 갑작스럽 게 뒤쪽에서 메디아가 걸어나오자 깜짝 놀랐다. 그러나 메디아는 후마나 마법 사는 신경도 쓰지 않는지 말을 이끌고 계속 걸어나가더니 개들에게 겁을 주고 있는 마시의 옷을 살며시 낚아채어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메디아의 행동 에 상대 마법사도 당황한 눈빛을 지었지만 그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저 다가오는 메디아를 경계하는 눈으로 쳐다보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메디 아는 바짝 긴장하고 있는 마법사를 유유히 스쳐 지나가서 생각났다는 듯이 후 마를 뒤돌아보았다. 어정쩡하게 붙들려있는 마시를 여전히 끌고 가면서. "밥 먹으러 안가니?" "하...하지만... 저기..." 후마는 입만 뻥긋거리며 그녀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는 마법사를 손가락으 로 가르켜 보였다. 하지만 메디아의 시선은 후마에게 머물지 않았다. 메디아 는 평소 같으면 제일먼저 그녀를 따라왔을 카란이 아직도 멍청히 서있는 것을 발견했다. "카란, 뭐해?" 그러나 카란은 아무반응이 없었다. 그는 메디아의 뒤쪽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정신나간 표정이었다.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메디아는 자신의 뒤쪽에 있는 하얀망토의 사내와 개들을 살펴보았다. 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 개 들이 마시의 시선에 주눅이 들어서 끙끙거리고 있는 것만 빼면 지극히 평범해 보였다. 그녀는 다시 시선을 돌려 카란에게 큰소리로 외쳤다. "카란! 안가?" 그제서야 카란이 흠짓 놀라며 메디아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는 무덤덤한 메디 아의 모습에서 약간의 안정감을 되찾았다. 아직도 심장은 미친듯이 뛰었고 피 부가 낮은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지만 그는 주먹을 한번 꼭 쥐고는 용기를 내어 발을 움직였다. 그 남자였다. 자신을 가장 밑바닥까지 추락하게 했고 스스로를 포기할 정도로 막강한 감정 의 폭력을 행사했던 인간. 카란 자신이 최초로 믿었던 사람이었고 그 때문에 비참한 배신을 경험하게 만든 인간이였다. 그를 얼마나 증오했었던가. 그를 얼마나 죽이고 싶었던가. 아니, 그보다 그를 믿었던 자기 자신을 얼마나 죽이 고 싶어 했었던가. 죽음이 그를 삼키지 않으면 절대로 잊을 수 없을거라 생각 했었다. 하지만 카란은 그를 잊기로 했었다. 신의 종으로서의 삶을 시작한 순간, 카란 은 모든 증오와 고통을 망각하기로 결심했었다. 설사, 지금 이 순간처럼 증오 라는 존재와 정면으로 맞딱드려 그 결심이 시험받는 순간이 왔을지라도...... 카란은 핏기가신 창백한 얼굴이 무섭게 경련하는 것을 애써 무시했다. 그리고 그는 정면을 응시하며 침착하지만 굳은 걸음으로 메디아를 향해 걸었다. 메디 아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카란은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줄 수 없었다. 미소를 지어보려고 했으나 어쩔 수 없이 시선이 가버린 그 남자의 얼굴에서 발견한 스쳐가는 기묘한 미소를 보는 순간 카란의 얼굴은 그대로 얼 어붙어 버렸다. - 계 속 - 결국은 오후 내내 잠을 자고 이제서야 한편을.....;;; 미쵸... 번 호 : 84 / 84 등록일 : 2000년 05월 11일 03:55 등록자 : DEADSEA 조 회 : 112 건 제 목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84. =====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 ===== 그대를 가장 뜨겁게 타오르게 했던 사랑이 그대를 가장 차가운 증오속에 던질 것이며 그대를 가장 행복하게 했던 순간이 그대를 가장 고통스럽게 할 것이다. 제 84장 여자 대 여자. "카란?" 카란은 마시가 보기에도 이상해 보였다. 그의 핏기없는 얼굴과 경련을 일으키 고 있는 턱근육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것 을 짐작할 수 있었다. 메디아는 다시한번 카란의 시선이 닿아있는 남자를 유심 히 살펴보았다. 그 남자도 카란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매우 거슬리는 표정으로 카란을 바라보고 있었다. 멈추어서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는 카란과 그 남자를 잠시 관찰하던 메디아는 쥐고 있던 마시의 옷자락을 놓아두고 카란에게 걸어 갔다. 왠지는 몰라도 그를 구해줘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메디아는 그에게 다가가 경직되어있는 그의 손을 살며시 붙잡았다. 그의 손은 생각보다 더 차 가웠다. 메디아는 카란의 굳어있는 손을 꽉 붙잡아 당겼다. "가자." 그제서야 움직이게 된 카란은 딱딱한 나무토막처럼 메디아의 손에 이끌려 그 남자의 시선에서 벗어났다. 메디아가 카란을 끌고 그 남자를 지나치자 남자는 입술끝을 말아올리며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녀에게 붙잡혀 있는 카란 의 손이 오므라드는 것을 메디아는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메디아는 카란의 반응을 무시하고 계속 걸어가 마시까지 붙들었다. "길도 뚫렸는데 왜 안가고 미적거리고 난리야. 빨리 가자. 배고파서 죽겠다." 후마도 일행이 그렇게 전진하기 시작하자 주춤주춤 걸어서 우두커니 서있는 토 오조라는 마법사를 지나가려 했다. "이것들이-!" 그때 물에서 기어나와 흠뻑 젖은 꼴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던 마부가 소리쳤다. 마부는 주인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이 이상했지만 그냥 가려는 그들을 두고 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비싼 마차가 부서지고 말들이 다쳤는데 그들을 그냥 보낸다는 것은 그의 입장에서는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마부가 빠른 걸음 으로 후마의 앞을 가로막으려 들었다. "그냥가게 두어라." 지금까지 한마디도 하지않던 하얀 망토의 사내가 조용히 마부를 향해 명령했다. "하지만 주인님, 저 자들이..." "되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다리위의 그들을 구경하고 있는 모습을 잠시 언쨚은 듯이 둘러보며 남자는 천천히 말했다. "너는 가서 새마차나 구해오거라." 그의 목소리는 표정과 달리 자신의 집에서 하인들에게 명령하는 것처럼 편안하 게 들렸다. "예, 알겠습니다." 머뭇거리던 마부가 물방울을 튀기며 뛰어가자 남자는 메디아 일행은 쳐다보지 도 않은채 후마를 지나쳐 마법사에게로 다가갔다. 그의 개들이 슬금슬금 마시 의 눈치를 보며 주인의 앞을 가로질렀고 남자는 아무렇치도 않게 산보를 하듯 이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는 겁니까?" 토오조라는 마법사가 남자에게 말했다. "오늘은 이 정도면 충분하오. 더구나 생각지도 못 했던 반가운 얼굴을 보았으 니 다음 기회에 이 빚을 근사하게 갚을날이 있을것이오." 후마의 귓가로 나직한 남자의 대답이 들려왔다. 토오조는 남자의 대답에 후마 를 한번 쳐다보고는 발걸음을 돌려 남자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뜻밖에 상황이 조용히 무마되자 어처구니 없어진 사람은 후마였다. 그녀는 눈을 꿈벅거리며 양쪽으로 멀어져가는 메디아와 토오조 쪽을 한번씩 번갈아 보다가 메디아를 향 해 뛰어갔다. "뭐야? 금방이라도 뭔가 벌어질 것 같더니......" 아쉬운 듯 아자탄이 중얼거리자 크란도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코마지 는 다리위에서 시선을 떼지않고 카란과 그 남자 사이에 흘렀던 미묘한 긴장감 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쩌면 다리위에서 벌어졌던 잠깐의 모습들 이 그에게 유리한 정보를 제공해 줄 수도 있을것 같았다. "우리도 자리를 옮겨야겠는 걸. 벌써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쟎아." 다리를 건너 다른 길로 빠져나가고 있는 메디아 일행을 관찰하던 아자탄이 엎 드려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왕궁에서 기어나온지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따라다니기가 이렇게 귀찮을줄은 몰랐군." 이어지는 그의 투덜거림에 크란이 작은 실소를 터뜨렸다. "당신은 워낙에 몸을 가만히 두지 못하는 사람이라 이렇게 한곳에서 오랫동안 기다리는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은 모양이군요." 크란의 말대로 아자탄은 쉴새없이 몸을 움직이던 전투기사였기에 이런 관찰임 무에는 적당하지 않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아자탄은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의 외로 이 일에 생각지도 못 했던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는 멀리있는 메디아 일행의 작은 대화까지도 놓치지 않고 듣고 있었기 때문에 생각지도 못 했던 재 미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의 관찰대상자는 매우 흥미로운 면이 많았는데 그 일 행들도 제각각 특이한 구석이 있어서 그에게 톡톡한 재미를 제공했다. "자,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고 어서 따라가기나 하지. 어두워지기전에 따라잡아 야 할테니." "놓칠 염려는 없으니 안심하세요. 그리고 오늘 밤에는 저들도 반드시 왕궁으로 되돌아 가게 되어있으니까요." 왕궁으로 돌아온 일행들은 각자 저녁시간이 되기전에 만찬에 참석하기 위해 옷 을 갈아입었다. 매달 1일에 왕의 직계가족만이 모이는 이 작은 모임에 초대된 다는 것은 대신이라 할지라도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메디아와 마시는 물론 왕실 마법사인 아담과 후마 그리고 케이론의 제자인 크라메드도 초대되었다. 그리고 마법의 섬으로 떠나기로 되어있는 흑기사 카드모와 제피로 스도 참석했을 뿐더러 알렉토와 카란도 함께였다. 촛불이 은은하게 밝혀진 거대한 식탁위로 가득 차려졌던 음식들이 치워지고 그 자리에는 신선한 과일과 귀한 포도주가 놓이기 시작했다. 왕의 아내들과 그 자녀들이 한 자리에 모두 모인 모습을 처음보는 후마는 연신 식탁 너머로 화려 하게 차려입은 공주와 왕자들을 훔쳐보기에 바빴다. 조용하면서도 낮은 대화소 리로 조금은 소란스런 실내는 무척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는데 아 담은 옆에 앉아서 다소곳이 얌전을 떨고 있는 제자를 쳐다보며 자애스런 표정 을 지었다. "오늘 시내 구경은 잘 하고 왔느냐?" "예, 스승님. 오람시내에 코끼리가 그렇게나 많은지 오늘 처음 알았어요." 시내의 외곽은 물론 중심가에서도 종종 눈에 띄던 코끼리에 대해 조심스럽게 대 답하는 후마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침울하게 들렸다. "상인들이 상품을 나르는데 가장 좋은 교통 수단이 코끼리란다. 그래서 코끼리 를 조련하는 마후트들이 나날이 늘어가는 추세지." "예에." 아담의 자상한 설명에도 후마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후마야?" "예?" "왜 그렇게 풀이 죽어 있느냐?" 아담이 힘없이 대답하는 후마를 이상한 듯이 쳐다보자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 이며 입술을 삐죽거려 보였다. "저기.. 아무한테도 말씀하시면 안돼요, 스승님." 주위의 눈치를 보며 그렇게 속삭이듯이 말한 후마는 오늘 밖에서 있었던 일을 남이 듣지 못하도록 나직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래도 그만하게 끝난게 다행이구나." "하지만 스승님, 전 화가 나요." "네가 아직 어려서 그런 일에 경험이 없어서 그랬을뿐이란다. 나이가 들고 많 은 시간을 살아가다보면 그런 일쯤은 현명하게 대처하게 될테니 그렇게 속상해 할 것 없단다, 후마야." 아담이 낙담해있는 후마를 다독여주는 사이 상석에 앉은 히페리온과 헬레나가 곁에 있는 첫째왕자 헬리오스와 대화를 나누다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리고 있 었다. "하하핫... 그럼, 오늘은 디아 공주의 하프소리 좀 들어보자꾸나." 아마도 헬레나와 헬리오스는 디아 공주의 악기연주 솜씨를 칭찬하고 있었던 모 양이었다. 마침 히페리온의 흡족한 웃음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시종들은 큼지막 한 하프를 실내의 한쪽에 옮겨 놓는 중이었다. 디아 공주는 히페리온의 첫째 딸로 올해 스물셋이 되었지만 아직 결혼을 하지 않고 있었다. 디아 공주를 낳은 탄티아라는 그의 두번째 아내가 공주의 결혼을 한사코 반대했기 때문이었는데 수 많은 청혼자들을 물리치고 지금까지 공주를 독신으로 남아있게 했다. 디아공주도 어머니의 의견에 따라 결혼에는 생각이 없는지 아직까지도 홀로 남아 바로 한 살 위의 오빠인 무다파 왕자와 여행 하 는 일이 많았는데 여자로서는 보기 드물게 대담하고 현명하여 왕의 사랑을 많 이 받았다. 다른 공주들과는 달리 성밖에 따로 집을 마련해 생활하는 디아 공 주는 사교생활에도 남다른 일면을 보였는데 그녀는 귀족들과 어울리기 보다는 평민들과 어울리는 일을 좋아했다. 예능에도 소질이 있는지 몇 가지 악기를 능 숙하게 다룰 수 있었고 노래와 춤에도 일가견이 있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였는데 특이한 성품과 개성으로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었다. 점성술을 익힌 어머니 탄티아를 닮아 키가 크고 마른 몸매를 타고난 디아 공주 는 초원에서 살던 관습을 그대로 간직한 탄티아와 같은 풍의 옷을 입었는데 화 려한 자수가 놓인 치맛단에는 색색의 실이 늘어져 있어서 움직일 때마다 종아 리에 부딪히는 색실이 매우 독특해 보였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하프를 연 주하기 시작하자 향초가 타오르는 실내에는 은은한 음률이 퍼져나가 한결 편안 한 분위기가 되었다. "그런데 사만다는 언제쯤 돌아올 예정이오?" 히페리온이 포도주를 마시다가 지나가는 말로 아라크네에게 말을 걸자 아라크 네는 순간 긴장했다. 그러나 그녀는 금새 활짝 웃으며 히페리온의 눈을 정면으 로 쳐다보고 대답했다. "그 아이는 아직도 여신관이 되고 싶다는 꿈을 버리지 못한 모양입니다, 폐하. 얼마 전에는 수도원에 들어가 백일기도를 드리고 있다는 전갈을 받았답니다." "백일기도라고? 지난 번에는 여신관들을 따라 여행을 갔다고 하지 않았소?" 아라크네는 땀이 배어나는 손을 자신도 모르게 드레스 자락에 문질러 닦았다. "아... 여행에서는 며칠전에 돌아왔다고 하더군요." "그렇소? 그런데 어째서 문안인사조차 없는 거요?" "폐하, 몸이 불편하여 그랬을겁니다. 여행도중 병을 얻어 중간에 돌아왔다고 하더군요. 심려를 끼쳐 드릴까하여 신전에서 요양을 하는 중이었다고 합니다." "어허, 몸이 아프다면서 백일기도라니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요?" 그녀의 눈동자가 그녀처럼 긴장하고 있는 카드모에게 잠시 머물렀다. "호호... 신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어찌 다 알겠습니까. 신의 보살핌으로 병 이 나았으니 백일기도를 하는 것이겠지요." 아라크네는 손으로 입을 슬쩍 가려 어색하게 웃는 척했다. 사만다 공주가 지금 현재 대신 네토르의 집에 있다는 것은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만약 사만다 공주와 카드모의 아들이 맞교환되어 서로 볼모로 잡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 면 그들 모두가 위험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눈에 띄게 굳어있는 카드모의 얼굴을 바라보자 아라크네는 더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왕이 모든 사실 을 알면서 묻는 것이 아닐까 라는 걱정도 들었다. 안그래도 요즘 그녀의 주위 로는 감시의 눈길이 삼엄해 진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와 셰 도우 아미 간의 일이 어느정도는 알려졌지만 아직까지 네토르와 그의 아들 카 드모까지 연관되었다는 것이 알려진 것은 아니었다. 아라크네는 애써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더욱 담담해 지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들의 대화를 빠짐없이 듣고 있던 메디아는 그녀와 히페리온의 가식적인 태도에 한심함을 느꼈다. "희극배우가 울고 가겠군." 혼자 중얼거리는 메디아의 비꼬는 음성에 가장 가까이에 있던 헬리오스 왕자가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메디아는 히페리온이 가족들에게 그녀를 소개할 때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었다. 식사중에도 말 한마디 없이 음식만 먹어대던 그녀가 포도주를 연신 가져다가 마시며 입을 열자 헬리오스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당연했는지도 몰랐다. "방금 뭐라고 했소?" "아무말도 안했어." 첫째 왕자 헬리오스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그러나 메디아는 그의 반응 에 전혀 관심이 없는지 은잔에 담긴 포도주를 혀까지 핥아가며 마셨다. 그녀의 곁에 앉은 마시도 꿀단지를 가져다가 먹는 곰새끼처럼 포도주를 먹어대고 있었 는데 쩝쩝대는 소리가 장난이 아니었다. "역시 왕실이라 그런지 포도주 하나는 끝내주네." 메디아의 만족스런 목소리가 조금 크게 울려퍼졌다. "으응. 메디아야. 이거 나중에 집에 가져가자. 우리 꺼보다 훨씬 맛있다." 마시가 메디아의 감탄성에 보태어 끼어들자 이번에는 아라크네가 그들의 대화 에 관심을 보였다. "호오.. 집이라니, 집이 어디이길래 그러지? 가까우면 내가 포도주를 많이 보 내줄 수도 있는데 말이야." 아라크네는 메디아와 마시에게 말 붙일 기회가 생기자 반색을 하며 물었다. 그 들에 대해 무언가 알아 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산인데요." 마시가 포도주를 꿀꺽거리며 말했다. 포도주를 준다는 말때문인지 조금은 공손 한 목소리였다. "산? 어느 산 말이지? 산이 한두군데가 아닌데 그중에 어디에 있는 걸 말하는 거지?" 아라크네가 마시를 향해 관심있게 질문하자 메디아가 포도주를 마시다가 잔을 탁 내려놓으며 조금 크다싶게 말했다. "남의 집에 관심이 많군." 반짝거리는 촛불사이로 두 여자의 시선이 공중에서 맞부딪쳤다. "뭐라고?" 얼굴을 찌푸리며 반문하는 아라크네의 목소리가 기이하게 올라갔다. 그러자 각 자 잡담을 나누던 모두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포도주 따위 보내주지 않아도 되니까 남의 집이 어디에 있는지 관심 둘 것 없 다는 뜻이야." 순간, 주위는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시중을 들어주던 시종들의 움직임도 딱 멈추어졌을정도였다. "감히... 감히 무슨 말을......" 아라크네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그러나 메디아는 가볍게 코웃음 치는 것으로 아라크네의 서슬퍼런 눈길을 무시했다. 두 여자 사이에 냉랭한 공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왕의 아내들은 오늘을 기다렸다는 듯이 모두 호화찬란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왕비 헬레나는 물론이고 그 나머지 다섯아내들도 비단과 귀한 보석으로 온 몸 을 치장한 상태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이 바로 아라크네였다. 워낙에 불꽃같은 외모에다가 짙은 자주색 옷과 루비로 장식한 아라크네는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그에 비해 메디아는 단순한 검은 색 옷을 입고 있었는데 장식품도 검은 마노 귀거리와 반지정도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메디아는 긴 검 은 머리와 보라빛 눈동자로 기이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는데 화려한 왕의 아 내들 사이에서도 특별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따위 말을 함부로 지껄이다니 어린 것이 겁도 없구나. 감히 내가 누군줄 알 고 그러느냐?" 아라크네가 흥분하며 메디아를 노려보자 히페리온은 헛기침을 하며 괜히 천장 을 바라보기 시작했고 헬레나는 식탁위에 누워 아양을 떨고있는 고양이의 머리 를 한가롭게 쓰다듬으며 흥미로운 듯 사태를 관망하기만 했다. 히페리온은 어 색하게 그들을 외면했지만 다른 열두 명의 왕자와 공주는 흥미진진하게 두 여 자를 지켜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헬리오스 왕자는 옆에 있는 메디아를 놀랍다 는 눈길로 바라보았고 오피온 왕자는 불안스럽게 로사리아 공주를 보았는데 그 녀는 눈을 치켜뜨고 메디아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갑자기 썰렁해진 식탁의 분 위기 때문인지 어느덧 디아 공주의 조용한 하프소리도 멈추어진 상태였다. "히페리온, 집안 단속 좀 잘해야겠어. 소문을 듣자하니 한꺼번에 같은 침실에 서 잔다더니 아내들이 왜 저 모양이지? 버릇이 없쟎아."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메디아의 한마디에 천장을 쳐다보며 그들을 외면하고 있 던 히페리온이 질겁한 표정으로 메디아를 무섭게 쏘아보았다. - 계 속 - 주간 연재는 고사하고 월간 연재가 될까 걱정스럽군요.;;; 그러나 최선을 다하는 중이랍니다. ^^; 그런데 감상 좀 보내주세요. 기운이 안나요. 흑..ㅠ_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