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내 가족 정령들 [1 회]글쓴이: 탁목조 첫 만남 - 1 어느 가을날 주말, 갑자기 울적해진 기분과 쓸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야외로 바람을 쐬러 가기로 했다. 그렇다고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근처 불암산에 올라서 가슴속에 바람이나 넣고 답답 함을 잊기로 한 것이었다. 예전에 나와 같이 있던 선생님은 이런 행위를 [숨쉬로 간다]고 표현하기도 했었는데.... 토요일 오전인데도 사람들이 제법 많이 있어서 나는 될 수 있으면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길을 택해서 산길을 오르기로 했다. 산길에는 그렇게 적힌 곳이 많이 있다. [입산 금지] 하하하 그렇다고 그 길로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서 나도 그렇게 적힌 철조망 사이로 허리를 숙이고 들어가 한참을 걸었다. (이건 비밀로 합시다. 아이들 배우면 안돼는 거라서.) 산길은 별로 가파르지 않고 완만했고 제법 오랫동안 통제가 되어 있었던 모양으로 솔 잎들이 깔려서 푹신거렸고 아직 지지 않은 나뭇잎들로 적당한 녹음도 지워주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없어 한산한 산길에서 오랜만에 시원하다는 생각을 하며 [숨쉬기]를했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에서 굳이 정상을 향해 가야 한다는 생각도 없었기에 적당한 곳에서 쉬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마침 얼마 걷지 않아서 길옆으로 비스듬히 난 길을 따라서 작은 공터가 보였기에 그리로 발길을 옮겼다. 사실 그곳이 누구의 무덤자리였다가 지금은 봉분마저 비바람에 쓰러져 보이지 않게 된 것인지 아니면 자연적으로 생긴 공터인지는 몰랐지만, 나는 그저 누군가의 무덤자 리이겠거니 했다. 산속에 그런 모습으로 남아있는 장소치고 무덤자리 아닌 곳이 이 나라 산에 어디에 있을까 하는 것이 나의 평소 생각이었으니까.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아서 앞쪽으로 경사진 탓에 소나무들 사이로 넘어 보이는 풍경 들을 바라보며 나름의 호젓함을 느끼는 일도 참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솔잎을 흔드는 바람, 바람에 간간히 날리는 갈색 솔잎, 솔잎이 날려간 자리에 햇빛 을 받아 빛을 뿌리는 민들레와 소복하니 털을 달고 비상을 준비하는 들국화의 꽃씨, 그리고 그 위에 앉아 있는 작은 아이. ...? ...?! 흐-억 아이 아이라고.. 여러분도 상상이 갈 것이다. 어떻게 아이가 아니 조그마한 인간이 민들레의 꽃씨 무더기 위에 앉아 있을 수가 있냐구. 물론 나도 평범하고 보통인 사람이니까 당연히 몇 초 동안 멍-- 했다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자세히 그 곳을 바라보았지. 하하 여러분도 짐작하겠지만 그 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요즘 너 무 판타지 소설을 많이 읽어서 헛것을 본 거야. 하하하 여러분도 이런 나의 반응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시 그 자리를 둘러보면서 이런 당연한 생각을 하면서도 조금은 아쉽더군. 사실 일상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니까 당연히 헛것을 보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남는 미묘한 아쉬움. 그런 비상식적인 일이 그리고 그렇게 획기적인 일이 나에게 한 번쯤 일어나 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 하지만 역시 그건 잠시의 착각일 뿐. 나는 그런 씁쓸한 아쉬움 속에서 다시 답답함을 잊기 위한 숨쉬기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바람은 여전히 나의 머리칼을 흔들고 때로는 잡아당기듯 했지만 주위는 너무나 고요 했고 새소리도 바람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직 정오도 되지 않은 시간이라 나는 느긋하게 입고 온 잠바를 벗어 깔고 팔배게를 하고 햇빛을 피해 소나무 그늘에 얼굴만을 묻고 온 몸을 햇빛에 맡기고 눈을 감았다. 햇빛은 가을이라고는 해도 한 여름 온기를 지니고 있었고 입가를 스치는 풀 향기며 마른 나뭇잎의 향기는 나에게 충분히 즐거운 기분을 주었고 느긋하고 포근한 느낌을 주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당연히 가지게 되는 생각은 내가 무엇 때문에 저 아래 인간들이 복작거리는 세상에서 하루하루를 피곤하게 끌려 다니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지. 하지만 그도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그렇게 살아 갈 수밖에 없다는 걸 이미 알 나이가 지나버렸는걸. 나이 서른이 넘어서도 아직 순수를 꿈꾼다고 하지만 그래도 세상 알 건 다 아는 나이 고 보니 먹고사는 문제에서부터 인간관계에 이르기까지 복잡하고 다난한 일들에서 벗어나서 살 수 없는 존재가 인간임을 깨닫고 있는 거지. 무엇보다도 인간은 오래 못 살거든. 나도 이제 어쩌면 살아갈 나이가 살아온 나이 보다 적을지도 모르는데... 사실 나는 늙고 힘이 없어서 누군가에게 의지해서 살아가야 할 나이가 되면 깨끗하게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리라고 결심하고 있는 사람이거든. 뭐 그런 거야 닥쳐봐야 아는 일이지만. 그러다가 나는 갑자기 담배가 고파졌다. 하하 어릴 때 배운 도둑질이라 고치지 못하는 고질병 중의 하나지. 뭐 솔직히 고치려고 해 본 적이 없기는 하지만... 몸을 일으켜 세우고 느긋하게 담배를 피워 물고 나는 갑자기 불장난을 시작했다. 언제 맡아도 좋은 냄새거든. 나뭇잎이 타 들어가는 냄새는... 솔직히 그건 어디 화재 가 나서 나는 냄새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나뭇잎이 타는 냄새는 향기 이지. 정말 좋은. 상수리 나뭇잎 하나가 타들어 간다. 점차 짙은 갈색을 띄우다가 가운데 부분이 검어 지면서 구멍이 뚫리고 화르륵 불이 붙어서 타들어가는 것이지. 그리고 그 옆에 가느다 란 솔잎으로 불 하나가 붙어 나온다. 솔잎의 끝에는 더 이상 타 들어갈 만한 무엇이 없으니 곧 꺼지겠지. 그런데 용하게도 꺼지지 않고 제법 버티고 있다. 꼭 새끼 도마뱀 같은 녀석이 꼼지락거리는.. ...! 쩝 오늘은 왠지 헛것이 많이 보이네. 꼼지락거리던 도마뱀도 곳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여전히 타오르는 작은 모닥불(사실 모닥불이라고 할 수도 없다. 난 산에서 그런 크기 의 불은 절대 피우지 않는다 기껏해야 내 손바닥만한 불이다. 혹시 산림청에서 보시 더라고 용서해 주세요.)속에서 가끔 허공으로 몸을 띄우는 도마뱀이 보이는 것도 같지 만... 헛생각 하지 말고 그만 불을 덮어야겠다. 역시 연기가 나야 냄새가 짙어진다. 나는 깊이 나뭇잎 타는 냄새를 맡으며 시리지도 않은 손을 조금 남은 불씨 위에서 비볐다. 그러는 동안에 시간은 정오를 훨씬 지난 모양이었다. 제법 배도 출출하고 어서 내려가지 않으면 산 아래에 내려갔을 때쯤엔 뱃가죽이 등 가죽에 붙을지도 모른다. 뭐 그렇게 평소에 시간을 지켜서 밥을 먹는 것은 아니지만 배가 고프면 꼭 먹어야 한 다는 생각은 지키는 사람이 나다. 그게 언제가 되었든 배가 고플 때는 먹고 안 고프면 안 먹고. 나는 그렇지만 서두르지 않고 발길을 옮겼다. 다시 [입산금지]표지판을 지나서 사람들이 오가는 등산길을 따라서 계곡을 끼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아직 내려오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토요일 오후 일을 마치고 오는 사람들 때문인지 등산로를 따라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쩐지 모두들 올라가는데 혼자 내려가고 있으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은... 사실 평소에도 다른 사람들 퇴근 시간이 내 출근 시간이었고, 다른 사람들 깨어나는 시간에 잠드는 생활을 해 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들어내놓고 반대가 되는 분위 기는 이질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곡 옆으로 약수터가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목이 마르던 참이라 잘 되었다는 생각으로 약수터로 향했다. 사람들은 여기서도 욕심껏 물통들을 줄지어 놓고 약수를 받는 모양이었지만 산에서 는 물통에 물을 받는 사람들 보다는 한 바가지의 물을 얻어 마시는 사람에게 언제나 우선권이 있는 법이다. 더구나 이렇게 물이 펑펑 쏟아지는 것이 아니라 졸졸졸 흘러 나오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사람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께서 푸른 국자 바가지에 물을 받아서 건네 주셨다. “감사합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나는야 대한민국 건전맨,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인사성 밝은 것은 기본. 캬~~! 시원한 물맛, 나는 연이어 한 바가지를 더 청해 마시고 꾸벅 인사를 하고는 조금 아래쪽 의자로 가 앉았다. 약수터에서 흘러온 물이 계곡으로 흘러가는 물길이 앞에 있었다. 그렇게 깨끗하게 보 이지는 않았지만 도심 근처 산의 약수터 치고는 깨끗한 모습을 하고 있다. 물길을 양 옆으로 막아선 돌담에는 푸른 이끼들이 아직 빛을 잃지 않고 버티고 있었 고 나무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햇살은 얕은 웅덩이의 물살에 부딪혀 부서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그 속에서 이상한 것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무심히 눈을 흔드는 빛의 산란을 보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민들레의 씨앗 같은 것이 둥실둥실 떠 있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물 위에 떠 있는 줄 알았는데 조금 지나고 보니 그것은 빛의 흔들림 에 따라 춤추듯이 움직이며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잠깐 나무의 흔들림으 로 빛의 산란이 멈추면 그것도 사라져 버리고 그러다가 다시 나타나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신기한 마음에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좀 더 가까이 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물웅덩이에 다가갔을 때 나는 더 이상 그것을 찾을 수 없었다. 물론 다시 이전에 자리에 돌아와 그것을 찾으려 해 보았지만 역시 허사였다. ‘참 이상한 일도 다 있지’ 나는 궁금하기는 했지만 그런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겠다 싶어서 그만 산을 내려 가기로 했다. 아직 등산로는 한참 남아 있었다. 이젠 두 시가 되어 제법 날이 더워지고 있었다. 가을이라고는 해도 햇살이 눈부실 만큼 좋은 일기였고 그런 중에 가장 더운 시간이었 으니 더위를 느끼는 것도 탓할 일은 못되는 것이었다. 더구나 제법 두툼한 잠바까지 걸치고 있었으니... 나는 계곡으로 내려가 한차례 세수를 했다. 시원한 계곡물. 작은 피라미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사람들이 산천어라고 하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아이들은 그냥 물고기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아마도 피라미는 아닐 것이고, 산천어가 맞을지도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아이들이 말하는 물고기라는 것이다. 물고기. 내 눈앞에 있던 물고기는 빠르게 꼬리를 치며 물살을 거스르며 바위사이로 작은 포말을 일으키는 곳으로 사라져 버렸다. 물이 많지도 않았고 물살이 거세지도 않았지만 아직 계곡이 말라있지 않은 것만으로도 좋았다. 예전에는 가재도 많이 잡았었는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 물살을 바라보고 있었다. 쪼그려 앉은 나는 두 팔을 무릎에 대고 펴고 있었는데 조금 전 물을 묻힌 손에서는 아직도 물방울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 손끝에서 떨어진 물방울은 계곡 웅덩이에 떨어져 작은 동심원을 이루어 내었다. 그리 멀리 가지도 못하는 모양이었지만 나는 그것조차도 작고 귀엽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도 이상한 것이 나타났다. 그 작은 동심원의 중앙에 물방울이 떨어져 내릴 때 마다 잠깐 잠깐 물방울이 튀어 오르며 사람(아주 작은 사람)의 모습을 만드는 것이었다. 나는 이번에는 그냥 움직이지 않고 이 녀석의 모습을 살펴 보기로 했다. 투명한 물색의 어린아이. 어린아이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기 어렵지만 일단 머리카락이 기니까 여자아이 같다. 물방울이 떨어져 내릴 때 마다 잠깐씩 나타나는 모습이었는데 무릎 아래쪽 까지는 솟아 나오지 않았다. 그 녀석은 솟구쳐 오를 때 마다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있는 모양이었는데 내 쪽에서 고개를 돌린 상태였다가 조금씩 반복 될수록 내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리고 그 녀석이 내 쪽으로 완전히 몸을 틀었을 때, 녀석은 웃는 것 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리곤 그만이었다. 내 손의 물기가 거의 말라 버린 것이었다. 역시 나는 다시 손에 물을 묻혀서 또 같은 자세를 취해 보았지만 다시 그 녀석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나는 허전한 마음으로 길을 따라 산을 내려왔다. 그리고 곧장 집으로 들어와 버렸다. 생각하면 생각 할수록 너무나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그 녀석들은 내가 너무 판타지 소설을 많이 읽었기 때문에 생긴 착시였을 것이다. 내가 오늘 기분이 이상했기 때문에 그리고 감상적이고 조금 우울한 기분에 오랜만에 자연 속에 나갔던 탓에 그런 헛것들을 보았을 것이다. 나는 몇 번이나 이렇게 내 자신에게 타일러 보았다. 하지만 역시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 할 길이 없었다. 그건 분명히 정령이나 요정 그런 것이었을 거야. 분명히 그럴 거야. 아마 처음에 보았던 것은 어쩌면 바람, 그다음에는 볼 것 없이 불, 그 다음에는 빛, 그다음에는 물의 정령. 분명히 그럴 거야. 이건 분명한 거야. 어떻게 한 번 도 아니고 네 번이나 그런 것을 볼 수가 있겠어. 이건 분명히 실재야. 나는 결국 그런 어처구니없는 결론에 도달해 버리고 말았고, 내가 아는 모든 지식을 (기껏해야 판타지 소설에서 읽은 것이 전부지만) 동원해서 정령들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으로 조잡한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정령. 이 세상과는 다른 정령계에 존재하는 것. 세상의 거의 모든 것에는 정령들이 있으나 대표적으로는 빛의 정령, 땅의 정령, 물을 정령, 불의 정령, 바람의 정령 등이 있다. 이외에도 많은 정령들이 있지만 대표적인 것이 이와 같다는 것이다. 정령들은 하급 중급 상급 그리고 정령왕의 계급을 가지고 있다. 무조건 하위 존재는 상위 존재에 종속된다. 정령은 계약에 의하여 종속시킬 수 있으며 그럴 수 있는 사람은 마법사나 정령사들이 있다. 이외에도 드래곤이나 초월적 존재들이 가능하지만 인간들은 기본적으로 정령들을 보거나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정령들과 대화가 가능해야만 계약을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정령들과 계약을 맺게 되면 언제든 계약된 정령은 계약자가 원하는 어떤 일이든 시키 는 대로 해야만 한다. 그것이 비록 소멸에 이른 경우라 할지라도. 사실 이 세상에서 소멸된다고 해도 정령계로 돌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정령과 계약하여 소환한 사람은 마법사의 경우에는 마력이 소비되면 정령사 의 경우에는 특정한 마력이 소비되지는 않으나 정령이 힘을 쓸 때에 정령사의 정신력과 체력이 소비된다. 내가 대충 살펴본 바에 의하면 이런 것이 정령들에 관한 대부분이었다. 때문에 나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정령들을 보았다면 내가 마법사가 아닌 이상 정령사에 해당한다는 말인데, 왜 이제서야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그리고 내가 다시 정령들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정령들을 보면 내가 정령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나는 그 주말을 그렇게 내내 고민하고 고민했지만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었고 또 다시 일상의 나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것일 뿐. 나는 여전히 정령들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있었 고 차근차근 정령들을 어떻게 하면 다시 볼 수 있을지 계획을 세워 나갔다. 나는 먼저 기본적으로 눈에 잘 보일 것 같은 불의 정령을 불러보기로 했다. 방법이야 내가 아는 것이 아니니까 어떻게든. 첫 만남 - 2 참으로 무대뽀. 나는 밤이면 밤마다 촛불을 켜 놓고 그 불꽃 속에서 정령을 불렀다. 나는 내가 봤던 정령들이 중급이나 상급에 속한다는 망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잘난 척을 해 보아야 이 세상에 정령이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미친놈 소리를 듣게 될 것이 분명한 이런 상황에서 중급이나 상급이 나타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나는 촛불을 켜놓고 불의 하급정령이라고 하는 [카사] [사라만다]의 이름을 죽어라고 불렀다. 물론 큰소리를 지르면 옆집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미친놈이라거나 숙면방해라거나 소 음공해라거나 하는 여러 가지 불이익이 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그저 조용히 촛불을 앞에 놓고 ‘카사, 카사, 카사, 카사, 카사, 카......’ 혹은 ‘사라만다, 사라만다, 사라만다, 사라만.....’ 이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 도마뱀 녀석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포기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다음에는 작으마한 대야에 물을 떠 놓고 한 방울씩 한 방울씩 물방울을 떨어 뜨리며 ‘운디네, 운디네, 운디네, 운디네, 운디네.....’ 그러다가 그것도 안되어서 선풍기 틀어놓고 ‘실프, 실프, 실프, 실프....’ 그것도 안되면 형광등 백열등 보면서도 .... ‘나타나라, 나타나라, 나타나라, 나타.....’ 솔직히 그러면서 생각하는 건. 내일은 인터넷에 들어가서 빛의 정령의 이름을 알아와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나는 어떤 정령의 모습도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헛수고를 계속하는 시간이 자꾸만 흘러서 다시 주말이 되었을 때 나는 망설임 없이 다시 불암산을 올랐고 그 때와 같은 코스의 같은 행동을 반복했지만 역시 정령들의 모습을 다시 볼 수는 없었다. 그리고 또 한 주가 흐르고 다시 한 주가 흐르고 10월에 시작한 짓이 12월이 다 가도 록 결실을 맺지 못했을 때 나는 역시 내가 미친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그래 솔직히 미친거지 이 세상에 정령이라는 것이 있을 턱이 없다. 나는 오늘도 늦은 밤 방에 앉아서 촛불을 켜 놓고 ‘카사, 살라만다’를 부르다가 맥 빠진 모습으로 처져 있었다. 휴우-- 나는 한 숨을 쉬곤 담배를 뽑아 촛불에 대고 불을 붙였다. 뻐끔 뻐끔 담배 끝에 불량품이 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담배는 곱고 질이 좋은 잎을 잘게 썰어야 하는데 가끔 줄기 부분이 들어 있는 경우 가 있었고 재수 없으면 재대로 썰어 놓지 않아서 덩어리가 있는 경우가 있었다. 이럴 때에는 담배가 잘 빨리지도 않고 불도 잘 붙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담배의 끝에 있으면 가끔 지금처럼 불이 붙기도 한다. 하지만 곧 꺼지고 마니까... 역시나 담배끝의 불도 곧 빨간 불씨만 남기고 꺼져 버렸다. 그리고 그 덩어리가 다 타고 나서야 매콤한 연기가 입을 통해서 폐로 넘어 들어왔다. 한참을 촛불만 보고 있었던 탓인지 담배를 빠느라고 피가 몰린 탓인지 조금 어지러웠다. “간만에 핑 도는군...” 나는 혼잣말을 뱉으며 재떨이에 담뱃재를 떨었다. “오늘도 여전히 그 녀석들은 보이지를 않는군.” 나는 허탈한 마음이 되었다. “불의 정령이라... 불의 정령.” 내가 이렇게 허탈하게 부르는 순간 갑자기 촛불의 불꽃이 일렁였다. 나는 그저 바람이 부는 것이려니 하고 무심했다. 하지만 그 동안 아무 변화가 없던 촛불만을 봐왔던 탓인지 왠지 신경이 쓰였다. 나는 다시 조그마한 소리를 내 뱉었다. ‘불의 정령’ 그 순간 나는 다시 촛불이 일렁이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불의 정령!” 나는 다급하게 큰 소리로 불렀다. 그리고 그 순간 더욱 더 촛불이 크게 일렁거렸다. 그것은 절대로 내 입바람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갑자기 긴장되고 두근거리가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불의 정령!!” 이라고 크게 소리를 질러 보아도 촛불의 일렁임 이외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결국에는 옆집에서 항의를 받고서야 소리를 지르는 것을 멈추기는 했지만 나는 여전히 낮게 부르는 ‘불의 정령’ 이라는 소리에 반응하는 촛불을 보고 있었다. 소리를 크게 지르는 것이 소용이 있는 것이 아닌가 보다. 이건 뭔가 더 있어야 하는 것인가 보다. 그게 뭘까? 지금까지는 왜 한번도 반응하지 않다가 이제서야 이렇게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또 그러면서도 왜 정작 나타나지는 않는 것일까? 나는 지금까지 내가 했던 것과 지금의 상황에서 무엇이 달라 졌는지를 생각했다. 일일이 펜으로 적어가면서 예전의 상황과 지금의 차이점을 생각했다. 시간? 시간은 언제나 비슷한 시간이다. 그럼 달과 관련이 있나? 하지만 내가 했던 기간이 두 달이 넘었으므로 이것도 아니다. 그럼 내가 담배를 피워서? 그것도 아닐 것이다. 예전에도 담배 피워 문 것이 한 두번도 아닌데. 그럼 .... ...! ....!! 혹시 불의 정령이라고 부른 것 때문에? 카사나 사라만다라고 부르지 않고 불의 정령 이라고 부른 때문에? 그래 그럴지도 모른다. 어차피 명칭이 어찌 되었든 상관없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에서야 우리말이 가장 좋은 것일지도 모르니까. 그럼 왜 반응만 있고 정작 나타나지는 않는 것일까? 그리고 다른 녀석들도 반을을 보일까? 나는 즉시 실험에 들어갔다. 우선 그릇에 물을 떠 놓고 ‘물의 정령’ “물의 정령” 을 불러 보았다. 역시 반응이 있었다. 그릇의 물이 흔들렸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정령이 나타난 것은 아니었지만. 역시 일단 반응은 있었다. 그럼 뭐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가만... 혹시? 혹시? 이게 맞다면 나는 어쩌면 바보 일런지도 모른다. 이렇게 간단한 것을....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떠오른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불의 정령 소환” ..... ..... 촛불이 흔들렸다. 하지만 전처럼 곧 멈추지는 않았다. 조금씩 조금씩 계속 흔들렸던 것이다. 나는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촛불을 응시했다. 작게 흔들리던 촛불이 점점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작은 아주 작은 도마뱀 모양으로... “으하하하하하 으하하 으하 케켁 켁 으하하” 나는 웃다가 사례가 들릴 정도로 웃었다. 그리고 가만히 그녀석을 들여다 보았다. 모양은 역시 도마뱀처럼 생겼다. 목도리도마뱀. 목 부분에 불길이 너울거려서 더욱 목도리 도마뱀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왠지 녀석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왠지 띠꺼운 표정이다. 솔직히 말하면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급한 마음에 물그릇을 바라보며 외쳤다. “물의 정령 소환” 그 순간 촛불의 녀석이 더욱 티꺼운 표정으로 나를 봤다는걸 나는 그 순간 알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물그릇에 정신을 쏟고 있었던 것이다. 물그릇에서도 조금씩 조금씩 파랑이 일면서 사람의 형체를 가진 녀석이 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저번에 내가 가장 뚜렷히 볼 수 있었던 바로 그 녀석이었다. 투명한 몸체를 가진 뚜렷하게 옷을 입었는지 어쩐지 확인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저 얼굴 부분만 뚜렸했을뿐 아래로는 물기둥 모습이었다 겨우 어깨 부분까지가 드러났 을 뿐이었다. 그 때 나는 촛불의 녀석도 많이 작아져서 목도리 부분 까지만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 그러니까 한꺼번에 많은 녀석을 불러 올 수 없는 것이구나. 어쩌면 내가 능력이 안돼서 그런지도 모르겠고. 나는 그때야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 어떤 녀석을 돌려 보내고 어떤 녀석은 남겨두고 할 수가 없었다. 둘 다 처음으로 겨우 얼굴을 볼 수 있게 된 녀석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촛불을 돌아 보았다. “불의 정령 만나서 반갑다.” 나는 역시 물의 정령을 돌아 보며 인사를 했다. “물의 정령 만나서 반가워.” 하지만 불의 정령 녀석은 고개를 비스듬히 틀어서 나를 외면했고 물의 정령은 그저 빤히 나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여러 가지로 궁금한 것이 많았다. 그래서 이것 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너희들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니?” 하지만 녀석들은 아무 반응 없이 그 모습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가끔씩 불의 정령 녀석의 티꺼워하는 듯한 눈알을 굴리는 것이나 물의 정령이 얼굴에 비해 커보이는 눈을 껌뻑이는 이상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너희들 내 말 못 알아 듣는 거야?” “너희들을 내가 불러서 기분이 상한거니?” “뭐라고 말을 해봐. 답답하잖아.” “너희는 말을 할 수가 없는 거니?” 하지만 녀석들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생각 밖으로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자거나 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계속해서 녀석들에게 말 을 걸며 어떤 반응이든 이끌어 내려고 했지만 나는 아무런 반응도 얻어 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서 아침 날이 밝아 올 무렵 나는 내 몸을 짓누르는 피곤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때서야 내가 한 가지를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령사가 정령을 소환하게 되면 마법사의 마력 대신에 체력과 정신력을 소비해야 한 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었던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게 되었을 때 녀석들을 돌려 보내기로 했다. 하지만 돌려 보내는 방법도 쉽지 않을 것 같아서 고민이었다. 뭐 닥치는 대로 해 보는 수 밖에 없으니까. 일단은 이름을 알았으니 그 뒤에 명령을 붙이면 되겠지 “불의 정령 돌아가!” 나는 먼저 불의 정령에게 말했다. 녀석은 특유의 티꺼운 눈으로 나를 보더니 촛불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별로 어렵지도 않네... 하지만 역시 하나라도 사라지니까 부담이 덜 한 느낌이 들기도 하네. 하하 나는 물의 정령을 돌아 보았다. 녀석은 불의 정령이 돌아 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였다. 좀더 선명 한 모습이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제 너도 돌아가야겠지? 그런데 혹시라도 다음에 내가 물의 정령을 부르면 너 말 고 다른 녀석이 나오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 난 처음에 봤던 녀석들이 좋은데.. ”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버티고 있을 여력이 없었다. 나는 “물의 정령 돌아가!” 하는 소리와 함께 물의 정령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혹시 내가 녀석들을 돌아가라고 하지 않고 기절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기절해도 남아서 내 체력과 정신력을 빼앗아 가는 것일까? 이것이 내 마지막 기절하기 전의 생각이었다. 덕분인지 나는 그날 잠 속에서 내내 악몽에만 시달렸다. 안 그래도 말라 비틀어진 몸이 스켈레톤이 되어 덜그덕 거리는 그런..... 난 하루 종일 잠만 자고 있었다. 하룻밤 동안 정령 둘을 데리고 있었던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나 보다. 하지만 나는 저녁 무렵 일어나서도 곧장 다시 정령 소환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정령 하나만 불러 보기로 했다. 하지만 어떤 녀석을 불러 보아야 할는지... 아무래도 아직 불러 보지 않은 녀석을 불러 보고 싶었지만, 확신도 서지 않았고 또 무엇보다도 다른 녀석들은 어떤 준비를 해야 할는지 확실하지가 않았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다시 불이나 물의 정령 중에 하나를 불러 보기로 했다. 그래도 가장 준비가 필요 없는 녀석이 물의 정령이었다. 뭐 불의 정령도 촛불만 켜면 되는 일이었지만 어쩐지 그 놈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안 부르기로 했다. 하하하 나도 마음이 여린 사 람이라고... (누가 그건 쫌스러운 거라고 하는 소리가... 안들려! 안들려!) 간단하게 조금 큰 그릇에 물을 떠 놓고 나는 물의 정령을 소환했다. “물의 정령 소환!” 역시 수면에 잔잔한 파랑이 일면서 물의 정령이 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완전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어제보다는 나은 모습이었다. 무릎 아래로는 아직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 위로는 그런대로 선명한 모습을 하고 있다. 내가 가진 정령의 이미지 탓일까? 아니면 인간들이 정령이라는 것에 대해서 쓸 때 이미 정령들을 만나 본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의 지식을 은연중에 적용할 탓일까? 책에서 읽은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긴 머리는 허리까지 내려오고 두 손은 가슴쪽에 모아 쥐고 썩 귀엽게 생긴 얼굴에 큰 눈을 가진. 옷이라고 해야 할는지 아니면 그냥 피부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알몸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인간으로 치면 몇 살이나 되었을까? 아마 중학생 정도의 모습이라고 하면 될 것 같다. 참 귀엽게 생겼다. “반가워, 난 루탄이야. 최루탄 ㅡ.ㅡ;;” 내 이름에 대해서는 아무말도 말았으면 좋겠다. 내가 내 이름 지은 것은 아니니까. 세태가 너무나 슬프다고 우리 할아버님께서 눈물루 탄식할 탄으르 쓰셔서 내 이름을 지으셨단다. 우리 조부님은 그 당시의 군부독재가 마음에 안드셨다고... 덕분에 이런 개성적인 이름을 가지게 되었지만... 하하 이 녀석은 설마 최루탄이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를 알 턱이 없겠지.. 하하하 하지만 이 녀석은 여전히 반응이 없다. 오늘이 토요일이라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되고 또, 연말이라 1월 3일 까지는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시간은 많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녀석들과의 친분(?)관계를 만들고야 말겠다. 카카카... 흠... 여전히 말뚱말뚱 쳐다만 보고 있다. 뭐가 문제일까? 내가 불러 낸 거니까 뭔가 시키면 말을 들을까? 그런데 뭘 시켜 보나? “이봐, 너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반응이 없으니까 그럼 심부름하나 해 줄래?” 음 ... 여전히 말뚱말뚱. 아니다 그것도 아니고 그냥 보고만 있는 거군. 아무 느낌도 없다. 그저 가만히 손을 모으고 서 있을 뿐이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음... “저기 나 목이 마른데... 여기 물 한 컵만 담아 줄래?” 나는 우선 내가 쓰는 머그컵을 내밀어 보았다. 그러자 녀석은 천천히 손을 내밀어서 머그컵 안으로 뻗었다. 그리곤 그 손 끝에서 물방울들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하하 뭔가 시키면 말을 듣기는 하는 구나. 신기하다. 나는 녀석이 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 보고 있었다. ‘얼래? 이거 뭐하는 거야?’ 나는 그러다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왜냐하면 머그컵에 물이 차면 찰수록 녀석이 들어 있는 그릇에 물이 줄어드는 것이다. ㅡ.ㅡ;; 그럼 아무 소용이 없는 것 아니냔 말이야. 그럴 것 같으면 내가 물을 따라 마시는 것이 빠르지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물을 채우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구. 하! 허탈하다. 뭐 일단은 시키는 일을 해 준다는 것은 그나마 얻은 수확이지만. 허긴 지금 이녀석이 나에게 무엇을 해주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은 없는 일이다. 하하하 이런 신기한 녀석이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충분한 일이다. 세상에 정령을 보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구. 하하하 시간이 좀 걸리기는 했지만 녀석은 컵 안에 물을 채우고는 손을 거두었다. “야, 솔직히 이건 내가 떠 놓은 물을 옮겨놓은 거잖아. 난 물을 만들어서 컵에 담아 줄 줄 알았는데.. 그리고 이건 다시 여기 부어 놓을게...” 나는 컵의 물을 다시 녀석을 발치에 내리 부었다. 쪼르르르.... 그런데 물을 부으면서 그릇에 물이 흔들리자 놀라운 일이 생겼다. 녀석의 모습이 훨씬 더 정확하고 구체적인 모습이 되는 것이었다. ?? 색도 모양도 짙어지고 눈에 구별도 잘 가는.. 뭐라고 설명하기는 어려웠지만 녀석의 모습이 훨씬 더 생기가 있어 보였던 것이다. 나는 그런 사실을 깨닫는 순간 행동에 옮겼다. 실험 장소를 목욕탕으로 옮긴 것이다. 흔히 세면장으로 말하기는 하지만 샤워기도 있고 변기도 있고... 하하하 나는 그릇을 들고 세면장으로 가서 샤워기의 꼭지를 돌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샤워기의 물을 녀석의 그릇으로 가지고 갔다. 처음에는 그저 그릇의 테두리로 해서 물을 부었지만 좀 지나서는 녀석의 머리 위로 물을 부었다. 찬물이라 손이 시리기는 했지만 녀석은 물이 쏟아지고 물이 넘칠수록 더 선명하고 깨끗하고 생기를 띄어 갔다. 쏟아지는 물 때문에 녀석의 모습이 조금씩 가리기는 했지만 녀석이 생기를 띄면 띌수록 나는 녀석이 웃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물론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겠지만.... 한참을 그렇게 물을 쏟아 붓던 나는 손이 얼어붙는 것 같아서 샤워기의 물을 온수 쪽으로 옮겼다. 설마 따뜻한 물이라고 녀석이 화를 내지는 않겠지? 역시 예상대로 물의 온도는 별로 상관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가만히 고여 있는 물 보다는 살아 움직이는 물이 좋은 모양이었다. ‘그렇겠지, 아무래도 물은 고여 있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것이니까..’ 하지만 언제까지나 세면장에 쪼그리고 앉아서 그러고 있을 수도 없는 문제고 해서 나는 다시 그릇을 들고 방으로 돌아 왔다. 그릇을 들고 돌아 다니는데도 녀석은 변화가 없었다. 방으로 돌아오자 녀석을 처음의 그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조금은 더 생기가 있어 보이기도 했지만 역시 물이 쏟아지고 있을 때와 비교하면 기운이 빠진 듯이 보였다. “미안해, 계속 물을 부어주고 싶지만 궁금한 게 많아서. 내가 다음에는 멋진 선물을 준비해 줄게.” 나는 녀석에게 그렇게 말했다. 나는 이미 녀석을 위한 멋진 선물을 생각해 놓았던 것이다. 하하하 역시 나는 천재라니까. ㅡ.ㅡ;; 이제 어떻게 하나. .... .... 나와 녀석을 서로를 멀뚱멀뚱 바라만 보고 있었다. 계약. 솔직히 계약을 맺고 싶은데 ... 어떻게 하면 되는 것인지 알지를 못하니... 하하 “이봐 물의 정령아, 혹시 나하고 계약이라는 거 맺을 생각 없어? 왜 있잖아 니가 알까 모르지만 책 같은데 보면 정령하고 계약을 맺으면 심부름도 해주고, 또 명령 내리면 그것도 잘 들어주고 그러던데.. 그렇다고 내가 무슨 심부름 시켜 먹자고 이런 말 을 하는 것은 아니고.. 그러니까 서로 말도 안 통하고 그저 이렇게 서로 쳐다보고만 있는 것도 좀 이상하고 해서..” 나는 스스로가 실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녀석에게 반 독백으로 이렇게 말을 했다. 그렇다고 녀석이 어떤 반응을 보인 것도 아니지만. “이봐 물의 정령아.. 아니다 이거 좀 이상하다 그지 물의 정령아, 이렇게 부르는건 좀 이상하니까 너 이름하나 지어 줄게. 음... 그러니까 아무래도 너는 물의 정령이니까 그냥 [수] 그런니까 [수]아라고 부르면 되겠내.” 나는 또 내 마음대로 떠들어 댈 수 밖에 없었다. “그래 정했다. 수. 넌 이제부터 수아다. 수.” 나는 물의 정령의 이름을 그렇게 정했다. 앞으로 다른 녀석들의 이름도 그렇게 해서 이미 정해져 버렸다. 수, 화, 풍, 지, 광.... 아무튼 간단하게 이런 식으로 정해야 겠다는 생각을... 뭐 누가 그렇게 몰개성적인 이름을 짓느냐구 따지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나는 이렇게 말해 주겠다. 티꺼우면 댁도 정령 불러서 이름 붙이면 될거 아닙니까? 내가 부른 정령 내가 이름 붙이는데 왠 참견이슈? 카카카카카 ㅡ.ㅡ;; 하지만 수아는 그래도 별 반응이 없었다. 그저 두 손을 앞에 모으고 기도하는 자세로 그냥 서 있을 뿐이었다. 나는 점점 심심해 졌다. 아무 반응이 없으니 당연한 것이겠지만... 나는 결국 녀석을 돌려 보내기로 했다. “물의 정령 돌아가.” ?? 하지만 녀석은 돌아가지 않았다. 그냥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것이었다. “뭐야? 왜 그래 왜 가만히 있는 거지?” 나는 갑자기 무서워 졌다. 뭐가 잘못된 것일까? 뭐가 문제지? ..... 하지만 나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수아야 돌아가!” 순간 녀석은 물그릇 안으로 빨려들 듯이 쓰러져 버렸다. 이름이다. 이름. 녀석은 내가 지어준 이름으로 자신에게 내려진 명령에 따른 것이다. 내가 녀석과 계약을 했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녀석은 소환과 역소환, 그리고 간단하지만 컵에 물을 옮겨주는 일에서 내가 시킨 명령을 따른 것이다. 하하 뭐 굳이 계약이 어찌 되었든 상관은 없는 일이다. 나는 다시 소환을 했다. “물의 정령 소환” 역시 정령이 나타났다. 하지만 나는 다시 녀석을 돌려 보냈다. “물의 정령 돌아가!” 그리고 나는 조심스럽게 소환을 했다. “수아 소환!” 나는 소환을 하면서도 걱정이 되었다. 만약에 나타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하고.. 하지만 수아는 다시 나타났다. 앞의 정령이나 수아나 다른 모습은 하나도 없었다. 어쩌면 이렇게도 정령이라는 녀석들이 몰개성적인지.... 하지만 수아는 다르다. 생긴 것이 어떻든 수아는 물의 정령으로 불리지 않고 수아라고 불리는 것이다. 하하하 나는 가만히 조심스럽게 수아에게 손가락을 가지고 갔다. 어쩌면 내 손가락 하나보다도 작아 보이는 수아에게 위험스러울 수도 있다고 생각 했기 때문에 내 행동은 몹시 조심스러웠다. 나는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수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손가락은 그저 수아의 몸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수아의 형체가 이그러진 것이다. “앗!!” 나는 놀라서 얼른 손가락을 떼었다. 그러자 곧 수아의 모습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미안하다 수아야. 그렇게 될 줄은 몰랐어. 혹시 아픈 것은 아니니?” “미안해 수아야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나는 말 없이 서 있는 수아에게 머리를 숙이며 사과를 했다. 뭐.. 그렇다고 수아가 반응을 보인 것도 아니지만... 하룻밤 동안에 별 진전은 없었다. 정령에게 이름을 붙여 준 것 이외에는 별다른 진전은 없었다. 진전이 있다면 화아, (이녀석은 도마뱀이라는 이름을 지어 줄까 하다가 형평성을 고려해서 화아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의 몸으로도 담배불을 붙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점과 광아(이녀석은 빛의 정령이다)는 빛이 뭉쳐진.. 뭐라고 해야하나 그냥 존재감이 없이 그저 빛의 덩어리 처럼 보인다는 것, 풍아(물론 바람의 정령이다)는 처음 불러 낼 때 여건을 만들기 위해서 상당히 피곤 했다는 것 (바람이 눈에 보이지를 않 아서 천장에 모빌 같은 것을 잔뜩 만들어 달고 나서야 녀석을 불러 올 수 있었다.) 과 모습이 수아랑 많이 닮은 인간형의 모습이라는 것(머리에 고깔을 쓰고 있다는 것이 다르다. ^.^) 마지막으로 땅의 정령도 있을 것 같은데.. 서울 이 바닥에서 땅의 정령을 어디에서 부르나 싶어서 아직 시도를 해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 (화분을 하나 사와서 시험을 해 볼 생각이다. 밤이어서 방법이 없었다.)이 전부이다. 그리고 수아는 두손을 모으고 무표정, 화아는 티꺼운 눈빛으로 고개를 돌려 외면한 모습, 광아는 알 수가 없는 모습, 풍아는 나타나면 모빌들 사이를 쉬지 않고 날아 다니는 모습. 하지만 내가 하는 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건 좀 그렇다. 물이 없으면 수아가 안 나오고, 불이 없으면 화아가 안 나오고, 빛이 없으면 광아가 안 나오고, 바람이 없으면 풍아도 안 보이고, ㅡ.ㅡ;; 원래 내가 아는 정령들은 어두우면 빛의 정령을 불러서 도움을 받거나 목이 마르면 물의 정령을 불러서 도움을 받거나 ... 뭐 그렇게 도움이 되는 것이었는데... 이 녀석들은 그런거와는 거리가 멀다. 그저 있으니 신기하다는 정도 이외에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를 않는 거다. 하하하 별수 없이 이제부터는 그냥 애완동물 키우는 것처럼 이 녀석들과 지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하하 ㅡ.ㅡ;; 그래도 허전한 집에 새 가족들이 생긴거니까. 하하하 솔직히 따로 밥을 줄 필요도 없고.... 신기하고.... 시키면 작은 재주도 피울 줄 알고...(별로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하면 같이 지내기에 좋은 녀석들이다. 하하하 인연이란.. - 1 한 겨울 내내 나는 정령들과 동거를 했다. 그 사이에 소개 하지 못한 정령 하나가 늘었는데.. 땅의 정령이다. 처음에 이름을 지을 때... 풍, 수, 화, 광까지는 좋았는데.. 토라거나 지라거나 하는 이름을 붙이기가 이상해서 (생각해 보라. 토아야라거나 지아야 라거나..) 음... 별로 이상하지 않다고? 그건 땅의 정령이 생김새가 늙은 난쟁이 할아버지처럼 생겼다는 사실을 몰라서 하는말이다. 할아버지 처럼 생겼는데 토아야? 혹은 지아야? 라고 부르는건 문제가... ㅡ. ㅡ;; 그래서 결국 혼자만 특이한 이름을 지어 주었다. 지토. 흠.. 토지라고 지으면 이상해서 거꾸로 지토라고 지어 주었던 것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14평 짜리 작은 집에는 수아를 위한 간이 분수, 풍아를 위한 모빌, 화아를 위한 청동화로(이건 인사동에서 사왔다.), 광아를 위한 프리즘, 지토를 위한 화분이 놓여졌다. 그 동안 정령들과의 관계가 달라진 것은 없다. 그저 불러 놓으면 쳐다보고 서 있거나, 티꺼운 표정으로 쳐다보거나, 모빌 사이를 날아서 돌아다니거나, 둥둥 떠서 조금씩 흔들리고 있거나, 땅속으로 들락 날락 하고 있거나... 내가 뭐라고 해도 별다른 반응은 없는 것 같다. 뭐 사실 별로 시켜 볼 것도 없었지 만... 수아가 있는 분수는 집안 습기 보충에 좋다고 선전하는 것을 보고 샀는데 작지만 그 런대로 모양이 예쁘다. 수아는 그 분수가 올라 와서 사방으로 물을 둥글게 떨어뜨리 는 중앙에 서 있는 게 좋은 모양이다. 처음 분수에서 소환 했을 때 거기에서 나오더 니 언제나 그 자리에 서서 손을 모으고 있다. 그나마 수아가 있어 좋은 건 물을 갈아 주지 않아도 정화를 해 준다는 것이다. 한 번 물이 더러워 진 것 같아서 수아에게 깨끗하게 해 보라고 시켰는데... 수아의 몸을 통과한 물은 깨끗한 물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더러운 것들은 무슨 방법을 썼는지 작은 알갱이처럼 되어서 물 아래 가라 앉았다. 하지만 봄이 오는 지금까지 정령들과의 관계에 변화가 없어서 답답하기는 하다. 이런 상황에 대해 어디 물어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슨 책에서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참, 난 이제 정령을 둘을 한꺼번에 불러 놓을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 수아와 화아를 같이 불렀을 때 무척 힘들었었는데.... 사실은 지금도 그렇게 둘을 부르지는 않는다 정령들의 속성에도 차이가 있어서 서로 반대되는 속성끼리 불러 오면 내가 더 힘들어 지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불과 바람, 물과 땅, 이렇게 둘씩은 참 잘 어울리는 모양이다. 전혀 거부감이 없이 불러 낼 수 있다. 그리고 광아는 어떤 정령들과 불러도 별로 마찰을 일으키지 않았다. 지금도 분수 위에 수아가 있고, 넓은 화분(이건 지토를 위한 것인데, 방 모서리에 20 센티 정도의 흙을 사방 70센치 정도로 깔고 부추, 파, 상추 등을 몇 포기 심어 놓았다. 화분처럼 생기지는 않았다.) 에서는 지토가 흙 속을 들락거리고 있다. 지토는 농사 짓는 것을 아주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몇 안 되는 식물들이지만 너무 보 기에 좋게 잘 키워 놓았다. 다행히 창가여서 그런대로 햇빛도 들어오고 해서인지 정 말 먹음직스럽게 키워 놓은 것이다. 하지만 내가 가끔 그것들을 뽑아서 라면에 넣어 먹으면 투덜투덜 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뭐 사실은 내 기분이겠지만... 벌써 새 학기가 시작하고 상당히 지난 시간이어서 학원 일도 그런대로 다시 정리가 되었고(학기 초엔 좀 바쁘다), 중간고사는 조금 남았으니까 나에게는 어느 정도 여유 가 있는 때다. 그래서 이번 주에는 야외로 나갔다가 올까 생각 중이다. 아무래도 답답한 도시 보다 는 봄빛이 넘치는 자연이 정령들에게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너무 변화가 없으니 별별 생각을 다 하게 된다. 금요일밤 수업이 끝나고 나는 원주로 가는 기차를 어렵게 잡아 탈 수 있었다. 사실은 수업이 끝나면 12시가 넘기 때문에 기차를 탈 수 없는데 원장님께 말씀드리고 (급한 일이 있다고 핑계를....) 바쁘게 역으로 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준비라고 할 것은 별로 없었다. 작은 배낭 속에는 코펠하나와 두 세 끼 분량의 쌀과 밑반찬, 라면 몇 개가 들어 있 다. 뭐 담배 몇 갑과 작은 물통, 등산용 컵, 기타 몇가지 용품들이 들어있지만 그렇 게 무거운 것도 아니다. 예전에 대학 다닐 때는 한가득 짐을 지고 산 속으로 헤매고 다는 적도 많았다. 그저 사람들이 싫어서, 그리고 그저 산과 나무와 풀들이 좋아서 그러고 다녔었는데... 지금은 겨우 이틀이나 있을까 하고 가는 길이라 텐트도 없고, 작은 방수 침낭이 하나 있을 뿐이다. 그러고 보니 준비할 것이 많은데... 간단한 여행도 이렇게 막무가내로 가는 것은 아 닌데... 워낙 집을 떠나서 돌아다녀 본 지가 오래 되어서인지 되는대로 준비를 하고 나왔다. 필요하면 근처 어디서든 살 수 있을 테니... 하하하 이런 여기가 무슨 역인가? [별어곡]이라. 그럼 이별의 골짜기 뭐 그런 이름인가? 하하 내리긴 내렸는데... 어디로 가야하나. 중간에 원주에서 기차를 갈아타느라고 생 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던 모양이다. 벌써 아침이다. 역 주변에는 그다지 식사를 해결 할 만한 식당이 보이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역 안 에 있는 매점에서 간단하게 빵과 우유로 아침을 때웠다. 난 일단 걷기 시작하면 무조건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가고 싶어한다. 될 수 있으면 사람들이 가지 않을 법한 곳, 험하고 길이 제대로 나지 않은 길. 그런 곳으로 발길을 옮기는 것이다. 뭐 사람을 싫어해서 보다는 자연 속으로 들어오면 왠지 사람들이 같이 있는 것은 싫 다. 사람들과 같이 있는 것은 자연 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지 않는 것이다. 나는 언제나의 습성대로 주위를 살피고 치악산의 끝자락인지 모를 산을 살폈다. 될 수 있으면 숲이 우거져 보이고, 사람들이 별로 다닐 것 같지 않은 곳을 찾는 것이다. 일단은 계곡이 보기도 좋고 느낌도 좋지만, 그런 곳은 이미 사람들의 발길이 너무도 많이 닿아 있는 곳이어서 싫었다. 결국은 일단 좁은 논두렁길을 따라 산 쪽으로 발을 옮겼다. 이 산골에도 폭 좁은 논이 길게 옆으로 누워 계단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억척스러움이란.... 정말 존경스러운 것이다. 오랜 시간을 두고 다듬었을 이 계곡 사이의 논은 그러나 인공이라는 느낌 보다는 자연이라는 느낌을 준다. 정형화 된 반 듯 반듯한 모양이 아니어서인지 아니면 들판에 허리 숙인 이들이 오랜 시간 이 풍경 속에 그렇게 머물러 동화된 탓인지는 모르지만 전혀 위화감이 들지 않는 것이다. 한창 봄 농사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아직도 논에는 물이 차지 않았다. 나는 일단 흔들리는 마른 풀잎들 속에서 풍아를 불러 내었다. 그리고 좀 힘들겠지만 지토를 불러 내었다. 둘은 수아와 화아 만큼은 아니었지만 속성이 상충되는 면이 있는지 썩 편하지 않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크게 불편한 정도는 아니니까 별로 상관은 없다. 풍아는 풀잎들 사이에서 머뭇거리다가 내가 발길을 옮기기 시작하자 내 어깨위로 날 아왔다. 어깨에 앉은 것은 아니고 아마도 머리카락이 날리는 사이로 돌아 다니는 모양 이다. 소리가 없어서 모르겠지만 간간이 눈 앞으로 튀어나오기도 한다.(내 머리카락 은 좀 길다. 고생고생 길러서 이제는 뒤로 묶고 다닐 수 있을 정도는 된다. 원래는 검 은 색이지만 갈색염색을 했다. 검은 생머리는 이상해서 염색도 하고 웨이브 파마도 하 고...) 지토는 내가 발걸음을 옮기는데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두고 땅 속을 들락 거리며 따라 오고 있었다. 집에서 보다는 둘 다 생기가 있어 보여서 데리고 나오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한 시간 남짓 걸어서 이제는 논길도 끝나고, 산으로 접어든 길이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어디에 있을까... 여기도 작은 길이 산 속으로 어슬렁거리는 모습으로 뻗어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산 속으로 삭정이를 주우러 가는 마을 사람 들의 발길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이 길 어디에 무덤이 있어서 생긴 길일 수도 있다. 흔히 산 길의 많은 곳은 무덤으로 통한다. 그것이 등산로가 아닌 이상은... 나는 서두를 것도 없었기에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풍아도 지토도 계속 그렇게 따라오고 있었다. “풍아, 지토 이렇게 나오니까 좋지? 나도 오랜 만이라 그런지 가슴이 시원해 지는 것 같다.” 나는 평소의 습관대로 그들에게 대답도 없는 말을 걸며 걸었다. 10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제법 따사로운 햇빛이 빽빽한 침엽수림 속으로 반짝이고 있다. 물이 오르고 있는 나무들과 흙들... 이제 완연한 봄으로 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산 길은 여전히 이어 지고 있었다. 원래 산 길이란 이렇게 길게 이어지기도 하지만 흔히 얼마쯤 더듬어 가다 보면 길이 끊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이렇게 깊은 산 속으로 까지 나무를 하러 오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요즘 같은 때에 사시사철 나무로 취사를 하는 사람들도 별로 없어서 나뭇꾼이 있을 턱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깊은 산 속으로 길이 이어지는 경우는 별로 없다. 한 두 사람쯤 가끔 산을 탄다고 이렇게 길이 나지는 않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길이 이어지고 있다. 허긴 별로 상관이 없는 일이기도 했다. 걷기에 불편하지 않아서 좋았고 인적이 있어 나를 방해하지는 것도 아니라 상관이 없는 문제였다. 정령들은 계속 따라 왔지만 나는 이제 별로 녀석들을 상관하지 않았다. 나는 나 대로 그저 맑은 공기와 푸른 산빛에 젖어 들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만 더 있으면 이렇게 솔 숲이 우거진 곳에서는 송화가루 날리는 모습을 볼 수 있 을 텐데... 군대 있을 때에도 소나무 숲으로 바람이 불어가면 숲 전체가 일렁이며 날아오르는 송화가루들이 환상적인 아릿함을 가슴으로 뿌리곤 했었는데.. 나중에 송화가루 날릴 때쯤 다시 산행을 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길은 제법 가파른 모습으로 이어진다. 돌아보니 제법 높은 곳 까지 와 버렸다. 어느 틈엔지 나무들도 키가 작아지고 바닥도 흙보다는 돌이 많아지고 있었다. 지토 녀석은 흙이든 바위든 상관없이 들락거리고 있었지만 나는 아무래도 가팔라진 길과 바윗길에 걸음이 더뎌졌고 숨이 거칠어지는 것을 느꼈다. 하하하 움직이지 않던 몸이 산길을 오르려니 당연히 삐그덕 거리는 것이다. 나는 잠시 길을 멈추고 앉아 쉬기로 했다. 12시에 가까워진 시간, 이제는 천천히 결정을 해야 한다. 오늘 밤에는 산에서 잘 생각 이지만 이렇게 바위 틈에서 자는 것은 아무래도 어렵다. 산 위 바위틈에서 잠을 자보 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내가 지금 그렇게 팔팔한 청춘도 아니고 (난 서른하고도 이제 셋 이나 되었다. 늙었지.... ㅡ.ㅡ;;) 아직 날씨가 노숙하기에 적당한 것도 아니다. 뭐 예전이라면 침낭 하나도 충분하겠지만, 왠지 지금은 사양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아무튼 그래서 결국 위로 계속 가다가는 바위틈의 노숙을 각오해야 하고, 그렇다고 지금 내려가자니 왔던 길을 되돌아 가야 하는 것이 싫고... 나는 물통을 꺼내서 몇 모금 들이키곤 잠시 하늘을 보며 고민에 빠졌다. ‘음.. 아무리 생각해도 왔던 길을 돌아 내려 가는 것은 취미에 맞지 않는 일이니까 그냥 한 번 올라가 볼까?’ 하하 고민이라고 해 봐야 뭐 그리 오래 생각 할 것도 없는 문제였다. 이런 건 고민이 아니라 그냥 선택이니까... 다시 길을 따라 걸음을 옮기다가 나는 내 결정이 참 다행스러운 것이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산등성이를 따라 위로 뻗어가던 길이 산의 옆구리를 끼고 돌며 옆으로 돌아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산 정상쪽으로 올라 가지 않고 있으니 한 두 시간 정도 이렇게 가다가 산 아래도 발을 옮긴다 해도 산 아래도 내려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길은 제법 운치를 더해가며 넓어 졌다. 내가 가던 길이 중간에서 다른 길과 더해진 것이다. 산 아래에서 올라오는 길이 그렇게 넓은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껏 내가 오던 길 보다는 더 선명했다. 길 옆으로 나이 든 소나무들이 허리를 비틀며 낙락하고, 작은 계곡 위로는 통나무 두개를 가로 놓은 다리도 놓여 있었다. 아무래도 앞쪽으로 산사가 있지 싶었다. 그리고 내 예상은 틀리지 않고 들어 맞았다. 자그마한 암자. 담도 없는 산사에 문은 왜 필요한지 산문이 가로 놓여 있고 곧 대웅전이 보였다. 서너 계단 토대 위에 지어진 대웅전은 조촐한 모양으로 산 속에 파 묻힌 모습이었고 오른쪽에 있는 요사채는 방이 두 개 뿐이었다. 부처님 상을 모신 곳 빼고는 겨우 방이 두 개 뿐이 없는 사찰. [地土寺] 나는 산문위에 쓰여진 이름을 보았다. “하하하 지토야 여기 너의 집인가 보다. 이름이 너하고 꼭 같다. 지토. 땅지 흑토. 하하하” 나는 옆에서 땅속을 들락거리는 지토를 돌아보며 말을 걸었다. 정말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허긴 부처님의 땅이나 부처님의 나라라는 뜻의 사찰들이 많이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해 한다면 그다지 이상할 것도 없는 이름이었지만, 그저 대단한 우연이라고 나는 웃음이 나왔던 것이다. 나는 우선 안으로 들어가 좁은 마당을 거쳐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 앞에 가서 합장하고 예를 취했다. 내가 불교 신자이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교회에 가면 하나님을 존중하고 절에 가면 부 처님을 존중하고 무속인을 보면 나름의 무속신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평소 생각이었으므로 이상할 것은 없는 문제다. 나는 그 중에서도 자신을 갈고 닦아서 수행하는 불교나 도교등의 종교들을 좋아한다. 믿음이라는 면에서 보면 많은 신들의 존재를 믿으므로 다신교라 해야겠지만 딱히 믿 고 의지하지는 않으니 종교가 없다고 할 수도 있다. 작은 사찰에는 아무도 없었다. 불당에 아무도 없어서 마당에서 몇 번 인기척을 내고 사람을 불러 보았지만 대답이 없었다. 나는 기왕 이렇게 된 것 이 곳에서 하룻밤을 신세질 생각으로 주인을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2시가 지나도록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작은 부엌 옆에서 우물을 발견하고 점심을 해 먹기로 했다. 코펠을 꺼내 놓고 버너에 불을 붙이고 국거리를 먼저 올렸다. 버너가 하나 밖에 없었기 때문에 한꺼번에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될 수 있으면 조심스럽게 쌀과 찬거리를 다듬고 흘리지 않도록 했다. 불교에서는 쌀 한 톨이라도 헛되게 버리는 것을 큰 죄로 여긴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 이었다. 국이라야 별건 없었다. 감자 몇 개 썰어 넣고 양파 썰어 넣고 고기를 넣고 싶었지만 절에서 그럴 수는 없어 서 된장 풀고 소고기 국물맛 분말 스프(이건 고기가 아니라 그냥 맛만 내는 거니까.... ㅡ.ㅡ;;)를 넣고... 혼자 살아도 음식을 잘 해먹지 않는 나인지라 별로 할 줄 아는 것이 없다. 그저 있는대로 넣고 끓이다 보면 먹을만한 것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적어도 맛이 이상해서 속이 뒤틀리는 음식을 만들어 본 적은 없었으므로 되는 대로 만들어도 먹을 수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사실 양파가 들어간 된장국은 그런대로 달싹한 맛이 괜찮다. 물론 그 때 그 때 맛이 달라지기는 하지만... 하하하 나는 국이 끓고나서 쌀을 씻어 앉혔다. “이보게 청년, 하는 김에 한 숟가락 더 올리면 안되겠나. 나도 배가 고픈데...” 허걱!! 깜짝이야. 나는 놀라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못했으면 쌀을 쏟을 뻔 했다. 내가 돌아보자 내 두어걸음 뒤에 할아버지 한 분이 서 있었다. 승복을 입었지만 머리가 길어서 어깨까지 내려오는 것이 거의 내 머리카락 길이 쯤 되어 보였다. 작달막한 키에 한 손은 뒷짐을 지고 한 손에는 호미를 들고 있었다. “이런 죄송합니다. 어르신. 아무리 불러도 아무도 안나오시기에 기다리다 배가 고파서 밥을 해 먹을까 하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얼떨결에 변명 비슷한 시늉을 하며 말을 이었다. “혹시 여기 사시는 분이십니까?” 나는 승포를 보고 짐작을 했지만 이렇게 여쭈어 보았다. 노인은 그런 나를 웃는 얼굴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셈이지. 내가 여기서 지낸 지 오래되었고 원래 주인이 없던 곳이라 내가 주인은 아니지만 여기 사는 것은 맞아.” “아! 네.. 그럼 여기 혼자 사십니까?” “그렇네. 나 혼자 살고 있지.” “네.. 그러시군요. 참, 쌀 더 씻어서 올리지요. 뭐 어려운 것도 아니고...” 나는 배낭에서 쌀 봉지를 꺼내서 코펠에 부었다. 원래 세 끼 분의 쌀을 들고 왔었지만 부어 넣다 보니 별로 남지를 않아서 그냥 전부 부어서 씻었다. 둘이 먹기에는 좀 양이 많겠지만, 남으면 저녁에 먹어도 되겠지 싶은 마음이었다. 나는 쌀을 씻어 앉히고 적당한 돌을 들어 뚜껑을 눌러 놓았다. 다 아는 상식이지만 산 위에서는 기압이 낮아져서 온도가 낮은 상태에서 물이 끓기 때문에 이렇게 돌을 눌러 두지 않으면 밥이 설게 된다. 내가 그러고 있는 동안 노인은 그저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나를 보고 있었다. 표정이 무서운 것도 아니고, 그저 무료해서 그러시려니 하고 가만히 내 할 일을 했다. 하지만 쌀을 앉히고 익을 때 까지는 별로 할 일이 없었다. 나는 우선 주위에 있는 쓰레기(양파껍질, 파 다듬은 찌꺼기 등. 감자는 깍아서 포장 한 것을 가지고 왔다.)를 주워서 적당하다 싶은 나무 밑에 야삽으로 적당히 파고 묻어 버렸다. 가만히 있기가 거북해서 움직였지만 너무 빨리 움직인 모양이었다. 그러고 나니 할 일이 없었다. 나는 버너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올려진 코펠만 보고 있었다. 노인 역시 별로 할 일이 없는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다가 돌아서 부엌으로 갔더니 작은 상을 들고 나왔다. 그릇 두 개와 숟가락 젓가락 두 벌이 그 위에 놓여 있었다. 나도 코펠 안에 작은 그릇이 몇 개 들어 있어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노인은 당신 나름의 배려를 해 오신 것 같았다. 노인은 그저 말없이 그 상을 내 앞에 놓더니 철퍼덕 땅에 앉아 버렸다. 사실 야외에서 했으니 야외에서 먹는 것이 이상할 것은 없었지만 옆에 방을 두고 밖에서 먹는 것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기는 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노인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여기에서 이렇게 먹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별 신경 쓸 일도 아니다 싶었다. 나는 상 위에 된장 찌개가 든 코펠을 올리고 깻잎이 든 통조림을 따서 오려 놓았다. “허허 세상이 좋기는 좋군. 깻잎을 이런 깡통에 넣어서 보관하다니.. 허허 참.” 노인은 못내 그런 것이 신기하다는 듯이 허허 웃었다. 나는 다른 반찬이 든 통도 꺼내 놓고 싶었지만 전부가 다 육식이라 어떻게 해야하나 망설였다. “저.. 노인어른 육식도 하시는지 저는 여기가 아무래도 절이어서 육식은...” 나는 마을 잇지 못하고 노인을 바라 보았다. 나이가 얼마쯤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뭐 신비로운 분위기다 그런 말은 아니고 내가 워낙 사람의 얼굴을 보고 나이를 짐작 하는 일에 서툴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나이 든 사람, 더구나 시골에 사는 사람들의 얼굴은 더욱 나이를 짐작하는 데 곤혹스러움을 느끼는 나였다. “허허, 생각해주니 고맙구만. 나는 원래 육식을 하지 않네만, 자네가 먹고 싶다면 먹는 것을 말리지는 않겠네..” 노인은 사람 좋은 웃음으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한 두끼 안 먹는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사찰에서 육류라니요 원 당치 않는 말씀을요.” 노인은 그저 웃을 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식사는 조용하고 느긋하게 진행되었다. 둘 다 먹는 동안에 별다른 말은 없었고, 노인이 식사가 늦은 탓에 빨리 먹는 나로서도 다급하게 먹지 못하고 천천히 수저를 놀린 까닭이다. 밥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양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늦은 식사인 탓인지 내 가 상당히 많이 먹었고 노인도 시골 사람들이 그러하듯 밥에서 에너지를 얻는다는 식 으로 제법 많은 양을 드셨다. 덕분에 밥을 먹고 바닥에 붙은 누룽지를 끓여 나누어 마시기까지 제법 시간이 걸려 서 식사가 끝나고 설거지를 마쳤을 때는 이미 4시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나는 노인과 요사채 앞에 작은 마루에 앉았다. “덕분에 맛있게 잘 먹었네 그려. 허허” 노인이 인사를 해 왔다. “별말씀을요. 저도 혼자 먹지 않아서 더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을 받았다. “그래 이렇게 깊은 산에는 무슨 일인가 그래... 별로 오는 사람이 없는 곳인데...” 노인은 그렇게 궁금증을 표현했고, 나는 주저리 주저리 서울에서 학원 강사를 하는 사람인데 봄도 되고 해서 그냥 바람이라도 쏘일 겸 해서 산에 올랐노라고 (정령에 대한 말만 빼고는) 제법 자세하게 떠들었다. 노인은 그렇게 떠드는 내 말을 가끔씩 놀라는(선생이라고 했을 때..ㅡ.ㅡ;;) 표정이나 옳다는 맞장구의 표정으로 지루하지 않게 들어 주었다. 그리고 이야기의 끝에 나는 노인에게 하룻밤 자고 갈 수 있을지를 청해 물었다. 노인은 “산 속을 특별한 이유없이 돌아다닐 거면, 아예 여기 있다가 올라가도 되지 않겠 나? 나도 그 동안 혼자 지내서 사람하고 같이 이야기 해 본 것이 하도 오래 되니 말벗이 있으면 좋겠고...” 라고 하며 내일 하루도 머물러 가기를 은근히 권하는 말로 허락을 해 주었다. 그리고는 방 하나를 열어주며 짐을 넣어 두라 했다. 짐이라고 해야 별 것 없는 것이었기에 나는 배낭을 그 방안에 넣었다. 잠시 눈에 들어온 방은 그저 작은 방에 치장도 없었고 옷고리를 대신하는 듯 긴 나무 막대가 벽에 가로질러 매달려 있었다. 한 쪽에 놓여진 호롱불이 왠지 반가운 느낌을 주는 방이었다. 노인은 잠시 앉아 쉬라면서 마루를 떠났지만 나는 별달리 갈 곳도 없었다. 나는 일단 지토와 풍아를 돌려 보냈다. 그리고 산 속이라 일찍 찾아드는 저녁 노을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산 아래에서부터 찾아드는 초록 어둠은 조금씩 짙어지며 풍경들을 녹여들이고 있었다. 산 위로 후광을 드리운 듯 빛이 남았지만 그도 오래지 않아 사그러 들기 시작했다. 절이 계곡 사이에 있는데다가 가파르기까지 한 양쪽 산세 때문에 하늘은 밝았지만 땅 은 어두워지는 이상한 풍경이 산사의 계곡을 감싸고 있었다. 노인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6시가 조금 지나자 사위가 어두워 졌다. 나는 발걸음을 산문 밖으로 조심스럽게 옮겼다. 담배를 피우고 싶은데 절이 워낙 좁아서 절 안에서 피우기가 민망스럽게 느껴진 까닭 이었다. 산문 밖에서 담배를 한 개피 피우고 멍하니 산바람 소리에 젖어 있다보니 어느틈에 하늘에는 별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나는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아느틈에 노인이 와 있었는지 노인이 있음직한 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노인어른 저 잠시 나갔다 왔습니다. 들어오셨군요.” 나는 문 밖에서 인기척을 내며 말했다. “청년인가? 그래 바람은 잘 쏘이고 왔는가?” 노인의 반기는 목소리가 들리며 방문이 열렸다. “잠시 들어오게나. 잠들기에 이른 시간이니 이야기나 하세.” 노인은 나를 방으로 끌었다. “그보다 식사를 하지 않으셔서 어쩝니까? 식사를 하셔야...” “허허, 밥 먹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한 일도 없으니 배가 꺼질 틈도 없었을텐데. 배가 고픈가?” 노인은 그렇게 되물었다. 나는 전혀 배가 고프지 않았고 또 먹고 싶은 생각도 없었지만 단지 노인이 걱정되어서 한 말이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만...” “그럼 나도 일 없네. 조금 있다가 먹을만 한 것이 있으면 좀 먹으면 그만이고..” 노인을 그렇게 말하며 나를 다시 안으로 끌었다. 나는 노인을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노인의 방은 내게 내어준 방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한 쪽 벽으로 여러 서책들이 쌓여 있다는 것 뿐. 언뜻 보기에 불경들이 보였지만 한자에 능통하지 못한 나였기에 언 듯 보이는 제목들을 다 읽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노인 앞에 놓인 호롱불에 지워진 그림자가 흔들리며 책들을 가렸기에 더 이 상 책에 관심을 가질 수가 없었다. 노인과 나는 방 가운데 있던 서안을 옆으로 치우고 마주 앉았다. 호롱불이 흔들려서 노인의 얼굴이 흔들리기도 했지만 문제는 아니었다. “그런데 자네 옆에 있던 그 작은 것들은 왜 안 보이는가?” 마주 앉자 마자 노인은 내게 물었다. 내 옆에 있던 작은 것들이라면? 설마 풍아와 지토를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나는 그 전에도 정령들과 같이 다닌 적이 있었다. 가끔은 학원에서 수업을 할 때도 풍아나 광아를 불러 놓고 있었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 번도 다른 사람이 정령들을 보는 경우는 없었다. 그런데 이 노인이 정령들을 보았다는 말인가? “저기 작은 것들이라면? 어떤 것들을...” 노인은 웃으며 말했다. “거 왜 있잖은가 작으마한 여자아이처럼 생겨서 날아다니는 것하고 난쟁이처럼 생 긴 그것 말일세. 뭔지는 모르겠지만 자네에게 해가 되는 것 같지도 않고 자네 몰래 붙 어 다니는 것 같지도 않아서 가만히 뒀는데 설마 자네 모르고 있었던 건가?” 노인은 내가 몰랐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당황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닙니다. 어르신. 제가 부른 녀석들이니 제가 알지요. 다만 아무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놀라서 드린 말씀입니다.” “허허허 그럴만도 하지. 그런 존재를 본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니 말일세. 하지만 귀신도 보는 사람이 있으니 귀신 보는 눈에는 그런 것들도 보일걸세. 허긴 귀신하고는 많이 다르더군. 자네 힘을 빼긴 하겠지만 그것이 몸을 해치는 정도까지는 가지 않을 것 같이 보이니 말일세.” 노인을 껄걸 웃었다. “어르신 그럼 어르신은 그 녀석들이 뭔지도 아십니까?” 나는 갑자기 혹시 이 노인은 정령에 대해서 알지 않을까 싶어 물어보았다. “글세 내가 그것 까지야 어찌 알겠는가. 이 세상의 것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이세 상과 연관이 전혀 없어 보이지도 않으니, 귀신도 아닌데.. 참으로 신기한 것들이라는 생각이 들더구먼. 나도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들일세. 굳이 말한다면 지신 이나 수신과 닮기는 했지만 그것도 닮기만 했지 같은 것은 아니고... 자네는 그것들 이 뭔지 알고 있는 건가?” 노인을 갑자기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나도 역시 정령들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에 그냥 처음에 그 녀석들을 만나 게 된 계기와 소설속에 등장하는 정령들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을 했다. “흠... 그렇다는 말이지. 정령이라. 그런 것이 있다고 하는 소리는 들었지만 그렇게 보게 될지는 몰랐구만 그래. 그럼 자네는 불, 물, 땅, 바람, 빛 이렇게 다섯을 부를 수 있다는 말이군...“ “네.. 하지만 한꺼번에는 불러 낼 수가 없고, 그냥 둘씩 둘씩은 가능해요. 그렇다고 불러서 뭘 하는 것도 아니지만요.” “흠... 그렇겠구먼, 그렇게 작아서야 무슨 힘을 쓰겠는가. 그렇겠지.” 노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나를 바라 보았다. “자네는 그것들을 가지고 뭘 하려나. 그것들이 없으면 어떨까?” 노인은 갑자기 정색을 하며 물었다. “뭐 있다고 해도 별로 하는 것도 없지만... 없다면 섭섭하겠지요. 좋은 친구들인 데... 집이 쓸쓸하지 않게 되기도 했고. 대답은 없지만 말벗도 되어주고... 딱히 가지 고 무얼 하겠다는 생각은 없어요. 다만 그 녀석들 이제는 제가 불러 주지 않으면 아무 도 불러 주지 못할거거든요. 제가 이름을 붙여 버려서....” “이름을 붙이다니?” 나는 다시 정령들의 이름을 붙이던 때를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니 이제 제가 부르지 않으면 아무도 그 녀석들을 불러 줄 수 없을 것 같아요. 제가 제 욕심 때문에 실수 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그래서 다른 정령들은 더 안 부르고 있어요. 다른 정령을 부른다고 해도 이름을 붙이는 건 하지 않을 생각이예 요.” 내 이야기를 듣는 노인의 얼굴은 별 변화는 없었지만 나는 노인이 왠지 고개를 끄덕 이는 것 처럼 느껴졌다. “그래.. 그렇겠구먼.” 역시 노인은 내 말에 짐작하기는 어려웠지만 맞장구를 쳤다. “그럼 자네 여기 그 것 중에 아무거나 하나 불러 보게나.” 노인은 그렇게 말하고 나를 바라 보았다. 나는 마침 옆에 놓인 호롱불에서 화아를 소환했다. “화아 소환” 녀석은 여전히 티꺼운 얼굴로 나타났다. “호-! 그녀석은 참 히안하게 생겼구먼. 도마뱀처럼 생긴 녀석이라니.” 노인은 신기한 듯이 화아를 바라 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화아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잠깐 불꼿이 흔들린다 싶은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불꽃이 갑자기 다섯 배 정도 커진 것이다. 그에 따라 화아도 크기가 커졌다. 순간 나는 내 몸의 힘이 한꺼번에 빠져 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어찔해 하는 순간 다시 불꽃의 크기는 예전으로 돌아왔고 화아도 같은 크기로 줄어들었다. 어느 사이에 노인은 손을 거두고 있었다. 그러더니 다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불꽃이 커지지 않고 오히려 화아의 크기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엄지 손가락 보다 약간 커 보였던 화아가 손톱크기로 줄어 버린 것이었다. “어엇.” 나는 화아가 커졌을 때 보다 더 놀랐다. 그러다가 화아가 사라져 버리면 어쩌나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노인은 곧 손을 거두었고 불꽃 속에서 화아도 다시 원래의 크기로 돌아왔다. “허허 그것 참. 신기한 일이로군. 이녀석은 정말 오로지 화기만을 지니고 있군. 다 른 어떤 것도 지니고 있지를 않아. 허허 그것 참.” 노인은 혼자 중얼 거렸다. 그리고 노인은 화아를 돌려 보내게 하고 수아, 지토를 불러서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그리고 풍아와 광아를 불러서도 같은 행동을 했지만 풍아와 광아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를 않았다. “음...” 노인은 정령들을 다 돌려 보내게 하고 나서 나를 쳐다보았다. “자네는 참 재미있는 것들을 데리고 있구먼. 복이라고 해야할지...” “무슨 말씀이신지.” 나는 노인에게 영문을 몰라 물었다. “자네 오행에 대해 아는가?” 노인은 엉뚱한 질문을 했다. 수련이라... - 1 나는 오행이 火水木金土을 말하는 것이고 서로 相生相剋하는 것을 알고 있지만 자세 히 어떤 것인지는 모른다고 솔직히 대답했다. “흠.. 그래도 그 정도만 알아도 설명하기가 쉽겠구먼. 예전에 사람들은 세상이 태극 이라는 혼돈에서 음과 양으로 나뉘고 다시 음과 양에서 오행이 나와서 세상 만물을 이 루었다고 생각했다네.. 그다지 많이 틀린 것은 아니지... 세상의 극을 따지다 보면 언 젠가는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니... 그런데 그런 오행을 가지고 수행의 방법으로 삼은 사람들이 있었지. 몸 속에 세상의 기운을 모아 선계에 들려고 하는 사람들이 주로 그 런 수행을 했다네.. 원래는 그냥 세상 만물의 기운을 바탕으로 하늘의 기운 즉 태극 의 기운을 받아 선인이 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워낙 크고 방대한 하늘이라는 것에 이 르기까지 어려움이 있어 사람들은 그보다 작고 분화된 오행의 기운으로 눈을 돌린 것이지.” 그리고는 노인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나는 궁금증이 일었지만 뭐라 물을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조용히 기다렸다. “그런 오행의 기운을 다스리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신선에 이르는 좋은 길임에는 틀림없었지만 때로는 사람들의 욕심이 그것을 힘으로 사용하게 되기도 했다네. 이를테 면 바위를 쪼개고 산을 뛰어 넘고 하늘을 날고 하는 그런 힘으로... 더 나아가서는 사 람들의 해하는 방법으로 나아가기도 했지...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은 하늘에 이른다는 의미는 퇴색하고 그렇게 힘으로 이용하는 방법만이 남겨지게 되었다네.” 노인은 다시 말을 끊었다. “선계에 이르는 길. 이제 오행으로 그러한 것을 꿈꾸는 사람은 없다네. 나름대로 수 행을 하는 사람들도 오행수련은 단지 몸의 기운을 기르는 것으로 생각할 뿐이지 그리 고 사실 중요한 뜻은 사라지고 방법만이 남았으니 어쩌면 그것도 당연한 것인지도 모 르지. 이런 내가 해야 할 이야기는 하지 않고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보게 청년 내 가 오행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자네가 가진 그 정령이라는 것들 때문이네.. 세상 어디든 오행의 기운이 없는 곳이 어디에 있겠는가 만은 그래도 수련을 하는 사람 들이 숲에서 목의 기운을, 폭포에서 수의 기운을, 땅에서 토의 기운을 수련하는 것은 일정한 지역마다 그 기운이 강한 곳이 있기 때문이네 그렇다고 해도 역시 여러 기운 이 뒤섞인 곳에서 수련하다 보니 한가지 기운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일이지... 그 런데 자네의 그 정령들은 그 기운을 순수하게 지니고 있다는 말일세. 그러니 만약 자 네가 그 기운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자네는 다른 사람들의 몇 십 혹은 몇 백 배의 속 도로 오행의 기운을 수련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일세.” “그런....” 나는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평소에 무협으로 읽던 일들이 현실에 있을 수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무협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것이 오행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되다니 “처음에는 자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고 했다네. 무릇 힘이란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 갈 수 있지만 큰 힘이 생기면 그것으로 화를 자초하기도 하기 때문이지. 하 지만 곰곰 생각해 보니 자네가 이리 나를 만난 것도 인연이고 또 자네의 심성이 악하 지 않고 정령이라는 것들을 대하는 것에도 온기가 느껴지니 힘을 지니더라도 세상에 해악이 되지는 않을 성 싶었네. 보이지 않은 곳에서 여전히 이러한 힘으로 외도를 행 하는 자들이 세상에 많으니 어쩌면 자네가 세상의 한 모퉁이를 평화롭게 할 수도 있을 듯 하고...” 나는 노인의 말을 들으며 지금껏 읽은 것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세상을 그려 보았다. 평범하지 않은 인간들. 흔히 초능력이라 말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사람들의 다툼. 평 범한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면... 그리고 내가 힘을 지닌다면 나는 어떤 모습일까? 나도 내가 어떤 모습이 될는지 자신이 없었다. “사실 자네에게 어찌 어찌 하라고 하고 싶은 생각은 없네. 다만 말 그대로 인연이 라 생각하고 내가 자네에게 이걸 전하기로 했을 뿐일세. 다만 바라는 것은 자네가 자 네의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지 않기를 바랄 뿐이네.. 그리고 아무래도 자 네가 가진 것들 중에는 목의 기운과 금의 기운을 가진 것이 없어서 오행의 기운을 온 전히 모으기는 어렵기도 하겠다는 생각이 드네만. 자네에게 운이 닿는다면 완전한 오 행을 수련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노인은 어딘지 속 시원해 하는 느낌이드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노인은 책을 두 권 서안 밑에서 꺼내 주었다. 두 권 다 표지에 제목이 없어서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건 내가 원래 내 스승에게 배웠던 내용을 언문으로 풀어 놓은 것일세. 요즘에야 한자로 적어서는 알아보는 사람이 없으니 어쩌겠는가? 그러고 보면 나도 언젠가는 누 군가에게 이 내용을 전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지. 이런 것을 만들고 있을 때부터.” 노인은 다시 말을 끊고 생각에 잠기는 듯 하더니 두 책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한 권은 자네가 익혀야 할 심법일세. 오행의 기운을 끌어 모으고 몸에 골고루 미치 게 하여 몸을 이롭게 하는 방법을 적은 것이라 생각하면 되네. 그리고 한 권은 그 기 운들을 사용하는 방법일세. 완전히 익힌다면 능히 바위를 가르고 산을 넘을 수 있을 것일세. 심법에는 그 끝이 없으니 끊임없이 수련하다 보면 언젠가는 마음의 눈을 뜨 는 날도 있을 것이네.” 노인은 내게 책을 내밀었다. “이런걸 제가 받아도 될런지요. 솔직히 힘을 가진다는 것이 좋다고 생각되면서도 겁이 나는데요.” 나는 정말 주저하는 마음이 들었다. “허허, 인연이라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이건 자네가 내 마지막 식사를 챙겨준 몫으 로 생각하게. 어쩌다가 내가 돌아가는 마지막 날에 자네를 만나게 되었는지 모르겠구만.” “예? 무슨 말씀이신지. 마지막이라 하시는건...” “세상에 우연이란 없는 것일세. 다 하늘이 정한 이치대로 돌아가는 것이겠지. 어쩌 면 자네에게 이걸 전하게 되는 것도 혼탁한 세상 탓일런지도 모르지 나야 주어진 운명 에 따른 것일뿐.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나를 찾지 말게나 나는 가야 할 길이 있으니. 아침 일찍 떠날 것이네.” 노인은 아무래도 축객령을 내리는 듯 싶었다. 이만 나가보라는 ... 하지만 “노인어른 무슨 말씀이신지. 마지막은 또 뭐고 이 책들은... ” “허허허허 그리 신경쓰지 말게나 자네가 짐작는 대로 나는 오늘이 이 세상의 마지 막 밤일세 아침이 되기 전에 떠나야 하지. 그리고 그 책들을 혼자 배우기는 힘들것이 네만 다른 누구에게도 전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명심하게. 언젠가 자네의 전인이라 생 각되는 사람이 있으면 전한다고 해도 무어라 않겠네만 자네가 미흡한 상태에서는 누 구에게도 전해서는 안되네. 그것만은 약속하게.” “그거야 그리 하라면 하겠지만...” “그럼 가서 쉬게. 나도 이만 준비를 해야겠네. 다시 이야기 하지만 내일 나를 찾을 생각은 말게 나는 이곳에 없을 것이니.” 노인은 손을 흔들었고 나는 왠지 모를 조름에 옆 방으로 발을 옮겼다. ‘뭔가 이상하기는 한데...’ 하지만 내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정령들을 부를 때 마다 노인의 손짓에 커지 면서 빼앗아간 체력이 보통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노인이 어떤 수를 썼을 수 도 있었지만 어찌되었든 나는 더 이상 졸음을 견딜 수 없어 방 모서리에 기댄 채로 잠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나는 잠시 여기가 어딘가 하고 생각을 더듬어야 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서 치악산 기슭의 작은 절임을 깨달았고, 밤에 노인어른과 주구 받은 이야기들이 머리를 헤집어 놓았다. 노인 어른은 아침이 되면 이 곳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오전 내내 빈 절을 지키며 노인을 기다렸다. 아울러 노인이 나에게 준 책들을 뒤적여 보았다. 처음 오행의 기운을 모으는 방법이 적혀 있다는 책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로 가 득 차 있었다. 좌선을 하고 오행의 기운을 느끼고 그것들을 몸 속으로 움직이며 단전 에 모으는 과정들이 자세히 적혀 있었지만 한 번 보는 것으로 그것을 기억 할 수도 없 었고, 더구나 여러 가지 혈도에 대한 이름들은 있었지만 정확히 어느 위치에 있는 것 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이해 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두 번째 책에 있는 내용은 그런 기운들을 활용하는 방법인 것 같았지만 역시 제대로 이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아침도 굶고 점심을 지날 때 까지 산사는 고즈넉한 빛 속에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오후로 접어 들 때 쯤, 새로운 손이 찾아 들었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스님이었다. 바싹 마른 장작 같은 몸에 작은 키의 스님은 절 문으로 들어서다 나를 보고는 천천히 걸어와 합장을 했다. “시주께서는 어인 일로 이렇게 깊은 산사에 찾아오셨는지요. 주인 없는 절간이라 적적하셨겠습니다.” 나는 엉겁결에 마주 합장하며 인사를 했다. “아닙니다. 어제 이곳에 계시던 노인께서 맞아주시고 말벗을 해 주셔서 편히 쉬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니 노인어른이 보이지를 않으시는군요.” 노승은 내 말을 듣고는 별로 놀라는 기색없이 말을 이었다. “허허, 그분은 이제 이세상에 계시지 않으실 테니 찾아야 헛수고 일겁니다. 이미 입 적하셨으니 말씀입니다. 저도 간밤에 그분께서 입적하신다는 말씀을 꿈에 듣고 이 절 을 지켜 달라 해서 부랴부랴 오는 길입니다. 가고 오는 것에 바랑 하나면 족한 것이 우리들 수행자이니 그 곳이 어디가 되었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만 그 어른의 뒤를 이을 수 있으니 그것도 복이지요.” 노승은 그 노인에 대해서 잘 아는 듯 하였지만 내가 더 이상 그 노인에 대해 물어 보아도 연이 끊긴 사람이니 연연해 하지 말라는 말로 내 질문을 막아 버렸다. 그후 노승은 더 이상 나에게 별다른 말도 없었고 내가 이만 내려가 보아야 하겠다고 했을 때에도 별다른 말없이 조심해 가라는 인사를 해 주었을 뿐이었다. 흔한 말로 인 연이 닿으면 또 보겠지요 어쩌구 저쩌구 하는 말도 없이 그저 조심해 가라는 인사만했다. 나는 언제든 다시 찾아 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노인이 없이 주인이 바뀐 절에 무슨 볼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고 그저 분위기가 조용하고 편안해서 가져본 생각이었다. 나는 그 뒤로 서둘러 산길을 더듬어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이 험하지는 않았지만 저 녁이 늦어서야 고픈 배와 풀린 다리로 겨우 산 아래 마을로 내려올 수 있었다. 거기서 겨우 작은 구멍가게를 들러 빵과 우유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원주로 가는 막 차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차를 기다려 타고는 원주 터미널로 왔다. 도시라는 곳에서 는 돈만 있다면 어렵지 않게 먹고 지내는 것을 해결할 수 있었고 서울로 돌아오는 것도 쉬운 일이었다. <<<수련, 수련, 수련>>>> 으아--- 머리에서 쥐난다. 아무리 책을 읽고 연습을 해도 제대로 되지를 않는다. 아주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좌선을 하고 모든 생각을 비우고 배로만 호흡을 하며 단전으로 들락거리는 기운을 느껴보라고 써 있지만 이론만으로 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산사에서 노인에게 책을 받은 것도 벌써 한 달 전이다. 그 동안 쉬지 않고 밤이면 밤마다 단전호흡을 하고 있지만 전혀 진척이 없는 상태이다. 어떤 때에는 수아와 지토, 어떤 때에는 화아를 불러 놓고 옆에 두고 호흡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눈만 감으면 이 녀석들의 기운을 느낄 수가 없다. 노인 어른의 말대로 정령들이 순수한 기운으로 된 것들이라면 이 녀석들의 기운을 느 낄 수 있으면 쉽게 단전에 그 기운을 모을 수 있으리라 생각 했지만 도무지 그 기운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혼자서 단전 호흡을 해 보기도 했지만 역시 아무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다. 책에는 일단 기운을 느낀 다음에야 그 기운들 중에서 오행의 기운을 골라 받아 들여 수행하는 것이라 되어 있었다. 그리고 기운만 느끼면 자연스럽게 오행의 기운을 받아들이는 경로가 있어서 그 경로 에 따른 호흡을 하면 각각의 경로마다 각각의 기운들을 받아 들일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 놈의 기운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겠으니 방법이 없는 것이다. 어쩌면 조바심이 심해서 더 그런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보기도 하고, 잡념이 많아서 집중을 못해서 그런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기도 하지만 전혀 아무런 변화도 없이 그 저 같은 짓을 반복한다는 생각어 조금씩 지쳐 가고 있다. 단전호흡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야 이미 여러 책들을 통해서 소개가 되어 있어서 어렵 지 않게 알 수 있었지만 역시 그 뭐냐 단전으로 기운을 모아서 라는 말은 이해가 안되는 것이다. 나는 오늘도 수업을 마치자 마자 집을 달려와서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실제로는 거의 옷을 입지 않는다. 웃통은 벗고 헐렁한 운동복 바지만 입고 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손과 발바닥을 모두 하늘로 향하고 몸 주위에 흐르는 기운을 느끼며 호흡을 시작한 다. 처음에는 깊지 않게 시작하지만 점차 호흡을 깊게 하여 단전으로만 숨을 쉰다는 생각으로 아랫배만을 움직이며 .... 후아~~ 말은 쉬운데 이것도 진짜로 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어쩌면 도시 안에서는 기운이 약해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그렇 다고 하는 일이 있는데 산으로 도 닦으로 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벌써 두 달째, 그나마 얼마 전부터 변화가 있는 것 같다. 단전으로 숨을 쉬면 무언가(솔직히 그게 무슨 기운인지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 어쩌 면 배가 움직이니까 피가 흘러 들었다가 나왔다가 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렇다고 그게, 무슨 기운인지 아니면 혈액인지야 알 바가 아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게 무슨 기운이겠거니하고 천천히 혈도를 따라 움직이는 연습을 하고 있다. 뭐 있는 것이라고 해야 화아나 수아 아니면 지토이기 때문에 나는 먼저 화아를 불러 놓고 호흡을 하고 있는 중이다. 한 삼일 전부터 그러고 있는데 처음에는 그 기운을 정해진 혈도를 따라 움직이는 일 도 쉽지가 않았지만 하룻밤 내내 미친 척하고 같은 연습만 했더니 둘째 날부터는 그런 대로 혈도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고 나는 혈도를 따라 움직이니까 그게 피는 아니겠거니 하고 있다. 그리고 화아를 불러 놓고 그 경로를 통해서 호흡을 하면 화아가 있는 곳에서부터 뜨 거운 기운이 흘러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그리고 그 기운들은 몸을 돌아서 결국에는 단전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단 전에서 나온 그 기운은 같은 경로를 돌아 나오면서 화아에게서 밀려온 기운과 더해져서 좀 더 큰 기운이 되었고 또 단전 안으로 흘러 들어간다. 하지만 그렇게 한 바퀴를 돌아 단전으로 들어오는 시간이 상당히 많이 걸리는 것이다. 거의 하룻밤에 세 번이나 네 번 정도 할 수 있는 것 같다. 한 번 기운을 끌어 내어서 몸으로 한 바퀴를 돌리는데 두 시간 정도 걸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운기(기운을 움직이는 것)를 하고 나면 잠을 자지도 않았는데 전혀 피곤하지 않고 숙면을 취한 것처럼 몸이 가뿐해진다. 덕분에 밤 세워 운기를 하고도 낮 시간에 잠을 자지 않아도 되어서 낮 시간이 남게 되었다. 보통 나는 밤에는 무엇이든 하면서 깨어 있고 낮에는 잠을 자고 저녁에 학원 수업을 했는데 이제는 낮 시간에 잠을 자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좀 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동안 제법 많은 수확이 있었다. 수아와 화아 지토를 상대로 운공을 시작한지 벌써 두 달이 되어간다. 한 여름의 무더위 속에서도 나는 지치지 않고 여전히 운기에 힘을 쏟고 있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 낮 시간에는 근처 도장(해동 검도)에 다니고 있다. 실제로는 두 번째 책에 실려 있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실험해 보고 싶어서 몇 번 시 도를 해 보았지만 아직은 제대로 되지 않아서 그 전에 몸이라도 유연하고 힘있게 만들려는 목적으로 다니기 시작 한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도움이 되는지 가끔은 집에서 연습하면서 목검에 단전에 모인 기운들 을 불어 넣는 것을 성공하곤 한다. 물론 언제나 되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몸 밖으로 기운을 끌어 내어 쓰는 것은 어렵다. 그래도 내 몸 안으로 기운을 돌리는 것은 어느정도 익숙해 지고 있다. 거기다가 이제 는 밤에 운기를 할 때도 한 번 기운을 돌리는 시간이 30분 정도면 될 정도로 발전을 했다. 책에 적혀 있는 대로라면 한 번 호흡을 하는 동안에 그 기운을 몸 안으로 돌릴 정도가 되면 절정에 이른 것이라고 했다. 뭐 그렇게 되려면 아직 멀었지만 그나마 이 정도도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하하 솔직히 이 정도면 장족의 발전이 아닌가 하하하. 참, 수.화.토의 기운이외에 부족한 금과 목의 기운은 아직도 수련이 부족하다. 도움을 주는 정령들이 없어서인지 다른 기운들에 비해서 미약한 느낌만 들 뿐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나무의 정령이나 쇠의 정령이 있는지 소환을 해 보려고 했다. 뭐 솔직히 지금 있는 정령들 만으로도 충분하지만 왠지 욕심이 나서 .. 대신에 불러 올 수 있어도 이름은 붙이지 않을 생각이지만... 그런데 정령들 불러 보았지만 나타나지를 않았다. 뭔가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 실제로 판타지 책에 언급되어있는 나무의 정령은 흔히 말하는 지박령 비슷한 것 같다. 무슨 말이냐하면 모든 나무의 속성을 가진 정령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나무에 일정한 정령이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한 나무에 하나의 정령만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무의 정령들은 정령과 요정 혹은 요괴의 중간 형태라고 되어 있었다. 또 나무의 정령은 그 나무에서 일정한 거리 밖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으로 되어 있기도 하다. 그리고 쇠의 정령이라는 말은 아직 들어본 적이 없어서.... 어쩌면 땅의 정령과 같은 것 같은데 왜 나뉘어 있는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실은 빛이나 바람의 기운을 모아 볼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방법은 일정한 경로를 통해서 기운을 돌 리면 자연스럽게 그에 해당하는 기운이 모이는 방법이기 때문에 어떤 경로를 통하면 빛이나 바람의 기운을 받아 들일 수 있는지 내가 알 턱이 없다. 덕분에 그냥 일정한 경로 없이 단순한 단전 호흡을 하면서 광아와 풍아를 불러 놓고 있다. 이제는 광아나 풍아 수아 화아 지토의 기운을 각각 나누어서 느낄 정도가 되었기 때 문에 단전 호흡을 하고 있으면 광아와 풍아의 기운이 단전으로 모이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다른 녀석들의 기운에는 턱없이 모자라지만 그래도 내 단전에는 미약하긴 하지만 목. 금.광.풍의 기운들도 조금씩 모이고 있다. 제 목: 내 가족 정령들 글쓴이: 탁목조 수련이라... - 2 그런데 신기한 것은 단전이 무지하게 넓다는 것이다. 온 몸에 골고루 퍼질 정도의 기운도 단전안으로 들어가면 별로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 다. 거기다가 각각 다른 기운들이 서도 영역을 정한 것처럼 나뉘어서 모여 있는 것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역시 한꺼번에 두 가지의 기운을 불러 내기는 어렵다. 운기 중에는 언제나 한 기운만을 모으게 되고 평소에 기운을 끌어 낼 때에도 수아와 화아의 기운을 한꺼번에 끌어내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다. 다행히 수아와 지토의 기운은 같이 끌어 올려도 별 무리가 없어서 그런 때에는 화아의 기운만 끌어 내었을 때 보다는 갑절에 해당하는 기운을 끌어 낼 수 있다. 책에 보면 다섯가지의 기운을 모으게 되면 서로 상생상극하기 때문에 한꺼번에 그 기 운들을 끌어 쓸 수 있다고 되어 있지만 지금 내가 가진 목과 금의 기운이 너무나 약해서 다섯 기운을 끌어 낼 엄두는 내지도 못하고 있다. 실제로 한 번 시도를 해 본 적이 있었지만 다른 세 기운 때문에 목과 금의 기운이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책에도 한꺼번에 여러 가지 기운을 끌어 쓰 는 것은 오행의 기운을 충족시켰을 때에만 가능하다고 했고 하나 하나의 기운들을 끌 어 쓰는 것만으로도 예전과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힘을 낼 수 있으니까. 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화의 기운이나 수의 기운을 뽑아 내면 정령들을 매개체 없이도 불러 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하하하 그러니까 내가 수의 기운을 끌어 올리고 수아를 부르면 수아는 물이 없는 곳에서도 나타났다. 그럴 때에는 그저 공중에 두둥실 떠 있는 모양으로 나타났는데 더 신기한 것은 수아에게 그 상태에서 물을 부탁해도 물을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면 내 몸에서 상당한 기운이 빠져 나가는 것을 느끼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 몸의 기운을 실제 물질로 바꾸어 주는 역할을 정령들이 해 줄수 있는 것이다. 물론 화아를 불러 내어서 라이타 없이 담배에 불을 붙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불러낸 정령들은 사람들의 눈에도 보이는 모양이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서 잠깐 시험 삼아 페스트푸드점에서 화아를 불러 냈더니 여자들이 도마뱀이라고 빨간 도마뱀이 나타났다고 비명을 질렀던 것이다. 뭐 곧 돌려 보내고 모른척 했지만.... 이건 정말 획기적인 발견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까 정령들을 매개체를 이용해서 부르면 나만 볼수 있지만(아니다 노인도 봤었군)..... 뭐 평범한 사람들은 볼 수 없지만 내 몸 속의 기운을 이용하면 매개체 없이 또, 물질화 된 상태로 나타나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나타난 녀석들은 내가 손으로 건들어도 형태가 흐트러 지거나 하지 않고 기묘한 촉감을 제공해 주었다. 또 한가지는 그렇게 불러 낸 상태에서 내가 의식적으로 기운을 쏟아주면 형태가 커진다는 것이다. 한 번은 수아를 불러서(왜냐면 여자처럼 생겼고 귀여우니까) 최대한 내 몸의 기운을 불어 넣어 주었는데 녀석의 크기가 거의 일미터 정도의 크기까지 커지는 것을 보았 다. 덕분에 얼마 버티지 못하고 지쳐서 나동그라 지기는 했지만.... 하하 커지니까 더 귀여운 것 같았다. 수련, 수련, 수련, 수련... 정말 학원에서 수업을 하는 시간과 수업 준비를 하는 시간을 빼곤(단전 호흡은 기억 력에도 도움을 주는지 수업을 준비하는 시간도 별로 들지 않게 되었다) 무조건 수련의 연속이었다. 그 동안 목의 기운과 금의 기운이 부족해서 주말이면 광릉수목원에 가서(사실 지금 출입이 제한되어 있지만 남모르게 숨어 들어간다) 목의 기운을 이틀 내내 수련하고 집에는 온갖 쇠붙이들(아무래도 강철 종류들이 금의 기운이 강한 것 같다. 진짜 금으로 한 번 시험을 해 보았지만 별로 효과가 없었다)을 쌓아 두고 수련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제 수아와 화아 지토의 기운을 한 번 수련하면 목과 금은 상대적으로 세 번이나 다섯 번, 그리고 풍과 광의 기운은 열 번 정도 수련을 하는 것 같다. 점점 경락을 따라 운기하는 시간도 짧아지고 있어서 이제는 15분 정도면 한 번 기운을 모아 들일 수가 있다. 물론 광아와 풍아의 기운을 모아 들이는 시간이 비중이 큰 것은 그만큼 체계적으로 기운을 모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제는 왠지 한 쪽의 기운이 강해지면 다른 기운들이 힘을 빼앗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에 더더욱 다른 기운들을 강하게 해 주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건 비밀이지만 요즈음 정령들을 상대로 훈련도 시키고 있다. 뭐 별다른 것은 아니고 지토같은 경우에는 대상을 땅 속으로 끌어 들이거나 땅에 묻 거나 땅을 솟아 오르게 하는 그런 것들을 연습시키는 것이고 화아는 불덩이를 토하게 하는 것이다. 제법 큰 불덩이를 쏘게 되었는데 불덩이 자체가 물질이 아니라서 그런 지 그 불덩이를 맞은 것은 기름을 뿌린 것 같은 효과를 보이면서 탄다. 물론 젖은 수 건이나 안 마른 통나무를 태울 수는 없다. 그저 그을리게만 한다. 수아도 물로 만든 창을 던지게 하는 연습을 시키고 있는데... 처음에는 그저 물방울을 날리는 수준에서 이제는 제법 형태가 생긴 모습이다. 거기다가 파괴력도 괜찮은 편이어서 얇은 판자 정도는 구멍을 낼 수 있다. 광아는 기운이 약한 탓인지 원래 성향이 그런 것인지 내 기운으로 불러 내어도 물질 화 되지 않는다. 그래서 물질 적인 공격을 할 수 없어서 그저 빛을 순간적으로 강하게 하는 연습만 하고 있다. 아마 순식간에 그렇게 빛을 낸다면 잠시 눈이 어두워지지 않을까 하면서.. 풍아는 바람이라 물질화는 잘 안되는 것 같지만 그래도 작은 돌풍을 일으키는 정도는 할 수 있다. 물론 아직은 풍아와 광아의 힘이 약해서 별로 쓰임새가 있는 것은 아니다. 대신 언젠가 힘을 쓸 수 있게 되면 쓰도록 연습시키는 것이다. 참, 수아는 물로 만든 방어벽도 연습 중이다. 아무래도 지토 녀석에게 흙으로된 벽을 둥글게 쌓아 올리게 하는 것은 방어력은 뛰어 날지 모르지만 시간이 좀 더딘 문제가 있어서 언제든 물로 장막을 만들 수 있도록 연습을 시키는 것이다. 뭐 보니까 정령들은 나름대로의 마법을 쓸 수 있다고 되어 있지만 내가 그런 마법의 이름을 알아야 그거 해 보라고 시킬 텐데... 녀석들과는 여전히 말이 통하지 않기 때 문에 그저 처음부터 내가 하나하나 가르치면서 발전시키고 있는 중이다. 하하하 그러고 보니 정령들에게 한 가지 변화가 생겼다. 내가 정령들에게 기운을 나누어 주면서부터 정령들이 조금씩 커지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매개체를 이용한 소환에서는 변화가 없는데 매개체 없이 소환을 하면 확실히 처음보다 커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 봐야 수아는 10센치 정도 크기가 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리고 광아와 풍아는 상대적으로 다른 녀석들에 비해서 크기가 별로 커지지 않기는 했지만... 아무튼 정령들이 자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하하 그런 재미가 생기고부터는 더더욱 정령들의 기운을 수련하는 일이 재미가 있어졌다. 이제는 쉬지 않고 밤에도 낮에도 운기를 하고 있다. 주말에는 수목원에 숨어 들어가서 목의 기운을 수련하고 주중에는 학원에 가는 시간 을 빼곤 줄곧 앉아서 정령들의 기운을 수련하고 있는 중이다. 덕분에 두 번째 책에 적힌 내용은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있지만 지금으로선 굳이 바 위를 가르고 산을 뛰어 넘는 그런 방법들을 서둘러 배우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저 몸에 기운이 늘어 갈수록 변해가는 정령들의 모습과 조금씩 내가 시키는 것들 을 능숙하게 해 내는 녀석들의 모습이 보기에 즐거울 뿐이다. 솔직히 정령들은 내가 시키는 것을 한 번에 해 내는데.. 내가 그 때 그 때 알맞은 기 운을 전달해 주지 못하기 때문에 미숙하게 보이는 것이기는 하다. 내가 기운을 적절하게 보내기만 하면 내 명령이 내려지는 즉시 정령들은 그것을 해 낼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사실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은 정령들이 아니라 나 다. ㅡ.ㅡ;; 크리스마스이브. 아무리 수련이 좋다고 해도 오늘 같은 날 집안에만 있다는 것은 왠지... 이제 서른 셋도 곧 저물어 갈 텐데... 나는 오랜만에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 폐쇄적인 인간의 전형인 나에게 이런 날 만나서 놀자고 하는 친구는 없 다. 대부분 와이프랑 아니면 애인이랑 데이트를 해야 한다고... 쩝.. 하는 수 없는 문제다. 지난 1년 가까이 만난 적은 한 번도 없고, 가끔 전화만 하던 내가 이런 날... 이런 날, 만나자고 한다고... 만나 줄 턱이 없는 것이다. 음... 생각해 보니 너무 처량맞은 생각이 드는군. 그렇다고 오늘까지 이렇게 집에서만 웅크리고 있을 수는 없다. 나가자. 나가서 생각하자. 나는 청바지에 오래된 가죽잠바를 입고(이거 언젠가 아파트 의류 수거함에서 주운 건 데 쓸만하다.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것이 운치가 있게 보인다. ㅡ.ㅡ;;) 무작정 길거 리로 나섰다. 무얼하나... 오늘부터 내일 금요일 크리스마스. 그리고 토요일 일요일. 시간도 많이 남는데 멀리 여행이나 갈까? 아니면 시내로 나갈까... 나는 고민.. 아니 선택의 기로에서 잠시 고민을 했다. 역시 어디로 여행을 가는 것은 운치가 있는 일 같기는 하지만 처량맞은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인 것 같고... 차라리 시내로 나가서 사람들 속에 파묻혀서 돌아다니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나는 종로로 가는 버스를 잡아탔다. 길거리에는 사람들과 차로 미어지고 있었고 버스는 좀처럼 움직이지를 못했다. 청량리를 지나고 신설동을 지나고 동대문을 지나고.... 아니 못지나갔다. 완전히 꽉꽉 막혀서 움직이지를 않는 것이다. 나는 기왕에 움직이지도 않는 버스에서 그냥 내렸다. 근처에 쇼핑몰이 많으니까 구경이나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곳곳에 사람들은 넘치고 있었고 혼자서 걷는 사람은 나뿐인 것 같았다. 다들 짝을 지어 다녔고 그게 아니라면 삼삼오오였다. 역시 혼자는 나 뿐인가? 여기 저기 쇼핑몰을 돌아다니는 것이 재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 외로운 내 신세야... 정말 처량하군...’ 이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나는 다시 발길을 돌렸다. 종묘... 역시 종묘 앞에도 사람들은 넘치고 있었다. 갖은 먹거리와 게임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그 중에서 다트 던지기 앞에 웬일인지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모여 있었다. 다트 던지기는 8개의 다트를 던져서 높은 점수를 받으면 그에 알맞은 선물을 주는 그런 게임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게임에는 별다른 흥미를 갖지 못했다. 다만 다른 곳에도 다트 게임은 있는데 왜 유독 여기만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인지 그 것이 궁금하게 생각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 쪽으로 발길을 옮기기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그 곳에 모인 사람들 사이로 상황을 보았을 때 절로 입사이로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박장 대소가 아니라 그저 머금어지는 웃음. 그 곳에는 예쁘장한 아가씨(?)가 (나는 나이를 짐작하는 일에 서툴다) 다트를 들고 얼굴을 붉히면서 씩씩 거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이번에는...” 그 아가씨는 신중하게 다트를 던졌지만 그다지 높은 점수를 얻지는 못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나는 왜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아가씨는 핸드백에서 만원권 하나를 꺼내서 다시 그 게임을 하는 것이었다. 내가 보는 중에도 그 아가씨는 3만원이나 되는 돈을 그렇게 꺼내고 있었지만 한 번도 선물을 받지는 못했다. 대부분의 다트들은 형편없이 빗나갔고 몇 개가 맞았다고 해도 선물을 받을 정도의 점수는 되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 그 아가씨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다트를 던지고 있었다. 굉장히 약이 오른 모양이었다. 왠지 나는 그 아가씨의 그런 모습이 순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아가씨에게 계속 돈을 받고 웃고 있는 게임점 주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도 어느 사이에 계속되는 반복에 흥미를 잃었는지 많이 줄어들고 있었다. 나는 그 아가씨가 마지막 다트를 던지고 핸드백으로 손을 가져갈 때 말을 걸었다. “이봐요 아가씨. 도대체 무슨 선물을 가지고 싶어서 그렇게 열심입니까? 내가 대신 받아 드릴께요.” 아가씨는 핸드백에서 눈을 돌려서 나를 보았다. 커다랗고 시원스럽게 생긴 눈동자가 먼저 보이고 오밀조밀 균형있게 자리잡은 하얀 얼굴이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 것이었다. “원 아가씨가 워낙 매달리기에 한 번 물어본 겁니다. 원한다면 내가 그 선물을 따 줄 수도 있으니까요.” 아가씨는 잠시 의아한 표정을 보이더니 “정말 자신이 있나요? 정말 내가 원하는 선물을 받아 줄 수 있어요?” 이렇게 물었다. 어쩐지 그 표정이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반가워하는 표정이어서 나도 모르게 웃어주었다. “물론이지요. 원하는 어떤 것이든 드릴 수 있습니다.” 나는 자신있게 말했다. 솔직히 이런 것은 어려울 것도 없었다. 풍아의 힘을 빌리면 전혀 어려울 것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지금처럼 주위에서 바람이 불고 있다면 기운을 끌어 내지 않고도 소환을 할 수 있었고 아무도 모르게 풍아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에 내가 적당히 표적을 향해 던진 다트를 풍아가 알아서 맞춰 줄 것이다. “정말이죠? 정말? 그럼 나 저거, 저거 하나만 따줘요. 저게 가지고 싶은데...” 아가씨가 가리키는 것은 거의 내 키의 삼분의 이는 되어 보이는 고릴라 인형이었다. 흔하게 보는 인형이지만 의외로 크게 만들어 졌음에도 균형이 맞고 귀엽게 보이는 인형이었다. 아무래도 이 아가씨는 그것이 그렇게 가지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 인형에는 400점이라는 점수가 붙어 있었다. 그리고 이 게임장에서 다트판에 가장 높은 점수는 가운데에 있는 작은 동그라미가 가장 높은 50점이었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8개의 다트를 모두 가운데에 넣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ㅡ.ㅡ;; 정말 이런걸 ... 한 번도 가운데는 맞추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돈을 써가면서 던졌다는 말인가? 하하하 정말 대단한 아가씨군. 나는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아가씨는 그런 내 모습을 보고는 시무룩한 표정이 되었다. “역시 어려운 일인가 보죠. 그렇겠죠. 그렇게 쉬운일이 아닌건 저도 알아요.” 이런 이런 그렇게 말하면서 포기하는 듯 하지만 그런 표정을 짓지말고 이야기를 해야지.. 정말 세상 끝난 것 같은 표정으로 그런말을 하면... “무슨 말씀을 하하하 제가 저거 따 드릴께요. 하하하 ” 나는 그렇게 자신있게 말하고는 게임 주인에게 돈을 지불했다. 솔직히 내가 저 인형을 그냥 따 간다면 주인도 손해겠지만 아까 아가씨가 잃은 돈을 생각하면 저 인형 가격 보다는 더 많이 벌었을 테니 손해는 아닐 것이다. 그러니 양심에 걸릴 것도 없다. 하하하 변명같긴 하다. ㅡ.ㅡ;; 나는 조용히 풍아를 소환했다. “풍아 소환” 그리고 조용히 입 속으로 풍아에게 내가 던진 다트를 전부 가운데 작은 원 안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말했다. 아마 옆에서 보는 사람은 기도하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하하 나는 천천히 다트를 들어 던졌다. 휘-익 탁. 음... 역시. 하하하 당연히 다트는 정 중앙에 들어가서 꽂혔다. 옆에 서 있던 주인도 움찔하는 표정이 되었다가 우연이겠지 하는 표정으로 다시 느긋하게 바뀌었다. 두 번째 휘-익 탁. 음 역시. 주인은 앞서의 표정 변화를 반복했다. 세 번째 휘-익 탁. 음. 역시. 주인은 아무래도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표정이다. 네 번째 역시. 다섯 번째 역시. 여섯 일곱 번째 역시. 삽시간에 주위에는 사람들이 벽을 이루었다. 하하하 음.. 이렇게 시선을 집중시키다니.. 쩝.... 왠지 화끈거리는구만... 나는 마지막 다트를 던졌다.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아가씨는 고릴라 인형을 안지도 못하고 들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었다. “하하하 그거 어떻게 들고 갈려고 그렇게 욕심을 냈어요?” 나는 놀리듯 물어보았다. 하지만 그 아가씨는 겨우겨우 그 인형을 안고 근처 벤치로 가더니 벤치 위에 인형을 올려 놓고 즐거운 얼굴로 그 인형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무척이나 행복한 표정이었다. 덕분에 나도 기분이 즐거워졌다. “하하하. 아가씨 그러고 보니 혼자 놀러 나온 건가요? 이런 그럼 그 인형을 어떻게 들고 갈거죠?” 나는 다시 웃으며 물어 보았다. “헤헤 어떻게든 되겠죠. 아무튼 고마워요. 이 인형. 너무 좋아요.” 아가씨는 다시 인형의 얼굴과 가슴에 머리를 묻으며 말했다. 그리고 나는 갑자기 더 이상 내가 그 아가씨 옆에 있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 이성적으로는 아가씨에게 말을 걸고 계속 같이 이야기하고 재미있게 놀라고 시 키고 있었지만 내가 가진 본성이 그런 속보이는 짓에 미숙한 탓에 아쉽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만 헤어져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저 그럼 즐거운 크리스마스 되세요. 나는 이만....” 나는 그렇게 인사를 했다. 하지만 그 아가씨가 발을 돌리려는 나를 잡아 놓았다. “저기요. 저기. 인형도 주셨는데.. 바쁘지 않으시면 제가 차라도 한 잔 사 드리고 싶은데....” 흐흐 차를 사준다고.. 켜켜켜 솔직히 같이 있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건 내가 속보이는 짓을 하지 못하는 탓이지 관심이 없어서는 절대 아니다. 그리고 이런 기회가 생겼는데 그냥 갈 정도로 바보도 또 숫기가 없는 것도 아니다. 하하하 기회가 있으면 잡아야지. “하하, 차라.. 그럼 그 차 한 잔 얻어 먹어 볼까요?” 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의 말을 받았다. “혹시 제가 그런말 하길 기다리신건 아니예요?” ㅡ.ㅡ;;; “하하 뭐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 이야기 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습니다. 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니까 아무래도 혼자 있는 것은 싫었는데... 하하 이렇게 기회가 되었으니 얼마나 좋아요. 하하” 나는 아무래도 웃음을 숨길 수가 없어서 어쩌면 붉어진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좀 화끈 거렸다. 쩝.. 하지만 문제는 그 고릴라 인형이었다. 하하하 아무래도 크기가 너무 큰 것이다. 결국에 그 아가씨가 들기 버거워하는 그 인형을 내가 대신해서 업게 되었다. 인형을 등에 업고 아가씨가 목에 늘이고 있던 목도리로 고릴라의 허리를 둘러서 내 허리에 묶는 .... 졸지에 고릴라 아빠와 엄마가 된 우리는 복잡한 사람들을 헤치고 나갔다. 우리는 간단하게 전통 찻집 쪽으로 결정을 보았다. 나는 원래 차를 잘 마시지 않는 편이고 아가씨도 따뜻한 전통차를 마시고 싶다고 해서 가까운 전통 찻집을 가기로 한 것이다. 아가씨는 자주 가는 찻집이 있다며 조금 걸어도 되느냐고 물었다. 나는 냉큼 상관없다고 대답했다. 뭐 고릴라를 업고 좀 걷는다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도 아닐테고... 하하하 사람들이 지나갈 때 마다 돌아보는 것이 좀 쑥스럽기는 하지만... 왠지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 쑥스러움도 덜해지는 느낌이었다. 찻집은 예상외로 외진 곳에 있었다. 한참을 걸어서 전통가옥들이 즐비한 골목을 들어가서 가게가 있을 법하지 않은 곳이 었는데 골목이 끝나는 즈음에 한지로 茶를 적어 놓은 한옥 대문이 있었다. 그 아가씨는 거리낌 없는 동작으로 대문을 밀고 들어갔고 작은 소나무 분재와 매화나 무가 놓인 좁은 마당을 둘러선 방과 대청 마루가 눈에 들어왔다. 대청마루는 유리로 된 문으로 막혀 있었지만 그것을 빼면 거의 손을 대지 않은 한옥의 모습을 하고 있는 곳이었다. 아가씨는 나를 데리고 한 쪽 방으로 갔고 나는 섬돌 위에서 신발을 벗어야 하나 어쩌 나 고민 했지만 아가씨가 그대로 방문을 열고 들어가기에 따라 들어갔다. 방 안으로는 벽이 전부 트여 있어서 좁은 느낌을 주지 않았고 겉보기와 달리 찻집의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나는 고릴라를 먼저 의자에 내려 놓기 위해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다리를 굽히고 허리에 둘러진 목도리를 풀었다. 그리고 다시 목도리를 접어서 고릴라의 목에 둘러 준 후에 고릴라 옆에 앉았다. 그 아가씨는 그런 내 모습을 웃음끼 어린 얼굴로 보더니 내가 자리에 앉자 물어왔다. “뭐 드실래요? 저는 국화차를 마실건데...” 흠... 국화차라.. 난 먹어 본 적도 없다. 그러니 그거 먹는 건 아무래도 모험이다. 아는 걸 먹어야 한다. 아는거.. “나는 대추차로 먹지요. 그거 달삭지근하고 먹을 만 하던데...”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음 대추차요? 음.. 여기 있군요. 그럼 그걸로 드세요.” 오래지 않아 주문을 받는 사람이 왔다. 사람들이 별로 없는 모양으로 중년의 기품이 있어 보이는 아주머니가 주문을 받으셨다. “사장님 오늘은 손님이 더 없는 것 같으네요. 그래도 명색이 크리스마스 이븐데...” 앞의 아가씨는 그 아주머니를 아는 척 했다. “호호, 여기 찻집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몇 안될 텐데... 더구나 오늘 같은 날 여기까지 외진 곳에 오는 사람이 어디 있을려구. 다례양 아니면 아마 없을걸?” “어머 사장님도 참... ” 나는 그 때서야 그 아가씨의 이름이 다례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 누구야? 애인?” 아주머니는 눈웃음을 지으면 다례라는 아가씨에게 물었다. “어머 아니예요. 그냥 방금 만났어요. 우선 차나 주세요.” 그 아가씨는 당황스럽다는 표정인지 장난하는 표정인지 모를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사장 아주머니의 말을 끊으며 쫓아 보냈다. “이름이 다례군요. 혹시 성이 진인가요? 진다례?” “어머.... 어떻게 아셨어요? 제가 진가인걸요?” 아가씨는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정말 진씨라는 말입니까? 진다례? 난 그저 진달래 생각이 나서 장난으로 한 말 인데...” “호호호호. 사실은 그렇게 물어보는 사람들이 가끔 있어요. 진다례 아니냐고... 하 지만 사실은 진다례가 아니라 금다례예요. 금다례. 호호호. 그리고 진짜는 금이 아니 라 김이예요. 김. 써 놓고 보면 금다례라고도 읽잖아요. 그래서 금다례 혹은 진다례 는 제 별명이구요. 진짜는 김다례예요. 많을 다. 징검다리 례. 호호” 나는 그 말을 듣고 한참이 지나서야 진짜 이름은 김다례. 그리고 진다례나 금다례라는 별명을 지녔다는 걸 이해했다. 명색이 국어 선생이면서.. 쩝.. “아~~! 난 루탄이라고 해요. 최루탄. 눈물 루. 탄식할 탄. 하하하 이름이 우습지만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난 탓이거니 해야지요. 하하하 ” 다례라는 그 아가씨는 내 이름을 듣더니만 마시던 물에 사례를 들였는지 잠시 켁켁 대었다. “큭--ㅋ 흠!흠. 죄송해요. 이름이 너무 뜻밖이어서... 호호 그래도 루탄. 이건 멋있네요. 최루탄은 좀 그렇지만. 호호호.” 크-윽 어쩔 수 없는 운명의 장난이다. 내 이름이 이런 건 내 잘못이 아니니까. 하하하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이젠 만성이 된 일이기도 하고.. “흠..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웃을 필요는... ㅡ.ㅡ;;” “어머 죄송해요.” 다례는 조금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여전히 얼굴에서 웃음기를 다 비워 내지는 못 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주인 아주머니가 차를 들고 들어 왔다. “뭐가 그렇게 즐겁죠? 재미 있는 일이 있나봐요.” 주인 아주머니는 그렇게 말을 붙이며 찻잔을 내려 놓았다. 재미라니.. 그렇지 다례야 재미가 있을는지 모르지만 나는 재미 없는데... 그렇게 찻잔이 앞에 놓이고 나자 별로 할 말이 없어서 찻잔만 홀짝거리기 시작했다. 그건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례라는 아가씨도 마찬가진 것 같았다. 달싹한 대추차는 평소 마시지 않던 것이지만 참 맛이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별미였다. “차가 아주 맛이 좋군요. 여기 자주 오시나 봐요.” 나는 다례라는 아가씨를 건너 보며 말했다. “아~~ 예. 여기 차 아주 잘 끓여요. 사장님이 직접 끓이지는데 시간도 정성도 상당히 많이 들어가거든요.” 다례라는 아가씨는 그렇게 말을 받았다. “그런데 다례씨. 이렇게 불러도 되죠? 다례씨는 나이가 얼마쯤 됐어요? 전 사람 얼굴 보고 나이를 잘 짐작하지 못하거든요.” “어머, 숙녀의 나이를 물어보시다니. 호호. 그저 먹을 만큼 먹었겠거니 하세요. 비밀이거든요. 호호호” ㅡ.ㅡ;; 먹을 만큼 먹었다라니... 쩝... 찻집 답지 않게 음악이 흐르지 않는 곳에서 그렇게 간간히 찻잔을 들면서 가만가만 주위를 살폈지만 그리 눈에 뜨이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례라는 아가씨에게 특별히 말을 걸기도 쑥스럽고. 나는 그저 비어가는 찻잔만 돌리고 있었다. “저 그런데 루탄씨는 어디 사세요? 여기서 가까우신가요?” 갑자기 그 아가씨가 질문을 해 왔다. 아무래도 나처럼 답답했던 모양이다. “네.. 여기서 좀 멀어요. 시 외각에 살고 있어요. 거의 동쪽 끝이죠. 구리 가는 길목에...” “네... 그렇군요. 저는 이 근처에 살아요.“ 이 근처라... 아마도 이 한옥촌의 어느 곳에 집이 있는 모양이었다. “평소에는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데.... 오늘은 특별한 날이라서 한 번 나와 본 거예요.” “아~~ 그렇군요. 저도 평소에는 집 밖으로 잘 나가지 않아요. 그저 집에만 있는 편이죠.” 우리들은 이렇게 실없는 이야기만 주고 받으며 차를 마셨다. 그리고 그렇게 나누던 이야기마저 끊어질 때 쯤, 차도 바닥을 들어 내었다. 사실은 아껴먹는다고 먹은 건데도 어느틈엔지 다 마셔 버리고 말았다. 하하하 그렇게 잔을 비우고 잠시 앉아 있던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를 다 마셨으니 그만 일어나자는 다례씨의 의견에 따른 것이었다. 그렇다고 어디로 가자고 정한 것도 아니어서 그저 이제는 나가서 헤어지는 일만 남았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밖으로 나오자 고릴라 인형이 문제가 되었다. 고릴라 인형은 아무래도 다례라는 그 아가씨가 들고 다니기에는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나도 그 아가씨도 머뭇거리고 있었다. “나참.. 이럴 때는 제가 댁까지 들어다 드리겠습니다. 대신 차 한 잔 더 주십시오. 뭐 이렇게 말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무슨 사람이 그렇게 눈치도 없이...” 결국 다례라는 아가씨가 손 들었다는 표정으로 먼저 말을 꺼냈을 때에야 “이런 이런... 죄송합니다. 제가 집에까지 모셔다 드릴께요.” 이렇게 버벅거리는 말로 곤경에서 빠져 나올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한옥촌 골목을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느 정도는 위치를 짐작 할 수 있었는데 골목을 몇 번 돌아 나가면서 계속 되는 골목길에서 어느틈에 방향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평소에도 길눈이 어둡다는 소리는 듣지 않는 편이었고 기껏해야 종로바닥 어디겠거니 하고 다례라는 그 아가씨의 뒤만 따라 걸었다. 그렇게 한동안 걷고 났을 때 우리는 어느 틈에 높은 솟을 대문이 있는 커다란 한옥 앞에 와 있었다. 평소 사극에서 한 시대를 주름잡던 사대부의 우두머리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나오는 그런 집 보다도 더 웅장해 보이는 그런 집이었다. 종로에 이런 집이 아직도 남아있었나 싶은... 하지만 예부터 서울에서 숨겨진 부자들은 모두 종로에 산다고 했으니 그럴 수도 있으려니 싶었다. 그 큰 대문은 다례씨가 슬쩍 밀었는데도 삐그덕 거리는 소리도 없이 스르르 열렸다. 대문 안으로는 양 옆으로 사랑채가 있었고 안쪽으로 다시 대문이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사람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없네요.” 나는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네, 평소에도 사람이 별로 없는데 오늘은 특별한 날이라 거의 다 밖으로 나갔어요.” “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예수 탄생일에 이런 집에 사는 사람들이 들뜨는 것은 왠지 어울리지 않게 느껴졌지 만 그래도 이제는 국정 공휴일에 속하고 전 세계적인 휴일이니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다시 두 번째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안에서야 안채로 보이는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고, 다례씨는 그 건물 오른쪽으로 난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예전 같으면 별당이라 불렀을만한 곳이었다. 마당에 작은 연못이 있었지만 투터운 얼음이 얼어 있었고, 연못 주위는 여러 자연석 으로 꾸며져 있었다. 아마 저 속에는 잉어라도 놀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있는 아담한 건물 앞에서 다례씨는 나를 돌아 보았다. “다 왔어요. 여기가 제 방이에요.” 다례는 방문 앞에 작은 마루가 붙은 방 앞에서 그렇게 말하고는 마루 앞에 올라 섰다. 그리고 다시 나를 돌아 보며 “어서 올라 오세요. 안은 여기보다는 따뜻할거예요. 제가 차 한 잔 대접 할께요.” 나는 “예... 예.” 하며 다례씨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이 집 분위기로 봐서 외간 남자가 여자 방에 들어갔다가 들키면 치도곤을 당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몰라. ㅡ.ㅡ;; 나는 왠지 등골이 서늘해 지는 기분이었다. 지금이야 사람이 없지만 나중에 알게 되면... “저기 어른들은 안계신 모양이네요. 아까 안채쪽에도 불이 꺼져 있는 것 같던데...” “네, 부모님께서는 지금 외국에 나가 계세요. 그리고 이 집에는 일하는 사람들 뿐이고요.” 방 안은 겉보기와 달리 현대식이었다. 넓은 방 안 한 쪽에는 칠기로 된 옷장이 있었고, 화장대 그리고 차를 마실만한 둥근 유리 테이블도 세 개의 의자 중앙에 놓여 있었다. 침대는 놓여 있지 않았지만 여러 가지 물건들의 배치로 보아서 여기가 침실은 아닌 모양이었다. “잠깐만요. 차 끓여서 올께요.” 내가 허리에 맨 고릴라를 풀어 놓는 동안 다례라는 아가씨는 그렇게 말하곤 옆으로 난 문을 열고 사라졌다. 나는 고릴라를 방 구석에 밀어 놓고 천천히 방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깔끔한 분위기... 동양화 족자가 걸린 벽이며 칠기로 된 것 같으면서도 밝고 그러면서 기품이 있어 보이는 장과 정돈된 화장대. 유리 테이블 위에는 별다른 장식이 놓여 있지 않았지만 세 개의 의자도 방 전체의 색과 잘 어울리고 있었다. 이상하게 현대적인 것과 고전적인 것이 잘 어울려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심목? - 1 그렇게 이것 저것 고개를 돌리며 구경을 하고 있는 동안에 다례라는 아가씨는 찻잔을 들고 사라졌던 문을 열고 나타났다. 두 개의 옹기로 된 제법 큼직한 찻잔을 나무로 된 쟁반에 받쳐 든 채였다. “이 차 한 번 드셔 보세요. 맛있을 거예요.” 무슨 차라는 말은 없이 한 번 먹어 보라고 내미는 옹기 찻잔에는 무슨 색인지 모를 액체가 가득했다.(옹기 색이 어두우니 차의 색을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아가씨도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테이블이 작아서 테이블 위에 팔굽을 올린 모습으로 있으면 너무 가까이 마주 보는 것 같아 나는 조금 깊이 의자로 파고 들어 앉았고 그 아가씨도 느긋하게 의자에 기댄 모습으로 찻잔을 테이블에서 들었다. 나는 호기심에 무슨 차인가 하고 천천히 차를 입에 머금고 맛을 보았다. 처음 먹어보는 차였다. 뜨거운 차였지만 이상하게 청량감이 느껴지는 그러면서 향도 상쾌하다는 느낌이 들 뿐 무슨 냄새가 난다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참, 잠시만 혼자 계세요. 전 옷을 좀 갈아입어야 될 것 같아요.” 그 아가씨는 한 마디를 남기고 다시 예의 그 문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천천히 차를 마시다가 갑자기 수아를 불러 보고 싶었다. 나는 조용히 찻잔을 내려 놓고 수아를 불렀다. “수아 소환” 언제 그 아가씨가 들어올지 몰랐기 때문에 나는 차를 매개로 해서 소환을 했다.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소환된 정령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소환된 수아의 모습에 하마트면 비명을 지를 뻔 했다. 수아는 온통 피 칠을 한 것 처럼 붉은 빛을 띄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제서야 짙은 옹기 찻잔 안의 차가 짙은 핏빛임을 알았다. 거기다가 더 이상한 것은 수아는 소환 된 이후 줄곧 찻잔의 물을 정화하고 있다는 것 이었다. 수아는 더러운 물을 정화하는 능력이 있다. 하지만 시키지 않으면 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소환한 이후 찻잔의 물을 정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점차 수아의 모습은 본래의 색을 찾고 있었지만 나는 불안해졌다. 내가 집에서 녹차나 커피를 마실 때 소환한 적이 있었지만 그런 때에 수아는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런 것일까? 나는 천천히 단전의 기운을 끌어 올려서 몸 안으로 움직였다. 몸에 이상이 있는지 어떤지 알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즉시 반응이 왔다. 단전에서 나온 기운은 몸으로 채 퍼지지 못하고 곳곳에서 막히고 있었던 것이다. 온 몸에 통로를 막은 것 처럼.... ‘독이다.’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이런 생각이었다. 하지만 왜 무었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왜 나에게 독을 먹였을까? 그리고 무슨 독일까? 나는 갑자기 급한 마음이 되었다. 나는 급히 수의 기운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 힘들게 수아에게 그 기운을 불어 넣었다. 아직은 독이 많이 퍼지지 않았는지 힘들기는 했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수아, 내 몸 속의 독들도 없앨 수 있니? 아니 없애지 못하면 지금 하는 것 처럼 굳혀서 한 쪽으로 모아 두었으면 좋겠다.” 나는 수아에게 내 몸의 독들을 한 쪽으로 몰아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아직 내 몸 속의 독기운 같은 것을 가려서 따로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능력도 안되었고 그럴 기운도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수아에게 그런 부탁을 한 것은 어차피 내가 먹은 것도 액체니까 어떻게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에서 였다. 하지만 수아는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내 손 위로 올라오더니 몸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나는 내 몸 속에서 피가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몸 속의 피들은 빠르게 손바닥으로 밀려들어와서 밀려 나갔다. 그리고 새끼손가락 끝으로 붉은 점이 모여 들었다. 일단은 그것이 무었인지는 몰랐지만 차 속에 들어 있던 불순물임에는 틀림이 없을것 이었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지났을 때, 수아는 다시 손바닥 위로 모습을 드러 내었다. 그리고 내 몸 속에서 기의 흐름을 막고 있던 부분들이 시원하게 뚫린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손가락 끝에 모인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었다. 나중에 손가락 끝에 상처를 내고 뽑아 내면 될지... 나는 일단은 수의 기운을 끌어 올려서 손가락 두 째 마디까지를 막아 두었다. 그리고 다시 수아를 돌려 보냈다. 내 기를 받고 있는 수아는 다른 사람의 눈에도 보이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방문이 열리며 다례라는 그 아가씨가 다시 들어왔다. 옷을 갈아 입은 모양인지 개량 한복 같은 모양의 옷을 입고 있었다. 한복 모양의 옷이 썩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도 잠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에 나는 난감했다. 독을 먹었으니 기절한 척 해야 하나 배가 아픈 척 해야 하나 아니면 머리가 아픈 척 해야 하나... 독이 어떤 증상을 일으키는지 알아야 반응을 보이지.... 하하하 나는 등으로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다례라는 아가씨는 내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잠깐 놀라는 표정이 되는 것 같았다. “어머 차 안드셨어요? 왜 맛이 없으세요?” 그 아가씨는 그렇게 말하며 다가 왔다. 나는 얼른 찻잔을 들어 들이켰다. “아..아뇨. 조금 뜨거워서 식혀 먹느라고...” 나는 찻잔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미 정화가 되어 있었고 바닥에 깔린 고형물만 조심해서 삼키지 않는다면 걱정은 없을 터였다. 내가 차를 마시는 모습을 본 그녀는 안도하는 표정이 역력하게 나타났다. 하지만 이내 표정이 바뀌었다. 나는 순간 이 차가 반응이 빨리 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으흠... 어지럽다.” 나는 어찌 되었든 기절 한 척 하기로 했다. 아니면 다시 일어나면 그만인 것이다. 테이블 위에 엎어진 나는 그 아가씨의 표정을 살필 수는 없었다. 눈도 감고 있는 형편이라... 다만 잠시 가만히 있던 그 아가씨가 천천히 테이블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을 뿐이다. 나는 갑자기 찻잔 바닥에 깔려 있는 작은 알갱이들을 떠올리곤 신음을 하며 몸을 움 직이는 척 하며 바닥으로 옹기 그릇을 떨어뜨렸다. 예상외로 바닥에 떨어진 옹기잔은 깨지지는 않았지만 그 아가씨는 떨어진 잔에는 신 경을 쓰지 않는 모양으로 놀라는 소리도 내지 않았다. 천천히 나에게 다가온 그녀는 “미안해요, 하지만 방법이 없어요.” 라는 말을 흘리며 나의 뒷덜미를 잡고 자신의 어깨위에 나를 올려 놓았다. ‘허걱, 이 여자 장사네. 무슨 힘이 이렇게...’ 그리곤 그녀는 나를 들춰 업고 예의 그 문으로 다가 갔다. 나는 머리가 그녀의 등 뒤에 있었기 때문에 눈을 뜨고 주위를 살필 수가 있었다. 다만 내가 놀라서 심장이 평소와 다르게 빨리 뛰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에 숨을 고르게 하느라 애를 먹었다. 여자가 들어간 방은 별다른 것이 없는 텅빈 작은 골방이었고 그 옆으로 또 작은 문이 있었다. 여자는 그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사실은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아마도 아까 그 건물의 뒷채가 아닌가 싶었고 그 곳에는 아주 낡아 보이는 작은 문이 높은 담에 달려 있었다. 담은 높아서 3미터 가까이 되어 보였는데... 사람이 고개를 숙여야 들어갈 정도의 문이 그 담에 개구멍처럼 달려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나를 어깨에 걸치고 그 문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문을 닫기 위해 몸을 돌렸을 때 나는 그 안의 정경을 볼 수 있었다. ‘뭐야? 아무 것도 없다니..’ 그 곳은 사방이 담으로 둘러 쌓인 곳이었지만 아무것도 없는 공터였다. 아니 공터라기 보다는 중앙에 말라비틀어진 분재 같은 나무 하나가 있는 그런 곳이었다. ‘이 곳에서 뭘 하려는 것일까?’ 여자는 다시 걸음을 옮겨 공터의 중앙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중앙에 와서는 나를 내려 놓았다. 나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기 때문에 그 여자가 무엇을 하는지 볼 수가 없었다. 잠시의 시간이 지나도 여자는 움직임이 없었다. 나는 조금씩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솔직히 눈 감고 누군가 때리기를 기다리는 공포는 그냥 열 대를 맞는 공포 보다 더 크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눈을 가늘게 떠 보았다. “헉!!” 나는 그만 놀라서 튕기듯 일어나 서너걸음 뒷걸음을 쳤다. 나를 내려 놓은 그 여자가 어느틈에 바짝 마른 미이라의 모습으로 서 있었던 것이다. 어떤 생기도 없이 그저 고목의 가지 같은 느낌으로 서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놀라서 그 자리에서 뒷걸음질 치고 있는 동안에도 그 여자는 점점 말라가는 모습으로 발치의 나무와 연결되고 있었다. 그녀는 나무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다리는 나무에 스며들어 뭉쳤고 팔과 머리카락들은 하늘로 뻗치며 나뭇가지가 되어갔다. 얼굴 부분만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도 나무가 기형으로 자라나 만들 진 모습처럼 형태가 온전한 것은 아니었다. “뭐 뭐야? 이게 무슨 일이야.” 내가 놀라는 사이에 어느덧 그 나무(?)의 변신은 끝이 났다. 나무를 뿌리채 뽑아 거꾸로 땅에 박아 놓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는 기괴한 나무. “어 떻 게 그 걸 마 시 고 도 정 신 을 차 릴 수 가 있 었 지 ?” 이상한 공명 같은 소리로 나무가 물었다. “뭐가 어떻게야 어떻게는. 그걸 알아서 뭐 하자는 거야? 너 도대체 정체가 뭐야? 왜 나에게 그런걸 먹인거지?” 나는 천천히 뒷걸음질 치며 그 나무에게 물었다. 하지만 내가 그 쪽문을 통해 나가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둘 나무는 절대 아니었다. 어느틈게 쪽문에는 얼기설기 나무의 뿌리 같은 것들이 얽혀 있었고 아무리 살펴봐도 문이 쉽게 열릴 것 같지는 않았다. “인 간 너 는 여 기 에 서 살 아 나 갈 수 가 없 다. 도 망 을 가 려 고 했 으 면 이 곳 으 로 들 어 와 서 는 안 되 는 거 였 어. 여 긴 나 의 공 간 이 다.” 여전히 머리를 울리는 그 소리는 무감각하고 어지러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는 거지? 넌 뭐야 뭐라는 녀석인데 나를 잡고 이러는 거야? 내가 뭘 어쨌다고 나를 가지고 이러는 거냐고?” 나는 조금씩 단전의 기운을 끌어 올리며 말을 걸었다. “나는이곳에서수천년을살아온지심목이다.너희인간들이이곳에도시를건설하기전부터이 곳에서뿌리를내리고살고있는존재다.나는너희인간들이이땅에자리를잡을때도도시를건설 할때도몇번이고폐허를만들어낼때도그저그러려니하고있었다.하지만너희가땅에쇠말뚝을 박고땅을파헤쳐지하철이라는것을만들고부터나의생명을유지하던땅의기운이흩어지기시작 했다.덕분에나는나의생명을유지하기위하여너희인간을이용하기로결심했다.그리고인간너 는다른인간들에비해서유독땅의기운을강하게가지고있다.그걸네가알지모르지만.다혜의눈 에네가보인것이불운이라생각해라.아니네가다혜에게친절을배푼것이잘못된선택이었다고 생각해라.” 나무는 그 사이에 적응이 되었던지 말이 빨라졌고 또 머릿속으로 전달되는 것도 명확해져 있었다. “이 이런, 그럼 혹시 그 이용이라는 것이 사람을 죽여서 비료 같은 것으로 쓰는 거냐?” 나는 오싹한 기분으로 물었다. “인간나는인간을죽이지는않는다다만몸속의기운을빼앗을뿐이다.나약한인간들이야그렇 게되면폐인이되기는하지만나는인간을죽이지는않는다.그리고그런폐인이된인간들은이집 에서죽을때까지다례가알아서간수하고있다.그러니너도이제곧그사람들속에서아무생각도 없이살다죽으면되는것이다.이제대답을다했으니이만죽어라인간.” 나는 지심목이라는 녀석이 어떤 형태로든 공격을 해 올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서둘러 화의 기운을 끌어 올리고 화아를 소환했다. “화아 소환” 화아는 여전히 티꺼운 눈으로 두리번 거리며 나타났다. 내 기운으로 소환되면 내 몸 주위에 떠 있거나 땅위에 서 있는데 화아와 지토는 땅위에 서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순간 땅속에서 지심목의 뿌리들이 솟아 나오면서 내 발목을 감았다. 그리고 그 뿌리들을 통해 몸 속의 기운이 빠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다급히 외쳤다. “화아 이 뿌리들을 태워버려. 파이어볼.” 여기서 잠깐, 내가 정령들에게 여러 가지 기술들을 가르치면서 이름을 붙일 때 그 기 술을 따온 판타지 속의 이름들을 붙여준 것이 제법 많이 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지만, 그중에서 파이러볼도 판타지의 마법명을 따라 붙인 이름이다. 화아는 순식간에 내 발밑으로 불덩이를 토해내었다. 화르르륵 -- 펑! “켁--!” 나는 순간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화아의 불덩이가 내 발쪽을 강타한 것도 좋고 덕분에 나무의 뿌리들이 거의 끊어져 서 내가 발을 움직이자 모두 끊어진 것도 좋았지만 멍청한 화아의 불덩이는 지심목의 뿌리 뿐 아니라 내 발까지도 같이 상처를 입힌 것이었다. “아이고... 나를 죽여라 죽여. 내가 줄기 끊어달랬지 언제 내 발을 날리라고 그랬냐?” “지토 소환” 나는 지토까지 소환을 했다. “지토 저 나무의 뿌리가 나에게 오지 못하도록 막아줘. 부탁한다.” 지토는 스윽 땅속으로 사라졌고 곧 내 몸에서 상당한 기가 빠져 나가기 시작하는 것 을 느꼈다. 아마도 땅 속에서 지심목의 뿌리를 막느라고 제법 힘을 쓰는 모양이었다. “화아 저 지심목을 공격해, 나무니까 태워버려.” 화아는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지심목으로 달려들어 불덩이를 쏘아 붙이기 시작했다. 내가 가르친 것이 그것 뿐이니 하는 수 없는 일이지만 너무 단순하다는 생각이 든다. 뭐 움직이지 못하는 나무를 공격하는 것이니까 어려울 것도 없을테지만..... 하지만 나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나는 오래지 않아서 알 수 있었다. 지심목은 화아의 불덩이 공격을 자신의 나뭇가지들을 이용해서 쳐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럴 때 마다 가지들이 상하지는 했지만 어느틈엔지 가지들은 상처를 회복하고 또 다시 자라나고 해서 정작 몸체에는 별다른 상처를 주지 못하고 있었다. 한동안 그런 공방이 계속되었지만 어느새 나도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땅 아래에서는 지토가 땅 위에서는 화아가 힘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내 몸에서 빠져 나가는 기의 양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지심목은 지치지도 않는지 그대로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나는 지토와 화아가 지심목을 상대하는 동안 내가 들어온 쪽문으로 다가 갔다. 쪽문 쪽은 지토가 땅 속에서 뿌리를 막고 있기 때문인지 얽혀있던 뿌리들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서둘러 쪽문으로 가서 문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그 순간 엄청난 양의 기운이 빠져 나가면서 쪽문으로 지심목의 뿌리들이 쏟아져 나왔고 곧 내 몸을 얼기 설기 잡아매기 시작했다. 아마도 한꺼번에 몰려오는 지심목의 뿌리를 막기에는 내가 지토에게 보내는 힘이 약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 지심목이 흡혈을 하는 것 처럼 내 몸에서 기를 빼앗아 간다는 것이었다. 몸을 감고 있는 지심목의 뿌리들은 내 몸 곳곳에 뿌리를 내리듯 감겨왔고 화아도 지 토도 어느사이 견디지 못하고 역소환을 당해 버렸다. 나는 순식간에 나무 뿌리로 감겨서 고치 모양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내 몸이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과 몸안의 기운들이 빠져 나간다는 것에서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죽음... 어둡고 캄캄한 곳에서 맞이하는 죽음... 하지만 나는 죽고 싶지 않았다. 나는 궁리하고 생각하고 고민하고 내가 아는 모든 지식들을 동원했다. 그러다가 내가 오행의 기운을 모으는 방법 중에서 목의 기운을 모으는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지심목이 나의 기운을 빼앗아간다면 나는 지심목의 기운을 빼앗아 오자. 여기는 지심목이 만든 공간이라 목기가 많으니까 그 기운을 빼앗아 오면 어쩌면 지심목을 상대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단전에서 목기를 끌어올려 운기를 시작했다. 같은 목의 기운이라 그런지 지심목의 뿌리들도 몸속의 다른 기운은 빼앗아 가면서도 목의 기운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목의 기운을 몸을 운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렵게 한 번의 행공이 끝났을 때 어쩌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졌고 오직 운기에만 정신을 쏟기 시작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나는 오직 목의 기운을 운기하는 것에만 열중했고 그것이 성공했는지 죽지 않고 있었다. 하루나 이틀 혹은 한 달이나 두 달.. 아니면 일년 혹은 이년.... 나는 오행 중 목의 기운을 운기하는 것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몸 안으로 흘러 다니는 목의 기운이 엄청나게 강해졌다는 것을 느끼고 있지만 지심목 의 뿌리들은 여전히 나를 감싸고 있었고 내 몸은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내 몸속에 다른 기운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목의 기운만이 몸 전체를 돌고있을 뿐, 남은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지심목은 나를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나도 죽지 않기 위해서 또 할 일도 없었으므로 여전히 목의 기운을 운기하고 있을 뿐 이었다. 또 시간은 흘렀다.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른다. 그저 시간이 흘렀을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다. 내 단전 안에는 목의 기운이 가득 차고 있다. 지, 수 , 화, 풍, 금, 광의 기운들은 사라져 버린지 오래다. 오직 하나의 기운만이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지심목은 더 이상 내 기운을 빼앗아 가지 않는다. 아니 빼앗아 갈 기운이 남아있지 않다. 아마도 지심목은 나를 자신의 신체의 일부쯤으로 여기는 모양이다. 내가 목의 기운만을 지니고 있자 아마도 나의 존재 자체를 놓친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조심해서 화의 기운을 모으는 운기를 해 보았다. 예상외로 막대한 화의 기운이 지심목에 쌓여 있었다. 어떤 경로로 쌓인 것인지는 몰랐지만 상당한 기운이 지심목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화의 기운을 모으기 시작하자 어김없이 지심목이 나에게서 화의 기운을 빼앗아 가 버렸다. 나는 난감해졌다. 어떻게 해야 여기에서 나갈 수 있을까? 나는 지금 그저 정신만 살아 있을 뿐, 몸은 살아 있다고 할 수 없었다. 몸 전체는 나무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무의 기운 이외에 다른 아무 기운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다만 내가 죽지 않은 것은 그 나무의 기운을 내 기운으로 사용하는 심결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살아나고 싶었고 어둠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나는 다시 궁리했다.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리고 드디어 방법을 찾아내었다. 지심목이 내 몸을 자신의 몸의 일부로 생각한다면 나도 지심목을 내 몸의 일부로 생각하고 그 몸 속의 기운을 내 것 처럼 사용하면 되는 것이다. 다행히 이 지심목은 오행의 모든 기운을 골고루 가지고 있었다. 지수화목금의 모든 기운들을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가장 지배적인 기운은 목의 기운이었지만 기운을 먹고 사는 이 지심목은 세상 의 모든 기운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모양으로 세상의 모든 기운을 다 지니고 있다고 할 만큼 다양한 기운들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내 몸 속에 목의 기운과 다른 기운이 있으면 지심목이 여지없이 빼앗아가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다른 방법을 쓰기로 했다. 오행의 기운을 한데 모아서 그 기운을 단전에 모으는 것이었다. 물론 오행의 기운이 모이면 전혀 다른 기운이 되기는 하겠지만 한가지 믿어볼 만한 것은 오행의 기운이 모인 기운은 오행의 어떤 기운으로도 변형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오행의 기운을 하나로 뭉쳐 그것을 목의 기운으로 바꾸어 단전에 저장한다. 내가 세운 계획은 이런 것이었다. 다행스럽게 지심목은 오행의 기운을 넘친다고 할 만큼 지니고 있었으므로 가능할 것 같았다. 오행의 기운을 모으는 일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우선 다섯 가지의 운기를 동시에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고 그렇게 모인 기운을 단 전에서 혼합시켜야 하는 어려움도 있었다. 거기에 더해서 나는 그렇게 바뀐 기운을 지 심목이 눈치채지 못하게 목의 기운으로 바꾸어 놓아야 한다는 숙제가 한 가지 더 있었다.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다섯 가지 행공을 해 나갔다. 가장 어려운 것은 지심목 전체를 나의 몸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지심목 전체의 모습을 파악하는 것부터 지난한 작업이었다. 하지만 곧 지심목 전체를 내 몸에 붙은 혹덩어리 쯤으로 생각하기로 했으므로 그 문제는 해결되었다. 그리고 그 혹덩어리 속에서 오행의 기운을 불러오는 것도 몇번의 시도 끝에 포기 해야 했다. 혹 덩어리는 자신의 몸 속에서 다른 기운들이 움직이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기운 자체를 끌어오는 것은 포기하고 아주 조금씩 운기를 통해서 주위의 기를 모아들이듯이 표시 나지 않게 지심목 속의 기운을 끌어 오기로 했다. 시간은 넉넉했다. 나는 시간이 흘러가는 것인지 아닌지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에(실제로 시간 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다. 배가 고프지도 않고 심장이 뛰지도 않는다. 그저 나무같 은 내 몸과 생각하는 정신만이 내가 가지고 있는 자아의 전부이다.) 시간이 걸린다거나 하는 문제는 전혀 상관이 없는 문제였다. 쉬지않고 운기는 계속되었고 내가 만드는 오행의 집합체들은 그 때 그 때 지심목의 이목을 피하지 못하고 빼앗기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저 묵묵히 오행의 기운을 모으는 일에만 집중을 했고 더불어서 단전속에 목기를 크고 강하게 키우는 일에 집중했다. 내 단전에 있는 목기에 대해서는 지심목은 전혀 관계하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도 목기를 가지고 지심목에게 힘을 쓸 수는 없었는데 그 이유는 아무래도 지심목이 목기 그 자체이기 때문인 것 같았다. 물을 물에 섞는다고 어찌 해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는지. 하지만 나는 여전히 오행의 기운을 합쳐서 새로운 기운을 만들어 내었고 오행이 합쳐진 그 기운들은 족족 지심목에게 쌓여갔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는 시간 뒤에 드디어 지심목이 지닌 지 수 화 금 의 기운들이 거의 바닥을 보였다. 지심목 속에는 종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운들이 얽혀 있었는데 그 중에서 지수호금의 기운들만이 바닥을 보이게 된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오행의 기운을 모을 수 없게 되자 드디어 내가 계획한 마지막을 실행에 옮겼다. 지심목은 내 몸의 일부이다 비록 혹에 지나지 않지만 그렇다면 내 몸에 있는 기운을 내가 조절하지 못한다는 것도 말이 안된다. 나는 지심목이 지닌 오행기(오행이 합쳐진 기운)를 목의 기운으로 변형시켰다. 순식간에 변형된 목의 기운을 내 단전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내 단전에 모인 목의 기운을 오행기의 자리에 바꾸어 넣는다. 일명 바꿔치기. 나는 신속하게 오행기를 내 단전으로 끌어 들이고 목의 기운을 몸 밖으로 내 보냈다. 그리고 단전의 주위를 목의 기운으로 꼭꼭 둘러싸고 그 안에서 오행의 기운들을 움직였다. 다행히 오행기가 없어진 이후 소란스럽던 지심목의 기운들이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조용해 졌다. 아마도 지심목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을 터였다. 모여진 오행기의 힘은 대단한 것이었다. 나는 서두르지 않았다. 지심목은 알고 있을 것이다 어딘가 무언가가 자신의 기운을 훔쳐갔다는 사실을... 단지 어디에 숨었는지를 모를 뿐일 것이다. 만약 내가 틀킨다면 녀석은 내 기운을 빼앗고 자신의 몸에서 나를 뜯어 내 벌릴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내가 죽을지 아니면 나무 토막같은 모습으로 지금처럼 살아 있을지 모를 일이지만 살아있게 된다고 해도 다시 오행의 기운을 모아서 살아나게 될지 어떨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지금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처음 단전에서 오행기를 움직여 보다가 천천히 내 몸 안으로 이 기운들을 움직여 보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 지심목의 기운들이 술렁이는 것을 느끼고 얼른 기척을 숨겼다. 그리고 또다시 수막히는 술래잡기를 시작했다. 나는 절대 들키면 안되는 것이었다. 지심목을 아주 예민한 술래였다. 나는 내 몸에 공간들을 조금씩 조금씩 아주 조금씩 넓혀 갔다. 목의 기운으로 아주 굳은 방책을 치고 그 방책의 넓이를 넓혀 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넓이 속에서 오행기를 움직이고 키워가는 것이다. 이런 작업은 정말 지리하고 답답하게 진행되었지만 조금씩 조금씩 오행기의 움직임이 생겨 갈수록 그 변화라는 것이 나를 즐겁게 했다. 얼마의 시간동안인지 모르지만 그 동안 내 몸에서 목기를 제외한 모든 기운들이 빠져 나간 이후로 내 몸속에서 어떤 변화도 없었는데 이제 아주 작지만 변화를 느낀다 는 것은 신선하고 또 즐거운 일이었으며 무엇보다 희망이라는 것이 있었다. 실제로 처음에는 오행기의 움직임의 공간이 넓어지면서 단전 자체가 커지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후에는 단전의 크기는 더 이상 늘어나지 않았고 하나씩 하나씩 혈도들을 향한 길을 내는 것으로 공간을 넓혀 나갔다. 단전 주위의 혈도들에서 시작해서 야금야금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모든 기척을 숨기고 목기들로 방책을 치면서 나는 내 몸의 부분들을 회복했다. 덕분에 나는 내 몸의 혈도들속에 있는 아주 작은 걸림돌 까지도 치워 나갈 수 있었다. 처음부터 혈도와 혈도 사이가 넓고 훤하게 트여 있는 것은 아니다. 운기를 하면서 점차 혈도와 혈도 사이가 트이고 길이 넓어지고 중간중간 막히는 것들도 없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단전에서 명문혈까지의 혈도를 뚫은 후로는 오행기가 돌아 다닐 수 있 는 곳이 단전에서 명문혈까지 밖에 없었기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나돌아 다니는 오행 기가 혈도를 넓히고 걸리적거리는 장애물을 치우고 하면서 정리를 했던 것이다. 예전에는 비포장 도로 같은 곳을 어느틈에 아우토반으로 만들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런 일들은 그 이후로도 계속 되었다. 영역을 넓히는 시간은 무척이나 더뎠 고 아우토반을 달려온 그 기세로 넓어진 다른 혈도들 역시 아우토반을 만드는 것이 반복되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시간을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내 몸은 거의 수복되었다. 목기로 만들어진 방책은 이제 내 몸밖으로 나가 있었다. 나는 그 안에서 내 몸을 회복하고 있는 중이다. 사방을 목기로 둘러치고 그 속에 서 있다고 해야 할까? 더 이상 내 몸에 붙어 있는 지심목의 뿌리는 없었다. 천천히 천천히 내 몸에서 꺼풀이 일어나듯 자라나서 자리를 넓히는 목기를 따라서 지 심목의 뿌리들도 내 몸을 떠났던 것이다. 덕분에 목기로 둘러싸인(다시 말하면 지심목의 뿌리로 둘러싸인) 안에서 나는 내 몸에 오행기를 돌리면서 신체의 각 기관들을 회복하고 있는 중이다. 몸의 대부분이 수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지만 여러 다른 장기들이며 피며 수많은 몸의 구성요소는 결국 태초에 기운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나는 오행기로 그 모든 몸을 다시 만들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사이에 내 몸은 뒤죽박죽이 되기도 했고 이상한 모양으로 바뀌기도 했다. 실제 정신만이 남아있는 것이나 다름 없는 나무토막에서 인간의 형상을 하고 피가 흐르는 몸을 재구성해 낸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결국 한가지를 깨닫고서야 내 몸을 회복하는 방법을 알았다. 모든 세상의 살아있는 것들은 같은 기운에서 비롯되지만 그 생김이 다르다. 꽃이 되고 새가 되고 인간이 되고 ... 그것은 그 기운이 모인 안쪽에 그것의 모양을 정하는 기본 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의도적으로 내 몸을 재구성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오행의 기운이 나를 만들어 줄 것이다. 흔히 이런 것을 유학에서는 이기론이라 한다고 했는데... 나는 멍청해서 이제서야 이런 도리를 기억해내다니.. 기억해 냈다기 보다는 깨달았다는 쪽이 어울리겠지만.... 나는 몸 밖의 목기를 유지하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몸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에는 관심을 갖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흐르고 결국 내 몸은 다시 만들어 졌다. 예전에 목기만을 남겼던 내 몸은 다시 예전의 몸처럼 피가 돌고 심장이 뛰고 있었다. 그리고 원래 내 몸이 있었던 자리에는 한줌의 잿가루 같은 것이 흩어져 있을 뿐이다. 나는 내 몸을 살펴 보았다. 어차피 옷이고 뭐고 없다. 여전히 마른 몸이었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좀 나은 것 같기도 하고... 세상에 처음 태어나는 아기에게 흉터 있는 거 봤수? 그래서 내 몸에도 흉터는 없었 다. 하하 그렇다고 성별이 바뀌었냐 하면 그런건 절대 아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남 자로 태어나라는 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 다시 만들어진 내 몸도 남자다. 그런데 머리카락이 좀 길군. 생머리가 엉덩이까지 온다. 깔고 앉으면 좋겠다. 거울이 없으니 어떤 얼굴인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순수 오행기로 만들어진 몸이니까 좀 멋진 얼굴이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나는 완성된 몸으로 천천히 운기를 해 보았다. 단전에서 일어난 기운은 순식간에 내가 원하는 곳으로 이동했다. 수.금.지.화.목의 기운들이 한꺼번에 만들어지고 몸 곳곳으로 이동이 되었다. 이런 정도면 정령들을 한꺼번에 불러 내는 일도 가능할 것 같았다. 거기다가 내가 오행기의 기운을 일으키지 않고 다섯 기운으로 나누어서 기운을 끌어 올려도 예전에 가지고 있던 기운의 열 배는 넘는 기운이었다. 만약에 오행기 자체를 한꺼번에 한 가지 기운으로 바꾼다면 예전에 비해서는 몇 십 배의 힘을 낼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나는 내가 가진 기운을 전부 끌어 올리지는 못하고 있었다. 만약 그랬다가는 지심목이 눈치를 챌 것이기 때문이었다. 비록 목기로 다른 기운들을 가리고 있지만 목기속에서 강한 기운을 뿜는다면 그것을 모를 지심목이 아니었다. 나는 내 몸을 모두 회복하고 더 강한 힘을 지니게 되었지만 아직도 지심목을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지심목을 벗어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일단 목기로 내 몸을 보호하고 있는 이 상 지심목이 나를 어찌 할 수는 없는 일이었고 나머지는 물리력을 동원해서 나를 막 는 것인데... 그것도 그다지 어렵지 않게 피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수아나 지토를 소환한다면 그정도는 해 줄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나는 지심목의 범위를 벗어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심목이 내게 한 짓이 괘씸하게 생각돼서 그대로 두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나는 어떻게 복수를 할 것인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이럴 때 그 두 번째 책을 자세히 읽어 두었으면 도움이 되었을 텐데... 몸이 다시 만들어지면서 머리가 좋아진 것 같기는 한데 몸이 다시 만들어 지기 이전의 것들에 대해서는 그런 효과가 적용이 안되는 모양이었다. 분명 한 번은 읽어 봤는데.. 다시 세상으로 - 1 그 동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지만 이제는 더 이상 이렇게 나무뿌리에 쌓여서 앉아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천천히 손에 목기를 두르고 지심목의 뿌리들을 헤치기 시작했다. 아마도 지심목으로서는 땅속의 돌들이 움직이는 것이나 그런 것으로 밖에는 보지 못 할 것이었다. 내 예상과는 달리 내가 있는 곳은 땅위가 아닌 모양이었다 어느틈에 나는 지심목의 뿌리에 안겨서 땅 속에 내려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지토를 소환했다. “지토 소환” 지토는 순식간에 내 앞에 나타났다. 예전에 비해서 속도가 빨라진 것은 내가 힘이 강해진 탓인가 보다. “지토 땅위로 올라가는 길 좀 만들어 주겠어?” 내 부탁이 떨어지자 마자 지토는 빠르게 땅을 넓혀 나갔다. 없어진 흙들이 어디로 가는 것인지는 몰랐지만 순식간에 머리 위로 구멍이 뚫렸다. 나는 오랜만에 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공기를 가슴속에 빨아들이며 발을 굴렀다. 내가 의지를 움직이는 순간 이미 오행기는 다리로 모였고 내 몸은 순식간에 구멍을 통해 밖으로 솟아 올랐다. “으헛!” 예상외로 높이 솟구친 나는 중력의 힘에 의해서 다시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간신히 몸을 바로 세우고 바닥에 내구르지 않은 나는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하하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으로 땅바닥을 구르는 것은 내가 생각해도 꼴불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천천히 주위를 살펴 보았다. 여전히 사면이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주위가 어두운 것으로 보아 밤인 것 같았다. 나는 지심목을 향해 돌아섰다. 하지만 지심목은 여전히 변화가 없는 모습이었다. 예전에 보았던 그 모습 그 대로 앙상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이봐 내가 다시 나왔는데 뭐라고 반응을 좀 보여야 할 것 아냐?” 나는 내 몸 주위의 목기을 풀며 말했다. 하지만 지심목은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봐, 나에게 한 짓이 있으니 면목이 없어서 그런건가? 왜 말이 없지?” 나는 지심목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인간너는누구인가?어디에서온것인가?나는너를알지못한다.” 얼라이여?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까먹는 소리야? “이거봐 지심목씨. 댁이 그 좋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나를 꼬셔서 이상한 독약 먹이 고 이리 끌고와서 몸 속의 기운이란 기운은 다 빨아 먹고 죽을 뻔 하게 만들어 놓고 이제와서 모른다고 하면 내가 얼마나 섭섭하겠어? 그런다고 내가 그냥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난 빚지고는 못살거든.” 내가 조금 화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지만 “무슨말인가인간나는너를알지못한다.크리스마스라니크리스마스를아는인간이있다니 그건놀라운일이군.” 지심목은 무슨 크리스마스가 무슨 대단한 것인 양, 도리어 크리스마스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이 이봐, 무슨소리야. 니가 다혜라는 여자로 변해서 크리스마스 이브에 나를 꼬셔 설랑은 이상한 차를 마시게 하고 그래서 너랑 나랑 싸웠잖아. 그러다가 내가 너한테 잡혀서 죽을 뻔 하고... 그 동안 시간이 좀 지나기는 했지만 그런 중요한 걸 잊고 있 다니... 너무하잖아. 그리고 내가 따준 고릴라 인형 그거 내놔.” 내가 이렇게 따지듯 말하자 그제서야 지심목이 반응을 했다. “인간무슨말인가다혜라니그리고고릴라인형이라니그럼니가그때의그인간이란말인가그 럴리가없다이미이천오백년전의일이다인간너는거짓말을하고 있다.” 허걱 이, 이천, 이천 오백 년 전, 이십오 년도 아니고 이백 오십 연도 아니고 이천 오백이라고? 시간이 흘렀다고 해도 그렇게 흘러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인간이 그렇게 살 수도 없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그렇게 오래 있지도 않았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다고는 생각 할 수가 없었다. “무슨 소리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어떻게 이천 오백 년이 지날 수 있단 말이 야. 시간이야 좀 흘렀겠지만 이천 오백년이라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도 말앗!”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사실이다인간만약에그때그인간이인간니가맞다면그건분명이천오백여년이더지난일이 다나도정확히시간이얼마나흘렀는지는모르지만그정도의시간이흘렀다는것은알고 있다. ” 나는 무슨 말인지 알지 못했지만 한 가지만은 정확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내가 지심목에게 잡힌지가 이천 오백년이 지났다는 사실을........ “이천 오백 년이라니... 그럼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은 이 세상에 남아 있지도 않겠 군. 아니 인간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짐작이 가지 않는군. 어쩌면 모두들 우주선 을 타고 날아 다닐지도 모르겠군. 하하하” 나는 허탈한 웃음 이외에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곧 그 허탈함은 분노가 되었다. 무엇 때문에 내가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죽은 듯이 있어야 했는지를 기억해 낸 것이다. “하하. 그렇단 말이지. 내가 그렇게나 오래... 그래서 이젠 내가 아는 사람이라곤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말이지... 내가 가르치던 아이들도 없고... 나를 기억하던 사람들도 없고... 하하하 그럼 그럼 그게 누구때문이라고 생각하나 지심목씨? 누구탓이지?” 나는 온 몸에 살기를 불러 일으키며 천천히 지심목에게 다가갔다. 지심목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내가 목기로 몸을 감싼다면 내 기운을 흡수하지 못 한다. 그리고 나머지 물리적인 공격이야 정령들을 부르든 아니면 내 몸으로 해결을 해도 될 것 같았다. 내 몸이 낼 수 있는 힘은 이미 땅위로 올라오는 중에 깨달은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심목도 나의 살기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이봐인간잠깐만내말을들어라내가너에게과거에잘못을했다는것을인정한다그리고너의 힘이강하다는것도인정한다하지만덕분에인간니가살수있었다는것도알아줬으면한다어떤 의미에서나는너의생명의은인이다그것이비록의도한바가아니라고할지라도.” 지심목은 빠른 소리로 나에게 자신을 변호하려 애썼다. “무슨 말이냐? 니가 내 생명을 구했다니?” 나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인간너와의일이있은지얼마후인간들의세상에는큰변화가있었다인간들이서로싸웠다는 식의이야기가아니다어느날차원의공간이이글어지는불상사가있었다말그대로아주작은차 원의어긋남이있었다하지만결과는참혹했다세상의모든살아있는것들이멸종했다공각의왜곡 은아주작은것이었지만어디에나있었다땅속의아주깊은곳에도우주의진공속에도인간의심장 속에도어떤것이든물질적인공간이라고일컬어질수있는곳이면어디든지그일그러짐이없는곳 이없었다덕분에지구상의모든생물은멸종했다.” “무 무슨소리야. 여기는 예전 그대로인데.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는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그건당연하다여기는내가만든공간이다내가만든결계가있는그런곳이기때문에이곳에는 그런작은비틀림이들어올수는없었다물론조금만더큰일그러짐이었다면여기조차무사하지 못했을것이다만약인간니가그때밖에있었다면인간너도사라졌을것이다그러니나에대한분노 를거두어달라의도한바가아니라고하지만한번의생명을빼앗은댓가로한번의생명을살려주었 으니비긴걸로하자.” 뭐 뭐야? 비긴 걸로 하자니... 이게 그런 말도 될 법이나 한 소리야? “그렇군. 그래 한 번 죽이고 한 번 살려줬으니 비긴 걸로 하자라... 그럴 수도 있다 고 생각되는군. 하지만 아무래도 내가 손해인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군.” 나는 이미 살기를 거두었다. 만약 지심목의 말이 맞다면 ... 그렇다면 어쩌면 다행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살아 남았다는 것이 중요하니까... “그럼 지금 이 지구상에는 아무 것도 살지 않는 다는 말인가? 그러고 보니 참 심심하게 되었겠군.” 나는 새삼 깨달아지는 바가 있어 물었다. 그렇겠다. 그렇게 모든 것이 멸종한 상태에서 이천 오백 년이 겨우 지났다면 새로운 생명체가 나타나고 발전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일 것이다. 기껏해야 박테리아나 생겨났을까? 하하 그러고 보니 살아있는 것도 그다지 별로 좋을 것도 없을 것 같았다. “그건아니다인간그뒤이세상에새로운창조가있었다만약에그비틀림이후아무런조치가없 었다면이지구나우주라고하는것들도결국은붕괴되고말았을것이다아무리작은것이라해도 어디에나있는비틀림이란그런힘을지녔다그러나그런속에서세로운질서가생겨났다어쩌면조 물주의직접적이고파격적인개입이라고볼수도있는사건이었다수년만에새로운동식물이자리 를잡았고인간들도나타났다땅과하늘과바다가갈렸고인간계신계가갈렸으며정령계가가까워 졌다그것이비틀림뒤의몇년동안에일어난일이었다다만그뒤인간계는스스로발전을해야했고 신계는신들의힘으로발전했고정령계는질서를지켰다지금인간들의세계가얼마나발전했는지 는직접경험해보아야할것이다내가보는발전과인간너의시각은다를것이기때문에.” “그럼 이곳에 인간들이 살고 있다는 말이야? 그나마 다행이로군. 혼자서 우주를 지키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으니까. 하하” 나는 갑자기 인간들이 살고 있다는 말에 즐거워졌다. 혹시 원시인의 모습으로 살고 있다고 한들 어떠랴. 내가 가르치고 이끌어서 훌륭한 사회인으로 만들면 되지... 내가 명색이 선생이었는데 그까짓거야... 하하하 그런 나 왕 되는 건가? 하하 왕 되면 왕비도 있고 후궁도 있고... 하하하 신난다. 이런 이런 내가 무슨 생각을... “그럼 지심목, 너는 그 동안 쭈-욱 혼자서 여기서 이러고 있었던 거냐? 심심했겠군. 불쌍해라.” “인간나보고불쌍하다니겨우백년을살까말까한주제에이제만년의수명을채우는나에게불 쌍하다니그런말은나같은존재에게는쓰는것이아니다인간.” 지심목은 가소롭다는 듯(물론 그 말소리에는 어감이 없다)말했다. 하지만 상관은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지심목 이제는 인간을 잡아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는 모양이네?” “그거야당연하다인간들이망쳐놓은땅이다시복구되었기때문에내가굳이하찮은인간들에 게의지해야할필요가없다그리고이제는그런것도필요가없다이제내수명은다했다어쩌면인 간니가이렇게나를만나게된것도다인연탓인지도모른다.” 지심목은 잠시 말을 끊었다. “인간나와한가지거래를하자.” “거래? 무슨 거래를 하자는 거지?” 나는 갑자기 거래를 하자는 지심목의 말에 호기심을 느꼈다. “거래의내용은다른것이아니다내후손을적절한장소에심어주는것이내부탁이다대신에내 가인간너에게몇가지선물을주겠다.” 뭐 뭐야 이 녀석 자기 후손이면 씨앗을 심어 달라는 건가? 내가 무슨 산 속 다람쥐도 아니고 땅파고 씨앗 심는 일을 하란 말이야? “선물이라 어떤 선물을 줄거지? 적당한 것이라면 내가 받아들이도록 해 보지.” 선물이라잖아. 선물 하하 “나는이제곧일만년의수명을다한다그리고다섯의후손을맺을것이다이건보통의지심목에 비하면많은것이지보통은많아야셋이니까아무튼그후손들의자리를정해주는것이인간니가 해줄일이다한가지어려움이있다면하나의세상에는하나의씨앗만을심어야한다는것이다그러므로인간계에하나를심는것은어렵지않은일이다그저아무곳이나땅을파고묻기만하면된다하 지만나머지넷은어렵다이세계에는인간계외에신계와정령계가있다정령계는언젠가정령들에게부탁하면될지도모른다하지만신계에는직접가야하는데그게가능한지어떤지는나도모른다 그게가능해서신계에까지후손을심을수있다면더바랄것이없겠지만그것이어렵다면나머지세개의씨앗들은다른세계로넘어가서심어야한다하지만이때는그세계의지심목의허락을얻어야 하는데쉽지않은일이다어쩌면상대를쓰러뜨려야할런지도모른다지심목의힘은각세계마다다르기때문에여기에서나를이길수있다고다른세계의지심목을이길수있으리란법은없다그리고 다른세계의지심목은어떤명칭의어떤형태인지나도모른다그리고그일을해주는댓가는내가죽으면서내몸으로한자루의칼을만들어주겠다는것과동화력이라는힘을주겠다는것이다동화력 이란어떤존재가다른세계로넘어갈때그세계의언어를자연스럽게습득하게되는것을말한다아울러서내가지닌힘중에서후손을만들고남은힘을너에게전해주겠다는것도거래의이다너의힘 이강하다면나의후손들이자리를찾을확률도그만큼강해지기때문이다.” 하하하. 이런 정말 쉬운일이군 그냥 땅만 파고 묻으면 된다잖아. 신들의 세계나 정령의 세계에 가서 그냥 심어주면 된다는 말이잖아. 야~~ 그것 참 쉬 운 일이군. 그리고 남는 것은 다른 세계로 가서 심어주면 되는 거란 말이지?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군. 어렵지 않아. 하하하 ㅡ.ㅡ^ “이봐 지심목 그걸 말이라고 하는거야? 나보고 다른 세계로 가서 어쩌라고? 그게 가능한 소리야?” “인간내가너에게주는칼은능히그런힘을지니고있다공간을쪼개고이계로의통로를여는힘 이있다물론그런힘을발휘하려면상당한힘이필요해서몸에무리가가는것이기는하지만인간 너의힘과나의힘이합해지면불가능한것도아니다다만이계의통로를열고나면힘이얼마남지않을테니운이좋기를바래야할거다잘못해서상대못할존재앞으로길을연다면방법이없을테니.” 이런 이런 아주 편한 소리를 하는군. 심부름을 시키는 주제에...... “그런데 지심목이라는 존재는 평범하지 않은 모양이지? 왜 한 세계에 한 존재만 있 어야 한다는 거지? 그리고 다른 세계에도 비슷한 존재가 있다는 말은 무슨 말이지?” 나는 갑자기 궁금해졌다. “인간똑똑하구나우리들은신이나그와관계된모든것들과관계없는존재이다어찌보면스스로존재하는신들의파편이라고해야하나...어쨌든우리들은각각의세계에존재하는창조신의 개념을넘는존재들이다어떤의미에서는각세계에대한감시자의역할같은것이원래의임무였겠지만오랜시간전에그런임무는사실상없어지고그저존재하는것으로만족한그런존재가되었 다어쩌면그런사실은그위대한어떤존재의관심이이세계에미치지않는탓인지도모르지만그런사실까지내가알수는없는일이다아무튼내가아는한에서나와같은존재는다른어떤세계에도존 재하는것으로알고있다지금도맡은임무를하고있는지어떤지는알지못하지만....” “특이한 존재로군 이세계의 창조신의 영역에도 닿지 않는 존재라... 재미있어.” 나는 혼잣말을 하면서 머리를 정리했다. 어차피 이 곳을 떠나서 여행을 한다면 동화력이라고 하는 것은 무척이나 좋은 조건이었다. 더구나 지심목의 나머지 힘을 준다니 그것도 괜찮은 것 같고 거기다가 칼도 준다는데... 이계로 갈 수 있는 칼이라. 내 생각에 내 생명이라는 것은 아마도 꽤 길 것 같다. 노화라는 것이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언제든지 재구성이 가능한 몸이라면 노화를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이 아닐까? 예전에 오행의 기운으로 신선이 되었다는 사람들도 이런 방법으로 영원히 늙지 않는 방법을 알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흠... 어쨌든 길고 긴 인생이라면 할 일이 있는 것도 좋겠지. 더구나 어렵고 힘든 일이라면 더더욱... “좋아 지심목 너와의 거래를 수락하겠다. 너의 말대로 너의 후손들을 적당한 세계에 퍼트려 주지. 그런데 다른 세계에 있는 너와 같은 존재들과 싸워야 할런지도 모른다니 좀 무섭군. 하하” 나는 어쩐지 앞날이 편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좋다인간그럼거래는성립되었다이제약속된것을주겠다.” “잠깐, 혹시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어쩌려고 ....” “인간약속은깨지지않는다나의후손들은언제든인간너의앞에나타날것이다인간너가후손들이있어야할세상에도착하면나타날것이다만약그곳에균형의존재가있다면그때는아마도 큰싸움이있어야할것이고그세계가멸망해야할것이다그리고새로운세계가만들어져야할것이다그래야만새로운균형이생길것이므로그건무서운일이다.” 무슨 소리야? 그럼 결국에 말 한 마디로 나는 선물을 받고 내가 여행을 하는 동안 운에 따라서 결정이 된다는 말인가? 재미있는 일이군. 재미 있어. 다시 세상으로 - 2 그 동안 지심목은 천천히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의 몸은 하나 하나 말라 비틀어지며 떨어져 나갔고 결국에는 기괴한 모양의 칼이 남았다. 넓고 길게 뻗은 가운데 뿌리는 조금씩 구불구불 하기는 했지만 중심은 맞는 것 같았고 좌우로 벌어진 작은 뿌리 들은 칼날을 타고 내려오는 상대의 검날을 충분히 막아 줄 만 했다. 손잡이는 굴곡이 있었지만 손에 쥐기에 더할 나위 없이 편했고 두 손을 모아 쥘 수 있는 길이였다. 검 이라고 불러야 할 녀석은 주 손으로 휘둘러야 할 정도의 크기를 지니고 있었고 그만한 무게 중심을 지니고 있었다. “인간이안에는나의자아가들어있다평소에는너의어떤행동에도관여하지않으나이계로의 문을열때에는나의동의가있어야한다아울러지금너에게나의남은힘을주겠다” 지심목의 목소리가 머리에 울리면서 손잡이를 통해 막대한 기운이 몰려들었다. 지심목이 지니고 있던 온갖 종류의 기운들이 밀려들어온 것이었다. 나는 우선 그 기운들을 단전의 한 곳에 뭉쳐두었다. 내 몸은 순수한 오행의 기운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모든 기운들을 다 수용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당장에 그걸 시도 해 볼 생각은 없었다. “인간마지막으로동화력을선물한다그리고이제이결계는사라지고나의첫번째후손이나타 날것이다그는그저내자리를지키게될것이므로크게신경쓰지않아도될것이다.” 그리고 나는 조금 어지러움을 느끼곤 정상으로 돌아왔다. “인간그럼이제모든계약은이루어졌다너는나의후손다섯을그들의세계에뿌리내리게해야 한다그리고앞으로너에게있을수많은일들에마지막으로축복을내린다인간그대에게영원한 의지가존재하기를...”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칼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순간 당황스러워졌다. 이런 옷은 있어야 할거 아냐? 옷도 없이 미친놈처럼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나돌아 다 닐 수는 없는 일이잖아. 쩝... 하지만 나의 불행은 그렇게 끝나지 않을 모양이었다. 갑자기 눈 앞에 엷은 빛무리가 생겨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빛무리는 어느 사이 허공 중에 여인의 모습을 이루어 내었다. 이런 세로운 세계의 첫 시작부터 뭐 팔리는 일로 시작하는군. “누구신가? 혹시 내가 아는 사람은 아니겠지?” 나야 이제 가릴 것도 없고 내가 남잔데 부끄러우면 여자가 부끄러워야지. “반가워요. 내가 첫 번째 후손입니다. 이 땅 위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갈.....” “아~~ 그런 댁이 여기 있던 이 지심목의 대타라는 말씀이시군. 그럼 이제부터 여기 서 뿌리를 내리고 다시 후손을 이으실 건가요? 일만년 정도 걸리겠군요. 그럼 행복하 게 지내세요. 그리고 혹시 몰라서 하는 말인데 내가 댁에게 다른 어떤 일을 해 줘야 한다는 것은 이 거래에서 없었으니까 옆에서 같이 놀아달라거나 혹은 잠시 여기 있다 가 가라거나 하는 말은 하지말아요. 하하 그럼 안녕히.” 나는 서둘러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렸다. “자, 잠깐만요. 기다려요.” “무슨 일입니까? 나하고 볼 일은 없을 텐데?” 나는 다시 돌아서며 삐딱하게 물었다. “성격이 좋지 못한 분이군요. 저도 댁한테 무슨 부탁 같은 건 없어요. 단지 내가 다 시 이 땅에 있을 수 있게 해 준(?) 뭐 실상은 아무 것도 해 준게 없긴 하지만 일단은 내가 다른 세계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을 때를 생각해서 준비해 둔 것이 있으니 받아 가세요.” 하하 이것도 공짠가 보다. 하하 난 공짜라면 사양하지 않는다. 지금 옷도 없는 판에.. 뭔들 사양하랴.. “하하 그래요? 하하 이거 고마워서... 그런데 뭘 주실려고. 혹시 옷이라면 좋겠는데...” 나는 웃으며(좀 비굴하다고 생각되기는 한다.) 될 수 있으면 좋은 인상을 주려고(옷 벗고 그게 될까?) 노력했다. “재법 쓸모가 있을 겁니다. 이건 일종의 창고입니다. 당신에게 언젠가는 필요가 없 어질 하찮은 것이겠지만 처음에는 아주 유용할 것입니다. 이제 당신은 당신의 의지에 의해서 열리고 닫히는 작은 공간을 가지게 됩니다. 작다고는 해도 경우에 따라서는 산 하나 정도는 들어갈 크기니까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겁니다. 물론 그 속의 물건들 은 일일이 찾을 필요 없이 영상사념 만으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공간을 소 환하는 것은 당신의 의지 만으로 되겠지만 주문이나 명령어를 만들어 두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당신에게 좋은 선물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그렇게 말을 마친 그 여자(?)는 한 점 빛으로 몰려들어 작은 복숭아씨 모양의 나무 씨로 변해서 땅위에 떨어졌다. 아마 저 자리에서 뿌리를 내리고 한 생을 살아갈 것이다. 나는 천천히 걸어가서 씨앗을 주워들고 손에 들고 있던 나무칼로 땅을 파고 다시 묻었다. 명색이 공간을 가르고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힘을 지는 칼로 고작 땅파고 나무씨를 심다니... 그후 나는 먼저 새로운 인간계의 지심목이 선물한 내 개인 창고를 살펴 보기로 했다. 그렇다고 무턱대로 손에 들고 있는 것이 칼 밖에 없다고 그걸 넣어 볼 수는 없어서 돌맹이를 하나 주워들고 공간을 불렀다. 주위에 아무 변화는 없었지만 나는 내 머릿 속에 서랍장을 떠올리며 돌을 그 서랍장 위에 올려 놓았다. 그러자 내 손에서 떠난 돌은 허공 중에서 사라져 버렸다. 나는 다시 그 돌을 떠올리며 손을 뻗어 움켜 쥐었다. 다행스럽게도 돌은 이내 내 손에 잡혀 올라왔다. “아주 좋은 선물이군. 이렇게 되면 힘들게 물건들을 많이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겠 군. 그럼 제일 먼저 이 공간을 차지하게 되는 것은 이 칼인가? 그런데 칼의 이름이 없군...” 나는 혼자 중얼거리며 벽에 칼을 걸어 놓는 기분으로 공간 속으로 칼을 내려 놓았다. 빈 손이다. 아니 빈 몸이다. 우쉬.... 이런 몸으로 어떻게 밖을 나돌아 다니나..... 나는 우선 날이 밝기를 기다리기로 하고(날 밝는 것이 두렵다. 옷이 필요해..) 천천 히 사방 벽에서 유일한 통로인 문쪽으로 발을 옮겼다. 그리고 아주 조금 문을 열어 밖을 내다 보았다. 혹시라도 이 곳이 도시라거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과 가깝다면 아침에 밖으로 나갔 다가 무슨 창피를 당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밖으로는 숲이 보이고 있었다. 내 예상이 맞다면 내가 밖으로 나가는 순간 이 문은 보이지 않게 될 것이었다. 이 공간은 이미 이 세계와는 유리된 결계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벽에 기대어서(머리카락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꺼칠한 느낌이 덜하니까..) 새벽을 기다렸다. 그리고 선 채로 몸 속의 기운들을 끌어 올렸다. 예상외로 지심목이 전한 기운들이 컸다. 내가 가진 오행기들은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움직였지만 그 나머지 기운들은 그렇게 쉽게 통제가 되지 않았다. 어쩌면 앞으로 이 기운들을 내 기운과 융합시키는 일이 쉽지만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나는 서둘러 빛의 기운과 바람의 기운을 찾았다. 다행히도 그 기운들 역시 예전에 내가 가지고 있던 것 보다는 훨신 강한 기운들이 들어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우선 오행기를 바람이나 빛의 기운으로 바꿀 수 있는지를 먼저 시험해보기로 했다. 그럴 수 있다면 빛의 기운이나 바람의 기운을 곧 오행기로 흡수하고 정령들을 다룰때에도 편해 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몇 번의 시행 착오가 있었지만 오행기는 역시 세상을 만든 근원 답게 빛과 바람의 기운으로 변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빛의 기운과 바람의 기운을 오행기 속으로 받아 들여 동화시켜 버렸다. 그럼 내 몸에 있는 엄청난 수의 기운들도 이런 방식으로 하나 하나 해결해 나가면 될 일이었다. 어차피 몸 속의 기운을 밖으로 빼서 버리는 것 보다는 나을 것이니까... 어느덧 주위가 밝아 지고 있었다. 결계 속이지만 햇빛이나 바람 기타 자연 적인 것들은 제약을 받지 않고 들어오고 나 가는 모양이다. 뭐 그래야 나무도 살아갈 수 있겠지... 아무리 땅속에서 기운을 받아 사는 지심목이라 해도... 나는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문은 쉽게 열렸고 밖으로는 사람의 흔적이 없는 숲이 우거져 있었다. 예전에 내가 살던 시대에 이런 숲이 있었으면 영화난 CF찍을 때 최고의 장소가 되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곳이다. 나무의 굵기는 내가 본 어떤 나무들 보다 굵었고 또 컸다. 침엽수는 아닌 활엽수였지 만 그 높이가 엄청났다. 그리고 그 나무들이 우산처럼 퍼진 아래로 또 작은 나무들이 빽빽히 자라고 있는 모습이 내가 아는 일반적인 나무의 생태와는 맞지 않아 보였다. 원래 아래에 있는 나무들은 큰 나무가 빛을 차단하기 때문에 잘 자라기 어렵고 결국 에는 빛이 적어도 잘 자라는 침엽수가 자라나서 번성하게 된다는 것이 보통의 상식인 데 이상하게도 낙엽수림 아래 또 다른 낙엽수림이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뭐 어쨌든 사람은 일단 없는 것 같고... 그럼 나가 볼까? 나는 천천히 문을 나섰다. 그리고 예상대로 내가 문을 나서자 곧 뒤로도 숲이 이어져 있었다. 이제 그 지심목이 있던 공간은 이 세계와는 동떨어진 곳이 되어 버린 것이다. 첫 날 나의 하루는 정말 비참했다. 우선 정령들을 불러 내어서 화아에게 불을 피우게 하고, 수아에게 물을 샤워기 처럼 뿌려 달래서 목욕을 하고(새로 만든 몸이라 그런지 때가 없어서 쉬웠다.), 풍아에게 말려 달라고 하고(따뜻한 바람은 화아 뒤에서 풍아가 바람을 불면 된다.), 그리곤 숲 을 걸으며 먹을 수 있는 것이 없을까 하고 찾는 일이 시작되었다. 부스럭 거리는 소리만 들려도 사람인가 싶어서 바짝 긴장하다가(나중에는 풍아에게 주위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살펴보고 사람이 있으면 가까이 오기전에 알려 달라고 하고 나서야 안심했다.) 동물들을 발견하곤 잡아 먹을까 하다가 양념이 하나도 없다 는 사실을 깨닫고(소금도 없다.) 과일들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과일도 변변한 것을 찾지 못했다. 뭔가 나무에 달려 있기는 한데 그것이 먹을 수 있는 것인지 어떤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쫄쫄 굶으며 숲길을 헤메는 방법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우쒸. 아무 것도 먹을 수가 없다니.. 무슨 짐승들이 먹은 흔적이라도 있어야 따 먹던지 말던지 하지.. 미치겠군.” 나는 투덜 거리며 나무와 나무 사이를 헤쳐 나갔다. 다행히도 지심목 안에서의 수련 으로 피부에 까지 오행의 기운을 퍼뜨릴 수 있었기 때문에 쇠의 기운을 피부로 퍼뜨 리고 나서는 피부가 나뭇잎이나 가지에 상하는 일이 없게 되어서 좀 썰렁하고 꺼칠한 느낌만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아무리 걸어도 길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나는 주위의 나무에 올라가서 이 빌어먹을 숲이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알아 보기로 했다. 나무에 올라가는 일은 어려울 것이 없었다. 이미 내 몸은 내가 알지 못할 정도로 변해 있어서 몇 번 뛰어서 나뭇가지를 밟은 후에는 제법 높은 곳에 올라 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높은 곳에 올라간 나는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하하하 눈에 보이는 끝까지는 숲이었던 것이다. 내 눈이 제법 좋아져서 아주 멀리 볼 수 있는 상태인데도 아무리 안력을 높혀도 숲 이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었다. 하하 이런... 정말 이럴때는 돌아버리겠다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는 것이다. 하기는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모르지만 지구라는 곳이 좀 넓은 곳이었던가... 쩝..... 아래로 내려온 나는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안되면 되게하라... 무슨 군대 구호같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되게 해야 한다. 생각해 보면 내 몸에 무슨 독같은 것이 영향을 줄 것 같지도 않고.. 정 안되면 수아에게 도움을 청하면 되겠지... 그런 이후로 나는 좀 나아졌다.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아니다 그래도 먹을 만 한다고 생각되고 맛있어 보이는 것들 로...) 집어 먹고, 동물들을 먹지는 못해도 잡아서 가죽을 벗겨서 옷을 만들어 입 고... 특히 좋은 재료는 우연히 발견한 뱀이었다. 하얀색 뱀(백사다 엄청 몸에 좋은 건데...)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크기가 무척이 나 큰... 거의 아나콘다 수준의 크기였다. 십오미터 정도.. 몸통이 내 몸통 보다 컸 기 때문에... 그 껍질을 두르는 것으로도 충분히 옷으로 쓸만했다. 좀 사납고 재빠르긴 했지만 그거야 내가 보통 사람일 때의 일이고... 나는 그 녀석을 잡아 목을 자른 후 껍질을 벗기고(이런 일은 정령들이 못한다. 왠지 는 모르겠다 손 발 다 있으면서 못하는 이유가 뭘까?) 잘 말린후(신기한 것은 이 껍 질이 말라도 딱딱해지지 않는 다는 것이다. 아주 부드럽고 껍질 안쪽도 이물질이 붙어 있지 않아서 쓸만 했다. 나는 우선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었다. 칼은 없으니까 창고에 들어 있던 그 검으로 했다. 하하하 처음 만든 옷의 모양을 생각해 보라. 그게 옷이었겠는가를... 쩝........ 하지만 그 것도 서너번 하다 보니 나아졌다. 제법 맵시도 있게 만들어서 품이 좀 넓게 웃옷을 만들고 바지는 카우보이 옷처럼 만 들었다. 처음에는 단추를 만들어 달려고 했지만 단추 구멍이 잘 찢어져서 하는 수 없이 도복 처럼 만든 윗도리가 만들어 졌다. 바지도 끈으로 묶었다.(이건 좀 불편하다.) 그렇게 옷이 완성되기까지 정령들은 그 뱀을 찾아 헤매고 다녔고 제법 많은 뱀들이 희생되었다.(삼가 명복을..) 추가로 내 창고에는 뱀 가죽을 좀 많이 모아뒀다. 나중에 사람들 만나면 팔아서 쓸까 하고... 정말 괜찮은 옷감이다. 신축성도 좋고 감촉도 좋고 빛깔도 멋지고(이놈 비늘 이 없다.).... 아무튼 팔면 돈 될 것 같다. 허걱!! 성장? - 1 나는 낮에는 길을 가고 밤에는 운공으로 몸 속의 기운들을 정리하며 길을 재촉했다. 벌써 일주일 가까이 숲을 헤치고 가고 있는 중이다. 이제는 먹는 것에는 도가 텄다. 제법 맛있는 과일들이 많이 있었던 것이다. 고기만 먹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먹고 싶어서 구워 보기도 했지만 역시 소금도 없이 먹는 것은 무리였다. 혹시나 싶어서 지토에게 소금을 구해 오라고 시켜 봤지만 아무래도 그건 불가능한 모양이었다. 쩝...... 수아도 소금물을 만들어 내지는 못하고... 분명 땅 속에도 소금기가 있을 텐데... 그걸 걸러서 먹을 방법도 없고..... 나는 낮에는 길을 재촉하며 오직 고기를 어떻게 먹을까 하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풍아가 날아왔다. 뭔가 발견했다는 모습이었다. 나는 풍아를 따라 몸을 날렸다.(거의 날아가는 수준이다. 백 미터면 3초에 주파할 수 있을 것이다. 하하하) 풍아를 따라 간 곳은 커다란 협곡이었다. 땅을 가르는 엄청난 협곡이 있었다. 어쩌면 이 협곡 때문에 사람들은 이 숲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협곡 아래는 까마득한 깉이로 파여 있었지만 육안으로 그 깊이를 살펴 볼 수는 없었다. 그리고 말이 협곡이지 반대 편까지의 거리는 거의 몇 키로는 되어 보였다. 족히 2키로미터... “난감하군... 저길 어떻게 건너간다....”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래로 내려가서 다시 위로 올라간다 이게 첫 번째 방법이지만 아무래도 피곤하고 또 어려울 것 같고... 글라이더를 만들어 타고 넘는다. 이것도 그럴싸 해 보이지만 내 실력에 만든 글라이더가 넘어갈 수 있을 턱이 없다. 그럼 기구를 만들어 넘어간다. 재료는 뱀 껍질을 이용한다. 가볍고 또 쓸만한 도구니 까 그리고 바람은 풍아가 있으니까 조정하면 되고.. 된거 같다 만들자... 결론은 빨리 내려졌다. 나는 우선 정령들에게 근처에서 그 뱀을 찾아 보라고 시켰다. 될 수 있으면 큰 녀석으로... 그리고 정말 대짜 뱀을 지토가 발견했다. 땅위가 아니라 굴 속에 있는 녀석이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정령들이 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나는 아직도 정령들고 대화를 하지 못한다.) 지토 가 땅위에 표시한 대로라면 거의 팔십 미터는 될 것 같은 녀석이었다. 나는 볼 것 없이 그 녀석을 잡기 위해 출발했다. 녀석의 굴은 제법 깊었다. 입구부터 안쪽으로 들어가는 넓이가 두 사람이 어깨를 맞대고 걸을 정도의 넓이였다. 그 굴의 안쪽에서 넓은 광장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녀석을 발견 했을 때... 나는 정말 감탄했다. 웅장하다고 표현해야 할 녀석의 모습을 정말 멋지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난 계곡을 건너 갈꺼야, 그리고 너의 껍질이 필요해. 나는 천천히 그 녀석에게 다가 갔다. 녀석도 내가 다가가는 것을 느낀 모양인지 고개를 쳐들었다. ‘목이 뻐근하군... 상당한 녀석이네...’ 나는 창고에서 검을 꺼내 들었다. 이 싸움이 끝나면 이 검도 이름을 정해 줘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쉬잇 그대는 누구인가? 무슨 일로 이곳에 왔는가? 쉬익 - 허거걱 말을 한다. 뱀이 말을 해..... 이빨 빠진 소리 같기는 하지만 말을 했다. 나는 천천히 검을 내리며 말했다. “이거 미안하군, 내가 잠을 깨운 것은 아닌지 모르겠군. 이런 말 하기는 싫지만 사 실은 내가 너의 가죽이 필요해서 말이야.. 그래서 그 가죽 좀 빌릴까 하고 왔어.” 그제서야 그 뱀은 내가 입고 있는 것이 동족의 껍질이라는 것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쉬익 그대는 많은 동족들을 헤쳤군. 아직도 어린 녀석들이라 상대를 알아보지 못한 모양이군. 쉬익 쉬익 - 녀석은 천천히 또아리를 틀고 풀고 하며 말을 이었다. - 그대는 어디에서 온 것인가 저 넓은 벽을 어떻게 건너온 것인가? 쉬익 - 녀석은 내가 그 협곡을 건너 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봐 난 그 계곡을 건너 온 것이 아니라 건너 가려는 것이야. 그리고 그걸 위해서 너의 가죽이 필요한 것이고 말이야.” -그럼 쉬익 그대는 그 곳에서 건너온 것이 아니라는 말인가? 이 땅의 주위는 온통 그 벽에 가로 막혀 있는데.. -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야. 쉽게 생각하라고... 재수가 없어서 하늘에서 떨어져 보니 이 숲의 중앙에 있었던 사람이로구나 하고...” 나는 내가 생각해도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며 뱀을 바라보았다. -쉬익 그렇군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겠군. 쉬익 내가 곧 죽게 되리란 것이 중요한 것인가? 그렇겠군 쉬익 - 뱀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쳐들었다. 나는 일순 긴장하며 검을 치켜 들었다. -쉬익 그렇게 긴장 할 필요가 있을까? 나를 죽이는 것을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쉬익 그리고 그런 능력이 충분히 있으면서... 쉬익 뭘 그렇게 놀라나.. 쉭- 뱀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해 졌다. 나는 왠지 모르게 뱀의 태도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이봐 아무리 내가 이길 수 있다는 자신이 있어도 언제나 최선을 다해야 하는 거라 고.. 그리고 너도 곧 죽겠지만 최대한 살아 보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겠어?” 나는 조금은 한심한 생각을 하며 뱀에게 말했다. -그도 그렇겠지 쉬익 하지만 나는 그대를 이길 수 없다. 쉬익 그대의 힘은 나를 훨 신 넘어서는 것이다. 쉬익. 아마도 숲 속의 많은 존재들은 그대를 보았다 하더라도 쉬익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쉬익 그대가 강하기에 자신들의 영역에서도 그대를 조용히 보냈으리라. 쉬익 그렇지 못한 어린 것들은 그대에게 죽었을 것이고. 쉬익 하지만 나 는 그대에게 힘들여 덤빌 생각은 없다. 만약 그대가 원하는 것이 나의 가죽이라면 주 겠다. 쉬익 가죽을 벗는 다고 죽는 것도 쉬익 아니니까 쉬익 - “ 뭐 뭐라는 거야? 가죽을 벗겨도 죽지 않는다니...” -모르는가? 쉬익 우리들은 가죽을 벗어야 성장을 한다. 쉬익 그리고 지금 나는 가죽 을 벗을 수 있는 몸이다. 그러니 좀 이르다 해도 가죽을 벗는다고 죽지는 않는다. 쉭- 아하~~! 그래 뱀은 허물 벗기를 하지? 그럼 지금 말대로 라면 가죽을 벗고 살 수 있 다면 굳이 이 녀석을 죽일 필요는 없는 것이겠군. 하하하 나는 그나마 이성을 지니고 말을 하는 뱀을 죽이지 않게 된 것이 다행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뭐 그 전에 죽인 녀석들은 단 한 번도 내 앞에서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쩝... 어려서 그랬다고 해도 뱀은 뱀이다. 쩝... 그래도 기분이 영 찝찝하군... “그래? 그렇다면 굳이 내가 너를 죽일 이유는 없겠군. 그럼 빨리 가죽을 내어 주겠나? 난 지금 바빠서 말이야.”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속으로 내가 너무한다는 생각을 했다.(그래 나도 양심은 있 는 놈이다. 쩝... 어쩌다 이런 세상에 오게 되니까 사람이 좀 변해서 그렇지...) -쉬쉬쉿 잠시만 기다려달라. 쉬익 아무리 껍질을 벗어 줄 수 있다고 해도 금방 끝나 는 일은 아니다. 나에게 삼일의 시간을 달라. 쉭 그럼 내가 나의 껍질을 내어 주겠 다. 우리들에게 껍질을 벗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쉬익 이왕 죽이지 않기로 했다 면 삼일의 시간을 주었으면 한다. 물론 그대가 강하므로 지금 나를 죽이고 껍질을 벗 길 수도 있겠지만...쉬쉭 그대 말대로 상황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부탁한다. 삼일만 시간을 달라. 쉬쉭 - 내 말에 놀란 듯 뱀의 말이 조금 급해졌다. 삼일이라. 뭐 일단 기구 아래에 달 것 준비하는데 하루. 여행하는데 필요한 준비를 하는 데도 하루 그리고 하루는 쉬지 뭐... 급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거참 세상에 나가기 한 번 드럽게 힘드네.. “알았다. 그럼 삼일 후에 오겠다.” 나는 말을 마치고 그대로 발을 돌렸다. -쉿 고맙다.- 등 뒤로 뱀의 목소리가 들렸다. 삼 일째. 기구에 매달 바구니와 화아를 올려 놓을 돌판. 뱀 껍질을 묶을 끈들을 준비하고 창고 안에 몇가지 과일들을 쌓아두고 폭포가 있는 연못에서 하루를 느긋하게 쉬고 난(그 때 새삼 알았는데 나 오행기로 변신하고나서 완전히 용됐다우. 엄청 멋있어진 얼굴이 었다우. 정말 내가 봐도 잘생긴 미남형이얌. 머리카락이 길게 허리까지 내려오지만 그래도 그 긴 머리가 잘 어울리는 얼굴이라구요. 상상해 봐요. 긴 머리가 어울리는 남자 얼굴이라니..) 다음날. 나는 뱀의 굴을 다시 찾았다. 뱀은 약속대로 그의 껍질을 벗어 놓았다. 혹시나 허물벗은 뱀껍질 처럼 이상하게 변해 버리지나 않을까 걱정을 했지만 뱀을 잡 아서 껍질을 벗겨 놓은 것과 다름없는 가죽이었다. “고맙군 약속을 지켜 주어서. 그런데 몇 가지 물어봐도 되나?” 나는 그 동안 준비해 두었던 궁금증 때문에 뱀에게 물었다. -쉬익 내가 아는 것이라면 알려 주겠다.- 이제 뱀의 크기는 거의 백여미터에 이르고 있었다. 그 사이에 성장을 한 모양이었다. 다만 껍질은 아직 굳지 않은 듯 연약해 보였다. “뭐 일단 이렇게 되었지만 성장을 하게 된 것을 축하해. 그럼 물어볼게. 혹시 이 숲 밖, 그러니까 그 계곡 밖으로 어떤 세상이 있는지 아나?” -쉬익, 쉬익, 그걸 물어보는 것을 보니 계곡을 건너오지 않았다는 말이 사실인 모양 이군. 쉬익 하지만 나는 계곡 밖의 것들에 대하 알지 못한다. 쉿 내가 태어난 200년 전에도 이 숲은 그 벽에 의해 고립되어 있었다. 쉭 쉬익 내가 아는 것은 이 숲이 그 렇게 만들어 진 것이 언제인지 모를 예전 부터라는 사실 뿐이다. 쉬이익 - 혹시하고 생각하고 있던 대로 이 숲은 단절된 채로 나름대로 발전해 온 모양이었다. 왜 이런 곳이 만들어 졌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신들이 직접 관여한 세계에 이런 곳이 왜 필요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 혹시 지심목 때문이라면 어쩌면 가능한 이야기 이기도 하니까. 아무튼 별로 도움이 되는 이야기는 없군. “그래 알았다. 그리고 이 껍질 고맙다. 그리고 죽이려고 했던 건 용서 안되겠지만 미안하다.” 나는 껍질을 돌돌 말아서 어깨에 걸치며 말했다. -쉬익 강자는 약자에게 요구한다. 쉭 약자는 강자에게 고개 숙인다. 쉭 이것이 우리 들의 법칙이다. 당연한 것이다. 오히려 죽이지 않아서 고맙게 생각한다. 쉬쉿- 나는 뱀의 대답을 들으며 뱀의 껍질을 어깨에서 내려서 끌고(껍질이 상당한 부피인데다가 굴이 입구쪽으로 좁기 때문에) 굴 밖으로 나왔다. 처음에는 껍질들을 잘 자르고 붙이고 해서 기구 모양을 만들 생각이었지만. 생각해 보니 그렇게 거창한 모양을 만들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그냥 이 뱀의 허물을 통째로 기구로 사용하고 밑에 상자 같은 것은 달 필요도 없이 그냥 줄 하나 내려서 잡고 날아가면 될 것 같았다. 나는 즉시 계곡을 넘어가는 작업에 들어갔다. 풍아에게 뱀의 꼬리 부분을 잡고 하늘로 올라가게 하고 밑에서는 화아가 곧장 뜨거 운 기운을(불덩이를 쏘면 안된다. 그저 뜨거운 기운만..) 그 허물 안으로 불어 넣게 했다. 삽시간에 허물은 부풀어 오르며 천천히 부력을 가지게 되었다. 나야 원래 가벼운 몸이고 더구나 몸에 바람의 기운을 불어 넣으면 더 가벼워진다. 덕분에 순식간에 부풀어 오른 뱀 껍질 기구는 나를 허공 중에 뛰웠다. 사실 높이 뜰 필요는 없었다. 이 상태를 유지하며 건너 편으로 넘어가기만 하면 되 는 것이었다. 풍아는 미리 알려 준 대로 기구를 계곡의 틈 위로 밀고 나갔다. 나는 순식간에 발 밑의 땅이 몇 미터 아래에서 끝도 알 수 없는 깊이로 꺼져 버리는 것을 보고 오싹한 느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기구는 나름대로 순조롭게 앞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거의 중간 쯤 왔을 때, 사건은 터지고 말았다. 갑자기 밀어닥친 역풍, 바람의 정령인 풍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구는 자꾸만 밀려 오는 바람에 건들거리고 휘둘리기 시작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사람 미치게 하는군.” 나는 이리 저리 흔들리는 기구의 줄을 잡고 버티는 방법 밖에 없었다. 아마도 어떤 형식으로든 이 숲과 바깥 세계를 단절시키려는 의도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숲 안에 조류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던 사실이 그제서야 생각이 났다. 숲 안에 없다는 말은 밖에서도 들어오지 못했다는 말인데... 이제서야 그 생각을 하다니 나도 미련하군. 그나저나 바람인데 풍아가 밀린단 말이야? 나는 순식간에 이런 생각들을 하고는 오행기를 끌어올려 풍의 기운으로 바꾸어 풍아에게로 방출시켰다. 풍아가 힘을 얻었는지 점차 기구가 안정되어 갔다. 하지만 여전히 기구는 앞으로 나가지는 못하고 있었다. 나는 평소에 원래 가지고 있었던 이상의 기운들을 정령들에게 주어 본 적이 없었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다. 나는 오행기의 다른 기운에 해당하는 양의 기운들도 풍의 기운으로 바꾸어 풍에게로 보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기구는 천천히 계곡의 중심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첨차 강하게 풍아에게 기운을 보냈고 그에 따라 기구도 중앙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신기한 일이 생겼다. 기구의 앞에서 바람을 끌어 모으고 중심을 향해 나아가던 풍아의 크기가 점점 커지더니 모습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겨우 내 엄지 손가락 크기였던 풍아가 기를 수련한 이후에 조금 커져서 팔 뚝 정도의 크기가 된 것을 본 적은 있었지만 진짜 사람 정도의 크기가 되더니 점점 더 커지면서 모습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개구쟁이 중학생같은 모습에서 판타지에 나오는 엘프 같은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변한 풍아는 팔을 벌리고 비단옷자락을 날리며 하늘을 날아가는 선녀 같은 모습으로 계곡의 중앙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나는 그 때 계곡의 중앙에서 그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는 또 다른 정령을 보았다. 아마도 이 계곡의 중앙에 바람의 정령이 장벽의 역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풍아와 그 바람의 정령은 거의 손을 내밀면 닿을 듯한 위치에서 더 이상 가까워지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서로의 힘이 같은 모양이었다. “풍아 힘내라구. 너한테는 내가 있잖아. 자 힘내.” 나는 풍아에게 외치며 더욱더 힘껏 기운을 밀어 보냈다. 표정이 없는 정령들의 싸움에서 힘이 드는지 아닌지는 모를 일이었다. 다만 내가 풍 아에게 더욱 강한 기운을 보내는 순간 흔들 하면서 상대편 바람의 정령이 흐려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풍아의 모습이 다시 부풀어 오르며 커지는 순간 상대 정령은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그 순간 나는 풍아에게 보내던 기운을 조절했다. 풍아는 전보다 더 커진 모습으로 있었지만 아직 모습 자체가 변하지는 않았다. 나는 계속 기운을 보내서 풍아가 어떻게 변하는지 보고 싶었지만 일단은 위급한 상황 이 넘어갔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천천히 힘을 줄였다. 기구는 이제 빠르게 건너편 땅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얼마 후 나는 안전하게 건너편 땅에 닿을 수 있었다. 나는 화아를 돌려 보내고 풍아를 돌려 보내기 위해 말했다. “풍아 수고했어, 풍아 돌아가” 순간 나는 가슴이 멎는 줄 알았다. ‘네 주인님’ 그리고 풍아는 사라져 버렸다. 나는 급히 다시 풍아를 소환했다. “풍아 소환” 여전히 풍아는 손가락 크기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보통 때에는 이렇게 작은 모습이 보기에도 좋고 편하기도 하다. “너, 너 지금 말했지? 다시 해봐. 무슨 말이든 다시 해봐.” 하지만 풍아는 말이 없었다. “너 말 할 수 있지?” 나는 방법을 바꾸었다. 무슨 말이든 이라는 것은 정령들에게 어려울지 모른다. 정령들은 명령 이외의 것은 하지 않는 것이다. ‘네, 말할 수 있습니다.’ 역시 풍아는 대답을 했다. 음색은 맑은 바람 소리 같았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말을 하지 않았던 거야? 혹시 오늘 커진 거하고 관련이 있는거냐?” 나는 다시 물었다. ‘네 주인님, 처음의 저는 바람의 최하급 정령이었습니다. 때문에 주인님과 대화를 할 정도의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조금 커진 모습도 하급 정령이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조금 전에 중급 정령으로 변하는 순간 주인님의 말씀에 대답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습니다.’ “흠... 그런 것이로군. 그럼 이젠 바람의 중급정령이네? 그래 계급이 높아진 기분이 어때?” 나는 웃으면서 풍아에게 물었다. ‘정령은 진화하지 않습니다. 저는 예외에 해당합니다. 주인님께서 저에게 주신 힘 때문에 이렇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기분이라는 말씀은 알 수 없습니다. 저희는 기분이라는 것은 모릅니다.’ 풍아는 다시 대답을 했다. “기분이라는 것을 몰라? 감정이라는 것이 없다는 말이야?”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뭐야? 그럼 위에 있는 상급정령이나 정령왕들도 그런거야? 흔히 정령왕은 화도 내고 사랑도 하고... 뭐 그런 것 같던데...” ‘저는 저보다 상위 존재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다만 시키는 대로 할 뿐입니다.’ 나는 갑자기 서글퍼 졌다. 그럼 내가 다섯 정령들을 아끼고 좋아했던 것들을 이들이 알지 못한다는 말이 아닐까? 정말 허탈해 지는군. 나는 갑자기 심통이 났다. “풍아 돌아가.” ‘네 주인님’ 풍아는 대답과 함께 왜 갑자기 돌아가라고 했는지에 대한 어떤 의아함도 내비치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나는 대충 기구(허물)를 둘둘 말아서 창고에 넣어두고(아껴야 잘 산다.) 터덜 터덜 걷기 시작했다. 계곡 이쪽은 그리 크지 않은 나무들과 바위가 뒤섞인 모습이었다. 길은 없었지만 동물들이 다닌 것인지 그런 대로 걷기에 불편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가슴이 답답했던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던 나는 우뚝 멈추어 섰다. 드디어 발견한 것이다. 사람의 흔적. 분명히 길이었다. 길. 사람들이 지나 다니는 길.... 그럼 여기는 이런 길이 생길 정도로 사람들의 왕래가 있다는 말이다. 적어도 이 길을 따라 가면 마을을 만날 수는 있을 터였다. 덕분에 조금 기분이 풀려 버렸다. 뭐 어쨌든 나만이 불러 올 수 있고 나만의 정령들이니까. 그들은 어찌 생각하는지(참 감정이 없다고 했으니까...) 모르지만 일단은 나에게 소중한 존재들이다. 하하하 그걸로 된 것이다. 어쩌면 언젠가는 감정이란 것이 생길지도 모른다. 희망은 어디에나 있다. 나는 일단 다른 정령들을 불러 변신을 시켜 보기로 했다. 어쩌면 이러는 사이에 사람들이 나타날 지도 모른다. 나는 화, 수, 지토, 광아를 차례로 불러 변신을 시켜 보았다. 예상대로 내가 기운을 몰아 주자 녀석들은 변신을 했다. 화아는 그 중에서도 나를 깜짝 놀라게 하는 변신을 했는데... 도마뱀이 개가 된 것이다. 화려한 목갈기를 가진 사냥개.... 내 인상은 그랬다. 그리고 녀석의 목소리는 남성적인 목소리였고 화끈화끈한 느낌을 주었다. 수아는 변신 끝에 물동이를 쏟고있는 여신의 모습이 되었다. 뭐 처음 불러 내면 원래 그 모양이지만... 역시 목소리는 계곡물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지토, 이 할배는 갑자기 할아버지 헤라크레스가 되었다. 목소리는 땅이 울리듯이 쿵쿵거리는 느낌을 주는 목소리였다. 그런데 광아는 여전히 같은 크기에 같은 모습이었다. 다만 무언가 달라졌다는 느낌 만 주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목소리도 아무 느낌이 없이 그저 뜻만이 전해지는 그런 것이었다. 그렇게 정령들을 변신 시켰지만 풍아와 다른 점은 없었다. 그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한다는 것이 그들의 모토인 모양이었다. 쩝.. 불쌍한 중생들 언젠가는 살아있는 모습이 되게 만들고야 말겠다고 나는 그 녀석들을 보면서 결심했다. 언젠가는... 한참을 길을 따라 걸어갔지만 여전히 마을은 보이지 않는다 아니 마을 뿐이 아니라 농작물을 가꾼다거나 하는 그런 사람의 흔적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하하하 그런데 이 길은 어디까지 이어질까? 나는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이틀..... 드디어 변화가 왔다. 갈림길.. 하하하 나는 그 갈림길에서 망설이지 않았다. 큰 길.. 큰 길이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이어질 거야. 나는 단순하게 생각하고 다시 길을 재촉했다. 정말 이렇게 걸어가는 것도 보통 사람들의 걸음이라면 두 배는 더 시간이 걸릴 거리 를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힘이 넘쳐나니까 쉬지도 않고 빠르게 빠르게... 하지만 밤은 다시 돌아왔다. 나는 길 위에서의 노숙을 피해서 길 옆 작은 숲으로 들어갔다. 길 위에서 마차라도 오면 어쩌냐... 쩝.. 오면 좋겠지만.. 우선 모닥불을 피우고, 지토가 캐온 뿌리식물(이건 감자와 고구마의 중간 맛이다. 무 척 커서 창고에 넣어두고 저녁이면 꺼내서 단면을 두툼하게 잘라서 구워 먹는다.)을 창고에서 꺼내고 나뭇가지에 끼워서 굽기 시작했다. 그런 대로 저녁 식사로는 괜찮은 편이다. 뭐 물론 소금만 있으면 뭐든 고기를 먹고 싶기는 하지만.. 그런데... 불청객이 나타났다. 흠... 귓가로 들리는 소리는 분명 짐승의 소리였다. 그리고 한 두 마리도 아니고 떼거리.. 애구 짜증나네.. “화아, 다가오는 동물들이 있다. 만약 덤비면 니가 알아서 쳐리해라.” 나는 화아에게 말하고는 느긋하게 뿌리감자를 굽기에 전념했다. 화르르륵 -- 펑. 케겅~ 케겅~ 켕~ 아무래도 이 소리는 강아지(아니 개) 소리같다. 흠.... 화아가 개니까 이건 개싸움이로군. 나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화아는 잔뜩 웅크리고 몸을 뒤로 뺀 상태에서 언제든 앞으로 달려 들 모습을 하고 있 었고 화아가 날린 불덩이에 맞은 녀석들(강아지는 절대 아니다. 크기가 거의 3미터는 되어 보이는 개들이었다.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은 몇몇 널부러지거나 그나마 좀 덜한 놈들은 털이 타는 냄새를 피우며 이리 저리 뒹굴며 짖어대고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녀석들은 별로 도망가고 싶은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어느새 주위는 녀석들로 포위당한 모습이었다. 나는 지토를 소환했다. “지토 소환” “지토 저녀석들 거슬린다. 대충 잡아서 땅에 묻어 버려.” ‘네 주인님.’ 지토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귀에서 울린 순간 갑자기 들개들의 무리에서 소란이 생겼다. 땅속에서 올라온 손이 들개들을 한 마리씩 잡아서는 땅 속으로 끌고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놀란 들개들은 땅속으로 끌려 들어가며 비명을 질렀다. 케갱 케갱 ~~ 이 틈에 어느사이 몸을 날린 화아는 닥치는 대로 들개들을 헤집으며 입으로 물고 발톱을 휘두르고 있었다. 화아는 몸 자체가 온통 불덩이였고 그 온도는 철을 녹일 수 있을 온도였다. 화아의 몸이 지나가는 것 만으로도 매케하게 연기를 뿜으며 들개들이 쓰러졌다. “풍아 소환” “풍아야 이 냄새 때문에 토할 것 같다. 그러니까 부탁인데 이 냄새 좀 다른 곳을 날려 버려라. 아주 죽겠다.” 나는 화아에게 일을 시킨 나를 욕하며 풍아에게 말했다. ‘네 주인님’ 순식간에 주위의 공기들은 허공에서 내려온 공기로 채워졌고 더 이상 들개들의 냄새는 밀려오지 않았다. 그 사이에 대충 마무리가 된 모양이었다. 이제 땅 위에는 더 이상 들개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화아에게 당해서 누워버린 녀석들까지 지토가 땅 속에 묻어버린 모양이었다. 흐흐흐 기특한 지토. 나는 그렇게 요란한 중에 준비한 뿌리감자로 배를 채우고 잠자리에 들었다. 마땅히 깔고 덮을 것이 없었던 나는 기구(뱀 허물)을 꺼내서 몇 겹으로 깔고 덮고 잠을 청했다. 불침번은 광아에게 부탁했다. 빛을 뿌리고 조용히 떠서 흔들리는 광아를 보다가 나는 어느 사이에 잠이 들었다. 사람들... - 1 ‘주인님 사람들입니다.’ 광아의 목소리가 내 머리를 파고 들었다. 광아의 목소리는 소리라기 보다는 의미의 전달이었다 때문에 잠들어 있어도 그 의미가 나에게 전달이 빨랐다. 물론 그것도 광아를 불침번으로 삼은 이유중의 하나다. 나는 부스스 눈을 뜨며 광아를 돌려 보냈다. “광아 돌아가.” ‘네, 주인님’ 광아는 대답과 함께 사라졌다. 나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사람들의 위치를 파악했다. 사람들은 길을 따라 오고 있었다. 그리 빠르지 않은 걸음이었지만 걸어오는 사람과 함께 뭔가를 타고 오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었다. 짐승의 투레질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아직 거리가 있었다. 나는 급히 뱀 껍질을 창고에 넣고 내 몸을 살폈다. 그다지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급히 눈꼽을 떼는 것으로 세수를 대신하 고 머리를 뒤로 모아 묶었다. 그리고 화아를 불러 모닥불을 급히 붙이고는 돌려 보냈다. 창고에서 꺼낸 뿌리감자를 잘라 불위에 올려 놓았을 때, 드디어 사람들이 숲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었다. 난 모르는 일이다. 흠...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이 그러니까 호~~ 20명 가량은 되는군, 거기다가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도 제법 흠.. 대충 다섯 정도인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그저 뿌리 감자 굽기에 정신이 팔린 듯이 모른 채 하고 있었다. 저들이 무슨 말을 쓰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함부로 먼저 떠들 수도 없는 형편이었 고 지금까지는 말 이라기보다는 의지를 통한 대화가 전부였기 때문에 상관이 없었지만 인간들과 그런 대화방식이 통할 리가 없는 것이었다. 아직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있는 주위를 둘러싸는 사람들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상당히 가벼운 몸놀림으로 기척 없이 움직이고 있었지만 나는 못 속인다네.. 하하하 뚜둑- 분명히 의도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포위망이 완성되자 한 쪽에서 나뭇가지 밟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놀란 듯이 굽던 것을 한 손에 든 채로 소리가 들린 쪽(내 등뒤)을 향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일어났다. 그제서야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람들 하나같이 나는 판타지에 나오는 용병입니다. 우리 시대는 유럽의 중세와 비슷한 시대입니다. 우리는 칼이나 화살, 혹은 철퇴, 혹은 창 같은 무기를 쓰지요. 이런 분위기를 팍팍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내 정면에는 그 중 우두머리인 듯 망토까지 멋지게 두른 건장한 남자가 한 손에 칼을 들고(검집에 들어 있었다.) 나를 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동양인 서양인이 뒤섞인 모습이었는데 체격은 차이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머리 색은 총 천연색을 방불케 하고 있었다. ‘머리카락의 색이 가지가지군. 나도 염색을 좀 할까?’ 나는 놀란 모습으로 멍하니 상대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자 그 망토 사나이는 한 말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이런 놀랐다면 미안하오. 하지만 이런 곳에 사람이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아서 말이오. 그래서 몇 가지 물어볼까 하고 식사를 방해했으니 이해하시오.” 나는 어렵지 않게 그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 네... 그러세요. 저기 식사는 하셨나요? 혹시 소금 같은 것 좀 있으세요. 있으시면 조금 얻을 수 없을까요?” 나는 그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해서 그만 실없는 소리를 하고 말았다. “에~? 소금이요? 소금은 왜?” “저 저기요, 제가 소금도 없이 벌써 근 한달 동안 과일하고 풀뿌리만 먹어서요. 그래서 소금 좀 얻어서 고기 좀 구워 먹을까하고....” 그러자 그 사람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하다가 곧 한 사람을 불러서 귓말로 뭐라고 했다. 뭐 듣자고 하면 못 들을 것도 없겠지만 평소처럼 있을 때에는 들리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솔직히 그 말을 들은 사람이 어처구니 없는 표정으로 시키니까 하기는 한다는 식으 로 자리를 떠났을 때에는 무슨 말을 했는지 상당히 궁금해 지기는 했다. “저 저기요. 저 이거 마저 구워야 하는데 앉아도 되죠?” 나는 다시 어벙하게 물었다. “아 그럼 물론이오. 좋도록 하시오.” 그의 말투는 상당한 격식을 가진 것 처럼 보였지만 평소에 내가 쓰던 말투와는 거리가 멀어서 좀 근질거렸다.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아서 뿌리 감자를 굽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런 곳에 혼자 계신 겁니까?” 그가 다시 물어왔다. “아, 네. 실은 저 길을 잃었거든요.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그냥 어쩌다 보니 여기 있게 되었더군요. 저도 제가 왜 여기에 있는지 몰아요. 벌써 한 달 가까이 사람 이라고는 본 적이 없었어요. 하하 아무튼 만나서 반가워요.” 나는 망토 사나이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는 여전히 조금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상당히 위험한 곳입니다. 사람들을 헤치는 짐승들이나 괴물들이 많 이 나타나는 곳이지요. 적어도 여기까지 들어오려면 그 험한 길을 헤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인데...” 나는 어젯밤의 그 들개들이 생각나서 물었다. “뭐 들개들 말씀인가요? 어제 밤에 한 번 나타나기는 했었는데 별 볼이 없다는 듯이 그냥 가 버렸어요. 하하하” “무슨 말씀을... 들개들이라면 혹시 3미터 정도의 크기에 발톱이 여섯인 그 무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망토 사나이는 다시 물었다. “제가 발톱 숫자는 잘 모르겠고 뭐 그정도 크기의 짐승인 것은 맞네요. 네 발로 뛰는 이빨 달린 것들이요.” 다시 그 사나이의 표정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난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굽고 있던 뿌리 감자를 집어 들었다. 마침 적당히 익어서 구수한 냄새가 풍겼다. “조금 드실래요? 보기에는 이래도 맛은 괜찮은 편인데...” 나는 망토 사나이에게 뿌리 감자 한 쪽을 내밀었다. “여기 있는 분들 전부는 못 드려요. 가진 것이 별로 없어서... 그래도 대장인 것 같 으니까... 성의를 봐서 드셔 보세요.” 그는 마지 못한 듯 받아들었다. 나는 그가 그것을 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에 대충 탄 부분을 털어내고 껍질을 벗기곤 조금씩 베어먹기 시작했다. “흠.. 보기 보다는 맛있다니까요. 드세요.” 나는 다시 망토 사나이를 재촉했다. 쓰~~ 먹으라고 주는데 성의를 무시하다니.. 짜증나네.. 하하하 뭐 대놓고 말할 입장은 아니었지만.... 망토 사나이도 내 마음을 짐작했는지 내가 했던 대로 따라서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거 정말 맛있군. 무례한 우리들에 대한 이런 환대에 감사하는 바이오. 나는 넥스 라고 하오. 우리들은 이 곳에서 짐승들이나 괴물들을 사냥하고 그 대가로 보상을 받 는 일종의 사냥꾼들이오. 이번에는 산록늑대의 무리를 잡아달라는 의뢰를 받고 그 녀 석들을 쫓는 중이었소. 분명 이 곳으로 도망을 갔는데... 이곳에서부터 흔적이 없어 져버려서....” 나는 순간 당황했다. “하하 그렇게 된 것이군요. 그럼 그 녀석들을 잡지 못하면 어떻게 되나요?” “좀 더 살펴 보아야겠지만 만약 잡지 못한다면 다른 무리를 찾아야겠지요. 산록늑대 의 무리는 그 녀석들 하나만은 아니니까요. 물론 그만큼 시간이 낭비되고 수입이 줄기는 하겠지만...” 나는 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때 아까 심부름을 갔던 사람이 돌아왔다. 어디에서 잡았는지 토끼처럼 생긴 동물을 두 마리 들고 왔다. “아, 이건 나의 성의이오. 그리고 소금은 여기 있소. 무척 놀라게 했던 것에 대한 사죄로 생각하시오.” 그는 주먹만한 주머니 하나를 꺼내 주면서 말했다. 나는 냉큼 그 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그 주머니 안에 들어있는 소금을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았다. “우화~~!!! 얼마만의 소금인가? 우화...맛있다.” 나는 연거퍼 소금을 입안으로 찍어 날랐다. 그러다가 주위 사람들의 날카로운 시선을 의식하고서야 그 행동을 멈추었다. 하하 뭐 그렇게 놀란 표정들을 짓고 그러시나.. 쩝.. “하하하 제가 워낙 오래 소금을 맛보지 못해서... 하하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뒷통수를 긁었다. 그러다가 나는 이 무안한 분위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위기감에 “저기 어제 밤에 그 늑대들이요...... 사실은..” 내 말이 나오자 모두들 갑자기 시선을 나에게로 집중했다. 좀 전까지는 다들 못 볼 것을 보았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돌리던 사람들이 모두들 나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저기 그러니까 그렇게 바라보지 마시고요. 그러니까 그 늑대들 제가 어제 다 죽여 버렸거든요.” 순간 그 사람들은 하나같이 멍 한 표정을 짓더니 갑가기 의아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리곤 말도 안돼는 소리라는 듯이 피식피식 웃었다. 나는 아무래도 말을 잘못 꺼냈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래도 비웃음을 당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지토 소환” 순식간에 내 앞에는 조그마한 지토가 소환되었다. “헛. 놀래라. 정령이잖아. 정령술을 아는가?” 망토 사나이 아니 넥스라는 사람은 잠깐 놀라는 듯 하더니 그렇게 물었다. “에~~ 정령을 아시네요. 네... 그리고 어제 밤에 제가 여기 있는데 그 녀석들이 나타나기에 쓸어서 땅속에 묻어 버렸거든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지토에게 명령했다. “지토 어제 묻은 녀석들 전부 여기로 좀 꺼내와. 이런거 시켜서 미안하다.” ‘네 주인님’ 지토는 곧 땅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고 곧 땅 속에서 산록늑대들의 시체가 쏟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넥스는 다시 나에게 물었다. “여기에 또 누가 있는 것이오? 저기 있는 것들 중에는 땅의 정령이 아닌 불에 당한 것들도 있는 것 같은데 말이오.” “아뇨. 아무도 없어요. 제가 불러낸 불의 정령이예요.” “그럼 두 종류의 정령을 불러 낸다는 말이요? 대단하군 간혹 그런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 “아닌데요. 전 다섯가지 정령들을 가지고 있어요. 자 보세요. 화,수,금,광, 소환!” 나는 한꺼번에 다른 네 정령을 불러 내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주위는 소란해 졌다. “이 이런 말도 안돼는 어떻게 불과 물의 정령을 한꺼번에...” 넥스의 헛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이, 이봐요. 그렇게 놀라거나 하면 ....” 나는 갑자기 이렇게 된 데에 당황했다. 그런데 “당신이 보여준 것은 이 세상의 기존 관념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반응이 오는 것도 당연하지요.” 넥스의 뒤에서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났다. 다른 사람과 달리 지팡이를 들고 나타난 그는 아무래도 격투술을 익힌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아! 어서 오십시오. 쉬벡. 그리고 이 분은.... 참 이름을 아직 모르는 군요. 저 성함이....” 넥스는 나에게 물었다. “전 루탄입니다. 루탄 최 한국. 나는 내 이름을 영어식으로 말하고 뒤에 우리 나라 이름을 붙였다.” 어쨌든 성과 이름 그리고 세자리 이름은 판타지에서도 귀족의 이름으로 쓰이는 것이니까 혹시 여기서도 그런 대접을 받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저... 귀족이셨습니까?” 예상대로 쉬벡이 물어왔다. “저 귀족 아닌데요. 그냥 이름이 그런 것 뿐이예요.” “그러시다면 더 이상 묻지는 않겠습니다. 저는 상급메지커 쉬벡이라고 합니다. 그런 데 정말 대단하시군요. 다섯 종류의 정령을 다루는 사람이라니... 지금껏 세가지 정 령을 다루었던 사람도 역사상 단 둘 뿐이었는데... 대단하군요.” 쉬벡은 놀랍다는 듯이 나를 바라 보았다. “별말씀을...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된 걸 가지고...” 나는 다시 머리를 긁었다. 그 사이에 공터에 쏟아진 산록늑대들을 둘러싼 사람들은 저마다 산록늑대의 송곳니를 뽑아내고 있었다. “저건 왜 뽑는 거죠? 파는 건가요?” 나는 넥스에게 물었다. 돈 되는 거면 내꺼라고 우겨볼까 생각 중이었다. “일단은 늑대 무리를 없앴다는 증거가 되고, 다음에는 악세사리를 만드는 도구로 쓰 이지요. 그러고 보니 주인이 있는 것을 함부로 가지고 가는 꼴이군요. 미안합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돌려줄 생각은 없는 듯 했다. 뭐 하는 수 없는 일이었다. 일단은 역시 소금을 얻었다는 단순한 기쁨에 그런 것은 뭐라든 상관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러는 사이에 넥스는 사람들을 정리하고 식사 준비를 시켰다. 어차피 목적은 달성(아주 쉽게...)했고, 이제는 돌아가 대가를 받는 일만 남아서 인지 무척이나 즐거운 표정들이었다. 그리고 덕분에 나는 곁다리로 끼어서 점심을 얻어 먹을 수 있는 행운을 맞았다. 그들은 일단 숲으로 들어가 한 동안 사냥을 해서 사슴과 돼지를 잡아 왔는데 점심에는 보통 그런 것을 먹지 않는다고 한다. 오로지 나를 위해서 그런 것이라고 넥스는 은근히 힘주어 말했다. 그래 알았다 송곳니 달라는 말 안한다. 쩝..... 그렇게 준비된 점심은 고기 바비큐와 고깃국 그리고 과일과 빵 등으로 성찬이 부럽지 않은 식사였다. 나는 정말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열심히 먹었다. 평소에 그렇게 많이 먹지는 않지만 배 고플 때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먹어야 한다는 신조를 지키던 나였는데 한 동안 먹고 싶은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한 울분이 쌓여 있었던 모양이었다. 덕분에 사람들이 한동안 나를 무슨 짐승 보듯이 했지만 배가 부른 나는 그런 것에 상관하지 않았다. ㅡ.ㅡ;; 식사가 끝났을 때, 일행들은 출발 준비를 했다. 물론 나도 곁다리로 끼어서 마을까지만 데려다 달라고 했다. 길을 잃었다는데... 어쩌겠는가 하하하 결국 나는 쉬벡과 함께 마차(이건 식료품과 장비를 싣기 위한 것인데 상당히 큰 편이 었다. 그리고 다행히 앞에서 마차를 끌고 가는 것도 말이었다. 물론 털이 10배 이상 길기는 했지만 말은 말이었다.)를 타고 가기로 했다. 다른 사람들은 말을 타고 갔다. 덕분에 상당히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었지만(나는 속이 울렁 거려 죽는 줄 알았다) 넥스의 말로는 이 지역에서 사람이 사는 곳 까지 가려면 빨라야 일주일은 걸릴 것이라고 했다. 물론 더 빠른 길이 있기는 했지만 그건 길이 아니라 숲이나 산을 가로 질러 가야 하는 길이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어떤 괴물이 나올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은근히 겁을 주기도 했다. ㅡ.ㅡ;; 하지만 마차가 달리다 바퀴가 찌그러지는 불상사를 당한 후로는 나에게 별로 그런 말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한 손으로 마차를 들어 올려서 바퀴를 빼고 고치고 갈아넣는데 도움 을 상당히 주었기 때문에 내가 힘이 센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저녁과 아침에 이 집단이 단체로 단련을 하는 것도 지켜 볼 수 있었다. 보통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서 하지 않아도 상관은 없다고 하는데.. 넥스가 나와서 칼 을 휘두르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도 하는 수 없는지 나와서들 연습을 했다. 활을 쏘는 사람 단검을 던지는 사람, 창을 쓰는 사람 각양 각색의 사람들이 아침 저녁으로 살벌한 분위기를 벌이곤 했다. 뭐 나야 천천히 구경하면서 노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리고 역시 넥스의 칼솜씨는 일품이었다. 역시 대장은 달라. 아니면 혹시 지가 제 일 잘 하니까 일부러 폼 잡으려고 매일같이 사람들 못살게 하는 건가? 아무튼 나라고 해도 별로 피하고 공격하는데 자신하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뭐 이기는 건 문제도 아니겠지만... 내 힘과 공력에 어이 당하리... 캬캬캬캬 쉬벡은 조용한 편이었지만 이것 저것 간간히 물어 볼 때 마다 내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질문을 했다. 예들 들어서 - 그래 어느 지역에서 주로 생활을 하셨나요? - 종교는 어떤 .... - 어떤 음식을 좋아하..... - 책은 읽을 줄 아시는지 아신다구요 그럼 어떤 책이 기억에 남는지.. -그리고.. 뭐 이렇게 가끔 물어 보는데 내가 이 세상의 지명을 어떻게 알고, 어떤 종교가 있는 지 어떻게 알겠으며, 어떤 음식이 있는지는 또 어떻게 알아? 거기다가 책? 무슨 책이 있는지 알게 뭐냐고... 그러더니 이 늙은이가(늙은 생강이 맵다더니...ㅡ.ㅡ;;) 내 정체를 의심하는 눈빛이다. 그런다고 내가 뭐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대신에 나는 쉬벡 이 늙은이에게서 좋은 것을 얻었다. 그 늙은이가 가지고 다니는 책들을 빌린 것이다. 뭐 언제나 마차 안에만 있으니까 시간은 넉넉했고 지심목의 그 동화력이라는 것의 덕택에 책을 읽는 것에 대한 어려움은 없었다. 두툼하게 한지처럼 보이는 종이에 쓰여진 글씨는 필사본이었다. 주로 가지고 있는 책들이 역사와 종교에 관한 책 뿐이었지만 나에게는 그렇게 좋은 책은 다시 없었다. 일단 역사를 아는 것과 종교를 아는 것은 세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리고 나머지는 마법에 대한 것들이었는데.... 기본적으로 마법을 하기 위해서는 초능력이 있어야 한다. 뭐 누구나 가진 것이기는 하지만... 예를 들어서 내가 몸 속의 기운을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활용하는 것 처럼 마법 은 몸 밖에 있는 그러한 기운들을 직접 사용하는 것이다.( 때문에 그 기운들을 모아 서 움직이는데 필요한 정신적인 힘이 필요한 것이다. 생각해 봐라 기운을 손이나 발 로 움직이리?) 그러니까 그것들을 몸 주위에 모아 두었다가 필요하면 필요한 만큼 활 성화 시켜서 서로 충돌시키거나 속성을 부여해서 거기에서 얻어지는 힘으로 어떤 일을 하는 것을 마법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러한 힘을 만드는 것이 기본이라면 그 힘을 사용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은 정말 복잡한 계산과 순서에 따라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별로 그렇게 복잡한 짓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난 지난 이천오백년의 수련만으로도 충분히 할 공부는 다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휴우~~ 우화~~ 마을이다. 마을. 사람들이 사는 마을. 집도 있고, 가게도 있고, 사람들도 많고 그래봐야 겨우 백여 채 남짓한 집들이 있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드디어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을 보게 된 것이다. 집들의 모습은 전통적인 중세 양식을 따르고 있는 것 같았지만 목재를 사용한 부분 이 많은 것은 서부 영화에 나오는 집들을 연상케 하고 있었다. 이 일행들(일종의 용병들인 것 같다.)의 목적지는 아직도 상당히 먼 거리가 남아 있 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거의 일주일 걸렸다. 여기까지 오는데...) 보는 마을이라 일행들도 보급을 해야 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나도 여기까지만 데려다 달라고(마을까지만 데려다 달라고 했었다.) 부탁을 했던 입장이라 이제 부터는 내 힘으로 모든 일들을 꾸려 나가야 할 것이다. 쩝... 돈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다. 하하하 안되면 사냥이라도 해서 돈을 좀 모아 보는 수 밖에... 일행들은 마을 회관에서 하루를 묵어 가기로 했다. 작은 마을이어서 이런 인원이 묵 을 여관도 없었고(실제로는 여관이 아예 없다.) 대부분 이런 작은 마을에서는 이런 사냥꾼들을 매우 반기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그들의 삶에서 장애가 되는 요소들을 해결해 주는 사람들이라 인식이 좋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따로 갈 곳도 없는 처지였기에 일행들의 틈에 끼어서 신세를 지기로 했다. 이 마을에서는 내일 하루까지 푹 쉬고 보급을 하고 떠난다고 했다. 저녁은 마을에서 대접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노숙을 할 때 처럼 일행들 끼리 해결을 했고 노숙하던 때와 달라진 것은 잠자리 위에 하늘이 보이지 않는 다는 것과 바람이 불지 않는 다는 것 이외에는 없었다. 참, 여자가 있다. 하하 마을에는 여들이 있어서(물론 아이들도 있지만) 이 세상을 맞고 처음으로 여자들을 보았다. 불침번 없는 밤을 보내고 난 다음날 아침, 나는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 보기로 했다. 다행히 이 곳에서 사냥꾼들이 가죽을 거래하는 곳이 있어서 그 곳으로 물어물어 찾아 갔다. 다른 일행들은 나름대로 보급품을 산다고들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가죽을 구입하는 곳은 마을의 중앙 부근에 있었는데, 건물 앞에 좌판 처럼 늘어놓은 곳에는 가죽으로 만든 신발과 옷가지들이 놓여 있었다. 나는 좌판 건너에 앉아 있는 중년의 배불뚝이 주인을 바라 보았다. “저기 여기서는 아무 가죽이나 다 사나요?” 그는 나를 쳐다보며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물론 토끼 가죽도 사긴 하지만 그런 것은 값이 나가지 않는데.. 그리고 넌 아무 것도 팔 만한 것이 없어 보이는군.” 나는 조금은 깔보는 그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일단은 내가 급했기 때문에 참 기로 했다. 나중에 두고 보자... “그럼 제가 입고 있는 이런 가죽도 사시나요?” 나는 다시 주인에게 물었다. 그때서야 주인은 천천히 내가 입고 있는 옷을 바라 보았다. 그리고 조금은 놀란 얼굴 이 되어서는 나에게로 다가와서 내 옷을 이리 저리 만져 보는 것이었다. “뭐지? 이런 가죽은 처음보는 건데... 신기한 가죽이네... 이런 촉감도 부드럽고, 신축성도 좋고, 빛도 곱고, 아주 좋은 옷감이 되겠군. 질기기만 하다면 좋겠는데.. 시험을 해 볼 수도 없고...” “이거 상당히 질긴 편인데요. 지금까지 한 달 정도 이 옷만 입고 땅에 뒹굴면서 잤 는데도 지금처럼 깨끗하고 또 긁힌 자국도 없어요.” 그는 미심적은 눈으로 나를 보면서 물었다. “그 말이 정말이라면 썩 좋은 가죽이로군? 그런데 이 가죽은 무슨 가죽이지? 어디 이음새도 별로 없는 것을 보니 상당히 큰 동물인 것 같은데...” “이건 뱀가죽이에요. 뱀이요.” 나는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흠... 뱀 가죽이라. 가끔 뱀 가죽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런 색이나 크기는 없었던 것 같은데... 거기다가 비늘도 없는 것을 보니 아주 신기한 뱀이 것 같구나. 그런데 이 옷을 팔 려구?” 그는 나를 보며 다시 물었다. 아무래도 그 눈빛이 이 옷이 탐나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니요. 이 옷 말고 그냥 가죽을 팔려고 하는데... 가격을 어느 정도 주실 건지 알고 싶어서요.” 나의 대답에 그는 망설이는 듯 한 모습으로 말했다. “글쎄 크기와 상태를 보지 않고서는 뭐라고 해 줄 수가 없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에 반대쪽에서 넥스가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화폐의 단위도 잘 모르는 상태여서 넥스를 불렀다. “넥스, 넥스. 여기와서 나 좀 도와줘요. 가죽을 팔려고 하는데 가격이 맞는지 어떤지 모르겠어요. 전 이곳 화폐 단위를 잘 모르잖아요.” 처음에는 그냥 물물교환을 할 생각이었지만 돈도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넥스를 불러 도움을 청했다. “어~~! 그래? 그런데 뭘 팔려고?” 나는 품속에 손을 넣게 그 속에서 창고에 있던 뱀 가죽 하나를 꺼냈다. 내가 꺼낸 것은 창고에 있는 가죽들 중에서 중간 크기쯤 되는 것이었다. “이걸 팔려고 하는데...” 넥스와 주인은 내가 품 속에서 생각지도 못하게 큰 가죽을 꺼내는 것을 보고 놀란 모양이었다. “어, 어.... 어떻게 그렇게 큰 것이 품 속에서 나오지? 신기하네...”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냥 부피를 좀 줄여서 넣고 다닌다고 생각하세요.” 나는 그저 그렇다는 표정으로 말을 했고 넥스도 그 가죽상 주인도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 “흠... 이 정도면 300메티를 주지.” 흠 300메티가.. 그게 얼마나 하는 것인지 알아야 대답을 하지... “넥스 300 메티면 어느정도 돈이 되는 거지요? 그걸로 뭘 할 수 있어요?” 나는 어쩔 수 없이 넥스에게 물었다. “300메티면 어디 보자 여관에서 하룻밤 잠을 자고 식사를 하고 술을 한 잔 하고 그 리고 점심과저녁을 해결 할 수 있는 그래, 그냥 여행자가 하루 생활 할 수 있는 돈 정도는 되겠군. 그런데 그 가죽 좋아 보이는데... 너무 싼 것 같다. 도시에 가면 아마 1500이나 2000은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루탄 니가 입고 있는 그 옷이 같은 가죽으 로 만든 것이라면 상당히 특이한 것이니까 어쩌면 5000까지도 가능할 것 같기도 하 고... 일단은 희귀한 물건이니까...” 넥스는 300메티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말했다.(그 사이에 넥스는 나에게 말을 놓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나도 서른이 넘은지 오랜데.. 겉모습은 10대 후반 정도로 보인다.) 나는 약간 고까운 눈으로 가죽상을 바라 보았다. “뭐... 사실 도시에서 그렇게 받을 수 있을지도.. 하지만 일단은 처음 보는 가죽이니까 값을 정할 수가 없어서...” 가죽상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 때 다시 쉬벡이 우리들에게로 다가왔다.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죠? 나는 다시 가죽을 팔려고 한다는 것과 그 사이에 있었던 거래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흠.. 그 가죽이라면 아마 도시에서 5000정도에 팔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어차피 도시로 가실거면 제가 여행에 필요한 경비를 빌려 드릴테니 도시에서 가죽을 팔아서 주셔도 될 것 같은데... 어떠신지요?” 나? 나야 당연히 좋지.. 하지만 내가 대답을 하기 전에 가죽상 아저씨가 끼어들었다. “잠깐만, 잠깐만. 제가 그 가죽을 사지요. 4500드리겠습니다. 그러니 그냥 여기서 파십시오.” 그 아저씨는 갑자기 말을 높이면서 흥정을 걸고 있었다. 아마 나 때문은 아니고 쉬벡이 늙어 보이니까 그런 모양이었다. 나는 아직 창고에 제법 많은 가죽들이 있었고 또 신세를 지는 것도 좋을 것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가격에 팔기로 했다. 하지만 흥정인데 그냥 그렇게 넘길 수는 없었다. “아저씨 5000에 해 줘요 대신에 내가 그 돈으로 여기 있는 물건들은 몇 가지 사야 하니까... 어떻게 생각해요?” 그 아저씨는 내가 흥정을 걸자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뭐 그렇다면 적어도 여기 물건 중에서 2000메티 정도는 사야한다. 그래야 ....” “뭐.. 알았어요. 일단 제가 사고 싶은 물건들을 일단 골라보죠.” 나는 제일 먼저 가죽으로 만들어진 부츠들을 살펴 보았다. 여러 모양의 부츠가 있었지만 역시 나는 부드럽고 또 투박해 보이지 않는 부츠를 신어 보았다. 발 크기에 딱 맞지는 않았지만 양말을 신는다면 어느정도는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양말이 있을까? 그리고 그 이외에도 물통과 작은 배낭, 모자를 샀다. 모자는 다행히도 하햔색으로 된 것이 있었는데 모양은 카우보이 모자 처럼 생겼다. 가죽상은 그 물건들을 1800메티라고 했지만 넥스가 말도 안된다며 1500으로 깍았고 나는 다시 허리띠를 하나 샀다. 물론 색에 맞는 것을 고르려고 했지만 하얀색이 없었 기 때문에 아예 검은 색으로 정했다. 처음에는 얇은 것을 선택했지만 아무래도 잘 어 울리지를 않아서 손가락 세 개 정도의 넓이를 지는 것으로 정했다. 중간에 구멍을 내고 허리에 두르게 된 것이었는데 그렇게 두르고 나니 뭔가 허전했다. 아마 다들 허리에 단검이나 롱소드 같은 것을 차고 있는데 나만 없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결국 나는 내가 산 물건값을 제외하고 3200메티를 들고 가죽상을 뒤로했다. 그 이후에는 계속해서 넥스와 쉬벡의 도움을 받으며 그 마을에 하나뿐인 잡화점에 들 러 갖가지 양념들을 샀다. 물론 무슨 양념인지는 알바 아니었지만 일단 소금을 잔뜩 사고 나머지는 되는대로 사서 배낭(을 빙자한 창고) 속에 넣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을 대장간에 들렀다. 역시 빈 몸으로 다니는 것 보다는 작은 칼이라도 하나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대장장이는 몇 가지 무기들이 놓인 곳에서 알아서 찾아보라고 하고는 여전히 망치질에 몰두했다. 나는 적당한 길이의 검을 들었지만 넥스는 “검은 처음 정할 때 신중해야한다. 검이란 처음에 손에 잘못 익히면 나중에 고치기가 어려워져... ” 하면서 이것 저것 검들을 들추고 살피더니 “그래도 여기 있는 검들 중에서는 이 녀석이 제일 좋은 녀석이다. 아주 무게 중심이 잘 맞혀져 있어서 휘두르기에 무리가 가지 않을 것 같군.” 하면서 검 하나를 꺼내 주었다. 길이는 1미터20정도 되는 길이였고 폭은 손가락 두 개 반 정도의 넓이였다. 폭이 좀 좁아서 빈약해 보이기는 했지만 나에게 그런 것은 상관이 없는 문제였다. 금 의 기운을 검에 넣는다면 절대 부러지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대장장이는 곧 그 검에 맞는 검집을 꺼내 주었고 예상외로 검 값으로 2000메티라는 거금을 불렀다. 하지만 그것도 싼 편이라는 넥스의 말에 그렇겠지 하는 마음으로 검을 허리에 채워 넣었다. 대장장이는 아무 말 없이 검값을 치루는 것이 마음에 들었던지 허리띠에 검집을 끼울 수 있는 고리를 달아 주었다. 그렇게 나는 대충 살림살이를 준비했다 싶었지만 생각해 보니 양념 말고는 요리 기구를 사지 않아서 다시 잡화점에 들러야 했다. 그리고 큰 냄비와 작은 냄비, 후라이팬, 포크, 작은 나이프 등 이것 저것 사서 배낭 안에 넣었다. 넥스는 아까부터 자꾸만 들어가는 내 배낭이 신기한 모양으로 어떻게 그 많은 것이 들어가느냐고 물어 보았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쉬벡은 짐작을 했던 모양으로 말 없이 지나갔다. 하지만 나는 그 날 쉬벡과 넥스가 자기 볼 일을 보는 동안에 몇 번이나 잡화상에 들 러서 밀가루를 사고 야채를 사고 부상자 치료를 위한 응급약도 사고 정신없이 뛰어 다녀야 했다. 그리고 저녁이 되었을 때 나는 혼자서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일단은 오늘의 요리는 수제비였다. 하하하 이곳 사람들은 그런 것을 모르겠지만 일단은 예전에 먹던 것을 먹고 싶어서 선택한 것이었다. 이곳 잡화점에는 쌀이 없었기 때문에 밥을 해 먹을 수는 없었다. 야채는 그런대로 예전 세계와 많이 달라지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 중에서 제일 기쁜 것은 고추가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음식에 넣기는 하지만 많이 쓰지는 않는 모양이고 고기를 구울 때 조금씩 넣는 향료에 글어간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고추를 잡화점에 있는 전부 다 사서 창고에 넣어 두었다. 나중에 꺼내 말려서 김치를 담아 먹을 생각이었다. 물론 배추는 없었지만 양배추와 배추의 중간 형태로 보이는 것이 있었으니 가능할 것이다. 물을 끓이고 밀가루를 반죽하고 야채를 썰어 놓고 고기(무슨 고긴지는 잘 모른다. 여 기 고기 국물 맛을 낼 만한 것이 없었다.)를 다져 넣고 끓는 물에 밀가루 반죽을 뜯 어 넣고 간을 하고 고추도 약간 썰어 넣어서 매콤한 맛을 내고.... 하하하 결국 완성. 나는 기대에 찬 모습으로 끓고 있는 냄비(이건 사실 솥이라고 해야 한다.)를 바라 보았다. “여~~! 이게 무슨 냄새인가 했더니 루탄이 음식을 하고 있었군. 그래 무슨 음식이야?” 넥스였다. 넥스는 가까이 와서는 냄비를 들여다 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대체 뭐라고 하는 음식이지? 냄새는 그럴 듯 한데... 생긴 것이 이상하군..” 넥스는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음식 이름은 아실 필요가 없고요, 이건 제가 살던 곳에서는 아주 쉽고도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최고의 요리였어요. 생긴 것은 이렇게 보여도 먹을 만 해요.” 나는 웃으며 말하고는 그릇에 옮겨 담았다. (이 국자는 잡화점에 네 번째로 들어갔을 때 산 것이었다.) 나는 조용히 수저를 들고 수제비를 먹기 시작했다. 흠... 아주 잘 만들어 졌다. 특히 호박 대신에 넣은 야채가 호박 보다 더 좋은 맛을 내고 있었다. 나는 열심히 수저를 움직이며 한 그릇을 비우고 다시 한 그릇을 떠서 수저를 꽂았다. “이봐, 루탄. 그거 나도 조금만 주면 안될까? 냄새도 그렇고 먹는 것도 아주 맛이 있어보이는데... 보기 보다는 아주 맛있어 보이고..” 옆에서 내가 먹는 것을 보고 있던 넥스가 불쑥 말을 꺼냈다. “아~! 죄송해요. 별로 드시고 싶어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서... 자 여기 드세요.” 나는 그릇을 꺼내서 조금만 담아 주었다. 혹시라도 먹다 남기면 아깝다... 넥스는 조금 주저하는 모습으로 국물을 떠서 입으로 가져 갔다. 그리고 그 뒤로 나는 아주 피곤해 졌다. “우화~~! 이거 아주 맛있는데? 햐~! 죽인다. 이거. 여기 들어간게 뭐야? 조금 매콤 하면서도 달싹한 맛도 나고... 거기다가 고기 맛도 나는데.. 전혀 노린네는 안나 고... 밀 가루로 만든 것 같은데도 물에 불은 빵하고는 전혀 다르고.. 화~ 이거 정 말 맛있다. 어귀 어귀 쩝. 쩝. 후루룩. 이거 더 먹어도 되지?” 넥스는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이 그릇을 비우더니 다시 그릇 가득히 떠가면서 물어 보았다. 흠.. 일인분으로는 좀 많아도 저렇게 되면 내가 먹을 것이 모자라게 되는데... 나는 급히 남은 것은 내 그릇으로 옮겼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렇게 소란을 떨며 수제비를 먹고 있는 넥스 때문에 다른 일행들이 몰려 든 것이었다. “뭐야? 대장. 뭘 그렇게 맛있다고 하는 거야?” “이런 솥이 비었잖아. 대체 뭔대 그래?” “루탄 혼자만 그렇게 먹지 말고 우리도 좀 만들어줘. 지금까지 우리들이 먹여 줬으니까 루탄도 한 번쯤은 음식을 대접해야 될 것 아냐?” 분위기는 순식간에 험악한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아무래도 단순한 사람들이라 먹는 것에 대해서는 민감한 모양이었다. 그래 군대에 있으면 먹는 것 가지고 뭐라 하는 것이 제일 서글프지... 먹는 것이 달 리 1종이겠냐? 쩝.. 나는 어쩔 수 없이(이건 순전히 넥스 때문이다.) 내가 산 제일 큰 냄비(이건 대형 솥 이다.)를 꺼내고 밀가루 반죽을 다시 하고 물을 끓이고 한바탕 수선을 피워야 했다. 그래도 내가 다시 요리를 시작하니까 말들이 없어졌다. 그저 꿈뻑꿈뻑 눈만 굴리면서 나를 보고 있었다. 다 큰 어른들이 그것도 덩치는 산만해서 그렇게 기다리는 것도 보기에 좀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대형 솥에서 수제비는 끓었고 먹성 좋은 사람들은 한 그릇 밖에 안 된다는 것을 아쉬워하며 빈 그릇을 긁고 있는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 나는 그 밤이 깊어 가도록 수제비를 끓여 대었고 네 번이나 끓이고 나서야 자리에 퍼질러 앉을 수 있었다. “허허 정말 처음 먹어보는 요리였습니다. 대단하군요. 이런 방법의 요리가 있다니... 참 신선한 맛이었습니다.” 주책이지 쉬벡, 그 나이에 네 그릇을 꿈쩍하지 않고 비워놓고는 허허라니... 나는 허탈하고 피곤한 마음에 앞에 널부러진 그릇들을 바라 보았다. 저걸 언제 다 씼나... 귀찮아.. “수아 소환.” 나는 수아를 소환했다. “수아 저 그릇들 깨끗하게 씻어줘.” 몸 속에서 기운이 빠지는 것이 차라리 피곤한 몸으로 움직이는 것 보다는 낫다는 생각에 나는 수아에게 설거지를 시켰다. 하하하 이런 면에서 보면 정령은 참 편하기도 하다. 하하 “루탄님, 정령에게 저런 일을 시키시다니... 허허” 쉬벡은 내가 정령에게 설거지를 시키는 것을 보면서 허허 거렸다. “그런데 루탄님은 이제 어디로 가실 건지요? 달리 계획이라도 있으신지...” “쉬벡, 저에게 말 높이실 필요 없어요. 전 귀족이 아니거든요. 그리고 전 특별한 계 획은 없어요. 당분간은 여행을 하면서 이 세계를 둘러 보고 나중에는 ..... 아무튼 지금으로서는 계획이 없어요. 그냥 여행이죠.” 나는 사실 별로 무엇을 해야 할까 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저희들을 도와주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사실 이번 일이 끝나 고 나면 저와 넥스는 다른 일을 해 볼 생각입니다. 넥스도 저도 나름대로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힘을 모으기로 했거든요.” “목표라구요? 쉬벡은 무슨 목표가 있으신데요?” 쉬벡에게 물었다. “넥스의 목표는 나중에 넥스에게 듣도록 하시고, 일단 제 목표는 4대 불모지대를 탐험하는 것입니다.” “4대 불모지대라니요?” “허허 그럼 자세히 말씀드리지요.” 쉬벡은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4대 불모대지란 아직 인간의 손이 미치지 못한 땅들을 일컬어서 부르는 말입니다. 물론 루탄님을 만난 그 계곡 너머도 인간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기는 합니다만 그 곳에서는 인간들을 위협하는 요소가 없기 때문에 그다지 알려지지도 않았고 사람 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땅이지요. 하지만 4대 불모지대는 인간들의 터전과 단절되어 있 지 않으면서도 인간들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는 곳입니다. 각각 북의 흑색지대, 남의 녹색지대, 동의 청색지대, 서의 적색지대로 불리는 그 장소들은 수많은 괴물들과 함 정들과 자연적인 영향으로 인간의 출입을 막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곳으로부터 수 많 은 괴물들이 쏟아져 나와 인간들의 터전을 위협하고 있지요. 때문에 이 인간들의 대 지는 역사가 시작 된 이래로 점점 좁아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4대 불모 지대를 탐험하는 것을 저의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우화~! 그런 곳이 있어요? 그런데 그 곳은 무엇 때문에 들어가려고 하시는 건데요? 그냥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신거예요?” 나는 쉬벡이 그 곳을 들어 가려는 이유가 궁금했다. “일단은 확신하지 못하지만 그 속에는 인간들을 위협하는 요소를 제거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지요. 어느쪽이든 한 쪽이라도 해결 할 수 있다면 인간들은 좀 더 안전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하고요...” “그래서 제가 읽은 역사에서 오직 하나의 나라만 있는 것이로군요. 그다지 넓지 않 은 탓에... 뭐 몇몇의 자치구가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 그러고 보니 그 자치구들 전부 그 불모지와 연관이 있어 보이네요.” “허허, 총명하시군요. 네.. 자치구들은 주로 사냥꾼, 헌터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모 여든 곳이지요. 일단은 괴물들을 막는 요충지에 위치해 있고 또한 오직 힘의 지배만 을 숭상하는 사람들의 땅이지요. 우리 일행도 그 곳의 사람들이고 말입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제에게 도와 달라고 하시는 것은 그 뭐냐, 4대 불모지대를 들어 가는데 같이 가자고 하시는 건가요?” 나는 쉬벡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루탄님. 제가 보기에 루탄님은 그 불모지대에서도 충분히 견디실 수 있을 정도로 강한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저희들의 안전을 맡길 수도 있을 정도로....” 쉬벡은 그렇게 말하며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나에게 ‘이제 털어놔라. 넌 이미 들킨거야’라고 말하는 듯 .... 쩝... “글세 저도 잘 모르겠네요. 제가 강한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쉽게 죽지는 않 을 것 같기는 하네요. 하지만 제가 그렇게 위험한 곳을 일부러 찾아 들어갈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죽을지도 모르는데...” 쉬벡은 얼굴에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말했다.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루탄님같은 분은 평범한 사람들 속에서 평범하게 지내시는 것은 심심하게 생각하실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기에는 너무 특 별한 분이 아니신가하고 생각했지요. 심심하기 보다는 차라리 위험해도 재미있는 일을 찾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쉬벡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아마도 자신의 말이 틀림없으리라 짐작하는 얼굴이었다. 허긴 생각해 보면 앞으로 얼마나 오래 살 수 있을지 모르는데..(실제로 난 내 수명 이 무지하게 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왜냐면 앞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내 몸을 새로 재구성했기 때문에 언젠가 다시 기회가 되면 그렇게 내 몸을 재구성하게 될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심심할 것 같기도 했다. 뭐 예쁜 여자 만나서 오순도순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지만... 그러다 그 여자가 죽어 버리면 슬플 것 같다. 그러니 그런 것도 별로 하고 싶지 않다. 어쩔 수 없이 좋아하게 되면 몰라도... “뭐 그 말씀도 맞는 것 같기는 하네요. 하지만... 재미만 있다면... 그런 것 말고 뭐 저에게 득이 되는 뭔가는 없나요?” 나는 웃으면서 장난스레 물었다. “허허 왜 없겠습니까. 성공만 한다면 역사에 이름이 남게 되고 영예로운 사람이 되 겠지요. 그리고 그 안에서 어떤 보물을 얻게 될런지도 모르고... 허허” “결국은 남는 것은 없다는 말이군요. 쩝... 생각해 보지요. 4대 불모지대라...” “그렇게 하십시오. 그리고 좋은 대답 주셨으면 합니다. 루탄님.” 나는 그 사이에 깨끗해진 도구들을 다시 배낭 안에 넣었다. 그리고 아차 하는 생각을 했다. 이런 침낭이나 그런 것도 사야 하는데.. 그런데 지금 나에게 남은 돈이 별로 없었다. 1200메티가 남았었지만 지금은 100메티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흠.... 역시 낭비가 심했나... 나는 내일 다시 가죽 하나를 더 팔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뱀가죽을 꺼내 덮었다. 마을 회관 안이었지만 밤에는 꽤나 쌀쌀한 날씨가 되어 버렸다. 계곡 너머의 숲과는 달리 이쪽의 날씨는 가을날씨를 생각나게 했다. 뭐 조금만 화기를 끌어 올리면 되는 문제였지만 언제나 운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 었기 때문에 잠에서 깨어나면 오싹한 느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다음날 일찍 나는 가죽상에서 작은 뱀가죽 하나를 3000메티에 팔고 두툼한 침낭을 하나 샀다. 그리고 우리 일행은 서둘러 출발을 했다. 원래는 마을에서 헤어지기로 했던 것이었지만 쉬벡의 부탁이 있었고 넥스의 이야기 도 들어봐야 할 것 같았고, 또 나도 도시를 구경하고 싶은 생각에 동행을 부탁했던 것이었다. 걸어가는 것이 힘든 것은 아니지만 혼자 다니는 것은 심심했다. 넥스의 일행들은 이 대륙의 동쪽 영주에게 부탁을 받고 산록늑대의 퇴치를 맡은 것이 라고 했다. (이 대륙의 왕가는 중앙을 직접 통치하며 대륙을 나누어서 동,서,남,북에 각각 영주를 두고 다스리도록 하고 있었다. 그리고 각각의 영주들은 여러 마을과 도 시를 거느리고 있었고 한 영지에 두 서 너 개의 도시와 백여개의 마을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일단 가장 가까운 도시에 가서 파견 관리에게 영주로부터 받은 산록 늑대의 퇴치 의뢰서를 보이고 그 일이 끝났다는 증거를 제출하고는 대가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사실 영주의 의뢰란 영주가 직접 하는 경우는 별로 없고 그 대리인인 도시의 관리들이 알아서 처리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 대륙에는 세 계급이 존재하는데 일반인과 귀족 그리고 왕족이었다. 신기한 것은 왕족이라는 것은 왕으로부터 4촌까지만 왕족에 해당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왕족이지만 그 아들이 왕이 되면 선왕의 4촌들은 왕족의 지위를 잃고 귀족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왕의 8촌까지만 허용되고 나머지는 일반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왕족과 귀족은 그 지위에 해당하는 권리로 적당한 영지를 지니지만 일반인에게 특별 한 권한을 행사하지는 못한다고 한다.(물론 법적으로는 ㅡ.ㅡ;;) 그리고 귀족 중에는 왕과 상관없이 귀족이 된 사람들이 있는데 대부분은 나라를 위해서 큰 공을 세운 사람들이 이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많지 않고 또 세습되지만 직계만이 세습권과 귀족의 칭호를 가진다고 한다. 현재 이 나라에는 그런 귀족이 열 개의 가문 뿐이라는데, 4대 영주와 4대 자치령주 (자치령주는 세습이지만 직계가 아니라 선출이었다.) 왕궁의 군부를 장악한 기사단장 선드라스 가문, 그리고 특이하게도 학술협회를 장악한 헤이스런 가문이 바로 그들이라고 한다. 뭐 일단은 이 나라에서 그렇게 엄격한 계급제를 지키다 보니 귀족의 수가 자연스럽 게 규제 되었고 또 귀족에서 일반인이 되면 그 혜택을 전부 반납하게 되므로 귀족이 라는 이유로 그렇게 차별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도 별로 없어서 귀족에 대한 인식이 좋은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그런 와중에서 쉬벡이 나에게 귀족이냐고 물어본 이유는 한타라는 왕족의 성과 한국이라는 성이 비슷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쩝... 우리 일행은 그 후로 점점 커지는 마을들을 거치면서 동부 영지의 세 도시 중 하나 인 바리크 시에 도착했다. 일행들은 일단 두 개의 여관이 붙은 곳에 자리를 잡고 두 여관에 나뉘어서 투숙했다. 하지만 한 여관은 전적으로 숙박을 위한 곳이었고 다른 한 여관에서 식사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식사를 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나와 쉬벡 그리고 넥스는 식사가 되는 여관에 방을 잡았다. 넥스는 바리크에서 의뢰에 대한 대금을 신청하고 지급받고 하는 데에 3일은 걸일 것 이라고 했고 나는 그 동안에 또 필요한 물품들을 챙기기로 했다. 내가 먼저 한 일은 번화가에 있는 가죽상을 찾아 가는 일이었다. 도시라 그런지 가죽상이 있는 시장은 활기가 있었고 가죽상점의 사람도 내 뱀가죽을 가지고 가격으로 장난을 치려는 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 가죽이 아주 희귀한 종류의 것이며 5000메티에 팔았던 정도의 것이면 7000메티는 받을 수 있는 것이라 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원료로 옷을 만든 경우에는 그 가격이 몇 배가 될 수도 있다고 했다. 나는 그 상인에게 내가 가진 가죽중에서 다섯 개를 팔았고 그 값으로 4만메티를 받았다. 그 후에 나는 근처 옷 가게를 들렀다. 그리고 뱀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줄 것을 주문했다. 가게 주인여자는 그 가죽을 보더니 “이런 가죽으로 옷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저의 영광입니다. 그래 어떤 옷을 원하시는지요?” 이렇게 물어왔다. 나는 그 여자에게 청바지모양을 설명하고 또 반팔 티와 조끼, 잠바, 팬티, 양말등을 설명하고 그림도 그려주면서 만드는 것이 가능한지를 물었다. “이 가죽의 신축성으로 가능할 것 같네요. 그런데 이건 아주 재미있네요. 호호” 그 여자는 팬티를 설명한 그림을 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 여자에게 양말 10개 팬티 5개 그리고 나머지는 각각 3벌씩 만들어 줄 것을 부탁하고 뱀 가죽을 내어 보였다. 그 여자는 그 가죽들을 보고는 “이 정도면 되겠어요. 그런데 망토는 안 하실 건가요? 그리고 이왕이면 모자와 부츠도 하시지요. 어차피 한 벌로 입고 다니면 더 나을텐데...” 라고 조언을 했다. 결국 나는 그 여자가 권하는 대로 부탁을 하고 대금을 지급했다. “될 수 있으면 이틀 내로 됐으면 합니다만...” 나는 마지막으로 그렇게 말했다. “어머, 너무 급한 시간인데... 알았습니다. 제가 잠을 줄여서라도 완성해 드리지요. 그리고 묵고 계시는 여관이..... 아~! 그 쌍둥이 여관이요? 알았습니다.” 그렇게 나는 내 옷을 부탁하고는 시장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일단은 이곳은 물건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창고를 채워두자는 생각이었다. 문제는 야채 같은 것이 창고에서 변해 버린다는 것이었다. 다른 공간 속에 있기 때문에 상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 창고에도 시간을 흘러 가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일단은 변하지 않을 것을 준비하기로 했다. 주로 마른 것들과 술(나는 여러 가지 술들을 되는 대로 사서 창고에 넣어두었다.)과 고추(고추는 시장에 있는 것을 거의 다 사서 넣었다. 마른 고추는 없었지만 상관없었 다. 계획이 있으니까...)를 사고 요리 기구도 좀 다양하게 구비하고 그 이외에 밧줄 이나 갈고리 같은 도구들도 필요 할 것 같은 것은 마음껏 사서 배낭 속에 넣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돈도 배낭(창고)에 넣어 버렸다. 그 후로는 별로 할 일이 없어서 여관으로 돌아와서 시장에서 산 고추들을 햇빛에 널 어 말리기 시작했다. 가을 같은 빛이었지만 이틀이 지났을 때 고추는 어느 정도 말라 있었고 나는 급한 마음에 고추들을 곱게 가루로 만들었다.(가루로 만드는 것은 지토 에게 부탁했다. 그냥 아주 고운 가루로 만들어 달라고 하자 지토는 두 손 사이에 넣어 비벼서는 가루로 만들었다. 허긴 돌도 그 사이에서는 가루가 될텐데... 거기다가 지루해하지도 않으니...) 결국 고춧가루를 잔뜩 마련한 나는 3일째 되는 날 시장에서 잡종배추(양배추과 배추 의 중간형)를 사 가지고 와서는 소금에 절이고 고춧가루와 설탕, 과일 등으로 만든 속을 마련해서는 김치를 담았다 처음이라 많이 담지는 않고 조금만 담아서 창고에 넣었다.(맛이 들려면 이틀은 걸릴 것이다.) 흐뭇 3일 후, 넥스는 도시 관리로부터 의뢰대금을 받아 왔고, 일행들은 그 대금을 나누어 가졌다. 나에게도 나누어 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별로 욕심이 나지 않았으므로 됐다는 말로 사양했다. 그리고 옷도 아침에 도착했다. 결국 밤잠을 줄이면서 작업을 했던 모양인지 그 여주인의 얼굴이 많이 헬쓱해져 있었다. 만들어 온 옷은 정말 마음에 들었다. 내가 원하던 모양을 아주 잘 맞추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내가 옷을 만들 때에는 신경을 쓰지 못했던 가죽의 무늬(잘은 안보여도 결 이 있어서 빛을 받으면 다르게 보인다.)까지 살려서 만들어져 있었다. 나는 그 아주머니에게 뱀가죽 한 장을 선물했다. 여주인은 너무 고맙다며 언젠가 그 가죽으로 만든 옷을 왕궁에서 열리는 무도회에 춤추는 숙녀가 입게 될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그거야 어떻든지... 쩝... 이제 창고에는 뱀 가죽도 별로 남지 않았다. 다섯장 정도 있는 것 같다. 뭐 가장 큰 것은 빼고... 그리고 그렇게 보수를 받은 사람들은 제각기 따로 헤어졌다. 원래 이 일을 위해서 모인 사람들이라 다른 일을 찾아 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와 넥스 쉬벡은 그 여관에서 다시 하루를 머물기로 했다. 넥스가 나에게 할 말이 있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무슨 말인지는 짐작하고 있었지만.. 우리들은 3인용 방을 택해서 처음으로 잠자리(?)를 같이 했다. 저녁무렵 우리들은 식당 겸 바의 한 구석진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나는 루탄 네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다만 지금까지의 모습으로 악인은 아니라 는 생각을 하고 있고 또, 네가 정령들을 다루는 것이나 여러 물건들을 넣는 배낭이나 그런 것을 보면서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쉬벡이 루탄 너를 동 행하자고 했을 때 많이 망설였다. 동료란 서로의 목숨을 맡기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목숨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이기도 하고... 그래서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데... 나는 너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너는 너에 대해서 말하기를 꺼려 하는 것 같았고... 그래서 물어 볼 수도 또 너를 동료로 선선히 받아들일 수도 없는 그 런 상황에 있었다. 하지만 나는 결국 네가 우리의 동료로 들어오겠다면 환영하자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왠지 루탄 네 녀석이 마음에 든다.” 넥스는 이렇게 긴 이야기의 끝을 맺었다. “나는 루탄님께 다시 한 번 우리의 여정에 동행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쉬벡은 간단하게 말을 맺었따. 그리고 나와 쉬벡, 넥스는 술잔(난 맥주, 쉬벡은 포도주, 넥스는 모르겠다....)을 앞에 놓고 침묵했다. 잠시의 침묵뒤에 나는 말을 꺼냈다. “뭐 일단은 믿으실지 아닐지 모르지만 저는 과거로부터 온 사람입니다. 여기에 대 해 자세히는 묻지 마세요. 언젠가 말 할 때가 있겠지요. 그리고 저는 다섯 정령을 다 룰 수 있으며 다른 사람보다 튼튼한 몸을 지니고 있지요. 궁금하셨던 물건들을 많이 넣는 배낭은 실제로 배낭에 비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이공간을 창고처럼 쓰면 서 물건들을 넣고 뺄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능력은 누군가 저에게 준 선물이 기 때문에 원리를 설명할 수는 없어요. 아무튼 엄청 편한 것은 사실입니다. 때문에 저는 이 세계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물론 아는 사람도 없고요, 그래서 처 음 만난 넥스나 쉬벡과 당분간이라도 함께 있는 것이 싫지는 않습니다. 자세히 설명을 해 주신다면 저도 동행이 되겠습니다.” 나는 좀 장황한 이야기를 느릿느릿 이야기 했다. 넥스는 담담한 모습으로 쉬벡을 웃음을 지으며 일행이 된 것을 축하하는 건배를 들었다. 그리고 넥스의 말이 이어졌다. “일단 쉬벡은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니까 이젠 내 이야기를 하지. 나는 북영주의 손 자다.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차남이었거든. 그래서 난 귀족이 되지 못했지... 뭐 그 게 문제라면 문제고... 난 이 나라에 귀족이 되고 싶다. 돈이나 권력을 위한 것은 아 니고 그냥 남자라면 누구나 가져보는 꿈과 같은 것이지... 그리고 또 사람들에게 이 롭고 싶다는 생각도 있고... 그래서 4대 불모지대를 탐험하고 그 사정을 여러 사람에게 알리는 일을 하고 싶은 것이다. 아직까지 4대 불모지의 3일거리 안쪽에까지 가서 살 아온 사람이 없었다. 나는 그 중심을 보고 싶다. 얼마나 걸릴런지는 모르지만... 그리 고 그 정도면 영웅도 될 수 있지 않을까? 하하하 난 그게 목표다.” 음... 간단하군. 영웅이 되고 싶다. 그것도 희망만을 품지 않고 실천하려는 사람이라... 재미있는 여행이 되겠군... 하하 “음... 좋아요. 저도 동행하죠.. 재미있을 것 같군요. 대신에 그 일이 마무리 되게 되면 내 일을 도와줘요. 내 일은 모든 일이 마무리 되면 알려 드리죠.” 하하 나중에 정령계와 신계를 간다면 뭐라고 할까... 쩝.. “할 일이 있다는 말인가? 계획이 없다면서?” 넥스가 물었다. “어차피 기한이 정해진 것도 아니고 방법을 아는 것도 아니니 지금은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일이에요. 언젠가 운명이 다가오겠죠.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 했으니...”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루탄님 우리들은 이제부터 동의 청색지대로 갈 생각입니다. 그 전에 동쪽 자치령 을 지나가야 하겠지만 우선은 동쪽의 불모지대를 먼저 가 보기로 했습니다. 그나마 안쪽으로 3일 정도의 거리까지는 알려진 바가 있어서 다른 지대 보다는 좀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입니다.” 나는 쉬벡의 설명에 간단히 대답했다. “뭐 상관없어요. 전 어차피 모르는 곳이니까요. 하하 ” 그리고 우리는 이것 저것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것이었는데 넥스는 내 창고 때문에 짐을 들고 갈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굉장히 기뻐하는 것 같았다. 쩝.... 이건 공용 창고가 아니라고요. “그러다가 우리가 헤어지면 다들 굶겠군요. 난 안 굶을 텐데...” 내가 이렇게 말하고 나서야 최소한의 짐은 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다음 날 우리들은 동쪽 자치령을 향해 떠났다. 여전히 남아있는 마차는 나와 쉬벡의 몫이었고 넥스는 말을 타고 나란히 달렸다. 그렇게 급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천천히 가도 될 것 같았지만 왠지 서두르는 것 같아 물어 보았더니 이제 곧 겨울이란다. 아무래도 탐험을 하기에 적당하지 않은 계절이라고 될 수 있으면 일찍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쩝.. 그럼 다음 봄에 가면 될 텐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쉬벡의 주름진 얼굴을 보곤 시간이 무한정한 것이 아님을 느꼈다. 하하하 나는 어떨까 몰라. 미래는 모르는 일이었다. 쩝... 그리고 그 여행에서 나는 또 한 가지 일을 내가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날 저녁의 일이었다. 둘 다 식사는 당연히 내가 준비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투덜 거리면서 식사를 준비했다. 저녁은 불고기였다.(한국식 불고기. 돌판 위에 구워 먹는...) 고기를 오래 재워 둘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양념이 잘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먹을 만 하다는 생각 을 하면서 굽기가 무섭게 달려 들어서 찍어가 버리는 두(늙은이 하나와 젊은이 하나) 사람 때문에 나는 굽기만 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만약 한 번만 더 찍어 먹으면 앞으로 내가 식사를 준비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ㅡ. ㅡ^” 내가 이렇게 엄포를 놓고서야 두 철없는 어른들은 한 걸음 물러나 앉았다. 쩝.. 아무래도 마늘이 있으면 좋은데... 다음에 도시에 가면 마늘을 찾아봐야 겠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고기를 구웠다. 그리고 어느 정도 고기가 구워지자 창고에서 김치를 꺼냈다. 그리고 정말 아깝다는 듯이 아주 조금씩만 그릇에 나누어 담아서 각각 주었다. “이건 더 달라고 하지 마세요. 이거 무지 비싸게 먹히는 음식이니까...” 이렇게 거짓말 까지 하고는 보라는 듯이 고기위에 김치를 한 점 올려서 젓가락으로 집어 먹었다.(이 사람들은 젓가락을 사용하지 못한다. 그래서 포크를 쓴다.) 내 모습을 보더니 그 둘도 따라 한다. 하지만 곧 기들은 애처로운 눈으로 나를 보고 있다. “제가 그랬죠? 더 달라고 해도 못주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비싸고 만들기 어려고 또 귀한 건데....” 나는 어림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김치를 더 이상 줄 수는 없다. 아무렴. 쩝... “야 루탄 그러지 말고 조금만 더 먹자. 이거 맛있네... 조금만 아까보니까 많이 있던데... 루탄아, 응, 응? 조금만..” 넥스는 아주 사정을 한다. 하지만 나는 냉정하다. “......” 쉬벡도 그런 눈으로 쳐다보다니... 그런다고 내가 줄 것 같아요? “험. 루탄님, 루탄님이 그거 좀 더 주시면 앞으로 창고에 들어가는 음식에 보존마 법, 신선마법, 온도 유지마법 이런거 팍팍 걸어드립니다. 이 정도면 되지 않을까요? 그러니 조금만 더 먹지요.” 헐~~ 늙은이가 역이 매운 맛이 있군...쩝. 그래 그런 조건이면 들어줘야지... 하지만 넥스는 뭘 해줄까? 나는 은근한 눈으로 넥스를 돌아 보았다. 순간 넥스의 눈이 빠르게 돌아간다. 무슨 궁리를 하는 걸까? “좋아, 그럼 나는 루탄 너한테 검술 가르쳐 준다. 검술. 아무나 배우는거 아니다. 내가 가르쳐 주마.” “이봐 넥슨씨 내가 검술이 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거야? 별로 쓸모가 없을 것 같은데...” “그래도 배우면 좋은거야. 아는 것은 힘이다. 그러므로 쓸 일이 없어도 알아둬서 나쁠 것은 없다. 그러니까 가르쳐 줄게.” 허궁, 그런 눈으로 그렇게 말을 한다고... 쩝.. 하는 수 없지... 나는 다시 창고에서 김치를 꺼내며 넥스에게 물었다. “넥스 다음 마을이 어디쯤 있어?“ “음. 내일 저녁은 마을에서 잘 수 있을 거야. 주르륵--” 이봐 침 흘리지 말아 침. 나는 넥스와 쉬벡에게 김치를 나누고 다시 고기를 구웠다. 아무래도 아침에 사냥을 해야 할 것 같다. 쩝. 돼지 잡아서 삼겹살 해 먹으면 맛있는 데... 우리의 식사는 그렇게 끝이 났다. 물론 우리들의 잠자리에 불침번은 필요가 없었다. 나는 광아와 지토에게 불침번을 부탁했고 우리들은 편안한 잠자리를 가졌다. 그리고 아침 그 사이에 몇 번 동물들이 다가온 모양이지만 지토는 성실하게 불침번의 임무를 완수했다. 그리고 내가 만약을 위해 부탁해 두었던 대로 돼지를 잡아 두었다. 어휴~~ 귀여운(어국! 속이 미식거린다. 늙은 할아버지 같은 지토가 귀엽다니 내가 미친거야.) 지토. 나는 서둘러 아침을 준비했다. 물론 돼지를 잡는 일은 넥스의 몫이었다.(돼지라곤 하지만 야생의 티가 물씬 나는 놈 이다. 색도 그렇고 특히 이빨이나 다리는 더욱 그렇다.) 나는 그 옆에 붙어서 간, 허파, 심장, 그리고 내장을 챙겼다. 그리고 쉬벡에게 우선 그것들에 보존 마법을 걸어 달래서는 창고에 넣었다. 둘은 그걸 뭐하러 하는 표정이었지만 나는 다 생각이 있었다. 우리는 다시 그 돌판 앞에 모여 앉았다. 불은 이미 피워져 있었고... 우리의 삼겹살 파티가 시작되었다. 나는 우선 식용기름에 소금을 넣고(언제 깨가 있 는지 알아봐야겠다.) 약간의 고춧가루도 넣고 후추를 넣었다. 그리곤 그냥 구워지는 삽겹살을 찍어 먹는 것이다. 물론 느끼하니까 김치도 꺼내 놓았다. 오늘 밤에 도착하 는 마을에서 재료를 장만해서 김치를 담을 생각이다. 이번에는 깍두기도 담아 봐야겠 다. 그 잡종배추의 뿌리를 시험삼아 김치 안에 묻어 두었는데 그런대로 괜찮은 맛이 난다. 이 모든 것은 단지 고추의 역할이다. 빨리 마늘이랑 깨랑 그런거 찾아야 하는데... 아침 식사도 전투를 치루듯 끝이 나고 우리는 다시 길을 재촉했다. 우리의 여행은 그야말로 먹자판의 여행이 되었다. 김치는 거의 200포기는 담은 것 같다. 열 통이 넘게 나왔다. 나는 나머지는 보존 마 법을 걸고 한 통만 일정온도를 유지 하는 마법을 걸어서 창고에 넣었다.(완전히 김치독이다.) 다행히 마을에서 고추를 보충했고 또 엉뚱하게도 방충제로 쓰이는 것 중에서 마늘과 같은 것을 발견했다. 이젠 제대로 된 김치를 담을 수 있었다. 하하하 그리고 역시 고 소한 것은 누구나 좋아하는 모양이다. 내가 잡화점에서 여러 가지 향신료에 혀가 마 비되는 고통을 겪으면서 발견한 것은 깨였다. 문제는 갈아 놓은 것 밖에 없는 것이었는 데... 나중에 갈기 전의 것을 찾아서 참기름을 짜야겠다. 하하하 그렇게 완비된 우리의 여행은 틈틈이 먹는 것을 만드는 것으로 즐거움을 대신했다. 하지만 점점 자치령에 가까워지면서 나타나는 괴물들이 위험해지기 시작했다. 식물들도 독성을 지닌 것들이 많아졌고, 동물들은 곤충에서 냉혈동물 포유류까지 엄 청나게 몸집이 커지고 사나워지고 있었다. 물론 처음보는 놈들도 많았다. 한번은 맛있는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는데(이 때 나는 드디어 비장의 순대를 만들고 있었다. 순대 속을 대부분 고기와 아채로 채웠다는 점이 다르기는 했지만....거기다 가 피는 사슴피를 사용했다. 하하하) 난데없이 나무를 부러뜨리며 다가온 괴물은 정말 아찔했다. 일단은 크기가 5미터 정도는 되었고 두 발로 걷고 있는데다가 머리 중앙에 한 개의 뿔이 나 있는 두쌍 송곳니의 멋진 미남. 그런데 어디서 저런 몽둥이를 만들었냐고... 저건 나무를 통째로 들고 있는 거잖아... 쿠워워워~~ 쿵. 쿵. 왜 저 발자국 소리가 지금까지 안 들렸을까... 성큼 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오는 녀석을 나는 빤히 보고 있었다. 저걸 죽이러 가야 하나 아니면 넥슨이나 쉬벡에게 맡기나..... 하지만 나는 요리가 더 급했다. “넥스 뭐해, 밥 안 먹고 싶어?”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넥스는 단숨에 녀석에게 달려가서 실랑이를 벌였다. 큰 키 때문인지 조금은 둔해 보이는 움직임을 이용한 넥스는 순식간에 녀석이 휘두르는 몽둥이속으로 뛰어들어 팔둑을 베었다. 하지만 팔에 상처를 주기는 했지만 잘라 내지는 못했고, 녀서의 뒤로 돌아가 다시 허 리 부분에 상처를 입혔지만 워낙 체구가 커서 그런지 상처에 화만 더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일단은 녀석을 맡아 주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요리에 전념하기로 했다. 그건 쉬벡 역시 넥스쪽에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걱정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우라차차차!!” “쿠워워~!” 둘의 싸움을 격렬한 모양이지만 상처를 입고 있는 것은 그 괴물이었다. 그리고 내가 거의 준비를 마쳤을 때, 나는 넥스에게 한 마디를 던졌다. “넥스, 우리 먼저 먹어도 되지?” 순간 넥스의 눈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았다. “이얏-!!” 순간 넥스의 검에 검기가 맺혔다. 호~~ 검기라... 저런걸 쓸 수 있군. 재미있네.. 그 뒤는 볼 것도 없었다. 넥스의 검은 괴물의 방망이와 손목과 가슴을 한꺼번에 그어버렸고 괴물을 뒤로 넘어 갔다. “지토 소환” “저놈 땅 속에 묻어 버려. 보기 싫잖아.” 그렇게 주위는 정리가 되었고 우리는 식사를 위해 둘러 앉았다. 쩝.. 뭐 둘의 표정이 어떤 모습이었을지는 상상해 보기 바란다. 시커멓게 생긴 뭔가를 연상시키는 것이 솥 안에 들어 있었으니... 하지만 나는 신경쓰지 않고 깨소금을 만들어 각자에게 분배하고 순대를 썰기 시작했다. 그리고 잘 썰어진 순대를 각자의 앞에 분배하고 먹기 시작했다. “뭐, 언제나 모습은 이상해도 맛은 보장했잖아요. 신경 쓰지 말고 먹어봐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식사에 열중했다. 간간히 허파와 간, 심장을 썰어 먹으면서...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각자의 앞에 있는 순대를 소금에 찍어 먹은 사람들의 뒷 이야기는 하지 말자. 불괘한 생김새라는 표정으로도 입에서는 맛있다는 그런 표정을 함께 지을 수 있다니... 쩝......... 그렇게 여행은 계속되었고 결국 우리들은 동쪽 자치령에 도착했다. “저기가 동쪽 자치령이야.” 넥스가 언덕에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을 때 내 눈에 보인 것은 엄청나게 길게 늘어선 성벽이었다. 쉽게 말해 자치령이라는 곳은 만리장성 같은 성벽 안쪽으로 성벽을 따라 이어진 마을이었다. 그리고 그 성벽 중에서 커다란 문이 달려 있어서 안쪽으로 들어 갈 수 있는 곳이 있 었는데... 그 곳을 외곽에 또 다른 벽을 쌓아서 그 문이 열려도 상대편이 한꺼번에 밀어 닥치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고 있었다. “저기 저 성이 자치령주가 있는 성이야. 일명 쥐덧이라고 부르지.” 넥스는 이중 성벽으로 둘러 진 곳에 있는 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성벽으로 다가갈수록 위압감은 강하게 다가왔다. 성벽의 높이는 거의 50미터는 넘어 보였고 쥐덧이라 불리는 성은 거대한 성문을 가 로 막은 이중의 성벽 안쪽에 세워진 거주지를 부르는 말이었다. 그 곳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안쪽 성벽(내벽이라 불렀다.)에 만들어진 작은문(이건 작 은게 아니지만 안쪽에 있는 문에 비해 작다는 뜻이다.) 앞에서 검문을 받아야 했다. 그렇지만 검문이 심하지는 않았다. “여긴 누구나 들어갈 수 있어. 괴물만 아니라면 말이야.” 넥스는 다시 설명을 덧붙였다. 성 안쪽은 생각보다 정돈된 모양이었다. 집들은 성벽을 등지고 가지런히 붙어 있었고, 길거리에는 사람들이 넘치고 있었지만 모두들 중무장을 한 모습들이었다. 어쩌다가 넥스보다 더 덩치가 큰 사람들도 오가고 있었다. 넥스의 키가 2미터정도 되는데... 우리는 우선 성안에 유일한 여관으로 갔다. 성 안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고 했다. 거기다가 이 자치령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든 빈 집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까닭에 여관을 별로 이용하지 않 는다고 한다. 그저 술을 마시려는 사람들이 여관을 자주 이용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자치령에 오래 머물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일단, 여관에 방을 잡았다. 여관은 그리 크지 않았고 여관 주인은 예상외로 여자였다. 그 여주인이 넥스를 반겼다. “이봐, 오랜만이야 넥스. 산록늑대 사냥을 간다더니 벌써 일이 끝난 모양이군. 그래 많이 벌었나?” 삼십대를 조금 넘어 보이는 여자의 덩치는 넥스에 조금 못미치는 정도 였지만 다부진 몸매라는 느낌이 들었다. “어, 유소. 그동안 잘 있었어? 하하 그럭 저럭 손해는 안 보고 왔지. 그리고 여기 새로운 동료가 있어. 이봐 루탄 인사해. 이 여관의 주인 유소야. 유소 이쪽은 루탄.” 여주인은 그 때에야 뒤에 있는 쉬벡과 나를 바를 보았다. “안녕하세요, 쉬벡. 그리고 루탄이라고? 반갑군요. 이렇게 젊은 사람은 오랜만이네... 호호” 젊은 사람이라... 어쩌면 어린 사람이라고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쩝.. “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쉬벡이 간단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간단하게 인사를 받았다. “일단 방 좀 준비해 주고, 3인용. 그리고 음식 좀 줘...” 쉬벡이 주문을 하고 우리들은 구석진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날이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는 시간이라 사람이 많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쉬벡, 이상하게 사람들이 많지 않네요?” 나는 옆자리의 쉬벡에게 말을 걸었다. “그건 지금부터가 괴물들이 많이 들이 닥치는 시간이어서 그런거야. 야행성은 아니 지만 해가 질 때 쯤이 가장 습격이 많아. 뭐 그렇다고 특별한 것은 아니지만 일단 성 벽 이쪽과 저 쪽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괴물들의 분포가 다르니까 말이야.” 쉬벡 대신 넥스가 말을 받았다. “그렇지요. 루탄님도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성벽위에 한 번 올라가 보시는 것도 좋을 겁니다. 이제 곧 녀석들과 맡붙을려면 참고도 될거고 말입니다.” 넥스의 말을 이어서 쉬벡이 덧붙이는 말이었다. 그래서 결국 푹 쉬는 것은 조금 미루고 식사를 마치고는 곧장 성벽 위로 올라 가기로 했다. 성벽에 올라 가는 것도 그다지 검문같은 것은 없었다. 다만 커다란 성문 위로 올라 가는 것 만은 허락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어쩌면 그 성문에 좋지 못한 짓을 할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큰 문에 무슨 짓을 할 수 있단 말일까? 쩝.. 우리들이 셩벽 위에 올라 갔을 때에는 등 뒤에서 해가 지고 있었다. 성벽의 그림자 는 길게 어둠을 뿌리며 성벽너머 동쪽 불모지대를 달려 나가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어둠이 내리는 자리마다 보이지 않던 움직임들이 생겨나며 순식간에 괴물들로 성벽 너머가 가득 찼다. 성벽 위의 사람들은 그 모습을 대수롭지 않게 바라보고 있었지만 나로서는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눈에 보이는 이 쪽부터 저 쪽 끝까지 이어진 성벽은 그 길이를 가늠할 수 없는데 그 벽 너머가 온통 괴물들로 가득 차는 것이었다. 어쩌면 발디딜 틈도 없다는 말이 맞을 정도 였다. 두 발로 걷는 유사인간(무조건 손 발이 있고 두 발로 걸으면 그렇게 부르기로 하 자... 너무 종류가 많다.)들의 평균 신장은 아마도 2.5미터 정도 되는 것 같다. 거기 다가 네 발로 달리는 녀석들과 여섯 혹은 여덟 혹은 무수한 발을 가지거나 발이 없는 녀석들 까지... 종류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괴물들이 성벽 너머에서 밀려 들었다. 하지만 그 수가 많다고 성벽을 밀어서 무너뜨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성 벽 위의 사람들은 그렇게 다가오는 녀석들을 별로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다만 가끔씩 날아드는 녀석들(익룡같이 생긴 녀석에서 박쥐같은 녀석, 때로는 날개달 린 개나 뱀, 여하튼 새 종류도 몇 있는 것 같았지만 내가 보기에는 포유류나 파충류 에 날개가 달린 녀석이 더 많은 것 같았다.)만 적절하게 상대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래서 그런지 대부분 활이나 창, 혹은 쇠사슬 같은 리치가 긴 무기들을 선호하는 모습 이었다. 그렇게 싸움은 시작되었고 사람들은 성벽 위에 견고한 벽 뒤에서 날아드는 녀석들을 상대했다. 아무리 하늘을 나는 녀석들이라고 해도 이미 그런 싸움에 능숙한 사람들은 날아들어 부리나 발톱을 세우는 순간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고, 때로는 정지 비행을 하는 녀석들도 가장 먼저 처리해서 위험을 줄이고 있었다. 나는 넥스와 함께 그 모습을 보고 있었고 간간히 날아드는 녀석들은 쉬벡의 마법에 불덩이가 되거나 전기 구이가 되어서 떨어졌다. 그리고 그 사이를 비집는 녀석들은 넥스가 알아서 미리 준비한 창으로 요절을 내고 있었다. 나는 성 벽 밑을 바라 보았다. 땅위에 발을 붙인 괴물들은 성벽 아래에서 기를 쓰고 있었지만 성벽을 기어 올라 올 수 있는 녀석은 별로 없어보였다. 간간히 성벽을 찍고 얼마쯤 올라오던 녀석들도 주 르륵 미끌어져서 아래에 있던 녀석들 위로 떨어져서는 저히들 끼리 싸움을 벌이곤 했다. “아무리 지능이 모자라는 녀석들이라고 해도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을 이렇게 무모한 싸움을 하고 있다니 저것들은 바보로군요.” 나는 그저 지나가는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쉬벡은 당치 않은 소리 하지도 말라는 듯이 말했다. “루탄님, 그런 말씀 마십시오. 가끔 녀석들 중에서 머리가 좋은 녀석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인간 이상의 지능을 가진 녀석들이 나타나는 것이죠. 그럴 때에는 엄청난 희 생을 해야 합니다. 그게 한 삼 년 전쯤 되는군요. 그 때 괴물들 속에 어쩌다가 변종 이 나타났습니다. 사자의 몸에 인간의 머리, 독수리의 날개를 지닌 녀석이었죠. 그 녀석이 괴물들을 규합해서 싸움을 지휘했을 때, 이 동쪽 자치령의 사람들 반 이상이 죽 었습니다. 어쩌면 이 성벽을 지키지 못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지요. 그 때 그 괴물 을 죽이고 성벽을 지켜 낸 인물이 지금의 동쪽 자치령주입니다만.” 그리고 쉬벡은 이렇게 말을 이었다. “만약에 저 괴물들이 학습 능력이 있었다면 아무리 이 곳 사람들이 싸움에 능하고 용감하다고 해도 저 괴물들을 막을 수는 없을 겁니다. 일단 수적으로 상대가 되지를 않으니까요. 아마 다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야 할 겁니다.” 나는 쉬벡을 말을 들으면선 어쩌면 내가 한 말을 다른 사람들이 들었으면 맞아 죽었 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식은땀이 좌르르 흘렀다. 쩝... 내가 알고 그랬나 뭐.. 그나저나 저 많은 녀석들을 뚫고 어떻게 불모지대 안을 탐험한다는 건지.... 아무리 나라고 해도 저렇게 몰려 드는 녀석들을 상대하면서 앞으로 나가자면 엄청 피 곤할거고 가끔 밀리기라도 한다면 쩝... 아무래도 자신이 없는데...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 해는 서쪽 언덕 너머로 사라져 버렸고 그 순간 성벽을 향해 죽자고 달려들던 괴물들의 기세도 수그러 들었다. “어? 이상하네요. 왜 갑자기 저렇게 공격을 멈추는 거죠?” 나는 이상한 생각에 물었다. “글세, 그건 아직 아무도 모르는 일이야. 이상하게도 괴물들은 해가 질 무렵에만 성 을 향해서 달려들거든, 그리고 해가 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발길을 돌리지. 뭐 그렇 다고 밤에는 전혀 공격이 없다는 말은 아니고 그저 평범한 정도라는 것이지.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어쩌면 이번 여행에서 쉬벡이 알아 내고 싶은 많은 것들 중에 하나는 바로 그런 것일거야.” 넥스는 내 말에 이렇게 답을 했다. 그리고 쉬벡도 그 말에 동조한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리는 괴물들의 공격이 뜸해지자 성벽 아래로 내려갔다. 쥐덫 여관에 들어온 우리들은 다시 테이블을 마주하고 간단한 술을 시켰다. 언제나처럼 쉬벡은 와인, 나는 맥주, 넥스는 뭔지 모를 술... “그런데.. 저기 어떻게 가죠? 아까같은 분위기라면... 아무리 기를쓰고 간다고 해도 밟히는 것이 괴물이라면 앞으로 나가기가 쉽지 않겠는데요...” 나는 조금 걱정이 되어서 물었다. “그건 그렇게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루탄님. 아까 말씀드린 데로 일단 괴 물들이 그렇게 설치는 시간은 해가 질 무렵에만 그렇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그 때도 주로 성벽이 공격 목표가 되기 때문에 아침에 일찍 성 벽을 넘어서 하루 동안 성벽에서 멀어지면 그만큼 그 시간에는 괴물들의 공격을 덜 받게 됩니다. 물론 그것도 하루 거리에 있는 괴물들이 몰려 들어오는 것이기 때문 에 그 이상 성벽에서 멀어지면 덕을 보지도 못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는 성벽 의 공격 같은 공격을 항시 받아야 할 정도의 곳은 3일 이내의 거리에는 없습니다. 그 리고 그 이상의 안쪽에는 어떤 상황인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들이 알아 보는 방법 밖 에는 없습니다.” 나는 쉬벡을 말을 듣고 어느 정도 안심이 되었다. “이, 이봐. 넥스 설마 저 불모지대 안으로 들어가려는 거야? 농담하지 말아.” 아까부터 관심을 가지고 이야기에 신경을 썼던 모양인지 유소라는 여관 주인 아줌마가 끼어들었다. “이봐, 유소. 내가 어디를 가든 신경 쓰지 말라고. 나보다 나이도 많으면서 나한테 시집을 올 생각은 아닐텐데 뭣 때문에 신경을 쓰는 거야?” 넥스는 능글맞은 웃음을 띠며 유소에게 농담을 던졌다. “이봐 넥스, 까불지 말고 다시 생각해 봐. 그 안으로 들어갔다가 살아온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아.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는 정찰조도 이틀거리 이상은 절대로 들어가지 않는다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살아온 사람은 한 사람 뿐이었잖아 그것도 얼마 살지 못하고 죽을 정도의 상처를 입고 돌아왔었단 말이야.” 유소는 그래도 말리고 싶다는 표정을 지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말아. 쉬벡과 루탄, 그리고 나라면 그정도는 해결 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 되. 뭐 정 안되면 돌아오더라도 살아오는 문제는 신경 쓰지 않아. 문제는 얼마나 깊이 들어갔다 오는가 하는 문제지만...” 넥스는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고 유소는 쉬벡과 나를 돌아 보았다. 하지만 상상했던 것과 같이 - 저런 어린 아이가 뭘 할 수 있다는 거지? - 하는 식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하하 나를 알아 본 것은 아니겠지만 그나마 마음에 드는 아줌마네... 하하하 나는 그런 유소의 모습이 왠지 마음에 들었다. 상대를 깔보지 않는 것은 얼마나 좋은가? 하하하 (그런데 나는 왜 사람들을 깔보는 경향이 생기는 것인지..... 요즘은 넥스도 별로 강해 보이지 않으니... 아직 넥스의 본 실력을 보지는 못했지만 이제 겨우 검기를 쓰는 정도인 듯.... 쩝..) 유소는 다시 넥스에게로 고개를 돌렸지만 더 이상 말을 늘이지 않았다. “쉬벡, 저기 혹시 유소하고 넥스하고 서로 어떤 관계인지 아세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 나는 조용히 쉬벡에게 말했고, 내 말을 들은 쉬벡은 슬그머니 “글쎄요, 아마도 넥스가 유소에게 먼저 관심을 가졌던 모양인데 그게 마음대로 안된 것 같았습니다만, 이제 보니 유소도 뭔가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이렇게 웃는 얼굴로 조그맣게 말했다. “에엑? 설마? 넥스는 나이가 이제 스물 넷이잖아요. 그런데 유소는 아무리봐도 서른은 넘은 것... 으악!!” 나는 다시 쉬벡에게 낮은 목소리로 되묻다가 한 쪽 귀가 끊어지는 느낌에 비명을 질렀다. “이봐, 루탄 유소가 어디를 봐서 그렇게 나이가 들어 보인다는거야? 응? 유소는 이제 겨우 스물 여섯이라고 여섯.” 허국!! 말도 안되는 어디를 봐서 유소라는 여자가 그렇게 젊다는 거야? 하지만 나의 불행은 귀가 당겨지는 것에서 멈추지 않았다. 갑작스런 넥스의 고함에 놀라던 유소의 눈초리가 매섭게 모아진 것이다. “이봐요. 젊은 사람, 내가 너보고 어린아이 같다면 좋겠니? 이 꼬맹이야? 응?” 유소의 말은 처음과 끝의 어미가 달라지면서 해요체의 높임말이 해라체의 낮춤말로 바뀌고 있었고 그 내용 또한 내 기분을 상당히 거스르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은 죄가 있으니 일단은 참아야 한다. “하하 제가 원래 사람의 얼굴을 보고 나이를 짐작하는 일이 서툴러서요. 하하하 더 구나 이렇게 고생이 심한 곳에 계시다 보니 조금 보기 보다 나이가 들어 보이시는 것 도 이해를 하셔야 해요. 하하하 아무튼 이거 숙녀분께 실례를 했습니다. 하하. 죄송합니다.” 나는 그렇게 웃으면서 사과를 하는 것으로 유소의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막을 수는 있었지만 역시 그 못마땅해 하는 눈초리 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그 불편한 자리를 일단 벗어나기로 했다. “저... 저는 그만 올라가서 쉬고 있을께요. 하하 아무래도 여행이 길어서 그런지 피곤하네요. 그럼 내일 아침에 봐 넥스. 하하하.” 나는 그렇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지만 넥스에게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이봐 루탄, 가는 건 가는 거고.. 일단은 사과하는 의미에서 그 김치라는거 한 통 만 꺼내놓고 가라. 우리 오늘 밤에 불고기나 구워 먹을란다. 참... 가는 김에 불고기 거리도 좀 꺼내 놓고 가고...” 넥스는 이렇게 말하며 교활한(?)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이, 이봐. 여긴 여관이라고. 여관에서 내 음식을 내 놓으라고 하는 거야? 그건 조 금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이제 여덟 통 남았다고. 그걸 한 통씩이나 내 놓으라 니.. 지금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그거 만들 때 뭐 도와준 거 있어? 없잖아. 못 줘, 못 준다고. 절대 못 줘.” 나는 그렇게 악을 썼다. 히유~~ 정말 나도 이러고 싶지 않은데... 이거 정말 체면이 말이 아니구만... 왜 이 렇게 점점 어린아이 같은 행동만 하게 되는 것인지... ㅡ.ㅡ;; “루탄, 그러지 말고 한 턱 써라. 내가 내일 이 쥐덫에 있는 재료 전부다 사서 줄 게. 그럼 되잖아. 어차피 출발 준비를 하려면 하루나 이틀은 걸릴 거고 그 사이에 출 발 준비는 내가 다 할게. 대신 루탄이 너는 그냥 먹을 거만 준비하면 되는 거야. 어떻게 생각해? 좋은 조건이잖아. 응. 그러니까...” 나는 그 사이에서 아무 말도 없이 그냥 꿋꿋히 앉아있는 쉬벡이 눈에 들어오자 더 화 가 났다. 저 영감은 평소에는 아닌데, 이렇게 먹는 문제에 있어서는 안 그런 척 점잖은 척 하면서도 챙길 건 다 챙기는 스타일이다. 쩝... 으이구... 나는 또 지기로 했다. 더 이상 사람들의 눈초리를 맞는 것도 싫었고, 더 싸우면 나만 더 망가지는 것 같아서 그냥 져 주기로 했던 것이다. 나는 품 속에서 김치 한 통과 양념에 잘 절여 놓은 돼지 불고기 한 통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 놓고는 팽하고 돌아서 이층 방으로 올라와 버렸다. “하하하, 역시 루탄은 마음이 넓다니까. 하하하” 등 뒤에서 넥스의 득의 만만한 웃음이 울렸다. 아마도 쉬벡 역시 느긋하게 그것들을 바라보고 흐뭇해 하고 있을 터였다. 쩝... 아깝다... 나는 이층 방에 올라오자마자 침대 위에 앉아서 운공을 시작했다. 뭐 이제는 예전처럼 특별히 운공을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기가 소통되고 있는 수준이지만 그래도 가끔은 이렇게 전체적인 순환을 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고 운공중에 누가 흔들거나 두들긴다고 내가 위험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그 경지는 지나 있었다. 만약 내가 운공중에 누가 나를 건든다면 그 사람은 상당히 후회 해야 할 것이다. 하하하 오늘 운공중에 제발 넥스가 나를 건들어 주기를.. 하하하 아무튼, 나는 요즘 내 몸 속에 있는 여러 가지 다른 기운들을 전부 오행기 안에 끌어 모으는 중이다. 오행기 자체가 거의 모든 형태의 기로 변형이 가능했기 때문에 이 작업은 조금 번거 롭기는 해도 어려운 작업은 아니었다. 거기다가 한 가지 기운을 오행기에 더할 때 마 다 표시가 날 만큼 오행기의 기운이 강해지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무료한 작업 도 아니었고, 어쩌면 곧 정령들을 중급에서 상급으로 진화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기의 수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중이었다. 더구나 이 세계는 의외로 기운을 함축하고 있는 듯이 이전 세계 보다는 기운이 넘쳐 나는 곳이어서 평소에 무의식적으로 운기되는 것 만으로도 상당한 기운이 축적되고 있었다. 오래지 않아서 화, 수, 금, 광, 지토가 상급 정령으로 진화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어쩌면 녀석들도 자아가 생겨날지도 모른다. 분명 내가 아는 정령들은 자아를 지니고 있었는데... 물론 하급 정령은 자아가 없는 것 처럼 표현된 판타지들이 많았지만 정령왕이 자아가 없는 경우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니 어쩌면 상급정령이 되면 자아를 가지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금의 나에게는 어쩌면 그 일이 넥스와의 여행보다도 더 중요한 일처럼 느껴진다. 나는 그렇게 휴식 겸 회복을 하고 있을 때, 아래 층에서는 쉬벡과 넥스의 불고기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내가 눈을 떴을 때 쉬벡은 자리에 앉아 메모라이즈를 하고 있었고(메모 라이즈는 마법사가 미리 마법을 준비해서 주문 없이 빠른 속도로 사용할 수 있게 하 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고 메모라이즈를 하지 않은 마법을 쓰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시간만 충분하고 여건만 된다면 메모라이즈를 하지 않아도 마법을 쓸 수는 있다. 그 래서 주로 급한 경우에 사용하는 마법만을 기억한다.) 넥스는 자리에 없었다. 나는 쉬벡의 메모라이즈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오래지 않아서 쉬벡이 눈을 떴고 나를 바라 보았다. “루탄님 잘 주무셨는지요. 지난 밤에는 그렇게 앉아서 휴식을 취하시던 것 같던데 괜찮으시지요? 넥스가 루탄님을 바로 눕혀드린다고 나섰다가 호되게 당했습니다. 허허” 히히히 역시 넥스가 당했군. 카카카 나는 속으로 올라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물었다. “그래 넥스는 괜찮은가요? 아침부터 일어나서 나간 것을 보니 뭐 괜찮은 것 같기는 하지만....” “그럼요. 조금 놀란 모양이지만 괜찮습니다. 지금은 아마 성주를 만나고 있을 겁니다. 우리들이 성벽 너머로 가는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하니까요.” “그렇군요. 그럼 우리도 내려가서 식사나 하시죠. 배가 고프네요.” 내가 이렇게 말했을 때 쉬벡이 난처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그게 문제가 좀 있습니다. 유소가 더 이상 루탄님께 식사를 대접하지 않겠다고....” “예에? 그게 무슨? 여관에서 식사를 주지 않겠다니...” “그게... 어제 밤에 김치하고 불고기에 충격을 받아서 더 이상 요리를 하지 않겠다 고 결심을 했답니다. 워낙 맛이 있다고들 난리가 나서... 사실 넥스가 루탄님을 깨우 려고 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그런 문제 때문이었지만...” “쉬벡? 무슨 말인지 좀 자세히 해 보세요.” 나는 쉬벡을 다그쳐서 사건의 전모를 들었다. 어제 밤에 불고기 파티에서 다른 손님들 까지 끼어서 불고기와 김치에 대한 칭찬이 넘치자 유리가 맛을 보고는 더 이상 자신은 요리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는 것과, 그 와중에 불고기를 더 얻기위해 노력하던 넥스가 운기하는 나를 건들었다가 날아가 는 불상사가 일어났다는 것, 그리고 오늘 아침은 유소에게 얻어 먹을 수 없다는 결정 적인 문제... 더 나아가서는 유소가 나에게 김치담는 법을 배우겠다고 선언했다는 것 까지... 이런.. 정말 대책이 없는 문제로군. 그렇다고 방에 앉아 있는다고 밥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나는 방을 나서서 1층으로 내려왔다. 역시나 나를 반기는 것은 계단 앞에 의자를 놓고 감시를 하고 있었던 것 같은 유소였다. “호호 루탄 어서 내려와, 나보다 어려보이니까 말 놓는 거 이해하겠지?” 이봐요 아줌마 나는 벌써 서른이 넘은지 옛날이라고요.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도 말아요. “이봐 유소씨,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닌 법이야. 내가 나이를 먹어도 유소씨 보다 십년 정도는 더 먹었을 거야. 그러니까 말 함부로 하지 말아.” 나는 처음부터 강하게 나가기로 했다. 내가 쉬벡에게 존대를 쓰는 것은 내 나이가 서른 넷이라는 전제 하에서이다. 뭐 오랜 동안 죽은 듯이 있었던 시간도 있기는 하지만 그 시간은 아무래도 나이라고 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아서 그저 원래 내 나이를 생각해서 나이 많은 쉬벡에게는 존대 어린 넥스에게는 반말... 하지만 내 말을 들은 유소는 어처구니 없는 표정으로 한참을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래? 하지만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으니 난 내 마음대로 할란다. 흠 어쨌든 어제 밤에 우리 여관에서 있었던 불상사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했으면 하는데...” “그래요? 불상사라.... 뭐 유소씨의 음식 솜씨가 별로여서 다른 사람들이 제 음식 을 맛있다고 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것이 저와 무슨 상관이지 엄연히 따지자면 그런 문제를 일으킨 것은 넥스니까 넥스한테 따지지 그래?” 나는 여전히 무뚝뚝한 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유소는 좀 당황한 모습이었다. 하기는 어제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는데 오늘은 전혀 다른 모습이니 그렇기는 하겠다. 하지만 나도 생각이 있어서 하는 짓이었다. 여기서 잘못하다가는 또 한 동안 음식 만 드는 일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난 요리사가 아니다 그저 내가 먹고 싶을 때 조금 만 들어 먹는 것은 상관없지만 누가 따라 다니면서 음식을 해 달라거나,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거나 하는 것은 별로 달갑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처음부터 딱 부러지게 거절해 두려는 것이다. “그렇지, 루탄 너의 말이 맞아, 하지만 덕분에 맛없는 여관으로 소문이 나서 장사 도 힘들게 되었으니까 뭔가 책임감이라거나 죄책감이라거나 그런 거 조금은 생기기 않아?” 유소는 다시 나에게 뭔가 책임감을 느끼게 하고 싶은 모양으로 말했지만 그런다고 내가 넘어갈 사람이 아니었다. “전혀! 난 그런 마음 전혀 안 들어. 따지고 싶으면 넥스한테 따지라고 했잖아. 그리고 오늘 아침에 식사를 안 준다는 말이 있던데? 사실이야?” 나는 유소에게 물었다. 유소는 잠시 난처한 얼굴을 하더니 결심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먹고 싶으면 직접 만들어서 먹어. 어차피 음식을 팔지 않기로 했으니까 여관에서 음식을 해 먹는 것 가지고 뭐라고 하지는 않겠어.” 유소는 그렇게 말하고는 막고 섰던 계단에서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섰다. 쩝... 어쩔 수 없이 음식을 해 먹어야 할 모양이었다. 하지만 유소는 어쩌면 내가 음식을 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그런 말을 했는지도 모른다. 쩝... 그렇다고 굶을 수는 없는 문제고... 하는 수 없지. 우선 먹는 게 우선이다. 쩝... 나는 어쩔 수 없이 창고에서 취사도구를 꺼냈다. 유소는 내가 품 속에서 솥이며 그릇 들을 꺼내는 것을 보고 놀란 모습이었지만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나는 우선 간단하게 수제비를 끓여 먹기로 했다. 순대가 남아 있기는 했지만 아침부 터 먹고 싶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불고기를 해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간단하게 물을 끓이고 밀가루를 반죽해 넣고 적당한 야채와 소금간, 그리고 약간의 고춧가루와 국물맛용 고기. 쩝... 나는 그렇게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고 유소는 곁에서 내가 음식을 만드는 것을 보고 있었다. 물을 끓이는 데에 화아를 불러 쓰고, 물은 수아를 불러 쓰고 쩝... 아마도 유소는 그런 모습에 질려 버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저 의자에 거꾸로 앉아서 턱을 받치고 아무 말도 없이 나를 보고만 있었다. 아침 준비는 간단하게 끝이 났다. 그리고 시간 맞춰서 쉬벡이 1층으로 내려왔다. 역 시 먹는 시간은 절대 놓치지 않는다. 아니 시간 뿐만 아니라 분위기나 여건도 아주 잘 만드는 것 같다. 표시는 안나는데... 나와 쉬벡이 자리에 앉아 수제비와 김치를 앞에 두고 막 한 숟가락 뜨려는데 역시 귀 신같은 넥스가 여관문을 열고 들어와 능글거리는 표정으로 테이블에 합석했다. 나는 째려보는 눈빛을 잠시 보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 해 봐야 내 입만 아프다. 쩝... 하지만 우리들의 식사는 유소까지 끼어들어 넷이 되고 말았다. 쩝... 자기도 아침을 아직 먹지 않았다면서 턱을 고이고 바라보는데 우리끼리만 먹는 다는 것은 아무래도 우리 민족의 정서상 맞지 않는 일이었다. 식사는 조용하고 냉혹하게 진행되었다. 분배는 나의 몫이었고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아무래도 여자라고 조금 유소에게 더 준 것에 못마땅한 표정들이었다.(분명 들이다. 단수가 아닌 복수.) 식사가 끝나고 유소는 공짜음식에 대한 답으로 설거지를 자청했고 넥스는 나갔던 일에 대해서 결과를 알렸다. “일단, 내일은 성벽을 넘을 수 있겠습니다. 성주님도 누가 밖으로 나가든 나가고 싶 은 사람은 상관하지 않겠다는 말씀이셨고, 이 자치령에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자유는 보장된 것이니까요. 그리고 역시 정문을 통해서 나가는 것은 안되 겠고, 성벽에서 뛰어 내리는 방법 뿐일 것 같습다.” 넥스의 말은 쉬벡을 의식해서 인지 존대였다. “그렇겠지요. 그럼 오늘 중으로 준비를 서둘러야 되겠군요. 아침부터 바빠지겠습니다. 서둘러야 하겠네요.” 쉬벡은 그렇게 말을 받았고 우리들의 출발은 내일 아침으로 정해졌다. 나는 별로 준비할 것이 없었기 때문에 여관에 그냥 있기로 하고 쉬벡과 넥스가 필요한 준비를 위해서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루탄, 너는 안 나가는 거야?” 옆에서 유소가 그릇들을 가져다 놓으며 말했다. “뭐 나는 준비할 것도 별로 없으니까. 필요한 것은 넥스와 쉬벡께 말해 뒀으니까 사 가지고 올거고 나는 별로 할 일이 없어.” “그렇지만 잠깐의 여정도 아니고 짐이 많을텐데...” 그렇게 말하던 유소는 내가 그릇들을 품속에 넣는 것을 보더니 말을 멈추었다. “그 옷 속에 얼마나 많은 물건들이 들어 있는거야? 상당히 많이 들어가네....” “별로 많이 들어있지 않아. 옷이 몇벌 들어 있고, 침낭이나 취사도구 칼하나 돈이 조금 들어 있고 음식이 좀 많이 들어있고... 그리곤 없는 것 같은데.... 참. 물을 좀 준비해야 되겠다. 아무래도 수아가 있어도 공짜로 나오는 것도 아니고 내가 힘이 빠지면 수아를 불러 낼 수도 없으니까...” 나는 혼잣말 처럼 중얼거리고는 유소에게 물었다. “혹시 여기 술창고 있어? 큰 통이 하나 필요한데... 비어있는 거면 더 좋고...” 유소는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부엌을 향해 난 문으로 들어갔다가 오래지 않아서 자기 키 정도의 물통을 안고 나왔다. 흔히 오크통이라고 불리는 것인데... 높이가 거의 2미터는 되어 보이는 것을 어떻게 안고 나올 수 있는지.... 옆으로는 더 넓은 것 같은데... 하지만 나는 통을 잘 살펴보고는 그 안에 물을 길어 붓기 시작했다. 수아를 불러 내면 금방 끝날 일이었지만 이 정도의 물통을 채우려면 수아의 평소 모 습으로는 좀 힘들 것 같았고 중급으로 변신하면 넘칠 것 같았고... 그냥 운동삼아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물통이 가득 차자 나는 한 손으로 물통의 귀퉁이를 잡고 가뿐하게 들어 올렸다. “우와~~! 힘도 쎄네. 나는 그냥 정령만 다루는 줄 알았는데... 그정도 통에 물을 채우면 나라고 해도 한 손으로 들기는 어려울텐데...” 뭐야? 그럼 한 손으로 드는 것이 가능은 하다는 말이야? 이 여자도 보통 사람은 아닌 모양이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물통을 등뒤로 돌려 창고에 넣었다. 한 순간 물통이 등 뒤에서 사라지자 유소는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역시, 마법이로군. 너 마법도 쓰는거야?” 유소가 그렇게 물었지만 “마법 아니야. 난 마법 쓸 줄 몰라. 그냥 선물 받은 능력이라고 생각해.” 이렇게 간단히 더 이상의 질문을 막았다. “그런데 유소, 한 가지 물어보자. 이곳에는 치료술사나 혹은 신관 같은 사람은 없 나? 이를테면 다친 사람을 치료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 말이야.” 내가 그렇게 물어보자 유소는 놀란 얼굴을 하며 말했다. “치료술이 능한 사람들은 그렇게 흔하지 않아. 여기 자치령 안에서 그런 능력을 지 닌 사람은 많아야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고 신의 힘을 빌어서 치료를 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신전 밖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 그런걸 모르고 하는 말이야?” 뭐.. 내가 모를 수도 있는 거지. 그런걸 가지고 그렇게 놀란 얼굴을 하다니.. “내가 꼭 그런 것들을 다 알고 있어야 하는거야? 모를 수도 있는 일이지..” 나는 그렇게 얼버무리며 2층으로 올라왔다. 역시 아직은 이 곳에 익숙하지 않은 점이 많다. 쩝. 점심시간이 거의 지나고 나서야 쉬벡과 넥스가 돌아왔다. 그들의 짐을 본 유소는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급하게 사용할 것들을 빼고 나머지는 내가 적당하게 챙겨 넣는 것을 본 유소는 이해했다는 표정이었다. 우리들은 될 수 있으면 짐을 들지 않는 방향으로 하기로 했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최소한의 도구들은 들고 가기로 했다. 그리고 쉬벡은 15개 정도의 약병을 들고 왔는데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투명한 제질의 병 안에는 푸른색과 황금색의 액체들이 들어 있었다. “이 파란색 물약은 외상을 치료하는데 사용하는 것입니다. 루탄님. 만약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면 이 물약을 사용하면 됩니다. 그리고 이 세 개의 황금색 물약은 신체의 일부가 떨어진 경우에 쓰는 것입니다. 목이나 허리가 떨어진 경우가 아니라면, 아니 허리가 떨어져도 살아있는 동안이라면 사용이 가능합니다. 허허 이 물약들 15개면 아 마도 이 쥐덫을 하나 정도는 지을 수 있을겁니다. 무척 비싼 물건이지요.” 쉬벡을 그렇게 말하고는 각자에게 물약을 나누어 주었다. 황금색 하나와 푸른색 네 개. 아마도 이 물약들은 그 수 만큼이나 우리들의 목숨을 구해 줄런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곳에는 치료술사나 신관이 별로 없다던데 이런걸 구해 오시다니 힘드셨겠군요.” 나는 쉬벡에게 감탄한 표정으로 말했다. “허허 이걸 준비하느라 지금까지 모은 전 재산을 털었습니다. 허허 만약에 이번에 동쪽 불모지대를 성공한다고 해도 다음 불모지대에서는 어떻게 해야할는지... 허허” 오히려 쉬벡은 다음 여행을 미리 걱정하는 소리를 하며 별 것 아니라는 투로 이야기 했다. “이번 여행에서 돈 되는 것들은 전부 들고 오죠. 뭐 루탄에게 맡기면 얼마든지 들 고 올 수 있을테니 마법 연구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이 있으면 전부 들고 오면 되지 않겠어요?” 넥스는 그렇게 말하며 빈털털이가 된 쉬벡을 위로했다. 쩝.. 아무래도 난 창고지기의 역할로 뽑힌 것이 아닐까...쩝.. 하지만 그럭저럭 우리들의 준비는 모두 끝이 났다. 마지막으로 내 창고에 들어간 것은 넥스가 준비한 무지막지한 무기 한 수레였다. 창, 활, 할버드, 도끼, 화살, 방패 칼등이 각각 서너 개에서 다섯 개 까지, 정말 무 지막지한 무기들이었다. 아마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면 백 명은 너끈하게 무장을 시킬 수 있을 것 같은 양이었다. 그렇게 준비가 끝나고 나는 점심 겸 저녁으로 바비큐 파티를 하고 남는 시간에 여관 에 있는 재료를 모아서 김치와 깍두기를 담갔다. 하루종일 유소는 내 곁에서 내가 뭔 가를 만들 때 마다 눈을 부라리고 있었지만 요리에 대한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가보자 불모지대 - 1 아침 날이 밝기도 전에 우리들은 성벽으로 올라가 있었다. 이미 우리들이 성벽을 넘어간다는 소문을 들었는지 많은 사람들이 배웅을 나와 있었다. 유소는 어디를 갔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도 넥스와 헤어지는 것이 마음을 아프게 한 탓이거니 하고 있었다. 넥스는 여러 사람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살아서 돌아오기 어려울테니 다시 생각하라는 쪽이 우세했다. 그나마 가끔 꼭 불모지의 비밀을 밝혀 오라고 건투를 빌어 주는 사람이 가뭄에 콩 나듯 있어서 완전히 절망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리고 멀리 쥐덫의 성 위에 한 남자가 망토를 날리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30대 중 반으로 보이는 그 사내는 넥스와 비슷한 체격을 지니고 있었고 검붉은 머리를 짧게 기르고 있었다. 잠깐 잠깐 펄럭이는 망토 밑으로 보이는 검은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 옛날 장군들이 썼던 칼처럼 생겼다. 하지만 워낙 멀리 있어서 다른 사람들은 그저 그가 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일 것이다. 나는 그가 우리 일행을 바라보며 굳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어쩌다가 그의 눈과 내 눈이 마주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도 느끼지 못한 모양이었지만 조금 지나자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모습을 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먼 거리에서 그는 우리들 하나 하나를 살필 수 있는 시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눈에서 이채가 빛났고, 우리들이 성벽을 뛰어 내리기 직전에 그는 나에게 손을 흔들며 웃어 보였다. 나도 그에게 손을 들어 웃어 보이고는 일행을 따라 성벽을 내려갔다. 넥스는 막무가네로 뛰어 내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땅에 깔린 괴물의 주검을 밟는 반동 으로 무사히 땅에 내려섰고, 쉬벡을 깃털처럼 느린 속도로 땅위에 내려섰다. 나는 그 뒤에서 성벽을 밟고(성벽에 붙어서 걸어 내려가는 것이다. 조금은 기운을 많이 써야 하는 무리가 따르기는 했지만 어쩐지 성 위에 서 있는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었다.)내려갔다. 내려가면서 성 위의 사내에게 얼굴을 돌렸을 때, 그는 놀라는 얼굴을 하더니 더욱 환한 웃음을 던져 주었다. 우리들은 말을 준비하지 않았다. 어차피 길이 없는 곳이었고 말은 괴물들의 식사가 될 뿐이라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었다. “이제부터 저녁이 되기 전까지 최대한 성벽에서 멀어져야 합니다. 쉬벡이 걱정이군요.” 넥스는 그렇게 말하며 쉬벡을 돌아 보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일단 오늘 하루는 모든 마법을 내 몸에 걸기로 하겠네. 근 육강화와 민첩, 그리고 속도 마법까지 건다면 자네들보다 더 빨리 갈 수 있을 것이 네. 대신에 오늘 하루 동안 나는 전투 불능이 되겠지만 말일세.” 쉬벡을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하지만 나는 그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하기로 했다. “제가 업고 가죠. 제가 업는다고 해도 속도에서 넥스에게 뒤처지지는 않을 겁니다. 만약 뒤처지면 그 때 마법을 거시죠.” 나는 그렇게 말하고 쉬벡을 업었다. “이봐 루탄, 어디 힘내 보라고.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해 보인단 말이야?” 아마도 넥스는 나에게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냉정하게 말했다. “떠들지 말고 빨리 앞장서. 시간이 우릴 기다려 주지는 않아.” 넥스는 다시 한 번 나를 째려보고는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이 미터의 거구가 순식간에 대지를 박차고 나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본 실력을 보인 적이 없다는 듯이 넥스는 독특한 발걸음으로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지면에 발이 닿는 순간 폭발적인 힘으로 땅을 박차며 땅 위로는 전혀 솟구치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지면 위를 스치듯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신기하네, 저렇게 달릴 수도 있군. 나도 한 번 해 볼까?” 나는 처음에는 그저 발에 기운을 모아서 그 힘으로 마냥 달리기만 하다가 넥스가 달리는 모습이 효과적일 것 같아서(솔직히 멋있어 보이기도 했다.) 따라서 해 보기로 했다. 등 뒤에 쉬벡이 있어서 잘 못해서 땅위를 구르게 된다면 심각한 문제가 생길 것이기 때문에 나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도약력을 앞으로 옮겨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 조금 위로 뛰어오르는 힘을 앞으로 전진하는 힘으로 옮겨 가자 한 번에 달리는 거리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서 내 속력은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고 넥스도 따라서 속력을 높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넥스는 내 속력에 맞추어서 달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뒤에 눈이 달렸나? 어떻게 내가 따라 가는 것을 뒤도 안 보고 저렇게 잘 알지? 그렇게 점심 때가 될 때 까지 괴물들의 모습은 없이 넥스와 나는 달리기 시합을 하듯 평원을 질주했다. “이 평원은 지나야 해. 일단 이 평원을 지나면 성벽으로 몰려드는 괴물들의 영향권 에서는 벗어난 것으로 볼 수 있어. 가끔 정찰을 나가는 사람들도 이렇게 평원을 건너 서 휴식을 하지. 일단은 그 전에 발이 빠른 괴물들을 만나지 않는다면 무조건 싸움은 피하고 달리기만 해야해.” 넥스가 뒤를 돌아 보며 말했다. “그럼 점심은 굶어야 하는거야?” 나는 시큰둥한 목소리로 물었다. 반나절을 달린다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아무리 내가 내공의 힘을 쓴다고 해도 전혀 무리가 가지 않는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이봐 넥스, 점심은 안 먹냐구. 잠시 쉬기라고 해야 할거 아냐.” 그러자 넥스가 돌아보며 말했다. “왜? 힘든가 보지? 그럼 좀 쉴까?” 저 녀석은 아무래도 내가 쉬벡을 업고도 자기를 충분히 따라 갈 수 있을 거라고 한 말에 아직도 꿍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뭐 솔직히 저녁까지 이렇게 달릴 수는 있겠지만 저 밴뎅이의 마음도 풀어 줘야 할 것 같기는 하다. “응. 그래 좀 피곤하네. 넥스는 지치지 않는 모양이지? 대단한데?” 나는 이런 입에 바른 말로 넥스를 꼬드겼다. “하하. 그래? 피곤하면 쉬어야지. 그래 쉬자. 점심도 먹어야 하고.” 그렇게 우리는 평원의 한 가운데에서 발을 멈추었다. “풍아 소환” 나는 풍아를 소환해서 주위 경계를 부탁했다. 그리고 간단하게 식사를 준비했다. 그런데 왜 언제나 내가 식사를 준비해야 하는 걸까? “이봐 넥스, 왜 항상 내가 식사를 준비해야 하는거야? 다음에는 넥스가 준비해. 나도 좀 얻어 먹어보자.” 나는 미리 준비한 빵과 큼직한 고기를 창고에서 꺼내며 말했다. 오래 요리를 하고 있을 틈이 없었기 때문에 화아를 소환해서 고기를 통째로 익히고 듬성듬성 잘라서 미리 만들어 놓은 쏘스를 곁들여 접시에 담고 빵을 더하는 것으로 식사 준비는 간단하게 끝이 났다. 그리고 창고에서 와인 한 잔을 꺼내서 한 잔씩 돌리는 것. 쩝.. 이런 야외에서 챙길 건 다 챙겨 먹다니... 식사는 간단하게 끝이 났고 다들 만족한 얼굴들이었다. 뭐 고기 익히는 과정이 간단해서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은 것 뿐이지 사실 그 쏘스 를 만드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구... 그거 만드느라고 실패도 좀 했는데...(사실 은 다른 식당에서 먹은 맛에다가 내 나름대로 몇 가지를 첨가해서 만든 것이다.) 하지만 간단한 식사 후에는 운동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가야 할 방향에서 한 때의 괴물들이 나타난 것이다. 덩치가 커서 동작이 굼뜬 녀석들이라면 어떻게 해 보겠지만, 저번에 보았던 산록늑대 와 비슷한 덩치에 붉은 색과 검은 색의 반점 무늬가 있는 늑대 사촌들이 달려 오고 있었다. “이런 하필이면 저런 녀석들이 첫 손님이라니... 저 녀석들 달리는 속도가 빨라서 떨쳐 버리고 가기는 어려울 것 같고 어쩔 수 없이 돌파해야 하는데...” 넥스는 중형 도끼 두 개를 창고에서 꺼내 달래서는 두 손에 나누어 쥐고는 준비를 마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준비 된거야? 그럼 시작해 볼까?” 나는 풍아와 화아를 불러 호위를 맡겼다. “풍아는 내 주위로 오는 녀석들을 막아주고 화아는 저 녀석들 다 태운다고 힘 낭비 할 것 없이 걷지 못할 정도로 만들어 버리면서 따라와.” 그리고 나는 쉬벡을 업으며 물었다. “달리는 등 위에서 마법 쓰실 수 있어요? 가능하면 마음대로 하세요. 대신에 제 머리카락 태우거나 얼리거나 하시면 저녁은 없어요.” “걱정 하지 마십시오. 허허 그렇게 땅 위를 스치듯 달리는 중이라면 아무리 어려운 마법이라도 가능하겠습니다. 간단한 공격마법 정도야 충분합니다.” “그럼 갑니다.” 나는 뽀얗게 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는 반점늑대들을 향해서 달려 갔고 넥스는 한 발 앞서 나가고 있었다. 우리들은 녀석들과 부딪히는 순간 속도를 잠시 주춤했지만 다시 계속 평원을 가로 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넥스는 좌우로 따라 붙는 늑대들을 도끼로 상대하고 있었지만 가끔씩 등 뒤로 따라 붙는 녀석들은 달리는 중에 방어하기가 어려워 보였다. 나는 지토를 불렀다. “지토 소환, 지토 넥스 뒤에 가까이 붙는 녀석들을 묻어버려.” 그렇게 정령 셋을 소환하고 거기다가 달리기 까지 하려니 나도 힘에 부치는 것 같았다. 화아는 늑대들과 어울려 싸우면서 몇 마리를 눕히면 다시 나를 따라 달렸고 풍아는 언제나 내 옆에서 가까이 오는 녀석들을 바람으로 날려 버렸다. 강력한 회오리 바람을 쓴다면 몇 마리쯤 허공중에 날려 버릴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달리는 중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내 주위로 가까이 오는 녀석들만 그렇게 날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달려 가자 우리 주위에는 더 이상 따라오는 늑대들은 없었다. 넥스 는 처음에 등 뒤에서 따라 오는 녀석에서 종아리 부근의 옷이 찢어진 이외에는 상처가 없었고 나와 쉬벡은 아무 이상도 없었다. “허허, 이런 가까이 오는 놈들이 없으니 마법을 쓸 기회도 없군요. 하지만 그렇게 정령을 셋이나 불러내면 무리가 갈 텐데요. 앞으로는 그렇게 무리하지 않아도 됩니 다. 그 정도라면 저만으로도 주위로 다가오지 않게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쉬벡은 내가 정령들을 돌려 보내가 등뒤에서 이렇게 말했다. “쉬벡은 나중에 정령들이 해결 할 수 없는 녀석들을 책임지셔야하니까.... 하하” “이런 참. 옷을 준비하는 것을 잊어 버렸다. 옷은 안 샀는데...” 앞에서 달리던 넥스가 마침 생각이 났다는 듯이 그렇게 비명처럼 외쳤다. 아무래도 앞으로 긴긴 여정동안 넥스는 누더기가 된 옷을 입게 될 것 같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 옷이나 쉬벡의 옷은 절대로 넥스가 입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넥스는 갈아 입을 옷을 없다는 말이다. 하하하 “이봐 넥스 그렇다고 돌아갈 수는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겠지? 투덜거리지 말고 빨리 가자구...” 넥스는 뭐라고 투덜거리는 듯 했지만 뒷모습을 보고 달리는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역시 이 넥스식 달리기는 참 괜찮은 것 같다. 위로 도약하며 달려나가는 힘까 지 최대한 앞으로 전진하는 힘으로 사용하는 방법이라니, 둔해 보이는 넥스치고는 멋 진 방법인걸? 하하하 “후아~! 드디어 끝인가? 정말 멀기도 하다. 말을 타고 전 속력으로 달려야 겨우 닿을 만한 거리인가?” 나는 드디어 끝이 보이는 평원을 보며 말했다. 그 동안 간간히 괴물들이 있었지만 속력이 느려서 따라오지 못하는 녀석들은 따돌리 고 힘을 써야 하는 녀석들은 넥스가 알아서 처리했다. 물론 가끔 쉬벡의 마법이 날아 가기도 했지만 나는 내 허리에 있는 검을 한 번도 뽑을 필요가 없었다. 내 근처로 다가오는 녀석들은 언제나 척살 대상 1호였다. 맛있는 식사가 나에게 좌우 되지 않았으면 어찌되었을지 모를 일이지만 일단은 현재까지는 내 근처로 괴물들은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봐 루탄,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말처럼 빨리 달린 것은 아니야. 순간 속도는 말 보다 빨리 달릴 수가 있을지 몰라도 우리가 달린 속도는 말이 보통 달리는 속도 정도야. 말이 있었으면 더 빨리 올 수 있었을 거야.” 넥스는 내가 말이 전속력으로 달려야 어쩌구 한 말에 토를 달아왔다. “쩝, 말이 그렇다는 거지. 별 것도 아닌 일 가지고 꼬투리를 잡기는.. 소심하군.” 나는 중얼거리며 평원에 이어진 숲으로 따라 들어갔다. 하지만 그 숲 속에서는 쉬벡을 업고 달릴 필요가 없었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야 해. 언제 늪을 만날지도 모르고, 또 나무 위에서 떨어져 내 리는 녀석들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서둘러 가다가는 식물 괴물들에게 당하는 수 도 있으니까. 더구나 여기서는 흩어지면 다시 모이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니 걸어서 이동하자.” 그래 뭐 나야 시키는 대로 하면 그만이지 뭐 니가 대장이니까. 히히 이럴 때는 대장 시키지만 보통 때에는 절대 아니다. 캬캬캬 “우선은 좀 더 안쪽으로 평원에서 멀어진 뒤에 오늘 잠자리를 찾아 보자. 지금까지 의 경우로 보면 숲 안쪽에서는 일몰 시간의 괴물들의 이동은 없는 것 같지만 일단은 평원 쪽 괴물들만으로 성벽을 둘러싼 괴물들을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 같으니까 안전을 위해서도 좀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래 그래 알았다니까, 가자구 가. 나야 시키는 대로 한다니까 그러내. 나는 느긋하게 넥스와 쉬벡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러면서 풍아를 소환해서 주위를 살피게 했다. 하지만 정확히 무얼 찾아야 하는지 모르는 풍아는 그렇게 큰 도움을 주지는 못할 터였다. 보통 불침번을 세운다면 근처로 다가오는 무엇이 있으면 깨우라는 식의 이야기가 되 지만 이렇게 이동 중에는 특별히 지정을 해 주지 않으면 정령들은 제 임무를 맡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풍아에게 살아서 움직이는 것 중에서 크기가 일 미터 이상 되는 것이나 작아도 수가 많은 것들이 있으면 이야기 하라고 했다. 덕분에 벌이 있다거나 벌레들이 뭉쳐 있다거나 하는 소리를 간혹 듣게 되기는 했지 만 그것이 그렇게 번거로운 것은 아니어서 그대로 주위를 살피게 했다. 우리들이 어느 정도 숲으로 들어 가는 동안 우리의 앞을 가로 막는 것은 없었다. “별로 위험해 보이지 않네요. 그런데도 이 쪽은 불모지대라고 한다니... 이상하네요.” 나는 옆에서 걷고 있는 쉬벡에게 말을 걸었다. “일단은 성벽으로 막혀 있고, 또 그 뒤로 이어진 평원에는 절대로 사람이 살 수 없 기 때문에 일단 이 안쪽으로 들어오면 고립된다고 봐야하니까요. 거기다가 이 안쪽에 도 상당한 괴물들이 있습니다. 이 숲은 그런대로 괜찮은 형편이지만 조금 더 나가면 정신을 차리기 힘들정도로 괴물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쉬벡도 나름대로 알고 있는 설명을 해 주었다. 서서히 해가 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전부터 숲 안쪽이어서 해가 지는 것인지 어쩐 지를 알지 못했지만 갑작스럽게 어두워지는 것이 해가 수평선 밑으로 떨어진 모양이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적당한 공지를 찾아 잠자리를 정했다. “여기서 일단 하룻밤을 보내기로 하죠. 루탄 그럼 저녁 부탁할게.” 넥스는 자리를 잡자마자 나에게 식사를 부탁하곤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내가 여기서 아무리 투덜거린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어차피 우리들이 여행하 는 동안에 식사는 내 몫이었으니까 달리 투덜거릴 것도 없는 일이었고... 나는 식사 준비를 하고 쉬벡은 주위를 돌아다니며 간단한 경고 마법을 걸고 있었다. 넥스도 나름대로 준비를 돕고 있었고, 또 한 아름의 장작도 준비해 왔다. 난 창고에서 잠자리에 필요한 물품들을 꺼내 놓았고 식사는 푸짐하고 열량이 높게 준비했다. 물론 빠지지 않는 김치. 주로 고기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서 고기를 어떻게 요리하든 김치만 있으면 고기 특 유의 느글거림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만족스러운 식사가 될 수 있었다. 나는 그 식사의 디저트로 야채고기전을 부쳐 내었다. 하하 언젠가 꼭 만들어 먹어야지 하고 벼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이 식사를 마치고 광아를 불침번으로 잠을 청하고 있을 때 불청객이 나타난 신호가 들어왔다. 쉬벡의 경고마법과 광아의 경고가 동시에 울린 것이다. “근처로 사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광아의 목소리가 내 머리속을 파고들 때, 나는 넥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천천히 따라서 몸을 세웠다. “이봐 넥스, 지금 오고 있는 것이 사람이라는데? 여기 우리말고 돌아 다니는 사람이 또 있다는 말이야?” “글세? 내가 알기로는 성에서 나간 정찰조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설마 이 곳을 돌아 다니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는데...” “하지만 분명 사람이라고 했단 말이야.” 나는 넥스에서 말하며 쉬벡을 돌아 보았다. “저도 마법에 걸린 존재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전달되었으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떠들고 있는 사이에 벌써 그 사람은 우리들 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둠속에서 모습을 들어낸 사람은 이런, 이런, 바로 여관집 주인 아줌마였다. “이봐, 유소 여긴 무슨일이야? 설마하니 내가 좋다고 따라온 건가?” 넥스는 유소를 발견하자 그렇게 실실 거리며 인사를 했다. 내가 생각해 봐도 그 이유 말고는 별로 없어 보였다. 둘 사이가 어떤 사이인지 내가 아는 것이 없으니 뭐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이런 위험한 곳에 따라올 다른 이유를 난 아는 것이 없었다.(물론 넥스가 좋 아서 같이 죽자는 식으로 왔다는 것은 더 신빙성이 없기는 하지만...) “휴우~~! 힘드네. 그 사이에 참 멀리도 왔군. 성벽에서 떠나자 마자 따라온다고 온 건데... 아이구 힘들어. 점심도 저녁도 굶고 흔적을 따라왔는데도 이렇게 늦어 버렸네...” 유소는 우리들의 말에 그런 혼잣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정말 무슨 일입니까? 유소가 이런 곳을 따라오다니... 궁금하군요.” 쉬벡도 상당히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유소를 보았다. “뭐 다들 그렇게 볼 필요는 없잖아요. 나도 누구에게 짐이 될 실력은 아니라고요. 그러니까 그렇게 안 반갑다는 표정을 적나라하게 들어낼 필요는 없잖아요.” 또 한 번 유소는 자기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하지만 우리들이 모두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언제까지 그렇게 버틸 수도 없는 노릇일 것이었다. “그래요. 따라온 거 맞아요. 솔직히 이제 여관도 지겨워졌고, 쉬벡도 아시는 것처 럼 저 원래 용병이잖아요. 그런데 그런 여관에서 숨죽이고 있는 것이 답답해서 때려 치울 생각이었는데... 뭐 이런 흥미진진한 모험이 있다는데 같이 따라 나서면 좋을 것 도 같고... 또 넥스도 여기 있잖아요. 넥스나 나 좋다고 꽤 오래 따라 다녔는데... 언제 다시 그런 사람이 나타날 지 알 수도 없는 일이고... 이런걸 일거양득이라고 하는 거죠. 이제 설명 된거죠? 그럼 빨리 뭐든 먹을 것이나 좀 내놔봐요. 난 점심도 저녁도 못 먹었다고 아까 말 한 것 같은데..” 그렇게 길면서도 내용 없는 변명은 나에게 늦은 저녁을 준비하라는 말로 끝이 나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또 한 쪽에서 찌그러져서 저녁을 준비하게 되었고 귓전으로 넥스네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정말 그런 이유만으로 여길 따라 왔다는 말이야? 그건 좀 설명이 부족하잖아.” 넥스의 다그침이었다. “뭐 다른 이유도 있는데, 그건 나중에 설명해 줄게. 그리고 여기 이 짐들도 루탄에게 부탁해줘. 이거 매고 오느라고 아주 죽는 줄 알았다고.” 유소는 그렇게 말하며 옆에 내려 놓았던 배낭을 밀어 놓았다. 유소는 오는 중에 제법 싸움을 했던 모양인지 옷 곳곳에 괴물들의 혈흔과 타액을 묻 히고 있었다. 하지만 입고 있는 갑옷 종류가 튼튼해 보이는 체인갑옷 종류였고 무장 도 롱소드와 건들렛으로 무장을 하고 있었기에 왠만해선 부상을 입을 것 같지는 않았다. 좀 무거워 보인다는 점이 문제였지만... 아무튼 그렇게 하루가 가기 전에 우리 일행은 넷으로 늘어났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유소는 왕년에 알아주는 용병이었다고 한다. 무슨 이유로 여관에서 죽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넥스와 비교해도 뒤 지지 않는 솜씨를 지니고 있는데다 특기가 흔적을 추적하는 추적술과 함정해체라고 했다. 또 그런 특기를 지닌 사람들이 체력과 접근전에 약한 경우가 많은데 유소는 그와는 반대로 무지막지한 힘에서 나오는 근접전의 명수이기도 하다는 설명이었다. 밤을 세운 우리들은 이른 아침부터 출발을 서둘렀다. 사실 어둠이 깔리고 아침이 올 때 까지는 시간이 너무 길다. 낮과 밤의 비율이 비슷 한 것이다. 도시에서나 밤을 낮처럼 지내지 이렇게 해만 지면 암흑속에 묻히는 곳에서 밤 시간은 너무도 긴 것이다. 대충 8시면 완전히 어두워지고 새벽 6시는 되어야 날이 밝기 시작한다. 그렇게 때문 에 밤 시간이 상당히 길어지는 것이다. 때문에 이른 아침에 출발을 서두른다고 몸이 피곤하거나 한 것은 전혀 아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이 동쪽 불모지대의 주파입니다. 어디까지 이어지는지는 모르지 만 일단 최대한 깊은 곳 까지 들어가는 것이 첫 번째 목적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불모지대에 무슨 이유로 괴물들이 끊임없이 늘어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아무래도 성벽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몰시의 기현상에 대한 것을 알아내는 것이 명확하게 세워진 두 번째 목표라고 하면 되겠지요.” 넥스는 유소를 의식 한 듯이 다시 한 번 우리들이 목적을 밝히는 것으로 둘째 날의 여정을 시작했다. 그리고 둘째 날의 여정은 첫째날의 여정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었다. 거의 한 시간의 한 번씩은 괴물들고 마주하고 인상을 써야 했던 것이다. 될 수 있으면 최대한 무리가 가지 않도록 힘을 합쳐서 상대했기 때문에 점심시간까 지 다섯 번 이상의 싸움을 벌이고도 별로 지친 사람은 없었다. 넥스와 유소가 앞에서 칼부림을 하면 쉬벡의 마법과 정령들의 공격이 이어진다. 때문에 근접전을 펼치는 사람도 불의의 공격을 당하는 경우가 없었고, 뒤에 있는 나 나 쉬벡은 풍아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안전한 상태에서 괴물들을 상대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점심 때가 되었을 때, 우리들은 다시 여정의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숲이 끝나면서 늪이 나타난 것이었다. 어제 숲을 들어서면서부터 늪지를 조심시켰던 넥스가 늪에 빠진 첫 인물이 되긴 했지 만 놀람은 있었어도 위험은 별로 없었다. 넥스의 몸에 붙은 거머리들이 수가 상당히 많았다는 점만 빼곤... 어쩌면 한 마리씩 떼어 내려고 했으면 넥스가 빈혈로 쓰러지는 사태가 생겼을 지도 모르지만 나는 한 줌의 소금으로 모든 사태를 해결했다. 소금 한 줌을 넥스에게 쥐어주곤 -문질러!-라고 한 마디만 해주었던 것이다. 물론 손이 안 닿는 부분은 알아서 했을 것이다. 뭐 온 몸에 붙은 거머리를 옷을 벗겨서 흉물스런 모습을 봐 가면서 떼어 주는 것은 취미가 아니었다. ㅡ.ㅡ;; 다음에는 아예 화아로 적당히 구워버릴까도 생각중이다. 나는 그런 와중에 나무 한 그루를 잘라내었다. 아마 이 정도면 사람 셋이 손을 잡아야 둘레를 돌릴 수 있을 정도는 되는 것 같다. 워낙 이 지역의 나무들이 무식하게 큰 것들이 많으니 이것도 엄청 크다는 말은 안 나 오는 정도의 크기일 뿐이다. 나는 내 칼에 금의 기운을 모아서 나무의 둘레를 돌아가며 슥-ㄱ 베어 내는 것으로 그 작업을 마무리했다. 늪이 얼마나 넓은지를 몰라서 배를 만들어 타고 갈 생각이었다. 일단 보이는 곳은 전부 늪지였던 것이다. 늪에는 길이 있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언제 빠질지 모르는 늪지를 걸어서 건너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결국 나무를 적당히 다듬고 화아에게 나무의 겉과 속을 예쁘게 다듬어 태우게 하고 재가 된 안쪽을 긁어 내는(이건 풍아에게 시켰다. 작은 회오리로 배 속을 긁고 재를 날려서 늪의 물 속으로 넣는 것이다.)것으로 어느 정도 배의 모양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배의 한 쪽으로 작은 배를 하나 더 만들어 연결하는 것으로 일단 배의 모양은 완성이 되었다. 일단 물에 뜨기만 하면 문제는 없었다. 그 다음은 수아의 도움으로 배를 끌면 되는 것이다. 물론 땅위에서 짧은 거리를 이동해야 할 필요가 있으면 지토에게 부탁하면 될 일이었다. “야~~! 루탄 너는 참 편하겠다. 모든 일을 정령들에게 시키면 되니까...” 유소는 부럽다는 듯이 웃으면 나에게 말했다. “이것 보라구 유소. 내가 정령들에게 일을 시킬 때는 그 만큼 내 몸에서 기운이 빠 져 나가는 것이란 말이야. 이게 전부 공짜로 이루어지는 일인 줄 아는 모양인데 적어 도 이런 일을 하려면 아까 그 큰 나무를 등에 업고 우리가 떠나온 성벽까지 가는 정 도의 힘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내가 말하면 믿을 거야?” 나는 조금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지만 “그런 거야? 그런 거로군, 그럼 별로 좋을 것도 없겠네...” 라는 시큰둥한 반응과 함께 “그래도 정령들 시키면 편하기는 하잖아.” 라는 반론을 들어야 했다. 정말 무슨 생각인지. 이런 중노동에 내가 얼마나 많은 기운을 쏟아야 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나는 정말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쩝. 내가 무슨 이유로 이렇게 고생을 사서 하고 있는 것인지... 내가 마음먹고 혼자서 이 곳을 간다면 훨씬 빠르고 또 쉬울텐데... 하지만 나는 혼자서 독불장군처럼 지내는 것에는 별로 흥미가 없기는 했다. 역시 혼자만의 고독이라거나 그런 것은 별로 겪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사람들과 다니면서 조금은 피곤한 일이 있어도 감수해야 하겠지... 잠시 지체되었던 걸음은 배를 타면서부터 빨라지기 시작했다. 가끔 늪지가 끝나고 땅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땅이 그다지 크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끌고 가거나(완전히 머슴이다.) 아니면 지토에게 부탁해서 땅을 가로 질러 가기도 했다. 똑바로 앞으로... 이것이 우리들의 모토였다. 어차피 길은 없는 것이었고, 그저 앞으 로 앞으로(이렇게 나가다가 지구촌 아이들을 다 만나는 것은 ㅡ.ㅡ;;) 나가는 것이 전부였다. 물론 가끔 심심찮게 늪지의 괴물들(대부분이 슬라임 같은 것이었지만 굉장히 지저분 하고 맞붙어 싸우기 싫은 녀석들이라서 수아나 풍아에게 부탁했다. 그리고 뱀도 아닌 것이 거북이도 아닌 것이 그런 것이 나오기도 했지만 땅위에서는 굼뜬 모습이어서 간 단한 녀석들이었다.)이 나오기도 했지만 아직 힘에 부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게 이틀째의 시간도 흘러갔다. 그리고 우리들의 잠자리는 늪지에서 발견한 좁은 땅덩어리 위였다. 땔감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저녁을 하느라고 힘이 빠져 버렸다.(화아에게 불을 부탁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몸에서 빠져나가는 피 같은 힘이란 말이야.) 그리고 밤을 보내기 위해서는 어제 보다는 좀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늪에서 어떤 녀 석이 나올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덩치가 큰 녀석이라면 문제가 없었지만 덩치 작은 벌 레 종류라면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불을 피우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결국 광아에게 조명을 부탁하고 돌아가며 불침번을 서기로 했다. 나는 광아를 빌려주는 대신 불침번에서 제외되었지만, 다른 사람들도 그것은 이해해 주는 분위기다.(아무렴, 내가 어찌되면 당장 불편할 테니까...) 하지만 밤은 역시 인간들의 자리가 아닌 모양이었다.(적어도 이 지역에서는...) 우리들은 거의 밤 세워 온갖 괴물들을 상대해야 했다.(아주 작은 협혈충이나 거머리 군단, 아니면 슬라임떼도 괴물에 속한다면....) 그리고 그런 녀석들을 상대하는 데에 넥스나 유소의 칼은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한 마리 한 마리 찍어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결국 그 녀석들을 상대한 것은 쉬벡과 나였다. ㅠ.ㅠ) 아침이 되었을 때, 나와 쉬벡은 거의 파김치가 되어 널부러져 있었다. 물론 나는 그 와중에 아침을 준비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런 내 모습에 넥스들도 아침을 준비하라는 말은 못하겠던 모양인지 투덜거리며 마 른 빵과 물로 아침을 해결했다. 물론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그렇게 시작된 하루는 점점 늪지가 줄어들고 결국에는 늪지가 끝났을 때, 점심시간을 넘기고 있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넥스는 오후의 여정을 멈추기로 결정을 내렸다. “아무래도 피곤한 사람이 있어서 더 이상 강행군은 무리인 것 같습니다. 루탄이야 그런대로 버티겠지만 쉬벡이 지치시면... 아무래도 나이가 있으시니까....” 이렇게 말한 넥스는 늪지에서 한참 벗어난 곳에 자리를 정했다. 이제부터는 숲이라기보다는 산이 시작되는 모습이었다. 아직은 가파르게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멀리 보이는 산의 모습은 제법 험준한 모 습이었고 산 봉우리는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습지가 많은 탓에 안개나 구름이 많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이 산이 성벽에서는 보이지 않은 것이죠? 이상하네..” 나는 곁에 앉은 쉬벡에게 물었다. “아마도 거리 때문은 아니고 평원과 늪지에서 일어난 먼지와 안개가 시야를 가리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알 수 없으니까요.” 쉬벡은 간단하게 대답하곤 곧 눈을 감고 정신집중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마법사도 휴식동안 정신력을 높이지 않으면(이건 몸 주위에 마나라는 것들을 배열해 놓는 것이라고 한다. 자연적으로 되기도 하지만 정신을 집중해서 하면 빠른 시간안에 마나를 몸 주위에 모아 둘 수 있단다. 쩝.. 그런 의미에서는 내가 몸 속에 기운을 모 으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아무튼 그렇게 모인 마나는 몸 주위에서 원을 형성 하고 돌아가는데 그 원의 수에 따라서 몇 써클이니 하는 단계가 정해진다는 것 같았다.) 나중에 마법을 쓰기 어렵다고 한다. 나도 그 옆에서 나란히 앉아서 운기를 시작했다. 그렇다고 삼매경에 빠지면 깨어나기 가 어렵기 때문에 완전히 몰입하기는 어려웠다. 뭐 삼매경에 든다고 주위의 여건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반응이 느려질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와 쉬벡이 나란히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넥스와 유소는 나름대 로 무기들을 손질하고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뭐 아직은 낮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위험은 없을 터였다. 그리고 밤이 되기 전에 쉬벡은 다시 주위에 경고 마법과 기타 준비를 할 것이고 나도 풍아를 소환해 와야 할 터였다. 사실 계속해서 정령들을 소환해 놓고 있는 것은 알게 모르게 힘이 드는 일이었다. 더더욱 중급의 힘을 지니게 된 정령들은 아무리 작은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해도 예전에 비할 바 없이 많은 기운을 필요로 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물론 덕분에 능력도 커지기는 했지만... 휴식중의 시간은 참으로 빠르게 흘러갔고 저녁이 되어 적당히 식사를 한 후에 우리들 은 그 동안과는 다른 여유가 있어 보이는 모습들을 하고 있었다. 피곤에 지쳐서 잠에 빠져들던 지난 이틀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던 것이다. 우리들은 모닥불 주위에 둘러 앉아 간단한 술과 차, 그리고 과자까지 버석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 불모지대라는 곳은 얼마나 넓은 것일까? 굉장히 넓어 보이는데...” 나는 조용한 분위기의 멋적음을 감당하지 못하고 말을 꺼냈다. “글세, 아무도 끝을 보고 왔다는 사람이 없어서 알 수가 없어. 다만 지금 보이는 저 산을 올라가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넥스가 말을 받았다. “그런데 저 산, 얼마나 높은 걸까? 모습이 보이지를 않아서 알 수가 없잖아.” 유소가 옆에서 거들었다. “그러게 저거 얼마나 높을까? 내일 가까이 가 보면 알 수 있을까?” 나는 유소의 궁금증에 동감을 표했다. “그건 루탄님이 바람의 정령에게 알아보라고 하면 알 수 있지 않을까요? 금방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쉬벡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그렇군, 그렇게 간단한 방법이 있다는 말이군. 역시 연륜은 무서운 거야... 나는 나만 멀뚱이 쳐다보는 넥스와 유소에게 어색하게 웃어보이고는 풍아를 소환했다. “풍아 소환, 저기 저쪽 산이 어느정도 높은지 좀 알아보고 올래?” 순식간에 풍아는 눈 앞에서 사라졌다. “윽-ㄱ” 나는 갑자기 몰려오는 통증에 신음을 흘렸다. 풍아가 떠난 잠시 후 갑자기 엄청난 기운이 빠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도 풍아가 힘을 쓰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가 심했다. 아마도 예전에 바람의 중급 정령의 맞상대 할 때 썼던 힘 정도의 힘을 한꺼번에 몰아 쓰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모자라는 듯 자꾸만 몸에서 빠져 나가는 힘의 크기는 커지기만 했다. “이, 이런 무언가 있는 모양입니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요. 풍아 돌아와.” 나는 몸에서 빠져나가는 힘을 견디지 못하고 풍아를 불러들였다. 하지만 여전히 내 몸에서는 엄청난 힘이 빠져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세찬 바람과 함께 풍아가 모습을 들어내었다. “오오!!” “와~~!” “대단한데? 저게 풍아야?” 제 각각의 반응이 나타났다. 그들은 한 번도 중급 정령으로 완전히 변신한 정령들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오! 저건 바람의 중급 정령이로군요. 예상은 했었지만 중급 정령을 불러 내시다니.. 루탄님 대단하시군요.” 그나마 쉬벡은 내 능력을 감탄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나머지 둘은 그저 풍아의 모습에만 빠진 모양이었다. 나는 천천히 풍아에게 가는 힘의 양을 줄였다. 처음에는 힘이 줄어드는 것에 반하는 힘이 있는 것 같았지만 곧 풍아의 모습은 작은 모습으로 바뀌어 내 앞으로 내려왔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 있었지?” “저 앞으로 정령이 지키는 지대가 있습니다. 산은 올라 갈 수 없는 곳입니다. 산에 는 바람의 상급정령과 얼음의 상급 정령이 지키고 있습니다. 단지 올라 가려는 것 뿐 인데도 가로 막고 있습니다. 저는 주인님의 명령이라 가야 한다고 했지만 상급정령들 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어디로도 갈 수 없다. 아무도 이 곳을 벗어나지 못한다.’라고요.” “그렇다는 말이지.. 그래 알았어. 내일 가 보면 되겠지....” 나는 풍아를 돌려 보내고 일행들에게 풍아의 이야기를 전했다. “뭐? 뭐야? 바람의 상급정령과 얼음의 정령이라구? 미치는군. 그건 괴물이 아니라구. 그걸 어떻게 상대하라는 거야?” “대단한데? 상급 정령이 둘씩이나 지키고 있단 말이야? 뭔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네... 재미있네 재미있어.” 먼저는 넥스의 반응, 후자는 유소의 반응이었다.(어째 남녀가 바뀐 모양새다.) “그런데 이상하군요. 왜 침입금지라든가 들어올 수 없다는 표현이 아니라 벗어날 수 없다는 표현을 쓴 것일까요? 역시, 동서남북의 불모지대들은 우리가 사는 이 곳을 가두어 놓고 있는 것이라는 말이 되는 것일까요?” 쉬벡의 말은 그 중에서도 핵심을 지적하는 말이었다. 역시 연륜이다.(내가 생각한 것을 그대로 말하는 것을 보면... ㅡ.ㅡ;; 나도 늙었다는 말일까?) “어? 생각해 보니 그렇네? 정말 그런 것일까?” 넥스가 뒤늦게 깨달았다는 듯이 말했다. “뭐 지금으로서는 그 정도 밖에는 알 수가 없는 것 같네요. 그럼 내일 산에 가서 알아보기로 하죠. 그 방법 뿐이잖아요.” 유소는 여전히 태평한 소리를 늘어 놓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이 정답이었다. 지금 다른 어떤 방법도 없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모두들 궁금증을 품고 잠자리에 들었다. 정말 진절머리나는 숲이다. 벌써 5일째. 멀리 산은 보였지만 우리들은 그 산에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숲은 빽빽했고 그 속에는 정말 괴물들의 종합전시장이었다. 지겹도록 많은 종류와 수의 괴물들이 달려들었고 번번이 우리들을 위험 속으로 내몰았다. 처음에는 나도 정령들을 소환해서 괴물들을 상대했지만 이제는 정령들을 소환하지 않고 있었다. 그 사이에 내 칼 솜씨도 장족을 발전을 이루어 내었다. 일단은 몸이 가볍고 날렵한 탓에 칼을 들고 피하고 찌르거나 베어내면 되는 것이었지 만 그것도 경우에 따라서는 막고 피하고 공격하는 동작들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실적에서(괴물들을 처치하는 숫자) 차이가 났기 때문에 싸움을 하는 동안에 검술들을 배우게 된 것이다.(넥스와 유소의 솜씨를 하나하나 보면서 따라하다 보니 늘었다. 물론 그 둘은 내가 자신들의 검술을 그렇게 빨리 익히는 것에 대해서 까무라칠 정도로 놀라워 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거기다가 나는 그들 보다는 한 단계 위의 실력을 지닐 수 밖에 없는 것이, 나는 언제 나 검에 푸른색(수), 황토색(지), 금색(금), 아지랑이(풍), 흰빛(광), 갈색(목), 붉은색(화)의 검기들을 자유자재로 꺼내 쓰고 있다는 사실이 문제다. 그 덕분에 나는 내가 몸을 움직여서 괴물들을 상대하는 것이 내 몸 속의 기운들을 아낄 수 있는 방법임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정령을 불러내면 한꺼번에 큰 힘을 쓸 수는 있겠지만 한 곳에 힘을 집중해서 사용하는 것이라면 내가 직접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기껏 검기를 사용하는 정도 뿐이고 그것을 가지고 원거리 공격을 한다거나 하는 무협 영웅들 흉내는 내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것도 해 보면 되지 않을까 싶긴하다.(아직 시험을 해 보진 못했다. 안그래도 힘이 딸린다.) 그리고 쉬벡은 나름대로의 연륜(이게 계속 빛을 발한다.)때문인지 처음부터 고급의 마법을 난사하지 않은 까닭에 아직까지도 나름대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일행이 아무리 힘이 넘치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이렇게 가다가는 얼마 가지 못하고 쓰러질 것이라는 그 것은 분명했다. “헉, 헉, 이봐 넥스, 우리 어디 숨어서 좀 쉬었다가 가자. 이거 이러다가는 얼마 버티지 못하겠는걸?” 유소가 한 무리의 괴물들을 처치하고 다들 그 자리에 앉아서 숨을 고르고 있을 때, 당연하지만 요긴한 제안을 넥스에게 했다. “학, 학, 그, 그래야겠다. 어디 동굴이나 아니면 방어하기 편리한 곳을 찾아서 쉬기 로 하자. 나도 더 이상 나가다가는 장담하지 못할 것 같다. 이거 정말 우라지게 많은 괴물들이다.” 이런 결정에 누구라도 반대 할 사람은 없었다. 어차피 시간을 정하고 나온 여정도 아니었고, 서둘러야 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때문에 우리들은 천천히 주위를 살피며(사실 풍아와 지토를 풀어서 찾고 있었다.) 길을 찾았다. 얼마 후, 풍아와 지토가 발견한 곳은 계곡 초입에 있는 동굴이었다. 물론 그곳으로 가는 길이 무조건 편하고 번듯한 길이었다는 식의 이야기는 아니다. 죽도록 괴물들을 상대하면서, 가끔 팔을 휘두르는 나무들을 베어내면서 땅에서 이빨 을 들이미는 초대형 지렁이의 내장을 갈라버리면서 그렇게 우리들은 동굴 입구에 도착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 이 동굴에 뭔가 살고 있으면 어쩌지?” 당연한 우려였지만 우리들은 일단 그렇게 물어본 유소까지를 포함에서 동굴 속으로 용감하게 뛰어들었다. 물론 풍아에게 적당한 지점까지 정찰을 시킨 후의 일이지만... 하지만 풍아는 동굴을 끝까지는 가지 않았다. 동굴이 상당히 깊은 모양이었다. 우리들은 일단 동굴 입구를 지토의 흙 벽으로 막아 버렸다.(물론 위쪽으로 숨구멍은 남겼다. 숨막혀 죽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최대한 빠르게 모닥불을 피우고, 저녁을 준비했다. 그렇게 오랜만에 긴장을 풀고, 식사를 준비하고(정말 오랜만이고 맛있는 국을 끓이 고, 두꺼운 김치전을 부치고, 양념불고기를 구웠다.) 다들 둘러 앉았을 때는 제법 시간이 흐른 후였다. “우걱, 우걱 와~! 역시 이 맛이야. 역시 루탄이 최고라니까. 우걱, 우걱” 이봐 넥스 음식을 입에 넣고 말을 하지 말란 말이야. 쩝... 다들 먹는데 열중해서 정신들이 없구만.. 허긴 나도 오랜만에 음식다운 음식을 먹는 중이어서 조금은 행복한 기분이기는 하지만... 역시 사람은 먹는 문제에 있어서는 최선을 다해야 하는 거야. 암 그렇고 말고. 그렇게 우리들의 식사가 끝이 났을 때, 우리 일행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전부 침낭도 채 꺼내지 못한 상태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물론 그 중에 내가 빠질 이유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역시 유비무환, 나는 피곤한 중에도 광아와 지토에게 불침번을 부탁하고 잠이 들었다. 떨그렁, 떨그렁, 뻐벅, 뻐벅, 웅, 누구야, 누가 잠도 안자고 먹다 남은 음식들을 긁어 먹고 있는거야? 아마도 넥스겠지. 쩝.. 그래 많이 먹어라. 나는 잠결에 들리는 소리로 누군가 음식을 긁어 먹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눈을 뜨고 누군지 확인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만약 우리들이 아닌 다른 무엇이었다면 지토와 광아가 가만히 있을 턱이 없는 것이다. 뻐걱, 뻐걱, 뻐걱. “이봐 적당히 해 두라고, 내가 잠에서 깨어나면 다시 해 줄 테니까 시끄러우니까 그만하란 말이야. 잠 좀 자자. 잠 좀.” 뚝! 내가 신경질적으로 한 마디를 내 뱉자 순식간에 소리가 그쳤다. 그리고 나는 또 수마 속으로 잠겨들었다. “우화아아아악, 뭐 뭐야? 누구야?” 갑작스러운 비명소리에 나는 벌떡 일어나며 칼을 빼 들었다. 소리를 지른 사람은 넥스였다. 그리고 그 옆으로 유소도 눈을 똥그랗게 뜨고 바라 보고 있었고, 쉬벡도 마법을 날릴 만반의 자세를 반사적으로 갖추고 그 곳을 바라 보고 있었다. 물론 나도 분위기에 따라서 모두의 시선이 모아진 곳에 눈길을 던졌다.(반사적인 행동이다.) 흠.. 지토로군. 나는 손에 든 칼을 내렸.... 아니다. 지토가 아닌데? 생김새는 맞는데 크기가... 그리고 옷도 머리색도 다 르 다. 나는 다시 칼을 들었다.(역시 반사적이다.) “뭐? 뭐야? 정말 이 녀석은 뭐라는 녀석이지?” 나는 그러면서 지토와 광아를 돌아 보았다. “지토, 광아 저 녀석이 언제 여기 온 거야? 그리고 왔는데도 왜 아무 말이 없었던 거야?” “주인님, 저것은 위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깨우지 않았습니다.” “주인님, 저 노옴은 정령계와 인간계의 중간에 위치한 것입니다. 때문에 일부러 말 씀드리지 않아도 왔다가 그냥 갈 녀석이었습니다. 물론 음식을 조금 축내는 정도에서 그쳤을 텐데... 주인님께서 깨어나면 다시 음식을 해 주신다고 하셔서 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앞은 광아, 뒤는 지토의 말이었다. “뭐야? 내가 언제 음식을 만들어 준다고 했다는 거야?” 나는 기억에도 없는 소리라 화를 내며 물었다. 순간 저쪽에서 가만히 서 있던(그러고보니 손에는 숟가락을 들고 솥단지 앞에 서 있었다.) 녀석이 나에게 고개를 돌리고는 화난 표정을 지었다. “주인님께서 주무시는데 시끄럽다고 깨어나면 맛있는 음식을 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소리는 저와 광아도 들었습니다.” 나는 그때서야 잠결에 시끄럽게 음식을 긁어 먹던 녀석이 넥스가 아니고 저 녀석임을 알았고, 내가 음식을 해 주겠다고 말한 것을 기억했다. “그, 그럼 내가 잠결에 들었던 소리가 넥스가 음식을 긁어 먹던 소리가 아니라(이때 넥스의 얼굴이 나에게로 돌아오는 것을 느꼈지만 모른 척 했다.) 저 녀석이란 말이야? 그, 그렇다면 내가 음식을 해 주기로 한 것도 맞기는 맞는 이야기네.(그 순간 나를 바라보고 화를 내던 그 녀석의 얼굴이 풀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루탄님, 이 생명체는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만. 아무래도 지금까지 인간과의 접촉이 없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신기한 일이군요.” 쉬벡은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천천히 그 새로운 등장인물을 천천히 살펴 보았다. 생김새는 흔히 보는(판타지에서 말이다.) 드워프를 연상시켰다.(짧은 팔 다리,큰 머리에 수염난 대머리) 이 모습은 곧 지토의 모습과도 거의 흡사하다. 물론 지토는 그것 보다는 돌하루방에 더 가깝기는 하지만... 나는 지토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지토 저 녀석 뭐라는 녀석이야? 어디서 온 거야?” 그 때 갑자기 가만히 있던 그 녀석이 불쑥 끼어 들었다. “나도 말 할줄 아니까 내게 물어봐, 내 이야기를 다른 녀석에게 물어보면 기분이 좋을 것 같냐?” 허국, 말도 하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말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허국, 말을 할 줄 아는 거야? 그럼 진작 말을 하지.....” 내가 이렇게 말하지 일행들은 모두 놀라는 눈치였다. “루탄, 너 저 녀석이랑 대화가 되는 거야?” “저 녀석 뭐라고 하는거야?” “루탄님, 저런 존재와도 대화가 되시는 겁니까? 대단하시군요.” 뭐 각각 누구의 질문인지는 이야기하지 않겠다.(유소와 넥스를 구별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일단은 잠시 기다려보세요. 이야기를 좀 해 보고 말씀을 드리지요.” 그리고 나는 일행들을 제치고 조용히 그 녀석과 마주앉았다. 다른 일행들은 신기한 듯이 주위를 배회했지만 그들은 나와 녀석의 대화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야기가 시작되고 얼마 후부터 이곳의 말이 아닌 다른 말(내 모국어)을 사용해서 대화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대화의 처음이 이랬기 때문이다. “이천 오백년 전의 인간이라니... 그것도 비틀림 전의 인간이라니 대단한 일이로군.” 쩝.. 이렇게 말을 걸어오는 녀석에게 대꾸하는데 어떻게 모두들 알아 들을 수 있는 말로 할 수 있겠는가? “이런 그런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은, 지토나 광아가 다 불었다는 말인가?” “그런 표현보다는 그저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나왔다고 해야겠지.”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지토나 광아는 자아가 없단 말이야. 그런데 무슨 대화를 한다는 거야?” “이런 쯧쯧 이런 주인을 모시고 있으니 힘들다는 소리가 나오지. 이봐 정령들 모두 에게 자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주인이 있고 주인과 교류가 오래 진행된 정령들은 자아를 지니게 된다는 사실을 모른단 말이야?” “하지만 한 번도 저 녀석들은 그런 내색을 해 본 적이 없는 걸 어떻게 안다는 거야? 그저 인형처럼 움직이기만 하는데 내가 어떻게 아느냐구.” “흠.. 그건 그렇겠군. 아직은 정령계가 아닌 곳에서 자아를 실현하기란 어려울 수 도 있겠군. 이렇게 생각하게 현재의 자네 정령들의 자아는 깊은 무의식 속에 자리잡 고 있어서 밖으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언제든 여건이 된다면 밖으로 깨어 나는 날이 있을거야.” “그래? 그것 정말 반가운 말이군. 고마워. 희망이라도 있다는 것은 정말 반가운 일이야. 정말 고마워.” “뭐 그렇게 반가워 할 일은 아니지. 깊게 정이 쌓인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이별에서 의 아품이 커진다는 반대급부를 항상 지니는 것이니까 말이야. 누가 누구에게 그 아픔을 주게 되던지 말일세.” 뭐 그런 말이야 어찌 되었든 상관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말을 들어보니 너는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 같은데.. 너는 그 비틀림 속에 끼지 않았었나?” 나의 이런 질문에 녀석은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이런, 나는 정령계와 인간계의 중간에 위치한 존재야. 물론 다른 정령들 처럼 정령으로서의 기운을 강하게 지니지 않았지만 정령계로 갈 수는 있는 몸이라고, 그 때문에 우리 일족들은 그 비틀림이 다가오는 순간 다들 정령계로 들어갔고,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지. 뭐 사실 그 당시 인간계가 속한 우주에 우리 일족들이 몇 없기도 했지만...” “그렇게 된 거로군, 가만 그럼 그 비틀림은 오직 인간계에만 있었던 사건이라는 말인가? 왜 무엇 때문에 인간계에만 그런 사건이 있었던거지?” 나는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그럼 인간계를 제외한 신계나 정령계는 그런 비틀림이 없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음.. 그건, 뭐 말해 준다고 해도 상관이 없는 문제겠지. 그 당시에 이 세계는 신계 와 정령계 그리고 인간계의 구도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신계가 분열되었 다. 흔히 그 예전 시대의 신과 악마의 싸움과 같은 것이지 뭐 그 때는 신계 내부에서 그런 싸움들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신계의 싸움이었지. 하지만 그 비틀림 이 있은 이후로 신계는 세 조각으로 나누어졌다. 그렇다고 나누어졌다는 의미를 조각 나서 작아졌다는 의미로 보지 말아라. 그것은 신계와 같은 영역이 세 개가 더 생겨난 사건이었다.” “뭐라고? 그럼 신계라는 곳이 세 개가 되었다는 말이야?” “이를테면 성향별로 나뉘어진 것이라고 해야할까? 잘 설명은 안되지만 이렇게 간단 하게 말하지 예전 인간세상에서 천사와 악마가 있었지? 그 천사와 악마들이 기존의 신계에서 분리되어 나왔다는 말이다. 왜 천사와 악마 이외에도 신선, 부처, 성자 등등과 갖가지 괴물들이 신계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건 알고 있겠지?” 뭐 그렇기는 하겠다. 염라대왕도 신계고 그 속에 갖은 악귀들도 신계의 존재들이니까. “그래서 그렇게 나뉘어지면서 이 세상이 그 혼란으로 망해버렸다 그 말이야?” “이제서야 이해를 하는군. 그렇지 그렇게 된거지. 이건 새로 생긴 이 세상의 사람들은 모르는 일이야. 뭐 알아봐야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서 모르게 했지. 그리고 신계, 천사계, 악마계에서도 자기들 때문에 한 세계가 망해버린 것이 걸렸던 모양인 지 최대한 복구를 한다고 했는데 역시 나뉘어진 성향 때문인지 나름대로의 성향에 맞 는 세계를 이 인간계에 만들게 된 것이지.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만들어진 세상의 한 귀퉁이에 정령계도 나름의 세계를 만들었다는 사실이야. 그래서 결국은 동-정령 서-신계 남-악마계 북-천사계의 세계가 만들어졌지. 그리고 그 중앙에 인간계가 만들어졌어.” “그러니까 신계를 모방한 세계의 중앙 부분에 완충지대 같은 것으로 만들어진 것이 인간계라는 건가?” “이보라구 그건 오해야. 인간계는 오직 이런 모든 세계가 조화를 이루어야만 만들 어 낼 수 있는 곳이라구. 흔히 신이 가장 완성된 존재라고 하지만 언제나 가능성을 지니고 발전 할 수 있는 존재는 인간이란 말이야. 그건 인간이 이 네 가지 성향을 모두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구. 지금 인간계가 그렇게 작고 힘이 없는 이유는 다른 세계가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야. 이유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래.”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깨닫게 되었다. 지심목, 지심목 때문이다. 다른 세계에 지심목의 힘을 잃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다. 아마도 내 생각이 맞을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지 지심목은 각 세계에 없어서는 안될 존재인 모양이다. 그리고 그 지심목들이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 점점 인간들의 힘이 줄어드는 것일 것이다. “저기, 혹시 각 세계가 힘을 잃고 있다면 그 이유가 뭔지 알아? 아주 조금이라도 뭐 아는 것이 없느냐구?” 내가 이렇게 물어보자 그 녀석을 그 때에야 얼굴을 굳히고 이렇게 말하며 입을 다물었다. “이봐,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한 것도 네가 이 세계의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야. 그리고 나는 그런 깊은 문제까지 알 수 있는 존재가 아니란 말이야. 아무튼 나한테 약속 한 거나 줘. 일어나면 맛있는 것을 해 준다고 하고는 말만 시키고 먹을 건 언제 줄거야?” 이걸 그냥...콱! 하지만 그렇다고 안 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그냥 준다면 왠지 손해 같기 도 하고(사실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 만으로도 충분히 음식을 대접하고도 남는 것이지만...), 나는 일단은 음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다른 일행들은 모두들 내가 갑자기 음식을 준비하기 시작하자 다들 구미가 당기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푸짐하고 맛있는 요리를 준비했다. 일단은 제일 자신있고 간단한 수제비.(이게 만들다 보니 제일 푸짐하고 맛있고 간단한 요리였다.) 그리고 역시 빠질 수 없는 소금구이(참기름장이 중요하다.). 그리고 김치(더해서 깍두기도) 하지만 나는 요리가 거의 되어갈 무렵에 군침을 삼키는 일행을 무시하고 다시 녀석 을 돌아 보았다. 지토의 말로는 녀석을 그 노옴이라고 부른 이유는 놈-者의 그 놈이 아니라 노옴(gnom)이라고 한다. 노옴이 종족의 이름이라는 것이다.(내가 알기로는 흙의 하급 정령의 이름으로 알고 있었는데..) 아무튼 나는 노옴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 노옴, 그런데 내가 음식을 주면 너는 무엇을 줄거지? 내가 아무리 잠결에 약속을 하기는 했지만 그냥 얻어만 먹는다면 너도 미안하지 않을까?” 여기에서 나는 일행일 알아 들을 수 있는 말을 사용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고, 일행들 중에서 넥스와 유소가 당연한 말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것도 말 할 필요가없다. 그 순간에 노옴도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래, 니 말도 맞다. 그럼 뭘 원하지? 적당하다면 내가 들어주겠다.” “이봐, 노옴 나는 내가 만든 요리를 대접하는 거잖아. 하지만 나는 니가 뭘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하거든. 그러니까 니가 알아서 주면되. 뭐든 주고 받는 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나는 이렇게 말했고, 유소와 넥스의 표정에 불만이 스쳐간 것은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래 그 말이 맞다. 그럼 네가 뭔가를 만들어서 나에게 주니까 나도 내가 만든 것 들 중에서 몇 가지를 주겠다. 물론 음식을 먹어보고 어떤 것을 줄 것인지는 내가 판단 하겠다. 너의 솜씨에 어울리는 선물을 하겠다.” “좋았어, 노옴. 말이 통하는구나.” 그렇게 우리들의 거래는 끝났고 우리들의 음식 쟁탈전은 다시 시작되었다. 상당한 양을 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연륜의 쉬벡까지도 점잖은 태도의 완고한 쟁탈전 참여가 있었던 식사는 오래지 않아서 끝이 났다. 아마도 입이 하나 더 늘었다는 데에서 오는 중압감 탓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예상은 맞았다. 처음에는 맛을 음미하던 노옴도 사람들의 속도를 보더니 음식을 넘기는 속도를 빨리 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식사를 들고 있는 것도 노옴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그릇에 음식을 담은 이후로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맛을 음미하며 음식을 삼키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노옴의 그 모습(내 음식을 저토록이나 진지하고 맛있게 먹어주다니)에 흠뻑 반하고 말았다. 그 모습에 비한다면 점잖은 쉬벡도 배고픈 강아지가 밥먹는 모습이라고 해야 할 정도였다. 여기에서 역시 넥스와 유소는 말하지 않는다.(실제로 비교할 무엇인가가 없다.) 우리 일행은 모두들 조용히 노옴의 식사가 끝이 나기를 기다렸다.(이 순간에 그것을 방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말 경건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어울리지 않는 노옴이었다.) 그리고 식사는 끝이 났다. “정말 오랜만의 성찬이었습니다. 루탄씨. 아주 맛있는 식사였습니다.” 나는 갑작스런 노옴의 존대에 말을 잇지 못해 버벅거렸다. “아, 아니 왜 갑자기 존대를... 이거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거야 당연한 것이지요. 우리들은 장인에게 예의를 다합니다. 당신은 적어도 이 음식들로 장인이라는 소리를 들을 자격이 있습니다.” 노옴은 다시 한 번 칭찬을 했다. 그리고 “잠시만 기다려 보십시오. 제가 미흡하지만 식사에 어울리는 선물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그리고 그 말과 함께 노옴은 뒤로 이어진 동굴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우리들이 노옴이 사라진 뒤로 설거지를 마치고 짐을 정리하고 있을 무렵에 노옴은 다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는 등 뒤로 커다란 상자를 들고 오고 있었다. 그 상자는 적어도 넥스의 덩치 보다는 커 보이는 것이었는데 상당히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진 것이었다. ‘저 속에 보물이라도 잔뜩 들어 있는 것일까?’ 하지만 정작 노옴이 그 상자를 열었을 때 나온 것은 무구와 장신구들이었다. “이건 제가 만든 물건들 중에서 작품이라고 자부하는 것들입니다. 예전에 신계에 납품되던 것들입니다. 그것도 신계의 대장군급이 아니라면 생각도 하지 못하던 물건들입니다. 자세히 보시고 하나씩만 가지십시오.” “그럼 우리 일행의 수가 4명이니 4개를 가져도 된다는 말이야?” 나는 노옴에게 정확을 기하기 위해서 물었다. “일행은 아홉이지요. 루탄님과 5정령, 그리고 저 세분. 하지만 정령들을 위한 준비 는 제가 따로 했으니 한 분이 한 가지씩의 물건들을 가지십시오. 하지만 저에게 도움 을 구하지는 마시고 알아서 마음에 드는 것들을 가지십시오. 물건을 고르시면 제가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일행에게 노옴의 말을 전했고 일행은 기쁜 얼굴로 상자에 고개를 밀었다. 처음 물건을 고른 것은 역시 넥스였다. 언제나 처럼 단순하게 행동하는 것이다.(때로는 상당히 생각을 하고 행동하는 때도 있는데 보통때에는 절대 아니다.) 넥스가 고른 것은 건들렛이었다.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수수하게 생긴 외장을 지닌 건들렛은 평범해 보였다. “원래 평범한 것이 뭔가 있는 법이라구. 더구나 유소가 건들렛을 하고 있어서 나도 하고 싶었거든.” 역시 단순한 이유다. 다음은 역시 유소였다. 유소가 선택한 것은 목걸이였다.(역시 여자는 여자다.) “이거 꽤나 멋지지 않아? 이것봐 이 중앙에 있는 거. 뭔가 들어 있는데 움직이고 있어. 예쁘잖아. 난 이런 보석은 본 적이 없어. 이거 비쌀 것 같다.” 역시.... 그리고 마지막으로 쉬벡이었다. 하지만 쉬벡은 쉽게 선택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망토 하나와 반지를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허허, 이런 이 둘다 마음에 드는데... 선택하기가 어렵군.” 그래서 나는 하는 수 없이 쉬벡에게 말했다. “그럼 그 둘 다 가지세요. 제 몫으로 드리면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나는 노옴에게 설명을 부탁했다. “노옴 저것들 어떤 물건인지 설명좀 해 줄래?” 그러자 노옴이 내게 물었다. “루탄님은 왜 안 고르지는지요.” “저는 쉬벡이 두 개를 고르셨으니까....” “아~! 그건 원래 망토와 반지가 한 세트여서 그런 겁니다. 그러니 루탄님도 하나 골라 보세요.” 나는 그 말이 진짜인지 거짓인지는 몰랐지만 정령이 거짓말을 한다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상자로 다가다서 물건들을 살폈다. 공짜라는데... 하하하 그러다가 나는 그 상자 안쪽에 세겨진 글씨와 그림들이 있는 것을 보았다. 상자 안쪽에는 예상 밖으로 고어로 된 한글과 그림들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상자 곁에 쪼그려 앉아서 그 글씨들을 읽어 보았다. 그것은 아무리 보아도 한글의 고어체였다. 나는 노옴에게 물어 보았다. “노옴 이 상자 말이야. 이것도 노옴이 만든 거야?” 그러자 노옴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 상자는 내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 상자는 예전에 우리 일족이 짐을 담아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저도 오늘 이곳에 이 물건들을 들고 오기 위해 쓰는 겁니다. 바구니 같은 용도로 쓰는 것이지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는 저도 모릅니다.” “그럼 여기 물건들을 가지는 대신에 이 상자를 안쪽이 잘 보이도록 분해해 주는 것으로 선물을 대신하면 안될까? 이 안에 써 있는 글에 흥미가 있어서 말이야.” 나의 이 말에 반응을 먼저 보인 것은 쉬벡이었다. “그 안에 글씨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아까 볼 때 이상한 문양들과 사람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보기는 했지만 설마 그것이 글이었다니...” 그리고 내 말을 들은 노옴은 조금 화가 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상자 정도는 그냥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권하는 물건 중에서 한 가지를 가지십시오.” 아마도 내 행동이 노옴의 장인 기질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나는 군말 없이 상자 속의 물건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정말 마음에 드는 녀석을 발견했다. 그것은 팔뚝 전체를 감싸는 팔찌였다. 그것도 한 벌로 되어 있었다. “난 이게 마음에 드는데?” 그렇게 물건들을 정하자 노옴은 투덜거리면서 물건들을 들고 사라졌다가는 금방 다시 상자를 들고 나타났다. 아마 아까는 물건들을 고르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던 모양이었다. 그리곤 내 앞에서 상자를 분해하면서 각자가 선택한 물건들에 대한 설명을 했다. 넥스의 건들렛은 실제 보기처럼 평범하다고 했다. 다만 그 건들렛을 끼고 있으면 어떤 무기를 들던지 뇌전의 마법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 다르다는 것 뿐. 아마도 넥스의 무기에 살짝이라도 스치면 당장에 전기 통구이가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쉬벡의 망토는 하루 최대 1시간 정도 육체를 이공간으로 옮겨놓는 기능을 한다고 했다. 그렇다고 사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닌데 이를테면 홀로그램처럼 남아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는 어떤 물리적인 행동도 할 수 없었다.(단 이동은 가능하다. 쉽게 이야기하면 홀로그램 상태에서 원하는 지역까지 안전하게 이동하고 몸을 불 러오면 되는 그런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순간 순간 그런 능력을 나누어 쓸 수 있다 는 것이 더욱 매력이 있는 것이었다. 내가 칼을 아무리 휘둘러도 그 순간만 육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가 되돌리면 되는 것이니까 얼마나 편할까.... 단지 문제는 내 칼이 몸 속에 들어 있는 상태에서 몸을 되돌린다면 문제가 되기는 하겠지만.... 그래서 필요한 것이 그 반지라고 한다. 반지는 홀로그램 상태일 때 몸 속에 무엇인 가 위험 요소가 있으면 의지에 의해서 육신을 불러 오는 것을 거부하는 역할을 한다 는 것이다. 뭐 그래도 자살을 하고 싶어서 심장 부근에 칼을 넣어두고 억지로 육신을 소환하면 반지의 힘을 이길 수 도 있다고 하지만 보통의 경우에는 그것이 안 되는 것 이다.(즉 무의식적인 자살을 방지하기 위한 안전 도구라고나 할까...) 그리고 내가 선택한 팔지 두 개는 무협에 흔히 나오는 연검이었다. 원래는 마력을 넣 어서 풀어내게 되어 있었지만 몸 속의 기운을 끌어 올리는 것으로도 풀리게 되어 있었다. 더더욱 좋은 것은 이 검이 자체적으로 마법을 쓸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다. 그것도 그 사람이 지닌 마력의 종류에 따라서 마법을 쓸 수 있게 해 주는데, 검이 두 개이다 보니 서로 상반되는 마력을 부여하면 동시에 상반되는 마법을 쏘아 보낼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마법의 위력은 칼이 지닌 기본적인 힘 이외에는 외부에서 주입되는 마법력 에 좌우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소의 목걸이. 이 목걸이에 대해서 노옴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말을 했다. “그 목걸이는 원래 내가 만든 것이 아닌데 어쩌다가 실수로 이 상자 속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 목걸이는 원래 신계의 大神께서 만드신 것인데 그 효과는 잘 모릅니다. 어떤 소원이라도 들어준다고 하는데 그게 그 목걸이가 빛을 낼 때에만 그게 가능하다고 하는군요. 하지만 그 빛이 너무도 짧게 빛나서 누구도 그 빛이 빛나는 순간에 맞추어 소원을 빌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목걸이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없군요.” 그렇게 우리 일행에게는 아주 이상한 물건들이 보너스로 주어졌다. 하하하 그리고 노옴은 내 정령들을 위한 것이라면서 반지 하나를 선물로 주었다. “이 반지는 정령들이 머물 수 있는 집의 역할을 할 것입니다. 앞으로 정령들은 이 반지 속에서 지낼 것입니다. 이 반지들 속은 작은 정령계와 같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의 여행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루탄님이 소환한 정령들은 다시 정령 계로 돌아가지 않고 이 반지 속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렇다고 너무 많은 정령들을 소환해서 넣지는 마십시오. 어차피 공간 크기라는 개념이 없는 정령계라곤 해도 그 반지안에 정령왕정도의 존재라면 손가락 수 이상은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그 말에 급히 노옴의 손가락 수를 헤아려 보았다. 휴~! 다행이었다. 노옴의 손가락은 다행히 인간들 보다는 하나 많았던 것이다. “그 손가락 숫자는 노옴의 손가락 숫자야 아니면 내 손가락 숫자야?” 내가 이렇게 물어보자 노옴은 생각을 못했다는 표정으로 “그, 그야 물론 제 손가락 수입니다.” 라며 말을 더듬었다. 하하 반은 정령이라면서 말을 더듬기도 하는군. 하하하 “대충 들어서 앞으로 정령들의 지역으로 들어오실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왠만하면 싸움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만약에 싸움이 일어난다고 해도 저는 도와드릴 수가 없습니다. 어차피 저는 전투 종족이 아니기 때문에 싸움에서 뵐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몸조심하십시오. 상급정령들도 무섭지만 정령왕은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 니다. 그리고 정령들도 자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시고 대화가 가능한 존재임 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급이 높을수록 자아가 깨어나기 쉽다는 것도 아울러 알려 드리지요.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그리고 아까 보았던 그 음식들은 앞으로 제 가 열심히 노력해서 만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참 그리고 그 물건들 은 일단 주인이 정해진 이상 그 주인 이외의 사람에게 효과가 없습니다. 그걸 알아두시기를....” 그렇게 말을 마친 노옴은 동굴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노옴이 서 있던 자리에는 노옴에 의해서 해체된 상자가 놓여 있었다. 어쩌면 지심목이 이야기했던 사자와 같은 녀석이 아니었을까?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각 세계의 녀석들이 접근해 올 것이라고 하더니.. 아무튼 지심목의 씨앗들이 있으니 어쩌면 조금은 쉽게 일이 해결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하하 정말 재미있는 일이다. 어쩌면 쉬벡과 넥스의 여정이 곧 내가 가야 하는 여정과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거기다가 지심목의 씨앗이 다섯이 생긴 것이 이제 보면 이해가 가는 것이다. 지금 이 세계에는 인간계(좀 망가진 모습이기는 하지만) 이외에도 4개의 세계가 더 있는 것이다. 그러니 4개의 씨앗이 남아 있는 것과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지 않은가 하하하. 쩝... 우리들이 굴 밖으로 나왔을 때는 막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다. 상당히 오랜 시간을 굴 속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우리들은 서두르지 않았다. 일단은 넥스와 쉬벡 그리고 내가 얻은 물건들을 익숙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유소가 얻은 목걸이는 따로 쓰는 연습을 할 필요는 없는 것이었지만, 쉬벡의 망토는 여러모로 실험을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고 괴물들과 싸우면서 연습을 할 수는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유소 가 공격을 하면 그것을 홀로그램이 되면서 피하는 연습을 시작했고, 의외로 의지가 발현되는 순간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쉽게 적응을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넥스의 건들렛도 별다른 연습이 없이 평소대로 무기를 들고 싸우기만 하면 알 아서 무기들에서 전격계열의 마법들이 발동되었기 때문에 오랜 연습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다만 앞으로 사냥을 할 때는 그 건드렛을 쓸 수 없을 것 같았다.(죽은 괴물들은 하나 같이 겉은 멀쩡해도 속은 다 타버렸다. 먹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새로 얻은 쌍검은 처음에 팔에서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고민을 했지만, 오행기를 주입시키는 것으로 해결이 되었고, 그 이후에는 검에 기운을 불어 넣는 양을 조절하는 것이 문제였다. 너무 많은 기운을 쏟아 넣으면 멋대로 마법이 날아가기 때문에 조심해야 했던 것이다. 그것도 어느 정도는 내 의지와 연결이 되는 모양이어서 별다른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다만 내가 전력으로 기운을 쏟아 넣었을 때 어떤 일이 발생할지는 알 수 없었다.(시험을 해 보지 못했다.) 그리고 내가 낀 반지는 처음에는 옅은 푸른색이었는데 정령들을 소환해서 넣은 뒤에는 색이 검은 색이 되어서 좀 이상한 반지가 되었다. 뭐 그래도 정령들을 소환해 내면 조금씩 색이 옅어지기는 한다. 평소에 검은 색이라 보기에 좀 그렇기는 하지만...(그것도 나름대로 멋있기는 하다.) 그런 이유로 우리들은 산을 향해서 나가는 동안 연신 닥치는 괴물들을 때로는 반가워 했다. 정말 연습 상대가 무궁무진하게 많은 것이다. 다만 유소가 자기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고 투덜거리기는 했지만(실제로 이제는 유 소가 무력으로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쉬벡 마저도 유소가 아무리 날뛰 어도 무기에 맞지를 않으니 소용이 없다. 뭐 한 두어시간 공격하다 보면 쉬벡도 더 이상 망토의 힘을 쓰지 못하겠지만, 그 동안에 쉬벡이 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신기하게도 홀로그램 상태에서도 마법을 준비하는 데에는 별 무리가 없는 모양이었다. 홀로그 램상태에서 마법을 준비하고는 신체를 소환하는 즉시 마법을 날린다. 그러니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다. 쩝..) 그래도 언젠가는 멋진 소원이 이루어 질 것이라면서 별로 낙담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실제로 특별한 아이템이 없이도 싸움 하나는 끝내주는 여자니까... 내가 가진 검이나 넥스의 건들렛에 깃든 힘이 떨어지거나 하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에 우리들의 속도는 조금 빨라졌다. 나도 내 기운을 별로 쓰지 않으면서 검이 지니고 있는 기본적인 힘을 쓰면서도 괴물들을 상대하는 데에 별로 무리가 없었다. 그렇게, 멀어만 보이던 산이 이제 제법 가까워지고 있었다. “휴~우. 이제 내일이면 가파른 산행이 시작되겠군요. 이제는 괴물들의 수도 좀 줄어 들까요?” 나는 한바탕 괴물들을 쓰러뜨리고 난 후에 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겠지요. 일단은 산 쪽에는 울창한 숲이 없고, 위로 올라갈수록 날씨가 변할테 니 여기처럼 이렇게 많은 괴물들이 있지는 않을 겁니다. 뭐 숫자가 적어진 만큼 강한 녀석들이 나올지도 모르지만...” 쉬벡이 옆에서 거드는 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바라보이는 산은 여전히 허리 위로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가까이 갈수록 거대한 모습이었다. 거기다가 옆으로 길게 퍼진 모습으로 양쪽 어느 쪽으로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어쩌 면 우리들을 산이 아니라 거대한 병풍 앞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가지게 했다. 우리들의 산행은 점차 힘들어지고 있었다. 산 아래에 도착해서부터 괴물들의 출연 빈도는 낮아지고 새로운 괴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단은 첫 변화가 날아 다니는 녀석들이 많아진 것이다. 지상전에서 공중전이 된 것인데, 녀석들이 왠만한 공격에는 피해를 입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넥스와 유소가 활로 무장을 했고, 나는 여전히 칼(마법은 공중으로도 잘 나간다.) 쉬벡은 여전히 빈 손이다. (들고 다니는 막대기가 있지만 공격용은 아니니까.) 하지만 넥스의 화살이나 유소의 화살이 공중에서 공격하는 녀석들에게 큰 위협이 되지는 못했다. 덕분에 나와 쉬벡의 수고가 커졌다. 물론 지상형 괴물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까지와는 사뭇 다른 덩치를 자랑하는(거의 코끼리 세 마리 정도 되는 덩치) 변신 맘모스 같은 녀석이나 돌연변이 사자, 불덩이를 날리는 가고일(이건 정말 돌덩이같다. 그런데 날지 않고 걸어다닌다. ㅡ.ㅡ;;) 이런 녀석들은 넥스와 유소의 몫으로 남겨주었다. 하하하 하지만 그 역시도 이제부터는 어려울 것 같다. 왜냐하면 이제부터 시작되는 길은 거의 수직에 가까운 암벽인 탓이다. 하지만 이 길을 어떻게 올라가느냐가 문제였다. 이런 수직벽을 타고 올라갈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하라면 못 할 것도 없다 싶지만 우리 일행 전체가 그렇게 올라 가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우리들은 그 암벽 앞에 모여서 회의를 시작했다. “어쩌지요? 이대로 올라 갈 수는 없을 것 같은데...” “그러게 말입니다. 이 상태로는 더 나갈 수 없겠군요. 조금 옆으로 나가면서 혹시 길이 있는지 찾아 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아니면 정령들에게 길이 있는지 알아보라고 부탁하는 것도...” 역시 쉬벡은 날카롭다.(아니면 내가 점점 바보가 되는 것이거나...) 나는 군말 없이 풍아와 지토에게 양 옆으로 길이 있는지 알아보게 했다. 그리고 제법 높이 올라와서 낮아진 기온을 생각해서 서둘러 불을 피우고 야영을 준비했다. “오늘은 날도 늦었는데 일단은 여기에서 쉬고 내일 출발 하도록 하죠? 그리고 오늘은 특별히 술도 약간씩 마시기로 하고요... 어떻게 생각해요?” 나는 오랜만에 느긋하게 쉬고 싶은 마음에 제안을 내었다. “하지만 루탄, 여기는 언제 괴물들이 나올지 모르는 곳이란 말이야. 그렇게 안전하다고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그래? 하지만 내 기억으로는 이 절벽 앞에 오기 얼마 전 부터는 괴물들이나 그 괴물들의 흔적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나는 넥스의 말을 반박했다. “그래, 이 근처에서는 괴물들의 흔적을 본 적이 없어. 루탄의 말이 맞는 것 같아.” 유소도 내 말의 찬성을 표시했다. “하지만 다른 괴물들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무서운 녀석이 있다는 말이 아닐까?” 넥스도 지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은 보이지 않는 것을 걱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나는 한 마디로 이야기의 끝을 맺었고 그 때 정찰 갔던 정령들이 돌아왔다. ‘넥스 그럼 넥스가 경계를 해줘. 우리는 좀 쉬면서 맛있는 것도 먹고 충전을 해야겠으니까.“ 하하하 넥스는 그 말에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나만 노려보고 있었다. “그렇게 노려보면 밥이고 뭐고 없어.” 히히 한 순간에 꼬리 내리는 넥스. 캬캬캬 정령들이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왔다. 오른쪽으로 반나절 정도 거리에 산을 갈라 놓은 길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길이 어디로 통하는지는 알아보지 않았다. 정령들은 시키지 않은 짓은 하지 않는다.(나도 저번처럼 상급정령과 만나는 불상사가 일어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직접 알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 밤은 옹기 종기 모여서 음식과 술을 마시고(절대 취할 정도로 마신 것은 아니다. 기온이 낮았기 때문에 적당한 정도로만... 안 먹겠다던 넥스가 좀 많이 마신것 같기는 하지만...) 정령들과 쉬벡의 마법을 믿고 잠이 들었다. 뭐 잠결에 유소가 떠드는 소리를 들은 것 같기는 하지만 아마도 피곤해서 잠꼬대를 한 것 같다. 쩝... 다음날 아침 우리들은 정령들이 발견한 계곡을 향해 출발했다. 정말 장관이었다. 끝도 보이지 않는 산봉우리(당연하다 위는 구름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를 반으로 쪼개 놓은 모습의 계곡이었다. 그 안쪽으로도 제법 짙은 안개가 깔려 있어서 얼마나 깊은 곳인지 아니면 끝이 뚫려있는지 어떤지도 몰랐지만 일단은 계곡으로 들어가자는 데에 이견은 없었다. 계곡은 별로 넓지 않았다. 그리고 굴곡도 없었다. 누가 보면 정말 반듯하게 칼로 잘라 놓은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곳이었다. 얼마쯤 걸어들어가자 이제는 양쪽이 벽으로 된 건물 속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물론 짙은 안개가 문제라면 문제였다. 때문에 우리들은 서로의 허리를 밧줄로 묶어서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괴물이 나타나면 단체로 저승사자를 만날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안개가 짙어져서 앞으로 뻗은 손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여서 방법이 없었다. 나처럼 시력이 좋은 사람도 앞서가는 넥스와 뒤에 오는 쉬벡은 보였지만 끝에 오는 유소는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다행인 것은 길은 곧게 뻗어 있었고 계곡의 폭이 그다지 넓지 않아서 길을 잘못 들어 갈 염려는 없다는 것과 괴물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들은 점차 지치기 시작했다. 허기를 느끼고(점심) 다시 허기를 느끼고(저녁) 졸음을 느끼고(밤)... 처음에는 별로 말이 없이 걷다가 점점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커지더니 나중에는 갖가지 소리로 떠들다가 또 조용해지고 있는 분위기였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어떤 괴물들 보다도 이 길과 안개가 더 무서운 상대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쯤 “루탄님. 아무래도 이 길은 이상한 것 같군요. 아무리 살펴도 무슨 마법이나 다른 흔적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만... 이렇게 곧게 뻗은 길이 이토록이나 길게 이어지다니...” 아마도 이 때가 계곡 안에 들어온지 이틀 정도는 지난 것 같은 때였다. “쉬벡, 지금 그런 말씀을 하셔도... 이상하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다른 방법이 있는것도 아니고... 뭐 위험은 없으니까요.” 나는 쉬벡에게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나도 느끼고 있었다. 넥스와 유소는 점차 이상한 증세를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정신병원이 원래 하얀 색으로 칠해 놓는다고 했던가? 그런데 사실은 하얀 색을 칠해진 방안에서 다른 색을 보지 못하고 오래 있으면 정신이 오히려 이상해 지기도 한다는데.... 그래서 그런지 유소와 넥스도 점차 히스테리나 발작을 일으키려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루타님은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이 이렇게 반복되고 또, 변화가 없는 곳에 오래 있다보면 정체성을 잃기 쉽습니다. 사람은 뭔가 변화가 있어야 하지요. 나이를 먹은 저도 조금은 무료함을 넘어서 짜증스러움과 답답함, 그것이 변형 된 분노 같은 것이 가슴에 쌓이고 있는데 아무리 수련을 한 넥스나 유소라고 하더라도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쉬벡이 이렇게 말을 했을 때, “정말이야 이러다가는 미치겠다구. 답답하고 짜증나고 화나고... 뭐든 하고 싶단 말이야.” “그래, 그래. 나도 나도. 아주 미치겠어.” 이 둘이 누구인지는 일단 말 안 한다. 하지만 대책이 있어야 했다. “그래? 그럼 하는 수 없지 뭐. 일단은 지겹지 않게 해 주면 되는 거야?”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화아를 소환했다. 그리고 화아에게 기운을 최대한 발산해서 화아를 중급정령으로 변신 시켰다. “화아 이 주위에 있는 안개들을 좀 증발시켜버려.” 하지만 화아가 증발시킨 자리에는 다시 안개가 밀려드는 악순환이 반복 되었다. 어쩔 수 없이 풍아를 소환해서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안개들을 차단시키고 안쪽을 화아에게 건조 시켰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들의 만찬을 준비했다. “일단은 맛있는 것을 먹고 보자. 그리고 좀 쉬면서 서로서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거야. 뭐 서로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이야기를 하다보면 지루한 것도 없어질 테고.. 그렇게 하다가 좀 힘이 나면 또 길을 가고... 참 우리가 가던 방향이 이쪽이지? 가던 방향은 표시를 해 둬야 나중에 잊어버리지 않지... 아무튼 그렇게 하다보면 언젠가는 이 길이 끝나지 않겠어?” 그렇게 해서 하얀색 벽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우리들의 만찬이 시작되었다. 나는 내가 이 세계에 와서 했던 거의 모든 음식들을 쏟아 놓았고, 심심해진 넥스와 유소도 요리에 동참을 했다. 그리고 쉬벡도 그 동안 숨겼던 비장의 무기라면서 정신을 맑게 하는 차를 준비했다. 나는 창고에서 맥주 한 통과 쉬벡을 위한 와인 한 병. 그리고 넥스를 위한 그 이상한 술을 꺼내 놓았다. 어차피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낮과 밤의 구별이 없었고, 아무런 변화도 없는 곳에서의 축제, 나는 우리 시대의 노 래를 (난 정말 노래를 못해서 동요같은 것들을 들려 주었다. - 푸른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될 수 있으면 잘 부르려고 목청을 가다듬었고, 넥스는 자기가 북영주(북쪽자치령의 영주 = 귀족)의 조카가 된다고 했다. 뭐 그건 예전에 들은 이야기였다. 어려서부터 북쪽 자치령에서 자라서 어쩔 수 없이 괴물들과의 싸움에 익숙해 졌고, 또 자연스럽게 검술을 익혔다고 했다. 그러다가 20세가 되면서 그렇게 싸움만 하면서 살 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이 나라를 돌아보기 위해 여행을 떠났고, 동서남북을 가로막은 성들과 그 성 너머에 있는 불모지대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뭐 누구나 이 나라 사람이라면 한 두 번 그런 생각을 하지만 넥스는 언젠가 꼭 이 불 모지들을 탐험하고야 말겠다는 계획을 세웠다고...(아무리 생각해도 인간들의 역사란 이런 무모함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그리고 동쪽 자치령에서 자리를 잡고 동료들을 사귀던 중에 쉬벡을 만났다고 한다. 쉬벡은 오직 마법을 연구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 일생을 바칠 결심을 했던(그게 언제였는지는 이야기 하지 않았다.) 사람이었다고...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사람들을 많이 사귀지 않고 스승 밑에서 열심히 수련만을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스승이 죽고 난 후 자신의 마법을 실험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실험비를 마련하기 위해 동쪽자치령에서 용병들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고...(사실 마법사는 다른 용병에 비해서 훨씬 많은 보수를 받았다. 꽤 쓸모가 많은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더 이상 자신의 마법이 발전하 지 않는 다는 것을 느낀 쉬벡은 불모지대 안에는 어쩌면 자신의 마법을 발전시킬 단 서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넥스를 만난것이라고... 하지만 유소는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젊은 시절(지금도 별로 늙은 나이는 아 닌데... 스물 여섯이라면서...)에는 다른 용병들과 함께 용병 생활을 했었고, 얼마전 까지는 쥐덧여관의 주인 지금은 불모지대를 탐험하는 탐험가. 나중에는 뭐가 될지 모 른다. (솔직히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면 내가 이런 자리를 만들어서 무료함을 달래 려고 했던 취지에 맞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꼬치꼬치 물어보자니.. 안 그래도 현재 상황이 정신이상에 가까워지고 있는 형편이라 뒷 감당이 안될 것 같아서 참았다.) 그리고 나는 내 이야기를 조금만 들려 주었다. 이 세계의 탄생부터... 그러니까 이 세계가 인간계, 신계, 정령계 이렇게 있었는데, 어느순간 신계가 다시 악마계, 천사계, 신계 이렇게 나누어지면서 그 전에 있던 인간계가 차원의 비틀림으 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 후에 약 2500년 전에 이 땅에 다시 인간계가 만들어 졌 다. 그런데 문제는 정령계와 신계, 천사계, 악마계의 힘이 약해져서 인간들의 세상이 균형있는 발전을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나는 그 세계의 균형을 맞추어주어야 할 운명을 타고 이 땅에 왔다. 캬캬캬캬 이 순간에 나는 인간 뿐만 아니라 이 세계 전체의 영웅이 되는 것이다. 내가 이야기를 늘어 놓고 있을 때, 이미 유소와 넥스는 어느 정도 취기가 올라 정신이 없는 모양이었지만, 쉬벡만은 또렷한 정신으로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럼 루탄님이 인간계를 제외한 다른 세계의 균형을 맞출 힘을 가지고 계시다는 말씀입니까?” “아니요, 제가 그 힘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제가 그 세계에 가면 자연스럽게 그 힘들이 그 세계에 생겨날 것입니다. 저는 일종의 심부름을 하는 것이죠. 균형의 배달이라고나 할까요?” “그럼 이 인간계에도 그런 역할을 하러 오신 겁니까?” “글쎄요. 전 원래, 차원의 비틀림 속으로 사라져버린 그 인간계의 사람이라서 이 곳 에 왔다고 해야할지는 모르지만 일단 이 인간계에 그 균형의 씨를 뿌려 놓은 것은 맞으니까 그렇게 볼 수 있겠군요.” “그 균형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모습으로 맞추어지는 것입니까?” “하하 쉬벡, 저도 그것 까지는 알지 못해요. 일단 저는 그저 심부름꾼에 불과하거든요.” “그럼 루탄님의 그 힘은 그 심부름을 위해 받은 것이겠군요.” “음... 그건 아닌데.. 제가 힘이 있어서 심부름꾼이 되었다고 해야할 것 같은데.. 뭐 어쩌면 그 모든 것이 어떤 안배에 의한 것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만.. 하하 쉬벡 저 도 보통 인간일 뿐이어서 그렇게 깊이 있는 질문에는 답을 해 줄 수가 없어요. 하하하.” 그리고 우리들은 서로의 생각에 잠겨서 더 이상 의미 있는 이야기를 주고 받지 못했다. 넥스와 유소도 마음껏 취한 모양이었다. 나도 더 이상 진전되지 않는 이야기판 보다는 술판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먹고 마시고 떠들다가 우리 일행들은 모두 잠이 들었다. 그리고 우리들이 잠에서 깨어 났을 때, 일행들을 짓누르고 있던 무게들이 많이 걷혀져 있었다. 한동안은 다시 걸어도 지장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우리들은 의식적으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장난을 하면서 무료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덕분인지 다시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처음 같은 위기감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변화가 왔다. “이봐 넥스, 바람이다.” 뒤에서 유소가 소리를 질렀다. “바람이 불어 오고 있다. 앞쪽이야.” 나는 바람의 정령을 부리기 때문에 바람에 민감한 편인데도 느끼지 못하는 것을 유소는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우리가 서둘러 앞으로 걸어가자 함참 뒤에 우리들은 바람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안개가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머리카락이 날리는 것도 느낄 수가 있었다. 아울러 살을 에이는 듯한 추위도.... 우리가 앞으로 나가면 나갈수록 바람은 세어졌고, 아울러서 한기도 강해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앞쪽에 그 바람의 정령과 얼음의 정령이 있는 모양이군. 정말 드럽게 춥네.” 넥스가 투덜거렸고, 다른 일행들도 동감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화아를 소환했다. 얼음의 정령이 어떤 정령인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화아를 가운데 두고 한기에 대항하기로 한 것이다. 화아의 기운은 어느 정도는 우리 일행의 추위를 막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거센 바람만은 막아 줄 수가 없었다. 결국은 나도 풍아를 소환해서 바람에 대항하게 했다. 일단은 상급의 정령이 어떤 녀석인지 모습이라도 봐야만 대화를 하던지 말던지 할 것 같았다. 그렇게 한 동안 앞으로 나가던 우리는 드디어 안개를 벗어났다. 안개를 벗어났다기 보다는 너무나 낮은 기온 탓에 안개가 얼어버린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정령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바람의 정령은 거의 20여 미터는 되어 보이는 키에 회오리로 몸을 가린 모습이었고, 얼음의 정령은 설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풍아는 상급정령의 힘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흔들리는 모습이었다. 나는 최대한 풍아에게 힘을 실어주며 바람의 상급정령에게 말을 걸었다. “이것봐, 바람의 상급정령, 잠시만 이야기좀 하자구. 이렇게 찾아온 손님을 박대하는 경우가 어디에 있단 말이야? 그리고 얼음의 정령도 마찬가지. 잠시만 기다려봐.” 나는 있는 힘을 다해서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정령들의 힘은 줄어들지 않았다. “이봐, 너희들 나는 너희 정령계의 균형을 맞춰주기 위해서 온 사람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말 좀 들어보고 실력행사를 해도 하란 말이야. 미치겠군.” 그제서야 정령의 입에서 말소리가 흘러 나왔다. 하지만 그 말은 내가 예상한 것과는 전혀 달랐다. “인간, 너희는 그 곳에서 나올 수 없다. 돌아가라. 돌아가지 않는다면 영영 이곳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쩝... 하는 말하고는 저번에 풍아에게 했던 말과 전혀 다른 것이 없는 것 같군. “이봐, 뭔 말이 통해야 말을 하지. 그러지 말고 너희 위에 있는 정령왕중 누구에게 라도 이야기를 좀 해봐. 정령계의 무너지는 균형을 맞출 사람이 찾아 왔다고 전하란 말이야.” 하지만 역시 바람의 정령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같은 말 뿐이었다. “인간, 너희는 그 곳에서 나올 수 없다. 돌아가라. 돌아가지 않는다면 영영 이곳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정령의 힘은 강도를 더했다. 한 순간 일행들 전부가 휘청거릴 정도였다.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물러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아무래도 저 정령들은 이미 받은 명령만을 수행하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상급정령들도 자아가 깨어나지 않은 상태인 모양이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대항을 하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비좁은 계곡 안이어서 바람이 다른 곳으로 빠져 나가지 못하고 몰아 오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방법이 없었다. 거기다가 얼음의 정령이 함께 있었기 때문에 바람의 힘과 얼음의 기운은 정말 살떨리게 만드는 것이었다. 벌써 조금씩 옷 끝단이 얼어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자리에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이제부터는 정령들의 싸움이었다. 나 혼자라면 칼을 들고 설 보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다른 사람들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어디에도 다른 사람들이 몸을 피하고 있을 곳이 없었던 것이다. “모두 내 뒤로 가서 앉으세요. 어차피 서 있는다고 나아지는 것은 없으니까.” 그리고나서 나는 온 몸의 오행기를 운행시켰다. 처음 정령들이 변신을 했을 때 보다는 몇 배 강해진 힘이었다. 그 동안에 지심목에서 받은 수 많은 기운들을 거의 오행기에 합쳤기 때문에 그런 성과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기운들을 3중에 2는 풍아에게 1은 화아게게 보냈다. 같은 바람과 바람. 그리고 상반된 불과 얼음의 싸움인 것이다. 힘겨워하던 풍아도 점차 기운을 차리고 모습이 짙어지기 시작했고 검붉게 변했던 화아의 몸도 선홍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풍아와 바람의 상급정령 사이에서는 열풍과 한풍이 거대한 힘을 부딪히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렇게 부딪힌 힘은 위로만 솟구쳤기 때문에 뒤에 있는 우리들에게는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그 싸움은 너무도 격렬한 것이었다. 사방 어디로도 바람이 몰려 가지 못하고 오직 위로만 빠져 나가는 상황에서 두 정령에게서 생성된 바람은 끝없이 상대방을 향해 몰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천천히 풍아가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전에 계곡을 넘어 올 때와 같은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만약에 풍아가 상급 정령으로 변신하지 못한다면 이 싸움은 질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천천히 풍아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지만 아직도 중급 정령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표정없는 두 정령이 서로 상대를 향해서 다가가는(실제로는 풍아만 앞으로 나가고 있었지만...) 모습은 손에 땀을 쥐게 만들었다. 하지만 역시 아직은 무리인 모양이었다. 나는 급히 쉬벡을 돌아 보았다. “쉬벡, 잠시만 일행들을 추위에서 견딜 수 있게 해 줄수 있죠? 아무래도 화아에게 가는 힘을 풍아에게 몰아줘야 할 것 같아요.” “그럼요. 잠시라면 문제 없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쉬벡은 급히 마법으로 일행들 주위에 장벽을 쌓았고 나는 화아를 돌려 보내고 남는 힘을 모두 풍아에게 몰아 넣었다. 당연히 풍아의 기세는 올랐고, 점점 모습을 바꾸어 갔다. 하지만 풍아의 모습은 앞에 있는 바람의 상급정령이라는 그 녀석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게 변했다. 선녀같은 하늘하늘한 옷이 줄어들어 몸에 꼭 맞는 갑옷으로 변하고 손에는 칼을 쥔 모습이었다. (정령이 손에 칼을? 그것도 바람의 정령이?) 그리고는 여전사 같은 모습으로 변한 풍아는 칼을 정수리에서 아래로 내리치는 모습으로 상대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변신이 이루어진 후에는 지루한 힘겨루기 같은 시간이 잠시 지나고는 곧 상급 정령의 모습이 흐려졌고 그 위를 겹쳐서 풍아가 지나갔다. 그리고는 풍아는 곁에 있는 얼음의 정령에게 칼을 휘둘렀다. 얼음의 정령도 그 순간 모습이 흐려지며 사라지고 말았다. 두 정령이 사라진 곳에 당당하게 칼을 땅에 짚고 서 있는 풍아의 모습은 어쩌면 대지의 여신이라는 가이아의 모습이 저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나는 풍아에게 안개들을 헤쳐 줄 것을 부탁했다. 풍아는 내 몸에서 막대한 기운을 끌어가며 주위의 안개들을 날려 버렸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우리가 가야할 계곡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계곡의 출구가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들은 다시 걸음을 재촉해서 그 지겨웠던 계곡을 벗어났다. 그리고 우리의 눈 앞에 펼쳐진 세상은... 우리들의 눈 앞에 있는 것은 완전한 평화와 조화로움이었다. 내 주위에는 어느 사이에 다섯 정령들이 모습을 들어내고 있었다. 풍아는 또 다시 진화한 모습으로 그리고 다른 정령들은 첫 번째로 진화했던 모습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내 몸에서는 별달리 기운이 빠져 나가지는 않았다. 나는 그 때서야 이 곳이 정말 정령들의 세계임을 알 수 있었다. 푸른 나무와 호수, 산들거리는 바람과 찬란한 태양, 그리고 아늑함. 정령들의 세계에 발을 디딘 우리들은 한 동안 말을 잊고 있었다. 그 곳은 계곡 안에서 바라보고 있었을 때와는 또 다른 곳이었다. 우리들의 몸 주위를 감싸는 하나 하나의 모든 것들이 정령이었다. 머리칼을 흔드는 것은 바람의 하급정령이었고, 눈부심의 이유는 빛의 정령 탓이었다. 우리가 밟고 있는 땅은 땅의 하급정령으로 이루어진 것이었고 호수는 온통 하급, 중급의 물의 정령들이 유영하고 있는 곳이었다. 아마도 불의 정령은 멀리 타오르는 화산에서 노닐고 있을 터였다. 그러면서도 어느 하나 불편함이나 긴장이 없는 .... 어쩌면 낙원이란 이런 곳을 가리키는 것인지도 몰랐다. “아~~ 정말 아늑하다. 그 동안의 피로가 싹 가시는 것 같은 느낌이야.” 유소는 그렇게 첫 느낌을 표현했고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말로 표현하지 못할 감동을 대신했다. 우리는 천천히 정령들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여전히 주위에는 다섯 정령들이 따라오고 있었지만 나는 특별히 말을 걸지는 않았다. 우리들이 한동안 숲을 걸어 들어갔을 때(사실은 나무와 풀의 요정들 사이를 조심스럽게 걸었다고 해야한다.) 나는 이상한 것을 느꼈다. 어디에도 상급 정령이나 정령왕으로 보이는 존재가 없었던 것이다. 있다면 풍아만이 상급 정령의 모습이라고 해야 할 것이었다. “이상하네, 왜 중급 이상의 정령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걸까?” 나는 혼잣말 처럼 주위 사람들에게 의문을 표시했다. “그러게요. 정말 그렇군요. 어떻게 된 일일까요? 그리고 그렇게 요란하게 들어왔으면 어떤 반응이 있어야 하는데 전혀 반응이 없군요.” 쉬벡의 대꾸였다. 그때야 다른 둘도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정말 무슨 생각들을 하는지, 가끔은 저 둘은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분명 똑똑하고 딱 부러지는 성격인 것 같은데... 평소에는 전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다니... 그것도 신비한 일이다. 쩝... “그건, 여기가 완전한 정령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곳은 다만 정령들의 힘으로 인간계에 만들어진 세상일 뿐이기 때문이죠.” 갑작스럽게 대답을 해 온 것은 풍아였다. “?? 지금 풍아가 말 한 것 맞지? 하하. 이제는 묻지도 않아도 말을 잘 하네...” “그건 이 곳이 정령계에 가깝기 때문에 평소와는 달리 본래 모습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은 여기 있는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풍아는 주위에 있는 다른 네 정령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응? 그럼 다른 수아나 화아들도 다 여기서는 자아를 가진다는 말이야?”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말들이 없지? 수아야 안녕?” 하지만 수아를 포함한 다른 정령들은 말이 없었다. “잉? 왜 말이 없어? 나하고 말하기 싫은 건가? 왜 그래?” 하지만 역시 그들은 말이 없었고 풍아가 대답을 대신했다. “그건 이 곳에 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상급의 힘을 지녔지만 다른 친구들은 중급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저의 영향으로 반응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같은 바람의 정령이라면 제가 허락할 수 있겠지만, 종류가 다른 정령이라 명령같은 것을 내릴 수도 없고, 어찌 할 방법이 없습니다. 제가 이 곳을 떠나는 것 밖에는 하지만 저는 다른 곳으로 가고 싶지 않습니다.” “가만, 그러니까 다른 정령들이라고 해도 같은 급이 아닌 정령은 다른 정령의 위에 있게 된다는 말이야? 그래서 다른 정령들은 그 높은 위치의 정령 때문에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한다는 말이야?” “비슷합니다. 하지만 제가 그들에게 어떤 위협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바람의 상급정령의 힘을 지녔으므로 이 주위에는 저의 기운으로 온통 가득해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다른 종류의 정령들은 자신의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해야하겠지요. 그렇다 고 정령계 내에서 스스로 자신의 힘을 줄이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곧 낮은 급 으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니까요.” “뭐, 그럼 다른 정령들도 상급으로 진화시키면 되겠네. 그럼 너와 같아질 테니까.” 나는 이렇게 말했다. “네, 그렇게 하면 되겠지요. 하지만 이 정령계 안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정 령계 안에서 정령의 힘은 정령계 밖에서의 힘의 열 배가 넘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다 른 이유는 그렇게 순식간에 늘어나는 정령의 존재감이 다른 정령들에게 어떤 형식이 될지 모를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이런 그럼 어떻게 한다? 다시 계곡 밖으로 나가서 이 녀석들을 진화시키고 돌아와야 한다는 말인가?” 쩝, 나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뭘 그렇게 고민하시죠? 이들과 말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은 없지 않나요?” 풍아는 이렇게 물어왔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그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봐, 풍아 너는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싫은거야?” “싫지는 않습니다.” “그 말은 좋지도 않다는 말인가?” “뭐 그저 그렇다는 말이죠. 특별히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순간 나는 조금은 섭섭했다. 나는 정령들을 남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같은 계열의 정령이라도 나만이 소환할 수 있는 특별한 존재의 정령들, 나는 오래 전부터 같이 해 온 이 정령들을 아끼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정령들은 전혀 그런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너무하는구나. 나는 너희들이 좋아 그래서 너희도 나를 좋아했으면 하고 바란건데... 너히는 그런 생각이 전혀 없는 거야? 내가 그저 다른 사람과 같은 인간 중에 하나일 뿐인거야?” 나는 어쩌면 투정같은 말을 풍아에게 쏟아 놓았다. “주인님은 분명 다른 사람과는 구별되죠. 우리들을 불러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거죠?” “그, 그럼. 내가 너희를 좋아하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거야? 내가 너 아닌 다른 바람의 정령을 불러서 이름을 지어주고, 또 함께 여행을 하고 그래도 너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거야? 다시 너를 부르지 않아서 나를 보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이 없다는거야?” “음.. 그건, 그래도 하는 수 없는 것 아닌가요? 제가 뭐라고 강요할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니까요.” “그래도 함께 같이 있고 싶다거나 자주 불러줬으면 한다거나, 안 부르면 보고싶다거나 그런 생각은 없는 거야? 정령은 그런 생각이 없는 거야?” “그건, 그건 잘 모르겠군요. 보고싶다라.. 그런 생각이 들었던가... 가만히 정령계에 있으면 다시 소환되기를 기다리기는 했지만, 그리고 그 반지 속에 있으면서 소환되지 않고도 주인님의 모습을 볼 수 있을 때는 심심하지 않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역시 잘 모르겠군요. 우리 정령들의 자아란 일종의 의지 같은 것이어서 인간들의 그런 자세한 감정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군요. 그런데 그것이 다른 정령들과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과 관계가 있는 것인가요?” “그거야 당연하잖아. 나는 풍아 너도 좋아 하지만 다른 정령들도 똑 같이 좋아한단 말이야. 그러니까 내가 풍아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다른 정령들도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할 거라고... 그러니까 ... 뭐랄까... 같이 이야기하는 이런 즐거 움을 함께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하잖아. 그리고 다른 정령들은 나를 어 떻게 생각하는지도 궁금하고. 이를테면 화아는 언제나 나를 보면서 약간은 거만하고 약간은 아니꼽다는 눈빛인데, 그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본다든지 혹은 광아는 왜 언제 나 그렇게 빛의 모양으로만 있는 것인지, 뭐 등등 물어보고 싶은 것들도 많고 알고 싶은 것들도 많고,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하는 것 보다는 자기가 평소에 하고 있던 생각들을 말하는 생기있는 모습이 보고 싶은 거라고. 지금 풍아가 그런 것 처럼...” 나는 이렇게 말을 맺었다. “그런 것인가요? 사실 잘 이해가 가지 않네요.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겠군요. 그리고 지금 바람의 정령왕께서 루탄님 일행을 모시고 오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러니 계곡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셔야 되겠군요.” 나는 그 말을 듣고 놀랐다. 정령왕이 데리고 오라고 했다고? 하지만 정작 놀란 것은 나보다는 일행들이었던 모양이었다. 풍아의 말이 끝나는 순간 다들 놀라는 얼굴이 되었다. “이런, 정령왕이라니... 그런 존재는 거의 신과 맞먹는 존재인데... 우리가 지금 그런 존재의 초대를 받았다는 겁니까?” 옆에서 쉬벡이 이렇게 되물었을 때,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 곳이 정령계(실제로는 불완전하지만...)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풍아의 이야기를 다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 정말로 우리가 진자 정령계로 가야 하는 건가?” 나는 풍아에게 물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진짜 정령계는 아무나 들어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적어 도 둘 이상의 정령왕의 허락이 있어야만 외부의 존재가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일단은 여러분을 이 곳에서 가장 정령의 기운이 강한 곳으로 모시고 오라는 분부이십니다.” “그래? 그럼 빨리 가자고, 어차피 만나야 할 사람(?)이라면 빨리 만나는 것이 좋겠지.” 나는 이렇게 말하며 일행들을 돌아 보았다. 그리고 일행들 역시 별다른 반대가 없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동의를 표했다. “그럼 제가 모시겠습니다. 놀라지 마세요. 날아서 갈테니까요.” 풍아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우리들의 발 밑으로 상당한 풍압이 치밀어 오르며 우리들의 몸을 공중으로 띄웠다. “이거 새로운 경험일걸? 재미있는데?” 그 중에서도 넥스는 이런 얼빠진 소리를 했고 “이봐, 루탄 밖에서 이동할 때도 풍아에게 이렇게 이동시켜 달라고 하면 좋겠다.” 라고 남의 속을 긁어 놓았다. “이봐, 유소. 만약에 밖에서 이런 힘을 쓰려고 했다가는 아마도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서 나는 지쳐 쓰러질 거고, 그럼 이렇게 높이 떠 있던 우리들은 전부 땅바닥과 입 맞춤을 하는 사태가 벌어질거야. 그래도 좋다면 밖에 나가는 대로 유소만 혼자 이런 기회를 만들어주지.” 나는 이렇게 쏘아 붙였다. 하지만 그 중에 쉬벡은 서 있기가 불안했던지 공중에서 주저 앉아 버렸다. 어쩌면 그 것이 아래로 부터의 바람을 더 많이 받아서 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우리 셋 중에서 그렇게 앉으려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그렇게 잠시의 비행 끝에 우리는 넓은 숲과 호수 그리고 화산(그 위를 지날 때에는 떨어지면 어쩌나 상당히 식은 땀을 흘렸다.)을 지나고 우뚝 솟은 바위 기둥 위에 내려 서게 되었다. 말이 우뚝이지 위에서 아래는 거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까마득한 높이의 바위 기둥의 위는 반경 20미터 정도의 원형이었다. 그리고 그 곳에 내려서자 순식간에 다른 정령들은 주위에서 사라져 버렸다. “엇? 무슨 일이지?” 나는 놀라서 외쳤다. “그 친구들은 정령왕님의 기운을 견디지 못하고 반지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저도 정 령왕님이 오시기 전에 반지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아무리 상급정령이라고 해도 정령왕님과는 비교 할 수 없는 존재니까요.” 그렇게 말을 마친 풍아도 곧 모습을 감추었고 잠시 동안의 정적만이 남았다. 하지만 그 정적은 실바람이 날아오면서 깨졌고, 그 바람 속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전체적으로 가냘퍼 보이는 몸매의 키가 큰 남자. 솔직히 말도 그 모습을 표현하는 것은 어렵다. 어렵다가 아니라 못한다.(그렇게 완전한 아름다움은 본 적이 없었다. 정말 뭐라고 표현해야 할는지. 나는 일행을 돌아 보았지만 역시 이런 자리에 나설 만한 사람은 연장자인(?) 나 밖에 없는 것 같았다. “저 실례지만 바람의 정령왕이신가요?” 내가 그렇게 물었을 때 “그렇습니다. 제 모습이 어떤지 모르겠군요. 인간들을 만나는 것이 너무도 오랜 만이라 이렇게 인간의 모습을 했습니다만 어색하지 않은지... 하하하” “무슨 그런 말씀을.... 정말 제가 본 어떤 사람보다도 완전한 모습이십니다.” 나는 아부 같지도 않은 아부를 했다.(뭐가 거짓말이거나 해야 아부라고 하지. 말 한 것이 사실이면 사실의 표현이지 아부가 되지 못한다. ㅡ.ㅡ;;) “고맙습니다. 하하. 하지만 이렇게 잡담을 나눌 시간이 없으니 곧 바로 본론으로 들 어가지요. 댁들이 이 곳에 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실 이곳이 인간계이긴 하지만 아 직 이 곳은 인간에게 허락된 곳이 아닙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이 곳에 들어온 것은 침입과 같은 것이지요.”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인간계의 동서남북을 가로막은 불모지대를 알아보기 위해서 시작된 여행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불모지대가 인간들에게 너무도 많은 위험 을 주고 있기에 그 비밀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인간들에게 절실한 문제였습니다. 그러니 저희들이 여기에 들어온 것도 이해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건 인간들의 일이지요. 그리고 만약에 이 곳을 관할하는 정령왕이 제가 아닌 불의 정령왕 같이 성격 급한 존재였다면 여러분은 이미 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람의 정령왕이 그렇게 말하자 주위의 바람들이 조금 사나워졌다. “정령왕님 잠시 제 말씀을 좀 들어 주십시오. 사실은 저는 이 곳에 들어오기 전에 노옴이라는 존재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노옴에게 지금 인간계가 처한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이 다른 4대 세계에 아주 중요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른 4대 세계에 중요한 것?” 바람의 정령왕은 내 말에 관심을 가지는 것 같았다. “네, 사실 저는 이 일행들을 만나기 전에 다른 존재를 만났습니다. 그 존재의 이야 기로는 자신과 다른 존재 둘이 신계와 정령계 그리고 인간계를 맡아 어떤 일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수명이 다한 것과 같이 다른 존재들 역시 수명을 다 해 가리라고 했습니다.” 나는 여기까지 말하고는 바람의 정령왕의 모습을 살폈지만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다만 주위의 공기들이 잘게 흔들린다고 느꼈을 뿐이었다.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 존재는 자신과 자신의 동료들이 죽으면 그 자리를 대신할 존재가 반드시 있어 야 한다고 말하면서 저에게 그 존재들을 대신할 씨앗을 남겼습니다. 때문에 저는 이 인간계가 아닌 신계와 정령계에 그 씨앗을 전해주기 위해 여행을 떠났던 것입니다. 혹시 정령왕께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아시는 것이 없으신지요?” 내 이야기가 끝나자 바람의 정령왕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대가 균형의 전달자라니 놀라운 일이로군. 그렇다면 그대가 이 곳에 들어온 것도, 또 결계를 깬 것도 무엇 하나 문제가 될 것은 없소. 하지만 알다시피 이제 세계 의 수는 둘이 아니라 넷이요. 때문에 어쩌면 다른 세계의 존재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뭐 정령계에 그 균형이 생기기 시작하는 순간 알게 될 테지만... 그럼 어떤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바람의 정령왕은 정말 순간적으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듯 근심을 드러낸 얼굴이 되었다. 때를 맞추어 주위의 바람은 축축한 느낌으로 무거워지고 있었다. 이 곳의 바람은 정령왕의 기분에 따라 변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하, 그런 문제라면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가진 씨앗의 수는 네 개입니다. 그러니 각 세계에 하나씩 주면 되겠지요.” 그 순간 정령왕의 표정은 밝아졌다. “정말 그 씨앗의 수가 넷이란 말이요? 정말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별다른 우려는 없겠군요.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군요.” 하지만 나는 그 순간 궁금증이 생겼다. “그런데 만약 이 균형을 잃게 되면 그 세계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사라지는 것인가요?” 나의 질문에 정령왕은 잠시 침묵했다. “그것은 여기에서 이야기 할 성질의 것이 아니군요. 일단은 정령계로 가서 이야기 를 하지요. 다만 다른 일행들은 이 곳에서 기다리고 계셔야 겠습니다. 아무나 정령계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니 말입니다.” 나는 순간 일행들을 돌아 보았다. 일행들은 나와 떨어진다는 것에 불안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그들의 안전에 대한 불안이 아니라 나에 대한 염려 같이 느껴졌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기 남아 계시는 분들에게 어떤 위험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 고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정령계는 시간의 개념이 이 곳과 다르니 말씀입니다.” 바람의 정령왕은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다른 일행들의 걱정이 자신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모양이었다. “이런, 이런. 균형의 전달자에게 어떤 위험도 없을 것임을 제 이름을 걸고 약속드리지요. 이 세계의 어떤 존재도 균형의 전달자에게 해를 가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 세계의 균형이 전달자에게 달려있는 이상에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 마지막 말은 조금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그 문제를 꼬집은 것은 쉬벡이었다. “루탄님, 아무래도 정령계로 가시는 것을 잠시 미루시고 저와 이야기를 좀 하셔야 겠습니다. 만약 정령계에서 균형의 씨앗을 전달하고 정령계의 입장이 다른 세계에 균 형을 전달하는 것을 반대하는 입장이라면 문제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돌아오지 못하실지도 모릅니다.” 쉬벡의 이 말은 주위의 바람들을 사납게 만들었다. 순식간의 바위 기둥 위의 바람은 매섭게 변했고, 일행들은 위태롭게 흔들렸다. “인간 무슨말을 하는 것인가? 내가 내 이름을 걸고 균형의 전달자의 안전을 보장했거늘 그런 말을 하다니...” “하지만 정령왕님의 말은 그 세계의 균형이 이루어진 뒤를 약속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저의 이런 우려도 이해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쉬벡은 변명처럼 외쳤다. 하지만 바람은 그 기세를 멈추지 않았다. 나는 그 상황에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어쩌면 정령들은 다른 세계의 균형을 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 상당한 위험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정령왕의 앞으로 나갔다. “바람의 정령왕님 화를 내시기 보다는 상황을 설명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지금 제 일행의 이야기는 틀린 것이 없는 것 처럼 보입니다만...” 바람의 정령왕의 모습은 처음 우리들을 만났을 때의 그 표정이 아니었다. 매서움과 날카로움 그리고 숱한 표정의 변화를 보이는 얼굴이었다. 아름다움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아름다움 보다는 섬뜩함이 먼저 다가오는 얼굴이었다. “하하하, 인간. 언제나 우리들을 놀라게 하는 인간. 그것이 운이든 아니면 능력이 든 어쩌다가 가끔은 우리들을 놀라게 하는 인간들이 존재하지. 정말 대단해. 간단한일이었는데...” 아마도 정령왕은 나를 정령계로 끌어들여 자신들의 균형을 맞춘 후에 다른 계획이 있었던 모양이다. “궁금하군요. 제가 정령계의 균형을 맞춘 후에는 저를 어떻게 하려고 하셨는지... 정말 궁금하군요.” 내 말이 끝나자 바람의 정령왕은 주위의 바람을 잠재웠다. “하하, 별로 어떻게 하려는 생각은 없었다. 다만 한 3000년 정도만 정령계에 머물 게 할 생각이었지. 그리고 그 후에 너를 놓아주는 것이다. 그 사이에 다른 세계는 그 힘을 거의 잃은 상태일 것이고 그러면 앞으로 이 우주는 우리 정령들의 세계가 되는 것이지.” 정령왕의 대답은 나의 상상을 벗어났다. “다른 세계를 멸망시키는 것은 아니었나? 아예 다른 세계가 망해 버릴 때 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지 않은가?” “하하 어리석은 인간 그렇게 간단 할 것 같은가? 우주의 중심이 신이라고 생각하는가? 하하 어리석은 인간이여 우주의 중심은 인간계이다. 어떤 경우에도 정령계나 신계가 한 우주의 중심이 되지는 못하지. 그런데 그 인간계라는 것이 다른 세계가 없이는 존재 할 수가 없는 곳이란 말이지, 얼마전, 신계의 분열이 있었을 때, 인간계가 차원 의 비틀림에 견디지 못하고 거의 사라질 뻔 했을 때, 우리들은 정말 놀랐다. 만약 그때, 힘을 모아 인간계를 복원시키지 않았다면 사라진 것은 인간계 만이 아니었을 것이 다. 이 우주 전체가 사라지는 것이지. 변화란 인간계가 있으므로 가능하기 때문이지. 인간계가 없이 존재하는 정령계나 신계란 그저 존재만 할 뿐 어떤 변화도 없다. 인간 너는 너의 모든 신체가 멈추고 생각이 멈추는 상태의 존재란 것이 존재라고 생각하는 가? 아무것도 변하는 것이 없다는 것은 그 자체로 죽음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 우 주에서 인간계가 없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상태가 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뭐, 얼마간은 버틸지도 모르지만 몇 만년, 혹은 몇 억년의 불변이라니... 하하하” 나는 정령왕의 말을 천천히 정리했다. “결국 인간계의 유지를 위해서는 다른 세계의 유지가 필요하다는 말인 것 같은데, 그렇다면 정령계의 힘이 비 정상적으로 다른 세계보다 강해진다면 인간계는 어떻게 되는 거지? 왜 정령계의 힘이 강해지는 것을 원하는 거야?” “하하 얼마전, 신계의 분열 직전의 상황으로 돌아가 볼까? 그 당시 신계의 힘은 그 야말로 막강한 것이어서 정령계의 힘을 몇 배를 넘어서고 있었다. 덕분에 인간들 중 에서 정령계의 영향을 받은 존재는 거의 없었지. 그래서 우리 정령들은 인간계에 발들 들여놓기 어려웠고 때문에 점점 정령들의 힘은 기울어져 갔다. 악순환의 반복이었지. 그런 것이다. 각 세계의 힘이 강해지면 그 세계의 영향을 받은 인간들이 많이 나타나 게 되고 그러면 그 세계는 좀 더 우위의 힘을 지니게 되는 것이지. 나는 단지 우리 정령계가 그런 우위에 서기를 바랐던 것일 뿐이다.” 흠... 그건 사실일지도 모른다. 사실 내가 살던 그 당시에 정령을 부린다는 것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지를 내가 경험해 봤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인간들을 정령에만 가깝게 만든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기는 마찬가지다. 음.. “바람의 정령왕께 제가 한 말씀 드리지요.” 뒤에서 쉬벡이 나서며 말했다. “무슨 말인가 인간?” “바람의 정령왕께서는 이런 생각을 해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신계가 어찌해서 그렇게 분열되게 되었는지를...” “무슨 말인가 인간?” 바람의 정령왕은 쉬벡의 말에 호기심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신계가 분열된 것은 신계가 정령계보다 우위에 선 힘으로 팽창을 거듭했기 때문에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속성을 나누어서 분열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 상황이 정령계에서도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무, 무슨 말인가 인간.” “이런 것이지요. 만약 정령계의 힘이 다른 세계의 힘 보다 강해 진다면 언젠가는 정 령계도 각각의 정령왕 혹은 파벌로 나뉘어서 반목하고 다투다가 분열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갑자기 주위로 한 번의 광풍이 몰아쳤다. “무슨 헛소리를 .. 정령계는 조화로운 곳이다. 신계 따위와 비교하다니...” 하지만 쉬벡은 물러나지 않았다. “허허, 그럼 신계가 처음부터 그런 분열의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씀입니까? 처음에는 신계 역시 조화로운 곳이 아니었던가요?” 마치 쉬벡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태연하게 말했다. “하지만 신계에는 이미 분열의 기운이 있었다. 선과 악의 개념이 존재했기 때문이지, 그 존재는 서로가 배척하고 다툴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었다.” 바람의 정령왕은 쉬벡에게 너 따위가 무엇을 알겠느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허허, 정령왕이시어 이미 선과 악이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입니다. 어느 한 쪽 이 없으면 전체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면 정령들은 어떻습니까? 정령들은 서로 반목하 지 않을까요? 물과 불, 빛과 어둠, 사랑과 증오, 아마도 정신계 정령도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 이런 정령들이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대립하고 다투다 분열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습니까? 신계의 본보기를 앞에 두고서 말입니다.” 쉬벡의 말이 끝나자 바람의 정령왕은 난감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정령왕님 저도 일행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잘 생각해 보시기를... 균형이란 적절 한 힘으로 서로 맞추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어쩌면 신계의 분열은 그런 균형을 맞추 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균형의 씨앗이 다음 분열에서도 세계의 수에 맞게 나타나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어쩌면 어떤 세계는 불필요하다는 결론으로 알맞은 씨앗이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가진 균형의 씨앗은 제가 심고 싶다고 심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인간계에서 경험한 바에 의하면 그 세계 에 알맞은 씨앗이 스스로 그 세계를 선택했습니다. 그러니 어쩌면 다시 분열이 일어 난다면 그 세계는 그 힘을 잃고 말지도 모릅니다. 정령왕님 잘 생각하시고 판단하시기를...” 내 말이 끝나자 바람의 정령왕은 나에게 말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내가 혼자서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이 문제는 정령계의 균형이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앞으로 나타날 균형의 전달자를 만나게 되면 실행하기 위해 세 운 계획이었다. 물론 그것은 ‘그 전달자가 정령계를 먼저 찾으면’이라는 단서가 붙 은 것이기는 했지만... 하지만 이젠 그것이 어렵게 되었으니 일단 돌아가서 다른 정령 왕들과 이야기를 해 보아야겠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모르지만 여기에서 잠시만 기다려라.” 바람의 정령왕을 그렇게 말하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내가 이 곳을 떠나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알았습니다. 기다리지요. 하지만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마십시오. 이 곳은 너무 높아서 무섭거든요.” 나는 그렇게 농담을 하는 것으로 지금껏 긴장되었던 마음을 풀어 보려고 했다. 그리고 바람의 정령왕은 내 대답이 끝나는 순간 별다른 말없이 바람으로 흩어져 버렸다. “이제 어떻게 하지요?” 나는 쉬벡을 돌아보며 말했다. “무얼 말씀입니까? 루탄님” “뭐긴 뭐겠어요. 이 곳에서 기다리느냐 아니면 도망을 가느냐 하는 문제지요. 아무 래도 이 곳이 정령계와 유사하기는 하지만 일단 이 곳이 아니면 정령왕이 나타나기는 어려운 모양이니 자리를 옮기는 것이 어떨까하고요. 만약에 정령왕들이 떼거지로 나 타나서 납치를 하면 어쩔 수 없이 당해야 할지도 모르잖아요.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들의 의논 결과가 그렇게 나온다면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예요.” 내가 그렇게 말을 끝마치자 쉬벡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주인님은 이 곳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미 상당한 상급 정령들이 정령계에서 이 주위를 감싸고 나타났습니다.” 쉬벡과 나의 대화에 끼어든 것은 풍아였다. “뭐? 다른 상급 정령들이 나타났다고?” “그렇습니다. 아마도 정령왕들이 보낸 모양입니다. 바람, 불, 땅, 빛, 물 등의 원소 계 정령들은 물론이고 분노, 증오, 사랑, 용기 등의 정신계 정령들 까지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거의 상급 정령들이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피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나는 상황이 어쩌면 아주 나쁘게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 넓지 않은 원형의 감옥 속에 갇힌 것이나 다름이 없어진 것이었다. “이런, 아주 떼로 몰려들고 있군. 저것들도 번개에 영향을 입을까?” 넥스는 오랜만에 입을 열고는 다가오는 정령들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아!! 이런 저 많은 정령들을 상대로 싸운다니... 그게 될까? 하지만 정말 멋진 경험이 되기는 하겠다. 이길 가능성이 없어서 그렇지. 그런데 한 대는 칠 수 있을까?” 유소도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지만 표정은 어두워 보이지 않았다. “이곳은 아무래도 다른 곳 보다는 마나의 양이 많아서 싸운다면 평소보다는 강력한 마법을 무리 없이 쓸 수 있겠군요. 허허 루탄님, 뭘 그렇게 걱정하십니까? 이젠 어쩔 수 있는 방법이 없지 않겠습니까? 정령왕들의 결정이 어떤 것인지가 문제겠지만 여차하면 여기서 뼈를 묻지요. 허허” 쉬벡은 평소와는 다른 기백을 보이며 웃고 있었다. “아니 무슨 말들을 하고 있는 거예요. 곧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그렇게 웃음이 나와요? 나참 어이가 없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내 얼굴을 볼 수는 없지만 내가 지으려는 표정은 확실했으니까..) “허허, 루탄님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살겠습니까. 때로는 병들고 때로는 짐승에게 물려죽고 때로는 잠자던 침대에서 굴러 떨어져서 죽기도 하는데 ... 그것에 비하면 지금 우리들이 죽으면 적어도 이 우주의 균형을 맞추는 거창한 일에 목숨을 거는 것이니 그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허허허 이런 죽음은 한사람을 위하거나 가족을 위하거나 마을을 위하거나 영지를 위하거나 혹은 인간들 전부를 위하거나 하는 그런 거창한 죽음 정도의 가치는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허허허” “맞아 맞아. 하하 이런 거창한 자리 정하기도 얼마나 어려운데... 뭐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대단하잖아?” “그래, 그래. 이 정도면 목숨이 아깝지 않은 자리지. 다만 시집을 못 가 본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뭐 누구의 말인지 따로 이야기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 보다는 좋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거창한 일을 위해 죽기 보다는 그런 거창한 일을 이루는 것이 더 보람이 있는 법이다. 정말이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바람의 정령왕이 나타났던 곳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런데 주인님, 배 안고프세요? 나도 주인님이 만든 음식 먹어보고 싶은데...” 나는 갑작스러운 풍아의 말에 놀랐다. “뭐? 풍아 니가 음식을 먹는단 말이야? 음식을 먹을 수 있어?” 내가 이렇게 물어 보았을 때, 다른 일행들도 주위의 상황도 잊고 황당하고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풍아를 보고 있었다. “굳이 무엇을 먹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상태라면 음식을 먹을 수도 있습 니다. 그리고 갑자기 다른 사람들이 맛있다고 하는 주인님의 음식을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하하 이거 정말 웃기는 일이다. 정령계에 왔더니(완전한 곳은 아니지만) 정령이 음식을 먹을 수가 있다고 한다. 하하 나는 주저하지 않았다. 곧장 재료들을 꺼내서 음식을 준비했다. 하지만 주위의 정령들 때문인지(제법 떨어져 있었지만 수가 많아서 인지) 화아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해서 요리를 하는데 애를 먹었다. 시간이 얼마나 있을지 몰라서 간단하게 돌판 위에 고기를 굽고 김치를 꺼내는 것으로 요리는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 고기들은 내가 일일이 집어서 정령들에게 김치와 함께 먹였다. 다른 정령들은 그저 주는 대로 입에 넣고 삼키는 것이 전부였지만 나는 풍아나 다른 정령들 모두 꼭 같이 음식들을 주었다. “음... 이런 맛이군요. 음.... 맛이 이런 거로군요. 음...” 음식이라는 것(실제로는 어떤 물질을 맛본다는 것)을 처음 해 보는 풍아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음식을 삼켰다. “풍아야. 그렇게 삼키지만 말고 꼭꼭 씹어서 먹어. 그래야 맛도 느끼고 그러는 거야.” “아~~ 네.” 그리고 그 다음부터 다른 녀석들은 입에 넣어준 요리들을 끊임없이 씹었다. “음... 얘들아 적당히 씹으면 삼키고 또 씹고 하는 거야. 그렇게 씹고만 있다가는 아예 물이되겠다. 하하” 그렇게 음식을 먹는 방법까지 가르치며 우리의 식사는 계속되었다. 결국 우리가 배를 든든히 채우고 식사를 끝마칠 때 까지 정령왕은 나타나지 않았다. “와~! 배부르다. 하하 힘이 나는 걸? 이제는 아까보다는 좀 더 오래 싸울 수 있겠는걸? 이거 어쩌면 마지막 식사였는지도 모르겠는걸? 그럴 줄 알았으면 좀 천천히 음미 하면서 먹어볼걸... 하하하” “그러게, 루탄의 음식을 앞으로 못 먹게 된다면 그게 제일 아쉬울 거야. 여행 따라나서서 루탄의 음식 먹는 시간이 제일 즐거웠는데...” 넥스와 유소의 말이었다. 쩝... 쉬벡은 별 말 없이 앉아 있었다. 하하 이제는 기다리는 일만 남은 셈인가 보다. 그리고 아까부터 화아는 계속해서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아마도 앞으로는 싸움을 할 때 괴물들을 입에 물고 익혀서 한 입씩 뜯어 먹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우리들은 그저 무료하게 앉아서 바람의 정령왕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 이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우리들의 기다림은 어느 정도 소화가 되고 움직임이 편해졌을 때 끝이 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존재들은 없이 그저 바람의 정령왕만이 우리를 다시 찾았다. “아~!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우리들은 결정을 내렸다.” 그리곤 정령왕은 말을 끊었지만 우리들 중에서 누구도 섣불리 그 결론에 대해서 물어 보는 사람은 없었다. 단지 닫혀진 정령왕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는가에 따라서 우리들의 입장을 정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최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정령계에서는 균형의 전달자가 다른 세계에 균형의 씨앗을 전달하는 것을 막 지 않기로 했다. 다만 우리 정령계가 다른 세계에 비해 늦지 않게 그 씨앗을 받게 되 기를 바랄 뿐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 정령왕들이 신계와 마계, 그리고 천계에 연락을 취하기로 했다.” “그럼 다른 계의 존재들과 함께 모여서 이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입니까?” 나는 바람의 정령왕에게 확인하듯 물었다. “그렇다. 균형의 전달이란 상당히 미묘한 것이다. 어느 쪽이고 자신들의 계가 늦게 전달받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처음에 이런 문제를 제기 하지 않 았다면 모르겠지만, 일단 문제가 제기된 상태에서 어떤 형태로든 사태를 악화시킬 소지 가 있는 행동은 하지 않는 것이 전 계의 이익을 위하는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때 문에 이제 너희들이 기다리고 있으면 각 계와 합의된 상황을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다 만 문제는 그 시간이 얼마가 걸릴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너희 인간들의 땅으로 돌아가 우리들의 연락을 기다려라. 마침 균형의 전달자가 정령의 다루고 있으니 연락을 취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에~~!” “이렇게 끝나는 건가?” “그래도 별 어려움이 없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겠지요.” 이상의 말들이 누구 누구의 말인지는 아시리라 믿는다. 단 유소와 넥스의 구별을 하 려는 분이 있다면 다시 말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고 하고 싶다. 어차피 구별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 “무슨 일인가? 균형의 전달자.” 내가 말끝을 흐리자 정령왕이 돌아보며 물었다. “그것이 일단은 제가 균형의 씨앗을 전달하는 것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간계를 둘 러싼 4대 불모지와 그 지역에서 일어나는 괴물들의 잦은 출현에 대한 문제를 조사하 는 것도 우리들의 목적이었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아직 이렇다 할 소득이 없는 상태여서, 혹시 정령왕께서 아시는 것이 있으시면 좀 알려 주실수 없으신지요.” 내 말에 그제서야 유소와 넥스는 생각났다는 표정을 지었고 쉬벡은 껄꺼로운 질문을 대신 해 준 것이 못내 고마운 눈빛이 되었다. 흠흠, 내가 이래뵈도 연륜(?)과 경륜(?)이 있는데..ㅋㅋ “음 어차피 균형의 전달이 끝나면 모든 것이 정리가 되겠지만, 궁금하다니 간단히 알려주지. 인간들의 땅울 둘러싼 사대 불모지는 짐작하는 바와 같이 정령계, 신계, 마계, 천계의 세력들의 본거지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그 세계가 모두 인간계를 바탕으로 유지되는 곳인 까닭에 균형의 힘이 약해지고 인간계의 힘이 약해진 상황에서 각 계의 유지를 위해 조금이라도 인간계 가까이에 자신들의 세계를 두고자하는 이유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다만 그 중에 인간들이 각 계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숱한 괴물들을 풀어놓을 수 밖에 없었다. 인간들과 각 계는 직접적인 소통을 금 하고 있는 까닭이다. 물론 아주 소통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이런 이유로 생긴 4대 불모지는 각 계에 균형의 씨앗이 전달된다면 천천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괴물들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같은 조직적인 움직임은 없어질 것이니 인간계의 영역이 넓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음.. 그런 것이군요. 4대 불모지에서의 괴물들의 행동들은 각 계에서 자신들의 계가 인간에 의해 침범당하는 것을 막는 일종의 결계와 같은 것이었군요. 그럼 제 문제가 해결되면 당연히 그런문제도 해결되는 것이고... 그럼 더 이상 우리들도 불모지를 헤매고 다닐 이유가 없어졌네요. 하하.” “그렇다. 하지만 아까 이야기 한 것처럼, 각 계의 입장을 정리하는 데에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적어도 몇 달에서 몇 년은 걸릴 것이다. 인간의 입장에서야 긴 시간이지만 인간계와 다른 계의 시간 개념이 다르기 때문이다. 기다려 주길 바란다.” “뭐 그런 건 문제가 없어요. 나도 남는 건 시간뿐이니까. 하하하” “그럼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보도록 하자. 그리고 소환하는 정령들에 대해 한마 디 하겠다. 최하급 정령에서 성장을 거듭하는 그대의 정령들은 이미 우리 정령계의 여 러 법칙들을 깨고 있는 존재들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힘의 우열을 제외한다면 이미 우리들 정령왕의 영역을 벗어나 있다고도 할 수 있는 독립된 개체가 되었다고나 할까? 때문에 우리 정령계에서는 이미 그대가 부리는 다섯 정령 이외에 다른 정령들을 그대 가 소환하는 것을 금지하기로 했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그대의 정령들도 그대의 반 지 속에서 지내기를 권하는 바이다. 때문에 노옴을 통해서 그 반지를 전달한 것이기도 하다. 기억하기를.. 그럼..” 말을 마친 바람의 정령왕은 곧 모습을 감추었고, 주위의 다른 정령들도 하나 둘 사라져 갔다. “음. 그럼 이제 우리는 돌아가는 일만 남은 것인가? 하~~! 그런데 돌아가는 것도 쉽지 않겠네. 언제 그 길을 돌아나가나. 하하” “루탄님 그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이곳의 힘이 다른 곳과는 많이 달라서, 쥐덧까지 한 번에 텔리포트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나의 푸념에 쉬벡이 귀가 솔깃한 이야기를 했다. “정말이야? 그럼 이제 지긋 지긋한 싸움은 당분간 하지 않아도 되겠네? 이야 이거 정말 다행이군.” “그래 그래. 안그래도 요즘 제대로 쉬지를 못해서 피부가 엉망이란 말이야. 정말 다행이다.” 물론 넥스와 유소의 말이다. “그럼 지금 당장 돌아갈 수 있다는 말씀인가요? 쉬벡?” 나의 물음에 쉬벡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준비에 들어갔다. “풍아와 너희들은 그만 돌아가있어. 쥐덧에 도착하면 불러줄 테니.” 풍아와 다른 정령들은 곧 반지 속으로 들어와 버렸다. 이제는 정령계로 돌아가지 않을(어쩌면 못가는 것인지도..) 모양이었다. 쉬벡의 준비는 예상보다 오래 걸렸다. 아마도 쉽지 않은 마법구현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자신있게 할 수 있다고 했기 때문에 나도 유소도 넥스도 그다지 걱정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럼 모두 모여서 손을 잡아 주십시오.” 우리들이 쉬벡의 손을 잡고 서로의 손을 잡았을 때, 우리 발 밑에서 둥근 원형 마법진이 발동 되었다. 그리고 온 몸이 휘청거리는 느낌과 함께 빛 속에 잠겼던 몸은 어느 사이에 유소의 여관방 안에 돌아와 있었다. “우와!! 대단해요. 쉬벡. 이렇게 한 순간에 돌아오다니. 정말 대단해요.” 한동안 주위를 둘러보던 유소는 이 곳이 자신의 여관방 중의 하나라는 것을 알고는 탄성을 지었다. 물론 나도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이 곳이 어딘지를 알았지만 말이다. “정말 대단하군요. 쉬벡. 이런 일이 가능하다니. 하하 정말 대단해요.” 나도 감탄에 감탄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별로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이 있던 곳이 비정상적으로 마나가 많은 곳이었 고 또 이 방에 텔리포트가 가능하도록 마법진을 그려 놓고 갔기 때문에 멀리에서도 좌표를 틀리지 않고 돌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 이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려 고 했다면 불가능 했을 것입니다. 좌표가 조금만 어긋나도 심각한 문제가 생기게 되 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마법진이 있으면 그런 문제가 해결되지요. 뭐 아직은 영 구 마법진을 만들지는 못하고 단지 1회용에 지나지 않고 많은 시간이 걸리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쉬벡은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자신이 그런 고난위도의 마법을 실현시킨 것이 자랑스럽다는 표정을 얼굴에서 감추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들의 불모지 답사는 끝이 났다. 하지만 아직도 남은 일이 있었다. 우리들의 일을 알릴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 일은 물론 넥스와 쉬벡이 맡기로 했고, 필요하다면 내가 가야겠지만 될 수 있으면 다른 사람들 (특히나 권력을 지닌 사람들)과의 교류를 꺼리는 내 마음을 넥스와 쉬벡에게 이야기 했기 때문에(소직히 귀찮다는 말이다.) 나를 부르는 일은 별로 없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나만의 생각이다. 예상컨데 제대로 된 경우라면 우리들은 여기저기 불려 다니면서 이번 일에 대한 설명 을 해야 할 것이고 더구나 나는 그 균형의 씨앗인가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을 해야하는 처지가 될 것이다. 분 명 히 그 렇 게 될 것 이 다 . 하지만 일단은 쉬고 싶었다. 하하하 그래서 아주 잠시만 이번 여행에 대한 보고를 미루어 두기로 잠정적인 합의를 보았다. 하하하 -월동하자... - 한가지 일을 마무리하고 얼마간의 시간이 생긴 우리들은 잠시의 휴식을 가지기로했다. 넥스와 유소는 그저 빈둥거리는 것으로 소일을 결정한 듯이 보였고, 쉬벡은 이번 싸 움에서 얻은 경험과 아이템을 토대로 무언가 마법을 새롭게 한다고는 방 하나를 차지하고 칩거에 들어갔다. 덕분에 혼자서 할 일이 없어진(이건 취사를 제외한 경우에 해당된다. 이젠 취사는 일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건 이제 나에게 있어서는 습관이자 의무에 다름아니다 ㅜ.ㅜ) 나는 노옴에게서 받았던 금속 판을 다시 들여다 볼 여유가 생겼다. 한글의 고문으로 적혀있는 그 글은 처음에는 무척이나 생소한 것처럼 보였지만 오래지 않아 나의 지극히 뛰어난 오성은 그것을 해독해 내고야 말았다. 카카카 인체를 그려 놓은 앞뒤 모습 한 장씩.. 그리고 각 부위별로 사지(四肢)와 얼굴, 내장 기관을 그려 놓은 것이 한 장씩에 각각의 부위별 명칭이 적혀있었다. 솔직히 명칭이야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설명하는 부위가 어디를 말 하는지 알 수 있으면 그만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부위들이 바로 혈도라는 것이었다. 각각의 혈도는 360개였지만 그 혈도들의 조합은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흔히 무협지를 보면 어디 한 군데를 눌러 놓으면 꼼짝을 못하는 그런 것이 나오는데.. 실상 그런 혈은 몇 되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팔 하나나 다리 하나를 움직 이지 못하게 하려면 일정 부위를 일정한 힘으로 지속적으로 눌러주면 되기는 하지만 혈도를 집는 다는 것은 인체에 기운을 불어넣어서 그 혈도 부분을 막아 버린다는 말인데.. 이게 쉽지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기운을 불어넣어서 막는 방법이 아니라 몇 개의 혈도를 순차적으로 두드려서 인체 스스로 경직 상태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즉 일정 간격(그렇다고 해도 순식간이지만)으로 혈도를 누르게 되면 그 순간에 몸의 경직 현상이 잠시 일어나게 되는데 그런 경직이 모아지면 결국 전체적으로 원하는 형태의 경직이 지속시간동안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사실이 그 금속판에 모두 적혀 있는 것은 아니고, 그저 혈도의 위치와 각 혈도들의 중요한 특징들을 적고 있는 그런 것이었다. 특히 재미 있는 것은 이 혈도들의 특징에 다른 혈도들과의 관계를 적어 놓은 것들이 있어서 그런 혈도들의 조합으로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해 언급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어떤 혈도 세 개를 순서대로 누르면 어느 쪽 팔을 움직이지 못한다거나 어느 쪽으로 허리나 목을 돌리지 못한다거나 하는 그런 것들이었다. 그리고 몇 개의 혈은 사지로 들어가는 혈관과 관련되어 있어서 지혈을 하는데 좋은 것도 있었고 통증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것도 있었다. 나는 다음 여정을 떠나기 전까지 이 내용을 익히기 위해서 나는 무척이나 바쁘게 시 간을 보냈다. 물론 여기서 익힌다고 하는 건 당연히 실험을 포함하는 이야기고 예상 하듯이 이 실험의 몰모트는(혹은 교부재. 혹은 마루타라고 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실 험용 흰쥐라고도..) 당연히 넥스와 유소 였는데.... 나에게는 맛있는 밥이라는 최고의 교환조건이 있었기 때문에 힘들었지만 그들을 그런 용도로 쓸 수 있었다. 물론 그들 도 몸을 체험하는 중에 혈도들의 역할을 조금씩 배운 것은 말 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어떤 때에는 서로 티격태격하면서 상대의 혈을 짚어 놓아서 한 팔을 못쓰게 하거나 다리 혹은 목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는 어째서 그런 문제 가 생겼는지를 몰라서 해혈을 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게 만들기도 했다. 사실 그러다 잘못되면 평생 불구가 될 수도 있는데..(물론 내가 있으므로 그런 문제 는 거의 생길 수가 없다. 그리고 설마 넥스나 유소가 상대에게 기를 사용한 공격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지속적인 점혈은 어려웠던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아주 위험 한 사혈이나 기타 다른 혈에 대한 실험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혹여 문제가 생긴다 해도 그건 우연이지 내 탓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ㅋㅋ 그렇게 우리들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나는 풍아를 제외한 다른 정령들을 성장시키는 시도를 했고 다른 정령들 역시 쉽지는 않았지만 성장 시킬 수 있었다. 신기한 것은 풍아는 모습이 검을 든 18살 전후의 여전사의 모습을 했던 데 비해서, 수아는 연록색 머리카락을 지닌 16살 정도의 모습으로 지토는 완전한 노옴의 모습(별로 나아지지 않았다.)이었고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광아와 화아의 변신이었다. 화아는 완전히 탈태환골 해서 인간의 모습이 되었던 것이다. 그것도 훤칠한 20살 정 도 나이의 미남의 모습으로(전체적으로 붉은 계열의 옷을 입고, 머리카락 마저도 붉 은 색인데 흔히 말하는 호남 같은 느낌을 주는 모습이었다. 거기다가 엄청 잘 생겼 다.)바뀌었고 광아 역시 사람의 모습을 했던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광아는 무슨 이 유에서인지 등 뒤에 한 쌍의 날개를 가진 천사의 모습이라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나이는 10대 후반 정도. 그렇게 성장한 정령들은 그 의사 소통에 있어서도 예전과는 다르게 자아를 가지고 행 동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상당한 문제였다. 무슨 문제냐 하면 이 녀 석들이 딴지를 걸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예전에는 시키면 시키는 데로 하던 녀석들이 이제는 꼭 한 마디씩 뭐라고 하는 것이다. 물론 주로 지토나 화아의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그들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넘어설 어떤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명령이 아닌 것 같은 일에는 고집을 부리기도 하고, 점점 의지를 지니고 자아를 표현하는 일이 늘어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런 모습이 너무 좋아서 속으로 흐뭇하기는 하지만 겉으로야 기어오르는 놈이 있으 면 가만히 두지 않는다는 주의여서 가끔은 지토나 화아가 복날 개 맞듯이 맞는 경우도 있다. 하하 정령들을 줘 패는 것도 상당한 스트레스 해소가 된다. 그런데 정령들은 혈도가없다. 아무리 혈을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하 아무튼 그렇게 정령들을 성장 시키고, 점혈법을 비롯한 혈도에 관한 공부를 하는 동안에 우리들의 휴가는 지나가고 있었다. 그 동안에도 여전히 쥐덧에서의 싸움은 그치지 않아서 괴물들의 습격은 해질 무렵이면 어김없이 일어났고, 그 싸움에 나나 유소, 넥스가 빠질 수는 없는 일이어서(쉬벡은 아직도 칩거중이라 밖으로 거의 안나온다. 밥 먹는 시간만 빼면...) 싸움에 참가하고 그 보수를 받는 것이 일이라면 일이었다. 뭐 덕분에 우리들은 이 곳 용병들 사이에서 굉장히 유명한 사람이 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일단 불모지를 탐험하고 돌아온, 일단은 오랜 시간 동안 안보이다 나타났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몰라도 꽤난 깊은 곳까지 갔다 왔으리라고 짐작들 하는 모양이었다. 우리들이 그 문제에 관해서는 입을 꼭 다물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물론 이 곳의 영주에게 상황을 보고 하기는 했지만 넥스가 어떤 말을 했는지는 몰라도 아무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는 잘 둘러대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그렇게 불모지를 탐험하고 돌아온 것도 그렇지만 넥스의 건들릿이나 나의 쌍 검이 상당한 위력을 발휘하는 까닭에 단기간에 유명인사가 되었던 것이다. 물론 아직도 다른 용병들은 내가 정령들을 다룬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한다. 그렇게 시간은 지나가고 있었고, 오래지 않아서 대륙의 겨울이 찾아왔다. 서둘러 불모지 탐험을 떠났던 이유가 겨울이 오기 전에 탐험을 마치자는 것이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 겨울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눈은 많이 내리지 않았지만 넓고 넓은 벌판을 막힘없이 불어온 바람이 몰아치는 성벽 밖은 끔찍할 정도의 온도를 기록하고 있었다. 성벽에서 펄펄 끓는 물을 성벽 아래도 뿌리면 금세 얼음이 되어서 바람에 날려 버리는 것이다. 그런 추위가 시작되자 그 때에야 겨우 괴물들의 공격도 잦아 들었다. 물론 얼음 속에 서 활동하는 녀석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수가 많이 줄었다는 말이다. 그런 겨울은 그야말로 용병들의 휴식의 시간이었다. 술을 진탕 마시거나 겨우내 실력을 갈고 닦거나 그것은 그들 개인의 사정이었지만 매 일같이 반복되던 싸움에서 벗어나 잠시의 여유를 가지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었다. 요 근래에 별다른 할 일이 없었던 나는 내 몸 속의 기운들을 정리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지심목의 기운들을 거의 모두 오행기의 기운으로 바꾸어 단전에 갈무리해 둔 후였지 만 내 몸 속에 있는 기운의 크기에 비해서 그 활용에 있어서는 실용적이지 못한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혈도들을 통해서 기운들을 운용하고 활성화 하는 연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예전에 지심목에 잡혀 있으면서 했던 수련의 정도에 이르는 집중이나 경지를 올라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금 같은 경우에는 내가 내 몸을 재구성하는 것은 불가능 한 것 같았다. 예전에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ㅎ ㅎ 뭐 정말로 도전을 해 본다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이 몸으로 나이도 먹고, 또 시간이 지나면 늙어 가기도 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솔직히 몸의 재구성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은 불만이 있지만 지금의 내 상태에 대해서 실망하지는 않았다. 피부로 느끼는 말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도 않는 말이지만, 인간이란 유한한 존재이기에 더욱 발전을 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내가 어쩌면 무한한 삶을 살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없어진 덕분에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몰랐지만 무언가 하고 싶었다. 돈을 벌거나 지위를 얻거나 명성을 얻거나 하는 것은 그다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겨울이 지나는 동안 나는 무슨 도나 닦는 것처럼 내가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에 대한 고민에 싸여 있었다. 넥스는 귀족이 되는 것이 꿈이라 하였고, 쉬벡은 마법을 높은 경지로 끌어 올리는 것 이 목표라 하였고, 유소는 모르겠지만 (별다른 목표가 있는지) 일단은 현재에 대해 별다른 불만은 없어 보이고, 하지만 나는 내 몸에 대해 알게 된 순간부터 내 삶이 끝이 언젠가는 다가 올 것이면 그 끝이 오기 전에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조급증에 시달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거센 바람이 잦아지고 방향이 바뀌면서 숨결이 부드러워지기 시작할 때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하게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내가 이 새로운 세계에서 맞이하는 봄이 오고 있었다. “이봐 루탄 뭐하고 있냐? 우리 심심한데 대련이나 하자. 웅 몸이 찌뿌둥하잖아. 안그래?” 가만히 자리에 앉아 사색에 잠겨있는 호랑이의 콧털을 건들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넥스다. 지난 겨울동안 성벽을 위협하는 괴물들의 수가 줄어서 그다지 움직일 일이 없던 넥스와 유소는 한 계절을 나에게 실험 대상(점혈법)으로 시달렸었다. 그런데 요즘 날이 풀리면서 괴물들의 수가 늘고 있는데도 어쩐 일인지 성벽에서 괴물들과 싸움을 할 생각은 않고 나를 괴롭히는 것이다. “이봐 넥스 나 지금 무지 바쁘니까 괴롭히지 말았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가서 유소하고 놀란말이야.” 나는 나의 사색을 방해하는 넥스에게 삶의 기회를 한 번 주기로 하고 완곡한 말로 거부의 뜻을 전달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루탄, 지금 가만히 의자에 앉아서 음료수 잔을 탁자에 놓고 퍼진 모습으로 앉아서 늘어진 모습으로 있으면서 바쁘다고 말하면 믿을 사람이 어디에 있 다는 거냐? 그러지 말고 나랑 대련 한 번만 하자. 내가 이번에 새로 만든 기술이 있단 말이야. 그거 보여줄게 응? 한 번만 하자. 잠깐이면 되는데....” “이봐 넥스, 너는 몸을 움직이는 것 만이 일이라고 생각하는 놈이지만, 나는 몸을 움직이는 것 보다 가만히 머리를 움직이는 것이 더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거기다가 지금 나는 굉장히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중이니까 건들지 말아라.” 이번에도 나는 부드러운 말(?)로 넥스의 생명을 유지시켜주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역시 넥스는 몸으로 당하지 않으면 이해를 하지 못하는 존재다. 퍼~억!! 이 소리가 넥스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번쩍 불이 난 것은 분명히 내 눈이고 등을 거처 올라오는 통증은 분명히 내가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그럼 결론은 한 가지다. 누군가 나의 어딘가를 상당한 경도를 지닌 무엇인가로 상당한 속도를 부여하여 건드렸다는 말인데.. 그 누군가는 분명히 넥스(주위에 그 뿐이다.), 그리고 어딘가는 내 허벅지, 그 무엇인가는 분명히 넥스의 손에 들린 칼(말이 칼이지 무식한 쇠몽둥이)이 분명했다. 파직!! 무슨 혈관모양이고 뭐 없었다. 그냥 내 몸 안에서 인내라는 끈과 이성이라는 끈이 끊어진 것 뿐이다. 그 이후에 상황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는다. ㅡ.ㅡ^^ “루 루탄아 이거 좀 풀어주면 안될까? 지금 비가 온단 말이야. 에~~ 엣취!!” 어디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으아악 루탄, 벌서 두끼를 굶었단 말이다. 이거 빨리 풀어주지 못해? 허허헝 루탄아 내가 잘못했다. 내가 미쳤던 거야. 다시는 안그럴테니 좀 풀어줘!!” 어디서 분명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저기 루탄님 아무래도 이젠 풀어 주시는 것이 어떠실지... 아침부터 저러고 있는 데 거기다가 점심때 쯤 부터는 비가 오기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튼튼한 넥스 라고 해도... 상당히 몸에 무리가 갈 텐데요. 더구나 칼을 머리 위에 치켜 든 상태에서 한 발을 든 모습으로 굳어 있는 것은 아무래도...” 음 이건 쉬벡의 목소리로군. “네? 뭐라구요? 아~~! 넥스 말이죠? 뭐 괜찮을 것 같네요. 이제 좀 있으면 자동적으로 풀릴 테니까요. 하하하.” 나는 머리를 쓱쓱 긁으면서 쉬벡을 보았다. “그렇군요. 그럼 좀 있으면 넥스도 들어오겠군요.” 짐작하는 것 처럼 오늘 아침 내 사색을 방해한 넥스는 그에 응당한 보상으로 마당에 하루 종일 서 있었다. 우당탕탕 “으갸갸갹 크헉” 음.. 비명소리가 아주 신선하군. 아마도 넥스의 혈들이 풀린 모양이다. 덜컹!! “으~~! 루탄 너 이럴 수가 있는 거냐? 어떻게 인간이 하루 종일 나를 그렇게 만들어 놓고 무심하게 있을 수가 있는 거냐? 응. 어구구.” 문이 열리고 넥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넥스는 보이지가 않... 는게 아니라 바닥으로 기어 들어오는군 캬캬캬 그러길래 상대를 보고 덤벼도 덤벼야 할꺼 아니냐구. “이제 그만하고 여기 와서 식사나 하지 그래?” 내 목소리가 퉁명스럽다고 느꼈는지 궁시렁거리는 넥스가 의자로 기어올라왔다. “그런데 유소는 어디로 간 거죠? 오늘 아침부터 보이지 않던데?” 나는 갑자기 생각이 나서 물어보았다. “음. 유소는 영주를 만날 일이 있다면서 갔는데...” 대답을 한 건 넥스였다. 역시 먹을 것이라면 껌벅 죽는 넥스답게 벌써 식사에 집중한 모습이지만 그나마 대답을 할 정신은 있는 모양이었다. “무슨 일로 갔는지 알아?” “아니 몰라. 그냥 갔다온다고만 했어.” 매일 같이 식사를 하던 사람이 없으니 좀 이상해서 물어 본 것이지만, 무슨 일로 영주를 만나러 간 것일까? 삐걱! “아 식사중이네? 아직 끝난 건 아니지? 나도 저녁을 안먹었다구.”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유소였다. 뭐 들어오자마자 식사에 집중하는 사람에게 무슨일로 영주를 만났는지 이런걸 물어보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결국 우리들의 식사가 끝나고 수아와 풍아가 설거지를 하고 차를 한 잔씩 앞에 놓고 둘러 앉았을 때에야 이야기를 할 분위기가 되었다. “그래 무슨 일로 영주를 만난거야? 궁금하잖아.” “내가 보고 싶어서 간 건 아니고, 영주가 불러서 간 거였어.” “응? 영주가 불렀단 말이야? 무슨일로 영주가 널 부른건데? 영주가 널 알고 있단 말이야?” 넥스였다. “왜? 내가 영주를 알고 있으면 안되는 거야?” “아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 그건 그렇다고 하고, 왜 영주가 널 보자고 한 건데?” 내가 다시 물었다. “으응, 사실은 이번에 왕궁에 가는 공물이 있는데 호위를 맡지 않겠냐는 의뢰가 있어서.. 그래서 간 거였어.” “뭐? 왕성에 가는 공물 호위? 그러고 보니 이제 봄이니까 공물이 갈 때가 되기도 했군.” 넥스가 말을 받았다. “뭐야? 무슨 일이야?” “그건 말이죠 루탄님.” 내 질문에 답을 한 것은 역시 쉬벡이었다. 다른 놈들 보다는 쉬벡이 역시 이런 면에서는 세세한 것에 신경을 써주는 면이 있다니까.. “매 해 봄이 되면 여러 지역에서 공물들이 왕성으로 모이게 됩니다. 물론 이것은 일 종의 세금과 같은 것이기는 합니다만 그보다 더 큰 것인 이 기회가 각 지역의 물품들 이 한 자리에 모이는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각 지역의 물품들이 한 곳에 모이는 만큼 필요한 물품들을 구입하고 보충하기에 편하다는 것이죠. 때문에 이런 기회를 빌어 서 일년 동안의 살림을 위한 거의 모든 물품을 충당해 오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엄청나게 많은 물량 이동이 생기는 때가 바로 이 때입니다. 이 동쪽지역에서는 특별히 생산되는 특산품이나 물품이 없는 대신에 괴물들로부터 얻어낸 여러 가지 것들이 특 산품으로 취급이 됩니다. 작게는 가죽이나 뿔, 이빨이나 뼈에서부터 크게는 마법을 위한 갖가지 재료들이 그것들입니다.” “그럼 그런 것들을 가지고 가서 물물 교환을 한다는 것이겠군요. 뭐 얼마간은 왕성 에 선물로 바치기도 하겠지만 일단은 불모지대라는 곳이 생산형 도시가 아닌 소비형 도시일 테니 왕성에 바쳐야 할 세금이라는 것은 명목 뿐일 것이고, 도리어 왕성에서 부터 지원을 받아서 무기나 기타 여러 가지 생필품들을 구입해서 돌아오는 그런 것이겠군요?” 나는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하면서 이야기했다. “역시 루탄은 이해력이 빠르네... 누구처럼 머리는 그저 없으면 이상하게 보이잖아!! 하고 달고 다니는 것이 아닌 모양이야.” 이 말은 역시 유소의 말이고 여기에서 누구처럼이 누군지는 밝히지 않는다. 그래도 지금은 유소의 말에서 이상한 것을 느낀(느낀 것이다 깨달은 것이 아니다 본능이다)모양인지 눈을 부라리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아! 아무튼 그런데 왜 영주가 유소를 불러서 그런 말을 한 거야? 설마 유소만 그 호위에 붙이겠다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내 생각이 맞다면 그 호위에는 넥스와 쉬벡 그리고 나도 끼어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 “맞아, 분명 영주는 우리 넷이 모두 그 호위에 참가해 줄 것을 바라고 있어. 뭐 싫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 “그런데 왜 영주가 너만 부른 거야? 그게 이상하잖아.” 난 역시나 그게 이상했다. 왜 유소였을까? “그런 건 중요한 것이 아니잖아. 그냥 이 일을 할 것인지 아닌지만 결정하면 되는 거 아니야? 물론 나는 이번에 왕성에 갈 생각이지만... ” 역시 유소는 이번 일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럼 넥스는? 그리고 쉬벡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야 물론 유소가 간다는데 같이 가야지. 이제야 겨우 유소의 마음을 알아가고 있는데... 절대로 유소를 놓칠 수는 없지.” 물론 이건 내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이런 닭살스러운 말을 거리낌 없이 하는 것은 넥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소는 어느집 닭이 우나?하는 표정이다. 순식간에 닭 된 넥스... “저도 이번에 왕성에 갈 일이 있기는 합니다. 이번 겨울에 어느정도 마법적인 진전 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에 관해서 마법협회에 보고도 하고 또 자문을 구할 일도 있어 서.... 물론 루탄님도 이번에 같이 가시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아까 말씀드린 대로, 공물을 바치는 이 기간에는 전 지역의 물품들이 모이기 때문에 거의 최고의 구경거리 들이 모이게 됩니다. 어쩌면 하나의 거대한 축제와도 같은 것이지요. 아마 재미있는 시간이 되실 겁니다. 여기에 있어도 별로 재미있는 일이라고는 없지 않습니까?” 음.. 역시 쉬벡은 무서운 말빨을 지니고 있다. 재미있는 일이라. 이야기를 들어보면 역시 재미가 있을 것 같기는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기회에 다른 지역을 둘러 보고 싶기도 하고.. “뭐, 저야 할 일이 없는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왕성에 가는데 얼마나 걸리지요?” “네. 아마도 한 달정도 걸리게 될 겁니다. 그냥 빨리 달린다면 이 주일 정도면 되겠 지만, 상당한 물품들을 운반하는 일이라 그다지 빠른 속도로 갈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상황에 따라서 시간이 더 걸릴 수도 있지요.” “그럼 다른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나는 쉬벡의 말에서 무언가 석연찮은 감을 느꼈다. “어차피 알게 될 일이지만, 실제로 이 공물 운반은 만만찮은 일이야. 이상하게 이 시기, 즉 봄이 되면 성벽을 위협하는 괴물들의 수는 줄어드는 대신에 성벽 안쪽에서 괴물들의 출현빈도가 높아지거든. 특히 이렇게 공물을 운반하는 길을 따라서 괴물들 이 나타나는 거야. 어쩌면 이 공물 운반이라는 것이 그 괴물들이 나타나는 길을 따라서 만들어 졌다는 편이 옳겠지만...” “그러니까 뭐야 봄이 되면 불모지대 안쪽으로 괴물들이 늘어나게 되는데.. 그 괴물 들을 소탕해서 사람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괴물들을 소탕하면서 왕성으로 이동 하는 것이라는 말이군. 일석이조라고 해야하는 것인가? 그럼 상당한 병력이 이동해야 하는 일이겠네?” 나는 이 공물 운반이라는 것이 가지는 의미를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역시 루탄은 머리가 좋아.” 그럼 그럼. 내가 한 머리 하지. 하하하 “그런데 출발이 언제야? 아직 쥐덧 안에서 별다른 움직임은 없던 것 같던데? 준비를 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아?” 내 질문에 답을 한 것은 의외로 넥스였다. “그런 별로 준비 할 것이 없기 때문이야. 설마 이 청색지대를 방어하는 이 긴 성벽에 이 곳 같은 마을이 여기 뿐이라고 생각 하는 것은 아니겠지?” 사실 나는 이곳 뿐인 줄로 알고 있었다. 물론 말이 안 되기는 한다. 만리장성로 마 을이 하나 밖에 없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이 청색지대 성벽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마을은 12개가 있어. 물론 이곳처럼 이중으 로 된 것도 아니고 성문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나름대로 성벽을 지키는 임무를 수행 하는 마을들이 성벽을 따라 늘어 서 있는 것이지. 그리고 그 마을들에서 각각 1년 동안 준비를 해 온 것이기 때문에 따로 준비를 해야할 것은 별로 없어. 그저 공물 운반에 필요한 인원을 뽑고 물건들을 창고에서 꺼내서 마차에 싣는 것으로 준비가 끝나는 거 지. 아마 영주가 결정을 내렸다면 이 삼일 이내로 공물이 출발 할 거야.” “그래? 그럼 뭐 준비할 것도 없으니 출발 할 때 따라 가기만 하면 되겠네.” 나는 그렇게 간단히 말을 마쳤다. “그런데...” 말을 늘이는 유소였다. “뭐, 다른 문제가 있어?” “그게 이번 공물 운반에 책임을 우리들이 맡았으면 하는 부탁이 있어서..” 유소의 말에 기겁을 한 것은 다름 아닌 넥스였다. 물론 쉬벡도 의외라는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뭐, 뭐라는 소리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넥스는 거의 비명같은 소리를 질렀다. “이 이봐 넥스 그게 뭐가 어렵다고 그런 비명을 지르고 그러는 거야? 너 전에도 용 병들 끌어모아서 대장노릇 했잖아. 그런데 왜 그렇게 과민 반응을 보이고 그러는 거야?” 나는 좀 이상하게 보이는 넥스의 행동이 궁금했다. “너, 너 그렇게 잘 돌아가는 머리로 생각을 해 보란 말이야. 공물이라고 공물 그게 누구한테 간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건 왕에게 가는 물건이란 말이야. 그걸 누가 갖다 바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걸 왕에게 가서 잘 가지고 왔습니다라고 신고하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구? 그건 운반 책임을 맡은 사람이 하는 일이란 말이야. 다시 이야기하면 그 일을 우리들이 해야 한다는 말이야. 왕을 만나야 하는 일이라구.” “그게 뭐? 그냥 가서 인사하고 잘 가지고 왔습니다. 뭐 이러고 나오면 되는 것이 아니었나?” “이, 이 바보가 지금 뭐라는 거야? 그냥 인사만 하고 나오는 일이라면 그저 그렇겠지만 공물을 바치는 그 기간에 왕성 전체에 축제가 벌어진단 말이야 그라고 궁안에서 는 왕족이나 귀족들 그리고 기타 권력자들이 모여서 고상한 파티라는 것을 하는데 그 파티에 참가를 해야 한단 말이야. 그게 어디 보통 일이냐? 그런 터무니 없는 일을...” “파티? 그거 재미 있겠네. 그럼 즐기면 되는 거잖아. 별거 아니네.” 나는 그저 심드렁하게 이야기 했다. 나도 파티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런 고상한 곳에 가 본 적이 없기는 했지만 한 번쯤 가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봐 루탄, 나는 한 번도 그런 자리에 가 본 적이 없단 말이야. 그런데 그런 자리에 가서 어쩌자는 거야?” “넥스, 나도 그런 자리에 가 본 적은 없지만 재미 있을 것 같지 않아? 일단 가 보고 안되겠으면 도망 나오면 되는 거지 그렇게 떨 필요가 뭐가 있어?” 나는 넥스를 안심시키려고 나름대로 노력했다. “그런데 이상하군요. 보통은 이런 공물 운반에는 영주가 직접 참가해서 일년에 한번 왕을 뵙고 그간의 일을 보고하고 또, 친분을 나누는 것도 중요한 일의 하나인데... 물론 4대 영주들이야 언제든 사람이 바뀔 수 있다는 특이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상하긴 하군요.” 쉬벡이 그렇게 말을 시작하자 유소가 말을 이었다. “그게 이번 겨울에 영주님이 왕성에 갔다 온 일이 있어서, 굳이 이번 공물 운반에 참가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고... 그리고 여기에서 할 일이 있어서 오래 자리를 비우는 것이 어렵다고 하던데...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자자, 그럼 결정을 내리자. 어차피 가고 싶은 사람은 가고 가기 싫은 사람은 말고, 그러면 되는 거니까.” “이봐 루탄,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잖아. 우린 그래도 벌써 몇 달을 함께 보낸 사이라고. 그런데 가고 싶은 사람은 가고 말고 싶은 사람은 말고라니... 섭섭하게 그러면 안되지..” 넥스 녀석이 말을 끊어 들어온다. 뭐 말은 틀린 말이 아니지만... “이봐 넥스야, 여기서 이번 공물운반에 참가하지 않을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유소는 당연히 간다고 했고, 쉬벡도 어차피 일이 있다고 했고, 나도 재미있을 것 같다고 했고, 또 너도 유소 때문에라도 가야 한다고 했는데, 겨우 왕궁 안에서 있을 파티가 무서워서 안 가겠다는 말을 할 수 있냐? 그리고 그게 정 무서우면 우린 공물운반 책임만은 맡을 수 없다고 하면 되는 것이고, 그런데도 꼭 책임을 맡아야 한다고 우기면 책임을 맡기 싫은 사람은 그냥 공물 운반 호위가 아닌 동행 형식으로 따라 가면 되는 거잖아. 안 그래?” 하하 역시 순식간에 돌아가는 잔머리는 결국에 이런 기발한 의견을 끌어내서 넥스의 입을 막아 버렸다. 하하하 꿀먹은 벙어리가 된 넥스. 결국 그렇게 우리들이 공물 운반에 참여 하는 쪽으로 결과가 나오게 되었지만 아직 그 책임자 자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결과를 내지 못하고 흐지부지 되었고, 그 결과는 책임을 넥스와 유소, 그리고 쉬벡과 내가 함께 지기로 하고 리더는 넥스가 맡는 것으로 나고 말았다. 다음날 유소가 영주에게 가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고 마음대로 결정해 버렸기 때문이었지만.... 나는 그 문제에 대해서 뭐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기 때문에... 나는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리더의 역할을 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그런 일에는 전혀 소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뭐 솔직히 다른 일행들도 내게 그런 것을 요구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기껏해야 취사를 맡기는 선에서 마무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뭐 밥하는 일이야 이제는 당연히 내 몫이라고 생각하고 있기는 하지만... 출발까지 준비해야 할 일은 별로 없었다. 어차피 모든 준비는 대장이 하는 것이 아니다. 대장은 점검을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계획도 따로 세우거나 할 필요는 없었다. 이번이 처음이 아닌 까닭에 이전에 했던 대로 하면 되는 일이라 경험자들의 조언을 들어서 이것 저것 준비를 확인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의외로 유소는 그런 일에 소질이 있어 보였고, 쉬벡도 어느 정도 신경을 써 준 덕분에 나는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들이 이야기를 나눈 사흘 후 아침 출발이 이루어졌다. 의외로 굉장히 많은 짐들이 갈 것이라 생각한 것과는 달리, 공물을 실은 마차는 5대였고 기타 음식과 텐트 등을 실은 마차가 2대, 쉬벡과 내가 타고 있는 예비용 마차가 1대, 이렇게 7대의 마차가 전부였다. 마차 수가 예상외로 적다는 내 말에 쉬벡이 자세한 설명을 붙였는데, 앞으로 이틀 정도 가는 동안 성벽에 속한 마을들에서 출발한 각각의 일행들과 합류를 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럼 결국 처음 출발한 이 마차의 10배 이상의 마차가 모인다는 말이 되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지금 우리들의 인원이 50명을 넘는데 나중에 모두 모인다면 500명이 넘는 인원이 되는 것이었다. 정말 어마 어마한 숫자가 되는 것이다. 그냥 말해서 500명이지 사실 그 정도의 인원에 70대가 되는 마차가 간다고 하면 정말 엄청난 규모의 이동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500명이라면 작은 마을 전체의 인구와 같은 인원이기 때문이다. 마을 하나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서 70대의 마차에 실린 물품이면 말 그대로 청색지대와 관련된 영지의 1년 예산이라는 말이 되는 것이다. 물론 그 공물을 상대로 도둑질을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세계가 비록 중세 시대 정도의 제도를 유지하고 있지만 괴물들이 많아서인지 나름대로 살기 좋은(귀족들 의 횡포에 시달리지 않는) 분위기 탓인지 떼를 이루어 도둑질을 하는 산적, 임적(숲에서 나오는), 야적(들에서 나오는), 해적같은 떼도둑들이 없다는 것이다. 그럴 힘이 있으면 차라리 용병이 되어서 괴물 퇴치를 하는 것이 수익이 더 낫고 떳떳하기 때문에 도둑질을 하는 것은, 규모가 큰 도시나 마을에서 소매치기를 하는 정도가 전부라는 것 이다. 물론 대 저택을 터는 도둑들도 있는 모양이었지만 떼도둑은 없다는 것이다. 오로지 걱정할 것은 괴물들의 습격이 전부였다. 문제는 우리들이 가는 길이 그 괴물들의 상습 출몰지역을 골고루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어쨌든 우리 일행들은 그 하루가 가기 전에 300여명으로 늘었고 마차도 50여대에 가깝게 늘어났다. 새로운 사람들이 합류할 때 마다 유소는 그들을 마을별로 한 사람씩 책임자를 정하고 관리를 위임했는데, 지금까지 그렇게 해 온 관례라고 한다. 그리고 전투시에는 그 책임자들이 각각의 마을에서 차출된 용병들을 통솔하는 것이었다. 다만 마법사나 궁병과 같이 원거리 공격을 담당하는 사람들만 따로 차출해서 적소에 배치하는 일을 했을 뿐이었다. 나는 여전히 쉬벡과 함께 마차를 타고 행렬의 끄트머리를 따라가는 것이 전부였다. 나야 뭐 밥이나 해 주면 되는 것이었으니까. 그것도 우리 일행의 밥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우리 넷의 식사만 책임진다고 했지만, 하는 일도 없이 빈둥거린다는 넥스의 불만에 함게 떠난 우리 마을의 용병일행의 식사를 책임지는 것으로 타협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원래 이런 야외에서 남이 식사를 준비해 주기를 기다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차라리 몇몇이 모여서 알아서들 끼니를 준비하고 해결하는 것이 시간도 노력도 적게 드는 것이다. 물론 자기 취향에 맞게 먹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고.. 때문에 대부분의 용병들은 자신의 식사는 자신이 해결한다. 결과적으로 내가 식사를 준비하는 것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내 예상이다. 특별하게 관심을 끌 만한 식사를 만들지 않는다면 말이다. 하하하 내가 괜히 사람들의 이목을 끌 요리를 만들 이유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ㅋㅋㅋ 그리고 우리 마을의 용병들은 대부분 순대나 수제비, 혹은 불고기, 삼겹살 정도는 만들어 먹을 줄 아는 수준이다. 워낙 내가 만들어 먹는 것을 보고 익힌 사람이 많은 까닭에.. 물론 아직 맛을 따라 오려면 멀었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길을 가는 동안 여기 저기서 합류하는 인원들은 다음날 저녁까지 계속되었고, 예상보다 인원이나 마차의 규모가 커졌다. 인원은 정확히 724명 마차는 82대였다. 그 중에서 예비마차는 12대, 70대는 물품을 싣고 있는 마차였고 마차 한 대에 2명씩의 인원이 타고 있었기 때문에 164명이 마차를 타고 있었고 나머지는 말을 타고 있었다. 결국 말을 타고 따르는 사람이 560명인 것이다. 마법사는 쉬벡을 제외하고 12명(마을 하나에 한 명을 보내온 것같았다.) 이었는데 모두 마차를 타고 있어서 각 마을의 마차 가장 마지막에 타고 가도록 했다. 물론 다른 마차를 모는 사람들은 대부분 활을 다루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뭐 쉬벡과 내가 탄 마차는 여전히 행렬의 후미에서 따라가는 입장이었고 넥스는 선두에 유소는 후미에 있어서 식사시간을 제외하면 넥스의 얼굴은 거의 볼 수가 없었다. 거의 1Km를 넘는 행렬이었기 때문에 앞에서 가는 넥스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도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3일째 되는 날부터 행렬은 변화를 보였는데 그 이유는 마차 행렬이 평야를 가로 질러 가기 시작하면서 길이 따로 없어진 까닭이었다. 물론 사람들은 흔히, 다른 사람들이 다닌 길을 따라 다니는 습관이 있어서 길이 희미하게 나 있기는 했지만 우리 마차들은 선두 8대를 기준으로 10대씩 한 줄로 대를 이루어 나갔던 것이다. 이 평야지역은 거의 일주일이 계속되는데 늑대(말이 늑대지 거의 황소같은 놈들...)나 기타 평야형 괴물들이 출몰하는 지역이라고 한다. 그 녀석들은 기동성이 뛰어나기 때문에 밀집된 형태로 이동하는 것이 방어에 유리하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경험에서 나온 결론이라고.. 그리고 결과는 그렇게 대단위 인원으로 구성된 행렬이었지만 평야가 시작되고 그날 하루에 우리 일행이 받은 습격은 7번, 쓰러트린 괴물들의 수만 1000을 훌쩍 넘는 이해 못할 결과를 낳았다. 어떻게 괴물들의 수가 이렇게 많을 수 있는지 그리고 이 많은 인원을 보고 덤빌 생각을 할 수가 있는지.... 쉬벡의 설명에 의하면 이 시기가 되면 괴물들이 너무나도 많이 출몰하는 까닭에 이 런 공물 행렬을 제외하고는 거의 어떤 사람들도 움직이지를 않기 때문에 그 많으 수의 괴물들이 자연히 공물 행렬에만 몰릴 수 밖에 없고, 그 때문에 이렇게 대단위로 움직이면서 괴물들을 처단하는 것이란다. 그래야 또 1년 동안 사람들이 그나마 안심하고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때문에 이 공물 행렬은 굳이 빠른 속도를 내려고 하지도 않고 천천히 움직이면서 괴물들을 퇴치하고 어떤 경우는 괴물들을 기다려서 해치우고 이동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이 평야에서 보통 하루에 1000-2000마리 정도의 괴물들을 처리하는데 예상외로 처리한 괴물의 수가 적다면 그 수를 채우고 이동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중에 다치거나 죽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렇게 대규모의 인원이 모여있을 때 생기는 사상자는 작은 그룹을 이루고 다니는 경우보다 훨씬 적기 때문에 이런 방법을 쓰는 것이란다. 하하하 아무튼 그런 이유로 그 평야에 들어선 이후로는 계속되는 싸움의 연속이었다. 모두들 청색지대의 성벽에서 몇 년을 괴물퇴치를 해 온 경험 많은 사람들이라 그런지 어렵지 않게 싸움을 해 나갔고 위험한 경우에는 마법사들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부상자는 있어도 사망자는 없이 하루가 저물어 갔다. 하지만 나는 그런 싸움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다만 화아를 소환해서(인간형이 아닌 늑대형으로 소환했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주위 경계를 맡기고 사람들이 위험하면 될 수 있으면 도와주라는 주문을 해 두었을 뿐이다. 뭐 덕분에 그 날 하루가 가기전에 화아는 모든 용병들의 환호를 받는 존재가 되어버리기는 했지만... 위험이 있을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서 도와주는 불덩어리 늑대를 사람들이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는가 말이다. 처음부터 유소와 넥스가 불의 정령이라고 설명을 해 주어서 무서워하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정령을 누가 불렀는지는 몰랐다. 나도 그렇게 늑대형(중급)의 정령 하나를 소환해 놓는 것은 그다지 힘들 것도 없었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할 수 있었고 덕분에 주위에 사람들도 내가 화아를 소환해 놓았다는 사실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날이 저물 무렵 마차의 움직임은 멈추었고 드넓은 지평선의 가운데에서 마차를 벽으로 야영지를 만들고 밤이 시작되었다. 724명의 인원들이 북적거리는 속에서 낮 동안의 싸움을 놓고 와자한 소리들은 밤의 어둠이 짙어질수록 잦아들고, 잠자리에 들었던 사람들은 그러나 곧 어둠 속에서 울리는 마법 알람과 불침번들의 경고에 깨어나 무기를 들어야 했다. 밤은 곧 괴물들의 세상이나 다름이 없었다.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운 어둠 속에서 괴물들은 유령처럼 다가와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을 빛내곤 했다. 마법사들의 조명 마법이 여기 저기 떠오르고 내가 소환한 광아의 빛이 허공중에 떠 있었지만 주위를 둘러싼 마차를 얼마쯤 벗어난 자리에서부터는 어둠의 영역이었고 그 어둠 속에서 예고 없이 날아드는 괴물들은 몹시도 위험한 상황을 만들곤 했다. 그렇게 밤은 흘러갔다. “쉬벡 예상보다 상당히 어려운 싸움이 되겠네요. 이렇게 밤에 잠도 자지 못하면서 이동을 해야 한다면 일주일이면 모두 지쳐 쓰러지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동을 한달 이상을 해야 한다면 그건 불가능한 일일텐데 무슨 방법이 있는 거겠죠?” “허허 루탄님도... 어찌 인간이 이렇게 싸움만 하면서 이동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한 3일정도 가면 마을이 있습니다. 마을에 들어가면 더 이상 괴물들의 습격도 없을 것이고, 습격이 있다고 해도 마을 사람들이 알아서 해 줄 것이니 그리 피곤한 일도 없는 것이지요. 그러니 그런 마을에서 하루나 이틀 쉬고 출발을 하면 되지요. 그렇게 마을들 마다 적당하게 휴식을 취하고 가기 때문에 그렇게 걱정을 하실 일은 아닙니다. 다만 어쩌다가 상대하기 벅찰 정도의 괴물들과 마주하는 경우가 문제가 될 뿐이죠. 피곤해서 문제가 될 일은 아마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이동하는 경로에는 크고 작은 마을들이 들어 있었던 기억이 났다. 급할 것도 없으니까 마을들마다 들러서 피곤을 다스리고 다시 출발을 한다면 그리 어려울 것은 없어 보이기도 했다. 더구나 부상자들은 그 마을들에 맡기고 가기 때문에 부상자로 인한 문제도 별로 없다고 한다. 문제가 있다면 호위를 끝까지 마친 사람과 일찍 탈락한 사람들 사이에 보상액에 차이가 많을 뿐이다. 이동한 경로가 길면 길수록 많은 괴물들을 퇴치한 것이라 그 만큼 보수도 많아진다는 것이었다. 보통 500명 정도가 출발을 하면 왕성에 닿을 때쯤이면 부상자와 사망자를 제외하고는 200명 정도가 남게 되는 것이 보통이라고 한다. 그럼 우리가 724명이니까 300명 정도가 남게 된다는 말인데.. 마차를 몰아야 하는 인원이 164명이니까 마차에 타고 있는 인원이 말을 탄 인원보다 많아지는 것인가? 아니면 예비마차가 줄어들고 마차에 타는 사람도 줄이면 되는 것인가? 뭐 그건 별로 중요할 것 같지는 않군. 끝도 없을 것 같던 싸움은 새벽 여명이 밝아 오면서 끝이 났고 아침 해가 뜰 무렵 각 마을의 책임자들은 인원 보고를 했다. 밤사이에도 사망자는 없었지만 중상자가 제법 되었다. 넥스는 예비 마차에 중상자를 태우고 가게 했고 특히 상태가 심한 세 사람을 쉬벡과 내가 모는 마차에 태웠다. 환자들의 상태는 보기보다 심각했는데, 한 사람은 목을 괴물에게 물려서 목의 경동맥이 터져서 출혈과다로 위험한 상태라 나는 그의 수혈 (잠드는 혈이다. 일종의 기절인데 몸에 무리는 없다.)을 눌러 재우고 심장에서 목을 물린 쪽으로 흐르는 혈관을 압박해서 피의 흐름을 줄였다. 또 한 사람은 불행히도 다리 하나가 떨어져 나가고 없었는데(허벅지 중간 부분이 뜯겨 나갔다.) 깨끗하게 잘려 나간 상처가 아니어서 (잘린 상처가 뜯긴 상처보다 치료가 쉽다.) 어쩔수 없이 통혈(쉽게 감각을 느끼는 신경을 마비시키는 혈이다)을 점하고 내 검으로 산뜻하게 잘라내고 소독을 하고 붕대를 매어주었다. 마지막 사람은 그야말로 식물인간이었는데 외상은 전혀 없는데 목뼈가 어긋나면서 척추 신경을 다쳤는지 의식은 있는 것 같은데 전혀 움직이지를 못하고 있었다. 쉬벡의 말로는 이런 경우는 신전에서 신관치료를 받으면 나을 수 있을 것이란다. 그래서 결국 아무 치료도 못하고 그냥 마차에 태웠다. 나중에 목을 다친 사람은 그 일행이 치료물약을 가지고 와서 어느 정도 혈관이 재생 되어서 중상자에서 경상자가 되어 말을 탔고(다음날 점심때 쯤의 일이다.) 다리를 다친 사람은 그래도 의족을 달면 걷는 데야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면서 씁쓸한 웃음을 웃었다. 다행히 지금까지 모은 돈이 제법 되니까 어디든 정착해서 잡화점같은 가게를 하나 차려야겠다고... 그래도 다행히 그들은 희망을 잃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적어도 용병으로 살면서 수많은 싸움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던 그들에게 삶이란 어떤 경우에도 죽음보다는 가치가 있는 것인 모양이었다. 평야를 건너는 동안에 우리일행은 단 한 사람의 사망자도 내지 않았다. 평야에서 처음으로 마을에 도착했을 때, 우리 일행들은 724명중 전투불능으로 마을에 남아야 하는 사람은 32명으로 적지 않은 수였지만 누구도 죽지 않았다. 나는 마을을 떠나면서 이번에 한 사람도 죽지 않고 성도(왕성이 있는 도시)에 도착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번 여정에서 정말 그렇게 되도록 해 보자는 결심을 했다. 어차피 운명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다. 다만 내가 조금 더 노력한다면 부상자나 사망자를 좀 더 많이 줄일 수도 있을 것이란 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그 이후 마을에서 이틀을 쉬고 다시 4일 동안 평야를 건너는 동안 나는 모든 정령들을 소환했고 그 정령들로 하여금 사람들을 보호하게 했다. 5대 정령들은 동서남북 사방과 중앙(광아가 중앙이었는데 주로 밤에 주위를 밝히는 역할이 가장 컸다. 물론 경계임무에도 쓸모가 있기는 했지만 적어도 중급까지의 모습에서는 특별한 공격력을 기대하기 어려웠다.)을 맡아 역할을 다했고 지토나 수아는 주로 방어가 능숙했고, 화아나 풍아는 공격이 능했지만 어떤 쪽이든 상당한 전력이 된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이번 일행들 중에서 누가 정령을 불러 내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 사람들에게 무엇을 바라는 것도 아니었고, 그들이 고마워하는 말에 우쭐해질 생각도 없었다. 그저 한 번의 싸움이 끝나고 나면 크게 다치거나 죽은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 나에게 즐거움이 되었을 뿐이었다. 어쩌면 나는 한 번 한 번의 싸움에서 죽는 사람이 없다는, 기록을 세워나간다는 꼴 같지않은 성취감에 도취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 죽게 된다면 무 척이나 실망스러울 것이라고(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기분이 나쁠지도 모르지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내 가슴 속의 내밀한 음습함이야 드러내지 않는다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인간이란 누구나 그 정도의 어둠이야 가진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하하하 아무튼 우리 일행은 그렇게 평야를 건넜고, 두 번째 마을에서 우리가 남겨 두어야 할 인원은 14명이었다. 그렇게 평야를 지나는 동안 46명의 인원이 줄었고 678명의 인원이 두 번째 마을을 나섰다. 그리고 우리들의 대형은 다시 일렬로 늘어서게 되었다. 평야가 끝난 다음은 산을 지나야 했던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조심해야 한다는 쉬벡의 경고가 있었다. 산악지역은 대형괴물들의 출현이 많은 곳이라고 한다. 또한 유사 인종의 공격도 있는데, 유사인종은 인간과 비슷하게 생각 괴물들을 이야기 한다고.., 나름대로 지능도 있어서 집단으로 사회를 구성하여 살아가며 집단 행동을 하며 무기도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사상자가 많이 나올 수 있고, 특히 대형괴물의 경우에는 다수의 사람들이 달려드는 것 보다는 실력자 한 두명이 처리 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이 산악지역에서는 실력자가 잘 해 주면 그만큼 사상자의 수가 줄어드는 것이다. 떼로 덤비는 유사인종의 경우만 아니라면 대형 괴물들은 오히려 쉬운 상대가 될지도 몰랐다. 그리고 쉬벡의 예상대로 산악 지대에서는 넥스와 유소 그리고 쉬벡과 내가 나서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암석지대를 지날 때 나타난 스톤웜(보통은 사막의 모래속에 살아서 쎈드웜이라 부른다는 녀석인데 이놈은 변종으로 바위 속을 마치 물 속 돌아다니듯 다니는 놈이었다.)은 상당히 위험한 녀석이었다. 마침 지토를 소환해 놓고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그 녀석의 접근을 몰았을 것이고 만약 그랬다면 상당히 많은 인원이 희생되어야 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다. (다들 그 녀석은 왜 건든 거냐고 뭐라고 한 소리씩 했지만)나는 그 녀석이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다행히 지토를 소환하고 있는 상태여서 땅 속에서 접근하는 녀석의 기척을 미리 알 수 있었고, 일행들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싸움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무식한 녀석은 생긴 것은 지렁이 같은 녀석이 거의 고래 같은 몸통을 지니고 있는 데에다 칼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지니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하기도 했다. 바위속을 물속처럼 돌아다니는 녀석의 피부가 얼마나 단단하겠는가 말이다. 결국 그 녀석을 상대 할 수 있는 것은 검기(솔직히 검기로도 어렵지 싶다. 거의 검강의 수준이 아닐까?)를 쓰거나 마법을 쓰는 방법뿐이었는데, 넥스는 전격 계열의 건들렛을 가지고 있었고, 나도 쌍환검(내가 차고 있는 한 쌍의 팔찌로 이루어진 검에 붙인 이름이다. 멋있지? 카카카)으로 마법을 쓸 수 있었기 때문에 둘이서 붙어서 두드리고 깍아내고 파내고 찍어내고 태우고 그렇게 해서 쫓아 보냈다. 흠... 솔직히 이야기 하면 잡을 수도 있었을 텐데(지토를 상급까지 변신시키면 잡아 죽일 수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냥 놔주기로 했다. 원래는 인간들에게 덤비는 경우가 거의 없는 괴물인데(실제로 녀석은 땅속에서 밖으로 나오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인간을 공격하는 경우도 없다고 한다.) 내가 쓸데없이 녀석을 건드려서 싸우게 된 거라고 넥스 녀석은 두고두고 불평을 했다. 솔직히 내가 알고 그랬겠는가? 다만 지토가 땅속에 엄청나게 큰 괴물이 있는데 녀석이 일행들 가까이로 오고 있다고 해서 그 녀석이 일행들 가까이에 오기 전이 미리 잡으려고 한 것 뿐인데... 그렇게 우리들은 넥스와 나, 쉬벡이 몸살이 날 정도로 뛰어다니면 대형 괴물들의 상대하고 오크(이녀석을 부르는 이름이 있지만 번역이 안 된다. 아무리 이 세계에 대한 동화력이 있어도 내가 애초부터 가지지 않은 개념에 대한 번역은 안 되는 모양이다.) 같은 유사인종들은 일행들이 힘을 합쳐서 상대해 나갔기 때문에 산악지대를 지나는 데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솔직히 평야에 비해서 괴물들의 출현 빈도가 낮은 편이었다. 하지만 거의 산의 정상(솔직히 정상으로 길을 가는 멍청이는 없다. 그저 산의 고개를 넘어가는 것이다.) 즉 고개를 넘어가는 즈음에서 처음으로 공중전을 치르게 되었을 때는 상당히 위험했다. 아무리 마법사들이 몇몇 있다고는 하지만 길게 늘어선 일행들을 모두 책임을 질 수는 없었던 것이다. 꼬리에서 머리까지가 5미터가 넘고 펼친 날개의 넓이가 10미터에 이르는 날개달린 것들이 공중에서 급습을 했을 때, 우리는 세 대의 마차을 잃어야 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마차에서 뛰어내려서 괜찮았지만 마차를 끌던 말들이 괴물들에게 찢겼고 상처 입었고 말을 끌고 놀아 오르는 괴물 때문에 말에 묶여 있던 마차가 뒤집어지고 들어올려졌다가 떨어지고 해서 부서진 것이었다. 미처 풍아를 소환해 놓지 않은 상태여서 산등성이 너머에서 갑자기 나타난 녀석들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린 마법사들과 궁수들의 공격으로 일단 괴수들은 날아올랐고 그 후의 상황은 나름대로 낙관적이었다. 급히 소환한 풍아는 결국 상급 변신까지 해서 녀석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렸고, 처음으로 바람의 상급정령을 본 용병들을 저마다 입을 다물지 못했다. 뭐 나야 덕분에 상당히 지쳐버리기는 했지만 말이다. 아직도 나는 상급 정령을 오랜 시간동안 소환하지도 못했고 급하게 소환을 할 수도 없었다. 즉 중급이라면 그대로 중급 상태로 소환이 가능했지만, 상급은 중급으로 소환해서 변신을 시켜야 하는 것이었다. 물론 일단 상급으로 변신했던 녀석들이라 중급으로 소환을 해도 정신은 상급으로의 정신을 유지하기는 했다. 덕분에 기어오르는 화아와 지토를 가끔 늘신하게 패버리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물론 다른 사람들은 안 보는 곳에서의 일이다. 카카카) 그 후로는 좀 더 주위의 경계에 신경을 썼기 때문에(역시 풍아가 그런 경계에서는 제일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급습을 당하는 일은 없었고 무사히 산을 넘어 세 번째 마을로 들어 설 수 있었다. 그건 우리가 산악지대를 들어서고 5일만의 일이었다. 벌써 우리가 쥐덧을 떠난 지도 거의 20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마을에서 쉰 시간을 제외하고 평야에 도착하기 전에 3일, 평야에서 7일, 산에서 5일 그리고 앞의 두 마을에서 쉰 날이 합이 4일 그리고 이 마을에서 하루를 쉬기로 했기 때문에 또 하루... 이제 20일이 지나는 것이다. 이번 마을에서의 휴식이 그다지 길지 않은 것은 산악지역을 지나면서는 뛰어난 실력을 지닌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힘든 일이 없었던 탓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거의 나와 쉬벡, 그리고 넥스가 모든 일을 처리 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였다. 특히, 나...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밥하고, 쌈하고, 물건 보관하고... 따지고 보면 그냥 물건들을 모두 창고에 넣었다가 우리 일행만 왕성에 가서 그 물건들을 전해주면 되는 것이었는데.. 문제는 괴물들의 소탕이라는 이면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도 못한 것이다. 아무튼 우리의 여정은 거의 절반은 끝이 났다. 왕성에 가깝게 가까울수록 괴물들의 출현 빈도는 낮아지게 되는 것이니까 어려운 일은 거의 지났다고 봐도 될 것 같았다. 언제나 하는 이야기지만 별다른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말이다. 하하, 그래도 우리의 출발은 여전히 힘에 넘쳤고, 걱정이라고는 한 올도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예상보다 부상이나 사망자가 적은 탓에 일행의 사기는 충천해 있는 상태였고, 날씨도 더 할 나위없이 화창한 날이었다. 우리들이 가게 될 길은 이제부터는 적당한 숲과 낮은 산과 구릉지대가 전부였고, 험한 지형은 없었다. 그리고 괴물들도 숲이나 산지에 나뉘어서 분포해 있었던 지난 날의 예로 미루어 어려움 없는 여행이 될것이라고 사람들은 즐거워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예상과 다른 일은 별반 일어나지 않았다. 적어도 이런 이상한 경우를 당하기 전 까지는 말이다. “쉬벡, 이건 아무래도 이상한데요? 여기가 우리가 쉬어갈 마을이 맞는 거죠?” 나는 옆에 앉은 쉬벡에게 물어 보았다. 사실 내가 물어보는 것이 별달리 이상할 것도 없었다. 마을은 앞에서 보았던 여느 마을과 다를바 없었지만 문제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앞의 마을을 떠나서 이틀째 오후, 우리는 하룻밤을 쉬며 보급을 할 예정으로 되어있던 마을에 도착을 했지만, 마을 전체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아니 말이 틀렸다. 쥐도 있고, 고양이도 있고, 개도 있고, 닭도 있는데 문제는 오직 사람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그대로 있었다. 마을을 급히 떠난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일행들이 주워온 몇가지 정보들을 토대로 상황을 분석하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입니다. 루탄님,”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도 없고, 사람들이 사라진 것도 기껏 어젯밤인 것 같은데...” 물론 이런 결론을 내린 것은 다 근거가 있었다. 사람들이 사라진 것은 마을 사람들의 옷가지가 어느 집에는 일상복이 벗어져 있고 잠옷들이 없는 반면, 어느 집에는 잠옷이 남아 있다는 것이었고, 식탁의 식사는 거의 말끔히 먹어치워져 있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잠옷을 입은 사람도 있고 잠옷을 입지 않은 사람도 있는 시간은 , 잠들기 전의 시간과 잠든 후의 시간인데, 문제는 식사를 마친 시간이라는 점이다, 적어도 아침 식사는 잠옷을 입고 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이다. 이런 작은 마을에서 잠옷을 입고 식사를 할 정도로 느긋한 사람은 몇 없을 것이기 때문에 결국 사람들이 사라진 시간은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 시간쯤 해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 마을 사람들은 자의로 마을을 떠나지는 않았을 것 같군요, 잠옷을 입고 어디를 갈 생각은 하지 않을테니 말입니다.” 넥스의 추리였다. “하지만 이 마을 사람들이 반항을 하거나, 혹은 다툰 흔적이 없고 주점에는 마시던 술잔이 그대로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갑자기 떠나게 된 것은 맞는 것 같은데요?” 이건 유소의 말이었다. “그럼 결론은 별로 많지 않겠네요, 자의로 가지도 않았는데 반항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 마을 사람들 한꺼번에 정신을 빼앗긴 경우가 아닐까싶은데.” 이건 내 말이다.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그런 결론 이상은 나오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루탄님, 그 이외에 한 가지 상황이 더 있습니다. 마을사람들 전체가 반항을 할 수 없을 정도의 힘에 눌리게 되면 이런 상황이 될 수도 있지요. 예를 들어서 이 마을이 약 300명 정도의 소규모 마을이니까 다수의 강력한 힘을 지닌 사람들이 와서 이 마을 사람들을 억압했다면...” “하지만 쉬벡,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어디에서도 반항의 흔적이 남지 않는다는 것은... 더구나 잘 살펴보니 어떤 집 침대 아래서는 신발이 그대로 남아있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봐서는 아무래도 정신을 조종당한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나는 여전히 내 주장을 지켰다. “흠흠, 루탄님 사실 제 생각도 루탄님 생각과 많이 다르지는 않지만 다른 가능성도 살펴야 하겠기에 말씀을 드린 것 뿐입니다만, 역시 마을 사람들 전체가 어떤 힘에 의해서 조종을 당했다는 것이 현재로서는 최선의 설명이 되겠군요.” 결국에 마을 사람들이 전부 사라져버린 이상한 상황에 대한 결론은 그렇게 내려졌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 마을에서 계속 머물 것인가 아니면 마을을 벗어날 것인가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했다. 아직은 해가지지 않았지만 곧 저녁이 오고 밤이 올 것이었다. 만약 이 마을 사람들처럼 우리 일행이 전부 같은 경우를 당하게 된다면 그 문제는 상당히 심각해지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우리들의 여정의 목적이 괴물들을 소탕해서 사람들의 생활환경을 개선하는 것인 만큼 이런 상황을 모른 체 넘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넥스 생각은 어떼? 그냥 이 마을에 있을까? 아니면 마을을 벗어날까?” 나는 표면상 이 일행의 리더인 넥스의 의견을 물었다. 그렇다고 그 의견을 전적으로 들어줄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난 아무래도 이 마을을 벗어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 적이 어떤 녀석인지 녀석들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 마을에 무조건 있는 다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야.” “그 의견에는 나도 동감이야. 마을 사람 전부가 어이없이 당했다면 우리들로서도 별다른 방법이 없다고 봐야해. 일단은 마을을 벗어나자.” 넥스의 말에 찬성한 것은 유소였다. “저도 일단은 마을을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다만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도 모색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몇몇 인원을 마을에 남겨서 추이를 살펴 보는 것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물론 자원자를 뽑아야겠지요.” “저도 쉬벡의 의견과 같습니다. 일단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으니까 일단 일행들을 마을에서 떨어진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고 소수의 인원만 남기로 하지요. 뭐 지금 이런우리들의 상황까지도 다 아는 놈이라면 별 필요도 없는 방법이 되겠지만요.” “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하고 빨리 서둘러야 겠네? 그런데 우리들 중에서 누가 여기 남지? 누군가는 여기 남아야 할텐데?” 넥스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그거야 당연히 내가 남지. 내가 그래도 제일 믿음직스럽지 않아? 하하하” 이게 유소의 말이라고 생각하시는지... 이건 내가 한 말이다. 솔직히 여기 쉬벡을 남겨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대장격인 넥스를 둘 수도 없고, 여자인 유소를 둘 수도 없으니 남는 건 나뿐이다. 물론 나 혼자만의 생각이겠지만... “그래 드럼 루탄이 남는 걸로 하고 나는 나가서 마을에 남을 지원자 몇을 구해 볼게.” 하하하 뭐, 뭐냐? 이런 분위기는 어째 당연하다는 듯이 내가 남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거냔 말이다. 아무래도 나는 인복이 없는 사람인가보다. ㅜ.ㅡ 결국 모두들 떠나 버리고 말았다. 유소와 넥스 그리고 쉬벡은 일행들을 이끌고 떠났다. 이제는 거의 날이 저물고 있고 내 주위에는 마을에 남기를 지원한 열명 정도의 사람들만 있다. 이들은 그저 보너스를 준다는 말에 혹해서 남은 사람들이다. 물론 나름대로 배짱이 있고 실력이 있다는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우리들은 지금 마을 중앙에 있는 주점에 있다. 그럭저럭 식사를 준비해서(물론 내가 했다. ㅡ.ㅜ) 먹고, 그저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 사이에 말도 별로 오가지 않고 조용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마음편히 눈을 붙이는 사람은 없는 모양이다. 다들 앞에 놓인 술잔을 홀짝거리거나 칼을 닦거나 도끼를 손질하거나 그도 저도 아니면 탁자에 엎드려 있다. 완전히 분위기가 물에 젖은 빵같은 분위기다. 하하하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이젠 가끔 조는 사람도 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무엇인지도 모를 것을 기다리는 것은 정말 지루한 일이다. 당연히 졸리게 된다. 즉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어디 집중할 것이 있어야 집중을 하지... 하하하 그리고 내 감각 속에도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이렇게 조용한 분위기라면 적어도 이 마을 절반 정도는 내 이목속에 잡히게 되는데.. 그 속에서 움직이는 특이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의자를 뒤로 젖혀서 벽에 기댄 모습으로 조용히 눈을 감고 앉아 있을 뿐이다. 같이 남은 일행들도 내가 지금까지 싸워 온 것을 보았기 때문에 나를 많이 믿는 눈치였고 나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이 정도 숫자의 사람들은 보호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거기다가 믿는 것도 있었고 말이다.(쉬벡이 가면서 준비해 둔 것이 있었다.) 그 속에서 밤이 깊어갔다. 그리도 드디어 기다리던 무엇인가가 나타났다. 그건 솔직히 어떤 움직임이 아닌 느낌이었다. 주위를 흐르는 기의 흐름의 변화, 그것은 소리도 없이 다가 오고 있었지만 주위를 흐르는 기의 흐름이 이상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눈을 뜨고 몸을 세웠다. “모두들 준비 하세요. 무언가 다가오고 있어요. 일단은 밖으로 나가서 어떤 녀석인지 맞이 해 보도록 사지요.” 그렇게 우리들은 주점 앞 공터(사실 이 마을의 중앙)에 나갔다. “저 쪽이군요.” 나는 왼쪽으로 뻗은 길을 가르켰다. 물론 그 방향에 무엇이 보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쪽으로 기의 흐름이 이상하게 흘러 들어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아무것도 안 보이지?” “정말?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그러게 말이야.” 일행들은 그 쪽을 보면서 무언가를 찾으려 했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물론 나도 느낌만 있을 뿐 그것을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쌍환검을 들었다. 평소에는 팔뚝을 감싸는 형태지만 이렇게 검으로 바꾸면 더없 이 훌륭한 명검이었다.(거기다가 마법도 쓸 수 있다. 기껏 내가 가진 기의 형상화이지만...) 내가 검을 드는 것을 본 일행들도 무언가 다급하다는 것을 느낀 모양인지 다를 무기를 들고 긴장하기는 했지만 사실 대상이 있어야 어떻게 해 볼텐데 아무것도 없는 허공 앞에 무기를 들고 선 모습이 어정쩡해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우리들은 곧 그것을 볼 수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중에서 형체를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흡사 서양에서 죽은 자의 영혼을 데리러 온다는 사신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긴 낫 모양의 무기를 어께에 걸치고 머리까지 덮은 고깔달린 찢어진 검은 로브를 걸치고 있는 그런 모습의 존재. 크기도 엄청나게 큰 모습이었다. 거의 7미터 정도는 되는 크기 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그 녀석이 나타나는 순간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적대감이나 반항하고 싶은 마음 같은 것은 전혀 들지 않고 그저 멍한 느낌만 들었다. 그건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아무 말도 없이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서서히 그 존재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내 몸이 움직이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정신은 멀쩡한 것 같은데 어떤 행동도 내 의지로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런 이게 무슨 일이람. 정신은 멀쩡한데 몸은 내 멋대로 움직이다니.. 그럼 다른 사람들도 이런 상태인가? 아주 웃기는 일이네... 이거 무슨 방법이 없나?’ 나는 우리 일행들이 천천히 걸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아니 내가 같이 걷고 있으면서도 방법이 없었다. ‘이런 아주 내 의지 말고는 어느 하나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구만... 이런 상태는 뭐라고 해야 하나?’ 하하하 정말 웃기는 일이었다. 정신과 몸이 따로 놀고 있는데 몸은 딴 녀석이 지배하고 있다니... 하지만 나는 한 가지를 알 수 있었다. 내 몸이 외부의 어떤 강제적인 힘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다시 말하자면 육체의 운동을 담당하는 부분에 대한 통제를 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만약에 외부에서 오는 힘에 의한 것이라면 나는 아주 약간이라도 반발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이렇게 무기력하게 당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론은 한 가지였다. 저 이상한 녀석은 내 운동신경 전체나 운동을 관장하는 뇌를 장악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리고 그런 경우는 내가 아는 경우에도 있었다. 경우가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몽유병. 물론 그건 꿈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어서 좀 다르기는 하지만... 어찌되었든 지금 내 모습은 무언가가 내 뇌의 한 부분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럼 방법은? 방법은 있나? 일단은 어떻게 해서든지 외부에서 내 뇌로 들어오는 명령을 차단해야 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방법이.. ‘혹시 정령들을 말이 아닌 정신으로 불러 올 수 있을까?’ 나는 그게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으로 정령들을 불러온다. ‘풍아 소환.’ 나는 마음속으로 풍아를 소환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중급의 모습으로 풍아가 소환되었던 것이다. ‘주인님 부르셨어요? 그런데 상황이 좋지 않군요.’ ‘그래 넌 이게 무슨 이유인지 알겠냐? 정신은 있는데 몸은 전혀 움직이지를 못하겠네.’ ‘음,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저는 하급정령에서 성장한 경우여서 다른 상급정령들과 달리 많은 지식을 가지지 못했거든요.’ 풍아는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젠 제법 자기 표현도 능숙해진 녀석들이었다. ‘그래 그럼 일단은 할 수 있는 만큼은 해 보자. 내 주위로 음파가 소리나 공기가 들어오지 못하게 막을 칠 수 있겠니? 물론 내가 숨을 쉴 수는 있게 니가 처리해 주고..’ ‘한 번 해 볼께요. 이건 상태로 가능할 것 같은데..’ 그리고 풍아는 내 주위에 공기의 차단막을 형성했다. 하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주인님 이제 괜찮으세요?’ ‘아니 여전히 같은데? 뭔가 내게 명령을 내리는 것이 있을텐데... 수아 소환.’ 나는 다시 수아도 소환해 내었다. ‘안녕하세요 주인님.’ ‘응 그래 안녕, 너도 이 상황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니?’ ‘네. 저도 모르겠어요. 죄송해요.’ ‘그게 무슨 너희의 잘못이니. 죄송하기는... 일단은 풍아는 그 상태를 유지해 주고 수아는 풍아의 막 밖으로 또 한 겹 막을 둘러봐 역시 공기나 소리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한 가지 겸해서 물리적인 힘이 안으로 작용하지 못하게 만들어봐.’ ‘네, 주인님’ 그리고 곧 내 주위에는 엷은 물의 장막이 둘러졌다. 하지만 여전히 내 몸은 움직이고 있었다. 효과가 없었던 것이다. ‘정말 방법이 없네. 어쩌란 거야? 이러면 곤란한데...’ 그렇게 우리가 마을 중앙로를 따라서 마을을 벗어났을 때 우리 일행들은 마을 뒤쪽의 낮은 산을 향해서 방향을 바꾸었다. ‘엇. 어어 이거 무슨 일이야. 왜 다른 사람들을 저 쪽으로 가는데 나만 이쪽이냐구...’ 갑자기 일행들의 방향이 바뀌자 이상한 일이 생긴 것이다. 다른 일행들은 모두 방향을 바꾸었는데 나는 지금까지 왔던 그 방향을 그대로 유지하고 걷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게 무슨일이람. 그럼 지금까지 마을을 벗어날 때 까지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가도록 내린 명령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었다는 말이고 지금 다른 명령이 내려온 것을 내 뇌가 수령을 못해서 이렇게 원래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말이네?’ ‘주인님 주인님 일행들은 그대로 가는데요? 앞에가는 커다란 유령같은 녀석은 돌아 보지도 않고 그냥 가고 있어요.’ ‘지토 소환, 지토는 지금 가고 있는 일행들이 어디로 가는지 목적지를 알아와. 절대로 들키면 안되.’ ‘알았다 주인.’ 크~ 지토 저거하고 화아는 언제나 말을 짧게 잘라먹는단 말이야. 그것도 상급으로 성장한 이후부터... 저것들은 그냥 중급으로 두는 건데. ‘풍아 내 몸을 약간 허공으로 들어서 더 이상 걷지 못하게 만들어봐. 아마 좀 시간이 지나면 이것도 풀리지 않을까 싶은데... 아니면 앞으로 영원히 이렇게 걸어다니는 존재가 될지도 몰라.’ 그리고 나는 허공에 떠서 걸어가는 우아한(?) 포즈로 상당한 시간을 있어야 했다. 그 상당한 시간이라는 것이 아침이 되어 해가 뜨는 시간까지라는 점이 문제였지만... 나는 아침에 몸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곧 넥스와 일행이 기다리는 곳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 곳에는 덩그러니 마차와 짐들만이 있을 뿐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일행들도 어제 나와 같은 경우를 당한 것이리라. 나는 곧 지토를 소환했다. “지토 소환.” ‘불렀어? 주인.’ “우리 일행이 어디로 갔는지 알아뒀어? 여기서 멀지는 않지?” ‘여기서 가깝지는 않아 어제 밤에 하룻밤 내내 움직였어. 제법 거리가 되.’ “그럼 거기 다른 사람들도 같이 있어? 유소나 넥스, 쉬벡 말이야.” ‘아침이 거의 되어서 오더군.’ “그럼, 우리 일행 말고 마을 사람들은 없었어? 우리 일행 뿐이야? 그 전에 와 있던 사람은 없었냐구.” ‘그것 까지는 나도 잘 모르겠군. 제법 넓은 곳이어서.’ 그 이후의 지토의 말의 종합하면 이랬다. 어제 밤에 마을에서 따라간 사람들이 도착한 곳은 제법 떨어진 산속의 동굴이었는데 동굴이 상당히 깊고 또 넓기도 해서 시키는 대로 우리 일행이 그곳에서 멈추고 쓰러져 정신을 잃어 버리자 그냥 돌아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따라갔던 일행들이 그 곳에 도착할 때 마침 유소 일행들도 도착을 했는데 마을에서 따라갔던 일행들과 다르지 않았다고 했다. ‘그나저나 이 물건들을 어떻게 하지? 걱정이네. 이렇게 둔다면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화아 소환, 화아는 이곳에서 말과 마차를 지키고 있어. 만약 무슨 일이 있으면 능력껏 막아보고 안되면 내가 있는 곳으로 와서 소식을 전해.” ‘알았다. 주인. 걱정마라.’ 역시 짧게 끝나는 말이다. 뭐 그렇다고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점점 기어 오르는데 왜 존대를 하지 않느냐구 따져봐야 소용이 없다. 나는 일단 지토의 안내를 받아서 최대한 빠르게 그 동굴을 향해 갔다. 아직도 별다른 방법이 떠오른 것은 아니지만 일단은 일행들을 구하기는 해야 할 것이었다. 경공(넥스에게 배운 달리기 방법을 경공이라 부르기로 했다.)을 사용해서 달렸기 때 문에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고 지토 덕분에 길을 헤멜 일도 없었다. 동굴은 깊었지만 앞을 막거나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우리 일행들이 있는 곳까 지 아무 일도 없이 갈 수 있었다. 동굴의 어둠이야 광아를 소환한 것으로 해결이 되었다. 내가 일행들이 누워있는 곳에 도착해서 그들을 살펴 볼 때도 주위에는 아무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일단 유소와 넥스, 쉬벡을 따로 한 곳에 들어다 눕혔다. 하지만 어떻게 깨워야 할지는 난감했다. 그래서 일단은 풍아와 수아로 주위에 어제밤과 같은 막을 치고 그들을 흔들어 깨웠다. 하지만 그건 효과가 없었다. 결국에 그들을 깨울 방법이 없다는 판단이 서자 나는 이 동굴을 뒤져보기로 했다. “풍아는 일단 이 동굴을 둘러보고 특별한 것이 있으면 알려줘. 나보다는 빠르게 훑어 볼 수 있를 테니까 말이야. 그리고 지토는 여기에서 사람들을 좀 지켜 주고, 수아 광아는 나랑같이 가자.” ‘네. 주인님.’ ‘알았다.주인’ 끄덕. ... 풍아, 지토, 수아의 반응이다. 음.. 수아는 상당히 부끄럼을 많이 타는 성격인 듯, 꼭 필요하지 않으면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하하 광아는 한 술 더 떠서 거의 과묵형 인 것 같다. 상급으로 변신한 상태에서는 좀 달라지는 것 같던데... 동굴 여기저기로 구멍들이 뚫려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일단 몸속의 오행기를 운용해서 동굴 속 기의 흐름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어느 한 방향으로 기가 조금씩 흐르는 느낌을 받아서 그 방향으로 가 보기로 했다. 물론 풍아가 간 방향과는 달랐다. 내가 들어간 동굴은 오래지 않아서 상당히 가파르게 밑으로 뻗어 있어서 내심 내려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놓고 고민이 되기도 했지만 이왕 내친걸음이다 싶은 생각에 성큼성큼 발을 뻗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서 풍아가 돌아왔다. ‘주인님이 가고 계신 이 동굴 말고는 다 돌아 봤는데... 주인님 일행 말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상한 것도 발견을 할 수 없었고요.’ 풍아가 가지고 온 소식은 뜻밖의 말이었다. 풍아의 말대로라면 만약 내가 내려가는 이 동굴 안에도 말을 사람들이 없다면 이 동굴은 절대로 사람들을 끌고 가려는 종착지가 아니라는 뜻이 된다. 그럼 단지 낮이기 때문에 이 동굴 안에 사람들을 넣어 두었다는 말 밖에는 안되는 것 이었다. 그럼 오늘 밤에는 또다시 사람들을 끌고 어디론가 갈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내가 이렇게 동굴을 뒤지도 다닐 이유가 별로 없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단 내려온 길인데 그냥 돌아서기도 그렇다. 혹시 이 동굴 끝이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나는 일단 풍아를 동굴 안으로 정탐을 보냈다. “풍아 이 안쪽에 뭐가 있는지 살펴보고 와, 대신에 뭔가 이상이 있으면 그냥 돌아와서 이야기만 해.” 풍아는 대답과 함께 사라졌다. 나와 수아는 다시 동굴을 걸었다. 광아는 여전히 빛덩어리의 모습으로 둥둥 떠서 따라오고 있었지만 수아는 내 어깨위에 올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서 풍아가 돌아왔다. 풍아는 그리 깊이 들어가기 전에 자신을 막는 무엇인가를 느끼고 돌아왔다고 한다. 단지 막는 것 뿐이었지만 이상이 있으면 돌아오라는 말대로 돌아왔단다. 아마도 귀찮아서 뭐가 막고 있는지 그런걸 살펴볼 생각도 안했을지 모른다. 이젠 내가 시키는 일을 자기 생각에 따라 판단하는 경우도 있다. 쩝.. 우리도 곧 풍아가 말한 곳에 도착을 할 수 있었다. “음.. 이건 뭐야. 동굴이 끝나는 곳인 것 같은데?” 동굴은 막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풍아는 자신을 막는 무엇인가가 있어서 더 나가지 못했다고 말했다. “풍아야 이 벽 너머로도 동굴이 계속 이어진다는 거냐? 아무리 봐도 그냥 동굴이 끝나는 벽처럼 생겼는데...” ‘주인님 저도 벽이 있는 것은 알아요. 하지만 바람은 분명 이 벽을 넘나들고 있다구요. 그러니까 나는 더 갈 수 있는데.. 이상하게 벽으로 보이는 부분에서 뭔가 자꾸 밀어내는 기분이 들어서 못 가는 거예요.’ “그럼 이 벽이 진짜가 아니라는 소리내? 그럼 뭐지 이 벽은? 일단 지나가기는 해야 겠는데 깨부수면 될까?” “지토 일단 이곳으로 잠시만 와봐.” 나는 위에서 사람들을 지키는 지토를 불렀다. “지토 앞에 있는 벽 말이야. 이거 네가 다스릴 수 있는 거야?” 나는 땅의 정령에게 바위를 다스릴 수 있느냐는 바보 같은 질문을 했다. 하지만 만약 앞에 있는 것이 바위가 아닌 다른 것인데 바위처럼 보이는 것이라면 지토는 손을 쓸 수 없을지도 몰랐다. ‘당연하다 주인. 그걸 말이라고 하나? 땅의 상급정령에게 그런걸 물어보다니. 이건 땅의 기운에 다른 기운을 섞어 만든 것이기는 하지만 나에게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단은 그 근본을 땅에 속한 것으로 이루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벽을 허물 어 주기를 바라나 주인?’ “그, 그래 지토, 그 벽을 좀 치워줘. 안에 들어가 봐야 하겠거든. 그리고 풍아는 올라가서 사람들 있는 곳을 좀 지켜 줄래? 아무래도 깊이 들어갈 수록 바람의 힘이 약해지니까 풍아의 힘보다는 지토가 더 힘을 쓰기 좋을 것 같다.” ‘네. 주인님.’ 풍아는 역시 대답과 함께 사라졌다. “그럼 들어가보자. 지토.” 곧 내 몸에서 제법 많은 기운이 빠져나가면서 앞을 가로 막고 있던 벽이 뚫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벽 뒤로는 넓은 광장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마을의 주민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다. 나는 천천히 광장안으로 들어섰다. 마주 보이는 광장의 벽 쪽에는 제단같은 모습이 놓여있었고 그 옆에 어제 밤에 보았던 그 사신이 낫을 어께에 걸치고 가만히 서 있었다. 나는 천천히 그 제단쪽으로 걸아가면서 쌍환에 기운을 불어넣어 검으로 변형시켰다. 어제 밤처럼 그런 경우를 당한다면 방비할 틈이 없을 것 같기도 했지만 꼬리를 말고 도망을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수아 어제밤처럼 공기와 소리그리고 물리력을 차단하는 막을 내 주위에 부탁해.” 나는 저 사신녀석의 공격 수단을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녀석의 명령이 어제밤에 통하지 않았던 것을 기억했기에 수아로 막을 쳤다. 하지만 내가 제단에 가까이 갈 때 까지도 사신녀석은 전혀 반응이 없었다. 그리고 내가 사신의 앞에까지 다가갔을 때에도 사신은 반응없이 그냥 서 있기만 했다. ‘이런, 굉장히 크군. 내 키의 세 배는 되는 것 같은데? 그런데 왜 움직임이 없지?’ 나는 일단 움직임이 없는 사신을 건드는 것 보다는 주위를 살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제단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제단에서 누군가가 희생당한 듯한 핏자국이나 시체 같은 것은 발견 할 수 없었다. “뭐야, 사람들을 끌고와서 뭘 한 거지? 죽인 것은 아닌 모양인데 피도 없고 시체도 없고, 뼈도 없고, 설마하나 뼈까지 한꺼번에 어떻게 해 버린 것인가?” 나는 중얼거리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이상하게 바닥에 여기저기 누워있는 마을사람들의 수가 적다는 것이었다. “이상하네? 마을 사람들이 이것 밖에는 안되나? 음.. 한 130-140명 되겠네? 적어도 마을에서 없어진 사람은 300명 정도 될 거라고 했는데?” 나는 급히 주변을 살펴 보았다. 하지만 이 광장을 제외하고는 어디에도 내가 들어온 곳을 제외한 통로는 없어 보였다. 이 광장에 들어왔다면 들어온 곳을 제외하고는 나가는 길이 없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 절반 이상의 수가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우화!! 미치겠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숨을 곳도 없는데...그리고 왜 저 사신 녀석은 움직이지를 않는 거지? 그리고 나는 아침에 몸이 풀렸는데 왜 다른 사람들은 몸이 풀리지도 않고 그냥 쓰러져 있는 거냐고. 저 사신 녀석을 깨워볼까? 그래서 물어 볼까?” 하지만 나는 내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꼭 실천에 옮기고 깊은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두리번 거리며 주위를 살피던 나는 다시 넥스등이 누워있는 동굴까지 올라왔다. 그리고 일단은 일행들을 동굴 밖으로 옮기기로 했다. 지토와 풍아가 그런 일에는 능숙했기 때문에 일단은 빠르게 사람들을 굴 밖으로 옮겨 눕히기로 했던 것이다. “지토하고 풍아는 일단 여기 있는 사람들을 동굴 밖으로 좀 옮겨줘. 밑에 있는 마을 사람들은 일단 여기가 끝나고 나면 어떻게 해 보기로 해자.” 하지만 그렇게 사람들을 굴 밖으로 옮기면서 극적인 전환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밝은 햇빛 속에 놓인 사람들이 하나 둘 깨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덕분에 나는 다시 유소와 넥스, 그리고 쉬벡과 둘러 앉을 수 있었다. “몸은 괜찮으신지 모르겠네요.” 나는 우선 쉬벡에게 인사를 건넸다. “허허, 이런 면목이 없게 되었습니다. 일단 상황을 정리하지요.” 쉬벡은 ‘허허’하는 웃음으로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일단은 모두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다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기억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 말입니다. 야영을 준비하는 중에 그 마족이 나타났지요. 한 순간에 제압당한 사람들이 줄줄이 제 발로 걸어서 이 동굴까지 왔고 그리곤 몸이 움직이지 않으니 그냥 쓰러져 있다가 루탄님이 오셔서 이렇게 밖으로 끌어 내어 주셔서 몸을 움직이게 된 것입니다.” “그럼 그말은 모두들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고 있다는 말이네요? 그럼 잠깐만요. 동굴 제일 아래에 마을 사람들로 보이는 130-140여명의 사람들이 있어요. 그들을 구해 오면 저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겠군요.” 나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라 급히 풍아와 지토를 보내서 마을 사람들을 데려 오도록 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도 햇빛 속으로 나오자 모두들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 비명을 지르거나 공포에 휩싸이거나 슬픔에 젖어 버렸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그나마 정신을 차린 사람들에게서 수집한 정보는 다음과 같았다. 엊그제 밤 우리와 같은 경로로 동굴에 끌려온 마을 사람들은 우리 일행과 마찬가지로 동굴 위쪽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 밤에 동굴의 제단이 있는 곳으로 끌려 갔다 는 것이다. 물론 정신을 말짱하게 남아있었지만 몸이 제압당한 상태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제단 앞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다가 한 사람씩 제단위에 올라가면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사람들이 사라져 갔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그냥 허공중에서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밤세워 계속 되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더 있었다. 처음에는 거의 30분에 한 명씩 사라지던 사람이 아침이 될 때 쯤에는 거의 2분이나 3분 정도에 한 사람씩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침이 왔을 때, 다시 모두를 쓰러져 밤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고... 그리고 그 사신에 대해 물었을 때, 마을 사람들은 그런 녀석이 모두 셋이었는데 둘은 아침에 제단위에서 사라졌고 하나는 남아 있었다는 것이었다. “서둘러야 겠는데요. 해가 질려면 얼마 남지 않았어요. 겨우 한시간 정도 남은 것 같은데... 일단 그 제단에 가서 확인을 좀 해 보고 나머지 사람들은 일단 돌아가라고 하죠? 아무래도 최대한 빠르게 이 동굴에서 멀어지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다시 마을 까지만 돌아가 있어도 동굴까지 끌려온다면 아침이 될테니 하루는 벌 수 있지 않겠어요?” 나는 쉬벡에게 의견을 내 놓았다. “넥스가 수고를 해야 겠군. 일단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이 동굴에서 최대한 떨어진 곳까지 이동을 하게.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의 방법일 것 같군.” 쉬벡도 내 의견에 동의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인지 넥스도 군소리 없이 사람들을 인솔해서 자리를 벗어 났다. 그 사이에 올라온 마을 사람들과 함께 부지런히 길을 떠난 것이다. “최대한 빠르게 달려. 이 동굴에서 최대한 갈 수 있는 한 멀리 가라고. 만약 밤이 되더라고 될 수 있는한 달려서 멀어져야해.” 나는 다시 한 번 넥스의 등에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결국 동굴의 밑바닥에 돌아온 것은 나와 쉬벡이었다. 유소도 걱정스러운 얼굴이기는 했지만 넥스와 함께 사람들을 끌고 갔던 것이다. “음,. 이건 아주 흥미로운데요? 이건 이동마법진과 비슷하군요.” 쉬벡은 제단위로 살피면서 입을 열었다. “이동마법이면 이동 마법이지 비슷하다는 건 뭐예요?” 나는 궁금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건 이 마법진이 보통의 법진과는 달리 공간만이 아닌 다른 것을 건너는 역할을 하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아무래도 무슨 결계 비슷한 것을 넘는 역할을 하는 것 같은데... 아~! 그러고 보니 이 진은 보조 마법진에 해당하는 군요. 본체는 건너편에 두고서 이 곳에 있는 법진을 통해서 무언가를 받도록 되어있는 ... 아니군요. 반대쪽에 있는 진은 소환진이라 해야겠네요, 여기 이 법진에 있는 것을 소환하는 진이 본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일단 건너편의 것은 어쩔 수 없으니까 이 진부터 부수는 것이 좋겠군요. 그럼 당분간 다시 이 진을 그리기 전까지는 이런 짓을 할 수 없을 겁니다. 이 진은 어떤 의미에서는 본체에서 이 곳을 역소환도 가능한 마법진인데 이 진이 없어지면 본체에서 어떤 영향도 이곳에 끼칠 수 없게 되니까요.” 나는 쉬벡의 말이 끝나자 마자 쌍환검을 휘둘러 제단을 조각내기 시작했다. 의외로 암석 하나로 이루어진 제단이라 힘이 들기는 했지만 금의 기운을 가득 머금은 내 검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리고도 나는 안심이 되지 않아서 지토를 시켜서 제단을 이루고 있던 돌맹이들을 땅속 깊이 용암이 흐르는 곳 까지 옮겨 버리도록 시켰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 해가 졌던 모양이었다. 일을 마치고 서둘러 광장을 벗어나려는 우리 앞을 가로 막고 선 것이 있었다. 사신. 정말 운이라고는 지지리도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 녀석이 움직인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풍아와 수아로 하여금 쉬벡과 나를 둘러싼 막을 형성시켰다. 사신은 입구를 막아선 모습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도 막을 둘러싼 상태에서 급하게 움직이는 것은 어려웠기 때문에 (정령들이 내 주위에 막을 형성하고 움직이는 것에는 빠르거나 느리거나의 문제가 없지만 쉬벡과 함께 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천천히 사신에게 다가갔다. 사신은 그렇게 움직이는 우리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하지만 곧 녀석의 장기인 육체 조종이 되지 않는 것을 깨달은 모양으로 낫 모양의 무기를 치켜들고 다가오기 시작했다. “쉬벡 여기에서 벗어나는 좋은 방법이 없으신가요? 저런 녀석과 싸우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는데요.” 나는 쉬벡에게 의견을 물었다. 하지만 “그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약 저 녀석을 그냥 두고 간다면 곧 보조 마법진을 완성해서 지금까지와 같은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그러니 반드시 없애야 할 것 같군요.” “하지만 쉬벡,방법이 없다구요.이 막이 풀리면 곧장 육체적으로는 죽은 몸이 되어 버리고 말아요.그런데 어떻게 공격을 해요?더구나 이 막 안에서는 공격도 제대로 할 수가 없다구요.” 나는 쉬벡에게 따지듯 물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허허 루탄님 무슨 그런 말씀을... 루탄님이 여기 있다고 밖에 있는 정령들이 싸우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허허허” 그랬다. 내가 여기 있다고 정령들이 싸우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저 정령들에게 싸우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주로 이렇게 육체적인 싸움은 내가 담당해 왔기 때문에 저 녀석과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나나 쉬벡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곧 졍령을 소환했다. 아무래도 공격적인 면에서는 화아나 풍아가 뛰어난데 풍아는 지금 막을 형성하는 중이라 화아를 다시 부른 것이다. “화아 소환” ‘불렀나 주인?’ 쩝.. 말하는 것 하고는... “불렀으니 왔겠지. 알면서 뭘 물어 여러 소리 말고 일단 저 녀석부터 처리해봐.” 나는 사신을 가리켰다. ‘알았다 주인.’ 화아는 곧장 사신(이렇게 부르고는 있지만 가명이다. 이름을 모르니까.)에게 달려들었다. 화아가 늑대형으로 있을 때 가장 잘 하는 것이 있는데, 완전 개싸움이다. 달려 들어서 물어뜯고 할퀴는 것이 주를 이루는 싸움 방법이니 당연히 개싸움이라 부를만도 한 것이다. 지금도 화아와 사신(역시 이 이름은 싫다. 다음부터는 누더기유령이나 낫귀신 뭐 이렇게 불러야 할까보다.)의 싸움도 그렇게 진행되고 있었다. 달려들어 물어뜯으려면 피하고, 낫을 휘두르면 역시 피하고 발톱을 휘두르는 것이다. “그런데 쉬벡, 소리가 안 들리니 좀 이상하죠? 소리까지 들리면 좀 더 멋진 구경이 될텐데...” “루탄님, 아무리 직접 싸우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이 싸움에서 지면 우리가 위험해 지는 겁니다. 좀 긴장감을 가져 보세요.” 쉬벡은 내 행동이 못마땅한 표정이다. 하지만 싸움을 하고 있는 것도 나고 구경을 하고 있는 것도 나라는 사실을 쉬벡은 잊은 모양이다. 내가 아무리 이렇게 태연하게 있어도 화아가 힘을 쓰기 시작하면 내 몸에서 그 힘들이 쑥쑥 빠져나가는데... 화아와 누더기의 싸움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피해도 주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무턱대고 오래 시간을 끌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화아 힘을 좀 더 내봐. 빨리 끝내야지. 나도 오래 시간을 끌면 피곤해 진단 말이야.’ ‘알았다 주인. 그럼 형태 변화를 하겠다. 준비해라.’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내 몸에서는 엄청난 양의 기운이 흘러 나갔고 화아는 빠르게 인간으로 변신을 이루었다. “두번째로 보는 모습이군요. 역시 무게가 느껴지는 군요. 상급 정령이란 그 존재감 만으로도 엄청나니 말입니다.” 쉬벡은 옆에서 아까까지도 구경할 때가 아니니 어쩌니 하더니 지금은 오히려 나보다 더 싸움 구경에 빠진 모양이다. 허긴 나는 지금 내 몸에서 빠져 나가는 기운을 감당하기도 쉽지 않은 상태여서.. 실제로 정령들을 소환하면서 알게 된 것인데, 정령을 소환해 놓은 상태에서는 정령들이 어떤 행동을 한다고 해서 특별하게 많은 기운을 정령들에게 줄 필요는 없는 것 같았다. 실제로 정령들이 쓰는 힘은 정령들 스스로가 지닌 힘이었던 것이다. 단지 나는 그 정령들이 물질계에서 행동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문제는 정령들이 하급정령, 중급정령, 상급정령에 따르는 유지력의 차이가 엄청나다는 데에 있다. 상급정령은 자그마치 중급정령 50여 개체의 힘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아주 사람 자지러 질 정도의 힘이 들어가는 것이다. 그나마 내가 지난 겨울에 기운을 키우는데에 신경을 써서 다행이었다. (이제 지심목의 기운은 모두 모아졌다. 때문에 이제 내가 기운을 축적하는 방법은 예전처럼 정령들의 힘을 내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정령들의 힘이 커지면 커질 수록 내가 기운을 모으는 양도 커지고 있어서 점점 많은 기운을 갈무리 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무튼 지금은 중요한게 저 누더기를 없애는 것이다. 화아의 상급정령으로서의 모습은 붉은 머리카락에 붉은 무도복을 입고 있는 모습에 불칼을 들고 있다. 검이 아닌 폭이 넓은 대환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칼이다. 보통은 칼은 안나오는데 전투중이라 그런지 오늘은 칼을 든 모습이었다. 뭐라고 하는지는 모르지만 누더기 녀석에게 뭐라고 뭐라고 하는 것 같기는 한데 일단은 싸움이 끝날 때 까지는 말걸지 않기로 마음먹고 열심히 무언의 격려를 보내고 구경 중이다. 하하하 뭐 결론이야 구경중이라는 것이지만, 나름대로 같이 힘쓰고 있는 입장이니까 나에게 뭐라고 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화아는 이제 그 누더기를 확실하게 밀어 붙이고 있었다. 누더기의 몸은 여기 저기 불에 타고 그을려 있었고 손에 들고 있던 낫도 자루가 부러져 날아갔다. 하지만 그 녀석을 제압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만약에 그 녀석을 못 움직이게 제압하고 막을 풀었을 때 내 몸을 장악하면 문제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죽일 수도 없고... “쉬벡, 어쩌면 좋지요? 저 녀석 그냥 죽여야 하나요? 잡아서 심문을 하기는 해야 할텐데 그러다가 다시 육체를 점령당하면 곤란하잖아요.” 내 말에 쉬벡은 잠시 생각을 하는 듯 하더니 아주 좋은 답을 해 주었다. “육체가 제압당한다고 정신이 제압당하는 것은 아니니 정령들을 다루는 데는 문제가 없지 않습니다까? 만약 그런 순간이 오면 그냥 저 녀석을 날려 버리라고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말이다. 요즈음 내가 느끼는 거지만 난 가끔 조금 모자라지는 때가 있는 것 같다. ‘화아, 혹시 그 녀석 뭐라고 말하는 거 있어? 거의 싸움도 끝이 나 가는데, 그 사이에 무슨 말 오고 간 거 없냐구.’ ‘없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럼 일단은 그 녀석 움직이기 어렵게 제압만 해봐. 없애지는 말고, 뭐좀 물어봐야 할 것 같으니까.’ ‘알았다 주인.’ 그런 대화가 오고가고 얼마 되지 않아서 쉬벡과 나는 그 누더기 앞에 설 수 있었다. 만신창이가 되어서 늘어진 녀석을 화아는 한 쪽 발로 가슴을 밟고 있는 상태였다. 뭐 솔직히 누더기의 크기가 워낙 커서 가슴에 올라있는 모습이기는 했지만 어차피 정령들은 물질계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무게가 나가지 않는다. 쉬벡과 나는 그 녀석의 얼굴쪽을 보며 말을 걸었다. “이봐, 뭐라고 불러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은 내가 누더기라고 부르기로 했으니까 그렇게 알고, 내가 누더기라면 널 부르는 거라고 알아들어, 일단은 너 내 말을 알아듣기는 하는지 알고 싶은데... 누더기 내 말 알아들어?” 나는 누더기에게 그렇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녀석의 반응은 시큰둥. 아무 말도 없는 것이다. “쉬벡님, 이 녀석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걸까요? 그럼 이렇게 둘 필요도 없잖아요? 그냥 처치하고 돌아가죠? 언젠가는 무슨 일인지 알게 되겠지요.”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별다른 방법도 없으니까요.” “네, 그런데 사라진 마을 사람들에 대해서 알 수가 없어서 걱정이네요. 다들 다시 돌아 올 수 없게 된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도리가 없네요.” “그렇지요. 화아 이 녀석 처치해 버려.” 나는 그렇게 명령을 내리고는 쉬벡과 함께 돌아섰다. - 흐흐흐 역시 대단한 녀석이군. 나를 이렇게 만들다니. - 우리는 반사적으로 돌아섰다. “화아 잠시만, 아직 죽이지 말아. 이야기 좀 하고.” 나는 급히 화아를 제지했다. “뭐야. 말을 할 수 있잖아? 그런데 왜 말도 없이 그러고 있었던 거야? 누굴 놀리나?” 퍽-! 나는 누더기의 옆구리를 발로 내리 질렀다. - 음. 인간 성격이 더럽구만. - “내 성격 이런데 보테 준 것 있냐? 그나저나 마을 사람들 어떻게 된 거냐? 왜 사람들을 끌고 간 거야? 그리고 어디로 데리고 간 거지?” - 성격이 더러운 것도 문젠데 급하기 까지 하군. 일단 마을 사람들은 나의 주인이신 텡구(天狗) 님께서 <註釋 : [일본] 악마. 날개와 독수리 발톱을 가진 인간의 모습. 오만한 승려와 무사의 화신으로 믿어졌으며 오니와 같이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지 않았다.> 데리고 가신 것이라 주인님의 거처에 있는 것이 당연하고, 무엇 때문에 인간들을 데리고 가신 것인지는 나도 모르는 일이고, 주인께서는 인간을 죽이거나 하는 취미는 없으시니 죽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나의 답이다. - “텡구? 그런 놈이 있었나? 그러고 보니 예전 일본 귀신들 중에서 그런 놈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놈 악마라고는 분류가 되지만 그렇게 나쁜 녀석도 아닌 것 같았는데... 사람들을 해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구. 그런데 이번에는 무슨 일이야? 시간이 흘러서 이젠 성격도 바뀐 건가?” 나는 내가 알고 있는 텡구에 대해서 쉬벡에게 간단히 이야기 했다. 알고 있는 것이라고 해야 위에 주석에 달려 있는 정도가 전부이다. - 인간 그렇게 사람들이 궁금하면 텡구님에게 가 보면 될 것이 아닌가? 가는 길은 내가 열어 줄 수 있다. - 누더기 녀석이 나에게 제안을 한다. “너, 조용히 하고 있어라. 생각을 좀 해 보게. 그나저나 쉬벡님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하죠?” “저는 아무래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단 루탄님이 텡구라는 악마의 거처로 가신다는 것은 그 곳이 마계일 가능성이 높은데 그렇다면 일단 그 계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균형의 씨앗이 전달될 가능성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쉽게 생각 할 문제가 아니라는 말씀이지요.” “아~! 그렇군요. 그런 문제도 있네요. 깜빡하고 있었는데...” 나는 다시 누더기를 돌아 보았다. “야! 누더기, 너의 주인이 있다는 곳이 마계냐? 신계냐? 천사계나 정령계는 아닐 것이고...” - 음, 텡구님은 신계에 계신다. 그리고 이젠 나를 놓아 줘라. 내가 텡구님께 보내진 사람들을 모두 돌려주겠다. 인간 너를 우리 신계로 불러 들이려는 계획이 실패했으니 인간을 더 이상 데리고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아무 이상 없이 돌려주겠다. 그러니 나를 풀어줘라. - “역시, 루탄님을 끌어들이려는 계획이었군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텡구의 세계로 가는 것이 곧 신계에 발을 들이는 것이 되니까 이런 계획을 세운 모양이네요.” “정말 웃기는 놈들이네. 그렇다고 그게 들통난 것 같으니까. 순순히 물러나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요?” “이상할 것은 없지요. 전에도 바람의 정령왕이 이런 상황에서 순순히 물러난 것과 같다고 보시면 되겠지요. 루탄님이 상황을 알게 된 상태에서는 직접적인고 강제적인 행동은 하지 않기로 한 모양입니다. 그건 곧 다른 3계 전체를 상대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 일테니 말입니다.” “그런건가요? 그렇겠네요. 그럼 이 누더기는 놓아줘야 하겠네요?” “그렇겠지요. 그래도 제법 힘을 쓰는 녀석인 것 같은데... 신계와 좋지않은 관계를 만들 필요는 없겠지요. 허허허” 나는 화아에게 누더기 녀석을 그만 풀어 주라고 했다. 그리고 풀려난 누더기는 간단히 인사를 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 인간, 다음에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 이름은 누더기가 아니다. 스펙터 라고 불러라. 다음에 보자 인간. - 그런 간단한 인사와 함께 보조 마법진 같은 것은 그리지도 않고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아무래도 저 녀석 화아에게 일부러 잡혔던 것 같지요? 제법 강한 녀석인 것 같은데..” “아마도 그럴겁니다. 일부러 잡혀서 루탄님의 애를 태우다가 텡구인가의 거처로 가도록 만드는 것이 이번의 목적이었던 것 같군요. 하지만 너무 눈에 띄고 또 허술한 계획인데요? 이 계획이 신계 전체에서 나왔다면 신계의 수준도 알만 하네요. 허허허” “하지만 문제네요. 각 계들 마다 이런 식으로 사람 피곤하게 만든다면,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 신경이 쓰여서 어떻게 살겠어요? 정말이지 빨리 연락이 와야 할텐데... 참,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돌아온다는 거죠? 그러고 보니 누더기 녀석 그냥 사라져 버렸네?” 나는 한동안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겨우 마을 사람들에게 생각이 미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동굴 광장 중앙에 빛으로 휘감긴 공간이 생겨났고, 그 안에서 마을 사람들이 걸어 나왔다. 들어갈 때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금방이었다. 아무래도 마을 사람들을 처음에는 천천히 나중에는 빨리 소환해 갔던 것은 어떤 꿍꿍이가 있었던 모양이다. 예를 들면 저 쪽에 있는 녀석이 처음에는 힘이 없다가 인간들을 하 나씩 끌어 들여서 힘을 회복하는 듯이 보이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상당히 신빙성 있는 생각이기는 하지만 역시 확인은 불가능한 일이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서 마을 사람들이 전부 도착했고 그 빛으로 쌓인 공간은 사라졌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 광장에 도착해서 제단 위에 올라서서 빛으로 된 통로를 지나오니 다시 이 광장에 있더라는 말로 나와 쉬벡을 허탈하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자신들이 하루 동안 어디에 있었는지를 전혀 모른다는 말이다. “결국에 얻은 것은 하나도 없네요. 쉬벡님 이만 돌아가죠?” “허허, 그러지요.” 그렇게 우리는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은 어둠 속을 헤치고 오는 길이라 아무리 광아의 도움이 있다고 해도 낮보다는 오래 걸렸고, 결국 새벽이 되어서야 마을로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을에는 유소와 일행도 함께 기다리고 있어서 다시 일행을 찾을 걱정은 덜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덕분에 아침이 되어서도 일행들을 출발을 못하고 하루를 더 머물고 다음날 다시 왕성을 위해 출발을 했다. 그 누더기 사건 이후로는 별다른 사건 없이 우리들의 여정은 이어졌다. 그 동안에도 숲과 산들을 지나면서 괴물들을 찾아 처리하는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일들은 누더기 사건에 비하면 그다지 언급할 필요도 없이 느껴진다. 이제 일주일 정도의 거리만 가면 왕성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별다른 괴물 출몰지역도 없다고 한다. 이번에 마지막으로 지나게 되는 호수만 제외하면 말이다. 호수의 이름은 ‘무즈’라고 불린다는데 상당히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호수였다. 우리가 지나온 길이 그렇게 험하지는 않았지만 예전에 지나온 산악지대 이후로 조금씩 조금씩 고도가 높아져 왔던 것이다. 실제로 이 호수가 있는 곳의 해발 고도는 예전에 지나온 산악지대의 정상과 맞먹는 고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쉬벡의 설명이고 보면 상당한 고지대 임은 틀림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 고지에 호수가 있고 이 호수를 기점으로 다시 반대 편으로는 낮아지는 형태라니 상당히 이상한 지형이다. “루탄님 이 무즈호는 전설을 지니고 있는 몇 안 되는 장소 중의 하나입니다. 예전에 이 지역은 이렇게 높은 지역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평범한 숲과 들로 이루어진 지역이었지요. 그런데 1000년전에 이곳을 지나던 한 정령사가 마침 가뭄이 들고 메마른 이땅에 물의 정령과 땅의 정령을 불러서 대지를 촉촉이 적시고 기름진 땅을 만들라는 주문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물의 정령은 대지를 적시는 물을 흘렸고, 대지의 정령은 땅을 갈아서 비옥하게 만드는 일을 했지요. 그런데 문제는 물의 정령이 대지를 적시면 그 위에 땅의 정령이 새로운 흙으로 덮어 버려서 대지를 적시는 효과가 없었다는 거지요. 그래서 화가 난 물의 정령은 더 많은 물을 쏟아 내었고 흙의 정령은 또 그 위에 흙을 더하고 그렇게 몇 날 몇 일을 싸움을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이 자리는 점점 높아지고 물은 끊이지 않고 흘러나오고, 그런데 그렇게 되고 보니 처음에 정령사가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엄청나게 많은 땅이 그 여파로 피해를 입어서 인간들의 삶이 더욱 힘들어졌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정령사는 자신의 잘못으로 인간들에게 피해를 주게 되었다는 자책감으로 그 정령들에게 영원토록 이 땅에 머물러서 흙과 물을 만들라는 명령을 내리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는 겁니다. 결국 이 땅 깊은 곳에서는 아직도 물의 정령은 물을 만들고 땅의 정령은 땅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디서도 흘러오는 물이 없어도 호수는 물로 가득해서 사방으로 흘러내려 이 대륙 모든 강들의 어머니가 되고, 그렇게 물에 씻겨가는 흙들이 있어도 땅은 여전히 비옥하며 낮아지지 않고 유지된다는 겁니다. 허허허 그런대로 재미있는 전설이지요? 루탄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정말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쉬벡은 긴 이야기를 마치고 옆에 앉아있는 나에게 물었다. “글쎄요. 정령에게 한 가지 명령을 내리고 그것을 영원히 하게 한다는 것은 어렵지 않을까요? 풍아 소환, 수아 소환.” 나는 풍아와 수아를 소환했다. “풍아야 수아야, 만약에 내가 어떤 명령을 내리고 나서 내가 죽으면 너희들은 그 명령을 이루어 질 때 까지 계속 할거니 아니면 그만 둘거니? 어떻게 할거야? 응?” 나는 소환된 풍아와 수아에게 물었다. ‘주인님, 정령은 자신을 소환한 소환주의 힘으로 물질계에 존재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소환주가 없으면 물질계에 남아서 계속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는 말이지요. 만약에 소환주을 대신해서 물질계에서 정령이 존재할 수 있는 매체를 만들어 준다면 소환주가 없어진다고 해도 그 명령을 수행할 수는 있겠지만 그건 아무 생각도 없는 하급정령들이나 그렇지 생각과 자아가 있는 정령이라면 그런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풍아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풍아의 말을 쉬벡에게 알려 주었다. 그리고 다시 수아에게 물어 보았다. “그럼, 수아도 같은 생각이겠네?” ‘주인님 그건 정령들의 생각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저도 주인님이 어떤 명령을 내리고 돌아가신다면 어떻게 할지는 잘 모르겠여요. 어떤 명령일지도 모르고 그때 제가 어떻게 할지는 지금으로선 말씀드리기가 어렵네요.’ 나는 이번에도 역시 쉬벡에게 수아의 말을 전해 주었다. “허허 그럼 만약 정령이 이 물질계에 계속 남아 있을 수 있는 매체가 있다면 소환주가 없다고 해도 그 명령을 계속 실행해 나가고 있을 가능성은 있다는 말이군요? 허허 참 신기한 일이네요. 그럼 이번에 무즈호에 가면 정말 그런 매체가 될만한 것이 있는지 한 번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요? 어떠세요 루탄님.” “그거 재미있겠네요. 어차피 호수에 닿으면 하루 야영을 할 거고. 또 호수를 따라 가면서 또 하루 야영을 할테니 시간을 내어서 한 번 살펴 보도록 하죠.” 그리고 드디어 우리 일행은 무즈호에 도착했다. “와~~! 정말 깨끗한 물이네. 너무 너무 투명하다. 속이 훤히 비취고 있잖아? 정말 깨끗하네.” 나는 절로 탄성이 나왔다. 오후의 해가 남은 호수는 그 밑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맑았고 가끔 호수의 물 만큼이나 투명해 보이는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호수를 누비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물고기들의 움직임을 투명한 호수의 물 때문인지 햇빛을 받은 비늘들의 반짝임으로 더욱 선연한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었다. 예상한 것과는 달리 호수변에는 모래가 전혀 없었고 호수 물이 닿지 않는 부분부터는 초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초록빛 초지가 끝나는 부분부터는 에메랄드빛의 호수가 펼쳐진 것이다.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아름다운 호수네요. 이런 곳에 작은 집이라고 짓고 편안하게 산다면 너무 좋을텐데..” 나는 옆자리의 쉬벡을 돌아보았다. “허허, 루탄님 사람들의 마음은 다 같은 것입니다.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지요. 하지만 이 호수 근처에는 어떤 마을도 없고 사람도 살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이유겠습니까?” “혹시 괴물들이 많아서 그런 건가요?” 나는 성급한 대답을 했다. “허허 루탄님 사람들은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는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만약 괴물들 탓이었다면 여기에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마을을 만들고 성을 쌓았겠지요. 하지만 여기는 이상하게 건물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건물을 지으면 일주일이 되기 전에 땅 속으로 가라앉아 버리거든요. 아주 천천히 천천히 땅 속으로 끌려 들어가 버리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떤 마법사가 실험을 해 보았답니다. 사람이나 바위 혹은 나무 같은 것들을 한 장소에 오랜 시간동안 놓아두는 실험이었는데, 인공적인 건축물이나 가구, 혹은 장신구나 옷, 무엇이든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은 모두 땅 속으로 빨려 들어갔는데 자연적인 것들은 그렇지가 않았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여기서는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면 물건들이 조금씩 땅 속에 들어가 있게 됩니다. 뭐 그렇다고 걱정은 않으셔도 됩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이곳에선 어떤 물건이고 땅 속으로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데는 일주일이 걸리거든요. 땅 위에 떨어진 칼 하나가 되었든 커다란 집 한 채가 되었든 모두 일주일이 걸리니까요. 그래서 여긴 건물들이 없습니다. 그렇게 된 것이지요. 사람들은 그런 현상이 땅속에서 흙을 만들어내는 흙의 정령의 심술 때문이라고 말한답니다. 허허허” 음... 요즘들어 쉬벡의 웃음이 늘어난 것 같군. 그건 그렇고 이 이상한 호수에 정말 정령들이 있을까? 정말 궁금하네. 빨리 밥 먹고 살펴 봐야 겠네. 나는 서둘러 저녁을 준비했다. 어차피 오늘은 호수 주변에서 밤을 세우기로 했던 것이었고 일행들도 적당히 자리들을 정리 하고 야영준비에 들어가고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이 지역에 사람들이 살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괴물들의 출현 빈도가 상당히 높다는 것이었지만 별걱정을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여행하는 동안 한 두 번 격은 일도 아니고 말이다. 나는 창고에서 이것 저것 물건들을 꺼내고 수아를 소환했다. “수아 소환.” ‘주인님.’ 수아는 여전히 두 손을 가슴쪽에 모아쥐고 선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머리카락 색이 무즈호의 색과 비슷한 색이다. 눈동자도 그렇고.. “수아 요리를 하자. 하하” ‘네 주인님. 오늘은 무슨 요리를 하실 건데요?’ 수하는 내가 요리를 할 때 가장 많이 도와주는 녀석이다 때문인지 상급정령으로 성장 한 후로는 요리에 관심을 많이 가져서 이것 저것 요리를 만들 때 마다 물어보고 또 어떤 때에는 직접 만들기도 한다. 물론 불을 이용하는 경우에는 멀찍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불만 꺼지면 뜨거운 것은 신경을 쓰지 않으니 참 신기하다. “흠 어디보자. 불고기는 떨어진 것 같고. 오늘은 밥을 해 먹기로 하자. 밥을 해서 그래 매운탕을 끓이는 거야. 마침 호수도 있으니 그게 좋겠다.” ‘매운탕이요? 그건 처음 하는 요리인 것 같네요? 그거 뭐뭐 들어가는 건가요? 전 뭘 준비하죠?’ 수아는 다른 때에는 별로 말이 없는데 이렇게 요리를 할 때는 제법 수다를 떨곤 한다. 아무래도 사람이라면 참 가정적이고 가사일을 좋아하는 여자가 될 것 같다. “일단은 물고기를 잡아야 겠다. 그런데 이 호수에서 물고기 잡는다고 무슨 일이 벌어지거나 하는 것은 아니겠지?” 나는 느긋하게 마차 바퀴에 기대고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 쉬벡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저기 쉬벡님 이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거나 수영을 하거나 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겠지요? 무슨 물의 정령이 해코지를 한다거나 하는 일이 있느냐구요.” 내 말에 고개를 들던 쉬벡은 엷은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그런 일은 신경쓰지 마십시오. 아까 말씀드린 것 이외에는 다른 것은 없습니다. 이 호수에 배가 없는 것은 배를 정박시키거나 혹은 묶어 둘 수가 없기 때문이지 호수 자체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허허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고 물고기 잡아서 저녁을 하시지요. 허허 그러고 보니 처음으로 물고기 요리를 먹게 되는 것 같습니다. 기대가 되는데요?” 쉬벡을 그렇게 말하면서 슬며시 군침을 삼킨다. 요즈음은 내 요리에 입맛이 적응이 된 탓인지 많이 내 요리에 대한 감탄이 많이 줄었다. 왠지 그런 것에 섭섭해 하는 내 자신이 싫다. 난 정말 밥순이가 되어가고 있나보다. “수아야. 일단 호수에 가서.... !!!” 나는 그렇게 말하며 호수를 돌아보다가 말을 잊었다. 호수는 그야말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온통 루비를 깔아 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여기 저기서 그런 호수의 모습에 탄성을 자아내고 있었다. 정말 호수는 말 그대로 루비의 고양이 눈이었다. 둥근 호수는 온통 붉은 색으로 반짝이는데 호수의 중앙부분은 마지막 태양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연분홍 빛으로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짙은 루비색의 바탕에 길게 늘어지 선연한 분홍빛의 모습,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고양이의 눈동자를 떠올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 감동이 지나고 나자 곧 어둠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어둠에 따라 밀려나듯 감동이 밀려나자 나는 곧 내가 할 일을 깨달았다. “수아야, 하하 이거 정신이 없었네. 그럼 일단 호수에 가서 물고기 몇 마리 잡아다 줄래? 큼직한 놈 서너마리 하고 자잘한 녀석으로 여기 이 그릇에 가득할 정도로 잡아 주면 좋겠는데...” 수나아는 곧장 호수로 날아갔다. 그리고 내가 화아를 불러 불을 준비하는 동안에 벌써 날아와서 물고기들을 쌓아두기 시작했다. 먼저 큼직한 물고기는 잉어나 연어처럼 생겼는데 그런 구별은 쉽지 않았고, 작은 물고기들은 여러 종류였다. 나는 먼저 작은 물고기들을 장만해서(장만하다는 것은 필요에 따라 사거나 만들거나 하여 갖추어 준비하는 것을 말하므로 여기서는 물고기를 다듬어 요리할 준비를 해 두는 것을 말한다. ㅋㅋ 흠 예전 직업정신이 살아나는 느낌이다.) 한 쪽에 두고 역시 큰 물고기들도 다듬었다. 내가 하는 매운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구 향신료이다. 예전에 경상도에서 계피라고 부르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그렇게 매운탕에는 최고의 향을 만들어 주는 것 이다. 나는 예전에 향신료 가게에서 이것 저것 맛보는 중에 그 환상의 맛을 지닌 재료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쉬벡의 말로는 그걸 마법에서 촉매로 쓰는 경우도 있다고 하긴 했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작은 고기들은 매운탕을 만들고 큰 고기는 적당히 소스를 만들어 발라가면서 굽고, 한 쪽에서는 밥을 짓고(이건 이제 수아에게 맡겨두면 아주 잘 한다. 밥은 나보다 잘 하는 것 같다.) 그렇게 오늘의 저녁도 준비가 되었다. 사실 매일 같이 하는 일이지만 내가 이런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것은 내가 점점 이런 일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현실이 싫기 때문이다. 나도 누군가 그냥 차려주는 밥을 먹고 싶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먹는 것을 가지고 따지지 않는 편이기 때문에 그저 적당한 먹거리면 되는 것이다. 그런 내가 맛있는 것을 먹고야 말겠다는 넥스와 유소, 그리고 쉬벡들 때문에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 것인지, 생각하면 억울하다 못해 눈물이 앞을 가린다. 어쩌면 이러다가 주부습진에 걸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도 나의 이런 눈물은 가슴속에만 흐르고, 이런 탄식도 내 입속에서만 옹알이가 되고 말았다. 식사가 끝나고 다들 푸근한 마음으로 둘러 앉아 있을 때, 그런 느긋함을 깨트린 것은 역시 탐구열에 넘치는 쉬벡이었다. 그 나이에 뭐가 그리도 궁금한지 결국은 이 무즈호에 정령이 있는지를 알고 싶다는 것이다. 뭐 그런 일이야 그다지 어렵지 않겠다 싶어서 나는 수아를 불렀다. “수아 소환, 수아야 저기 호수에 가서 호수속에 정말로 물을 만드는 정령이 있는지 좀 알아보고 올래? 그리고 정말 있으면 나하고 잠시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지 좀 물어 봐주고. 그리고 또, 땅의 정령도 있는지 좀 알아봐줘.” ‘네 주인님.’ 대답과 함께 수아는 호수로 사라졌다. 그리고 우리들은 호숫가로 천천히 걸어갔다. 밥 먹고 산책인 샘이다. 우리들이 호숫가를 걸으며 산책을 즐긴지(넥스와 유소는 요즈음 왠지 서로 가까워진 것 같다. 지금도 둘이서 조금 떨어져서 걷고 있다.) 오래되지 않아서 수아가 돌아왔다. 그리고 수아 뒤를 따라서 또 다른 정령이 솟아났다. 호수에서 상반신만들 들어낸 정령은 물의 상급정령으로 보였지만 수아의 변신형과는 많이 달랐다. 긴 머리카락은 호수의 색과 같은 색이었고 얇은 물빛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었다. ‘저를 청하셨다 들었습니다. 균형의 전달자여.’ “음? 저 저를 아시네요? 수아가 말했나요?” ‘아닙니다. 제가 비록 이 호수에 묶여 있지만 저의 본신은 정령계에 있습니다. 그러니 정령계의 소식을 모를 수가 없지요. 그래도 명색이 물의 최상급정령입니다. 그러니 그런 일을 모른다면 이상하지요. 저는 저 정령처럼 성장한 것이 아니라 오랜 예전부터 최상급정령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니 저 정령과는 다르지요. 그런데 저를 보자고 하신 이유가? 궁금하네요. 균형의 전달자께서 저를 부르실 이유가 없을 텐데요.’ 최상급 정령이란다. 그럼 아직도 수아나 풍아들은 성장을 더 많이 해야 한다는 소리인가 보다. “아! 저 그게 몇가지 궁금한 것도 있고 정령계에 전할 말도 있어서요. 일단은 이 호수에 전해지는 전설에 대해서 실제로 어떤 것인지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어서 보자고 했어요.” ‘호수에 얽힌 전설이라면 어떤?’ 나는 쉬벡에게 들은 전설을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호호 재미있는 이야기로군요. 상당한 상상력이네요. 일단 그 이야기에서 대부분은 말도 안되는 것이라고 해 두죠. 저를 이 호수에 묶은 것은 인간이 아니라 이 세계를 만들어 낼 때, 인간들의 생활 환경을 기름지게 하고자 하는 의도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땅의 정령에 대한 것도 있기는 하지요. 이 인간계에 땅의 정령들이 때때로 땅의 기운을 북돋워서 기름지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니까요. 하지만 그런 일이 인간 정령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그것은 각계의 협약에 따라 인간계의 삶을 윤택하게하고 인간계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정령계에서 강구한 수단이지요. 때문에 저는 정령왕님의 명령으로 이 호수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 근처에 마을이 들어설 수 없는 것도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인가요?” ‘그것 역시도 각 계의 협약에 의한 것입니다. 아무리 인간계의 발전을 위해서 와 있다고는 하지만 인간과 정령이 너무 가까워지는 것을 우려한 다른 계에서 이렇게 호수 주위에 마을이 형성되지 못하도록 한 것이지요. 인간의 마을이 이 호수 주변에 있었다면 상당히 많은 영향을 서로 주고 받게 되었을 테니까요.’ “아 그런 것이었군요. 하하하” ‘그런데 제게 전할 말씀이 있으시단 것 같았는데 무슨 말씀이신지?’ “예, 그게 말이죠, 얼마전에 그러니까.....” 나는 얼마전 누더기 녀석의 일을 이야기했다. “그렇게 된겁니다. 그러니까 정령계에 이야기해서 빠른 시간안에 각 계와의 이야기를 마무리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어서, 하하하 좀 전해 주셨으면 하는 작은 소망이... 하하하” 내 머리에 들러 붙은 건 분명이 커다란 땀방울일 것이다. 하하하 ‘알았습니다. 그럼 그렇게 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더 말씀하실 것은 없으신지요?’ “저기 그럼 정령계에서 인간계의 발전을 위해서 무즈호를 만들었다면 다른 계에서도 그런 비슷한 일을 했을 것 같은데 그런 곳이 어딘지 알려주실수 있나요?” ‘물론 각 계에서 인간들의 발전을 위해서 나름대로 방법들을 강구하긴 했지만 그리고 그걸 각 계에서 서로 알 수 있도록 만들기는 했지만 그걸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는 것은 금지되어 있어서, 저도 알려드릴 수가 없네요. 다만 정령계에서 인간들을 위해 나온 정령이 저 뿐만이 아니라는 것과, 그와 마찬가지로 다른 계에서 인간계로 파견되어 인간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도 한 가지씩만은 아닐거라는 건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그럼 별다른 말씀이 없으시면 이만 들어갈께요. 오랜만에 나누는 이야기라 더 있고 싶지만 인간과의 접촉을 최소한으로 하라는 약속 때문에 오래 있을 수가 없네요. 그럼 이만.’ 그리고 그 정령은 다시 호수 밑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야기가 끝나자 나는 곁에서 멀뚱거리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다시 세세한 이야기를 해 주어야 했다. 정말 다른 사람들도 들을 수 있도록 이야기해 주면 얼마나 좋아. “그것 참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이번에 마법협회에 가면 보고할 내용이 상당히 많겠군요. 그리도 이참에 각 계에서 인간계에 파견한 존재들에 대해 조사를 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루탄님, 어차피 쥐덧에 다시 간다고 해도 별로 할 일도 없고 말입니다. 일단은 재미 있을 것 같잖습니까?” 아무래도 쉬벡의 이말은 자신의 궁금증을 풀어보기 위해서 나를 고난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일단 재미가 있을 것 같다는 데는 나도 동감이다. 하하 “글쎄요. 일단은 왕성에 들렀다가 일을 마치고 나면 다시 이야기를 하죠? 아직 이 일도 끝이 나지 않은 상태니까요.” 나는 일단은 어느 정도 여유를 두기로 했다. “허허허 그럼 그렇게 하지요. 급한 것도 아니니까요.” 역시 늙은 생강이다. 쩝. 말은 저렇게 하면서도 어떻게 해서라도 나를 끌고 가려고 무지 머리를 쓸거란 걸 내가 모를 것 같아? 흠흠. 역시 무즈호의 명성은 헛된 것이 아니었나보다. 무즈호를 지나는 동안 우리들은 상당히 많은 괴물들을 처리해야 했던 것이다. 정말 왕성으로 가는 마지막 고비라고해도 틀리지 않을 듯했다. “허궁 힘들어라.내가 아무리 가만히 앉아서 정령들 부리는 것만 하면 된다지만, 이렇게 정령들을 모두 불러내서 싸우는 건 힘들다구.정말이지 내가 무슨 철골에 무적인줄 아는 거야?” 나는 마차 의자에 철퍼덕 몸을 눕히며 궁시렁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슨 괴물들 이 호수에서 밤을 보낸 다음날 아침부터 끊임없이 몰려드는 것이다. 처음에야 그냥 다른 용병들이 처리하겠지 하는 생각으로 화아를 불러서 좀 도와주라고 하곤 신경을 안썼는데 좀 시간이 지나니까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사람들도 상당히 다치고 또, 호수변을 따라 길게 늘어진 모양이어서 그런지 중간 중간에 약한 부분이 있었던 모양인지 행렬이 끊어지는 경우까지 생긴 것이다. 덕분에 정령들을 다 불러내어서 그 끊어진 부분을 복구하는 데 힘을 쓰다 보니까 아주 녹초가 된 것이다. 그나마 이렇게 비명이라도 지르고 마차에 누울 수 있는 것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기 때문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허허 루탄님, 그래도 이제 더 이상 괴물들은 나오지 않을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왕성까지는 그냥 길따라 가기만 하면 됩니다. 생각해 보세요. 청색지대에서 왕성까지 오는데 이렇게 적은 희생으로 오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를 말입니다. 지금까지는 거의 반수 정도가 희생되는 고단한 여행이었는데, 이번에는 거의 희생자 없지 않습니까? 그게 다 루탄님 덕분인걸 모두 알고 있어요. 허허허 그러니 그만 엄살 피우시고 빨리 일어나세요.” “그래 그 말이 맞아, 정말 루탄이 큰 일을 했다. 이번에 같이 온 사람들은 전부 루탄의 덕을 많이 봤어. 나도 물론이고.” 어느새 다가왔는지 유소가 옆에서 나란히 말을 타고 가며 하는 말이었다. “그래 그래 알았어 알았다구. 하지만 힘든건 힘든 거라고. 그러니까 오늘은 저녁밥 알아서들 먹어. 알았지?” “응, 그래 그러지뭐. 안그래도 오늘은 저 앞에 보이는 마을에서 지낼거니까 루탄이 밥을 안해도 될거야. 호호 저 마을은 굉장히 큰 마을이라 우리들이 음식을 먹을 곳은 충분히 있을 거야. 호호” 사실 지금까지 이 많은 인원이 마을에서 쉰다고 해도 환자가 아닌 사람들은 야영을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다만 마을 안이어서 편히 쉴 수 있다는 점이 달랐을 뿐 천막을 치고 마을에서 주는 음식을 먹고 지냈던 것이다. 그러니 이번 마을은 규모가 커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서 여관이나 민박을 사용할 수 있을 거란 이야기였다. 뭐 솔직히 유소나 우리들은 다른 용병들과는 달리 어느 마을에서도 천막같은 걸 치고 잔 적은 없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그래도 인솔자였기 때문에...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 말시키고 일이나 봐. 언제 또 괴물들이 나올지 모르니까. 이번에는 나도 몰라, 난 정말 더 이상 힘이 없어. 그러니까 알아서 해.” 솔직히 말해서 반은 엄살이었지만 정말 힘이 드는건 사실이었다. 이럴줄 알았으면 직접 뛰어들어 싸우는 건데, 그 편이 힘이 덜 들고 운동도 되는데, 이렇게 정령만 불러 놓고 힘을 쓰면 온몸이 나른하고 기운이 빠져서 짜증스러운 기분이 되는 것이다. 다음부터는 직접 싸우는편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유소는 내 말을 들었는지 아니면 할일이 있는지 말을 몰아서 행렬의 후미로 가버렸고 나는 흔들리는 마차에서 하늘을 보고 누웠다. 그러고 보니 하늘을 이렇게 보는 것도 오랜만이다. 정말 예전에 보았던 하늘과 많이 다르다. 예전에 서울에서는 이런 하늘은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정말 맑은 하늘. 이제 봄인데 꼭 예전 우리나라의 가을 하늘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여행을 해 오는 동안에 초록이 많이 짙어졌다. 봄이 시작 될 때 청색지대를 떠났는데 벌써 봄이 한창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무즈호에 갔을 때 이미 들판이 초록으로 덮혀 있었다는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정말 시간이 빠르기도 하네. 벌써 반 년이 지나고 있는 거잖아. 내가 이 곳에 오게 된 것도, 정말 빠르네.” “뭐가 빠르다는 겁니까? 루탄님” 마차를 몰던 쉬벡이 내 혼잣말을 들었는지 물어왔다. “아니요. 그냥 제가 쉬벡님과 넥스를 만난게 벌써 반년이 되어가네요. 하하 정말 시간이 빠른 것 같지 않아요? 별다른 일도 별로 없었던 것 같은데 말이죠.” “허허 루탄님도. 별다른 일이 없다니요. 상당히 많은 일이 있었지요. 청색지대 탐험도 했고, 그 전에는 산록늑대 사냥도 있었고, 그 후에 여행을 해서 쥐덧까지 갔고, 겨울 동안 쥐덧에서도 나름대로 의미있는 시간을 보냈고요, 그리고 이렇게 공물을 운반 하면서 숱한 경험을 했는데 별다른 일이 없다니요. 허허허 지금까지가 별다른 일이 아니면 그럼 어떤 일이 별다른 일이라는 말씀입니까? 허허허” “그러고 보니 그렇기도 하네요. 정말 많은 일이 있었네요. 제가 데리고 있는 정령들도 참 많이 성장했지요. 처음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요즈음은 수아는 혼자서 요리도 할 수 있어요. 하하 정말 많이 변했네요. 풍아도 화아도 지토도 광아도 전부들 많이 변해서 처음과는 전혀 달라요. 물론 나도 많이 변했고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하늘로 눈길을 돌렸다. 정말 많이 변한 모양이다. 생각해 보면 별일 없었던 것 같은데, 실제로는 엄청 많은 일이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가는 왕성에서는 또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조금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대가 되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이곳에 와서 사귄 사람은 겨우 넥스와 유소, 쉬벡이 전부이다. 얼굴을 알고 인사를 할 사람이야 쥐덧에 가면 많이 있고, 또 이번 여행에서 알게 된 사람들도 많지만 그건 그저 아는 사람이지 마음을 주고 받는 관계의 사람은 아닌 것이다. 내가 사람들 깊이 사귀는 것에 인색한 탓이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면 어쩐지 어려워하는 탓도 있는 것 같다. 물론 그 이유 중에서 많은 부분은 내가 사람들을 잘 받아 들이지 않는 탓일 것이다. 이상하게 나는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 이번에 가는 왕성에서는 새로운 사람을 사귀게 될까? 마음을 터 놓을 수 있는 좋은 친구를 가지게 될까? 내가 정령들의 성장을 반가워하는 것도 어쩌면 그들은 나에게 영원한 친구로 남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인지도 모랐다. 우리들이 무즈호를 지난 다음부터는 정말 아무 일도 없고 평온한 여행이었다. 같이 길을 가는 일행들도 이제는 모든 어려운 일들이 끝났다며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또 살아남은 것을 큰 부상이 없는 것을 자그만한 상처들을 자랑삼으며 고마워하고 즐거워하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드디어 쥐덧을 떠난지 정확히 41일만에 우리는 왕성의 입구에 도착했다. 처음 출발 인원 724명 중 사망자 0명 부상으로 인한 낙오 54명을 제외한 670명의 인원이 왕성에 도착한 것이었다. 성도는 넓은 평야에 약간 언덕진 구릉위에 세워져 있었는데 상당히 넓은 면적을 지니고 있는 듯 했지만 도시 자체가 높은 곳에 위치한 까닭에 전체적인 모습을 볼 수는 없었고, 다만 도시의 외각을 둘러싸고 있는 15m높이의 성벽이 도시를 감싸고 있어서 그 끝이 보이지 않을정도의 성벽으로 도시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성도의 입구 중 하나라는 동쪽정문 앞에는 20여명 정도의 병력이 출입자를 살피고 있었는데, 우리가 가까이 가자 그들 중 상급자로 보이는 자(다른 병사들은 파이크를 들고 있는데 이 자는 칼을 차고 있었다. 그리고 투구도 일반 병과는 구별이 되는 것이 장교임을 드러내고 있는 자였다.)가 넥스에게 뭐라고 말을 걸었고, 넥스가 보이는 서류를 살피고는 곧 우리 일행들의 인원과 수레의 수를 확인하면서 성도로 입성 시켰다. 한타왕국의 성도 한타리단. 사람 사는 곳이야 어디든 다를 것이 없지만, 한 나라의 수도라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모든 문물의 최첨단의 장소이기 마련이다. 물론 전투와 같은 특이 요소의 경우에야 변경이 더 발달하긴 하겠지만 보통의 문명과 문화는 당연히 수도가 발전을 하기 마련인 것이다. 한타리단 역시 성문을 들어선 순간부터 펼쳐지는 모습이 여느 도시나 마을이 모습과는 격이 달랐다. 잘 포장된 넓은 도로는 직선으로 쭉 뻗어서 그 끝이 보이지 않는 반대편 성문을 향하고 있었고 그 도로 옆으로는 낮이라 꺼져 있는 모양이었지만 마법을 사용한 등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서 있었다. 사람들의 옷은 여느 곳과 달리 화려해 보이고 표정은 더 밝아 보였으며 여유가 있어 보였다. 물론 이런 도시에는 어딘가 음습한 어둠으로 감싸인 곳이 있으리란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이었지만 그런 것이야 인간이 사는 어디에나 있는 단면이니 별다를 것도 없을 일이었다. 나는 어쨌든 달라진 주위 환경이 싫게 느껴지지 않아 좋았다. 그리고 사람들의 북적거림도 또 우리 일행을 바라보는 호기심어린 눈빛도 싫지 않았다. 구경거리가 된 기분이긴 했지만 우리들을 바라보는 성도의 주민의 얼굴에는 호기심과 함께 약간의 동경도 살펴볼 수 있었던 탓이다. 아마도 성도의 여유롭고 편안한 삶을 사는 그들에게 용병이라는 거친 삶을 사는 우리들의 모습은 잠깐의 동경을 가지기에 무리가 없는 낭만인지도 모른다. 물론 생사를 가늠하는 괴로움을 염두에 두지 못한 철없는 생각들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나도 수도의 주민들의 그런 철없는 생각이나 동경을 깊이 받아들이며 기분이 상하거나 얼굴을 찌푸릴 만큼 속이 좁은 사람도 아니었다. 가끔은 이런 동경의 대상이 되어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성의 입구에서 우리 일행의 안내로 붙여준 병사의 뒤를 따라서 우리 일행은 한타리단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황성으로 행진을 했다. 변변한 환영인파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왠지 내가 보기에도 우리 일행은 한타리단에 들어온 후부터 조금은 질서가 생긴 모습이기는 했다. 뭐 쉽게 이야기하면 내가 앞에서 이야기한 그런 시민들의 반응에 한창 고무된 모습이라고나 할까? 하하하 우리 일행은 그런 행진 끝에 왕성의 외성에 도착했고, 그 외성의 입구에서 또 한 차례 검열을 받은 후, 외성문을 통과해서 외성의 창고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외성의 창고는 왕에게 공물을 진상하기 전에 보관을 하는 곳으로 일단 이곳에 물품들을 맡기고 물품 대장을 만든 후, 창고의 열쇄를 받는 것으로 대충 공물들에 대한 처리가 끝나게 되는데, 실제로 이번에 가지고 온 물건들 중에서 공물에 해당하는 것은 겨우 수레 10대 분량에 해당하는 것 뿐이고 나머지는 이 성도에서 열리는 시장에서 처분하거나 다른 품목들과 바꾸는 것이었다. 물론 그런 일이야 각 마을의 인솔자들이 알아서 그 마을의 물품들의 처분을 맡은 것이기 때문에 넥스나 우리들이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다만 왕에게 가는 물품들만이 이제부터 우리의 책임으로 남은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일행들을 여기에서 15일 정도 머무르며 필요한 것들의 마련해서 다시 청색지대로 돌아갈 것이었다. 그럼 우리는 같이 안 가느냐, 그게 이제부터 우리의 문제였다. 아직 모든 공물들이 모두 도착하지 않아서 좀 더 기다려야 하겠지만 일단 모든 공물이 모이고, 한타왕국의 건국기념일이 되면 각 영주들의 공물을 왕에게 바치는 행사를 벌이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게 앞으로 20일 정도 남았으니까 그 때 까지는 별로 할 일도 없이 외성에서 우리에게 배정한 방에서 뒹굴거나 성도를 구경하는 일이 전부였고, 공물을 바치는 행사를 하고 나서는 얼마간 왕궁에서 벌어지는 행사에(이건 다른 말로 연회 혹을 파티라고 한다)참가해서 다른 영지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었다. 뭐 솔직히 연회같은 것에 참가하는 것은 영주가 하는 일이지 우리처럼 대리로 온 사람들은 별로 그런 곳에서 환영을 받지 못하는 편이니 처음 하루나 이틀만 예의상 참가해 주고 나머지는 나가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쉬벡이 말했었다. 아무튼 우리는 앞으로 상당히 오랜 시간을 이 왕궁에서 보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내가 앞으로의 일들을 마음속으로 정리하는 동안 우리가 가지고 온 물건들의 대장을 작성하고 창고에 수납하는 일이 모두 끝이 난 모양이었다. 정확히 수레 50대 분량의 물건이었는데 그 중에서 왕에게 헌상될 10대 분량의 물건들은 한 쪽에 특별히 세워진 창고에 수납되었고 나머지는 일반 창고에 넣었는데, 이 일반창고에 넣어진 물건들은 말 그대로 창고를 빌리는 것과 같았다. 그 속에 있는 물건들은 당장 내일 부터라도 성도의 시장으로 가지고 나가서 판매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이번에 온 용병들은 이 성도에 들어서서는 상인이 되는 셈이었다. 그리고 그건 벌써 오래도록 내려온 전통이라 언제나 이런 행렬에는 흥정에 능한 사람들을 꼭 함께 보낸다고 하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 했다. 우리 일행의 거처는 미리 정해진 대로 외성에서 손님들을 위해 지어진 건물들 중 동쪽 건물이 주어졌다. 예상외로 대인원이 왔기 때문에 걱정을 했지만 3층의 석조로 지어진 그 건물은 700에 가까운 우리 일행을 충분히 수용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리고 인솔책임을 맡은 우리 4명을 따로 방이 주어졌는데 그 건물은 동서남북으로 지어진 손님용 건물의 중앙에 지어진 규모가 좀 작은 건물 안에 있었다. 우리가 성도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다른 일행들과는 이야기가 되어 있어서 더 이상 그들을 신경쓰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제부터 홀가분한 마음이 될 수 있었다. 적어도 건국 기념일이 되지 전까지는 특별히 무슨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를 괴롭힐 사람은 없는 것이었다. 2층 절반을 할해한 우리의 숙소는 아래층에서 2층으로 올라서서 왼쪽으로 뻗은 복도에 속한 모든 방들이었는데 큰 방이 하나 있었고 자그마한 방들이 대여섯 개 정도 있었다. 또 그 방들마다 욕실까지 붙어 있어서 상당히 호화로운 숙소였다. 사실 이 건물은 4대 불모지의 영주들을 위한 건물이고 보면 이런 정도의 규모도 어쩌면 소박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우리들(넥스, 유소, 쉬벡과 나)의 입장에서야 이런곳에서 지내 본 적이 없으니 엄청 호사스럽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우리가 숙소에 짐을 풀고 대충 씻고 났을 때, 우리들은 자연스럽게 한 자리에 모였다. 바로 1층에 있는 식당이 그 곳이었다. 벌써 저녁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식당은 예상외로 길게 늘어진 테이블이 아닌 주점식의 테이블들이 놓인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런 테이블의 한 곳은 이미 한 무리의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 나이 들어 보이는 흰수염의 덩치가 큰 인물(전형적인 기사형의 인물이었다.)과 조금 장년의 남자(역시 단단한 몸매에 덩치기 큰 인물로 앞서의 인물과 별달라 보이지 않는 분위기의 인물), 그리고 그보다 앳되게 보이는(거의 내 나이 정도 되어 보이는 -겉으로 보이는 나이-인물이었다.) 젊은 남자와 쉬벡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며 로브를 입고 있는 인물(나이도 비슷해 보였다.)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식당 입구에 들어서서 그들을 보는 순간 넥스의 반응이 문제였다. 아니 넥스 뿐 아니라 식당으로 들어오는 우리들에게 무의식적으로 눈길을 던지던 그 사람들의 반응도 함께 문제였기는 하다. 갑자기 몸이 굳어 버린 넥스와 잠시 굳었다가 말없이 식사를 하는 노인과 장년과 아직 굳어버린 청년과 슬쩍 웃음 보이는 마법사. 나는 그때서야 그들이 누구일 것이라는 짐작이 갔다. “이봐 넥스 혹시 저기 저 할아버지가 넥스 할아버지 아니야? 맞지? 맞지?” 나는 내 직감을 넥스에게 확인했다. 그리고 다음 넥스의 행동으로 내 짐작은 확실해졌다. 넥스는 성큼성큼 그 탁자로 걸어가서는 꾸벅 인사를 했던 것이다. “하하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여전히 건강하시네요. 하하하 그리고 큰아버지도 잘 계셨지요? 그리고 많이 변했구나 멕스, 이젠 완전히 한 사람의 몫을 충분히 하겠구나. 마지막으로 봤을 때만 해도 아직 덜 여물었다 싶더니, 하하하 아참, 루니스님도 오랜만이네요. 여전하시죠? 하하하” 보통 때와 달리 조금 소란스럽게 느껴졌지만 그런대로 소박하고 애정이 넘쳐 보이는 인사였다. 적어도 할아버지라는 사람의 반응이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래, 너도 잘 있었던 모양이구나. 그런데 아직 한타에서 넥스라는 귀족이 생겼다는 소리는 못들은 것 같은데 네가 어떻게 여기에 와 있는 것이냐? 설면 네 주제에 동자치령주가 됐을 리는 없고...” 어떻게 보면 약간은 비꼬는 듯한 소리였던 것이다. 아무래도 넥스와 할아버지 사이에는 좋지 못한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뭐, 제가 벌써 귀족이 될 수 있겠습니까? 워낙 능력이 안되는 놈이라서 여전히 용병으로 여기 저기 떠돌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동 자치령주님의 대리로 공물 운송을 맡게 되어서 여기 있는 것 뿐입니다. 하하 아직 멀었지요. 하지만 언젠가는 저도 귀족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말 겁니다. 하하” “놈! 아직도 그 허황된 꿈을 버리지 못했단 말이냐? 그렇게 쓸데 없는 생각하지 말라고 했건만은, 쯧쯧쯔.” 이젠 혀까지 차며 불쌍하다는 눈빛이 된 할아버지였다. 아니 북 자치령주였던가. “어쩌겠어요. 저한테는 물려받은 힘이 없으니 노력으로라도 해 볼수 있는 데 까지는 해 봐야죠. 하하. 그럼 식사 맛있게 하세요. 저도 일행들이 기다려서 가 봐야겠습니다. 하하” 끝내 지지 않고 맞받아 치고 돌아서는 넥스였다. 뭐 그렇다고 북 자치령주라는 사람이 그렇게 화를 내는 것 같지도 않았다. “넥스형님 2층에 계시죠? 제가 한 번 찾아 갈께요.” 멕스라고 했던 그 청년이 돌아서는 넥스에게 그렇게 호의적인 인사를 건네도 할아버지라는 북 자치령주가 아무 말도 없었던 것을 보면 넥스가 다른 가족들과 그렇게 나쁜 관계는 아닌 것 같았지만, 북 자치령주 일행은 우리가 식탁에 앉은 지 얼마 되지않아서 식사를 마치고 나가 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넥스가 스스로 말하기 전에는 꼬치꼬치 케묻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은 나뿐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서 우리들의 식사는 느긋하지만 조용하고 묵묵하게 진행되었다. 오랜만에 남이 차려주는 식사였는데... 정말 나는 먹을 복이 없나보다. 우리들이 2층 우리의 숙소로 올라와 하녀가 가져다 준 차를 다 마시기도 전에 멕스라고 했던 젊은이와 루나스라고 했던 마법사가 찾아 왔다. “실례합니다. 넥스형님을 너무 오랜만에 뵙는 거라서 오래 기다리지 못하고 급하게 왔습니다. 방해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멕스는 서글서글하고 붙임성 있게 인사를 해 왔다. “본의 아니게 폐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허허” 루나스라는 사람의 인사다. “저기 오랜만에 만나셨는데 저희는 방해가 되면 그만 나가볼께요.” 이건 예상외로 유소의 말이었고 이어진 유소의 행동을 막은 것은 멕스라는 인물이었다. “아, 아니.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그냥 저는 넥스형님이 어떻게 지내셨는지 궁금한 것 뿐인데... 일행분들이 계시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테니 더 좋지요 뭐.” 그래서 엉거주춤 일어났던 유소와 덩달아 일어나려던 나는 다시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조용해 보이던 멕스라는 인물의 독무대가 전개되었다. 이것 저것 물어가며 무얼하고 지냈는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눈을 반짝반짝 거려가며 묻는 말에 떠듬떠듬 대답하는 넥스와 그 대답이 답답했던 유소, 그래서 모르는 일은 그냥 지나갔지만 아는 사건이 나오면 열을 내고 설명하는 유소, 거기에 박자를 맞추듯이 와와 거리는 멕스, 대충의 분위기는 이런 것이었다. 그리고 결국 넥스와 나의 만남과 청색지대의 탐험에 이르러서는 내가 적당히 눈짓을 주어서야 겨우 정령계와 4계의 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어영부영 넘겨서 이야기 할 수 있었다. 다만 그 때 얻었던 장비들에 대한 이야기가 어쩌다 나오게 되어서 호기심에 가득찬 멕스에게 날이 밝으면 그 위력을 보여주겠다는 약속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쉬벡과 루나스라는 마법사는 언제 마법협회에 들를 생각인지 가는 길이면 같이 가면 좋지 않겠냐는 등 일상적인 이야기만을 늘어 놓았고 역시 끼어들 자리가 없었던 나는 그냥 가만히 있었지만, 역시 유소의 수다로 인해서 내가 5대 정령을 다룬다는 말을 들은 루나스는 그 말도 안되는 것이 사실이냐는등 한동안 목에 핏대를 세우더니 정말이라면 한번만 보여달라고 소매를 잡고 늘어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정령들을 소환해야 하는 곤역을 치루었고, 멕스라는 미숙아의 와와 거리는 함성을 들어야 했다. 그렇게 한 번 그들이 휩쓸고 가자, 나와 넥스는 곱지 않은 눈으로 유소를 노려보았고, 결국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유소는 슬그머니 제 방으로 가 버렸다. 뭐 그다음에야 우리들도 각자 자기의 방으로 돌아가 잠자리에 드는 이외에 다른 할일이 없기는 했지만 말이다. 다음날 우리가 아침 식사를 하고 있을 때, 북 자치령주 일행들이 식당에 들어왔지만 넥스의 간단한 인사와 거의 씹히는 분위기의 할아버지의 응대와 큰아버지의 응대 그리고 열렬한 멕스의 환대와 루나스의 은근한 환대를 받은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우리가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설 때, 입에 빵을 웅얼거리며 달려나와 넥스의 바지를 잡고 늘어진 멕스로 인해서 우리는 숙소에서 조금 벗어난 작은 연무장에서 넥스의 건들렛과 내 쌍환검의 위력을 보여주는 시간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건 둘의 대련 형식이었지만 평소처럼 서로를 죽일 듯이 하는 살벌한 대련은 애초부터 피하려고 했었다. 물론 처음의 계획은 그랬다는 것이다. 연무장 군데군데가 쌍환검에서 날아간 마법과 건들렛에서 날아간 뇌전으로 엉망이 되고 넥스가 한 구석에 처박힌 후에 폭음과 진동에 놀라 사람들이 뛰어온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던 것이다. 덕분에 북 자치령주 일행들이나 숙소를 관리하는 집사나 경호하는 병사들에게 일급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힌 넥스와 나는 그 후로는 될 수 있으면 외성밖으로 나가서 도시를 구경하거나 숙소의 방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하지만 나나 넥스는 될 수 있으면 외성 밖으로 나가는 쪽을 택하기로 은연중에 낙찰을 보았다. 왜냐하면, 그 미숙아 멕스가 언제 어디서 나타나서 빤짝이는 두 눈을 들이밀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정말 넥스의 말 대로라면 벌써 나이가 스물이란다. 그런데 그렇게 어린아이 같다니. 말을 들어보니 그 집안의 혈통이 전부 그렇단다. 지금 할아버지도 즉 북 자치령주 역시도 그런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데, 사실 북 자치령주가 넥스에게 화가 나 있는 것도 넥스가 자기를 도와주지 않고 다른 곳을 전전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다시 말하면 삐져 있어서 그런 것이라나? 물론 그건 큰아버지 역시 마찬가지란다. 그리고 멕스가 자꾸만 들러붙는 이유도 큰아버지나 할아버지가 넥스에게 궁금한 것이 있는데 직접 물어 보기는 쑥스러우니까 안 그런척 하면서 멕스에게 시키는 것이라고, 물론 덜떨어진 멕스는 자기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그런 약을 수를 쓴다는 사실도 모를 것이라고... 정말 생각해보면 웃기는 일이다. 그 덩치에 그 얼굴에 그 나이에 손자에게 삐져있는 할아버지라니, 그게 어디 어울리기나 한 일인가 말이다. ㅡ.ㅡ;; 오랜만에 뺨으로 땀 방울이 흐르는 걸 느낀다. 하하 뭐 각설하고 그 연병장 대련 사건 이후로 우리들은 주로 밖으로만 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었는데 쉬벡은 처음의 의도대로 마법협회에 보고 할 일이 있다고 한 일주일 걸릴 거라고 사라졌고, 이틀 정도 한타리단 시내를 돌아다닌 우리들은 이제는 별로 구경 할 거리도 없어지고 있었다. 아직 본격적인 축제가 시작되지 않아서 그다지 특별한 구경거리가 별로 없었던 것이다. “이봐 루탄아, 우리 근처 무기점에 들러서 좋은 물건이 있는지 한 번 살펴보자. 나는 건들렛을 빼고는 나머지 무기들을 좀 손봐야 할 것 같다. 솔직히 검도 그렇고 갑옷도 그렇고 제대로 된 것이 이젠 거의 없어. 이 기회에 쓸만한 것으로 마련해서 좀 오래 써야지. 괴물들을 몇 번 상대하고 나면 칼이고 도끼고 남아나는 것이 별로 없으니 말이야.” “그래 그거 좋겠다. 나도 이번에 새로 무기들을 좀 구입해 둬야 하겠다.” 넥스의 제안에 유소가 찬성하고 나섰다. 그럼 결과는 내 반대는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사실 용병들이 쓰는 무기라는 것은 길어야 몇 년을 쓰지 못한다, 더구나 우리처럼 그렇게 자주 괴물들과 싸우다 보면 일주일이 멀다하고 칼이 망가지는 것이다. 물론 검기를 능숙하게 쓴다면 어떤 검을 들더라도 검에 무리가 가지 않게 할 수 있겠지만, 넥스의 경우나 유소처럼 자주 싸움을 하는 경우에 언제나 검기를 사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검기를 사용하는 것은 기력을 많이 소비하기 때문에 장기전에서는 위험해 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장기전을 대비해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검기를 자제하게 되는데 덕분에 검은 더 빨리 망가지게 된다. 허긴 도끼조차도 얼마 쓰지 못하고 망가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보다 약한 검이나 창 같은 경우는 말할 것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용병들은 적어도 세 개 이상의 무기를 들고 다닌다. 검과 도끼 그리고 창 정도가 그것이고 거기에 더한다면 활이나 석궁같은 원거리 무기를 더한다. 솔직히 이번 공물 운송에서도 넥스와 유소의 무기들은 상당히 많이 망가져서 내 창고에 쌓여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이번 기회에 창고에 널려있는 쓰레기들을 치우기로 하고 넥스를 따라서 무기점이 늘어선 곳을 찾았다. 성도의 무기점은 완성된 무기를 진열해서 파는 곳도 있었고 대장간을 겸해서 무기들을 파는 곳도 있었다. 나는 우선 대장간을 겸하는 곳에 들러서 창고에 있는 무기들을 고철로 처분했다. 내 작은 배낭 속에서 줄줄이 이어지는 갖가지 무기들을 본 대장장이는 기가 막혀 했지만 결국은 거의 한 수레가 넘는 고철들을 싼 값에 사게 되어 아주 만족스러워 했다. 사실 그 무기들 중에는 싸움을 하는 도중에 용병들이 버린 것들이나 괴물들이 간혹 들고 있던 것들도 있어서 제법 돈이 되었던 것이다. 앞으로는 이런 무기들을 전부 주워서 창고에 넣어둬야겠다고 다짐했다. 무조건 돈이 되는 일은 하고 본다. 하하하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자연도 보호하고 얼마나 좋은 일인가 하하하 그렇게 고물들을 처리하고 그 대장간에서 무기들을 사려고 했지만 넥스나 유소는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면서 좀 더 고급스러운 무기점을 찾았다. 무기점 안에는 갖가지 무기들이 그 종류에 따라서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었고, 나는 그 엄청난 양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인은 50대 정도의 근육질의 남자였는데 아무래도 젊은 시절에는 한 가닥 했을 것 같은 인물이었다. “그래 어떤 물건을 찾으십니까? 저희 가게에는 없는 물건이 없습니다.” 누구나 그렇지만 자기 가게에 대한 자랑이야 주인 된 입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리라. “주인장, 일단 내가 찾는 물건은 대형검으로 양손사용에 적어도 대형괴물을 200마리 정도는 베어도 끄떡없는 강도를 지닌 것이어야 하오. 그런 물건이 있소?” 넥스는 시작부터 단호하게 물었다. “흠, 대단한 물건을 찾으시는군요. 일단 그런 물건이 있기는 합니다만... 잠시만 기다리세요.” 주인은 말을 마치고는 돌아서 진열장 뒤로 난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흐른 뒤 주인은 검신의 길이만 160cm쯤 된어 보이는 검을 들고 왔다. 검의 폭도 상당히 넓은 편이었고, 흔히 말하는 바스타드소드 정도의 검으로 보였는데 검날과 손잡이에 이음세가 없는 일체형의 물건이었다. 넥스는 그 검을 슬쩍 들어서 양 손으로 눈 앞으로 들어보고는 만족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일단은 균형은 아주 잘 맞는 것 같고, 강도 시험만 해보면 되겠군. 주인장 강도 실험 가능하겠소?” 넥스의 물음에 주인은 아무말도 없이 자기의 허벅지 두께의 나무토막을 하나 들고 나왔다. “물이 흠뻑 젖은 철목이요. 이정도면 괜찮을 거요.” 실제로 철목은 도끼로 이빨도 잘 들어가지 않는 나무이다. 그런데 거기에 물까지 흠뻑 묻게 되면 경도와 연성도 높아지게 되기 때문에 잘라 내기에는 상당히 까다로운 상태가 되는 것이다. 어쩌면 주인은 넥스의 실력을 시험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어지간한 용병들은 이런 상태의 철목에 깊은 흔적을 남기는 것도 어렵기 때문이다. 더구나 넥스가 들고 있는 검처럼 날이 날카롭게 서 있지 않은 경우에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헙~!” 슈~캉! 하지만 넥스는 그런 무딘 검으로도 어렵지 않게 철목을 잘라 내었다. “상당히 좋은 검이군요. 일부러 검기를 아주 약간만 썼는데도 상당한 예기를 뿌리네요. 거기다가 철목을 벨 때의 느낌으로도 확실히 강한 검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주인장 이 검 얼마에 팔겁니까?” 넥스는 그 검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리고 주인도 넥스의 실력이 예상 보다 뛰어나다 느꼈는지 처음보다는 부드러운 표정이 되었다. “어디보자, 이건 좀 비싼데, 5만메타는 받아야 할 것 같군. 그 정도 값어치는 할 녀석이니 깎을 생각 말고 그냥 주게나.” 음. 5만메타면 그러니까 예전 내가 살던 때의 5백만원 정도되는 돈인데... 상당히 비싼 가격인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그리 비싼 가격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솔직히 물건만 좋다면 그 정도의 돈이라도 아까울 것이 없는 게 사실이다. 싸움을 하는 도중에 검이 부서지거나 하면 정말 낭패가 아닐 수 없으니까 말이다. 자기의 목숨을 거는 것인데 가격이 문제겠는가 말이다. 다만 그건 넥스의 마음에 검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는가에 달린 것이다. “상당히 비싸군요. 물건은 좋은데 가격은 별로 좋지 못한 것 같으네요. 이 검과 적당한 창 5대, 도끼 5개, 석궁 2개, 화살을 포함해서 5만메타 드리죠. 그럼 되겠지요. 어차피 나머지 물건들이야 다 합해도 1만은 넘지 않을 것이고, 그 정도면 이 검 값으로 충분할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넥스는 검이 마음에 들긴 든 모양이지만 손해도 보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넥스의 말에 주인은 인상을 찌푸리긴 했지만 곧 웃으며 대답했다. “검을 다루는 솜씨뿐만 아니라 흥정을 하고 물건에 값을 매기는 것도 수준급이로군. 허긴 용병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그런 데에도 익숙해지기 마련이지. 알겠네. 그렇게 하세.” 곧 넥스는 주인에게 대금을 계산했고(여기서 넥스가 화폐가 아닌 보석을 사용했기 때문에 약간의 문제가 생겼다. 유소가 보석의 가치가 더 5만을 좀 넘는다면서 자기가 쓸 장검을 하나 어거지로 차지했던 것이다.나는 그 물건들을 창고에 차곡 차곡 쌓았다. 그 이후로도 우리들은 무기점들을 다니며 도끼나 방패, 창, 철퇴, 메이스 등의 무기들을 샀고(전부 넥스와 유소의 몫이었다.) 나는 따라다니면서 창고에 쌓는 일을 했다. 넥스는 새로 구입한 검이 마음에 들었는지 자꾸만 등에 짊어진 검으로 손을 가져갔다. 검이 크기 때문에 따로 검집이 없고, 검날 양쪽을 가려주는 길다란 막대 같은 것이 있을 뿐이었다. 요령껏 등 뒤에서 비틀어 주면 검의 날을 물고 있는 그 막대들이 벗겨지면서 빠져나오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분리된 검날 가리게는 또 중간중간 이음새가 있어서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게 되어있었다. “넥스, 검이 아주 마음에 드는 모양이네? 그렇게 좋아?” 나는 은근히 넥스의 마음을 떠 보았다. “검사에게 검이란 곧 분신과 같은 것이야. 너는 쌍환검을 들고 있으니까 별달리 검에 욕심이 없는 모양이지만, 나같은 검사에게 좋은 검이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과 같지. 하하” 넥스는 기분 좋게 웃다가 갑자기 나를 돌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 “???” 당연히 나와 유소는 멈추어서 넥스를 볼 수 밖에 없었다. “루탄아 우리 이 검을 산 기념으로 대련 한번 하자.응? 나도 빨리 이 검에 익숙해 지려면 아무래도 제일 좋은방법이 대련을 하는것 아니겠어? 그러니까 우리 대련 한 번만 하자? 응?”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멕스처럼 눈빛을 빛내며 말하는 넥스.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다구. 속이 이상해지잖아. “이, 이봐 넥스. 설마 우리가 왜 그 좋은 숙소를 두고 이렇게 밖으로 나돌고 있는지를 잊은 것은 아니겠지? 다시 대련을 한다고 하다가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른단 말이야.” 나는 진지한 얼굴로 마주보며 우리가 대련을 하면 안되는 이유를 설명했다. 사실 쓸데없이 엉겨서 싸워봐야 나는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것이다. 그저 운동이 된다는 것 말고는 정말 도움이 안 된다. 뭐 잘난 척 하는 것은 아니지만 넥스와의 대련에서 내 실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나는 싸움에서 검기를 얼마든지 사용할수 있는데다가 내 몸이 다른 사람에 비해서 근력이나 반사신경 또 속도까지 몇 배나 빠르기 때문에(기운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그렇다.) 넥스와의 대련은 정말 아무 도움이 안 된다. 고로 대련은 귀찮은 일이다. 그래서 나는 대련을 하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 있어도 넥스의 이런 제안을 거부해야한다. 뭐 이런 생각으로 넥스의 제안을 아주 간단하게 묵살하려는 나의 의도는 넥스의 다음 말에서 무저지기 시작했다. “그거야, 우리가 싸울 때, 마법은 쓰지 않고 하면 다른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일은 없을 거 아냐? 뭐 거기에 대해서 검기도 사용하지 않고 오직 검술과 체력만으로 하면 운동도 되고 얼마나 좋아. 응 그러니까 한 번만 하자. 한 번 만 하 자.” 은근히 눈동자에 힘까지 주고 협박을 한다. “해 봐야 매일 지면서 뭘 하자는 거야? 그냥 유소하고 해라. 난 귀찮아서 싫어.” 나는 그래도 상황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포기 하지 않았다. “어머, 루탄아. 내가 넥스와 왜 대련을 해? 난 그래도 섬세한 편이라구, 넥스처럼 힘으로 밀어 붙이는 싸움에는 흥미가 없다는 말씀.” 물론 이 소리를 들은 나와 넥스 모두 그게 무슨 오크 풀뜯어 먹는 소리냐는 눈으로 잠시 유소를 보기는 했지만 넥스는 아무래도 유소의 헛소리보다는 나와의 대련에 더 미련이 많았던 모양이다. “루탄, 그러지 말고 한 번만 하자. 지금 성으로 돌아가서 몸 좀 풀고 저녁 먹으면 되겠다. 그러니까 가자 응. 가자?” 다시 초롱초롱 빛나는 눈동자 모드로 돌아가는 넥스를 말리지 않으면 어쩌면 돋아난 닭살로 피부병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어쩔수 없이 대련을 승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옆에서 유소도 자신이 했던 망언에 대해서는 아주 잊은 듯이 넥스의 행동에 지탄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고, 그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무언의 압력을 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외성문을 들어올 때, 입구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경비병들의 험난한 눈초리를 피해서 숙소로 돌아오던 우리는 애초의 계획대로 은근슬쩍 창고를 돌아 보는 척 하다가 다시 창고 뒤를 돌아서 연병장으로 향했다. 전번 대련으로 좀 많이 망가졌던 것이 이제는 깨끗하게 정비가 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집사와 관리병들이 힘을 쓰며 욕을 했을 것이다. 하하 넥스는 벌써 웃옷을 벗어던지고 검을 들고 준비를 하고 있었고, 나도 이왕 시작된것 최선을 다해서 상대해 주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나는 쌍환검 중에서 하나만 풀어내었다. 어차피 내가 쌍검술을 익힌 것도 아니고, 어차피 검술을 했다고 해야 예전에 도장에 다니면서 배운 것이 전부였기에 검은 하나만 있는 편이 전력을 다하기에 오히려 좋았던 것이다. 넥스의 검술을 가벼운 검을 쓸 때는 정확하고 간결한 특징을 지니지만 저렇게 큰 검을 쓰게 되면 파괴적이고 무거운 검술이 된다. 그러니 내가 쓰는 검처럼 가벼운 검으로 상대하기가 어렵게 되는 것이다. 물론 내 검이 보통 검이 아니어서 넥스의 검과 정면으로 승부해도 부러지거나 하지도 않을 거고 내가 넥스보다 힘이 못한 것도 아니지만 일단은 나는 넥스와 대련할 때는 스피드와 정확성, 그리고 검도 도장에서 배운 몇 가지 검술들로 상대를 해 왔다. 그리고 오늘도 그렇게 하려고 마음 먹고 있었다. “자 준비 됐으면 간다?” 넥스는 슬쩍 나를 보더니 달려 들었다. 채챙, 말이 피한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검을 몸놀림 만으로 피하는 것은 너무 밋밋한 느낌이다. 그래서 나는 슬쩍 넥스의 검을 검을 맞받으며 흘려 버리는 방법을 쓰는 것이다. 이건 실제로 검과 검을 부딫히는 것 보다는 더 고난위의 방법이지만 내 신체적인 조건이 다른 사람보다 특수하기 때문에 (다시 말하지만 재구성된 내 몸은 일반 인간의 몸의 비해서 월등한 능력을 지녔다.) 이런 방법을 쓰는데 전혀 무리가 없었다. 넥스의 공격은 거검을 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은 반경을 지니고 빠르게 움직이는 방법을 쓰고 있었다. “예전에 쓰던 방법이 아닌데? 그 사이에 검법을 바꾸기라고 한 거야?” 나는 넥스와 의 거리를 약간 벌이며 물었다. “별거 아니야. 그냥 검이 크다고 해서 동작을 크게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말이야. 물론 파괴력을 필요로 할 때는 다르겠지만 일단은 파괴력 보다는 스피드가 필요한 경우에는 작은 움직임으로 효율적인 공격을 할 수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말을 하면서도 넥스의 검은 그 크기에서 일어날 수 있는 변화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하고 날카로운 변화를 일으키며 날아들었다. “하하, 제법인데? 그렇다고 나를 잡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않겠지? 그런 방법으로는 힘들다구.” 나는 넥스의 검을 일일이 맞받아 비껴가게 만들며 약을 올렸다. “루탄, 진지하게 하는 게 좋을거야. 봐주면서 하다가는 큰 코 다칠 수가 있다고. 차앗!” 적당히 대처하고있는 상태에서 넥스 녀석도 그렇게 분위기를 만드는듯 하더니 갑자기 울려나오는 기합소리가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고,그 순간 넥스의 검이 허리를 가르고 날아들었다. “횡 베기.” 거참 아주 간단한 명칭이구만. 하지만 명칭은 간단한데 공격은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빠르게 뒤로 빠지면서 넥스의 검을 내 검으로 맞받아 흘려 버리려고 했지만 넥스의 검이 지닌 힘과 스피드가 그것을 어렵게 했던 것이다. 그래서 겨우겨우 검을 흘려 보내지는 못하고 내 검에 몸들 맞겨서 넥스의 검을 겨우겨우 덤불링 넘듯 넘으며 피했을 때, 어느 틈에 넥스의 검은 내 뒤를 따라 붙고 있었다. “종 베기.” 그 참 이름하고는... 하지만 역시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재빨리 옆으로 구르듯 넥스의 검을 피하는 나를 따라오는 “사선 베기.” 이름이 검의 행로를 알려주니 그나마 고맙구만 그리고 사선은 그나마 검을 맞대고 힘을 흘려 버릴 가능성이 있을 것 같은데, 결국 그것도 안되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횡과 종으로 밀린 까닭에 그런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또다시 겨우 겨우 칼날을 피한 나에게 “점!!” 단 한마디와 함께 다가오는 넥스의 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넥스의 그 큰 검이 찌르기로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두 손으로 잡은 검으로 찌르기라니, 이건 옆으로 피할 수가 없었다. 옆으로든 뒤로든 순간적인 속도에서 검을 찌르면서 몸을 날린 넥스의 속도가 더 빠르기 때문이다. 기본 속도는 내가 더 빠르지만 내가 몸을 날리는 속도 보다 느린 넥스의 속도는 굽힌 팔을 뻗는 속도를 더했기 때문에 팔이 다 펼쳐지는 순간까지는 내가 몸을 피하는 속도의 세배 이상의 속도가 나오는 것이다. 완전히 본능이었다. 넥스의 찌르기를 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낀 본능은 다시 내 몸을 검에 실었던 것이다. 넥스의 검을 뒤로 피하는 것과 동시에 내 검의 넓은면으로 넥스의 검에 실린 힘을 받아 내 몸의 추진력으로 삼아 뒤로 한참 떨어졌던 것이다. “허거걱, 이런 이런 낭패를 볼 뻔 했네. 넥스 이 무식한 녀석아 그렇게 무턱대고 공격하는게 어디 있냐? 그러다가 내가 죽으면 책임 질 거야? 정말 위험했다구.” 나는 넥스의 얼굴을 보며 소리를 질렀다. “크크 루탄아 내가 조심하랬지? 그러기에 진지하게 대련에 임해야지. 크크크” 넥스는 오랜만에 나에게 충격을 주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즐거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가 당하고만 있으면 절대 루탄이 아니다. “자, 간다. 넥스 조심해라. 나에게 그런 짓을 하고 무사하게 지나가리라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았겠지? 케케케” 아무래도 서로의 웃음소리가 이상해지는 것을 보니 본능이 이성을 누르기 시작하는 것 같은데... 그 이후의 대련이야 당연히 나의 일방적인 우위에서 행해졌다. 넥스의 그 검법이(넥스 말로는 종횡무진 검법이란다. 무식한 놈 같으니 검법의 이름을 그따위로 짓다니) 나를 밀어 붙인 것은 내가 넥스와 가까이 있는 상태에서 검법이 시작되는 종 베기를 허용한 까닭이었다. 종 베기가 시작되면 그 이후는 어쩔 수 없이 아까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달리 뚜렷한 방법이 없는 셈이었다. 하지만 그 종 베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내어주지 않으면 되는 것이었기에 나는 최대한의 스피드로 치고 빠지기를 반복했고, 결국 넥스는 그 이후로 변변한 공격을 시도하지 못하고 방어만 하다가 처참하게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다. “헉! 헉! 루탄 그만하자. 허헉, 하지만 기억해 둬라 종횡무진의 끝은 점이 아니다. 나중에 완성되면 보여주마. 크크크 그 때는 네 녀석의 그 멋진 옷에다가 구멍을 몇 개 뚫어 주도록 하지 크크크” 결국 그렇게 마지막을 장식한 넥스가 땅바닥에 길게 늘어지자 나도 오랜만에 몸을 혹사시킨 덕분에 연병장의 한 쪽에 마련된 나무 의자에 가 앉았다. “수아 소환, 수아야 나 적당히 좀 씼어 줄래? 한바탕 뛰었더니 땀이랑 먼지랑 말이 아니야. 하하 부탁해.” ‘네 주인님.’ 의자에 앉은 나룰 수아가 불러낸 물방울(내 상체는 다 들어갈 정도로 크다)이 감싸더니 잠시 회전을(이건 세탁기 같다.) 하곤 사라졌다. 그 덕분에 내 몸을 깨끗해졌고 젖은 옷가지는 수아가 물기를 제거해 주었기 때문에 걱정이 없었다. “둘 다 대단한 실력이네, 언제 봐도 넥스나 루탄의 실력은 대단해. 그런데 왜 루탄은 괴물들을 상대할 때 검은 쓰지 않고 정령들에게만 일을 시키는 거지?” 한쪽에서 구경하던 유소가 다가오며 물었다. “그거야 내가 직접 뛰는 것 보다는 정령들을 시키는 것이 좀 더 넓은 범위를 방어할 수 있기 때문이지. 나 혼자서 4곳을 동시에 어쩔 수는 없잖아. 거기다가 정령들 나름대로 특수한 능력들도 있고 말이야. 하하 말은 이렇지만 실상은 귀찮아서 그렇지 뭐, 하하.” 그러는 사이에 넥스가 어기적 어기적 다가와 옆에 주저 앉았다. “어구구, 몸이 뻑쩍지근 한게 말이 아니네. 그런데 루탄 너는 별로 지친 것 같지가 않네? 역시 대단한 체력이다. 어구구.” 옆에까지 거의 기다시피 해서 온 넥스는 되지도 않는 엄살을 부리고 있었다. “쓸데 없는 엄살 피우지 말고 그만 일어나라 밥이나 먹으로 가자.” “흐흑, 매정한 루탄, 어떻게 그렇게 말을 할 수가.” 하지만 그런 넥스의 닭살 모드는 순식간에 날아든 유소의 주먹으로 마무리 되었고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하 이제 가시는 겁니까?” 우리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목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 때였다. 그것도 그리 멀지 않은 나무 위에서 들린 소리였던 것이다. “누, 누구야?”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적잖게 당황한 넥스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이런, 죄송합니다. 놀라게 해 드릴 생각은 없었습니다.” 넥스의 목소리와 함께 나무위에서 떨어져 내린(우아하게 뛰어내린) 의문의 사내가 늘어놓는 사과의 말을 들으면서 그제서야 우리들을 그 녀석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180이 조금 안되어 보이는 키에 마른 체형을 지닌 인물로 가벼운 여행복 차림에 허리에는 레이피어를 차고 있는 인물이었다. 얼굴은 갸름한 편이었고 갈색이 포함된, 웨이브를 이룬 금발을 장발처럼 기르고 있는 인물이었다. “누구신지? 처음 뵙는 것 같네요.” 서둘러 정신을 수습한 내가 퉁명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조용한 곳을 찾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서 그냥 나무위에 올라 갔는데 예상외로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대련을 하실줄은 몰랐씁니다. 그렇다고 대련 중에 내려가면 방해가 될 것 같아서 그냥 그대로 있었던 겁니다. 그렇다고 대련을 마치고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모른채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싶어서 인기척은 내었습니다. 모처럼 좋은 대련을 구경했는데 도둑 처럼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서 말입니다.” 그렇게 길게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는 모습을 보니 성격이 나쁜 인물은 아닌 것 같았다. “아, 네. 뭐 그렇게 미안해 하실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저 연병장에서 대련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잘못은 아니니까요. 그저 사람이 없는 줄 알았는데 인기척이 나서 놀랐던 것 뿐입니다. 참, 저희는 이번에 동 자치령주님 대신 공물 운송을 맡아 온 사람들입니다. 저는 루탄, 여기 이친구는 넥스, 그리고 이 여자분은 유소입니다.” “네, 그러시군요. 반갑습니다. 저는 오늘 외성에 도착한 서 자치령주님 휘하의 하츠키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동 자치령주님의 공물 운반일행은 사망자가 없이 거의 모두 왕도에 도착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여러분이 그 일행에 있었다면 그게 이상할 것도 없겠군요. 더구나 정령도 다루시니 대단하시네요.” 하츠키라는 인물은 그렇게 자신을 밝혀왔다. “아, 서 자치령주님 일행이 도착하신 모양이군요. 이제 남영주님 일행만 도착하면 이번 공물 운송도 끝이 나는 군요. 아울러 다시 1년 동안은 그런대로 편안한 생활 환경도 만들어 지는 것이고 말이죠.” 넥스가 말을 받았다. “그렇지요. 저도 이번이 공물 운송에 처음 참가하는 것인데 정말 어마어마한 괴물들이더군요. 어쩌면 그렇게 많은 괴물들이 인간들이 사는 이런 곳까지 퍼져 있을 수 있는 건지. 아무튼 언젠가는 모두 몰아내야 할텐데 말이죠.” “네, 그렇지요. 그런데 이만 돌아가야겠군요. 한바탕 뛰었더니 배가 고파서, 마침 식사 시간도 된 것 같고 말이죠.” 나는 하츠키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일행과 함께 숙소로 방향을 잡았고 물론 하츠키도 역시 숙소로 돌아가야 한다면서 강아지처럼 따라왔다. 뭐 그래봐야 숙소로 들어오자마자 어영부영 인사를 하고 우리 일행은 식당으로 하츠키는 3층에 있다는 숙소로 가버렸지만 말이다. 처음에는 상당히 예의 바르고 꼿꼿한 인물로 보였는데 잠깐사이에 그런 인식을 불식 시키는 무언가가 있는 인물이었다. 아무래도 앞으로 저 인물과도 많이 부딪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여전히 식사는 북 자치령주 일행과 우리 일행뿐이었고, 그나마도 쉬벡과 북 자치령 주 쪽의 루나스가 빠지고 없기 때문에 테이블당 세 명씩이 둘러앉은 간소한 모습이었다. “그럼 이제 정말 남영주 쪽의 공물만 도착하면 공물은 다 도착을 하는 건가?” 나는 슬쩍 넥스를 모며 물었다. “그렇지는 않아. 일단은 각 불모지대의 영주들이 괴물들을 퇴치하고 지나가면 그 뒤에 한 3일이나 4일 후에 각 지역의 공물 운송이 시작되니까, 아마도 앞으로 삼 사일은 더 있어야 공물이 다 모일거야. 그래야 시장 같은 시장이 들어서고 축제 같은 분위기가 나는 거지. 물론 건국 기념일을 기점으로 해서 축제가 절정이 되기는 하지만 말이야. 나도 사실 이야기만 들었지 직접 성도의 공물 축제에 와 본 적이 없어서 정확히는 모르겠어.” “그건 나도 그래, 나도 이야기만 들어서 자세한 것은 몰라.” 입에 음식을 가득 넣고도 발음이 세지 않고 말하는 재주를 보이는 유소의 대답도 있었다. “그럼 오늘도 무사히 지나갔으니 올라가서 아까 대련의 피로나 풀어 볼까? 그럼 나 먼저 간다.” 나는 별로 할 일도 없는 식당에 오래 있고 싶지 않아서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2층 내 방으로 돌아온 나는 우선 편안히 가부좌를 하고 몸속의 기운을 움직이기 시작 했다. 예전에는 혈도들을 자세히 알지 못해서 그나마 몸을 재 구성하고도 기운의 흐름을 잘못 운용하고 있는 부분이(쉽게 말하면 지름길 두고 돌아가는 경우와 같은) 있었는데, 이번에 혈도에 대해서 배우면서 그런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던 것인데, 덕분에 새로 개척된 길들이 아직 비포장인 곳이 많아서 원활한 유통을 위해서 길을 다듬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정령들을 불러서 정령의 기운으로 내 기운을 몸 속에 축적하는 호흡도 다시 시작했다. 이제는 굳이 어떤 기운이 필요하고 어떤 기운이 필요없는 단계는 지났지만(오행기가 모두 하나로 모여서 단전에 저장된 기운이 어떤 특별한 속성을 지니지 않고 있다. 아니 모든 속성을 다 지니고 있다고 해야할까?) 운기를 할 때 주위에 순수한 기운의 덩어리를 두고 그로부터 기운을 얻는 것은 더없이 좋은 방법이었다. 이런 걸 무협지 같은 것에서 보면 희귀한 돌을 깔고 앉는다거나 혹은 이상한 연못에 들어가 운기를 하는 식으로 표현을 한 모양인데, 아니면 기보를 몸에 지니고 있으면 공력이 빨리 증진이 되느니 어쩌느니 하는 그런 표현들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적어도 정령이란 그 속성의 기운을 순수하게 지니고 있는 것이므로 그런 기보나 연못들에 비해 월등히 나을 것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리고 내가 힘을 많이 가지게 되면 곧 정령들의 힘을 크게 성장시키는 바탕이 되기 때문에 정령들이 나에게 기운을 빼앗기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어차피 정령계로 돌아가면 이렇게 물질계에서 빼앗긴 기운은 금방 회복이 된다고 하니 걱정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가진 힘으로 정령들을 더 높은 최상급 정령으로 성장 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적어도 상급 정령을 다섯 모두로 불러내고도 아무 무리가 없는 정도는 되어야 최상급 정령 하나를 겨우 불러 내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정령들을 성장시키지 못한다고 실망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꾸준히 노력하면 언젠가는 내 정령들을 모두 최상급을 넘어서 정령왕까지도 성장시킬 수 있으리라 믿고 있으니까 말이다. 솔직히 요즈음은 바빠서 이렇게 기운을 모으는 운기도 할 겨를이 없었지만 이제부터는 좀 차분하게 기운을 모으는 일에 열중을 해야겠다. 다행히 지난 겨울도 놀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어서 예전 보다는 기운의 크기가 제법 커졌다는 걸 느낄 정도니까 오래지 않아서 좀 더 발전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렇게 힘을 좀 더 기르는데 신경을 써야겠다는 다짐을 한 다음부터 내 생활은 조금 바뀌었다. 어차피 성도라고 해도 구경거리는 대부분 봤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 돌아다니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냥 방에 앉아서 기운을 수련하는 데에 열중했던 것이다. 물론 그런 나를 방해하고 싶어서 안달인 놈들(넥스, 멕스, 하츠키 등)이 있기는 했지만 문까지 걸어 잠근 나를 어떻게 할 수 없었는지 첫 날 하루 못살게 굴더니 내가 식당에도 가지 않으니까 제발 식사는 같이 하자면서 물러났다. 덕분에 상당히 무료하게 된 것 같았지만 실제로 나에게는 제법 성과가 있는 시간이 되었다. 정령들을 더 성장 시킬 수 있게 된 것은 아니었지만 몸 속의 기운들을 단전 속에 가득 채웠던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상하게 기운들이 더 이상 몸에 축적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그릇을 다 채워서 이젠 더 채울 곳이 없다는 말이 될까? 그렇다고 내가 갑자기 그 그릇을 넓게 만들거나 다른 그릇을 만들 수 있는 재주도 없으니 벽에 막힌 셈이었다. 그런데도 내가 성과가 있었다고 하는 것은 이제 또 다른 목표가 생겼기 때문이다. 내가 부딪힌 이 벽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그런 목표 말이다. 그렇게 한 일주일 정도 숙소에 틀어 박혀 있는 동안 다른 일행들과 북 자치령주, 서 자치령주 일행들은 그런대로 인사를 하고 제법 친해진 모양이었는데 서 자치령주 일행은 하츠키와 기타 용병 둘, 그리고 서 자치령주라는 학자풍의 인물로 구성이 되어있었다. 처음에는 서 자치령주가 검을 쓰는 인물이 아닌 것 같아서 이상했는데, 알고보니 아주 높은 써클의 마법사라고 한다. 솔직히 그 마법사라는 것도 약간은 다른 문제라고 넥스가 뭐라 하기는 했지만 잘 듣지를 않아서 잘 모르겠고 아무튼 그랬다. 그리고 그렇게 내가 방에서의 두문불출을 깨고 나오는 날 쉬벡과 루나스가 돌아왔다. 오랜만에 돌아온 쉬벡을 환영하는 인사를 위해 우리가 큰 방에 모였을 때, 쉬벡의 안색은 그리 밝지 않았다. “무슨 일이예요? 쉬벡, 안색이 좋지 않네요. 무슨 일이 있어요?” 그래도 먼저 이야기를 꺼낼 사람은 나 뿐인가 보다. 히휴~~ “그게 좀 문제가 생겼습니다. 일단 헤이스런가에 가서 이번에 있었던 불모지대 탐험에 대한 보고를 했습니다만, 그들이 그 내용을 믿어주지 않는 분위기였습니다. 일단은 그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는데, 저희가 보고 들었던 것 이외에는 저희가 노옴에게 받은 무구들 말고는 증거가 없으니 그럴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그래도 너무 배타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어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데다가 제가 이번에 새롭게 정립하고 발전시킨 마법에 대한 저의 이론을 전혀 수용할 가치가 없는 외도로 규정하고 인정을 해 주지도 않아서... 덕분에 상당히 오랜 시간을 그들과 논쟁을 벌였습니다. 뭐 솔직히 그들의 인정을 받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는 생각하지만 억울하고 섭섭한 마음은 어쩔 수 없는가 봅니다. 허허허” 그렇게 말하는 쉬벡은 좀 많이 피곤해 보였다. “그럼 결국에 쉬벡님이 협회에서 하고자 했던 것은 하나도 이루지 못한 거나 마찬가지네요.” “그런건 문제가 아닙니다. 솔직히 제가 이번 협회를 찾은 것은 그들에게 저의 연구결과를 알리고 연구 자금을 지원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고 해서 크게 실망하거나 하지도 않습니다. 저에게는 청색지대의 탐험과 겨울동안의 정리에서 7써클의 벽을 허물었다는 가장 큰 성과가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그 상위 써클에 대한 대략적인 개념 정리도 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 부분이 협회에서 인정하려고 들지 않는 부분이기는 합니다만, 언젠가 제가 7써클 이상을 이루게 되면 그들이 반박 할 여지가 없겠지요. 허허허.” 그렇게 말하는 쉬벡에게서는 그나마 생기가 느껴졌다. “7써클이라고요? 아니 언제, 아니 어떻게 7써클을 이루셨다는 거예요? 대단하네요. 지금 이 나라에 7써클에 오른 사람은 다 합해도 열이 안 되고 그나마도 8써클에 이른사람은 헤이스런 가주와 서 자치령주 뿐인 것으로 아는데, 쉬벡님이 7써클에 이르시다니, 정말 축하드려야 할 일이네요.” 옆에서 듣고 있던 넥스가 놀랍다는 듯이 환호성을 올렸다. 물론 옆에 있던 유소도 상당히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허허 그렇게 대단 할 것도 없습니다. 그저 사용할 수 있는 마나의 양이 7써클에 도달 했을 뿐이지 7써클에 해당하는 마법은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알고 있는 마법이 별로 없어서 따지고 보면 써클은 7써클인데 마법 사용은 6써클 마스터도 아닌 유저 정도라고 보면 되겠군요. 허허” “에? 무슨 말씀이예요. 그럼 7써클이 되면 7써클의 마법을 다 쓰게 되는 것이 아니란 말씀이예요?” 나는 순간 멍청한 질문을 하고 말았다. “그거야 당연하지요. 일단 마나의 양은 6써클에 비해서 128배 늘었다고 보면 되지만, 그건 사용할 수 있는 마나의 양이 늘어난 것 뿐 마법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뭐랄까 마나의 사용은 훨씬 자유롭고 정교하게 되었지만 사용 방법은 따로 공부를 하거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 그럼 그 마법은 어디에서 배워요? 7써클에 이른 마법사도 많지 않다고 하니 그런 사람들에게 가르쳐 달라고 하면.... 아무래도 무리겠군요. 자신의 마법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 준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검사가 자신이 지닌 비전의 검술을 알려 주는 것과 같을 수도 있을 테니 말이예요.” 나는 내가 말을 하면서 그런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허허, 그렇지요. 어쩌다 운이 좋아서 마음이 넓은 선배을 만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마법의 수식을 배운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지요.” 쉬벡의 말에는 씁쓸함이 묻어 있는 것 같았다. “이번에 학술협회에 들어가면서 협회 도서관의 열람을 신청했지만 그것마저도 거절을 당해서... 도서관에 있는 마법서들의 도움도 받을 수도 없게 되었거든요. 뭐 실제로 헤이스런 가문이 아닌 사람이 7써클 이상에 이르는 경우가 많지 않다 보니, 헤이스런 가문의 개인 도서관이나 마찬가지인 협회 도서관을 열어주고 싶지 않은가 봅니다. 그러니 이제는 별다른 방법이 없이 마법을 훔치는 수 밖에 없겠지요.” 순간 우리들의 방에 차디찬 냉기류 형성. “마법을 훔쳐요? 어디서 어떻게요? 설마하니 협회 도서관이라도 털 생각이세요? 그건 불가능하다구요. 거길 지키는 마법들이 얼마나 많은데... 아마 8써클 마스터라고 해도 어려울 것 같은데요. 그 안에 숨어들어가는 것은...” 넥스가 당장 뛸 듯이 반발을 하고 나섰다. “그래요. 그러다 들키는 나에는 협회 전체에서 제재를 가하려고 나올 거예요. 지금 분위기로 보니 쉬벡님이 7써클에 이른 것을 달가워 하지 않는 것 같은데, 그런 꼬투리라도 잡으면 어쩌면 마나를 쓰지 못하게 만들지도 모른다구요.” 유소도 덩달아 반대를 하고 나섰다. “허허, 무슨 말씀을 마법을 훔친다는 것은 그런 말이 아닙니다.” 쉬벡은 손사레를 치며 넥스와 유소를 진정시켰다. “그럼 마법을 훔친다는 것은 무슨 뜻이예요?” 나는 다시 쉬벡에게 물었다. “그건, 설명이 좀 어려운데 쉽게 말씀드리면 보고 배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마법을 쓰게 되면 일정한 마나의 흐름이 생기게 되고 그것은 실제로는 일정한 수식에 의한 마나의 배열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마법서에는 수식과 공식이 적혀 있어서 어떤 마법을 쓰려면 마나를 어떤 방법으로 변형시켜서 어떤 방업으로 결합을 시키고 또 배열하는가 하는 것들이 적혀 있는데, 저는 그런 것이 없으니 다른 사람이 시행하는 마법을 보면서 마나의 움직임을 통해서 그런 것들을 유추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유추된 공식들을 좀 위험하더라도 시험을 해 보면서 잘못된 부분을 고쳐서 결국에는 올바른 공식을 만들어 내는 것이지요. 뭐 가끔은 그 와중에 전혀 의도하지 않은 마법이 탄생하기도 합니다만, 일단은 마법사들은 그렇게 다른 사람의 마법 시행을 보고 배우는 것을 훔친다라고 합니다.” 쉬벡의 설명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인 것은 당연했다. 워낙 쉽게 설명을 했으니까 하지만, “쉬벡님 그렇지만 그렇게 마법을 훔치려면 어느정도 가까운 곳에서 그런 고난위의 마법을 시행하는 것을 직접 봐야 한다는 말이잖습니까? 하지만 그런 고난위의 마법을 볼 기회가 흔한 것은 아니잖아요.” 나는 쉬벡의 말에 토를 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건 그렇지만 그나마도 하지 않으면 거의 방법이 없으니까요. 어디에서 고난위 마법을 기록한 마법서가 떨어져 내리는 것도 아니고... 허허 방법이 없지요.” “정말 그 방법 밖에는 없는 건가요?” 나는 그렇게 쉬벡에게 물었지만 쉬벡은 잔잔히 고개를 저었다. “참, 그런데 서 자치령주도 마법사라면서요? 몇 써클이나 되는지 아세요?” 나는 마침 생각이 나서 쉬벡에게 물었다. “허허 서 자치령주는 헤이스런 가의 가주 동생입니다. 실력이야 가주와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8써클 유저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서 자치령주에게 마법을 가르쳐 달라면... 같은 헤이스런 가의 사람이니까 어렵겠네요. 그럼 방법이 없을까?” 나는 어떻게 하면 서 자치령주에게서 쉬벡의 마법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글세, 서 자치령주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으니 방법이 없네. 쉬벡님은 서 자치령주에 대해서 뭐 아시는 거 없어요?” 내 고민에 넥스가 끼어 들었다. “허허 저도 마법을 공부하는 데에만 신경을 써 온 터여서 그저 다른 사람이 아는 이상은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쉬벡은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쉬벡은 서 자치령주에게 마법을 훔치게 하려는 우리들의 고민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럼 일단은 하츠키를 잘 구워 삶아서 서 자치령주의 약점을 알아 내는 것은 어떨까? 그 녀석이라면 좀 알고 있지 않을까?” “그렇기도 하겠다. 루탄이 방에서 나오지 않는 지난 일주일 동안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루탄을 찾았는데.... 이유는 모르지만 루탄에게 관심이 많았던 것 같으니까, 충분히 하츠키를 구워 삶을 수 있을 거라고 믿어.” 그러면서 나를 돌아보는 넥스와 유소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뭐, 뭐야? 왜 하츠키 녀석이 나를 찾는단 말이야? 그 녀석 남자잖아, 그런데 나를 왜?” 나는 조금은 걱정스러운 빛으로 넥스 등에게 물었다.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는데, 그 날 이후로 매일같이 너를 만나고 싶다면서 은근히 달라붙고 있는 건 사실이야. 이유야 나도 잘 모르지. 아마 내일 아침에 식당에 가면 알게 되지 않을까? 오늘이야 쉬벡님과 루나스가 오는 바람에 분위기가 아니었지만 내일은 특별한 일도 없으니까 말이야.” 그렇게 결정은 나 버렸다. 그리고 그 와중에 사악하게 자기와는 별 상관이 없다는 듯이 태연한 표정으로 차를 마시고 있는 쉬벡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쉬벡은 겉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 실제로는 상당히 무서운 사람이다. 밥을 먹을 때도 전혀 아닌 척 하면서 남들 보다 더 많이 먹는 것 같고, 또 무슨 일이 있으면 은근히 아닌 척하면서 등을 밀어넣는 묘한 재주가 있는 인물이다. 뭐 그렇다고 그런 것이 기분 바쁘게 다가온 적은 한 번도 없다. 그저 좀 능글맞은 모습이기는 하지만 왠지 그런 모습이 정이 가는 것은 내가 이상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악의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것이니까, 그러니 넥스도 유소도 그런 모습에 돌아서서 혀들 빼물고 웃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다음날 나는 정말 곤역을 치루지 않을 수 없었다. 문제는 내가 하츠키에게 인사를 하고 아는 척을 하는데, 멕스가 나타나 끼어들었던 것이다. 그 동안 보지 못해서 섭섭했다느니, 보고 싶었다느니, 어디가 아팠냐느니, 갑작스레 끼어든 멕스의 궁금증은 자꾸만 늘어가고, 그런 멕스의 모습에 처음에는 그저 그러려니 하는 분위기로 눈살을 찌푸리던 하츠키가 멕스의 말이 길어지자 결국 참지 못하고, 자신의 의도를 달성하려는 노력을 시도한 때부터 나의 불행은 시작되었다. 서로 서로 쓸데도 없는 말들로 내 관심을 끌려는 어린아이 같은 행동을 하는데, 사실 멕스는 나이가 스물이다. 그리고 하츠키는 그보다 더 많은 20대 중반에 가까워 보인다. 그런 인물들이 생긴 것이야 멀쑥하게 생겼다지만 어린아이 같은 말싸움을 하는 모습이 과히 좋게 보이지는 않는 것이다. “조, 조용히해!!” 결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이봐 멕스, 나에게 특별한 볼 일이 없다면 그만 좀 자리를 비켜 줄래? 나는 하츠키와 할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야.” 순간 극명하게 나뉘는 두 사람의 얼굴 표정, 따로 설명하고 싶지는 않지만 주인잃은 강아지와 뼈다귀를 받은 강아지의 모습이라면 말이 될까? “아, 미안. 내가 방해가 되었나 보네. 미안해. 그저 굉장한 실력을 지니고 있으니까 대단해 보이고, 또 멋있고, 그러니까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그래서 그런 것 뿐이었어. 그럼 난 그만 갈게.” 그렇게 말을 마친 멕스는 어깨를 떨구고 천천히 멀어진다. 그러고 보니 내가 좀 심하기는 했나? 심했을까? 내가 뭘? 하지만 역시 저런 모습이니까 미안하기는 하다. “멕스, 하츠키랑 이야기가 끝나면 같이 한 번 대련해 줄게. 그러니까 나중에 보자.” 이렇게 달래 줄 수 밖에 없었다. “정말? 정말이지? 그럼 저번에 썼던 그 마법쓰는 검도 써서 대련해 줘야 한다. 정말이야! 알았지?” 순간적으로 돌아서서 그렇게 막무가내 약속을 혼자서 하고서는 재빨리 뛰어가 버리는 멕스, 어쩌면 나는 내 무덤을 내가 판 것인지도 모른다. 갑자기 기운이 빠지는 느낌이다. “루탄님, 마법검이 있다는 말이 정말인가 보네요. 그럼 검술도 하고 정령도 다루고 마법도 쓰고 그러는 겁니까? 대단하군요. 정말.” 그렇게 말하는 하츠키의 표정에는 한 점의 사심도 없어 보였다. “그래 하츠키님이 그 동안 저를 찾으셨다는데 무슨 일로 저를 그렇게 찾으셨는지요? 제 일행들이 하츠키님이 워낙 성화라고 꼭 만나야 할 거라고 협박아닌 협박을 해서 나오기는 했습니다만, 이유를 모르겠네요.” 나는 될 수 있으면 정중한 말로 본론을 시작했다. “하하 그렇게 말씀하시니 섭섭하네요. 그건 그렇고 우리 내가 나이도 많아 보이는데 말을 놓으면 안될까? 그게 더 편하고 좋을 것 같은에..” 아마도 하츠키는 스물도 안되어 보이는 나와 존칭을 써가면서 이야기 하는 것이 거북했나 보다. “겉으로 들어나 보이는 것이 모든 것을 알려 줄 수는 없는 법이지요. 제가 이렇게 보여도 30해를 넘게 살아온 몸입니다. 뭐 그래도 정 거북하다면 서로 말을 놓는 선에서 타협을 하지.” 나는 그렇게 마지막 말을 짧게 끝냈다. 하츠키는 내 말이 의외였는지 한참 나를 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하하, 이런, 내가 실수를 한 모양이네. 뭐 그래도 외모가 그러니까 내가 반말을 들으면서 말을 높이는 것도 이상하고, 그래 그냥 서로 말을 트기로 하지.” 하츠키는 그렇게 말을 끊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 내가 루탄을 보고 싶어 한 것은 전에 보았던 그 정령 때문이야. 내가 아는 정령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아서, 물의 정령 같았지만 처음보는 형태였거든. 그래서 어떤 정령일까 하고 궁금해서 말이야. 참, 그리고 나는 종류는 좀 다르지만 소환술을 쓰는 사람이야.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정령계가 아닌 신계에서 환수를 불러 쓰는 것이지.” “환수요? 그건 처음 듣는 말이네요. 어떤 건지 궁금하군요.” 나는 하츠키의 환수라는 말에 궁금증이 일었다. 정령과 비슷하지만 다르다니 어떤 존재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래? 그럼 보여 줄게. 저기 연병장으로 가자. 여기서는 아무래도 위험하니까.” 그렇게 우리는 다시 그 문제의 연병장에 오게 되었다. “이건 내가 부리는 환수 중에서 중급 정도에 해당하는 녀석인데, 주로 바람을 이용한 공격을 하지. 나와라 풍신.” 하츠키는 손가락을 이상한 모양으로 인을 맺으며 소리를 질렀고, 곧 연병장에는 2미터 정도의 존재가 모습을 들어내었다. 무슨 커다란 구름괴물처럼 생긴 모습이었는데 몸체는 구름이나 안개로 만들어 졌고 안개의 명암으로 이루어진 이목구비는 뚜렷하지 못한 편이었다. “이 녀석이 풍신이야. 바람을 이용한 여러 가지 일들을 하지.” 하츠키는 자랑스럽다는 듯이 하츠키의 옆에 서서 나를 보았다. “음. 처음보는 녀석이네. 그럼 보통의 공격으로는 타격을 받지 않아?” 나는 만약 녀석과 싸운다면 어떤 식으로 싸워야 할는지 몰라서 물어 보았다. “뭐 싸워 보면 알겠지만 물리적인 공격에는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아. 마법이나 검기 같은 것을 이용한 공격에는 타격을 입지만 그것도 상당히 강한 것이 아니면 어려워.” 역시 자랑스럽다는 표정이다. “그럼 이제 루탄 니가 전에 불렀던 그 정령 좀 불러봐. 나도 우리 풍신 보여줬으니까. 너도 니 정령을 보여 줘야지.” 그다지 틀린 말도 아니었다. 하지만 왠지 녀석이 잘난 척 하는 모습이 보기가 싫었다. “그래? 그럼 나도 정령을 보여줄게. 너도 바람을 이용하는 환수를 불렀으니까. 나도 바람의 정령을 보여줄게. 풍아 소환.” ‘주인님 부르셨어요? 무슨일이예요? 어머 저건 뭐야? 이상하게 생긴 녀석이네.’ “응, 저거 뭔지 몰라? 너 반지 안에 들어 있어서 다 알면서 왜 모른척 하는 거냐?” 내가 그렇게 핀잔을 주자 풍아는 토라진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다. “응? 이게 바람의 정령이야? 예쁘게 생겼네?” 어느틈에 가까이 온 하츠키 녀석이 풍아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내가 부리는 환수 중에는 예쁘게 생긴 것은 별로 없는데... 불의 환수인 화신이 그나마 예쁘다면 예쁠까. 정말 예쁘게 생겼네?” 그러면서 하츠키가 슬적 손가락으로 풍아의 얼굴을 건드리려고 하는 순간 풍아는 내 옆으로 날아와서는 순식간에 손바닥 크기에서 인간형 크기로 변했다. ‘뭐 저런 놈이 다 있어요? 지가 뭔데 나를 잡을려고 해요? 저거 혼내 줘도 되요?“ “이 이런 풍아 참아, 모르고 그런걸 거야. 네가 예쁘니까 그런거겠지. 내가 이야기 할게. 다시는 너 건들지 말라고 말이야.” 그리고 나는 놀라서 서 있는 하츠키에게 말 했다. “이봐, 하츠키 상대의 양해도 구하지 않고 멋대로 숙녀의 얼굴에 손을 대려고 하다니 예의가 없는 편이구만, 정중히 사과하게나. 풍아가 화가 나면 무섭다네.” 난 짐짓 점잖은 투로 하츠키에게 말했다. “뭐? 그 그럼 너는 네가 다루는 정령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거야? 아니다 나도 그들의 말을 알 수는 있지. 하지만 그건 내가 묻는 것에 대답하는 정도이지. 환수들은 자아가 없는데, 아니 있는지는 모르지만 소환주에게 자아를 표현하지 않는데, 그런데 루탄 네가 다루는 정령들은 자기 의사를 밝힌단 말이야?” 하츠키는 정말 놀란 모양이었다. “뭐, 그런걸 가지고 놀라구 그래? 정령들도 나름대로의 자아를 지니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가? 이들도 하나의 계를 형성하는 계의 주인들이란 말이야. 물론 물질계로 소환되면 상당부분 그런 면이 없어지기는 하지만, 중급이나 상급으로 올라갈 수록 정령들은 자아를 지니고 물질계에 있게 되는 경우가 많지. 그리고 나와 같이 있는 정령들은 모두들 상급 정령이란 말이야. 당연히 자아를 지니고 의사표현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 내 말에 하츠키의 인상은 더 창백해지는 것 같았다. “그런 말도 안되는 일이, 전에 언듯 듣기로 몇가지 정령들을 함게 다룬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어떻게 그 모두가 상급 정령들일수 있는 거지?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거야? 도대체 몇가지나 되는 상급정령을 다루는 거야?” 나는 그 질문에 간단하게 대답했다. “당연히 말이 되는 소리고, 내가 다루는 정령은 5가지 정령이야, 물론 모두 상급 정령이고, 단지 한꺼번에 상급정령들을 모두 불러 올 수는 없지만 각각 불러 오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안되지.” 이제는 하츠키는 다른 할 말이 없다는 듯이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 “말도 안되는, 나는 우리 가문에서 이어오는 피를 받았고, 또 아주 어려서부터 환수를 다루는 훈련을 받아 왔지만 아직도 상급의 환수는 한 마리 밖에는 잡지 못했는데 어떻게 상급 정령을 다섯이나 가질 수 있다는 거야?” 그렇게 웅얼거리고 있던 하츠키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되면 그 정령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상급의 정령이라고 해도 환수를 당해내지는 못할 거야.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고.” 혼자말을 하고 있었지만 내 피부로는 위험 신호가 아주 격렬하게 잡히고 있었다. “풍신 저 정령을 공격해!!” 역시나 말이 필요없는 상황이다. 이렇게 되면 하는 수 없다. “풍아 저 풍신인가 뭔가 아주 작살을 내 버려. 짜증스럽게 어디 바람의 정화인 너에게 바람으로 덤비는 거야? 보내 버려.” ‘호호 알았습니다. 루탄님.’ 웃어? 정령이 소리를 내서 웃어? 거기다가 뭐 루탄님? 주인님이 아니라 이젠 루탄님? 뭔가 변하긴 한 것 같은데... 일단은 그게 문제가 아니니까... 순식간에 연병장에는 바람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풍신이라는 녀석이나 우리 풍아나 모두들 바람을 쓰는 공격법을 사용하기 때문인지 연병장은 온통 거센 폭풍에 휩싸였다. 나는 급히 몸을 무겁게 만들어 다리를 고정시키고 둘의 싸움을 바라보았다. 정령들의 싸움을 보통 서로가 지닌 힘의 우열을 가리는 것이었는데, 이번에는 좀 달랐다. 풍신의 공격이 주로 몸을 이용한 물리적 공격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긴 팔을 휘둘러 풍아를 때리려고 하거나 잡으려고 하고 가끔은 입에서 바람을 뿜어 내기도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 풍아는 예전에 다른 정령들과의 싸움처럼 힘의 우열을 나누려고 했지만 풍신의 싸움스타일이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 어느틈에 손에 검을 쥐고 온 몸에 갑옷을 걸친 모습으로 육박전을 하기 시작했다. 아직 상급 정열으로 변신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중급의 힘을 쓰면서도 저런 형태로의 변화가 가능했던 모양이었다. 결국 풍신의 팔이 풍아의 칼에 잘려서 허공중에 사라지는 불상사가 생겼고 나는 급히 풍아를 불러들였다. “풍아 그만하고 돌아와라. 그렇게 약한 녀석 괴롭히면 뭐하겠냐?” ‘네, 루탄님.’ 그리곤 풍아는 조용히 내 옆에 와서 섰다. 여전히 갑옷에 검을 든 모습이었지만 상급으로 변신 했을 때에 비하면 좀 앳되고 부드러워 보이는 보습이었다. 상급으로 변했을 때에는 거의 강철기사와 같은 분위기를 가지니까 말이다. “이 이런, 그게 상급 정령의 모습이냐? 기다려라 나도 상급 환수를 불러서 상대를 해 주마.” 하츠키는 아무래도 풍아의 모습이 변한 것이 상급으로 변한 것이라고 생각 하는 모양이었다. “이봐 하츠키, 이 모습은 상급이 아니야. 그냥 전투를 위해서 모습을 바꾼 것 뿐 여전히 중급 정령의 모습이란 말이야.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계속 싸움을 한다면 저 사람들에게 상당히 곤역을 치러야 할 것 같지 않아? 이쯤에서 그만 대련을 마치는 게 좋지 않아?” 나는 하츠키에게 환수와 정령의 싸움으로 몰려온 사람들이 있음을 주의 시켜야 했다. 우리 일행은 물론 북과 서의 자치령주 일행들이 모두 와 있었고, 그 틈에 숙소의 집사가 못마땅한 눈빛으로 우리를(특히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먼저 공격한 녀석은 하츠키 인데. “무슨 소리를, 한 번 시작한 대련인데 여기서 그만 둘 수야 없지 않겠어? 그리고 우리 영주님께서는 이런 대련을 무척이나 좋아하시니까 직접 하시지 못해서 안타깝기는 하시겠지만 구경만이라도 좋아하실거야. 그러니 말리지 않으실 거고. 북 영주님도 이런 좋은 구경을 놓치고 싶지는 않으실 것 같은데...” 나는 그들을 돌아 보았지만 별로 하츠키를 말리고 싶은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도리어 하츠키의 말 대로 어느정도는 흥분과 기대로 가득 찬 얼굴이라는 것을 언듯 보아도 알 수 있는 상태였다. 특히 서 자치령주는 될 수만 있다면 하츠키 대신에 자기가 싸우고 싶다는 표정이 역력하게 드러나고 있을 정도였다. 결국 우리의 싸움을 말리고 싶은 사람은 소외된 집사와 병사들 뿐인 모양이었다. 연병장 망가지면 또 저들만 괴롭겠네. “자, 그럼 간다. 나와라 불의 환수 대화신(大火神).” 하츠키의 인을 따라서 다시 연병장의 공간이 이지러지며 환수가 등장했다. 불의 환수라. 크기는 3미터 정도, 이런걸 불새라고 하면 되나? 검붉은 빛의 불로 덮힌 환수의 몸은 온통 용암인 것 같았다. 용암으로 된 새라. “그럼 나도 불로 상대를 해야 하나? 화아 그리고 수아 소환.” 나는 서로 상극인 두 정령을 불러 내었다. 결국 내 주위에는 풍. 화. 수의 세 정령이 있게 되었다. “자 일단 화아가 저 대화신이라는 녀석과 붙어 보고, 수아는 주위에 연병장 주위로 불이 옮겨 붙지 않도록 해 주고 풍아는 내 주위에 바람의 막을 부탁해.” ‘알았다. 주인.’ ‘네 주인님.’ ‘알았어요, 루탄님’ 아무래도 아직 나를 루탄이라 부르는 것은 풍아 뿐인 모양이다. 정령들은 제각기 할 일을 찾아 사라졌고. 화아는 곧장 뛰어나가(늑대 모습이니까) 대 화신의 날개를 물어뜯었다. 내가 아무리 화아 편이라지만 대화신의 만만찮은 반격을 무시하고 지나갈 수는 없겠지. 기세 좋게 대화신의 날개 죽지를 물어뜯었던 화아는 그러나 대화신의 부리에 찍혀서 케갱(물론 소리는 안질렀다.)하는 모습으로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고 그 이후로는 공격 보다는 수비에 치중하는 모습이 되었다. “이런 아무래도 중급 하나로는 상급 환수를 당해내지 못하는 건가? 그럼 하는 수 없지. 극성인 수아로 도와주는 수 밖에.” 나는 싱긋 웃으면서 연병장 주위를 돌면서 떨어지는 불똥을 지우고 있는 수아에게 명령을 내렸다. “수아야, 화아하고 협공, 너는 너무 붙지 말고 원거리에서 화아가공격할 틈을 만들어 주고, 대화신녀석의 움직임을 묶어.” 그 순간부터 전세는 역전되고 말았다. 대화신의 무리와 발톱을 이용한 공격은 번번히 수아의 방어벽에 막혔고, 또 심심찮게 날아드는 물화살에 닿은 대화신의 몸은 처음보다 더 어두운 빛을 띄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다급해진 것은 하츠키였다. “이, 이런 나는 아직 상급 환수와 함께 다른 환수를 불러 낼 수 가 없는데.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마지막 수를 쓰는 수 밖에는, 나와라 화령수, 나와라 화령수,” 하츠키의 인을 따라 나온 것은 1미터 정도 되어 부이는 불개 두 마리 였다. 아마도 하급 환수인 것으로 보였다. “가라 화령수, 대화신 화령수를 취해 화우를 뿌려라.” 나는 무슨 말인지 몰라 그냥 상황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화령수라 불렸던 두 불개는 그대로 대화신 앞으로 달려갔고, 대화신은 두 마리 환수를 발톱과 부리로 찢어 먹어 버렸던 것이다. “무슨 짓이야. 그런 짓을 하다니.” 나는 너무 놀라서 하츠키를 노려 보았다. “무슨 짓이냐니. 이건 환수를 다루는 기본이란 말이야. 환수의 힘을 회복하기 위해서 제물을 바치는 거니. 평소에는 이런 일을 잘 하지 않지만 위급한 상황이 되면 어쩔 수 없이 이런 방법을 쓰는 거라구. 나도 어렵게 잡은 환수를 희생시키는 것이 아깝기는 하지만 하는 수 없잖아.”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자신이 소환한 환수를 그렇게 다루다니 그런 말도 안되는 짓을... 거기다가 이건 죽고 사는 일도 아니고 그저 대련일 뿐인데 그럴 필요가 뭐가 있냐는 말이다.” 나는 하츠키의 말에 동의 할 수 없었다. “후후, 그렇게 여유가 있을까? 내가 그렇게 까지 해서 만든 기회를 그냥 보낼 거라고 생각한 것이냐? 대화신 너의 힘을 보여라 불의 비, 화우!” 순간 대화신은 둥실 허공중에 몸을 띄우고 날개를 펼쳤고, 그 날개에서는 깃털들이 쏟아지듯 불의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불의 깃털들은 엄청난 힘으로 연병장의 바닥을 파헤치고 또 한쪽은 녹여 내기도 하고 있었다. “수아 물의 장벽, 화아 대화신을 막아.” 순식간이긴 했지만 화우는 벌써 연병장의 반을 휩쓸고 있었고, 대화신의 방향은 나와 구경꾼을 향하고 있었다. 급히 쉬벡이 실트를 펼치는 모습이 보였고 북과 서의 자치령주의 일행 주위에도 투명한 막이 형성되고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집사나 일반 병사들로 이루어진 사람들에게까지 그 효과가 미치지는 못하고 있었다. “지토 소환, 지토 저 사람들을 보호해.” 나는 마법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지토에게 맡겼다. 화아와 수아는 나름대로 대화신이라는 녀석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자신을 지키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는 듯이 보였다. “이봐 하츠키 너 미친거야? 잘못하면 구경하는 사람들까지 다친단 말이야. 빨리 그만 두지 못해?” “하하 그거야 능력도 안되면서 이런 대련장에 꾸역 꾸역 밀려든 사람들의 잘못이지 내 잘못이 아니지. 그리고 지금 그런 걱정을 할 때가 아니라고 보는데?” 그 말은 맞 았다. 지금 급한 것은 나에게 쏟아지는 불덩이들을 해결하는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수아나 화아도 나름대로 열심이었고 지금 나에게는 내 주위를 둘러싼 바람의 벽을 만드는 풍아와 아직 불러 내지 않은 광아뿐이 없었다. 그나마 광아는 중급의 형태에서는 공격력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지금으로선 별 소용이 없는 터였다. “풍아, 주위에 바람의 막을 쳐줘.” ‘네, 루탄님’ 나는 급히 몸에 남은 기운을 수의 기운으로 바꾸어서 쌍환검을 풀어 밀어넣었다. “가라, 물.” 쩝. 썰렁하지만 기합소리는 필요하고 그렇다고 그 와중에 작명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탓이라고 해 두자. 내가 쌍환검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좀처럼 쌍환검에 많은 기운을 넣지 않는다. 검 자체가 지는 마법력 만으로도 어지간한 괴물들을 상대하는데 무리가 없었던 탓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검이 지닌 고유의 마법력에 내가 물의 기운으로 바꾼 기운이 더해졌던 것이다. 나도 이렇게 많은 기운으로 검을 통한 마법을 시현했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곧 이어 나타난 광경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손에 든 검에서는 일직선으로 늘어난 검이 대화신의 목을 찌르고 나갔지만 그 뒤로도 기세를 멈추지 않고 하늘로 뻗어 올랐다. 그리고 잠시동안 상태를 유지하던 그 기운은 곧 사그라 들었다. “무슨 일이야. 이건 마법인가? 마법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뒤쪽에 서 있던 서 자치령주의 중얼거림이었지만 내 청각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대화신이, 대화신이 소멸해 버렸다. 이럴수가. 이럴수가. 루탄 어떻게 이럴수가 있단 말이냐? 대련에서 소환수를 소멸시키다니. 어떻게 이럴수가.” 나는 하츠키의 말의 대꾸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한 마디 해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야? 구경하는 사람이 다치거나 죽게 될지도 모른다고 했을 때 너 뭐라고 했지? 능력도 안되는 것들이 이런 곳에 온 것이 잘못이라고 했던가? 그럼 나도 한마디 해 주지 겨우 그런 상급 환수 따위로 내게 대련을 청하고 보기 싫은 역겨운 장면들을 보여준 데에 대해서 간단히 인사를 한 것 뿐이라고 말이야. 그리고 다음에 대련을 청할 때는 마음가짐을 바로 하던가 좀 더 힘이 있는 소환수를 준비하기 바래. 수와 풍아 화아는 돌아가고 지토는 어지러진 연병장 깨끗하게 정리해주고 돌아가.” 내가 명령을 하는 순간 정령들을 사라졌고 대련으로 엉망이 된 연병장은 지토의 힘에 의해서 금방 깨끗안 모습을 되찾았다. 그 이후로 아예 무시하고 지토에게 세세하게 연병장 정리를 지시하는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하츠키는 힘없는 모습으로 서 자치령주 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서 자치령주는 하츠키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아까부터 여전히 나를 쳐다 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보게 자네 이름이 루탄이라고 했는가? 나는 서 자치령의 영주인 갈리안 헤이스런이라고 하네. 정령을 다루는 것도 대단하고 그 검을 이용한 마법도 대단하군 그래. 혹시 나와 대련을 한 번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나이를 먹었어도 강한 사람을 보면 싸우고 싶은 호승심을 이기지 못한다네. 어떤가? 한 번 싸워보지 않겠는가?” 순간 나는 넥스와 유소, 그리고 특히 쉬벡의 눈빛이 섬뜩하게 빛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럼 지금 여기서 하자는 말씀입니까? 저는 아무래도 괜찮습니다만, 영주님께서 마법을 쓰신다고 들었는데 여기에서 마음대로 마법을 쓰실 수가 있으실런지요. 다른날 다른 장소를 정해서 한 수 배웠으면 합니다만, 어떠신지요.” 내 말에 쉬벡 등이 실망하는 기색이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건 그들도 모르지는 않을 터였다. “허허, 그것도 그렇겠군. 그럼 자네가 하츠키와 이야기해서 장소를 정해주게 날짜는 아무래도 내일이 좋겠군. 건국 기념이 4일 후이니 시합을 빨리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으니 말일세. 혹시라도 다친다면 회복할 시간도 필요하고 말일세. 그런 불상사는 없어야 하겠지만 말이야.” “네, 알겠습니다만 저는 저 하츠키라는 사람을 마주하고 싶지 않으니 우리 일행들에게 위임해서 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저도 이만 들어가겠습니다. 왠지 영주님의 옆에 서 있는 사람은 보면 볼 수록 속이 좋지를 않아서요.” 나는 쌀쌀하게 내뱉듯이 말하고는 숙소쪽으로 발을 옮겼다. “미안하지만 넥스 자네가 내일 어디에서 대련을 했으면 좋을지 저쪽 사람들과 상의해서 알려줘.그럼 좀있다 숙소에서 보자.그리고 너무 많은사람이 구경을 오지 않도록 해줬으면 해.” 나는 그렇게 말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버렸다. 화령이라고 했나? 불로 이루어진 개들. 하지만 소환되자 마자 다른 환수의 먹이로 던져지다니... “화아 소환.” 나는 화아를 불렀다. ‘불렀나 주인.’ “화아 아까 싸웠던 환수라는 것에 대해서 아는 것 좀 있어?” 나는 화아에게 환수에 대해 물었다. “그거 정령하고 비슷한 거야?” ‘주인, 그건 아니다. 환수는 말 그대로 짐승이다. 물론 물질계가 아닌 신계에 사는 짐승이기는 하지만 짐승인 것은 사실이다. 어찌 보면 물질계의 짐승들이 오랜 시간 능력을 길러서 신계로 넘어간 것이라는 쪽이 맞을까?’ “무슨 소리야? 물질계의 동물들이 신계의 환수가 되다니?” ‘주인 너도 알고 있을 것이다. 예전에는 인간들이 신선이 되거나 하는 경우가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옛 이야기 속에는 몇 천년을 산 동물들이 영성을 지녀서 도술을 부려 비바람을 부르곤 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어떤 나무나 동물이 원한이 깊거나 은혜가 깊으면 죽은 후에 그 원한이나 은혜를 갚는 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 것들이 전부 허황된 이야기겠나?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동식물들이 결국에는 신계의 동식물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신계에 사는 동물이나 식물을 불러와서 부리는 사람들이 환수사라 한다.’ “그 그래? 그럼 아까 불려왔던 그 화령같은 환수들도 나름대로 혼이 있는 거란 말이야? 그리고 예전에는 물질계에서 살았던 그런 존재라는 말이야?” ‘전부는 아니다. 신계에서 태어난 존재들도 있기 마련이니까. 신계라고 해서 새로운 개체가 탄생하지 않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아무튼 그 녀석들도 너희처럼 나름대로 생각이 있고 의지가 있을 것 아니냐구. 그렇지.” 나는 화아에게 따지듯 물었다. ‘물질계로 소환되면 대부분 그런 것을 잊어 버리기는 하지만 신계에서는 분명히 자아와 의지를 지닌 존재들인 것은 분명하다.’ “그럼 혹시 그 녀석들도 너희 정령들처럼 물질계에서 힘이 다해서 사라지면 신계에서 다시 힘을 회복하게 되는 거야?” ‘그건 아니다. 처음에 나타난 풍신처럼 팔이 잘린 정도는 신계에 돌아가면 금방 회복하겠지만 화령이나 대화신같은 경우는 죽음을 당했기 때문에 절대로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 아마 그 혼들은 다른 형태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결국은 죽었다는 이야기네. 죽어서 그 혼이 다른 것으로 태어난다는 말이잖아.” ‘그렇다. 우리 정령들은 죽으면 그 순수한 기운으로 돌아가고 그 기운 속에서 다시 태어나지만 영혼을 지닌 것들은 그렇지 않다. 죽으면 다음에 어떤 존재로 태어날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럼 정령들은 영혼이 없는 거냐?” ‘그렇지, 정령들은 속성의 기운을 지닌 존재, 때문에 정령계에서만 형상을 지닐 수 있지. 계약자의 힘을 빌리거나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의 힘을 빌리지 않는 경우는 물질계에서 모습을 나타낼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아무튼 그 하츠키라는 놈은 생각을하면 할수록 용서가 안된다.적어도 자신이 환수로 소환한 것이다.아까 잠깐들었지만 아마도 환수는 자기가 직접잡아서 길들여야 하는것 같았는데, 녀석은 그렇게 잡은 환수를 마치 도구처럼 써버린 것이다. 나는 그것이 용서가 되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녀석의 다리나 팔을 하나쯤 분질러 버릴걸. 정말 화가 나네.” ‘그게 그렇게 화가 날 일인가? 어차피 소환자는 소환체를 도구로 생각하지 않는가? 주인 너에게도 나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나?’ 갑작스런 화아의 말에 나는 기가 막혔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도구라니. 난 절대로 너희를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처음 너희를 만났을 때를 기억하지? 너희 아무것도 못하고 아무 힘도 없었어도 나는 그저 좋았어. 새롭고 신기한 존재들이 내게 있다는 그런 생각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나는 너희와 친구가 되고 싶었어. 말도 못하고 반응도 없었지만 나는 너희들을 보고 있는 것이 즐거웠던 거야. 그러다가 조금씩 너희들이 성장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희망을 가졌어. 대화가 되지 않던 너희와 대화가 되고, 또 자기 표현이 없던 너희들이 자기 표현이 생기고, 그렇게 너희가 점점 너희들 본연의 모습을 찾아갈 때, 나는 더없이 기쁘고 행복했어. 너희는 내 도구가 아니라, 내 친구이자 가족이야. 내가 어떤 싸움에서 힘겨울 때 너희의 도움을 받지만 나는 너희가 걱정스럽고 안쓰럽고 그래. 나는 그 하츠키라는 녀석처럼 너희들을 그렇게 대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야. 내가 비록 화아나 지토를 많이 괴롭히긴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너희를 수아나 풍아나 광아 보다 미워한다는 것도 아니야. 그냥 나름대로 상대에 따라 다늘 애정표현일 뿐이지.”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흥분해서는 혼자 떠들어 대었다. 그리고 내 말이 끝났을 때, 나는 내 주위에 화아 뿐이 아니라 다른 녀석들 모두가 나와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소환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녀석들은 내 주위에 나타나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된 거야? 내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나오다니. 이래도 되는 거야?” 내 말에 대답을 한 것은 지토였다. ‘흥 무슨, 친구라면서? 친구끼리 보고 싶으면 보러 오고, 미워지면 가고 그러는 거지. 그게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그러니까 지금, 우리는 친구니까 내가 부르지 않았는데도 마음대로 나왔다는 말이야?” ‘그렇습니다. 루탄님, 앞으로도 언제나 이렇게 우리들의 의지로 언제든지 나올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지금 상황에서는 루탄님의 마음이 우리들과 아주 가깝게 연결되었기 때문에 특별한 소환이 없이도 이렇게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건 광아의 대답이었다. ‘루탄님이 이렇게나 우리를 생각해 주시다니 정말 놀랐어요. 흑흑 전 너무 기뻐요. 루탄님’ 이렇게 입으로만 흑흑 거리면서 아양을 떠는 것은 풍아다. ‘저도 정말 기쁩니다. 루탄님께서 저희를 이렇게 아껴주셔서 너무 너무 행복해요. 이런걸 행복이라고 하는 것이 맞겠지요?’ 이건 수아의 답이었다. ‘우리들을 친구로 말하고, 더하여 친구로 인식하는 루탄의 마음, 고맙게 받겠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좀 더 쓸모가 있는 친구가 되어야겠지? 하하 기다려라. 너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지.’ 그리곤 화아가 사라졌다. ‘그럼 나도 가 봐야겠네. 그럼 다음에 뵈요 루탄님.’ 사라지는 풍아. 그렇게 지토도, 광아도 사라졌다. “잠깐 수아야. 다들 어디로 가는거야?” 나는 자기도 갔다 오겠다고 말하고 사라지는 수아를 불러세웠다. ‘그게요. 저희가 상급 정령으로 성장하고나서 정령계에 가지를 않았거든요. 상급정령이면 특수한 능력들이 생기는데 그걸 다른 정령들에게 배워야 하는데, 자좀심이 상해서 배우러 가지를 않았거든요. 다른 상급 정령들은 태어날 때부터 가진 능력이지만 저희는 이제 겨우 생긴 능력이라 어떤 능력이 있고 어떻게 쓰는지도 몰라서, 그걸 배우러 가는 거예요. 최상급 정령들을 찾아가서 물어보는 쪽이 빠를 거라고 다들 각 속성의 최상급 정령들을 찾아갔어요. 저는 전에 무즈호에 있던 그 정령을 찾아가 볼까 하고 있어요. 물질계와 정령계의 시간이 다르니 금방 돌아올 거예요. 내일 아침까지는 올께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렇게 쏟아내듯 말하곤 수아도 사라져 버렸다. 그럼 이제부터 내일 아침까지는 정령들을 부르려고 해도 안 된다는 뜻일까? 아니면 부르면 오기는 오는 것일까? 한 번 시험을 해 보고 싶었지만, 괜히 방해가 될 것 같아서 그만 두기로 했다. 그렇게 정령들을 보내고 잠시 후 넥스와 유소 쉬벡이 들어왔다. “그래 어떻게 됐어? 어디서 붙어보자든?” 나는 급하게 물었다. “응, 성도 밖에 남쪽으로 조금만 가면 넓은 평원이 나오는데 버려진 땅이니까 그 곳에서 대련을 하자던데? 그리고 인원은 우리 넷, 저쪽에서 넷, 그리고 참관인 자격으로 북 자치령주 쪽의 넷 이렇게 가기로 했어. 그리고 승자가 패자에서 한 가지 요구를 할 수 있도록 하기로 했다. 그건 내가 하고 싶지 않았는데 하츠키놈이 워낙 교활하게 나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붙게 된 조건이다.” 나는 넥스의 그 말을 듣는 순간 안 봐도 뻔하다는 생각을 했다. 분명 하츠키 녀석이 넥스를 약올렸을 것이고 넥스는 덥썩 그 조항을 승낙했을 것이다. 어쨌든 쉬벡의 마법 훔치기를 위해서는 아주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쉬벡님, 내일 서 자치령주의 마법 많이 훔쳐 오셔야 해요. 하하 제가 최선을 다해서 마법을 훔칠 수 있도록 도와드릴께요. 하하” 나는 될 수 있으면 자신있는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루탄님, 7써클 이상의 마법은 그 파장이 엄청나기 때문에 보통 대인공격에서 사용하는 경우는 많지않습니다.그러니 그런 고단위 마법을 쓰게 하려면 상당히 힘이 들텐데요.” 쉬벡의 말을 분명 걱정을 담은 말인데도 이상하게 고단위의 마법을 많이 쓰게 만들어 달라는 말로 들렸다. “만약 내일 서 자치령주가 쓰는 마법 중에서 나중에 쉬벡님이 소화하지 못해서 쓰지 못하는 마법이 있으면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하하 저도 나름대로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니 그만한 노력을 하셔야 겠지요? 어쩌면 그 마법들을 완성하지 못하면 제가 만드는 음식은 포기 하셔야 할런지도 모릅니다. 하하” 그런 말도 안되는 협박을 하면서 나는 분위기를 편안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쉬벡에게 그 말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던 모양이었다. 곧장 자기 방으로 가서 어떻게 하면 좀 더 효과적으로 마법을 훔칠수 있을지 연구에 들어갔으니 말이다. 나도 곧 내 방으로 돌아와 저녁도 건너뛰고 침대에 누워버렸다. 아마도 쌍환검을 사용한다면 서 자치령주와의 싸움에서도 그리 크게 밀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솔직히 마법사와 싸워본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쉬벡과는 대련도 한 번 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다음에는 꼭 쉬벡과 대련을 해서 마법사에 대한 적응력을 길러둬야 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 밤에 대화신이 화령을 수백마리 잡아먹었다. 나중에는 대화신이 하츠키도 집어 삼켰다. 아침을 대충 해결한 우리들은 먼저 남쪽 평원을 향해 길을 떠났다. 넥스와 유소도 말을 두고 우리와 같이 마차를 타고 같이 길을 나섰지만 평원은 예상외로 멀지 않아서 두 시간이 채 지나기 전에 평원에 도착했고, 우리들은 적당히 평원 안으로 마차를 몰아갔다. 30분 정도 마차를 평원 안으로 몰고 가서 우리는 푸른 초지 위에 몸을 누이고 따스한 봄에 취해 보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봄이 성큼 성큼 다가 와서 이제는 들판에 가득 이름모를 꽃들이 피어 있었다. 오늘 여기에서 싸움을 하면 여기 이 많은 꽃과 풀들이 죽을 텐데, 문득 이런 생각을 하다가 내가 정말 한심하게 느껴졌다. 숱한 괴물들을 죽였으면서도 꽃과 풀은 죽이기 싫다고 생각을 하다니 너무 이중적인 것 같아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렇게 하늘을 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중에 풍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루탄님 저 돌아 왔어요. 오늘 싸움 저에게 맡겨 두세요. 호호호 제가 아주 멋진 모습을 보여드릴께요. 호호’ 나도 풍아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 속으로 응답을 했다. ‘뭐 좋은 것을 많이 배워 온 모양이네? 그래 기대 하고 있을게.’ 그렇게 풀 밭에 누워 있는 동안에 속속 다른 정령들이 돌아왔다. 풍아 다음에 지토, 광아, 수아, 화아의 순으로 하나 하나 돌아왔다는 보고를 했던 것이다. 이제는 반지 안에 있으면서 자기 의지대로 밖으로 나오는 것이 가능했고(그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고, 내가 정령들에 대해서 깊은 애정을 마음속에 불러 일으킬 때나 가능하다고) 또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정도는 어렵지 않은 일이 되었다고 한다. 덕분에 이제는 내 머릿속에 5명이나 되는 존재들의 목소리가 언제 울려 나올지 모 는 상황이 되어버렸지만 어제나 5명의 친구들과 함께 있는 거라고 생각하면 될 듯했다. 화장실에 앉아 있을 때도 여섯이 함께 있는 느낌이 좀 이상할 것 같지만 말이다. 더구나 두 명의 여자 친구와 함께 화장실에 있다니... 다행히 정령들이 내 생각을 읽지 못하는 것이 다행이지 지금 이런 생각을 안다면 무슨 창피냐. 히휴~~ 어쩌다가 이런 신세가 되는 것인지. 드디어 북, 서 자치령주 일행들이 도착하고 있었다. 멀리 평원의 북쪽에서 일단의 사람들이 말을 타고 나타났던 것이다. “오래 기다렸는가? 허허 늙으니 몸이 게을러지는 모양일세 이해하게나.” “별말씀을요. 저희가 일찍 나왔을 뿐입니다. 어차피 같은 곳에서 오는데 같이 왔으면 번거로움이 없었을 것을 미처 생각을 못했습니다. 하하 양해해 주시겠지요?” “허허 젊은 사람이 예의가 제대로구먼, 허허. 그래 준비는 잘 되었는가? 허허” “네, 저는 언제라도 좋습니다.” “그럼 자네는 어떤 방법으로 싸웠으면 좋겠는가? 나는 자네에게 마법과 소환으로 공격을 할 생각이네만, 나도 환수 소환을 제법 한다네. 허허” “네? 영주님도 소환을 하신다니 놀랍군요. 생각도 못했습니다. 잘못하면 낭패를 면하지 못하겠군요. 저는 검을 이용한 검술과 마법, 그리고 정령들의 도움을 받을까 합니다.” “그래 기대가 되는구먼, 그럼 시작하세나.” 우리는 20미터 정도의 간격을 두고 서로를 마주했다. “화아와 수아 지토 나를 도와줘.” 내 말에 화아와 수아 지토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일단은 영주가 어떤 환수를 불러낼지 모르니까 소환된 환수를 너희가 맡아 줘야 되겠어. 그리고 마법으로 싸워 본 적이 없어서 불안하니까 내 쪽에 방어도 신경을 좀 써줘. 부탁해.” “알았다. 루탄. 기대해라.” “네, 걱정마세요. 루탄님” “케케 내 힘을 보여주지. 걱정마라.” 그러는 사이에 영주의 마법 공격이 시작되었다. 불덩이가 날아오고 얼음 화살들이 날아왔지만, 예전에 쉬벡이 괴물들을 상대할 때 썼던 것들이라 어렵지 않게 피할 수 있었다. 소도가 좀 빠르고 숫자가 많기는 했지만 내 주위에 있는 정령들이 놀고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어려움이 없었다. “허허, 그런 것 쯤은 문제도 안되는 것인가? 그럼 좀 더 다른 것이 필요하겠구먼, 이건 어떤가?” 뜻 모를 중얼거림과 함께 머릿속에 위험을 알리는 신호가 울렸다. 나는 순간적으로 자리를 옮겼고 내가 있던 자리에는 날카로운 바위가 솟아 올랐다. 하지만 내가 피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영주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가 땅에 발을 딛는 순간마다. 땅에서는 날카로운 칼날들이 솟아 났던 것이다. “지토, 이것 좀 어떻게 해 봐. 흙은 니가 어떻게 해야 할 것 아니야?” ‘알았다. 투덜거리기는. 걱정마라.’ 그리고 지토가 내 곁으로 다가 와서 쿵 소리가 나도록 땅을 밟아버리자 더 이상 영주의 공격은 쏟아지지 않았다. ‘일단은 이 근처에서 땅을 이용한 공격은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저 영감 마법력이 상당하군. 잠시동안 나도 움직이지 못할 것 같은데. 지금 상태로는 말이야. 케케.’ “뭐야? 너 뭔가 보여준다고 하더니 겨우 이거란 말이야?” ‘겨우라고 말하지 말아. 명색이 8써클 마법사라면서? 그런 마법사가 시행한 마법을 막고 있는 거란 말이야. 이 마법은 시간을 두고 계속되는 지속형이라. 그 시간 동안은 이 힘을 막아둬야 한단 말이야. 모르면 가만히나 있던지.’ “그런거냐? 미안하다. 모르고 그런걸 가지고. 힘내.” 나는 지토의 낮은 등을 퍽 소리가 나도록 두드려 주었다. ‘켁, 무슨짓이야. 내가 못움직이는 상태에서 비겁하게 공격을 하다니. 두고보자.’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지토도 악의는 없어보였다. “영주님 일단 이번 공격은 막아낸 것 같네요. 그럼 저도 공격을 해야지 방어만 할 수는 없으니 조심하세요.” 나는 쌍환검을 손목에서 풀어들고 각각의 검에 수의 기운과 화의 기운을 약하게 불어 넣어서 공격을 시도했다. “갑니다. 하압!!” 쌍환검에서는 물로 이루어진 줄기와 불덩어리가 각각 영주를 향해서 날아갔다. “허허 이런 피해버리면 너무 허무하려나? 안티 매직 실드.” 순식간에 엷은 막이 영주 주위를 감싸고 돌았고 쌍환검에서 날아간 마법은 영주의 막에 부딪히자 푸시식하는 반응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이런, 역시 그런 작은 공격은 통하지 않는 거네요. 그럼 갑니다.” 나는 검을 들고 영주쪽으로 달려 갔다. “허허 성격이 급하구먼, 라이덴” 번쩍! 허국. 혹시 번개 맞은 사람 본 적 있수? 나는 순식간에 번개에 휩싸여 버렸다. 급하게 나를 방어해 준 물의 장벽이 번개를 대부분 흡수해 주기는 했지만, 그래도 짜릿한 충격이 몸을 감쌌다. “크헉, 아갸갸갸. 정말 짜릿하군. 수아 고마워.” 나는 잠시 멈칫했던 속도를 높이며 영주에게 검을 뿌렸다. 영주에게 후두른 검에는 어느사이 금빛의 막이 형성되 있었다. “허허, 이런 물의 정령이 제법이로구먼, 그 사이에 방어막을 치다니. 블링크” 내 검이 영주에게 휘둘러진 순간 영주는 눈 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순간적으로 가까운 거리를 이동하는 마법으로 자리를 피한 것이다. 나는 영주가 사라진 순간 흠칫 놀랐지만 급히 영주의 기운을 쫒기 시작했다. “여기다. 나는 영주가 나타나는 방향으로 검을 통한 마법을 날렸다. 순간적이어서 그렇게 강하지는 못했지만 금빛의 환이 날아갔다.” “헛, 실드.” 퍼걱. 다행히 영주는 실드로 날아드는 마법을 막기는 했지만 충격을 받는 것은 피하지 못 한 모양이었다. “크, 대단하군 그 짧은 시간에 내가 움직이는 곳을 알아내고 공격을 하다니, 이렇게 되면 나도 좀 더 큰 마법을 쓸 수 밖에 없겠군그래. 그러자면 시간이 필요하니 환수의 도움을 받아야 되겠구먼 그래. 나와라 대화신, 대풍신, 대수신.” 영주는 순식간에 인을 맺고 환수들을 불러 내었다. “대단하네, 상급 환수가 셋이나 되. 저녀석들 어떻게 상대하지? 화아는 화신을 수아는 수신을 그리고 풍아는 어서 나와서 풍신을 맡아.” 또 다시 풍아가 소환되어 나왔고. 지토는 여전히 아까의 마법을 막느라고 움직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허허, 이런 중급 정령으로 상급 환수를 상대하는 것은 어렵지 않겠나? 자네도 힘을 더해야 할 텐데?” “걱정 마십시오. 저 녀석들이 알아서 할 겁니다. 그리고 저는 영주님을 상대해야지요. 잘못 시간을 드리면 한꺼번에 저희를 날려버릴지도 모르는 일 인데 조심해야죠.” “허허, 정말 대단한 친구로구먼, 그럼 안되지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고난위 마법에는 시간이 좀 걸린다네. 마법을 준비하는 동안 자네를 묶어 두지 않으면 곤란하지. 흑신 소완” 아무래도 단단히 각오를 한 모양인지 영주는 다시 환수를 소환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환수가 아니라 검은 안개 같은 모습을 한 존재였다. “흑신 잠시 저 인간을 묶어 주었으면 좋겠군. 능력이 된다면 마음대로 해도 되지만 내 곁으로 다가오는 것은 막도록 해.” 흑신이라는 존재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지만 스물스물 내가 있는 쪽으로 움직이는 것 으로 봐서는 영주의 명령을 접수한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녀석의 몸에서 일부가 촉수처럼 뻗어나와 나를 공격했다. “이런, 이런 걸로 날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순식간에 날아온 촉수를 나는 쌍환검을 휘둘러 잘라내었다.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다른 상황이 전개 되었다. 촉수는 검에 잘리지 않고 튕겨져 나갔던 것이다. “큭. 이런 상당한 힘이네? 손목이 얼얼하군.”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흑신의 촉수가 여러개로 늘어나면서 여유가 없어지기 시작했다. 한쪽에서는 영주가 마법의 케스팅에 들어갔고 풍아 화아 수아는 각각의 환수들과 어우러져 팽팽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이런 이러다가 저 마법이 완성되면 낭패를 보겠는데? 어쩌지?’ ‘루탄님, 이 흑신이라는 녀석은 제가 맡지요. 아무래도 속성이 어둠에 속한 것 같으니 빛의 속성인 저와는 천적 관계인 것 같군요.’ 스르륵 모습을 나타낸 광아가 흑신의 상대를 자청하고 나섰다. ‘하지만 넌 그 모습으로는 공격력이 별로 없잖아. 어떻게 상대하려고?’ ‘걱정마세요. 내가 물리적인 공격력이 없다고 하지만 적어도 어둠의 존재들에게는 물리적 공격력 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으니까요.’ 광아의 말이 끝나는 순간 광아의 몸에서 빛이 쏘아졌고, 그 빛은 흑신의 촉수들을 여지없이 태워 버렸다. 덕분에 여유가 생긴 나는 곧장 영주에게 달려갔다. “멈춰, 이얍.” 나는 쌍환검을 휘둘러 영주의 마법을 막으려고 했다. 챙~ “이런 뭐야?” 내 검은 영주의 주위에 만들어진 막에 어이없이 가로 막히고 말았다. ‘뭐야? 자동적으로 형성되는 보호막이란 말인가? 예전에 쉬벡이 고단위의 마법을 시행할 때는 자동적으로 이런 보호막이 생긴다더니 정말 이런걸 보게 되네?’ 하지만 그렇다고 그대로 마법을 실행하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검에 남은 힘을 쏟아 부으며 보호막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별로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조금씩 시간이 흐르자 영주의 보호막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검과 부딪힐 때 마다 생겨나는 빛의 세기도 약해지고 케스팅을 하는 영주의 안색에도 다급함이 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영주의 보호막이 거의 부서질 무렵, 영주는 웃음을 지었고 나는 다급해 졌다. 영주의 마법 케스팅이 끝난 것이었다. “이제 자네의 정령들을 구해야 할 걸세. 새미 메테오.” 결국 영주의 입에서 시동어가 울리고 말았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자그마한 운석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운석 소환, 쉬벡의 말로는 9써클 마법이라고 했는데, 쉬벡의 말 보다는 못한 것을 보니 위력을 줄여서 8써클에서 실행이 가능하도록 만든 것인 모양이었다. 나는 급히 정령들이 있는 곳으로 뛰었다. “모두들 정령계로 돌아가. 여기 있으면 위험하다.” 하지만 정령들은 쉽게 환수들에게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나마 지토는 이제 마법지연 시간이 끝나서 자유로운 모양이었지만 정령계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떨어지는 운석을 보고 있었다. “이런, 빨리 돌아가란 말이야. 이러다간 다 죽는단 말이야.”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될대로 되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내 몸을 피하는 것은 가능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령들은 몸을 뺄 수도 없고, 더구나 환수들도 이대로 두면 모두 죽게 될 것이었다. 나는 쌍환검에 남은 힘을 모두 모았다. 어차피 두개의 검을 사용할 필요도 없었기에 한 검에 모든 기운을 불어 넣고 떨어지는 운석을 향해 기운을 쏘아 보냈다. “차압, 가라 태극.” 솔직히 내 단전에 모인 기운은 모든 기운의 초기 형태였다. 아니 모든 기운이 순수하게 정제된 모습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그 기운을 태극이라 이름 붙였다. 사실 내가 태극이 뭔지 알겠는가 마는 그냥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쌍환검의 우검을 통해서 쏘아 보낸 기운은 오행의 어떤 기운도 아닌 바로 그 혼합된 기운이었다. 급하게 검을 통해서 쏘아진 기운은 투명했고 금,청,녹,황.자의 여러 색들이 일렁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기운은 떨어지는 운석을 정확하게 맞추었다. 파파박. 콰광 하늘에서는 불꽃놀이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구경하던 사람들은 급하게 실드를 만들어야 했다. 비록 잘게 부셨다고는 하지만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 조각들의 힘이 보통이겠는가 말이다. 그나마 마음에 드는 것은 그 중에서 큰 덩어리가 하츠키 일행 쪽으로 떨어져 하츠키가 환수를 이용한 방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낭패를 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구경을 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나는 또 다시 환수를 도구로 사용하는 영주의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지토 저 영감 기회를 봐서 땅속으로 끌어들여서 반쯤 묻어 버려. 내가 기회를 만들어 줄게.” ‘그래 알았다. 저 영감 나도 마음에 들지 않아.’ 나는 쏘아진 듯 영주에게로 달려들었고, 늙은 만큼 경험이 많은 영주도 자신이 어렵게 만든 공격이 무위로 돌아간 것에서 온 충격에서 쉽게 벋어났다. 하지만, 마법사와 검사에 싸움에서는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줄 공간이 필요한 법인데, 나는 그런 공간을 줄 생각이 없었다. 순식간에 영주 앞으로 달려든 내가 검을 휘둘렀을 때 영주의 선택은 하나였다. “블링크.” “놓칠 것 같아?” 나는 곧장 영주의 이동을 쫓았다. 하지만 영주의 블링크는 연속되었고 간발의 차이로 번번히 영주를 놓쳤다. 다만 성과가 있었다면 영주의 옷자락을 제법 베었다는 것 정도였다. 하지만 영주는 도망 다니는 중이었고 나는 공격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정령들도 환수들을 상대로 정혀 밀리지 않고 싸움을 하고 있는 상태여서 영주에게 여유를 만들어 줄 수 있는 존재는 없어 보였다. “블링크.” 다시 영주가 내 칼을 간신히 피했을 때, 나는 영주에게 잠시 여유를 주었다. 그리고 영주가 그 여유를 이용해서 공격을 했을 때, 나는 영주의 마법 공격을 간단하게 피했고, 영주는 무릎까지 땅속에 박혀버렸다. 그리고 내 칼은 영주의 목에 가까이 붙어 있는 상황까지 시간은 필요하지 않았다. “이런, 땅의 정령이 보이지 않는다 했더니, 이런 준비를 하고 있던 거였나? 허허, 내가 진 것 같구만. 자네가 이겼네.” “그럼, 저 환수들을 그만 돌려 보내시지요.” “알았네. 그럼.” 영주가 인을 맺고 환수들을 돌려 보내자 정령들이 내 곁으로 돌아 왔다. “수고들 했어, 이만 들어가서 쉬어. 조금 있다가 이야기 하자. 지금은 사람들이 많으니까.” 정령들은 제각각 한 마디씩 인사를 하곤 돌아갔다. “영주님도 환수들을 도구로 생각하시는 모양이시네요. 어떻게 정령들과 환수들을 한꺼번에 없앨 생각을 하실 수가 있죠?” “허허, 무슨 말을, 자네가 정령들을 아끼니 당연히 그 공격을 막아주리라 생각했던 것이지. 다만 그 공격을 막으려면 어느 정도 희생은 감수해야 할 것이고, 그럼 내가 이 싸움에서 이기는 것은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것인데, 예상외로 아무 피해도없이 그 공격을 막아 버려서 내가 지게된것 같구만.아무튼 대단한 실력이라고 해야겠군.” 하지만 나는 역시 영주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만약에 정령들이 내 공격의 범위 안에 있다면 나는 어떤 경우에도 공격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영주는 아무렇지도 않게 공격을 했던 것이다. 그것도 그 무지 막지한 공격을... “허허, 아무리 나라고 해도 상급환수를 길들이는 것이 쉬운일은 아니라네. 그런 상급 환수 셋을 그렇게 허무하게 희생시킬 수야 없지 않겠나?허허허 다 자네를 믿었기 때문이지.” 이렇게 덧붙이는 영주의 말에도 역시 환수들에 대한 애정은 느껴지지 않는다. “자 그만 돌아가시지요. 대련도 끝이 났으니 가서 밥이나 먹어야 겠네요.” “그러세나. 허허.” 그 사이에 우리 일행과 북영주 일행, 그리고 서영주 일행들이 모여들었다. “대단했습니다. 정말 보기 힘든 승부였습니다. 이런 싸움을 본 적이 언제인지. 정말 안목을 넓힌 것 같습니다. 하하” 가까이 다가온 북영주가 치하를 한다. “루탄님 정말 대단했습니다. 정령들과 환수와의 싸움도 그렇게 영주님과 루탄님의 싸움도 그렇고 정말 대단한 승부였습니다.” “루탄 정말 쎈데? 이제보니 나하고 대련을 하지 않으려는 것도 이해가 가는구만. 하하 대단해.” “정말 대단해요. 호호 멋진 시합이었어요.” 그렇게들 호들갑을 떨고 있을 때, 멀리 남쪽에서 사람들이 나타났다. 아니 달려오고 있었다. “아니 저 사람들은 남 자치령주 일행인 것 같은데? 복장을 보아하니 분명한 것 같군. 그런데 왜 저렇게 달려 오는 거지?” “달려 오는 것이 아니라 쫓기고 있는 거로구만, 저기 뒤에 따라오는 괴물들을 보게.” 가리안 영주의 말에 북 자치령주가 말을 받았다. “이런 좀 도와줘야 할 것 같군요. 남 영주의 자존심이 좀 상하기야 하겠지만 지금으로선 도움이 필요할 것 같군요.” 가리안 영주의 말에 모두들 남 자치령주 일행을 돕기 위한 준비를 했다. 나는 다시 정령을 소환했고, 가리안 영주는 환수들을 소환했다. 그리고 북영주와 그 아들과 손자(멕스)는 가만히 서서 기도하는 모습으로 서 있었다. 남쪽 사람들이 가까워지고 그에 따라 괴물들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나와 가리안영주는 각각 정령과 환수에게 공격을 명령했고, 넥스와 유소, 그리고 쉬벡도 질 수 없다는 듯이 괴물들을 향했다. 쉬벡은 망토가 있었기 때문에 마법 케스팅이 끝나는 순간에만 잠시 실체화해서 마법을 구현하곤 다시 몸을 숨기는 방법으로 공격을 하고 있었고, 넥스와 유소는 말 그대로 뛰어난 체력과 검술로 괴물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가리안 영주의 다른 두 용병들도 상당한 실력으로 괴물들을 상대하고 있었고 하츠키 의 환수도(상급은 없는 모양이었다. 풍신과 화령들로 공격을 하고 있었다.) 괴물들을 상대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멕스 3대의 공격이었다. 그들은 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기도하는 자세로 있다가는 갑자기 몸에서 빛을 내면 괴물들에게 달려 든 것이다. 그런데 괴물들은 멕스 3대 앞에 서기만 하면 꼼짝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고 죽은 듯이 있다가는 공격을 받아서 쓰러지는 것이었다. “북영주님 일행의 공격은 상당히 이상하네요. 어째서 괴물들이 저렇게 꼼짝을 하지 못하는 거죠? 정말 이상하네요.” 나는 옆에 있는 가리안에게 은근히 들으라는 듯이 물었다. “허허, 그건 북영주 일가에 장자에게만 유전되는 신의 권능 때문이네. 이상하게도 저 일가의 장자들은 저런 능력을 타고 난다네, 아무튼 괴물들은 어 일가의 장자 앞에서는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이지. 그것도 유독 북 자치령 주위에 있는 괴물들은 그 정도가 심해서 저들 일가가 나타나면 모두 도망을 가거나 혹은 스스로 자살을 하는 괴물들도 있다고 하더군. 뭐 확인이 된 것은 아니지만 말이지. 허허” 나는 그 말을 듣고 어느정도 이해를 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저 북 자치령에서는 그럼 그 귀족이라는 것이 거의 세습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는 사이에 순식간에 우리를 지나쳤던 남 자치령주의 일행들은 우리가 괴물들을 막고 있는 동안 대열을 정비하더니 곧 싸움에 참가했다. 그들은 주로 활과 창을 무기로 쓰고 있었는데 반바지에 반팔을 입고 슬리퍼 같은 신발을 신은 것이 열대지방의 사람들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상당히 용감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손에 창을 들고 한 손에 방패를 들고 방패로 후려치고 창으로 찔러 죽이는 공격 방법을 쓰고 있었는데, 문제는 그 공격에 약점이 있다는 것이었다. 괴물들 중에서 어지간한 상처로는 죽지 않는 녀석이 있는데 그런 녀석은 목을 분리 시키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데 창으로는 그게 어렵다는 점이었다. 실력있는 사람들은 방패의 단면으로 괴물들의 목을 베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런 실력자는 많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지가 궁금했다. 실제로 저런 정도라면 숫자가 많다고 해도 그 긴 여정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남 자치령주의 마차 행렬 중에서 뚜껑이 달려있는 마차에서 한 사람이 내리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쓰러진 괴물들이 일어나 다른 괴물들을 상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되자 우리 일행이나 다른 사람들도 전권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괴물들이 괴물들과 싸우고 괴물들이 죽으면 다시 괴물들을 상대하고.. 그렇게 오래지 않아서 우리편(?)괴물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싸움은 곧 끝이 났다. 하지만 마차에서 내렸던 사람은 싸움이 끝이 나자 쓰러져 버렸고, 때맞추어 설치던 시체괴물(우리편)도 다시 쓰러져 버렸다. 가냘픈 체구에 마법사의 로브와 같은 것을 입고 후드를 눌러썼던 그 사람은 곧 다시 마차 안으로 사라졌고, 곧 이어 일군의 무리들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감사합니다. 뭐라고 인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북영주님과 서 영주님의 도움을 받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쪽의 분들은 누구신지 모르겠군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남쪽의 다른 일행과는 달리 풀플레이트 갑옷을 완벽하게 차려입고 말에 올라탄 불혹의 나이 정도 된 인물이었다. “도움이라니 별말씀을, 그런데 남영주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는 모양이지요? 아까 보니 몸이 좋지 못한 것 같던데요.” 역시나 나서기 좋아하는 가리안 영주의 답변이다. 뭐 그러고 싶으면 그러라고 두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은 거다. “네, 이번에는 영주님께서 직접 오시지 않고 차기 영주님이 경험도 쌓을 겸 오셨는데, 아직 이런 장거리 여행에 익숙하지 못하신 데다가, 기후가 워낙 틀려서 병이 드셨지요. 그래서 아까 같은 좋지 못한 상황이 생긴 것입니다. 때마침 의식이 없으신 상태에서 많은 수의 괴물들의 습격을 받아서, 직접 상대를 한다면 너무 많은 희생이 생길것 같아서 소영주님의 의식이 깨어나실 때 까지 괴물들을 유인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여러분의 도움을 받게 되었군요. 그런데 다시 한 번 이 분들은 누구신지... 아까보니 정령을 다루시고, 또 마법사님도 아주 특이한 능력을 지니신 것 같고, 저 두 분도 상당한 실력이신 것 같던데..” 이런 질문에는 당연히 가리안이나 북 자치령주가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이지만 말이 없으니 내가 소개를 하는 수 밖에 없다. “하하, 안녕하세요, 저희는 이번에 동 자치령주님의 명령으로 공물 운송을 맡은 사람들입니다. 저는 루탄, 저 분은 쉬벡, 그리고 넥스, 유소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하하 네, 그러시군요. 예사롭지 않은 실력이다 했더니 역시 동 자치령을 대표하는 분들이셨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남 자치령의 수비총대장 타호루라고 합니다.” “그런데 소영주님께서 몸이 편치 않으시다고요? 그럼 빨리 숙소로 가시지요. 여기서 이렇게 있을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또 다시 가리안이다. 우리는 가리안의 제안대로 빠르게 행렬을 이동시켜서 외성의 숙소로 돌아왔다. 하지만 남쪽의 소영주라는 사람은 끝내 얼굴을 완전히 가린 후드를 벗지 않아서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다. 더구나 몸이 좋지 않아서 다른 사람들과 인사도 없이 숙소 집사의 안내를 받아 숙소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에 더더욱 자세히 볼 기회도 없었다. 우리들, 그러니까 대련에 참가했던 사람들, 남쪽 영주 일행을 제외한 전부는 ㅡ. ㅡ;; 다시 식당에 모였다. “허허, 그러고 보니 이번 시합에 요구조건을 한 가지 들어주기로 한 내용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래 루탄군 어떤 걸 요구할 생각인가?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것이면 무엇 이든 들어 주겠네. 허허” 테이블에 둘어 앉자 마자 가리안 영주가 급하게 말을 꺼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나에게로 집중되는 것은 당연했다. “글쎄요. 별로 생각을 해 보지 않아서, 어떤 것이 좋을지... 영주님은 어떤 게 좋 을 것 같으세요?” 나는 도리어 가리안 영주에게 물었다. 돈을 달랄 수도 없는 문제고, 쉬벡을 위해서 마법서를 좀 보여 달라고 하고 싶지만 그건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고, 그렇다고 딱히 요구할 것이 없으니... 사실 환수에게 애정을 좀 가져 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이미 환수는 도구라는 생각을 뿌리 깊게 가진 사람들이라 그것도 힘들 것 같았다. “허허, 그거야 루탄군이 알아서 해야지 도리어 내게 물어 보면 어떻게 하나? 잘 생각해 보게. 뭔가 필요한 것이 있는지 말일세.” 하지만 나는 지금 필요한 것이 별로 없었다. “저기 그럼요. 그 환수에 대한 이야기 좀 해 주세요. 환수는 어떤 존재이고 어떻게 소환을 할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어떤 종류가 있는지 그런 것 말이에요.” “설마 루탄군, 그게 요구 조건은 아닐테지?” 옆에서 듣고 있던 북 자치령주의 질문이었다. “네? 맞는데요? 이게 제 요구조건이에요.” 뭐 순간적으로 주위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황당하다는 표정이 된 것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련의 대가로 무얼 달라고 하는 것도 이상하고, 그냥 나는 이게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허, 이런 예상도 못한 요구조건인걸? 허허 알았네. 내 자세히 이야기 해 주지.” 그리곤 가리안 영주는 느긋하게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물론 나머지 사람들은 가리안 영주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가 되었고 말이다. 무슨 옛날이야기 하는 할아버지와 그 앞에 모여 앉은 개구쟁이 어린이들 같은 모습이다. 하하하 “먼저 환수라고 하는 것은 이곳 물질계의 존재가 아니라 이계의 존재, 정확히 신계의 존재라고 보면 될 것이네. 다만 이 환수들은 물질계로 소환되면서 물질계의 존재와 같은 물질로 형상화 된다는 점이 정령들과는 다른 점이지. 환수의 종류는 그야말로 다양함을 넘어서 무궁무진하지. 즉 종류를 다 알고 있는 존재는 없다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네. 아주 작은 곤충에서부터 용에 이르기까지 무척이나 다양한 환수들이 있으니 말일세.” “저 말씀중에 죄송한데요? 그 용이라는 것이 환수 중에서는 최고의 환수인가 보죠?” “그렇지, 용은 환수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지. 예전부터 신계의 환수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라 해서 4대 환수가 최상위의 환수로 알려져 있지만 그 4대 환수 위에 모든 환수의 왕이 있고 그 환수도 용이라고 하더군. 금룡이라고. 하지만 본 적은 없고 전해 들은 것이니 자세히는 나도 알 수 없는 일이라네. 아무튼 이 환수들은 그들을 제압한 존재에게 귀속되는데, 물론 무조건 귀속이 되는 것은 아니고 환수를 제압하는 주문이 있지. 그러니까 환수를 찾아서 그 환수를 제압하고 주문을 각인시키면 그 이후로는 언제든지 정해진 주문에 따라 그 환수를 소환할 수 있는 것이지. 물론 보통 때에는 신계에서 머물고 있다가 부름에 따르는 것이고 말일세.” “저기 그럼요. 그 환수 잡으려면 신계라는 곳에 가야 하지 않나요? 환수는 신계에 사는 것이니까 말이죠.” 나는 궁금해서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허허, 이런 인간이 어떻게 마음대로 신계를 들락거릴 수가 있겠는가. 그건 말이 안되지. 다만 환수들을 불러내는 진을 그리고 그 진을 통해서 귀속되지 않은 환수를 소환하는 것일세. 문제는 그 소환진이 어떤 환수를 정해놓고 소환하는 것이 아니라 무작위로 소환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굉장히 많은 노력과 정성, 그리고 힘을 기울여서 만들어낸 소환진이 벌레같은 것을 소환하고 사라지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일까? 허허.” “저기 그럼 여기에서도 그 소환진을 통해서 환수를 불러 볼 수 있나요? 그리고 저도 주문만 알면 그 환수를 제압해서 부릴 수 있는 것인가요?” “이런 이런, 욕심이 많군. 루탄군은. 그러니까 루탄군은 환수를 가지고 싶다는 거로군.” “아니요. 그게 아니라 보통 사람들도 환수를 다룰 수 있는지 궁금해서요. 그리고 한 마리쯤 애완동물을 가지고 있으면 좋을 것 같기도 하고요.” “허허허, 이런 이런 그럼 어쩔 수 없이 내가 환수 하나를 불러서 루탄 군에게 붙혀 주어야 하겠군. 사실 보통 사람은 환수를 다루지 못해요. 몸 속에 마나를 축적하고 그 마나를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존재만이 환수를 다룰 수 있는 거지. 실재로 귀속된 환수를 신계에서 소환하는 것에는 별 힘이 들지 않지만 제일 처음에 환수를 제압하고 또, 구속 주문을 할 때에 굉장히 많은 힘이 들기 때문에 보통 사람은 환수를 다룰수 없지. 더구나 신계의 환수를 소환하는 진을 아는 사람은 몇 되지 않기 때문에 환수사는 흔하지 않고 말이죠. 자, 내가 주문을 알려 주지. 이건 속박주문인데 어떤 환수든 제압한 후에 이 주문을 외우면 그 환수에게 구속의 인장이 세겨지면서 자신의 것이 되지. 이 주문은 알고 있는 사람이 제법 되니 알려 준다고 해도 상관은 없을 것 같군. 다만 환수를 최초로 소환하는 소환진은 함부로 알려 줄 수가 없어. 어쩌다가 되지도 않는 사람이 감당하지 못할 환수를 불러내면 이 물질계가 어떤 피해를 입을지 알수 없기 때문이지. 그리고 오늘 여기 소환진을 하나 그려서 무엇이 나오던지 루탄군이 제압한다면 그 녀석을 선물로 주도록 하지. 이 정도면 좋은 선물이 될걸세. 물론 소환진에서 아무 소용도 없는 존재가 나온다고 해도 그건 내 잘못이 아니라네.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이 소환진은 무작위로 신계의 환수를 소환하는 것이니 말이야.” “정말이세요? 우화. 나도 환수를 가지게 된다. 하하 어서 해 주세요. 네? 어서요.” 나는 좀 전까지와는 다르게 할아버지에게 떼를 쓰는 어린 아이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내 나이가 서른이 넘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건 거의 엽기 수준이다.) “허허허, 조금만 기다리게 일단 이 주문부터 외우게나.” 그리곤 가리안 영주는 이상한 억양의 주문을 알려 주었다. 아무래도 해석이 되지 않는 말이었지만 그 주문을 따라 외우자 몸 속에 있는 기운이 이상한 모습으로 흘러나오면서 손으로 몰려 들었다. 그리고 그 기운들이 손가락으로 몰려 들어 맺혔다. “이 이거 이상해요. 손가락에 기운들이 맺혔어요.” “호? 역시 되는구만. 자 그럼 자네가 그 손가락들을 잘 연결해서 기운들이 한 곳에 모이도록 해 보게. 하츠키나 내가 손가락으로 이상한 모양을 만들던 것을 기억하지? 그런 모양으로 두 손의 손가락들을 움직여서 맺다 보면 편안하게 기운들이 뭉쳐지는 때가 있을 것이네 그럼 그게 자네의 주문에 알맞은 수인이 되는 것이지.” 나는 그 말을 듣고 곧 여러 가지 모양으로 손가락들을 붙이고 떼고 해 보았다.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어떤 모양이 기운을 자연스럽게 하는지를 깨닫게 되었고 오래지 않아서 알맞은 수인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렇게 맺힌 수인으로 기운이 뭉치면서 라이트 마법에서 나오는 광구 같은 빛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벌써 알아냈군. 거기다가 기운이 아주 강하군 그래. 나나 하츠키보다 몇 배는 밝은 빛이 나오니 말이야. 대단하군. 몸 속에 기운이 굉장한 모양일세 그려. 자 그건 그만 되었으니 이젠 소환진을 그려야 하는데 여기서는 안될 것 같으니 어제 그 연병장으로 가세나. 그리고 그 손은 그만 풀어도 되네. 나중에 환수를 귀속시킬 때 그 빛을 환수에게 옮겨 주면 되는 것일세.” 내가 손의 수인을 풀어 내자 그 빛은 곧 사라져 버렸다. 우리 일행은 전부 그 연병장으로 갔다. 다른 사람들도 신기한 구경을 놓치고 싶은 생각들은 없었던지 쫄래쫄래 따라들 왔던 것이다. 연병장에 소환진을 그리는 것은 하츠키가 맡아 했다. 늙은 몸이 직접 움직여야 겠느냐는 가리안의 호통에 못마땅한 표정이면서도 미기적미기적 움직이는 하츠키였다. “최초로 억지로 물질계로 소환되는 환수는 상당히 기분이 나쁜 상태가 된다네, 그래서 나오자 마자 미친 듯이 날뛰는 경우가 많지 미리 준비를 하고 있게나. 어떤 환수가 나올지 모르니 조심해야지.” 가리안 영주의 충고였다. 하츠키가 그리는 소환진이라는 것은 한자와 일본어 아랍어 같은 글자들을 조합해서 쓰는 것 같은 글씨들로 선을 이루어서 육망성 모양으로 만들고 그 육망성에 세 개의 원을 그리고 또 각 꼭지점에 이상한 글씨들을 세기는, 정말 복잡하고 정신없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외워서 그리려고 해도 안될 것 같은 모양이었다. “허허, 여기 마법사들도 있어서 노파심에 하는 이야기 인데, 소환진은 때와 장소, 그리고 숨겨진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고 또 그리는 사람의 기운을 더하는 것이니 모양만 흉내 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쓸데 없이 카피 주문 같은 것을 쓸 생각은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허허” 순간 쉬벡과 루나스가 움찔 했던 것은 무슨 이유였을까. 드디어 하츠키의 작업이 끝이났다. 하츠키가 가리안 영주에게 인사하고 옆자리에 서자, 가리안 영주가 마법진을 향해서 수인을 맺고 이상한 주문을 영창했다. 그러자 소환진 전체가 빛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준비하게 빛이 사라지면 환수가 나와 있을 것이네.” 순간, 눈을 마비시킬 정도의 빛이 소환진에서 뿜어져 나왔고, 나는 급히 기운을 끌어 올리며 소환진을 바라 보았다. “에게? 이게 뭐야? 이걸 때려야 하나? 이거 환수 맞아요?” 나는 지름이 20미터가 넘는 소환진 위에 놓여진 손바닥 크기의 환수를 보면서 물어보 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거 새(鳥)인거 같지?” 옆으로 다가온 넥스가 물어보는 말이었다. “아니다 이건 알이다.” 넥스의 말에 반박을 하는 유소. “무슨? 날개가 달려있잖아. 날개 달린 알이 어디있어?” 다시 넥스다. 나는 아직도 정신이 없는지 어리버리하게 있는 날개달린 계란(아니 좀 더 크다. 타조알보다는 좀 작은 것 같고 오리알 보다도 크고 그냥 손바닥 크기의 알에 날개가 달려있다. 눈도 있고 부리도 있다.)을 집어 들었다. “이보게 루탄군 그 녀석을 자네 환수로 삼으려면 귀속의 주문을 외우게나. 허허 하지만 그런 것을 어디에다 쓸지 모르겠군. 허허” 나도 좀 한심하기는 했지만 일단 반항을 하지 않으니 귀속의 주문을 외우고 빛의 인장을 심어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 사이에 녀석도 정신을 차린 모양인지 날개를 파닥거렸다. 하지만 내가 귀속의 인장을 새겼기 때문인지 도망을 가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것 참, 이런 녀석이 있다니. 이녀석은 뭐라고 불러야 하는거지? 이름이 있을 것 같은데. 야 너 말을 할줄 알아?” 나는 녀석을 보면서 물었지만 알이 무슨 대답을 하랴. 녀석의 입에서 나온 것은 예상하지도 못했던 맑은 새소리 였다. 뾰로롱 뾰로롱 뾰룡뾰룡 “우화 이녀석 울음소리가 아주 예쁘잖아. 정말 예쁜 소리네? 귀엽기도 하고. 하하 마음에 든다. 마음에 들어. 하하하” 하지만 일단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다. 가리안 영주도 처음보는 것이어서 이름을 알 수 없다고 했고, 이렇게 처음 보는 환수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냥 신계로 돌려 보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귀속의 인을 세겨넣은 나의 환수였기 때문에 다음에 소환을 하려면 이름이 필요했다. “그래 이름을 내가 지어주지. 어떠냐? 괜찮겠냐?” 내 물음에 들려오는 대답은 역시나 뾰료룡 뾰룡. “하하 그래 맘에 든단 말이지. 그럼 넌 이름을 란으로 하자. 란. 알처럼 생겼으니까. 이름은 란이다. 하하” 뾰로롱 뾰료롱 경쾌한 소리로 미루어 맘에 든다는 소리일 것이다. “자 그럼 이제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알려주겠네. 귀속된 환수에게 자네의 기운을 조금 불어넣었다가 다시 돌려받게.” 나는 내 기운을 약간 끌어 올려서 조심스럽게 란의 몸에 흘렸다. 그러자 내 기운이 란의 몸에 저항없이 흘러 들어갔다가는 다시 흘러 나왔다. 그런데 그 기운은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것이 되어서 단전으로 흘러 가지도 않고 몸 속을 떠돌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거 이 기운이 멋대로 움직이는데요? 어떻게 해야 하지요?” “그 기운이 바로 자네와 그 환수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일세. 그럼 이 주문을 외우게. 그리고 주문과 함께 그 기운을 움직이면 나머지는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일세.” 나는 가리안 영주가 시키는 대로 주문을 외우면서 기운을 움직였고 그 기운은 다시 아까 귀속 주문을 외울 때 처럼 손가락 끝으로 모여들었다. 나는 그 기운에 알맞은 수 인을 한참만에 알아낼 수 있었고 수인을 완성시키자 란이가 사라져 버렸다. “그 주문은 소환과 역소환을 하는 주문일세.” 가리안 영주의 설명이었다. “하지만 란이의 기운이 사라져버렸는데요? 어떻게 다시 부르지요?” “허허허, 환수를 소환하는 경우는 상관이 없지만 역소환을 하는 경우는 그 기운이 사라져 버린다네, 아마도 환수가 그 기운을 대가로 받아간다고 해야할까? 그런데 그 기운은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 다시 생성된다네. 그러니 그 기운이 생성되면 다시 소환이 가능해 지는 것이지. 허허 걱정말게 자네 같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정도의 기운이야 금방 회복이 될테니 말이야. 그리고 환수의 등급에 따라서 그 기운이 차이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네. 자네가 다시 아까의 그 환수를 소환 하는데 어느정도의 기운이 필요한지를 알 수 있다면 그 환수의 등급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걸세. 허허.” 그리곤 가리안 영주는 중급 환수를 불러오는 데 필요한 기운이라며 내 손을 잡고 기운을 불어 넣어 주었다. 물론 내 몸에서는 반발력이 생겼고 말이다. 그런데 가리안 영주가 중급 환수를 소환하는데 필요하다는 기운의 크기는 대충 중급 정령들을 소환하는데 필요한 힘보다 더 많이 필요한 정도였다. 환수는 소환한 후에는 소환자의 힘을 쓰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어떻게 보면 정령들 보다 더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요즈음은 정령들도 자기가 지닌 힘을 쓰는 경우가 많았고 특별히 힘을 쓰는 경우가 아니면 내 기운을 끌어 쓰는 경우가 별로 없기는 했지만 말이다. 뭐 일장 일단이 있는 거겠지 싶었다. 그렇게 대충 상황이 마무리 되고 우리들은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넥스와 유소, 쉬벡등과 함께 모인 자리. “쉬벡님. 그래 마법은 많이 훔치셨나요?” 우리들의 주된 궁금증은 바로 그것이었다. 얼마나 많은 마법 훔치기에 성공을 했느냐 하는 것. “흠흠. 그러니까 새로 알게 된 마법은 블링크, 스톤 엣지, 안티 매직 실드, 그리고 새미 메테오 등입니다. 그 중에서 새미 메테오는 8써클이라 간신히 마나 수식을 알아 내기는 했지만 사용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고, 나머지는 연습을 한다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블링크는 6써클, 스톤엣지4써클, 안티 매직 실드 7써클입니다. 다만 가리안 영주가 사용한 스톤 엣지는 새로운 수식을 첨가해서 대상을 따라가며 시속시간동안 일정 범위 안에서 연속되게 만든 것으로 7써클로 발전된 형태입니다. 대인 공격으로 만 들어지기는 했지만 조금만 손을 본다면 일정범위에 마법을 실현시키는 범위 마법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가리안 영주의 비행마법이 간결하고 쓸만 한 것 같아서 수식을 알아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이 마법들이 가능하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대략적인 것을 알게 된 것 뿐이니 앞으로 시행착오를 거치면 서 계속 연구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허허허 그래도 대단한 수확입니다. 특히 그 새미 메테오는 아주 많은 파생 마법들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허허허 이거 바빠지겠군요.” 아마도 정말 즐거운 모양인지 쉬벡의 말은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각 마법의 수식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온통 숫자로 점철되는 그 머리 아픈 이야기는 별로 듣고 싶지 않았다. “그건 그렇게 오늘 환수는 정말 아깝네. 상급 환수나 최상급 환수 같은 것이 나와서 루탄이 가졌으면 좋았을 텐데, 손바닥만한 날개달린 알이라니, 정말 아깝잖아.” 옆에서 투덜거리는 것은 유소였다. “뭘, 그래도 그 녀석 우는 소리가 얼마나 좋아. 애완동물로 놓고 키운다고 생각하면 좋잖아? 그런데 환수들도 성장을 하나? 그건 안물어 봤네? 내일 물어봐야 겠다. 그리고 오늘은 이만 자자. 하하 낮에 한바탕 뛰었더니 피곤하네.” 다음날 우리들은 조금 바빴다. 숙소 집사가 우리 일행 전부와 이번에 처음으로 왕을 뵙게 된다는 사람들(멕스와 하츠키, 그리고 가리안 영주의 떨거지 둘, 남 자치령주의 수행원 둘)은 예절을 배울 필요가 있다면서 궁중 예절을 가르친다고 우리들을 괴롭혔 던 것이다. 그나마 내가 연병장을 지토에게 깨끗하게 정리해 준 보람이 있어선지 다 른 사람들 보다는 덜 괴롭히는 것 같았지만. 왕을 처음 뵐 때는 열린 문을 통과해서 몇 걸음 지나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또 몇 걸음 걸어서 무릎을 꿇고 인사를 하 고 고개를 숙이고 왕의 말이 끝날 때 까지 기다리고.... 어쩌구 저쩌구. 거기다가 우리 일해의 명목상의 대장인 넥스는 왕에게 보고도 하고 질문에 답도 해야 한다면서 세세한 문제까지 배워야 했기 때문에 점심 식사가 끝나고 몇 차례 확인으로 집사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우리와는 달리 그 날 밤이 늦도록 잡혀 있어야 했다. 그리고 나는 그 오후의 시간을 정령들과 란이를 불러 놓고 숲에서 뒹굴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그저께 밤에 있었던 일 때문인지 이제 모두들 나를 주인님이라 부르지 않는다 이젠 루탄, 아니면 루탄님이다. 화아와 지토는 루탄이라 부르고 풍아 수와 광아는 루탄님이라 부른다. 녀석들은 정령계에 가서 최상위 정령들에게 상위 정령들이 가지는 능력들을 배워 왔다는데 그게 일종의 정령 마법이라는 것이었다. 먼저 화아는 불의 정령이라 불을 이용한 공격 마법이 가능하다고 했다. 종류를 보면 대인 공격을 위한 것으로 파이어 볼과 같은 낮은 수준의 것에서부터 수많은 불의 화살을 날리는 것이 있는가 하면 일정 범위를 불의 장벽을 막아 버리는 것도 있었고 일정 범위를 온통 불바다로 만들어 버리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역시 압권은 상급의 형태로 변신 한 상태에서 불의 검을 휘두르는 것이라는데 해 보라고 시켜볼 수는 없었다. 덕분에 내가 능력이 안되니 그런 거라는 핀잔을 들어야 했다. 그리고 수아는 공격 보다는 주로 방어 계열이었고 특히 상급이 되면서 치료가 가능해 졌다는 것이었다. 마법사들이 쓰는 힐과 같은 것이기는 했지만 상당한 힘을 쓰면 상급의 모습에서는 마법사의 리커버리 수준의 치료도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풍아, 풍아도 역시 화아처럼 공격 마법이 많았지만 화아처럼 공격 일변도는 아니었고 바람의 장벽 등 방어도 어느 정도 가능했다. 어떻게 보면 수비와 공격의 절 충형이라고 해야하나?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사람들을 빠르게 움직이게 하는 헤이스트 마법이 가능해 졌다고 한다. 지토, 지토는 말 그대로 방어 전문형. 물론 땅을 흔들거나 땅을 갈라서 대상을 빠트리는 것도 가능했지만 보통은 강한 공격을 흙을 이용한 장벽으로 방어하는 것이 주된 능력이었고 상급이 되면서 흙의 기운을 일정한 사람들에게 부여해서 방어력을 상승시키는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광아. 광아의 특수 능력은 암흑 계열의 마법이나 주술에 대한 방어와 공격이라고 한다. 쉽게 말하면 흑마법에 대한 무효화나 무력화가 가능하고 대상에게 축 복을 걸어서 흑마법에 영향을 받지 않게 하거나 일정지역을 보호하는 힘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격력도 상당히 향상되었는데 빛의 검을 이용한 공격은 날카로운 점이 그 어떤 것에도 비길 수 없다고 한다. 역시 상급정령 변신에서만 가능하다고 해서 볼 수는 없었다. 그렇게 자기들이 얻은 능력에 대해서 이것 저것 이야기하면서 주위에서 조잘거리고 날아다니고 어깨에 올라타고 하는 정령들의 모습이 너무나 보기가 좋았다. 또, 란아. 이 녀석은 소환하는데 상당히 많은 기운이 필요한 녀석이었다. 중급 정령을 불러내는 것 정도의 힘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역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뾰로룡 뾰롱 뾰료료룡 하는 울음소리와 파닥거리며 날아서 따라 다니는 정도가 전부였다. 그리고 가끔은 어깨위의 자리를 놓고 풍아와 실랑이를 벌이는 정도. 어쩐지 수아와는 별달리 마찰이 없는데 풍아와는 상당히 티격태격이다. 그래봐야 언제나 풍아에게 밀리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불쌍하니까 너무 괴롭히지 말라고 풍아게 주의를 줄 정도였다. 마스코트가 하나 생겼다고나 할까? 그리고 이 녀석은 역소환을 시키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옆에서 붙어있을 모양이다. 그런데 뭘 먹여야 하는 건지. 란이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오후의 한 때를 정령들과 란이와 보내고 저녁 식사 시간에 가리안 영주에게 환수를 역소환 시키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물었는데 환수도 먹어야 살기 때문에 너무 오래 소환해서 두면 시들시들 병들어 죽고 말거라고 했다. 그리고 환수가 무엇을 먹는 지는 환수들 마다 다르다고 했다. 예를 들어 전에 대화신이 화령을 먹었던것 처럼 그렇게 환수들 끼리 잡아 먹기도 하고 또는 신계의 열매들을 먹기도 하는데 란이의 경우는 처음보는 환수여서 알 수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환수와의 대화에 대해서 물어보자, 환수 중에서 물질계에서 대화가 가능한 경우는 상급환수부터 가능하지만 그것도 묻고 대답하는 단편적이 정도라고 한다. 즉 의지를 가지고 대화를 하는 경우는 아직 경험해 보지 않아서 알 수가 없다고... 뭐 거의 정령들과 다를 바가 없는 모양이었다. 정령들도 중급에서는 단편적인 대화만 가능했으니까. 그러니까 상급환수는 중급정령과 비슷한 수준의 대화가 가능하다는 말 같았다. 그런데 란이는 중급 정도의 기운이 필요하니까 중급 환수 정되 될 것이고 그러니까 대화를 하는 것은 어렵다는 말이 된다. 히휴~~ 하는 수 없는 문제다.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나 새가 말하는 것 봤나? 애완 동물로 생각하면 되는 것이지. 또 하루 그렇게 날이 저물었다. 그리고 이틀이 흘러 드디어 왕을 만나는 날. 아침부터 수선을 떨면서 복장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나는 내가 가진 최고의 정장을 준비했다. 아래위로 하얀색의 이름모를 배얌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옷. 사실은 수도에와서 창고에 있던 가죽으로 다시 옷을 만들었다. 뭐라더라, 그래 예복이라는 것이라는데 예저에 결혼식에서 신랑이 입는 옷과 비슷해 보였다. 그 동안 입고 다니던 것도 괜찮았지만 그래도 왕을 만나는 날이라는 생각에 새 옷을 입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솔직히 아래 위로 하얀색으로 만들어진 옷에 백금색의 단추가 달린 모습은 정말 내가 보기에도 한 멋 하는 모습이었다. 카카카 넥스도 쉬벡도 정장을 입은 모습이 딴 사람으로 볼 정도로 잘 어울렸고, 특히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유소가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었다. 붉은 색이 주를 이루는 드레스는 끝단을 옅은 하늘 색으로 대었는데 유소의 붉은 머리카락과 아주 잘 어울렸다. 거기에 전에 노옴에게 받았던 목걸이를 걸고 있었는데 신비로운 빛이 흘러 나와 그 모습을 한층 더해 주고 있었다. 외성에서 내성으로 들어가는 길도 한참이나 되어서 마차를 타고 가야 했는데 우리가 외성이라 생각했던 곳은 정말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한참을 더 가서야 내성의 입구가 보였고, 이미 연락이 되었던 모양인지 가단한 서류확인만 하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내성안에서는 마차를 타고 다닐 수 있는 사람이 왕족으로 한정되어 있었던 까닭에 우리들도 걸어서 움직여야 했다. 그리고 내성에서도 왕궁 본체에 도착한 것은 한참이나 걸어서 이동한 후의 일이었다. 왕궁 본체는 그리스 신전과 이슬람 사원의 모습을 합쳐 놓은 것 처럼 보였고, 대리석과 비슷한 돌로 지어져있었다. 웅장하다는 말로는 모자랄 정도로 거대한 입구는 두꺼운 나무와 금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문은 밖으로 활짝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 문을 통해서 들어선 복도도 한참을 걸어서야 왕의 알현실에 도착했다. 이미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복도에 서성이고 있었는데 아직 왕이 알현실 안에 도착을 하지 않아서 알현식이 시작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와중에도 안면이 있는 사람들은 1년 만에 만나는 반가움을 나누으라 분주했고, 또 그들을 수행하는 사람들도 가끔은 안면이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지 조심스럽게 인사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중에 여자는 몇 되지 않았는데, 거의가 마법사거나 아니면 인솔자들의 인척인 듯 싶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유소만이 실력으로 이 자리에 있다는 말이 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중에 타호루 일행이 들어서고 있었다. 타호루 일행에는 보지 못했던 여자가 한 명 끼어 있었는데 조금은 피곤해 보이고 병색이 있는 모습이었다. 나이는 스물이 체 되지 않은 것 같았 옅은 하늘색의 수수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갈색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고 있었고, 얼굴은 병색이 짙은 모습임에도 눈이 커질 정도로 예쁜 얼굴이었다. 큰 눈동자와 시원스런 이마, 그리고 오똑한 코와 작고 도톰한 입술, 내가 비록 수아와 풍아 때문에 눈이 높아지기는 했지만 그 여자도 상당히 예쁜 얼굴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 증거로 지금까지 수선스럽던 복도가 그 아가씨의 등장으로 제법 조용해진 것을 들 수 있겠다. 역시 남자들의 공통 관심사는 예쁜 여자라는 것인가? 하하 하지만 나는 그 여자가 남 자치령의 소령주라는 데에 더 관심이 있었다. 특히 그 여자가 전에 죽은 괴물들을 다루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 것인지가 더 궁금했던 것이다. 하지만 옥의 티라고 해야 하나? 그 여자의 얼굴에는 한 겹 얼음이 덮혀 있는 것 갔아서 쉽게 사람들과 가까워 질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렇게 남 자치령의 일행 뒤로 얼마간 사람들이 더 들어왔고 그 이후로는 더 이상 새로운 사람들이 등장하지 않았다. 어디선가 나팔소리가 들리고 드디어 알현실의 문이열렸다.알현실의 문은 복도가 끝나는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었으므로 알현실 문이 열렸다고해서 왕의 모습을 볼수 있는것은 아니었다. 알현실의 문이 열리는 순간 순식간에 왕궁 안내원 같은 사람이 작은 목소리로 알현순서에 따라서 사람들을 불러서 세웠는데 의외로 헤이스런가문과 선드라스가문을 다음이 우리 일행의 차례였다. 때문에 헤이스런 가문에 대한 호명다음에 선드라스 가문에 대한 호명이 있었고 곧이어 알현실 안에서 “동 자치령의 공물과 령주를 대리하는 사람들입니다.” 라는 소개 말과 함께 우리 일행이 알현실로 들어섰다. 들어가서 다섯 걸음 그리고 간단한 묵례(고개는 높이 들지 말 것) 그리고 다시 열 걸음을 걸어서 깊이 묵례를 하고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왕의 말을 기다린다. 이 때 넥스가 손을 받쳐든 공물 목록은 몇 사람의 손을 거쳐 왕 옆에 있는 어떤 인물의 손으로 전달되고 그 것을 왕에게 보였는지 어쨌는지 모르지만 일단 왕이 본 것으로 한다. 참 여기서 유소는 여자이기 때문에 무릎을 끓지 않고 고개만 숙이고 있는다. 결국 넥스가 앞에 나와 쉬벡 그리고 유소가 뒤에 있는 모습으로 유소를 제외하고는 모두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직 왕은 얼굴도 못봤다. “어서들 오시오. 먼 길에 수고가 많았소. 이야기를 들으니 이번 일정에서 죽은 사람은 하나도 없이 그 험한 길을 열고 왔다고 들었소. 정말 장하고 기특한 일이오. 그대들의 노고를 치하하오.” 왕의 목소리는 의외로 젊은 편이었고(늙은 할아버지를 예상했는데 40대 정도로 들리는 목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왕이 어떤 사람인지 물어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다.) 힘이 있으면서도 잔잔한 목소리였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넥스의 의례적인 감사 인사가 끝나고 우리들을 곧 다시 일어나 깊은 묵례로 예를 차리고는 옆으로 자리를 옮겨서 왕의 오른쪽 앞쪽 자리(헤이스런 가문 사람들 다음자리) 에 섰다. 물론 얼굴은 들지도 못하고 있었다. 뻐근하다. 하지만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 이후로 서, 남, 북 영주가 각각 인사를 하고 그 이후로 4대 영주들이 인사를 하고 또 4대 영주 밑에 있는 작은 똘마니 영주들이 인사를 하고 왕의 치하가 이어지고,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왕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싶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얼굴을 빤히 들 수도 없는 노릇이라 답답하고 목은 아프고 그래서 결국 발광직전까지 갔을 때, 왕에 대한 알현이 끝나고 왕이 전체를 치하하는 순서가 되었다. 어디서나 이런 때에는 차렷 자세에서 열중쉬어가 되는 것이 순리이다. 그래서 인지 왕은 이야기의 처음을 이렇게 시작했다. “자 모두들 고개를 드시오. 드디어 내일이 이 왕국의 2000년 건국 기념일이오. 역사가 분명하게 기록되어 우리 왕국의 건국일을 알 수 있는 것에 다시 한번 기꺼움을 느끼는 바이오. 내일 건국 기념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 이렇게 어려운 걸음을 해 준 여러분의 노고에...” 어쩌구 저쩌구... 왕의 치하가 시작되면서 나는 왕의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예상했던(늙은이의 모습) 모습은 전혀 아니었고, 그렇다고 학자같은 모습도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한 자 루 큰 칼을 손에 들고 대군을 호령하는 장군이 어울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왕의 치하에 관심이 없었기에 그저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하 역시 이렇게 떠들고 있는 것은 별로 좋지를 않군요. 다들 지루해 하는 표정입니다. 하하. 그럼 쓸데 없는 말은 이쯤에서 그만두고..” 갑작스런 말 때문이었을까? 옆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늙은 집사같은 사람이 다급하게“폐하, 이러시면..” 이라고 말려 보려곤 했지만 괜히 왕이 아닌 모양이었다. 간단하게 무시하는 것으로 무마시키곤“자 이제 연회장으로 자리를 옮기기로 하지요. 그 곳은 여기보다는 분위기가 좋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그렇게 말을 맺고 말았다. 덕분에 알현장에 있던 대군들이 왕을 따라서 알현장의 복도를 달려가는 웃지 못할 사태가 벌어져 버렸고, 연회장에 도착한 왕은 입고 있는 옷이 거추장스럽다며 잠시 옷을 갈아 입고 온다는 말과 함께 연회를 재미있게 즐기라는 인사를 하곤 사라져 버렸다. 만약에 연회를 즐기라는 말이 없었으면 모든 사람들은 왕이 옷을 갈아입고 올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연회장에는 조용한 음악이 흐르고 사면 벽을 따라 세워놓은 테이블 위에는 갖가지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시종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여기 저기서 음식 시중을 들고 있었고, 곧이어 연회장의 다른 문이 열리고 수많은 여자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무슨 여자들이 이렇게 많이 들어오는 거야? 어디서 불러온 여자들이래?” 나는 갑작스런 여자들의 출현에 놀라는 소리를 했고 옆에서 있던(언제 왔는지 모르겠 다.) 멕스가 참견을 했다. “무슨 여자는 무슨 여자, 다들 한 재산하고 한 집안 하는 여자들이야. 왕의 알현이 소수에게만 허락되니까 다들 이곳 연회장에서 기다리다가 자연스럽게 합류하는 것이지. 대부분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데리고 온 인척들이야. 이런 자리에서 멋진 남자를 사귀고 싶은 것은 모든 여자들이 꿈꾸는 낭만이니까 말이야. 물론 그건 남자들도 마찬가지지. 어쩌다가 귀족과 연을 맺으면 얼마나 좋겠어? 특히 4대 영주나 헤이스런가문 선드라스가문 그리고 나같은 거의 세습에 해당하는 가문의 실세를 잡으면 그야말로 행운을 잡은 것이라고나 해야할까? 어? 내가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고? 그거야 여기 오기 전에 할아버지랑 아버지가 조심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면서 알려 준 거니까 알지. 하하” 결국에 이 세계도 귀족들이 비록 1대에 한하는 것이라고 해도 2000년이나 지나는 동안에 이런 면들이 생겨났던 것이다. 사실 능력이 있어서 귀족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렇게 인맥으로 얽혀서 고위직에 올라 앉고 또, 귀족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아. 예전에 민주주의 한국에서도 돈 있고 권력 있는 놈들끼리 모여서 몰려 다녔던 것 처럼 여기도 그런 모양이었다. 특히 돈은 개인 재산으로 자연스럽게 세습되는 것이니 금력이 곧 권력과 이어지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여기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한 재산 한 권력 한 인맥 하는 사람들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나마 자치령의 경우는 좀 다를까 했더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북 자치령은 거의 피를 통해 유전되는 능력으로 령주가 되고 서 자치령도 환수를 부리는 능력에 따라서 령주가 되는 모양이고 남 자치령 역시도 이미 소령주가 있는 것으로 봐서 귀족의 직위가 세습되거나 전대 귀족의 힘으로 차기 귀족이 결정되는 추세가 확실해 보였다. 그럼 동쪽 자치령도 그럴까? 전에 듣기로는 지금의 자치령주는 몇 년전에 괴물들이 한꺼번에 단합을 했을 때 그것을 무난히 해결해서 령주가 되었다고 했는데... 그러고 보니 누가 령주를 선출하는 것이지? 자치령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투표를 하나? 하하 정말 갑자기 복잡해 졌다. 하긴 내가 그런 것까지 신경을 써야 할 필요는 없지 싶다. 나는 북적거리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한 쪽 구석 벽을 따라서 길게 놓여진 의자에 앉아서 유리컵에 담긴 음료수를 홀짝 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그러고 있자, 곧 넥스가 다가왔고 그 옆에 유소가 와서 앉았다. 또 쉬벡이 유리컵을 들고 다가오고... 사실 우리들이야 여기 알고 있는 사람들도 없었고, 우리들이 잘 보이고 싶은 사람들도 없었다. 나로 말하면 더더욱, 힘있고 돈있고 떼로 몰려 다니는 놈들 중에 쓸만한 놈은 별로 없고, 썩은 놈들이 많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어울리기 싫었다. 그렇게 우리끼리 말없이 앉아서 음료수나 간간히 비우고 있을 때, 멕스가 어디에 갔다가 왔는지 갑작스레 나타났다. “이런 이런 한참 찾았잖아. 역기서 뭘하는 것야? 이런 자리에 왔으면 즐겨야지. 예쁜 아가씨들도 많은데 뭐 하는 거야?” 아주 신이 난 모양이었다. 여기 저기 눈오는 날 강아지 처럼 돌아다녔던 모양이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의 주위에는 그의 관심을 끌어 보려는 아가씨들의 은근한 눈빛이 따라 다니고 있었다. 적어도 북 자치령의 영주가 될 신분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이유로 멕스가 가까이 오는 것이 싫었다. 멕스 덕분에 나까지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었다. “이봐 멕스야,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그러니까 될 수 있으면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가까운척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조금은 싸늘하게 멕스에게 충고를 했는데, 전에 내가 차갑게 말했다가 대련이라도 하자면서 달랜 이후로는 이 녀석이 내 성격을 다 알았다는 듯이 내가 어떻게 대해도 막무가네로 다가온다. 쉽게 말하면 대책이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오늘은 내 입장을 이해했는지 쉽게, 웃으면서 알았다는 말과 함께 멀어졌다. 어쩌면 저 녀석 여자들에 더 관심이 있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멕스가 다른 곳으로 가 버리자, 우리 일행은 마땅히 할 일도 없었다. 그렇다고 연회장에서 마음대로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언제 왕이 와서 누구를 찾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우리 일행의 위치가 상당한 것 같았기 때문에 더더욱 우리들은 연회장을 뜰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조용히 란을 소환했다. 날개 달린 알, 혹은 껍질을 깨지 못한 새 처럼 보이는 란이는 크기가 작았기 때문에 그렇게 눈의 뜨이지도 않았고, 소환되면 내 어깨위에 올라 앉아서 다른 곳으로는 날아 가지 않았기 때문에 걱정도 없었다. 다만 연회장에 울리는 음악을 생각 못한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일까. 처음에 소환되어 와서는 주위 분위기에 적응을 하지 못하는 것 같더니, 곧 잔잔히 울리는 음악 소리를 들었던지 음악에 맞추어 울어대기 시작한 것이다. 뾰롱 뾰로롱 로롱 뾰로로롱 뾰뵤롱 ~~ 란이의 울음소리는 음악소리처럼 잔잔했고, 또 음악과도 멋진 조화를 이루었다. 그리고 그 소리가 크기 않았기 때문에 나는 느긋한 마음으로 의장에 기대어 눈을 감고 어깨에서 들려오는 란이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조용히 듣고 있으면 마음을 안정시켜 주면서도 즐겁고 행복한 느낌을 주는 소리였다. 그렇게 한동안 란이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던 나는 주위가 조용해 진 것을 깨닫고 눈을 떴다. 순간 나는 몸을 바짝 경직시켰고, 란이도 그 때문에 놀랐던지 노래를 멈추었다. 우리 일행 주위에 사람들이 잔뜩 몰려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더해서 왜 왕이 내 앞에 서 있는 것이냐고, 왕은 서 있고 나는 그 앞에 눈을 감고 앉아 있었으니...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황공하옵니다. 미처 폐하께서 오신 것을 모르고 추태를 보였습니다. 너그럽게 용서를...” 속으로야 닭살이 돋는 맨트지만 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말이다. “하하 그것이 어찌 그대의 잘못인가, 내가 그대 모르게 온 것을... 그건 그렇게 그 이상하게 생긴 동물은 무엇인가? 아주 아름다운 소리를 지니고 있구만 그래.” “저 그것이, 이 동물은 환수이옵니다. 이름을 몰라 그냥 란이라 부르오나 정식 이름은 아니옵고 제가 붙인 이름입니다.” “호오, 환수라. 그렇군. 그런데 보통 환수는 싸움에서 사용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란인가 하는 환수로 그러한가?” “아니옵니다. 보통 환수를 소환하여 귀속시켜 자신의 환수로 만드는데 저는 우연찮은 기회로 서 자치령주의 호의를 입어 한 마리 환수를 소환하여 제 소유로 할 기회가 있었사온데 그 때 나온 환수가 란이옵니다. 특이한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옵고 그저 애완동물 처럼 데리고 있사옵니다.” “허~ 그래? 그것 참, 소리가 곱다 싶어 짐에게 줄수 없겠느냐 물어보려고 했더니 불가능하겠구만 그래. 내 알기로 일단 귀속된 환수는 양도가 되지 않는 것으로 아니 말일세. 하하 그럼 대신에 그대는 그 란으로 하여금 오늘 이 자리에서 즐거이 노래를 하도록 하게.” 왕은 아무래도 내가 란이에게 노래를 부르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사실 소신이 란이에게 무엇을 시킨 바가 없어서 그런 것이 가능할지 모르겠사오나 성심껏 시켜 보겠사옵니다.” 나는 어깨 위에 주눅든 모습으로 앉아있는 란이를 내려다 보며 말했다. “란아, 폐하께서 네 노랫소리를 듣고 싶어 하시는데 노래를 불러 주겠니? 사람들이 모두 들을 수 있게 좀 더 큰 소리로 이왕이면 즐거운 노래로 말이다. 할 수 있겠니? 부탁한다.” 내 말이 끝나자 란이의 입에서는(이건 부리지 입이 아니다.) 아까 같은 노래가 흘러 나왔다. 다만 조금 빠르고 경쾌한 느낌을 주었고, 그 소리는 봄날 햇빛 속에 떨어진 빗방울이 도르륵 풀잎위를 굴러가는 환상을 보였다. 그리고 그 물방울들은 수천 수만 빛의 방울이 되어 연회장 안을 굴러 다니는 것이었다. “허허 자, 그럼 이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어야 하지 않겠나? 자 모두들 연회를 즐기시오.” 그리곤 왕은 옆의 왕비의 손을 잡고 연회장 가운데로 나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춤을 시작으로 궁중 악사의 음악이 시작되었는데, 그 음악은 절묘하게도 란이의 노랫소리와 어우러지고 있었다. 어쩌면 란이의 노래가 그 춤곡에 어울리고 있는지도 몰랐지만 말이다. 그 이후로 란이는 환수답게 쉬지도 않고 늦은 시간 왕이 연회장을 떠날 때 까지 노래를 계속했다. 물론 왕은 자리를 떠나면서 연회에 자주 참석하라는 인사를 남기고 갔다. 아마도 나는 이번 건국기념 연회가 끝나는 날까지 빠짐없이 연회에 나와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늦게 연회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의외의 소식을 전해 받았다. 왕의 배려로 우리들의 숙소가 내성으로 옮겨졌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그날 밤으로 옮 겨야 했기에 우리들은 부랴부랴 짐을 들고 내성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리고 우리의 숙소는 연회장의 바로 옆이었다. “이봐 루탄 이건 아무래도 순전히 네 탓인 것 같다. 여기서는 마음대로 돌아다니지도 못한단 말이다. 그리고 넌 앞으로 매일 연회에 참석해서 악사 노릇을 해야 하겠구나. 니가 좀 불쌍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까지 이런 상황으로 만든 책임을 느껴야 하지 않겠냐?” 쿵. 말이 끝나는 순간 내 머리에서는 불이 났다. 뭐겠는가? 원한에 사무친 넥스의 주먹이지. 사실 유소나 쉬벡도 못마땅한 표정이기는 했지만, 일단은 엎질러진 물이었다. 하하하 그 다음날부터의 일정은 별로 소개하고 싶지 않다. 모든 사람들과 격리된 상태에서 연회가 열리면 연회장에 갔다가 연회가 끝나면 숙소로 돌아오는 것이 전부였던 것이다. 심지어 건국 기념식에도 참가를 못했다. 왜냐하면 어떻게 가야 하는지를 몰랐던 탓이다. 물론 우리 일행이 기념식에 참가 하지 못한 이유가 참석하는 방법을 몰라서였다는 것을 안 왕이 궁중집사에게 한 소리를 하기는 했지만 그건 내가 알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렇게 왕성에만 있어야 하는 까닭에 오후부터 열리는 연회를 기다리면 빈둥 거리는 생활이 지겨워지면서 한편으로 도성에서 열리는 축제 분위기에 참가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더 커져서 가끔씩 쏟아지는 비난의 눈초리와 넥스의 증오에 쌓인 주먹을 견뎌야 했다. 그리고 결국에는 궁중 책임자에게 부탁해서 연회에 늦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도성의 축제를 구경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 오는 임무가 나에게 맡겨졌고, 그 임무는 참으 로 다행스럽게도 성공적으로 완수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아침을 먹자 마자, 내성문으로 달려가 출입증을 보이고 곧장 달려서 외성문을 나서고 있었다. 중간에 예전 숙소에 들러서 인사라도 할까 하다가, 생각해 보니 매일 연회에 나타나는 인물들에게 따로 인사를 할 필요가 없겠다 싶어서 그냥 무시했다. 뭐 연회장에서도 별로 인사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기는 하지만 말이다. 축제가 시작된 성도는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물건을 사고 파는 것도 있었지만 무슨 이벤트들이 그렇게 많고 시합도 또 그렇게 많은지... 술마시기부터 시작해서 팔씨름, 다트 던지기, 궁술시합, 검술 시합 등등 아무튼 가지가지의 이벤트나 시합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대부분 그 결과가 밤에 나올 도로 참석자가 많았고, 우리는 시간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것 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워하고 있었다.(사실 평균 나이로 따지면 30대 중반이 될 나이에 이러고 다니는 것도 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어쩌겠는가 저렇게 즐겁게 웃고있는 넥스와 유소, 쉬벡의 얼굴을 보고는 도저히 말릴 수가 없으니 말이다. 하하하) “어? 저기 저 사람 남 자치령의 수비대장인가 하는 타호루란 사람이잖아? 그리고 저 사람은 소령주인가 하는 그 사람인 것 같은데?” 길거리에서 파는 꼬치를 한 입 물고 즐거워하던 넥스가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는 듯 이 손가락을 들어 가리키며 말했다. “음. 정말이네? 저 아가씨 소령주라는 그 사람 맞네.” 유소가 덩달아 확인하고 나섰다. “왠일이야? 저 얼음여왕이 이런 곳에 다 나오고? 거기다가 표정도 많이 풀려 있잖아? 저렇게 웃으니까 얼음같을 때 보다는 훨씬 나아보이네.” 넥스가 다시 소령주쪽을 보면서 주절거렸다. “무슨 소리야? 그럼 나보다 났다는 말이야?” 헉!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순간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독기를 품고 넥스를 노려보는 유소와 붉어진 얼굴로 버벅거리는 넥스였다.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지. 어떻게 유소보다 예쁠 수가 있겠어. 당연히 유소가 제일 예쁘지 그럼. 야 루탄 안 그러냐? 저 소령주 보다는 당연히 유소가 예쁘지 그지?” 여전히 나는 경직 모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지만 요란하게 머릿속에서 넥스의말에 동조하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간신히 대답을 할 수 있었다. “그럼 당연히 유소가 더 예쁘지 그럼, 그렇게 말고. 당연한 걸 왜 물어.” 나는 이 순간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회의가 들기는 하지만 왠지 이래야 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넥스와 유소의 사이가 이렇게나 진전이 되어 있었던 것인가? 뭐 따지고 보면 거의 반년동안 같이 지내고 있고, 처음부터 넥스는 유소에게 관심이 있었다고 했고, 아직도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유소가 우리들의 청색지대 탐험에 따라 온 표면적인 이유도 넥스를 놓치기 싫어서 였으니 이런 발전이 새삼스러울 것은 없겠지만, 왠지 닭살이 돋는 느낌이다. 아무튼 우리 일행은 남 자치령의 소령주가 있는 쪽으로 발을 옮기고 있었다. “하하, 이거 반갑습니다. 타호루씨. 가끔씩 연회장에서 뵙는데도 제대로 인사를 나눌 틈이 없었습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지요?” 서글서글하게 인사를 건넨 것은 역시 넥스였다. 그리고 우리들도 따라서 간단하고 의례적인 인사말을 건넸다. 하지만 소령주라는 아가씨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우리의 인사를 받아 넘겼고, 나는 무슨 까닭인지 그 소령주라는 아가씨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걸 혹시 피해의식이라고 하는 건가? 소령주 얼마나 선택받은 이름인가 말이다. 내가 예전부터 서민으로만 살아봐서 이렇게 선택받은 것 같은 사람을 보면 왠지 거부감이 생기는 모양이다. “그런데 여기서 뭘 하고 계십니까? 무슨 좋은 구경거리라고 있나요?” 넥스가 다시 넉살 좋게 다시 말을 붙이고 있었다. “하하, 소령주께서 나와보자고 하셔서 나오기는 했습니다만 이게 영 안되네요. 하하” 나는 슬쩍 소령주 일행이 있는 건너편을 보았다. 그리고 왠지 모를 오한이 등골을 스치고 지나 가는 것을 느꼈다. 여러분, 내가 제일 하기 싫은 게임이 있다면 그건 무엇일까요? 짐작하는 분도 계시겠지요. 그건 바로 다트게임입니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게된 원인이 바로 이 다트게임이지요. 그런데 거기에 더해서 지금 분위기가 소령주가 그 다트를 하고 있는 것이고 또한 다트의 선물로 나와 있는 것이 인형이라는 아주 웃기지도 않는 분위기라면, 제가 어떤 기분인지 여러분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단호하게 돌아서서 가는 것도 별로 내 잘못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고 말이죠. “어, 어? 루탄 어디로 가는거야? 이봐, 아직 이야기가 안 끝났단 말이야. 그리고 너 이거 아주 잘 할 수 있잖아. 내가 아는데 너 이거 하면 무조건 선물 받을 수 있지? 그지? 그러니까 한 번만 해 봐라. 응?” 뒤에서 부르는 넥스의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넥스의 말을 옮겨 놓았는지 묻지 마라. 다친다. “정말, 루탄님이라면 이 선물을 받을 수 있는 겁니까? 정말이요?” 괜히 흥분하는 타호루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나는 그냥 계속 발을 옮긴다. “저기 루탄님이라고 하셨나요? 저기요? 잠깐만요.” 이러면 안되는데...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려 세워야 한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여기에서 그냥 모른척 하면 나중에 숙소에서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 “무슨 일이시죠? 소령주님?” 나는 될 수 있으면 딱딱한 목소리를 내었다. 차갑게만 보이던 소령주의 얼굴이 지금은 빨갛게 물들어 있다. “저기 그러니까, 저기요. 저거 하나만 따 주시면 안될까요? 저거 가지고 싶은데 아까부터 해도 안되네요. 타호루 아저씨도 단검이나 데거 종류의 무기는 잘 던지시는데 왜 그런지 이건 잘 못하시네요.” 그럴리가 없다. 대거나 단검을 잘 다루고 검술에 능한 사람이 이런 다트를 못할 수 가 없는 것이다. 아마도 타호루란 저 사람은 인형을 소령주에게 선물하는 것 보다는 이런 조바심과 긴장을 선물하는 것이 이런 축제에서 가장 좋은 선물이라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그리고 끝에 가서는 가지고 싶은 인형을 얻게 되는 기쁨도 선물할 것이다. 나는 천천히 다트 이벤트를 하는 곳으로 다가가면서 타호루만 들릴 정도로 낮게 물었다. “내가 성공하기를 바랍니까? 아니면 실패하기를 바랍니까? 당신의 소령주에게 직접 선물을 해서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으실 텐데요?” 순간 타호루는 흠칫하는 기색이었지만 곧 등을 돌려 외면하며 입을 열었다. “그 기쁨을 누가 주던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리고 루탄님께서 그 기쁨을 주시면 축제에서 피어나는 사랑, 뭐 이런 낭만적인 꿈도 함께 선물 할 수 있을 것도 같으니 좋겠지요. 물론 나중에는 한 때의 즐거운 기억으로만 남겠지만...” 나는 그쯤에서 타호루의 바람을 들어주기로 했다. 다트를 던지고 선물을 따고, 선물을 소영주에게 주고, 그 이후로 여기 저기 함께 어울려 다니며 녹아내린 얼음 공주의 얼굴을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오랜만의 도성구경은 끝이 났다. 그리고 외성을 거쳐 오면서 헤어질 때, 소령주의 표정은 다시 얼음공주로 돌아가 버렸지만, “오늘 정말 즐거웠어요. 그리고 루탄님 이 인형 고마워요.” 라는 인사말을 할 때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어서 하루종일 함께 있었던 사람이라는 느낌을 가지게 해 주었다. 그리고 그 날 밤 연회에서 그 얼음 공주는 우리 일행이 있는 곳으로 찾아왔다. “여전히 여기 계시네요. 그리고 아름다운 노랫소리도 여전하고 말이죠. 저 여기에서 루탄님과 이야기 좀 해도 되죠?” 그렇게 다가온 소령주는 내 옆에 와서 앉았다. “루탄님은 별로 말씀이 없으신가 보내요. 저도 원래 말이 없는 편인데, 그래도 그냥 이렇게 있으면 어색하지 않으세요?” 아마도 이 소령주라는 여자는 평소 이렇게 먼저 말을 걸거나 하는 일이 별로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말이다. 이것도 타호루란 인물이 예상한 그 축제의 낭만적 사랑이라는 것의 연장이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네, 특별히 할 말이 없을 때는 입을 다물고 주위를 구경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 하거든요. 그리고 소령주님께서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이름이라도 알려 주시는 것이 좋을 듯 하군요. 계속 소령주님이라고 부르기를 원하신다면 몰라도 말이죠.” “어머 그렇네요. 제 이름을 아직 모르시겠네요. 제 이름은 이루비아라고 해요. 이루비아 리르몬. 그냥 이루비아라고 불러주세요.” 이루비아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이름을 알려 주었다. “이루비아,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이루비아님과 잘 어울리는 이름인 것 같으네요. 그 미모에 딱 맞는 이름인 것 같습니다.” 나는 내 느낌을 솔직하게 이야기 했다.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가만히 계시면 심심하지 않으세요?” “별로 심심하지는 않습니다. 가끔씩 레이디들을 살피기도 하고 란이의 음악을 듣기도 하고 사람들의 모습을 보기도 하고, 그리 심심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솔직히 밖에 있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못 견딜 정도로 심심하고 따분하고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머 루탄님도 레이디에게 관심이 있으셨어요? 제가 알기로는 어떤 레이디에게도 관심을 보이지 않으신 것으로 아는데요?” 이루비아는 놀랍다는 듯이 커진 눈동자를 하곤 물었다. “하하 실제로는 여성분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들이 입고 있는 옷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루비아님 제가 입고 있는 이 옷 어떻습니까?” 이루비아는 내 모습을 찬찬히 훑어 보더니 말했다. “글쎄요. 루탄님에게 아주잘 어울리는 옷이네요. 제질이 아주 특이한 것 같지만 뭔지는 모르겠고요.” “하하 고맙습니다. 잘 어울린다니 다행이군요. 그런에 이 옷의 재료 말입니다. 그게 아주 특별한 것이거든요. 그런데 예전에 제가 이 옷의 재료를 옷을 만든 대금으로 준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이 언젠가는 그 재료로 만든 옷이 왕궁의 연회에서 주목을 받게 될 것이라고 장담을 했었거든요. 그래서 혹시라도 그 옷이 나오지 않을까 하고 레이디들을 살피는 것입니다. 하하 특별히 레이디에게 관심은 없지요.” 그제서야 이루비아는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았다는 표정으로 환히 웃었다. 그건 내가 다른 여자에게 관심이 없어서 다행이라는 웃음이 아니라 궁금증을 풀어서 좋다는 웃음이었다. 그런데 내가 왜 이 여자의 웃음에 대해서 이러저러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지... 나는 다시 표정없는 얼굴로 돌아왔다. “루탄님 제 별명이 뭔지 아세요? 제 별명이 얼음공주라던데 아세요?” 그거야 물론 알고 있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걸 알고 있을 것이다. 남 자치령의 차기 령주로 내정된 소령주가 여자인 탓에 여러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것은 당연했던 것이다. 오히려 그 때문에 더욱 그런 별명이 붙게 된 것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만약 주목 받지 못하는 여자가 그런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면 그저 왕따를 당해서 한 구석에서 찌그러져 있는 것으로 끝났지 그런 별명 따위를 지어줄 이유가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래요? 별로 잘 어울리지 않는 별명인 것 같군요. 그다지 차갑게 보이지 않으니 말입니다.” “그래요? 사실은 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이렇게 말하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얼음처럼 차갑다는 소리 많이 듣거든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루탄님의 표정이 저보다 더 차갑고 딱딱한 것 같아요. 우리 둘이 이렇게 나란히 앉아서 무표정으로 있으면 완전히 연회장에 눈보라가 몰아치지 않을까요? 호호” 누가 이루비아에게 얼음공주라는 말도 안되는 별명을 붙인 것일까? 이렇게 혼자 웃고 떠들고 하는 여자에게 말이다. 하지만 나는 별로 그렇게 웃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비록 예의를 지키느라 대꾸를 해 주고 있기는 했지만 별로 이득이 될 만한 이야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한담을 나누고 있자니 짜증이 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솔직히 이렇게 예쁜 여자가 가까이 와서 말을 걸고 호감을 표시하면 좋아해야 할 일이겠지만, 여러분도 아시는 것처럼 내 나이가 서른이 훨씬 넘은 나이고, 이루비아 정도의 나이는 내가 가르치던 제자들의 나이였던 것이다. 그러니 이런 여자 아이가 눈에 들어올 수가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냉담하게 있어도 이상하게 이루비아는 재잘재잘 혼자서 잘도 지껄이고 있었다. 무슨 할 말이 그렇게도 많은지... 대부분의 이야기는 이번 공물 운송에서 있었던 일들에 관한 것이었는데 중간에 병이 나는 바람에 굉장히 고생을 많이 했다면서, 때문에 일행들 중에 사상자가 많이 나와서 마음이 아프다면서, 그 때 우리들이 나타나서 도와주지 않았으면 피해가 컸을 것이라면서, 왕성에 와서도 아파서 알현장에 못가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많았다면서, 그리고 또 어쨌다 저쨌다면서 혼자서 잘도 떠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역시 끈기는 없었나 보다. 그렇게 떠들어도 별 반응이 없자 결국에는 포기하고 자리를 떴으니 말이다. 물론 나도 이루미아가 자리를 뜨자마자 숙소로 돌아왔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연회가 끝이 났기 때문이다. ㅡ.ㅡ;; 다른 말로 하면 이루비아는 연회 내내 나를 못살게 혹은 귀찮게 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은 그 이후로도 계속 되었다. 요즈음은 넥스나 유소, 쉬벡이 연회에 잘 나오지 않거나 잠시 왔다가 가기 때문에 나 혼자 남게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빈 자리를 이루비아가 채우기 시작한 것이다. 넥스와 유소는 이젠 연회가 지겹다며 나오지 않으려 했고, 쉬벡도 이유는 비슷했지만 겉으로는 가리안 영주에게서 훔친 마법을 제대로 익혀야 한다는 것 때문에 연회에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내 곁에 이루비아가 붙어 있다고 해서 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연회에 참석하는 사람들 사이에 나와 이루비아의 관계를 곡해하는 이야기들이 떠도는 것을 간간히 들을 때면 기분이 상하기도 했다. 도대체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을 억지로 자기들의 입방아에 올리고 싶어하는 심리는 무엇일까? 그리고 가장 궁금한 것은 어째서 타호루조차 이루비아를 막으려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도대체가 무슨 생각인지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시간은 흘러가고 날씨가 무더워질 무렵, 왕성에서의 연회도 끝이 났다. 장장 20일에 걸친 연회였다. 도대체가 그 긴 시간을 죽치고 있는 이 잘난 귀족들은 무엇인 지 모를 일이다. 그렇게 할 일들이 없나? 특히 서와 북 자치령주들은 자신들의 영지를 놓아두고 이렇게 오래 자리를 비우다니 이해를 할 수가 없다. 말로는 일년에 단 20일 뿐인 휴가라곤 하지만, 그래도 좀 무책임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뭐 넥스의 말로는 동 자치령에 비해서 다른 자치령에서는 영주의 책임과 일이 상당히 많은 편이어서, 영주들이 없으면 괴물들을 수비하는데 심각한 어려움을 느낄 정도 라고 한다. 그래서 영주들은 일년 내내 과로를 하게 된다고... 때문에 이렇게 쉴 수있을 때 쉬어 두고 싶어하는 것이라고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힘과 권력을 지니면 그 에 합당한 책임과 의무의 무게를 벗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꼬집고 싶은 마음이다. 여하튼 왕성에서 가장 긴 연회라고 하는데 그 동안 빠지지 않고 연회장을 지킨 나는 될 수 있으면 빨리 왕성을 나오고 싶었고, 때문에 왕에게 인사를 하는 그 날로 숙소를 도성안의 작은 여관으로 옮겼다. 이미 동 자치령에서 함께 떠나왔던 사람들은 자치령에서 필요한 물품들을 마련해서 령지로 돌아간지 오래였고, 우리들은 따로 자치령으로 돌아갈 특별한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이제부터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의논하기로 한 것이다. 도성이 이 왕국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서, 어디를 가든 출발하기에 편한 곳이었기에 도성에서 목적지를 정하자는 의견일치를 보고 여관을 잡은 것이었다. “자 그럼 이제 우리가 무얼 할지를 결정해 볼까요? 하지만 좀 문제가 있네요.” 내가 말을 꺼내자 다들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 표정들 짓지 말고 제 말을 한번 들어보세요. 일단 우리들이 함께 움직이는 일행이기는 하지만 뚜렷한 목적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한 팀이라고 했을 때, 우리 팀의 목표 같은 것이 없다는 말이죠. 예전에는 불모지대 탐험이라는 목표가 있었지만, 일단은 우리들이 불모지대에서 알고 싶었던 것들은 대충 청색지대를 지나면서 알게 된 것 같으니 그 목표는 없어진 것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말하면 그렇다고 할 수 있겠군요. 루탄님.” “그래 그 말도 일리가 있네.” 쉬벡과 넥스였다. “그러면 남는 것은 넥스의 개인적인 목표인 귀족되기와 쉬벡의 마법의 성장, 그리고 저는 제 마음대로 할 일은 아니지만 균형의 씨앗을 전달하는 일, 그리고 유소는 당장 어떤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으니까, 결국 지금 우리 일행이 함께 할 일은 별로 없다는 것이 되잖아요.” 나는 지금 우리들의 상황을 대충 정리해 보았다. 그리고 그 정리에 반박하는 사람들도 없었다. “그러니까 어쩌자는 거야? 나처럼 머리를 안 쓰는 사람은 루탄 너의 의도가 뭔지 짐작이 안간단 말이야.” 쉬벡의 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음, 그래서 하는 말이잖아. 이제부터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결정을 해야한다고 말이야.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현재 우리의 상황을 짚어본 것 뿐이고.” “루탄님의 말씀이 틀린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만, 만약 지금 앞으로의 거취를 결정하는 것이라면 저는 계속 루탄님과 함께 다녔으면 좋겠습니다. 그 편이 저한테는 큰 도움이 되니 말입니다. 적어도 루탄님을 만난지 반년만에 6써클에서 7써클로 올라 섰으니 저로서는 루탄님 곁에 있는 것이 최선인 셈이지요.” “뭐야? 그런 말이야? 그럼 나도 루탄이 하고 같이 있는 것이 좋지. 일단은 내가 귀족이 되는 것이 꿈이기는 하지만 일단은 머리쓰는 일로는 불가능 할 것이고 그렇다면 몸으로 치고 받는 일로 귀족이 되어야 하는데, 그럴려면 우선되는 것이 실력이 있어야 하는데, 루탄을 만나고 나서 실력이 상당히 늘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정도니까, 같이 있으면서 좀 더 발전을 하고 싶거든. 귀족이 되는 일은 앞으로 몇 십년이 걸릴지 모르는 일인데 서둘러서 무엇을 이루고 싶은 생각은 없어.” 물론 넥스의 말이다. “하지만 너 만약에 동 자치령에 계속 있으면 얼마든지 지금 자치령주의 뒤를 이어서 령주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보기에는 동쪽 자치령에 너 정도의 인물은 없어 보이던데... 그 쪽이 귀족이 되는 더 확실한 길일 것 같지 않아? 어차피 세습되는 영주직이 아니고 하니까..” 이런 내 말에 넥스가 반박을 하고 나선다. “무슨 말이야? 어쩌면 루탄이 너의 말 대로 동 자치령에 있으면, 동 자치령주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지금의 실력으로는 좀 모자라지 않을까 싶어. 적어도 지금처럼 괴물들이 설치는 와중에는 영주라는 자리에 있으려면 그만한 힘이 있어야 하는데, 솔직히 지금의 내 능력으로 동 자치령주와는 상대도 되지 않을 거란걸 알거든. 혹시 내가 동자치령주를 상대할 수있는 정도의 능력이 생긴다면 동자치령으로 가는것도 한번 고려해 볼 문제기는 하지만,아직은 실력이 되지 않으니까 너를 따라 다니겠다는 거야.” 이렇게 나오는데 내가 뭐라고 하겠는가? 어쩔 수 없이 한 발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그럼 유소는 어떻게 할려구? 나나 쉬벡이나 유소가 정말로 우리들을 따라 다니는 이유를 모르겠거든. 유소의 목적은 뭐야? 왜 우리와 함께 다니는 거야? 그렇다고 기분 나빠하지는 말아. 같이 다니는 것이 싫다거나 하는 것은 전혀 아니니까 말이야. 그냥 궁금해서 그래.” 그제야 지금까지 옆에서 듣고만 있던 유소가 입을 열었다. “호호, 솔직히 비밀이 있기는 하지만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고, 여자에게는 숨기고 싶은 비밀이 있거든. 일단 내가 이 파티를 따라 다니고 싶은 이유 중에서 가장 큰것은 넥스가 있기 때문이야. 넥스를 좋아하거든.” 순시간에 얼음이 된 것은 나와 쉬벡 뿐이었다.(아마도 넥스가 얼음이 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이미 상당히 진척된 모양이다.) “호호, 넥스가 언젠가 귀족이 되면 나도 그 부인이 되는 거니까. 그 때까지 같이 고생하고 동고동락 하면서 나중에 넥스가 나를 버리지 못하도록 하는 거지. 그럴려면 함께 다녀야 하지 않겠어? 그리고 언제 딴 곳에 눈을 돌릴지 모르니까 그것도 걱정이 되고. 호호호 물론 우리 넥스가 그러지는 않으리라고 믿지만 말이야.” 아~! 이게 일인칭 시점에서 소설을 이끌어 나가는 한계인가 보다. 어느 구석진 곳에서 둘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모르니 내가 이렇게 뒤통수를 맞게 되는 것이다. “그럼 결국에 세 사람 모두 나를 따라 다니겠다는 거잖아. 달라지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거잖아.” 나는 허탈한 기분이 되었다. “허허, 루탄님 그건 아니지요. 상당히 많이 다릅니다. 이제는 정해진 할 일이 없는 까닭에 루탄님이 하고 싶은 일을 하시면 우리는 그걸 따라다니면서 같이 하는 것이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이 팀의 대장이 되는 거지요. 어디에 가서 무슨 일을 하던지 그건 모두 루탄님이 결정하실 문제가 되는 것이니까요.” “그래, 그렇지. 나도 그 말에 찬성이야.” “그래, 넥스가 찬성인데 나도 찬성이야. 호호” 어째 닭살 모드가 오래도록 지속될 것 같은 느낌이.... “하지만 내가 무슨 일을 할지, 어떤 위험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무조건 나를 따라 간다는 것은 무모하잖아요. 그리고 제가 어떤 일을 하자고 해서 그 일을 하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 책임을 어떻게 지라고요? 전 그런 책임 같은거 사양입니다.” 솔직한 마음이었다. 사실 언제 어디서 어떤 괴물에게 당할지 모르는 세상이 이 세상이었다. 그런데 그 책임이 나에게 돌아온다면.... “허허 루탄님 그런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시다니요. 우리가 어린아이들도 아니고, 만약에 루탄님이 절대 불가능한 일을 하시겠다는데 따라가서 위험에 처한다면 그건 따라간 사람의 잘못이지 데려간 사람의 잘못이 아니지요. 만약 루탄님이 정령왕과 한판 붙어 볼래라고 하는데 따라간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의 판단에 따른 것이잖습니까. 그리고 어쩌다가 예상하지 못한 위험이 닥친다면 그것 역시도 루탄님의 잘못이 아니지요. 우리가 루탄님을 따라 다니겠다고 말하는 순간 모든 책임을 우리가 지겠다는 것이지 책임을 떠넘기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 정도는 아실만한 분이...” “하하, 역시 쉬벡님은 말을 잘 하는 것 같아. 루탄이 꼼짝을 못하잖아? 그렇지?” “호호, 정말이야. 역시 루탄한테는 쉬벡님이 강하다니깐. 호호” 하하, 뭐 그렇게 되어서 우리 일행의 앞으로의 여정은 모두 나에게 일임되어 버렸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해야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결국에 내린 결론은 돈벌며 여행 하기, 여행은 남 자치령을 갔다가 서 자치령을 갔다가 북 자치령까지 가 보는 것. 돈은 중간중간 의뢰를 받아서 해결하기로 하고, 그 여정 중에 각 계에서 물질계에 도움을 주기 위해 만들어 놓은 무엇인가를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모았다. 그거야 그런 존재들을 만나면 넥스나 쉬벡의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도성을 출발하면서 우리들은 먼저 용병길드에 파티 신청(일단 파티로 신청을 하게 되면 그 파티는 길드에 해산 신고를 하지 않는 이상 한 팀으로 묶이게 되며 파티의 등급 에 따라서 일거리를 얻게 된다.)을 먼저 했는데, 그 전에 넥스와 유소, 그리고 쉬벡의 기록이 남아 있어서 높은 등급의 파티로 등록이 될 수 있었지만 파티의 대장이 나였기 때문에 (난 전혀 경험이 없다. 용병 기록이 없는 것이다.) 겨우 2등급 파티로 기록이 되었다. 파티명은 유소의 주장에 굴복해서 ‘란의 용병대’가 되었다. 어째서 용병 파티의 이름이 ‘란의 용병대’냐고 물었더니 유소는 환수 란을 우리 용병 파티의 마스코트로 하고 나중에 깃발을 만들게 되면 란의 모습을 그린 깃발을 쓰겠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 때문에 용병 길드에 우리의 마크로 등록 된 것도 란이의 모습이었다. 실력있는 접수원은 소환된 란의 모습을 보고 곧바로 우리의 마크를 만들어 기록하고 파티를 증명하는 신분증에도 란의 모습을 새겨 넣었다. 결국 우리 일행의 이름은 ‘란의 용병대’ 마크는 환수 란의 모습. 그렇게 우리들의 새로운 여정은 시작되었다. “그럼 접수는 완료 되었습니다. 지금 당장 일거리를 보시겠습니까?” 실력있고, 게다가 친절한 접수원이 물었고 우리는 당장 일거리를 받겠다고 했다. 다만 우리의 여정이 남 자치령 쪽이기 때문에 그 방향의 일을 찾는 다는 말을 덧붙였다. “지금은 일거리를 찾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가장 많은 일거리가 호위입니다. 지금 건국기념 행사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귀향하는데 대다수 실력있는 용병들이 각 자치령의 공물 운반과 물자 수송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마땅한 호위 병력이 없어서 용병들의 보수가 많이 늘었고, 일거리도 많습니다. 그럼 일단 남쪽 자치령 쪽으로 의 일이라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보여준 그 일거리에는 남쪽 방향으로 가는 인물들의 호위를 청하는 의뢰가 10여건 이상 있었다. “응? 이건 이루미아 소령주의 의뢰인 것 같네? 의뢰자가 타호루야. 가만 보자. 음... 도성에서부터 칸타트를 경유해서 남 자치령까지의 호위를 의뢰함. 보수는 칸타트 앞까지 일급 1000메타, 전투 발생시 추가 급여 지급. 칸타트 내부 일급 3000메타 전투 발생에 따른 추가 급여 없음. 단 칸타트 통과 후 추가지급 2만 메타. 칸타트에서 남 자치령까지 일급 1500메타. 의뢰수행중 사망시 보상금 없음. 이라는데?” 의로를 살피던 넥스가 이루비아 일행의 의뢰를 찾아 내었다. “설마 그 일을 하자는 것은 아니겠지? 넥스 칸타트가 어떤 곳인지 몰라서 하는 말은 아니지? 설마 그거 하고 싶어?” 나는 칸타트가 어딘지는 몰랐지만 아무래도 유소는 별로 가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뭐 상당히 위험한 곳으로 소문이 나 있으니까 한 번 가 보면 실력이 늘지 않을까? 그리고 우리팀이 가는데 무슨 문제가 있을려구.” 넥스가 하는 말을 들으면 그다지 위험할 것 같지도 않은데.. “넥스! 거긴 들어가서 나온 사람이 없단 말이야. 단 한 사 람 도 나 오 지 않 았 다 구.” 저렇게 강조하는 유소를 보면 상당히 위험한 것 같기도 하고... “흠.. 루탄님 이 칸타트 라는 곳은 도성과 남 자치령의 중간 정도에 위치해 있는 작은 산과 그 산을 둘러싼 숲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숲의 넓이가 엄청나게 넓은 것은 아닌데도 이상하게 이 숲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깊은 곳에 가지 못하고 숲 밖으로 돌아 나오게 되는데, 아예 마음 먹고 이 숲을 지나서 산으로 가려고 작정을 한 사람들은 숲으로 들어가서는 한 사람도 돌아나오지 못했지요. 그래서 출입금지 구역으로 설정된 곳 중 하나입니다.” 라는 쉬벡의 말에는 호기심이 생긴다. 위험하기는 하겠지만 왠지 의도적이지 않은 사람들은 피해가 없다는 말에 호감이 가는 것이다. “그럼 우리 이 의뢰에 참가해 볼까요. 잘만 하면 남 자치령까지 한 가지 의뢰로 보수도 받으면서 갈 수 있는 일이잖아요. 우리 이 일 하기로 하지요.” 그렇게 해서 우리는 이 일을 하기로 했다. 처음 접수원은 우리에게 등급이 낮아서 안 된다는 말을 했지만, 타호루에게 우리 일 행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고 결과를 알려 달라는 조건을 달고서야 이루비아의 의뢰에 응찰을 할 수 있었다. 아무리 용병이 없다고 해도 의뢰자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결과는 테스트 없이 합격이라는 통보를 받았고 출발을 이틀 후 아침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 이틀동안 나는 내 창고에 있는 쓸데 없는 물건들을 정리하고 또 새로운 여행에 필요한 물품들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특히 하루 종일 김치를 담는 일은 무척이나 힘들었다. 우리 넷이서 먹을 김치를 담는 것인데도 얼마나 오래 여행을 하게 될지 모른다면서 엄청난 양의 김치를 담았던 것이다. 물론 그 김치들을 담은 통마다 보존 마법을 걸고 먼저 꺼내 먹을 김치통은 일정온도를 유지하는 보온 마법을(이건 보온이 아니라 보냉이다.) 걸어 넣고, 쌀도 사서 넣었다. 도성이라 그런지 이 곳에는 남쪽 지역에서 난다는 쌀이 있었던 것이다. 제법 고급 음식에 속한다고 했지만 먹는 것은 아끼는 것이 아니라는 내 생각 때문에 상당한 양의 쌀을 창고에 넣게 되었다. “다시 만나게 되어 기쁩니다. 루탄님, 쉬벡님, 넥스님, 유소님.” 이런 깍듯한 인사를 하고 있는 것은 타호루다. 이른 아침부터 출발 준비를 하는 아루비아 일행과 막 합류를 하는 중이다. 여전히 뚜껑이 달린 마차에 타고 있는 이루비아를 호위하고 있는 것은 열대지역 복장을 하고 있는 10명의 병사와 용병으로 보이는 20여명의 인물들, 그리고 타호루와 우리 일행이 전부였다. “그럼 출발을 해도 되겠습니까? 루탄님?” 왜 그런걸 나에게 묻는 것인지 이 행렬의 우두머리는 이루비아 아닌가? “저희 일행은 출발 준비가 되었습니다. 언제든 출발을 하시지요.” 행렬은 오래지 않아 도성을 빠져 나와 남쪽으로 펼쳐진 평원으로 들어섰다. “하하 여기서 루탄님 일행을 처음 만났었지요.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서 자치령주와 대련을 하고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하하 루탄님이 서 자치령주님을 이겼다면서요? 8써클 유저에 상급 환수를 여럿 다루시는 분으로 이 왕국에서 상대할 수 있는 인물이 몇 없는 것으로 아는데 1:1에서 승리를 하시다니 처음에는 믿지 못했습니다. 하하.” 타호루가 나와 쉬벡이 타고 있는 마차 옆으로 말을 나란히 하며 입을 열었다. 거리가 있어 크게 이야기를 했던 탓에 주위에 있던 다른 용병들도 그 이야기를 듣고는 놀란 표정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결국은 또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받게 되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별 말씀을요. 가리안 영주님이 양보해 주신 덕분이었지요. 하하” 나는 될 수 있으면 이야기를 길게 끌고 싶지 않아서 짧게 대답하고는 눈길을 돌렸다. 마주보아 주지 않으면 계속 이야기를 해 나가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저 그런데 루탄님, 이루비아 소령주님이 마차에 혼자 계서서 적적하실 텐데, 일행중에 여성분은 저기 유소님 밖에 없으니 함께 마차를 타고 가시면서 이루비아님의 말 벗이라도 해 주시면 좋을 듯 한데 괜찮겠습니까?” 아마도 내가 우리 팀의 리더라는 입장을 고려한 질문이겠지 싶었다. “그거야 유소의 마음이니 물어보세요. 그렇게 하고 싶다면 하라고 하세요. 저는 상관 없는 일입니다.” “네 그러지요.” 그렇게 앞으로 달려간 타호루와 유소 사이에 몇 마디가 오고 가곤 유소는 달리는 마차의 문을 열고 스며들 듯 들어가 버렸다. “허허 루탄님, 카타트가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가게 되었는데 불안하지 않으십니까? 허허 저야 위험보다는 호기심을 채우는 것을 더 중히 여기는 마법사이지만 루탄님은 왜 굳이 그런 위험한 곳을 가시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허허”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내 한 몸을 지키지 못할까라는 자신감도 있구요.” “저는 루탄님과 만난 후로는 루탄님에게서 무언가 끈끈한 운명같은 것을 느낍니다. 아주 중요한 어떤 일을 함께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지요. 허허” “어째 마법사 같지 않은 말씀을 하시네요? 그건 신을 믿는 사람들이 하는 말 아닌가요?” “그런가요?” 그렇게 되물으며 쉬벡은 다시 허허하고 웃는다. “그런데 그러고 보니 이 대륙에 종교는 없는 것인가요? 이상하네요. 신을 믿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신이라. 글쎄요. 신이 있기야 하지만 신에게 무엇을 바란다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신에는 악신도 있고, 선신도 있고, 제 멋대로 내키는 대로 하는 신들도 있고, 더해서 전지전능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우리들 인간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어차피 신들의 세계와 인간들의 세계는 서로 간섭하지 않는데 말입니다. 우리가 신에게 무엇을 바란다고 신이 들어주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나는 쉬벡의 말을 듣고서야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지금 이 물질계는 각 4계의 영향 아래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각 계의 존재가 인간들을 직접 현혹하는 짓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실제로 인간에게 어떤 신적인 존재가 영향을 미친다면 당연히 인간은 그것에 의지하여 축복을 빌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인간들이 신의 존재를 알면서도 그런 행위를 하지 않는 다는 것은 그만큼 신과 인간의 경계에 넘지 못하는 벽이 있다는 것을 인식시킨 결과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왜 그런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알기로 신들의 신력이나 악마들의 능력들은 거의가 인간들의 믿음이나 증오 고통 사랑등의 플러스감정과 마이너스감정을 근원으로 하고 있는 것이었는데 그럼 지금의 신계나 천사계 악마계는 무엇을 바탕으로 유지되는 것일까? 그 사이에 각 계를 유지 시키는 근원이 바뀌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내가 생각하고 있던 신들에 대한 생각이 틀린 것일까? 나는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겼다. 신의 존재를 알면서 의지하지 않는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에 골몰하고 있을 때, 옆에서 쉬벡의 말이 들렸다. “루탄님 여기서 부터는 많지는 않아도 괴물들이 나올 수 있는 곳입니다. 약간의 준비를 해 두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는 풍아를 불러서 주위를 경계시키고 그 때부터 정령들과 놀기로 했다. 다른 정령들 모두를 불러서 수레(나와 쉬벡이 타고 있는 것은 마차라기 보다는 짐 수레라고 보는 편이 옳을 것 같았다. 대부분의 짐은 창고에 있어서 거의 비어있기는 했 지만 말이다.) 뒤쪽에서 뒹굴기 시작했다. 그 동안 정령들과의 사이에도 많은 변화가 생겨서 이제는 상당한 유대감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예전에는 내가 정령들에게 가지고 있었던 마음(그런까 소중한 존재라는, 가족같은 존재라는)을 정령들이 몰랐거나 믿지 않았다고 한다면, 요즘은 정령들도 나도 그런 것은 믿고 알고 표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수레의 짐칸에 서 뒹굴고 란이와 다른 정령들도 모두 나와서 나름대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풍아는 주위를 경계하는지 공중을 누비고 다니고 지토는 쉬벡 옆에서 말을 모는 것을 구경하고 화아는 두 앞발을 턱에 괴고 엎드려 있고, 수아는 수레 가장자리에 올라 앉아 있었다. 광아도 빛을 내며 두둥실 떠 있었고 란이는 뒹굴거리는 내 몸을 피해서 가끔씩 날아올랐다가는 내가 잠시 움직이지 않으면 내 가슴께로 내려 앉았다. 하늘은 너무 푸르고 드문드문 흘려 가는 구름은 깨끗하기 그지 없었다. “우화~~ 정말 날씨 좋구나. 이런 때는 아무 근심 걱정 없이 할 일도 없이 느긋하게 나무그늘 아래에서 쉬기도 하고, 개울에서 물장구도 치고 그래야 하는 건데. 에구구.” 나는 또 한번 뒹굴 거리며 한숨 섞인 비명을 질렀다. “허허, 루탄님, 그럼 이 호위를 그만 두고 여기서 그냥 쉬다가 갈까요? 우리가 받은 계약금에 위약금을 좀 물어주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말입니다. 허허.” “쉬벡님,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도 말아요.‘란의 용병대’의 첫 임무부터 중도포기라는 기록을 남길 수는 없는 일이라구요. 그것도 겨우 중간에서 놀고 싶어서 임무 포기라는 것은 치명적이란 말이예요.” 나는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여전히 나른한 표정으로 짐칸을 굴러 다녔다. “그러지 마시고 할 일이 없으시면 마법이나 배워 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미 상당한 마나를 다루시는 것이 가능하시니까 마법을 배우시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나는 쉬벡의 말에 솔깃한 마음이 들기는 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물건들에 보존 마법을 걸거나, 혹은 텔리포트 마법 같은 것은 상당히 유용해 보였던 것이다. 싸움을 위해서 마법을 배우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지만, 약간의 마법이 생활의 편리를 가져오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배워보고 싶은 생가도 들었다. “좋아요. 그럼 마법을 배워보죠. 그런데 마법을 하려면 가장 먼저 뭘 햐야 하죠?” “그거야 마나를 느끼는 일이 먼저지요. 루탄님이 특정한 마나를 다루는 데 익숙하시니까 그건 별로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난 마나가 어떤 것인지 모르는데... 내가 언제 마나를 쓴다는 거지?” 솔직한 말이었다.나는 마나가 어떤것인지 모른다.사실 내가 쓰는 몸 속의 기운과 마나가 비슷하다는 생각은 하지만 내가 알기에 내가 쓰는 기운으로 마법을 쓸수는 없는것 같았다. “루탄님이 정령을 부르고 검을 통해서 마법을 쓸 때 사용하는 그것이 마나의 한 형태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마법에서 사용하는 마나는 그것들과는 다른 것이지요. 흠, 루타님 몸 안의 마나는 일종의 가공된 형태의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무리 자연적인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몸 속에 저장한 것이라 해도 그것은 몸 속으로 들 어가는 순간 변화를 겪게 되지요. 어떤 의미에서는 마법적인 변화와 같습니다. 마나는 의지에 의해서 변화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몸 속으로 들어가 몸에 익숙하게 바 뀐 것이지요. 하지만 마법은 그것과는 다릅니다. 존재하는 마나를 그 상태에서 움직이고 재배열하는 것이 마법이지요. 즉 몸 속의 마나와 외부의 마나는 같은 것이면서도 다른 것입니다. 그럼 일단 아까 말씀하신대로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 해야할 기본적인 것부터 하지요. 마나를 느끼세요. 몸 밖에 있는 마나를 느끼세요.” 나는 쉬벡의 말에 따라서 마나를 느껴보려 했다. 자연 속에는(아니 세상어디에든) 기운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기운들은 몸 속으로 받아들이고 축적하는 것이 내 호흡법의 중심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나는 세계의 기운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은 어렵지 않았다. “루탄님, 지금 루탄님이 마나를 느끼시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그 마나는 루탄님의 몸 속에 저장 가능한 형태의 마나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법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흠, 제가 루탄님께 제가 느끼는 마법의 마나를 루탄님 주위에 깔아 드리겠습니다. 느껴보십시오.” 그리고 쉬벡은 내 몸 주위에 마나를 풀어 놓았다. 그리고 그 마나는 내가 지금껏 세상 어디에서나 느끼던 그런 기운과는 사뭇 달랐다. 그것은 너무도 촘촘하고 견고하게 얽혀 있는 것들이어서 일부를 내 몸 속으로 끌어 들이거나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분리 불가능한 상태의 대단위 기운이 라는 것이 옳을 듯 싶었다. “쉬벡, 마나를 느끼기는 했지만, 이건 너무크고 또 견고해요.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구요.” “허허, 그게 바로 마법의 마나입니다. 그것은 절대로 몸 속으로 끌어 들여서 자신의 것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조각조각 잘라지는 것이 아닌 까닭입니다. 마나는 하나입니다. 어찌보면 무한의 수를 지니지만 어찌보면 단 한 개로 이루어진 것이 마나입니다. 허허허. 그럼 그 무지막지한 마나를 어떻게 하면 마법에 사용할 수 있을까요? 만약에 하나로 느껴지는 그 마나를 전부 사용해서 마법을 할 수 있다면 아마도 다 한 순간에 세상을 어찌해 볼 수 있는 마법이 가능하겠지만 그런 존재는 없습니다. 신이라 해도 불가능하지요. 그래서 마법은 그 거대한 마나의 일부분을 움직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해 보지요. 물 속에서 물을 움직이면 어떻게 되나요? 호수 속에 들어가 물을 움직이면 어떻게 되나요? 호수의 물은 하나이지만 그 물의 일부를 사용할 수는 있지 않을까요?” 나는 쉬벡의 그 말에서 조금 마나의 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깊은 호수 속에 잠겨있는 나 자신을 마나 속에 묻혀 있는 자 자신을 보면, 내가 손짓을 하면서 일어나는 물의 파장을 마나의 파장으로 이해하면 되는것이다.내가 물속에서 손짓을해서 일으킨 물의 파장은 아주멀리 떨어진 물속에서는 아주 미미한 것이 된다. 또, 물 속에 아주 약간의 물감을 떨어뜨린다고 그 거대한 물에 변화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잠시 순간의 변화가 일어났다가 사라질 뿐이다. 그럼 남는 것은 물 속에서 그 물을 어떻게 움직이는가 하는 것이다. 물 속에서 손짓 발짓으로 물을 움직이고 물감을 풀어 놓고, 또 심하면 물을 끓이고 얼리고 그런 짓을 하는 것 처럼, 마나 속에서 마나를 내가 원하는 형태로 다루는 것이 필요하다. 그럼 그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마나를 느끼셨으면, 다음에는 그것을 움직여야 합니다. 하지만 그 움직임을 물질적인 힘으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정신력과 일정한 법칙에 의한 것입니다. 기본은 정신력이지요. 아니면 의지력이라든지. 그럼 일단 하나의 과제를 드리기로 하지요. 루탄님이 느끼시는 마나를 자신의 의지로 아주 약간이라도 움직여보세요. 사실 이건 정신력으로 물질계의 물질을 움직이는 것 보다는 쉬운 일입니다. 그러니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어요. 허허 그럼 성공하면 다은 단계로 넘어가지요.” 그리고 나는 또 다른 세계로의 발을 그렇게 들여 놓았다. 실제로 이제 내 단전에는 더 이상 기운을 모을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더 들어갈 자리가 없이 꽉 차 버려서, 더 이상 단전이 커지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 단전속에 불순물이 많으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내 몸속에는 불순물이 거의 없는 순순한 태극의 기운만이 있었다. 뭐 무협지 같은 것 보니까 상단전 중단전 하단전 이러면서 단전도 많던데, 나는 중단전이나 상단전을 운용하는 방법도 모르고 그것이 정말 있는 지도 모르겠다. 만약 내가 그것이 있는지만이라도 알고 위치라고 안다면 어떻게 방법을 찾아 보겠지만 지금으로선 방법이 없으니 몸 속의 기운이 아닌 몸 밖의 기운에 눈을 돌리는 것이다. 왜냐고 묻지마라. 아무 할 일 없이 있으면 얼마나 심심한지 아는가? 여기는 읽을 책도 없고, 그렇다고 가지고 놀 무엇도 없는 곳이란 말이야. 물론 놀 사람이나 존재야 많지만... ㅡ.ㅡ;; 솔직히 가만히 있으면 퇴보하는 느낌이 들어서라고 해 두자. 그렇게 내가 마법에 눈을 뜨기 위해 발악을 하고 있을 때, 넥스는 넥스 나름대로 고 민이 많은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실력이 부쩍 부쩍 늘지 않는 것이 문제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은근히 나에게 방법을 물어오는데, 실제로 예전부터 그런 낌새가 있었지만, 내가 무슨 도움을 줄 수 있겠는가? 그런데 넥스는 이번에는 아주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그건 넥스가 나에게 대련이 아닌 다른 것을 요구하면서 시작되었다. “루탄, 너 몸속에 기운을 축적시키지?” “응, 그건 너도 그렇잖아. 너도 몸 속에 기운을 써서 이동을 하거나, 혹은 검기를 만들거나 하잖아. 뭐가 세삼스럽다고 물어보는 거야?”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런데 문제가 있다. 나는 검술을 연마하거나 싸움을 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기운이 몸 속에 모인 것인데, 너는 오로지 기운을 모으기 위한 어떤 방법이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루탄 네가 가만히 이상한 자세로 앉아 있는 것 같은 거 말이다.” “음, 그건 그렇지. 그러니까 너 지금 그 방법을 알려 달라고 이렇게 가까이 얼굴을 붙이고, 목을 조르려는 동작을 취하고 있는 것이냐? 내가 안가르쳐 주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그런 기운을 풀풀 풍기면서 말이다.” “흐흠, 뭐 그렇다기 보다는, 그러니까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냐는 것이지 흐흐 흐.” 녀석의 웃음이 심상치 않다. “이봐 넥스. 너도 알다시피. 검술이나 여타의 기술들을 아무에게나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은 너도 잘 알지? 내가 아는 이 방법도 우리 가문의 비전의 수법이어서 아무에게나 알려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 믿을라나? 역시 안 믿는 얼굴이네. 하지만 아무렇게나 전수 할 수 없는 것임에는 분명하다. 이건 중요한 거야. 만약에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많다고 생각해봐라 얼마나 위험하겠는가. 그러니까, 야!! 그렇다고 칼을 빼들고 뭘 하자는 거야?” 무식한 녀석 갑자기 칼을 빼들고 나선다. “그래서 못 알려 준다는 거냐? 친구가 이렇게 사정을 하는데도 안된다고? 니가 그러고도 친구라고 할 수 있냐? 죽어라.” 허걱, 미친놈, 정말로 칼을 휘두른다. 어쩌면 이런 기회에 심법은 얻지 못해도 대련이라도 하려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글세, 그 정도의 잔머리가 돌아갈런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야, 야. 그만두지 못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잖아 거기다가 수레부서지면 책임질래?” “으하하. 그건 내 알 바가 아니다. 으하하 죽어라.” 이 놈이 아주 정신이 나간 것 처럼 위장을 하는구나. 정말 어이가 없다. “그래 알았다. 알았어. 가르쳐 주면 되잖아. 하지만 알아둬라. 이건 절대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지 않는다는 약속을 해라. 그래, 이렇게 하자. 이거 너하고 앞으로 태어나는 너희 자손에게만 알려주는 것으로 하자. 그렇게 약속하면 알려주지. 전부는 아니더라도 말이야. 그렇게 약속하면 알려주마 어떠냐?” 넥스가 바보가 아닌 이상 나의 이런 제안을 거부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바보같은 일이 벌어질 줄 누가 알았는가 말이다. “무슨 소리냐? 그런 약속은 못한다. 말도 안되는 소리다. 거기에서 유소가 왜 빠지는 거냐?유소와 나는 이심동체,영원히 헤어질 수 없는 사람들,그런데 왜 유소를 빼는 거냐아아아!!” 무서운 놈이다. 그래서 결국 나는 넥스와 그의 마누라(예비)에게 오행심공의 한 줄기를 전해 주었다. 넥스에게는 화의 기운을 모으는 방법을 유소에게는 수의 기운을 모으는 방법을 알려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유의해야 할 점을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잘 들어. 넥스가 익힌건 남자가 익히는 거고, 유소가 익힌 것은 여자가 익히는 거야. 만약에 서로 바꾸어서 익히면 여자같은 남자. 남자 같은 여자가 되어서 제 구실 을 못하게 될거야. 그리고 두 가지를 한꺼번에 익히면 안돼 그러다가는 죽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조심해. 나중에 자식들 죽이고 싶지 않으면 알아서 하란 말이야.” 그렇게 해서 넥스 부처에게 오행신공의 한 줄기씩을 전하는 동안 나도 마법에서 한 단계를 발전하게 되었다. 즉 마나를 내 의지로 움직이는 것이 가능해 진 것이다. 내가 물 속에 있는 것으로 비유했을 때. 이제 손을 휘저어 물을 내 쪽으로 끌거나 밀어내거나 하는 정도가 되었다 고 해야 하나? 그저 손 발을 흔드는 것이 가능한 정도가 되었다고 해야하나. 하지만 그 이후의 마법 수련은 가속이 붙었다. 마법은 그야말로 수학의 정점에 있는 학문이었다. 아무 기운도 가지지 않은 마나는 일정한 순서로 배열하면(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물 속에서 물을 어떻게 일정하게 배열을 한다는 말인가 아무튼) 어떤 성질을 지니게되는 데, 그것들을 또 다시 잘 조합하게 되면 원하는 현상을 이끌어 낼 수 있게 되는것이다. 하지만 말이 쉽지 내가 마나의 한 부분을 움직이면 다른 부분이 따라서 움직인다. 그 러니 그런 것 까지 계산을 하고 다른 부분의 마나의 흐름을 또 제어하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아주 간단한 라이트 마법을 하나 하는 데에도 여간 많은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다. 제일 간단해 보이는 라이트 마법의 경우에 한 지점의 마나를 정삼각형의 위쪽 꼭지점 에서부터 그려나가듯 끌고 가면서 다른 꼭지점으로 이동 시키고 그 상태까지 원래 자 리의 마나의 빈(완전히는 아니지만 밀도가 낮아진)상태를 유지하다가 처음 움직인 마 나가 다른 꼭지점에 이르는 순간 이번에는 처음 꼭지점의 빈 상태로 마나를 끌어들이 는데, 이곳으로 이동하는 마나는 삼각형의 세 번째 꼭지점에 해당하는 지점에서 서서 히 끌어온다. 그와 동시에 두 번째 꼭지점의 마나(처음 이동한)를 움직여 빠져 나가 기 시작한 세 번째 꼭지점의 마나를 채워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또한 처음 꼭지점에 채워지기 시작한 마나를 끌어다가 두 번째 꼭지점에서 이동하기 시작한 마나의 끝에 묶어둔다. 그런식으로 세 꼭지점에서 움직이는 마나들의 꼬리들을 묶는 것이 성공하면, 라이트 마법이 성공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라이트 마법이 연속 성을 오래 유지 하기 위해서는 처음에 움직이는 마나의 양이 커야 하고 정확한 정삼각형의 움직임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고 밝기를 밝게 하기 위해서도 마나의 양이 커야 하면 이동 속도가 빨라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이야기 해서 능숙하고 빠르게 마나를 움직이면 빛이 밝고 오래 가고, 그와 함께 움직이는 마나의 양이 많으면 역시 빛의 밝기와 시간이 오래 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장 밝기와 연관이 되는 것이 마나양과 마나 움직임의 속도, 유지시간을 좌우하는 것 역시 마나의 양과 삼각형의 정확성이라 했을 때, 이런 결론이 나올 수 있다. 움직일 수 있는 마나의 양이 적어도 마나를 빠르고 정확하게 움직이면 밝은 빛을 오랜 시간 낼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 반대였다. 움직이는 마나의 양이 엄청 많아서 밝기도 시간도 만족할 양이 었지만 “루탄님, 그 정도의 마나라면 4써클 마법을 쓸 정도의 마나인데, 겨우 라이트를 이 정도로 유지하시는 건 너무 심한 것 같군요. 4써클과 1써클의 차이는 8배입니다.” 라는 쉬벡의 말을 들어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별로 상관이 없었다. 적어도 마법을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마법을 직접 했다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결국 내가 처음으로 라이트 마법을 배운 날 밤, 우리 야영장에는 수십 개의 빛 덩어리들이 날아다녔다. ‘루탄님, 저런 짓을 왜 하시는 겁니까? 저 하나만 있어도 충분 한 것을요.’ 라고 처음으로 투덜거리는 광아의 말을 들을 정도였으니 다른 말은 하지 않겠다. 아니 하나만 더, 결국에 내가 잠든 틈에 넥스가 후라이팬으로 내 머리를 후려치며 “야!! 저거 못 없애냐? 눈이 부셔서 잘 수가 없잖아. 지금이 대낮이냐? 빌어먹을 놈.” 이라고 했던 것 같다. 내가 정신을 잃어서 잘은 모른다. 하하 유쾌한 여행이었다. 이루바아가 밖으로 나오지 않고 거의 모든 시간을 마차 안에서 보내고, 덩달아서 유소도 그 안에서 움직이지를 않고(이야기를 들어보니 오행신공의 수공을 익히느라 정 신이 없단다.) 넥스는 낮 동안에는 그럴 수가 없으니까 밤만 되면 잠을 자는 대신 운공에 몰두하고(사실 잠자는 것 보다 이게 좋을 수도 있다 익숙해만 지면) 나는 나 대로 쉬벡에게 마법을 배우는 재미에 푹 빠졌고, 정령들과 란이도 불러 주면 제각기 제 알아서들 잘 놀고(문제는 란이가 이상하다는 것이다. 이 녀석이 나와 같이 쉬벡에게 마 법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거기다가 정령들을 불러 놓았더니 지들끼리 알아서 주위에서 괴물들을 정리해 주고 있어서 걱정 근심이 없는 여행이었다. “대단하십니다, 루탄님. 벌써 3써클을 완전하게 돌리시는 군요. 허허, 그러면서 실제로 사용하는 마나량은 상상을 초월하니 이거 뭐라고 해야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허허.”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나는 마법을 배운지 열흘이 되지 않아서 3써클에 도달했다는 말이다. 무슨 빌어먹을 말이냐고 해도 하는 수 없다. 마나를 가지고 노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솔직히 이론만 알면 시행하는 데에 전혀 어려울 것이 없었다.) 마나를 내 몸 주위에 둘러서 써클을 만드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써클이란 원을 말한다. 그리고 마법에서의 써클이란 곧 마나의 띠를 말한다. 왜 토성이나 그런데 보면 둘러 있는 띠 말이다. 그런 식으로 마나를 몸 주위로 띠를 만들어 둘러 두는 것을 써클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몹시도 고난위의 작없이다. 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마나는 따로 떼어 넬 수 있는 것이 아닌 동시에 부분을 쓸 수 있는 것이라 했다. 그런데 이 마법사의 몸 주위에 있는 써클은 가장 마법사가 사용하기에 알맞은 형태로 준비해 놓은 재료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음... 그러니까 내가 물 속에 있기는 한데,뚜껑이 열린 작은 병들을 여러개 가지고 있어다고 하면 그 병 속에 들어 있는 마나들은 내가 병을 움직이면 쉽게 움직일 수 있고, 또 병속의 마나는 밖의 마나와 별다른 연관없이 변화나 이동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병들을 나열해서 몸 주위에 원으로 둘러 두었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 이다. 여기에서 문제는 이 병들이 잘못 부딪히면 깨지거나 할 수가 있기 때문에 이 녀석들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틀이 필요한데 이것도 역시 마나의 관계로 만들어야 한다 는 것이 문제다 더 문제는 그 병들도 마나로 만들어야 하고 병 속에 넣어두는 것도 마나라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하하 어렵다. 그렇다. 하나의 써클을 이루기 위해서는 상당히 어려운 관계조절이 필 요한고 그리고 써클이 만드어진다. 뭐 1써클은 그나마 병의 숫자가 10개 정로라서 좀 쉽다. 하지만 그 이후로 써클이 하나 올라갈 때 마다 꼭 2배의 병들이 생긴다고 봐야 한다. 이상하게 역 피라미드 형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2써클은 20개 다음은 40개 다음은 80개 다음은 160개 다음은 320개 다음은 640개.... 생각을 해 보라. 그냥 비유적으로 말을 한 것이지만 몸 주위에 1270개의 병을 달고 다니는 모습을(쉬벡이 7써클이니까 그렇게 된다.) 그러니 점점 써클이 올라 갈수록 그 써클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게 된다. 때문에 5써클에서부터는 아주 어려운 난관들이 생기는데, 일종의 마나의 운용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이 없으면 더 이상 써클을 높일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굉장히 많은 학문적이 지식과 사유를 토대로 만들어지는 것이라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물론 나 같은 경우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것이 쉬벡의 말이었다.(워낙 특이한 사람이란다. 내가 하하하) 아무튼 나는 그렇게 해서 어영부영 3써클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 써클을 이루는 마나 들은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내가 쓰기 편하게 만들어 놓은 마나들이다. 예를 들어 라이트 마법을 쓰는데 내가 가진 써클을 사용하지 않고 마법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냐면 그렇지는 않다. 직접 마나를 움직여서 만들어 낼 수도 있다. 하지만 써클에 있는 마나들을 촉매로 사용하면 훨씬 더 쉽게 된다. 이런 것이다. 물리에서 나오는 것인데 어떤 고정된 물제를 움직이기 위해서 필요한 순간적인 힘은 그 물체를 지속적으로 움직이는 데 필요한 힘 보다 훨씬 큰 힘이 필요하다. 그런 것 처럼 고정된 마나를 움직이는 것은 너무도 힘든 일이다. 그것도 가장 간단한 라이트 마법이 그 일을 여러 번 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좀 더 난위도가 높은 마법은 어떨지 상상이 갈 것이다. 때문에 촉매가 많이 있어야 고난위의 마법도 쓸 수가 있는 것이다. 뭐 의지에 따라서 그냥 마나를 숨쉬듯 움직 일수 있으면 달라지겠지만 인간은 그렇지가 못하니까 써클을 쌓아서 준비를 해 두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천재이며 능력이 뛰어난 존재라 해도, 3써클 이상을 한꺼번에 이르기는 어려운 모양이다. 70개의 병들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일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 그저 존재하고 있을 뿐 평소에는 잘 느끼지도 못하는 것이니까(쉽게 내가 활성화 시키지 않으면 그냥 물 속에 있는 물이나 다름없다.) 상관이 없지만 그 위에 또 다른 병들을 연결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 하나 차근차근 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80개의 병을 생성해서 올려 놓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힘들었다. 하긴 지금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은 고작 1써클과 2써클의 몇가지가 고작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내가 무리하게 써클 욕심을 낼 필요는 없을 듯 싶다. 예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마법이라는 것이 써클만 높아지면 무조건 사용을 할 수 있 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써클이 아무리 높아도 마법을 배우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그래서 나는 요즘에는 쉬벡과 함께 마법들을 연구하고 있는 중이다. 쉬벡은 내게 마법을 사용하는 수식을 알려준다. 수식에 따라 마법을 이동시키는 것 을 알려 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때때로 그 방법들이 너무 필요 없는 단계를 거친다고 생각하고 내 나름대로 필요없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을 삭제하고 또는 다른 방법을 넣어서 효율적으로 만들고자 한다. 쉬벡이 가르치는 것들이야 겨우 2써클에 해당하는 간단한 것들이지만 그런 것들에서 좀 더 효율적인 방법들을 만들어 내면 쉬벡은 아주 감격을 하곤 한다. 사실 고난위의 마법이란 전부 이런 자잘한 수식들의 합인데 그 작은 수식들의 간단해 지면 간단해 질수록 고난위의 마법은 그만큼 압축된다는 것이다. 사실 파이어 볼에 사용되는 수식은 12가지 정도가 되는데 그 중에서 2개나 3개의 수식을 줄이고 하나 정도로 그 효과를 대체한다면 6써클의 파이어 월과 같은 경우에는 그 렇게 없어진 수식 중이 34번이나 나오기 때문에 그 절반 정도의 수식 절감 효과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니 쉬벡도 나와 함께 마법의 수식을 연구하는 재미에 쏙 빠지고 말았던 것이고, 별다른 위협도 없이 카타트로 향하는 우리 일행들은 제각각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었다. “역시 재미있군요. 이렇게 이렇게 음, 파이어 애로우에 이렇게 수식을 더하면, 음.. 목표물을 쫓아 가는 파이어 애로우라... 최초에 그 대상을 지정해 주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기는 하지만 일단은 몇가지 고유 파동을 대략적으로만 지정을 해 둔다고 해도 도움이 되겠군요. 예를 들어 저런 괴물들의 경우는 인간과 전혀 다른 마나 파장 을 지니니까 대상을 지정할 때, 이 정도 오차 범위 내에서 지정을 한다면 인간에게는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도 대량의 파이어 애로우를 날릴 수가 있겠네여.” “허허 그렇군요. 추적 마법과 파이어 애로우의 결합니다. 거기다가 선별기능을 이런 식으로 활용을 하다니, 이 마법은 집단전에서 아주 유익한 마법이 되겠군요. 그건 그렇고 지금 저기서 싸우는 넥스쪽에 한 번 실험을 해 볼까요?” “그러지요. 뭐 잘못되도. 넥스 정도면 죽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겠지요?” 지금 이런 사악한 대화가 오고가는 것은 당연히 나와 쉬벡의 수레 위였고, 2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는 넥스 혼자서 신이나서 괴물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요즈음 심법 수련에만 힘을 쏟더니 오늘은 갑자기 나타난 괴물들을(실제로는 정령들에게 접근하도록 두라고 했다. 실험을 위해서) 혼자 상대 한다고 달려 나가서는 신이 나서 날뛰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쉬벡과 나는 우리의 실험을 위해서 넥스를 희생하기로 결의하고 마법을 시행했다. “10개 정도씩의 파이어 애로우면 될 것 같군요. 준비 되셨습니까?” “그럼요. 준비 되었지요.” 우리는 한 순간 마법을 넥스 쪽으로 난사했다. “추적 파이어 애로우.” “추적 파이어 애로우.” 순식간에 20개의 불화살이 넥스 쪽으로 날아갔다. “으학, 이게 무슨짓이야. 누구를 죽이려고.” 넥스는 기겁을 하고 불화살들을 피해서 분분히 날뛰었지만, 여러분도 그걸 아실 것이다. 서로 피하려고 하면 부딪히기 쉽다는 것을...... 대부분의 불화살은 괴물들을 찾아 갔지만, 멍청한 넥스가 가로 막은 불화살들은 넥스의 칼에 막혀 버렸다. “저런 저런, 쓸데 없이 움직여서 공격효과를 떨어 뜨리는 군요. 다음에는 이런 상황을 숙지 시켜서 지금과 같은 불상사를 줄여야 겠습니다. 허허” “네, 저런 경우가 쓸데없이 능력이 있는 경우지요.다른 일반적인 경우에는 파이어애로우를 피하거나 할생각도 못할것이고,그럼 알아서 파이어애로우들이 피해갈것을.... 쯧쯧쯔.” 우리가 이렇게 촌평을 하고 있을 때, 옆에서는 뾰료룡 뾰룡 뾰뾰룡 하는 소리와 함께 3개의 파이어 애로우가 다시 넥스에게로 날아갔다. 그리고 넥스 주위에 늘어진 괴물들에게로 퍼져 나가서 시체들에 구멍을 내고 태웠다. “허허, 이런 란이의 실력이 점점 늘어 가는군요. 허허 옆에서 루탄님과 같이 배우는 것인데도 제법 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상당한 능력의 환수인 모양입니다.” “뭐, 저야 환수에 대해 자세히 모르지만, 란이는 그냥 그대로 있어 주면 좋겠어요. 굳이 란이가 나서서 싸울 일도 없었으면 좋겠고. 란이가 그렇게 변하는 걸 바라지도 않고요. 뭐 나중에 란이에게는 치료 마법쪽을 가르쳐 봐야 겠어요. 그건 배워 두면 좋을 것 같아요. 하하” 하지만 나는 란이가 조그마한 날개를 파닥거리면서 마법을 시연하는 것이 귀엽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단지 파괴나 공격이 아닌 방어나 치료 쪽을 가르치고 싶었다. 아무래도 그 쪽이 란이의 모습에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고 말이다. “란아, 넌 그런 거 하면 안돼, 넌 공격 말고 치료나 방어 마법을 하도록 해라. 네가 위험하지 않으면 공격마법 같은 것은 쓰지 말아라. 알았지?” 뾰룡룡. 뾰롱 뭐 알았다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것인지. 처음에는 란이의 울음 소리에 특정한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고 그 소리를 구별해 보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 했다. 같은 상황 같은 질문에도 그 대답이 모두 틀렸던 것이다. 그러니 그 울음을 듣고 무슨 뜻인지를 아는 것은 불가능, 거기다가 다른 정령들도 란이와는 대화가 안 된다니 다른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냥 애완동물인데, 이젠 마법도 조금 쓰는 애완동물이다. 하하하 “그런데 카타트는 언제나 도착을 하는 거죠? 이제 거의 다 온 것 같은데요? 한타리 아에서 남 자치령 중간 쯤에 있다고 했으니까, 20일 정도 왔으면 거의 온 거 아닌가요?” “허허, 아마도 곧 도착을 하겠지요. 그리 서둘 일도 없지요. 바쁜 일도 없는데 말입니다. 허허.” “그야 그렇지만, 20일 이라고요. 20일 동안 이러고 있으니 좀이 쑤셔서.. 하하하.” “그런데, 루탄님.” “예? 왜요?” “이루비아 소령주 말입니다. 왜 마차 밖으로 전혀 나오지를 않는 건지 모르겠군요. 거기다가 요즈음 유소도 소령주에 대해서는 거의 말이 없으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뭐, 그 사정이야 제가 알 수 있나요. 그렇다고 마차 안을 몰래 엿보고 싶은 생각도 없고요.” “그래도 유소조차도 별 말이 없으니,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요.” “그럼 나중에 유소가 나오면 자세히 물어 보기로 하지요.” 여전히 쉬벡과 나는 행렬의 끝에서 수레를 끌고 덜커덩 덜커덩 쫓아 가는 중이었다. 이제는 다른 용병들도 긴장감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 사이에 괴물들이 거의 나타나지 않은 것이 내가 미리 정령들을 풀어 놓았기 때문이란 것도 알고 있었고, 괴물들이 나타나도 미친 듯이 달려나가는 넥스가 있었기 때문에 거의 칼을 휘둘러 볼 생각도 못했다. 덕분에 다른 용병들은 정말 널널한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었고, 긴장감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건 타호루나 그 일행도 마찬가지로 그냥 터덜터덜 마차를 따라 말을 몰 뿐이었다. 지금은 타호루가 오랜만에 후미의 우리 마차까지 말을 속도를 늦추어서 옆에서 나란히 말을 몰고 있다. “저기, 타호루님. 이루비아 소령주가 요즘 전혀 모습을 보이지 않네요? 무슨 일 있어요?” 나는 유소에게 물어보기로 했던 것은 타호루에게 물었다. 솔직히 타호루가 지금으로선 이루비아의 보호자나 마찬가지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소령주님은 별 일 없으십니다. 요즈음은 유소님에게 이것 저것 배우느라고 바쁘셔서 밖으로 나오지 않으시는 겁니다. 그리고 원래 이렇게 마차 여행을 할 때는 거의 밖으로 나오지 않으십니다.” “으음, 그래요? 난 또 어디가 아픈 줄 알았네요. 그런데 유소에게 뭘 배우는 거죠? 궁금하네요. 유소가 뭘 가르칠 수 있을까. 검술 같은 것이면 밖에서 해야 하는 거니까 그런 건 아닐 것 같고. 그럼 뭘까. 마차 밖으로 나오지 않은 것이 거의 열흘 가까이 되는 것 같은데... 으잉? 그러고 보니 내가 오행신공을 가르쳐 준 다음부터 유소가 이동중에 마차 밖으로 잘 안나오면서 덩달아서 이루비아도 안보였던 것 같은데... 설마하니 유소가 이루비아에게 오행신공을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내가 분명히 그런 일이 없도록 약속을 받고 전해 준 건데..” 나는 갑자기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왠지 시선을 피하는 듯한 타호루의 모습에서 그 불안은 더해지고 있었다. 나는 곧장 몸을 날려 마차 쪽으로 도약을 했다. 마차 옆에서 호위를 하던 남 자치령의 용사들이 흠칫 놀라기는 했지만 내가 마차 뚜껑위에 올라서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이봐 유소, 밖으로 나와봐. 할 이야기가 있어.” 나는 마차 위에서 유소를 불렀다. 하지만 대답이 곧장 들려 오지는 않았다. “유소, 좀 나와보란 말이야.” 쿵! 쿵! 내가 소리를 지르며 마차 위에서 발을 구르고 나서야 마차의 문이 열리며 유소가 고개를 내밀고 마차 위의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일이야? 왜 마차 위에서 소란을 피우는 건데?” 유소가 놀란 얼굴이 되어서 물었다. “그냥 물어볼 것이 있어. 간단하게 대답해줘. 이루비아에게 혹시 오행신공 가르치고 있어?” 나는 될 수 있으면 간단하고 또 딱딱하게 물었다. 이미 이 소란 때문에 행렬은 멈춰 있었고, 넥스도 다른 일행들과 함께 마차 가까이에 다가와 있었다. “저기 그게...” 내 물음에 유소의 얼굴 빛이 바뀌는 것은 보았다. “그렇군, 알았어.” 나는 아무 말 없이 행렬의 수레로 돌아왔다. 유소의 얼굴로 보아서 분명히 이루비아에게 오행신공을 가르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유소는 내가 다짐했던 조건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루비아에게 오행 신공을 가르친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떤 상황이 되었어도 오행신공을 가르치지 말았어야 했고, 가르친다고 하면 나에게 양해를 구해야만 했었다. 하지만 유소는 그 모두를 하지 않았다. 나는 수레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온 유소와 넥스를 무시했다. “저기 루탄, 미안해. 그러니까..” 유소는 상황에 대한 설명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됐어. 아무 소리도 듣고 싶지 않아. 내가 분명히 이야기 했어. 내가 가르친 것은 우리 집안에서 전해지는 비기라고. 그래서 아무나 가르칠 수 없는 것이라고. 그런데 그런 것을 가르쳐 주었더니 약속을 어겼어. 어떤 상황이 되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과는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아.” 나는 냉정해지고 있었다. 유소와 오래 여행을 했지만, 나는 유소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어쩌면 상대에 대 해 자세히 알지 못한다는 것이 예전부터 마음속에 조금씩의 벽을 만들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넥스가 있었기 때문에, 넥스 때문에 오행신공도 가르쳐 준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건 넥스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다음 마을에 도착하면, 용병길드에 가서 용병대를 해체하겠어. 나는 유소와 함께 여행을 하고 싶지 않아. 그리고 넥스나 쉬벡님도 잠시 헤어져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요.” 아마도 내 얼굴에는 상당한 실망감이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나도 알고 있었다. 넥스나, 쉬벡에게 잘못이 없다는 것을... 하지만 나는 속이 좁은 사람이다. 함께 여행을 하던 사람들 중에서 한 사람만을 쫓아 보내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즐겁게 지낼 자신이 없었다. 그러느니 차라리 모두가 따로 따로 떨어지는 것 이 좋을것 같았다. 넥스와 쉬벡등의 표정이 굳는 것을 보았지만 나는 내 생각을 바꾸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내가 성급하다는 것은 알아. 그리고 감정적이라는 것도 알아. 하지만 나는 어떤 이유로도 나와의 약속을 깬 유소와 함께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 그리고 유소를 보내고 다른 사람과 웃고 즐길 마음도 생기지 않아. 그러니까 이제 헤어지는 것이 좋겠어. 그래 그게 좋겠어.” “저기 루탄 내 말을 조금만 들어봐.” “됐어.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아. 그 어떤 사정이 있어도 네가 나와의 신뢰를 깬 것은 사실이야. 나와의 약속이 가볍게 생각되었다면 내가 주의를 덜 주었기 때문이고, 내가 너에게 그렇게 가벼웠던 탓이겠지. 내가 가르친 것을 다시 돌려 달라는 말을 하지는 않아. 그건 이제 네거야. 이제 그걸 어떻게 사용하든 그건 너의 자유로 해주지. 마음대로 해. 내가 너를 버리는 대가라고 생각해도 좋을거야. 너와 나는 모르는 사이야. 너를 다시 본다고 해도 알지 못하는 사이니까 적으로 서지는 말아. 그런다면 내가 어떻게 너를 대할지 몰라.” "루탄, 너 말이 너무 심하잖아. 유소가 잘못 한 것은 알겠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말하는 것은.” “넥스.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감정적인 것은 알아. 하지만. 나는 내 입장을 분명히 했어. 그러니까 더 이상 말하지 말아. 그럼 다음 마을에서 보자 내가 먼저 가지. 가서 기다리고 있겠어. 길드에서 보자.” 나는 말을 마치고 곧장 행렬이 가던 방향으로 몰을 날렸다. 왠만한 속도로는 따라올 수 없을 것이었다. 나도 말을 하면서 성급하다는 생각도 들었고, 또 유소의 변명도 듣고 싶었고, 또 이루비아의 말도 들어 보고 싶었다. 하지만 내 좁은 소견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유소가 나와 약속을 어겼다는 사실이 변할 여지는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니까 아주 간단한 문제였다. 유소가 약속을 어겼다. 그런데, 유소에 대해서는 어딘지 모를 의구심(정체가 뚜렷하지 않다는 점에서의)을 가진 상태이다. 그러다 보니 믿음이라는 것에 헛점이 있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그 빈 곳이 속속들이 내 마음을 잡아 버렸다. 그래서 결국 유소는 내가 믿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이제 유소가 자신을 밝힌다고 해도 내가 가진 이런 생각을 돌리기는 어렵다. 그러니까 다시는 유소를 보지 않겠다. 이런 결론이 내 머릿속을 메워 버린 것이다. 나는 상당히 오랜 시간을 달려서야 내가 길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풍아, 근처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이 어디에 있는지 좀 찾아 줄래? 아무래도 우리 일행들이 가던 이쪽 방향으로 있는 마을이어야 겠지?’ 그리고 잠시 후에 풍아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마을이 있음을 알려 왔다. 하지만 내가 마을에 도착했을 때, 나는 실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도착한 마을은 겨우 50여 채의 집이 전부인 아주 작은 마을이었던 것이다. 보통 마을들은 아주 작다고 해도 괴물들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을 정도의 단위를 형성하게 된다. 물론 괴물들이 거의 출현하지 않는 지역이라면 말이 달라지겠지만, 이렇게 괴물들이 많이 나타나는 지역에 이런 작은 마을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을이 작았기 때문에 내가 찾고자 하는 용병 길드는 없었다. 그래서 우선 마을의 여관을 찾았지만, 여관이라고 이름 붙은 곳이 없었다. 그저 작은 주점이 하나 있었고, 그나마도 테이블 네 개가 놓인 소박한 규모의 주점으로 따로 방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식사는 어찌 시킬 수 있어서 간단한 음료와 식사를 하고, 이루비아 일행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아마도 저녁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할 것이었다. 등지고 앉은 주점의 나무 창 밖으로 보이는 지평선 위로 검붉은 태양이 일렁이고 주점 안으로 핏빛이 물들 무렵 북쪽으로 나 있는 마을의 중앙로를 따라 이루비아 일행이 도착했다. 나는 주점의 주인에게 그 쉬벡등에게 전할 말을 남기곤 주점을 나섰다. “저기 오는 사람중에 쉬벡이라는 마법사가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루탄이라는 사람에게 이 마을에는 용병길드가 없어서 다음 마을에서 기다린다고 했다고 전해 주십시오.” 나는 말을 마치고, 주인에게 계산을 하고 주점을 나섰다. 주점 밖에서 일행들과 마주치기는 했지만 나는 그들에게 얼굴도 돌리지 않았다. 유소는 다시 마차에 들어간 모양인지 보이지 않았고, 쉬벡은 아직 뒤쪽 수레에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 다만 넥스가 나에게 다가 오려고 했지만 무시하고 다시 마을 밖으로 몸을 날렸다. 마을 밖으로 나온 나는 한 동안 달리다가 길 옆에서 작은 공터를 발견하고 그 곳으로 들어갔다. 적당한 알람마법을 걸고 광아에게 조명겸 불침번을 맡기고 침낭을 꺼내 두르고 누웠다. 하늘에는 전혀 낯선 별들이 총총했고, 내가 몸을 눕힌 대지는 내가 아는 땅이 아니었다. 어제도 그랬고 그제도 그랬지만 그 때는 그런 것은 신경쓰지 않았는데, 갑자기 혼자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것이 지금까지 나에게서 이런 무서운 느낌을 지워주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떨어져 내린 이 한타 왕국이라는 세계는 너무도 낯선 곳이었는데, 넥스와 쉬벡이 그 낯설음을(이 지독한 느낌을) 막아주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뺨을 타고 흘는 눈물의 감촉을 그대로 두었다. 그러다가 내가 왜 이렇게 바보같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에게는 넥스나 쉬벡보다 더 오래된 친구들이 있는 것을 잊고 있었다는 생각을... 그리고 그 순간 내 주위에는 풍아 수아 지토 화아가 나타났다. 소환하지 않아도 나타난 것은 그만큼 내가 이들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인가 보다. ‘바보 같으니. 그런다고 그렇게 뛰쳐 나오면 어쩌자는 거야? 사정이라도 알아보지 않고선.’ 투덜거리는 것은 화아였다. ‘루탄님, 굉장히 이상한 느낌이예요. 이런걸 슬프다고 하는 건가요?’ 아무래도 내 느낌을 나누는 모양인지 수아의 표정이 어두웠다. ‘루탄님이 이러고 있으면 나도 힘이 나지 않는데..’ 풍아고 축 처진 머리카락을 하고선 어깨위에 내려 앉아 있었다. 지토와 광아는 말이 없다. 하지만 이들이 나타나면서 나를 둘러싸던 두려운 느낌들은 걷히고 있었다. “하하, 너희들이 있는데... 그런데 내가 너무 의기소침 했던 것일까? 하하 괜찮아 괜찮아.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 하하.” 나는 반쯤 나무둥치에 기대고 있던 몸을 세웠다. 덕분에 어깨에 있던 수아와 풍아가 휘청거리고 머리카락에 매달리고 했다. “밥 먹자. 밥 해먹자. 수아야 오늘의 요리는 뭘로 할까?” 나는 요리 담당인 수아에게 물었다. 수아는 앞으로 모았던 손을 팔짱을 끼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대답했다. ‘좀 늦은 시간이니까, 간단하게 ’밥과 알의 만남‘이나 ’잎과 밥의 만남‘으로 해요. 그거 만들기도 어렵지 않고 좋잖아요. 밥은 아마도 보존마법으로 있는 게 있을 거고, 다른건 준비하기가 수우니까요.’ 음. ‘밥과 알의 만남’, ‘잎과 밥의 만남’은 쉽게 생각하면 김밥이다. 그런데 여긴 김이 없다. 때문에 김 대신에 새의 알을 얇게 펴서 부친 다음 김 대신에 사용(계란처럼 힘이 없는 것이 아닌다.)하는 것이 ‘밥과 알의 만남’, 그리고 역시 식용 풀잎으로 김을 대신한 것이 ‘잎과 밥의 만남’이다. 그냥 김밥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사실 그리 간단한 것은 아니지만 수아가 하고 싶다면 한다. 하하하 그래서 길 옆의 작은 공터에서는 한 인간과 다섯 정령과 한 환수의 저녁 파티가 시작되었다. 화아는 모든 음식을 알맞게 익히는 역할을 맡고 수아와 풍아는 재료들과 밥으로 완성품을 만들고 지토는 가끔 기웃거리다가 수아와 풍아의 잔심부름을 하고 손이 없는 광아는 그냥 둥둥 떠서 조명 역할을 하고, 소환된 란이는 경쾌한 배경음악을 연주하고. 하지만 음식을 먹을 때는 좀 허전하다. 나 혼자서 먹어야 하는 것이다. 정령들은 예전에 청색지대 안의 정령력이 강한 곳에서 이후로는 음식을 먹지 않았다. 먹어도 물질이라 도움이 안되고 상급의 상태가 아니면 맛도 제대로 느낄 수가 없다고 한다. 그냥 먹기만은 할 수 있지만 의미가 없는 일이라 시키지 않고 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빨리 힘을 키워서 너희들 전부를 상급상태로 불러 낼 수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더 이상 몸 안에 기운이 늘지 않아. 휴~~ 방법을 찾아야 할텐데. 그래야 내가 너희들이랑 식사를 하고 함께 여행도 하고 할텐데... 지금 상태에서 막혀 버려서 방법이 없네.” 나는 우리들의 만찬을 혼자 즐기는 것이 어쩐지 또 서글픈 생각이 들어서 중얼거렸다. 뾰롱 뾰뾰로롱 뾰로롱 로로롱 란이가 옆에와서 위로라도 하듯 노래를 부른다. 나는 란이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어 주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방법이 생기겠지. 너희도 그렇게 생각하지?” 정령들은 제각기 고개를 끄덕이거나 걱정하지 말라는 위로를 한다. 뾰롤 뾰로롱 뾰로롤롱 란이도 나에게 위로를 주고 싶은 모양이다. 나는 침낭에 혼자 누워서 생각에 잠겼다. 이제 다음 마을에서 일행과 헤어지면 무엇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일행과 헤어지고 한타 왕국을 계속 여행하는 것도 별로 내키지 않았고, 생각해 보니 마땅히 하고 싶은 일도 별로 없었다. 있다면 정령들을 빨리 성장시키고 싶었고, 균형의 씨앗인가를 빨리 전달해서 책임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그러면서 신계나 천사계, 마계의 존재들을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이번에 그냥 지심목이 있는 곳에 가서 좀 쉬어야 겠다. 가서 마법이나 좀 더 연구해 보고, 혼자서 하는 것도 재미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정령들에게 정령들의 마법도 배워보고, 환수도 많으면 재미 있겠는데.. 그냥 거기 가서 다른 4계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 기다려 봐야 겠다.” 나는 그렇게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다가 잠이 들었고, 날이 밝고 다시 길을 나섰다. 말을 타지 않는다고 해서 그다지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내가 달리는 속도는 말이 달리는 속도 보다 빠르면 빨랐지, 느리지 않은 속도 였다. 내공력을 사용하는 탓도 있었지만 마법으로 몸을 가볍게 한 상태였기 때문에 더더욱 이동이 힘들지 않고 편안한 탓도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전력으로 달린 끝에 나는 새로운 마을에 도착 했다. 이번 마을은 상당히 큰 마을이었고, 근처의 지역을 다스리는 영주라도 있는 모양인지 한 쪽에는 거대한 성이 지어져 있었다. 성이 좀 높은 언덕에 지어지고 그 아래 평지에 마을 있는 모습이었다. 지금까지 보았던 마을들 중에서 가장 큰 것 같은 마을이었다. 그리고 그 마을에는 당연히 용병 길드가 있었다. 나는 용병길드에 우리 일행에 대한 연락을 남기고 여관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여관에서 하루를 보낸 다음날 저녁, 넥스와 유소, 쉬벡이 내가 묶고 있는 여관을 찾았다. “제가 알기로 길드는 밤에도 문을 닫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빨리 용무를 마치기로 하지요.” 나는 여전히 뚝뚝한 목소리로 말했고, 유소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한 모양이었다. “루탄님은 이제 어디로 가실 생각이신지요. 딱히 어디 가실 곳도 없으실 텐데요.” “글쎄요, 쉬벡님. 잠시 어디 정착을 할 생각입니다. 사람이 전혀 없는 곳을 찾아서요. 그냥 4계의 연락이 올 때까지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지낼 생각입니다.” “루탄, 그럼 다음에 다시 만날 수 있는 거냐?” 넥스가 물었다. 나는 넥스를 돌아 보았다. 넥스의 잘못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넥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경고를 하지. 만약에 오행신공을 익힌 사람이 넥스 너와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면 나중에 내가 그런 사람을 만난다면 무조건 그는 나의 적이다. 죽이지는 않겠지만 팔 하나는 내 놓아야 할 것이다. 만약 유소와 네가 관계가 없어진다면 유소도 나를 만나는 것을 피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오행신공 중에서 유소가 익힌 오행신공의 수를 익힌 사람이 있다면 그도 나의 적이다. 그건 너의 자손이라도 마찬가지다. 내가 너에게 주는 것은 오행신공의 화 뿐이다. 명심해라.” 내 목소리는 내가 들어도 냉기가 날리고 있었다. 넥스는 내 말에 화를 내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얼굴이 굳어 있었지만 그것이 나에게 화를 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알았다. 나는 너에게 오행신공의 화만 받았다. 다른 것은 받은 적이 없다.” 나는 유소를 돌아 보았다. “유소, 이 상황이 내 탓이라고 하진 말아라. 그리고 분명히 말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오행신공의 수를 익힌 사람은 나의 적이다.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도 이미 전해진 신공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루비아나 너에게 하는 경고라고 생각해라.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말아라. 이건 마지막 경고다. 만약 이것을 어긴다면 팔 하나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곧장 여관을 나섰다. 그리고 용병길드를 찾아 ‘란의 용병대’의 해체를 신고했다. 그리고 타호루를 찾았다. “미안합니다. 타호루. 하지만 이 문제는 귀하의 소령주의 잘못도 있는 것이니 전적으로 내 잘못으로 돌리지는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유소에게도 말했지만 이루비아 소령주에게 전해주십시오. 오행신공의 수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수를 익힌 사람은 누가 되었든 나를 만나면 죽음보다 더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 전해 주십시오. 이건 분명한 경고입니다.” 타호루틑 침착했다. “알겠습니다. 분명히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소령주를 대신해서 비기를 훔친 것을 사과합니다. 사과한다고 될 일이 아닌 것을 알지만... 그리고 이렇게 용서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아마도 타호루는 내가 이루비아 소령주와 유소에게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는다는 것이 고마운 모양이었다. 사실 내가 싸우려고 마음을 먹는다면 꽤난 골치 아픈 상대가 될 테니 그럴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곧 그들 모두와 이별을 고했다. 그리고 마을을 벗어났다. “그래 이제 어디로 가십니까? 저도 함께 가면 안되겠습니까?” “하하, 쉬벡님께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저 혼자 있고 싶어요. 그리고 쉬벡님이 여기에서 빠진다면 카타트에 가는 데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고, 제가 없더라고 쉬벡님이 일행들을 도와주셔야지요.” “그렇게 걱정을 하시면서 왜 그렇게 냉담한 말씀만을 하셨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오행신공을 익힌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 비해서 검이나 무기를 쓰는 것에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게 될 겁니다. 자질이 있는 사람이라면 저 정도의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많이 나올 수도 있겠지요.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세상은 힘이 우선하게 될런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사람이 사람을 압박하는 경우가 많지 않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고 4계가 안정되고 괴물들이 줄어들고 인간들의 영역이 늘어나면 한타라는 테두리를 벗어나려는 사람도 생길 것이고, 한타를 전복하려는 사람도 생기지 않는다고 말하지 못하지요. 저는 다만 그런 생각을 가지는 사람들은 힘이 있는 사람들이고 힘이 있는 사람들 중에 오행신공을 익힌 인물들이 있게 되리라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쉽게 오행신공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근원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이죠.” “그럼 아예 처음부터 알러주지 말았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사람들의 정이란 것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된 것이고요. 나는 그나마 조금은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 이런 문제가 생길 거라고 생각했어요. 적어도 몇 대는 흐른 다음에... 그런데 유소는 그런 시간을 기다리는 것 조차도 싫었던 모양이네요.” 나는 지금 다시 마을로 돌아와 마지막으로 쉬벡에게 인사를 하고 있는 중이다. 쉬벡에게는 다른 사람들에게 했던 것 처럼 냉정한 인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시 어둠을 틈타, 쉬벡의 숙소를 찾은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되어 버린걸요. 이젠 제 손을 떠난 문제예요. 그렇다고 유소나 이루비나를 어쩔 수는 없지 않겠어요?” 나는 빙긋이 웃어주고는 쉬벡에게 인사를 했다. “쉬벡 그럼 나 이만 갈께요. 건강해요.” “정말 어디로 가는지 말씀을 않으실 겁니까?” “하하. 제가 갈 곳이 어디에 있겠어요. 왔던 곳으로 가야죠.” 그리곤 나는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몇 일의 고생 끝에 나는 다시 돌아왔다. 예전에 처음 이 곳에 발을 디뎠을 때는 정말 막막하기만 했었는데, 아무것도 입지 않은 빈 몸에 지심목 검을 들고 서서 여기가 어디냐고 황당해 하던 것을 생각하면 하하 정말 기가 막힌다. 나는 다시 지심목의 있던 그 계곡 안으로 돌아왔다. 계곡은 여전히 바람의 중급 정령이 지키고 있었지만, 이젠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기구가 없어도 계곡을 넘어오는 데에 큰 지장이 없을 정도였다. 그냥 풍아의 도움으로 공중을 디디고 날아왔던 것이다. 그냥 보통 상태라면 힘이 들었겠지만, 몸을 가볍게 만드는 마법은 이럴 때에 탁월한 효과가 있었다. 나는 우선 전망 좋고 살기 좋아 보이는 곳에 집을 짓기로 했다. 필요한 것들은 거의 정령들을 시켜서 만들면 되었기 때문에 그리 오래지 않아서 집이 만들어 졌다. 빨간 벽돌로 만든 벽돌집. 지토가 벽돌을 찍어내고 화아와 풍아가 벽돌을 굽고 다시 지토가 쌓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벽돌집. 큼직하게 지어서 내 방 하나, 수아 방 하나, 풍아 방도 하나, 지토 방도 하나... 이 렇게 각 정령들의 방을 하나씩 만들고, 란이의 방도 하나 만들고 다시 지하에는 마법연구를 위한 연구실도 만들고(여긴 거의 실험실 분위기다.) 잡다한 물품 저장 창고도 만들고(이공간 창고가 있는데 괜히 만들었다 싶었지만 잡동사니들을 두기에는 적절했다.) 좀 지나서는 이층도 올려서 휴식 장소도 만들고, 특히 모든 창은 유리로 만들었는데 처음에는 상당히 실패를 많이 했지만 곧 익숙해져서 화아와 지토가 알아서 유리판도 만들고 필요한 유리병도 만들고 하는데 아주 익숙해진 모습이다. 그렇게 우리 가족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우리들 사이의 호칭에도 변화가 생겼다. 하하 가족이니까 가족끼리의 호칭이 필요한 것이다. 처음에는 말도 많았고 탈도 많았지만 이제는 거의 해결이 되었다. 먼저 가장 나이가 들어 보이는 지토, 지토는 그냥 서로 말을 터 놓고 이름을 부르는 관계로 지내기로 했고, 광아와 화아, 수아 풍아는 모두 동생 삼기로 했다. 카카카 처음에 화아가 얼마나 반항을 했는지는 충분히 짐작하리라 믿는다 하지만 내가 힘이 더 쎄기 때문에 하는 수없이 그렇게 하기로 했다. 자기가 나이가 더 많다구 우기긴 했지만, 이런 경우에는 나이보다 중요한 것이 있는 법이라고 우겨서 결국 내가 큰형 화아가 둘째, 근데 광아가 밀려서 넷째, 풍아가 셋째, 우리 수아가 막내가 되었다. 그래서 난 여동생 둘에 남동생 둘, 그리고 한 늙은 친구와 한 애완동물을 가지게 되었다. 오빠! 그 얼마나 듣기 좋은 소리인가 말이다. 거기다가 루탄형, 루탄 형님, 카카 얼마나 좋아. 하하하 그래서 내 생활은 더할 나위 없이 즐겁고 행복했고 부족함이 없었다. 시간은 참으로 빠르게 흘러가는 것이다. 아마도 내가 다시 이 계곡으로 들어 온 것도 벌써 4년이 흘러버린 것 같다. 그 사이에 밖에야 무슨 일이 있는지 알 길이 없고, 그렇다고 내가 사는 이 곳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내가 마법이 드디어 8써클이 되었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로 할 줄 아는 마법은 없다는 것 정도가 전부이다. 정령들에게서 여러 가지 마법들을 배워서 예전에 비하면 일취월장한 솜씨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정령들을 성장시킬 방법은 없다. 내 몸 안의 기운은 전혀 변화가 없는 것이다. 쩝. 참, 우리의 귀염둥이 란이. 이 녀석은 그 동안에 내가 마법을 배우는 것을 옆에서 따라서 배우더니 이젠 7써클 정도의 마법을 쓴다. 이상한 것은 이 녀석은 몸 주위에 써클이 없다는 것이다. 그냥 마법을 쓴다. 신기한 녀석이다. 하지만 아직도 란이는 말을 못하고, 감정 표현도 안된다. 왜냐하면 당신은 알껍질이 어떤 형태의 표정 변화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표정을 보이는 것 자체가 불가능 하다. 그나마 날개짓이 빨라지거나 움직임이 빨라지는 정도로 짐작하는 것이 가능할 뿐이다. 울음소리로는 여전히 불가능 ㅡ.ㅡ;; 하지만 그래도 우리들의 마스코트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제는 내가 정령들을 모두 상급인 상태로 소환하는 것이 가능해 졌다. 상당히 마나의 소비량이 많아서 문제지만 다섯을 모두 상급으로 소환하고 남은 마나로 유지하다가 마나가 떨어지만 내공으로 유지하고 그 사이에 모인 마나로 다시 유지. 이렇게 번갈아 하면 반나절 정도는 함께 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만약에 9써클이 되면 무리 없이 함께 다닐 수 있을 것 같은데, 일단은 그래서 목표가 9써클의 마나를 가지는 것으로 해 두었다. 그렇게 되면 전부 인간형이니까 함게 여행을 다니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럼 무지 재미 있을 것 같다. 어차피 마나량이 많다고 새로운 마법을 쓸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마나량을 늘이면 내 가족을 온전한 모습으로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요즈음은 9써클을 이룩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중이다. 하지만.........ㅜ.ㅡ 사실 너무 힘들다. 내가 몸 주위에 둘러 두고 있는 마나의 총 량보다 많은 마나를 다시 한 번 덮어야 한다는 것인데, 도무지 공간도 없고 그 각각의 상관관계에 따른 배 열도 장난이 아닌 것이다. 왠지 내가 마나들을 배열해 둔 것이 이제는 더 이상 다른 마나 써클을 받아 들일 수없는 벽을 쌓아 둔 것처럼 막혀 버렸다. 그래서 꾸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방법이 보이지 않아서 침울한 상태. “오빠, 오늘은 저녁에 뭘 해 먹을까?” 옆에서 팔짱을 끼고 저녁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은 수아다. 요즈음 수아는 거의 모든 식사를 책임지고 있다. 일부러 다른 녀석들이 현신해 있도록 해 주려는 배려인지 지토나 광아는 반지 속에서 잘 안나오고(밥 먹을 때는 빼고.) 그래서 여유가 좀 있다보니 화아와 풍아 수아는 낮 시간에는 거의 대부분 반지 밖에서 상급의 상태로 현신해 있을 수 있는 것인데, 그러고 보면 지토나 광아가 기특하기도 하고 그렇게까지 변해가는 녀석들이 대견스럽기도 하고 그렇다. “다른 오빠들이나 풍 언니, 그리고 지토 아저씨가 오늘은 뭔가 새로운 것이 없을까 하는 눈치던데... 오빠! 뭔가 새롭게 먹을 거 없을까?” “글세, 뭐가 새로운 먹거리가 있을까? 대부분 다 먹어봐서. 그리고 내가 아는 요리는 수아 너도 다 알잖아. 그리고 요리란 창조야 창조, 새롭게 만들어 보는 건 수아 네가 해봐야지.” “피~~, 하지만 새롭게 뭘 만드는 건 어렵다구. 그게 얼마나 어려운데.” 사실 이런 수아의 반응은 대단한 것이다. 절대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대로 따라 하기만 하던 때도 있었다. 나는 그런 생각이 나서 흘러나오는 웃음을 짓지않을 수가 없었다. “오빠, 무슨 생각 하면서 웃는 거야? 내 흉보는 거지? 그렇지?” 하하 이녀석 참 민감하다니까. “아니야, 그저 옛날 기억이 나서.” “옛날 기억? 뭐? 어떤거? 솔직히 말해 내가 실수한 거 그런 거 기억하고 웃은 거지?” 역시 민감한 녀석이라니까. “하하, 아니야, 그저 넥스랑 다닐 때를 생각한 거야.” 나는 내가 이야기를 하고도 까무라치도록 놀랐다. 왜 갑자기 넥스를 변명거리로 생각했을까? 그 동안 될 수 있으면 기억하려고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이름을 떠올린 것이다. 옆에서 계속해서 삐쭉거리는 수아를 두고도 나는 잠시 멍청한 상태가 되었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유소와는 결혼을 했을까? 쉬벡도 잘 지내고 있겠지? 예전에는 한동안 많이도 생각했던 것들이 갑자기 떠올랐다. 정말 잘 지내고 있을까? 넥스도 쉬벡도, 그리고 유소도. 그리고 오행신공은 어떻게 되었을까? 유소와 이루비아는 내 경고를 받아 들였을까? 쉬벡은 어떨까? 잠깐동안 내 머리를 휘두르는 생각들은 끊임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곧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정리하곤 그들을 밀어내었다. 나는 한동안 이곳에서 나갈 생각이 없었고, 또 나갈 이유도 없었다. 지금 이대로가 좋은 것이다. 나는 수아와 이것 저것 저녁 거리를 수확해서 바구니에 담아 들고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지토가 정성들인 밭과 수아가 힘을 쓴 논, 화아와 지토의 대장간, 풍아가 좋아하는 작은 풍차. 란이가 좋아하는 과수원. 우리 집 주위에는 어느 사이에 아담하고 정겨운 삶의 흔적들이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수아의 손을 잡고 집으로 가는 나는 왠지 모르게 집 주위의 풍경이 아름답고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저녁 식사에 나타난 불청객은 우리들에게 이런 우리의 보금자리를 떠나도록 만들었다. 식사시간에 나타난 것은 네 명(?)의 존재였다. 갑자기 흔들린 마나의 물결을 느끼는 순간 함께 자리를 지키던 가족들이 전부 반지 속을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는 정령왕들 중 누군가가 온 것을 알았다. 그리고 란이 역시 내 어깨 위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식탁에서 일어나 현관 밖으로 나갔다. 하나는 정령왕이겠고, 아무래도 물의 정령왕 같군. 그리고 하나는 광아를 닮은 것을 보니 천사계의 인물이겠고 그럼 나머지는 신계와 마계의 인물일 텐데 그 구별이 안가는군. “처음으로 이 곳에 손님들이 오셨군요. 미처 오시는 것을 몰랐습니다. 이리로 좀 앉으시지요.” 나는 우리집 정원에 놓은 테이블과 의자 쪽으로 일행들을 안내했다. “이 분은 물의 정령왕이신 것 같군요. 그리고 이 분은 천사계에서 오긴 것 같고, 그럼 나머지 어떤 분이 신계고 어떤 분이 마계이신지 구별이 안가네요. 하하. 이미 저에 대해서는 아시고 오셨을 것 같습니다만.” 나는 일행을 안내하면서 자연스럽게 운을 떼었다. “이 곳이 인간계의 균형의 지킴이가 있는 곳인 모양이군요. 결계가 존재하는 것 같은데 아주 강력하군요. 참, 저는 신계의 대표로 온 우림선입니다.” “균형의 전달자를 보게 되다니 영광이군요. 저는 물의 정령왕 엘라임이예요. 반가워요.” “반갑습니다. 전 천사계의 대표로 온 방위 천사이자 어전천사인 가브리엘입니다.” “하하 반가워. 난 마계 대표로 온 베헤모스야. 다들 육지의 마수라고 불러.” 대충 신계의 대표란 우림선만 빼면 알만한 존재들이군. 적어도 이름만은 들어본 존재들인 거니까. “네, 그럼 이렇게 네 분이 찾으신 것은 균형의 씨앗에 대한 각 계의 입장을 정리하신 것으로 보면 되겠군요. 그래 어떤 결론을 내리셨습니까? 상당히 궁금하군요.” 나는 조금 성급하다 싶었지만 본론을 꺼냈다. “그건 제가 말씀드리지요.” 우림선이 나섰다. “우리들은 각 계의 어느 곳으로든 균형의 전달자가 가는 것을 달가워 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이미 알고 계시는 바와 같이 전달자를 억류하는 사태의 발생을 우려한 때문 입니다. 그리고 어느 쪽이라도 아주 미묘한 차이의 선후가 생기는 것조차 감수하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머리를 마주하고 고민을 했습니다.” “거 좀 본론만 이야기 하면 안 되나? 사설이 길잖아.” 따지고 들어간 것은 당연히 베헤모스였다. “상황설명은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좀 기다리시지요.” 당당하게 맞서는 우림선. 대단한 존재인가 보다. “이런 곳에 오래 있고 싶지 않아서 말이야, 될 수 있으면 빨리 끝내라고. 아무리 상황설명을 그 쪽에서 하기로 했지만 말이야.” 뭐야 그럼 이런 설명을 누가 하는지 까지 정하고 왔다는 말이야? 정말 세세한 상황까지 배려한(?) 협상이었던 모양이군. “그래서 각 계에서는 균형의 전달자가 있는 그 곳에 각 계의 일부를 구현시키기로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각자의 능력으로 자신이 속한 계를 균형의 전달자에게 구현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청색지대 같은 계의 속성을 지닌 유사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하나의 계를 만드는 것입니다. 물로 그래봐야 범위는 두세 걸음에 지나지 않겠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균형의 씨앗이 그 구현된 계에 뿌리를 내리게 되면 그 계를 가지고 본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각 계의 대표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입니다.” “예에? 그러니까 여기에다가 각 계를 구현시킨다는 말입니까? 여러분 각자의 힘으로요? 그럼 그렇게 각 계를 구현하면 이 곳에 어떤 영향은 없습니까? 여기는 중요한 곳 이란 말입니다. 인간계의 균형이 여기에서 결정되는 곳이란 말입니다. 신중해야죠.” 내 말에 답을 한 것은 물을 정령왕 엘라임이었다. “그런 걱정은 없습니다. 구현된 각 계의 크기가 크지않기 때문에 주위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 그럼, 이렇게 각 계가 균형을 찾게 되면, 다른말로 계의 붕괴라는 위험이 없다면 앞으로 각 계는 어떤 관계을 유지하는 거지요? 특히 물질계와 다른 계들의 관계를 알고 싶은데요.” “호오, 그래도 인간이라고 물질계를 걱정하는 것인가? 그건 내가 알려주지. 4계가 각각 붕괴의 위협에서 벗어나면 더 이상 지금처럼 인간계의 4대 불모지대니 뭐니 하는 이런 것을 둘 필요가 없고, 괴물들을 통제할 필요도 없어지지. 그러니 그냥 인간들이 살고 싶은 데로 살게 둔다는 말이지. 다만 우리 마계는 인간계 전체의 멸망이라는 최악의 상태를 제외한 어떤 경우에도 관계치 않고 인간들을 괴롭히고 싸우고 증오하게 만들고 뭐... 그런 것을 할 것이고. 천사계는 주신에게 영광을 바친다면서 인간들에게 사랑과 평화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추종자를 만들 것이고, 정령계는 그런 것과는 별 상관이 없으니 그저 자신들의 힘이 줄지 않도록 정령들을 인간계와 관련 맺도록 하는 일에 열중하겠지. 신계? 신계는 너무나 여러 종류의 존재가 있어서 어떤 일을 할런지는 모른다. 나같은 놈도 있고 천사같은 놈도 있고, 정령같은 놈도 있고, 다른 어떤 것과도 닮지 않은 녀석들도 있고 그러니까. 단 인간의 영혼을 담당하는 일이 아직은 신계의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건 악마인 우리가 관여하거나 천사계의 주신이 관여하는 부분보다는 신계에 속한 영혼이 더 많으니까. 물론 우리가 담당하는 영혼이 없는 것도 아니고 또, 우린 그런 영혼을 늘이는 것이 주목적이니까 열심히 노력하겠지. 아무튼 우리가 가진 영혼이든 천사계가 가진 영혼이든 다시 인간계로 태어나는 일만은 신계의 몫이다. 문제는 우리 두 계가 지는 영혼을 신계에서 인간으로 환생시키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이 문제긴 하지만. 아무튼 앞으로는 말 그대로 인간들을 인간답게 그냥 둔다는 것이 정답니다.” 나는 베헤모스의 말을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 예전에 내가 살던 때와 비슷해 지겠군. 단지 정령계와 신계가 좀 더 가까이 물질계와 가까워 졌다는 점만 빼곤 말이다. “그럼 빨리 일을 마치도록 하지요. 오래 걸리는 일인가요?” 나는 우림선 등을 돌아 보며 물었다. “어려울 것 없지요. 그럼 시작하지요.” 가브리엘의 말에 따라서 내 주위를 둘러싼 그들은 힘을 개방시켰다. 엄청난 압력. “크윽. 누굴 죽일 일이 있나? 넷이서 이렇게 힘을 쓰면 가운데 있는 나는 무엇이 되는 거야?” 나는 비틀거리면서도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사방에서 몰려 오는 힘에 꼼짝을 못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압력은 더해갔고, 압력에 의한 고통은 더없이 심해졌다. ‘이것들이 날 죽이려고 작정을 한 것인가? 내가 죽어도 균형의 씨앗이 전달되는 것에는 문제가 없는 것 아닐까? 그래서 내가 죽던지 말던지 신경을 쓰지 않고 이렇게 힘을 개방하고 있는 것이라면?’ 나는 불현 듯 이런 불길한 생각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불안한 마음이 들자 나는 최대한 나를 방어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다음 부터는 오로지 나를 보호하기 위한 모든 방법을 떠올리고 실행하기 시작했다. 마법으로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실드를 만들고 체내의 기운을 온 몸에 펼치고 금의 기운으로 바꾸어 몸을 보호했던 것이다. 다행히 란이는 압력이 시작되면서 돌려보냈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고, 정령들도 반지 속에 있는 이상은 괜찮을 것이었다. 그렇게 힘을 쓰고도 쏟아지는 압력에 정신이 가물가물 할 무렵 서서히 압력이 걷히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내 몸은 서로다른 4개의 계에 속해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정령계는 전에 느끼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익숙했고, 천사계는 광아와 비슷한 느낌이었고, 악마계는 칙칙하고 어두운 느낌이었지만 실제로 어둡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신계는 그냥 구름같은 느낌이었다. 신선이라 그런가? 그리고 그 순간 내 머리 위에는 4개의 씨앗들이 나타났다. -균형의 전달자여. 이제 나는 이 계에 자리잡아 이 계를 안정시키기로 했습니다. 이제 그대는 그대의 책임을 다했습니다. 수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특정하게 어느 한 곳에서 울린 소리가 아니라 네 개의 씨앗이 한꺼번에 같은 소리를 한 듯 싶었다. 그리고 그 씨앗들이 각 계로 스며들 듯 사라지자 그 공간은 작게 뭉치면서 우림선은 부채모양이, 엘라임은 물방울이, 가브리엘은 깃털이, 베헤모스는 뿔의 모양의 물건이 되어 각자의 손 위에 놓였다. “이제 모든것이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신계에서 드리는 선물입니다.태상노군께서 어차피 이차원과는 오랜인연이 없으니 상관없으리라시며 주신 것입니다.그럼 저는 이만.” 우림선은 작은 상자를 나에게 건네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호호, 그럼 저도 이만 갑니다. 대신에 저희 정령계에선 이걸 선물로 드리지요. 이건 각 속성의 순수 기운입니다. 아마도 쓸 데가 있을 겁니다.” 엘라임 역시 주머니 하나를 전하고선 사라져 버렸다. “저희 천사계에서는 마땅히 드릴 것이 없어서 균형의 전달자인 당신께 이것을 드립니다. 이것은 주신의 권능이 담긴 것으로 어떤 사악도 침범하지 못하며 주신에게 마음을 바친 자가 사용한다면 엄청난 힘을 발휘할 것입니다.” 역시 천사답게 가브리엘은 나에게 펜넌트 십자가를 하나 주고 갔다. “이제 나 뿐이군. 솔직히 말하면 나는 너를 죽이고 가고 싶다. 네가 무엇을 잘못해서가 아니라 원래 그런 게 우리 악마들의 속성이거든. 하지만 루시퍼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못하니 이걸 주마, 이것으로 너는 마계 전체와의 어떤 약속을 어기더라도 한번은 그 죄를 묻지 않는 특혜를 누릴 것이다.” 베헤모스는 이상한 무늬를 내 손바닥에 그려주고는 사라졌다. 물론 손가락으로 그린 무늬가 남아 있을 리가 없지만 말이다. “뭐야? 쫀쫀한 악마, 아무 것도 주지 않고 가버린 거잖아? 거 참, 못된 녀석일세.” 나는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와서 가족들을 불러내었다. 좀전에 힘을 써서 상급의 형태로는 안 되었지만 그래도 모두들 궁금해 할 것 같아서 선물들을 풀어 보기로 한 것이다. 음... 그러니까 이건 우림선이 준 물건, 어디보자 엥? 책이잖아. 그것도 이상한 글씨로 기록된, 뭐 읽을 수는 있는 것 같으니까 문제는 아니지만 처음 보는 글씨다. 그리고 이건 엘라임 선물, 음 구슬들이네 그런데 5개잖아. ‘이건 순수 정령력이군요. 이거면 최상급정령이 될 수 있겠는데요 루탄형님.’ 광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뭐? 그럼 너희들 이거 주면 최상급 정령이 되는 거냐?” ‘그렇게 될 것 같군. 시간이 좀 걸리기는 해도 이 졍령력을 다 내것으로 하면 최상급이 되겠군.’ 지토도 같은 소리를 한다. 그리고 풍아 화아 수아도 각각 하나씩의 구슬들을 앞에다 두었다. “음, 이런 방법으로 성장을 할 수도 있네? 그럼 다행이다. 그런데 시간이 걸린다는 건 얼마나 걸린다는 거야?”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100년이나 200년 혹은 길어야 500년이겠지요’ 광아의 터무니 없는 말이다. “야, 그걸 말이라고 하냐? 내가 그 때까지 살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뭐 생각해 보면 살 수도 있을 것 같기는 한데, 그 때까지 뭐하고 있으란 말인가 나 혼자서 말이다. 아니 란이는 있겠구나. 하지만 역시 심심하다. “안돼 구슬 내놔라. 너희들 없으면 무슨 낙으로 살라고. 절대 안 된다. 구슬 내놔.” 나는 다시 구슬들을 빼앗아서 주머니 안에 넣었다. 그리고 나선 별로 볼 것도 없었다. 베헤모스의 선물이란 손에 손가락으로 그린 그림이라 남아 있지도 않았고, 주신의 권능이 담겼다는 십자가는 뭔가 기운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딱히 꼬집을 수가 없었고 그렇게 되고 남은 것은 역시 책이었다. 책을 읽자, 마음의 양식이다. 책을 읽자. 처음 책을 읽을 때에는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이 책은 신선이 되는 비법을 전하는 책이라는 것이다. =신선이 된다는 것은 곧 세상 만물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니 이는 내가 곧 보이는 모든 것이요 내가 곧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이요 내가 곧 내가 되는 것이요 내가 곧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어쩌구 저쩌구. 하하하 이런 허무 맹랑한 말로 시작된 이놈의 책은 정말 이해 할 수 없는 수많은 말들로 들어 차 있었고, 그것들은 처음에는 황당함으로 다음에는 짜증으로 다음에는 신경질로, 그렇게 다가 왔지만 사실 할 일도 별로 없는 나는 하루 하루 수수께끼를 풀어 가듯이 그 책을 들여다 보고 또 들여다 보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런 ‘신선 되는 법’ 말고도 배울 것이 많이 있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진법이나 의술, 그리고 예전에 무선(무술을 익혀 선인이 된 신선들)이 썼던 몇가지 기공들과 심법, 그리고 경공이나 신법같은 것들과 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점성술과 카드점, 주술 같은 것들이 적혀 있어서 거의 백과 사전에 비견할 만한 책이었던 것다. 그리고 그런 부분들은 그다지 어렵지 않게 읽고 익힐 수 있었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러갔다. 하지만 여전히 ‘신선 되는 법’쪽의 내용은 보고 또 보고 해도 별 진전이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날들이 계속되던 어느 날부터 책의 어느 부분들이 이해 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결국에는 내가 세상과 하나가 된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었는데 나는 이것을 오행심법과 연관지었던 것이다. 오행은 곧 뭉쳐서 태극이 되고 태극은 곧 세상의 모든 것이 되고 그럼 내가 풀어 흩어지면 태극이고 그 태극이 모여서 세상을 만들면 세상이 되고 나를 만들면 내가 되고, 그러므로 내가 태극이 되면 곧 신선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뭐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내 몸 속의 태극을 오행으로 나누고 오행을 태극을 묶는 것은 가능했지만 다시 내 몸 자체를 오행의 기운으로 바꾸어 태극으로 모으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어느 날 나는 가족들을 다 불러 모았다.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이 책이 아주 재미가 있는데, 내가 예전에 내 몸을 다시 구성했다는 이야기 한 적 있지? 그런데 이 책에서 그 재구성이 신선이 되는 길이라고 하거든, 그리고 좀 더 깊이 있는 내용이 있는 것도 같은데 아직 잘 잡히지를 않아. 그래서 이 책을 수련을 해 볼까해. 그러니까 너희들은 이제부터 이 구슬들 가지고 가서 최상급 정령이 되는 수련을 해. 그리고 란아는 신계에 가서 놀다가 나중에 내가 부르면 다시와. 신계에서도 다른 환수를 잡아먹는 환수가 있다니까 조심하고. 나중에 내가 부를 때까지 건강하게 있어야 한다.” 나는 그렇게 정령들과 란이에게 다짐을 하곤 정령들에게 엘라임의 구슬을 건넸다. 수아나 풍아등은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좀 섭섭해하고 슬퍼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내 말에 화아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오빠가 그 시간동아 죽거나 하지 않을 걸 뻔히 아는데? 뭐가 섭섭하고 아쉽고 그래야 한다는거야?” “그러게 말이야.” “하지만 얼마나 오래 얼굴을 보지 못할는지 모르잖아. 그게 얼마나 슬픈 일이야? 그런데도 안 슬프단 말이야?” “하지만 루탄형님. 우리들은 반지 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않거나 아주 조금만 느낄 수도 있거든요. 그러니까 별로 바깥의 시간과는 상관이 없으니까 그리 섭섭하거나 하지 않은 거예요. 그러니 그렇게 토라지지 마세요.” 이거 광아의 말이다. 그런데 요즈음은 광아도 많이 변하는 것 같다. 어째 점점 이것들이 나를 물로 보는 경향이 강해지는 것 같단 말이야. 내가 이렇게 허탈해 하고 있을 때, 나의 기대를 충족시켜 준 것은 오직 란이 뿐이었다. 란이는 그 작은 부리로 내 머리카락을 물고 놓지를 않았던 것이다. “란이야. 그렇다고 헤어지지 않을 수는 없잖니. 그러니까 너도 신계에서 건강하고 멋지게 지내다가 나중에 다시 만나는 거야. 알았지?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몸조심 하고, 알았지? 응. 그렇게 슬픈 눈으로 보지 말아라. 시간은 금방 갈꺼야. 그러니까. 너도 꿋꿋하게 버티는 거야. 알았지?” 나는 한참을 달래서 란이을 신계로 돌려 보냈다. 그리곤 다음에 보자(100년, 혹은 200년, 또는 500년이나 그 이상 후에)라는 인사를 내일 다시 보자는 인사처럼 하고 수아들이 반지 속으로 들어가고 나는 몇 가지 준비 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들의 집을 다른 존재들로부터 지키기 위한 결계를 치는 것이었다. 비록 8써클에 불과했지만 최선을 다해서 외각에 마법 결계를 쳤다.(사실 내 마나 사용량은 같은 써클의 마법사보다 몇 배는 많은 양이기 때문에 마나량만 가지고 이야기하면 9써클 보다 많은 마나량을 썼을 것이다. 흐뭇) 그리고 그 안쪽에 신계의 책에서 배운 주술 결계(이건 예전에 죽은 뱀들을 가지고 만들었다. 쓸모가 있을까?) 그 안쪽에는 카드를 이용한 환상진과 미로진, 그리고 그 안에 마지막으로 동양진식의 최고봉이라는 만상은허폐쇄진을 펼쳤다. 이건 뚫고 들어올려면 적어도 신계의 인물이 아니면 어려울 거라는 장담을 하고 있는 진이었다. 그렇게 준비를 마친 나는 우리가 살던 집 전체에 보존마법을 걸고 지하실로 내려왔다. 물론 지하실에도 몇 가지 큼직한 결계를 걸어두고 실험실을 개조한 수련실 중앙에 가부좌를 하고 앉아 마지막으로 책을 펼치고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머리 속에 각인을 시켰다. 이미 다 아는 것이지만 만약에 명상중에 틀린 부분이 생기면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반지와 쌍환검을 비롯한 중요한 물건들을 모두 이공간 창고에 넣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실상 시간의 흐름이란 의식과 무관한 것이다. 때론 의식의 흐름이 시간의 속도보다 무한이 빠를 때가 있는가 하면 오랜 시간동안 한가지 생각으로 매달리는 때도 있다. 하지만 어떤 상황도 좋다 나쁘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빠른 시간속에서 혹은 빠른 사유속에서 혹은 느린 시간 속에서 혹은 느린 사유속에서, 그 어디에서 깨달음이 올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나의 명상과 호흡은 길고, 고요하고 느리고 침착했다. 시간의 흐름은 이미 놓은지 오래였고, 생각의 끈을 놓은지도 오래였다. 예전처럼 이제는 그저 내가 나를 보는 단계에 있었다. 호흡을 통해서 세상이 흘러와 몸 속에 쌓였지만 또 호흡을 통해 흘러 나갔다. 그리고 또 흘러 들어와서 흘러 나가고 세상이 우주가 내가 흘러 다녔다. 그러다가 그것들이 단전이 아닌 다른 곳으로 흐르기 시작했는데 하늘은 머리로 가고 땅은 가슴으로 오고 나는 단전으로 흘렀다. 어느 순간 하나였던 것이 셋이 되었고 셋은 하나가 되지 않았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셋이 하나가 되는 그것이 내가 가야 할 길이라는 것을 하늘과 땅과 나는 같은 것이었지만 그 근본을 알 수 없었다. 오행이 태극이 되었지만 태극은 내가 되었다. 태극은 하늘과 땅이 되지 못했다. 내가 가진 것은 나의 태극과 하늘과 땅의 기운 조금씩이었다. 하늘과 땅도 태극이 있을 것이지만 나는 하늘의 오행과 땅의 오행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하늘과 땅의 오행이 합하여 만든 태극도 알 수 없었다. 하늘의 기운은 미약했고, 땅의 기운은 모자랐고, 나의 기운은 넘쳤다. 그리고 진전은 없었다. 나는 눈을 떴다. 더 이상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나마 상단전과 중단전이 만들어 진 것이 내가 얻은 수확이었다. 이 단전들은 내가 이렇게 앉아 있는다고 채워지지 않을 것이었다. 내가 느낄 수 있는 것은 깨달음이 없이는 얻을 수 없는 것이라는 힘이라는 느낌 뿐이었다. 주위를 둘러 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입고 있던 옷은 보존 마법을 걸었던 기운이 남아있어 그대로 였고, 내가 쳐 놓은 지하실의 결계도 변화가 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윗층도 무사했고, 집 주위는 온통 아름드리 나무들이 가득 차 있었지만 집은 보존마법 덕분인지 무사하게 있었다. 현관을 열고나와 가장먼저 맞은 것은 만상은허패쇄진이었다. ‘시간이 흘러서 그런가? 진이 조금 흐트러 진 것 같네? 그래도 이 안으로는 아무도 안 들어온 모양이라 다행이네.’ 나는 만상진을 지나 카드진과 주술진이 있던 곳으로 갔지만 그 진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다만 그 곳에는 다른 마법진이 펼쳐져 있었다. 일종의 환상 마법진이었는데 내가 지닌 9써클(수련실에 있는 동안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의 마나와 비슷한 기운을 가진 것으로 봐서 9써클 마법사가 만든 결계 같았다. 하지만 나에겐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일단은 결계를 유지해 두고 밖으로 걸어나갔다. 환상 결계를 통과하고 나타난 것은 의외로 자그마한 석조 건물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듯 낡은 건물이었는데 그 건물도 보존 마법이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렇게 낡은 다음에 보존 마법을 걸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그 집으로 다가 갔다. 문에 마법이 걸려있지 않을까 걱정을 했지만 어떤 마법도 없었다. 그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간 내가(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발견한 것은 두툼한 한 권의 책이었다. 집 안은 돌로 만든 탁자 하나와 의자하나 그리고 탁자 위의 책 한 권이 전부였던 것이다. 그렇게 덜렁 놓여 있으니 밖에서 보던 작은 집이 엄청 넓어 보였다. 나는 호기심에 책을 펼쳐 보았다. 순간 책에서 빛이 떠오르며 한 사람의 일루젼이 나타났다. 그는 무척이나 늙은 남자였고, 그가 마법사라는 것은 그가 입고 있는 옷이나 분위기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왠지 내 눈에 익은 모습이었다. “허허, 루탄님 오랜만입니다. 저를 못 알아 보실 것 같습니다만, 저 쉬벡입니다. 허허허” 그렇게 말을 시작하는 쉬벡의 일루젼은 그 후로 오랜시간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미리 여러 가지 상황을 예비해서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일루젼인 모양 이었다. 그러니까 간단히 이야기하면 내가 질문한 것에 대한 답이 그 두꺼운 책 안에 있으면 그것을 찾아서 대답하는 형식인 것이다. 나는 조금 시간이 지나서 그런 형태의 책과 일루젼의 합성인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아마도 예전에 추적 파이어 애로우의 확장 변형판인 모양이었다. 나는 쉬벡의 일루젼을 통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유소, 넥스, 쉬벡의 뒷이야기 - 유소의 이야기 쉬벡의 이야기에 의하면 유소는 동 자치령주의 여동생이었다고 한다. 문제는 동 자치령주는 또, 남 자치령 사람으로 계획적으로 동 자치령에 와서 자치령 주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이다. 그것은 남 자치령주가 한타왕국의 왕위를 노리면서, 준비한 계획의 일부였다는 것이다. 유소는 그런 일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오빠의 일을 무시할 수 없어서 동 자치령에 와서 오빠를 도와주다가 오빠가 자리를 잡자 주점겸 여관을 차려서는 사람들의 동정을 살피는 일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각 자치령의 령주들은 그 때까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각 계의 속성에 영향을 받아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맡고 있었는데, 동 자치령의 전 영주도 정령을 다루는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갑자기 나타난 루탄이라는 인물은 당연히 경계의 대상이 되었고, 때문에 유소는 오빠의 부탁으로 나를 맡아서 감시하는 역을 맡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리라는 소리도 물론 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루탄 일행에 묶인 유소는 청색지대 탐험과 공물 수행을 하면서 루탄이라는 인물이 권력에 대한 욕심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보다 위협이 될만한 존재는 넥스 쪽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단다. 그래서 당연히 넥스 쪽으로 접근해서 그와 가까워졌고, 넥스의 믿음을 얻는 데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런 시점에서 넥스가 나에게서 오행신공을 얻게 되었고 덤으로 유소도 넥스 덕분에 오행신공을 얻게 되는 것 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그 신공을 탐낸 이루비아가 끈질기게 졸라대자 안가르쳐 줄 수도 없어서 신공을 이루비아게에 가르쳐 주다가 끝내 나와의 사이가 틀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 이후는 아주 상황이 복잡하게 돌아가게 되는데 카타트에서 이루비아가 다시 마족과의 계약을 맺고(남 자치령주는 카타트에 있는 마족과 계약을 맺어 죽은 괴물들을 부리는 능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었다. 이 계약은 세 번에 걸쳐 하는 것인데 처음에는 태어나자 마자, 부모에 의해서 계약을 맺게 되면 기한은 20년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자신이 계약을 맺게 되는데 그 기간은 30년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자신의 자손으로 계약을 맺는데 이때는 자신이 죽을 때 까지와 자손이 20살이 될 때까지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에는 재물이 없다. 이 마족도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계의 발전을 위해 파견 나왔던 존재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마족과 계약을 맺으며 몇 대를 내려 온 그 집안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마족의 마기에 오염되어 인간의 어두운 면을 추구하는 존재들이 되는 것이었다. 때문에 남 자치령주가 한타왕국의 왕권에 대한 욕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고 말이다. 아무튼 계약을 마치고 넥스와 유소 쉬벡은 이루비아 일행을 남 자치령까지 호위를 하고 쉬벡은 마법연구를 위해, 그리고 넥스와 유소는 동 자치령에 정착하기 위해 해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 때까지 유소에 대한 것은 알지 못한 상태였고 말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4년이 채 되기 전에 갑자기 모든 괴물들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하고 불모지대의 괴물들의 수가 갑자기 줄어들고 신계의 환수와 마계의 마수가 물질계에 모습을 나타내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나중에 내린 신탁과 악마와 계약한 사람들의 입에 의해 밝혀진 사실은 4계에서 모두 이와 같은 상황이 발생했지만 천사계는 미쳐 날뛰거나 뛰어나올 것들이 없어서 조용했고, 정령계는 물질계로 나온 정령들이 나무나 돌, 꽃이나 물, 바람들과 섞여서 이질적인 존재들을 만들어 내는 것을 끝났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변화가 없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사실 그 이후로 정령과 아주 친숙한 자연의 종족들이 나타났는데 바람과 물과 땅과, 나무와 꽃의 종족이라 불리는 것들이 그것들이라 한다. 이를테면 세로운 종족의 탄생 이라고 보면 된다. 그것은 다른 계에서 나온 존재들도 마찬가지였는데 환수들은 물질계에서 살아가면서 물질계와 동화되어 특수한 종들로 발전했고 마물들도 엄청난 번식력을 자랑하며 퍼져 나갔다고 한다. 아무튼 이런 변화가 일어난 것은 그 때, 각 계의 균형을 위해서 다른 곳에서 같은 계를 구현하는 바람에 본 계의 일부가 물질계에 노출된 결과라는 것이 신탁과 여러 경로를 통해 밝혀진 것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신이나 악마와 같은 존재들이 인간과 계약하고 소원을 들어주는 등의 일이 일어나고 신앙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도 이 즈음의 변화였다는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했다. 균형의 씨앗을 전달할 때, 생긴 일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각 계라고 있는 것들이 이런 결과를 예측하지 못하고 그런 짓을 하지는 않았을 거니까 나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그후, 상황은 돌변했다. 한꺼번에 몰려나온 마물들과 괴수들의 난동으로 대다수 인간들의 거주지는 파괴당하고 결국 도시 별로 고립되어 견디는 방법 밖에는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7써클 이상 의 마법사가 텔리포트를 해서 이동하거나 엄청난 인원이 뭉쳐 다니는 경우가 아니면 도시간의 왕래는 불가능했고 결국 그렇게 독립된 상태의 발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괴물들의 수가 적은 곳(북 자치령이 있던 지역과 동 자치령이 있던 지역은 새롭게 나타난 괴물들은 없었다.)으로 사람들의 이동이 일어났고, 때문에 그 쪽이 발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도시들의 고립은 하루 이틀이 아니었고, 장장 100여년에 걸친 고립이 계속되면서 도시들은 도시들 나름의 체계를 갖추고 소단위 국가로 발돋움을 하게 되었다고한다. 그런 상황 속에서 유소는 동 자치령에서 오빠를 도와 자치령을 이끌어나가는 열혈장군이 되었고, 그녀가 이끄는 부대원은 하나같이 여자들로 구성된 전사들이었다는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이유는 분명했다. 그 여전사들은 모두 오행신공 수를 바탕으로 한 전사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녀는 오빠가 죽은 이후에 동 자치령의 초대 왕이 되었다고 한다. 그것이 나와 헤어지고 30년이 흐른 후라고 하니 대단한 삶을 살았던 모양이다. 넥스의 이야기 넥스가 유소와 헤어진 것은 환수와 괴물들이 나타나고 난 이후, 유소가 동 자치령주와 남매라는 사실과 그 간의 사정을 알게 된 이후였다고 한다. 그는 그와 유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의 손을 잡고, 험난한 여정을 걸어 북 자치령으로 찾아 들었고 그 곳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우며, 령주 직속의 부대를 이끄는 총 사령관이 되었단다. 그로서도 오행신공의 힘을 무시할 수 없었던지 오행신공을 사용하는 부대를 만들었는데 그 부대원들은 모두가 외팔이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팔 하나를 거둘 것이라고 했던 말을 기억했던 탓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가 자신의 왼팔을 잘라냈던 것을 보면, 내 생각이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가 이끄는 그 부대는 파이어스톰이라 불리웠는데 그것은 그들의 검이 언제나 불길에 휩싸여 있었고, 붉은 망토를 후두르면 달려가는 모습이 불꽃의 폭풍으로 보였기 때문이란다. 아무튼 넥스는 북 자치령에 국가가 세워지고 그 국가의 최고 귀족 작위를 받았다고 하는데 그 이후로는 그의 자손들이 그 작위를 이어 받으며 왕국의 방패와 창이 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한가지 특이한 것은 넥스의 자손들은 모두가 넥스라는 이름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넥스미카. 넥스마이어. 넥스랄. 하는 식의 이름이라고 한다. 유소와의 사이에서 난 아이의 이름이 넥스미카라고... 쉬벡 이야기 쉬벡은 나와 헤어지고 남 자치령까지 넥스 일행과 함께 여행을 한 뒤, 예전에 스승과 함께 마법을 연구하던 곳으로 돌아가 꾸준히 마법에만 전념을 했다고 한다. 그는 나에게서 마법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고 새롭게 재 창조 할 수 있는 것이란 것을 배운 것이 가장 중요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는 환수와 마물들이 나타나고 그들을 상대하면서 조금씩 마법력을 늘렸고,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마침내 9써클의 마법을 이룩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9써클 마법을 이룩한 것이 나와 헤어지고 20년이 흐른 후였다고 하는데 그가 마법을 연구하는 곳에는 괴물들과 마물이나 환수가 접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주위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여 마을을 이루고 나중에는 도시가 되었는데, 특히나 마법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들고 마법사가 많아서 마법사의 도시(메직컬초) 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그것은 쉬벡이 9써클을 이룬 후로도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의 일이었던 것은 물론이다. 아무튼 9써클 마법사의 위력은 무시무시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여러 소도시 국가들이 난립하고, 그러면서 환수들과 마물들이 어느정도 자리를 잡고(전부 퇴치를 한 것이 아니라 공존을 모색했다고 한다. 환수나 마물 중에는 9써클 마법으로도 벅찬 녀석들이 있다고 하니 그럴 만도 하지만) 괴물들의 퇴치가 어느 정도 마무리 되기까지 100여년의 기간이 흐르고 드디어 새로운 인간들의 세상이 열리게 되었다. 곧 인간들 끼리의 싸움과 투쟁이 50여년간 벌어지고 결국에는 이 대지위에 5개의 왕국이 생기게 되었다. 고대로부터 존재하던 한타왕국은 대륙의 중앙에 존재했고 동쪽에는 여인왕국이 들어섰으며(여인왕국이라고 여자들과 남자들의 역할이 완전히 바뀐 것은 아니다. 다만 권력의 최상층에 언제나 여자가 있기 때문이다. 왕과 총리. 기사단장이나 군대 총 사령관등이 여자들이다.) 남쪽에는 암흑제국(상당히 마계의 영향을 받은 나라라고 하는데, 받드는 신들도 거의 마신이었고, 추구하는 바는 능력에 의한 챙취라고 한다.) 이 일어났고, 서쪽에는 누웬왕국 이라는 이름의 나라가 들어섰는데, 대체로 사람들이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자유로운 나라라고 하는데 암흑 제국과 함께 잘 알려지지 않은 면이 많은 나라라고 한다. 왜냐하면 누웬왕국으로 들어가는 길이 대부분 환수들의 둥지로 막혀 있어서 왕래가 어렵기 때문에 그 나라에 대한 것은 신비와 소문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쉬벡이 그 곳을 가 보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그 당시 상황이 사람들의 왕래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리고 북쪽에는 신성왕국이 자리 잡았다. 천사계의 주신을 믿는 교리를 국교로 하고 교황이 곧 황제인 체제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초대 교황이 넥스의 큰아버지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아들인 멕스가 2대 왕이 되었다는 사실만을 알 뿐 이 이후로도 계속 세습되었을지는 모른다는 것이 쉬벡의 설명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쉬벡은 주로 한타 왕국의 궁정 마법사 역할을 했다고 한다. 다른 나라를 택할 수도 있었지만 쉬벡의 생각에 적어도 암흑제국과 신성제국 사이에는 완충지대가 꼭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마계의 영향을 받은 나라와 천사계의 영향을 받은 나라가 붙어 있으면 반드시 싸움이 일어날 것이고, 그럼 너무나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 할 것 같았다는 것이다. 덕분이 9써클 마법사가 버티는 한타왕국은 명맥을 보존하고 메칼리초에서 나오는 우수한 마법사들은 한타왕국의 든든한 기둥이 되어주었다고 그렇게 한타왕국 또한 다른 왕국과 다른 특색을 지니며 발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쉬벡의 일루젼을 통해 대부분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후, 이계의 창고를 열어 반지를 꺼내었다. 그리고 조용히 가족들을 불렀다. “수아, 광아, 풍아, 화아, 지토, 내 가족들. 이제 그만 오랜 기다림에서 깨어나렴. 보고 싶구나.” 나는 조용히 반지를 쓰다듬었다. 반지는 전과 같이 검은 색이었지만 전보다 훨씬 선명한 검은 빛이었다. 그리고 내 그리운 가족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었다. “루탄형 드디어 왔구나.” 화아는 여전히 붉은 머리카락을 날리는 모습이었지만 좀 더 젊어진 것 같았다. “루탄형님 반갑습니다. 보고싶었어요.” 광아도 별로 변한 것은 없어 보였다. 금빛 머리카락이 가는 몸. 그런데 날개는 안보이네? “꺄하하 오빠, 오랜만이야. 호호호” 풍아다. 어째 더 채신머리가 없어지고 말괄량이가 된 것 같다. “큰 오빠.” 그렇게 부르고 말이 없는 수아였다. 여전히 애메랄드 빛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모습이 차분해 보인다. “루탄, 오랜만이다. 너무 많이 기다리게 만드는구나.” 지토였다. 여전히 땅딸한 키였지만 떡 벌어진 어깨에 어깨 넓이의 굳건한 허리를 지닌 모습이 단단한 바위를 보는 느낌이었다. “그래 다들 잘 있었어? 뭐야 다들 너무 오랜만이라고 궁시렁 거리다니. 반지 안에서 는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않는다면서. 그럴 수 있다면서? 그래 놓고선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다는 느낌이 팍팍 드는 말을 하는 이유가 뭐야?” 나는 일부러 밝은 목소리를 내었다. “그거야 최상급정령이 되고 나서 줄곳 언제나 오빠가 깨어날까 하고 기다리느라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으니까 그렇지. 칫” 풍아의 투정이다. “하하, 그래 너무 늦어서 미안하다. 그건 그렇고 다들 이제는 최상급 정령들인거야?” “그럼 당연하지. 하하” 자신있는 화아의 대답. 이제는 인간형으로 있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그러고 보니 저 녀석들이 나왔는데도 기운이 별로 소비 되지 않네? “그런데 어떻게 된거야? 너희들 다 나와 있는데오 별로 힘이 안드네?” 나는 놀라서 물었다. “그건 형님, 우리가 최상급이 되면서 어느정도 물질계에 자의로 존재하는 것이 가능해진 탓에 우리가 직접 힘을 쓰는 경우가 아니면 소환주의 힘으로 물질계에서 존재를 유지시키는 것을 하지 않아도 되거든요. 그래서 형님의 힘이 별로 없어도 충분히 이렇게 있을 수 있는 거예요. 뭐 실재로 정령력을 쓰게 되면 형님 허리가 휘어질 정도로 힘이 들긴 하겠지만 말입니다.” “하하, 그건 걱정하지마. 나도 이제 9써클 마나에 몸 속의 기운도 예전의 몇 배는 되거든. 하하. 그런데 우리 오랜 만인데 배가 고프지 않니? 수아야 오랜만에 수아 음식 솜씨나 한 번 보자. 응. 배고프다. 밥먹고 하자. 뭘 하더라도.” 그렇게 말하고 나는 쉬벡의 책을 집어서 창고에 넣어두고 아이들을 데리고 우리집으로 돌아왔다. 물론 아무리 보존 마법이 걸려 있었다고는 하지만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오래 방치된 집이 깨끗할 리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의 첫 일을 식사가 아니라 청소였다. 그리고 겨우 청소가 끝나고 식사 준비를 하려고 했을 때에는 더 큰 문제가 생겼다. 음식 재료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아주 오래전에 이공간의 창고 속에 넣었던 재료들은 비록 보존 마법을 써서 형태가 유지되고 있다곤 하지만 아무래도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대체 얼마나 시간이 지난 것일까? 쉬벡이 일루젼을 남긴 것은 나와 헤어지고 157년 후였다. 그는 200살 까지 살다 갔던 것이다. 그럼 그 이후로는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수아들도 반지 속에서는 시간 개념이 뚜렷하지 않다고 하니 알 수가 없고. 그러다가 나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저기 얘들아 뭔가 허전하지 않냐? 뭔가 빠진 것 같은데.” “뭐긴 뭐겠수. 배가 허전하니 그런거지. 여기서 식사가 안되면 어디 다른데로 빨리 가 봅시다. 빨리 밥을 먹어야지.” 화아의 말이다. “야! 화아 너는 아무것도 안 먹어도 되잖아. 그런데 무슨 식사 타령이냐?” 내 말에 화아가 대뜸 말꼬리를 잡는다. “아니 그럼 형님은 지금까지 뭐 먹고 살았수? 그 형도 안먹어도 사는 것 아니우?” “야! 그게 어디 같으냐? 그렇게 수련을 할 때야 내 몸을 모두 정지 시켜 놓고 세상의 기를 몸으로 받아들이니 괜찮지만 지금은 움직이고 있잖아 그러니까 밥을 먹어야 하는거야!!”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까부터 허전하다. “정말 뭔가 빠진 것 같단 말이야. 뭐지? 뭐지?” 나는 조급증이 일기 시작했다. 뭔가 생각날 듯 날 듯 하면서 안 날때의 그 미칠 것 같은 느낌. 그러다가 깜빡 깜빡하던 기억이 번쩍 하고 들어올 때가 있다. 이렇게 “맞다. 란이 란이가 빠졌잖아. 너희들 어째 그럴수가 있냐? 응 란이가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무심할 수가 있어?” 나는 내가 기억 못했던 것이 무안해서 더 큰소리를 질렀지만 솔직히 이러는 나나 듣고 있는 동생들이나 지토나 다들 무안하기는 마찬가지다. “내가 지금 란이를 소환할 테니까 우리 방금 만난 것 처럼 하는 거다. 알았지? 만약에 란이가 알면 무지 섭섭해 할꺼니까 알았지?” 내 제안에 모두들 끄덕끄덕 동의를 표한다. 역시 저 녀석들도 미안한거다. 나는 수인을 맺고 란이를 소환했다. “나와 귀속된 존재 란이여 모습을 들어내라.” 곧 신계로의 문이 열리고 란이가 소환되어 왔다. 란이가 왔다. 그런데 이게 무슨일이냐고 왜? 무었 때문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느냔 말이야. 소환된 것은 란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 란이겠지만 란이의 옛 모습이 아니었던 것이다. 날개가 없다. 부리가 없다. 눈도 없다. 그럼 란이에게 남는 것은? 그렇게 란이는 아무것도 없는 알의 모습으로 소환되어 버린 것이다. “으흐흑.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럴수가. 전에는 그래도 날개도 있고 부리도 있고 눈도 있고 그래 발도 있었는데, 어떻게 지금은 아무것도 없냔 말이야. 이게 말이되냐? 알을 깨고 나오던 새가 알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경우가 어디에 있느냔 말이야.” 우리들은 탁자에 헝겁을 조심스럽게 깔고 란이를 올려 놓았다. 하지만 어쩌랴? 란이가 깨어나지를 않는데... “저기 오빠. 란이 그냥 신계로 다시 돌려 보내면 안되겠지? 다시 돌려 보내면 처음에 있던 자리에 그대로 돌아가는 걸까? 만약에 아니면 둥지 같은 곳이 있었는데, 잘못해서 둥지 옆 같은 곳으로 돌아가면 높은 곳에서 떨어져서 죽을지도 몰라 그렇지? 그러니까 다시 돌려 보내면 안되겠지?” 걱정스러운 풍아의 질문이다. “아마도, 확신을 할 수 없으니까 돌려 보낼 수가 없을 것 같긴 하다.” “그런데, 란이 물질계에 오래 있어도 될까? 혹시 몸에 안좋은 점이 있는 건 아닐까?” 화아의 말이다. “정말 걱정이네요. 어쩌지요?” 광아도 걱정인 모양이다. 지토도 별 말이 없다. “하는 수 없지 뭐 일단은 우리가 보살피자. 그러다가 란이가 아파보이거나 하면 무슨 수를 내야지. 신계의 책에도 란이에 대한 것은 없어서, 그리고 환수에 대한 것도 없었거든. 문제는 문제네...” 그렇다고 무턱대고 우리집에 그대로 있을 수는 없는 문제였다. 일단은 배가 고픈 것이다. 란이를 세심한 수아에게 맡기고 우리는 일단 집을 나서기로 했다. 나는 우리집을 나서면서 쉬벡의 결계의 찬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쉬벡은 다른 결계들은 모두 지났는데 마지막 만상진만은 마법으로 해결이 되지 않는 것이라 끝내 포기했다고 했었는데. 우리집과 쉬벡의 집을 둘러싼 결계의 총 수는 15개 그 중에 외부에서 건드린 흔적이 보이는 것은 단지 6개. 그것도 제일 안쪽에 있는 결계 외부 14개 결계에 대한 자동 수선 기능을 지니고 있어서 조금씩 복구가 되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외부 6개의 결계이후로 다른 결계들이 침입을 받지 않은 것은 그 6번째 결계에 쉬벡의 마법들을 남겨놓은 흔적들과 수식을 기록한 비석들 탓인 모양이었다. 누군가 오래전에 이곳에 와서 쉬벡의 마법들을 익혀 간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쉬벡의 진정한 마법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허술한 면이 보이는 것들이었다. 솔직히 쓸데 없는 수식이 많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수식을 줄여서 마법을 쉽게 한다는 것이 쉬벡과 내가 수레에서 합동으로 연구했던 것인데 그런 쉬벡이 저런 수식을 썼을 리가 없는 것이다. 하하 껍데기를 얻고 행복해했을 인물이 누군지 궁금하다. 결국 우리는 15개의 결계를 모두 통과했다. 뭐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은 그냥 나오면 되는 거라 힘들 것은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마지막 결계를 통과하고 나타난 광경은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넓디 넓은 벌판과 가지런한 길과 농사 짓는 농부들. 그런데 옆에서 풍아가 옆구리를 찌른다. “응? 왜? 무슨 일 있어?” 풍아는 자꾸만 내 등 뒤를 가리킨다. 나는 고개를 돌리다가 하마트면 벽과 얼굴을 부딪힐 뻔 했다. 우리 등 뒤는 바로 성벽이었던 것이다. “이게 무슨 일이야? 성벽? 그럼 이 성벽 안이 우리 집이란 말이야? 가만히 보자 이건, 흠, 이건 오호라 그런, 음 이런 것이로군.” 나는 한참을 마나 흐름을 살펴보고 나서야 결계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일루젼과 공간왜곡. 실제로 우리집과 쉬벡의 집은 이 벽 안에 있었던 것이다. 쉬벡이 공각을 왜곡 시켜서 그렇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리곤 그 결계를 이런 성벽을 쌓아서 가려 버린 것이다. 물론 진짜 성벽과 일루젼 마법의 조합으로 말이다. 아마도 이 성벽을 쉬벡이 살아 있을 때 이미 마법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성벽안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거나 살도록 유도 했을 것이었다. 우리들은 성벽을 따라서 성문을 향했다. 풍아가 조금만 신경쓰면 성문이 어느 쪽에 있는지를 아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우리 앞으로 지나는 길을 바로 그 성문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은 예상외로 규모가 컸는데, 나는 도대체 그 계곡을 어떻게 지나왔는지가 궁금했다. 성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문을 지키는 사람은 다섯 명이었다. “어디에서 오시는 분들이신지. 처음 뵙는 분들이네요.” 인사를 건네는 병사의 얼굴은 밝았고, 생기가 넘치고 있었다. 당연히 그런 인사를 받은 것은 지토였다. “하하, 반갑습니다. 우리는 그냥 여기 저기 떠돌며 여행을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딱히 정해진 곳이 없이 다니다 보니 이렇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네, 그러시군요. 그럼 저의 ‘쉬벡의성’에 특별한 볼일이 있으신 것은 아닌 모양 이군요?” 지토의 말에 대꾸를 하는 병사는 다른 병사와는 달리 파이크가 아닌 검을 차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지위가 더 높은 모양이었다. “그렇지요. 특별한 볼 일은 없습니다만, 오랬동안 떠돌면서 야영을 했더니 이젠 따뜻한 침대에 몸을 누이고, 제대로 된 음식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군요. 그것이 볼일이라면 볼일이이지요. 허허” 참 대단한 지토다. 저런 일에 익숙하지 않은 텐데 말을 아주 잘 한다. “네, 그렇군요. 그런데 여행을 하신다고 보기에는 짐이 너무 없어서 이렇게 귀찮게 해드리는 것이니 양해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우리 일행은 간편한 옷차림 이왜의 짐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수아가 들고 있는 손수건(안에 란이 들었다.)말고는... “하하, 이런 이런, 미쳐 생각을 못했군요. 야 루탄, 짐 좀 꺼내서 이분들 좀 보여드려.” “응? 알았어. 그러지 뭐.” 나와 지토의 대화를 이상한 듯이 보는(나이 차이가 있는데 반말을 하는 것이 이상하기는 하겠다.) 사람들 앞에 나는 창고에서 간단한 취사도구와 침낭 들을 꺼내 보였다. “마법사? 마법사 셨습니까? 이런 알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갑자기 병사들의 태도가 바뀌었다. “마법사시면 그냥 길드 소속증만 보여 주셔도 되셨을 텐데요. 괜히 저희를 놀리시고 그러십니까? 하하” 지위가 높아 보이는 병사의 말이다. “저기 저는 마법은 쓰지만 마법사 길드에 소속이 되어 있지를 않아서요. 그래서 소속증이 없는데요?” 나는 얼른 길드에서 준 소속증을 내 놓으라고 할까봐서 앞질러 말을 했다. “아니, 그럴 수가 어떻게 마법길드에 소속되지 않고 마법을 쓰실 수가 있지요? 어떻게 그럴 수가. 길드 소속이 아니면 어디서도 마법을 배울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하하 저희들은 산 속에서 할아버지에게 수련을 받아서, 그런건 잘 몰라요. 이번에 처음으로 세상 구경을 나온 거거든요.” 나는 쑥스럽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네. 저희들 5남매는 이번이 세상에 나온 첫 경험입니다. 그래서 잘 모르거든요. 죄송합니다.” 도와주려는 광아. “호호, 그런데, 신분증이 없으면 성에 못들어가는 건가요? 그럼 안되는데.. 배가 고프단 말이예요. 잠도 자고 싶고. 아잉 어쩌면 좋아 히잉.” 아무래도 과장이 심해 보이는 풍아. “형, 빨리 어떻게 좀 해봐라. 난 기다리는 건 싫단 말이야.” 단호한 화아. 그리고, “이런 이런 죄송합니다. 어차피 여행자의 신분을 모두 조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다만 어디 출신인지 정도는 알아야하기 때문에 그런 것인데, 세상에 처음 나온다고 말씀을 하시니 어느 나라라고 하기도 어렵겠군요?” “아니요, 그건 아니예요. 우리 할아버지가 한타 왕국 분이셨어요. 그러니까 저희도 한타왕국 사람이예요.” 나는 쉬벡이 한타왕국의 궁정마법사라는 것을 생각해서 그렇게 말했다. “한타왕국이요?” 병사는 다시 되물었다. “하하, 알겠습니다. 그럼 들어가세요. 그리고 편안히 쉬세요.” 우리는 그렇게 어렵게 성문을 통과했다. 그리고 곧 제법 정리가 잘 된 포장도로를 따라 늘어선 집들과 상점들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오빠? 돈 있는거야? 돈 없으면 물건도 못사고, 음식고 못 먹고, 잠도 못자고, 그러는거 오빠도 알지?” 흠... 그러고 보니 우리 일행의 생계가 이제 내 책임에 달렸구나. 갑자기 어깨가 무거워진다. 나는 일단 창고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 살펴 보았다.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 다 합해도 약 2만메타를 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물가가 어떻게 되었을지도 모르고, 더구나 그 예전의 한타 왕국의 동전이 그대로 통용될 턱이 없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지만 일단은 여기가 무슨 왕국인지는 몰라도 한타왕국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성문에서 받았던 것이다. “글세. 오빠도 돈이 별로 없는데다가, 일단은 요즈음 사용하는 돈이 있을 턱이 없잖니. 일단 알아봐야지.” 내 말에 갑자기 시무룩해지는 일행들. “그런데 너희들 왜 시무룩한 건데? 너희들 이 반지 속에 들어가도 되잖아. 그런데 왜 그러는 거야?” 그러자 화아가 대뜸 대들고 나선다. “형, 그렇다고 여행을 하면서 반지 속에서 지내란 말이야? 난 이번 여행이 끝날 때까지 이 모습 이대로 있을거야. 절대로 반지에 들어가거나 정령계로 갈 생각 없어.” “그래 그래. 그건 나도 그래 오빠.” “저도 오빠랑 계속 여행하고 싶어요. 같이 먹고, 같이 자고, 같이 싸우고. 그렇게 진짜 사람들 처럼요.” “루탄형 나도그러고 싶어.” “음. 나도 그렇다.” 제각기 떠들어 대는 것이 아무래도 고집을 꺽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그냥 둘 수는 없었다. “좋아. 하지만 절대로 한가지는 약속해. 위험하면 다시 말해서 굉장히 위험해서 꼭 필요하면 돌려보낼거야. 그러니까 그 때는 이해해야해. 알았지? 어떤 가족도 자기 가족을 위험에 두고 싶어 하지 않는거야. 그리고 내가 힘이 제일 쎄니까 그런 때에는 말 듣기다. 알았지? 그렇지 안으면 허락 못해.” 결국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들. 나는 일행들을 이끌고 사람들에게 물어서 보석 상점을 찾았다. “루탄아 뭐 하려는 거야? 우린 밥 먹을 돈도 없는 것 같은데. 보석 가게는 뭐하로 온 거야?” 지토가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묻는다. 다른 동생들도 그런 눈빛이다. “하하, 일단 확인을 좀 해 볼일이 있어서 그래. 금방 끝날거야.” 나는 보석상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의 사네에게 물었다.. “아저씨. 혹시 예전 한타 왕국의 메타 동전을 취급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취급하시나요?” 내 질문에 그 중년 사내는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한타 왕국의 메타 동전이라구? 물론 취급하지. 취급하고 말고 가짜만 아니라면 말이야.” “그래요? 그럼 1메타, 10메타, 100메타 1000메타 짜리 동전은 각각 얼마씩에 거래가 되나요? 물론 진짜일 경우에요.” 그는 내 질문에 슬쩍 나를 훑어 보았다. 물론 뒤에서 나를 기다리는 내 동생과 지토를 쳐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마도 속으로 우리 일행의 수준을 가늠하고 있을 것이다. 나야 뱀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으니 특이하기는 해도 좋은 옷이 분명하고 제네들이 입고 있는 옷이야 정령들의 옷이니 흠잡을데 없이 좋은 옷이다. 그러면 자연히 장사꾼은 저자세가 된다. “허허, 그런 동전이 정말 있다면 순서대로 1메타와 10메타 동전은 10000덴에 사고, 100메타와 1000메타는 각각 5000덴에 살수 있지. 어떤가 팔겠나?” 하지만 장사꾼은 언제나 헛점을 파고든다. 나처럼 어린(겉으로만 이지만) 아이의 셈이 느리고 물정이 어두우리란 것을 짐작한 후려치기 가격인 것이 분명하다. “그렇군요. 그럼 이 동전들을 좀 봐 주시겠어요?” 나는 일단 각각의 동전을 하나씩 꺼내 놓았다. “그냥 감정만 해 보세요. 진짜인지 가짜인지.” 주인 사내는 꼼꼼히 살펴보고는 얼굴에 웃음을 띠고 말했다. “허허, 이건 정말 놀랄 정도로 보관이 잘 된 물건이로 구만, 물론 진짜고 말이야. 이 네 개에 38000덴을 주겠네. 워낙 보관이 잘 된 물건이라 내가 좀 더 얹어 줌세. 어떤가?” 나는 알고 있다. 여기서 더 준다는 8000이 바로 쥐약인 것을 하지만 나는 물지 않는다. “너무하시네요. 제가 이렇게까지 물건을 보여드리고 또, 성의를 보여드렸으면 아저씨도 그러셔야죠. 이렇게 물건을 깨끗하게 보관했다는 것은 그정도로 가치를 안다는 말이고 가치를 아는 사람이 판다고 했을 때에는 약간의 이문을 추구하는 것이 상인의 도리이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등치는 것 처럼 그렇게 가격을 후려치시면 안되지요. 죄송하네요. 전 다른 가게를 찾아 보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내 말이 상당히 길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실 것이다. 이것은 바로 내가 물건을 팔 생각이 있음을 간접적으로 주인에게 이야기 하는 것과 같다. 만약 팔 생각이 없었으면 그냥 들고 나갔을 것이다. 주인도 그것을 알 것이다. 그럼 이제 적정 가격에서 타협을 보려고 할 것이다. “저기, 잠깐만. 이렇게 하세 1메타와 10메타는 각각 25000씩 그리고 100과 1000짜리는 각각 20000씩에 주겠네. 그러니까 9만덴일세. 어떤가?” 나는 간단히 잘라 말했다. “10만에 드리지요. 상태를 고려하면 아마 3만 이상의 이익이 있을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주인은 나의 말에 이의를 달지 않고 10만덴이라는 액수를 주었다. 처음에는 돈이 작은 상자 하나 가득이어서 걱정이었지만 여섯이 나누어 들자 많은 양이 아니었다. 그렇게 우리는 간단하게 돈을 마련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우리들은 일단 시장을 둘러 보기로 했다. 물가와 화폐에 대해서 가장 빨리 알 수 있는 곳은 역시 시장이었다. 간단한 꼬치구이 먹거리에서부터 쌀과 밀가루, 고기와 아채, 생선, 그리고 향신료, 이런 것들을 사면서 우리는 화폐이 가치를 알아갔다. 그리고 그러 쇼핑이 거의 끝나 갈 무렵 우리들은 시장의 끄트머리에 있는 노천 식당에서 간단한 음료수를 앞에 놓고 있었다. “그러니까 오빠, 지금 여기 화폐가치가 예전에 메타랑 거의 같다는 거야? 쪼로록.” 빨대(갈대 간은 식물성이었다.)로 음료수를 빨아 먹으며 풍아가 묻는다. “응, 그다지 차이가 없어. 거의 같아. 단지 화폐의 모양과 명칭이 바뀌었을 뿐이야.” “그럼 오빠, 우리 지금 돈이 얼마나 있어? 오빠가 가진 메타를 전부 덴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 ” 수아가 물었다. 역시 살림꾼답다. “음. 계산을 좀 해봐야겠는데, 가만, 1000자리가 15개에 100짜리가 또 30개 정도 10 짜리는 8개 1짜리는 네 개, 그렇게 있는데? 누가 계산해봐.” “약 120만이네요. 형.” 대뜸 대답하는 광아. 광아는 이런 셈 계산에 빠른 모양이다. “우화 그렇게 많아? 우리 부자구나? 이제 먹는 거, 자는 거, 입는 거, 그런 걱정은 안 해되 되는 거지? 호호호 아이 좋아라.” “풍 누님, 누님이 왜 입는 걸 걱정하는 건데요? 옷은 언제든지 마음대로 바꿔 입을 수 있잖아요. 그리고 물질로 만들어진 옷을 입으면 정령력을 쓰는데 방해가 되서 힘들 잖아요.” 풍아의 말에 광아가 꿍한 소리로 하는 말이다. 그런데, “호호, 그럼 어떻다구 그래? 루탄 오빠가 다 알아서 해줄 거야. 그러니까 나는 옷을 입을 거라구. 그리고 옷을 입어도 중급 정도의 정령력을 쓰는 데는 아무 지장도 없잖아. 참. 우리 모두 옷을 입고 다닐까? 그럼 더 재미있겠다. 옷을 입은 상태에서는 힘의 제약을 받으니까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순식간에 얼굴빛이 바뀌는 무리들. 결국에는 그렇게 되고 말았다. 보통 때에는 솔직히 중급정령 이상의 힘을 쓸 일도 없을 거란 것이 녀석들의 말이었지만 그 보다는 단지 재미있을 것 같다는 그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제 이 녀석들은 반지에도 들어가지 않고 옷을 입은 채로 여행을 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나에게는 완전한 여행 동반자가 생겼다. 솔직히 나는 동생들과 지토를 데리고 이곳 저곳을 돌아보며 많은 것들을 경험하게 하고 싶었다. 점점 인간적인 모습으로 변해가는 동생들과 지토의 모습을 보며, 여행을 하다보면 진짜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습으로 변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정말 가족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가족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인 것이다. 이제는 세상 어디에도 나와 끈을 지닌 존재가 없으니 이제부터 그런 존재들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 아이들과 지토야 말로 내게는 가장 가까운 가족이고, 때문에 이들이 나를 진짜 오빠나 형이나 친구로 여겨줄 수 있는 때가 오기를 바란다. 그리고 여행은 그런 때를 당겨 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다들 옷을 사서 옷가게 안쪽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을 때, 나는 걱정이 앞섰다. 그 때까지 별로 거울을 본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나도 그 사이에 좀 많이 변한 것 같았다. 나이는 20대 초반? 머리카락은 여전히 길어서 발 끝에 끌릴 정도였고 얼굴은 참 잘? 아니면 귀엽게? 아니면 예쁘게? 생긴 얼굴이었다. 그런데 우리 여섯이 나란히 거울 앞에서자 문제가 생겼다. 지토를 제외한 우리들은 전부 너무 잘 생기고 예쁘게 생기고 했던 것이다. 화아의 남성미 넘치는 얼굴 광아의 꽃제비형 얼굴 풍아의 야생장미같은 얼굴에 수아의 수선화같은 청순 가련형의 얼굴. 너무 개성이 있으면서, 눈에 확 띄는 얼굴인 것이다. 그런데다 특이하게 허리까지 밖에 오지 않는 나무통 몸매를 자랑하는 지토, 이러니 어떻게 눈길을 끌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어쩐지 아까부터 시장을 돌아볼 때도 시끄럽지 않았다는 생각이 났다. 시장이 조용했던 것은 사람들의 이목이 우리들에게로 쏠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우리 여섯은 아무 생각도 없이 우리들 끼리만 정신이 팔려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등골이 서늘하다. 하지만 방법은 없다. 그냥 태연하자. 그리고 아이들에게는 아무 소리도 하지 말자. 모르는 것이 약이다. 옷가게에서 나름대로 옷을 골라 입은 우리 일행은 가까운 여관을 찾기로 했다. 여관은 아직 저녁이 되기 전인데도 사람들로 분주했다. “어서 오세요. 숙박이신가요? 식사이신가요? 아니면 주류이신가요?”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사내아이가 문을 열고 들어간 우리들을 맞으며 물었다. “앞에 것 둘다. 방은 2인실 4인실 각각 하나. 없으면 2인실 셋 없으면 2인실하나 1 인실 하나 3인실 하나. 그것도 없으면 다른 곳에 가겠어.” 나는 간단하게 대답을 했다. 동생들이 대단하다는 존경의 눈초리를 보낸다. 으쓱 “2인실 4인실 있습니다. 그리고 식사는 방에서 아니면 테이블에서?” “식사 먼저, 테이블에서 주문은 테이블에 앉은 후.” 그렇게 우리는 상당히 복작거리는 15개 정도의 테이블 중에서 한 곳을 차지하고 앉을 수 있었다. “점심을 못 먹었으니까 푸짐하고 맛있는 것으로 알아서 가져다 주고, 먼저 목을 축 이게 음료수 2잔, 그리고 맥주 4잔을 줘.” “네.네 알았습니다.” 종업원이 물러가고 나는 갑자기 생각이 나서 화아에게 물었다. “참 그러고 보니 화아는 도를 쓰지 않아? 그 상태에서 도를 쓸 수 있나?“ “아마 힘들 것 같은데? 아무래도 화도를 쓰는 건 상급 정도의 힘이 필요하니까 말이야.” “음. 그럼 화아는 도를 하나 만들어야 하겠고. 풍아는 검을 쓰지? 역시 검을 하나 만들어야 겠네? 지토는 그래 할버드를 쓰면.... 안되는 구나 길이가 너무 길어서. 그럼 찾을 무기가 없네? 도끼써라. 그럼 광아는 뭘 쓰나 광아는 무기 안쓰잖아.” “형님 전 그냥 다닐래요. 어차피 중급정도의 힘이라면 공격력도 없는데..” “안돼. 그나마 인간형이니까 너도 검술을 익혀라. 화아야 니가 검술 가르쳐 줘. 기본적인 체력이나 힘은 뒤지지 않을 테니까 조금만 알아도 잘 할거야. 틈틈이 가르쳐.” 그러자 화아는 잘 됐다는 듯이 벙긋 웃으며 알았다고 했고, 광아는 죽었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럼 우리 막내는 어쩌지? 우리 막내는 그냥 스테프 하나 사 줄게. 마법사들 마법 쓸 때 쓰는 거지만, 그래도 없는 것 보다는 좋겠다. 알았지?” “응. 오빠. 예쁜 걸로 사 주세요.” “그래, 그래.” 그러는 사이에 음료와 맥주가 나왔고 곧이어 우리들의 음식이 나왔다. 음식은 모두 네가지 종류 였는데, 하나는 고기들 삶아서 소스를 얹은 것이었고, 하나는 국수 종류인 것 같았는데, 스파게티 비슷했다. 또 하나는 국이라고 해야하나 스프라고 해야하나 그런 것이었는데 옆에 나온 빵을 찍어 먹거나 적셔 먹는 역할인 것 같았다. 그렇게 빵까지 네 종류의 음식들은 그런대로 먹기에 부담도 없었고, 양도 적당했고, 또 나름대로 궁합도 잘 맞는 모양으로 거부감이 없는 음식이었다. “우화~~ 맛있다. 오빠가 만든 음식보다 못해도 이 정도면 정말 먹을 만 하다. 그치 수아야.” “응. 맛있었어.” 대충 음식을 먹고 나자 수다를 시작하는 풍아. 일단은 오늘은 그만 올라가서 쉬고 내일 낮에는 각자 무기를 마련하기로 하자. 그리고 우리들은 각자의 방으로 올라갔다. 수아와 풍아의 방은 우리들 맞은 편이었고, 방에 들어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목욕을 하는 일이었다. 다행히 정령들은 목욕을 할 일이 없기 때문에 나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결국 종업원을 불러 여관 지하실에 딸린 목욕탕을 이용한 것은 나 뿐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목욕까지 마치고 방에 올라 왔을 때는 다들 이미 잠자리에 든 이후였다. “뭐야? 정령은 잠 안자도 되는 거잖아. 그런데 내가 오기도 전에 다들 누워버리다니. 너무하네.” 나는 혼자서 투덜거렸지만 들려오는 소리라곤 “루탄형 그만 궁시렁거리고 불끄고 빨리 누워. 눈이 부신단 말이야.” 화아의 말이다. 불의 정령이 밝다구 눈 부신단다. 나는 아무소리 없이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대충 수아네 방과 우리방의 창문과 출입문에 알람 마법을 걸었다. 아무리 수아네 방아 복도 건너편이고 벽으로 가로 막혀 있다고 해도, 9써클 마법사에게 그런 것은 문제도 아니다. 이 건물을 전부 결계로 싸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인 것 이다. 머리속을 울리는 알람. 그리고 퍼-ㄱ “일어나 형. 그렇게 안일어 날거면 알람 마법은 뭐라고 걸어 놓은거야?” 나는 누군가 부드러운 무엇인가로 호되게 나를 후려치는 느낌에 깨어났다. “음. 알람이 울리네? 그것도 수아네 방이잖아. 창문이네. 결론은 누가 수아네 창문을 열고 침입을 시도하는 중이거나 침입을 했다는 소리네? 아웅 근데 저 옆방 분위기로 보니까 풍아가 아주 날아 다니는 모양이네. 누가 들어왔는지 불쌍하다. 흠. 가보자.” 나는 침대에서 웅얼거리다가 험악한 인상을 쓰는 정령 3인방의 눈초리에 이기지 못하고 수아네 방문을 두드렸다. “수아야. 풍아야 들어가도 되니?” 곧장 안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네, 오빠. 어서 들어오세요.” 수아의 목소리다. 우리들이 수아네 방 안을 들어갔을 때, 우리가 본 것은 그야말로 난장판인 방 안이었다. 뒤집어진 탁자와 침대, 날리고 찢어진 커텐과 침대 시트와 배게, 그리고 정신을 잃고 쓰러진 세 명의 인물들. “음? 뭐야? 왜 복면들 하고 있는 거야? 도둑인가? 이상한 놈들이네.” 나는 가까이 가서 그들의 복면을 벗겼다. 20대 후반에 서 30대 초반의 인물들. 그다지 궁색해 보이는 얼굴들은 아니었다. “수아야, 얘네들 왜 이렇게 된거야?” 내가 수아에게 물어보자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풍아가 말을 한다. “나, 나하고 수아하고 자고 있는데, 이 녀석들이 창문으로 들어오잖아. 마침 오빠가 걸어준 알람 마법이 울려서 눈을 떴는데, 우리 잠옷 안샀잖아. 그래서 우리들 그냥 옷 벗고 잤거든. 그런데 이 놈들이 내 침대로 와서 침대 시트를 벗기잖아. 이놈들이, 그래서 화가 나서 날려버린 건데. 수아가 방어벽을 쳐서 벽이랑 막아줘서 안에 있는 것들만 이렇게 된 거야.” 말을 하는 풍아는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무지 화가 났거나 창피한 모양이다. “잘 했어, 풍아야. 그럼 아예 하늘로 날려 버리지 그랬어? 이렇게 곱게 두지 말고. 이런 놈들은 당해도 싸지. 아무렴. 그래 풍아는 어디 다친 곳은 없고? 괜찮은 거지? 수아도?” 풍아와 수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다는 표시를 한다. 나는 지금 겉으로는 표현을 하지 않아도 무척 화가 나 있는 상태다. 내 여동생의 맨 몸을 보았다는 말이다. 그런 짓을 용서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일단 한 녀석을 깨웠다. “끄응.” 그 녀석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정신을 못차리는 모양이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라. 너는 내가 무엇을 알고 싶어 할런지를 잘 생각하고 그리고 머리속에 정리를 하고 정리가 끝나면 고개를 끄덕여라. 그럼 된다.” 녀석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내가 쉽게 입을 열 거란 생각은 버리는 것이 좋을 걸? 차라리 나를 경비대에 넘기는 편이 빠를 거야.” 하지만 나는 녀석의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나는 녀석의 혈을 짚어 목소리가 나오지 않게 하고 손과 발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내가 자신의 몸에 손을 댈 때 마다 몸이 마비되자 녀석은 눈이 커지면서 두려움이 번지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하는 이 방법은 아주 예전에 사람들에게서 무엇인가를 알고 싶은데 사람 들이 그것을 말해주지 않아서 화가난 악마가 만들어 낸 방법이다. 이제 네게 그것을 맛보여주마.” 사실 그건 모두 거짓말이다. 하지만 분위기 조성으로는 최고의 말이지 않은가. 나는 녀석의 몇 몇 혈도들의 제압하고 비틀어서 몸 전체의 근육들이 수축되도록 만들었다.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쥐가 나는 것이지만 몸의 모든 근육이 쥐가 나는 기분은 느껴보지 않으면 모를 일일 것이다. 녀석은 순식간에 몸이 오그라들고 혈관이 팽창되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겉으로 보이는 근육들이 심각하게 수축되고 있었다. “이걸 오래 견디면 몸에 좋지 않아. 왜냐하면 한 번 망가진 근육들은 잘 회복이 되지를 않거든. 그러니까 조심하라구.” 녀석은 오래 견디지 못했다. 고개를 정신없이 끄덕이는 녀석의 모습을 보다가 잠시 후에 혈들을 풀어 주었다. “나는 오래 기다릴 생각이 없다.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할 이야기를 정리해서 고개를 끄덕이라고 했을 것이다.”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녀석의 입에서 말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저는 쉬벡의성 성주님의 사병으로 있습니다. 같이 온 두 명도 역시 같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낮에 소성주님께서 성 안에서 예쁜 여자 둘을 보았다고 그 여자들을 찾아서 데리고 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세 번 정도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저 시키는 데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 전에 데리고 갔던 여자들은 소성주님께서 욕심을 채우고는 성안의 말라버린 우물에 떨어뜨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워낙 깊어서 그 속에서 죽어 썩어도 냄새도 나지 않는 우물입니다. 성안에서 여자들이 셋이 없어졌지만 모두 여행객이었고, 일행이 없었던 탓에 전혀 소문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녀들을 데려 오면서 짐을 챙기고 또 방안에는 숙박비와 팁까지 남겨 두었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이야기한 녀석은 더 이상 말이 이어지지 않는 모양인지 두려운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곧 녀석의 수혈을 짚어 재우고는 다른 녀석들을 차례로 같은 과정을 밟아갔다. 그리고 세 녀석의 이야기는 거의 같은 내용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한 녀석은 자신은 늙으신 부모님과 결혼한지 한 달도 되자 않은 아내와 세 명의 자식이 있다는 헛소리를 지껄였다는 정도였다. “이거 재미있네?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그러게 그 소성주라는 놈 혼을 내 줘야해.” “아니야 혼을 내는 것으로는 모자라. 지은 죄 만큼의 대가를 치루도록 해야해.” 의견 수렴은 할 필요도 없는가 보다. 결론은 녀석을 잡아서 혼을 내 주던지 벌을 받게 하던지, 그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하지? 내가 의견을 물었다.” 아직도 이 녀석들은 창조적이라는 것에는 약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궁리해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머리가 나쁘다는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정령들은 무엇인가 없는 것에서 만들어 내는 것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즉 수리적 논리적 능력은 강하지만, 추상적이거나 감상적인 면이 약한 것이다. 그러니 무언가 방법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런 비슷한 경험이 있다면 경험했던 내용을 이야기 하면 되지만 이 녀석들은 경험도 없다. 그러니 새로운 무언가를 생각해 내야 하는 것이다. 괴로운 일이다. “저기 형. 우리가 가서 그 녀석을 잡아서 족치면 되지 않아?” “화아야, 무조건 힘으로 해결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야. ” “그럼 오빠. 오빠가 가서 잡아오면 되잖아. 별로 힘도 안들고, 다른 사람들 모르게 할 수도 있고.” “풍아야, 그럼 그건 나 혼자 하는 거지 우리가 하는 게 아니잖아.” “그럼 그 녀석에게 이리로 오라고 하면 되잖아.” “지토, 그럼 어떻게 그 녀석을 오라고 할건데?” “그건, 형 이 녀석들 중에 한 녀석을 보내서 오라고 하는 거야. 부하들이 잡혀서 증인이 있으니까 오지 않으면 경비대에 넘긴다고 말이야.” “그것도 좋은 방법인데, 아까 이 녀석이 차라리 경비대에 넘기라는 말을 했었거든? 그건 들어가면 빠져 나올 방법이 있다는 소리고, 그건 역시 소성주라는 녀석과 경비대가 연결이 된다는 소리일거야. 안돼.” “흠. 그럼 오빠, 우리 둘이 잡힌 척 하고 들어가 있으면 오빠들이 구하러 오면 되겠다. 그럼 성 안에 다른 사람들도 보게 될 거고 그럼 다 폭로하는 거야. 어떻게 생각해?” “하하하. 수아가 아주 좋은 의견을 내었는 걸? 그래 그렇게 하자. 아주 좋아. 하하하” 내가 수아를 칭찬하자 다른 녀석들이 삐쭉거린다. “하하, 다음에는 너희들의 의견을 들을지도 모르잖아. 겨우 이런 것을 가지고 막내를 시셈하다니, 오빠 언니가 되어서 부끄럽게. 그리고 지토 너는 나하고 동급이면서 그러고 있는 거냐?” 내가 그렇게 말하자 곧 얼굴을 붉히는 녀석들이다. 결국에 수아의 계획을 마무리 하기 위해서 나는 풍아가 날려버린 방안에 일루젼을 걸었고, 세 납치범의 머리에 최면을 걸었다. 최면의 효과는 일주일이 갈 것이고 그 사이면 우리는 모든 일을 마무리하고 사라지고 없을 것이었다. 영구 최면을 걸고 싶지만 그것은 잘못하면 부작용이 올 수 도 있기 때문에 자제한 것이었다. 녀석들은 풍아와 수아가 들어간 자루를 앞에 놓고 정신을 차렸다. 그리곤 자신들이 방에 들어와서 두 여자를 자루에 넣었다고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내가 만들 일루젼 뒤에서 녀석들의 행동을 살폈다. “이만 가자. 소성주에게 이 여자들을 갖다 주고 술이나 먹자.” “그래 그러지. 이게 무슨 짓인지. 그저 소성주만 아니라면 어디 조용히 묻어 버리고 싶은데, 힘이 없으니 어쩌겠어? 그저 여자들만 불쌍하지.” “그런데 이번에는 일행이 있는데 괜찮을까 몰라.” “그런 것 까지 우리가 어떻게 신경을 쓰겠어. 그만 가자구. 이러다 늦겠어.” 말을 주고 받은 녀석들은 재빨리 창문을 통해 사라졌다. 나는 일루젼을 풀고 동생들을 보았다. “이런 무기도 없으니 어쩐다? 알아서들 잘 해. 다치지들 말고, 알았지? 그럼 성주가 어떤 인물인지 한 번 보러 갈까?” “크크 그러자구 형. 감히 내 여동생들을 납치를 해? 너흰 다 죽은거야. 기다려라 크크크.” 아주 재미가 넘치는 모양이다. 화아녀석. 불안한 웃음을 흘린다. “그래요. 루탄형 빨리 빨리 가요.” 어째, 광아 까지도 눈이 빛나고 있다. 지토는 달리 하고 싶은 말이 없다. 그 짧은 팔을 붕붕 휘두르고 있는 중이다. “서두르자. 이러다가 놓치겠네.” 나는 화아등을 이끌고 세 납치범을 따라갔다. 소성주라는 녀석도 다른 경비병들에게 숨기고 싶었던 모양인지 세 납치범들은 잘도 경비병들을 피해가며 커다란 성의 본체로 다가가고 있었다. 가끔 경비병의 모습에 몸을 숨기는 것을 보면 역시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것은 확실했다. 세 납치범은 성의 본체로 보이는 건물의 정면으로 가지 않고 옆으로 돌아 2층 난간으로 뛰어 올랐다. 우리도 급히 2층으로 따라 들어갔지만, 그 순간 나는 미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형님, 이상한데요? 여기서는 마나가 움직이지 않아요. 비록 정령력이 마나와는 많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정령력을 쓰는 데도 상당한 제약이 있어요.” 광아가 대뜸 뭐가 이상한지를 찾아 내었다. “그래 그런 것 같구나. 이 건물 전체가 마법에 대한 무효화가 걸려 있는 것 같네? 이크 그럼 수아나 풍아도 힘을 쓰기 어려울 것 아냐?” 나는 마음이 조급해 졌다. “아까 그 녀석들 어디로 갔는지 봤어?” “아니 못봤다. 창문을 넘어 가는 것 까지는 봤지만..” “나도 못봤는데..” “그럼 수아들이 어디 있는지 모르잖아. 안되겠다. 화아하고 지토는 그 쪽으로 가고, 나하고 광아는 이 쪽으로 가면서 찾아보자. 찾으면 일단 수아들의 안전을 확보하고 연락을 하도록 하자.” 나는 우리 일행을 둘로 나누었다. 마법 무효화가 걸린 성이라니, 어째 이름이 ‘쉬벡의성’인 것으로 보아서 쉬벡이 걸어 놓은 마법인 것 같은데, 굳이 마법을 해제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빨리 수아들을 찾아야 한다. 나는 광아와 함께 복도를 살피며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2층 복도 끝까지 올 때까지 인기척을 느낄 수가 없었다. 때문의 2층 끝에서는 다시 3층으로 광아를 보내고, 1층으로 내가 내려갔다. 보통 이런 건물의 1층은 주거용이 아니다. 커다란 식당과 연회장, 그리고 취사장 들이 있는 것이다. 때문에 나는 곧 지하로 내려가는 길을 찾았다. 그리고 지하로 통하는 계단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지하는 상당히 깊게 내려갔고, 마지막에는 음침한 감옥들이 있었을 뿐, 소성주라는 놈이 있을 법한 곳은 없었다. “이런, 이쪽이 아닌 모양이네.” 나는 급히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내려올 때에 비해서 이미 알고 있는 길을 가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1층으로 나서는 순간 일이 커진 것을 알 수 있었다. 1층 홀로 사람의 몸뚱이가 떨어져 내린 것이다. 내가 위를 올려다 봤을 때는 3층 난간으로 사람의 그림자가 스치듯 지나가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급한 마음에 몸을 띄워 2층 계단으로 향하는 난간을 밟고, 반대쪽 3층으로 뛰어 올랐다. 그러 내 눈에 잡힌 것은 수아와 풍아가 들어 있는 자루 앞을 막고 서 있는 갈색머리의 사내와 그를 호위하듯 서 있는 세 납치범, 그리고 그 앞을 가로 막고 있는 화아와 지토였다. 그리고 사람이 떨어졌던 쪽은 반대쪽으로 건물의 중앙부분이 천장까지 뚫려 있었기 때문에 건너편과 이 쪽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 쪽에서 광아가 이 쪽 상황을 보고, 경비병들과 한바탕 드잡이질을 하면서 사람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그리고 지금 광아가 보이지 않는 것은 이쪽으로 오기 위해서 길을 찾고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화아와 지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형, 이것들이 우리 동생들 데려 갔어.” “야 루탄, 니 동생들 저기 있다.” 아주 신이 났구만, 그거 모르는 사람이 여기 어디있냐? 그래도 소란을 좀 크게 일이키는 것이 좋겠지? “알았다. 조용히 좀 해봐.” 나는 화아와 지토의 앞으로 나섰다. “당신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내 동생들을 돌려 줬으면 해. 만약에 허튼 짓을 한다면 후회하게 될 거야.” 나는 목소리를 깔고 흥분이 깃 들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된 일이야? 이렇게 꼬리를 달고 오다니. 바보같은 놈들.” 소성주라는 놈은 세 납치범들을 돌아보며 꾸짖는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동생들만 돌려 받으면 되는 것이다. 물론 그와 함께 소성주란 녀석의 악행을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말이다. “이봐, 그런 쓸데 없는 소리를 할 때가 아닐텐데? 내 동생들을 빨리 내놔.” 하지만 소성주라는 녀석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다. 오히려 손에 든 칼을 자루 쪽으로 향한다. “흐흐, 뭘 모르는 모양이군. 너희들은 내가 너희의 동생들을 데리고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나? 그것도 둘이나 되는군. 이 중에 하나를 죽인다고 너희가 덤빌 수 있을 것 같은가? 하나를 죽여도 하나가 남지. 그리고 하나를 죽이는 것은 너희를 협박하는데 아주 큰 효과를 가지고 오지. 어떤가 시험해 보겠나?” 아주 냉철한 녀석이고, 또 한 편으로는 야비한 녀석이다. 녀석의 말은 보통의 경우에 아주 타당한 말이다. 여기에서 녀석이 동생을 한 명 다치게 하거나 죽이는 것은 매우 효과적인 협박 방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있는 사람들이 보통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고, 녀석의 불행이라면 불행이다. 정령은 칼에 찔린다고 죽지 않는다. 조금 정령력에 손상을 입고 힘이 빠지는 정도일 뿐이다. 하지만 연극은 사실성이 중요하다. “잠깐, 내 동생들을 다치게 하지 마라. 원하는 것이 뭐냐? 왜 우리 동생을 납치한 것이냐?” 나는 그 사이에 우리들이 있는 방안의 장면을 입체적인 영상으로 ‘쉬벡의성’ 위에 구현시켰다. 성 자체에 깔린 마법 무효화 때문에 조금 화질이 좋지 않겠지만, 불가능 한 것은 아니었다. 일종의 프리즘 효과를 살리는 것인데 이 방의 빛들을 모아서 아주 작은 프리즘을 통과 시키면 반대쪽에 그 영상이 맺히는 것이다. 물론 마법적인 것이므로 고난도의 마나 운용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소성주 녀석은 그걸 알 수 없다. 하하하 두고 보자. 아쉬운 것은 소리까지 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눈치를 채게 될 테니 말이다. “흐흐흐, 별 것 아니다. 무기를 버리고, 순순히 묶이는 것이지. 그럼 동생들은 무사 할 것이다.” 이건 완전히 삼류 스토리에 나오는 이야기와 같다. 이런 경우에 보통 멍청한 사람이나 능력이 없는 사람은 가족애 때문에라도 결과를 뻔히 알면서 제압당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냉철한 사람은 동생의 복수를 다짐하며 피눈물을 흘리고 소성주를 잡아 죽이려고 할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가족들이 온전히 무사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다르지. “우선 동생들의 안전을 확인하고 싶다. 동생들을 보여줘라.” “흐흐흐. 그럼 그렇게 하지. 어차피 너희들에게 동생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으니까 말이야. 흐흐흐” 녀석은 옆에 놓인 자루를 풀고 수아를 꺼낸다. 수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로 겁에 질려있다.(하하 정말 대단한 연기력이다. 하하) “오빠. 흐윽!” 나에게 다가 오려던 수아는 납치범의 손에 잡혀 비틀거린다. 그리고 소성주는 다른 자루를 풀어 풍아를 끌어낸다. 풍아는 사정을 다 알았다는 듯이 몹시 화가 난 얼굴이다. “이 이거 놓지 못해? 너 죽여버릴 테다.” 역시 한 성질하는 풍아답다. 하지만 모두들 대단한 연기력이다.다른 사람이 보지 않을 때,서로 눈짓을하며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웃음을 짓는다.에구 다들 너무 재미있어 하는군. “자 이제 모두들 순순히 무기를 버려라. 아니면 서로 좋지 못한 일이 생길거야.” 녀석의 검이 풍아의 목으로 향한다. “무기를 버려라.” 나는 우리 화아와 지토를 보고 말했다. “하지만 형, 우린.” 화아가 억눌린 목소리로 대들고 나선다. “버리라면 버려. 동생들이 위험하잖아.” 하지만 화아는 더 큰 소리로 덤빈다. “형, 하지만 우린 무기가 없다구요. 처음부터 무기 같은 걸 들고 있지도 않은데 버릴게 뭐가 있어요?” 읔, 그러고 보니 우리는 무기를 가진 것이 없다. 물론 내 팔에 쌍환검이 있기는 하지만 알아보지 못할 것이고, 다들 맨 몸에 적수공권이다. 하하 “뭐, 우리는 무기가 없는 것 같군. 이제 어쩌면 되지?” 나는 소성주를 돌아 보며 말했다. 이런 어이없는 상황에 잠시 당황하던 소성주는 다시 칼을 풍아의 목에 들이대고 소리를 친다. “너희가 빈 손이라는 것은 뭔가 믿는 것이 있다는 말이겠지. 하지만 일단 잡힌 후에는 소용이 없는 일이지. 버크 가서 녀석들을 묶어라.” 그러자 납치범 3인조 중 한 녀석이 침대 시트를 찢어 들고 나와 화아 지토를 묶기 시작한다. 제법 주변 재료를 활용할 줄 아는 녀석인 것 같다. 그렇게 우리를 다 묶고 나자, 소성주 녀석은 여유가 생긴 모양이었다. 의자를 끌어다 앉아서는 “저녀석들이 뻣뻣하게 서 있잖아. 꿇려!” 간단한 명령에 우리는 오금을 사정없이 채여서 꿇어 앉게 되었다. 화아와 지토는 지금 당장이라도 소성주 녀석을 어떻게 해 버리려는 듯이 노려보고 있었지만 내가 가만히 있어서 인지 잘 참고 있었다. “왜, 우리 동생들을 납치했는지 말해 줄 수 있나?” 나는 소성주를 노려보며 물었다. “아하? 그거? 그거야 제법, 아니지 굉장히 반반한 얼굴 탓이라고 해야겠지. 나는 그런 여자들은 보면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지거든. 뭐 그렇다고 이 성에 사는 사람들을 건들었다가 들키는 날에는 아무리 나라고 해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고, 그러니 지나가는 여행객들을 상대로 해야 하는데, 그게 그렇게 흔하지를 않거든, 일행도 없이 혼자오는 여자 중에서 반반한 것을 찾기가 쉽지 않아서 말이야. 그리고 혼자 온다는 것은 그 만큼 실력도 있다는 말인데, 그게 쉽겠냐구. 하지만 그런 여자들은 대부분 마법쪽으로 능력이 있는 여자들이라 이 성에 일단 잡혀 들어오면 힘을 못쓰게 되지. 허긴 세 번 째로 잡혀온 여자는 일부러 잡혀서 앞서 사라진 동생의 행방을 찾으려고 했던 모양이지만 이 성에 들어오는 순간 힘을 쓸 수가 없어서 당해버리고 말았지, 하하하.” “그럼, 그 여자들은 어떻게 되었지? 설마 모두 죽였나? 그런 건가? 우리 동생들도 죽일 건가?” 나는 묶인 몸을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이봐, 이봐 흥분은 몸에 해롭다구. 일단 전에 끌고 왔던 여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나도 모르지, 성의 오래된 우물 속에 넣었거든. 너무 깊어서 한 번도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지만 들어가서 다시 나온 사람도 본 적이 없으니 아마 죽었을까? 하하하” 녀석이 그렇게 즐겁다는 듯이 말을 하고 있을 때, 복도 한 쪽이 소란스러워 지면서 문을 박차고 광아가 뛰어 들어왔다. 뒤로는 경비병들을 한 부대는 끌고 말이다. 그리고 뛰어든 광아는 우리들이 모두 묶여 있는 것을 보고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 되어서 굳어 버렸다. 물론 광아를 따라 오던 병사들도 문에서 얼어 있는 상태가 잠깐 만들어 졌다. “이런 이런 남은 일행이 도착을 하셨군. 그런데 어쩌나? 이제 혼자만 남게 되었으니 말이야. 자 너도 무릎을 꿇고 항복을 하는게 좋지 않을까?” 소성주는 여전히 여유로운 모습으로 광아를 협박한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대부분 모인 것 같다. 이 정도면 충분한 관객이 모인 셈이다. “풍아야 수아야. 이제 장난 그만하고 돌아가자. 빨리 끝내고 좀 더 자야지. 안그러면 피부가 상해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풍아들에게 말했다. “엇, 움직이지 말아.” 옆에서 아까 더크라고 불렸던 납치범이 어깨를 눌렀지만 그런 힘이 통할 내가 아니었다. 그리고 풍아도 손목을 묶고 있던 줄을 작은 바람칼로 잘라버렸고, 수아를 묶었던 줄은 얼음처럼 부서졌다. 그리고 슬며서 기지개를 펴는 수아. “아잉. 몸이 굳은 것 같아요. 오빠. 자루 속에 웅크리고 있어서 그런가봐.” 내 옆에서는 화아와 지토가 몸을 일으키고 몸을 묶은 끈들은 타거나 찢어져 버렸다. 순식간의 일이라 소성주도 납치3인방도 대처를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판단이 빠른 소성주는 곧장 일어나며 칼을 풍아쪽으로 뻗었다. 풍아를 제압하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다는 빠른 판단이었겠지만, 풍아는 날렵한 몸과 함께 무시 못할 힘을 지녔다구. 그러다가 다치지. 풍아는 소성주의 칼을 슬쩍 피하면서 양손으로 소성주의 칼을 쥔 손을 잡아 끌면서 오른 발로 힘차게 걷어찼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런 곳을 걷어차냐? 그것도 맨 발로. “으헉!” 간단한 비명과 함께 꼬꾸라진 소성주. 그리고 “움직이지 마세요. 여러분. 소성주가 어떻게 될지 몰라요. 여러분이 움직이시면 말이죠. 아이, 이렇게 무거운 칼을 들고 있으면 떨어뜨릴 지도 모르는데 여러분이 저를 놀라게 하시면 안되지요. 거기다가 이 칼 아주 날카로운 것 같은데요. 조심하세요. 조심. 호호” 역시나 수다가 심한 풍아. 하지만 이걸로 사건은 적당히 마무리가 되는 것 같다. 나와 동생들 그리고 지토는 일단 소성주 녀석의 커다란 침대에 아무렇게나 앉거나 기대거나 하고 꼼짝도 못하게 혈도를 짚은 소성주와 납치3인방을 어떻게 처리 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을 했다. 광아를 따라온 병사들은 소성주 때문에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그냥 문을 막고 상황을 지켜 보고 있었다. “이봐 소성주, 너 말이야. 우리 동생들을 납치해서 뭘 하려고 한 거야? 응? 자 이제 듣는 사람들도 많은데 어디 한 번 속 시원하게 말을 해 보는 게 어떨까?” 하지만 역시 만만찮은 소성주, 잔머리 돌아가는 데는 역시 대단하다. “무, 무슨 헛소리냐? 너희들이 잠자는 내 방에 침입해 놓고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 이냐?” 처음, 내 말에 웅성거리던 병사들은 소성주의 말에 그럼 그렇지 하는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나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쉬벡의성’ 위에서 벌어지 는 동영상을 아주 실감나게 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동영상은 되감기와 재상영이 가능하단 말씀이야. 재상영을 할 때는 음성더빙도 완벽하게 준비해 두고 있었다. 그러니 내가 걱정을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게 무슨 소란이냐?” 갑작스런 호통과 함께 병사들을 헤치고 새로운 인물들이 나타났다. 나이 50대로 보이는 갈색머리 남자와 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 갑옷을 입은 건장한 체 구의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 그리고 그 남자의 떨거지로 보이는 기사들. “아, 아버지. 이 녀석들이 갑자기 제 방에 침입을 해서...” 역시 지 아버지가 왔다고 기운이 나는 소성주다. 그럼 저 갈색머리 사내가 이 성의 성주인 모양이다. “너희들은 누군데 이 성에 침입을 한 것이냐? 거기다가 사람을 해치기 까지 하다니. 겁이 없는 모양이구나.” 성주도 역시 아비인 모양이다. 아들의 말을 곧이 곧대로 듣는 것을 보니 말이다. 나는 정중하게 입을 떼었다. “죄송합니다 성주님. 하지만 저희들은 이런 성에 들어오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성주님의 아드님이 제 여동생들을 납치해 가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저희는 단지 납치 당한 여동생을 찾기 위해 달려왔을 뿐입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 아들이 그런 짓을 할 턱이 없다.” “여기 이 세 명의 사람들이 제 여동생들을 납치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처음이 아니라고 아드님 스스로 제게 말을 했습니다. 여자들을 납치하고 나중에는 성에 있는 오래된 우물 속에 던졌다고 저에게 말했지요.” “아버지. 거짓말입니다. 저는 그런 짓을 한 적이 없습니다. 더크들에게 그런 일을 시킨 적도 없고, 오늘은 그저 이야기나 나누려고 더크 등을 불렀을 뿐입니다.” 소성주는 역시 발뺌 작전이다. “호오. 그래서 이 세 사람은 이렇게 검은 색의 야행복을 입고. 그리고 이렇게 복면까지 준비하고 다니는 모양이지요?” 나는 더크등의 품에서 복면을 찾아 꺼내며 말했다. “그건, 그냥 재미 삼아서 우리 셋이서 이 성의 경비들을 피해서 소성주님 방에 누가 빨리 도착하는가 하는 내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허튼 소리 하지 말아라.” 이것도 미리 준비된 대답일까? 아니면 방금 생각해 낸 것일까? 방금 생각한 것이면 더크라는 인물도 잔머리가 빠른 인물이네. 감탄 감탄. 하지만 나는 물러설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럼 하는 수 없군요. 여러분께 아주 재미있는 모습을 보여드리지요.” 나는 지금까지 ‘쉬벡의성’ 상공에서 상연되던 영화를 축소해서 방안에서 상영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이번에는 음성 더빙도 된 상태였다. 나가 화아와 지토 앞으로 나서면서 시작된 영상은 오래 볼 필요도 없이 소성주의 죄를 적나라하게 들어내 주었다. 그리고 영상이 끝났을 때, 성주는 침중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가서 엘리오를 불러 오게. 이 영상이 꾸며진 것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고 만약 사실이면 제란과 더크등을 감옥에 가두고 재판을 하도록 하겠네.” 아마도 엘리오라는 인물을 마법사인 모양이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기사단의 단장인 듯한 사람이 밖으로 달려 나갔다. 엘리오를 기다리는 동안 제란이라는 소성주는 그래도 엘리오가 내 마법을 꾸며진 것 이라고 말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을 했던지 입을 다물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만약 이 영상이 거짓인 것이 밝혀지면 자네들은 그에 상응하는 응당한 대가를 치루어야 할 것일세.” 아무래도 성주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도 그냥 당하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만약, 이 영상이 거짓이라고 말한다면 오늘 이 성은 잿더미가 될 것입니다. 저도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경고하건데 중간에서 어떤 일을 꾸밀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런 내 말에 성주는 어이가 없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성주가 뭐하고 하기도 전에, 나갔던 중년기사와 나이가 많아 보이는 학자풍의 새로운 인물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학자풍의 인물은 내가 한 말을 들은 모양인지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내가 다시 보여주는 영상을 말없이 끝까지 보고는 입을 열었다. “이 영상은 거짓이.....아닙니다.” 그리곤 중년 기사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일세. 만약 저 분이 화를 낸다면 소성주 뿐만 아니라 성주님과 성민 전체가 위험할지도 모르네. 그리고 내가 한 말은 진실일세. 자네가 소성주를 구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저 마법사가 하는 말은 거짓이 아닐세. 마지막으로 이 성이 ‘쉬벡의성’이란 것을 명심하게 이 성안에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전설의 대마법사 쉬벡의 마력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일세.” 엘리오라는 마법사의 말이 끝나자 주위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아마도 생각지도 못했던 것 같았다. 물론 나도 이런 상황이 될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상황은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다. “나는 동생들의 납치와, 앞서 세 여성의 납치 및 유기에 대한 자세한 조사가 이루어져 합당한 형벌이 제란이라는 인물에게 내려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엘리오님이 잘 못 이해를 하신 모양인데, 제가 쓴 것은 정령력을 이용한 마법이기 때문에 이 성 안에서 가능했던 것이지, 이 성에 걸린 마법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나는 엘리오를 지긋이 바라 보았다. 아마도 그는 내가 드러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아! 그렇군요. 어쩐지 마나에 정령력이 들어있다 했더니 그런 이유 때문이었군요. 네. 이제 좀 이해가 가네요.” 이래서 나는 마법사들이 좋다. 머리가 좋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아도 원하는 바를 알아서 해 주는 것이다. “음. 내 아들이 이런 일을 일으켜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할는지 모르겠구먼. 내가 자네들을 잘 대우해 주어야 할 것이지만, 지금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우선 엘리오와 함께 가 있게나. 내 아들 제린...에 대해서는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질 것을 약속하네.” 성주는 그렇게 말을 하면서 침중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간단한 인사와 함께 우리들은 성의 본체를 나왔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러고 보니 이름도 모르는군요. 저는 엘리오라고 이 성의 수석마법사로 있습니다. 마법길드에서 파견 나온지 5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네, 저는 루탄, 여긴 둘째 화, 셋째 풍, 넷째 광, 다섯째 수. 그리고 제 친구인 지토입니다.” “그런데 일행분들 모두가 이상하게 마나가 느껴지는데, 마법사분들이신가요?” “하하 아닙니다. 저는 마법을 조금 쓰기는 하지만 제 동생들과 친구는 아주 약간씩의 정령력을 쓰고, 주로 검이나 도, 도끼등을 쓰지요. 그나마 수아가 치료 마법을 좀 하는 편인데 그것도 정령력을 주로 사용합니다.” “아~~! 그러시군요. 그럼 루탄님은 길드에서의 위치가 어느 정도 되시는지. 저는 길드의 3급 회원입니다만...” 엘리오는 그렇게 말하면서 무척이나 자랑스러운 표정이었다. 3급 회원이 대단한 것인가 싶었다. “저는 길드 소속이아닙니다. 저희 일행은 이렇게 세상에 나온 것이 이번에 처음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산 속에서 살았는데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시고 할아버지께서 지토와 함게 저희를 키우셨지요. 그리고 마법이나 다른 모든 것은 할아버지께 배운 것입니다. 뭐 할아버지도 세상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해 주시지를 않아서 저희는 잘 모르구요.” “이런 그런일이. 할아버지께서 대단하신 분이었던 모양이지요. 이렇게 엄청난 분들을 키워내신 것을 보니 말입니다.” “하하 별말씀을요. 그런데 이 성은 굉장히 오래된 것 같으네요. 얼마나 오래 된 성이예요?” 나는 지나가는 투로 자연스럽게 물어보았다. “그렇지요. 아주 오래된 성이지요. 대마법사 쉬벡님이 성곽과 본채를 만들었던 것이니 벌써 800년 전의 건물입니다. 쉬벡 대마법사가 만년에 이 곳에 성을 짓고 사람들이 살게 한 것이 시작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렇게 대화를 하며 우리는 밤 어둠을 뚫고 엘리오의 집으로 향했다. 어차피 성의 본채가 마법을 쓸 수 없는 공간이라 성의 수석 마법사이면서 따로 거처를 정해야 했다고 한다. 아담한 엘리오의 집은 겉보기와는 달리 굉장한 책들과 마법시약들과 도구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런 지저분하네요. 혼자 지내기 때문에 정리를 잘 하지 않아서 이 모양입니다. 그래도 깔끔하다는 소리를 듣는 편인데,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너무 지저분해 보이지요.” 우리는 그 집에서 엘리오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들이 결계를 치고 세상과 단절되었던 것이 거의 950년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까 쉬벡이 죽고 나서도 800년이나 흘렀던 것이다. 정말 오래도 결계 속에 앉아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도 그런 시간의 흐름을 모르고 지냈다니 어떻게 보면 기가 막힌 일이었다. 쉬벡의 사후 800년, 인간의 역사는 많은 굴곡을 겪었다. 이 대륙에는 중앙 한타왕국과 여인왕국 암흑제국 누웬왕국 신성제국이 역사를 장악하고 있었지만 때로는 암흑제국이 때로는 신성제국이 때로는 여인왕국이 그 성세를 자랑하곤 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중앙의 한타 왕국이 그런 나라들의 완충 역할을 잘 해 주었다는 것이다. 단 중앙에 있던 까닭에 중계 무역을 통한 이윤을 챙기고 경제 대국이 될 수는 있었지만 다른 나라들에 끼어 있어 영토를 넓히거나 나라의 힘을 기르는 것이 어려웠던 단점을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예전 불모지대라 불리웠던 그 넓은 땅을 지니고 점점 국력이 강해지는 주변국에 비해서 상대적인 약소국이 되어버린 한타왕국은 그나마 마법사들의 도시 메지컬쵸의 힘으로 나라의 주권을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5개국이 어떤 의미에서는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경향도 있어서 가장 적대적인 암흑제국와 신성제국의 조율만 잘되면 태평스러운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결정적으로 그 800년 동안 신성제국과 암흑제국이 전면전으로 치달았던 것은 두번뿐으로 대략 200년 전과 600년 전의 일이라고 한다. 그 싸움은 물론 자신들의 땅이 아닌 한타의 영토 안에서 이루어졌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한타가 떠맡았지만 싸움으로 인해 상처입은 한타의 자존심은 두 제국에서 내 놓은 보상으로 무마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보상은 영토의 일부를 한타에 넘기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한타 왕국은 그런 싸움을 자국의 영토에서 허용할 수 밖에 없었을까? 그것은 어쩌면 비대해진 두 왕국의 군사력을 줄이려는 고육지계였는지도 모른다는 것이 학자들의 한 의견이었다. 물론 다른 의견으로 두 제국의 힘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두 제국이 상대 제국으로 쳐들어 가는 것을 방관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도 있다. 하지만 전쟁이 두 제국의 힘이 소진될 때까지 계속되어 결국 전쟁을 그만 둘 수 밖에 없게 되었을 때, 두 제국은 또한 한타의 보상요구를 거절할 힘도 없었던 것은 분명했다. 결국 그 두 전쟁으로 그나마 한타 왕국은 국토가 넓어지고, 또 국력이 신장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역시 4대 강대국 사이의 약소국인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그런 역사의 흐름 속에서 새롭게 등장한 존재들이 있었으니 환수와 마수와 정령족들이었다. 환수와 마수는 그야말로 최강의 힘을 바탕으로 물질계를 호령하는 존재들로 그 중에서 초환수와 초마수는 인간들의 힘으로 어찌해 볼 수 없는 존재들로 고유의 영역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었고, 다른 환수나 마수들 역시 강대한 힘으로 인간을 위협하거나 인간들과 갈등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는 형편이었다. 물론 환수 마수에게 희생당하는 인간이 있으면 반대의 경우도 생기는 것이어서 환수 마수가 인간의 부림을 받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정령족이 새롭게 나타났는데 그들은 인간과 밀접한 관련을 맺지 않고 자연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었지만, 물질계의 존재임에는 분명했기 때문에 가끔 인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가 발견되기도 한다고 한다. 뭐 가끔은 인간들이 억지로 사냥을 해온 경우도 있다고 하지만, 그런 경우 호전적인 정령족의 경우는 끝까지 자신의 종족을 찾아 복수를 하려고 하기 때문에 정령족을 납치하거나 사냥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모양이었다.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런 정령족 중에서 바위에 깃들인 정령족이 재미있는 존재들인데, 바로 지토와 꼭 닮았다는 것이다. 다른 정령족들의 생김새가 거의 인간과 비슷하고 다만 등 위에 잠자리 날개 같은 날개를 달고 있다는 것이 다른 점이라면 바위 정령족은 날개도 없고 지토와 꼭 닮은 모양이라고 한다. 일설에는 이 바위 정령족은 정령계의 노옴이 물질계에 나온 모습이라고 하는데, 사실 그 바위 정령족의 손재주가 매우 뛰어나다고하니 그 말도 일리가 있는 말인 것 같다. 아무튼 내가 다시 나온 세상은 그 사이에 상당히 다양해진 양상을 띄고 변화를 거듭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것도 모든 계의 균형이 갖추어진 때문에 일어나는 변화 일런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아직도 중세의 생활패턴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과학이라는 것은 거의 발전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허긴 대신에 마법이 있으니까 그럴 수도 있는 것인가? 우리는 엘리오의 집에서 이틀을 보내면서 이런 저런 사정들을 익혔다. 엘리오도 우리가 세상 물정을 모른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우리의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을 해 주었다. 그리고 사흘째, 결국 제란들의 재판이 열렸다. 재판은 성주가 맡아 진행했으면 그 사이에 밝혀진 사실들을 공표하고, 죄인들의 자백을 받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제란들은 모든 죄를 인정했고, 더크등의 납치3인방은 15년의 강제 노역형에 처해졌고, 제란은 교수형이 결정되었다. 판결을 내리는 성주는 어금니를 깨물고 눈물을 삼키며 형량을 공표했고, 그를 보는 성민들은 성주에 대한 연민으로 눈시울을 적시고, 못난 아들에게 힐책어린 눈빛을 보냈다. 교수형은 일주일 후로 정해졌다. 우리들은 그 재판을 모두 지켜보면서 나름대로 적절한 재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재판 결과에 아무런 불만도 없었기 때문에 제란에 관계된 일에서 신경을 끊기로 했다. 그리곤 엘리오의 집에서 앞으로의 여정을 상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형, 우리 지금 별로 할 일도 없잖아. 그치.”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오빠. 그렇다고 무턱대고 여기 저기 돌아 다니는 것도 좀 그렇다. 우리 예전에 시작했다가 그만 뒀던 거 다시 하자.” 풍아가 제안을 했다. “그거라니? 뭐 말이야?” “오빤? 그거‘란의 용병대’말이야. 그거 다시 하자. 이번에는 인원도 6명이잖아. 용병대 만들어서 의뢰를 받는 거야. 대신에 사람들 호위하고 이런 거 하지 말고 환수나 마수를 전문으로 하는 용병대 하자. 들어 보니까 환수나 마수들이 보물을 모으는 거 좋아하는 녀석들이 많다고 하던데, 거기다가 환수나 마수들 제압해서 길들이면 자기 부하로 만들 수도 있다더라. 그러니까 그거 하자. 응.” 아주 구체적인 계획까지 들고 나오는 풍아의 말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절대로 풍아는 이런 창조적인 아이디어들 낼 수 있는 녀석이 아니다. 물론 다른 녀석들도 그건 안 된다. “풍아 너, 이 계획 누가 세운거야? 엘리오한테 세워 달라고 했지?” 나는 풍아가 종종 엘리오에게 아양을 떨어가며 떼를 썼던 것을 기억해 내었다. “웅, 그래도 ‘란의 용병대’ 그건 엘리오도 모르는 거란 말이야. 치잇.” 그래도 엘리오에게 이야기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말을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너희들 생각은 어떼? 용병대 하고 싶어?” 나는 다른 녀석들의 의견을 물었다. “그래 재미있겠네. 그거 하자 형.” “그래요 형님. 괜찮겠네요.” “뭐 하다 재미없으면 다른거 하면 되지뭐. 일단 해 보자.” 다들 별로 반대는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용병대를 결성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럼 나가자. 일단 나가서 무기들을 구해야지. 무기도 없이 돌아다닐 수는 없잖아.” 그래서 우리들은 우르르 몰려나갔다. ‘쉬벡의성’은 상당히 큰 성이었지만 마수나 환수, 혹은 괴물들이 나타나는 경우가 거의 없는 곳이어서 대장간이 무기점을 겸하고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마음에 드는 무기가 있을 턱이 없었다. “형님, 여기 별로 마음에 드는 물건이 없어요. 다른 데로 가요.” “나도 별로 마음에 안 들어.” 돌아보니 다들 못마땅한 표정들이다. “야! 니들 도대체 얼마나 좋은 것을 원하는 거야? 일단 아무거나 가지고 쓰다가 나중에 돈 벌면 좋은 거 사야지. 처음부터 좋은 걸 탐내면 안 되는 거야.” 나는 단호하게 이 곳에서 물건을 살 것을 주장했다. “그래두 오빠. 너무해. 이런걸 어떻게 쓰란 말이야.” 풍아가 큼직한 장검을 휘두르며 말했다. 평범한 물건이긴 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우리 여기서 적당히 들고 나가서 첫 목표를 너희에게 알맞는 무기를 찾는 걸로 하는 건 어떻겠냐? 그럼 되지? 그렇게 하자 응?” 그제서야 녀석들의 눈빛이 바뀐다. “그것 좋겠다. 그 뭐냐? 바위 정령족이 물건을 잘 만든다면서? 우리 그 녀석들 찾아가서 물건 만들어 달라고 하자. 응?” 지토가 나선다. 물론 우리를 지켜보는 대장장이는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바위 정령족이 바위 정령족을 찾아가자고 하는 거니 말이다. “그래 그럼 빨리 알아서들 하나씩 정해. 수아의 지팡이도 사러 가야 한단 말이야.” 그래서 결국은 제 각각 하나씩의 무기들을 들고 대장간을 나섰다. 그리고 우리가 찾아간 곳은 성의 번화가에 보석상점 옆에 있는 마법 물품점이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도 그럴듯한 물건들은 보이지 않았다. “수아야. 너 이거 써라. 내가 나가서 여기에다 몇 가지 마법 걸어줄게. 그럼 제법 쓸만한 물건이 될거야.” 그렇게 수아에게 끝에 수정이 박혀있는 작고 깜찍한 지팡이를 하나 사 주었다. 그러고 보니 무기들에 연연할 필요가 별로 없었다. 내가 힘을 좀 써서 간단한 마법성향을 걸어주면 되는 것이다. 영구 마법을 거는 것은 힘이 들겠지만 한 번 마법을 걸면 3년 정도는 괜찮게 쓸 수 있을 것이었다. 어차피 평범한 강철이라 큰 마법은 견딜 수도 없으니까. 적당한 강화 마법과 몇가지 마법들을 걸어 주면 될 듯 했다. 그래서 엘리오릐 집에 돌아오자 마자 나는 동생들의 무기들에 마법을 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엘리오 몰래 하려고 했었지만, 신세를 진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들어서 엘리오를 불러서 마법을 거는 것을 도와 달라고 했다. 말이 도와 달라는 것이지 이제 6써클 밖에 안되는 엘리오는 그저 구경하면서 배우는 (훔치기) 것이 전부일 터였다. 일단 수아의 지팡이에는 수정에 마법 증폭기능을 넣었다. 작은 마나로 큰 효과를 보는 것인데 수정안에 축적된 마나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마나는 소비된 후에 자동적으로 시간이 지나면 재 충전 된다. 그리고 강화와 물리방어 실드, 마법 방어 실드를 함께 걸어 주었다. 뭐라해도 일단은 막내니까 말이다. 그리고 화아들의 무기에는 공통적으로 예기와 마법방어, 무기강화 마법을 걸었다. 뭐 대충 날카롭게 만들고 무기가 부서지지 않게 강하게 만들고 4써클 정도의 마법은 가뿐하게 막는 마법 방어를 걸어 놓은 것이었다. 엘리오는 그런 마법들을 쉬지 않고 거는 나를 보고 놀란 눈빛이었지만 나는 무기들 하나 하나에 그런 마법들을 번갈아 걸었다. 사실 한 번에 다 걸 수 있지만 그렇게 하면 엘리오가 마법을 훔치기 어렵기 때문에 천천히 보여 준 것이었다. 그렇게 준비가 끝난 우리는 엘리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용병 길드에 등록을 하는 대로 곧 성을 떠날 생각이었던 것이다. 결국 성주에게서는 다시 연락이 오지 않았다. 자식이 그 모양이 되었으니 우리를 다시 보고 싶어하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엘리오에게는 우리들에 대해서 함구해 줄 것을 부탁했다. 물론 엘리오는 우리의 이런 부탁을 거절하지 않고 기쁘게 받아들여 주었다. 엘리오의 집을 나선 우리들은 조금은 익숙해진 마을의 길을 따라 용병길드를 찾아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의뢰하실 일이 있으신가요? 아니면 다른 용건이 있으신가요?” 데스크에 앉아 있던 접수원이 우리를 반겼다. 그리 넓지 않은 실내에는 데스크에 앉은 사람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저기, 우리들은 용병대를 새로 만들어서 신고를 하려고 하는데요. 여기서 신고를 받나요?” 나는 데스크에 앉은 30대 초반의 인물에게 물었다. 체격으로 보아 용병일을 하는 사람 같지는 않았고, 주위의 마나도 특별한 것이 없는 것으로 보아 마법사도 아닌 사람이었다. 그냥 평범한 사무원이 아닐까 싶었다. “네? 용병대를 신고하신다구요? 제가 이곳에서 근무하고 처음으로 있는 일이네요. 뭐 여기서도 신고를 받기는 하니까요. 그럼 여기 이 서류를 작성해 주시겠어요?” 나는 그 접수원이 어렵게 찾아 건네는 종이를 받아들었다. 용병대 명칭 : 란의 용병대 용병대 인원 : 6명(남 4명, 여 2명), 루탄, 지토, 화, 풍, 광, 수. 용병대 구성 : 마법전사 1명. 치료 마법사 1명, 전사 4명. 특이사항 : 마수, 환수 전문. 나는 기록을 마치고 접수원에게 건넸다. “음.. 그런데 마법전사는 어느 분이신지요?” “제가 마법전사인데요.” 내가 나서며 말했다. “확실하게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실력을 알아야. 의뢰를 맡길 수가 있는데, 실력을 평가할 근거가 없으니, 음 이름이 루탄인가요? 네. 루탄님의 실력을 보고 용병대의 등급을 결정하겠습니다.” “그건 어렵지 않겠네요. 저희들 누군지 모르시겠어요? 얼마전에 이 성의 소성주와 한바탕 했었는데... 혹시 그 모습 못 보셨어요?” 나는 접수원에게 물었다. “이런 죄송해요. 그 때 저는 잠을 자느라고 하늘에서 펼쳐 졌다는 그 광경을 못 봤 거든요. 그래서 소문만 들었지, 여러분이 그 주인공인 줄은 몰랐네요. 그러고 보니 소문으로 들은 그 분들이시네요. 제가 좀 그런 면에서는 늦거든요. 죄송합니다. 그럼 일단은 수준급 이상의 실력으로 판단 할 수 있겠네요. 음. 일단은 2급 용병대로 기록해서 본부로 보내겠습니다. 그리고 용병대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무엇으로 하실지...” 나는 이미 그 문제에 대해서 생각을 해 둔 바가 있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란이의 예전 모습을 마법으로 만들어 보여 주었다. “이것이 우리 용병대의 상징입니다. 란이라는 환수이지요. 하하.” 그러자 접수원은 용병대를 표시하는 둥근 메달을 내어 주었다. “마법사님의 실력이면 이 메달에 란이의 모습을 세겨넣을 수가있겠네요.일단 란이의 모습을 세겨서 여기에 도장으로 찍어주십시오.그럼 접수가 끝나게 됩니다.접수비는 2만덴입니다.” 나는 곧 메달에 란이의 모습과 ‘란의 용병대’라는 이름을 세겨서 도장으로 찍어 주었다. “그 메달을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모든 용병 길드와 관련된 일은 앞으로 그 메달을 증표로 사용하게 되니까요. 그럼 란의 용병대 여러분에게 행운이 있으시기를... 참, 대장님은 루탄님으로 기록하면 되나요?” 정말 끝까지 정신 산만한 접수원이다. 그렇게 접수비까지 주고 용병대 접수를 마쳤지만, 결과적으로 그 용병길드에 들어와 있는 임무는 하나도 없었다. 전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다른 도시를 찾기로 했다. 이 성에서는 수입이 없이 지출만 있을 테니까 빨리 움직여야 했다.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아껴야 잘 사는 거다. “그런데, 형. 우리 이렇게 가는 거 이상하지 않아. 왜 우리 걸어가는 건데?” 옆에서 터덜터덜 걸어오던 화아가 결국 한 소리를 한다. “그러니까, 이렇게 먼 길을 가려면, 말을 타거나, 마차를 타거나 하는 거잖아. 그런데 왜 우리는 이렇게 걸어서 가는 거냐구.” 투덜거리는 화아의 말에 나는 대꾸를 못했다. 쉬벡의 성을 나서서 호기롭게 걷기 시작하고 오래지 않아서 나는 이 문제를 깨달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돌아가 기는 늦어버린 때였으니, 어쩌겠는가 그냥 그러려니 하고 계속 길을 재촉할 밖에. “화아야. 그러니까 이렇게 좋은 날에 천천히 걸어가면서 구경도 하고, 또 야영도 하고, 그러면서 이런 생활에 익숙해 져야지. 우리가 언제나 날아다니고, 아니면 타고 다니고, 그럴 수만은 없지 않겠냐? 그러니 불편해도 좀 참아라. 응.” 나는 그럴 듯 한 말로 화아를 진정시키고 있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도 좀 더 빨리 가고 싶었다. 벌써 일주일 가까이 이렇게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방법은 없다. 마법을 쓰거나 혹은 녀석들의 힘을 개방하면 어렵지 않은 일이 겠지만 우리들은 암묵적으로 그런 것들을 자제하는 형편인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이 렇게 터덜터덜 걸어갈 수 밖에 없었다. 그 사이에 가끔 말이나 마차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기는 했지만, 우리들이 한 꺼번에 의탁할 만한 규모는 없었다. “그런데 오빠? 원래 예전에는 여기 계곡으로 둘러 싸여 있어서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했던 곳 아니었어? 그런데 어떻게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이 들어와 있는 거지? 신기 하네?” 수아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수아는 마법스틱을 허리에 질러 넣고, 란이를 싼 손 수건을 가슴의 꼭 안고 있다. 언젠가 알은 품어줘야 되는 거 아니냐는 소리를 들은 다 음부터는 저렇게 란이를 안고 다니는 것이다. 거기다가 란이를 감싸고 있는 손수건에 는 물리력과 마법력 방어 결계까지 걸어두어서 어지간한 충격은 문제도 아니게 만들 었 다. 그런 걸 보면 수아도 대단하다. “음? 그러게? 뭐 그 동안에 계곡이 무너지기라도 했나보지.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렇 게 돌아다니겠지.” 나는 대충 생각나는 데로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우리들이 투덜거리며 올라서던 언덕 이 끝나자,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세상에!! 대단해요. 오빠. 정말 멋있어요.” “오빠. 오빠. 빨리 가보자. 정말 대단하다. 어떻게 저런걸 만들었을까? 우화.” 대뜸 수아와 풍아의 입에서 감탄사가 쏟어졌다. 그건 나를 포함한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남자라고 가진 무게가 그저 입을 벌리고 “어,어.” 하는 감탄사에서 머물게 했을 뿐, 수아나 풍아가 느끼는 감탄과 놀라움의 크기에 모 자라지 않는 충격을 받았다. 2키로미터가 넘는 계곡을 가로 지르는 다리를 본 적이 있는가? 다리의 폭만 해도 100 미터는 넘어 보이는 다리였다. 가운데가 유연하게 처져 있긴 했지만, 양 끝 부분 을 제외하면 어디 한 곳도 의지 할 곳이 없는 길이 2키로미터 폭 100미터의 다리란 상 상만으로 대단하지 않은가 말이다. 끝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깍아지른 계곡 위로 펼쳐진 대 역사의 모습이었다. 그 다리 위를 사람들이 걸어가고 마차가 지나가고, 사방에서 모여든 길들이 그 다리 로 이어지고 있었다. “엄청나구나. 계곡이 무너진 것이 아니라 다리가 생기다니.” “정말 인간의 힘이란 대단하군. 이런걸 만들다니.” 지토가 한 마디 거들고 나섰다. “하지만 그냥 토목 공사는 아닌 것 같아. 저 다리에서 상당한 마나 결집이 느껴지거 든.” 나가 지토의 말에 대꾸하자 풍아가 물어온다. “그럼 오빠. 저 다리 마법으로 만들었단 말이야? 정말 대단하네? 저런 다리를 다 만 들다니 말이야. 도대체 누가 만들었을까? 오빠 혹시 저 다리, 쉬벡이 만들어 놓은 것 아닐까?” 나는 풍아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쉬벡의 성으로 통하는 길은 당연히 쉬벡이 만들었을 것이다. 엘리오의 말도 쉬벡이 그 성을 만들고 나서 곧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고 했으니까 아마 틀림 없을 것 같았 다. “그래 아마도 쉬벡이 만들었을 것 같구나. 그런데 어떻게 800년이 넘는 시간을 버 틸 수 있는 거지? 내가 다리를 만들어도 저 정도 규모라면 100년을 버티기 어려울 텐 데... 어떻게 한 것일까?” 우리는 언덕을 내려갔다. 가까워 보이는 다리는 상당히 멀어서 한 참을 걸어서야 다 리에 도착을 할 수 있었다. 마침 다리 앞에는 큼직한 수레에 야채를 가득 싣고 다리를 건너기 전에 잠시 쉬려는 듯 한 옆에 수레를 끌어 놓고, 수레를 끄는 말을 토닥거리는 30대의 사내가 있었다. “저기요 아저씨? 이 다리 대마법사라는 쉬벡님이 옛날 옛날에 만든거 맞지요?” 질문을 던진 건 풍아였다. 10대 후반의 또랑또랑하게 생긴 여자 아이의 질문에 무심하게 있을 사람은 아마 별 로 없을 것이다. 풍아가 얼마나 귀엽고 예쁘게 생겼는데.. “하하 아가씨 물론 이 다리는 쉬벡님이 만드신 거지요. 그런데 왜 그런 당연한 걸 물어 보는 거지요?” “저기요, 그게 아니라. 제 동생이요. 이 다리가 어떻게 그렇게 오래 있을 수 있는 지 물어보는 데요, 제가 대답을 못해서 혹시 아시는가 싶어서요. 헤헤” 풍아는 수아를 가리키며 그렇게 능청스럽게 말을 한다. 어째 아이들이 점점 발전하는 것 같다. “하하, 그거야 제가 알지요. 이 다리 중간 쯤에 마법력을 저장하는 마법 저장석이 있답니다. 그곳에서 나오는 마법력이 이 다리를 유지해 주는데 그게 충전이 가능하거 든요. 그리고 일년에 한 번, ‘쉬벡의성’에서 열리는 축제일이 되면 마법을 익힌 사 람들이 모두 이 곳으로 와서 쉬벡의 업적을 기리고 찬양하면서 그 마법석에 마력을 불 어 넣지요. 그래서 언제나 이 다리는 이렇게 튼튼하게 지켜지고 있는 것이랍니다.” 사내는 그런대로 자세하게 다리가 오랫동안 유지된 이유를 설명했다. “아하!! 그렇군요. 그럼 그 마법석이 깨지면 어떻게 해요? 만약에 나쁜 마음을 먹 은 사람이 그 마법석을 깨려고 하면 그럼 안 되잖아요.” 수아가 걱정스런 얼굴로 다시 물었다. “하하, 걱정하지 마세요. 그 마법석은 쉬벡님이 어떤 환수의 비늘로 만든 보호체 안 에 들어 있어서 절대로 그 마법석을 어떻게 할 수는 없어요. 쉬벡님도 그 비늘을 깨 는 것은 어렵다고 했다니까 문제는 없을 겁니다. 하하하.” 아무래도 이 아저씨는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러운 내 동생들이 자꾸 말을 시키는 것 이 즐거운 모양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아저씨와 함께 다리를 건너가기 시작했다. 수아와 풍아가 아저씨에게 이런 저런 것들을 물어 보았는데, 이 다리를 건너서 다음 도시는 가까운 길로 가면 하루, 다른 길로 가면 이틀과 삼일 거리에 하나씩 있다는 것 이었다. 아저씨는 이틀 거리에 있는 도시에 야채 배달을 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렇게 거다가 드디어 다리의 중앙 부근에 도착을 했다. 다리 중앙에 있다는 마법석은 따로 돌출된 것이 아니라 다리 바닥에 깔려 있는 것이 었는데 크기가 가로 세로 1미터 정도 되는 크기였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은 마법석이 아니라 환수의 비늘이라고 한다. “아저씨. 이 마법석에 마력을 충전시키는 것은 보통 때에는 할 수 없는 건가요?” 풍아가 아저씨에게 물어보자 아저씨는 손을 내저었다. “하하 아니지요. 여기를 지나가는 마법사들은 대부분 잠시 시간을 내어서 이 마법석 에 마력을 충전시키곤 하지요. 그리고 한 번은 8써클의 마법사가 혼자서 마력을 불어 넣어서 다리를 들어 올린 적이 있었다고 해요. 그 때는 모든 사람들이 놀랐죠.” “다리를 들어 올리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다시 풍아가 물어본다. “하하, 이 다리가 지금 중앙 부분이 끝 부분 보다 내려가 있잖아요. 처음에는 아니 었데요. 처음에는 완전히 평평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마력이 떨어지면서 조금씩 밑으 로 처진 거지요. 그래서 일년에 한 번 마법석에 마력을 넣는 날에는 이 다리가 상당 히 많이 위로 올라가요. 그런데 가끔 대단한 마법사들이 혼자서 이 다리를 조금 올라 가게 만드는 경우가 있지요. 그럼 다른 마법사들이 그 마법사를 대단하다고 칭찬하고 하는 거지요. 그래서 가끔 호기심에 넘치는 마법사들이 여기 와서 서로의 능력을 시 험 하기도 합니다. 하하 재미있는 일이지요.” 나는 그 말을 듣고 마법석에 마력을 넣으려던 것을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다른 형제 들을 다 불러 모았다. “야. 너희들 좀 도와라. 우리가 그래도 마법을 쓰는 사람들인데, 마법석에 약간의 마력이라도 충전하고 가야 하지 않겠냐? 지토 너도 좀 돕고.” “내가 무슨 도움이 된다고 그래. 그냥 혼자 해도 될 걸...” 말을 잇던 지토는 옆구리를 찌르는 광아 때문에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궁시렁 대면서 마법석에 손을 대었다. “아저씨, 저희들은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으니 먼저 가세요. 감사했습니다.” 나는 야채 장사 아저씨에게 인사를 하고 먼저 보냈다. 그리고 천천히 마법석에 마력을 불어 넣기 시작했다. 9써클에 이르는 엄청난 양의 마나를 거의 처음으로 모두 쏟아 부었다. 하지만 그건 여느 9써클과는 다른 것이다. 나는 몸 속의 기운 탓인지 같은 써클의 마 법사에 비해 서너배는 더 되는 마나를 움직일 수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실은 내가) 마력을 다 불어 넣었을 때는 다리가 거의 평평하게 올라와 있었 다. 나는 마력석에서 손을 떼자 마자 다리 건너편으로 텔리포트를 해버렸다. 비록 다리 위에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주목 받고 싶은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앞서 떠났던 야채 아저씨는 벌써 다리에서 세 갈래로 갈라진 길의 왼 쪽 길을 따라 가고 있어서 다리의 변화를 알지 못했다. 다리 위의 사람들도 다리의 변화를 알지 정확히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들을 자세히 살피고 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텔리포트로 사라져서 이 곳에 나타난 것을 눈치채는 사람도 없을 것이었다. “오빠? 왜 갑자기 순간이동이야? 깜짝 놀랐잖아.” 풍아가 물어오고 다른 녀석들의 눈에도 궁금하다는 빛을 담고 있다. “응, 우리가 다리를 들어 올렸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싶어서 우리가 한 일이란 걸 숨길려고, 그래서 이리로 순간 이동을 한 거야. 너무 멀 리는 자세한 지형도 모르고 해서 그냥 눈에 보이는 다리 끝으로 온 거야.” “웅 그렇구나. 그럼 앞으로 우리 이렇게 이동해서 다니면 안 되나? 헤헤 편하잖아. 안 걸어도 되고.” 그렇게 말하는 풍아의 콧잔등을 살짝 팅겨주고선 등으로 돌렸다. 말은 안해도 풍아도 자기 말이 먹힐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큰형. 저기 저 사람들은 뭘 하는 거지? 왜 절벽에 매달려 있는 것일까?” 등 뒤에서 광아의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돌아서서 광아가 가리키는 곳을 보자 정말로 사람들이 계곡의 벽에서 밧줄을 타고 있 는 것이 보였다. “정말 무슨 일이지? 궁금하다 그지.” 풍아의 말. “하지만 다시 다리를 건너가서 물어보는 건 싫다.” 지토의 말. “그래도 궁금한 건 해결을 해야 하니까 가서 물어보고 텔리포트로 넘어오자.” 화아의 말. “그럼 갈 때도 텔레포트 올 때도 텔레포트로 하면 되잖아.” 이건 광아의 말. “그거 괜찮겠네요. 오빠.” 이건 수아의 말. 그래 막내가 하자고 하면 하는 거다. 그래서 우리는 절벽에 매달린 사람들이 밧줄을 묶은 근처로 이동을 했다. 그리고 나기둥에 묶은 밧줄 옆에서 기둥을 지키고 있는 듯한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었 다. 간편한 가죽 갑옷을 입고, 바위에 앉아 있던 2대 중반의 사내는 우리가 숲에서 걸어 나가자, 바위 옆에 세워 두었던 칼을 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서 그 사내에게 물었다. “그렇게 놀라실 필요는 없어요. 그냥 저쪽 편에서 밧줄을 타고 절벽을 내려가는 사 람들이 있어서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동생들과 함께 와 본거예요. 그러니 그렇게 긴 장 하시지 않으셔도 되요.” 내가 그렇게 말하며 더 이상 다가가지 않자 그는 조금 안심을 하는 모양이었다. “미안합니다. 몰라서 그런 것이겠지만, 우리 이 계곡에서 사냥을 하는 사람들 끼리 의 불문율이 있습니다. 그건 이렇게 밧줄을 묶은 곳에는 절대로 가까이 가지 않는다 는 것입니다. 봐서 알겠지만, 이 밧줄에 사람의 생명이 달려 있는 상황이라 상당히 민 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는 여전히 긴장한 모습이었지만 자세한 설명으로 우리를 이해시키려는 모습을 보였 다. “네. 그렇겠군요. 줄 하나에 동료의 생명이 달려 있으니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럼 우리가 좀 더 물러날 테니 몇 가지만 알려 주시겠어요?” 나는 동생들과 지토를 손짓으로 좀 더 뒤로 물러나게 하면서 물었다. “지금이야 내가 할 일이 별로 없으니 그건 어렵지 않겠지요. 그래 알고 싶은 것이 우리들이 이 절벽을 왜 내려 가는가 하는 그것이겠지요?” 그는 좀 더 여유를 찾은 듯이 빙긋 웃으며 물었다. “네, 뭐 그렇지요. 저는 물론이고 이 동생들이 궁금해해서. 하하.” 나는 일부러 수아와 풍아를 가리켰다. 이럴 때에 여자는 참 큰 힘을 발휘한다. “이런 숙녀분들이 궁금해 하신다면 당연히 알려 드려야지요.하하.” 역시 반응이 빠르다. “우리들은 이 계곡에서 화이트 스테이크를 잡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입 고 계신 그 옷도 화이트실크 같습니다만?” “화이트 실크요?” 나는 모르는 일이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모르시는 겁니까? 화이트 스네이크의 가죽을 보통 화이트 실크라 부르지요. 그 정도의 옷을 만들 정도의 화이트 실크라면 상당히 비싼 것일텐데 모르다니 이상하 군요.” 그는 정말 이상하다는 듯이 나를 보며 말했다. “그럼 그 하얀 뱀을 화이트 스테이크라 한다는 말씀인가요? 그래서 그 뱀을 잡으려 고 이 계곡을 내려간다는 말씀인가요?” “언제 화이트 스테이크를 본 적이 있으신 겁니까? 그 뱀은 이 계곡 아래에서만 사는 데... 이상하군요. 아무튼 그렇습니다. 화이트 실크가 워낙 고가에 매매 되기 때문에 우리들 같이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 이 계곡을 내려가서 화이트 스네이크를 잡곤 하지 요. 하지만 워낙 위험 한 일이라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숙 녀분들 같은 사람은 모르는 것이 당연하지요. 하하.” 역시 아직도 동생들의 위력이 남은 모양이다. “네. 그렇군요. 잘 알았습니다. 그럼 수고 하십시오.” 나는 그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아니 벌써 가십니까? 하하 아쉽군요. 그럼 살펴 가십시오. 배웅은 못하겠네요. 밧 줄들 때문에.” 그는 머리까지 긁적거린다. 가까이 오지 말라고 눈에 불을 켰던 것이 잠시잠깐 전인 데 이젠 벌써 가냐고 한다. 거참. 우리는 다시 텔레포트 해 왔던 장소로 돌아왔다. “어쩔까? 내려가서 화이트 스네이크인가 뭔가를 한 번 보고 갈까? 아니면 그냥 계 속 길을 따라 갈까?” 나는 동생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거 예전에 처음 여기 왔을 때 본 그 하얀 뱀을 이야기 하는 거지요?” 광아가 물었다. “그렇겠지. 그 녀석들 말고 또 있겠어?” 나는 광아에게 대답했다. “형, 우리 내려가서 그 뱀 몇 마리 잡아서 가죽 몇장 들고 가자. 가서 팔면 돈이 된 다잖아. 우리 어차피 환수 마수 전문이니까, 그 뱀도 그런 걸로 치면 되잖아. 가보자 형.” 화아는 내려가는 쪽을 택한 모양이다. “난 뱀이 싫은데....” 수아는 가기 싫은 모양이고, “돈 된다잖아. 맛있는 거 먹을려면 부지런히 벌어야 하는 거야.” 풍아는 가고 싶은 모양이다. “지토는 어떻게 생각해?” 내가 지토에게 물어보자 지토는 의외의 대답을 했다. “예전에 그 큰 뱀 있을까? 아직 살아 있으면 더 많이 컸을 텐데, 그럼 그 가죽도 엄 청나게 클 텐데...” 하하 그래 그런 녀석이 있었다. 나에게 허물을 벗기 위해 3일의 시간을 달라고 하던 녀석. 그 녀석이 있었다. “그래 내려가 보자. 어쩌면 그 녀석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일단은 그 녀석 이 예전에 살던 동굴을 가 보고, 없으면 계곡 아래로 내려가 보자.” 나는 지토에게 예전 그 뱀이 살던 곳으로 안내를 부탁했다. 지표의 것들은 많이 바뀌어서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땅의 정령인 지토에게 예전의 그 동굴을 찾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동굴의 입구는 막혀버렸지만, 그 안에 녀석이 없다는 것은 충분히 탐지해 낼 수 있었 고, 지토도 안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그럼 하는 수 없이 계곡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는 건가?” “어쩔 수 없네 뭐. 형 가자. 가서 뱀도 잡고, 그 덩치 큰 뱀도 찾아 보고.” 화아는 서둘렀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계곡으로 나갔다. 다리에서 제법 멀리 떨어지고 아까 그 사람들이 내려가는 길과도 멀리 떨어진 곳에 서 우리는 계곡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거 반칙 아니냐? 이렇게 마법을 펑펑 쓰는 건, 애초의 계획과는 틀린 거잖아.” 나는 비행마법으로 모두를 데리고 내려가면서 투덜거렸다. “하지만 형, 사람들도 안 보는데 괜찮잖아. 우리가 꼭 밧줄에 매달려서 여기를 내려 와야 겠어? 더구나 수아랑 풍아도 있는데 말이야.” 화아가 이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다. “그래 그렇지. 아무래도 수아랑 풍아 때문에도 어렵겠지? 더구나 지토는 팔 다리가 짧으니까 더 힘들거야 그지.” 나는 슬쩍 지토를 걸고 넘어갔다. “뭐야? 내가 어떻다는 거야? 이정도면 준수하지. 나도 최상급으로 변하면 보통 사람 처럼 된단 말이야.” 역시나 지토는 열받은 모습이다. “아! 이제 바닥이 보여요. 세상에 위에는 거의 보이지도 않아요. 그런데 어떻게 이 런 곳을 밧줄을 타고 내려올 생각을 했을까요? 대단한 사람들이네.” 수아는 아까 그 사람들에 대해서 감탄어린 표정이 되었다. “정말 대단하군.” 화아도 그 점에서는 동감인 모양이었다. 이렇게 어영부영 지토 문제는 가려져 버렸다. 크크 우리는 곧 바닥에 닿았다. 계곡의 바닥이라고는 하지만 태양이 들지 않아서 조금 어둑하고, 습기가 많고 이끼류 가 많이 끼어 있는 것 이외에는 별로 이상한 것도 없었다. “이제 그 뱀들을 찾는 건가요? 영차.” 수아는 계곡이 습기가 많아서 그런지 갑자기 활기가 넘치는 모습이다. “그래 이제부터 그 뱀들을 찾아 보자. 그리고 그 녀석들 예전에도 제법 빨랐던 것 같으니까 조심들 하고, 참 뱀을 잡을 때, 절대로 상처내면 안된다. 알았지? 가죽이 상 하면 안 된단 말이야.” 나는 동생들과 지토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리고 생명탐지 마법을 펼쳤다. “음, 이쪽으로 상당한 개체의 생명이 탐지된다. 가 보자.” 나는 계곡의 한 방향에서 생명체의 반응이 많은 것을 보고 그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하지만 이 생명탐지 마법을 지속형이 아니었기 때문에 방향을 잡은 이후에는 소용이 없었다. 지속형으로 만들 수도 있었지만 예상외로 넓은 범위에 적용되는 마법이라 마 력의 사용이 많아서 지속형을 쓰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물론 나 정도 되면 크게 무리 가 가는 것은 아니겠지만, 나 혼자 쓰자고 마법을 뜯어 고치는 수고를 하고 싶지 않 아 서 그런 것은 만든 적이 없었다. 실제 내가 쓰는 마법의 거의 전부는 쉬벡의 책에 기록된 것들을 조금씩 배운 것이다. 우리는 산책이나 하듯이 여기 저기를 살피며 계곡을 걷고 있었다. 계곡은 위의 넓이가 2키로미터인 데 비해서 조금은 좁아져서 1500미터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어찌 보면 넓은 들판 같기도 했다 온통 이끼들로 덮혀 있기 때문에 주를 이루는 초록 이끼들 사이에 간간히 보라색이나 노란색 갈색의 이끼들이 섞여 있는 모습이, 이른 봄 풀들이 자라기 시작하는 초원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오빠! 저것 봐. 호수야. 호수.” 수아가 아주 즐거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리고 우리가 가는 방향에 계곡 전체를 덮은 물이 보였다. 그러니까 계곡의 땅이 끝 나고 온통 물로 가득찬 모습이 나타난 것이다. 이를테면 계곡의 땅이 낮아지는 곳인 모양이다. 이 물길이 어느 정도 인지 몰라도 굉 장히 길게 뻗어 있는 것은 사실인 모양이었다. 우리 눈 앞에 아득하게 보이는 부분까 지는 온통 수면이었다. “우화, 오빠. 여기 이렇게 큰 호수가 있다니 대단하지 않아요?” 물의 정령다웠다. 수아는 물가에서 한 손에 란이를 들고 한 손으로 물을 참방거리고 있었다. “위험해!!” 곁에 있던 풍아가 수아의 손을 끌어 당긴 것과 물 속에서 하얀 기둥이 날아 온 것은 동시의 일이었다. “아야. 잉. 젖어 버렸다.” 수아의 그런 투정은 문제가 아니었다. 다들 무기를 꺼내고 수아를 비껴서 날아간 하얀 기둥을 쫓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것이 하얀 뱀이라는 것을 알아보자 한마디씩을 한다. “거 굉장히 빠른 녀석이네.” “저거 잡아야 하는데 어떻게 잡지?” “루탄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저거 그 때 그 하얀뱀 맞는 것 같냐?” 마지막은 지토의 질문이었다. 나는 물에서 솟구쳐 나와서 저만큼 떨어진 녀석을 살펴보았다. 예전에 내가 가죽을 벗기기 위해서 사냥을 했던 그 녀석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좀 더 투명해 진 것 같기는 했지만 말이다. “오빠. 저거 잡자. 잡아서 우리 맛있는 거 사먹자 응.” 풍아는 당연히 저 녀석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녀석은 또아리를 틀고 혓바닥을 낼름 거리면 기회를 보고 있었다. “화아. 니가 처리해라. 무기 쓰지 말고 상처 내지 말고 잘 알아서 해. 알았냐?” 나는 그 뱀을 화아에게 맡겼다. 화아는 칼을 두고는 맨 손을 꺽으며 뱀을 향해 다가갔다. 뱀의 날카로운 공격을 슬쩍 몸을 틀며 피하고 당수치기. 땅바닥에 처박힌 뱀은 곧장 기어서 거리확보,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고 흔들며 기회를 보기, 그러다 순식간에 공 간을 좁히며 이빨을 들이 미는 뱀, 하지만 여전히 슬쩍 몸을 틀며 피하고 이번에는 팔 꿈치로 찍어버리는 화아. 끈질긴 뱀의 공격을 그 후로도 몇 차례 있었지만 번번히 화아의 당수에 당하더니 마 지막으로 위에서 치는 것이 아니라 머리의 아랫부분을 앞쪽에서(그러니까 기어다닐 때 땅 닿는 쪽) 얻어 맞은 다음에는 더 이상 반항을 하지 않았다. “죽었냐?” 나는 쓰러진 뱀을 끌고 오는 화아에게 물었다. “아니 형, 아직 죽지는 않았어. 그런데 껍질 벗기려면 죽여야 하잖아. 죽일까?” 녀석 인정머리 없기는. 허긴 동물을 사냥해서 가죽을 얻는 것은 오랜 예부터 있었던 일이니 세삼스러울 것 도 없겠다. “잠깐만, 기다려봐. 수아도 있고 풍아도 있는데 좀 그렇잖아. 그대로 가져다가 팔 자. 그럼 가격을 더 받을지도 몰라. 안 그러냐? 혹시 이거 암놈하고 수놈을 가져다 팔 면 엄청 비싸게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양식하면 좋잖아. 돈도 되고. 그지?” 내가 그렇게 말을 하자, 다들 새로운 것을 깨달았다는 존경스런 얼굴이다. “그래 오빠, 그거 멋있다. 몇 마리 잡아서 양식용으로 팔면 돈 엄청 벌겠다. 그 지.” 풍아도 내 계획이 마음에 쏙 드는 모양이다. “그래요. 그거 좋겠네요. 우리가 직접 죽이지 않아도 되니까.” 수아도 찬성. 그럼 다른 이야기는 들을 필요도 없다. 귀염둥이 여동생들이 다 찬성 을 하는데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말이다. 하하 “자, 그럼 이제부터 화이트 스네이크 생포작전을 벌이기로 합니다. 자 그럼 이제 호 숫가에서 뱀들을 유인 생포 합니다. 유인은 수아와 풍아. 생포는 화아와 광아 그리고 지토. 자 시작하자.” 내가 그렇게 말을 하자 당연히 화아가 삐쭉거린다. “그럼 형은 뭘하는데? 왜 우리만 시키는 거야?” 둘째라고 제일 많이 개기는 것 같다. “나? 나는 일단 예전 그 덩치 큰 뱀을 찾아보고 올까 하는데? 그리고 너희들 여기까 지 내가 마법으로 내려 줬지? 그리고 또 올라갈 때 데리고 올라가야지? 그렇게 고생 한 이 형을 이 오빠를 고생시켜야겠냐?” 내가 이렇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하자 내심 불만인 듯 화아가 입을 삐죽거린다. 하 지만 더 이상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일단은 안심이다. “그럼 나는 이 계곡을 좀 돌아보고 올게. 적당히 잡으면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참, 여기 취사도구하고 재료 꺼내 놓을 테니 시간되면 저녁 준비도 좀 하고, 알았 지?” 나는 그렇게 말하곤 창고에서 물건들을 꺼내 놓고 비행 마법으로 호수 위를 날아가 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끔씩 탐지 마법을 썼는데, 호수 속에 상당히 많은 생명체가 있 고 그 종류가 다른 것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뱀은 물 속에서 살고 있는 모양이었 다. 그렇게 한동안 비행 마법으로 호수를 가로지르던 내게 드디어 새로운 것이 잡혔 다. 상당한 수준의 마나로 형성된 결계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곳에 왠 결계? 음... 상당히 복잡한 결계네? 음? 약간의 공간 왜곡도 있고, 대단하군. 어디 한 번 들어가 볼까?’ 나는 결계를 파괴할까 생각하다가 그냥 통과만 하기로 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결계를 통과하고 나타난 것은 계곡의 벽에 뚫려 있는 커다란 동굴이었다. 그리고 그 동굴 안에서는 꽤나 강해 보이는 마나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입구쪽으로 날아갔다. -누군가? 나의 거처를 찾은 존재는? 나의 영역을 이렇게 한 마디 말도 없이 들어오 는 것은 예의가 아님을 모르는가?- 내가 입구로 들어서기도 전에 머릿속을 울리는 말소리가 있었다. “이런 미안하오. 이곳에 누가 있는지를 모르고 다만 지나다 흥미가 생겨 오게 되었 소. 가능하다면 나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소?” 나는 상대가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일단 상당히 강한 기운을 지니고 있는데다가 대화 가 가능하다는 이유로 상대를 존중해주기로 했다. -내 거처를 다른 존재가 찾는 것도 흔한 일이 아니니 그럼 그대를 내 손님으로 맞겠 소. 그대도 나를 주인으로 인정하겠소?- “물론이요. 나는 객으로서 주인에게 예의를 지킬 것을 약속하오.” 나는 그 존재의 요구를 수락했고, 그는 나에게 동굴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했다. 나는 천천히 동굴 안으로 날아들어갔고, 그 동굴 안의 존재와 마주하게 되었다. 하얀 뱀. 예전 그 거대한 뱀이었다. “하하 그 동안 상당히 많이 변했군요. 이제는 말도 더듬지 않고 말입니다.” 나는 그에게 존대를 했다. 그도 나를 보고 놀란 모양이었다. -그대는 전혀 변하지 않았군. 1000년에 가까운 시간이었는데 그대는 변한 것이 별로 없이 그대로라니 그대는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존재로군.- “하하, 사람이 살다 보면 이런 저런 일을 겪는 것이지요.” -그렇지. 참으로 묘한 일이군. 다시 그대를 만나게 되다니 말이야.- “그래 어떻게 여기에 있는 겁니까? 예전의 동굴에 갔었는데 없어서 걱정했습니다. 하하” -위쪽에 사람들이 들어와 살게 되면서 우리 동족들이 쫓기게 되었지. 그대로 두었으 면 멸종을 했겠지. 다행히 쉬벡이라는 마법사가 자신의 잘못으로 위기에 처한 우리들 을 이 계곡 아래도 옮겨 주고, 삶의 터전을 만들어 주었지. 빈 호수에 물고기도 채워 주고 말이야. 물론 나중에 인간들이 이 계곡에 까지 내려오게 되었지만 그 정도는 그 리 큰 문제가 아니었지.- “그럼 이 역시 쉬벡의 힘이었단 알입니까? 쉬벡이 많은 일을 한 모양이군요. 하 하.” -쉬벡을 아는가?- “한 때 생사를 같이 했던 적이 있었지요. 어쩌면 쉬백이 이 곳에 온 이유도 나 때문 이었으니까요.하하” -그렇군. 그럼 오늘 이 계곡을 내려온 것은 나를 보기 위함인가?- 나는 그에게 우리들이 내 동생들과 함께 내려왔다는 이야기와 처음 가죽 몇 개를 가 지고 가려다가 지금은 몇 마리 산채로 잡아다가 사육용으로 팔 계획이라는 말을 멋쩍 은 표정으로 이야기 했다. -흠, 사육이라.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군. 오히려 그렇게 되면 이 계곡의 동족들이 좀 더 편안히 살 수도 있겠군 그래. 사냥꾼이 전혀 없어지지는 않아도 상당히 줄어들 테니 말이야.- 나는 이 녀석의 사고 구조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같은 동족인데 사육당하는 쪽은 생 각하지 않고 그 때문에 편해질 쪽만 생각을 하다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 동족의 암컷은 잡기가 어려울 것이다. 태어나는 확률은 반반이지만 살 아남는 비율이 얼마 되지 않아서 성장한 암컷은 우리 동족의 절대적인 보호를 받기 때 문이지. 나도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어린 암컷은 거의 성장한 암컷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니 말이야.- “그것도 암컷들의 생존 수단이라 보면 되겠지요.” -그렇지.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니까. 아무튼 그럼 내가 그대에게 선물로 암컷 을 몇 마리 주지. 그 대신 내가 새끼 암컷을 몇 마리 더 키워 준다면 다른 동족들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야.- “그래도 잡혀가는 암컷들이 싫어할 텐데.” -동족 전체를 위한 일이다. 하는 수 없는 일이지. 더구나 아직 영성도 생기지 않은 어린 것들이라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조만간 신계로 가야 하는데 그 전에 동족 을 위한 선물이라 생각하면 되겠구먼.- 뱀의 말에 나는 되물었다. “신계로 가다니 무슨 말입니까?” -말 그대로 신계의 환수가 된다는 말이지. 그동안 쌓은 힘이 이제 신계로 오르는데 부족하지 않은 모양인지 신계가 열리곤 하거든. 언제 활짝 열리면 들어가야겠지.- “정말 축하 합니다. 하하 예전 같으면 용이 되어 승천하는 것과 같은 이치로군요. 하하 정말 축하합니다.” -고맙군. 그 옛날 그대가 나를 죽이고 가죽을 취했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겠지.- “하하 지난 일이니 너무 탓하지 마십시오. 하하.” -아니 나는 오히려 고마워하는 것이네. 그 때, 그런 아량을 배풀어 주어서 말이야.- 그런 이야기를 끝으로 잠시 말을 끊은 우리는 천천히 동굴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큰 뱀 앞으로 기어오는 작은 뱀 세 마리가 있었다. 지금까지 보던 하얀 뱀에 비해서 머리가 좀 홀쭉하게 생긴 모습이었는데 그것 만으로도 수컷과는 구분이 분명했다. 나는 뱀 세 마리를 구속마법으로 묶어서 공중에 띄우고는 큰 뱀을 돌아 보았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그리고 이건 제 선물입니다. 빅.” -빅? 그건 뭔가?- “크다라는 뜻의 이름입니다. 계속 큰 뱀이라 기억하기는 뭣하니 지금부터 저는 당신 을 빅이라 기억하겠습니다.” -이름이라, 좋은 선물이군. 비록 그로 인해서 제약이 생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이름 이 있으니 좋구먼, 빅이라. 좋아. 고맙네.- 나는 그렇게 빅과 작별을 고하고 동생들과 지토가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왔다. “형, 그건 뭐야? 우리도 10마리나 잡았는데. 그건 또 뭐하러 잡아 온 거야?” 화아가 나에게 물었다. “화아야. 뱀도 암컷이 있고 수컷이 있는데 그렇게 수컷만 잡아 두면 어떻게 사육을 하겠냐? 그래서 가서 암컷을 잡아 오는 중이다.” 내가 대답하자 다들 몰려와서 화이트 스네이크 암컷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웅, 암컷이 머리가 더 가를게 생겼구나. 수컷은 넓은 머리 암컷은 뾰족 머리네. 호 호.” 잠시 보고 있던 풍아가 둘의 차이를 알았다는 듯이 웃으며 말하자 그때야 다른 녀석 들도 알아본 모양이었다. “그런데 형님 이거 얼마에 팔 거예요? 상당히 비쌀 것 같은데. 우리 이거 팔지 말 고 우리가 키워서 팔면 안 될까요?” 광아가 이제는 사업 계획을 내 놓는다. “하지만 그러면 우리가 여기 저기 돌아다니려고 한 계획에 차질이 있잖아. 그러니 까 우리가 키우는 것은 어렵지 않을까?” 나는 광아의 계획에 제동을 걸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광아는 뱀 양식 사업에 욕심이 나는 모양이다. 뭐 수리적인 면에서는 특별 한 능력이 있어 보이는 녀석이니 그 동안에 한 마리에 얼마 사육하면 얼마 하는 식으 로 계산을 해 보니 아무래도 파는 것 보단 직접 기르는 쪽이 더 많은 이익이 있다 싶 은 모양이다. “광아야. 우린 돈이 많아. 그러니까 돈 걱정 같은 것은 하지 않아도 되는 거야. 거 기다가 돈이 무지무지 많으면 뭘 할건데? 적당한 이상은 있어도 별 소용이 없잖아. 안 그러냐?” 내가 그렇게 설득을 하지 그때야 광아는 욕심이 없어진 모양이다. “그래 형, 그렇네. 그렇게 많은 돈을 쓸 데가 없네. 많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무지 많은 건, 아무래도 처치 곤란이다. 하하” 역시 아직은 단순하다. 하지만 어쩌면 이 단순한 말이 진리인지도 모를 일이다. 쓸 정도만 있으면 남는 돈은 처치 곤란이라. 하하 우리는 서둘러 밥을 먹고 계곡의 다리 건너편으로 텔레포트를 했다. 혹시라도 사냥꾼 들고 마주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건너편에서 어두워오는 반대편을 보았을 때, 여전히 밧줄을 지키는 그 사네 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 오빠, 우리 어느 도시로 갈 거야? 가운데는 하루 정도 걸린다고 했고, 왼쪽 은 이틀, 오른쪽은 3일이라는데. 어디로 갈거야?” 풍아가 야채장수 아저씨에게 들었던 말을 토대로 물었다. “아무래도 가까운 곳으로 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빨리 가서 우리들이 타고 다닐 말 이랑 마차도 사고. 그렇지? 얘들아.” 나는 동생들의 보면서 동의를 구했다. “음. 뭐 이정도 걸었으면 걷는 것도 많이 했으니까. 이번에는 마차 타기 하는거야? 그래 좋겠다. 그렇게 하자 오빠.” 순진무구한 수아의 대답. 그래서 우리는 가운데 길로 방향을 잡았다. 물론 오래 가지 않아서 야숙을 준비해야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창고에는 충분한 야숙 준비물이 있었다. 2인용 침낭은 수아와 풍아 몫으로 주 고 다른 사람들은(?) 1인용 침낭을 쓰고 자는 것이다. 주위에는 결계를 간단히 치고, 알람 마법도 걸어두고. 모닥불도 적당히 피워두고. 이런 야숙은 조금 어두워지면 시작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너무 시간이 많이 남는다. 해가 지고 어두워지는 시간에서 동이 터 오는 시간까지는 하루를 24시간으로 나누면 9시간이 되는데 그 시간을 잠을 잔다는 것은 아무래도 너무 길다. 그래서 이런 때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우리들이 이런 시간에 함께 나눌 수 있는 이야기는 처음 내 방에서 우리들이 만났을 때와 그 이후로 함께 했던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제는 잘도 웃고 떠들고 화내고 토라지고 하는 녀석들이지만 그 때는 얼마나 답답하 게 했던지... 우리들은 그런 이야기를 하다가 잠이 든다. 어쩌면 녀석들은 내가 잠들 때까지 기다려 주다가 잠이 드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말이 다. 사실 피곤하다는 것을 정령들이 느끼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잠을 자면 그런 피 곤이 가시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나중에 물어봐야겠다. -내가 땅꾼인가. 뱀을 팔자. - 노숙을 한 아침은 깔끔하다 싶을 정도로 몸이 좋은 경우는 별로 없다. 하지만 간밤에는 잘 잤던 모양인지 피곤이 싹 가셔서 가뿐해진 몸 상태였다. 나는 수아에게 물을 부탁해서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고 한동안 부산한 아침을 맞았 다. 머리카락이 길기 때문에 수아가 머리를 감겨주면 풍아가 머리를 말려줘야 하는 것이 다. 하지만 내가 수아등이 귀찮을까 싶어서 머리카락을 짧게 자를까 하고 물었더니 펄쩍 뛰면서 안 된단다. 보기 좋다고 절대로 자르지 말란다. 그래서 그냥 다니는 중이다. 뭐 평소에는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 신경이 쓰이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그 날 점심을 먹고 얼마 되지 않아서 새로운 도시에 도착했다. “어서 오십시오. 자간입니다. 신분증이나 그에 상응되는 것을 지니고 계신지요?” 역시 입구를 지키던 병사는 신분을 물어온다. 이상한 것은 지나다니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을 묻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마 도 이 도시에서 밖으로 나가 농사를 짓거나 생업에 열중하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었 다. “네, 여기 용병대 메달이 있습니다. 이거면 되겠습니까?” 나는 용병대를 나타내는 메달을 보였다. “용병대 메달이면 신분을 확인할 수 있지요. 어디보자. ‘란의 용병대’라 알았습니 다. 그렇게 기록해 두겠습니다. 란의 용병대 6명. 됐습니다. 통과하십시오.” 문지기 병사는 그렇게 우리 신분을 확인하고는 우리들을 통과 시켰다. “여기는 ‘쉬벡의성’보다는 좀 작은 것 같은데 사람들은 훨씬 더 많은 것 같네요. 루탄형님.” 광아가 첫 소감을 밝힌다. “그나저나 빨리 가서 이 뱀들 어떻게 해야지 죽겠어 형. 빨리 가서 이 녀석 들을 처 리하자구.” 화아가 등에 지고 있는 뱀이 든 상자를 흔들며 투덜거렸다. 상자 안에는 암컷과 수컷이 각각 3마리씩 들어 있었다. 워낙 뱀들이 컸기 때문에 상 자도 거의 화아 덩치 두 배는 되어 보였다. 사실 무겁기도 할 것이고, 일단은 부피 때문에 상당히 거추장스럽기도 할 것이었다. “그래 일단 빨리 숙소를 정하자. 자 가자.” 그리고 우리들은 대로를 걸어가다 보이는 첫 여관의 문을 밀고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그래 숙박을 하실 건가요? 식사를 하실 건가요? 아니면 주류를?” “음. 일단 앞의 둘 다. 방은 2인실 하나 4인실 하나, 없으면 2인실 세 개. 없으면 2 인실 하나 1인실 하나 3인실 하나, 그래도 없으면 다른 곳으로 가지.” 종업원의 말에 낼름 대답을 하고 나선 것은 내가 아닌 화아였다. 전에 내가 ‘쉬백의성’에서 했던 것을 보고 언제 한 번 해 보겠다고 벼르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광아와 지토도 아깝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둘 도 한 번 해 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지 모르겠다. “네, 방은 2인실 4인실이 있습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리시면 준비를 하죠.” 그리고 등을 돌리는 종업원에게 나는 “우선 방을 준비하는 동안에 가벼운 음료 좀 주세요.” 라고 말하며 일행들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곧 간단한 음로수가 나오고 우리들은 느긋하게 오랜만의 휴식다운 휴식을 즐겼다. 줄곧 걸었으니 피곤은 둘째고 느긋한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자네 이야기 들었나?” “무슨 이야기?” “풍교가 평평해 졌다는 소리 말이야.” “음? 그 소리 어제 저녁부터 마을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그러던데? 풍교가 평평해졌 다고 말이야.” “도대체 어떤 마법사들이 그 다리를 평평하게 만들었을까? 그 정도면 앞으로 50년 정도는 마력을 넣지 않아도 걱정 없을 거라고 그러던데.” “글쎄, 알 수 없지 누가 마력을 불어 넣었는지는 말이야. 다리가 평평해 질 때 그 위에 있었던 사람도 있는 모양인데 다리가 평평해 진 것을 보고 마법석이 있는 자리 를 보니까 아무도 없더라는 거야. 그러니 알 수가 없지.” “아무튼 어떤 마법사인지, 아니면 마법사들인지 대단한 사람들인 모양이야.” “그렇지 않아도 자간시장님이 조사단을 보내기는 했는데, 와 봐야 알겠지. 그렇지 만 다리 위에 있었던 사람들의 말로는 다리 위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으면 보지 못했 을 리가 없다는 거야. 그들이 본 것은 젊은 남녀 몇이 마법석 주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본 것이 전부라던데.. 그 이상은 모른다는구먼.” "참, 그건 들었어? 쉬백의 성에서 있었던 교수형 말이야." "응 들었지.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 혹시 일부러 놓아 준 것은 아닐까? 아 무 리 기사가 뛰어들어 구해갔다고 하지만 그렇게 쉽게 도망을 가게 했을까?" "그러게 말이야. 아마도 성주도 아들이 죽는 것은 차마 볼 수가 없었던 모양이지?" "그것 때문에 난리가 났었다면서? 얼마 전에는 그들에 대한 수배전단도 돌렸다고 하 던 데..." 창가에 앉아 낮부터 맥주를 마시던 사람들이 우리가 지나온 다리와 쉬벡의 성에 대해 서 이야기 하고 있었다. "지금 저 이야기는 제란이라는 녀석 이야기죠? 도망을 간 모양이네요? 참나, 성주가 놓아줬겠군요." 풍아가 먼저 짜증이 난다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했다. "아마 그런 모양이구나. 무슨 일을 그렇게 처리를 하는 것인지... 쩝." 왠지 모르게 나도 입맛이 쓰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일에 오래 신경을 쓰고 싶지도 않았기에 대충 이야기를 흐지부지 해 버 렸 다. “그 다리는 이름이 풍교인 모양이네요. 그런데 이름이 왜 풍교죠? 혹시 풍아 누나 이 름을 딴 걸까요?” 광아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마 쉬벡이 그 곳에 바람의 정령이 지키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풍아 생각이 나서 그렇게 지었을 수도 있겠지. 뭐 지금 그럴 알 수가 있나? 나중에 쉬벡의 책에서 찾아 보고 알려줄게.” 나도 낮은 소리로 대답을 했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우리들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는 점이었다. “자 다들 쉬었으면 이제 나가서 일을 해 보자. 저 뱀도 처리를 해야 하지 않겠어?” 우리는 여관을 우르르 몰려나가서 시내를 여기 저기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것으로 보아 여러 물품들이 오가는 중간 지점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결국 우리가 찾고자 한 곳을 찾았다. [자간 경매장] 나는 그 팻말을 보자마자 그 곳을 걸음을 옮겼다. “루탄, 너 이 뱀을 경매로 팔 생각이냐?” 지토가 물었다. “아무래도 그냥 파는 것 보다는 경매로 파는 것이 값을 더 많이 받을 것 같은데 지 토 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렇기는 하겠군.” 지토는 간단하게 수긍을 한다. 우리는 경매장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저는 ‘자간경매장’ 수석 매니저인 알이라고 합니다. 무슨 일로 저희 경매장을 찾으셨는지요? 지금은 경매를 하는 시간이 아닙니다만. 경매 일정은 밖 에 게시되어 있습니다.” 정장 차림의 40대의 호리호리한 인물이 문에 들어서는 우리를 맞으며 긴 인사를 해 왔다. “우리는 경매 물품을 사고자 온 사람이 아니라. 경매 물품을 맡기고자 찾아온 사람 입니다.” 나는 간단하게 우리의 입장을 밝혔다. “아! 죄송합니다. 그럼 어떤 물품을 맡기려 하시는지요?” 그가 물어오자 화아가 나서려고 하는 것을 막아서며 내가 입을 열었다. “이 경매장은 손님을 이런 식을 맞이하는 모양이군요. 입구에 세워두고 무슨 물건이 냐고 물어보는 것이 이 경매장의 예절이라면 더 이상 이런 곳에서 거래를 할 생각은 없습니다. 얘들아 가자.” 나는 곧 몸을 돌렸다. “저 손님 죄송합니다. 제가 큰 실례를 했습니다. 그러니 용서해 주시고 사무실에서 천천히 이야기를 한 번 해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제가 결례를 사과드리는 뜻으 로 경매 수수료를 절반으로 해 드리겠습니다. 어떤 물건이든 말입니다.” 뒤에서 들리는 알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고, 음성에는 사과의 진심이 묻어 있었 다. 나는 다시 몸을 돌려 알을 따라 사무실로 들어갔다. 사무실 안은 긴 탁자와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고 건너편에는 알이 이쪽 편에는 우리 일행이 마주 앉았다. 그리고 곧 차가 나왔다. “그래 어떤 물건을 경매에 맡기시려는지요? 보통 물건은 아닐 것 같습니다만...” “왜 보통 물건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을 하시는지…….” 내가 물어보자 알의 대답은 이렇다. “그냥 직감입니다. 처음 별 볼일 없다 생각하고 결례를 했습니다만 그 후에 손님의 태도에서 뭔가 대단한 것을 맡게 될 것 같은 직감이 들었습니다.” “하하 대단한 직감이로군요. 화아야 그거 올려놔라.” 나는 화아에게 상자를 올려놓게 했다. 그리고 상자에 투명화 마법을 걸었다. “하~~!, 화이트스네이크 6마리. 대단한 물건이로군요. 이정도면 꽤나 큰 가격이 나 오겠군요.” 하지만 알의 목소리에서는 약간의 실망을 느낄 수 있었다. “하하, 예상보다 별 것 아니라 실망을 하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시 잘 보시지 요. 이쪽 3마리는 수컷이고 이쪽 3마리는 암컷입니다. 저 같으면 이 녀석들을 화이트 실크의 가죽으로 보는 잘못은 범하지 않겠습니다만…….” 내 말을 들은 알은 그때야 이 화이트 스네이크 6마리가 화이트실크 6장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는 수건을 꺼내 땀을 닦으며 말을 더듬었다. “저, 죄송합니다. 이 물품은 저 혼자서 결정을 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닌 것 같습니 다. 경매장 운영진의 동의가 필요한 사항인 것 같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운영진 모두가 참석하는 회의를 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밖에서 사람을 불러 회의장 주변의 경계를 최고상태로 바꾸라고 지시하 곤 다급히 사라졌다. “오빠, 저사람 많이 놀란 모양이다. 그치.” 수아는 란이가 든 손수건을 품에서 탁자 위에 올려놓고 손수건을 풀어 보며 말했다. “음. 정말 많이 놀란 모양이네? 그런데 저 알이라는 사람 올 때까지 우린 뭘 하고 있지? 언제 올려나?” 내가 수아의 말에 대답겸 질문을 던지자 다들 멀뚱한 표정들이다. “그런데 오빠, 이 란이 말이야. 요즘 점점 빛이 탁해지는 것 같아. 처음에는 밝고 빛나는 노란색이었는데 이제는 빛도 별로 안 나고, 색도 탁해지는 것 같아.” 나는 수아에게서 란이를 받아서 살펴보았다. “정말이네, 수아 말이 맞는 것 같다. 경매장 일이 끝나면 좀 알아보러 갔다 와야겠 다.” 나는 빅이라면 좀 알지도 모른다 싶어서 그렇게 말하곤 란을 다시 수아에게 맡겼다. 그리고 우리들이 차를 거의 마시고 지루해 할 때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들어오 기 시작했다. 사람의 수는 건너편 의자의 수와 일치하는 8명. 중앙에는 살집이 두툼해 보이는 풍 채 좋은 노인이 앉았고, 그 옆에 알이 앉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이 경매장의 주인인 자톤입니다. 경매를 의뢰하신 화이트스네이 크 암수 3마리씩에 대한 이야기는 알에게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물품은 알이 말씀 드린 대로 우리 운영진 모두가 참여해야 할 정도의 고액이 예상되는 물품이라 부득이 사람들이 모두 모일 때까지 시간이 걸렸습니다. 양해해 주시기를. 그럼 이 물품에 대 한 경매 수주여부를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운영진 여러분의 의견을 듣겠습니다.” 자톤이라는 사람은 바로 알의 옆에 앉은 풍채 좋은 영감이었다. “먼저 이 물건의 예상 가격은 어느 정도로 보시는지 말씀을 해 주시겠습니까?” 한 사람이 말을 꺼내자 알이 대답을 했다. “적정선이 결정될 수 없는 것입니다만, 제 예상으로는 5천만덴 이상의 가격이 나오 리라 생각합니다.” “그 정도뿐이 안 되리라 생각한다는 말입니까? 화이트실크 고급품이 10만덴에 거래 가 되는데 겨우 그 가격에 경매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는 말입니까?” 알의 대답에 다른 사람이 지적을 하고 나섰다. “그 열배에서 백배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자톤이라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삽시간에 주위가 조용해 졌다. “그러기에 앞서서 먼저 여쭈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선은 이 뱀이 알을 몇 개나 낳는가 하는 점이고 얼마 만에 한 번씩 알을 낳는가 하는 것과 또 한 가지는 성 체가 되는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가 하는 점입니다.” 역시 날카로운 인물이다. 나는 그 점에 대해서 빅에게 들은 내용이 있어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그렇군요. 그걸 아셔야 이 이야기가 진행되겠지요. 일단 화이트 스테이크는 한 번 에 15개에서 20개 정도의 알을 낳습니다. 한 번 알을 낳은 녀석이 다시 알을 낳는 것 은 어린 새끼를 독립시킨 2주 후입니다. 즉 주위에 새끼가 없으면 2주후에 새끼를 낳 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알을 낳고 바로 알을 치워버리면 2주정도 후에 또 알을 낳 는 다는 말과 같습니다만, 그렇게 하면 알을 부화할 수가 없기 때문에 어미가 알을 낳 고 알이 부화를 하고 새끼가 어미가 필요 없어지는 두 달 정도의 기간이 지나면 다시 알을 낳아도 별 상관이 없습니다. 결국 3개월에 한 번 꼴이네요. 뭐 대략 4개월로 넉 넉잡을 수도 있겠고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새끼가 다 자라서 성체가 되는데 걸리 는 시간은 대략 1년 정도입니다. 하지만 지금 보시는 것 같은 크기의 화이트 스네이 크 는 10년 이상이 된 녀석들입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설명이 되었을 것입니다. 덧붙여 이야기하면 이 암컷들은 지금부터 2주가 되기 전에 알을 낳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원하는 경매일은 암컷들이 알을 낳은 2주후입니다. 참고로 태어나는 새끼들의 성비는 1:1이지만 어미 이외의 성체 암컷은 자기의 새끼가 아닌 새끼암컷을 죽이는 습성이 있 습니다.” 나는 그것으로 설명을 마쳤다. 잠시 운영진이라는 인물들이 서로서로 옆 사람과 웅성거리는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그 중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이건 예상보다는 가격이 훨씬 더 많이 나가겠군요. 그 말이 사실일 경우에 화이트 스네이크경매의 대금은 약 250억덴이 될 것 같습니다. 실제로 화이트 스네이크를 처 음 사육하는 사람은 화이트 실크를 독점 할 수도 있고, 또한 화이트 스네이크를 사육 용으로 공급할 수도 있는데, 앞서의 경우보다 뒤의 경우가 더 빠른 자금의 회전이 가 능할 것 같군요. 그 이익도 엄청날 것으로 기대되고 말입니다. 아마도 사람들이 희소 가치를 느끼는 동안은 상당한 고가의 물품으로 자리 잡게 될 것이기 때문에 엄청난 이 권의 달린 문제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우리 자간 경매장이 생긴 이후로 최고의 경매가 될 것 입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경매 준비에 만전을 기해야 하며, 또한 만일의 사태에 대 한 보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만약 경매물을 분실 할 경우, 우리 경매장은 경매물품의 예상 경매 가 격인 250억덴의 지급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것은 용병과 마법길드에 의뢰하면 해결이 되지 않겠습니까? 최고 수준의 경비를 부탁한다면 비용이 많이 들기는 하지만 불상사는 막을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런 경우에는 경매 물품을 맡기시는 분의 의견을 들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나는 운영진들의 이야기에서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있었다. “잠시만 제 말씀을 들어 주시겠습니까?”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여러분의 고민을 저희가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경매가 끝나는 순간까지 경매 물품 에 대한 보호는 저희의 책임으로 하겠습니다. 그러니 자간 경매장 측에서는 경매에 참 가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자세한 홍보를 해 주시고, 경매 당일 원활한 경매를 진 행해 주시는 것에만 신경을 써 주시면 되는 것으로 하지요. 그러니, 보험이나 불상사 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으셔도 된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 경우에 경매 수수료에 대한 하향조정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입니다만, 자톤님 이하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 지 요?” 내 제안이 파격적이었던 모양인지, 혹은 그런 조건이라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뜻인 지, 사람들의 얼굴은 확실히 편하고 밝은 얼굴이 되어서 다시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주 고받았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서 그 결과가 나왔다. “흠,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저희 경매장에서는 의뢰자분들의 요구를 수용 하기로 했습니다. 때문에 경매에 대한 수수료는 경매가의 10%를 받던 것을 이번 경우 에는 알이 결례를 한 탓에 5%, 그리고 물품의 보관 등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 탓에 3%를 깎아서 2%만을 받는 것으로 경매를 맡겠습니다. 이 조건이면 좋으시겠습니까?” 확실히 나쁜 조건은 아닌 것 같았다. 사실 경매장 측에서야 땅짚고 헤엄치는 격이겠 지만, 나로서도 귀찮은 일들을 하지 않고 높은 가격에 물건을 팔 수 있다면 좋은 일 이 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내 대답에 이어서 곧장 몇 장의 서류가 들어왔고, 그 서류들로 계약이 이루어졌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최고의 경매 참가자들을 모아주시기를……. 아마도 2주라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아서 어려우시겠지만, 좋은 구매자가 있어야 경매가도 높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하” “물론입니다. 아무리 거리가 멀다고 해도 초청장은 이틀이면 모두 배달이 될 것입니 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이번 경매에 참가할 정도의 사람들이라면 자간에 도 착 하는데 아무리 멀리 있어도 일주일 안에 올 능력들은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 내 말에 자톤은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럼 이만…….” 내가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자톤이 우리를 불렀다. 그리고 “어디 정해진 숙소가 없으시면 저희가 작은 집을 하나 빌려 드릴 테니 그 곳에서 경 매일까지 지내시면 어떻겠습니까? 물론 집안일을 하는 사람들과 심부름을 할 사람들 도 보내 드리겠습니다.” 라는 호의를 보였다. “하하, 그럼 신세를 지겠습니다.” 나도 자톤의 호의를 무시할 이유가 없었다. 뭐, 잡아 놓은 여관이야 이미 방세를 지 불한 상태였으니 문제가 될 일도 없었고, 따로 짐을 놓고 온 것도 아니어서 곧장 자 톤 이 붙여준 사람을 따라서 숙소로 향했다. 2층으로 된 숙소는 크지 않았지만 아담하고 깨끗했다. 침실은 2층에 있는 방들을 마 음대로 골라서 쓰라고 했고, 1층은 홀과 식당과 응접실과 서재로 되어 있었다. 우리들은 일단 응접실에 모여 앉았다. “호호, 오빠. 이주일 후면 우리 엄청엄청 부자되는 거지? 그럼 그 돈으로 뭐 할 거 야? 맛있는 거 사먹고, 음. 좋은 옷도 사고. 음, 화아 오빠가 투덜거리는 무기도 바 꾸 고, 음. 그리고...히~ 그러고 나니까 할게 없다. 히히” 풍아가 하는 말이다. “그렇지? 돈 엄청 많으면 좋을 거 같은데 많이 생긴다니까 막상 할게 없지? 원래 그 런거야. 하하.” “루탄 형님. 그래도 사람들은 부자가 되려고 무지무지 애쓰잖아요. 때로는 그것 때 문에 나쁜 짓도 하고...” “그건 그렇지.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돈이 모자르다고 생각하기 때문 에 그런 거지. 자기가 가진 돈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면 절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아. 뭐 결국은 마음 먹기에 따라 달린 것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루탄아. 이 뱀들 이제부터 우리가 지켜야 하는 거지. 상당히 비싼 거니까 돈에 눈이 먼 녀석들이 훔치러 올지도 모르는데 자신 있는 거야?” “하하, 그럼 그럼. 이제부터 우리는 이 뱀을 지키는 용병대가 되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의뢰를 하고 우리가 보수를 받는 거지. 이 뱀을 노리는 녀석들을 통 해서 우리 용병대의 이름을 알리는 거야. 어떻게 생각해? 좋은 생각이지?” 나는 마치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것인 양, 문득 생각난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오빠, 정말 좋은 생각이네요. 호호. 재미있겠다.” “수아는 무조건 루탄 오빠가 뭐라하면 좋다구 그러내.” 수아의 말에 풍아가 끼어든다. “내, 내가 언제 그랬다구. 풍아 언니는 괜히...” 얼굴이 붉어지는 수아. 그러고 보니 이것도 하나의 변화다. 보통을 이 녀석들이 주된 대화 통로를 나로 정하 고 있다. 그러니까 다른 정령들 끼리는 서로 의사 표현을 잘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풍아가 수아의 행동에 딴지를 걸고 나온 것이다. 참 이례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들이 내 동생들이기만 한 것이 아니 라, 이들 끼리도 언니 동생 오빠가 되어서 형제처럼 지내고 애정을 가지기를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변화는 썩 반가운 것이다. “그래, 그럼 우리는 이제 이 뱀들을 지키기만 하면 되는 건가? 꽤나 따분할지도 모 르겠군.” 지토는 도끼를 쓰다듬으며 궁시렁 거린다. “음. 일단은 이 상자에다가 몇 가지 마법 결계를 걸고, 보호 마법을 걸어 놓으면 문 제가 없지 않을까 싶지만, 신경을 쓰기는 해야겠지?” 그렇게 말을 마친 나는 우선 뱀들 2층 방 중에 한 곳에 가지고 가도록 하고, 상자에 마법을 걸었다. “음, 일단은 위치 고정 마법을 걸고, 생명 탐지 무효 마법을 걸고, 물리 마법 방어 도 걸어두고, 접근 알람, 디스펠 디텍도 걸어두고, 뭐 이 정도면 될 것 같네. 음, 그 리고 아참 잊을 뻔 했다 만일을 위한 추적마법도 걸어야지.” 그리고 나는 밖으로 나가기 전에 뱀들이 들어있는 상자에 테이블로 보이는 일루젼을 걸었다. “하하하. 이 정도면 어지간한 경우에는 찾지도 못할 거고 찾아도 가까이 갈 수도 없 을 거야. 하하하” 나는 즐겁게 웃다가 란이 생각이 났다. “참 수아야, 란이 좀 줘바. 란이 상태가 어떤지 좀 알아보고 와야겠다.” 내가 란이를 받아 들자 풍아가 묻는다. “오빠 어디를 가는데? 누구 한테 물어 본다는 거야?” “응, 전에 이야기한 빅, 빅이라면 뭔가 알지도 모른다 싶어서 데리고 가 볼려구. 금 방 갔다 올테니까 걱정하지 말아.” “응, 알았어. 그럼 우린 뭘하지?” “글쎄, 생각들 해 보고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어. 참, 화아는 광아 검술좀 가르치 고, 풍아도 광아 검술 배우는 것 좀 도와주고. 알았지? 그럼 나 갔다 올게.” 나는 그렇게 인사를 하곤 텔레포트로 곧장 빅의 동굴 앞으로 날아왔다. “빅, 빅 안에 있습니까? 저 루탄입니다.” 내 물음에 곧 답이 왔다. -어서 오게, 들어와. 금방 다시 만나는 구만.- 나는 곧 동굴 안에서 빅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래 무슨일인가? 동족들에 관한 이야기인가?- “일단 데리고 간 동족들은 이주일 후에 경매를 통해 처분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리 고 오늘 제가 여기 온 것은 이 것 때문입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란을 꺼내 보였다. 빅의 큰 머리가 가까이 다가와 유심히 보는 관심어린 표현을 했다. “이 환수는 빅을 처음 만나고 1년도 되지 않아서 신계에서 소환해서 제가 귀속시킨 환수인데, 그 때는 날개도 있고 부리도 있고 발가락도 있고 그런 상태였는데 얼마 전 에 다시 불러보니 이렇게 다시 알이 되어있더군요. 그래서 신계로 다시 보내면 위험 할 까 싶어서 그냥 계속 데리고 있었는데, 자꾸만 기운을 잃어가는 것 같아서 걱정이 되 어서 혹시 알까 해서 빅에게 왔습니다. 혹시 뭔가 아는게 있으면 알려주십시오.” 빅은 유심히 란을 들여다 본다. -나도 이 환수의 정체를 모르겠군. 일단 보통의 환수는 아닌 것 같지만 나도 신계에 대해 많이 아는 것이 없어서... 다만, 이 환수가 기운이 빠진 것은 알 수 있겠군. 이 런 상태로는 신계에 있었다고 해도 무얼 먹지는 않았을 것이고 아마 신계에서 특수한 기운을 흡수하면 지냈을 것 같은데 그 기운이 아무래도 화기와 풍기인 것 같군. 그런 데 계속 상극인 수기와 접촉을 하고 있어서 기운을 잃은 것으로 보이는군.- 빅의 진단은 그랬다. “그럼 수기를 오래 맞아서 이렇게 기운을 잃었다는 말입니까? 그럼 화기와 풍기를 주면 괜찮아 지겠습니까?” -그렇게 한다면 괜찮을 거야. 아마 강한 화기와 풍기라면 알에서 깨울 수도 있을 것 같군. 뭐 상당히 많은 기운을 지속적으로 오래 줘야 하겠지만 말이야.- “네.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덕분에 걱정을 덜었습니다. 뭔가 보답을 해 드리고 싶 은데...” -보답이라. 인연이란 주고 받는 것이니... 그럼 내 한가지 부탁을 하지. 우리 동족들 이 사는 호수 위에 결계를 만들어 주겠나? 인간들이 더 이상 호수까지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말이야. 이번에 우리 동족들을 사육하는 것을 알게 되면 지금까지 그런 생각 을 하지 못했던 인간들이 동족 암컷을 잡기 위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일단은 인 간 들 사이에 사육되는 종족의 수가 늘어서 더 이상 이 계곡의 암컷들을 탐내지 않을 때 까지 인간을 막을 수 있는 결계가 있었으면 좋겠네.- 그렇게 빅은 종족들을 위한 결계를 부탁했다. “그렇군요. 그런 생각은 못했습니다. 그럼 제가 호수에 결계를 처서 당분간 화이트 스네이크들이 마음 놓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잘 가게. 언제든 또 오고. 앞으로 얼마나 이 동굴에 있을지 모르지만 내가 주인으 로 있는 이상 언제든 환영하네.- 나는 빅의 배웅을 뒤로하고 동굴밖으로 나와 호수 위에 결계를 치기 시작했다. 상당히 넓은 범위였기 때문에 5개의 영역으로 나누어서 결계를 쳐야 했다. 땅과 호수가 마주하는 부분에는 마법결계와 진법을 같이 설치 했지만, 화이트 스네이 크만 그 결계와 진법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쉽지 않은 일이었 다. 그리고 호수의 중앙쪽으로는 비행마법과 텔레포트 방해 마법을 걸고 특별히 한 부 분에는 공간 왜곡으로 아주 위험한 경우에 피신처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하 지 만 나는 이 결계들이 15년 후에는 자연스럽게 풀리도록 만들었다. 그 때에는 아마도 화이트 스네이크의 사육이 많이 보급되어 이 곳까지 내려와서 암컷 을 구하려는 사람들은 없으리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대충 결계를 완성하고 나자 새벽이 되고 있었다. “이런 동생들이 많이 걱정하겠다. 빨리 가야지.” 나는 중얼거리면서 숙소 응접실로 텔레포트를 했다. “잉?” 나는 응접실의 모습에 잠시 당황했다. 풍아와 수아가 한 쪽 쇼파에 서로 머리를 기대고 자고 있고, 나머지 녀석들도 여기 저기 늘어져 자고 있는 것이었다. “뭐야? 야! 지토, 지토 너 일어나봐.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거야? 응?” 나는 지토를 깨웠다. 정령이 잠을 자다니 이게 말이 되는 걸까? 나는 전에 궁금했던 것을 이 참에 물어 보기로 했다. “음, 이제 왔군. 상당히 늦었네? 얘들은 너 기다리다 잠이 들었는데...” “이봐, 지토. 정령이 왜 잠을 자는 거야? 거기다가 정령이 피곤한 것도 있어? 또, 정령이 잠을 잔다고 그 피곤이 풀려?” 나는 잠도 덜 깬 것 같은 지토에게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음? 뭐라고? 그거야 당연하지. 정령도 피곤하다구. 특히 우리처럼 전혀 정령계에 가지 않는 정령들은 정령력을 사용해서 존재하니까 정령력이 떨어지면 당연히 피곤하 지. 그리고 잠을 자면 피곤이 없어지냐구? 그것도 당연하잖아 잠을 자면 움직임이 최 소가 되니까 당연히 소비되는 정령력 보다는 보충되는 정령력이 커지고 그럼, 피곤이 풀리는 거지.” “뭐야, 그럼 그냥 반지 속에 들어가면 이렇게 잠을 자는 것 보다는 훨씬 빨리 피곤 이 회복될 거 아냐? 그런데 왜 이러고 있는 거냐?” “그걸 몰라서 묻냐? 우리들이 처음 여행을 시작하면서, 진짜 인간처럼. 가족처럼 지 내고 싶어 했잖아. 그러니까 우리들도 인간처럼 피곤해 하고, 너무 정령력이 모자라 면 몸의 기능이 줄어서 잠을 못이기기도 하고 그런거지. 당연하잖아. 그리고 그렇게 하고 싶은 거고.” 지토의 말에서 나는 무언가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어쩌면 이 녀석들도 나 만큼이나 서로를 가족처럼 느끼고 싶어하는 것인지도 몰랐 다. 아니 그럴 것 같았다. 그래서 왠지 뭉클한 기분이었다. 나는 동생들을 하나하나 안아서 편하게 눕혀 주었다. 그리고 풍아를 방에 안아다 눕힐 때였다. “웅~ 오빠 왔네? 으음...” 비몽사몽간인가 보다. “음, 그래. 그러니까 이제 편히 푹 자고. 좋은 꿈 꿔라.”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응접실로 내려왔다. “그런데 지토, 정령도 꿈을 꾸나? 잠을 잘 때 말이야.” 내 질문에 지토는 잠시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글쎄, 잠이라는 것을 자는 것도 익숙하지 않은 일이라서, 꿈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 지는 모르지만.. 잠자면서 생각은 한다. 예전에 있었던 일이나 앞으로 있을 일들에 대 해서 명확하지 않지만 생각은 하는 것 같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나는 지토의 말에 이렇게 답해 주었다. “아마도 그렇게 잠을 자면서 생각하는 것을 꿈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거다. 너도 그 만 자라. 그리고 자면서 좋은 것만 많이 생각해라.” 이를테면 좋은 꿈 꿔라 이런 말인데, 지토에게 하기는 좀 간지러운 말이다. 하하하 나는 지토가 2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오랜만에 심법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내가 기초로 한 심법은 오행심법이었다. 뭐 어쩌다 보니 조금씩 바뀌어서 이 제는 태극심법이라 불러야 될 것으로 변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내 몸 속의 상 중 하단전의 기운들은 언제나 평온을 유지하고, 몸을 균형맞게 만들어 준다. 때문에 평소에 무리해서 힘을 쓰지 않는 이상 의도적인 운기가 필요없이 몸은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밤사이 결계를 만드느라 무리를 하기도 했고, 특히 란이를 위해서 운 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기운들을 모아서 몸 전체를 순수한 화기로 덮어갔다. 몸 속의 화기들을 모두 끌 어 낸다면 아마 주위의 모든 것이 녹아버리겠지만 겉으로 표출하지 않는 기운은 그런 위험을 가지지 않는다. 다만 나는 그 기운들을 란이에게 전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리고 한동안 화기를 전하는 것이 끝나자 다시 기운을 바람의 기운으로 바꾸어 란이에 게 전했다. 한동안 번갈아 그렇게 란이에게 기운을 전해주자 란이는 겉으로 보기에도 뚜렷하게 윤기가 나고 생기가 넘쳐 보였다. 그리고 그렇게 운기를 하고 있는 동안에 동생들이 하나 둘 내려왔다. “오빠, 언제 왔어요? 나 여기서 자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일어나보니 침대에 있던 데.” 수아가 아침 인사를 한다. “호호호, 그거야 어제 오빠가 수아 너를 꼭~! 안아서 침대에 눕혀 주었기 때문이 지. 호호호” 풍아가 어느 틈에 나타나선 수아를 못살게 군다. “응? 정말? 정말이야? 어떻게해? 아이 몰라.” 수아가 고개를 푹 숙이고 어쩔 줄 몰라한다. “크크 그럼 풍아는 누가 안아서 침대에 눕혔을까나? 거기다가 수아를 눕히는 건 어 떻게 알았을까나? 그럼 풍아는 잠도 안자고 있었으면서 루탄이 품에 안겨서 침대까지 간 건가?” 이렇게 풍아의 덜미를 콱 잡은 것은 지토다. “무슨 소리예요. 난, 그냥 침대에 갔을 때, 잠깐 깬거라구요. 그런 유언비어를 날조 하지 말아요. 지토.” 풍아도 얼굴이 붉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척이나 시끄러운 아침이네. 그런데 광아는 아직 안 내려온건가?” 화아 녀석의 등장이다. “화아 오빠가 어제 한 짓을 생각을 해봐. 어떻게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광아를 괴롭 힐 수 있는 거야? 그게 훈련이야? 사람 잡을려고 작정을 한 거지?” 풍아는 그렇게 화아에게 내 쏜다. 지토에게 당한 분풀이지 싶다. “정말이예요. 어제 과아 오빠 너무 불쌍하더라. 훌쩍.” 수아는 생각만 해도 불쌍하다는 듯이 훌쩍이는데.... “뭐, 뭐야? 이런 분위기는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수아 너는 왜 우는 거야? 광아 녀석 멀쩡하잖아. 그런데 왜...” “형님, 이 제가 어디가 멀쩡하다는 겁니까? 자그마치 목검으로 얻어 맞은 것이 362 회, 발길에 차인 것이 73회, 주먹에 맞은 것이 94회, 바닥에 엎어진 것이 276회, 구 른 것이 170회에 기절한 것이 32번이었습니다. 그리고 수아가 회복 마법을 걸어 준 것 이 도합 22회입니다. 아무리 겉으로 별로 드러나지 않는 신체를 지니고 있다고 하지 만, 너무 심하잖습니까. 뭐 제 특기는 빛이란 말입니다. 빛을 이용한 환상. 실제보다 더 실제같은 환상공간 창출이 제 특기란 말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 섬세한 저에게 그 런 무식한 방법으로 검술을 가르치는 겁니까.” 음... 광아의 등장이다. 어제 광아가 무지 당한 모양이다. 대충 들어도 엄청나게 많 이 맞은 것 같다. “하지만 환상 속에 가두어두고 괴롭혀서 제압하는 데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잖 아. 그러니까 환상으로 혼란스럽게 하고 일격에 제압하는 것이... 그럴려면 아무래도 이런 검술을 알아야.. 그리고 평소에는 그 특기를 제대로 살릴 수 없으니까 특히 검 술 을 알아야 할 거 아냐? 내 말이 틀리냐?” 음, 제법 논리적인 화아의 반박. “그야... 그래도 형은 너무 심하잖아요. 어떻게...” “아~! 알았어. 그럼 오늘은 풍아에게 배워봐. 나는 주로 힘을 위주로 하니까 스피드 와 섬세함을 위주로 하는 풍아는 좀 다를지도 모르지. 그렇게 해 보고 저녁에 누구에 게 배울지 결정을 하도록 하자. 그럼 됐지?” 화아가 한 발 물러서는 모습이다. 아마도 광아가 맞고, 넘어지고, 기절하고, 뭐 이런 숫자를 꼼꼼히 모두 기억한다는 것이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광아는 그런 쪽에서 상당히 무서운 면을 자꾸만 보이고 있다. “아참, 얘들아 란이 말인데, 란이가 원래 속성이 불과 바람이어서 수아가 품고 있었 던 것이 해가 됐나 보더라. 별 이상은 없으니까 염려는 말고 앞으로는 하루는 화아가 하루는 풍아가 품고 있어라. 하하 그렇게 품고 있으면 알에서 깨어날지도 모른다니까 정성들여서 해봐라. 하하 어쩌면 둘을 닮은 녀석이 나올지도 모르겠는걸? 하하하” 내가 그렇게 말하자 질겁을 하는 풍아와 화아다. “오빠, 무슨 말씀을 우리 둘을 닮은 녀석이라니요!!” “형!!” “하하 농담을 한 것을 가지고... 아무튼 란이를 위해서도 화아와 풍아가 잘 돌봐주 도록 해라.” “알았어요 오빠. 그럼 오늘은 내가 광아랑 검술 연습을 해야 하니까 화아 오빠가 품 고 있어야 겠네? 그럼 부탁해요.” 풍아는 대뜸 화아에게 란이를 떠맡긴다. 하하 제 목: 내 가족 정령들 [72 회] 글쓴이: 탁목조 2002-12-08 조회/추천: 11519 / 30 내가 땅꾼인가. 뱀을 팔자. - 3 우리는 아침을 먹고 대부분 각자 하고 싶은 일들을 하기 시작했다. 예전 같으면 모두 어미닭을 따라 다니는 병아리처럼 내 곁에서 멀리 가지 않던 녀석 들이 이제는 제법 빨빨거리고 돌아다니게 된 것 같다. 수아와 지토는 시장에 살 물건이 있다고 함께 나갔고, 광아와 풍아는 집 위에 있는 작은 공터에서 드잡이질을 하고 있는 중이다. 아마도 저녁에 광아의 입에서 나오는 숫 자는 장난이 아닐 것 같다. 화아는 란이를 손에 들고 어쩔줄을 몰라한다. 품 속에 넣어봤다가 불안한지 꺼내서 두 손위에 올려 놓았다가 또 주머니에 넣어 봤 다가... 결국에는 길게 누워서 가슴위에 올려 놓고 가만히 눈을 감고 있다. “화아야. 란이 말이야. 그 손수건에 왠만한 방어마법은 다 걸려 있으니까 그렇게 안 절부절 하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옆에서 그렇게 말을 해도 “그건 알지만, 이건 아무래도 너무 작고 여려 보인다구. 만약 잘못되면 어덯게 해. 그러니까 내가 맡고 있는 동안은 이렇게 잘 모셔야 한다구.” 라면서 하루 종일 움직이지 않을 모양이다. 이런걸 모면 참 우직하게 보인다. 하하하 점심 대가 지나고 오후가 되자 시내에 나갔던 수아와 지토가 돌아왔다. 수아는 한 아름 요리 재료를 사 들고 왔고, 지토는 아무 것도 사가지고 온 것은 없 어 보였다. 그리고 수아 덕분에 우리는 만족스러운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이제 수아는 내 요리의 모든 것을 물려 받은 모양이다. (이제 그만 하산하여라. 하하 하) 그리고 물론 그 저녁에 떡이 되어 널부러진 광아는 수아의 치료를 받아야 했고, 고 민 끝에 번갈아 가며 검술을 배우기로 했다. 어차피 같은 등급의 정령들이라 힘의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물질계에서 인간형 으로 지내는 데에는 육체적인 능력의 차이를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광아도 배우면 조금씩 실력이 는다는 것을 느끼는 모양이니 투덜거리기는 해 도 그만 둘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우리들이 숙소에 머물고 일주일이 되어갈 무렵, 자톤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내용은 경매에 대한 홍보는 충분하고도 넘칠 정도로 잘 되었고, 구매자들의 관심도 엄청나게 크다고 했다. 다만 문제는 경매 물품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르지 만, 경매 물품이 우리들의 숙소에 있다는 정보가 어디선가 빠져 나간 것 같다는 것이 었다. 그래서 우리는 자톤에게 경매물품의 주인이 그 물품의 경비를 ‘란의 용병대’라는 용병들에게 맡겼다는 소문을 아무도 모르게 퍼뜨려 달라고 했다. 그 말에 자톤 그 영감도 감을 잡았는지 ‘일석이조를 노리는 좋은 방법이군요’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차피 알려진 것, 이제는 우리 용병대의 능력을 보여주는 일만 남아 있었다. 자톤의 말로는 이번 경매에는 신성왕국과 여인왕국에서도 관심을 보이고 있어서 구매 자가 올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번 경매는 상당히 많은 구매자(그래봐야 대륙 전체에서 한 가닥 재력을 지 닌 인물들만 가능하기는 하지만)들이 참가하는 엄청난 경매가 될 것이라고 자톤은 조 금 흥분된 모습이었다. 물론 우리들이 경매물을 잘 지킬 수 있을지에 대해서 걱정하 는 빛도 보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구매자가 많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구매자와 함게 몰려들 도둑이나 강도들이었다. 250억덴이라는 돈은 충분히 법과 질서를 무시할 수 있는 유혹이니까 말이다. 자톤의 연락이 있었던 바로 그 밤부터 우리들은 상당히 피곤해 졌다. 숙소 주변에 깔아놓은 탐지 마법을 통해서 상당수의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졌던 것이 다. 그리고 그 중에는 서로가 서로를 피해가며 우리 숙소의 동정을 살피는 기색이 역력 한 패거리도 있었다. “형, 대충 얼마나 되는 것 같아?” 화아가 물었다. 우리는 지금 테이블 주위에 놓인 편안한 의자에 앉아서 느긋하게 기다리는 중이었다. “음, 약 열 다섯 명 정도. 보아하니 일행은 아닌 것 같고 적어도 여섯에서 일곱 이 상의 각기 다른 패거리의 사람들 같다.” “호호, 오빠. 화아 오빠는 정문 방향에서 들어오는 놈을 맡고, 지토 아저씨는 집 뒤 를 통해 오는 놈을 맡고, 나는 왼쪽, 광아는 오른쪽을 맡는 거지? 그런데 집 안에서 잡아야 하나 밖에서 잡아야 하나? 호호호” 풍아는 우리의 계획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우리는 각자가 한 방향을 맡기로 했던 것이다. “그건 이제부터 마음대로 해. 여기서 기다리다가 녀석들을 잡던지. 나가서 기다리다 가 잡던지. 하지만 조심해. 상당한 실력을 지닌 녀석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위험하 다 싶으면 몸을 빼야 한다. 알았지. 돈보다는 너희들이 더 중요하니까 말이야. 그리 고 내가 있으니까 힘에 겹다 싶으면 이곳으로 후퇴하는 거야. 알았지?” “알았어, 형.” “물론이지. 걱정마라.” “응 오빠.” “알았습니다. 형님.” 그리곤 녀석들이 제각각 방을 나선다. 어디 소풍이라도 가는 모습이다. 쩝. 긴장감이 없어 긴장감이. 사실 현재까지 긴장감을 느낄 정도의 기척은 없었기 때문에 나도 별 걱정은 하지 않 았지만 그래도 첫 싸움인데, 거기다가 사람을 상대로 하는... 나는 동생들의 등 뒤에 한 마디를 붙혔다. “될 수 있으면 사람들을 죽이지는 말아라. 죽이지 않고 제압을 하지 못하겠으면 차 라리 피해서 이리로 와라. 나는 동생들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보고 싶지 않으니까 말 이야.” 내가 그렇게 말하자 지토와 동생들은 돌아서서 빙긋 웃고는 사라져버렸다. “음. 그럼 이제 우리는 뭘 하지? 그래 우리 여기서 재미있는 구경을 하자.” 내가 그렇게 말하자 수아가 궁금한 듯이 물어온다. “재미있는 구경요? 어떤거요? 네? 오빠.” “하하 이거야. 내가 미리 준비해 둔 건데 재미 있을 거야.” 나는 창고에서 커다란 거울을 꺼내서 우리 앞에 세워 두었다. “거울이요? 이게 뭐가 재미 있어요?” 실망한 수아의 목소리. 하지만 “이거 봐라 수아야. 여기 우리 숙소의 모습이 다 나온다. 정말이야.” 나는 거울에 마법을 시전했다. 내가 이 숙소 곳곳에 마법 수정을 박아 넣어서 그 수정을 통해서 영상과 소리를 전 달 받는 방식으로 만든 것이었다. 일명 몰래 카메라. “음 어디보자. 화아는 아예 현관쪽에 의자를 놓고 앉았고. 지토는 음? 어디있지?” “오빠, 지토 아저씨 여기 여기있어요. 호호 나무 사이에 숨었네요. 키가 작으니까 잘 안보이는 구나 호호.” 내가 지토를 찾는 동안 수아가 지토를 찾아 내었다. 후원쪽의 나무 그늘 속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풍아는 창문 테라스에 앉아있네? 올 테면 오라는 건가? 하하” “근데 오빠. 광아 오빠는 안보이네? 아무리 찾아도 없어요. 여기서 안 보이는 곳에 숨었나?” 나도 여기 정기 광아를 찾아 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리서 슬쩍 탐지 마법으로 위치를 찾아 보았다. “응? 이상하네? 수아야. 여기 여기에 광아가 있는데 어째 안보이지? 넌 보이니? 분 명 여기 있는데. 그런 기척이 있는데 보이지는 않네?” “정말 여기 있는 거 맞아요? 음... 그럼 광아 오빠가 빛을 이용해서 몸을 숨겼나 보 네요. 있잖아요. 광아 오빠 전문이 빛을 다루는 거라는거 호호.” “음. 그런가 보네. 거참 신기하네. 꼭 진법은 쓸 것 처럼, 마나의 변화도 없는 것 같은데...” 그리고 나서 우리들은 거울의 여기 저기를 살피면서 멀리서 숙소를 정탐하거나 가까 이 접근하는 사람들을 찾는 것에 몰두 했다. “호호, 이거 재미있네요. 오빠, 여기도 한 사람 있어요. 이 사람은 천 같은걸로 몸 을 가렸네요. 신기해라. 천이 주위의 모습으로 막 바뀌고 있어요. 호호.” “그래도 아직은 투명화 마법이나 그런 거 써서 접근하는 사람은 없네?” 수아와 내가 그렇게 거울을 통해서 숙소 주위의 사람들을 살피는 사이에 본격적으로 접근을 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좀 전까지 열 다섯 정도였던 숙소 주변의 사람들도 삼십에서 사십명에 이를 정도로 늘어나 있었다. 그래봐야 오늘 밤에 이 숙소에 들어올 사람들은 거의 전력 탐색을 위한 사람들일 확 률이 높았다. 물론 워낙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만약에 먼저 탈취 당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성급하게 계획을 세웠을 수도 있지만 내 생각에는 사람이 많은 만 큼 어부지리를 노리는 놈들이 분명 있을 것이었다. 제일 먼저 싸움이 시작된 것은 의외로 광아 쪽이었다. 하지만 광아가 있는 방향으로 들어온 녀석들은 영문도 모른 채로 쓰러져서 일어나지 않았다. 대충 살펴보니 혈도를 점해 놓은 것 같았다. “응? 광아가 혈도를 알아? 어떻게 알지?” “아이~ 오빠는~ 전에 우리들 상대로 정령도 혈도가 있나 없나 하면서 실험도 하고 선? 그리고 유소랑 넥스 데리고 실험 할 때 우리도 봤으니까 알지. 특히 광아 오빠는 그런 섬세한 작업은 아주 능숙하잖아. 호호.” “그럼 풍아나 화아, 지토도 혈도를 알고 있는 거야?” “그럼. 나도 알고 있는걸? 아마 완전히는 몰라도 대충은 다 알고 있을거야. 적어도 유소나 넥스에게 가르친 정도보다는 더 많이 알고 있을걸?” 수아는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한다. 그러고 보면 참 오래 함께 있었고, 나에 대해서는 어쩌면 나보다 더 많이 아는 것이 지토와 동생들이 아닌가 싶다. 그 사이에도 광아 쪽에는 제압당한 사람들이 늘었고, 지토 쪽에서도 싸움이 일어났 다. 커다란 도끼를 휘두르는 지토는 종횡무진 상대들을 내 몰며, 그 잛은 팔다리로 열심 히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기회가 생기면 놓치지 않고 혈도를 점해서 눕혀 놓는다. “지토 아저씨 파이팅. 호호. 저렇게 뛰어 다니는 모습을 보니까 귀엽네요. 헤헤” 지토가 귀엽다라.... 그럴 수도 있겠지. 쩝. 그 사이에 화아나 풍아 쪽도 싸움이 시작되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분산되어 있는 까 닭도 있었고, 함께 싸우면서도 서로 같은 편이 아닌 경우에는 서로 견제를 하는 까닭 도 있었기 때문에 어느 쪽도 위험하거나 하지는 않아 보였다. 그리고 그 싸움도 곧 끝이 났다. 광아 쪽에는 원인도 모르고 몇 사람이 쓰러지자 더 이상 사람들이 오지 않았고, 지 토 쪽에서도 여섯 명 정도가 쓰러지자 물러났다. 풍아는 넷, 화아는 다섯을 잡아 두고 있었다. 아무래도 노출된 상태로 있었던 것이 기습의 효과를 보지 못해서 제압한 사람의 수 가 적은 것 같았다. 화아 등은 사람들을 차곡차곡 한 곳에 쌓아 두곤 다시 경계에 들어갔다. 하지만 새벽이 될 때까지 멀리서 경계를 하는 사람들은 있어도 다시 숙소에 접근하 는 사람들은 없었다. 나는 날이 밝자 제압된 사람들을 모두 한 곳에 모으고 그 신분을 확인했다. 물론 여기서 약간의 강제적이고 고통이 수반되는 행동들이 있었음을 부인하지는 않는 다. 약간의 희생은 늘 필요로 한다. 대부분은 이번 기회에 한 몫을 벌어 보려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는데, 그렇지 않은 경 우도 있었다. 이번 경매에 참가하는 구매자의 일행이 이 무리 속에 끼어 있었던 것이 다. 예상은 했던 일이지만 정말로 확인이 되니까 기분이 묘했다. “형, 이 사람들 어떻게 하지? 죽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렇게 둘 수도 없고.” “그러게? 어떻게 할거야 오빠?” 물어본다고 낸들 방법이 있나? 풀어주자니 또 싸워아 할지도 모르고... 그냥 시 경비 대에 넘기는 것이 좋을 것 같기는 한데.. “그냥 시 경비대에 넘길까?” “음. 그거 별로 재미 없을 것 같다. 우리 이렇게 하자 오빠. 이 사람들 숙소 입구에 다가 전시를 하는 거야. 못 움직이게 해서 말이야.” 풍아의 의견이다. “하지만 그래도 먹어야 하고, 그럼 음. 화장실도 가야하는데... 그냥 두면 불쌍하잖 아.” 이건 수아다. “그럼 어떻게 하지? 그냥 경비대에 넘기나?” 지토도 별 의견이 없는 모양이다. “그럼 이렇게 하자. 몸을 제압해서 팔 다리를 하나씩 못쓰게 하고 자발적으로 전시 물이 되라고 하지 뭐. 혹시 도망가면 팔 다리 안 고쳐주면 되고 도망 안가면 경매 끝 나고 고쳐주고, 그럼 되겠지?” 나는 그렇게 즉흥적인 계획을 내 놓았다. “음.. 좀 이상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할까?” “뭐 도망가도 별로 상관은 없으니까 그렇게 하자.” 그렇게 포로 처리 회의는 끝이 났다. 그리고 그 뒤로 포로 22명은 장애인의 아픔을 몸소 체험하는 귀중한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이 할 일은 숙소 앞에 정원에 푯말을 세우고 그 뒤에 일렬로 서거나 앉아 있는 일이었다. 푯말의 내용은 이런거였다. ‘란의 용병대’ 화에게 잡힌 사람들 ‘란의 용병대’ 풍에게 잡힌 사람들 ‘란의 용병대’ 광에게 잡힌 사람들 ‘란의 용병대’ 지토에게 잡힌 사람들 ‘란의 용병대’ 수에게 잡힌 사람들 ‘란의 용병대’ 루탄에게 잡힌 사람들 그리고 그 푯말을 숙소의 담에서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정문에서 보명 아주 잘 보였다. 그리고 그 때문에 수아는 한참 칭얼거렸다. 자기는 사람들을 잡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아의 이름은 알려질 것이고 나중에 수아가 공격위주가 아니라 치료 위주의 능력이 뛰어난 것을 알게 되면 괜찮을 거라고 한참을 달래고 나하고 거울을 보면서 노 는 것이 좋지 않느냐는 말에 겨우 칭얼거림이 멈추었다. 거기에는 내 이름에도 한 사람도 없다는 점도 한 몫을 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밤도 역시 전날 밤과 별다를 것 없는 밤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아침에는 또, 푯말 뒤의 사람들이 늘었다. 물론 밤에는 이 사람들을 방을 정 해서 가두어 둔다. 셋째 날 밤. 드디어 화아들의 방어를 뚫고 들어온 인물들이 생겼다. 아무래도 혼자서 여러 명을 상대하다 보니 돌파를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다음날 아침에 <‘란의 용병대’ 수에게 잡힌 사람들>이라는 표 지 뒤에 서게 되었다. 란이는 간단하게 물의 장벽 안에 가두어서는 물 화살로 혈도를 짚어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수아는 마법을 쓰는 것으로 소문이 났고, 다른 지토와 동생들은 무기를 쓰는 전사로, 광아는 술법을 쓰는 술사로 소문이 나 버렸다. 그리고 사람들의 궁금증은 이제 내가 어떤 인물인가 하는 것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언제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 줄 사람이 내 푯말 뒤에 설 것인지 자 뭇 기대를 가지고 기다리는 중이다. 넷째 날도 수아가 두 명의 적을 잡고 끝이 났다. 하지만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3일동안 화아는 16명 풍아는 12명, 지토는 13명, 광아는 12명, 수아는 2명의 사람들 을 잡았는데, 넷째날에는 화아 1명 풍아 1명, 광아 2명, 지토 0명. 수아 2명의 침입 자 를 잡았던 것이다. 이것은 이제 어중이 떠중이는 대부분 정리가 되었고, 강자들이 남았다는 말이었다. 거기다가 제법 머리도 써서, 한 두명이 화아등을 잡고 있는 사이에 다른 인원은 수아 와 내가 있는 쪽으로 오는 방법을 택한 것 같았다. 다시 말하면 한 두명이 화아나 풍아 지토를 감당 할 수 있는 실력이 되는 녀석들이 라는 말과도 같았다. 물론 아직은 죽이지 않고 제압을 할 수 있을 정도이니 화아나 지토 등이 걱정이 되 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 이틀 밤이 지나면 경매가 있는 날이라는 점에서, 이 이틀 밤 동안에 지금까지 몸을 숨기고 있던 강자들이 나타날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거기다가 다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몹시 피곤한 상태이기도 했다. 밤은 보통 꼬박 세우다 시피하고, 낮 동안에 번갈아 가면서 수면을 취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선잠을 자는 모양인지 피로가 완전히 가시지 않는 모양이었다. 더구나 매일 밤 정령력을 사용해서 싸우고 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나는 심법을 수련하면 잠깐 동안에 피로를 풀 수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아니었지만 지토와 동생들은 왠지 고생시키는 것 같아서 미안했다. “오늘은 다들 숙면을 취하도록 하자. 하하 내가 낮동안에 지키고 있을테니 걱정하 지 말고. 무슨 일이 있으면 깨울테니 걱정하지도 말고. 그냥 나를 믿고 푹, 쉬는 거 다. 알았냐?” 나는 아침에 동생들과 지토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런 표정 지을 것 없다. 오늘 밤과 내일 밤은 아무래도 상당히 힘을 써야 할 것 같으니까. 다들 힘을 보총해 두란 말이야. 상당히 힘든 상대들이 올지도 몰라. 어쩌 면 내일 낮에는 쉴 틈도 없을지도 모르고 말이야.” “우웅, 그러지뭐. 오빠는 혼자 있어도 그런 사람들 정도는 문제도 아니니까. 걱정 은 안해. 아웅. 나 그만 잘란다.” 풍아다. 그리곤 그대로 쇼파에 늘어져 버린다. 어차피 여기저기 흩어져서 자는 것은 무리가 있다. 곧 이어서 수아도 화아도 광아도 지토도 나름대로 잠자리를 마련하고 잠이 들었다. 나는 모두들 잠이 들자 슬며서 운공을 하면서 기운을 흘려보내서 각각의 기운들을 보 충해 주었다. 아마도 잠에서 깨어나면 몸이 한결 가벼울 것이다. 그렇게 다들 잠든 것을 확인하고는 응접실 전체에 세겹의 결계를 치고 밖으로 나왔 다. 푯말 뒤로 길게 앉아있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보인다. 저들 속에는 예상외로 암흑제국과 여인왕국의 인물들도 끼어 있었다. 250억덴의 돈이 상당한 위력을 발휘하는 모양이지만, 무었 때문에 암흑제국과 여인왕 국 쪽에서까지 이번 화이트 스네이크의 경매에 관심을 가지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 았다. 물론 저기 있는 인물들이 단지 출신만이 암흑제국과 여인왕국 일런지도 모르지만, 실 제로 다른 왕국의 인물들이 단체를 이루어서 어떤 일을 도모한다는 것은 아무리 봐도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자국의 경제적 부흥을 위해서 이런 경매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더구나 말 이 되지 않는다. 도리어 중계무역의 중심인 한타 왕국과의 불화가 생길 우려를 걱정 하 는 것이 옳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화이트 실크가 무슨 전략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하지만 내가 아는 바로는 그런 것은 아니었다. 상당히 유연하고 질기기는 하지만 무 구를 만들기에 적당한 가죽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저 고급 옷감으로 쓰이는 것일 뿐인데... 정말 이해가 안가는 상황이었다. 뭐 단순한 도둑일 수도 있는 거니까. 하하 생각이 깊으면 실수가 커질 수도 있지. 왜냐하면 때로는 깊은 생각이 독선과 아집을 크고 깊게 하기도 하거든, 하하. 편하게 생각하고 닥치는 대로 해결을 하자고. 그럼 그럼. 낮 동안에 우리들의 숙소를 위협하는 존재들은 없었다. 그리고 밤. 상황은 어제와 같았지만 시간상으로는 상당히 이른 시간이었다. 화아는 세 명의 복면인과 접전중. 풍아도 두 명의 복면인과 접전중. 광아는 놀고 있 는 중. 지토는 세 명의 복면인과 대치중. 그리고 나와 수아가 있는 방에는 다섯 명의 불청객이 찾아든 상태. “이런, 오늘은 상당히 이른 시간부터 많은 손님들이 오셨군요. 가능하시면 소개를 좀 부탁 드릴까요?” 나는 문을 들어서서 서로 거리를 두고 대치한 사람들을 보았다. 둘, 둘, 하나. 모두들 복면을 했다는 공통점이 있었고. 오른쪽 둘은 검은색 야행복에 일체형의 복면 에 단검. 중앙의 둘은 감청색 야행복에 분리형 복면에 단검. 왼쪽 한 명은 평상복에 복면과 장검. 하지만 자기를 소개하고 싶은 생각들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럼, 여러분 중에서 누가 화이트 스네이크를 가지고 가실 건가요? 모두들 욕심이 있어 보이니 어느 한 분이 가지고 가시기가 어렵겠네요?” 이런걸 이간질이라고 하지. 하지만 눈 앞의 복면들이 이런 간단한 말장난에 놀아날 사람들이 아닌 것은 나도 아는 일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선 우리들을 어떻게 꺽고 뱀이 들어 있는 상자 를 가지고 가실 생각이신지요? 참 뱀이 들어 있는 상자는 어디에 있을까요?” 나는 될 수 있으면 명랑하게 들리도록 이야기를 늘어 놓았다. “호호, 오빠. 상자를 못 찾으면 너무 불쌍하다 그지? 어떻게 하지? 여기까지 와서 뭘 가지고 가야 할지도 모른다면... 아~! 속상하겠다. 저 사람들.” 아마도 수아가 약을 올리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수아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정말로 걱정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여러분은 왜 이리로 오신거지요? 여러분이 찾는 물건이 여기에 있다고 누 가 알려주기라도 한 듯이 여기를 목표로 삼으셨네요?” 수아와 내 말이 떨어지자 그들은 빠르게 방을 훑어 보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방에서 그들이 뱀이 들어있는 상자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내가 그래도 한 마 법 하니까 말이다. 하하 “그런 말로 나를 속이려고 해도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이미 물건이 어디 있는지 확인을 했으니 말이다. 다른 분들은 물건조차 찾지 못했으면 이만 자리를 비켜주는 것 이 어떻겠나? 실력이 없으면 눈치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나?” 홀로 자리를 지키던 평상복 복면인이 그렇게 입을 열고 슬쩍 감청색과 검은색의 복면 인 팀들을 돌아 보았다. “물건의 위치를 파악해 낸 것이 너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성급하지 않은가? 그렇게 나서기를 좋아하다가는 일찍 관을 쓰게 될지 모르지. 흐흐” 평상복의 말에 감청색의 대꾸였다. 검은색 쪽은 아무 말이 없이 서 있었지만, 평상복의 말대로 물러나고 싶은 생각은 전 혀 없는 모양이었다. “어쩌시겠습니까? 시간이 넉넉하기는 하지만, 오래 이렇게 대치한다고 방법이 나오 는 것이 아니니 빨리 행동들을 하시지요. 따로 따로 순서를 정해서 물건에 도전을 하 시던지 아니면 함께 도전을 하시던지 그건 알아서 하시고요.” 하지만 내 말이 끝나고도 그들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대치 상태에서 내 감각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한 번도 침입이 없었던 창문쪽으로 미세한 기척이 스며드는 것을 느낀 것이다. “이런 이번에는 새로운 손님이 등장 하시네요. 이렇게까지 기척을 숨기시다니 대단 하시군요. 파이어 애로우.” 나는 기척이 느껴지는 쪽을 향해서 20여 발의 미니파이어 애로우를 날렸다. 한마디 로 산탄의 효과라고 보면 된다. 파파파박 피피핑 “흣차!” 쏟아지는 마법화살들 속에서 한마디 낮은 기합과 함께 새로운 인물이 방 안에 등장했 다. 구리빛 머리카락, 호감가게 생긴 얼굴, 20대 초반의 나이. 180정도의 단단해 보이는 몸. 그리고 그의 등 뒤에 있는 존재하나. “손님이시면 문을 통해 오셔야지. 창문을 넘다니 예의가 없으시군요.” “하하, 미안합니다. 초청을 받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문으로 올 수가 없었지요. 하하하” 반응을 보아하니 상당히 능글맞은 녀석이다. 이런 녀석은 다루기가 까다로운 인물에 속한다. “움직이지 마세요. 아무리 오빠가 딴 곳에 정신을 팔고 있다고 해도 저를 무시하시 는 행동은 싫어요. 저도 이 용병대의 일원이라는 것을 잊으시면 안되지요.” 수이의 말과 함께 감청색 복면인들의 앞에 수막이 펼쳐졌다. 창문으로 나타난 의외의 인물에 정신을 쏟는 틈을 노리고 움직인 모양이었지만 수아 의 수막에 막히고 곧 수막에서 기습적을 자라난(쏘아진) 물화살에 점혈을 당해 버렸 다. 불쌍한 사람들, 수막에서 조금만 떨어 졌으면 그런 공격은 피할 능력은 충분했을 텐 데, 수막을 그저 방어막 정도로 생각하고 깨기위해 달려들다가 의외의 공격에 쓰러져 버린 것이다. 그럼 이 녀석들은 엑스트라. 그럼 남은 녀석들 중에서 어떤 녀석이 힘 을 쓰는 녀석이라는 것일까? “그럼 다시 3파전이 된 것 같군요. 그럼 누가 누가 물건을 가지고 이 숙소를 벗어나 게 될까요? 호오? 그러고 보니 밖의 싸움은 거의 끝이 나는 모양이군요. 역시 우리 동 생들의 실력은 대단하단 말이야.” 그 사이에 밖의 싸움은 대충 끝이 나고 있었다. 원래라면 상당히 고전을 해야 할 전 력상의 차이가 있었지만 심심하다고 이리저리 돌아 다니던 광아가 끼어 들어서 싸움 은 금방 끝이 났던 것이다. 광아 녀석이 몸을 숨기고 있으니 어떻게 상대를 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평소에야 단지 모습이 보이지 않는 정도니까 눈을 감고 싸운다고 생 각하면 될 일이지만(고수들은 어느 정도 가능하다.) 다른 상대와 싸우는 중에 광아같 은 인물이 기습을 하면 당해낼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럼 아우들이 싸움을 끝을 냈으니까 여기도 끝을 내기로 해 볼까요?” 나는 그 말고 함께 쌍환검 중에서 우검을 발출했다. “그럼 수아야 저 검은색 아저씨들 좀 막아줄래?” “응, 오빠. 걱정하지 말아. 막는 거는 자신있어.” “그럼 간다. 차앗!” 나는 곧장 평상복 복면에서 검을 휘두르면 달려 들었다. 창~ㅇ 아주 능숙하게 검을 흘리는 평상복 두건맨. 하지만 검을 흘린다고 따라가는 손을 흘린 수는 없는 일이다. 검이나 기타 도구들고 달리 신체의 일부는 그 반응이 즉흥적이면서 부분적이 변화가 가능하기 때문에 흘려 버리는 것이 쉽지 않다. 더구나 나 정도의 속도를 낼 수 있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힘 든 일이다. 우검이 두건맨의 검로에 막혀 흐르고 있을 때, 내 왼손은 녀석의 혈을 점하고 있었 던 것이다.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속도의 차이는 쉽게 극복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몸 속의 기운과 함께 헤이스트 를 사용하면 보통 사람이 낼 수 있는 속도 이상의 속도가 나오니 말이다. “수아야 그 아저씨들 잘 대접해 드려.” 나는 수막과 물화살로 상대와 밀고 당기는 싸움을 하고 있는 수아에게 응원을 보내 며 창문등장맨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를 무시하시는 것 같군요. 저를 두고서 다른 사름을 상대하기 위해서 등을 돌리 다니 말입니다.” 그는 불쾌한 듯이 말했다. “그래서 제 등을 누가 노리기라도 했나요?” 이 말의 뜻은 이런 거다. 만약에 내가 너를 무시해서 등을 돌렸으면 내가 등에 칼을 맞았겠지만, 어느 정도 인정을 했기 때문에 등을 보였고 너도 어느 정도 되니까 등을 노리지 않은 것이 아니냐는 뭐 이런 아주 심도 있는 의미가 저 간단한 말 속에 숨어 있는 것이다. 그게 정말이냐고 물으면 할 말은 없다. 내가 그런 의미로 말을 했는데 그 의미가 잘 전달되지 않는 것은 두 가지 경우다. 하 나는 표현의도와 표현이 틀리게 된 경우. 하나는 의도와 표현은 잘 되었는데 그것을 이해할 머리가 없는 사람에게 한 경우. 그러니까 여러분이 내 말을 이해해야 된다는 말이다. 머리가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카카카 앞의 경우는 생각 하지 않는다. 몰라 몰라. 나는 모르는 일이야. “그럼 이제 그쪽만 남은 것 같군요. 이 쪽은 우리 수아가 충분히 해결을 할 수 있 을 것 같으니 말입니다.” “그런가요? 그럼 일단은 물건을 가지고 가려면 당신을 눕히지 않으면 안 되겠군요. 먼저 소개를 하지요. 이 녀석은 환수입니다. 능력은 주위와 동화되는 능력입니다. 이 를테면 이런 것입니다.” 순간 환수는 말하던 녀석의 등에서 녀석을 감싸기 시작했고 환수가 녀석을 완전히 감 싼 이후에는 녀석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완전히 광아의 능력과 같은 능력인 것 같았다. “그럼 저도 좀 노력을 해 봐야 겠군요. 투명.” 나는 좀 급이 낮아 보이기는 하지만 투명화 마법을 시행했다. 비록 마법 자체가 불완 전해서 투명한 상태로 걷거나 조금 움직이는 것은 가능하지만 급한 움직임이나 마나 의 변화에는 쉽게 깨어지는 단점이 있지만, 이렇게 숨어 있는 녀석을 상대하기 위한 한 번의 기회를 가지기에 무리가 없는 마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렇게 되자 방 안에는 수아와 싸우는 검은 색 복면인 한 사람만이 남았다.(한 녀석은 이미 누웠다.) 나는 지금 녀석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상당히 잘 숨어서 미세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 었지만 녀석에 대한 기척을 놓칠 내가 아니었다. 나도 될 수 있으면 기척을 들키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숨어 있는 의미가 없 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 녀석은 도대체 어떤 공격을 하는 것일까? 검 종류일까 아니면 마법이나 술 법 종류일까? 만약 마법이나 술법 종류라면 굳이 몸을 감출 이유는 없을 것 같지만 여하튼 미리미 리 대비를 하는 것은 나쁠 것이 없다. 이제는 주위동화맨이 된 녀석은 벽에 붙은 상태로 천천히 이 쪽을 향해서 접근 중이 다. 이럴 때, 신경 쓰지 않고 그냥 범위 마법으로 한 방 갈기면 좋겠지만 그렇게 하면 이 숙소가 망가지게 되니까 자톤이 상당히 가슴아파 할지도 모른다. 나는 일단 나에게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 아이스 대거를 세 개를 형성시켰다. 투명화 상태에서 마법을 실현 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숫자가 많지 않고 크기도 큰 편이 못된다. 하지만 충분히 견제의 효과는 있을 것 같다. 휙, 휙, 휙 세 개의 마법 대거는 약간의 시차를 두고 녀석이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퍼퍼벅. 하지만 녀석은 그 자리에서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모두 피해 버린 모양인지 벽에 세 개의 구멍이 나는 것으로 마법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호호, 그만 쉬세요. 계속 서 계시면 힘들잖아요.” 수아의 말이 들리고 검은 복면 두 번째도 쓰러졌다. 옷이 상당이 너저분해 진 것으 로 봐서 고생이 심했던 모양이다. “호호, 편히 쉬세요. 호호, 음? 아이 오빠. 뭐하는 거예요? 아직도 못 잡았어요? 빨 랑 빨랑 잡고 우리 거울이나 보면서 놀아요. 호호” 수아는 탈탈 손을 털며 혼자 방안에서 으쓱 포즈를 취한다.(으쓱 포즈란 나 잘했지 멋지지 대단하지의 뜻을 담고 어깨를 펴고 조금은 잘난 척 하는 포즈다. 다른 사람이 하면 짜증나지만 수아 같은 아이가 하면 너무 귀엽다. 하하) 그럼 빨리 상대를 제압하지 못하면 면목이 서지 않는 일이다. “중압.” 나는 투명화 마법에 신경을 쓰지 않고 녀석의 기척이 감지되는 곳에 중력의 힘을 가 중시키는 마법을 걸었다. 굉장히 넓은 범위는 아니지만 상대가 한 번의 움직임으로는 피할 수 없는 범위 마법에 해당한다. 쿠쿡-퍽. 덕분에 바로 그 곳에 놓여있던 나무 가구가 찌그러져 버렸다. 그리고 물론 녀석도 찌 그러 지기는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하지만 환수의 능력인지 여전히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만 나오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비록 모습이 보이지는 않지만 어디에 있는지는 이 미 들킨 상태에서 계속 모습을 감추려고 하는 것도 민망한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 까?” 중압 마법을 쓰면서 이미 모습이 드러난 나는 녀석의 기척을 향해서 말했다. “오빠? 정말 저기 있는 거 맞어? 그런데 안나오네? 나같음 오빠말 들었으면 그냥 나 오겠다. 오빠. 안나오면 가꾸 때려버려, 쾅쾅쾅쾅 때리면 정신 차리고 나올꺼야. 히 히.” 어쩐지 수아가 사악하게 느껴진다. 예전에는 이런 적이 없었는데 일주일 가까이 싸 움 구경을 하더니 애가 바뀌는 것 같다. 역시 환경이 중요하다. 환경이 좋아야 애들 이 바로 크는 거다. “좋아 그럼 시키는 대로 한 번 해 볼까? 중압 4연타!!” 퍼거걱 순식간에 녀석의 기척이 느껴지는 자리에는 4번의 중압이 가해졌다. 이런 경우 저 안에 있는 것들은 약 1톤짜리 물건으로 얻어 맞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걸 한 순간에 4번이나 맞으면 많이 아프다. “잉? 오빠 그래도 안나오잖아. 정말 저기 있는 거야? 아닌 것 같은데...” “무슨 말을 오빠 말을 믿어 분명히 저기에....” 나는 말하는 순간 수아의 뒤에서 이상한 기척을 느꼈다. “차앗 실드,” “아악!” 퍼-엉 “챗, 이런.” 녀석이 수아에게서 떨어져 나간다. 상황설명은 이렇다. 녀석의 기척이 갑자기 수아의 뒤쪽에서 느껴진다. 다급한 나는 실드를 전개한다. 수아는 갑작스런 상황에 놀라서 비명을 지른다. 간신히 생성된 실 드 에 달려들던 녀석이 부딪힌다. 투덜거리며 물러난다. “휴~, 큰일 날뻔 했네. 수아야 다친데 없지?” 나는 급히 수아 곁으로 가서 수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우웅, 괜찮아. 안 다쳤어.” 수아는 놀란 모양인지 얼굴이 창백해 진 것 같다. “상당히 비겁한 방법이라고 말하면 좀 그런가요? 아무튼 여동생을 노리다니, 큰일 날뻔 했네요.” 나는 녀석을 노려 보았다. “거의 성공할 뻔 했는데, 아깝군.” 그 사이에 말투도 바뀐 것 같다. “그럼 이제 마무리를 해야 겠지요?” 나는 우검을 들고 녀석에게 몸을 날렸다. 차창, 챙. 휘익 녀석도 제법 실력이 있는 모양이다. 그리 크지 않은 검으로(약 70센치미터 쯤 된다 검날만) 내 검을 잘 막아내고, 유연하게 피해 내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게 공격을 가할 여유는 찾지 못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나는 빠른 시간안에 녀석을 제압하기 위해 검에 기를 불어 넣었다. 푸르게 일렁이는 검신. “이런 오러를 사용한다는 건가? 대단한 검사로군. 마법도 수준급인데 검기도 아니 고 오러를 사용하는 수준의 검사라. 칫 어렵겠네.” 녀석은 그 와중에도 투덜거리면 이리 저리 몸을 피한다. 될 수 있으면 검을 마주 하 지 않으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검이 견디지 못할 테니 말이다. “악, 오빠!” 나는 갑자기 들려오는 수아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 보았다. 그 곳에는 수아의 목에 칼을 대고 있는 또 하나의 주위동화맨이 있었다. 여기 저기 찢어지고 특히 한 쪽 팔은 부러진 모양인지 기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또 하나의 주위동화맨, 나는 칼을 거두고 자리에 서 버렸다. “그만 움직이시고 무기를 버리시지요. 이 귀여운 동생 분이 다치시면 어쩌려고 그러 십니까? 자자 이제 상황이 바뀐 것 같군요.” 수아의 목에 칼을 대고 있는 녀석의 말이다. “그럼 루탄이라고 했지? 이제 우리가 얻고자 하는 물건을 주겠나? 우린 물건만 가지 면 조용히 물러 간다. 그러니 괜한 행동으로 동생을 위협에 빠트린는 짓은 하지 않는 것이 좋지 않을까?” 나와 싸우던 녀석의 말이다. “쌍둥이, 둘이었군. 아주 멋진, 대단한 계획이었어. 어이없이 당해버렸군.” 나는 허탈하게 우검을 바닥에 던져 버렸다. 바닥에 떨어진 우검은 곧 팔찌(팔보호대 와 비슷하다.)로 바뀌었다. “음? 그것도 마법물품인가? 대단한 물건이군. 그럼 왼쪽에 차고 있는 것도 같은 것 이겠군 그래? 그것도 풀었으면 하는데?” 나는 좌검도 풀어 바닥에 던졌다. “그럼 이것도 우리 노동의 대가로 가지고 가도 되겠지?” 녀석은 쌍환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녀석이 쌍환을 쓸 수 있을 턱이 없었다. 기본적 으로 어느 정도의 마나가 필요한 것이기도 했지만, 예전 그 노옴의 말로는 한 번 정 해 진 주인은 바뀌지 않는다고 했으니 말이다. “응?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지 모르겠군. 뭐 나중에 연구해보면 알 수 있겠지. 그럼 이제 루탄씨? 우리들의 보물을 구경해 보도록 할까요?” 물론 녀석이 노리는 것은 화이트 스테이크가 들어 있는 상자이다. “오빠. 주지 말아요. 치잇 나땜에...히힝.” 수아의 큰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런데 정령이 웃는 것은 봤는데 눈물도 흘리나? 혹 시 물의 정령이라서 가능한 것인가? 풍아도 눈물을 흘릴까? 후두둑 쏟아지듯 떨어지는 눈물에 놀란 것은 나 뿐만 아니라 옆에서 수아의 목에 칼 을 대고 있던 녀석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이, 이봐 아가씨 왜 울고 그래요? 내가 뭘 어쨌다고, 울지 말아요. 금방 일을 끝내 고 놓아 줄께요. 이봐 루탄씨 빨리 물건을 넘기라고요. 이 아가씨가 탈수로 쓰러지기 전에 말이예요.” 참 이상한 것을 걱정하는 녀석이다. 물의 정령이 탈수로 쓰러진다니... 물론 물의 정 령이 물이 없으면 쓰러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어떻게 물의 정령에게서 물이 떨어지기 를 바라는 걸까? 나는 어쩔 수 없이(솔직히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뱀이 들어있는 상 자에 걸었던 일루젼 마법을 해재했다. “이제 그 상자를 나에게 넘겨라.” 역시 싸가지 없이 반토막으로 말을 하는 것은 나와 싸우던 녀석이다. “내가 이 상자를 넘기면 수아를 돌려준다고 어떻게 믿지? 이렇게 하지. 너는 창 쪽 에 서고 너의 반쪽과 수아는 문 앞에 서서 내가 문 앞에 수아에게 걸어가면 너는 창 쪽에서 이 상자가 있는 곳으로 걸어오는 것이다. 그렇게 교환을 하는 것이 어떤가?” 나는 말을 짧게 잘라먹는 녀석에게 제안을 내 놓았다. “하하, 그것 참 좋은 방법이군. 하지만 내가 그런 제안에 응할 이유가 어디에 있 나? 자신이 유리할 때, 그런 제안에 응하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라네.” 녀석은 비웃음을 지으며 나를 보았다. “이젠 더 이상 쓸데 없는 소리 하지 말고 상자를 넘겨라. 야! 그 아가씨의 머리카락 이라도 좀 잘라드려라. 그래야 정신을 차릴 모양이네. 아니면 손가락이나 팔도 괜찮 고.” 나는 녀석의 말에 다급하게 외쳤다. “상자는 여기 있다. 동생을 건드리지 말아라.” 나는 급하게 상자 옆에서 떨어졌다. “후후 허튼 짓은 하지 않는 것이 좋아. 내 동생이 비록 마음이 여리기는 하지만 한 번도 일을 하는데 그 마음 때문에 상황을 어렵게 만든 적은 없거든. 뭐 나중에 펑펑 울기는 하지만 말이야.” 녀석은 그런 경고의 말을 주절거리며 상자로 다가갔다. “그럼 우리는 이만 퇴장을...” 하지만 상자가 움직이지를 않는다 거기다가 알람 마법까지 울리고 있었다. “뭐야 무슨 짓을 한 거냐?” 녀석이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건 상자에 처음부터 걸려 있던 마법일 뿐이야.” “그럼 당연히 그걸 해제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동생의 안전을 고려한다면 말이 야.” 녀석은 상당히 신경질 적인 표정으로 으르렁 거렸다. 나는 상자에 걸린 고정 마법과 알람 마법, 물리 방어 마법을 해제 했다. “여기에 다른 마법이 걸려 있는 것은 아니겠지?” “그게 궁금하면 직접 알아보면 될 것이 아닌가? 뭘 물어보는 거야?” 나도 조금음 뽀족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적어도 9써틀 마법사가 걸어 놓은 추적 마법이었다. 적어도 8써클에 가까운 마법사가 아니라면 찾기 어려울 것이었기에 자신하는 것이다. 녀석은 상당한 크기의 상자를 꺼든히 들고 쌍둥이 동생에게 다가갔다. “이제 동생을 보내라. 더 이상 너희를 잡지 않겠다. 동생만 무사히 보내준다면 말이 다.” 나는 이제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 된 듯 녀석들에게 수아를 돌려 줄 것을 요구했다. 뭐 물건이야 추적 마법이 걸려 있으니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을 터였다. 나에게 우선 중 요한 것은 수아의 안전인 것이다. 정령으로서의 수아야 별 위협을 당하는 상황이 아 니 지만 동생으로서의 수아는 상당한 위험에 있으니 최선을 다해서 구해야 하는 것이다. “동생은 우리가 안전해지면 보내 주지. 그 전에는 보내 주기가 어렵지 않을까? 겨 우 너의 말을 믿고 안전을 포기 하는 것은 싫어서 말이야.” 여전히 느글거리는 녀석이다. “더 이상 나를 자극하지 말아라. 비록 사람을 헤치고 싶지 않아서 지금까지 순순히 대해 주기는 했지만 너무 몰아 세우면 나로서도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일이다.” 내 목소리는 차가워지고 있었다. “호오? 그래서 동생의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말이냐? 응? 그래? 그럼 한 번 해봐. 해 보라니까?” 녀석은 한 쪽 어깨에 상자를 둘러 매고, 다른 한 손에 든 칼로 수아의 뺨을 툭툭 치 고 있었다. 물론 칼날로 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때마다 흠칫흠칫 하는 수아의 떨리 는 모습이 너무 안스러웠다. “너어! 그만 두지 못해?” 나도 모르게 흥분한 목소리가 튀어 나온다. 하지만 “좋아 결정했다. 너희들을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 주겠다. 너무 사람을 궁지 로 모는 것은 좋지 않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했건만 이런 결과를 자초 한 것은 너희 잘 못이다.” 나의 목소리는 다시 차분해 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수아와 쌍둥이들 사이에서 공간이 흔들렸다. 그리고 수아를 안아든 광아가 녀석들에게서 튕기듯 쏘아져 나왔다. “이 이런, 튀어.” 상당히 상황 판단이 빠른 녀석이다. 녀석은 곧장 창문 쪽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나는 녀석을 그냥 보내 줄 생각이 없었고, 또한 창문 턱으로 올라서는 풍아 도 마찬가지 생각인 모양이었다. “신세를 졌으면 갚고 가야지요. 우리 오빠 굉장히 화가 난 것 같은데 말이죠.” 차창-! “헛.” 창문으로 달아나던 녀석은 다시 방안으로 튕겨 들어왔다. “형, 상황이 영 깔끔하지 못하네. 반성하라구.” 문쪽으로 화아와 지토가 들어오고 있었다. 광아는 수아를 안고 등을 다독이고 있었다. “수아 괜찮지? 형님 수아를 이렇게 겁먹게 하다니 반성하셔야 겠습니다.” 광아도 나에게 한 소리를 한다. “음, 면목이 없구나.” 내 목소리는 낮게 가라 앉아 있었다. 동생들의 말이 농담인 것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나에게는 상당한 질책으로 다가 오 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내 몸의 기운을 모두 끌어 올렸다. 방안으로 거대한 기운이 퍼져 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평소에는 갈무리 되어있는 힘이지만 이렇게 방출하면 상당한 무게감을 지닌다. 이럴 때는 동생들도 가까이 오기 어려워 하기 때문에 평소에는 절대 보이지 않는 기운이다 . “이런, 루탄 형이 정말 화가 나 버린 모양이네. 어쩌지?” 화아의 걱정스런 목소리다. “뭐가 걱정이야? 우리한테 화내는 것도 아니고 불쌍한 건 저 녀석들이지.” 지토는 그래도 여유만만이다. 나는 몸 주위로 간단한 파이어 애로우를 형성시켰다. 숫자는 단 두 개. “이걸 잘 피해봐라. 피하면 곱게 놓아주지.” 나는 파이어 애로우를 녀석들에게 한 발씩 날려 보냈다. 느릿느릿 날아가는 불화살. 하지만 녀석들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풀어내는 기 운의 영향도 있지만 이 파이어 애로우의 정식 명칭은 추적파이어애로우 인 것이다. 오 직 쌍둥이 형제의 마나 파장에 맞추어 만들어진 그들만을 위한 선물. “잘 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단순한 파이어 애로우가 아니니까 말이다. 그건 포이 즌 합성 애로우다. 맞으면 독에 중독되기도 하지. 아마 힘들꺼다.” 아무리 느리다고 하지만 날아가는 것이다. 불화살은 벌써 녀석들이 있던 자리를 지나 가고 있다. 물론 그 느린 화살을 처음부터 맞아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나는 방 전체에 9써클 결계를 쳤다. 처음부터 이런 결계였으면 아무도 들어오지 못했겠지만, 동생들과 용병대를 이끄는 재미가 없어지기 때문에 발동하지 않았던 것인데 이제는 상황이 달랐다. 녀석들은 불화살을 피했지만 언제까지나 피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얘들아 우리는 그만 나가자. 저들은 저렇게 두고.” “하지만 오빠, 저렇게 두면 견디지 못하고 언젠가는 죽을텐데...” 수아는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상관없는 일이다. 남을 헤치려고 한 녀석은 당해도 싸. 난 저런 녀석에게 배풀고 싶은 동정은 없다. 나가자.” 나는 쌍둥이 형이 어느틈에 내려놓은 상자를 마력으로 당겨서 어깨에 둘러 매곤 결 계 밖으로 발을 옮겼다. 수아등도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따라 나왔다. “으아악, 제발 이걸 치워줘. 니가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아직도 기운이 펄펄해서 날뛰는 쌍둥이의 형이다. 아무래도 동생은 부상이 심해서 오래 버티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봐 내가 충고 하나 할까? 그 속에서 둘 중에 하나는 살 수 있을 거야. 생각해 보 면 방법은 아주 간단하지. 희생을 하라구. 동생을 위해서 형이 죽던가 아니면 동생이 형을 위해서 죽던가. 그것도 아니면 상대를 방패로 사용해도 되고. 그건 알아서 하도 록 해. 내 동생을 데리고 협박을 한 대가다. 그럼 조금 있다가 다시 보자구.” 나는 그 말을 끝으로 지토와 동생들을 데리고 1층 응접실로 내려왔다. 화아 등이 쓰러진 5명의 인원들을 챙겼다. “괜찮은 거니 수아야? 미안하다 오빠가 지켜주지도 못하고...” “아니예요 오빠. 그 땐 전혀 예상치도 못한 상황이었는 걸? 똑 같이 생긴 사람이 둘 이 있을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참 멋진 방법이었던 것 같아요.” 수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화아 등에게 아까 있었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 그러니까 그렇게 오빠가 싸우고 있는데 지금까지 묵묵히 맞고만 있어서 잘못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 곳에서 동생이 튀어 나온거야. 호호 나도 얼마나 놀랐다고. 보 니까 팔도 하나 부러지고 몸도 많이 다쳤던데. 그러고도 암 소리 않고 있었다니 대단 하지 뭐야. 호호 그런데 아무래도 그 동생이 먼저 쓰러지겠지? 불쌍하다.” 수아의 말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거 참 대단한 방법인데요? 만약에 제가 쌍둥이면 그 방법은 정말 좋은 방법이 될 것 같군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환수는 어떤 종류일까요? 궁금하네 요.” 광아는 자기와 비슷한 능력을 지닌 것 같은 환수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글쎄... ??! 음.” “왜 그래? 형 표정이 이상하네.” “음 방금 파이어 애로우가 둘 다 사라졌다. 위에서 결과가 나온 모양이네. 올라가 봐야 겠다.” 내가 몸을 일으키자 모두들 따라 나선다. “여기서들 기다리고 있어라. 이 상자를 지켜야지. 그리고 수아는 오빠랑 같이 좀 가 자. 어쩌면 네 힘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아니라면 최악이겠 지.” 나는 모두들 의아해 하는 모습을 뒤로하고 수아를 데리고 다시 2층으로 올라왔다. “어머 오빠. 저 사람.” 수아는 놀란 모양이었다. 결계안에 쓰러져 있는 것은 예상 밖으로 쌍둥이의 형이었다. 그 옆에는 만신창이가 된 동생이 형의 머리를 허벅지에 올려 놓고 앉아 있었다. “형, 형 정신 차려. 이게 뭐야? 왜 이랬어. 형은 멀쩡하고 나는 다쳤으니까 내가 내 가 대신 죽어야 하잖아. 그런데 왜 왜이런거야 형. 흐윽.” 동생의 얼굴에는 눈물이 범벅이 되어 있었다. 쯧 스물이 넘은 사내 녀석이 얼굴 전체 에 눈물 범벅이 된 것은 좀 이상하기는 했지만 워낙 얼굴이 귀엽게 생긴 탓인지 그리 심한 위화감은 없었다. “하아, 괜찮아. 이제 너는 괜찮을 거야. 저들이 약속을 지킨다면 너는 살 수 있을거 야. 하아, 하아, 그 동안에 내가 너를 너무 많이 고생을 시켰어. 하기 싫다는 암살이 나 시키고, 도둑질이나 시키고... 하아, 하아. 하지만 하지만 내가 너에게 냉정하게 했지만, 내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언젠가는 언젠가는 말하고 싶었는데... 미 알 란, 미알란 이제는 도둑질도, 암살도 하지 말고 니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그렇게 살 아. 이제는 길드에 빚도 없으니까... 자유롭게.... 나도 너와 함께 자유롭게... 살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형의 힘겨운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형, 무슨 소리야. 빚이 없다니? 아직 길드의 빚은 많이 남았단 말이야. 그리고 형 이 없으면 그런 게 무슨 소용이 있다는 거야? 형 정신 차려.” 나는 녀석들의 곁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이런 우애가 아주 깊으신 형제분들이네? 그런데 남의 형제를 인질로 삼아 위협을 하다니 상당히 이기적이 형제들이네... 그런데 이제 이 동생분만 남게 되었으니 어쩌 면 좋은가? 혼자라서 외롭겠군.” 나는 일부러 비꼬는 투로 말을 쏟아 내었다. “루탄님, 제발 우리 형을 살려 주세요. 제가 제가 대신해서 용서를 빌께요. 잘못했 어요. 잘못했으니까 우리 미알린 형 좀 살려줘요. 제발...” 미알란의 젖은 얼굴이 처절하기까지 하다. “후후, 미알란, 내가 한 이야기를 잊었구나. 자신에게 유리한 경우에는 상대의 편의 를 봐서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는 사람은 바보란다. 욱,우욱.” 미알린은 말 끝에 한 모금 피를 토해낸다. “형, 형. 제발 정신 차려 형.” “이, 이봐. 그런데 내 동생은 정말 살려 줄 건가? 그 파이어 애로우를 피하면 살려 준다고 하지 않았나? 물론 크게 기대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하아, 하아.” 녀석은 몹시도 숨이 가빠오는 모양이다. “내가 그래할 이유를 모르겠군. 일단 몇 가지를 알아보고, 예를 들어 어디에서 누구 의 사주를 받고 왔는지 하는 그런 것들 말이야.” 나는 여전히 무심한 어투로 녀석들을 위협하는 중이다. “오빠.” 갑자기 수아가 나를 불렀다. “응? 왜?” “근데 이상하다 저 사람, 왜 아직 안 죽는 거야? 제법 시간이 오래 지났는데 아직 도 안 죽고 있네? 아까보다는 혈색도 많이 좋아진 것 같기도 하고... 오빠가 마법을 잘못 쓰지는 않았을 테고.” 수아는 이상하다는 듯이 미알린의 얼굴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허엇 눈치가 빠르네. 어떻게 알았지? “하하 들켰다. 수아는 역시 머리도 좋고, 관찰력도 좋고 대단해. 하하” 수아는 내 칭찬에 입이 함지박만큼 벌어져 좋아한다. “구럼 구럼, 내가 누구 동생인데. 호호. 오빠 저 미알린이라는 사람 죽는 거 아니 지? 그치? 어떻게 된 건지 설명 좀 해봐. 궁금하잖아.” 수아가 제촉을 하고 미알린과 미알란 형제도 의아한 눈으로 쳐다본다. “뭐 별건 아니었어. 그냥 파이어 애로우에 중독을 걸기는 했는데, 둘을 동시에 맞으 면 독성끼리 중화되도록 한 것 뿐이야. 물론 중화되는 동안에는 몹시 괴롭기는 하지. 그리고 이건 만약이었는데 둘 중의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희생시키고 살아나고자 했 다면 나는 오늘 여기서 살인을 했을지도 몰라. 아까 밑에서 네 힘이 필요하면 다행이 고 그렇지 않으면 최악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말이었어. 이제 네가 일단 적당히 너 녀석들 치료를 해줘. 혈도는 힘을 못쓸 정도로 점해두고.” “응, 알았어.” 수아는 곧 쌍둥이 형제의 혈을 점하고는 치료를 시작했다. 녀석들도 더 이상은 반항을 하고 싶지 않았는지 수아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수아는 미알란의 팔의 뼈를 맞추고 마법으로 접골을 시켰고 외상도 힐을 써서 아물 게 했다. 그리고 미알린의 가슴에 난 파이어 애로우의 상처도 치료를 마쳤다. “쓸데없는 반항을 할 생각 하지 말고 따라와라. 이번에도 반항을 하거나 허튼 짓을 하면.... 그 뒤는 알아서 상상해라.” 나는 수아와 함께 먼저 1층을 향해서 발을 옮겼다. 뒤에서 주춤거리는 형제의 발걸 음 소리가 따라오고 있었다. “응? 왜 이녀석들을 데리고 온거야? 형. 그러고 보니 상처도 다 치료를 해 준 모양 이네? 내 참 그럴거면 아까 그냥 잡아서 끌고 오지 뭐하러 그렇게 고생을 해?” 우리 가 들어서자 화아가 궁시렁 거린다. “그러게. 무슨 일이지? 참나.” 풍아도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이다. “있잖아 아까 오빠가...” 역시 이런 때에는 수아가 다 설명을 해 주니 좋기는 하다. 거기다가 아까 칭찬을 받 은 것도 있어서 그런지 신이 난 모습이다. “이렇게 된거야. 호호.” “그런데 왜 그렇게 한 거지? 이유를 모르겠네...” 여전히 의하한 표정의 화아와 다른 녀석들, 그건 수아도 마찮가지 인 것 같다. “그럼 내가 잘 설명을 해 줄게. 야 그리고 너희도 잘 들어.” 나는 미알란 형제에게도 말했다. 갑작스럽게 내가 자신들에게 뭐라 하자 깜짝 놀랐는지 한 녀석이 목을 움추린다. 아 마 동생 일 것이다. “너희도 아는 것처럼, 내가 처음에 이 숙소에 오는 녀석들 최소한 죽이지 말고 제압 을 하라고 했을거야.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는 지토와 동생들 그런데 쌍둥이는 왜 고개를 끄덕이는 거야? “아무튼 내가 너희들에게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한 건, 나도 사람을 죽여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어쩌면 사람을 죽이고 나면 무서워 질 것 같았기 때문이야. 우리들이 가 진 힘은 상당히 큰 편이잖아. 그런데 어쩌다가 사람을 죽이게 되면 처음에는 충격을 받겠지만 그 충격을 이겨내고 나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잖아. 사람이란 자기 합 리 화를 잘 시키는 족속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어쩌면 사람을 죽이는 것에도 자기 합리 화 를 시킬지 모르는 일이고, 그럼 우리들의 능력으로 볼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 는 일이지. 그래서 사람을 죽이고 싶지도 죽이게 하고 싶지도 않았던 거야. 그런데 이 쌍둥이 녀석들이 나를 화나게 만들었거든, 나한테는 너희들뿐인데 수아를 상대로 아주 치졸한 짓을 했다 이거야. 그래서 그 때는 정말 죽여버릴까도 했는데, 그래도 사 람을 죽이는 것은 좋지 않을 것 같아서 기회를 주기로 한 거야. 둘이 형제일 테니까, 형제끼리 서로 희생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었어. 그렇게 자기 형제를 아끼는 녀석들 이 라면 좀 더 살려둬도 될 것 같았거든. 그래서 그런거야.” “그럼 루탄형님. 만약에 둘 다 파이어 애로우에 맞았으면 어떻게 할려고 그랬어 요?” “그런 경우? 그럼 그냥 두는 거지 뭐. 내가 분명히 한 사람은 살 수 있는 방법을 가 르쳐 주었고, 화살도 빠르지 않아. 그러니까 그런 멍청한 결과가 나온다는 것은 희생 정신은 전혀 없는 거라구. 혹시 또 몰라 서로 자기에게 향한 화살이 아니라 상대의 화 살을 맞아서 누워 있는 상태라면 말이 달라지겠지만...” “그렇군요. 그런데 이제 저 사람들 어떻게 하실 거예요?” 광아가 다시 물었다. “글쎄, 일단은 내 푯말 뒤에는 아무도 없으니까 내 푯말 뒤에 세워 둬야지. 하하 그 리고 나머지는 나중에 생각하지 뭐.” “그럼 이제 남은 건, 저들을 심문해서 배경을 알아내고 가둬두는 것 뿐이네요?” “그렇지. 그리고 화아하고 광아가 심문을 해 봐라. 난 좀 쉬어야 겠다. 이제 각자 떨어져서 사람들 상대하는 것도 피곤하니까 여기에서 그냥 함께 이걸 지키도록 하 자.” 나는 우리들 앞의 탁자에 놓인 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런데 오빠? 이 안에 들어있는 뱀들 괜찮을까요? 아무것도 안 먹고 여기 들어 있 는건데...” 풍아의 질문이다. “괜찮아 한 두어 달 굶어도 안 죽는다고 했으니까. 거기다가 알을 가진 암컷은 그 기간동안은 아무것도 안 먹는다니 상관 없을 거야. 그렇게 궁금하면 한 번 보면 되 고...” 나는 상자에 투명화 마법을 걸었다. “어머, 오빠. 이것 좀 보세요. 암컷들이 또아리를 틀고 있어요.” 수아가 신기한 듯이 소리를 높혔다. “응? 이 녀석들 알을 낳는 중인 모양이네? 이렇게 또아리를 틀고 그 안에 알을 낳거 든 그리고 하루가 지나면 또아리를 푸는 거야. 내일이면 이 녀석들의 알을 볼 수 있 겠 구나. 은빛 알이라고 그랬는데 빨리 보고 싶은 걸?” 나는 동생들이 알아듣기 쉽게 설명을 했다. “응? 정말 정말 은빛이야? 크기는 얼만한데? 응 예뻐?” 역시 수아는 막내 다운 맛이 있다. 이렇게 귀여우니 말이다. “하하, 수아야 오빠도 직접 본 적은 없으니 잘 모르지.. 내일 같이 보도록 하자.” 내 말에 수아는 섭섭한 듯 하면서도 쇼파에 일으켰던 몸을 앉혀다. 그리고 그 후는 화아와 광아가 쌍둥이 형제를 심문하고(실제로 심문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물어보는 것에는 꼬박꼬박 대답을 했기 때문에... 물론 성질 있어 보 이는 미알린은 입을 다물고, 서역 좋은 미알란이 대답을 했다.), 우리는 그 광경을 보 는 시간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나온 결과를 대충 점검하면 이런 것이다. 미아린 형, 미알란 동생. 특기는 환수를 이용한 주위환경과의 동화. 때문에 습격이 나 암습. 그리고 도둑질에 능함. 소속은 마췬길드(도둑 및 암살 길드)이며 이번 임무 는 길드장의 명령이었음, 길드장의 개인적인 명령인지 혹은 의뢰인지는 알 수 없음. 두 형제는 어려서부터 길드에서 양육됨, 현재는 그 양육비를 갚고 있는 중. 미알린이 미알란의 양육비 명목의 빚은 다 갚은 상태. 하지만 아직 상당액의 빚이 남아있음. 암 살과 도둑질에서는 상당히 알려진 형제임. 이상이다. 그리고 아침이 되었을 때, 드디어 내 푯말 뒤에는 세 명의 사람이 앉아 있게 되었다. 쌍둥이 형제와 평상복 복면인(이 놈은 도둑이 아니라 용병이란다. 이 기회에 한 몫 을 잡아 보려고 했다는데 용병 사이에서는 꽤나 알려진 인물이란다.)이 바로 그들이 다. 제법 지명도가 있어서 시시함 조무래기 보다는 내 명성이 높아질 것이다. 카카카 역 시 한 번에 큰 걸 노려야 하는거다. 뭐 다른 녀석들이 내가 녀석들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이 자기들의 도움 때문이라고 생 색을 내기는 했지만 어떠랴 다른 사람은 모르는 일인데 하하하. 그리고 의외로 마지막 날 밤에는 숙소 주위를 서성이는 사람들이 없었다. 아마도 이번에 우리를 노린 최고 고수는 미알린 형제인 모양이었다. -거금 400억 덴 크흐흐흐... - 그렇게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경매일 아침이 밝았 다. “자 빨리 경매장으로 가자. 우하하 오늘 우리는 부자가 되는 거야. 하하하.” 나는 아침부터 서두르고 있었다. “형님, 아무리 일찍 가면 뭘 합니까? 경매는 점심을 먹을 후에 시작한단 말입니다. 우리도 아침 먹고, 점심 먹고 그리고 나서 느긋하게 가도 되는 겁니다. 좀, 무게를 가 지세요. 안그러던 분이 갑자기 그렇게 체신없이...” 이럴 때, 광아는 딴 사람이 된 것 같다. 흐음. 도무지 감이 안 잡히는 녀석이다. “그런데 저 밖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지? 자간 시에서는 현상범이 많이 있다고 경비대에 넘기라는 모양이던데, 다행히 이 숙소가 자톤 양반의 것이어서 함부로 들어 오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화아의 말이다. “그냥 놔주면 안되나요? 그래도 오래 고생한 사람도 있는데... 잡혀있는 동안에 도 망도 안가고... 불쌍하잖아요.” 천사표 수아의 말이다. “저런 녀석들 놔준다고 좋은 건 아무것도 없어. 전부 도둑 아니면 암살범이고 용병 이라고 해도 불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놈들이라면 다른 사람들에게 해악 밖에는 안 되는 거야. 그냥 경비대에 넘겨.” 아주 논리적인 지토의 말이다. 다시 한 번 느끼는 거지만 지토나 동생들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인간에 가 까워지고 있다. “그래도...” 수아는 여전히 미련이 남은 듯이 나를 돌아 본다. “뭐, 내 생각에는 우리가 저 사람들이 나쁜 짓 하는 걸 본 것도 아니고 피해를 입 을 것도 아니고 또, 우리가 저들을 경비대에 넘긴다고 세상이 그 만큼 깨끗해지는 것 도 아니면 처음 약속대로 그냥 풀어 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적어도 우리는 약속은 지키는 거잖아? 뭐 숙소 안에서 풀어 준다는 소리니까 밖에 있는 경비대를 피해 가는 것은 알아서 할 일이고 말이야.” 내가 이렇게 이야기 하자. 다들 별 반대는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지 뭐. 능력이 없어 못가는 것까지 책임을 질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지토도 별다른 반대가 없이 수긍을 해 준다. 그래서 우리는 그 동안 잡힌 사람들을 모두 모아두고 그런 상황을 설명을 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경매장으로 가고 나서부터 여러분은 여러분 하고 싶은 데로 하 세요. 일단 혈도는 점심 때 쯤에 다 풀리도록 해 뒀으니까 걱정들 하지 마시고요. 그 럼 모두 잘 도망가세요. 호호호. 행운을 빌어요.” 수아가 제일 신이 난 모양이다. 그리고 사람들도 풀어 준다는 말에 얼굴에 화색이 돌 고 있었다. 팔 다리가 정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도망을 가지 못하고 있기는 했지만 정말도 놓아 줄거라고 생각은 못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헤~ 벌어지는 입으로 연신 고맙다는 말을 했다. 물론 그건 대부분 용병 출신과 도둑 출신의 녀석들이었고, 암살자 출신의 녀석들은 냉기가 풀풀 날리는 얼굴에 약간의 표정 변화만이 있었을 뿐이다. 지토와 우리 형제는 좀 일찍 점심을 먹고, 자톤이 보내준 마차에 올랐다. 경매장까지가 멀지는 않았지만 일단은 너무 쿤 관심의 대상이 된 우리들을 배려하려 는 의도인 모양이었다. 다행히 우리들은 경매물품의 호위 용병이지 경매 물품의 주인은 아니었다. 그렇게 소 문이 나 있다는 말이다. 경매 물품은 주인이 원하지 않으면 주인을 밝히지 않는다. 대 신 경매장이 그 물품에 대한 보증을 서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물건은 보증을 설 필 요 도 없었다. 누가 유사품을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처음부터 주인이 있었던 물 건 도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곧 마차는 경매장 앞에 도착했고, 경매장 앞에는 온갖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마차에서 내리기 전에 상자에 투명화 마법을 걸었다. 아직도 암컷들은 또아리를 풀지 않고 있었고 다들 건강한 모습이었다. “광아와 화아가 앞뒤에서 들고 들어가자. 그리고 풍아와 지토는 뒤쪽을 맡고, 정면 은 내가 측면은 광아 화아 수아가 맡는다. 그럼 가자.” 우리는 차례로 마차에서 내렸다 “와~! 저게 그 화이트 스네이크로군. 저게 그렇게 비싼 건가?” “저게 많이 비싸기는 하지만, 중요한 건 암컷이 있다는 거야. 그러니까 사육을 해 서 키울 수 있게 되었다는 거지. 대단하잖아. 화이트 스네이크의 사육이라니 말이 아.” “저걸 오늘 사는 사람은 일년 후부터는 엄청난 부자가 되겠군.” “그러게나 말이야. 정말 돈이 돈을 버는구먼. 우리 같은 사람이 언제 저런 경매에 참가할 엄두나 낼 수 있겠나 말일세.” “그렇지. 예상 경매 가격이 300억 덴이란 소문이 있던데?” “정말인가? 아 좀 그만 밀어? 왜 이리 밀고 그래?” “내가 밀고 싶어 미나? 뒤에서 밀잖아.” “아 앞에 사람들 좀 앉아 구경이라도 좀 하자.” “아구구. 누가 밟는 거야?” 경매장 앞에는 구경꾼들로 발디딜 틈도 없었다. 다행히 경매장으로 들어가는 길은 경매장에서 파견한 경비병들에 의해서 통로가 만들 어져 있었다. 우리는 그 사람들의 벽으로 만들어진 통로를 따라 경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긴장한 것과는 달리 그 사이에 어떤 도발도 없었다. “이제부터는 좀 마음을 놓아도 되겠지만, 그래도 경매가 끝나서 대금을 받기 전까지 는 긴장들 풀지마라.” 나는 일행을 돌아보며 다시 한 번 주의를 주었다 “호호, 걱정하지마 오빠. 잘못하면 우리 돈이 날아가는데 당연히 최대한 조심을 해 야지.” 풍아는 주위에 다른 사람이 있었지만 큰 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그저 사람들은 우리가 호위를 잘못하면 호위대금을 받지 못하게 된다는 소리도 들었 을 것이다. 우리는 경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경매장은 예전 영화관처럼 경사진 좌석들이 배열되어 있고 그 앞에 단상이 있는 형태 였지만 우리들이 들어간 곳은 무대 단상으로 바로 통하는 곳이었다. 아직 경매가 시 작 되지 않은 까닭에 객석과 단상 사이는 커다란 칸막이로 막혀 있었다. 칸막이에서 마나의 응집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서 칸막이 자체가 마법적인 힘을 지 닌 것으로 보였다. 우리는 단상의 테이블 위에 상자를 올리고 양 옆으로 세 개씩 놓인 의자에 앉았다. 나와 수아 광아가 같이 앉고 화아 지토 풍아가 같이 앉았다. “허허, 그동안 아주 유명해 지셨습니다. 이제 ‘란의 용병대’라는 이름은 이 대륙 곳곳에서 유명해질 겁니다. 아니 벌써 유명해지고 있다고 해야겠지요. 조금만 기다리 시면 경매가 시작될 겁니다. 그리고 이건 오늘 경매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신원과 좌 석 배정표입니다. 경매중에 상대를 파악하시는데 도움이 되실겁니다.” 어느 틈에 다가온 자톤이 몇장의 서류를 꺼내주었다. 나는 천천히 그 서류들을 살폈다. 그 중에는 이번에 나에게 잡힌 사람들을 고용했던 이름들도 제법 보였다. “어머, 이 사람들도 있네요. 호호. 경매에 나오면서 사람을 시켜 훔치려고 하다니, 오빠 이 사람들한테는 팔지 말아요.” 수아도 옆에서 명단을 보다가 화가 난 것처럼 씩씩 거린다. “수아야, 그 일은 그 일이고 이 일은 이 일이지. 이들이 비싸게 준다면 판다. 그리 고 나서 나중에도 왠지 분이 안 풀리면 그 땐 분풀이를 하는 거야. 어떻게 생각하 니?” 나는 은근히 수아를 달랬다. “히히, 그게 좋겠다. 일단 챙길 건 챙기고, 나중에 혼을 내 주는 거야. 역시 오빠 가 최고야. 히히” 건너편에 앉은 화아와 지토 등도 같은 서류를 들고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역시 자톤 이라는 인물을 꼼꼼한 인물이다. “자 이제 곧 경매가 시작되겠습니다. 경매에 참여하시는 분들은 자리에 착석해 주시 기 바랍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배정된 번호표가 놓인 자리에 앉아 주시기 바랍니 다.” 어디선가 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마법을 이용한 것 같았다. “그럼 오늘의 경매 물품을 발표합니다. 화이트 스네이크 3쌍입니다.” 알의 모소리와 함께 객석과 단상을 막고 있던 불투명한 칸막이들이 바닥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테이블 위는 사방의 마법등으로 환하게 비춰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3마리의 암컷 화이트 스네이크가 또아리 를 풀고 그 속에 감추었던 알들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얀 어미의 또아리 속에서 드러나는 은빛의 알들, 겨우 손가락 두 마디 크기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렇게 작았기 때문에 더욱 신비한 보석같은 모양이었다. “루탄 형님 저 알도 상당한 고가에 거래되겠군요. 저대로 상품화 한다면 대단히 아 름다운 악세사리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끝에 앉아있던 광아의 평가였다. 만약에 저 알들을 저 상태로 변하지 않게(이를테면 부화를 한다거나 혹은 썪는다거 나 혹은 색이 변한다거나) 잘만 가공할 수 있다면 정말 훌륭한 장신구가 될 것 같았 다. “네,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로군요. 그리고 지금 보시는 바와 같이 화이트 스네이크 는 한 번에 15-20개의 알을 낳습니다. 그리고 이미 아시는 바와 같이 적어도 1년에 3 번 정도 번식이 가능합니다. 또한 성체가 되는데 걸리는 시간은 1년으로 그리 긴 시 간 이 아닙니다. 이제 여러분은 이 확실한 미래에 투자할 기회를 가지신 것입니다. 더 이 상의 부연 설명은 쓸데 없는 행동이라 곧바로 경매에 들어가겠습니다.첫 경매가는 1 억 덴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경매가 시작되었다. “25억덴,” “네, 9번 좌석의 손님께서 25억덴 부르셨습니다.” 9번 좌석이라. 한타왕국 남부에 자리잡은 상업도시의 영주로 남작이라는 작위를 지 닌 사람이다. “30억덴.” “35억덴.” “40억.” “50...” “...” 경매는 활기차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 경매의 가격이 250억 정도에서 결 정되리라는 예상이 있었던 것에 비해서는 너무 더디게 가격이 오르고 있기는 했지만 꾸준히 가격은 올라가고 있었다. 하지만 지루함을 느끼는 사람은 나 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250억덴.” 순간 경매장에 정적이 찾아왔다. “네, 2번 좌석의 손님 250억덴을 부르셨습니다. 다른 분 안계십니까?” 2번이라. 2번 좌석은 어디보자 루이스 마치 한타라. 한타? 왕족인가? 왜 설명이 빠 진 거지? 겨우 이름뿐이네? “다른 분이 안계시면 2번 좌석의 손님에게 낙찰 시키겠습니다. 하나, 둘,..” “300억덴.” 알의 말을 자르며 또 다른 사람이 액수를 올렸다. “4번 좌석에서 300억덴이 나왔습니다. 또 다른 분?” 4번 좌석은 어디보자. 자이건 썬드라스? 썬드라스 가문이면 한타 왕국의 기사 가문 인가? 그런데 공작이라. 그 사이에 귀족들도 많아지고 체계도 생긴 모양이군. 그런데 한타면 왕족이고 싼드라스면 그 왕국의 귀족인데 서로 싸운다? “300에서 더 없으시면 4번 손님께 낙찰을 드립니다. 하나, 둘,...” “320억덴.” 역시 2번 좌석에서 나온 소리였다. “320억 덴이 나왔습니다.” “400억.” 경매장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네, 400억 덴, 1번 좌석의 손님이십니다.” 나는 이미 1번 좌석의 인물을 명부에서 찾고 있었다. 스원 워터. 여인 왕국의 재상. 재상이라. 그것도 일국의 제상이 이런 자리에 왔다는 말이다. 장내의 소란은 가라 앉았지만 이후의 경매가 어떻게 진행될지에 대한 관심 탓인지 열 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400억이 나왔습니다. 이 이상 없으십니까? 없으시면 1번 좌석에 낙찰을 합니다. 하 나. 둘. 셋. 자간 경매장의 화이트 스네이크 경매는 400억 덴에 1번 좌석의 손님에게 낙찰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알의 선언이 있고 나서 각 좌석에 앉았던 사람들은 제각기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밖으 로 나갔고, 1번 좌석의 인물만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단상 앞에 테이블과 의자가 놓이고 자톤이 1번 좌석의 인물과 마주 앉았다. “그럼, 경매 물품에 대한 대금을 결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톤은 앞에 앉은 인물에게 대금을 청구했다. 그리고 그 인물은 품 속에서 금박이 들어간 카드 4장을 꺼내서 자톤에게 제시했다. “100억 덴씩의 대급 지급을 약속하는 여인왕국의 약속어음이로군요. 이건 약속이 다 른 것 같습니다만, 저희는 현금과 보석만을 취급합니다. 이런 어음으로는 결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아실텐데요?” 자톤의 음성에 은근한 노기가 느껴졌다. 나는 일행들에게 눈짓을 보내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자톤님도 아실 겁니다. 400억 덴에 해당하는 보석이라는 것은, 최고급의 보석들로 만 준비를 해도 큰 마차 한 수레가 넘습니다. 그런데 그런 물건을 들고 여기까지 무 사 히 올 수 없으리란 것은 자명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 것은 저희 경매장에서 알바가 아닙니다. 400억 덴의 액수라면 국가적인 신의 도 충분히 무시할 수 있는 액수입니다. 그런데 단지 지불 약속만을 믿고 어떻게 물품 을 전해드릴 수가 있단 말씀입니까. 이번 거래는 없었던 것으로 하고 재 경매를 해야 겠군요. 물론 재 경매에 대한 설명에 여인 왕국의 이번 행동에 대한 내용도 분명히 포 함할 것입니다.” 자톤의 억양은 강했고, 양보의 의사는 없는 것으로 보였다. “그건 너무 성급한 판단이 아닙니까? 최소한 물건의 주인에게 의사를 타진하는 정도 는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여인 왕국의 재상측도 만만찮은 반발을 하고 나왔다. “이 문제는 우리 경매장의 기본적인 수칙을 어긴 경우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경매 의 무효를 선언할 권리도 저의 경매장 측이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경매 물품의 주인 에게 양해를 구하는 것은 그 이후의 일입니다.” 옆에서 알이 자톤을 돕고 나섰다. “알, 자네는 나설 것 없네. 자네는 빨리 나가서 오늘 경매에 참석한 분들과 접촉을 하고 내일 다시 경매가 열린 것이라는 것을 알리게. 오늘 참석한 모든 분들에게 전해 야 하네. 아무리 액수가 적다 하더라도 경매에 참석하셨다는 점에서 모두 존중을 해 드려야 하니 말일세.” 자톤은 그렇게 알에게 지시를 내리는 것으로 완전히 여인 왕국 재상 측의 항의를 무 효화 시켰다. “이 이런, 지금 우리 여인 왕국을 무시하는 것이오?” 마주 앉은 사내는 주먹을 떨고 있었다. “제가 왕국을 대상으로 무시라는 것을 할 수나 있는 존재로 보이십니까? 저는 귀국 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경매의 규칙도 지키지 않는 당신과 당신을 사주한 사람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규칙을 어겨서 당하는 무시를 귀국에서 약속한 지불 약소을 무시 하는 것으로 외곡하지 마십시오. 전 저희의 규칙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귀하에 게 는 경매가 늦추어 짐으로써 입게 된 피해에 대한 청구서를 내일 아침까지 보내도록 하 겠습니다. 그럼 이만.” 그렇게 말을 마친 자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정말 무지막지한 인물이다. 자톤이라는 사람은. 그는 지금 일국을 상대 로, 그것도 아니면 일국의 재상을 상대로 꼿꼿한 성미를 그대로 내 보이고 있는 것이 었다. “저 자톤이라는 할아버지 상당히 무서운 사람이네. 오빠. 막 느껴지지 않아? 저 할 아버지의 패기가? 멋지다 그지?” 옆에서 수아가 나에게 말했지만 그 소리는 결국 자톤이 마주하고 있던 사람의 인내 를 무너뜨리고 만 모양이다? 쾅! 그는 탁자를 거세게 후려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이 이러고도 무사할 성 싶은가? 이런 식으로 우리 왕국과 재상님을 무시하고 무사할 것 같은가 말이야.” 자톤은 그를 마주 보고 있었지만 어디에도 두려움의 표현은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귀국의 백성인가? 내가 귀국의 재상에게 무슨 득을 보았는가? 그대는 지금 남 의 나라 한가운데서 자기 나라의 힘으로 나에게 협박을 하는 것인가? 그럼 내가 그대 에게 굽히고 잘못을 빌 것 같은가? 기본을 지키지 않은 자가 도리어 내게 화를 내는 것인가?” 도리어 자톤의 노기어린 음성이 여인 왕국의 인물에게 쏟아졌다. 짝짝짝짝- 그 때까지 경매장의 입구 문을 열고 들어와 끝자리에 앉아있던 인물(들어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우리 일행 중에는 없을 것이다.)이 천천히 박수를 치며 자리에 서 일어났다. “하하하, 훌륭해, 정말 훌륭한 연설이야. 정말 대단해.” 그가 앞으로 걸어 나오자 경매장의 입구가 열리며 은빛의 갑옷으로 무장한 일군의 기 사들이 와르르 쏟아져 들어와 단상을 포위했다. 그리고 좌석 끝자리에 앉았던 인물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오면서 단상의 조명에 분명 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자이건 썬드라스. 썬드라스 가문의 인물이니 이 기사들은 썬드라스 기사단일 것이었 다. “자톤씨 정말 훌륭한 말씀이었소.” 하지만 역시 자톤은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자이건님께서는 무슨 일로 여기 이렇듯이 기사들을 끌고 오신 것인지요? 설 마 자이건님께서 기사들을 이렇게 데리고 오신 이유가 여기 있는 경매 물품 때문은 아 니시겠지요?” 자톤은 아마도 자신의 그 생각이 틀리지 않으리란 것을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말로 우리 일행에게 경고를 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이런, 역시 자톤씨는 눈치가 빠르군요. 하지만 눈치가 빠른 것이 언제나 좋 은 것만은 아닙니다.” 자이건 이라는 인물은 여전히 느물거리는 표정으로 자이톤에게 말했다. “그 말씀은 여기 있는 사람들을 해치시겠다는 소리로 들립니다만...”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썬드라스 가문의 기사들이 여인왕국의 첩자를 포 획하는 중에 격렬하게 반항하는 바람에 함께 있던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그리고 경매 장의 주인인 자톤과 그의 아들 알이 죽음으로 해서 경매 물품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때문에 경매 물품을 국가의 재산으로 귀속시키기로 했다. 어떤가 정 말 멋진 계획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어차피 우리가 낙찰을 보았다 하더라도 대금을 지 불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말이야.” 자이건의 긴 설명이 끝나자 우리 일행은 물론 자톤과 알 역시도 허탈한 표정을 지었 다. “정말 한심하군. 수아야 우리 아무래도 돈을 못 벌 것 같다. 그치?” “응.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짜증나고 화나고 그렇기 그지?” “우응. 오빠. 짜증나고 화나고 그래.” “우리 여기 뒤집어 버리고 딴 곳으로 갈까?” 나는 수아와 만담같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옆자리의 광아는 내 분위기를 눈치챈 모양 이었다. “루탄 형님, 우리 돈 좀 있나요? 얼마간은 굶지 않겠지요?” 광아가 물었다. “그야 물론이지. 내가 너희를 굶기기야 하겠냐?” “그럼 형님 마음대로 하세요. 정말 짜증나는 놈들이내요.” 그 때, 반대쪽에 앉아있던 광아가 끼어들었다. “형님 신호만 하세요. 그냥 뒤집어 버리죠.” “루탄 아무래도 돈도 못 벌 것 같은데 그냥 가자. 나도 별로 이런 분위기는 안 좋 아.” 지토가 거들고 나선다. 아무래도 너무 큰 물건을 가지고 왔나 보다. 도대체 왜 이런 뱀 3쌍이 왕국의 우두머리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물론 우리들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이 못 들었을 리는 없었다. 단상 주변을 포위한 기사들은 물론이고, 자이건이나 자톤, 알, 그리고 여인왕국의 재 상측 인물도 들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를 무시하는 것인지 전혀 반응이 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톤님, 저희들은 이 물품의 호위를 맡으면서 물건의 주인에게서 또 다른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경매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에 이 물품을 폐기 해 줄 것 을 부탁받은 것입니다. 때문에 이제 그 약속을 지키려고 합니다. 자톤님의 의견은 어 떠신지요?” 나는 화이트 스네이크가 들어있는 상자위에 손을 올리고 자톤에게 물었다. “죄송합니다. 이 경매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해서 의뢰인에게 피해가 가게 되었 습니다. 만약 경매 물품의 주인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셨다면 저희는 물품의 폐기에 의 의 제기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그간의 경비 일체에 대한 어떤 청구도 하지 않을 것 입니다. 단, 물품 폐기로 인한 피해에 대해서는 어떤 보상의 의무도 없음을 알려 드 립 니다.” 자톤의 말은 참으로 냉정한 말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이런 경우에 피해자는 둘 모두 였으니 그런 것을 문제 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자 모두 들으신 바와 같습니다. 이제 이 물품을 폐기 하겠습니다.” 나는 천천히 마법을 외웠다.(실제로는 폼만 잡은 것이다.) “잠깐, 무슨 짓이냐? 멈추어라.” 자이건은 놀라서 당장이라도 나에게 달려 오려고 했지만 지토와 동생들이 가만히 있 을 턱이 없었다. 순식간에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잠깐만 멈추십시오. 잠깐만, 제발.” 이번에는 자이건이 아니라 여인왕국의 재상측의 인물이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나는 슬쩍 허공중에 대형 파이어볼 하나를 만들어 놓고 상자에서 손을 떼었다. “그래 무슨 하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저희는 이미 들을 것은 모두 들은 것 같습니다 만? 이렇게 기사를 끌고 와서 목숨을 위협하는 인물들에게 설마하니 원하는 것을 고 스 란히 주고 죽어갈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까?” 나는 자이건이라는 인물을 보며 이야기를 했다. “제발, 잠시만 멈추시오. 우리 여인왕국은 절대로 약속을 어기려고 했던 것이 아니 오. 정말이오. 우리에게 그 뱀을 꼭 필요한 것이고, 때문에 이렇게 남의 나라에까지 와서 경매에 참가한 것입니다. 그 뱀이 없으면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을 지 모릅니다. 제발 멈추십시오.” 자이건 이라는 인물이 내 말에 얼굴만 변색을 거듭하고 있을 때 들려온 말은 여인왕 국 인물의 말이었다. “그건 무슨 말이죠? 사람들이 피해를 입다니요?” 나는 의외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이건 극비에 속하는 것입니다만, 저 자이건도 이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까 저희 여인왕국과 한타의 국경선에 환수가 하나 있습니다. 등급으로는 초환수에 속 하는데 초환수 중에서도 수위를 다툴 정도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녀석입니다. 그 런데 그 녀석이 능력에 비해서 상당히 단순한 녀석이라 녀석이 원하는 것을 해 주면 아주 좋아하고 순해지는데 바라는 것을 해 주지 않으면 난동을 피웁니다. 그래서 이 미 오래 전부터 한타와 저희 왕국에서 그 환수를 제거하기 위해 노력도 하고 달래도 보고 하면서 공존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 환수가 특히 좋아하는 것이 화이트 스네이 크 입니다. 언젠가 한 번 화이트 스네이크를 생포해 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약 70 년 전의 일인데 특별한 것을 좋아하는 환수에게 그 화이트 스네이크를 선물로 주었지 요. 그리고 그 환수는 그 화이트 스네이크 한 마리로 3년동안 자신의 영역에서 조용 히 지냈습니다. 그런데 3년이 지나자 죽어버린 화이트 스네이크를 들고 와서는 다른 화이트 스네이크를 내 놓으라고 협박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없는 것을 어떻게 하겠 습 니까. 결국 양국 모두 상당한 피해를 입고 화이트 스네이크의 서식처를 가르쳐 주었 습 니다. 그런데 그 환수는 그 화이트 스네이크의 서식지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돌아 나 와 서는 자기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다면서 또, 엄청난 난동을 부 린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분이 풀리자 그 환수는 다시 자신의 영역으로 돌아갔 는데 그 이후로도 종종 난동을 부리곤 했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화이트 스네이크를 가 지고 간다면 그 환수와 계약을 맺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그 이후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계약을 맺지는 못해도 적어도 자국에게는 피해를 주지 않겠다는 약속 정도 는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거지요. 그레서 저희 재상님이저를 이곳에 보 내서 경매에 참가하게 한 것입니다. 물론 한타에서도 이런 상황을 잘 알기 때문에 저 희 나라에서 당연히 참가할 것을 알고 있었고, 국경을 강하게 통제했기 때문에 그런 많은 양의 보석을 가지고 올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약속어음의 형태를 취할 수 밖에 없었고 말입니다.” 상당히 긴 설명이었다. 그러니까 이제는 화이트 스네이크의 껍질이 문제가 아니라 살아있는 몸뚱이가 문제 가 되고 국가의 전략적인 면에 아주 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말이 되어 버렸다. 거참 상당히 복잡하네. 뭐가 이래? 뱀 몇 마리가 왜 일을 이렇게 어렵게 꼬는 거야? “좋아 좋아, 그렇단 말이지. 그래 여인 왕국에서는 그렇다고 치고, 자이건? 넌 뭐하 는 놈이냐?” 내 입에서 거친 소리가 나온다. 아까부터 그랬어야 하는데 왜 내가 그렇게 말을 높혔 던 것인지 모를 일이다. “이 이놈이 누구에게 감히 그 따위 망발을 ...” 자이건이라는 놈 옆에 서 있던 나이들어 보이는 인물이 자이건 보다 더 붉어진 얼굴 로 칼을 뻗으며 소리를 지른다. 그래도 자이건 옆을 지키는 것을 보니 경호랍시고 있 는 모양이다. “미친놈, 그럼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놈에게 말을 곱게 하란 말이냐? 넌 널 죽이려 는 놈에게도 지위와 명성을 인정하고 존경하면서 죽어가냐? 병신.” 참 실랄한 말이다. 내가 언제 이렇게 성격이 나빠졌을까? “아무튼 너 자이건이라는 놈의 말을 들어보자. 너도 이 뱀이 필요한 이유는 저 녀석 과 같을 것 같은데, 그런데 방법은 아주 지랄이네? 다 죽이고 빼앗겠다? 미친놈. 이 건 누구 생각이냐? 공작이라는 니 애비 생각이냐? 아니면 이나라의 통치자라는 한타 일가의 짓거리냐?” 나는 막나가는 말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러면 좋지 않은데, 누가 나 좀 말려주세요. “큰오빠, 화난거 같으네. 어쩌나. 오늘 여기서 살인 나는 거 아닐까 몰라.” 흐흠 전혀 긴장감이 없는 풍아의 말이다. “글쎄, 형이 화났으니까 무사히 넘어가기는 좀 어렵지 않을까? 혹시 한타리아에 메 테오라도 떨어뜨리지는 않을까?” “이 미친놈아 아무리 루탄이 화가 나도 그 많은 사람들을 무작위로 해치는 짓은 하 지 않을거다. 모르지 이놈의 나라에 귀족들을 씨가 마르게 만들지는 모르지만... 뭐 지가 왕같은 귀찮은 것은 하기 싫을 테니까 안 그럴지도 모르겠다. 알아서 하겠지. 지 금도 우리에게 화내는 거 아니니까 신경 안써도 될거야.” 지토의 말이다. 주위에서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기사들의 얼굴에는 기가 막혀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놈들이 너무 태연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여인 왕국의 사람은 그나마 관찰력이 뛰어난 모양인지 방금 지토와 화아의 말 을 들으면서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아마도 메테오란 말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하 그런데 나 그 마법 할줄 아나? 아직 안 배웠는데. 그건 수식이 너무 길어서 쉬벡의 책을 보면서 해야 한다. 즉 외워서 할 정도의 간단한 주문이 아닌 것이다. 주문 영창시간만 5분이다. 5분의 영창이 끝나면 약 24시간안에 운석이 쏟아진다. 상당히 어려운 고난위 마법이다. 9써클 마법이니까. “어디 이야기를 한 번 들어 보자구. 어떤 미친놈의 대가리에서 나온 계획이냔 말이 다. 이 개자식아.” 여전히 내 입은 거칠다. “형님, 이런 경우에는 그렇게 말씀을 하신다고 해결이 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냥 붙잡아서 적당히 주물러 주면서 물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단다. 광아가 그렇다면 그런거다. 녀석이 평소에 좀 냉철하고 상황판단이 빠르니 까 말이다. “그래? 그럼 잡아서 물어보지 뭐.” 내가 이렇게 말하자 결국 자이건과 그 옆의 경호원이 곡지까지 돌아버린 모양이다. “저 놈들을 모두 잡아라. 뭣들 하나?” 자이건 옆에 있던 녀석이 주위의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왜 사람들은 내가 마법사라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일까? “그리스.” 아주 간단한 마법이다. 바닥의 마찰력을 거의 0에 가깝게 만드는 것이니까 말이다. 마찰력 0의 지면에서 제대로 균형을 잡을 수 있는 인물은 별로 없다. 비록 저들이 갑옷에 마법 방어 룬자를 가득 세기고 있다고 해도 이런 간접 마법까지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곧장 넘어져서 버둥러리는 자이건 썬드라스의 멱살을 잡아올렸다. 수업을 제대로 받은 모양인지 그런 중에도 칼을 쥐고 있었지만 내 손에 손목을 잡힌 이상 칼을 휘두르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구나 갑옷도 입고 있지 않은 까닭에 곡지혈 (팔굽 부분에 위치한 혈도로 팔굽 아래의 근육과 신경에 영향을 줌)을 점혈당하자 곧 검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나는 몇 곳의 혈도를 점혈당해 반병신이 된 자이건을 일행 들 이 있는 곳으로 끌고 왔다. “자 이제 다시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 나는 다시 의자에 앉았고, 눈 깜짝할 사이에 변해버린 상황에 사람들은 멍청한 표정 이 되었다. “이봐 자이건 썬드라스, 니가 나를 죽이려고 했던 사실을 잘 기억하는 것이 좋을거 야. 그걸 떠올리고 있어야 할거야. 왜냐하면 내가 너의 팔을 자르거나 다리를 자르거 나 혀를 뽑거나 눈알을 뽑는다고 해도 너는 네 자신이 죽이려고 하던 사람에게 당한 다 는 사실을 기억해야 억울하다거나 분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가 죽이려던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 억울하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 가? 그러니 죽지도 않고 팔이나 다리나 그런 신체의 일부분을 잃는 다는 것은 별로 큰 문제가 아닌 것이야. 그렇지 않은가?” 나는 내 앞에서 점혈당해 움직이지도 못하고 무릎을 꿇고 앉은 자이건을 바라 보았 다. “대답하기가 싫은가? 그건 자네의 자존심이니까 뭐라고 할 것은 아니야. 하지만 말 이야 자네의 자존심이 자네의 손가락이나 팔목이나 팔뚝이나 어깨나 그런 것들 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에 변화가 없기를 바라네.” 나는 쌍환검의 우검을 불러내었다. 아무것도 없던 손에 120센치 정도의 검신을 지닌 검이 나타나는 것은 언제 보아도 신 기하다. 나는 우검을 천천히 녀석의 손으로 가지고 갔다. “그래 자네의 자존심은 어느정도 가치가 있을까? 손가락일까? 아니면 팔목일까? 난 자네에게 여러번의 고통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아. 손가락을 자르고 아니다 싶으면 팔 목 을 자르고 그것도 아니면 팔뚝을 자르고 그것도 아니면 어깨를 잘라내는 것은 너무 잔 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나는 말을 할 때마다 칼 끝을 손가락 팔목 팔뚝 어깨로 옮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무슨 짓이냐? 그 분은 썬드라스 공작가의 셋째 공자이시다. 네까짓게...” 나는 순간적으로 떠들고 있는 녀석의 주위에 중력을 변화시켰다. “중압.” “컥!!” 녀석은 엄청난 충격에 주저 앉으며 피를 토했다. 죽지는 않겠지만 꽤 고생을 할 것이 다. “아까도 이야기했잖아. 멍청아. 나를 죽이려는 놈이 왕이라 해도 나는 상관이 없 어. 내가 죄가 있다면 달개 받을지 모르지만 죄가 없다면 나를 죽이려는 녀석을 그냥 두지 않아. 알겠어? 이 새끼가 어떤 놈의 자식인지 혹은 어떤 피를 타고 났는지는 중 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이 놈이 너희 같은 떨거지를 데리고 와서 우리형제와 내 친 구를 죽이려고 했다는 점이야. 알겠냐? 다시 한 번 더 떠들면 너희도 가만히 두지 않 는다. 너희가 아무리 명령을 받고 움직였다는 것을 감안해 준다고 해도 더 이상 날뛰 면 명령이 아닌 자의로 우리를 핍박하는 것으로 간주해서 합당한 대우를 해 주겠다. 그러니 그냥 찌그러져 있던가 아니면 칼을 들고 덤비던가 알하서 해라.” 나는 주저 앉아 피를 토하는 녀석과 함께 주위의 기사들을 눈으로 훑으며 말하고는 다시 자이건을 바라보았다. “그래 결정은 했나? 너의 자존심이 너의 몸 중에서 어느정도 가치가 있는 것인지 를? 이번에도 대답이 없다면 손가락부터 차례로 직접 알아보겠다.” 내 말에 자이건은 입술을 깨물었다가 입을 열었다. “무얼 알고 싶은 거냐?” “호? 자존심은 일고의 값어치도 없다고 생각한 거냐? 손가락 하나 정도는 가치가 있 을 것 같았는데 계산이 빠르구만 하지만...” 퍽 퍽 퍼-억 나는 녀석의 허벅지와 가슴에 이어 넘어가는 녀석의 턱을 연달아 걷어찼다. “자이건, 자존심을 버릴려면 똑바로 버려라. 어디다가 말을 짧게 끝내는 거냐? 그 런 자존심은 버린 것이 아니었나? 병신.” 넘아진 자이건을 화아는 무뚝뚝하게 일이켜 세워서 제자리에 놓았다. “그럼 다시 물어봐라. 뭐라고?” 자이건은 턱이 부어오르고 있었지만 쓸데 없는 반항을 하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무얼 알고 싶은 것...입니까?” 씹어 삼키는 듯한 목소리가 자이건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뭐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긴 하지만 일단 내용은 마음에 드는군. 내가 알고 싶 은 것은 간단하다. 이번 경매에 대한 내용을 들은 다음부터 니가 경매에 참여하게 되 기까지의 과정. 물론 상세하게.” 내 말에 자이건은 잠깐의 망설임 후에 입을 열었다. 12일 전 썬드라스 가문에 마법길드를 통해서 한 장의 초청장이 전해졌다. 자톤 경매장의 경매 초청장. 초청장을 받은 집사는 언제나 넘치는 초청장의 일부로 분류해서 한 구석에 치워버리 는 우를 범했다. 11일 전 썬드라스의 말썽장이 자이건이 왕궁에 들어갔다가 어릴 때부터 친구로 지내는 루이 스 마치 한타 즉 한타 왕국의 3왕자에게서 재미있는 소리를 듣는다. 자톤 경매의 물품에 대한 것으로 화이트 스네이크의 전략적 가치를 알게 된다. 10일 전 집에 돌아와 초청장을 찾은 자이건은 집사를 약간 무찔러주고 곧장 계획 수립에 들어 간다. 국가의 전략적인 도움이 될 것이 자명하므로 이 기회에 자신의 이름을 알려 보려는 입신양명의 꿈을 꾼다. 9일 전 다시 왕궁을 찾은 자이건은 루이스 3왕자가 왕궁의 대표로 경매에 참여하게 된 것을 알고 호위를 자청한다. 썬드라스 가문은 3왕자의 경호에 당연히 썬드라스 기사의 정예를 투입하고 그 지휘 를 개망나니 자이건에게 맡긴다. 8일 전 왕자와 출발을 기다리며 꿈에 부풀어 지낸다. 아울러 만약의 사태에 경매에 실패할 경우를 생각해, 오늘과 같은 계획을 수립하고 은연중 경매에 실패하기를 기도한다. 7일 전 한타리아를 출발. 2일 전 자간에 도착 잠깐 경매장을 둘러보고 기사들로 하여금 확실한 지형 숙지를 명령한다. 기사들은 그 날과 다음날 차례로 경매장을 둘러 보며 지형을 숙지한다. 1일 전(어제) 숙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뒤늦게 알게 되어 ‘란의 용병대’에 대해 알아 보지만 아무 내용도 나오지 않는다. 실력이 제법 되는 용병으로만 생각하고 계획을 강행하기로 한다. D-데이 왕자의 양해를 얻어 경매에 참가하는 척 하며 분위기를 살핌 경매가 왕자의 실패로 돌아가자 곧 최소한의 인원으로 왕자를 호위하여 보내고 기사 들을 밖에 대기 시키고 안으로 들어와 분위기를 살핌. 이후 멋모르고 덤벼들다 개망신 당하고 있는 중. 이상이 자이건을 통해서 알아낸 그 간의 진행상황이었다. “그럼 이제는 어떻게 한담? 화아야, 아니다 광아야(광아가 화아보다는 좀 더 똑똑 한 것 같다.) 이제 어떻게 할까? 자이건하고 주위의 이 똘마니 기사들하고 말이다. 어 쩔까?” 나는 삐쭉거리는 화아를 무시하고 광아에게 물었다. “글쎄요, 상당히 복잡하지 않을까요. 이일로 우리들의 돈은 날아가 버린 것 같군 요. 거기다가 썬드라스 가문에게 쫓기는 상황까지 될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묻고 있는 거잖아. 내가 다른 걸 묻는 게 아니잖 아.”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 성난 기사들을 피해서 간다는 것이 어렵지는 않 겠지만 계속해서 따라온다거나 아니면 전국에 지명수배라도 내린다면 피곤해지지 않 을 까 싶은데요? 그냥 모두 묻어 버리고 모르는 척 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일 것 같습 니다만.... 아무래도 루탄 형님이 반대를 하실 것 같고....” 광아는 아직 별 도움이 안되고 있다. 그래도 조금은 냉철하고 잘 돌아가는 머리를 가지고 있지만 좀 더 발전을 해야 할 것 같다. 아무튼 창의력이 모자란단 말이야. 창의력이. 나는 일단 뱀들이 들어 있는 상자를 순간이동으로 빅에게 보내 버렸다. 빅이라면 그 녀석들을 잘 알아서 처리 해 줄 것이었다.(더불어 음성 전달 마법을 상 자에 걸어 상황을 대충 이야기 해 주고 뱀들의 처리를 맡겼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즉흥적인 생각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그건 바로 “이런 미안합니다. 이제부터 이 자이건은 저희가 데리고 가기로 하겠습니다. 만약 에 우리들을 못살게 구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때는 이 귀공자의 안전은 보장하지 못 합 니다. 참고로 말씀드린다면 여기있는 우리들이 비록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용병들이 지 만 미알란 미알린 형제들을 제압한 사람들입니다. 그 정도의 실력이라면 아마도 여러 분의 도발에 흥분한 우리들 중의 누군가가 공작님의 침실을 찾아갈지도 모른다는 것 을 걱정하셔야 할 겁니다. 물론 그 전에 귀공자의 신체의 일부를 선물로 보내드리지 요. 그럼.” 나는 말을 마치고 지토와 동생들을 데리고 단상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썬드라스 기사들은 그들의 지휘자(아까 중압으로 많이 찌그러진 인물인 듯)가 아무 말이 없어서 인지 아니면 자이건이라는 놈의 안전을 고려한 탓인지 별다른 도발은 없 었다. “이런 자이톤씨께 대단히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이건 경매 물품의 주인께서 선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맡겨 놓으신 것입니다. 이번 손해에 대한 경비로 쓰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창고에서 화이트스네이크의 가죽을 5장 정도 꺼내어 자이톤에게 건넸다.(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품속에서 나온 듯 하지만 이렇게 큰 가죽을 품속에 넣고 다닐 수 있 는 사람은 없다.) “뭐 이런 것을... 저희의 불찰로 이런 문제가 발생한 것인데... 아무튼 감사하다고 전해 주십시오. 그리고 다음에 경매할 물건이 있으시면 꼭 저희 경매장을 들러주십사 부탁드린다는 말도 전해 주십시오.” 자이톤은 아마도 내가 건넨 물건이 입을 다물어 달라는 부탁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 르겠다. 나로서는 그냥 순수한 선물이었는데.. “네, 그럼 이만.” 나는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잠깐만, 혹시 그 물품의 주인을 만나신다면 여인왕국에서는 그 물품을 400억 덴에 언제든 구입할 의향이 있으니 저희 왕국으로 찾아와 달라고 전해 주십시오. 기다린다 고 말입니다.” 여인왕국의 경매참가자가 뒤에서 우리에게 말했다. 하지만 우리들은 아무 반응도 보 이지 않고 그대로 경매장을 나섰다. “그런데 오빠, 이제 어디로 갈거야? 이렇게 나와도 갈 곳이 없잖아. 아무래도 이 자 간시에 오래 있지는 못할 것 같고 말이야. 거기다가 저것도 어떻게든 처치를 해야하 지 않을까?” 풍아가 경매장 문을 나서서 입구 계단에서 걸음을 멈춘 나에게 물어보며 자이건을 턱 으로 가리켰다. 자이건을 어떻게 할지 문제는 문제였다. 하지만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지는 이미 생각을 해 두었다. “우리는 여인왕국으로 간다. 목표는 환수, 그 환수를 잡아서 우리들이 이번에 손해 본 돈을 충당하는 거야. 그 녀석이 특이한 것으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돈이 될만한 것 을 많이 가지고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그리로 가자.”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즉시 자간시의 시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런데 루탄, 저 녀석은 어떻게 할거야? 그냥 저렇게 끌고 다닐거야?” 지토가 화아에게 멱살을 잡히다 시피해서 끌려오는 자이건을 가리키며 물었다. “글쎄, 일단은 자간시를 벗어날 때까지는 그냥 끌고 다니지 뭐. 일단 아혈(입과 혀 에 관련된 혈로 제압당하면 입을 못 움직임)을 제압하고 두 팔만 제압해 둬. 뭐 그냥 말 못하고 팔을 못쓰는 불편한 몸으로 계속 살고 싶다면 도망을 갈 것이고 아니면 따 라 오겠지. 물론 도망을 시도하면 잡아서 몇군데 잘라버려. 아무데나.”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시장을 향했다. 검은 머리카락을 종아리까지 기른 한 사람과 타는 듯 붉은 머리카락과 옷을 입은 건 장한 남자, 금발머리에 호리호리한 체격의 남자, 연쳥색과 연록색의 머리카락을 한 두 늘씬한 여자. 바위의 정령족을 닮은 짧은 다리, 짧은 팔. 큰머리의 늙은 남자. 암갈 색 머리카락에 두 팔은 전혀 흔들지 않고 묵묵히 빨간 머리의 뒤를 따르는 남자 하나. 문제는 키 작은 늙은이를 뺀 나머지는 모두들 엄청나게 잘 생긴 얼굴들이라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일까? 시장에서 집중된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묵묵히(풍아와 수아가 이것 저것 여전히 수 다를 떨기는 했지만) 앞으로 나간 내가 도착한 곳은 마시장이었다. “여기서 말과 마차를 사고, 곧바로 여인왕국을 향해 간다. 그러니까 알아서들 말들 을 골라와라. 마음에 드는 놈으로 골라라. 앞으로 말도 일행으로 취급해서 버리거나 하지 않을 거니까.” 나는 지토와 동생들에게 말을 골라 오라고 시켰다. 그리고 한 쪽에 있는 마차 가게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어떤 물건을 찾으시는지요?” 주인으로 보이는 40대 남자가 나무 울타리 앞에서 나를 맞았다. 마차 가게는 건물 앞에 울타리를 치고 마차들을 전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잠시 마차들을 둘러 보고 마음에 드는 것을 골랐다. 일반 짐수레처럼 생긴 마차는 앞 좌석 부분을 제외하고는 뒷 부분이 천막으로 덮혀 있어서 예전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의 마차를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비록 옆에 달린 바퀴가 그처럼 투박한 것은 아니었지만 전체적인 모습은 분명 서부 로 개척을 떠나던 마차와 닯아 있었다. “이 마차로 하겠습니다. 얼마입니까?” 나는 주인에게 물었다. “네, 아주 잘 고르신 겁니다. 비록 겉보기에 화려해 보이지는 않지만 실용적인 마차 임에는 틀림이 없지요. 그리고 튼튼하기도 하고 말입니다.” 주인은 이런 저런 말로 마차를 자랑하고 마차 가격을 2만 덴이라는 가격을 불렀지만 그런 가격을 다 줄 생각은 전혀 없었던 나는 결국 13000덴에 마차를 살 수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흥정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 말을 사러 갔던 지토와 동생들이 돌아왔다. 그것도 각자 한 마리씩의 말과 판매인들을 끌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말을 사라고 하곤 돈을 안 줬던 것이다. 나는 일행들이 끌고 온 말들을 살펴 보았다. 역시 정령들이라 그런지 말들도 아주 괜찮은 것들을 골라 온 모양이었다. 순수한 기운을 지닌 지토와 동생들은 동물들의 힘과 건강 정도를 알아보는 일은 어렵 지 않았을 것이다. “응? 화아야 그런데 자이건 녀석의 말도 골라 온 거냐?” 나는 자이건이 옆에 있는 말에 눈길을 주었다. “뭐, 형이 전부 한 마리씩 골라 오라고 했으니까. 그래서 이 놈한테 말을 골라 보랬 더니 이 말을 골랐거든.” 나는 화아의 말에 그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일단 말 값을 흥정하기 시작했다. 화아의 말은 역시 적색의 느낌이 강하게 나는 큼직한 녀석이었다. 다른 말들 보다는 머리 하나 정도 더 커 보였다. 풍아는 날렵한 갈색의 말, 느낌이 역시 바람이었다. 광아는 백색의 말, 조금 화려해 보이는 녀석이다. 수아도 백색의 말이었지만 귀와 다리에 검은색 털이 있었다. 지토가 투덜거리면서 끌고 온 말은 온통 얼룩이 있는(얼룩 보다는 갈색, 회색, 흰색 의 색이 커다란 무늬를 그리는) 녀석이었는데 화아의 말 다음으로 큰 녀석이었다. 자이건의 말은 검은 색 일색이었다. 나는 꽤 긴 시간동안 상인들과 흥정을 해서 말을 구입했다. “그런데 오빠? 오빠는 말을 안살 거야? 그리고 마차가 있으면 마차를 끌 말도 있어 야 하잖아.” 계산을 마친 나에게 풍아가 물었다. “난 말을 탈 생각이 없어. 그냥 마차를 탈 거야. 그리고 마차를 끌 말은 이미 정해 졌어. 지토의 말하고 수아의 말로...” 내가 대답하자 당장 반대를 하고 나선 것은 지토였다. “무슨 소리야? 왜 내 말을 마차를 끄는 용도로 쓰겠다는 거야? 내가 왜 내 말을 마 차 몰이로 내 놓아야 하는 거냐구?” 나는 태연하게 다음과 같은 말로 지토의 반발을 무시했다. “지토, 너 그 말위에 어떻게 올라갈건데? 그리고 안장 길이도 안 되는 발로 안장 에 올라 앉으면 안장 발걸이에 발도 안 닿는데 어떻게 말을 탄다는 거야?” 뭐 솔직히 지토가 할 말이 없는 것은 당연했다. “참 그리고 마차도 몰아야 하잖아. 내가 마차를 몰까? 아니면 수아에게 몰라고 할 까? 그러니 지토 니가 몰아야지.” 지토는 뭐라고 궁시렁 거리기는 했지만 별달리 할 말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럼 이제 마구들을 사로 가 볼까? 마구는 편한 것으로 사야하는데...” 그리곤 우리들은 다시 마구를 사러 시장을 헤집고 다녔다. 그리고 저녁이 되었을 때, 우리들의 준비는 끝이 났다. “그냥 출발할거죠? 루탄형. 뭐 썬드라스 기사단인지 뭔지 하는 녀석들이 이렇게 뒤 를 따라 다니는 것도 좀 신경이 쓰이고 하니 그냥 가는 쪽이 좋을 것 같은데요?” 광아가 그렇게 출발을 독촉하는 것은 아까부터 하나 둘 주위로 모여들기 시작해서 우 리의 뒤를 따르거나 혹은 길을 앞질러 기다리는 등, 신경을 긁고 있는 녀석들 탓이었 다. 뭐 지들은 잘 숨는다고 숨는 모양이었지만 우리들에겐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자꾸만 눈에 걸리적거려서 광아가 한 마디 하는 것이었다. “그래, 그냥 가도록 하자. 일단 시장에서 간단하게 달리면서 먹을 음식들을 사고, 마구들은 말에 잘 붙을어 매고, 마차를 타고 가자. 솔직히 너희들 아직 말 탈줄도 모 르잖아.” 나는 자기 말 옆에 붙어서 좋아서 어쩔줄 모르는 녀석들에게 간단히 찬물을 부어주 곤 마부석으로 올라갔다. 그래도 예전에 쉬벡과 돌아다녔던 경험으로 말차를 모는 것이 어려울 것은 없었다. 마차 뒤로 말 4마리를 매달고 우리 일행은 일단 자간시 밖으로 나왔다. 자간의 경비병들이 우리를 그냥 보내주는 것으로 보아서 썬드라스 기사들의 우두머리 도 바보는 아닌 모양이었다. “저, 근데 오빠? 어느 쪽이 여인왕국인지 알고 가는 건가요?” 마차 뒤에 앉아서 풍아가 품속에서 꺼낸 란이를 보면서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만지지 도 못하고 안타깝게 보고만 있던 수아가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물었다. “글쎄, 나도 예전에 갔던 적이 있지만 워낙 시간이 지나서 모른다고 해야겠지? 그래 도 동쪽에 있다는 것은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아라. 가다가 나오는 마을에서 물어 보 면 되겠지. 하하하.” 무척이나 무책임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생각하기 나름이다. 앞으로를 모른다는 것 이 그 얼마나 흥미진진함이냐? 모험이란 이런 것이지 하하하. 우리들은 자간 시를 나서자 마자, 동쪽으로 방향을 잡아 말차를 몰았다. 자가 시의 밖으로 나서는 순간부터 뒤에서 우리를 쫒는 기사들의 기척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 만 눈에 보일 정도로 가까이 오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별다른 신경은 쓰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밤이 늦었을 무렵 나는 마차를 길 옆의 공터에 세우고 노숙을 준비했다. 저녁은 이미 마차에서 적당히 해결을 했지만, 노숙을 그냥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오빠, 오늘밤에 비가 올 것 같아. 수아도 알고 있겠지만 바람이 그걸 말해 주고 있 어. 어떻게 해지?” 풍아가 나에게 물었다. “뭐, 상관없지. 마차에서 자면....안되겠구나? 인원이 많아. 마차에서는 많아야 5 명 정도 밖에 잘 수가 없겠군. 그럼 자이건은 밖에서 재운다고 해도 한 사람이 문제 네? 또, 우리 귀여운 숙녀들에게 이런 비좁은 곳에서 자게 할 수도 없고....” 나는 마차 밖으로 나와서 야영용 텐트를 꺼냈다. 용병들이나 병사들이 야전에서 사용하는 것인데 설치하기가 어렵지도 않았고 보온이 나 방수에도 무리가 없는 좋은 것들이었다. 물론 그 옛날에 쓰던 텐트에 비한다면 엄 청 무겁고 불편하기는 하지만... “그럼 야숙 준비를 해 볼까? 화아야 자이건의 혈도를 풀어줘라.” 나는 화아가 자이건의 혈도를 풀어주자 텐트를 그에게 던졌다. “윽.” 갑작스럽게 날아온 텐트를 가슴으로 안아 든 녀석은 뒤로 비틀거렸다. “텐트를 쳐라. 나도 공짜로 먹여줄 생각은 없으니까 말이야. 앞으로 너는 우리들의 사소한 일들을 도우면서 지내도록! 괜히 하지 싫다고 떠들면 화아, 그래 니가 좋겠 다. 말썽피우면 적당히 주물러 줘라.” 자이건은 핏발이 선 눈으로 나를 노려 보았지만 내가 녀석을 무시하자 잠시 그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저 녀석 지금 뭘 하는 거야? 오빠? 저 녀석 텐트를 못 치는 거 아닐까? 저거 별로 어렵지 않은 것일텐데? 왜 저렇게 버벅거리는 거야?” 아마도 녀석은 단 한 번도 그런 텐트를 쳐 본 적이 없을 것이었다. 녀석이 들고 있는 것은 용병들이나 일반 병들이 쓰는 물건이었다. 공작가의 아들이 나 되는 녀석이 쓸 일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혹시 훈련을 할 때, 보거나 사용을 했을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녀석 정도의 인물이 직접 텐트를 치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정말 곤란한 녀석이네? 그럼 뭘 시키지? 텐트도 못치는 녀석에게 뭘 바란다는 것 이 어리석은 일일까?” 나는 자이건 녀석이 들으라는 듯이 조금 크게 말하고는 다른 텐트를 꺼내서 치기 시 작했다. 어차피 텐트는 2-3인용이었다. 여자들은 마차 안에 약간의 결계와 마법으로 쾌적한 환경을 만들고 잠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러니 이젠 남은 우리 형제와 지토가 잘 텐트가 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나는 서둘러서 텐트 2개를 치고 나와 지토, 화아와 광아가 하나씩을 쓰기로 했다. “이봐 자이건 이제 곧 비가 올거야. 그러니 그 텐트를 치지 못한다면 비를 꼬박 맞 을 수 밖에 없다. 우린 절대로 네 녀석이 우리 텐트에 들어오는 것을 용납해 줄 생각 은 없어. 그러니 알아서 하라고.”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우리 숙영지 주변에 만상진의 축소형을 펼치고는 잠자리에 들 었다. 물론 만약을 위해서 우리 텐트와 마차에 몇 가지 마법을 걸어 두었다. 자이건 이 만약에 우리가 잠든 사이에 칼질이라도 하려고 설친다면 아마 두고두고 후회해야 할 것이었다. 우리 일행이 모두 텐트와 마차에 들어가서 잠을 청한 이후에도 자이건은 텐트를 다 치지 못했다. 광아는 불쌍한 자이건을 위해 작은 조명하나를 만들어 허공에 띄워 주었다. “그런 것에 신경을 써 주다니 광아 오빠는 정말 마음이 착한 것 같아. 호호. 그럼 수고해요. 자이건씨.” 수아는 그런 인사를 하곤 마차 안으로 들어갔었다. 나는 별로 잠을 자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텐트 안에서 자이건의 동정을 살피 고 있었다. 옆에 누운 지토는 벌써 잠이 든 모양이었다. 그래도 우리 일행들은 밖에 서 자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피로가 더 잘 풀리는 경향이 있었다. 정령력을 회복하 는 것은 아무래도 마을 안에서 보다는 이런 야외가 더 좋은 모양이었다. 자이건은 아마도 지금 후회에 후회를 거듭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래도 처음에는 텐트를 쳐 보겠다고 노력을 하는 것 같더니 우리들 모두 자리에 들 고 나서는 그냥 텐트를 치던 그 자리에 앉아서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 아무래도 오늘 하루 아주 재수가 없는 날을 되짚어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어쩌다가 자신이 지금의 이런 신세가 된 것인지에 대해서 고찰하고 또 고찰하면서 앞 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도 생각해 보고 있을 것이었다. 몇 번이나 자리에서 일어나서 우리 텐트 쪽으로 발을 옮기려다 돌아서고 옮기려다 돌 아서는 것은 아마도 우리들이 잠든 사이에 어떻게 해 보려는 시도를 결정하지 못한 탓 일 것이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계절이 아무리 봄이라고는 해도, 밤중에 비를 맞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몸에 적지 않 은 무리가 가는 일일 것이지만 그래도 명색이 기사라는 녀석이었다. 때문에 나는 녀석이 조금 더 비참한 생각을 가지도록 그냥 두자는 생각에 녀석에 대 한 관심을 끊어 버리고 잠을 청했다. 만약에 녀석이 쓸데 없는 행동으로 우리 일행의 잠을 깨우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이 다. 그리고 나는 아침 날이 밝은 후에야 잠에서 깨어났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밖으로 나갔을 때, 가장 관심이 갔던 자이건이라는 녀석은 그 빗속에서 텐트를 치지는 못하고 텐트를 몸에 두르고 가까운 나무 밑에 앉아 있다가 내가 텐트 밖으로 나서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결국에 텐트를 치지 못했군. 눈썰미가 나뿐 것인가? 아니면 머리가 나뿐 것 인가? 내가 텐트를 치는 것을 두 번이나 보여주었으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를 보면서 조금은 비웃음을 담아서 말했다. 하지만 녀석은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구먼, 뭐 반응이 없으니 재미가 없다고 해야하나?”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곤 풍아와 수아가 자고 있는 마차로 다가갔다. “오빠, 일어나셨어요? 오늘 아침은 뭐가 좋을까요?” 내가 마차에 가까이 가기도 전에 마차 포장 밖으로 수아의 얼굴이 쏙 하고 내밀어진 다. 역시 물의 정령이라 온통 물바다인 이런 환경이 마음에 드는 것일까? “글쎄? 뭘 먹을까나? 우리 수아가 만들어 주는 걸 먹도록 하지 뭐. 아무거나 주는 데로 먹을테니 그냥 줘. 하하하.” “알았어 오빠. 조금만 기다려. 호호, 언니하고 다른 오빠들은 아직이네? 일어나기 전에 빨리 아침을 준비해야 되겠네? 그러고 보니 오늘부터는 1인분이 더 있어야 하는 구나. 호호.” 수아는 날씨 탓인지 기분이 좋아서는 부산하게 떨들기 시작했지만 역시 음식을 하는 데에 불이 없으면 곤란했다. 나는 수아 곁에서 수아의 일을 거들고 마법으로 불을 지폈다. 나중에 시간이 나면 음식을 할 때 쓸 수 있도록 필요한 경우에 불을 피울 수 있는 마 법 도구를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예전 가스레인지처럼 스위치를 돌리면 불의 강도가 조절되는 형태로 만들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생각을 해 보면 그런 것이 별로 어렵지도 않았고, 시간이 없는 것도 아니었 다. 나는 수아가 아침을 하는 동안에 이런 저런 물건들을 만들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음 그러니까.... 이렇게 저렇게 그리고 이건 이렇게 저건 그렇게 흠... 그럼 되는 건 가? 그렇군. 음.. 내가 그렇게 딴 곳에 정신을 파는 동안에 수아는 거의 식사 준비를 마쳤고, 텐트에서 는 녀석들이 하나 둘 기어 나왔다. 그리고 그들의 관심은 역시 나무 밑에 어정쩡히 텐트를 덮어 쓰고 서 있는 자이건에 게 갔다가 빗속에서 아침을 준비하는 수아와 나에게로 돌려졌다. 수아는 물의 정령이라 비가 상관이 없었지만, 음식에 빗물이 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 해서 우리가 음식을 하는 주변에는 실드로 빗방울을 막고 있어서 둥근 원형 밖으로는 빗방울이 튕겨져 나가고 있어서 어찌 보면 아름다울 수도 있는 모습이었는데, 밖으로 나오는 녀석들 모두다 내가 실드를 쳐 주어서 나중에는 다들 원형의 투명한 구 안에 들어 있는 모양이 되었다. 화아는 내가 실드를 쳐 주지 않아도 주위에는 빗방울이 몸에 닿기도 전에 기체가 되 고 있었지만(수증기가 심하게 일어서) 다른 녀석들과 함께 실드를 쳐 주었다. “뭐한다고 밖으로 우리들한테 이렇게 실드를 치고 난리야? 그냥 이 주위로 빗방울 이 떨어지지 않게 하면 되잖아. 수아가 그런 정도는 할 수 있을텐데?” 지토는 자기 몸 주위로 빗방울들이 튕겨지는 것을 보고는 투덜거렸고 생각해 보니 그 편이 좋을 것 같기는 했다. “하하, 그렇구나. 내가 뭐하는 짓이지? 수아야 이 주위에 빗방울 좀 떨어지지 않게 해 줄래? 그래 우리가 앉아서 식사를 할 수 있는 정도 범위만 되면 되겠다. 굳이 힘 을 많이 쓸 필요없이.” 나는 자이건이라는 놈이게까지 그런 혜택을 누리게 해 줄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 에 이렇게 말했고, 아마도 혀를 차는 표정으로 자이건을 보는 광아나 지토, 그리고 빗 방울을 막으면서 안쓰러운 눈으로 자이건을 보는 수아는 내 의도를 안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광아 빼곤 다 알아버린 모양이다. “아아! 이런 벌써들 다 일어나 있네? 호호호. 아침도 준비가 끝난 모양이고. 호호 호. 그럼 먹는 일만 남았네?” 마차에서 풍아가 고개를 내밀었다. 풍아는 내가 실드를 걸어 줄 필요도 없이 몸 주위에 바람으로 막을 만들고 있었다. 그리곤 훌쩍 땅바닥에 닿지도 않고 수아의 결계 밑으로 뛰어내렸다. “풍아야. 자리에서 일어나자 마자 먹을 것부터 찾으면 안되지. 일단 씻고 옷차림도 단정히 하고 그리고 식탁에 앉아야지.” 나는 점점 말괄량이 기질을 드러내는 풍아에게 한 마디 잔소리를 한다. “호호, 오빠도 참~! 내가 씻기는....” 풍아는 대뜸 한 마디 하려다가는 나무 밑에 서 있는 자이건을 보곤 입을 다물었다. “풍아 누님,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을 않겠다고 하면 안 되지요. 하하 하 그럼 좀 씻고 오시지요. 누님.” 광아가 풍아에게 일침을 놓는다. “호호, 근데 광아 오빠. 오빠도 그렇게 화아 오빠도 그렇고 지토 아저씨도 그렇게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아무도 씻지 않은 것 같은데, 그렇게 말씀을 하시니 이상하네 욤 호호호.” 순식간에 얼어붙는 무리들, 그 속에는 나도 들어 있었다. 수아가 나는 빼 놓고 이야 기 했지만 결과적으로 같은 이야기인데. “흠, 흠.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오고 그러니 그런 것은 좀 생략을 하자는 거지. 흠. 그런 말이지 그치 풍아.” 화아가 수습을 나선다. “그, 그렇지. 화아 오빠 말이 바로 내 말이야. 호호호호호.” 어색해서 그런가 웃음이 긴 풍아. “그럼 밥이나 먹자.” 지토는 묵묵하다. 그렇게 우리의 식사가 시작되고 문제가 생겼다. “자 이리로 오세요. 식사는 하셔야지요?” 수아가 자이건을 불렀던 것이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자이건에게 쏠렸다. ‘저런 놈에게 밥은 무슨...’ 이런 눈빛은 화아와 풍아와 지토. ‘저 놈이 이리로 와서 밥을 먹을까?’ 이건 풍아의 눈빛. ‘어떤 행동을 보일 것인가?’ 탐구심이 넘치는 광아의 눈빛. ‘안 먹으면 배가 고플 텐데, 오늘 아침은 양도 많은데 남으면 어쩌지?’ 물론 수아의 눈빛이다. 그럼 나는?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든다. 아니 이건 아닌가? 아무튼 먹는 것을 가지고 사람을 차별하는 것만큼 야비한 짓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녀석이 아침을 같이 먹는 것에 하등의 불만은 없었다. “그래 너도 와서 밥을 먹어야지. 언제까지 거기 그렇게 서 있을 것이냐? 설마 거기 까지 밥을 배달해 주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겠지?” 나는 그런 말로 녀석의 식사 참여를 허락했고 내 허락에 반발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 었다. 그리고 미적거리며 다가온 자이건을 포함한 우리들의 아침식사. 그다지 시끄럽지 않 게 식사를 하는 우리 집안(나와 동생들과 지토)의 가풍에 합당하게 아주 조용하고 심 풀한 분위기의 식사가 이루어졌다. 물론 그것은 자이건 녀석이 묵묵하게 자기 앞에 놓여진 음식을 먹으며 그것만이 자기 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듯이 최선을 다해서 꼼꼼하게 씹어 삼키는 탓도 있었을 것이 다. 이상하게 자이건 녀석의 식사모습은 경건하게까지 보이는 것이었다. 녀석이 설마하니 우리가 밥을 먹이고는 죽여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대충 식사가 끝나자 나는 입을 열었다. “일단 식사가 끝나면 자이건 네가 가서 설거지를 해 와라. 설거지란 음식물이 묻어 있는 식기들을 깨끗하게 닦는 것을 말한다. 기름기가 없는 식기는 그냥 물로 닦으면 되지만 기름기가 있는 식기는 고운 흙을 사용하거나 기타 지용성 식물을 사용해서 씻 어야 하는데 일단 오늘은 고운 흙을 찾아서 씻도록. 그리고 수아는 저기 나무 밑에다 가 설거지 할 수 있는 샘을 일시적으로 만들어주고 알았지? 그리고 오늘은 비가 오니 까 여기에서 이동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리고 낮 동안에 비가 그치면 출발을 하겠지 만 그 사이에 몇가지 물건들을 만들어야겠다. 일단은 그렇게 알고 자이건은 설거지 하 고 우리들은 마차로 들어가자.” 나는 자이건에게 설거지를 시키고는 마차로 들어왔다. “우리 이 마차를 좀 더 넓히기로 하자. 마차 자체를 넓히는 것은 어렵지만 일단 마 차 안의 공간을 확장시켜서 편리하게 만들자는 거다. 그리고 너희들은 오늘 각자가 내가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것을 만들어야 할 것 같다.” 그 후 나는 지토와 화아에게 편중된 듯한 일거리를 동생들과 지토에게 분담시켰다. 그리고 나는 마차를 손보기 시작했다. 일단은 마차 안의 공간을 네 배 정도 확장 시켰다.(실제로 밖에서 보는 아무 변화가 없지만 마차 안으로 들어가면 공간이 넓어지는 것이다. 실제로 마법배낭이나 그런 물 건을 만들 때, 공간을 확장시키는 마법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다만 알아도 할 수 있 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 문제지만... 8써클 마법이다. 하하) 그리고 밖으로 나와서 마차의 한 쪽 벽을 손을 보아서 그 얇은 벽 안으로 깊이 50센 치의 공간을 만들었다. 그리곤 그 벽의 일부를 밖으로 접을 수 있도록 만들고는 지토 와 화아가 흙으로 구워 만들어 온 가스레인지(형태를 잣히 알려 줬더니 모양을 아주 잘 만들어 왔다.)에 몇가지 장치를 했다. 이 메직레인지는 세 곳에 불꽃이 나오도록 되어 있는데 그것은 각각의 룬어가 새겨 진 돌림쇠로 작동이 되었다. 물론 메직레인지가 영구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급조 된 마법석이 들어 있어서 마력이 저장되어 있었다. 그럭저럭 한 번 저장하면 한 두달 은 쓸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내가 한 일은 메직레인지를 아까 만드어 놓은 접이식 마차벽 안쪽에 고 정을 시키는 것이었다. 그 벽을 접으면 마차 벽 안으로 사라졌던 레인지가 벽을 밖으로 펼치면 나타나는 것 이다 아울러 그 벽은 놓이가 높아서 충분히 음식을 다듬고 요리 준비를 할 탁자의 역 할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레인지 옆으로 갖은 취사도구를 정렬해 놓았다. 그 벽을 보고 제일 좋아한 것은 역시나 수아였다. 아울러 메직레인지는 지토와 다른 모두가 감탄 할 만한 물건이었다. 마차 안에서 풍아와 수아 광아는 나름대로의 솜씨로 좋은 여행환경 만들기에 주력하 고 있었다. 풍아는 나무들을 깍아 탁자와 의자를 만들고 광아는 조명을 담당하고 수아는 모자라 는 부분들을 꼼꼼히 챙기고는 다음 마을에서 시장에서 살 것들을 챙기기에 바빴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마차 밖에서 바퀴에 강화 마법과 탄성을 강화하는 마법을 걸고 마차 바퀴와 마차 몸체가 이어지는 부분에 완충력을 높혀주는 마법들을 구현해 내었 다. 물론 마차에 약간의 경량화 마법을 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차 안에 들어가는 물건들은 자연스럽게 그 경량화의 영향을 받을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밖에서 마차 안을 들여다 볼 때 이상하지 않도록 일루젼도 걸어 두는 것을 잊지 않고 말이다 . 결국 점심 준비를 할 시간이 되었을 때, 대략적인 마차 정리가 끝이 났다. 그리고 새롭게 만들어진 마차 부엌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수아는 더없이 신이 났다. “호호, 오빠, 이거 집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것 같다. 호호호. 그런데 오빠 여기쯤 에 물이 나오는 거 있잖아 예전에 그 수도라고 있었던 그거 만들어 주면 안되나? 그 리 고 씽크대라고 하는 그런 모습으로 여기도 만들어 주고...” 생각해 보니 수아도 예전에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비록 하 급 정령의 신세였지만 말이다. 그럼 음식을 하면서 씽크대를 만들어 달라는 것은 당 연 한지도 몰랐다. 나는 그 즉시 지토와 화아에게 얇은 도자기 씽크대 윗판을 만들어 오라고 시키고 만 드어진 씽크대 윗판을 마차의 나무 판에 붙였다. 그리고 함께 만들어 온 도자기 수도 꼭지와 수도관을 설치했다. 물론 그런 것들은 금방 깨진다. 내가 강화와 탄성 마법을 걸지 않았다면 말이다. 강력하고 탄성이 있는 도자기라는 말이다.(도자기가 탄성이 없 다고 말하지 말아라. 도자기도 열받은 상태에서는 연성이 있어서 유동적이 성질을 지 닌다. 그런 유동성을 상온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마법적이 효과인 것이다. 과 학 으로 불가능하다고 나에게 시비 걸면 할 말 없다. 과학과 마법은 영역이 겹치면서 전 혀 다른 것이니까.과학으로 입증하지 못한 현상이 마법이지만 그것이 과학으로 증명 되 면 마법이 아니게 된다.) 결국은 내가 아는 20세기의 기술과 마법이 조합을 이루어서 우리들의 마차는 캠핑카 의 모습을 갖추어가고 있었다. 우리들이 부산하게 돌아다니는 중에 제일 곤욕을 치룬 것은 자이건이었다. 모두들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데 할 일이 없이 우두커니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은 정말 못할 짓인 것이다. 그나마 설거지라도 할 일이 있었을 때는 내가 왜 이런 것을 해야 하는지 하면서 비애 를 느끼던지 절망감을 느끼던지 분노를 느끼던지 했겠지만, 그 일 마저도 몇 번 퇴짜 를 맞으면서 끝을 내고 난 다음부터는 그저 소외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물론 나도 점심을 먹을 때, 녀석이 끼어 있는 것을 보았고 또, 식사 후의 설거지를 시키기는 했지만 그 뿐이었다. 그리고 오후에는 더더욱 우리들이 우리의 일에 몰두해 서 녀석이 설거지를 어떻게 했는지도 별로 신경을 쓰지 못했기 때문에 녀석의 소외감 은 더 심했을 것이다. 거기에 우리들이 마차안에 접이식의 침대를 구상하느라고 정신이 없어서 마차 안에 들어가 있는 바람에 자이건은 저녁 무렵 비가 그치고 어둠이 깔릴 때까지 혼자서 밖 에 있어야 했다. 자이건은 그저 한쪽에서 말들이 풀을 뜯는 것을 보는 것이 전부였던 것이다. 물론 우 리들이 정신이 없는 틈에 도망을 가려고 시도를 해 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만상 진의 축소형이라고 해도 녀석이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런 자이건을 소외감과 외로움에서 구해 준 것은 다름아닌 지토였다. “그런데 저녁은 안 먹는 거냐?” 이런 지토의 물음에 시간이 많이 지난 것을 깨달은 것이다. 결국 우리들은 또 밖으로 나와서 저녁을 만들기로 했고 거기에서 발생한 소소한 문제 들은 즉석에서 해결이 되었다.(이를테면 밤이 되니 싱크대 위가 어둡다던가 하는 것 들 이었다. 아울러 필요에 따라서 수도 꼭지의 물의 온도를 조절하는 기능의 룬을 새로 부착해야 했다.) 그리고 저녁은 좀 아침보다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이루어 졌는데 왜냐하면 그것 은 자이건이 내 뿜는 오라가 많이 가라 앉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적대적이거나 한 느낌은 주지 않고 있었던 것이 우리들 의 식사를 편하게 만들었던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식사가 거의 끝이 날 무렵에 자이건이 입을 연 것도 의외의 일이었다. “저기, 죄송합니다만 한 말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자이건은 고개도 들지 않고 물어왔다. 다들 시선을 모았지만 자이건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왠지 어깨가 떨리는 것 같다. “그래? 무슨 말인지 한 번 들어나 보지. 괜찮지 형?” 화아가 자이건의 말에 반응을 보였다. “그래 뭐 상관없겠지.” 내 말에 자이건은 잠시 고개를 들 듯 하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당신들은 어떤 존재입니까? 인간이 아니시지요?” 자이건의 말소리는 차분했지만 왠지 두려움이 묻어 있었다. 아마도 자이건에게서 적대감을 빼앗을 것은 우리들이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 에서 나온 두려움 때문인 것 같았다. “뭐? 무슨?” 화아가 말을 더듬으며 나를 본다. 즉 나에게 책임을 미루는 것이다. “호? 우리가 인간이 아니라? 그럼 우리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 인간이 아니 라면?” 나는 궁금한 듯이 자이건에게 물었다. “그, 그건. 저도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다만 염두에 둘 수 있는 존재들은 초환수나 초마수, 혹은 마족이나 천사, 아니면 신족 중에서 한 존재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우리들이 조금 특별한 힘을 지녔기 때문인가?” 나는 다시 자이건에게 물었다. “조금 특별한이 아닙니다. 여섯 분 모두가 특별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겉 으로 드러난 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고 보면 그 힘을 짐작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 런 힘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자이건의 대답에 고개를 저었다. “이런, 이런.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인간이야. 그리고 한 가지만 말을 해 두지. 내 가 오늘 쓴 마법은 고위 마법사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들이야. 문제는 지금 이 세상 에 고위 마법사가 별로 없다는 데에 있겠지만 말이야. 적어도 한 가지는 이야기를 해 주지. 난 말이야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마법사 보다도 강한 마법사야. 그러니까 쓸 데없이 나를 인간이 아니라는 헛소리를 지껄이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그렇게 말을 마쳤다. 물론 내 말중에 걸리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내가 인간이라고 말했지 동생들 이나 지토가 인간이라는 마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언젠가 저 녀석이 알 수 있을까 모르지만 말이다. 어쨌든 녀석은 내 말이 끝이 나자 한 동안 말도 없이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정말 인간이라는 말입니까? 그리고 정말 세상의 어떤 마법사 보다도 강한 마법사란 말입니까?” 나는 그 말에 간단히 대답했다. “그 말은 사실이야. 적어도 이 세상에 9써클의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지 않 다면 말이야.” “9써클이라구요!!” 내 말이 끝나는 순간 자지러진 자이건의 목소리가 터졌다. “그럴 리가, 9써클이라니 그건 1000년 전의 쉬벡대마법사를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단 2번 출현했을 뿐인데, 어떻게 9써클 마법사라니..” 그런 자이건의 말은 이미 누군가에 대한 표현의도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일컬어 표 출 적 기능의 언어라고 한다. 표현의도와 전달의도를 지니지 않은 상태의 언어형식. 나는 그렇게 멍청해진 자이건 녀석을 밖에 버려두고 마차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오늘은 우리들 모두 마차 안에서 잘 거다. 너는 밖에서 알아서 자도록 해라. 짐승 이 나 기타 위험한 것은 가까이 오지 않을테니 걱정은 없겠지만 불은 피우는 것이 건강 에 좋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일행들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 비록 마차에 침대는 없었지만 충분히 넓어진 공간은 우리 모두가 편한 잠자리를 가지 고도 남았다. “그 사람도 오라고 했으면 좋을 텐데.” 수아는 자이건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드는 모양이었다. “수아 어 혹시, 자이건이라는 그 사람에게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니? 호호호 아무래 도 그런 것이...” 하지만 풍아가 수아를 놀리는 말은 곧 멈추었다. 수아가 뿜어내는 정령력이 장난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무리 언니라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수아의 말소리는 한 겨울 얼음물 같은 냉기가 풀풀 풍기고 있었다. 하긴 얼음이나 눈과 같은 정령들이 실제로는 물의 정령의 변형이라고 하니 이미 물의 최상급정령인 수아에게 그런 성향이 숨어 있는 것도 이상할 것은 없지만 굉장히 차갑 다. “오호호호호, 수아도 참. 미안하다 그런 농담을 하다니 내가 잠시 미친 모양이다. 호 호호호. 미안하다 정중히 사과할게. 응 화 풀어라. 응.” 그렇게 풍아는 대뜸 사과를 하고 나섰고, 결국 수아의 분노(이런 상황에서 분노라니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는 겨우 진정이 된 것 같았다. “아! 이제 잠을 잡시다. 오늘 하루도 많이 피곤했던 것 같으니 말입니다. 그럼 안녕 히들 주무세요.” 광아는 그런 분위기를 그렇게 흩트리고는 잠자리에 들었고 다른 사람들도 말없이 잠 자 리에 들었다. 거참, 별 것 아닌 말에 수아의 반응이 상당히 과격한 것 같다. 아무래도 아직은 내가 정령들에 대해, 아니 동생들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많은 것 같 다. -용병대의 첫 개시다 잡자 환수 - 다음날 아침은 활짝 개여 있었다. 그리고 자이건은 그 밤을 전날 우리가 잤던 텐트 하나에 신세를 진 모양이었고 텐트 앞에는 작은 모닥불이 붙어 있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우리들은 천천히 출발 준비를 했다. “여기서부터는 화아와 풍아 그리고 광아는 말을 타는 연습을 한다. 하하하. 그래야 나중에 어딜 가더라도 덜 창피하지. 어째 용병이 말도 못 탄다는 것이 말이 되겠냐? ” 물론 내 말에 반발이(내가 말을 탈 줄 모른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내용이었고, 수아 도 말을 안탄다는 것이 소수 의견으로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지토에 대한 의견은 없 었 다. 신체적으로 불가능한 문제니까 말이다. 하지만 나는 마차를 타고 용병대 대장이고 또, 마법사니까 마차를 타야 한다고 우겼 고, 수아도 치마를 입고 다니는데 어떻게 말을 타고 달릴 수 있겠느냐고 우겨서 결국 우리 셋을 제외한 셋은 말을 타는 연습을 해야 했다. 말을 살 때는 지토가 자기는 왜 말을 못 타게 하느냐고 시비를 걸더니 나중에는 말 을 타게 한다고 시비를 걸고, 애휴~ 아무래도 동생들의 비위를 맞추어 주는 것도 힘 들 었다. 어차피 출발은 해야 하는 것이었기에 다들 말에 올라탔다. 뭐 그래도 최상급 정령들 이라 말들이 깔보고 덤비는 일은 없는 모양이었다. 거기다가 말 안장에 올라 앉아서 그냥 붙어 있는 것이라면 그들 정도면 어렵지 않을 일이었다. 다만 문제는 그 모습이 그다지 폼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에 비해서 검은 색의 말 위에 떡하니 올라서 출발 준비를 하고 있는 자이건의 모습 은 제법 멋이 있었다. 나는 천천히 마차를 출발시키면서 한마디 충고를 마지 않았다. “이봐 자이건, 만약에 도망을 가고 싶다면 한 번 해 봐. 내가 왜 9써클 마법사인지 자네 집 위에 떨어지는 운석으로 증명을 해 줄테니 말이야. 물론 그 속에 자네가 없 다 면 그 때는 다시 자네를 찾아 보도록 하겠네.” 그 말과 함께 일행들은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말들은 제대로 타지 못하는 동생들은 한 동안 날뛰는 말 위에서(말이 날뛰었다기 보다는 동생들이 말을 잘못 다룬 것이다. 말 은 절대로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말들이 최상급정 령의 명령을 무실할 턱이 없었다.) 싸름을 해야 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은 자이건이 얼마쯤 동생들에게 말을 타는 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주고 나서야 진정이 되었다. 그리고 그런 자이건에게 동생들은 전혀 스스럼 없이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고맙군. 일단 우리를 죽이려고 했던 인물임을 잊지는 않겠지만 나에게 작은 도움 을 준 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지. 만약 모숨에 대한 것을 갚는다면 내가 이 작은 도 움에 대한 빚을 갚도록 하지.” 이건 화아의 첫 인사. “호호, 나도 마찬가지야. 고마워. 이렇게 고맙다는 인사는 이자라고 생각해. 호호 호.” 풍아. “저도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지요.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하하. 저 역시 화아 형님 의 말씀에 동감하는 바입니다. 큰 빚을 주고 작은 빚을 얻었다고 생각하죠. 그럼 갑 시 다.” 광아의 말이다. 역시 냉철한 녀석이다. 어째 같은 말을 하는데 조금은 다르게 느껴지 는 것이다. 출발은 그렇게 이루어 졌다. 밝은 아침 햇살을 가르며 검은 색 말을 타고 유연하게 앞을 달리는 자이건과, 암적 색 말 위의 붉은 머리 화아가 흰색 말 위에서는 금발의 광아가 갈색 말 위에서는 하 늘 빛 머리카락을 날리는 풍아가 익숙하지 못한 모습으로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나와 지토, 수아는 마차의 마부석에 나란히 앉아서 뒤를 따라 말을 몰았다. 그리고 그 날 저녁 우리들은 새로운 도시의 입구에 닿았다. “음, 자간 시에서 하루 거리 정도가 되겠네요. 썬드라스에서 벌써 다녀갔겠는데요? 어쩌면 마을 안에서 기다릴지도 모르고 말이죠.” 곁으로 다가온 광아의 말이었다. “별 상관없어. 만약에 썬드라스 기사단이 있다고 해도 저 자이건이 알아서 처리 할 거야. 그러니까 신경쓰지 않아도 될거야.” 나는 그렇게 말하곤 도시의 입구를 지키는 경비병들 앞으로 말을 몰았다. “어서 오십시오. 멜아린시입니다. 저희 도시에 잘 오셨습니다. 간단히 신분을 확인 할 만한 것을 제시해 주시겠습니까?” 나는 용병대를 나타내는 메달을 보였고, 병사는 곧 우리들을 통과 시켰다. “정말 썬드라스에서 지나간 모양이네요. 그렇지 않다면 인원수가 한 명 많은데도 그 냥 보낼 리가 없을 텐데요.” 역시 광아의 냉철한 판단이다. 우리들은 도시의 중앙 쪽으로 가면서 여관을 찾았고 도시를 가로질러 반대편의 끝에 이르러서야 여관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실제로 여관이 필요없는 우리들이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도시에 들어와서까지 자이 건을 땅바닥에 자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도시 안에서 텐트를 칠 수는 더 더욱 없는 일이고 말이다. 우리는 여관에 방을 정하고 저녁을 먹기 위해 1층 탁자에 두러 앉았다. “그런데, 여인왕국과 저희 왕국 사이에 있는 환수를 잡기 위해 가신다고 하셨는데, 그 곳까지 그냥 이렇게 가실 겁니까?” 자이건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무슨 말이지?” “저 그게... 환수라면 여기서 여인 왕국 사이에도 몇이 있을 것이고 수는 더 적겠지 만 마수도 몇이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그 것들을 그냥 두고 지나가실 것인가 해서 요.” 자이건의 말은 여전히 조용조용 했다. 아무래도 이제는 포기를 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우리와 함께 다니면서 환수나 마수를 퇴치하면 자신의 이름도 조금은 알려지 지 않을까 하는 망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우리가 환수나 마수를 잡는 것은 의뢰가 들어오는 경우에 한해서야. 지금 우리가 의뢰 없이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직 우리에게 별다른 의뢰가 없고, 그 환수가 돈이 될 것 같아서지, 다른 이유는 없어. 중간에 다른 의뢰가 들어오면 의뢰부터 해결을 할 생각이니까 말이야. 그러고 보니 내일은 길드에 들러서 환수나 마수 퇴치에 관한 의뢰가 있는지 알아 보아야겠군.” 나는 그렇게 말을 마치고는 자이건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하지만 다음날 우리에게 급한 것은 수아가 들고 나온 물품 목록이었다. 마차 안을 꾸 미려면 필요하다는 것이었는데 그것 때문에 하루 종일 시장을 돌아다녀야 했다. 특히 침대를 사는 것은 쉽지가 않은 일이어서(침대를 만들어 놓고 파는 가게가 없었다. 다 들 침대는 주문 생산이라고... 거기다가 거의 모든 가구가 주문 생산이었다.) 아침에 주문해서 급하게 저녁에 찾는 것으로 했지만 그 결과로 또 하루를 메아린시에서 보내 야 했다. 다만 그 저녁에 나와 지토가 길드에서 의뢰 목록을 살펴 보았을 뿐이었다. “이봐 루탄, 이거 우리가 할까? 환수 퇴치에 관한 것인데 여기 보니 우리가 들렀다 가도 길을 많이 벗어날 것 같진 않군 그래.” 지토가 의뢰 목록 중에서 하나를 건네주며 말했다. 의뢰 내용 : 환수 퇴치 환수 등급 : 중,대환수. 환수 위치 : 메아린시 동북방 하루 반 거리의 구릉지. 환수 형태 : 지상형 환수 환수 특징 : 땅 속을 물 속 헤엄치듯 다니는 환수. 흙과 돌을 이용한 공격을 하며, 갑작스러운 출현으로 주위의 인간들에게 위협이 됨. 의뢰자 : 헤이스런 공작가. 의뢰금액 : 10만덴. 추가 내용 : 환수를 생포하는 경우 50만 덴을 지급함.(이 경우 환수는 헤이스런 공작 가의 소유가 됨) “음, 이거 재미있겠는데? 환수를 생포하라는 것은 어쩌면 아직도 헤이스런 가문에 환수를 귀속시키는 환수사가 있다는 말인가?”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의뢰에 지원신청을 하고 다시 지토와 함께 여관으로 돌아와 일행들고 마 주 앉았다. “이런 내용이야. 중급에서 상급 정도의 환수라니까 그다지 어렵지는 않을 것 같아 서 일단 지원을 해 두었다. 가는 길에 들러서 환수를 잡고 다음 마을에서 길드를 통 해 연락을 하고 대금을 받도록 하자.” “이거 오랜만에 몸을 좀 풀어 보겠는걸? 하하 신난다.” 화아는 싸움이라면 그저 좋은 모양이다. 누굴 닮았는지.... “아니지, 환수의 성격상 이 싸움은 내 싸움이야. 봐라. 특징이 땅속을 돌아다니는 거잖아. 그러니 내가 해결을 해야 하는 거다. 우하하하.” 지토도 그 동안에 쌓인 것이 많았나? 다음날 우리는 계획대로 열심히 말과 마차를 달려 북동쪽의 환수를 향해 걸음을 재촉 했다. 출발부터 흥분하던 화아와 지토는 점심을 먹을 때 쯤에는 흥분이 가라 앉은 모양이었 다. 점심은 간단히 여관에서 준비한 도시락으로 해결을 하고 다시 길을 재촉. “오빠. 이러다가 우리 밤중에 그 곳에 도착해서 싸워야 하는 거 아니야? 말로 하루 반 거리에 있다고 했지만, 이렇게 달리면 밤중이면 도착해서 녀석과 붙어야 할지도 모 르는데... 밤에 싸우는건 미용에 좋지 않다구. 밤에는 잠을 자야지. 요즘 안 그래도 바람 때문인지 피부가 영~~” 하지만 풍아도 말을 하다가 이상했는지 입을 다물고 만다. 세상에 바람의 정령이 바람 때문에 피부가 안 좋아 진다는 말을 하다니 참, 세상 오 래 살고 볼 일이다. “흥 그래도 밤에는 잠을 자야 하는 거라구, 미인은 많이 자야 한단 말이야.” 그렇세 쏘아붙인 풍아는 말을 몰아서는 마차에서 멀어졌다. “오빠? 풍아 언니가 왜 저러는 거야?” 수아는 이해를 못한 모양이다. 머리가 나쁜 것은 아닌데 가끔 맹한 것 같다. “풍아가 바람 때문에 피부가 상한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 하냐? 그건 니가 물에 피부가 상한다는 말고 같지. 하하하.” “우웅! 그런 말이구나. 호호.” 하지만 우리들은 어둠이 내리기 시작할 때까지 환수가 있다는 구릉지에 도착하지 못 한 듯 했다. 자세한 지리야 모르지만 일단은 메아린시에서 동북방으로 달려 왔으니 방향은 틀리 지 않았을 터인데 계속해서 평야지대를 달려 왔던 것이다. 나는 마차를 세우고 야영을 결정했다. 밥을 먹고 이제는 설거지 담당이 된 자이건이 설거지를 하는 동안 우리들은 모닥불 을 중심으로 둥글게 모여 앉았다. “오빠, 헤이스런가문에 대해서 뭐 아는 거 있어요? 예전에 썬드라스와 함께 한타 왕 국의 귀족이었다는 거 말고 다른거 말이에요.” 풍아가 모닥불을 뒤적여 불씨로 장난을 치며 물었다. “아니 나도 아는 바가 없어. 쉬벡의 이야기에 보면 마법길드에서 헤이스런 가문의 영향력이 많이 줄어들었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곧 정계나 권력에 서 의 영향력과 연관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거든. 영향이 전혀 없지는 않았겠지만 일단 은 아직도 공작이라는 지휘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으니 말이야.” “루탄 형님 그건 저기 자이건에게 물어보면 될 것 같은데요? 뭐 두 가문은 오랜시 간 최고의 귀족을 군림해 왔으니 서로에 대해 잘 알 것 같지 않아요?” 광아의 제안에 우리들은 설거지를 마치고 돌아온 자이건에게 자리를 내 주고 헤이스 런 가문에 대해 물어 보기로 했다. “이봐, 자이건. 헤이스런 가문에 대해서 좀 물어볼 것이 있다. 헤이스런 가문이 예 전 쉬벡 대마법사에 의해서 학술협회가 흐지부지되고 마법길드에서도 영향력을 잃게 되었을 때, 당연히 그 가문의 위세도 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었나? 그런데 어떻게 계 속해서 최고의 귀족가문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이지?” 내 질문에 자이건은 의아한 표정을 잠시 지었지만 곧 대답을 시작했다. “그건 헤이스런 가문에 다른 강력한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헤이스런은 신계에서 풀려 나온 수 많은 환수들을 제압하고 그 환수들을 다스릴수 있는 귀속 주문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그 주문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없지는 않았지만, 일단은 그 환수들을 제압하고 주문을 걸어야 하는데 그런 대단위 공격과 체계를 가지 고 환수들을 제압할 능력이 있었던 것은 헤이스런 가문 뿐이었지요. 더구나 대부분의 환수들이 제압된 상태에서, 물론 더 이상 손을 댈 수 없을 정도의 초환수급은 제외하 고 말입니다. 다른 환수들을 신계에서 불러올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도 헤이스런 가 문 뿐이었습니다. 즉 환수를 신계에서 소환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마르지 않는 무 력 과 권력을 지니게 되었던 것이지요. 저희 썬드라스가 인간의 군대를 통솔한다면 헤이 스런은 환수의 군대를 지휘한다고 볼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힘은 마법과 함께 이 한 타왕국을 지탱하는 중요한 전력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결국 그 환수를 소환하고 귀속시켜서 다루는 능력 때문이네? 그럼 헤이스런 가문에 서 보유하고 있는 환수는 대략 얼마나 되는 거야?” “그건,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 동안에 헤이스런 가문은 점점 직계가 줄 어들어서 지금은 겨우 20여명 정도의 인원이 그 가문의 전체 인원입니다. 그들이 가 진 환수도 거의 200년 정도 밖으로 내보인 적이 없기 때문에 전력을 짐작하는 것은 어 렵다고 보입니다. 특히 지상으로 나온 환수가 아닌 신계에서 소환된 환수는 소환주가 죽으면 다시 신계로 돌아가 버리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환수가 돌아갔고, 또 다시 소 환되어 귀속되었는지는 그 가문의 사람이 아니고서는 절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다 만 그 귀속이 혈족에게 물려지는 물질계환수의 경우에는 아마도 대환수 몇이 있는 것 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위급인 태환수나 초환수는 가능성만이 있을 뿐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 특히 초환수는 헤이스런 가문에 없으리라고 봅니다만 그것을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군. 그럼 이번에 목표로 하는 중, 대급환수는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건데 50 만덴이라는 거금을 걸다니 이상하네...” 내 말에 자이건은 펄쩍 뛰며 반발했다. “그런 말도 안되는 말씀을 중, 대형 환수라면 기사단 1개단과 맞먹는 전력입니다. 아니 그보다 훨씬 강한 전력이라고 할 수 있지요. 명색이 헤이스런 가문에서도 확인 된 최고의 환수가 대환수입니다. 그런데 그와 맞먹는 환수인데 대단할 것이 없다니 요...” 자이건은 내 말이 얼토당토 않다는 듯이 말을 흐린다. “호호, 그건 내일 보면 알게 될 일이죠. 대환수라. 전에 싸울 때 나왔던 그 대화신 대풍신 대수신 그리고 흑신 뭐 그랬던 것 같은데 그것들 대환수 아니었나요? 그것들 대환수 맞죠 오빠?” 풍아가 신이 나서 떠들었다. “그래 맞을거다. 그것들 별로 쎄지 않았으니까 너희들이 알아서 처리하도록 해라. 그리고 내일 그 녀석은 특징을 보아하니 지토의 상대로 맞을 것 같군. 대신에 화아와 풍아가 지토를 엄호해 주고. 뭐 위험하지 않으면 그냥두고 위험해 보이면 좀 도와주 란 거니까 그렇게 얼굴 구길 필요없잖아. 지토.” 나는 내일의 싸움을 대충 정리해 주고는 몸을 일으켰다. “자 그만들 자자. 컨디션 유지를 해야지.” 그리고 나는 주위에 결계를 치고 마차로 들어갔다. 자이건은 자기 말에서 텐트를 꺼내서는 뚝닥거리고 있었다. 아마 텐트를 분해할 때, 대충 본 것이 있으니까 이번에는 텐트를 치고 잘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 본 다. 그리고 또 하룻밤이 무사히 지났다. “호호, 오라버니 빨리 씻고 식사를 하세요. 그리고 마차 건너편에 세면대도 한 두어 개 만들어 달면 좋겠네요. 호호호.” 잠에서 깨어 밖으로 나온 나를 반기는 것은 열심히 아침을 준비하는 수아였다. “벌써 일어난 거냐? 하하 그래 오늘은 건너편 벽에다가 세면대라도 만들어 보자꾸 나. 하하” 촉촉한 습기가 서린 아침 공기 속으로 우리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리고 지평선 위로 태양이 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우화~ 멋있어요. 오빠. 호호호. 다른 언니 오빠들은 저런걸 보지 못하다니 잠꾸러 기의 비애라고 해두고 우리만 구경해요. 호호.” 수아가 곁으로 와서 팔짱을 끼고 몸을 기대며 말했다. “뭐가 잠꾸러기의 비애라는 거냐? 수아. 너 오빠와 분위기를 잡고 있는 거냐? 꺄하 ~~ 오빠. 나두 나두 호호호.” 뒤에서 풍아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어느틈에 풍아가 반대쪽 팔을 잡고 팔짱을 낀다. 이런 이런 두 아름다운 아가씨를 가까이 하는 것은 좋지만 여동생들이라니 이번 여행 에서는 나도 아가씨를 한 번 사귀어 볼까? 흠흠. 뭐 나도 이 나이 되도록 여자친구가 하나도 없었던 점을 생각하면 이제라도 하 나정도 있으면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인 거지뭐. “음, 보기 좋은데 형? 셋이 그렇게 있으니까 아주 잘 어울린다. 하하하” “정말이네? 수아랑 풍아 누나랑 루탄 형이랑 같이 있으니까 아주 잘 어울린다. 뭐 옛날부터 둘이서 루탄형의 어깨를 차지하고 비켜 주지를 않았으니까 말이야. 그런거 지 뭐.” 화아와 광아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야! 나갈려면 빨리 나가. 왜 앞을 가로막고 난리냐?” 물론 이건 둘에게 앞을 막혀서 못나오는 지토의 목소리다. 하하하 자이건은 수아가 일어났을 때 벌써 일어났는지 한 쪽에서 말없이 말들을 돌보고 있었 다. 그리고 아침을 먹은 나는 또 지토와 화아를 시켜서는 수아가 만들어 달라던 세면대 를 건너편 마차 벽에 만들어 주었다. 마차 지붕에 오려 놓은 물통은 그다지 크지 않은 것이었지만 그 안에는 자그마한 연 못 크기에 해당하는 물이 들어 있었다. 물이 줄면 수아가 알아서 채워 놓을 것이고, 그 물로 식사에 필요한 식수와 세면에 필요한 물을 동시에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첫 사용자는 자이건이 되었다. 그동안 자이건은 제대로 씻지도 못한 것이다. 설거지를 매일 하면서 그 물로 씻을 생각은 왜 못한 것인지 정말 머리가 나쁜 모양이 다. 그렇게 두어시간이 지나서 세면대 공사가 끝나고 우리 일행은 다시 출발했다. “지토, 저 앞에 구릉지가 시작되니까 긴장하고 잘 살펴봐. 그리고 화아와 풍아도 준 비하고. 대신에 꼭 살려서 잡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당히 손해란 말이야.” 나는 일행에게 주의를 주었다. 우리가 잠을 잔 곳에서 두시간 정도를 달리지 나지막한 구릉들이 연이어 파도처럼 늘 어진 지형이 나타났던 것이다. “루탄 이건 이상하다. 저 구릉들 속이 비었어. 그러니까 저 구릉들은 원래 있던 것 이 아니라 그 환수라는 녀석이 이동하면서 생긴 거란 말이지. 두더지 같은 녀석인 가?” 지토가 앞쪽을 생겨난 구릉지에 생성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지토가 그렇다면 그런거다. 지토는 땅의 정령이니까 땅에 대한 것은 믿어야한다. “그래? 그럼 빨리 가서 그 두더지를 잡자구. 뭐해? 가지 않구?” 화아가 서두르며 앞으로 가려고 하는 것을 지토가 말렸다. “기다려, 우리는 몸이 빠르지만 마차나 말은 그렇게 빨리 움직일 수가 없잖아 혹시 라도 기습을 받으면 귀찮으니까 다른 사람은 여기서 구경이나 하고 우리끼리 갔다 오 자.” 그리곤 지토가 우리들이 있는 장소를 구릉지가 잘 보이도록 높혀 주었다. 말이 좀 높인 것이지 언덕 하나늘 만들었다고 보면 되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옆에서 구경하던 자이건이 갑자기 높아지는 땅에 놀라서 허둥거렸지만, 말들은 미리 풍아가 다스려 놓았는지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는 않았다. 겁이 잔뜩 난 듯 했지만 날 뛰거나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자 그럼 구경이나 할까? 우리는. 광아야 안에 들어가서 테이블하고 의자 들고 오 고, 수아는 미안하지만 맛있는 차 한잔 끓여 줄래?” 그렇게 해서 우리 3남매(나와 광아 수아)는 테이블을 앞에 두고 의자에 앉아서 언덕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구릉지를 향하는 지토등을 바라 보게 되었다. “그런데 환수라는 녀석 아무래도 두더지일까? 그렇게 생긴 것이 아닐까?” 나는 나름대로 환수에 대한 추측을 내 놓았다. “저는 아무래도 지렁이 같은 녀석이 아닐까 싶은데요? 쎈드웜이나 스톤웜같은 계열 의 녀석이 아닐까 하는 거지요.” “음, 저는요. 그러니가 뭐가 있을까? 그래 땅 속에 굴을 파는 거니까 토끼나 그런 거 아닐까요. 귀엽게 생겼으니까.” 역시 수아의 대답은 거리가 멀다. “글세, 수아의 기대처럼 토끼같은 환수면 좋겠는데 일단은 귀여우니까 말이야.” 역시 나는 수아에게 약한 모양이다. 말도 안되는 의견의 동조하고 나서다니 말이다. “그렇군요. 토끼라. 토끼라면 좋겠군요.” 역시 광아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그리고 어째 옆에 서서 가만히 있던 자이건의 몸이 잠깐 경련을 일으킨 것 같은데, 잘못 본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환수에 대한 우리의 추측은 지토 일행을 향해 솟아오른 환수로 인해 멈추어졌 다. “뭐, 뭐야? 저게?” “어머 오빠, 토끼가 아닌데요? 그치만 저건 뭐지요?” 모르는 건가? 모를 수도 있겠네.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까 말이야. “저건 말이야. 땅강아지라고 하는 거야. 다른 이름은 땅개. 땅개비라고도 하고, 한 자어로는 누고, 혜고, 석서, 토구, 지구 등으로 불리는 녀석이지. 하하하 그런데 저 렇 게 큰 녀석이 있다니 보통은 손가락 마디 하나 정도되는 건데 하하하.” 생각해 보라 땅강아지가 환수라고 등장을 하다니 말이다. 물론 가까이서 보면 상당 히 징그럽기는 하다. 몸에 난 자잘한 털들이 거의 흉기 수준이다. 찔리면 상당히 아 프 겠다. 더구나 곤충류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각질과 날개로 무장한 녀석의 모습은 상 당히 위압적이다. 멀리서 보면 웃음이 나긴 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장난이 아니겠다. 지금 등장한 땅강아지의 크기는 길이가 10여 미터가 넘고 복부 쪽의 지름만 2미터는 되어 보이는 녀석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미 지토등은 준비를 마친 것인지 능숙하게 땅개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이미 지토에게 일임을 한 상태여서 그런지 화아와 풍아는 그저 뒤에서 무기만 들고 구경만 하고 있다. 지토는 그 작은 체구에도 땅개의 앞다리의 무지막지한 공격을 막아내며 반격을 시도 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리치가 너무 짧다. 하하하 웃으면 안 되는데 웃긴다. 크크 “지토 아저씨, 빨리 잡아버리고 올라와서 차나 한 잔 하세요. 차가 맛있어요. 호호 호.” 지토를 응원하는 수아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전혀 없다. 그래도 저게 중, 대환수라는 건데 그리 간단하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다.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지토는 땅개를 잘도 밀어붙이고 있었다. 힘으로도 땅개에게 밀리지 않다니 대단한 일이었다. 물론 환수의 앞 발이 워낙 크고 튼튼해서 상처를 주지는 못하는 모양이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땅바닥이 꺼지면서 지토와 땅개가 구멍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헛, 저거...” 옆에서 구경하던 자이건이 낮은 비명을 지른다.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별 걱정을 하지 않는다. 땅의 정령이 땅 속으로 들어간다고 문제가 생기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리고 땅 속이라면 지토에겐 더 안전한 곳이기도 하고 말이다. 한동안 땅 속에서 싸움이 있는지 여기 저기 구릉들이 움푹 움푹 밑으로 꺼져 내렸다. 아마 그 속에서는 동굴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을 것이다. “형님 상당히 격렬한 싸움인데요? 저거 저래서는 도무지 결과가 안나오겠어요. 벌 써 상당히 지났는데 나올 생각을 않네요. 지토 아저씨가 힘을 좀 더 쓰지 않으면 어 렵 지 않을까요?” 아마도 광아는 지토가 상급 정령의 힘 정도는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비록 지토들의 모습이 상급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물질계에서 내 힘을쓰지않은 상태 에서 쓸 수 있는 힘은 중급 정령의 힘까지가 한계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지토가 내 힘을 끌어다 쓰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는 줄곳 중급 정령 의 힘만을 쓰고 있는 것이다. 뭐 예전에도 중급의 힘으로 대환수를 상대한 적이 있었지만 그 때에 이기지는 못했다 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으로서도 어려운 일이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흠, 글쎄 그거야 지토가 알아서 할 일이겠지. 거기다가 화아와 풍아도 있는데 무 슨 걱정이야? 하하. 그런데 땅 속에서만 싸우니까 도무지 재미가 없잖아 구경을 할 수 가 없으니 말이야.” 내가 그렇게 투덜거리는 순간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지금까지 잘 싸우던 곳에서 땅위 위로 솟아오르면서 길게 뻗어서는 우리가 있는 언 덕 쪽으로 밀려 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오빠, 저거 혹시...” “그래 아무래도 땅개가 이 쪽으로 오고 있는 모양이네? 설마 도망을 간다는 것이 이 쪽으로 길을 잡은 것인가? 정말 지지리 복도 없는 땅개네...” 어쨌든 땅개의 움직임이 우리 쪽으로 향하고 곧 지토가 땅 위로 솟아 올랐고 내 몸 에 서 약간의 힘이 빠져 나갔다. 지토가 내 힘을 끌어 쓴 것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땅개가 땅위로 솟아 올랐다. 그것도 바위들로 만들어진 창살속에 갖힌 모습으로 말이다. 말 그대로 지토는 땅을 이용해서 포획 우리를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땅개의 발악으로 얼마나 갈지는 모를 상황이었다. “루탄 뭐하는 거냐? 잡아 줬으면 처리를 해야 할 거 아니냐.” 지토가 소리를 질렀다. 가만히 있자 처리라, 어떻게 한다.? 나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결정을 내렸다. “절대 물리 방어.” 나는 지토가 만든 돌로 된 우리에 물리 방어 마법을 걸었다. 아마도 땅개 정도의 힘으로는 그 우리를 부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었다. “이제 된거야?” 나는 지토에게 물었다. “되기는 쥐뿔이 되? 이 녀석이 무슨 덩치만 큰 바보인줄 알아? 이 녀석이 땅속을 헤 집고 다니는 것이 겨우 저 앞발이 가진 힘이라고 믿는 거냐구? 그건 저녀석이 흙이나 돌의 속성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야. 만약에 내가 힘을 빼면 곧 저 우리를 가루로 만들걸? 녀석은 마법력도 쓴단 말이야. 힘들어 죽겠구만 빨리 좀 해봐.” 나는 지토의 설명에 또 다른 마법 결계를 걸까 하다가 그냥 환수에게 직접 마법을 걸 었다. “마력 봉인.” 하하하 얼마나 간단한 방법인가? 대상이 고정되어 있으니 더 쉽구만 그래. 아마도 이 땅개 환수는 당분간 마력을 쓰 지 못할 것이다. 그럼 문제는 해결 된 것이고, 이제 이 녀석을 어떻게 끌고 가지? “오빠도 지금 그 고민하고 있지? 이걸 어떻게 끌고 가나하고, 그치?” 풍아가 옆으로 다가와서 물었다. “그래, 이거 덩치가 너무 크군. 어떻게 이걸 끌고 가지?” “그냥 오빠가 이거 귀속 시켜서 데리고 가면 안 되는 거야?” 수아가 물어온다. “글세, 그렇게 되면 헤이스런 가문에서 돈을 안 주지 않을까? 비록 생포라는 말 뿐 이었지만, 그래도 생포의 목적이 환수의 귀속임이 분명한데...” “그렇겠지. 그럼 정말 이 녀석을 어떻게 데려가지? 그냥 죽이고 10만덴만 받으면 안 될까?” 화아가 대뜸 하는 말이다. 좀 성격이 급하기는 하네. “휴~ 어쩔 수 없다. 그냥 순간이동으로 옮기자.” 내가 제안을 내 놓았다. “에~? 형, 그럼 다시 메아린이나 자간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건 좀 그렇잖아 요.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화아가 반대 의사를 내 놓는다. 다른 곳의 좌표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아무렇게나 순간이동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 다. 그러니 이미 가 보았던 곳이 아니면 어려운 것이다. “자, 자. 그럼 일단 점심을 먹고 생각을 하자구요. 다 먹자고 하는 일인데 안 그래 요?” 풍아가 모처럼 좋은 의견을 낸 모양이었다. 다들 표정이 풀려서는 탁자로 모였다. 몇 개의 의자가 더 나오고(간신히 자이건의 의자도 놓을 수 있었다. 먹을 때 차별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테이블에 둘러 앉아서 오랜만에 삼겹살 파티 를 열었다. 즉석에서 구워서 즉석에서 먹는 맛이란...꿀꺽. 처음 먹어보는 음식일 텐데도 자이건은 군말 없이 잘도 집어 삼킨다. “응? 처음 먹는 폼이 아닌데? 자이건 이거 먹어본 적이 있는 모양이지?” 화아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네? 네. 비록 자주 먹을 수는 없는 것이지만 궁중요리사나 여인왕국의 요리사들 중 에 이걸 할 줄 아는 사람이 있어서 몇 번 먹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처럼 이렇게 맛있는 쏘스는 처음이지만요. 거기다가 이런 야채를 곁드리니 정말 새로운 맛 이네요.” 그렇게 대답하곤 다시 먹기에 열중하는 자이건. “호호, 오빠. 그러고보니 우리 창고에 김치가 없어요. 이번에 마을에 가면 김치를 담아야 겠어요. 물론 담아 주실거죠? 그게 있어야 제대로 된 맛이 난다구요.” 수아가 아쉬움을 표시한다. 그래, 그렇다면 해 줘야지 어쩌겠는가. 수아의 말인데. “그래, 알았다. 이번에 마을에 가게 되면 재료들을 준비해 보자. 하하 맛있는 김치 를 담아야지. 물론 수아도 도와야 하고. 알았지?” “네. 오빠. 호호호.” 그런데 그렇게 괜찮은 식사를 하고 나서도, 여전히 우리가 의도적으로 외면하던 문제 를 해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휴~~ 저 땅개를 어떻게 끌고 가지? 마차에 실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끌고 갈 수도 없고...” 나도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저기 그럼 여기 몇 사람이 지키고 있고, 루탄님이 근처 마을에 가셔서 이곳을 텔레 포트 해 오셔서 모두를 데리고 다시 돌아가시는 것은 어떨까요?” 자이건이 한 마디 거들고 나섰다. “결국은 그런 방법 뿐인가?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지. 일단 여기는 지토, 풍아, 화 아, 광아가 남도록 하고 자이건과 수아는 나를 따라 가자.” “그럼 우리 헤어지는 거예요? 우웅, 우리 헤어진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이렇게 멀 리 떨어지면 싫은데...” 수아가 불안한 듯한 표정을 지었고, 역시 남게 된 네 명도 그런 표정을 애써 감추려 고 하지는 않았다. “무슨 걱정이야? 사실 따지고 보면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잖아. 금방 돌아올 수 있는 거린데 뭐. 그냥 심부름하고 있다고 생각해. 나도 최대한 빨리 오도록 노력할 테 니까. 그리고 만약에 문제가 생겨서 위험해지면 최우선으로 안전에 신경을 쓰도록 하 고. 알았지?” 나는 지토와 동생들에게 당부를 하곤 곧장 동쪽을 향해 마차를 몰았다. “그냥 메아린으로 가는 것이 빠르지 않겠습니까?” 자이건이 옆에서 말을 몰면서 물었다. “이봐 메아린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아까 그 자리에서도 당장 가능한 것이었어. 굳 이 이렇게 헤어질 필요도 없는 거지. 그리고....” 나는 그쯤에서 말을 줄였다. 그리고 동생들은 좀 떨어져서 혼자라는 느낌도 가져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 이 뒤에 이어질 말이었지만 자이건에게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나중에 지도를 좀 사던지 해야겠네. 이건 어디를 가나 정확한 지리를 알 수가 없으 니 답답하잖아.” 내가 투덜거리자 자이건이 또 소리를 친다. “루탄님 지도를 아무렇게나 구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군사 정보에 해당하 는 것인데 말입니다.” “야! 너 아까부터 소리를 지르는데 죽어볼래? 어따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난리가 앙?” 내가 화를 내는 이유는 당연하다. 녀석이 옳은 소리를 하는데 내가 반박할 말이 없 기 때문이다. 달리는 말에서 옆에 있는 마차에 말을 할려면 소리를 지르는 것이야 당연한 것이 아 니겠는가 말이다. “오빠, 지금 심술부리는 거지? 그치?” 수아의 말이다. 물론 나는 아무 말 없이 마차 몰기에만 몰두하고 있다. 옆에서 수아가 웃던지 말던지 달려라 마차야. 이랴 이랴. 우리는 밤에도 대형 라이트마법구로 앞을 밝히고 길을 제촉했다. 그나마 산악지형도, 또 숲지도 아니어서 마차의 앞을 가로 막는 것은 별로 없었다. 문제가 있다면 지리를 몰라서 이렇게 달리기만 하면 되는가에 대해서 심각하게 갈등 을 하고 있었다는 것 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갈등은 밤을 도와 말을 달린 아침에 도로를 발견하는 것으로 끝이났다. 동쪽을 향해 뻗은 대로. 아직은 사람들이 오가지 않았지만 오래도록 사용된 큰 길이 라는 것이 우리들에게 곧 도시를 보게 될 것이라는 안도감을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참을 달린 끝에 우리가 만난 첫 여행자는 우리의 기운을 빠지게 만드는 말 을 했다. 앞으로 3일 거리에 도시가 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뒤로는 말로 달리면 반나절도 안 걸리는 거리에 도시가 있단다. 결국 우리는 죽어라고 달린 길을 되돌아 달려야 했다. “그런데 그 여행자는 왜 그 길에 있었던 거야? 어제 도시에서 출발을 했으면 더 많 이 가야 하지 않나?” 내가 자이건에게 물어보자 자이건이 딱 잘라서 대답을 한다. “그 사람은 걸어서 다니는 겁니다. 말을 타고 달려서 반나절 거리면 걸어서는 3일 은 가야 하는 거리란 말이죠. 그러니 그 사람이 그런 곳에 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런 길을 혼자서 다니는 것은 위험하지 않을까?” “그것도 이런 길이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오래도록 인간들이 길을 내고 다녔기 때문 에 다른 위험 요소가 없는 곳이라는 말이 되니까요. 물론 오가는 인간들이 위험할 수 는 있지만 아까 그 사람처럼 별 것 없어 보이는 사람을 괴롭히려고 이런 길로 나올 건 달들은 없을 거니까 별 문제는 없는 겁니다.” “하지만 혼자 여행을 한다는 건 아무리 보아도 이해가 안 되는데...” 뭐 내가 그렇게 궁시렁 거린다고 해서 말을 타고 달리는 자이건의 귀에까지 들리지 는 않는 모양인지 더 이상 대꾸가 없었다. 아무튼 우리들이 열심히 말을 달린 보람이 있었는지 점심 시간이 조금 지나서 우리들 은 새로운 도시에 들어설 수 있었다. “도시 이름이 크리트니아인데 일단은 길드에 들러서 헤이스런 가문에 의뢰해결을 통 보하는 것이 우선이겠군.” 나는 도시 입구를 들어서면서 경비병들로부터 들은 도시 이름을 알려주고는 도시 안 으로 마차를 몰았다. “크리트니아라면 꽤나 유명한 도시인데요. 여기 저기 돌아 오느라고 여기가 크리트 니아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다니, 저도 이 도시에 한 번 왔었습니다. 용병들과 마법 사들로 유명한 곳이지요. 특히 이 곳의 용병 길드와 마법사길드는 꽤나 중요한 위치 를 차지하는 곳이라 실력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이건이 이 도시에 대해서 아는 척을 하고 이야기를 했다. “그래? 그럼 용병 길드로 안내부터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나는 자이건에게 길 안내를 맞겼다. 그리고 곧 오래지 않아 우리들은 길드 문을 열고 들어설 수 있었다. “어서 오세요. 무슨 일이신지요?” 접수대의 젊은 사내는 웃는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다. “사건 의뢰의 해결을 통보하기 위한 것입니다. 의뢰주 헤이스런 공작가의 환수 퇴치 에 관한 의뢰을 해결했기에 그에 따른 차후 문제를 듣기 위해 온 것입니다.” “어디보자. 헤이스런 가문의 환수 퇴치는 몇 건이 있지만 일단은 가장 가까운 곳이 메아린시의 동북방에 있는 중,대급의 환수에 대한 건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접수대의 사내는 서류를 확인하며 재차 물었다. “맞습니다. 퇴치 및 생포에 관한 의뢰로 우리들은 그 환수를 생포했지만 워낙 크기 가 큰 때문에 일단은 그 환수를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차후 문제를 의뢰주에게 들 어야 할 것 같아서 우리가 먼저 왔습니다.” “그렇다면 문제 해결이 간단하지는 않군요. 그런 문제를 길드에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헤이스런 가문과의 원거리 통신을 준비하겠습니 다. 물론 비용은 의뢰주 측의 부담으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잠시 기다려 주시겠 습니까?” 접수대의 인물은 그렇게 말하고는 곧 몇 가지 사항(용병대의 이름과 생포과정에 관 한 간단한 질문과 환수의 현 상태에 대한 것)들을 알아보고는 서류를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그리고 잠시 로비에 앉아 기다리고 있으려니 다시 접수원이 우리를 불렀다. “이 쪽으로 들어가시면 3번이라고 쓰인 방이 있습니다. 그 안에 있는 마법사가 통신 을 열어 줄 것입니다.” 우리는 접수원이 가리키는 쪽의 문을 들어서서 번호대로 늘어져 있는 방문 중에서 3 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지금 헤이스런 가의 의뢰주와 연결중입니다. 중간에 지국을 거치는 것이라 선명하지는 않지만 불편함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들어간 방 안에는 탁자위에 큰 수정구슬 하나와 몇 개의 의자. 그리고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한 사람이 있었고, 그는 우리들에게 의자를 권했다. 그리고 곧 수정구슬에서 영상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영상은 확실하지 않아 건너편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었지만 음성은 명확하게 전달이 되고 있었다. “반갑소. 나는 헤이스런 공작가의 집사인 하츠키라고 하오. 그래 우리가 의뢰간 환 수를 생포했다고 들었소. 맞습니까?” 질문에 대한 답은 내가 했다. “맞습니다. 하지만 이미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그 환수의 크기가 너무 크고 우리안 에 가두기는 했지만 완전히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 것도 아니기 때문에, 뭐라 할까요. 제압이 아니라 포획이라 해야겠군요. 그런 상태라서 헤이스런 공작가에서 어떤 것을 원하고 우리가 어떻게 했으면 하는지를 알기 위해 이렇게 연락을 드린 것입니다.” 그러자 잠시 수정구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어쩌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럼 당신들은 그 환수를 이동시키는 것은 가능합니까?” 수정구 안에서 하츠키가 물었다. “어느 정도의 이동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이 크리트니아시 까지 이동을 시키는 것은 가능하리라고 봅니다.” 내 대답에 수정구에서는 즉각 반응이 나왔다. “그럼 어느 정도 시간이면 크리트니아시까지 이동이 가능하겠습니까? 일주일 정도 의 시간이면 가능합니까?” 수정구의 질문에 나는 간단히 대답했다. “그렇게 긴 시간은 별로 필요가 없습니다. 원하신다면 오늘 저녁까지는 가능할 것입 니다.” “무, 무슨 소리를 그 크고 무거운 환수를 어떻게 반나절도 안 되는 시간에 그 크리 트니아시까지 옮겨 올 수가 있다는 겁니까?” “그런 것은 아실 필요가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의뢰주가 원하는 것을 해 주 면 되는 것이지 그 내용을 알릴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럼 일주일 후에 이 곳에서 환수를 인계하는 것으로 할까요? 아니면 그 전에 인수하시겠습니까?” 내 물음에 역시 잠시 대답이 없다가 수정구에서 대답이 흘러 나왔다. “그럼 가능하다면 오늘 저녁에 그 환수를 그 곳에서 보고 싶소. 그럼 우리 쪽에서 도 준비를 해서 출발하겠소.” “알겠습니다. 그럼 저녁에 뵙지요. 아마도 도시 안에는 데리고 들어오는 것이 어려 울 것 같으니 동 쪽 출입문 밖에 환수를 데려다 놓고 기다리겠습니다. 그럼.” 나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제 지토등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하는 건가?” 나는 마차를 몰아 동쪽 문 밖으로 나가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오빠, 이 말들이랑 자이건이랑 모두 데리고 텔리포트 하는 건 쓸데 없는 낭 비잖아. 오빠 혼자서 갔다가 와. 나는 여기서 오빠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말이야.” 수아가 어른스러운 소리를 했다. 나는 수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자이건을 불렀다. “이봐, 내가 잠시 갔다오는 사이에 수아를 잘 보살펴라. 만약에 수아에게 무슨 일 이 있으면 각오하고. 그럼 수아야 오빠 갔다오마.” “응 오빠. 잘 다녀오세요. 호호.” 나는 마차를 길 옆에 세우고 텔리포트로 화아등이 기다리는 곳으로 이동했다. “이런 늦게 오셨네요. 루탄 형님.” “좀 늦었네? 무슨 일 있었어?” “오빠 왔다. 호호, 이제 도시로 가는 거야? 이번에는 어떤 도시야? 큰 곳이야? 구경 거리는 많아?” 광아 화아 풍아가 반기는 말이다. 겨우 하루의 시간을 헤어져 있었는데도, 상당히 오랜 시간을 헤어져 있었던 것처럼 반가워하는 동생들이었다. 물론 함께 서 있는 지토의 얼굴에도 평소와는 다른 반가움이 묻어 있었다. “오빠, 우리 오빠가 간 뒤로 계속 굶고 있었다. 수아가 요리 기구를 주기는 했는데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있어야 말이지. 호호, 그래서 내가 음식을 하다가 호호호...” 풍아의 수다의 요점은 이거였다. 먹지도 못할 음식을 만드느라 재료를 낭비하고 냄비 와 솥을 태웠다는 이야기. 하하 “그래, 알았다 빨리 가서 식사를 하도록 하자. 그런데 저 환수는 여전히 그 모양인 모양이네? 그나마 덜 날뛰기는 하는 모양이지만 말이야.” 나는 땅개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래도 중급에서 대급을 오가는 환수라 그런지 이제는 거의 포기를 한 모양이었다. 험악하게 날뛰지도 않았고 적으를 뿜지도 않았다. “이거 많이 순해졌는걸?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나는 지토 등에게 물었다. “그게 다 음식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루탄 형님. 풍 누님이 음식을 망치면 꼭 저 환 수에게 화풀이를 하는 바람에 몇 번을 당하더니 더 이상은 싸울 의지도 없게 되어 버 렸는지 저 모양이 되었습니다.” 광아는 풍아의 눈초리를 피해가며 꿋꿋이 이야기를 끝맺었다. 그렇게 된 거로군. 그런 거야. 음. 나는 곧 환수를 이동시킬 마법진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냥 그대로 이동 시키는 것도 가능은 했지만, 이번 이동에는 어느 정도 계산이 필요 했다. 일단은 환수를 가두고 있는 우리에 깃들어 있는 마법적인 배열이 흩어지면 안 되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서 환수의 마력을 봉쇄한 것도 풀리면 안 된다. 마력이 풀리는 순간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말이다. 그리고 우리들이 텔레포트로 나타나는 곳이 지상에서 약 5미터 정도 떨어진 공중으 로 위치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도착 즉시 부유 마법이 자동 실행 되도록 하는 것도 필 요했다. 물론 순간이동 때에 그 범위안에 이물체의 유입을 막고 축출하는 기본 적인 전위 마 법도 범위가 큰 까닭에 마법진을 이용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준비를 마치고 나서 환수와 우리 일행은 크리트니아의 동쪽 관도 위로 모습 을 나타내었다. “오빠야! 호호, 오빠 무사히 갔다 왔구나? 언니랑 오빠들도 그리고 지토 아저씨도 모두들 아무 일 없는 거지요?” 수아는 서둘러 일행의 안부를 확인한다. “그런데 수아, 저기 마차 옆에서 뒹굴고 있는 사람들은 뭐냐?” 화아가 수아에게 물어보았을 때에야 나는 마차 옆에 뒹구는 네 명의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우응 그게 자이건이 저 사람들을 저렇게 두들겨서는...” “뭐? 자이건이? 왜? 무엇 때문에? 자이건은 괜찮냐?” 나는 수아에게 물었다. 4대1의 싸움이었다면 자이건으로서도 힘겨웠을 것이었다. “으응 자이건은 괜찮아. 조금 다쳤지만 내가 치료해 줬어. 그리고 지금은 마차 뒤에 서 씻고 있어. 호호 흙투성이가 되었거든.” 곧 마차 뒤에서 자이건이 나왔다. “무슨 일이지? 왜 이런 소란이 일어난 거지?” 나는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저들이 수아님께서 마차 밖에 계시는 것을 보고는 같이 이야기나 하자면서 수작을 거는데, 수아님께서 저 녀석들의 말을 어느 정도 대꾸를 해 주고 받아주자 나 중에는 수아님의 손을 잡으려고 하는 것을 막다가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수아님도 저 들과 이야기를 하는 것은 개의치 않으시는 것 같았지만 손을 잡히는 것은 싫어하시는 것 같아서 제가 나섰습니다. 물론 나설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지만 말 입 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자이건이 사람들을 모두 물리친 것은 아닌 모양이다. 4대1은 쉬 운 숫자가 아니니 말이다. 결론은 수아가 저들을 눕혔다는 말이 된다. 한 둘은 자이 건 의 솜씨겠지만 말이다. “그래? 별일은 아닌 모양이군. 수아 정도면 저런 녀석은 떼거지로 덤빈다고 해도 무 서울 것은 없으니까 말이야. 적어도 ‘란의용병대’의 수아란 말이지 하하하.” “호호, 오빠 나 잘했지? 호호. 그지?” 수아는 내 칭찬이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는 수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띄워 주었다. “물론이지 우리 수아가 얼마나 대단한데 하하하.” 그러는 사이에 주위가 정리 되었다. 환수가 들어 있는 우리는 한 쪽으로 치워져서 사람들이 길 위를 다니는 데에 불편이 없도록 만들었고, 일을 마친 지토와 화아가 풍아와 함께 모여서 드디어 우리 형제와 지토가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솔직히 얼마 되지도 않는 시간인데도 함께 있지 않았다는 느낌 때문인지 우리들 사이 의 유대감이 더욱 강해진 듯 했다. “자. 그럼 시간이 좀 있으니까 수아하고 풍아 그리고 화아가 가서 시장에서 김치 담 을 재료들을 사 가지고 와라. 여기를 지키기는 해야 할테니까 모두 갈 수는 없잖아. 그리고 우리 김치 재료가 오면 겉저리를 해서 파티를 벌이기로 하자꾸나. 하하하.” 그렇게 심부름을 시켰지만 도시 안에서 여기 저기로 돌아가니는 것은 몇 번 해본 까 닭에 서로 떨어져 있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저 맛있는 음식을 준비한다는 이야기에 들 떠서는 우르르 시장으로 몰려갔다. 흥정에 익숙하지 않아서 바가지를 좀 쓰기는 하겠지만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이라 신 경 쓸 정도는 아닐 것이었다. 그리고 남은 광아와 지토 그리고 나는 환수의 우리 밖에서 녀석의 동태를 가만히 지 켜봤다. 정말로 풍아에게 심하게 당한 모양인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앞으로 뻗은 넓적한 다 리 사이에 묻고 있었다. “기가 많이 죽은 모양이네? 하하 정말 풍아가 어지간히 괴롭힌 모양이네? 도대체 어 떻게 괴롭힌 거야?” 나는 슬쩍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별거 아닙니다. 그저 몇 번 괴롭히다가 결정적으로는 망친 음식을 억지로 먹였거든 요. 국자로 퍼서 입에 넣었는데, 물론 좀 심하게 두들겨서 기절을 한 상태여서 가능 했 겠지만요. 아무튼 그렇게 국자 하나로 풍 누님이 만든 음식을 먹은 이후로는 저 모양 이예요.” 광아의 대답이다. 정말 어떤 음식이었을까? 갑자기 풍아가 무서워진다. “앞으로는 풍아가 음식을 한다면 말려줘. 내가 부탁하지.” 지토가 옆에서 거들었다. 그렇게 한가하니 시간을 보내는 동안 풍아와 수아, 화아가 돌아왔다. 뭐 화아를 딸려 보낸 이유는 방금 자이건이 했던 역할을 화아에게 맞기는 것이었지 만 의외로 화아가 가까이 있으면 다가와서 말썽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모양 이다. “우와~ 오빠. 재료가 다 있어. 이제 김치를 담는 일만 남았어요. 호호. 그럼 빨리 김치를 담아요. 호호.” 그 뒤는 수아와 내가 침치를 담고, 간간히 재료들을 다듬는 일을 광아가 하고 잔 심 부름을 자이건이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오후 해가 크리트니아의 위에서 모습을 감추기 시작할 때, 우리들의 작업도 끝이 났다. “자~. 이제 모두 다 만들었고, 저장도 완료. 그럼 이제는 오랜만의 파티를 해야 하 겠네요. 호호호. 오빠. 오늘은 삼겹살과 불고기의 만남을 주 메뮤로 해서 저녁을 준 비 해요. 호호호.” 뭐 그런 거다. 이제 우리의 먹거리는 수아의 담당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수아 가 원하는 대로... “그래, 그럼 오빠가 뭘 도와줄까? 응?” “음, 오빠는 그럼 불고기 쏘스를 만들어서 고기를 재워주세요. 호호호.” 사실 그게 제일 중요한 일이고 맛을 결정하는 문제기는 하지만 어쩌겠는가 수아가 시 키는 일인데... 나는 화아와 지토에게 다시 한 번, 고기 굽는 불판을 만들어 줄 것을 부탁하고는 고 기 준비에 착수했다. 그런대로 창고에 준비물들이 있어서 어렵지 않고 고기를 준비했을 때, 화아와 지토 도 불판을 만들어 왔다. 우리는 마차안에서 탁자와 의자를 꺼내고 메직레인지를 탁자에 옮겨 놓고 고기를 굽 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나는 오늘 만든 김치에 약간의 숙성 마법을 걸어서 맛을 내고 탁자위에 꺼 내 놓았다. “이건 정말 특식이로군요. 이 김치를 담을 수 있는 사람은 여인왕국에서도 몇 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렇게 이런 음식을 먹게 되다니....” 자이건은 정말 기대에 찬 눈빛으로 아까부터 군침만 삼키고 있었다. 그리고 불판에서 고기들이 익어가면서 그 기다림은 허겁지겁 고기를 삼키는 것으로 보상이 되었다. 우리 가족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하루를 온통 굶은 풍아와 광아 화아 지토도 질세라 열심히 젓가락을 놀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가족들은 포크 보다는 젓가락을 더 잘 사용한다. 자이건은 애초에 젓가락 대신 포크를 선택했지만 말이다. “자이건, 이건요. 이렇게 김치에 싸서 먹으면 더 맛있어요.” 수아는 먹기에 한창 열중인 자이건에게 김치와 삼겹살의 환상적인 매치를 알려주고 있었다. 적당히 익은(이 경우는 숙성된) 김치를 불판에 적당히 구워서 익힌 다음(이 때 김치 는 될 수 있으면 고기에서 나온 기름에 적당히 절어 있으면 더 좋다.)에 고기를 그 김 치에 싸서 먹는 것이다. 음, 이 방법은 그야말로 최고의 맛을 느끼는 방법인데, 자이건에게 알려주는 것은 아 무래도 아깝다. 아무리 먹는 것을 가지고 차별하지 말자는 주의기는 하지만 말이다. 주위는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지만 광아가 만들어 놓은 광구는 우리 마차 주변을 대낮 처럼 밝게 만들어 주고 있었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음식에 전념하던 우리의 이목에 접근하는 사람들이 포착 된 것은 한창 식사를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그렇다고 식사가 끝났다는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많은 양을 먹을 때에는 한 박자를 늦추면서 음식에 대한 새로운 열의를 다지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그럴 때는 지금처럼 간단한 알콜 음료가 동반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고 말이다. 그렇게 잠깐의 여유를 가지는 중에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이목이 느껴진 것이다. “지금 오고 있는 사람들이 헤이스런 가문의 사람들일까? 루탄형 어떻게 생각해?” 화아가 나에게 물었다. “아마 그렇겠지? 그런데 사람 수가 좀 많은 편이네? 거기다가 마법사의 수가 예상보 다 많은데?” 나는 우리 일행의 저녁을 방해하는 인물들 중에 상당수의 마법사들이 끼어 있는 것 을 알 수 있었다. 마법사들이 가지는 마나의 파장이란 그 보다 높은 써클의 사람에게 숨기기가 쉽지 않 은 것이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는 사람들을 맞이했다.(물론 먹기 바쁜 자이건은 예외 다. 무신경한 지토도 포함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은 열 명 정도 되는 인원이었는데, 앞쪽에는 20대 초반으 로 보이는 여자가 서고, 그 뒤를 호위기사로 보이는 인물 두 명이 따르고 나머지는 로 브를 입은 사람들로 마나 싸이클이 느껴지는 자들이었다. “식사중에 방해가 되었군요. ‘란의용병대’이시죠? 저기 있는 환수를 보니 알겠네 요. 제가 헤이스런 공작가에서 환수를 인계받기 위해 온 사람입니다만 용병대의 대장 님이 어떤 분인가요?” 우리에게 말을 걸어 온 것은 앞장서서 일행을 이끌던 20대 초반의 여자였다. 좀 가냘파 보이는 몸매에 파란눈동자 적금발의 머리카락을 한 여자는 매우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잘 생겼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시원스러우면서도 매력이 느 껴지는 얼굴형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이거 손님을 초대해 놓고 시장기를 참지 못해 추태를 보였습니다. 제가 용병대 대장인 루탄입니다. 여기는 제 일행들이고, 저 사람은 지나는 길에 잠시 합류한 사람입니다. 썬드라스 공작가의 셋째라더군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함께 식 사라도 하시겠습니까? 마침 별미를 맛보고 있는 중이어서 식사를 멈추기가 어려운데, 공작가의 귀한 분을 기다리시라 할 수도 없으니 난감하군요. 저희의 의식이 어떨지 모 르지만 함께 자리를 하시지요.” 이건 절대로 여자가 예쁘기 때문에 나온 말은 아니다. 솔직히 못생긴 것 보다는 낳지만 그래도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 다. 생각하긴 하는데... 그렇지만... 그렇군... “호호호, 맛있는 냄새에 구미가 당기기는 하지만 실은 제가 맡은 일이 급한 일이어 서요. 잠시만 시간을 내 주시면 안 될까요? 저분들은 식사를 하시고 대장님만 잠시 시 간을 내셔도 될 텐데요. 오래 걸릴 일도 아니고요.” 여자는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하하, 하는 수 없지요. 그럼. 계속 식사들 하고 있어라. 빨리 일마치고 올테니까. 그리고 술 많이 먹지 말고. 적당히 해라. 참, 자이건 그만 먹여. 배탈 나겠다.” 나는 동생들을 돌아보고 이야기하곤 그 여자와 함께 조금 떨어진 환수의 우리로 발길 을 옮겼다. “환수는 여기 우리에 들어 있고, 원하는 장소까지 가지고 왔으니 일은 모두 끝난 것 이 아닌가요? 그냥 의뢰대금만 주시면 될 텐데요?” 나는 여자의 뒤쪽 우측에서 두어 발 떨어져 걸으면 물었다.(호위들이 가까이 접근하 는 것을 은근히 막고 있었다.) “네? 아~!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어서 말이죠. 일단은 환수를 확인을 좀 하고 이야기를 계속 하시지요. 호호.”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며 말하고는 다시 우리 쪽으로 발음 옮겼다. 환수는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상태였고, 여전히 마력은 봉인되어 있었다. “음, 이 우리는 상당한 마법이 들어 있군요? 어떤 마법들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요.” 우리에 다가선 여자는 곧 우리에 쳐진 마법들에 관심을 보였다. “별 것 아닌 마법입니다. 이제 빨리 볼 일을 보도록 하지요. 그래 무슨 일이 더 남 았다는 건지요?” 나는 조금은 삐딱한 기분이 드는 목소리로 물었다. 사실 다른 녀석들이 밥을 다 먹기 전에 가서 더 먹어야 하는 것이다. 다 먹고 살자 고 하는 짓인데.. “호호, 심기가 불편하신 모양이네요. 그럼 빨리 일을 마치기로 하지요. 일단은 제 가 이 환수를 구속시키는 것이 우선이구요. 그 다음은 재계약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대장님을 모셨습니다.” 재계약이라. 그것 나쁠 것은 없는 일이다. 하지만 “재계약은 그렇다고하고, 도대체 환수의 구속에 대해서 제가 신경을 쓸 일이 있습니 까?” 나는 물었다. “그게 일단은 문제가 좀 있겠네요. 이 환수는 마력이 봉인된 것 같으니 말이죠. 봉 인을 풀어주셨으면 하네요. 물론 제가 구속을 마친 상태에서 말이죠.” 그런 것인가? 결국에는 이 여자는 환수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 여기까지 나를 데 리고 온 모양이었다. “글쎄요, 그런 문제는 계약에 들어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만.... 계약에는 생포냐 아니면 퇴치냐의 문제만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만약에 그런 문제를 이야기 하신다면 아무래도 추가 비용이 들겠군요. 하하.” 밥도 못 먹게 된 상황이면 이익이라도 남겨야 한다. 하하하 “계약 외의 일에 대한 추가 보수를 원하신다면 그렇게 해 드리지요. 그럼 제가 구속 을 마치고 나면 마력을 풀어 주시는 대신에 10만덴의 추가 보수를 드리기로 하지요. 어떤가요?” 여자는 문제를 끌고 싶은 생각이 없는 모양인지 시원스럽게 말했다. 뭐 나도 별달리 문제가 되는 것은 없었다. “그럼 그렇게 하시지요. 저도 그 정도면 만족합니다.” 그렇게 헤이스런 공작가의 여자와 나와의 거래는 끝이 났다. 그리고 그 여자는 예전 서자치령주가 나에게 가르쳐 주었던 방법으로 환수를 구속시 켰다. 그리고 나는 우리에 걸린 마법을 풀었고 우리는 곧 흙으로 돌아갔다. 그런 모습에 여자나 호위기사는 물론 함께 온 마법사들도 놀람을 감추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이제는 구속되어 조용해진 환수에게 다가가 환수의 봉인된 마력을 풀어 주었다. “호호, 고마워요. 그럼 대금이 60만덴이로군요? 대장님께 대금을 지급하세요.” 여자는 그렇게 말하곤 뒤에 호위로 따라온 기사에게 대금을 주도록 이야기했다. 그 기사는 품속에서 묵직하게 보이는 가죽 주머니 하나를 꺼내 던져 주었다. 그 속에는 여러 종류의 보석들이 들어 있었다. “하하, 보석의 가치를 알지는 못하지만 일단 헤이스런 공작가에서 지불하는 것이니 문제가 없을 것으로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저는 식사가 끝이 나지 않아서 가 봐야 겠 습니다. 그리고 재계약에 대한 문제는 나중에 이야기 하로록 했으면 좋겠습니다만, 제 가 지금은 밥이 먼저여서요. 하하.”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대충하고는 동생들이 있는 곳으로 발을 돌 렸다. “잠깐만요. 아직 일이 남았는데....” 뒤에서 헤이스런가의 여자가 나를 불렀지만 나는 돌아보지 않고 동생들에게 가며 큰 소리로 말했다. “하하, 죄송합니다. 처음으로 의뢰대금을 받은 기쁜 날이라 대원들과 회식을 해야하 니 나중에 뵙도록 하지요.” 나는 손을 저어 보이며 그렇게 동생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뒤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이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얘들이 드디어 우리 ‘란의용병대’의 첫 의뢰대금을 받아 왔다. 축하 파티를 하 자. 하하하” 나는 식사에 열중인 동생들 곁에 앉으며 호기롭게 소리를 질렀고 “호호호, 오빠. 그러고 보니 처음으로 돈을 번 거네? 호호. 그럼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그리고 옷도 좋은 것으로 장만하고 또... 아무튼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좋은 옷 도 ...” 풍아가 그렇게 응대를 해 왔다. 그런데 “야! 누구야? 누가 풍아에게 이렇게 술을 많이 먹인거야? 응? ” 그랬다. 풍아가 내 말에 대꾸를 하는 것은 좋았는데 술에 취해 있었던 것이다. “헤헤 오빠. 뭘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그러시나 헤헤. 나 아직 많이 먹은거 아닌 데. 헤엑.” 풍아는 아무래도 심각하게 먹은 것 같았다. “하하, 루탄형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오늘은 기쁜 날이잖아. 하하. 좀 먹는다고 무 슨 문제가 있겠어? 하하.” 화아 녀석은 멀쩡한 모양이었지만 그래도 술을 먹어서 그런지 평소와는 좀 달라 보였 다. “루탄형님, 그렇게 걱정하지 마세요. 풍 누님은 그래도 괜찮아요. 문제는 막내죠. 딱 두잔 먹었는데 저러고 있으니 말이죠.” 나는 광아의 말에 수아를 찾았다. 수아는 아까부터 가만히 앉아 있었다. 말도 없고 움직이지도 않고 그냥 가만히 앉아만 있었는데, “수아야, 괜찮니?” 내가 수아에게 다가가서 수아의 어깨를 잡았을 때, “히잉, 이게 자꾸 도망을 간다아아. 오빠야. 이게 자꾸만 움지기는 거다아아. 히 히. 이리로와라 헤~” 수아가 탁자위에 검지 손가락으로 술잔을(작지도 않다 거의 머그컵 수준의 잔이다.) 찌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술잔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곳을 찌르면서 술잔이 움직인다고 시비를 걸고 있는 수아. 에구. 정말 못말리는 녀석들이네. “크크크 술 몇 잔 먹여 놓으니 아주 볼 만하네 크크크.” 지토 녀석은 그런 풍아와 수아의 모습이 재미가 있는 모양이다. “쩝, 이런 일단 재워야 겠다. 도대체 그 사이에 무슨 술을 그렇게 먹은 거야? 나 참.” 나는 일단 수아와 풍아를 마차 안에 데려다 눕히고 밖으로 나왔다. “하하, 형. 풍아도 술 먹으니까 귀엽네? 하하하.” 화아가 풍아의 모습이 귀엽다며 한 소리를 한다. “크크. 그런 면에서는 막내도 마찬가진 것 같던데? 크크 수아녀석 손가락으로 술잔 이 도망을 간다고 이렇게 이렇게 크크크.” 지토다. “으이구 이 주책들아! 그래 여자애들 술 먹이니까 좋으냐? 좀 보면서 말리지는 못하 고. 내가 미친다 미쳐.”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있었지만 속으로야 술먹은 여동생들의 모습이 귀엽지 않을 리 가 없다. 하하하. 주정을 부리는 여동생들이라. 하하하 “으큭, 이런 술이 떨어졌네? 크윽. 저기 대장님 술 좀 더 주면 안 되나요. 흐윽, 오 랜만에 마시는 건데. 좀 더 마시죠? 안주도 많이 남았는데. 크흐흐.” 무슨 소린가 하고 돌아보니 자이건이다. 두 눈이 풀려서는 빈 술통을 거꾸로 들고 흔들고 있다. “아니 저건 또 뭐야? 누가 자이건에게 이렇게 술을 먹였어?” “그거야 형님이 꺼내 놓은 술이 양이 좀 많았던 모양이지요. 저희 탓은 아닌 것 같 습니다. 하하.” “맞다. 광아 말이 백번 맞는 말이네.” “그러게 무슨 술을 그렇게 많이 꺼내 놓으랬나?” 이것들이 이제는 모든 책임을 나에게 돌리고 있다. 나는 자이건을 한 쪽 구석에다 구겨 놓고 자리로 돌아왔다. 결국에 풍아, 수아, 자이건이 술에 취해서 정신을 못 차리는 중이고 이제는 나하고 광아 화아 지토만 남은 모양이다. “그래. 뭐 어떻겠어. 우리끼리 더 마시자. 일단 오늘 첫 수입이 있었으니까. 마음 껏 마시고 피로도 풀고 그래야지. 하하하.” 나는 다시 창고에서 술을 한 통 꺼냈다. 예전에 유소와 함께 여행을 할 때 사 두었던 그 술들 중의 하나였다. “하하 이거 거의 1000년이 된 술이다. 하하하. 비록 보존 마법이 걸려 있었다고는 해도 시간의 흐름을 완전히 막은 것은 아니었으니까 엄청 오래된 술이지 하하하.” 그리고 다시 술자리를(원래는 술자리가 아니라 식사였는데..) 시작하려는데 방해자들 이 나타났다. “죄송합니다만, 아직 용무가 다 끝나지 않았는데요.” 헤이스런 가문의 여자다. 짜증스럽다. 일은 일이고, 즐기는 건 즐기는 거다. “이봐요. 나는 지금 의뢰를 맡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즐거운 자리 를 방해 받고 싶은 생각도 없고 말이죠. 굳이 의뢰를 하고 싶거나 볼 일이 있으면 내 일 오세요. 그 사이에 어디 딴 곳으로 갈 생각은 없으니까 말이죠.” 나는 의자에 앉은 채, 돌아보며 말하고는 다시 탁자를 향했다. “이, 이런 건방진 작자가 있나. 감히 공작가문의 영애께 그 무슨 버르장머리 없 는....” “당장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하지 못하겠느냐?” 음, 옆에 서서 아무 말도 없이 지켜보던 기사들이 나서는 모양이다. “형, 시끄럽다. 술자리는 좀 시끄러워야 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신경쓰이니 까 어떻게 좀 해.” 화아가 신경질을 부린다. 아무래도 이 녀석도 술을 먹은 것이 전혀 티가 안 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뭐 동생이 원하는 일인데 못해 줄 것도 없다. 나는 간단히 마차 주위에 결계를 쳤다. 물리력과 마법에 대한 방어 결계였기에 웬만해선 안으로 들어오지 못할 것이었다. “흠. 좀 조용해지니 좋군. 그럼 술이나 마시자구. 크크.” 지토가 마음에 든다는 표현을 한다. 밖에서는 결계가 쳐진 것을 알았는지 기사들이 검으로 몇 번 쳐 보고, 마법사들이 결 계에 대해서 디스펠을 해 보는 모양이었지만 직접적으로 과격한 행동은 없었다. 우리들은 탁자에 둘러 앉아 열심히 부어라 마셔라 아마도 처음인 듯한 술자리를 가졌 다. 화아도 광아도 지토도 이렇게 모여서 술을 마시기는 처음이었지만, 술에 취해서 인사 불성이 되지는 않았다. 어쩌면 한 번쯤은 인사불성이 되도록 취해 보는 것도 좋을텐데... 재미있을 것 같기 도 하고... 또, 술을 먹으면 그 사람의 본성이 나온다는데 지토나 화아나 광아가 애정 표현이 좀 모자라는 편이니까, 술이 취해서 한 번 정도 애정 표현을 해 주면 좋지 않을까 싶 기도 한데, 술이 엄청 쎈 모양이다. 하하하 우리는 그렇게 술을 비우고 어느 정도 마무리를 짓고는 마차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자이건은 아직도 마차 밑에 구겨져 있었지만 자이건의 자리는 마차안에 원래부터 없 었던 것이니까... 밖에 있던 사람들은 내가 결계를 친 다음에 잠시 머뭇거리는 듯 하더니 곧 크리트니 아로 들어갔다. 볼 일이 있으면 아침에 다시 오겠지. -예전에 탐났었어 환수 소환술...그거. 다음날 아침, 약간의 숙취로 절래절래 머리를 흔들며 마차 밖으로 나왔을 때, 아직 도 다른 녀석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밖에는 자이건이 추위에 오돌오돌 떨면서(날씨가 떨 정도로 추운 날씨는 절대 아니 다. 다만 분위기상 그렇다는 것이지.) 여전히 마차 바퀴 옆에 구겨져 있었다. 나는 마차 옆구리에서 세면 장비를 열고 시원하게 씻었다.(아무래도 나중에는 목욕탕 을 만들어서 샤워도 좀 해야 하지 않을까싶다.) 내가 머리를 씻고 긴 머리카락을 비 틀 어서 짜고 있을 때, 풍아가 마차에서 내려왔다. “오빠, 일찍 일어났네? 잠만, 내가 머리 말려 줄께. 헤헤.” 풍아의 잡은 내 머리카락들은 풍아의 손 끝에서 일어난 바람에 날리며 말라갔다. “그래. 너는 괜찮은 거냐? 무슨 술을 그렇게 먹어서는... 그래도 술 먹고 고집은 많 이 안부려서 다행이다만...” “헤헤, 괜찮아. 머리가 좀 띵 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심하지도 않고...” 역시 술이란 안주가 좋아야 하는 것이다. 술을 많이 마셔보지 않은 풍아도 과음을 했는데도 이렇게 멀쩡한 것을 보면 말이다. “우응, 오빠랑 언니랑 벌써 일어났네? 아하! 좋은 아침이예요.” 수아가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인사를 한다. “그래, 너도 괜찮냐?” “응, 괜찮아요. 호호호.” 나는 수아와 풍아가 세면을 하도록 자리를 비켜주고, 잠든 자이건을 깨웠다. “일어나라. 언제까지 퍼질러 자고 있을거냐?” 나는 자이건을 깨우고(간단하게 옆구리를 질러 주는 것이다.) 마차 안으로 들어가서 광아등을 깨웠다. “음, 머리가 아파요. 흐흑. 이런 경험 처음이야. 흐흑.” 다들 멀쩡하게 일어난 것 같은데, 유독 비명을 지르는 녀석이 있었다. 평소와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광아였다. “저런 다른 녀석들에 비해서 광아는 술에 약한 모양이네? 다음 부터는 광아는 독한 술은 먹지 말아라. 하하” 그런 쓸 데 없는 주의를 주고나서 나는 아침 메뉴를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렇게 술을 먹은 다음에는 콩나물 국이 좋은데... 가만있자. 콩나물이라... 아무리 급하게 준비를 한다고 해도 마른 콩이 콩나물이 되려면 시간이 걸린다. 결국 콩나물을 어렵다는 말인가? 그럼 뭘 먹나... 아침부터 먹을 거리가 걱정이라니... 나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쉬벡의 마법서를 뒤적거렸다. ㅋㅋ 역시 마법은 좋은 것이다. 넥스의 마법서에는 9써클 마법으로 시간 조정에 관한 것이 있었는데 시간을 멈추는 것이었다. 술자와 술자가 지정한 대상을 제외하고 시간의 흐름을 멈추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이 콩나물을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8써클에 해당하는 마법 중에서 시간의 흐름을 조절하는 것에 관한 것이 있었 던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공격 마법이라고 할 수도(실상은 마법이 걸린 대상에게만 시간이 빠 르게 흘러가는 것인데... 상대적으로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는 존재는 다른 사람의 10 분에 자신은 30분을 쓸 수가 있는 것이라. 엄청 동작이 빨라진다. 부작용은 있지 만...) 있는 마법이었는데... 하하 다시 이야기 하면 마법을 걸기에 따라서 다른 사람에게 10분의 시간이 마법 대 상에게는 20분 혹을 30분 길게는 1시간에 해당하는 시간의 흐름을 가지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방법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마법 대상에게만 그렇게 빨리 흘러가는 것이기 때문에 본래의 시간으로 돌아 오는 순간 그 사이에 무리하게 적용되었던 신체 기능에 대한 대가를 치루어야 하는 것 이다 작게는 근육통에서 심하게는 노화에 이르기까지... 뭐 8써클이라 아주 긴 시간(예를 들어 몇 년 정도의 시간)을 변화시키는 것은 어렵 고 길지 않은 시간(한 몇 일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반작용을 견딜 수 있는 존재라 는 조건이 붙겠지만..)이 가능할 뿐이었다. 물론 그 경우에도 대상이 받게 되는 반작용은 엄청난 것이었지만... 하지만 콩나물 콩이 반작용을 받든 말든(콩나물이 비명을 지를 것도 아니고...하하) 나는 급하게 콩과 물을 준비하고 콩나물을 만들었다. 딱 30분만에 먹음직한 콩나물이 수북하게 자라나는 모습을 그야말로 환상이었다. 역시 마법은 좋은 것이다. 하하하 나는 준비된 콩나물로 얼큰하고 시원한(이 맛을 이해하는 사람은 우리 민족 뿐이라 고 하던가? 매운 고춧가루를 넣은 음식을 시원하다고 하는 것은....) 해장국을 끓였 다. 다들 아침을 먹을 생각들이 별로 없다고 했지만, 일단 콩나물국을 조금씩 마셔 본 이후에는 준비한 사람의 마음이 흡족할 정도로 맛있게 아침을 마무리했다. “자 그럼 이제는 기다리는 일만 남았나? 어제 우리를 못살게 굴던 헤이스런가의 여 자 와 마법사들이 몰려 오겠지?” 나는 식사를 마치고 탁자에 둘러 앉아 휴식 모드로 들어간 일행들을 둘러 보면서 말 했다. “그렇겠지. 그런데 무슨 일이야?” 지토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별거 아니야. 아무래도 재계약을 하고 싶은 모양이야. 환수를 잡아 달라는 것이겠 지. 어쩌면 그 보다 더 큰 문제일 수도 있고...” “환수를 잡아달라라... 그거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닌데 그냥 재계약하고 일 해 주면 되는거 아니야?” 화아가 거들고 나선다. “그야 뭐 일거리가 많은 것은 좋지만 일단은 특정인에게 묶이는 것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말이야.” “그것도 그렇네요.” 내 말에 동의를 표하는 광아였다.(처음 일어 났을 때에 비하면 많이 좋아진 모습이 다.) “뭐 그래도 환수 사냥하는 거 재미있잖아. 돈도 벌고 좋은 것 같은데...” 풍아는 환수 사냥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뭐 환수 사냥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는 아니지. 다만 헤이스런가에 묶이는 것 같아서 싫다는 거지.” “그럼 헤이스런가와 계약을 하지 말고 환수를 잡아서 팔면 어떨까요? 헤이스런 가문 에서만 환수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니까 환수를 사려는 사람은 많은 텐데요?” 자이건이 참견을 하고 나선다. “그게 좋겠다 오빠. 일단 환수를 찾아서 잡은 다음에 환수를 파는 거야. 음... 그리 고 우리들도 환수를 하나씩 가지면 좋을 거 같은데.. 란이 같은 환수를 키우면....” 수아의 말이다. 환수를 잡아서 판다. 경매 때문에 곤역을 치루고도 아직 그런 생각이 나는지... 하지만 분위기가 다들 그런 모양이니, 어쩔 수 없겠다. “뭐, 그럼 이제부터는 환수를 잡아서 파는 걸로 직업을 바꿔 볼까나? 하하” “와! 환수 사냥꾼이 되는 거네? 호호 재미있겠다.” 어째 풍아는 아직도 술기운이 남은 걸까? 흠.. 그렇게 우리들이 식사를 마치고 앞으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헤이스런가 의 여자와 그 떨거지들(마법사와 기사)이 나타났다. “식사를 마치셨는지 모르겠네요. 호호 대장님은 먹는 것에는 민감하신 것 같아서 아 침 식사 시간을 피한다고 피해서 왔는데요. 호호.” 그래 나 먹는 거에 목숨 건 사람이다. 세상에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하하, 어제 제가 실례를 했던 것을 꼬집는 말씀 같습니다. 하하 몸 둘 바를 모르겠 군요.” 난 역시 생각과 말이 다르게 나오는 모양이다. “하하, 마침 식사를 마치고 쉬는 중이었습니다. 이리 앉으시지요.” 나는 자이건을 자리에서 내 쫓고 의자를 권했다. 여자는 별 말 없이 자이건의 자리에 앉았지만 다른 일행들(떨거지들)은 물론 앉을 자 리가 있을 턱이 없었다. 상당히 불편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무슨 언질이 있었는지 별다른 말 없이 여자의 뒤쪽에 서 있었다. (시실 윗사람이 앉는다고 자기들도 앉으려는 것이 잘못 아닌가?) “호호, 그럼 일단 용건부터 이야기를 하지요. 저희 헤이스런가에서는 란의용병대 여 러분과의 장기 계약을 원합니다.” 역시 시원스런 성격의 여자다. “장기 계약이라. 하하. 죄송하지만 저희 용병대는 어떤 특정인이나 집단에 속하는 것 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헤이스런가의 재계약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합 의를 했거든요.” 나는 말을 돌리지 않고 직설적으로 의사를 전했다. “이, 이런 감히 용병대 따위가...” 역시 성격이 급한 무슨 대장인가 하는 사람의 이빨 사이에서 나온 말이다. 이빨을 악물고 말을 하는 특이한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이런 그러시다가 이빨 다치면 평생 고생입니다. 대신에 저희들은 앞으로 환수를 잡 아서 팔아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하 알고 보니 환수사가 제법 많은 모양이고 그 환수사들은 대부분 능력있는 후견인들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니 환수를 잡아서 팔면 제 법 벌이가 괜찮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내 말이 끝나자 그 때까지 얼굴 표정의 변화가 없던 여자의 페이스가 조금 흔들였다. “호호, 그거 재미 있겠네요. 하지만 여기 저기 환수를 찾아 다니고 또 제압하고 하 는 것은 힘들고 귀찮지 않을까요? 그냥 저희 가문과 계약을 하시면 그렇게 돌아디니 는 수고를 하지 않으셔도 될 텐데요.” 여자는 표정을 바로 잡으면 말했다. “헤이스런 가문에 아직도 신계로부터 환수를 소환하는 방법이 전해지는 모양이지 요? 그 방법이면 굳이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될지 모르지요. 하하 하지만 우리들은 여 기 저기 여행을 하고 싶어서...” 나는 말을 중간에 끊어야 했다. 여자의 얼굴 표정이 이상하게 바뀌었던 것이다. “어, 어떻게... ” 말을 하던 그녀는 곧 말을 멈추고는 나를 노려 보았다. “잠시만 대장님과 단 둘이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만... 가능하겠습니까?” 이크 아무래도 내가 무슨 실수를 한 모양이다. 음, 역시 신계에서 환수를 소환하는 것에 관한 문제인가? 나는 아무 말 없이 여자를 따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생들과 지토도 문제를 인식했는지 의아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둘이 이야기를 나 누는 것에 이의는 없는 모양이었다. 우리들은 자리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고, 나는 사안의 중요성을 인식해서(사 실 여자의 표정이 장난이 아니었던 까닭으로) 주위에 결계를 쳐 주었다. “단도직입적으로 여쭈어 보지요. 어떻게 우리 가문에 그 방법이 다시 나타났다는 것 을 알게 된 것이지요? 얼마 전에야 겨우 문헌을 통해 알게 된 것인데...” 음, 그럼 그 사이에는 그 방법이 전해지지 않고 있었다는 말이네... 흠.. 그렇군. “하하 뭐 그런 것을 가지고, 전 그저 마법을 배울 때 책에서 읽은 것 뿐입니다. 책 에 그런 내용이 있더군요. 하하하 아~! 그리고 그 사이에 헤이스런가에서 그 방법이 실전되었었다는 것은 제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하” “그럼 결국에 원점인가요? 아시는지 모르지만 헤이스런가는 지금으로서는 거의 이름 뿐인 공작가 입니다. 쉬벡 대마법사 이후로 마법길드에 대한 영향력을 잃었고, 환수 를 구속해서 부리는 능력으로 공작가의 위치를 지키고 있었지만 300년 전 쯤에 신계 에 서 소환한 환수를 제압하지 못하고 가문의 어른들이 거의 몰살을 당한 이후로 환수를 소환하는 방법 마저도 유실된 이후로는 점점 공작가의 위치를 지키기 어려워 졌지요. 이제 겨우 소환 방법을 다시 찾게 되었지만 사실 지금 공작가의 힘으로는 신계에서 소 환되는 환수가 상급이거나 그 이상인 경우에는 제압하기가 어려운 형편이라 무턱대고 소환을 할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란의용병대의 힘이 무척이나 절실한 것이지 요.” 어쩌면 이 여자는 상대를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솔직하고 숨김이 없이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나에게서 도움 을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저희 용병대가 도움을 드린다고 해도 말이지요. 언제까지나 저희 가 헤이스런가에 속해 있을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국에는 태급 이상의 환 수 를 제압해서 헤이스런가에 귀속을 시켜 주어야 한다는 말이 되는데.. 그래야 다른 환 수를 불러 내었을 때에 제압이 가능할 테니 말입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무작위 로 소환이 되는 헤이스런가의 소환방법에는 마땅히 대책이 없는 것도 사실이지 않습 니 까?” 사실 그렇다. 환수중에 어떤 강한 환수가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이니 어느정도 안 전하리라는 보장을 만들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300년 전에 나왔다는 그 환수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어떤 환수였지요?” 나는 갑자기 생각이 나서 물었다. “아! 그 환수는 아마도 초환수에 속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환 수는 신계에서 소환된 것이었기에 소환자가 죽은 다음에(물론 그전에 그걸 막으려는 사람들을 전부 죽였지만) 다시 신계로 돌아갔습니다.” 하하 결국 초환수란다. 초환수가 신계에서 소환되어 오면 그걸 막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소환된 환수는 곧장 역소환이 되지 않나요? 내가 알기로는 그냥 돌려 보내 는 방법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물론 그렇게 돌려 보내는 방법이 있지만 어느 정도 이상의 환수의 경우에는 돌아가 는 것을 거부하고 행패를 부리는 경우도 있어서... 힘이 있는 환수는 역소환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뭐 그런 건가 보다. “그렇군요. 그럼 헤이스런가에서 환수를 소환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고 해도 기뻐 만 할 수는 없는 문제로군요. 어떤 환수가 소환될지 모르는 것이니....” 그러고 보면 예전에 그 서자치령주는 정말 무대포였던 것 같다. 만약에 란이가 나오 지 않고 초환수가 나왔다면 상당히 땀을 흘려야 했을텐데... 뭐 주위에 사람들이 모두 한가닥씩 하는 사람들이었으니 그걸 믿은 것이겠지만 말이 다. “그래서 저희들은 최대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한 상태에서 태급정도의 환수를 소환하 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란의 용병대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았 기 때문에...” 뭐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문제였다. “뭐 다 짐작이가는 일입니다. 그것 참. 대충 상황을 알았으니 다시 우리 일행들과 이야기를 해 봐야 겠군요. 시간을 좀 주셔야 겠습니다.” 나는 헤이스런 가의 여자에게 호감이 갔다. 솔직했고, 숨김이 없었으며, 투명했다. 어쩌면 나는 아직도 유소에게 받은 상처를 기억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다시 일행들이 기다리는 탁자로 돌아왔다. “오빠, 무슨일이야? 뭐 심각한 일이라도 있었어?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네?” 풍아가 장난스럽게 물어왔다. “일단은 헤이스런가의 계약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를 해 봐야 겠다. 하하 저 여자분 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거든. 숨기지 않고 솔직하다는 것은 충분이 그에 상응하는 보 답 을 받을 자격이 있는 행동이지.” 내 말에 화아등은 조금 얼떨떨한 표정이기는 했지만 반발은 없었다. 여자는 잠시후에 다시 오겠다는 말고 함께 일행들(떨거지)을 데리고 자리를 피해 주 었고 나는 다시 동생들과 의논을 시작했다. 물론 그 자리에 자이건은 껴주지 않았다. (설거지 시켰다.) 나는 대충 상황을 설명했다. “그래서 형은 어쨌으면 좋겠어? 도와주고 싶은거야?” 화아가 물었다. “그래, 오빠 생각이 중요하지 뭐. 일단은 우린 별다른 불만도 없고, 그렇다고 꼭 이 일을 해야겠다 말아야 겠다는 생각이 없으니까...” 풍아도 내 의견을 묻는다. “글쎄, 내 생각은 이런데, 일단은 헤이스런가의 일을 도와주고 대신의 그 대가로 신 계에서 환수를 소환하는 방법을 받는 것은 어떨까 하고 말이야. 하하 그럼 우리 심심 할 때, 환수들 소환해서 마음에 드는 환수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싶어서...” 내가 이렇게 말을 줄이자 “오호! 그거 좋은 생각이네. 그거 마음에 든다.” 지토다. 무슨 일로 지토가 저렇게 좋아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호호 그게 좋겠다. 나도 귀여운 환수를 가지고 싶어.” “흠. 그거 좋겠네. 나도 찬성이야.” 풍아와 화아도 찬성이었다. 그리고 수아와 광아도 어떤 환수를 가질까 하는 표정인 것으로 보아서 적극 찬성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소환법을 알려주기는 할까? 소환법을 알려주는 것이라면 어쩌면 상당한 대 가를 치루어야 하지 않을까?” 잠깐의 흥분 뒤에 따라오는 걱정이다. “그래, 광아 말에도 일리가 있어. 소환법을 알려 주려고 할까? 그리고 알려준다면 어쩌면 태환수 정도를 제압해 달라고 하지 않을까?” 풍아가 광아의 말을 받았다. “뭐 태환수 하나 정도는 잡아 줘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중인데...” 나는 별 것 아니라는 투로 이야기를 했다. “아무래도 태환수급 정도는 되어야 하겠지? 그런데 그걸로 만족하지 못한다면 어떻 게 하지?” 지토가 끼어 들었다. “태환수로 만족하지 못한다면 우리도 손을 떼는 것이 좋겠지. 뭐 안 되면 슬쩍 훔쳐 오는 것도 한 방법이고 말이야. 하하하.” 나는 잠시 굳은 일행들을 돌아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우리 입장은 정해진 거다. 태환수급을 귀속시켜주는 대가로 소환법을 받는 것. 여기의 이의 있는 사람 있어?” 나는 동생들과 지토를 돌아보며 말했고 아무도 반대하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에 우 리의 입장은 깨끗하게 정리가 되었다. 사실 예전에 서자치령주가 란이를 소환해 주었을 때, 나는 그 소환법 자체에 무척이 나 관심이 있었지만 그걸 가르쳐 달라고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무래도 이 기회에 그 방법을 알아내려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나 싶다. 흐흐 흐 우리들은 어렵지 않게 우리들의 입장을 정리했고, 곧 다시 헤이스런가의 여자와 마 주 앉았다. “그래 어떤 결론을 내리셨는지 궁금하네요. 저희와 계약을 하시겠습니까?” 역시 이 여자는 성격이 직선적인 데가 있는 모양이다. “네, 일단은 약간의 의견 조정이 필요하겠지만 저희의 요구를 수용하실 수 있다면 저희들도 도움을 드리도록 하지요.” 나는 이렇게 말머리를 꺼냈다. “그래요? 그래 그 요구사항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지요? 너무 무리하지만 않다면 수 용할 의향이 있습니다만...” “음, 우리들의 요구조건은 헤이스런가에서 가지고 있는 신계의 환수를 소환하는 방 법입니다. 그 방법을 알려 주신다면....” 하지만 내 말을 끝나지 못했다.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그런 조건이 가능하다고 생각 하는 겁니까?” 역시 성격 하나는 대찬 여자라는 생각이 든다. 하하 ㅡ.ㅡ;; 탁자를 두드리며 일어난 그녀의 눈빛이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하하 어차피 그 소환법으로 환수를 소환해 낼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소환 법을 나누자는 말이 그렇게 화를 낼 만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역시 이런 때에는 여유가 필요하다. 느긋한 모습은 상대로 하여금 때로는 분노를 불러 일으켜 논리적인 이성을 박탈하는 좋은 방법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정 반대의 역할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소환법이 다른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것이 어떤 위험을 초래할지를 알고나 하는 말 씀입니까?” 그 여자는 다시 자리에 앉으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글쎄요. 알지요. 일단 소환된 환수를 제압할 수만 있다면 무궁무진한 전력을 지니 게 되는 것이니까요. 어쩌면 그런 의미에서 헤이스런가는 잠재적인 전력으로 친다면 이 대륙 어떤 국가보다 큰 전력을 지녔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환수를 소환한다 고 그 환수를 귀속시킬 능력이 아무에게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따지고 보면 지금 아가씨도 대환수를 넘어서면 귀속시키는 것이 가능할는지 어떨지 모르지 않습니 까? 거기다가 귀속을 시킨다고 해도 제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러 니 굳이 소환술을 저희가 알게 된다고 해서 걱정하실 필요는...” “잠깐만요. 그게 아닐텐데요? 제가 느끼기에 대장님은 저보다는 더 높은 등급의 환 수를 귀속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계신 것 같군요. 그리고 같이 계시는 분들 역 시 만만한 분들이 아니고 말씀이지요.” “뭐 그런 문제를 숨길 이유는 없겠지요. 일단 그 문제는 인정을 하지요. 하지만 그 렇다고 틀려 지는 것이 있을까요? 지금 이 대륙에도 환수는 많이 있습니다. 어쩌면 소 환되는 환수보다 더 좋을 수도 있지요. 소환주가 사라진다고 해도 이 대륙에 있는 환 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러니 환수가 필요하다면 저희들은 좀 귀찮기는 하 겠지만 그런 환수들을 제압하고 귀속시키면 되는 일이지요. 굳이 헤이스런가의 그 소 환법을 탐을 낼 이유가 없지 않을까요?” 내 말이 끝나자 헤이스런가의 그 여자는 한 동안 말이 없이 생각에 빠지는 모습이었 다. “이 문제는 제가 단독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닌 것 같군요. 일단은 집안회의를 거치 지 않고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시간을 주시면 회의를 해서 결과를 알려 드리지요. 그럼 일단 저희가 소환법을 알려 드린다고 했을 때, 어떤 대가를 치루실 생각이신가 요? 그건 말씀을 해 주실 수 있겠지요?” 그런대로 머리가 돌아가는 여자인 것은 확실하다. “물론입니다. 소환법을 받는 대신 다른 대가 없이 소환되는 환수들을 제압해서 귀속 시켜드리지요. 태급환수가 나올 때까지 소환되는 환수들을 제압해서 헤이스런가에 귀 속시켜드리고 태급환수를 귀속시키면 계약이 끝나는 것으로 하지요. 이게 저희가 드 리 는 조건입니다.” “태급환수라... 그정도로..”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초환수 수준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헤이스런가에 있으리라 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9써클의 마나량과 더불어서 환수에 대한 친화력도 상 당 해야 하는 것이니까요.” “초환수는 ... 그렇군요. 제압해도 귀속이 가능한 사람이 없다는 거로군요. 하지만 태급환수 한 마리로는... 3마리의 태급환수라면 가족회의에서 설득을 해보겠습니다만 어떤가요?” 거래라는 것인가? 아마도 3마리라는 것에서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이다가 2마리 정도에서 타협을 보려는 것이겠지. “두 마리에서 타협을 보자는 말씀인가요? 글쎄요. 태급환수의 능력을 무시하시는 것 같군요. 아마도 태급환수라면 8써클 마법사는 되어야 상대가 가능할 것이고 그렇 다 고 제압은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런 존재를 둘이나 달라고 하는 것인 가요? 별로 내키지 않는군요.” “제가 언제 두 마리라고.... 분명 3마리라고 ....” “거래에서의 기본이지요. 자기가 원하는 것에서 흥정의 여지를 남기고 조건을 내세 우는 것은 말입니다. 분명 아가씨도 그러셨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절대로요. 전 그렇게 계산적이지 않습니다. 전 분명 3마리의 태급환수라면 가족들 을 설득해 보겠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 이하라면 제 설득은 기대하지 않으셔야 할 거고 말입니다.” “그래요? 그런 하는 수 없군요. 저희의 조건은 태급환수 한 마리를 제압 귀속시켜드 리는 것입니다. 그 이상은 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아가씨께서 마음에 안 드신다면 할 수 없지만 집안의 어른들은 어떨지 어쭈어나 보시지요. 그럼 이제 용건은 끝이 난 것 같군요. 그리고 될 수 있으면 내일 까지는 가부의 결과를 알고 싶습니다만, 저희 들 이 바쁜 것은 없어도 한 곳에서 기다리는 것은 지루해서 말이지요.” 나는 말을 마치면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이스런가의 아가씨를 따라온 기사들이 얼굴이 붉어져서 당장이라도 칼을 빼들고 달 려들 듯 했지만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고 있었다. “협상이 아니라 일방적인 통보를 받은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군요. 하지만 일단 란의용병대의 협조를 얻을 방법과 조건을 알게 된 것도 수확이라면 수확인가요?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다시 뵙도록 하지요.” 저 여자 화가 난 모양이네. 인사도 없이 몸을 돌려버리다니 말이야. 그런데 이 떨거지들(마법사들)은 왜 따라가지 않고 얼쩡거리는 거지? “마법사님들은 따로 볼 일이 있으신 것인가요?” 나는 마법사들을 좋아한다. 아마도 쉬벡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흠, 일단은 같은 길을 걷는 분을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몇 써클이신지를... 여쭈어도 될런지요.” 흠.. 이들은 내 마법에 관심이 있는 것인가? 하지만 내 마나량은 숨겨진 상태인데...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나.. 흠... “얼마전에 길드에서 내려온 공문에 루탄님 일행에 대한 공문이 있었습니다. 쉬벡의 성에서 마법을 사용하신 분이라고... 엘리오 길드원이 보고를 했더군요. 그래서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습니다.” 음... 알고 있으니까 발뺌할 생각은 하지 말라는 협박이네... 킁 “거기다가 풍교의 일도 있었으니... 솔직하게 털어 놓으시는 것이...” 이젠 협박까지? 이걸 그냥 콱... “허허 물론 드러나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으실 테니 저희 길드원 이외에는 이런 사실 을 모르도록 조치를 하겠습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은 않으셔도.. 허허” 역시 늙은 생강이 매운 법이다. 떨거지들 앞에서 떨거지들의 대표로 보이는 늙은이가 슬쩍 내 표정을 살피며 하는 말 이다. “그래 내 써클은 당신들의 짐작대로라고 하고 나에게 궁금한 것이 뭡니까?” 나도 성격이 급해진 건가? “뭐 별로 궁금하다거나 그런건 아니고.... 어제 대단위 마나의 운용이 감지되어서 길드에서 그 마나 운용이 어떤 이유, 어떤 형태의 마나 운용인지에 대한 보고를 하라 는 연락이 와서 말입니다. 허허” 그러니까 말인즉은 어제 내가 환수를 여기까지 데리고 올 때 생긴 마나 파장을 조사 보고하는 임무를 맡았다는 말이군. 뭐 그렇다면 이 떨거지들은 헤이스런가의 그 여자 와는 상관이 없는 것인가? 그러고 보면 정말 단촐한 인원으로 환수를 인계 받으러 왔다는 말이되네? 어째 공작 가의 행차라고 보기에는 상당히 초라하다는... 역시 가세가 기울어서 그런 걸까? 흠.. 아차 이게 아니네.. 중요한 건 눈 앞에 이 마법사들을 해결하는 것이.. “뭐, 그런 문제라면 이미 다 확인을 하신 것이 아니셨습니까? 어제 환수를 이곳으 로 이동시키면서 생긴 마나의 유동이라는 것은.... 물론 그 형태야 이동 마법진에 의 한 대단위 이동에서 나타나는 마나의 상호 간섭에 의한..... 어쩌구 저쩌구...” 나는 한동안 이동 마법에 대한 이야기를 떠들어야 했다. 하지만 결론은 한 가지였다. 다 아는 문제를 뭐하러 또 묻는 거냐? 뭐 이런거.. “허허허. 물론 저희도 어제의 상황으로 그런 문제를 파악했습니다만, 실제로 그런 대단위 이동마법을 일시적인 마법진의 사용으로 진행시킨 것과 아울러서 마법적인 능 력이 상당한 환수는 물론이고 그 환수를 둘러싼 강제마법들을 유지하고 이동을 무리 없이 진행시켰다는데에 상당한 흥미와 관심이..” 결국은 그런거다. 마법사들의 공통적인 폐해중에 하나인 호기심과 탐구심.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이들이 호김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나를 희생할 생각은 전혀 없다. “지금 그 말씀은 제가 사용한 마법의 개요와 마나 운용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것 과 마찬가지라는 걸 알고 계시겠지요? 그리고 그건 저의 마법을 가르쳐 달라는 것이 나 마찮가지라는 것도 아시겠지요? 그런데 전 제 마법을 가르쳐 드릴 의향이 없으니 어쩌지요?” 내 말은 물론 그렇게 다정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허허, 물론 그거야... 하지만...” “이거보세요. 아무리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그럼 이만 돌아가 주시지 요.” 난 단호한 목소리로 축객령을 내렸다. 물론 그런 내 모습에 더 이상 말을 꺼낼 수 없는 신세가 된 마법길드 일행의 모습이 처량하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흐흠.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하지만 만약에 마법길드의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 제든 연락을 주십시오. 길드 마스터께서 특별히 루탄님 일행에 대해 길드의 작은 도 움 을 필요로 하는 경우에는 우선적으로 도와드리라는 전갈이 있었습니다. 물론 어느 도 시에 가든 길드의 도움을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이만. 아참, 그리고 전 크리 트 니아 마법길드의 마스터 우제푸입니다. 다음에 뵙지요. 허허.” 흠, 제법 사람을 다룰 줄 아는 인물인가보다. 축객령에 화를 내기 보다는 호의를 보 임으로 해서 싸늘하게 대한 나에게 약간의 미안함을 느끼게 함과 동시에 자신들이 보 이는 호의의 크기를 부각시키는 방법을 쓰는 길드마스터다. “안녕히 가십시오.” 어쨌든 조금은 내가 손해를 본 것 같은 기분이다. 쩌비.. “호호, 어쨌든 이렇게 해서 또 하루는 여기에서 지내야 겠네? 그럼 이제 뭘 하지?” 마법사들마저도 사라지고 우리 일행만 남게 되자 풍아가 하는 말이다. “글쎄, 별로 할 일도 없고, 어제 술을 먹어서 아직 피곤이 다 가신 것도 아니니 다 들 무리 하지말고 푹 쉬기로 하지뭐.” 나는 일행을 돌아 보며 말했다. “뭐 그러지. 난 광아하고 검술 연습이나 해야겠네. 적당히 몸을 푸는 것도 피로를 씻는 좋은 방법이라고.. 하하” 화아는 그렇게 광아를 끌고 간다. “뭐, 뭐야 형, 난 그냥 쉬고 싶단 말이야.. 으아~~!” 어째 광아가 요즘은 많이 망가지는 듯한 인상이.... 깨끗, 깔끔, 단정의 이미지가 점 점.... “음. 그럼 나도 들어가서 잠이나 자야겠네.. 호호. 아무래도 미인은 잠이 부족하면 피부가 안 좋아진단 말이야. 요즘은 피부가 건조해지는 것 같아. 호호호.” 풍아는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늘어 놓으며 마차로 들어갔고, 수아는 탁자와 찻잔 들을 정리한다. “지토, 넌 뭘 할꺼야?” 나는 의자에 앉아서 꿋꿋하게 찻잔을 지키고 있는 지토를 보며 물었다. “글쎄, 별 할 일도 없으니 여기 앉아서 오고가는 사람들 구경이나 해야 겠다. 오늘 은 간만에 느긋하게 쉬어보겠군.” 역시 늙은 티를 내는구나. 하지만 나도 솔직히 그냥 의자에 앉아서 해바라기나 하고 있었으면 싶은 마음이다. 나도 숨겨진 나이는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다. “하하 그래, 그럼 나하고 같이 앉아서 해바라기나 하자. 하하.” “에구. 무슨 새파랗게 젋은 놈이 늙은이 흉내를 내는지.. 허~참.” 지토가 뭐라하든 나는 의자를 조금 뒤로 눞히고 곁에 나무에 기대고는 눈을 감았다. 그런데.. “저기 루탄대장님 저는 시내에 좀 들어갔다 오면... 안될까요?” 자이건이다. 시내에 들어가든 도망을 가든, 이제는 별로 상관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처음에야 화 가 나서 잡아다가 고생을 시켜볼 생각이었지만 시간은 사람의 마음을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변화시키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냥 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라고 두고 싶었다. “그래, 갔다와. 뭐 그냥 집으로 가도 상관은 없고....” 나는 눈은 감은 채로 웅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렇게 시간은 참 조용조용하게 흘러갔다. 크리트니아 동쪽 문으로 통하는 관도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세워진 마차 하나와 마 차 옆 큼직한 나무 밑에 탁자를 놓고 의자를 나무에 기댄 한 젊은이와 한 늙은이가 가 끔씩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속에서 느긋한 낮잠을 자고, 마차에서 조 금 떨어진 곳에서는 멋들어지게 생긴 젊은이 둘이 칼을 들고 먼지를 날리며 이리 뛰 고 저리 뛰고, 에메랄드색 긴 머리카락을 늘인 미녀 한 명은 탁자옆에 턱을 받히고 그 의 큰오빠와 둘째오빠와 작은오빠, 그리고 늙은 아저씨의 모습을 돌아보며 간간히 미 소를 짓고 있었다. 정말 한가하고 평화로운 순간. 수채화로 그린 정물화 같은 느낌의 시간이었다. (하하 그런데 여기 풍아가 침대위에서 침을 흘리고 있는 모습이 끼어들면... 퍼걱.) 그리고 날이 저물 무렵에 자이건이 돌아왔다. 내 생각에 도망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도대체 무슨 이유로 돌아왔는지 내심 궁금했다. 사실 괜히 멋모르고 까불다가 죽도록 맞고 끌려 다니면서 명색이 공작가의 공자쯤 되 는 녀석이 잠자리도 제대로 없어서 마차 밑에서 찌그러져 자야 하는 경우를 당하면 도 망갈 기회가 있을 때, 도망을 가는 것이 정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그런데 자이건은 성문 위로 해가 떨어질 무렵에 노을을 등뒤로 깔고(이 때 제법 분위 기가 있었는데..) 돌아왔던 것이다. “응? 자이건, 뭐하러 돌아왔어? 그냥가도 된다고 했을 텐데? 뭐 여기 남아서 복수 를 꿈꾸는 거라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말이야.” 나는 일부러 퉁명스런 목소리로 녀석의 마음을 떠 보았다. “별일 아닙니다. 그저 집에 돌아간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겠지요. 여기서 대장님과 함께 다니면 적어도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시간의 한 귀퉁이는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돌아왔습니다. 아울러 썬드라스 공작가에서 루탄님이나 일 행 에 대해서 어떤 참견도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약속드립니다.” 자이건의 대답은 의외였다. “뭐야? 그 사이에 철이 들기라도 했다는 건가? 뭐 따라오고 싶다는 걸 말리지은 않 겠 어. 적어도 먼저 끌고 온 것이 우리들이니까 말이야. 하지만 너에 대한 대우가 달라 지 기를 기대하지는 말아. 넌 여전히 우리들의 인질이지. 아니 이젠 인질일 필요가 없으 니 식객? 그것도 그렇고 아무튼 넌 우리 일행에게 짐인 것 만은 분명하니까.” “알았습니다. 지금까지처럼 그렇게 대해 주셔도 상관없습니다.” “뭐, 그러지 뭐.” 이렇게 해서 자이건은 조금 묘한 입장의 일행이 되었다. 나는 자이건을 믿을 생각도 또 믿지 않을 생각도 없었다. 그거 깊은 관심을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건 아무래도 유소 탓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또 하루 밤이 지나고(자이건은 여전히 여행용 천막을 잘 치지 못했지만 처음 보다는 그런대로 모양을 만들어서 들어가 잤다.) 아침을 먹고 쉬는 우리들을 헤이스 런 가의 여자가 다시 찾아 왔다. “그래, 어떤 결론을 가지고 오셨습니까? 헤이스런가의 입장을 듣고 싶군요. 아울러 우리들의 입장에 변함이 없다는 것을 알려 드리지요.” 나는 우리들의 입장이 변함이 없음을 그 여자에게 알렸고, 그녀의 대답은 조금 의외 였다. “좋아요. 태환수 한 마리를 제압 귀속시켜 주시는 것으로 소환법을 교환하기로 하지 요. 대신에 제압해 주시는 태환수는 소환환수가 아니라 대륙에 존재하는 환수로 해 주 세요. 그 조건이라면 저희도 응하기로 하지요.” 신계의 환수가 아니라 대륙의 환수를 요구하는 것은 귀속된 환수는 대를 이어 귀속시 키는 것이 용이하기 때문일 것이었다. 신계의 소환 환수는 소환 계약자가 죽으면 다시 소환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어 쩌면 후대를 위해서도 대륙에 있는 환수를 제압하는 것이 좋을 것이고 또한 신계에서 소환되는 환수는 그 능력이나 힘이 증빙되지 않은 상태지만 대륙의 환수는 그보다는 많이 알려져 있기 때문에 좋은 조건의 환수를 선택할 수 있다는 점도 이점이었다. “아주 좋은 조건을 찾아 내신 것 같군요. 그럼 어디에 있는 어떤 환수를 선택하실 지도 정해 오신 것 같습니다만, 말씀을 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나는 그녀의 조건에 그다지 불만이 없었기 때문에 계약을 수락할 생각이었지만, 확실 한 것이 좋다는 생각에 환수의 위치를 물었다. “저희가 가지고 있는 자료에 따르면 누웬으로 가는 길목에 환수들의 군집처가 있어 요. 거기에 태환수가 몇 있다고 하니 그 중에 하나로 했으면 합니다. 특히 저와 성향 이 맞는 환수가 있다더군요. 전 그 환수가 탐이 나거든요.” 여자의 말이다. 그로보아 이번에 태환수를 가지게 될 사람은 의외로 이 여자인 모양 이었다. “뭐 우리들은 어디에 있는 환수인지는 그다지 상관이 없는 문제군요. 일단은 여기에 서 상당히 먼 곳이라는 문제가 있지는 하지만 우리들은 여행중이니까요. 그럼 그곳 까 지는 여러분이 동행을 하시는 건가요?” 나는 그 여자와 두 기사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거리가 멀다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니예요. 크리트니아에는 아주 큰 이동마법진이 있 으니까요. 아마 다른 곳을 거치지 않더라도 열명 정도의 인원이라면 이동이 가능할 겁 니다.” 그녀는 아마도 이동마법을 이용한 이동을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이동마법진으로 여기있는 마차와 말들도 이동이 가능한가요?” 가만히 듣고 있던 풍아가 물었다. “글쎄요. 아마 그건 좀 어렵지 않을까요? 한꺼번에 그런 이동은 무리가...” 여자가 난감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마도 그녀는 우리들의 마차가 대수롭지 않게 보이 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우린 이 마차 없이는 안 갈거예요. 그렇죠? 오빠.” 수아도 마차를 두고 갈 생각은 저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럼, 그럼. 마차를 두고 갈 수는 없지.” 내가 대답하자 화아가 한마디 거들고 나섰다. “그럼 이번에도 형이 먼저 가서 좌표를 알아오고 다시 형이 이동을 시키는 방법을 써야겠네? 그건 될꺼아냐?” 흐흑 이런 무슨말을... 아무리 나라고 해도 그렇게 먼 거리라면 상당히 피곤한 이동 이... 거기다가 마차가 가지고 있는 공간왜곡을 유지하고 이동시키는 것은 보통 마차 100대를 이동시키는 것만큼의 힘은 더 들텐데... “화아야. 아무리 나라고 해도 저 마차는 그렇게 먼 거리로 날린다는 것은 어렵지 않 을까?” 내가 이렇게 말했지만 화아는 내 말이 엄살쯤으로 들리는 모양이다. “그럼 안된다는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형이 그런 일을 못한다는 것이....” 흠. 왜 무슨 이유로 화아가 이러는 것일까? 녀석도 분명히 내가 하는 말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텐데... 설마 아침에 잠깐 있었던 대련에서 깨진 것을 가지고 꽁해 있는 것은.... 아무래도 아니겠지.... 가 아닌 모양이군. “그런데 굳이 그렇게 서둘러 가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그냥 여행을 하는 셈 치고 천천히 가도...” “죄송합니다. 루탄 대장님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저휘 헤이스런가에 태환수가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되는 다른 귀족들이 가만히 있을 것 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루탄님이 그렇게 빈 틈을 보이시다니 의외로군 요.” 큭 한 대 맞았다. 그렇군 다른 귀족들이 헤이스런가의 부흥을 반가워할 턱이 없는 건가? “그럼 최대한 빠른 시간안에 거래를 마치는 것이 서로에게 이익이 되겠군요. 어쩔 수 없지요. 그럼 일단 이동마법진을 살펴보고 생각을 해 보죠.” 이렇게 해서 우리 용병대와 헤이스런가의 계약은 대충(정말 대충이다) 맺어지게 되었 다. 그리고 우리들이 헤이스런가의 인물들을 따라서 크리트니아 마법길드에 도착했을 때 우리를 맞이한 것은 어제의 그 우제푸라는 길드 마스터였다. “허허 다시 뵙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공녀님과 함께 가시는 모양이군요. 누웬으 로 가는 길목의 환수 군집처라.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는 마을이 없군요. 마법길드의 이동마법진이 있는 곳은 목적지에서 이틀 정도 거리에 있는 마티운시가 되겠군요. 그 곳이 가장 가까운 곳입니다.” 마티운이라. 마티운이라고 한들 내가 알 수 있을 턱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인원과 말, 마차가 이동이 가능할지 모르겠군요.” 나는 우제푸에게 물었다. “그건, 일단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 마법진은 다른 마법적 간섭이 없는 경우 12명의 인원을 이동시킬 수는 있습니다만, 그 이상은 무리입니다. 그리고 특히 마법 적 인 간섭이 심한 경우의 물품이나 존재가 있는 경우에는 그 이동에 제한을 받을 수 밖 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우제푸의 말에 따르면 우리 일행이 가지고 있는 무기들과 내가 가진 반지등이 마법적인 간섭이 일어나는 이유로 이동에 상당한 무리를 주는 것들이 란 다. 결국에 우리 일행만 하더라도 한꺼번에 이동이 불가능하다는 말이었고, 거기에 더해 서 마차의 경우에는 의외로 부피가 큰 것도 있었지만 공간왜곡이라는 것이 이동마법 과 는 상당한 간섭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 때문에 안전한 이동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 었 다. “오빠, 사람들은 되는데 왜 마차는 안 되는 거야? 이상하네.” 옆에서 듣고 있던 수아가 물었다. “그건, 의지의 탓이다. 사람들은 의지가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모습을 유지하려 는 성향의 마나를 지니게 되지만 무생물의 경우에는 그런 성향 자체를 지니지 않기 때 문에 이동 중에 그 형태가 일그러지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는 것이지. 때문에 그런 무 생물의 경우에는 그 형태를 보존하기 위한 마법력이 더 많이 필요하게 되는데... 우 리 마차의 경우에는 그렇게 간단하게 될 문제가 아닌 것이 공간왜곡과의 간섭을 조정 해줄 마력이 더 필요한 거란다. 문제는 그 힘이 상당히 크다는 것이 문제지만...” “그럼 오빠가 같이 오면서 마력을 유지하면 되겠네. 오빠 마력 쎄잖아.” 헉, 수아의 천진한 말 한마디.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마차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그 먼 거리를 공간 이동하라는 건 (뭐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심하잖아. “그, 그래. 뭐 마차는 내가 함께 가면서 이동을 하기로 하지.” 생각과는 다른 내 말을 어떻게 좀 해줘. 흐흑. 우리 막내가 하자면 하는 거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좀 힘들 것 같다. 차라리 거기 가서 이런 마차를 하나 더 만드는 것이 덜 힘든데... 그런소리를 했다가 는 어째 그냥 지나갈 것 같지 않다. 그냥 좀 힘들어도 내가 참고 가는 수 밖에는... “허허 그럼 마차 쪽은 그렇게 해결을 하면 되겠군요. 그럼 별다른 문제는 없는 것 같으니 지금 출발을 하시겠습니까?” 우제푸는 빨리 우리들을 이동시키고 싶어 안달이 난 모습니다. 어째 하는 짓을 보니 조금 이상하다. 어쩌면 우제푸라는 저 인간이 마티운까지 이동 시키는 것이 가능하면서 내가 마력을 쓰는 것을 보기 위해서 이런 상황을 연출하고 있 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제푸라는 저 마스터의 마력도 자세히 살펴보니 8써클에 육박하고 있다. 설마 지금 마법 길드의 마스터라는 인물을 9써클이란 말인가? 아무튼 8써클 정도면 이런 마법진을 이용한다면 우리 일행을 이동시키는 것이 불가능 한 것은 아닐 것 같은데... “허허, 그럼 이동마법진의 이용료는 마티운시까지 아홉명의 사람과 마차, 그리고 말 도 가지고 가실겁니까? 그러면 말이 6마리, 제법 요금이 많이 나오는군요. 15만덴 정 도가 되겠군요.” “뭐, 뭐라구요? 15만덴?” 15만덴이라는 말에 놀라지 않으면 이상한 거다. 1500만원. 순간이동에 1500만원이라 니, 우리가 환수를 잡아 주고 받은 대금이 60만덴이었다. 그것도 생포인 경우 50만덴 에서 조금 어거지로 10만덴을 더 받은 것이었는데, 겨우 이동 한 번에 1500만원이라 니. 목숨걸고 환수를 상대해서 환수를 죽이면 1000만원이었는데, 겨우 이동에 1500만원이 면 이게 말이 되냐구. “사, 상당히 비싼 가격이네요.” 아무래도 이렇게 말하는 내 목소리에 불만이나 수긍하지 못하겠다는 의사표현이 상당 히 강하게 들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허허, 여기서 마티운시까지 이동하는데 적어도 30일 정도는 걸릴겁니다. 그 시간동 안 대략 한 사람이 하루에 500덴의 비용을 쓴다고 하면 이 인원이 이동중에 쓰는 경 비 가 약 15000에서 2만정도 되겠군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한 달이라는 시간을 길에 버 리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동마법진을 이용하면 13만정도의 비용으로 30일의 시 간 을 아끼는 셈이니 그다지 낭비는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만, 물론 돈이 시간보다 더 가치를 지니는 사람과 시간이 돈보다 가치를 지니는 사람에 따라 그 판단은 달라지겠 지만 말입니다.” 30일이라. 허긴 30일이면 한달이다. 한 달을 빈둥거리며 낭비하는 것 보다는 15만덴 의 돈이 싸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겠군. 하지만 난 남는게 시간인데, 우리 일행이 급한 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비싼 돈을 내고 이동을 해야... 그런데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내가 이 돈을 내야 하는 것도 아닌데, 설마 고용주가 피 고용인에게 경비를 부담시키지는 않 겠 지. 나는 얼굴을 태연하게 바꾸고 공작가의 사람들을 돌아 보았다. “아가씨. 아무래도 비용이 너무 비싼 것 같습니다만 어떻게 하실건지요?” 크크크 이 간단한 질문 하나로 이동 비용은 공작가의 몫이 되는 것이다. 크크크 역 시 탁월한 순발력에 말솜씨다. 흐흐 “비용이 좀 과하다고 해도 시간에 쫓기는 입장이니 하는 수 없지요. 마스터님 그럼 출발을 서둘러 주세요.” 공작가의 여자는 망설이지 않고 비용을 계산했다. 그리고 1차로 공작가의 인물들과 화아, 풍아가 이동을 했고, 다음으로 수와 광아 지 토가 이동했다. 그리고 마차와 말들을 포함한 나머지 짐들과 내가 이동마법진에 올라섰다. “그런데 우제푸님 세 번째 이동에는 제가 마력을 보테는 만큼 요금을 깍아 줘야 하 는 것 아닙니까? 사실 힘은 거의 제가 써야 하는데 말이죠.” 나는 마법진에 오르면서 우제푸에게 할인을 요구했다. “허허, 그 무슨 말씀을... 실제로 저희가 받는 비용은 마차를 제외하고 루탄님과 말 들의 이동요금 뿐입니다. 실제로 마차에 대한 비용은 계산을 하지 않았지요. 허허 마 차에 대한 비용은 루탄님의 마력운용을 보는 참관비고 생각하고 깎아드린 겁니다. 허 허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어째 빨리 보내려고 하는 것을 보니 뭔가 속는 느낌이지만, 늙은이의 말빨에 넘어가 서 조금이라도 이동비용에서 공작가 모르게 횡령을 해 보려던 시도는 물건너가고 말 았 다. “그런 다음에 또 뵙지요. 우제푸님.” 그리고 나와 마차와 말들과 기타등은 하얀빛에 휘감겼다. 거리가 멀어서인지 마법진의 성능이 떨어져서인지 마티운까지의 이동에는 상당한(그 래봐야 몇 초의 시간이다.)시간이 걸려서 덕분에 상당한 마력을 써야 했다.(몇 초라 고 해도 실제 순간이동에 걸리는 시간이 1초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어마어 마 한 차이인 것이다.) 그리고 내가 다시 마티운으로 짐작되는 곳의 마법진위에 나타났을 때, 나는 소모된 마력으로 어찔한 현기증을 느껴야 했다. 물론 나를 기다리던 여러 쌍의 눈동자들을 의식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태연을 가 장했지만 말이다. “여기가 마티운시인 모양이군요.” 나는 마법진에서 걸어나오면서 새로운 얼굴들에게 물었다. (아마도 이 도시의 마법길 드 길드원일 것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우제푸님께 연락은 받았습니다.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우제푸에게 연락을 받아? 그래서 그렇게 손에 뭔가 들고 잔뜩 쓰고 있는 거였어? 이 동마법에 사용된 마나량의 산출과 마나 간섭에 대한 수식들로 보이는구먼. 그런데 그 런 걸 왜 들고 있는거야? “하하, 시간이 좀 많이 걸리는군요. 예.상.외.로. 시간이 지체된 이유가 뭔지 알고 싶네요.” 나는 내가 도착한 마법진을 돌아 보았다. “호오, 이건 좀 이상하군요. 왜 이동마법진에 마법발현 지연 룬어가 들어가 있는지 궁금하네요. 그것도 아주 최근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요?” 나는 이동마법진의 한 부분에서 이상을 발견하고 물었다. “응? 오빠? 무슨 말이야? 그거 아까 우리가 도착하고 나서, 오빠가 이동하는데 도움 이 될거라고 여기 이 분들이 급히 설치한 건데.” 수아의 말이다. 물론 로브를 걸친 마법사 떨거지들은 수아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아주 난처한 표정이 되었고, 내 얼굴에는 그와 대조되는 웃음이 피어 올랐다. “오빠, 그렇게 웃지 말아. 음흉해보인다구.” 큭 풍아 네가 나에게 그런 말을 .... 흐흑, 가만 이런 분위기가 아니지. “아주 간단하게 생각해서 지금 마티운 마법길드와 크리트니아 마법길드사이에서 나 를 대상으로 마법연구, 아니지 실.험.을 하신 것 같은데 이에 대한 확실한 답변이 있 어야 할겁니다. 만약 대답이 확실하지 않을 경우에 크리트니아와 마티운시의 마법길 드 위에 작은 운석들을 몇 소환해 드리도록 하지요. 흐흐흐” 나는 풍아의 표현대로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마티운의 길드원들을 훑어 보고며 말 했다. “저, 저기 그건 제가 아니라 우제푸님께서 막무가내로 그렇게 하라고 하셔서, 전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냥 시키는 대로 한 죄밖에는 없습니다.” 식은 땀을 흘리는 젊은 마법사의 변명이다. 그러고 보니 마티운길드 쪽에는 나이든 마법사는 하나도 보이지를 않는다. “그건 내가 알바가 아니지요. 그럼 우제푸님을 불러 오시지요. 아니면 운석소환을 막을 준비를 하시던가요.” “저, 저기 그게 마스터께서 루탄님이 이렇게 화를 내시면 전해 달라는 말씀이 있으 셨는데...” 내 말에 식은땀을 흘리는 젊은(그래도 40대 초는 되어 보인다.) 마법사는 우제푸라 는 놈의 전갈이 있다면서 나의 말을 붙들었다. “그래, 우제푸님께서 뭐라고 하시던가요?” “저기 우제푸님은 실제로는 마법길드의 총 마스터이신데요. 우제푸님의 이번 실험 에 루탄님의 동의를 얻지 않은 것을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며, 동시에 언제든 마법길 드 에 도움을 청하시면 도와드릴 용의가 있다고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제푸 님은 크리트니아에 계시지 않을테니 쫓아 오실 생각은 하지 마시라고. 대신에 시간이 좀 지나고 나서 화가 가라 앉으면 뵙겠다고 전해 달라고...” “크흑, 이 늙은이가.” 결국 내 입에서 험한 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좀 전까지만 해도 우제푸님이라고 부르던 입에서 늙은이라는 소리가 나오는 것을 보 니 내 이성의 끈이 위험 수위에 이른 모양이다. 후~~휴. 심호흡. 심호흡. “알았습니다. 이번 문제는 나중에 우제푸 늙은이에게 직접 받도록 하지요. 하지만 만약 앞으로 한 번이라고 마법길드가 저를 속이는 일이 있으면 제가 아는 최고의 마 법 을 선물로 드리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우제푸 늙은이에게 말입니다.” 그렇게 마법길드의 이동마법진 소동은 마무리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손해를 본 것은 나 뿐인 모양이다. 언젠가 우제푸 이 늙은이에게 대가를 치루고 말테다. 흐흠. “아직 시간이 있으니 곧 출발을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여행 준비를 하고 내일 아침 에 출발을 하시겠습니까?” 나는 공작가의 인물들에게 고개를 돌리면 물었다. “대장님 일행은 준비를 할 것이 없는 모양이지요? 저희는 말과 간단한 여행 장비가 필요한데요. 일단 상점과 시장을 들렀다가 출발하는 것으로 하지요. 그다지 시간이 걸 리지는 않을 거예요.” “그럼 기사분들에게 일을 맡기시고 일단 마차에서 기다리시지요. 천천히 가고 있으 면 기사분들이 준비를 해서 따라오시면 되겠군요. 어떻습니까?” 내 말에 두 기사는 당장에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반발을 한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어떻게 아가씨를 너희에게 맡기고 안심을 할 수가 있다 는 말이냐?” 역시 발언권은 나이가 많은 기사쪽이 가진 모양이다. 하지만 옆에 있는 젊은 기사도 표정으로도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이라는 뜻을 나타 내기에 부족함이 없어보였다. “하하, 그렇게 걱정이 되시면 기사분들 중에 한 분이 함께 가시고 나머지 한 분이 물품을 준비하시던지요. 혼자서 시장도 못 보시는 것은 아닐테고 말입니다. 뭐 그것 도 안 된다면 아가씨를 모시고 상점과 시장을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물건들을 준비 해서 오시는 것도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저희는 어디 적당한 곳에서 기다리고 있지 요.” 흐흐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겠지. 이유도 없이 속은 좀 쓰리겠지만 말이야. 결국 젊은 기사가 아가씨의 호위를 맡아 함께 떠나고 늙은(그냥 나이가 든) 기사가 여행준비를 위해서 잠시 일행을 떠났다. 아무래도 젊은 기사는 경험이 부족해서 필요한 물품을 빠트릴 것 같았던 모양이다. 그래도 윗사람이 장보기를 하러 간다니 젊은 기사는 한동안 얼굴이 붉어져서 어쩔 줄 을 몰라했다. “그럼 아가씨 마차에 오르시지요. 그리고 젊은 기사님도 함께 오르세요. 하하 보기 보다 넓으니까 걱정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자이건, 마차를 좀 몰아. 우린 들어 가 서 간단하게 점심 요기나 할까 하니까 말이야.” 그렇게 마부석에 자이건을 앉히고 우리들은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오호? 생각보다 아주 멋진 마차군요. 안이 이렇게 넓을 줄은 몰랐는데요?” 스스럼없이 마차에 올라 마차 안 탁자에 앉으며 공작가의 아가씨가 말을 꺼냈다. “반갑습니다. 정식으로 다시 인사를 드리지요. 저는 란의용병대의 대장을 맡고 있 는 루탄입니다. 그리고 여기는 제 친구인 지토, 그리고 이쪽으로는 제 동생들인 둘째 화, 셋째 풍, 넷째 광, 막내 수입니다. 앞으로 계약이 끝날 때 까지는 함게 생활을 해 야 할 것 같아 소개를 드렸습니다. 참, 그런데 아가씨는 그냥 아가씨라고 부르면 되 는 건가요? 그리고 기사님들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겠네요.” “호호, 오빠는 공작가의 아가씨는 그냥 아가씨. 그리고 기사님들이야 나이든기사님 젊은 기사님 이렇게 부르면, 호호호 역시 어색하구나. 헤헤.” 풍아다. 달리 누구이겠는가. 어째 점점 푼수기를 들어내는 것이 그 쪽으로 성격이 굳 어지는 것 같아 좀 걱정이다. “호호, 그러고보니 아직 소개도 제대로 드리지 않았군요. 먼저 제 소개를 드리지 요. 저는 헤이스런 공작가의 아세티아르 헤이스런입니다. 그리고 지금 자리에 없는 나 이드신 기사분은 헤이스런 공작가의 기사단 부단장이신 바이란님이시고 여기 이 기사 분은 콜린드님이시지요.” “아니 아가씨 님이라는 말씀은... 저는 그저 아가씨의 호위기사에 불과합니다. 그 런 말씀은 격에 맞지 않는...” 젊은 기사의 얼굴은 대장간의 화로에 익은 얼굴처럼 붉어졌다. “호호, 제게는 콜린드라 불리겠지만 이 분들에게는 콜린드님이라 불리는 것이 맞는 것 아닌가요? 그러니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호호.” 뭐 기사라니 귀족이라는 말이 되는 모양이었지만 우리들에게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 지 않다는 것을 이 아가씨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기사라고 대접을 받은 생각이라면 포기하는 것이 좋을 거야. 루탄은 물론이겠지만 나도 그렇고 여기 이 일행들도 귀족이니 뭐니 하는 신분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타입 이 라 말씀이야. 저기 밖에서 마차를 모는 녀석만 해도 썬드라스의 공자라는 신분이니 알 아서 생각하라구.” 지토가 오랜만에 따끔한 한 마디를 날린다. 흐흐 역시 과묵한 사람이 때로 무섭다는 것을 보여주는군. 콜린드라는 기사도 밖에 있는 자이건 때문인지 아무 말도 못하고 얼굴만 다시 화로가 로 가지고 간 모양이 되었다. 하하 “그건 그렇게 아세티아르님 환수들의 군집처라면 상당히 많은 환수들이 있는 모양이 지요? 그래 그 중에서 어떤 환수를 원하시는지 말씀을 좀 해 주시겠습니까? 저희도 사 전 지식이 좀 있어야 대처방법도 생각을 해 볼테니 말입니다.” “호호, 그냥 아세트라고 부르세요. 그리고 제가 원하는 환수는 약 300년 전에 처음 알려진 환수인데 성향은 물과 얼음의 속성을 지니고 있어요. 처음에는 그다지 알려지 지 않았는데 어느 틈에 주위의 환수들을 밀어내고 넓은 영역을 차지해서 자신의 존재 를 알린 환수이지요. 사람들은 스컬프트라는 이름으로 불러요.” “스컬프트요? 설마 그게 사람들을 얼려서 조각처럼 세워두는 악취미에서 온 이름은 아니겠지요?” “호호 어떻게 아셨어요? 바로 그런 이유로 스컬프트라 불려요. 실제로 그 환수의 영 역에는 곳곳에 마차와 말, 사람들의 행렬이 조각처럼 얼어붙어서 세워져 있다고 하더 군요. 저도 본 적은 없어서 장담은 못하지만 말이죠.” 아세트라는 이 여자 좀 엽기적인 느낌이 든다. 어째 그런 환수를 택하겠다는 건지. “그럼 그 환수의 영역까지는 사람들이 제법 왕래를 했던 적이 있었던 모양이군요. 지금이야 그렇지 못하다고 해도 말이죠.” “네, 예전에는 누웬으로 가는 관도가 있던 곳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스컬프트가 자리 를 잡은 이후로는 일체 왕래를 할 수 없게 되어 버렸어요. 다른 곳들은 그나마 이동 이 불가능한 정도는 아닌데, 스컬프트가 태급환수인 관계로 그 곳을 무사히 지나간다 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루탄형님, 그럼 이번 거래에서 헤이스런 공작가에서 얻는 이익이 태환수의 귀속만 은 아니겠네요. 아무래도 누웬국과의 통로 개척이라는 면이나 한타왕국의 영토 확장 이 라는 면에서도 상당한 입지를 세울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광아가 오랜만에 냉철한 분석을 내 놓았다. “뭐 그렇겠지만, 그런 것이야 우리들과는 별 상관이 없는 문제겠지. 우리들이 약속 을 지키는 중에 발생하는 우리와는 상관없는 이익을 헤이스런가에서 가지고 간다고 속 좁게 따지고 들어갈 필요는 없을 테니 말이다. 뭐 왕국이니 귀족이니 하는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기로 하지 않았니?” 나는 어째 불만스럽게 들리는 광아의 말에 단단히 못을 박았다. 우리들은 귀족이니 왕국이니 하는 것과는 연관을 맺고 싶지 않았다. 아니 우리들이 아니라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말이다. 그러니 환수를 제압하면서 생기는 이익을 우리가 활용할 생각이 없는 이상 굳이 헤이 스런가에서 가지고 간다고 불만을 가질 이유도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빠, 이번 일 끝나면 다시 여인왕국쪽으로 갈거야? 그냥 서쪽으로 많이 왔 으니까 누웬으로 한 번 가보는건 어떻게 생각해? 응 오빠?” 풍아가 벌써 일이 끝난 다음을 궁금해 한다. 아무래도 우리 일행은 긴장감이 너무 없다. 태환수급이면 정령으로 치면 상급정령은 넘어서는 능력을 지니고 있을 터였다. 그런 데도 일행들은 전혀 걱정스러운 표정이 아니니 정말 대책이 서지 않는다. 이러다가 호 되게 고생을 하는 것은 아닌지... “글쎄 일단은 이번 일이 끝나고 생각을 해 보도록 하자. 정령족들을 만나보고 싶기 는 한데, 누웬이라는 곳도 워낙 알려진 것이 없으니 한 번 가보는 것도 좋을 듯 하 고... 아무튼 지금은 지금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 갑자기 마차가 멈추었다. 덜컹. “무슨 일이지? 제법 급제동인 모양이네? 마차 안에까지 이런 충격이 올 정도면? 나 가 보자.” 나는 서둘러 마차 밖으로 나왔다. “자이건 무슨 일이야? 왜 마차를 세운거야?” 나는 마부석에 앉은 자이건부터 찾았다. “그게 저기 오는 기사가 아무래도 좀 이상해서 말이죠. 많이 다치신 것 같은데요?” 자이건은 뒤쪽으로 마티운시 쪽으로 난 길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 길에는 헤이스런가의 부기사단장이라던 바이란이 말을 타고 달려 오고 있 었다. “저 아저씨. 말을 하나만 끌고 오네? 짐도 없고. 어머, 다쳤나 보다. 피를 많이 흘 리네.” 풍아가 바이란을 보며 쫑알거린다. “아무래도 좀 이상하군. 그리고 저 뒤에 또 다른 사람들이 따라오고 있는걸? 한 10 여명 되는 것 같다. 조금 거리가 있긴 하지만 미리 준비를 해야겠다.” 나는 바이란의 뒤쪽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다른 사람들의 눈(물론 평범한 자이건이나 콜린드 같은)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우리 일행들은 어느정도 파악을 할 수 있을 터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죽이지는 말고 제압만 한다. 그리고 위험하면 몸을 피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알았지?” 나는 지토와 동생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솔직히 10명 정도의 인물들이 우리들을 곤란하게 할 수 있으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 만 일단은 조심하는 것이 최선인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준비를(솔직히 할 것도 없다. 마음의 준비 왜에 뭘 더 할게 있을 까...) 하는 동안에 바이란은 마차 앞까지 달려와서는 구르듯이 뛰어내렸다. “공녀님, 어서 피하셔야 겠습니다. 수가 많아서, 어디서 온 녀석들인지는 모르겠지 만 전력이 상당합니다.” “클클 나 같으면 공녀를 위해 한 목숨 바칠 각오라면 녀석들을 끌고 다른 쪽으로 갔 겠다. 클클 뭣 때문에 이쪽으로 끌고 오는 거야?” 지토가 투덜거렸다. “내가 다른 곳으로 간다고 녀석들이 공녀님의 행선지를 모를 것 같으냐? 이미 우리 들의 움직임을 파악했다면 다음 행선지 정도는 바보 아니면 아는 것이다. 그런데 내 가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냐? 차라리 내 힘을 조금이라도 보 테 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바이런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지토도 머쓱하니 머리를 긁고 있다. “음, 숫자가 꼭 10명이네? 한 사람이 둘씩 맡아서 처리하면 되겠군. 수아야 넌 여기 서 이사람 치료나 해 줘라. 야, 가자.” 나는 쌍환검의 우검을 변형시켜 들고 말을 타고 달려오는 녀석들을 향해 먼저 뛰어나 갔다. “오빠, 같이 가자 호호호.” 풍아다. 그리고 나머지 지토와 화아등도 말없이 무기를 들고 뛰어나왔다. 불쌍한 지토, 이럴때는 언제나 비교가 된다. 같은 속도를 내기 위해서 얼마나 발빠르 게 달려야 할 것인가 흐흑. 우리가 달려 나오는 것을 본 때문인지 녀석들의 속도가 느려졌다. “하하하 문답무용, 일단 쓰러져라.” 나는 달려 나가는 여세를 빌려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물론 약간의 마력이 깃든 검에서는 반달형의 마력이 유형화되어 쏘아졌다. 사실 그다지 강력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맞아도 죽지는 않을 것이었다. 더구나 예 기가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상처를 입지는 않을 것이었다. 뭐랄까 공기나 물 같은 것 으로 호되게 맞은 느낌이랄까?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내 공격에 당한 것은 주인 없는 말들이었다. 앞서오던 두 명의 인물은 내 공격을 말과 함께 피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말 을 버리고 위로 뛰어 올랐던 것이다. 물론 말들은 내 공격에 호되게 맞고서는 쓰러져 버렸고 뒤에 따르던 녀석들은 급급하 게 쓰러진 말들을 피해 말을 세웠다. “제법 하는데?” 나는 중얼거리며 다시 검을 휘둘러 공중에 뜬 녀석들을 향해서 주문없이 검의 힘을 빌어서 얼음화살들을 날려 보냈다. “차앗~!” 호-? 제법인데? 공격을 받은 녀석들은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손에 든 검으로 얼음화살들을 쳐내며 내 등 뒤로 뛰어 내렸다. 나는 멈추어서 그 녀석들을 향해 돌아섰다. “이 녀석들은 내꺼다. 너희들은 뒤에 녀석들을 맡아.” 아무래도 이 녀석들의 실력이 제법이었다. “하하, 이런 문답무용이라고 했지만, 의외의 실력인걸?” 나는 내려선 자리에서 등을 돌리며 나를 향하는 녀석들의 모습을 살피며 말했다. 이번에도 늙다리 하나와 젊은이 하나. 이 대륙의 유행인가 보다. 자이건도 늙다리 하나를 끌고 다니더니 아세트도 늙다리 하나와 젊은이 하나, 우제푸와 마티운의 젊은 마법사, 그리고 이번에는 늙다리 와 젊 은이 콤비의 습격자. “제법 한 수 하는 걸? 다른 건 물어도 대답을 않을 테니 이름이라도 알 수 있을까? 어차피 한 판 붙긴 해야겠지만 이름이라도 알자는 말이지.” 나는 자세를 잡는 두 사람에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두 판박이 습격자(나이를 빼면 비슷하다. 거추장 스럽지 않은 가죽 갑옷에 특 징없는 롱소드를 들었고 손에는 가죽 장갑을 끼고 있었다. 젊은 쪽은 미끈한 얼굴에 흉터도 하나 없는 얼굴이었고, 늙은 쪽은 왼쪽 뺨에 길죽한 칼자국이 있었고 코 밑에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 이외에는 복장이나 장비가 두사람 모두 꼭 같은 모습이었 다.) 중에서 늙은 습격자가 입을 열었다. “문답무용이라 했던가? 어차피 여기에서 죽지 않으면 죽이는 것이다. 덤벼라.” 그 참 살벌한 녀석들이네. 그러고 보니 이 녀석들의 눈빛은 평범한 사람들과 많이 다 른 느낌이다. 뭐랄까 핏빛이라고 해야 하나? 눈동자에 핏빛이 물들어 있는 느낌이다. “제길 눈빛 하나는 끝내주게 살벌하네. 아무래도 사람 여럿 죽인 눈빛인 것 같군. 일단 제압이 우선인가?” 나는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뒤에서 싸우는 동생들과 지토도 걱정이 되었고, 일단은 녀석들의 눈빛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간다. 차앗” 나는 순식간에 녀석들의 사이로 달려 들었다. 예전에 신계의 선물로 받은 책에서 배운 것들이 이런 때에는 꽤난 유용하다. 싸움의 기본은 보법과 신법. 하하하 순식간에 뒤를 점령하고 칼 하나로 둘의 목을 제압한 것은 정말 멋진 한 수였다. 그런데 칼 하나로 어떻게 두 사람이 목에 칼을 댈 수 있느냐구 묻고 싶다면 상상력 을 발휘해 보면 된다. 단 이 두명이 제법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그림이 그려진다. 두 목 사이에 비스듬히 가로지른 검의 모습을 말이다. “하하 이제 얌전히 칼을 버리고 항복을 하시는 것이...” 하지만 녀석들의 태도는 내 생각과는 달랐다. 솔직히 검이 그렇게 사선으로 되어 있는 상태에서 둘이 동시에 움직이면 어느 한 쪽 은 포기를 해야하는데.. 이 녀석들은 둘중 누가 죽을지에는 신경을 쓰지 않은다는 듯 이 양쪽으로 갈라졌던 것이다. “이런, 하나는 죽어도 하나는 산다는 것인가? 독하군.” 하지만 나도 녀석들을 놓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나는 일단 늙다리 습격자를 따라 붙으며 검을 휘둘렀다. 그냥 스윽 하면 아마도 죽겠지만, 나는 아직 살인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검면으 로 목을 후려쳤다. 챙~ 어쭈? 막어? 늙다리도 그냥 나이를 먹은 것은 아니라는 듯이 뒤로 날아드는 검을 눈도 돌리지 않 고 검을 돌려 막았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스피드의 우위라는 것을 놓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퍼벅~! “크헉” 충격이 좀 있을 거네. 하하하 나는 검이 막히는 것과 동시에 녀석의 옆구리를 질러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안심은 금물, 벌써 녀석의 파트너가 검을 날려 오고 있었다. “이크 위험하군.” 살짝 고개를 숙인 머리 위로 젊은 습격자의 검이 지나갔다. 아까운 머리카락 몇 가닥 이 잘려나갔다. 나는 고개를 숙이면서도 왼손을 뻗어 늙은 습격자를 완전제압을 시도했다. 중요 혈도 몇을 제압하려는 내 노력은 다행히도 성과를 거두어서 완전 제압은 아니었 지만 행동의 불편을 초래해냈다. “그럼 이젠 저쪽에 볼 일을 봐야겠군.” 나는 젊은 습격자에게 등을 내 주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급히 앞으로 달려 거리를 벌이며 녀석과 마주했다. 반신(정확히는 왼쪽 반쪽)을 제압당한 늙다리 습격자는 겨우 겨우 버둥거리면서 자리 에서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의 파트너는 도무지 파트너에 대한 관심이 없는 모양인지 나게게 제차 검을 날려왔다. 제법 날카롭기는 하지만 역시 멀었다. 하하하 나는 오랜만에 대련이라도 하는 듯이 녀석의 검을 이리저리 비껴내며 여유를 가지기 시작했다. 사실 이 두 습격자의 실력이 굉장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평소 기사들이 쓰는 검과 는 달리 가볍게 놀리는 몸놀림이 다른 것이었다. 쉽게 이야기하면 무게는 없는데 가벼움과 스피드를 주로 하는 검이라고 할까? 거기다 가 제법 검술의 보법이나 신법도 가미되어 있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거기다가 내력까 지? 그러고 보니 실제로 쉬벡의 성에서 나온 이후로 제대로 기사나 검사들과 싸움이 붙 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뭐 자간에서 경매 때문에 싸움을 했던 적은 있었지만 실제로 그건 동생들과 지토가 싸운 것이 대부분이었고 미알란형제는 워낙에 특이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니 그 쪽 에 만 신경을 썼던 것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그 때 보았던 녀석들이나 그 후에 자이건을 호위하던 녀석들 도 제법 기초가 다져진 모습이었다. 그리고 어쩐지 내력이 있는 듯한... 적어도 예전 에 넥스처럼 전혀 운기를 못하는 그런 몸은 아닌 것 같았다. 그 사이에 이 대륙에 새로운 무공이라도 창조가 된 것일까? 아무튼 나는 이제 이 젊은 습격자에게서 더 알아볼 것이 없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녀석의 품 속으로 파고들면서 혈도를 제압해 버렸다. “차앗” 하지만 그 짧은 순간에 늙다리 습격자가 혈도에 제압된 젊은 습격자가 쓰러지는 뒤에 서 검을 날려왔다. 제대로 정비가 되지는 않았지만 평범한 검은 아니었다. 내력이 깃들어 있었고 깨달음 을 반영하는 검의 변화를 내포하고 있었다. 물론 그 수준이 그렇게 높은 것은 아니었지만, 평범하게 검을 휘두르는 것과는 천양 지차의 위력이 생긴다. 나는 순간의 틈을 노린 늙다리의 검에 한순간 당황할 뻔 했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이미 이런 수준의 검이라면 검으로 보이지도 않는 경지에 있는 사람이다. 장난이 아닌 진심으로 대한다면 이런 검은 내 호신기도 뚫지 못할 것이었 다. 나는 날아오는 검을 손가락 사이에 끼워잡고 곧바로 지풍을 날려서 늙다리의 나머지 반쪽도 제압해 버렸다. 그러고 보니 반쪽에 제압당한 상태에서 이런 정도의 위력이라니 대단한 사람이다. 만 약 제압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기회를 만들어서 기습을 했으면 상당히 냉패스런 모 습(예를 들어 옷자락을 찢긴다거나 하는)을 동생들에게 보였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두 습격자를 제압하고 동생들과 지토를 돌아 보았다. 역시나 능력있는 녀석들이다. 화아는 여전히 두 녀석과 실랑이 중이었지만 장난을 치고 있다는 것이 역력하게 보였 고 나머지는 이미 둘씩의 상대를 제압하고는 내 쪽을 구경하고 있다가 화아 쪽으로 고 개를 돌렸다. “오빠. 그만하고 빨리 끝내. 뭐하는 거야? 몸도 안풀리는 상대를 가지고 그렇게 시 간이나 끌고 말이야.” 풍아가 화아에게 쫑알거리자 그때야 주위가 정리된 것을 알았는지 화아가 도를 거칠 게 휘둘러서는 상대들을 한꺼번에 날려보냈다. “크흑,” “컥” 별 수 있겠는가 땅에 처박힌 사람들이 내는 소리가 다 이렇지. 불쌍하네 조금. 곧 우리들은 마차 주위에 습격자들을 제압해서 앉혀 두고는 탁자를 꺼내서 늦은 점심 을 준비했다. “수아야 아저씨는 어떤거 같아? 많이 다친거냐?” 나는 수아에게 바이란의 상태를 물었다. “응, 별로 많이 다치진 않았어. 팔하고 다리. 어깨에 상처가 좀 깊긴 했지만 치료 마법으로 대충 치료가 되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될거야. 내일 아침이면 거뜬해 질 걸?” “그래? 그럼 다행이네. 그런데 아세트 아가씨. 이렇게 습격을 당하는 것은 처음 계 약 조건에는 없는 것으로 아는데요?” 나는 빙긋 웃으면 아세트에게 말했다. “그, 그렇지만 이런 상황도 환수를 제압하기 위해 가는 길에 생긴 불상사니까...” 아세트는 마땅히 말이 생각나지 않는지 우물거렸고 “아! 그렇게 걱정은 않으셔도 됩니다. 추가 요금을 달라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저 말이 그렇다는 거지요. 하하” 뭔 말이 이렇게 꼬이는 것일까? 설마 아세트라는 여자가 좀 예쁘다는 이유로 내가 이 렇게 너그러워지는 것은 아니겠지. 물론 아니지. 풍아도 수아도 아세트 보다는 더 예 쁜데. 그럼 그럼. 흠. “그럼 이제 이분들이 우리를 찾아온 용건에 대해서 여쭤보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 같군요. 아세트 아가씨는 아무래도 보기에 좀 역겹거나 혹은 비위가 상하는 모습이 있 을지도 모르니, 자리를 피해 주시겠습니까? 어쩌다가 방금 점심으로 뭘 먹었는지에 대 한 고찰을 직접적인 실험을 통해 알아볼 생각이 없으시다면 말입니다.” 그냥 쉽게 말해서 자리를 비켜라 아니면 토할지도 모를 장면이 연출될 수도 있다. 그런 이야기였지만 아세트는 괜찮다는 말로 내 호의를 일축하고는 자리를 지킨다. 이렇게 되면 점잖은 방법의 고문이 필요한데 이 녀석들은 그런 수준으로 입을 열 것 같지 않으니 문제다. 일단 나는 나와 싸웠던 젊은 습격자에게 다가 갔다. 음, 의연한 태도. 굽히지 않으려는 표정. 악다문 이빨. 그런데 젊은이 왜 그렇게 눈 동자가 떨리시나? 아까 보니 사람여럿 잡아본 눈동자이던데 아무래도 자신의 죽음이 나 고통은 아직 뛰어넘지 못한 모양이지? 나는 그의 아혈(점혈되면 혀와 턱을 움직이지 못한다.)을 풀어주고 물었다. “이 이놈 나를 죽여라.” 흑 물었다가 아니라 물어 보려고 했다가 되어버렸네. 짜식이 성질 정말 급하네. 퍽! “억~!” “조용히 해라. 여기 숙녀분들도 계신데. 내가 이렇게 과격한 모습을 보여야겠냐? 질 문은 내가 하는 것이고, 요구도 내가 하는 것이지 넌 그냥 대답하고 시키는 대로만 하 면 되는 거야.” “미친새끼. 퉷” 흠. 전형적인 반항의 모습이다. 이런건 예전에 영화에서 많이 봤지. 그런데 내가 그 런 더러운 공격을 당하면 체면이 서지를 않지. 나는 슬쩍 날아오는 덩어리를 피했고 뒤에서 관심 깊은 표정으로 사태의 추이를 지켜 보던 콜린드의 가슴팍에 그 물질이 날아가 붙은 것은 전혀 나의 의도가 아니었다. 상당히 열받은 모습이네 콜린드 흐흐흐. “이런 미안합니다. 콜린드. 그렇다고 제가 맞아 줄 수도 없는 일이라 잘 피하시지 그러셨습니까. 흐흠. 아무튼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하하” 나는 말 몇마디에 페닉에 빠지 콜린드를 뒤로 하고 다시 젊은 습격자를 보았다. “그렇게 반항을 하시니 별 수 없군요. 이런 경험을 많이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상당히 고통스러운 경험이 될 겁니다. 뭐 국소적인 부위의 고통에 대한 훈련을 받으 셨 을 것으로 짐작을 합니다만 이런 것은 어떤지 ...” 나는 그 녀석의 몇 혈도를 슬쩍 쥐어 주었다. 뭐 혈도니 뭐니 하는 것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몸의 몇 곳은 작은 충격에도 상당 한 고통을 느끼는 곳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곳을 몇 개 연결 시켜 자극을 주면 그 효과가 상당하게 되는데 어떤 경우에는 몸에 좋은 경우도 있지 만, 지금 같은 경우는 상당히 몸에 무리가 가는 경우이다. 근육과 힘줄이 오그라 들 게 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심한 경우에는 힘줄이나 근육이 뼈와 연결된 부분에서 뜯 겨 지거나 혹은 중간에서 끊어지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는데... 뭐 아주 상당히 잘 견디고 있는 것 같긴 하다. 드러난 피부에는 굵은 힘줄과 근육들 이 의지와 상관없이 요동을 치고 혈관이 터질 듯이 팽창되는 모습이 좀 징그럽긴 하 네... “크 으허허헉. 제, 제발. 그만둬. 차라리 죽여라. 크아아악. 케에에겍” 음. 비명소리가 아주 리얼해지는 느낌이 드네. “오빠, 저러다가 죽으면 어떻게해? 차라리 최면을 걸던가 아니면 정신 마법을 거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 흑. 불쌍하다.” 수아는 더 이상 못 보겠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고는 마차 쪽에 누워있는 바이란 쪽으 로 가 버렸다. “오빠, 그러고 보니 고문을 하는 것 보다는 마법을 쓰는 쪽이 더 효과적인 방법 아 니야? 이렇게 고문을 하는 것은 왠지 보기에도 그렇고, 효율도 떨어지는 것 같은 데..” 풍아도 별로 보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전에 자간에서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지만 그 때는 이런 반응 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물론 그 때와 비교하면 지금의 상황이 좀 더 심하기는 하지만... “뭐, 최면이나 정신제압과 같은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게 후유증이 많이 남 는 편이어서.... 최면 같은 경우에는 별 영향이 없을 것 같지만 자의로 최면에 걸리 는 것과 억지로 최면을 거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거든. 잘못하면 아주 바보가 되어 버리는 경우도 있단 말이야. 몸이 좀 망가지는 것이야 그렇다고 해도 정신이 망가지 면 문제가 심각해진다고.” 나는 동생들에게 설명을 해야 했다. 나라고 쉬운 방법을 쓰고 싶지 않을까만, 그렇다고 사람을 아주 병신으로 만들 수도 있는 방법을 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헹, 그렇다고 저렇게 팔 다리가 병신이 되면 뭐 다른가? 그게 그거지.” 풍아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풍아야, 팔 다리가 없어도 사람은 사람이야. 물론 정신이 나간 사람도 사람이지. 하지만 사람구실을 하느야 아니냐는 달라진다. 정신이 나간 사람은 사람구실을 할 수 없는 사람이지만, 팔 다리가 없다고 해도 정신만 멀쩡하면 사람구실을 할 수 있는 가 능성은 언제나 가지고 있다. 실제로 몸이 불구라도 사람구실을 못하는 사람보다는 사 람구실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더 많아. 뭐 팔다리 멀쩡해도 사람구실 못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 그런가? 그렇기도 하겠네.” “그런 것 같네요. 루탄 형님 말이 옳은 것 같군요. 그렇다고 저렇게 뭔가 말을 하 고 싶은 사람을 말도 못하고 계속 괴로워 하게 두는 것은 좋지 않은 방법인 것 같은 데 요?” 광아가 풍아에 이어서 내 생각에 동의 하면서 그 젊은 습격자의 상태에 대한 주의를 주었다. 아주 잠깐 동생들과 이야기를 하느라고 신경을 안쓰는 사이에 아주 많이 망가진 모습 이었다. 언뜻 봐도 근육의 상당수가 끊어진 것 같고, 작은 힘줄들도 제법 많이 끊어진 듯 보 였다. 뭐 근육의 힘에 못 이긴 뼈도 좀 상한 것 같군. 나는 녀석의 혈도들을 풀어 주었다. 순식간에 오그라들던 몸이 늘어지는 것은 참 특이한 모습이다. 팽팽하게 근육들이 일 시에 늘어져서 땅에 퍼질러지는 듯한 느낌. “자, 그럼 뭔가 나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을까? 나는 내가 들을 이야기가 상당 히 많이 있다고 생각하고 니가 그럭저럭 그런 이야기들을 많이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 각하는데 말이야. 물론 진실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서로에게 좋을 거야.” 땅바닥에 비스듬이 늘어져서 고개도 들지 못하고 땀과 눈물과 침으로 범벅이 된 얼굴 에서 눈동자만 굴려서 나를 보는 녀석에게서 더 이상의 반항의 기운은 찾을 수가 없 었 다. “이봐 잘 생각해 봐. 내가 흡족한 기분이 되면 너희 일행들을 풀어 주도록 하지. 뭐 적당한 치료도 해 주도록 하고 말이야. 어뗗게 생각해? 좋은 것이 좋은 거 아닌 가?” 내 말에 잠시 녀석의 눈에서 희망이라는 빛이 반짝인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이제 이 녀석은 술술 모든 것을 털어 놓을 것이다. 죽음만이 있으리라는 미래에 대 한 예측에 내가 삶이라는 작은 희망을 던져 주었기 때문에... 흐흐 그걸 잡고 싶으면 최대한 발버둥을 쳐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정말 이 고문은 무지막지한 것 같다. 흐흐 나는 그 습격자를 화아 등에게 맡기고 다시 마차로 돌아왔다. 뭐 늙은 습격자와 그 일행들이 있기는 하지만 화아와 광아 등이 알아오는 정보가 부 족하지 않다면 다시 저들을 건드릴 생각은 없었다. 나와 수와 풍아 아세트(그러고 보니 1:3의 성비가 되었군.)가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 며(거의 아세트가 우리 일행에 대해 물어보는 것이었지만) 차 한 잔을 거의 마셨을 무 렵 심문이 끝났는지 화아등이 돌아 왔다. “형, 이번에 저 녀석들을 보낸 사람이 마롤 후작이라는 인물이라는데... 아무래도 소모품인 것 같아. 헤이스런가의 제1공녀가 마티운으로 이동했다는 것과 일행의 인상 착의 그리고 다른 정보는 가지지 못하고, 뭐 셋의 신분과 실력에 대한 것은 어느정도 알고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공녀가 대환수를 부린다는 사실 조차도 알지 못하고 있는 상태인 것으로 봐서는.... 내 생각대로 역시 소모품이자 정찰용이 아닐까 하는데요? ” “제 생각도 그래요 루탄형님. 아세트 아기씨의 행적을 그렇게 잘 알고 있다면 적어 도 크리트니아에서 대환수급 환수를 귀속시켰다는 정도의 정보는 알고 있을 것이고, 그럼 저 정도의 인원으로는 어렵다는 것도 알았을 텐데, 그런 정보도 없이 아세트 아 가씨 일행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들을 소모품으로 여기는 것 같아요.” 화아와 광아가 심문 결과를 그렇게 요약해서 알려줬다. “그런데 마롤 후작이라는 인물은 어떤 인물이지?” 나는 아세트 그리고 일행에서 조금(몇 걸음정도)떨어서서(무지 관심이 있으면서 아 닌 척) 서 있는 자이건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마롤 후작은 현재 귀족들을 대표하는 무리들 중 한 무리의 수장이랄 수 있는 인물 이예요. 지금 한타 왕국의 귀족들은 제1황자파, 제2황자파, 제3황자파, 그리고 중립 파, 마지막으로 국왕파로 나뉘어 있다고 할 수 있어요. 1황파는 정통 왕위계승자라는 명분을 등에 업고 있는 귀족들로 대표가 재상으로 있 는 마르틸 후작이고. 2황파는 마롤후작이 대표인데 2황자의 어머니이신 제2황비의 모국이 암흑제국인 까닭 에 무시할 수 없는 배경을 지니고 있다고 봐야 겠지요. 3황파는 제일 힘이 약한 세력이지만 3황자의 자질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그런대로 세 력을 모으고 있지요. 대표는 군대를 통솔하는 썬드라스 공작가예요. 뭐 군대라고 해 야 유명무실한 것이기는 하지만요.(여기서 자이건의 얼굴이 구겨지는 것을 어쩌랴.) 중립파는 말 그대로 왕권에 대한 관여를 않겠다는 귀족들이지만 실제로는 가진 힘이 미약해서 능력이 없는 거라고 봐야 할거예요. 대표는 헤이스런 공작가.(자기 가문에 대해 그렇게 말하면서도 얼굴색이 변하지 않는 것을보면 자이건 보다는 나은 것 같 다.) 마지막으로 국왕파는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귀족은 아니지요. 이 나라를 지탱하는 힘을 지닌 단체니까요. 다름아닌 메카리쵸가 국왕의 힘이예요.“ “그래요? 그런데 마롤 후작이 헤이스런의 공녀를 노린다. 이유가 뭐지요? 설마 단순 하게 헤이스런 공작가의 발언권이 커지는 것을 막아보자는 생각치고는 출혈이 큰 것 같은데요? 아무리 2황자를 옹호한다고 해도 표면적으로는 헤이스런가의 힘이 커지는 것은 어떻게 보면 한타왕국의 국력 신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인데 그것을 막으 려고 한다는 것은 국가의 이익에 반하는 반역과도 같은 것이 아닌가요? 그런데 마롤 이 라는 사람이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은 좀... 머리가 떨어지지 않는 이상은 이해하기가 어렵군요.” 나는아세트를 보며 물었다. “그건 제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마롤 후작이 이번 일을 시켰다는 것은 다른 사람 들이 알 수가 없다는 것이 답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마롤이 시켰다는 것을 증명하려 고 해도 마롤의 힘이라면 그런 것들을 조작이나 무고라는 이름으로 우리들에게 죄를 전가시킬 힘이 충분하지요. 그러니 섣불리 그런 문제를 표면화시키는 것은 어렵다는 것입니다. 더더욱 암흑제국에 대해 신경을 써야 하는 일이라면....” 자이건의 말이다. “뭐? 그럼 그렇게 심각하다는 거야? 아니 도대체 뭔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기에 그런 경우가 생기는 것이지? 하다 못해서 다른 파벌들과의 연합을 통해서라도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럴 수 있다고 해도 그것도 문제지요. 마롤이 무너지면 귀족들의 힘의 균형이 무 너지고 그럼 상당히 많은 피를 흘려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그 피가 귀족들의 피가 될 것이라는 것은 모두들 알고 있는 것이지요. 때문에 서로들 그런 파국은 피하려고 하는 실정이고, 뭐 언젠가 현 국왕의 자리가 비게 되면 누구든 그 자리를 잇게 되는 황자의 패거리가 다른 파벌들을 짓누르게 되기는 하겠지만 그런 경우에도 견제의 효 과 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귀족들 자체에서 흘리는 피의 양은 얼마 안 될 것이 라는....” 뭐 들어보면 복잡해 보이지만 간단하다. 지금의 형태를 유지하는 것이 자신들의 이익 에 도움이 되니까 굳이 사안을 복잡하게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돼지 귀족들이 서로 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면서도 서로를 옹호하는 이상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 다. “그건 그렇다고 치고, 귀족들의 문제에까지 관여해서 복잡해지고 싶은 생각은 없으 니까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저 녀석들이 희생양이나 시험용이라면 본격적인 공격이 있을 거라는 이야기잖아. 그럼 상당히 복잡해지는 건데? 이거 이번 일 때문에 언제 어 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화살을 걱정하고 살아야 한다는 거야?” 뭐 이건 거의 혼잣말 이 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마롤도 대단위의 공격은 하지 못할 것입니다. 적어도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는 말이지요. 위험한 곳은 사람들이 살지 않는 환수들의 군집처에 들어가 있는 동안 이 문제가 되겠지요. 그 안에서라면 몇 백 명의 대단위 인원의 싸움이나 마법, 환수 나 정령, 마수를 이용한 공격도 사람들의 이목을 신경쓰지 않고 할 수 있으니까 위험 해지겠네요.” 그게 그 말이잖아. 지금부터 상당히 위험해 질거라는... 에구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꼬이는 것인지.. 자간에서 돈 좀 왕창 벌었으면 그냥 지토랑 동생들이랑 여기 저기 다 니면서 구경이나 하고 그럼 좋았을텐데..(뭐 생각해보면 지금도 그건 가능할 것 같 다.) 하지만 역시 이 쪽이 스릴이 있어서 재미가 두 배가 되는(퍼걱) 이런 분위기가 아닌데 어쩌면 동생들이 위험해질 수도.. 역시 고정관념이란 무서운 것이다. 화아 등이 인간형태로 있으니까 이젠 아주 인간으로 생각을 하는 듯한... 최상급정령 이라는 무시무시한 신분을 지닌 녀석들인데... 아마도 최상급정령이면 초환수보다 위 에 있지 않을까나? 가끔 이런 것을 잊어 버리는 경우가 있단 말이야. 흠.. “얘들이 이번 의뢰는 상당히 재미있을 것 같지 않니? 하하하 어디 한 번 해보지뭐. 하하하” 나는 동생들을 돌아보며 활짝 웃었다. “그래, 오빠. 재미있겠네.” “그래. 재미있겠어.” 그런데 대답을 하는 녀석들의 얼굴이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는다. 뭐, 뭐가 잘못된 것일까? “왜 그러는거야? 풍아야 재미 없을 것 같으니?” “아니야, 오빠. 재미 있을거야.” “그런데 왜 표정들이 그런거지. 한 둘도 아니고 다섯이 전부 표정이 이상하잖아. 왜 그러는 거야?” “아니야. 우리가 뭘 어쨌다구.” “그래요. 오빠. 우리 아무렇지도 않아요.”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절대 아니다. “무슨일이야? 왜 그러는 거야? 뭐가 문제냐구. 알아야 고칠 거 아니냔 말이야.” 나는 나도 모르는 답답함에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럴 때는 정말 답답하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를 눈치챈 모양인지 아세트와 자이건, 그리고 떨거지들이 우리 일 행에게서 멀어졌다. “저, 잠시 바이란에게 가볼게요.” 아세트. “전 마부석에나 가 있겠습니다.” 자이건. “아가씨 가시지요.” 콜린드. 결국 우리 일행만 남게 되었을 때, “히힝, 오빠는 우리 마음도 몰라주고. 흐흑.” 수아가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수, 수아야 왜 그러는 거야?” “루탄 니가 잘못 한거야. 우리들이 인간형으로 있으면서 우리들도 가끔은 정령이라 는 것을 잊게 되었는데, 그럴땐 정말 가족이고 정말 친구인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되 지. 그리고 그런 느낌이 왠지 좋아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아. 그리고 그런 것은 루탄 너와 맺어진 우리들의 정신에서 비롯된 거야. 네가 우리들을 정령으로 인 식 하지 않으니까 우리들도 자연히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이지. 그런데 방금 루탄 네가 우리들이 정령이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고 생각하게 되니까 서운한 마음이 들어서 그런 거야. 루탄 니가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우리들이 가지고 있던 인간으 로 서의 환상이 깨어진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뭐 솔직히 정령이라는 본질을 바 꿀 수 없는 이상 그런 꿈에서 일찍 깨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쉬운 마음은 어 쩔 수가 없는 모양이다.” 지토의 설명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모두 아무 말이 없이 서 있었다. 그런 것이었나 보다. 내가 이 녀석들에게 느끼는 것을 이 녀석들도 느끼는 것이었나 보다. 그렇지만 내가 녀석들을 인간으로 생각하는 것과 정령으로 생각하는 것과의 차 이가 있었나? 정령이라서 정이 덜 가는 것도 아닌데... 인간형이어서 더 가족처럼 느껴지는 것이었 을까? 마음을 가닥가닥 정리하고 되짚어 보는 일은 너무나 어렵다. 하지만 한 가지는 말해야 한다. “그래 본질은 바꾸지 못하는 것이라는 지토의 말이 옳아. 너희들 정령이잖아. 정 령. 하지만 그게 어쨌는데? 나와 처음 만날 때도 그리고 지금도 같은 정령이지만 그 사이에 많이 달라졌잖아. 조금씩 조금씩 변해왔잖아. 지금 니들이 나 좋아하는 느낌 이 인간형이기 때문에 가능한 느낌이야? 그런거 아니잖아. 정령이면서 느끼는 느낌이 잖아. 나도 그래, 인간이 아닌 정령이라고 내가 너희에게 가지는 느낌이 달라지는 것 은 아니야. 난 그저 정령이든 인간이든 화아, 풍아, 광아, 수아, 지토를 좋아하고 사 랑해. 너희는 내 가족이란말이야. 언제까지나.... 내 가족이라고.” 나는 뭔가 더 많이 말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를 몰랐다. 평소처럼 머리가 핑핑 돌아가면서 말빨이 쏟아져 나오지도 않았고, 가슴속에 답답함 만 가득해서 목에 메여왔다. “흐흑, 오빠. 미안해요. 흐흑.” 수아가 울면서 안겨온다. “뭐가 분위기가 이런거야? 나 가서 잠이나 잘거야.” “광아야 우리 대련이나 가자. 실력을 높혀야지. 실력을.” “으악, 화아형 이 귀를 놓으란 말이야 간다구 가.” 어색한 분위기 탓일까? 다들 슬금슬금 자리를 피해버린다. “수아야. 울지 말아. 뚝. 우리 막내 그렇게 울다가는 얼굴이 부어서 안돼지. 그만 울어라. 하하. 오늘은 여기서 더 움직이지 않을 테니까 우리 저녁이나 준비하자. 하 하.” 나는 훌쩍이는 수아를 데리고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뭐 다른 녀석들은 다들 어디 숨었는지 보이지를 않으니.... 하지만 이 짧은 사건이 우리들을 좀 더 가깝게 이어 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말로 하라면 하지 못할 느낌이지만 말이다. 조금은 어색하고 묘한 분위기의 저녁을 먹고 난 후, 우리는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서 생각을 해야 했다. “이제부터 가는 길에는 하루거리에 마을이 하나 있고, 그 이후로는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곳이에요. 아마도 마롤 후작도 그 마을을 지난 다음부터 본격적인 행동을 시작 할 것 같아요. 뭐 하루 정도는 편안하게 있어도 될 것 같다는 말이죠.” “그럼 그 마을을 지난 다음에는 사람들이 전혀 없다는 말입니까? 아세트 아가씨?” 나는 아세트에게 다시 확인을 했다. “그렇다고 보시면 되요. 스컬프트 때문에 누웬으로 가는 길목이 완전히 차단이 된 후로는 사람들이 그 쪽으로는 전혀 가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으니까 말이죠.” “그렇군요. 그럼 마을을 지난 다음에는 어떻게 할 계획인지요?” “마을을 벗어나서 하루 정도면 스컬프트의 영역에 도착하게 될거예요. 아마도 마롤 후작도 그 영역 안으로는 사람들을 보내지 않을 거라고 봐요. 그러니 빠른 속도로 이 동해서 스컬프트의 영역에 들어선다면 더 이상 위험은 없지 않을가까 싶은데요. 그게 제 생각이예요. 물론 마롤 후작의 위협보다 더한 스컬프트를 상대해야 하겠지만 말이 죠.” 그러니까 호랑이 굴로 들어가서 늑대를 피하는 거나 같은 이야기다. “하지만 마롤 후작이 스컬프트의 영역으로 들어서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는 것이 아닌가요? 아세트 아가씨를 상대할 전력이라면 태환수를 상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 라 고 생각할지도 모르고, 어떻게 되든 아세트 아가씨의 행적을 알기는 해야 할 테니 계 속해서 추적을 할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말이죠.” “대장님. 대장님은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모양이지만, 태환수는 만만한 존재 가 아닙니다. 솔직히 저는 마롤 후작이 제 앞을 막으려는 것이 도리어 이상할 정도예 요. 태환수를 잡겠다는 것은 곧 맨몸으로 불속에 뛰어드는 것과 같으니까 그냥 둬도 죽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사고방식이거든요. 호호.” 어째 이 여자는 태환수를 잡으려고 하는 우리들을 미친놈들로 몰아가는 분위기다. 자기가 잡아달라고 와서는 이런 말이라니.... “그럼 별 이야기도 없는 거잖아. 그냥 열심히 달린다. 그래서 스컬프트의 영역에 들 어가서 마롤인가 하는 사람을 피하고 우리의 목표인 스컬프트를 잡아온다. 이런 내용 아닌가? 겨우 그런 이야기를 하자고 이렇게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있는 거였어?” 풍아가 시시하다는 듯이 한 마디를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아야, 우린 들어가서 잠이나 자자. 미인은 일찍 자야 하는 거야. 그래야 피부가 상하지 않지.” 풍아는 머뭇거리는 수아를 끌고는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럼 일찍 잠이나 잘까? 할 일도 없으니 말이야. 그런데 아세트 아가씨는 어디에 서 주무시나? 바이란이 여행 준비를 못하고 온 것 같던데?” 사실 바이란은 자기가 타고 온 말 한 필 이외에는 여행에 도움을 될 만한 어떤 것도 가지고 오지 못했던 것이다. 뭐 말안장에 묶인 침낭 하나는 도움이 될 것 같긴 하지 만.... “그거야 바이란이나 콜린드가 알아서 할 문제지. 설마 아세트 아가씨가 마차에서 자 아 하니까 우리들에게 밖에서 잠을 자라고 하지는 않겠지?” 지토가 그렇게 말하면서 은근히 아세트 쪽을 바라보았다. “호호호, 여기 있는 분들은 의외로 기사도 정신이 없으신 것 같군요. 당연히 이런 경우에는 제가 마차에서 여동생 분들과 같이 자고, 여러분이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아 니었나요? 호호호.” 얼굴 두꺼운 면도 있는 여자네? “하지만 아세트양, 형님들과 저, 그리고 지토는 지금까지 여동생들과 함께 마차에 서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아가씨 한 분으로 인해서 저희 넷이 밤바람을 맞으면서 잠 을 자야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납득할 수 없는 경우로군요. 정 밖에서 주무시기 어려 운 상황이라면 저희와 함께 마차 안에서 주무시는 것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말이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어떻게 아가씨와 함께 마차 안에서 같이 주무실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광아의 말에 콜린드가 질색을 하고 나섰다. “그럼 이야기는 끝이 났군요. 아가씨는 바이란, 콜린드, 자이건과 함께 밖에서 주무 시는 것으로 하고 우리는 이만 들어가서 자야겠군요.” 광아는 끝가지 양보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물론 화아아 지토도 편안한 잠자리를 양보할 생각은 없을 터였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요? 어떻게 여자를 밖에서 재우고 남자들이 편안한 잠 자리를 찾을 수가 있는 거죠? 그런 비상식적인 경우가....” 아세트는 끝까지 양보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광아와 화아등을 보면서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건 콜린드도 마찬가지의 표정이었다. “뭐, 여자를 아끼고 보호해야 한다는 점에는 저도 반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세 트양이 밖에서 주무신다고 목숨이 위험하거나 혹은 심각한 무리가 가는 것도 아닌 이 상, 굳이 한 사람을 위해서 여러 사람이 양보를 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 것도 단지 고귀하신 신분인 까닭에 합숙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당해야 하는 불편이 라 면 더더욱 그렇고 말이지요. 그럼 안녕히 주무십시오. 지토, 형님들 그만 들어가지 요. 오늘은 좀 피곤했어요. 안 그래요?” 광아는 그렇게 우리들을 우르르 마차 쪽으로 몰아갔다. 그리고 결국 마차 밖에는 두 개의 천막이 세워졌고, 그 하나가 아세트의 차지가 되었 다. “굳이 불침번을 설 필요는 없을 겁니다. 주위에 결계와 알람을 걸어 두었으니 아침 까지는 아무것도 가까이 접근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니 편히 쉬십시오.” 나는 그렇게 인사를 하고는 마차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남은 네 명의 인물들이 어떻게 밤을 세울 것인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도 없었다.(아세 트라는 여자가 유소 이후로는 처음으로 가까이에 있는 이성이기는 했지만.... 잘 모 르 겠다 관심이 있는 것인지는) “오빠, 들어왔네. 그런데 그 스컬프트라는 환수 말이야. 어떻게 생겼을까? 전에 잡 을 녀석처럼 그렇게 징그럽게 생겼을까? 좀 예쁘게 생겼으면 좋을텐데 말이야. 호호 ” 마차 안에서는 모두들 침대도 펼치지 않고 탁자에 둘러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글쎄, 나도 본 적이 없으니 알 수 없지. 나는 그보다는 태환수라는 녀석의 위력이 어느정도 일지가 궁금하다. 전에 잡았던 녀석이 중급은 넘고 대급에는 조금 모자라는 정도라고 보면 지금 너희들 상태로는 절대 태급은 상대 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고. 이번에는 내가 나서서 잡아야 할 것 같은데 말이야. 걱정이네.” 내가 그렇게 엄살을 부리자 다들 고개를 돌려 버린다. “뭐냐? 그런 반응들은?” 어째 이상한 반응이었다. 좀 걱정하는 투의 말이 따라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수아 마저도 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는 표정이다. “루탄, 너 겨우 태급환수를 상대하는데 걱정이라느니 하는 그런 말을 하고도 전혀 쑥스럽지 않냐? 명색이 최상급정령을 다섯이나 데리고 있는 녀석이 그게 말이 되는 소 리냐? 만약에 내가 최상급의 상태라면 태환수가 아니라 초환수라도 어렵지 않을 것 같 은데, 나도 아니고 루탄 네가 그런 말을 하면 누가 믿냐? 봐라 수아까지도 저러는 데..” 지토의 신랄한 한 마디. 흐흑. 수아 너마저도 이제는 흐흑. “얘들아 자자. 아무래도 루탄 형은 좀 더 있다가 잘 모양이네. 우리 먼저 자자.” 화아가 아이들을 침대로 몰아간다. 이런 경우를 따를 당한다고 하는 것 같은데... 아무리 좀 전의 상황을 되돌려 봐도 내가 이런 상황에 처할 이유가 없는데.. 그런 고민 중에 밤은 깊어갔다. 우리들은 지금 스컬프트의 영역 전에 있는 마지막 마을을 나서고 있는 중이다. 습격을 받은 그 날 밤(내가 이상하게 따를 당한)이 지나고 하루를 달려서 도착한 이 마을에서 편한 잠자리를(아세트와 떨거지를에게 해당하는 것이지만) 만끽하고 스컬프 트의 영역으로 향해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이에 마롤 후작인가 하는 녀석의 도발은 더 이상 없었고, 우리들 습격했던 10인 조는 몇 군데의 혈도를 제압해서 반병신(팔과 다리를 쓰기에 조금의 무리가 있는 정 도)을 만들어서 풀어주었다. 말로는 다시는 그 팔과 다리가 완전하게 돌아오지는 않을 거라고 했지만 두 달 정도 지나면 예전처럼 회복되도록 만들어 놓았다. 고생을 좀 하면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이었지만 잘 한 일인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마롤 후작의 앙갚음을 받을지도 모르는데.. 아무튼 그 이후로 별 일 없이 이제 우리는 스컬프트의 영역 하루 거리에 도착하고 있 었던 것이다. 마을을 나선 후에 길은 의외로 험하지 않았고, 예전에 누웬으로 통하는 관도가 그럭 저럭 회손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제법 속도감 있는 여정이 되었다. 나와 지토, 수아는 마차를 타고 이동 중이었고(자이건은 자기 말은 타지도 못하고 여 전히 마부 노릇을 하고 있었다.) 화아, 광아, 풍아는 자기 말을 타고 따라왔고(그 사 이에 참 능숙하게도 말을 탄다. 역시 배우는 것이 빠른 녀석들이다.) 콜린드는 자이 건 의 말을 빌려 타고 있었고, 바이란은 자기가 끌고 온 말을 타고 있었다. 물론 아세트 는 마차 안에서 함께였다. 수아와 풍아는 처음 보다는 아세트와 친해진 모양인지 이것 저것 수다를 떨기도 했지 만 나와 지토는 그거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오빠, 마차에 창문이 있어야 되겠다. 생각해 보니까 좀 답답하다.” 갑작스러운 수아의 말에 한 구석 탁자에서 이것 저것 마법들을 조합하고 있던 나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창문이라. 그거 좋은 생각이다. 그럼 양 쪽으로 창문을 만들면 되겠네? 그런데 양 쪽에 이미 여러 가지 장치들이 있어서 구멍을 뚫는 것은 불가능하고 어차피 이 마차 에 환기는 별 의미가 없으니까 바깥의 모습만 볼 수 있으면 되는 거지?” 나는 마차의 벽에 숨겨진 침대와 외벽에 있는 취사대와 세면대 등을 생각하고 그렇 게 물었다. “그럼, 밖이 안보이니까 답답한 것 뿐이야. 오빠.” 그 말에 아세트도 덩달아 한 마디 한다. “그래요. 밖을 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없을 턱이 없다. 사실 수정구를 통해서 먼 곳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도 가능한 마법인 데 바로 밖에 있는 경치를 보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곧 마차에 창문 달기 작업에 들어갔다. 마차의 바깥 벽에 주위의 풍경들을 보는 눈에 해당하는 마법석을 만들어 달고(현대 식으로 하면 카메라 같은 것이다. 풍경과 음향을 집적하는) 마차 안에는 그 마법석에 서 모아진 영상과 음향이 실현되는 하얀색 천을 창문 크기로 달아 놓았다. “어머, 대단하군요.” 아세트가 놀란 감탄사를 뱉었다. “정말 대단해요 오빠. 정말 창문 같아요. 고개를 밖으로 내밀지는 못하지만 밖의 풍 경이 아주 잘 보여요. 호호.” 수아도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렇게 작은 아이템을 마차에 만들어 다는 동안에 점심 시간이 다가 오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점심을 편하게 먹기는 어려울 듯 했다. “잠깐만 여기 있어라 밖에 좀 나갔다 올께. 지토 같이 가자.” 나는 양쪽 창문에 정신이 팔려 이 쪽 저 쪽으로 왔다 갔다 하는 두 여자들을 남겨두 고 마차 지붕위로 지토와 함께 올라왔다. 우리들이 마차 위로 올라가자 앞뒤에서 말을 타고 달리던 일행들이 마차 주위로 모여 들었다. “주위 경계를 좀 해야 겠다. 아까부터 우리를 따라오는 사람들이 있는데 50여명은 되어 보인다. 거리가 좀 멀기는 하지만 갑자기 속도를 내는 것으로 보아서는 우리를 더 이상 그대로 두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다.” 나는 주위에 다가온 사람들에게 내가 알아 낸 것을 알려 주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마법사와 그 비슷한 부류의 인물들도 있는 것 같으니까 조심 들 해야 할거야.” “형 정확히 어느 정도 거리에 있는데? 난 아직 모르겠는데?” “우리가 온 길을 따라서 오고 있는 중이야. 언제부터 따라 왔는지는 몰라도 약 한 시간 전부터 따라고는 것을 느꼈다. 우리가 달리는 것을 멈추면 금세 모습이 보일꺼 야. 이 속도로 달린다면 오래지 않아서 따라오는 녀석들을 볼 수 있을 거야.” “형님 그냥 속도를 내서 떨쳐 버리고 스컬프트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광아의 의견이었다. “나도 그 방법이 최선일 것 같기는 하다만 아무리 그래도 마차를 끌고는 속도에서 차이가 나니 좀 어렵지 않을까 싶은데...” 내가 좀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자 화아가 나섰다. “그럼 볼 것 없이 쓸어버리고 느긋하게 가면 되겠네요. 설마 우리가 지기야 하겠어 요?” “하지만 화아 이번에는 50명이나 되는 인원이야. 그렇다는 말은 잘못하면 집단전이 될 수 있다는 말이고 그 속에서는 어쩔 수 없이 사람이 죽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는 말이다. 난, 난 말이다. 적어도 내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거 든...” 나는 어렵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었다. 솔직히 따라오는 사람이 걸리적거리면 여기서도 적당히 막을 수는 있었다. 8써클이나 9써클 마법이라면 보이지 않는 상대라하더라도 광범위한 영역에 충격을 주 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사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이런 이상한 세상에 있으면서도 아직 살인은 해 보지 않았던 것 같으니 행운이라면 행운이었을까? “루탄, 그럼 어쩌자는 거야? 도망가기도 어렵고, 싸움을 하기도 어렵다면 ..” “아~! 글쎄. 일단은 도망을 가는 데 까지는 가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일단은 최대 한의 속도로 달려 봐야겠지?” 내가 생각해도 맥빠지는 대답에 긴장감 없는 말이지만 어쩌겠는가? “자이건, 달려. 하하하. 도망이다. 콜린드 바이란, 달려요. 최대한 도망을 가는 겁 니다. 하하하하.” 내가 생각해도 도망가면서 이렇게 웃으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데... 아무튼 내가 그렇게 하하 거리며 마차의 속도를 올리자, 동생들도 덩달아 하하 호호 거리며 말의 속도를 높혔다. “오빠. 그렇게 웃으면 이상하잖아요. 도망가면서 뭐가 좋다고 그렇게 웃어요?” 수아가 마차 뒤로 고개를 내밀고 물었다. “하하, 즐겁게 가자는 거지 뭐. 하하.” 그렇게 한동안 보이지도 않는 적들과의 속도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적은 곧 보이는 적으로 바뀌었고 속도전은 추격전으로 그리고 추 격전은 원거리 공격무기의 사정거리에 들어서면서 공격과 방어전을 겸하게 되었다. 물론 마차를 중심으로 강력한 물리력 및 마법력에 대한 방어벽은 쉽게 적들이 원하 는 성과를 안겨주지는 않았지만 점점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위험은 가까워지고 있었다 . “이러다가 마법까지 날아들면 상당히 버거워지겠는걸? 지토 어쩌면 좋을까?” “일단 녀석들의 속도를 늦추는 것이라면 어렵지 않아. 길을 조금 울퉁불퉁하게 만들 어주고 웅덩이를 좀 만들어 주면 되니까 말이야. 그걸 원하는 거야?” 지토가 벙글거리며 물었다. “그래, 그거 좋은 방법이다. 부탁해 지토. 하하” “어렵지 않지 크크.” 지토의 이상한 웃음과 함께 상황은 눈앞에 드러났다. 적이자 추격자이자 우리의 위험이었던 녀석들은 땅바닥이 울렁거리고 멋대로 갈라지 는 경험을 해야했고 운이 없는 몇 몇은 말고 함께 땅 위를 구르는 경험도 함께 해야 했다. “저런 많이 다치지는 않았어야 할텐데... 쯧쯔.” 내가 그런 녀석들을 보며 느긋하게 걱정을 하고 있을 때, 우리 쪽에도 이변이 일어났 다. 길 옆으로 늘어섰던 나무와 풀들이 멋대로 움직이며 말과 마차, 사람들을 공격해 온 것이었다. 제일 먼저 피해를 본 것은 콜린드였다. 관도의 옆에서 갑자기 덮쳐온 나무에 간신히 몸을 피하기는 했지만 자이건의 말을 나 무에게 내어 준 것이었다. “크흑. 이게 무슨...” 말을 내어주고 간신히 땅을 굴러 위험을 피한 콜린드가 먼지 속에서 칼을 빼들고 달 려 오면서 투덜거렸다. “마법은 아닌 것 같고. 정령력도 아닌데... 이건 또 무슨 일이지?” 나는 주위의 나무와 풀들이 마차 쪽으로 더 이상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실드를 치면서 중얼거렸다. “아마도 환수를 이용한 것 같아요. 초목을 움직이는 환수라니, 그런 것이 있는 줄 은 몰랐지만 아무튼 환수인 것은 틀림없어요.” 내 중얼거림에 대답을 한 것은 마차 밖으로 나온 아세트였다. “환수라. 그럼 이 문제는 같은 환수로 해결을 해 보시겠습니까? 아세트 아가씨?” 나는 이제는 마차와 말들을 포함한 일행들이 겨우 들어갈 정도의 실드를 유지하면서 아세트에게 물었다. “일단은 이 나무와 풀들은 어찌 한 번 막아 보지요. 계약에 의하여 너의 속한 힘을 나를 위해 쓸지어다. 귀속의 인으로 명한다 나와라 중급환수 화신.” 아세트의 중얼거림에 따라 아세트가 맺은 인에서 빛이 나며 공간의 작은 떨림과 함 께 불꽃으로 휩싸인 새가 나타났다. “어머, 저거 대화신이라는 녀석 아니야? 이상하네 그 때는 저 녀석 상급환수라고 했 던 것 같은데 겨우 중급이란 말이야?” “그러게, 중급이라는 개념이 많이 달라진 모양이네? 그럼 우리가 지금 잡으려는 태 급환수도 만만하지 않겠네? 형이 고생을 좀 하겠군. 하하.” 아세트가 불러 낸 녀석은 예전에 본 적이 있는 대화신이었다. 지금은 화신이라고 부 르는 모양이지만 말이다. “그런대 좀 다른 것 같기도 하네. 저번보다 크기가 좀 작아요. 그래서 중급인 것일 가요?” 수아가 아세트가 불러낸 환수를 보며 그렇게 말하고 나서 자세히 보니 크기가 좀 작 아 보였다. 예전에는 3미터 정도는 되었는데 지금 나온 녀석은 2미터를 채 넘기지 못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음. 그런가 보내. 같은 종류인데 성장을 덜 해서 중급으로 불리는 것인가?” 이렇게 우리가 아세트의 환수에 대해서 품평을 하고 있는 동안에 화신이라는 환수는 아세트의 명에 따라 초목을 움직이는 환수를 찾아 숲으로 날아 들어갔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서 화신이 상대를 찾았는지 우리들을 향한 나무와 풀의 공격이 무 디어 지더니 더 이상 공격이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되고 보면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저들을 제압해야 하는 걸까요?” 광아가 어깨를 으쓱하며 물어왔다. “그렇게 된 것 같군. 하지만 역시 사람을 죽이는 것은 피하고 제압하는 쪽으로 하도 록 하자.” 그리고 우리들이 상대를 향해서 싸움을 시작하려는 순간 또 다른 존재가 우리의 앞 을 막았다. “크허헝~” “어맛. 놀래라.” “이크. 뭐야 이 고양이는.” 갑작스럽게 나타나 발톱을 휘두른 녀석은 고양이과에 속하는 녀석 같기는 했다. 적어 도 그 크기가 2미터를 넘지 않고 입에 송곳니가 한 뼘 이상 돋아나 있지 않다면 말이 다. “이것도 환수인 모양이네. 제법 환수사를 많이 데리고 온 모양이네? 그런데 이건 어 느 정도 되는 녀석일까?” 나는 쌍환검 중 우검을 변형 시켜 들고 녀석의 접근을 막으며 말했다. “모르겠어요. 그냥 물리력만 지니고 있다면 중급은 안 되는 환수일 것이고 만약 특 수 능력을 지니고 있다면 급수를 짐작하기 어렵겠지요.” “크항!” 뭐가 크항이야 크항이. 고양이면 야옹이라거나 호랑이면 어흥이라거나 얼마나 듣기 정겨운 소리가 많은데...(이런 말도 안되는 생각이 왜 나는 것일까) 나는 급히 휘두르는 녀석의 발톱을 검을 들어 막았다. 역시 환수라 그런 것일까? 녀석의 발톱이 검을 어쩌지는 못했지만 검도 녀석을 발톱 을 어떻게 하지는 못하는 듯 했다. 발톱 뒤를 이어 날아오는 이빨의 공격. 그래도 단조로운 것은 단조로운 것이다. 몇 번 녀석과 붙어 보니 별 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보다야 공격력이 있겠지 만 중급이나 대급 환수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화아 이 녀석은 니가 상대해라. 별로 위험해 보이지는 않는구나. 될 수 있으면 죽 이지는 말고.” 나는 고양이(?)를 화아에게 양보하고 상대편 진형을 살폈다. 이미 녀석들도 지토의 방해 공작을 피해서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미리 파악했던 대로 50여명의 인원에 복장으로 보아서 우두머리급의 인물이 여섯 정 도인 것 같았고 나머지는 흔히 나오는 떨거지들로 숫자를 메우는 존재들이 분명해 보 이는 구성이었다. 여섯 중에서 둘은 마법사인 것을 주위의 써클로 파악 할 수 있었지만 나머지 넷 중 에 한 녀석이 검기를 쓰는 수준은 넘어 보이는 것으로 보아(몸 안에 축적된 내력을 짐 작해서 파악한 것이니 틀리지 않을 것이다.) 검사나 기사 계열, 다시말하면 몸빵용이 라는 것을 파악했지만 나머지 셋은 파악이 어려웠다. 아세트가 환수가임에도 불구하고 그 힘이 파악되지 않는 것을 보면 아마도 그 셋도 환수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별 수 없이 싸워야 한다면 능력없는 떨거지들은 좀 치우고 싸워야 하겠지? 광아 저 앞에 있는 여섯을 뺀 나머지는 광아 네가 정리를 좀 해라. 네 특기를 살려서 잘 해 봐. 가능하지?” 나는 광아에게 물었고 광아는 싱긋 웃고는 자취를 감추었다. “저럴 때 보면 광아가 지닌 능력은 상당히 편한 것 같아. 호호.” 풍아가 사라지는 광아를 보면서 말했다. 실제로 저렇게 사라져 버리면 광아의 인기척을 찾는 것이 나로서도 쉽지 않은 일이었 다. 뭐 정령의 기운을 찾는 방법이라면 의외로 간단하다는 약점이 있기는 하지만 말 이 다. “그럼 나머지들을 어떻게 상대하지?” “음, 오빠가 저 마법사 둘을 묶어 두고, 내가 저 덩치 큰 녀석(몸빵)을 처리 하기 로 하고 지토가 나머지 셋을 맡는 것으로 하죠. 호호.” “어째서 내가 셋을 상대해야 한다는 거냐? 아무래도 저 녀석들 환수를 쓰는 것 같은 데...” “호호, 환수 둘은 이미 상대하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까 겨우 한 쪽만 신경쓰면 되잖 아요. 지토는 괜히 투덜거려. 하난 아세트가 맡았고, 하난 화 오빠가 맡았으니까 나 머 지는 지토 아저씨의 몫이라구요. 호호호. 그럼 가요.” 풍아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날렵하게 뛰어나갔고, 나는 서둘러 마법사들의 마력을 제압해갔다. 아무리 자신의 마나로 써클을 만들어 놓았다고 해도(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배열했다 는 말이다) 그 위에 평소와는 다른 압력이 가해지면 그 것들을 움직이는 것이 상당히 어려워지는 것이다. 아니 움직이는 것은 고사하고 그 써클을 유지하고 있는 것 조차 도 쉽지 않아진다. 더구나 나처럼 마력이 남아도는 사람이 전개하는 마력장 안이라면 상대적으로 마력이 약한 쪽에서는 엄청난 압력을 받는 것이다. 의외로 써클이나 마력의 차이가 많이 나는 경우에 상대를 제압하는 것은 기사처럼 내 력을 사용하는 사람을 제압하는 것 보다 수월하다. 다른 사람의 몸 속에 있는 힘이야 밖에서 관여할 수 없는 것이지만 몸 주위에 둘러두고 있는 마력의 경우에는 강제적인 간섭이 가능하니 말이다. 정말 힘이 우선한다는 것을 세삼느끼는 경우라고나 할까? 나는 간단한 방법으로 마법사들을 무력화시키고(마법사들으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자신 들의 몸 주위에 있는 써클을 유지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지만 아마 오래 버티지는 못 할 것이다.) 풍아와 지토가 싸우는 것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풍아는 날렵한 움직임으로 기사를 상대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기사의 솜씨가 만만하 지 않았다. 검기를 사용하고 있기는 했지만 여유가 있어 보였고 솜씨를 모두 드러내 고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지토는 또 다른 환수사가 불러낸 환수를 상대로 무식하게 도끼를 휘둘러대고 있었다. 지토가 상대하는 녀석은 지네로 보이는 녀석이었지만 몸통 둘레가 살마 서넛은 되어 보이는 크기에 길이도 10여 미터는 넘어 보였다. 날렵하게 피하고 찍고 자르고, 지토는 보기보다 완력이 엄청난 모양인지 한대 맞을 때 마다 지네 녀석의 몸동이 푹푹 파이고 다리가 끊어지고 있었다. 문제는 상상을 초월하는 회복력이라고나 할까 잘린 다리가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으 니 말이다. 어떤 경우에는 마디를 잘라내면 그 마디를 몸에서 떼어내서 포기하는 경 우 도 있었는데 어찌되었든 지토도 상대에게 밀리지는 않고 있어서 걱정은 없어 보였다. 그리고 그렇게 싸움이 시작된 이후로 우리를 향해 오던 떨거지들도 하나 둘 쓰러지 기 시작했는데 물론 광아의 작품이었다. 처음에는 우리 일행들(나와 자이건, 아세트, 바이란과 콜린드)를 향해서 용맹하게 돌 진하던 녀석들이 달려나가는 중에 하나 둘 쓰러지기 시작하자 어느틈에 공포에 질려 서 는 서로 등을 마주하고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허공을 향해서 칼질을 하는 것이었 다. 그 중에서도 대충 열 몇 명의 희생자를 내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런 대치는 간간히 짧은 신음과 함께 쓰러지는 녀석들을 만들어 내면서 이어 졌고, 얼마 후에는 보이지 않는 광아의 공격을 막아내는 녀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아무리 떨거지라고 전혀 맹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봐 바이란, 콜린드, 자이건, 그렇게 구경만 하고 있을 텐가? 저 정도 인물들은 상대를 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제압을 못하면 빈 틈이라도 만들어 주는 성의를 보 여 야 할 것 아닌가 말이야.” 나는 칼을 들어 어정쩡한 모습을 하고 있는 그들에게 한 마디를 했고, 드디어 그들 이 광아 한 명에게 막혀서 수비에 여념이 없는 녀석들을 향해 달려나갔다. 그 이후의 떨거지들이야 볼 것도 없었다. 자이건의 솜씨야 별 볼 일이 없다고 해도, 바이란은 무시할 수 없는 실력이었고, 콜 린드도 제법 날카로운 면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신경을 쓰는 중에 하나 둘 보이 지 않는 광아의 공격에 쓰러졌던 것이다. “아악~!” 의외의 사건은 아세트에게서 일어났다. 갑작스런 비명과 함께 아세트가 비틀거렸던 것이다. “윽, 화신이 당했어요. 화신으로 상대하기는 무리가 있었나 봐요. 다행히 소멸은 면 했지만 당분간은 움직이기 어려울 것 같네요. 하는 수 없지요. 계약에 의하여 너의 속 한 힘을 나를 위해 쓸지어다. 귀속의 인으로 명한다 나와라 몰크리킷.” 아세트는 또다른 환수를 소환했다. “어? 이녀석 땅강아지잖아. 그래서 몰크리킷인가? 이름은 그럴 듯 하군.” “겨우 부르긴 했는데 상당히 무리가 가는 녀석이네요. 오래는 못 견딜 거예요. 그 전에 저 녀석들을 제압해야 해요.” 아세트는 땅개에게 초목을 조정하는 환수를 잡으라고 시켰는지 땅개는 곧 땅속을 사 라져 버렸지만, 힘든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는데 말이야. 환수를 불러내는 힘은 마나의 힘이 아닌가? 이 상하게 환수사에게 마나가 느껴지지를 않는군.” 나는 궁금했던 점을 아세트에게 물었다. “무슨 소리예요. 환수를 유지하는 것은 마나 같은 것이 아니라고요. 그건 정신력과 체력이지요. 일종의 동화라고나 할까요? 소환된 환수와 자신을 동화시키는 것이죠. 둘 이 하나가 된다고나 할까요? 그러니까 환수가 충격을 받으면 소환주도 어느 정도 충 격 을 받게 되는 것이고요.” “그래? 그런데 넌 화신이 상당한 충격을 받았을 것인데도 별로 영향을 많이 받지 않 은 것 같은데?” “그건 환수사의 능력에 차이가 나기 때문이지요. 저와 중급환수 사이에 동화 비율 은 1:10 정도예요. 그러니까 내가 중급환수를 완벽하게 제어하기 위해서 내가 환수와 동화되는 것이 1이라면 환수는 10에 해당하는 부분이 동화된다는 것이죠. 그러니 전 환수가 10의 충격을 받으면 1의 충격을 받아요. 물론 지금 싸우는 몰크리킷의 경우에 는 거의 4:10 정도는 되는 것 같아요. 이번에 몰크리킷이 충격을 많이 받으면 견디기 어렵겠지요.” 이상한 일이었다. 예전에는 환수를 소환하는 것은 몸 속의 마나를 사용하는 것이었는 데 그 사이에 이런 변화가 있는 줄은 몰랐다. “그참, 이상하네 환수와의 동화라. 그래서 마나가 없는 상태에서도 환수를 쓰는 것 이 가능하다는 것인가? 그럼 문제는 환수와의 동화력에 있는 것이겠군.” “그래요. 평범한 사람들은 환수와 절대로 동화가 되지 못하죠. 동화가 가능하다고 해도 중급, 상급. 태급으로 넘어갈 수록 그 비율이 커지게 되니까요. 그래서 저 같은 경우에 계산대로라면 태급환수를 소환할 경우 거의 1:1의 비율로 동화가 일어날 거예 요. 만약 그 이상이라면 소환이 불가능한 경우가 되겠지요.” “그럼 그 능력이라는 것을 키우는 방법은 없나? 타고나는 것이란 말인가?” “그렇지는 않아요. 일단은 하급의 환수라도 소환이 가능한 능력을 타고나야 한다는 전제가 있지만 그 이후에는 노력과 훈련에 의해 좀 더 높은 수준의 환수를 소환하는 것이 가능해 지는 것이죠. 하급 환수를 계속 소환해서 익숙해지면 점점 그 동화 정도 가 낮아지고 그건 곧 좀 더 높은 수준의 환수를 소환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이되는 거죠.” “그럼 한꺼번에 둘 이상의 환수를 소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예전에는 여럿 환수를 소환했었는데 그 동안에 바뀌었을까? “그렇지는 않아요. 부담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기는 하지만 둘 혹은 셋의 환수를 부르 는 것도 가능은 해요. 저는 중급이라면 둘, 무리하면 셋까지 가능하겠지만....” 뭐 그 뒤의 말은 안 들어도 알겠다. 그 정도의 숫자를 귀속시키지 못했다는 말이겠 지. 그러고 보면 참 한심하다. 능력이 되는데 환수를 잡아서 귀속시키지를 못하다니 말이 다. 명색이 공작가에서 그 정도도 안된다니, 정말 몰락한 가문이라는 느낌이 팍팍 든 다. 아무튼 그 사이에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환수를 소환하는 데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은 분명한 모양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예전과는 다른 환수의 소환이라. 흠. 하지만 일단 중요한 것은 앞의 녀석들을 처리하는 것이 중요했다. 나는 간단한 파이어 에로우를 주위에 생성시켰다. 떨거지들이야 거의 제압이 된 상태였고, 표정을 보아하니 환수사들도 이제는 거의 패 닉에 가까운 상태로 보였다. 소환수가 당하는 공격이 곧 그들에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라면, 어진간한 충격을 받 았을 것이다. 문제는 풍아 쪽이었는데 상황이 어렵게 돌아가는 것을 느꼈는지 자신의 실력을 모두 발휘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풍아의 힘이 녀석보다 약한 것은 아지만 중급의 능력만으로는 어려운 상대였다. “풍아, 오빠가 도와줄께. 하하하. 간다. 파이어 애로우 추적.” 내가 만들어 놓았던 10여 발의 파이어 애로우 중에서 세 발이 풍아와 싸우는 녀석을 향해서 날아갔다. 풍아도 내가 보낸 불화살이 추적기능이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신경도 쓰지 않고 녀석 을 공격하고 있었다. 물론 녀석이야 간단하게 풍아의 공격과 마법을 피해 냈지만, 곧 되돌아 오는 불화살 과 풍아의 협공에 몸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하합.” 다급해진 녀석이 기합과 함께 검강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알아보았다. 그 녀석이 만드는 검강의 연원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그것은 오행심법의 화의 기운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본래 위력의 반의 반도 안되는 위력이었지만 어쨌든 그 것은 오행심법의 화에 서 변형된 것임에 분명했다. 아마도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 이 대륙 곳곳에 이런 식으로 화와 수의 심법이 변 형되어 퍼졌을 것이었다. 물론 그 중에서는 나름대로 변형과 개조를 한 것들도 있을 것이고, 어쩌면 더더욱 발전된 심법이 나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말이 1000년이지 그건 장난이 아니니까 말이다. 인간이 강해지고자 하는 욕망은 어떤 경우에도 숨길 수 없는 것이니 말이다. 나는 녀석이 심법을 알고 있다(비록 한심한 수준의 것이기는 하지만)는 것을 아는 순 간 몸을 날렸다. 지금 풍아의 힘으로는 검강을 형성한 녀석의 검을 막을 수는 없었다. 쨍! “앗!”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풍아의 검이 반쪽이 되었고, 풍아는 아슬아슬하게 뒤로 몸을 날려서 녀석의 검에서 벗어났다. 만약에 평범한 검이었으면 풍아도 함께 반토막이 났 을 것이다. “풍아 엎드려!” 나는 풍아의 등 뒤로 날아들며 외쳤고, 풍아가 숙인 등 위로 녀석에게 날아들었다. “받앗!!” 채챙~! 역쉬 힘에는 힘으로. 이번에는 녀석의 검이 반토막이 되었고, 내 검은 녀석의 목울대 앞에 멈추어 있었다. 그리고 녀석이 제압되는 순간, 다른 싸움도 대충 끝이 나고 있었다. 아마도 이 녀석이 대장이었던 모양인지 사기가 급격하게 떨어졌던 것이다. 나는 대장 녀석의 혈도를 몇 개 점하고는 다른 녀석들과 함께 관도 위에 늘어 놓았 다. “다친 사람들 없어?” 나는 우리 일행의 상태부터 확인을 했다. 상처가 제일 심한 사람은 자이건(팔에 길게 검상을 입었다.) 콜린드(허벅지에 검상 을) 아세트(외상은 없었지만 불규칙한 맥이 내상을 알려주고 있었다.)의 순서였고, 다 른 사람들은 좀 지저분해(광아는 깨끗하다.)진 것 이외에는 별 부상은 없었다. 상대편에는 바이란과 콜린드 등에 의해서(자이건이 상처를 입힐 실력이 될까?) 다친 몇몇의 사람들은 있었지만 죽은 사람은 없었다. “그런대로 잘 정리가 되었네. 이것 봐, 죽은 사람은 없잖아. 하하.” 나는 이번 싸움에서도 사망자가 없다는 것에 왠지 모르게 집착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언젠가는 죽음이라는 것은 경험하게 되리라는(살인일지도 모른다.) 막연한 불 안감 때문일 것이다. 시대가 시대이고 우리가 하는 일이 농사나 짓고 사는 일이 아닌 이상, 언젠가는 있을 수 있는 일이니 말이다. “점심 시간이 지났잖아. 우리 밥이나 먹고 가자. 저 녀석들 때문에 속도를 냈으니 까 스컬프트의 영역도 멀지 않을 거야. 밥이나 먹고 가야지. 아니면 아예 여기에서 쉬 었다가 내일 진입을 하던지.” “그래요. 일단은 좀 쉬었다가 가지요. 만약에 마롤 후작이 저 사람들 이외에 다른 사람들을 더 보냈는지는 모르지만 그건 물어보면 알겠죠?” 아세트가 피곤한 모양인지 기쁜 얼굴로 동의를 했다. 결국에 수아등은 밥을 준비하고, 화아와 지토, 광아가 마법사와 환수사들을 맡아 심 문을 하기로 했고, 나는 대장으로 보이는 검사 녀석을 맡았다. “이봐, 우리 피곤하지 않게 간단하게 이야기를 하지. 마롤 후작이 보냈지? 너희 말 고 다른 인물들이 또 있나? 우선 궁금 한 것은 그거야. 대답을 해 주겠나?” 가까이서 보니 그다지 나이가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30대 중반 정도의 나이로 보였 고, 눈은 맑았다. 허긴 검강을 쓸 정도의 수련을 한 인물이라면 어느 정도는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그런 것을 물어본다고 대답할 것 같은가? 제압당했으니 처분을 맞기는 방법 뿐이겠 지만, 그렇다고 배신을 종용하지는 말았으면 좋겠군. 적어도 상대에 대한 예는 지켜 야." 퍼벅. “허헉. 크윽.” “이봐 예의라니 이렇게 떼거지를 데리고 와서 나를 죽이려던 사람에게 예의를 지켜 주어야 한다는 거야? 니들이 우리에게 예의를 차렸냐? 그리고 죽고 죽이는 상황에서 무슨 예의냐 예의가. 곱게 말로 해서 안되는 거라면 실력 행사를 하는 수 밖에 없 지.” 나는 녀석의 몸에 분골착근의 수법을 걸었다. 앞서에서도 상당히 효과를 본 방법이었기 때문에 믿는 바도 있었다. “크흑, 이런다고 내가 굽힐 것 같은가? 고통스럽긴 하군. 하지만 고통이 의지를 꺾 을 수는 없을 것이다. 크흐흑.” 녀석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 핏발선 눈동자로도 흔들리지 않는 의지를 보였다. “그래? 그럼 그렇게 죽으라고.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다른 의지가 약한 사람들이 알 려 주겠지.” 나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흐흑. 이봐. 연극을 하려면 제대로 하라고. 싸움 와중에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것을 기뻐하던 녀석이 갑자기 포로를 죽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거든. 뭐 죽인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으으흐흑 크큭” 그 고통 속에서도 상당히 냉철한 녀석이다. 이렇게 되면 내가 1차전에서 패한 것인 가? 나는 돌아서서 녀석 앞에 놓인 의자에 다시 앉았다. “하하, 내 패배로군. 그래 그 말이 맞아 난 내 앞에서 누군가 죽어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하지만 고통을 주 는 것까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 난 사람의 정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그 래서 몸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지. 그러니 당신의 몸에서 지금 찢어지고 뜯 겨 나가고 있는 근육과 힘줄들은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는 말이야. 하지만 나는 당신까지도 당신의 몸에서 뜯기고 찢기는 것들에 관심이 없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 아. 어떤가 그럼 다른 것을 묻도록 하지. 마롤과는 상관이 없는 다시 말하면 이런 상 황과는 상관이 없는 내 개인적인 호기심에 대한 질문이라고 하면 대답을 하겠나?” 녀 석은 잠시 생각을 하는 듯(그 고통속에서 참 대단한 녀석이다.) 하더니 곧 고개를 끄 덕였다. “내가 판단해서 으으.. 내 주인에게 손해가 가지 않는 질문이라면 상관없겠 지. 크륵 상당히 아프거든. 크크” 나는 녀석의 승낙에 점했던 혈도를 풀어 주었다. “크흐. 이 방법은 좀 연구를 해 봐야 겠는걸? 직접 몸으로 당해 봤으니 확실하게 배 운 것 같군. 하지만 점혈도 쉽지 않고 해혈은 거의 불가능하니 좀 많이 연구를 해야 겠어, 크흐.” 혈도가 풀리자 녀석은 분골착근의 수법에 관심이 생긴다는 듯이 중얼 거 렸다. “그건 나중에 알아서 해봐. 하지만 쉽지는 않을거야. 상당히 어려운 방법이거든. 내 력도 상당해야 하고 말이야. 자네의 내력으로는 불가능한 방법이지. 그럼 내가 알고 싶은 것을 물어보지. 자네가 쓰는 그 심법은 어디에서 온 것이지?” “심법이라니?” 명칭이 다른 모양이다. “쉽게 이야기해서 자네 몸 속에 기운을 축적시키는 호흡법을 말하는 것이야. 그건 어디에서 배운 것인가?” “별 이상한 것을 묻는군. 그거야 기사단에서 배운 것이다. 대부분의 기사단들은 그 런 방법들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어떤 기사단에서 배웠는지는 알 필요없다. ” 뭐 마롤의 개인 기사단인 모양이다. “그래? 그럼 모든 기사단이 그런 방법들을 가지고 있다면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어 떤 것이지? 위력이 가장 뛰어난 것 말이다.” “고작 그런 것을 알고 싶어 하다니... 검을 쓰는 사람이면 코흘리개라도 아는 일 을... 가장 뛰어난 것이라고 단언하지는 못하지만 일단 신성왕국의 파이어스톰, 여인 왕국의 근위기사단, 암흑제국의 제국기사단. 누웬왕국의 건곤기사단 등의 기사단에서 쓰는 것이 뛰어나다고 하지만 그 이외에도 그에 필적할 몇 몇 기사단이 있고, 용병들 이나 유서 깊은 무가에서는 그런 방법들을 연구 발전시켰기 때문에 나름대로 대가라 고 할 만한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느 누가 자신이 최고라고 할 수 있겠는 가? ” “그럼, 검강을 쓰는 사람들이 많은가?” “숫자로 딱히 얼마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표면적으로 알려진 것을 말하자면 대부 분의 기사단에는 20명 정도는 있을 것이다. 한타에만 해도 제법 규모가 되는 기사단 이 20여개가 넘으니 그 곳에만 400여명이 있다는 말이 되겠지. 그 이외에도 작은 기 사 단들이 수없이 많고 용병들도 많으니 수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다.” 호오? 그 사이에 대단한 발전이라도 봐야겠다. 대충 생각해 보면 누웬을 제외한 다 른 왕국의 심법들은 내가 유소와 넥스에게 전수한 것들일 것이었다. 물론 그 사이에 많이 변형되고 발전 혹은 퇴보했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심법들이 알게 모르게 유출되고 전해져서 대륙에 무술의 한 갈래를 이루었 으니 1000년의 시간동안 어떤 발전을 이루었을지는 짐작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 만 한타가 다른 왕국에 비해서 기사단의 위력이 떨어진다고 보면, 다른 왕국에 더 많 은 실력자가 있으리란 것을 짐작해 볼 수는 있었다. 나는 대충 궁금한 것들을 더 물어 보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대장과는 달리 의지력이 약한 녀석들(마법사와 환수사들)이 털어놓은 정보를 듣기 위해 화아등을 불렀다. “그래 어떻게 됐어? 뭐 좀 알아낸 것 있어?” 내가 묻자 광아아 요약해서 내용을 알려주었다. 이번 공격도 역시 마롤 후작의 음모였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이번 에 후작이 아세트들을 공격한 것은 스컬프트라는 그 환수를 마롤이 노리고 있기 때문 이라는 것이었다. 마롤은 마수를 부리는 마수사였는데(환수나 마수나 다루는 것에서 별 차이가 나지 않 는다고 한다.) 이번에는 스컬프트라는 환수를 제압해서 귀속시키려고 시도하고 있다 는 것이다. 그리고 실상은 그 동안 서너번의 원정을 했지만 실패했고 이번 아세트가 스컬프트를 선택한 것도 마롤의 힘을 줄여보자는 의도가 숨어 있을 것이라는 것이 광 아의 분석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찜해 놓은 스컬프트를 아세트가 가로채려고 한다는 것은 알게 된 마롤은(이 부분이 상당히 의문이 가는데 어떻게 그런 상황을 알 수 있 었 던 것일까?) 급히 아세트 제거 혹은 저지 작전을 펼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마롤은 이미 스컬프트와 마주하고 있을 것이라고... 급하게 병력을 정비 해서 이 쪽에 사람을 보내서 시간을 끌게 하고(가능하면 제거 해도 좋다) 자신은 먼 저 스컬프트를 찾아 갔다는 것이다. “이런, 그럼 지금 서둘러 가면 방법이 있을까?” 내가 광아에게 묻자 광아는 고개를 저었다. “어려울 것 같아요. 마롤이 이미 워프로 떠났다고 하니 어려울 거예요. 마롤이 몇 번의 원정을 하면서 스컬프트의 영역 바로 곁에 이동마법진을 완성해 두었던 모양이 예 요. 우리가 마을을 출발할 때, 이미 순간이동으로 출발을 했다고 하니 우리가 서둘러 간다고 해도 어렵지 않을까 싶어요.” “안돼요. 이렇게 스컬프트를 빼앗길 수는 없다고요. 빨리 서둘러 가면 기회가 있을 수도 있잖아요. 안 그래요?” 아세트가 어느 틈에 우리 곁에서 듣고 있다가 다급한 소리를 질렀다. “아마도 어려울 것 같은데요? 거의 하루 정도의 차이가 나는 겁니다. 그걸 무슨 수 로 만회를 한다는 겁니까?” “하지만 마롤이 이번에도 실패했을 수도 있잖아요.” 아세트는 여전히 포기 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도 스컬프트의 영역으로 갈 거니까요. 하지만 마롤이 실패 했다면 서둘러 가나 천천히 가나 상관이 없지 않을까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요. 약 속대로 스컬프트를 잡지 못하면 다른 태환수를 잡아 줄테니 말입니다. 하하.” “하지만 빨리 가면 스컬프트가 지쳤을 때 제압하기도 더 쉬울 거고...” 끈질긴 아세트. “그렇게 보면 우리들도 지치기는 마찬가지죠. 그러니 천천히 가도록 합시다.” 나는 아세트를 반 강제적으로 진정시키고는(사실 우리 일행들이 많이 피곤한 것은 아 니었지만) 수아가 준비한 점심(저녁이다.)을 먹기 시작했다. 물론 잡아놓은 물고기 미끼 안 준다는 말에 따라 포로는 굶기는.... 어째 말이 안 맞 는 것 같다는... “그런데, 제압된 환수사의 환수를 빼앗는 방법은 없나? 아까 그 초목을 다루는 환수 는 쓸만한 녀석인 것 같던데 거의 땅개와 비슷한 수준인 것 같던데 말이야. ” 내가 식사를 마치고 느긋한 자세로 후식을 즐기는 일행들(특히 아세트)를 보며 묻자 다들 이목이 아세트에게 집중되었다. “그건, 환수사가 죽지 않는 이상은 어려워요. 그것도 신계에서 소환된 환수라면 불 가능하고 말이죠. 일단은 저 사람들이 가진 환수를 신계에서 온 것은 아닐테니 저들 이 죽는다면 그 환수들은 주인이 없으니 제압해서 귀속 시킬 수는 있겠지요.” “그럼 죽이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는 말인가 쩝. 아깝네.” “그렇지는 않아요. 만약에 저들이 환수와의 귀속을 깨게 되면 소환주가 죽는 것과 같은 효과가 생기지요. 다만 환수사는 절대로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지 만...” “아니 왜요? 그럼 죽기라도 하는 것은 아닐테고..” “죽지는 않지만 환수와의 동화력이 상당히 떨어지게 되거든요. 잘못하면 다시는 환 수를 부를 수 없게 될지도 모르고 말이죠.” 그렇다면 환수를 빼앗을 수도 있다는 말이네? 하하. 그럼 이번에는 환수를 빼앗아 볼 까? 나는 일행들과 함께 포로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이봐요. 환수사씨. 난 환수들이 필요한데 나에게 줄 생각이 없으신지요? 댁들이 가 지고 있는 환수를 불러서 귀속을 파기해 주셨으면 하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요?” 나는 생글거리는(생각하면 역겹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얼굴로 환수사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환수사들은 입만 뻐끔뻐끔 거렸고, 화아가 앞으로 나서자 식 은 땀을 흘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 아까 화아가 이들을 좀 심하게 다룬 모양이다. “그럼 환수들을 불러 주시겠어요? 많이 다쳤겠지만 소환 자체가 불가능하지는 않겠 지요?” 소환사들은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각자의 환수를 소환했는데 고양이와 지네는 그렇 다고 해도 처음보는 환수는 의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에~~ 이건 뭐가 이렇게 생겼을까?” 풍아의 첫 반응이 이런 것이었으니 짐작을... 그 새로운 환수는 버섯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완전히 송이버섯의 모양을 지니고 있 는... 물론 팔 다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눈이나 기타 동물적인 무엇이 있는 것도 아 니 었다. “이게 정말 아까 니가 불렀던 그 환수 맞는 거냐? 아니면 넌 내가 특훈을 시켜 주겠 다.” 화아가 어처구니 없어하는 표정으로 그 환수사를 향해서 으르렁거렸다. “맞습니다. 이 녀석이 그 녀석입니다. 지금은 심한 상처로 이런 모습이지만 평소의 모습은 다른 여러 가지 형태의 초목들입니다. 저 모습은 심각한 부상을 치유하기 위 한 모습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 이 녀석은 정해진 모습이 없다는 말이 야?” “그건 아닙니다. 원래 모습은 오래된 고목의 모습입니다만 평소에 여러 가지 모습으 로 나타나기 때문에 좀처럼 본모습을 보기 어려울 뿐입니다.” 아마도 이 환수는 나무가 오랜 시간을 보내고 신계로 올라간 녀석이었거나 그 후손 인 모양이었다. “그럼 이제 귀속을 해지해 주셨으면 합니다만...” 내 말에 따라서 환수사들은 환수의 귀속해지 주문을 외웠고 그렇게 풀려난 환수들은 곧 제압되어 우리 속에 갖히는 신세가 되었다. “흠. 그럼 이 환수들은 어떻게 하지?” 내가 중얼거리자 아세트가 단번에 달려들었다. “저한테 주시면 되잖아요. 스컬프트를 잡기 위한 일정에서 나온 환수니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그런 내용은 계약에 없었습니다. 아세트 아가씨. 이 환수들은 우리 용병대의 과외 수입이라고 봐야 하겠지요. 상당히 가격도 나갈 것 같 은 데... 이걸 넘겨드려야 할 이유가 없을 것 같군요.” “하지만 그 중에 한 마리는 제가 제압을 한...” “이것 보세요. 아세트양. 아세트양이 혼자서 이 환수를 제압했지만 주위에 우리들 이 없었다면 가당키나 한 일이었습니까? 그런 억지는 통하지 않아요.” 아세트와 말싸움을 벌이는 것은 광아였다. 언제 부터인지 광아는 사사건건 아세트의 일에 참견을 하고 나왔다. 조금이라도 아세 트의 말이 꼬투리가 잡힐 만한 상황이면 어김없이 광아가 나서는 것이다. 물론 덕분 에 많이 편해지기는 했지만... “그래서 어쩌자는 거지요? 그럼 그 환수를 저의 헤이스런 공작가에서 매입하는 것 은 어떤가요? 그건 가능하겠지요? 매입대금은 어느정도 상황을 고려해서 50만덴으로 했으면 하는데 어떨까요?” 결국 한 걸음 물러나는 아세트였다. “80만덴으로 하지요. 여기 이 버섯은 땅개와도 비슷한 수준이니 전의 대금 60만 정 도로 보고 나머지 둘은 자네는 30만정도 고양이는 20만 정도로 계산하면 110만이 나 오 지만 함께 싸우면서 제압했던 것을 감안해서 80만으로 하면 될 것 같군요.” 광아는 계산이 확실히 빠른 것 같다. “좋아요. 60만 드리지요. 저도 양보를 한 것이니 그 정도로 하지요. 어떤가요?” 흐흠 광아가 그렇게 만만하지 않을텐데...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흐헉, 이건 무슨 일이지? 광아가 이렇게 쉽게... 나 같아도 좀 더 끌면서 70만 정도 는 받을 수 있을 텐데.. 못해도 5만 정도는 너끈히 더 받을 수 있는 것인데, 이렇게 쉽게 양보를? 나는 광아의 얼굴을 살폈다. 하지만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는 화아.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사사건건 꼬투리를 잡지 않나. 이런 때는 또 쉽게 흥정을 하지를 않나... 쩝.. 아무튼 그렇게 해서 환수 세 마리는 아세트의 몫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많은 수의 환수를 귀속시키는 것은 무리가 가지 않는 모양이지? 숫자에는 상관이 없나?” “귀속된 환수의 수에는 상관이 없어요. 얼마를 불러내는가 하는 데에 문제가 있지 요. 물론 한 사람이 많은 수의 환수를 독차지 하는 것은 별로 능률적이지 못하지만 말 이죠. 저도 이제는 더 이상 낮은 등급의 환수를 귀속시키는 것은 하지 않을 생각이에 요.” “지금 어느 정도 환수를 가지고 있어요?” “그런 건 비밀이에요. 하지만 특별히 가르쳐 드리지요. 하급은 다섯 마리정도 있고 중급은 지금까지 세 마리 상급은 두 마리 그 이상은 없어요.” “예? 그럼 우리를 만나기 전에는 중급의 화신 하나 뿐이었다는 말입니까? 허~참. 공 작가의 공녀 맞는 겁니까?”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예상보다 너무 열악한 수준이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지요. 그리고 이제는 다른 환수를 잡아도 매입을 할 수도 없어요. 돈이 떨어졌거든요. 호호.” 어쩐지 그렇게 말하는 아세트의 얼굴에 처연함이 베어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광아는 아세트의 이런 사정을 짐작했는지도 모르겠다. 흠. 아침 해가 떠오는 시간에 우리들은 이미 식사를 마치고 출발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 다. 포로들은 수아가 대충 치료를 했고, 대장은 좀 많이 망가졌지만 내가 내력을 이용해 서 대충 치료를 했다. 조금 오래 요양을 해야겠지만 큰 문제는 없을 터였다. 그리고 그들역시 몸에 약간의 제약을 두어서(앞서의 10인조 습격단과 마찬가지의 제 제) 풀어주기로 했다. 물론 마법사는 당분간 마력을 쓰지 못하도록 봉인을 해 두었다 . 그들을 뒤로 하고(솔직히 살려주면 고맙다고 절이라도 해야지 왜 눈에 독기를 품고 있는지... 아무리 그 먼 거리를 걸어서 돌아가야 하고 배가 고프다는 문제가 있다고 해도 말이다.) 우리 일행은 스컬프트의 영역으로 속력을 높였다. 아세트가 여전히 서둘러 재촉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우리는 우리가 있는 곳이 스컬프트의 영역임을 알 수 있는 흔적들 을 발견했다. 조각상들, 얼음으로 얼어붙어 있는 조각상들이었다. “좀 쓸데없는 녀석이네. 여기 이 조각상들은 아주 지속적으로 마나가 공급되면서 일 정 온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로군. 그러니까 어려서 그 상태를 유지하는데 상당히 많 은 힘을 낭비하고 있다는 말이지. 만약에 이런 모양으로 영역 곳곳에 깔고 있다면 실 제로 쓸 수 있는 힘은 별로 없을지도 모르겠는걸?” 나는 조각상들을 보고 나름대로 상태를 파악했다. 조각상들이 순간적으로 얼어서 그 속에 있는 사람이나 말들이 살아있는 상태의 냉동 이라는 말은 아니다. 실제로 얼음 조각들은 얼음이 녹지 않을 정도의 온도만을 유지 하 고 있는 것이었다. 급속냉동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겉모습을 제외하면 얼음속의 것들 은 내부기관은 모두 변질된 상태일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태로 녹지 않게 유지하는 것도 힘은 필요한 법이었다. 작은 힘이라도 말이다. “그렇게 보면 아직 스컬프트는 건재한 모양이군. 이렇게 조각들이 무사한 것을 보 면 말이야.” 지토가 옆에서 통찰력있는 분석을 내 놓아서 아세트의 얼굴을 밝게 만들었고, 우리 일행의 행군 속도를 빠르게 만들었다. 물론 흥분한 아세트가 서둘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안으로 계속되는 조각들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스컬프트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닌 모양이네. 오빠. 저 조각들은 녹아내리 고 있어. 아마 밖에 있는 것들은 신경을 써서 상태를 유지시키고 있는 모양이지만 안 쪽까지 그럴 힘은 없는 모양이네? 그럼 그 녀석도 다쳤다는 말이겠지?” 풍아가 녹아내리기 시작하는 조각들을 보면서 말했다. 실제로 안으로 들어가면서 스컬프트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징후들이 나타 나고 있었다. 안쪽으로 갈 수록 급속하게 녹아내리고 썩은 조각들이 많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조각의 수가 많아지지는 않았지만 비율적으로 온전한 조각들이 줄어들 었 다. “잠깐. 저 앞에 상당한 마나가 느껴진다. 속도를 줄이고 천천히 접근하자.” 나는 얕은 언덕 너머에서 전해지는 기운을 일행들에게 알렸다. “도대체 어떻게 생긴 녀석일까? 환수라는 녀석들이 가지가지 모양이니 상당히 궁금 하단 말이야.” 화아가 옆에서 말을 몰며 중얼거렸다. “그건 나도 그래요.” 광아도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앞쪽의 언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들이 그 언덕을 올라섰을 때, “가지가지 하는군. 이건 또 뭐야? 왜 이 모양이야?” 역시 가장 먼저 눈앞의 모습에 반응을 보인 것은 풍아였다 우리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확실히 풍아가 한 소리를 할 만 하다는 생각이 드는 모습이었다. 널찍하게 펼쳐진(학교 운동장 정도 넓이) 공터에는 갖가지 모습의 조각상들이 전시되 어 있었던 모양이었지만 지금은 전부 녹아 내려서 흉측한 모습을 하고 있었고 그 공 터 중앙에는 하얀 털이 뭉쳐진 모습을 한 공 같은 것이 보였다. 풍아의 반응은 녹아내리는 조각들의 흉한 몰골에서 비롯된 반응이었을 것이다. 아주 오래도록 조각으로 서 있었던 것들은 겉이 녹으면서 흐물흐물 무너지면서 뼈들 이 삐죽삐죽 솟아난 모습으로 쓰러지고 있었고 시커먼 액체를 배 밖으로 쏟아내고 있 는 인간의 모습도 있었던 것이다. 별로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인 것은 사실이었다. “저기 저렇게 붉은 피를 쏟고 있는 사람들은 어제 왔던 마롤 후작 일행인 모양이 지?” 화아가 한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쪽에는 형체를 알아보기 어렵게 찌그러진 살덩이 들이 폭탄을 맞은 듯이 파여진 흙구덩이 속에 흩어져있었다. “아마도 그런 모양이네. 조각이 되었던 것 같지는 않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어떤 공격이었기에 저런 모양으로 다들 쓰러진 것이지? 그것도 한 곳에 모 여서 말이야.” “보아하니 검사들과 마법사 환수사들인 모양인데 아마도 마법과 환수로 스컬프트를 공격하고 저기에서 검사들의 호위를 받았던 모양인데 한꺼번에 기습을 당한 모양이 군. 아니면 검사들이 지친 마법사들을 끝까지 지키려고 하다가 당했거나 말이야. 아 무 튼 자세히 보면 한 번에 당한 것은 아니야. 적어도 당하기 전에 강도가 좀 약하기는 하지만 상당한 공격을 막아냈던 것을 알 수 있어. 주위에 흔적들이 남아 있으니까 말 이야.” 나는 지토의 의문에 나름대로의 생각을 이야기 해 주었다. 실제로 그 구덩이의 근처에는 상당한 공격을 짐작하게 하는 흔적들이 있었던 것이 다. 직접적인 대단위 공격은 아니었지만 산탄과도 같은 형태의 공격이라고나 할까? 여 러 발의 마법화살들이 만들어 낸 것과 같은 흔적들도 보였고, 좀 더 큰 규모의 공격 (매직 볼의 형태 파이어든 콜드든 아무튼 그런)도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직접적인 것은 아무래도 마지막 구덩이를 만들어 놓은 공격이었던 것 같았다. “저 정도면 7써클 마법은 넘어 보이는 걸? 대단한데?” 나는 구덩이의 규모로 순수 마력일 때의 공격력을 짐작해서 말했다. “7써클이라. 상당하군. 그런데 정작 그 녀석은 어디에 있는 거지?” 지토가 다시 물었다. “아무래도 저기 중앙에 있는 하얀색 공 같은 것이 그 녀석인 듯한데? 상당한 마력 과 힘이 느껴지고 있으니 말이야.” 나는 중앙에 있는 공 같은 녀석을 가리켰다. “응? 오빠? 저거 별로 크지도 않은데? 저렇게 작은 것이 태급환수란 말이야?” 풍아가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크기가 힘을 좌우하는 것은 아니잖아. 아무튼 상당한 녀석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럼 어떻게 하지? 제압을 해야 할 거 아니야? 뭐 어느 정도 힘이 빠진 상태라고 보면 마롤인가 하는 녀석에게 신세를 지게 되는 셈인가?” 화아가 도를 어깨에 올리며 중얼거렸다. “일단은 내가 상대를 해 볼 테니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라.” 나는 앞으로 나서려는 동생들고 지토를 말리고는 천천히 스컬프트에게 다가갔다. 공과 같은(실상은 공이 아니라 웅크리고 있는 모습일 뿐이다. 웅크리고 있어서 보이 는 부분이 하얀색의 머리카락 뿐인 상태라서 공처럼 보이는 것이지, 실제로는 아마도 인간형에 가깝지 않을까 싶었다.) 모습을 하고 있던 녀석은 내가 다가가자 천천히 고 개를 들었다. 얼굴 전체도 하얀색 털어 덮인 모습을 보니 거의 원숭이에 가깝게 보였다. 그리고 녀 석이 몸을 일으켰을 때, 녀석은 분명히 원숭이였다. 크기는 별로 크지 않아서 채 2미 터를 넘지 않는 모습이었고, 팔이 길어서 몸을 세우고도 거의 땅에 닿을 듯이 보이는 모습이었다. “이런 원숭이로군. 예전에 설인이니 뭐니 하던 그런 모습이로군. 어쩌면 예전 시대 에 설인으로 알려졌던 존재인지도 모르겠구나.” 나는 천천히 검을 변형시켜 들고 다가가며 중얼거렸다. “케케케 원숭이라. 그런 소리를 듣는 것도 오랜만의 일이군. 케케케. 나를 그렇게 부른 녀석들은 모두 죽었지. 너도 예외는 아닐 거다. 케케케” “호? 말을 한다? 지성이 있다는 말이군. 그러고 보니 환수들이 소환자와 이야기를 한단 말은 들었지만 환수와 이야기를 해 보기는 또 처음이군.” 나는 걸음을 멈추고 녀석을 살피며 말했다. 여전히 내가 보기에는 설인의 모습이었다. 조금은 두루뭉술한 면이 있어서 민첩해 보 이지는 않았지만 생긴 것과 능력이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란 것을 모를 정도는 아니 었 다. “케케 인간이 제법이군. 힘이 느껴진다. 케케 어쩌면 내가 질 수도 있겠군. 케케.” 내가 자리에 멈추어서 녀석의 모습을 살피자 똑같이 나를 살피던 녀석이 나의 힘을 느꼈던 모양인지 켈켈 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힘의 차이를 알았으면 당연히 고개를 숙이는 것이 자연의 법이지. 어떻게 생각하 나 그냥 항복할 생각은 없나?” 나는 의외로 이성을 지니고, 또 상황을 판단 할 줄 아는 녀석에게 항복을 권했다. 하지만 녀석의 지성은 생각보다 높은 모양이었다. “케케 동물의 본능이야 항복하라고 하지만, 그렇게 되면 자유가 없어지지. 케케케 이성은 싸우라고 하는군. 캬--악!!” 녀석은 말과 함께 경고 없이 공격을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눈앞으로 날아든 것은 얼음으로 만들어진 창들이었다. 순간적으로 공기를 응축시켜 만든 듯이 갑작스럽게 생겨난 것이었다. 하지만 쉽게 당해서야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다. 나는 날아오는 얼음들을 검을 이용해서 쳐 내는 것과 동시에 견고한 실드를 쳤다. 급한 것들은 칼로 막았고 나머지는 곧이어 형성된 실드에 막혀버렸다. “케케 빠르구나 인간. 케케 받아랏!” 스컬프트의 공격은 연이어 이어졌다. 얼음덩이를 이용한 공격은 상당히 매섭고 날카로운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렵지 않 게 스컬프트의 약점을 알 수 있었다. 녀석은 많이 지쳐 있었던 것이다. 공격은 매섭고 적절했지만 큰 힘이 들어 있지는 않 았다. 다시 이야기하면 힘은 없으면서 그저 노련함으로 나를 상대하려고 드는 그런 느 낌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런 느낌을 갖자마자 실드를 걷고 곧장 스컬프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녀석은 급하게 얼음을 이용한 방어벽을 만들었지만 힘의 차이를 어쩔수는 없는 것이 었다. 내 칼은 녀석의 방어벽을 뚫고 어깨부위에 박혀들었다. “시시하군. 겨우 이런 실력이라는 것이 태환수란 말이야? 별것도 아닌데?” 나는 빈 정거리는 투로 녀석을 약올렸다. “케케 내가 본래 힘을 지니고 있었다면 적어도 반나절이상은 싸울 수 있었을 것이 다. 그래도 이길 수는 없었겠지만....케케 반나절은 지지 않고 싸울 수 있었을 것이 고 내가 도망을 가려고 했다면 막지는 못했을 걸? 케케” “그건 붙어봐야 아는 거고 이제 어쩔 거냐? 항복할테냐?” “케케 이렇게 붙잡힌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항복하겠다. 케케” 나는 의외로 쉽게 스컬프트를 제압했다. 아니 어쩌면 너무 쉽게 항복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예전에 빅도 나를 처음 만났 을 때, 약육강식의 법칙을 이야기 했었다. 이 녀석도 비록 이성은 거부하지만 본능적으로 약육강식을 받아들이는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쉽게 항복을 할 리가 없다. “케케 힘만 있었으면 이렇게 끌려가지는 않을 텐데..케케” 그래도 속상하긴 하는 모양이다. “야, 그 웃음소리 좀 바꿀 수 없냐? 케케가 뭐냐 케케가...” 나는 아까부터 거슬리는 소리에 핀잔을 주었다. “케케 이건 웃음이 아니다. 케케 이건 말을 할 때 나오는 숨소리와 같은 거다. 케 케.” “윽 숨소리? 바꿀 수 없다는 말이냐?” “케케 숨소리를 바꾸는 생물은 없다. 케케” 나는 이런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지껄이며 스컬프트를 일행 쪽으로 데리고 왔다. “케케 이런 여기 있는 이 녀석들도 상당히 강한 녀석들이군. 제 실력을 보이면 나 와 비슷하겠군. 케케.” 스컬프트는 일행들 앞으로 끌려오자 지토와 화아등을 보면서 그렇게 지껄였다. 하지 만 녀석이 아무리 상대를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녀석의 힘이 최상급정령 의 힘을 능가하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적어도 최상급 정령의 힘이라면 초환 수 와 겨루어서 지지 않을 정도의 힘일 것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봐 헛소리 그만해라. 넌 내 동생들이 실력을 전부 발휘하면 이길 수가 없어. 내 동생들은 초환수와 맞먹는 힘을 지녔단 말이야.” 나는 다른 일행이 듣지 못하도록 스컬프트에게 작게 으르렁거렸다. “케케, 그거야 누가 모르나? 그런데 누가 나를 태환수라는 거야? 내 힘은 초환수에 필적하는 힘이라구 케케 태환수는 100년도 더 전의 이야기지 케케” “뭐야? 그럼 네가 초환수의 힘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야?” 나는 갑작스런 녀석의 말에 놀라 소리를 질렀다. 덕분에 다른 일행들도 내 말에 놀라 입을 벌리는 상황이 벌어졌지만.. “오빠? 무슨 일이예요? 이 환수가 태급이 아닌 초환수란 말이에요? 그렇게 힘이 쎄 다는 건가요?” 수아가 놀랍다는 듯이 물어왔다. 당연히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나에게로 집중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자기가 그렇다는데 알 수 없는 일이지. 자기 말로는 자기가 초환수급에 필적한다는 구먼.” 내 말에 다들 시선이 스컬프트에게 모아졌다. “케케 뭐하는 거냐? 설마하니 내가 거짓말을 한다는 거냐? 케케 거짓말 같은 것을 하는 환수는 없다 케케 난 분명 초환수에 필적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내가 완전하게 회복만 한다면 초환수라고 해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케케. 믿어라 케케.” 정말인 모양이다. “아세트. 상황이 달라졌군요. 태급이 아니라 초급 환수라니 이건 계약과 다르지 않 은가요?” 광아가 다시 아세트에게 신랄한 한마디를 쏘아 붙이고 있었다. “아니에요. 분명히 태급환수로 분류가 되어 있었단 말이에요. 정말이에요.” 아세트는 당혹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자자.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광아. 이미 제압을 한 상태이니 이젠 아세트가 이 환수를 귀속시킬 수 있으면 상관이 없는 일이겠지. 그렇지 않은가요? 아세트양?” 나는 아세트를 보며 말했다. 어차피 제압을 한 녀석이니 아세트가 귀속을 시킬 수 있다면 그냥 주면 그만인 것이 었다. 굳이 초환수냐 태환수냐를 구별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형, 하지만 태급과 초환수는 그 가치가 다른데..” 광아가 투덜거렸지만 나는 한 마디로 일축했다. “그럼 다시 다른 환수를 찾아서 이 아가씨와 함께 가자는 말이냐?” 이 말에 광아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고개를 숙여 버렸던 것이다. “자, 그럼 아세트 아가씨? 귀속을 시키시고 우리들에게 환수의 소환법을 가르쳐 주 시지요.” 나는 아세트를 제촉했다. “네. 알았어요.” 아세트는 곧 귀속의 인을 맺고 주문을 외웠다. “케케 잠깐만 기다려라. 지금 나를 귀속하는 것은 저 아가씨가 가능하겠지만 절대 로 나를 불러내지는 못한다. 케케. 아마도 나를 불러낸다면 동화 비율이 5:1 정도가 될걸? 내가 당하는 충격의 다섯 배의 충격을 받는다는 말이지. 케케 그래서야 무슨 소용 이 있지? 더구나 나는 소환주가 불러 줄 때 까지 아무것도 없는 무의 공간에서 지내 야 한다. 그건 참을 수 없는 일이지. 케케 차라리 죽여라. 죽으면 죽었지 저런 여자의 소 환수가 될 수는 없다.케케 적어도 소환은 할 수 있는 소환자를 맺어 줘야 할 것이 아 니냐 케케” 스컬프트는 진저리를 치면서 반항을 하기 시작했다. “이런, 이봐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구. 아세트가 나중에 능력이 더 생기기를 바라 는 것이 좋을거야. 하지만 지금으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니 그만 포기 하라구.” 나는 버둥거리는 녀석을 제압하고 아세트에게 내밀었다. 아세트는 수인을 맺은 상태로 스컬프트를 보았다. “미안하다. 하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꼭 자유롭게 불러 낼 수 있도록 할께. 그리고 평소에도 자주 소환을 해줄께. 그냥 소환만 하는 건 크게 무리가 가지 않을 테니까 너 무 섭섭해 하지는 말아. 열심히 노력 할게.” 말을 마친 아세트는 귀속의 인을 스컬프트의 이마에 찍어 넣었다. 그리고는 곧 비명과 함게 스컬프트를 역소환 시켜 버렸다. 아무래도 스컬프트가 입은 상처의 고통이 엄습한 모양이었다. “이제는 계약을 지켜 주시겠습니까? 신계로부터 환수를 소환하는 방법을 알려 주시 지요. 아 물론 역소환하는 방법도 아울러서 말입니다.” 나는 고통에서 서서히 벗어나 얼굴빛이 돌아온 것을 확인하고 아세트에게 말했다. “좋아요. 계약이니까요. 잠깐만 마차로 들어가시죠. 물론 다른 분들은 안되요. 나중 에 대장님께 듣는 것은 자유지만요.” 그리고 나와 아세트는 마차 안으로 들어왔고 마차 안에서 아세트는 소환 방법에 대해 서 거의 한시간 정도를 설명했다. 소환진을 그리는 것은 이미 한 번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았지만 그 소환진 에 적절한 마력 배열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알게 된 것인데 실제로 공작가에서 이 마법진을 그릴 수 있는 사람 이 없다는 것이다. 이론은 확실하지만 소환진에 마력을 적절하게 배열해서 진을 완성 할 수 있는 사람이 가문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헤이스런 가문도 거의 폐가나 마찬가지로 보였다. “그리고 이건 역소환인데 소환진위에서 간단한 조작으로 가능해요. 물론 너무 강력 한 존재는 어렵지만요. 이제 다 된건가요?” 한 시간이 지난 후 아세트는 피곤한 표정으로 물었고 “밖으로 나가서 소환을 한 번 해 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일이지요. 일단 한 번 해 보 도록 할까요?” 내 말에 피곤한 얼굴이면서도 반색을 하고 찬성한 것은 아마도 아세트의 호기심이 강 한 탓이었을 것이다. -환수를 불러보자!! 이거 누가 할래? - 소환진을 그리는 일은 복잡하고 신경이 쓰이는 것이기는 했지만 나 정도의 마법적인 지식이 있다면 그렇게 어려운 작업은 아니었다. 그리고 소환진을 그리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진에 적당한 마력을 배분해서 진을 활성화 시키는 것이었는데 실제로 이 작업은 숨겨진 몇 가지의 수식을 제외하더라도 7써클 마법으로도 성공 가능성이 반 반 밖에는 안 될 정도의 난이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공작가에서 이 진을 사용할 수 있는 인물이 없다는 것도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결국 완성된 소환진에 마력을 배분하고 나는 신계의 환수 소환에 들어갔다. 소환진은 금색 빛을 뿜으며 빛나더니 환수 하나를 소환해 내었다. “음? 이건 뭐라고 하는 녀석이지? 새 같은데?” 화아가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환수는 공작같은 녀석이었다. “누가 이 녀석을 가질래? 능력이야 나중에 보기로 하고 일단 가지고 싶은 사람?” 나는 소환된 환수를 보면서 지토와 동생들에게 말했다. 공작처럼 긴 꼬리 깃털을 지니고 크기도 공작과 비슷한 크기였다. 성격이 순한 편인지 소환된 후에도 별다른 움직임이 없이 긴 목을 이리저리 돌리면 서 주위를 살피기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우화~! 예쁘다 오빠. 이거 제가 가질게요. 하늘색 깃털도 그렇고 깃털 끝에 달린 눈 모양의 무늬도 예쁘고 좋아요. 이거 제가 가질게요. 오빠. 네?” 의외로 첫 환수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은 수아였다. “응? 수아가 가질래? 그럼 귀속 주문은 알고 있지? 어디 한 번 해 봐라. 성공하면 이 녀석은 수아 네거다. 하하.” 나는 수아에게 기회를 주었고 수아는 곧 수인을 맺고 환수를 귀속시키는 과정에 들어 갔다. 하지만 그런데도 의외로 환수는 움직이지 않고 수아의 손에 맺힌 귀속의 인을 받았 다. “호호, 이제 이 녀석은 내꺼다. 호호. 응? 음... 오빠 나 이 새하고 이야기좀 하고 올께요.” 귀속을 마친 수아는 갑작스러운 말을 하고는 어정쩡하게 걷는 환수와 함께 마차 쪽으 로 걸어갔다. “뭐야? 환수가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야? 그런 것이 가능한 모양이지?” 나는 아세트를 보면서 물었다. “글쎄요. 환수가 의사 표현을 하기는 하지만 주로 묻는 것이 아니면 대답을 않는 편 인데요? 제가 처음 환수의 자발적인 의사 표현을 들은 것은 몰크리킷이 처음이었으니 까 환수의 능력이 커지면 자의식도 강해지는 모양이죠.” “뭐야? 그럼 저 이상하게 생긴 새가 그 땅강아지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더 뛰어난 녀 석이라는 거야?” 화아가 세삼스럼다는 듯이 멀리 환수와 함께 있는 수아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거야 모를 일이지. 수아는 워낙 섬세하니까 환수에게 이것 저것 물어보려는 것일 지도 모르고 말이야. 그건 나중에 물어보기로 하고. 다음 환수를 소환해 볼까?” 나는 곧 다시 환수의 소환에 들어갔다. 소환진은 그 형태가 회손되지 않는다면 몇 번이고 소환이 가능했던 것이다. 문제는 그럴 정도의 마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만 말이다. “이번에는 어떤 녀석이 나올까? 기대가 되는 걸?” 하지만 그 후로 세 번에 걸쳐서 소환을 했지만 별 볼일 없는 환수들(우리는 잘 모르 지만 환수사인 아세트는 여러 환수에 대해서 알고 있었는데 세 마리들 모두 하급 환 수 에 해당하는 것들이라고 했다. 사실 풍기는 기운이 약했던 것도 사실이고 지토나 화 아 등이 관심을 보이지 않기도 했다.)이었기 때문에 신계로 돌려 보내야 했다. 그리 고 시간도 그렇고 마력도(너무 여러번 소환을 하는 것도 좀...) 그렇고 해서 환수의 소환을 다음으로 미루었다. 대신에 우리들의 관심은 수아가 선택한 그 환수에게 집중되었다. “수아야 그 녀석 어떤 녀석이야? 마음에 들어?” 소환진을 지우고 마차 주위로 돌아온 우리는 수아가 쓰다듬고 있는 공작을 보며 물었 다. “오빠. 호호 파울은 공작이예요. 아주 오래전에 신계에 들었다는데 지금까지는 선인 들의 정원에서 살고 있었다네요. 그래서 선계의 여러 신선들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 데 요. 그리고 가끔 신선들이 가르쳐 준 잡기들도 할 줄 안데요. 하지만 자세히는 잘 모 르겠어요. 그냥 선계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들었어요. 호호.” “파울? 그게 그 새의 이름이야?” 화아가 물었다. “응. 자기 이름이 파울이래. 예전에는 다른 이름이 있었는데 언젠가 파란눈의 신선 이 붙여준 이름이래. 호호 파란눈의 신선은 누구였을가 호호호. 그러고 보면 신계도 참 다양한 곳인 모양이야.” 수아는 파울이라는 녀석에게 신계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즐거운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소환하고 있으면 힘들지 않아?” 나는 은근히 아세트를 피해 작게 물어보았다. “히히 오빠. 괜찮아요. 이상하게 소환해도 아무 느낌이 없어요. 전혀 힘이 들지 않 아요.” 수아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고는 큰 눈으로 윙크를 한다. 허~~ 이런. 흠흠. “그렇다고 그런 모양으로 계속 데리고 다니기에는 좀 부담되는 크기라는 생각이 들 지 않니? 좀 작게 변할 수 없나 물어봐라.” 광아가 하는 말이다. 정말 크기가 공작새의 크기라고 하지만 좀 크기는 했다. “응. 오빠. 파울 좀 작게 변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우리와 함께 있을려면 말 이야.” 수아의 그 말이 끝나자 파울이라는 녀석은 순간적으로 형태를 바꾸었다. “응? 이건 뭐야? 깃털 망토네? 이런 걸로 변한거야? 거참.” 화아가 파울이 변한 모양을 보고 한 말이다. 정말 파울이라는 공작 환수가 변한 모습은 공작의 화려한 깃털로 만든 망토의 모양이 었던 것이다. “와~~ 예쁘다 이럴줄 알았으면 내가 가질걸. 호호 어디 한 번 둘러봐라. 수아야. 예 쁘겠다.” 풍아는 깃털 망토가 마음에 드는지 부러운 눈으로 수아에게 둘러 보라고 성화였다. “으응. 이렇게?” 수아가 망토를 두르자 화려한 듯 보이는 깃털들이 수아의 종아리까지 늘어져 흔들리 며 요란한 빛을 뿌렸다. 상당히 화려하게 보였지만 그렇다고 거부감이 생기는 인공적인 느낌은 전혀 없었다. “야! 정말 잘 어울리네. 예쁘군. 정말 예뻐.” 과묵한 지토가 감탄사를 토했다. 정말, 아름답다고 표현하는 것으로는 부족한 신비로움을 보이고 있었다. “하하, 이거 환수가 아니라 멋진 옷을 선물한 것 같구나. 하하. 정말 예쁘다 우리 막내. 하하 정말 예뻐.” 나도 수아의 모습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공작의 깃털이 뿌리는 푸른색이 주류를 이루는 빛은, 수아의 머리카락과도 너무 잘 어울리고 있었고 자연적으로 배열된 무늬들은 정말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었던 것 이다. 물론 원판이 뛰어난 탓이겠지만 (동생 자랑을 하는 것도 팔불출일까? ㅡ.ㅡ;;) 우리들은 저마다 수아와 파울의 조화에 탄성을 지었고, 아세트나 풍아는 못내 부러워 하는 빛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수준의 환수일까? 궁금하네. 그냥 보기에는 별 능력이 없어 보이 면서도 이런 변형 능력도 있고... 자의식도 강한 것 같고... 그런 면에서는 대급 환 수 를 넘어서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모르겠네요. 호호.” 아세트는 파울이 어느 정도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궁금해 했지만 당장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도 환수를 척 보고 어느 정도의 능력이 있는지를 파악해 내는 것은 어려움이 있었 기 때문에 파울의 급수를 알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인간들이 정해놓은 급수에 따라서 신계의 환수가 ‘나 몇 급에 해당하는 환 수임다.’라고 할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그럼 이제 아세트 아가씨와의 거래는 끝이 났군요. 하하. 그럼 이제 여기서 헤어지 는 건가요?” 나는 아세트를 돌아 보며 물었다. “그렇겠지요. 저희들도 이제는 일이 끝났으니 돌아가야 겠지요.” 아세트의 대답이었지만 그 속에 서운함이 배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겨우 몇 일이었는데 헤어지는 것이 섭섭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하하. 그 사이에 정이라도 든 모양인걸요?” 나는 굳이 서운함을 숨기려는 듯이 밝게 말했지만 수아나 풍아의 얼굴에서 서운한 표 정이 지워지지는 않았다. “호호, 너무 신세를 많이 진 것 같아요. 호호. 생각지도 못했어요. 설마하니 초환수 급의 환수를 귀속시키게 될거라고는.... 지금은 소환하는 것이 어렵지만 오래지 않아 서 자유자제로 소환을 할 수 있을 거예요. 호호. 여러분 덕분에 저희 헤이스런가의 이 름을 회복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어요. 언제튼 한타리아에 오시면 저 희 헤이스런 공작가를 꼭 들러 주세요. 귀빈으로 모실께요.” 아세트는 그렇게 인사를 했다. 그러고 보면 공작가의 공녀치고는 참 인간적이고 서민적인(?) 면이 있는 공녀라는 생 각이 든다. “제가 마티운시까지 이동을 시켜 드리지요. 그 정도는 어렵지 않으니까요.” 나는 공녀 일행의 배웅을 자청했다. “아세트양 다음에 꼭 찾아 갈께요. 호호 건강해요.” “다음에 뵐께요. 아세트 아가씨. 잘가세요.” 풍아와 수아가 인사를 했고, 화아등은 아세트 일행을 일별하고 고개를 까딱하는 것으 로 인사를 대신했다. 바이란과 콜린드 역시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아세트 곁에 붙어 섰 다. “형님, 잠깐만요.” 막 출발을 하려는데 광아가 나를 불렀다. “??” 광아는 천천히 아세트 일행 쪽으로 가더니 작은 빛의 정령을 불러 내어서는 아세트에 게 주었다. “아무 힘도 없는 녀석이지만 당신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 줄겁니다. 그럼 안녕히 가 십시오.” 광아가 건네준 빛의 정령은 내가 처음 광아를 소환했을 때와 같이 작은 빛의 정령이 었다. “호호, 고마워요. 이런 선물을 주시다니. 그 동안 저를 괴롭힌 사과의 뜻인가요? 그 사과 받아 들이지요. 그리고 이건 답례예요.” 아세트는 말을 마치고는 광아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호호, 그럼 안녕히. 루탄 대장님 계속 이렇게 있으면 너무 부끄럽잖아요. 빨리 보 내 주세요. 호호.” 나는 아세트의 말에 일단 준비된 마법을 실행시켰다. “안녕히....” 빛무리 속에서 아세트의 목소리가 여운을 남기고 그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리고 자이건을 마차로 보내버린 우리는 광아를 둘러싸고 모여들었다. “이런 이런, 광아가 아세트라는 그 아가씨에게 반한 모양이네? 그렇지?” 아세트가 사라지자 화아가 광아를 보며 하는 말이다. “호호, 그러고 보니 정말이네. 광아가 아세트에게 트집을 잡고 못살게 괴롭힌 것도 관심의 표현이었다는 말이네? 호호. 어쩌나? 한타리아에 언제 가게 될지도 모르는 데.... 호호호.” “정말이야? 광아 오빠가 아세트양을 좋아하는 거야? 그런 건가? 그런 거구나 호 호.” 풍아와 수아도 약간은 다르지만 놀랍다는 반응이다. 뭐 솔직히 놀라기는 나도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이런 그렇다면 진작 말을 하지. 그럼 아세트 일행과 좀 더 오래 여행을 할 수도 있 었는데.. 하다못해 마티운까지 우리랑 같이 이동을 할 수도 있었고...” “괜찮아요. 그리고 오해하지 마세요. 루탄 형님. 그리고 제가 아세트양을 좋아하는 것은 사랑이라거나 그런 것과는 좀 달라요. 길거리에서 귀여운 여자 아이를 보면 쓰 다 듬어 주고 싶고, 울먹이는 모습을 보면 달래주고 싶은 그런 마음이라고 할까요? 아세 트라는 그 여자는 너무 힘들어 보였거든요. 잔뜩 슬퍼 보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신경 을 써 주고 싶었어요. 그것 뿐이에요.” 광아가 내 말에 길게 답을 한다. “그래, 좀 슬퍼 보이고 힘들어 보이기는 했지. 안쓰럽기도 했고. 등에 지고 있는 짐 이 좀 많아 보이기도 해서 나누어 들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으니까...” 지토가 광아의 말을 받았다. “뭐야? 이런 분위기는... 왜 나는 그런 느낌을 전혀 받지 못한 거지? 이상하네. 아 니 조금은 그런 느낌이 있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 참 이상하네..” “그래, 난 그런 느낌은 못 받았다구. 광아하고 지토만 왜 그런 느낌을 받은 거지?” “그래요. 저도 별 느낌을 못 받았는걸요?” 내 말에 풍아와 수아가 거들고 나섰다. “아마도 친화력 때문이 아닐까 싶네 그건. 그 아가씨 빛의 정령이나 땅의 정령과 친 한 친화력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싶어. 어쩌면 그 아가씨는 환수사의 능력 과 함께 정령사의 힘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르겠는 걸? 아마도 그런 걸거야. 광아가 특 히 아세트라는 아가씨의 느낌과 연결이 잘 되었다면 그 아가씨는 빛의 계열 정령에 대 한 친화력이 상당히 높은 것이라고 볼 수 있겠지. ” 화아가 대충 상황을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고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 수도 있겠네. 대단한 잠재력을 지닌 아가씨인 걸? 나중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 날지 모르겠군. 하하 기대되는 아가씨야. 그럼 광아가 아세트라는 아가씨에게 보인 관 심은 친화력 높은 사람에게 느끼는 친밀감 비슷한 것인가? 나는 또 우리 동생에게 애 인이 생기는 것인가 하고 잔뜩 기대를 했더니 말이야. 이런이런.” 내가 아쉽다는 듯이 중얼거리자 화아 등도 그렇다는 듯이 아쉬운 표정을 짓는다. “호호. 광아의 여자친구라. 괜찮았는데. 호호.” “불쌍하다 그 아가씨. 어쩌면 광아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데. 아 니 분명 그렇게 생각을 할 텐데..” “정말이야. 광아 오빠가 자기 좋아 한다고 생각할거야. 그 아가씨.” “클클클. 다음에 한타리아에 가면 꼭 헤이스런 공작가에 들러 보아야 할 것 같군. 재미있을 것 같아. 클클.” 지토의 웃음이 점점 도를 더해간다는 생각이... “자. 그럼 이제는 어쩌나? 이제 어디로 가지요?” 어느 정도 주위가 정리되고 저녁 식사를 마친 우리들은 마차 옆에 꺼내 놓은 탁자에 둘러 앉아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의견 조율에 들어갔다. “음, 이제 우리들이 가진 돈은 150만덴 정도 되는 것 같아요. 이 정도면 한동안은 돈 걱정은 없을 것 같은데... 우리 이대로 누웬 왕국에 들어가 보는 것은 어떨까요? 한번도 그 쪽은 가 본 적이 없잖아요.” “그래요. 광아 오빠 말대로 우리 누웬에 한번 가 봐요. 어차피 이쪽으로 가면 누웬 왕국이잖아요.” 수아가 광아의 말에 찬성하고 나섰다. “그것도 좋을 것 같네요. 처음에는 여인왕국과 한타쪽에 있다는 그 환수를 제압하 는 것이 목표였지만 조금 늦게 간다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이렇게 된 것, 그 냥 누웬으로 가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형 그렇게 하지. 누웬으로 가자구. 그 쪽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으니까 더 재미있 는 일이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화아의 찬성. 뭐 이런 분위기면 더 이야기를 해 볼 것도 없이 방향이 정해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래, 그럼 누웬 쪽으로 가도록 하자. 어차피 예전에 쓰던 관도가 있으니까 길을 잃거나 하지는 않겠지.” 나는 결국 우리 일행의 목적지를 누웬왕국 쪽으로 잡았다. “쿡 콜록 콜록, 이 녀석이. 죽어라 야압!!” 콰과과곽. 끼야아아--ㄱ 캬악. “어딜 도망을 가는 거냐? 도망을 갈 수 있을 것 같으냐? 어림도 없다 이녀석아. 쿨 럭 쿨럭.” 파바바박. 퍼벅. 꾸아악. 끼끼익.껙 철푸덕. “진작 항복을 했으면 이런 꼴은 안 당할 것 아니냐구. 도대체가 이 녀석은 머리가 있는 녀석이야 없는 녀석이야. 어쭈 눈 안 깔아. 그래도 성질은 안죽었다는 말이냐? 죽어죽어 이 녀석아.” 퍼버버버벅. 퍽. 꾸구구국 끅 “화아 오빠, 그만 좀 해라. 그 녀석 그러다 죽겠다. 도대체 벌써 세 시간째 그렇게 패고 있는 거란 말이야. 싸움하던 시간까지 하면 6시간을 그러고 있는 거라구. 정말 저 녀석도 운이 없지 어쩌다가 화아 오빠의 성질을 건드려서 저 모양이 되는 건지. 에 이그.” “그래 화아 그만하고 귀속 주문이나 걸어라. 그러다가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오빠. 너무 불쌍하잖아. 파울도 그만 하래요.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고.” 대충 짐작이 가겠지. 지금 화아가 환수 하나를 잡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누웬 왕국을 향하는 관도를 따라서 여행을 하는 중이다. 환수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환수 군집지를 지나고 있었기 때문에 간간히 환수들의 흔적을 볼 수는 있었지 만 실제로 우리 앞을 가로막는 환수는 없었기 때문에 순탄한 여행을 하고 있었던 우 리 는, 하루에 한 번씩 신계로부터 환수를 소환해서 화아 등이 마음에 드는 녀석이 나오 면 가지기로 했었는데, 그 동안에 별로 마음에 드는 녀석이 없다가 오늘 아침에 드디 어 화아가 마음에 드는 녀석을 발견했던 것이다. 보통은 하루에 다섯 번 정도씩 환수를 소환했다가 돌려보냈었는데 그다지 강해 보이 는 녀석도 없었고 마음에 들어 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첫 소환에서 뛰어나온 녀석은 그야말로 화아의 확대형이었던 것 이다. 그러니까 처음에 화아가 소환되었을 때, 불도마뱀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튀어나온 환수가 바로 그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 던 것이고 화기가 성한 녀석이라 그런지 화아가 마음에 들어 해서 제압에 들어갔었는 데, 녀석이 상당히 힘이 세어서(사실은 화아가 화기를 쓰기 때문에 충격을 덜 받는 것 이기도 하다. 불이 불을 공격하니 마법력이라는 것이 거의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 니 특기를 살리지는 못하고 서로 육탄전이 되어버렸다.) 세 시간 정도의 구타전 끝에 겨우 제압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후의 일이다. 화아가 녀석이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는다느니, 눈빛 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느니, 동작이 굼뜨다느니 하면서 죽도록 패기 시작을 했는데, 처음에는 간간히 반항을 하던 녀석도 끝내는 도망을 다니다가 이제는 땅바닥에 널부 러 져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눈빛이 반항적인 것은 여전하다. 하하 처음에 화아가 띠꺼운 눈빛으로 나 를 보던 때가 생각이 나는 녀석이다. 완전히 판박이다. “죽어~~ 이녀석아.” 퍼버걱. 또 다시 화아가 녀석을 두들려 패고 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녀석과 화아를 연관시켜서 옛 기억을 하면 화아가 더 날뛰고 있는 것 같은.... 허기는 이 녀석들과는 어느 정도 마음이 연결되는 상태니까.... 허걱, 그 럼 지금까지 저 불도마뱀이 맞고 있는 이유가 나 때문이라는.... ㅡ.ㅡ;;; 그리고 잠시 후 내가 더 이상 화아와 그 녀석의 모습을 연관시키는 생각을 하지 않으 려고 노력한 끝에 녀석에 대한 귀속이 끝이 났다. 길이 6미터 정도의 목도리 도마뱀, 결정적으로 꼬리가 짧기는 하지만 불덩어리로 된 목도리 도마뱀을 닮은 녀석이다. “흠. 이름이 아눈나키라는군요. 이름이 기네... 넌 이제부터 아눈이다. 알았냐? 어 쭈 반항이냐?” 화아는 아눈나키라는 녀석의 이름을 간단하게 아눈이라고 줄이고는 다시 녀석을 노 려 보았다. “너 모습을 변형시킬 수 있냐? 어쭈? 그것도 못해? 뭐 이런 능력없는 녀석이 있어? 내가 너처럼 큰 녀석을 데리고 다녀야겠냐? 저기 봐라. 수아의 파울은 저렇게 멋진 모 습으로 변신을 하잖아. 그런데 넌 그런 능력도 없다는 말이냐? 이런 덜떨어진 놈 같 으 니라고.” 다시 아눈에 대한 화아의 구박이 시작 되려는 순간 아눈은 연기같이 변해서는 화아 의 도로 들어가 버렸다. “어? 음, 그나마 이런 능력이라도 있으니 다행이로군. 어라? 칼 색깔이 바뀌었네? 노을빛이라... 마음에 들어 하하. 좋아 용서해 주지. 하하하.” 정말 화아의 평범한 도는 도신 천체가 노을빛을 내고 있었다. 그것도 투명하게 보이 는 노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색체가 흘러가는 것처럼 변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하. 정말 멋있는 녀석을 얻었구나. 하하. 축하한다.” 나는 화아에게 환수가 생긴 것을 축하해 주었고, 지토 등도 함께 축하의 말을 해 주 었다. “뭐, 별 쓸모도 없는 녀석이야. 지금까지 신계 화산에서 살던 녀석이라나 봐. 예전 바빌로니아의 불의 신으로 불리던 아눈나키라는 녀석의 흔적 쯤 된다는군. 아눈나키 에 대한 믿음이 없어지면서 그 흔적으로 남은 녀석이야. 그래도 신의 흔적이라고 궁 시 렁 거리기는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모르는 신이라 별 힘도 없어.” “신의 흔적이라. 그렇겠네요. 신자가 없는 신은 이미 힘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까요. 신선이야 자신의 힘을 키워 선인이 된 경우지만 신이란 인간의 믿음이 만들어 내 게 되니 믿음을 받지 못하는 신이 힘을 가질 수가 없지요.” 수아가 화아의 말에 설명을 덧 붙였다. “에? 그럼 천계의 주신은 어떻게 된 거지? 1000년 전에는 주신을 믿는 존재들이 없 었잖아?” 나는 수아에게 물었다. 수아는 파울 덕분에 그런 문제들에 대한 지식이 상당히 많았 고, 수아가 알지 못하는 것이라도 파울이 대답을 해 주었기 때문에 신계를 포함한 다 른 계에 대해서는 수아에게 묻는 것이 가장 빨랐다. “에? 그거야 천사들이 전부 주신을 믿는 신도들인 걸? 그 수가 어마어마 하잖아. 그 러니까 힘을 잃을 수가 없지. 뭐 옥황상제님이나 염라대왕님도 어마어마한 신자들을 가지고 계신걸....” 수아가 그렇게 웅얼거렸다. “흠, 그런 것이군. 그럼 이제 화아의 환수도 생겼고 다음에는 누가 환수를 가지게 될까? 이거 누웬에 도착하기 전에 다들 멋진 환수를 하나씩 가지게 되었으면 좋겠는 데...” 나는 그렇게 상황을 정리했고, “멋지긴 뭐가 멋지다는 거야? 이런 덜떨어진 녀석을...” 화아는 자신의 도를 손바닥으로 쓸며 중얼거렸지만 얼굴에는 마음에 든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호호, 나도 빨리 환수를 가지고 싶어. 어떤 녀석을 가지게 될는지는 모르지만 말이 야. 멋있는 녀석이면 좋겠는데...” 풍아가 아무래도 부러운 눈초리다. “형, 이거 언제쯤 길이 끝나는 거지? 아세트와 헤어진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는 데 계속 관도의 흔적만 있고 인가가 없으니 말이야.” “그러게요. 환수들의 영역이 의외로 넓은 모양이네요. 뭐 환수의 영역입니다 라는 표시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죠.” 화아의 말에 광아가 말을 이었다. “글쎄, 어느 정도 가야 될 지야 내가 알겠냐? 아무튼 좀 길긴 기네.. 이 정도의 영 역이 환수의 영역으로 되어 있으니 당연히 누웬과의 왕래가 끊어지는 것이겠지. 아무 튼 심심하기는 하다. 그럼 우리 잠시 쉬면서 다시 환수 소환이나 해 볼까?” 내 제의에 우리의 행진이 멈추었다. “그럼 오빠는 소환진을 그려요. 나는 식사 준비를 할게요.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오 늘은 여기서 쉬고 갈 거죠?” 수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마차 옆에서 조리대를 꺼내고는 식사 준비에 들어갔다. 그 동안에 파울의 쓰임새가 하나 늘었는데 파울의 망토 속에는 작은 이공간이 있어 서 어느 정도의 물건들을 보관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창고의 이원화라 고 할까. 덕분에 어느 정도의 음식들은 마차의 조리대와 수아의 망토 속으로 자리를 옮겼다. 물론 엄청나게 많은 양은 아니고 배낭 서너개 분량이 들어가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동안에 능숙해진 소환진을 그리고 환수의 소환에 들어갔다. “오빠, 오늘은 좀 많이많이 소환해 봐요. 시간도 넉넉하니까. 호호호.” 풍아는 요즈음 환수에 대한 욕심이 생겨서인지 소환진을 그리고 나면 아주 작정을 하 고 나를 부려먹었다. 마음에 드는 환수를 마련 할 때까지는 계속 될 터여서 빨리 멋있는 환수가 나왔으면 좋겠다. 첫 번째, 환수는 몇 번 본 적이 있는 하급환수였다. 두 번째도, 세 번째도, 네 번째 도, 다섯 번째도 역시... 결국 잠시 소환을 멈추고(소환과 역소환에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수아가 준비한 식 사를 하고, 다시 환수 소환에 들어갔다. “여섯 번째다. 좀 멋진 녀석이 나왔으면..” 이렇게 환수를 소환하는 것은 거의 도박이다. 뭐 밑천이 들지 않는 도박이기는 하지 만 어떤 녀석이 나올지에 대한 어떤 예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확률도 적용되지 않 는다. “응? 이번에는 분위기가 틀리다. 모두들 준비를 해라. 소환에 시간차가 있다. 생각 해 보니 수아나 화아의 환수 경우에도 이랬던 것 같다. 급이 높으면 소환에 약간의 시 간차가 생기는 것 같아.” 나는 소환진에서 느껴지는 느낌에 소리를 질렀다. “야아. 이번에는 어떤 녀석일까?” 파-박. 소환진에서 빛의 증폭이 끝나고 진 위에 있는 것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녀석이었 다. “이것도 환수일까요?” “에~~ 어째 환수 같지 않은데...” “그러게 이건 뭐랄까 골렘인걸....” “그래 골렘이네요.” 그랬다. 소환진 위에 나타난 것은 골렘이었다. “지토, 이거 아무래도 지토 네 몫인 것 같다. 어떠냐? 가지고 싶은 생각 없냐?” 나는 지토를 보며 물었다. 바위로 만들어진 골렘이었다. 인간형의 골렘으로 크기는 2미터 정도 상당히 육중하 게 보이는 몸을 자랑하고 있었고, 전체적인 색깔이 검은 색이었다. 뭐랄까 검은색 보석 원석으로 만들어 놓은 돌골렘이라고 할까? “좋아. 이 녀석은 내가 맡아 보지. 돌이라. 어떻게 상대를 해야 하나?” 지토는 천천히 소환된 돌 골렘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돌 골렘은 아무 반응도 없이 가만히 지토를 보고 있었다. “뭐, 별로 반항을 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네? 그럼 곧바로 귀속을 시켜 볼까나?” 지토는 골렘 가까이 다가가서는 귀속의 인을 맺었다. 그리고 지토의 인이 골렘의 배(지토가 키가 작아서 까치발을 하고 손을 들어야 겨우 골렘의 배 부위에 닿았다.)에 닿았을 때, 골렘에게 변화가 생겼다. “뭐야? 저건.” “글쎄요. 저건 방어벽 같이 보이는데요?” “그래요. 실드 같은 것 같이 보이는데요?” 은은하게 황토색과 금색이 섞인 반투명의 벽이 지토와 골렘 사이에 생겨 있었던 것이 다. 하지만 지토와 골렘의 실랑이는 금방 끝이 났다. “클클 이 녀석아 그런 기운으로 나를 막을 수는 없단다. 내가 바로 땅과 흙과 대지 의 모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구나. 클클클.” 지토는 잠시 당황했던 표정을 풀고는 웃으면서 골렘의 배에 귀속의 인을 찍었다. 보통 귀속의 인은 제압이 되지 않은(그러니가 힘이 빠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자신이 지닌 힘으로 거부를 할 수도 있었는데..)상태여서 걱정을 했지만. 아무래도 골렘은 지 토를 거부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지토의 환수 귀속과정은 무리 없이 끝이 났다. “음. 게브. 역시 예전 이집트의 대지의 신의 흔적인 모양이군. 신계에는 이런 녀석 들이 환수가 되어 버리는 것인가? 신의 흔적이 동물 취급이라니... 한심한 일이군. 대 지의 신이었던 탓에 나와는 속성이 거의 같아. 단지 이제는 대지를 움직이는 능력은 거의 없는 것 같고, 물리력을 동원한 공격력은 상당하고, 마법적으로는 아까 본 것과 같은 방어에는 솜씨가 있는 모양이야. 음 치유력도 약간, 그리고... 변신!” 지토가 변신이라고 외치자 게브가 모습을 바꾸었다. “이렇게 변신이 가능해. 적어도 땅위에 있는 모든 동물로 변신이 가능하다는군. 문 제는 변신을 했다고 해도 그것의 소리를 내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지만 말이야.” 바뀐 게브의 모습은 당나귀의 모습이었다. “이렇게 보여도, 달리는 데는 문제가 없어. 그러니 이제부터는 나도 이 녀석을 타 고 다닐 거야. 마차 지붕위에서 다니는 것은 사양하고 싶으니까 말이야.” 게브는 정말 지토가 타기에는 아주 적당한 크기의 당나귀였다. “하하, 지토는 그럼 말 한 마리를 얻은 셈이네. 하하. 좋아. 마음에 든다면 그걸로 된 거지뭐. 하하하.” “어휴~~, 왜 내가 마음에 드는 녀석은 나오지를 않는 거냔 말이야. 이제 광아하고 나만 남았잖아. 에이.” 풍아가 투덜거렸다. “그럼 계속 소환을 하지 뭐. 오늘은 아직 해가 많이 남았잖아.” 나는 아쉬워 하는 풍아를 위해 다시 소환에 들어갔다. 섭섭해 하던 풍아도 기대 섞인 얼굴로 소환진에 몰두했다. 지토는 새로 생긴 당나귀(게브)를 타고 이리저리 달리고 있었다. 작은 당나귀 모양인 데도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달리는 게브였다. 그리고 소환진 위에 또 다른 환수가 소환되었다. “음? 이건 어떨까?” 나는 소환진 위에 나타난 푸른색의 새를 보고 물었다. 크기는 크지 않았지만 몸 전체에 스파크를 일으키고 있는 모습이 꽤나 위협적으로 보 이는 녀석이었다. “별로, 속성이 전기인 것 같은데... 전 마음에 안 드는 데요?” 광아가 녀석을 보며 말했다. “음. 나두 푸른색에 날개 달린 것은 마음에 드는데... 별로 힘이 없어 보여서 싫어 요.” 풍아도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표정으로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럼 하는 수 없지 돌려보내야지.” 나는 소환진의 마력 배열을 역소환으로 바꾸었다. “윽-! 이런 반항인가? 돌아가고 싶지 않은 모양이네? 이거 소환을 하면서 처음 있 는 일인데?” 나는 역소환에 들이던 힘을 조금 줄였다. “뭐지? 야. 넌 별로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냥 돌아가라. 억지로 보 낼 수도 있지만 그럼 다칠지도 모르고, 그냥 돌아가는 것이 어떠냐?” 나는 소환진 위에서 날개를 펴고 역소환의 마력을 거부하는 녀석에게 말했다. 녀석은 고개를 나에게 돌렸다가는 다시 풍아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풍아를 응시하 고 있었다. “왜, 나를 보는 거야? 난 너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 크지도 않고, 조금 예쁘기는 하지만 힘도 없어 보이는데 별로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 풍아는 녀석을 보면서 소리를 질렀다. “끼--이익” 순간 날카롭게 울음을 터뜨린 녀석의 몸 주위에서 스파크가 일어나면서 풍아 쪽으로 뻗어 갔다. “뭐, 뭐야 해 보자는 거야? 내가 힘이 없어 보인다고 했다고 덤비는 거냐? 이런.” 풍아는 날아오는 스파크를 날렵하게 피해 내고는 소리를 질렀다. 풍아는 전에 마롤의 두 번째 습격에서 검이 부러진 이후에 아직 무기를 마련하지 못 했는데 빈손인 풍아는 대책이 안 서는 모양이었다. “좋아. 너 임마. 내가 아무리 빈손이라도 너 정도는 털을 다 뽑아서 오늘 저녁 식탁 에 올릴 수 있단 말이야. 이게 까불고 있어.” 결국 풍아는 빈손으로 날렵하게 환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는 이왕 이렇게 된 것, 환수도 자기 힘을 모두 쓸 수 있도록 역소환 마력을 모두 풀어 버렸다. 그리고 풍아와 환수와의 드잡이질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풍아는 바람이었고 환수는 뇌전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마력의 강도 차 이로 인해 생기는 충격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바람이나 뇌전이 지닌 속성이 미치는 영향력이 없어지는 것이다. 바람의 힘이나 뇌전의 힘은 서로 영향을 미치지 못 하는 까닭이다. 때문인지 둘의 싸움도 역시 물리력을 동반한 난타전의 양상으로 발전 했다. “하악, 아학. 정말 끈질긴 녀석이네. 너 일루 안와? 넌 오늘 저녁 요리감이다. 죽어 랏.” 풍아는 점점 성격을 드러내는 모습(평소에는 안 그런데 가끔 상당히 엽기적인 것 같 다. 전에 땅개가 당한 전력을 봐도 짐작이 간다.)이 위험 수위를 넘어가는 것이 아닌 가 싶었다. 거기다가 환수 녀석도 아주 날렵하게 이리저리 날아다니면서 부리나 발톱을 이용한 공격을 시도 하고 있었는데 제법 날카로운 공격이라 풍아의 팔과 어깨에는 긁히고 쪼 인 상처가 제법 되었다. “씨-익, 씨익.” 풍아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환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래, 그랬단 말이지. 이 미모에 이렇게 상처를 내다니... 이젠 못참아. 햐햐햐햐 햐 넌 이제 죽은 거야. 햐햐햐햐.” 어째 웃음소리가 불안.... 순간 내 몸에서 상당한 기운이 빠져 나가는 것이 느껴졌 다. “오호호호호호홋, 죽어라.” 풍아의 외침과 함께 사방에서 날카로운 바람이 휘몰아쳐 환수를 덮쳤다. 불쌍한 녀석, 적당히 하고 항복을 할 것이지. 날카로운 바람은 그 자체로도 검날과 같은 물리적 성향을 지니는데... 풍아가 화가 난 상태에서 날리는 것이라면 장난이 아닐 터였다. “어쩌면 좋아. 저러면 환수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저건 정말 죽으라는 거잖 아. 아이 어쩌지..” 수아가 옆에서 안타까운 소리를 한다. 순식간에 바람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환수는 최대한 스파크를 일으키며 날아오는 바람 의 칼날들을 막았지만 결국에는 숱한 깃털을 떨어뜨리며 땅바닥에 구겨졌다. 끼기기이-익. 부리를 통해 나오는 소리가 아주 처량하게 들렸다. “오호호호홋, 그러기에 진작 항복을 하지. 뭐한다고 덤비냐? 덤비기를... 오빠, 이 젠 저 녀석 돌려보내 버려. 오호호호홋.” 역시 아직은 풍아가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다. 이런 폭주 모드는 앞으로 보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풍아야 그럼 이 녀석 그만 돌려보낸다?” “호호, 응, 좀 더 때려 주고 싶지만 참기로 하지. 호호.” 풍아는 손을 탁탁 털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누가 잠시 이 녀석 좀 데리고 있어라. 소환진이 몇 곳 이상이 있는 것 같으니까 손 을 좀 봐야 역소환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동안 풍아와 환수의 드잡이질로 소환진이 여기 저기 훼손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환수를 집어서 수아에게 던져 주고 소환진을 보수하기 시작했다. “오빠, 이 녀석 돌아가고 싶지 않아 한다는데? 제발 자기를 데리고 있어 달라고 사 정사정하고 있데. 파울이." 나는 수아의 말에 하던 손을 멈추고 환수 녀석을 돌아보았다. 그 사이에 조금 기운을 차렸는지 목을 가누고(아직 몸은 움직이지도 못하는 것 같 다.) 이리 저리 목을 돌리며 수아와 화아 광아 지토를 번갈아 보고 나를 돌아보더니 다시 풍아를 쳐다보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날개를 푸득거리며 몸을 일으키고는 찔룩 거리면서 풍아 쪽으로 기어(?)가는 것이다. “뭐야? 왜 나한테 오는 거야? 싫어 싫단 말이야 저리가...” 풍아는 재빨리 화아 뒤로 숨었지만 환수 녀석은 끈질기게 망가진 몸을 끌고 풍아를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가서는 풍아의 옷자락을 부리로 물고 흔들었다. “그 녀석 풍아 네가 마음에 든 모양이네. 좀 봐줘라. 그렇게 니가 마음에 든다는 데....” 나는 풍아를 보고 녀석을 거두어 주라고 권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나 처절하게 보이던지.... 다른 일행들도 풍아를 보는 눈길이 녀석을 거두어 주었으면 하는 눈초리다. “왜, 왜 나만 이렇게 덜 떨어진 녀석을 내 환수로 해야 하는 거야? 파울은 멋진 망 토에 신계의 소식을 많이 알고, 아눈은 덩치도 크고 저렇게 멋진 칼도 만들어 주고, 게브는 뭐든 변신이 가능하고 방어력도 뛰어나다면서? 그런데 난 이렇게 작고, 쬐끔 밖 에 안 예쁘고, 힘도 별로 없는(?) 이런 녀석을 가지란 거야? 너무해. 히잉.” 풍아는 정말 너무한다는 표정으로 모두의 동의를 요구하는 표정이었지만 다들 별로 동의하고 싶어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풍아 누나를 저렇게 좋아 하잖아. 거기다가 풍아 누나랑 그 정도로 싸울 정도면 힘이 없는 것도 아니고, 혹시 다른 멋진 능력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게 아 니 어도 그렇게 누나가 좋다는데...” 광아가 풍아에게 직접적으로 환수를 거두어 주라는 표현을 한다. “그래, 널 저렇게 좋아하는데... 받아 줘라. 응?” “그래 언니. 불쌍하잖아.” “클클. 날개 달린 녀석이니 너와도 어느 정도 속성은 맞을 것 같은데.. 왠만하면 좀 받아 주는 것이... 클클클.” 화아, 수아, 지토가 광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풍아를 몰아세우는 분위기다. “히잉. 알았어. 알았다구. 나만 가지고 그래. 히힝. 훌쩍.” 풍아는 다른 사람들의 압력에 견디지 못하고 환수에게 귀속의 인을 맺으면서 결국 훌 쩍거린다. “풍아야. 나중에 니가 마음에 드는 녀석이 나오면 다시 한 마리 더 가지면 되잖아. 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구박하지 말고 받아 줘라. 응?” 내가 그렇게 풍아를 달래자 그제서야 풍아도 얼굴이 밝아 졌다. “정말이지? 다음에 마음에 드는 녀석으로 한 마리 더 불러 줄꺼지? 응 오빠?” 풍아는 그렇게 다짐을 받고서야 축 져진 날개를 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환수에게 귀속의 인을 심었다. “카다클란? 그게 이름이야? 꼴에 너도 신이었어? 뭐가 이렇게 신이 많아? 번개의 신? 이름 귀찮으니까 그냥 카다로 해. 변신은 못해? 저기 아눈처럼 물건 속에 들어가 는 것은 할 수 있어? 그럼 나중에 검을 사면 거기 들어가 있으면 좋겠군. 뭐? 싫어? 이게 너 같은 녀석을 데리고 다니는 것도 어딘데 반항이야 반항이? 어쭈? 니가 옛날 에 신이었다고 지금도 신인 줄 알아? 웃기는 놈이네? 뭐? 신도를 만들면 되는 일이라 고? 그럼 힘도 커지고 능력도 생기고? 웃기는 놈이네? 누가 널 신이라고 섬겨? ” 귀속을 마친 풍아와 카다라는 환수는 그렇게 쫑알거리는 풍아의 말로 소개를 대신했 다. “그러고 보면, 이 녀석들이 원래부터 신의 흔적이면, 신자들을 만들어 주면 힘이 더 커지는 것이겠군. 그런 면도 있구나. 하하.” 나는 풍아와 카다의 말에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신의 흔적으로 남은 녀석들이지만 만약에 이 녀석들을 신으로 믿는 사람들이 생기면 신력을 회복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것이었다. “수아야. 정말 이 녀석들이 신자가 생기면 힘이 더 세어지고 그럴 수 있을까?” 나는 수아에게(실은 파울에게)물어 보았다. “응, 오빠. 좀 어렵기는 하겠지만 만약에 이들을 믿는 사람들이 생기면 어쩌면 가능 할거라네. 호호. 하지만 사람들이 좀 어수룩하지 않으면 어렵지 않을까나? 호호호. 파 울이 그러는데 원래 자연의 속성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이란 무지에서 오는 두려움 탓이라는데... 그렇게 무지한 사람들이 어디 있을까? 호호호.” 요즈음 들어서 수아의 지력이 일취월장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좋은 선생이 옆에 있 다는 것은 이래서 좋은 것인가? 하하. “그럼, 결국에 게브, 아눈, 카다는 모두 비슷 비슷한 녀석이라는 말이네? 풍아도 너 무 카다 구박하지 말아라. 불쌍하잖니? 하하.” “피이. 이런 녀석, 어디 좋은 곳이 있어야 구박을 않지.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녀석 이라니까...” 여전히 투덜거리는 풍아의 어깨 위에서 카다는 고개를 숙이고 기가 죽어 있었다. 카다가 어째 불쌍하다. -행문촌 지나서 행문성 ? - 삐이이익- 삐익. “오빠, 앞에 보이는 언덕을 넘으면 작은 마을이 보인데요. 드디어 누웬에 도착한 모 양이네요. 자그마치 2주일이 넘도록 산과 들판을 지났군요. 그렇게 넓은 지역이 환수 의 거처라는 이유로 일반인의 통행이 제한되어 있다니...” 풍아가 정찰 결과를 알려 왔다. 카다라는 녀석이 쓸모가 없다고 투덜거리던 풍아였지만, 날개 달린 녀석의 활용처는 상당히 많았다. 매끼마다 어딘가 날아가서 자잘한 동물들을 잡아오기도 했고, 우리 앞길에 있는 지형 이나 위험에 대해서 미리 경고를 주기도 했고. 관도의 방향을 따라서 정찰을 하기도 했던 것이다. 지난 열흘정도 카다의 노력은 정말 눈물겨운 것이었다. 언제나 풍아의 어깨 위에서 떨어지지 않고 애교를 피우고, 그 틈틈이 사냥을 하고 정 찰을 하고, 때로는 풍아를 위해 이름모를 과일까지 따가지고 오는 성의를 보였던 것 이 다. 그 덕분인지 요즈음은 풍아가 카다를 좀 덜 구박하는 것 같기도 하다. 가끔은 깃털을 쓰다듬어 주는 모습도 보이니 말이다. “그래? 드디어 누웬에 도착인가? 하하. 이 나라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상당히 궁 금하네. 하하.” 우리 일행들 모두 누웬 왕국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보게 된 다는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그리고 우리들이 고개를 넘어 마을이 바라보이는 곳에 올라섰을 때, 나는 너무 놀랐 다. 눈에 익은 풍경, 기와집과 초가집들, 꼬불꼬불한 논두렁과 밭두렁. 해질녘의 작은 마을은 마을을 둘러싼 산을 넘어가는 노을 속에 고즈넉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저거, 예전에 지토사 갈 때 봤던 풍경하고 비슷하네. 그치 오빠.” 풍아가 예전 기억을 떠올렸을 정도로 한국의 농촌 풍경을 기억나게 하는 그런 모습이 었다. 누웬 왕국은 예전의 동양적인 문화를 많이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신계라는 곳이 동양적인 성향이 강한 곳인 모양이다. 누웬이 신계의 영 향을 많이 받아 만들어진 나라이고 보면, 내 생각이 맞을 것 같았다. “아무튼 일단 마을에 들어가 보자. 그나저나 말은 다르지 않겠지? 어차피 예전 한타 에서 비롯된 곳이니 말이야.” 내가 중얼거리자 자이건이 나섰다. “말은 다르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도 간혹 누웬에서 특산품을 가져다 가 거래를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완전히 누웬과 단절이 된 것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누웬에서도 암흑제국이나 신성제국으로 가는 길이 트여 있어서 삼국 간에는 좀 더 원 활한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한타와 누웬의 사 이 를 오가는 것 보다 쉽다는 것이지 그렇게 많은 양이 오갈 정도로 편한 길은 아니라고 하더군요.” 오랜만에 자이건이 한 마디를 했다. 하하하. 우리의 마부로 전락한 자이건은 요즈음 그저 마차 위에 앉아서 거의 모든 시간을 보 내고 있었다.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멍한 표정으로 생각이 많아 보였지만 별 다른 사고는 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데리고 다니는 중이었다. 그런데 자이건은 언제까지 끌고 다녀야 하는 것일까? 그냥 사라져도 된다고 언질을 줬는데도 따라다니고 있으니... 언제든 가고 싶을 때, 가겠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 마차는 누웬의 첫 마을 입구에 들어서고 있었다. 관도는 마을 앞으로 지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관도를 따라 갈 경우에 집들 옆으로 붙 어서 마을을 비껴가게 되어 있었다. “오빠, 우리 이 마을에서 묶어 갈 거예요? 아니면 그냥 지나갈 거예요? 해도 지고 했는데... 어쩔 거예요?” 수아가 마차에서 고개를 내밀고 마차 지붕에 앉은 나에게 물었다. “글쎄, 이 마을에 여관이나 숙박업소가 있을 것 같지 않은데... 그래도 첫 마을인 데 들렀다가 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아까 보니까 마을 중앙 쪽에 큰 집이 있더라 그 리로 가 보자.” 나는 수아에게 대답을 하고는 자이건에게 마차를 마을 중앙으로 몰라고 시켰다. 우리들이 마을로 접어들면서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간간히 볼 수 있었다. 혹은 대청마루에서 식사를 하는 중이었고, 혹은 마당에서 곡식이나 채소를 말리는 중 이었고, 혹은 강아지의 밥을 주는 중이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들의 모습은 한타 왕국의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외모였 다. 금발이나 적발도 있었고 청색이나 백색에 가까운 머리카락도 있었다. 한타인들이 백인 황인의 중간형인 것처럼 이들의 피부색도 어떤 이는 백인에 가까웠고, 어떤 이 는 황인에 가까웠다. 복장도 한타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별로 다르지 않네요. 생활 습관이 좀 달라 보이기는 하지만... 옷의 재질 이 좀 다른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큰 차이는 없어 보이네요.” 광아가 옆으로 말을 몰아 붙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우리가 담 안의 사람들을 관찰하고(겉으로는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담 안 의 사람들은 숨김없는 표정으로 우리를 낯설어 하는 동안에 우리 일행은 마을의 중아 에 위치한 큼직한 집 앞에 섰다. “음, 현판이 붙은 것으로 보아서는 일종의 관청 역할을 함께 하는 것인가?” 집의 현판에는 ‘행문성분청’이라 적혀있었는데, 아마도 이 마을의 이름이 행문촌 인 모양이었다. 큼직한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그 양쪽으로 작은 문이 열려 있었는데 문 앞에는 지 키는 사람이 없었다. “실례합니다. 지나가는 여행객입니다. 뭣 좀 여쭈어 볼까 합니다. 안계십니까?” 나는 마차 지붕 위에서 목청을 돋우었다. 듣는 사람들에게 부담이 갈 정도의 크기는 아니었지만 내공이 실린 목소리라 멀리까 지 뚜렷하게 들릴 것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리고 잠시 기다리자 작은 문을 통해서 문안의 넓은 마당(?)을 가로 질러 달려오는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는 가죽갑옷 종류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실용성보다는 좀 격 식에 치우친 감이 있어 보이는 옷이어서 관복인 듯 했다. “이런 손님이 오셨는데 마중이 늦었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저는 행문촌의 분청관 리 란도암입니다. 잠시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일단 누웬국의 신민이 아니신 것 같으 니 여행에 따르는 입국 절차를 밟으셔야 합니다. 드시지요.” 란도암이라는 관리는 보기보다 관리라는 작자들이 흔히 지니는 고압적인 자세나 거드 름 없이 우리들을 건물 안으로 안내했다. 처음 우리 일행들의 모습에 상당히 놀라는 듯 했지만(아마도 외모 때문이리라고 생각 된다.) 겉으로 내색하는 경박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들은 본 건물이 아닌 좌우로 늘어선 행랑과 같은 곳 중에서 오른쪽에 있는 건물 로 안내되었는데 다른 이름이 붙어 있지 않아서 무엇을 하는 곳인지는 알 수 없었다. 건물 안은 탁자와 의자가 놓인 방이었는데, 문과 창이 한옥식의 건물이라 정감이 가 는 곳이었다. 거기다가 벽에는 동양화풍의 그림까지 걸려 있어 더더욱 마음에 들었다. “자, 자. 앉으십시오. 조금 있으면 간단한 다과가 나올 겁니다. 손님이 흔하지 않아 서 준비가 좀 걸릴 것 같습니다. 이거 주인으로서 송구합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런 별 말씀을... 이렇게 환대를 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 다. 하하.” 나는 그의 환대에 웃음으로 감사를 표했다. “아! 이쪽 분이 이 일행의 대표이신 모양이군요. 하하. 반갑습니다. 란도암입니다. 행문성분청장이라는 말직을 맡고 있습니다. 하하.” “반갑습니다. 저는 한타왕국에서 여행을 나선 루탄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제 친구 인 지토, 동생들인 화, 풍, 광, 수. 그리고 일행인 자이건입니다.” “아! 역시 한타왕국에서 오셨군요.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환수들의 지역을 통과해 서 이곳으로 오실 생각을 하셨는지, 이 곳이 본래 그나마 안전한 지역으로 한타와 저 희 누웬을 이어주는 관도였기는 하지만 스컬프트라는 환수가 자리를 잡은 후로는 전 혀 여행객이나 상인들이 오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하하, 그게.. 그 사이에 스컬프트가 제압당해서 겨우 길이 뚫리게 되었습니다. 한 타왕국의 헤이스런가에서 스컬프트를 제압했다고 하더군요. 쉬쉬하는 분위기지만 우 연 찮게 그런 사실을 알게 되어서 누웬왕국에 대한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동생들과 함 께 여행을 떠난 것이지요. 하하. 다행히 관도를 따라 오는 길에는 다른 환수들의 공 격 이 없어 어렵지 않은 길이었습니다. 하하.” 나는 란도암에게 지난 여정에 대해서 차분히 이야기를 해 주었다. 어차피 입국에 대 한 질문들에서 나올 것이라 생각한 탓도 있었고, 란도암이란 인물의 태도가 마음에 들 었던 탓도 있었다. “오~! 그런 일이. 그건 아주 중요한 일이군요. 빨리 본청에 그런 사실을 알려야 할 것 같습니다. 한타왕국과의 길이 열린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일이지요. 이런 소식을 알 려주시다니 감사합니다.” 그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모으며 고개를 숙였다. 중국 영화에서 이런걸 포권 을 한다고 하던가.. 하하하 “당연히 아실 것을 알려 드린 것인데 인사까지 하실 거야 있겠습니까. 하하.” “그래도 그게 아니지요.” “하하, 아닙니다. 그런 이야기는 그만하고 저희가 누웬왕국에 들어가는 입국 절차 를 밟아야 한다고 하신 것 같은데.. 어떤 절차가 있는지 궁금하군요.” 나는 쓸 데 없는 허례로 시간을 끌기 싫어서 곧장 본론으로 말을 돌렸다. “하하, 입국절차라고 해야 별 것 없습니다. 그저 입국 목적과 첫 도착지를 적고 첫 도착지의 책임자가 입국을 허락하는 증서를 적어주는 것이지요. 그런데 누웬왕국에 오 신 것은 단순한 여행을 위해서 입니까? 아니면 상업이나 기타, 다른 이유가 있으십니 까?” 란도암은 궁금하다는 듯이 물어왔다. “지금으로서는 별다른 것은 없고 관광이 목적이라고 해야겠지요. 뭐 나중에 돌아가 는 길에 누웬의 특산품을 좀 사가지고 갈 생각도 없지는 않지만 그건 아직 확실한 계 획 은 없습니다. 하하.” “그래요? 그런데 일행은 이렇게 일곱 분이 전부입니까? 상당히 적은 인원으로 위험 한 길을 통과하셨군요.” 란도암의 이 질문은 당연히 우리들의 실력을 묻는 것일 터였다. 어느 정도 무력을 확인하는 것도 입국 심사를 맡은 사람의 책임이기도 할 것이고 말 이다. “하하, 저희가 조금씩 재주가 있어서 여행에서 곤란을 당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 다. 하하. 저는 마법과 검법을 쓰고, 막내 수아는 치료마법에 능숙하고, 지토와 나머 지 동생들도 약간의 재주가 있습니다. 하하.” 나는 우리들의 실력을 적당한 말로 얼버무렸다. “역시, 대단한 분들이셨군요. 하하. 이렇게 영웅들을 뵙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하 하.” 란도암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포권...) 한다. “이런, 듣기에 부담스럽습니다. 영웅이라니요. 하하 그저 약간의 재주가 있을 뿐입 니다. 그런 말씀은...” 나는 얼떨결에 따라 일어나 인사를 받으며 말했고, 일행들이 덩달아 일어나는 어수선 한 분위기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들이 다시 자리에 앉을 때, 문이 열리면서 네 명의 여자들이 잔과 주전 자 그리고 과자가 담긴 쟁반들을 들고 들어왔다. “하하, 이제야 손님대접을 하는군요. 드십시오. 여행에 피로를 풀어 드릴겁니다. 피 로회복에 좋은 차입니다. 하하.” 우리는 란도암이 따르는 차를 잔에 받아 들고는 제각기 맛을 보았다. 화아와 지토는 대뜸 입에 털어 넣었고, 나머지 일행들은 가볍게 입술을 축였다. 맛이 녹차와 비슷한 맛이 나는 차였다. 좀 더 청량감이 있다는 것이 다르다면 다른. 그리고 같이 나온 과자들은 쿠키 종류와 한과 종류들이었는데 차와 더불어 먹기에 부 담이 없는 것이었다. “그래, 여러분들은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이제 도착하셨으니 어디 목적지라도 가지고 오셨나 궁금하군요.” 란도암의 물음에 답을 한 것은 수아였다. “처음 오는 곳이라 뚜렷이 목표는 없는데요, 아무래도 일국의 수도만큼 볼거리가 많 은 곳도 없을 것 같아요. 호호. 수도는 꼭 들러봐야겠지요? 안 그래요? 오빠?” “그래 그렇구나. 수도는 꼭 들러봐야겠지. 그리고 누웬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 로 없으니 여행을 하는 동안에 조금씩 알아가면서 여정을 정하면 되겠지? 안 그러 냐?” 나는 수아의 말을 받아 일행들에게 물었고, 일행들은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 로 동의를 나타내었다. “하하. 그렇군요. 그런데 오늘 밤은 어디서 묵으실 생각이신지요? 입국허가서는 내 일 아침에 여러분께 발부를 해 드리겠습니다만 일단 하룻밤 지내실 곳이 마땅치 않으 실 것 같은데. 예전과는 달리 이 곳을 지나는 여행객이나 상인들이 없어서 이 마을에 작은 주점은 있어도 숙박업소는 없어서 말입니다. 관청이 넓기는 하지만 유숙하기에 는 불편한 곳이라 권해 드릴 수도 없고.. 이것 참.” 란도암이 우리들이 잠자리를 걱정하는 말을 했지만 나는 우리 마차에 충분히 자리가 있음을 설명하고 그의 걱정을 진정시켰다. “그럼, 별 문제가 없겠군요. 하하. 다행입니다. 대신에 관청 앞에서 하룻밤 유하시 는 것을 허락 할 테니 멀리 가실 필요 없이 그곳에서 유하십시오.” “하하, 감사합니다. 이거 신세를 지는군요. ” “아닙니다. 별말씀을. 그리고 식사를 대접해야 하는데 이거 전혀 준비가 없어서... 그 후로도 란도암과 우리들 사이에는 이런 저런 이야기가 오고 갔지만, 대부분이 한 타와 누웬왕국의 사소한 관습의 차이나 사고 방식 등에 대한 궁금증을 표현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리들은 행분촌분청의 정문 앞 공터에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다. “후우~! 드디어 누웬에 도착을 하게 된 모양이네요. 그런데 란도암이라는 그 사람 참 성격이 좋은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아요 오빠?” 식사를 준비하며 수아가 옆에서 돕고 있던(요즘은 재료 준비나 야채 다듬기 같은 것 을 한다. 요리는 수아가.....) 나에게 물어왔다. “그래, 괜찮은 사람인 것 같더구나. 지방관이면서 그런 성격을 지니고 있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 이렇게 중앙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지방일수록 관리들의 횡포가 심 하기 마련인데 말이다. 만약에 누웬의 모든 관리들이 이렇다면 아마 누웬은 이 대륙 에 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드느구나.” “호호, 정말 그렇겠네요. 호호. 중앙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지방까지도 규율이 지켜 지는 나라라면 그 만큼 백성이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곳이라는 말도 될 테니까요. 호 호.” 나와 수아가 이런 수다(?)를 떨며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풍아는 카다와 실랑이를 벌 이며 카다의 깃털을 몇 개 뽑았고(이유는 잘 모른다. 아마도 쓸데 없는 트집을 잡았 을 것이라고 짐작이 될 뿐이다. 그래도 그 정도는 카다에게 있어서는 아주 사소한 일 에 지나지 않는다. 적어도 가끔 쓰다듬어 주는 때도 있으니까 처음보다 발전적인 관 계 를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무론 이건 파울이 전해준 내용이다.) 지토는 당나귀(게브)와 함께 탁자에 앉아서(이것도 요즘 일어나는 일인데 당나귀 모양의 게 브 가 지토와 함께 탁자에 앉아서 가끔 장기를 두거나 카드를 하는..) 무언가 심각한 토 론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고 화아와 광아는 자이건을 데리고 대련을 하고 있는 중이었 다.(자이건은 요즈음 화아와 광아가 가끔 놀아준다. 마차 지붕위에만 있으면 몸이 굼 뜬다는 이유로...) 그리고 식사 준비가 끝이 났을 때 우리들은 의외의 손님으로 란도암을 식탁에서 맞이 해야 했다. “하하 이거 실례합니다. 그래도 우리 집 처마 밑에 손님을 모시고 주인 된 자가 그 냥 모른 척 할 수는 없는 일이라 이렇게 간단하게 음식을 준비해 왔습니다. 저희 누 웬 에서는 손님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라 여기기 때문에... 하하.” 그는 이런 말과 함께 우리 식탁 위에 몇 가지 간단한 음식들을 올려놓았는데 짐작했 던 것과 같이 옛 중국이나 한국 일본 등의 음식들이 조합된 듯한 목록이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중국식의 튀김이나 조림이 주종을 이루었고, 한국식의 고춧가루나 된장 을 이용한 음식은 보이지 않는 다는 점이었지만 전체적인 느낌이 동양적인 것은 사실 이었다. 젓가락도 있었으니 말이다. “이런, 저희가 그런 예를 몰라 손님의 예를 다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하하. 그럼 같이 식사를 하시지요. 저희도 마침 식사 준비가 끝났으니 말입니다. 하 하.” 나는 란도암을 웃으며 맞았고, 란도암은 사양하지 않고 우리들의 식탁에 마주 앉았 다. 간단한 야채무침과 불고기 조림, 김치와 밥을 저녁으로 준비했던 식탁에 란도암의 음 식들은 무리 없이 어울렸고 란도암은 불고기와 김치에 특히 감탄하며 식사 내내 탄성 을 자아내었다. 그리고 식사가 끝난 후에는 손님에게 실례가 되지 않아야 한다면서 자리를 급하게 비 웠고, 우리들은 자이건의 설거지를 기다리면서 식탁에 둘러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럼, 내일은 입국 증서를 받아서 누웬왕국으로 들어가는 일만 남은 거네? 그럼 수 도로 곧장 갈 거야?” 화아가 이야기 중에 이렇게 물어왔고, 덕분에 내일에 대한 계획을 생각하기 시작했 다. “뭐, 별달리 일이 없다면 수도로 가 보는 것도 좋겠지.” 나는 별 생각 없이 화아의 말에 동의 했다. “호호. 누웬의 수도는 어떻게 생겼을까요? 궁금해요. 거기다가 파울의 말로는 누웬 은 신계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신계의 존재들과 만날 기회도 많을 거라는데... 호호. 정말 신계의 신선이나 그런 존재들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호호.” 수아는 누웬보다는 신계에 더 관심이 많은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파울과 함께 있으면 서 파울이 신계의 이모저모를 이야기 해 준 영향이 큰 모양이었다. “클클 그거야 이제부터 누웬을 돌아다녀 보면 알 일이지. 클클” 지토는 무슨 생각인지 앞으로의 여정에 대해 느긋한 태도를 보였다. 게브라는 녀석과 함께 있으면서 이상하게 진짜 늙은이 같은 성격으로 변해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음날 아침 우리들의 식사에는 역시 란도암이 나타나서 식탁을 함께 했고 식사가 끝 난 후에는 곧 란도암이 이끄는 대로 전날 란도암과 마주했던 방에서 그가 대접하는 차 를 마시고 간단한 입국 증서를 받을 수 있었다. “하하. 이 증서라면 여행에 불편이 없을 것입니다. 적어도 천왕야의 땅에서는 아무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천왕야의 영지가 수도에 까지 이르니 굳이 다른 왕야들의 영 지를 지나지는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하하.” 그는 증서를 건네주며 이렇게 말했고, 당연히 우리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란도암을 바 라 볼 수 밖에 없었다. “란도암 분청장님 무슨 말씀이신지? 저희는 누웬의 사정을 잘 모르기 때문에 천왕야 라는 분이 누구신지 또, 다른 왕야들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군요. 죄송하 지만 설명을 좀...” 나는 란도암에게 어정쩡한 모습으로 설명을 요구했고 란도암 역시 잠시 아차 하는 표 정을 지었다. “이런 너무도 상식적인 것이라 다들 아실 것이라 생각을 했는데... 죄송합니다. 누 웬에 한타의 여행자들이 온 경우가 없다 보니.... 상인들이야 가까운 성에서 볼 일을 보고 돌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다른 왕야의 영지를 거치는 경우가 없어서 이런 문 제를 이야기 할 필요도 없었는데..” 이렇게 시작된 란도암의 설명을 요약하면 이런 것이었다. 누웬은 황제가 있고 그 아래에 9명에 이르는 왕야들이 있다고 한다. 이를테면 황제 는 황성의 왕이고 왕야들은 지방 호족들인 셈인데, 왕야들이 황제의 신하인 것은 분 명 한 것이지만 왕야들은 황제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대신 자신들의 영지에 대한 자치 권을 지닌다는 것이다. 황제가 필요로 하면 재력과 무력을 황제에게 바쳐야 하지만 왕 야들 끼리의 영지는 개별적인 것이라 황제가 왕야들의 분쟁이나 심한 경우 내전에 관 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즉 어찌보면 작은 아홉 나라로 이루어진 것이 누웬이라는 말과 같았다. 다만 이 아 홉 나라를 지배하는 상징적 존재가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황제의 황성이라고 해 봐야 커다란 도시 하나에 지나지 않으니 왕야들의 영지에 비하면 하찮은 크기에 지나 지 않는단다. 란도암의 말에서 황제가 왕야들의 절대적인 충성을 받는 것은 알 수 있 었지만 어째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황제의 혈통은 지금까지 끊이지 않 고 이어지고 있지만 왕야들의 경우는 그 수가 넷에서 열일곱까지 시대에 따라 변해 왔 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누웬에는 아홉 명의 왕야가 있으며 이들은 서로 경쟁관 계 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도착해 있는 이 행문촌은 천왕야라는 인물이 다스리는 영지에 속해 있고 천왕야의 세력은 9왕야 중에서 1, 2위를 다투는 존재라고 했다. (말로는 최고의 세력이라 했지만 그 말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천왕야에 조 금 못미치는 세력으로 단, 정, 고왕야 등을 이야기 하는 것으로 보아서) 아마도 천, 단, 정, 고 라는 네 왕야가 현 누웬의 주도권을 지니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럼 우리들이 다른 왕야의 영지에 들어서게 된다면 새롭게 입국 절차를 밟아야 한 다는 말입니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지금처럼 왕야님들의 견제가 심한 경우에는 이 쪽 영지에서 다른 영지로 들어가는 것 자체가 어렵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다른 영 지에는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굳이 다른 영지로 가시려면 황성을 통해 서 다른 영지로 들어가시는 것이.. 그런 경우에는 어느 영지에서 왔는지를 따지지 않 는 것이 관례로 되어있으니 말입니다.” “호호, 그럼 만약 아홉 영지를 다 들러 보려면 결국 황성을 들락거려야 하겠네요? 호호. 상당히 번거롭네요.” 풍아가 웃는 얼굴이었지만 조금은 귀찮다는 투로 말했다. “하하. 그게.. 굳이 누웬을 편히 여행하시고 싶으시다면 황성에서 발행하는 통행증 을 받으시는 방법이 있습니다만 좀처럼 발행되지 않은 것이라 어떨는지 모르겠습니 다. 하하.” 란도암은 조금은 난처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고, 그 말은 우리들에게는 아주 흥미로 운 것이었다. “호호. 루탄 오빠가 나서면 문제없을 거예요. 호호. 그렇죠? 오빠?” 막내 수아가 이렇게 말하면 어쩔 도리가 없어진다. 막내의 이 말은 곧 내가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에 다름이 아니다.(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하하. 그럼 일단은 누웬왕국의 황성으로 먼저 가는 것이 급선무로구나. 하하. 그 럼 란도암 분청장님 저희는 이만 출발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하. 다시 뵙기를 바 라겠습니다.” 나는 란도암에게 작별을 고했고, 일행들 역시 간단한 인사로 란도암과 작별을 고했 다. “하하. 이거 아쉽군요. 그럼 다음에 또 뵙지요. 그리고 관도를 따라 가시면 행문성 이 나올 겁니다. 제가 미리 여러분에 대한 연락을 드려 놓을 테니 그 곳에서는 달리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행문성주님께서 혹시라도 스컬프트라는 환수의 문제를 묻기 위해 여러분을 청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번거로우시더라도 그런 일이 있으면 협조를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하하.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란도암의 이 부탁을 마지막으로 행문촌에서의 일정을 마무리 하고 관도를 따 라 누웬의 황성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째서 누웬의 이런 정치적인 문제들이 한타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 지 이해가 안 되는군. 이봐 자이건 넌 알고 있었냐? 누웬의 황제와 왕야의 체제를?” 나는 마부석에서 말을 몰고 있는(왜 이렇게 된 것일까? 아마도 지토가 게브를 타고 난 이후부터 자이건이 마부가 된 것 같다. 자이건의 멋진 흑마는 마차 뒤를 따라 오 고 있다.) 자이건에게 물었다. “죄송합니다. 저도 이런 상황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습니다. 다만 황제와 왕야가 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을 뿐, 이런 형태의 체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들은 바가 없 습니다.” 자이건도 자기는 모른다는 말이다. 그것 참. 아무리 서로 왕래가 없고, 또, 분쟁의 소지가 없이 지내온 나라라고 하지 만 정도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인접국에 대한 정보가 이렇게 빈약할 수 가 있는 것인지... 아마도 1000여년 정도 아무런 분쟁이 없었고, 또 앞으로도 분쟁이 없으리란 생각이 이런 상황을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암흑제국이나 신성제국, 혹은 여인왕국에 대한 정보도 이렇게 빈약하지는 않 겠지?” 나는 슬쩍 지나가는 투로 자이건에게 물었고 자이건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당연히 그 나라들에 대한 정보는 상당히 자세하게 수집되고 분류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세히는 몰라도 그 나라들에 대한 것이라면 저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물론 세부적인 것은 잘 모르지만 말입니다.” 뭐 당연한 것이다. 이런 정도의 세상(예전에는 지구촌이라고 했지만 여긴 아직 옆 마 을도 같은 마을로 생각 할 수 없는 상황이다)에서 직접 여행을 해 보지 않은 이상 어 떤 지역의 상황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알기 어려운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한동안 길을 재촉하고 나서야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건 란도 암이 행문성이 행문촌에서 어느 정도 거리에 있다는 말을 해 주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 거기다가 중간에 다른 마을들이 있는지 어떤지도 알 수 없었으니... “오빠, 아무래도 여기에서 하룻밤 보내고 내일 출발을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렇 죠?” 수아가 그렇게 물어 온 것은 우리가 달려가는 관도 위로 노을이 물들기 시작하는 때 였다. “음, 아무래도 그래야 하겠군. 카다의 정찰로는 앞으로 반나절 거리에는 인가가 없 다니까 밤길을 서둘러 달려야 할 이유도 없고 말이다. 그럼 여기서 야영을 하자. 자 이 건 마차를 세워.” 그렇게 우리들은 행문촌을 떠난 첫 밤을 관도 위에서 보내게 되었다. 여느때와 같이 식사를 마친 우리들은 간단한 결계를 치고 밤을 맞이했고(그 전에 환 수 몇을 소환하고 광아와 화아 풍아 지토 자이건 등이 몸을 푼다는 명목으로 한동안 드잡이질을 했지만..) 자이건은 이제는 좀 능숙해진 천막을 치고, 우리들은 마차 안 으 로 들어와 잠자리에 들었다. ... ....?! 잠결에 신경을 긁는 무엇인가 때문에 잠을 깨는 것은 절대로 기분이 상쾌한 경험은 아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 그런 경우에 속했기 때문에 역시 내 기분은 상당히 찌뿌둥한 기분 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차 밖으로 나왔다. 관도의 전면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은 분명히 상당한 규모의 인원들로 구성된 무리였 다. 그것도 이 어두운 밤을 미친 듯이 달리는 것으로 보아서 우리 마차와 자이건의 천막 을 깔고 지나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결계가 없어야 가능한 일이겠지 만 말이다. 내가 마차 밖으로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지토와 동생들이 역시나 퉁퉁한 얼굴 (짜증과 신경질과 칭얼거림을 더한 표정이다)로 깨어나 나왔고, 마지막으로 자이건이 (이건 우리들이 나온 것을 느끼고 나온 것이다.) 천막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무슨 일이지.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다가오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것도 무지 급하 게 달리는 것으로 보아서는 우리가 관도 위에 있다는 것이 좀 문제가 될 것도 같은 데.” 화아가 사태 파악을 하고 나섰다. 그렇다 우리가 관도 밖에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면 문제가 안 되는 것이겠지만 우리들 은 그 동안의 경험으로 이 관도를 사용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관도 중앙에 마차를 세우고 천막을 쳤던 것이다. “이크, 서둘러서 마차를 옮겨야 겠다. 말을 끌고 올 수는 없으니까 화아하고 지토 가 어떻게 해 보고, 자이건은 빨리 천막을 치워!” 나는 최대한 빠른 방법으로 관도 위에서 우리 마차와 자이건의 천막을 치웠다. 하지만 우리가 마차와 천막을 다 치우고 안심하고 관도 옆으로 몸을 옮겼을 때, 나타 난 일군의 무리들은 상황이 좋지 못했다. 50여명으로 구성된 일군의 무리들은 모두 말을 타고, 적갈색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갑 옷을 입고 있었는데 갑옷 위에는 촘촘하게 금속판을 붙여서 방어력을 높인 것이었다. 그리고 머리에는 투구를 썼지만 안면은 전체적으로 노출이 되어 있었고 지휘가 높아 보이는 인물들은 콧등과 광대뼈까지 가리는 보호대가 달린 투구를 쓰고 있었다. 지휘 고하를 막론하고 허리에는 검을 차고 있었고 지휘가 낮은 자들은 창 모양의 무기들을 들고 있었는데 그들 중 몇은 창 대 끝에 형형색색의 깃발을 달고 있었다. 깃발 끝에 달린 문양의 종류와 크기가 다른 것은 아마도 소속을 나타내는 것인 모양이었다. 그 리 고 제일 큰 깃발의 문양이 입국 증서 끝에 찍힌 도장의 모습과 같은 것으로 보아서 이 들은 천왕야라는 인물 밑에 있는 군졸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제일 앞에서 말을 타고 깃발을 들고 달려오던 한 사내(흔히 무리들이 이동하는 경우 에 앞에서 무리를 선도하며 정찰의 임무와 함께 무리의 이동을 알리는 인물이 앞장선 다.)가 관도 중앙에서 말과 함께 엄청난 속도로 튕겨져 나가는 불상사가 생긴 것이었 다. “어머! 어떻게 해요? 결계를 아직....” 수아가 소리를 질렀을 때에야 상황이 판단되기는 했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일은 벌어 진 다음이었다. 히히히히힝, “핫~!” 철퍼덕!! 떼구르르르 퍽! “크흑!” 상황은 간단했다. 결계에 부딛힌 말과 사람이 튕겨저 나가면서 말의 울음과 사내의 기합소리가 울렸고 사내는 튕겨지는 말에서 몸을 빼 내고, 바닥에 구겨진 말과는 달리 낙법 비슷한 모습 으로 관도 위를 굴렀던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그렇게 굴러서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 었으면 좋았을 텐데 미쳐 구르는 힘을 줄이기도 전에 관도 옆의 나무 둥치에 부딪힌 것이었다. “많이 아프겠다.” 수아의 걱정스러운 말이 있었지만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 소동으로 달려오던 일군의 무리들이 말을 멈추었고 호통이 터져 나왔던 것이다. “누구냐? 어떤 놈들이냐? 감히 관병을 습격하다니 간이 부은 녀석들이로구나!!” 질서 정연하게 말을 세운(상당한 속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선두의 한 명을 제외한 전원 이 안전거리에서 말을 세우고 사방을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시 말해서 엄청 훈 련 이 잘 된 무리들이란 말이다.) 무리들 중에서 보기에도 지위가 높아 보이는 사람(물 론 대장은 아닌 모양이다. 더 폼 나는 사람이 있다.)이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를 질렀 다. “어쩌지 오빠? 우리 나가서 상황을 설명해야 하는 거 아니야?” 수아가 다시 조그마하게 이야기 했지만 나는 망설이고 있었다. “아마도 저 사람들 천왕야인가 하는 사람 밑에 있는 무리들 같은데, 지금 나가서 상 황을 설명하면 이해를 해 줄까나? 걱정이네? 그냥 여기에서 버티고 있다가 들키면 그 때, 어떻게 해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주위에 쳐진 결계가 깨진 것도 아니니까 저들 이 우리를 발견할 수는 없을 테고 말이야.” 나는 오리발 작전을 펼치기로 했다. 상황이 좀 당황스럽게 되어버렸기 때문에 구구절절이 설명을 해야 할 형편이었지만 사실 잘못이 우리들에게 있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냥 모르는 척 하고 지나가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 사람들이 그냥 지나가 줄까요? 호호 우리야 숨어 있는 것이 어 려운 것은 아니지만 저 사람들이 계속 여기에서 우리들을 찾는다고 설치면 피곤할 텐 데..” 풍아는 밤잠을 계속해서 자지 못하는 것이 문제인 모양이었다. “뭐 숨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네요. 저 사람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상당히 급하게 길 을 가던 것 같던데.... 사.소.한. 문제로 여기에서 시간을 끌고 있을 것 같지는 않네 요.” 광아가 내 계획에 동참을 했다. “그래두. 우리가 잘못했는데,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사정을 설명하면 좋지 않을까 요?” 수아는 역시 천사표 발언을 하고 있다. 하지만 왠지 귀찮다는 생각에(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사악해 진 것일까?) 나는 우리 일행의 기척을 완전히 가리고 결계를 약간 보 완 해서 그 무리들로부터 일행과 마차를 숨겼다. 그들은 주위를 경계하며 몇몇의 인물들로 관도와 숲을 정찰하게 했지만 별다른 수확 이 있을 수 없었다. “관도 위에 이상한 벽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일종의 결계 같지만 저희들의 능력으로 는 파악이 불가능합니다. 다만 결계의 성격이 안쪽으로의 침입을 방어하는 것이지 공 격형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일정 범위 밖으로는 결계의 힘이 미치지 않고 있습 니다.” 처음에 호통을 쳤던 인물이 조금 더 화려해 보이는 복장을 하고 있는 인물(대장인 듯)에게 보고를 했고 그는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수염이 난 사람들은 저런 행동을 가 끔 한다. 흔히 생각에 잠긴다는 무언의 표현인 경우가 많다.) 고개를 숙이더니 곧 얼 굴을 들고 명령을 내렸다. “일단은 상황이 급하니 관도위의 결계를 우회해서 계속 달린다. 단 이곳에 제1부장 과 열 명의 병사를 남겨 수색을 하고 결계를 경비하라. 그리고 성으로 전령을 보내 술 사를 지원받아 결계를 파악하도록 한다. 우리들은 빠른 시간 안에 한타왕국의 여행자 라는 인물들의 신변을 확보하고 성으로 안내한다. 아마도 오래지 않아서 그들의 숙영 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행문촌에서 아침에 출발했다면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서 야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자. 그럼 출발!” 그와 함께 전령 하나는 오던 길을 되돌아 달렸고, 40여명의 군졸들은 대장의 지휘를 받아 관도 옆으로 우회해서 달려 나갔다. 그리고 관도 위에는 처음 호통을 쳤던 인물과 열 명의 병사들이 남았다. “이제부터 결계의 정확한 범위를 파악하고 일정한 간격으로 결계 주위를 경계한다. 누구도 결계 안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도록 하고, 또한 들어가지도 못하도록 해야 한 다. 결계는 7명이 지키고 나머지 셋은 주위를 정찰하라. 이상!” 제1부장이라는 그의 명령과 함께 일사분란하게 병사들이 움직였고, 우리들은 우리들 의 결계 안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음, 제법 머리를 쓰는 인물인 걸? 그나저나 저 사람들 우리를 찾아 온 사람들인 모 양이네? 무엇 때문에 우리들을 찾아 온 것일까? 아까 말을 들어보니 신변을 확보하고 행문성으로 안내 한다라고 했으니 어감 으로 봐서 적대적인 건 아닌 모양인데 말이 야.” 나는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거야 우리들이 이렇게 결계 안에 숨어 있다는 것을 모을 때의 이야기지. 클클 아 마도 이 사실을 알게 되면 태도가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는 일이지. 클클.” 지토 녀석이다. “그거야 들키지 않으면 되는 일이니까 걱정 없고. 일단은 우리들이 이 곳에서 무사 하게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겠지?” 나는 곧 우리 일행이 11명의 감시 속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고민했고 답을 얻었다. 일단 결계 밖의 인물들은 마법이나 결계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마법과 결계를 이용해서 벗어나기로 했던 것이다. “일단은 먼 거리는 어렵겠지만 내가 가까운 곳으로 이동해서 여기 있는 일행 모두 를 순간이동 시키는 것으로 하자. 일단은 내가 먼저 나가서 행문성 쪽으로 얼마쯤 이 동한 지역으로 너희를 순간이동 시켜 줄께. 가 본 적이 없는 곳으로 이동시키는 것은 쉽지 않으니까 내가 먼저 가야 한다는 건 다들 알지? 그럼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나는 일단 우리 일행들이 이동할 순간 이동 마법진을 그려놓고 경계를 서고 있는 병 사들 옆을 유유히 빠져 나왔다.(투명마법은 여러모로 쓸모가 있다.) 그리고 빠르게 신법을 전개한 나는 행문성 쪽으로 2킬로미터 정도를 이동하곤 관도 옆으로 일행들을 불러들였다. “하하. 이렇게 쉬운 것을... 하지만 앞으로는 관도 위에서 자는 것은 삼가야겠다는 깨달음을 얻었으니까... 하하. 자, 그럼 못 잔 잠이나 마저 자자.” 나는 그렇게 일행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물론 아침에 천천히 출발을 해서 가다 보면 행문성에서 나왔다던 그 인물들을 다시 만날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우리는 관도 위에서의 불상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 는 것이었다. 하하하 그리고 나는 일행들이 잠들기 전에 잠시 결계가 있는 곳으로 이동해서 우리들의 흔적 을 깔끔하게 지우고 결계도 해가 뜨는 시간쯤에 자연 해체 되도록 만들고 돌아왔다. 덕분에 우리들의 작.은.실.수.는 영원히 미궁속에 감추어지게 되었다. 하하하 다음날 아침 우리들은 지은 죄가 있는지라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식사를 마치고 관도 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언제 어제 그 무리들이 따라 올지 모르는 상황이라 도망을 가는 것이었다. 뭐 잡힌다고 해도 별로 문제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서 불편한 것이... 하하 하지만 우리의 이런 노력은 점심 식사를 마치고 다시 출발을 서두를 때 나타난 일군 의 무리들 때문에 허사가 되고 말았다. 점심을 막 마치고 자리를 정리하던 우리들은 하필이면 관도의 양쪽에서 달려오는 인 물들 사이에 끼어 버렸던 것이다. “이런 이런, 아무래도 이쪽 사람들은 행문성에서 오는 술법사들 같고, 이쪽은 어제 밤에 본 그 사람들이네? 그런데 숫자가 서른 남짓 되는 것 같네? 어쩐 일이래? 그 사 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어머? 정말이네요? 어제 50명 정도였는데 지금은 서른 정도뿐이네요? 무슨 일일까 요?” 수아가 내 말을 듣고는 궁금함을 비쳤다. “뭐 어제 밤에 대장이 똑똑 한 듯 하던데 가던 길에 또 인원을 나누어서 절반은 돌 아오고 절반은 행문촌까지 갔다 오는 것으로 했던 모양이지요. 그나저나 밤사이에 돌 아다녔으면 굉장히 피곤하겠군요.” 나와 수아의 말에 광아가 날카로운 분석을 내 놓았다. “뭐, 이제는 도망을 갈 수도 없는 것 같으니까 저 사람들을 맞이해 보자구. 하하 우 리가 무슨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말이야. 하하하.” 나는 조금 과장되게 일행들을 안심시키면서 다가오는 사람들을 기다렸다. 그리고 행문촌 방향의 서른 정도의 인물들과 행문성 방향의 여섯 명의 인원들이 거 의 동시에 우리 마차 앞뒤에서 멈추어 섰다. “거기 마차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 행문촌을 거쳐 온 한타의 여행자들인가?” 행문촌 쪽에서 온 사람들(어제 밤에 본 적이 있는) 중에서 제1부장이라고 불리던 인 물이 앞으로 나서며 물어왔다. 행문성 쪽의 인물들은 거리를 두고 서서는 아무 말 없이 사태의 흐름을 살피고 있었 다. “그렇습니다만, 행문촌에서 오시는 길이십니까? 란도암 분청장님이 저희 뒤를 따라 사람들이 올 거라는 말씀은 없으셨는데요?” 나는 아주 간단하게 우리 일행들이 그들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암시하면서 우리들 의 신분을 밝혔다. “아니오. 우리들은 행문성에서 당신들을 마중 나온 관병들이오.” 나는 그 부장이라는 사람의 말에 결정적으로 우리들이 빠져 나갈 길을 만들어 대답했 다. “예? 그럼 우리들이 길을 잘못 든 것인가요? 여러분들이 행문성에서 오셨다면 중간 에서 마주 쳐야 했을 텐데, 저희는 여러분을 만난 적이 없으니 길을 잘못 온 모양이 네 요. 하하 이런 이런...." 나는 일부러 난처한 듯한 표정으로 말을 했고, 분위기를 의식한 동생들이 함께 표정 연기에 동참을 했다. 하지만 역시 수아는 이런 면에서는 조금 느린 모양이다. 여전히 어벙한 표정이다. 그 나마 파울이 상황 설명을 하는 모양인지 가끔 고개를 끄덕이기는 한다. 이런 때에는 수아를 보면 조마조마하다. 하하 “그 점은 저희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점입니다. 길은 외길인데 서로 만나지 못하고 지나쳤다니 말입니다.” 지금까지 말이 없던 대장이 말에서 내려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그럼, 이 길을 지나치셨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럼 어제 밤에 저희가 잘 때에 지나가 신 건가요? 저희는 여기에서 반나절 정도 거리의 관도 옆에서 야영을 했었는데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우리가 밤을 지냈다는 흔적을 팍팍 남겨 놓은 두 번째 야영지를 떠올렸다. “저희도 이 곳으로 돌아오는 길에 여러분이 밤을 세운 듯 한 곳을 발견 했습니다 만, 분명 어제 밤에 지날 때에 확인을 했던 곳인데.... 이상한 일이지요.” 어째 대장이라는 인물의 눈빛이 빛나는 것 같지만 증거가 없는 이상에야 어찌 하겠는 가? 하하하 “그래요? 그것 참 이상한 일이군요. 어쩌면 저희가 일루젼 마법을 써서 야영지를 보 호했던 탓인지도 모르겠군요. 하하.” “하하, 그럴 수도 있겠지요. 아무튼 반갑습니다. 저는 행문성의 치안을 맡고 있는 행문군장 모리요타입니다. 행문성주님의 부탁으로 여러분을 행문성까지 모셔가기 위 해 서 출정을 했는데 길이 어긋나서 늦었습니다.” 아무래도 모리요타라는 이 인물은 보기보다 심기가 깊은 인물인 모양이다. 쓸데없이 신경전을 벌이는 것이 별 득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밤에 자신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밖으로 내비취지 않고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 일행들은 더욱 조심을 해야 한다. 절대로 밤에 있었던 일에 대한 어떤 언급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조금의 실수도 용납이 안 되는 것이다. 물론 나 는 빠른 시간 안에 간밤의 일을 이들 일행 중 누군가의 입에서 토해내도록 할 것이고 그 이후로는 우리 일행들은 조금 편하게 간밤의 일에 대해서 언급을 할 수 있을 것이 다. “아! 그러시군요. 란도암 분청장님이 행문성에 가게 되면 성주님이 우리들을 청하실 지 모른다는 말씀을 하시기는 했지만 설마하니 우리들을 마중오실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하하하. 그런데 저 쪽에 계신 분들은 같은 일행이신가요? 복장이 비슷하 신 분이 계시니 일행이신 것 같습니다만..” 나는 행문성 쪽에서 어정쩡한 모습으로 서 있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그들 중에 셋은 모리요타의 부하들과 같은 복장이었지만 다른 셋은 어떤 의미에서는 일상복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의식용 복장이라고 생각되는(흔히 소매가 넓고 길 고 머리에 쓸데없는 관을 쓰고 손에 상징적인 지팡이나 그에 준하는 홀을 들고 있는 모습)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 저들은 여러분을 좀 더 안전하고 편안하게 모시기 위해서 추가로 요청한 술사 님들입니다. 하하” 모리요타는 그렇게 슬쩍 난관을 넘어가려 했고 나는 거기에 ‘이 관도에 무슨 위험 이 많은 모양이지요? 저렇게 술법을 하시는 분들까지 모시고 오다니 말입니다. 우리 들 은 한 번도 위험한 상황을 맞지 않았으니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요?’라는 등의 말을 해서 행문군장이라는 인물의 비위를 긁어 볼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하다가 참아 주기로 했다. 괜히 성질 건들어서 좋은 것은 없는 것이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 “아! 그렇군요. 이런 고마우실 데가... 저희를 위해 이렇게 배려를 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하하 그런데 여기에서 행문성까지의 거리가 멉니까? 오늘 밤 전에는 도 착 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나는 그렇게 모리요타의 곤란을 건들지 않고 감사하는 쪽으로 환심을 얻으려 했고 모 리요타도 내가 곤란한 질문을 더 이상하지 않고 자세를 낮추는 것에 마음이 풀어진 모 양이었다. “하하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닙니다. 서둘러 간다면 태양이 지는 모습을 행문성 안에 서 감상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하하.” 행문군장 모리요타는 그렇게 내 말에 웃으며 답하는 것으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 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일군의 병사들 사이에 끼어서 행문성으로의 여정을 재촉했다.(이건 거의 모리요타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는 실제로 바쁜 일이 없었다.) 우리 일행의 앞뒤로는 병사들이 호위하는 형국으로 둘러싸고 있었고 마부석에 앉은 자이건과 나, 그리고 수아를 중심으로 풍아 광아 화아 지토가 양쪽에서 마차와 나란 히 달리는 모습이었다. “호호, 이렇게 사람이 많으니까 좋으네요. 우리가 무슨 대단한 사람 같잖아요? 호 호.” 수아가 옆에서 바람에 머리카락을 날리며 말했다. 사실 마차를 모는 일은 요즈음 자이건의 일이라서(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지토가 없으면 내가 몰아도 되는데..) 나와 수아는 자이건 옆에 서 나란히 앉아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중이었다. 모리요타와 제1부장이라는 사람은 앞쪽에서 병력을 인솔하고 꼿꼿한 허리를 하고는 잘도 달리고 있었는데 대화도 없이 말을 몰고 주위를 살피는 일에만 몰두하는 모양이 었다. “수아야, 우리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면 좋을까?” 나는 수아가 사람이 많은 것을 보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어디 나라를 세우든 영지를 가지든 세력이라는 것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하는 생각 말이다. 우리 여섯만 뭉쳐 다니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기는 한데... “응? 무슨 말이야? 많은 사람을 거느리다니? 호호 나라라도 만들 생각을 하는 건 아 니겠지? 높은 의자에 앉아서 사람들을 다스리는 그런 걸? 그럼 나하고 다른 오빠 언 니 들하고 지토는 어디 있어야 하는 거야?” 왠지 마지막에 힘이 빠지는 듯한 수아의 이 말은 나의 망상을 깨끗하게 날려 버렸다. “하하, 무슨 말이야? 나라를 세우다니. 그냥 수아가 사람이 많은 걸 보고 좋아하니 까 농담을 해 본 거지. 하하. 우리는 우리끼리 다니는 것이 좋잖아. 괜히 높은 자리 에 올라가면 할 일만 늘어나고 바쁘기만 하고 재미는 없을 거야 그렇지? 하하 걱정 하 지 말아라. 오빠는 그런 생각 절대 없으니까.” 나는 수아에게 이렇게 말하면서 생각한다. 간사한 인간의 마음이라고..흑흑 좀 전까 지만해도 한 번 해 볼까 하는 생각을 했으면서 아니라고 뚝 잡아 떼는 .... 어쩌랴 내 가 높은 자리에 있으면 수아는 어디 가냐고 묻는데 뭐라고 하리.... 그러는 동안에도 마차는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앞에서 달리는 수아와 지토의 말 엉덩이에 땀이 흐르는 것 같다. 정말 말 엉덩이에서 땀이 날까? 말이 한동안 뛰고 나서 몸에서 김이 나는 것은 본 적이 있는데... 엉덩이에 맺힌 땀 은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 보니까 달리는 말 엉덩이에 땀이 맺힌 것 같다. 하하하 마차는 넓은 관도를 통해서 숲과 들로 이루어진 벌판을 열심히 달렸다. 간간히 작은 새들이 놀라 숲을 흔들며 날아오르고 말발굽소리에 놀란 작은 짐승들이 길을 잘못 들어 관도 안으로 뛰어들었다가 후다닥 수풀 속으로 되돌아 뛰기도 했다. 여름을 향하는 계절의 변화가 오랜만에 눈에 들어왔다. 짙어지는 녹음과 뜨거워지는 햇살과 저기 앞에서 이글거리는 관도위의 아지랑이와 이 마위에서 바람에 씻기는 땀이 그런 계절을 알려주고 있었다. 아마도 이런 모습들이 이제야 눈에 들어오는 이유는 우리들의 일정에 신경을 쓰지 않 고 마음 편히 주위를 살펴 볼 수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마차는 이제 앞으로 보이는 고개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관도는 벌판을 가로 질러 벌판 끝 나지막한 산언덕으로 기어 오르고 있었고 우리들 은 이마 그 관도를 따라 잡아 산길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산길을 향한 관도는 폭이 좁아 졌고 덕분의 우리 일행의 행렬을 길게 관도를 따라 늘 어졌다. 그 때, 모리요타가 말의 속도를 늦추어 마차 옆으로 붙어 왔다. “하하. 이 산의 관도를 경계로 오른쪽은 천왕야의 영지가 아닙니다. 이런 상태가 산 을 내려간 후 얼마 동안 지속됩니다. 별 문제는 없겠지만 요즈음 정왕야와의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아서 간간히 마찰이 있으니 조금은 조심을 하셔야 할 거라는 말씀을 드 리 기 위해 왔습니다. 하하 하지만 너무 걱정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그냥 참고하시라는 말씀입니다. 하하” 나는 모리요타의 말에서 정왕야라는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 기억해 내었다. 천왕야와 함께 현재 누웬의 4대 세력에 해당하는 인물이란 것을 란도암에게 들은 적 이 있었던 것이다. “그럼 지금 이 관도의 오른쪽은 정왕야의 영지라는 말씀이군요? 그런데 영지의 접경 인데 별다른 경계가 없군요?” 나는 조금 느려진 마차의 속도로 겨우 모리요타에게 말을 걸 수 있었다. “하하 그건 아닙니다. 건너편에 보이는 저 봉우리에 정왕야의 경계초소가 있습니 다. 잘은 보이지 않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이 왼쪽 산봉우리 위에도 우리 경계 초소 가 있지요. 봉우리에서 주위를 살피는 것이 더 시야 범위가 넓어서 그렇게 초소를 만 들고 있습니다. 하하 허허 벌판에서야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다고 해도 이렇게 주위를 살피기 좋은 지역에서야 당연히 경계를 서야지요.” 모리요타는 자신이 정왕야 측의 병력들을 효과적으로 견제하고 있다는 것은 자랑이라 도 하고싶은 모양이었다. “하하. 그렇군요. 훌륭하신 판단입니다. 하하하.” 어째 내가 모리요타의 비위를 맞추고 있다는 생각이? 흐흠. “이런, 이런 별말씀을, 그렇게 보아주시니 감사합니다.” 모리요타는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다. 처음에는 냉정하고 상황판단이 빠른 인물이라 성격이 날카로울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성격도 좋고 능력도 있는 인물이다. 뭐 어차피 내 판단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 일행의 선두는 관도가 넘어가는 고개를 따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삐이이익--- 하늘을 선회하면 따르던 카다의 날카로운 울음이 들려온 것은 우리 마차가 고개를 막 넘어서서 밑으로 달려 내려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카다의 울음이 있자마자 풍아가 말을 달려 마차 옆으로 바짝 붙어 왔다. “오빠.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에요. 이 앞쪽으로 관도 양 옆에 사람들이 숲에 숨어 있는 것 같아요. 카다가 그 쪽에서 무기가 반짝거리는 것을 봤다는데요?” 나는 풍아의 말을 듣고 급히 반대쪽에서 달리던 모리요타를 바라보았다. 모리요타도 풍아의 말을 들었던 모양인지 얼굴빛이 변하고 있었다. “대장님도 아시는 일입니까? 혹시...” “아니, 무슨 말씀이요? 우리는 분명 당신들을 안전하게 모시고 오라는 부탁을 받았 을 뿐. 우리가 매복을 하고 습격을 준비할 일은 없습니다. 그런 오해를..” 모리요타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얼굴을 붉히며 소리를 질렀다. “아니 그게 아니라 대장님도 모르시는 일이라면 혹시 정왕야측의 군사들이 아닐까 하고 말씀을 드린 것인데...” 나는 급하게 변명을 했다. “으음. 흠흠. 이런 죄송합니다. 저는 그만...” 모리요타는 얼굴이 더 붉어졌다. “자자.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요. 이제 곧 선두가 매복지역을 지나가게 되는데.. 여기서 속도를 말을 세울 수도 없고 어찌하시렵니까?” 나는 상황의 타개책을 물었다. “이런 조금만 빨리 행렬을 멈출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하지만 이렇게 되면 전 속 돌파의 방법뿐이겠군요. 아무래도 적의 병력 수가 정확하지 않고, 또 우리 인원이 고작 40을 겨우 넘으니 방법은 그 뿐이겠군요.” 그 동안에도 마차는 달려 우리 마차가 매복병들이 있는 지역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 양쪽 숲에서 화살과 창이 날아들었다. “이런 과격한 인사로군. 수아 막아. 풍아 앞으로 가서 병사들을 보호하고 화아와 지 토는 뒤쪽에서 방어를 해.” 나는 급하게 마차 위로 뛰어 올라 균형을 잡으며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마차 쪽으로 날아오던 화살과 창들은 수아가 펼친 막에 의해 거의 막혀 버렸 다. 하지만 마차 앞에서 달리던 병사 둘은 화살에 맞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훈련을 잘 받은 모양인지 그 뒤를 따르던 병사들이 양쪽으로 둘씩 붙어 하나 는 말의 고삐를 잡고 한 사람은 화살에 맞은 병사를 끌어 자신의 말안장 뒤로 끌어 올 렸다. 화살에 맞은 병사들도 죽은 것은 아닌 모양인지 동료 병사가 이끄는 데로 몸을 옮기 기 쉽게 움직여 주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병사와 함께 화살을 맞은 말은 곧장 다른 병사에 의해 관도 밖으로 옮겨졌다. 이런 과정이 양쪽에서 화살이 날아오는 속에서 참으로 신속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정말 훈련이 잘 된 병사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앞으로 달려가는 풍아가 날아드는 활고 창들을 해결해 준 탓인 지 희생자는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행문성에서 나온 술사라는 인물들도 처음 공격에 당황한 듯 했지만 곧 방어 를 시작했기 때문에 희생자는 더 이상 없었다. 나는 급하게 적들이 매복한 양쪽 숲으로 아이스 애로우를 날려 보냈다. 추적 옵션이 없는 것들이라 한 번에 40 - 50개 정도의 얼음화살들이 양쪽 숲으로 날 아들었다. 숲 속에서는 몇 번의 비명이 들려오고 당황한 기척이 느껴졌지만 나는 계속해서 얼음 화살을 날리며 우리 쪽으로 날아오는 화살과 창의 수를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풍아 수아 그리고 화아, 지토가 일행들의 중간 중간에서 적의 원거리 공격을 막으며 속도를 올려 매복을 통과한 우리들은 산길을 미친 듯이 달려 내려갔다. 삐이이익--- 다시 한 번 카다의 울음이 들리고 풍아가 앞에서 소리를 질렀다. “전방 양쪽 산기슭에서 일단의 기마병 출현. 관도위에는 장애물 발견.” 간략하게 상황을 보고하는 풍아였다. “지토, 앞으로 가서 장애물들 해결 좀 해줘. 빨리. 그리고 화아가 앞쪽으로 가서 풍 아와 함께 양쪽에서 오는 기마병들을 좀 막아. 급하면 환수들을 써서라도 병사들이 다 치지 않도록 도와줘.” 내 말에 화아와 지토가 앞으로 나갔고 게브를 탄 지토는 그 작은 몸에 당나귀를 타 고 바람같은(?)속도로 우리 일행을 앞서 나가 장애물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양쪽 기마대를 향해서 날아가는(아눈은 뛰어가야 하는데... 환수라고 어기적 어기적 거리는 모습으로 날아간다. 우째 저런 일이) 카다와 아눈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역시 아눈은 멀리 날지는 못했다. 하하하. 얼마 가다가는 기어가기 시작한 다. 크흐흐 하지만 아직 우리들의 눈에는 기마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양쪽 산기슭 에 가려 있는 것이다. “전속으로 달려라. 우리의 임무는 안전하게 신변을 보호하는 것이지 전투가 아니 다. 그리고 루탄님 환자들은 죄송하지만 마차에 좀 태워 주셨으면 합니다.” 모리요타는 아무래도 환자를 말의 등에 달고 가는 것은 말의 속도에도 환자에게도 좋 지 않다고 판단을 한 모양이었다. “물론이지요. 어서 이리로..” 내 허락과 함께 병사들을 뒤에 싣고 달리던 두 기마병은 말을 마차 옆으로 몰아왔 고, 나는 달리는 줄에 마차위로 병사들을 끌어 올렸다. 양쪽에 발을 디딜 받침대가 있었기 때문에(조리대하고 세면대를 밟고) 병사들을 마 차 지붕으로 끌어 올렸던 것이다. 튼튼하다 조리대 세면대.(역시 부실시공은 아니었어.) 수아는 마차로 끌어 올려진 병사들의 상태를 먼저 살폈다. 한 사람은 갈비뼈 사이에 화살이 들어가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목에 화살이 박혀 있었다. 그나마 목에 박힌 화살이 목의 바깥 부분을 관통하고 있어서 목숨을 잃지는 않은 것 같았다. 수아는 목에 화살을 맞은 병사에게 가서는 급히 화살을 제거하고(관통한 화살은 부러 뜨려서 빼는 거지만 수아는 상처에 충격이 가지 않게 잘라내고 제거했다.) 치료 마법 을 걸었다. 순식간에 피가 멈추고 상처가 지혈되었다. 나는 그 사이에 갈비뼈 사이로 화살이 들어간 병사를 살피고 있었다. 그러면서 어떻게 수아가 뭘 했는지 아느냐고 묻지 마라. 그냥 안다. 옆구리의 화살은 그냥 뽑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했다가는 엄청난 일이(화살촉에 내 장기관이 상하고 어쩌면 걸려 나올지도 모른다.)벌어질지도 몰랐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혈들을 짚어 피의 몸의 활동을 정지시켜 놓았다.(완전 정지가 아니라 진행을 느 리게 하는 것이다. 신체의 모든 활동의 속도를 거의 멈추는 것처럼 만들어 놓는 것인 데 예전에 냉동인간 만들었던 것과 비슷하다. 물론 그 보다는 훨씬 생명활동이 왕성 한 상태로 만든 거지만) 그리고 나서 나는 수아와 병사들을 모두 마차 안으로 텔리포 트시켜 버렸다. “수아는 안에 들어가서 환자들을 잘 돌봐. 앞으로 얼마나 더 환자들이 나올지 알 수 가 없으니까 말이야.” 나는 그렇게 수아를 마차 안에 들여보내기 전에 말했고 수아는 빙긋 웃으며 “응, 오빠 나 최선을 다해서 치료 할게.”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나중에 치료를 해야 할 환자들은 내가 이렇게 만들어 보낼 테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나는 혈을 짚어 놓은 환자를 가리키며 일러주고는 수아들을 들여보냈다. 그리고 그 동안에 지토는 장애물이 있는 곳을 갈아엎어 버리고는 그 위로 길을 내었 고 주위에서 숨어서 우리들을 기다리던 일군의 병사들과 드잡이질을 하고 있었다. 카다와 아눈 역시 양쪽에서 달려오는 기마병들을 막고 있었지만 풍아와 화아가 사람 을 죽이지 말라고 했던 모양인지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모리요타 대장님 서둘러 여기를 벗어나야 합니다. 양쪽 기마병의 수가 거의 500씩 입니다. 양쪽을 합하면 1000명의 기마병인 셈입니다. 대장님이 되었든 저희 일행이 되 었든 정왕야라는 인물이 상당히 높게 평가하는 모양이군요. 겨우 40명을 상대하기 위 해서 1000명의 병사들을 보내다니 말입니다.” 나는 앞에서 병사들을 독려하는 모리요타 대장에게 소리를 질렀다. 내 소리에 잠시 고개를 돌렸던 대장은 다시 병사들을 독려했다. 어느 틈에 제1부장이라는 인물은 행렬의 후미에서 병사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빠르게 지토가 싸우는 곳을 통과했다. 그 사이에 벌써 매복했던 인물들 은 상당히 정리가 되어 있었다. 그러면서 놀란 것은 지토가 둘이라는 사실이었다. 게 브가 지토로 변했다는 것은 우리가 지나가고 지토가 따라오기 위해서 게브의 등에(지 토가 지토 등에 탄줄 알았는데 금방 당나귀로 바뀜) 탔을 때에야 알 수 있었다. 뭐 열심히 달리는 사람들은 그런 것에는 별로 신경을 안 쓴 모양이지만 제1부장은 지 토가 지토 등에 탈 때 잠깐 휘청거린 것 같았다.(분명히) 우리들이 지토와 함께 장애물이 있던 곳을 지나가고 나서 잠시 후에 우리들을 잡으려 는 양쪽 기마병들이 관도에 도착을 했다. 카다와 아눈이 기마병을 막은 덕분에 우리가 포위를 당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제법 쓸만한 녀석들이다. 적 기마병들의 복장은 우리 쪽 병사들과 별 차이가 없었지만 대신에 가슴쪽에 이상 한 형상(꼭 기린같은)을 그린 흉갑을 입고 있다는 것이 차이가 있었다. 아무래도 정 왕 야의 문양이 저 기린같은 동물인 듯 했다.(여기서 기린은 목이 길어서 슬픈 짐승이 아 니다. 상상의 동물이다. 기린은 중국전설에서 성왕(聖王)의 치세(治世) 때만 나타난 다 고 하는 상상의 서수(瑞獸)이다. 산 풀을 밟지 않는 어진 짐승으로, 형상은 사슴의 몸 에, 소의 꼬리, 이리의 이마, 말의 굽을 가지며 머리에는 살로 된 뿔이 하나 나 있 다.) 매복을 위한 것이었는지 깃발을 든 병사는 없었다. 다들 창과 칼로 무장을 한 상태였 고 역시 지위를 구분 할 수 있는 것은 들고 있는 무기와 머리의 투구나 어깨를 감싸 는 보호대를 제외하면(거의 전부인 듯, 한마디로 삐까번쩍한 놈이 지위가 높은 놈이 라 는 말이 된다.) 별로 없었다. 하지만 우리 일행의 앞이 더 이상 막히는 것이 없다면 별 걱정은 없을 것 같았다. 뒤 에 따라 오는 녀석들은 간간히 카다가 번개로 지지고 지토가 땅을 흔들고 해서 접근 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장님 별 걱정 없겠네요. 이렇게 뒤를 따라 온다면 우리에게 접근은 불가능합니 다. 저렇게 막는다면 말이죠.” 나는 어느 틈에 옆에서 말을 달리는 모리요타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렇겠지요. 하지만 전체적으로 우리 일행의 속도가 마차 때문에 느려서 잘못하다 가는 포위를 당하는 수도 있겠습니다. 그게 문제지요.” 대장은 아무래도 뒤의 적들이 양쪽을 날개를 펼쳐서 감싸듯 포위를 하는 것을 걱정하 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우려는 현실이 되고 있었다. 일정한 거리 이상을 좁히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자 적 기병들이 양쪽으로 날개를 펼 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까처럼 산지였다면 불가능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완전한 초원지역이었다. 어디 하 나 가릴 수 있는 곳이 없었고 말이 달리지 못할 곳이 없었다. 지토가 나름대로 방어를 한다고 하기는 했지만 멀찍이 마차에서 떨어져서 포위를 하 는 적들의 움직임을 지토가 막을 수는 없었다. “이런 이러다가는 정말로 포위를 당할지도 모르겠군요.” 나는 조금 걱정되는 목소리로 모리요타에게 소리쳤다.(달리는 중이어서 소리를 지른 거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뚜렷한 방법이 없으니 어쩌겠습니까? 최대한 속도를 내어야지 요. 저 앞에 강이 있습니다. 그 강과 관도가 만나는 곳 부터는 천왕야님의 영지밖에 없으니 저들이 그 곳 안으로는 들어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곳에는 상비군이 200여명 있고 작은 토성도 있으니 방비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 곳까지만 간다면 말 입니다.” 모리요타도 마주 소리를 질렀다. 앞쪽에 토성이 있다라.... 그 곳까지만 간다면 무사할 수 있을지.. “루탄경, 아무래도 그 곳까지 가기는 어려울 듯 합니다. 저들이 벌써 거의 포위를 만들고 있으니 말입니다.” 모리요타가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루탄경이라? 처음부터 모리요타는 나나 우리 일행을 부르는 것을 자제해 왔었다. 겨우 당신들이라는 정도의 표현이나 여행자 일행이라는 표현이 전부였던 것이다. 나는 아마도 모리요타가 우리를 부를 마땅한 호칭을 찾지 못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 었다. 낮추어 부를 수도 없고, 높이자니 자존심 상하고 뭐 그런... 그런데 방금 그가 나에게 루탄경이라 부른 것은 우리들이 지금의 도주 상황에서 상당 한 전력을 보였기 때문으로 보였다. 아무튼 루탄 경이라, 듣기에 나쁘지 않은 호칭이다. 그럼 나도 그 보답을 해 줄까? 역시나 사람은 능력이 있어야 대우를 받는다. 나는 흐뭇한 웃음을 짓고 우리 앞으로 천천히 포위를 형성해서 양쪽에서 앞쪽 관도 를 향하는 기마병을 향해 마법을 시전 했다. 양쪽으로 각각 세 개씩의 파이어볼을 날려서 적의 앞을 가로 막은 것이다. 포위를 좁히려는 앞 쪽으로 떨어진 파이어볼은 깊은 웅덩이를 만들었고 상당한 기병 들이 웅덩이로 굴렀다. 제발 죽는 사람이 없기를... (하지만 확인은 불가능했다.) 나는 그 구덩이에 빠진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에서 위안을 삼았다. 뭐 보지 못했으니 죽었는지 어쩐지는 모르지만 내가 사람을 공격하려 한 것은 아니라 는 위안을 했다. 하지만 그런 나의 공격 때문에 적의 포위가 잠시 주춤했고 그 사이에 나는 지토를 앞으로 보낼 수 있었다. “지토와 화아가 앞쪽의 기병대가 우리를 포위 하는 것을 막고 풍아가 뒤쪽으로 따르 는 병사들을 막아.” 곧 지토와 화아가 앞쪽으로 나갔고 풍아가 뒤를 맡았다. 그러고 보니 이런 싸움에서 광아는 별 도움이 안 되고 있다. 환수도 없고, 대인 원거리 공격을 능숙하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그래서 아까부터 마차 옆에서 말을 몰면서 침울한 표정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광아를 어디 보낼 수도 없다. 쩝... “광아, 너 마차에 들어가서 수아 좀 돌봐 줄래? 아무래도 혼자 환자와 있으니 까...” 나는 좀 작은 소리로 광아에게 말했고 광아는 마차에 말을 묶고 마차 안으로 들어갔 다. 들어가서 무슨 생각을 할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할 일을 줬으니 다행이다. 빨리 광아 도 환수를 하나 가져야 할 텐데... 화아와 지토가 앞에서 기병들이 포위를 막고 있는 사이에 방어가 허술해진 양 옆에 서 가까이 다가온 기병들이 석궁(활이 아니라 석궁이었다.)을 쏘았지만 대부분은 행 문 성의 술사라는 인물들의 방어에 막혔고 곧 이어진 내 공격에 다시 멀찍이 멀어져야 했 다. 그렇게 초원을 15분 정도 달렸을 때 오른쪽으로 강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 강과 관도가 만나는 부근에 토성이 있습니다. 그 곳까지만 간다면 저들도 더 이 상 쫓아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동안 그 추격전은 계속 되었지만 모리요타의 말 대로 우리들 앞에 작은 토성이 보 이기 시작하자 적 기병들의 속에서 뿔피리 소리가 들리며 기병들의 속도가 느려졌다. 우리는 그 무리들을 뒤로 하고 토성을 향해 말을 몰았다. “대장님 여기서 행문성이 멀지 않다면 그냥 행문성으로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 다. 어차피 이 성의 병력이 200이라면 적들이 1000명에 해당하니 수성이라고 해도 인 원이 넉넉하지 않을 것이고 괜히 전투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니 그냥 행문성으로 곧 장 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나는 모리요타에게 말했고 모리요타도 그 생각이 옳다고 여겼는지 뒤를 따르던 전령 을 불러 무어라 이야기를 하고는 전령을 앞서 보냈다. 앞선 전령은 선두의 인솔병에게 무어라 하고는 말을 몰아 토성 쪽으로 갔고, 인솔병 은 토성을 오른쪽에 둔 방향으로 일행의 방향을 정하는 듯 했다.(아마도 모리요타는 토성의 병사들이 걱정된 것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적절한 대응책을 말했을 것이고, 선 두의 인솔병에게는 진로 변경을 명령했을 것이었다.) “이봐 제1부장, 부장 이리로 와.” 큰 소리로 부장을 부른 모리요타는 다시 부장에서 무어라 하곤 부장을 토성쪽으로 보 내었다.(아무래도 토성의 지휘를 제1부장에게 맡긴 모양이다. 전령만 보내기에는 불 안 했나?) 그리고 우리 일행은 속도를 늦추지 않고 행문성을 향해 달렸다. 우리 등 뒤의 적들은 더 이상 우리를 따라 오려는 시도를 하지 포기한 모양이었다. 그 후로도 우리는 카다를 정찰병으로 날려 두고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길 때 까지 달렸 다. 그리고 더 이상 적의 추적이 없다는 것을 확신한 이후에 우리들은 속도를 늦추었고, 나는 마차 안으로 들어가 환자를 살폈다. 목에 부상이 있던 환자는 마차의 속도가 느려지자 마차 밖으로 나가고 싶다고 해서 밖으로 내 보냈을 정도로 상태가 호전되어 있었고(말을 타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에 자 이건 옆에 앉아 가도록 했다.) 점혈을 당한 환자가 내가 손을 보아야 할 환자였다. 수아와 광아는 창문을 통해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있었기에 따로 설명을 하 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오빠, 이 사람은 어떻게 할거예요? 지금 치료하실 건가요?” 수아가 죽은 듯 누워있는 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글쎄. 마차 안은 흔들림도 별로 없으니까 지금 시작을 해 볼까하는데... 나중에 피 냄새가 마차에서 좀 날까? 그래도 너무 오래 이렇게 두는 것도 좋지 않으니까 말 이 다.” “그래요. 그럼 제가 도와드릴게요. 어서 치료를 해요. 네?” “그러죠 형님. 저도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돕겠습니다.” 수아도 광아도 마차 안에서 피 냄새가 날거라는 소리는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다. 하 지만 난 싫은데... 뭐 그래도 사람 목숨이 더 중요한 것이지... 나는 일단 환자의 옷을 벗기고(물론 상처 부위로 보아 하의를 벗길 일은 없다. 수아 도 있는데....) 상처를 살펴보았다. 화살은 불행하게도 갑옷의 봉재선(가죽 끈으로 엮은 부분)의 허술한 틈으로 끼어 들 어가 별다른 저항 없이 갈비뼈 사이로 박힌 모양이었다. 화살의 반 이상이 들어간 것으로 보아서 거의 관통에 가까운 상처였다. (석궁 화살 과 보통 화살은 길이가 다르다. 이건 석궁이 아니다. 상당히 길다.) “이 화살을 어쩌나? 그냥 뽑아 낼 수는 없고, 그렇다고 수술을 할 수도 없고...” “그렇군요. 형님 이거 난감하내요. 어떻게 하죠?” “오빠? 방법이 없을까?” 우리는 환자를 가운데 두고 앉아 상처를 살폈다. “형님. 이거 그냥 이쪽을 잘라버리고 반대쪽으로 관통을 시키는 것이 어떨까요? 어 차피 이 쪽으로 뽑는 것 보다는 그 쪽이 상처가 덜 할 것 같은데요?” 광아가 그런 제안을 했을 때, 상당히 무식한 방법이지만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 도 들었다. 나는 차라리 관통이면 훨씬 더 좋은데.. 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냥 관통을 시켜 버릴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하하, 역시 광아는 상황 판단이 빠르고 차분하구나. 하하 그런 방법이 있었군.” 나는 수아가 멍- 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중에 수아의 “어, 어, 어!” 하는 소리를 들으며 화살을 병사의 반대편으로 관통 시켜 버렸다. 혈도를 집힌 병사는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잔 떨림은 있었지만 모르는 척) 그리고 반대편 깃털 부분을 잘라버리고 화살을 통과 시키고 난 후에는 빠른 속도로 치료가 진행되었다. 다행히 속의 내장이 관통되기는 했지만 이물질이 내장 밖으로 나와서 복중에 쌓인 것 은 거의 없어보였고(투명화 마법으로 살펴본 바에 의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수아의 치료 마법은 거의 부활 수준이라 외상에 대해서는 무적에 가까웠다. 떨어진 팔다리도 붙이는데... 이 정도는 문제도 아닌 것이지... 그런데 팔다리 재생은 될까? 내가 아 는 마법으로 팔뚝이나 발 정도는 재생이 가능한데... 수아는 어느 정도 되는지 알 수 가 없네? 그러고 보면 우리 일행이 크게 다친 적이 없구나. 하하. 그렇게 치료를 마치고 나서 혈도가 풀린 병사는 곧 정신을 차렸다. “으흠. 여기가...” “호호, 여긴 저희 마차 안이에요. 상처가 심하기는 했지만 이제는 괜찮을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호호. 일주일 정도만 요양을 하면 예전과 같이 건강해 질거예요. 호 호.” 수아가 병사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병사는 가까이에서 본 수아의 얼굴에 더 충격을 받은 듯이 멍~한 얼굴이 되 어 있었다. “어? 이봐요? 어디 아파요? 치료는 잘 했는데? 이상하네? 어디가 아픈 거예요? 네?” 수아는 병사의 그 멍~한 얼굴이 아파서라고 오해한 모양이지만 나나 광아는 대충 짐 작하고 수아를 끌고 마차 밖으로 나왔다. “이봐. 이대로 누워서 좀 쉬라고. 괜히 여기가 어딘가 돌아다니지 말고 말이야.” 나는 그렇게 말하곤 수혈을 눌러 잠을 재우고 나왔다. 저 놈이 마차 안을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뒤지면 골치 아프다. 마차는 그 사이에 어느덧 강을 왼쪽으로 두고 있었다. 마차 안에서 치료를 하는 동안 에 강을 건넌 모양이었다. 그리고 벌판도 이제는 초지로만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목책과 말뚝으로 경계가 나뉘 어져 있었고, 군데군데 경작의 흔적이 보이는 밭이 보였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지만 경작의 흔적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성이 멀지는 않은 모양 이었다. 적어도 걸어서 한 시간 이상의 거리(약 4Km)에 농지를 가지는 것은 여러모로 힘겨운 일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자세히 보니 경작지는 흔적만 있을 뿐, 농작물을 심은 것 같지는 않았다. 벌써 여름이 가까운데 저렇게 두었다는 것은 농사를 짓지 않는다는 말과 같았다. “루탄경, 경의 일행들 덕분에 이렇게 무사히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하하. 안전 하게 호위를 하려고 가서는 호위를 받아 온 것 같아서 면목이 없습니다.” 옆으로 말을 몰아 다가온 모리요타가 조금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건네왔다. “하하. 무슨 그런 말씀을, 그게 어디 저희만의 힘이었습니까? 대장님과 저 병사들 과 술법사님들이 힘을 합한 것이지요. 하하 모두가 도운 덕분이란 걸 대장님도 잘 아 시면서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시는군요. 하하.” 나는 마부석 옆으로 다가와 말을 모는 모리요타에게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 다. “하하. 역시 루탄경은 대인입니다. 그리 말씀을 하시다니...” 음, 이제 모리요타는 완전히 나에게 승복을 한 모습이다. 하하 깍듯한 존대가 마음 에 든다. 처음에는 어정쩡해서 기분을 건들더니.... “그런데 농지에 농사를 짓지 않았군요? 이상하네요?” 나는 말을 바꾸기 위해 대장에게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아네. 그건 이쪽이 정왕야와의 전장이 될 확률이 높아서 성주의 명으로 성의 서쪽 과 북쪽으로 경작지를 옮긴 탓입니다. 농지가 부족한 것도 아니니 될 수 있으면 피해 가 적을 곳으로 옮긴 것이지요.” “아~! 그렇군요.” 나는 그렇데 건성으로 대꾸하면서 성주라는 인물도 상당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 다. 그 정도로 백성을 생각하고, 앞날을 대비하는 인물이란 흔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주위를 살피는 동안에 마차는 관도를 끊임없이 뒤로 밀어 보냈고, 나는 한참 후 모리요타에게 물었다. “대장님, 그런데 행문성은 아직입니까? 제법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요? 중간에 그렇 게 열심히 달렸으니 도착을 할 때도 된 것....” 나는 그렇게 말하며 관도 앞으로 바라보다 말을 끊었다. 관도 멀리에 희미하게 성곽이 드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성 쪽에서는 길~게 징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태양이 성곽 위에 있어 역광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성곽은 그리 멀지 않은 곳 에 있었다. 더구나 완만한 고개를 오르고 있었던 모양인지 성의 모습은 우리가 앞으 로 갈수록 불쑥불쑥 솟아나는 것 같이 커져만 갔다. 성의 모습은 예상했던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성의 모습이 아니라 중세 서양식의 성의 모습이었다. 다만 그런 성문 위에 누각 형태를 올린 것이 다른 점이라면 다른 점이었는데, 가까 이 다가갈수록 그 누각조차도 목조가 아닌 석조로 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성벽에서 20미터 정도는 깊게 파서 해자를 만들어 놓았다. 물이 우중충한 것 이 아닌 것은 아마도 어디선가 흘러 들어와서 흘러나가는 모양이었다. 성문에 가까워지자 성문 앞을 지키는 경비병들과 성벽 위의 망루에서 경비를 서던 병 사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망루에 놓여진 커다란 징과 북도 볼 수 있었다. 아마도 우리가 고개위로 나타났을 때, 망루에서 징을 울린 모양이었다. 그럼 북은 적군이 나타났을 때 울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가까이 가 보니 이상하게도 성문으로 통하는 길은 들어 올릴 수 있는 다리가 아니라 그냥 석조 다리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럼 해자가 무슨 소용인지..... 혹시 적을 성문 쪽으로 유인하려는 것인가?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우리 일행들은 성문에서 어떤 조사나 확인도 없이 그대로 행문성 동문이라 쓰여진 성 문을 지나 성 안으로 들어갔다. 성안의 모습은 행문촌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반대편으로 곧게 뻗은 대로가 성 안을 나누고 있었고 넓은 대로 양쪽으로 초가집은 보이지 않고 모두가 기와로 만들어진 집 들이 늘어섰다. 그리고 그런 집들 대부분은 상점의 역할을 하는 듯 좌판을 조금씩 앞으로 펼쳐 놓고 있었다. 우리들은 멀리 보이는 성의 서쪽 문을 향해 마차를 몰고 있었다. 하지만 그냥 대충 봐도 우리의 목적지가 성의 중심에 5층으로 지어진 누각이란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모양이 조금 일본의 황성을 기억나게 만드는 모양이다. 삐죽삐죽 튀어나온 거 슬리는 모양의 기와들 때문인가?) 그 누각은 다시 높은 대문을 가진 벽 안에 있었는데, 가까이 가 보니 대문에 달린 편 액에는 행문성본청이라 적혀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도 역시 커다란 문을 통해 마차를 탄 그대로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본청 안 마당(마당이 아니라 운동장이다)에서는 마차에서 내려서 두 번째 대 문을 지나 본 건물로 가야 했다. 여기에서 나는 마차에 타고 있던 환자를 깨워 모리요타에게 넘겨주었다. 상태를 이야기 해 주고 일주일 정도 요양을 하면 될 것이라 말했더니 상당히 놀라는 눈치였다. 그런 사소한 일을 마무리 하고 우리들은 본청의 건물 안으로 안내 되었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성주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하고 나오겠습니다.” 처음부터 느낀 것이지만 성주의 부탁을 받았다느니 혹은 지금처럼 성주에게 이야기 를 하겠다느니 하는 표현을 쓰는 것으로 보아서 모리요타라는 저 인물은 거의 성주와 동급인 인물인 모양이다. 어째 그런 인물이 우리를 호위하는 일을 하게 되었을까 짐작이 안가는 일이다.(물론 무지 궁금하다.) 모리요타는 우리를 방에(이걸 방이라고 해야 하나? 탁자가 놓여있고 의자가 있는 분 위기니 사무실이라고 해야 하나?) 안내하고는 간단히 그렇게 이야기하고는 사라져서 는 좀처럼 올 생각을 않았다. 심심했다. 우리들은 의자에 앉았다가 일어났다가 벽에 붙은 그림(입구 문을 제외한 삼면에 그림 이 붙었다.)을 구경하다가 다시 의자에 앉았다가 하면서 정신이 없었다. 그런 중에서도 침착한 것은 자이건이었다.(물론 이건 침착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들 이 조금 활달한 것이다.) 물론 나와 지토도 나름대로 조용히 있기는 했지만, 나중에는 모두들 벽을 긁는 사태 가 생겼다.(자이건은 여전히 팔짱을 끼고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일어나지 않았다.) 뭐 솔직히 좀 과장되기는 했지만 그렇게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는데 드디어 몇 사람 의 발소리와 함께 모리요타가 돌아왔다. 하지만 기다리던 성주는 보이지 않고 뒤를 따라 온 것은 일곱 명의 시녀들이었다.(어 떻게 시녀인줄 알았냐구? 그거야 척하면 착이지만. 수건 비슷한 것을 팔에 두르고 고 개를 숙이고 있는 것이 그럼 성주겠어?) 그리고 우리들은 그 시녀들을 따라서 거처로 안내 되었다. 다행인 것은 수아와 풍아 가 여자라고 우리와 떨어진 거처를 주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랬다면 절대로 그냥 안 넘어 갔을 텐데... 다만 수아와 풍아의 방이 끝 쪽에 있어서 중앙 쪽으로 바꿔달라는 소란이 있었다.(물 론 수아와 풍아가 아니라 오빠들이....) 가운데 있어야 안심이 된다는 것인데, 시녀들은 간단하게 “방은 어디를 쓰셔도 상관없습니다.” 라는 말로 우리를 허무하게 했다. 그리고 우리들은 여섯 개의 방이 나란히 있는 객청에 자리를 잡았고, 나를 따라 들어 온 시녀는(솔직히 못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예쁜 동생들만 봐서, 그리고 아세트도 그 렇고..) 성주가 저녁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일행들을 그 시간에 편안하게 만나고 싶어 한다는 말을 전했다. 그리고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하다는 말도 함께 전하라 했단다. 뭐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뭐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 렇. 지. 만. 이건 뭐냐구?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시키는 것이냐구. 목욕? 그래 목욕하라고 해서 내가 몸에 클리어 마법 써서 깨끗하게 했잖아. 그런데 왜 꼭 물 속에 들어가야 한다는 거냔 말이야. 그리고 왜 이런 자리에 시녀가 있겠다는 것이냐구. 내가 열 한 두 살 먹은 어린아이라면 그나마 이해를 한다. 나 이렇게 보여도(이십대 초반으로 보인다.) 나이가 살아온 정신 차리고 산 날만 따 진다고 해도 40대에 가까운 나이인데 지금 목욕을 시킨다는 것이야? 나는 황당함에 어이없음에 짜증에 두려움(?)에 시녀를 방 밖으로 끌어내고 나 혼자 목욕을 하겠다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하겠다고 했으니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옷을 벗는데 시녀가 또 다시 들어왔 다.(옷은 상의 조끼를 벗은 것뿐이다. 상상하지 말아!!) “또, 뭐냐? 왜 또 들어온 거냐구?”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고 목이 자라목이 된 시녀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어서는(혹시 내가 옷을 덜 벗어서 억울해서 그런 것일까?) “여기 이 옷을 입고 저녁식사에 참석하시라는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하면서 푸른색으로 된 옷을 방안의 작은 탁자 위에 올려놓고 서둘러 문을 열고 나갔 다. 참, 우리가 배정 받은 방은 한 칸짜리 방이다. 뭐 잠을 자는 침대 쪽에는 커텐인지 발인지로 가릴 수 있게 되어 있었지만 나머지는 통으로 된 방인 것이다. 그럼 나는 지금 어디에서 목욕을 하려는 것이냐고? 그게... 목욕통이다. 나무로 둥글게 만들어진 목욕통. 이런 면에서는 참 구식인 곳이다. 나는 정말 목욕을 하겠다는 생각을 바꾸어서 시녀가 가져다 준 옷으로 갈아입기로 했 다. 물론 이번에는 문에 마법을 걸고 방안을 들여다 볼 수 없도록 차단 마법을 걸고 옷 을 갈아입었다.(그런데 어디선가 한숨 소리가 들린 듯한....) 시녀가 가져다 준 옷은 그리 불편하지도 않았고 낯이 설지도 않았다. 뭐랄까, 개량 한복과 같은 모양이라고 해야 하나? 품이 넓고 소매도 넓고 동정 비슷한 것이 깊이 패인 목선을 따라 달린. 많이 바뀌기는 했지만 한복의 냄새가 나는 옷이었다. (그러고 보면 술법사라던 그 사 람들이 입고 있던 옷도 중국의 도가 계열의 인물들이 입던 옷과 닮아 보였다는 생각 이 든다.) 나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번개 같은 환복만이 내 몸을 지킬 수 있는 길이라는 퍼 걱.) 미러 마법으로 모습을 비추어 보았다.(여긴 벽거울이 없다.) 푸른색 개량한복을 차려입고 발목에 대님까지 맨 듯한 모습으로 폭 넓은 바지를 입 은 모습에 종아리에 이르는 머리카락을 뒤로 묶고 있는 늘씬한 모습. 흠, 정말 몸이 재구성된 이후로는 어디 흠잡을 곳이 없이 멋진 모습이다. 예전에는 못생기지 않았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전부였(아니다 가끔 잘 생겼다는 소리도 들었다 는)는데 말이다. 푸른색 한복과 팔목에 채워진 쌍환검의 비취색이 너무 잘 어울렸다. 그리고 화아 등이 빠져나온 반지의 색도 푸른색이어서 조화가 잘 맞는 것 같았다. 그렇게 차려 입은 나는 문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복도에 모여서 머리를 마주대로 궁시렁거리는 화아들(지토, 광아, 자이건까 지)을 볼 수 있었다. 지토는 갈색, 광아는 흰색, 화아는 붉은색 자이건은 무늬가 있는 개량한복(?)을 차 려 입고 있었다. 색깔만 다를 뿐 다른 것은 꼭 같은 옷이었다. 아마도 모리요타가 우리 일행들이 입고 있던 옷의 색까지 이야기를 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럼 왜 나만 푸른색이지? 다들 원래 입고 있던 옷의 색에 가까운 옷을 입었 는데... 우쒸 짜증이 날려고 하네? “너희들도 목욕은 않은 모양이네? 그런데 수아하고 풍아는 아직 멀었나?” 나는 녀석들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원래 여자들은 오래 걸리는 거래. 그거 몰랐어?” 화아가 내 말에 대꾸를 한다. “아니 그런 건 또 어디서 들었어?” 나는 화아가 엉뚱한(화아가 여자에 대해서 파악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미심쩍 은 일이다.) 소리를 해서 물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뭐, 잘못된 거라도 있어? 자이건이 여자들은 이것저것 준비를 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단 말이야.” 화아는 조금은 자신없는 목소리로 말하면서 자이건을 돌아보았다.(불쌍한 자이건 목 도 자라목이 되었군. 역시 화아와의 대련은 무서운 모양이다.) “아니 아니야. 맞아 맞는 말이야. 그냥 화아 니가 그런 것을 어떻게 아는 가 궁금해 서 물어 본 것뿐이야.” 나는 화아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웃으며 이야기 했다.(화아 기분이 상하면 내일 자 이건은 어디가 상당히 거북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한동안 심심한 시간을 보내고 나서(이번에도 지토는 벽을 긁었다. 화아도 약간은..) 수아와 풍아가 거의 동시에 문을 열고 나왔다. 그 뒤로 시녀들이 따라 나왔음은 물론이다. 풍아와 수아가 입은 옷은 차이나드레스, 그 이름만 듣고 실물은 본 적이 업는 차이 나 드레스였다. 다행한 것이 있다면 다리 옆으로 터진 부분이 그렇게 과하지 않다는(이건 과하고 말 고의 문제가 아니다. 옆으로 터진 그 곳으로 살짝 살짝 드러나는 속살이 사람을 얼마 나 ...퍼걱. 푹. 그만하자. 아무래도.)것과 팔도 팔꿈치 아래에까지 달려 있는 것이 었 다는 점이었다. 만약 어깨가 드러나는 것이었으면 오늘 이 행문성에 운석 몇 개 소환해 버렸을 것이 다. 우리들은 풍아와 수아의 시녀들의 안내를 받아 복도를 걸어(많이 걸었다. 객청이 알 고 보니 건물 외각이다.) 걸어서 연회장(식당? No No 연회장. 엄청 넓다.)에 도착했 다. 길게 디귿자 모양으로 이루어진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우리들은 그 중에서 중앙과 가 까운 자리에 안내를 받았다 양쪽으로 나뉘어서(물론 수아와 풍아도 나뉘었지만 오빠 들 사이에 끼어 앉았다. 건드는 놈이 있으면 오늘...왠지 신경이 거슬리는 이유는 뭘 까? 아까 시녀의 행동 때문은 절대 아닐거야. 그럼. 그렇지. 그럴거야.) 앉았는데 가 운데 앉을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나는 오른쪽 편에 가장 가깝게 앉았고 그 다음이 수아 그리고 광아가 앉았다. 반대편은 가운데에 가까운 순서로 지토, 풍아, 화아, 자이건의 순서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들이 자리에 앉을 때 까지도 연회장에는 사람들이 아무도(시녀는 빼 고..) 없었다. 테이블의 중앙에는 두 자리가 놓여 있었는데 내 생각에는 모리요타와 성주의 자리가 될 듯싶었다. 아직도 상차림이 다 끝나지 않은 듯 테이블의 터진 가운데 부분을 오가면서 시녀들 은 음식들 올려놓기에 바빴고, 차라리 그렇게 움직이는 시녀들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 이 덜 심심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벽을 긁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시녀들의 움직임이 없어졌다 싶은 순간 우리가 들어온 반대편 의 문이 열리며 모리요타와 일군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하하하. 이렇게 손님을 먼저 와서 기다리게 하다니 정말 예의가 아니구만. 이래서 야 어디 제대로 손님 대접을 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말이야. 하하.”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모리요타가 우리 일행을 발견하고 처음 내 놓은 말이었다. 그 것도 커다란 목소리로 옆에 나란히 들어오던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인물의 얼굴에 침 을 튀기며 그렇게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이봐 모리요타 대장. 여기는 공석이라고. 그러니 품위를 지키는...” “푸하하하. 품위를 지키라... 그게 행문성주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소리인가? 음. 품위라... 푸하하하 행문성주가 품위를 입에 담아?” 성주라는 인물의 말에 다시 한 번 모리요타는 성주의 얼굴에 침을 튀기며 웃었다. 결국은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하고 칠면조가 된 성주는 모리요타를 뒤로 두고 먼저 우 리 일행들을 향해서 걸어왔다. 40대 초반. 머리에는 관(옛날 황제가 머리에 쓰던 약식 왕관같이 생겼다. 머리를 위 로 올려 묶고 그것을 한 개의 비녀와 호박이 달린 관으로 고정했다.)을 쓰고 있었고, 얼굴은 갸름하게 생긴(젊어서는 한 바람돌이 했을 것 같은.... 여기서 바람돌이란 다 른 말로 풍뎅이라고도 하는데.... 여러 여자를 사귀는...퍽. 오늘 많이 맞는군.)얼굴 에 전체적으로 섬세하다는 편이 어울릴 얼굴선을 지닌 인물이었다. 복장은 행분성분 청 장의 관복과 많이 다르지 않아 보였다. 모리요타를 무시하고 우리에게 다가온 행문성주는 길게 읍을(포권과 비슷하지만 좀 더 깊고 길다고 해야 하나? 그런 중국식 인사법입니다.) 하고는 입을 열었다. “주인 된 도리로 손님이 먼저 오셔서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행문성의 성 주를 맡고 있는 소란 천입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을 소개 했다. “얼씨구? 이봐 성주 본색을 드러내란 말이야. 본색을. 아무리 그래도 이제 술 한 잔 들어가고 하면 다 드러날 것을 그렇게 폼을 잡는다고 될 일이 아니란 말이다. 크 하 하.” 모리요타가 다시 딴지를 걸었다. 모리요타는 그렇게 성주에게 딴지를 걸고는 내 옆자리(그러니까 중앙에서 오른쪽 자 리)에 털썩 하고 앉았다. 어째 밖에서 보던 모습과는 너무 달라진 모습이었다. 잠깐 따로 있는 동안에 모든 격 식이나 예절에 대한 상실증을 보이는 모양인지 태도가 자못 비정상적이었다. 하지만 성주는 그런 모리요타를 무시하고는 천천히 자신의 자리로 가서는 함께 온 일 행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모리요타는 자리에 앉아있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일어서서(우리도 성주 일행이 문을 열고 들어올 때 일어나 있었다.) 포권 형식의 인사를 주고 받았다. 뭐 그래봐야 나와 화아 광아 자이건이 포권으로 인사를 받았을 뿐이고, 지토와 수아 풍아는 고개를 숙 이 는 것으로(지토는 그나마도 까딱하는 것이 전부) 인사를 대신했다. 솔직히 성주가 일일이 저 사람은 어떤 일을 맡고 있는 누구, 누구하고 소개를 했지 만 난 기억하지 못한다. 그냥 대체적으로 이호례병형공의 6방과 비슷한 일을 하는 인물 6명에다가 무관이 셋 (모리요타 제외)에 술법사들의 우두머리가 하나였다. 그들이 자리를 잡은 다음에야 성주는 “자 다들 앉으세요. 서서야 식사를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할 이야기도 많지만 일 단은 식사를 하고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요. 하하하 소화가 거북한 이야기는 없을 듯하니 먼저 식사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하하하. 자 다들 앉으세요.” 그는 그렇게 권하면 자신의 자리에 앉았고 우리들도 자리에 앉았....으면 얼마나 좋 을까. 우리들을 포함한 모든 인물들(역시 모리요타 제외)는 우당탕. 끄흐흑. “이 죽일... 죽어라 이놈” 이상의 소리와 함께 성주와 모리요타의 엽기적인 행동을 보아야 했기 때문에 자리에 앉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간략하게 상황을 풀어보자. 모두들 어릴 때 한 번씩 했던 장난이 있을 것이다. 뭐 동심을 지닌 인물들이라면 나 이 서른이 지나도 가끔 하는 짓이기는 하다. 자리에 앉는 사람의 의자를 살짝 빼는 그것. 바로 그 성공했을 때는 행한자의 뿌듯 한 전율과 당한자의 당혹감과 치솟는 혈관들에 의한 전율이 공존하는 바로 그 행위를 모리요타가 성주에게 했던 것이다. 순간 모든 사람이 얼어붙은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우리 일행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속도로 해동이 되어서 자리에 앉았고 우리 일행은 한동안 성주가 이마에 혈관을 세기고 자신의 의자를 들어 모리요타를 가격하는(모리요타가 피했기 때문에 의자들끼리의 상잔이 벌어졌고 파편 이 튀었다.) 것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저들이 진정 나이 40대에 들어선 한 군의 대장이요. 한 성의 성주란 말인가? 한동안 엽기적인 행동을 보이던 성주와 모리요타는 시녀들이 다시 가지고 온 의자에 앉았다.(그 동안에 6방이하의 떨거지들은 부지런히 식사를 했다.) “뭐 보여 줄 것 다 보여주었으니 예의고 나발이고 집어 치우지. 이봐 자네들 자네들 이 이번에 정왕야 쪽의 공격 속에서 우리 덜떨어진 군장과 용감한 병사들을 무사히 성 으로 귀환시켰다는 소리를 들었네. 원래는 자네들이 한타와의 관도를 막고 있던 환수 가 없어졌다는 소식을 가지고 왔다기에 자세한 내막을 알아보기 위해 이 녀석을 보냈 던 것인데, 이제는 그것 보다 이 녀석들을 구했다는 것이 더 중요하게 되었구먼 그 래.” 성주는 그렇게 처음부터 말을 놓고 나왔다. 그럼 나도 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뭐, 그렇게 말을 놓고 싶다면 그렇지 하도록 하지. 아! 그렇다고 나이도 어린놈이 라느니 그런 생각은 하지 말게나 겉으로 이렇게 보여도 나는 자네보다는 나이가 많으 니까 말이야. 믿든 말든 그거야 별 상관이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리고 아까도 이야기를 했는데 병사들과 우리들이 다들 무사했던 것은 서로가 힘을 합한 탓이지 특 히 우리들의 힘이라고 하지는 말았으면 좋겠군. 조금 도움이 되었다는 인정하겠지만 말이야. 하하.” 내 말에 성주 이하 모든 이들이 잠시 얼어버린 듯 했다. 뭐 우리 일행들까지 내가 그렇게 나갈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으니 다른 사람들이야 당 연한 것이었겠지만 말이다. “하하. 이런이런 루탄경에게 이런 면이 있는 줄은 나도 몰랐습니다. 하하. 그런데 그럼 나도 말을 놓아야 하나? 이것 참. 난감하군.” 그런 분위기를 깬 것은 모리요타였다.(역시 신경이 무딘 인물인가?) “하하. 그렇단 말이지. 자네가 그렇게 나이를 먹었다면야 말을 놓는 것을 뭐라 할 수도 없는 문제지. 우리 천왕야의 백성도 아닌데다 내가 먼저 손님에게 말을 놓았으 니 당연하겠지. 하하.” 성주도 얼음에서 깨어나면서 별 것 아니라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럼 다행이군. 그리고 내 동생들도 누구에게 존대 해야 할 나이는 아마 여기 없을 거야. 그러니 동생들도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말을 할 걸세. 그리고 저기 자이건은 성 주 자네나 모리요타 대장이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인물이야. 한타의 썬드라스 공작 가 의 3남이거든. 하하.” 내 말의 성주와 모리요타는 뜻밖의 사실이었던지,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저 사람은 마부, 마부였는데... 어떻게...” 모리요타는 아직도 내게 말을 놓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하지 못한 듯이 말끝 을 줄였지만 눈동자는 열심히 설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거야 우리 사정이지 자네의 사정은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말끝을 흐리지 말고 말을 놓으라고. 성주가 나에게 말을 놓는데 자네가 나에게 말을 높인다면 자존심에 상 처를 입지 않겠나? 하하하.” 내 말에 잠간 성주의 어깨가 떨린 것 같다. 모리요타가 나에게 계속 존대를 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던 것인가? “하하. 자자. 그만하고 일단 식사부터 하지. 차린 것은 별로 없지만 많이들 들게 하 하하.” 성주는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이 우리들에게 음식을 권했고, 그 동안에도 부지런히 음 식들을 들고 오가던 시녀들의 탓인지 제 온도를 지닌 음식들을 먹기 시작했다. 음식들은 조금 고급스러운 접시에 담기기는 했지만 란도암이 대접했던 종류들과 많 이 다른 것 같지는 않았다. 뭐 군데군데 못 보던 음식들이 큰 접시에 올려져 있었고, 닭이나 사슴 등의 동물들 이 큼직한 부위로 올라와 있는 점이 다른 점이라면 다른 것이었다.(큰 접시에 음식이 많고 크게 올라왔다는 것 말고 별다른 차이는...) 그 이후의 분위기는 별로 말하고 싶지 않다. 결국 모리요타도 말을 놓은 것 까지는 좋았는데, 그 덕분에 위 아래 없이 막나가는 분위기라서 성주도 우리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대로 못했고(뭐 실제로 관도의 환수 스컬프트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으니 그가 알고 싶었던 것은 모두 알게 된 것이 아닐까 싶기는 하다. 우리야 성주의 칭찬이니 격려니 하는 것(모리요타 일행을 무사히 데려온 것에 대한) 은 별로 듣고 싶은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그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은 것은 도 리 어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 내가 왜 뒷이야기를 꺼리느냐 하면, 그 술 때문이다. 수아는 내 옆에 있으니까 안심을 하고 있었고 풍아는 옆에 화아와 지토가 있으니 알 아서 말려 줄 것이라 생각을 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던 모양인지, 오래지 않아서 풍아 가 취해서 헤헥 거리고, 나의 방심을 틈타 한 잔의 술을 홀짝거리던 수아가 또 다시 술 잔에 시비를 거는 사태가 발생. 결국에는 풍아가 앞쪽에 앉아있던 6방중의 한 사람이 자꾸만 자기를 노려본다며 시비 를 걸어 테이블 두 개를 넘어 멱살을 잡는 사태에까지 이른 것이다. 흐흑 그러니 내 가 무슨 말을 하고 싶겠으며 연회가 어떻게 되었겠는가? 겨우 겨우 풍아를 진정시켜서 내가 안아들고 수아는 광아가 안고 숙소로 돌아오는 수 밖에 방법이 없었다. 다음날. 숙취는 전혀 없이 가뿐하게 일어난 나는(소란 탓에 먹지도 못했다.) 하얀 예복(뱀껍 질로 만든 것 중에서 깨끗한 것. 솔직히 별다른 차이가 없는 옷이다.)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기억을 더듬어 건물 앞의 마당으로 발길을 옮겼다.(처음 문을 통과해서 본 그 무식한 곳 말고, 두 번째 문 안에 있던 작은 마당) 이제 해가 뜨는 시간이라 이른 탓인지 그 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고 마당에 이를 수 있었다. 나는 주위의 인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쌍환검을 변형시켜 들고 간단하게 몸을 풀 기 시작했다. 일명 쌍검무(雙劍舞). 신계의 책에 의하면 무슨 검술을 통해 도를 얻었다는 신선이 처음 검의 길을 찾기 위해 만들었다는 것인데 쌍검으로 전 방위를 전부 두 번 지나지 않고 갈라가는 것이었다. 겹치지 않게 쌍검의 괴적을 그리는 것인데 빠르게 움직이면 검막이 형성된다. 하지만 이건 그냥 몸을 풀기에 좋은 운동일 뿐이다. (검막을 만들 힘이면 실드를 치고 말겠다.) 내가 그렇게 한창 몸을 풀고 있는데 건물 안에서 성주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뭐 봤다고 내가 운동을 멈출 생각은 없었다. 거의 끝나가는 중이었으니까. 그리고 성주가 잠시 내가 운동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동안에 나는 검무의 끝을 장식했 다.끝에는 완전한 검구(검막의 확장 강화판)를 형성하는 것인데 성주 녀석은 완전히 눈 호강을 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어디에 가서 보겠는가 말이다. 짝짝짝짝. “하하 대단하군. 나는 모리요타 녀석의 말들 듣고 뛰어난 마법사인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검술까지 능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걸? 대단해 정만 대단해.” 성주 녀석은 마당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오면서 박수를 치고 감탄을 하고 웃고 떠들 고 혼자 쑈를 하고 있었다. “일찍 일어났군. 뭐 어제는 경황이 없어 제대로 사과도 못했으니 이 참에 사과를 하 지. 동생들이 술이 약해서 말이야. 정말 미안하네. 쩝.” 나는 그들 양식으로 포권을 해보이며 사과를 했다. “하하 아닐세. 그런 일이야 어디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지. 만약 그대로 술자리가 계속 되었으면 나와 모리요타가 파장을 만들었을 것이네. 뭐 성 내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아는 사실이니 굳이 변명이랄 것도 없다네. 술자리의 끝에는 언제나 나와 모리 요 타의 난타전이 있지. 뭐 집기도 많이 깨지고 부서지고 하고... 그런대로 요즈음은 시 녀들이 눈치가 빨라져서 비싼 물건은 때맞추어서 잘 치우곤 했는데, 어제는 좀 예상 외 의 사건이기는 했지. 하하하.” 내가 무슨 말을 하랴. 나는 그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최선이었다. 하하. “그런데 루탄 자네는 정말 무슨 일로 이 누웬에 온 것인가? 나는 자네 같은 사람이 아무 이유 없이 이 나라로 들어왔다는 것이 정말인지 궁금하다네.” 성주는 갑작스럽게 눈빛을 빛내며 심각하게 물어왔다. “뭐 믿지 못한다면야 하는 수 없는 일이지만, 우리 일행들 중에서 누웬으로 오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네. 우린 그저 환수를 잡아서 파는 용병 일을 하기 로 했던 것인데, 어쩌다 보니 스컬프트를 잡아 달라는 요청이 있었고 때문에 누웬에 가까이 오게 되었기에 어디 특별히 정해 놓고 다니는 여정도 아니니 그냥 누웬이나 구 경을 하자는 말이 나와서 오게 된 것 뿐이지 별다른 이유는 없다네. 성주.” “그래? 자네가 그렇다는데 믿어야지. 어쩌겠는가 하하. 그리고 내 이름은 알려 주었 을 텐데... 성주라고 부르는 것은 좀....” 이녀석은 내가 자기를 성주로 부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그런데 이 녀 석 이름이... 그러니까 음... 그 소란 속에 등장을 했지. 그래서 이름이 소란인가? 크 크크 아무튼 이름이 소란 천이었던 것 같군. “그럼 이름으로 부르기로 하지. 그런데 소란 자네의 성이 이 곳 왕야의 성과 같으 니 인척 관계인 모양이지?” 나는 마침 어제 이름을 들으며 궁금했던 것이 떠올라 물어 보았다. “하하. 성씨가 같다고 인척이냐고 묻다니.... 흠. 흠. 뭐 알게 될테니 알려주지 그 래 맞네. 난 천왕야의 혈족일세. 아니 정확히 말하면 천왕야의 2왕자일세. 위로 형님 이 계셔서 성군의 자질이 있으시니 나는 이 변방에서 정왕야의 힘을 견제하는 역을 자 임하고 있는 중일세.” 뭐라. 왕자. 흐흑 어째 나는 만나는 놈들 마다 이렇게 거물급이냔 말이다. 한타의 왕자는 경매장에서 봤고, 공작가의 공자와 공녀도 보았고, 마법사 길드의 마 스터도 보았고, 이젠 누웬의 왕야의 아들이란다. 뭐가 이렇게 엄청난 녀석들과만 관계를 맺는 것이냐고. “허~~ 왕자라. 이야기를 들어보니 위의 형님을 무척이나 존경하는 모양이로군. 성군 의 자질이라....” “하하하. 그럼 우리 형님이 비록 나보다 나이가 한 살 밖에 많은 것이 아니긴 하지 만 성군이 되실 자질을 타고 나셨지. 백성을 위하고 아끼고 나라를 경영하는 것에 있 어서 누구도 따르지 못할 능력을 지니신 분인데다. 자애와 엄격함을 함께 지니신 분 이 니 앞으로 우리 천영지는 나날이 발전할 것이야. 그리고 언젠가는 이 누웬에서 천왕 가 라는 이 이름을 떨치게 될 것이 분명하지. 하하하.” 나는 소란 성주가 진정 형을 높이는 것인지 궁금했던 것이었지만, 그의 말을 들으면 적어도 천왕야의 첫째와 둘째가 권력다툼을 일으킬 일은 절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 었다. 그는 정말로 형을 존경하고 자랑스러워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거야 당연하지 어디 너 같은 망나니하고 태자님을 비교한다는 말이냐? 태양과 횃불을 비교해라 이놈아.” 갑작스럽 목소리와 함께 모리요타가 건물 문을 박차고 뛰어나와 소란의 목을 걸었다. (일명 헤드락이라 하는건가?) “케켁 이 이놈 놓지 못해? 아침부터 이런 놈을 만나다니...” 그렇게 잠깐의 소란이 있고 우리들은 계단에 나란히(전선위의 참새처럼) 앉아서 이야 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어제 정왕야의 군사들이 쳐들어 온 것은 자주 있는 일이야?” 내가 물어보자 소란은 얼굴을 굳혔다. “절대 그런 식으로 도발을 한 적이 없는데... 처음 있는 일이야. 내 생각에는 아무 래도 모리요타가 소수의 병력을 거느리고 행문촌 방향으로 갔다는 사실을 정왕야 측 이 알았던 것 같아. 그러니까 그런 인원을 동원해서라도 모리요타 이 망나니를 잡으 려 고 했겠지. 적어도 정왕야에게 있어서 모리요타는 상당히 껄거로운 존재거든.” “껄거롭다니?” 나는 다시 물었다. “별건 아니고, 이 녀석이 다른 것에는 칠삭둥이 같은 녀석이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것 하나는 아주 똑 부러지는 녀석이거든. 덕분에 우리 병사들은 500이면 적의 병사 1000을 상대 할 수 있지. 아무튼 이 녀석이 맡은 군대는 언제나 자신들보다 두 배에 이르는 병력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정병이 되거든. 그러니 이 녀석이 우리 전력에 얼마나 중요하고 또 정왕야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베어버리고 싶은 녀석이겠는가 말이 야. 하하하.” “그럼 어제 우리를 습격한 것이 모리요타 때문이라는 말이군. 50명의 병력을 상대하 기 위해서 1000명의 병력을 보냈는데 실패라. 아무래도 어제 군을 통솔했던 인물은 엄 청 깨졌겠구만. 하하하.” 나가 그렇게 말하며 웃자 다들 덩달아 따라 웃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정왕야의 움직임이 불안하기는 해. 이런 식의 대규모 습격을 내 놓고 한다는 소리는 어느 정도는 침략의 준비가 끝이 났다는 말이 되거든. 정왕야 쪽 이야 인적 자원이 많은 편이니 언제나 병사들이 넘쳐나고 우리쪽은 아무래도 인적 자 원이 부족하니 그것 참 문제로군.” “그래? 천왕야 영지의 백성 수가 적은 모양이지?” 나는 소란에게 물었다. “영지안의 백성 수에서야 우리가 더 많다고 할 수 있지만 영지가 넓어서 백성들이 흩어져 있고, 또 우리의 병사들은 거의 모병제이지 의무병이 아닌 까닭에 많은 수의 상비군을 준비할 수 없는 형편이지. 뭐 전쟁이 나면 모든 백성이 군사가 되어야 하기 는 하지만 평상시에 훈련을 받지 못한 병사들이라 얼마나 도움이 될지 알 수도 없 고....” 소란이 그렇게 말하자 모리요타가 소리를 지르며 반박에 나섰다. “이런, 내가 전에도 이야기 했잖아. 이 행문성에서는 남자라는 남자는 다들 훈련받 은 병사들 못지않게 훌륭한 병사들이라고 말이야. 이게 왜 이렇게 내 말을 안 믿는 거 야?” 하지만 소란은 모리요타의 말에 거품을 물고 반박에 나섰다. “이,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겨우 겨울철에 20일도 안되는 기간동안 훈련을 받 는 것이 전부인 그들이 무슨 정병이냐 정병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하지만 모리요타 역시 소란의 말에 지고 싶은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이게? 니가 니 입으로 내가 병사들 훈련을 시키는 것 하나는 확실하다고 하지 않았 어? 그런데 왜 내 말을 안 믿는 거냐? 응. 너 죽어 볼래?” 결국 험한 소리가 나오려는 모양이었다. “됐다 그만 하자. 매일 같은 소리로 싸우는 것도 지쳤다.” “그거야 니가 쓸데 없는 근심을 하니까 그러는 거지. 내가 병사들 수에는 신경을 쓰 지 말라고 누누이 이야기 했잖아. 상비군이 1천2백에 이성의 남자들 수가 1만9천이 다. 그러니 우리들이 거느린 병사의 수는 2만이야 2만. 그런데 무슨 걱정이냐? 이 정 도의 성에 2만 병력이면 넘치고 남는 병력이다.” “이런 무식한 놈아 세 살 박이 아이도 싸움터에 끌고 나갈래? 60이 넘은 고령을 싸 움터에 끌고 나갈 거냐? 남자가 다 병사가 되어도 1만 4천이다. 이 녀석아.” “음. 그렇게 되나? 아무튼 그래도 1만5천의 병사 아니냐. 그 정도면 되는 것이지.” 그렇게 둘은 서로의 고집을 토로하며 동쪽 담 넘어 들어오는 햇살을 맞이했다. 물론 나도 계단에 쪼르르 앉아서 함께 떠오르는 태양 빛을 마주 했다. “그만하고 들어가자. 아무래도 영지의 경계선에 대한 감시를 강화해야 겠다. 그리 고 정왕야 쪽의 밀정도 다시 점검을 하고...” 그렇게 중얼거린 소란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모리요다가 나의 등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날 것을 권했다. 그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온 나는 다시 내 방으로 돌아가 잠시 운공을 했다. 물론 방문을 걸어 잠구고... 오래지 않아서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시녀가 식사를 알려 왔기에 나는 밖으로 나 가 동생들과 지토 자이건을 만났다. 역시 풍아와 수아는 지난밤의 잘못을 아는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시녀는 우리들을 어제 밤과는 다른 식당(규모가 작은)으로 데리고 갔고 그 곳에서 간 단한 아침 식사를 했다. 다행하게도 숙취에도 먹을 만한 음식들이 준비되어 있어서 풍아와 수아도 어느 정도 는 음식을 넘길 수 있었다. 그 후에는 별다른 연락이 없었기 때문에 다시 성주가 불러 줄 때 까지는 빈둥거리는 일만 남아 있었다. 그냥 행문성을 나가서 누웬의 황성으로 가고 싶었지만, 그래도 인사는 해야 겠다 싶 어서 다시 그들을 보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침나절에 화아 풍아 광아 자이건 지토가 한 바탕 몸을 푼 이후에는 커다란 마당으로 자리를 옮겨서(그러니까 첫 번째 문 안에 있는 엄청 큰 마당) 환수를 소환 하 는 것을 점심 먹을 때 까지 했다. 물론 멋지고 강한 환수를 광아에게 붙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는데... 결과는 영~~ 아 니었다. 소환되는 환수가 하나같이 중급도 안 되는 환수들이었던 것이다. 파울은 어제 밤에 잠시 수아와 떨어져 있었다가 수아가 술에 취해 들어오자 다시는 자기와 떨어질 생각은 하지도 말라고 상당히 잔소리를 했다고 한다.(덕분에 더운 날 씨 에도 수아는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말로는 파울이 전혀 더위와는 상관이 없다지 만...) 나는 속으로 수아에게 시어머니가 생겨서 피곤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수아에게 든든한 존재가 생겼다는 생각도 했다. 하하. 그렇게 점심시간이 되어서 역시 아침과 같은 곳에서 식사를 하고 또 오후에는 환수 를 소환하는 것으로 소일거리를 삼았다. 하지만 결국 해가 질 때가 되어서도 마땅한 환수는 나오지 않아서 소환진을 지울 수 밖에 없었다. 광아에게는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평소와 달리(아마 어제 싸움 에 보탬이 못되어서 충격을 받은 듯) 은근히 환수를 기다리는 눈치였는데.. 결국 좋 은 녀석을 만나지 못하자 실망한 표정이어서 더 미안하기는 했다. “광아야. 너무 실망하지 말아라. 곧 좋은 녀석이 나오겠지. 그게 다 운이잖니. 내일 도 소환을 할거니까 힘내라.” 나는 광아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말했고 “형님 괜찮습니다. 너무 그러지 않으셔도 되요. 하하 제가 힘이 없는 것도 아닌 데 요 뭘.” 광아는 그렇게 도리어 내게 웃어 보였지만 녀석의 마음이 왠지 내게 전해져 왔다. 실망스럽고 한심스러워 하는 그런 느낌이... 어쩌면 공명인지도 모르겠다. 감정의 공명. 내가 그런 것을 느낄 정도라면 광아가 느끼는 실망감과 자괴감이 상당하다는 생각이 들어 더더욱 조급하고 미안해지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희망이 없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좀 걸리는 것뿐이라고 스스로 암시를 걸어 서 희망을 가득 가슴에 품었다.(광아도 내가 안타까워하는 것 보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는 것을 느끼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우리는 광아를 둘러싸고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역시 성주나 모리요타의 연락 은 없이 시녀들을 따라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방으로 돌아와 격리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이른 시간에 잠을 잘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나와 우리 일행들은 곧 이 방 저 방으로 돌아다니며 별 내용도 없는 말들을 주고받다가 다시 무리 지어 옆방으 로 가고 다시 둘 셋으로 나뉘어 흩어 졌다가 또 모이고 하면서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 렸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이 밝았을 때,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전 날의 완전한 반복이 었다. 심지어 기운 없는 광아를 에워싸고 들어오는 것에서부터 밥 먹고 이 방 저 방 을 순례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음날 우리는 아침 시중을 드는 시녀에게 모리요타나 성주에게 우리가 그만 성을 떠났으면 한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했다. 하지만 시녀는 성주도 모리요타도 지금은 만날 수 없다는 말만 반복하면서 조금만 기 다려 달라고 사정해 왔다. 자신들이 우리를 제대로 모시지 못해서 그런 것이냐는 다분히 발목잡기식의 발언을 서슴지 않으면서 시녀들은 윗사람을 곤란하게 하지 않고 우리들을 붙들어 두려는 시 도 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결국 우리들은(실은 내가 시녀의 꼬임에 넘어간 것이다. 여자의 눈물은 무서 워 제가 불편하게 해 드린 것이 있다면 부디 용서를 흑흑흑, 이러는데 어쩌겠느냐 구.) 시녀들을 따라 아침을 먹고(이젠 안내도 필요 없는데...) 오전 한 나절을 또 대 련과 환수 소환으로 보냈다. -전쟁이라고? -- 병원을 차리는 란의 용병대 - 하지만 점심을 먹을 때쯤에 사건은 터지고 말았다. 삐이이익 저렇게 울어대는 카다의 소리는 이제 귀에 익다. 그리고 저 소리는 경고의 뜻을 담고 있었다. “오빠! 큰일 났어요. 지금 행문성을 향해서 군사들이 몰려오고 있데요. 숫자가 얼마 인지 파악도 안 될 정도로 많다고 하는데요?”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 저놈의 카다는 도움이 안 되는 놈이다.(불길한 소식만 전하다니.... 사실 카다가 무 슨 잘못이 있겠는가만...) “서둘러 마차로 가자.” 나는 풍아의 말을 듣는 순간 일행들을 이끌고 우리들의 말과 마차가 있는 곳으로 달 렸다. 그 사이에 동쪽 성벽에서는 긴박한 북소리가 울려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말과 마차를 이끌고 서둘러 행문성본청의 대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우리들은 앞을 가로막는 병사들에게 막히고 말았고 그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소란과 모리요타가 본청 건물에서 뛰어나왔다. “이봐 무슨 일인가? 왜 이렇게 갑자기 떠나려는 것인가?” 소란이 물어왔다. 옆에는 모리요타가 가득 궁금증을 담은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그걸 몰라서 하는 말인가? 밖에 행문성을 향해 달려오는 병사들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우리들은 우리와 관계없는 전투에 끼어들고 싶은 생각은 없다네.” 나는 소란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지금 간다고 해도 성문이란 성문은 모두 닫혀 있을 텐데 어쩌려는 것인 가?” 모리요타가 나에게 물었다. “그거야 단거리 이동이니 순간 마법을 쓰면 될 것이네. 걱정 말게나.” 나는 별 문제 되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지 말고 이 성에 남아서 우리들을 좀 도와주면 안 되겠나? 자네 일행이라면 큰 도움이 될 것인데...” 모리요타가 다시 나와 일행을 붙들며 직접적으로 도움을 구하는 말을 해 왔다. “적의 병력이 예상보다 많은 수라네. 3만5천에 가까운 수야. 아무리 수성이라고는 하지만 두 배가 넘는 병사들이고 또 이번에는 술법사들이 상당히 많이 투입되었다는 보고가 있었다네. 그러니 자네들이 좀 도와주면...” 나는 모리요타의 말에 단호한 거절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자네나 소란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로 인해서 다른 사람 의 목숨을 취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네. 전쟁이라는 말이지.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전쟁, 나는 어떤 경우에도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네. 물 론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겠지. 죽이려 하는 자를 죽이지 않고 는 도저히 피하지도 막지도 못하는 상황이라면 죽여야 하겠지. 하지만 나는 죽이지 않을 수 있는데 죽이 는 것은 하고 싶지 않다네. 그건 우리 일행들 모두가 가진 생각이야. 우린 사람을 죽 이지 않아. 그리고 우리는 누웬의 사람이 아니야. 그러니 천왕야의 편도 정왕야의 편 도 아니라는 것이지. 미안하지만 우리는 이 전쟁에 휘말리고 싶은 생각은 없네. 그 럼.” 나는 말을 마치고 마차에 올라 본청의 대문을 지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리요타는 뭔가 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모양이었지만 뒤에서 소란이 그를 말렸다. 나는 그런 그들을 잠시 돌아보다가 말을 빠르게 동문쪽으로 몰았다. 우리가 동문에 도착할 때쯤에는 이미 성문은 닫혀 있었고, 성안의 사람들은 전쟁을 위한 준비를 착착 진행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많은 수의 아이와 늙은이들이 행문성본 청으로 몰려가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아마도 저들은 전쟁에 지게 되더라도 가장 늦게 죽게 될 것이었다. 소란 성주라면 저들을 버리지는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사실 침입자를 응징하는 의미에서 행문성을 도와줄 수도 있었지만 내가 아는 전쟁은 (실제 경험도 없었지만)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처참하게 죽어가는 것이었다. 그 속에 나와 내 가족들이 있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들의 손에 살인의 도구들이 쥐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나는 동문 앞에 이르러 우리 일행과 말들을 모두 동문 너머로 순간이동을 시켰다. 겨우 몇 미터밖에 되지 않는 거리라 인원과 말들이 있었지만(솔직히 함께 움직인 게 브와 아눈 파울이 더 문제였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들이 동문 밖에 나타나자 성문 위에서는 잠시 소란이 일었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고 마차와 말을 몰아 해자를 벗어나자마자 북쪽으로 방향을 잡고 말을 몰았다. 북쪽에는 성에서 조금 떨어진 곳(1Km남짓 되는 거리)에 조그마한 언덕이 있었다. 나 는 그 쪽으로 방향을 잡아 마차를 몰았고 왠지 무거워진 내 분위기 탓인지 다른 일행 들은 말도 없이 뒤를 따랐다. 우리들은 성밖으로 나와 오래지 않아 언덕위에 올랐고 그 곳에 마차를 세우고 행문성 을 돌아보았다. 동쪽에서 물밀 듯 달려온 적군들은 행문성을 둘러싸고 행문성의 출구인 동문과 서문 쪽으로 병사를 나누어 포위한 모습으로 진형을 짜기 시작했다. 하지만 행문성에선 성곽위에 병사들이 묵묵히 그 모습을 보기만 할 뿐 별다른 움직임 이 없었다.(어쩌겠는가, 적들의 거리는 원거리 무기가 닿지 않을 거리였고 대단위 마 법이 아니면 원거리 공격 마법도 쓸모가 없는 거리였다.) 아마도 8써클 정도 되는 공격마법이 아니면 별 효과가 없을 것이었다. 7써클 마법 중에 위력이 강한 것들은 대신 시전자와 대상간의 거리에 제약이 많았다. “오빠, 이젠 어쩌실 거예요? 그래도 행문성 사람들을 도와 주실거죠?” 수아가 가만히 옆으로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글쎄, 너희들의 의견을 들어보자. 어쩌면 좋겠는지 말이다. 우리가 행문성을 도와 야 할까?” 나는 주위에 둘러서서 행문성과 행문성을 포위하는 정왕야의 병사들을 바라보는 일행 들에게 물었다. “그래도 행문성의 사람들이 많이 죽을 텐데 그냥 당하게 할 수는 없지 않아요?” 풍아는 행문성을 돕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렇지, 아무래도 모리요타나 성주와의 인연도 있는데 도와주는 것이 좋지 않았나 싶어.” 화아 역시도 행문성 쪽을 돕고 싶은 모양이다. “크크 뭐 난 어느 쪽도 돕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 놈이나 그 놈이나 같은 녀석들인 데....” 어떤 의미에서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지토가 하는 모양이다. “형님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죽을 텐데, 우리가 어디를 도와야 할런 지...” 광아는 선택을 못한 모양이다. 나는 자이건을 바라보았다. 자이건은 자기에게도 의견을 묻는 듯한 나의 표정에 잠시 당혹감을 나타냈지만 곧 입 을 열었다. “어차피 많은 사람들이 죽을 것이라면, 최대한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자이건은 그렇게 대답했다. 나는 잠시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사실 무슨 생각을 정리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일행들에게 나의 생각을 분명히 밝혀두 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눈을 뜨고 일행들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너희들도 알고 있을 거야. 내가 지금까지 사람을 죽인 적이 없다는 것을... 사실 저기 모여 있는 저 정왕야의 병력 위로 운석소환을 하면 아마 상당한 피해를 주지 않 을까? 솔직히 너희들이 전력을 다한다면 그다지 어렵지 않게 저들을 물리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고 싶은 생각이 없다. 적어도 나와 너 희 의 손으로는 말이다.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물론 불가피한 상황이 없으리란 법은 없 다. 하지만 살인(殺人)을 피할 수 있는데 피하지 않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저기 싸우는 저들은 꼭 같은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우두머리를 뭐라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역사가 그렇게 투쟁을 통해 성취해야 하는 것들도 있음을 알려주 고 있기 때문에... 나는 다만 그 소용돌이에 관여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저 싸움은 저들의 싸움이지 우리들의 싸움이 아니다. 그런데도 내가 여기에서 발을 멈추고 저들 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앞으로 죽어갈 수많은 생명들이, 그들의 비명이 들리는 듯하 기 때문이다.”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내 말을 듣고 있는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모두들 무엇엔지 생각에 잠기는 모습이었다. “나도 때로 욕심과 분노와 살의를 느끼곤 하지만, 역시나 생명이란 아껴야 하는 것 임을 잊지 않는다. 그리고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이 싸움은 우리의 싸움이 아니라 저 들의 싸움이고, 그 싸움에 우리가 끼어들 명분이란 단지 모리요타와 성주, 혹은 행문 성 사람들과의 안면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인연이란 너무나 소중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인연을 빌미로 수많은 생명을 끊어야 한다면 당연히 그 무게를 저울질해 야 할 것이다. 때문에 나는 우리들이 저 싸움에 끼어들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동생들과 지토, 자이건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럼 오빠는 그냥 여기에서 싸움을 바라보기만 하실 건가요? 무엇 때문에 여기에 마차를 세우신 건가요?” 수아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수아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아마도 마음의 정리를 한 듯.) “글쎄, 오빠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못하더라도 살리는 것은 하고 싶거든.” 내 말에 수아의 눈빛이 빛났다. “하지만 역시 전장에 참여하겠다는 말은 아니다. 전장에서 죽어가는 병사들을 치료 하는 치료소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에? 치료소? 그런 또 무슨 말이야? 오빠?” 풍아가 대뜸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음, 싸움이 일어나면 엄청난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여기 저기 쓰러져 죽음을 기다 리게 될 것이다. 중상을 입은 환자들은 대부분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어가게 되겠지. 나는 그들을 구하려고 한다. 그것이 정왕야의 병사이든 천왕야의 병사이든 상 관없이.” “하지만 그렇게 치료를 한다고 해도 또 다시 싸움터로 갈 텐데, 전쟁만 부추기는 것 이 아닐까?” 화아가 의문을 제기 한다. “물론 그건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에게 치료를 받을 사람들은 모두 우리의 제약을 받아들이는 경우에 한하기로 했다. 즉 다시는 전장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겠지. 그들 은 죽은 것으로 되는 것이니까 말이야.” “무슨 말이야? 오빠 , 자세히 좀 이야기 해봐.” 풍아가 채근을 한다. “음, 이런 식이면 어떨까하고... 싸움을 하는 저들에게 죽을 정도의 부상을 입은 상 태에서 살고 싶으면 일정한 양식의 표식을 하라고 하는 거야. 그럼 우리가 살려주겠 다 고, 대신에 죽음과 자유를 바꿀 생각이 있는 경우에만 그 표식을 하라고 하는 거지. 그리고 우리들은 그 표식을 한 사람들만 골라서 데려다가 치료를 하고, 물론 표식이 없는 자라도 데려다가 치료를 하겠지만 의식을 차릴 정도만 치료하고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인지를 물어보는 것이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이 다시 돌려보 내야 하겠지만 말이야. 뭐 기본적인 치료를 해서 보내는 것이니 살아날 확률이야 더 높아 지겠지만....” “하지만 오빠, 저 많은 사람들이 싸우면 엄청난 환자들이 생길 텐데 어떻게 감당을 하려구?” 풍아가 또 다시 물어왔다. “글쎄, 그럼 그런 문제가 생길까?” “제 생각에는 우리들이 살려주겠다느니 표식을 하라느니 하는 것은 지금의 인원으로 는 무리인 것 같습니다. 그냥 전투가 소강상태로 접어들면 부상자들을 데려올 수 있 는 최대한 데려와서 치료를 해 주고, 회복된 사람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제약을 두 어 다시 전쟁터에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면 족할 것 같습니다. 어차피 그 많은 사 람 들을 다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말입니다. 그냥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지요.” 광아가 나서서 하는 말이었다. 그 말이 어쩌면 옳은 말이었다. 우리 인원으로 얼마나 많은 인원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도 거의 모두가 중환자만 몰려 들 것이 분명한데 말이다. “그래, 그냥 싸움에서 중상을 입고 버려진 사람들만 데려다가 치료를 하기로 하자. 그럼 우리도 준비를 좀 해야겠지? 자, 여기다가 병원을 만들자. 그런 최소한 천막이 라 도 있어야 할 테니 지토하고 화아는 천막을 세울 나무 기둥들을 준비해 주고, 풍아는 카다와 함께 싸움의 진행을 살펴주고, 수아는 이쯤에다 연못을 하나 만들어 주고, 아 무래도 물이 필요할 테니 말이다. 광아는 나와 함께 잠시 할 일이 있다.” 나는 광아를 데리고 한 쪽으로 갔다.(별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이 일은 아 주 중요한 일이라는 느낌을 광아에게 주기 위해서다. 요즘 의기소침이라...) “광아야 이번에 사람들을 데리고 오는 일은 광아 네가 책임을 져야겠다. 일단은 전 장을 누비는 것이 다른 사람의 눈에 보여서는 안 되겠지? 그러니 너의 능력을 발휘해 서 환자들을 찾아서 이 곳을 옮겨오는 일을 네가 해 주어야 하겠다.” 그리고 나는 한 가지 마법진을 광아에게 보여 주었다. “이번에 이걸 사용하면 좋을 것 같다. 여기에 본 진을 그려두고 본진에서 소환을 하 면 이 작은 마법진을 가진 사람들이 순간이동 되어 오는 것이지. 실제로는 텔레포트 스크룰의 변형이라고 보면 될거야. 환자가 스크룰을 찢을 수는 없으니까 여기에서 그 스크룰을 찟는 것을 이 쪽 마법진에서 대신 해 주는 것으로 만든 것이야. 물론 한꺼 번 에 약 30명 정도가 한계이니까 더 많은 인원은 할 수가 없어. 그리고 이번에 환자들 을 선별하는 일을 너에게 맡긴 것은 다른 이유도 있어. 아무래도 네가 합리적이고 논 리적인 판단이 다른 사람보다 앞서는 것 같으니까 환자들을 보고 선별해 오는 임무를 너에게 맡기는 것이다. 잘 할 수 있겠지?” 나는 광아의 눈을 쫓으며 물었다. “물론이지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번에야 말로 내가 할 일이 생겨서 기쁩니다. 하 아 그것도 사람들을 구하는 일을 하게 되어서 정말 좋습니다. 훌륭하게 해 낼 테니 걱 정하지 마세요. 형님.” 광아는 변함없는 눈빛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 금빛의 눈동자는 떨림 없이 잔잔하기 만 했다. 그 뒤로 나는 광아와 함께 스크롤(찢는 것은 아니지만)을 만드는 일에 몰두 했다. 솔 직히 한 장을 만드는 데에도 상당한 마력이 들어가는 작업이라 쉽지 않았다. (아니 힘 들었다. 너무 너무) 하지만 한 번 사용하고 나서 다시 재 충전 해서 사용할 수 있다 는 장점이 있어서(소환한다고 찢어져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단지 순간이동에 필요한 마력이 스크롤에서 빠져 나가는 것일 뿐.) 그나마 앞으로 예상되는 환자의 수만큼 만 들 필요는 없었다. 광아는 300장 정도를 만들자고(이 놈이 누구를 죽이려고)했지만, 나는 하루에 그렇 게 많은 사람이 온다고 해도 다 돌 볼 수도 없을 거라는 말로 숫자를 줄였다. 210장 30명씩 소환을 해서 일곱 번의 소환이 필요한 인원이었다. “이 숫자도 많아. 이렇게 많을 숫자를 어떻게 치료를 한단 말이냐? 쩝. 어찌 되겠 지.” 그렇게 내가 스크롤을 만드는 동안 지토와 화아는 천막용 기둥(암튼 어디서 저런 것 들을 구해 온 것인지는 몰라도 엄청 튼튼해 보이는 규격화된 나무들을 잘라왔다.(어 디 에 이렇게 똑 같이 생긴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을까?) 나는 그 기둥들을 일렬로 길게 세워서 일자형의 구조를 만들게 했다. “그런데 오빠, 이 천막 뭐로 덮을 생각이에요?” 어느 사이에 큼직한 연못을 한 쪽에 만들어 놓은 수아가 다가와서 물었다. 나는 “하하, 그거 아주 좋은 것이 있지.” 나는 수아에게 웃어 주고는 아공간에서 예전에 기구와 내 이불로 쓰였던 빅의 허물 을 꺼냈다. “하하 이 정도면 충분할거야. 두 장으로 잘라서 쓰면 저 천막은 충분히 덮을 수 있 을 거야. 하하하.” 나는 허물을 지토와 화아에게 건네주고 다시 스크롤을 만들기 시작했다. 정말 한 장 한 장 그리는 것도 장난 아니었다. 그러다가 나는 쉬벡의 마법서에서 서 류 복사에 관한 마법을 본 기억이 났고, 후다닥 쉬벡의 마법서를 펼쳐서 그 부분을 찾 아내었다. 이름하여 카피페이퍼, 흑흑 이런 것이 있었으면 진작 기억이 났어야지. 머 리가 나쁘면 수족이 고생이라더니.... 결국 그 마법을 찾아 낸 나는 빠르게 마법진이 그려진 종이를 양산할 수 있었다. 물 론 그 종이에 마력을 불어 넣는 일은 따로 해야 하는 일이었고 한꺼번에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내 수준에도 그건 겨우 10장 정도씩만 가능했던 것이다.(무지 힘들게 고생했다. 마력이 탈진상태라는...) 휴~~우 좀 더 실력을 길러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우리들이 천막을 치고 마법진이 그려진 스크롤을 만들고, 소환 마법을 위한 대형 본진도 그리고, 연못도 만들고 하는 동안에 서쪽 언덕으로 해가 지기 시작했다. “우화화 배고프다. 그러고 보니 점심도 못 먹은 거잖아. 우리 밥 먹고 합시다.” 풍아가 수선을 떨며 어디선가 나타나선 우리 일행 모두가 반겨할 제안을 했다. “그래, 일단 밥을 먹고 하기도 하자. 아마도 저들은 오늘은 싸움이 없을 것이다. 모 르지 야간 습격을 할 섰아갔다. 그리고 우리들이 포근한 잠자리를 누리는 동안에도 상당한 수와 종류의 사람들이 왔 다가 갔지만 우리 병원으로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어쩌면 그 밤에 전투가 없었던 것은 우리 병원의 개원 덕분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들이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언덕 주위로 약간의 경계병을 두고는 더 이 상 언덕에 접근하는 사람들은 없었고 아침 해가 뜨는 무렵에 첫 공성이 시작되었다. 양쪽 성문을 향해 치닫는 병사들은 거대한 파쇄차를 앞세우고(쉽게 공성무기 중에서 성문을 부수기 위해 사용되는 무지무지 커다란 꼬챙이-바퀴가 달린) 대형 방패로 몸 을 가린 상태로 성문을 향해 진격했다. 바퀴가 달린 탓인지 멀리서부터 탄력을 받아 온 탓인지 파쇄차의 속도는 매우 빨랐 고 성문을 향해 내 닫는 기세도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무시무시하게 달려가던 양쪽의 파쇄차는 성문 앞에 놓여있던 다리들 이 해자 밑으로 순식간에 가라앉는 사태로 갈 길을 잃고 속도를 늦추어 겨우 겨우 해 자 앞에서 멈출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멈추어진 파쇄차를 끌고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순식간에 성벽에서 날아온 화살들이 파쇄병(이렇게 불러도 되나?)을 향해 날았고 커 다란 방패로 몸을 가렸다고는 하나 진형을 채 만들지 못한 그들은 하나 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파쇄차 한 대에 각각 200명 정도의 인원이었으니 그렇게 많은 인원이 동원된 것은 아 니었다. 어쩌면 간단한 시험 정도였을지도 모른다. 그럼 저 파쇄병들은 실험을 위한 흰쥐쯤이 되는 것인가? 그러는 동안에 벌써 광아는 전장으로 떠나고 없었다. 아마도 광아는 몸을 숨기고 싸움이 소강상태가 될 때를 기다릴 것이다. 드디어 정왕야 쪽에서 뿔피리 소리와 함께 우왕좌왕하던 정왕야의 병사들이 대오를 갖추고 후퇴를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서 화살의 범위 밖으로 이동해서는 각 진영으로 서둘러 돌아갔다. 그리고 양쪽 성문 앞에는 30여명씩의 병사들이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곧 카다로부터 연락이 왔다.(광아가 환자들을 적당히 준비하면 신호를 보내 고 카다가 연락을 해서 이곳 마법진에서 환자를 불러 오는 것이다.) 나는 곧 대형 마법진을 가동 시켰고, 환자들이 이동되어 왔다. 수는 12명, 광아는 곧 반대쪽의 성문으로 달려가 연락을 해 올 것이다. 곧바로 환자는 천막으로 옮겼고 수아는 곧 치료에 들어갔다. 치료의 순서는 일단 다음과 같다. 먼저 환자가 도착하면 화아 풍아 지토가 달려들어서 혈도를 짚어 지혈을 시키고(광아 가 해 주기로 되어 있었지만 아주 간단한 응급처치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시간이 없 으니까.) 환자를 천막으로 옮긴다. 자이건은 환자들의 상처 부위를 잘라내고(몸뚱이 말고 의복이다.) 깨끗하게 씻는다. 그리고 수아가 그 환자에게 회복 마법을 쓰고 고 비 를 넘기면 일단 다음 환자를 살핀다. 물론 환자의 위급 상태를 파악해서 위급한 환자부터 수아에게 보인다. 그렇게 수아가 두 번째 환자를 살피고 있을 때, 다시 카다의 연락이 왔다. 그리고 마법진을 가동시키자 이번에는 9명의 환자가 이동되어 왔다. 그 후로 우리들은 상당히 바빴다. 광아의 신호로 더 이상 전장에 환자가 없다는 연락을 받은 나는 곧장 수아와 함께 환 자들의 치료에 들어갔다. 일단 급한 환자는 숨이 붙어 있게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환자들이 도착하면 무조건 상태를 따져서 구분하고 목숨이 경각에 달린 사람 부터 치료를 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상황이 호전되면 다른 사람을 살피는 것이다. 그나마 이번 환자들은 모두가 화살에 의한 상처들이라 대행이 사지가 잘려 나간 환자 는 없었다. 문제가 있다면 첫 화살에 맞아 쓰러진 그 위로 다시 많은 화살들이 덮쳤기 때문에 상 처가 하나 뿐인 환자는 없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후퇴한 병사들 중에도 화살을 맞은 사람들은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대열에 서 쓰러지거나 자세가 흩어 졌다면 여기에 있는 이들이나 지금 땅위에 누워있을 그들 과 같은 신세가 되었을 테지만 말이다. “후아~~ 오빠, 힘들지 않아요? 이제 거의 치료가 끝나 가네요. 이마도 이 사람들 중 에서 죽는 사람은 없을 것 같아요. 더구나 불구가 될 사람도 없는 것 같고... 정말 다 행이에요.” 우리들이 그나마 21명의 환자들을 대충 한 번씩 살피고 여유를 가진 것은 첫 전투 후 한 시간 정도가 지난 후의 일이었다. 그것도 상당히 빠른 편이었다. 한 사람이 10명 정도의 중상자를 살피는데 한 시간정도라... 그럼 하루 절반을 온통 여기에 투자 한다고 해도 하루 120명이 전부였다. 수아와 내 가 합해서 소화할 수 있는 인원이 240명, 물론 더 오래 일하면 되지 않겠냐고 하겠지 만 언제나 계산은 중간치를 뽑는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사지 중에 한 둘이 없는 사람들도 오게 될 것이었다. 그럴 때는 지 금 보다 치료 시간이 더 오래 걸릴 것이니 당연히 이 정도의 계산에도 미치지 못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환자를 치료하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 사이에 정왕야 쪽의 병사들이 대대적 인 공성을 시작하려는 모양이었다. 이제는 해자를 건너서 성벽을 타고 오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것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병사들을 긴 사다리를 앞세우고 사방에서 벌 떼처럼 행문성을 향해 달 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행문성의 해자에 닿기도 전부터 날아오는 화살에 여기저기서 쓰러졌 고, 그런 사람들 위로 또 병사들이 내닫고 있었다. 거의 동시에 사방에서 해자에 도착한 병사들은 사다리를 세워 해자에서부터 성벽으 로 사다리를 걸쳤고 그 위를 또 사다리를 가진 병사들이 타고 올랐다. 사다리를 운반하는 병사들의 손에는 병장기도 없었다. 그저 제법 두터워 보이는 갑옷 에 사다리를 들고 있을 뿐. 하지만 그런 두꺼운 갑옷도 필요가 없었던 모양인지 벌써 숫하게 많은 사람들이 벌판 에 쓰러져 있었고 해자에 빠져 둥둥 떠다니거나 혹은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정왕야 쪽의 궁병들이 진격해서 엄호 사격을 시작했고 상당수의 사 다리가 성벽위로 오르는 데 성공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정왕야 쪽의 세 번째 군대가 궁병들 뒤쪽에서 내닫기 시작을 했다. 기마병(?) 하지만 그 기마병들은 뒤에 한 사람씩의 병사를 태우고 있었고 엄청난 속 도로 성을 향해 달린 기마병들은 그 병사들을 내려놓는 것과 동시에 말을 돌려 되돌 아 나갔다. 어찌 보면 말과 기병을 잃은 것이 손해일 것 같은 방법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성벽에 가깝게 많은 병사들을 한꺼번에 투입하는 효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성벽에 가까이 내려진 병사들은 순식간에 사다리를 타고 올라 성벽을 공략하기 시작 했다. 처음에 성벽에 걸렸던 사다리들이 많이 제거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제법 많은 수의 사 다리가 성벽 위에 닿아 있었고 그 사다리를 통해 올라온 돌격병(이름은 모르니 그렇 게 부르자 말 타고 온 돌격병은 너무 길다.)들이 성벽위에서 싸움을 시작하자 그나마 성벽 아래쪽에 대한 견제가 약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일단의 무리들이 궁병들 앞으로 나서고 있었는데 그들 앞에는 대 형 방패를 든 병사들이 경호를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들은 술법사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예상이 맞았다는 것을 알리는 듯이 성문 쪽을 향해서 그 일군의 무리들로 부터 원거리 공격 마법이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환수와 마수로 보이는 것들도 있었고, 직접적인 마법 공격과 같은 효과를 보이는 것들도 있었다. 그 원거리 공격은 순식간에 양쪽 성문을 향해 날아갔고, 성문은 태풍 앞의 촛불과 같 아 보였다. 하지만 행문성에도 술법사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처럼 성문 앞에서 알지 못할 방 어벽들과 부딪힌 정왕야 쪽의 공격이 무산되고 있었다. 결국 성문은 무사한 모양이었고 성벽위의 궁수들이 정왕야의 술법사를 향해 조준사격 을 시작하자 술법사들이 서둘러 후퇴하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그 중에 성벽 위에서는 드디어 성벽 위의 일부를 차지한 정왕야의 병사들이 그 세를 불려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술법사라 불리는 그들(마법사나 환수사 마수사 정령사 그 외의 일반적이 지 않은 힘을 쓰는 모든 자를 부르는 누웬의 명칭인 듯)의 가치를 보여주는 듯이 성 벽 위에 올라서 세를 불리던 정왕야의 병사들 위로 화려한 공격 마법들이 떨어져 내 렸 고 순식간에 성벽 위는 정리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 동안 사다리병들은 거의 전멸을 했는지 더 이상 성벽을 향에 올라오는 사 다리는 없었고 성벽에 걸린 사다리들은 차례차례 제거되고 있었다. 그리고 정왕야 쪽의 궁수들이 사정거리 밖으로 물러나는 것으로 행문성 2차 접전은 막을 내리는 듯 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바빠진 것은 우리 야전 병원이었다. 순식간에 환자들이 몰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한꺼번에 30명의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곤 쉴 틈도 없이 또 30명의 환자. 그리고 또 ... 한꺼번에 6번의 환자 이동이 있었고 순식간에 180명의 새로운 환자가 생겨 버렸다. 그런데도 광아는 카다를 통해 수거된 스크롤의 전달을 요구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광아에게 수거된 100여장의 스크롤을 전해 주고나자 다시 환자들 을 순간이동 시키기 시작했다. 다시 100명, 나는 카다에게 이 이상의 환자는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뜻을 광아에게 보내고 철수 하 라고 알렸다. 그 뒤는 그야말로 전쟁과 같은 시간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화살에 의한 환자가 대부분. 성 위에서 싸운 인물들이야 대부분 해자 에 빠져서 건져 올 수가 없었던 탓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환자들 200명 정도는 대부분이 사다리병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수아와 나는 위급 환자를 먼저 골라 살폈고, 풍아, 화아, 지토 등은 환자들의 지혈 과 간단한 응급처치를 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지토가 어느틈에 둘이 되어 있었고 말없는 지토(게브)가 환자들에게 치료 마법을 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응? 게브가 치료마법을 쓰네? 그럼 다른 환수 중에서 치료 마법을 쓸 수 있는 녀석 은 없나?” 나는 환수를 가진 다른 수아나 풍아, 화아에게 물어 보았지만 수아의 파울이 치료 마 법을 알고 있다는 대답만 들을 수 있었다. 물론 풍아는 불쌍한 카다를 쥐어박으며 그 런 것도 못한다고 구박을 했다. “우리들이 상급으로 변한다면 어느 정도는 다들 치료 마법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형 이 그런 힘이 남아있어?” 화아가 그렇게 물어 왔을 때, 나는 겨우 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괜찮아 지금은 거의 마력만 필요하고 내공은 필요가 없으니까 너희들 전부가 상급 으로 변신을 해도 반나절을 걱정 없이 버틸 수 있을 거야.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힘 을 써.” 내가 그렇게 말하는 중에 어느 틈에 광아가 돌아와 있었다. “광아도 상급 상태에서 치료 마법이 가능하지? 빨리 환자들 치료를 하자. 수아와 내 가 응급처치와 생명 연장을 맡을 테니 그 뒤의 치료를 너희들이 맡아 그리고 자이건 너는 이걸 들고 필요한 사람에게 사용해.” 나는 자이건에게 치료 포션들을 건넸다. 그리고 그 뒤로는 그야말로 쉬지 않고 치료 마법을 쓰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물론 그 사이에 정왕야의 병사와 행문성 사이의 전투가 두 번째와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되었지만 우리들은 더 이상은 환자를 받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세 번째 전투가 끝나고 오래지 않아서 우리들은 환자들의 치료를 대충 마 무리(완전하게 치료는 하지 않았다. 그저 죽지 않고 정신을 차릴 정도만 치료를 했고 치유력을 아꼈다. 이들은 여기서 몇 달이고 누워 있으면서 회복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회복을 억지로 치료 마법으로 시켜 줄 생각은 없었다). 다만 처음에 왔던 21명의 환자들은 여유가 있어 많이 치료를 한 상태였고, 나중에는 잔심부름을 해 줄 사람들이 필요했기 때문에 여유가 생기자 그들을 먼저 완전하게 치 료했다. 모두들 아무리 심한 상처라도 외상들이었기 때문에 상처를 치료하는 데에 큰 무리는 없었다. (엄청 소비되는 마력과 정령력을 제외하면 말이다. 참, 내공도... 흑흑)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환자들의 수가 300명이 넘는데... 점심과 저녁을 어떻게 해결 을 해야 할지... 이런 추세라면 좀 있으면 수천에 이르는 인물들이 생길텐데... 어쩌 나.... 아무튼 급한 것은 일단 300인 분의 식사를 준비하는 일이었다. 가능할까? 그냥 한 두 끼는 굶기고 방법을 만들어 보는 것이... 하지만 환자를 굶길 수는 없는 문제인데.. 세 번째 전투가 끝나고 잠시 후에 우리 환자들의 대략적인 생명 유지가 끝나자 광아 는 대뜸 전장으로 나가 환자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환자 수는 200을 넘어서고 있었다. 아까보다는 수가 적은데 그 잠깐 사이에 숨이 끊 어진 것일까? 그리고 도착한 환자들부터 생명 유지 작업이 시작되었고 이번에도 역시 1차는 나와 수아가 2차는 지토, 풍아, 화아, 자이건이 맡아 진행했다. 그래도 그 동안에 연습이 되었는지 호흡이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 돌아온 광아도 치료에 참가를 했다. 반나절 사이에 환자의 수가 500이라.... 그나마 다른 녀석들이 상급정령의 힘으로 치료가 가능했기에 그나마 가능한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 중에 절반, 아니 그 반도 치료하기가 어려웠을지 모를 일이었다. 다시 세 번째 전투의 환자들의 치료가 대충 마무리가 되자 우리들은 모두 탈진 상태 에 이르러 있었다. “이거 만만찮은 일이야. 아무리 사람을 살리는 것이 고귀하고 가치 있고 뜻 깊 고,,, 아무튼 대단히 좋은 일이지만, 이젠 손 하나 까딱할 힘도 없다구.” 화아가 흙바닥에 주저앉으며 그렇게 주절거렸다. “클클 나도 이제는 정말 힘들다. 저 녀석도 기운이 다한 모양이야.” 지토가 게브를 (또 하나의 지토 모양이다. 헷갈린다.)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수아나 풍아 광아 자이건도 마찬가지라는 듯이 동의에 가득찬 눈빛과 표정이 었다. 뭐 수아는 그래도 환자들이 더 걱정되는 눈치기는 했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문제를 회피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자, 그럼 이제 생각들 해 봐라. 밥은 어떻게 하냐? 자그마치 500명이 넘는 환자와 우리의 밥은 어떻게 해결을 하면 좋겠냐?” 나는 주위에 제각각의 모습으로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있던 아이들이 전부 맥없이 늘 어지는 것을 보아야 했다. 방법이 없단 말이다. 방법이. “일단 제일 먼저 심부름을 하고 식사를 할 인원부터 완전히 회복을 시킨 다음에 생 각을 하자. 일단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정신이 있는 사람에게 요리를 할 수 있는 사 람을 물어 찾아서 우선 회복시키고, 요리 도구를 좀 만들어야겠다. 지금으로서는 내 가 다시 어디를 갔다 오는 것은 무리일 것 같으니 말이야. 나중에 여유가 좀 생긴다 면 몰라도...” 그래서 우리들은 일단 환자들 중에서 요리에 능한 사람을 찾아 우선 회복 대상으로 지정했다. 그리고 지토와 화아는 예전에 도자기를 굽고 유리를 굽던 실력을 발휘해서 커다란 도 기 솥(크기가 사람 허리까지 오는 것을 솥이라 할 수 있나?) 몇 개와 작은 그릇과 수 저 등을 만들어 내었다. 하지만 도기는 잘 깨진다. 그러니 당연히 마법이 필요했다. 에구구 안 그래도 모자라는 마력이건만.... 나는 그 많은 솥과 국자와 그릇과 수저들에 (왜 하나같이 이런 걸 도자기로 만드느 냔 말이야. 철광석이나 하다못해 구리광석이라도 캐서 만들면 오죽 좋은가 말이야. 이 것들이 좀 힘들고 귀찮다는 이유로 나를 고생시키는 것이 아닐까?) 강화 마법을 걸어 야 했다. 그리고 그 동안 수아가 심혈을 기울인 요리사들이 하나 둘 원기를 회복하고 솥단지 앞으로 모여 들었다. 나는 어지간하면 요리를 위한 매직레인지(우리 마차에 달린 것 같은)를 만들어 주고 싶었지만 기본적으로 힘을 아껴야 했다. 그래서 결국에 솥의 음식을 끓이는 일은 아눈이 맡아 하기로 했다. 물론 그 때문에 카다는 저런 일에도 도움이 안 된다고 풍아에게 구박을 받아야 했고 말이다. 그 이후에는 아공간에 있는 요리 재료들을 풀어 주고 환자에게 알맞은 죽 종류의 음 식과, 내상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건강식으로 나누어 요리를 해 줄 것을 부탁했다. 여기에서 아까부터 언급하기를 꺼려서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물론 그것은 환자들의 반응이다. 거의 모든 환자들은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이 곳에 도착했고 치료를 받은 후에 정신을 차렸다. 물론 멀쩡한 정신으로 온 사람들도 간혹 있었다. 아무튼 이들은 자신들이 죽음의 문턱에 갔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우리들이 그들 의 생명을 살려 준 것을 알았다. 그러니 그 반응이야 당연히 우리들에게 고마움과 감사를 넘어서 경배의 수준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특히 수아는(왜 나는 빼는지 몰라) 어떤 이는 약사보살이라느니 혹은 약선(藥仙)이라느니 자애의 여신이라느니 아무튼 굉장한 별칭들을 붙이고 신성시까지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죽음이란 모든 인간들이 피할 수 있으면 언제까지나 피하고 싶은 가장 꺼려하는 존재 인 것이다. 그리고 그 죽음에서의 구원은 고정된 가치관에서 생각을 하든, 개방적 가치관에서 보 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최고의 은혜라 생각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그러니 그들은 무조건 시키는 대로 고개를 숙이고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내가 그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것은 그들의 반응을 이야기 하는 것은 바로 우리 얼굴에 금칠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하하 하지만 역시 요리 문제를 해결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 되는 것은 아니었다. 환자의 수가 의외로 많았고(500명이 뉘 집 애들 이름이냐? 나란히 눕혀 놓았지만 제 대로 깔아 놓은 것도 없이 풀 위에 그냥 누워있는 셈이다.) 처음부터 천막을 치기는 했지만 지금 천막 안에 누워있는 사람은 겨우 200명 정도 뿐이고 나머지는 그냥 흙바 닥에 누워있는 실정이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그나마 있지도 않은 힘을 끌어다가 지토가 지반 고르기를 하고, 언덕 뒤쪽으로 야전 병원을 확장했다.(그냥 땅만 마련했다. 지토가 있어 다행이다.) 하지만 여전히 물자가 모자라는 상황이었다. 환자들이 따듯하게 누워서 이슬을 피할 곳이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우리들은 머리로는 이것저것 고민을 하면서 환자를 돌보는 일에 열 중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일꾼으로 우선 회복을 시킨 사람들이 이리 저리 다니면서 우리들 의 잔심부름을 하기 시작했고, 요리사들의 요리도 어느덧 만들어져 잔심부름꾼에 의 해 서 환자들에게 전해졌다.(실제로 식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이 된 사람들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저 죽지 않을 정도의 치료로도 힘겨운 상황이었다.) 나는 그렇게 환자들 사이를 오가면서도 다시 싸움이 시작되는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싸움이 시작되면 이번에는 정말 전장에서 환자들을 데리고 온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인 것이다. 우리는 마음속에 그런 걱정을 품고 한 편으로는 환자들을 어떻게 먹일까? 어떻게 어 디에 재울까? 이런 걱정을 더하여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정말 다행스럽게도 그 밤이 올 때까지 더 이상의 전투는 없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정왕야의 병사들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나는 그것이 이상했 다. 여기에서 시간을 끄는 것은 정왕야 쪽이 불리한 상황이었다. 오래지 않아 천왕야 쪽의 원군이 온다면 상황은 어려워지는 것이니까.) 덕분에 우리는 환자들을 돌보면서 조금씩 힘을 회복할 수 있었고(실제로 치료에 사용 되는 힘은 수아와 파울의 힘과 게브의 힘, 그리고 나머지는 전부 내 힘이다. 흑흑. 다 른 녀석들이 상급의 능력을 쓰기 위해서는 내 힘이 무진장 필요하니 말이다.) 그러니 당연히 내가 힘을 회복하는 것이 곧 우리들 전제의 전력 회복이라고 보아도 무방한 상황이었다. 그러니 틈만 나면 운공에 명상이다. 특히 운기조식은 상당히 자주 해야 했다. 화아등이 쓰는 힘을 마력이 아닌 내공으로 뒷받침을 해야 했기 때문에 엄청나게 소비 되는(한 둘이냐? 넷이 한꺼번에 힘을 끌어 쓴다. 그러니 힘이 안 들겠냐? 아직 죽을 정도는 아니지만 말이다.) 내공을 틈틈이 보충을 해야 했던 것이다. 그렇게 오후 내내 환자를 돌보고(거의 수아와 화아등이... 난 가만 있었다.) 기력을 회복하고 하면서 보냈다. 그리고 그 동안에도 일꾼들의 필요성을 느껴서 상처가 그나마 덜한 사람들을 우선적 으로 회복시켜서 일꾼 확보에 주력했다. 하는 일이라고 해야 우리들의 잔심부름이지만 환자들의 상처를 닦아내고 외상약을 발 라주고 붕대를 감는 일이야 훈련받은 병사들이니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터를 마련한 곳에 일단은 나무를 이용해서 천막의 골격을 세우는 일도 그들에 게 부탁해 두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내 마력이 회복되고 나는 다시 장거리 워프를 했다. 마티운 시의 마법 길드가 또 한 번 시끄러워진 것은 당연했다.(사실 마땅히 부려 먹 을 사람이 없으니 마법사들을 닦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들은써클의 차이가 곧 계급의 차이로 느끼는 경향이 있으니 말이다.) 곧장 길드원들을 풀어서 천막을 칠 재료들과 침상의 용도로 쓸 수 있는 물건들을 끌 어 모으라고 닦달을 했다.(덕분에 상당히 많은 보석들이 허공중에 흩어졌다.) 나 혼자서 돌아다니는 것 보다는 훨씬 효과적으로 일을 할 수 있으니 이 방법이 제일 이었다. “저 루탄님, 어디서 뭘 하시는데 이렇게 많은 물건들이 필요하신지...” 마티운의 젊은 마법사(이름이 두루린이란다. 보기보다 제법 실력이 있는지 4급 마법 사라고...4급이면 6써클 정도 된다.)가 물어왔지만 나는 굳은 얼굴로 그 말을 씹어 주 고는 할 일이나 하라고 밖으로 내 몰았다. 그리고 길드원들이 물건을 들고 들어오면 내가 준 보석과 물건의 가치를 따지고 남 은 돈(흔히 이런 경우에 삥땅이라는 고전적인 습관들이 발현되기 때문에..)을 철저히 따져서 돌려받고(좀 심했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아마 상당수의 길드원들은 자기 주 머니를 털어야 했을 것이다.) 물건들은 아공간에 차곡차곡 쌓았다. 그리고 대충 물건들을 사는 일이 마무리되자 나는 두루린을 불러 앞으로 필요할 것 같은 물건들(주로 식량과 잡화 종류, 그리고 옷감들이었다. 물론 의약품은 당연한 것 이었고)의 목록을 정해주고 다른 도시에서 주문해서 빠른 시간 안에 준비해줄 것을 부 탁(?)했다. 그리고 고생한 길드원들에게 마법실현에서 많이 사용되는 두개의 수식을 결합해서 하 나의 수식으로 만든 것을 선물로 안겨 주었다. 뭐 그 순간에 그들의 표정이야 달리 이야기 하지 않겠다.(나 완전히 우상이 되었다 고 봐야....) 그렇게 일을 마치고 다시 야전병원으로 돌아왔을 때는 해가 지고 하늘에 별이 하나 둘 어둠을 비집고 돋아나고 있는 시간이었다. 밤이었지만 광아의 조명아래에서 천막을 치는 일이 시작되었고(이런 걸 마법으로 하 면 되지 않느냐는 소리는... 방법이 있을지 몰라... 하지만 모른다.) 새로 투입된 30 여명의 일꾼들이 들려들자 오래지 않아서 마무리가 되었다. 천막 안에(실제로 천막이라 해도 벽도 없다. 지붕만 있다. 벽은 필요 없다. 바람이 불지 않고 온도 변화도 거의 없으니까. 이 지역에는 말이다. 마법은 위대하다 가끔 은.) 환자들을 위한 침대(재료가 많이 않고 시간이 없어 상당히 조잡해 보인다.)가 만 들어 졌고 환자들이 옮겨졌다. “그 동안에도 정왕야 군대가 움직이지 않은 모양이지? 무슨 일일까? 시간이 지나면 더 불리한 쪽이 그들인데..” 나는 풍아에게 병사들의 움직임을 물어보고 중얼거렸다. “저기 형님, 제가 생각을 해 봤는데요. 아무래도 정왕야 쪽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우리들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나의 중얼거림에 광아가 나섰다. “무슨 소리야? 우리 때문이라니?” 나는 의외의 말에 되물었다. “그게요. 아무래도 우리가 환자들을 데리고 온 것이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어요. 전장에서 어느 순간에 병사들이 사라진 것이죠. 그것도 한 둘이나 몇 십 단위 라 면 어느 정도 그러려니 했겠지만, 500이나 되는 인원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건 눈감 은 장님이 아니면 알 수 있는 일이지요. 그러니 도대체 무슨 일이진 확인하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움직임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겁니다.” 나는 광아의 말에 어느 정도 수긍이 갔다. 아무리 적의 병력이 3만5천의 대군이라고 해도 그 중에 500이 별 것 아닌 것이라 해 도 전장에서 병사들이 이유 없이 사라진다는 것은 확인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저들 중에 뛰어난 술법사(이 경우에는 마법사가 유리하겠다.)가 있다 면 전장에서 일어난 마나의 유동을 따라서 이곳으로 병사들이 이동되었다는 것을 알 아 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문제는 그 이후에 정왕야의 군대가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가 문제이기는 했지만 말 이다. “그래.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 그럼 풍아 그 동안에 여기로 정왕야 쪽에서 어떤 특 별한 움직임은 없었니?” “글쎄요. 아직까지는 별다른 움직임은 없어요. 이 곳을 지키는 경계병의 수가 바뀐 것도 아니고. 특별한 인물이 왔다 간 것도 아니고..” 그럼 정왕야 쪽에 뛰어난 술법사가 없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조금 더 시간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나는 속으로 머리를 굴리며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했다. “그런데 풍아야 행문성 안의 상황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 있니?” 나는 다시 풍아에게 물었다.(이제는 풍아가 우리의 정보 담당이 되었다. 이게 다 카 다 덕분이다.) “네, 오빠. 세 번의 공격으로 어느 정도는 피해가 있었나 봐요. 두 번째와 세 번째 에 성벽위로 올라간, 그 돌격병이라고 했던 병사들 때문에 피해가 제법 있었고, 정왕 야의 궁수부대의 공격에도 꽤 피해가 있었어요. 아직은 정왕야가 투석기나 화공을 하 지 않아서 성 내의 물질적인 피해는 그다지 없지만 몇 백은 죽거나 다쳐서 전투가 어 려운 상황이에요. 허긴 저 성벽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병사가 아니라 일반인이었 으니 그 정도도 대단한 것이라고 봐야겠지요.” “역시 모리요타가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데에는 재주가 있다더니... 성의 주민들을 농한기에 잠시 훈련을 시킨 것으로 저 정도의 전력을 만들었다니 대단하군. 그럼 성 안 에서는 병사들의 치료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 거야?” 나는 다시 풍아에게 물었다. “호호, 성안은 걱정이 없을 것 같아요. 환자들은 우선적으로 본청 쪽으로 이동이 되 어서 치료를 받고 있으니 말이죠. 호호호.” 일단 그럼 행문성 안의 사람들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 밤에 나와 동생들 그리고 지토는 생각지도 않은 이유로 생긴 여유를 이용해 최대 한 환자들을 치료하는데 최선을 다 했고, 아침 해가 뜰 무렵까지 정왕야는 행문성을 다시 공격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자정이 넘어가는 시간부터 상당수의 인원(거의 술법사로 보이는 인물들 이) 야전병원의 결계 밖에서 가지가지 방법으로 결계를 풀거나 파해하려고 애를 쓰고 있 었다. (아니 해가 뜬 지금도 여전히 노력중이다.) 하지만 결계가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간간히 살펴보니 마법사도 있 고 또, 그 중에 진법에 대한 지식이 있는 인물도 포함이 된 모양이었지만 그 두 가지 에 대한 지식이 함께 있는 인물이 아닌 이상은 우리가 설치한 결계를 이해하고 파해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하하 거기다가 마법도 진법도 상당히(이건 아주, 상당히, 굉장히, 매우, 무지무 지, 꽤 높은) 실력을 지닌 내가 설치한 것이니 저들로는 아무래도 무리일 수 밖에 없 다. 하지만 끈기있게 연구하고 도전하다 보면 무언가 얻는 것도 있을 것이니.... 푸하하 하 노력들 해 봐라. 하하 아무튼 그렇게 밖에서 고생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안에서 고생하는 사람들도 있 었다. 우리들 말이야. 잠도 못잤지. 별로 맛도 없는 음식을 먹으면서(요리사들 실력이 별로 였다. 거기다가 대량으로 만드는 음식이니...) 죽어라 환자들을 치료해야 하는 우리 들 의 고생이야 말로 해서 무엇 하겠는가? 온 몸에 피범벅이 되어서 치료술을 쓰는 수아나 광아나 지토나... 그나마 붉은 색으 로 도배를 한 화아는 별로 표시가 나지 않지만... 하하. 처음에는 적당히 치료를 해서 죽지 않을 정도만 치료하고 오랜 기간 요양을 통해서 건강을 회복하게 하는 방향으로 치료를 했지만 아무래도 필요한 일꾼들을 확보하기 위 해서 어쩔 수 없이 완전하게 회복시켜야 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밤 세워 노력한 끝에 이제는 야전병원 일꾼이 100여명, 요리사가 10여명 확보 가 되었다. 일꾼들 중에서 20여명은 건축에 재주가 있는(전직이 건축인) 사람들이었고 10여명은 약초와 치료에 대한 경험이나 지식이 있는 사람들(약방을 경영했거나 혹은 의료와 관 계있는 직업. 그 중에 수의사도 있었는데...)로 뽑았고 나머지는 완전히 믿는 것은 힘 뿐인 사람들이었다. 뭐 단순한 심부름꾼이라 생각하면 될 일이다. 그리고 치료에 관한 지식이 있는 사람은 찾기가 어려워서 그 정도의 인원 뿐이었지, 더 있었으면 그들을 우선적으로 치료했을 것이다. 워낙 젊은 사람들뿐이어서(그 중에는 10대 후반도 제법 되었다.) 재주가 있는 사람 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아무튼 그렇게 준비를 하고 우리들은 잠시 한가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특별한 돌발 상황이 생기지 않는 이상, 이제 남은 사람들은 시간이 병을 고쳐줄 것이 었다. 그렇게 한 밤을 고생한 덕분에 아침 해가 뜨는 것을 지켜보면서 잠시의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역시 한 손이 하는 일 보다는 여러 손이 하는 일이 힘도 덜 들고 시간도 절약된다. 일꾼들과 치료사(사실 크게 실력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지만)들이 환자들 돌보는 사이 에 나는 운기조식과 명상을 했고 동생들과 지토, 자이건은 옷을 갈아입었다. 그런데 자이건은 언제 옷을 준비한 것일까? 아마도 크리트니아에서 잠시 갔다 온다 던 그 때에 준비한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누가 그랬던가? 일복이 터진 놈은 하늘이 쉬게 해 주지를 않는다고(그런 말 이 있나?)... 오래지 않아서 정왕야의 병사들이 다시 행문성 공성에 나섰던 것이다. 방식은 어제와 비슷했지만 이번에는 크게 달라진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투석기(다른 이름으로 발석차)가 동원되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저 투석기들은 밤사이에 도착을 한 모양이었다. 아마도 먼 거리를 옮겨 오는데 시간이 걸려서 어제는 사용을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투석기는 화살보다도 사정거리가 길어서 정왕야의 공격은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사다리부대의 돌격과 함께 투석기가 성벽을 공략했고, 덕분에 사다리부대는 상대적으 로 적은 희생으로 성벽에 사다리를 올릴 수 있었고, 이어 말 탄 돌격병들이 성벽아래 도착, 궁병과 투석기의 지원을 받으며 성벽을 타고 올랐다. 그리고 그와 함께 술법사 들이 어제와는 달리 전방향으로 분산되어서 마법 공격으로 돌격병을 돕고 있었다. 한마디로 전면적인 공격이라고 봐야 했다. 거의 2만 5천에 이르는 병사들(기마병이 1만정도 된다. 그리고 돌격병이 1만, 사다 리 부대가 1만, 나머지는 궁병이다. 기마병을 제외한 모두가 공성중이다.)이 성벽을 타고 오르고 떨어지고, 비명을 지르고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좀처럼 성벽 위로 올라가는 돌격병의 수가 많지 않았고, 성벽을 확보하는 돌 격병도 아직은 거의 없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기마병들이 일제히 성벽을 향해 말을 몰았고 성벽 가까이 다가간 1 만 기병들이 동시에 석궁을 성벽으로 쏘아올렸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한 발씩의 석 궁을 쏜 기병들을 썰물처럼 성벽에서 물러났다.(두 개의 석궁을 들고 있었던 것이다. ) 하지만 이 한 번의 공격은 참으로 유효적절했다. 가까운 거리까지 쇄도한 기병들의 2만발의 석궁화살들은 성벽의 병사들을 쓰러뜨리기 도 했지만 돌격병들이 성벽위로 올라설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 그와 함께 전세가 급격하게 기울기 시작했다. 수많은 돌격병들이 성벽 위로 올라섰고, 성벽위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지금까지 용감하게 싸우던 성벽 위의 병사들이 급격하게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뭐야? 왜 저렇게 형편없이 밀리는 거야?” 화아가 전황을 살피다가 어이없는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그러게요. 오빠 왜 저렇게 상대도 안 되는 거지요? 지금까진 잘 싸웠잖아요.” 수아가 안타까운 듯이 물어왔다. 나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건 아마도 모리요타가 짧은 시간에 병사들을 훈련시키느라 궁술을 통한 수성만 을 가르쳤기 때문일 거야. 사실 지금까지는 너무 잘 싸웠지. 하지만 성벽위의 싸움은 1:1이나 혹은 집단으로 이루어지는 직접 전투란 말이지. 그러니 당연히 경험이 없는 행문성 사람들이 밀리는 것이지... 이렇게 되면 싸움이 끝났다고 봐야 할 것 같은 데... 뭔가 획기적인 전술이 없다면 말이야.” 나도 안타까운 마음에 행문성의 최후를 보고 있었다. 이제는 거의 성벽위의 병사들은 성 안으로 밀리고 있었다. 다행한 것이 있다면 성벽에서 성 안으로 내려가는 길이 좁아서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정도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 곳을 뛰어난 사람이 지킨다면 어느 정도 시간을 벌 수는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내 생각대로 성벽에서 성 안으로 내려가는 계단들은 철저하게 막혀서 성벽위 에 병사들은 많았지만 성안으로 들어간 병사들은 없었다. 성벽에서 계단으로 가는 길이 일종의 2차 저지선의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왕야 쪽도 그런 문제를 짐작한 듯이 성문으로 술법사들을 집결시키고 성문 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술법사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성문은 집중적인 공격에 서서히 부서지기 시작했고 사다리병들은 해자 위로 사다리를 몇 겹으로 걸치고는 사다리 위에 나무판들을 깔아서 다리를 만들었다. (완전히 공병들이다.) 그리고 이제는 성문을 통해서 기마병들이 쇄도하는 일만 남겨두었다. “이제는 별 도리가 없겠구나. 막을 길이 없어. 행문성의 패배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일행을 돌아보았다. 다들 안타까운 표정들이었다. 우리가 도와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마음속에서는 행문성의 편을 들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행문성이 이렇게 지게 되니 속이 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행문성의 끝을 보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기마병들이 양쪽 성문을 향해 말발굽을 떨치며 쇄도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 “어떻게 해? 흑” 풍아와 수아는 아무래도 마지막을 보지 못하겠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그런데 막, 기병들이 성문 앞 사다리로 만든 다리에 닿았을 때, 이변이 일어났다. 성을 둘러싸고 있던 해자에서 거대한 무엇인가가 솟아나며 다리를 치워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가 아니었다. 해자 전체를 돌아가며 생겨난 그것들은 높이가 성벽의 높이 보다 높았다. 생물 시간에 배운 적이 있지요? 히드라라는 녀석이요. 그거 머리 부분에 여러 개의 촉수를 지니고 있는 그거. 종류로는 강장동물에 속하며 항문이 없어 입으로 먹고 입 으 로 토해내는 그 무지 지저분한 동물 히드라. 바로 그렇게 생긴 녀석이었다. 아니 그런 녀석들을 무수히 등에 달고 있는 한 마리라고 보아야 할까? 왜냐하면 그 녀석들이 밑 부분에서는 이어져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촉수들의 무수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성벽 위에 있던 수많은 돌격병들과 해자를 둘러싸고 있던 사다리병들이 순식간에 히 드라의 촉수에 감기고 얻어맞아서 쥐어짜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 갔다. 그 거대한 성을 둘러싸고 무지막지한 공격을 하는 히드라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정말 어마어마한 장면이었다. “오, 오빠? 저거 환수일까요?” 수아가 물었다. “글쎄, 환수가 아니면 마수이겠지만 나도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구나. 아무튼 대단 한 녀석인 것은 분명하구나.” “그런데 왜 저 녀석을 지금까지 쓰지 않았을까요? 그랬으면 싸움이 훨씬 더 유리해 졌을 텐데요?” 광아가 다시 물었다. 그런 걸 내가 어찌 아냐구. 내가 모든 것을 알 것이라는 그런 눈빛으로 설명을 요구 하지 말란 말이야. “글쎄, 내 생각에는 아마도 저 환수 혹은 마수를 다루는 사람의 자질이 문제인 것 같다. 저 녀석과 동화력이 아마도 상당히 낮은 모양이지. 그러니 저 녀석이 공격을 받 으면 그 몇 배의 충격을 입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 지금까지 저 녀석을 쓰 지 못하고 있었겠지. 물론 저 녀석의 덩치가 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상처가 경미하 기 는 하지만 지금처럼 저렇게 투석기에 사정없이 맞으면 상당히 충격이 있을 것이고, 저 녀석은 ‘우쒸 무지 아프잖아 왜 때리려?’ 할 정도의 충격에도 소환자는 기절할 것 같은 고통을 느낄 수도 있지. 그러니 부르고 싶어도 마음대로 부르지 못하는 녀석 이었을 거야.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성벽 위에 많은 병사들을 유인하고 도망갈 길이 없 는 상태에서 저 녀석을 불러 병력을 한꺼번에 몰살시키려는 것이었겠지. 그리고 그건 성공을 거둔 듯이 보이는 구나. 이제 성벽 위에 있는 병사들은 사다리가 없으니 도망 도 갈 수가 없고 성안으로 내려간 궁병들이 화살을 쏘기 시작한다면 피할 길도 없으 니 전멸이나 마찬가지겠지.” 나는 그렇게 말하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사다리병들은 이제 모두 물러나 진지 쪽으로 퇴각을 하고 있었고, 성벽을 둘러싼 괴 물을 향해 투석기와 화살, 술법들이 맹렬하게 날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괴물은 다시 해자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정왕야의 사다리병은 더 이상 해자쪽으로 달려가 사다리를 성벽으로 걸칠 생 각을 하지 못했고, 성벽위에 있던 돌격병들은 하나 둘 무기를 버리고 항복을 하는 모 습이었다. 이 한 번의 싸움에 정왕야는 엄청난 병사를 잃고 말았다. 돌격병 1만이 거의 모두 성벽 위에 올라가 있었고(물론 그 전에 죽은 사람도 부지기 수다.) 사다리를 걸치기 위해 죽은 사다리병도 만만한 수가 아니었다. 대충 살펴보면 돌격병 중에서 남은 수는 이제 5천이 겨우 되는 것 같았고, 기병은 9 천, 궁병 5천이 남아 있었다. 그럼 결국에 어제 오늘 싸움에서 정왕야의 3만 5천 병 사 가 1만 9천이 되었다는 말이었다. 그것도 이제 돌격병은 남아 있지도 않았다. 공병들에게 성의 공략을 맡길 수는 없는 일이니 전투는 끝이 난 것이나 마찬가지였 다. 그렇게 전투가 끝나자 광아는 곧 전장으로 달려가 환자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200의 환자가 도착했고, 급하게 스크롤을 요구하는 광아에게 다시 스크롤 의 마력을 충전해서 보내고 다시 환자를 받고... 그렇게 우리 야전 병원에는 순식간 에 700이 넘는 환자가 모여 들었다. 나는 그 사이에 죽어라 스크롤 충전하고 환자들 소환하느라 마력이 급격하게 줄어들 었다. 이 놈이 몇 번이나 더 이상 환자를 받을 수 없다고 했는데도 자꾸만 스크롤을 요구 해 왔던 것이다. 무슨 생각이 있겠거니 하고 계속 스크롤을 보내기는 했지만 700이나 되는 환자를 한 꺼번에 데리고 올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죽지 않을 정도의 최소한의 치료만을 하라고 시킨 탓이었는지 환자들의 치료 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상태가 그나마 덜 한 사람들은 마법 길드에서 사온 치료 포션을 이용해 상태 를 호전 시키고 있었다.(그게 자그마치 30만 덴 어치인 것을 알기는 할까? 이제 수중 에 돈이 거의 없는데...) 그렇게 급하게 죽지 않을 정도로만 치료를 하면서 700명의 환자를 한 바퀴 돌아오자 해가 기울고 있었다. 하지만 700명의 환자 중에서 드디어 사망자가 나오고 말았다. 상처를 어느 정도 치료해서 목숨에는 지장이 없을 것으로 보고 다른 환자로 넘어갔는 데.... 나중에 정신을 차린 환자가 자신의 눈에 화살이 박힌 것을 알고는 충격을 받 아 서 심장 마비를 일으킨 것이었다. 부들부들 떨더니 죽었다는데... 다른 환자를 신경 쓰던 우리는 미처 그것을 보지 못 했다. 덕분에 환자들을 어느 정도(정말 죽지 않을 정도로만) 치료를 하고 잠시 휴식을 위 해 모인 우리의 얼굴은 별로 밝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저기를 봐라. 저기 누워있는 병사들의 수는 자그마치 1만에 가까운 숫자다. 여기 한 사람이 더 있다고 해서 그렇게 우울할 필요는 없는 것이야. 우리의 부주의란 생각도 버려라. 그것이 그 사람이 타고난 수명이라 생각하면 되는 것 이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우리가 그 사람에게 신경을 쓰다가 다른 사람이 죽었을 수도 있다. 그러니 깊게 생각할 것 없다.” 나는 특히 우울한 표정인 수아와 광아, 풍아의 머리와 어깨를 한번씩 쓸어주고 두드 려 주었다. 사실 나로서도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눈앞에서 치료하던 환자가 죽었는데 기분이 좋으면 그게 이상한 일이지. 하지만 그 일에 오래도록 마음을 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밤이 찾아왔다. 한꺼번에 밀린 환자들로 병사(천막 침대)가 모자라는 상황이라 많은 환자들이 맨땅 에 마른 풀을 깔고 눕혀졌다. 어둠 속에서는 소리가 참 잘 전달되는 듯 하다. 실제로 그렇지는 않겠지만 아무래도 낮 보다는 밤에 여러 가지 소음들이 줄어든 탓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밤이 되자 환자들의 신음 소리가 높아지는 것 같다. 사실 어제 밤에는 정신없이 환자들 사이를 오고 가느라 신경을 쓰지 못했지만 오늘 밤은 좀 느긋한 마음이 되어서 인지 환자들의 신음이 귀에 들린 것이다. 환자들의 수야 1100에 가까운 수였지만(회복 되서 움직이는 사람이 100정도 된다.) 이제 급하게 손을 볼 환자들도 없었고, 일꾼 확보를 위해 완전 회복을 시켜야 할 사 람 도 없었다. 그리고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제는 전투가 없을 것 같다는 안도감일 것이다. 정왕야의 병사들은 이제 더 이상 공격을 할 병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아마도 저들이 계속 진지를 지키고 있는 것은 적에게 뒷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마 지막 남은 자존심일 것이다. 나는 이 밤에 야음을 틈타 병력들이 철수 할 것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내 생각대로 밤이 되자 우리 야전 병원을 지키고 있던 경계병들이 철수 했 고, 멀리서 정왕야의 병사들이 철군하는 소리를 희미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소리는 행문성의 병사들도 들었던 모양인지 행문성에서 승리의 함성이 울 려 퍼지는 것도 들을 수 있었다. 승전고를 울리고 징을 치고 피리를 부는 소리가 멀리까지 들려왔다. “이제 싸움이 끝난 모양이네? 그래도 다행이네. 이렇게 빨리 싸움이 끝나게 되어 서...” 지토가 옆으로 다가 앉으며 클클 거리는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그렇지? 아무래도 행문성의 싸움을 이끌었던 사람이 누구인지 몰라도 상당한 수단 을 지닌 인물이야. 자신이 가진 최고의 무기가 지닌 약점을 잘도 파악해서 아주 적절 하게 사용을 했으니 말이야. 실제로 그 괴물이 한 일은 해자와 성벽을 잇는 사다리와 다리를 제거하는 일과 사다리병을 놀라게 해서 퇴각 시키는 일이었겠지. 물론 어느 정 도 적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생각을 했겠지만 말이야. 하지만 만약 성벽위에 돌격병 들 이 모두 올라와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면 이야기는 달랐겠지. 정왕야의 병사들이 저렇 게 물러가지도 않았을 것이고 말이야. 성벽 위에까지 적의 병사들을 끌어 들여 고립 시 킨다는 생각은 정말 대단한 생각이었던 것 같아. 그러고 보면 성벽 위에서 어처구니 없이 밀리기만 했던 행문성의 병사들의 행동이 이해가 가기도 하는군.” 나는 그렇게 행문성 싸움의 승리를 이끌어 낸 인물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실제 그 괴물이 등장해서 움직인 시간은 겨우 십여 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지만 그 효과는 엄청난 것이었다. “아마도 그 성주라는 인물이 이번 싸움을 지휘하지 않았을까요? 어쩌며 그 성주가 괴물을 소환한 당사자인지도 모르지요. 형님.” 그러고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소환술을 쓰는 사람은 나도 구별이 잘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이 마나를 동원해서 소환을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예전에는 마나를 썼는데 이제는 동화력을 쓴다니...) 평범한 사람들과 구별이 쉽게 되지 않았던 것이다. “어쨌든 싸움이 끝나서 이제 더 이상 다치는 사람이 없게 된 것이 무엇보다도 다행 이에요. 호호호. 오빠 그렇죠?” 수아가 어느새 옆에 다가와 어깨에 기대앉으며 말했다. “하하, 그럼 그럼. 이제는 환자들을 회복시켜서 돌려보내는 일만 남은 셈이구나. 하 하하.”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중에 어느 사이 우리 일행들은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지난 이틀 간의 일들에 대해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었다. 환자들은 그냥 뒀다. 10명의 치료사(미덥지는 않지만)가 일꾼들을 데리고 돌보고 있 는 중이니 문제가 있으면 부를 것이었다. 그렇게 밤은 깊어 갔고, 환자들의 신음소리가 들리는 곳이었지만 어둡고 습한 느낌 없는 밤하늘이 우리를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오랜만에 따뜻한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우리의 잠자리 마차안의 침대 말이다. (뭐 자이건은 여전히 밖에서 천막을 치고 자 야 했지만...) 함께 고생하고 그렇게 잘 준비를 하는 것이 조금은 안쓰럽기는 했지만 하는 수 없는 일이다. 하하하 그리고 잠자리에 든 우리들을 밖에서 환자를 돌보던 사람들은 깨우지 않았다.(그들 이 보기에도 우리들은 너무 많이 고생을 했으니까...아니면 무서워서였을까? 모른다. ) 우리들은 아침 해가 제법 떠오른 다음에야 자리에서 일어났고, 요리사들은 환자식이 아닌 특별 요리를 만들어 우리들에게 가져다주었다.(그래 봐야 우리 입맛에 안 맞는 다. 김치를 꺼내고 나서야 맛있는 식사가 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행문성 쪽을 자세히 살펴보니 아직도 행문성의 성문을 부셔진 채로 있 었지만 성문 앞에는 예전에 있었던 그 다리가(돌로 된 그 다리. 우리가 마차를 타고 건너던 그 다리. 싸움 중에는 해자 밑으로 들어가 있던 그 다리.) 벗듯이 놓여 있었 고, 사람들이 나와서 전사자들의 시체를 수거하고 있었다. 여기서는 적의 시체를 어떻게 하는지 환자들에게 물어 보았더니 그건 사람에 따라 다 르다고 한다. 어떤 경우에는 들판에 짐승 먹이로 던지고, 어떤 경우에는 성벽에 매달아 두기도 하 고, 어떤 경우에는 땅에 묻어 주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적의 진지로 보내 주기도 한다고... 아마도 행문성주의 인상으로는 두 번째 까지는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아마도 땅에 묻거나 적에게 돌려보내겠지만 적이 이미 말머리를 돌려 사라진 마 당에야 그게 불가능하니 땅에 묻을 것 같았다. 아무튼 우리가 바라보는 동안에 까맣게 사람들이 몰려 나와서 시체를 모아 수레에 싣 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군, 우리가 행문성으로 다시 갈 때는 시체가 썩는 모습은 보지 않아 도 되니 말이야. 그나저나 해자에 빠진 시체들은 상당히 보기가 휴할텐데....크으” 밥 잘 먹고 옆에서 쓸데없는 소리를 주절거리는 지토의 머리를 지긋이 눌러주고는 나 는 다시 환자들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일단 밤사이에 상황이 악화된 환자들은 치료사들이 알아서 채크를 해 두었기 때문에 급한 환자들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들은 짧은 오전을 그렇게 환자들을 돌보는 것으로 보냈다. 그리고 우리가 점심을 먹고 잠시 허리띠를 풀고 있을 때,(그건 그냥 느긋이 쉬고 있 다는 말이다. 누가 허리띠를 진짜 풀겠는가.) 행문성으로부터 일군의 무리들이 야전 병 원(언덕)을 향해 왔다. 그들이라고 결계를 통과할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닐 것이기에 나와 화아가 마중을 나갔 다.(다른 사람들은 환자를 돌봐야 하니까...) 우리를 찾아 온 것은 의외로 6방들(연회장에서 본 적이 있는 행문성의 행정 실무관 들, 각각의 직책을 외우고 있을 턱이 없다. 자세히 듣지도 않았다.)이었다. “하하, 다시 뵙는군요. 대승을 축하드립니다. 뭐 도움도 준 것이 없는 저희야 드릴 말씀도 없이 송구스럽습니다만... 그런데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는지요?” 나는 그들과의 격식적인 인사를 대충 건너뛰고 물었다. “저 그것이 저희 성주님이 이 곳의 상황을 알아 오라고 하셔서, 그리고 이 곳의 상 황을 봐서 루탄님께 부탁하실 일이 있으니 성에 잠시 들러 주셨으면 하는 말씀을 전 하 라 하셨습니다.” 나는 대표격인(이방인가?) 관리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의 잠겼다. 하지만 여기 상황을 행문성의 성주에게 알린다고 해서 특별히 나쁠 것도 없었다. 나는 지금 우리들이 1200여명의 환자들을 치료 중이며, 전원 정왕야의 병사들이라는 것을 말하고, 그들을 데리고 온 경위도 간단히 설명을 했다. “그럼 여기 있는 환자들이 대부분 치료가 되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것도 1200이 나 되는 중상자들이 말입니까?” 나는 그렇다고 대답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놀라는 것은 내가 알 바가 아니다. “그럼 혹시 저희 성에 잠시 들러주실 시간은 있으신지요? 시간이 되신다면 지금 당 장 모시고 싶습니다만...” 이방은(아! 이들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이름도 관직도 기억 이 나지 않으니...) 그렇게 서둘러 나를 성으로 초대했다. 나는 위에서 남은 사람들이 충분히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화아에게 내가 잠시 성에 다녀온다고 전하고 내려오라고 했다. 그리고 곧 화아가 돌아오자 우리들은 육방관속들을 따라서 행문성으로 향했다. 그들이 미리 작은 마차를 준비했기 때문에(올 때는 육방들 중 몇이 타고 왔던 것 같 은데... 갈 때는 그들은 말을 타고 있었다.) 화아와 나는 마차를 얻어 타고 행문성으 로 향했다. 성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전쟁의 비참함이 피부로 와 닿았다. 성을 둘러싼 해자 주위의 땅은 온통 검붉은 피에 물들어 있었고, 아직도 전부 치워지 지 못한 시체들이 보였다. 땅 위에는 빽빽하게 화살들이 박히고 또 흩어져서 치열했던 전투를 대변해 주고 있었 고, 그 사이로 창과 칼, 방패 사다리와 그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성벽도 여기 저기 술법과 투석기에 당한 흔적이 커다랗게 남아 있었고, 가까 이 다가간 해자의 물빛도 차마 보기 민망한 빛으로 흐려 있었다.(제법 붉은 기가 도 는 흙탕물이었다.) 그리고 성문은 나뭇조각으로 흩어져 있었고, 성문 위의 돌로 지은 누각도 군데군데 허물어지고 있어서,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음을 말해 주었다. 마차는 성문을 지나 곧장 행문성본청을 향해 달렸다. 본청을 향해 달리는 중에도 화살과 돌덩이에 부서진 집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행문성의 본청 마당(큰 마당)에는 부상자들로 발 디딜 틈도 없었기에 마차는 본청 문 앞에 세워 두어야 했다. 수많은 환자들이 누워 신음하고 있었고, 성의 백성인 듯한 아낙들이 분주하게 오가 며 상처를 돌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 사이에 의원인 듯한 사람들과 술법사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거의 탈진에 가까워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서야 행문성주가 나를 부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턱없이 부족한 의원들 때문일 터였다. 나는 곧 이방들의 안내를 받아 본청 건물의 3층으로 안내 되었고 그 곳의 큼직한 방 에서 침대에 누워(왕야의 아들이라 그런지 무지 호화스러운 방이다.)있는 소란을 볼 수 있었다. 그의 옆에는 모리요타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환자를 지키고 있었다. “이런, 귀한 성주가 이게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망가진 거야? 설마하니 성주가 칼 들고 싸우지는 않았을 것이고, 역시 마지막에 나온 그 괴물은 이 녀석의 솜씨였던 모양이지?”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소란의 상태를 살폈다. “이런 심각하군. 이건 뭐야? 겉은 멀쩡한데 속은 아주 망가졌네? 충격으로 내장과 심장에 무리가 갔고 혈관도 몇 개 터진 것 같고, 그나마 머리 쪽에는 상처가 없는 것 같으니 다행이지만, 이대로 두면 살기 어렵겠네?” 나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모리요타를 보았다. 그는 불안한 얼굴로 나를 마주보고 있었다. “그, 그럼 방법이 없을까?” “글쎄,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다는 생각이 드는군. 어제 낮에 이 모양이 되었는 데.. 거의 하루 동안 변변한 치료를 받지 못한 것 같은데? 이래서는 어렵지.....” 순간 모리요타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제, 제발 부탁이네. 이 친구 좀, 어떻게든 살려주게. 그, 그럼 내, 무슨 일이라도 다 하겠네? 제발 좀 살려주게. 제발.” 모리요타는 순식간에 내 의자에서 내려와 한 쪽 무릎을 꿇고 내 손을 잡고 사정을 하 기 시작했다. 나는 조금 놀려 주려고 했던 것이 이렇게 심각해지자 조금 난간해 졌다. “이, 이봐. 이 손 좀, 놓아. 일단 치료를 해 보자고. 그래야 어떻게든 방법이 나올 것이 아닌가 말이야.” 나는 그렇게 모리요타에게서 손을 빼고 소란의 상처를 살폈다. 솔직히 소란의 상태는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치료가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말이다.) 나는 일단 몸의 활력을 위해서 치유마법을 걸어 주고, 몸속에서 파열된 혈관들을 찾 아 공력을 이용해서 연결하는 작업을 했다. 실제로 연결을 하는 것은 마력으로 운용된 치유마법의 기운이었지만 아주 작은 범위 에 한정되게 그 기운을 유도하는 것은 내공의 힘이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혈관에 대한 치유가 끝나자, 그의 심장에 대한 치료를 시도 했다. 그런데 살펴보니 그의 심장은 처음부터(아니 어려서부터인 것 같았다.) 상처가 있었 던 모양이었다. 이를테면 심장에 커다란 상처를 입고도 살아있는 존재라고나 할까? 그는 어려서 심장에 상처를 입어, 심장의 한 귀퉁이가 약화되어 있었다. 아마도 무리 한 운동은 어려웠을 것이다. 예전 모리요타와의 활극조차도 그에게는 상당히 힘겨운 일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나는 그 심장의 약해진 부분을 마나와 내공을 이용해서 보완했다. 일종의 영구 강화마법의 변형판이라 생각하면 된다. 그걸 인체에 걸었다는 것이 문제 이기는 하지만, 더 이상 성장이 필요하지 않은 부분이니 괜찮을 것이었다. 그 이후는 별로 어렵지 않게 치료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의 전신에 상급 치유마법을 걸어 활력을 찾아 주자, 소란은 그 때야 눈을 떴다. “이게 누군가 루탄 자네가 이 방에는 어쩐 일인가? 자네가 여기 있는 것을 보니 우 리가 싸움에서 이긴 모양이군. 어? 모리요타 거기 있었어? 그래 우리계획대로 되었 지? 그렇지?” 나는 소란의 말을 듣고서야 나를 부른 것이 소란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그럴 수 있는 놈이 모리요타 뿐임도 알았다. “그래, 니가 세운 계획대로 조금의 어긋남 없이 마무리가 되었다. 포로만 6700명이 나 된다. 이놈아.” 아마도 그 전투의 계획은 소란의 것이었나 보다. “그런데 루탄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소란은 다시 나를 보며 물었다. “그, 그게 루탄이가...” 모리요타가 대신 하려는 설명을 내가 잘랐다. 퍼벅!! “어서 안 일어나? 멀쩡하게 고쳐 줬더니 뭐 한다고 계속 침대에 누워서 손님을 맞 고 있는 거야? 응? 그리고 미리 말해 두지만 앞으로 심장이 무리가 가지 않는다고 미 친 짓은 하지 말아. 아~~! 그리고 절대로 마법을 익히는 것은 안 된다. 심장에 마나 가 뭉쳐 있기 때문에 마법을 배운다고 심장에 써클을 만들려고 하다가는 그대로 저승 문을 두드릴지도 몰라. 뭐 어차피 나이가 있어서 배울 생각도 없겠지만 말이야.” 나는 소란의 얼굴을 배게(소란의 머리 밑에 있던 것이다.)로 호되게 갈기며 소리를 질러 주고는 몸을 돌렸다. “나 이만 가 볼란다. 환자들이 많아서 여기 이렇게 죽치고 있을 수가 없다. 그럼 나 중에 보자.” 그렇게 내가 방문으로 몸을 돌리자 등 뒤에서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다. “자, 잠깐만, 이봐 루탄, 저기 소란의 치료 말고도 부탁이 있는데...” 나를 부른 것은 모리요타였다. “뭐야? 또 무슨 일인데?” 나는 다시 돌아서며 짜증스럽다는 듯이 물었다.(내용이야 뻔한 이야기다 이 성의 환 자들을 돌봐 달라는 것이겠지...) “저, 그게 아까 들어오면서 봤겠지만 성에 부상자들이 많은데,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아. 그러니 자네가 힘이 된다면 좀 도와주었으면 하는 데...” 역시 그거였어. 하지만 지금 난 거의 모든 자금이 바닥난 상태, 그럼 이런 경우에는 부자인 성주에게 치료비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하하 이런 나에게 돌을 던지지는 말라. 현실이다 현실. 눈물이 앞을 가려도 하는 수 없다. “음, 치료라... 그런데 치료에 쓸 약재나 그런 것은 넉넉한가? 그리고 우리들을 고 용하려면 제법 돈이 들 텐데?” 나는 모리요타를 보며 물었다. “그, 그건 생각을 못했군. 하지만 정왕야의 병사들을 공짜로 치료를 해 주었다 고.....” 모리요타가 더듬거렸다. “그거야, 이제는 그 병사들은 우리 것이 되는 거거든. 죽을 목숨 살려 줬으면 그 목 숨은 우리 것이 아닌가? 하하하 하지만 여기 백성들을 치료한다고 그들을 우리 마음 대 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말이야.”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모리요타와 소란의 표정을 살폈다. 그들의 표정에는 의외라는 감정이 솟아나고 있었다.(쉽게 말하면 저 놈이 저런 놈인 줄 몰랐다는 뭐 그런 표정이다. 하지만 신경 안 쓴다. 이제 동생들과 재미있게 먹고 마시고 할 돈도 모자라는 판에 무슨....) 하지만 그들이 고민도 오래지 않았다. “그래, 그럼 우리가 자네들을 고용하지. 그래 얼마면 되겠는가?” 소란이 계산이 빠른 모양인지, 아니면 백성을 아끼는 마음이 강한 것인지 먼저 거래 에 응해 왔다.(하하 성공이다. 만약 그만 두라고 했으면 무료 봉사를 했을지도 모르 는 데..) “일단 환자의 수가 문제겠지요? 그래 얼마나 됩니까? 아~! 저희는 중상자만 맡겠습 니다. 그러니 중상자의 수만 알려 주십시오.” 나의 물음에 답한 것은 지금껏 말이 없던 이방이었다.(아직 방에 있었네?) “네, 지 금 환자 중에서 위급한 환자는 대략 600명 정도 입니다. 그리고 생명에는 지장이 없 겠 지만 불구가 될 사람의 수는 약 400명 정도 됩니다. 나머지는 상처가 심하다고 해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 회복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 대략 1000명의 환자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럼 1000명의 환자로군요. 중환자가 600이라. 그리고 불구가 될 환자가 400명이 라... 그럼 이렇게 하지요. 일단 중환자 600명의 치료비로 100만 덴, 그리고 400명의 불구가 될 사람들을 완치 시키는 대가로 200만 덴, 합해서 300만 덴으로 하고, 기타 약재와 약재는 성에서 부담하는 것으로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뭐? 300만 덴? 그 그게 얼마나 많은 돈 인줄 알고 하는 말이냐? 이 이 녀석이?” 모리요타가 발작을 한다. 하지만 곧 소란의 제지로 숨만 가쁘게 쉬고 있다. “그래, 300만 덴이면 600명의 환자들의 생명을 책임지고 팔 다리가 잘린 환자들의 팔 다리를 붙여주겠다는 말인가?” 소란의 목소리는 가라 앉아 있었다. “솔직히 신체의 일부가 완전히 잘려 나간 경우에는 그 부위가 너무 크면 완치가 불 가능하지 하지만 팔뚝 하나나, 발목 하나 정도의 부상이라면 재생을 시켜 줄 수 있을 것일세. 물론 이건 굉장히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자네가 알 테니 내가 제시한 가격이 그리 과하지 않다는 것도 알 것이야.” 내 말에 소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이렇게 하지, 그 환자들 중에 정왕야의 병사들도 있을 것이야. 그러니 정왕 야의 병사들은 치료가 되면 자네가 맡기로 하고, 우리 성의 백성들에 대한 비용은 그 비율에 따라서 지급하도록 하지. 어떤가? 이 조건이면 되겠는가?” 소란은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생각한 후에 이렇게 말했다. 아마도 그는 전투의 끝을 보지 못하고 기절을 한 상태에서도 전투가 끝나면 포로들 과 부상병들을 어떻게 처리하라는 지시를 내려놓았던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정왕야의 병사들은 내가 가지라는 말이로군. 하하. 그럼 그렇게 하지. 하 지만 환자들을 치료하는 약재와 기타 물품들은 행문성에서 제공하는 것으로 하겠네. 이의 없겠지? 그럼 나는 이만 밖의 환자들을 보러 가야겠네. 그럼.”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허겁지겁 따라 나온 육방중의 한 사람의 안내로 다시 환자들 이 누워있는 마당으로 안내 되었다. 이제 제법 햇살이 뜨거워지는 시간인데도 마당에는 천막조차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 다. 나는 곧 나를 따라온 관리에게 마당에 전체적으로 천막을 만들어 태양빛을 가려 줄 것을 요구하고, 환자들의 치료를 도울 사람들을 모아 달라고 했다. 그리고 얼마지 않아서 주위에서 환자들을 돌보던 사람들이 모여 들었고, 나는 그들에 게 먼저 위급한 환자들을 파악해서 치료를 시작했다. 그리고 화아에게는 일단 야전병원에 가서 지토와 게브를 남기고 모두 데리고 오라고 했다.(그 곳에는 더 이상 위급 환자는 없을 것이었다. 지토와 게브라면 어느 정도 해 결을 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정신없이 환자를 돌보는 사이에 화아와 일행들이 마차를 타고 달려왔다. 오면서 설명을 들은 모양인지 수아 등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환자들에게 달려들었 다.(흐흑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이 막대한 내공. 흐흑 어찔하다.) 그렇게 우리들 5남매가 합세한 치료는 빠르게 진행이 되었다. 우리들은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생명을 보존하는 것을 기본으로 먼저 환자를 살핀 이 후에 상처의 빠른 회복을 위한 치료의 순서를 밟아 치료를 해 나갔다. 일단은 죽지 않으면 나중에 어느 정도의 상처는 치료하는 것에 무리가 없지만 죽은 다음에는 치료가 전혀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점심은 아예 먹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환자들이 자그마치 600이었다. 우리들은 우선적으로 600에 이르는 중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400여명의 부상자들(다른 말로 불구가 될 사람들)에게는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사실 상처를 입은 직후에 재생치료를 하는 것이(아니면 접합을 시키는 것이 ) 최고 의 방법이겠지만 이미 그들은 접합 치료를 할 시기를 놓치고 만 사람들이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모두 재생치료를 해야 하는데.. 그건 정말도 막대한 힘이 필요 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많은 힘이 들겠지만 우선은 그들에게 신경을 쓸 수가 없 었다. 그렇게 시작된 환자 치료는 그나마 행문성에서 딸려준 일꾼들과 치료사들이 야전병원 의 인물들에 비해서는 월등한 솜씨를 지니고 있는데다, 수도 많았기 때문에 오후 해 가 질 무렵에는 대충 마무리가 되고 있었다. 역시 이래서 인재를 써야 한다니까. 행문성에서 나온 치료사들 중에는 마법을 쓰는 사람도 있었고, 치료용 환수를 쓰는 사람도(환수 중에서 치료를 전담하는 녀석이 있다고 한다. 찾기도 어렵고 또 능력이 아주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제법 쓸모는 있어 보였다. 문제는 그 생김이 고슴도치같 이 생겼고, 그 등에 난 바늘을 환자의 상처 부위에 찔러 상처를 치료하는데... 상처 의 크기에 따라서 바늘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환수는 내가 봤을 때, 거의 벌 거숭이였다.) 있었고, 부적을 이용한 치료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약방을 하고 의원을 하던 사람도 있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 어중이 떠중이를 모은 야전병원의 치료사들에 비해서 믿을 수 있는 존재들이 었던 것이다. 그렇게 위급 환자들을 대충 마무리 지어 놓고 우리는 저녁별을 보며 식당으로 안내 되었다. 식당은 그 전에 우리가 여기 머물 때 가던 곳이 아니라 좀 더 크고 화려한 곳이었다. (물론 연회장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곳에는 소란과 모리요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와. 수고 많이 했다. 벌써 그 많은 환자들을 거의 치료 했다면서?” 모리요타가 먼저 반기며 말했다. “어서 오게. 수고 했네. 그래 더 필요한 것은 없던가? 만약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 제든 이야기 하게. 그리고 내 몸을 치료해 준 것은 인사도 못했는데 정말 고맙네. 이 제는 나도 남들처럼 살 수 있겠구먼. 나는 신체의 흥분을 자제해야 하는 형편이라 아 직 자녀들도 없었는데... 하하 이제는 나도...” 퍼걱!! 모리요타의 일격이 소란의 머리에 떨어지는 소리였다. “이런 빌어먹을 놈이 예전에는 행동으로 안 되니 입으로 주절거리는 것을 봐 주었지 만 이제부터는 택~도 없는 소리다. 더구나 여기 이렇게 아가씨들이 계신데...” 모리요타의 한 소리에 식탁에 엎어졌던 소란은 고개를 들고 풍아와 수아를 잠시 보고 는 얼굴을 숙이고 말았다. 뭐 그런 것이겠군. 그럼 이 녀석은 아직 총각이라는 말인가? 흐흐흐 40이 넘어서 총 각이라... 하하하, 하하흐흐, 흐흐흑, 이런걸 동병상련이라고 하는 것일 거다.(나는 언제 여우같은 마누라에 토끼같은 자식을...) “하하, 좀 힘들기는 하군. 더구나 정왕야의 병사들을 지난 이틀 무리하게 치료하 느라 지금은 거의 쓰러질 지경인데 말이야.” 나는 그렇게 인사를 받으며 일행들과 함께 식탁에 앉았다. 지토와 자이건이 없어서 우리 일행은 다섯이었다.(자이건은 자신이 환자 치료에 별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지토 옆에 남았다.) “자 그럼 우선 식사부터 하지. 당장 급한 이야기가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야.” 소란은 그렇게 우리에게 식사를 권했고, 점심을 먹지 못한 우리들은 참으로 맛있게 음식을 먹었다.(거의 남김없이...) 그리고 식사가 치워진 식탁에서 간단한 차를 앞에 놓고 소란과 모리요타는 진지한 얼 굴이 되었다. “루탄, 나는 자네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군. 뛰어난 마법에 검술 에 치료술에 거기에 더해서 함께 있는 일행들 모두가 엄청난 능력을 지니고 있으니 도 대체 정체가 뭔가?” 먼저 입을 연 것은 소란이었다. 아무래도 이런 자리에서는 모리요타의 발언권이 약해지는 모양이었다. 역시 모리요타는 몸뚱이 소란은 머리에 해당하는 셈인가?(헉, 그런데 두 남자가 일심 동체라는....퍽!) 요즈음 내가 점점 엽기적이 되어 가는 것 같아 불안하다. 이건 무슨 이유일까? 쩝. “하하, 정체라. 무슨 정체 말이지? 내가 전에 말했을 텐데? 우리들은 단순히 용병들 이라고 말이야. 뭐 상당히 강한 모임이라는 것을 숨기고 싶은 생각은 없어. 하지만 우 리 다섯 남매와 지토는 분명 용병이고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란 것 은 말해 줄 수 있지. 우린 가족일 뿐이야. 그리고 우리는 어떤 나라라 권력이나 무력 에도 속해있지 않아. 우리가 힘이 있기 때문에 남을 누르고 싶다는 생각도 없고, 동시에 누구에게 눌리고 싶은 생각도 없다네. 그저 자유롭게 여행을 하면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우고 싶은 것 뿐이야. 그러니 어떤 의미로든 우리를 내가 말하는 그 이상이나 이하로 상상하거나 의심하지는 말아. 그래봐야 머리만 아프고 얻는 것은 없을 테니 말 이야.” 내 말에 소란과 모리요타는 무언가 더 할 말이 있었지만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입만 벙긋 거리다가 말았다. 그리고 소란의 그 질문을 끝으로 더 이상 우리들의 신경을 건들만한 말은 없었다. 다만 우리가 행문성을 나가서 지난 시간동안 어떻게 무얼 하고 있었는지를 물어보고 답하고, 또 우리는 우리대로 행문성에서의 전투 과정을 모리요타의 침튀기는 설명을 통해 들었을 뿐이다. 어느 정도 이야기가 마무리 될 때, 나는 소란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 해자에서 나온 괴수 말이야. 그거 환수야? 아니면 마수아?” 내 질문에 소란은 벙긋 웃더니 말했다. “그거 환수네. 우리 집안에 대대로 전해지던 녀석이지 하지만 그걸 다룰 수 있는 사 람이 거의 없어서 겨우 속박만 시키고 대대로 물려왔었지. 녀석이 속박을 시킬 때, 별 다른 반항을 하지 않거든. 이름은 이드라네.” 어째 생긴 것 같이 히드라라는 이름을 닮았다. “그런데 너 그 녀석과 동화가 어느 정도나 되는 거야? 비율이?” 나는 아까부터 소란 녀석의 어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될 수 있으면 친근하게 대 하려고 노력중이다. 아마도 녀석은 내가 자신에게 계산적으로 대했다고 자기도 거리를 두려고 하는 모양 이다.(내가 자기 치료비는 받지도 않았다는 사실은 생각지도 않는 모양이다. 나도 몰 랐지만 덕분에 대를 이을 수도 있게 되었는데..) “음. 동화 비율이라.. 그런 건 묻지 않는 것이... 하지만 뭐 이미 내가 이드라를 불 러내고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것을 보았을 것이니 솔직히 말해 주지 사실 동화 비율 이 10:1 정도 일세. 아주 극악이지 그 이하가 되면 소환 자체가 불가능해지니 말이 야. 하하.” 나는 그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동화력이 10:1이라면 이드라가 슬쩍 꼬집힌 느낌을 받으면 소환자는 살덩이가 뜯겨 나가는 느낌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중에도 이드라가 해자에서 그렇게 오래 버 티며 싸웠다는 것은 소란의 정신력이 그정도로 뛰어나다는 말일 것이다. 때문에 나는 적잖이 소란이라는 인물에 대해 재인식과 함께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하하 대단하군. 그런데고 그렇게 오랫동안 싸움을 지속했다니 말이야. 덕분에 죽 을 뻔 하기는 했지만 말이야. 하하하.”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소란을 새롭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뭐 그렇게까지 말할 것이야 없겠지 어차피 성이 함락되면 죽는 것이었으니 말이 야. 하하. 죽기 싫어서 발악을 했다고 하면 되겠지.” 소란은 별 것 아니라는 듯이 자신을 낮추었다. “그런데 말이야. 환수와 동화되는 연습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이야? 도대체 언제 이드 라를 받았기에 아직도 동화력이 10:1이지?” 나는 소란에게 지나가듯 물었다. “뭐? 동화되는 연습? 그게 어떤거지? 나는 그런 것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는 데?” 그러자 옆에있던 모리요타가 식은땀을 흘리는 표정으로 소란에게 변명을 했다. “그게 말이야. 너는 심장이 약해서 이드라를 불렀다가는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까 그 방법을 너에게 알려주지 않은 것이야. 이제는 그런 염려가 없으니까 동화력을 기르는 방법을 알려줄게 내일부터 연습을 해봐.” 그게 끝이었다. 우리 일행은 발광모드로 들어간 소란과 그의 밥이 되고 있는 모리요타를 식당에 남기 고 밖으로 나왔고 우리를 기다리던 시녀의 안내로 처음 우리가 묵었던 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그리고 나는 방으로 들어가는 동생들에게 수고 했다는 말과 끈끈한 눈길을 보내는 것 을 잊지 않았다. 어쩐지 이들이 동생이라는 느낌이 점점 실체화되고 있는 느낌이었다. 다음날도 바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더 힘든 하루였다고 해야겠다. 일단은 어느 정도 중환자의 상태를 다른 사람들이 살필 수 있게 되자 수아와 나는(우 리 둘이 그나마 재생 치유가 가능하다.) 400여명의 환자들을 상대로 잃어버린 신체의 재생 시술에 들어갔다. 우리들은 가장 상태가 가벼운 환자들을 상대로 시술을 시작했는데 대부분이 손가락 한 두 개가 없는 상태거나 귀가 없는 상태 혹은 코가 잘린 경우이거나 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눈을 다친 사람은 재생이 어려웠다.(불가능이야 아니겠지만 당장은 너무 많은 마력을 요구하는 일이었기에 뒤로 밀어두었다.) 그리고 그런 환자들을 겨우겨우 재생 시술을 하고나자(여기에서 수아가 재생을 하려 면 상급정령의 힘을 써야 했기에 따지고 보면 이 재생 시술은 나의 마력과 나의 내공 에 의한 것이었다. 완전히 나만 죽어나는 것이다.) 다음은 몸에서 많은 양의 살덩이 가 잘려나가거나 손목이나 발목이 없는 사람들의 차례가 되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의 상처를 재생시키는 것만으로도 나는 더 이상 힘이 남지 않았 다. 물론 내가 힘이 떨어지자 수아도 덩달아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솔직히 지금의 내 수준에서 상급 정령은 5명을 한꺼번에 상급으로 유지한다고 해도 마력과 내공을 번갈아 쓰면 언제까지나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정령들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지 능력을 사용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지금처럼 상급 정령이 큰 힘을 쓰는 경우에는 엄청나게 많은 힘이 빠져 나가게 된다. 그리고 재생술 마법은 그 마나량이 무식할 정도로 들어가는 것이고 자그마치 8써클 에 해당하는 마법이다. 아무리 내가 9써클 마스터에 마력이 같은 써클의 다른 사람보 다 많다고 해도 100여명의 사람들에게 재생술을 펼치고도 기운이 남을 정도는 절대 아 니었다. 이럴 때에는 마법 아이템을 만들면 좋겠는데 문제는 나는 그런 방법을 모른다는 것 이다. 일시적으로 마력을 불어 넣어서 마법 아이템을 만드는 방법은 알지만 여러 룬 어 를 새겨 넣어서 자연의 마나를 강제로 동원하여 마법을 영구적으로 사용하게 하는 마 법 아이템은 만들 줄을 모른다. 더구나 8써클 마법의 영구 마법 아이템이 가능이나 할까? 아무튼 결론은 점심시간이 되기 저에 녹초가 된 우리들은 점심을 먹은 이후로는 휴식 을 취하며 기력을 회복하다가 오후 늦게야 다시 재생 치료를 시작해서 상태가 심각한 100여명의 환자를 남기고는 모두 치료를 마쳤다는 것이다. 하지만 남은 100명은 정말 상황이 좋지 않았다. 허벅지부터 다리가 잘려 나가거나 어 깨에서 팔이 잘려나간 사람이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물론 거기에 더해서 눈을 다친 사 람들이 몇 있었는데 솔직히 눈을 재생하는 것은 자신이 없었다. 뭐 그렇다고 팔 다리를 전체적으로 재생하는 것에는 자신이 있다는 말은 아니지만 말 이다. 다음날도 역시 일은 변함이 없었다. 다만 화아와 풍아를 야전병원에 보내서 사람들 을 돌보게 한 것이 변화라면 변화였다. 어차피 이쪽에는 뛰어난 치료사들이 있었기 때문에(물론 고슴도치 환수를 쓰는 치료 사는 더 이상 환수로는 치료를 못했다. 바늘이 없었으니까.. 빨갛고 조그마한 살덩이 가 된 불쌍한 환수 하하하.) 생명에 지장이 없도록 응급 처치를 해 둔 환자들은 천천 히 살펴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야전 병원 쪽에 더 문제가 있을 터여서 화아와 풍아를 보낸 것이었다. 그리고 남은 광아가 돌아가며 일반 환자를 살피고 나와 수아는 재생 치료에 전념했 다. 사람의 수는 적었지만 그 재생 범위가 상상을 초월하는 경우가 전부여서 엄청난 마력 과 정령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내공과 마력에 현기증을 느낄 정도였다. 그리고 결국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치료된 환자의 수는 20명 정도가 전부였다. 우리들은 한 쪽에 마련된 작은 방에서 환자를 치료하고 있었는데, 들어올 때에는 들 것에 실려서 혹은 한쪽 팔만 달고 들어왔던 사람들이 나갈 때는 두 다리 두 팔로 나 가 는 모습에 밖에서 대기하던 환자들은 매번 기대에 찬 환호성을 울렸지만, 안에서 치 료 를 하는 나와 수아는 기진맥진이 되었다. 상처 치료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힘들고 어려운 것이라 빨리 끝내고 싶었지만 이 미 나와 수아가 치료에 사용한 힘을 모으면 행문성 정도는 날려버리고도 남을 힘이었 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밖에서 기다리는 환자들이 애타는 시선이 방안에서 잠시라도 쉬고 있으면 벽을 뚫고 들어오는 듯 했기에 잠시 쉬는 것도 눈치를 보면서 쉬어야 하 는 형편이었지만 힘든 것은 힘든 것이었다.(이렇게라도 쉬지 않으면 죽을지도...) 그리고 또, 나와 수아는 점심조차 거르고 휴식과 명상 운지조식을 통해 기력을 회복 하는 데에 최선을 다했다.(수아는 내 힘을 쓰는 거니까 전혀 힘들지 않을 것이라는 생 각은 하지 마시길... 수아도 나름대로 몸을 혹사하고 있는 중이라 무지 피곤합니다. 정령력의 고갈은 곧 정령의 극심한 피로로 이어지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런 건 내 공 력을 가져다가 피로를 풀면 되지 않겠냐고 생각하겠지만 순수 정령력과 공력은 같은 것이 아니랍니다. 변형을 한다고 해서 같아지는 것은 아니지요. 그러니 둘 다 피곤에 지치기는 마찬가지가 된 것이고요.) 그리고 반복된 오후와 반복된 다음 오전과 오후가 지나고 또 다시 하루의 시간이 그 렇게 흘러갔다. 그렇게 야전 병원에서 행문성에 다시 들어온 지 4일 만에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 을 거의 마무리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저녁에 우리는 소란과 모리요타의 부름을 받았다. 나와 수아와 광아는 다시 그들과 탁자를 함께 하고 조촐하게(말이 조촐이지 황금으 로 치장된 도자기 잔이었다)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루탄, 자네와 자네 동생들의 수고 덕에 이제 더 이상 희생자는 나오지 않을 것이 고, 또, 그 많은 백성들이 일생을 짊어지고 갈 멍에를 풀어 주게 되었네. 정말 고맙 게 생각하네.” 그렇게 말을 마친 소란의 눈짓으로 모리요타가 밖으로 나가더니 상자를 하나 들고 들 어왔다.(흐흐흐 분명 보석이 들어 있을 터였다. 우리의 고용 대금이 분명했다.) “이건 전에 자네와 우리가 계약을 했던 내용대로 계산한 대금일세. 대충 정왕야의 병사들이 자네가 치료한 1000명 중에서 300명 정도가 되니 자네에게 200만 덴에 해당 하는 보석을 준비했네. 그리고 이것은...” 소란은 자신의 소매 품속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나에게 건네주었다. “그건 자네의 노고에 대한 작은 성의네. 그리고 절대로 내 병을 고쳐 준 것에 대한 답례라는 생각은 하지 말게. 그건 언제까지나 내 가슴속에 고이 묻어 두었다가 언젠 가 필요할 때에 꼭 갚을 것이니...” 소란은 그렇게 말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눈 속에서 그의 말투와는 다른 진정 한 감사와 고마움의 빛을 보았다. “험험, 나도 분명히 말해 두지만. 이 친구를 살려 준 것에 대한 보답은 언제든 내 목숨으로라도 하겠다. 그러니 내 목숨이 필요하면 언제든 불러라. 내 단걸음에 달려 가 는 것을 머뭇거리지 않을 것이니까. 하하하하.” 모리요타가 소란의 말에 이어서 제법 무게 있는 목소리로 진정을 이야기 하고 있었 다. “뭐, 이런 것을... 그 마음들은 분명히 받아두지. 그리고 그 마음만으로도 난 충분 해. 하하하. 그럼 이제 우리는 볼 일이 없으니 일행이 기다리는 곳으로 가 봤으면 하 는데 말이야. 괜찮겠지? 너무 오래 일행들과 떨어져 있어서... 뭐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아도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어 본 적이 없어서 말이야.” 나는 그렇게 말하며 그들에게 우리가 성을 나가는 것에 대한 동의를 구했다.(괜스레 머리를 긁게 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하하, 그래? 동생들과 그렇게 떨어져 있지 않았다니 그 우애가 부럽군. 나도 형님 과 함께 있을 수 있으면 좋을 것을.... 그래 알았네. 그럼 그래야지. 그런데 여기 있 는 정왕야의 병사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소란의 말에 간단히 대답했다. “우리도 그 곳에서 얼마동안 머물러야 할 것 같으니까, 나중에 환자들이 조금 나아 서 움직일 정도가 되면 수레에 실어서 보내줘.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겠지?” 나는 그렇게 말하며 웃어 보이고 밖으로 나왔다. 마차는 화아와 풍아가 돌아갈 때에 가지고 갔기 때문에 소란과 모리요타가 본청까지 배웅을 한다고 했지만 우리는 문 밖으로 나오자마자 순간 이동을 해서 야전병원으로 돌아왔다.(물론 광아가 이미 보수가 들어있는 상자를 챙겨 든 이후였다. 하하하.) 우리가 야전병원에 갑자기 나타나자 처음에는 놀라던 사람들이 금방 환호성을 올리 며 반가워했다.(특히 수아의 귀환에 열렬한 환영을 표했다. 그런데 환자들의 분위기 가 약간 이상했다.) 나는 짚이는 바가 있어서, 화아를 불러 슬쩍 물어 보았다. “여기 분위기가 왜 이런 거야?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내 말에 화아가 조금 머뭇거리며 풍아 쪽을 보더니(아무래도 내 짐작이 맞는 것 같 다.) 사건의 전모를 전해 주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화아와 풍아가 이 곳에 돌아온 그 날 저녁. 여러 날 동안 수아나 내가 만든 음식을 먹지 못한 풍아는 요리사들의 음식을 거부하 고 스스로 요리를 만들어 먹겠다는 거창한 목표를 가지고 거대한 솥에 하나 가득 수 제 비라고 이름 붙인 정체불명의 음식을 끓였고 환자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며 시식을 시 켰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상한 바와 같이 그것을 먹은 환자들이 경련과 구토를 동반한 발작(그리 오 래지 않은 과거에 환수조차 한 국자의 음식에 모든 전의를 상실했음을 떠올린다면)을 일으켰음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며, 이로 인해 한동안 엄청난 소란이 있었다고.. 하지만 풍아는 그 밤의 실패를 거울삼아 다음날 아침과 점심 저녁을 수제비에 도전했 고 처음 시식에 참여 하지 않은 사람들을 상대로 돌아가며 시식을 시켜서 환자들을 돌 보는 사람들을 바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것이 방금 저녁 식사에 이르도록 이어졌다고 하니 환자들이 수아와 나의 귀환을 반 가워하는 것이 당연했다.(나와 수아는 의사가 아닌 요리사로써 환영을 받았던 것이 다. 흑흑.) 그 열렬한 환영 속에 돌아온 우리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당연히 식.사.준.비였다. 그것도 요리사들을 모아서 비법 수제비 끓이기를 전수하면서 우리는 오랜만에 수제비 를 끓여 저녁을 먹었다. “왜 내가 끓이면 이런 맛이 안 난다는 걸까?” 식사 중에 나온 풍아의 이 한 마디는 우리들 얼어붙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 말속에는 자신은 아직까지 자신이 만든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다는 깊고 심오한 뜻이 숨어 있는 것이었으니... 무섭다. 며칠 사이에 이 언덕은 완전히 환자 요양소의 분위기가 되었다. 그것도 남자들만 벅시걸 거리는 분위기 속에서 이곳저곳 환자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 어서 수다를 떠는 모습이란... 하기는 그들도 할 일이 없으니 그런 것일 것이다. 그저 하루 종일 밥 주면 먹고, 누워서 쉬는 일이 전부이니... 더구나 점점 몸이 회복되어 움직임이 자유로운 사람들이 늘어갈 수록 이 인간들을 통 제하는 일이 장난이 아니었다. 인원은 1500명(행문성에서 정왕야의 병사들을 보내왔다.) 이제는 몸이 나았다고 사소한 시비 끝에 쌈질을 벌여서 다시 중태에 빠진 놈도 있었 다. 그래서 나는 하는 수 없이 그들 중에서 어느 정도 신망이 있는 자들 뽑아서 천거하 라 하고, 그들에게 100명씩의 인원을 통솔하라 맡기고 그 밑으로 알아서 10명씩 조를 짜고 조장을 뽑으라고 일렀다.(이건 완전히 예전 몽고 놈들이 백인장 십인장 하던 군 대 체제를 따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뽑힌 백인장과 십인장에게 부하들의 통솔을 맡겼다. 그리고 아울러 이런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자고로 짐승도 자신을 구해 준 은혜는 갚는다고 했다. 우리가 너희의 목숨을 구했 으니 그 남은 목숨은 우리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이제부터 소란을 일으키거나 혹은 항명하는 자는 자신이 살아난 것을 불만으로 여기는 것이라 생각하고 그에 해당하는 처분을 해 주겠다. 그리고 너희에게는 너희 아래의 사람들을 통제하고 명령을 전달할 책임과 권한을 주겠다. 나는 제 할 일을 하지 못하는 자를 경멸한다. 최선을 다해서 밖의 병사들을 다스릴 수 있도록.” 뭐 이런 말이었다. 듣기에 상당히 정떨어지는 소리지만 대부분의 병사들이 배운 것 없는 무지렁이고 보면 그들을 다스릴 방법은 두 가지 뿐이었다. 힘과 덕(德)이 그것 이 었다. 하지만 덕은 쉽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었고, 그래서 내가 쓸 수 있는 방법은 힘 을 통한 압력뿐이었다. 그리고 그 방법은 그 뒤의 사소한 문제들에 화아가 개입하면서 완전하게 해결이 되었 다. 화아는 풍아와는 또 다른 형태의 위력을 지닌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지내다 보니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 은 나도 잘 알 수가 없다. -누웬 황궁 - 란이가 란이가.... - 그러는 동안에도 내가 가진 피 같은 경비는 깨지고 있었다. 먹는 것이 얼마나 들겠냐고 하겠지만 실재로 1500명이 하루 50 덴의 식비를 사용하면 (식사가 대량이 되면 원가가 떨어집니다.) 그것만으로 7만 5천 덴의 비용이 나가는 것 이다. 물론 이것은 아주 최소한으로 잡았을 때의 이야기이다. 지금 내가 가진 액수는 행문성에서 받은 200만 덴과 아세트에게 받아서 그 동안 쓰 고 남은 20만 덴, 그리고 예전 화폐인 상태의 동전들이 전부였다. 동전들이 100만 덴은 나올 것이라 했으니까 결국 약 300만 덴이 있는데.. 이 액수로 버틸 수 있는 최대한의 기간은 40일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가면 40일이 지나도 치료가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우리 는 지금 이들을 자체 치유력에 맡기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내가 돈 계산을 한 그 순간부터 우리의 치료는 상당히 가속화 되었다. 남는 마력과 내공을 아껴서 어디에 쓰겠는가? 하루면 아무리 바닥이 난 마력과 내공이라도 회복이 되는데... 그걸 아껴서 무엇 하 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빠른 치료가 돈을 아끼는 지름길이라는 모토 아래에서 우리는 최대한 환자들 을 회복시키는 데에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완쾌된 인원이 확보되자 나는 소란에게 사람을 보내서 행문성에서 필요한 노동력이 없는지 물어보고(전후 복구에는 노동력이 당연히 많이 필요하다.) 우 리 인원을 싼 값에 지원해 주기로(여기서 하루 일당을 100덴으로 하고, 점심 저녁을 책임져 주기로 했다.) 계약을 맺고 일꾼들을 보내 주었다.(하하하 완전히 남는 장사 다. 앞으로 이 녀석들을 끌고 다니면서 이런 일이나 할까? 돈 많이 벌겠다. 크흐흐)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의외로 야전 병원 주위의 결계를 해제 했는데도 병원에서 도망가는 사람은 나오지 않 고 있었다. 솔직히 도망을 간다고 해도 말리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전투가 끝나고 보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 동안 행문성엔 몇 번의 행차 가 있었는데 천왕야가 보낸 물자들과 격려차 온 관리들이었다고 한다. 또 한 3일 동안 내리 비가 내려서 우리의 일꾼들이 일당을 벌어오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었다. 뭐 병원이야 남아도는 마력과 수아의 힘이면 빗방울이 들어올 여지가 없었다. 병사들은 하늘에서 떨어지던 빗줄기가 갈라져 병원 밖으로만 떨어지는 것이 신기한 지 거의 하룻동안 하늘만 보다가 목이 아프다고 끙끙거리는 경우도 많았다. 어떤 병사는 우리들이 분명히 인간이 아닌 것이라고 궁시렁거리다 몰매를 맞기도 했 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우리 야전 병원은 그 기능을 상실하여(환자가 없다. 있다고 해 도 막일하다가 삐끗하거나 망치로 손가락을 내리찍은 경우같은 작은 상처일 뿐이다.) 폐원을 결정하고 아침부터 부지런히 천막을 걷고 있었다. 나는 어제 미리 우리들이 이 곳을 떠날 것이라는 소식을 소란에게 주었고 소란은 제1 부장이라는 녀석을 우리의 길잡이로 쓰라고 오늘 아침 일찍 보내 주었다. 우리들의 목적지는 누웬의 황도였다. 솔직히 이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내가 끌고 다니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 인원들을 그들의 황제에게 맡기기로 했다. 솔직히 그냥 정왕야의 영지로 보내 주려는 마음도 가졌지만 그래 보아야 또 다시 전 투에 참가하게 될 것이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이미 정왕야의 입장에서는 전사자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 전사자가 단체로 나타난다면 그것은 이들을 탈영병 으 로 만드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이들의 상관이 그나마 마음이 넓은 호인이어서 어떤 미친놈이 나타나서 전장에서 중 상자들을 데려다가 치료를 해 주고 돌려보내 주었다는 말을 믿고 받아줄 사람이라면 또 다른 이야기이겠지만, 불행히도 이들의 상관이자 성주 되는 인물은 그런 아량도 이 해심도 없는 인물이었다. 이 병사들도 부모형제와 처자가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차라리 전사로 알려지 는 것이 탈영병으로 알려지는 것 보다는 남은 가족들에게 편할 것이라 말했다. 그래서 나는 이들을 이끌고 황성에까지 가기로 한 것이었다. 거기에서 황제가 이들을 받아 준다면 이들은 나름대로의 삶을 다시 살 수 있을 것이 고, 그렇지 못하다면 어쩔 수 없니 내가 이들을 이끌고 다시 이들의 생계를 꾸려 주 어 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제일 먼저 생각난 방법이 이들을 그들의 황제에게 맡겨 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부지런히 황도를 향해서 걸음을 옮겼다. 1500의 병력이라고는 하지만 깊어가는 여름에 빠질 대로 빠진 군기의 병사들이 갑옷 을 제대로 걸치고 있겠는가? 완전히 거지들의 행군이다. 그렇다고 1500의 인원에게 옷을 만들어 입힐 수는 없는 일이라 우리들은 그저 그들 이 갑옷을 벗고 다니든 어깨에 걸치고 다니든 질질 끌고 다니든 버리고 다니든 신경 을 쓰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어디로 보아도 난민과도 같은 무리들이 다시 행문성을 지나 관도를 따라 누웬 의 황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누웬의 황도가 그리 멀지 않다는 데에 있었다. 그 예전 서 자치령이 존재하던 그 시기 자치령의 영주가 머물던 곳이 지금의 황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누웬이 그 서쪽 불모지대 안으로 개척된 나라라고 보면, 누웬의 황 성은 나라의 동쪽 끄트머리에 자리 잡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가깝다고 해도 말을 타고 달려서 이틀이 걸리는 거리였고 그 사이에 작은 마을도 몇 개 있고 중간 정도에 성도 하나가 있다고 한다. 그러니 걸어가는 우리들(물론 저기 따라오는 군기 빠진 떨거지들 이야기다 소수는 말 을 타고 마차를 타고 있다. 우리 일행과 제1부장과 그의 부하 10명.)은 아무리 빠르 게 걷는다고 해도 칠 팔 일은 걸릴 거리였다. 거기다가 뒤를 따라오는 저 떨거지들은 도무지 걷는 것에 열과 성을 보이지 않는 것 이다. 어쩌면 야전병원을 떠나 어디론가 이동한다는 것이 그들의 가슴에서 불안감을 증폭시 키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들은 그들의 앞날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던 것이다. 허긴 나도 그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확신이 없으니 그런 나에게 묶인 저들이 야 말해 무엇 할까. 하지만 적어도 내가 저들의 삶을 괴롭지 않게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것 을 그런 마음을 전해주고 싶은 것은 생각뿐이었다. 도무지 그 방법을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래도 제법 오랜 시간 저들과 어울려 있었지만 솔직히 털어 놓지 못하는 서로의 벽 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러니 마음에서 마음으로 통하는 이라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게 우리 일행의 행진은 하루 이틀 사흘을 넘기고 있었다. 누말(이건 제1부장이라는 녀석의 이름이다. 길 안내로 왔을 때, 이름을 듣고 잊어버 렸다가 그의 부하들이 누말부장이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서야 떠올린 이름이다.)이 있 었기 때문에 너무나도 의심스럽고 괴이스럽고 위험하게 보이는 우리 일행들은 무사하 게 그 동안의 마을들을 지나쳐 올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들은 해가 진 어스름에 멀리서 어둠 속에 웅크린 성을 바라보며 걸 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성은 서령이라는 이름이었다. 해석하면 서쪽 영지라는 뜻이니 아마도 그 예전의 서자 치령에서 나온 이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우리들은 성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다만 누말 제1부장이 성 안으로 들 어가 우리에 대한 해명을 하고 성 밖에서 머무는 것을 허락 받을 수 있었을 뿐이다. 솔직히 우리들 만이라면 성 안에 들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우리에게는 최고의 잠자리 인 마차와 최고의 요리사인 내(?)가 있었기 때문에 굳이 성 안을 고집할 이유는 없었 다. 거기에 성 안에 우리 일행 1500이 다 들어간다고 해도 성 밖에서와 달리 따뜻한 잠자 리를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닐 터였다. 그래서 떨거지들(무슨 적당한 명칭이 떠오르지도 않는다.)도 성안에 들어가고 못 들 어가고는 별 관심이 없는 듯 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천막치기를 시작한 그들은 순식간에 1500이 잠잘 자리를 마련했고, 요리병들은(그래도 병사니까) 순식간에 식사를 마련했다. 이 물자들이 전부 내 아공간에 들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마라. 이것들은 그나 마 소란이 빌려준 수레에 싣고 다니는 것들이다. 우리들이 식사를 하고, 다들 이리 저리 흩어져서(우리 남매와 지토등이 아니라 떨거 지들...) 무슨 할 말이 있는지 머리를 마주하고 웅성거리고 있을 때, 서령의 성주가 우리를 방문했다. 자신을 서령의 성주라 소개한 사람은 상당한 체격의(이걸 체격이라고 하나 아니면 체 중이라고 하나?) 인물이었다. 그에게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배를 두르고 있 는 밸트였는데 그 밸트는 신체의 어떤 부위보다 컸다.(다시 말하면 허리 부분이 몸중 에서 가장 두껍다는 말이다.) 흔히 이런 사람은 탐관오리요. 탐욕에 절어 온갖 간사함으로 아랫사람들을 쥐어짜는 인물로 여겨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성주라는 인물을 그 체격에 허위적 거리는 손짓으로 아등바등 걸어 다니면 서도 얼굴에는 웃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허허허, 반갑습니다. 행문성주의 연락을 이미 받았지요. 그런데도 이렇게 성 밖에 서 지내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허허, 행문성주의 말을 전부 믿지는 않았는데 이렇게 보니 그의 말이 전부 사실인 모양입니다. 그려 허허허.” “반갑습니다. 성주님. 그런데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나오셨습니까?” 나는 그를 맞아 인사를 하며 물었다. 솔직히 움직이는 것도 말하는 것도 힘들어 보이는 인물이 여기까지 오다니, 그러고 보니 수레나 마차를 타고 온 것이 아니라 걸어서 온 모양이다. 상당히 힘겨웠을 것 같다. 양 팔을 허위적 거리며 여기까지 오려면 말이다. “성주로써, 어찌 황제폐하의 손님을 맞이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허허 오늘 황성 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루탄님과 그 일행들을 황도에 도착하는 즉시 황성으로 오게 하 라는 내용의 연락이 말입니다. 이렇게 황성에서 어떤 요구가 있는 것은 참으로 보기 어려운 경우이지요. 더구나 그 내용이 루탄님 일행을 손으로 대접하라는 내용이니 더 욱 그렇지 않겠습니까. 허허 그러니 어찌 황제의 뜻을 비천한 일개 성주가 거스를 수 가 있겠습니까. 허허허” “황제 폐하의 연락이라니, 그런 일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 그럼 그런 사항을 알 려 주시기 위해서 성주님께서 직접 여기까지 오셨다는 말씀입니까? 하하 이렇게까 지... ” 솔직한 심정으로야 성주의 그 과한 모습이 부담스러워 한 말이었지만 성주는 여전히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허허허, 이 몸이 언제나 마음을 따라 오지 못하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는 모양입니다 그려. 허허 하지만 이렇게 보여도 제 몸보다 좁은 곳만 아니라면 어디든 제 발로 뛰어다니는 사람이니 너무 부담스러워 하지 마십시오.” 도대체 나이조차 짐작이 가지 않는 서령의 성주는 그렇게 웃고는 앞으로의 여정에 도 움이 되었으면 한다며 몇 수레의 식료품을 전해 주고는 성안으로 뛰어(헉, 정말 뛸 수 도 있었다. 양 팔을 허우적거리며 발을 바둥거리는 것이지만... 수행원들은 그 모습 을 전혀 이상히 여기지 않는 것 같았다.)갔다. 그리고 그 밤에 우리 일행은 오랜만에 좋은 시간을 가졌다. 성주는 식료품 속에 상당량의 술을 보내왔던 것이다. 군기 빠진 떨거지들이야 당연히 환호성을 올렸고, 마시고 싶다는 오라를 우리 일행 에게 쏘듯 뿌려왔고 나는 백인장과 십인장에게 음주를 허락했다. 뭐 사고 치면 태워버린다는 화아의 말이 있기는 했지만 술통을 옮기는 녀석들은 그 런 것은 금방 잊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덕분에 우리 일행도 마차 옆에서 간단하게 술잔을 나누었다.(물론 풍아와 수 아를 위한 특별 제작주도 만들었다. 적당한 온도를 가해서 알콜의 기운을 상당 히 제거한 술을 준비했다.) 그렇게 우리들이 어쩌면 한가롭게 술을 마시고 있을 때, 떨거지들은 술이 몇 잔 들어 가고 나서는 둘러앉은 일행들끼리 동병상련의 서러움에 묻혀, 신세 한탄과 가족에 대 한 그리움과 앞일에 대한 불안을 떠듬떠듬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런대로 어기적거리며 여기까지 따라왔던 그들이지만, 그들이 죽었다고 하는 것이 남은 가족들이 편하게 살 수 있는 길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다시는 가족을 보지 못 할 지도 모른다는 것이 그들의 가슴을 누르는 것이리라. 아마도 자신들이 살아있다는 것을 가족들에게만 알리고 싶은 마음도 있을 것이었다. 그것만 된다고 해도 그들의 마음에 담은 무게가 덜어 질 것이었다. 그렇게 술자리가 깊어지면서 여기저기서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가족을 부르며 울부짖는 자가 있는가 하면, 가족에게 돌아가겠다고 발버둥을 치는 녀 석도(진짜 가려고 했으면 남몰래 가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저 힘없이 말 리는 동료들의 손짓에 더 큰 몸짓으로 버둥거리다 엎드려 울었다.) 있었고, 처음부터 냉철하게 현실을 파악한 자들은 그들 나름으로 쌓이는 눈물을 주르륵 흘려내고 있었 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제압하려는(한 성질 한다니까..)화아와 지토를 불러들이고 그들 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 보았다. 가족들이라... 내게는 이미 오래전에 멀어진 이름이었다. 아니 새롭게 내 곁에 있은 화아, 풍아, 광 아, 수아, 지토가 이제는 가족이었다. 그러고 보면 예전 가족들과 헤어지고 나서(지심목 때문에...)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 았던 것 같다.(아무래도 이미 차원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는 현실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만약 지금의 가족들과 헤어져 혼자가 된다면 나는 어떨까하는 생각에 눈물바 다를 이루는 저 무리들의 소란을 막을 수가 없었다. 힘이 되는 한은 찾으려 하겠지? 하지만 만약 그들을 찾는 것이 그들에게 피해가 간다 면 어쩔 것인가? 나는 단념을 할까? 내 가족의 행복을 위해 내 가슴을 묻을 수 있을까? 아니면 나를 다시 만나 잠시의 행복 뒤에 말 못할 불행이 있더라도 함께 하려고 할 까?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 나는 가슴속이 형언할 수 없는 여러 감정으로 흔들리는 것 을 느꼈다. 그리고 동생들과 지토를 바라보았다. 역시나 나와 연결되어 있어선지 모두들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은 알 수 없겠지? 하지만 깊이 생각하지 말자. 우리는 헤어지지 않을 테니 말 이야. 하하하.” 나는 조금 과장된 몸짓과 웃음으로 우리를 덮고 있는 알 수 없는 무게를 털어 내었 다. 그리고 조금씩 잦아드는 병사들의 소란을 뒤로 하고 마차에 올랐다. 저들이 내일 아침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고 해도, 그건 그들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그들의 선택을 할 수 있기를 마음속에서 빌었다. 어떤 것이든 자신의 선택이라 믿으면 그나마 마음이 후련해지기 마련이다. 그렇게 또 하루 밤이 흘렀다. 다음날 우리가 눈을 뜨고 마차 밖으로 나왔을 때, 이미 천막이며 수레들이 정리 되 어 있었고, 떨거지 병사들은 그나마 오와 열을 맞추고(복장이 여전히 엉망이라 ...)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15인의 백인대장이 우리를 찾았다. 그리고 그들은 지난밤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보고를 하기 시작했다.(이것들이 약을 먹었나? 시키지도 않은 짓을... 그것도 하지 않던 짓을 하니 ...) 그들의 말에 따르면 지난밤에 다섯 명의 십인대장이 50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떠났다 고 한다. 그들은 각각 30명 정도씩의 병사들에게서 이름과 살던 곳의 위치를 듣고 떠났으며 그 들이 여기 있는 사람들의 가족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이들의 생존을 알리기로 했다 는 것이었다. 물론 그들 50인은 각각 자신들이 살던 곳 주위의 사람들의 연락을 가지고 떠났으며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들이 맡은 일을 마무리하고 돌아오겠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곳에 남은 사람들은 이제 어떤 일이 있던지 모든 처분을 우리 일행에게 맡 기기로 했다고 한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 살았으니 어떻게 되든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며 다들 동의를 했다 는 말도 함께 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나타내기 위해 오늘부터는 새로운 명령이 있을 때까지는 이렇게 한 부대로서의 자세를 지키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들은 자신들의 부대 이름을 지어달라고 했다. 결심도 좋고, 그들이 지난밤에 실행한 방법도 괜찮은 방법이다. 그런데 부대의 이름 을 왜 나에게 지어 달라는 것이야? 내가 작명에는 워낙 어벙하다는 것을 모르는 이들의 탓이지만... 그래서 부대의 명칭을 우리 형제와 지토와 자이건이 합심해서 겨우겨우 지어 내었다. 이름하여 야전대(野戰隊), 사실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서 야전 병원에서 나온 사람들 이니까 그냥 야전대로 하자는 화아의 의견을 따른 것이다. 하지만 야전대의 병사들은 아무런 불만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큼직한 삼각 깃발을 만들어 와서는 부대의 깃발을 만들어 달라고 했 다. 그래서 만들어주었다. 당연히 깃발에는 하늘색 배경에 날개달리고, 발 달리고, 부리가 달린 알의 모습이 들 어가 있었다.(우리 용병대의 마크다.) 그런데 그렇게 주고 나니 정말 안 어울린다. 이름 거창한 야전대에 란이가 상징으로 걸려 있으니... 크하하하 하지만 야전대 부대원들은 아침을 먹은 후, 그 깃발을 선두로 보무도 당당히 황성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그들이 아직도 실력 없고 덜떨어진 어중이떠중이를 모아놓은 허섭스레기 같은 집단 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어제의 그들과 오늘의 그들은 달랐다. 그들은 이제 피동적이 아닌 능동적인 자세를 가진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술을 돌릴걸... 그러고 보면 서령의 성주에게 신세를 톡톡히 졌다는 생각이 든다.(만약 그가 이런 상황을 내어다 본 것이라면 그는 엄청난 인물일 것이다.) 그리고 그 4일 후, 우리는 드디어 황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끝없이 이어진 성벽(예전 동자치령의 성벽과 같은 모습이었다.)이 가장 먼저 눈에 들 어왔고, 그 성벽 안쪽으로 멀리 화려하지 지어진 궁전이 보였다. 궁전, 하지만 궁전이라기보다는 탑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피사의 탑 같은 서양식이 아닌 동양식 석탑의 모습을 닮은 것이었다. 대충 혜아려봐도 층수가 12층 정도 되어 보이는 건물은 그야말로 넓은 대지 위에 홀 로 우뚝 서서 대지를 굽어보는 모습이었다. 누말의 설명에 따르면 지금 눈앞에 끝도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성벽은 양쪽에서 꺽여 서 정 사각형의 성을 만들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성 안에 있는 영역이 황성의 영 역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저 탑 같은 황궁이 중심에 있고 황성은 정사각형의 모양으로 둘러진 성벽 안을 이르는 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천천히 황성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황성 입구에서 우리를 맞은 것은 네 명의 경비병이 전부였고, 누말을 보고는 아무 제지도 없이 황성 안으로 우리 일행들을 통과 시켰다. “이건 정말 이상하군, 어떻게 이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들어가는데 제지는커녕 검문 도 없을 수가 있지?” 나는 마차 옆으로 말을 몰고 따르는 누말에게 물었다. “하하, 그거야 당연하지요. 이미 황제께서 루탄님 일행을 황성으로 모시라 했으니 그 어떤 간이 부은 자가 그것에 대해 한 마디라도 더하거나 뺄 수 있겠습니까. 하 하.” 누말은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통과해서 들어간 황성의 모습은 또 한 번 나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황성은(일단 수도이니까) 화려하고, 번화하며, 활기차고, 어수선하고, 또 아무튼 사 람도 많고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성벽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다가 내 눈에 모습을 드러낸 황성의 모습은 그 게 아니었다. 황궁을 향해 곧게 뻗은 대로와 그 주위를 늘어선 으리으리한 건물들... 하지만 그 속 에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사람. 사람이 없는 것이다. 우리들은 그 황궁을 향해 가는 그 넓은 길, 화려한 건물들 속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단 하나도 볼 수가 없었다. “누말, 이건 무슨 일이지? 어떻게 황성에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거지? 설마 황 성에 사람이 살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 내 물음에 누말은 당장 대답했다. “당연하지요. 어떻게 황제폐하 홀로 이 곳에 계실 수가 있겠습니까. 황제를 모시는 시녀의 수도 만만한 수는 아닐 텐데요.” 나는 누말의 말에 눈을 부라렸다. “내가 지금 그걸 묻고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어째서 황성에 이렇게 사람이 없느 냐고 묻는 것이잖아!!” 내가 그렇게 소리치자 누말도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 황성에 어찌 일반인이 거주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황성은 오직 황제 폐하 의 거처일 뿐입니다. 그러니 하찮은 일반 백성들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지요.” 나는 누말의 말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그럼 이 많은 건물들과 거리는 어떻게 관리를 한다는 건가?” “그런 저도 잘 모릅니다만... 아무튼 이 황성 안에 일반 백성이 없다는 것은 확실합 니다.” 누말은 그렇게 못을 박듯 말했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는 점점 황궁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는가?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대로와 점점 부피를 더해가는 황성의 크 기와 높이에 억눌리는 기분을..... 우리가 황궁의 앞에 도달했을 때, 우리가 할 일은 그저 입을 벌리고 하늘을 보는 것 뿐이었다. 황궁의 크기는 그야말로 거대, 그 자체였다. 내가 예전에 살던 시대에 두타니 63이 니 하는 것들을 보았지만 이 황궁도 그에 못지않았다. 아니 도리어 하층부의 면적으 로 짜지면 그런 건물의 두 배는 넘어 보이는 건물이었다. 사방에 담장 없이 그대로 몸을 드러내고 있는 황궁의 모습을 정 12각을 이루고 있었 다. 그리고 그 각 면에는 그 면상들도 낯이 익은 것들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었다. 12지신의 모습. 물론 좀 다른 면도 있었다. 예를 들어 소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은 거의 미노타우로스였고, 용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용머리가 아니라 공룡 머리를 한 이상한 녀석이 들어 있었다. 뭐 그 나머지는 대충 비슷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나 머지 부분에 그려진 것들을 일일이 확인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 황궁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아니 도대체가 무슨 건물이 12면에 모두 문이 달려 있는 것이냐고.... 그러니 어디로 들어가야 할지 모르는 우리들은 머뭇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곧 황성의 한 문이 열리며 일단의 사람들이 걸어(가마 비슷한 것을 타고 다니 는 것도 걷는 것인가?) 나왔다. 어쨌든 그가 우두머리로 보였으니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로 몰렸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인물이었으나 외모로만 보아서는 성별을 구별하기 어려운 인물 이었다. 금갈색의 긴 머리카락을 머리에 쓴 관 밑으로 흘리고, 풍성한 예식용 복장 같은 옷 을 입은 그는 우리를 보고 매혹적인 미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어서를 오세요. 누웬의 황궁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일단 안으로 드셔서 이야기 를 나누시지요. 그리고 뒤에 서 있는 무리들은 안으로 들어가면 알아서 방을 내어 줄 것이고 먹고 입을 것을 풍족히 줄 것입니다. 그들은 걱정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 그럼 이리로.” 그(?)는 말을 마치고 주위의 인물들을 독촉해서 가마(참 이런 것은 교자라고 한다. 뚜껑이 없으니)를 돌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를 우리 일행이 따랐다. 하지만 마차와 말들은 어쩌라는 말인가? 다시 난감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누말의 행동에 답을 찾았다. 그냥 말을 타고 건물 안으로(상식이 통하 지 않는다.)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뒤를 우리의 말과 마차가 따라 들어갔고 1500에 가까운 인원들과 수레들이 뒤를 이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간 우리는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황궁의 건물 안은 또 다른 하나의 도시가 만들어져 있었다. 건물을 가로 지르는 길과 그 양 쪽으로 늘어선 상점들... 다시 말해서 이 1층은 하나 의 거대한 시장통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한 쪽에는 말과 마차들을 맡아주는 곳이 있었다. 우리가 건물 안으로 다 들어서자 문이 닫혔고(누가 닫는 것인지 보지도 못했다. 내 뒤로 인간들이 너무 많아서..) 야전대 인원들은 다른 인솔자의 뒤를 따라 건물의 뒷 길 을 따라 사라졌다. 그리고 우리들은 아까의 교자를 따라 또 다른 문 앞에 섰다.(참고로 우리가 들어온 문은 쥐였다.) 그 문에는 닭 닮은 녀석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문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나는 우리들이 순간적인 이동을 해 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그 문은 일종의 마법진의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디로 이동이 되었는지는 건물 안에서는 좀처럼 확인을 할 수가 없었다. “이런, 대단하군요. 순식간에 순간이동이라니... 보통 사람은 느낄 수도 없을 정도 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이동진이로군요.” 나는 감탄스러운 느낌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하지만 앞서 교자에 올라있던 인물은 내 말에 많이 놀란 듯, 당혹감을 표하는 얼굴 로 나를 보았다.(그나저나 정말 아름다운 얼굴이다.) “대단하시군요. 그 곳에 이동진이 설치된 것을 알아내시다니 말이죠. 그럼 지금 위 치가 건물의 어디쯤인지도 아실 수 있으시겠어요?” 그녀(?)는(아무래도 헛갈린다.) 눈에 흥미로운 문제를 내었다는 듯이 내 답을 기다리 며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건물의 10층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하하하” “흑!? 어떻게 이 건물 안에서 위치를 파악할 수가 있지요? 그건 불가능한 일인 데...” 글쎄 불가능할까? 그건 나도 모르겠다. 위치를 알아보기 위한 노력을 해 보지도 않았 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들어왔던 문에 새겨졌던 형상이 닭이었으니 12간지의 열 번째에 해당 했기 때문에 그냥 찍은 것이었다.(이럴 때, 찍었다는 말은 품위를 떨어뜨린다. 미루 어 짐작했다. 혹은 유추했다의 표현을 쓰자.) “하하, 저도 이 건물에서 위치를 파악한 것은 아닙니다. 그저 문에 새겨졌던 상의 순서를 생각해서 답을 한 것이니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습니다. 하하하.” 내가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그 혹은 그녀는 놀란 표정을 조금은 지웠다. 하지만 대신에... “호호호, 대단하시네요. 그 사이에 그런 기지를 발휘하시니 말이에요. 그럼 서두르 시지요. 황제폐하께서 오래 기다리시겠군요.” 그녀(웃음으로 보아 확실한 것 같다.)는 얼굴 표정을 추스르고 우리 일행을 이끌기 시작했다. 음, 나와 우리 남매, 그리고 지토, 자이건(따라왔네?), 누말, 이렇게 8명의 인원이 우르르 교자를 따라 갔다.(어디까지 저걸 타고 다닐까? 황제 앞에서도 저걸 타고 있 을 까?) 그리고 우리는 넓은 복도를 지나 커다란 홀로 안내를 받았다. 홀 안 전면 세 계단 위에는 커다란 의자에 앉아 사람을 내려다보는 인물이 있었다. 솔직히 감히 고개를 마주 들고 똑바로 바라보는 것은 왠지 하지 말아야 할 짓인 것 같아서 들어서면서 슬쩍 보고 모든 정경을 머리 속에 담고 살짝 고개를 숙인 것이다. 의자 위의 인물은 20대 중반 정도의 나이로 보이는 인물이었고, 준수한 외모에(약간 사각형 얼굴이었다. 약간이 아닌가?) 머리위에 면류관(그 있지 않은가 모자위에 직사 각형의 판이 올려지고 그 판 앞뒤로 구슬줄이 늘어진 모양)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복 장은 고전의상실에 온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한복에 가깝게(한복 중에서 예 전 왕궁에 출입하던 관리들이 입던 옷과 같이 생겼다. 파란 색이어서 더 그런가?) 생 긴 옷에 화려한 요대를 걸치고 있었다. 그는 느긋한 모습으로 의자에 기대 앉아 있었고 한 손은 턱 쪽에 한 손은 무릎 쪽에 두고 있었는데 무릎 쪽의 손에는 접이 부채 같은 것이 쥐어져 있었다. 우리 일행은 교자를 따라서(저 인간은 끝까지 교자에서 내리지를 않는다.) 황제인 듯 한 인물의 가까이로 안내되었고 교자인이 황제에게 우리를 소개했다. “폐하 이들이 이번에 행문성에서 명을 받아 온 인물들입니다. 여기 이 자가 우두머 리인 루탄이라는 인물이옵고 이자가 화, 이자가 풍, 이자가 광, 이자가 수, 이자가 지 토, 이자가 자이건, 이 자가 누말로 페하의 신민입니다.” 어떻게 이 인간이 우리의 신상명세를 알고 있는지는 궁금하지 않다. 뭐 행문성이나 혹은 지나오는 여러 길목의 마을과 서령에서 이미 정보가 들어왔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교자인의 소개에 따라 가볍게 혹은 깊게 허리를 숙이거나 고개를 숙이는 것으 로 인사를 대신했다. 괜히 무슨 말이고 입 밖으로 꺼내고 싶지 않았다. 말은 만병의 근원이 될 수 있다. 조심 조심. “하하, 그래, 그대들이 이번에 천과 정의 전장에서 짐의 백성들을 구했다 들었다. 비록 전투를 거쳐 힘을 겨루는 것은 무어라 할 생각이 없으나 때로 백성이 그 싸움에 서 많이 상하고 또 많이 죽은 것을 아쉽게 생각했는데, 그대들이 짐의 아픔을 조금이 나마 덜어주니 심히 기껍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하여 내가 그대들을 불러 그 노고를 치하하고 상을 내리고자 하였다. 때문에 내가 그대들을 부른 것이다. 그래 원하는 것 이 있으면 말해 보라.” 음. 상당히 단도직입적인 사람일세. 그렇다고 넙쭉 돈 좀 주세요. 할 수도 없는 노릇 이다. 그래도 황제이니 한 번 거절한다고 냉큼 그래 알았다 그럼 가 봐라 하지는 않을 것 같다. 한 번 튕겨 보는 것이... “하지만 짐은 한 번 거절하는 사람에게 다시 권하지 않으니 진중히 생각하고 답하 는 것이 좋을 것이다.” 헉, 이 인간이 독심술을 하는 것인가? “폐하, 저희가 무슨 큰 공이 있어 폐하의 은혜를 입겠습니까. 하지만 만약 작은 공 이라도 있다 여기시어 상을 주신다면 감히 청할 것이 있습니다.” 나는 재빨리 황제에게 입을 열었다. 잘못하면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 “그래? 바라는 것이 있다? 그럼 그것이 무엇이냐?” 말이 아까부터 짧게 끝나는데... 이걸 그냥.... “예, 그것이 실은 저희가 치료한 1500 정도의 인원이 갈 곳이 없이 떠돌며 그 가족 과 헤어져 살게 되었사온데, 그들이 비록 우매하고 미천한 것들이나 폐하의 신민이니 폐하께서 거두시어 그들에게 살아감의 의미를 짐 지워 주시면 좋을 듯 하여 감히 청 하 옵니다.” “으응? 그 무슨 소리냐? 나는 그들이 이미 죽은 목숨에서 그대들이 그들을 살렸다 하여 그대들의 수족으로 삼은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아니란 말이냐?” 황제는 의외로 자세한 것 까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황제에게 조금 더 속을 털어 놓을 필요를 느꼈다. “아닙니다. 폐하. 어찌 저희가 그 많은 사람을 거느릴 생각을 했겠습니까. 저희는 단지 세상을 여행하고 이것저것을 구경하는 것을 즐기는 것일 뿐인데 그렇게 많은 인 원은 도리어 방해가 될 뿐입니다. 다만 저들을 처음에 다스리고 통제해야 할 필요가 있어 불가피하게 그들에게 핑계를 댄 것이 폐하께서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만, 그것은 추호도 저희의 진의가 아니었음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폐하.” 뭐 내가 하는 말이 황궁의 격식에 맞는지 아닌지는 내 알 바가 아니다. 그저 최대의 진심을 담아 황제에게 할 이야기를 하는 것뿐이었다. 여기서 저 떨거지들(야전군)을 떨쳐내지 못하면 그 혹을 얼마나 달고 다녀야 할지 모 른다. “하하, 그래, 그래. 그대들의 마음이 진정 그러했단 말이지. 하하. 좋다 그렇다면 내가 특별히 그 야전대를 황궁의 병사로 쓰도록 하겠다. 많은 훈련을 받아야 할 것이 나 한 번 죽음을 경험한 자들이니 잘 할 것이라 생각이 되는구나. 하하하. 그래 그럼 내가 너희의 짐을 덜어 주었으니 그럼 너희도 나에게 조금 더 도움을 줄 수도 있겠구 나. 그렇지?” 허헉,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이놈의 황제라는 인간은 정말 독심술을 하는 것일까? 우리가 야전대를 혹이라고 생각 하는 것을 어떻게 알았던 것일까?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 무얼 원하는 것일까? 나는 갑자기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이 하나 있었다. 이렇게 되면 흥정이 되는데... 흥정에서 밀릴 수는 없는 것이다. “하오나 폐하, 지금의 결정은 폐하께서 들어 주시마고 한 그 청이 아니었사옵니까? 설마 폐하께서는 청을 하라 하시고 저희에게 이익이 없는 청을 하라 하신 것은 아니 시 겠지요? 그러하오니 저희가 폐하께 어떤 일을 더 해 드려야 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일 줄 아오니다.” 하하하 누말이 부들부들 몸을 떨던지, 교자인이 당혹해 하던지 나는 모르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 또한 하나의 거래라는 것이다. “하하, 그렇군, 그러고 보니 내가 실수를 했다는 말이 되는 것인가? 이런 이런, 그 래 그럼 그대들은 짐이 시키는 일을 해 줄 수 없다는 말인가?” 황제의 목소리에 변화는 없지만 왠지 몰려오는 이 위기감, 예사롭지 않은 것이다. “폐하 아무리 저희가 폐하의 신.민.이 아니라고 하나 폐하께서 청하시는 것을 거절 할 수 있겠습니까. 저희의 능력이 닿는 것이면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이 말의 오묘함이란.(잘 이해가 안 되면 잘 들어. 황제는 시키는 일을 하지 않겠느냐 고 따지고, 나는 황제의 청을 어찌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차이는 명령을 수행하느냐 아니면 부탁을 들어주느냐의 차이가 생기지. 그래도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켜야지.) 나는 이번에도 황제가 딴지를 걸면 확 뒤집어 버리겠다는 생각을 마음속에서 다짐하 고 또 다짐했다.(독심술이 있으면 알겠지...) “하하, 그래? 그렇다면 내 그대들에게 한 가지 일을 맡겼으면 하는데... 지금은 내 가 사무가 바쁘니 내일 다시 그대들을 부르지. 그 때,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 그리고 유교인은 술교인에게 이들을 안내하여 별궁의 한 자리를 내어주라 일러라.” “예? 예, 폐하.” 뭐야 정말 저 인간의 이름이 유교인이었어? 아닌가 성이 유고 교인은 교자에 탄 인간 인가? 술교인도 있다니 말이다. 아무튼 황제의 말에 의문을 제기하는 불충 무도한 짓을 저지른 것을 안 유교인은 곧 대답을 하고는 우리를 데리고 홀을 빠져 나갔다. 그러고 보니 유교인의 교자 뒤에 아까 문에서 보았던 닭 비슷한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유교인은 우리를 이끌고 또 다른 문 앞에 갔고, 그 문을 통해 우리는 순간 이동을 했 다.(그 문에 새겨진 것은 개였다. 반인반견의 모습.) 그리고 나는 유교인 술교인 하는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예상대로라면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교인들이 모두 있을 터였다. 그리 고 그들이 이 황궁의 12개 층을 맡은 책임자들이고 말이다. 나는 잠시의 생각 끝이 이런 결론을 도출한 나의 추리력에 감탄하며 크큭 대며 유교 인을 따라 문을 지나갔다. 그리고 우리가 들어온 곳은 화려한 복도와 복도 밖의 연못과 정원이었다. 그리고 밖으로 보이는 하늘과 멀리 보이는 산과 들의 모습들... 우리는 잠시 주위를 살펴보고 그 구조를 알 수 있었다. 11층의 삼분의 일은 위로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즉 3층면적의 일부분을 정원과 연 못 정자 등으로 꾸며 놓고 있었던 것인데... 우리가 안으로 들어가자 곧 또 다른 교자인이 나타났다. 어째 생긴 것은 판박이로 똑 같이 생겼을까.. 그럼 다른 녀석들도 있다면 꼭 같이 생 긴 것일까? “어서오세요. 유교인, 그래 무슨 일이신가요? 좀처럼 자신의 공간을 벗어나는 일이 없는 교인이 여기까지 찾아오다니요? 아! 손님들도 계시는군요. 그럼 이 손님들을 모 시고 오신 건가요? 그럼 폐하의 명을 받으셨겠네요? 그래 뭐라 하시던가요? 여기에 쉴 곳을 마련해 주라고 하셨나요? 그렇겠군요. 호호호. 그럼 안녕히 가세요 유교인, 다음에 뵙지요. 그리고 손님들은 이리로 오세요. 호호 오랜만에 별궁에 손님이 드시 겠 군요. 폐하께서는 아마도 별궁에 자리를 마련하라 하셨을 테니 말이죠. 그렇지 않고 서 야 유교인이 직접 여기까지 올 리가 없지요. 호호호호.” 순간 나는 보았다 우리 일행들의 뒷머리에 맺히는 커다란.... 착시다. “이봐요. 술교인 언제나 정신이 없군요. 아직도 그런 건가요? 그럼 수고 하세요. 그 럼 루탄님 일행도 내일 뵙지요. 그럼 안녕히,” 유교인은 왠지 모르게 더 공손해진 모습으로 우리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는 문 을 통해 사라졌다.(그러고 보니 그 문에는 닭이 새겨져 있다. 혹시 문은 하나인데 그 때, 그 때, 무늬만 변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유교인이 사라지자. 술교인이라는(솔직히 구별이 잘 안가는 ... 외모로는.) 여자는 (이것은 아직도...) 복도를 따라 우리들을 데리고 작은 문을(이동문 아니었다. 가슴 을 쓸어내린다.)지나서 작은 연못과 꽃과 풀들로 가꾸어진 정원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그 정원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는 건물 안으로(솔직히 한 건물인데..) 우리 를 이끌고 들어갔다. “호호, 여기가 별궁의 중앙입니다. 그리고 주위에 방들이 많이 있으니 쓰시고 싶은 방을 쓰시면 됩니다. 곧 여러분을 모실 시녀들을 보내겠습니다. 그리고 너무 건물 바 깥에 가깝게는 가지 마십시오. 아무리 밑을 보고 싶은 생각이 드시더라도 자제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얼마 전에 바람이 잘 들지 않아서 결계 마법을 풀었기 때문에 잘못하 면 떨어지는 일이... 호호호. 조심하시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술교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밖으로 나가려다 교자를 세우고 다시 입을 열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이 별궁 밖으로는 허락 없이 나가시는 것을 금합니다. 꼭 알아 두시기 바랍니다. 어디에 가든 주인의 법도를 따르는 것이 예의이겠지요. 그리고 식 사 는 여기에서 드실 수 있도록 시녀들이 준비를 할 것입니다. 그럼.” 그렇게 술교인이 사라지고나자 우리들만 별궁이란 곳의 응접실쯤 되는 곳에 남겨졌 다. “이제 또, 우리들만 남았네? 이제 야전대는 황제가 책임을 져 줄 것이고, 그런대로 문제가 해결이 되어서 다행이네.” “호호, 그러게 말이야. 그 녀석들 끌고 다니느라 얼마나 돈이 축났는데... 호호 호.” “이제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오빠?” “아무튼 짐은 내려놓았군.” “그래 이제 황제가 무슨 일을 시킬지에만 신경 쓰면 되는 거야?” “그런데 형님, 우리가 가는 곳에서는 언제나 일이 기다린 듯 달려드는 느낌이네 요.” 내 말에 풍아, 수아, 화아, 광아의 대답이 줄줄이 이어 나왔다. “큼, 그런데 굳이 황제의 일을 해 줘야 할 이유가 있는 거냐? 어차피 야전대 녀석들 이야 황제에게 맡겨도 알아서 할 것이고, 우리야 그냥 떠나도 문제가 될 것은 없지 않 냐?” 지토가 왠지 기분이 언짢은 듯이 말했다. 무슨 일일까? 나는 지토가 왜 저기압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냐? 왜 그렇게 기분이 좋지 않은 거냐? 어차피 우리가 무슨 할 일이 있 는 것도 아니고, 황제가 그냥 일을 시키는 것도 아니고 내가 적당히 대가를 얻어내려 고 무지 노력한 거 너도 알잖아. 그런데 왜 그러는 거야?” 내가 지토에게 조금 이상하다는 듯이 물어보자 지토는 연신 헛기침만 하고 말이 없었 다. 그런데, “저기 오빠, 지토 아저씨는 땅이 필요한데 여긴 땅이 없으니까. 너무 땅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기분이 상하신 것 같아요. 내 말이 맞죠? 지토 아저씨?” 이렇게 수아가 설명을 하고 나서야 나는 지토의 상태를 알 수 있었다. 하긴, 이렇게 높은 곳에서는 토의 기운이 약해지기는 하겠다. 하지만 명색이 최상급 정령이라는 녀석이 ..... 나는 자이건과 누말이 모르게 지토의 어깨를 짚으며 내공을 토의 기운으로 바꾸어 서 잔뜩 밀어 넣어주었다. 사실 지토도 현재 상황에서 영향을 받을 정도는 아닐 것이다. 그저 조금 평소와 다 른 느낌에 거리낌이 생겨서 보이는 반응일 뿐일 것이다. 그리고 내 행동 역시 지토의 기분을 풀어주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기운을 잔뜩 넣어 준다고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오빠, 우리 이러지 말고 밖에 나가서 황궁 밖의 경치 구경이나 해요? 내?” “하지만 수아 아가씨, 아까 술교인이 나가지 말라고... 위험하다고...” 자이건이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평소에는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지내다가 가끔씩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자이건이 수아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기도 하다.) “호호호, 괜찮아요. 내가 있으니까 걱정 말아요. 가자 수아. 그리고 광아하고 오빠 들도 같이 가요. 어차피 지토 아저씨는 안 움직이려 할 거니까. 호호호.” 그렇게 서두르는 풍아의 손에 이끌려 수아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모두들 따라서 일어 나 정원으로 나갔다. 그리고 너나 할 것 없이 전부 정원의 가장자리로 달려갔다.(자이건이 어정거리기는 했지만..) “꺄~~하, 정말 높구나... 멋지다.” 제일 먼저 풍아가 괴상한 함성을 질렀다. 그리고 그런 풍아에게 아래쪽에서 무엇인가 날아올라 달려들었다. “호호호, 카다 어서와라.” 풍아는 날아드는 카다에게 한 쪽 어깨를 내어 주었다. 수아는 가만히 서서 멀리 경치를 바라보고 있었고, 화아는 어느 틈에 건물 밖으로 다 리를 내어 놓고 앉아 있었다. 나는 서너 걸음 가장자리에서 떨어져서 주위를 보며 될 수 있으면 아래를 보지 않으 려고 노력 중이었다. 떨어져도 죽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높은 곳에서 느끼는 본능적인 공포감이 야 어쩌겠는가. 높은 나무에 올라간 것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예전에 빅의 허물로 만든 기구를 타고 날아갈 때도 신경 쓸 것이 많아서였는지 이렇 게 무섭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사실 무척 무섭다. 하하 그렇다고 그런 티를 낼 수도 없고 나는 듬직하게 뒷짐을 지고 멀리 경치를 바라 보았다. 그렇게 바라보는 누웬의 모습은 새로웠다. 한타나 동쪽 지역과는 달리 많은 초원과 나지막한 구릉들로 이루어진 누웨의 땅은 어 디로든 지평선이 보이는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이제 한창 여름으로 접어드는 누웬의 들판은 온통 푸르름으로 물결치고 있었고 황성 주위를 둘러싼 성벽 너머로는 보이느니 온통 그 한 가지 색이었다. 우리는 한 동안 편한 모습으로 경치를 구경하다가 다시 응접실로 들어왔다. 그 동안 누말과 지토는 의자에 앉아 묵묵히 앉아만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누말은 우리 일행들이 황제에 대해 불경스런 어투를 쓰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지만, 그걸 말리거나 참견을 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숨소리 만 조금 거칠어져 있었다. 그 얼마 후에 시녀들이 몰려와서 이것 저것 우리의 수발을 들어주었지만, 실제로는 그게 더 귀찮았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누웬에서는 푸른색은 우두머리를 뜻하는 것이 라고 한다. 그래서 어떤 죄석에 참가하는 일군의 사람들이 있으면 그들 중에 우두머 리 인 사람이 푸른색의 옷을 입어 자신을 우두머리라 표시를 하는 풍습이 있다는 것이었 다. 그러고 보니 행문성에서 나온 옷도 다른 사람은 대충 그들 본래의 옷 색과 맞는데 유 독 나만 푸른색이라고 투덜거린 것이 생각이 났다.(그런 것이었군. 내가 그걸 어찌 알았겠느냐고.) 이걸 어떻게 알게 되었느냐 하면, 시녀들은 별궁에 들어와서 누가 우두머리인지 몰 라 허둥대었기 때문에 물어보고 알게 된 것이었다. 아무튼 그리고 나선 별 일 없는 밤이 찾아오고, 또 아침이 왔다. 우리가 아침을 먹고,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중에 술교인이 우리들을 데리고 가서는 미교인이라는 자(어째 생긴 것은 하나도 다르지 않다.)에게 인계(?)했다. 그리고 미교인은 우리를 데리고 어제 우리가 왔던 문을 통해서(양처럼 생긴 무늬가 나타난 문, 하지만 서양의 악마를 표시할 때 쓰는 것 같이 생긴 양이다.) 우리를 다 른 곳으로 안내했다.(역시 문은 동일한데 교인이라는 저들은 문을 조절하는 능력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들어간 곳은 또 한 번 우리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 곳은 한 개의 층이 네 개의 커다란 기둥을 제외하고는 트여 있었던 것이다. 그리 고 바닥은 벽돌로 깔려 있었다. “여기는...” 내가 중얼거리듯 물어보자 미교인이 대답했다. “이곳은 연무장입니다. 이 황궁을 지키는 자들이 훈련을 하고, 또, 가끔은 폐하께 서 심신을 굳히시는 곳이지요.” 어쩐지 미교인은 상당히 딱딱한 것 같았다. 교관타입일까? 그렇게 대답을 하고 있는 동안에 여러 방향의 벽들이 갈라지며 수 많은 인영들이 나 타났다. 하나같이 예기를 뿜어내는 그들은 내가 보기에도 상당한 실력의 검술을 지닌 자들로 보였다. 그들은 전체적으로 세 부류의 인물이었는데 한 부류는 중갑에 거검을 들고 있는 거인 들의 무리였고, 한 종류는 경갑옷에 일본도와 비슷한 모양의 검을 들고 있는 무리였 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어디로 보아도 티가 나는 인물들로 온 몸을 흑색으로 가리고 날렵한 움직임을 보이는 인물들이니 당연히 자객이나 보이지 않는 검들일 것이었다. 그리고 한 동안 우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들끼리의 훈련이 있었다. 역시 1부류의 인물들은 힘과 파괴력을 위주로 싸움을 했고, 2부류는 검의 스피드와 정교함으로 승부를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3부류는 어느 틈에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가끔 한 순간의 움직임으로 상대를 제압한 인물들아 나타나는 것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저렇게 숨을 수가 있는 것인지 참으로 대단한 인물들이다. 그렇게 연무장의 광경을 구경하고 있는데 갑작스런 소란과 함께 모든 인물들이 한 쪽 벽 쪽으로 가서 정렬을 하고 한 쪽 무릎을 꿇고 대기 상태에 들어갔다. 아마도 황제가 오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들을 따라 할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무릎을 꿇은 사람들의 전면 벽이 열리고(엄청 크게 열리네...) 황제 가 걸어 나왔다. 그의 곁에는 한 사람의 시위나 시녀도 없었고, 손에는 화려해 보이는 검을 하나 들 고 있었다. 그리곤 무릎을 꿇고 있는 무리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각 대 별로 20명의 인물을 차출하여 짐을 호위하라.” 순간 무릎을 꿇고 있던 인물들(각 부류별로 150명이었다.) 중에 각 부류에서 20명이 후다닥 뛰어나와(정말 소리도 없이 빠르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황제의 주위를 감쌌 다. 자객팀은 보이지도 않았고, 중갑옷 팀이 외각을 그리고 그 안에 경갑옷 팀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황제의 양 쪽에는 각각 중갑과 경갑 한 명씩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우리는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이게 훈련이라면 저 상태에서 나머지 인물들로 황제에 대한 공격을 하지 않을 까?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흥미롭게 황제 진영과 나머지 진영을 살피고 있었다. “자, 그럼...” 드디어 황제가 입을 열었다. “루탄 그대들이 나를 공격하여 나를 제압하는 것이다. 실패하면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뭐, 뭐라는 거야? 무슨 이런 황당한 경우가. 나는 갑작스럽게 뛰는 심장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황제를 올려 보았다.(뭐 거리가 멀 어서 올려다 본다라기 보다는 그냥 보는 것이다.) “폐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어찌 저희들이 폐 하에게 칼을 들 수가 ......” “내가 언제 짐을 죽이라고 했던가? 내 주위의 인물들을 물리치고 나를 제압하라 했 지. 여러 소리 말고 빨리 시작하라. 다시 이야기하지만 죽음도 각오해야 할 것이다. 어떤 수단 방법도 인정한다.” 나는 황제의 말을 듣고 황제가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까 저들의 실력이라면 어쩌면 황제는 우리를 죽이려고 생각을 한 것인지도 몰랐다. 물론 내가 보기에는 우리를 죽이기에 조금 모자라 보였지만 말이다.(여기서 조금이 란 것이 문제다. 저들의 실력과 구성이 우리들을 위협하기에는 충분한 것이었으니 까...) 하는 수 없이 우리는 진형을 짜기로 했다. “우선 자이건과 누말을 빠져 있어. 일단 도움이 안 되니 말이야.” “네, 알겠습니다.” “무슨 말씀을 폐하의 령을 어찌 어긴다....” 물론 앞의 것은 자이건의 대답이었고 뒤의 것은 말하다 아혈과 마혈을 점혈당한 누말 의 말이다. 우선 내가 중심을 지토가 오른쪽, 광아가 왼쪽을 맡았다. “풍아와 광아는 보이지 않는 자객들을 맡는다. 수아는 위급 상황에서 방어를 맡고, 화아와 지토는 덩어리들을 나는 나머지를 맡는다. 준비 됐지?” “걱정말아. 형.” “클클 오랜만에 몸을 좀 풀겠군. 클클클” “네, 오빠.” “예. 형님.” “조심하세요. 오빠들. 그리고 아저씨도.” 나는 시원스럽게 대답하는 동생들과 지토를 보자 든든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절대로 조심해야해. 위험하다 싶으면 자리를 벗어나는데 최선을 다해. 알았 지?” 나는 마지막으로 말하고는 전면을 바라보았다. “변함없는 모습이로군. 공격형이 아니라 방어형이라는 소리인가? 그럼 가 볼까? 가 자!!”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공격 명령을 내렸다.(가자가 공격 명령이었나?) 순식간에 황제를 향해 달려간 우리들은 먼저 지토와 광아가 덩어리들과 어울렸고, 그 순간을 노리고 달려드는 날카로운 검들은 나의 쌍환검에 막혀 임무를 완수하지 못 했다. “속전속결!!” 나는 그렇게 외치며 곧장 덩어리 둘을 뛰어넘어 황제에게 다가갔다. 그와 동시에 어디선가 자객들이 달려들었지만 이미 풍아가 준비를 하고 있는 상태였 다. 그리고 수아가 수막으로 다른 병력이 황제 쪽으로 오는 것은 아주 잠깐이지만 막아주 었기에 나는 황제에게 쇄도해 들어갈 수가 있었다. 물론 문제는 황제의 옆에 있는 두 명의 인물들이었지만, 나는 충분히 그들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내 검이 황제의 목을 향해 뻗는 것을 본 그 둘이 나에게 달려 들 때에 나는 아주 잠깐의 틈으로 블링크를 시도 했다. 그리고 황제의 목에 검을 대고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에게 뻗어오던 검(아마도 자객 우두머리가 아닐까?)은 그의 옆에 서 모습을 드러낸 광아의 칼에 의도가 무산되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광아의 검과 자객의 검이 부딪힌 이후로는 어디에서도 싸움이 없었다. 내 검은 황제의 목에 닿아 있었기 때문에. “하하, 아무래도 이번에는 내가 이긴 것 같은데 어찌 생각하느냐?” 황제는 자연스럽게 하대를 하며 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 일행들은 상황을 파악해 내었다. 황제의 검이 내 심장에 닿아 있었던 것이다. 그랬다. 내가 황제의 목에 검을 대는 그 순간 환상적으로 뽑혀 나온 황제의 검이 내 가슴의 심장 앞에 멈추어진 것이다. 만약 생사결전이었으면 아마도 우리는 둘 다 죽음을 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생사의 싸움이 아닌 이상, 내가 황제를 완전히 제압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우 리가 졌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황제가 열 받네 너 죽어봐라 하면서 꼭지 돈 행동을 하면 상당히 위험해지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졌다고 할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이건 황제가 그 정도의 검술 실력을 지녔으리라는 상상을 하지 못한 나의 탓이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참 이상한 일이었다. 황제가 약간의 내공을 지니고는 있지만 이렇 게 대단한 검술을 지니고 있을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그것이 내심 궁금했지만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싸움이 끝나고 우리들은 다시 황제의 앞에 섰다. “하하, 역시 생각했던 대로, 자네들의 실력은 엄청나군. 내 근위 부대의 정예로 구 성된 최고의 경비가 그렇게 무너지다니 말이야.” “아닙니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지요. 저희의 실력과 능력을 제대로 알지 못한 탓 에 결과가 이렇게 된 것이지, 정보가 확실했다면 그들도 그리 쉽게 당할 실력은 아니 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만나 본 중에서 최고의 실력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이런. 정보가 부족했다? 하하하. 이런, 이런.” 황제는 내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기도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도 했다. 지금 우리는(나와 황제뿐이다.) 황성의 모처로 이동 중이었다. 싸움(아니면 평가?)가 있은 이후에 황제는 나와의 독대를 원했고, 결과는 일행들을 연무장에 남겨두고(아무래도 지금쯤 한판 붙고 있을 것 같다. 화아나 지토 성질에... 거기다가 광아도 자객들의 솜씨를 다시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았으니...) 황제를 따라 쫄래쫄래 강아지처럼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 중이다. 황제가 나를 데리고 들어간 문은 다시 계단으로 이어졌는데,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끝없어 보이는 계단을 황제가 앞서고 있었다.(그래도 드문드문 발광석들이 박혀 있어 서 어둡지는 않다.) “그대는 황제라는 것이 어떤 자리라고 생각을 하는가?” 잠시 어이없는 표정을 짓던 황제가 갑작스레 물었다. “그거야... 해 보지 않은 일이라 잘 모르겠군요. 백성을 다스리고 나라를 경영하는 자리가 황제의 자리가 아닌가 싶은데요.” 내 대답에 황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그대는 나의 황성에 백성들이 없는 것을 보지 않았나? 그리고 나머지 땅이야 모두 왕야들의 것이지 내 것이 아니지. 그런데 내가 백성을 다스리고 나라를 경영한다는 것 이 말이 되는가?” 그러고 보면 그렇기도 했다. 실제로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이 황궁의 인물들뿐인 것이 다. “하지만, 왕야들 모두가 폐하의 부림을 받으니 어차피 같은 것이 아닌지요?” 나는 내가 가지는 의문을 묻어두고 물었다. “하하, 그건 다르지 나는 왕야들의 목을 쥐고 있는 것이지. 다스리는 것이 아니 야.” 나는 무슨 말인지 대뜸 이해가 가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이해를 할 수 있었다. 누웬의 사정을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누웬의 모든 힘은 왕야들이 독자적으로 가지 고 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왕야들이 하나의 왕국을 통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위로 황 제라는 이가 있다. 문제는 황제라는 이는 영토도 없으며 백성도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황제는 절대 허수아비가 아니다. 왕야들은 이 황제의 명을 절대적으로 따 른다. 그리고 황제는 그것이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목을 쥐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황제는 정말로 왕야들의 약점을 쥐고 그들에게서 복종을 받아내고 있는 것 인지도... “무얼 그리 생각하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그대의 생각이 맞을 것이다. 나는 이 나 라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왕야들을 밑에 두고 있을 뿐이지. 그것은 선대 황제들 역 시도 그러했으니... 그런데 말이야. 그럼 도대체 무슨 힘으로 그 왕야들의 목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나에게 무슨 힘이 있겠는가 말이야. 아~! 그렇다고 왕야들에게 무 슨 주술이나 마법이나 저주를 걸었다는 생각은 하지 말게. 그런 것은 혈족을 상대로 하는 것인데 왕야들의 자리는 자주 그 자리가 바뀌기도 하니 말이야. 전혀 새로운 왕 야가 나타나기도 하지. 그럼 무엇일까? 짐이 가진 그 힘이라는 것은?” 황제는 여전히 계단을 내려가며 뒤도 보지 않고 묻고 있었다. 이 작은 황궁에서 황제가 지닐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여전히 오리무 중의 상태에서 헤매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 가지 생각을 해 내었다. 아까 황제가 한 말에서 실마리를 잡은 것이다. 정보. 막대한 정보의 효과적인 사용이면 보이지 않는 힘으로 대륙을 흔들 수도 있을 것이 다. 황제의 힘은 그 정보가 아닐까? “하하, 역시 대단한 인물이야. 그래 바로 그것이지. 내가 가진 힘은 바로 그것이 야. 천 년을 이어져 오면서 오로지 이 누웬의 모든 것을 수집하고 분류하고 그것들의 가치를 파악하고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가진 힘이지. 그리고 여 기가 바로 그 심장이고 말이야.” 말과 함께 황제는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의 벽을 열었다.(계단의 수라도 세고 있었 나? 어떻게 문을 찾지?) 그리고 그 안에서 내가 본 것은 10여 미터 아래의 거대한 홀에서 줄줄이 이어진 탁자 와 탁자에 앉아서 서류를 작성하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저들이 바로 이 황성의 힘이야. 저들이 이 누웬의 모든 정보를 수집하는 인물들이 지. 물론 그들은 정보를 수집하고, 그 정보를 분석하는 사람은 따로 있어. 그리고 그 분석을 통해서 적절한 조취를 취하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지.” 나는 탁자에 앉은 사람을 살펴보았다. 아무 것도 없이 그는 그저 책상위에 종이위에 무슨 내용인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서 아무런 마법적인 흐름도 찾아낼 수 없었다. 어떻게 저렇게 내용을 기억해서 쓸 수가 있을까? “여기 있는 인물들의 수는 총 240명이지. 그리고 이들은 하나의 환수를 운용하는 사 람들이네. 뭐라고 해야 하나.. 이를테면 하나의 환수를 공동 소환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까... 신계에는 아주 많은 신과 신선과 환수와 신비로운 것들이 많지. 그런데 우리 의 조상은 신계에서 뛰어나온 환수들 중에서 아주 이상한 녀석을 차지하게 되었지. 공 격능력도 없고 방어 능력도 없고 그렇다고 치유 능력도 없는 이상한 녀석이 신계가 열 리면서 흘러나온 것이야. 그것이 바로 지금 이 황궁을 있게 만든 것이고 누웬의 황제 가 있게 만든 것이지. 그게 뭔지 궁금하겠지?” 황제는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 나는 그저 묵묵히 있었다. 아무래도 이 황제라는 인물은 사람의 마음을 읽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거의 확실한 것이었다. “그 환수는 바로 천 개의 눈을 가진 녀석이었어. 그러니 그 천 개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었지. 어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살피는 것은 식은 죽 먹기나 같은 것 이 었지. 자세히 그것이 어떤 것인지 이야기 하지 못하는 나를 이해해야 할 거야. 그 이 상은 비밀이라 말이야. 아무튼 그래서 저기 있는 저 인물들이 4개씩의 눈으로 세상을 살피고 있는 중이지. 이렇게 환수의 능력을 나누어 쓰는 것에 대한 것도 비밀이야. 아! 그리고 남는 40개의 눈은 내가 관리하고 있는 것이야. 그 중에 몇 개의 눈은 특 이 한 능력이 있지. 지금처럼 누군가의 마음을 대충 읽어내는 그런 것도....” 결국 그렇다는 말이로군. 그럼 도대체 왜 이런 이야기를 나에게 하는 것이지? 이건 비밀이 아닌가? “하하, 이젠 마음속으로 질문을 하는군. 이게 비밀이 아니냐고? 물론 비밀이지 누웬 의 백성들은 이런 사실을 모르니까 말이야. 하지만 왕야들은 알고 있는 사실이고, 또 누웬의 식자라고 자부하는 자들은 대충 알고 있는 내용이야. 그러니 내가 그대에게 이 런 내용을 알려 준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지. 그저 별 것 아닌 비밀을 아는 사람이 하나 더 느는 것뿐이니까. 그리고 이건 이미 많은 사람이 알고 있기에 비밀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고...” 뭐 그렇기도 하겠군. 둘 이상이 알고 있는 것이면 이미 비밀이 아니게 되는 것이지. 그런데 그럼 황제가 나에게 이러는 이유는? 역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무엇인가가 있는 것일까? 그도 이제는 겉으로만 황제인 것에 싫증이 난 것일까? 나에게 황권을 세워 나라를 통일해 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지? “하하, 이런 이런 정말 생각도 많고, 진도도 빠른 인물이로군. 하하. 하지만 그런 것은 아니야. 우리들 그러니까 선대 황제를 포함해서 말이야. 우리들이 마음을 먹었 으 면 이 누웬을 통일하는 것도 그다지 어렵지 않았을 거야. 뭐 작은 왕야를 하나 세운 다음 수많은 정보를 이용해서 주위의 왕야를 하나하나 쓰러뜨려 나가면 시간은 좀 걸 리더라도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지. 하지만 그런 욕심은 없어. 왜냐고? 이렇게 많은 눈으로 세상을 보면 생각이 트이게 마련이지. 이미 내가 가질 것은 다 가진 것이나 마 찬가지인데 무엇을 더 욕심을 내겠는가 말이야. 사람이란 자신이 보는 시각에 따라 가 치관을 지니는 것이지. 그런데 무슨 일로 그대 일행을 불렀는가 궁금하겠지?” 그걸 몰라서 묻나? 아까부터 그, 말을 굉장히 돌리네... 딱 부러지게 말하면 얼마나 좋아? “해교인을 구해주게.” 에~? 무슨 소리야? 해교인이라면, 본 적은 없지만 아무래도 이 황궁의 제일 마지막 층에 있을 교인인 것 같은데.... 그런 해교인을 구해달라는 것은 또 무슨 소리야? 납치라도 당했나? 그건 그렇게 정말 딱 부러지게 말하는군. “짐작대로 해교인은 마지막 층에 있는 교인이지. 그리고 비밀을 한 가지 알려주면 바로 그 교인들이 여기서 모이는 자료들을 분석하고 정리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야. 봐 서 알겠지만 1층에는 물류의 이동이나 자본의 이동, 더하여 인구의 이동 등을, 자네 가 봤던 미교인은 누웬의 무력이나 병력등에 관한 동향을, 유교인은 정책이나 외교등 에 관한, 술교인은 왕야들의 손님이나 후궁들 왕자들 등에 대한, 그리고 마지막으로 해교인은 각 왕야와 직계들에 대한 정보를 각각 담당하네. 그러니까 12개 분야로 나 누 어서 누웬의 정보를 총괄하는 책임자들이라고 할까? 교인들이란. 물론 나의 편안한 휴 식처이기도 하지만...흠흠. 아무튼 해교인이 있는 곳은 본래 내가 머무는 침궁이 있 는 곳인데 얼마 전, 그러니까 70일 정도 된 것 같군. 그 환수가 나타난 것이.” 환수라고? 그러니까 환수가 해교인을? 그럼 소환자가 있다는 말이잖아. “흠, 그런데 소환자가 없이 나타난 환수라는 것이 문제야. 그러니까 자의로 신계를 벗어나서 이 곳으로 온 것이지 물론 침궁에 있던 물건이 그 매개체가 되었지만 말이 야. 그것이 없었으면 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인데... 아무튼 침궁에 나타난 그 환수는 해교인의 몸과 정신을 제압하고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는데.. 그 때, 모든 침 궁 의 사람들이 죽거나 혹은 다른 층으로 피신을 했다네. 그 후로 몇 번이고 제압을 하 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를 해서... 이번에 그대들의 힘으로 그 환수를 제압해 주었으 면 하는 것이네.” 뭐야? 그러니까 빼앗긴 침실과 침실을 지키는 여자(?)를 찾아달라는 말이잖아? 하긴 황제라고 이런 문제를 왕야들에게 맡길 수도 없는 문제일 것이고, 그래서 우리 를 찾은 것이다? 그럼 우리에게 남는 것은? 뭔가 이익이 있어야.... “하하, 일단 이 누웬의 어느 곳이든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는 통행권과 누웬의 정보 를 원하는 것이면 어떤 것이든 얻을 수 있는 자격과 방법을 주지. 하지만 잘 알겠지 만 알고자 하는 정보를 알 뿐이지 모든 정보를 자동적으로 제공한다는 말은 아니야. 그렇게 되면 또 다른 내가 생기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말이야.” 하? 통행권과 정보라. 뭐 별로 소용은 없을 것 같지만 한 번 해 보지 뭐. 어떤 환수인지 몰라도 상당히 강한 것 같으니까 광아에게 주면 좋겠네. “하하, 그럼 그렇게 결정 된 것으로 알고 이만 올라가지. 급하기는 하지만 일단 점 심을 먹고, 해교인을 구하기로 하지.” 나는 될 수 있으면 이 황제 앞에서는 많은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뭐 정신을 집중하고 생각을 읽히지 않으려고 방어를 한다면 어떻게 될 것도 같지만 입 아프게 떠들지 않아도 알아서 다 대답해 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았다. 하하하. 우리는 곧 다시 돌아 나왔다. (참 허무하다 문을 나서자 곧 연무장이었다. 아깐 왜 돌아 돌아서 내려간 건데?) 연무장은 그야말로 난리가 아니었다. 화아와 지토가 덩어리들과 한바탕 하고 있었고, 풍아는 경갑옷을 입은 검사들과 , 광 아는 자객들과 접전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상당수의 인원들이 바닥에 널부러져 있었고, 수아는 자이건, 누말과 함께 불안 한 시선으로 우리를 보았다. 아무래도 이 녀석들 분위기가 조금 맛이 간 것 같았다. 어느 틈에 풍아는 행문성에서 마련한 검을 팽개치고(야전 병원을 하는 중에 전장에 서 하나 주워 가지고 있던 칼인데) 검사들이 쓰던 칼을 빼앗아 들고 있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꽤 오랜 시간을 싸운 것 같아 이쯤에서 말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 다. “하앗!!” 나는 내공을 모아 소리를 질렀고(이럴 때, 길게 소리를 지르는 거 뭐냐 사자후 이런 거 쓰면 좋을 텐데.. 방법을 모른다.) 연무장의 움직임이 순식간에 멈추었다. 그리고 황제를 발견한 병사들은 무릎을 꿇었고, 우리 일행은 나와 뭉쳤다. 황제는 별 말 없이 넓은 문을 열고 사라지며, “저들에게 점심을 주고, 식사가 끝나면 미교인이 해교인 처소까지 데려다 주도록.” 이라는 말을 남겼다. 미교인은 그 말에 조금 놀라는 듯(표정 변화가 거의 없다.) 하더니 우리들을 술교인 에게 데려다 주고 식사가 끝나면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그리고 우리들은 별궁에서 기다리다 점심을 먹고 잠시 뒹굴고 우리를 찾아온 미교인 과 해교인이 있는 곳을 향했다. 미리 이야기를 들은 동생들과 지토도 조금은 긴장된 모습이었다.(별 것 아니겠지만 그래도 연무장의 그 병사들이 해결을 못했다는 것이 긴장감을 준 모양이었다. 화아나 지토의 이야기로는 그들이 상당한 실력을 지니고 있다고 했으니 말이다.) 참, 자이건과 누말은 별궁에 두고 왔다. 정말 도움이 안 되는 녀석이다. 다른 곳으로 이동 할 때와 마찬가지로, 해교인의 거처 역시 문 하나를 지나자 나타났 다. 침실이라고 하더니 침실이 아니네? 이건 하나의 전각이로군. 그랬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아담한 마당이 있고 한 쪽에 정원이 꾸며진 뒤로 전각 형태의 건물이 있는 곳이었다. 이제는 위로 천장도 없었다. 뜨거운 태양과 간간히 엷은 구름이 보이는 하늘이 펼쳐 지고 있었다. 땡그렁, 땡그렁. 오랜만에 추녀 끝에 달린 풍경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 소리가 신호가 되었는지 전각의 문이 열리고 해교인이 걸어(정말 걸어 나 왔다. 다른 교인들은 언제나 교자를 탄다. 사인교.) 나왔다. 미교인은 우리에게 급히 인사를 하고 문을 빠져 나갔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이만...” 말을 마친 미교인은 문을 통해서 나가 버렸다. 그런데 그럼 우리는 어떻게 가라는 것일까? 설마 이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은? 갑자기 오한이 드는 것 같다. “호호호, 드디어 왔군. 오호호호. 드디어 왔어. 어서 내놓아라. 이 놈들.” 뭐가? 뭘 달라는 거야? “해교인 뭘 달라고 하시는 것인지... 저희는 황제의 부탁으로 해교인을 구하려고 온 것인데...” “닥치거라. 누가 해교인이란 말이냐? 헛소리 말고 어서 내놓지 못하겠느냐? 내 놓 지 못한다면 죽이고 빼앗으면 되는 것이지. 오호호호. 죽엇!!” 헉! 이 여자가 미쳤나? “실드!!” 해교인은 죽엇 소리와 함께 손을 흔들었는데, 그 손끝에서 숱한 불화살들이 날아들었 다. 그러니 말이고 뭐고 우선 막고 봐야 할 일이었다. 불화살이 실드에 부딪히는 것을 보며 나는 충분히 실드가 견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 지만 오산. 실드가 살얼음 같이 깨어져나갔다. 그 위험한 순간에 수아의 수막이 펼쳐졌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극성인 탓인지 불화살은 수막에 막혀 사라졌다. “응, 상당히 강한 힘인데? 그런데 저거 아무래도 빙의 상태인 것 같지?” 나는 수아를 보며 물었다.(이런 건 파울이 잘 알고 있다.) “아마도 그런 것 같아요. 하지만 속성이 무엇인지는 잘...” 파울도 모른다는 말이겠지만 해교인의 공격에 말을 잇지 못하고 방어에 들어갔다. “오호호, 그래, 재주가 있다는 말이지? 그러고 보니 정령의 냄새가 나는 구나. 오호 호 그렇다고 겨우 중간 정령의 능력으로 나를 막겠다고? 오호호. 그럼 이걸 받아 봐 라. 간다.” 또 예의 그 간단한 손짓이다. 하지만 이번에 날아오는 것은 화살이 아니라 뱀들이다. 그것도 불뱀들 10마리쯤 되 어 보인다. 징그럽기도 하지.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수는 없겠지. 아까는 방심을 했던 것뿐이었으니까 말이야. 나는 다시 실드를 전개했다. (물론 아까 같은 수준의 실드가 아니다.) 쿠구구구궁. 키기기기익 생김이야 불뱀이라도 화기의 결합일 터였다. 그 힘을 이번에 만든 실드는 참으로 적 절하게 막아주고 있었다. 잠시 동안 실드 앞에서 힘을 쓰던 불뱀들이 허공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오호? 너도 제법이구나.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직접 공격을 해야 하는 것인 가? 이 몸으로는 너희를 상대하기가 힘들겠구나. 기다리거라. 오호호.” 해교인은 상당히 거창한 웃음소리를 남기고는 전각 안으로 퇴각을 했다. 그리고 우리들이 전각 안으로 들어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을 때, 그것이 나타났다. 그것도 전각의 문을 부수면서 나타났다. 머리만 나왔는데..통째로 부서진 문. “오호호호, 너희들은 이제 죽은 목숨이다. 진작에 내 놓았으면 내 여기까지 가지고 와 준 성의를 봐서 살려주고 선물도 주려고 했건만.... 오호호호.” 그러니까 아줌마(분위기가 그런 분위기다.) 그게 뭐냐구요 알아야 주던지... 그리고 그 모습은 도대체... 왠 하마냐구요. 하마가... 콧김이 아니라 불을 뿜고 있으니... 불뿜는 하마냐구요. 그게 말이 된다고.... 머리에 커다란 물방울이 달리면서 .... “자, 잠깐만 진정을 하시고, 제 말을 좀... 저희는 도대체 무엇을 달라는 것인지 몰 라서 드리지 못하는 것이지 알고 있었으면 당연히 드릴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이 무 엇 을 말씀하시는지 ... 말씀을 해 주시면...” 아니 도대체 내가 왜 존대까지 해 가면서 겨우 하마에게 사정을 하고 있어야 하는 것 이냔 말이야. 흐흑 “응? 내가 뭘 달라는지 이야기를 안 했나? 그랬나?” 크흑 하마가 고개를 갸우뚱 한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겁니까? 그런데 나는 지금 그걸 보고 있다. 덩치가 족히 맘모스 크기의 하마가 전각 안에서 고개만 내 민 상태에서 고개를 꺄우뚱(?). “오호호, 그렇군. 내가 달라는 것은 거기 시뻘건 놈이 품속에 품고 있는 그걸 달라 는 것이다. 그 알 말이다.” 에~~! 그러니까 시뻘건 화아고 화아가 품고 있는 알이면 란, 란이네? “네? 라, 란이를 달라고요? 무엇 때문에요? 설마 드실려는 것은...” 풍아가 대뜸 한 마디를 하고 나섰다. “이이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어떻게 먹는 다는 말을 할 수가 있다는 말이냐? 그 귀엽고 사랑스럽고 앙증맞은 것을....” “예? 네, 그렇지요. 귀엽고 앙증맞고 사랑스럽지요. 그런데 무엇 때문에 란이를 달 라시는 것인지.. 저희에게도 란이는 무척이나 소중한 존재여서 무턱대고 드릴 수는 없 는 일이라...” 나는 하마에게 사정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음? 너희에게도 소중한 존재라? 아낀다는 말이겠지? 사랑한다는 말이겠지? 좋아한 다는 말이겠지? 그렇지?” 하마 환수는 도리어 물어왔다.(아까도 말했지만 아줌마 분위기의 목소리다.) “그렇습니다. 물론이지요. 제가 소환을 했고 제가 아끼는 녀석입니다. 예전에는 그 래도 날개도 있고, 부리에 발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것도 없어서 신계로 보내지도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뭐라고? 날개와 다리? 부리? 그건 아주 오래전의 일일 텐데? 어떻게 네가 그걸 알 고 있다는 거냐? 설마 그 예전에 소환했던 것도 너라는 말이냐?” 내 말에 놀라 고개를 들다가 전각의 처마를 조금(?) 부순 하마는 위에서 떨어지는 부 스러기에 눈을 꿈뻑 거리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1000년 전에 제가 란이를 소환했었지요. 그런데 이상하게 다시 불러보 니 모양이 이런 상태라서....” “음, 그러고 보니 들은 기억이 있다. 예전에 이 세계의 조화를 찾아준 인간이 있었 다고... 이제 보니 그게 너로구나. 음. 그것 참. 내가 오해를 상당히 했던 모양이구 나. 미안하다. 잠깐만 기다리거라. 내 다시 나올 것이니.” 말을 마친 하마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고 곧 해교인이 걸어 나왔다. “호호호, 어서 들어들 가자꾸나. 내가 자세한 이야기를 해 주마. 호호호.” 다시 해교인의 몸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우리는 하마해교인이 이끄는 대로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전각 안은 그야말로 화려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사치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원룸이 이런 모습이겠지? 저기는 목욕탕이고(그런데 원룸에 목욕탕이 밖으로 나와 있나?) 저건 식탁이고 저건 침대, 저건 옷장이고 저건.... 그런데 내 눈에 들어오는(다시 말하면 관심이 가는, 혹은 신경이 쓰이는) 물건 하나 가 벽에 걸려 있었다. “저건?” 내가 그것을 보고 입을 열자 하마해교인이 금세 무엇을 말하는지 알겠다는 듯이 말했 다. “호호호, 역시 느끼는 모양이구나. 그래 저것이 나를 이 곳에 소환자도 없이 올 수 있게 한 물건이지. 어떤 녀석인지 참 대단한 것을 가지고 있더구나.” 나는 그것을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아무리 봐도 그것은 아눈의 머리를 잘라 박제를 해 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호호, 그것은 신계에서 지상으로 나온 환수들 중 한 녀석이 죽으면서 남긴 것이 다. 생긴 것은 그렇게 생겼어도 엄청난 신기와 화기를 지닌 것이지. 아마도 이 곳에 못된 기운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걸어 놓은 것 같더군. 뭐 인간이 그 힘을 끌어 쓸 수는 없는 것이니까... 하지만 나는 다르지 화기만 있었다면 안 되는 일이지만 신 기까지 지니고 있으니 내가 이 곳으로 올 수 있었지. 물론 저 물건에 손을 댈 수도 없 어서 저 물건의 기운이 있는 범위를 벗어날 수도 없었지만 말이야.” “그러니까 신계에서 저 환수의 신기와 화기를 빌어서 인간계에 나오셨다는 말씀이세 요? 그것도 란이를 찾으려고요?” 풍아가 하마해교인에게 물었다. 다른 녀석들은 별 말이 없었다. 특히 수아는 하마해교인과 상극인 듯 전혀 말을 걸 지 않았다. “호호호, 그렇지 란이, 그래 란이라 부르자 이름이 없으니... 란이는 내가 보살피 며 부화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소환을 당해버려서... 알인 상태라 무척이나 위 험하다 싶어 고민 끝에 인간계에서 직접 찾아야 겠다 싶었지. 그래서 나온 것이란 다.” 으음. 그럼 이 하마해교인이 란이의 엄마? 흑흑 란이가 하마라니... “그럼 란이의 어머니세요? 전에 란이는 날개도 있었는데..” 풍아가 다시 물었다. 물론 그 어투 속에 있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미를 우리 가 모를 턱이 없었다. 하지만, “호호호, 어머니라니..호호, 아니야. 난 란이의 보모랄까? 유모랄까? 그런 거야. 호 호호. 내가 기운을 줘서 부화를 시키는 것이지. 그건 그렇게 그만 란이를 좀 줘 보겠 어?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거든. 호호호.” 그 말에 화아가 머뭇거리며 내 눈치를 보더니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품속에서 손수건 에 싸여진 란이를 꺼내서 건네주었다. “호호호, 이 손수건도 상당히 신경을 썼군. 여러 가지 보호 마법이 걸려 있네. 호 호.” 하마해교인은 조심스럽게 손수건을 펼치며 칭찬을 했다. 그리고 손수건 안에서 란이가 나왔다. 그 동안 나도 별로 란이를 볼 기회가 없었는데(풍아와 화아가 번갈아 품고 다녔는데 꺼내서 보여 주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그 동안에도 별다르게 바뀐 것은 없었다. “오호? 이런 아주 잘 키우고 있었네? 어떻게 란이에게 화기기 필요한 것을 알았는 지 모르지만 화기를 적당히 잘 받았군. 문제는 쓸 데 없는 풍기가 상당히 들어가 서....” “뭐라구요? 쓸데없는 풍기라니.. 내가 얼마나 신경 써서 품고 다녔는데...” 하마해교인의 말에 풍아가 대뜸 발작을 일으켰다. “호호, 그러고 보니 아가씨에게서 바람의 기운이 느껴지는군. 호호, 뭐 기분 나쁘 게 생각하지는 말아. 내가 란이의 아빠 되는 놈에게 감정이 있어서 말이 헛 나온 것 이 니까. 사실 란이에게 바람의 기운도 상당히 중요하지. 그럼.” 우리는 그 말에서 이 하마가 란이의 출생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기 란이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를 좀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소환주이기는 하지만 제대로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어서....” 나는 하마해교인에게 란이에 대한 이야기를 물었다. “호호호, 그래요? 그럼 잠시 기다려. 우리 뭣 좀 먹으면서 이야기를 하지. 호호 호.” 하마해교인은 란이를 가슴에 넣고(그게 그러니까 그 사이에 끼워 넣는 엽기적인 모습 을 보여서 풍아와 수아가 어려워했다.) 일어나 한 구석의 주방으로 가서는 곧 찻잔과 과자가 담긴 쟁반을 들고 왔다. 그렇게 우리는 탁자에 둘러앉아서 다과회를 겸하여 란이의 출생의 비밀을 듣기 시작 했다. “호호, 그러니까 란이는 말이지...” 이렇게 시작된 하마해교인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그러니까 신계의 화산지대(아눈이 살고 있던 그 지역인 것 같다.)에 아주 이름나고 덕망 있고 어여쁘고 실력 있고 신력까지 넘치는 존재가 있었으니 그 이름도 유명한 염 제(炎帝)의 딸이었다고 한다. 염제가 워낙에 생김이 미노타우로스 형이지만(염제(炎 帝)는 중국의 신농(神農)으로 불의 신(火神)인 축융이 보좌했다고 한다. 농업과 의약 의 신이며 소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딸은 그야말로 어여쁜 송 아지 모습이었다는데.. 어느 날, 그 화산지대를 지나가던 바람의 신인 바유(바유 (Vayu)는 인도 바람의 신으로 뜻은 “공기, 바람”이다. 현자 나라다가 바유를 사주 하 여 수메루 산을 허물려고 했을 때. 가루다가 날개로 산을 엄폐하여 바유가 일으키는 돌풍을 약하게 만들었는데, 바유는 가루다가 없는 틈을 타고 수메루 산을 허물어뜨려 바다 속으로 흘려보내 스리랑카 섬을 만들었다는 신화가 있다.)의 아들이 지나가다가 송아지에게 반해서 사랑을 고백하고 어쩌고 해서 란이가 태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문 제는 그 바유의 아들이 유부남인 관계로 (역시 바람의 신의 아들이라 바람을 피웠다 는 말이 되는 것 같다.) 얼마 후에 란이 엄마의 곁을 떠나고 홀로 남아 란이를 낳았 다 고 한다. 참, 란이 아빠의 모습은 대머리 독수리의 모습이라고 했다. 쿨럭(하마 유모 의 란이 아빠에 대한 적의가 들어간 표현이 아니가 하는 생각이 든다.) 송아지 엄마 가 란이를 처음 낳았을 때는 알의 모습이었다가 부화를 하는 듯이 날개와 다리가 나 오 고 부리가 생겨 기뻐했는데 그 후로 변화가 없어서 걱정이 태산 같았다고... 그러다 가 잠시 인간계로 소환을 당해서 갔다 오더니 성격도 좋아지고 활달해져서 한 시름은 놓았다 싶었더니 어느 날인가 다시 껍질을 뒤집어쓰고 알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그래 서 란이의 엄마가 란이를 용암 속에서 헤엄치고 잘 지내던 하마에게(짝이 없어 노처 녀 인 모양이었다. 못 물어봤다.) 맡겨서 부화할 때까지 보호하라 했단다. 그래서 하마 유모가 돌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소환을 당해서 인간계로 나가버렸다고... 참, 그 사 이에 란이 엄마는 란이 아빠를 잊고 새 출발을 했다고 하마 유모가 지나가는 말로 전 했다. 란이는 그래서 이제 아무도 없다고... 우리는 란이의 탄생에 얽힌 비화를 듣고 잠시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니까 란이는 신들 의 제 삼 세대쯤 되는 것인가? 흠... “그럼 지금 란이를 데리고 가실 건가요?” 풍아가 이야기의 충격(충격적인가?)에서 벗어나 하마 유모에게 물었다. “호호호, 그러려고 왔으니 그래야겠지만, 일단은 소환주가 있으니 그것도 쉬운 것 은 아니고... 죽일 수도 없고 말이야.” 뭐야? 그런 눈빛은 왜 아쉽다는 눈빛을... “그리고, 란이도 이제 부화가 막 시작되고 있으니 깨어나면 알아서 선택을 하겠지. 잠시 여기 있으면서 란이가 부화하는 것이나 보고 갈까? 어떻게 생각해? 어차피 밑에 있는 녀석들은 여기 오지 않으니까 잠시 여기 머물러서 란이 부활하는 것이나 보고 가 라.” 우리는 그 말에 따르는 방법 밖에 없었다. 문 밖으로 나가는 방법을 모르는 것이다. 그렇다고 날아 내려가는 것도 그렇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란이가 하마해교인의 가슴(가슴의 의미는 여러 가지지만 여 기서는 아기가 배고플 때, 찾는 그 가슴, 다른 용도로 쓰이기도 하지만....) 속에 있 기 때문에 놓고 갈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럼 란이가 얼마나 있어야 깨어나는 것인가요?” 처음으로 수아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화아 광아 지토는 처음부터 말이 없다. 설마하니 해교인에게 반하기라 도? 아니면 란이를 넣는(?) 모습에 충격을 받기라도? 뭐 솔직히 이 애들이 아직까지는 그런 선정적인 것을 본 적이 없으니 그럴 만도 하 지.(나도 얼마나 당혹스러워 했는데... 아이들은 충격이었나?) “오호호호, 그동안에 란이에게 필요한 기운은 충분히 전해진 것 같아. 부화에 필요 한 모든 준비는 끝이 났다고나 할까? 다만 이 경우에는 혼자서 알을 깨고 나오지 못 하 니까 조금 도움을 줘야 하는 것이지.” 우리는 도움이라는 말에 궁금한 눈빛을 빛냈다. “도움이요? 어떤 도움인데요?” 이번에는 풍아가 물었다. “호호, 별 것 아니야. 일종의 신호를 보내는 거지. 이제 일어나라. 넌 준비가 되었 어. 나와도 된단다. 뭐 이런 식의 내용을 자고 있는 란이에게 전해 주면 되는 거야. 호호호.” 그리고는 가슴으로 손을 쑤욱(나는 서둘러 화아 광아 지토의 표정을 살폈다. 역시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 하하하 화아와 광아의 이마에 땀이 나는 것 같다. 착각인 가. 하하) 넣어서는 란이를 꺼내서 손에 쥐었다. “별로 어려운 것은 아니지. 그냥 전해주면 되는 거니까.” 라고 하며 잠시 란이를 손에 들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한동안 란이를 들고 있던 손에 붉은 기운이 넘실거렸다. 그리고 그 기운이 사라지자 하마 유모가 눈을 떴다. “호호, 이제 깨어날 거다. 정확하게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지만 곧 깨어날 테니까 이 젠 소환주에게 돌려주지.” 하마해교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나에게 란이를 넘겼다. 나는 서둘러 탁자위의 손수건으로 란이를 감싸며 받았다. “호호호, 그럼 이제 란이가 깨어나는 것만 남았군. 나도 어떻게 생긴 녀석이 나오는 지 보고는 가야겠지? 오호호호.” 나는 하마해교인의 말을 듣고 물어 보았다. “그럼 어떤 모습으로 나올지는 모르시는 겁니까? 손수 기르시고?” 내 말에 하마해교인(그냥 하해라고 부를까? 이름이 길다. 하마 유모도 이상하고.)은 고개를 저었다. “알 수 없지. 소와 대머리 독수리의 사이에서 나왔다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으니 말이야. 새로 태어나는 환수는 부모의 기운에 영향을 받지만 그 형태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아. 그러니까 제 멋대로 생겨서 나오지. 예전에는 청룡과 현무 사이에서 토끼 가 나온 적도 있었으니까 말이야. 오호호호. 뭐 뿔이 나 있긴 했지만... 차라리 기린 과 닮았다고 해야 할 텐데.. 그 때 한동안 신계가 들썩거렸지. 오호호호 그러니 무슨 모양이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 하지만 크기는 알 수 있어. 지금 껍질의 크기로 봐 서는 그리 크지는 않을 거야. 그렇다고 알 크기로 생각하지는 말아. 알 보다는 클 테 니까 말이야. 호호호.” 그러니까 깨어나 봐야 안다는 것인가? 나는 탁자위에 손수건을 차곡차곡 잘 접고 그 위에 란이를 올려 놓았다. 아무도 아무 소리도 하지 않으면서 죽어라 란이만 뚫어지게 바라보는 시간이 흘렀다. “...” “...” “...” “.......하~압!” 찌리릿!! 기다림에 지친 지토가 하품을 하다 눈총을 받았다. 솔직히 이게 얼마나 피 말리는 짓인지 해 본 사람은 안다. 무언가 끝없이 주시하며 변화 없는 그것에서 변화를 찾아내려는 무료함과 따분함과 기대감과 흥분 속에서 눈이 아파오는 그 고통을... “잠깐, 지금 움직였지? 그렇지?” 내가 잠시 딴 생각을 하는 사이에 갑자기 화아가 소리를 질렀다. 우리들의 눈은 다시 초점이 잡혔다. 하지만 오래도록 움직임이 없었다. “아, 아니야 분명히.. 움직였단...” 결국 우리의 눈총에 화아가 변명을 하는 순간 손수건 위의 란이가 흔들렸다. “봐!! 진짜잖아. 움직였지. 그지? 그지?” 화아는 우리의 눈총에서 벗어나게 된 것을 다행이라 생각하는지 목청을 높혔다. 정말이었다. 란이는 조금씩 흔들렸다. 이쪽으로 움찍, 다시 저쪽을 움찍. 그렇게 아주 조금씩 움직이던 란이의 움직임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우리들은 이제 주위의 것들은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란이 밑에 놓인 천 조각의 색도 보이지 않았다. 약간은 붉은 기운을 내는 란이에게 모든 정신을 빼앗겨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집중력은 조금씩 란이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까지로 이어졌다. 토독, 토독, 톡톡, 톡톡톡. 란이는 안에서 껍질을 깨기 위해 무던히 노력을 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우리들은 란이가 힘들어하는 것을 알고 또,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 만 누구 하나 란이에게 손을 대는 사람은 없었다.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모두가 어렵고 힘든 것이다. 톡. 톡. 톡. 토톡. 찌. 분명히 들었다 아주 작은 차이였지만 알을 두드리는 소리 끝에 균열의 소리가 들렸 다. 힘내라 란이야. 너는 할 수 있어. 이제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되는 거야. 아마도 나 아닌 여기 있는 누구라도 이런 생각은 같을 것이었다. 톡. 톡. 찌직. 톡톡토톡 찍. 쩌쩌적. 란이의 노력은 드디어 결실을 이루어 내었다. 아주 가는 균열 끝에 드디어 무언가가 정말 병아리 눈꼽 크기로 떨어져 내렸던 것이 다. “아, 알이 깨지고 있어. 이제 곧 구멍이....” 감탄을 하는 화아를 풍아가 지긋이 눌렀다. “조용히 좀 해! 란이 놀라면 어쩔려구..” 풍아는 작지만 엄한 목소리로 오빠인 화아를 윽박질렀다. “아, 그, 그래.” 화아도 잘못을 알았는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투둑, 툭, 툭, 툭툭툭. 이제는 용기를 얻었는지 란이의 움직임과 소리도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제법 큼직한 껍질이 떨어져 내렸다. 삐쭉삐쭉 갈라진 껍질의 일부가 떨어지고 구멍이 생기자 모두들 그 쪽으로 몸을 날렸 다. 우리 일곱의 얼굴을 거의 밀착이 되다시피 붙어서 그 작은 구멍을 들여다 보았다. 어둡고 캄캄한 그 속에서 란이가 움직이고 있었다. “저거 귀일까? 방금 보인 거 말이야.” “어쩌면 부리가 아니었을까?” “아니야 코 같았는데...” “음 난 아무리 봐도 귀였던 것 같은데..” “구로니까, 제 생가게는 아모리 봐도 소가락이나 바까라그의 일부가 나니까 하 는...” 마지막 말은 가운데에 있다보니 몇 사람의 얼굴에 샌드위치가 된 광아의 말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이번에는 큼직한 껍질이 우두둑 떨어져 내렸고 드디어 란이가 그 속에서 기어 나왔다. 순식간에 떨어진 껍질이라 우리들은 한 순간 말을 잊고 란이의 모습을 보았다. “라, 란이?” 다들 말을 잊고 있었다. 심지어는 유모까지도 말을 잊은 모양이었다. “라, 란아 이리로 와라. 정말 오랜 만이구나. 하하하.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이 리로 오너라.” 내 말에 란이는 고개를 들어 나를 보더니 몸을 세우고 푸드득 거리며 천천히 날아와 서 내 눈 앞에 왔다. “반갑구나 란이야. 하하 그 동안 잘 지냈니? 우리는 변한 것이 없는데 너는 많이 바 뀌었구나. 하하. 겉모습만은 말이다.” 하지만 그 동안에도 동생들과 지토, 하마 유모는 말이 없이 란이만 바라보고 있었다. 뾰로로로롱. 뾰롱. 뽀뾰로롱. 언제나 들어도 상쾌한 울음소리. 모양은 바뀌었어도 우는 소리는 같은 소리로구나. 하하하. 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소리에 담긴 뜻이 머리 속에 울린단 것이었다. - 반가워요. 주인님. 무척이나 오래 된 것 같아요. 신계에서 주인님이 다시 불러 주 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다른 친구들이 그 인간은 이미 죽어 버렸을 거라고. 기다 리지 말라고 했었어요. 그래서 얼마나 슬퍼했다고요. “하하하, 그랬어? 그럼 나는 다른 인간과 많이 다르다고 해 주지 그랬어? 뭐 그런 걸 슬퍼하고 그래?” 뾰로로롱. 뾰뾰뿅. 뽀로로로롱 - 그래도 괜찮아요. 이렇게 다시 만났으니까요. 그렇게 나와 란이는 오랜만에 다시 만난 것을 반가워하고 기뻐하며 못 다했던 정(?) 을 나누는 동안 패닉에 빠졌던 일행과 하마 유모가 깨어났다. 그리고 내가 란이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고는 물었다. “응? 오빠? 란이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거야? 예전에는 못했잖아.” 풍아가 물어왔다. “응. 이제는 알아들을 수 있어. 왠지는 모르지만 말이야.” “그래? 그럼, 그럼 말이야.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저런 모습이 되었는지 좀 물어 봐줘. 제발..” 풍아가 갑자기 사정조로 이야기를 하기 매달렸다. 그리고 일행들과 하마 유모도 그에 동감의 표하는 얼굴을 내게 집중시켰다. 뭐, 나도 궁금했던 것이라 란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란아, 그런데 그 모습은 왜 그렇게 된 건지 알고 있니? 혹시 니가 그렇게 되고 싶 어서 된 거니?” 뾰로롱 뾰뾰로로롱 뽀로룽 란이의 이야기는 이와 같아서 내용을 통역하면 다음과 같다. 이야기의 전달을 쉽게 하여 내용만 요약하기로 한다. 그러니까 란이는 소환주인 내가 죽었을 것이라는 친구들의 말에 충격을 받아서 소환 주와 환수와의 관계는 소환주가 죽으면 끊어지게 된다는 사실도 생가하지 못하고 하 마 아줌마(?)의 품속에서 변태를 하기로 결정을 했다는 것이다.(신의 자손이라서 그 런 지 성장을 위한 변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일종의 돌연변이 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 다. 두 신족의 결합에서 태어난 돌연변이.) 그렇게 알 속에 들어가 있는 상태에서는 시간의 흐름도 느끼지 못하고 별다른 감각도 느끼지 못하고 그저 주위에서 감도는 기 운을 몸속에 축적하며 변태에 필요한 힘을 기르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도 중 요 한 시기가 있으니 부화하기 얼마 전에 형체를 형성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기간에 그 때까지와는 이질적인 기운인, 물의 기운이 들어와서 그 형태가 물의 속성을 지닌 것들 중의 하나로 결정이 되었다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아마도 그 때가 수아가 란이를 품에 안고 다니며 애지중지 보살피던 시 기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결국은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음, 그러니까 이제는 그 란이의 모습을 설명하도록 하자. 아주 간단하게 설명을 하겠 다. 란이의 모습은 바람을 잔뜩 머금은 복.어.의 모양이었다. 아가미 부분의 지느러미를 파라락 흔들며 날아다니는 모습이다. 복. 어. 어떻게 이런 일이... 나름대로 귀엽고 앙증맞은 것은 사실이다. 크기도 사람 머리 반 정도의 크기였고, 흰 빛의 배에서부터 등 쪽으로 가면서 점점 색깔이 변해서 등의 색은 흑적색이었다. 거의 몸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아래쪽은 흰 빛이 주종이었고, 위쪽으로 점점 노을 빛으로 짙어 지다가 등은 흑적색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 모습으로 뾰로롱 거리며 날개(아가미 지느러미)를 파라락 거리며 내 눈 앞에서 날아다니는 란이의 모습은 정말 귀엽기는 했다. 다만 우리 일행이 놀란 것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모양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복어의 눈에 눈썹이 있었나? 그래도 짙은 눈썹이 있어서 조금은 나아 보인다. 적갈색의 굵고 짙은 눈썹이... “오호호. 그럼 나는 이만 돌아가 봐야겠네. 그동안 용암 속에서 헤엄을 못 쳐서 피 부도 상하고, 몸무게도 줄어서.... 뭐 내가 있어 봐야 할 일도 없으니까 말이야. 그 리 고 란이는 잘 지내고 가끔 신계로 나를 보러 와야 한다? 그럼 나는 이만 가야지.” 하마 유모는 그 말을 마치고 신계로 돌아가 버렸던가 보다. 그 순간 해교인은 쓰러 져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뭐가 이런지. 갑작스레 그렇게 떠나는 것은 또 뭐람? 물어 볼 말도 많은데... 그리고 잠시 수아가 해교인을 살펴주자 해교인이 정신을 차렸다. “누, 누구시죠? 어떻게 이 곳에 계시는 겁니까? 이 곳은 황제 폐하만이 오실 수 있 는 곳입니다. 그런데..” 아마도 해교인은 그 간의 기억이 아무것도 없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해교인에게 그 사이의 일을 간단하게 설명했고(여기에서 란이와 연관지어진 부분은 전적으로 삭제 은폐되었다. 만약 이 사건의 발단이 우리들이라는 것이 알려지 면... 괴로워진다. 이건 우리 남매와 지토, 그리고 란이만의 아니다 아눈, 파울, 카 다, 게브... 이런 너무 많은데.... 아무튼 우리만의 비밀이다.) 해교인은 처음 하마 유모가 나타났던 것은 기억하고 있었기에 곧 우리 말을 믿게 되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우리는 날이 밝는 것을 기다려(그 사이에 해가 지고 밤이 깊어져 새벽이 오고 있었다.) 해교인의 안내를 받아서 문을 통해 유교인이 있는 곳으로 내려 올 수 있었다. (문제는 이 해교인이 걷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아니 걷지를 않으려는 것이다. 뭐 폐하의 앞이 아니면 걷지 않는다나 어쩐다나.. 이미 다 봤는데...) 그래서 결국은 화아와 광아가 급조한 교자를 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왕이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하, 그래 수고들 했다. 음, 란이도 반갑구나. 이렇게 보게 되어서...” 첫 황제의 말이 우리들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잊고 있었다. 저 인간이 모든 세상을 살피는 눈의 주인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 방법은 알 수 없지만 자기 집에서 일어나는 일도 모를 것이라 생각한 내가 바보 다. 나는 마음속으로 란이에 대한 생각만은 읽히지 않으리라 굳게 결심하고 생각의 방어 벽을 치고 있던 것을 풀어 버렸다. 에구구. 괜히 쓸데없이 정신을 집중하느라 신경만 썼네. 나는 그냥 말없이 황제를 바라보았다. “하하, 그렇다고 짐이 약속한 것을 어기지는 않을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그리 고 해교인의 침소에 있는 그 환수의 박제는 선물로 주도록 하마. 혹시 또 그런 환수 가 날아드는 것은 원하지 않으니 말이야. 그리고 그 증서는 짐이 내일 줄 것인즉 오 늘 은 하루 피로를 풀고 내일 출발을 하도록 하라. 수고들 했다.” 그렇게 허무하게 황제와의 면담은 끝이 났고, 우리들은 다시 유교인의 안내로 별궁에 서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밤에 나는 또 다시 황제와의 독대를 해야 했다. 곤히 자는 나를(하루 종일 잤다니...) 술교인이 깨우더니 해교인의 거처(황제의 침 궁)에 데려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곳에서 처음으로 교인이 제 정신으로 걸어 다니는 것을 보았다. “그래 어서 와라. 내일 아침이면 서둘러 떠날 것 같아 불렀느니. 자, 그럼 이제부 터 묵은 빚을 청산 해야겠지?” 대뜸 해교인이 차려온 술상을 앞에 두고 꺼낸 이야기가 이따위다. 그래 안 그래도 란이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꼬투리 잡을 거라 생각은 했다. 그러니 할 말 있음 다 해라. 나는 내가 일어나자 같이 따라 나온 란이를 보며 생각했다.(보면 볼수록 정이 가게 생겼다. 그 부리부리한 눈동자와 두꺼운 눈썹이 얼마나 귀엽던지.. 파라락 거리는 아 가미 지느러미는 또 어떻고... 살랑대는 꼬리지느러미... 동그란 몸체... 처음 볼 때 보다는 정말 익숙해진 란이의 모습이다.) “하하, 뭐 그리 어려운 것을 시키자는 것은 아니니까 너무 죽을상을 할 것은 없어. 내 조건은 간단한 것이니 말이야.” 어제도 이야기 했지만 제발 빙빙 돌리지 말란 말이야. “그러니까 내일 이곳을 떠나면 암흑 제국으로 가 주었으면 하는 것이야.” “암흑제국?” 나는 생각으로 뜻을 전달하던 습관에다 놀라움이 더해져서 반말을 토해내고 말았다. “그래 암흑제국. 요즈음 그 곳과 인접한 곳에서 좋지 않은 징후들이 보이고 있어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싶지만 암흑제국 안쪽으로는 내 능력으로도 상황이 파악되지 않 아. 뭐 처음부터 그 예전의 서 자치령 안쪽으로만 힘을 발휘하기로 조건부 계약을 한 것이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어쩐 일인지 내가 반말로 응대 했던 것은 신경을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에게 암흑제국으로 가서 요즈음 국경선에서 일어나는 이상 징후에 대한 조 사를 하라 그런 말이네? 내 참, 돌겠구만. 도대체 나는 언제 여인왕국으로 가는 거야? 처음 계획이 그 쪽이었 는데.. 여인왕국과 신성제국을 들러서 유소와 넥스의 후예들을 보고 싶은 마음이 마 음 한 구석에 늘 있었는데 말이야. “하하, 미안하지만 그대의 계획은 나중에 알아서 실천하기로 하고 일단은 나에게 진 빚을 갚는 것이 우선이지. 그러니 암흑제국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아보고 알려줘. 그럼 빚은 없는 것으로 하지.” 이런... 나는 분명히 내가 혹은 우리 일행이 잘못이 있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뭐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유모가 여기까지 온 것은 모두 란이 때문이니까...) 그래도 왠 지 황제 녀석을 보고 있으면 손해 보는 거래를 하는 것 같은 생각이 자꾸만 드는 것 이 었다. “그렇게 인상 쓰지 말아. 그리고 저기 걸려 있는 환수의 박제는 온 김에 가지고 가 고... 뭐 떼어 낼 수가 없으니 알아서 가지고 가도록.” 나는 고개를 돌려 아눈의 박제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뾰롱 뾰롱 뾰로롱 -주인님 저거 제가 가지면 안돼요? 저거 먹으면 굉장할 것 같은데.... 라는 것이다. “저걸 먹어? 뭐 먹어서 좋은 것이면 먹어라. 어차피 나에게 주신 것이니 뭐라 하시 지는 않겠지.” 하고 내가 란이에게 박제에 대한 처분권을 넘기자 란이는 박제로 포르륵 날아가서는 몸을 부풀리고(거기서 더 부푼다는 것이 상상이 안 갔는데.. 더 부풀리니까 온 몸에 가시가 돋아났다. 거참. 저거 가시복어였었나?) 박제에게서 기운을 끌어 마시기 시작 했다. 먹는다고 해서 그런 줄 알았더니 박제가 지니고 있는 힘만 흡수를 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한 동안 그것은 나와 황제는 말없이 보고 있었다. 박제로부터 굵은 붉은 선과 가느다란 금색 선이 나와서는 란이의 입 안으로 빨려들 고 있었다. 아마도 란이의 유모가 이야기하던 화기와 신력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계속되던 란이의 식사는(그러고 보니 환수가 무얼 먹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게브는 가끔 지토와 차를 마시거나 했지만) 두 기운이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 게 되어서야 끝이 났다. 그리고 란이는 부풀렸던 몸을 정상으로 돌리고 파르륵 날아서 내 어깨위로 올라왔다. 뾰로롤뾰롱 - 아 맛있다. 주인님 저 이제 얼마 있지 않아서 다시 변태를 할 수 있을지도 몰라 요. 생각보다 도움이 많이 되는데요? 뭐 그렇단다. 나야 지금은 그런 기운 준다고 해도 더 이상 모이지도 않는다. 그러니 너 다 가져라. 쩝. 그렇게 란이가 내 어깨위로 올라오자 황제가 한 마디 했다. “자, 그럼 이제 가서 푹 쉬어. 내일 통행증과 정보 이용을 할 수 있는 방법, 그리 고 암흑제국 쪽의 문제를 전해 주지. 자 가봐.” 뭐,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 그럼 여기 차려 놓은 술 상은 뭐냔 말이야. 젓가락도 들지 못하고 가게 할 거면 뭐하 러 차린 거야? “하하, 이봐. 이 자리는 나와 해교인을 위한 것이야. 70일 동안이나 만나지를 못했 으니 회포를 풀어야 할 것이 아닌가 말이야. 하하하.” 나는 해교인의 배웅(뭐가 그렇게 좋은 것일까 나를 내 보내는 것이..)을 받으며 별궁 으로 돌아왔다. -황제 너.....정말.....이씨..... - 다음날 아침 부스스한 얼굴로(난 왠지 모를 울화 때문에.... 아마도 황제에게 당하는 느낌이 강해서 그런 것인 듯) 일행들과 함께 황제의 연락을 기다렸다. 하지만 우리를 찾은 것은 자교인이었다.(어차피 생긴 것은 전부 똑 같다. 표정변화 나 행동, 어투에서 차이가 날 뿐. 생긴 건 똑 같다. 중성적인 미를 풍기는 ... 그러 고 보니 황궁이니까 내시들일까? 확인을... 할 수가 없구나!!) 그리고 자교인을 따라 문을 나서자 우리는 황궁의 밖에 서 있었다. 정말 아주 간단하게 쫓겨난 것이다. 정말 생각하면 할수록 알 수 없이 화가 난다. 왜일까? 자미인은 나에게 한 통의 서찰과(편지 아님 서찰임 크기가 다름.) 네모난 패를 주고 는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갑자기 황궁 앞으로 바람이 휭~ 불어가고 그와 함께 낙엽이 흩날리는 환상이 ... 나와 화 풍 광 수 지토, 자이건과 누말. 정말 신세 처량하게 되었다. “그런데 누말, 부하 병사들은 어디로 간 것이지? 왜 아무도 없어?” 나는 누말에게 그의 부하 10명에 대해 물었다. “그것이 제가 루탄님을 따라가서 암흑제국의 소식을 알아오는 임무를 맡았기 때문 에 그들을 데리고 올 수가 없었습니다.” 누말의 말에 나는 짐작했다. 저 녀석은 감시병이야. 어차피 누웬에서는 내가 어디로 움직이는지 어떤 짓을 하는지 숨길 수가 없지만, 암흑제국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는 알 수가 없으니까 누말 녀석을 보낸 것이야. 그런데 저 녀석은 언제 그런 명령을 받은 것일까? “궁금한가? 그건 이자의 몸에 내가 특별히 눈 하나를 심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 런 상황을 알고 있는 것이야. 뭐 몸이나 정신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니고 내가 필요 할 때에 이렇게 잠시 몸을 쓸 수 있게 하거나 내가 암흑제국에서도 그 상황을 살필 수 있게 하기 위한 방법이지. 그럼 잘들 가라고. 그리고 이런 사항은 이 자도 동의한 것이고 지금도 상황을 보고 듣고 있으니 따로 설명을 할 필요는 없어.” 그, 그런. 말도 되지 않는 짓을... 결국에 우리는 황제라는 녀석을 감시자로 데리고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 출발을 하시지요. 폐하의 말씀으로는 저와의 연결은 될 수 있으면 피하신다 하셨습니다. 폐하의 옥체에 무리가 많은 것이라 하시면서...” 누말은 그렇게 덧붙였다. 결국 또 한 사람(그게 둘이야 하나야?)의 동행을 이끌고 우리는 암흑제국을 향해 발 길을 옮겼다. 마차는 우리가 들어왔던 동문이 아니라 남문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었고, 선두에는 누말이 말을 타고 우리를 이끌고 있었다. 남쪽으로 나서면 행문성을 공격한 정왕야의 영지였다. 이 영지의 끝이 암흑제국과의 국경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뭐 정왕야 걱정은 없을 것이다. 황제의 명으로 가는 것이니 말이다. 나는 황제의 서찰을 살폈다. 봉투 안에는 한 장의 금빛으로 치장된 통행서 하나와 나에게 준 패를 사용하는 일종 의 심법 같은 것이 적혀 있었다. 그 패는 심법을 이용하여 나의 정신과 교인들의 정신을 연결하여 필요한 정보를 물어 볼 수 있게 해 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누웬의 어디에서든 가능하다는 것이 설명의 뒤에 쓰여 있었다. 그러니까 황제 의 눈들이 영향을 미치는 범위라면 이 패의 사용이 가능하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암흑제국의 문제를 알고 싶으면 패를 이용해서 정보를 찾으라는 말도 함께 들 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점심시간이 되어서 누말이 들판 가운데에서 말을 세울 때까지 심법을 통 해 여러 교인들과 접촉하고 암흑제국과의 국경에서 있었던 이상 징후들에 대해서 알 아 보았다. 교인들을 통해 알아 본 암흑제국과의 국경에서의 이상 징후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국경선의 비무장 지역이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이건 누웬과 한타의 국경선이 환수들의 영역으로 나뉘어 있는 것과 달리, 암흑제국과 의 국경선이 숲으로(밀림이다. 아주 빽빽한 밀림)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 다. 환수가 갑자기 생겨서 국경선이 늘어나는 것과 숲의 넓이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 도의 속도로 넓어지는 것에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밀림이라는 것이 상당히 악취미를 가진 작자들이 장식을 한 듯이 곳곳에 독충과 육식 식물들이 판을 치고 있고, 전설의 마물들도 심심찮게 등장을 한다고 한 다.(전설의 마물이라 해 봐야 본토에서 거의 전멸하다시피 한 그 예전의 마물들이다. ) 때문에 암흑제국과 누웬 사이에서 근근이 이어지던 교류도 끊어지게 되었다는 것인 데... 황제가 우리에게 알아 달라는 것이 바로 그 국경선의 비정상적인 확장의 이유와 상 업 거래를 위한 무역로의 확보였다. 그나마 암흑 제국의 정계에서 무슨 일이 있으며, 현 상황에서 암흑 제국이 획책하고 있는 비밀공작은 무엇인가 하는 그런 것을 알아오라 하지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것인지... 그런데 정말 어떻게 숲의 넓이가 갑자기 세배 가까이 늘어날 수가 있는 것일까? 아무리 암흑제국과 누웬의 국경이 좁은 곳이라고 하지만(국경선은 국가의 영토끼리 의 접점을 이야기 하는데, 누웬과 암흑제국의 접점은 넓지 않았다. 처음에는 도보로 이틀 정도의 거리였다고 한다. 그 영토의 밖으로는 아직도 개척되지 않은 지역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인간의 발이 닿지 않은 처녀지라고 해야 하나?) 그 곳에 순식간에 세 배의 넓이를 지니게 된 것이다.(아니군. 넓이가 아니라 직선거리가 세 배로 늘었으니 면적은 아홉 배가 되는 것인가?) 아무튼 그런 변화가 시작된 것은 3년 전, 여름 우기가 시작된 이후부터라고 한다. 때문에 우리는 여름 우기가 시작되기 전에 국경선에 닿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여름 우기라. 본격적인 우기가 앞으로 열흘 정도 남았는데, 서둘러야. 아주 서둘러 야 될 것 같다. 나는 여기까지 교인들과 정보를 교환하다가 점심을 먹으라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점심을 먹으면서(누말, 아니 황제냐? 누구든 그렇게 음식에 욕심내면 남모르 게 언젠가 묻어 주마는 생각을 하면서) 황제가 시킨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이 무엇인지를 일행들에게 알렸다. 물론 가장 시급한 것은 이 곳의 성이나 도시를 들러서 물건을 사는 것이다. 이 누웬 에서 생산 되는 것 중에서 암흑 제국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은 바로 유리라고 한다 . 그것도 건축용 유리 판. 그러니 빨리 유리판을 사재기를 한 다음에 암흑제국에 도착해서 이윤을 남겨 팔아먹 는 것이다. 그러니 우선 유리판을 사야 한다. 거기다가 정왕야의 영지에서 나는 특산품이 유리라고 하니 그 얼마나 다행인가. 하하 하. 어쩌겠는가. 황제의 심부름을 하는 동안에 이익이 없으니 그렇게라도 여행 경비를 벌 어야지. 암흑제국과는 3년 정도 거의 완전히 모든 교류가 없었다고 하니, 유리값은 어마어마 하게 치솟았을 것이다. 기왕 가는 김에 조금 머리를 쓰자는 것뿐이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그 오후 내내 서둘러서 제법 큼직한 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말 들이 많이 지쳤다. 당나귀는 멀쩡한데..환수라 그런가?) 그리고 황제의 통행증을 가졌다는 이유로 귀빈 대접을 받으며 관사에 방을 얻고 식사 를 대접 받을 수 있었다.(더구나 유리를 사고 싶다는 말에 성에 있는 유리란 유리는 모두 관청 앞에 쌓아 올리는 열성을 보였다. 한 밤중에 마법 등을 밝히고 유리를 쌓 아 둔 모습이 제법 찬란하게 보였다.) 다음날 나는 아공간이 비좁을 정도로(물론 과장이다. 아공간은 크기가 작은 산의 크 기다.) 유리를 쌓아놓고는 대금을 계산하고(아주 실비만 받는 것 같은 느낌이어서 기 뻤다. 나중에 교인들에게 확인을 해 봐야지.) 다시 마차에 올랐다. “자, 이제부터는 무조건 달리는 거다. 우기가 시작되기 전에 도착을 해야 하니 말이 다.” 뾰로롱, 뾰롱 - 말이다 말이다. 윽 제발 평소에는 란이의 말을 알아듣고 싶지 않다. 그 동안에 란이가 이상한 짓을 시작했는데.. 별 내용도 없는 이야기를 따라 하거나 변형시켜 말하는 것인데... 다른 사람은 참 예 쁜 울음이구나 하는 수준이지만 그 내용을 듣는 나는 조금 괴롭다. 자 밥을 먹자고 했는데... 뾰롱. 뾰루롱 - 먹자 먹자. 이러면 ... 내용을 모르는 사람과 아는 사람의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거기다가 란이는 거의 내 어깨를 떠나지 않는다. 그러니 귀 옆에서 - 먹자, 먹자. - 가자. 가자. - 달리자, 달리자. 이런 식의 말들 이 자꾸만 들려오면 정말 정신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열심히 말을 재촉해 국경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는 동안에 날짜는 지나고 지나 드디어 본격적인 우기가 시작되는 무렵이 되었다. 참, 누웬의 날과 달과 해를 나누는 것은 한타와 같은 방식이었다. 처음 세상을 재구성 할 때, 의도적인지 아니면 우연인지 몰라도 하루의 시간과 한 달 한 해의 구분을 그 전의 세상과 같이 만들었기 때문에 여기의 시간과 달의 구분은 내가 살던 예전 세상과 다르지 않았다. 한창 여름을 향해 가는 중에 그러니까 달로 치자면 7월 중순에 우기는 시작되는 것이 었다. 그리고 그 우기는 별로 길지 않아서 보름 정도 지속되다가 그친다. 우리는 그 우기가 시작되기 전에 숲으로 들어가야 하고, 숲이 우기에 무슨 이유로 넓 어지는 것인지를 알아야 했다. “이러다가 시간에 맞추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뾰루룽 뾰롱 -아닐까? 아닐까? 나는 마차를 모는 자이건에게 물었다. “글쎄요. 제가 이곳의 지리를 모르니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자이건은 단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자이건은 자간의 경매장에서 처음 잡혀서 바락바락 대들고 난 후로는 별 로 반항도 없고, 곧잘 잔심부름(설거지나 마차몰기)을 하면서 버티고 있다. 가끔 화아나 광아의 대련 상대(스트레스 해소용)로도 역할을 해 주는 것 같고... 다 만 언제나 말 수가 적은 편이고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 많다는 것과, 우리 일행들에게 깍듯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이 놈이 처음에는 이런 성격이 아니었는데... 우리를 따라다니는 것이 시간을 무의미 하게 보내는 것 보다는 나을 것 같다고 했던가? 아~~ 모르겠다. “누말, 누말. 아직 멀었어?” 뾰로롱 뾰료료 -멀었어? 멀었어? 나는 저 앞에서 달리는 누말에게 공력을 실어 소리를 질렀다. 잘 조정을 한 것이라 다른 말이나 사람들에게는 영향이 없다. 하지만 내 말을 직접 듣는 누말은 경기를 일으키지... 않는구나.(경기를 일으켜서 말 에서 떨어지면 어쩌면 감시자를 떨굴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누말은 반은 누말이고 반은 황제라고 생각한다. 황제라는 생각이 들 때면 언제나 목을 조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데... 따지고 보면 황제와의 거래에서 내가 손해를 본 것도 아닌데... 왠지 그 황제라는 놈만 생각을 하 면 열이 나고 혈압이 상승하는 것 같다. 아무래도 내가 평소에 누구에게 지지 않다가 황제에게는 졌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왠지 이기지 못했다는 느낌이 ... 나를 이렇게 만드는 것일 것이다. “저 앞에 상인들이 사용하던 길이 있으니 이제 그 길을 따라 가면, 곧 국경에 도착 할 것입니다. 오늘 저녁은 들판에서의 마지막 야영이 될 듯 합니다. 내일 아침부터는 밀림을 헤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이제 다 왔다는 말이네? 알았어.” 뾰로롱, -알았어. 알았어. 나는 그 순간 란이의 목을(목이 없지....) 조를 뻔 했다. 그리고 잠시 심호흡을 하고 란이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란아? 있잖니.. 내 말의 끝을 따라하는 거 하지 않으면 안 되니? 내가 신경이 몹 시 쓰여서 그렇거든?” 뾰로롱. 뾰뾰로롱.... - 왜요? 난 재미있는데... 주인님 말 따라하는 거 재미있어요. 하면 안 되는 건가요? 허허, 그렇게 커다란 눈에 눈물이 글썽하면서 물어보면 안 된다고 말할 수가 있겠느 냐구... “저기, 그게 아니라 란이야. 특별하게 내가 할 이야기가 아니면 이렇게 머리 속에 서 울리는 말 대신에 나는 란이의 보통 때의 소리를 듣고 싶거든? 란이 너의 노래 소 리가 얼마나 듣기에 예쁘고, 또 기분 좋은지 모르지? 굉장히 예쁘고, 듣기 좋고, 기 분 도 좋아지는 소리란다. 그래서...” 뾰로롱. 뾰로로로롱. 뾰뾰뾰롱. - 그러니까 주인님에게 특별히 어떤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면 그냥 혼잣말을 하 듯이 하란 말이죠? 주인님에게 특별히 말하지 말고...“ “그래, 그런 이야기지... 그럼 란이도 재미있는 것을 계속할 수 있고, 나도 란이의 노래 소리를 듣고 즐길 수 있고... 서로 좋은 거잖아. 안 그러니?” 나는 최대한 웃는 얼굴로 란이를 설득했다. 뾰롱 뾰로로롱 뾰롱 - 그래요. 주인님. 그럼 그렇게 하지요. 주인님 말 따라하는 건, 이제부터 저 혼자하 고 할 말 있으면 주인님께 말 걸게요. 그럼 되는 거지요? 나는 란이의 말에 란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생각보다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몸이 다.) 말했다. “그래, 그래. 란이 착하구나. 하하하. 그럼 되는 거란다. 하하하.” 뾰로롱롱. 뾰로롤 하지만 이번에는 란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들려오지 않았다. 짐작만 한다. 아마 -거란다, 거란다 이랬을 것이다. 하하하. 그렇게 란이의 문제를 어렵게 해결하고, 나는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것은 광아에게 환수를 하나 불러 주는 것인데, 누말이 있는 상태에서는 조 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뭐 이미 행문성에서 환수를 소환하는 진을 보았을 수도 있지만, 이번에 환수를 소환 하면 어쩐지 그 방법을 황제라는 녀석이 훔쳐 배울 것 같은 느낌이 나를 사로잡고 있 었다. (드디어 강박관념에 사로잡히는 모양이다.) 그러니 광아의 환수는 좀 기다려야 할 듯(아니면 누말을 진짜 묻어 버리던지.) 했 고, 국경선의 문제를 해결하면, 더 이상은 황제 놈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에 누웬으로 돌아오는 일은 없어야 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내가 창고에 쌓아놓은 유리들을 팔아야 한다는 것인데...(자그마 치 100만 덴의 거금을 지급했다.) 내 생각에는 엄청난 이윤이 붙을 것 같았다. 하하 하. 그런 생각을 하면 조금은 마음이 풀리는 것 같다. 하지만 교인들에게 연결된 상태로 정보를 얻을 때나, 누말을 보고 있으면 황제라는 놈이 자꾸만 떠올라서 화가 나는 것이다. 왜 그런지는 모르면서 말이다. 결국에는 앞으로의 계획이라고 해 봐야 국경선에 도착을 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쩝. 저녁 무렵 우리는 드디어 지금까지와는 다른 분위기의 풍경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주로 평원의 초지와 낮은 구릉지와 작은 강으로 이루어졌던 누웬의 풍경이 사라지면 서, 흑록색의 빽빽한 나무들(풀인지 나무인지)로 가득 찬 숲이 나타난 것이었다.(정 말 끝없이 넓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우리가 제법 높은 구릉지 위에 있었기에 가능한 판단이다.) 서쪽 하늘로 지는 태양의 붉은 빛을 받아 더욱 음산한 느낌을 주는 숲은 온통 그 노 을의 붉은 빛으로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정말로 숲이 숨을 쉬고 있어서 숲 위의 공기가 흔들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 을 하게 만들었다. 사실 숲과 평원의 기온 변화의 차이가 있으니 빠르게 식어가는 초원에 비해 온도 변 화가 없는 숲이 온도 차이가 생기는 것이라 볼 수 있었다. 여기서 문제, 숲과 초원이 있으면 어느 쪽의 온도가 높을까? 해가 있을 때는? 당연 히 초원이 높지. 그러니 숲에서 초원으로 바람이 불어온다. 초원의 따뜻해진 공기가 위로 올라간 자리를 채우는 것이다. 그럼 해가 지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초원의 온 도 가 내려가면서 숲 보다 낮은 온도가 되면 반대로 바람의 방향이 바뀌게 되지. 이런 것은 해풍과 육풍이라는 것으로 과학 시간에 배웠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해가 지는 시간이라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때였고, 밀림이 지니는 습 기 때문에 숲 위로 올라온 습기들이 초원의 찬 바람에 안개를 이루면서 노을빛을 머 금 고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에게는 그 모습이 숲이 핏빛 숨을 쉬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이 무슨 불길한 예감이란 말인가. 흐흑 우리는 숲이 내려다보이는 구릉지 위에 말과 마차를 세우고 야영 준비에 들어갔다. 상식적으로 높은 지역에 물이 없어서 이런 짓은 바보짓이지만 수아가 있으니까 우린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는 아침부터 부산하게 준비를 해야 했다. 일단은 밀림 안에 들어가면 언제 어디에서 어떤 공격을 받을지 모르는 상황이라 조심 을 해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의 말을 각자가 맡아서 관리하기로 했다. 이 무슨 황당한 이야기 냐 하겠지만 밀림에서 말이 다치게 되면 이 마차를 어떻게 하란 말인가? 게브에게 끌 게 하는 방법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극악의 상황이다. 그러니 당연히 공격에서 취약한 말에 대한 방어를 생각해야 했던 것이다. 뭐, 자이건이나 누말이야 알아서 하겠지만... 우리는 누말의 말은 신경을 안 쓰려고 하다가, 누말이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기에 누말의 말도 경호 대상에 첨가 시켰다. 그래도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일행들이었지만, 말도 신경을 쓰자는 취지였다. 처음에는 누말이 마차를 버리고 가야 한다고 헛소리를 해서... 수아와 풍아가 결사 반대를 했고, 또 만약 마차가 없으면 식사 준비에 어려움이 있다는 수아의 말이 결정 타가 되어서(역시 누말인지 황제인지도 먹는 것에는 약한 모양이다.) 마차를 끌고 가 기로 했고, 덕분에 길도 예전 상인이 다니던 관도를 따라 이동하기로 했다. 지금 이 숲을 가로 질러 가려면 족히 팔, 구일은 걸릴 것이라고 한다.(그렇다고 여기 에서 황궁까지의 거리와 비슷하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황성까지는 말을 타고 달려서 열흘이 걸리는 거리지만, 이 숲은 도보로 열흘이 걸리는 거리다. 거기다가 빽빽한 밀 림을 헤치고 가야 한다는 것과 숱한 마물들과 싸워야 한다는 것은 계산한 시간이다.) 우리의 마차는 관도를 따라 천천히 밀림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자, 이제부터 신경들 바짝 써야 한다. 이 숲에는 상당히 위험한 동 식물들이 많 아. 거기다가 곤충들도 상당히 많고 말이야. 그리고 특히 쓸데없이 아무거나 따먹거 나 주워 먹지 말아라. 그러다간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알았어 누말?” 나는 마지막 말을 누말에게 집중시켜다.(먹는 것에 이상하게 집착하는 녀석. 특히 우 리 식사에 참가한 다음부터...) “네? 네...” 기가 죽은 듯이 그래도 안 속는다. 우리는 마차 앞으로 화아와 지토를 마차 뒤쪽으로 광아와 풍아를 세웠다. 그리고 그 사이에 누말이 어기적 따라 다니는 것이다.(정말 위험할 때, 도움이 되는 동료들을 좀 주란 말이야.) 그리고 마차 위에 자이건 나, 수아가 타고 가는 중이다. 밀림은 겉으로 보는 것 보다는 여유가 있었고, 특히 관도는 제법 넓고 또 오랜 동안 다져진 탓인지 작은 나무나 풀들이 있을 뿐, 마차 바퀴를 멈출 정도의 것들은 없었다 . 하지만 위쪽으로는 나무들이 우거져서 하늘이 보이지 않았고, 온통 초록색으로 덮혀 있었다. 여기서 생기는 그림자는 검은 색이 아니다. 검기야 검은 색이지만 온통 검은 것은 아니다.(초록색 조명 아래에서 그림자를 보면 안다.) 그림자의 색은 언제나 검은 색일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은 버리시길... 숲으로 점점 깊이 들어가고 있었지만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직 마물이나 위험스런 곤충을 본 적도 없고, 육식 식물을 만나지도 않았다. 가끔 숲 속에서 이름 모를 새나 짐승의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지거나 날짐승의 홰 를 치는 소리가 들리기는 했지만 아직 모습을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점점 머리 위를 덮은 숲의 색이 짙어 지면서 조금씩 주위가 어두워지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느릿느릿 전진하던 우리들은 점심을 먹고, 다시 걸음을 재촉해(그래봐야 느릿느릿.) 밀림을 헤치고 나가던 중, 처음으로 변화를 느꼈다. “여기는...” “여기는 예전에 마을이 있었던 곳입니다. 그리 작지 않은 마을이 있었습니다만, 숲 이 넓어지면서 그 범위에 포함이 되어 사람들이 모두 이주를 해 버린 곳이라고 합니 다.” 누말이 대답했다. ‘라고 합니다.’라는 말은 누말도 정보를 어디선가 얻는 다는 말인가? 혹시 나보다 더 쉽게 황궁에서 정보를 전달받고 있는 것은? “그참, 말이 많네. 그냥 그러려니 해라. 궁금해 하지 말고, 그리고 이 마을은 일단 조사를 좀 해 봐야 한다. 작년 여름 우기가 끝나면서 숲 속에 있게 된 마을인데, 사 실 은 이 마을 사람들은 이 숲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정왕야는 별 일 아니라고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마을 사람들이 전부 사라진 것에 대해서 뭔가 조사를 좀 해 봐야 할 것이다.” 황제라는 녀석이다. 이 녀석은 거의 표시가 나지 않게 누말의 몸에 드나드는 것 같다. 그런데 내 생각이 지만 식사 시간에 나타나는 녀석은 이 황제 녀석인 것 같다. 심증뿐이지만... 우리는 황제의 말에 따라 마을을 살펴보기로 했다. 일단은 환수들이 총 동원되어 사람의 흔적을 찾는 일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흔적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이 뼈 조각만 남기고 있었다. 다시 이야기 하면 완전하게 남은 뼈가 거 의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은 바스라진 듯한 뼈만 남았고 일부분만 온전한 유골이 남 아 있었다. 특이한 것은 그 온전한 유골 중에는 유독 걷지도 못할 어린 아이들이 많다는 것이었 다. “이래서는 도대체 원인을 알 수가 없잖아. 다들 뼈도 제대로 남지 않았으니 말이 야.” 내가 투덜거리자 누말이 끼어들었다. “그게 아니지. 사람이 죽어서 땅에 묻히고 식물들의 영양분이 된다고 해도 지금 여 기 보이는 이상한 식으로 되지는 않아. 잘 봐라. 모든 뼈들이 한 쪽으로 구멍이 나서 그 속에서 무언가 솟아 난 모습을 하고 있잖아. 넌 뭘 보는 거냐?” 나는 자세히 유골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건 마치... 뼈 속에서 씨앗이 발아를 하는 것 같은 모습이로군. 그러니까 사람 의 몸 전체에 씨앗을 심고 그 속에서 솟아나는...” “그렇지. 바로 그런 모습이다. 나와 의견이 같군. 그렇게 보면 아는 자가 왜 하지 않는 것인지...” 나는 이래서 이 놈이 싫다. 언제나 나를 앞서서 나에게 패배감을 안겨주는 것 같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며 누말을 바라보자 그 녀석(황제다.)이 비죽이 웃음을 지었다. 갑자기 주먹이 부르르 떨린다. “루탄님? 왜 갑자기 ...” 누말로 돌아온 것인가? 우리는 일단 마을에서 그나마 형체가 잘 유지되어 있는 석조 건물에 자리를 잡기로 했다. 일단 조사를 하고, 무언가 결과를 내자면 오늘 밤은 이 마을에서 보내는 방법 밖에 는 없었던 것이다. “이상하게 마을 사람들의 시체는 모두 집 안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체들이 있 던 자리에서 식물들의 성장이 활발한 것을 살필 수도 있었고 말입니다. 제 생각에는 정말 사람들 몸에서 씨앗이 발아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어느 정도 주위를 살피고 돌아온 일행들이 건물(아무래도 관청으로 쓰였던 듯)의 중 앙에 있는 작은 홀의 탁자에 모여서 의견을 나누는 중에 광아가 내 놓은 말이었다. “그래요. 오빠. 확실하게 사람의 시체들이 집 안에 그것도 침대 위에 대부분이 있었 어요. 아니면 침대 밑이지만 그건 침대에서 떨어져서 올라가지 못한 것인 것 같고요. 그렇다면 이 마을 사람들 단체로 병이 들었던 것일까요? 전염병 같은?” 풍아가 살펴본 바를 이야기 했다. “나도 상황은 같아. 별로 다르지 않아.” 화아의 이야기였다. “음, 이 곳의 식물들은 크기는 하지만 겨우 1년도 되지 않은 것들이야. 그 때문에 위로는 거창하게 크게 자랐지만 땅 속의 뿌리는 얕게 박혀 있어. 그리고 별나게 땅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니야. 그냥 일반 적인 밀림의 모습일 뿐이지.” 이건 지토가 확인한 것이었다. “그럼 뭐지? 정리하면 사람들은 무언가 병이 들어 앓다가 죽었다. 그런데 죽은 사람 들의 몸에서 식물들이 자라 나왔다, 그것도 뼈 속에서... 그런데 내가 확인한 바로는 그렇게 자라난 식물들의 종류가 일정하지 않고 잡다하게 여러 가지라는 것이야.” 나는 말을 끊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여기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은 어느 특별한 식물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한꺼번에 마을 사람들이 병에 걸린 것으로 보아서는 굉장히 빠른 전염성을 지녔거나 오랜 잠복기를 가졌거나 하는 것인데.. 우기가 짧고 사람들 이 마을에서 움직이지 못했으니 잠복기는 아닌 것 같아. 결국 아주 빠른 속도로 병이 들었고 결국에는 그 병으로 모두 죽었다는 것인가? 그럼 유골이 보존된 사람들은 그 병이 걸리지 않고 죽은 사람이라는 결론이 나오는군.” 나는 여기까지 정리를 하고 그 전염병이 어떤 것이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저기 오빠? 그 병이 무엇인지는 나중 문제고 그 병이 어떻게 마을에 그렇게 전체적 으로 순식간에 퍼진 것일까요?” 수아가 내 생각을 끊고 들어왔다. 그래 어차피 병명을 모른다면(알려지지도 않은 병인데 어찌 알겠는가?) 그럼 우선 그 병이 어떻게 퍼졌을까를 고민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암, 그게 현명한 방법이겠지. 그런데 말이야. 이 마을 우기 동안에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되었다고 봐야 하는데 말이야.” 갑작스런 이 말소리는 그 황제라는 놈의 등장일 것이다. “우기라. 그렇겠군. 아마도 그 병을 옮기는 녀석은 그 우기에 내리는 비가 되겠군 그래. 비를 맞은 사람들이 병에 걸린 것이지. 그런데 유골이 무사한 사람들은 도저히 문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노약자나 병자 혹은 어린 아이인 인 까닭에 비를 맞지 않아 서 병에 걸리지 않은 것이라고 보면 되겠군. 그럼 우기에 비를 맞으면 우리도 이 마 을 사람들처럼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내가 내린 결론에 잘못은 없는지를 다시 따져 보았다. “음, 그렇군. 우기에 비를 통해서 식물들의 씨앗이 비정상적으로 퍼져 나온 것이라 는 설명이 되는군. 그리고 그 씨앗들은 무슨 이유인지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라는 말 이 군. 그렇지 않다면 사람을 그렇게 만들지도 못했을 것이고, 또 이렇게 1년 만에 빽빽 한 밀림을 이룰 정도로 자라지도 못했을 것이니까 말이야.” 저, 저 잘난 척 하는 입을 누가 좀 막아줘. 나도 그 정도는 생각을 해 낼 수 있다는 말이다. 황궁이라는 곳에 갇혀 살면서 배운 것이라고는 정보를 보고 분석하는 능력뿐인 녀석 이 뭐가 잘났다고... 아~~! 내가 왜 이럴까. 내가 왜 저 녀석에게 신경을 쓰는 것일까? 내가 나이도 많지. 힘도 세지. 생기기도 더 잘 생겼지. 머리도 내가 더 좋은데.. 왜 내가 밀리는 느낌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이냐고. “그거야 밀리니까 밀리는 것이라고 느끼는 것이지.” 누말이 엉뚱한 소리를 하자 모두 무슨 소리인가 하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지만 내용 을 아는 것은 나뿐이었다. 내 저놈을 그냥!!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요?” 누말이다. 그 사이에 황제라는 놈은 사라지고 누말만 남았다. 갑자기 뒷 골이 띵~~ 한 것이 이러다가 내가 내 명에 못 죽지.(근데 내 명이 얼마나 될까? 무척 궁금하다. 보통 인간 100년 살면 오래 살았다고 하면서 대충 인간의 수명 을 이야기 하는데 나는 대충도 알 수가 없으니...) “자, 그럼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저 밀림 안으로 들어가서 이런 현상의 원인을 밝히 는 것이겠지? 확인 된 바로는 처음 이 숲이 확장될 때에 어느 한 쪽으로만 편향적으 로 확장된 것이 아니고 전체적으로 확장이 되었다고 하니 아마도 그 해답은 이 숲의 중앙에 있을 것 같다.” “자, 그럼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저 밀림 안으로 들어가서 이런 현상의 원인을 밝히 는 것이겠지? 확인 된 바로는 처음 이 숲이 확장될 때에 어느 한 쪽으로만 편향적으 로 확장된 것이 아니고 전체적으로 확장이 되었다고 하니 아마도 그 해답은 이 숲의 중앙에 있을 것 같다.” 나는 이렇게 서두를 시작했다. “그리고 아마도 이번 우기에 누웬의 백성들이야 황제가 책임을 지고 일정한 거리 안 에서 백성들을 모두 피신을 시키든 뭘 하든 결정을 내릴 테니 우리만 걱정을 하면 된 다. 당장 오늘 밤에라도 비가 올지 모르는 상황이니 대책을 세워야 할 텐데 좋은 방 법 이 있으면 이야기를 해 봐라.” 나는 자연스럽게 수아에게 시선을 주었다. 뭐니 뭐니 해도 물의 정령이다. 그것도 최상급의 정령인 것이다. “오빤, 그렇게 똑바로 쳐다보면... 호호. 비는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일행 주위로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은 범위가 좀 넓으니 오빠의 기운을 조금만 쓰면 될 거에요. 다 만 그 물방울이 평범하지 않을 것이라는 게.. 예측을 못하니까요. 아무튼 물이라면 막 을 수 있어요. 그리고 적당히 막을 치면 어느 정도 방어도 될 거에요.” 역시 수아는 물이라면 자신이 있다는 표정이었다. 분명히 예측 불가능한 요소가 있음에도 자신에 넘치는 모습이었다. 수아의 저런 표정은 요리를 시킬 때 이외에는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그런데 언제 봤지? 본 적이 있나? 저런 자신 있는 표정?) 그러는 사이에 어느덧 저녁이 되었고, 우리는 말과 마차를 건물 안으로 끌어놓고(아 예 한 쪽 벽을 텄다.) 건물 안에서 숙영을 하기로 했다. 참고로 이 때가 제일 기분이 그나마 좋은 때이다. 왜냐하면 누말을 차가운 땅에서 자게 할 수 있으니까. 천막을 쳤다고 해도 우리 마차 안에 비하면... 하하하(사실 괴로운 것은 누말이지 황 제가 아니란 것은 알지만...) 나는 여기 저기 건물에 틈이 생기서 빗물이 셀 것을 염려해서 건물 전체에 다시 마 법 결계를 쳤다. (물론 물리 방어와 마법 방어를 겸하는 것으로..) 하지만 다음날 우리가 일어났을 때에도 하늘은 여전히 맑았고, 우리들은 다시 숲의 중앙을 향했다. “도대체 원인이 무었일까? 그것참....” 뾰로로로옹 뾰롱 로로롱 란이도 그것참, 그것참,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냥 듣기에는 너무 듣기 좋은 소리였다. 그런데 우리가 길을 나서서 점심이 지날 무렵에 우리 일행은 장벽에 부딪혔다. 밀림이 그야 말로 빽빽하게 펼쳐져서 지금처럼 그렇게 쉽게 갈 수 없는 상황이 된 것 이다. “이것으로 어느 정도 일정한 시기에 일정한 범위 안에 무작위로 식물의 씨앗들이 떨 어진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겠군. 여기는 아마 2년 전에 밀림이 되었던 곳의 시작인 것 같군. 그러면 더 안쪽에는 이보다도 더 심각한 밀림이 펼쳐진다는 말이 되는 것인 가? 정말 한심해진다.” 내가 그렇게 말끝을 말며 중얼거리자 화아가 나섰다. “형, 그냥 확 밀어 버리지? 불로 싹 태워 버리면 되잖아. 여기서부터 중앙 쪽으로 일직선으로 다 태우고 길을 내면.... 아눈 시키면 잘 할 것 같은데.. 그냥 걸어가는 것으로 길은 날 거 아냐?” 나는 화아의 말에 정말 그렇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기가 밀림이라 나무와 풀들이 많기는 하지만 아눈의 화기라면 일정 범위를 조절해 서 그 안쪽으로만 나무나 풀들을 태우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럼 그 도마뱀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 가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하하, 그거 좋은 생각이다. 대신에 화기 조절을 잘 해서 일정 범위 밖으로는 불이 옮겨 붙지 않도록 해라. 알았지?” 나는 화아의 말에 가슴이 시원해 져서 말했다. “호호 오빠 걱정하지 마세요. 조금 문제가 생겨도 제가 금방 꺼버릴 테니까요. 호 호.” 수아가 한 팔 거들고 나서자 모든 것은 순조롭게 진행이 되기 시작했다. 아눈이 그 큰 덩치로 앞장서서 풀과 나무를 태우며 지나가면 지토가 그 자리를 대충 흙으로 갈아엎어서 열기를 죽이고 길을 만들었고, 아주 가끔 불똥이 튀어도 수아가 알 아서 해결을 했다. 그리고 그렇게 길을 가는 동안에 갑작스럽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정말 갑작스러운 비였다. 아눈 덕분에 하늘을 볼 수 있게 되어서 줄곧 맑은 날씨라고 좋아하고 있었는데 하늘 이 어두워지기 시작해서 단지 몇 십 초가 되지 않아서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 이 다. 비가 내리기 얼마 전에 “오빠, 하늘에... 비가 올 것 같아요.” 무슨 말을 찾는 듯하다가 알맞은 단어를 찾지 못한 듯이 비가 올 것 같다고 말하는 수아를 보며 반신반의(솔직히 날씨가 너무 좋았다.) 했지만 정말 순식간에 쏟아지는 빗줄기는 머리 위에서 양동이도 쏟아 붓는 것 보다 더 심했다. 그리고 그 빗줄기 속에서 꿋꿋하게 길을 내던(너무 수증기가 많이 나서 풍아가 시야 를 확보했다.) 아눈이 끝내 화아의 칼 속으로 들어와 버렸을 정도였다. (수증기에 빼 앗기는 열로 아눈이 많이 지쳤던 것이다.) 참, 칼 하니까 생각이 나는데... 요즈음 카다는 풍아의 칼(황국의 연무장에서 황제 의 검사에게서 수거한) 속에 들어가 있다. 가끔 필요하면 불러서 정찰을 시키곤 했는 데... 그러고 보면 이번 숲에 들어와서는 카다를 활용할 생각을 전혀 못했다. 이런, 정말 황제를 만나고 나서부터 머리가 나빠진 것은 아닌지...(왜 요즘 모든 것 을 황제의 탓으로 돌리는 것일까? 이런 내가 싫다.) 그런데 아눈이 더 이상 일을 하지 못하게 되자 이제는 우리 일행의 진행이 문제가 되 었다. “이젠 어떻게 하지요? 형님?” 광아가 빗속에서(물론 수아가 아주 확실하게 방어를 하고 있는 중이다. 반구형의 투 명한 벽으로 둘러진 것 같다.) 꼼짝을 하지 못하게 되자 물어보았다. “그렇다고 여기서 이러고 있을 수는 없지. 이 비는 이렇게 시작하면 이대로 15일 정 도를 내리니까 말이야.” 내가 그렇게 말하자 수아가 한 마디 했다. “오빠, 이 비는 아직까지는 전혀 이상한 것이 없어요. 그냥 무척 많은 비일 뿐, 다 른 것은 없어요.” 라고. 그럼 비 자체가 위험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얼마쯤 시간이 지나면 빗속에 무엇인 가 섞여서 내리게 되는 것일 터였다. 하지만 일단은 언제 무엇이 섞여 내릴지 모르는 상황이라 수아의 벽을 허물 수도 없 었고 전진을 멈출 수도 없었다. “수아야. 저 앞쪽에 공간을 좀 만들어 줄래? 마법을 써도 상관없도록 말이야.” 그래서 수아는 반구형의 모습을 이글루의 모습(에스키모네 집)으로 바꾸어서 앞쪽을 비웠다. 나는 그 입구를 통해서 빙계 마법을 실현시켰다. 주위의 마나를 일정하게 배열한 후 그 마나를 급속하게 운동시키면서 발열이 아닌 흡 열을 하게 하는 방법이 빙계 마법을 만드는 기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마나량과 범위와 운용력에 따라서 효과가 달리 나타나는 것은 당연했 다. 나는 마나를 우리가 가야 할 길로 일직선으로 배열하고, 순간동결마법을 실현했다. 그리고 마법의 결과는 순식간에 극저온으로 얼어붙은 나무와 풀들이 쏟아지는 빗방울 에 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물론 우리가 지나갈 정도의 넓이와 높이에만 시행했기 에 윗부분에 남아있던 부분들이 쏟아져 내려서 반의 성공과 반의 실패를 만들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같은 방법으로 길을 내어야 했다. 그리고도 남는 것들은 지토가 적절히 갈아엎었다. 문제는 그렇게 되어서 물과 흙이 혼합된 진창이 되었다는 것이지만 그건 의외로 란이 가 파르륵 날아서 이글루의 입구 부분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해결이 되었다. 무슨 조화인지 몰라도 란이가 그 자리에서 우리가 전진하는 부분의 땅을 깔끔하게 말 렸던 것이다. 그리고도 수증기나 그런 것이 시야를 어지럽히지도 않았다. 역시 불과 바람의 혼합형이라 그런 모양이었다.(흐흠 제법 도움도 된다. 그런데 누 말 저건 도움이 안돼....) 그래서 우리의 발걸음은 다시 빨라졌다. 이번에도 광아의 역할이 별로 없었다. 이러다가 광아가 우울증에 걸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조금 기가 죽어 있었다. 우리 일행은 같은 방법을 반복하면서 전진해 나갔다.(사실 이 정도의 일은 그다지 힘 든 일은 아니었다. 써클에 비해서 마나의 절대량이 많은 관계로... 솔직히 이런 것은 신체를 재생시키는 것이 비한다면 거의 어린아이 장난이다.) 그렇다고 속도가 빨라진 것은 아니었다. 빠르게 달릴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속도가 늘어나면, 이 밀림 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어요. 이 숲에 마물들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한 번도 본 적이 없기는 하지만요. 만약에 있다면 어떻게 이 숲에 살 수 있는 것일까요? 이 숲 에서 일 년에 한 번 떼죽음을 당하고 남는 것은 없어야 하는 것 아니었나요?” 느릿하게 나아가는 마차 위에서 수아가 갑자기 내 어깨를 짚으며 물었다.(놀래라.) 그런데 생각해 보니 정말 그랬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뭐 아직은 진짜 마물들이 살고 있는지. 독충들이 살고 있는지. 식인 식물이 살고 있 는지는 확인이 되지 않았지만 만약에 살고 있다면 그 녀석들은 그 기괴한 전염병에서 벗어날 방법이 있다는 말일까? 식물이나 동물은 1년생이라 그렇다고 해도, 마물들은 절대 그럴 수가 없다. 그러니 만약에 마물들이 살고 있다면, 무언가 단서를 잡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 이 들었다. “하하하, 우리 수아가 그런 생각을 해 내다니 정말 기특하구나. 그렇지, 마물들이 정말 있다면 뭔가 단서가 되겠지. 그럼.” 나는 오랜만에 수아의 머리를 부비부비 해 주었다. 하지만 우리들이 밀림 속으로 들어갈수록 동물들의 흔적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역시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 알게 모르게 우리 일행의 속도를 늘려 주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우기의 첫 날을 두 번째로 생성된 숲에서 보내고 다음날 부지런히 말을 몰아 서 저녁이 되어 야영을 해야겠다고 느낄 때쯤엔 3년 전에 생성된 숲을 만날 수 있었 다. 그 숲에서는 앞서의 밀림보다도 더욱 밀도 높은 나무와 풀들이 얽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숲을 지나는 데에 또 이틀의 시간이 걸렸다. 우리는 그 저녁에 초목의 벽을 마주하고 있었다. “여기가 원래 암흑제국과 국경선을 이루던 숲이 시작되는 지역인 모양이군. 정말 엄 청난 나무와 풀들이야. 어디 이래서야 뭐가 더 들어설 자리는 보이지도 않는 걸? 대 단 한 숲이야. 이렇게 자랄 수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군. 틈 하나 없을 정도로 빽빽하 다니 말이야.” 언제 나온 것일까? 저 황제라는 녀석은. 이리 저리 초목의 벽을 살피고 있는 녀석은 분명히 누말이 아닐 터였다. 나는 뭐라고 해 주려다가 입을 다물고 무시를 하는 방향으로 나의 태도와 생각을 바 꾸었다.(괜히 신경 쓰다가 나만 이상한 놈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누말(황제놈)은 이런 나를 잠시 쳐다보더니 “흠, 이젠 조금 정신을 차린 건가?” 라는 혼잣말을 지껄여서 신경을 건들어 놓고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남은 우리들은 벽 앞에서 내일을 위해 준비를 했다. 준비라야 별 것은 없었다. 수아의 보호벽 아래로 마법 결계를 걸어서 비를 막고, 지면을 높여서 일행들이 잠을 자는 동안에 침수를 당하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수아도 잠을 자야 하기 때문에 잠을 자는 동안에는 수아가 힘을 쓰고 있을 수가 없어 서 정지 해 있는 동안에는 마법 결계를 쓰는 것이다. 이동 중에도 가능은 하지만.. 아무래도 그 때는 수아가 하는 편이 힘도 덜 들고 효율 적이라 수아에게 맡긴 것이고. 맛있는 식사와 편안한 잠자리(물론 여기에 자이건과 누말이 제외되기는 한다. 이제 는 자이건을 위해서도 편안한 잠자리를 만들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미운 정이 드는 모양이다.)에서 달콤한 잠에 빠져 있는 것은 분명 행복이다. 하지만 그 행복이 침해당하는 것은 정말 악몽이다. 정말 오랜만에 달콤한 잠이었는데(그게 사실은 중간에 깨움을 당했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겠지만..) 누말(황제놈이다.)의 다급한 목소리가 우리들을 깨웠다. 쾅!쾅!쾅! “이봐, 일어나 일어나란 말이야.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 빨리 일어나라 빨리.” 아주 작정을 하고 깨우는 누말(황제)의 횡포를 누가 말리겠는가? 우리들은 졸린 눈을 비비고 마차 밖으로 나갔다. 정말 잠이 달콤한 시간, 아주 조금이라도 더 자고 싶은 시간, 그건 바로 잠에서 깨어 나기 직전의 시간이다. 그리고 내 달콤한 잠이 말해주듯 우리가 밖으로 나왔을 때, 주위는 어슴어슴 밝아 오 고 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예전에 서울에 살 때도, 새벽의 색을 초록으로 지정해 두었었다. 왠지 동이 트기 전의 어스름에 젖은 풍경은 초록을 닮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마차 밖으로 나온 그 시간이 바로 초록의 시간이었다. 더구나 밀림 속에서 초록의 시간은 황홀하기까지 한 모습이었다. 엄청난 폭우 속에서 어둠이 밀려가면서 드러나는 초록의 풍경들.... 나는 잠시 그 모 습에 빠져서 누말(황제)에 대한 노여움(짜증, 분노, 살의)까지 잊어 버릴 정도였다. “이봐, 뭐하는 거야? 지금 상황이 보이지 않아? 지금 떨어지는 빗방울이 연녹색이 란 말이다. 도대체 뭐에 정신을 놓고 있는 거냐?” 뭐? 빗방울이 연녹색? 그래서 새벽빛이 더욱 황홀하게 보였던 것인가? 하지만 빗방울 색이 연록색이라는 말에 잠시 전에 가졌던 그 황홀감은 모래 속으로 파고드는 도마뱀처럼 꼬리를 감추고 말았다. 정말 아쉽다. 비록 착각이라도 내가 본 새벽 빛 중에서는 가장 환상적인 모습이었는 데... 예전, 태백산록 바위틈에서 혼자 침낭으로 추위를 이기고 난 새벽에 바라보던, 그 자 욱한 안개속의 새벽빛과 견주어도 손색없을... 아니 그것을 뛰어넘을... 그런데 허무하게 사라졌다. 나는 누말을 사나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아마 사나웠을 것이다.) “뭐야? 왜 나를 쳐다보는 거냐? 빨리 빗방울이 왜 저런 것인지 조사나 하지 않 고...” 어쩌겠는가? 힘이 없는 것을... 나와 지토 그리고 동생들은 곧 빗방울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수아가 투명한 유리컵에 빗방울을 담았고(손을 대지 않고 해야 하는 작업이다.) 우리 들은 새벽 여명을 광아의 광구로 대낮같이 밝히고 컵 안에 들어있는 물방울을 살폈다 . 나는 눈에 공력을 모아 세심하게 물방울을 살펴보았다. “음. 다들 결론이 비슷하겠지? 어떠냐? 광아야.” 나는 우선 광아의 생각을 물었다.(기를 좀 살려 줘야 한다.) “모두들 보셨겠지만, 물 속에 꿈틀거리는 투명한 생물이 있습니다. 크기는 대략 쌀 알 크기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놈들의 몸속에 식물들의 씨앗으로 보이는 것들이 들 어 있습니다. 비의 색이 녹색으로 보이는 것은 그 작은 씨앗들이 대부분 녹색을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원래 녹색의 씨앗은 아닌 것 같은데 이 생물의 몸속에 있는 것 은 하나같이 녹색을 띠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때, 아마도 이 생물이 비속에서 동물의 몸에 닿으면 몸 안으로 침투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하하 역시 똑똑한 것은 알아 줘야 한다니까... “그래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어때? 나는 광아의 생각과 같은데... 역시 똑똑하다니 까 광아.” 내 칭찬에 광아는 조금 고무된 표정을 지었다.(‘고무된’이란 주위의 격려와 칭찬 등으로 사기가 오른 모습을 말한다. 쩝.) “그렇군. 그럼 이제, 이 빗방울 속에 어째서 이런 것들이 들어 있는지만 알아내면 되는 것인가? 그리고 그 원인을 제거하면 되겠군. 하지만 시험을 해 보지 않고 결정 을 내릴 수는 없으니...” 갑작스럽게 누말(중요한 때는 언제나 황제 놈)이 그렇게 말하고는 유리컵을 들고 가 서는 자기 말의 등에 부어버렸다.(저 저런 잔인한 놈.) “음, 굉장하군.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군. 그런데 말은 그것을 느끼지도 못하고 있 고... 대단하군 대단해. 어떻게 이럴 수가...” 가만히 자기 말의 반응을 살피던 누말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우리들도(수아는 무슨 혐오 동식물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누말을 보고 있었 다.) 이미 벌어진 일을 어찌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다 함께 우르르 몰려가서(역시 수아는 일어나지 않았다.) 말의 상태를 살폈다. 물이 닿은 말의 거죽은 거의 다른 곳과 차이가 없어 보였다. 다만 내 눈에는 아주 작 은 바늘 구멍 같은 것들이 수도 없이 나 있는 것이 보이기는 했다. “대단한 녀석이야. 이 녀석은 굉장한 마취력도 지니고 있는 모양이군. 이걸 연구해 보면 좋을 것 같아. 조금 들고 가야겠군. 그러나 저러나 당장 어떤 변화가 생기는 것 은 아니군...” 그렇게 말을 살피고 있는 중에 이상한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투두둑. 투두두둑. 투두두두두두둑 투두두두두~~~투루루루루루루.... 조그마하게 들리던 소음이 온 세상에 깔리기 시작했다. “음? 우박이 오는군?” 누말이 그렇게 말하다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우박이 아니라 덩어리가 큰 씨앗들이네? 저 씨앗은 거의 어린아이 주먹 크기 정도 될 것 같은데?” 내가 한 말이다. 정말 주위에 떨어지는 것은 우박이 아니라 빗줄기와 함께 쏟아지는 씨앗들이었다. “잠깐만 저 씨앗들도 아까 그런 투명한 생물이 감싸고 있는 것인가? 색깔들은 전부 녹색인데?” 화아가 그렇게 물어보자 수아가 다시 빗방울들을 조정해서 몇 개의 씨앗을 컵에 담았 다. “이거 과식을 한 것 같군. 그래도 배 속에 이렇게 넣어 가지고 있으니까 먹은 것은 먹은 것이군. 크흐흐흐.” 오랜만에 지토가 한 마디를 했다. 정말 그랬다. 아까의 작은 씨앗과는 달리 투명한 생명체는 거의 씨앗들의 겉껍질인 것처럼 얇은 두께로 펼쳐져서 씨앗을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본 누말(실제로는 황제 놈이다.)이 그 큰 씨앗들이 들어있는 유리컵 을 들고 가서 젓가락으로 씨앗 하나를 집어서(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말의 등에 올 려놓았다. 역시 궁금증이 생긴 우리들은 처음부터 가까이에서 그 광경을 관찰(?)하고 있었다. (어째 수아는 이제 우리 모두를 아까 누말을 보던 눈빛으로 보는 듯한....) 말의 등에 올려진 큰 열매는 아주 빠르게 말의 거죽을 파고 들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 일을 하는 것은 투명한 생명체의 짓이었다. 순식간에 아주 날카로운 침의 모양으로 말이 가죽에 구멍을 내고는 그 안으로 몸을 밀어 넣는다. 그렇게 얇은 상태에서도 순식간에 자신의 몸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이번에는 열매를 포함한 몸체를 끌어 들이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바늘구멍 으로 들어간 몸체가 밖에 있는 거대한 씨앗을 몸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물론 그 때문에 말의 가죽이 찢어지고 살이 터지고 있었지만 말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몸속으로 씨앗이 들어가자 말의 상처는 아주 빠르게 아물어 갔다. 물론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굉장히 빨리 이루어진 일이란 것 은 사실이었다. 그렇게 종결된 말의 상처는 아까보다는 좀 커서 육안으로 식별이 쉽게 되었지만 오래 전의 흉터처럼 보였다. 대단하다. 솔직히 나도 그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실제로 그 생물의 크기는 쌀알 정도의 크기이다. 그런데 그런 것이 호두 크기의 씨앗을 감싸면 도대체 얼마나 얇게 되겠는가? 그런데 그 상태에서 침 모양을 만들고 몸 속으로 침투하고 그 큰 씨앗을 끌어들일 수 있다니... 거기에 더해서 그 엄청난 마취와 치유력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 것인가 말 이다. “저, 정말 대단한 녀석이다. 이런 것이 이 빗속에 얼마나 많이 있다는 것이냐? 이 녀석 하나의 마취력과 치유력만으로 수많은 백성을 고통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인데... 그런 녀석이 이 빗속에 엄청난 수로 존재한다니... 이건 정말 연구를 해 봐야 할 것 이 야. 루탄, 나중에도 이야기를 하겠지만 절대로 이 원인이 되는 것을 없애지 말고 보 존 한 채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가도록 하자. 정말 이것은 보물이야 보물.” 정말 이 녀석의 머리는 어떻게 생겼는지 열어보고 싶다.(아니다 지금 열면 누말의 머 리를 구경하는 것이겠군.) “그럼 빨리 아침을 먹고 이동을 하자. 내 생각이지만 이 사건의 원인은 멀지 않을 거야. 바로 저 담만 넘으면 있을 거라고 생각이 된다. 빨리 밥 먹고 준비를 하자.” 나는 서둘러 아침을 준비하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무슨 생각이냐면, 당연히 이 희귀한 생물을 어떻게 이용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다. 잘만 하면, 황제 놈의 말대로 엄청난 결과를 가지고 올 수 있는 것이 이 놈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이 놈이 만약 무기로 사용이 된다면 아마 엄청난 생화학 무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이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자 조금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심각해 질 우려가 있는 물건이었다. 생화학 무기라... 끔찍하겠군. 대단위 성이나 마을에 워터컨트롤로 비를 부르고 거기 에 이런 걸 넣으면? 그냥 전멸이겠군. 거의 전부가 전멸이야. 전멸.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클클 무슨 생각을 하냐? 저것이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냐? 그렇겠지. 너 정도의 사고가 있으면 저것이 어떻게 사용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내고 있겠지. 그 렇지만 걱정하지 말아라.” 식사 준비를 하며 생각 중에 고개를 흔드는 것을 지토가 본 모양이다. 슬쩍 다가와 서 그렇게 한 마디를 했다. 가끔은 지토가 정말 나이를 먹어서 늙은 생강이 맵다는 속담에 어울리는 짓을 하는 것은 아닐까 싶은 때가 있다. 지금처럼. “클클 저것들은 땅이나 나무에 닿으면 금방 죽어버린다. 아까 젓가락으로 집었을 때 도 조금만 더 있었으면 죽었을 텐데... 동물체에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살았 던 것 같다. 지금 내리는 빗속에 들어있는 녀석들은 땅 위에 흐르는 물 속에는 전혀 없다. 단지 씨앗만 남을 뿐이지. 그리고 같은 식물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인 지 살아있는 식물에 닿은 것들은 그 순간 증발되듯 죽어 버린다. 물론 흙과 닿은 것 들 도 씨앗들이 발아를 하기 편하게 하기 위해서인지 죽어 버리더군. 그러니까 지금 저 누말이 가지고 있는 저 컵만 잘 회수하면 되지, 뭐 그전에 잘 감시를 해서 빗물을 받 는 것을 감시해야겠지만 일단 그런 일을 누말이 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고 보면 우기 가 끝난 다음에 저 컵만 처리를 하면 되지. 지금 컵을 어찌하면 황제가 어떤 생각을 할지 모르니 말이야. 그리고 이건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고 생각도 하지 말아야겠지. 황제가 생각을 읽는 것에 능하니까 말이야.” 지토의 정보는 정말 특별한 것이었다. 그럼 그 생물체는 공중에 있는 빗방울 상태가 아니면 취할 수 없다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건 지금으로선 자이건이나 누말은 어려운 일이다. 물론 여기에서 누말이 황 제가 되었을 때, 어떤 능력을 발휘할지에 대한 것은 계산에 넣지 못했다. 속을 파악할 수 없는 존재이다. 단 한 가지 이 나라의 모든 정보를 촐괄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내가 교인들을 통해서 알아본 바에 의하면 누웬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시비 끝의 주먹 다짐도 정보로 수집되는 정도였다. 정말 천 개의 눈으로 그것이 가능할까 싶은데...하고 있었다. 방법은 모르지만.. 아무튼 그러니 지금은 누말에게 저 컵을 맡겨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우리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우기의 5일째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우기가 시작되고 5일이 지나자 문제의 비가 내린 것이다. “이것 참, 대단한 숲이군. 정말 칼을 꽂아도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라니.. 이건 정 말 그냥 하나의 거대한 나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군.” 똑똑한 황제 녀석이었다. 이제는 저 녀석이 우리 일행을 이끌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녀석의 말은 맞는 말이었다. 이건 초목의 벽이 아니라 숲 자체가 하나의 통나무라고 보는 것이 좋을 정도로 얽혀 있는 숲이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기다릴 수는 없잖아. 빨리 들어가서 해결을 하자고.” 나는 그렇게 소리치고는 예의 동결마법을 실행하려 했다. 하지만 너무나 밀도 높은 숲이라 마나가 마음먹은 모양으로 유지가 어려웠다. 그래서 결국에는 방식을 바꾸어서 터널 공사를 시작했다. 즉 파괴력이 강한 마법으로 통째로 구멍을 내는 것을 택한 것이다. 몸에 가득 걸치고 있는 마나 써클들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9써클에 오른 이후로, 한 가지의 일을 하기 위해서 몸에 걸친 전 써클의 마나 를 움직이기는 처음인 것 같았다. 지금 내가 하려는 것은 9써클 마법의 하위에 들어있는 물질계마법이었다. 쉬벡의 설명으로는 이 마법은 속성이 물리력과 화력, 그리고 빛의 혼합이라고 했는 데, 빛 속에 물리력과 불의 속성을 담아서 대상을 태우는 동시에 날려버리는 마법이 라 고 했다. 쉬벡이 나와 함께 여러 가지 결합마법을 연구했던 것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최고의 마 법들 중 하나라는 것이다. 내 머릿속으로 엄청난 수식과 연산이 지나가고 나는 그것들을 오차 없이 계산하는 중 에 내가 가진 써클 마나를 바탕으로 마법 실현의 핵을 만들어 내었다. 마법을 할 때, 뭐라고 웅얼거리는 것이 주문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 은 일종의 수식계산이다. 그리고 손을 움직이거나 지팡이를 움직이는 것은 정신력으 로 마나를 움직이면서 일종의 자기 최면형식으로 손끝을 따라 혹은 지팡이를 따라서 마나를 배열해 나가기 위한 것이다. 물론 뛰어난 마법사는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적어도 낮은 수준의 마법을 구현할 때 는..) 하지만 이건 나도 처음으로 해 보는 9써클 마법이었다.(쉬벡이 자기가 만들고서 9써 클이라고 했으니까.) 그리고 실제로 그건 무척이나 까다로운 것이었다. 한참을 웅얼거리고, 또, 손짓을 해 가면서 마나를 배열하고 해서 겨우 마법 실현을 위한 핵을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어려울 것이 없었다. 핵이 모든 것을 알아서 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마법의 시전 방향을 핵의 높이에서 전면으로 지면과 수평으로 설정 하고 핵에 시동을 걸었다. 순간 어마어마한 마나가 소비되면서(뼈 속에 있는 골수가 빠지면 이런 느낌일까?) 대 기 중에서도 어마어마한 마나가 호응을 해 왔다. 절대 몸에 걸친 마나만으로 마법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 것. 그럼 룬어만으로 마법을 하는 사람은? 혹은 기호만으로 마법을 하는 사람은? 그들은 몸에 마나가 하나도 없어도 마법을 한다. 대기중의 마나를 움직이는 힘을 정신력과 룬, 혹은 기호를 이용하기 때문에.. 아무튼 내 써클 마나에 의해 활성화되고 필요 형태로 변형된 대기 중의 마나는 곧 핵 에 응집되어 내가 원하던 마법을 구현해 내었다. “으흑.” “이런!!” “어멋.” “헛.” “제길..” 뾰뾰로.... 이 속에 내 목소리도 있다는 것을 숨기지 않겠다. 그리고 여기 목소리와 마법의 위력에 묻혀서 들리지 않은 소리도 있음을 알려준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태연하게 있었던 사람이 아무도(한 사람은 있었지만 몰랐다) 없다는 것이다. (쉬벡 이 영감탱이....) 쉬벡에게 험한 소리가 나올 뻔 했던 순간이었다. 이런 마법이면 진작 부작용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아니냔 말이야. 쉬벡의 9써클 마법(라이트 파이어 파워)는 그야말로 빛이 나는 마법이었다. 그것도 엄청난 고광도의 빛이 쏘아져 나오는 그런... 예전에 특수부대 같은 것이 영화에 나올 때, 진압용으로 시력을 마비시키는 그런 탄 을 사용하던데... 이건 어쩌면 그보다 더 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 대책 없이 빛을 바라본 나는 그만 시력이 마비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눈이 없다고 사물을 분별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마법만 쓰는 것 이 아니라. 내공도 지니고 있기에... 주위의 기척으로 충분히 상대를 파악하고 행동 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파악된 일행들의 상태는 거의 전멸이었다. 누말(황제)도 자이건도 지토 화아 수아 풍아도, 모두들 시력이 마비가 된 것이다. 뭐 정령들이야 금방 회복이 될 것이지만(인간형으로 있으면서는 어려울까? 모르겠 다.) 나는 시력 회복에 상당히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괜찮은 거냐? 광아야. 네가 마차에서 탁자와 의자 꺼내오고, 수아는 그 순간 에도 수막을 지켜줘서 고맙다.” 나는 일단 광아에게 심부름을 시키고 수아가 있는 쪽을 보면서 칭찬의 말을 했다. 만약 수아가 놀랐을 때, 수막이 흩어졌다면 무슨 일이 있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우리들은 광아가 꺼내 온 의자에 엉거주춤 앉았다.(다들 그런 것 같다. 안 보이지 만...) “야, 루탄 너, 앞으로 마법 쓰려면 잘 아는 거나 써. 이게 뭐야? 뭐가 보이는게 있 어야 말이지.” “그래, 형. 이런 경우는 처음이야. 눈이 안 보이다니...” “호호, 솔직히 눈은 필요 없잖아요. 주위의 바람들이 모든 것을 알려주니까... 아 차, 여기는 오빠에게 알맞은 불이 없구나.” 풍아는 별로 상관없다는 듯이 웃었다. “광아오빠. 잠깐만 나 큰오빠에게 데려다 줘요.” 수아가 광아에게 부탁을 했다. 나는 천천히 수아에게 다가가서 수아의 손을 잡았다. “왜 그러니? 오빠 여기 있다. 잠시 눈이 안 보이겠지만... 곧 괜찮아 질 거야. 그러 니까 무서워하지...” 내가 그렇게 수아를 달래는데 수아의 손이 내 눈에 닿으면서 상쾌한 기운이 스며들었 다. 그리고 곧 눈을 감싸고 있던 검은 장막이 거두어졌다. “호호, 오빠가 요즈음 잠깐씩 이상해지는 것 같아요. 호호. 그냥 치유하면 되는 걸. 무슨 고민을 해요?” 수아의 말이 내 머리를 쳤다. 이상해진단다. 내가 이상해져. 이상... 나는 끙끙대는 누말을 보았다. 수아는 그렇게 나를 먼저 치유해 주고는 화아, 풍아, 지토의 순서로 치유를 하고 자 기 눈에도 치유를 걸었다. 그리고 자이건을 치료하고 누말에게 다가가는 수아를 내가 잡았다. 그리고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이 때, 내 눈이 어떤 모양으로 웃고 있었는지 는 나도 ...) 나는 그렇게 정리가 된 상태에서 아까 목표로 했던 방향을 바라보았다. “부작용을 제외하면 정말 괜찮은 마법이로군. 아주 확실하게 길이 나 버렸네?” 나는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지정했던 그대로 우리 일행의 이글루 크기의 구멍이 길게 뚫려 있었던 것이다. 저기 멀리 터널이 끝나는 부분이 보이고 있었다. 빛이 세어 들어오는 곳은 상당히 멀어 보였지만 그 앞을 가로막는 것은 없었다. 나는 누말을 마차에 싣고 터널로 들어갔다. 터널안은 이 숲이 얼마나 빽빽한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위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은 고사하고 가지를 타고 내리는 물방울도 보기 어려운 곳이 었다. “저기 루탄님, 저는 언제나 치료를 해 주실 겁니까? 왜 저는 치료를 해 주시지 않 는 것인지...” 누말이 마차 지붕에 누워서 억울하다는 듯이 항의를 해 왔다. “그 상태면 황제가 나타나지 못할 것 같아서 그대로 두는 것이야. 아마도 황제는 너 의 눈을 매체로 나타나는 것 같으니까 말이야. 아마 너와 연결을 하려면 새까만 암흑 과 만나야 하겠지. 당분간은 그대로 있어. 그렇다고 우리가 어디로 도망을 가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야. 지금도 문제의 해결을 위해 나아가고 있지 않은가 말이야.” 나는 그렇게 윽박질러 주고는 입을 다물었다. “이봐 루탄. 우리 지금 땅 위가 아니라 나무 위를 달리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냐? 여기는 지금 땅 위가 아니라 나무 위야. 아까부터 언덕이 졌는지 땅이 아래로 꺼지고 있다. 클클클” 지토가 옆으로 당나귀(게브)를 몰고 와서 이야기 했다. 아까 마법이 일방향 마법이었으니 땅이 아래로 내려가든 말든 곧장 뻗어 나갔던 모양 이었다. “그럼 어쩌지? 다시 땅 쪽으로 길을 내야 하나?” 내가 중얼거리자 옆에서 따라오던 풍아가 한 마디 했다. “오빠, 저기 보이는 곳까지 가면 주위의 모습을 볼 수 있겠지요. 그럼 그 때 결정 을 해요. 어디로 이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면 다시 나무속으로 들어가야 하겠지만 그 렇지 않다면 주위가 훤히 보이는 곳이 좋지 않을까요?” 나는 풍아의 말이 옳다는 생각이 들어 찬성했다. 그래서 결국 우리 일행은 터널의 끝에 가까이 다가갔다. 물론 터널 끝에 가까이 갈수록, 지반이(이 경우에는 목반인가? 아무튼 바닥이) 허술 해 지고 있어서 터널 끝까지 가지 못하고 마차를 세웠다. 그리고는 우리 앞으로 있는 나무들을 모두 동결마법으로 치워버렸다. 순식간에 시야가 넓어졌다. 쏟아지는 폭우 속에 밀림은 그야말로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있는 곳은 일종의 분지의 언덕 중앙부분인 듯 했다. 아까부터 땅은 내려가고 우리는 수평으로 전진해 왔으니 위쪽으로는 그 만큼 비스듬 히 나무들이 자라 있을 것이고 또, 우리 눈 아래로도 비스듬히 나무들이 자라 있었다 . 아주 거대한 원형 경기장의 관중석 중앙에서 주위를 살펴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 다. “저것인가? 이번 사건의 원흉이?” 어느 틈에 시력을 회복한 것인지 누말이 일어나 다가왔다. 이런 벌써 시력이 회복 되었나? 이런 생각을 하는 나를 누말이 잠시 노려본다. 하지만 나는 별로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능력이 있는 놈은 내버려 둬도 알아서 이렇게 잘 일어나는데 뭘.... 그리고 우리들은 누말(황제)가 무엇을 보고 말을 한 것인지 살펴보았다. 언제나 주인공은 중앙 무대를 차지하는 법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 주인공은 이 거대한 경기장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었다. 물론 배경이 크니까 주인공의 크기도 상당히 큰 것이었다. 생긴 것은 뭐라고 하면 설명이 될까? 일단 송이버섯을 따서 머리 부분과 몸통 부분을 떼어서 머리 부분을 반대로 돌리고 줄기 부분을 붙인 다음 땅에 심는다면 저런 모양이 될 듯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뒤집어진 머리 부분에서는 끊임없이 공기 주머니 같은 것이 하늘로 날 아오르고 있었다. 흔히 말하는 버섯의 포자와 같은 것일까? “저기 저 주머니 안에 문제의 생명체가 들어 있겠지? 그럼 도대체 씨앗들은 어디에 서?” 화아가 밑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글쎄, 일단 가 보면 답이 나오겠지. 그런데 어떻게 가까이 다가가지?” 내가 물어 보자 다들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나무들 위를 이동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까 나무속으로 터널을 뚫어서 이 동을 해요. 그게 좋을 것 같아요.” 풍아가 제안을 했다. 그건 맞는 말이다. 이 많은 인원에 말에 마차를 풍아와 내가 허공에 띄우고 이동하 는 것은 가능은 할지 몰라도 별로 권하고 싶지 않은 노동이 필요했다. 그래서 결국 우리들은 다시 나무터널을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아까의 그 부작용이 심한 마법을 다시 쓴 것은 아니었다. 그냥 아눈을 앞세우고 천천히 걸어 간 것이다. 이번에는 아눈도 최대한 고온으로 나무들을 처리했기 때문에 연기가 많이 나지도 않 았고, 연기가 피어나도 곧 풍아가 해결을 해 주었기 때문에 어려움은 없었다. 도리어 나무속이라 비가 내리지 않아서 이동이 편한 면이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리들은 나무의 장막을 벗어나 사건의 원흉을 가까이에 서 볼 수 있었다. 아눈은 쏟아지는 비를 피해 터널 속으로 들어가 버렸고, 우리는 다시 투명 이글루 안 에 들어가 있는 모습이 되었다. “신기하군, 그 투명한 생명체가 저런 역할을 하는군. 신기해.” 우리는 이번에도 누말(황제다. 황제.)의 말에 시선을 돌렸다. 그 곳에는 쌀알 같은 괴 생명체들이 무리를 지어 기어 다니며 과일들을 운반하는 것 이 보였다. 이렇게 보니 꼭 작은 개미들이 먹이를 사냥해서 끌고 가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저 거대한 녀석은 식물의 열매를 먹고 자라는 것이고, 이 녀석들은 그 열 매를 수확 운반 하는 녀석들이군. 아울러 파종을 하는 역할도 같이 하는 것 같고 말 이 야. 그럼 이 녀석들은 저 녀석의 무엇일까? 일꾼? 아니면 저 녀석이 이 녀석들이 붙 어 있는 기생? 아니면 서로 어떤 도움을 주고받는 공생? 그것도 아니면 이것들은 저 큰 녀석의 일부일까?” 나는 여러 가지 가설을 가지고 누말을 보았다. “그거야 나도 알 수 없는 일이지. 일단 가까이 다가가서 파악을 해 보아야겠지?” “그렇게 다가가는 것은 위험하지 않을까?” 나는 어느 틈에 말을 놓고 있었다. 솔직히 이제는 그런 거 따지기도 싫다. 지가 황제면 우리나라 황제냐? 내가 신하도 아니고... 난 그저 조금 빚을 진 것이 있어서 그걸 갚고 있을 뿐이란 말이야. “하하, 위험해도 내가 위험한 것은 아니니까 하는 말이지. 하하하.” 주, 죽여 버릴까?(참, 누말이지. 누말.) 나는 심호흡 한 번으로 살인 충동을 억누르고 다시 괴물체를 바라보았다. “일단은 저 녀석이 초식이니까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으리라 생각이 되는데 말이야. 마차와 말들은 터널 안에 아눈에게 맞기고 가 볼까나? 물론 자이건은 남아서 마차 잘 지키고 있어.” 여기서 나는 마차나 지키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나’라는 말로 하찮은 것을 지키 고 있어야 한다는 자괴감을 주지 않으려는 나의 배려를 저 놈이 알기나 할까? “누말, 너는 어쩔 거냐? 같이 갈 거냐? 같이 간다고 해도 보호를 기대하지는 말아. 이제부터는 각자 스스로를 방어해야 할 거야.” 나는 누말 아니 황제에게 말했다. 누말은 그런 능력이 없었다. 솔직히 자이건 보다도 못하다. 그동안 자이건이 짧은 시 간이지만 많이 맞아서 맞는 방법을 깨우쳤기 때문에 실력이 조금 늘었던 것이다. “걱정하지 마라. 이자는 내게 자신의 생명을 바치겠다 했으니 내가 알아서 할 일이 다.” 나는 그 말에 몸을 돌려 우리 일행을 보았다. “이제부터 자기 방어는 자기가 할 수 있도록 해라. 너희들 정도면 쏟아지는 폭우를 막을 재주는 모두들 가지고 있겠지?” 나는 말하는 중에 광아와 화아를 보았다. 수아는 수막을 풍아는 풍막을 친다. 그리고 지토는 땅의 성향이라 아마 비에 젖어도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흙에 닿으면 그냥 죽어버리는 것들이다.) 그런데 화아는 화기를 이용한 방어로 비를 막을 수는 있었지만 예상외로 아눈이 오 래 견디지 못한 것을 보았기에 걱정이 되었고. 광아는 방어막을 만드는 것을 본 적이 없는 것이다. “걱정하지마.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화아는 자신있게 말하고는 칼을 들어 보였다. “형님, 제 걱정 마세요. 저는 그냥 빗줄기 속에 숨을 겁니다. 하하. 단지 빛을 이용 한 환술 같은 것이 아니지요. 저는 빛입니다.” 라더니 슬며시 모습을 감추었다. 그래 그렇겠지. 그런데 모습만 감추고 나타나지 못하면 뭘 어쩌라는 것일까? 모습을 드러내고도 비를 피할 방법이 있는 것일까? 뭐 저렇게 자신이 있는 모습이니 믿어도 될 것이었다. 우리는 서서히 거대한 괴물체를 향해서 걸음을 옮겼다. 아직은 수아가 우리 모두를 방어해 주고 있었지만, 우리들은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치 고 있었다. 나는 내 몸 주위에 목(木)의 기운으로 강기를 형성시켰다. 내가 지닌 목의 기운은 나무의 순수 기운이기에 괴생물체들이 닿으면 그대로 죽어버 릴 것이었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녀석들이 내 몸에 닿을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천천히 그 괴물체를 향해 다가가면서 의견을 나누었다. “이거 어떻게 할 생각이지? 이번 사건의 원인이 이 녀석이라면 그냥 없애는 것으로 마무리를 하면 되는 것 아닌가?” “무슨 소리야? 이런 녀석을 그냥 없애버리다니. 마법을 한다는 녀석이 그렇게 호기 심이 없단 말이야. 이건 엄청난 녀석이란 말이야.” “하지만, 그와 동시에 아주 위험한 녀석이기도 하지 무슨 일을 벌일 줄 모르는 녀석 이니 말이야.” “하하, 아울러서 내가 이 녀석을 어떤 형태로 사용할지 모른다는 의심도 있겠지. 하 하. 하지만 난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황궁 이외의 곳에는 관심이 없어. 누웬의 평화와 아울러서 황궁이 나에게 모두이지. 그 이상은 어떤 것도 관심이 없다는 말이야. 내가 이것에 관심을 갖는 것도 이것이 누웬의 삶에 도움이 되리란 생각이지 무기나 위협을 위한 방법으로 개발을 할 생각은 전혀 없어.” 그래 말로야 무슨 소리를 못하냐? 어차피 너는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겠지만, 나는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없으니 너를 믿지 못할 수밖에. “무슨 말을. 사람의 마음을 보면 절대로 어떤 사람도 믿지 못해. 차라리 인형을 믿 지. 마음이 없는 꼭두각시 말이야. 사람의 마음을 모르기에 믿음도 생기는 것이야. 어 떤 인간도 완전하게 한 가지 생각을 가진 자는 없지만, 누군가에게서 믿음을 받는 자 는 제법 많지. 만약에 내가 믿는 자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고도 그를 여전히 믿을 수 있 는 사람이 있다면 내 목을 걸지. 대신 그 믿음을 받는 자가 정상적인 인간이라는 가 정 하에 말이야.” 뭐야?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면서... 역시 벌써 알아버린 것인가?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무섭군. 그러는 동안에 우리는 괴물체에 거의 다가가 있었다. -어세오세요. 아까부터 소란해서 손님이 오시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헉, 갑작스럽게 머릿속에 울리는 소리가 있었다. “지금 이야기 한 것이 당신인가?” 나는 전면에 보이는 괴물체에게 내공을 실어 물었다. -그럼요. 제가 말씀드린 겁니다. “너는 우리가 무슨 이유로 여기에 왔는지 알고 있나?” 나는 다시 물었다. -그건 저도 짐작을 할 수가 없군요. 그런대 다들 상당히 방비를 하시는 것이 무척이 나 저를 경계하는 것 같군요. “그거야 당연한 것이 아니겠나? 당신이 보낸 저것들로 인해서 지난 3년 동안 수많 은 지역이 밀림이 되었고, 또한 그 와중에 수많은 동물들이 죽었으며, 심지어는 마을 이 통째 전멸을 당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니 당신에 대해서 호의적일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여전히 괴물제의 변화에 대비하면서 말했다. -그럴 리가 없어요. 저는 모르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겁니까? 이제는 오리발이다. “당신에게서 나오는 그 작고 투명한 생명체가 식물들의 씨앗을 품고 빗줄기에 섞여 떨어져 내리는 것은 알고 있나? -물론이지요. 그렇게 해서 나무와 풀들을 기르는 것이 제가 하는 일인걸요. 뭐야? 나무를 기르는 것이 하는 일이라? “그럼 그 투명한 생명체가 식물이나 흙이 아닌 동물에게 닿는 경우에 그 동물을 숙 주로 삼아 식물들을 번식시키는 것을 모른다는 말인가?” 내 말에 그 괴물체가 부르르 경련을 일으킨 듯 느껴졌다. -그 말이 정말입니까? 정말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말입니까? 머리 속을 뜻이 울려오는 전달 방식의 말이었지만 나는 그 속에서 당혹감과 충격, 슬 픔, 부정 등의 느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런데 너는 무엇이냐? 식물이냐? 동물이냐? 환수냐? 마수 냐?” 누말이 끼어들어 물었다. 놈도 이 괴물체의 마음을 들여다보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것은 별로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지금 여기에서 이야기에 끼어들 기에 모자람이 많은 존재입니다. 그만 물러나 주시지요. 그와 함께 순식간에 누말의 주위에는 그 투명한 괴생물체가 둘러싸고 벽을 만들어 버 렸다. 우화화하 이렇게 속이 시원할 수가. 정말 오랜만에 가슴이 시원한 느낌이 든다. -그 말이 정말이라면 저는 엄청난 죄를 지은 것이겠군요. 처음 이 숲에 있던 동물들 이 모두 사라졌을 때, 이상하다 여겼지만 그런 일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다시 그 괴물체가 말했다. “그런데 당신은 정말 어떤 존재인가?” 나는 누말이 물었던 것을 그 존재에게 물었다. 그러는 사이에 전투의 위험이 줄었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일행들이 주위로 모여들었 다. -저는 신계의 목식(木植)입니다. 나무를 심는 자를 뜻하는 말입니다. 저는 신계의 정 원을 만들고 가꾸는 일을 하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이야기가 길었기 때문에 간단히 줄이면 다음과 같다. 목식이 신계에서 정원을 가꾸는 존재이지만 한 개체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신 계 곳곳에 이런 목식들이 있어 숲과 초원을 만들고 가꾸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목식은 신계의 변두리에서 목식의 임무를 열심히 수행하며 수련을 하 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가까운 변경에서 마계의 마수들이 분란을 일으켜 싸움이 났다 고 한다. 그래서 물론 그 마수들이야 변방을 지키는 병사신과 장군신들이 물리쳤지만, 훼손된 초목에 대한 것은 목식을 불러 그 회복을 부탁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곳에서 열심히 임무를 수행한 목식은 모든 임무를 마치고나자 무슨 일인 지 선계에서 추방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인간계에서 마계와 신계의 변경에 해당 하는 지역으로 말이다. 목식은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지난 3년 이 곳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그래도 할 줄 아는 짓이 초목을 키우는 일 뿐이라 그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의 말미에 이제는 자기가 왜 추방을 당해 이런 유배지에 왔는지 알았다 면서 신계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계의 마수들과의 싸움에서 흐트러진 지역을 복구할 때, 아무래도 마수들이 피에 영향을 받아(아무래도 식물 종류니 땅으로부터 기운을 흡수하는 모양이었다.) 약 간의 변화가 있었는데 자신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자 신계에서 그것을 알 때까지 유배 를 보낸 것이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나는 이야기를 듣고 어느 정도 이해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신이 여기에서 저지른 잘못은 어떻게 보상을 할 것인가? 수많은 동물들 과 사람들의 죽음을..” 내 물음에 목식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지은 죄의 대가를 내가 받기를 원한다면, 그것이 죽음이라해도 나는 받아들일 준비 가 되어있습니다.. 많은 업보를 쌓는 것이 되겠지만... 오랜만에 듣는 말이다. 업보라... 그래 업이라 하는 개념이 있었지. 그래서 착하게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러고 보니 신계에도 그런 존재들이 많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당신의 죽음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언젠가 당신이 지은 죄 값으로 인간 들에게 도움을 주었으면 하는 일이 있을 때, 당신이 인간을 도와주었으면 하는 것이 다. 천제지변이나 가뭄으로 들판이 말라버렸을 때에 당신의 힘이라면 능히 인간에게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의 제안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목식이 거절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목숨도 주겠다고 하면서 그 보다는 이쪽이 쉬운 일이니 말이다. -알았습니다. 그런 것이라면 좋습니다. 업을 풀 수 있는 방법이니 사양하지 않겠습니 다. 그럼 이것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언제고 제가 필요하시다 싶으시면 이것을 통 해 서 연락을 주시면 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목식이 나에게 준(공중에서 둥실 둥실 떠서 내려왔다.)것은 투명한 괴생명체였다. 문제는 그 크기가 사람의 머리 정도 크기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것은 저의 일부입니다. 약간의 치유력과 공격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만 치유력 을 많이 쓰면 크기가 줄어들어 회복하는 데에 시간이 걸립니다. 그리고 부정형이라 다 른 사물이나 동물에 펴서 바르듯 해서 데리고 다니는 것이 편하실 것입니다. “그럼 이것도 환수의 종류인가? 계약을 하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저의 일부이며 제가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영원히 당신 의 것입니다. “그래? 그럼 나 말고 저기 광아에게 주면 안 될까? 광아는 아직 환수가 없으니까 말 이야. 어차피 나와 함께 있을 테니 상관없을 텐데...” 나는 광아를 보며 그렇게 목식에게 물었다. -그렇게 원하시면 그렇게 해 드리겠습니다. 참고로 지금은 저의 영향으로 눈을 뜨지 않았지만 제 영향을 벗어나면 나름의 지성을 지닐 것이니 모쪼록 잘 돌봐주시기 바랍 니다. 광아님. 제가 이미 광아님을 주인으로 인식케 했으니 거두시는 것에는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목식님. 아끼고 또 아끼겠습니다.” 광아는 드디어 자기에게도 환수와 비슷한 것이 생긴 것이 기쁜 모양이었다. 그렇게 목식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는 광아였다. “이로써 저도 공격과 치료를 할 수 있게 되었군요. 루탄 형님 이제 저도 좀 더 도움 이 될 것입니다. 하하하.” “이런 내가 언제 광아 네가 도움이 안 된다고 한 적이 있냐? 괜스럽게....” 나는 말끝을 흐리고 목식을 바라보았다. “그럼 이제 돌아가려는가? 그대가 이대로 돌아가면 지상에 남은 저것들은 어찌 되는 가? ” -그것은 걱정마십시오. 제가 돌아가는 순간 모두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씨앗들에 걸어놓은 성장촉진에 관한 술법도 풀릴 것입니다. 다만 이미 만들어진 숲은 바뀌지 않 을 것입니다만... 목식은 그렇게 말을 줄였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그리고 제게 이렇게 깨닫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 다. 그럼 언제고 다시 뵙겠습니다. 그리고 목식의 그 거대한 몸은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물론 그 순간 누말이 풀려나기는 했지만 말이다. 나는 목식이 누말(황제를) 무시해 준 탓에 기분이 많이 풀렸다. “하하, 어쩌나 그 중요한 연구 자료를 빼앗겨서 말이야. 하하하.” 나는 통쾌하게 웃어주었다. 그러나 “정 안된다면 저기 있는 저것이라도 뜯어보면 될 일이다.” 누말이 광아의 품에 안겨있는 물체를 보고 한 마디를 하는 순간 주위의 온도가 급격 하게 냉각되었다. “만약에 이것에 손가락이라도 대는 날에는 장담하지만 당신의 잠자리에 칼을 꽂아 드리지요. 아마 그 아래에 당신이 아끼는 무엇이 있을 것입니다. 정 없다면 당신의 심 장이라도 놓고 꽂아 드리겠습니다.” 광아의 이 한 마디가 만든 현상이었다. “하하, 농담을 한 것이다. 그런 것에 그렇게 흥분을 하다니...” 누말(황제)는 그렇게 분위기를 반전시키려고 노력했다. “자,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마무리를 지었으니 우리는 이만 돌아가야겠다. 솔직 히 누웬을 거의 구경도 못하고 가게 되어서 아깝기는 하지만 누군가의 감시를 받으면 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말이야. 그럼 잘 가라구. 돌아가는 길 에 말이 죽으면 어쩌나 싶기는 하지만 능력이 있으니 알아서 하겠지. 아니면 누말의 일이라 상관을 않을지도 모르고 말이야. 아 참, 내가 여기에서 떠나는 데에 무슨 이 의 있나?” 나는 누말을 보고 물었다. “하하, 계약은 훌륭히 이행되었으니 내가 무어라 할 수가 없군. 그리고 품 속의 그 패는 언제든 누웬의 영토 안에서는 사용이 가능하니 필요하면 쓰도록. 참, 야전대의 병사들 중에서 고향에 갔던 인물들이 대부분 돌아왔더군. 그래서 다시 야전대에 편성 시켰지. 아마 고생을 좀 하기는 하겠지만 생활이 어렵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내가 그 들의 가족을 순차적으로 불러들여 생활을 안정시켜 줄 것이니 그들 걱정은 하지 않아 도 될 것이야. 그리고 어차피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이 내가 아니니 그들이 나에게 전 적 으로 충성을 하진 않을 것이야. 그러니 필요하면 언제든 찾아가도록 해. 대신에 약간 의 수고는 해야 할 거야. 훈련을 시키고 먹이고 재우고 하는 것도 상당하니 말이야. 그 대가는 있어야지? 그럼 잘 가. 언제고 또 보자구.”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은 누말은 곧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다음에 또 뵙기를 기대하겠습니다.” 라고 인사를 하고는 말을 타고 터널 안으로 사라졌다. 마지막은 누말이었겠지? 그건 그렇고 그러고 보면 황제라는 녀석도 나쁜 녀석만은 아닌 것도 같고... 내가 너무 미워했던 것일까? 조금 마음이 그렇군. “그럼, 이제 우리 일행만 다시 남은 거네?” 나는 그렇게 말하며 싱숭생숭한 마음을 추스르고 나서 자이건을 불렀다. 자이건은 말과 마차, 그리고 아눈과 함께 터널에서 나와 우리와 합류했다. -자이건은 가고,....우리는 암흑제국으로.... - “그런데 광아야 그 녀석은 어쩔 거야?” 우리는 다시 나무들 속으로 들어와 천천히 암흑제국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눈이 앞장서서 터널을 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는 중에 우리들은(자이건을 제외한 모두) 마차의 지붕에 올라앉아 광아 의 품에 안겨있는(자꾸만 흘러내리는지 자주 추켜 주어야 한다.) 그 녀석을 보고 있 었 다. “글쎄요. 아직은 깨어나지를 않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일단은 깨어나기 를 기다려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광아가 다시 한 번 녀석을 추스르며 대답했다. “그런데요? 그거 이름을 지어야 하지 않아요? 아까 목식도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으 니 우리가 이름을 지어주는 건 어때요?” 수아가 광아의 품에 있는 것을 보며 흥미 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거 좋겠다. 이름을 지어 주자. 호호. 뭐가 좋을까? 저렇게 흘러내리고 몸도 주체 를 못하니까 칠칠이라고 할까? 호호호” “무슨 소리에요? 풍누님. 어떻게 그런 이름을 붙일 수가 있어요?” 광아는 대뜸 풍아의 말에 열을 올렸다. 정말 새로 얻은 녀석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하지만 아직 새로 얻은 녀석에 대해 자세히 모르는 상태에서 저런 반응이 나온다는 것은 아무래도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의 환수를 그만큼 부러워했다는 말과도 통하는 것 같다. 그렇게나 부러우면서 별 내색을 않다니....(무서운 녀석)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무서운 녀석이니 저 새로 얻은 것에 대한 애착이 엄청 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괜히 저것을 잘못 건들었다간 미움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하하, 풍아가 농담을 한 것을 가지고... 그래 광아는 어떻게 생각하니? 이름을 지 어 주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나는 풍아를 감싸면서 광아의 생각을 물었다. 저것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광아의 의견에 맡기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음, 이름은 지어야겠지만... 제가 지을 겁니다. 제가 주인이니까...” 역시. 광아의 태도는 예상한 그대로 나왔다. “하하, 그래? 그럼 어디 이름을 한 번 지어봐라. 좋은지 어떤지 봐 줄게.” 솔직히 좋은 이름이 아니라도 무조건 통과를 시켜야 할 분위기였다. 그렇게 마차 위에 모인 우리들은 광아가 열심히 그것의 이름을 생각하며 앉아있는 동 안에 물끄러미 광아와 그것을 보고 있어야 했다. 어깨위에 있던 란이가 심심한 듯 이리 저리 파르락 파르락 날아다니면서 장난스런 울 음을 울었지만 광아는 여전히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 동안에 반듯하게 앉아있던 광아와 지토는 마차 위에 아슬아슬한 자세로 비스듬히 누워서 발장난을 하거나, 판박이 상대(게브)와 쎄쎄쎄를 하거나(그냥 서로 보면서 동 작 흉내 내기를 하고 있다는 말이다.) 하면서 무료함을 달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들은 터널 안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출발을 하면서도 광아에게서 그것의 이름을 듣지 못했다. 그리고 풍아, 화아, 지토는 다시 말과 게브를 타고 이동을 하기로 했고, 광아는 그것 이 자꾸 흘러내려서 마차의 지붕에 우리(수아와 나)와 함께 앉아서 가기로 했다. 뭐, 그러다가 나도 별로 할 말도 없고 해서 다시 자이건의 옆으로 와 버렸다. 그리고 수아는 잠시 마차 안에서 쉬겠다며 들어갔고(이제는 수막이 필요 없었다. 사 실 계속 수막을 펼치느라 피곤했을 것이다.) 광아는 여전히 웅크리고 그것을 안고 있 는 자세로 움직임이 없었다.(엄청나게 진지한 모습이지만, 어쩐지 집착이라는 느낌 이....) 저녁 식간. 우리들은 탁자에 둘러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누웬에서 있었던 일들과 특히 황제 에 대한 이야기들) 나누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 광아는 여전히 그것은 품에 안고, 식사를 하는 듯 마는 듯, 딴 곳에 정신이 팔린 것 처럼 멍~한 모습이었다. “저, 루탄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자이건이 말을 꺼냈다. “응? 무슨 일이지? 할 말 있으면 어려워 할 것 없이 해 봐.” 나는 자이건을 보고 말했다. “루탄님, 저는 이만 본가로 돌아가야 할 듯 합니다.” “뭐? 뭐라고? 왜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야? 그 전에는 그런 이야기 한 마디 도 없었잖아.” 제일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화아였다. 역시 숱한 대련으로(스트레스 해소였지만) 정이 많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대련이 많았던 광아도 이 순간만큼은 정신이 든 것 같았다. “어째서 지금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광아가 자이건에게 물었다. “그 이유는 지금부터 가려는 곳이 암흑제국이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아무리 힘이 부 족하다고는 하지만 저희 집안은 한타의 공작가입니다. 그리고 암흑제국은 저희 한타 의 제1적대국입니다. 그러니 제가 암흑제국에 들어간 것을 알게 된다면 그것은 상당 한 외교적, 군사적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물론 들키지 않고 다니면 상관이 없 다 하시겠지만, 지금까지 보아온 수많은 존재들이 저의 상상을 벗어나는 것들이었습 니 다. 환수나 마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이런 경험들을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지요. 그러니 암흑제국 안에서 제 정체가 밝혀지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것 이라고 봅니다. 때문에 저는 암흑 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자이건은 잠시 말을 멈추고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그리고 그것 말고도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제가 무료히 시간을 보내고 있고, 그다 지 세상에 영향을 끼칠 존재가 되지 못하리란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었습니다. 아니 언제나 위대한 인물이 되고 싶었지만 방법을 몰랐고, 힘이 없었다는 것이 맞는 말이 겠 지요. 그래서 어쩌면 자간에서와 같은 어이없는 짓을 벌인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제가 루탄님 일행을 따라다니면서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 사건 에 수많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또 수많은 다른 판단이 내려질 수 있겠기에 저도 그 동안의 일들에 대한 판단이 다른 사람들과 많이 다른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하 지 만 그렇다고 제가 내린 결론이 틀렸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배운 가장 큰 것 은 바로 믿음이 모든 것을 이룬다는 것이었니까 말입니다.” 갑자기 어렵다. 이게 어려운 것이 내가 이해력이 없어서가 아니라면 저 자이건이 말 을 잘 못하니까 그런 거겠지? 쉽게 이야기하면 그 동안 여러 사건을 겪으며 나름대로의 깨달음을 얻었다. 그 깨달음의 내용은 세상 모든 일은 믿음을 가지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뭐 이런 내용인 것 같은데 말이야. “저는 어떤 것을 이루는데 있어서 스스로가 그것을 믿는다면 무엇이고 이룰 수 있다 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믿음이 세상을 바꿀 수도 있지요. 그래서 저는 다시 돌아가려 고 합니다. 제 자리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위 대 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돌아가려는 것입니다.” 역시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르다는 것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위대한 사람이라. 나는 역사에 이름이 없는 수많은 위대한 사람을 알고 있다. 그들은 어디에나 있는 사람들이다. 땅에 괭이질을 하는 농부나, 건물에 못질을 하는 목수나,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어미 나, 노점에서 물건을 파는 상인이나, 헐벗은 자에게 옷을 벗어주는 성직자나, 죽음의 문턱에서 모든 것을 환원하는 기업가나, 나라의 유익을 위해서 사기를 치는 정치가 나... 어느 곳에나 위대한 이들은 있다. 물론 이것은 내 생각이니 자이건에게 강요할 바는 아니다. 아무튼 자이건은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위대한 인물이 되고 싶은 모양이다. “그래? 그럼 돌아가서 무얼 할 생각이지? 어떤 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은 것 이지?” 나는 자이건에게 물었다. “저는 군인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라를 지킬 것입니다. 아니 백성을 지킬 것입니 다. 왕족과 귀족이 아니라 백성을 지킬 것입니다. 침략전으로 상대를 해치고 싶은 마 음은 없습니다. 저희 왕국은 제가 죽을 때까지는 그럴 힘이 없을 것이니 걱정은 없겠 지요. 하지만 약한 나라이니 침략을 받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런 나라를 위 해 방패가 될 것입니다. 그럴 준비를 하기 위해 가려는 것입니다.” 크흐~ 멋지다 자이건. 그럼 그럼 그런 생각을 가져야지. 하하하. “좋아, 클클클. 그 동안에 배운 것이 많은 모양이군. 클클클.” 지토도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정말 좋은데? 처음에 만났을 때의 그 망나니가 이렇게 바뀌었단 말이야? 정말 멋진 데? 호호.” 풍아가 일어나 자이건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하하, 좋아. 자이건. 멋있다.” 화아도 한 마디 거들었다. 광아도 말은 없었지만 밝은 얼굴이 되어 있었다. “자인건씨, 정말 축하드려요. 어떻든 인생을 결정하신 것 같군요. 그리고 그 결정 이 정말 마음에 드는군요.” 수아가 마지막으로 활짝 웃는 얼굴로 말했다. 자이건의 얼굴이 붉어진 것 같은 느낌이... “좋아, 좋아. 어차피 자이건 너에게 언제든 떠나고 싶으면 떠나라고 했었으니까 지 금 떠난다고 해도 막을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철이 들어 떠난다니 정말 대견 스럽구나. 하하하. 가만히 있자 그럼 자이건에게 선물이라도 하나 줘야 하지 않을 까?”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순간 머릿속을 스친 선물은 앞으로 자이건이 원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심법을 하나 알려 주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유소와 넥스의 일도 있고 해서 쉽게 결심이 서지 않았다. 나는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결심했다. “자이건 내가 너에게 선물을 하나 주지. 네가 군인이 되고 싶다면 뛰어난 검술이 필 요할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에게 심법을 하나 알려 주마, 신성제국 화염기사단이나 여인왕국 얼음기사단의 심법에 견주어 손색이 없는 심법이다. 내가 그 심법들을 다 알 고 있으니 거짓말은 아니야. 그러니 여기에서 우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면서 심법을 배우고 가라. 대련은 화아와 광아 풍아가 좋은 상대가 되어 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말했고, 사정을 아는 일행들(자이건 제외)은 놀란 표정이 되었다. “어차피, 전에 마롤 후작이 보냈던 검사들의 실력으로 보아하니 대륙 곳곳에 심법들 이 퍼져 있는 상태다. 굳이 알려줘서 문제가 될 것은 없겠지. 어차피 화공과 수공의 심법이 알려져 있고 그 유사 갈래들도 많은 모양이니 말이야. 그 때는 그것이 세상에 무리를 줄 수도 있을 정도의 것이었지만, 지금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니까 상관없겠 지.” 내가 그렇게 말하자 일행들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표정이 되었지만 자이건은 더 이상한 표정이 되었다. “너는 그런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 그저 형이 가르치는 것만 잘 배우면 되는 것이지. 아마 잘만 배우면 대륙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수 있을 거야. 우리 일 행을 빼면 말이야. 하하하.” 퍽퍽퍽. 화아가 자이건의 등을 두드리며(?) 크게 웃었다. 그리고 조금 상황이 진정되자 나는 자이건에게 오행공 중에서 금(金)에 해당하는 심 법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내가 내공을 이용해서 심법의 흐름에 따라 운공을 도와주었다. 아마도 도움이 없이 시작을 하려면 몇 주일은 고생을 해야 할 터였다. 그리고 그 중 에 약간씩은 잘못된 경로를 택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말이다.(그런 작은 차이가 나 중에는 큰 차이를 만든다.) 터널 안이라 조금 비좁은 것 같았지만 아눈이 이리저리 몸을 굴리고 나자 어지간한 운동장 정도의 공간이 만들어 졌고, 나는 위에서 무너지는 일이 없게 마법으로 결계 를 만들어 주었다.(아무래도 머리 좋은 황제가 이 터널을 나중에 이용할 것 같아서 무 너지지 않게 영구 결계를 걸어 두었다.) 우리들은 그 터널 안에서 우기가 끝나는 날까지 시간을 보기로 했기 때문에 아눈을 시켜서 반대편으로 터널을 완성시키게 하고, 쉬엄쉬엄 숲의 끝가지 길을 내도록 부탁 (?)을 했다. 나중에 나갈 때는 마차를 타고 달릴 생각이었다. 우리들의 터널 속 생활은 그런 대로 재미있었다. 오랜만에 파울도 현신을 시키고, 카다, 아눈, 게브(이놈은 그냥 지토 모습으로 있는 것을 좋아한다. 제 주인도 상급의 모습보다 중급의 작달막한 모습을 좋아하더니 닮았 나?) 그리고 맘맘(광아가 이틀을 고민해서 붙인 이름이다. 다들 그 이름을 듣고 당황 했지만 광아의 작명 실력이 그러니 하는 수 없다.)등 5마리(?)의 환수와 정체불명의 생물은 여기 저기 터널 안을 돌아다니며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고, 다만 란이는 언제 나 내 근처를 벗어나지 않고 따라다니고 있다. 그리고 그 주인들은 제각기 그 소유의 환수들(맘맘도 환수에 포함시키자.)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랬다. 하지만 가끔은 자이건과의 대련을 놓고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화아, 풍아, 광아가 서로 먼저 자이건과 대련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결국 셋 중에 누군가가 자이건과 대련을 하게 되면, 남은 둘이 상대가 되어 한 판 대 련을 하는 것이 일정한 과정으로 굳어진 것 같다. 뭐 수아는 조용히 음식을 하고(이제 수아가 식순이가... 아니지 식순이는 안 어울리 고 취사 담당이 된 것 같다. 나는 자유를 얻었나 보다.) 지토는 이 곳에 들어와서 새 로 생긴 버릇으로 파이프 담배를 즐기고 있다. 내가 알기로 그 동안에 지토가 누군가에게 파이프 담배를 배울 일은 없었을 것 같은 데 어떻게 그런 것을 하게 된 것인지 물었더니 게브가 가르쳐 준 것이라고 한다. 신계에서는 담배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면서... 꼭 쓸데없는 것만 배운다.(점점 늙은이의 모습으로 정형화되는 느낌이다.) 그리고 자이건은 아침나절은 운기조식을 하고, 오후에는 대련(을 빙자한 구타당하 기)을 하고 밤에도 잠도 없이 운기조식이다. (많이 하는 것이 몸에 무리가 가는 것이 아닌 만큼 말리지는 않고 있다.) 그리고 열흘이 지나갈 무렵 드디어 폭우가 그쳤다. 밤사이에 쏟아지던 빗방울이 잦아들고 아침에는 오랜만에 찬란한 햇빛이 비추었던 것 이다. 그건 물론 자이건과의 이별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자이건, 인연이라는 것이겠지. 너를 만나고 이렇게 심법을 알려 준 것도. 하지만 나는 다시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너에게 심법을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허락해 주겠다. 네가 원한다면 그 심법을 누구에게 전해 준다고 해도 말리지 않겠다. 세상에 는 뛰어난 심법들이 많이 있겠지만 그 심법은 어디에 내 놓아도 뒤지지 않을 것이고, 또 안정적인 것이다. 너에게 큰 힘이 될 것이다. 다만, 네가 지금 가지고 있는 생각 을 끝까지 지키고 내가 준 힘을 사사로이 쓰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잘 가거라.” 어쩐지 자이건이 제자라도 되는 기분이다. “알겠습니다. 루탄님의 마음에 들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자이건은 고개를 숙였다. “잘 가라. 다음에는 멋지게 한 번 어울려 보자. 그 때는 그렇게 얻어터지진 않겠 지? 하하” “잘 가. 다음에 한 번 찾아갈게. 호호.” “안녕히 가세요. 다음에 또 뵙겠죠.” “클클. 잘 가거라. 매사에 신중하고.” “그 동안 수고 많이 하셨어요. 그리고 여기 가시는 길에 드세요. 음식 조금 쌌습니 다.” 수아는 마지막으로 자이건에게 보따리 하나를 건넸다. “자, 이별의 시간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가슴이 아픈 법이다. 내가 자이건을 크리 트니아로 보내 줄 테니 나머지는 알아서 가도록 해. 그 참. 말까지 함께 보내는 것이 라 힘 좀 들겠군. 그리고 이건 여행경비다.” 나는 마지막으로 자이건에게 약간의 보석을 건네고는 자이건을 텔레포트 시켰다. 희미한 빛과 함께 사라져 버린 자이건. 정말 갑자기 허전해 진 것 같다. 그리고 뭔가 빠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게 뭔지 잘 모르겠다. 우리는 말과 마차를 타고 암흑제국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유리를 팔아야지. 돈을 벌어야지. 돈을... “으아아아아. 이게 뭐야.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내가 왜 그랬을까? 왜 그랬지? 왜! 왜! 왜!” “오빠, 오빠 잘못이 아니잖아요. 모두들 정신이 없어서 생각을 못한 것이니 너무 자 책하지 마세요.” “그래요, 형님. 형님 잘못이 아니잖아요. 그냥 부딪히다 보면 어찌 되겠지요.” “그래 오빠, 암흑제국에 대해서 모르면 어떻다고 그래? 언제는 누웬에 대해 알고 갔 었나?” “그럼, 그렇지 그냥 가 보면 되는 거잖아. 형.” “클클. 그래도 자이건의 말로는 암흑제국에 대한 정보는 한타에서 수집을 잘 하는 편이라고 했는데... 어느 정도 자세한 내용을 알 수도 있었을 텐데... 우리는 예전에 도 남 자치령에는 못 가 봤잖아. 뭐 어차피 가 본 곳이 동 자치령뿐이긴 하지만... 클 클.” 그렇다. 내가 자이건을 보내면서 허전하다고 느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던 것이다. 뭐, 자이건을 보내고 곧장 이런 것이 생각났으면 가서 잡을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늦었다. 이틀을 열심히 달려서 숲을 빠져 나온 다음날 아침인 것이다. 아니면 마법길드라도 찾아가서 물어볼까? 하하, 그것참. “어쩔까? 내가 한타의 마법길드에 가서 조금이라도 알아가지고 올까? 어떻게 생각 해?” 나는 일행들에게 물었다. “뭐,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클클클 방금 풍아가 말했지만 그냥 가보자구. 얼마 나 멋진 일이야. 미지의 무엇에 대한 도전이라고 할 만하지 않아? 아까 내가 한 말은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별다른 뜻은 없어. 크크크.” 지토다. “그래, 그냥 가다가 마을이 나오면 물어보고 가면 되겠지. 마을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그냥 가자. 호호. 어쩌면 오늘 밤이 되기 전에 마을을 발견할지도 모르잖아.” 풍아도 지토의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 하고 나섰다. 그래서 결국 우리들은 마른 땅에 머리를 박는 기분으로(맨 땅에 헤딩이라는 용어를 쓰지.) 그냥 암흑제국의 마을을 찾아 길을 재촉했다. 다행히 오래지 않아 카다가 예전 상인들이 쓰던 관도를 발견했고, 우리들은 그 길을 따라 마차를 몰게 되었다. 숲을 하나 지나왔다는 것 말고는 그리 먼 거리를 온 것도 아닌데, 암흑제국의 지형이 나 식생이 많이 달라 보였다. 우선 드넓은 초원이나 평야가 거의 없었고 험악한 산악지형의 깊은 계곡과 유속 빠 른 강물이 우리를 맞이했다. “이거 정말 별천지네? 어떻게 순식간에 이렇게 지형이 바뀔 수가 있지?” 나는 옆에 앉은 수아에게 물었다. 지금 우리들은 화아, 풍아, 광아, 지토는 말을 타고, 나와 수아는 마차를 타고 있었 다. 그리고 마차에 묶인 말들은 자연히 한 마리는 수아의 것이었고, 한 마리는 내 것이 되었다. 지토에게 게브가 생겼기 때문에 나는 자연히 지토의 얼룩무늬 덩치 큰 말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말이 생겼다고 말을 타고 가는 것은 아니다. 수아의 하얀색(귀와 다리에만 까만 색이 있는 말과) 나의 세 가지 색(갈색, 회색, 흰 색) 얼룩무늬 말은 여전히 마차를 끌고 있는 것이다. 참, 광아의 맘맘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맘맘은 지금 마차의 표면에 붙어 있다. 그러니까 어떤 모습이냐 하면, 마차에 투명한 광택 도장을 한 것처럼 얇은 막으로 붙 어 있는 것이다. 광아가 그냥 데리고 있으려고 했지만 마땅히 둘 곳이 없어서 그냥 마차에 펴서 발랐 다. 뭐 자기 스스로 마차에 붙은 것이니 발랐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지만 말이다. 그래서 우리 마차는 예전보다는 좀 더 투명한 광택이 나는 모습이 되었다. 지금 우리는 숲에서 벗어난 이후로 계속해서 오르막을 오르고 있었다. 어쩌면 암흑제국은 고산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렇게 이어진 관도는 꽤나 높은 언덕(?) 위에서 끊어지고, 그 곳에서 우리 는 눈앞에 펼쳐진 난관을 바라보았다. “저기 지나가야 하는 걸까요? 오빠. 아무래도 상당히 위험해 보이는데요?” “저건 도대체 누가 만들어 놓은 거야? 만들려면 풍교처럼 만들어 놓던지...” 화아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언던 위에 올라선 우리들은 거대한 협곡을 맞이했던 것이다. 협곡의 폭이 약 2백미터 정도 되어 보였는데, 그 사이에는 마차가 지나갈 정도의 다리가 놓여 있었다. 예전의 풍교와 같이 양쪽 끝에만 지지대가 있고 중간은 자체 무게로 늘어져 있는 모 습의 다리. 하지만 풍교는 너비만 100여 미터에 이르는 그야 말로 엄청난 규모였지만 여기 있는 다리는 폭이 4미터 정도 되는 좁은 나무다리였다. 양쪽을 지지하는 곳에는 쇠기둥을 박아 놓기는 했지만, 그 사이에 다리를 지지하는 것은 굵은 동아줄(솔직히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식물의 줄기를 엮어 놓은 것 같다.) 네 개가 전부였다. 양쪽으로 두 개의 굵은 동아줄이 쇠기둥에 연결되어 다리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더 문제는 그 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탓인지 바닥에 깔린 나무들도 상당히 낡 은 상태라는 것이었다. “오빠, 차라리 힘이 들겠지만 우리들 전부 날아서 건너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위 험해 보이는데, 오빠와 풍아 언니가 함께 힘을 쓰면...” 수아는 아까부터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하하 그냥 가도 될 거다. 뭣하면 경량화 마법으로 가볍게 하고 건너가면 문제없겠 지. 그것도 불안하면 다리에 일시적인 강화 마법을 거는 방법도 있고... 아무래도 이 런 계곡을 날아서 건너는 것은... 하하. 별로 권하고 싶지 않구나. 우리가 처음 출발 할 때, 될 수 있으면 인간답게 지내자고 했었잖아. 그래서 너희도 옷을 사서 입고, 그 제약에 묶여 있는 것이고 말이다. 하하.” 그러자 수아도 어느 정도는 이해를 한 모양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에 마법이나 정령력을 쓰면서 산다면 참 쉽게 쉽게 살 수 있을지 모르 지만 그 만큼 재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지토에게 땅 속에서 황금과 보석 원석을 가져오라고 해서 돈을 벌면 무슨 의미와 재 미가 있겠는가 말이다. “꼭 필요하지 않으면 자제하면서 지내자꾸나. 하하.” “네. 오빠.” 그렇게 해서 우리들은 그 위험해 보이는 다리를 건너기로 했다. 찌익 찌익. 다리가 말과 마차의 이동에 따라서 조금씩 흔들리며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 다. 옆에 앉은 수아는 밑으로 시선을 주지 않고 다리 앞쪽으로 시선을 던지고 얼굴이 창 백해진 모습이다.(점점 수아나 화아 광아 풍아 지토 모두 인간적인 모습이 되어가는 것 같다. 뭐라고 할까. 정령력을 쓸 때와 아닐 때가 완전히 달라진다고 해야 할까?) 수아의 모습은 겁먹은 열여섯 꼬마 아가씨 같은 느낌이었다. 하하하 찌끄덕. 찌끄덕. 우리 일행은 무사히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다리는 이제 삼분의 일이 남아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반대편 숲 안에서 일단의 무리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빠르게 다리로 달려와 소리를 질렀다. “그 자리에 멈추어라. 우리는 암흑제국 국경 수비대 34 분대원이다. 멈추지 않으면 공격하겠다.” 우리들은 모두 자리에서 멈추어 그들을 살폈다. 카다가 풍아의 칼 속에서 잠을 자고 있었던 까닭에 이들이 숲에 있는 것을 알 수 없 었던 것이다. 물론 내가 조금 신경을 썼으면 알 수 있었겠지만 나도 마차와 다리의 적절한 균형을 만드느라 온통 여기에만 신경을 썼던 탓에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왠지 복장이 통일되지 않고 있었다. 20여명의 국경수비대는 검은 색의 갑주가 주를 이루고 있었지만 그 중에는 전혀 다 른 색의 갑옷을 입은 자도 끼어 있었고, 무기의 종류도 석궁이나 활에서부터 창, 검, 쇠방망이(낭아봉이라 부르는 것)등 아주 다양한 무기를 들고 있었다. “오빠, 저 사람들 국경수비대는 아닌 것 같은데?” “글쎄, 내 생각에도 그런 것 같구나.” 나는 수아에게 슬쩍 미소를 지어주고 그들에게 말했다. “하하, 국경수비대원들께서 마중을 오셨군요. 이렇게 고마울 수가, 저희는 누웬에 서 유리를 가지고 온 상인들입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자 그들 중 하나가 소리쳤다. “누웬과의 길목은 3년 전부터 죽음의 숲으로 왕래가 불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건너왔다는 것이냐? 사실대로 이야기해라.” 아무래도 아래위로 검은 갑옷을 빠짐없이 차려 입고 허리에 칼을 차고 있는 자가 대 장인 모양이었다. 소리를 지르는 자는 그 옆에 붙어 서 있는 덩치가 큰 인물이었지만 가끔 그 검은 갑 옷의 눈치를 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르셨습니까? 이번에 누웬에서 숲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조사했지요. 황제폐하께 서 직접 관여하신 것이라 결국에는 그 원인을 밝혀 없애는데 성공을 했다고 합니다. 저는 정왕야님의 영지에서 장사를 하는 장사치인데, 그 소식을 듣자마자, 유리들을 가 득 싣고 제국을 찾은 것이지요. 워낙이 고가의 물건이지만 이익이 많이 남으니 말입 니 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할 자들이 저 말고도 많을 것이기에 서둘러 말을 달렸습니 다. 그런데, 아직 이 곳을 지나간 다른 상인은 없겠지요? 있으면 이익이 줄어들지도 모르는데...” 나는 그들에게 내가 상인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리고 내 말을 들은 그들은 잠시 검은 갑주를 중심으로 눈짓을 교환했다. “그럼 일단 마차만 이리로 올라오너라. 나머지 놈들은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고, 조 사가 끝나면 부를 테니 기다려라.” 다시 덩치 큰 인물이 소리쳤다. “그래, 너희들은 일단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어라 내가 마차를 몰고 올라갈 테니 말 이다. 보아하니 정상적인 수비대 같지는 않은데다가 여차하면 다리를 끊을지도 모르 니 일단 다리에서 놈들을 유인해야 겠다.” 나는 낮은 소리로 동생들과 지토에게 이야기를 하고, 수아를 마차에서 내려 화아와 함께 있게 하고 란이도 함께 맡기고는 천천히 마차를 몰아서 언덕 위로 올라갔다. 마차가 다리에서 벗어나자 곧 수비대라는 녀석들이 달려들어 말고삐를 잡았다. “어서 내려라. 이놈, 이제부터 이 마차는 우리가 관리 하겠다. 야, 어서 이놈을 끌 어 내려서 묶지 않고 뭘 하는 거야?” 덩치가 소리를 지르고 마차를 에워싼 녀석들은 나를 마차에서 끌어내려 밧줄로 묶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저는 아무 죄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나는 놀라고 겁먹은 표정으로(내 연기 실력에 될까 몰라.) 물었고, “이놈아 이쪽으로는 아무도 다니지 않는 길이다. 그런데 너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 고 해도, 너에 대해서 알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지. 우리야 부수입을 조금 얻으면 되는 것이고 말이야. 자,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좀 해 볼까?” 여전히 이야기를 하는 녀석은 덩치가 큰 놈이었다. “크크크, 거기 멀뚱히 서 있는 놈들도 어서 와서 조용히 항복해라. 아니면 이 녀석 의 목숨은 없다. 크크크크.” 덩치는 다리 위에서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동생들에게 소리를 질렀고, 동생들은 놀 란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동생들에게 슬며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자, 차례 차례, 하나씩 건너와라. 거기 예쁜 아가씨부터 건너오는 게 좋겠군.” 덩치는 수아를 가리키며 말했고, 수아는 미적미적하는 걸음으로 다리를 건너왔다. 물론 다리를 건너자마자 달려든 수비대원들에게 묶여서 내 옆에 세워졌다. “아니 이건 또 뭐야? 이상한 것을 데리고 다니는군.” 수비대원 중 하나가 수아를 따라 온 란이를 보고 말하며 툭툭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그, 그러지 마세요. 그냥 애완용 동물일 뿐이에요. 그러지 말아요.” 수아가 그런 모습에 사정하듯 말하자 그 녀석은 수아의 표정에 밀려서(누가 수아가 부탁을 하는데 들어주지 않을 수 있을까.) 머쓱한 표정을 짓고는 무리 속으로 들어갔 다. 그리고 다음에 풍아, 광아, 지토, 화아의 순으로 포박이 되었다. “그런데, 어째서 마차가 열리지 않는 것이야? 응, 어서 열쇄를 내놓지 못하겠냐?” 덩치가 마차로 다가가 문을 열려고 시도를 하다가는 콧김을 씩씩거리며 달려와 소리 를 질렀다. 나는 여기에서 잠시 고민이 생겼다. 원래 계획을 이들에게 붙잡혀서 어느 정도 상황을 보며 정보를 얻는 것이었지만, 마 차를 열어 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뭘 꾸물거리는 거냐? 응? 이것들이 그럼 어느 누구 하나가 죽으면 말을 듣겠군. 죽 어!” 덩치는 순식간에 들고 있던 방망이(방망이에 삐죽삐죽 가시들이 붙은 이른바 낭아봉) 를 지토의 머리에 휘둘렀다. 나는 그런 상황에서까지 내 계획을 진행시킬 생각은 전혀 없었다. “피, 피해!” 급하게 소리를 지른 나는 곧장 포박을 끊어 버리고(힘든 것도 아니다.) 덩치를 향해 달려들어 주먹을 내 질렀다. 쿵, 퍼억. “큭!” 지토는 날렵하게(?) 바닥을 굴러 방망이를 피했고, 내 주먹은 덩치의 옆구리를 강하 게 후려 쳤다. 짧은 비명과 함께 쓰러진 덩치는 아마 오래도록 일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동생들은 이미 포박을 풀고 내 주위로 몰려들고 있었다. “이런, 이런 국경 수비대가 아니라 산도적이로군.” “그러게 말이야. 뭐 이런 사람들이 다 있어? 지토 아저씨를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려고 하네?” “이들의 행동으로 봐서 누군가를 죽이거나 헤치는 것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못하 는 것 같습니다. 그냥 일상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분위기였어요.” 나도 마지막 광아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이었다. 스스럼없이 지토를 향해 낭아봉을 휘두르던 그 모습은 분명 아무런 생각도 없이 사람 을 헤치는 모습이었다. 아니다 생각은 했을까? 그러니 그 중에서도 지토를 택했겠지? (겉으로 보기에 제일 쓸모가 없어 보이는...미안하다 지토.) “어떻게... 모두들 밧줄을 ...” “저 여자까지도 밧줄을 혼자 풀었어. 얼음 가루가 되어버렸어.” “저 녀석은 불로 태웠어. 내가 봤어.” 웅성웅성, 제법 시끄럽게 떠든다. “광아야. 맘맘이의 실력을 한 번 볼까? 저 사람들 제압좀 해 줄래?” 나는 지금까지 광아가 활약을 하지 못해서 내심 불만인 것을 알고 있었고, 더구나 맘 맘의 능력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광아에게 그렇게 부탁을 했다. “알았습니다. 형님. 맘맘 실력을 보여 봐라. 죽이지 말고 모두 잡아. 움직이지 못하 게...” 광아의 말이 떨어지자, 지금까지 마차에 붙어서 조용하던 맘맘이 한 곳으로 모여서 덩어리가 되더니, “뭐라고 떠드는 거냐? 우리가 그렇게 호락호락해 보이냐? 이것들이... 죽여! 죽여버 려!” 라고 소리치며 패거리를 선동하여 공격을 시도하려는 녀석을 포함해서 자칭 수비대라 는 산적들을 향해 가느다란 실을 뻗었다. 정말 그냥 보기에는 실 같았다. 자기의 몸을 아주 가늘게 만들어 뻗은 것인데 투명하 고 가느다란 실 같은 모양이었다. 실은 꼭 사람의 수와 같은 숫자였고, 그 실이 몸으로 파고 든 사람들은 움직임을 멈 추었다. 거의 모든 산적들이 우리 일행을 향한 상태여서 뒤쪽의 마차에는 신경을 쓰지 못했 기 때문에 기습이라는 효과까지 겹쳐서 순식간에 산적 제압이 성공했다. 하지만 그래도 대장은 조금 다른 모양인지, 날아오는 맘맘의 실(?)을 검으로 쳐 내 는 순발력을 보였다. 곧 이어진 광아의 공격에는 손도 쓰지 못하고 바닥에 눕긴 했지만 말이다. “자, 이렇게 되어서, 가만히 있자, 하나, 둘, 셋... 열아홉의 정보원이 생겼군. 이 제부터 암흑제국에 대한 것을 알아보기로 할까? 그런데 광아 이 사람들 어떻게 제압 이 된 거야? 혈도를 짚은 것은 아니고 맘맘이 어떻게 한 거지?” 내가 광아에게 물어 보자 광아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형님, 마취는 치료에만 쓰는 것은 아니지요. 마취를 당하면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되기도 한답니다.” 그런 모양이다. 맘맘이 치유력을 지니고 있지만 그 전에 상처를 마취시키는 능력도 있으니 전신 마취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예전에 쌀알 크기의 것들이 보였던 마취력을 생각하면 사람 머리 크기의 맘맘이라면 상상이 가지 않는다. 우리는 다시 우리의 소지품을 찾고 녀석들이 준비했던 밧줄로 굴비 엮듯이 산적들을 엮었다. 제일 앞에는 검은 갑옷의 대장을 세우고... 그리고 한 쪽에 구겨져 있는 덩치를 깨워 역시 마찬가지로 묶어서 마차에 그 밧줄을 묶었다. “자, 풍아는 카다에게 주위를 정찰하라고 시키고, 우리는 일단 이 녀석들을 데리고 조금 내려가서 점심 준비를 하자. 그 사이에 화아하고 지토가 이 녀석들 고분고군하 게 교육을 좀 시키면 되겠지. 가자.” 그렇게 우리는 다시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리 건너의 언덕 너머로는 완만하게 구릉지가 펼쳐지다가 곧 깎아지른 듯한 산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산 사이로 희미하게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 이어지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그 길을 따라가면 암흑제국의 마을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마 후에 카다의 정찰 보고가 있었다. 언덕 아래로 조금 내려간 곳에 이들의 거처로 보이는 곳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곳에는 여자와 아이들도 있다는 것이었다. “어쩌지? 그 곳으로 갈까?” 앞서 말을 타던 화아가 나에게 물었다. “아니, 아이들과 여자들이 있는데, 이들을 이렇게 데리고 간다면 무슨 소란이 일어 날지 모르잖아. 그냥 반대쪽으로 가자.” 나는 어쩐지 아이들과 여자들이 무섭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무서운 여자와 아이들을 피해서 방향을 틀었고, 구릉지를 거의 내려와서 마차를 세우고 식사 준비에 들어갔다. 그렇다고 산적 무리에게 밥을 주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식사 준비를 하면서 수아가 나에게 말했다. “오빠, 부식이 별로 없어요. 이번에 마을에 가면 재료들을 좀 사야겠어요. 김치나 그런 것은 있는데, 쌀하고 밀가루 같은 것이 얼마 안 남았고, 야채나 과일 같은 것도 거의 떨어 졌어요.” 나는 내 아공간에도 그런 것들이 거의 없다는 것을 기억해 내고는 말했다. “그래, 이번에 마을에 가면 사도록 하자꾸나.” 그렇게 둘이 작은 소리로 이런 저런 물품을 이야기 하며 수다를 떨고 있을 때, 마차 의 반대편 공지에서는 화아가 산적들을 교육 시키는 소리가 들렸다. “있잖아. 이건 별로 아프지 않을 거야. 사람 머리를 곤봉으로 때리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자, 일단 덩치 너부터 한 번 경험을 해 보도록 하자.” 어떻게 했는지 몰라도 그 뒤를 이어서 땅 위를 구르는 듯한 소음이 들려왔다. 비명이 없는 것을 보니 입을 막은 모양이었다. “클클클, 그 녀석은 내가 손을 봐야 하는데... 하는 수 없지. 이 녀석들은 내가 손 을 보도록 하지. 그냥 땅에 묻어 버리는 거야. 그게 좋을 것 같아. 땅 속에 있어보면 죽은 자의 느낌이 어떨지 알게 될 거야. 화, 그만하고 그 녀석도 이리 끌고 와. 함께 묻어 버릴 거니까 말이야. 땅 속에 생매장을 당하는 기분이 어떨까?” 들리는 소리가 상당히 과격하다. 물론 지토가 사람을 묻는다고 해도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거의 숨이 멎을 때 쯤 해서는 꺼내 주겠지... 그리고 사람들의 기척이 사라졌다. 정말로 땅 속에 묻힌 모양이었다. “그래도 정말 묻어 버리니 좀 섬뜩하네요. 너무 과격하지 않아요?” 광아가 지토에게 묻는 말이었다. “클클. 내 머리에 곤봉을 날린 것에 비하면 약과야. 이 정도는 되어야 고분고분 말 을 듣지.” “뭐 그렇기는 하지만요....” “지토 아저씨가 화가 많이 나셨나 보네요. 이런 방법을 쓰시다니..” 풍아도 지토에게 한 마디를 하고 나섰다. “그런데 시간이 좀 많이 흐르지 않았나? 이러다가 정말 죽는 것은...” 화아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클클, 땅 속에 있다고 내가 상황을 모르는 것은 아니야. 오히려 더 자세히 알지. 걱정하지 말아. 죽지 않을 테니 말이야. 클클클.” 그리고 잠시 후 한꺼번에 이십여 명의 사람들이 막힌 숨을 트는 소리가 일제히 터져 나왔다. 마차 건너편이라 보이지는 않았지만 흙 속에 갇혔던 사람들이 꺼내진 것일 터였다. “클클클 다음에는 조금 더 오래 묻어 줄 테니까 심호흡들 해 두라고, 클클클.” 그리고 그 이후로 한 동안 땅 속에 생매장을 시키는 것이 반복 되었다. 내가 그들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상당히 괴로울 것이라는 것은 장담할 수 있었 다. 그리고 식사 준비가 다 되고 나서 일행들을 불렀을 때에야 잠시 악몽에서 벗어나는 그들이었다. “크크, 그럼 너희는 다시 땅 속에 들어가라 이번에는 코는 꺼내 주지. 괜히 움직이 지 말아. 그러다가 코가 막히면 책임 못 지니까 말이야.” 끝까지 심술을 부리는 지토였다. 곤봉을 피해서 땅 위를 굴렀던 것에 자존심이 상한 것일까? 사실 그 모습이 그다지 멋진 모습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하하 식사를 마친 나는 일행들과 함께 산적들을 보러 갔다. 지토는 땅 속에서 코만 내 놓은 사람들을 꺼내 주었다. 이미 그들 전부는 눈동자 깊이 회색의 공포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런 눈동자는 이들이 어떤 형태의 저항도 포기 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다만 검은 갑옷의 대장만이 아직도 살아있는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보았는지 지토는 대장만 끌고 저만치 일행에게서 떨어졌다. 나는 덩치의 혈도를 풀고 질문을 했다. “나는 이 암흑제국에 처음으로 와서 아는 것이 별로 없다. 그래서 내 생각에는 네 가 우리들에게 암흑제국에 대한 여러 가지를 알려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렇지?” “그, 그러믄요. 그렇지요. 뭐든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면 묻기만 하십시오. 뭐든 아 는 대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전히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덩치는 내가 묻는 것에 답하는 것만이 자기가 그 공 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는 모양이었다. “그래? 그럼 일단 질문을....” 그러는 동안에 화아, 풍아, 광아도 역시 나름대로 마음에 드는 녀석을 잡고서는 질문 을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질문은 작게는 화폐의 단위에서 크게는 정치와 국가 지휘체제에 이르 기까지 다양한 것들이었고, 수아가 설거지를 마치고 구경을 왔다가 별 재미가 없던지 란이와 함께 언덕으로 주위 경치 구경을 가고 난 이후로도 상당한 시간이 걸려서야 끝 이 났다. “어째, 가는 곳 마다 이렇게 상황과 여건이 달라질 수 있는지 신기하네요.” 광아가 처음 한 말이었다. 우리들은 대략적인 정보 수집을 마치고 수아와 함께 탁자에 앉아 정보 교환을 시작했 다. 대략 그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다. 암흑제국도 화폐는 덴을 쓴다. 단위는 덴이지만 동전의 종류가 다르다. 가치는 한타 와 비슷해 보인다. 암흑제국을 다스리는 것은 역시 황제이다. 하지만 여기서 황제란 세습이 아니다. 일종의 쟁취라고 해야 할까? 능력 있는 귀족 이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쉽게 이야기하면 암흑제국에서는 능력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쟁투(爭鬪)라는 제도이다. 이것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도전을 해서 윗사람이 지닌 모든 것을 빼앗는 것을 말 한다. 윗사람은 아랫사람에게 지면 그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된다. 그렇다고 일반 평민이 귀족에게 쟁투를 청할 수는 없다. 암흑제국에서는 일정한 지위가 되면 그 아래로 일정 수의 부하를 거느리게 되는데, 그 부하들 전부가 쟁투에서 쓸 수 있는 무기가 되는 셈이다. 때문에 일반인이 귀족에 게 쟁투를 청하려면 그 많은 부하들을 한꺼번에 상대해야 한다는 결과가 나온다. 때문에 그렇게 무모한 쟁투는 일어날 수가 없다. 다만 그 귀족의 바로 아래에 있는 놈이 바로 위의 귀족에게 쟁투를 청하면 귀족은 자신의 부하들을 쟁투에 쓸 수가 없 다. 왜냐하면 자신의 부하이기도 하지만, 쟁투를 청한 놈의 부하이기도 하기 때문이 다. 그리고 쟁투는 귀족 간에도 일어날 수 있는데 그런 경우에는 서로가 가진 부하의 수 가 비슷하다면 그들 부하 역시도 쟁투에 참가하지 못한다. 그런 경우 대대적인 싸움 이 일어나서 국가 전력 자체가 약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쟁투는 1:1의 싸움이 되고 이기는 자가 진자의 모든 것을 가지게 된 다. 그리고 그렇게 일정 지위가 생기면 부하들과 함께 그 재산을 가지게 되고 또, 권력 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아무튼 한 마디로 강한 녀석이 모든 것을 가지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쟁투를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도 권력자의 비호를 받아 그 힘을 기르는 모사 같은 존재들이 있으니 말이다. 쟁투는 누구나 누구에게나 청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 위의 권력자가 그것을 대리 해 줄 수도 있다. 즉 아끼는 부하의 일이라면 그 상관이 힘을 쓸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경우는 그리 많지 않지만 말이다. 그리고 쟁투가 성립하는 것은 5명 이상의 참관자가 있는 자리에서(신분이 확실한) 쟁 투를 신청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성립한다.(받아들이는 것은 무의미한 절차 이 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진 것이 되니까...) “오빠, 참 재미있는 제도네요? 그럼 우리도 야금야금 쟁투를 해 나가다 보면, 황제 라는 자리에도 오를 수 있지 않을까요?” 풍아가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글쎄, 제도상으로는 그것도 가능은 할 것 같다만... 이 녀석들은 작은 마을의 영주 급에 해당하는 지위의 인물들의 실력도 모를 정도로 정보가 빈약한 녀석들이니 상급 귀 족의 실력이나 황제의 실력을 가늠해 볼 수도 없는 것이 아니겠냐? 그런데 그렇게 성 급하게 이야기 할 것은 아니겠지...” “하지만, 오빠보다 강한 사람이 어디 있기나 할까?” 풍아는 여전히 아깝다는 듯이 말했다. “그건 모르는 일이다. 혹시 황제가 마수사고 초마수라도 부린다고 하면 상황이 그 리 쉬운 것만도 아니겠지. 거기다가 암흑제국에는 마계의 힘을 사용하는 존재들이 있 다고 했으니 만약 마계의 힘을 빌려 쓴다고 하면 그건 추측조차 불가능할 정도다. 내 가 아무리 조금 능력이 있어도 세상에서 제일은 아니지... 누웬의 황제만 하더라도 만 만한 녀석이 아니었는데....” “뭐 그렇기는 하네요. 거기다가 그런 귀찮은 자리를 할 오빠도 아니고...” 풍아는 이해를 했다는 표정이었다. “그건 그렇고, 왜 누웬이나 암흑제국이나 여자들과 아이들에 대해서 이렇게 대우가 엉망인 걸까? 누웬에서 봐도 여자들은 별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 같았고, 여기 암흑 제 국에서는 여자에게는 사회로의 진출이 거의 막혀 있는 것 같던데... 오죽하면 쟁투라 는 것에도 여자는 기회조차 가질 수 없게 되어있으니 말이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언니?” 수아가 풍아에게 물었다. “말 그대로야. 완전히 살림하고, 애 낳고 일하는 것이 여자들의 몫이고 다른 어떤 사회적인 진출도 막혀 있는 모양이야. 참, 하나 있구나. 사제가 되면 어느 정도는 영 향력이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으니 말이야.” “사제요? 어떤 사제요?” “음, 그러니까 암흑제국에서 국교로 삼고 있는 종교가 있는데, 그 루시퍼를 섬기는 종교야. 이를테면 마계의 힘을 빌어서 축복을 내려 주기도 하고 흑마법으로 여러 가 지 일도 하는 모양이야. 웃기는 건, 그 종교에서 신성력은 곧 흑마력이라는 등식이 성 립한다는 거야.” “그런 종교가 있어요? 이름이 뭐에요? 그 종교?” 수아가 다시 물었다. “응, 암흑교. 간단하지. 암흑제국의 국교인 암흑교. 절대신은 루시퍼. 그리고 그 아 래도 여러 마신들이 있어서 종파가 몇 개로 분파 되어 있는 모양이야.” “그렇군요. 암흑교라. 별로 호감이 안 가는 이름이네요.” “뭐, 그렇다고 해도 종교는 종교야. 믿음이 있어야 성립이 되는 것이지. 물론 이 나 라에서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지만 암흑교를 신봉하는 사람들도 많아. 어느 정 도는 신의 힘을 빌린 이적이 일어나기도 하니까 말이야. 예를 들면 치유력이나 개인 능력의 신장이라거나 마계의 힘을 빌려 쓰게 해 준다거나 하는 것도 이 암흑교에서 하 는 것이니 말이야. 물론 소원을 빌면 그것을 들어 주기도 한다더군. 뭐 대가를 지불 해 야 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야.” 나는 수아에게 좀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그런데 형님, 이대로 암흑제국으로 들어가실 건가요?” 광아가 앞으로의 여정을 물어왔다. “글쎄, 어차피 온 거니까, 둘러보고 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은데, 거기다가 암흑 제국의 반대쪽 국경선에는 여인왕국과 국경을 이루는 곳도 있다고 하니까 그리로 가 서 여인왕국에 갈까 생각 중이거든.” 내가 암흑제국을 가로질러 갈 생각을 밝히자 광아가 조금 어두운 표정으로 다시 물었 다. “하지만 형님. 방금 저들에게 들어서 아시겠지만, 암흑제국에서는 살인이 너무도 쉽 게 일어나지 않습니까? 한 마디로 너무 험악하다는 것이지요. 그나마 아이와 여자에 대한 살인은 제법 규제를 하는 것 같긴 하지만 그것도 큰 마을 이상의 규모가 아니고 는 잘 지켜지지도 않는 것 같고 말입니다. 제가 걱정하는 것은 암흑제국에서는 인간 들 의 어두운 면들이 너무 많이 볼 것 같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우리들 형제 와 지토 아저씨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광아의 걱정이 무엇인지 대략 짐작이 되었다. 아직은 채 성장이 되지 못한 동생들과 지토가(여기서 성장이란 인간적인 면을 지녀가 는 것을 이야기한다.) 암흑제국의 모습들을 보면서 어떤 영향을 받데 될지에 대한 걱 정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도 어느 정도는 그런 면이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인간들의 어두운 면이란 어느 곳이나 있는 것이고, 암흑제국에 어두운 면이 만연되어 있다고 해도 여기도 사 람 들이 사는 곳이니 따뜻하고 포근한 일들이 없으란 법도 없었다. 어느 한 쪽의 모습으로 동생들과 지토에게 편협한 모습을 가지게 하고 싶지는 않았 다. “그래, 어쩌면 많이 힘들고 어려운 것들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언제 까지나 외면하고 모른 척 할 수 있는 것들은 아니지 않겠니? 사람들이란 때로 너무 이 기적이고 또, 때로 너무 이타적이기도 하니까 말이야.” 나는 그렇게 말하고 동생들과 지토를 바라보았다. 뾰로로롱. 뾰로로. 로롱 란이가 무거워진 분위기를 깨려는 듯 탁자 위를 돌며 노래를 불렀다. 그 덕분인지 우리들은 곧 ‘어떻게 되겠지’라는 막연한 말로 미래에 대한 불안을 씻 고 탁자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하지요? 끌고 다닐 수도 없고...” 풍아가 나에게 물었다. “그냥 그대로 둬. 나중에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회복이 되겠지. 그리 고 여기 모닥불을 피워 놓으면 이들의 마을에서 사람이 오겠지. 행방불명이 되었으니 찾지 않겠어? 그러기에 그냥 원래 목적대로 사냥이나 하지 지나가는 사람을 털 생각 을 뭐하러 했데? 정말 재수라고는 없는 녀석들이라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 사람들을 그대로 두고, 험악한 산악지대를 향해 마차를 몰 았다. 그 뒤를 화아와 지토 풍아 광아가 따랐다. 녀석들은 원래 큰 규모의 도시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여기 저기 떠도는 이른바 부랑 아 신분의 놈들이라는 것이었다. 원래는 미엔리도에 살던 녀석들이었지만 그 곳에서 하나 둘 자리를 잃고 쫓겨 온 것이라고 했다. 암흑제국이라는 곳이 상당히 험한 곳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산악지대로 접어들면서 실 감하게 되었다. 심심찮게 괴물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리고 이 괴물들은 대부분이 산악지대에 살고 있는 마수들에 의해서 생겨난 것들이 라는 말을 산적들에게 들었었다. 괴물들은 예전 유소와의 여행에서 본 것과 비슷한 것들도 있었고 처음 보는 것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밀림과 산악지역이어서 그런지 거기에 적합하게 만들어진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예를 들면 나무 위를 뛰어다니는 녀석이라거나, 나무속에 숨어서 기습을 하는 녀석이 라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한 번은 넓은 나무 잎으로 위장한 녀석도 있었는데 대상을 보쌈 하듯 싸서는 아주 강 력한 산성으로 공격하는 녀석이었다. 덕분에 화아와 풍아의 옷에 구멍이 생기고 말들이 상처를 입었지만 맘맘이 간단하게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정말 생각보다 대단한 치유력이었다. 그렇게 심심찮게 괴물들의 습격을 받다 보니 무료하거나 지루하다는 느낌은 없이 길 을 갈 수 있어 좋았다. 뭐 별로 위험하지는 않아서 그런 생각이 든 것이겠지만 말이다. 우리들은 산적들을 뒤로 하고 험준한 산악지대의 계곡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마을을 찾아 가고 있었다. 산적들의 이야기로는 그 계곡의 안쪽으로 하루나 이틀을 가다 보면 미엔리도라는 제 법 큰 마을이 있다고 했다. 예전에 누웬의 상인들이 그 곳에서 거래를 했다고 하니 아마 우리의 유리도 그 곳에 서 거래를 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 곳으로 가는 길은 그 사이에 거의 왕래가 없어서 괴물들과 여러 장애물들 이 많은 편이었다. 한 마디로 우리가 가면서 길을 내고, 청소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우리가 가는 길은 예전에 동쪽 불모지대에서 정령들의 땅으로 들어가던 때와 비슷한 (물론 그에 비하면 상당히 넓고 또 양쪽 벽이 나무가 우거진 계곡이라는 차이가 있지 만) 모습이었다. 말 그대로 계곡인 것이다. 가끔가다 지역이 넓어지고 분지 같은 모습을 보이는 곳이 있고, 그 곳에는 어김없이 작은 호수가 자리하고 있었다. 계곡의 중앙에는 얕은 개울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개울은 처음 우리가 들어온 쪽의 산에서 떨어져 내린 물줄기에서 시작된 것이었는 데, 이 곳의 지형 상 이런 식의 물줄기들은 너무나 흔할 것이었다. 여기 저기 이런 계곡이 있을 것이고 계곡에는 어김없이 물이 흐를 것이기 때문에... 미엔리도는 산적을 만난 밤이 지나고, 다음 날 하루가 거의 저무는 지금까지도 나타 나지 않고 있었고, 길의 사정도 별로 나아지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오빠, 이런 곳에 왜 마을이 있는 것일까요? 신기하네. 마을이면 사람도 많 고 그럴 텐데 도대체 이런 산 속에 뭐가 있다고 마을이 생겼을까요? 혹시 누웬과의 상 거래 때문에 생겼던 마을이면 지금쯤이면 없어지지 않았을까요?” 지루했던 것일까? 수아가 말을 걸어왔다. “그건 미엔리도가 광산촌이기 때문이라고 하던데? 미엔리도는 금광과 철광, 거기에 동광까지 엄청난 지하자원이 있는 곳이라 큰 마을이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하더라. 그 래 서 암흑제국에서는 제법 중요한 마을이기도 하고 말이지. 금과 철과 구리라면 굉장한 것이지. 나라에서 직접 관여를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해. 뭐 일반인이 아닌 노예들의 경우에는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로 최악의 장소라고 하지만, 광산과 관련된 사람들에게는 큰 이익을 주는 곳이라니 가 보면 알겠지.” “노예요? 노예가 있어요?” 수아가 놀랐다는 듯이 물었다. 어제 그 이야기는 안 했던 모양이다. “그래, 암흑제국에는 노예가 있단다. 흔히 쟁투에서 지고 살아남는 경우에 노예가 되고, 어떤 경우에는 자기 소유의 여자와 아이들을 노예로 팔아버리는 경우도 있다고 하더구나. 하지만 한 번 노예가 영원한 노예는 아니란다. 일정 금액에 해당하는 노예 라고 할까? 평생 갚지 못할 금액이면 평생 노예겠지만 일정 금액의 노예들은 그 금액 을 갚고 나면 다시 자유인이 된다더구나. 그러니 노예의 가격은 그 노예가 진 빚의 크 기와도 상관이 있는 것이지. 참, 그런데 실상은 그 금액을 전부 갚고 노예에서 풀려 나 는 경우는 백에 하나도 찾기 어렵다더군. 노예도 먹고 자고 해야 하니 그 비용을 계 산 하면 점점 빚이 늘기도 한다나?” 내 이야기에 수아는 곰곰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설마 노예를 풀어줘요 우리. 뭐 이런 소리는 하지 않겠지. 아 무리 돈이 남아돌아도 그런 짓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어떤 이유로든 노예가 된 것도 이 사회의 일정한 틀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니 그런 상 황에 끼어들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내가 세상을 바꾸겠다는 의지를 지닌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럼요. 오빠, 처음부터 엄청난 금액으로 노예를 팔면, 그렇게 되면 그 노예는 절 대로 벗어날 길이 없는 것 아닌가요?” 그래도 다행이다. 이런 것을 고민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수아야. 너에게 누군가가 무얼 팔려고 하는데 네가 생각하기에 비싸다면 너는 그 걸 살 생각이 있니? 안 사겠지? 그러니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노예를 팔 수는 없단다. 그리고 노예들은 처음 팔린 가격에서 더 빚을 지지 않는 이상은 그 금액에 액수가 더 해지는 경우는 없지. 누군가가 어떤 사람에게 정말 악감정이 있어서 평생 노예로 만 들 고자 한다면 아주 비싸게 거래했다는 것을 노예 문서에 적을 수는 있지만 그 경우도 세금이 꽤나 높기 때문에 특별하지 않으면 쓰지 않는 방법이라더구나. 세상에 어떤 법 이라도 허점은 있는 거니까 말이다.” “네, 그렇군요. 그럼 어린 노예는 좀 더 비싸겠네요. 일을 오래 할 수 있을 테니 말 이죠. 그리고 나이가 든 노예는 값이 싸겠고요.” “그렇지. 그리고 실제 어릴 때에 1만 덴을 주고 산 노예라고 하더라도 나이가 들고 늙으면 그 값이 내려가게 되는데 그런 경우에는 그 주인이 노예의 빚을 탕감해 주는 형식이 되는 것이지. 그래서 늙어서 1000 덴에 팔린 노예의 빚은 1천 덴만 남게 되는 형식이란다.” 나는 수아에게 비교적 자세하게 암흑제국의 노예 제도에 대해서 이야기 해 주었다. “그런데 노예가 빚을 갚았는지 어쨌는지 어떻게 알 수가 있지요? 노예에게 임금을 지급해서 그걸 모아서 갚으라는 것도 아닐 테고 말이에요.” 이런, 이런 궁금한 것도 많네. “그건 말이다. 일정한 일을 하는 노예는 일정한 기간에 일정 액수를 자연히 탕감하 게 되어 있단다. 노예로 마부 일을 시킨다면 그 노예는 한 달에 얼마의 빚을 탕감한 다. 뭐 이런 식의 이야기지. 그리고 그런 신고를 대체적으로 일정 기간마다 하게끔 되 어 있는 모양이더라. 그러면서도 노예들에게 먹이고 입히는 것에는 액수를 정하지 않 은 것 때문에 앞에 있던 제도들은 유명 무실이지. 보통의 경우 한달에 100덴을 갚을 수 있는 경우에는 의식주의 해결 명목으로 110덴 정도의 비용이 들었다면서 도리어 빚 을 늘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하니 말이다.” 그렇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도 계곡은 끝이 없을 것 같이 이어지고 있었 다. “오빠, 저기 계곡이 휘어진 그 뒤쪽으로 마을이 있데요. 아마도 거기가 미엔리도인 모양이에요.” 풍아가 말을 몰아와서는 카다의 정찰 결과를 알렸다. “그래? 얼마나 걸릴 것 같은데?” “아마, 어두워지고도 한참을 가야 할 것 같아요. 계곡이라 빨리 어두워지니까요.” “그래? 그럼 어쩔까? 미엔리도에 들어가서 저녁을 먹을까? 아니며 여기서 밤을 지내 고 내일 아침에 미엔리도에 들어갈까?” 내가 주위를 둘러보자 그 사이에 말을 몰고 몰려든 지토와 동생들이 두리번거리며 서 로의 눈치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냥 여기서 자고 가지. 어차피 잠도 마차에서 자면 되고, 식사도 수아의 실력보 다 나을 거라는 보장도 없는데. 안 그래?” “그래요 형님. 아침에 들어가서 시장도 둘러보고, 유리를 팔 수 있는 곳도 찾아보고 하지요. 밤에는 어쩌면 들어가기도 어려울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워낙 흉흉한 곳이 라 밤에 출입이 통제되는 경우도 많다고 하니까요.” 화아의 말에 광아가 찬성을 하고 나섰다. “그렇게 하지. 우리가 급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말이야. 클클클.” 지토가 여전히 파이프 담배를 물고 중얼거렸다. 결국에 풍아의 의견은 들을 것도 없이 결정이 나 버렸다. 그리고 해가 졌는지 계곡의 앞뒤에서 밀려드는 어둠에 하나 둘, 형체를 빼앗긴 사물 들이 늘어갈 무렵 우리들은 마차를 세우고 야영 준비에 들어갔다. 이제는 이런 생활이 익숙한 것인지, 마차를 세우면 화아 풍아 광아는 대련이나 운동 을 시작하고, 지토는 게브와 쌍둥이가 되어서 탁자에 앉고, 수아는 식사 준비를 하 고, 나는 주위에 결계를 쳐서 밤사이를 대비한다. 그리고 결계가 끝이 나면 수아와 함께 식사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 동안에 카다는 마차의 지붕이나 말의 등에 앉아 있고, 아눈은 화아의 칼 속에서 잠시 나와서(대련하는 동안에는 아눈이 없는 생태로 한다.) 땅바닥을 뒹굴고, 파울도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이곳저곳으로 산책을 한다. 그리고 새로운 일행인 맘맘은 가끔 나무의 수액을 빨아 먹거나(다른 환수는 먹지 않 는데 맘맘은 먹어야 한다.)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운동을 한다. 마지막으로 란이는 언제나 내 주위를 떠나지 않고 따라 다닌다. 그러다가 가끔씩은 내가 치는 결계에 대한 것을 묻거나, 마법에 대해 묻기도 한다. 이를테면 나에게 개인 교습을 받는 셈이다. 이상하게도 란이는 마법이나 진법 등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편이다. 거기다가 예전에 배웠던 마법들도 잊지 않고 있었다. 실제로 보면 마법이 아니라 형태만 비슷한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란이는 마나를 쓰지 않고 마법을 하는데, 잘 보면 그것은 마법이 아니라 마법의 겉모 양만 흉내 낸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탁자위에 음식이 차려지면 게브는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고 우리 들의 식사가 시작된다. 그리고 식사 후에는 차를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마차 안으로 들어가 잠 을 자는 것이다. 아침 해가 어둠을 몰아내고 밝음 속에서 사는 것들의 잠을 깨우는 시간까지. *** 저는 이만 퇴근을... 그래도 크리스 마스인데... *** 결국 오늘 나와서 여유분만 축내고 들어갑니다. *** 그래도 이번에 올리는 분량 정도는 썻으니... *** 출근해서 올린 정도의 분량이 줄어들었네요. *** 그래서 110 페이지의 여유가 남는군요. *** 그래도 이만 들어가 봐야 해요. 좋은 사람을 만나서 영화라도 보고 *** 떡꼬치라도 사 먹으면서... *** 늦은 크리스마스를 자축해야지요. *** 그럼 여러분도 행복하세요. *** 내일 낮에 출근해서 또 올릴께요. (내일은 출근해서 써서 올려야지. 여유가 너무 없네요. ㅡ.ㅡ;;) 제 목: 내 가족 정령들 [154 회] 글쓴이: 탁목조 2002-12-26 조회/추천: 10035 / 37 암흑제국이란 곳이....그런데 넌?!!! - 2 “자, 그럼 이제 미엔리도를 구경해 보도록 할까? 대신에 우리들은 누웬에서 온 장사 꾼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여기를 벗어나면 우리는 암흑제국의 사람으로 행동해야 할 테니까 다른 사람들의 행동들을 잘 봐 두도록 해라. 어색하지 않게 말이야.” 나는 마차를 출발시키기 전에 동생과 지토에게 이야기 했다. “그런데 지토 아저씨는 아무래도 암흑제국의 사람으로 보이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을 까? 걱정이네.” 풍아가 지토를 보고 말하자 지토가 소리를 질렀다. “걱정하지 말아라. 이것아. 암흑제국에도 가끔은 바위 정령족이 돌아다니기도 한다 니 말이다. 클클클.” “저는 그것 보다는 지토 아저씨가 바위 정령족이라는 것이 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아무래도 알려지기로 바위 정령족은 쇠와 돌과 나무 등의 재료를 이용한 물 건 들을 만드는 데에 탁월한 솜씨를 지닌 종족이라는데 만약 지토 아저씨에게 그런 것을 부탁하면 어떻게 하지요? 특히나 우리가 가는 미엔리도는 광산도시라니 그런 문제가 생길 확률이 크잖아요.” 광아가 지토의 말에 걱정스러운 투로 대꾸를 했다. “걱정하지 마라. 나는 손재주가 전혀 없어서 바위 정령족에서 쫓겨난 신세니까 말이 야. 이를테면 돌연변이라고 해야 하지. 클클클.” 어느 틈에 지토는 그런 것까지 생각을 했던 것일까? “그럼, 이제는 별 문제가 없을까? 출발해도 되는 거야?” “형님,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는데요? 풍 누님과 수아는 어떻게 하지요? 암흑제국 에서는 여자들의 위치가 너무 낮은데 풍 누님 성격에 사건 저지르는 것은 순식간일 텐 데요.” 광아가 다시 문제점을 이야기했다. 상당히 풍아의 눈치를 보고 있었지만, 풍아도 어느 정도는 틀리지 않다고 생각하는 모양인지 잠시 노려보는 것으로 광아에 대한 1차 응징을 마무리 했다. (나중에 무슨 일이 있을지는 나도 모른다.) 암흑제국이 그런 면이 없지 않았다. 여자가 주점이나 음식점에 있는 경우는 손님 접대를 위한 경우였지 손님으로 가는 경 우는 없는 것이다.(물론 가끔은 지위가 높은 인물의 총애를 얻는 여자가 있어서 특별 대우를 받기도 한다지만..) “음, 정말 문제네. 수아는 워낙 얌전하니까 루탄 형 옆에 있으면 될 거고. 풍아는 어떻게 하지? 누가 데리고 있어야 할 텐데...” 화아도 걱정이 되는 말투였다. 그랬다. 여자가 혼자 거리를 어슬렁거리거나 혹은 주점이나 음식점을 어슬렁거릴 수 는 없을 것이었다. 특히나 그 지역의 사람이 아니라면 더더욱. “그럼 풍아는 화아가 책임지고 데리고 다녀. 사고 못 치게 하고, 광아도 함께 붙어 있고. 그리고 풍아는 혹시라도 문제가 생겨도 오빠들이나 광아에게 맡기고 참도록 하 고. 알았지?” “으응, 알았어 오빠.” 풍아는 왜 말을 할 때마다 말끝이 짧아졌다 길어졌다 하는 것일까? 제 멋대로 하고 싶은 데로 하는 것이니, 그것도 바람의 성향일까? 우리는 대충 출발 전의 점검이 끝나자 미엔리도를 향해 힘찬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시계방향으로 휘어지는 계곡을 따라 한참을 가서야(반나절은 걸린 것 같다.) 드디어 미엔리도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에? 저런 모양이었어?” 미엔리도를 본 풍아의 첫 감상이었다. “세상에 저건 댐이잖아. 계곡을 통째 막아서 댐을 쌓았네? 그리고 그 댐에 문을 달 아 놓은.” 그랬다. 미엔리도는 계곡을 막아서 만든 댐처럼 성벽을 쌓고 성문을 달아놓은 모습을 하고 있 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경비병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성 벽 위 망루로 보이는 곳에 경계병이 있는 모양이었지만 그 경계병도 우리 가 성벽에 가까이 갈 때까지 우리의 접근을 모르고 있었다.(완전한 근무 태만이다.) 그리고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 때에서 우리를 발견한 모양이었지만 성벽의 높이 가 높고 미엔리도 안쪽에서 들려오는 소음 탓 에 그들이 하는 말소리가 겨우겨우 들 릴 정도였다. 아니 보통은 안 들렸겠지만, 우리 일행이 보통 일행이 아니니까 말이다. “거기 오는 자들은 누구인가? 소속과 신분과 방문 목적을 밝혀라.” 쩝, 그렇게 밖에는 소리를 못 지르나? 그리고 그렇게 질러서 밑에 있는 사람이 듣기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안 들린다는 표정과 몸짓을 해 보이고 마차에 앉아서 반응을 기다렸다. 그리고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나고 미엔리도의 성분 한 쪽에 열렸다. 커다란 성문이 한 쪽에 달린 쪽문 같은 것이 열리고, 십여 명의 병사를 거느린 30대 초반의 인물이 걸어 나왔다. 병사들은 파이크 종류를 들고 있었지만 허리에는 롱소드 계열의 무기를 차고 있었 고, 가죽과 금속판으로 만들어진 갑옷을 입고 금속제의 투구를 쓰고 있었다. 우두머리인 듯한 인물은 창이 없고, 검은 망토가 달려 있는 옷을 입고 있었으며 허리 에는 역시 칼을 차고 있었다. 머리는 짧게 잘랐는데 투구를 쓰지 않아서 볼 수 있었다. “누구냐? 그 쪽으로 길이 통하는 마을은 없는 것으로 아는데 어디에서 온 것이냐?” 어째 이 지역 사람들은 무조건 반말부터 하고 보는 것 같네? “우리는 누웬에서 유리를 가지고 온 상인들입니다. 이번에 누웬 황제께서 국경선에 있던 숲에서 일어나는 이상을 조사하게 하시고 그 원인을 제거하게 하시어 길이 열렸 기에 서둘러 유리를 싣고 거래를 하기 위해 달려왔습니다. 상인이란 동작이 빨라야 이 윤을 많이 남기는 법이지요. 그리고 여기 일행들은 제 동생과 친구입니다.” 나는 반토막짜리 말을 하는 녀석에게 공손하게 대답을 했다. “그래? 길이 열렸단 말이지? 그럼 이제 이 문도 쓸모가 있게 되겠군. 여봐라. 성문 을 열어 마차가 들어가도록 하라.” “옛!” 명령과 대답, 그리고 그 실행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자, 그럼 나중에 돌아갈 때 보도록 하지. 알고 있겠지? 성문을 지나는데 어느 정도 의 통행료가 있다는 것을 말이야. 지금은 거래 전이니 나중에 나갈 때에 통행료를 내 도록. 마차 하나와 말, 그리고 사람들이 여섯이니 3만덴 정도면 되겠군. 마차가 많으 면 더 많이 받겠지만, 일단 마차가 하나뿐이니 엄청난 이익이 남는 것도 아닐 테고, 이 정도 통행료면 적당하다고 생각하는데 너희의 생각은 어떠냐?” 그 말을 하면서 눈빛을 빛내는 녀석의 표정으로 보아서 이 통행료의 대부분은 이 자 의 주머니로 들어가리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요. 물론이지요.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이번이 첫 거래 여행이라 모 르는 것이 많습니다. 모쪼록 이해를 해 주십시오. 그리고 이것은...” 나는 은근히 3천 덴 상당의 보석 하나를 꺼내서 그에게 넘겨주었다. “좀, 잘 봐달라는 것입니다. 하하하” “크흐흐. 역시 말이 통하는 놈이로군. 그래 그래 알았다. 내가 미엔리도의 북문 책 임자이다. 그러니 어디에서 문제가 생기면 내게 도움을 청해라. 내가 성안에도 잘 이 야기를 해 두지. 크흐흐흐.” 역시 돈은 무서운 것이다. 하지만 입구에서부터 이런 상황이면 암흑제국이 어떤 상황인지를 어느 정도는 짐작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잠시 북문 책임자라는 녀석은 성 안에 있는 여관 겸 주점을 하나 알려주며 그 곳에 묵으라고 은근히 권했다.(설마 이 녀석이 호객꾼의 노릇도 함께 하는 것일 까?) 그리고 지금은 거래가 없지만 예전 누웬의 유리를 전문으로 거래하다가 지난 3년 사 이에 다른 업종으로 바꾼 인물도 한 사람 알려 주었다. 아! 돈의 힘은 정말 엄청나다. 끝에는 북문 책임자는 허리를 약간 숙이는 자세까지 도 나왔던 것이니... 우리는 활짝(사실 활짝은 아니고 제법 넓게)열린 성문을 지나 미엔리도에 첫 발을 들 여 놓았다. 성문이 열리면서 성안의 소음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고, 그 소음 속에 성 안을 오고가 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유달리 여자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암흑제국의 관습과 제약 탓도 있겠지만 광 산도시라는 특이성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아무튼 미엔리도의 첫 인상은 시끄럽고, 먼지 많고, 어둡고, 칙칙하다는 것이었다. 광산이 가까이 있기 때문인지 흙가루가 많이 날렸고, 건물들도 그런 가루를 뒤집어쓰 고 있었다. 더구나 밀림지역이다 보니 아침저녁으로 생기는 안개나 이슬에 그런 흙가루들이 섞 여 건물의 벽에 붙어 있어 더욱 지저분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우리들을 성문에서 이어지는 대로를 따라 북문 책임자가 알려준 시장으로 향했다. 여러 갈래로 퍼질 수 없는 지리적 조건 때문인지 미엔리도는 일정하게 건물들이 늘어 서 있는 열촌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따로 안내가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간단한 구조 를 지닌 듯 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길을 따라 가면서 변화도 있었는데, 시끄러운 소음의 정체가 나타 난 것이었다. 그것은 엄청난 수의 대장간과 석공들의 가게였다. 수백에 이를 가게들이 열 지어 있었던 것이다. “정말 대장간이 많이 있네요? 저 사람들은 저렇게 물건을 만들어서 어디다 파는 것 일까요?” 수아가 옆자리에서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워낙 주위가 시끄러워서 하마터면 수아 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뻔 했다.) “으응? 아! 저들은 실제로는 거의 몇 사람의 밑에 딸려 있는 사람들이야.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여기를 총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지. 저들 대부분은 노예야. 저 기 사람들 귀 뒤에 보면 노예를 표시한 표식이 있을 거야. 저건 노예 신분에서 벗어 나 지 않으면 절대로 없어지지 않아. 노예 문서가 없어지면 자동적으로 없어지지. 일종 의 주술적인 것이야.” “으음, 저기 귀 뒤에 지네 같은 모양을 말하는 거죠? 저게 노예를 뜻하는 거라 니...” 우리들은 그 시끄럽고 복잡한 대장간 거리를 지나서 시장 거리를 향해 마차를 몰았 다. “그런데 저 노예들이 도망을 가면 어떻게 하지요? 감시하는 사람도 없는 것 같던 데...” 수아가 다시 물었다. “그건 아주 간단해, 뭐냐 하면 도망가는 노예는 죽인다. 만약 문제가 생길 경우에 는 주인이 와서 노예 증서를 보여 주어야 찾아 갈 수 있는데, 보통의 경우에는 주인 이 가까이에 없는 경우에는 그냥 죽이지. 왜냐하면 도망간 노예와 연관이 있는 경우 에 는 상당한 물적 손해를 볼 수도 있고, 또는 함께 잡혀서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으니 까. 더군다나 도망간 노예였다는 것이 밝혀지면 노예 주인이 죽은 노예의 몸값 중에 서 절반 정도를 보상금으로 주게 되어 있어서. 죽여도 돈이 되거든. 그러니 도망을 나 온 것 같은 노예는 죽이지. 그래서 노예들은 주인이 정한 범위 밖으로는 실수로라도 나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던데?” 언제 왔는지 광아가 수아에게 자세한 설명을 했다. “응, 그렇구나. 고마워 광아 오빠.” “자, 저기가 시장인 모양이다. 그리고 저기 저 2층 석조 건물이 바로 예전에 유리 를 거래했다던 그 집인 모양이네. 어디 가 보도록 하자.” 우리는 말과 마차를 그 건물 앞에 세우고, 나와 광아만 안으로 들어가 거래를 하기 로 하고 나머지는 말과 마차를 지키기로 했다. 맘맘이나 카다에게 맡길 수도 있지만, 괜히 마차와 말을 지키는 사람 없이 두었다가 다른 사람들이 엉뚱한 마음을 먹게 만들어 사건을 일으키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나와 광아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제일 먼저 눈에 보인 것은 벽을 장식하고 있는 수 많은 금속 무기들이었다. 그리고 벽과 바닥을 장식한 것들에는 돌로 조각되거나 만들어진 조각과 돌판들이 있 었다. 그렇게 진열된 물건들 앞쪽에 편안한 의자와 탁자가 있었고, 그 곳에는 찻잔을 마주 한 두 사람의 인물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우리를 돌아보았다. 그 둘은 모두 30대 정도의 나이로 보였고, 건장하고 튼튼한 몸을 지니고 있었다. 꼭 비교하자면 입구를 마주 보고 있는 사람이 좀 더 우람한 육체를 지니고 있기는 했지 만 말이다. “어서 오시오. 무슨 용무이신지. 저희 가게는 건축 재료와 금속 무기, 두 종류를 다 루고 있습니다만, 소매는 하지 않습니다.” 입구를 마주 보고 있던 우람한 덩치의 인물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큼직한 목소리로 말 했다. “음, 저희는 누웬에서 유리를 거래하고자 온 상인들입니다. 그 사이에 누웬과 제국 사이를 막고 있던 장애가 없어졌기에 서둘러 상품의 유리를 싣고 큰 이익을 위해 불 철 주야 달려 이제야 도착을 했습니다.” 광아가 옆에서 대답을 맡고 나섰다. “누, 누웬의 유리라고!!”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일어난 사람은 등을 보이고 앉아있던 사람이었다. 조금은 왜소한(분명히 말하지만 그건 상대적인 것이다. 나와 비교하면 주먹 하나 정 도는 키가 더 컸고, 몸도 근육질이었다.) 그 사내가 소리를 지르고 일어나자 덩치가 큰 인물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 이봐, 여기는 내 가게다. 그러니 내 손님이라는 말이지. 끼어들 생각을 하지 말았으면 한다.” 당황한 표정이었지만 그의 말은 듣는 사람이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위압감과 살기를 지니고 있었다.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내 일을 방해하면 죽인다라는 느낌이 드는 말이었던 것이다. “크크, 이봐. 아직 거래가 성립된 것도 아닌데 그렇게 자기 것이 된 것처럼 말을 하 는 것은 보기에 좋지 않지. 그리고 니가 나에게 그렇게 소리를 친다고 내가 무서워 할 것이라고 생각하나?” 왠지 낮은 목소리로 하는 말이었지만 이 말에도 살기가 숨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 는 목소리였다. “저기, 여러분? 일단 저희 형님의 말씀을 들어 보시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아마 두 분이 싸우실 이유가 없을지도 모르거든요.” 광아가 중재에 나섰다. “흠흠, 제 생각에는 여기 계신 두 분이 모두 유리가 필요하시다면 제가 두 분 모두 에게 유리를 드릴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번에 들고 온 물량이 상당히 많은 것이기 때 문에 충분하리라고 봅니다만. 일단 거래를 시작해 보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이렇게 세워두고 거래를 하는 것은 달갑지 않군요.” 나는 광아의 말에 잠시 싸움을 멈춘 둘에게 이야기했다. “그렇지. 이런 미안하네. 어서 들어오게. 그래 유리를 얼마나 들고 왔나? 양이 충분 하다면 굳이 싸울 이유가 없지만 그 양이 상당히 많지 않고는 어려울 것인데 말이 야.” 덩치가 우리를 자리로 안내하면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우리들이 자리에 앉자 덩치가 무슨 조화를 부렸는지 열다섯, 여섯 정도의 아 이가 찻잔 두 개를 들고 와서 탁자에 올려놓았다. “일단 저는 누웬의 정왕야님의 영지에서 장사를 하는 장사치입니다. 이번에 제국과 의 길이 트인 것을 우연히 듣게 되어서, 실은 아직 비밀로 되어 있습니다. 가진 재신 을 모두 처분하여 유리를 매점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제 이름은 루탄입니 다. 그리고 이 쪽은 제 동생 광입니다.” “반갑네, 나는 미엔리도의 철광 생산 책임을 맡고 있는 비아더라고 하네. 그리고 여 기 이 자는 동광 생산 책임을 맡고 있는 미아더네. 이름에서 짐작했듯이 우린 부모가 같네. 그것뿐이지.” 비아더는 미아더가 자신의 형제라는 것이 못마땅한 듯이 이야기를 했고, 미아더 역 시 콧방귀를 뀌며 냉소를 날렸다. “아! 여기에서 미엔리도의 주요 인사님들을 만날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영광 입니다.” “그건 그렇게 유리는 얼마나 가지고 온 것인가? 거래를 시작하지.” 미아더가 말을 끊고 들어왔다. “이봐, 여기는 내 가게라고 했다. 좀 자중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 비아더가 곧장 반박을 하고 나섰다. “저기, 두 분께서는 잠시만 제 말씀을 좀 들어 주십시오. 일단 제가 가지고 온 유리 는 건축용 판유리로 수량은 1만장입니다.” 나는 그들의 싸움을 말리기 위해 빠르게 이야기를 했다. “뭐? 1만장?” 순간 소리를 지른 미아더가 가게 앞으로 뛰어 나갔다. 하지만, “이런 사기꾼 같은 녀석을 보았나? 저 작은 마차에 무슨 유리가 1만장이 들었다는 말이냐? 유리구슬이라면 또 모를까. 이놈이 누굴 속이려고...” 소리치며 곧 달려들 것 같은 미아더의 모습은 상당한 위압감을 전하고 있었다. 역시 지위가 높다는 것이 곧 어떤 의미에서든 힘을 지녔다는 말이라고 하더니 미아더 의 기세도 상당한 수준이었던 것이다. “하하, 너무 성급하십니다. 제가 없는 상품을 팔겠다고 하겠습니까? 물건이 없으면 대금을 받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말입니다. 그리고 이 곳에서 두 분의 심기를 건드리고 무사할 수 없으리란 것은 방금 두 분의 지위를 알고서야 당연히 짐작할 수 있는 문제이지요. 그러니 물건 걱정은 않으셔도 됩니다. 일단 먼저 견본품을 보여 드 리지요.” 나는 허공중에서 유리를 꺼내서 탁자위에 올려놓았다. “음. 평범한 인물은 아니라는 것인가? 자신만의 아공간을 가지고 있다니 적어도 7써 클의 마법사이거나 아공간을 지니는 환수를 부리는 환수사인 모양이군. 아니면 마수 사 이거나. 아무튼 그렇다면 일단 믿어보지.” 내 모습을 본 미아더는 다시 의자에 와 앉았다. “크크, 앞뒤도 안 가리고 설치더니 한 방 먹는군. 크크” 비아더가 슬며시 미아더의 속을 긁었지만 미아더는 반응 없이 나를 보았다. “그래 거래량은 그 정도면 우리가 나누어도 충분하겠군. 남은 것은 거래 금약인데 어느 정도를 원하는 거냐? 알고 있겠지만 3년 전에는 유리 판 하나에 500덴에 거래가 되었다.” 미아더는 일단은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호감을 얻으려는 것 같았다. 어떤 말을 하더라도 앞에는 사실에 입각한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이 뒤에서 아주 작 은 거짓을 말해도 그 정도쯤이야 하고 넘어가 줄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이다. 지금 이 금액에 거래를 한다고 해도 내게 남는 돈이 400만 덴이 남는다. (처음 구입 금약이 100만 덴이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예전에 거래를 위해 유리를 옮길 때에 는 손상도 많았지만 나에겐 손상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이익이 더 남을 수 있을 때는 더 남겨야 한다. “그럼 어느 정도의 가격에서 거래를 하시기를 원하시는지요. 저는 아무래도 3년 전 의 가격에 비해서는 좀 더 많이 받아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만..” 내가 말꼬리를 감추자 비아더가 나섰다. “나는 여러 소리를 하기 싫어한다. 나는 장당 750에 사겠다. 1만장 모두를 살 수도 있고 나누어 살 수도 있다.” 비아더의 말에 미아더는 약간 인상을 쓰더니 입을 열었다. “쯧쯧쯔. 700정도에서 흥정이 될 수도 있었는데 그걸 깨버리다니... 성격이 급한 것 은 역시 도움이 안 된다니까.” 이렇게 혀를 찬 미아더가 입을 열었다. “좋다. 나도 750에 사지. 더 욕심을 내고 싶겠지만 그러지 않는 것이 좋아. 그 정도 면 상당히 많이 남는 장사일 테니까 말이야. 어떼? 이 조건에 거래를 할건가 말건 가?” 성질 급하기는 둘이 다 똑 같은 녀석들이네. “좋습니다. 그 정도로 만족하겠습니다.” 나는 약간 아쉬운 듯한 표정을 보이며 말했다. “그런데 물품은 어디에 내려놓으면 되겠습니까? 아무래도 이 곳은 장소가 적당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만.” 내가 그렇게 장소를 지적하자 비아더와 미아더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건물의 뒤쪽 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집 뒤로는 돌 판으로 바닥이 깔린 마당이 있었지만 이들은 다시 걸음을 옮겨서는 계 곡의 돌 벽까지 갔다. 그리고 계곡 안쪽으로 구멍을 파고(흔히 굴을 판다. 터널을 만든다고 한다.) 안쪽에 만든 창고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여기가 좋겠군. 이곳에 물건을 쌓아줘.” 비아더가 우리를 창고 안에 데려다 놓고 말했다. “저기, 그럼 대금 지급을 해 주시겠습니까? 대금이 있어야지요. 물건만 쌓는 다는 것은 상당히 불공평한 것 같습니다만...” 나는 비아더 형제를 바라보며 말했고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물건을 쌓고 있어. 우린 가서 대금을 가지고 오지. 대금은 모두 금화로 계산을 할 것이야. 어차피 아공간이 있으니 상관없겠지?” 그렇게 말을 마친 두 형제는 나와 광아를 창고에 두고는 대금을 준비하기 위해서라 며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나는 아공간의 유리들을 꺼내서 창고에 쌓았다. 창고에 유리판들을 다 꺼내 놓았을 때, 비아더 형제가 돌아왔다. 그들의 뒤에는 커다란 상자를 든 사내들이 따라왔고, 그 상자 안에는 그들이 약속한 대금이 들어 있었다. 황금으로 만들어진 암흑제국의 화폐였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황금이라는 것이 중요할 뿐이었다. 생긴 것이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크크, 아주 만족스러운 거래다. 그리고 빠른 시간 안에 이 미엔리도를 떠나는 것 이 좋을 것이다. 크크 750만 덴이라면 언제 어디서 목이 날아가도 이상할 것이 없는 거금이지. 클클클.” 이제 거래가 끝이 났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네. 계속 그렇게 반말을 해도 봐 주는 것은 거래 전에나 가능한 이야기지 지금처럼 내가 아쉬울 것이 없는 상태에서는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지. “그렇겠군. 그런데 말이야. 왜 아까부터 말끝을 그렇게 잘라먹는 거야? 내가 당신들 의 아랫사람인가? 예의들이 없군 그래.” 내가 대금을 챙겨서 아공간에 넣고 돌아서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어투로 이야기를 시작하자 비아더 형제는 잠시 놀란 표정이 되었다. “이봐, 이제 거래도 끝났는데, 내가 뭐가 아쉬워서 너희에게 계속 존대를 할 거라 고 생각하냐? 그리고 난 처음부터 그렇게 막말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어. 조심하라 고.” 나는 그렇게 쏘아 주고는 광아와 함께 창고 밖으로 나섰다. 비아더 형제는 얼굴 표정이 상당히 구겨졌지만 발작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창고에 가득 유리를 쌓아두고 싸우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니까 말이다. 깨지면 자기들 손해니까...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그들은 창고 밖으로 나간 나와 광아의 뒤통수를 치는 짓도 하지 않았다. 그냥 아무 소리 없이 우리를 보내 주었던 것이다. “자, 이제는 돈도 벌었고, 미엔리도에서의 볼 일은 끝이 난 것 같네? 어쩔까? 미엔 리도에서 하루 정도 시간을 보내고 출발을 할까? 아니면 그냥 출발을 할까?” 나는 마차로 돌아와 일행들을 모아 놓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의논을 시작했다. “여긴 너무 시끄럽고 또 지저분해요. 그러니까 밖으로 나갔으면 하는데..” 수아는 미엔리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요. 여기 인간들도 마음에 안 들어요. 사람들을 마구 다루는 모습들이 싫어 요.” 풍아는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미엔리도의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을 보이고 있 었다. “클클. 뭐 그다지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라고 해야겠군. 역시 노예라는 제도는 적응 하기 어렵겠어. 클클클.” 지토였다. “뭐, 그럼 결정이 된 거네? 미엔리도를 나가자. 그럼.” 결정을 내린 우리들은 그대로 말을 몰아 미엔리도의 반대쪽 성문으로 향했다. “잠깐 정지. 너희는 누구냐? 어디로 가는 것이냐?” 성문 앞에서 우리를 막은 것은 북문 책임자라는 자와 같은 복장의 인물이었다. 이 쪽 성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간간히 마차들이 물건을 싣고 빠져 나가고 있었는 데, 그 마차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제지가 없다가 우리가 다가가자 검문을 시작한 것 이 었다. “네, 저희들은 누웬에서 유리를 가지고 와서 비아더, 미아더 님과 거래를 하고 마 침 제국을 구경하고 싶다는 동생들의 의견이 있어서 여행을 할까 하고 나선 사람들입 니다.” 내가 웃으며 대답을 하자, 그는 비아더 미아더라는 이름에 잠시 흠칫하는 표정을 보 였다가 거래를 마치고 가는 길이라는 말에 표정이 변했다.(쉽게 일을 처리하게 만드 는 얼굴, 탐욕.) 나는 그의 얼굴 표정을 읽은 즉시 품속에서 황금 조각을 꺼내서(1만 덴 짜리 화폐였 다.) 슬며시 쥐어 주었다. “아~! 그렇군. 그래 여행 잘 하라고. 길에 마물들이 종종 나타나니 조심하고 말이 야. 크흐흐 좋은 여행이 되기를 빌어주지.” 재빨리 품속으로 황금을 숨겨 넣은 그는 모든 것에 문제가 없다는 표정이 되어서는 우리들을 통과 시켰다. 정말 이 나라는 어디를 가나 돈이 있어야 한다니까. 그렇게 우리는 미련 없이 미엔리도의 성문을 뒤로하고 암흑제국으로 한 발 더 깊숙 이 들어갔다. 우리들은 미엔리도를 지나서부터 많이 바뀐 풍경을 접하게 되었는데, 일단 번듯해진 관도와 끝나가는 계곡이 그것이었다. 미엔리도를 나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계곡이 끝이 났던 것이다. 그리고 그 앞으로 펼쳐진 것은 예상과는 달리 험준한 산악이 아니라 끝없는 밀림이었 다. 정말 지평선 끝까지 온통 밀림으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목식이 있던 숲을 생각하게 만드는 곳이네요. 정말로.” 광아가 내 뱉듯 한 마디를 했다. 그 말이 딱 맞는 모습이었다. “휴우! 저 안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니 조금 끔찍한 기분인데. 다시 나무들과 전쟁 을 해야 하나?” 화아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가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니 어쩌겠는가. 우리는 계곡을 벗어나 밀림을 향해 다가갔고, 밀림에 들어가기 전에 식사를 위해 멈 추었다. 그리고 남은 것은 우리의 맛있는 식사. 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지 못했다. 겨우 식사 준비를 마치고 탁자에 둘러앉은 우리의 귀에 계곡 쪽에서 달려오는 말발 굽 소리가 들렸고, 비아더가 한 무리의 사람들을 이끌고 오는 것이 보였던 것이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우리에게 호의적인 목적을 가지고 온 것 같지는 않군. 준비들 해야겠다.” 나는 그들을 보며 이야기 했고, 일행들은 준비를(마음의 준비 밖에 없다.) 단단히 하 는 눈치였다. 우르르 몰려온 비아더의 무리는 수가 서른 정도 되었다. 모두들 갑옷과 검으로 무장을 하고 있었고, 복장이 통일 된 것으로 보아서 어중이떠 중이를 모은 것 같지는 않았다. 마차 주위를 둘러싼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우리를 보고 있었고, 비아더가 입을 열었 다. “크흐흐 짐작은 했겠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황금이야. 그리고 아울러서 저기 있는 저것들도 함께 주었으면 좋겠군. 크흐흐.” 비아더는 저것들 이라는 말로 풍아와 수아를 가리켰다. “어쩐지 아무 말 없이 보내 준다 싶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무식한 방법을 쓸 줄은 몰랐는 걸? 하지만 겨우 이 정도를 가지고 우리를 어찌하겠다고 생각하다니. 좀 무리 라는 생각이 드는군.” 나는 비아더를 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크흐흐. 그럴까? 아무리 7써클 마법사라 하더라도 마법을 쓰지 못하면 무서울 것 이 없지. 나와라 계약에 묶인 존재여. 소환.” 내 말에 비아더가 무엇인가를 불러내었다. 그걸 막을까도 생각을 했지만 새로운 환수나 마수를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라 그냥 놓아두었다. 그리고 비아더의 소환에 따라 나온 것은 박쥐였다. (크기가 좀 크고, 이빨이 두드러 지게 돌출되었고 날개가 두 쌍이라는 것만 빼면 말이다. 크기는 사람의 크기와 비슷 했 다. 공중에 둥둥 떠서 거꾸로 매달린 모양으로 소환되었다. “크흐흐, 이제 너에게 기회는 없다. 이 녀석이 소환된 이상 마법이란 무용지물이 지. 미아더 녀석이 마법과 마수를 능숙히 다루지만 나를 이기지 못하는 것도 바로 이 녀석 때문이지. 크흐흐. 이 녀석의 특기가 마법 무효화 결계를 치는 것이거든.” 비아더는 너무 신이 난다는 듯이 떠벌였다. 마법을 무효화 시키는 결계라.... 다시 이야기하면 주위에 있는 마나를 동결시키는 힘을 지녔다는 말인데, 글쎄 그게 9써클의 힘도 막을 수 있을까 몰라. 더구나 내가 마법을 쓰지 않는다고 저런 인원으로 우리 일행에게 덤비다니 비아더의 처지가 딱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봐, 비아더라 했나? 그냥 돌아가라. 그럼 용서해 주지. 하지만 계속 이렇게 식사 를 방해하면 미엔리도에 돌아갈 때는 기어가야 할 거다.” 나는 다시 조용히 비아더에게 철수를 권했다. 어차피 들을 녀석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크흐흐, 그래? 도대체 무엇을 믿고 떠드는 것인지 한 번 보기로 할까? 죽여라! 계 집들만 남기면 된다. 다른 것들은 들개 밥으로 만들어 버려라.” 비아더의 명령이 떨어지자 곧장 병사들이 공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미리 준비를 하고 있던 화아와 풍아 광아 지토가 방어에 나섰다. 그리고 그 사이를 란이가 비집고 날아다니며 공격을 시작했다. 란이가 공격적으로 행동하자 작은 변화가 있었는데 몸 전체에 가시가 돋는다는 것이 다. 완전히 열 받은 복어가 되는 것이다.(평상시에는 바람을 잔뜩 먹은 모습이기는 해도 가시 같은 것은 안 보였는데 말이다.) 마법이나 정령력을 쓰지 않고 단순히 육탄전의 양상이었지만 동생들과 지토가 밀리지 는 않았고, 그 사이에서 란이가 허점을 노려 불화살을 날렸기 때문에 병사들이 조금 씩 밀리는 모습이었다. “뭐야? 저 조그마한 것은? 어떻게 마법을 쓰지? 마나를 쓰지 않고 마법을 쓴다는 건 가?” 비아더는 의외로 란이의 활약으로 병사들이 쓰러지자 칼을 빼들고 싸움에 끼어들었 다. 나는 그런 비아더의 앞을 막아섰다. “이봐, 너는 내 상대야. 그러니까 너무 한 눈을 팔지 말라구.” 비아더는 란이에게 달려가려다가 막아서는 내 검에 주춤 멈추었다. “벳, 저 쪼그마한 녀석을 맡아라.” 나에게 진로를 차단당한 비아더는 곧 뒤에 있던 마수에게 란이의 처분을 맡겼다. 아마도 결계 이외에도 다른 능력도 있는 모양이었다. “아마 좀 어려울 거야. 란이가 보통이 아니거든.” 내 말을 들었는지 란이의 대답이 들렸다. 뾰로로롱 로로롱 뾰롱. -그럼요. 주인님 저런 녀석은 제 상대가 안 되니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란이의 대답을 들으며 비아더와 검을 나누기 시작했다. 비아더가 무식한 속도로 검을 휘둘러 왔던 것이다. 체챙~ 슬쩍 비아더의 검을 흘려보냈지만 그 한 번의 부딪힘으로 나는 비아더가 상당한 실력 의 검사임을 알 수 있었다. 검신을 타고 미묘하게 힘을 분배하는 것이 보통의 검사들은 꿈도 꾸지 못할 경지였 던 것이다. 그래도 미엔리도의 실력자 중에 하나라는 것이 실감이 나게 하는 비아더였다. “제법, 실력이 있군. 하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다.” 확실히 실력이 있다고는 하지만 힘에서도 기술에서도 나를 능가할 수는 없었다. 왜냐? 나에게는 엄청난 내공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비아더가 어느 정도 내공이 있 었지만 그걸로 나를 상대할 수는 없었다. 나는 식사가 바빴기 때문에 서둘러 비아더를 제압했다. 강하게 부딪힌 힘을 이기지 못하고 손아귀가 찢어진 비아더의 손에서 검이 하늘을 날 아가는 것으로 승부를 결정지었던 것이다. 나는 비아더의 목에 칼을 대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더 이상 싸움은 무의미하지 않나? 그만 두라고 하지 그래?” 하지만 비아더는 내 말에 고개를 저었다. “저들에게 공격을 명령할 수는 있어도 항복을 명령할 수는 없다. 이미 내가 저들의 방패가 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무슨 명령을 내릴 수 있다는 말이냐? 하긴 누웬의 녀석 이니 이해를 못하겠지만...” 비아더는 나에게 졌다는 것이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끼기기기기기-- 그 사이에 박쥐 괴물(이름이 벳?)이 란이의 공격에 날개가 너덜너덜해 져서는 괴상 한 비명과 함께 역소환을 당해 버렸다. 순간에 비아더는 꽤나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 다.(마수도 환수처럼 동화비율이 적용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란이가 다시 전권에 개입을 하자 빠른 속도로 병사들이 제압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병사들이 끝까지 저항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 불리한 상황이 되자 모두들 빠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호락호락 놓아주고 싶은 생각은 나도 없었다. “저들을 잡아. 도망가지 못하게...” 내가 동생들에게 말하는 순간 카다, 맘맘, 아눈, 게브, 란이가 흩어지는 병사들에게 로 쏘아져갔다. 그리고 단연 압권은 맘맘이었다. 예의 그 실같은 공격으로 대다수의 병사들을 잡아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이외에는 아눈의 덩치에 밟힌 녀석이 있는가 하면, 꼬리에 맞은 녀석도 있 었고, 카다의 공격에 머리가 부스스하게 올라선 모양이 된 녀석도 있었고, 게브의 발 차기에 얻어맞은 놈. 란이의 불화살에 땅바닥을 뒹구는 녀석도 있었다. 그렇게 대충 정리가 되자 게브와 아눈이 병사들을 수거해 왔고(아눈은 물고 왔고, 게 브는 인간형 골렘이 되어서 들고 왔다.) 비아더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넋을 놓 은 모양이었다. 그저 어,어,어 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자신이 생각을 잘못 했다는 것을 뼈저리게 후 회하고 있을 것이었다. 우리는 일단 비아더와 병사들을 제압해 두고 운동 후 밀려오는 허기를 채우기 시작했 다. 식사가 끝나고 언제나처럼 고민으로 남는 포로들의 처분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 었다. “어떻게 하지? 그냥 두고 갈까?” “그래도 그냥 봐주는 것은... 지은 죄에 대한 대가는 치루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요? 안 그래요? 루탄 형님?” “그래요. 분명히 벌을 줄건 줘야죠. 안 그러니 수아야?” “으응. 지은 죄가 있으니까 벌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이야기가 진행되자 비아더와 병사들에 대한 무죄 방면은 불가능한 상황이 되 었다. “그래, 그럼 어떤 벌을 줄까? 목숨을 노렸으니 어디 몇 군대 부러뜨려서 병신을 만 들까? 아니면 아예 사지 중에서 하나를 잘라 버리고 재생조차 못하도록 만들까? 무슨 방법이 좋을까?” 나는 동생들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적절한 벌을 주기로 했고, 그 벌의 종류와 정도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글쎄, 생각 같아서는 목숨에는 목숨으로 하고 싶지만 형인 그런 것은 절대 반대니 까, 다시는 폭력을 쓰지 못하도록 제재를 가하는 것으로 하지. 오른 팔에 혈도를 짚 어 서 일상적인 근력 이외에는 낼 수 없도록 하고, 내공은 완전히 없애는 것으로 하지 요.” 화아가 의견을 내었다. 그리고 다른 일행들도 그 정도의 벌로 부족한 감은 있지만 그렇게 하자는 분위기여 서 그 방법을 쓰기로 했다. 하지만 비아더는 문제가 있었다. 그에게는 벳이라는 마수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 우리는 비아더의 마수를 풀어주는 것으로 결정을 내리고 비아더에게 갔다. “이봐, 우린 너희를 죽일 것인지 살릴 것인지를 고민했는데 말이야. 대충 결론이 나 왔거든. 일단 죽이지는 않기로 하지만 네가 가진 마수는 귀속을 풀어주어야 되겠다. 그게 싫다면 너는 평생을 말을 못하고 살아야 할 거야. 뭐 소환을 하지 못하게 하려 니 방법이 그 뿐이네.” 나는 비아더에게 그렇게 협박을 했고, 비아더는 망설임 끝에 마수를 불러 귀속을 풀 었다. 그런데 마수는 귀속이 풀리자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뭐야? 설마 마계에서 불러 온 녀석이란 거야? 물질계의 마수라면 사라지지 않았을 텐데?” 내가 비아더에게 따지듯이 물어보자 비아더가 대답했다. “신전에서 어렵게 구한 것이다. 아주 많은 돈이 들었지. 신전에서는 그럴 듯한 마수 를 소환해서 주인을 찾아 주기도 하거든.” 비아더는 내가 따지듯 묻자 주눅이 든 모습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화아가 비아더와 병사들 모두의 혈을 짚어 팔의 근력을 떨어뜨리고 몸속의 내 공을 흩어 버렸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화아는 오른쪽만 아니라 왼쪽의 근력과 양 다리의 근력도 상당 히 떨어뜨려 놓고 있었다. 완전히 사지는 멀쩡한데 힘은 보통 사람들 보다 없는 존재들이 된 것이라고 생각하 면 된다. “조금 심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어쩔 수 없겠지. 목숨을 노리고 그 정도의 대가라 면 비싼 것도 아니고...” 나는 비아더와 병사들에게 그렇게 말하고 그들을 놓아 주었다. 아무리 이를 갈고, 차라리 죽이라고 소리를 질렀어도 우리 일행이 그것에 신경을 쓸 이유는 없었다. 한탄과 하소연과 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그들을 뒤로 하고 우리들은 다시 길을 나섰 다. 밀림 속의 그 후덥지근하고 끈적이는 공기는 풍아가 있어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자 질구레하게 달려드는 벌레들만큼은 정말 질색이었다. 그렇다고 일일이 마법으로 실드를 치고 다닐 수도 없는 일이었고 말이다. 란이는 가끔가다 내 주위를 날아다니는 벌레들을 태워 죽이고, 찢어 죽이고(바람을 이용해서 찢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그 때 알았다.) 하면서 나를 조금이라도 쾌적한 환경에서 있도록 해 주려고 노력을 했지만 그래도 벌레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밀림 안으로 들어오면서부터 시작된 괴물들의 공격도 짜증스러운 여행길을 만 드는 요인이기도 했다. “뭐야? 거창하게 몸을 푸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일일이 신경을 써야 하다니. 짜증나 네.” 이렇게 화아가 투덜거렸을 정도였다. 결국 얼마 후부터는 카다와 맘맘이 주위의 괴물들을 처리하는 임무를 떠맡게 되었 다. (물론 란이도 상당한 전력이 되어 주었지만 말이다.) 우리들의 암흑제국 여행은 별달리 거칠 것이 없었다. 어쩌다가 조금 강한 괴물들이 나오기도 했고, 마을을 들러서 가게 될 때는 사소한 시 비가 붙어 상대를 곤죽으로 만들어 버리는 경우도 있었고, 때로는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면서 성문을 통과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별달리 문제가 되는 것은 없었다. 그렇게 여행을 하는 동안 우리들은 조금씩 암흑제국의 모습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쟁투라는 제도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암흑제국에서는 그야말로 힘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리들도 몇 개의 마을을 지난 다음부터는 누웬의 사람이 아니라 암흑제국의 사람으 로 행동하며 다녔는데(워낙 마을 단위로 떨어져 있거나 마을 사이의 밀림에서 소단위 로 모여 사는 사람들이 많아서 어려울 것도 없었다. 그냥 한타의 사람이라거나 누웬 의 사람이라는 말만 하지 않으면 그냥 암흑제국 사람으로 아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신 분에 대한 확인도 거의 불가능하니 말이다.) 마음만 먹으면 쟁투를 신청하고 마을 하 나를 집어 먹는 것은 그리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성격이 정말 나빠진 아이가 있는데 풍아였다. 풍아는 여자라는 이유로 암흑제국에서 기를 펼 수 없다는 것이 스트레스가 되었는지 성격이 굉장히 과격해져서는 일단 기회만 되면 부수고 때리고 엎어버리는 경향이 강 해 지고 있었다. 사실 그것 때문에 빨리 암흑제국을 벗어나야 하는 것이 아닐까하고 고민을 하고 있기 도 하다. 그리고 오늘 우리들은 드디어 암흑제국의 대도시라 할 수 있는 모르탄에 도착 했다. 역시나 밀림 속에 자리잡은 모르탄은 그러나 제법 높은 산 위에 자리 잡은 도시였다. 그러니까 밀림 속에 우뚝 솟은 산이 모르탄이라는 도시가 생기게 된 이유라고 보면 될 것 같았다. 처음부터 그런 모양이었는지 아니면 오랜 시간이 흐르며 형성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 지만 모르탄은 산의 위쪽을 잘라 없애고 지어진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위로 솟아서 원뿔이 되어야 할 산의 모습은 간 곳이 없고 위로 솟아오르다가 평평한 땅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지형을 뭐라하더라? 분지의 정반대 형상인 이것을... 그래 고원이라 불렀군. 솔직히 고원이라 부르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는 높이기기는 하지만 일단 주위에 워낙 산악이 없다보니 이 삼백 미터 정도 솟아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원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모르탄은 그렇게 솟아 있는 부분을 모두 돌로 둘러서 거대한 성벽처럼 보이 게 만들어 놓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올라선 도시 전체가 석조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어디에서 이렇게 돌을 들고 왔을까?” 무심코 내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올 정도로 모르탄은 돌로 만들어진 도시였던 것이 다. 하나에서 열까지 돌, 돌, 돌이었다. 대략 지름이 3킬로미터 정도 되어 보이는 원형의 모르탄은 그렇게 우리를 맞고 있었 다. 그리고 역시나 여기서도 입구를 지나는 데에 손을 내미는 경비들이 있었지만 이제는 화아가 나서서 대충 눈에 힘을 주고 인상을 쓰는 것으로 해결이 되었다. 아무리 경비라해도 힘의 차이에서는 아무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이 경비를 서는 것은 대부분 부랑아들(밀림 속에서 소단위로 모여 사는 자들로 능력이 없어 마을이나 도시에서 쫓겨난 경우를 말한다.)이 마을이나 도시에 들어오는 것을 막는 역할이지 힘이 있는 자를 막거나 할 능력은 없었다. 그렇게 화아가 경비들을 책임진 이후로는 별달리 뜯기는 돈이 없다는 이점이 생기기 도 했다. 뭐 때에 따라서는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싫어서 돈으로 해결을 하기도 했지만... 그렇게 모르탄에 입성한 우리들은 우선 깨끗한 여관을 정해서 쉬기로 했다. 마차 생활이 좋기는 하지만 결정적으로 한 가지가 불편했는데, 그것은 바로 목욕을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몸이 지저분해지는 경우는 없었지만(마법으로 해결이 되니까.) 그래도 시원한 물 속 에서 온 몸을 담그고 누워있고 싶은 마음이 들어도 그건 좀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정말 오랜만에 여관을 잡고 쉬기로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동생들과 지토도 오랜만의 외식이라며 좋아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어렵지 않게(그냥 지나가는 놈 하나 잡아서 화아가 지긋이 노려보 며 물어보았다.) 모르탄에서 유명한 여관을 찾을 수 있었다. 사실 암흑제국에서 여관이란 그다지 수익이 괜찮은 사업이라고 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일단 마을과 마을을 돌아다니는 여행객이라는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마을을 지배하는 우두머리에게 그보다 지위가 높은 자(일정 지역을 총괄하는 자 가 있다. 대충 중간 귀족 정도라고 보면 되려나....)가 명령을 보내고, 회신을 받고 하는 이유로 도시와 도시를 오가는 사람들이 간혹 있었고(전령이라 해야 할까?) 또는 특별한 특산품으로 교역을 하는 무리들이 있을 뿐, 여행을 목적으로 하는 자들은 거 의 없었다. 물론 아주 큰 쟁투가 벌어지는 경우에 그것을 구경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모이는 경우 는 있다지만 우리가 제국에 들어온 이후로는 아직 그런 일은 없었다. 아무튼 이런 이유로 여관업은 그다지 수익이 별로 없는 곳이었다. 다만 여관이 주점을 겸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 주점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여관도 함 께 하는 것이 보통의 암흑제국 여관의 현실이었다. 하지만 모르탄은 제국에서도 손가락에 꼽는 대도시였고 그에 따라 유동인구도 많은 편이라 여관도 제법 그럴듯한 곳이 있었던 것이다. 맛있는 식사와 느긋한 휴식.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쇼핑. 문제는 물건을 사러 나가는 때에도 이 곳에서는 우리 모두 함께 움직여야 한다는 것 이었다. 아니 적어도 수아나 풍아를 따로 둘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물건도 함께 다니면서 사야 했고, 그럴 때에도 조용 조용 소근 소근하면서 자 신의 의사를 밝혀야 한다는 사실에 때로 풍아는 발작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우리들은 모르탄의 시장에서 모르탄이 자랑하는 특산품을 볼 수 있었는데, 그것은 염 료로 염색이 된 천이었다. 빨간색과, 하늘색, 노란색, 보라색 등. 그야말로 깨끗하게 염색이 된 옷감들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 알고보니 모르탄은 천연 염색으로 유명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옷감들은 실제로는 특산품으로 제국 곳곳에 팔려가는데 특히나 여인왕국 과의 거래에서 가장 중요한 품목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천의 재질도 특별한 것이었는데(비단이었다.) 밀림에서 자생하는 누에를 번식 시켜서 얻은 실로 짠 것으로 역시 모르탄의 특산품이었다. 그러니까 모르탄은 그 누에를 기르기 위한 환경(그 놈이 밀림에 사는 녀석이면서 심 한 습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에 걸맞게 만들어진 도시라고 볼 수도 있었다. 석조 건물이라 습기가 덜한 편이고, 지형상 밀림에서 고도가 높은 편이라 통풍도 잘 되는 지역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뭘 어쩌겠는가. 당연히 다음 목표가 여인왕국이니 이 곳에서 특산품 을 잔뜩 사서 창고에 넣어 놓기로 했다. 그리고 그 일을 하느라고 우리들은 이틀 동안 모르탄에 머물러야 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날 무렵 겨우겨우 일이 마무리가 되어 우리들은 다음날 모르탄을 떠 나 여행을 계속 하기로 했다. “오빠. 저 사람 쉬벡의 성에서 봤던 그 기사 아니에요?” 우리가 상품 구매를 모두 마치고 어두워지는 거리를 걸어 여관으로 돌아오고 있을 때, 수아가 슬며시 내 팔을 잡아당기며 황당한 말을 했다. “뭐? 쉬벡의 성의 기사? 그 제란이라는 망나니 소성주를 데리고 도망을 갔다던 그 사람? 어디? 어디?” 나는 수아의 말에 놀라서 급히 수아에게 물었고, 수아는 슬쩍 손가락으로 한 사람을 가리켰다. “저기 저 사람이요.” 수아의 손끝에는 한 중년의 사내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는 많이 변하기는 했지만 분명 쉬벡의 성에서 보았던 그 기사임이 분명했 다. 나는 재빨리 우리 일행을 거리 옆으로 난 골목으로 몰고 들어갔다. “응? 무슨 일이야? 왜 그래?” 화아가 물었다. “그게 쉬벡의 성에서 봤던 그 기사. 있잖아 소성주를 데리고 도망을 갔다던 그 사 람 말이야. 그 사람이 저기 있어.” 순간 동생들은 물론이고 지토도 놀랐다는 표정(수아는 당연히 아니다.)을 짓고는 내 가 가리키는 곳에서 그를 찾았다. 그는 암흑제국에서 어느 정도 지위를 얻은 모양으로 번듯한 복장에 검을 차고 있었 다. 복장으로 보아 적어도 밑으로 쉰 명 이상의 부하는 거느리고 있을 것 같은 모습이었 다.(제국에서는 지위에 따라 자연스럽게 부하가 생긴다. 우리처럼 여기 저기 떠돌아 다 니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그는 거리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과 무언가 험악한 분위기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흔히 여기에서는 저런 분위기면 곧 하나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것으로 끝이 난다. 뭐 그렇다고 저기 장사하는 사람이 무조건 피의 주인이 될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저 정도의 번듯한 가게(좌판 형식이기는 해도)를 가진다는 것도 능력이 없이는 불가 능한 것이니 말이다. “그래? 정말 말을 못 듣겠다는 말이지? 뭐 그렇게까지 죽고 싶다면 하는 수 없는 문 제지. 자 그럼 쟁투를 해 볼까?” 그에게 집중하자 그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제기랄,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지. 좋다 쟁투를 받아들인다. 증인들을 세워라.” 상인도 만만찮은 목소리로 대들었다. 그리고 곧 주위의 상인들이 증인이 되고 쟁투가 벌어졌다. 쟁투는 쉽게 말해서 내가 힘이 세니까 너 가진 것을 내놔라. 그런 거였다. 다만 지위가 높은 자들은 낮은 자들을 별로 건드리지 않았는데, 대부분의 경우 한 지 역에서 자신의 지위가 더 높은 경우에 지위가 낮은 상대는 대부분 자신의 부하이거 나, 자신과 비슷한 지위에 있는 자의 부하이거나 한 경우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는 지금 자신보다 낮아 보이는 자에게 쟁투를 신청한 것이었다. 어쩌면 저 상인은 특별한 소속이 없을지도 모른다.(별로 그런 경우는 없는데...) 그것이 아니라면 누군가의 죽음으로 윗사람이 없어진 경우라서 그 공백 때문에 생긴 다툼일 수도 있었다. “그냥, 밑으로 기어들어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미련한 놈.” 그는 상인을 보며 으르렁 거렸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들은 조금 자리를 옮겨 쟁투가 일어나는 곳과 가까운 골목에서 상 황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역시 이야기를 들어보니 누군가의 부재로 공백이 생겼던 모양이다. 가끔 불의의 사고로 쟁투 없이 일정 지위에 있는 사람이 죽는 경우에 그 밑에 사람 이 그 자리를 차지하기 전에 다른 사람들이 그 밑에 있는 부하들을 흡수해 버리는 경 우가 있는데 지금이 그런 상황인 듯 했다. “그럴까? 미안하지만 나도 그렇게 호락호락 당하지는 않아. 네 자리나 잘 지켜봐 라. 어디서 굴러 들어온 녀석인지 몰라도 이제 너도 운이 다한 거다. 나를 건들다니 말이야.” 상인도 밀리지 않는 말대답으로 기세가 꺾이지 않으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하지만 막상 쟁투의 여건이 갖추어 졌음을 선언하고(증인들이 준비되면 그렇게 한 다. 그리고 쟁투는 특별한 조건이 없다. 그저 상대의 것을 모두 가진다는 것이 있을 뿐이다. 재산, 지위, 그가 소유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여기에서 사람에는 아내와 자 식 이 포함된다. 자식이 성인이 아닌 경우에는 말이다.) 싸움이 시작되자 싱겁게 결과가 나오고 말았다. 두세 번 칼을 나누는가 싶더니 상인의 목이 허공을 날았던 것이다. 부릅뜬 눈으로 땅바닥을 구른 상인은 더 이상은 고민이 없을 터였다. 다만 남은 자에 게 슬픔과 아픔이 남겠지. 수아와 풍아는 눈앞에서 일어난 살인에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 모습이었고, 화아와 광아, 지토는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 쟁투가 끝나자 증인들은 그 쟁투의 결과를 서면으로 작성하고(이런 경우에 증인도 약 간의 수입이 생긴다.) 증거를 관청에 넘기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상인을 죽인 그는 그 증인들에게 서면으로 만들어진 증거의 사본을 하나 받아 들고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그를 쫓기 시작했다. 이제는 해가 지고 밀림 위로 방금 상인이 흘렸던 피 색깔의 노을이 쏟아져 모르탄의 석조 건물들을 물들이고 있었다. 모르탄은 아침저녁으로 한 번씩 피에 물든 모습으로 붉게 변한다. 노을과 여명을 받을 때는 온통 붉은 색이 되기 때문이다. 석조 건물들이 거의 흰 색을 띠고 있어서 그런 것이었다. 아무튼 그 사내는 이제 막 절정에 오른 노을 속에서 느릿느릿 걸음을 옮겨 어디론가 가고 있었고, 우리는 들키지 않게 조심하며 그를 따라가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사내는 어떤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집은 모르탄의 수많은 건물들 중에서 대략 중간 정도의 규모를 지니고 있는 건물 이었고 다른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마당이 없이 곧장 현관이 길 쪽으로 나 있는 3층짜 리 석조 주택이었다. “어쩌지? 따라 들어갈 수도 없잖아.” 화아가 투덜거렸다. “글쎄, 어쩌면 좋을까?” 나는 반문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형님, 지금은 어쩔 수 없으니까 나중에 밤에 다시 오지요? 이 건물의 옥상으로 순 간 이동을 해서 오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상황을 살펴보지요.” 광아가 제안을 했다. “그래요. 그렇게 해요. 오빠.” 수아도 찬성을 했기에 우리들은 다시 여관으로 돌아와 식사를 하고 밤이 되기를 기다 렸다. 밤은 이내 깊어졌고(솔직히 기다리기 굉장히 지루했지만 란이나 맘맘, 카다를 보는 것도 꽤 시간이 잘 가는 일이다.) 우리들은 그 기사가 들어갔던 집의 옥상으로 이동 했 다.(모르탄의 석조 건물들은 대부분 위에 따로 기와 같은 것을 올리지 않았고 돌판을 깔아서 지붕을 만들었다.) 그리고 집 안의 동정을 살폈다. 의외로 집 안에는 1, 2층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아무래도 부하들인 모양이었다.) 3 층에는 단 두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일단 스캔을 마치고 나서 사람들이 없는 쪽으로 일행들을 데리고 내려가서(날아 서 간 것이다.) 창문을 통해 복도로 들어갔다. 창문에는 탐지 마법과 알람 마법이 걸려 있었지만 나에게는 문제도 되지 않는 것이었 다. 일단 복도로 내려선 우리는 두 사람이 있었던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가기 전에 나는 우리 일행에게 투명 마법을 걸어 주었다. 단지 모습을 감추는 것이기는 하지만 기척만 잘 숨긴다면 쉽게 들키지는 않을 것이었 다.(물론 광아는 그냥 알아서 숨었다.) “제란님, 이제 어느 정도는 준비가 되었습니다. 조만간 모르탄을 손에 넣을 수 있으 실 것입니다.” 방 안에서 그 기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역시 안쪽에 있는 것은 제란과 기사였던 모양이다. “그래? 좀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 기반은 다진 것이 되겠군.” 제란의 목소리 같았지만 예전과는 사뭇 달라진 듯한 목소리였다. 왠지 모르게 힘이 실린 목소리라고 해야 하나? “그렇습니다. 그것으로 제란님의 목표에 한 발 더 다가가는 것이지요.” “그래, 언젠가는 이 제국을 발아래에 두겠다. 그리고 대륙도 또한 ....” 제란이 저런 야심을 가진 녀석이었나? 여자만 밝히는 놈이었는데? “그러고 보면 쉬벡의 성에서 도망친 것이 전화위복이야. 흐흐흐 신전의 선택을 받 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어. 이런 큰 힘을 지니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지. 아직 은 제어가 힘들기는 하지만 익숙해진다면 이 마수의 힘만으로도 제국의 황제 자리는 노려볼만 하지. 크흐흐. 하지만 너무 자신을 드러내는 것도 좋지 않아. 아무렴. 조금 씩 조금씩 올라가서 황제에게 쟁투를 걸 수 있는 때를 기다려야지. 크흐흐흐.” 아무래도 제란이라는 저 녀석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제국의 황제 자리도 넘볼 마수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제란님 지금은 조심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아직 제어가 마음대로 되지 않으 니 도리어 제란님이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요. 초마수를 훨씬 뛰어넘는 능력을 지녔지 만 그만큼 다루기가 어려우니 말입니다.” 기사는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걱정하지 말아. 두룬. 절대로 서두루지 않다. 나도 신중해졌거든. 흐흐흐.” 기사의 이름이 두룬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별다른 이야기가 없었다. 조만간 모르탄의 최고위층에 대한 쟁투를 위해서 세력을 더 많이 끌어 모을 필요가 있다느니 제란의 숨겨진 힘이면 충분히 성공을 확신할 수 있다느니, 그래도 신중에 신 중을 기해야 한다느니 하는 말들이 오고 갔지만, 이미 들은 내용에 비하면 별로 중요 하지 않은 내용이었다. 우리들은 그 정도의 정보를 듣고 다시 여관으로 돌아왔다. 여관으로 돌아온 우리가 한 자리에 모여서 의논에 들어간 것은 당연했다. “제란, 저거 어떻게 하지?” 화아가 대뜸 입을 열었다. “잡아서 어떻게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수아가 내 놓은 의견이었다. “글쎄요. 우리가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요? 한타도 아니고, 쉬벡의 성도 아니고, 이 암흑제국에까지 와서 제란을 발견했다고 해서 우리들이 그를 잡고 벌하고 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에 대한 처벌은 이미 쉬벡의 성에서 우리의 손을 벗어난 것 이라고 생각하니까요.” 광아는 제란에 대한 처분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 “클클클,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제란에 대해서 우리가 참견할 시기는 이미 지났고 그럴 필요도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제란이 이 제국을 손을 넣으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이 대륙을 지 배하겠다는 생각도 가진 것 같은데... 어떻게 모른 척 하자는 말씀이에요?” 풍아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반대를 하고 나섰다. “풍누님. 그렇다고 해도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문제입니다. 이 제국에서 황제의 자 리를 노리는 자가 제란 뿐인 것도 아닐 것이고, 또 대륙을 지배하고자 하는 마음을 먹 고 있는 사람도 제란 뿐인 것도 아닐 겁니다. 그런데 굳이 제란이기 때문에 그에게 제 재를 가하려는 것은 모순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그는 암흑제국의 한 사람일 뿐이지 저희와 연관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광아의 말에 풍아는 잠시 생각에 빠진 모습이 되었다. 나는 내 생각을 정리해서 동생들과 지토에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음, 내 생각에는 말이야...” 헉, 그렇게 시선을 집중시키다니.... “흠... 제란은 우리가 관여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그고 우리 는 우리지. 솔직히 이야기하면 예전에 그의 죄를 묻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 만 이제는 이 암흑제국에서 나름의 삶을 사는 것 같은데 그것을 우리가 힘이 있다는 이유로 깨트리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한타의 제란은 죽고 암흑제국의 제란 만 남았지. 성격이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기는 이 제국의 대다수가 그런 것이니 따 질 것도 없고, 그 예전의 악연으로 끝까지 제란이라는 인물을 괴롭히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니 나는 제란을 그냥 두었으면 좋겠다. 나중에 혹시라도 황제가 되고 한타 를 점령하고 또 대륙을 지배하고 할지 모르지만 그것도 그가 만들어가는 역사이겠지. 끼어들고 싶지 않구나. 우리와 직접 연관만 없다면 말이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동생들과 지토의 표정을 살폈다. 잠시의 침묵이 흐르고 조용히 생각을 하던 일행들이 하나 둘 고개를 들고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나는 그 표정에서 내 생각을 따르기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요. 오빠. 그렇게 해요. 괜히 싸울 필요는 없겠죠. 더구나 오빠 말 대로 제란 에 대한 처분권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수아가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일행들의 생각을 대변해 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늦은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밤에 무언가 짓눌리는 느낌으로 잠을 잔 모양이었다. 아침 일찍 수아와 풍아가 건너와 빨리 모르탄을 떠나자며 졸랐을 때, 나는 묵직한 머 리를 겨우 절레절레 흔들어 정신을 차려야 했던 것이다. 간단하게 식사를 마친 우리들은 마치 도망을 치는 것처럼 모르탄을 떠났다.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달리는 우리의 등 뒤로는 여전히 핏빛에 젖은 모르탄이 어제와 는 다른 음울함으로(그 전에는 아침, 저녁의 그 경치가 참 보기 좋았는데....) 등을 밀고 있었다. 하지만 곧 제란에 대한 생각을 말끔히 머리 밖으로 밀어 버리고 우리들은 또 다시 진 지한 토론에 들어가야 했다. 그것은 암흑제국의 수도를 들렀다가 여인왕국으로 넘어갈 것이냐, 아니면 그냥 여인 왕국으로 넘어갈 것이냐를 놓고 벌인 토론이었다. 당연히 풍아와 수아는 그냥 가자는 쪽이었고, 화아와 광아는 수도를 보지 않고 가는 것은 억울하다는 쪽이었다. 거기다가 이루비아가 유소에게 배운 심법의 흔적도 찾지 못했으니 더더욱 아직은 좀 더 돌아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광아였다. 그리고 나는 둘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입장이었고 말이다. 처음 여행을 떠날 때에 제일 먼저 찾게 되리라고 생각한 곳이 신성제국이나 여인왕국 이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넥스나 유소의 흔적들을 더듬게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처음에는 그 후손들을 어떻게 할 것이냐를 고민했지만, 곧 그런 고민은 의미가 없어졌다. 내가 유소나 넥스에 대해 화를 내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나 에게는 몇 년 전의 일일 뿐이다.) 가능한 것이었지만, 아무리 죽을 죄를 진 사람이 라 하더라도 1000년이 지난 후손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야 없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그냥 그 후손들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냥 그 모습에서 넥스와 유소의 흔적을 더듬고 싶었던 것이 맞을 것이다. 짧은 인연이었지만 이 새로운 세상에서 그들은 나의 첫 동료였고, 또 친구였으며, 형 이었다.(솔직히 유소는 조금 거리감이 있다.) 그런 사람을 그리워하지 않았다면 말이 될까? 미워하는 마음에 그리움이 없었다면 그것도 말이 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내 스스로가 아무 생각도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는 방법을 지니고 있었기에 굳 이 스스로를 속이며 1000년의 수련을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지금은 그저 그들의 흔적만이라도 쓰다듬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그래서 여인왕국과 신성제국으로 가려고 했던 것이고 말이다. 물론 그 마음속에서 후손에 대한 징벌이라는 것이 마음속에 걸렸기에 머뭇거리는 것 도 없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상황이 닥치면 그 예전의 죄과를 가지고 현재를 주무할 생각이 없는 것은 확실했다. 아무튼 나의 이런 생각은 그 동안의 여행에서 주고받은 이야기들 속에서 동생들이나 지토도 이미 아는 바였고.... 지금은 암흑제국에서 여정을 더 할 것이냐 아니면 여인왕국으로 최단시간에 갈 것이 냐가 문제였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런 의논을 해야 할 이유도 별로 없었는데, 제론을 본 이후로는 왠지 제국에서 빨리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문제다. “그래도, 이루비아 소령주가 어떤 일을 했는지는 별로 아는 것이 없으니 그것도 알 아보고, 수도도 구경하고, 응? 좋잖아. 수도에 들렀다가 가자.” 무슨 일인지 포기하지 않는 화아의 말이다. “오빠, 난 더 이상 여기에서 지내기 싫단 말이야. 행동을 하는 데에도 제약이 많 고, 내가 많이 참았다는 거 알잖아. 응?” 풍아도 역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좋은 해결이 될까. 이렇게 우리 남매의 의견이 부딪히는 경우는 없었던 것 같은데 말이야. 그렇다고 풍아가 여자라고 풍아 편을 들어줄 수도(나는 원래 예전에 아이들 가르칠 때 여학생 우선주의였었다.) 없는 일이고, 난감한 상황이었다. “화아 오빠, 나중에 다시 오면 안 될까요? 저도 좀 갑갑하기는 하거든요. 여러 가지 로 불편한 것이 많은데...” 수아도 화아에게 부탁을 한다. 나는 수아와 풍아, 광아와 화아가 어떤 결론을 내릴지 기다려 보기로 하고, 지토, 게 브(?)함께 한 쪽에서 찻잔 비우기나 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한 터프하는 화아가 의견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 같았지만, 잠시 후에는 화아의 기세를 누르는 풍아의 폭주 전초 모드가 주도권을 쥐었고, 또 광아의 논리와 냉철함이 그 뒤를 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결론은 수아의 몫인 모양이었다. 한 마디만 했다. “자꾸 이러시면 이제 밥 안 해줘요. 오빠들이 해서 먹어요. 이제부터는 루탄 오빠 랑 풍아 언니랑, 지토 아저씨랑, 내 밥만 할 거니까 알아서 하세요.” 라고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던 것이다. 그 뒤는 볼 것도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식사 시간이 되었던 터라, 화아와 광아가 수아의 비위를 맞추지 않고 는 굶는 방법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점심 식사를 마친 우리들은 말머리를 여인왕국과의 국경선이 있는 동북방으 로 잡았다. 그나마 그 쪽으로 제법 큰 마을이나 성이 있는 모양인지 관도가 밀림 속에도 번듯하 게 깔려 있어서 여행이 힘들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암흑제국의 도시와 마을들이 상당히 교류가 원활하지 않고, 어떤 의미에서는 준 독립체와 같은(상급자가 별로 간섭을 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지 지위가 높은 사람 이 나타나면 모든 것은 상급자의 것이 된다.) 상태로 운영이 되고 있었기 때문에 모 르 탄을 급하게 떠난 우리는 이쪽에 어떤 도시와 성이 있는지 자세히 알지 못하고 출발 을 했다. 덕분에 우리들이 아는 것이라고는 이 방향이 여인왕국과의 경계선으로 가는 길이라 는 것과 제법 먼 거리가 아직도 남았다는 정도였다. 그런데 앞서도 이야기를 했지만 도로가 상당히 잘 정비되어 있었다. 밀림에 도로를 만든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빠르게 자라는 나무와 풀들이 도로를 빨리 훼손시키기 때문이다. 그나마 암흑제국의 도로는 도로 중간에 사이사이 특이한 돌들을 박아 넣어서 그 도로 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 성분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 돌이 박혀 있는 부분은 주위 로 나무나 풀이 자라지 못하고 있었다. 뭐 그렇다고 그 돌들로만 도로 전체를 만들 수는 없었던 모양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런 돌들은 중요도가 높은(그러니까 큰 마을이나 성으로 통하는) 길일수록 좁은 간격으로 놓여져 있었는데, 우리가 가는 이 길은 모르탄으로 통하는 길이어서 인 지 아니면 우리 앞에 있는 어떤 도시 탓인지 몰라도 상당히 잘 닦여진 도로였다. “이봐 루탄, 이 도로 말이야. 모르탄 때문에 생긴 도로가 아닌 것 같지 않아? 전에 모르탄에 올 때 지났던 도로 보다는 훨씬 잘 만들어져 있어.” 지토가 게브의 등에서 말을 걸었다.(그런데도 지토의 머리는 마차 지붕 밑에 있다.) “글쎄, 내 생각도 그런데... 이거 앞에 있는 도시나 성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으 니 답답하네. 풍아야 카다 좀 보내서 정찰 좀 해 보라고 해라. 이 도로 끝에 뭐가 있 는지...” 곧 카다가 풍아의 명령으로 날아올랐다. 하지만 카다는 오래지 않아서 앞으로 반나절 거리에는 계속되는 길 뿐이라는 답을 가 지고 돌아왔다. “뭐야? 그럼 대충 모르탄에서 하루 거리에는 없다는 말인데, 그럼 이 도로는 그냥 모르탄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에 만들어진 길인가? 그 참.” “알 수 없잖아요. 오빠. 가다 보면 알게 되겠죠.” 암흑제국을 벗어나기로 해서일까? 풍아는 상당히 여유가 생긴 모양이었다. 대답하는 것이 그렇게 보였다.(지금까지는 언제 무슨 일을 터뜨릴지 몰라 전전긍긍하게 만들었었는데...) 처음에는 동북으로 곧장 가던 도로가 점점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서 결국은 동쪽으 로 뻗어 있는 모습이 되었고, 우리는 사흘 동안 그 도로 위에서 머물고 있었다. 아침을 먹고 출발 준비를 하는데 화아가 소리를 질렀다. “우화!! 미치겠네. 뭐가 이래? 가도 가도 길이고, 나무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잖 아. 전에는 그래도 자잘한 괴물이라도 나오더니 왜 여기는 그런 것들도 없냔 말이 야.” 화아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소리를 지른 것이다. 어째, 어제부터 화아와 지토가 은근히 지겨워한다고 느꼈지만, 결국에는 화아가 폭발 을 하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어떻게 해? 가다보면 뭔가 나오겠지. 빨리 준비나 해. 여기 있는다고 뭐 가 달라져? 가자 오빠.” 풍아가 화아에게 한 소리를 퍼붓고는 말을 타고 앞장섰다. 풍아가 앞장서자 카다가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고, 일행들도 말과 마차를 타고 따라가 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카다가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앞쪽에 거대한 건물이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그 건물을 향해서 이와 같은 도로가 거미줄처럼 모여들고 있다는 말도 아울 러 전했다. “뭐지? 무슨 건물인데 이런 도로가 사방에서 모여드는 거지?” “글쎄요? 어쩌면 암흑교의 신전이 아닐까요?” “신전이라도 규모가 너무 심한데? 설마하니 신전의 본전이라도 되는 것일까?” “그런 것으로 생각하면 여기로 오는 길에 사람들이 전혀 없었다는 것도 이상하잖아 요.” “그건 그래요. 이런 도로를 깔아 둔 것을 보면 상당히 중요하고, 또 많은 인원들이 동원되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 곳이거나, 혹은 이런 규모로 권위를 나타내야 할 곳이 라 는 이야기가 되는데... 황제가 있는 곳은 이쪽이 아니라 남쪽이잖아요. 결국 황제가 아니라면 엄청난 사람들의 모임이 있는 장소, 그러면서 평상시에는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 장소라는 말이 되는 거네요.” 나는 광아의 말에 잠시 내가 알고 있는 여러 가지 사실들을 통해 앞쪽의 건물에 대 한 추리를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고개를 들었을 때, 광아도 눈빛을 빛내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우리 둘은 한꺼번에 소리를 질렀다. “대쟁투!!” “대쟁투장!!” “아!” “그래. 그거야!!” “흠.” 뾰로롱 뾰로롱 그러자 다른 일행들도 우리 둘의 생각에 동감을 한다는 듯이 감탄사를 토했다. “일년에 한 번 열리는 대쟁투의 장소라면 충분히 이런 규모가 되어야겠지. 뭐 평상 시에는 사람들이 없겠지만....” “정말 그렇겠네요. 오빠.” 풍아가 맞장구를 쳤다. 여기서 잠시 대쟁투를 이야기하면 일종의 암흑제국 등용문인 셈이다. 지방의 작은 마을이나 혹은 그 보다 더한 소부락의 경우라 하더라도 능력이 있는 자 가 없으란 법은 없다. 단지, 어디서나 기득권을 지닌 자들이 자신의 본래 능력뿐이 아닌 주위의 힘을 이용 하여 그들을 억누르고 심지어 쥐도 새도 모르게 묻어 버리는 경우도 있으니 제국의 힘 을 키우기 위해 그런 폐해를 없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대쟁투라는 것이다. 절차는 아주 간단하다 대쟁투 선포 후에는 개인적인 어떤 쟁투도 금지되며 한 달 이 내에 대쟁투장에 모여서 개인 대 개인의 쟁투가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상급의 지위를 지닌 자(일정 이상의 지위에 있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빠 질 수 없는 것이며, 참가하고자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신청이 가능하다. 특이한 것은 신청자가 지명하는 자는 싫어도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여기서는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고 자신의 힘만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점 때문에 높은 지위를 지키거나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는 곳 이기도 하다. 뭐 그렇다고 대쟁투가 전국적인 행사는 아니다.(그랬다는 오히려 국력이 약해지지 않 았을까?) 지역별로 돌아가며 열리기 때문에 6년에 한 번 기회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제국을 6개 지역으로 나누어서 일 년에 한 번 대쟁투를 선포하는 것이다. 뭐 선포 날짜가 정해지지는 않아서 어떤 경우에는 한 쪽의 대쟁투가 끝나고 곧 다른 쪽의 대쟁투가 시작되는 경우도 있다지만, 사실 어떤 면에서는 황제와 고위 귀족들의 행사에 맞추어 대쟁투를 여는 것이란다. 뭐랄까 하나의 축제와 비슷하게 말이다. “그럼 아직 사람들이 별로 없는 것은 대쟁투 기간이 아니어서 그런 것이겠군. 아깝 네. 좋은 구경이었을 텐데...” 화아의 말이었다. “오빠, 우리 가서 대쟁투가 언제쯤 열릴지 물어보고 시간이 멀지 않으면 기다렸다 가 보고 가는 건 어떨까요? 네?” “풍아야. 너 빨리 암흑제국에서 나가고 싶다며? 거기다가 대쟁투를 구경하는 곳에 여자가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고 말이야. 또 여자는 대쟁투에는 참가할 수도 없잖 아.” 화아가 풍아의 말에 쌍지팡이를 들고 나섰다. 아무래도 수도 구경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화풀이지 싶다. 그렇다고 수아에게 뭐라 하지는 못하고 만만한 풍아를 대상으로 한 모양이다. “오빠, 오빠도 보고 싶잖아. 안 그래? 자꾸 이러면 그냥 여인왕국으로 빨리 가는 방 향으로 이야기를 ...” “아니다. 아니야. 볼 수 있다면 봐야지. 재미있을 것 같잖아. 뭐 쟁투에서 사상자 가 나오기는 하지만, 전력의 보호를 위해서 어느 정도 승부를 가리는 것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고, 지위가 높은 경우에는 상대를 해치는 것을 금하고 있기도 하니까 봐도 별 무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그렇겠네요. 형. 솔직히 수많은 싸움이 벌어지고 갖가지 병기와 마수와 마법 과 환수에 가끔 정령까지 등장한다고 하니 볼 만한 광경이겠지요. 저도 기회가 닿는 다 면 보고 가는 쪽에 찬성입니다.” 가만히 듣고 있으니 반대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수아야. 너는 어떠니? 오빠도 볼 수 있으면 보고 갔으면 하는데..” 수아는 내 물음에 별 상관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도 상관없어요. 그런데 풍아 언니가 대쟁투장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그런 곳에 여자들이 있는 것은....” 수아가 말끝을 흐렸지만, 그게 문제이기는 했다. 암흑제국에서 그런 큰 행사를 하는 곳에 여자를 들어가게 할 것인지는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거야 가 보고, 방법을 찾으면 되겠지. 방법이 있을 거야 분명히.” 풍아는 상당히 적극적인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이런 경우라면 어떻게 해서든 방법을 만들어야 한다. 어떻게 해서든.... 우리들은 결국 대쟁투장에 도착했다. “저런 건물이 있다니... 어떻게 저런 것을 세울 생각을 했을까요?” 수아가 감탄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정말 엄청나군. 대단해. 정말 대단해.” 지토도 감탄에 감탄을 늘어놓았다. 그런 모습은 우리 일행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음... 15층이네요. 저기 바닥에서부터 세어보니 15개 층이 맞아요.” 풍아가 건물의 층수를 세어 이야기 했다. 하지만 건물이 지상으로 올라와 있는 부분은 없었다. 그러니까 건물의 모양을 설명하면 이렇게 생겼다. 일직선으로 깊고 둥근 원통형의 공간을 땅 속으로 만든다.(말이 깊고 둥글다지 그 넓 이가 상상을 초월한다.) 그리고 그렇게 원형으로 이루어진 벽면을 15층으로 나누어 커다란 방들을 만들었다. 각 층의 높이나 원주의 길이는 같았지만 방들의 수가 달랐다. 제일 아래층은 같은 규모임에도 방들의 수가 많았고, 위로 올라가면서 방들의 수가 줄어드는 것이었다. 그것은 꼭 절반의 수로 줄어들고 있었다. 아래에서 다섯 번째 층 방의 수는 4개, 그럼 1층은 64개의 방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6층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모양으로 벽이 만들어져 있었고, 11층은 다시 방 이 4개로 7층은 그럼 64개의 방이 되는 것이다. 12층은 다시 벽으로 둘러진 층이었다. 그리고 13층 14층 15층은 별다른 규칙 없이 방들이 배열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대쟁투장의 설명이 끝이 아니었다. 그 원기둥처럼 생긴 빈 공간에 탑이 하나 서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다시 이야기하면 이렇게 된다. 엄청난 넓이로 땅을 일직선으로 파고 들어가서 원통형의 공간을 만든 후에 그 공간 에 다시 그보다 작은 원통형의 탑을 세운 것이다. 하지만 말이 탑이지 밑면이나 윗면의 넓이에 차이가 없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높이는 밖을 두르고 있는 벽면(층마다 방의 수가 틀린..)의 11층 높이였 고, 층도 11층까지였다. “정말 어마어마한 규모네? 이런 것을 만들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인력과 시간과 노력이 들어야 하는 것일까?” 화아도 감탄어린 눈으로 난간에 기대어(지름이 500미터는 되어 보이는 함정인데 안전 장치가 없으면 이상하겠지.) 대쟁투장으로 보이는 건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깊이는 대략 150미터 정도 되어 보였다. 각 층이 10미터 정도로 보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구경을 하고 있는 동안에 반대쪽에서 마나의 움직임과 함께 한 인물이 나타났 다. 다른 일행들도 그 마나 이동과 인물의 모습을 발견한 모양인지, 일제히 그 쪽으로 시 선을 맞추었다. “누구지? 지금 텔레포트로 봐서는 7써클은 넘은 것 같은 인물인데?” 나는 중얼거리며 그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 반대편에 나타난 그에게 가는 방법은 건물을 비~잉 돌아서 가는 방법 밖에 없었 다. 하지만 우리가 얼마 가기 전에 그가 다시 모습을 감추었다가 우리의 지척에서 모습 을 드러내었다.(그 참, 조금만 기다리면 갈 텐데.....) “어떻게 오신 분들이신지요? 저는 이곳을 지키는 사제 아르미엘입니다만...” 그는 뜻밖에도 여자였다.(목소리도 투명하게 느껴지는 미성이었다.) 온 몸을 검은색 로브로 감싸고 후드를 깊숙하게 쓰고 있었기에 성별을 구별하지 못했 고, 더구나 암흑제국에서 혼자 있는 여자란 본 적이 없었기에 당연히 남자라고 생각 했 던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의 두 손은 소매 안으로 들어가 있었 다.) “여, 여자분 이셨습니까? 하하, 이런 생각지도 못했군요. 죄송합니다. 저희는 우연 히 이곳을 지나던 중에 이곳을 발견하고 도대체 무엇을 하는 곳일까 하면서 구경을 하 고 있던 참입니다. 저는 루탄, 여기는 제 일행들입니다.” 나는 일행을 대표해서 인사를 했다. 아르미엘이라는 여사제는 잠시 아무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시군요. 그런데 여기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모르신다니 암흑제국의 분들이 아 니신 모양이지요?” 날카롭다고 해야 할까? 뭐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일이기는 하다. “하하, 예. 저희는 누웬에서 온 여행자들입니다. 처음에는 그냥 미엔리도에서 물건 만 거래하고 돌아갈 계획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여행을 오게 되었습니다.” “네, 그러시군요. 여기는 혹시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대쟁투를 위한 대쟁투장입니 다. 잠깐 구경하시겠습니까?” 아르미엘 사제는 전혀 거부감이나 의심을 보이지 않고 나에게 되물었다. “아니 구경을 해도 된다는 말씀입니까? 저희는 그냥 밖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 히 만족하고 있었는데 말이죠.” 화아가 대화에 참견을 하고 나섰다. “오랜만에 오신 여행객이신데 그냥 보내는 것은 대신大神 루시퍼님께서도 원하지 않 으실 것입니다. 더구나 루시퍼님의 인장을 받으신 분이시니 충분히 자격도 있으시고 말이죠.” 아르미엘 사제의 대답은 의외였다. 루시퍼의 인장이라. 예전에 손바닥에 뭐라고 그렸던 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어쩌면 이 사제는 우리의 정체를 알 수도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인장이라니요? 무얼 말씀하시는 건지....” 나는 일부러 놀라는 표정으로 물었고, 다른 일행들은 정말 놀란 표정이었다. “아니! 모르고 계셨다는 겁니까? 루탄님의 손에 새겨진 것은 분명 루시퍼님의 권능 이 숨어있습니다. 솔직히 저로서는 그 권능을 읽을 수는 없지만 루시퍼님의 지고한 힘 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인을 가지고 계신 것인지 모르겠군요. 이 제국에도 대신大神님의 권능을 받은 사람은 손으로 꼽는 정도 인데 말이죠. 뭐 굳이 숨기고 싶으시다면 더 묻지 않겠습니다. 이리로 오시지요.” 뭐 내 생각대로 손바닥에 장난치듯 그렸던 그 것을 이야기하는 모양이었다. 다만 다 행히 그것을 제대로 알아본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여기 이 곳이 쟁투장 안으로 들어가는 이동문입니다. 지금은 작동하지 않습니다. 상당한 신력으로 운행하는 까닭에 이걸 움직이려면 여러 명의 고위사제들의 힘이 필 요 한 까닭입니다. 그리고 이리로.....” 아르미엘은 우리를 데리고 건물 주위의 여기저기에 있는 이상하게 생긴 돌판들을 보 여 주었고 그것들이 쟁투가 벌어지는 기간에는 사제들의 힘으로 이동통로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 위에 오르는 자들은 무조건 최하층에 도달하게 되며 한 방에 두 명이 들어가게 된 다는 것이다. 그리고 승리하게 되면 위층으로 올라가게 되며, 진 사람은 밖으로 나오 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위층으로 올라가고 올라가서 5층에 닿으면 4명이 남게 되는데 그들은 다시 6 층에서 인원이 모을 때까지 기다리다 인원이 채워지면 7층으로 이동되어 싸움이 시작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64명이 출발하여 4명이 남아 다시 64명이 되면 다시 위로 올라가는 것이었 다. “6층이 지나면 다시 6층의 난관이 기다리지요. 그리고 6번의 2차전이 끝나고 24명 의 인물이 12층에 모이게 되면 저 곳 중앙탑의 꼭대기에서 싸움을 벌이게 됩니다. 그 리고 중앙탑의 1층에서 11층은 각각 쟁투를 벌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기 위한 관람 석 의 역할을 합니다. 또한 쟁투장의 12층 위쪽으로 3개 층은 마지막 24명의 쟁투자가 벌 이는 싸움을 보기 위한 관람석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 마지막 쟁투는 6명을 남기 고 멈추며 그 때부터는 각 지역의 패자인 6명의 귀족들을 지명하여 쟁투를 치룰 수 있 는 권리를 가지게 되어 황제를 제외한 누구의 자리든 도전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는 것이지요. 물론 아직까지 그렇게 6인의 패자에 끼었던 예는 많지 않지만 말입니다.” 아르미엘의 설명은 자세하고도 명쾌했다. 그리고 그는 우리를 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는데 그것 역시 이동문을 이용한 것이었 다. 아르미엘의 말로는 우리가 지나가는 문은 상당한 고위층의 인물들이 통과하는 곳으 로 작은 힘으로 소수의 인원을 이동시키는 것이라 사용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중앙탑이라 불리는 곳의 11층으로 이동되었는데, 탑 안은 텅 비어있어 허전하 게 느껴졌지만, 쟁투 기간에는 이 곳에 테이블과 의자가 놓이고 상급 귀족을 위한 특 별석이 만들어 지는 등 아주 복잡하게 된다고 했다. 그리고 특히 건너편의 4개의 방을 자세히 볼 수 있는 곳이 특석이 된다고 알려 주었 다. 우리가 중앙탑의 가장자리로 가 보니 탑이 11층의 싸움장 보다는 약간 높아서 싸움 을 보기에 편하게 되어있었고, 11층에서는 11층의 싸움은 물론이고 10층의 싸움도 충 분히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원형으로 생겨서 모든 싸움을 다 볼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아르미엘은 다시 우리들을 원래 우리가 있던 자리로 데려다 주었다. “이거 덕분에 아주 좋은 구경을 했습니다. 거기다가 자세한 내용도 알려주셔서 너 무 감사합니다.” 나는 아르미엘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감사를 표시했다. “아, 아닙니다. 무슨 그럼 말씀을, 그저 루시퍼님의 뜻을 따른 것일뿐입니다.” 약간은 나의 행동이 의외인지 당황하는 듯 하던 아르미엘은 그렇게 말하는 동안 다 시 목소리에 안정을 찾았다. “그런데, 아르미엘 사제님은 여기 혼자 계시는 것입니까? 이 큰 대쟁투장을 관리 하 시기에 혼자는 힘이 드실 텐데요.” 나는 숙인 고개를 들어 아르미엘의 얼굴을 보며(아르미엘이 아주 잠깐 고개를 들었다 가 숙이는 순간에 살핀 것이다. 후드의 깊이가 깊고 얼굴도 숙인 모습으로 있어서 얼 굴을 볼 수가 없다.) 물었다. 갸름한 턱선과 오똑한 콧등이 잠시 후드 밑으로 보였다 사라졌다. “저 말고도 많은 사제님들이 이곳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곳의 책임자이기에 여러분들을 모시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아마도 어딘가에 이들이 모여있는 곳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중앙탑의 어느 부분이 아닐까? “아무튼 덕분에 좋은 구경을 했습니다. 그런데 올해의 쟁투는 언제 열리는지 알 수 있을까요? 시간이 되면 보고 가고 싶다고 해서....” 내가 말끝을 흐리자 아르미엘이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올해의 대쟁투는 이미 오래전에 끝이 났습니다. 다음 대쟁투는 적어 도 5개월이나 6개월은 있어야 열립니다.” 라는 실망스러운 내용으로 말이다. 그 말에 화아와 풍아의 광아의 얼굴은 물론이고 지토나 수아의 얼굴에도 실망감이 돌 았다. “아쉽지만 하는 수 없지요. 그럼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보도록 하지요. 좋은 구경이 었을 텐데...” 나는 그렇게 말하고 아르미엘에게 인사를 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꼭 바쁜 여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 곳에 머 무는 것을 싫어하는 녀석들이라서...” 아르미엘 사제는 내 말에 별다른 대답이나 소리가 없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기회가 되면 다음에 또 뵙지요.” “예...루탄님.” 나의 반복되는 인사에 아르미엘 사제는 겨우 허리를 숙이며 작별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 우리 일행이 말과 마차에 올라 막 출발을 하려고 할 때 아르미엘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만요. 대신大神님의 인장을 지니신 분인데 이렇게 보내는 것은 아무래도... 여 기 이것을 드리겠습니다. 가지고 가십시오. 목에 걸고 다니시면 암흑제국 안에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참견하는 인물들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계 시면 언젠가 대쟁투가 시작되는 때에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어디에 계시든 한 번은 메 시지를 전할 수 있는 기능이 있습니다.” 빠르게 마차로 다가온 아르미엘은 지금껏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손을 소매에서 꺼내어 금속 목걸이 하나를 전해 주었다. 금속의 재질은 알 수 없었지만 그 모양은 눈에 익은 것이었다. 십자가. 하지만 온전한 십자가가 아닌 역십자가에 뱀의 형상이 둘러진 것이었다. 뱀의 형상이 일반적인 뱀이 아닌 괴수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굉장히 정교하기는 했 다. “이런 것을 선물로 주시다니...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대쟁투 에 불러주신다면 꼭 다시 오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는 아르미엘의 손에서 목걸이를 받으며 말했다. 아르미엘의 손은 무척이나 차가웠다.(소매 안에 얼음이 들어 있을까?)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목걸이를 건네준 아르미엘은 우리가 자리를 뜨고 시야에서 사 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어찌 아느냐고 묻지 마라. 나도 언제 들어가나 보고 있어서 아는 거니까. -여인왕국 아니 트렌스젠더왕국 - 우리는 대쟁투장을 뒤로 하고, 쟁투장 덕분에 잘 정비된 길을 따라서 다시 동북쪽을 향해 속력을 높였다. 그 사이에 여러 마을들이 있었고, 또 마을들을 지나서부터는 간간히 괴물들의 습격 도 있었지만 우리에게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 사이에 마수의 영역들이 있었지만 우리는 굳이 마수의 영역을 침범해서 싸움을 벌 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화아가 가끔 한 번 잡아 보고 싶다는 말을 하기는 했지만, 더 이상은 암흑제국에 있 고 싶지 않다는 풍아의 완강한 반대에 어쩔 수 없이 손을 들어야 했다. 나는 아르미엘이 건네준 목걸이를 목에 걸고 있었고, 그 덕분인지 지나는 마을과 성 에서 더 이상 귀찮은 일을 당하지 않아도 되었다. 알고 보니 그 목걸이는 재질에 따라서 신분을 나타내는데 내가 받은 것은 교주, 그리 고 그 바로 아래의 최고위신관 6인 다음으로 높은 신분의 사제들이 지니는 것이라고 한다. 한 마디로 제법 지위가 높은 사제였다는 말이다. 암흑교가 직접적인 무력을 행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하지만, 암흑제국 안에서 그 영향을 벗어나는 사람도 별로 없고 보면, 고위 사제의 비위를 건드리고 싶지는 않 은 모양이었다. 때문에 우리의 여정이 편해졌고 말이다. 그리고 드디어 우리는 암흑제국의 국경선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강이네요. 정말 깨끗한 강이에요.” 수아가 먼저 강을 반겼다. 우리 앞에 놓인 국경선은 강이었다. 솔직히 국경선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암흑제국과 여인왕국 사이에는 별다른 적대관계가 없는 모양인지(예전 이루비아와 유 소의 관계에서도 볼 수 있는 문제였다.) 국경선을 경비하는 자들도 없었고, 그 넓은 강 위에 배도 한 척 없었다. 그리고 동쪽으로 올수록 식생도 많이 바뀌어서 이 강에 이르러서는 밀림이라기보다 는 교목림의 성격을 보이고 있었다. 이제는 지겨운 밀림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장 강을 건너갈 방법이 없는 우리는 폭만 1키로가 넘을 강가를 따라 상류 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여인왕국과 교류를 한다는 이야기를 분명히 들었고, 그 때문에 일부러 모르탄에서 돈 벌이가 될 옷감들을 챙겨 가지고 왔던 우리들이었다. 그렇게 다시 며칠을 헤매며 우리들은 강물 속에서 수영을 즐기기도 하고(거머리만 피 하면 문제가 없었다.) 백사장에서 일광욕을 즐기기도 하는 여유를 누렸다. 음… 의외로 서슴없이 물 속에 뛰어든 수아와 풍아 때문에 한참 당황해야 했다.(수영 복이 있을 턱이 없으니 그대로 첨벙… 옷을 어떻게 하려고….) 하지만 정령이라는 것이 편하긴 편했다. 수아는 물 밖으로 나오면 옷이 그냥 말라 있었고, 풍아도 바람이 한 바퀴 돌고 간 몸 에 물기라곤 없었으니 말이다. 화아는 물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을 별로 즐기기는 않았지만, 광아와 지토는 물과 모래 를 오가며 신나게 놀았다. 대신 화아는 일광욕을 심하게 즐겼다. 드디어 카다의 정찰에 강을 건너는 작은 배들이 있는 마을이 포착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암흑제국에서의 마지막 밤을 강가 백사장에 앉아 보내고 있었다. “이제, 드디어 여인왕국이로군. 이봐 루탄, 여인왕국에서 뭘 할 거야?” 저녁을 먹고 난 후의 티타임에 지토가 물었다.(이 티타임은 나와 지토, 게브가 주로 하고 란이가 함께 하는 경우가 많다. 다른 녀석들은 대련을 하거나 설거지를 한다.) “너도 알잖아. 내가 유소의 후예에 대해 어찌할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란 것을 말이 야. 그냥 고향을 찾아가는 기분으로 가 보는 거야. 그 곳에서 예전 유소나 넥스의 흔 적을 찾을 수 있을까하고 말이야. 여인왕국의 초대 왕이었다니까 유소의 동상이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넥스와의 사이에서 아들이 있었다니 쉬벡이 언급하지 않 은 둘의 비밀스런 이야기가 전해 올 수도 있고 말이야. 원래 그런 것은 시간이 오래 흐르면서 밝혀지는 것들도 있으니까 말이야. 그저 그런 것이야. 여인왕국에 그런 것 들 이 없다고 하면 또 어떻겠어? 지금 우리들이 할 일이 뭐가 있어? 내 소원은 그저 너 희 들과 행복하고 즐겁게 지내는 것을 족해. 그렇다고 그저 아무렇게나 여기저기 돌아다 니는 것보다, 뭐든 조금이라도 목표 같은 것. 그게 비록 핑계라고 해도 말이야. 그런 것이 있으면 좋겠기에 세운 목표야. 음, 그건 있겠다. 유소가 썼던 그 목걸이 말이 야. 그거 어찌되었을까? 궁금하지 않아? 뭐 넥스의 건들렛도 그렇고… 그러고 보니 쉬 벡의 망토와 반지는 어디로 갔을까? 쉬벡이 마지막으로 있었던 그 곳에는 없었는데 말 이야. 나중에는 그것을 한 번 찾아봐야겠네? 하하 할 일이 생겼군.” 내가 그렇게 말을 마치고 슬쩍 웃고 있을 때, 수아는 설거지를 마치고 왔고, 다른 녀 석들은 대련을 마치고 탁자로 돌아왔다. 다들 밝은 얼굴이었고, 그 동안 여기 저기 다니면서 좋지 않은 일도 많았는데 변함없 는 내 가족들로 남아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광아야! 저 광구 좀 없애줄래?” 나는 광아에게 그렇게 부탁했고 광아는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별 말없이 공중에 띄워두었던 광구를 소멸시켰다. 순식간에 찾아 온 어둠. 나는 수아와 풍아의 손을 잡고 천천히 강변으로 나갔다. “아!!” “예쁘다.” 풍아와 수아가 감탄을 터뜨렸다. 짙은 하늘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이제는 북두칠성도 카시오페아도 없었고, 아직 신화의 주인공들이 차지하지 못한 상 태로 이름도 없는 별이었지만 밤하늘의 별들은 그야말로 소리만 질러도 흔들릴 것처 럼 흩뿌려져 있었고, 그 아래를 조용히 흐르는 강에는 또 한 하늘이 열려 물결 따라 별빛을 하늘로 되돌리듯 뿌려대고 있었다. “싸일런스!!” 나는 우리 주위에서 밀려드는 모든 소리들을 잠재우고 다만 그 휘황한 빛의 무리 속 으로 발을 들여 놓았다. 내 손에는 수아와 풍아가, 풍아의 남은 손에는 화아가, 화아의 남은 손에는 광아가, 수아의 남은 손은 지토가… 그렇게 서로의 손을 잡은 우리들은 강물 위로 걸어갔다. 아무런 빛도 없고 심지어 달도 뜨지 않은 어둠 속에서 강으로 올라온 우리들은 온 천 지에 별빛만 가득한 중에 서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내 심장이 뛰는 소리와 피가 흐르는 소리만이 들이 고 란이가 지느러미를 파락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우리들은 잠시 그렇게 별들의 품속에서 눈으로 듣는 음악을 듣다가 돌아와 조용히 잠 자리에 들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는 그 밤에 별빛이 온통 내 몸에 묻어나는 꿈을 꾸 었다. 나는 그렇게 동생들과 지토에게 선물을 주었다. 어두운 암흑제국을 지나는 동안 혹시 가슴에 스미어들었을지 모를 어둠을 씻어내기 위한 선물을…. 충동적인 선물이었지만 참 좋은 선물이었던 것 같다. 나를 포함한 모두에게 말이다. 다음 아침, 우리들은 어제 카다가 발견한 마을로 마차를 몰았고 그 마을에서 작은 배 를 타고 강을 건널 수 있었다. 주로 교역상들을 위한 배였고, 건너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 에 배의 선실도 없는 뗏목 수준의 배였다. 하지만 덕분에 마차와 말들과 사람들이 모두 탈 수 있었다. 배에는 우리 일행 이외에도 다른 일행들이 더 있었는데, 모두 건장해 보이는 남자들 이었다. 커다란 짐수레 하나를 호위하듯 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일행인 것을 알 수 있었는데, 모두들 허리에 큼직한 도를 차고 있었다. 상인이라기보다는 검사에 더 가까운 모습이었지만, 암흑제국에서 저정도도 되지 않 고 장사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언제 어디서 좋지 못한 일을 당할지 모르는 판이니 말이다. “어디에서 온 녀석들인지는 몰라도 운수 하나는 최고로 좋은 녀석들인 모양이군. 저 런 인원으로 무사히 여기까지 오다니 말이야.” 그 중 하나가 빈정거리는 투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어제밤의 즐거운 기억에서 깨어나기 싫은 우리들은 그 소리를 들은 척도 하 지 않았다. “크흐흐. 그렇지 그 정도의 눈치는 있어야지. 괜히 발끈하면 좋을 것이 없는 법이 지.” 처음에 입을 연 자가 우리들을 보고 다시 빈정거렸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자가 그의 팔을 잡았다. “조용히 하게. 만약 쓸데없는 소란이 있으면 주인어른께 혼이 날거야. 여기는 이제 암흑제국이 아니란 말이야. 이러다가 괜히 암흑제국과의 습관차이를 잊고 행동하다가 무슨 봉변을 당하려는 거야? 자네 성격이 암흑제국에서야 그런대로 쓸 만 했지만 여 기 서는 그러다가는 제 명에 못 죽어. 알면서 왜 이러는 것인가?” 옆 사람이 그렇게 말리자 그 때야 그는 우리 일행을 힐끗 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오빠, 습관 차이라는 것이 여자들에 대한 행동을 이야기하는 것이겠지요? 여인왕국 에서 설마하니 여자들을 암흑제국처럼 다루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죠.” 풍아가 즐겁다는 듯이 물었다. “아마 그럴 것이다. 오랜 시간동안 암흑제국을 돌며 장사를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여 자를 무시하는 습관이 길러지게 될 것이고 그런 상태로 귀국을 해서 그 버릇을 고치 지 못한다면 봉변을 당할 테니 말이다.” 내가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아까 빈정대던 인물을 말리던 사람이 내 목소리 를 들었는지 한 마디 참견을 해 왔다. “그것뿐만이 아니지. 우리 왕국에서는 사사로이 싸움을 벌이거나 시비를 거는 것을 금하고 있는데, 잘못해서 아무 곳에서나 싸움을 벌이다간 지방군이나 기사단에게 잡 혀 곤욕을 치르게 되기도 하지. 그러니 이제부터는 암흑제국에서의 습관들은 버리는 것이 좋을 것이야. 아무렴 그렇지. 흠흠.” 배는 우리들을 태우고 조용한 물살을 가르며 새로운 곳으로 우리를 안내하고 있었 고, 기대와 설레임에 찬 우리들의 눈은 별 다를 것 없어 보이는 강변을 무슨 대단한 곳이나 되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후, 배는 우리들을 나무로 만들어진 선착장에 내려놓았고, 작은 규모의 마을임 에 틀림없는 강변 선착장 마을은 우리 일행과 장사꾼 일행들로 인해 부산해지고 있었 다. 겨우 20여 호가 남짓 되어 보이는 마을은 전체적으로 허름하다는 인상을 주고 있었 고, 마을의 술렁거림은 우리들을 어찌하려는 것이 아닌 단지 호기심에서 기인한 것이 었다. 그러고 보면, 마을이 작으니 여관이나 주점이 하나뿐이니 호객으로 다툴 일도 없어 보였고, 주민들의 모습을 보니 상인도 아니어서 물건을 먼저 거래하려고 나설 사람들 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단순한 호기심과 구경거리라는 것 이외에 우리들이 그들의 관 심을 끌 만한 것은 없어보였다. 조막만한 어린 것들도 우리들을 보고 손을 내밀어 구걸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는, 허름한 마을이라 해도 굶주리지 않고 있는 듯 했고, 나름의 가정교육도 되어 있 는 모양이었다. 허긴 이렇게 작은 마을에서는 누군가 굶어 죽는 일이란 쉽지 않은 일이다. 대도시의 어느 허름한 골목에서야 하루에도 몇이 굶어 죽고 병들어 죽는지 모르지 만, 이런 곳에서야 옆집에서 무엇을 하는지는 그 얇은 벽을 통해 보이듯 전해지는 것 이 상례일 터였다. 이런 느낌이 내가 여인왕국의 첫 마을에서 느낌 느낌이었다. 그리고 허름한 마을의 인상과는 달리 사람들의 얼굴은 밝아 보였다. 그리고 더욱 내게 새롭게 보인 것은 마을의 여자들의 표정이었다. 암흑제국의 여인들은 언제나 고개를 숙이며, 어깨를 움츠리고, 눈치를 살피기에 여념 이 없었으며, 눈동자는 암울하게 죽어 있었다.(아니 그보다는 그저 그러려니 하는 모 습이라 해야 할까?) 하지만 이 마을의 여자들은 손끝으로 빨래의 물기를 털어내는 행동 하나조차도 힘이 있어 보였고, 생기가 있어 보였다. 고만고만한 어린 아이들도 마을의 대로(그래 봐야 별 것 없지만)를 활보하며 돌아다 니고, 우리 일행을 신기한 듯이 바라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우리들의 미모(?)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아이들의 눈동자에는 선망이 어려 있었 고, 가까이로 다가왔다가 곧 폴짝거리며 거리를 두는 아이들의 모습에는 구김이 없었 다. “아하! 정말 좋은 곳이네요. 갑자기 너무 많은 것이 바뀐 것 같아요.” 수아가 옆에서 감탄을 할 정도로 별 것 아닌 것 같은 변화가 우리를 놀라게 했다. “그럼, 우리 이 마을에서 며칠 쉬었다가 갈까? 급한 것도 없는데 말이야. 어떻게 생 각해?” 나는 그렇게 물었고, 일행들은 모두들 내 의견에 찬성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을을 거의 벗어난 길목에 마차를 세우고 다시 마을 안으로 들어갔 다. “저기 죄송합니다만, 이 마을의 촌장님이나 그런 분이 계시면 좀 뵙고 싶습니다 만….” 나는 마을 안으로 들어가다가 처음으로 만난 사내에게 그렇게 말했다. “촌장님이요? 계시긴 합니다만, 무슨 일이신지요?” 촌사람들의 보편적인 태도랄까? 조금은 공손해 보이면서도, 무언가 새로운 것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내는 그의 대답 에 나는 웃으며 말했다. “네, 저희는 저기 누말에서부터 여행을 하면서 암흑제국을 지나왔는데, 이 마을에 도착한 일행들이 너무도 평화롭고, 생기 찬 마을 모습이 보기 좋다 하여서, 며칠 저 기 마을 입구에서 지내다 갔으면 해서 허락을 얻을까 합니다. 그래서…” 내가 웃으며 자세히 설명을 하자, 그 사내는 어느 정도 경계를 풀고 촌장의 집에까 지 우리를 안내해 주었다. 겉으로 보기에 특별한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 촌장의 집은 마을의 중앙 부분에 위치 해 있었다. 촌장은 의외로 여자가 아닌 남자였고(난 여인왕국에서는 이런 일이 여자에 의해 이루 어지는 줄 알았다.) 그는 우리가 마을 입구에 머무는 것에 대해서 별로 참견하고 싶 은 생각은 없다고 했다. 다만 마을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없도록 자제를 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 가 끔 교역꾼들이 지나다니기는 하지만 이 마을에서 우리 같은 사람들은 보기가 어려워 호기심이 많은 아이들이나, 적당한 나이가 된 처녀 총각들이 관심을 가질 지도 모르 지 만 될 수 있으면 가슴에 바람을 넣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우려 섞인 말을 하기도 했다. 우리는 촌장의 부탁을 고개 숙여 그렇게 하도록 노력하겠다는 인사로 대신하고 촌장 의 집을 나왔다. 뭐 따지고 보면, 그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고, 늙은 나이답게 혜안도 지니고 있다 고 할 만한 것이었다. 사실 우리 같은(생긴 것에서부터, 입고 있는 옷이나 아직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능력 까지 뛰어난) 사람들을 보는 순박한 사람들의 마음이야 설레임과 선망의 감정이 생기 지 않을 수가 없을 테니 말이다. 뭐 그렇다고 그걸 어떻게 할 도리는 없다. 다만 조심(?)하는 수밖에는 말이다. 우리들은 그 작은 마을에서 오래 있지는 않았다. 이틀 정도 머물면서 마을의 분위기를 멀리서 지켜보는 것이 우리가 한 일의 전부였 다. 수아는 상처나 난 아이의 무릎을 치료해 준 때문에 잠깐 마을 사람들의 자잘한 상처 들을 돌보아 주기는 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저 그 마을의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풍 경 들을 바라보거나 강물 속으로 자맥질을 하거나 강변으로 나가 일광욕을 하거나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마을의 젊은 남녀들이 우리를 소 닭 보듯이 했다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우리들은 그저 지나가는 존재에 불과한 것을 빠르게 깨우친 탓인 것 같 다. 그런대로 이 마을을 지나 암흑제국으로 가는 사람이나 암흑제국에서 마을로 들어오 는 사람들이 가끔 있으니 지나가는 사람이라는 개념이 빨리 자리를 잡은 것 같았다. 그렇게 이틀을 마을에서 머물고 떠날 때, 그동안의 정으로 우리를 배웅 나온 것은 조 무래기 꼬마들과 촌장이 전부였다. 하지만 우리들은 마을의 풍경과 사람들의 순박함과 아이들의 해맑음과 포근한 느낌 을 가슴속에 가득 안고 떠나고 있었다. 그래도 이틀을 머무는 동안에 전혀 소득이 없었던 것도 아니어서, 여기저기서 주워들 은 풍월 덕분에 어느 정도는 여인왕국에 대한 정보를 약간이나마 얻을 수 있었다. 현재 이 왕국을 이끌고 있는 것은 제 34대 여왕이라고 한다. 그 동안에 이 나라에서 는 단 한 번의 반란도 성공을 거둔 적이 없었기 때문에 1대 여왕인 유소의 후예임에 틀림이 없었다.(솔직히 자신은 없다. 유소가 넥스 이후에 재혼을 했나?) 여전히 왕의 권력은 강한 편이었고, 기사단의 힘도 막강한 상태라고 한다. 물론 그 기사단은 얼음기사단이다. 하지만 처음 건국 당시처럼 거의 모든 고위 관료들이 여자인 것은 아니고, 건국 후 에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기도 전에 그런 양상이 반전 되어 여자들이 밀려나고 남자 들이 관료의 자리에 올랐다고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당시에 유소에게 힘을 실어주던 얼음기사단을 제외하 고는 모든 능력 있는 자들이 남자들이었을 테니까. 사실 그 당시에 여자들은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여자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기란 쉽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얼음기사단이 국가 방위의 커다란 축을 담당하고 있었기에 여인 왕국은 점차 여자에 대한 어떤 차별도 용납되지 않는 체제가 되어 갔던 것이다. 때문에 여인왕국의 현재 상황은 남녀의 절대적 평등상태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 었다. 물론 상대적으로 힘에서 밀리는 여자들이었지만 그 힘을 보충할 수 있는 우월성들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겠지만 말이다. 실제로 여인왕국에서는 가사 일을 하는 것조차도 나름의 가치로 인정받고 있는 실정 이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여인들의 힘이 있었으니 출산과 육아의 힘이었다. 그것은 아직도 여자들이 어느 정도는 남자들의 우위에 있는 가장 큰 힘이 되어주고 있었다. 절대적 평등이었지만, 여인왕국의 남자들은 여자들이 자신들 보다 더 위대하다고 말 한다. 여자들은 남자가 하는 일의 전부를 맡을 수 있지만, 남자는 출산을 할 수 없으므 로….(여기에서 아기를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은 남자다 뭐 이런 소리는 하지 말기 를…. 그건 상방간의 노력에 의한 결과다. 그 이후로 남자는 배 속에 아이를 데리고 있지 않다.) 그래서 여자들은 남자들로부터 존중 받으며 때로 보호 받는다. 그것이 여인왕국의 현 실정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조화로운 나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들은 국경을 넘어서서도 부대나 기타 군인 기사의 모습을 보지 못한 상태로 길 을 재촉하고 있었다.(평화로운 모습에 두드러지지 않아서 일까?) 주위의 풍경들은 교목림의 모습에서 관목림의 모습으로 바뀌고 있었고(교목 관목을 모르면.. 교목 8미터 이상되는 나무, 관목 2미터 정도 나무로 아시면..) 더 이상 후 덥 지근하고 습기가 가득한 밀림의 기후가 아니라는 것이 우리들을 즐겁게 하는 또 하나 의 이유라면 이유였다. 적절하게 구릉지와 평원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강과 호수도 간간히 자리 잡고 있 었다. 사람들이 사는 마을은 주로 농업을 하고 있었고, 가끔 평원을 이용한 목축을 하는 사 람들도 있었다. 삶은 힘들어도 괴롭지 않아 보였고, 착취나 억압의 흔적은 얼굴에 보이지 않았다. “정말, 괜찮은 나라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유소가 참 좋은 나라를 세웠어.” 나는 이렇게 건국왕인 유소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이에요. 한타나 누웬, 암흑제국에 비해서 너무 평화롭고 행복해 보이는 나라라 는 생각이 들어요.” 수아도 내 말에 동감을 표했다. “이대로 왕국의 수도로 가실거지요? 형님.” 광아가 하얀색의 말을 마차 옆으로 붙이며 물었다. “그래. 그렇게 하지 뭐. 특별히 들렀다가 갈 곳도 없으니 말이야. 나중에 수도에서 다른 곳으로 갈 일이 생기면 모를까 지금은 그냥 수도로 가자. 가서 돈도 좀 벌어야 지.” 나는 빙긋 웃으며 말했고, 광아도 모르탄에서 가지고 온 옷감들에서 남을 이익을 생 각하는 것인지 빙그레 웃었다. 왕국의 수도는 그 예전 넥스등과 함께 불모지대의 탐험을 떠나면서 통과했던 그 평원 의 중앙쯤에 위치에 있었다. 사람들의 이야기로 예전 동자치령의 령주가 있던 쥐덫의 성벽은 이미 풍상에 쓰러지 고 그 보다는 좀 더 한타 쪽으로 나아간 곳에 국경선이 만들어지고 성이 쌓였다고 했 다. 다만 쥐덫의 일부만이 건국왕의 명령으로 그 형태를 보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그 곳도 한 번은 거치고 가야 할 곳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가는 길에 쥐덫이 있었기 때문에(수도로 가는 길에 조금만 돌아가면 된다.) 우리는 그 곳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광아와의 이야기에서 쥐덫을 경유한다는 말이 빠진 것은 그런 것은 이미 우리 일행 이 다 알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벌써, 추수철이 가까워 진 모양이네요. 저 사람들 첫 추수를 하고 있어요. 오빠.” 수아가 들녘을 흔드는 바람 속에서 추수를 하는 농부들을 발견하고 환호하듯 말했다. “그래, 그러고 보니 벌써 그렇게 되었구나. 쉬벡의 성에서 나와서 지금까지 제법 많 은 시간들이 흘렀구나.” 나는 그렇게 말하며 새삼스럽게 변해가는 풍경들에 눈길을 돌렸다. 이제 오래지 않아서 이 들판과, 저 산등성이가 푸르름을 잃어 갈 것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곳간에는 곡식이 들어차고, 입에는 풍성한 먹거리가 들어가고, 동물 들의 보금자리에는 월동을 준비하는 부산함이 일어날 것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들도 모르는 사이에 또 한 계절을 보내고 맞이하고 있었다. 처음 우리가 나왔을 때가 늦봄이었으니 이제 가을이 지나고 겨울을 맞으면 모든 계절 을 다 지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 들녘을 지나 작은 산 어귀의 개울가에 마차를 세우고 저녁 준비에 들어갔 다. 여인왕국의 어느 곳에나 있는 이런 작은 개울과, 조그마한 산들은 우리 같은 여행객 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쉼터가 되어 주었다. 아무래도 취사에는 물이 필요하니 말이다. 여행객에게 깨끗한 물이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수아는 오랜만에 저녁으로 수제비를 준비했다. 그리고 우리들이 저녁을 먹을 무렵, 산등성이를 타고 넘어온 바람결에 새로운 손님들 이 찾아 들었다. 그들은 바람처럼 가벼운 몸짓으로 광아가 켜 놓은 광구주위를 돌며 머뭇거리다가 곧 수아와 풍아, 광아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어머!! 이게…..” 수아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래, 그런 것 같구나. 정령족인 모양이네. 그 예전에 정령계에서 떨어져 나와 물 질계에 머물게 되었다고 하던 그 존재들인 모양이구나. 그런데 무슨 정령족일까? 종 류 가 많다고 쉬벡이 그랬는데 말이야.” 나는 유독 수아와 광아 풍아에게만 관심을 보이는 그들을 보며 말했다. “음, 저기 노란 모자를 쓴 녀석들 그러니까 풍아 주위에 있는 녀석들은 바람의 정령 족, 그리고 파란 모자를 쓰고 수아 곁에 있는 녀석들은 물의 정령족, 물론 광아 곁에 있는 녀석들은 빛의 정령족, 이마 더듬이에서 빛이 나잖아. 그렇게 세 정령족들이네. 저들 말로는 어둠이 짙어지면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이렇게 놀러 나오는 경우가 가끔 씩 있다고 하는군.” 화아가 설명을 했다. 나는 듣지 못했지만, 동생들이나 지토는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을 피한다니? 왜 사람들이 해치기라도 한다는 거야?” 나는 다시 놀고 있는 동생들을 피해서 화아에게 물었다. “그런 것은 아닌데…. 일단 신기해 하니까 장난으로 잡으려고 하는 경우도 있고… 워낙 체구가 작아서 잡히면 크게 다칠 경우도 생기고 하니까 그런 모양이야. 그렇다 고 이 녀석들이 무슨 힘이나 특수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야. 겨우 결계를 만들어서 인간들로부터 모습을 감추고 마을을 만드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 는 모양이야.” 나는 화아의 말에 다시 정령족들을 살펴보았다. “음, 별다른 능력이 없다고 한다면 무척이나 피곤하겠군. 일단 귀여우니까 잡으려 고 드는 사람들도 제법 있을 것 같고 말이야. 잡아서 애완용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은 없을까나?” 내 말에 화아가 대답했다. “그런 것은 걱정이 없을 거야. 만약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인간계에 나온 정령계 정령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말이야. 저들은 이를 테면 정령들의 보호를 받는 존 재라고 할까? 그래서 특히나 이 나라에서는 이들을 그런 식으로 취급하는 경우는 없 다 는군.” 나는 화아에게 다시 물었다. “그런데, 넌 어떻게 그런 것을 다 알고 있는 거야? 저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아 니면서..” 내 말에 화아가 빙긋 웃었다. “형, 난 최상급 정령이야. 저들은 하급정령에서 변화한 존재들이지. 저들이 내 범 위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저들에 대한 모든 것을 알 수 있어. 그냥 저들이 기운을 느끼는 것으로도 모든 사정을 알 수 있다는 말이지.” 나는 화아의 말을 듣고 어느 정도 이해를 할 수 있었다. 뭐 일종의 동화와 같은 것일까? 그런데 성향이 다른데도 그런 것이 되는 모양이네? 그 사이에 수아와 광아 풍아는 주위를 맴도는 정령족들과 무언가 교감을 나누는 듯 미소를 띠기도 하고, 눈을 감고 한 동안 가만히 있기도 했다. 어쩌면 동생들이나 지토도 정령계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닐까? 왠지 그럴 것도 같다는 생각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나는 동생들과 지토 화아를 두고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산책을 나갔다. 하긴 그럴 것도 같았다. 고향이랄까? 정령계는 저들의 고향이었으니 가끔 고향이 생각나기도 하고 가고 싶기 도 했을 텐데, 겨우 반지 속에 만들어진 가짜 정령계에서나 지내다가 이젠 나와 함께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니, 정령계가 그립지 않을까? 뭐 모르겠다. 아직까지 그런 내색을 전혀 느끼지 못했으니 아닐 수도 있는 것이고… 나는 그렇게 내 스스로를 변명하며 산책을 하다가 마차로 돌아갔다. 마차 옆 탁자에는 이제 동생들과 지토만 남아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응? 벌써 가 버린 거야? 좀 더 놀다 가라고 하지. 왜 보냈어?” 내가 탁자에 앉으며 그렇게 물어보자 풍아가 빙긋 웃으면 대답했다. “으응. 아니야. 오랜만에 봤다고 해야 하나? 그냥 그래서 반갑기는 하지만 서로가 다른 존재들인 걸 뭐. 우린 정령들이고 그것도 최상급이라 그들에게는 부담이 상당했 을 거야. 우리가 기운을 많이 줄이기도 했고, 또 물질계에 오래 있어서 그나마 적응 을 하는 모양이었지만 말이야.” “그래, 예전에 우리들이 상급정령이나 최상급 정령들이 있으면 기도 펴지 못했었잖 아. 정령왕님들 같은 경우에는 완전히 같은 자리에 있지도 못할 정도였는데…” 화아가 풍아의 말에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하급의 정령들은 상급의 정령과 한 자리에 있는 것이 몹시 힘들다는 소 리를 예전에 들은 적이 있었다. “그, 그래? 그래도 오랜만에 만나니까 좋지?” 나는 은근히 말을 돌리며 물었다. “호호, 오빠는 가끔 정말 바보가 되는 거 같아. 오빠가 느끼는 느낌들을 우리가 모 를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몇 번을 이야기해야 하는 거야? 오빠의 느낌은 우리들도 느 낀단 말이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아. 오빠. 우리 오빠 곁을 떠나고 싶은 생각은 전 혀 없어. 정령계라고 특별하진 않아. 친구가 있어서 우정을 나눈 것도 아니고, 그저 몸이 좀 편하다는 정도 일까? 재미없는 곳이야. 그러니까 그런 곳에 돌아가 있고 싶 은 생각은 없어. 뭐라고 해야 하나 피로를 풀기 위해서는 가 볼 만 하다는 생각이 들 긴 하지만 말이야.” 풍아가 내 질문에 꽤나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한 말이다. 이러다가 내가 누웬의 황제와 같은 녀석을 다섯이나 곁에 두는 것은 아닐까 몰라. 혹시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이 녀석들이 전부 그를 좋아하게 되는 것은 아닐 까? 아니야, 느낀다고 했지. 꼭 같은 느낌을 가진다는 말은 없었으니까 괜찮을 거야. 그럼, 그럴 거야. 나도 모르게 생각이 이상한 곳으로 빠져서 중얼거리는 말이었다. 그렇게 짧은 정령족들과의 만남을 가진 후로는 우리 여정에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 았다. 그리고 드디어 쥐덫이 멀리 보이기 시작하는 곳이었다. 예전 넥스 등과는 쥐덫의 정면에서 다가갔지만, 지금은 쥐덫의 남쪽에서 올라가고 있 다는 것이 다르다면 다를까? 그리고 더 이상 쥐덫에 성벽이 없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겠다. 하지만 그 이외에는 별로 많이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성벽이 없어진 쥐덫 주위는 온통 드넓은 평원으로 변해 있었다. 수많은 괴물들의 주검들이 쌓이고 쌓이며 성벽 너머와 이쪽을 차이를 극명하게 만들 어 주었던 그 옛날의 흔적은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쥐덫 안으로 마차를 몰았다. 하지만 시간이 많이 흘러서일까? 우리가 쥐덫으로 들어가도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 었다. 가까이에서 본 쥐덫은 하나의 유적이었다. 지키는 사람도 하나 없는. 우리는 마차를 세우고 쥐덫의 성벽 위로 올라갔다. 실상은 내가 올라가서 다들 따라 올라왔지만 말이다. 저기 멀리 해가 지고 있었다. 나는 등 뒤로 지는 해를 맞으며, 그 예전 온 들판을 빈틈없이 메우며 달려오던 마물 들의 환영을 보았다. 쥐덫의 좌우로 늘어선 성벽위에서 마물들을 향해 무기를 휘두르던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다. 피로 물든 대지를 적시며 비명을 지르는 괴물들과 성벽 위에서 재수 없이 공격을 피 하지 못한 사람의 처절한 비명을 들었다. 그 겨울, 불모지대를 다녀온 후로 나와 넥스와 쉬벡이 참여하던 그 처절한 전투가 눈 앞에 펼쳐졌다. 그리고 그 싸움은 등 뒤로 해가 저물고 어둠이 짙게 깔려올 무렵에야 끝이 나고, 나 는 겨우 고개를 돌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동생들과 지토를 보았다. “그 때는 참 처절하게들 싸웠었어. 그렇지? 성벽 덕분에 사상자가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목숨을 걸고 싸운 거였어.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나는 싸움에 별 의미를 두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어쩌면 심심풀이였을까? 강하다는 오만함이었겠지? 하지만 다 른 사람들은 다들 목숨을 내 놓고 무언가를 위해서 싸웠었던 것 같아. 적어도 그 때 를 생각하면, 이 성벽에 서 있던 사람 중에서 내가 제일 하찮은 존재였는지도 모르겠 구나.” 내 기분을 이해하는 탓인지 동생들과 지토는 별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우리는 성벽을 내려와 골목을 휘휘 돌아 예전 유소의 여관을 찾았다. “어쩌면, 하나도 안 변한 것 같네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나와 일행은 유소의 여관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간 여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떠들고 한 구석에는 취기 를 못 이겨 바닥을 기어 다니는 녀석까지 다양하게들 떠들고 놀고 있었다. “뭐, 뭐지? 이런 모습들은? 밖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무슨 일이야? 이게?” 내가 놀라 소리를 질렀지만 술을 마시는 누구도 우리를 돌아보거나 하지 않았다. “오빠, 이상해요. 그만 나가요? 네?” 수아가 옆에서 소매를 잡아 끌었다. 쿵. 쿵. 쿵. “이거 안 되겠는 걸? 힘으로도 안 되고, 지토 아저씨의 도끼로도 흠집도 나지 않 아. 갇혀 버린 것 같아.” 화아가 문에 몸을 던지다가 말했다. 그 순간 주점의 모습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순식간에 주점에는 나와 넥스, 쉬벡의 모습들이 오가고, 그 옛날의 기억을 떠올리기 에 충분한 모습들이 연출되었다. 기억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은, 혹은 기록 영화의 한 장면을 보여주는 것 같은 모습 이었다. 내가 넥스와 유소의 혈도를 점혈하고 맛있는 밥을 핑계로 협박을 하는 모습도 있었 고, 넥스 유소가 서로의 혈을 짚어서 고생하는 모습도 있었다. 어느 사이에 나와 동생들, 지토는 그런 모습을 넋을 잃은 듯이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또 다시 풍경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유소와 넥스가 함께 지내는 모습이었다. 서로를 사랑하는 모습들이 스치고 지나갔고, 유소의 아이가 태어났다. 사내아이였다. 그리고 다시 얼마간 평화로운 가정의 모습이 이어지다가 넥스의 불같이 화난 모습이 나타나고 아이를 품에 안고, 큰 칼을 들고 문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나타났다. 흐느끼던 유소를 마지막으로 여관은 완전히 어두워지고 말았다. “이, 이건. 유소와 넥스의 이야기인가? 어떻게 된 거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 은 거지?”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와 함께 다시 여관의 불이 켜지고 깨끗하게 차려진 식탁이 나타났다. 그리고… “오랜만이구나. 루탄.” 한 여자가 주방에서 음식을 가지고 나와서 식탁위에 올려놓고는 말했다. 중년을 지나 이제는 할머니가 되어가는 여인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힘이 넘치고, 여유와 자애까지 두루 갖추었고, 알지 못할 위엄까지 곁드린 멋 진 모습의 여자였다. “설마? 유소야? 유소?”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물었다. “그래, 나야. 유소. 너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던 장본인 그래 나 유소야.” 그렇게 말하는 유소의 눈에는 아픔이 묻어나고 있었다. 후회를 포함하는… 하지만 나는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 지.. “묻고 싶은 것이 있어도 잠시만 참아. 해가 뜨기 전까지는 시간이 많아. 이제 겨우 밤이 깊어 오는 시간인 걸? 우선 식사부터 해. 걱정하지 말고. 먹을 수 있는 것들이 야. 너보다는 맛이 없겠지만, 나도 실력이 많이 늘었거든. 시녀들의 눈을 피해서 요 리 연습을 하느라 참 고생도 많았어.” 그리고 유소는 우리들에게 식사를 권했다. 유소의 장담대로 식사는 맛있었다. 오히려 나보다 나은 맛이었다. 역시 숙련된 아줌마의 음식 맛을 따를 수는 없는 것인가? (아니 이게 아닌데..) 식사가 끝나고 유소가 내 놓은 찻잔을 앞에 두고 탁자에 마주앉아 우리는 서로를 물 끄러미 보았다. 이제 그녀는 말을 하고 나는 들을 차례였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을 그녀는 말해 줄 것이었다. “내가…. 루탄에게 미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어. 나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거든. 이루비아는 우리 오빠의 주인 되는 사람의 딸이었고, 더 나아가서는 주인 이 될 사람이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너에게 미안한 것은 사실이야. 어쩌면 너에게 그런 실망감을 준 것이 내 일생에서 두 번째로 가슴 아픈 일이었을지 몰라. 내가 넥 스 를 떠나보낸 것 다음으로 말이야.” 그리고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인 그녀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그 이야기는 새벽까지 계속되었기에 줄여서 소개한다. 유소는 나와 헤어지고 넥스와 결혼해서 이 여관에서 신혼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 사이에 오빠인 동자치령주가 가끔 유소의 원조를 바라기는 했지만, 이제는 한 남 자의 아내로 살아갈 결심을 한 유소는 오빠의 그런 청을 거절하고 넥스와의 평온한 삶 을 누리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곧 온 세상에 변화의 물결이 닥치고(마수와 환수의 유입과 혼란) 동자치령주 는 그런 혼란 속에서 유소의 힘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넥스에게 유소의 이야기를 해 버렸고(그 때까지 그 사실을 넥스가 모 르고 있었단다.) 넥스는 자신을 속인 유소를 용서하지 않겠다며 네 살이 겨우 된 아 들 을 안고 여관을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혼자 남은 유소는 결국 다시 칼을 들고 오빠를 돕기 위해 나섰고, 오빠를 돕는 다는 것이 곧 동자치령의 수많은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어쩔 수 없 이 다시 나와의 약속을 깨고 기사단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몰려드는 괴물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강한 기사들이 필요했기 때문에… 유소는 이 대목에서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누누이 빌고 또 빌었다. 그리고 결국 온 세상이 고립되어 겨우겨우 소단위의 마을들이 뭉치면서 생존을 모색 할 무렵, 그 오빠가 괴물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일이 벌어지고, 그 주위의 모든 사 람들이 가장 강력한 무력을 지닌 유소에게 지휘권을 넘겼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근 30여년을 외롭고 고독한 전쟁을 치루며 유소의 나이 62세가 되던 해에 드디어 여인왕국이 탄생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유소는 그 이후로 20년을 왕국을 통치하다가 그의 딸이자 넥스의 딸에게 왕권 을 넘겼다는 것이다. (넥스가 떠날 때, 배 속에 있던 아이라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이 있었고, 이루고 싶은 일이 있었기에 유소 는 노구를 이끌고 북자치령을 찾아 넥스를 만나고 그의 아들을 만나 용서를 빌고, 용 서를 하고 가슴의 응어리를 풀었다고 한다. 넥스는 그 당시 유소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우리의 고통과 괴로움으로 루탄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풀렸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우리는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구료. 나는 내 소원을 이루었고, 당신도 당신의 소원을 이루었는데… 루탄이 보고 싶구료.” 하지만 그것을 끝으로 여인왕국에 돌아온 유소는 다시 넥스를 보지 못했고 주어진 시 간이 끝나 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으로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소망을 빌었으니 그것이 바로 나를 다 시 만나는 것이었다고 한다. 나를 만나 단 하룻밤 이야기를 하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너를 만나고 있는 거야. 그거 기억나? 내가 놈의 상자에서 꺼내 들었 던 그 목걸이 어떤 소원이든 이루어준다던 그 목걸이 말이야. 그 목걸이가 내 소원을 이루어 주었지. 나는 죽었고, 잠시 눈을 감고 시간의 흐름을 느끼고 있다가 이 곳으 로 오는 너를 느끼고, 이 쥐덫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했지. 다른 이들은 쥐덫에 들어 와 도 황폐한 풍경 이외에는 볼 수 있는 것이 없지만 너는 다르지. 여관을 보고 여관 안 으로 들어올 수가 있었으니 말이야.” 유소는 찻잔에서 고개를 들어 나를 지긋이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이젠 되었어. 난 이제 아무 아쉬움도 없어. 천 년이라… 많이도 흘렀지만 나는 그 동안에 시간으로 괴롭지도 않았으니 걱정은 말아. 넌 그런 것을 먼저 걱정할 녀석이 지. 그리고 얼음 기사단은 네가 하고 싶은 데로 해. 어차피 이제는 그들이 싸워야 할 마물들이란 거의 없을 테니 말이야. 참, 난 그 기사단에게 절대로 사람을 상대로 집 단 전을 벌이지 못한다는 계율을 붙였어. 그들은 대 마물전 기사들이야. 간혹 있는 대인 전이야 어쩌겠어? 하지만 기사단이 집단으로 그런 짓을 하는 것은 막고 싶었지. 네가 준 것으로 사람을 구하고 싶었지, 사람을 해치고 싶지는 않았거든.” 그렇게 말하는 유소의 얼굴을 보며 나는 빙그레 웃어 주었다. 유소도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여명이 트고 있었다. “이제는 가 봐야겠네. 내게 허락된 시간은 하룻밤이었으니까. 잘 있어. 그리고 행복 해야해.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한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 넌 그냥 행복하면 되는 거 야.” 창을 통해 들어온 햇빛이 유소의 몸을 통과하며 유소는 흐릿하게 사라져갔다. “나, 난 그냥 유소 네가 보고 싶었어. 절대로 미워한 적은 없었어. 처음에는 그냥 조금 화가 났을 뿐이야. 내가 찾아가지 않아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나는 사라지는 유소를 보며 점점 커지는 목소리로 말했고, 유소는 마지막으로 환하 게 웃어주고는 사라져 버렸다. “흐흑, 미안해. 정말이야. 미안해. 너희를 미워한 것이 아니었어. 흐흑.” 나는 탁자위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유소의 마지막이 슬퍼서도 아니었고, 말처럼 내가 그들에게 진정 미안하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그저 오랜 시간동안 나를 기다렸을 유소와의 만남이 너무나 짧게 느껴졌던 탓일까? 내 가슴을 흔들고 올라오는 서러움은 그 연원을 알 수 없이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유소는 성공적인 삶을 살았고, 또 원하는 바를 마지막까지 이루었다. 충분히 축하해 주고, 또 기뻐해야 할 일임에도 내 눈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그치지 않았다. 나는 한참 후 동생들과 지토(그 사이에 이들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방관자의 태 도로 나와 유소의 만남을 지켜 주었다.)와 함께 마차에 올랐고, 마차는 화아에 의해 쥐덫을 벗어났다. 나는 마차 안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오빠, 쥐덫이 사라지고 있어요. 모래성이 바람에 날리는 것처럼요.” 걱정되어 따라 들어온 수아가 이렇게 말했지만, 나는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느껴져 서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 이제 유소와 쥐덫은 할 일을 모두 마친 것이다. 마차는 여인왕국의 수도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나는 달리는 마차에서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동생들과 지토도 내 기분을 아는지 참견을 하지 않았고, 심지어 식사시간에도 부르 지 않고, 조용히 식사를 하고는 수로를 향해 길을 재촉할 뿐이었다. 그 날 하루가 지나고, 해가 질 무렵. 마차는 달리던 속도를 늦추고 관도 옆 공터로 들어서서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고, 나 는 마차 문을 빼꼼히 열고 밖으로 나왔다. “어머, 우리 오빠 나왔네? 다 울었어요? 호호.” 먼저 나를 발견한 풍아가 악의 없는 농담을 건넸다. 그러고 보면, 이 아이들과 지토는 내 기분을 참 잘도 알고 맞추어 주었다는 것을 새 삼 느끼게 된다. “그래, 벌써 밤이 되고 있네? 그런데 오늘 밤에는 무얼 먹지? 수아야 메뉴가 뭐 니?” 나는 조리대에서 무언가 토닥거리는 수아의 등을 보며 물었다. “응, 그냥 간단하게 술이나 한 잔 해요. 모두들 밥은 생각이 없을 것 같고, 오빠도 기분이 조금 우울해 보이니까 간단하게 포도주나 먹으면서 기분 전환을 하죠? 그래서 그냥 과일하고 튀김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수아가 허공에 손을 털어 물기를 없애고 다가오면서 말했다. “어? 그래? 그거 참 좋은 생각이다. 술이라…. 그럼 어디보자. 여기 어디에 좋은 술 이 있을 텐데… 예전에 넥스가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인물이라 창고에 잔뜩 쌓아 두었지. 그런데 지금도 먹을 수 있을까 몰라. 내가 보존 마법을 걸어서 보관한 것들 이 지만….”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아공간에서 포도주통을 꺼내 놓았다. 그러고 보면 이 포도주는 넥스가 아니라 쉬벡이 즐기던 것이었다. “어디 보자. 이건 한타리아에서 샀던 것이군. 쉬벡이 넥스가 술을 살 때에 끼워 넣 었던 것 같으네…” 나는 포도주통을 개봉하며 중얼거렸다. 다행히 보존 마법이 걸려 있었던 탓인지 술은 상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술이 상하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다면 소주가 아닌 포도주나 과일주를 가지고 실험 해 보면 안다. 이상한 덩어리가 지면서 술이 썩는 경우가 생긴다. 하지만 이렇게 은근한 향을 내는 경우는 상한 것이 아니라 심도 있게 숙성이 된 경우 이다. 나는 포도주를 수아가 꺼내 온 유리병에 옮겨 담고 남은 술을 다시 창고에 고이 모 셔 두었다. 쨍~~! 투명한 포도주가 유리잔 안에서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인다. 건배를 마친 우리들은 의자위에 편안한 자세로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부어라 마셔라하는 분위기를 원한 것은 아니었기에 그저 깊어가는 어둠을 바라보며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것이었다. 다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그렇게 우울하거나 슬픈 느낌은 아니었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 틈엔지 아눈과 카다, 파울, 게브, 맘맘, 란이가 주위를 돌아다니 고 있다. 주인들이 마음이 풀어지니 이 녀석들도 그런 모양이었다. 그렇게 황혼도 쓰러지고 광아의 광구가 더욱 빛을 발할 무렵 또 다시 우리들에게 손 님이 찾아 들었다. 관도 위를 기운차게 달려 온 세 마리의 말과 그 말의 주인들이었다. “워~! 워.” 급하게 말을 달렸던 모양인지 말들은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고, 말 위에 올라탄 인물 들도 하나같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모습이었다. 관도 위에서 말을 세우고 일제히 말에서 내린 그들은 말의 고삐를 잡고 우리 마차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오면서 그들의 모습이 뚜렷이 드러났다. 한결같이 20대를 겨우 넘긴 것 같은 또래의 인물들이었고 셋 모두 여자들이었다. 가벼워 보이는 금속 흉갑을 입고 있었고, 허리에는 칼을 차고, 등에는 망토를 걸친 모습이었다. “죄송합니다. 지나다 보니 불빛이 보여서 결례를 하게 되었습니다. 잠시 말씀을 좀 나누어도 될까요?” 그 중에 한 여자가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신지요? 저희는 괜찮습니다.” 내 대답에 그 여자는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저희에게 식수와 먹을 것을 좀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사 실 저희는 여정을 잘못 계산하고 중간에 피치 못할 일이 있어서 식수와 음식이 떨어 져 서요.” 그렇게 말하는 여자의 얼굴이 언 듯 붉어진 듯 보였지만 금방 회복했다. “그런 문제라면 어려울 것은 없겠지요. 이리 오십시오. 많이 피곤해 보이시는데 일 단 여기 있는 것들을 같이 드시지요. 그 사이에 적당한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마차로 걸어갔다. 좀, 어색한 듯 했지만, 곧 여자들은 탁자의 의자에 합석을 했고(의자가 자이건과 누 말의 몫으로 준비한 것이 남아 있어서 모자라지는 않았다.) 풍아의 수다로 분위기는 곧 풀렸다. 풍아는 우리들이 누웬에서 암흑제국을 거쳐 온 여행자라고 소개했고(한타에 대해서 는 조금 적대적이다.) 여자들은 수련여행중인 수습기사라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나는 풍아의 수다 속에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드는 그들의 소리를 등 뒤로 들으며 음식을 부지런히 준비해서 식탁으로 옮겼다. 열심히 포크와 나이프를 놀리는 그들의 모습에서 조금 많이 굶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후아~~! 잘 먹었습니다. 요리 솜씨가 아주 뛰어나시군요. 평소보다 괴식을 했네 요. 덕분에 내일은 운동을 좀 많이 해야 될 것 같네요.” “호호, 저도요.” “네, 저도.” 이런 인사는 정말 듣기에 좋았다. 거칠 것도 없이 담백하고 또 숨김없이 소탈하니 말이다. “다시 인사를 드릴게요. 저는 안나, 여기는 미레아, 여기는 쉬리나. 우리들은 전부 수도 기사단의 수습기사로 있습니다. 아까도 말씀을 드렸지만 못 들으셨으니 다시 말 씀을 드릴게요. 수습기사는 기사학교나 훈련소를 졸업하고 3년 동안 기사로서의 자질 이 있는지를 마지막으로 검증하는 기간에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물론 무력도 중요 하게 보지만, 거기에 인간성이나 기타 인성을 파악하는 데에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해 서 생긴 제도입니다. 그리고 그 3년이 끝나게 되면 정식으로 기사단에 소속이 됩니 다. 뭐 저희의 희망은 당연히 얼음기사단에 들어가는 것이지만 어떻게 될지는 아직 알 수가 없습니다. 이번에 맡겨진 임무를 완수하기는 했지만 돌아오는 중에 사건이 있 어서 지금 돌아가도 늦게 되거든요.” 마지막 말은 안나의 입에서 힘없이 새어 나왔다. “그런 게 어딨어. 마을에 어려움이 있어서 도와주고 오는 길이었다면서? 그런데 왜 그런 것이 문제가 된다는 거야?” 풍아가 끼어들었다. “그래요. 괴물들이 나타난 마을을 지키다가 괴물들을 쫓아 보내고 돌아오는 길이라 면서요? 그런데 그게 무슨 문제지요?” 수아도 이야기를 들었는지 돕고 나섰다. “그건 생각에 따라, 혹은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기사도 군인이지요. 그러 니 명령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 우선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기사로서 지켜야 할 도 리를 다한 다는 것도 무시할 것은 아니지만, 어느 쪽이 더 비중이 있는지는 지위관의 개인차이라고 봅니다.” 쉬리나라는 금발머리 여기사의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안나는 흑적색, 미레아는 갈색, 쉬리나는 금발, 머리색이 다 다른 색이 었다. 그럼 안나는 화아와 비슷한 색이고, 쉬리나는 광아와 같은 색, 미레아는 여긴 없지 만 자이건과 같은 색이네? 내가 이렇게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여전히 그들의 행동에 대한 잘 잘못을 따지는 말싸움이 계속되었지만, 말 그대로 그것은 어떻게 결론이 내려질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그럼 어쩌실 거지요? 지금 이대로 다시 수도를 향해 말을 모실 건가요? 날이 어두 워서 위험할 텐데요? 뭐 관도라 그리 문제가 안 될 수도 있지만..” 나는 그들의 말을 끊고 물었다. “아니요. 어차피 수도까지 간다고 해도 늦은 시간이라 들어갈 수도 없는 걸요. 그 냥 새벽에 출발해서 성문이 열리는 시간에 맞추어 들어갈 생각이에요. 아마 여기서 새 벽에 출발하면 될 것 같은데…” 역시 안나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모양이었다. 주로 대답을 하는 것은 안나였고, 쉬리나는 자기주장이 강한 편인지 자신의 생각과 다른 이야기가 나올 경우에만 입을 열었다. 하지만 미레아는 별달리 입을 열지 않고 그저 바라보는 쪽에 속했다. “그럼 잘 됐군요. 오늘은 우리 마차에서 자고 가세요. 큰오빠, 그래도 되죠? 오빠 랑 지토 아저씨가 오늘은 밖에서 주무세요. 그래도 되지요?” 수아였다. 어쩌겠는가 아무도 이길 수 없는 존재가 수아다. 일단 밥에 대한 권한을 쥐고 있는 이상에야 작은 것들은 양보를 해야 한다. 조잘 조잘 물만난 물고기처럼 생기가 돌아 수다를 떠는 풍아를 필두로 다섯 여자들 이 마차 안으로 들어가고 나와 지토, 그리고 화아와 광아는 각각 천막을 품에 안고 잠 시 허탈해 하다가 잠자리를 마련하고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하루 종일 침대에서 뒹굴었던 탓에 피곤한 것이 없었기에 그대로 앉아 새벽을 맞으며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겼다. 새벽 여명이 채 밝기도 전에 마차 문을 열고 나온 것은 미레아였고, 뒤를 따라 안나 와 쉬리나가 나왔다. 나는 마차의 건너편 세면대 사용 요령을 간단히 일러주고 일찍 길을 떠날 그들을 위 해 간단한 아침을 준비해 주었다. 수아와 풍아도 이들이 일어나 나온 것을 알고 있겠지만 나를 믿는 것인지 아니면 미 리 아침 인사를 한 탓인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아침을 사양하려 했지만, 아주 간단하게 빵과 스프, 그리고 음료로 된 식탁 의 모습에 부담이 없다고 느꼈는지 차분히 식사를 마치고 말안장에 올라앉았다. 그리고 다른 일행을 배려해서인지 조용히 인사를 하고, 천천히 말을 몰아 어느 정도 멀어지자 박차를 가하곤 쏘아지듯 수도를 향해 달려갔다. “가버렸네요? 참 어순선하게 찾아와서 어수선하게 가버리는 사람들이네요.” 그 사이에 등 뒤에 나와 서 있던 수아가 한 마디를 하고는 세면대로 가 버렸다. 수아가 다시 돌아와 탁자에 마주 앉아, 멀리서 떠오르는 태양과 그 태양빛에 김을 내 뿜는 대지의 초목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 풍아와 다른 일행들이 깨어나 하루 의 시작을 열었다. 그리고 간단한 식사와 수도를 향한 여정이 이어졌다. 안나의 말과는 달리 우리는 점심을 관도에서 먹고 나서 좀 더 가서야 수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보통 수도는 어느 정도는 방어에 편리한 곳을 찾는 것이 상례일 터인데 여인왕국의 수도는 그야말로 허허벌판, 아무 가릴 것도 없는 곳에 세워져 있었다. 그나마 높은 성벽이 수도를 지키는 최대의 방어벽으로 보이는 곳이었다. 사방이 훤히 트인 곳에 세워진 성이라 무슨 생각인 것일까. 하지만 오랜 시간 여인왕국이 침략을 받지 않았음을 떠올린다면 그다지 이상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우리는 지금 성문 앞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있는 중이다. 여인왕국의 수도는 다른 곳에 비해서 까다로운 검문이 있었던 것이다. 일단은 신분확인이 있었는데, 누웬에서 온 여행자라는 것은 황제 녀석의 통행증으로 확인이 되었지만, 마차와 무기에 대한 검색이 까다롭게 진행이 되었던 것이다. 특히나 화아와 풍아의 검은 그 특이성 때문에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마차는 겉과 속 이 차이가 나는 그 구조 때문에 또 한 번 관심을 끌어야 했다. 그리고 수도를 찾은 목적을 묻는 말에 수아가 여행과 장사라고 해서 무엇을 팔 것인 지 살 것인지 이런 것을 묻는 데에 또 시간을 빼앗겨야 했다. 결국에 다른 사람들은 잘도 통과하는 성문에서 우리는 저녁 해가 질 무렵까지 시달림 을 받고서야 통과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이 맡은 일을 한 것이니 너무 짜증스럽게 생각하지 말라는 말로 우리를 위로 할 뿐, 사과 같은 것은 없었다. 어찌 보면 사과를 받아야할 이유가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너무 고생을 시켰으니 아 무 문제가 없는 사람들이라는 결과가 나왔으면 당연히 미안하다는 인사 정도는 있어 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풍아의 나지막한 투덜거림이 있었다.(크게 떠들면 또 시달릴 지 도 모른다.) 성 안의 모습은 한타의 여느 성의 모습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성문에서 곧게 뻗은 대로의 끝에 세워진 하얀 궁전을 제외하면 말이다. “여기서 보니 더 멋있는 건물이네? 저건 도대체 뭐로 만든 걸까?” 화아가 성을 보며 이렇게 한 마디 할 정도로 아름다운 성이었다. 흡사 그 예전 타지마할과도 같은 외형이었지만 그 보다 훨씬 많은 건물 지붕들이 보 였다. “글쎄, 아무리 봐도 돌로 만든 것 같은데?” 풍아가 대답했다. “글쎄요, 저도 그런 것 같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너무 잘 다듬어 놓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광아도 한 마디 거들고 나섰다. 하지만 계속해서 궁전을 향해 말과 마차를 몰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는 적당한 곳에서 방향을 바꾸고 여관을 찾기로 했다. 여관에 하루 머물면서 이곳의 지리와 시장의 위치 물가 등을 알아볼 생각이었던 것이 다. 참, 이 성의 이름은 유소미아다. 초대 건국왕의 이름을 딴 것이라 그다지 낯선 이름은 아니었다. 우리는 여기 저기 두리번거린 끝에 여관 하나를 찾아 들었다. 여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곳은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사이에 우리들도 우리 자신에 대한 자각이 조금은 생겨서 사람 많은 곳에서는 피 곤한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을 아는 까닭이었다. 우리가 들어간 여관은 작고 낡은 여관이었고, 이름도 붙어있지 않았다. 그저 여관이라는 낡은 표시만 걸려 있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2층짜리 작은 여관의 1층 주점에도 테이블 네 개와 의자가 몇 놓여있을 뿐이 었고, 우리가 들어갔을 때는 겨우 한 테이블에 입구와는 등을 돌리고 앉은 사람이 한 명 있었을 뿐이었다. 딸랑!! 문에 달린 방울이 손님이 왔다는 것을 알리는 역할을 하는 모양이었고, 곧 종업원인 듯한 여자 아이(16살 정도?)가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 쪽에서 빠르게 걸어 나왔다. “어서오세요. 어머 일행이 많으시네요? 주무시고 가실거지요? 식사는 지금 하실래 요?” 인사와 함께 수다를 늘어놓는 종업원을 보며 예전에 여관에 들어서면서 주문을 하던 생각이 났다. 그 주문을 꼭 한 번은 해 보고 싶어서 순서를 기다리던 화아와 풍아 광아 지토가 이 제는 많이도 달라져서, 예전의 그 치기 어린 모습은 없어져 버렸다. “일단 숙박을 할 거고, 방은 2인실과 4인실 하나씩, 안되면 2인실 3개, 그것도 안 되면 2인실 하나 1인실 하나 3인실 하나로 해 줘요. 그리고 우선은 여기에서 식사와 간단한 음료를 먹고 올라가기로 하지.” 내가 그렇게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주문을 하자 수아와 풍아가 쿡쿡 거리며 입속에 서 웃음을 터뜨렸다. 아마도 나처럼 그리 오래 전도 아닌 그 때가 생각이 났을 것이다. 하지만 내 주문을 받은 종업원은 조금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저기 지금 남은 방이 2인실 하나와 3인실 하나 밖에 없는데요. 4인실이 하나 있기 는 하지만 저 분이 먼저 방을 얻으셨기 때문에…” 종업원은 등을 돌리고 식사를 하는 인물을 가리켰다. “그래요? 그럼 하는 수 없지요. 조용해서 좋겠다 싶었는데. 그럼 다른 곳을 알아보 겠습니다. 미안합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일행들을 앞세우고 여관을 나서려고 했다. “이봐 아가씨. 내 방이 4인실이니까 내 방을 드리고, 내가 3인실 방을 쓰도록 하 지. 내가 좀 넓은 것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이런 여관에서 저렇게 많은 손님을 놓친다 면 아깝지 않겠어? 대신에 난 맥주 한 잔만 공짜로 주면 되. 어때?” 등 뒤에서 들리는 이 말소리가 우리들을 잡았다. “네? 네. 그럼요. 그렇게 해 주시면 고맙지요. 아직 방에는 들어가시지도 않았으니 까 그냥 바꾸면 되는 일인데요. 고맙습니다. 제가 맥주 금방 가져다 드릴게요. 그리 고 손님들도 이리 앉으세요.” 종업원 아가씨는 우리가 막 열어놓은 문을 통해서 금방이라도 나가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조바심으로 우리를 서둘러 탁자에 앉혔다. 하지만 탁자가 6인용이 아닌 때문에 나와 지토가 따로 앉기로 했다. “밖에 있는 말고 마차는 알아서 마구간에 보관을 할 테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 요.” 아가씨는 그렇게 말하고는 우리에게 간단한 주문을 받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런 어수선함이 지나고 나는 옆자리에 앉은 사람의 모습을 찬찬히 살폈다. 아까의 말소리로는 30대 정도의 남자였는데 가까이 앉아서 보니 참 애매한 성별의 사 람이었다. 흑갈색 머리카락은 어깨를 겨우 감쌀 정도의 길이를 묶어서 말총머리처럼 만들었고, 등에 걸친 망토 안으로는 견고해 보이는 가죽 갑주가 눈에 들어왔다. 체격은 나와 화아의 중간 정도 되어 보였고, 맥주잔을 쥐고 있는 팔뚝은 내 팔의 두 배는 되어 보였다. 건장한 체구에 가죽 갑주, 그리고 은연중에 뿜어 나오는 예기(다른 사람은 느끼기 힘 들다.)로 보면 간단히 성별을 구별할 것 같은데…. 그 얼굴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얼굴은 수아나 풍아와 비견될 정도(그래도 수아 풍아가 더 예쁘다.)의 미모를 지 니고 있으니 헛갈리는 것이다. 커다란 눈동자와 긴 속눈썹, 아미라 불러야 할 눈썹과, 오똑한 콧날, 작고 붉은 입. 그리고 전체적으로 작게 보이는 얼굴은 큰 눈이 주는 시원함과 함께 코와 입으로 인 한 귀여움까지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 이게 여자인지 남자인지를 분간하는 일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아까의 목소리 역시 상당한 미성이어서 성별 구별은 또 힘들었다. 뭐, 예전의 교인들의 목소리와는 또 다른 목소리이긴 했지만 말이다. 변성기를 지나 지 않은 소년의 맑은 목소리? 예전 빈소년합창단이 노래를 부를 때면, 그것이 남자아이인지 여자아이인지 구별이 잘 되지 않았던 것과 같다고나 할까? 나는 탁자에 앉으며 어정쩡하게 인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이거 고맙습니다. 덕분에 여기 저기 돌아다니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 다.” 나는 탁자에 앉으면서 동시에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는 내 말에 간단히 고개를 끄덕여 주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고, 그의 그 행동이 더 이상의 이야기를 막아 버렸다. 그리고 우리들은 종업원이 들고 나온 식사를 하고 후식으로 간단하게 음료와 맥주를 시켜 마셨다. 작고 허술한 여관에 손님도 없는 곳이라는 선입견은 말끔히 날려버릴 맛있는 식사와 맥주였다.(음료는 안 마셔서…) 그렇게 우리들이 식사를 마치고 후식을 즐기는 동안에도 그는 아무 말도 없이 묵묵 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뭐 그래 봐야 내가 보는 동안에 맥주 세 잔째를 마시고 있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이를테면 맥주잔을 앞에 두고 고사를 지낸다? 혹은 제사를 지낸다라는 식의 이야기 가 딱 맞을 스타일이었다. 맥주란 그저 시원하게 꿀꺽꿀꺽 들이키는 것이 … 그러고 보면 여자들은 그렇게 마시는 경우가 별로 없으니 저 자는 여자인가? 우리는 그런 그의 모습을 뒤로 하고,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올라갔다. “2인실, 3인실, 4인실이 순서대로 있어서 중간에 아까 그 분이 주무시게 될 것 같습 니다만, 상관없으시겠지요?” 종업원을 그렇게 수아와 풍아에게 물었다. “그럼요. 상관없어요.” 풍아는 빙긋 웃으며 대답을 해 주었고 우리는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란이를 수아와 풍아의 방으로 딸려 보냈다. 요즈음은 워낙 내 몸의 일부처럼 따라 다니기 때문에 그 존재감을 잊어버리는 경우 도 생기는 란이다. 내 몸의 일부 같은 느낌이어서 …. 손가락 발가락 혹은 무릎이나 팔꿈치가 내 몸에 달려 있는지 어떤지를 신경 써야 하는 경우는 별로 없으니 말이다. 어쩐지 란이가 요즈음은 그런 존재가 되어 가는 것 같다. “꺄~~악!! 꺄꺄꺅” 으하학!! 도대체 무슨 일이야. 왜 여관이 다 날아가도록 소리를 지르고 난리인 것이야. 미치겠네. 하지만 이미 우리 일행들은 옷을 걸치고 문 밖으로 뛰어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비명의 근원지를 찾아 뛰어 들었다. 콰콱!! 문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우리 일행이 우리들의 중간에 있는 방에 들어갔을 때, 우 리의 눈에 보인 것은 거의 벗겨진 사람의 하체였다. “어멋!!” “이크.” “으흠.” “호!?” 뾰롱. 왜 이 녀석들의 비명이 다르게 들리는 것일까? 아무튼 그 앞에서 온갖 비명을 지르고 발을 동동거리는 것은 아까의 그 여 종업원이 었고, 거의 벗겨진 바지를 발목에 걸치고 팬티 한 장을 아슬아슬하게(아무래도 벗기 려 다 만 듯하다.) 입고 있는 인물은 밑에서 우리가 올라올 때 까지 술을 마시던 그 자 였다. “아니 무슨 일입니까? 아가씨.” 나는 이 이상한 상황에 대한 설명을 요구했고, 겨우 비명을 그치던 아가씨는, “나, 남자. 남자였어요. 나, 남자.” “네? 그게 무슨?” 아직 이해가 되지 않은 내가 되묻자 그 종업원은 소리를 빽~ 질렀다. “글쎄, 이 손님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구요. 난 여자인줄 알고…” 그렇게 말을 시작한 종업원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이 웃기지도 않게 생긴 녀석이(남자니까.) 밑에서 홀짝 홀짝 맥주를 먹더니, 결국에 는 다섯 잔을 먹고는 머리를 테이블에 박아 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같은 여자의 입장에서 종업원은 이 녀석을 끌고 업고, 당기고 해서 이 방에 넣어 주고는 그냥 내려가려다가, 그래도 술을 먹고 또 좀 엎질러서 축축하게 젖 은 옷을 입고 자면 몸에 해롭겠다는 생각에 옷을 벗겨 주려고 했다는 것이다. 종업원 생각에 자기가 입는 옷을 가져다 입혀주면 되겠지라는 생각이었다는데, 일단 은 갑옷을 풀고, 그 안에 상의를 벗기기 전에 가죽으로 된 바지도 벗기고, 내친김에 팬티도 벗기는데… 이 이후의 일은 이야기하지 않겠다. 뭐, 소리를 지를 만도 했다. 당연히 비명이 나와야지. 안나오면 그게 정상이냐? 그렇게 이야기를 마친 종업원은 정신적인 쇼크를 이기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내려갔 고, 나는 수아와 풍아를 보내고 녀석의 옷을 다시 입히고, 녀석의 멱살을 잡고 우리 방으로 끌고 와서 방 중앙에 던져 놓았다. 그냥 그 방에 둘 수도 있었지만 아까의 소란으로 문이 박살이 났던 것이다. 녀석의 짐은 광아가 챙겨 왔는데 아래층에서 발밑에 놓여있던 가죽으로 만들어진 작 은 배낭과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이 전부인 모양이었다. 우리들은 일단 녀석을 내 버려두고 모자란 잠을 보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침이 되어 수아와 풍아가 우리를 깨우러 올 때까지도 녀석은 일어나지 않 고 그 자세 그대로(늙은 강아지가 사지를 뻗고 누워있는 모양)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 그리고 우리들이 깨끗이 씻고 식탁에 앉았을 때, 녀석이 2층을 통한 계단에서 모습 을 드러내었다. 머리카락이 풀어져서 얼굴을 반쯤은 가린 상태로 부스스한 모습으로 계단을 거의 내 려와서는 계단의 끝에 앉아서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을 보이던 녀석이 갑자기 자 리에서 일어나서 우리 쪽으로 후다닥 뛰어와 테이블의 모서리를 잡고 허리를 숙이고 소리를 질렀다. “왜, 내가 당신들의 방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내 방은 왜 문이 그 모양 이 되어 있는 것이고요? 도대체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우리는 소리를 지르는 그를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퍼퍽!! “윽.” 우리를 구해 준 것은 어제의 그 종업원이었다. “뭐가 무슨 짓을 해요? 술을 먹었으면 곱게 찌그러져 잠이나 잘 것이지 그 행패를 부려서 문을 부수지를 않나, 잠자는 다른 사람들의 방에 어거지로 들어가서 쓰러져 잠 이 들지를 않나. 도대체 무슨 생각이에요?” 종업원의 말의 들은 녀석은 갑자기 멍~한 얼굴이 되어서 털썩 자리에 주져 앉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난 술을 먹으면 그냥 엎어져 잠을 자기는 해도 사고를 친다는 말은 없었는데… 단 한 번도 그런 소리를 들은 적은 없단 말이야. 아니지 그들이 나 를 속였을 수도 있어. 충분히 그럴 수 있었을 테니까. 내가 밖으로 나와서 술을 먹은 적이 없으니 그 안에서야 그들이 충분히 모든 것들을 무마하고 내가 행패를 부린 사 실 을 숨겼을 수도 있지.”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들을 하나하나 쳐다보았다. “혹시 다친 곳은 없으신지. 제가 좀 과격한 인물이라 여러분에게 피해가 있었다면 어떻게 해서든 보상을 하겠습니다.” 그는 의외로 종업원의 말을 그대로 믿은 모양이었다. “아, 아닙니다. 술이란 것이 사람을 변하게 하지요. 하지만 별로 크게 상관할 문제 는 없었습니다. 있다면 저기 종업원 아가씨가 좀 문제가 있었지만 수리비와 적당한 수 고비를 주신다면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는 그의 말에 이렇게 대꾸를 해 주었다. “휴~ 다행이군. 그래도 칼을 뽑지는 않은 모양이네.” 그는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렸지만 못들은 사람은 종업원뿐일 것이다. 그는 곧 이어 여종업원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나서야, 우리들이 있는 테이블로 돌아왔다.(솔직히 그냥 안 와도 되는데…) 슬금슬금 의자를 끌어다 자리에 합석을 한 녀석이 실실 웃으며 입을 열었다. “신세를 졌습니다. 술을 잘 마시지 않아서 술이 안 받는 체질이거든요. 그런데 어제 는 폭음을 하는 바람에…” 그래 폭음이라는 것이 맥주 다섯 잔을 못 마시는 수준이니 거의 우리 수아와 동격이 라고 해 줘야 할 것 같군. “뭐 괜찮습니다. 별로 피해를 입은 것도 아닌데, 그렇게 사과까지 하실 필요는 없습 니다.” “그런데, 남자분치고 생긴 것이 너무 여자 같으네요. 호호, 그런 소리 많이 들으시 겠네요.” 옆에서 보고 있던 풍아가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넷? 어떻게 제가 남자라고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겐 그런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상당히 놀란 모양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얼굴만 빼고 보면 여자보다는 남자에 가깝다. “에~! 그게…” 풍아가 핑계를 찾지 못하자, “뭐 그냥 딱 보기에도 남잔데 그게 무슨 소리야? 누가 자네에게 여자라고 하던가? 얼굴이 좀 그렇게 생겼다는 것 빼면, 어디로 봐서 자네가 여자 같다는 거야? 말도 안 되지…” 나는 서둘러 난처한 상황을 모면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누구도 그렇게 남자라고 단정 지어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없 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입니다.” 에~~? 여자라구?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 만약 그랬으면 어제 밤에 그 소동이 있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말이야. 저거 혹시 성정체성을 잘못 인식하고 있는 녀석 아닐까? 그 예전에 트랜스젠더 어쩌구 저쩌구 했었던 그런 녀석인가? 나는 새삼스럽게 녀석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역시 예쁜 얼굴이다. 하지만 분명히 어제 밤 사건으로 이 녀석은 남자인 것이다. 설마 종업원이 잘 못 보고 소리를 지른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렇게 우리 모두의 얼굴에서 불신의 기운을 느꼈던 모양인지 한 동안 불안하게 우리 를 쳐다보던 녀석이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좋습니다. 내가 남자라는 사실을 인정하지요. 하지만 어떻게 그 사실을 알게 되었 는지는 꼭 말씀을 해 주셔야겠습니다. 저에게는 중요한 문제니까요.” 결국에 녀석의 입에서 사실을 인정하는 말이 흘러 나왔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하는 녀석의 어조는 사뭇 진지하고 어찌보면 비장하기까지 했다. 그러니 그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우리들은 어제밤에 있었던 사건을 거의 사실대로(문 을 부수고 난동을 부린 것은 여전히 이 녀석으로 해 두고) 이야기함으로써 녀석의 궁 금증을 풀어 줄 수 있었다. “그렇게 된 것이로군요. 그래요. 음… 알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여기에서 오래 머무실 것입니까?” 녀석이 갑작스런 질문을 해 왔다. “글쎄요. 볼 일을 마치면 떠날 생각이지만, 일단 일을 해 봐야 알 것 같습니다.” 나는 어정쩡한 대답으로 녀석의 물음에 답했다. “그럼 적어도 오늘 밤에는 다시 여기서 뵐 수 있겠군요?” 녀석이 다시 다짐을 하듯이 물어왔다. “네, 그야 물론이지요. 그렇게 일찍 떠날 것은 아니니까요.” 내 대답에 녀석이 어색한 웃음을 웃으며 말했다. “네, 저는 또, 신세를 졌는데 그냥 가시게 하면 예의가 아니니까… 아무튼 오늘 저 녁에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러니 꼭, 저녁에는 이 여관에 계셔 주십시오.” 녀석이 다짐을 했기에 나도 그러마고 약속을 해 주었다. 그 대답을 들은 녀석을 비칠비칠 여관 밖으로 모습을 감추었고, 우리들은 식사를 마 치고 유소미아의 시장을 돌며 우리가 가지고 온 옷감의 시세를 살피고, 괜찮은 거래 조건이면 그 자리에서 거래를 하는 형식으로 물건을 처분했다. 사실 암흑제국과의 거리가 제법 되고, 더해서 모르탄은 그 중에서도 암흑제국 안으 로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 곳의 옷감들은 별로 많지 않았고, 때 문에 상당한 이익이 남는 것이었지만, 장사꾼이란 좀 더 많은 이익을 노리는 것이다. 그렇게 하루 종일 시장을 돌아다닌 결과 저녁 무렵에는 모든 물건들을 정리하고 또 필요한 물품들을 사서 채워 넣는 일까지 끝낼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들이 어두워지는 골목의 그림자를 밟아 그 이름도 없는 작은 여관에 도착 했을 때,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묘한 위기감이었다. 그리고 그 위기감은 여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섬과 동시에 더욱 커졌다. “무슨 일이죠? 갑자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여관을 찾아왔다는 것은…” 수아가 내 옆에서 조용히 이야기하자 화아가 한 마디를 던졌다.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잖아. 다들 한 솜씨하는 녀석들뿐이란 말이야. 거기다가 전 부 여자들이라니, 설마 얼음기사단이 총출동이라도 한 것인가?” 화아의 말끝은 여관 안에 진을 치고 있던 인물 중 한 사람이 잡았다. “그렇다. 우리는 얼음기사단 제 3단의 인물들이다. 우리는 너희를 정중하게 모셔오 라는 제1공주님의 명령으로 이 곳에 와 있다. 물론 호의를 거절할 경우에는 부득이하 게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모시고 오라는 말씀이셨으니 너희들은 조용히 따라왔으면 한 다.” 입을 연 인물은 불혹은 넘어 보이는 여기사였다. 하지만 그녀에게서 쏟아지는 기운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의 것이었다. 아마 단순한 검으로만 따지자면 화아나 풍아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었다. 뭐 상급이 사의 힘을 쓴다면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기사들의 복장은 갑옷에 망토로 통일이 되어 있었고, 갑옷은 금속인지 가죽인지 확인 이 되지 않는 재질로 청백색으로 도장이 되어 광택이 있는 모습이었다. 가슴부위에는 단순한 무늬를 이루며 이상한 형상이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예전에 란 이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가슴에 란이를 품고 있는 여기사들이라.. 나는 입가에 솟아나는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얼음기사단이라. 그렇게 유명한 분들을 여기에서 뵙는군요. 그런데 공주님께서 왜 우리를 보자고 하는지 여쭈어도 될까요? 우리는 단 한 번도 공주님을 뵌 적이 없는데 말씀이죠.” “그런 것은 물을 필요가 없다. 단지 이 나라 공주님의 초대로 가는 것이니 거절하 지 않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해라.”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기도 하다. 일국의 공주가 여행객을 불렀으니 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겠지. 어떤 간이 부은 작자가 그런 것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솔직히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싫지만 이대로 끌려가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 는 일이었다. “뭐, 댁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지만. 우리 형제들은 누군가 우리를 강제로 어쩌려 고 하는 것을 참는 성격이 아니라서 말이야. 이봐, 기사단 대장인지 뭔지 모르지만 그 냥 부하들 데리고 사라져. 겨우 서른셋의 인원으로 우리들을 어찌할 수는 없으니까 말 이야. 그리고 여기는 너무 좁아서 수적인 우위를 마음대로 내세울 수 있는 곳도 아니 고 말이야.” 내 말이 끝날 때까지도 여기사들의 움직임은 없었다. 다만 좀 더 날카로운 기세만 늘어날 뿐이었다. 제법 솜씨를 지닌 여기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몸에서 흘러 다니는 기운들이 오행공 중에서 수공의 흐름을 따르 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제법이다. 나는 불현듯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속으로 칭찬을 하든 말든 그것을 알고 싶지 않은 그들이었을 것이다. 점차 포위를 좁히는 기사단의 예기가 사뭇 날카롭게 변하고 있었다. 안쪽으로 열 셋의 인물이 있었고, 밖으로 이십 명의 인물들이 있었다. 우리는 입구 쪽에 갇혀서 기사들을 상대해야 하는 입장이 되어 있었다. “이거 분위기가 무사히 지나갈 분위기가 아닌데? 그런데 왜 이런 문제가 생긴 거 야? 우리가 판 옷감에 문제라도 있는 것일까?” 화아가 분위기 파악 못하고 농담을 하자 광아가 일침을 놓았다. “화 형님. 그런 농담이 나오십니까? 이 여기사들 실력이 장난이 아니란 말입니다. 지금 위험한 상황이라구요.” 언제 불렀는지 맘맘이 땅바닥을 어기적거리며 저 쪽 어둠 속에서 기어오는 모습이 보 였다. 여기사들 뒤를 맘맘이 장악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그 옆에 지토(게브)가 나란히 나타나서 주인들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포위를 당한 것이 아니라 이들이 포위를 당했다고 해야 하나? “아직 늦지 않았다. 그냥 순순히 왕궁으로 가 준다면 무력을 사용할 생각은 없다. 그러니 쓸데없는 반항을 그만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자신감일까? 기사단의 단장인지 뭔지 자기소개도 하지 않은 우두머리 여자가 다시 우리들에게 항 복을 종용해 왔다. “그러고 보니 정말 장난이 아닌데? 모두들 검기는 자유로운 수준이겠어. 거기다가 저 여자는 한 단계 더 높아 보이는 실력인데? 그냥 항복을 할까?” 내가 이렇게 농담으로 동생들에게 묻자 동생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런 농담을 하실 때가 아니잖아요. 좀 긴장을 하세요.” 수, 수아가 나에게 이렇게 말을 하다니…. 하지만 그런 생각도 오래 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제압해라. 죽지만 않는다면 다치는 것은 상관없다.” 드디어 공격 명령이다. 그리고 좁은 입구를 사이에 두고 싸움이 벌어졌다. 입구의 밖은 지토와 광아가 맡았고, 안쪽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인물들은 화아와 풍아 가 맡았다. 실제로 장소가 좁았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끼어들 여지도 없었다. 순식간에 여기저기에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이미 어둠은 깊어지고 있었고, 그 어둠 속에서 난무하는 칼날을 막아내는 지토의 도 끼와 광아의 칼이 그 임무를 다할 때 마다 불꽃이 튀었고, 화아의 도와 풍아의 검은 잠자고 있던 환수들의 힘을 받아 화려하게 열기와 스파크를 날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무기의 우세에서도 이점이 있으니 단장 같은 저 여자와 싸워도 광아나 풍아가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나와 수아는 그저 구경꾼으로 바뀐 상태에서 싸움이 진행되었다.(순전히 자리 와 위치 탓이지 내가 싸우기 싫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싸움의 양상은 밖에서는 광아와 지토가 게브, 맘맘의 지원을 받아 기사들을 하나 둘 쓰러뜨리고 있었고, 안쪽에서는 검과 도만을 사용하는 싸움이라 그런지 제압되는 기 사 들은 없었지만, 풍아와 화아에게 밀리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싸움이 진행되자 나는 느긋한 마음으로 구경꾼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었다. 수아 조차도 처음에는 걱정스러워 하던 모습에서 점점 정리가 되어가는(밖의 이야기 다.) 모습에서 안도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맘맘, 정말 쓸만한 녀석이었다. 녀석의 공격이 전부 성공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여기사들의 검에 제지를 당하는 것 보 다는 격중하는 것이 많았던 것이다. 이를테면 쏟아지는 빗방울을 한꺼번에 막을 실력들이 안 된다고 해야 할까? 안쪽에 있던 우두머리 여자도 밖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느꼈는지 인상이 어둡게 변하 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칼을 빼 들고 전권에 끼어들었다. 그녀 혼자서 화아를 상대할 실력이 되었기 때문일까? 서너 명의 합공을 받는 풍아가 위태로워 보였다. 자리가 협소하다는 이점이 있기는 했지만, 풍아가 움직임이 많은 편이었기 때문에 그 나마도 풍아에게는 도리어 방해가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밖이 정리된 후에 안으로 들어선 지토와 광아로 인해 금방 싸움을 그 끝을 향 해 가고 있었다. 지토나 광아가 싸움에 끼어 든 것은 아니었지만, 안에서 싸우는 여기사들도 화아와 풍아를 어쩌기 못하는 상태에서 지토와 광아가 합세한다면 승산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까닭이었다. 여자 우두머리는 칼을 크게 휘둘러 간격을 넓히고는 그의 부하들과 함께 전열을 가다 듬었다. “대단하군. 이런 결과는 상상도 못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하지만 만약 죽이고 자 마음먹은 싸움이었다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굉장히 분한 모양이었다.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지. 죽이려고 했으면 지금까지 끌 것도 없이 끝이 났을 거 야. 어떻게 상대도 모르고 싸움을 걸 수가 있나 몰라. 자기 파악을 좀 해야지.” 화아가 대뜸 상대의 화를 돋우었다. 하지만 그 말 속에는 밖에 있던 기사들이 죽지 않았으니 걱정말라는 뜻도 들어있어 서 대장 여기사는 발끈하는 부하들을 제지했다. 나는 어느 정도 상황이 마무리되었기에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아직도 우리들을 공주에게 끌고 갈 생각이 있나? 혹시라도 모시고 갈 생각이면 우 리도 한 번 고려해 보지. 다만 우리들을 무장해제 하겠다거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는 다는 조건이지만 말이야.” 내가 그렇게 황궁에 따라가 줄 의향이 있음을 밝히자 그 여기사의 안색이 조금 밝아 졌다. “그런 것은 상관없다. 처음부터 무장해제라는 조건은 있지도 않았으니까. 단지 공주 님께서 데리고 오라고 하셨으니 데리고 가려는 것이었을 뿐.”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우리들은 누군가의 강요로 무엇을 하게 되면 기분이 아주 나빠지거든. 그래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니 이해를 하라고. 당신들도 알겠지만 누 가 억지로 뭘 하라고 하면 싫은 거잖아?” 나는 그런 말로 여기사들에게 우리의 태도에 대한 어정쩡한 해명을 했다. 그리고 대충 상황을 정리한 우리들은 여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궁전으로 향했다. 밖에 쓰러져 있던 여기사들은 혈도로 점혈된 경우에는 혈도를 풀어주면 되었지만, 맘 맘에게 당한 마취는 맘맘이 풀어주거나 치료마법을 써야 했기 때문에 그냥 두고 기사 몇이 남아서 지키기로 했다. 굳이 우리가 나서서 회복을 시켜 줄 정도로 기사들과 우리의 사이가 좋아진 것은 아 니었다. 우리들은 평소와 같이 수아와 나는 마차를 타고, 나머지는 말과 당나귀를 타고 궁전 으로 향했다. 기사단은 우리를 궁전의 정문이 아닌 옆문으로 데리고 갔고, 그 문을 통해서 들어간 곳이 제1공주가 있는 곳이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공주가 머물고 있다는 궁전의 앞마당에 덩그러니 놓여져서 누군가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것은 함께 온 기사단 역시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거, 누가 들어가서 좀 불러와야 하는 거 아닌가? 우리가 무슨 볼 일이 있다고 이렇 게 서서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거야?” 성질 급한 화아가 잠깐 기다리더니 한 마디를 던졌다. “글쎄, 이런 곳이면 공주의 심부름을 하거나 하는 사람이라도 있어서 손님 대접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풍아도 화아의 말에 맞장구를 칠 무렵에 드디어 문이 열리고(궁전의 별궁이라 해도 규모라는 것이 있으니 엄청 넓고 높은 문이다. 원목 나무로 되었으면 무거울 텐데..) 안에서 기품이 있어 보이는 노부인이 걸어 나왔다. 그녀에게서는 서늘한 예기도 함께 흘러 나와서 그녀가 과거 얼음기사단의 일원이었던 가 아니면 그 심법을 익히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기사단 여러분은 그만 가 보세요. 무사히 임무를 완수하셨군요. 그리고 여러분은 잠시 기다려 주세요.” 문을 나온 노부인은 그렇게 기사단을 보내고, 우리에게는 대기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잠시 후, 기사단이 모두 사라지고, 궁전 앞마당에 쏟아지는 별빛과 주위를 밝 히는 가로등(마법으로 만든 영구 발광등)의 빛만이 넘실거리는 시간이 또 한동안 흐 를 동안 노부인과 우리들은 꼼짝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누구신지 모르지만 대단하신 분이군요. 단지 혼자서 우리 전부를 여기 이 자리에 이렇게 오래 묶어 두시다니 말입니다. 이런 것은 연륜인가요?” 먼저 입을 연 것은 나였다. 기사단이 떠나고 나서 우리들은 주위로 다가드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척을 느꼈다. 그들은 방금 떠난 얼음기사단의 전력에 비할 바가 아닌 사람들이었고, 나는 우리들 이 그들의 포위 속에 갇혀버린 것을 느꼈다. “이거 대단한 환영이로군요. 이 정도면 우리들도 무사하리라는 보장을 못하겠습니 다. 대충 봐도, 8써클 마법사가 하나, 7써틀이 여덟, 6써클은 한 쉰 명 정도 되나요? 거기에 엄청난 실력의 기사들이 또 쉰 명 정도. 음, 거기에 더해서 능력이 겉으로 드 러나지 않는 사람들의 수도 상당하군요. 환수사인가요? 정령의 기운도 있으니 정령을 부리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고.” 나는 말을 멈추고 노부인을 바라보았다. “저들은 지금 아무 것도 모르고 여기를 포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종의 훈련이라 고 생각하고 있겠지요. 하지만 그 동안 훈련을 장난으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 든지 실전으로 변한다고 해서, 적응력이 그렇게 떨어지지 않을 거예요.” 그 말은 저들은 상황을 모르니 저들에게 이야기가 들어가지 않게 조심을 하라는 말이 고, 그렇다고 마음 놓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경고겠군. “그런데 마법사들이 준비하고 있는 것은 마법 제한이로군요? 거의 마나를 동결시키 는 수준이네요? 이건 무슨 뜻인가요?” 내 말에 노부인은 잔잔히 웃었다. “그냥 준비를 한 것이지만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9써클이 넘는 마나 량을 지닌 사람을 보게 되다니 대단히 영광이군요.” 이 여자가 내 마나량을 안다? 하지만 난 이 여자의 마나량을 모르겠는데? 아니 별 마나가 없어 보이는데? 그런데 어떻게 내 마나량을 안다는 것일까? “그렇게 의아한 표정을 지으실 것은 없습니다. 제가 지닌 환수의 능력이니까요. 그 건 그렇고, 이제 이야기를 해 볼까요?” 노부인의 말끝이 조금 딱딱해지면서 진지한 분위기가 되었다. “그러죠. 안 그래도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이야 이 나라 의 백성이 아니기는 해도, 별달리 실수를 하거나 죄를 지은 것도 없는데.. 이런 대접 을 받는 이유가 궁금하거든요.” 나도 역시 진지하게 물었다. - 어제 여관에서 보신 분이 계시지요? 갑자기 머리 속에서 울려오는 목소리는 노부인의 목소리였다. 나는 노부인이 우리들의 이야기를 주위 사람들이 듣는 것을 원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았다. -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것과 이 문제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입니까? 나는 일종의 심어로 말을 전달했다. 쉽게 이야기하면 내 마음속에서 하려는 말을 상대의 뇌신경에 직접 전달하는 방법이 다. 공격용으로 쓰면 상대의 뇌에 치명상을 줄 수도 있다는데 실험을 해 보지 않아서 모 른다. - 그… 분이 이 나라의 제1공주님입니다. “엣! 에?” 나는 순간 입 밖으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동생들도 덩달아 내 비명에 무슨 일인가 하는 표정이었다. 동생들과 지토는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신경 쓰면서 주위 경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노부인과 나 뿐이었다. -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이 나라의 공주이든 왕자이든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지 요.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사실 이 순간에는 머리가 전혀 돌아가지 않았다.) 그렇게 소리 를 질렀다.(내 느낌이 그랬으니 듣는 사람도 소리를 지른 것으로 느꼈겠지.) - 우리들도 처음에는 그냥 여관의 종업원만 처리하고 당신들은 그냥 두려고 했습니 다. 처리라, 지금까지의 행태로는 죽여 없앤다라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공주가 남자라는 사실만은 지켜져야 하는 비밀이라는 결론 앞에서 우리들은 망설였습니다. - 당신들을 그대로 둔다고 해도, 언제 다시 이 나라의 왕이 되실 분의 얼굴을 보고, 어 저 사람은 남자였다고 말할 확률은 없었지요.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었습 니 다. 때문에 당신들을 조용히 데리고 와서 기억을 지우는 방법을 택하기로 했던 것입 니 다. 나는 노부인의 말을 들으면서 회복된 이성으로 상황을 판단할 수 있었다. -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냥 당신들을 보내는 것이 좋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9써클 마법사의 기억을 지울 수 있는 마법은 없겠지요. 상상도 하지 못한 일입니다. 거기다 가 당신의 일행들도 평범한 사람들은 아니군요. 그렇게 말하며 노부인은 한숨을 쉬었다. - 그래서 이제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해 주기를 원하는 것입니까? 나는 일단은 기세가 수그러든 노부인의 모습에서 위험이 줄었다는 생각을 하며 물었 다. - 솔직히 아직도 그건 결정을 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저들을 희생시키며 당신들을 제압해야 할지, 아니며 그냥 당신들에게 약속을 받는 것으로 이 상황을 마무리해야 할 지를 말입니다. -정말 당신들은 어리석은 짓을 한 것입니다. 당신들의 공주에 대한 것을 우리가 알 수도 없었을 텐데… 우리는 여기까지 오면서도 이런 상황이 되리라는 생각은 해 본 적 도 없었습니다. 만약 이후에 공식석상에서 공주를 만났다고 해도 그저 닮은 사람이겠 거니 했겠지요. 여관에서 만났던 한 남자와 공주를 연관짓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나는 노부인의 잘못을 지적했다. -그야 그럴지도 모른다고 저희도 생각이야 했지요. 하지만 아까 말한 대로, 당신들 을 제압하고 기억을 지우는 것이 더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것뿐입니다. 적어도 왕국의 힘으로 그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여겼지요. 그리고 지금도 모든 전력을 다한다면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럴지도 모른다. 여기를 포위하고 있는 인물들과 이 앞에 서 있는 노부인의 능력에 건물 안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을 더한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다시 이야기하면 우리가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인원이라고 해 봐야 6명에 환수들이 전부이다. 실제로 마법과 도검이 난무하게 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알 수 없게 되는 것이 다. 어떤 식으로든 아주 무사하게라는 것은 나로서도 장담할 수 없는 문제였다. 이렇게 마나가 동결된 공간이라면 더욱더 힘이 반으로 줄어들게 되는 것과 같기 때문 에 동생들이나 지토가 상급의 힘을 쓰는 것에도 제약이 따른다. 어쨌든 다시 한 번 노부인의 말로 분위기가 싸늘해지는 느낌이었다. 우리 둘만이 대화의 내용을 알고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 어쨌든 우리가 할 수 있는 양보는 하고 결과를 기다려 보기로 하죠. 저희는 이후 로 공주에 대한 모든 기억을 잊으려고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입 밖 으로 내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약속은 꼭 지키겠습니다. 그 외에 어떤 것을 더 원 하 시는지 말씀을 해 주시면 수용 가능한 한은 수용하겠습니다만 결국 어쩔 수 없다면 저 희도…. 나는 그와 함께 몸속의 내공을 개방했다. “흠…” 노부인도 놀란 모양인지 잠깐 신음성을 흘렸다. - 몰랐군요. 마력뿐이 아니라 내공까지 지니고 있을 줄은… 그것도 상대를 찾기 어려 울 정도의 내공이로군요. 그렇게 말을 끊은 노부인은 잠시 침묵 속에 서 있었다. 집 안에 있는 인물들과 대화를 하는 것인지, 그냥 생각에 잠긴 것인지는 알 수 없었 다. 그리고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나는 우리를 포위하고 있던 인물들이 사라지는 것을 느 낄 수 있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를 하지요. 이젠 이쪽에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 었으니 말이죠. 당신들이 이 자리를 벗어나고자 한다면 이제는 막을 도리가 없으니 내 말은 이제 부탁이라고 해야 하겠지요?” 노부인을 그렇게 말하며 인자한 웃음을 얼굴에 담았다. “그렇게 하죠. 궁전까지 왔는데 그냥 간다면 동생들도 섭섭해 할 겁니다. 좋은 구경 을 놓쳤다고 말이죠.”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앞장서서 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뒤를 동생들과 지토가 따라 왔는데, 지금까지와는 달리 광아는 맘맘과 함께 들어 오고 있었다.(맘맘을 허리에 둘렀다. 허리띠로 쓸 수 있을까? 흘러내리지 않을까 몰 라…) 밖에는 게브만 남아서 말들을 지키고, 나머지 전력들은 모두 함께 가고 있는 셈이었 다. 우리가 노부인을 따라 들어간 곳은 거대한 응접실이었다. 양쪽으로 푹신한 의자가(소파라고 하나?) 놓여있고 가운데에 낮은 탁자가(무지 비싸 겠지? 나무의 결이 그대로 살아있는 원목이다.)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그 의자에는 십여 명의 인물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 다. 다들 머리가 하얗게 세어가는 인물들로 대부분이 여자였고, 가끔 성별이 모호한 사람 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 테이블의 끝(가운데 한 자리)에 공주(?)가 앉아 있었다. 여전히 갑옷으로 무장을 한 모습이었다. “자, 자. 앉아요. 그렇게들 서 있지 말고. 우선 소개부터 하지요. 우리들은 왕실의 원로들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왕의 오빠나 여동생, 혹은 사촌이나 이모들이지요.” 노부인은 그렇게 자신들을 소개하며 우리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루탄, 여기는 동생들인 화, 풍, 광, 수. 그리 고 친구인 지토입니다." 나는 그렇게 일행을 소개하고 의자에 앉았다. 내가 일행을 소개하자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침묵을 깬 것도 노부인이었다. 다른 인물들은 그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우리들을 관찰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한 가지만 물어보지요. 루탄 당신은 우리가 익힌 심법을 알고 있나요? 그리고 저 신성제국의 화염기사단의 심법도 알고 있나요?” 그렇게 물어보는 노부인의 마지막 음성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때서야 문제가 심각해 진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들은 우리 일행의 정체를 파악해 내고 있었던 것이다. 왜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유소의 후예들이니 나와 동생들, 그리고 지토에 대 한 이야기를 전설처럼이라도 듣고 살았을 수 있다는 것을 왜 염두에 두지 못했을까 하 는 후회가 들었다. 나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고 이야기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는 갑니다만, 저는 그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람을 알고는 있지 만요. 그 분은 저희 조상님이시지요. 저는 그 분의 25대 후손입니다. 그리고 동생들 과 친구에 대한 것은 묻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물론 저는 두 심법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상황을 피해 갈 길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지금 1000살이 넘었 는데… 라고 할 수도 없는 문제였다. 내 대답에 그들은 그저 멀뚱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 그들 모두가 일어났다. 심지어 공주까지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사적으로 우리들이 의자에서 일어난 것은 당연했다. “왕국의 건국왕 유소 넥스의 35대 후손, 왕국의 제1공주 이그시니아 넥스가 루탄 최 한국 대공을 뵙습니다.” “대공을 뵙습니다.” “루탄 대공을 뵙습니다.” “….” 그들은 순식간에 무릎을 살짝 굽히는(여자들이 하는 인사법) 모습이나 오른쪽 주먹 을 가슴에 대고 허리를 굽히는 모습(남자)으로 인사를 해 왔다. 물론 이 상황에서 당황하지 않으면 그것이 인간이겠는가? 어정쩡한 모습으로 서 있던 나는 그들이 고개를 숙이고 의자 곁에 서 있는 모습을 물 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 대공, 이리로 자리를 옮기시는 것이, 일단 자세한 이야기는 앉으시면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결국 잠시의 소란 끝에 우리 일행의 자리와 공주 일행의 자리가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노부인의 설명이 그 뒤를 이었다. 건국왕 유소 넥스(남편 이름을 성으로 썼다.)는 평소에 불꽃같은 모습으로 전장을 누 비고, 싸움을 이끌어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과 흠모를 받았지만, 언제나 자신의 무력 이 별것 아니라며 스스로를 낮추었는데 특히 신성제국의 화염기사단의 단장에게는 조 금치의 승률도 없다고 누누이 이야기 했다고 한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그 단장과 자신이 함께 덤벼도 이길 수 없는 존재가 있으니 그 가 바로 자신에게 이 나라를 만들 초석을 주었던 사람이라고 틈만 나면 이야기를 했 다 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나라의 왕좌에 오르는 그 날, 왕과 동일한 권력을 지니는 상징적인 인물 을 만들었으니 그가 바로 대공이라는 지위의 인물이었다. 그리고 유소는 그 대공에 대한 기록을 세세히 남기도록 하여, 언제든 그나 그의 후손 이 나타나면 그에게 대공의 자리를 넘기도록 했다는 것이다. 대공은 왕과 같은 지위이기에 영지도 없었고 부하도 없었다. 그저 이 나라의 모든 것이 대공의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유소는 한 나라에 왕이 둘이 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대공에게 선택권 을 주도록 했다. 유소는 자기가 아는 루탄이라면 절대로 이런 지위 따위는 가지지 않을 것이지만 그 나 그의 후손이 원한다면 왕위를 넘겨주고 왕족들을 모두 그에 알맞은 귀족으로 돌아 가라는 명을 내렸다는 것이다. 물론 1000년이 흐른 지금에 건국왕의 그런 명령이 얼마나 힘을 가지겠는가 하는 것 은 듣고 있는 나로서도 의문이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지금의 상황은 그 건국왕의 명령에 따르는 왕족들이 앞에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러니까 오빠가 이제 이 나라의 대공이 되는 거야? 그리고 맘만 먹으면 왕도 될 수 있겠네? 와~~ 좋겠다. 호호호.” 풍아가 호들갑을 떨었지만 나를 놀리는 것이라는 점은 분명했다. “자, 그럼 이제 들어봅시다. 건국왕의 명령을 지키기 위해서 나에게 대공의 자리를 주겠다? 나는 그런 말은 믿지 못합니다. 그게 어디 말이나 된다고 생각을 합니까? 나 라의 왕이라는 자리가 어디 그렇게 단순하게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자리입니까? 이유 를 들어 봅시다. 내가 나타나자 아주 짜 맞추듯이 내게 대공의 자리를 주려는 당신들 의 의도를 말입니다.” 내 말에 다시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드디어 입을 열어 침묵을 깬 것도 그 노부인이었다. “대공의 말씀이 맞습니다. 이유가 있지요. 그리고 우리들이 이런 생각을 한 것도 참 으로 순식간에 결정된 것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사실 우리들은 공주님의 말씀에서 어 느 정도 대공저하 일행의 신분을 짐작했습니다. 아니 짐작보다는 대공이라는 인물을 만들 수 있는 완벽한 조건을 갖춘 인물들을 찾아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 옳겠군요.” 그리고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인 노부인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저희는 아주 오래 전부터 왕실의 왕위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 고 있었습니다. 다시 이야기하면 저희 왕가의 왕족들 대부분이 왕족이기를 원하지 않 는다는 말입니다.” “에~? 보통의 경우 왕이 되려고 발버둥치는 거 아니었나? 그런데 왕족 대부분이 왕 족이기를 원하지 않는다니? 그게 무슨…” 풍아가 놀라서 소리를 지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한 나라의 최고 권력을 지닌 자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버리기를 원한다는 것은 일상적 이 상식으로 전혀 맞지 않는 것이다. “대공, 대공은 제가 여자로 보이십니까? 남자로 보이십니까?” 노부인이 갑작스럽게 물었다. “그거야 당연히…” “그렇지요. 여자이지요. 누가 보더라도 저는 여자입니다. 하지만… 태어났을 때, 저 는 남자였습니다. 그리고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은 남자입니다.” 하늘에서 벼락이 쳐서 내 머리를 때린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소 리가 이렇게도 선명하게 내 귀에 들릴 수가 있을까? 환청이다. 환청. 하지만 환청이 아닌 모양이었다. “다들… 다들 남자입니다.” 다시 노부인이 작고 애잔한 목소리로, 그러나 너무도 선명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확인 을 해 주었던 것이다. “무슨? 어째서 이런 일이…” 나는 그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 심법 때문이지요. 그리고 우리들이 왕족이라는 이유 때문이고, 이 나라의 왕이 여왕이라는 이유 때문이지요.” 이제 여기서 노부인의 말을 정리하여 이야기 하면 다음과 같다. 여인왕국, 이런 이름이 붙은 이유는 이 왕국의 왕이 여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황 을 살펴보면 참 신기하게도 여왕에게서 태어난 아이의 첫 아기는 무조건 여아였다. 그러니 왕실의 왕이 정해지고 이어지는 것에 아무 문제가 없이 34대라는 긴 시간을 이어온 것이다. 하지만 이건 산술적으로도 말이 되지 않는다. 어떻게 여왕이 낳은 첫 아이는 언제나 여자아이이며, 또 그 아이가 여왕으로 등극하 게 되는가? 여기에 비밀이 있었다. 지금의 제1공주와 같은 비밀이… 다시 이야기하면 첫 아이가 남자이든 여자이든 무조건 여자로 키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맞추어서 다른 왕족들도(중요한 위치에 있는 왕족들) 그와 비슷한 모습 으로 살아가야 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내가 전해 준 그 심법이었다. 그 심법을 아주 어릴 때부터 익히게 되면 남자아이도 외형이 점점 여성화 되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아주 나이가 들도록 계속 익히게 되면 지금의 노부인처럼 거의 여성화된 모습 이 된다는 것이다. 일종의 생체적인 변화가 생기는 모양이었다. 이건 나도 확실하게 알지 못하던 부작용이었다. 아무튼, 그 덕분에 왕족들은 남자라도 여성화된 삶을 살아야 했다. 물론 제1공주처럼 남자가 여왕이 되는 경우에는 그 심법을 익히는 것을 적절하게 균 형을 맞추어 익혀서 대를 잇는 데에는 무리가 없도록 하고, 둘이나 셋의 아이를 얻은 후에는 전력으로 심법을 익힌다는 것이다. 너무 심법의 수준이 높아지면 생식능력도 없어진단다.(그나마 난 오행공을 다 익히 고 있어 다행이다.) 그렇게 이 왕실은 이어져 왔다. 숱한 남자들의 눈물을 삼키면서 말이다. 그리고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못하고 살다 간, 왕후와 왕족의 숨겨진 부인들도 많이 있었다. 그녀들의 한 또한 엄청날 것이었다. 그리고 결국 그 한들이 이어지면서 차라리 왕족임을 포기하고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영향력이 있는 거의 모든 왕족들이 이런 생 각에 동참한다는 것이다. 그가 비록 여자라 할지라도 그건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자신의 아들이 여성화되어 가는 것을 보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이 왕족들은 은밀하게 자신들의 지위를 버릴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게 되었 고, 결국에는 건국왕 유소가 내세운 대공이라는 또 하나의 왕을 내세우는 방법을 찾 게 된 것이었다. “결국 허수아비를 내세우고 실리를 취하자는 계획이로군. 또 다른 계획은 없나? 그 허수아비가 어느 정도 왕의 일을 하는 동안에 넥스왕가에서 태어난 아주 똑똑하고 능 력 있는 왕자가 어벙하고 별 능력 없는 허수아비 대공을 밀어내고 왕이 되는 계획도 있지 않나?” 나는 어느 틈에 말을 낮추고 있었지만 내 목소리에 빈정거림은 없었다. 정말 진지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묻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도 내 말이 진심임을 알았던 모양인지 진지하게 대답했다. “물론 그 비슷한 계획도 있습니다. 권력이란 누가 뭐래도 쉽게 뿌리칠 수 없는 유혹 이니까요. 하지만 만약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면 이제는 권력보다 자유로운 삶을 택 하 고 싶습니다. 저는 이제 다시 남자로서의 삶은 살지 못하겠지만 이그는, 제1공주의 애 칭입니다. 그렇게 살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건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의 의견이기 도 합니다.” 분위기상 그런 모양이었다. 누구하나 반발이 없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래서 이제는 나에게 대공의 지위와 왕권을 넘기겠다는 말인가? 하지만 나는 그 런 귀찮은 자리에 있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어. 그건 정말로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 이 지. 한 나라를 책임진다는 것은 너무도 무겁고, 또 성가신 일이야. 난 안 해.” 내가 그렇게 말하자 왕족들은 다들 침묵을 시작했다. 뭐야? 침묵시위인가? “아무리 생각을 해도 오빠가 그런 일을 할 것 같지는 않아요. 그런 욕심은 없으시거 든요. 돈에는 조금 욕심이 있으신 것 같지만 그것도 재미삼이 그러시는 거지 특별한 의미는 없고, 그저 저희와 여행을 즐기는 것만이 유일하게 하시고 싶어 하는 일이라 고 할까요? 그러니 아무리 뭐라고 하셔도 안 될 거예요.” 수아가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대신하며, 침묵으로 일관하 는 그들을 타일렀다. “저희를 좀 보십시오. 저희는 남자입니다. 이런 저희의 모습을 보시고도 아무 마음 도 드시지 않는다는 말씀입니까? 이제 곧 제 아이가 태어납니다. 그 아이가 제발 여 자 아이이기를 바라지만 만약에 남자아이라면 어찌해야 합니까? 그냥 남자아이로 키울 수 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왕족이라는 태두리 안에서 고립되고 소외된 삶을 살 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힘을 모아서 왕자를 만들고 왕자에게 왕위를 전하는 방법도 있 지 않겠느냐고 하시겠지만, 저희 왕국이 여인왕국으로 불리고 또, 백성들이 그리 믿 는 이유는 왕국의 중심이 여왕이라는 정통성으로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정통성이란 정 말 중요한 것입니다. 이 나라에 반란이 없었고, 내란이 없이 평온했던 것은 어느 누 구 도 그 정통성을 깰 생각을 하지 못한 탓입니다. 그런데 왕가에서 그 정통성을 깨면 그 때부터 엄청난 시련이 시작될 것입니다. 백성들은 여왕이라는 테두리를 잃고 불안 해 할 것이고, 귀족들은 정통성을 잃은 왕에 대해 신뢰를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 리 고 그것은 내정의 혼란과 정치적 혼란을 가지고 올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이 나라를 지탱하는 또 다른 한 힘이 바로 얼음기사단이라는 것도 중요합니다. 왕자는 그 얼음 기 사단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지 못할 것입니다. 심법을 알고 그것을 할 줄 아는 것이 얼 음기사단을 다스리는 중요한 조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연설을 한 인물은 그나마 남자로 보이는 모습을 하고 있는 젊은 사람이었다. 뭐 아주 여성스럽게 생긴 남자라는 말이 맞을 것이지만… “결국, 저희로서는 별다른 해결책이 없이 이렇게 자신의 성을 숨기고 왕가의 한 부 분에 어둠을 만들면서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1000년, 너 무 나 길고 긴 시간입니다. 이제 끝을 맺고 싶습니다. 나라의 혼란이 가장 적은 방법으 로 말입니다. 대공의 정통성을 부인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니 제발… 이 런 모양으로 살아가는 왕가의 인물들이 저희뿐이 아님도 알아주십시오.” 이젠 사정하는 모양이네? 하지만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 난 왕 같은 것은 정말 질색이다. “나 말고 다른 대공을 찾아보도록 해. 난 못하니까 말이야. 굳이 내가 필요한 것도 아니잖아. 허수아비 대공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을 텐데?” 나는 딱 잘라 거절했다. “물론 조금 전까지는 가짜 대공을 세우는 것이 최상의 해결 방법이었습니다. 하지 만 그 방법은 만들어졌지만 아직 실행되지 못하고 있는 방법입니다. 그 이유는 이 나 라에 아주 뛰어난 재상이 있는 까닭입니다. 그는 왕국과 왕실 모두에게 최선을 다하 는 훌륭한 인물이지만,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우리들이 세운 계획을 알아내고 무력화 시킬 수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런 이유로 이 계획은 벌써 20년 가까이 실행되지 못하고 있었건 것입니다.” 노부인의 말이었다. (노부인이 아닌가? 그럼 뭐라 부르나..) “그럼, 그 자는 왕가의 이런 비밀 정도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 말에 노부인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천 년에 가까운 시간입니다. 그런 비밀이 여전히 비밀로만 지켜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요. 하지만 우리 왕가는 최선을 다 했고, 결과적으로 국가의 핵심 지 위에 있는 몇몇을 제외하고 이런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고 자부합니다. 그리 고 왕가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자도 또한 비밀을 간직한 채 살아야 하지요. 어느 순간 한 가문이 나라 안에서 사라지는 일이 역사 속에서 몇 번 나타났으니 말입니다.” 뭐 비밀을 누설한 가문 전체를 어찌 해 버렸다는 말일 것이다. “그럼 재상도 알고 있는 비밀인데 무슨 상관이 있단 거지. 그냥 재상의 동의를 얻 고 하면 될 일이 아닌가?” 나는 다시 노부인에게 물었다. “그것이 문제가 있습니다. 재상은 뼛속까지 이 나라를 위한다는 생각을 가진 인물입 니다. 때문에 그는 왕가에서 이런 식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절대 적인 충성이 오히려 저의 왕가에게는 독이 되는 셈이지요.” 나는 그 말에서 재상이라는 인물이 어떤 의미에서 왕가의 걸림돌이 되는지 알 수 있 었다. 왕가에서 가짜 대공을 내세우는 것은 왕국 전체로 보면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닌 것이 다. 대공이라는 인물로 어떤 혼란이 야기 될지 모르는 형편이니 말이다. 그러니 지금의 체제를 조용히 유지하려는 것이 재상이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보 면, 그는 왕가의 어떤 시도도 미연에 막으려고 할 것이었다. 아마도 왕가의 시도가 표면까지 드러나게 되어 여러 사람이 알게 되면 어떤 방향을 택할지는 모르지만, 일단 재상이 뛰어난 인물이라면 왕가의 어떤 시도도 겉으로 드러 나기 전에 무마시킬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저희는 계획만 세웠을 뿐, 실행을 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가짜가 아 닌 진짜 대공이 나타나신 것이니 재상이라고 해도 어쩌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제 발 저희를 좀 도와주십시오.” 또 다시 조르기라는 방법으로 나를 괴롭히기 시작하는 놈들이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남자라기보다는 여자에 가까우니 어쩌면 좋을까. 남자라면서 눈물을 찔끔거리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는 모습이라니… 그 참 마음 에 쓰려오는 것 같다. 원래 내가 여자에 약했던가? 그러고 보면 그랬던 것 같은데… 이러다가는 정말 곤란해 질 것 같다. 여자들이 단체로 울고 있다니…(실제로는 다 남자라고 해도… 느낌이 그게 아니니..)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지끈거리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자 내가 거부 의사를 표현한 것으로 생각한 여자들이 더욱 서럽게 운다. 이제는 여자의 최대 무기는 눈물이라는 것으로 공격 방법을 바꾼 것처럼 보인다. 나는 일단은 어떻게 해서든 상황을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일단 오늘은 그만 하고 내일 다시 이야기 하도록 합시다. 우리도 피곤하니 말이 야. 벌써 밤이 깊었어. 나도 왕이 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조금은 도와줄 수도 있으니 까 내일 다시 만나서 방법을 연구 해 봅시다. 그럼 우리는 이만..” 그렇게 말의 높낮이가 어색한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난 우리들이었지만, 우리는 결국 궁전을 떠나지 못하고 궁전에서 잠을 자야 했다. 쉽게 보내 주려고 하지 않는 것도 당연한 것인가? 다음날, 감금을 당하다 시피하고 잠을 잔(큰 방에 다 몰아넣고 감시중이다.) 우리들 은 일찍부터 준비된 식사를 마치고 다시 응접실로 내려가 여장남자들과 모여 앉았다. “일단, 확실히 할 것은 내가 왕이 되어서 이 나라를 다스릴 생각도 없고, 또 대공이 라는 공식적인 자리를 차지 할 생각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 두고 이야기를 시작하 도 록 하지요.” 나는 다들 모인 자리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못 박고 이야기를 시작했 다. 그리고 말을 놓던 것도 내 성미에 맞지 않아 그냥 조금 높이는(하오체라고 한다.) 정 도로 조절을 했다. “내가 밤사이에 고민 고민하면서 생각을 해 봤는데 말이오. 재상이라는 인물을 일 단 만나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것이 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재상을 좀 불러줘요. 뭐 이 나라의 대공이 부른다면 오기 싫어도 오겠지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모여 있던 왕족들이 모두 불안한 얼굴이 되어 나를 보았고 대표 격인 노부인이 나에게 물었다. “도대체 어떤 생각이신지…. 조금이라도 알려 주시면…..” 하지만 나는 그냥 슬쩍 인상을 쓰고는 말했다. “내가 무슨 생각이든 알 것 없습니다.. 가서 그냥 불러오면 될 일이지요. 나도 일단 은 만나보고 결정할 문제가 있어서 말이죠.” 그래서 아침 일찍 시작된 회합은 재상이 도착할 때까지로 미뤄졌고, 나와 동생들 그 리고 지토는 주위의 감시자들을 무시하고 정원을 감상하고 차를 즐기면서 시간을 보 냈다. 아마도 재상은 대공이 부른다는 소식에 까무러칠 지경이 되어서 내가 진짜인지 가짜 인지를 따지고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든 나에 대한 정보를 얻어서 이 곳으로 올 것이 분명했다. 그 정보에서 내가 진짜라는 결론을 내릴 경우와 가짜라는 결론을 내릴 경우에 각각 어떤 대응을 할지는 나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리고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빠른, 점심 식사가 끝난 직후에 재상이 도착한다는 연 락을 받았다. 겨우 느긋하게 점심을 먹었는데, 재상이라는 인물과 마주할 생각을 하니 속이 먼저 더부룩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우리 일행이 재상과 마주 했을 때, 나는 내 불안감이 현실이 되는 것을 느꼈 다. 속이 아주 좋지 않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재상이라는 자가 풍기는 느낌이 누웬 의 황제와 비슷한 느낌(재수 없다는 느낌)이었기 때문이었다. 겉보기 나이는 오십 정도의 사나이였지만, 그는 70을 바라보는 인물이었다. 생긴 것 은 과히 거부감이 없이 단정한 모습이었고 아직도 검은 머리가 더 많이 남은 머리카 락 을 가지런히 정리해서 올백이라는 형태로 넘기고 있었다. “신, 여인왕국의 재상 로드릴 주제프가 대공전하를 뵙습니다.” 그는 깊숙한 군신의 예로 나에게 인사를 해 나를 피곤하게 하는 것으로 첫 인상을 남 겼다. 굉장히 격식적인 느낌의 인사, 그것은 상대와 나의 거리감을 확보함과 동시에 호의 가 아닌 경계의 의미를 시사하는 것이었다. “그 쪽에 앉으시오.” 나는 그에게 자리를 권하고(나와 마주 보는 자리) 자리에 앉은 그와 눈싸움에 들어갔 다. 의지, 신념, 믿음, 그리고 충성과 결백. 그의 눈빛은 그런 것들로 꽉 들어찬 것 같았다.(이건 노부인이 그에 대해 들려준 정 보가 끼친 영향이 크겠지.) “우리 어차피 시간 낭비는 하지 맙시다. 나는 대공이오. 물론 가짜는 아니오. 진짜 고 그걸 증명할 방법도 제법 있소.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왕이 되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것과, 이 왕가의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두 가지 문제 사이에서 결 론이 쉽지 않다는 것이오. 재상도 이 왕가의 고질적인 문제점은 알 것이요. 그러니 재 상께서 그 해결책을 내어 주셨으면 하오.” 순간 주위의 왕족들이 술렁거렸다. 방법을 재상에게 물어보다니… 라는 것이겠지만, 재상은 능력이 있는 인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러니 그에게서 좋은 해결책을 듣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재상도 내가 이렇게 질문을 하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는지 잠시 생각에 잠 긴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의외로군요. 이런 질문을 받게 되다니, 아무튼 그럼 제가 제시할 수 있는 방법 몇 가지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그 최고의 방법은 대공께서는 그냥 조용히 사라지시고 지 금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 이 방법은 왕가의 희생만 감수하 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순간 왕족들의 살기가 재상에게로 쏟아졌다. 하지만 재상은 태연하게 다음 말을 꺼냈다. “그 다음 방법은 첫 번째의 방법만은 못해도 아주 좋은 방법입니다. 바로 대공께서 왕이 되시는 것이지요. 추측컨대 대공의 능력이면 이 나라는 상당한 발전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귀족들의 약간의 반발과 아울로 대공의 희생이 필요한 방법입니 다.” 순간 왕가의 인물들이 쏟아 내던 살기는 간 곳이 없어졌고, 내가 내 뿜는 암울한 오 라만 실내를 채웠다. “흠, 흠. 마지막 방법은 최악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지만 앞서의 두 방법이 어렵다 면 이런 방법뿐이지요. 대공이 왕좌에 오르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 “그건 두 번째 방법이 아닌가요?” 풍아가 끼어들어 물어본 말이다. “그건 내용이 좀 달라서 그렇습니다. 왕좌에 오르는 대공이 가짜라는 것이 문제이지 요.” “가짜 대공이요? 그게 무슨 말이죠?” 풍아가 다시 재상에게 물었다. “풍아야. 잠시만 기다려라. 어차피 이야기를 꺼냈으니 재상이 알아서 이야기를 하겠 지. 뭐가 그리 급하냐?” 나는 풍아를 제지하고 다시 대공을 바라보았다. “말씀드린 대로 대공을 왕좌에 올리되 가짜대공을 왕좌에 올려 이 나라를 다스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짜 대공은 제1왕자이신 이그님께서 하신다면 아무 무리 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그님께서는 나중에 제1공주인 이그시니아 공주님 과 결혼을 하셔서 대공과 왕가와의 관계를 묶으신다면 중간에 약간의 혼란과 어려움 은 극복 할 수 있을 것이라 봅니다.” 나는 재상의 말을 들으면서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저 인간은 아마도 이런 생각을 아주 오래전부터 해 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마 내가 나타나지 않고 왕가의 불만이 자꾸만 커져갔다면 언젠가는 이 방법 으로 나라를 안정시켰을 것이었다. “주제프 재상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습니다. 아 마 내가 나타나지 않았어도 재상이 그 자리에서 물러나기 전에 이 방법을 써서 왕가 와 나라를 안정시켰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군요. 어쩌면 그를 위한 준비도 이미 되 어 있을지 모를 일이고 말입니다.” 나는 진정으로 재상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허, 글쎄요. 아마도 대공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이 일이 제가 이 나라와 왕가를 위해 한 일 중에서 가장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 되었을지도 모르지요.” 재상은 그런 말로 내 짐작이 맞았음을 시인했다. “진작 그런 것을 알았으면 우리들이 이렇게 마음을 조리지도 않고 매일 밤을 한숨으 로 보내지도 않았을 텐데….” 이렇게 중얼거린 것은 여장 남자들인 왕족의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말에 슬픔이 밀려오는 듯이 또 손수건을 꺼내서 눈물을 찍어내는 그들이었 다. “하지만 그것도 그렇지가 않습니다. 저는 왕가의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말 많 은 고민을 했고,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의 성공을 위해서 세심한 준비를 해야 했습니 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도 완전하지 못한 구석이 있기에 함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그마치 10년이 넘도록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만 완벽하게 상황을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특히나 대공이라는 인물이 화염기사단의 심법과 얼음기사단의 심법을 동시에 익히고 있어야 한다는 점은 정말 해결이 불가능한 것이라…” 그렇게 말꼬리를 자를 재상은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나는 재상이 무슨 의도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파악해 낼 수 있었다. “주제프 재상, 욕심이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시오? 그 말은 이그 왕자에게 화염기 사단의 심법을 전수해 주라는 말인데…. 실제로 당신이 준비한 그 준비에 그럴듯한 눈 속임 정도는 있을 텐데요? 이미 얼음기사단의 심법은 익히고 있으니 문제가 없고 화 염 기사단의 심법이야 어차피 여기 누구도 모르는 것이니 적당히 닮은 효과를 내는 것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을 텐데…” 내 말에 재상은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대공께서 제 의도를 파악하실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는 해 주실 수도 있 지 않겠습니까? 어제 서쪽에 있던 쥐덫 유적이 사라졌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아마 도 대공 일행께서 다녀오신 듯 한데… 그 곳에서 혹시 건국왕 전하와 연관된 어떤 일 이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만…” 이 능구렁이가 이제는 유소와 나의 관계를 가지고 매달리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유소와의 하룻밤이 떨치기 어려운 무게로 다가오는 것을 느껴야 했다. 사실 쥐덫에서 나를 기다리던 유소의 그 마지막 인상은 아직도 내 가슴에 뿌리 깊은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주제프 재상은 확실히 뛰어난 인물이었다. 사람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할 줄 아는 동시에 작은 정보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능력이 탁월한 작자인 것이다. 하긴 이미 자이건에게도 오행공의 하나를 알려 주었는데 유소의 후예에게 알려 준다 고 문제가 될 것 같지도 않았다. 그건 그 동안 시간의 흐름이 오행공의 영향력을 많이 감소시켰다는 것도 감안한 생각 이었다. 여기 있는 왕족들은 어려서부터 수공을 익혀온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성취는 한 개 인을 대환수와 비견될 수 있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그 중에서 자질이 뛰어나고 남자가 아닌 여자라면 더 큰 발전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어제 본 얼음기사단의 단장 여자도 아직 대환수를 상대하기 어려운 실력이었다. 그 정도의 실력이라면 환수사나 마수사와 같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이 세계에서 특별 하다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여기에서 내가 또 다른 심법을 알려 준다고 해서 세상이 한꺼번에 변하거나 혹은 파란을 일으킬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예전 넥스와 유소에게 심법을 알려 줄 때는 그것이 나라를 세우는 초석이 될 수 있 을 정도로 큰 영향력을 가진 것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랜 고민 끝에 결심을 했다. “좋소. 내가 이그 왕자에게 심법을 전해 주겠소. 하지만 나머지는 도와줄 생각이 없 으니 알아서들 해결을 하시오. 나는 모르는 일이요. 그럼 되겠소?” 나는 재상에게 한 발 밀린 느낌이었지만 그다지 기분은 상하지 않았기에 흔쾌한 목소 리로 물었다. “저... 한 가지만 더 도와주시면….” 하지만 재상은 쉽게 물러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뭐가 또 있다는 거요? 내가 해 줄 것은 더 없는데… 그래 그게 뭐요? 바라는 것 이?” 그러자 재상은 동생들과 지토를 보며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흠. 이그님이 대공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자리에 저 분들께서 조금 힘을 써 주셔서 확실히 해 주시면 좋을 거 같아서 부탁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 나라에도 정령사들이 있지만 다섯 정령들이 모두 나타나 대공임을 확실히 해 준다면 더 없이 확실한 것이 될 겁니다. 그러니….” 한 마디로 연극에 화려한 조연을 해 달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다시 정령들을 부르지 못할 텐데? 그건 어쩌려고 그러시오?” 내가 그렇게 묻자 재상은 내가 반승낙을 했다고 여겼는지 입이 찢어지는(좋아서 헤벌 쭉 웃는 모습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모양이 되어서 대답했다. “그건 문제가 없습니다. 이그님은 대공의 후손으로 설정되기에 5정령들은 그 예전 대공님과의 관계에서의 호의로 잠시 나타난 것으로 해결을 한다면 무리가 없을 것입 니 다.” 나는 그것 때문에 왕궁에 좀 더 있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싫었지만, 그리 어렵지도 않은 부탁이라 그렇게 해 주마고 약속했다. 그리고 그 이후는 내가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이 재상과 왕족들 사이에서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논의가 되었다. 특히 이그의 남녀 일인이역에 대해서는 어디서 준비를 했는지 이그를 닮은 여자를 구 해서 공주를 대신 시킨다는 것 까지 준비가 되었다. 그리고 대공이 나타났다는 소문을 수도와 전국에 퍼트리고 이그에게 심법을 가르치 는 기간 동안에 왕위 이양에 대한 모든 준비를 하기로 했다. 그렇게 모든 계획이 세워지고, 나와 일행들은 여전히 그 궁전에 머물면서 이그에게 심법을 가르치고 대련을 해 주고, 여자가 아닌 남자의 행동을 가르치는 일을 맡게 되 었다. 그리고 이그를 화아에게 맡기는 것으로 남자다운 이그 만들기는 성공적인 것처럼 보 였다. 처음에는 여자 같은 모습에 조금 꺼려하던 화아도 이그가 조금씩 남자다운 면을 나타 내면서 적극적으로 돕고 나섰던 것이다. 그리고 이그는 화공을 익히면서 그 동안 드러나지 못했던 남성적인 모습들이 드러나 게 되었는데, 특히 몸매의 변화가 심했다. 수공을 오래 익힌 것 치고는 너무 중성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던 이그는 수공을 멈추 고 반대인 화공을 익히면서 원래의 남자다운 체구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솔직히 얼굴은 많은 변화가 없었지만 수염이 조금씩 나기 시작했기 때문에 수염을 깍 지 않고 기르는 것으로 얼굴의 약점을 가리기로 했다. 그리고 수공을 익힌 사람이 화공을 익히는 이 무식한 방법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야 겠다. 지금 다른 왕족들은 화공을 익힐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건 몸속에서 두 기운의 충돌이 심하기 때문이다. 특히 수공을 오래 익힌 사람일수 록 화공은 익힐 수가 없었다. 잘못하면 그대로 세상 하직하는 경우도 생길 것이기 때 문이다. 하지만 이그는 꼭, 어떤 일이 있어도 두 가지의 심법을 모두 익혀야 했기 때문에 내 가 편법으로 약간의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다. 모든 기를 하나의 종류로 만들고 그것 을 다시 어떤 형태로든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태극기였다. 때문에 겨우 겨우 이그는 몸속의 수기와 화기를 중화시킬 수 있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영구적인 것은 아니었다. 대공으로 확인된 이후에는 수공을 폐하고 화공만을 익히게 할 생각이었다. 언제까지 내가 태극기를 조절해 줄 수는 없는 것이니 말이다. 이그 혼자서 그런 조절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왕궁에 머무는 동안 이 왕국의 왕이 두 번 찾아와서 나와 일행들을 만났다. 처음 대면에서는 대등한 지위라고는 하지만 한 나라를 다스리는 여왕의 신분이라 상 당히 곤혹스러운 자리였는데, 여왕은 고맙다는 짧은 말로 자신의 심정을 충분히 표현 했고(말의 길이가 문제가 아니다. 진심임을 알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그 짧 은 인사말로 충분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다음에 왔을 때에는 이 왕궁을 만든 바위정령족의 물건이라며 풍아와 화아 광 아에게 각각 검과 도를 선물했다. 겉보기에 명품으로 불릴만한 것들이었고 검을 받은 광아와 풍아, 그리고 도를 받은 화아는 정말 마음에 드는 선물이라며 고마워했다. 하지만 여왕은 지토와 수아에게 따로 줄 만한 것이 없다고 미안해함으로써 숨겨진 수 아의 섭섭함과 겉으로 드러나는 지토의 불만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한달이 훌쩍 지나고 말았다. 이제는 계절이 가을을 향해 가속도를 붙이고 있었다. 곧 낙엽들이 지고, 하늘은 더 높아지고 바람은 서늘해 질 것이었다. 그리고 그 가을의 막바지에 추수를 마무리한 여인왕국에 왕이 바뀌는 역사적인 사건 이 벌어졌다. 건국와 유소의 스승으로 알려진 대공의 후예가 오랜 이역에서의 삶에 싫증을 느껴 여 인왕국을 찾았다가 대공으로 추대를 받아 여왕으로부터 왕권을 이양받게 되었다는 소 문이 왕국을 흔든지는 벌써 한 달이 지났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겠느냐고 생각 하던 백성들의 기대와는 달리, 대공의 후예는 제1공주인 이그시니스와 결혼식을 올림 과 동시에 왕좌를 물려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역사적인 자리에서 이그 최 한국이라 이름을 밝힌 건장한 체구에 아름다 운 얼굴을 한 대공은 얼음기사단과 화염기사단의 심법을 동시에 보임으로써 자신이 대 공임을 분명히 증명했고, 결혼식이 끝날 무렵에는 왕궁의 상공에 불과 바람과 빛과 물 과 대지의 최상급 정령이 차례로 나타나 그 대공에게 축복을 내려주어 결혼식 겸 즉 위 식에 참가한 수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실제로 나도 최상급으로 변한 모습은 처음 보았다. 하지만 좀 더 노숙한 느낌이 드는 것을 제외하고는 외모에서 변화는 없었다. 다만 그 능력이 워낙 컸기 때문에 한꺼번에 둘 이상을 최상급인 상태로 어떤 일을 시 키는 것이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런 경우에 내공을 한 녀석을 유지하고 마력으로 한 녀석을 유지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법이었다. 이로써 내가 만약 정령들의 능력이 필요하다고 해도, 최상급의 상태로 둘 이상의 능 력을 쓸 수는 없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지토와 동생들이 최상급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최상급의 힘이 상급과 그 렇게 차이가 날 줄은 몰랐다. 아무튼 그렇게 이그의 즉위식을 끝이 났고, 왕국의 귀족들과 일반 백성들은, 왕좌에 앉은 이그가 자신이 부족한 것이 많아서 전대 여왕님께 많은 것을 의지하여 배우겠노 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듣는 것으로 마음속의 조그마한 불안조차 날려 버리며 자신의 영 지와 마을로 돌아갔고, 재상은 이번 왕권이양으로 인한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는 분 석이 나왔다고 했다. 그렇게 여인왕국에서의 엄청난 돌풍은 잠잠해 지고, 우리들은 다시 길을 떠날 준비 를 하고 있었다. 유소를 만나고 나니 넥스의 소식이 너무도 궁금했던 것이다. 쉬벡의 이야기에도 유소의 말 속에도 넥스에 대한 부분은 상당히 부족한 부분이 많았 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이그왕의 즉위식이 있고 얼마 되지 않아서 왕궁의 문을 나서고 있었다. 떠나는 우리들을 배웅하는 이들은 역시나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고 있는 남장 여자들 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동안에 정이 들어서인지, 익숙해진 탓인지, 별로 위화감은 느 껴 지지 않았다. 왕과 전대 여왕이 우리를 잡고자 했지만, 잡혀 주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재상은 우리들이 왕국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손해를 주지는 않을 것이 라 판단했는지 우리의 행보를 막으려 들지 않았다. 어찌 보면 우리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은 듯도 하다. 그래서 우리들은 여인왕국 아니, 이제는 전 여인왕국이라 해야 맞을 것이다. 이그 왕은 왕위에 즉위하고 나라의 이름을 개명했던 것이다. 일반 백성들에게 공포하 여 알린 것은 아니지만 역사서와 공공 문서에서 여인왕국이라는 명칭은 사라지고 그 란 드왕국이라는 명칭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지금 그란드왕국의 수도 유소미아를 떠나고 있었다. 한 달이 조금 넘는 동안에 참 많은 일이 있었던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유소미아를 나서서 곧장 신성제국으로 방향을 잡았다. 신성제국은 북서쪽에 그란드국과 일부 국경선을 맞대고 있었다. 하지만 신성제국은 그란드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런 면에서는 암 흑제국과 신성제국 양쪽으로부터 어느 정도 안전을 보장받고 있는 그란드국은 혜택 받 은 나라라 할 수 있을 것이었다. 누웬은 어느 왕국과도 우호가 없었고, 한타는 암흑, 그란드, 신성제국 등의 나라들 과 별로 관계가 좋지 못한 상태이니 말이다. 그리고 암흑제국과 신성제국은 그야말로 완전한 적대국인 것이니 이 다섯 나라 중에 서 그래도 그란드왕국은 제일 여유로운 나라로 보였다. -빅, 그리고 마르트라 이런.... - 이제는 가을이 완연한 들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이그 왕은 나에게 특별한 무엇을 해 주고 싶어 했지만 나는 어떤 지위도 그를 나타내 는 신분증도 필요 없다고 받지 않았다. 우리 일행은 평소처럼 여행을 즐기고 싶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또 한 가지 있다면 너무 깊이 나라와 정치에 관계되고 싶지 않은 이유도 있었고 말이 다. “이젠 추수가 거의 끝이 난 모양이네요. 그런데 그런 들판이 조금 쓸쓸해 보여요.” 수아가 옆자리에서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런 면도 없지 않아 있구나.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렴. 저 들판의 곡식들이 이제는 어떤 사람의 창고에 가득 차서 그에게 따뜻하고 행복한 겨울을 이야기하고 있 다고 말이야. 그럼 이 들판이 그다지 쓸쓸하지만은 않을 것도 같은데 말이다.” 나는 말고삐를 느슨하게 풀어주며 수아의 말에 대답했다. “그렇기도 하네요. 그러고 보면 오빠는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그래, 그런 것도 같구나. 하지만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은 누구나가 알면서 진짜 로 그렇게 느끼고 생각하기는 어렵지. 그게 문제야 그게.” 내가 그렇게 분위기를 잡으며 수아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이야기를 막 시 작하려는데 앞서서 말을 달려갔던 풍아가 급하게 말을 몰아 달려오고 있었다. 평소 그렇게 급하게 말을 몰지 않았기에 무슨 일인가하고 우리 일행들은 모두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오빠! 하아, 하아, 오, 오빠 저 앞에 큰 일이 났어요. 저기 저 앞에 마을이 온통 불타고 있어요. 사람들이, 사람들이 많이 죽었어요.” 풍아의 말을 들은 우리들은 곧장 전 속력으로 말과 마차를 몰았다. “아! 어쩜 이럴 수가. 흑 너무해요.” “참혹하군요. 루탄 형님. 이건 도대체가….” “어떤 녀석이 이런 짓을 한 건지…” 수아 광아 화아가 한 마디씩 놀라움과 분노를 드러내었다. 삼십여 호가 될 마을 하나가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었다. 살아남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말고, 강아지, 가축들도 살아남은 것은 없었다. “이거 인간의 짓이 아닌데요? 루탄형님. 이건 인간이 아닌 다른 녀석의 짓입니다. 인간들은 가축까지 저렇게 찢어 죽이지는 않지요. 거기다가 마을 밖으로 나간 것은 하 나도 없습니다. 일정한 범위 안에서만 우왕좌왕하면서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면서 죽 어갔습니다.” 나는 광아의 말을 들으면서 마을을 하나하나 살피고 있었다. 그 사이에도 수아와 풍아는 마을에 살아남은 사람이 있는지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생명탐지 마법으로 이 마을에 살아 있는 것이라고는 벌레정도가 전 부라는 것을 안 후였다. 얼마간 마을을 살핀 우리들은 다시 마을 밖으로 나와 상황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살아있는 것은 전혀 없고, 없어진 듯한 물건도 전혀 없고, 그냥 뭔가가 와서 생명 체를 다 죽이고 건물들을 부수고 간 것이 전부야.” 화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거기에 더한다면 아까 말한 것처럼 마을 전체를 일정한 결계로 묶어서 누구도 도망 을 가지 못하게 만든 상태에서 이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고.” 지토가 화아의 말에 설명을 더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사람들과 동물들의 사체에 생긴 상처로 보면, 마법적인 공격 에 당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 중에는 몸이 통째로 찢긴 경우도 있고, 날카로운 무 기에 당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로 보아서 마법, 육탄전, 무기 공격을 동시에 할 수 있 는 녀석이거나 혹은 각각 독립된 둘 셋 이상의 존재가 한 짓이라는 결론이 나옵니 다.” 광아는 좀 더 날카로운 분석을 내었다. 하지만 수아와 풍아는 그런 것에는 신경을 안 쓰고 생존자를 찾아 헤매다 왔기 때문 에 다른 정보를 모으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내가 살펴본 내용도 그와 같다. 하지만 이건 한 녀석이 한 짓이 아니야. 적어도 둘 이상이지. 말을 찢어 죽인 괴력의 녀석은 검이나 도를 사용해서 사람을 죽인 녀석 과 비교하면 덩치가 다섯 배 이상 차이가 난다. 그러니 당연히 같은 녀석이라고 볼 수 없지. 그 중에 어떤 녀석이 마법을 썼는지 아니면 다른 녀석이 또 있는지는 모르 지 만 적어도 한 녀석은 아니라는 것이 내 생각이야.” 내 결론에 광아도 끄덕끄덕 머리를 주억거려서 동감을 표했다. “일단은 여기 마을을 지토가 알아서 정리 좀 하고 사람들도 묻어주고, 나는 잠시 유 소미아에 이그 왕을 보고 와야겠다. 이게 무슨 일인지 좀 알아봐야 겠다. 금방 오 마.” 나는 곧 이그 왕이 있는 궁전으로 순간이동을 했다. 물론 주위에 사람들이 있을 것을 대비해서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을 위치로 이동 을 한 후에 몸을 감추고 이그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그 곳에서 이그와 재상이 함께 무엇인가 궁리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 었다. 내가 그들 앞에서 갑자기 모습을 나타내자 상당히 놀란 모양이었지만 경비병을 부르 고 호통을 치고 하는 추태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그 왕과 재상에게 물어 볼 것이 있다고 이야기하고 방금 우리가 본 것들에 대 해서 자세히 이야기했다. 물론 내 이야기를 듣는 이그의 얼굴이 일그러진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재상은 묵묵히 내 말을 듣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내 말이 끝나자 재상이 입을 열었다. “폐하, 이로써 피해 마을의 수가 다섯 개가 되었습니다. 어떤 방법을 만들든 방법 을 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재상의 그 말에서 다른 곳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여기 말고도 다른 곳에서도 같은 사건이 있었다는 말이군요. 그럼 혹시 이런 일을 벌이는 녀석이 누군지도 알고 계십니까?” 나는 재상을 보고 물었다. “물론 어떤 녀석의 소행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는 존재 라 손을 놓고 있는 것이지요.” 한 나라의 재상이 어찌해 볼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은 아니다. 그럼 인간이 아니면서 나라의 힘으로 어찌할까를 고민해야 하는 존재는 정해져 있었 다. “초환수, 아니면 초마수 중에 하나로군요? 그래 이건 어떤 녀석들의 짓입니까?” 내가 그렇게 묻자 재상은 잠시 의아한 얼굴이 되어서 되물었다. “녀석들이라니요? 그 녀석은 한 놈입니다. 단 한 놈이지요.” “하지만….” 나는 마을에서 내린 결론을 이야기했고 재상은 간단하게 결론을 지었다. “그 초환수는 몸체의 변형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런 그렇게 생각하시게 된 것입니 다. 하지만 범인은 한 녀석입니다. 분명히 그 녀석이지요. 초환수 마르트라, 그 빌어 먹을 녀석이 분명합니다.” 초환수 마르트라라, 어떤 녀석인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 궁금증은 재상의 다음 혼잣말로 풀려버렸다. “그 때, 자간에서 화이트스네이크만 확보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을 그 빌어먹 을 썬드라스가와 경매장 주인 녀석 때문에 이렇게까지 상황이 나빠지다니…” 헉험. 나는 순간 목이 콱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아직 재상은 그 때, 그 뱀들을 팔려고 했던 것이 우리 일행이라는 것 까지는 파악을 못한 모양이었다. 아무튼 그 단순하게 화이트스네이크를 탐한다던 그 초환수 녀석이 이번 사건의 범인 일 줄은 몰랐다. 솔직히 지은 죄도 없으면서 어쩐지 가슴 한 구석이 찔리는 느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내가 그 경매에서 물건을 내 놓았던 인물이라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 곤란해 질까나… 나는 일단 사실을 감추고 이야기를 들어 보기로 했다. “그래, 그 초환수가 무슨 이유로 이런 짓을 벌이는 겁니까?” 내 물음에 재상이 답한 내용은 자간 경매에서 들었던 내용과 많이 다르지 않았다. 그란드와 한타 사이의 국경선, 신성제국과 그란드의 국경선에서 남쪽으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초환수 마르트라가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그 곳에 자리를 잡은 녀석은(역사 기록으로는 4계의 대혼란기에 나온 것으로 되어 있다.) 단순한 성격과 그 포악성과 엄청난 능력으로 주위 나라에 큰 위 협 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초환수라면 한 나라의 고급 전력을 총동원해야 싸워 볼 수 있는 녀석이니 다 른 나라와의 관계도 생각을 해야 하는 각국에서 굳이 초환수와의 싸움을 자청할 이유 가 없었다. 사실 마르트라에 의한 피해는 암흑제국과 누웨을 제외한 삼국에서 모두 입고 있는 피 해였기 때문에 삼국 모두 이 환수를 제거 혹은 제압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지만 쉽게 국력을 쏟을 엄두는 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신성제국은 환수의 영역이 자국과 면해 있는 곳이 없어 환수의 영역에 직접 개입을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고 말이다. 사실, 재상의 이야기로는 그 녀석은 이렇게 한 번 마을들을 쑥밭으로 만들고 나면 한 동안은 조용하다고 한다. 때문에 적게는 300에서 많게는 1000에 이르는 백성들이 피해를 입어도 조용히 사건 을 덮어, 민심의 혼란을 막는 것이 그나마 최선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녀석이 움직이더라도 제발 다른 나라로 가 주기를 바란다나 어쩐다나… 나는 재상의 이야기를 듣고 처음 우리 일행이 녀석을 목표로 삼았던 것을 떠올렸다. “좋아, 그 녀석 잡아 드리지요. 대신 우리 용병대는 비쌉니다.” 내가 이렇게 입을 열자, 재상과 이그는 황당하다는 얼굴이 되었다. “왜? 못 잡을 것 같아서 그럽니까? 뭐 잡든 못 잡든 그란드와의 관계는 철저히 비밀 로 해 드릴 테니 그 점은 걱정 마시고 얼마나 주실 건지 말씀을 해 주시지요.” 내가 다시 대금 이야기를 하자, 그 때에야 정신을 차린 듯 재상과 이그가 나를 무슨 괴물 보듯 보더니 입을 열었다.(말하는 것은 재상이다.) “대공께서 해결을 해 주신다면 그 액수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얼마든지 드리지 요. 100억 정도 드리면 어떨지요?” 뭐? 100억. 이 재상놈이 아주 날 가지고 놀려고… “자간에서 겨우 뱀 몇 마리에 400억을 내 놓더니 이젠 100억? 재상, 나를 너무 부 려 먹으려는….” 헉, 들켰다. 나는 말을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들킨 것이다. “역시 대공께서 그 곳에 계셨군요. 제 심부름꾼에게 이야기를 듣고 잊어버리고 있었 는데 방금 생각이 나서 말입니다. 그 때, 경매 물품을 경호하던 용병대가 있었다는… 그리고 그 일행의 구성이…” “그래서 뭐가 문제라는 겁니까? 우리가 무슨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저 우린 경매 물품을 경호하는 일을 했을 뿐인데 말입니다.” 나는 겨우 겨우 태연함을 되찾고 재상에게 따지듯 물었다. “그게 무슨 문제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저 그런 생각이 났다는 것이지요.” 재상은 여전히 태연스럽게 말을 받았다. “어찌 되었든 그건 마르트라와 상관이 없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일에 우리가 무 슨 책임을 질 일도 없고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갑자기 나에게 주겠다는 대금이 그렇게 싸게 바뀌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재상.” 나도 재상에게 밀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어떻게 400억에서 100억이 될 수가 있단 말인가? “400억에서 100억이라 너무 차이가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재상?” 나는 역시 돈 문제에는 민감한 것일까? “그럼 이렇게 할까요? 재상. 내가 그 화이트 스네이크를 얻어다 주면 400억을 주시 겠습니까? 그걸로 마르트라를 회유하든 구워삶든 그건 재상의 능력으로 알아서 하고 말입니다.” 나는 약간 삐딱한 기분으로 물어 보았다. 재상은 잠시 고민에 빠진 듯 했다. 고민의 내용이야 뻔한 것이었다. 나에게 마르트라를 맡기면 해결될 확률이 상당히 높지만 마르트라가 국가 전력이 되 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뱀을 가지고 가서 마르트라를 구워삶을 수만 있다면 국가 전력에 막강한 도움 이 될 것이다. 그러니 이 둘 중에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일 터였다. 물론 나 같으면 확실하게 해결이 되는 쪽에 맡기겠지만, 가끔은 사람들은 도박을 택 하는 경우도 있으니…(특히 판돈이 크면 더더욱 도박적 성향을 보이는 것이 인간이 다. 뭐 나도 그렇지만…)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일단 저희가 화이트 스네이크를 사겠습니다. 그리고 마 르트라를 회유해 보고, 그것이 실패할 경우에 대공께서 힘을 써 주시면…” 역시 늙은이가 머리를 굴리니 이런 방법이 나오는군.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라고는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 상황을 분석하고 그에 가장 적절한 방안을 수립하는 것은 정말 보통 능력이 아닌 것이다. 역시 이름난 이유가 있는 사람이다. “그럼, 화이트 스네이크의 대금은 400억. 그리고 우리 용병대의 고용 대금은 얼마 나 주실 생각입니까? 공짜로 해 달라는 것은 아니겠지요?” 내가 다시 용병 고용 대금으로 이야기를 돌리자 재상은 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요. 절대로 공짜는 안 되지요. 600억을 드리겠습니다. 총 1000억이 되겠군 요.” 재상이 그렇게 말하자 이그가 반대를 하고 나섰다. “로드릴재상, 우리나라의 국고에서 그 정도의 액수가 빠지면 거의 파산입니다. 알 고 계시는 겁니까?” 이그가 그렇게 따지고 나서자 재상은 벙긋 웃으며 말했다. “폐하 저도 그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타와 신성제국에 사신을 보내어 마르트 라의 제거를 위한 도움을 청하고 원조를 요구한다면 그 정도의 손해는 만회를 하고 남 을 듯 합니다. 두 나라에서 각각 500억씩만 내라고 하지요. 허허허.” 뭐 저런 못된 인간이… 결국에는 자기는 손도 안대고 코를 풀어보자는 소리가 아니고 뭐란 말이야. 아무튼 어디를 가나 무서운 놈들이 꼭, 꼭, 하나씩은 있는 것 같다. 재상의 이야기를 들은 이그는 그 때에야 느긋한 표정이 되어서는 재상을 믿음직스럽 다는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결국에 화이트 스네이크로 마르트라를 회유할 수 있으면, 400억으로 초환수 하나 를 거느리는 것이니 손해는 아니고, 만약 제거해야 할 경우라면 우리들을 움직여서 마 르트라를 상대하고, 그 전에 각국에서 원조 명목으로 대금 지불 약속을 받고, 마르트 라가 제압되면 그 대금을 청구한다는 것이겠군요. 각국에서도 마르트라가 제거되지도 않았는데 대금을 줄 생각은 하지 않을 테니 말이죠.” 내가 그렇게 상황을 대충 정리하자 재상은 아주 잘 정리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 였고, 이그도 재상의 계획을 짐작했는지 흡족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어째, 누웬의 황제에게 당했던 그대로 이 로드릴 주제프에게 당하는 느 낌이 들었다. 이 끈적끈적하고 기분 나쁜 느낌이 난 정말 싫다. 나는 일단 재상에게 화이트 스네이크를 확보하고 연락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동생들 이 기다리는 마차로 돌아왔다. “그럼, 다시 그 화이트 스네이크를 가지고 이그 왕에게 가야 한다는 거야? 그럼 또 빅에게 가 봐야겠네? 어떻게 갈 거야? 금방 갔다 올거야 아니면 마차로 이동을 할거 야?” 이야기를 다 들은 후에 화아가 물어 온 말이었다. “야!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잖아. 상대는 초환수란 말이야. 초.환.수. 실제로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상대라는 말이야. 솔직히 나로서도 어느 정도의 녀석일지 감이 안 잡히는데 걱정도 안 되냐?” 나는 전혀 긴장감이 없어 보이는 일행들에게 한 소리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목소리가 높아졌다. 초환수라는 존재는 본 적이 없었다. 전에 스컬프트가 자기도 초환수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고 했었지만, 그 녀석과는 상 대도 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그 녀석도 나와 반나절은 싸울 자신이 있다고 했었다.) 확실한 전력은 몰라도 이 마르트라라는 녀석은 지금 이 인간계에 있는 환수들 중에 서 수위를 다툴 거라는 예상이 지배적인 녀석이니 그 위력이 엄청날 것은 분명해 보 이 는 것이다. 솔직히 내가 지닌 힘이 어느 정도 되는지 모르지만, 또 내가 질 거라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긴장되고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 녀석들은 조금도 긴장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으니 화가 난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일행의 안전이었다. 솔직히 이야기하면 마을 한 둘 보다도 우리 일행의 안전이 나에게는 더 중요한 문제 인 것이다. 이기적이라고 하겠지만 나와 관계없는 사람들이 쓰러져 죽어있는 것은 나에게 그렇 게 큰 의미가 되지 못한다. 그 예전의 시대에도 지구 건너편에서 숱한 사람들이 국지전이나 내란이라는 이름하에 서 쓰러져 썩어가는 것을 화면으로 보았었다. 지금은 직접 그 모습을 본다는 점이 조금 다른 것일 뿐, 화면속의 주검과 여기 누워 있는 사람들의 주검에 큰 의미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동생들과 지토, 그리고 란이와 아눈 등은 의미가 달랐다. 그들은 이제 내 가족이며 일행인 것이다. 내가 힘이 있다고 해서 그 힘에 상응하는 짓을(예를 들어 사람들에게 도움되는 어떤 일) 꼭 해야 한다는 법은 없는 것이다. 그런 것은 가치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그가 그것을 하고 싶다면 그것은 그의 믿음이며 그의 바람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인류의 구원이니 어쩌니 하는 것이 되고 싶은 마음은 절대 없다. 나는 그저 지토와 동생들, 이렇게 우리 일행의 여행이 순조롭기를 바라며, 그 사이 에 이들과의 교감과 정이 더 깊어지고, 그로인해 인간으로서의 행복을 더 크게 누리 게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가장 큰 바람이다. 그리고 비록 우리들이 엄청나게 강한 구성원이라고 하지만 나는 우리 구성원이 무적 이라는 생각은 가지지 않는다. 초환수는 그 끝을 짐작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상당히 걱정이 되는데 동생들과 지토는 여전히 걱정하는 표정이 아니니 조금 신경질이 난 모양이다. 때 아닌 내 고함소리에 일행들이 의아한 표정이 되었지만, 곧 내 마음속의 걱정과 근 심을 읽은 모양인지 미안한 얼굴들이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들은 너무도 나를 잘 이해해준다. 나도 조금은 머쓱해져서 씨익 웃고 말았다. 그 후로 우리들은 서둘러 일을 진행했다.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빅에게 갔다 오는 것이었다. 물론 그 일은 내가 맡았고, 동행은 없었다. 그 동안 일행들은 마을에 남은 건물과 시체들을 마저 정리하고, 나를 기다리기로 했 다. - 루탄인가? “그렇습니다. 빅.” 내가 그의 처소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빅은 나를 감지해 내었다. - 오랜만이라고 하기에는 겨우 몇 달이 지났을 뿐이로군. 잘 지냈나? “그렇습니다. 빅. 빅도 잘 지내셨지요?” - 이렇게 둥지에 박혀 지내는 내게 무슨 일이 있겠나. 그저 이제 신계로 가야 할 때 가 된 것 뿐이지. “그래요? 시간이 별로 남지 않은 모양이지요?” - 그렇다네. 이제 며칠 사이로 신계로 갈 것 같아. “정말 축하드립니다. 빅.” - 고맙네, 그런데 무슨 일인가? 자네가 이렇게 다시 찾을 줄은 몰랐는데…“ 나는 빅의 질문에 마르트라의 존재와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 초환수급의 능력에 대해서도 물어 보았다. - 초환수라, 그건 인간들의 잣대로 세운 기준이니 내가 잘 알 수는 없지만, 일단 이 땅위에 있는 환수들은 그다지 능력이 뛰어난 환수들이 아니라는 것은 말 할 수 있지. 실제 신계에서 소환한 환수라 하더라도 인간계에서의 제약으로 그 능력을 거의 발휘 하 지 못하니까 말이야. “그럼, 그 초환수가 신계에 있었다면 더 큰 힘을 발휘하는 존재라는 말입니까?” 나는 빅의 말에 의문은 느껴 물어 보았다. - 그런 말이 되기도 하지만, 인간계에 나온 환수들 대부분이 그저 그렇고 그런 것들 이라는 말이지. 처음부터 힘이 있는 환수들은 혼란에 빠지지도 않았을 것이니 말이 야. 아무튼 그 마르트라라는 환수도 역시 별 볼 일 없는 녀석일 것이야. 다만 그동안 1000년의 시간을 잘 보냈다면 나름대로 힘을 많이 키웠겠지. 그렇지만 매번 그렇게 행 패를 부린다니 힘을 기르는 것도 어려웠을 것 같군. “그럼 빅이 그 환수와 싸운다면, 빅이 당연히 이긴다는 것인가요?” - 글쎄, 그건 알 수 없군. 아마도 영기의 싸움에선 내가 앞서지 않을까… 하지만 나 는 싸움 자체에 익숙하지 못하니 알 수 없는 일이지. 절대적인 힘의 차이만으로 승부 를 점칠 수는 없으니 말이야. 하지만 신계라면 무조건 내가 이기겠지. 신계는 영기의 힘이 모든 것을 지배하니 말이야. “그 동안에 상당히 많은 것들을 아시게 된 것 같네요?” 나는 막힘없는 빅의 말에서 신계의 내용을 듣고 물었다. - 신계에 오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교육도 받아야 한다네, 그래서 가끔 선배들이 찾아오곤 하지. 그래서 그 사이에 좀 늘었지. 아마도 신계에 들기 위한 오리엔테이션이라도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네, 다행이네요. 그런데 빅이 보시기에 제가 그 초환수와 싸운다면 어떨 것 같습니 까? 제가 이길 수 있을까요?” 내 물음에 빅은 그 동안 움직이지 않던 몸을 움직여 머리를 들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 그런 질문은 바보 같은 질문이로군. 루탄 자네의 능력이라면 좀 곤란을 겪을지는 몰라도 어렵지 않게 나도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 도대체 무얼 걱정한다는 것인지 모 르겠군. 겨우 그 정도의 존재에게 말이야. 빅의 말에는 어감이 없었지만 내가 듣기에는 분명히 어이없어하는 말 같았다. 나는 빅의 그 말에 지극히 안심이 되었다. 빅의 생각이 그렇다면 적어도 그 마르트라라는 초환수에게 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 단 한 가지만 조심한다면 되겠지. 인간은 말이야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 서는 아주 약해지는 면이 있으니…. “빅, 그건 무슨 말이죠? 경험하지 못한 것에는 약해진다는 것은….” 하지만 빅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백색 뱀들을 소환해서 나에게 건네주었다. 석곽石槨에 든 뱀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죽은 듯이 조용한 모습이었다. - 이걸로 자네가 하고자 하는 일이 성공하기를 빌겠네. 그리고 25일 후에 한 번 찾아 주게. 그 날이 인간계에서의 마지막이 될 것 같으니 자네의 얼굴을 보고 가고 싶어 그 러네. 빅은 그 돌상자를 내밀며 그렇게 말하곤 들어 올렸던 머리를 몸체에 다시 내려놓았 다. 나는 그 석곽을 로드릴 재상에게 전하고 동생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내가 동생들과 다시 만났을 때에는 이미 마을은 땅 위에서 그 흔적을 지우고 없었다. 지토는 아주 말끔하게 마을 하나를 땅 속으로 묻어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그 모습이 더 황량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제 로드릴이 하는 일을 지켜보는 것만 남았다. 그러다가 로드릴이 마르트라의 회 유에 성공하지 못하면 우리가 나서서 녀석을 제압해야겠지.” 내가 입을 연 것은 우리가 식사를 마치고 취침을 준비하는 때였다. “그럼 그 때까지는 무얼 하고 있으면 되지요? 그리고 얼마나 오래 걸릴까요? 시간 이 많이 걸리면 안 되는데…” 풍아가 내 말이 끝나자 물어온 것이다. “글쎄, 일단 다른 나라에 협조를 구하기도 해야 할 테고, 마르트라를 회유하기 위 한 시간도 필요할 테니까 금방 해결이 될 문제는 아니지 않을까?” 나도 확실한 기간을 정할 수는 없었기에 자신 없는 대답을 해야 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요? 다시 궁전에 가서 지내나요? 아니라고 여기에서 무턱대 고 기다릴 수도 없잖아요.” 이번에는 수아가 하는 말이다. 그도 그렇다. 그냥 무턱대고 기다리고만 있을 수도 없는 문제기는 하다. 나는 잠시 고민을 해 보고 결정을 내렸다. “일단은 마르트라의 영역에서 가까운 마을이나 성에 가서 로드릴의 연락을 기다리기 로 하자. 마을에 도착해서 우리가 그 마을에 있다는 것을 알리면 로드릴이 알아서 하 겠지.” 나의 결정으로 우리들은 마르트라의 영역에 가장 가까운 마을을 알아보고 다음날 출 발하기로 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난 뒤 내가 재상에게 다녀온 덕분에 우리들은 마르트라의 영역에 가장 가까운 마을과 위치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꼬박 하루를 서 쪽으로 달려서 그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을이라고 해 봐야 겨우 십여 호에 지나지 않는 마을에 사람 수도 삼십명 남짓 되 는 마을이었다. 모두들 농사와 사냥에 종사하는 농군과 사냥꾼들이었고, 어린 아이들과 노일들은 집 안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돕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시골 마을의 모습이었다. 그런 마을에 제대로 된 이름이 있을 턱이 없었지만, 우리가 그 마을에 들어섰을 때 우리를 반겨준 중년의 농사꾼은 자신들의 마을을 마르의 입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했다 . 뭐 따지고 보면 마르트라의 아가리라는 뜻이겠지만 차마 초환수인 마르트라의 노여움 을 살 여지가 있는 이름은 택하지 못하고 줄여서 마르의 입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모 양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살아가는 동안 이 마을에서 문제가 생긴 적은 없다고 말하는 그 농군 의 얼굴에서 근심이나 두려움은 찾을 수 없었다. 우리가 마르의 입에서 머문 것도(사실 마을 곁에서 야영중이다.) 벌써 이십일이 되어 간다. 그 사이에 로드릴이 한 번 연락을 해서 내일쯤에 마르트라에게 교섭단을 보낼 생각이 라는 말을 전해 왔다. 적어도 내일이나 모레면 결과가 나올 것이었다. 재상의 계획은 생각보다 단순했는데, 마르트라에게 화이트스네이크의 존재를 알리고 원한다면 화이트 스네이크를 언제든지 공급해 주겠다는 것을 조건으로 그란드 왕국의 도와줄 것을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만약 그것을 거부한다면 최소한 그란드 왕국에는 피해를 주지 않겠다는 약속 을 받아내겠다는 것이 재상의 목표였다. 그리고 70년 전의 사건을 생각해 본다면 그 계획의 성공 가능성은 매우 높은 것이라 고 분석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조만간 있을 재상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재상의 연락에 따라서 우리들의 행동이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재상은 마르트라와의 교섭이 실패하면 곧장 마르트라의 제압에 나서 줄 것을 부탁했 는데, 그 사이에 벌써 한타와 신성제국 사이에 물밑 교섭을 마무리 해 놓은 모양이었 다. 다음날 우리의 예상대로, 재상이 보낸 십여 명의 교섭단이 마르트라의 영역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화이트 스네이크를 무슨 신주단지 모시듯 곱게 모시고 마르의 입을 지나(잠 시 나를 찾아 재상의 연락사항을 재확인하고)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그들은 돌아오기로 한 하루가 지나도 오지 않았고, 결국 로드릴 재상은 자신 의 첫 번째 계획이 실패했다는 판단을 내렸고, 급하게 말을 몰아 온 전령이 우리들에 게 마르트라의 제압에 나서 줄 것을 요청한 것은 그 다음날 이었다. “결국은 이렇게 되는구나. 이젠 우리가 나서야 하는 건가? 그런데 아직 용병 고용대 금을 못 받았는데…. 가서 재상에게 내 놓으라고 할까?” 나는 마차를 마르트라의 영역으로 몰아가며 실없는 농담을 던졌고, “정말이네. 그럼 빨리 가서 돈 받아 와요 오빠.” 라고 풍아가 허전한 맞장구를 쳤다. 그렇게 마르트라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우리에게 서서히 긴장감이 생기고 있었다. 나는 광범위 탐색 마법으로 대략적이 녀석의 위치를 잡고 마차를 모는 중이었고, 다 행스럽게도 마차가 지나갈 정도의 길은(길이 아니라 그냥 공간) 확보할 수 있었기 때 문에 큰 불편은 없었다. 그리고 반나절이 되지 않아서 드디어 마르트라와 가까워 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녀석이 있는 곳으로부터 엄청난 마나의 유동이 느껴진 것이다. 그렇게 녀석이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을 안 우리들은 말과 마차를 두고 도보로 녀 석에게 접근하기로 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산책을 나온 것처럼 여유 있게 걸어가는 우리였지만, 적어도 나는 마르트라가 벌써 우리의 존재를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동안에도 몇 번 서로가 서로를 탐색하는 마법들이(녀석의 방법은 확실하지 않지 만 위치를 탐색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마나의 흐름이 있었다.) 오고 간 탓이었다. 그리고 내가 마르트라에게 느끼는 심한 압박감을 마르트라 역시 느끼지 않을까 하고 나름대로 내 스스로를 격려하고 있는 중이기도 했다. “저 앞이다. 제법 결계를 치고 공간을 만들었구나. 확실히 환수들이 쓰는 힘은 마나 와는 관련이 없는 것 같아. 이 녀석이 마나를 쓰기는 하지만 그 이외에 다른 힘도 함 께 쓰고 있어.” 나는 마치 작은 계곡처럼 보이는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 그럼 들어가 볼까?” 내 말과 동시에 동생들과 지토는 각자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란이와 게브도 준비를 마쳤다. 란이야 내 옆에서 삐죽삐죽 가시가 돋은 모습이 되는 것이었고, 게브는 당나귀에서 지토로 변하는 것이 준비였다. 파울은 수아의 망토로, 아눈, 카다는 도와 칼 속에 들어가 있었고 맘맘은 광아의 검 과 몸 전체에 붙어 있었다. 나는 일행들과 마르트라의 영역 안으로 발을 들였다. 결계는 시각적인 현혹의 효과가 있을 뿐이었고, 안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거나 하는 요소는 없었다. 아마도 처음부터 없었던 것은 아이었을 것이다. 나와 일행들을 그런 것을 막을 수도 없는 이상, 우리에게 자신의 자신감을 보이기 위 해 없앤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들어선 마르트라의 둥지 안은 온통 바위와 모래로 이루어져 있었다. 밖에는 이런 모습이 아닌데 안쪽만 이런 모습을 만든 것은 녀석이 사막이나 모래사장 을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마르트라, 손님이 왔으면 인사를 나누는 것이 예의가 아닌가? 잠시 인사를 나누고 용건을 해결하는 것이 어떤가?” 나는 크지 않지만 내력이 담기 목소리로 마르트라를 불렀다. - 담이 큰 녀석이로군. 인간 중에서 제법 힘을 가진 것이 너를 그렇게 안하무인으로 만들었던가? 마르트라의 말이(혹시 아실라나 랑그와 파롤이라고… 파롤은 언어의 형식을 랑그는 언어가 지니고 있는 뜻을 이야기하는데, 머릿속에 울리는 것은 그 랑그에 해당한다고 해야겠지?) 머릿속으로 스며들었다. “시간이 없어서 바삐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것 이 어떻겠나? 마르트라.” 나는 다시 녀석에게 말을 걸었다. 순간 녀석의 둥지 전체에 엄청난 기운이 터질 듯이 쏟아져 올랐다. - 건방진 놈. 감히 나에게 그 따위의 말투를 쓰다니.. “이봐 나도 나이가 있는 몸이라네, 내 나이가 지금 3500살이 넘었으니 너무 그렇게 늙은 티를 내지 말라구.” 나는 마르트라의 약을 올리고 있었다. 녀석은 그 둥지의 모래 아래에 있었고, 그 기세가 엄청나게 강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하지만 모습을 확인을 할 수 없어서 그가 모습을 드러내도록 약을 올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 3500살의 인간이라.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마르트라는 그렇게 말을 줄이며 우리 앞에 나타났다. “응? 사람이야? 사람처럼 생겼네?” 타나난 마르트라를 보고 풍아가 보인 반응이었다. “인간형으로 나타났군. 아직도 본체는 모래 속에 들어가 있고, 그래 이야기를 나눌 준비가 된 건가? 마르트라?” 나는 30대 중반의 평범한 농사꾼 모습으로 나타난 마르트라에게 물었다. 변신을 하려면 좀 멋지게 변신을 하지… 왜 하필이면 농사꾼의 모습일까? “이야기라 무슨 이야기를 하자는 거냐? 이제 보니 저 녀석들도 인간이 아니군. 정령 의 냄새에 환수의 냄새가 난다고 했더니 아주 골고루 몰려 왔군. 인간 하나에 정령이 다섯에 환수가 다섯에 저건 신계의 생물인 것 같군. 환수는 아닌 것 같은데…” 마르트라는 조금 갈라지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녀석이 나를 쳐다보며 빈정거리 듯 말했다. “그래 여기 온 용건이나 들어보자. 보나마나 얼마 전에 어정거리던 녀석들과 관련 이 있겠지만 말이야.” 나는 마르트라 녀석의 행동이 아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차피 제압하기 위해 온 것이지만, 대화로 녀석을 회유할 수 있으면 그것도 좋은 일 이겠다 싶었지만, 녀석의 말대로 안하무인인 모습이 자꾸만 짜증을 불러오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 전에 화이트 스네이크를 선물로 보냈는데 잘 받았는지 어쩐지 연락이 없어서 말이야. 그래서 한 번 와 보았지. 그래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가?” 나는 그래도 마음을 삭이고 일단은 대화로 이야기를 풀어가기로 했다. “그거?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기분이 영 좋지 않아. 그것이라면 여기 있지.” 얼굴을 찌푸리고 중얼거리듯 말하며 녀석이 내민 손으로 화이트 스네이크가 소환되 어 나타났다. “어머, 어쩜."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군.“ “쩝.” 그 화이트 스네이크는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온 몸의 가죽이 드문드문 벗겨지고 찢어져 있었고, 거의 숨이 끊어지고 있었던 것이 다. “다른 것들도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야. 이건 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내가 아무 리 환수라 해도, 완전히 본능을 감추고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니까 말이야.” 조금은 자조적으로 들리는 소리였다. “무슨 말이지? 그것들을 그 모양으로 만드는 것이 본능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이 지?” 나는 녀석의 말에 궁금증을 느꼈다. “크~흐. 자세히 설명을 해 주고 싶지만 시간이 없을 것 같군. 하필이면 아주 때가 좋지 않은 상황에 왔으니 말이야. 앞으로 반나절을 버틴다면 다시 이야기를 할 수 있 겠지. 크흐흐흐.” 하지만 녀석은 이따위 말을 남기고는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어째 불안한 생각이 드는데요?” 광아가 주위를 경계하며 말했다. “그래, 기분이 별로야.” 화아 역시 같은 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땅이 흔들리며 녀석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러난 모습은? “어머, 뱀이네? 그것도 파란색 일색이네?” “정말 큰 녀석이네? 거의 100미터는 되겠군.” 풍아와 화아가 대뜸 녀석을 보고 내 뱉은 탄성이다. 그랬다. 마르트라의 본체는 거대한 뱀이었다. 빅이 화이트 스네이크라면, 이 녀석은 블루 스네이크라 해야겠고, 빅이 조금 통통한 모습이라면 이 녀석은 아주 날렵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럼 빅은 구렁이고, 이 녀석은 독사 쯤 된다는 것일까? “엇! 피해.” 녀석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첫 공격은 평범한 육탄 공격. 하지만 당하는 입장에서 평범한이 아니었다. 그 거대한 녀석이 엄청난 빠르기로 아가리를 벌리고 달려드는 모습은 상당히 위압적 이었다. “하는 수 없지 최대한 몸을 보호하고 공격해!!” 나는 몸을 날려 공격을 피하며(수아를 품에 안고) 일행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드디어 마르트라와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마르트라의 성향이 무었인지 도대체 칼이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화아의 도도, 풍아 광아의 검도 모두 튀어나오는 상황이었고, 지토의 도끼역시 그다 지 상처를 주지 못하고 흠집만 가끔 만들고 있을 뿐이었다. 게브나 란이의 공격도 실효성은 없었다. 게브의 물리 공격은 흔적이 없어 확인이 되 지 않았고, 란이의 마법 공격은 역시 비늘을 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엄청나게 단단한 녀석이네. 수아야 조심하고 여기 있어. 일행들이 위험하면 도와주 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수아를 뒤로 하고, 마르트라에게 달려들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그래도 초환수라는 녀석이 미친 듯이 날뛰다니. 이유라도 말을 하고 날뛰어도 날뛰어야 하는 거 아냐?” 내가 이렇게 소리를 질렀지만 마르트라는 여전히 반응없이 일행들을 공격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나는 쌍환검에 기운을 불어 넣어 녀석의 등을 내리 찍었다. 챙~ 역시나 검기로는 별다른 흔적이 남지 않았다. 미세한 자국만 남은 것이다. “젠장, 정말 웃기는 녀석이네. 공격이 먹혀야 공격을 하지.” 나는 하는 수 없이 검기를 검강으로 바꾸었다. 검강을 쓰는 것이 무리가 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직까지 검강을 써야 할 정도의 인 물을 만난 적이 없었는데… “블링크.” 나는 순간적인 근거리 이동마법으로 마르트라의 머리 쪽으로 이동을 했고 머리 가운 데를 향해 칼을 날렸다. 텅~ 허헉. 검강이 튀어 나왔다. 나는 너무 놀라 녀석이 순간적으로 목을 돌려 아가리를 다무는 순간에 오른 팔뚝을 물리고 말았다. 본능적으로 내뻗은 왼 손의 검에 입 안에 상처를 입은 녀석이 물었던 팔뚝을 놓고 내 가 땅으로 떨어져 내린 것은 순간적인 일이었다. “으아아아악!!” 나는 땅에 떨어져 뒹굴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팔뚝을 부여잡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내 머릿속에는 고통 이외의 것은 들어오지도 않 았다. “으으으 내 파, 팔. 팔.” 나는 땅에 엎드려 팔을 감싸 안고 몸을 웅크리고 공포에 떨었다. 너무나 커다란 고통, 너무나 무서운 느낌. 나는 죽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땅바닥을 뒹구는 나를 끌어안는 포근하고 따뜻한 무엇이 있었다. 나는 고통 속에서도 그 따뜻함에 안도하며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눈에 온통 근심과 아픔으로 가득 눈물을 머금은 수아의 얼굴이 보였다. 수아는 파울로 된 망토를 넓게 펼치고(공작이 깃털을 펼친 것 같다.) 나를 안아 들 고 있었다. 그리고 수아의 손에서 나온 빛이 내 상처를 감싸고 서서히 고통이 줄어드는 것을 느 낄 수 있었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든 나는 정말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법으로, 떨어진 사지도 재생이 가능한 내가 겨우 뱀에게 물린 상처로 땅바닥을 뒹 굴며 고통 속에서 정신을 놓고 발광(?)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하지만 나는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내 몸에 고통을 느껴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온실 속의 화초라고 해야 할까? 내 몸에 그런 상처가 난 적이 없었고, 그런 고통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러니 내 고통을 내가 이길 수가 없는 것이다. 빅의 말이 맞았다. 경험하지 못한 것에는 약해진다는 말… 빅은 이런 것을 미리 내다 본 것일까? 수아는 여전히 위험한 속에서 정신을 놓은 듯한 나를 끌고(가쁜하게 집어 들고) 싸움 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피했다. 내가 빠진 싸움에서 동생들과 지토는 고전하고 있었다. 내가 끼어 있을 때에도 나은 것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점점 수세에 몰리던 동생들은 드디어 상급 정령의 힘을 쓰기 시작했고, 내 몸 에서는 마력이 서서히 빠져 나가시 시작했다. 상급 정령의 힘을 쓰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마르트라를 몰아가는 일행들이었 지만 쉽게 마르트라를 제압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곧 마르트라가 마법을 쓰기 시작하면서 전세는 다시 불리해 졌다. 마르트라의 속성은 아무래도 얼음과 바람인 것 같았다. 숱하게 쏟아지는 얼음 조각들과 바람의 날카로운 공격들은 동생들의 옷에 흔적을 남 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싸움의 여파가 미치지 않는 곳에서 내 마음속의 두려움과 싸우 고 있었다. 다시 상처를 입고 고통을 느끼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하지만 그것은 동생들과 지토가 조금씩 위험에 처한다는 사실 보다 크지는 않았다. 나는 다시 내공을 일으켜 마르트라에게 달려갔다. 죽어라고 공격을 하는 동생들과 지토 때문에 운신이 편하지 않은 마르트라의 옆구리 에 도착한 나는 검강이 깃든 검으로 옆구리를 길게 내 질렀다. 추~아아악. 깨에에에엑!! 아까 머리와는 달리 녀석의 옆구리는 검강에 허무하게 갈라졌고, 처음으로 마르트라 녀석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급속도로 몸의 또아리를 튼 녀석은 눈꺼풀 없는 눈으로 나를 노려 보며 혀를 날름거렸다. 그리고 그 사이에 동생들과 지토가 여유를 찾고, 내 주위로 몰려 들었다. “괜찮은 거야?” “괜찮아요?” “형님?” 다들 내가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내 어깨위로 란이가 날아와 앉았다. 상당히 지친 모양인지 이제는 돋아났던 가시도 거의 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상봉을 기뻐하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마르트라 녀석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공격을 해 온 것이다. 순식간에 덩치를 줄여버린 녀석은 도마뱀인간(리쟈드맨?)의 모습을 하고는 어디서 꺼 낸 것인지 장도를 들고 공격을 해 온 것이다. 그리고 그 공격에는 물리적인 공격과 마법적인 공격이 함께 들어 있었다. 장도를 휘두르는 물리 공격을 따라 도의 괘적에서 엄청난 수의 얼음조각들이 생겨나 사방으로 비산한 것이다. 그리고 내가 녀석의 장도를 막았을 때, 그 얼음조각들은 수아가 급하게 걸어준 방어 막을 무시하고 나와 동생들에게 파고들었다. 그나마 수아가 속도를 늦춘 것이었는지 몸을 뚫고 지나가지는 못했지만 나와 동생들 은 상당수의 얼음조각이 몸속에 박히는 것을 감수해야 했다. “크아악.” 내 입에서 나오는 이 비명을 나도 막고 싶었다. 이성적으로는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느끼는 그 고통은 절대 무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동생들도 비명을 질렀을까? 나는 내 비명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내 몸의 피가 돌아가는 맥박 소리만 크게 들려왔다. 곧 맘맘의 촉수가 뻗어와 몸속을 파고들고 상처 치유에 들어가면서 마취가 되어서인 지 고통이 없어지기는 했지만, 나는 정말로 이런 고통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검을 쥐고 있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고통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데서 오는 두려움. 나는 몸속의 모든 기운을 칼에 집중시키고 마르트라를 밀어 붙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광기에 젖고 있는지도 몰랐다. 두려움에 젖어 이 녀석을 빨리 없애고 싶다는 생각만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을 따지고 싶지 않았다. 내 쌍환검은 쉬지 않고 녀석의 빈틈을 노렸고, 녀석의 장도에서는 점점 빈 틈이 커지 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내 검이 녀석의 장도를 피해 목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역시 순순히 당할 녀석은 아니었는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고, 내 검은 빈 공 간을 가르고 말았다. 그리고 아직도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는 녀석의 행적을 찾아 마법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분명히 블링크 마법과 비슷한 방법인 것 같았고, 나도 녀석의 기척이 느껴지기만 하면 가장 빠르게 발현할 수 있는 마법으로 녀석을 공격했다. 나에게서 쏘아지는 형태의 공격은 블링크 앞에서는 거의 무용지물이다. 하지만 상대 가 위치한 곳에 발현되는 마법은 쓸모가 있다. 특히 내가 즐기는 중압은. 처음에는 내 마법을 잘도 피하던 녀석이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조금씩 마법에 격중 되는 횟수가 늘어났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녀석이 본체의 모습으로 현신을 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본체의 모습이 방어력에 있어서는 월등히 뛰어난 것이었다. 왜 도마뱀인간으로 변신을 했던 것인지 이해가 안가는 상황이었다. 아마도 내 검술이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을 했던 것일까? 그리고 그렇게 본신으로 현신한 녀석에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공격마법 을 쏟아 부었다. 그렇다고 메테오 같은 무식한 것을 상상하지 말아라. 메테오는 말 그대로 운석 소환 인데 그 운석을 우주에서 대기권으로 불러서 내가 원하는 위치에 가져다 놓는 데에만 몇 시간이 걸리고(혹은 몇 십 시간) 그 운석이 떨어져 내리는 데에도 몇 십분은 걸리 는 것이다. 그런 것에 맞아줄 생물은 별로 없다. (느리면 맞는다. 보통 인간은 느린 편에 속한다.) 그건 말 그대로 도시나 성을 날릴 때에 사용할 만한 것일 뿐이다. 그래서 내가 주로 사용한 것은 운석 소환이 아니라 암석 소환이었다. 일정 높이에 무작위로 암석을 소환하고 그 암석들에 화염 마법을 걸어 불덩어리로 만 드는 것이다. 그리 시간이 걸리지도 않고 상당한 파괴력을 지니기 때문에 저렇게 덩치가 큰 녀석에 게는 그런대로 효과가 있었다. 뭐 그렇다고 그것들을 다 맞아주는 녀석도 아니지만 말이다.(대부분의 암석들은 녀석 의 실드와 마법에 허공에서 날아가 버렸고, 몇몇 개만 녀석의 몸뚱이에 상처를 주고 있었다.) 그리고 간간히 그 사이를 비집고 날아가는 것은 뇌전이나 돌기둥 같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나의 이런 공격은 전적으로 두려움에 젖은 광란에 지나지 않았다. 이성적인 판단으로 녀석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저 죽어라 죽어라 하면서 날리는 마법들이었다. 광기. 두려움은 사람을 광기에 젖게 하기도 한다. - 그만해라 인간… 나는 마르트라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쑥대밭이 되었다는 말이 맞는 것일까? 이런 걸 두고 말하는 것이…. 마르트라의 둥지는 그야말로 화산폭발과 화재에 지진, 그리고 삼풍백화점의 현장이 겹쳐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돌덩이들이 여기저기서 채 식지 않은 열기로 메케한 연기를 뿜어내고, 곳곳의 땅이 움푹움푹 파인 속에 마르트라는 긴 몸뚱이를 가누지 못하고 비틀린 모습으로 땅에 널 려(?)있었다. - 완전히 미쳤군. 미친 인간이 가끔 나에게 곡괭이를 들고 달려들곤 했지만, 그것과 는 많이 다르군. 힘이 있으니 이렇게도 되는구나. 여전히 마르트라의 말소리가 귀에 울리는 것으로 보아서는 죽지 않은 것 같은데, 마 르트라의 겉모습은 절대 살아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물론 거죽이 워낙 질겨서 그런 것인지 잘 살펴보면 외상은 별로 없어 보이기는 했지 만, 일단 하고 있는 꼴이 죽은 놈 같았기 때문이다. 뱀은 절대로 혀를 빼어 물지 않는다. 뱀의 혀가 입 밖으로 나와서 늘어진 것은 뱀이 죽어서나 하는 모습인데, 마르트라는 그런 꼴로 땅에 대가리를 박고 있는 것이다. “오빠….” 수아가 다가와 내 팔을 살며시 잡았다. 뭐냐? 왜 그렇게 이상한 눈빛으로(약간의 두려움과 걱정, 그리고 서먹함.) 나를 보 는 거야? 그러고 보니 다른 녀석들도 비슷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잖아? “으음. 수아? 왜 그래?” 나라고 내가 잠시 정신이 나갔다는 것을 모르겠는가만, 그렇다고 그래 나 미쳤었나 보다고 할 수는.. “이제 괜찮은 거지요? 네?” 수아의 눈에서 눈물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다. “그럼, 물론이지. 괜찮아. 걱정하지 말아라. 오빠가 잠시 정신이 나갔었나 보다.” 그래 수아가 이렇게 걱정을 하는데 내가 미쳤다고 하는 것이 무에 그리 대수로운 일 일까. 흠흠. 다른 동생들과 지토도 가까이 다가와서 한마디씩 했다. “이제 좀 나아졌나 보네?” “오빠, 괜찮은 거지?” “형님, 이런 모습은 처음입니다. 놀랐습니다.” “큼, 미친놈.” 걱정스러운 눈빛과 말들이 상당히 부담스럽다. 하지만 나는 마지막 지토의 말에 잠시 한 번만 더 미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기 도 했다. 대충 동생들과 지토의 상태를 살피고(뭐 별로 다친 곳은 없었다. 좀 긁힌 상처가 있 기는 하지만, 정령체는 피를 흘리지는 않는다. 상처에서 그 졍령력이 빠져 나오기는 하지만 말이다.) 서로를 걱정하는 시간이 지나고 우리들의 관심이 마르트라에게 돌려 질 때, 다시 녀석의 말소리가 들렸다. - 대충 정리가 된 것인가? 그럼 나와 이야기나 좀 나누지… “이야기? 웃기는 소리하고 있네. 니가 이야기를 나누지… 뭐 이런 소리를 할 입장이 냐? 처음에 이야기를 나누자고 할 때, 죽어라 공격을 한 녀석이…” 나는 별로 마르트라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 사실 나도 별로 변명을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상황을 제대로 알고 일을 진행해 도 해야 하지 않겠나? “상황? 뭔 상황? 응? 지금 내 눈에 상황이 보이게 생겼어? 내가 동생들 앞에서 이 런 꼴을 보이고도 제 정신을 차리고 있겠냐고?” 내 목소리가 커지고 흥분하는 모습에 수아가 슬며시 내 팔을 잡는다. 내가 또 아까처럼 미칠까봐 그러는 것일까? - 미안하다. 하지만 그건 내 본의가 아니었다. 내가 자세한 이야기를 할테니 잠시만 내 이야기를 들어라. 그리고 마르트라는 예의 그 농사꾼 아저씨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잠시만 내 이야기를 들어봐라. 환수란 것이 무엇이라 생각을 하나? 환수란 신계에 서 살아가는 여러 동물들을 이야기하는 것이야. 사람이 육식 동물을 이기지 못하는 것 처럼 가끔 신계의 선인仙人들을 능가하는 환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선인들에 미치지 못하는 동물들이지. 여기서 문제는 환수들이 동물들이라는 것이 문제야. 아무 리 도를 닦고 선행을 쌓아 신계에 든 환수라 할지라도 동물적인 본성이 전혀 없는 경 우는 드물다는 것이지. 그래 그것이 문제야.” 다시 마르트라의 말을 정리해 보자. 이 빌어먹을 파란 뱀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자기도 환수다. 그런데 이 인간계로 흘러온 다음, 처음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그 저 인간들의 방해를 받지 않을 영역을 확보하고 다시 도를 닦아 신계의 문이 열리기 를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했고, 그건 불가능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계에 들기 위해 도를 닦던 마르트라는 자신에게 문제가 생긴 것을 알게 되 었다. 그 예전에도 도를 닦았지만 그 때는 곁에 함께 도를 닦던 마누라가 있었던 것이다. 다시 이야기하면 뱀이란 동물이 본능적으로 가지는 관능과 욕념을 해결할 수 있는 대 상이 곁에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다. 그 혼자만이 이 땅에 버려진 상태여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솟구치는 본능을 제 어할 길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 때부터 이 땅에 마르트라라는 이름의 초환수가 만행을 저지르는 일이 벌어지게 되 었다. 그나마 이성을 회복한 상태에서는 자신의 행동을 자제했지만, 가끔 본능이 이성을 마 비시키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그 사이에 파괴본능과 살의가 자신을 지배하고, 때문에 인간들 의 마을을 불태우고 날려 버리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로서도 뾰족한 방법 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도 도를 닦은 환수라는 이유로 본능이 이성을 잠식하는 것이 흔하지 않은 일이기 는 했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주기성을 지니고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 주기가 점 점 빨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10년 혹은 20년의 주기를 지녔다면 지금은 거의 3년 정도의 주기를 지니게 되었고, 한 번 발작을 하게 되면 이성을 찾기까지의 시간도 오래 걸리게 되었다고… 그리고 처음에 이야기 했던 대로 이성을 잃고 반나절이 지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것이란다. 오늘 싸움에서도 그나마 본능만을 지니고 이성이 없이 싸웠고, 또 잠제의식의 이성 이 공격적인 성향을 말리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이 싸움을 유리하게 이끌어 갈 수 있 었던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들이 쉽게 자신을 어쩌지 못했을 것이라는 이야기 도 끝에 덧붙였다. 언제나 이것들(환수)은 지고 나면 헛소리를 붙이는 것이 특기인 모양이다. “흐휴~~!! 결국 이 모든 것이 겨우 뱀 한 마리의 성욕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말이 야?” “정말 어처구니가 없네.” “크흠. 쩝.” 한동안 우리 일행이 말을 잇지 못한 것은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을 것이다. 뱀 한 마리가 짝이 없다고 난리부르스를….(난리부르스는 지랄발광이라는 말의 현대 판 번역 속어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거의 몇 백 년 동안 주위 나라에서 전전긍긍 했다는 말이다. 그럼 방법은 간단하네. 짝을 찾아주면 되는 것이지. “그럼 화이트스네이크가 저 모양이 된 것도 다 이성을 잃고 그 뭐냐 그래서 그렇게 되었다는 이야기냐?” 내가 농사꾼을 보며 비꼬듯 물어 보자 녀석이 얼굴빛도 변하지 않고 대꾸를 한다. “그렇다. 내가 이성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야 저런 하찮은 것에게 눈길이라도 줄 일 이 없지만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 일어난 일이 그렇게 된 것이다.” 저 놈의 낯짝을 그냥… 얼굴 가죽도 두꺼워요. “그럼, 너에게 짝을 찾아 주면 이제 이런 일은 없겠군?” 내가 그렇게 물었을 때, 녀석의 눈빛이 살아난 것 같은 느낌이(농사꾼 말고 그 뒤에 혀를 빼고 널부러져 있는 녀석.) 든 것은 착각일까? “물론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나도 차분히 도를 닦으며 다시 신계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면 될 것이고...” 녀석의 말소리에 흥분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래? 그런데 지금 장거리 순간이동이 가능하냐?” 내가 물어보자 녀석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으로서는 조금 어려울 것 같다. 상당히 많이 망가진 상태여서...” “그럼 본체로 돌아가라. 내가 널 데리고 이동을 하지. 으휴~~ 저 덩치를 데리고 이 동이라니... 요즘은 일복만 터지는군.” 마르트라가 본체로 돌아가고 나는 동생들에게 주위를 잠시만 기다리면서 식사 준비 나 해 두라고 하고 마르트라를 끌고 빅의 동굴로 이동을 했다. “빅, 빅.” - 어서와라. 들어와. 그 녀석은 거기 두고. 내가 빅의 동굴 앞에 도착했을 때, 빅은 미리 예상을 한 것처럼 나를 반겼다. 내가 안으로 들어갔을 때, 빅은 또 다른 모습이 되어 있었다. - 어서와. 이제 난 신계로 갈 시간이 거의 되었어. 내일 오라고 했더니 일찍 왔네? 조금 예상이 어긋나 버렸구나. 빅은 예저에 비해 몸의 크기가 반의 반 정도로 작아져 있었고(30미터 정도 되어 보였 다.) 하얀 몸체에서는 빛이 나고 있었다. “응? 날개나 팔 다리 같은 것은 없는 거야? 예전에는 이무기가 용이 되어서 하늘에 오른다고 했는데... 그럴 때는 뱀처럼 생긴 이무기가 용이 된다고..” 나는 정말 변해버린 빅의 모습에서 그런 옛 이야기를 떠올리고 여의주나 다리, 뿔 같 은 것을 찾았다. - 나는 그런 것은 없어. 원한다면 그런 모습이 될 수는 있지만... 아마도 예전에 나 처럼 신계에 들었던 많은 뱀들이 그런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보였던 것은 사람들의 기 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은 마음에 그렇게 보이도록 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실제로 비슷하게 생긴 환수도 있긴 하지... 도롱뇽이 환수가 되면 그런 모양이 되기도 하지. 도롱뇽이라 ... 그렇기도 하겠지만 용에 대한 신비감이 떨어지는 느낌이다. “하지만 신계에 있는 용들에 대한 이야기는 참 많은데...” - 그건 또, 다른 종류의 환수야. 인간계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신계에서 태어나 는 종들이지. 그건 달라. 생각을 해봐. 도를 닦거나 영성이 생겨서 영물이 되는 것들 에는 수많은 것들이 있어. 지네나 쥐, 너구리, 곰, 등등 그런데 왜 뱀만 용이 되고 다 른 것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 것일까? 사람들이 인세에 나온 용을 보고 뱀과 닮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을 한 것뿐이지. “그런 것인가?” - 그건 그렇고, 저 밖에 있는 녀석은 정말 미련한 녀석이로군. 아직도 그 본성을 잊 지 못해서 저 모양이 되다니... 빅이 마르트라에 대해서 말을 꺼냈다. “뭐야? 알고 있는 거야? 어떻게...” - 원래 알고 있던 것은 아니야. 신계에 들기 바로 전이라 신력이 세어져서 약간의 예 지력과 혜안이 생긴 탓이라고 할까? 전에 루탄이 다시 여기 내일 다시 오라고 했던 것 도 사실은 예지력으로 한 말인데 하루가 틀려 버린 거야. 그리고 저 녀석을 보니 상 황 이 떠오른 것이고. “대, 대단하군. 실제로 환수란 엄청난 존재인가 보네?” 나는 정말로 빅의 능력에 감탄했다. - 그렇지도 않아. 사실 사람들마다 특기가 다른 것처럼, 환수의 능력도 다 다른 것이 지. 이상하게 나에게는 이런 방면에 조금 능력이 생긴 것뿐이야. “응? 그렇구나. 그래도 정말 대단하군. 부럽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이에 마르트라는 밖에서 어느 정도 몸을 추스린 것인 지 꼼지락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데 빅. 마르트라는 어쩌면 좋지? 여기 혹시 마르트라의 짝이 될 만한 화이트스 네이크 없을까? 전에 말할 때, 영성을 지닌 다른 녀석도 있는 것처럼 이야기 했었잖 아. 사육용으로 키울 뱀들 주면서 말이야. 아직 영성을 지니지 않은 것들이라 괜찮을 거라고.... 그러니까 영성을 지닌 다른 녀석도 있을 것 같은데...” -그래 있어. 충분히 짝이 될 수 있는 녀석이 하나 있지. 그렇지 않아도 그 녀석, 아 무래도 본능적인 욕구를 끊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것을 내가 다독이느라 힘들었는데 이 제 내가 없으니 어쩌나 싶었는데 잘 되었네. 저 녀석이랑 같이 도움을 주고받으면 될 것 같군. 설마 그 다독여 준다는 것이 그렇고 그런 것은 아니겠지.... “그래? 그것 참 다행이네. 야! 마르트라 이리 들어와 봐.” 내가 밖으로 소리를 지르자 마르트라가 그 날렵한 몸을 유연하게 움직여 동굴 안으 로 들어왔다. 그런데 마르트라는 빅의 앞에서 기를 펴지 못하고 있었다. “뭐야? 마르트라가 신계에서 선배 아닌가? 그런데 왜 이렇게 기가 죽은 거야?” - 그건, 저 분의 신력이 나를 월등히 능가하는 까닭에... 신계에선 신력으로 윗사람 을 가리는 편이라서... - 예전에는 상당한 신력을 지녔겠지만 인간계에 오래 머물고, 수행을 못해서 신력이 많이 깎인 탓이지, 하지만 곧 신력을 회복하고 신계로 들게 될거야. 마르트라의 대답과 빅의 보충이었다. “그럼 이제는 해결이 되는 것이지? 마르트라가 다시 인간세상에 나와서 해꼬지를 하 는 경우는 없겠지?” 내가 그렇게 물어보자 - 물론이야 루탄. 걱정하지 말아. 여기에서 마르트라가 밖으로 나갈 일은 없을 거 야. 빅이 선뜻 대답을 해 주었다. “그래? 그럼 난 이만 가 봐도 되는 거지? 저 녀석 별로 보고 싶지도 않아. 끔찍했다 구.” 내가 그렇게 진저리를 치자 마르트라가 고개를 땅에 깔았다. - 얻어터진 것은 난데... 뭐라고 궁시렁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 그래 루탄, 대신에 내가 내일 밤에 찾아 가지. 마지막으로 인사는 해야 할 테니 말 이야. 빅의 말이었다. “알았어. 그럼 내일 봐. 그리고 마르트라 넌 많이 봐주는 거야. 이거 그냥 귀속을 시켜서 부려먹을까? 쩝.” 내 말에 마르트라는 움찔하고는 잠시 들었던 고개를 땅에 박았다. - 그럴 필요는 없을 거야. 뭔가 필요하면 불러서 부려도 될 거야. 자주는 곤란하겠지 만 가끔은 그렇게 인간들에게 진 죄를 씻는 것도 좋겠지. 빅이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도 닦는다고 동굴에 박힌 뱀을 불러서 일을 시키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었다. “뭐 나중에 필요하면 찾아오지. 그럼 나중에 보자. 마.르.트.라.” 크흐흐. 왠지 놀리는 재미가 있는 녀석이다. 들었던 고개를 땅에 박는 모습이 귀엽군.(?) 나는 다시 동생들이 기다리는 마르트라의 둥지로 돌아와 빅의 동굴에서 있었던 이야 기를 해 주었다. “오빠, 그럼 이제 문제는 깨끗이 해결이 된 거네? 그럼 빨리 가서 재상에게 돈 달라 고 해요? 네?” 풍아가 이야기 끝에 한 말이었다. “으응, 그래. 저기 광아가 가서 재상에게 용병 고용대금 내 놓으라고 해라. 이상하 게 재상하고 내가 이야기를 하면 손해를 보는 것 같아서 말이다. 네가 심부름 좀 해 라.” “알았습니다. 형님.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광아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빛의 정령이니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것일까? 하지만 지금은 물질계의 옷을 입은 상 태로 움직였으니까 그렇게는 안 되는 것 아닌가? 에구 에구 모르겠다 오늘은 만사 다 귀찮다. 몸도 피곤하고. 나는 광아를 기다려 심부름을 무사히 마친 광아와 함께 대충 식사를 하고는 마차 안 으로 기어들어 갔다. 광아가 대금을 다 받아 온 것은 아니었지만 언제 와서 받아가라는 약속을 받았다고 했으니 별 문제는 없을 것이었다.(내년 봄에 600억을 주겠다고 했단다.) 점심 해가 기우는 것을 보며 마차안으로 기어들어간 나는 동생들과 지토에게 혹시라 도 마르트라가 숨겨놓은 물건들이 없는지 찾아보라는 말을 하고는 침대에 누워 버렸 다. 사실은 동생들과 지토가 곁에 붙어서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것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다음날 아침까지 자고 깨고를 반복하며 침대 속에서 뒹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 수록 마르트라와 싸우면서 비명을 지르고 두려움에 젖어 미친 듯이 행동 했던 것이 창피스러워서 동생들과 지토의 얼굴을 보기가 어려웠던 탓이다. 하지만 어쩌랴. 그렇다고 안 보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침에 동생들과 지토가 밖으로 나가서 씻고 식사를 준비하고 있을 때, 나는 또 다 시 마차 분을 빼꼼히 열고 밖으로 나갔다. 전번에 유소 만나면서 펑펑 울었을 때도 이런 느낌으로 마차 문을 열고 나갔던 것 같 다. 하지만 동생들과 지토는 “어? 일어났네?” “오빠. 식사 준비 다 됐어요. 안 그래도 깨우려던 참인데...” “늦잠을 주무셨군요. 형님.” 이런 식이었다. 아무 거리낌도 이상한 태도도 보이지 않는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나를 대하는 것이었 다. 어째 가슴이 뭉클하다. 그러고 보면 이제 이들은 완전히 사람 같은 존재가 되어가는 것인가 보다. “어! 그래. 배고프다. 수아야 아침 준비 다 된 거지?” 나는 어색함을 떨치며 타자로 가 앉았고, 금세 준비된 아침 식탁에서는 마르트라 녀 석이 둥지에 모아 놓은 것이 없다는 통탄스러운 결과를 들어야 했다. 그 오랜 시간을 살았으면, 뭐든 좀 훔치든 빼앗든 해서 모아두고 해야 하는 것이 아 닌가? 그런데 이 놈은 그런 것은 하나도 없는 모양이었다. 겨우 건진 것이 한 쪽 벽 속에 들어있던 장도였다. 그거 도마뱀인간으로 변했을 때, 사용하던 바로 그 장도 말이다. 하지만 그건 화아도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서(너무 길어서 거추장스럽단다.) 쓸 사람도 없었다. 결국 그 장도는 내 창고 안에 넣어 두게 되었다. 지심목검 아래에 나란히 걸어두는 기분으로 창고에 넣어 버렸다. “자, 오늘은 천천히 신성 제국 쪽으로 출발을 해 보자.” 나는 식사가 끝나고 이렇게 제안을 했고, 우리들은 다시 방향을 북쪽으로 잡고 길을 떠났다. 그 날 밤, 동생들과 지토 그리고 나는 드넓은 평원 가운데 마차를 세우고, 강에서 바 라보는 것과는 또 다른 밤하늘을 감상하고 있었다. 한 쪽에는 그 예전 하늘에 떠 있던 달과는 많이 다른 달 하나가 떠서 자태를(문제 다. 쥐가 파먹은 꼴은 아니지만 찌그러져 있는 달이다.) 빛내고 있었다. 참고로 이 달은 길죽하고 갸름둥글하게 생긴 모습이라 일 년에 단 한번 정확한 둥근 모양이 되기도 했지만 그것도 재수 없으면 못 보는 때도 있었다.(그 둥글게 되는 순 간 달이 안 떠 있을 시간이면 못 본다.) 그리고 그 밤하늘을 배경으로 멋지게 빅이 나타났다. 머리에서 꼬리까지 30미터 정도, 몸체는 밤에 보니 확실히 빛을 내고 있었다. 또아리를 풀고 밤하늘을 날아 온 빅의 모습은 공중에서 몸뚱이를 비틀 때 마다 은가 루라도 떨어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우화! 예쁘다. 빅 멋있어요.” 수아가 감탄을 터뜨렸다. “정말 예쁘네.” 뾰로롱 뾰뵤오롱. 다들 감탄을 터뜨릴 만한 모습이었다. - 이제 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루탄. 이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덕분에 내가 살아서 신계를 밟아 환수가 되게 되었다. 너에게 감사한다. 빅은 동생들과 란의 감탄을 가뿐하게 무시하고 나에게 말을 꺼냈다. “그런 소리 말아요. 아무튼 다시 한 번 축하해요. 신계에 가면 잘 지내요.” - 이제와서 신계에 드는 순간에 너를 만난 것도 인연의 줄기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 리고 언젠가는 다시 만나는 날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아직은 그 때를 짐작 치 못하지만.... 그럼 잘 있어라 루탄. 좋은 인연이다. 우리는... 빅의 몸은 천천히 허공중에 녹아들고 있었다. - 루탄, 곧 이 대지에 시련이 있을 것이다. 많은 피가 흐를 것이고, 죽음이 있을 것 이다. 그 때에 네가 무엇을 할지는 네가 정할 문제겠지만... 부디... 하지 말아라... 인간...싸... 개.... 빅의 말은 채 끝을 맺지 못하고 끝이 났다. 아마도 빅은 내가 자신의 말을 모두 듣지 못하게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리라. 흔히 천기누설이라 하니, 조심을 했겠지. 그래도 무언가 말하고 싶었다는 것이 중요할 것 이 다. 나를 배려하려 했다는 것이. 하지만 대지에 있을 시련이란... 아무튼 앞으로 무언가 큰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이겠 지. 그런데 빅의 시간개념으로 곧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일까? 전에 몇 개월만에 만나고는 오랜만은 아니라고 했었는데... 알 수 없는 일이군. 쩝. “뭐야? 뭐가 이래? 지 할말만 하고 사라져 버리고, 우린 아는 척도 않고... 쳇 웃기 지도 않는 배암 따위가...” 풍아는 빅이 무시했다고 화가 난 모양이었다. “하하 풍아 빅이 시간이 없었던 모양이지. 봐라 지금도 채 말도 다 못하고 사라져 버렸잖니.” 나는 풍아를 달래며 빅이 사라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날려 다닐 것 같은 별들과 바람에 흔들리는 달빛이 내 눈에 들었다. -레고리오 성사제와 여행을... - 우리들은 지금 그란드 왕국에서 신성제국으로 가는 중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중앙의 한타 왕국을 제외하고 다른 나라들은 그 왕래가 그리 용 이하지 않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일단 누웬에서 암흑제국은 협곡의 다리와 그 이후로 이어지는 골짜기가 있었고, 암흑 제국에서 그란드 왕국 사이에는 커다란 강이 막혀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란드와 신 성제국 사이에는 엄청난 산이 가로 막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전혀 길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랜 시간동안 사람들이 지나다니며(보통은 상인들이었을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서 는 어떤 역경도 넘어가는 것이 상인이니...) 만들어진 길이 있었다. 겨우 마차 하나가 지나갈 정도의 길이었고, 산으로 올라 갈수록 가파른 산기슭의 옆 구리를 따라서 길을 만들어 놓았다. 그 위험한 길, 그러니까 한 쪽으로 보면 까마득히 떨어져 내릴 것 같은 낭떠러지가 보이는 그런 길을 가는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우리 일행만 있는 것은 아니고, 우리 앞에 상인들의 짐수레가 함 께 가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 우리가 이 길을 들어섰을 때는 아무도 없어서 그저 무료하게 길을 따라 갔지 만, 산을 오르기 시작해서 하루가 저물 무렵에 우리들은 길에서 야영을 준비하는 상 인 일행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지나치려는 우리들을 상인들이 막았다. 그것도 완전히 죽일 놈을 쳐다보는 눈빛으로 막아섰던 것이다. 영문을 몰랐던 우리들은 당황했지만 그 이유를 듣고 나니 그럴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어 정중히 사과하고 무지에 대한 대가로 창고에서 작은 술통 하나와 안주를 꺼내야 했다.(그들이 원해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입으로만 미안하다고 할 문제가 아닌 것 같 아서....) 그들의 말에 따르면 이 길에서는 절대 상대를 추월하는 것은 용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대쪽에서 오는 사람과 엇갈리는 것 이외에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앞서 가는 사 람을 추월하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예전에 이 좁은 길을 다니며 장사를 하던 자들이, 제대로 만들어지 지도 않은 이 좁은 길에서 먼저가려고 다투다가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사고가 잦았다 는 것이다. 그런 일이 오래도록 계속되면서 이 길에서 상대를 추월하려는 것은 살의를 가진 것 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상인들이 갖게 된 것이고, 어느 틈에 이 길에는 추월 할 수 없는 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그 일로 해서 우리들은 상인들과 친해졌고(순박한 사람들이었다. 술통 하나 에 넉넉한 웃음을 찾았으니 말이다.) 그들의 뒤를 따라 산길을 넘어가는 중이었다. “음? 오빠. 상인들이 멈추었어요.” 옆에 있던 수아가 말했지만 그것은 왜 그럴까를 묻는 것이지 함께 눈뜨고 보고 있는 나에게 그걸 알리기 위한 것은 아니다. “저 쪽에 사람들이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려는 것 같네. 여기와 저기 사이에 내려오 는 사람들이 없고, 중간에 교차할 수 있는 장소가 있으니까 곧 출발을 하겠지.” “응. 그렇겠네요.” 무슨 소리냐 하면 이런 것이다. 길이 워낙 좁다 보니 마주 오는 사람들의 수레와 엇갈려 가는 것에 어려움이 있었 다. 그래서 길의 폭이 좁은 곳에서는 이 쪽의 능선에서 저 쪽 능선까지 이르는 길이 보이 는 지점에서 중간에 행렬이 있는지 확인을 하고 출발을 하는 것이다. 만약 그 사이에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이 교차장(길을 넓혀서 마차와 말들이 쉽게 지 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곳)을 지나지 않았으면 이쪽에서 간다는 신호를 하고 출 발을 해서 그들과 교차장에서 엇갈리게 되고(먼저 도착해도 기다려야 한다.) 그들이 교차장을 지났으면 이쪽 사람들이 교차장에서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런 자리는 언제나 넓게 만들어져 있었다. “이제 출발을 하네요. 이번에는 저 쪽에서 오는 사람들이 없어서 빨리 갈 수 있겠네 요.” 수아의 말에는 얼마 전의 상황에 대한 불만이 들어있었다. 그건 지금과 같은 상황이었는데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 행렬이 무척 느리고 수레의 수도 많았기 때문에 꽤나 오래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마주 오는 사람들이 없어서 상인들은 서둘러 수레를 출발시켰다. 이런 식으로 이 길을 가야 하기 때문에 보통 길을 가는 것 보다는 느리고 짜증스러 운 면이 있었지만, 어떻게 보면 낭만이 넘치는 길이기도 했다. 이 길에서는 힘이 있다고 사람들을 해치고 지나가려는 자들은 없었으니 말이다. 우리 일행들이 가운데 있는 교차장을 지나서 다시 길을 재촉하고 있을 때, 앞쪽에서 행렬이 나타났다. 저들은 저 곳에서 우리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우리가 이미 중간 교차장을 지나온 상태였기 때문에... “어머, 오빠, 저 사람들 그냥 마차를 몰아오고 있는데? 어쩌려는 거지? 설마?” 나는 수아의 말을 들으면서 마주 오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위기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위기감은 현실이 되었다. 마차를 호위하듯 앞쪽에서 달려오는 네 마리의 말에 탄 인물들 중에 둘은 칼을 빼들 고 달려오고 있었고, 나머지 둘의 모습은 마법을 준비하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미친놈들, 저거 그리스 마법이야. 저 놈들이 준비하고 있는 마법.” 그리스는 말 그대로 지면과의 마찰계수를 엄청나게 떨어뜨리는 마법이다. 이런 곳에 서는 그냥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마법인 것이다. 그리 써클이 높은 것은 아 니지만 이런 경우에는 상당한 효과가 있을 것이었다. 나는 서둘러서 상인들의 앞으로 몸을 날렸다. 벌써 상인들은 이 웃기지도 않는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 쪽 마법사들이 마법을 쓰지 못하도록 주위의 마나를 동결시켰다. 급하게 만든 것이라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녀석들의 시도를 무산시키기에는 충분했 고, 녀석들의 마법 캐스팅이 무위로 돌아가는 즉시 나는 다시 결계를 보강했다. 그리고 약한 검기로 우리 일행과 그들 사이에 폭발을 일으켰다. 파과광!! 히히이이힝!! 갑작스런 상황에 마주오던 녀석들은 말을 멈추었고, 뒤를 따르던 마차도 급정거를 해 야 했다. 그 사이에 화아와 광아 풍아가 내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우리 마차 옆으로는 걷는 것이 위험해서 뒤를 따르고 있었는데, 상황을 알고 달려 온 모양이었다. 아마도 말과 마차는 지토와 수아가 돌보고 있을 터였다. 상황이 자신들이 의도한 대로 되지 않자 저쪽 녀석들은 잠시 웅성거리다가 다시 이 쪽을 향한 공격을 시도했다. “저거? 내참. 죽겠네.” 화아가 상대방이 하는 짓을 보더니 실소를 터뜨렸다. “저거 뭐야? 내가 보기에는 불의 중급 정령 샐리스트 같은데?” 내가 화아를 보고 말하자 화아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보다 더한 것은 그 정령을 불러 낸 정령사의 모습이었다. 자신이 불러낸 정령이 전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당황하지 않으 면 이상한 것이겠지. 정령을 불러 낸 녀석은 아까 마법을 쓰려던 녀석 중에 한 녀석이었는데, 아마도 마력 이 봉쇄당하자 정령을 불러 낸 모양이었다. 이 경우에는 자기 몸에 있는 마력을 쓰니까 대기중의 마력이 봉쇄당했다 하더라도 약 간 무리한다면 정령을 불러 낼 수는 있었을 것이다. 결국은 간만에 모습을 드러낸(우리 일행이 정령을 만난 적이 없다.) 샐리스트는 화아 가 은근히 노려보자 고개를 땅에 박아 버렸다.(불덩어리 강아지.) “자, 이제 대화를 시작해 볼까? 먼저 이 쪽을 공격하고 죽이려고 했으니까 어차피 나도 너희들을 곱게 보낼 생각은 없어. 하지만 상황을 잘 보고 빌어 보라구. 혹시 아 나? 살려 줄지?” 내가 그렇게 말하며 앞으로 나서자, 말을 타고 선두에서 달려오던 녀석이(흔한 모습 의 검잡이, 기사라고 할까?) 내 말을 받았다. “미친놈, 감히 우리 앞을 막고...” 하지만 녀석의 말은 곧 멈추어 졌다. “그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 마차에서 들려온 말이었다. 상당히 늙은 목소리였고, 또한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침침함이 깔린 목소리가 공기를 타고 전달되었다.(꼭 공기가 물인 듯이 소리가 출렁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는 나도 모르겠군. 모두 절벽으로 밀어 드릴 테니 알아서 살아나시라고 하면 가장 좋을 것 같기도 한데...” 그들의 인원은 열명을 겨우 넘기는 인원이었다. 말을 타고 마차를 호위하는 인물이 앞뒤로 넷, 그리고 마차 위에 마부 포함 둘, 마 차 안에는 최소 한 명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게 가장 공평하기는 하겠지만, 이 마차에 타고 있는 사람 중에는 그런 대접을 받 는 것이 억울한 사람도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 모양이군.” 마차 안에서 들린 그 소리는 자신들이 인질을 데리고 혹은 납치를 한 상태임을 나타 내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 그건 내가 알바가 아니야. 마차 안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만약 그렇다 고 해도, 여기 있는 이 사람들 전부와 그 마차 안의 누군가와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지. 사람 중에 누가 누구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은 객관적으로는 절 대로 내릴 수 없는 판단이지.” 일단은 용서가 안 된다는 말이지만 나와 이야기라도 계속하려면 인질의 모습을 보여 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차의 문이 열리면서 한 인물이 고개를 내 밀었다. 15 - 16세 정도의 사내아이였다. 광아의 동생인가? 금발에 미소년이었고 하얀색의 로브를 입고 있었다. “천교의 사제다.” 등 뒤에서 상인이 낮은 목소리로 부르짖듯 내 뱉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년은 천천히 마차 밖으로 걸어 나와 우리 일행에게 다가왔다. “이 아이가 바로 우리의 인질이지. 우리의 목표이기도 하고. 일단 생포가 목표이지 만 최악의 경우에는 죽이는 것도 어쩔 수 없이 고려해야 하는 존재라서 말이야.” 공기를 울리는 듯한 목소리. 물속을 흐르는 듯한 목소리는 그 소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아이를 어떻게 한 건가? 아니지 지금 말하는 자가 이 아이 자신일 수도 있지. 나 를 속이려는 것일 수도 있어.” 나는 상대가 들을 수 있도록 중얼거렸다. “이 아이는 지금 정신을 제압당한 상태다. 아니 신성력을 제압당했다고 봐야겠지. 천교의 녀석들이 쓰는 힘은 짜증나는 것이라 말이야. 그리고 나선 내가 잠시 이 몸을 거두고 있는 것이지. 물론 잠정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녀석은 내가 소년으로 가장했다고 생각하고 공격을 할 것이라 생각했는지 제법 자세 하게 주절거렸다. “좋아, 믿어주지. 그래서? 이제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는 것인가?” 나는 녀석이 무엇을 원하는지 물었다. “별 것 아니다. 이 아이와 저기 저 둘을 보내주면 되는 것이다. 말을 타고 갈 것이 니 너희들을 지나가는 것에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남는 것들은 네가 하고 싶 은 데로 해도 된다.” 둘은 마법을 쓰던 인물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 말은 나머지는 죽이든 살리든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나머지 인물들은 조금 착잡한 표정이 되었다가는 다시 평온한 얼굴이 되었다. “대단하군. 부하들이 아주 훈련이 잘 된 모양이군. 그렇게 나는 도망갈 테니 너는 죽어라 하는 말을 듣고도 동요가 없으니 말이야. 하지만 나는 별로 너를 보내주고 싶 은 생각이 없는데?” 나는 다시 소년을 보며 이야기했다. “바보 같은 선택이다. 어차피 여기 인물들이 모두 죽어도 나에게 오는 피해란 없 다. 이 애가 죽는다면 나는 절반의 성공을 하는 것이지. 하지만 너는 아주 중요한 사 람 하나를 죽이게 되는 것이다. 이 아이는 차기 천교의 교황이 될 수도 있는 아이니 까 말이야.” “천교의 교황?”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그럼 저 아이는 다른 나라로 치면 태자에 해당하는 아이라는 말이 된다. 그런데 어떻게 저런 아이가 이렇게 외진 곳까지 끌러 온 것일까? “아직 모르는 모양이군. 사람이란 다 똑 같은 것이지. 지위로 사람을 구분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말과 함께 행동에 들어갔다. 검을 들고 녀석들에게 달려 간 것이다. 물론 화아 광아 풍아도 날렵하게 몸을 날렸다. 그리고 광아는 순식간에 마차 뒤로 떨어져 내리며 방심한 녀석들을 처리하고 있었 고, 풍아와 화아가 앞쪽의 칼을 든 두 인물을 상대했다. 하지만 마법사나 정령마법사 쪽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마법은 이미 봉쇄된 상황이었고, 정령들 중에서 자신들을 어찌할 정령을 없을 터였 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소년에게 달려들어 소년의 손목을 잡았다. 하지만 소년은 전혀 반항이 없었다. “결국 이 아이를 죽이려는 것이군. 나로서는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이 녀석이 죽 어 없어지는 것도 괜찮은 일이지. 크흐흐흐.”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소년의 머리 위에서부터 검은 물감이 번지듯이 몸이 검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천히 소년의 눈이 감겼다. “이런, 이게 무슨 일이야. 야! 정신 차려. 야 임마. 일어나봐.” 나는 소년의 뺨을 때려 보았지만 소년은 정신을 차리지 않았다. 그런데 “어쩌면 좋아. 천교의 사제님께서 이렇게 ...” 하며 한 상인이 뛰어나와 소년의 얼굴을 쓸며 안타까워하는 순간이었다. 그 상인의 손이 닿은 소년의 얼굴이 잠시 회백색으로 검은색이 엷어지는 것이었다. 상인도 그것을 보았는지 다시 한 번 손으로 소년의 얼굴을 쓰다듬었고, 소년의 얼굴 은 상인의 손길을 따라서 회백색과 검은 색을 교차했다. 하지만 그 동안에도 소년은 빠르게 검은 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이제는 손과 발의 얼마간을 남기고는 전부 검은색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상인은 품속에서 십자가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소년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소년의 팔을 타고 내려오던 검은 색의 흐름이 팔뚝 중앙을 경계로 더 이상 내려오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 이보게들 혹시 천교의 성물을 지닌 사람 있으면 이리 들고 오게 전부, 어서.” 상인이 그렇게 소리치자 30여 명의 상인들 중에서 대 여섯이 십자가가 새겨진 목걸이 나 팔찌 귀고리 등을 가지고 왔고, 그것들을 소년의 몸 중에 아직 검어지지 않은 부 분 에 올려놓자 소년의 몸 색이 변하는 것이 멈추어 졌다. 하지만 팔 다리의 일부분을 제외한 모든 부분은 검은 색으로 변색이 되어 있었다. 그 사이에 화아와 광아 풍아는 상대를 모두 제압해서 한 구석에 늘어놓고 있었다. 나는 그 무리들 중에 정령을 불렀던 녀석에게 뛰어가 녀석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어떻게 된 일이야? 왜 저 아이가 저 모양이지? 어서 대답해!” “크윽, 이런다고 상황이 달라지지는 않아. 어차피 저 아이는 대신 루시퍼님의 힘에 죽을 것이다. 크흐흐.” 녀석은 그렇게 내 뱉듯이 말하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화아 이 녀석들 입을 열어,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밝혀 봐. 암흑교의 잔당들 같기 도 한데... 아직은 잘 모르겠네.” 나는 녀석이 루시퍼의 이름을 이야기하는 순간, 소년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방법 이 생각났기 때문에, 녀석를 화아에게 맡기고 서둘러 소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창고에서 오래도록 꺼내지 않았던 십자가를 꺼냈다. 예전 가브리엘이 주신의 권능이 담겨 있는 어쩌구 저쩌구 했던 그 십자가였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소년의 손에 올려놓은 순간 소년의 몸을 차지하고 있던 검은색 이 스르르 밀려가며 머리 위로 옮겨졌다. 그리고 그것은 머리카락 속으로 사라져 남아있는지 없는지 구별이 잘 되지 않게 되었 을 때, 소년이 스르르 눈을 떴다. “으음.” 나는 몸을 일으키려는 소년의 어깨를 슬며시 누르면 입을 열었다. “그대로 있거라. 정신이 든 모양이다만, 아직은 움직여도 될지 알 수 가 없으니 잠 시 기다려라.” 내가 그렇게 소년이 일어나는 것을 만류하자 소년은 얼굴에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입 을 열었다. “걱정마세요. 제가 몸을 빼앗기고 있었지만 정신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은 그가 내게 심어준 암흑의 흔적을 말끔히 벗어버렸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 다. 그저 잠시 잠을 자고 일어난 것과 같다고나 할가요.” 그렇게 말하며 소년은 몸을 세웠다. 주위에서 그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상인들(천교의 신자인 모양이다.)은 연이어 주신 의 은혜를 중얼거리며 사제가 다시 회복된 것에 대한 감사 기도를 하고 있었다. 소년은 그들을 보며 “주신의 은혜와 여러분의 믿음의 힘이 저를 구원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라고 인사를 했고, 상인들은 그런 사제의 행동에 황송하다는 표정으로 몸 둘 바를 몰 라 했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주신의 종 레고리오입니 다.” 소년 사제는 상인들에게 말을 마치고 돌아서며 나에게 합장(이건 불교에서 하는 것 아닌가?) 인사를 해왔다. “반갑습니다. 사제님. 그런데 이제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나는 다시 레고리오에게 물었고, 소년 사제는 빙긋 미소를 짓는 것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는 의사를 표시했다.(그 전에는 몰라도 스스로 성직자라 밝힌 후에도 반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손에 들린 여러 성물들 중에서 내가 쥐어준 십자가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나 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십자가를 건네면서도 레고리오의 눈에는 하나 가득 의문과 경악이 담 겨 있었다. 아마도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십자가가 보통 물건이 아니라는 것에서 기인한 눈빛일 것이었다. “그렇게 궁금해 하지 마십시오. 사제님. 이 십자가는 예전 저의 조상께서 천사님께 직접 받으신 것이라고 합니다만 자세한 것은 저도 잘 모릅니다. 그저 그렇게 전해 들 었을 뿐입니다.” 나는 레고리오 사제의 의문을 그렇게 잠재웠다. 모른다는 데에야 어쩌겠는가. “하지만, 그것은 교황께서 가지신 성물에 버금갈 정도의 성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물론 믿음이 없는 자는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 것이니 누가 지니든 문제는 아 니지만, 그 성물이 진정 믿음 있는 사람에게 갔을 때, 얼마나 큰 도움을 사람들에게 줄 수 있을지... 그것이 아쉽군요.” 이야기인 즉, 내가 이 물건을 가지고 있어봐야 쓸모도 없는데, 개 발에 편자나 다름 이 없으니 그냥 자신에게 넘기는 것이 어떻겠는냐 하는 말인가? 하지만 눈동자에 탐욕이 없는 것을 보니 그것은 아닌 모양이고, 그럼 정말로 이 십자 가가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데, 그렇게 쓰이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는 것일까? “사제님, 이 물건이 어떻게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다는 말씀인지 저는 잘 이해 가 가지 않습니다만....” 내가 그렇게 말하며 십자가를 이리 저리 살펴보자, 레고리오 사제는 그렇게 성물을 함부로 다루는 모습에 눈살을 약간 찌푸렸다. “저는 천교의 사제입니다. 사제는 임무는, 주신에 의지하여 그 권능을 부여 받아 병 자를 치료하거나, 사람들을 해하는 삿된 것들을 물리쳐, 주신의 아들, 딸들이 편안하 게 살아갈 수 있도록 힘쓰는 것이 바로 주신을 찬양하고 받드는 것과 함께 사제의 주 된 임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물의 경우에는 그 자체로도 주신님의 권능을 발 현 하는 경우가 있고, 그런 경우에는 평상시에 발휘할 수 있는 성력보다 더 강한 성력을 발휘 하여 힘을 쓸 수 있지요. 물론 그 모든 것은 주신에 대한 믿음과 바침의 마음이 얼마나 강하고 굳은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십 자가의 경우에는 감히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증폭력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 다. 다른 일반 성물의 경우 보통의 1.5배 정도의 증폭력을 지닌다면 그 십자가는 도 저 히 그 힘을 짐작하지 못할 정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힘이라면 충분히 더 많은 자매들을 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역시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이 물건이 힘을 강하게 해 주기 때문에 힘이 강하면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말이 되는 모양이다. “그렇군요.” 나는 간단히 그렇게 대답하고는 다시 십자가를 품속(아공간)에 넣어 버렸다. 그 순간 순진한 레고리오 사제의 얼굴에 어리는 실망감을 나는 보았다. 그렇다고 내가 십자가를 선뜻 어린 소년 사제의 손의 쥐어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십자가를 팔아먹으려는 의도나 생각이 있는 것은 절대 아니었지만, 내 물건을 남에 게 선뜻 줄 생각도 없었던 것뿐이다. 내가 레고리오 사제와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화아는 납치범 무리들에게 정보를 얻고 있었고, 풍아와 광아는 말과 마차를 수습하여(마차를 돌리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 다.) 진행 방향을 돌려놓았다. 나는 레고리오 사제와 함께 우리 마차로 가서 함께 길을 가기로 했다. 어차피 레고리오 사제도 신성제국 안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광아가 제압한 납치범들을 그들의 마차에 아무렇게나 구겨 넣고 앞장을 섰고, 그 뒤 를 상인들의 마차가 따라갔다. 이제는 제일 뒤에서 나와 수아 레고리오가 탄 마차가 따라가고 있었다. 지토는 어느 틈에 게브를 타고 앞쪽으로 가 있었다. 화아는 잠시 납치범들을 심문해 보더니 앞으로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 같다는 말을 했다. 확실히 믿음을 전제로 어떤 행동을 하는 자들의 심리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의 단단 함을 지니게 되는 것 같다. 분명 온 몸이 틀어지는 고통을 받았을 텐데도 그들 중, 누구도 입을 열려고 하지 않 았다는 것이다. 차라리 죽는 것이 순교라고 생각하는 녀석들이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화아에게 일단 그들을 마차에 싣고 가라고 하고 그들에 대해 고민을 하 는 중이었다. 신성제국에 닿으면 저들은 사제에 대한 납치 및 살해 기도에 대한 죄를 물어 사형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더구나 저들이 암흑교의 신자들임을 자청하고 있는 상태이니 그것은 더욱 명확한 일 이었다. 레고리오의 말에 의하면 루시퍼라는 삿된 악마를 추종하는 무리는 회개의 기회를 한 번 주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유를 막론하고 사형을 집행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신성제국 안에서 만의 일이고, 또 레고리오의 말에 의하면 신성제국 안에서 주 신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벌을 받는 것은 아니고 단지 루시퍼를 따르는 경우에만 해 당 하는 것이라고 한다. 일례로 지금 함께 가고 있는 상인들 중에서 천교의 주신을 믿는 사람이 많지 않은 데 도 신성제국과 상거래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신성제국이 그렇게 폐쇄적인 것은 아니 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하튼 문제는 납치범들이 신성제국에 닿게 되면 죽음이 확실하다는 것과 그 전에 될 수 있으면 저들이 무슨 일을 꾸미는 것인지를 알고 싶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그들의 일에 끼어들어 방해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뭐 루시퍼를 믿든, 주신을 믿든, 그것은 나와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레고리오 사제의 이번 일도 그들이 우리 일행에게 못된 짓을 하지 않았다면, 굳이 문 제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절차를 지켜서, 조용히 지나갔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를 공격하고 위험에 빠트렸기 때문에 나도 대응을 했던 것이다. 내가 저들의 일을 알고 싶은 것은 어찌 보면 단순한 호기심일 뿐이었다. 내가 그렇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마차를 모는 동안에 레고리오와 수아는 그런 저 런 이야기들을 나누며 친해지고 있었다. “그래요? 그럼 신성제국에는 교황께서 황제나 마찬가지인 건가요?” “아니요. 물론 가장 웃어른이시기는 하지만, 정치나 외교에 관여하시는 경우는 없으 시고 주신께서 바라시는 것을 행하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시지요. 그 바라시는 중에 형 제 자매들의 평안과 복됨이 있으니 그를 위해 힘을 쏟으시는 것이고요. 실제적으로 행 정이나 국방의 임무를 책임지는 것은 제국회의에서 하는 일입니다.” “제국회의요? 그건 뭔데요?” “그건, 그러니까 각 계의 원로들이 모여서 국가의 중대사를 의논하고 결정을 내리 는 사람들과 그들의 모임을 일컫는 말입니다. 군사, 행정, 조세, 교육 등등의 문제들 을 책임지는 15인의 원로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단체라고 할까요? 그런 것입니다. 물 론 천교의 원로분도 참석을 하시죠.” “그렇군요. 그럼 그 회의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모양이지요? 그런데 그 원로들은 세습인가요? 아니면 어떻게 뽑지요?” 수아는 무척이나 세심하게 이것저것을 물어보고 있었다. 하지만 레고리오도 별로 할 일 없이 마차를 타고 있는 것 보다는 그렇게 이야기를 주 고받는 것이 좋은 모양인지 번번이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고 있었다. “글쎄요. 세습이라고 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고, 그러니까 이런 것이죠. 군부를 손에 쥔 가문이 있다면 그 가문의 힘이 건재한 동안에는 군사에 관한 부분에 서 는 그 가문의 인물들이 세습을 할 수도 있고, 그러다가 그 가문의 힘이 약해지고 다 른 힘이 강해지면 다른 쪽에서 원로가 나올 수도 있는 것이고 그런 겁니다. 사실 예 술 이나 교육의 경우에는 세습 보다는 학파의 힘에 의해서 힘 있는 학파의 우두머리가 그 원로의 자리에 오르는 경우가 많으니 또 다른 형태라고 할 수도 있겠군요.” 나는 아까부터 납치범들에 대한 생각은 잊고 레고리오의 말을 들으며 신성제국에 대 한 정보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렇게 레고리오를 구하고 신성제국으로 향해 2시간 쯤 갔을 때, 저기 멀리서 급하 게 말을 몰아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의 선두에는 금빛 십자가가 크게 그려진 깃발을 날리는 자가 있었다. 상인들은 그 깃발을 보자 급하게 마차를 몰아 교차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저 깃발은 신성제국에서 급한 일이 있어서 이 길을 빠르게 통과해야 하니 양해을 해 달라는 뜻을 지니는 것입니다. 그러니 빨리 교차장에 가서 저들이 지나갈 수 있도 록 길을 내어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수레들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앞서가던 상인이 상황을 몰라하는 나에게 급한 목소리 로 한 말이었다. 국가 중대사가 있으니 길을 빨리 열어달라는 표식이라...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리고 우리 마차가 마지막으로 교차장으로 들어섰을 때, 깃발을 앞세운 기마병들이 우리 일행이 있는 곳으로 달려 왔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를 지나치지 않고 우리를 포위하는 형국으로(교차장의 입구를 막 은 모습으로 말을 세웠다. 아무래도 레고리오를 찾아 온 기마병들인 모양이었다. 그 기마병들 사이에서 한 명의 인물이 말에서 내려 우리 마차로 다가왔다. 정확히는 레고리오 사제를 찾아 온 것이겠지만 말이다. “마르티낭의 성기사 나발리스가 레고리오 성사제님을 뵙습니다.” 가까이 다가온 나발리스라는 성기사는 온통 먼지가 묻어 구별하기 어려웠지만 은빛으 로 빛나는 갑주를 걸친 모습이었고, 30대 중반 정도로 보였지만 갈색의 머리카락과 수 염으로 정확한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고,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은 보통의 검 보다는 폭이 무척이나 넓어 보이는 것으로 화려하지 않았지만 칼의 가드 부분이 넓게 돌출되 어 있어 칼 전체가 커다란 십자가로 보일 정도였다. “반갑습니다. 나발리스 기사님. 제가 고집을 부려 마르티낭 밖으로 나와, 기사님을 번거롭게 해 드린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겠습니다.” “아닙니다. 레고리오님 제가 경비를 태만히 한 때문에 이렇게 고초를 겪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그나마 이렇게 주신의 은총으로 무사하신 모습을 뵙게 되어 다행스럽습 니 다.” 뭐가 주신의 은총이라는 거야? 우리 아니었으면 벌써 어디로 가도 갔던가 아니면 주 신 곁에서 인간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인데. “참, 여기 이 분과 이 분의 일행들이 저를 위험에서 구해 주셨습니다. 아마도 주신 께서 이분들에게 역사하신 것이라 생각됩니다. 저는 아무래도 주신님의 사랑을 너무 많이 받는 모양입니다.” 레고리오는 그렇게 말하며 부끄러운 듯이 얼굴을 붉혔다. 정말로 주신의 편애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당연한 것이지요. 성사제님께서 주신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으시는 것이야 모든 제 국의 형제자매들이 아는 일이 아닙니까. 하하하.” 그래 너희 마음대로 해라. 주신이 역사를 하긴 뭘 했다는 거야? 하지만 굳이 ‘거 무슨 이빨도 안 들어가는 소리를 하고 있느냐’라고 시비를 걸어 분위기를 망칠 생각은 없었다. 결국 나발리스라는 기사가 데리고 온 기마병들이 납치범들을 인계받아 먼저 돌아갔고 (사실 그냥 데리고 갔다. 죄를 지었으니 마르티낭의 군사와 치안을 맡은 자신이 데리 고 가야 한다고 나발리스 그 자가 막무가내로 우겨서.) 레고리오는 우리 마차를 그냥 타고 돌아가고 싶다고 우겨서 나발리스가 마차 위에 동행을 하게 되었다. 솔직히 넷이 앉아 가기에는 좁은 곳이어서 어쩔 수 없이 수아가 마차 안으로 들어갔 고, 나도 나발리스와 레고리오가 주신의 은총이 어떻고 저떻고 하는 소리로 떠드는 것 이 듣기 괴로워서 나발리스에게 고삐를 넘기고 마차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고삐를 넘겨받는 나발리스의 얼굴에 내가 이런 일을 해야 하느냐라는 거부의 빛이 있 기는 했지만 무시했다. 마차도 나의 것이고 레고리오를 구한 것도 우리 일행인데, 겨우 마차를 대신 몰라는 것이 그렇게 문제가 되냐는 뜻의 얼굴 표정을 나발리스는 읽었을까 모르겠다. 그리고 우리가 신성제국의 첫 관문인 마르티낭에 도착할 때까지, 레고리오와 나발리 스는 우리 일행이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대상 1호가 되었다.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인데도 주신의 은총을 수도 없이 떠들어대는 그들에게 질렸기 때 문이었다. 그런다고 우리 일행이 그들의 신앙에 함께 동참하게 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신성제국의 관문도시 마르티낭은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 내려와 산기슭을 거의 벗어 나 평원으로 접어드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 전에 산길에 초소와 유사시를 대비한 것으로 보이는 낡은 관문들이 있기는 했지 만 따로 지키는 병사들은 보이지 않았다. 오래전에 만들어 사용하다가 한동안 쓰지 않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마르티낭의 첫 인상은 한타나 그란드의 여느 성과 다르지 않았다. 그저 여기도 사람들이 사는 곳이구나 하는 것이 첫 느낌이었다면 느낌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나발리스의 안내로 성문을 무사통과하고 중앙로를 지나 성의 중심으 로 나아갈수록 무언가 다른 도시와는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오빠, 좀 이상하네요. 잘은 모르겠는데 좀 달라요. 지금까지 지나온 도시와 다른 느낌이...” 마차 안에서 밖을 구경하던 수아가 이런 말을 할 정도였다. 정말 막연히 무언가 차이가 있다는 느낌. 여기도 가게가 있고, 행인들이 있으며, 상거래가 있고, 아이들이 있고, 아이의 손을 잡은 어머니가 있고, 노인이 있으며, 젊은이가 있고, 겉으로 드러나는 빈부의 격차가 있으며, 권력의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 다른 것이 있었다. 무언가... 그러는 사이에 마차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마르티낭의 중심에 위치한 마르티낭 성신전. 백색의 대리석으로 지어진 신전은 그 아름다움이나 섬세함이 그란드 왕국의왕궁을 넘 어서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규모도 엄청나게 큰 것이었다. 사람들이 들어가면 얼마나 들어갈 수 있을까? 혹시 이 성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여기 에 와서 한꺼번에 기도를 하거나 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마르티낭 성신전의 규모에서 이 성의 모든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이는 것을 떠올 려 보았고, 불가능하지도 않겠다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그 정도로 성신전의 규모는 컸던 것이다. 역시 성신전은 성신전인 모양이었다. 아직은 잘 모르지만, 신성제국에서도 사제들과 신전들의 차등이 있는 모양이었다. 어느 신전이든 사제가 있는데 문제는 그 신전의 등급에 따라 파견되는 사제의 등급 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신전의 등급은 가장 낮은 등급이 수신전, 그 다음이 교신전, 다음이 순신전, 그리고 성신전, 마지막으로 주신전으로 나누어지는데, 그 신전을 책임지는 사제들은 또한 그 에 따라 수사제, 교사제, 순사제, 성사제, 주교로 불린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이외에도 교황이 있고, 또 다른 명칭의 사제들이 있지만, 대략적으로 수, 교, 순, 성, 주교의 순서로 사제의 계급이 나뉜다는 것이다. 물론 수사제 아래로 평사제들이 있고, 수습사제들도 있다. 아무튼 이 마르티낭에 있는 신전은 성신전에 속하는 것으로 신성제국 안에서도 상당 히 이름이 높은 신전이라고 한다. 레고리오 성사제는 나발리스 성기사와 함께(성기사 아래에 순기사, 교기사 그런 것 이 있는 것은 아니다.) 신전 안으로 들어갔지만, 우리들은 신전 입구에서 그들과 헤 어 졌다. 우리들이 신전 안에서 지내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성직자들의 삶은 상당히 고달프고, 지켜야 할 계율들도 많은 것이었다. 물론 내가 천교의 성직자의 생활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신전 안에서는 우리 들이 밖에서 누리던 자유를 누릴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은 거의 확실했기 때문에 그들 의 청을 완곡하게 거절했던 것이다. 물론 우리가 어느 여관에 있든 나발리스라는 그 자가 이 성의 군사와 치안을 책임지 는 자라고 했으니 어렵지 않게 우릴 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나발리스도 우리에게 마르티낭을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문제가 없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가 무슨 죄인인가? 남이야 어디를 가든 말든 무슨 참견이람. 아무튼 성사제와 성기사가 모두 우리들에게 금족령을 내렸기 때문에, 우리들은 마르 티낭에서 잠시 머물기로 했다. 하지만 우리들이 마르티낭의 여관에서 다음날 하루를 보내고 지루함으로 벽을 긁고 있을 때까지 레고리오 등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이번에 신성제국에 오면서는 그란드의 특산품 같은 것을 사가지고 오지 않았기 때문 에 우리들이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겨우 한다는 것이 도시를 구경하는 것이 전부였는데, 특별하게 구경을 할 것 이 없는 마르티낭이었다. 있다고 해 봐야 성신전 뿐이었는데, 왠지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망설여져서 밖에 서만 구경을 하고 말았다. 그렇게 마르티낭을 돌아가니던 우리들은 저녁이 되어 올 무렵, 터덜터덜 여관으로 돌 아왔다. 그나마 수확이 있었다면, 처음에 마르티낭에 들어오며서 느꼈던 그 이질감의 원인을 짐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원인은 이 마르티낭의 사람들에게서는 악다구니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들의 모든 삶의 중심에 주신이라는 절대자가 있기 때문에 삶의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 신의 뜻으로 받아들이려는 성향을 보인다 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의 삶에서는 강력한 극복의식이나 도전의식이 결여된 모습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아무튼 이들의 삶은 자신들의 기준에서 판단되는 것으로, 가난과 고난조차 신의 뜻으 로 돌리고 나면 힘들거나 괴롭다고 여기지 않는 것이다. 물론 열심히 노력해서 그런 상황을 벗어나려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언제나 마지막 보루로 주신에게 기댈 수 있기 때문인지, 다른 나라의 사람들 이 사는 모습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그것이 우리들이 마르티낭을 돌아보며 느낀 것이었다. 하루를 마르티낭에서 보내고, 정말 심심한 곳이라는 느낌을 받은 우리들은 다음날 아 침, 마르티낭 성신전을 찾았다. 그냥 마르티낭을 떠날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인사를 하고 가야 할 것 같았기 때문에 (왜냐하면 둘 다 상당한 지위의 인물들이었으니까.) 신전을 찾았던 것이다. 신전 입구에서 안내하는 사제에게 우리의 용무를 말하고(뭘 그렇게 놀라는 것인지) 신전 안쪽에 마련된 작은 방에서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또, 지루할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 레고리오와 나발리스가 함께 들어왔 다. “어서 오십시오. 형제자매님. 그렇지 않아도 연락을 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레고리오가 두 손을 모야 깊게 합장을 하며 인사를 했다. “오서 오십시오.” 나발리스는 짧고 간결한 말로 인사를 대신했고, 우리들은 그저 “네, 안녕하세요.” “다시 뵙는군요.” “흠..” “반갑습니다.” 뾰로로롱. 등의 간단한 표현으로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그렇게 격식적인 인사를 마치고 방에 마련된 앉은뱅이 원탁을 중심으로 둘러 앉은 후 나는 곧장 본론을 꺼냈다. “성사제님, 그리고 기사님, 저희들은 이만 마르티낭을 떠날까 합니다. 그래서 인사 는 드리고 가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 무슨 바쁜 용무라도 있으신 것입니까? 서둘러 떠나려고 하시니...” 나발리스가 내 말에 의외라는 표정으로 답을 했다. “아닙니다. 저희가 바쁘게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겨울이 오기 전 에 신성제국에서의 볼 일을 마치고 싶기도 하고, 이 마르티낭이라는 도시가 저희들 일 행에게 흥미를 주는 것이 없어서... 솔직히 여행에서 볼거리 먹을거리가 없는 곳은 인 기가 없지 않습니까. 하하.” 나는 그렇게 답하면서도 우리 일행이 단지 팔자 좋은 유람객이 되는 것 같아 기분이 편치 않았다. “네. 그런데 신성제국에서 볼일이 있으시다니 그건 무슨 일이신지요? 혹시 제가 도 움이 될 수도 있을 텐데요.” 나발리스는 무슨 이유인지 우리들에게 처음과는 다른 호의를 보이고 있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우리들에 대해서 무관심하려는 태도를 보인 것 같은데... “아닙니다. 별 일 아닙니다. 그저 예전 저희 조상님께서 친한 벗으로 여겼던 분이 이 나라 출신이라 혹 그분의 흔적을 알 수 있을까 하는 것이지요. 뭐 그것이 안 된다 고 해도 상관은 없는 일이고 말입니다. 도와주시려는 마음만은 고맙게 받겠습니다.” 나는 나발리스의 호의를 부드럽게 거절했다. “네, 그렇군요. 그럼 마르티낭을 떠나시면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끈질긴 나발리스. 그냥 간다면 잘 가세요. 그리고 신세를 졌으니 이건 여비로 쓰시지 요. 혹은 이건 선물입니다. 이러고서 깔끔하게 끝내면 얼마나 좋아. 왜 이리 물고 늘 어지는 거야? “네, 일단은 여행이니 신성제국의 수도를 가 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몇 가지 정보를 찾아보고 다시 여정을 결정할 생각이지요.” 나는 별로 숨길 것은 없겠다 싶어 솔직히 말했다. 그리고 내 머리를 강타하는 불안감이 있었으니, 나발리스의 표정이 심상찮게 밝아졌 기 때문이었다. “사르벨리로 가신다는 말씀이군요.” “네에,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말을 바꿀 수는 없어 재차 묻는 나발리스의 물음에 대답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레고리오의 얼굴빛까지 밝아지면서 확신이 되었다. “그럼, 제가 부탁 하나 드려도 되겠지요? 어차피 가시는 길이시라니 레고리오 성사 제님도 함께 모시고 가 주셨으면 하는데 말이죠.” 나발리스 성기사 자네가 그런다고 내가 그런 일을 해 줄 것 같은가? “그래요? 저희는 상당히 비싼 용병들인데요? 적어도 인물 호송에다 저희 가 모르는 지역으로 이동을 해야 하고, 그 거리가 상당하고, 또 전에 습격을 받은 적도 있었으 니 가만 있자...광아야 어느 정도의 비용이 나오냐?” 나는 혼자 중얼중얼 거리다가 광아에게 갑작스럽게 비용 계산을 넘겼다. “네, 형님. 이런 일이라면 약 20만덴 정도의 비용은 받아야 하고, 중간에서 일어나 는 불상사에 대해서는 추가 비용을 계산한다는 조항이 들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 역시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광아였다. 짧은 시간에 정확한 판단과 계산능력, 역시 맘에 들어.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비용이라니...” 나발리스는 놀란 표정이 되었고, 레고리오도 역시 마찬가지의 표정이었다. “이런, 형 설명을 안했단 말이야. 우리들이 용병이라는 걸?” “그러게? 설마 용병에게 이런 일을 그냥 맡기려고 하지는 않았을 텐데?” 화아가 풍아가 적당한 대응을 해 온다.(역시 오래 다니다 보니 손발이 맞는다.) “용병? 아니 루탄님 일행이 용병이었어요?” 레고리오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저희들은 상당히 고급 용병에 속합니다.” 내가 그렇게 대답을 하자, 레고리오는 나발리스를 바라보았다. “성사제님, 이렇게 되면 오히려 잘 되었다고 할 수도 있잖습니까? 이들을 고용해서 사르벨리까지 가신다면...” 나발리스가 자신을 바라보는 레고리오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레고리오가 제국의 수도로 가야 할 일이 있는데, 우리와 함께 가면 좋겠다 고 생각을 했다.(이유는 모르지만..) 그런데 우리가 그걸 들어주지 않을 것 같아서 걱정이었다. 하지만 용병이라면 고용하면 되니까 문제가 아니다. 이런 식의 내용 요약이 가능한 것 같았다. 하지만 왜 나발리스나 다른 성기사들과 함께 가지 않고, 우리들 같은 잘 알지도 못하 는 사람들과 움직이려고 하는 것일까. 여행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믿을 수 없는 동행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없나? 없음 말고.) 그런데 아무리 목숨을 구해 준 이력이 있다고는 하지만, 다시 우리 일행에게 이런 부 탁을 하려고 작정을 하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들은 상황이 확실하지 않은 일을 맡아서 위험을 자초 할 생각은 없습니다. 만약 우리들을 고용할 생각이시라면 상황을 자세히 알려 주셔야 할 겁니다. 만약 중간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면 우리들은 계약을 파기하고 우리 갈 길을 갈지도 모르니까 말입니다.” 나는 레고리오와 나발리스의 태도에서 무언가 비밀의 냄새가 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비밀이 레고리오가 성기사들의 호위 속에 수도로 향하지 못하는 걸림돌이 된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이유를 알아야 우리 일행의 안전도 보장되는 것이다. “루탄님, 저는 수도에 가야만 하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켜서는 안 됩니 다. 이번 저의 납치 사건에서 알게 된 몇 가지 사실들을 종합해서 나발리스와 저는 상 당히 주목할 만한 어떤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자세히 알려 드릴 수 없 습니다. 대신, 제가 마르티낭에서 몸을 움직이는 순간 저를 제거하기 위한 수많은 시 도들이 생겨날 것임은 확신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 제국의 절반을 적으로 돌려야 할 정도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말을 끊은 레고리오는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신성제국은 교황저하의 통치를 받지 않습니다. 교황저하는 상징적인 존재이시며 단 지 천교의 형제자매의 믿음을 총괄하시는 분이실 뿐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주신의 권능을 무시하고 교리를 무시하는 것까지도 무관하다 여기며 방관하지는 않으신답니 다. 여기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주신의 교리가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경우에 감히 주 신의 교리를 어기려는 자가 나타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런 자들이 모여서 주신의 나 라를 흔들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걸 아는 것은 극소수의 인물들뿐이고, 자애하신 교 황 께서는 그런 시도들을 상상도 하지 못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극소수의 인물 중 하 나가 된 제가 가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레고리오의 말에 이의를 제기했다. “아니 그게 말이 됩니까? 그런 일이 일어나면 주신께서 당신의 역사를 방해하는 무 리들을 척결하실 것이 아닙니까. 아니 직접 그 일을 하시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도움 을 주실 계시 정도야 해 주실 것 같은데요?” 내 말에는 그런 것도 안 된다면 무슨 신인가라는 식의 트집이 들어 있는 것이었다. “그렇습니다. 신께서 이 땅에 직접 역사하시고 그 권능을 보이시는 것이 종종 있는 일이기에 그런 일이 가능한 것도 사실이고 그래야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 난 200년 전 대 신성 암흑 전쟁 이후로 그런 직접적인 역사가 사라졌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다만 그 권능을 발현하는 것은 전혀 무리가 없으나 직접적 인 계시나 축복이나 이적을 일으키는 일만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지요.” 그건 나도 모르고 있던 것이었다. 주신의 힘을 빌려 쓸 수 있으니 당연히 신의 직접적인 개입이 있으리라고 보았던 것 인데 실재는 그렇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럼 그건 암흑교 쪽에서도 마찬가지인 것입니까? 성사제님?” 나는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어 물었다. “그 삿된 어둠의 찌꺼기가 발휘하던 힘은 더 이상 이 땅에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 다. 다만 그 흔적으로 어둠을 빌려 쓰는 자들이 있기는 하지요.” 엎치나 메치나 결과는 같은 말이네, 암흑교나 천교나 주신과 루시퍼가 직접적인 힘 을 인간계에서 쓰지 못하고(혹은 않고) 있다는 말이다. 그 이유야 알지 못하지만 말이다.(하긴 인간들의 사이에서 신들의 직접개입이 있다 면 여러 가지로 문제가 될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레고리오 사제님께서 교황께 가서 사건의 전모를 밝혀야 하는데, 마르티낭 에서부터 사르벨리에까지 갈 자신이 없다는 겁니까? 하지만 그것도 좀 이상하군요. 그 정도의 공간이동은 어렵지 않을 텐데요? 적어도 성사제나 성기사의 지위로 그 정 도 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나는 아무래도 무언가 더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쩌면 정작 중요한 것은 레고리오가 아닐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루탄님께서는 마법을 쓰시면서 성직자의 신성력과 마법사의 마력이 충돌을 일으키 는 것을 모르시는 것 같군요. 저희 사제들은 마법사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공간이동 은 쓰지 못합니다. 주신께서 주시는 힘이라면 필요한 곳에 이동하는 것이 가능할지 모 르지만 그것은 주신께서 기도를 들어주셨을 때에나 가능한 것인데, 지금 제가 원하는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시니, 제 힘으로 가라는 말씀이신 것 같습니다. 저희 사제들 이 쓰는 신성력이란 언제나 허락되지 않으면 쓸 수 없는 것이지요.” 그것참, 그렇게 말하면 어쩔 도리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신께서 허락을 하지 않으셔 서 그런 것이라는데, 신이 왜 그러는 거냐고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인간이 신의 뜻을 어이 알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순간이동은 안 되고 수도는 가야겠고, 노리는 사람은 많을 것이고, 결국 찾 은 방법이 이 마르티낭 성신전에 허수아비를 두고 몸을 빼는 방법을 택하겠다는 것이 로군요? 그럼 사제님께서는 이동 중에 변장을 하고 움직이시겠군요?” 나는 레고리오를 보며 물었다. “네,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사제로서 사제복을 벋는 것은 안 될 일이지 만, 그 정도의 잘못이야 주신께서도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레고리오는 얼굴을 붉히며 그렇게 대답했다. “형님, 아무래도 우리가 이 일을 맡지 않으면 상당히 오래 불편을 겪던가 신성제국 밖으로 추방이 되겠지요?” 광아가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마 그렇겠지. 이미 비밀을 우리들에게 다 이야기 했으니까, 만약에 도와주지 않 으면 상당시간 억류를 하지 않을까? 아직은 그런 시도는 없지만 말이다.” 내가 광아에게 그렇게 대답할 때, 다른 일행들의 얼굴에 떠올랐던 의아함이 지워지 고 있었고, 레고리오와 나발리스는 놀란 얼굴이 되었다. “아, 아닙니다. 저희는 전혀 그런 의도는 없었습니다. 정말...” “저희의 부탁을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해서 은인에게 위해를 가할 수는 없는 일입니 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습니다.” 레고리오와 나발리스가 펄쩍 뛰며 말도 안 된다고 손을 내저었다. “정말인가 보네요. 오빠. 오빠들이 오해를 하신 것 같아요.” 수아는 그런 그들의 모습이 진정이라 느낀 모양이었다. 그리고 내가 느끼기에도 그들의 행동에는 가식이 없었다. 내가 누말 황제와 로드릴 재상 같은 사람들만 만나다 보니 이런 사람들도 믿지 못하 게 된 것일까? “광아야 다시, 고용비용을 계산해 봐라. 아무래도 상당히 상향조정이 되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나는 다시 광아에게 우리 용병단의 고용 비용에 대한 계산을 하라고 말했지만, 실제 로는 성사제와 성기사에게 우리들이 용병이라는 입장에 있음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 었다. 아무래도 이런 분위기에서는 도와달라는 말이 나오기 쉽다. 고용된다는 것과 도와준다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고용은 계약이지만 도움은 마음이다. 상당한 부담을 안게 되는 일이라는 말이다. 마음으로는 돕는다고 해도 겉으로는 계약이라고 해 두는 것이 나중에 몸을 움직이기 편해진다. “네, 형님. 상황이 상당히 불리하고 좋지 않을 까닭에 중간에 무슨 일이 있든 수도 의 목적지까지 보호라면 약 150만 덴은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계 약 금 80만에 중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한 추가 비용을 그 때, 그 때, 받는 방법도 있습니다.” 광아가 냉큼 계산을 뽑았다. “위험대비 고용비용이 이렇게 나오는 군요. 어떻습니까? 저희 용병을 고용하실 생각 이 있으십니까? 그러시다면 응해 드릴 생각이 있습니다만, 참고로 저희는 한타왕국의 란의 용병대입니다.” 내가 그렇게 우리를 소개하고 고용할 의사가 있는지를 묻자, 나발리스와 레고리오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비용에 부담이 가는 것일까? 음, 그래도 고래로 종교 단체가 돈이 제일 많은 것이 아니었나? “나발리스 성기사님, 우리에게 남은 올해 예산이 얼마나 되지요?” 역시 돈 문제였나 보다. “별로 남은 것이 없습니다. 이제 가을이라 지출도 없을 것이지만 그 동안 구제와 도 움으로 나간 금액이 상당하기 때문에 겨우 몇 십만 덴 정도가 남았을 뿐입니다. 하지 만 150만 덴이라면 어떻게든 마련이 될 것입니다. 성사제님께서 원하신다면 만들어 보 겠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그 많은 돈을 만드시겠다는...” “제가 가진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신전에 기부하는 형식으로 한다면 그 정도의 여유 는 생길 것입니다. 어차피 저에게 개인적인 재산이야 의미가 없는 것이니 언제든 신 전 에 기부를 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문제를 해결하려면 신전 의 자금을 뺄 수는 없으니 제가 기부한 것을 저들이 모르게 하여 쓰면 될 것입니다. ” 완전히 우리들만 나쁜 놈이 되어가는 기분이었지만 일은 일이다. 그냥 못 들은 척 하고 있었다. “좋습니다. 루탄 대장님. 우리들이 란의 용병대를 고용하겠습니다. 의뢰는 레고리 오 성사제님을 사르벨리의 교황전까지 무사히 모시고 가는 것입니다. 기간은 특별히 정하지 않았지만 빠를수록 좋습니다. 대금은 출발 전에 50만 덴을 지급하고 사르벨리 에서 100만 덴을 수령할 수 있도록 증서를 드리겠습니다. 성사제님께 받으시면 될 것 입니다.” 지금까지는 그런대로 조용하던 나발리스가 계약에 대한 문제는 나서서 맡았다. 아마도 살림꾼의 역할인 듯하다. 나는(우리는) 그 조건에 쾌히 승낙하고 계약을 했다. 레고리오는 당분간 이름을 바꾸어서 우리들의 막내 동생으로 행세하며 사르벨리를 향 해 가기로 결정하고 이름은 성아로 정했다. 그리고 성아에게 맘맘을 맡겨서 환수를 다루는 환수사의 역할을 시키기로 했다. 어차피 맘맘을 다룰 수 있는 것은 광아뿐이었지만, 흉내를 내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대충 계획이 세워지자 레고리오는 옷을 갈아입고 와서 나에게 자신의 성물과 사제복을 맡겼다. 그리고 우리들은 다시 여관으로 돌아왔다. 성아는 성신전 안에서 아무도 모르게 밖으로 먼저 빠져나갔고, 그 빈 자리는 게브를 불러 대신 시켰다. 말을 하지 못한다는 단점을 뺀다면 게브만큼 완벽하게 변신을 할 수 있는 존재도 드 물 것이었다. 미리 레고리오를 대신한 사람이 준비되어 있기는 하겠지만 예상보다 빨리 움직이게 되어 게브가 수고를 하기로 한 것이다. 게브는 내일까지 레고리오의 역할을 하다가 점심때쯤 해서 지토와 함께 우리들을 따 라 올 것이었다. 그것 때문에 지토도 성신전으로 다시 가 있었다. 우리는 일단 성아를 우리 마차 안에 감추어 두고, 마르티낭을 떠날 때까지 움직이지 말라고 당부했다. 솔직히 레고리오 같은 외모는 너무 눈에 띠는 것이다. 만약에 밖으로 나온다면 그 순간 그의 얼굴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를 알아볼 것이 었다. 뭐 자기 말로는 자기를 알아볼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라고 했지만 믿을 수 있는 말 이 아니었다. 덕분에 나는 일행들 몰래 모습을 바꾸고(환영 마법중에 모습을 변화시키는 것이 있 다.) 시장에 나가 염색약과 약간의 변장도구를 사 와야 했다. 그 후에 마차 안에서 레고리오를 성아로 만드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금발의 머리는 염색약이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에(절대 약의 배합이 잘못 된 것은 아 니었을 것이다.) 누르틱틱하고 꺼칠꺼칠하게 변해 버렸지만, 다른 것은 문제가 없었 다. 사실 염색을 제외하고는 다른 부분은 어떻게 바꾸어 볼 방법이 없어서 조금 더 나이 가 들어 보이도록 옷을 입히는 것이 최선이었다. 사제라고 마법이 잘 실현되지 않는 까닭에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억지로 마법을 쓴다면 마법이 실현되지 말라는 법도 없지만 사제에게 마법을 거 는 것은 곧 그 정도의 마력으로 공격을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을 정도라니 그런 짓을 할 수도 없었다. 거기다가 정령력 조차도 통하지 않았다. 결국 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조잡한 방법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변신을 다 시켜 놓고는 우리 모두 한숨을 쉬었다. 해 보지 않았다는 것은 언제나 이렇게 의외의 결과를 만들어 내게 되는 것이다. 꼭 어디서 포탄 맞은 귀공자를 끌고 온 것 같았다. 머리는 수세미에 꺼칠꺼칠하고 피부는 그야말로 새하얗게 투명하고, 눈동자는 너무 나 맑아서 보는 이의 마음을 열게 만드는 느낌이라니. “오빠, 아무래도 너무 이상하게 보여요. 그냥 로브를 입히는 것이 어떨까요? 피부 가 너무 하얗고 균형이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정말 이상하게 되어 버렸네.” 수아와 풍아가 레고리오의 모습을 보고 한 말이었다. “아무래도 저 피부가 문제네. 다른 것이야 어떻게 이해를 해 준다고 해도...” 화아 역시도 그런 모양이었다. “광아야. 맘맘이 불러서 성아의 피부에 붙어 있으라고 해.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좀 거칠게 느껴지도록 하라고 하고, 가능하겠지?” 나는 광아에게 그렇게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했고, 레고리오는 맘맘이가 온 몸에 얇 게 펼쳐져서 붙어오는 느낌에 진저리를 쳤지만 잠시 후에 우리는 그런대로 우리가 원 했던 모습의 성아를 볼 수 있었다. “자, 소개 합니다. 우리들의 막내 동생 성아입니다. 특기는 맘맘을 이용한 환수 공 격. 사르벨리에 도착할 때까지 함께 여행하게 될 테니, 성아도 누나와 형들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알았지. 그리고 지금 마르티낭 성신전에 가 계신 지토는 아저씨라고 부르면 된다. 알았어?” 내가 그렇게 모든 상황을 마무리 하자, 성아는 한 발 앞으로 나서서 머리를 긁적거리 며 입을 열었다. “저기 형님들 누님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성아라고 합니다.” 조금 미적거리던 행동과는 달리 차분하게 인사를 하고는 깊숙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성아였다. “그래, 그래. 하하 이렇게 동생이 생겼네. 하하하.” “어쩌면... 나도 동생이 생겼네요. 기뻐요. 언제나 막내였는데... ” 화아와 수아가 성아의 인사에 그렇게 반가움을 표시했고, 나머지 풍아와 광아도 성아 를 반겨 주었다. 결국에 성아는 마차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우리는 해가 채 뜨기도 전에 마르티낭의 성문을 나서고 있었다. 성문에서는 간단하게 검문이 있었을 뿐이고 이것저것 따지지 않았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신성제국의 사르벨리를 향해 출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성을 나오고도 한 나절이 지나 점심을 먹을 때까지 성아는 마차 안에서 밖으 로 나오지 못했다. 성아가 밖으로 나온 것은 점심을 먹기 위해 마차를 세웠을 때였다. 그것도 주위에 우리 일행 이외에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이후의 일이었다. 우리들은 곧장 사르벨리를 향해가는 것을 피하고 먼저 마르티낭에서 서쪽에 있는 국 경도시인 그라아노를 경유하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어딘가 있을지 모를 감시의 눈길을 이렇게라도 피해 보자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성아야, 혹시 신성제국의 화염의 기사단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있니?” 나는 열심히 식사에 몰두해 있는 성아에게 지나가듯 물었다. “화염기사단이요? 알아요. 그런데 그건 왜요?” 이게 왜는 무슨 왜야? 그냥 물어보면 대답을 하면 되는 것이지.. “응? 아니 신성제국에는 화염기사단, 여인왕국에는 얼음기사단, 이런 말이 있잖아. 대륙에서 제일가는 기사단이라는... 그래서 그냥 궁금해서 물어 본 거야. 우리들은 세 상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잘 모르거든. 할아버지하고만 같이 살다가 여행을 나온 것 도 몇 달이 되지 않아서 말이야.” 내가 그렇게 고개도 돌리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하자 성 아도 그렇게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응, 그렇구나. 그럼 내가 아는 한에서 이야기 해 줄게요. 화염기사단은 처음부터 누구의 밑에도 있지 않은 독립 기사단이었어요. 초대 단장이었던 넥스님이 신성제국 의 초석을 세우는데 일조하시면서 오직 마물들을 상대하는 것에만 일생을 바치셨고 다 른 어떤 것에도 일체 욕심을 부리지 않았기에 후대의 교황님도, 제국회의도, 화염기 사 단은 어떤 제재도 없이 그대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도록 한 것이지요.” 성아는 자신이 하는 이야기를 다들 골몰하게 들어주는 형과 누나들 때문에 고무된 표 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 이후로도 화염기사단은 이 나라의 여러 지역에서 괴물들과 마수, 환수 를 상대하면서 그 맥을 유지해 왔어요. 물론 그 기사단에 들기 위해서는 팔이 하나라 는 조건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기사단의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말이죠. 이상하게도 넥 스 단장은 처음부터 팔을 한 쪽 쓰지 못하는 사람들만 모아서 기사단을 만들었고, 자 신의 후예가 아니면 절대 두 팔을 쓸 수 있는 사람은 기사단에 들 수 없다는 규칙을 남겼다고 해요. 하지만 그것도 잠시, 600년 전에 있었던 신성제국과 저 악마의 무리 들 의 싸움 선두에서 괴물들을 상대하던 화염기사단은 거의 전멸을 면치 못했고, 그 수 가 많이 줄어서 처음 500 정도의 수에서 그 전쟁 이후로는 100명 정도의 인원만으로 명맥을 잇게 되었지요. 그런데 그 이후로는 점차 기사단의 수를 늘이기 위해 정상인 을 받아들이기 시작하고, 빠르게 인원을 확충하면서 원래의 화염기사단이라는 명칭에 서 조금씩 벗어났다고들 해요. 저도 자세히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지는 잘 몰라 요. 아무튼 그 기사단은 점차 영지를 가지고 권력을 가지게 되었고 지난 200년 전의 전쟁에서는 화염기사단의 수가 오천에 이를 정도였다고 해요. 하지만 이상한 것은 60 0 년 전의 그 전투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넥스가家는 화염기사단의 단장자리를 스스로 내 놓고 조용히 사라졌다는 거예요. 아무튼 200년 전의 싸움에서 큰 힘을 발휘한 화 염 기사단은 그 단장이 제국회의의 원로가 되는 정도에 이르게 되었어요. 지금은 화염기 사단이 이 신성제국의 최고 전력이지요. 인원은 정확히는 몰라도 4만에서 5만 정도가 될 거라고 해요. 제국 내에서 특별하게 치안 문제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문제 는 대부분 신전에서 알아서 관리하니까 화염기사단은 오직 국방과 마물을 퇴치하는 데 에만 신경을 쓰면 되는데 인원이 많은 편이죠.” 성아의 말대로 인원이 많은 편이기는 하다. 국방에 4만 정도의 수가 뭐가 많으냐고 하겠지만, 화염기사단은 말 그대로 기사들인 것이다. 기사는 고급 지휘관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4만이면, 언제든 병사들을 모아서 싸움을 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 인원은 대략 400만 정도를 이끌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기사 한 명이 100명의 병 사 를 부린다고 하면 말이다. 그런 수의 병사를 모을 수도 없지만.... “그럼 지금은 넥스가의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는 알 수 없겠네?” 내가 말없이 수저를 놀리고 있자, 광아가 넌지시 물었다. “넥스 가문이요? 그 사람들은 지금도 북쪽 끝에서 작은 영지를 가지고 살고 있을 거 예요. 제가 전에 도서관에서 본적이 있는데, 그 북쪽의 영지는 일종의 보상으로 영원 히 넥스가에 주기로 교황 저하와 제국회의에서 결정을 했었다고 해요. 600년 전 그 전 투가 끝나고 말이죠.” 영지가 생기고 단장직을 물러났다는 말인가? “그런데요. 그 영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땅이래요. 농사는 거의 불가능하고 험 한 산악지역이라 사람들이 살기 어려운 곳이라고 하던데요?” 성아가 뒷말을 덧붙였다. 그럼 넥스가는 어쩌면 퇴출을 당한 것일까? 어떻게 된 것일까? 600년 전이라... 그건 정말 오랜 세월이다. 비록 마법과 기록 문화가 발달해서 역사가 좀 더 자세히 전해지는 이 세계라 하더라도 이렇게 뒷거래의 냄새까지 나는 상황이 자세히 전해질 리는 없다. 결국에는 사르벨리를 지나서 그 북쪽의 영지를 찾아가봐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 다. 그렇게 성아에게서 신성제국의 화염기사단에 대해 들으며 점심을 마치고 우리는 곧 장 그라아노를 향해 출발했다. 그라아노는 신성제국과 한타왕국의 국경에 마주한 군사상업도시였다. 아무래도 그다지 우호적인 관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언제나 이빨을 드리밀고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어서, 어느 정도는 사람들이 오가며 교류를 하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라아노는 마르티낭에 비해서는 상당히 거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고 나발리 스가 귀띔을 해 주었다. 우리들은 일단 그라아노가 보이는 곳에서 지토를 기다렸다. 지토는 점심나절에 마르트낭에서 출발 했을 것이었다. 게브를 타고 오는 것이니 우리 들 보다는 훨씬 빠르게 달릴 것이고, 성문에 닫히기 전에 우리와 합류할 수 있을 것 이 라는 것이 우리의 계산이었다. 그리고 그 계산은 틀리지 않아서, 해가 가물가물 그라아노의 저 편으로 지고 있을 때, 지토가 바람처럼(정말 빠르다.) 달려왔다. 그리고 우리들은 지토의 투덜거림을 들으며(점심을 먹지 못한 것에 못내 불만인 듯) 그라아노의 성문으로 향했다. 성문의 병사들은(신성제국의 거의 모든 치안은 신전에서 맡고 있었지만 그라아노는 병사들이 맡고 있었다.) 내가 내미는 용병대 패를 보고, 입국 목적과 일행의 수를 확 인했다. 다행히 용병대의 수가 어떻게 되는지 확인할 수 있는 용병길드가 신성제국에 있을 턱 이 없었다. 그리고 용병의 패에도 그런 것은 나와 있지 않은 것이다. 언제 용병이 죽어 나갈지 모르는 상황에 그런 것은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겠지만, 그 덕에 란의 용병대가 여섯 인지 일곱인지를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이 확인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만들어준 입국 증명서에 버젓이 성아의 이름이 들어감으로써 우리들 은 7명의 일행이 입국을 했다는 증거를 가질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가 원하는 것이 착착 이루어지고 들어선 그라아노이기 때문인지 몰라도 마르트낭에 비해서 훨씬 살아있는 듯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사람들은 지는 해를 등에 지고 술집을 찾기도 했고, 때때로 언성을 높이는 모습을 찾 아 볼 수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마르트낭은 너무 엄숙하고 경건하고 조용한 도시였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들도 그라아노의 그런 분위기가 좋아서 조금은 흥겨운 기분으로 여관을 찾아 들 었다. 군사도시라고는 하지만, 한타와의 무역이 성행하는 곳이라 여관이 제법 많았고 술집 도 많은 편이었다. 마르트낭에는 술집이 별로 없었다. 여러 가지로 마르트낭과 비교되는 곳이었다. 우리는 될 수 있으면 조용한 여관을 찾으려고 했지만, 이른 저녁부터 간단히 한 잔 을 하기 위해서 주점을 찾은 사람들과 여관에서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 때문에 조용한 여관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또, 우리도 어느 정도는 이런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전적으로 마르트낭의 분위기에서 벗어나려는 본능일 것이다.) 적당히 자리가 있는 여관을 찾아 들었다. 음식과 음료수 술을 시키고 우리들이 자리에 앉았을 때, 생각지도 않은 일이 벌어졌 다. 어느 곳이나 있는 건달들, 그러니까 마을들마다 있는 시시껄렁하고 혈기만 넘치는 그 런 녀석들이 수아와 풍아의 미모에 눈독을 들인 것이다. 보통 때에는 화아와 지토가 어느 정도 분위기를 잡으면 저런 녀석들이 알아서 피하 곤 했는데 역시 성아가 우리 일행이 되고 나서 우리 일행의 겉보기 등급이 많이 내려 간 모양이었다. 그 전에는 6명 중에서 힘을 쓸 것 같은 사람이 화아와 지토 둘이었다면, 이제는 7명 중에서 둘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위압감이나 위기감이 덜해지는 모양이었다. 성아 한 명으로 이런 분위기 전환이 생긴다는 것이 좀 억지스럽기는 하지만, 지금까 지 별로 당해보지 못한 상황인 것은 분명했다. 물론 처음에는 우리도 조용하고 예의 바르게 같이 술을 한 잔하자는 그들의 청을 완 곡하게 거절했다. 하지만 두 세 번의 권유에도 함께 자리를 같이 해 주지 않자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 고, “같이 한 잔 하자는데 뭐가 이렇게 비싸게 구는 거야? 앙?” “이리 오라니까!!” 이렇게 자기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녀석들이 나와 우리 일행의 심기를 건드렸고, 녀 석들 일행 여섯은 그대로 몸이 굳어서 의자나 탁자, 혹은 술집 바닥에 퍼질 수밖에 없 었다. “화, 환수사다. 저 녀석들 임자 만났군. 그런데 저렇게 어려 보이는데 환수를 다루 고 있네?” “그러게? 그런데 그거 봤어? 이상하게 미끌거릴 것 같은 것이 저 소년의 몸에서 뭉 클뭉클 움직이는 거?” “응? 그럼 그게 정말 있었던 모양이지? 나는 헛것을 봤는가 했는데..” 우리 주위에서 술을 마시던 사람들은 갑자기 쓰러진 패거리의 걱정보다는 맘맘의 모 습에 더 관심이 있는 모양이었다. 더불어서 성아가 그 맘맘을 움직여서 공격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다. 확실히 그라아노는 마르트낭과 많은 차이가 있는 도시였다. 마르트낭에선 이런 일이 거의 일어날 확률이 없었다. 사실 젊은 혈기에 한 번 해 보고 싶다고 해도, 주위에서 그에 동조해 줄 사람을 찾 기 어려울 것이고, 사람을 모아서 실행에 옮긴다 해도, 다른 사람들의 눈총을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심하면 자치대에 끌려가서 곤욕을 치룰지도 모르고.... 아무튼 많이 차이가 난다. 그런데 어느 쪽이 좋을까? 이 그라아노는 우리들이 느끼기에 생기가 넘치는데. 마르 트낭은 경건하고 엄숙하니.... 확실히 한 가지를 선택하라면 어려운 문제이기는 하다. 아무튼, 성아는 갑작스럽게 맘맘이 그 건달들을 공격해서 쓰러뜨리고 그것이 자신이 한 것으로 주위 사람들이 인식하자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성아 잘 했다. 역시 이 누나를 걱정해 주는 것은 성아 뿐이구나. 호호.” 능청스러운 풍아의 말과 “고맙다. 성아.” 수아의 이 한 마디로 꼼짝없이 환수사의 신분이 되어버린 성아는 그저 얼굴만 붉히 고 고개를 숙여 버렸다. “으하하. 솜씨는 있는데 아직은 어린아이로군. 내가 술을 한 잔 사고 싶어도 안 되 겠군.” “그러게 말이야. 아직은 술을 먹을 나이는 아닌 것 같구만, 나중에 다시 만나면 우 리가 한 잔 사지.” “그래, 그래 그거 좋겠다. 뭐 잊혀질 것 같지도 않은 얼굴이니 말이야.” 한 옆에서 테이블을 차지하고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악의 없는 농담을 던져와도 성아 는 계속 얼굴만 붉히고 있을 뿐이어서 우리는 난처해하는 성아를 위해 일찌감치 3층 숙소로 들어왔다. “그래도 그 녀석들 덕분에 성아를 우리 용병대의 환수사로 조금이나마 알렸으니까 앞으로 행동하기가 편해지지 않을까?” 화아가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우리들은 지금 제일 큰 방에서 모여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수다를 떠는 중이 다. 잠을 자기에는 이른 시간이고 밖으로 나돌아 다니기에는 늦은 시간. 지토는 게브를 데리고 와서 함께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있다. 도대체 저러고 있으면 어느 쪽이 주인인지 헛갈리곤 한다. “그렇겠지. 아무래도 그렇게 소문을 좀 내면, 감시의 눈을 피하기가 쉽겠지. 하지 만 그렇다고 눈에 드러나게 그런 짓을 할 필요는 없어. 우린 그냥 조용히 여행을 하 면 되는 것이야. 아직 경험이 없는 동생들을 위한 여행이라고 아까 입국 증서 받을 때 도 이야기를 했으니까. 그렇게들 알고 맞추어서 행동들 해.” 그렇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우리들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경직된 우리들, 하지만 곧 여유를 가지고 문을 향해 대답했다. “누구십니까? 문은 열렸습니다만...” 내가 그렇게 문을 향해 대답하자 슬며시 문이 열리고 두 명의 사람들이 문 안으로 들 어왔다. 약간 뚱뚱하게 보이는 30대의 남자와 조금 말라 보이는 30대의 남자. 첫 인상은 원만한 사람과 날카로운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이거 죄송합니다. 쉬시는데 방해가 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뚱뚱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별로 방해라고 할 것까지야 있겠습니까. 그래 무슨 일로 저희를 찾으셨 는지요? 보시다 시피 방이 좁아서 자리를 권하기도 어려우니 이해을 해 주십시오.” 내가 그의 인사를 받아 말했다. “아닙니다. 그런 것이야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럼 그냥 본론을 말씀드리겠습니 다. 저희는 이번에 한타에서 물건을 가지고 사르벨리로 교역을 하기위해 가는 상인들 입니다. 그런데 요 근래에 이상하게도 한타의 상인들이 실종되는 사건들이 늘고 있습 니다. 처음에는 별 일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제법 큰 상단까지도 사라져 버리는 형편 이라 불안했지요. 그렇다고 장사를 하지 않을 수는 없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번 저희 상단의 여정에 여러분들이 함께 해 주시면 어떨까하고 부탁드리려고 왔습니다. 저희 가 여기를 찾은 것도 한타의 용병대가 입국했다는 소리를 듣고 확인하고 온 것입니 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사르벨리로 가신다는 것도 알고, 또, 무슨 임무가 있어 가시 는 것이 아니라 단지 경험을 위해서 가신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짜로 같 이 가 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끼리 여행을 할 때에 비해서 위험이 늘게 되니 그 에 따르는 수당은 드릴 생각입니다.” 음, 이러면 2중 계약이 되는데... 이렇게 섞여서 간다면 더더욱 감시의 눈길을 피할 수 있게 될 테니 그것도 좋을 것 같고... “그래 어느 정도의 액수를 책정하고 오신 것입니까? 그걸 한 번 들어보고 결정을 하 도록 하지요.” 나는 그 뚱뚱한 상인에게 직접적으로 물었다. “저희는 일단 10만 덴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중간에 위급상황을 해결해 주신다면 최대 저희 상단의 물건을 팔아 생기는 이득의 사분의 일까지 드릴 생각입니다. 그리 고 그 예상 금액은 20만 덴 정도가 될 것입니다.” 결국 30만 덴의 의뢰라는 말이었다. 그런 액수를 가지고 우리를 고용하려고 하다니, 자존심이 상하는군. 하지만 지금은 우리도 위장이 필요하니 그 정도에서 들어 주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좋습니다. 그럼 그렇게 계약을 하도록 하지요. 그런데 출발은 언제 하실 예정이신 지요?” 나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실은 우리에겐 일거양득인) 그 제의를 흔쾌히 받아 들였 다. 그리고 그 상인은 지금까지 여정의 위험을 걱정하며 지체한 시간이 있어서 될 수 있 으면 빨리 출발을 해야 하니 내일 아침에 당장 출발을 하자고 말했고, 고용된 용병들 인 우리는 그 일정에 순순히 따르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 우리들은 상인들의 짐수레를 따라 그라아노를 떠났다. 이미 상인들은 출입에 대한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기 때문에 그저 수레를 따라 이 동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여정에서 우리들은 별다른 위협을 받지 못했다. 그저 가끔씩 나타나는 들짐승(거의 괴물 수준이지만)들이 있었을 뿐이고 그런 것들 은 굳이 우리의 도움이 아니라도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물론 그런 것들은 우리들에게 등을 떠밀린 성아가 나서서 해결을 했기 때문에 상인들 에게 성아는 아주 인기가 좋았다. 그리고 나중에 알고 보니 뚱뚱이 상인이 이 상단의 지휘자였고 그 옆에 붙어 다니는 인물은 상단의 감찰을 맡은 인물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감시역이라고 보면 되는 것이 다. 상단의 지출 내용과 그 적합성을 판단하는 인물이라고 하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상단에서 사용한 지출에 대해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공동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이니 무조건 감시역으로만 볼 수도 없다고 뚱뚱이 상인이 웃으며 이야기를 해 주었다. “오빠, 벌써 내일이면 사르벨리에 닿게 되겠네요? 다행히 아무 일도 없이 도착을 할 수 있겠네요.” 옆자리의 수아가 그렇게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그래. 정말 다행이구나. 성아에 대한 위험도 없고, 상단에 대한 위험도 없으니 정 말 다행이야.” “네, 그래요. 정말 무사히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전부 형님들과 누님들 덕분입니 다.” 성아가 수아의 옆자리에서 말을 받았다. “그렇지. 그렇고 말고.” 나는 그렇게 의미 없는 대꾸를 하면서 상단의 수레들을 따라 마차를 세웠다. “여기서 밤을 보낸다. 내일 점심때쯤에는 사르벨리에 닿게 될 것이다. 자 준비들 해 라.” 앞쪽에서 상단 지휘자의 목소리가 들리고 상단의 사람들은 수레를 모아서 원형으로 방책을 치고, 말을 풀어 놓고, 땔감을 준비하고, 저녁을 준비하고, 여기저기서 부산 해 지기 시작했다. 물론 우리 일행들도 가까이에 마차를 세우고 수아는 저녁 준비를 나는 상단 주위에 전체적인 알람마법과 탐지 마법을 걸고, 광아와 풍아는 대련하고 화아는 대련 구경하 고, 지토와 게브는 나란히 의자에 앉아 파이프 담배를 피우는 일상적인 휴식 상태로 들어갔다. 그 사이에서 할 일이 없는 성아는 요즈음은 수아와 함께 취사담당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맛있는 식사와 달콤한 휴식이 이어졌다. 다들 이제 내일이면 사르벨리에 도착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들뜨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평소처럼 주위의 마법을 불침번으로 잠이 들었지만, 그 잠은 오래 가지 못했 다.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다. 겨우 하루 남았는데 문제가 생기다니. 나는 내 신경에 닿는 탐지마법의 신호에 눈을 떴다. 그리고 조용히 화아와 광아만 깨워서 밖으로 나왔다. 사실 바닥에 누워 자고 있는 지토(성아에게 침대를 양보했다.)와 풍아 수아도 우리 가 움직이는 것을 알았겠지만, 굳이 깨우지 않으니 그냥 누워있을 터였다. 나는 광아에게 주위를 경계해 줄 것을 부탁하고는, 사람들이 다가오는 방향으로 화아 와 함께 발을 옮겼다. 그들은 아직 포위를 하고 있는 것이 무리를 지어 접근하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숫자는 대략 20여명. 마법사로 보이는 자도 있었고, 검사로 보이는 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기운이 미약한 자들은 아마도 환수사나 마수사 일 것이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접근을 하고 있었지만, 우리들이 그들 앞으로 성큼 성큼 걸어 나 가자 놀란 듯이 멈추어서서 경계를 하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이 앞쪽으로 상단의 숙영지가 있습니다. 상단에 특별한 볼일이 없으시 면 조금만 우회해 길을 가 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그들에게 우리들이 당신들의 접근을 이미 알고 있으니 그냥 물러가 달라는 의미 로 그렇게 말을 했다. “흐흠. 상단이라. 우리는 상단에는 별 볼일이 없다. 다만 너희 용병대에 용건이 있 을 뿐이다.” 입을 연 것은 마나량이 8써클에 이르는 것으로 느껴지는 4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음 침한 인상의 사내였다. 그가 이들 무리의 우두머리인 듯 했다. “용병대에 용건이 있다니요? 저희는 별달리 원한을 쌓은 일도 없는데 무슨 일이신지 요?” 나는 어째 상황이 좋지 못하다 느꼈지만 시치미를 떼고 되물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마르트낭에서 성사제가 감쪽같이 사라졌지. 그런데 우리의 감시를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임에도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상 당히 치밀한 조사를 해야 했다. 그리고 성사제와 함께 입성했던 인물들을 찾아내었 고, 그들이 성사제 납치를 방해했다는 것도 알아낼 수 있었지. 그런데 그 인물들이 아 주 특색이 있는 인물들이란 말이야. 두 명의 아름다운 여자와 세 명의 미남, 그리고 바위 정령족 하나, 아마 이 대륙을 모두 찾는다고 해도 그런 구성의 일행이 또 있지 는 않을 것이라는 데에 내기를 걸 수도 있지. 그런데 그 일행에 동생이 하나 늘었더 군. 마르트낭에서는 없었던 동생이 그라아노에 들어갈 때는 생겼더란 말이지. 그럼 이 제 모든 상황은 분명한 것이 아닐까?” 쩝, 성아를 변신시키는 것에만 신경을 쓰다가 정작 우리들을 찾을 것이라는 생각은 못한 것이 잘못이었다. 이런 간단한 것도 염두에 두지 못하다니... 내가 생각해도 정말 바보 같았다는 생각 이 든다. “그래서 어쩌자는 것인가? 우리 용병대에 용건이 있다면 레고리오 사제를 내 놓으라 는 이야긴가? 아니면 우리 전부에게 볼 일이 있다는 것인가.” 나도 더 이상 우리를 감출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발뺌하지 말라는데 어쩌겠는가. “물론 우리의 용무는 성사제에게 있지만, 용병대에게도 얼마간 알아볼 것이 있지. 사제의 입이 얼마나 무거웠느냐에 따라서 너희의 운명도 결정이 되겠지.”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겨우 8써클 유저에 해당하는 녀석이 대가리 수만 믿고 함부로 설치는 꼴이라니... 나는 서둘러 주위에 다른 사람들의 접근이 있는지 알아보았다. 하지만 근처에 다른 사람들은 더 이상 없었다. “그러니까 우리들도 잠시 당신들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는 말이로군?” 내가 들끓는 분을 삼키며 조용히 물어보자 그 마법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거야 물론, 별다른 것이 없다면 곱게 보내 줄 생각이니까 그렇게 걱정은 하지 않 아도 될 거다.” 걱정이라, 글쎄 그걸 누가 해야 하는지 모르는 녀석들이라니까, 아무튼 요즘에는 왜 분수를 아는 녀석들이 없는 것일까. “그런데 겨우 이정도 인원으로 우리들을 어쩔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의외 로군. 우리를 파악했다면 이런 정도로 어림도 없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는 건가?” 내가 한 말이 지금까지의 분위기와는 많이 다른 내용이란 생각이 들었는지 마법사를 비롯한 일당들이 긴장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크흐흐. 이 인원으로 부족하다고 했나? 상당한 자신감이군. 하지만 여기 있는 이들 을 상대해 보면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지. 아무튼 꼭 확인을 해야 직성이 풀리 는 멍청한 놈들이 있지. 홀드.” 마법사 녀석이 말의 끝에 홀드 마법을 걸었다. 하지만 그런 것에 걸려서 꼼짝도 못하고 있을 내가 아니고, 내가 있는데 동생들이 마 법에 구애를 받게 만들고 싶은 생각도 없다. 간단하게 홀드 마법이 무효화되는 것을 느낀 마법사는 잠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디스펠 매직인가? 제법 실력이 있는 모양이군. 내가 건 마법을 무효화시키다니. 하 지만 다른 실력은 어떨까? 공격해라. 죽여도 상관없다.” 자신의 마법으로 제압하기가 어렵다고 느꼈는지 마법사는 기사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 렸고, 우리는 순식간에 포위를 당했다. 뾰로롱 뾰로 뾰로롱 하지만 어느 틈에 따라 온 것일까? 란이가 기사들의 뒤쪽에서 불화살을 날린 탓에 기사들은 우리들을 공격하기도 전에 방어 태세에 들어가야 했다. “아니, 저건 또 뭐야? 파이어 애로우.” 란이의 모습에 마법사가 짜증스럽다는 듯이 불화살을 날렸지만, 란이에게 불이나 바 람은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는 공격이다. 거기다가 란이가 그런 불화살에 맞아 줄 것도 아니고 말이다. 란이는 이리 저리 몸을 움직이며 불화살을 피하고 기사들에게 불화살을 날리고 있었 다. “우리도 가 볼까?” 나는 화아와 광아에게 말하고는 기사들에게 달려들었다. 매끈한 공격, 빠른 공수 전환, 거기에 더해서 검에 실린 내공력. “뭐야? 이거. 혹시 화염기사단이라는 말인가?” 나는 몇 번 기사들과 검을 섞어 보고는 내심 중얼거렸다. “형, 이거 그 심법 같은데. 맞지?” 화아도 내가 느낀 것을 느낀 모양인지 큰 소리로 물어 왔다. “맞는 것 같다. 겨우 만났더니 이런 상황에서 보게 된단 말이야?” 나는 왠지 모를 짜증이 솟구쳤다. 겨우, 겨우 넥스의 흔적을 발견한 것이 내 목에 칼을 꽂으려는 녀석들에게서라니 기 가 막힐 일이다. “이런 젠장. 화아 광아 이것들 곱게 잡지 말고 어디 한 군데씩 부러뜨려, 될 수 있 으면 팔 하나씩이 좋겠다.” 나는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는 기사들 틈으로 달려 들어가, 기사들의 팔을 검으로 그 어버렸다. 사람에게 칼질이라. 내가 그런 적이 있던가? 생소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마물들과 다르지 않은 느낌이었다. 더 부드러운가? 하지 만 왜 이렇게 낯설게 느껴지는지. 상처입고 지르는 비명이 사람의 입에서 나온다는 이유일까? 나는 기사들의 팔에 깊은 상처를 남기면서도 이런 생각에 빠져 있었다. 순간 등 뒤를 파고드는 위기감. 나는 급히 땅 위로 몸을 굴렸다. 퍼~엉 “으아아아악!!” 내가 땅 위로 몸을 굴린 빈 자리에 커다란 불덩이가 지나가 내 앞에 있던 기사를 덮 쳐 버렸다. 순식간에 피부가 녹는 열기에 기사가 처절한 비명을 지른 것이다. “실드!” 나는 땅에서 일어나며 나에게 마법을 날린 마법사에게 신경 쓰기보다 기사의 몸에 붙 은 불을 꺼 주었다. 불이 붙은 주위에 강력한 실드로 공기와 마나를 차단하면 마법으로 붙은 불이라 하더 라도 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나는 그와 동시에 마법사를 찾았다. 마법사는 란이의 공격을 실드로 막으며 눈치를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전황이 좋지 않게 흘러간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이런 녀석들은 꼭 상황이 좋지 않으면 도망을 간다. 하지만 나는 우두머리를 놓치고 꼬리를 잡을 생각은 없었다. 마법사가 도망을 가는 방법이야 간단하다. 마법, 그러니 그것만 쓰지 못하게 만들면 그만인 것이다. 나는 그 녀석 주위의 마나를 동결시켰다. 물론 그게 쉬운 일은 아니다. 8써클에 이르는 마법사의 마나를 동결시킨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보통의 경우). 하지만 나는 9써클, 그것도 같은 9써틀에 비해서는 마나량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기형적인 9써클이다. 그러니 8써클의 마나를 동결시키는 것이 불가능 한 것은 절대 아니다. (실제로 9써클이면 8써클 마나를 동결시키는 것이 어렵지 않다.) 갑작스럽게 주위의 마나가 동결되자 실드가 깨진 마법사의 몸으로 란이의 마법이 날 아들었다.(란이는 마나를 쓰지 않는다.) “크허헉!” 팔 다리에 란이의 마법을 직격당한 마법사는 비명을 지르며 땅을 굴렀다. 나는 기사들을 광아와 화아에게 맡겨 두고(처음에는 적응을 잘 못하더니 곧 기사들 을 어렵지 않게 제압하고 있었다. 얼음기사단 보다는 수준이 떨어지는 모양이었다.) 마법사에게로 다가갔다. 마법사는 땅바닥을 구르며 몸에 붙은 불을 끄고(구른 이유가 그런 것이었군. 난 고통 스러워 그런 줄 알았더니) 일어나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크흐, 대단하군. 셋이서 8써클 마법사가 포함된 기사단 스물을 상대하다니, 거기다 가 9써클 마법사라니, 우리 계산이 완전히 틀렸군.” 녀석은 중얼거리며 자꾸만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이봐, 그만 멈추는 것이 좋겠다. 조금만 더 움직이면 이번에는 다리를 모두 잘라주 마.” 나는 녀석의 움직임이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다. 두려움 때문에 자연스럽게 뒷걸음질을 치는 것과는 거리가 먼 행동. 무언가 의도하 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 모습에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마법사는 내 말에 걸음을 멈추고,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자, 이제 순순히 항복을 하는 것이 좋겠다. 너의 부하들도 이미 모두 제압된 모양 이니 말이야.” 나는 화아와 광아 쪽에서 상황이 정리되는 것을 느끼고 그렇게 말했고, 마법사 녀석 은 내 등 뒤로 시선을 주었다가는 실망한 표정이 되어서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저들이나 나에게서 무엇을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괜한 고생은 하 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들의 죽음 뒤에는 영원한 권력과 영광과 쾌락이 있으 니 도리어 우리에게 죽음은 복되도다. 크하하하” 무슨 헛소리야? 설마하니 이 녀석들 광신도? 전에 레고리오를 납치했던 녀석들도 우두머리가 자신들을 사지死地에 두고 가려해도 담담하게 그것을 받아들이더니, 이 녀석도 죽음이 무슨 영광이고 쾌락이고 권력을 준 다고 떠들고 있으니.... 나는 녀석의 미친 소리에 잠시 얼떨떨한 기분이 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미친 듯이 웃던 마법사 녀석이 멀쩡한 한 쪽 팔로 품속에서 스크롤 을 꺼내서는 입에 물고 찢었다. 미친, 공간이동이다. 아무리 스크롤이라고 해도 마나가 봉쇄된 상태에서는 어떤 위험이 생길지 모르는 것 이었다. 거의 자살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스크롤은 출발지 지정 없이 도착지만을 계산해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스크롤이 찢 어지는 순간 출발지의 마나를 사용해서 출발지 계산을 해 주게 되어 있는데 지금처럼 마나가 봉쇄된 경우에는 출발지 계산이 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사태가 발생할지 모른 다. 지금처럼, 허리 아래를 남겨두고 사라지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는 것이다. 정말 미친놈이다. 8써클이면 이런 것이야 기분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짓을 한 것을 보면, 정말 미친놈은 미친놈인 모양이다. “크흑” “윽.” “푸헉!” 나는 재빨리 등 뒤에서 나는 소리의 원인을 찾았다. 그리고 그 원인이 남아있던 몇몇의 기사들이 스스로의 목이나 가슴에 칼을 꽂음으로 써 나는 소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대부분의 기사들은 혈도가 제압되어 있었지만, 심한 상처로 움직이기 어려운 사람들 은 혈도를 점혈하지 않았는데, 그들이 마지막 남은 힘이라도 쓴다는 듯이 단검으로 숨 을 끊었던 것이다. 화아와 광아도 그것을 막으려고 했던 모양이지만, 혈도가 잡히지 않은 녀석들은 모 두 목숨을 끊었다. “미안해 형. 이럴 줄은 몰랐어.” “죄송합니다. 형님. 미처 상상을 하지 못한 상황이라...” 화아와 광아가 어처구니없는 모습으로 미안해했다. “아니야.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나도 상상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그게 너희 잘 못이겠어? 괜찮아. 눈앞에서 사람이 죽은 것은 기분 나쁘지만 그렇다고 이런 경우까 지 마음에 두고 싶지 않아.” 나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하고는 남은 기사들을 살폈다. “뭐, 이 자들의 눈빛을 봐도 기회만 되면 죽어버릴 것 같은데? 어쩌지?” 나는 도리어 남아있는 열 서너 명의 기사들이 문제였다. 이들도 혈도가 풀리면 자살을 기도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걱정이네요. 그런데 형님, 이 자들이 분명 화의 심법을 쓴 것이 맞지요?” 광아가 내 말에 동조하며 물었다. “그래 맞다. 분명 그것이야. 뭐 약간은 변형되어서 완전한 위력이 나오는 것은 아니 지만 화의 심법인 것은 분명하다.” “그럼 이자들이 화염기사단의 일원들이란 말이야?” 내 말에 화아가 물었다. “그건 나도 모르지, 그 사이에 화염기사단의 심결이 밖으로 유출되었다면 또 모를 일이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들이 화염기사단의 일원인 것은 분명해.” “화염기사단이라, 그런데 아까 그 마법사는 뭐지? 그리고 이 녀석들은...” 화아가 마법사로 관심을 돌렸다. “글세, 내 생각에는 전에 레고리오를 납치하려던 그 녀석들과 한 패인 것 같아. 아 까 이야기로 분명 마르티낭에서부터 쫓아온 것 같으니까 말이야. 아마도 레고리오가 걱정하던 그 패거리들 중의 일부인 모양이지. 하지만 이상한 것은 신성제국이라는 이 곳에서 어떻게 암흑교와 관련이 된 인물들이 돌아다니고 있느냐 하는 것이야. 설마 이 나라에서 암흑교와 손을 잡은 녀석들이 있다는 걸까?” 나는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해서 화아와 광아에게 조용히 이야기했다. “글쎄, 저 녀석들을 어떻게 심문이라도 해 볼 수 있으면 좋겠는데, 혈도를 풀면 죽 으려고 들 테니, 손발을 묶는다고 해도 혀라도 깨물 녀석들인 것 같단 말이야.” 화아도 대책이 안 선다는 듯이 한 쪽 구석에 구겨지듯 널려있는 기사들을 보며 말했 다. “형님, 정말 어쩌지요? 저들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냥 내공을 없애고, 팔다리의 근력을 떨어뜨려서 내버려 둬라. 어차피 죽을 녀석 들이라면 우리가 가고 나서 혈도가 풀린다면 죽겠지. 내가 최면이라도 걸고 싶지만 그 렇게 사는 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니 자기 의지로 하고 싶은 데로 살도록 내버려 둬 라.” 최면 마법을 이용하여 저들의 비밀을 캐 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최면마법은 저런 광적인 집착이 있는 이들에게는 잘 통하지 않는다. 어쩌면 정신 붕괴가 일어날 수도 있다. 잠시 후, 화아와 광아는 제압된 기사들의 내공을 없애고, 근력을 떨어뜨리고는 내 옆 으로 돌아왔다. “가자. 가서 잠을 좀 자야지.” 나는 그렇게 동생들을 데리고 마차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차에 돌아와서 풍아를 깨워 그 사이에 있었던 사정을 설명하고 바람의 하 급 정령을 불러서 그들을 감시하도록 부탁을 했다.(나는 지금 동생들과 지토 이외에 는 어떤 정령도 부르지 못한다는 것을 여러분도 알고 있을 것이다. 예전 청색지대에 서 바람의 정령왕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러는 중에 수아, 지토, 성아가 깨어나 이야기의 전모를 들었지만, 그렇다고 별달 리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런 일이 있었군.’하고 말 뿐이다. 날이 밝고 우리가 신성제국의 사르벨리로 출발을 할 때, 풍아가 기사들의 소식을 전 해 왔다. 별로 아침에 듣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 기사들의 절반 정도는 자신의 가슴에 칼을 꽂았고, 나머지 절반 정도는 무거운 몸 을 이끌고 말을 타고 떠났다는 것이다.(멀지 않은 곳에 그들이 타고 온 말이 있었다 고 한다.) 그나마 다행으로 그 이후로는 별 사건 없이 상단과 우리 일행은 신성제국의 사르벨리 로 들어 설 수 있었다. 성문을 지키는 사람들은 성기사와 화염기사단이 연합한 모습이었는데, 그들은 별다 른 검문 없이 우리 일행을 입성시켰던 것이다. 처음으로 본 정식 화염기사단의 복장은 검붉은 망토에 붉은 빛이 감도는 갑주를 입 고 있었고, 가슴에는 불타는 알이 그려져 있었다.(처음에는 란이의 모습이 아니었을 까, 넥스가 만들었다면 분명 얼음기사단과 마찬가지로 란이의 모습이었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그 알의 모습이 무슨 괴물의 알처럼 위압적이고 흉물스럽게 보이는 모 습이었다.(얼룩얼룩하고 엉망으로 금이 가 있는데다 박쥐의 날개에 발은 본 적도 없 는 생물의 발이었다. 눈과 부리는 그야말로 해골의 눈과 매부리였다.) “오빠, 저거 란이를 그린 것이었을까요? 설마...” 성문을 지나며 수아가 낮은 목소리로 물어 볼 정도였다. 뾰로로로 뾰뾰뾰롱 - 주인님 저기 기사의 가슴에 그려진 것이 저의 모습이라고 생각해요? 이럴 수는 없 는 겁니다. 넥스 그 사람 정말 미워요. “ 란이야, 저걸 넥스가 그리지는 않았을 거다. 시간이 지나면서 바뀐 것이겠지.” 나는 이런 말로 란이도 위로해야 했다. 그렇게 성문을 통과하고 상단을 따라 그들이 머물 여관에 도착을 했을 때, 우리와 상 단의 계약은 끝이 났다. 그리고 그 사이에 별다른 사건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10만 덴의 고용비용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나는 뚱뚱한 상단 지휘자에게 지나가는 말로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린다면 좀 이상합니다만, 앞서 신성제국에 들어온 상인들이 실 종 된 것이 혹시 사르벨리에서 거래를 마친 후가 아닌지 잘 알아보시고, 만약 그렇다 면 여기서 거래를 마치는 즉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한타로 돌아가는 방법을 구 하도록 하십시오. 만약 그 방법을 구하지 못하시면, 이틀 내로 저를 찾아오십시오. 그 동안은 사르벨리에 머물면서 볼일이 있으니 다른 곳으로 가지는 않을 겁니다. 물 론 저희는 다른 볼일이 있으니 여러분을 다시 그라아노로 호송하는 일은 하지 못할 것 입니다. 그래도 도울 방법은 있으니 찾아오시면 도와드릴 수는 있습니다. 그럼.” 나는 그렇게 상단 우두머리에게 이야기를 하고 그들과 헤어졌다. 그 뒤에 우리에게 남은 일은 레고리오 사제의 교황전 입전入殿이었다. “성아야, 넌 이제 어떻게 교황전에 들어갈 생각이냐? 그냥 교황전 앞에 내려주면 되 는 거지?.” 나는 수아 옆에 앉아 생각에 잠긴 레고리오에게 물었다. “아~! 네에. 저는 그냥 교황전 입구로 들어갈 생각이니까요. 설마하니 교황전에까 지 그런 인물들이 있을 턱이.... 없진 않겠지요? 뭘 농담을 한 것을 가지고 그렇게 노 려보고...” 수아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것을 느꼈는지 성아가 말을 얼버무리고 만다. “그래서, 어떻게 들어갈 생각인데?” 수아가 성아의 행동이 미덥지 못하다는 듯이 대답을 재촉했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교황전에도 비밀 통로가 있어요. 제가 예전에 그 곳으로 몰 래 나와서 사르벨리를 돌아다니곤 했었어요. 넘치는 신성력을 아무 곳에도 쓰지 않고 있는 것은 죄악이다 싶은 마음에, 밤마다 나와서 사르벨리의 빈민들이 사는 곳에서 주 신의 은혜를 나누어 주는 일을 했었지요.” 성아는 그렇게 말하며 조금은 자랑스럽다는 눈빛이 되었다. “그래서? 그 통로로 들어가겠다는 말이야? 정말 그 길이 안전하기는 한 것이야?” 수아는 여전히 안심이 되지 않는다는 듯이 확인하듯 물었다. “음... 그건 저도 잘... 사실 제가 거기로 드나드는 것을 아는 사제님들이 제법 많 이 있었으니까 그다지 비밀이랄 것도 없겠네요.” 성아는 별로 자신이 없는 목소리가 되었다. “그런데 오빠,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전부 우리를 알아보지 않을까 요? 어제 밤에 그런 일이 있었으니 이미 소식이 전해 졌을 텐데요.” 풍아가 길옆에 마차를 세우고 옥신각신 하는 모습이 걱정스러웠는지 한 마디 참견을 해 왔다. “하하, 우리가 여기서 도망을 간다고 감시자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어쩌겠니. 그냥 편하게 생각하고 지내는 것이 좋아. 그럼 피곤해 지는 것은 저들이 지. 저들은 절대 이 사르벨리 한 가운데에서 우리들을 어찌할 생각은 못 할 거야. 그 러니까 걱정하지 말아.” 내가 그렇게 자신 있는 표정으로 이야기하자 화아가 이상하다는 듯이 물어왔다. “하지만 형, 그 녀석들 목숨도 아깝지 않다고 하는 녀석들인데 여기서 무슨 일이 벌 어질지 알 수 없는 일이잖아. 성아를 암습하려고 한다던가... 방법은 많이 있을 것 같 은데?” 화아의 말이 전부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암중의 그 자들이 사르벨리에서 드러내 고 일을 벌이지 못하리란 확신이 있었다.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그건 녀석들에겐 너무 큰 모험이야. 일단은 마르티낭에서 는 왜 레고리오가 공격을 받지 않았을까? 그걸 생각해 봐. 거기에도 목숨을 내 걸고 무슨 짓이든 하려고 했으면 할 수 있었는데 그런 일이 없었어. 이유는 뭘까?” 내가 그렇게 말하고 일행을 돌아보자, 레고리오까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레고리오 네가 모르면 누가 안다는 거야? “그건 말이야. 사람들의 이목이야. 사건의 확대지. 마르티나의 성사제가 마르티낭에 서 죽는 것과, 어느 한적한 숲에서 죽는 것은 차이가 크지. 적어도 도시에서 그런 일 이 일어나면 도시 전체에 대한 비상이 걸리지만 숲에서 일어나면 숲에 대한 수색이 있 을 뿐이야. 그 차이는 엄청나게 크지. 파장이 크다는 말이야.” “그게 어쨌다는 건데?” 화아는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건, 신성제국에서 음모를 주도하는 세력은 아직 그 힘을 키우지 못한 상태일 거 라는 거야. 이제 겨우 시작하는 음모라고나 할까? 그러니 처음부터 상황을 어렵게 끌 고 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지. 어쩌면 레고리오가 교황을 만나는 것도 이제는 막지 않을지도 몰라.” “에?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오빠?” 풍아도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이다. “꼬리가 짧으니까 끊어버리고 몸통을 숨길 수 있는 때라는 말이다. 만약 그렇지 않 았다면 레고리오는 마르티낭에서 이미 죽은 목숨이라고 봐야 해. 그리고 그런 시도가 없었다는 것으로 미루어서 이런 추리가 가능해 지는 것이지.” 내 말이 끝나자 화아와 풍아, 수아, 성아는 겨우 이해를 한 모양이었다. “그렇구나. 그럼 성아가 교황전에 가는 것이 위험하지 않다는 말이네? 그럼 그냥 가 면 되겠다.” 풍아의 말이다. “그렇다고 어째 말이 그렇게 되냐? 확실하지는 않은 거잖아. 그러니까 성아에 대한 문제도 최대한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어.” 화아가 옆에서 지금까지의 미욱함을 만회하려는 듯 오랜만에 똑 부러지는 소리를 한 다. “어쨌든 내 생각에는 어느 정도는 성아에 대한 위험이 줄었다고 볼 수 있어. 적어 도 사르벨리에 들어온 이상은 말이야. 그러니 이제 남은 것은 성아를 성아가 아닌 레 고리오로 만들기만 하면 될거야. 지금은 성아로 있는 것이 도리어 위험하지.” 나는 그렇게 말을 마치고는 성아를 데리고 마차로 들어가 사제복과 성물을 꺼내 주 고 옷을 갈아입게 했다. 그리고 우리들이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 성아는 없고 레고리오 성사제만 남아 있었 다.(비록 머리카락이, 보기에 불편한 느낌을 주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럼 오빠. 이제 사제님을 어떻게 하면 되지요? 비밀 통로로 모시나요?” 수아는 변해버린 레고리오의 모습에 말투를 바꾸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다. 도리어 이런 경우에는 비밀통로가 더 위험하다고 봐야겠 지. 그 곳에서 죽어버리면 아무도 모르게 실종처리가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지금 은 바로 정공법을 쓸 때야.”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마차를 몰아 교황전으로 향했다.(물론 길 안내는 레고리오 사 제의 몫이었다.) 뭐 교황전을 길 안내를 받아 간다는 것도 이상한 말이기는 했다. 가장 넓고 잘 닦여진 길과 성의 입구에서부터 주목을 받았던 건물이 있는데, 굳이 안 내라니. 한 나라의 황궁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겠지만, 동시에 한 나라의 국교를 총괄하는 최고위신전의 의미를 아울러 지니는 교황전의 모습은 웅장, 장엄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었다. 단지 그 입구가 개방되어 신도들이 외성에 해당하는 예배실을 무상으로 출입할 수 있 다는 것이 다른 점이라면 다른 점이었다. 그리고 우리들이 교황전의 대예배실에 도착했을 때에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기도 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레고리오가 안으로 들어가 앞으로 걸어 나가자 곳곳에서 그를 알아보는 사람 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저분은 주신의 빛 레고리오 성사제님이잖아?” “그래 맞아. 나도 저 분에게서 신의 은총을 입은 적이 있어.” “아니 그런데 마르트낭에 계시지 않았나? 언제 오신거지?” “글쎄...” 조용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낮은 웅성거림으로 바뀌는 것을 보고, 나는 더 이상 우 리들이 할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사제님, 그럼 저희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나는 조용히 레고리오의 뒤에서 말하고는 몸을 돌렸다. “사제님, 남은 비용은 기부금으로 생각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형님이 받으실 생각 이 없으신 모양이네요.” 광아가 남은 대금에 대한 마무리를 그런 식으로 내렸다. 그냥 광아가 슬쩍 받아오면 좋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광아가 내 본 마음을 잘 읽은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교황전을 빠져나가는 우리들을 레고리오 성사제는 잡지 않았다. 아마도 마음속에서는 많은 아쉬움과 이별에 대한 씁쓸함이 남겠지만, 사제의 복장을 입고서는 그런 사소한 감정을 쉽게 내 보일 수도 없을 터였다. “다시 뵙게 되기를 주신께 기도드리겠습니다. 또한 평안한 여행이 되시기도 아울 러....” 이것이 레고리오가 낮은 목소리로 대신한 인사였다. 교황전을 나온 우리는 곧 여관을 잡고 이른 식사를 하고, 휴식을 취했다. “이제는 넥스가문의 영지를 찾아가는 일이 남은 건가요?” 모두들 휴식을 취하며 의자에 앉거나 침대에 앉거나 혹은 바닥에 앉거나 하는 느긋 한 자세로 늘어져 있을 때, 수아가 앞으로의 일정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거야 언제나 형이 결정한 문제니까 형이 그런다면 그렇게 하는 거지뭐.” 화아가 모든 것은 내 결정에 달렸다는 말로 우리의 여정에 대한 모든 것을 나에게 미 루었다. 사실 여행의 모든 여정이 내 결정으로만 된 것은 아니었는데... 누웬으로 먼저 간 것 도 내 의견은 아니었던 것 같고, 암흑제국으로 가게 되었던 것도 내 의지는 아니었 고, 그나마 암흑제국에서 여인왕국으로 다시 신성제국으로 온 것은 내 뜻이었을까? 하지만 그것도 길 따라 돌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나에게 여정을 맡긴다는 것이 나쁘지는 않은 기분이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음. 일단 그라아노에서 함께 온 상인들을 기다려 보고, 그들에 대한 문제가 해결 되면 곧장 넥스 가문의 영지를 찾아가도록 하자. 그 전에 먼저 넥스 가문의 영지가 어 느 곳에 있는지 정확한 위치를 알아보는 것도 필요하겠지? 내일은 일단 넥스 가문에 대한 것을 알아보도록 하자. 그리고 모레까지 상인들이 연락이 없으면 다음날 떠나기 로 하고...” 내가 그렇게 간단히 일정을 이야기하자 지토가 말꼬리를 물고 나왔다. “그런데 루탄. 상인들은 왜 신경을 쓰는 거냐? 이미 고용에 대한 대가는 다 치룬 것 으로 아는데 말이야. 그들과 우리 사이에 주고 받을 것은 더 이상 없잖아?” 이럴 때는 지토도 아직은 사람들 사이의 정에 민감하지 못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도 잠시라도 보호를 했던 사람들이 허무하게 죽어가는 것을 볼 수는 없잖아? 그래서 그러는 거야.” “죽다니? 왜 누가 죽는 다는 거야?” 이번에는 풍아가 끼어들었다. “응, 그 상인들 말이야. 어쩌면 사르벨리에서 거래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변을 당 할지도 몰라. 그들은 짐을 가지고 오는 길을 걱정했지만, 실제로 더 위험한 것은 물 건 이 아니라 돈을 들고 돌아가는 길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지 않겠어?” “그건 그렇겠군요. 형님. 그래서 상인들에게 실종된 사람들이 이 곳에서 거래를 했 었는지 알아보라고 하신 거로군요. 그들이 거래 후에 사라진 것이라면 이번에 우리가 데리고 온 사람들도 상당한 위기감을 느끼겠군요. 그래서 도와주시려는 거란 말씀이 죠?” 광아가 확실히 이럴 때는 정확한 판단을 하는 것 같다. “물론 그런 것도 있지만, 실은 그들을 도와주는 대신 우리들에게도 이익이 생기지 않겠냐? 뭐 레고리오 사제에게 받지 못한 돈의 일부라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말 이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풍아가 대뜸 입을 열었다. “그딴 먹지도 못하는 돈은 뭐 하러 그렇게 모아요? 벌써 가지고 있는 돈만해도 400 억 덴이 넘잖아요. 거기다가 그란드 왕국 재상도 600억 덴 빚이 있고. 그런데 별로 쓰 지도 않으면서 모으기만 하면 뭐한다구.” 어째 조금 목소리에 불만이 끼어 있는 것을 보니, 사고 싶은 물건들이 있는 모양이었 다. “풍아가 뭘 가지고 싶은 것이 있는 모양이구나. 그래 뭘 가지고 싶은데? 언제 오빠 가 안 사준 적 있었니? 요즈음에 워낙 일이 많아서 그랬던 거지. 그래 뭐야? 응 오빠 가 내일 나가서 사 줄 테니 이야기만 해라.” 나는 얼른 풍아의 비위를 맞추었다. 사실 그 동안에 여행을 하면서도 동생들이나 지토을 위한 물건을 제대로 사 본 적이 별로 없었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정말이죠? 오빠. 호호. 내일 뭐든 사 주시는 거지요? 잘 됐다. 수아야 너도 사고 싶은 거 많이 사. 그리고 화아 오빠하고 광아도. 그리고 지토 아저씨도요. 내일은 전 부 거창하게 장을 보는 거야. 호호호호.” 내 대답을 들은 풍아의 얼굴은 금세 웃음이 피었고, 풍아의 수다 덕분에 내일 하루 는 온 종일 동생들과 지토의 지갑 노릇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역시 그 느낌대로 하루 종일 끌려 다니며 이것 저것 물건들을 사 주면서 때로 는 당황하고(어쩌다 여동생들 속옷 사는 곳에 끌려 들어가야 했을까?) 때로는 미안하 고(신발이 거의 헤어져 있었다.) 때로는 황당하고(풍아가 보석상에 들어가자고 졸랐 을 때) 때로는 행복하고(수아가 오빠를 위해 장갑을 선물했다. 돈은 내 돈이지만) 때 로는 화가(지토가 대장간에서 발견한 도끼를 꼭 사야겠다며 우겼을 때. 참고로 무지 비싼 것이었다.)나기도 했지만, 하루 종일 돌아다닌 끝에 머리에서 발끝까지 단장을 한 동생들과 지토의 모습은 나를 즐겁게 했다. 화아는 여전히 붉은 색의 옷을 선호했지만 이번에는 헐렁한 도복 같은 옷이 아닌 가 죽갑옷과 망토를 두르게 했다.(불의 정령이라 추위는 타지 않겠지만 겨울에 그런 옷 을 입고 다니면 다른 사람이 춥게 느껴진다. 그래서 바꿨다.) 풍아는 이번에도 가죽갑옷을 입었다. 여성용이 거의 없어서 고생했지만 운이 좋았던 지 한 잡화점에서 상당한 고가의 여성용 갑옷을 살 수 있었다. 전체적인 색은 엷은 황 색과 하얀색이 어울린 갑옷이었는데 망토를 하늘색으로 선택해서 둘렀다. 수아도 옷을 바꾸기는 했지만 여전히 비슷한 모양이었다. 역시 파울을 두르고 있으 면 그것만으로도 최고였다. 광아는 이번에 아예 하얀색으로 치장을 했다. 부츠에서 바지 윗옷과 조끼, 그리고 그 위를 덮는 로브 형태의 옷까지도 모두 흰색으로 통일을 했던 것이다. 지토는 멋과는 전혀 상관없는 모습을 고수했다. 갈색의 사냥모자에 초록색 조끼, 갈 색 상의와 하의를 선택한 지토의 모습은 그저 어느 시골의 늙은 농사꾼의 모습처럼 보 였다. 우리는 그렇게 사르벨리를 돌아다니며 필요한 물건들을 사고 동시에 넥스 가문에 얽 힌 자잘한 이야기들을 묻기도 했다. 특히 수아나 풍아가 그런 이야기를 물으며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눈빛으로 나이든 늙 은 상인들을 바라보며 조르면, 상인들의 입에서는 젊은 시절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경 험한 자잘한 모험담을 덧붙인 이야기가 흘러 나왔고, 그 여행 중에 들렀다는 넥스 가 문의 영지에 대한 것이 더불어 섞여 나오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상인들은 넥스 가문의 영지를 조그마한 촌 동네로 치부하고 있었고, 때문 에 넥스 가문의 영지는 초입에 있는 몇몇의 마을들 이외에 깊은 곳까지 찾아 들어간 상인들이 별로 없었다. 또, 영지 내로 깊숙이 들어갔다가 온 상인들이라 할지라도 험준한 산악지형과 빽빽 한 침엽수림으로 이루어진 험난한 여행길만을 떠올릴 뿐, 실제로 영지 내부의 모습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어찌 보면 숨긴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영지 내부 깊은 곳의 모습은 별로 알려진 것 이 없는 것이었다. 하루의 피곤한(장을 보는 것은 피곤하다. 그것도 두 여자와 함께 장을 보는 것은 더 피곤하다.) 일과를 마치고 여관방으로 돌아온 우리들은 오늘 들었던 넥스 가문의 영 지 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를 조합해 보았다. “그러니까 넥스 영지는 이 사르벨리에서 2주일 정도 달려야 하는 거리에 있다는 말 이네. 꽤 멀구나.” “그렇지 언니? 하기는 신성제국의 제일 북쪽 변방이라고 했으니 그 정도는 가야겠 지.” “그나저나 그 거리를 느긋하게 갔다가는 눈이 내릴 때나 되어야 영지에 도착하겠 어. 난 추운 건 별로 달갑지 않은데.” “그거야 화아 형님이나 그렇지요. 눈 내리는 것도 참 좋습니다. 눈 내린 경치가 얼 마나 아름다운데요.” “아무튼 꽤나 시간일 걸릴 것 같긴 하다. 열심히 말을 달려서 2주 거리면, 우리가 가는 속도로는 한달이 꼬박 걸리고도 모자랄지 모르는데... 정말 긴 여정이 되겠구 나.” “에이, 오빠는 그게 무슨 문제야? 어차피 할 일도 없잖아. 천천히 가면 되지. 경치 도 구경하고, 사람들도 사귀고. 그렇게 가면 되는 거잖아.” 풍아는 아무 문제없다는 듯이 싱글벙글 웃고 있다. 사실 그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래, 그렇지. 그냥 닥치는 대로 부딪치고 보는 거지. 그지?” 내가 그렇게 속 편하게 결정을 내리려고 하자 광아가 제동을 걸고 나섰다. “하지만 형님, 아무래도 넥스 영지의 소식이 너무 밖으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생 각이 듭니다. 더군다나 몇몇의 상인들 중에서 영지 내부에 깊이 들어갔다 왔다는 사 람 들도 의식적으로 영지 내부의 이야기를 꺼려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 그건 나도 느꼈어. 뭔가 느낌이 시원하지 못해.” 광아의 말에 가만히 파이프 담배를 피우던 지토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는 어쩔 도리가 없는 거잖아. 그렇다고 그런 일로 상인들을 잡 아 심문을 해 볼 수도 없고 말이야. 안 그래?” 나는 다시 광아와 지토의 걱정을 잠재웠다. “그렇기는 합니다. 가서 보면 알게 되겠지요. 형님.” 광아는 이런 말로 한 발 물러서 주었고, 지토는 그저 아무소리 없이 담배 연기만 뿜 는 것으로 양보의 태도를 취해 주었다. “그럼, 내일은 어쩔 거예요? 별로 할 일도 없으니 그냥 여관에서 상단의 사람들이 오는지 안 오는지를 살피고 있을 거예요?” 수아가 내일의 일정을 물었다. “글쎄, 오빠는 내일 하루는 좀 쉬었으면 하는데, 왜 그런지 가을이 깊어지면서 몸 이 노곤해 지는 것 같아.” 이건 전적으로 핑계에 불과하다. 내가 몸에 이상이 있다고 하면 여기 있는 녀석들 중 에 믿을 녀석은 하나도 없다. 그나마 수아는 걱정하는 시늉이라도 하겠지만 다른 녀 석 들은 담 너머에서 짖는 개소리보다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별달리 사르벨리에서 구경할 만한 곳이 없다는 것을 오늘 하루 몸으로 보고 느낀 일행들은 내 결정에 별 불만이 없어 보였다. 다음날 우리는 오래 기다리지 않고 상단의 인물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우리가 아침을 먹고 방으로 돌아오고 얼마 되지 않아서 상단 경비 감찰과 함께 왔던 것이다. 조금은 급한 모습으로 방으로 들어온 그를 맞아 의자를 권했다. “그래, 제가 드린 말씀을 잊지 않으셨던 모양이군요. 한타의 상인들은 이 사르벨리 에서 거래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실종된 것인 모양이지요?” 내가 그렇게 뚱뚱한 상단 지휘자에게 말을 꺼내자 상단 지휘자는 상당히 긴장된 모습 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저희가 거래하는 도중 알아보니 한타의 상인들은 이곳에서 거래를 무 사히 마쳤다고 합니다. 때문에 이곳 상인들은 한타의 상인들이 실종되고 있다는 사실 도 전혀 모르고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벌써 3개월 째 벌어지고 있는 일인데도 말입니 다.” “그래요? 3개월이라. 상당히 오랜 시간인데도 한타에서는 신성제국에 어떤 항의도 없었나요?” 나는 이상해서 물어 보았다. “그거야, 저희 왕국에서 시성제국과의 교역을 전면 허용한 상태가 아니고 우리 상인 들이 음성적으로 거래를 하는 형식이기 때문에 나라에서 안다고 해도 외교적인 문제 로 언급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모양입니다.” “그럼 그 동안에 실종된 상단의 수가 얼마나 되는 거지요?” 내가 다시 물었다. “글쎄요. 정확하지는 않지만 열흘에 두 번 정도는 상단이 오가고는 했으니까 대략 20개 정도의 상단이 실종된 것으로 보입니다. 사르벨리에 지난 석 달 동안 왔던 한타 의 상단을 알아보면 정확한 수가 나오겠지만 대충 그 정도 된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는 않을 것입니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석 달 동안 20개 정도의 상단이 실종되었다. 그것도 국가를 넘나들며 거래를 하는 상 단이었다. 그럼 그들은 누가 왜 그렇게 했을까? “저기 주로 한타의 상단들이 신성제국과의 거래에서 어떤 물품을 취급하는지 아십니 까?” “그거야, 대부분이 암염이지요. 대부분이 아니라 거의 전부가 그렇다고 보아야 할 것 같군요. 암염입니다. 그것 말고는 신성제국에서 거래를 할 것이 거의 없지요. 신 성 제국도 자급자족이 가능한 나라이니 말입니다. 더구나 천교를 믿어 세속적인 유흥이 나 쾌락에 별로 관심이 없고 외양을 꾸미는 것에도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소극적이기 때문에 별달리 거래를 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소금은 꼭 필요한 것인데 신성제국에 는 그 소금의 절대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교역이 가능한 것이지요.” “소금이라. 그럼 돌아가실 때에는 보통 무엇을 사가지고 가시지요?” “그건 이 수도가 아니라 조금 더 북쪽에 있는 코르닐에서 생산되는 술과 약재입니 다. 아주 고급의 술이 생산되는 곳이지요. 더불어서 신성제국의 산악지대에서 생산되 는 희귀 약재들이 모이는 곳이기도 하기 때문에 저희 상단들은 이곳 수도에서 그 곳 으 로 가서 술과 약재를 싣고 돌아가는 것이, 한타와 신성제국 사이를 오가며 거래하는 사람들의 변함없는 오랜 방식이지요.” “그러면 이젠 어쩌실 겁니까? 이번에도 코르닐까지 가실 겁니까?” 내가 그렇게 상단 지휘자를 보며 묻자 그는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아닙니다. 코르닐까지 가는 것도 문제지만 코르닐에서 다시 한타까지 가는 것도 문 제입니다. 루탄님께 부탁을 드리고 싶지만 그렇게 되면 솔직히 이익보다는 손해가 더 커진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위험을 모두 제어할 수 있다는 확신도 없고, 그래서 이만 한타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나는 그의 말을 이해했다. 솔직히 우리 같은 용병을 그렇게 고용해서 먼 거리를 다닌 다면 거래로 인한 이익이 상당히 축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반토막의 장사에 서 끝을 내겠다는 말이다. “그런데 루탄 대장님. 우리들이 한타로 무사히 돌아갈 방법이 있습니까?” 여전히 불안한 빛으로 물어보는 그였다. “있습니다. 간단하지요. 일단은 상단의 일꾼들은 여기서 품삯을 주어서 그들끼리 돌 아가게 합니다. 아마도 그런 일꾼들은 노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두 분은 제가 그 리아노로 순간이동을 할 수 있는 스크롤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럼 문제가 쉽게 해 결되지 않겠습니까?” 내 말을 들은 두 사람의 얼굴에 밝은 빛이 살짝 드러났다. “그런데... 스크롤이 공짜는 아닙니다. 그것도 제법 힘과 노고가 드는 것이었서 말 입니다. 두 분이 함께 이동하시는 것이니까 20만 덴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뭐 값을 흥 정하려고 하신다면 다른 마법사를 찾아 보셔야 할 겁니다. 솔직히 싼 가격이니까요. ” 물론 내가 한 이 말에 그들의 표정이 잠시 주춤하기는 했지만, 곧 얼굴을 펴고 내 제 안을 받아 들였다. 그리고 나는 간밤에 준비해 두었던 스크롤을 그들에게 건넸다. “이건 두 개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을 생각해서 두 개를 만들었습니 다. 하지만 스크롤의 쓰임에 따라 다른 효과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일단 이렇게 동그 랗게 말린 상태에서 찢으면 무작위 순간이동이 됩니다. 주위 일정 범위 안의 어디로 갈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렇게 펼친 상태에서 찢는다면 찢는 사람과 그와 신체적 접 촉 이 있는 1인을 그리아노의 성문 옆으로 이동시켜 줄 것입니다.” 내가 설명을 마치고 스크롤을 건네자 그들은 각각 하나씩의 스크롤을 받아 들었다. “그런데 루탄대장님 혹이 이것들을 각각 사용하면 네 명이 그리아노로 갈 수도 있 는 것입니까?” 역시 상인은 잔머리가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 특히 이익에 관해서는 말이다. “물론입니다. 그렇게 사용하실 수도 있지요. 그리고 어떻게 사용하시든 자유입니다 만, 그 스크롤은 그 효과가 길지 않습니다. 길어야 1년 정도면 그 효과가 사라질 것 입 니다. 사용한 종이와 시약의 질이 워낙 조잡한 것들이어서 말입니다.” 내 말에 두 사람은 조금 실망하는 빛이 보이기는 했지만 곧 우리들에게 스크롤 대금 을 주고, 인사를 하고는 여관방을 나갔다. 아마도 그들은 함께 왔던 아랫사람들에게 임금을 지불하고, 또 상황을 설명할 것이었 다. 그 이후의 일이야 알아서 할 일이다. 내가 그것까지 신경을 쓰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이었다. “자, 그럼 이제 우리도 출발을 할까? 저 사람들이 일찍 오는 바람에 아직 점심시간 도 안 되었으니 지금 출발해도 될 것 같은데....” 내가 이렇게 일행에게 제안을 했고, 우리들은 서둘러 짐을 챙기고 마차와 말에 올랐 다. 수도의 성문을 나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우리들은 사르벨리의 북문을 통과 했다. 사르벨리를 나온 우리들의 여정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중간에 코르닐에 잠시 들러 창고에 고급술들을 사서 채우고(사실 창고에 있는 아주 오래된 술들에 비하면 아직은 격이 많이 떨어지는 것들이지만 시간이 해결할 것이었 다.) 시장을 구경한 것을 빼면 우리는 줄기차게 북쪽을 향해 달리는 것이 일이었다. 순조롭다는 것이 곧 행복하고 즐겁다는 것이 아닌 이유는 여기 있었다. 그저 달리만 하는 것이니 얼마나 심심하고 따분하고 짜증스럽겠는가 말이다. 특히나 화아와 풍아는 온 몸이 근질거리는 모양인지 요즘 들어 더 많이 투덜거리는 것 같았 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가 가야 할 여정은 절반도 오지 않은 상태였다. 그나마 사르벨리에서 계속되던 구릉지와 숲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풍경이 험준한 산악 지형으로 바뀌고 있어서 같은 경치를 보아야 하는 지루함을 면했다는 것이 이 둘을 진 정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코르닐은 사르벨리에서 일주일 정도 거리에 있었는데 코르닐을 지나고 다시 일주일 정도를 왔을 때, 우리들은 우뚝 솟은 은빛머리 산과 그의 우람한 어깨와 팔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 그 모습을 보고 수아는 “은발의 할아버지 장군과 그 뒤로 늘어선 장년의 병사들을 보는 것 같다” 고 표현해서 나를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 유독 높은 봉우리를 가지고 그 위에 만년설(아직 이 세계가 생긴지 만 년이 안 되기 는 했지만)을 이고 있는 웅장한 모습은 정말 위엄 있는 장군처럼 보였고, 그 옆과 뒤 로 늘어선 수많은 봉우리들의 모습은 그를 웅위 하는 부장副將과 용맹한 병사들로 보 기에 무리가 없는 모습이었다. 아마도 저 장군이 병사들을 이끌고 인간들의 나라도 진격을 한다면 그 어떤 나라도 그것을 막지는 못할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웅장하고 패기 있는 산의 모습 때문이었을까? 화아와 풍아도 그 동안의 무료함 에서 벗어난 듯 보였다. 솔직히 얼마나 오래 조용히 있을 것이지는 자신이 없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산을 향해 며칠을 달려 드디어 그 발치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깊은 산속 으로 통하는 오솔길과 그 길을 지키며 통행자들을 괴롭히는 수많은 괴수들을 만나야 했다. 덕분에 신이 난 것은 풍아와 화아였다. 오랜만에 몸을 푼다며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아무튼 녀석들도 심심한 것은 참지를 못하는 성격이다. 그리고 이렇게 산악지형으로 들어오면서 풍아의 카다는 부지런히 하늘을 날아다니며 정찰을 시작했다. 숲으로 들어갈수록 길은 험해지고 나무들은 울창해지고 이름도 모를 이상한 괴물들 은 수를 더해가고 있었지만 별다른 위험은 없었다. “그런데 이 길이 넥스 영지로 들어가는 것이 맞긴 맞는 건가요?” 옆자리에서 어두침침해진 숲 속을 보며 수아가 물었다. “글쎄, 일단은 북쪽을 향해 있으니 그렇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사르벨리에서 듣기 로는 북쪽 산악지대 안에 넥스 영지가 있다고 했으니 말이다. 아마 좀 더 들어가다 보 면 마을이 있겠지.” 나도 점점 어두워지는 숲을 바라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암흑제국의 밀림 속에서 느꼈던 것이 칙칙함과 끈적끈적한 느낌이라면 이 곳의 느낌 은 싸늘한 바람이 옷깃 속으로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무언가 날카로운 숲의 예기라고 해야 할까. “오빠, 이 숲이 얼마나 오래 갈까요?” 수아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그러야 내가 알 수 있겠니? 상당히 긴 숲일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꽤 오래 괴 물들이 나오지 않는구나. 그렇지?” “그러고 보니 그렇군요. 정말.” 괴물들은 산맥의 초입에만 뭉쳐 있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그들 때문에 넥스 영지에 대한 정보가 그렇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나무들은 온통 곧게 하늘을 향해 뻗은 교목들이었다. 교목도 그냥 교목이 아니라 그 둘레에 비해서 키가 엄청 큰 녀석들이었다. 아마 꼭대기까지 의 길이가 족히 50미터는 되는 것 같았다. 암흑제국의 나무들도 크게 자라긴 했지만 큰 만큼 밑둥치도 컸는데, 여기 나무들은 그 키에 비해 밑둥치의 둘레가 그리 굵은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 기준은 암흑제국 쪽의 나무에 비해서 그렇다는 것이지 사람 한 두 사람으로 는 감히 둘레를 잡을 생각도 못하는 나무들이다. 그리고 그 나무들은 전봇대처럼 중간 가지가 별로 없이 곧게 뻗어 올라가서는 머리 위에만 나뭇잎을 달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주위를 빽빽하게 매우고 있는 기둥들 사이를 지나가는 느낌으로 길을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바닥에 잔 나무들이 별로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마차가 지나가 는 데에는 별 무리가 없다는 것이다. “자, 여기서 잠시 쉬었다가 가도록 하자. 점심도 먹어야 하고 말이다.” 주위에서 괴물들도 나타나지 않는데다가 주위의 풍경이 빽빽한 기둥들이 늘어선 모습 으로 변화가 없어지자 조금씩 심심해하기 시작하는 화아와 풍아를 보며 나는 휴식을 제안했다. “으아아아아!! 정말 몸이 찌뿌둥하다. 이거 상당히 힘드네. 벌써 얼마동안 마차를 타고 달린 거지?” 나는 마차에서 뛰어내리며 기지개를 켜며 소란을 떨었다. “사르벨리에서부터 계산을 하면 20일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쉬벡의 성에 서 계산을 하면 8개월 정도 되는 것이고 말입니다. 상당히 오래 여행을 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요?” “뭐야? 벌서 그렇게 되었어? 하긴 우리가 출발 할 때가 봄이었는데 그 사이에 겨울 이 오고 있으니까 맞는 것 같기는 하네.” 풍아가 광아의 대답에 놀란 모양이다. “그래, 그렇게 되었나. 이번에는 넥스 영지에서 일이 마무리되면 쉬벡의 성으로 돌 아가서 잠시 쉬자꾸나. 생각해 보니까 우리 집은 그 곳인 것 같지 그지.” 나는 동생들과 지토를 보며 물었다. “그야 당연하잖아요. 오빠. 우리가 만들어 놓은 집도 거기 있고, 우리가 가장 오래 지낸 곳도 그 곳이니까요.” 그랬다. 사실 쉬벡등과 여행을 다닌 것은 여러 사건이 있어 기억에 많이 남지만, 동 생들과 지토가 나와 가장 오래 있었던 곳은 그 결계 안의 우리집이었다. “그래, 맞다. 빨리 돌아가서 깨끗하게 청소도 하고 해야 하는데, 그러고 보면 우리 거기 나오면서 그냥 나와버린거잖아. 1000년이나 방치해 뒀던 집인데 말이야.” “그러고 보니 그렇구나. 어쩌면 좋지. 청소 할 일이 암담하네.” 풍아가 그렇게 엄살을 피우자 화아가 슬쩍 풍아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겨우 생각한다는 것이 청소할 걱정이냐? 걱정마라 내가 다 치워 줄 테니까.” “아야! 오빠. 제발 참아줘. 오빠가 나서면 집안 곳곳을 불로 그을려 놓을 것이 분명 한데 어떻게 오빠에게 집을 맡긴단 말이야. 예전에 오빠방을 오빠가 청소하라고 했더 니 침대며 바닥을 태워 먹은 거 기억 못해?” 꿀밤을 맞은 풍아는 화아의 옛 실수를 꺼내서는 공격에 들어갔다. “그러는 너는? 너도 청소한다고 방을 더 어지럽게 만들고 창문도 날려 먹고....” 그렇게 둘이 재잘거리며 옥신각신하는 것을 보면서 문득 방금 화아가 풍아의 머리에 꿀밤을 먹인 것이 생각이 났다. 비록 오빠 동생으로 묶여 있지만 이들은 정령으로는 같은 등급의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서로 오빠 동생이라고 부르는 것도 어려워했던 녀석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처음으로 화아가 풍아의 머리에 꿀밤을 주고, 풍아도 그것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만약 같은 최상급 정령이라는 테두리라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 었다. 역시 조금씩 조금씩 변해가는 녀석들이다. 나는 그런 동생들의 모습이 너무 좋았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왜 저 지토는 계속해서 늙은이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하느냐 하 는 것이다. 점점 나이든 늙은이가 그러하듯이 말수를 줄이고, 생각에 잠기고, 불만을 별로 늘어 놓지 않으면서 가끔 어른 행세를 하곤 한다. 내가 지토를 나이 든 할아버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지토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하지만 지토는 지토 나름의 개성을 지니는 것이니까 그대로 두고 볼 일일 뿐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점심을 먹은 우리들이 다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을 때, 카다가 풍아의 어깨 위로 내려 앉았다. “오빠, 사람들이야. 그것도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저 쪽 능선 너머에서 움직이 고 있다는데?” 평소라면 굳이 사람들을 찾아 움직일 이유는 전혀 없었지만 오래도록 사람 구경을 하 지 못한 우리들은 곧장 그들이 있다는 곳으로 방향을 잡았다. 하지만 사람들이 있다는 곳은 산등성이 너머였고, 그 쪽으로 마차를 몰고 가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때문에 한참 방향을 잡고 가던 우리는 마차를 세우고 고민에 빠졌다. “어쩌지? 이 길로는 더 이상 마차가 갈 수 없을 것 같은데...” “하는 수 없지. 그렇다고 마차를 버릴 수는 없잖아. 그냥 가던 길을 가기로 하자. 우리가 특별하게 그 사람들에게 볼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나는 화아에게 그렇게 대답하고는 마차가 갈 수 있는 길을 찾아 마차를 몰았다. 실제로 우리가 가는 길이 길인지 아니면 자연스럽게 나무들이 자라며 만들어진 것인 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카다의 정찰로는 나무들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이 통로가 끊 이지 않고 산 속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하니 길을 따라 가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이 다시 방향을 정하고 능선 너머의 사람들과 헤어진 다음날부터 우리 들은 카다가 발견하는 그런 사람들의 소식을 종종 접할 수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가족 단위로 움직이고 있었고, 산의 능선 위쪽에 마차가 갈 수 없는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뭘 하는 건지는 알 수 없어?” 내가 풍아에게 물어보자 풍아는 카다에게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자세히 알아오라고 시켰고 그 결과는 그 오후에 나왔다. “아마도 산에서 무언가를 채집하는 모양인데요? 산 위를 날렵하게 달리는 동물의 등 에 짐을 잔뜩 싣고 있고, 식사를 할 때도 그 짐들 속에서 도구를 꺼내 쓰고 있데요. 그리고 그 가족들 속에는 어린 아이도 있고, 늙은 노인도 있다고하니 정말로 가족 단 위의 이동인 것 같아요.” 풍아의 보고는 그런 것이었다. “그럼 산 위에서 약초 같은 것들을 채집하는 약초꾼이라는 소린가? 그런데 왜 정착 생활이 아니라 이동을 하는 것일까? 보통은 산 아래에 정착해 살면서 채집을 하지 않 나? 그런데 가족들 전체를 동행하는 경우라니... 이상하네.” 나는 이해가 안 되는 그들의 생활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런다고 이유를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사람들이 발견되기 시작하고 사흘이 더 지나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산 능선을 타고 움직이는 사람들은 일정한 방향으로 이동 중이었고, 그 방향은 우리 가 가고 있는 길이 향하는 곳과 같은 방향이었다. 즉 능선 위에서는 점점 많은 가족단위의 무리들이 한 방향을 향해서 움직이 고 있는 것이고, 우리는 능선 아래에서 이제는 양쪽으로 늘어선 산들에서 움직이는 사람들과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어쩌면 능선 위의 사람들은 아래에서 움직이는 우리들을 더 잘 보았을 수도 있을 것 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들은 능선 아래로 내려오지 않았고, 여전히 능선 위를 통해 걸음 을 옮기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험준한 산맥 속으로 발을 들인지 열흘 만에 드디어 마을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왜 모든 사람들이 우리들처럼 산 밑으로 이동하지 않고 능선을 따라 이 동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이 마을은 산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산 중턱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가 온 길을 잘 살펴보면 커다란 산의 기슭부분으로 빙빙 돌아 서 이 마을의 아래로 와서는 다시 가파르게 느껴지는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와서야 마 을에 도착을 했다. 그런데 능선을 타고 이동하는 사람들은 산기슭을 따라 이동하는 우 리들에 비해서 훨씬 짧은 이동 거리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위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이 굳이 아래로 내려와 기슭을 따라 많은 거리를 움직 일 이유가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산 속에서 처음으로 도착한 마을은 완전히 폐가들의 모임이라고 밖에 는 볼 수 없는 곳이었다. “오빠, 여기 이 집들 사람들이 살지 않은 것 같아요.” “아마 그건 아닐 거다. 지금 이 마을로 들어오는 저 사람들이 이 집들의 주인일 거 야. 다만 오래 비워 두어서 이런 모습이 된 것일 뿐 일거다.” 나는 수아의 말에 내 생각의 이야기 해 주었다. “아마 형님 말씀이 맞을 겁니다. 벌써 몇 집에는 사람들이 정리 하고 들어간 곳도 있으니 말입니다.” 광아가 앞쪽으로 보이는 몇몇 집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머, 저기 저 집들은 아주 깨끗해요. 아마 계속해서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모양이 네요.” “그런 것 같구나. 아무래도 마을을 통째로 비우지는 않았을 것이고, 마을을 지키는 사람들이 남았을 것이니 저 집들이 그런 역할을 했던 모양이지.” “그럼, 이제 며칠 있으면 이 마을도 사람들로 북적거리겠네요? 지금까지 오면서 본 사람들이 이 마을로 오고 있는 것이라면 말이죠.” “아마 그렇겠지.” 이렇게 우리들이 두런두런 거리며 마차를 몰아 마을 중앙로를 통과하고 있을 때, 마 을 사람들은 그런 우리들의 모습에 상당한 호기심을 표현하고 있었다. 다들 하던 일을 멈추고 우리들의 모습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던 것이다. “왜들 이렇게 쳐다보는 거야? 부끄럽게.” 풍아는 마땅히 시선을 둘 곳이 없어서인지 투덜거렸지만 마을 사람들이 적의를 보이 는 것도 아니어서 그냥 꾹 참고 있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마차를 마을의 중앙이라 생각되는 공터에 세웠다. “자, 여기서 잠시 쉬어가자. 그리고....”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주위를 둘러보고, 30대 중반의 사나이를 발견하고는 그에게 걸 어가며 웃는 얼굴로 물었다. “죄송합니다만, 저희가 여기서 잠시 쉬어 가려고 하는데 마을 어른께 허락을 얻었으 면 합니다. 어디에 가서 허락을 얻으면 될까요?” 내가 다가가자 움찔하던 그는 웃으며 부드럽게 물어보는 말소리와 그 내용에 기운을 얻었는지 곧 어깨를 펴고 입을 열었다. “우리는 지나가는 여행객이 마을에서 쉬는 것을 막지 않습니다. 굳이 허락이 필요 한 일은 아니지요. 그래도 마을 어른을 뵙고 싶다면 저기 저 집이 촌장님 댁이니 그 리 로 가 보십시오.” 그는 수아가 깨끗하다고 했던 건물을 가리켰다. “감사합니다. 그리 오래 머물 것은 아니고, 또 마을 분들께 해를 끼칠 일도 없을 테 니 다른 분들께 걱정하지 말라고 해 주십시오. 그리고 만약 몸이 좋지 않은 분들이 계 시면 여기 수아가 간단한 외상은 치료를 해 드릴 수도 있으니 필요하면 말씀을 하시 고 요. 그럼 저는 촌장님을 좀 뵙고 오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일행들에게 오늘 밤을 여기서 머물 것이라고 말해 주고는 촌장의 집으 로 향했다. 하지만 나는 촌장집의 문을 두드리기 전에 문을 열고 나오는 초로의 늙은이를 만날 수 있었다. “우리 집에 볼 일이 있으시진 않을 테니, 이 촌장에게 볼 일이 있으시겠구료. 제가 이 마을의 촌장입니다. 무슨 일로 저를 찾으시는지요?”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확실히 사람이나 상황을 파악하는 혜안을 뜨게 만드는 모양이 다. “아! 안녕하십니까. 저는 일행을 이끌고 넥스 영지를 찾아가는 사람입니다. 오래 마 차로 여행을 하며 마을을 만나지 못해 사람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마 을 을 만나 이 곳에서 잠시 쉬어가고자 합니다. 그래서 허락을 얻으려고 왔습니다. 아울 러 넥스 가문의 영지로 들어가는 정확한 길을 알고 계시면 그도 여쭙고 싶어 서 이렇게 실례를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최대한 예를 갖추어서 말을 꺼냈다. “넥스 가문의 영지를 찾으신다구요. 허허. 이 산 전체가 넥스 가문의 영지입니다. 그리고 저희들이 영지의 백성들이지요. 헌데 따로 넥스 영지를 찾으신다니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 “제가 말씀드리는 넥스 영지는 넥스 가문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을 말하는 것입니 다. 저는 그 넥스 가문의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이곳을 찾아 온 것입니다.” 나는 촌장의 물음에 솔직하게 대답했다. “영주님을 만나기 위해 오셨다구요? 지금까지 영주님을 찾아 온 경우는 없는 것으 로 알고 있는데... 제가 이 마을에서 살아온 80년이 넘는 시간동안 그런 일은 없었 고, 또 그 전에도 없었다고 들었는데 외부에서 넥스 가문을 찾는 사람들이 며칠 사이 에 두 분이나 있다니 그 참 이상한 일이군요.” 촌장은 내 말에 놀랍다는 듯이 중얼거렸지만 나에게 들으라는 것인지 혼잣말인지는 가늠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내용은 중요한 내용이었다. 오랜 세월 찾는 사람이 없었던 넥스 가문에 그를 찾는 사람들이 들어갔다는 말이다. 촌장의 그 말 속에서 나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아마도 지금 신성제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사건들 때문에 오는 노파심일 것이라고 불 안감을 씻기는 했지만 그래도 깔끔한 기분은 아니었다. “저희 말고도 넥스 가문을 찾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어떤 사람들이 지도 아시겠습니까?” 나는 혹시나 해서 촌장에게 물었다. “저야 이 산속에서 뼈가 굵은 노인일 뿐인데 어떻게 그런 것을 알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의 품속에 거꾸로 된 성물이 있는 것은 보았습니다. 아마도 제가 그것을 보았다 는 것을 알았다면 이 마을이 온전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지요.” 촌장은 자신이 그들을 속인 것이 꽤나 흥분된다는 듯이 자랑을 했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함부로 한다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저는 그래도 사람을 보 는 눈은 있는 편입니다. 가식과 진실을 구별하는 눈도 가지고 있지요. 그러니 이런 이 야기를 한다고 저희에게 해를 끼칠 분들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답니다. 산 속 에서 오래 살다보면 보통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되는가 봅니다. 저는 이런 느 낌은 틀린 적이 거의 없거든요.” 나는 노인의 말에서 예전에 아이들을 가르치며 읽었던 ‘큰 바위 얼굴’의 어니스트 를 떠올렸다. 정말 그랬을 수도 있겠다. 멀리 보이는 만년설의 모습을 보며 우리들은 장군의 모습 을 떠올리지만 이 노인은 현자의 모습을 떠올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평생 닮아가고 있었을 수도... 이런 생각이 엉뚱한 곳으로 흘렀다. “그래, 그 사람들이 몇이나 되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나는 다시 촌장에게 물었다. “인원이 제법 되었지요. 기사들이 백 명 정도 되었고, 기사가 아닌 사람들이 오십 명 정도 되었으니까요.” 정말 상당히 많은 인원이다. 그 정도의 인원이면 작은 영지 하나는 어찌 해 볼 수 있을 인원이 아닌가 싶다. “그들은 언제쯤 이곳을 지나갔습니까?” 나는 다시 촌장에게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허허, 닷새 전이지요.” “그럼 여기서 목적지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나 걸립니까?”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물어 보았다. “글쎄요, 길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들이 간 길을 따라 간다면 아마 15일 정도 걸릴 것입니다. 길이 편하긴 하지만 많이 돌아가야 할 테니 말입니다.” “그게 무슨....” “허허 아무래도 불안해서 그들의 길 안내를 우리 작은 아들을 시켰지요. 멀리, 아 주 멀리 돌아가는 편안한 길로... 그리고 큰 손자를 영주님께 보냈습니다. 소식을 전 하라고. 허허.” 역시 촌장의 얼굴에는 자랑스러운 빛이 흘러 넘쳤다. “그런 일이.... 그럼 큰 손자님께서 간 길은 얼마나 걸리는 길입니까?” “글쎄요. 그 녀석이 가는 속도라면 열흘이 넘게 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는 촌장의 말에 안도감을 느꼈다. 적어도 무방비로 당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럼 저희 일행도 그 길을 따라 갈 수 있겠습니까?” 나는 우리가 그 길을 따라 간다면 앞서 간 사람들을 따돌리고 먼저 넥스 영지에 도착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우리들이 넥스 가문에게 도움을 주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판단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도 들어 있었다. “물론 가실 수는 있지만, 저기 저 마차를 가지고는 어려울 것입니다. 다른 길은 무 리가 없지만 꼭 한 곳은 계곡을 가로질러 놓은 외줄다리를 지나야 하기 때문에...” 촌장은 우리 마차가 지날 수 없는 곳이 있다는 말로 불가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아닙니다. 길만 알려 주시면 저희가 가 보고 안 되겠다 싶으면 마차와 말을 버리 고 가는 방법도 있으니 일단 길을 좀 알려 주십시오.” 내가 그렇게 촌장에게 부탁하자 촌장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뭐가 어렵겠습니까? 제가 둘째 손자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영지까지 잘 모 시고 갈 겁니다. 물론 수고비는 손님께서 알아서 주시면 됩니다. 너무 과하지 않게 일 한 만큼의 가치를 깨닫게만 해 주시면 되는 것이지요.” 촌장은 그렇게 둘째 손자의 아르바이트 자리를 만들고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촌장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곧장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상황을 설명했다. “뭐? 그럼 그 기사들이 넥스 가문의 영지에 좋지 못한 의도로 간 것 같다는 거야?” 화아가 물었다. “일단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촌장의 이야기로는 이 마을을 지나지 않고는 넥스 영 지로 들어가기가 어렵다던데, 그 동안 왕래가 없었던 곳에 그런 대단위의 무장 인원 이 들어갔다면 아무래도 좋은 의미는 아닐 것 같지 않아?” 나는 화아 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렇군요. 형님. 그럼 어쩌실 겁니까? 그들을 앞질러 가서 그들을 막으실 겁니 까?” 나는 광아의 말에 신중히 대답했다. “그건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아직도 넥스 가문의 사람들을 만나보지 못했다. 그 리고 그들에 대한 판단이 없는 상태에서 그들이 암흑교의 무리들 보다 나에게 우선할 이유는 넥스의 후예라는 것 말고는 없다고 본다. 그 우선하는 느낌이 암흑교의 무리 를 막고 싶다고 생각하면 막겠지만, 암흑교의 무리가 직접적으로 나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은 선뜻 개입하지 않을 생각이다. 내가 좀 이기적인지 몰라도 어떤 존재든 나와 직접 연관이 없는 어떤 일을 하는 것을 끼어들어 방해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 건 넥스 가문과 암흑교와의 문제도 마찬가지지.” “그럼 어째서 서둘러 넥스 영지로 가려고 하는 거냐?” 오랜만에 지토가 말꼬리를 잡고 물었다. “그건,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넥스 가문이 그 예전에 나와 인연이 있었다는 것이 이 유야. 조금은 그 쪽에 마음이 기울어 있는 것은 사실이니까 말이야. 다만 내가 가서 그들에게 도움을 줄지 그렇지 않을지를 결정하는 것과 그 결정도 하지 못하는 것은 차 이가 있으니까 말이야.” “킁. 결국은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거란 말이군.” 어쩐지 지토의 말이 차갑게 들리기는 하지만 어쩌면 그 말이 맞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무턱대고 ‘암흑교를 때려잡겠다.’라는 생각은 전혀 없으니 말이다. 그저 가서 보고 내가 결정하겠다는 것일 뿐이다. “뭐 그렇게 볼 수도 있지. 하지만 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힘이 있다고 다른 사람들 의 일에 참견하고 내 멋대로 방해하거나 돕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어. 적어도 그 일 에 내가 개입되기 전에는 말이야. 그저 우리들은 우리들이 가고 싶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되는 거지.” “에~! 오빠, 말이 이상하잖아. 그럼 우리들이 하고 싶은 일이 넥스 가문을 돕는 일 이면 그냥 가서 암흑교를 쓸어버릴 수도 있다는 말이잖아. 그게 뭐가 달라.” 풍아가 내 말의 빈틈을 찔러 들어왔다. “글쎄, 나는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어찌 되었든 그건 우리들의 결정이지 다른 누구 의 결정에 끌려가는 것은 아니잖아. 지금까지 형이 좀 끌려 다닌 것 같은 느낌이 있 긴 하지만, 그래도 형이 싫었으면 안 했을 걸?” 화아였다. 화아가 그런 생각도 한단 말이야? 아무튼 어느 정도 화아의 말이 내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기는 했다. “그래,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의견이고 생각이야. 나는 내 생각과 너희의 의견을 존 중하지.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뿐이야. 물론 거기에 우리와 인연이 있던 사람들에 대 해 무게를 싣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야.”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열다섯 정도 된 소년이 우리 마차로 뛰어왔다. 촌장의 집 쪽에서 온 것으로 봐서 분명 촌장의 손자일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전 세미예요. 할아버지께서 형이랑 누나 모시고 넥스님 성에 갔다 오 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이 마차는 중간에서 버려야 할 거 같은데...” 녀석은 마차 앞으로 와서는 나와 수아에게 꾸벅 인사를 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나와 수아가 이 무리들의 우두머리로 보였던 모양이다. “그래? 인사는 나중에 하고 우선 올라오너라. 길을 안내 하려면 그 쪽이 편하겠 지?” “네!!” 세미는 날렵하게 마차 위로 뛰어 올랐다. 역시 산속에서 자란만큼 몸놀림이 민첩한 아이였다. “이랴! 가자. 오랜만에 좀 서둘러야 할 것 같다. 화아 풍아 광아 지토도 처지지 말 고 잘 따라와라.” “핫! 형이나 걱정해. 우리 걱정은 말고.” 화아가 말의 박차를 가하며 대답해 왔다. 마차는 마을을 벗어나 곧장 달려가기 시작했다. 조금은 가파른 오르막길 이었지만 마 차 자체가 경량화 마법이 걸린 것이라 말들이 많이 힘들어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게 마을을 벗어나 계속되는 오르막(실제로는 산을 타고 비스듬히 돌아가는 길이 다. 곧장 산 위로 길을 내는 짓은 누구도 하지 않는다.)을 따라 두어 시간을 달리는 동안 세미는 마차를 처음 탄 것처럼 불편한 몸짓을 하고 있더니 어느 정도 적응이 되 었는지 옆자리의 수아와 조근조근 말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래? 이쪽으로 가다가 갈림길에서 오른 쪽으로 가야 한다는 말이지? 그런데 넌 넥 스 영지에 가 본 적이 있니?” “그럼요. 할아버지께서 봄이면 언제나 가시는 걸요? 그래서 저랑 형도 열 살이 넘으 면서는 언제나 함께 갔었는걸요. 갈 때는 왼쪽 길로 가고 올 때는 오른쪽 길로 와 요.” “어머 왜?” “갈 때는 짐이 많아서 오른 쪽으로 못가지만 올 때는 짐이 없으니까 오른쪽 길로 오 는 거죠. 시간이 훨씬 적게 걸리니까요.” “으응. 그렇구나. 그럼 그 사이에 마을들도 있니?” “네 있어요. 오른쪽으로 가면 마을 두 개를 거치게 되고, 왼쪽으로 가면 마을 다섯 개를 거치게 되요.”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세미에게 물었다. “세미. 할아버지와 함께 갈 때 왼쪽 길로 가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지?” “그거야 20일 정도 걸리죠. 올 때는 10일 정도 걸리고요.” “그럼 갈 때나 올 때, 이렇게 빨리 움직이니? 그러니까 이렇게 말을 타고 달려서 가 는 거냔 말이다.” “아니요. 그냥 천천히 걸어서 갔다가 걸어서 와요.” 나는 세미의 말을 듣고 아차 싶었다. “이런, 어쩌면 늦을 수도 있겠는 걸?” “왜 그래요 오빠?” 나는 수아의 물음에 대답하며 말에 채찍질을 했다. “그게 말이다. 앞서서 간 사람들이 말을 타고 갔다고 한다면, 기사들이 아닌 사람 이 끼어 있다고 해도 이들 노손老孫이 걷는 것 보다는 두배 이상 빠르게 이동을 할 수 있단 말이야. 그럼 그들이 넥스 영지에 닿는 것은 팔, 구일이면 된다는 말이지. 하 지만 지금부터 우리가 열심히 간다고 해도 넥스 영지까지 삼, 사일은 걸리니까 잘못 하 면 늦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어. 정말이네. 그렇구나.” 세미가 내 말을 듣고는 이해가 간다는 듯이 탄성을 지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해요 그럼.” “어쩌기는 우리도 최대한 빨리 가는 수밖에 없지.”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싱긋 웃어 주었다. 걱정은 있어도 우리에게 위험이 있는 것도 아닌데 조급해 할 필요는 없었다. 정 안되면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가 쉬지 않고 말을 달린 끝에 갈림길을 지나고 드디어 최대의 난관에 도착했다. “형, 여기서부터는 마차로 갈 수가 없어요. 이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세미가 우리 앞에 놓인 다리를 보며 이야기 했다. 어쩌면 간신히 말을 타고 지나가는 데에는 무리가 없어 보이는 다리였지만 마차는 절 대 불가능한 곳이었다. “세미 저 건너편으로 이어진 길은 이 마차가 지나갈 수 있는 길이니? 중간에 다른 장애물 같은 것은 없어?” 나는 세미에게 그렇게 물었고, 세미는 이 다리 이외에는 마차가 지나가지 못할 길은 없다고 대답했다. 길이 좀 가파르기는 하지만 마차가 지나갈 정도는 된다는 것이었다 . “그래? 그럼 좀 힘이 들겠지만 마차를 끌고 가기로 하자. 겨우 50미터 정도의 거리 밖에 안 되니까 가능하겠다. 일단 마차를 끄는 말의 눈을 완전히 가려라. 그리고 나 머 지는 다리를 건너서 오고. 일단 우리 먼저 건너가마.” 그리고 나는 마차를 다리 옆의 허공으로 몰았다. 눈이 가려진 말들은 내가 고삐를 쥐고 인도하는 대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으악. 계곡으로 떨어져요. 이 밑은 엄청나게 깊다구요. 으아아악.” 세미는 마차에서 뛰어내리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수아가 어깨를 꾸욱 누르고 있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호호, 세미야. 걱정하지 말아. 정말 멋있는 광경을 보게 될 거야. 나중에 친구들에 게 자랑도 할 수 있을 거고 말이야. 자 눈을 떠 보렴. 어서.” 수아가 부드럽게 어깨를 감싸고 말하자 세미는 천천히 눈을 뜬 모양이다. “우와!! 마차가 날아가고 있어. 어떻게 이런 일이... 이야아아아. 정말 대단해요. 형, 형 마법사죠. 그렇죠. 하늘을 날아다니는 마법사 맞죠?” 세미는 난생 처음으로 보는 신기한 광경에 넋이 나간 모습이었다. 지금 우리 마차는 하늘을 날고(정확히는 협곡을 가로질러 놓인 실드 위를 굴러가고) 있는 중이었다. 세미도 조금만 정신을 집중하면 말과 마차 아래에 깔려 있는 투명한 실드를 볼 수 있 을 테지만 하늘을 나는 마차를 탔다는 흥분이 그런 여유를 빼앗아 가 버렸다. “으앗 형 기다려, 가는 김에 같이 가자고. 왜 우린 저 다리를 건너라는 거야? 이 럇!” 마차 뒤를 따라서 화아가 말을 몰아왔다. 그리고 줄줄이 그 뒤를 따라 온다.(말들이 눈도 안 가렸는데 잘도 공중으로 뛰어 드 네? 역시 정령의 기운을 이기지 못해서 그런 걸까?) 읏. 이것들이 실드를 유지하는 마력을 다시 조정해야 한단 말이야. 그렇게 달려들면 실드가 깨질 수도 있는데... 하지만 어찌 동생들 앞에서 그런 꼴을 보일 수 있겠는가. 나는 최대한 빠르게 실드 에 마력을 불어 넣어 동생들과 지토 그리고 그 말들과 게브의 무게까지 지탱하도록 만 들었다. 이런... 이렇게 순식간에 마력을 움직이는 일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냥 우리 건너가고 건너왔으면 이런 고생은 없을 것을... 아무튼 성질 급한 화아 때문에 나만 고생이네. 하지만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우리는 금방 협곡의 반대편에 닿았고, 땅 위에 내려선 모습에 세미는 안도감과 섭섭 함을 동시에 보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하늘을 난다는 것이 불안과 흥분을 동시에 주었던 모양이다. 나는 화아에게 성급한 행동으로 모두 협곡으로 떨어져 죽을 뻔 했다고 한 소리를 했 지만 화아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도 말라며 뻔뻔한 얼굴을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차라리 물고기가 물에서 익사했다고 해. 그걸 믿지 형이 마력이 모자라서 이런 협 곡에서 동생들을 떨어뜨린다는 걸 상상하라니...” 라고 지껄이면서 말이다. 나는 할 말이 없어서 그냥 마차를 몰았다. 마차는 조금은 거칠지만 산길을 따라 만들어진 곳 치고는 상당히 곧게 뻗은 길을 따 라 거침없이 달려 나갔다. 그리고 결국 산 속에 발 빠른 어둠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아직도 평원에는 태양의 밝은 빛이 그 치맛자락을 늘이고 있을 터였지만, 산 속은 으 레 어둠의 전초병들이 빠르게 태양빛의 틈새를 노리고 짓이겨 들어오기 마련이다. 깊은 계곡의 어느 틈서리에서라도 온 몸을 구겨 넣고 태양을 피하던 것들이 거침없 이 저 산과 산 사이에서 기어오르기 시작하더니 어느 틈에 달려들어 말과 마차의 발 목 을 잡는 것이었다. “오빠, 어쩌지요? 그냥 계속 갈까요? 아니면 쉬었다가 내일 아침에 출발을 할까 요?” 나는 수아의 질문에 마차를 세우고 야영을 결정했다. 오랜만에 상당히 먼 거리를 달려온 말들이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도 3일 이상을 달려야 할 말들이었다. 산으로 둘러싸여 좁아진 하늘에는 아직 달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어둠을 거대한 광구가 쫓아내었다. 세미는 그런 모습에 또 한 번 탄성을 지으며 허공에 떠 있는 광구를 향해 손짓을 했 다. “자, 빨리 식사를 하고 쉬도록 하자. 그리고 세미는 마차 바닥에서 나와 함께 자기 로 하고...” 길을 안내한다고 하지만 세미는 우리의 손님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손님을 함부로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세미를 침대 에 재우고 다른 누가 바닥에 자면 세미가 불편할 것이고, 그러니 내가 세미와 함께 바 닥에서 자는 것이 제일 좋았다. 세미도 내가 함께 자는데 자기를 소홀히 대한다는 느낌은 없을 것이고, 나도 손님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는 만족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니 말이다. 그렇게 밤을 세운 우리는 다음날도 미친 듯이 달리는 일이 전부였다. 그리고 오후에 첫 마을에 도착했지만 세미가 마을 사람들과 제대로 인사를 나눌 틈 도 없이 마차를 몰아야 했다. 겨우 확인 할 수 있었던 것은 사흘 전에 세미의 형이 이 마을에 와서 말을 빌려갔다 는 것이 전부였다. 아마도 세미의 형은 이곳까지는 줄기차게 달려와서 여기서 말을 빌려 타고 넥스 영지 로 향한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여기까지 이틀 만에 달려 왔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었다. 완전히 마라톤 하듯이 달렸을 것 같다. 그것도 이틀 동안이나... 우리는 세미의 형 세안의 뒤를 따라 달리고 또 달렸다. 우리가 산 속으로 달려 들어갈수록 경사는 완만해지고 드디어는 온통 산으로 둘러싸 인 분지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계곡을 벗어나 분지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거대한 성벽을 통과해야 했다. 성벽을 지키는 병사들의 눈빛이 사나웠지만 대충 검문을 하고는 우리를 통과시켰다. 물론 세미를 알고 있는 병사가 몇 명 있었던 것이 큰 힘이 된 것이지만 말이다. 밖에서 볼 때는 온통 험준하고 가파른 산뿐이었지만 그 안에는 상당히 넓은 분지가 있었다. 분지에서 주위의 산들을 보면 그렇게 높아 보이지도 않았고 오히려 든든한 성 벽처럼 느껴지는 곳이었다. 그 이후로 다시 이틀 밤이 지났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요. 이렇게 가면 한나절이면 넥스 영지를 볼 수 있을 거예 요. 그리고 저기 합쳐지는 길이 있지요? 저 길이 우리 마을 왼쪽 길에서 오는 거예 요.” 나는 세미의 말을 듣고 곧장 풍아에게 카다를 날려 앞서 갔다던 그 기사들의 행방을 알아보라 시켰다. 하늘을 날아간 카다는 넥스 영지 쪽으로는 기사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소식을 전하고 다시 뒤쪽으로 날아갔다. 우리는 카다의 소식에 일단 안도하며 다시 넥스 영지 쪽으로 마차를 몰았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지나고 해가 분지의 서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을 때, 카다가 돌아왔 다. 카다는 아직 뒤쪽으로 기사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소식을 가지고 왔다. “그럼 두 가지 경우 중에 하나겠군. 이미 넥스 영지에 들어가 있는 경우나, 아직 분 지 안으로 들어서지 못한 경우이거나.” “그렇겠네요. 그럼 어쩌죠. 만약 이미 넥스 영지에 들어가 있다면...” “글쎄, 일단 영지에 가까이 가보면 알겠지. 무조건 항복을 하지 않았다면 전투의 흔 적이라도 있겠지. 그리고 경비를 서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말이야.” 우리 마차는 그야말로 미친 듯이 넥스 영지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해가 분지의 산꼭대기에 걸릴 무렵에 우리들은 넥스 영지을 볼 수 있었다. 아 니 정확히 이야기하면 넥스 가문의 저택(성이라고 하기에는 초라하다.)과 그를 둘러 싸 고 있는 집들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저기가 넥스 영지인 모양이지? 세미?” 내가 세미에게 물어보자 세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기 중앙에 있는 저 큰 집이 넥스 영주님 집이고, 그 주위에 있는 집들은 영 지민의 집들이예요.” 세미의 대답에 나는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었다. “나참, 어떻게 영주가 있는 곳에 성벽 하나도 없는 걸까? 조금 초라해 보이네.”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혀를 차자, 세미가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 할아버지가 넥스 영주님은 가장 튼튼한 성벽을 가지고 계시다고 했어요. 여 기 영지를 둘러싸고 있는 저 높고 높은 산들이 모두 영주님의 성벽이라고, 그리고 영 주님 저택을 둘러싸고 있는 저 집들은 영주님의 저택을 지키는 가장 훌륭한 성벽이라 고 하셨어요. 그래서 영지에도 저택에도 우리 영주님처럼 멋진 성벽을 지닌 사람은 세 상에 아무도 없다고 하셨단 말이에요. 그건 주신님의 은총이라고 하셨어요. 할아버지 께서..” 따지듯이 소리를 높인 세미의 목소리에는 자신감과 할아버지의 대한 신뢰가 묻어나 고 있었다. “그래. 그렇구나. 이 형이 그걸 몰랐구나. 저 거대한 산들을 영지의 성벽으로 영지 민의 신망과 믿음을 저택의 성벽으로 삼았다는 말이겠지. 하하 그래. 그래 넥스 영주 님은 정말 최고의 성벽을 지니신 분이구나.” 내가 이렇게 감탄하며 사과하는 표정을 짓자 금세 풀어져 웃는 얼굴이 되는 세미였 다. “자, 그럼 영주님을 만나러 가 볼까. 이정도의 신뢰를 받는 영주님이라면 한 번 만 나 볼 가치가 있지 않을까?” 수아를 보며 그렇게 중얼거린 나는 멀리 보이는 넥스 가문의 영지를 향해 마차를 몰 았다. 그리고 우리가 그 마을의 외곽에 도착했을 때, 우리를 맞이한 것은 집들과 집들 사이 로 난 길을 막아 놓은 장애물이었다. 그리고 그 장애물 뒤에서 우리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는 사나이들이었다. 비록 그 나이가 거의 50을 넘어 보이는 사람들뿐이었지만 그들은 우리들에게 호의적 이라고는 볼 수 없는 시선을 보내며 경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우선 마차에서 내려 세미를 앞세우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거기 멈추어라. 신분과 용건을 밝혀라.” 굵은 목소리가 들리고 사람들 뒤에서 갑옷과 검으로 무장한 한 인물이 말을 타고 앞 으로 나왔다. 아마도 연락을 받고 급히 뛰어온 모양이었다. “우와 크라이안 할아버지다.” 앞에 있던 세미가 반가운 환호성을 올렸다. 그러자 앞으로 걸어나온 그 기사는(갑옷과 검으로 보아 기사인 것 같았다.) 그 때야 세미를 발견 한 듯이 입을 열었다. “아니 넌 세미 아니냐? 어저께는 세안이 오더니 이번에는 너까지 온 것이냐? 촌장 늙은이가 아주 집안사람들을 모두 다 불러냈군.” 그렇게 세미에게 이야기를 한 노인은 나에게 시선을 던졌다. 날카로운 시선, 나이와 함께 묻어나오는 연륜, 그리고 기세는 그란드의 노부인을 닮 아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저희는 넥스 가문에 볼 일이 있어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오는 길에 영지 입구의 마을에서 촌장님께서 넥스 가문에 어려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하셔서 급히 달려오는 길입니다.” “하지만 세안보다 늦게 출발을 했다면 벌써 여기 도착을 할 수 없었을 텐데, 거기다 가 이미 영지로 들어오는 길목은 영주님과 기사들이 봉쇄를 한 상태이니 절대 들어올 수 없었을 텐데 어떻게 들어왔다는 것이냐? 바른대로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무사하기 어려울 것이다.” 크라이안이라고 했나? 이 할아버지 기세가 장난이 아니다. 아마도 단순한 검술로는 화아가 확실하게 밀릴지도 모르겠다. “할아버지 저희는 오른쪽 길로 왔어요. 영주님은 왼쪽 길을 막으러 가신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들어왔지요.” 옆에서 듣고 있던 세미가 말참견을 해 왔다. “아니 어떻게 마차를 끌고 그 길을 올 수가 있다는 말이냐? 그 말이 정말이냐?” “그럼요. 이 형이, 그러니까 마법사라서.... 마차랑 말이랑 그 계곡 위로 날아서 왔 어요. 얼마나 멋있었는데요. 아래로 까마득한 계곡 위를 날아왔다구요. 정말이요. 말 과 마차가 날아서....” 그렇게 자랑을 시작하는 세미에게서 시선을 돌려 다시 나를 보는 크라이안 기사의 눈 에는 놀라움과 경계가 가득했다. 아마도 내가 보통 실력이 아니라는 것에서 오는 경계일 것이었다. “그래, 무슨 일로 이 영지를 찾은 것이오? 이 곳에는 지난 오랜 시간동안 아무도 찾 은 적이 없었소. 특히 공적이든 개인적이든 영주님을 찾아 온 사람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오. 당신은 무슨 용무로 찾아왔소?” 음, 조금 말투가 바뀐 것을 보니 상당히 조심스러워진 것 같긴 하다. “그건 오직 영주님 이외에는 말 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비밀이지요. 무턱대고 늘어 놓을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나도 당신이 누구인지 모르는데 말입니다. 저는 적어도 넥스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에게만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묻고 싶은 것과 받을 것이 있지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내 몸에서 일어나는 것은 부드럽고 우호적인 기운이었 다. 아마도 크라이안이라는 이 늙은 기사도 그것을 느낀 모양이었다. “좋소. 일단은 영지의 손님으로 오신 것이니 저택으로 모시겠소. 다만 지금은 전시 상황이니 무장은 할 수 없소. 무기를 압수하지는 않겠지만 소지하지는 마시오.” 크라이안은 그렇게 조건을 달고 길에 놓여진 장애물을 치웠다. 나는 다시 마차로 돌아왔다. 그리고 화아와 풍아 광아 지토에게 무기를 마차에 싣도록 했다. 우리는 장애물을 지나 크라이안을 따라 영주의 저택으로 천천히 마차를 몰았다. 마을은 멀리서 보기보다 큰 규모였다. 저택을 중앙에 두고 원형으로 발전한 마을은 계획도시와 같이 번듯한 길이 건물들 사 이에 뻗어 있었고 집들도 상당히 잘 지어진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 집들은 교묘한 배열로 외부에서 들어오는 대단위 침입자를 막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집들을 뛰어 넘어 가지 않는 한은 중앙으로 나 있는 대로를 이용하는 편이 수월하게 되어 있었고, 때문에 침입자가 있다면 한 방향으로 몰아서 방어할 수 있는 형태로 집 들이 배열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평소에는 알 수 없는 것이었겠지만 지금처럼 외부의 적을 막기 위한 채비를 한 후에는 그런 모습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이 마을 규모로 보아서 살고 있는 인원이 만 오천 정도는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눈에 보이는 이들은 모두 늙은이와 어린아이 그리고 여자들뿐이었다. 모두들 영주를 따라 싸움터로 나간 모양이었다. 150명의 인원으로 이 곳을 들어오던 사람들이 영주가 데리고 나간 인원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대충 살펴도 영주를 따라 나간 인원이 오천은 넘을 것 같은데.... 아무리 기사라고 해도 좀 어렵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보니 영지의 백성들도 경계는 하고 있었지만 불안한 표정은 별로 없는 것 같 기도 했다. 우리들은 크라이안을 따라 저택으로 향했다. 저택의 담은 높지 않았고, 입구를 지키는 병사는 단 둘이 있을 뿐이었다. 전시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너무도 허술한 경비였다. 아마 전시가 아니라면 경비조차 없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여기서 잠시 기다리시오. 안에 들어가 부인께 사정을 설명드리고 다시 나오겠소.” 크라이안은 우리들을 저택의 현관 앞까지 안내하고는 그렇게 양해를 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우리들은 밖에서 처량맞은 모습으로 오래 있지 않아도 되었다. 오래지 않아 현관문이 활짝 열리며 30대의 여자가 밖으로 튕기듯 뛰어 나왔던 것이 다. “어서 오세요. 넥스 저택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현 영주이신 넥스트리언 유 소의 안사람입니다. 제레이나 유소라고 합니다. 어서 들어오세요. 아마도 제가 아는 한에서는 100년 이내로 이 저택을 찾아오신 첫 손님이신 것 같군요. 적어도 영주님을 찾아서 외부에서 온 손님으로는 말이죠. 뭐하세요? 어서 들어오시라니까요. 호호호. ” 갈색의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고 뒤로 질끈 묶은 모습에 별다르게 꾸미지 않은 수수 한 브라우스와 치마를 입은 모습은 방금 전 마을에서 본 여염집의 아낙과 달라 보이 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를 손님으로 대하는 모습에도 귀족들이 흔히 보이는 격식이나 그 속에 녹 아있는 가식적인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런 모습에 잠시 멍~하게 바라보는 우리들을 보며 제레이나라는 여자는 곧 수다를 멈추고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저기, 제가 손님을 맞는 방법이 잘못되어서 그런 것인가요? 워낙 귀족들이 예의라 는 것을 듣고 배운 것이 별로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다른 영주의 부인들이 어떤 모 습 으로 손님을 대하는지 본 적이 없다보니 .... 그러니 제가 실례를 한 것이라면 용서 를... 죄송합니다.” 자꾸만 목소리가 작아지는 그 여인의 얼굴에서는 안절부절하며 어쩔 줄 몰라하는 당 황함이 어려 있었다. 나는 풀쩍 마차에서 뛰어 내렸다. 그와 동시에 동생들과 지토, 수아와 세미도 말과 마차에서 뛰어 내렸다. “이런 별말씀을... 오히려 저희가 실례를 했습니다. 저희가 원래 교양이 있다고 하 는 귀족들의 가식을 싫어하기 때문에 귀족들과 친하지를 못한 편입니다. 그래서 넥스 저택의 안주인이신 제레이나님의 모습도 그러하리라 짐작하고 있다가 의외의 환대를 받게 되어 적응을 하지 못한 것뿐입니다. 하지만 제레이나님, 제레이나님의 환영은 저 희가 어느 귀족가나 왕가에서 받았던 인사보다 더 값지고 의미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 희들 모두는 최고의 환대에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저는 루탄 최 한국, 그리고 동생 들, 화, 풍, 광, 수. 그리고 친구 지토 입니다.” 나는 그렇게 제레이나라는 넥스의 안주인에게 조금은 과장되지만 절대 가식이 섞이 지 않은 인사를 했다. 그리고 뒤에 있던 동생들과 지토 역시도 제레이아에게 고개를 숙이거나 허리를 숙이 는 것으로 인사를 했다.(지토가 오랜만에, 아니 처음인가?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했 다.) “네~에. 네. 이런, 이렇게 손님을 밖에 계시게 하다니...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 영주님은 아시는 것처럼 밖에서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아서 오시지 못하고 있어서 언제 뵙게 될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저희 집에서 머무시면서 주인어른을 기다리세요. 참, 이 제 곧 식사시간인데 음식은 아무거나 괜찮으시겠어요? 별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 줄 모 르는데 걱정이네요.” 그녀는 우리들을 응접실로 안내하고 의자를 권하며 수다를 떨었다. 그녀의 행동과 표정에서 처음으로 손님을 맞는 어색함과 어수선함을 볼 수 있었지만 그보다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대하는 따뜻한 마음씨를 읽을 수 있었다. “백작부인, 부인께서 직접 손님을 맞지 않으셔도 제가 알아서 할 것입니다. 그러 니 ...” “크라이안 아저씨, 아시잖아요. 저 그렇게 내숭 같은 것은 할 줄 모른다는 것을요. 그러니 그만 하세요. 원래 하던 것처럼 하자고요. 네?” 크라이안은 부인의 그 말에 그만 돌 씹은 얼굴이 되어서는 한 쪽으로 물러서 버렸다. (고개를 흔드는 것을 보니 포기한 모양이다.) “저녁이요? 그거 제가 도울게요. 저 음식 잘 만들거든요. 오빠가 더 잘하기는 하지 만 이런 자리에서 오빠한테 음식 만들라고 하면 안 될 것 같으니까 제가 부인을 도울 게요. 호호. 가세요. 부엌이 어디죠?” 갑자기 수아가 일어나 부인의 팔을 잡고 응접실을 밖으로 끌기 시작했고, 부인은 조 금 당황해 하더니 환한 웃음으로 수아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음식을요? 그래요? 그래 무슨 음식을 잘 해요? 그럼 오늘은 우리가 대접을 받게 되 는 건가요? 어서 가요. 오늘은 식탁에 손님들이 많으니까 큰 식당도 청소를 해야겠네 요. 호호.” 그렇게 수아와 백작부인(제레이나이며, 영주의 부인인 그 여자)이 응접실을 나가고 나자 남은 것은 크라이안이라는 기사와 나 그리고 화아, 풍아, 광아, 지토와 세미, 란 이였다. “크라이안 기사님 일단 자리에 좀 앉으시지요. 별다른 볼 일이 없으시다면 말입니 다. 지금 상황을 좀 여쭈어 보고 싶기도 하고 말입니다.” 내가 그렇게 말을 꺼내자 크라이안은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혹시 지금 영주님이 계신 곳의 소식을 알 수 있습니까? 영주님께서 가셨으니 마법 사가 따라갔을 것 같습니다만....” 내 말에 크라이안은 다시 돌 씹은 얼굴이 되었다.(입 안에 돌이 많은 모양이다.) “흠, 우리 영지는 마법사가 한 명 뿐이오. 그것도 이 영지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 는 풋내기 마법사일 뿐이오. 그러니 계곡을 막는 곳에 따라간 마법사가 있다고 해도 이곳에서 그 쪽으로 통신을 할 수도 그 곳에서 이쪽으로 통신을 할 수도 없소. 흐 흠.” 아무래도 크라이안은 그런 사실을 말하는 것이 별로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긴 마법사가 없다는 것은 전력상으로 큰 약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니 당연히 그럴 만 도 했다. “그럼 이 쪽에 마법사가 있다면 그 쪽과 연락이 가능한 방법은 있다는 말씀인가요? 혹시 연락을 위한 수정구같은 것이...” 내 말에 크라이안의 눈빛이 반짝 빛이 났다. 아마도 세미가 했던 이야기를 떠올린 모양이었다. “그럼 수정구가 준비되어 있다면 연락이 가능하다는 말이오? 그렇다면 곧 준비를 해 줄 수도 있소. 우리도 그 쪽의 상황이 궁금하지만 별다른 상황이 없는지 전령이 오 지 않고 있어서 걱정을 하고 있었소. 그럼 잠시 기다리시오. 내가 곧 준비를 해 올 테 니.” 말을 마친 크라이안은 곧 응접실을 달리듯 나가 버렸다. “음. 그런데 영주에게 별 문제는 없지 않을까? 비록 마법사는 없다고 해도 병력의 차이가 너무 많이 나잖아. 얼마나 데리고 갔는지는 몰라도 5천은 될 것 같던데? 그 정 도면 150명이란 인원은 강물에 던지는 조약돌과 같은 운명 아닌가?” 화아가 별 문제도 아니라는 듯이 웅얼거렸다. “화아 저녁석은 가끔 돌이 된단 말이야. 가끔은 똑똑한 소리도 하는 녀석이...” 지토가 화아의 말을 듣더니 한 소리를 했다. “지토 아저씨 그게 무슨...” “열 내지 말고 잘 들어라. 만약 우리 앞을 100명의 기사들이 막는다면 누가 이길 까? 당연히 우리가 이기겠지. 그럼 1000명이면 어떨까? 어렵기는 하겠지만 이기겠지? 포위되어서 움직이지 못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기사 따위에게 당하지는 않을 테니 말 이 야. 그럼 1000명이나 5천명이나 별 의미가 없어지지. 그런데 그것보다 더 쉬운 건. 루 탄이가 나서서 마법으로 날려버리는 것이지. 광범위 마법으로 날려버리면... 그럼 어 쩌면 우리는 나설 필요도 없이 싸움은 끝날 수도 있어. 5천중에서 500정도가 한방에 날아간다면 그 다음에는 항복만 남을 뿐이지. 그런데 말이야 저 쪽에는 마법사로 보 이 는 인물이 50명이야. 그 녀석들이 루탄보다 실력이 모자라서 한 번에 10명밖에 못 죽 여도 500이고 20명이면 1000이라는 수가 나오지. 그 나머지는 기사들이고 말이야. 이 작은 영지에 기사가 몇이나 될까? 기사라면 혼자서 10명은 상대 할 수 있을 거야. 하 지만 기사 몇 명과 100명은 달라. 100이면 1000 아니라 그 이상도 상대하는 것이 가 능 하지. 그런데도 상황이 낙관적이라고 보나?” 그러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마법사가 없다는 것이 이런 차이를 만들게 되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럼 지금 상황이 아주 좋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네? 응 오빠.” 풍아가 나에게 물어왔다. 다 듣고 왜 나에게 확인을 하는 것인지... “글쎄, 저 쪽의 50명이 마법사라면 아마 아주 힘겨운 싸움이 되지 않았을까? 이쪽 의 마법사가 어느 정도의 능력을 지녔느냐가 문제겠지만 50명이라면 아무래도 상대의 써클보다는 두 단계는 위에 있어야 될 것 같은데... 그러려면 9써클 유저나 마스터가 아니고는 힘들 것 같고... 적어도 50명의 마법사 중에 7써클이 다수 있다면 말이야. 만약 8써클이 둘 이상이 있는 50명의 마법사라면 9써클도 마스터가 아니면 어려울 거 야.” “형님 말씀대로라면 아주 비관적이로군요. 이 곳에 9써클 마법사가 있으리라고는 생 각하기 어려우니 말이죠.” 광아가 말을 돕고 나섰다. 그러는 중에 크라이안이 큼직한 상자를 들고 응접실로 들어왔다. “이게 전대 마법사님이 쓰시던 물건입니다. 제가 알기로 이와 비슷한 수정구를 그 풋내기도 들고 갔으니 쓸모가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뭐야? 결국에는 어디다 쓰는 건지도 모르고 들고 왔다는 말이잖아. 음. 어디 보자. 이거 통신용으로 쓰도록 만들어진 수정구는 맞군. 그것도 상당한 수 준의 수정구로군. 9써클에는 약간 모자르지만 거의 9써클에 이른 인물이 만든 것인데 ? “전대 마법사님이 대단하신 분인가 보군요. 거의 9써클에 이르신 것 같은데 말입니 다.” 내 말에 크라이안은 밝은 얼굴이 되어서는 입을 열었다. “물론이오. 그 분은 엄청난 마법사이셨소. 때로는 이 분지에 부족한 비를 불러 농작 물의 수확에 도움이 되게 해 주실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지니신 분이었소. 그런데 그 애송이 녀석을 제자라고 받으시다니 이해가 안 간단 말이야...” 뒷 말은 물론 그의 독백이었다. 아무래도 아까부터 풋내기라 부르는 사람은 그 전대 마법사의 제자였던 모양이다. 무 슨 이유인지 몰라도 크라이안에게 미움을 받고 있는 모양이지만 말이다. 나는 크라이안의 말을 듣고 조심스럽게 수정구에 마력을 흘려 넣었다. 그리고 수정구가 가지고 있는 패턴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수정구는 그 수정구를 만든 사람의 암호와도 같은 마력 패턴이 있었다. 그것을 제대 로 맞추지 못하면 수정구를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빌어먹을 수정구가 거의 9써클에 이르는 인물이 만들었으니 그 패턴을 읽 어내는 것도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어려운 것과 할 수 없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나는 결국 그 패턴을 읽었고 수정구를 통해 매체수정구에(이쪽의 수정구가 본체고 아 마도 부속 수정구가 몇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제자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 어떤 것 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모든 부속 수정구들에) 통신을 보내기 시작했다. 간단한 통신으로 내용은 ‘넥스 저택에서 영주님을 모신 영지 마법사에게 답변을 요 함’이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이 수정구가 가지고 있는 부속 수정구들은 모두 이 내용을 받을 것이고 그 중 에서 넥스 영주를 보좌하는 마법사가 이 내용을 본다면 곧장 연락을 해 올 것이었다. “일단 연락을 취하기는 했습니다만, 확실한 코드를 모르기 때문에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일단 한 번만 연락이 된다면 그 후로는 쉽게 연락이 될 텐데 말입니 다.”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수정구에서 손을 떼었다. “이 수정구는 잠시 이 자리에 두셨으면 합니다. 제가 이 수정구로 연락이 들어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도록 마법을 걸어 두었으니 연락이 들어오면 알람마법이 울릴 것 입 니다.” “아! 네.” 그렇게 크라이안이 어벙한 소리로 대답을 하고 있을 때, 응접실 입구로 우당탕하고 아이들이 뛰어들었다. “어디 어디 있어? 마법사 형이랑, 예쁜 누나랑. 자그마한 할아버지... 어? 저기 있 구나. 우와 정말 예쁜 누나다. 누나!!” “응 어디. 정말이네. 저 형 진짜 멋지다. 빨간 머리에 빨간 옷. 키도 크고.” “아니야. 아니야 저 오빠 봐. 무지 예쁘잖아. 검은 머리카락에 ... 응? 저기 저 오 빠도 예쁘다. 금발머리야. 우화 마을에 헤레아 언니보다 더 멋진 금발이잖아.” 우르르르. 아이들은 입구에서 그렇게 한마디씩 하고는 마음에 드는 사람 앞으로 달려 들었다. “누나 나 넥스길리어야. 넥스 가문에 차기 영주야. 누나 이름은 뭐야?” 풍아 앞까지 내리 달려온 녀석이 풍아 앞에서 머뭇거리고(분위기 보고 안겨 보려고 했던 것 같은데, 마침 풍아가 팔짱을 끼고 있었다.) 서서 물어본 말이다. “형, 형은 무슨 무기를 써요? 무기가 없네? 형은 커다란 검이나 도를 쓰면 멋있겠 다. 난 넥스길리온이야. 넥스가의 차남이지. 반가워 형. 형은 이름이 뭐야?” “오빠, 정말 멋있어요. 저는 넥스리아라고 합니다. 넥스가의 장녀고 음... 셋째예 요. 막내죠. 오빠는 이름이 뭐예요. 그리고 이 오빠는요?” 화아 앞에 선 사내 녀석과 광아와 나를 사이에 두고 고민하는 꼬마 아가씨의 말이다. 첫째는 열 살 정도 되는 것 같고, 둘째는 여덟? 막내는 일곱 정도로 보이는 나이였 다. “이런, 넥스길리어, 넥스길리온, 넥스리아 너희들 분명히 손님에 대한 예의범절을 배웠을 텐데 그런 행동을 보이다니 어찌 된 것이냐?” 갑작스러운 크라이안의 호통이 터졌다. 순간 떠들썩하던 아이들의 소란이 멈추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슬금슬금 손을 잡고는 응접실 입구로 뒷걸음을 쳤다. “안녕하십니까. 저의 저택에 오신 손님께 인사드립니다. 저는 넥스 가의 장남 넥스 길리어 유소. 그리고 이쪽은 둘째 넥스길리온 유소. 마지막으로 셋째인 넥스리아 유 소 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입구에 일렬로 정렬한 아이들은 넥스길리어의 소개로 자신들을 알리고 고개를 숙이거 나 무릎을 살짝 구부리는 인사법으로 인사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는 크라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넥스길리어, 넥스길리온, 넥스리아. 저는 루탄 최 한국, 그리고 일행 인 화, 풍, 광, 지토 입니다. 다른 일행은로 수아가 있습니다만 지금은 백작부인과 함 께 저녁을 준비하는 중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그들의 인사를 이렇게 격식적인 말로 받아 주었다. 아이들이 힘들고 어렵게 한 인사에 정중히 답하는 것으로 그 노력에 대한 치하를 하 고 싶었던 까닭이었다. “하하, 이제 인사가 끝났으니 그만 이런 격식은 벗었으면 합니다만, 크라이안 경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린 아이들은 어린 모습을 터놓을 때, 제일 아름다운 법이지 요.” 내 말에 크라이안은 더 이상 반대의사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반응을 읽은 아이들은 저마다 다시 쪼르르 달려와서 우리들 앞에 서거 나 앉았다. “그런데 이상하다 오빠. 그치 그치.” 넥스리아가 앞에 있는 넥슬길리온의 옷자락을 잡고 흔들며 말했다. “응? 뭐가? 뭐가 이상해?” “있잖아. 할아버지가 예전에 이야기 해 주신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말 이야.” “으응? 넥스 할아버지 말이야?” “응 그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의 가장 친한 친구분이 루탄 최 한국이라고 했잖아. 그리고 함께 있던 정령들이 화 수 광 풍 지토라고... 그런데 이 오빠들 이름이 꼭 같 아. 그치 그치? 이상하지?” 흐헉. 설마하니 여기서도 이렇게 들통이 나고 마는 것일까? “음? 그러고 보니 그렇네. 정말이다.” 조용해진 응접실에 넥스길리온의 목소리만 울렸다. 크라이안은 그 나름대로 당황한 얼굴이 되어서 우리들을 보고 있었고, 우리들 역시 생각지도 못한 사태에 당황한 얼굴이 되어서 머뭇거리고 서 있었던 것이다. “자!! 식사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어서 가시지요. 호호 아주 멋진 저녁식사가 될 겁니다. 수아 아가씨의 실력이 대단하더군요. 정말 대단했어요.” 제레이나 영주 부인의 목소리가 응접실에 울려 퍼진 것은 그 잠시의 정적이 흐르는 중이었다. 그리고 덕분에 우리들은 그 이상한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이들은 멋진 식사라는 말에 우두두 달려서 식당으로 갔고, 우리들은 크라이안의 의 문스런 눈빛을 피하면서 식당으로 종종 걸음을 쳤다. 식탁의 분위기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평소에 쓰지 않는 곳이라는 설명이 붙은 식당은 흔히 귀족의 식탁을 떠올리게 하는 길쭉하게 늘어진 식탁이었지만 화려하게 장식하는 꽃병이나 샹들리에 같은 것은 보이 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들은 이런 식탁에서의 식사가 익숙하지 않은 모양인지, 아니면 식탁에서 의 예절 교육 탓인지 떠들거나 소란스럽지 않게 식사를 했고(그렇게 먹는 것에 비해 서 는 상당히 많이 먹었다.) 크라이안도 왕성한 식욕을 과시했다. 제레니아가 놀란 표정 을 지은 것으로 보아서 크라이안의 평소 식사량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저택 안에 낮고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삐이이이익~~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수정구에 통신이 온 모양입니다. 계속 식사들 하십시오. 가서 보고 오 겠습니다.” 그렇게 인사를 하고 식당을 나서서 응접실로 달리는 내 뒤를 우르르 사람들이 따라 나왔다. 마저 식사나 하라니까는... 응접실에 도착해서 수정구를 보자 주정구에는 부속 수정구의 마력 패턴에 대한 정보 와 연락 코드가 들어와 있었다. 무선 연락 코드가 필요했던 것이기에 충분히 만족스러운 내용의 답신이었다. 나는 수정구에 마력을 집중하고 이번에는 확실한 코드를 이용해서 상대를 호출했다. 곧 수정구의 저 편으로 20대 초반의 젊은 마법사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루탄이라고 합니다. 현재 위치는 넥스 저택의 응접실입니다. 여 기 크라이안 경을 모셨으니 이야기를 나누십시오.”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크라이안을 쳐다보았다. “그냥 말씀하세요. 음성 전달은 이 응접실에 계시다면 누구나 가능합니다.” 내 말을 들은 크라이안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풋내기. 그래 그 쪽 상황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냐? 도무지 궁금해서 견딜 수 가 없잖아. 전령도 오지를 않고 있으니 말이야.” “크라이안 아저씨. 풋내기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요. 이젠 저도 영지의 수석 마 법사란 말입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소식이나 전해. 누가 그따위 푸념이나 듣자고 했냐?” 크라이안이 으르렁거리자 수정구 저 편의 마법사가 잠깐 떠는 듯 했다. “지금은 영주님과 상대 기사단이 서로 대치 중입니다. 다행히 우리가 먼저 도착해 서 입구를 봉쇄한 상태이기 때문에 적들은 방벽을 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아 직 직접적인 전투는 없었습니다만, 저들의 마법사 수가 워낙 많기 때문에 싸움이 벌 어 진다면 상당한 희생이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적들도 자신들의 수가 적다는 데에서 머뭇거리며 협상을 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그게 요구 조건이 말도 되지 않는 것 이어서 협상의 여지가 없을 것 같습니다. 저들의 요구는 영지의 무조건 항복입니다. ” 고분고분해진 마법사는 간략하게 전황을 보고해 왔다. “그런데 적의 마법사들은 어느 정도 수준입니까? 혹시 확인이 가능하셨습니까?” 내가 다시 마법사에게 물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알 수 있는 것은 적어도 5써클 이상의 마법사가 20여명이라는 것 뿐입니다. 그 이상은 파악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5써클이 겨우 되기 때문에....” 젊은 마법사는 상당히 주눅이 든 모습이었다. 20대 초반에 5써클이면 상당한 수준인데, 어쩌다가 이런 불학무식한 사람들 틈에서 대우도 못 받고 지내는 것인지... 불쌍한 마법사. “그럼 이렇게 통신 유지를 오래 하는 것도 힘이 드실 것 같으니 잠시 후에 제가 다 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 동안에 영주님을 모시고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해 주셨 으면 합니다. 잠깐이면 되니 시간을 내어 달라고 해 주십시오. 가능하시겠습니까?” 내가 그렇게 물어보자 수정구에서 다른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내가 넥스트리언 유소. 현 넥스 영지의 영주요. 할 이야기가 있으면 지금 해도 상 관없소.” “아! 아빠다. 아빠. 그치 큰오빠.” “응 아빠 목소리다.” “그래 리아야, 아버지 맞아.” 순서대로 리아, 길리온, 길리어의 말이다.(넥스가에서는 앞에 붙은 넥스를 빼고 애칭 으로 쓴단다.) 넥스트리언의 목소리는 톤이 강하고 굵은 목소리였다. 예전에 넥스도 그런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는데... “반갑습니다. 저는 영주님께 볼 일이 있어 여기까지 찾아왔습니다만, 지금은 그 볼 일이 급한 것은 아닌 것 같으니 잠시 미루어 두어야겠습니다. 대신에 제가 드리고 싶 은 말씀은 이것입니다. 저희는 용병들입니다. 그것도 아주 강한 용병들이지요. 그래 서 말씀인데 저희가 영주님을 어렵게 하는 그들을 막아드릴 수도 있습니다. 대신에 영 주님께서 저희에게 주실 것이 있으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물론 저희를 고용하실 생각 이 있는지도 아울러 여쭤야겠지요.” 나는 그렇게 말을 마치고 조용히 영주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에 수정구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만약에 당신들이 이들을 막아 우리 영지의 백성들이 해를 입지 않게 해 준다면 나 는 당신들을 고용하고 싶소. 그 대가가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오. 하지만 우리 영 지에는 그런 정도의 용병을 고용할 재물이 없소.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고용하고는 싶지만 고용할 대가를 가지지 못했다? 영지민이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기에 자신의 체면을 생각지 않고 용병의 조건을 수 용 하겠다? 그러면서 용병들에게 줄 대가가 마땅하지 않다는 것을 걱정한다? 이 정도면 괜찮은 영주겠지. 아니 썩 좋은 영주야. 거기다가 제레니아부인고 리아 남 매의 영접도 받았으니 이미 마음은 기울어 있는 것이겠지. “좋습니다. 제가 이 영지의 어려움을 구해드리지요. 그리고 이 영지에 있는 한 가 지 물건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내가 다시 수정구에 질문을 던지자 오래지 않아 답이 들려왔다. “좋습니다. 그 물건이 누군가의 목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물건이라면 어떤 것이 든 드리지요. 제가 생각하는 그것이라 해도 드리겠습니다.” 나는 그가 생각하는 것이 내가 요구할 그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쪽 마법사와 다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혹시 마법사님께서는 그 쪽의 순간이동 좌표를 잡아 주실 수 있으신지요. 그것이 7써클에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기는 하지만 좌표 계산만이라면 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 다.” 그러자 수정구에 보이는 젊은 마법사는 머리를 긁으며 대답했다. “글쎄요. 그게... 아직 해 보지 않은 것이어서... 일단은 한 번 해 보겠습니다.” “이 빌어먹을 녀석아. 하라면 하는 거지 해 보는 건 뭐냐? 너 나한테 한 번 맞아봐 야 정신을 차리겠냐?” 크라이안의 목소리가 응접실을 울리자 수정구 저 쪽에서 마법사가 고개를 숙였다. “제가 곧 계산해서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럼.” 그리곤 곧 통신이 끊겼다. 아마도 상당히 지쳤을 것이다. 거기다가 계산을 하려면, 아마도 머리가 상당히 아프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그럼 그 사이에 우리는 출발 준비를 해야겠다. 다들 나가서 무기 챙겨오고, 알 아서들 준비해서 들어와라. 이번에는 좀 힘들 것 같으니까 말이다. 마법사가 50명이 면 나도 버겁다. 나머지 기사들은 너희들이 알아서 해야 하니까 너희도 준비를 해야 지.” 내가 그렇게 말하며 동생들과 지토를 밖으로 내 몰자, 남은 사람들은 전부 놀란 표정 이 되었다. “정말 형이 마법사 50명을 막을 수 있단 말이야? 정말?” 지금까지 곁에서 주눅이 들어있던(명색이 영지의 주인 집인데 영지민이 들어와 있으 면 주눅이 들게 된다.) 세미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어린아이의 호기심은 주위의 두려움이나 압박을 이기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다른 사람들의 눈이 모두 나에게 집중되었다. “세미야. 내가 이 대륙에서는 제일 강한 마법사라면 안 믿겠지? 하지만 그건 사실이 란다. 마법으로 나를 이길 사람은 이 세상에서 없어. 인간이 아니면 모르지만 말이 야.” “에~ 정말이야? 정말?” 이번에는 길리어가 미덥지 않다는 표정으로 물어왔다. “호호. 그럼 물론이지. 오빠는 세상 최고의 마법사란다. 이 누나가 보장하지.” 수아가 옆에서 거들고 나섰다. 뭐 아이들이나 이 사람들이 그걸 전부 믿든 아니든 상관은 없었다. 그리고 내가 제일의 마법사일 것이라는 것도 지금까지 다른 사람을 만나지 못해서 짐 작하는 것이지 어디 9써클에 이른 사람이 없으리란 법은 없는 것이다. 물론 내가 동급 마법사들 보다 마나량에서 월등한 우위를 차지하기는 하겠지만 말이 다. 그럼 역시 내가 최고인가? 9써클이 마법의 정점이라 했으니 말이다.(끝까지 하고 보니 이런 결론이 나오네? 쩝.) 그러는 사이에 밖으로 나갔던 화아들이 들어왔다. “어? 지토 할아버지가 둘이야.” 확실히 아이들은 빠르다. “응? 정말이네. 어떻게 된 거지?” 길리어와 길리온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을 주고받았다. 그러자 한 지토가 모습을 바꾸어서는 길리어가 되었다가 길리온이 되었다가 리아가 되었다가 세미가 되었다가 하면서 주위를 돌았다. 그 갑작스러운 사태에 아이들은 무척이나 놀란 얼굴이 되었다. “지토, 그만하라고 해. 아이들은 그게 신기하기도 하지만 무섭기도 하단 말이야. 자 기와 꼭 같은 존재를 본다는 것은 무척이나 두려운 일이야.” 나는 지토에게 게브의 행동을 멈추게 했다. 사실이다. 어느 순간 자기 앞에 자기와 꼭 같은 존재가 나타난다면 그 순간에 느끼 는 위기감은 엄청난 것이다. 저것이 내 자리를 차지하면 어떻게 하지? 단 이 한 가지 생각만으로도 밀려오는 두려움은 벗어나기 어렵다. “으아아앙!!” 결국 리아가 먼저 울음을 터뜨렸다. 길리어와 길리온도 상당히 무서운 표정이 되어 있었다. “자자. 그만 울어요. 아무리 닮았다고 해도 엄마가 아이를 몰라보지는 않아요. 그러 니 걱정하지 말아요.” 제레니아가 다정스럽게 리아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사내 녀석들도 돌아가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아이들이 표정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미처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고 벌인 일입니다. 정말 죄송합니 다.” 지토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고, 곁에는 게브가 트레이드마크인 당나귀로 변해서 고개를 주억거리며 사과를 하고 있었다. “이 녀석이 말은 못해도 상당히 미안해하고 있습니다. 죄송하다고 전해달라는 군 요.” 지토는 게브 몫의 사과까지 하고 있었다. “아닙니다. 그런 사과까지 하실 일은 아닙니다. 그저 아이들이 조금 놀란 것 뿐인걸 요.” 라는 말로 제레니아 부인이 지토의 사과를 받아 들였다. 그런 소란 속에 다시 수정구에서 연락이 들어왔다. “그래 좌표 계산은 끝이 난 모양이군요.” “네, 겨우 끝을 내었습니다만, 확실한 것인지 어떤지 몰라서...” “그럼 일단 좌표를 불러 주십시오. 여기서 간단한 물건을 넣어서 실험을 해 보면 될 일이지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젊은 마법사는 복잡한 좌표를 불러주었다. “음, 알았습니다. 그럼 제가 그 곳으로 물건 하나를 보내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마땅히 응접실에서 보낼 것을 찾다가 의자 하나를 순간이동 시 켜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수정구 저 편에 의자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순간적으로 놀라서 마법사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 장소가 어느 정도 넓이가 되는 겁니까? 한꺼번에 많은 인원이 들어갈 수 있는 자리가 됩니까?” “그게, 여기는 제 천막 안입니다. 그러니까 ... 이런 이곳으로 이동을 하시면 천막 과 엉킬 수도... 죄송합니다. 제가 다시 다른 곳의 좌료를 알아서 연락을...” “저기 그러지 마시고 천막을 걷어서 다른 곳으로 옮기고 연락을 주십시오. 일단 위 치 좌표는 맞는 것 같으니까 말입니다.” 나는 허둥대는 젊은 마법사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연락을 끊었다. “쯧쯔. 아무튼 저 풋내기 녀석이 제대로 하는 일이란 없다니까. 그러기에 전대 마법 사님도 누누이 저 녀석이 정신만 차리면 될 텐데 하고 한숨을 쉬셨지...” 크라이안은 통신이 끊긴 수정구를 바라보며 혀를 차고 있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수정구를 통해 천막이 치워졌다는 연락이 들어왔 다. “그럼 저희들은 가서 일을 마치고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그 동안 마차와 말들을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 저희들에겐 아주 중요한 녀석들이어서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동생들과 지토 그리고 란이와 기타 등등의 환수들과 맘맘을 이 끌고 순간이동에 들어갔다. 물론 처음 좌표를 듣고 이동하는 것이라 혹시 있을지 모를 간섭현상(순간이동을 한 곳에 어떤 물질이 있어서 이동해간 물질과 섞이는 현상)에 대비한 방어벽을 보통의 서 너 배는 더 만들어 놓고 이동을 시도 했다. 그리고 다행히 우리가 도착한 곳은 아무 물체도 없는 곳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조금 높지도 낮지도 않은 허공이었다는 것이다. 다행히 아까 의자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은 후라 공중부양 마법을 준비해 갔기 때문 에 땅바닥에 떨어져 뒹구는 꼴사나운 모습은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바닥에 내려서면서 주위를 살펴보자 대략적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주위는 이미 어두워진 탓에 여기 저기 횃불을 밝히고 적을 대비하고 있었고, 이들이 있는 곳은 계곡을 막고 만든 성벽이었다. 내가 그렇게 주위를 잠시 둘러보는 사이에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좌표를 알려준 젊은 마법사와 건장한 체구의 30대의 기사와 그를 따르는 젊은 기사 셋이었다. “어서 오시오. 수정구로 볼 때보다 더 젊은 것 같소이다. 내가 넥스 영지의 넥스트 리언이오. 일단은 당신들이 저들을 막아줄 수 있다 했으니 저기 올라가서 저들의 상 황 을 살피는 것이 필요할 것이오. 물론 우리들도 최선을 다해서 당신들을 도울 것이오. 따라오시오. 오늘 밤은 왠지 저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소.” 입을 연 것은 30대로 보이는 건장한 체구의 기사였다. 플레이트 갑옷을 입고 붉은 망토를 걸친 그의 가슴에는 무척이나 낯이 익은 도안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예전의 란의 모습이. 뾰로로롱 뾰로로 뾰롱. - 저건 저를 많이 닮았네요. 주인님 전에 그것 보다는 훨씬 마음에 들어요. 란이가 오랜만에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전에 수도에서 본 모습에 지금까지 마음에 걸려 있었던 모양이다. “좋습니다. 영주님. 일단 급한 불을 끄고 봐야겠지요.”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다른 사람들과의 인사를 생략하고 성벽 위로 올라갔다. 건너편에는 좁은 계곡이 자리 잡고 있었고, 비교적 넓게 깍인 부분에 기사들이 말을 타고 대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마법사들이 열을 짓고 있었다. “영주님 저들이 언제나 저런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까?” 나는 급하게 영주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저들이 저런 대형을 한 것은 오늘 밤이 처음입니다.” “그럼 이제 곧 공격이 시작될 것이라는 것을 영주님도 아시겠군요? 그것도 마법으 로 먼저 공격을 할 것입니다.” “그건 알지만 지금으로선 방법이 없습니다. 다만 성벽에 최소한의 병력만을 남기는 것으로 성벽의 붕괴로 인한 희생을 줄여보는 방법 밖에는...” 그러고 보니 실제로 성벽 위에는 서너 명의 병사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찌 보면 현명한 방법인지도 모른다. 마법에 대항할 길이 없다면 이 성벽도 오래지 않아서 무너질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 원거리 공격에 변변히 대항을 할 수도 없을 것이고 말이다. “그럼 영주님은 저들이 이 넓은 곳으로 들어온 이후에 사방에서 공격을 하실 생각 을 하고 계시겠군요. 특히 기사들을 이용한 기습작전 같은 것을....” 내말에 영주는 놀랍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뻔한 계획인 것이오? 내가 세운 계획이?” 그는 한편으로는 자신의 계획이 그렇게 한심한 수준의 것이었나를 고민하는 모습이었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이 상황에서는 최선의 방법일 것 같아 여쭈어 본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말해 주고는 다시 적들에게 시선을 두었다. “혹시 저들의 목적을 알고 계십니까?” 내가 다시 영주에게 묻자 영주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우리 영지민들은 영지 밖으로 나가지 않은지가 600년에 가깝습니다. 심지어 우리들 은 제국에서의 어떠한 간섭도 받지 않고 세금도 없이 지내왔습니다. 완전히 독자적인 독립국이나 마찬가지지요. 그리고 그렇게 패쇄적인 탓에 밖에서의 어떤 정보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들의 목적이 이 땅이라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알지 못하는 입장 입니다.” 나도 그럴 수밖에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럼 하는 수 없이 저들에게 물어봐야겠지요. 이제 저들이 밀고 들어올 모양이니 말입니다. 그럼 일단 구경을 하고 계십시오. 정리가 끝나면 다시 이야기를 하지요. 그 리고 절대 싸움에 끼어들지 마십시오. 우리일은 우리가 합니다.” 나는 그렇게 영주에게 이야기하고(그 때, 뒤에 있던 젊은 기사들이 발광모드로 들어 가려고 했다. 기억해 둬야지.) 동생들과 지토를 돌아보았다. “아까 이야기한 그대로 내가 마법사들을 막고 너희가 기사들을 맡아. 물론 수아는 내 곁에 있고 너희가 25명씩 맡아서 처리해. 죽이지 말고. 그럼 간다.” 나는 그 말과 함께 성벽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그 뒤를 동생들과 지토가 따라 내렸다. 성벽 위에서는 놀라서 지르는 비명이 들렸지만 우리가 알 바 아니었다. 우리가 성벽을 뛰어내리자 적들 진영에서도 소란이 일어났다. “빠르게 접근하고 최대한 빠르게 제압한다. 최대한의 실력을 발휘해. 그리고 환수들 과 맘맘의 힘도 적절히 사용하고.” 나는 빠르게 기사들에게 다가가며 소리쳤고 동생들과 지토도 속력을 높였다. 상황 파악이 되지 못한 기사들이었지만, 우리가 공격 의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쉽 게 파악을 한 모양이었다. 빠르게 전열을 가다듬은 기사들이 말을 달려오기 시작했다. 우리들이야 말이 없지만 순간 속도에서는 말보다 빠른 우리들이었다. 순식간에 기사들과 우리들의 거리가 가까워졌지만 나는 이런 무식한 녀석들과 싸우 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나는 뒤를 따르던 수아를 붙들고 재빨리 기사들의 머리 위로 날아 넘었다.(이런 모습 은 완전히 무협영화에서 주인공이 여주인공 허리를 안고 날아가는 그것이다. 바로 그 것.) 그리고 순간적으로 나를 놓친 기사들이 당황하는 틈은 영락없이 동생들과 지토가 파 고들었다. 뒤에서 말이 쓰러지고 기사들이 말에서 떨어지는 소리와 비명이 들렸지만 나는 곧장 마법사들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마법사들은 내가 기사들을 뛰어넘는 순간 벌써 마법을 시현하고 있었다. 아마 메모라이즈 해 두었던 마법일 것이다. “수아 방어좀 부탁해. 저자들의 마력을 봉쇄해야겠다. 내가 마력을 봉쇄하면 수아 가 저들의 혈을 제압해. 가능하지?” “그럼 오빠. 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수아는 자신 있게 대답하며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마법들을 방어했다. 빠르게 캐스팅된 마법들일수록 그 위력은 떨어지게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 보다 상위마법은 펼칠 수가 없을 것이었다. “마력 봉쇄.” 나는 마법사들이 있는 지역의 유동마나를 전부 내 영향아래에 두었다. 이런 것을 쉽게 설명하자면 이렇게 된다. 내가 만약 9써클의 엄청난 마법을 사용하자 고 하면 내가 정말 사용하는 마나는 대부분이 자연에 퍼져 있는 것을 사용한다. 다만 그 시발점은 내 써클 마나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럼 두 사람이 동시에 자연에 있는 마나를 끌어 쓰려고 하면 어떻게 될까? 그런 때 에는 의외로 자연의 마나를 둘로 나누어 가지는 것이 아니라 마나를 정교하게 다루고 기본 마나량이 큰 사람에게 자연의 마나가 흘러가게 된다. 그래서 마력 봉쇄의 원리는 바로 그런 것이다. 내가 주위에 있는 아주 넓은 범위의 마나를 내 마법사용에 쓰겠다는 의지를 보냄으로 써 다른 사람들이 그 마나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나보다 마력이 높거나 마나를 다루는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 있다면 그에게 필요 한 마나를 빼앗기게 되겠지만, 이번에 이 50명 중에는 그런 인물은 없는 것 같다. 나는 그렇게 마나를 봉쇄하고 서둘러 그들에게 접근했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 있을수록 마나에 대한 강제력이 떨어지니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유리한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수아가 앞으로 나서며 우왕좌왕하는 마법사들에게 물줄기를 쏘아 보냈다. 한꺼번에 수백에 이르는 물화살들은 정확하게 마법사들의 혈도를 짚었고, 수아가 몇 번 힘을 쓴 뒤에 서 있는 마법사는 오직 하나였다. 그는 겨우겨우 실드를 형성해서 수아의 공격을 막았던 것이다.(그렇다고 마력 봉쇄 를 푼 것은 아니다. 그저 자신의 써클 마나로 급이 낮은 실드를 쳤을 뿐이다.) “이런 대단하군. 8써클이라. 하지만 실드를 치는 것으로도 써클 마나는 날아갈 텐 데? 그 다음은 어쩌려는 것인가?” 내가 그렇게 물어보자 그는 웃으며 품속에서 스크롤을 꺼냈다. “자, 잠깐. 이봐, 이야기나 하자고. 그렇게 도망을 갈 것은 무엇이란 말이야? 어차 피 도망에 성공을 할지 못할지도 미지수가 아닌가? 여시서 스크롤을 쓰면 제대로 성 공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 않나?” 나는 전에 저 스크롤을 쓰고 하반신을 남기고 사라진 8써클 마법사를 생각하며 그렇 게 소리쳤다. “크흐흐. 위대한 대신 루시퍼님의 힘은 위대하시다. 내 머리만 돌아가도 나는 부활 할 것이다. 너 따위가 위대한 신의 권능을 알 바 아니겠지. 무지한 것들 크크흐..” 그는 웃으며 실드 안에서 스크롤을 찢었다. “기억하마 너를 감히 우리의 대업을 방해하는 너를 칵!” 유유히 스크롤을 찢어가던 이번 녀석은 아무래도 재수가 없었나 보다. 전에 녀석은 허리를 남기고 갔으니 머리가 돌아가서 부활을 했는지 몰라도 이번 녀석은 머리만 남 기고 순간이동을 했던 것이다. 그렇게 마법사가 아주 간단하게 제압이 되고 나서도 제법 항쟁을 하던 기사단은 제압 되기 전에 죽음을 택하는 녀석들이 늘면서 정리가 되기 시작했다. “형, 상황이 별로야. 자살이 27명이야. 나머지 73명은 제압했지만 아혈만 풀려도 혀 를 깨물 녀석들이야. 상당히 곤란하네.” 화아가 기사들을 정리해서 보고를 했다. “그래? 어떻게 되겠지. 잠깐만 기다려봐.” 나는 그렇게 화아에게 이야기하곤 마법사들에게 다가갔다. 모두들 혈이 제압된 상태라 움직이지도 못하고 겨우 눈만 굴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 중에서 써클이 높은 마법사에게 다가갔다. “7써클이라. 그 정도면 어디 가서 푸대접을 받지는 않을 텐데 무엇 때문에 암흑교에 서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것이오?” 나는 눈만 굴리고 있는 마법사 옆에 앉아 지나가듯 물었다. 묻는다고 대답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그것참, 뭐라고 대화를 나누어 보려고 해도 전부들 목숨부터 끊고 보자고 하니 이 런 대화를 할 수가 없지를 않은가 말이야.”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품속에서(사실은 창고에서) 예전 아르미엘 사제가 주었던 역 십자가를 꺼내서 슬쩍 보여 주었다. 그리고 다시 역십자가를 품속에 넣었다. 순간 마법사의 눈빛이 빛나며 흠모와 존경의 빛이 되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그 마법사를 데리고 한 쪽 구석으로 가서 혈도를 풀었다. “조용히 하고 질문에만 답해라. 어찌된 것이냐?” “무슨 말씀이신지. 무얼 물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희야 그저 루시퍼님의 뜻에 따 른 것뿐인데 어찌된 것인지...” 마법사는 도리어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걸 묻는 것이다. 어째서 내가 해결을 하기로 하고 들어온 이 곳에 너희가 와서 일을 망치는 것이냔 말이다.” 나는 화가 난 듯이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 거렸다. “사제님 저희는 모르는 일입니다. 그저 다른 사제님들이 시키시는 대로 임무를 수행 하고 있을 뿐입니다. 저희야 사제님들이 무슨 일을 하시는지야 알 수 없습지요.” “그래? 그럼 너는 어느 사제의 밑에 있느냐?” “예? 어느 사제님이라니요? 그거야 대신 루시퍼님 심부름꾼이신 사제님이지요.” “그런 그 사제가 누구인지도 모른다는 말이냐?” “그거야 당연히... 아니 그런 것을 왜...” 나는 마법사의 눈초리가 의심으로 빛나는 것을 느끼고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이런, 그렇지 너희는 사제들을 모르지. 내가 너무 화가 나다보니 우리 사제들끼리 아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너에게 묻게 되었군.” 나는 그렇게 둘러대며 슬쩍 마법사의 표정을 살폈다. 다행스럽게 마법사의 눈에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긍정의 빛이 떠돌았다. “좋다. 어찌된 것인지야 내가 나중에 알아보면 될 일이지, 다만 도대체 어떤 명령 을 받고 이리로 온 것이냐? 설마하니 내가 하는 일에 도움이 되기 위해 죽으라는 소 리 를 듣고 온 것이냐?” “아닙니다. 그런 말씀을 들었다 해도 당연히 따랐을 것이지만 저희는 그저 넥스 영 지가 천교 놈들의 눈을 피하면서 힘을 키울 수 있는, 등잔 밑이라는 말씀에 따라 이 곳 을 점령하여 거점으로 삼으려 한 것입니다.” “흠, 그건 나도 같은 목적인데 어찌 이렇게 혼선이 빚어진 것이지? 그럼 혹시 너희 도 모르는 상태에서 너희를 순교시켜 내 일을 쉽게 하기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구 나. 어차피 너희가 넥스 영지의 병사들과 전면전을 벌였으면 살아남은 녀석이 몇 되 지 않았을 테니, 그 상태로 영지를 다스리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후속 병력이 없다면 당연히 너희는 내 일을 돕기 위해 보내진 것들이겠군.” 내가 그렇게 조그마한 소리로 정리를 하자 마법사 녀석은 정말 그렇겠다는 표정이 되 었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저희 중에 살아남는 자가 몇 명만 있어도 넥스 영지를 확보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겠지만 아무려면 사제님이 계시는 것 보다야 못하 겠 지요. 더구나 저희는 기충寄蟲들을 옮기는 것은 가능해도 제어를 못하니 사제님이 직 접 관할하시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고 말입니다.” 나는 녀석의 말에서 기충이라는 것이 이 사건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 다. “그럼 이번에 기충을 가지고 온 녀석은 누구냐? 설마 아까 스크롤을 성급하게 쓰다 가 날아가 버린 녀석이냐?” 내가 그렇게 마법사 녀석에게 물었을 때, 마법사 녀석이 얼굴빛이 확 달라졌다. 그리고 나는 내가 무언가 잘못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너는 사제님이 아니군. 어디서 성물이 났는지는 몰라도 감쪽같이 속았군. 하지만 너는 더 이상의 비밀을 나에게서 듣지 못할 것이다....” 혀를 깨물었다. 나는 급하게 녀석의 입을 벌리고 혀가 말려 들어가 기도를 막는 것을 막았다.(혀를 깨물면 죽는다? 그건 1차적으로 혀가 경직되며 말려서 목구멍으로 들어가 기도를 막 기 때문에 죽거나 2차적으로 출혈과다로 죽는 경우다. 혀가 무슨 심장이냐? 그거 다 친 다고 죽게?) 하지만 무식한 녀석이 혀를 너무 심하게 끊어 놓아서 목구멍에 말려 들어간 혀를 다 시 끄집어내는데 무지 힘들었다. 예전에 사극에서 본 적이 있어서(혀를 물고 자결한 여자를 구하는데 숟가락을 가지 고 와서 목으로 말려 들어간 혀를 끄집어 내는...) 그나마 녀석의 목숨은 살릴 수 있 었다. 그리고 간단하게 혀를 재생을 시킨 나는 녀석을 슬쩍 구석에 밀어 두고 다른 마법사 녀석을 잡아서 비슷한 경로를 통해서 비밀을 몇 가지 알아낼 수 있었다. 철저하게 비밀에 쌓여있는 사제들에 대해서는 알아낼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지만 적 어도 이들이 이렇게 광신도가 되는 이유는 알 수 있었다. 그건 기충이라고 불리는 것에 원인이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능력을 상당히 높여주는 효과가 있는 것이었는데 마법 써클을 자그마 치 두 단계를 높여주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8써클이라 생각한 녀석은 원래가 6써클이 마법사였는데 기충을 먹고 난 이후에 8써클의 마나를 지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건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들도 검기를 쓸 재주도 없던 자들이 기충을 먹고는 검기를 쓸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이 기충이라는 것이 일종의 심령제압의 능력도 지니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 어떤 방법으로 진행되는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기충을 먹은 자들은 사제의 말에 절대적인 충성을 보인다고 한다. 아니 그게 당연하다 여기는 것이다. 나는 그런 정보를 수집하고는 곧장 동생들과 지토에게 제압된 기사들을 마법사와 함 께 한 곳에 모아 두라고 시켰다. 그리고 정리가 끝나고, 성벽 위에서 이제나 저제나 하며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는 영 주에게로 발길을 옮겼다. “이제 저희가 한 약속은 지킨 것입니다. 영주님도 약속을 잊지 마십시오.” 나는 성문으로 다가가는 우리를 마중 나온 넥스트리언에게 그렇게 입을 열었다. “물론이오. 영지의 모든 힘을 모아도 당신들을 이길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약속을 어길 꿈이나 꾸겠소? 정말 대단한 실력들이었소.” 영주는 상당히 감동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저들은 어떻게 할 생각이오? 우리가 잡은 자들이 아니니 우리 마음대로 처 리를 할 수는 없는 문제고 당신들이 처리를 해야 하지 않겠소?” 영주는 잡혀있는 기사들과 마법사들에게 관심을 보이며 말했다. “일단은 조금 알아볼 것이 있어서 알아보고 나서 처리를 결정할 생각입니다. 자세 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겠지만 아무래도 저들은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서 말입니다.” 나는 그렇게 영주의 말에 대답해 주었다. 영주도 아직은 내가 잘 모르겠다는 말에 더 이상 묻지 않고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 든 이야기만 하라고 하고는 그들에 대한 관심을 끊었다. 그렇게 넥스 영지를 찾아 왔던 암흑교의 무리들은 일단 정리가 되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세미의 형은 영주와 함께 있었고, 세미의 아버지는 암흑교에 억 류되어 있기는 했지만 해들 입지는 않은 채로 발견이 되었다. 암흑교의 천막 안에 묶여 있었지만 별다른 이상은 없어 보였다. 그렇게 상황이 완전히 정리가 되고 영주는 포로들을 모두 수레에 싣게 하고 저택을 향해서 회군을 결정했다.(어둠이 서서히 걷히고 멀리 분지를 둘러싼 산들의 머리가 흑 청색 하늘로 서서히 돋아나고 있을 무렵이었다.) 물론 영주는 기사와 기병들로 구성된 무리들로 하여금 계곡 사이에 있는 마을들의 상 황을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일행들은 그렇게 다시 말을 타고 움직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다시 한 번, 포로들의 점혈 상태를 확인하곤 곧바로 영주에게 먼저 저택에 가서 기다 리겠다는 인사를 하고는 순간이동으로 영주의 저택으로 돌아와 버렸다. 물론 올 때는 영주 뒤에서 쫄쫄쫄 따라다니던 젊은 기사 하나를 데리고 와서 우리들 에게 쏟아질 질문 공세를 피하는 방법도 강구한 상태였다. 우리들은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제레니아의 안내로 방을 배정받아서는 저녁까지 깨우 지 말라는 말고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물론 피곤해 죽을 지경인 것은 나뿐이었지만 말이다.) 솔직히 마력 봉쇄라는 것이 9써클 마법을 시행하는 것보다도 더 힘든 일이 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서도 아직 도착하지 않은 영주 때문에 빈 속을 움켜 쥐고 기다려 야 했다. 그리고 영주는 자정이 넘어가는 시간에야 겨우 마을에 도착했고, 사정을 제대로 모르 는 영지민들의 열렬한 개선 환영을 받았다. 뭐 그런 것이야 영주에게 준다고 해도 별 상관은 없는 문제일 터였다. 마을에 돌아온 병사들은 사상자 없이 무사히 돌아온 것을 신에게 감사하는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 늦은 저녁을 위해 뿔뿔이 흩어져 집으로 돌아가고, 모든 병사들이 해 산 하고 나서야 영주는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 동안에 나는 배가 고파서 저택 지붕에 앉아서 마을에서 쓸데 없이 시간을 끌고 있 는 영주를 지켜보고 있었다.(그렇지 않고야 내가 마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어떻게 알겠는가.) 영주가 저택에 돌아오고 그를 따르는 두 명의 젊은 기사들이 함께한 식탁에서는 어제 와는 다른 생기가 돌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오고갔다. 짐작컨대 크라이안이 어제 분위기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식사 시간이 그렇게 딱딱했 던 것 같다. 그에 비해 영주는 소탈한 모습이어서 식탁이 부드러워 진 것이 아닐까싶 다. 길리어, 길리온, 리아 남매는 아버지의 활약을 듣고 싶어 안달이 난 모습이었고, 영 주는 조금 난처한 모습이었다. “얘들아, 원래 많은 사람을 이끄는 대장들은 직접 싸움을 하지 않아. 대신에 많은 사람들을 움직여서 적을 상대하게 하지. 하지만 직접 싸우는 것 보다는 그것이 더 힘 들고 어렵단다. 왜냐하면 자기가 움직이는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 이지.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나중에 이걸 알게 된다면 너희들도 아버지처럼 훌륭한 사 람이 될 수 있을 거란다. 이 형이 지금까지 본 어떤 영주님보다도 훌륭한 영주님이더 구나 너희 아버지는 말이다.” 나는 난처해하는 영주 대신에 이렇게 이야기 해 주었다. 물론 내 말을 들은 남매는 그 말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내가 자신들의 아버지를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해 준 것에는 대단히 만족한 모습들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아이들이 늦은 잠자리에 들고 난 후, 우리 일행은 다시 방으로 돌아왔 다. 어차피 하루를 꼬박 말을 달려 온 영주에게 우리의 볼일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어울 리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내일 오후에나 영주를 다시 만나기로 하고 우리들에게 주어진 방으로 돌아와 둘러 앉아 의견을 나누었다. “일단은 내일 아침부터는 포로로 잡아온 사람들의 몸에 있는 그 기충이라는 것을 좀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어쩌면 포로들을 구할 수도 있을지 모르니까 말이 다.” “오빠, 왜 이번에는 이 일에 이렇게 신경을 쓰는 거야? 암흑교가 무슨 짓을 하던지 그냥 두겠다면서?” 풍아가 내 태도에 대해서 따지고 들었다.(사실 따진다기 보다는 궁금해 하는 것이 다.) “글쎄, 나는 말이야. 자신의 의지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자들을 존중하고 싶어. 너희들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뭐라고 생각하니? 나는 말이야 그건 자유 의지라고 생각해. 자신의 일을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능력. 그래서 전에도 사람 들 의 의지로 하는 일에 별로 간섭하지 않으려고 했었지. 물론 그 의지가 내 의지와 마 찰 을 일으키면 문제가 되었지만 말이야.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지. 이번 경 우는 달라. 사람의 의지를 박탈하고 인형처럼 움직이는 것이지. 나는 암흑교의 일을 방해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내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구하고 싶은 것뿐이다. 뭐 따지 고 보면 결과는 같아지겠지만 말이야.” 나는 그렇게 내 생각을 밝혔지만 내가 생각해도 평소에 내가 하던 행동과는 약간 다 르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냥 모르는 척, 지나갈 수도 있지 않을까? 저들이 무슨 짓을 하던지 내버려 둘 수도 있는데... 지금 넥스 가문의 작은 일을 해결해 주고 마음에 만족을 얻은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 까?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 암흑교의 무리들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역시 설명이 잘 되지 않는다. 그저 호기심이라고 해 둘까? “뭐, 그냥 호기심이라고 해 두자. 일단은 나도 내가 저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 그것 이외에 다른 무엇이 있다는 생각은 안드는구나. 호기심과 측은지심에서 나온 행 동이라고 해 두자. 솔직히 나도 설명이 잘 안되거든. 어떻게 모든 행동을 설명할 수 있겠니. 이유 없는 마음의 흐름도 있는 것이지.” 내 말에 동생들과 지토가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이 되기는 했지만, 더 이상 따지고 들지는 않았다. “뭐 형이 하고 싶다면 하는 거지. 우리가 하기 싫다면 또 모르지만 별로 그런 생각 도 들지 않으니까... 그런데 기충이라는 그거 말이야 대충 어떤 것인지 감이라도 잡 히 는 거야?” 화아가 화제를 돌렸다. “그게 나도 잘 모르겠다. 일단은 기충이라는 것은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도 전달이 가능한 모양인데, 이를테면 번식이라고 할까? 사제라는 자들이 기충을 다수 가 지고 다니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기충을 몸속에서 길러서 다른 사람에 게 옮기는 방법을 쓰는 모양이야. 문제는 그 기간이 6개월 정도 걸린다는 것이 문제 지. 지금 우리가 잡은 녀석들은 실제로는 기충의 1기에 해당하는 녀석들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처음 사제들에게 기충을 주입받은 녀석들이지. 그리고 6개월이 되어서 이 제 몸속에 있는 기충을 옮기기 위해 이 곳으로 온 거지. 방법은 신체 접촉을 통해서 피부를 뚫고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더군. 그냥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기충을 옮길 수 있다는 거지.” “그, 그럼, 엄청난 수로 번식이 가능하다는 말이잖아요? 1년에 두 번 이면 처음 1000명이었다고 해도 금방 4000명이 되고, 2년이면 16000명이 된다는 말인데, 정말 엄 청난 숫자가 되는 거라고요. 그 인물들이 평범한 인물이 아니고 능력이 신장된 인물 들 이라면 기존 능력을 고려할 때,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전력이 되는 거잖아요.” 광아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비명을 지르듯이 말했다. “그렇지. 더구나 이들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기충을 쓰지 않아. 어느 정도는 능력 이 있는 사람을 골라 기충을 쓴 모양이야. 마법사도 대부분 5써클인 것으로 보아서 3 써클은 넘은 사람에게 기충을 썼다는 소리고, 기사들도 나름대로 검을 다루는 인물들 을 선택했어. 물론 그럼에도 실력이 뛰어나지 않은 것을 보면 수준이 높은 기사들에 게 는 연줄이 닿지 않았던가 아니면....” 나는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기충에 대한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영감 이 번쩍이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화아야. 너희가 상대한 기사들 솜씨가 어떤 수준이었지?” 내가 화아에게 불쑥 물어보자 화아는 깜짝이야 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전에도 그랬지만 별로 대단한 실력은 아니었어. 전에 얼음기사단과 붙었던 것을 비 교하면 조금 쳐지는 녀석들이 전부였지. 그리고 솜씨는 전부 고만 고만 했고 말이야. 어? 그러고 보니 특별히 실력 있는 녀석은 없었네? 기사단이면 우두머리가 있어야 하 는 건데 말이야. 누가 나 대신에 제법 실력 있는 녀석 상대한 사람 있어?” 화아가 풍아와 다른 동생들에게 물었지만 다들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는 말이지? 그럼 일단 추측이 가능한 것은 일단 기사들의 경우에는 실력이 뛰어난 기사 다시 이야기하면 몸속에 기를 축적한 경우에는 기충을 쓸 수 없을지도 모 른다는 결론이 나오네? 마법사들이야 몸에 마나를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몸 주위에 까 는 것이니까 상관이 없지만 몸 안에 기를 축적한 경우에는 어떤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 않았다면 언제나 마법사는 8써클이 왔다 갔다 하는데 기사는 그 렇게 실력이 떨어지는 녀석들만 보냈겠어?” 나는 그렇게 동생들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내 머릿속도 정리를 하고 있었다. “정말 그렇겠군요. 형님. 그럼 내일 시험을 해 보면... 일단 기사나 마법사의 몸에 기를 불어 넣어서 기충의 흔적을 찾으면?” “아니 그건 안 될 것 같아. 일단 기충이 몸에 있으면 기를 사용해서 검기를 쓰는 기 사들이 있었거든. 그러니까 일단은 기를 지닌 몸에 기충이 들어가기는 어렵지만 몸속 에 자리를 잡은 이후에는 기를 마음대로 쓸 수 있게 되는 모양이야. 그럼 어떻게 한 다?” 광아와 나는 서로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시작했다. 화아, 풍아, 수아, 지토는 이런 상황에서는 간간히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것 이외에 체계적인 분석이나 연구는 적성에 맞지 않는 모양들이었다. 광아와 내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했지만 별다른 방법을 찾기는 어려웠다. 워낙 기 존의 정보가 부족했던 탓이다. 우리는 날이 밝으면 우선 포로들을 대상으로 이것저것 실험을 해 보고 기충에 대한 연구를 하기로 했다. 그 후, 잠시 눈을 붙인 우리들은 아침을 얻어먹자마자 곧바로 포로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그들을 하나씩 끌어내어서는 나름대로 대상을 관찰하고 실험(?)에 돌입했다. 포로들을 지키던 병사들은 이미 우리들을 본 적이 있었고, 그 포로들이 우리의 관리 하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포로에 대한 처분은 우리가 어떻게 하든 신경 을 쓰지 않는 분위기였다. 다만 무슨 짓을 하는지 궁금해 하는 눈치기는 했지만 말이다. 나도 수아와 함께 포로 하나를 데리고 실험에 들어갔다. 포로는 내가 처음으로 아르미엘의 십자가로 사기를 쳤던 그 마법사였다. 나는 우선 마법사에게 내공을 흘려 넣어서 몸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마법사의 몸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이물질을 발견할 수 있었다. 위치는 목 뒤의 숨골이 있는 부분이었고 여러 갈래의 촉수가 뻗어서 뇌를 덮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참, 신기하네. 어째 이런 것이 머리 속에 들어 있어도 태연하게 행동을 하는 거 지? 그럼 이 녀석은 무얼 먹고 산다는 걸까?” 내가 중얼거리자 이번에는 수아가 마법사의 몸 안으로 물줄기를 넣어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이거 신기하게 생겼네요? 굉장히 얇고 넓게 생겼군요. 거기다가 다리도 많고, 그런데 이게 이 아저씨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요? 자살을 할 정도로 맹목적인 그런 지배를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렇지. 음? 그런데 처음에 사르벨리에 갈 때 만났던 그 기사들 중에서 얼마는 자 살을 하고 얼마는 그 자리를 떠났다고 했는데? 그럼 그 이유는 뭐지? 이게 일률적인 지배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인가? 그것 참 이해가 안 되네.”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리고는 기충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적 어도 기충이 사람을 한 가지 방향으로만 조정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이 그것 이었다. 같은 상황이었는데 자살과 도주라는 다른 판단을 내렸던 것을 보면, 기충이 완전하 게 대상을 꼭두각시로 만드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럼, 이 기충은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 여전히 질문은 같은 자리에서 맴돌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기충에 대해 여러 가지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수아가 놀랍다는 듯이 소 리를 질렀다. “어머, 오빠 이 기충 두겹이네요? 처음에는 껍질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두 겹으 로 되어 있어요. 꼭 같은 녀석이 두 겹인 것을 보니 아마도 6개월이 지나고 복제가 된 것인가 봐요.” 나는 수아의 말에 다시 마법사의 몸에 기운을 불어 넣고 기충을 세밀하게 살폈다. 역 시 수아의 말대로 꼭 같은 생김새가 겹쳐진 모습으로 있었다. “그럼 이 녀석이 다른 사람의 몸 안으로 들어간단 말이지? 그런데 어떻게 이동을 전 해지는 거지?” 나는 호김심에 천천히 공력을 이용해서 두 겹으로 되어있는 기충의 겉부분으로 조금 씩 들어내었다. 하지만 기충은 그렇게 들어올려지는데도 별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기충을 둘로 나누는 작업을 시도했고 꽤나 시간이 걸려서야 기충 은 본체에서 분리가 되었다.(사실 어느 쪽이 본체인지는 모른다.) 그리고 그 기충은 천천히 내공에 이끌려 혈관을 타고 손목으로 이동되었고, 결국에 는 손바닥에 도착하게 되었다. “수아야 지금 내가 이 손에 상처를 낼 테니까 상처에서 나오는 피를 땅에 떨어지지 않게 공중에 머무르도록 좀 해 줄래? 물론 피 속에 기충도 함께 나올 테니 그것도 함 께 말이야.” 내가 그렇게 수아에게 부탁하자 수아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라면서 준비에 들어갔 다. 그리고 내가 마법사의 손바닥에 상처를 내고 그 상처를 통해서 흘러나가는 피와 함 께 기충을 내 보냈을 때, 수아는 피와 기충을 허공에 둥근 핏방울로 만들어 둥실 띄 워 놓았다. 나는 기충이 마지막으로 마법사의 손바닥을 빠져 나간 것을 보고 상처를 치료해 주고 는 곧장 공중에 떠 있는 핏방울(조금 크다 빨간 당구공 같다.) 주위에 마나로 벽을 쌓 고 마나를 물질화 시켰다. 마나가 얼음이 되는 것은 마나의 차가운 기운으로 공기 중의 수증기를 취하는 것이지 만 지금처럼 마나 자체를 물질화 시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사실 순수 마 나가 물질화 되는 것은 불가능하고 약간의 매개체를 쓰는 것이기는 하지만.... 나는 그렇게 완성된 당구공(핏방울)을 들고 이리 저리 살펴보았다. 핏방울 속에 있는 기충은 거의 움직임이 없었지만 죽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이제 기충이라는 녀석은 확보를 했지만 이걸 가지고 뭘 할 수가 있단 말인가. 휴우~ 한숨만 나온다. 일단 당구공을 수아에게 맡긴 나는 다시 마법사의 몸속에 남은 기충을 내공을 이용해 서 뜯어 낼 방법이 없을까를 고민해 보았다. 하지만 나의 시도는 그야말로 처절하게 실패로 돌아갔다. 마법사의 뇌와 척추로 뻗은 촉수 중에서 한 가닥을 천천히 내공으로 뜯어내는 순간 다른 모든 촉수들이 요동을 치며 마법사를 경련과 발작으로 몰고 갔던 것이다. 내가 내공을 거두고 나자, 곧 기충의 움직임은 멈추었지만 아마도 마법사는 상당한 타격을 받았을 것 같다.(확인은 되지 않았지만, 뇌와 척추 쪽에 손상이 제법 될 것 같 았다.) 나는 마법사에게 치료 마법을 걸어 주었지만 외형이 외복된 뇌와 척추가 제 기능을 다할 지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일단 내가 마법사의 정신이 들게 만들었을 때, 그 눈빛이 처음 데리고 나올 때와 다르지 않아서 그나마 안심이 되기는 했다. 나와 수아는 일단 그 정도의 정보를 가지고 동생들과 지토와 합류했다. 그리고 점심을 먹고 각자 발견한 것들을 종합했다. 그 결과 특별한 것은 발견이 되지 않았다. 다만 맘맘이 그 기충을 제거 할 수 있다 는 기적 같은 발견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 방법은 아주 까다로운 것이었는데 일단은 맘맘의 일부가 대상의 몸 속에 들어가 서 복제된 녀석을 본체에서 떼어낸 다음 그 본체 위에 맘맘의 일부가 덮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아주 조금씩 기충을 고사시켜 나가는 것이 방법이었다. 처음에 는 뒤쪽 부분에만 붙어 있던 맘맘이 아주 천천히 기충의 전체 부분으로 몸을 펴는 것 이다 그 사이에 맘맘은 기충이 보내는 여러 생물적 화학적 전기적 신호들을 그대로 통 과시켜서 기충의 이목을 속이고 기충의 모든 부분을 점령하게 되면 순간적으로 기충 을 고립시키는 방법을 쓰면 대상의 몸에서 기충을 분리해 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 었다. 그리고 그 증거로 광아는 기충이 분리된 기사 하나를 데리고 왔다. 그는 그 사이에 있었던 모든 일을 기억하고 있었고, 또한 그것이 자신의 의도였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와 같은 생각을 왜 했는지 도저히 모르겠다고 말해서 우 리를 혼란시켰다. 다시 이야기하면 기충이 있는 사람은 그 모든 행동이 자신의 판단이라고 생각하고 믿 는 다는 것이다. 물론 기충이 제거된 상태에서 그 기사는 검기를 쓰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기가 검기를 썼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고, 또한 그 느낌과 방법을 알기 때문에 오래지 않아 서 검기를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하기도 했다. 뭐 그건 그럴지도 모른다. 검기가 물론 내공을 바탕으로 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한 번 그것을 해 보았던 사람은 그것에 빠르게 접근 할 수 있을 것이었다. 내공은 있어도 검기를 쓰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어쩌면 그 기사에게는 엄청난 이 익이 된 것이기도 할 터였다. 만약 내가 어떤 사람의 몸에 내공을 흘려주면서 ‘이것이 내공이라는 기운이다’라 고 가르쳐 주었다면 그 사람은 보통 사람들보다 내공에 대한 이해가 빠를 것임은 자 명 한 것이고, 지금 기사의 경우가 이와 비슷한 경우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그럼 일단 지금 포로들을 구하는 것은 가능하다는 이야기네? 그런데 시간이 얼마 나 걸릴까?” “형님 그게 시간이 꽤나 오래 걸리는 작업입니다. 물론 맘맘의 기력 소비도 만만찮 은 일이고 말이죠. 지금 포로의 수가 122명인데 한 명 치료가 되었으니 나머지는 121 명 그런데 맘맘의 경우에 하루에 셋 이상은 무리일 것으로 보이니까 40일이 넘게 걸 려 야 할 것 같습니다.” 계산이 빠른 것은 좋지만 그 결과가 엉뚱하게 나오는군. 앞으로 40일이 넘는 시간동안 포로들을 깨우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잖아. 정말 걱정된다. 그렇다고 방법이 생겼는데 죽든 말든 하고 내버려 둘 수도 없는 일이 었다. “좋아 그럼 일단은 여기 머물면서 치료를 하기로 하자. 대신에 40일동안 물도 못 먹 고 버틸 수 있는 존재는 없으니까 일시적으로 이빨에 힘을 주지 못하게 만들어서 자 살 을 방지하고, 영주에게 죽지 않을 정도로 먹을 것을 주라고 부탁을 하지. 일단 치료 가 된 사람들이 늘어나면 그들에게 동료들을 보살피라 하면 될 테니 문제는 없겠지. ” 결국 우리들의 의견 조율은 이렇게 결정이 났다. 사실 거의 광아의 공이라고 봐야 했다. 우리들의 의논이 끝난 직후에 영주가 우리들을 불렀다. 영주의 집무실로 보이는 곳에는 단촐한 책상과 의자, 그리고 그와는 독립된 응접세트 가 놓여 있었다. 우리들은 그 곳에서 영주와 마두 앉았다. “그래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루탄 최 한국.” 어째 말하는 분위기가 이상하다. “알고 계실 것 같습니다만, 저는 넥스의 건들렛을 원합니다.” 나는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이야기를 했다. “역시 그것입니까? 그렇군요. 길리어와 길리온 리아가 넥스 할아버지의 이야기에 나 오는 사람의 이름과 같다고 할 때에야 눈치를 채다니 저도 참 둔한 모양입니다. 그런 데 그 건들렛은 무슨 이유로...” “그냥 기념입니다. 어차피 주인이 아니면 쓰지도 못하는 물건이지만 그래도 넥스와 의 추억이 남은 것이니 가지고 있고 싶다는 이유 외에는 없지요. 사실 이 가문에 두 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저는 넥스와 헤어진 것이 몇 년 되지 않는 시간으로 느끼 기 때문에 후손들 보다 더욱 가깝게 그 물건의 의미를 세길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 래 서 건들렛을 제가 보관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내 말에 넥스트리언은 조금은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표정이 되었지만 곧 그런 것쯤은 상관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좋습니다. 어차피 약속을 한 것이니 내어 드리지요. 그럼 함께 가시겠습니까? 오래 전에 조상님들이 그것을 보관하고 계시다가 이리로 옮겨 오면서 한 곳에 안치하고는 아무도 그것을 열어 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것은 처음의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지요.” 우리는 넥스 영주의 뒤를 따라 저택의 지하로 안내 되었다. 별다른 마법 보호가 걸린 것도 아닌 평범한 계단을 지나 지하의 술 저장창고 안쪽에 그 방이 있었다. 오래도록 열린 흔적이 없이 녹슨 문고리는 이끼와 녹에 파묻혀 있는 모습이었다. “그럼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여기서 가지고 가실 것이라야 이 술들 뿐이니 몇 병 들고 나가셔도 상관 않겠습니다. 하하. 그럼.” 영주는 그렇게 농담을 늘어놓고는 자리를 비워 주었다. 어차피 넥스가 만든 공간도 아니고 그 후손들이 만든 공간에 불과했고, 그 동안 안무 도 들어가지 않고 그저 그런 것이 전해 온다는 이야기만 남은 넥스의 유품이 저 문 안 에 있을 터였다. 나는 천천히 문을 당겼다. 숱한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쌓였을 녹과 먼지와 썩어가는 나무였지만 넥스에 대한 내 그리움의 무게보다는 못했던가 보다. 늙은 고양이의 그르렁 소리 같은 신음을 흘리며 문이 열렸다. 동생들은 밖에 남아 나를 기다리기로 한 모양이었다.(언제나 나를 배려하는 녀석 들..) 천천히 들어간 지하의 작은 방은 다행히 어둡지 않았다. 돌로 쌓은 제단처럼 생긴 대 위에 놓여진 것은 역시 돌로 만든 함이었다. 그리고 누가 걸었는지 모를 보존마법과 강화마법, 그리고 청결마법까지 아직도 효력 을 발휘하고 있었고, 상자에서 뻗어 나오는 희미한 빛은 마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상 자 자체가 가진 특성인 것 같았다. 아마도 넥스의 후예는 이 상자를 만드는 것처럼 그렇게 자신의 조상에 대한 자랑스러 움이 대단했을 것이었다. 상자에는 그 이외의 마법은 걸려 있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 흔한 알람 마법도 걸려 있지 않았다. 이것은 이 상자를 후손들이 충분히 지킬 수 있으리란 자신감이었을까 아니면 이토록 오래 외부와는 단절되어 살게 되리라는 가문의 운명을 내어다 본 것일까? 나는 상자에 가까이 다가가면서도 수없이 많은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상자의 뚜껑을 열었을 때, 그 안에는 1000년의 세월을 짐작하게 하는 건 들렛이 놓여 있었다. 아무리 노옴이 만든 물건이라고 해도, 1000년은 짧지 않은 시간이었던 모양이다. 비 록 그 형체가 훼손될 정도는 아니었지만 군데군데 푸른 녹이 쓸어 있는 건들렛은 순 식 간에 넥스와 나와의 거리를 몇 년에서 1000년이라는 시간 차이로 밀어버리려고 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 건들렛이 마법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보존 마법 같은 것을 걸 수 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두꺼운 가죽으로 만들어진 책이 하나 놓여 있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투박하고 멋을 부릴 줄 모르는 넥스가 남긴 삶의 흔적일 것 이라고 생각했다. 녀석이 이런 일기를 다 썼다는 말이야, 그것 참. 어울리지 않는 짓을 했군.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그 책을 들었다. ‘나 넥스미카 유소는 내 아버지의 이야기를 여기 적어 남긴다.’ 첫 장의 첫 문구가 나를 힘 빠지게 만들었다. 이 책은 그러니까 넥스와 유소 사이에서 난 아이가 적은 것이라는 말이 된다. ‘넥스 유소. 이것이 내 아버지 신성제국의 공작이신 분의 이름이다. 그리고 유소 넥 스. 이것이 내 어머니 동부 여인왕국의 여왕이신 분의 이름이다. 서로의 이름으로 성 을 삼을 정도로 잊지 못하는 사람을 가지셨지만, 그것을 평생 가슴에 담고 지내시다 어느 황혼의 하루에 모든 것을 용서하고 용서받는 것으로 그 평생의 한을 씻은 내 부 모님과 그 친구분의 이야기를 여기 적고자 한다. 나도 부모님의 이야기는 단지 가끔씩 내 뱉듯이 아버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그리움 의 단편으로만 들을 수 있었을 뿐이었고, 마지막 두 분의 만남은 너무나 짧아 감히 내 가 끼어들어 자식이라고 보아달라 할 겨를조차 없을 정도였기에, 내가 적을 수 있는 것이 무척 단편적인 것임에 아쉬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두 분의 만남은 한타 왕국이 이 대륙의 유일한 나라였던 그 100여 년 전의 동쪽자치 령이라 불렸던 지금의 여인왕국에서 시작된 인연이었다. -------- 중략 ------------------ 아버지가 처음 루탄님을 만난 것은 산록 늑대의 토벌이라는 영주의 의뢰를 수행하던 중이었다고 한다. 처음 그 분을 뵈었을 때, 아버지는 어디서 저런 녀석이 이 험한 곳 에 나와 있게 된 것일까 하고 무척이나 고심을 하셨다고했다. 사방이 위험으로 가득 한 곳에 그토록 여려 보이고 또 어려 보이는 루탄님이 불을 피우고 무언지 모를 식물 의 뿌리를 불에 굽고 있었으니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들은 루탄님의 외모는 그야말로 조금만 꾸미면 레이디로 볼 수 있을 정도라고 했으니 말이다. ------- 중략 ----------------------- 그렇게 아버지와 루탄님의 인연은 끝이 났다고 한다. 깊은 밤 쉬벡님의 방에서 나와 모습을 감추는 루탄님의 뒷모습을 보며 아버지는 몇 번이고 어머니의 목을 쥐고라도 루탄님을 따라가 용서를 빌고 싶었고, 이루비아 소영 주의 목을 쳐서라도 잘못을 바로 잡고 싶었다고 하셨다. 하지만 루탄님도 그런 것을 원하지는 않으시리라 여겼기에 사라지는 루탄님의 뒷모습 만 보실 수밖에 없었다고..... -------- 중략 ------------------------ 그 겨울날 아버지의 등에 업혀 수많은 괴물들의 피로 몸을 덥히며 나는 어머니의 품 에서 떨어져 나와 북자치령으로 오게 되었다. 한 순간도 벗어나지 못했던 추위와 배고품과 죽음에 대한 공포와 어버지의 분노를 나 는 지금도 몸을 떨며 기억한다. 아버지는 북자치령에서 한 팔을 자르시고 나에게 심법을 가르치기 시작하셨고 괴물들 에게 한 팔을 잃은 자들을 불러 모아 심법을 전수하고 기사단을 만드셨다. 하지만 심법에 대한 욕심은 너무나도 큰 것이어서 번번이 심법이 유출되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밝혀진 날이면 어김없이 기사단의 누군가와 그 심법을 배운 사람 들 모두가 목이 잘렸다. 그렇게 파이어스톰이라 불리는 화염기사단은 자리를 잡아갔고, 누구든 그 심법을 아 는 자가 기사단원이 아닌 경우는 기사단원 스스로가 그를 잡아 죽였다. 하지만 어떤 누구도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것은 불문율이었다. 단지 한 팔로 북부제국을 건설해 가는 화염기사단은 모든 사람 들에게 희망이었고, 또한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 중략 ------------------------- 드디어 큰아버지가 북부제국의 황제가 되었고 아버지는 공작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 히 우리들의 위치는 변방이었고, 그 사이에 큰 아버지가 황제에서 교황이 되었어도 우 리들은 여전히 수많은 괴물들과 싸우고 있었다. ---------- 중략 ------------------------- 아버지는 드디어 손에서 칼을 놓으셨다. 영지도 없고 들어오는 세금도 없이 그저 이 름뿐이 공작이셨지만 그래도 파이어스톰의 위력은 살아있었고 이제 교황이 된 멕스 삼 촌의 형이라는 것도 무시 못 할 배경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모든 것을 버리고 단지 기사단의 단장이라는 것만을 내세우며 만족하셨다. 그래서 결국 파이어스톰은 신성제 국이라 명칭을 바꾼 나라의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기사단으로 남았다. 그리고 아버지는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은 이것이었다. “내가 젊어 원한 것은 귀족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이루었지. 내가 조금 나이가 들어 원한 것은 유소를 다시 찾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도 이루었다. 그 리고 내가 나이가 들어 원한 것은 파이어스톰이 자유의지를 지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도 어느 정도는 이루었다. 하지만 내가 죽음에 이르러 원하는 것은 루탄의 얼굴 을 한 번 보는 것이다. 그런데 왠지 이 소원은 내가 죽어서도 이루지 못할 것 같은 느 낌이 드는구나. 그 때, 쉬벡의 방에서 나오는 루탄을 불러 한 잔 술이라도 마시고 보 냈으면 좋았을 것을....” 눈을 감으신 아버지의 얼굴에는 생전의 그 당당함과 엄격함 대신에 아쉬움과 쓸쓸함 이 남아있었다. 신성제국의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영원한 건국의 아버지 넥스 유소 공작의 마지막 소 원은 마음속의 영원한 벗 루탄 최 한국 그 분을 만나는 것이었다. ------- 후략 --------------------------- 나는 두꺼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넥스도 유소도 모두들 나만 나쁜 녀석으로 만드는 것 같다. 제기, 지들이 잘못하고선 왜 지금에 와서는 모두 내가 잘못한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것일까? 아마도 오랜 시간이 지나고 이제는 나 이외에는 그들을 용서해 줄 사람이 없기 때문 일까? 아니면 그들은 가고 나는 남아있기 때문일까? 나는 천천히 돌 제단에서 엉덩이를 떼었다.(그럼 지금까지 서서 이것을 읽고 있었겠 나?) 그리고 돌 상자와 건들렛을 창고 속 지심목검과 마르트라의 장도 옆에 놓아두었다. 그리고 천천히 600년을 기다렸던 방문을 다시 닫고 위층으로 올라왔다. 밖에서는 넥스트리언이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창밖으로는 짧은 겨울 해가 서편 산을 넘어가고 없었고, 붉은 노을만 하늘을 물 들이고 있었다. “이거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영주님” 나는 영주에게 살짝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아닙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1000년을 기다린 만남이었을 텐데요. 하루 종일이 라 해도 오히려 짧은 것이었을 겁니다.” 영주는 그렇게 말을 받고는 우리들을 식당으로 안내했고, 우리 일행과 넥스 가문의 사람들과 크라이안(아무리 봐도 집사 같은데..)과 젊은 세명의 기사가 함께 식사에 참 가했다. 그리고 식사가 끝난 후 영주는 아이들과 부인을 올려 보내고 그대로 식탁 위에서 간 단한 술자리를 시작했다. 그리고 함께 있던 세 명의 기사들을 소개했다. “이들은 현재 파이어스톰의 부단장들입니다. 미흡한 제가 단장을 맡고 있지요. 테오 도, 오로한, 파비올입니다.” 기사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묵례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럼 화염기사단이 아직도 건재하고 있다는 말이군요. 그런데 이제는 화염기사단에 서 외팔이라는 전재는 없는 모양이지요?” 내가 그렇게 물어보자 넥스트리언 영주는 얼굴색이 어두워졌다. “그렇습니다. 저희가 이곳에 자리를 잡은 이후로 파이어스톰 기사단은 외팔이라는 제약을 없애기로 했습니다. 워낙 낙후된 곳이고 그 당시에는 거의 사람들이 살지 않 는 곳이어서 기사단원들을 모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대신에 지금이라도 원하시 면 제 팔 하나는 내어드릴 수도 있습니다.” “아니 단장님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단장님!!” “그럴 수는 없습니다.!!” 세 기사가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났다. “하하, 내가 지금 팔을 자른다고 한 것도 아니지 않나? 거기다가 나는 루탄님께서 내 쓸모없는 팔을 원하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한다네. 그저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안 그렇습니까? 루탄님.” “그야 물론이지요. 영주님. 제가 설마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길리어 남매를 봐서 도 안 될 말이지요.” 나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영주의 말이 밉지 않았다. 그것은 계산에서 나오는 행동 이 아니었다. 그저 우직한 사람의 숨김없는 자기표현일 뿐이었다. “그리고 여기 있는 저희 넷이 지금 파이어스톰의 전부입니다. 처음 이곳을 들어올 때는 50여명 남짓한 단원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기사의 필요성이 없어지다보니 기사라 는 고련을 하고자 하는 영지민이 없지요. 그래서 기사단이 없는 겁니다.” 영주가 그렇게 이야기하자 크라이안이 고개를 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영주님 무슨 그렇게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저도 파이어스톰의 일원입니 다. 비록 재주가 없어서 실력이 딸리기는 하지만 한 번도 기사단의 일원임을 잊은 적 이 없는데 그렇게 말씀을 하시다니 섭섭합니다.” 순간 3명의 부단장이라는 젊은 기사들의 어깨가 떨리는 것 같았다. “아, 아니. 크라이안 경이야 이제는 이 저택의 집사가 아닙니까. 현역에서 퇴역하셨 으니 그만 쉬셔야지요. 끝까지 기사단이라고 우기시면 곤란합니다.” 어쩐지 영주의 말 속에는 크라이안을 퇴출시키려는 강한 의지가 보이고 있었다. “그렇다는 말이지요? 내, 알았습니다. 제가 물러나지요. 하지만 앞으로 영주님의 일 과에는 아침 저녁으로 꼬박 꼬박 저와의 대련을 넣도록 하겠습니다.” 순간 영주의 얼굴에 나타나는 것은 당혹감이었다. 그리고 3명의 젊은 부단장들 역시 상당히 타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물론 부단장님들도 참석을 해 주셔야겠지요?” 역시나 하는 표정이 젊은 기사들의 얼굴에 스쳤다. 물론 그와 함께 영주에 대한 원망 의 눈초리가 빛나는 것도 나는 볼 수 있었다. 사실 이 식당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크라이안이라는 이 늙은 기사의 실력을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은 영주와 화아 풍아 정도였다. 물론 나를 제외하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분위기로 보아서 크라이안이라는 이 인물은 영주와 다른 젊은 기 사들 모두의 스승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참 재미있는 사람들이다. “저, 그런데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영주와 젊은 기사들을 절망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었다.(이제는 영주가 조금 전에 했던 말을 번복할 틈이 없어진 것이다. 하하.) “무, 무슨 말씀이신지...” 영주의 목소리는 크라이안에 대한 걱정으로 떨리고 있었다. 나는 영주에게 우리가 포로로 잡은 사람들의 정체와 그 사람들의 현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그들의 치료를 위해 얼마간 머물러야 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영주는 내 말에 선뜻 저택 뒤에 있는 별채 한 동을 내 주었고, 그 곳으로 포로들을 옮겨주기로 했다. 그리고 암흑교에 대해 물어왔지만 나도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신성제국에서 있었던 몇 가지 일을 알려주는 것이 전부였다. 다만 앞으로 다시 이 영지를 노릴지도 모르기 때문에 준비는 해야 할 것이라는 이야 기 해 두었다. 그 때, 영주의 얼굴이 어두워지기는 했지만 그것까지 내가 어떻게 해 결 을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우리는 저택의 뒤쪽에 있는 별채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뭐 실제로 그 건물을 쓰는 것은 122명의 포로들이었고, 우리들은 마차에서 생활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맘맘이 회복시킨 사람들이 늘어가면서 별채도 제법 시 끄럽게 사람 사는 곳으로 변해갔다. 맘맘에 의해 회복된 사람들 중에서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한타의 사람들이었는데 어 느 순간부터 암흑교에 관심을 가지고 심취하게 되었으며 암흑교 사제의 명령을 지키 는 것이 세상의 어떤 일 보다도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이 언제 시작된 것인지 뚜렷하게 알지 못했고, 또한 암흑교의 사 제들이 언제 자신에게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인지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어느 날 어디로 가야한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면 그리로 가서 거기서 모인 사람 들과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되는 일을 하고 헤어지는 것이 전부였다고 한다. 해야 할 일이란 대부분이 암흑교에 방해가 되는 인물들이나 단체를 공격하고 없애는 일이었다고 그들은 기억했다. 그리고 기사들 대부분은 신성제국의 화염기사단에서 수련을 받고 있던 사람들과 한타 에서 용병 일을 하던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 역시 언제부터 자신들이 변화를 시작했는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고 다른 것은 마법사와 같은 경우였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이들 대부분이 다른 연고자가 없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 하면 이들이 사라져도 목을 빼고 찾을 사람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마법사들이야 당연히 혼자 꿈지럭거리기를 좋아하니 그런 경우가 많았지만 기사들 대 부분을 그렇게 가족도 친척도 없는 경우를 선택한 것은 치밀한 안배에 의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맘맘에 의해서 기충을 제거한 사람들은 그 동안의 자신의 행동들에 대한 회의 와 곁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목숨을 끊어버린 동료들에 대한 기억에 갈등하고 고민하고 후회하는 시간들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기사들은 전부 자신들이 검기를 썼던 감각을 잊지 않고 가지고 있었고, 마법 사들은 자신들이 써클을 두 단계나 위로 쌓았던 그 노하우를 지니고 있었다. 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써클을 높인다는 것은 몸 주위에 수많은 병들을 아주 치밀하 게 계산해서 매달아 두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지금은 그 병들이 없어졌지만, 이미 그 병들을 한 번 쌓았던 사람들이고 그것을 관리 했던 경험이 있는 마법사들은 두 단계 위의 써클로 오르는 것이 어렵지 않으리라고 자 신하고 있었다. 때문에 기사들도 마법사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들이 잃은 것과 얻은 것을 가름할 수 있을 정도로 정신을 차려갔고, 어쩌면 과거의 자신을 잊기라도 하려는 듯이 자신 에 게 주어진 그 기회에 매달리고 있었다. 그 덕분에 크라이안은 회복된 기사들을 가르치는 재미에 빠져서 영주와 부단장들을 괴롭히는 것을 그만 두었다. 또, 넥스 영지의 젊은 마법사는(이름이 일데퐁소라고 한다.) 자신과 비슷한 5써클의 마법사와 여러 가지 토론을 벌이며 지금까지 막혀있던 벽을 깬 모양으로 다른 누구보 다 빨리 6써클에 도달했다. 그리고 당연히 맘맘에게 회복된 마법사들은 가장 써클이 높은 일데퐁소의 곁에 모여 서 써클을 높이는데 전력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더구나 일데퐁소의 스승이 9써클에 근접한 마법사였기 때문에 그들이 배워야할 마법 들이 일데퐁소에게 그대로 전해져 있는 상태인지라 써클만 높인 마법사가 아니라 써 클 과 주문의 균형을 갖기 위해서는 무조건 일데퐁소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는 그들이었 다. 그리고 일데퐁소는 그런 그들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마법 수식들을 아끼지 않았고, 그런 모습이 이들 마법사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지 그들도 자신이 알고 있는 마법 주문들을 아끼지 않고 내 놓았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단체로 모여서 마법에 대한 토론과 이론을 정립해 나갔고, 그 모 습은 흡사 예전에 나와 쉬벡이 마차를 타고 가며 나누던 대화와 비슷한 양상을 보이 기 도 했다. “우화~~! 오빠. 나와 보세요. 네? 어서요. 빨리요.” 마차 안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나를 수아가 호들갑스럽게 흔들어 깨웠다. 보통 때에는 절대 하지 않는 행동이라 나는 잠결에도 놀라 깨어났다. “응? 왜 무슨 일이야? 무슨 큰일이라도 났어?” 나는 수아의 팔을 잡고 물었다. 추운 밖에 나갔다 온 모양인지 손바닥을 타고 서늘한 기운이 흘렀다. “오빠. 밖에 밖에 온통 하얗게 눈이 내렸어요. 온 세상이 하얗게....” 수아는 상기된 표정으로 흥분해서 대답을 했다. “응? 그래? 정말이야? 눈이 내렸어? 어디 어디.” 솔직히 내가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것은 역시나 수아 때문이다. 내가 이 나이에(이제 마흔에 가까운 나이인데) 눈이 내린 것이 무슨 대수로운 일이겠 는가 말이다. 하지만 수아가 저리 기뻐하는데 그게 뭐? 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서둘러 겉옷을 걸치고 수아이 손에 이끌려 마차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따라서 지금까지 늦잠을 자던(그건 나도 그렇지만) 풍아고 덩달아 끌려 나왔 다. “아! 정말 대단하구나.” 나는 마차 밖으로 나서면서 그렇게 탄성을 질렀다. 세상이 온통 하얀 색이라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눈은 거의 허리에 올 정도로 내려 있었던 것이다. 화아와 광아는 다들 몸을 가볍게 해서 눈 위를 걸어 다니고 있었지만 나는 마차 밖으로 나서면서 내 허리까지 오는 눈 속에 빠지고 말았다. “어서 올라와요 오빠.” 수아가 곁에서 내 팔을 끌어 올려서야 나는 눈 위로 올라설 수 있었다. 몸을 가볍게 하고 눈 위를 걷는 것도 운치가 있는 일이지만 눈이 조금만 적게 왔으 면 눈길을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아침의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치고 싶다. 어린아이처럼 눈싸움을 했다거나 결국에는 집중공격에 두더지처럼 눈 속으로 파고들 어 위기를 모면했던 것이 나였다거나 살금살금 화아의 뒤로 걸어가서는 등 뒤에 숨겨 두었던 머리 두개 크기의 눈덩이로 화아의 머리를 찍은 것이 수아라거나 화아의 보복 으로 수아가 눈사람이 되었다거나 광아와 풍아는 눈으로 집을 짓고 소꿉장난을 했다 거 나 결국에는 지토가 눈을 몽땅 모아서 땅 속에 숨겨 버리고 마당을 깨끗하게 만들어 서 눈싸움을 중지시켰다는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다. 지토는 언제나 눈 속에서 걸어 다녔다. 눈 위로 올라오는 것이 힘든 것일까? 그래도 참, 즐거웠다는 생각이 든다. 에엣취. 이 몸이 감기에 들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도 새삼스러운 일이라면 일이 다. 그냥 운기 한 번으로 해결이 될 것이었지만 왠지 기침을 하는 것이 오랜만이라는 생각에 그대로 방치 중이다. 눈이 내린 얼마 후에 우리들은 모든 포로들의 치료를 끝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이에 두어 차례 눈이 더 내렸고 분지 안에 자리 잡은 집들은 거의 눈 속 에 묻혀 버렸다. 영지민들은 그런 상황에 익숙한 듯 마을 전체의 통로를 눈 속으로 만들고 터널 공사 를 했다. 위에서 눈이 쏟아지지 않고 터널 벽으로 나무판자를 데어서 완전한 터널을 만드는 것 이었다. 이 분지는 지금부터 두 달 정도는 이렇게 계속해서 눈이 내리고, 그 눈이 녹는 것은 또 한 달이 지난 후에 봄이 되면서부터라는 것이 마을 사람들의 설명이었다. 덕분에 우리 일행도 분지를 빠져나가는 것을 보류하기로 했다. 뭐 그냥 아눈을 앞세우고 전진하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가서 해야 할 정도로 급한 일은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우리들은 포로들의 치료가 끝나고 나서는 며칠동안 할 일이 없어서 빈둥거리 다가 길리어 남매와 놀아주거나(지토), 기사들과 대련을 하거나(풍아, 화아, 광아), 혹은 제레이나와 음식을 하거나(수아), 일데퐁소에게 마법을 조금 가르치거나(이건 나) 하는 것으로 여가 시간을 보냈다. 맘맘은 치료에 기력을 많이 소비했던 모양인지 몸집이 절반 정도로 줄어서는 틈만 나 면 주위에 있는 나무들을 못살게 굴면서 기력 회복에 전력을 다하는 모습이었고, 파 울 도 요즈음은 본래 모습으로 돌아와서 정원을 거닐기를 좋아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환수들은 신계에 갔다오라는 휴가를 받기도 했는데 이상하게 신계 로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냥 이 곳에 있어도 소환주들이 무리가 가는 것은 없었지만 어느 정도는 신계에 가 서 힘을 회복하고 뭔가 먹기도 해야 할 텐데 그런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참, 이제 넥스 영지의 화염기사단은 총원 77명이 되었다. 단장은 영주였고, 부단장이 3명, 그리고 포로였던 73명이 합해서 77명이 되었는데 게 으른 영주는 단장 직속 13명을 차출하고 나머지는 20명씩 묶어서 3개의 대隊로 나누 어 버렸다. 물론 그 대장은 젊은 부단장들이었다. 포로였던 기사들은 그렇게 넥스 영지의 기사가 된 것을 불만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목숨을 구함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대가가 된다고 생각하는 분위기였고, 거기 에 더해서 넥스 영주가 제법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고 신망을 받을 수 있는 인물이어 서 인지, 크라이안의 뒷 공작(협박과 폭력이 아니었을까?)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고분 고 분 무임금 평생 봉사라는 화염기사단의 조건에도 불만 없이 단원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마법사들 역시 일데퐁소의 밑으로 들어가 넥스 영지의 마법사로 평생을 봉사할 것을 약속했다. 원래 마법사들이란 계산이 빠른 족속들인데, 사실 일데퐁소의 스승이 남긴 연구 자료 들은 그야말로 평생을 연구하고 살펴보아도 모두 익힐 수 있을지 자신이 서지 않을 정 도로 방대하고 수준 높은 것들이었기에 이제 겨우 5써클에 이른 그들로서는 나가라고 등을 밀어도 나가고 싶지 않은 곳이 넥스 영지였다. 한타의 마법길드가 발달해 있다고는 해도, 그렇게 쉽게 고급 마법들을 접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더구나 현 길드장이 8써클 마스터로 알려져 있으니 그에 비하면 일데퐁소의 스승이 남긴 것을 배우는 것이 훨씬 빠른 길이라는 계산이 나왔을 것이었다. 거기에 더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열린 분위기의 토론과 연구가 주는 성과가 크다는 것도 이유가 되었을 것이고, 마지막으로는 목숨을 구함 받은 것에 대한 부담도 있었 을 것 같다. 그렇게 어영부영하면서 넥스 영지는 막강한 잠재력을 지닌 곳이 되어갔다. 넥스트리언 영주 역시 다시 있을지 모를 암흑교의 도발에 대한 걱정을 한시름 놓게 되었다고 기뻐하기도 했다. 그렇게 부산하게 돌아가는 넥스 영지의 겨울을 우리 일행은 함께 보냈다. 하지만 긴장이나 걱정이 없는 시간들은 바쁜 일상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편안하고 아 늑한 시간들로 느껴지게 만들었다. 예전 쉬벡과 헤어지고 우리들이 만들었던 우리들만의 집과 과수원에서의 생활을 떠올 리게 하는 그런 시간들이었다. 길리어 남매는 지토를 할아버지처럼 따르며 한 시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해서 크라이 안의 질투를 자아내었고, 제레이나의 음식 솜씨는 나날이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드디어 눈이 녹기 시작하고 눈 속으로 만들었던 터널의 나무판들 이 드러나기 시작할 무렵, 우리들은 마차에 모여서 앞으로의 여정을 의논하고 있었다 . “그러니까 어디 갈 곳도 없는데 뭐하러 서둘러 움직이려고 하냔 말이야. 그냥 여기 서 리아 들이랑 있으면 좋잖아.”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은 의외로 지토였다. 아무래도 지토는 리아 남매에게 정이 많이 든 모양이었다. “그래요. 오빠, 파비올 3대랑 노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데... 좀 더 있다가 가요. 갈 곳도 없고 할 일도 없고 주위 나라들도 대충 다 돌아 봤잖아요.” 풍아는 요즈음 파비올이 이끄는 기사단 3대와 어울리더니 이렇게 칭얼거린다. 그리고 화아와 광아도 제 각각 테오도와 오로한의 1대와 2대 단원들과 사이가 좋아져 서 떨어지기 싫은 모양이었다. 물론 수아도 제레이나와 음식을 만들고 가사 일을 배우는 것에 폭 빠진 모양이다. “그럼 넥스 영지에서 그냥 눌러 살자는 말이냐?” 내가 그렇게 물어보자 동생들과 지토는 잠시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평생 떠돌아다닐 것도 아니면 여기다가 우리 보금자리를 다시 만들어도 나 쁘지는 않을 것 같지 않냐? 사람들도 좋고 왕래도 없어 한적하고...” 지토가 작정을 한 듯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모두들 지토의 말에 찬성하는 모양이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솔직히 이 별채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우리는 저 기 마을 밖에 언덕에다가 새로 우리 집을 짓도록 하자. 우리가 너무 여기서 붙어 있 는 것도 좋지 않을 것 같으니까 말이야.” 나는 그렇게 결정을 내렸다. 사실 이 녀석들의 변화는 굉장히 큰 것이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정을 느끼는 것이다. 아니 정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관심 과 애착을 느낀다고 해야 할까? 정령이라는 존재로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부분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거기다가 자기 고집을 피우다니 이제 나는 진짜 이들의 오빠, 형, 친구가 된 것이다. 비록 아직은 내가 리더라는 위치에 있기는 하지만 내가 이들의 주인이라는 느낌은 나 도 이들도 가지지 않는 것임에 틀림없다. 나는 그것이 너무 좋았다. 우리들이 영지에 계속 남아 정착하기를 원했을 때, 가장 반긴 것은 역시 리아 남매였 다. 그리고 일데퐁소 또한 내가 남게 된 것을 몹시 기쁘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마법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나 뿐이었으니까 그럴 것이다.) 물론 제레이나 역시 우리의 결정을 열렬히 환영했다. 화염기사단의 76명의 단원들을 제외하면 말이다.(단장은 제외하고) 어쩐 일인지 화아와 풍아 광아가 그들의 훈련을 계속 도와주게 되었다고 했을 때, 그 들의 표정은 상당히 구겨졌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후로 우리들은 예전의 기억을 되살려 다시 아담한 건물을 지었다. 지하에 수련장 겸 마법 연구실도 만들고, 1층에 지토와 화아, 그리고 내 방을 만들 고 2층에는 수아와 풍아 광아의 방을 만들었다. 그리고 1층 중앙에는 커다란 응접실을 만들어 우리들이 모두 자유롭게 모여서 이야기 를 나누고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여기서 모두라는 것은 우리 여섯과 란 이를 포함한 여섯을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다. 낮에는 모두들 바쁘게 넥스의 저택과 기사단의 연병장(이건 지토가 새로 만들어 줬 다.)으로 달려가고 집에는 나 혼자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았지만, 나는 내 나름의 소일 거리를 찾았다. 집 앞에 작은 텃밭을 가꾸고, 담장 밑으로는 넝쿨 식물들을 기르고, 란이의 노래를 듣고, 쉬벡의 책을 펼치고 쉬벡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비록 환영마법에 지나지 않 고 책에 기록된 범위에서 답하기는 하지만...) 신계에서 받았던 책을 다시 꺼내 보는 것과 같은 일들이 그것이다. 물론 이런 나를 방해하는 거침 숨소리가 언덕 아래에서 들려오기 전까지의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꼬박꼬박 잊지 않고 거친 숨소리를 내 뿜으며 나를 방해하는 것은 다름 아닌 풋내기 마법사 일데퐁소였다. 그 동안에 하지 못했던 공부를 한꺼번에 하겠다는 듯이 그는 매일같이 찾아와서는 궁 금증들을 풀어놓곤 하는데, 그는 나에게서 의문이 풀린 것들을 곧장 자신의 탑으로 가 지고 가서 50명의 마법사들과 토론을 하는 것이다. 참, 일데퐁소에게 마땅하게 마법 연구를 할 장소가 없어서 별채를 그의 탑으로 내어 주었다. 물론 어줍잖은 솜씨로 별채 곳곳을 공간왜곡을 시켜 놓아서 정신이 없게 만들었는데 좁은 공간을 활용하려니 어쩔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소규모의 공간 왜곡은 6써클로도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에 일데퐁소의 탑은 6써클 공 간왜곡이 곳곳에 숨어있는 이상한 구조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탑이 한 번 정도는 무너질 것 같다. 일부분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면 좀 정신을 차리고 다시 만들 때에는 잘 하겠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 그렇게 날을 보낸 것이 벌써 여러 달이 지나고 있었다. 이제는 완연한 봄이었다. 그 동안에 간간히 기사들의 훈련으로 사냥을 나가기도 했고, 수아의 앙탈에 못이겨 산나물을 뜯으러 가기도 했고, 리아 남매와 함께 소풍을 가기도 했지만, 모든 일상들 은 평화롭고 여유가 있었다. 기사들 대부분은 이제 어설프게라도 검기를 일으키고 있었고(화의 심결을 익힌 것이 꽤나 도움을 주고 있었다.) 마법사들도 1서클씩의 성장은 모두 끝을 낸 모양이었다. 덕분에 일데퐁소와 같은 6써클 마법사가 넷이나 생겨버렸다. 6써클이 많아진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넷이서 여기 저기 공간 왜곡을 시도하다 결국 은 별채의 절반 정도를 날려 먹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인명피해가 없었다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나는 오늘도 모두들 외출을 한 집 마당에 만들어 놓은 평상 위에서 뒹굴고 있었다. 아직도 신계에서 받은 책에서 이야기하는 신선의 경지라는 그 구름잡는 소리는 이해 가 가지 않는다. “허억, 허억, 헤엑.” 아마도 이 소리는 일데퐁소의 숨소리가 분명할 것이다. 이제는 숨소리만 들어도 상태가 짐작이 간다. 오늘은 어째 더 급하게 서두르고 있군. 아마 우리 집에 들어설 때면 바닥을 기어 올 지도 모르겠군 그래. “루, 루탄님. 루탄님. 헤엑. 헤엑 켁켁!” 뭐가 그리 급해서 저렇게 기침을 할 정도로 뛰어 온 것일까. 아무튼 저 덜렁거리는 성격만 고치면 좀 더 빠른 성취가 있을 것 같은데, 진득하지 못한 것이 문제야 문제. 그나마 마나에 대한 친화력이 월등한 것이 장점이라면 장점 이 지. "무슨 일인데 그렇게 호들갑이냐? 도대체가 몇 번을 이야기해야 알아듣는 거냐? 좀 차분해 지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해도...“ “저기 루탄님, 그게 문제가 아니고 이걸 좀...” 일데퐁소는 내 말을 감히 중간에서 잘라먹고는 수정구를 꺼내 보였다. 오랜전에 처음으로 일데퐁소와 연락을 할 때, 사용했던 바로 그 통신용 수정구슬이었 다. “응? 이건 왜? 뭐야? 음... 누군가 연락을 했군. 가만있자. 그러니까 이 수정구의 부속 수정구 중에서 한 곳에서 온 연락이군. 어디보자. ‘이 빌어먹을 헤더튼, 그 동 안에 코빼기도 안 보이다가 누굴 찾는다고 이따위 무작위 통신을 보내는 거야? 난 이 미 죽은 줄 알고 있었더니 살아 있었던 모양이네? ...... 에? 가만 이건 어째 헤더튼 그 작자의 마력 패턴과는 좀 다른 것 같은데? 그럼 다른 녀석이 헤더튼의 수정구를 썼 다는 말인가? 늘그막에 제자 하나 건졌다더니 그 녀석인가? 아무튼 이 연락을 받는 녀 석은 곧 바로 여기로 연락해라. 여기에 사용되는 통신 코드는....... 이상이다. 그리 고 난 우제푸다.’ 음? 이게 끝이군. 가만히 있자, 우제푸라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 름인데...”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일데퐁소가 입에 거품을 물고 소리를 질렀다. “아니 루탄님, 우제푸님은 한타의 마법길드의 마스터시잖아요. 그런 분을 잊으셨단 말입니까?” 이 녀석이... 내가 그런 늙은이를 기억하고 있어야 할 이유가 없지... 않구나, 그 늙 은이가 날 실험 재료로 삼아서 골탕을 먹인 적이 있었는데. 이 망할 영감탱이를 .... 음. 잠깐 기억이 떠오르니 혈압이 오른 모양이군. “그래. 그렇지 마법길드의 마스터. 하지만 나하고는 상관없는 인물이다. 그저 내가 나중에 조금 받을 빚이 있을 뿐. 그런데 넌 왜 이걸 들고 이렇게 허겁지겁 뛰어 온 것 이냐? 설마 우제푸라는 이름에 놀라서 이렇게 뛰어온 것은... 맞는 모양이구나. 흐휴 ~!” 나는 일데퐁소에게 고개를 흔들어 주고는 수정구에 마력을 불어 넣어 통신을 보냈다. - 우제푸 영감 오랜만이군. 그 동안 잘 있었나 모르겠군. 설마하니 나에게 그런 짓 을 하고도 무사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감히 나를 실험용으로 써 먹어? 내 가 누군지 모르겠다고 한다면 그 머리 위에다가 언젠가 운석 하나를 떨어뜨려 주지. 아무튼 전에 내가 이 수정구로 사람을 좀 찾기 위해 무작위 통신을 했던 것을 받은 모 양인데 그게 자그마치 몇 달 전인지나 알고 이제야 통신을 보내서 뭐라고 지껄이는 거 야? 그러니까 간단히 이야기하면 헤더튼 이라는 그 사람은 이미 돌아가신지 오래 되 었 으니까 신경 끄고, 특별한 볼 일이 없으면 귀찮게 연락하지 말아. 나중에 내가 빚을 받으러 갈 때에나 보자고. 그럼 이만. 내가 수정구에 넣은 통신의 내용을 옆에서 지켜보던 일데퐁소는 입을 떡 벌리고는 어 버버 거리다가 나에게 쫓겨나서 자신의 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그 수정구를 한쪽에 치워두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수정구는 끝내 나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나기도 전에 수정구에서 얼굴이 뻘겋게 변한 우제푸 영감의 얼굴이 나타 나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던 것이다. 이 쪽에서 통신을 받아주지 않은 상태에서 저렇게 이 쪽의 모습을 보려면 엄청난 마 력이 소비될 텐데 잘도 그런 짓을 하는 것을 보면 이 늙은이도 이미 9써클에 도달해 있는 것 같다. 집 안에는 오늘도 아무도 없었고, 나는 마침 응접실에 앉아서 책을 보고 있던 참이 라 창가의 탁자위에 올려놓은 수정구에서 마력의 변화가 있는 것을 감지하고는 조용 히 우제푸 영감이 하는 짓을 살피고 있었다. 비록 수정구를 통해 주위를 살핀다고 해도, 그 범위가 그리 넓지 못하다. 더구나 일 방적으로 다른 사람의 수정구를 자신의 마력으로 활성화시킨 것이기 때문에 마력의 소 비에 비해 그 효과는 엄청나게 떨어지는 것이다. - 뭐야? 이거 잘 안보이잖아. 도대체 이 작자는 어디에 숨어 있다가 이제야 나타난 거야? 그런데 여긴 집 안인가? 멀리까지 안 보이니 답답하네. 그리고 오래지 않아서 주위를 살피던 우제푸의 모습이 사라지고 통신내용이 수정구 에 갈무리되기 시작했다. - 길드 마스터 우제푸가 루탄님게 보냅니다. 그 동안 루탄님의 소식을 알기 위해 부 단히 노력을 했지만 누웬 왕국으로 향하신 이후의 소식을 알지 못해서 답답해하고 있 었던 참에 이렇게 소식을 받데 되어 몹시 기쁘게 생각합니다. 사실은 저희 길드에서 루탄님의 용병대에 의뢰가 있어 이렇게 연락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상당히 급한 용무 의 의뢰입니다. 또한 심각한 문제의 의뢰이기도 하기에 이런 통신으로는 내용을 말씀 드리지 못하고 직접 통신은 되어야 말씀을 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 이 연락을 받 으시는 즉시 통신을 연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앞으로 하루 동안 언제든 통 신을 받을 수 있도록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사안이 급한 일이니 조속한 연락 다시 한 번 부탁드립니다. 이런 이런 웃기는 영감 같으니라고 좀 전까지만 해도 이 작자가 어떻게 하더니 통신 으로 남길 때에는 정중하게 루탄님이라? 도대체 무슨 일로 나를 찾는 것이지? 나는 그 날 저녁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아이들과 지토를 모아서 응접실에서 상황을 이야기하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수정구를 통해 통신을 연결했다. 그리고 통신 시도되고 오래지 않아서 우제푸의 재수 없는 얼굴이 수정구에 가득찼다. (제발 얼굴을 좀 멀리 떨어뜨리란 말이야.) “오랜만이군. 우. 제. 푸. 내가 말을 놓는다고 너무 고깝게 생각하지 말게나. 뭐 좋 은 것이 좋은 것인데 먼저 나에게 시비를 건 것은 우제푸 영감 당신이니 말이야.” 나는 수정구를 향해서 낮게 으르렁거리는 것으로 상대의 기선 제압에 들어갔다. - 오랜만입니다. 루탄님. 상당히 찾기가 어려운 분이군요. 한타를 이 잡듯이 뒤지고 있었는데도 찾지 못했는데 넥스 영지에 들어가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누웬에서 그 쪽 으로 넘어가신 것인가요? 그거야 당신이 알 바 아니지 않은가? 아무튼 무슨 생각인지 우제푸도 내가 말을 놓는 것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분위 기였다. 아무래도 내가 마법에서 자신을 앞선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나 에 대해서 짐작하는 것이 있는 것일까?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다. “그건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닐 텐데 영감? 나를 찾은 용건이나 빨리 이야기하는 것 이 어떨까? 우리들은 아직 저녁 식사 뒤에 후식을 즐기지 못해서 말이야.” 쉽게 우제푸 너의 말보다는 후식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 알았습니다. 용건을 말씀드리지요. 그런데 우선 여행 중에 좀 이상한 무리들을 보 신 적이 없으신지요? “이상한 자들? 어떤 자들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나는 문득 떠오르는 암흑교의 무리를 머리에서 지우며 물었다. - 그게, 암흑교라고 암흑제국에서 파생된 종교인들인데, 가끔 무리를 지어 움직이고 있다는 소문이 있어서 말입니다. 지금은 한타에서도 상당히 문제가 되는 무리들이지 요. “암흑교라, 들어 본 적이 있군. 그런데 그게 무슨 문제지?” -저 그것이 그들의 무리가 상당히 골수 신도들인데도 그렇게 골수 신자가 된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이지요. 특히 그 신도들이라는 자들이 대부분 특수 직에 종사하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보니 더더욱 그렇게도 하고 말입니다. “특수직이라니?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지?” 나는 마법사나 기사들 이외에 다른 직종에 종사하는 자들이 암흑교의 신도로 만들어 진 것을 본 적이 없어서 물었다. - 대부분이 마법사나 검사와 같은 인물들이고 더해서는 상인들이나 지역의 유지들인 경우가 많은 모양입니다. 물론 특별히 무리를 지은 인물들이야 마법사나 검사들이지 만 그들을 후원하고 돕는 사람들을 살펴보니 상인들과 관리 혹은 지역 유지 등의 인 물 들이 발견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역시였다. 무력이 있으면 금력金力과 정치력政治力도 필요한 법이다. “그래서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인가? 말을 돌리지 말고 하고 싶은 이야 기를 하지 그래. 우리 후식이 식어서 맛이 없어진단 말이야.” 순간 우제푸의 얼굴에 혈관이 돌출된 것 같지만 수정구에 이상이 있어서 그런 것일 것이다. - 저희 길드가 어느 정도 조사를 해서 암흑교의 신도들에 대한 대략적인 세력을 알 아 본 결과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파악되었습니다. 그들이 처음 나타난 것은 이제 겨우 1년이 되어 갈 뿐이지만, 그 사이에 이들의 세력이 너무도 급속하게 확장되고 있 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것에는 무언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으로 짐작이 됩 니 다만, 아직 그 원인을 밝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도를 생포해도 자살을 해 버리기 때 문에 도저히 그들의 조직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도 어려운 실정입니다. 그래서 루탄님 의 용병대에 한타 왕국 내의 암흑교에 대한 조사를 의뢰하려고 합니다. 결국의 그런 내용이로군. 가만히 있자. 그러고 보니 이제 곧 있으면 기충들의 두 번 째 복사가 이루어질 때가 되는 것인가? 그 주기가 6개월이라 했으니까... 그럼 문제 가 심각해 질 수도 있겠군. “암흑교라... 글쎄, 지금 우리들은 별로 의뢰를 받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우리들 은 지금 휴식을 취하는 중이라 말이야. 그 동안 열심히 일해서 어느 정도는 자금에 여 유도 있고. 그러니 의뢰에 목을 맬 일도 없고... 아무튼 우리 단원들과 의논을 해 보 고 결정을 하도록 하지.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연락을 하도록 하겠네. 그럼 이 만.” 나는 뭐라고 입을 열려는 우제푸의 표정을 무시하고 수정구에서 통신을 끊어 버렸다. 그리고 나는 동생들과 지토의 안색을 살폈다. 모두들 어느 정도는 이곳 생활에 적응하고 지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중에 이런 의뢰를 굳이 받아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 이었고, 역시 동생들과 지토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은 부정적인 뜻을 담고 있었다. “너희들은 별로 이 일을 맡고 싶은 생각이 없는 모양이구나. 그래, 나도 이 일은 맡 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나마 얻은 작은 여유이고 행복이니 놓고 싶지 않은 것이 당 연 하지.” 나는 그렇게 이해의 말을 하고 마음을 결정하려고 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암흑교의 창궐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고, 또 그런 이유로 방 해를 하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일단은 그들의 일에 개입하려는 이유가 고작 ‘내가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라는 것은 너무 약했던 것이다. 무슨 거창하게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 아니냐하는 것은 머릿속에 있지도 않았다. 솔직히 그런 것에 의미를 두고 내가 살고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나는 그저 모든 인간들이 그러하듯이 내 욕심을 위해 살 뿐이다. 어찌 보면 나는 인간들이 원하는 거의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힘도 있었고, 돈도 있었고, 지위도 있었으며, 무엇보다 자유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 내가 굳이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을 가르고 ‘좋은 사람을 돕기 위해 나쁜 사람 을 죽여야 해’라는 식의 태도를 가지고 암흑교에 맞서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냥 알아서 하라고 하지 뭐. 우리가 끼어들 필요는 없을 것 같으니까 말이야.” 내가 그렇게 말하고 결정을 내릴 듯하자, 지토가 갑작스럽게 끼어들었다. “루탄, 성급하게 결정할 일이 아닌 것은 너도 알 텐데? 너도 알고 우리들도 알고 있 는 일이잖아. 암흑교가 한타와 신성제국에서 움직이고 있는 중이라면, 언젠가는 누웬 과 그란드 왕국에도 손을 뻗을 것이고 결국에는 이 대륙 전체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는 말이다. 어쩌면 이 넥스 영지에도 영향이 있을지도 모르지. 그 때는 어떻게 할 생 각이지? 누웬이 무너지고, 헤이스런 공작가와 선드라스 공작가가 무너지는 꼴을 보고 있을 거냐? 그란드 왕국이 무너지는 것도 보고 있을 거냐? 누웬의 황제야 그렇다고 해 도 모리요타와 소란이 당하는 것을 보고 있을 거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우리와 인연 을 맺은 것이잖아. 지금 피하려 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우리 전부 알고 있 어.” 지토가 오랜만에 깊이 있는 말을 한 셈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나도 알고 있었고, 동생들과 지토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들이 모른 척 하고 있어도 세상은 그렇게 돌아갈 것이고, 암흑교의 세력이 커지 면 커질수록 우리가 알던 사람들이 힘겨워 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운명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 있는 문제가...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우리가 그들과의 인연의 끈을 얼마나 크게 생각하는가에 따라서 그들의 운명에 우리 의 운명이 깊게 얽힐 수도 작게 얽힐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야? 우리가 나서서 도움을 줘야 한다는 거야? 아니면 이런 상황 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결정을 해도 하자는 말이야? 정확히 원하는 것이 뭔데?” 나는 지토에게 그렇게 물었고, 지토는 “나는 우리가 지금 결정을 내리기 전에 상황을 냉정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말 을 하는 것뿐이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로 의뢰를 받고 싶은 생각은 없다.” 라며 의사를 분명히 했다. “뭐 나도 별로 직접적으로 끼어들고 싶은 생각은 없어. 자이건이 좀 걱정되기는 하 지만 말이야.” 화아였다. “아직 아세트에게도 별 일은 없는 것 같고, 자이건은 잘 할 수 있을 거고, 저도 별 로 직접 개입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광아의 말이다. “나도 별로 직접 끼어드는 것은 싫은데? 그래도 어느 정도 힘을 주고 싶기는 하 고... 우리가 아는 정보라도 각 국에 알려 주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냥 익명으 로 말이야.” 풍아의 말이다. “저도 풍아 언니 의견에 찬성이에요. 그래도 좀 도와주면 힘이 될 것 같고... 사실 나중에 우리들이 어쩔 수 없이 암흑교와 맞서야 할 때가 오더라도 조금은 그들의 도 움 을 받을 수도 있을 테니까... 그리고 사람들에게 많이 도움도 될거고...” 수아는 풍아의 의견에 찬성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되자 지토나 광아 화아도 우리들이 직접 나서는 것은 싫지만 정보 제공 정도 의 도움은 주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다음날 우리들은 오랜만에 외출 없이 집 안에서 이런 저런 일들을 하면서 불 안한 마음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서 다시 수정구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우제푸 우리들은 당신의 의뢰를 거절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나는 우제푸의 얼굴이 수정구에 비치자마자 우리의 의논 결과부터 먼저 알려 주었다. 우제푸의 얼굴에는 실망감이 나타났지만 그럴 수도 있으리라는 예상을 했던 모양인 지 크게 비관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리들이 암흑교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고급 정보가 있기에 그것에 대한 이 야기를 나누었으면 한다.” 나는 우제푸에게 그렇게 운을 띄웠다. 순간 수정구를 넘어서도 확인이 되는 우제푸의 빛나는 눈동자. - 그, 그게 어떤 정보입니까? 그 정보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신다는 것은 어떤 의미 로 하시는 이야기이신지요?“ 우제푸는 상당히 몸이 달아 보였다. “우리들이 가진 정보는 암흑교의 교도가 늘어나는 이유와 그 방법이다. 미쳐 그 방 지책은 알지 못하지만 원인 정도는 알 수 있다는 말이지. 물론 전체적인 것이 아닐 수 도 있겠지만 말이야.” 그러자 우제푸의 표정이 조금 신중해 지기 시작했다. - 그것이 혹시 인간의 몸속에 기생하는 그것에 대한 것이라면 우리도 알고 있습니다 만.... 역시 마법사 길드도 먹고 놀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이런 그럼 우리도 알려 줄 수 있는 정보가 별로 없군. 우리가 알려 주려던 정보가 바로 그것에 대한 것이었으니 말이야. 그럼 이만...”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식으로 통신을 끊으려 했다. - 아, 아니 루탄님 잠깐만.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사실 그것에 관한 것은 우연히 자 살을 실패한 사람의 몸을 조사하면서 알게 된 것으로 그런 것이 있다는 것 외에는 아 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저 그것이 자리를 잡은 위치 정도일 뿐입니다. 우제푸는 당황하며 통신을 유지하려 애를 썼다. “뭐, 우리도 그것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아는 것은 얼마 없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을 알기 위해서 자그마치 50명의 마법사와 100명의 기사가 희생을 당해야 했으니 꽤나 힘 들게 얻은 정보라고 해야겠지? 그럼 이제 거래를 해 볼까? 얼마나 주겠나?” 내가 그렇게 이야기를 이끌어가자 동생들과 지토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 같았다. 또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을 한 모양이다. 뭐, 그래도 하는 수 없는 문제다. 이렇게라도 조금씩 돈을 벌어야... 꼭 돈이라기 보 다도 무언가를 모으는 재미가 솔솔한 것이라서 말이야. - 그 정도의 인원이 희생되고 얻은 정보라면 적지 않은 대금을 지불해야 하겠지만 저 희도 사정이 별로 넉넉한 것은 아니라서... 일단은 정보의 질이 문제겠지요. 역시 늙은 생강이라는 건가? “일단 살아있는 상태의 표본 하나와 그것의 번식에 대한 것과 기능 정도가 되겠지 만 그것이 완전히 전부라고는 장담을 못해. 번식과 기능에 대한 것은 우리가 알아낸 부분까지만 이겠지.” - 좋습니다.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는 저희가 아쉬운 형편이니 거래에 응하지요. 그 정보 저희가 1억 덴에 사겠습니다. 오호? 화끈한데? “조금 손해 보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 조건에 응하기로 하지.”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슬쩍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수아를 보는 척 했다. 입가로 삐져나오는 웃음을 들키지 않으려는 .... 그리고 그 뒤의 정보는 광아에게 부탁해서 전달하도록 했다. 광아는 그런 쪽으로 정리해서 전달하는 데에 재능이 있으니까 말이다. - 그러니까 6개월이라는 말씀이로군요. 그리고 이제 곧 6개월이 되어간다는 말씀이지 요? 이거 정말 큰일이군요. 만약 그들을 그대로 둔다면 지금 파악하고 있는 인원의 두 배로 늘어난 암흑교의 교도들을 보게 될 거라는 말인데... 정말 큰일이군요. 그리고 잠시 침중한 얼굴이 되었던 우제푸는 고개를 들고 다시 말을 이었다. - 그럼 저희에게 제공해 주시겠다는 그것의 표본은 언제 보내 주시겠습니까? “그건 지금 바로 보내 주도록 하지. 좌표만 설정해 주면 작은 부피니까 그리 어렵 지 않게 보낼 수 있을 거야. 쓸데없는 장난을 치는 작자가 중간에 없다면 말이야.” 내 마지막 말에 우제푸가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나는 우제푸가 불러주는 좌표에 기충의 표본(빨간 당구공)을 전송시켰다. 사실 나는 그 동안에 약 30개 정도의 식충들을 채취해서 보관 중이었다. 이 녀석을 잘만 연구하면 어떻게 암흑교의 제약을 받지 않으면서 능력만 키울 수 있 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연구 중이었던 것이다. “지금 보낸 것은 취급에 조심해야 할 거다. 피를 신선하게 유지하고 온도와 영양 공 급이 신체 조건과 많이 달라지면 그것이 죽어버리는 경우도 있었으니 말이야. 그리고 혹시 암흑교와 그것에 대해 밝혀지는 것이 있으면 연락을 줬으면 좋겠군. 나도 이쪽 에 서 밝혀지는 것이 있으면 알려 주도록 하지.” - 고맙습니다. 루탄님. 그럼 곧 다시 연락을 드리.... “이봐 우제푸 정보 대금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해야 하지 않겠나? 그렇게 서둘러 통신을 끊으려고 하다니...” 나는 우제푸의 통신 단절을 막으며 빙긋 웃어 주었다. 물론 보는 우제푸의 입장에서야 그것이 어떤 웃음이었을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 물론입니다. 대금은 드려야지요. 아까 불러드린 그 좌표에 대금을 준비해서 올려 두었습니다. 그러니... 나는 우제푸의 말이 진행되는 동안에 그 좌표에 있는 물건을 소환해 왔다.(이건 드럽 게 힘든 일이다. 보내는 것은 쉽지만 좌표를 안다고 해도 불러 오는 일은 쉽지 않은 것이다.) 덕분에 잠깐 수정구의 화질에 이상이 오기도 했지만, 통신이 연결된 상태에서 소환 을 성공할 수 있었다. “형님, 대충 살펴보니 약 7000만 덴 정도 되겠는데요? 3000만이 모자라는 것 같습니 다.” 계산 빠른 광아의 한 마디. 그리고 수정구 건너편에서 당황하는 우제푸. “뭐 이 정도로 대금에 대한 추궁은 하지 않겠다. 하지만 우제푸 마스터, 만약에 어 떤 정보를 얻고서 나에게 숨긴 것이 밝혀지면 각오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내가 마음 먹고 찾자고 하면 숨는 것도 그리 쉽지만은 않을 거야.” 나는 그렇게 말을 해 주고는 우거지상이 된 우제푸의 인상을 보며 통신을 끊었다. 3000만 덴 보다는 마법길드의 마스터에게 짐을 지워 두는 것이 유리할 때도 있는 법 이다. 그리고 그 밤에 나는 오랜만에 많은 일을 해야 했다. 일단은 그란드에 보내는 암흑교에 대한 자료와 정보를 정리했고, 그와 같은 내용의 자료들을 세 개를 더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뭐 처음 만든 것을 카피하는 것이기는 했지만... 다음날 나는 광아에게 그란드의 재상을 찾아 정보를 전하고 600억의 빚을 받아 오라 고 시켰다. 그리고 풍아에게 부탁해서 카다를 누웬으로 보내서 정보를 전달하라고 시켰다. 그리 고 황제에게 암흑교에 대한 정보가 있으면 전해 달라는 부탁도 아울러 했다.(도움을 주었으니 부탁 정도야 들어 주겠지.) 광아는 내가 순간이동으로 재상의 집무실이 있는 곳으로 보내 주었고(지붕위로 보냈 다.) 오래지 않아서 내가 준 이동 스크롤을 이용해서 돌아왔다. 상당한 양의 보석과 금괴들을 동반하고 말이다.(600억 덴을 계산해서 그 예전의 우 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6조원이나 되는 돈이다.) 그리고 광아는 제상과 이그왕이 안부를 전하며 암흑교의 교세 확장에 신경을 쓰고 관 심을 가지겠다는 전갈을 가지고 왔다. 나는 광아가 심부름을 갔다오자마자 또, 아세트에게 광아를 보냈다. 아세트가 광아의 쫄다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좌표 계산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광아에게 두 벌의 정보를 주어서 아세트에게 전하게 하고, 한 벌의 정보는 자 이건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전하라 했다. 광아는 그런 임무를 가지고 아세트에게로 이동해 갔다. 그리고 심부름을 갔던 카다는 그날 밤이 가까워서야 돌아왔는데 황제라는 녀석의 서 찰을 들고(발목에 묶어서) 왔다. - 암흑교라는 녀석들이라. 아직 이 나라에서 그런 녀석들의 준동은 없다. 그저 국경 선에서 가끔 암흑제국 녀석들의 모습이 발견되어서 아예 협곡의 다리까지 국경선을 확 장하고 방비를 하고 있는 중이다. 아무튼 정보를 알려주어 고맙다. 별로 필요성을 느 끼지는 못하지만 일단은 신경을 써 주었다는 것에는 고맙다고 해 주지. 그리고 무언 가 변화가 있다면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지 너에게 정보를 알려 주어야 할 필요성 은 없다고 본다. 그럼 잘 있어라. 그리고 야전대 녀석들은 언제 데리고 가려는 것이 냐. 빨리 데려가라. 밥만 축내는 녀석들을 데리고 있자니 손해가 많다. 네가 있는 곳 으로 보내고 싶어도 딸린 식구들이 있어서 보내기가 어려워 못하는 것이니 빨리 데리 고 가라. 와직!! 무슨 소리이겠는가. 당연히 서찰이 내 손에서 구겨지는 소리지. 짜증나는 황제 녀석. 끝까지 속을 긁어 놓는군. 내가 그렇게 투덜거리고 있을 때, 광아가 다시 돌아왔다. “갔다 왔습니다. 형님. 아세트 아가씨가 안부를 전하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자이건 에게 꼭 전달하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헤이스런 공작가와 연락이 가 능 한 수정구입니다. 본체는 공작가에 있지만 이것으로도 언제든 연락이 가능할 거라면 서 주더군요. 그리고 스컬프트가 형님께 안부를 전하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이젠 동 화 비율이 4:1 정도는 된다고 하더군요.” 일년도 되지 않았는데 동화 비율이 4:1이라니 거의 언제나 소환을 하고 있었다는 말 일까? 그 정도로 서로 마음이 통했다는 말일까? 아무튼 초환수에 버금가는 녀석을 부릴 수 있으니 헤이스런 가문의 부활도 머지 않았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그럼 우리가 할 일은 모두 다 한 것이니까 당분간은 쉬어 볼까? 이젠 알아서 들 하겠지. 암흑교의 사제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어쩌겠어. 우리도 우리 나름의 사정이 있었던 것을 말이야.”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늦은 밤의 모임을 끝냈다. 날은 빠르게 지나갔다. 봄날 따뜻한 햇살은 분지 곳곳으로 쏟아져 내려와 갖가지 색으로 부서져 흩뿌려졌 고, 그 속에서 초록과 노랑과 빨강과 보라 등의 형형색색의 세계를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그 세계에서 또 다른 것들이 뛰어나와 달음질을 치고, 그 뒤를 겨우내 굶주 린 것들이 따라 뛰기도 했다. 봄날 초원의 어디에도 행복과 평화와 안식이 있었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그 속에서 좀 더 깊이 뿌리를 내리고 좀 더 많은 양분을 다투고, 좀 더 높은 키로 하늘의 햇빛 을 다투는 식물들과, 작은 곤충들의 영역 싸움과 그것들을 노리는 또 다른 포식자의 싸움이 끊이지 않았고, 같은 종이라 해도 자신의 후대를 남기기 위한 번식 경쟁이 치 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그렇게 봄이 깊어가는 어느 날, 아공간에서 알지 못할 이상을 감지한 나는 그 이상 을 일으킨 것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아르미엘 사제가 준 암흑교의 성물이었다. 그것을 손에 쥐자 메시지가 전해져 왔다. - 루탄님께 기쁜 소식을 알려 드립니다. 지금부터 두 달 후에 대쟁투장에서 대쟁투 가 벌어집니다. 이번에는 모르탄을 포함하는 제국의 서부지역이 대쟁투를 벌이는 지 역 입니다. 루탄님과 일행 분들이 대쟁투를 보고 싶어 하셨기에 이렇게 연락을 드립니 다. 만약 대쟁투의 관람을 원하신다면 앞으로 50일 전까지 대쟁투장에 도착해 주시면 제가 좋은 자리를 알아봐 드리겠습니다. 대신大神 루시퍼님의 인장을 지니신 분이시 니 어떤 누구도 암흑제국에서 루탄님을 소홀이 대하는 자는 없을 것이지만, 눈이 어 두 운 자들이 있어 귀찮은 일을 당하실 수도 있으니, 대쟁투장에 오시면 꼭 저를 찾아 주 시기 바랍니다. 그럼 루탄님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무런 어감도 없이 그저 머리 속으로 파고드는 의미의 전달이었다. 그리고 그 저녁에 어김없이 동생들과 지토를 포함한 우리 가족은 응접실에서 이번 문 제에 대한 가족회의를 열었다. 이젠 이렇게 모이는 것을 가족회의라는 명칭으로 부르기로 했다. “어떻게 생각해? 대쟁투 보고 싶은 생각 있어?” “그거야 당연하지. 그런 재미있을 것 같은 구경을 하지 못하면 평생 후회라지 않겠 어? 요즘 그렇지 않아도 테오도쪽의 기사들도 실력이 제법 늘어서 내가 도와주지 않 아 도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인데 잘 됐네.” 내 말에 대뜸 구경을 가자는 쪽으로 의견을 내 놓는 화아였다. “호호, 나도 보고 싶었던 거야. 꼭 한 번 보고 싶어. 솔직히 칼 들고 싸우고 마법으 로 싸우는 거야 해보기는 많이 해 봤지만 구경을 제대로 해 본 적은 별로 없잖아. 행 문성에서의 전투야 그게 어디 구경이랄 수나 있는 거야? 그러니까 이번에 확실하게 구 경을 한 번 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풍아도 역시 찬성인 모양이었다. “저도 한 번 갔다 오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목적이야 좀 다르지만, 저는 일단 암흑제국의 분위기를 살피고 지금 활약하는 암흑교의 무리들이 암흑제국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광아도 역시 가보자는 의견을 내었지만 그 목적은 달랐다. 놀러 가자가 아니라 뭔가 알아보고 오자는 쪽이었던 것이다. 물론 나도 만약 가게 되 면 암흑교 전체가 이 일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암흑교의 그 많은 파벌 중에 서 하나가 벌이는 일인지를 알아보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큼, 나는 별로 그런 구경은 하고 싶지 않지만 일단은 거의 결정이 된 듯 하니까 한 번 가 보는 것도 좋을 것 같군. 흐흠.” 지토도 그런 구경을 놓치고 싶은 생각은 없는 듯 했다. “그럼 우리 다시 여행을 하는 거예요? 마차를 타고요? 그런데 50일이면 대쟁투장까 지 가는데 촉박하지 않을까요. 시간이...” 수아는 마차 여행을 오랜만에 하게 된 것이 즐거운 듯이 말해서, 가기 싫은 것을 억 지로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불식시켜 주었다. “일단은 장거리 순간이동을 한 번 해야 할 것 같다. 일데퐁소와 그 일당들이 얼마 전에 한타의 크리트니아와 장거리 이동마법진을 완성한 모양이던데 우제푸의 도움을 받고, 내가 이 쪽에서 힘을 쓰면 이동이 가능할 거야. 우리 모두 한꺼번에 말이야. 그 게 안 되면 한 명 한 명 따로 따로 이동을 하고 마지막으로 내가 마차와 함께 이동하 는 방법을 써도 될 거니까 크게 문제는 없을 거야. 그렇게 되면 일단 25일 정도는 버 는 셈이니까 괜찮겠지. 거기서부터 암흑제국까지는 길어야 30일이면 될 테니 시간은 넉넉할 거야.” “음, 그럼 가는 길에 한타리아에 들러서 아세트를 보고 갈 수 있겠네요. 한 번 보 고 가죠? 그리고 자이건도 잘 있는지 만나보고 가면 좋겠네요.” 풍아가 그렇게 의견을 내 놓았고 아무도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다 음날부터 암흑제국의 대쟁투 관광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준비라야 넥스 영지의 아람들에게 우리들이 잠시 외출을 할 것임을 알리는 것과 칭얼 거리는 녀석들(리아 남매와 일데퐁소)를 떼어 놓고, 열렬히 환호하는 기사단을 지긋 이 밟아주는 것이 전부였지만 말이다. 여기서 리아 남매는 지토가 달랬고, 일데퐁소는 내가 달랬다. 그럼 기사단을 지긋이 밟은 것이 수아였겠는가? 수아는 제레이나와 석별의 정을 나누고 있었는데? 영원이 가는 것도 아니고 잠시 다녀오겠다는 인사에 왜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인지. 우리들이 우제푸와 연락해서 넥스 영지를 벗어난 것은 가족회의가 있은 3일 후의 일이었다. 우제푸는 그냥 한 사람씩 오면 될 것을 왜 자기까지 고생을 시키며 마차까지 끌고 오 려고 하느냐고 투덜거렸지만 내가 지긋이 눈에 힘을 주는 것에 알아서 꼬리를 말았다 . 그리고 우리가 도착한 곳은 그 예전에 마티운으로 가기 위해 올라섰던 이동마법진 보 다는 더 개량이 된 마법진이었다. 그 사이에 약간 손을 본 모양으로 제법 많은 마력 낭비를 줄일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우제푸가 나에게 했던 실험의 결과이려니 싶은 마음이 들어서 뒷 골에서 피가 솟는 것을 느꼈다. “어서 오십시오. 루탄님. 1년만에 다시 뵙게 되었군요. 그래 이번에는 무슨 일로 이 렇게 전부들 급하게 오신 겁니까? 궁금하군요.” “별거 아니야. 그냥 헤이스런 공작가에 들러서 좀 놀까 했는데 여기까지 마차를 타 고 오는 것은 너무 오래 걸려서 순간이동을 택한 것뿐이야.” 뭐 그렇게 황당하다는 표정이나 혹은 이마에 혈관을 보인다고 해서 내가 기가 죽을 것도 아니니 그만 표정을 풀라고 우제푸. 그러다가 쓰러지면 치료마법으로도 완치가 어렵다는 것을 모르나? 뇌는 아무래도 상처를 입으면 완치가 어렵다니까 그러네. 흠. 그래도 간신히 안정을 찾은 모양이군. “그럼 단지 먼 거리를 이동하는 것이 귀찮다는 이유로 마법길드의 마스터인 저를 이 곳에서 기다리며 이동마법진 유지에 혹사시키셨다는 말씀입니까? 이 저를 말씀입니 다.” “이봐 우제푸 내가 이 마법진을 보니 말이야 전에 비해서 상당히 개량이 된 모양이 군. 이게 어디보자 음... 이건 누군가가 아주 죽을 고생을 하면서 이동마법 도중에 갇 혀서 발버둥을 치지 않고는 이렇게 자세한 수식을 얻기 어렵지. 안 그런가? 우제푸 마 스터?” 잠깐 기어오르던 우제푸는 내 말에 다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어찌 감히 9써클 마스터를 마법 실험의 도구로 써먹고 큰 소리를 친단 말이야? 흠.흠. “그런데 그 사이에 그것에 대한 연구에 진척은 없었나? 분명히 있었을 텐데 소식이 없으니 말이야. 혹시 나에게 감추는 것이...” 나는 슬쩍 이야기를 돌리며 우제푸의 심문에 들어갔다. “아, 아니 무슨 그런 말씀을... 숨기다니요. 그런 것은 전혀 없습니다.” 우제푸는 펄쩍 뛰며 부인했지만 수아의 표정으로 보아서 아무래도 거짓말인 것 같다. (요즘 느끼는 건데 수아는 사람들의 감정 변화에 민감한 것 같다. 확실히 어떻다는 설 명으로 되는 것은 아니고 수아도 깨닫지 못한 것 같지만...) “마스터, 이러면 내가 섭섭하지 않겠어. 정말 이러면 재미없어. 좋아 그럼 이제부 터 우리 서로 모르는 척 하고 살자고. 그럼 되는 거지?”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등을 돌렸다. 안 잡을 수 있을까? 나를 안 보는 것이 실제로는 앞으로 손해가 없는 일이라고 해 도, 무언가 손해 보는 느낌이 들 텐데? “자, 잠깐만, 루탄님. 좋습니다. 제가 있는 그대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대신에 나 중에 저희에게 약간의 도움을 주시겠다는 정도의 약속은...” 역시나 늙은이는 상대하기 껄꺼로운 존재다. 이 상황에서도 거래를 하는 것이다. 이 런 것이 삶의 연륜인가? “뭐 그런 건 나중에 보면 알 일이고. 일단 이야기나 들어보지.” 하지만 우제푸는 내 이런 대답 속에 들어있는 반승낙의 의미를 읽어내지 못할 정도 로 어리석지 않았다. “그럼 일단 이리로...” 그렇게 해서 우리는 크리트니아의 마법사길드의 조용한 접대실에서 우제푸와 마주하 게 되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것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시작된 우제푸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기충에 대한 연구와 실험은 제법 진척이 되어서 일정한 사람들은(아니 기충은) 일정 한 한 사람의 지령을 수령하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언젠가 상당한 수의 암흑교 교도 들이 한타의 한 마을을 습격한 사건이 있었고, 그 습격에 발 빠르게 대응한 기사단이 있어서 도리어 암흑교의 교도들이 수세에 몰린 상황이 있었는데 이때, 궁지에 몰린 교 도들의 행동 양상이 상당히 다르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한 무리는 서슴지 않고 자살 을 택했고, 다른 무리는 도주를 택했다가 도저히 방법이 없으면 자살을 택했다고 한 다. 그리고 한 유형의 인물군은 동반 자살이라는 극악의 방법을 택한 무리도 있었다 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인원들에 대한 신원 추적을 마무리한 결과 일정한 양상을 보인 인물들이 각각 동일한 지역에서 몰려 온 인물들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으로 미루어서 기충들은 어떤 한 사람의 지령을 수행하여 같은 형태의 생각을 가 지는 것으로 보인다는 결론이 나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특이할 사항은 교도들의 수가 급격하게 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두 배의 수로 늘 것 같았던 교도의 수가 일정한 수(지역 단위로 추산한 수 로 는 약 500-700정도의 수)이상을 넘지 못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는 것인데, 마법사길 드 의 추측으로는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인원의 수가 그 정도가 아닐까 하는 것이었 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충의 제거에 관한 연구에서는 대상자의 몸에 무리가 가더라도 아주 강력한 뇌격으로 기충의 제거가 가능한 것으로 파악이 되었으며 이때, 성공확률 은 100%였지만 대상자가 폐인이 되는 경우가 반 정도 된다고 했다. 그래서 그것에 대 한 연구를 더 진행하는 중이라고. 마지막으로 암흑교의 사제들에 대한 것은 알아낸 것이 없다는 말이었다. 그들이 어떤 위치에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지는 전혀 파악이 되지 않고 있다고 한 다. 하지만 한타왕국 안에서 암약중인 암흑사제의 수는 약 2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 되었고 그것은 암흑교도의 추산 수인 1만 5천에서 역 추산된 숫자라고 한다. “그것 참, 결국에 이 나라에만 1만 5천의 암흑교도가 있다는 말이군. 그런데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인가? 그리고 그 암흑교도들이 목표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 나?” 내가 우제푸에게 물어보자 우제푸는 어설픈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것이 저희 마법사들이야 연구 쪽에 관심이 많지 그런 쪽으로는 그리 큰 힘이 없 습니다. 사실 이 정도의 정보들이 들어온 것도 마췬길드에 상당한 돈을 지불하고 얻 은 것입니다.” 확실히 마법이나 자료에 대한 연구라면 몰라도 정보를 모아서 분석하고 종합하는 능 력은 떨어질지도 모르겠다. “아! 그걸 뭐라고 하는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말아. 그런데 왜 기충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신성제국의 사제들의 힘을 빌려볼 생각은 하지 않은 거지? 아무래도 암흑교에 대한 일이라면 신성제국의 사제들이 도움이 될 텐데 말이야.” “그거야, 사제들과 마법사들이 쓰는 힘이 다르다보니 서로 경원시하는 이유도 있 고, 신성제국과 한타가 서로 우호적이지 못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지 요. 그리고 아직은 다른 나라에까지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로 문제가 커진 것도 아니 고 말입니다.” 이런 늙은이 같으니 이정도가 큰 문제가 아니란 말인가? 1만 5천이 그렇게 간단한 수인가? 검을 든 녀석들이라면 전부 검기를 쓰는 녀석들에 최하 마법이 3써클은 넘는 마법사가 합해서 1만이 넘는다는 말인데? 그래, 그렇게 생각한다는 데야 내가 뭐라고 하겠어. 알아서 하겠지. 나는 그렇게 마법사길드에서 알아낸 정보를 가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참, 그리고 말이야 이 기충이라는 녀석이 수면기가 있더군. 그리 길지는 않은 시 간인데 20일 정도에 한 번 정도 슬슬 온 몸을 돌아오는 때가 있어. 운동을 하는 것인 지 뭔지는 몰라도 아무튼 그런 때가 있더군. 그 때라면 뇌에 영향을 적게 주면서 기 충 을 제거할 수도 있을 거야. 안되면 팔 다리 잘라버리고 재생을 시키는 방법을 쓰더라 도 말이야. 그럼 우린 이만 가네.” 나는 마지막으로 우제푸에게 이렇게 귀띔을 해 주고는 가족들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이 정보는 내가 요 근래에 발견한 것이었다. 어느 정도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암흑교도의 정신을 돌리는데 어느 정도 는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그냥 죽는 것 보다는 팔 다리 재생술을 받는 것이 좋지 않을까? -대쟁투장을 향해서 - 우리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급하게 서두르지 않고 크리트니아에서 한타리아 로 향하는 길로 접어들었다. 한타리아는 크리트니아에서 서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쉬벡의 성은 한타왕국 전체로 보면 동쪽에 있었고, 크리트니아는 북동쪽, 한타리아 는 거의 중앙에 있었던 것이다. 거리가 제법 되어서 일주일은 걸릴 거라는 예상이었지만 어차피 남쪽으로 내려가야 하는 여정이었기 때문에 한타리아를 들러서 가는 것이 부담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오랜만에 마차를 타고 여행을 하니까 좋으네요. 따뜻한 빛과 생기가 넘치는 대지, 물들이 살아 움직여요. 초목과 대지와 공기와 몸속에서 힘차게 맥박질 하고 있어요. ” 얘가, 얘가 완전히 음유시인이 되는구나. 그래, 들판도 하늘도 이제는 완연히 봄을 넘어서는 듯 보이는 구나. 멋진 하늘과 태 양과 풀과 나무와 새들과 그것을 아우르는 세상의 모습. 또,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가족들과 함께 있다는 것이겠지. 나는 느긋하게 마차 지붕에 누워 말고삐를 놓아 버렸고, 수아가 옆에서 무릎베개를 해 주었다. 말들이야 이젠 알아서 길을 따라 갈 정도는 되고, 풍아 화아 광아 지토도 걱정할 일 은 없었다. 그들도 나름대로 풍경에 젖어 있는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얼마 전부터는 이 애들이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가는 것 같다. 그 전에는 함께 몰려다니면서 떨어지는 것을 싫어하는 것 같더니, 언제부터인가 혼 자 있는 것을 싫어하지 않게 되었고, 이제는 혼자 무언가에 골몰하는 시간이 많아진 것 같다. 허긴 사람들도 사춘기가 되면 그렇게 자기만의 시간과 공간을 가지고 싶어하는 것이 니까... 아마도 동생들과 지토도 점점 인간을 닮아가면서 그런 면도 닮아가는 것이 아 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들은 한타리아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편안한 분위기에서 아지랑이에 쌓인 듯한 여 정을 보냈다. 따뜻하고 감미롭고 그윽하고 행복한.... “저기가 한타리아로군. 천 년이 흘렀어도 많이 변한 것 같진 않네? 외형적인 모습 의 변화가 저렇게 없다니 도대체가 발전이라곤 없는 세상이라니까.” 화아가 한타리아의 모습을 보면서 한 마디 던졌다. 정말 그러고 보면 지금 이 세계는 물질문명의 발전이나 변화가 거의 없는 것 같다. 이것도 이 세계를 만들 때에 4계에서 조율을 했기 때문일까? 허긴 과학이나 물질문명 이 발전하면 4계 자체의 힘이 약해지는 걸 경험했으니 어떻게든 이런 면에 제약을 주 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우리들은 용병대의 패를 보이고 어렵지 않게 한타리아로 입성할 수 있었고, 곧장 광 아의 안내로 헤이스런 공작가를 찾았다. 헤이스런 공작가는 한타리아의 궁전 동편에 자리 잡고 있었고, 지금은 유명무실해 진 학술협회 건물을 포함하는 저택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저택의 입구에 섰을 때, 학술협회 건물이 담 안에 보였기 때문에 알게 된 사 실이다. 우리는 헤이스런 가의 문 앞에서 아무런 제재도 없이 경비병의 안내로 저택으로 안 내 되었다. “아세트 아가씨께 우리가 방문한다는 것을 미리 알려 드렸습니다. 그러니 별 문제 는 없을 것입니다.” 라고 했던 광아의 장담이 맞아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저택을 가로질러 후원으로 안내 되었고, 후원後園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세트 를 만날 수 있었다. 아세트의 옆에는 스컬프트가 오만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를 보고 있었다. 겨우 설인 주제에... 하지만 녀석은 예전 우리가 제압할 당시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 의 기세를 뿜고 있었다. 역시 그 때, 많이 다쳤기 때문에 우리에게 쉽게 제압이 되었다는 말이 사실이었던 것 같다. “어서오세요. 여러분.” “오랜만입니다. 아세트. 그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네, 루탄님, 화, 풍, 광, 수, 지토님도 안녕하셨지요?”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안부를 묻고는 정원에 놓인 탁자를 중심으로 둘러앉았다. “이렇게 찾아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그리고 전에 보내주신 그 정보도 정말 고맙게 잘 받았습니다. 의외로 암흑교의 교도가 저희 가문에도 침입해 있더군요. 상당히 놀 랐 습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자이건에게 전해달라던 그것은 잘 전달되었습니까?” “네, 그럼요. 자이건 선드라스. 요 근래에 떠오르는 별이 된 사람이지요. 선드라스 가문의 이름을 높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는 사람이니까요. 아마 그가 이끄는 기사단을 아이언나이트라고 부른다지요. 철의 기사들이라 멋진 사람인 것 같아요. 전 에 봤을 때는 별로 두드러진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말이죠. 아무튼 그에게 그 정 보는 확실하게 전달이 되었어요. 스컬프트가 직접 전달을 했으니까 말이죠.” 나는 그 때에야 스컬프트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건넸다. “그래, 지내기가 어때? 그럭저럭 지낼 만은 한 모양이지?” “케케 아직도 팔팔하게 살아있군. 케케 하긴 누가 너 같은 녀석을 건들겠냐? 케케 나야 잘 지내고 있지. 아세트 주인님이 아주 잘 대해주시거든. 케케” 어쭈? 이젠 주인님이라고 곧잘 부르는 모양이네? 역시 소환주를 무시할 수는 없는 모양이지? 나는 그런 스컬프트를 놀려주고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성질 건드려서 좋을 것 이 없을 것 같아 참았다.(그러다가 아세트와 사이가 나빠지면 내가 어떻게 책임을 지 냐?) “그럼 자이건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있겠습니까? 아세트 아가씨를 뵙고나서 자이 건도 한 번 만나고 갈 생각인데...” 내가 그렇게 자이건의 행방에 대해서 물어보자 아세트는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지요. 이제 자이건이라는 이름보다는 강철기사라는 이름이 더 잘 알려져 있 어요. 그리고 그는 지금 암흑제국과의 국경에서 기사단을 이끌고 있어요. 얼마 전에 그 쪽으로 배정을 받았지요. 더구나 이례적으로 그가 이끄는 기사단 전체를 그의 휘 하 에 넣어서 국경 중앙을 지키는 임무를 준 모양이에요.” 자이건 아주 잘 나가는 모양이네? 그럼 그 기사단 녀석들의 실력도 한 번 보지 않을 수가 없잖아? “화아, 풍아가 신이 나겠구나. 자이건 만나면 자이건의 실력도 살펴야 할 것이고, 더구나 새로 키웠다는 기사단의 실력도 가늠해 보아야 할 테니 아주 바쁘겠구나. 하 하 하.” 내가 화아와 풍아를 돌아보며 그렇게 말했을 때, 녀석들은 이미 상당히 기대가 된다 는 표정으로 들뜨고 있었다. “그래 헤이스런 가문도 이제는 어느 정도 입지를 세울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이젠 제법 힘을 가졌을 것 같은데요. 거기다가 다른 귀족들도 어느 정도는 그런 눈치들은 있을 테니 손을 내미는 쪽도 있을 것이고 말입니다.” 내 말에 아세트는 조금 난처한 표정이 되어서 입을 열었다. “사실 그렇습니다만, 지금으로서는 중립이라는 가문의 입장을 바꿀 생각은 없습니 다. 우리가 아느 쪽으로든 기울어지면 귀족들 전체에 상당한 파장을 불러 오게 되지 요. 그렇지 않아도 소란스러운 국내 사정인데, 혼란을 부추길 수는 없지요.” 어째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의 결정은 했지만 겉으로 밝히지는 못한다는 것 같다. “그래, 그럼 결정은 어디로 하셨습니까? 아무래도 분위기로 보면 선드라스 가문에 게 힘을 실어줄 것 같은 느낌인데 말입니다. 설마 자이건과 따로 만나시는 사이 는...” 내 말에 얼굴을 붉히는 것을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군. 뭐 말은 않겠다는 표정인 것을 보니, 더 물어보는 것도 실례겠군. “아가씨, 손님들의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후원을 향한 문을 열고 반백의 늙은이가 나와서(전형적인 집사일까? 저런 모습이?) 아세트에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어머, 하츠키 집사님. 집사님이 직접 나오셨어요? 아드님도 계신데...” “특별한 손님께서 오셨는데 어떻게 제가 나오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의 저 녁 식사는 특별히 신경 써서 준비하라 했으니 만족스럽지는 못하다해도 많이 부족하 지 는 않은 식사일 것입니다. 자, 이리로...” 그렇게 늙은 집사는 우리 일행을 식당으로 안내했다. 꼿꼿한 허리와 단정한 걸음, 먼지 하나도 용납하지 않을 것 같은 성격이 묻어나는 몸 가짐을 가진 사람이었다. “루탄님, 그럼 저희 집에서 얼마나 머물러 주실 거지요? 될 수 있으면 오래 계시면 서 이것저것 이야기도 나누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의논도 드리고 싶은데요.” “이런, 죄송합니다. 아세트 아가씨. 저희는 자이건을 만나고 다른 볼 일이 있어 급 히 움직여야 합니다. 내일 아침에는 또 길을 떠나야지요. 다시 시간을 내어서 들르겠 습니다.” “네, 그러시군요. 하는 수 없지요. 무슨 일인지는 말씀을 피하시는 것 같으니 여쭈 어 보지 않을게요. 대신에 꼭 다시 찾아 주신다는 약속은 지키세요. 호호, 참, 하츠 키 집사님, 루탄님 일행들의 말과 마차를 잘 돌보라고 하츠키 부집사에게 일러 주세 요.” “네. 알겠습니다. 아가씨.” 가만 그런데 이 사람이 하츠키, 그런데 또 다른 하츠키 부집사는 뭐지? “어머? 하츠키라는 분이 이 집에 두 분이나 있으신 모양이네요? 집사님도 하츠키, 부집사님도 하츠키?” 풍아도 그것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아~! 그게 우리집에서 대대로 집사 일을 맡고 있는 하츠키 일가의 특성이예요. 무 조건 장자에게는 하츠키라는 이름을 그대로 전하거든요. 아주 오래전에 이 대륙에 5 개 의 왕국이 생겨날 때부터 그렇게 해 오셨다고 해요. 특별한 이유는 없다는데 그게 일 종의 전통이 되어서 그대로 따르고 있지요.” 큿, 하츠키라면 멋모르고 덤비다가 환수만 날려먹은 그 녀석 이야기군. 그런데 그 녀 석의 후예들이 헤이스런 본가에서 집사를 하고 있다? 그럼 이 녀석들도 헤이스런의 상 당한 전력이겠네? 아닐까? 이렇게 속으로 쓸데 없는 궁리를 하는 동안에 우리들은 공작가의 식당에 안내 되었 다. “우와~! 대단하군. 기울어진 공작가의 식당이 이 정도면 잘나가는 공작가의 식당은 어느 정도라는 말이야?” 엉뚱하게 튀어나온 화아의 말이 식당의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들었지만, 솔직히 나도 부담이 가는 분위기인 것은 분명했다. “오빠, 이런 자리에서는 나이프 하나 포크 하나 스푼 하나도 마음대로 놓지 못하는 거 아닌가요? 제레이나도 이런 분위기의 식사는 정말 질색이라고 했는데... 크라이안 이 가끔 이런 것도 알아야 한다고 아이들에게 가르치곤 했었다면서....” 수아가 옆자리에 앉으면서 조용히 속삭였다. “큿, 그런 것에 신경을 쓸 녀석이 아니잖아. 루탄 저 녀석이 말이야.” 수아 옆에 자리를 잡은 지토가 나를 부추기고 있었다. 그래, 어떻겠어? 이런 자리에서 넘어가지 않는 밥을 어렵게 먹느니 나중에 좀 예의 가 없다거나 무식하다는 말을 듣고 말지. 나는 식탁에 놓인 십여 종이 넘어 보이는 나이프와 포크 스푼을 모두 한 곳으로 모 아 버리고 칼 하나 삼지창 하나 숟가락 하나만 남겼다. “뭐, 먹는데 필요한 것은 이거 하나면 되지만 그래도 예의를 지키려면 이거 세 개 는 있어야 되겠지?” 나는 포크를 들어 보이며 그렇게 말하고는 서두러 앞에 놓인 스프를 떠먹었다. 솔직히 우리 일행들이야 왕궁에서도 지내보고 백작 집에서도 지내 봤지만 그렇게 격 식을 따지며 힘들게 만드는 경우는 없었다. 그러다보니 이 집의 분위기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가 하는 짓을 본 일행들은 별다른 거리낌이 없이 평소에 하던 식사 습관대 로 나온 음식들을 적당한 도구로 썰어먹고 찍어먹고 퍼먹었다. “크크 이제야 식사다운 식사를 하는 것 같군.” 흐뭇한 표정을 짓는 지토, 아무래도 이 녀석이 나를 이용해서 이런 분위기를 유도한 것 같은데... 이런 것은 예전에도 당했었다는 느낌이... 그러고 보니 쉬벡이 한 발짝 뒤에서 이렇게 나를 조종하곤 했었는데, 지토가 그걸 닮아가는 것일까? 그렇게 어수선하게 식사를 마친 우리들은 식당을 나서며 하츠키에게 감사의 말을 잊 지 않았다. “호호, 집사님 정말 맛있는 식사였어요. 오랜만에 포식을 했군요.” 이런 풍아의 시원한 인사와 함께, “잘 먹었습니다. 언제 주방장에게 한 수 배우고 싶네요.” 라는 수아의 인사까지. 그렇게 인사를 하는 우리를 보는 하츠키 집사의 얼굴에는 만족스런 빛이 떠돌고 있었 다. “하츠키 집사님, 집사님이 계시니 공작가가 든든하겠습니다. 그럼 계속 아세트 아가 씨를 부탁합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하츠키 집사에게 중의적이 뜻을 담이 그렇게 말했다. 집사가 환수를 부리며 어느 정도 힘을 쓸 수 있다면 다른 의미로 해석을 할 것이고, 그렇지 않고 다만 성실한 집사일 뿐이라면 표면적으로 받아들일 것이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날 밤을 헤이스런 공작가에서 지낸 우리는 정작 헤이스런 가문의 늙은이들(얼굴도 못 봐서 짜증난 상태라 말이 함부로 나옴)은 보지도 못하고 아침 일찍 마차를 몰아 한 타리아의 남성문을 나서고 있었다. “오빠? 아세트가 거의 헤이스런가의 주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지요?” “글쎄,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헤이스런 공작가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 으니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알 수가 없구나.” “그런데 이제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곧장 자이건을 만나로 가실 건가요?” “글쎄, 이리로 내려가다 보면, 매직컬초가 나오니까 거기 잠시 들러서 쉬벡이 만들 었다는 탑도 좀 보고 가도록 하자.” “네? 쉬벡의 탑이요? 그런 게 있어요?” 내 말에 수아가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매직컬초가 쉬벡이 그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과 함께 만든 도시라는 것은 알지?” “그럼요. 한타에서는 그 매직컬초가 그 동안 다른 나라들로부터의 위협을 막아주는 기둥 역할을 했다면서요? 그런데요?” “음. 그런데 그 곳에서 쉬벡이 오래도록 있으면서 생활했던 곳이 있는데 그 곳이 쉬 벡의 탑이라고 불리는 모양이더라. 그리고 나름대로는 쉬벡의 마법에 대한 여러 기록 들이 남아 있어서 마법사의 총 길드 본부로 쓰이고도 있는 모양이지만 나도 자세히 어 떤 곳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 곳에 가면 쉬벡이 쓰던 망토와 반지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에~. 결국은 쉬벡의 망토와 반지가 목적이군요?” 수아가 놀리듯이 짓궂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건, 아니지만 아무튼 가는 길에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아마도 쉬 벡 정도라면 그것을 다른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을 곳에 잘 숨겨 두었을 테니 말이다. ”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마차를 모는 데에 신경을 썼다. 그렇게 3일을 달린 우리들은 눈앞에 거대한 강을 바라보게 되었다. “가만히 있자, 이 강이 바로 그 강이군. 전에 우리가 암흑제국에서 그란드로 넘어 올 때 건너온 그 강의 상류다.” 내가 마차에서 내려 강변으로 나가며 말하자, 뒤를 따라 오던 동생들과 지토가 놀란 모양이었다. “이게 그 강이란 말이야. 엄청나게 긴 강인 모양이네.” “그러게 말이야. 그럼 이 강을 따라가면 그 때 그 곳으로 갈 수 있겠네? 밤에 강을 따라 흘러가면 참 좋을 것 같아. 온통 별빛 속에 떠다니는 것 같을 거야.” “호오? 풍아 누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정말 놀랍군요. 새로운 발견인데요?” 퍼벅. “윽.” 괜한 소리를 했다가 옆구리를 잡는 광아였고, 더불어 얼굴에 웃음이 번지는 가족들이 었다. “자, 그럼 빨리 강을 건너갈 곳을 찾아야지. 강 건너서 얼마가지 않아서 매직컬초 가 있으니까, 이 길을 따라가면 분명 매직컬초로 가는 사람들을 위한 선착장이 있을 거다.” 나는 우리가 마차를 몰아온 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관도는 강둑을 따라서 이어 지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다시 길을 따라 얼마쯤 갔을 때, 내 예상대로 규모가 큰 선착장이 언 덕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규모가 큰 선착장이어서 그런지 그 주위를 둘러싸고 발전한 마을의 규모도 제법 컸 다. 우리들은 기울어가는 해를 보며 하루를 이 마을에서 머물기로 결정을 했다. 그리고 ‘여행자의 주머니’라는 이름의 여관으로 찾아 들었다. 입구에서는 사내아이 하나가 손님들의 말과 마차를 맡아서 마구간에 넣어주는 일을 하고 있었고, 우리가 안으로 들어가자 또 다른 사내아이가 우리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여행자의 주머니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1층 주점은 새벽까지도 술 을 드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위층 방은 지금 2인실 둘과 3인실 하나, 그리고 4인실 하나가 비어있고, 3층에는 3인실 하나가 비어있을 뿐입니다. 죄송하게도 아침 일출을 보기에 좋은 방들은 이미 예약이 되어 있어서 일출을 보시려면 일찍 일어나셔서 강변 으로 나가셔야 합니다.” 아마도 이 마을에서는 일출을 보는 것이 꽤나 좋은 구경인 모양이다. 어디에서나 흔한 것이 일출인데, 여기서는 무언가 새로운 것이 있다는 것일까? 사실 여행을 하다보면 일출을 볼 기회가 보통 때 보다는 많은 편이어야 하는데, 우리 들은 불침번을 서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그다지 일출에 익숙하지 않았다. 급한 경우에는 해가 뜨기 전에 길을 재촉하지만 그렇게 재촉하는 도중에 보는 일출 이 때로 감흥을 준다고 해도 느긋하게 감상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일출이라. 그런 내일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서 일출을 꼭 보도록 할까? 그렇게 여 기 일출이 멋있나?” 내가 동생들을 보며 말하다가 갑자기 소년을 향해서 질문을 하자, 소년은 당황한 듯 하다가는 재빨리 말을 늘어놓았다. “물론입니다. 이 곳의 일출은 그야말로 장관이지요. 이 앞을 굽어 돌아서 나가는 강 의 이 부분을 특히나 쉬벡 대마법사님께서는 ‘수아의 머릿결’이라고 부르셨다고 하 는데 이 쪽 강변에서 보면 아침에 태양이 떠오를 때에 뮤즈호의 눈동자보다도 아름다 운 빛을 만들어 내지요. 그리고는 곧 좀 더 태양이 떠오르고 나면 거기에서 ‘수아의 머릿결’에서만 볼 수 있는 장관이 펼쳐지는데 사람들은 그것이 쉬벡 대마법사님의 마 법이라고 해요. 강물의 이쪽으로는 태양빛으로 빨갛게 수줍은 얼굴이 만들어지고 휘 돌 아 굽어나가는 물줄기는 그 얼굴의 머리카락이 되지요. 아~! 그러고 보니 그 색이 바 로 이분의 머리색과 같은 색이네요.” 소년은 수아를 보며 그렇게 말을 맺었다. 그리고는 “그러고 보니 이 누나는 정말 그 수아라는 그 모습과 꼭 닮았군요. 신기하네요. 아 무튼 내일 아침에는 꼭 가셔서 보셔야 할 것 같네요. 이분 누나 때문에라도요.” 라는 말을 하고는 우리들의 투숙여부와 식사 등을 물어보고는 곧 먹을 것을 준비해 오겠다고 하고는 주방 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우리들은 1층의 주점 창문 쪽에 자리를 잡고 음식과 음료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 다. “수아의 머릿결이라. 그거 쉬벡이 지은 이름이라는 말이네? 그럼 혹시 광아 화아 지 토에 대한 것도 있을까?” 내가 그렇게 농담을 꺼내자, “어머, 그러고 보니 정말 그럴 수도 있겠네요. 나중에 한 번 찾아봐요.” 라고 수아가 맞장구를 쳤다.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큼. 쉬벡 그 늙은이가 엉큼하게 여자에게만 관심이 있어서 풍아와 수아만 그렇게 신경을 썼는지도 모르지.” 지토가 한 마디 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우리 같은 우락부락한 사람들이야 어디 신경이나 썼겠어?” 그런데 지토의 말 다음에 나온 화아의 말에서 느껴지는 것은 부러움이라는 느낌이다. 설마 정말로 부러워하는 것은 아니겠지? “이런 @$%%새끼가 어디에서 &%#@%고 있는 거야?” “뭐야? 이런 개#$% 니가 나한테 기어오르는 거냐? 이런 호로잡노무쉬키.” 와장창!! 쨍그렁! 퍼벅. 퍽. “으윽. 이게? 죽어라.” “누가 할 소리를.. 크륵.” 퍼벅! 퍽. 순식간에 장내를 소란하게 만들면서 왠지 모르게 몸의 혈관을 팽창시키는 분위기를 만드는 사람들은 우리들과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두 세 테이블 건너에서 싸움을 시작했다고 해서 우리들에게 아무 지장 이 없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요행이다. 결국 여기 저기 날아다니던 건더기들이 우리 일행쪽으로 튀기 시작했다. “이런, 안 되겠군.” 나는 간단하게 실드 마법으로 우리를 감싸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와 동시에 “아니 이것들이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시비를 붙는 거야? 아직 소문을 못 들은 모양 이네? 그래 죽어봐라. 오늘 한 번 죽어봐!!” 이런 소리와 함께 주방에서 뛰어나온 인물이 있었다. 구리빛 머리카락, 호감가게 생긴 얼굴, 20대 초반의 나이. 180정도의 단단해 보이는 몸. 이건 언젠가 한 번 했던 표현인데? “어머, 저 사람, 오빠 맞지? 그지?” 아무래도 풍아가 나보다 먼저 기억을 해 낸 모양이었다. “응? 정말 그 녀석이네?” “그렇군요. 그 사람이군요.” 화아와 광아도 기억을 해 낸 모양이었다. “근데 미알린일까요? 미알란 일까요?” 수아가 그렇게 물어볼 때에야 나는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화이트 스테이크 경매 전에 도둑으로 들어왔던 쌍둥이 형제. “아마도 미알린일 것 같은데? 미알란은 좀 더 차분했었던 것 같으니까 말이야.” 나는 짐짓 이미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는 듯이 딴청을 피웠지만, 너무도 민감한 녀석들은 아주 조금 어색한 내 낌새를 정확히 파악한 모양이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란 말이야. 쩝. 우리가 그렇게(아이들의 서슬 퍼런 눈초리에 내가 잘못을 시인하는 표정을 짓고 있 을 때.) 가족간의 사랑을 나누고 있을 때, 미알린으로 추정되는 녀석은 취객들을 흠 신 두들겨 패고 나서는 양 옆구리에 끼고 밖으로 나갔다가는 혼자서 손을 털며 들어 왔 다. 그리고는 빙긋 웃으며 손님들에게 사과를 했다. “하하, 가끔 저렇게 말썽을 피우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저들을 그리 심하게 대하지는 않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서로 얼굴을 붙이고 건초더미 속 에 있는 서로를 발견하면 아마도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볼 기회가 되 겠지만 말입니다. 제가 그렇게 이룩한 쌍도 제법 됩니다. 하하하.” “쌍? 크하하하.” “내일 둘의 얼굴이 궁금하군.” “크흐흐 역시 미알린 미알란 형제가 헛소문이 아니군.” “우하하하하. 재미있군. 이봐 여기 술 더 줘.” “아~! 네 곧 가져다 드리지요. 그리고 이렇게 물의를 일으켜 죄송.....” 그렇게 이어지던 미알린(예상)의 말이 끊어진 것은 당연히 우리들 때문이었다. 어디를 가든 이 특이한 가족들을 잊는 다는 것이 어디 가능한 일이겠는가 말이다. 더구나 그렇게 망가지도록 터진 경험이 있으니 잊는 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일이 다. 겨우 1년이 되었을 뿐인데 말이다. 미알린은 잠시 우리를 넋을 놓고 보더니 곧 손님들에게 사과를 하고는 주방으로 도망 을 가듯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에 종업원 소년이 우리들의 음식을 가지고 나왔다. “혹시 여기 독이 들어 있거나 하지는 않겠지? 아무래도 우리를 알아 본 것 같은데 말이야.” “쓸데없는 걱정 말고 어서 먹기나 해라. 덩치에 안 어울리게 무슨 궁상이냐?” 나는 화아에게 한 번 쏘아주고는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음~? 이 요리 참 맛있는데요? 지금까지 먹어 본 적이 없는 요리군요.” 역시 감탄사가 먼저 튀어나온 것은 수아였다. 새로운 요리에 대한 감격, 감동의 반응이 나보다 빨리 나온다는 것은 이미 수아의 요 리 실력이 나를 능가하고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일까? 아무튼 접시위에 놓인 생선요리는 너무나도 멋들어진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맛과, 향과, 촉감과, 시각적인 면에 이르기까지... 결국에는 처음 음식에 대해 궁시렁거린 화아가 제일 집착을 보이던 음식에 대한 투쟁 이 끝났을 때, 주방에서 다시 간단한 음료수와 술이 나왔다. “이건 주인님이 내시는 겁니다. 오랜만에 만난 귀한 인연께 드리는 것이라 전하라시 면서...” 그렇게 자리에 놓인 술과 음료는 수이 다섯 잔이었고 음료가 한 잔이었다. 그리고 술이라 짐작되는 것 중에는 풍아의 몫으로 만들어 진 듯한 예쁜 잔이 구별되 어 있었다. “오늘은 여러 가지로 호강을 하는 것 같군. 아주 멋진 식사야. 정말 최고의 음식 대 접을 받았다는 생각이 드네. 지금까지 수아가 만든 음식을 빼고 다른 누가 만든 음식 도 오늘처럼 맛이 있지는 않았던 것 같군.” 쥐덫에서 유소가 차려준 식탁을 금방 잊은 듯이 말하는 나도 정말 한심하지만 그 정 도로 마음에 드는 식사였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렇게 깔끔하게 술로 입가심까지 끝난 우리들은 곧 여관방으로 안내 되었지만 처음 2층에 잡은 방이 아닌 4층으로 안내 되었다. “여기는 주인님들이 만들기만 하시곤 한 번도 손님을 받은 적이 없는 방입니다. 동 편으로는 커다락 창문과 테라스를 만들어서 아침 일출을 가장 잘 볼 수 있도록 만들 어 진 곳입니다. 안쪽에는 침대가 여러 개 있으니 모자라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럼 편안 히 쉬십시오.” 종업원 소년은 처음보다 더욱 조심스럽고 차분하게 우리들을 안내해 주고는 내려갔 다. “미알린, 미알란 형제가 우리를 부담스럽게 만드는군. 그나저나 얼굴은 한 번 안보 여 줄 생각인가?” 내가 그렇게 동쪽을 향해 난 테라스를 보며 입을 열자, 테라스 창문에서 두 인영이 떨어져 나왔다. “역시 금방 알아보시는 군요.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언젠가는 뵙겠지 하고 생각 했습니다만, 이렇게 직접 찾아오셔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미알린입니다.” “다시 뵙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동생 미알란입니다.” 물론 떨어져 나온 인물들은 쌍둥이 형제였다. “나도 반갑군. 그래 그 동안에 마췬길드에서는 독립을 한 모양이지? 이렇게 여관을 차린 것을 보니 말이야. 빚을 다 갚은 모양이네?” 나는 의자에 앉으며 그렇게 물었고, 다른 가족들도 나름대로 편한 자리를 택해 앉았 다. “그것이...” 우리를 따라서 의자에 앉던 미알린이 말을 끌다가 입을 열었다. “길드에서 나오는 것이 어려워서 길드 마스터를 제압하고 길드를 차지해 버렸습니 다.” “에?” “그런.” 의외의 대답이었다. “그럼 마췬 길드의 마스터가 미알린이라는 말이야?” 내가 그렇게 놀라는 듯이 물어보자 미알란이 머리를 긁으며 대답했다. “형은 그런 자리는 귀찮다고 전부 저에게 맡겨 버려서 마스터의 역할은 제가 하고 있습니다.” 하긴 미알란이 광아와 비슷한 성향이라고 하면 미알린은 화아와 비슷하니 어쩌면 미 알란이 마스터에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일단 꼼꼼하니까 길드의 성격에도 맞고 말 이 다. “그렇게 되었군. 그거 잘 되었네. 나도 마췬길드에 의뢰가 있었는데 말이야.” 나는 그렇게 말하며 형제들 바라보았다. “의뢰라니요? 어떤 의뢰를...” 내가 의뢰를 한다는 말에 두 형제는 바짝 긴장을 한 모양이었다. “음, 별거 아니니까 그렇게 긴장하지 말아. 그저 약간 정보가 필요해서 말이야.” “그럼 어떤 정보를 원하시는지요?” 미알란이 여전히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음? 혹시 이 대륙에 지토, 광아, 화아와 관련 된 쉬벡이 남긴 흔적이 있는가 좀 알 아봐줘.” “어?” “형님!” “뭐야? 겨우 그런 걸 ...” 흐흐흐 다들 놀란 표정들이라니.... 아무렴 내가 도둑길드에 암흑교에 대한 조사를 의뢰할 것이라고 생각한 거냐? 난 그렇게 깊게 이 일에 관여하고 싶은 생각은 없는 사람이란 말이야. 안 그래도 상당히 개입된 것 같아서 자우하려고 생각하는 중인데... 이번에 대쟁투장 에 가서도 될 수 있으면 구경만 하고 올까도 생각중이구만. “네, 그런 정도의 의뢰라면 저희 손에서 의뢰대금 없이 조사해서 알려드리도록 하겠 습니다. 혹시나 암흑교에 관련된 것을 알아봐 달라고 하실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했습 니다만, 다행히 아니로군요.” 미알림의 말이다. “암흑교에 대한 의뢰?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한 거지?” 나는 미알란에게 다시 물었다. “그거야 루탄님의 란의 용병대가 마법사 길드와 연계해서 암흑교에 대해서 파헤치 고 있는 중이고, 더구나 그란드 왕국의 왕궁과 재상부에서도 루탄님과 관련되어 암흑 교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고가 들어온 상태니까, 루탄님이 암흑교 에 대한 정보를 요구하실 줄 알았던 거지요.” 뭐야? 이 마췬길드라는 곳의 정보력이 상상 이상이네? “그런 것을 다 알고 있었다는 말이야? 대단한데? 상상외로 도둑길드의 세력이 강한 모양이지?” 화아도 놀란 모양이었다. “그게, 사실은 사람들의 생활이 안정되고 도시가 발달하게 되면 당연히 우리같은 어 둠들의 힘이 커지게 마련이지요. 더구나 한타처럼 정세가 불안하고 귀족들 사이의 싸 움이 잦게 되면 도둑길드가 암살길드로 변하는 것도 시간 문제이지요. 또, 그렇게 되 면 세력이 급속도로 커지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고 말이지요. 그래서 이 대륙에서 신성제국과 누웬을 제외한 모든 나라에는 마췬의 그림자들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중입니다. 다른 두 나라에서는 그 활동이 미비하고 특히 누웬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실 정이지만요. 그 황제라는 자가 있는 이상은 어렵다고 보고 있습니다.” 역시 생각 이상으로 대단한 세력을 가진 것이 틀림없는 모양이다. “그래서 나, 아니 우리들에 대한 것도 어느 정도는 파악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로 군. 그것 참, 이러면 곤란한데, 이러다가 암흑교가 우리를 공적公敵으로 대하게 되면 피곤해지는데... 앞으로는 좀 조심을 해야겠군. 난 별로 그들의 일에 끼어들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데 말이야.”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미알린이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삐죽거렸다. “루탄님, 이미 이정도의 정보만으로도 루탄님은 암흑교의 제거대상 1호나 다름이 없 습니다. 지금까지 암흑교의 일에 이렇게 심한 타격을 준 사람은 없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나는 나를 건들지 않으면 될 수 있으면 개입을 하지 않으려는 생각인 데... 이걸 암흑교에서 믿어줄까? 어디가서 그렇게 전해달라고 할 데가 없을라나... ” 나는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될 말을 주절거리며 현실 도피를 시도했다. “그런다고 될 문제가 아니지. 아무래도 진짜 조심해야겠다. 이러다가 암흑교와 우 리 가족이 전면전을 벌여야 할지도 몰라.” 지토가 내 도피행을 막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정말이야. 별로 암흑교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은데 말이야.” “그러게 ...” 풍아와 화아도 같은 생각인 모양이다. “그래. 알았다고 알았어. 앞으로는 최대한 암흑교고 뭐고 신경 쓰지 말고 우리 할 일이나 하자. 됐지?” 그런데 어째 내가 하는 말에 미덥지 못하다는 표정을 보이는 것이냐? 아무튼 내가 마췬 길드에 부탁하고 싶은 것은 바로 그거야. 그거 알아보고 좀 알려 줘. 나중에 여행갈 때, 그런 곳이 있으면 빼 놓을 수 없는 일이니까 말이야. “네, 알았습니다. 쉬벡님과 연관된 것들을 살펴보면 단서가 있을 겁니다. 어렵거나 힘든 일은 아니니 제가 무료로 봉사를 해 드리지요.” 그럼 어려운 거였으면 돈 받았을 거라는 말이군. 미알란 이 놈도 역시 만만한 놈이 아니야. 아~! 세상에 어찌 이렇게 만만한 놈은 하나도 없단 말인가. 그 다음은 우리들의 여정에 대한 미알린 형제의 심문(?)이 있었지만 대충 여정만 이 야기하고 특별한 사건에 대한 것은 빼버렸다. 뭐 그래도 대충은 사건들을 유추해서 지네들이 가진 정보와 맞추어 보고는 거의 정확 한 줄거리를 만들어 내기는 했지만... 그리고 밤이 늦어 미알린 형제는 편히 쉬라는 인사와 함께 방을 나섰고, 우리들은 내 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며 잠자리에 들었다. 사실 별 일도 없었지만, 미알란과의 신경전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쿵쿵쿵!! 쾅! 쾅! 이렇게 이른 시간에 문을 두드리는 저 불학무식하고 예의라고는 약에 쓰려고 해도 없 는 놈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누구십니까?” 내 목소리가 상당히 갈라지고 끝이 높아지는 것은 내 탓이 아니다. 아직 새들도 깃털에 묻은 이슬을 털지 않을 시간에 나를 깨우다니... “저, 손님 지금 일어나시지 않으시면 오늘 일출을 놓치게 될지도 모릅니다. 주인어 른들께서 꼭, 꼭, 손님들의 일출을 놓치게 하면 안 된다 하셔서 잠도 못자고 지키고 있었습니다. 어서 일어나시지요. 안 그러면 제가 야단을 맞게 됩니다.”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종업원소년이 분명했다. “흐암. 알았다.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라.” 나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소년의 손에 금화 하나를 쥐어주 고 말했다. “이건 수고비다. 너희 주인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니까 누구에게도 빼앗길 이유가 없 는 것이다. 만약 너희 주인이 뭐라고 하거든 내 의지로 준 것이라 전하라고 하더라 해 라. 수고했다.” “예? 예. 감사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나는 연이어 허리를 숙이는 종업원을 뒤로 하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가족들을 깨우기 시작했다. “애들아 일어나라. 일출이란다. 일출. 이거 못 보면 후회한다고 하는데.. 빨리 일어 들 나. 어서.” 나는 침대를 오고가며 침대 시트를 벗기고, 꾸물거리는 녀석을 침대 밖으로 굴려버리 고, 귀를 잡아당기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하면서 잠을 깨웠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서 우리들은 여관 4층에 마련된 테라스에 나가 해가 뜨기를 기다 리고 있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여전히 검푸른 색으로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의 저 편으로 조금 씩 별빛을 재우며 여명이 트기 시작했다. 별들은 지평선 끝에서부터 조금씩 검푸른 하늘 속으로 파고 들어가면 그 위로 연홍색 의 아침이 밀물처럼 쓸고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밀려온 밤하늘 빛이 우리 머리를 지나 등 뒤로 밀려갈 때쯤에는 눈앞 으로 흘러가는 굽은 강물의 모습도 인화지에서 번져오는 사진처럼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멀리 지평선에서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자 그 강물도 완연히 붉은 홍조를 띄우 고 잔물결에 갖가지 빛을 허공으로 비산시키고 있었다. “멋있어요. 이렇게 조용히 해돋이를 보는 것도 좋군요. 왜 미처 이런 시간을 가지 지 못했을까요? 아깝네요.” “그러게 말이야 풍아언니. 다음에는 좀 일찍 일어나서 이런 풍경도 자주 보고 그래 야 겠어요.” “크큭 풍아는 잠이 많아서 그거 어렵지 않을까?” “맞아요. 풍아 누님은 좀 어려울 것 같군요.” 콩! “아앗.” 특별한 상황 설명은 필요가 없으리라 본다. “그런데 수아의 얼굴은 어디에 있다는 거지? 수아의 얼굴이 보인다고 했는데...” “그러게 말이야. 나도 그걸 찾고 있는데.....” 하지만 그 역시 오래 기다리지 않고 우리는 거대한 수아의 초상화를 볼 수 있었다. 해는 이미 지평선에서 떠난 지 오래였고 그 빛은 우리가 보는 곳에서는 강물이 휘어 지는 굽이의 안쪽에 비치고 있었고, 그 빛이 일렁이는 모습이 수아의 이목구비를 만 들 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밖으로 굽이쳐 흐르는 물결은 온전한 수아의 머릿결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이곳이 수아의 머릿결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 수아 얼굴이잖아.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 거지?” “그러게, 완전히 수아의 얼굴을 그대로 옮긴 거네.” “정말이군.” 다들 할 말을 잊고 있는 것 같았다. “왜들 그래요? 자꾸 놀리지 말아요. 쉬벡 아저씨가 이상한 거지. 강 바닥에 마법을 걸어 놓은 거예요. 원래는 그저 사람 얼굴을 조금 닮을 정도의 모습이 나타나는 정도 일 텐데 강바닥에 마법을 걸어서 빛이 반사되는 각도를 조절해 놓은 거란 말예요. 뭐 야? 마법으로 이런 것을 만들어 놓다니...” 의외로 수아의 반응이 따가웠다. “우하하. 수아가 부끄러워서 그런 모양이네요. 수아가 저러는 모습은 처음 본 것 같 아요.” 광아가 허리를 잡고 웃었고, 다른 녀석들도 얼굴 가득 웃음을 담았다. “히잉~!” 수아는 토라진 듯이 등을 돌려버렸지만 화가 난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짧은 시간, 자연과 대마법사가 그려놓은 한 폭의 인물화를 감상하고 1 층으로 내려왔다. “그래 좋은 구경하셨습니까? 저도 처음에 그 모습을 보고는 수아님과 꼭 닮아서 얼 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거기다가 이름도 같으시니 말이죠.” 1층에 내려온 우리를 이런 말로 맞은 것은 아무래도 미알란인 것 같았다. 확연한 차이는 아니지만 그 느낌에서 구분이 가는 것이다. “덕분에 좋은 구경을 했어. 정말 수아와 꼭 닮았더군. 거기다가 이름도 같으니 말이 야. 이런 우연이 있다니...” 무론 내 이런 말이 미알란에게 씨도 먹히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강물의 수아 가 이 수아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말이다. 그렇게 대충 분위기를 얼버무린 나는 가족들과 식탁에 앉아 음식을 주문해 먹고는 서 둘러 여관을 나섰다. 미알린과 미알란이 아쉬운 얼굴을 보였지만, 이렇게 종적이 들킨 이상 이들의 눈을 벗어나는 것도 힘들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내가 의뢰한 내용이 밝혀지면 어디로 가지고 오라는 말도 하지 않고 마 차에 올랐다. 그건 이들이 알아서 할 것이었다. 설마하니 내가 한타를 벗어날 때까지 그 내용을 알아내지 못하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 으니 말이다. 아침 첫 선편으로 우리는 ‘수아의 머릿결’을 쓰다듬듯 넘어, 관도 위에 올라섰다. 강의 건너편에는 마을이 발달해 있지 않았기에 별달리 시간을 지체할 일도 없었다. 그리고 강 건너에 마을이 없는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적어도 반나절 거리 안에 매직컬초가 있을 것이었다. 그런 대도시가 가까이 있은 이상 강의 이 쪽과 저 쪽에 모두 마을이 들어서는 것은 별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도시가 만들어 진다면 당연히 수아의 머릿결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강 건너 쪽에 발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말이다. 그 예상대로 우리가 탄 배가 이 쪽 강안으로 닿을 무렵에는 이른 새벽부터 길을 재촉 해서 매직컬초에서 떠났을 사람들이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관도를 따라 함께 강을 건넌 사람들을 뒤로 하고 한참을 달렸을 때, 드디어 매직컬초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저건 완전히 탑으로 이루어진 도시네?” 매직컬초가 모습을 드러내자 곁으로 다가온 화아가 대뜸 내 놓은 말이 그것이었다. 정말 매직컬초는 ‘피사의 사탑’과 같은 모양이나 그에 준하는 모양을 지닌 탑들로 이루어진 도시였다. 그나마 성의 모습이 오각형을 이루고 있고, 그 오각형의 꼭지점에는 생긴 것이 꼭 같 은 거대한 탑이 다섯 개 서 있다는 것이 규칙이라면 규칙적인 모습이고 중앙에 거대 한 탑 하나가 있는 것이 두드러진 모습이라면, 그 나머지의 모습은 그야말로 중구난 방 의 지멋대로인 상태였다. 어떤 탑은 윗부분이 날아가 버린 모습이기도 했고, 언제 쓰러질지 몰라서 곁에 가는 것조차도 겁이 날 정도로 허리가 굽은 모양으로 윗부분이 붙은 탑도 있었다. 어떻게 보면 정말 마법사들의 도시라고 불릴만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산만함과 자 유분방함이 느껴지는 도시였다. 우리는 도시의 모습을 보면서 빠르게 마차와 말을 몰았다. 가까이 갈수록 매직컬초의 힘이 전해지고 있었다. 매직컬초에 가까운 관도위의 돌을 수놓고 있는 것은 거대한 방어마법을 이루기 위한 마법기호들과 룬어들 이었다. 아마도 유사시에는 이 도시 전체를 둘러쌀 정도의 마법실드가 만들어질 것이었다. 그것은 9써클 마법 중에서 내가 아는 어떤 것으로도 한 번에 어쩔 수는 없을 것이었 다. 그리고 매직컬초의 성벽을 중심으로 곳곳에 약간의 활성 마법만으로도 유동시킬 수 있는 공격과 보조 마법진들이 널려있었다. “이건 완전히 마법으로 둘러진 철옹성이군. 이것들이 전부 발동된다면 우리가 전부 힘을 다 쓸 수 있어도 뚫고 들어간다는 것이 불가능할지도 몰라. 최상급 정령 다섯과 9써클 마스터의 합공을 이길 수 있는 도시라니... 엄청나군.” 나는 마차를 입구로 몰아가면서 중얼거렸고, 수아도 내 말을 들은 모양인지 눈이 동 그랗게 되었다. “정말 그렇게 대단해요? 난 잘 모르겠는데... 마법 방어나 공격 룬어들이 많은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설마 그렇게 대단하겠어요?” 수아는 믿기 어렵다는 듯이 말했다. “물론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들만 따지자면 내가 최대한 힘을 쓰면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 성벽과 탑으로 이루어진 5망성에 숨어있는 마법은 어떻 게 할 도리가 없겠다. 더구나 방어마법만이 아니라 공격마법도 함께 있는 것 같구나. 물론 이것을 발동시킬 수 있는 존재가 이 성에 있다는 것을 전재한 이야기지만 말이 야. 적어도 9써클 유저 여섯이 필요한 진이니까 발동 가능성이 희박하지 않을까?” 내가 그렇게 설명하자 수아는 성벽과 탑들을 새삼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러는 사이에 마차는 매직컬초의 성문앞에 도착했다. 아직은 수아의 머릿결에서 출발한 사람들이 닿으려면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인지 평소 보다 이른 방문객인 우리를 경비병(?)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맞이했다. 매직컬초의 경비병들은 일반적인 성문을 지키는 파이크병이나 기사와 같은 사람들이 아닌 마법사들이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오신 것을 보니 무척 급한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수아의 머릿결’에서 첫 배를 타신 모양인데 이 시간에 여기를 닿으시려면 무척 서두르셨을 것 같습니다만.” 역시 마법사는 머리가 좋아. 판단이 빠르단 말이야. “아닙니다. 급한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매직컬초의 모습을 빨리 보고 싶어서 조금 서둘렀을 뿐입니다. 저희가 이곳이 처음이라 무척 기대를 하고 왔거든요.” 나는 마차 위에서 웃으며 대답했고, 마법사 문지기는 그런 마음을 이해한다는 표정 과 함께 매직컬초에 대한 자부심이 얼굴 가득 어렸다. “그런데, 마법을 쓰시는 분들이신 것 같습니다만? 아까부터 주위의 마나가 평소와 는 다른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 여러분들 때문인 것 같군요?” 제법 눈치도 빠른 인물이다. 겉보기에는 6써클 정도 되어 보이는 인물이 주위 마나 의 흐름으로 우리들이 마나를 사용하다는 것을 눈치 채다니 말이다. “네, 저희도 자연의 힘을 연구하고 사용하는 데에 한 발을 들이고 있는 사람들입니 다. 다만 정식으로 길드에서 배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여기 저희 신분을 증명해 줄 용병패입니다.” 나는 품속에서 용병패를 꺼내 보여 주었다. 마법사는 슬쩍 패를 보더니 가타부타 말이 없이 우리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아무래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슬슬 흔들고 있었다. “저희가 이 성에 들어가지 못할 이유가 없다면 빨리 들어가 보고 싶습니다만, 솔직 히 저희들의 최종 목적지가 이 곳이 아니어서 시간이 넉넉한 편이 못되어서 말입니 다.” 나는 그렇게 문지기 마법사에게 쓸데없이 시간을 끌지 말라는 언질을 주었다. 쉽게 말하면 ‘볼 일 없으면 보내주고, 볼 일이 있으면 빨리 끝내자.’라는 말이다. 내 말의 본 뜻을 마법사도 알았는지 약간 얼굴을 굳히더니 곧 주위의 마법사들에게 성문으로 통하는 길을 열게 하고 자신도 옆으로 피해주었다. “고맙습니다. 마법사님. 그럼 좋은 하루 되십시오.” 나는 그렇게 인사를 하고는 성문 안으로 마차를 몰았다. “정말 복잡한 곳이네요. 어떻게 이런 도시를 만들 수가 있지요?” 수아는 매직컬초의 내부 모습에 처음부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그럴 만도 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직선으로 이어지는 길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넓은 길이 조금 이어지다가는 곧 건물(탑)에 막혀 버리고, 그래서 길을 조금 돌아가다 보면, 또 다른 건물에 막히고 거의 완전한 미로라고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우리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마차를 세우고 있을 때, 한 명의 작달막한 40대 인물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아하하, 저 손님들 이 도시에는 처음이신 모양이지요? 그럼 여기 최신형 매직컬초 안내도가 있는데 구입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이게 그러니까 이 도시의 탑들과 길을 안 내하는 것인데, 급속도로 변화하는 길들과 탑들을 가장 빠르게 포착하고 또, 유명하 고 볼거리가 많은 곳을 최단거리로 이동할 수 있는 길을 알려주기도 합니다. 더구나 멋진 여관과 주점들을 주제별로 모아서 소개하는 부록도 딸려 있습니다. 그 어떤 사 람 도 이 매직컬초의 처음 와서 길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이 지도를 사시 는 것이 시간과 노력을 아끼는 지름길인 동시에 웃으면서 도시 관람을 할 수 있는 최 선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불어서 매직컬초의 유명한 탑들에 대한 정 보를 담고 있는 꼭 가봐야 할 탑 10위에서 1위까지를 소개하는 책자도 있습니다. 손 님 들 어떻습니까? 꼭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대단한 입심이다. 그리고 사실 그런 책자나 안내도가 있다면 필요하기도 하다. “오빠, 저런 책이 꼭 필요하긴 하지? 그런데 왜 저 사람에게 이런 것을 사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걸까?” 풍아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했다. “그러게 말이야. 아직 가격을 들은 것도 아닌데... 무슨 이유로 이 사람에게 이런 것을 사면 안 된다는 느낌이 이렇게 강하게 드는 것일까?” 화아도 역시 같은 소리를 하고 있었다. “호호, 그거야 저기 있는 저 간판 때문이겠지요. 누가 그랬는지 몰라도 간판이 많 이 지저분해져 있기는 하지만 ‘매직컬초 안내 책자 무료 배포’라고 쓰여진 것 같은 데요?” 수아가 옆에서 쌩끗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먼지투성이의 간판을 가리켰다. 건물 보다는 훨씬 지저분해 보이는 간판은 쉽게 눈에 드러나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 었다. 그리고 그 건물에서 한 노인이 밖으로 걸어 나오다 우리와 우리 앞에 있는 인물을 보 고는 급히 돌아서서 간판을 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저 빌어먹을 자식이 또 간판을 이따위로 만들어 놓았네? 너 이자식 이번에는 정말 죽어봐라. 파이어 애로우.” 노인의 몸 주위에서 순식간에 불화살이 만들어져서는 이 작은 인물에게 날아들었다. “이런, 저 영감이 아주 나를 죽이려고 작정을 했군. 실드.” 퍼퍼펑. “크흐. 거의 다 됐는데... 아깝네. 블링크.” 중얼거리는 인물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고, “너 이자식 도망을 갈 수 있을 것 같으냐?” 라고 소리를 지르고 따라 가려던 노인은 우리들을 보더니 한숨을 쉬고는 모았던 마나 를 풀어버렸다. 그리고 소매를 흔들어 건물의 간판에 걸린 마법을 풀고(대상을 지저분하게 만드는 마 법을 누가 만들었을까?) 우리에게 걸어왔다. “매직컬초에 처음 오신 분들이시군요. 아까 그 녀석은 워낙 유명한 녀석이랍니다. ‘매직컬초 출입문의 떠벌이 사기꾼’이 바로 그 녀석이지요. 언제나 저희에게 안내 도 와 책자를 받아가서는 처음으로 이 도시를 찾는 분에게 돈을 받고 파는 짓을 하지요. 그렇다고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 장난이 아주 오래 도록 이어지고 있어서 이젠 유명인사가 되었답니다.” 그렇게 말하는 노인의 얼굴에는 그 사기꾼에 대한 적의라곤 찾을 수가 없었다. 어쩌 면 그 사기꾼이라는 사람도 은근과 끈기로 자신의 입지를 굳힌 인물인 것 같았다. 사람들은 그렇게 한 가지 일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사람을 인정해주고 싶은 마음을 가 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더구나 말을 들어보니 폭리를 취하는 것도 아니니 더더욱 어느 정도는 도시의 명물 정도로 인식하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아까의 마법 공격과 방어, 그리고 줄행랑도 어느 정도는 패턴화 된 것이 아닐 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도시에 대한 인상이 아주 강하게 남는 한 편의 연극이라고 할까? 그러면서도 악의라 곤 느껴지지 않는 재미 같은 것이 있었다. “자, 그리고 이건 이 도시의 안내도입니다. 워낙 건물들이 난립하고 때로는 며칠 사 이에 건물이 바뀌고 이동하는 까닭에 이 안내도는 거의 한 달에 한 번은 새롭게 만들 어지는 최신판입니다. 그리고 그건 돌려주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기념품으로 가지 고 가십시오. 그럼 즐거운 관광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인사를 마친 노인은 다시 그가 나왔던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자, 그럼 이제 이 도시를 한 번 돌아볼까? 우선은 쉬벡과 관련된 곳을 찾아보자. 음...” 내가 그렇게 안내도를 펼치자, 모두들 그 좁은 마차 마부석으로 몰려들었다. 덕분에 나와 수아는 중간에 끼어서 꼼짝도 못할 지경이 되었고 그 상태에서 안내도 를 살피기 시작했다. 음. 여기는 쉬벡의 연구실이었던 탑이군. 여기는 마법사 길드의 총 본부. 그리고 역 대 9써클 마법사의 탑과 연구실. 각종 길드와 여관, 주점. “자, 일단은 쉬벡의 탑으로 가 보자. 길이 이렇게 저렇게 엉켜 있으니까 차근차근 살펴서 가야겠다. 잘못하다가는 미아가 될 것 같으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오밀조밀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 동생들과 지토를 밀어버렸다. 다행히 지토를 뺀 나머지는 안전하게 마차에서 내렸지만, 지토는 땅으로 떨어지다가 말의 꼬리를 잡고 겨우 균형을 잡았다. 덕분에 말이 발굽을 들고 난동을 부리는 소동 이 있었지만... 우리들은 쉬벡의 탑이라고 이름 붙은 곳으로 마차를 몰았다. 구불구불. 비록 안내도에서는 최단거리라고 표현을 하고 있었지만 가만히 살펴보니 이 매직컬초의 길은 하나 뿐이 없는 것 같았다. 그저 뚫린 곳으로 가다 보면 모든 건물들을 지나게 되는 그런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 다. 가끔 조금씩 갈라진 길이 있지만 어김없이 한 쪽은 꽉 막혀 있어서 여전히 한 길만 따라 가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결국에 이 안내도는 대략적인 위치를 알려주는 것 빼고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 네.” “그래도 오빠, 이거 보니까 길이 이렇게 하나로 연결된 거란 걸 알게 된 거잖아요. 아니었으면 오래 헤매고 다녔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내 투덜거림을 수아가 그렇게 위로 했다. “저기 저 건물이 쉬벡의 탑이란 말이군. 생긴 것은 여느 탑과 다르지 않은데...” 우리들은 쉬벡의 탑이라고 소개되어 있는 건물 앞에 마차를 세웠다. “그리 높아 보이지는 않는 탑인데 안 쪽에 어떤 마법을 걸었는지 모르니 일단은 들 어가 볼까? 여기 설명에는 3층까지는 관람이 가능하고 나머지 층은 능력껏 들어가 보 라고 되어 있으니 말이야.”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탑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탑 안에는 이른 시간부터 구경을 온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아마도 이 도시에서 밤을 지낸 관광객인 모양이었다. 1층에는 보존마법이 걸린 쉬벡의 물건들이 여기 저기 전시되어 있었지만 내 관심을 끄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1층을 돌아보고 올라선 2층의 쉬벡이 연구에 사용했다고 하는 여러 장비들이 놓여 있 었다. 물론 가만히 보니 진짜 쉬벡의 물건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엉뚱한 연대의 물건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건 1층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이 모조품들로 채워진 것이다. 허긴 그럴 만도 하겠다. 그 오랜 시간동안 이렇게 전시가 되고 있었다면 간혹 있는 사건으로 파손되는 것이 1년에 하나씩만 나와도 거의 1000개에 가까운 숫자가 사라졌 을 테니 말이다. 그게 아니라도 슬쩍하는 손길도 있었을 테니... 마지막 3층은 쉬벡이 남긴 기초 마법 수식들이 가득 벽을 채우고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 수식들에는 쉬벡이 후배 마법사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모든 것이 들어 있었 다. 그건 수식을 간소화하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예들이 설명되어 있는 것으로 알 수 있 는 문제였다. 적어도 쉬벡에게 이런 수식 간소화는 평생을 두고 화두로 삼았을 문제였을 것이다. 쉬벡은 그 화두를 후학들에게 전하고 싶었을 것이고 그 마음이 남아있는 3층이었다. 그리고 4층 입구. 입구를 지키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이 곳은 쉬벡의 탑 4층 입구입니다.] 라는 표지만 붙어 있을 뿐이었다. “음, 이건... 결계마법이로구나. 그런데 한 가지가 아닌데? 이 입구는 한 곳으로 이 동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서 네 곳으로 이동이 가능한 곳이구나. 상당히 복잡 하 고 교묘하게 만들었네? 어? 그게 아니잖아. 네 곳 이외에 그 뒤에 한 곳이 더 숨겨져 있어. 이야!! 쉬벡이 머리를 좀 썼군. 일단 보통이 경우에는 4층으로 통하는 통로라 고 생각하고 이 입구를 지나서 4층으로 들어가겠지? 그럼 그 안에는 더 이상 통로가 없어.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말이야. 하지만 여기에서 좀 더 뛰어난 사람이 하나의 통 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서 다른 곳에까지도 이동을 해보고 만족하게 생각을 한다고 해도 결국에 그 뒤에 숨은 이것 하나는 발견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웠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 정말 대단해. 아니 아주 교묘하고 정교한 배치야.” 나는 그렇게 동생들에게만 들리도록 설명을 하고는 모두들 손을 잡고 통로 안으로 따 라 오게 했다. 그리고 나는 그 마지막에 숨겨진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음? 복도로군. 저기 문이 있으니 가 볼까? 설마 쉬벡이 여기에 더해서 어떤 방어막 을 만들지는 않았겠지?”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가족들과 함께 앞으로 걸었다. 그리고 석문 앞에서 잠시 멈추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혹시나 쉬벡이 무슨 마법을 걸어 놓았는지 확인을 하는 것이다. “별 마법은 없네. 그럼 밀어볼까?” 나는 문에 손을 대고 힘차게 밀었다. “끙!!” 이런 망신이 있나. 처음에는 그냥 살짝 밀다가 나중에는 내공을 사용해서 밀어보았지 만 끄떡도 않는 문이었다. “비겨 봐, 내가 해 보지.” 지토가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땅의 힘을 지닌 지토도 문을 열지 못했다. “그냥 지토 아저씨가 돌을 뚫어 버리면 되잖아요.” “불행하게도 그게 안 되는 것이 문제야. 이 돌은 토지의 속성이 아니야. 아주 재미 있게 만들어진 마법 물품이야.” 풍아의 말에 지토가 두털거리듯 말했다. “그래, 이제 보니 이 돌, 마법으로 만든 것 같다. 잠시만 기다려 봐라. 도대체 무 슨 역할을 하는지 살펴보자.”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돌문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이런 무식한 쉬벡 같으니라고, 이거 문이 아니라 그냥 돌덩이잖아. 겨우 돌덩어리 속에 약간의 공간을 만들어 놓은 거야. 이거 문이 없어. 더구나 이돌 자체는 마법이 전혀 먹지를 않아.” “그럼 이건 뭐라는 거지요? 뭐 하러 이런 것을 만들었을까요? 마법도 전혀 통하지 않는 이 거대한 돌을 뭐 하러 만들었....” 그렇게 물어보던 수아가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다른 녀석들도 이제 이 거대한 바위의 용도를 안 모양이었다. “쉬벡의 무덤.” “관이로군.” “그런 것이었군요.” 그랬던 것이다. 이것은 오직 쉬벡만이 쓸 수 있는 관이었던 것이다. 마법으로 만들어낸 절대 마법방어와 물리방어력을 지닌 무지막지한 크기의 물질 안 에 자신의 몸을 눕힐 정도의 공간만을 만들었겠지. 그리고 그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 어가서는 편안히 누워서 마지막 숨을 쉬었을 것이다. 아마도 자신이 입고 있는 그 망토에 대한 부담과 걱정이 이런 무덤을 만들게 했을 것 이다. 아무도 이 무덤을 깨고 그의 몸에서 망토와 반지를 취하지 못하게 하려는 방법이었 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지금까지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깊은 땅속으로 걸어 들어가서 아무도 모르게 죽어버리지 뭐 하러 이 런 것을 만들었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렇게 이야기 해 주고 싶다. 사람이란 언제나 그 끝에서 어떤 것이든 의미를 남기고 싶어 한다고 말이다. 아마도 쉬벡은 이 무덤을 통해서 자신이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의 단면을 보이고 싶었 던 것일지도... 아니 그저 아무 생각이 없이 이런 무덤을 만들었다 해도 후대의 누구 든 이 자리에서 선다면 쉬벡이 미래에 대해 염려하고 걱정했음은 느낄 수 있어야 하 지 않을까? “하여튼 결국에는 쉬벡의 망토와 반지는 손을 대지 못하게 되어 버린 것 같군. 이 제 그만 나가도록 하자.” 나는 지토와 동생들을 보며 말했고, 다들 별다른 의견은 없는 모양이어서 다시 손을 잡고 결계를 통해 밖으로 나왔다. 우리가 밖으로 나가자 3층에 있던 사람들은 우리들이 어디에 다녀왔는지를 궁금히 여 기는 눈치였지만 그런 것을 알려 줄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우리가 쉬벡의 탑 밖으로 나왔을 때, 게브는 지토의 모습으로 마부석에 앉아 우리의 말과 마차를 잘 지키고 있어서 수아의 칭찬을 들었다. 우리들은 다시 마차 앞에 모여서 여정을 의논했다. “이제 어디를 가 보지요? 다른 탑들도 돌아보실 건가요? 별로 볼 것도 없는 것 같은 데...” “혹시 알아? 9써클에 이른 사람들의 탑도 있던데 좋은 물건이라도 있을지 말이야.” “뭐가 좋은 물건이라는 거야? 루탄 녀석이 마음먹고 만들면 어떤 것이든 만들 수 있 을 텐데 무슨 욕심이야? 그냥 가자. 사실 우리가 시간적인 여유가 좀 있기는 하지만 앞으로 남은 시간은 겨우 40일 정도뿐이야. 그 사이에 자이건의 기사들을 보고 가려 면 시간이 모자랄지도 몰라.” 결국의 지토 녀석이 시간이 모자랄지도 모른다는 이유가 타당성을 얻은 모양으로 곧 장 매직컬초를 떠나 자이건이 있는 국경으로 향하기로 결정이 나고 말았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서둘러야 하나? “지토, 좀 천천히 가자. 뭐가 그리 급한 거야? 쉬벡의 탑에서 나와서 아직 점심도 못 먹었단 말이야. 우리 근처 식당에서 점심이나 먹고 가자. 좋지?” 그렇게 나는 지토에게 물었지만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마차 위로 올라탔다. 그리고 나머지 동생들도 먹고 가자는 말에는 전적으로 찬성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지토 역시 그 문제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 하지 않았다. 나는 매직컬초의 남동쪽 성문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음식점을 안내도에서 찾아서 그 앞에 마차를 세웠다. 음식점은 다른 건물들처럼 탑의 모양을 하고 있었고, 층 별로 다른 종류의 음식을 한 다고 되어 있었다. “음. 오빠, 여기 1층은 육류를 중심으로 한 구이와 찜 종류, 2층은 해산물을 중심으 로 한 탕과 구이 종류 3층은 채소를 중심으로 한 무침이나 샐러드 중심이라고 되어 있 네요? 음.. 그리고 다른 층의 음식을 시키면 추가 비용이 붙는다고 되어 있네요?” 수아가 1층 출입구 옆에 붙은 안내판을 보고 말했다. “조금 까다롭네. 그래 어떤 음식들을 먹을래?” 나는 지토와 동생들에게 그렇게 물었고, “난 1층” “2층” “나도 2층” “큼, 난 1층이다.” “저는 3층이요 형님.” “그래? 그럼 나도 3층.” 정확하게 2:2:2다. “그럼 이렇게 하자. 우리 각 층에서 식사를 하고 여기서 모이기로 말이다. 같은 건 물에 있는 것인데 무슨 문제가 될 것은 없겠지?”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3층으로 향해 발걸음으로 옮겼다. “참, 계산서는 입구에서 처리하는 모양이니까 나중에 1층에 모여서 계산을 하도록 하자. 마음껏 먹고 좀 있다가 보자.” 나는 계단에 서서 이렇게 마무리를 지어 주었다. 그리고 광아와 함께 3층에 올라서는 야채와 무침, 그리고 쌀로 된 밥을 시켜서는 맛 있게 비벼 먹었다.(이곳에선 고추장이 없어서 내가 창고에서 꺼내 먹었다.) 광아는 내가 그렇게 먹는 것에 아랑곳 않고 샐러드 종류로만 식단을 마련했다. “그거 그렇게 먹고 되겠냐?” 내가 그렇게 물어보자 광아는 “설마 제가, 먹는 음식의 종류를 따지거나 영양분을 따진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아니 시겠지요? 형님. 아무리 그래도 저는 ....입니다.” 중간 말은 안 들렸지만 짐작 못 할 내용은 아니었다. 이젠 정말로 가끔은 그런 사실을 잊어버리기도 하는 모양이다. 정령들에게 먹는다는 행위가 필요하지 않은 것임을 알면서도 그런 생각을 잊게 되는 것. 아마도 내가 이들을 완전하게 사람처럼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완전한 나의 가족 말이다. 그런데 언젠가 나도 가족들을 시집장가 보내는 기분을 느낄 날이 올까? 음... 어째 그건 불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광아와 내가 식사를 마치고 1층에 다시 내려온 후로도 한참의 시간이 흘러서 수아와 풍아가 내려왔고, 화아와 지토는 그로부터 또 한참의 시간이 흘러서야 계산대로 다가 왔다. “뭐가 그렇게 오래 걸리는 거야? 아까 바쁘다고 누가 서둘렀더라? 그거 지토 아니었 던가?” 내 말에서 조금 비꼬는 느낌을 받은 것일까? 지토의 표정이 무섭게 변하는 것을 보고 나는 곧장 등을 돌리고 계산을 했다. “자, 그럼 바쁘니까 빨리 가자.” 이 말 역시 지토와 눈이 마주치는 것을 피하면서 한 말이다. 가끔 별 말도 아닌데 눈을 부라린단 말이야. 저놈의 지토. 우리는 곧장 마차와 말을 몰아 매직컬초의 남동쪽 성문을 빠져 나왔고, 곧장 암흑제 국과의 국경으로 향했다. 아세트의 말에 따르면 자이건은 국경의 중앙 전체를 책임지는 부대에 속해 있다고 했 다. 아직 전 군을 통솔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모양이지만 일단은 한 기사단을 이끄는 수장 이 되었다고 했으니, 처음 우리를 만날 때에 천둥벌거숭이 같은 녀석은 아니라는 말 이 다. 집안의 후광을 얼마나 입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자이건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 하는 나로서는 자이건이 집안의 후광으로 잘난 척을 하는 것은 상상되지 않았다. 여하간 오래지 않아서 자이건의 모습을 볼 수 있을 터였다. 매직컬초에서 국경까지는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니었다. 우리들은 매직컬초를 출발해서 사흘이 지난 오후에 국경선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타와 암흑제국의 국경선은 이백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었 고, 그 경계는 넓은 개활지를 막고 있는 성벽이었다. 그러고 보니 한타와 다른 나라의 국경선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누웬왕국과의 국경은 오랜 시간 환수의 영역이 자연스러운 경계를 만들고 있었다지 만 한타과, 나머지 나라들과의 경계는 거의 개활지나 마찬가지였고, 어느 곳으로든 넘 고자 마음을 먹으면 불가능한 곳은 없었다. 그렇다고 그 길고 긴 국경선을 모두 성벽을 쌓아 방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 이나 마찬가지고 말이다. 신성 제국과 그란드 왕국과 암흑제국으로 이어지는 모든 국경선을 성벽으로 쌓는다 면 그 옛날 중국의 만리장성을 능가하는 성벽을 쌓아야 할 터인데 그건 그다지 실효 성 이 없는 짓이다. 때문에 우리들이 보고 있는 성벽 역시 일종의 주요 거점을 지키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 곳을 함락하지 않고 지나갔을 때, 지나간 군대는 뒤통수를 언제나 조심 해야 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런 성이 군데군데 있는 것으로 전체적인 성벽을 쌓는 것 보다 더 나은 효과 를 볼 수 있다. 어차피 한타를 침략하는 군대는 이 성의 장병들을 해결하지 않고는 진격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고, 결국에는 공성전攻城戰을 벌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성의 장병들은 나가서 맞서지 않고 오는 적을 기다려서 싸움을 하면 된다는 이점이 있고 말이다. 한타의 그 긴 국경들은 그렇게 군데군데 지어진 성들로 이루어진 국경선을 지니고 있 는 것이었다. 우리는 잠시 낮은 언덕 위에서 국경선을 이루는 성벽을 보다가 그 곳으로 마차를 몰 았다. 성벽이라 해서, 그냥 성벽만 있는 것은 아니다. 국경선 쪽의 성벽은 길게 쌓아 올린 모양으로 되어있고 그 뒤로 사각형의 성체를 만들어 놓은 형태였다. 어찌 보면 예전 쥐덫의 모양을 본딴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런 모양인 것이다. 하지만 역시 변방의 국경이란 마음대로 넘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닌 모양이었다. 다른 나라들을 오갈 때는 그다지 큰 무리가 없었지만 암흑제국과 한타왕국 사이에는 그런 융통성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성체로 들어가는 성문에서 심도 있는 심문을 받아야 했다. 평상시에는 무리 없이 통용되던 용병패 역시 확실한 신분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 는 이유로 마차와 소지품에 대한 검색을 당해야 했던 것은 정말 의외의 상황이었다. 마차에 대한 것은 간단한 일루젼 마법으로 넘어갈 수 있었지만, 우리 일행들이 지니 고 있는 무기들에 대한 것은 쉽게 납득시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용병이라 당연한 것이라 이야기를 해도, 병사들이 보기에는 일반인이 상당한 무장을 하고 성체 안으로 들어가려는 것은 쉽게 허락을 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닌 모 양이었다. 그렇게 병사들로서도 어떤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우리들도 무기를 전부 맡기고 들어 가는 방법 밖에는 없는 건가를 고민하고 있을 때, 성체 안에서 일단의 무리들이 말을 타고 나오는 것이 보였다. “응? 저거? 저건 또 뭐야? 요즘 어디를 가나 저렇게 란이를 가슴에 안고 다니는 것 이 유행인가?” 화아가 중얼거리며 말한 것은 그렇게 말을 몰고 나오는 기사들의 흉갑에 새겨진 문 장 탓이었다. 우리 용병대의 마크에 새겨진 란이의 모습이 그 기사들의 가슴 위에 찬란한 금빛으 로 새겨져 있는 것이었다. “아니 그러고 보니 아까 그 용병패에도 강철기사단의 문장이 있었던 것 같은데? 잠 시 다시 한 번 그 용병패을 볼 수 있겠나?” 갑작스럽게 생각이 난 듯이 경비병 중 하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별 생각 없이 용병패를 넘겼다. 하지만 그 결과는 별로 좋은 것이 아니었다. “정말 강철기사단의 문장과 같잖아? 감히 하찮은 용병 따위가 강철기사단의 문장을 사용하다니 아주 겁을 상실한 모양이군. 그것이 강철기사단의 영역에 들어와서 자랑 스 럽게 그런 패를 보이다니 말이야.” 그렇게 갑작스럽게 경비병들의 태도가 변했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호의적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감정이 섞인 대우는 없었는데, 갑작스럽게 이런 대우를 받다니. 거기다가 내가 용병패를 쓴 것이 먼저인데 뭔 헛소릴 하는 것인지... “죄송합니다만, 저희가 그 용병패를 쓰기 시작한 것은 벌써 1년이 넘은 것입니다. 저희가 알기로 강철기사단이 결성된 것이 1년이 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 문장은 저희가 먼서 사용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그렇게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무엇인가를 참고 이야기를 했건만, 이 경비병들 은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여러 소리 할 것 없다. 이 패는 압수다. 그리고 너희는 성채에 들어올 수 없으니 그만 사라져라.” 가라면 갈 수도 있다. 하지만 용병패를 주고 갈 수는 없지. 뭐 모조품을 만드는 것 이 어려운 것도 아니고, 경비병의 품에서 그것을 꺼내 오는 것도 어려울 것은 없는 일 이지만, 이런 식으로 이유 없이 쫓겨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것이다. “가라고 하니 가기는 하겠습니다만, 그 패는 돌려주시지요. 용병에게 용병패는 신분 을 증명하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아까 말씀을 드린 것처럼 우리들이 먼저 사용한 문장 때문에 저희가 병사님께 이런 대우를 받을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나는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지금까지는 다른 자세의 요구를 했다. 요구와 부탁이라는 것은 엄연히 차이가 나는 것이고 그걸 받는 사람도 확연히 느끼 기 마련이다. “아니 이것들이 곱게 돌려보내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지 않고 여기서 행패라도 부리 겠다는 것이냐?” 역시 병사들이란 단순 무식해 지는 것이 순간이다. 단지 누군가가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태도를 돌변시키는 것은 아마도 모든 군대의 병사들이 가지는 단순성이 아닐까 싶다. 순식간에 무리를 지은 녀석들이 살벌한 기운을 풍기기 시작한다. 그리고 상황이 이렇게 되자 아까부터 성문 앞을 가로 막고 실랑이를 벌이는 우리 때 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성문 안쪽에서 말을 세우고 발굽질만 하고 있던 기사들 이 말을 몰아서 병사들의 뒤로 다가왔다. “이봐,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어수선 한 건가?” 아무래도 기사들 중에서 선임자인 듯한 인물이 병사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병사는 마치 대단한 사실이라도 발견을 한 것처럼 우리 용병패에 강철기사단 의 문장이 들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그런 주제넘은 녀석들은 혼을 내 주어야 한 다 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자 그 기사는 말에서 내려 우리들에게 다가왔다. “미안하지만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다. 이 용병패가 너희의 것이고 우리들이 이 문 장을 쓰기 전부터 이 문장을 쓰고 있다면 이 문장이 무엇을 나타내는 것인지 알고 있 을 것이다. 대답하라. 이 문장에 새겨진 것이 무엇인가?” 상당히 무게감이 있는 목소리고 분위기였지만 그렇다고 기가 죽을 사람은 여기 아무 도 없었다. 그리고 내 어깨위에서 놀고 있는 란이는 아까부터 기사의 가슴에 새겨진 문장이 무척 이나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뾰로롤 뾰로로롱. -주인님. 이것도 마음에 드는데요? 그러니까 얼음기사단의 가슴에도 있고, 넥스 영지 에도 있고, 여기에도 있고, 제 모습이 그렇게 마음에 드는 것일까요? 란이는 모르지만 야전대의 깃발에도 있는 모습이지. 하지만 지금은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물론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지요. 그것은 란이라는 환수의 모습입니다. 아마도 자이건이 우리들의 상징인 란이의 모습을 빌려 쓴 모양인데 그렇다고 원래 주인인 우 리에게 그 문장을 쓰는 것에 대해서 뭐라고 할 자격은 기사단이나 병사들에게 없다고 봅니다만?” 내 말을 듣던 기사는 그도 문장의 정체를 알고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내가 자이건 의 이름을 부른 탓인지 흠칫 놀라는 얼굴이 되었다. “자이건 선드라스 단장님을 아십니까? 그리고 정말 단장님께서 이 용병대의 상징을 빌려 쓴 것이라는 말씀입니까?” “그거야 나중에 자이건에게 물어보면 알 일이고, 우리도 마침 자이건을 어디가면 만 날지 물어보기 위해 성채로 온 것뿐이니 기사님께서 자이건이 있는 곳을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만....” 내가 그렇게 말꼬리를 흐리자 기사를 비롯한 병사들까지도 혼란스러운 표정이 되었 다. 일개 용병에 불과한 자가 감히 자신들의 단장이자 상관의 이름을 아무 거리낌 없이 부르며 그에게 안내해 주기를 바란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처음에는 건방진 자를 호되게 혼을 내려다가도 자이건에게 가자는 말을 하고 있으니 진짜로 상급자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정도의 위치에 있는 사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 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물론 그러면서도 용병이란 신분과 기사단 단장이라는 신분의 차이에서 오는 의심과 부조화를 극복하기 어려울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언제나 결론은 간단한 곳에 있기 마련이다. “좋습니다. 마침 저희도 성채의 순시를 마치고 돌아가려는 길이니 본대本隊로 함께 가서 단장님을 만나도록 하시죠. 하지만 만약 우리들을 속인 것이거나 중간에 도주하 려는 시도를 한다면 무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위협을 가한 그는 다시 정렬해서 그를 기다리던 십여 명의 기사들에 게 돌아가 기사들을 이끌고 나왔다. 그리고 우리들은 앞서 달리는 기사단의 뒤를 따라 자이건이 있다는 곳으로 향했다. 물론 나는 그 성채의 경비병을 아주 지긋이 노려봐 주고는 용병패를 돌려받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가 기사들의 뒤를 따라 길도 아닌 구릉지를 달려서(마차가 따라가는데 이 런 길을 가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심술을 부리는 것이다. 평범한 마차는 절대 따라 가지 못한다.) 해가 지기 전에 또 다른 작은 성채에 닿았다. 그 곳은 그 전에 기사들이 나왔던 성채에 비해 크기도 작고 성벽의 높이도 낮은 성채 였다. 그리고 기사단을 따라 들어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다시 입구에서 간단한 검문(방문목적과 인원 그리고 장비에 대한)을 받아야 했다. 다른 곳에 비해서 규모가 작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군사 목적으로 세워진 성채였 기에 몇 곳의 우물과 석조 건물들과 연병장과 마구간 등이 눈에 들어왔다. 어림잡아 천에서 이천 정도의 병력이 상시 주둔하기에 적당해 보이는 성이었다. 우리들을 데리고 온 기사는 성문에서의 검문이 끝나자 곧장 성의 중앙에 있는 작은 석조 건물 앞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더니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 렸다. 2층으로 지어진 건물은 그 규모가 보통의 가정집보다 조금 커 보이는 정도였다. 그리고 그 건물 위로 펄럭이는 깃발은... “저기도 란이가 있네?” 그랬다, 풍아의 말대로 거기 그려진 것도 란이의 옛 모습이었다. 그렇게 고개를 들고 깃발을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으려니까 갑자기 건물의 문이 거칠 게 열리며 가슴에 란이를 새긴 암갈색머리의 인간 하나가 구르듯이 밖으로 뛰어나왔 다. “어서 오십시오. 루탄 대장님, 그리고 지토님과 여러분들.” 그렇게 인사를 건넨 것은 자이건이었다. 그전 보다는 머리카락이 많이 짧아지고 조금 더 햇빛에 그을린 모습이었지만, 힘이 넘치고 정돈된 느낌을 주는 모습이었다. “반갑군. 자이건 그 사이에 많이 변한 것 같군. 이제는 어엿한 기사단을 이끄는 우 두머리가 되었군. 그리고 그 모습이 어색하지 않으니 정말 보기가 좋군 그래. 우린 잠 시 자네에게 신세를 좀 질까 하고 왔는데 괜찮을까 모르겠군.” 내가 그렇게 자이건에게 이야기를 하자, 자이건은 그 전까지의 하대와는 약간 다른 내 말투가 생소하게 들렸던지 약간은 상기된 표정이 되었다. “루탄 대장님께서 머무르신다면 언제까지고 환영합니다. 더불어서 화아님과 풍아님 광아님들 다시 뵙게 되어 무척이나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 동안에 저를 단련시켜 줄 사람이 없어 많이 나태해 졌으니 다시 저에게 가르침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역시나 자이건도 화아나 풍아 등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자이건의 눈에서 보이는 것은 이번만은 그렇게 일방적으로 당하지는 않겠다는 각오였다. “좋아, 좋아. 나도 많이 기다렸지. 그리고 자네 밑에 있는 그 단원들도 조금 봐 주 지. 어차피 한 사람이 자네와 대련을 하면 나머지는 할 일이 없을 테니 말이야.” 화아는 아주 마음에 든다는 듯이 자이건의 등을 팡팡 때리며 그렇게 즐거워 했다. “일단은 오늘은 늦었으니까 내일부터 시작하도록 하자. 앞으로 30일 정도는 이곳에 서 머물 테니까 시간은 넉넉할 거야.” 나는 그렇게 자이건에게 이야기했고, 일행들은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 되었다. “오빠, 그러면 시간이 모자란다구요. 어쩌려고 그러시는 거예요? 설마 관광을 포기 하시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어째 말을 하는 풍아에게서 감당하기 어려운 기운이 몰려오는 것 같다. 그건 지토나 화아도 마찬가지 인 듯 하다. “그런 걱정은 하지 마라. 여기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다가 그 곳으로는 마차와 말 을 두고 순간이동으로 이동을 할 생각이니까 말이야.” 나는 그렇게 지토와 동생들의 의구심을 말끔히 씻어주고는 자이건의 안내를 받아 건 물 안으로 들어갔다. “이봐 자이건 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무슨 이윤가? 우리에게 최고의 잠자리는 마 차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말이야.” 내가 그렇게 자이건에게 묻자, 자이건은 슬며시 웃으면서 말했다. “실은 보여드리고 조언을 구할 것이 있어서 모시는 것입니다. 물론 그 곳에서 식사 도 함께 하시고 말입니다. 군대 음식이라 별로 맛은 없지만 그래도 찾아오신 손님이 시 니 이 곳의 음식도 한 번은 맛을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가장 힘들었던 것이 루탄님과 수아님의 음식을 먹다가 이 곳의 음식에 적응하는 것이었으니 모두들 그 괴 로움을 한 번 정도는 당해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그렇게 너스레를 떨며 자이건이 우리를 안내한 곳은 1층의 절반을 차지하는 방이었 다. 그리고 그 방에는 한타와 암흑제국의 경계를 중심으로 한 커다란 지도가 걸려 있었 다. 그리고 신기한 것은 그 지도가 걸린 벽에서 강제로 떨어질 경우에 자동 소멸이 되게 되어 있다는 것과 웬만한 카피 마법은 통하지 않을 방어 마법이 걸려 있는 것이었다. 아마도 군대의 고급 정보에 해당하는 것으로 유출을 염려한 것인 모양이었다. “여기 있는 이 것이 지금 현재 우리나라와 암흑제국 사이의 경계병과 포진 모습입니 다. 그런데 이 지역과 이 지역의 병력이 이렇게 이동을 해서 이렇게 진형을 바꾸었습 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는 것인가 하고 현재 한타의 군 수뇌부들이 긴장을 하고 있 는 중입니다.” 자이건은 우리가 그 방에 들어가 의자에 앉자마자 벽에 걸린 지도 위에 이정한 지역 에서 다른 지역으로의 병력 이동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전체적으로 국경선의 동부에서 서부쪽으로 병력들이 이동 배치되는 모습을 보 여주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에서 짐작 가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웃으며 자이건에게 물었다. “이봐, 자이건. 이런 형태의 병력 이동은 거의 이 삼년에 한 번 정도는 있는 일이 아닌가? 내가 알기로는 그런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내가 그렇게 자신 있게 이야기하자 다른 일행들(광아를 제외한)은 무슨 영문인지 모 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자이건 또한, 내가 한 말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실은 이런 형태의 군사 이동이 가끔 있는 일이란 것은 들었습니다만, 이 문제에 대한 확실한 답을 알아보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다른 일선 지휘관에게 이 문제에 대해 서는 저에게 함구하라는 명령이 내려온 모양입니다. 그래서 저로서는 도대체 무슨 이 유인지 알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굳이 따지자면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을 시험받고 있 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상황이 그렇다면 자이건의 말대로 이건 자이건을 시험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런 시험의 경우에 그 시험을 지휘관 단독으로 지지는 않는 것이 상례가 아 닌가? 장수가 만능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모자라는 것은 밑에 있는 부하장수들이 메워 주 는 것인데 지금의 상황은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니 아무래도 자이건에게 큰 힘이 실 리 는 것을 막으려는 군 수뇌부의 계략인 듯싶은 생각이 든다. “그런데 루탄님께서는 무언가 알고 계시는 것 같은데 저에게 좀 알려 주실 수 없으 시겠습니까? 제가 조금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서...” 그러고 보니 그 사이에 자이건도 말이 많아진 것인가? 전에는 조금 더 과묵한 모습이었던 것 같은데... 아니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물론 내가 그 답을 알려 주는 것은 문제가 아니야. 하지만 자이건 자네도 알아야 할 것이 있어. 자네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자네 주위에라도 그런 역할을 해 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지.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조용히 자이건이 내 말의 의미를 깨닫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천막도 치는 것도 몇 번을 보고서야 겨우 배웠던 자이건이라고 생각하기 어려 울 정도로 빠르게, 자이건은 내 말의 의미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렇군요. 아무래도 제 주위에는 힘을 쓰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니 머리를 쓰 고 정보를 수집 분석할 수 있는 존재가 없군요.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니... 알 겠 습니다. 잊지 않고 준비를 하겠습니다.” 라는 대답이 자이건의 입에서 나온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럼, 그 정도를 깨달았으니 그 보상으로 이번 시험의 답을 알려주도록 하지. 광아 야 잘 설명해 줘라.” 내가 그렇게 말하며 광아를 보자, 광아는 잠시 왜 그런 걸 나에게 시키느냐는 눈빛 을 보내다가 마지 못한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자이건도 알겠지만, 암흑제국에서는 제국을 여섯 개의 지역으로 나누어서 대쟁투 를 벌이지. 그러니까 여기 이렇게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동부, 중부. 서부 지역도 마 찬가지로 대쟁투의 때가 있게 되겠지? 그럼 그 때는 국경을 지킬 병사들까지도 대쟁 투 로 인해 빈틈이 생기게 되지 그러니 당연히 다른 두 곳의 병력과 지휘관들이 이동을 해서 일시적으로 지휘를 대리하는 것이 필요하지. 아마 그런 이유로 평균 2년에 한 번 은 이런 군사 이동이 있을 거야. 지금 병사들이 움직인 것도 이 서쪽지역에 대쟁투가 선포되기 때문이겠지. 아직도 40일 정도가 남은 것 같은데 벌써 이런 이동이 있다는 것은 대쟁투가 선포되기 전부터 시기는 미리 알게 되는 모양이군.” 여기까지 광아가 설명하자 우리 일행은 물론이고 자이건도 대략적인 상황을 이해하 게 된 것 같았다. “그럼, 대쟁투가 이번에는 서부지역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병사들이 국경선의 병사들 까지 빠져나가게 되었다는 말이군요. 그래서 동부지역과 중부지역의 병사들이 서부지 역까지 맡게 되어서 이런 이동이 생겼다는 그런 것이군요?” 자이건도 광아의 말을 이해했는지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뭐, 그 정도면 아마도 이번 시험에서는 충분히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을 것 같 군. 더구나 부하를 통솔하는데 힘과 더불어 머리의 중요성도 알게 되었다면 그걸로 충 분하지.” 나는 그렇게 자이건을 칭찬해 주고는 그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를 이것저것 물어 보았 다. 자이건은 우리와 헤어지고 곧바로 선드라스 공작가로 돌아가 공작가의 기사단에 자원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어느 정도 실력을 쌓은 자이건은 기사단에서 배울 것이 별로 없다는 것 을 깨닫고는 틈틈이 시간을 내어 마음에 드는 자들을 포섭해서 심법은 가르쳐주고 검 술을 함께 연습하는 무리들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안에는 귀족도 있었고, 평민들도 있었다.(평민에게까지 눈을 돌린 것은 자이 건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획기적인 전환인 셈이다.) 그리고 그 무리들이 어느 정도 실력을 쌓게 되자 곧 주변에서 그의 힘을 우려하고 걱 정하는 무리들이 생겨나고 그를 중앙에서 쫓아내려는 시도가 늘었다는 것이다. 자이건은 그런 주위의 시선과 분위기가 싫었기 때문에, 자신과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 을 이끌고 나라 안의 괴물들을 토벌하며 밖으로만 나돌았고, 그것이 도리어 자이건의 이름을 백성들과 귀족들에게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어 강철 기사단을 탄생시켰다는 것 이다. 물론 말을 들어보니 강철기사단이 정식 기사단으로 인정받은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저 공작가의 3남이 이끄는 부대이고 그 개개인의 솜씨가 뛰어나다는 소문에 사람들 이 붙여준 별칭이 강철기사단이고, 실제 군대 편제로는 자이건 선드라스 밑에 배속된 사병으로 되어 있었다. 물론 그 중에서 몇은 정식 기사로 인정을 받은 몸이지만 말이다. 아무리 선드라스 가문이라 하더라고 한꺼번에 수백에 이르는 기사들에게 서임을 줄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기사란 곧 귀족을 의미하는 것이니 당연한 것이지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자이건이, 자신과 헤어진 이후의 우리 여정을 물어왔을 때, 방문이 열리며 병사들이 식사를 가지고 들어왔다. 사각형 쟁반위에 접시 하나와 몇 개의 그릇으로 이루어진 식단은 무척이나 간소해 보 이는 것이었다. “하하, 식사가 왔습니다. 일단 식사부터 하시고 나머지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자이건은 그렇게 우리에게 음식을 권하고는 곧 음식에 몰두했다. 하지만 우리들은 우리 앞에 놓인 음식에 대해 깊은 고찰에 들어갔다. 접시 위에 놓인 것은 분명히 고기를 구워 놓은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칼로 자를 때 마다 딱딱하게 굳은 겉과(탄 것 같다.) 그 속에서 나타나는 붉은 생살은 칼질을 머뭇 거리게 만들었고, 그 고기를 덮은 검붉은 색의 소스는 포크에 꽂힌 살덩이를 입으로 가지고 가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고 있었다. “왜 안 드십니까? 이렇게 보여도 먹을 만 합니다. 우리 병사들 전부 이걸 먹고 지내 는 걸요?” 자이건이 다시 음식을 권했다. 그러고 보면, 나도 정말 사람이 많이 변한 모양이다. 아무리 맛있는 먹거리를 좋아하 고, 그럴 능력이 된다고 할지라도 요리가 된 음식을 앞에 놓고 불만을 가지다니.... 이 대륙에 비록 풍요로워서 괴물들에게 잡혀 죽거나 병들어 죽지 않으면 굶어 죽는 경우는 없는 곳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먹을 것을 가려가며 먹고 말고 하는 것은 사 치 스러운 것이다. 아무래도 지금껏 굶주림이 없었던 대륙의 모습이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일까? 쌀 한 톨도 아까워했던 내 모습이 사라진 것 같아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자 먹도록 하자. 설마하니 먹고 죽기야 하겠냐? 다른 사람들이 모두 먹는 것을 내 가 싫다고 해서야 사람들을 대하는 예의가 아니지.”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조각조각 잘려진 고기를 찍어 입에 넣고 딱딱한 빵을 뜯어 멀 건 스프에 찍었다. “별로 나쁘지 않아. 그렇게 어정쩡한 표정들 짓지 말고 어서들 먹어라. 괜찮아.” 나는 그렇게 말하며 음식들을 씹어 삼켰다. 사실을 이야기하면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먹고 있는 것이었지만, 솔직히 내 입에 맞 는 음식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음. 배가 고프군. 이렇게 있는 것도 예의는 아니니까 그럼 한 끼 먹어 볼까?” 지토가 그렇게 식사에 참가하면서 다른 아이들도 머뭇거리는 모습이었지만 식사를 시 작했고, 조금 힘들어하는 표정을 보이기는 했어도 입에 든 음식을 밖으로 뱉거나 한 번 만에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정말 묵묵한 식사였다. 자이건도 우리들이 별다른 이야기 없이 식사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이자 입을 다물고 는 조금 미안한 표정이 되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식사가 끝나고 나서 병사들이 들어와 식탁을 깨끗이 치웠을 때, 자이건이 입 을 열었다. “루탄님이나 다른 분들도 대단하시군요. 먹기 쉽지 않은 음식인데 별 말씀 없이 드 시니 말입니다.” “자네가 그렇게 원한 일이고, 우리들을 위해서 내어 온 음식이니 버릴 수가 없었을 뿐이지. 실제로 먹는 것이 편한 음식은 아니었네.” 나는 자이건의 말에 그렇게 대꾸했다. “사실 그렇게 열악한 식사를 드리지 않아도 될 것이지만, 처음이시니 저희와 같은 식사도 해 보셔야지 내일부터 단원들과 더 가까이 다가가실 수 있을 것 같아서 마련 했 던 음식입니다. 아마도 음식을 가지고 나간 병사들은 벌써 루탄님과 일행분들이 그 식 사를 다 드셨다는 것을 이야기 거리로 삼고 있을 것입니다.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그 들이 여러분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나는 자이건의 말을 들으면서 처음에 자이건이 부하들과 만났을 때, 얼마나 곤란했었 을 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자이건은 화아나 풍아 광아들이 다른 병사들과 한 동안 생활하면서 자신 과 같은 어려움을 겪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배려한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자이건도 완전히 돌머리는 아닌 것인가? 그 이후로 자이건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지금까지의 여정에 대한 것과 암흑교 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우리들은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물론 우리들은 우리 마차에서 자기를 원했고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음날 아침은 서둘러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아침을 활짝 열어놓은 병사들 의 고함소리와 말발굽 소리와 투레질소리, 대장간의 망치질 소리와 왁자지껄한 병사 들 의 고함소리에 놀라야만 했다. 어디에 이 많은 병사들이 있었던 것인지 수많은 병사들이 몇 곳으로 나누어진 연병장 에서 오와 열을 맞추고 인원점검과 일과를 배정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점검이 끝난 병사들은 아침운동과 식사 등을 하기 위해 흩어졌고 점검 은 마친 상급 지휘관들은 자이건이 있는 건물 앞에 모여서 다시 자이건에게 보고를 했 다. “오늘부터 한 달 동안은 특별 훈련기간으로 삼는다. 훈련은 전 병력을 3개조로 나누 어서 실시하고 하루씩 돌아가며 2개조는 기존의 임무를 맡고 1개조는 훈련을 하도록 한다. 훈련은 기사단을 제외한 병력은 전술 및 기동 훈련을 중심으로 하고, 기사단은 검술 및 심법 훈련을 한다. 기사단의 훈련 방법은 대련이다. 자세한 편제는 각 부단 장 들이 알아서 짜도록. 이상.” 자이건은 그렇게 기사단과 병사들의 머리위에 날벼락을 던지고는 유유히 건물 안으 로 들어갔다. 그리고 우리들이 아침을 준비하고 마차 밖에 식탁을 마련하고 둘러앉았을 때, 슬금슬 금 다가온 자이건이 “어서 오세요. 함께 식사라도 하세요.” 라는 수아의 말에 반색을 하며 식사에 동참을 했다. 그리고 자신이 짠 훈련 계획에 따라서 기사단을 훈련을 시켜주었으면 하는 부탁을 해 왔다. 우리들이야 어차피 처음부터 그럴 목적으로 왔으니 화아나 풍아 광아가 흔쾌히 그 부 탁을 들어 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날 오전부터 수아를 뺀 나머지는 모두들 강철기사단이라 불리는 자들과 어 울려 먼지 속을 뛰어다녔다. 처음 풍아를 얕보다가 크게 창피를 당한 이후부터 기사단원들은 동생들과 지토의 말 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복종하며 따라왔다. 반년이 조금 넘는 기간동안 만들어 놓은 기사단 치고는 제법 실력들이 있었지만 얼음 기사단이나 넥스 영지의 기사들에 비하면 부족한 점이 많았다. 때문에 화아 등은 그 공백을 메워보려고 온갖 힘을 쏟고 있었다. 특히나 자이건과 그 밑의 직속 기사들은 열외 없이 매일같이 땅바닥을 구르며 실력 이 모자라는 것에 대한 대가를 치루어야 했다. 물론 그 와중에 이빨을 깨물고 두고 보자고 오기를 부리는 것은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조금 상태가 나은 자이건에게 그들의 오기어린 노력의 결과가 돌아갈 것이니 까 말이다. 우린 그 때쯤이면 이 곳을 떠나고 없을 터였다. 오늘도 동생들과 지토는 기사들과 어울려 있었고, 나는 수아와 함께 아침 설거지를 마치고 산책을 나왔다. 구릉지 사이를 돌아나가는 개울물과 마치 장난치듯이 놓은 징검다리를 지나 초록을 넘어 한 여름의 녹음으로 변해가는 숲길을 걷는 것이다. 때로는 과일 나무를 발견하면 한두 개 따기도 했지만, 그런 것이야 그저 재미삼아 하 는 것일 뿐, 우리들은 성체 안의 그 후덥지근한 분위기와 공기를 피해 여유를 부리고 있는 것일 뿐이었다. “저기가 국경선이라지요? 그저 낡은 돌담 같은 것이 있을 뿐인데, 국경선이라고 하 니까 굉장히 살벌하게 느껴져요.” 수아가 숲 저 쪽으로 보이는 국경선을 보며 말했다. 언뜻 보기에는 여느 시골 마을의 낡은 돌담같이 보이는 것이, 오래전 수백 수천의 인 물들이 지키고 혹은 넘으려 했던 성벽이었다는 것이 쉽게 가슴으로 다가오지 않는 풍 경이 거기 있었다. 그 담에 이제는 피가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 저 벽을 넘으려 한다면 언제든 성벽은 높아지고 넘으려는 자와 지키려 는 자의 싸움이 벌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저 자리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러게 말이다. 저게 국경선이지, 저것을 사이에 두고 한타와 암흑제국이 나뉘고 그 풍습이 나뉘고 사람들의 가치관이 나뉘어 있는 것이지. 사람들의 모든 생활과 사 상 과 문화가 저것을 경계로 나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아니? 사람들은 변화를 두려워하지. 지금 자신이 누리는 것에서 더 나은 것을 원하는 마음은 누구나 가지지 만 그것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해도 급격한 변화는 두려움을 가지고 온단다. 그래 서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나라가 다른 나라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야. 생각을 해 봐라. 국왕이 바뀌는 것이 백성들에게 크게 영향을 주든? 그렇지는 않지? 그 왕이 아주 대대적인 개혁을 하지 않는다면 백성들에게 왕위를 누가 가졌느냐 하는 것은 상 관이 없단다. 하지만 누군가 다른 나라가 자신의 나라를 침략하면 문제가 심각해지지 상당한 변화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말이야.” 나는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그루터기에 앉아 국경선을 이루는 돌담을 보며 말을 꺼냈 다. 사실 이런 이야기를 수아에게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도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나 자신도 확신하지 못하는 생각들을 정리하 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넥스 영지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국가라는 것과 백성이라는 것에 대해 조금씩 생각하 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나라를 만들어 볼까라는 생각을 한 것은 절대 아 니다. 너무 귀찮은 일이 많을 것 같으니까 말이다.) 나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수아가 옆으로 다가와 잔디위에 앉는 것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국가의 존재란 백성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며, 울타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상하게도 조금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런 것은 잊어버 리고 백성들을 종으로 부리려고 한단 말이야. 백성들이 등을 돌리고 나면 아무것도 남 지 않는 것이 왕이고 귀족이고 또한 관리이며 백성들 자신인데 말이야. 백성들도 서 로 무리지어 살려고 한다면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희생은 있기 마련이지. 자기 의 마을이나 도시나 성이나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 생각이 없으면 군대에게 세 금을 주어야 하고, 그들을 떠받들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야. 결국에는 전부들 기대고 사는 것이 인간이면서 ....” “하지만 오빠, 암흑제국의 사람들도 그런 것일까요? 그들에게도 국가란 오빠가 말 한 그런 것일까요? 백성을 보호하고 울타리를 만들어주는...” 수아는 암흑제국은 좀 다르지 않겠느냐는 느낌으로 질문을 해 왔다. “글쎄, 그들은 그들의 관습에 때라서 쟁투를 당연히 여기고, 여자나 아이의 인격을 무시하며, 노예의 존재를 인정하잖니.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히 여길 수 있는 것은 그 들이 무리지어 이루는 암흑제국이라는 나라 때문이라고 봐야 하겠지? 그것이 없으면 암흑제국의 백성들도 그들의 그런 가치관과 풍습과 제도를 지킬 수 없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그러니 암흑제국이라는 나라도 그 나라의 백성들에게는 그런 울타리의 역할 을 한다고 봐야겠지. 물론 어느 나라든지 소수의 백성들이 자신의 나라와 그 나라의 관습과 제도에 불만을 가지기는 하지만 일단 그들의 힘이 나라를 바꿀 정도가 되지 않 는다면 별다른 의미는 없는 것이지. 아무튼 결국에는 암흑제국이든 어느 나라든, 그 나라의 백성이 그 나라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그 나라가 자신의 가치관과 생활을 지 켜 주는 존재라 믿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란다.” 나는 그렇게 말을 끊고 수아를 바라보았다. 수아는 내 말을 듣고 곰곰이 무언가 생각하는 모습이 되어있었다. 나는 수아의 모습을 보다가 나대로 생각에 잠겼다. 내가 가진 생각들에 맹점은 없는가를 살피는 것이었지만, 실제로 단 한 가지만을 생 각한다면 그다지 어렵게 고민을 할 것도 아니었다. 저 들에서 농사를 짓는 무지한 사람에게 가서 물어보자 ‘당신은 만약 전쟁이 나서 싸움을 하게 된다면 어떻게 하겠소? 가서 싸울 것이요? 아니면 숨어 지낼 것이요?’ 이 렇게 말이다. 그럼 그는 무엇이라 대답할까? 그가 만약 솔직한 사람이라면 숨어 목숨 을 보존하고 싶다고 할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자신의 가족들에 대한 안전도 보장되 어 야 한다는 작은 욕심을 부릴 것이고, 좀 더 나간다면 자기가 아는 사람들이 안전하기 를 바랄 것이다. 그런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나면 그는 싸움터로 가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가 족과 함께 안전하게 숨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나가 싸우면서 가족의 안 전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안전하게 도망을 가서도 편안하고 안락한 삶이 보장된 사람들은 도망을 가려 고 할 것이다. 도망가서 편안과 안락을 누리려 할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여기에 빠진 인간형이 있으니 그들은 바로 존경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가족의 안 전이나 지인知人의 안전이 아닌 대의를 위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어서(그것이 명예이 든, 책임이든, 의무이든, 빚이든) 그 대의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죽을지도 모르는 곳 에 남거나 그 곳으로 향하는 자들이다. 어쩌면 인간의 역사는 이러한 자들이 이끄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서 꾸며지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나는 분명히 평범한 사람에 속하고, 전쟁이 나면 도망을 가서도 행복하게 살 능력이 되니까 도망을 갈 궁리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하하 하. 나는 그다지 존경받을 사람이 아니니까 말이다.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카다가 날아 내렸다. 아마도 풍아가 입에 거품을 물고 점심 준비를 하지 않고 도망을 간, 나와 수아를 찾 아서 보낸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건 파울의 통역으로 확인이 되었다. 나는 수아의 손을 잡고 급히 순간이동을 했다. 괜히 풍아의 성질을 돋우면 무슨 낭패 를 볼지 모를 일이었다. 그날 나는 풍아와 화아, 지토와 광아의 무시무시한 시선을 받으면서 눈썹이 휘날리 게 점심을 해 바쳐야 했다. 지들은 지들 좋은 일이라고 재미있게 기사들 데리고 놀려먹으면서 왜 나의 이 작은 휴식조차도 봐주지를 않느냔 말이야. 시간의 흐름은 때로는 너무도 느리다가 때로는 순식간에 지나기도 한다. 기사들은 그 동안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을 테니 시간이 더디게 갔을 터였지만, 지토 와 동생들은 그야말로 너무도 빠르게 지나가버린 시간인 모양이다. 벌써 30일의 시간이 지나고 우리들이 떠나야 할 날이 다가온 것이다. 물론 말과 마차를 자이건에게 맡겨 둘 것이기에 금방 다시 보게 될 것이지만, 다시 보는 때는 그것이 곧 오랜 이별을 약속하는 시간이 되는 것이니 지금 가는 것이 아쉽 지 않을 턱이 없었다. 그 사이에 기사들의 실력은 제법 많이 늘었고, 나도 자이건의 심법을 도와주었기 때 문에 자이건도 검기의 수준을 높였고, 언젠가는 검강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 었 다.(근데 그게 뉘 집 애 이름 부르듯이 쉬운 일은 아니다. 고생을 좀 하면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지.) 우리들은 이른 아침에 자이건과 기사단원들에게 이별을 하고(솔직히 난 기사단들과 별로 안 친하다. 지난 30일 동안 내가 한 일이라고는 마차에서 쉬벡의 마법서를 보면 서 마법을 익히거나 요즈음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신계의 책을 보는데에 시간 을 보냈다. 물론 그 이외의 시간에는 요리에 전념을.....) 우리들은 암흑제국으로 순 간이동을 했다.(자이건에게는 우리가 어디 간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환수들은 전부 신계로 돌려보낸 상태였다. 남은 것은 광아의 맘맘 뿐이었다. 아무래 도 환수들을 모두 데리고 이동을 하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마법진도 없 이 이동을 하는 것이라 환수들은 잠시 신계에 보내기로 한 상태였다. 그리고 우리가 도착한 곳은 대쟁투장으로 통하는 관도 위였다. 대쟁투장 상공에서 나타날 수도 있었지만 그건 너무 눈에 띄는 짓이라 대쟁투장에서 조금 떨어진 관도 위로 이동을 한 것이었다. 나는 관도위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아르미엘 사제가 준 십자가를 목에 걸었다.(비록 내가 암흑교의 사제는 아니라고 해도 암흑제국에서의 이 성물의 가치는 이미 확인한 바가 있었던 것이다.) 마침 관도 위를 지나다가 우리가 나타나는 것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도 내가 꺼내 서 목에 건 성물을 보곤 아무 말도 없이 가던 길을 가 버렸기 때문에 작은 소란조차 도 일어나지 않고 지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천천히 대쟁투장으로 걸어갔다. 대쟁투장 주위는 예전 우리가 왔을 때와는 천양지차를 보이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어수선하게 돌아다니고 있었고, 쟁투장으로 향하는 거대한 마법진 은 수많은 사람들을 삼키고 또 토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쟁투에 참가하려는 사람들인 듯한 인물들은 갖가지의 천막들을 치고 (웬만한 집보다 큰 것에서 한 사람이 자기에도 비좁아 보이는 것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우선 예전에 아르미엘이 우리를 데리고 갔던 그 작은 마법진으로 다가가 그 앞 에서 사람들을 안내하는 사제에게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 사제님, 혹시 아르미엘 사제님을 뵈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혹시 그 분께 말을 전할 수 있다면 저희가 왔음을 알려 드리고 싶습 니 다만.” 내가 그렇게 사제에게 말을 걸자. 우리가 다가오는 것을 고개를 숙이고 기다리던 사 제는 곧 좀 더 고개를 숙이고는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사제님께서 사제님을 찾으실 분들이 계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래서 기다리고 있었지요. 이리로 따라 오십시오. 제가 아르미엘님의 손님을 모시게 되 다니 영광입니다.” 이렇게 말을 마친 사제는 우리들을 그 작은 이동진 위로 안내했고, 그 진이 발동되 고 우리가 이동해 간 곳은 넓은 홀이었다. 한 쪽으로 거대한 나무문이 만들어져 있었고, 천정은 아치형으로 되어 있는 홀에는 여러 가지 마법진들이 그려져 있었고, 한 쪽에는 마신으로 추정되는 7개의 석상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마신들은 넓은 나무문을 향해 공손한 태도를 지으며 시립해 있는 형상이었 는데 그것으로 보아 저 안쪽으로 루시퍼의 신전이 있는 모양이었다. “이리로 따로 오세요. 여러분.” 우리가 그렇게 주위를 살피고 있을 때, 우리를 안내해 온 사제는 우리들을 데리고 마 신들이 있는 반대쪽 벽으로 우리를 이끌었고 그 곳에 있는 작은(다른 문이 워낙 거대 했기에 작아 보일 뿐.) 문으로 들어갔다. 복도로 연결된 그 문을 지나 한참을 따라가서야 우리들은 또 다른 문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곳에는 소박하게 꾸며진 테이블과 의자들이 놓여 있었고, 벽에는 여러 가지 책들 이 꽂혀 있는 책장이 있었다. 다른 벽에는 역시 루시퍼로 보이는 신상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액자가 있었는데, 루 시퍼는 검은색 날개를 지니고 등 뒤의 어둠을 이끌고 빛을 몰아내는 모습으로 표현되 어 있었다. 원래는 사악한 뱀으로 표현되거나 꼬리가 달린 악마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이겠지 만 이런 장소에서 그런 말을 했다가는 신성모독이 될 것이었다. 어떤 의미에서건 하나의 계를 지배하는 절대신의 반열에 있는 존재이니 말이다. 인간이 어떻게 신들의 일을 알겠다고 나설 수가 있겠는가, 그저 신들의 입장에서야 인간들이야 정말 나약하고 능력 없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데 말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며 주위를 살피는 중에 우리를 데리고 온 여사제는(여자였다.) 잠시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우리들은 의자에 앉아 아르미엘이 오기를 기다렸고, 오래지 않아서 찻잔을 받쳐 든 아르미엘이 방으로 들어왔다.(사실은 아르미엘인지 몰랐다. 입을 열고 말을 시작해서 야 알 수 있었다.) “어서 오세요.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루탄님. 그리고 여러분들도요.” 탁자에 찻잔을 놓으며 그렇게 입을 연 그녀는 비어있는 한 쪽 의자에 가 앉았다. 의자에 앉으면 얼굴이 보일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었다. 워낙 후드가 깊은 것이다. “이렇게 환대를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저 대쟁투를 볼 수 있게만 해 주셔도 될 텐데 예상치 못한 환대로군요.” 나는 아르미엘 사제에게 그렇게 감사와 함께 의문을 던졌다. “죄송합니다. 루탄님. 사실 루탄님을 이렇게 모시는 것은 제 의지가 아니라 성녀님 의 의지이십니다. 루탄님께서 다녀가신 것을 성녀님께서 아시고 대신 루시퍼님의 인 장 을 지니신 분을 소홀히 대하지 말 것을 명하셨지요. 그리고 꼭 루탄님을 대쟁투에 모 시도록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 인사를 하시려면 제가 아닌 성녀님께 하셔야 하지 요.” 성녀? 암흑교에 성녀라는 존재가 있어? 나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일이라 조금 놀랐다. 이야기 분위기로 보아서 성녀라는 존재가 상당한 고위직에 있는 것 같은데... 어찌보 면 거의 최고위의 인물인 것 같은 느낌도 드는데,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었 다는 말이다. “성녀님이라니요? 제가 아는 짧은 지식으로는 암흑교에 성녀님이 계시다는 말씀은 들어 본 적이 없는데요? 그 분에 대해 말씀을 좀 해 주시겠습니까? 비밀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나는 그렇게 아르미엘 사제에게 부탁했고 아르미엘 사제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가(아 마 고민을 했나 보다.) 입을 열었다. “제가 많이 알지도 못하고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자세한 말씀은 드 리지 못합니다만, 저희 교에 성녀님은 오래전부터 계셨습니다. 다만 대외적으로 알려 지지 않았을 뿐이지요. 자세한 것은 대쟁투가 있기 전에 한 번은 성녀님을 뵙게 되실 테니 그 때에 직접 여쭈어 보시는 것이...” 그렇게 말을 맺은 아르미엘이었다. 뭐 별로 얻은 것도 없군. 성녀란 존재가 암흑교에 예전부터 있어왔다는 것 밖에 없 는 거네? “그런데 정확하게 대쟁투는 언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까?” 화아가 옆에서 갑작스럽게 물었다. 아무래도 빨리 구경을 하고 싶은 모양이다. “아!? 네, 대쟁투는 앞으로 열흘 후에 시작됩니다. 그리고 30일 동안 벌어지게 되지 요.” “그럼 그 때까지 여기서 기다려야 한다는 건가요?” 풍아의 질문이었다. “아닙니다. 언제든 밖으로 나가셔도 상관없습니다. 아까 여러분을 모시고 왔던 사제 님이 여러분을 모시고 온 그 이동진이 아니고 이 방 건너편 방에도 이동진이 있습니 다. 그걸 이용하시면 됩니다. 여기만 계시면 갑갑하실 테니 말이죠.” “저기 그런데요, 저희들 잠은 어디서 자야 하나요? 혹시 여기 침실도 있나요?” 아르미엘의 답에 이른 수아의 질문이었다. “물론이지요. 이 옆으로 방들이 있습니다. 이 방 옆으로 있는 세 개의 방은 여러분 들을 위해 마련된 방입니다. 특별히 시중을 드는 사제님들이 필요하시면 말씀을 하시 면 보내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방은 마지막 끝에 방이 루탄님의 방이고 나머지 는 여자분들과 남자 분들이 나누어서 쓰시면 될 겁니다.” 수아의 질문에 아르미엘은 성심껏 대답을 했다. “감사합니다. 아르미엘 사제님, 하지만 시중을 드는 분들은 없어도 됩니다. 그런 생 활을 해 오지 않아서 오히려 불편할 뿐이지요. 안 그래요? 루탄 형님?” 광아가 그렇게 마무리를 지었다. “네, 알겠습니다. 대신에 식사는 저희가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아침과 저녁은 해가 뜨고 해가 지는 시간에 맞추어 이 방으로 가지고 오겠습니다. 그러니 어디 멀리가시 는 경우가 아니시면 식사는 거르지 않도록 시간을 맞추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아르미엘도 그렇게 마지막 말을 하고는 방문을 나섰다. 그러고 보면 정말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만남이었던 것 같다. 신을 섬기는 사제들이란 개인적인 감정 표현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들 생각하는 모 양이었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런 분위기 탓인지 아르미엘이라는 사제에게 고마움과 감사의 마음 을 제대로 전하지 못했던 것 같다. 우리는 아르미엘 사제가 응접실을 나가고 나서 곧 몸을 일으켜 방들을 둘러보기 시작 했다. 방들은 의외로 큼직했고, 놓여 있는 가구들도 고급스러웠다. 방들 마다 침대가 네 개 씩 있었지만, 나에게 쓰라고 내어준 방에는 침대가 하나 뿐 이 없었다. “이건 뭐야? 혹이 여기 무슨 대단한 사람이 와서 묵어가는 곳인데 형 방은 그 대단 한 사람이 자는 곳이고 우리 방은 그 수행원들이 자는 곳이라는 뭐 그런 이야기 아닐 까?” 화아가 방들을 둘러보고 투덜거린 말이었다. “신경쓰지 말아라. 여기 침대가 네 개나 있는데 함께 지내면 되지. 꼭 내가 저쪽 방 에서 자야 할 이유는 없지 않냐?” 내가 그렇게 잠자리를 결정할 때까지 투덜거린 화아였다. 별것도 아닌 것에 상당히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군. 그렇게 잠자리에 대한 결정이 끝나고 나서 우리들은 곧장 응접실의 맞은편 방문을 열 고 이동마법진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이동 마법진을 통해 우리가 나온 곳은 대쟁투장의 대형 이동진이 그려져 있 는 곳 바로 옆이었다. 그곳에서 안내를 맡고 있었던 듯한 사제는 우리들이 나타난 이동진을 보다가는 우리 에게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아르미엘님의 손님이시군요. 지금 이동하신 그 이동진은 쌍방향 이 동이 되는 것이라 언제든 그 이동진을 이용해서 오고 가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리 고 대쟁투장의 관람을 위해서는 이 이동진을 이용하시고 1차 이동처에서 원하시는 층 으로 이동을 하시면 됩니다. 참고로 여러분들께선 어떤 층으로든 이동이 허락된 분들 이십니다. 아마 그 곳에 가시면 안내를 맡은 사제님께서 출입증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사제의 설명을 듣고는 곧장 이동진으로 올라갔다. 약간의 현기증이 생길 정도의 충격이 전해지고나서 우리들은 작은 이동진이 여러 개 일렬로 그려져 있는 곳에 도착해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여러분 어떤 층으로 가시려고 하시는지요? 출입증을 보여주시고 앞 에 적혀있는 번호에 따로 이동을 하시면 됩니다.” 그 곳에 있는 사제는 남자였고 후드의 깊이가 그렇게 깊지는 않아서 40대로 보이는 마른 얼굴이 드러나 보이고 있었다. 조금 어둡고 침침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의 얼굴이 빛을 받지 못한 탓일 거라고 생각 했다. 그의 목소리는 듣기에 좋은 목소리였기 때문에... “죄송합니다. 사제님, 저희는 아르미엘 사제님의 초대로 왔기 때문에 여기 출입증 을 어떻게 얻어야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위에 있던 사제님의 말씀으로는 사 제 님께서 저희에게 출입증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그러자 그 사제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우리 일행을 살피고는 곧 소매 속에서 얇은 금 속판을 건네주었다. “이것은 여기 있는 모든 이동진의 이동이 허락되는 코드가 들어있는 카드입니다. 이 걸 지니고 계시면 일행 분들과 함께 원하는 몇 층이든 이동이 가능하실 것입니다. 아 르미엘 사제님의 손님이신 줄은 몰랐습니다. 이렇게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제는 그렇게 사족을 붙이며 약간은 미안한 듯한 얼굴이 되었다. 뭐가 미안한 것일까? 겨우 아르미엘 사제의 손님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 미 안하다는 것인가? 그럼 아르미엘이라는 사제는 도대체 어느 정도나 되는 위치에 있는 것일까? 그렇게 높은 지위에 있는 사제가 전에는 겨우 우리들을 안내하기 위해서 나왔다는 것 은 또한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럼 도대체 이 사제가 미안한 것은 뭘까? 아무리 생각해도 미안해 할 것이 없는 데.... 그리고 그 미안함이 직접적으로 우리에게라기보다는 아무리 보아도 아르미엘 사제에게로 향한 것 같으니 정말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나는 곧 이런 저런 생각을 떨치고 동생들과 지토와 함께 1층(바닥 층이다)에 서부터 11층까지와 외탑의 13, 14, 15층을 이동하며 이것저것 구경을 하고 다녔다. 벌써부터 11층에는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의자와 탁자를 놓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아마도 그들의 주인은 제국 내에서 제법 힘을 지닌 위인들일 것이었다. 그리고 13, 14, 15층은 들쑥날쑥하게 방들의 크기가 달랐는데 그 곳에서 만난 사제 의 말로는 이 곳에는 일반 관람석을 제외하고는 모두 예약제도 되는 곳이라고 했다. 역시 대회의 절정을 보기 위한 곳은 구경꾼들이 많이 몰리는 모양이었다. “예약이라... 우리도 자리가 있으면 좋을 텐데...” 화아가 이렇게 투덜거렸지만 “그냥 일반석에서 구경하는 것은 제약이 없다잖아 오빠. 그 정도로 만족해.” 라는 풍아의 말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우리가 그렇게 대충 중앙탑과 외탑(사제들이 그렇게 불렀다.)을 돌아보고 땅 위로 올 라왔을 때는 벌써 해가 서쪽 하늘로 절반은 기울어 있는 시간이었다. “점심을 먹기는 늦은 것 같고, 그렇다고 저녁시간까지 기다리기는 허전하고..” 이렇게 내가 투덜거리자 수아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천막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오빠. 저기 가서 뭐든 좀 사 먹어요. 노점상들이 생겼네요. 저기.” 순간 우리 일행들 모두의 관심이 그 쪽으로 쏠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해가 질 때까지 천막들 사이를 오가며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으로 시 간을 보냈다. “정말 상당한 기세를 지닌 사람들이 있군요. 가끔 실력자들이 눈에 띄네요.” 풍아는 사람들을 살피며 조금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 사람들이 많기도 하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대쟁투에 참가를 하는 거지?” 화아가 이렇게 투덜거리자 광아가 대뜸 대답했다. “128명이 출발해서 4명이 남고 그것이 다시 64명을 만들어서 6번의 경기를 치룬다 고 하면 일만이천이백팔십팔명이 싸움을 하게 됩니다.” “응? 일만이천이백팔십팔? 그렇게 들으니 별로 많아 보이지 않는데?” 화아는 의외인 듯이 말했다. “그게 적은 숫자가 아니지 적어도 이런 자리에 나온다는 것은 나름대로 실력을 가진 자라고 해야 하지 않겠나? 한 번은 이길 자신이 있는 자가 나오는 것이지. 운을 바라 고 오기에는 너무 위험한 곳이니까 말이야.” 갑작스럽게 목소리가 들려 온 것은 우리가 이야기를 하고 있던 옆에 세워진 천막이었 다. “누구야? 누군데 얼굴도 없이 입으로만 다른 사람의 대화에 끼어드는 거냐?” 성격 급한 화아가 한 소리를 했다. “크흐. 대쟁투라 하니까 이젠 구경 온 녀석까지도 겁을 상실하는군. 아무리 대쟁투 라 해도 대쟁투가 선포되지 않은 지역의 사람이라면 쟁투가 가능한 것을 잊은 모양이 지?” 여전히 얼굴을 보이지 않는 그 자는 아무래도 우리들이 무척이나 약하다고 생각하거 나 자신이 무척 강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요즈음에는 자기 주제를 모르고 설치는 놈들이 많이 있지. 그렇지 않은가? 얼굴 없는 양반? 어디 그 낮작이나 한 번 내밀어보는 것이 어떻겠나?” 화아가 천막속의 목소리에 민감한 반응을 보냈다. “흐흐, 이거 재미있는 녀석이로군. 겁 없이 덤비는 것이 거의 눈 먼 마수 같은 녀석 이로구만... 읏차.” 천막 안에서 꿈지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입구를 열어젖히고 커다란 머리통이 나타났 다. 머리 크기가 지토의 상급 모습의 크기와 비슷한 것을 보고 우리는 녀석의 덩치를 짐 작할 수 있었다. 역시나 작은 천막 밖으로 몸을 뺀 그 녀석은 키가 2미터를 훨씬 넘어 보이는 몸집에 잘 발달한 상 하체를 지니고 있는 대머리였다. 저런 녀석이 예전 시대에 있었으면 람보 같은 영화는 장난이었을 텐데... 천막 밖으로 몸을 드러낸 녀석은 다시 천막 속에서 커다란 칼을 하나 꺼내 들고 우리 들을 바라보았다. “크흐, 아직 젖도 떼지 못한 것들이 벌써부터 어른을 놀리려고 하다니, 호? 그래도 괜찮은 물건들을 가지고 다니는군. 너희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분명 이번 대쟁투에 참 가하는 녀석들이 아니렸다? 크흐흐 그럼 내가 저것들을 가지고 싶으니 양보를 하라고 해도 피하지는 못하겠지?” 여기서 칼끝으로 가리키며 저것들이라 부른 것은? 당연히 수아와 풍아를 말하는 것이었다. 당장이라도 날뛸 것 같은 풍아를 광아가 간신히 잡고 있는 중이다. 그래도 지금 우리 가 암흑제국에 와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긴 했는지 풍아가 발작을 간신히 참고 있는 것 같다.(광아가 말리는 손을 떼는 순간 어찌 될지는 모르지만...) “그랬단 말이지? 그럼 이걸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어쩐다? 누가 가서 저 비계덩 어리를 잠재우고 올래?” 나는 화아와 지토에게 물었고 당장 칼을 들고 나선 것은 화아였다.(사실 쟁투를 걸어 오는데 피하는 것은 암흑제국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것이다. 더구나 이렇게 구경꾼이 모인 자리에서는 더더욱.) “하하, 몸 좀 풀어 볼까? 쟁투? 난 그런 거 상관 않는 사람이야. 하지만 도전은 받 아주지.” 화아가 칼을 들고 앞으로 나서자 덩치가 주위 사람들에게 쟁투에 대한 증인으로 요청 했고, 구경삼이 주위를 메우던 사람들 중에서 증인을 자청한 자들이 있었다. “흐흐, 너희들의 목숨은 물론 이 계집들까지도 걸린 싸움이니 잘 해야 할 것이다.” 덩치가 칼을 들고 앞으로 나서자 주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조금씩 들려왔다. “저 녀석 6년 전에 24인 최종 결전까지 올라갔던 그 자이곱 아냐? 맞는 것 같은 데?” “글쎄,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네. 나야 그 때 자세히 보지를 못해서 말이 야.” “맞아 저거 자이곱이야. 누군지 몰라도 재수 없는 녀석들이군. 자이곱에게 걸리다 니 말이야. 저거 6년 전 대쟁투에서 별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고 자기 스스 로 성에서 나가서는 부랑아들 사이를 전전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최강 24인 중에 들 었던 자가 저런 천막에 있다니 놀랍군.” “어쨌든, 우리 내기나 하는 것이 어떨까? 난 자이곱에게 걸지.” “미친놈, 그런 누가 저 뻘건 핏덩이에게 걸라는 거냐?” “혹시 알아? 핏덩이가 이기면 큰 돈이 생길 텐데? 모험을 하는 녀석이 있을지? 클클 클.” 하지만 그런 내기가 성립되기 전에 둘은 벌써 칼을 맞대고 있었다. 자이곱이라는 녀석은 아무리 보아도 힘을 위주도 하는 도를 쓰는 것 같았지다. 하지만 겨우 그런 실력으로 어떻게 24강에 올랐을까 하는 의아심이 들 정도의 실력이 었다. 몸이 느렸고, 칼에는 예기가 없었고, 동작은 컸던 것이다. 물론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그 검을 받아 치는 것도 어려울 괴력이 실려 있는지는 모 를 일이었지만 화아에게 그런 것은 통하지 않았다. 오직 실력으로 해결을 해야 할 터 였지만 자이곱이란 녀석의 실력은 그 정도가 되지 못했다. “크흘흘. 제법 큰 소리를 칠 정도는 된다는 거로군. 이 정도로 몸 풀기가 끝났으면 이제 본격적으로 놀아볼까?” 화아와 거리를 벌인 자이곱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칼을 땅에 꽂고 손에 인을 맺었 다. “크흐흐 나와라 존재의 귀속. 크라튼.” 역시나 다른 재주가 있었으니 24강에도 들었겠지. 자이곱이 소환을 한 것은 갑옷이었다. 아니 갑옷처럼 생긴 생물이라고 해야하나? 자 이곱의 등 뒤에 붙어서 촉수처럼 생긴 것으로 갈비뼈 쪽과 가슴 어깨를 감싸는 모습 으 로 굳어진 것이었다. “클라튼이라고 한다. 좀처럼 칼로 상처를 입히기는 어려울 것이다. 물론 미안하게 도 대 마법 능력도 아주 뛰어난 녀석이지. 더불어 이렇게 주인의 스피드와 근력도 높 여 주는 기능도 있지.” 말과 함께 칼을 들고 화아에게 달려든 녀석의 속도는 좀 전의 속도에 비할 바가 아니 었다. 그리고 급히 칼을 들어 막은 화아가 짧은 신음과 함께 뒤로 날려 가는 것으로 그 힘 도 짐작하게 만들었다. “크흑, 제법이군. 본신의 힘이 아니라 다른 힘을 빌린다는 말인가? 그럼 나도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해야 하지 않겠나?” 화아는 투덜투덜 땅바닥을 짚고 일어나며 몸에 묻은 흙을 털었다. “귀속된 존재여 그 모습을 드러내라 소환 아눈.” 화아의 부름에 신계에 갔던 아눈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넌 별 재주도 없으니까 도속으로 들어와서 도를 지탱해라. 평범한 도검으로는 상처 를 낼 수 없는 갑옷이라니 너의 힘을 견딜 수 있는지 알아보자.” 화아는 그렇게 아눈을 자신의 도속에 넣고(원래 바위 정령족이 만든 도라서 쓸 만 할 텐데 거기에 아눈까지 더해지면...) 자이곱에게 다가갔다. “잠시 방심을 했군. 아무튼 기다려 줘서 고맙다. 그럼 나도 받은 것을 돌려주지. 간 다.” 화아의 반격도 지금까지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내가 가끔 쓰는 신법을 이용한 접근과 타격으로 이어진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유효했다. 자이곱이라는 녀석은 화아의 변화 많은 신법을 따라가지 못하고 옆구리에 일격을 내 어 준 것이었다. 퍼걱! 피시싯! 끼이이익 화아의 도가 자이곱의 옆구리를 감싸고 있던 갑옷을 강하게 때리는 순간 갑옷은 열기 를 견디지 못하고 녹아들었고 자이곱의 등에서는 마수의 비명인 듯한 소리가 들렸다. “크흑. 제법이군. 그럼 어디 이건 어떤가?” 자이곱의 도가 빠르게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내가 보기에는 아주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도신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한꺼번에 8 개 정도의 도신이 뻗어 나오는 것처럼 느끼기에 충분한 도술刀術이었다. 화아도 그 빠른 도의 속도에 미처 적응을 하지 못했는지 급하게 뒤로 몸을 빼며 도 를 휘둘러 방어에 들어갔다. 하지만 결국에는 어깨 부위로 찔러 온 도는 막지 못하고 작은 상처를 내 주고 말았 다. 비록 작은 상처라고 해도 상처가 생긴다는 것은 공수 양면에 있어서 치명적인 약점 이 될 수 있었다. 아무리 정령이라고는 해도 물질계의 현신해 있는 상태에서 몸에 상 처를 입으면 그 상처를 통해서 정령력이 빠져 나가게 되는 것이다. (물론 내가 힘을 더해주면 그런 것이야 문제가 아니지만 동작에 무리가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화아는 거칠게 자이곱의 도를 쳐 내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나 여유를 만들었다. “이런, 내가 상처를 입은 것은 처음인 것 같군. 결국에 이렇게 전공이 아닌 것으로 싸움을 해서 너를 이기는 것은 어렵다는 말인가? 좋아 본격적으로 상대를 해 주지.” 화아가 그렇게 말을 하는 순간 내 몸에서 상당량의 마력이 빠져 나가는 것이 느껴졌 다. “그 갑옷이 어느 정도의 항마력을 지녔는지 시험을 해 보겠다. 간다!” 화아의 말이 끝나는 순간 자이곱의 주위로 불길이 치솟았다. 너울너울 타오르는 불길이 아니라 날카로운 기세로 타오르는 불길이 순식간에 자이곱 을 둘러싸고 만 것이다. “허헉!!” 자이곱은 급히 팔과 다리를 모아서 그 불길이 닿는 몸을 최소한으로 만들었다가 몸 을 펴며 도약을 했다. 아마도 불이 붙은 범위를 벗어나 보려는 시도인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타오르는 불은 화아의 의지에 의해서 피어난 것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빠 른 속도로 이동을 한다고 해도 그 불을 떨어뜨린다는 것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었다. 결국 몸을 날리고도 불길을 벗어나지 못한 자이곱은 몸을 웅크리고 땅에 몸을 붙였 다. “하하, 이젠 항복을 하는 것인가? 땅에 엎드려 빌다니 말이야.” 화아가 그렇게 자이곱을 놀렸지만 놀랄 일은 그 직후에 일어났다. 자이곱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런 자이곱의 몸은 전체가 온통 그 괴상한 마수로 덮여 있었다. 머리카락 한 올도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모습이었던 것이다. “크흐, 놀랍군. 내가 크라튼의 최후 모습을 이런 자리에서 보이게 되다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곧 죽음이란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네가 아무리 불을 다루는 술사라 하 더라도 용암 속을 헤엄치는 크라튼의 피부를 상하게 할 수는 없다. 그럼 이번에는 내 가 당한 것을 돌려주도록 할까?” 어느새 자이곱의 주위에서 타오르던 불꽃은 사라지고 없었다. 자이곱을 둘러싼 크라튼이라는 마수는 맘맘과 비슷한 체질인 모양이었다. 몸 전체를 펼쳐서 자이곱의 덩치를 감싸고 있었으니 말이다. 특히 눈까지 모두 덮어 버려서 전 혀 피부가 드러나지 않게 만든 모습은 자이곱을 사람이 아닌 괴물로 보게 만들고 있 었 다.(우들두들한 피부와 머리 위로 덮인 부분에는 뿔 같은 모습도 붙어 있었다. 나름 대 로 코디에 신경을 쓴 복장인가?) 자이곱은 급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손을 들어 화아를 가리키는 것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날카롭게 뻗어 나온 크라튼의 촉수가 공격 무기였다. 하지만 그 정도의 공격은 곧 화아의 도에 막혔고 아눈의 열기에 화상을 입고 말았다. “좋아, 좋아. 이렇게 되면 내가 자존심이 좀 상하는군. 불을 이용해서 어쩔 수 없 다? 웃기는 소리. 내가 아눈의 힘을 빌린 이 검으로 공격을 해도 충분히 너를 어쩔 수 가 있겠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불로 태워주지. 다시 한 번 간다!” 화아의 말과 함께 자이곱도 움직였다. 자이곱의 몸에서는 수많은 촉수들이 뻗어나가 화아의 몸을 휘감았고 화아는 그런 것 에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자이곱의 주위에 화염을 일으켰다. 둘 모두 상대의 공격은 피하지 않을 생각인 모양인지 촉수에 얽매인 상태에서도 화아 는 여전히 화염의 온도를 높이고 있었고, 자이곱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의 대치상태가 계속되는가 싶은 순간 화아의 몸을 감고 있던 촉수들이 떨 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이곱을 둘러싸고 있던 화염의 색을 적색에서 보라색 파란색 초록색을 거쳐 서 드디어는 백색으로 변해가고 있었고 자이곱의 몸에서는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었 다. “으으흑. 아아아악!! 그, 그만 해라. 내가졌다.” 아마도 더 이상 마수가 견디지 못하고 역소환이 될 것이란 것을 느낀 모양이었다. 화아가 자이곱의 몸에 붙은 화염을 끄는 순간 크라튼이라는 마수는 역소환을 당해 버 렸다. 아마도 조금만 더 있었으면 자이곱은 재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백색의 불꽃이란 수 천도를 넘어서는 것이니 그것이 몸을 덮친다면 순식간에 불타고 말았을 것이다. “크아악. 내 얼굴. 내 팔. 크흐흑.” 자이곱의 상태는 상당히 좋지 않았다. 아무리 마수가 온도를 견뎌 주었다고는 하지만 그 전에 받은 공격에서도 많은 화상 을 입은데다가 이번 공격에서도 상당한 피해를 입은 듯 온 몸에서 물집이 생겨나고 있 었고 민대머리 머리는 완전히 물에 삶아놓은 문어가 되어 있었다. 땅바닥에 쓰러져 제대로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는 자이곱에게 수아가 다가갔다. 그리고 자이곱의 상처를 돌보기 시작했다. “잠깐 움직이지 말아요, 그렇게 움직이면 상처에 흙이 들어가서 제대로 낫지를 않아 요. 곧 아프지 않을 거예요.” 수아는 그렇게 자이곱을 달래며 상처 곳곳에 치료 마법을 걸어주었다. “그런 녀석을 뭐한다고 치료까지 해 주는 거냐? 수아야 그만하면 죽진 않을 테니 그 냥 가자.” 지토가 보기 싫다는 듯이 수아를 재촉해서 끌고 왔다. “수아는 오빠 생각은 하지도 않고 저 녀석을 먼저 치료해 주다니... 이럴 수가 있 단 말인가 .... 이 슬프구나.” 한 쪽에서는 화아가 왠지 삐진 것 같은 목소리로 투덜거리고 있었다. “오빠는 오빠가 치료 마법 쓰면 되잖아요. 내가 해 줘요?” 화아의 말을 들은 풍아가 한 마디 쏘다 붙였다. 그래도 수아가 대충 치료를 마친 덕분인지 자이곱의 상태는 그런대로 봐 줄만은 했 다. 군데군데 타 들어간 옷이야 그렇다고 해도 어느 정도는 몸에 났던 화상들이 치료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 구경을 하고 있던 사람들 중에서 몇이 화아에게 다가갔다. “그럼 이제부터 쟁투의 결과에 대한 확인이 있겠습니다. 방금 싸움에서 패한 자이곱 이 가진 일체의 것과 그의 목숨까지도 이번 쟁투에 걸렸던 것이므로 이제 자이곱이 가 진 모든 지위와 권리를 넘겨드리겠습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그들은 다름 아닌 쟁투의 증인이었던 모양이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겨우 저따위가 지닌 물건이나 지위를 얻고 싶은 생각 은 없습니다. 그냥 이건 서로의 실력을 겨루는 것일 뿐이었소. 그러니 그런 쓸데없는 서류일랑은 저리 치우고 가서 얼큰히 적당히 즐기시오. 형님 이들에게 몇 푼 주시지 요?” 화아는 그렇게 말하며 증인들을 나에게 떠밀어 보냈다. “그렇게 하시오. 어차피 그 증서를 가지고 간다고 해 봐야, 자이곱이 가진 물건도 얼마 되지 않으니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도 얼마 되지 않을 테니 이걸 가지고 가서 술 이나 한 잔씩들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어떻소?” 나는 품속에서 약간의 보석을 꺼내 보이며 말했고, 그들도 별다른 불만은 없는지 서 류를 나에게 넘기고는 보석을 가지고 사라졌다. “자, 그럼 우리는 빨리 들어가자. 이러다가 아르미엘 사제가 준다는 저녁도 못 먹을 지 모르겠다.” “네, 그래요. 어서 가요.” “어떤 음식이 나올지 기대가 되는군. 크흠.” 우리들이 그렇게 완전히 자이곱을 무시하고 떠들며 천천히 숙소로 통하는 이동진을 향해 가고 있을 때, 자이곱은 다친 몸을 이끌고 다섯 발자국 정도 떨어진 곳에서 우 리 들을 따라 오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이동진위에 오르려고 하는 순간 자이곱이 우리를 불렀다. “저기 잠깐만, 그렇게 가 버리면 저는 어쩌라는 말씀이오?” 순간 우리들 모두의 시선이 자이곱에게 쏠렸다. “어쩌긴요? 그냥 가시면 되잖아요? 편하게 생각하세요. 그냥 대련 한 번 했다고 생 각하면 그만이지요.” “솔직히 성질 같으면 어디 몇 군데 부러뜨리고 싶긴 하지만, 그래도 싸움을 하는 도 중에는 비겁하지 않았으니 그 정도로 하고 끝내는 거야. 그러니 그만 가 보라고.” “당신이 조금 다치고, 마수도 상처를 입어서 이번 쟁투에서 불리하게 되었다고 해 도, 그것은 당신이 자초한 일이니 저희 잘못이 아니지요. 사실 따지고 보면 저희 화 형 님의 급한 성격도 한 몫을 한 싸움이었기에 당신에게 심한 짓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 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있었던 일은 잊고 그냥 돌아가십시오.” 풍아 화아 광아의 말이다. 하지만 자이곱은 그 말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쟁투의 결과가 나온 이상은 그 결과에 따라야 하는 것이 법이오. 내가 도망 을 간다고 해도 어차피 도망자의 신분이 될 뿐이오. 그러니 곁에 있도록 해 주시오. ” “이봐, 이걸 가지고 사라져. 그럼 아무 문제가 없을 거야. 난 귀찮은 것은 질색이거 든.” 나는 자이곱의 말을 오래 듣지 않고 내가 가지고 있던 쟁투 결과에 대한 서류를 던 져 주고는 이동진 위로 올라섰다. 그러자 동생들과 지토가 우르르 따라 올랐다. 순식간에 응접실 맞은편으로 이동한 우리들은 곧장 응접실에서 저녁을 찾아 먹고(음 식만 있고 사람이 없었다.) 방으로 돌아왔다. 이른 저녁 시간에 숙소에 들어 온 우리들은 별로 할 일도 없이 무기를 손질하거나 환 수들을 다시 소환해 오거나 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란이는 빨리 불러 주지 않았다고 상당히 오랜 시간 불만을 늘어 놓았다. 그래도 유모를 만나서 즐거웠던 모양인지 유모에 대한 이야기를 한동안 늘어놓아서 무료한 저녁 시간을 줄여 주기는 했다. -어쩌란 말인가 이 가슴을.... - 그렇게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다 잠든 밤. 나는 잠결에 밀려드는 이상한 느낌에 잠을 깨었다. 그것은 내가 자기로 했던 그 방에서 흘러나오는 느낌이었다. 다른 동생들과 지토는 아무 느낌도 없는지 잠에서 깨지 않았고 나 홀로 깨어난 것이 조금은 이상했다. 너무도 강렬하게 느껴지는 느낌. 어쩌면 나를 부르는 것 같은 .... 나는 동생들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그리고 옆방(원래 나에게 배정된 방)으로 걸어가 문을 천천히 열었다. 마법등이 희미하게 켜져 있는 방안에는 넓은 침대와 탁자, 의자가 놓여 있었고, 아무 런 인기척도 없었다. 하지만 그 방 안에 무엇인가 나를 부르는 것이 있었다. “누구냐? 누가 나를 부르는 것이냐?” 나는 낮은 소리로 입을 열었고 내 목소리는 방안으로 물결치듯 퍼져 나갔다. 하지만 방 어디에서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나는 다시 천천히 걸어 방의 중앙에 놓인 탁자와 의자로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 속으로 상당히 떨리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귀신이 나온다고 해도 별로 무서울 일은 없을 텐데도 상당한 긴장이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나는 의자 깊숙이 몸을 누이며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방안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계속해서 나를 부르는 무언가만 느껴지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흐르고 방안을 메우고 있던 그 느낌이 천천히 밀려가기 시작했 다. 그리고 나도 그 느낌을 따라 발을 옮겼다. 복도에서 그 느낌의 끝을 따라 잰걸음을 놀린 내가 도착한 곳은 처음 이 곳을 왔을 때 본 적이 있는 마신상들 앞이었고, 여전히 나는 거대한 문 쪽으로 발을 옮기고 있 었 다. “이런, 이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하는 것일까?” 나는 결국 거대한 문 앞에서 망설였다. 밀면 밀릴까? 밀고 들어가도 될까? 내가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마법진을 통해서 사람이 나타났다. 그 순간에 일어나는 마력의 이동으로 이미 느꼈던 것이기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지 만, 정작 나타난 사람은 조금 놀란 모양이었다. “루탄님께서 여긴 무슨 일이시지요? 이 늦은 밤에.” 그렇게 나타나 입을 연 사람은 아르미엘 이었다. “죄송합니다. 사제님.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떻게 생각을 하실지 모르지만 이 문 안 쪽에서 저를 부르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방을 가득 채우던 그 느낌을 따라 여기까 지 온 것입니다. 뭐 저도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말입니다.” 나는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아르미엘 사제에게 변명을 겸한 질문을 던졌다. “루탄님을 부르는 무언가...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곧 때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조금 더 기다리시지요.” 아르미엘은 그런 존재를 부인하지 않았다. 정말 문 안에는 나를 부르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왠지 그것이 가슴에 아릿한 저림을 던지고 있었다. 나는 아르미엘에게 인사를 하고는 천천히 방으로 돌아왔다. 동생들과 지토가 자고 있는 방이 아니라 나에게 배정된 그 방으로 간 나는 의자에 다 시 깊숙이 몸을 묻고 생각에 잠겼다. 무엇이 나를 부르는 것일까? 이런 느낌은 처음 가져 보는 것인데, 무언가 나를 애타게 그리워하는 듯한 느낌. 그렇지만 내가 그리워 할 사람들은 이미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었다. 넥스도 쉬벡 도, 유소까지도. 그런 지금 나를 이토록 그리워할 존재가 누구일까? 왜 이렇게나 가슴이 저민 것일까? 불현듯 생각이란 의미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가슴으로 저미어오는 이 느낌이 너무도 생소하면서 안타까웠다. 나는 그렇게 의자에 몸을 묻고 밤을 세웠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다들 나를 찾아 방으로 몰려 왔을 때에도, 잠시 나를 그냥 두라는 말로 지토와 동생 들을 내 보냈다. 지토와 동생들도 하룻밤 사이에 나에게 일어난 변화를 알지는 못했지만 느끼는 모양 이었다. 무언가 변해 버린 나. 나는 아침도 거르고 점심도 거르고 저녁도 걸렀다. 가끔 수아와 풍아가 나를 보기 위해 방으로 들어왔지만, 변함없는 자세로 앉아있는 나를 보고는 말없이 방문을 닫곤 했다. 그렇게 하루의 시간이 흐른 모양이었다. 햇빛이 들어오는 창이 없는 방이라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없어야 하지만 내 몸의 감 각은 정확히 해가 지는 때를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다시 밤이 깊어갔다. 그 깊은 밤, 나를 찾는 그 느낌은 복도를 밀려와서는 곧장 내가 있는 방으로 달려들 었다. 여전히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미세한 공기의 흐름도 없었고, 마력의 변화조차도 없었지만 나는 확연히 무엇인가가 아니, 누구인가가 방으로 들어온 것을 느낄 수 있 었 다. “누구지? 누구기에 이런 느낌을 주는 것이지? 왜 이렇게 안타깝고 왜 이렇게 절실하 지? 그리고 왜 이렇게 힘들어하지? 누구야? 누구냐고?” 나는 그렇게 빈 방안을 울리는 소리를 쳤다. 깊은 가슴속에서 이제껏 떠오르지 않던 숱한 감정들이 살아나 날뛰기 시작했기 때문 에 만약 내가 이렇게라도 소리를 지르지 않으면 의자에 몸을 묻은 채, 눈물이라도 흘 릴 것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쓸쓸했다. 허전했다. 빈 가슴으로 바람이 쓸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자꾸만 내 가슴 을 그렇게 자극하는 무엇이 방 안에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변한 가슴으로 자꾸만 파고들어오는 무엇이었다. 나는 몸을 일으키고 방 안을 무엇인가로부터 도망을 가듯 배회하기 시작했다. 자꾸만 가슴으로 파고드는 무엇인가를 피하고 싶은 느낌이었다. 내가 그렇게 도망을 가면 너무도 안타까워하는 그것이었지만 내가 그것에게 젖어드는 것이 두렵게 느껴지 기도 했다. 나는 방을 서성이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어제와 같이 그것이 천천히 방을 빠져 나가더니 빠르게 사라져갔다. 나는 홀린 듯 그것을 따라가다가 방문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어차피 거대한 문 앞에서 돌아와야 할 것이었다. 나는 다시 방으로 돌아와 의자에 몸을 묻고 아침을 기다렸다. 날은 밝았고 동생들은 다시 나를 찾아왔다가 돌아갔다. 그리고 아침나절이 지나기 전에 아르미엘 사제가 나를 찾아왔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루탄님. 성녀님께서 루탄님을 뵙고 싶어 하십니 다.” 아르미엘은 나에게 성녀가 찾는다는 말을 전했다. “사제님, 어제 밤에도 그것이 나를 찾아 왔었습니다. 저는 성녀님 보다는 그것이 무 엇인지가 더 궁금합니다. 오직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죄송합니다. 사제 님.” 나는 한 치도 몸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암흑교의 성녀라 할지라도 나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 가슴에 흔적을 남기 그것이었다. “루탄님, 루탄님께서 성녀님을 만나시면 그것에 대해 아시게 되실 것입니다. 그러 니 서두르세요. 시간이 길지 않습니다.” 아르미엘은 조금 조급해진 모습이 되었다.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이 정말로 느껴졌다. 무슨 시간을 말하는 것이지? “좋습니다. 제가 관심이 있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실 분이라면 만나야겠지요. 그럼 가시지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죄송하지만 일행분들은 여기서 기다려 주셨으면 합니다. 함께 가시는 것은 어렵습니다. 성녀님께서 루탄님만 청하신 것이니 말입니다.” “좋습니다. 동생들과 지토는 이 곳에서 기다리라고 하지요. 하지만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이야기를 해 주셔야 일행들이 걱정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아르미엘 사제의 말에 대답을 하자 아르미엘은 곧 대답을 했다. “길면 7일이고 짧으면 6일이 될 것입니다. 어쨌든 대쟁투가 벌어지기 전까지는 이곳 으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에? 무슨 말이죠? 7일이라니, 오빠를 그렇게 오랫동안 어디로 데리고 간다는 거예 요? 그게 말이나 되요?” “그러게 형과 그렇게 오래 떨어져 있을 수는 없는 일이지. 아무렴.” “그건 좀 어렵겠군. 루탄 너는 어떻게 생각을 하냐?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그렇 게 오래 떨어져 있는 것은 ...” 풍아 뿐만이 아니라 화아 지토까지 방문을 박차고 들어오며 반대를 하고 나섰다. 문 밖에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문제가 벌어질 줄은 몰랐다. 그리고 나도 7일이나 동생들과 헤어져 있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아르미엘 사제님, 저도 가족들과 그렇게 오래 떨어져 있어야 하는 일이라면 동행하 기가 어렵겠는데요. 우린 그렇게 오래 헤어져 있어 본 적이 없어서 말이죠.” 내가 그렇게 말하며 아르미엘을 바라보았을 때, 아르미엘의 몸이 떨리는 것을 보았 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그것이 두려움이 아니라면 분노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지 만 사제의 몸에서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약간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고 지나 갔다. “하지만 루탄님께서 지금 가시지 않으시면 두고두고 후회하실 것입니다. 정히 일행 분들과 헤어지기 싫으시면 반지 속에 모시고 가시는 방법도 있지 않습니까? 대신 절 대 로 성녀님 앞에서는 나타나지 않으신다는 조건이라면 말입니다.” 하지만 아르미엘의 이 말은 절대로 그냥 지나갈 성질의 말이 아니었다. 우리 일행들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누구이며 내 일행들이 어떤 존재들인지를 알고 있는 사람. 그것도 지금까지의 어떤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여기 있 는 것이다. “어떻게 우리들을 알고 있는 거죠. 거기다가 반지에 대한 것까지 알고 있다니, 정 말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수아가 왠지 모를 날카로움으로 아르미엘에게 쏘아붙이듯 물어본 질문이었다. “그것은 성녀님을 만나 보시면 아시게 될 것입니다. 저는 성녀님에게 들은 말씀을 전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게 대답을 피하는 아르미엘을 어떻게 해 볼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아르미엘이 우리에게 호의적이었다는 이유 때문에도 아르미엘에게 심한 말 이나 행동을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좋습니다. 사제님. 일행들은 여기에 두고 가기로 하지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반발하는 동생들과 지토를 보며 이야기했다. “내가 어디에 있든 너희들은 나를 알 수 있잖아.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그 리고 만약 위험한 일이 있으면 볼 것 없이 그대로 정령계로 돌아가거라. 괜한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알았지? 너희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내가 얼마나 슬퍼 할지를 안다면 몸조심하고 기다리고 있어라. 심심하다고 사고치지도 말고.” 이런 내 말에 모두들 불만이 가득한 모양이었지만 나는 마지막 말로 녀석들의 입을 막았다. “내 가슴에 흐르는 이 느낌을 너희도 알지? 이것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꼭 알 아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미칠 것 같은 느낌이거든. 그러니 아무 소리 말고 이 해 를 해 주면 좋겠다.” 결국 나의 이런 말에는 아무 대꾸를 찾지 못했는지 지토와 동생들은 안타까운 눈빛 이 되어버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절대로 루탄님에게도 일행 분들에게도 부슨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을 드립니다. 그럼 루탄님 이리로 따라 오시지요.” 그렇게 앞장선 아르미엘은 그 거대한 문이 있는 방으로 나를 안내했고, 가족들이 따 라오는 것을 말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큰 문 앞에 섰을 때, 아르미엘은 가족들에게 더 이상은 함께 갈 수 없다는 말 로 배웅이 끝났음을 알렸다. 그리고 아르미엘은 나를 문 옆에 있는 작은 이동진 위로 데리고 갔고, 그 곳에서 나 는 다시 순간이동을 했다. 그리고 내가 도착한 곳은 돌로 지어진 복도였다. 높이는 겨우 3미터가 되지 않는 높 이에 넓이는 2미터도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복도의 양옆으로 마법등이 간간이 켜져 있어서 복도가 어둡지는 않았지만 전체적으 로 음습하다는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이리로 곧장 가시면 성녀님께서 기다리고 계실 것입니다. 저는 곧 음식이라도 조 금 장만해서 가지고 가겠습니다. 먼저 가 계십시오.” 그리곤 아르미엘은 어떤 마법적이 흔적도 없이 복도에서 사라져 버렸다. 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아르미엘의 수단이 궁금하기는 했지만 일단은 성녀를 만나 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의 복도를 지나 한 참을 걸어간 나는 결국 거대한 원형 둠으로 나오게 되었다. 이 정도의 크기라면 실내 농구장 정도의 크기가 될까? 내가 느낀 둠의 크기는 그 정도였다. 그리고 원형의 바닥 중앙에는 제단과 같은 석조 구조물이 있었고, 그 위에 한 여자 가 누워 있었다. 나는 천천히 그 여자에게 걸어갔다. 갈색 웨이브 머리카락과 왜소한 체구. 하늘색 드레스를 입고 누워있는 여자. 시원한 이마와 오똑한 코와 작고 도톰한 입술을 다물고 큰 눈을 감고 누워있는 여자. “이런 일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지?” 나는 제단 앞에서 망연자실 서 있었다. 내 앞에 누워있는 여자는 분명 그녀다. 이루비아 리르몬. 1000년 전 공물 호위를 맡아 한타의 왕국으로 왔던 남자치령의 소령주. 그 여자가 지금 내 앞에 누워있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정리되지 않는 머리로 이루비아 소령주를 바라보고 있을 때, 또 다시 내 주위를 감도는 느낌. 너무 애틋하고 너무 잘게 부서져서 더 부서질 것이 없은 가루를 갈고 또 가는 사람 의 심정 같은 그런 느낌이 나를 감싸고돌았다. 그리고 그 느낌이 천천히 나의 손을 잡아 이루비아 소영주의 이마에 얹었을 때, 나 를 감싸고돌던 그 느낌들이 스며들 듯 이루비아 소영주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녀의 커다란 눈이 열렸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열리면서부터 한순간도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이루비 아 소영주의 눈, 그 속에 어제 그제 나를 감싸고돌던 그 느낌이 넘치도록 들어 있는 것을 나는 보았다. “오랜, 만이지요? 루탄님.” 자리에서 몸도 일으키지 않고 나를 보고 있던 이루비아 소영주가 처음 입 밖으로 낸 말이었다. 그리고 그 말을 따라서 흐르는 것은 눈꼬리를 따라 흘러 귓바퀴로 쏟아지 는 눈물이었다. 울먹임도 없이 그저 주르르 흐르는 눈물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적시고 있었다. 그런 이루비아의 모습에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얼굴에서 눈의 떼지 말아 야 한다는 명제를 부여받은 듯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 속에 들어 있는 것이 원망일까? 그리움일까? 기쁨일까? 절망일까? 나는 이루비아의 눈 속에 들어있는 숱한 감정들, 어느 하나도 그 극에 이르지 않은 것이 없어 보이는 그 감정들을 나 역시 눈으로 읽으며 아직도 그녀의 이마에 닿은 내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들은 오래도록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시간이 멎은 것처럼. “저를 좀 일으켜 주시겠어요?” 이루비아의 입이 다시 열리고 나온 소리는 이 말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머리와 등을 받치며 이루비아가 일어나는 것을 도왔다. 하지만 제단에 일어나 앉은 후에도 이루비아는 자세를 잡지 목하고 자꾸만 무너져 내 리려 했다. 결국 나는 이루비아 옆에 앉아 서로의 어깨를 기대는 방법을 찾았고, 우리들은 그런 모습으로 또 말이 없이 앉아 있었다. 조금씩 이루비아의 체온이 어깨를 통해 전해지고 이루비아의 향이 나에게로 스미고 있었다. 라일락? 아니 더덕의 냄새였던가? 아주 멀리까지 풍겨서 나의 호기심을 자아냈던 젊은 날의 어느 산행에서 맡았던 그 냄새가 나고 있었다. 결국에는 무엇이 내는 향인지 몰랐던 그 향이 이루비아에게서 풍겨오고 있었다. “말씀이.... 지금까지 단 한 마디도 하시지 않으시는군요.” 이루비아의 입에서 다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 목소리에 불안이 스미고 있었다. 나는 이루비아의 등 뒤로 팔을 올려 반대쪽 어깨를 잡아 주었다. 그것은 이루비아의 가슴을 스며드는 불안을 해소하기에 충분할 것이었다. 적어도 내가 이루비아에게 가진 가슴의 편린을 전하기에 부족하지 않을 것이기에... 비록 잠시잠깐에 생긴 가슴이라 할지라도. 이루비아의 머리가 내 어깨 위로 올라왔다. 와락 이루비아의 향기가 코로 밀려들었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렀다. 아무 말씀 마시고 제 이야기 좀 들어 주세요. 그래 주실 거죠? 그 때, 한타리아의 축제에서 루탄님께 받은 선물이 제가 세상에 태어나서 받은 가장 기쁜 선물이었단 걸 아세요? 제가 연회에서 루탄님 곁에서 떠들고 웃었던 것이 제가 그 때까지 살면서 느꼈던 가 장 행복했던 시간인 것을 아세요? 제가 유소에게 심법을 가르쳐 달란 것이 루탄님의 흔적이라도 가지고 싶었던 때문인 것을 아세요? 루탄님과 헤어지고 제가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아세요? 유소나 넥스님에게 불같이 화를 낼 때 가슴을 조이면서 얼마나 후회했는지 아세요? 이미 그 때에 제 가슴속에 루탄님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을 아세요? 하지만 루탄님은 모르셨겠지요. 겨우 열여덟이 되었을 뿐인 어린아이의 가슴속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신경도 쓰지 않으셨겠지요. 저도 루탄님이 그렇게 떠나시고 무척이나 후회하고 원망도 많이 했었답니다. 그러다가 칸타트에서 마족과의 계약을 맺을 때, 그 마족에 내어놓은 제안을 선뜻 받 아들였습니다. 그 마족은 저에게 루탄님을 만나거나 루탄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저를 쓰겠다는 말했 습니다. 그 동안 저는 잠을 자게 될 것이라고, 늙지도 않고 고통도 없이 꿈꾸듯이 기다리면 루탄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했지요. 아니면 루탄님이 돌아가시거나. 저는 당시에 이미 많이 지쳐 있었거든요. 쉴 사이 없이 밀려오는 괴물들을 막으며 소영주의 책임을 다하는 것도 싫었고, 그런 나를 두려워하고 멀리하는 사람들의 시선도 싫었고, 루탄님이 저를 미워하실 것도 싫 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냥 잠시 잠들어 있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동안 제가 해야 할 일은 마족이 대신 해 주겠다고 했으니까 말이죠. 아루비아는 잠시 말을 끊었다. 한꺼번에 많은 말을 하는 것이 힘겨워 보여서 안타까웠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잠들어 있었습니다. 아무 생각도 없었고 꿈도 꾸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어느 날 저는 깨어났습니다. 깨어났지요. 하지만 깨어나기만 했을 뿐, 여전히 눈은 감겨 있었고, 몸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아니 나중에 알았지만 몸은 이미 마족이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 의식이 갇혀 있 었던 것이지요. 그렇게 깊은 암흑 속에서 시간이 흘러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온통 암흑으로 가득 찬 곳에서 루탄님을 기다렸지요. 마족과의 계약이 끝나지 않은 것은 루탄님이 살아계시다는 것과 같은 것이었으니까 요. 그리고 그 깊은 암흑 속에서 저를 건질 수 있는 분은 역시 루탄님 뿐이었어요. 루탄님을 만나면 계약은 끝이 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루탄님은 오지 않으셨지요. 그렇게 또 시간이 흐르고 제 의식은 조금씩 어둠에 익숙해지고 두려움을 잊게 되었습 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기 시작했지요. 그렇게 어둠을 헤매고 다니다가 저는 조금씩 제가 갇혀 있는 곳에서 빠져나가는 방법 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가끔씩 마족의 기운이 약해지는 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그런 때에는 제가 잠시라도 어둠 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 니다. 그것을 알기까지 자그마치 400년이 지났지요. 물론 그 당시에 마족이 상당히 힘을 잃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저 는 마족이 잠시 힘을 거둔 상태에서 이곳 마족의 동굴과 루시퍼님의 신전을 돌아다닐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몸을 움직이는 것은 아니고 그저 의식만이 오고 가는 것뿐이지만요. 그렇게 의식만 움직이며 깊어가는 그리움만을 안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어쩌면 루탄님을 사랑하는 어린 마음은 이미 사라지고 없을지도 모르지요. 그저 이 깊은 암흑 속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만이 남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너무도 오래 절실하게 기다렸습니다. 루탄님이 오시기를... 그러다가 20년 쯤 전인가에 아르미엘을 만났습니다. 저를, 의식뿐인 저를 알아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특이한 능력을 지닌 아이였지 요. 그래서 그 아이와 함께 이 동굴과 신전에서 지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몇 개월 전에 루탄님과 일행을 보았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 소리를 들은 것은 석달 전이었지요. 저는 그렇게 자주 밖으로 돌아다닐 수가 없거든요. 삼 개월에 한 번씩 8일에서 10일 정도 밖으로 돌아다닐 수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때는 루탄님을 모실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대쟁투를 준비해야 하는 기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제가 다시 깨어날 수 있는 때를 맞 추어서 루탄님을 모시기로 했던 것이지요. 어깨에 머리를 묻고 상황을 설명하는 이루비아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없었다. 그저 지나간 일을 담담하게 늘어놓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담담함 속에 들어있는 절망의 깊이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둠과 암흑 속에서 얼마인지 모를 시간을 떠돌며 보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 한 일이었을까? 그리고 그 속에서 유일하게 가질 수 있는 희망이란 것이 나였다면 이루비아에게서 느 껴졌던 그 애틋함과 가슴 저림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이루비아가 말하지 않은 것이 있을 수도 있었다. 어찌 그 절망에서 벗어나는 방 법이 오직 내가 오는 것뿐이었겠는가, 어서 빨리 내가 죽어 주기를 바라기도 하지 않 았을까? 이루비아도 사람인 이상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으리라. 물론 지금으로선 이루비아가 나를 사랑하는지 좋아하는지는 알 수 없는 문제였다. 다만 지금 이루비아의 가슴속에 내가 절실한 사람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일 뿐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누군가에게 이토록이나 절실한 사람이 되어 본 적이 있을까? 하긴, 이제 내가 이루비아를 만남으로 그 절실함도 끝일지 모른다. 이제 이 여자의 기다림은 끝이 났고, 마족과의 계약도 그 효과가 끝이 났을 것이다. “이제, 당신은 어찌 되는 겁니까? 이루비아. 마족과의 계약은 끝이 났을 것이고 이 제 당신은 어떻게...” 나는 이루비아의 앞날에 대해서 물어 볼 수가 없었다. 천 년의 시간이 지나고 마족과의 계약이 끝난 후에 그녀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짐작 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는...” 말을 끊고 나를 올려다보던 이루비아의 눈에서 빛이 났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숙이 고 어깨에 무게를 실었다. “저를 데리고 가세요. 어디든지. 제가 지금 갈 수 있는 곳이 어디 있겠어요. 저를 데리고 가세요. 아니 그냥 따라 갈 겁니다. 루탄님을 따라서...” 이 여자의 눈에서 빛난 것은 결심이었던가? 아니면 의지였던가? “그럼 당신이 마족과 했던 계약은 완전히 끝이 난 것입니까? 혹시 그 계약의 대가 를 지불하기로 한 것은 아닙니까?” 나는 이루비아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아니요. 단지 늙지 않는 몸으로 꿈꾸듯 잠을 자는 대신에 그 마족이 저의 몸을 이 용해서 물질계에 자신의 영향력을 펼칠 수 있게 하는 것이 계약의 전부였어요. 다만 루탄님이 죽거나 내가 루탄님을 다시 만날 수 있을 때까지라는 약속이 붙은 것이 전 부 였으니 이제 제가 루탄님을 만났으니 계약을 끝이 난 것이겠죠. 그 마족이 약속을 지 킨다면 말이죠.” “그럼 지금 여기서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인가요? 그 마족이 올 때까지 기다 려야 한다는 것 같은데요?” “맞아요. 그래서 루탄님이 다시 돌아가시는 시간을 6일이나 7일 후로 잡았던 것입니 다. 이 마족의 동굴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은 의식뿐이지요. 들어오는 것은 가능하 지만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답니다.” 나는 이루비아의 말에 이상한 것을 느꼈다. “하지만 아르미엘은 ... ” “아르미엘은, 루탄님을 모시고 들어온 아르미엘은 정신체였습니다. 즉 아르미엘의 정신체만 따라서 이 곳을 들어왔다는 말이지요.” 결국에 음식을 준비해서 들어온다는 말은 거짓말인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앞으로 그 오랜 시간을 아무것도 먹지 않고 버텨야 한다는 말인가? “저기 그런데 이루비아 그럼 앞으로 굶어야 한다는 말인가요?” 내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어깨에 기댄 이루비아의 머리를 보며 물어보자, 이루비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마족이 올 거라는 것보다도 굶는 것이 더 문제인 거예요?” 귀엽군. 흠흠. 나는 그런 생각이 번득하고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흠, 아무래도 먹는 것이 중요하기는 하니까... 마족이야 설마 계약을 이행하지 않 겠다고 땡깡을 부리는 그런 녀석은 아닐 것 같고 말이죠. 적어도 칸타트에 있던 녀석 이라면 그 당시 인간계에 도움을 주기 위해 나와 있던 녀석일 테니 하급 마족은 아닐 것이고, 그럼 약속을 어기지는 않을 것 같은데... 별 걱정은 하지 않아요. 만약 문제 가 생기면 한 번 붙어 보는 거지요 뭐.” 이래서 남자들은 여자와 함께 있을 때에는 평소의 모습보다 더 기세를 올리고 허풍 을 내세우게 되는 것인가 보다.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 싶지만 그건 낯간지러운 때문에 꺼낸 말이 겨우 이 모양이니 말이다. “음식은 걱정하지 마세요. 아르미엘이 알아서 가져다 줄 거예요. 비록 직접 들어오 지는 못하지만 음식을 보내 주는 일 정도는 어렵지 않은 일일 테니까요.” 이루비아가 그렇게 말하고는 기대고 있던 어깨에서 떨어졌다. 그리고는 제단 아래로 걸어 내려갔다. 조심 조심. 처음 발을 딛는 어린 아이와 같은 몸짓으로... “오랜만에 걸어보니 이것도 쉽지 않은 일이네요. 언제나 훨훨 날아다니던 것이 이러 고 있으려니 힘들어요.” 몇 발 걸어본 것으로 이미 콧등에 땀을 달고 이루비가가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천천히 걸어 내려가 그녀의 옆에 섰다. “내 어깨를 짚고 걸어요. 그럼 조금 나을 테니까. 그런데 어디로 가려는 거지요?” 내가 그렇게 물어보자 이루비아는 씽긋 웃고는 말했다. “음식 냄새가 나요. 아르미엘이 음식을 보낸 모양이에요. 아주 오래 무언가를 먹는 다는 것을 잊고 살았어요. 먹을 것에 대한 욕심도 상당해졌지요.” 그렇기도 하겠군. 먹는 것도 삶의 즐거움 중에 하나라고 보면 그것에 대한 욕망이란 참기 어려운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것이든 있다가 결여된 것에 대한 갈증이야 말로 해 무엇 하겠는가? 경험하지 못 한 사람은 막연한 상상만이 가능할 뿐이다. 의지만이 살아 있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시각은? 청각은? 후각은? 미각은? 촉각은? 이런 것들을 하나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라면 도대체 어떤 것으로 인식을 하게 되었 던 것일까? 나는 무척이나 궁금했다. 물어볼 말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이루비아와 나는 처음 내가 도착했던 통로를 통해서 걸었고, 내가 처음 섰던 곳에 놓여진 음식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음식들이 올려진 쟁반을 허공에 띄우고(마법을 이용해서) 이루비아와 함께 돌아 가려고 했다. 하지만 마력이 움직이지 않았다. “음? 마법을 쓸 수가 없다니?”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경악성이 낮게 터져 나왔다. “루탄님 여기서는 어떤 마법도 쓸 수가 없어요. 지금은 모든 힘이 봉해져 있는 때거 든요. 그 마족이 돌아올 때까지는 이 상태가 바뀌지 않아요.” 나는 급히 아공간의 창고를 이용할 수 있는지 알아보았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불가능했다. 공간이 열리지 않았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내 몸 속의 기운들을 점검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 몸속에 갈무리 된 내공만은 변함없이 충만한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음식 쟁반을 들고 이루비아와 제단이 있는 곳까지 돌아왔다. 쟁반 위에는 이루비아를 위한 것인 듯 속에 무리가 가지 않을 부드러운 음식들로 가 득했다. 아르미엘도 오랜 시간동안 음식을 먹지 않고 지낸 이루비아의 몸 상태를 걱정했던 모 양이었다. 그나마 입에 넣고 씹어 먹을 만한 것은 부드러운 빵이 전부였다. 아~! 한심해진다. 그렇다고 내 음식까지 이런 것들로 주다니... 마족의 동굴 안에서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내 신체가 느끼는 감각과 아르미엘이 들여보내는 식사로 짐작할 뿐이었다. 이루바아 리르몬, 이 여자는 조금씩 기운을 찾더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하등 신기 할 것도 없는 모든 것들, 이를 테면 돌로 된 벽이라거나 제단이라거나 내 옷이라거나 머리카락이라거나 피부의 감촉이라거나 심지어는 자기의 옷과 몸에까지도 굉장한 관 심 과 흥미를 보이고 있었다. 아마도 그 오랜 시간동안 잃었던 감각들을 돌려받은 것에 대한 반응이 그렇게 나타나 는 듯 했다. 만지고 보고 냄새 맡고 맛보고 듣고.... 가장 기본적이라 할 수 있는 이런 것들을 그동안 얼마나 그리워하며 살았을지를 짐작 하게 하는 행동들이 이 여자에게 나타나고 있었다. 그렇게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다가 지치면 내게로 다가와 나에게 등을 기대고 앉아 있 는 것이 이 여자의 일과의 전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등을 기대고 나면 낮은 숨소리와 함께 잠이 드는 것이다. 나는 이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이성으로 되는 일일까? 이 여자가 나를 따라가겠다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것은 사랑일까? 집착일까? 아니면 원망일까? 그리고 나는 이 여자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일까? 처음 가슴으로 밀려들던 그 절절함이 조금씩 걷히기 시작하는 이 여자의 눈 속에 나 타나는 것은 어린아이의 천진함이다. 그 천진함속에는 아직 사랑이 깃들지 않았다. 남녀의 사랑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너무도 지고지순하지만 어린아이의 천진함 에는 없는 나이든 이들의 순수이다. 그토록 오랜 시간을 살아온 이 여자의 눈에 왜 어린아이의 천진함만이 남은 것일까? 그렇게 답이 없는 시간들이 흘러갔다. 변함없는 일상이 이어지고 이제는 이루비아가 나에게 등을 기대고 자는 것이 아니라 나를 안고 잔다는 것이 달라졌다면 달라진 것이라고 해야 할까? 계산상으로 내일이면 그 마족이 돌아오는 날이다. 그리고 이 여자를 데리고 나가야 할 것이다. 그 이후의 일이야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중요한 것은 이 여자를 데리고 나가야한다는 것과 마족과의 약속에서 벗어나게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만은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란 것을 자신할 수 있었다. 슬며시 잠든 이루비아의 머리카락을 쓸어 보았다. 갈색의 웨이브가 멋진 머리카락이 들려지고, 그 밑에서 시원한 이마와 감겨진 큰 눈 이 드러났다. 이 눈 속에 이제는 천진함만 남았다. 내 가슴을 들썩이게 만들었던 그 절절함과 애틋함과 아쉬움은 이제 없었다. 그 절망도 없었고, 그 원망도 없었고, 그 슬픔도 없었다. 그 기다림이 이제 없었다. 그리고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그런 것들이 없어지고 이루비아의 눈에 기쁨이 남 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를 만나 기쁘고 행복하다는 그것이 보이지 않았다. 나를 안고, 나에게 안겨 잠이 들 때도 이루비아는 참, 맑고 깨끗해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오감을 찾은 후에 돌 벽과 옷감과 제단, 혹은 갖은 음식들에게 보이던 그 호기심마저 도 나를 보는 눈 속에는 없었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는 갈등과 혼란만이 남았다. 이루비아는 아직 내게 사랑이 아니었다. 갑자기 이루비아의 맑은 눈을 보며 이런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 기억난다. ‘저토록 맑은 눈을 가지고만 있다면 아마도 난 저 여자를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그 건 마치 깨끗한 물 속에 물고기를 풀어 놓기 어려운 것과 같은 이유겠지. 살지 못할 테니 말이야.’ 그렇게 이루비아의 잠든 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동굴의 공간이 일렁이며 새로운 존재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족. 그것이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한 형체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기류의 형태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반투명체의 반물질半物質이라고 해야 할까? - 너는.... 그렇군. 드디어 이루비아와의 계약이 끝이 난 것인가? 그것은 잠시 나와 이루비아의 모습을 살피더니 그렇게 뜻을 전했다. 아직도 깨어나지 않은 이루비아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으며 나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 다. “그렇다고 봐야겠지. 내가 바로 계약의 매개체였던 그 사람이니 말이야.” - 그렇지. 계약이 끝났단 말이지. 그럼 이제 볼 일이 없으니 이만 가 봐야겠군. 그것은 그렇게 말하고는 한 쪽에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내었다. “이봐 잠깐만. 적어도 나를 이용해서 이루비아를 1000년이나 괴롭혔으면 그만한 보 상은 있어야 하지 않나?” 나는 그것을 그냥 보내고 싶지 않았다. 뭔가 머릿속에서 불안감이랄까 의구심이랄까 하는 것이 생긴 것이었다. ‘너무 쉽다.’라는 생각이... - 계약이었을 뿐이다. 서로의 계약 조건이 이행되었을 뿐인데 보상이란 있을 수 없 는 것이다. 일단은 관심을 돌리는 데는 성공했나보다. “그렇다면 계약이 끝났다는 어떤 증표라도 있어야하는 것이 아닌가? 단지 계약이 끝 났다는 말로 믿어버리기에는 마족이라는 족속들이 워낙 교활하다 들었거든.” 나는 조금 녀석의 비위를 건드려 보았다. - 큭큭. 나는 네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다. 하지만 너 정도의 능력이라 해도 인간 의 한계를 벗어난 것은 아니지. 그러니 함부로 날뛰지 말아라. 너 정도는 나에게 아 무 것도 아닌 존재에 불과하니 말이다. 그리고 분명 이야기하지만 내 입에서 계약이 끝 났 다는 말이 나온 이상 그것은 끝이 난 것을 의미한다.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슈마(Aeshma)([이란] 분노와 폭력의 악마.)님 계약의 파기는 두 계약자의 이름과 대신 루시퍼님의 이름으로 선언을 해야 이루 어지는 것이지요. 그렇게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실 텐데요?” 녀석의 말에 꼬리를 물고 나온 것은 의외로 아르미엘이었다. - 감히 루시퍼님을 모시는 사제가 나의 일을 방해하고 나서는 것이냐? 건방진 것. “대신大神께서는 어떤 말씀도 저에게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아이슈마님의 일이 루시 퍼님의 의지에 따른 것인지는 저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저 저는 사실을 이야기할 뿐입니다.” - 건방진 것. 지금까지 그 기척을 알고도 별 문제가 없어 두고 보기만 했더니 무서 운 것이 없는 모양이구나. 정신체로 들어온 것이 분명한(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갑작스럽게 나타나도록 모르고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아르미엘은 그 아이슈마라는 마족의 분노에 몸을 떨고 있었 지만 물러날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런 소란에 이루비아가 눈을 떴다. “아이슈마님이 오신 모양이군요. 그런데 무슨 일이지요?” “별 일은 아닙니다. 그저 아이슈마님께서 계약이 정당하게 끝이 났음을 알리려고 하 실 뿐입니다.” 이루비아의 질문에 아르미엘이 답했고 아이슈마라는 마족도 이루비아가 일어난 이후 로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이제 계약 당사자가 일어났으니 계약이 끝났음을 선언해 주어야 하지 않겠나? 아이 슈마?” 내가 그렇게 마족이라는 녀석에게 말을 건네자 더 이상 피할 길이 없다고 여긴 모양 인지 아이슈마의 목소리가 둠 안을 울리기 시작했다. - 나 아이슈마 아자젤은 인간 이루비아 리르몬과의 모든 계약이 완결되었음을 대신 루시퍼님의 이름으로 선언한다. 이로서 계약자들 사이에 어떤 이해도 남지 않았으며 인연의 끈도 없음을 선언한다. “감사합니다. 아이슈마님.” 아이슈마의 선언을 이어 이루비아의 감사 인사가 이어졌다. 그리고 한 쪽에 서 있던 아르미엘이 깊이 고개를 숙여보였다. 하지만 아이슈마라는 마족은 곧장 열어두었던 이동 게이트를 통해 사라졌고, 마지막 으로 녀석이 남긴 말소리가 둠을 흘러 다녔다. - 이미 이루비아 너의 역할을 끝이 났다. 이제 너를 대신할 녀석이 있으니 네가 없다 고 해도 별 상관은 없는 일이지... 하지만 네가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까... 나중 에 다시 보게 되겠..... 그렇게 녀석이 사라지고 마족의 동굴에는 굳어있던 마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렇게 순식간의 주위에서 요동치는 마력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토록 간단하 게 모든 마력들을 봉쇄하고 자신의 공간을 만드는 마족의 능력에 세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모든 상황은 끝이 난 것인가요? 그럼 이제 돌아가도 되는 거지요?" 나는 그렇게 이루비아와 아르미엘에게 물어 보았다. “물론입니다. 루탄님. 일행분들이 많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서 가시지요.” 나는 아르미엘의 대답에 이루비아를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이루비아, 이제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당신은 아직도 나와 함께 가고 싶습니까?” 내 질문에 이루비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무슨 말씀이지요? 제가 루탄님을 따라가면 안 된다는 말씀인가요? 무슨 문제가 있 는 건가요? 저를 떼어두고 가실 생각이신가요?”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오는 이루비아의 눈 속에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절망과 안타까 움과 두려움과 원망들이 마구마구 솟구치고 있었다. 이런 것을 감추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작은 감정들이라도 이 여자에게는 이렇게 절실하게 다가오는 것일까? “아니, 아닙니다. 내가 묻는 것은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그런 것이지요. 당신을 떼어 놓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급하게 변명을 했다. 내 말에 이루비아의 얼굴에서 불안과 두려움이 쉽게 가신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 도 안정이 되는 것을 보고, 아르미엘 사제에게 물었다. “여기에서는 제대로 좌표가 잡히지를 않는군요. 신전으로 이동하기가 쉽지 않아요. 나가는 방법을 아시나요?” “물론입니다. 루탄님이 처음 들어왔던 그 이동진이 지금은 활성화 되었을 것입니 다. 그 진 역시 쌍방향으로 작동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니 아이슈마님의 힘이 걷힌 이 상 제대로 작동을 할 것입니다.” “그럼 다행이네요. 일단은 이루비아님, 나가시지요. 이 지긋지긋한 곳을 벗어나야지 요?” 내가 다시 이루비아를 돌아보며 조금은 밝게 과장한 목소리로 말하자 이루비아는 다 시 천진스러운 눈빛으로 돌아와 나의 팔짱을 끼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처음의 그 이동진을 통해서 신전으로 돌아왔다. “오빠!.” “형님, 오셨군요.” “오빠 별일 없었지요?” “그런데? 저 여자는?” “그 여자다. 남자치령의 소령주.” “정말이네?” “어떻게 된 일이지?” 나를 기다리던 녀석들은 다섯인데 이렇게 말은 많은지... “그동안 잘 있었어? 별다른 사건은 없었지? 무사한 것을 보니 반갑구나. 응? 그런 데 란이는 보이지 않네? 무슨 일이야? 란이는 어디 간거야?” 다들 보였는데 란이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분명 소환을 시켜놓고 갔었는데 지금은 란이가 없었다. “란이는, 오빠가 사라지고 나서 곧장 역소환 당했어요. 파울 이야기로는 소환주의 기운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란이가 이 곳에 있지 못한 것이라고 했는데... 그래서 얼마나 걱정을 했다고요.” 수아가 그렇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래도 괜찮았어요. 우리들은 그래도 오빠를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 우리야 별 걱정 할 일이 없었지. 흐흠.” 아마도 내가 마족의 공간에 들어 있는 동안에도 이들은 나를 느낄 수 있었던 모양이 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런데 저 여자는 어떻게 된 거야? 분명히 그 여자 맞지 남자치령의 소령주 신분이 었던 그 여자.” 화아가 이루비아에 대해 물었다. 나는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내 어깨 뒤에 숨어있는 이루비아를 앞으로 끌었다. “그래 맞아. 자세한 이야기는 방으로 가서 하도록 하자. 응?” 우리는 그렇게 다시 신전의 응접실로 돌아왔다. “그러니까 이루비아가 1000년이나 오빠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이야? 정말?” 풍아가 대략적인 이야기를 듣고 보인 반응이었다. “그럼 이루비아는 이제부터 어쩔 생각이지요? 오빠와 함께 살 생각인가요? 이를테 면 오빠의 아내가 되려는 건가요?” 이건 수아의 반응이다. “그건 그렇게 물어 볼 문제가 아닌 것 같다. 루탄이가 말했지만 이루비아의 지금 감 정은 알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이 정확하지 않을까? 그 긴 시간동안 한 때 지니고 있던 얇은 감정이란 사라지고 없을 테니 말이야. 그리고 지금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걸. 기껏해야 집착이나 고집이 아닐까? 거기에 더한다면 두려움 때문에 기대고 싶은 마음일 것 같은데?” 이건 지토. “형수님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아직 무리가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형님의 마음이겠지요? 형님 이루비아님을 사랑하세요?” 광아다. 역시 날카롭다. 하지만 왠지 무자비하다는 느낌도 든다. 대답은 뻔한 것이고 그 대답 이 이루비아에게 상처가 될 것을 녀석도 알고 있을 텐데.... 그렇다고 침묵하고 있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다. “이루비아님에 대한 마음이라... 나도 모르겠다. 일단 오다가다 만난, 남이라고 생 각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이루비아님에게 달리 연정을 가진 것도 아니다. 처음 이 루 비아님의 의지가 나에게 왔을 때의 그 절실함과 그 애틋함, 아쉬움으로 가슴이 설렌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곧 사랑이라 할 수는 없지. 더구나 지금은 그런 설렘이 사라 졌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루비아님의 어디에도 나에 대한 애정이라 느낄 것은 없으니 무어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럼 이루비아님은 루탄 형님을 사랑하세요?” 내 대답에 곧 이어 이어진 광아의 질문이었다. 이루비아 역시 잠시 대답이 없었다. 이루비아의 눈빛은 참으로 다양하게 변한다. 지금은 당혹감일까? 아니면 초조함일 까? “저는 루탄님을 사랑합니다. 세상에 오직 한 사람뿐인 내 사람으로 사랑합니다. 떨 어져 살 수 없는 반쪽으로 사랑합니다.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줄 수 있는 그 런 사람으로 사랑합니다. 루탄님은 저의 하나뿐인 사랑입니다.” 이루비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의 말이었다. 하지만 사랑이 말로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루비아의 눈에서 사랑을 읽어내지 못 했다. 애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루비아님, 난 이루비아님에게서 사랑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루비아님이 저를 보시는 눈은 너무나 맑고 깨끗합니다. 일체의 사심도 욕심도 기쁨도 즐거움도 없 지요. 이루비아님이 바라보시는 책상이나 의자나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시는 감정의 어 떤 빛도 저를 보는 눈에서는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랑이라고 하시는 것은 이해 하기 어렵습니다.” 나는 솔직히 털어 놓았다. 맑고 깨끗하다는 것이 때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은 사실이다. ‘깨끗하다’가 아니라 ‘너무 깨끗하다’라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내 말끝에 이루비아의 눈에서는 슬픔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원망이 스며들기 시작했 다. 아픔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두려움이 물들기 시작했다. “저는, 루탄님이 저의 전부라 생각합니다. 곁에 있어서 기쁘게 생각하고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행복하다 생각하고 체온을 느낄 수 있어 제 맥이 뛰는 것을 느낄 수 있 습니다. 루탄님이 없이는 저를 생각할 수 없어요. 사랑이란 것이 무엇이지요? 저에게 루탄님이 전부로 느껴지면 그것이 사랑이 아닌가요?” 이루비아의 목소리에도 두려움과 슬픔이 묻어났다. “글쎄요. 그럼 저에게도 루탄형님은 전부입니다. 물론 다른 형제들과 친구가 있지 만 루탄님처럼 중요하진 않아요. 그리고 여기 있는 모두가 루탄님을 전부라 생각하 죠. 이것도 사랑입니다. 하지만 이루비아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이란 저희와는 많이 다 르게 느껴집니다. 그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광아가 이루비아의 말끝을 잡았다. “이루비아님, 저에게도 오빠는 전부예요. 저도 오빠에게 모든 것을 줄 수 있지요. 하지만 저와 이루비아님은 또 다른 것 같네요.” “큼.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야. 사랑이라고? 이젠 사랑이라는 것인가?” 수아의 말에 이어서 지토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곰방대에 불을 붙였다. “아~! 너무 골치가 아파요. 지금까지 이렇게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도하는 것을 배우 는데도 무척 오래 걸렸다구요. 이런 복잡한 문제는 시간이 지나야 해결이 되요. 말로 설명되지도 않고 행동으로 대신 해 줄 수도 없잖아요. 그냥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느 껴보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겠네요.” 풍아는 이렇게 말하고는 머리를 흔들며 의자에서 일어나 방 안을 서성거렸다. “그래, 그 말이 맞다. 한 순간에 사랑이라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것이 아니 니 시간이 필요하겠지. 나도 제대로 사랑을 해 보지 못했으니 알 수 없는 일이지. 이 루비아님 당신의 나에 대한 그것이 사랑인지 아닌지는 시간을 두고 함께 지내면서 알 아보기로 하지요. 그리고 그 동안 피곤했으니 오늘은 이만 쉬는 것이 어떨까요?” 나는 그렇게 일행들의 동의를 구했다. 그리고 아르미엘에게 물었다. “아르미엘? 이루비아가 우리와 함께한다면 아르미엘은 어떻게 할 거지요? 우리와 함 께 갈 건가요?” “저는 루시퍼님을 모시는 사제입니다. 신전에 묶인 몸이 아니니 제가 원하는 곳으 로 갈 수 있지요. 저는 이루비아님과 함께 가겠습니다. 루탄님과 함께 다니면서 이루 비아님을 모시고 루시퍼님의 교리를 알리는 일을 하겠습니다.” 그건 암흑교의 교리를 알리는 일을 하겠다는 말과 같은 거잖아? 별로 권장하고 싶은 일은 아닌데? “아르미엘 사제님, 하지만 저희들은 아르미엘 사제님의 종교로 인해서 분란이 생기 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저희는 암흑제국에서 지낼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암흑교의 사 제님이 계시면 여정에 지장이 많을 것입니다.” 이렇게 반대를 한 것은 광아였다. 그리고 다른 가족들도 그런 광아의 말에 동의한다는 표정이었다. 물론 나도 광아의 생각과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작 이루비아와 아르미엘은 상당히 곤혹스러운 상황이었다. 이루비아에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나를 빼면 아르미엘 뿐인 상태니 그런 존 재마저 곁에 없게 된다는 것은 힘겨운 일일 것이다. 그렇다고 아르미엘의 동행을 무턱대고 허락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제가 암흑교의 사제인 것을 숨기는 것으로 하지요. 제가 루시퍼님의 종이 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만 신분을 숨기기 위해 거짓을 말할 수는 있겠지요. 그 것이 루시퍼님의 이름에 누가 되는 것이라면 할 수 없겠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교리 를 알리는 것은 최대한 자제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르미엘이 양보안을 가지고 나왔다. 하지만 이걸로 된 것일까? 악신의 추종자를 일행에 넣어둔다는 것이... 나는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루비아의 안식처를 빼앗는 것도 할 수 없는 일이고... 참으로 난감한 일 이 아닐 수 없었다. “오빠, 그렇게 하세요. 이루미아님도 혼자 남게 되면 무척이나 쓸쓸하실 테니까 아 르미엘 사제님이라도 계시면 좋을 거예요. 지금까지 외롭게 지낸 분인데...” 역시 마음씨가 고운 것은 수아인 모양이다. 그렇게 수아가 허락을 하고 나서는 다른 일행들도 그 정도의 조건이라면 괜찮겠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져서 아르미엘의 동행을 허락하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잠자리에 사제들이 가져온 저녁으로 식사를 하고 이른 잠자리에 들 었다. 물론 나는 그 전에 란이를 다시 소환했다. 다시 소환된 란이는 한동안 자기가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무서웠는지, 나를 다시 못 만나는 것은 아닌지 속이 얼마나 탔는지 등등 한동안 조잘거렸다. 그래도 오랜만에 만나서 즐거워하는 녀석의 날개짓(아가미 지느러미)이 귀여웠다. 또, 그 울음소리도... 그 밤에 걱정과는 달리 이루비아가 내가 자는 방으로 찾아드는 불상사는 없었다. 다음날 아침, 이루비아는 수아와 풍아 등과 상당히 가까워 진 듯 편하게 서로를 대하 고 있었다. 하지만 이루비아가 수아와 풍아에게 언니라고 부르는 데에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 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루비아가 수아보다는 나이가 많아 보이는데 말이다. 아무튼 하룻밤 사이에 자매가 되어버린 수아와 풍아 루아(이루비아의 애칭이란다.) 덕분에 광아와 화아 내가 오빠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역시 아직은 어색해서 그런지 제대로 말을 주고받지 못하는 우리들이었다. 그래도 신이 난 것은 3자매들이었다. 우리야 어떻든 잘도 조잘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들어보면 전혀 내용도 없는 이야기를 하면서(음식 맛에서부터 입고 있는 옷의 레이스 에 대한 것까지.) 뭐가 그리도 재미가 있는 것인지... 다만 아르미엘은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 자신을 지키고 있어 다행이었다. 수아의 말로는 아르미엘은 침대에서 잠을 자지 않고 의자에 앉아서 잠을 잤다는 것이 다. 아니 잔 것인지 그냥 앉아 있었던 것인지도 알 수 없다고 했다.(깊은 후드 덕분 에 얼굴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식사가 끝나고 대쟁투장으로 향했다. 아직 하루가 남아있었지만 이루비아가 밖을 구경하고 싶어 했고, 다른 가족들도 그동안 안에서 나를 기다리느라 지루했던 모 양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다시 위로 올라왔을 때 그러니까 응접실 건너편 방에서 이동진을 이용 해서 지상으로 나왔을 때, 그 이동진 앞에는 자이곱이 죽치고 앉아 있었다. 무슨 생각인지 천막 같은 것을 등 뒤에 지고, 거창하게 생긴 도를 무릎에 올리고는 이동진 앞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상당히 오래 그렇게 있었던 모양으로 꾸벅 꾸 벅 졸고 있다가 우리가 나타나는 기척에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어서 오십시오. 주인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이곱은 자리에서 ‘끙’ 소리를 내며 일어나서는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뭐야? 내가 왜 당신의 주인이라는 거야?” 나는 깜짝 놀라서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저를 이기신 분을 거느리고 계신 분이시니 당연히 저의 주인님이시지요.” 자이곱은 굳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니 내가 분명히 그 서류도 주고 모든 것을 없던 일로 하자고 했으면 끝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이렇게 못살게 구는 거야? 응. 그리고 내가 싸운 것도 아닌데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할 말 있으면 화아에게 직접하라고. 안 그래도 머리 아픈 일이 많은데...” 내 말에 이루비아의 어깨가 움츠러드는 것이 보였다. “아니 형, 왜 책임을 나에게 맡기는 거야? 난 싫어 싫다구.” “주인님, 그런 종이쪼가리가 저를 어찌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건 제 의지가 시키는 일입니다. 저의 주인님을 제가 정한 것이니 아무도 말리실 수 없습니다. 그냥 이 자 리 에서 죽기를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적어도 제가 정한 주인님을 따르다 죽었다고 자부할 수는 있을 겁니다. 그럼 된 것입니다. 남자는 자기가 할 일 을 할 수 있으면 태어난 가치가 있는 것이지요.” 화아는 그렇다고 치고, 이 웃기지도 않는 덩치는 왜 이러는 거야? 그래 사람이 자신의 의지로 무언가를 결정하고 그 일을 이루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 을 모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게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으로도 이루어질 수도 있다 는 것은 참으로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주군을 찾기 위해 암흑제국을 떠도는 쟁투사는 저 뿐이 아닙니다. 큰 목표를 세울 능력이 없으면 주인을 정해 충성하는 것으로 목표를 삼는 것이지요.” 웃기는 일이군. 평생의 꿈으로 남을 섬기는 것을 택하다니. “하지만 아무나 대상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런 사람을 구하지 못하고 목이 떨어지 는 쟁투사가 너무도 많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인을 택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이지요. 저는 주인님을 주인으로 결정했습니다. 부릴수 없다는 말만 아니라 면 어떤 명이든 들을 것입니다.” 미치겠군. 한꺼번에 셋이나 되는 혹이 생긴 것인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천진한 눈빛의 여인과 그 여인을 따르는 암흑교의 고위사 제, 거기다가 이젠 덩치가 산만한 전사가 하나. 나는 아무 소리도 않고 몸을 돌리고 말았다. 진짜 정말로 아무 소리도 하고 싶지 않았다. 거의 사고가 마비된 듯이 그저 될 대로 되라는 느낌뿐이었다. 그 후로는 수아와 풍아 루아는 물 만난 고기처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신기해 했 다. 도대체 어떻게 저런 모습이 되는 것일까? 뭐가 그렇게 신기하지? 이루비아는 오랜만에 보는 것이라 그렇다고 하더라도 수아와 풍아가 덩달아 그런 모 습을 보이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튼 어쨌거나 나는 그런 것에도 깊이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생각이 많았다. 이루비아와 자이곱의 문제가 내 머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더 솔직히는 이루비아라는 여자가 온통 나를 혼란으로 빠트려 놓았다. 그 여자가 나에게 던진 파장이 적지 않은 모양인지 가슴속이 온통 흔들리고 있었다. 사랑. 그건 내 사십 평생에 별로 와 닿지 않는 감정인 것이었다. 아무리 젊은 모습으로 변해서 젊은 사고를 지니고 살려고 하지만, 내가 지닌 정신 연 령은 불혹의 나이였다. 그런 나에게도 사랑이라는 것은 먼 나라 이야기일 뿐, 어찌 어찌 보내온 시간들이 그 런 것과는 거리가 있는 삶을 살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한 여자가 나를 사랑하단 고백을 했다. 그것도 내 유일한 가족들이 모두 듣는 앞에서...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가슴에 온 전히 와 닿지도 않으니 문제였다. 사랑. 가족간의 그 은근하고 깊은 동기애와 같은 것이 아닌, 경험하지 못한 이성과의 사랑 이 아무리 나이가 들었다 해도 두근거리지 않을 턱이 없다. 나는 이리저리 수아네에게 끌려 다니며 대쟁투장을 돌아보면서도 여전히 관심은 내 머리와 가슴속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면서 가끔씩 이루비아에게 관심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완전히 18세 소녀의 모습으로 이리저리 수아와 풍아를 이끌고 구경에 여념이 없는 저 여자가 나를 사랑한다는 여자다. 그것도 절실하다 말하는 여자다. 그러면서 나를 보는 표정에는 아무 느낌도 없는 그런 여자. 나에게 보이는 표정은 두려움과 안타까움과 원망과 슬픔과 아픔과 절망의 그것이다. 그것이 아니면 아무 표정을 보이지 않는 여자. 나를 사랑한다는 여자를 나는 하루 종일 곁눈질했다. 화아와 광아와 지토는 아무 말도 없이 일행의 뒤를 묵묵히 따랐고, 자이곱은 큰 짐 을 등에 지고 고개를 숙이고 일행들과 거리를 두고 이리저리 따라다니는 것이 전부였 다. 그리고 대쟁투의 전야, 우리들은(자이곱까지 포함) 다시 응접실에 모였다. “일단은 대쟁투가 끝나면 이루비아와 아르미엘, 그리고 자이곱을 포함해서 모두 집 으로 돌아간다.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그 때까지는 어떤 형태로든 결 정 이 나겠지. 앞으로 한 달이 남았으니 말이야. 그리고 나머지는 집에 가서 결정을 하 도 록 하자. 단, 그 때까지는 그냥 이대로 지내자. 이루비아를 동생으로 생각하든 말든. 자이곱을 부하로 생각하든 말든. 일단은 일행속에 들었다는 것으로만 만족하고 더 이 상 나를 괴롭히지는 말아. 그냥 흘러가는 대로 두자. 시간이 많은 것들을 해결해 주 겠 지.”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조용히 일행들을 둘러 보았다. 어차피 자이곱은 스스로가 발언권이 없다고 생각하는지 응접실 문 입구에 퍼질러 앉 아서는 묵묵한 모습이었고, 이루비아도 아무 말 없이 나를 보고 있었다.(그 눈 속에 안타까움이 있었다.) 다른 가족들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 내가 상당히 복잡하다는 것을 느낌으로 알았는 지 그냥 고개만 주억거리고 만다. 그 밤에 내 잠자리는 다시 끝에 있는 독방으로 결정이 되었고, 여자들의 방은 가운 데 방, 다른 남자들의 방은 응접실 옆방이 되었다. 자이곱이 포함되어서 자리가 없었던 탓이다. 자이곱이 죽어도 큰 방을 혼자서 쓸 수 는 없다고 고집을 피우고, 나도 혼자서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기 때문에 독방을 택한 것이다. 그리고 그 밤에 나는 침대가 아닌 의자에서 창고의 술을 축내며 생각에 잠겼다. 아침이 되도록 결론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말이다. -시작 대쟁투, 그리고 나타난 제란... - 1층 관람석에는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아르미엘이 나타나자 사제들이 알아서 자리를 만들어 주기는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면 사람들의 틈에 끼어서 움직이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구경을 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다. 대전 일정표는 간단하면서도 합리적이라 할 수 있었다. 쟁투의 최하위층에서는 10일 동안 계속 싸움이 벌어진다. 2층은 둘째 날부터 싸움이 있다. 3층은 셋째 날부터 그 리 고 대쟁투의 15일까지는 1층에서 5층까지의 싸움만이 벌어지게 된다. 총 96번의 1층 싸움을 10일 동안에 나누어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 번 싸움을 시작한 자의 쟁투는 장 장 5일 동안 쉬지 않고 진행된다. 오늘 1층에서 싸우면 내일 2층 다음날 3층 다음날 4 층 마지막으로 5층이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1층에서 5층까지의 모든 싸움은 14일 째 마무리가 되게 되고 15일째는 전체의 휴식이 주어진다. 그리고 16일째는 7층에서 1 차 싸움이 3회 벌어지며 17일째 2차 싸움이 있게 된다. 그 다음부터는 자신이 싸움을 한 다음날 하루를 쉬고 격일 단위로 8층 9층 10층 11층에서 싸움을 하고 12강전을 남 기게 된다. 12강전을 거쳐 마지막 남은 승자 6명이 30일에 제국 6대 귀족에게 쟁투를 선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 결과적으로는 30일 정도에 걸쳐서 대쟁투가 벌어지는 것이지만 그것도 6대 귀족 에게 도전하지 않으면 금방 끝나기도 하기 때문에 정확한 것은 아니다. 아무튼 오늘은 첫날이라 1층에서만 싸움이 있기 때문에 1층 관람석도 이렇게 사람이 많은 것이지만 내일은 1층과 2층 다음은 3층 4층의 순서로 사람들이 분산이 되기 때 문 에 첫 날과 14일째 되는 날을 제외하고는 이렇게 사람들이 몰리는 경우는 없다는 아 르 미엘의 설명이었다. 그리고 7층부터는 관람에 자격 제한이 생기기 때문에 여유가 많이 생긴다고 한다. 어쨌든 우리들이 아르미엘의 주선으로 편한 자리를 잡고 난 이후에 곧 싸움이 시작되 었다. “이 대쟁투는 무작위 쟁투입니다. 지금 보이지 않는 지하층에는 쟁투에 참가하려는 사람들이 전부 모여 있습니다. 그리고 사제들이 나누어준 패를 들고 있으면 무작위로 쟁투장으로 이동되는 방법을 쓰기 때문에 누가 누구와 싸우게 될지는 알 수 없습니 다. 그리고 언제 싸우게 될지도 알 수 없지요. 다들 긴장된 상태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앗! 사람들이 나타났다.” 아르미엘의 설명 중간에 풍아의 탄성이 터졌다. 우리들이 바라보는 전면 쟁투장에(관람하는 중앙탑보다 약간 낮은 곳에 위치해 있 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이다. 중앙이 아닌 양쪽 끝에서 나타난 그들은 잠시 움직임이 없더니 곧 맹렬히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순간이동 되고 잠깐 동안은 전혀 움직일 수 없습니다. 단지 움직임만 제동을 건 것 뿐이지만, 순간이동과 함께 상대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의 기습을 당하는 것을 막 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움직임이 풀리는 것은 동시에 풀리기 때문에 별다른 공격 신호와 같은 것은 없습니다.” 아르미엘은 여전히 상황 설명에 열중하는 모습이었다. 우리가 앉은 곳에서 볼 수 있는 쟁투장의 수는 약 15개, 그 중에서 확실하게 싸움을 살필 수 있도록 사각이 거의 없는 것은 10개정도, 나는 그곳에서 일어나는 싸움들을 유심히 살폈다. 운이 없는 녀석은 단 한 번에 쓰러져 버렸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엄청난 혈전이 벌어졌다. “될 수 있으면 죽이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실력차가 많은 경우에 오히려 부상이 적습니다. 실력이 비슷비슷하면 둘이 동시에 죽어버리는 경우도 있지 요. 그런 경우에 2층에서 부전승으로 3층으로 통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제부터 승자는 절 대적인 대진표에 따라 싸우는 것이니까요. 물론 그 대진표는 사제단이 관리하고 있습 니다. 첫 싸움은 무작위지만 나머지는 대진표에 따르는 것이지요.” 결과적으로 싸움이 시작되고 나서 어떤 부정도 개입할 수 없다는 말과 같은 것이었 다. 하지만 우리가 보는 동안에 그렇게 대단한 접전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실력차이가 많이 나는 경우에는 실력을 드러낼 필요가 없어서 그런 것이었고, 처음부 터 엄청난 실력을 지닌 사람끼리 맞붙는 경우는 별로 없는 모양이어서 점심시간이 지 날 동안 흥미 있는 전투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점심시간이 지나고 광아가 한 사람을 발견하는 것에서부터 우리 가족들은 싸 움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형님 저자는 두룬이로군요. 제란의 부하였던 쉬벡의성 기사단장 말입니다.” 광아가 우리가 정면으로 보이는 쟁투장이 아닌 왼쪽으로 세 번째 쟁투장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이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자 아루비아와 아르미엘, 그리고 자이곱이 무슨 일인가 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렇군요. 제란 멜레시의 심복 두룬기사가 맞군요. 그런데 루탄님께서 어떻게 저 사람을 알고 계시죠?” 우리들이 두룬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을 때,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은 아르미엘 사제였 다. “어? 그러는 아르미엘은 어떻게 제란을 알아? 두룬도 알고?” 풍아가 아르미엘에게 물었다. 그 사이에 풍아는 아르미엘에게 말을 놓고 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지만 말이 다. “네? 네. 제란 멜레시는 아이슈마님이 아끼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알고 있습니다. 가끔 동굴에도 찾아왔었기 때문에 알고 있는 것이지요.” 제란이 아이슈마와 관련이 있다? 그럼 제란이 신전에서 힘을 얻었다고 했던 것은 그 아이슈마의 힘이었다는 것일까? 하긴 마족의 힘을 직접 얻었으니 마수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큰소리를 쳤을 수 도 있겠지. “그런데 여러분도 제란 멜레시를 아시는 것 같은데요? 어떻게 아시는 거죠?”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수아가 그간의 상황을 간단하게 둘에게(실제로는 뒤에서 듣 고 있는 자이곱까지 셋) 설명을 해 주었다. “그럼 별로 좋은 인연은 아니네요?” 이루비아가 수아의 말에 덧붙여 물어본 말이었다. “선연이고 악연이고 없지. 이젠 우리와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니까 말이야.” 풍아가 그렇게 대답을 해 준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이루비아가 그렇게 여운을 남기는 말을 해서 무언가 물어보려는 순간 싸움이 시작되 었다. “두룬이라는 기사는 누군지 모르지만 그 상대는 제가 아는 녀석입니다. 전번 대쟁투 에서 10층까지 올랐던 녀석입니다. 상당히 검이 날카로운 녀석이지요. 물론 마수도 만 만찮은 녀석을 데리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0층에 올랐던 강자라... 내가 알기로 두룬이라는 기사는 그렇게 대단한 기사는 아니 었다. 예전 쉬벡의 성에서 보았을 때나, 모르탄 시에서 봤을 때의 기세로 본다면 광아나 풍 아에게는 상대도 되지 않을 정도의 실력이었다. 지금의 자이건이라고 해도 두룬은 쉽 게 이길 수 있을 정도. 하지만 막상 싸움이 시작된 후의 양상은 그것이 아니었다. 몇 차례 칼을 맞댄 이후 10층에 들었다던 강자가 마수를 소환한 것이었다. 그것도 자이곱이 썼던 것과 비슷한 모습의 갑주형 마수였다. “저런 것이 인기가 많은 모양이지? 자이곱도 저런 녀석을 쓰더니?” 내가 그렇게 지나가듯 물어보자 자이곱이 황송한 표정으로 대답을 했다.(겨우 질문 에 답을 하는 것이 저리 좋을까?) “저런 갑옷 형태의 마수들은 저희 같은 검사들에게는 더없이 귀한 녀석들입니다. 방 어력은 물론 근력, 스피드, 내력, 동체시력 등을 높이는 것은 물론이고 마법에 대한 방어력도 상당한 때문에 약간의 헌혈로 저런 것을 얻는다면 전혀 손해가 아니지요. 더 구나 어떤 녀석들은 특수 능력을 지니는 것도 있기 때문에 모두들 눈에 불을 켜고 찾 는 것입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리고 녀석은 그 갑주로 온 몸을 감싸는 형태를 취했다. 멀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아 마도 두룬이라는 녀석의 실력이 상당하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나는 다시 두룬의 움직임을 신중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갑주로 온 몸을 감싼 상대의 힘과 스피드등 모든 면이 월등하게 변한 상태에서의 싸 움에서도 두룬은 전혀 변함없는 모습으로 상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평범하게 짓쳐오는 검을 막고 밀어내고 다시 검을 휘두르고, 그런 두룬의 모습에서 전혀 무리하는 느낌을 찾을 수가 없었다. 도리어 갑주를 입은 녀석이 밀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결국의 두룬의 검이 상대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놀랄 일은 그 순간에 일어났다. 검이 옆구리에 닿는 순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의 기운이 검을 감싸고 흘렀던 것이다. “헛, 검강!” 나는 헛바람 삼키는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검강을 다루는 인물이라. 검기와는 다른다. 아무리 검의 주변을 감싸는 기운이라 하더라도 검기와 검강은 차원 이 다르다. 검기는 검의 기운을 빌려 기운을 형상화 하는 것이라면 검강은 자신의 기 운 자체를 형상화 한 것이다. 이를테면 검을 통해서 검강을 시전하는 사람은 아무런 매개체 없이도 검강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아니 강기라는 것이지 그것이 굳이 검이든 도든 손이든 발이든 상관이 없는 문제다. 어디로 어떤 형태로 강기가 발현되느냐에 따라 달리 붙는 이름일 뿐이니까. “응? 검강? 정말? 두룬이 쓴 것이 검강이야?” 내 말을 들은 화아가 놀란 듯이 물어왔다. “맞아, 잘못 본 것이 아니야. 분명 검강이었다. 비록 수준이 낮은 것이라고는 해도 검강은 검강이야.”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만 주인님 말씀이 맞을 것입니다. 저 갑주를 저렇게 잘라낼 수 있는 것은 평범한 것으로는 불가능하지요. 저런 날카로운 상처를 남기다니 보통의 강철 갑주라도 어려운 일인데 저건 최강에 가까운 마수갑주입니다. 아마도 주인님이 보신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이런 검강이라니. 저 정도면 내가 전력을 다해도 어떨지 장담을 못한다는 말 아니 야?” 화아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그 짧은 시간에 검강을 쓴다는 것은 절대 정상적인 경우 가 아니야. 무슨 이유가 있겠지.” 나는 그렇게 화아를 달랬다. 사실 검강이라면 아무리 최상급 정령이라 하더라도 본 실력을 최대한 발휘하지 않고 는 어려운 일이다. 화아 역시도 화기를 도에 모은다면 화강火剛을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힘 은 최상급 정령으로서의 힘을 최대한 발휘할 때의 이야기다. “그럼 제란은 나오지 않고 두룬만 나와서 이번 대쟁투를 한다는 것일까?” 내가 그렇게 대상 없이 중얼거리자 다들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제란이 힘을 가지고 있다면 이번 기회를 놓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형님. 분명 히 이번 대쟁투에 참가할 겁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분명히 나올 거예요.” 광아와 풍아의 의견이었다. “이번 대쟁투에 분명히 참가할 겁니다. 제란 멜레시는 이번을 기회로 암흑제국의 황 제가 될 생각이니까요. 그리고 아이슈마님이 뒤를 받쳐 주시니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겁 니다. 그러니 당연히 참가를 하겠지요. 아마도 두룬은 6대 귀족 중 한 자리를 맡겨서 곁에 두려는 것일 겁니다.” 아르미엘이었다. 아르미엘은 아무래도 이 문제와 상당히 관련이 있는 모양이다. 어쩌면 지금 다른 나 라에서 설치는 암흑교의 문제에 대해서도 알 것 같은데.... 아무튼 복잡하네, 그럼 제란은 암흑제국의 황제가 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거네. 그리고 그 다음의 정세는 불을 본 듯 뻔하게 돌아가겠군. 어느 정도 암흑제국을 추스린 후에는 대대적인 전쟁이 벌어지는 것인가? 그럼 어느 나라가 먼저일까? 누웬은 아무래도 정보 부족이니 껄거롭고, 한타나 그란드가 되겠지 만 아무래도 약체는 한타보다는 그란드 쪽일 것 같은데... 주위에 적대국이 없었다는 이유로 상당히 무력에서 약체가 되어 있었던 것 같으니 말이다. 한타도 약하기는 하 지 만 마법사 길드가 있으니 쉽지 않은 문제고 그란드의 얼음기사단이 있지만 아무래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결론은 쉽지 않지만 그란드나 한타 어느 곳이든 전화를 피하지 못할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순서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내가 그렇게 머리를 굴리는 동안 두룬은 이미 승자로서 사라지고 없었고 또 다른 싸 움이 준비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싸움에서 제란은 등장하지 않았다. 아니 우리가 볼 수 없는 싸움이 훨씬 더 많았으니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 이었다. 어쨌든 결국에는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보게 될 확률이 높은 것이었다. 비록 누가 어떤 짓을 한다고 해도 별로 상관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제란이란 인 물의 변화가 궁금했다. 그 부하가 검강을 쓰는 수준이라면 그 녀석은 어떤 힘을 지닌 것일까? 상상이 가지 않는다. 나도 검강의 수준이 두룬보다 뛰어난 수준이지 그 이상의 경지 에 있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 이상의 수준을 제란이 가지고 있다면 내가 상대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 어쩌면 처음으로 불안을 느끼게 만드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는 셈이다. 제란과 싸움이 벌어진다면 절대 장담을 하지 못할 것 같다. 두룬은 내 상대가 아니 다. 하지만 제란은? 나는 일행들과 숙소로 돌아온 후에도 자꾸만 제란에게 신경이 쓰이고 있었다. “오빠, 그렇게 신경 쓰지 마세요. 제란과 싸울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싸우자 고 하면 싫으면 그냥 도망가면 되잖아요. 뭐 직접 잡으러 뛰어 오기야 하겠어요? 명 색 이 황제가 된다는데....” 풍아가 내 기분을 돋아 주려고 무척이나 노력해서 하는 말이었다. 나도 그런 말을 듣고 계속해서 인상을 쓰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래, 설마 무슨 문제야 있겠냐? 우린 그냥 조용히 대쟁투를 보다가 돌아가면 그만 이지. 그리고 위급하다 싶으면 대쟁투고 뭐고 그냥 돌아가면 되는 거잖아? 재미있는 구경이라고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뭐 지금까지는 별 문제가 없는 것 같기는 하다만.” 나도 그렇게 웃는 얼굴로 이야기를 하고는 “그런데 오늘은 오랜만에 우리 음식이나 해 먹자. 여기서 나오는 음식도 맛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들의 특식을 만들어 먹자. 어떻게 생각하냐?” 고 일행들에게 제의를 했다. “호호, 그거 좋아요. 그래요. 맛있는 거 만들어 먹어요.” “저도 루탄님이 만드신 음식을 먹어보고 싶었습니다. 마차 안에서 얼마나 일행분들 과의 식사에 끼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그 예전에....” 수아의 찬성을 이은 말은 지금까지 말이 없던 이루비아의 한 마디였다. 그 때, 내가 이루비아와 식사를 같이 하지 않았었나? 그러고 보니 칸타트를 향해 가는 그 동안에 이루비아는 마차 밖으로 나온 적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그 식사를 내가 만들어 준적도 없었던 것 같다. “좋아 좋아. 그럼 저녁을 만들어 먹자. 잠깐만...”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창고에서 이것저것 취사도구와 재료들을 꺼내 놓았다. 비록 마차에 있는 것보다는 못했지만 충분히 식사 준비를 할 수 있을 정도의 도구들 과 재료들이 있었다. “음. 오빠. 그럼 뭘 만들지요? 뭐가 좋을까요?” “그냥 고기하고, 김치하고. 파전하고, 야채들을 무치고 면 종류도 좀 삶고 하면 되 지 않을까?” 내가 그렇게 대답하자 수아도 괜찮다고 생각을 한 모양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일단 오빠는 고기를 좀 마련해 주시고요. 파전은 풍아 언니하고 루아 가 맡아서 해. 내가 반죽은 해 줄 테니까 알아서 잘 만들어봐.” 하지만 나는 수아의 말에 절대 반대하고 싶었다. 풍아의 음식이라니, 그런 절대로 안 될 말이다. 그것이 비록 반죽을 올려서 굽는 것 뿐이라고 해도 절대 풍아에게 맡기는 것은 안 된다. 요리와는 천적인 풍아다. 화아와 광아 지토도 나와 생각이 같은지 얼굴빛이 변하고 있었다. “저기 수아야. 그건 그냥 이루비아님에게 맡기고 풍아는 상차리기 시키는 것이 어떨 까? 풍아가 솜씨 있게 상을 차리는 걸 잘 하잖아. 안 그러니?” 내가 그렇게 수아에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지만 수아도 풍아에게 요리를 맡긴다 는 말을 하고 후회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곧 그게 좋겠다며 과장된 웃음으로 풍아에게 상차리기를 맡겼다. 풍아도 겉으로 보이는 것을 꾸밈세 있게 놓는 것은 제법 잘 한다. (그나마 그것도 못 했으면 식사 준비를 할 때 마다 곤욕을 치렀을 것이다. 자기만 할 일이 없으면 투덜 거 릴 풍아였으니까.) 식사 준비는 서둘러 진행이 되었다. 이루비아는(나를 볼 때 이외에는 너무도 풍부한 표정과 반응을 보인다.) 온통 밀가 루 투성이가 되어서도 도와준다는 풍아에게 후라이팬을 넘기지 않는 근성을 보이며 파 전을 붙이고 있었고, 요리에서 밀려난 풍아는 온갖 그릇들로 식탁을 멋지게 꾸미기에 들어갔고, 할 일이 없는 화아는 한 쪽에서 의자 깊이 몸을 묻었고, 지토는 파이프 담 배를 뻐끔거렸다. 그나마 광아는 수아 옆에서 잔심부름으로 무료함을 달랬고, 자이곱 은 그저 요리를 한다고 부산을 떠는 군상들의 모습을 즐거운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입구에 주저앉은 모양이다. 칼은 무릎위에 있다.) 결국 모든 준비가 끝나고 식탁 앞에 모였을 때, 이루비아의 모습은 상당히 비참한 모 양이었다. 옷은 물론이고 손과 이마에까지 밀가루 반죽이 붙어 있었고 머리카락에도 덩어리가 져 있었다. 그래도 뭐가 그리 좋은지 벙글벙글이다. 파전이야 말할 것도 없이 두께도 엉망이고 모양도 엉망이고 설익은 부분도 있고 꺼멓 게 탄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처음으로(아마 처음인 것 같다.) 만들었다고 잔뜩 기대를 품은 눈빛 을 하고 나를 보는 이루비아의 모습에 어쩔 수 없이 파전을 먹어야 했다. 맛있게. 그리고 자이곱은 정말 처음으로 자발적이고 열성적으로 움직였다. 특히 불고기에 대해서는 거의 광적으로 달려들었는데 덕분에 처음 준비했던 것 보다 서너 배는 더 많은 고기를 꺼내야 했다. 불고기로 안 되면 그냥 구워서 장에 찍어 먹는 방법도 있다. 자이곱은 그 것도 마다 하지 않았다. 이상하다. 다른 식사에도 고기는 나왔는데..... 물론 다른 가족들도 식사에 대해서는 언제나 그러하듯 열심히 참여했다. 이루비아도 물론... 근데 왜 자기가 만든 음식에는 손을 안대는 것일까? 참, 아르미엘 사제는 이 와중에도 후드를 벗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상당히 많은 음 식을(주로 파전과 국수, 김치 종류였지만) 먹고 있었는데 전혀 그 모습을 볼 수 없었 다. 고개를 숙이고 밑으로 쳐진 후드 안으로 음식이 들어가서 나오지 않는다. 그렇게 식사가 진행되는 중에 나는 창고에서 아주 오래된(1000년 된) 술을 꺼냈다. 작은 오크 통에 들어 있는 것은 분명히 쉬벡이 즐기던 그 포도주일 것이다. 보존 마법이 걸려 있었다고는 해도 완전히 시간의 흐름을 멈추는 것은 아니니 괜찮 게 숙성이.... 하지만 나는 세 개의 술통을 아무도 모르는 곳을 날려 버리고 나서야 겨우 제대로 된 술통을 찾을 수 있었다. 너무 시간이 지나서 변해 버린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렇게 건진 술은 그야말로 환상이었다. 경험상 수아와 풍아에게는 알콜의 도수를 낮추어서 주고 물론 이루비아도 수아와 같 은 과정을 거친 술을 주었다. 아르미엘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그리고 자이곱과 지토 화아는 다른 술을 꺼내 주었다. 과거 넥스가 즐기던 종류의 독 주들이다. 남은 나와 광아는 쉬벡의 포도주를 마시고... 어느틈에 게브도 나와서 지토와 술을 마시고 있을 때, 란이도 몇 모금 어깨 위에서 마신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며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있었다. 확실히 술은 사람들을 포근하게 해 주는 모양이었다. 자이곱과 지토 화아는 어느덧 가까워진 모습으로 술잔을 기울였고, 수아와 풍아 루아 도(나도 술이 들어간 모양이다 애칭으로 부르니..) 붉어진 얼굴로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와 광아는 향과 알콜에 취하고 있었고.... 날카롭다는 느낌이 전혀 없는 이런 분위기는 오랜만이었다. 대쟁투라는 험한 장소에서 우리들은 전혀 다른 세상으로 술의 힘을 빌려 들어와 있었 던 것이다. 그렇게 계속되던 술자리는 수아와 이루비아가 먼저 의자에 기대 잠들고, 화아가 수아 를 안고, 광아가 풍아를 부축하고 아르미엘이 이루비아를 안아 침실로 데려다 준 이 후 에는 남자들만의 자리로 새벽이 되도록 이어졌다. 그리고 다음날 잠에서 깨어난 우리들 사이에는 어색함이 많이 사라지고 없었다. 계속 이어진 대쟁투의 견학은 첫 날의 검강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성과가 없이 이어졌 다. 특이한 마수들, 이를테면 싸움터를 혹한의 추위 속으로 이끈다거나 화염지옥으로 만 들거나, 소환주의 능력을 키워 주거나 주인 대신 싸워주는 것들이 등장했고, 정령들 을 소환해서 싸움을 하는 경우나 환수를 이용하는 경우 그리고 7써클 마법이 등장하 기 도 했지만 아무래도 환수나 마수의 경우에는 7써클의 마법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 았 고, 정령을 소환하는 경우에도 상급정령을 소환까지는 했지만 운용에 무리가 가는 경 우여서 도리어 낭패를 당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역시 중요한 것은 소환주가 본래 가지고 있는 능력이 중요했다. 그래서 소환주의 능력 자체를 올려주는 갑주형 마수가 제일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마수의 경우에는 그 등급에 따라 다르지만 갑주형 마수가 다른 형태의 한 단계 높 은 마수를 상대할 수 있다고 할 정도로 발군의 능력을 보입니다. 특히 소환자가 지닌 본 능력이 뛰어날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지요.” 자이곱의 설명이었다. 우리들을 그렇게 14일 동안의 대쟁투를 보았고 5층에서 5일째 대쟁투를 보는 날, 그 러니까 대쟁투 시작 9일만에 드디어 제란을 발견하게 되었다. 물론 그 전에 두룬은 이미 6층으로 올라가고 난 후였다. 5층에서 볼 수 있는 싸움터는 겨우 4개였기 때문에 조금만 신경을 쓰면 찾고자 하는 사람이 나온다면 놓칠 일은 없었다. “제란이 어떤 능력을 보일까? 형, 어떻게 생각해?” 화아가 긴장된 모습으로 나에게 물었다. “글쎄. 잘 모르겠다. 지금 보이는 모습으로는 드러나는 것이 없군. 마력도 없고, 내 공도 없다. 그저 평범한 사람에 지나지 않아. 그런데도 여기까지 올라왔다면 그건 뭔 가 있다는 것이겠지. 아마도 환수나 마수의 소환을 거다. 지금까지 내가 상대를 파악 할 수 없었던 경우는 환수사나 마수사의 경우 뿐이었다. 정령사는 어느 정도 느낌이 왔거든. 마법사나 검사야 어느 수준이 되면 당연히 가늠해 보는 것이 가능하고 말이 야. 두룬은 예외였지만.” 내 눈에 모이는 제란의 모습은 정말 아무 능력도 없는 존재로 보였다. 하지만 곧 제란의 몸에서 변화가 생겼다. 제란이 마수를 소환한 것도 아닌데 제란의 몸에 힘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저, 저게 어떻게 된 거지? 갑자기 마력이 아니 써클이 생기고 있다. 7. 8. 맙소사 9써클이야. 거기다가 내력도... 몸 속에 내력도 생겼어.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의 내 력 이야. 아마 나와 비슷한 수준이 아닐까? 써클은 몰라도 내력은 확실하게 파악이 되지 않아. 거기다가...” 내가 놀라서 소리를 지르다가 말끝을 흐리자 가족들이 급하게 물어오기 시작했다. “뭐? 뭐가 또 있어? 왜 그래 오빠.” “무슨 일이예요. 오빠. 무서워요.” “형, 왜 그러는 거야?” 하지만 정작 대답은 광아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다른 힘이 또 있어요. 빛과는 상반된 힘이 있습니다. 어둠의 힘. 빛과 전혀 다른 힘이 있어요.” 나는 광아의 말에 붙여 내가 느낀 것을 이야기 했다. “저건 아무래도 마족의 힘인 것 같다. 지금까지 겪어 보지 못한 힘이야. 종류가 다 르다. 마력이 아니야. 마나의 힘이 아닌 다른 힘이다. 대처할 수 있을까? 어떤 형태 인 지도 파악이 되지 않는 힘이라니...” 그러는 동안에 싸움은 싱겁게 끝이 났다. 눈부신 속도로 움직인 제란의 칼 끝이 상대의 목에 닿은 것이다. 너무도 간단한 싸움. 하지만 제란의 움직임은 나로서도 겨우 잡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몇몇 제란의 수준을 짐작하는 사람들의 경악을 뒤로 하고 제란은 6층으로 올 라섰다. “마력에서 내가 조금 앞선다. 내공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남은 한 가지 힘은 견줄 것이 없다. 그럼 만약 정식으로 상대를 한다면 내가 질 수도 있단 말이다.”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은 다른 사람들의 싸움은 나에게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신계나 천사계 혹은 마계나 정령계에 내가 상대하지 못할 존재가 많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대가 되지 않던 녀석이 갑자기 나를 능가하는 존재로 인간계에 나타났다는 것이 이상하게 기분이 나쁜 나였다. 내가 최고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나는 그런 것을 원하지 않았는데? 아니다. 세상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 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은 부인하지 못하겠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왔던 것도... 그래서 혹시 제란이 내 앞을 막을 것이 겁이 나는 것일까? 숙소로 돌아온 나는 그런 생각에 빠져 있었다. “저, 루탄님 제란 멜레시의 힘은 아이슈마님의 힘을 받은 것입니다. 아이슈마님은 원래 루시퍼님의 계열이 아니었지만 신계에서 분리되어 나올 때에 루시퍼님을 따른 존 재들 중 하나입니다. 능력은 준마신에 해당하는 존재이니 그 힘을 이은 제란 멜레시 의 힘을 인간으로서는 이기기 힘든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슈마님의 힘은 암흑제국 밖에서는 작용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암 흑제국 밖에는 각 계의 묵계에 의해 직접적인 힘의 개입이 불가능하게 되어 있습니 다. 루탄님도 각 계의 영향력이 어떻게 미치는지는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르미엘의 말이었다. 도대체 이 사제는 어느 정도의 인물이기에 이런 것까지 다 알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나에게 이런 말을 해 주는 것은 무슨 의도일까? “왜 나에게 그런 말까지 해 주는 것입니까 사제님. 이유가 뭐지요?”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루탄님 저는 루시퍼님의 종이지 아이슈마님의 종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아이슈마님 의 행사보다는 루시퍼님의 인장을 지니신 루탄님이 더 중요하다 할 수 있지요. 적어 도 루시퍼님께 누가 되는 것이 아니라면 루탄님께 도움을 드리는 것이 제 도리라고 생 각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럼 아이슈마는 직계가 아닌 방계의 존재이기 때문에 지금 벌이는 일들이 루시퍼 님의 명이 없이 행하는 일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내가 그렇게 아르미엘에게 묻자 아르미엘은 잠시 시간을 두었다가 입을 열었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은 그저 제 믿음에 따라 행동하고 있는 것일 뿐 입니다.” 뭐, 일단 아르미엘의 말에 따르면 암흑제국 밖에만 있으면 제란 녀석과 붙을 일도 없 을 것 같으니 여유가 좀 생기기는 하지만 역시 홀가분해 질 수 없는 마음인 것은 사 실 이었다. 그 후로도 계속해서 대쟁투가 벌어졌고, 화아나 풍아가 관심을 가질 정도의 접전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나는 제란이나 두룬을 능가하는 인물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더 이상 그런 싸움에는 흥미가 없었다. 그저 빨리 16일째가 되어서 재란의 싸움이 벌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일행들을 모두 데리고 넥스 영지의 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싶었지 만(사실 제란과 부딪히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가족들과 이루비아 그리고 자이곱이 어떻게 생각을 할지가 뻔히 눈에 보였기 때문에 그러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도망을 갔다는 인상을 줄 짓을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내가 그렇게 싸움에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못하자, 역시 싸움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 는 수아와 이루비아가 내 곁에서 함께 있는 시간이 늘었다. 이루비아는 여전히 나를 보면 맑은 눈이 되었지만 그동안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표 정들이 드러나는 경우가 생기곤 했다. 내 생각에는 아마도 나에게만 가지는 특별한 어떤 감정이 도리어 그런 눈빛으로 나타 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대쟁투가 벌어지는 열흘 남짓한 시간동안 수아와 풍아 이루비아는 그야말로 자매처 럼 친해져서는 이제 아무 거리낌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이루비아가 나에게 눈빛은 그렇게 보여도 행동은 상당히 적극적인 면이 있었 다. 팔짱을 끼거나 어깨에 머리를 기대거나 슬며시 안아주기를 바라거나(표정 없는 눈빛 에서도 가끔은 이런 것을 읽어내게 된 나도 대단하다.) 내 옆자리에서 될 수 있으면 벗어나려 하지 않는 것들이 모두 그런 적극적인 면의 일부였다. 그래서 1층에서 5층 사이에서 일어나는 대쟁투는 제란이 나타난 다음날부터는 관심 밖에 있었고 오히려 수아나 이루비아와 노는(?) 것이 나의 주된 일과였다. 그리고 솔직히 내가 이루비아라는 이 어린(천 년을 살았는데...)아이에게 끌리고 있 다는 것도 고백을 해야겠다. 곁에 있는 이성이란 그것이 가족이 아닌 이상은 조금 신경이 쓰이기 마련인데다가 나 를 사랑한다고 말 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러하게 된다. 그리고 관심은 짙어지면 나쁜 감정이 아니면 호감으로 변하게 되고 호감이 짙어지 면, 그러니까 이성에 대한 호감이 짙어지면 사랑으로 발전하는 모양이다. 나도 잘 모 른다. 지금도 나는 루아를 사랑하느냐고 물으면 모른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래도 좋아하냐 고 물어보면 당연하다고 대답할 것이다. 호감이 짙어지는 것은 알겠는데 사랑이라는 감정인지는 잘 모르겠다. 자연스럽게 생겨난 감정을 가슴에 묻어두고는 그것이 어떤 감정이었는지 깨닫는데 오 랜 시간이 걸렸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아마도 나도 무언가 계기가 없으면 지금 내 가슴의 감정을 무엇이라 단언하기는 어렵 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하튼 루아는 귀여운 여자다. 드디어 14일간의 모든 쟁투가 끝이 났다. 이제는 7층에서부터 벌어지는 싸움이 남았다. 일만이천이백팔십팔명(실제로는 이보다는 조금 작았다.)의 인원이 이제 384명이 남았 을 뿐이었다. 그리고 대쟁투 15일째의 날은 조용히 지나가고(나와 이루비아는 모처럼 둘만의 산책 을 했다.) 16일의 아침이 밝았다. 그 동안 심심해서 계산을 해 본 결과 제란은 첫날의 싸움에 등장하게 되어 있었다. 그것도 첫 날의 마지막 싸움에서 등장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제란이 5층에 올라온 것이 9일째날 오전이었는데 그 때의 승자들까지는 첫 날의 싸움에 나오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이젠 대진표가 거의 나와 있다고 보면 된다. 아니 처음부터 일만이천이백팔십팔명의 인물들이 1층에서 싸우는 순간부터 대진표는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들은 7층의 관람석에서(이것도 32개의 대전장이 있어서 복잡했지만 제란이 어느 정도 위치에서 등장할 것인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은 64명의 대전자가 싸우는 것이 세 번 있는 날이다. 물론 내일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64명의 싸움이라고 해도 1층이나 2층의 싸움과 7층의 싸움은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일단 상대를 파악하고 상대가 되지 않을 것 같으면 항복하고 몸을 사리는 자들도 많 았고, 그렇지 않고 대등하다 싶어 싸움을 하는 경우에는 엄청난 혈투가 벌어지는 경 우 도 많았다. 그렇게 심하게 혈투를 벌이는 경우에는 다들 다음 싸움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라 고 봐야 했다. 아무리 하루를 쉬고 다시 싸움을 벌인다 해도 완전히 회복되기가 어려운 탓이다. 하지만 오늘도 나의 관심은 곧 이어 나올 제란의 등장에 관심을 모으고 있었다. 그리고 두 번의 싸움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지난 다음 드디어 제란이 쟁투장 안으로 등장했다. “제란의 상대는 이전 대쟁투에서 48강에 들었던 인물입니다. 주 특기는 마수를 이용 한 마력의 봉쇄, 그리고 육체적 힘을 이용한 접근전입니다. 하지만 상대가 검사인 경 우에는 마수를 이용한 육체구속 후 원거리 마법 공격을 쓰기도 합니다.” 아르미엘이 제란의 등장과 함께 그 상대에 대한 설명을 해 왔다. 역시 사제들도 쟁투 때마다 자료들을 수집 보관하는 모양이었다. 그래야 제국 내에 있는 실력자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을 테니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에상과는 달리 제란의 상대가 된 인물은 처음부터 환수 둘을 불러 마력의 봉 쇄와 함께 육체적인 구속을 병행했다. 나는 비록 그것이 쟁투장 내의 범위에 지나지 않았지만 제란이 어떤 방법으로 대처 할 것인지가 궁금했다. 하지만 제란이 그런 것에 곤란을 겪으리란 기대는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나라면 마력 봉쇄를 9써클의 마력으로 깰 수도 있었고, 내력을 이용해서 육체적인 속 박을 푸는 것도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제란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나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양상의 싸움이 전개 되었다. 제란의 몸에서 뿜어진 검은 기운(기운에 색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부르고 싶 은 기운)에 접한 두 마수가 그 공격 대상을 자신의 주인에게로 돌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제란의 상대는 그대로 무릎을 꿇고 패배를 시인했다. “저건 자기의 힘이 아니라 아이슈마의 힘을 이용한 것이겠군. 그럼 아이슈마의 힘으 로 상대 마수까지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거네? 이젠 제란의 앞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말이겠군. 여기 한 가닥 한다하는 사람들치고 마수나 환수 의 힘을 빌리지 않은 자는 거의 없으니 말이야. 환수는 몰라도 마수는 도리어 짐이 될 수도 있을 테니....” 나는 퇴장하는 제란의 모습을 보며 그렇게 촌평을 했다. 입맛이 아주 쓰게 느껴졌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나는 제란의 싸움이 있는 날에만 대쟁투장에 나갔다. 두룬과 제란의 싸움이 언제나 같은 날에 있었기 때문에(둘은 6명의 최후 승자가 될 때까지 싸울 일이 없는 편성이었다.) 따로 찾아야 하는 수고는 덜 수 있어 좋았다. 여전히 두룬은 검강을 이용한 공격으로 상대들을 쓰러뜨리고 있었고, 제란은 마법, 내력과 더불어 아이슈마의 힘을 활용한 다채로운 공격으로 상대를 제압하고 있었다. 그렇게 드디어 27일째 날의 싸움까지 끝이 나고 말았다. 승자는 제란과 두룬, 그리고 마수를 다섯이나 불러내었던 마수사와 갑주형 마수를 부 리며 검기의 극치에 이른 인물(이 인물도 갑주의 완전형을 보이지 않아서 그 능력의 끝을 알 수 없다.), 그리고 역시 갑주형 마수를 부리며 도을 쓰는 인물과 마지막으로 몸 전체가 마수와 동화된 모습을 하고 있는 인물 등 여섯 명의 인물들이었다. 결국 마지막 6인 중 넷은 마수의 힘을 이용하여 힘을 발휘하는 인물들로 구성이 된 셈이었다. 거기다가 제란은 마족 아이슈마의 힘을 받았고, 두룬 역시도 무언가 심상치 않은 점 이 있다고 보면, 순수한 힘으로 그 자리에 서 있는 자들은 하나도 없는 셈이었다. “결국 자기 힘이 아니라 다른 힘을 빌린 것에 지나지 않은 거잖아?” 화아가 불만스럽다는 듯이 말했지만 자이곱은 그에 대해서 오랜만에 자신의 생각을 열어 보였다. “하지만 둘째 주인님 이곳에서 마수란 곧 능력을 말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특히 갑주형의 경우에는 그 소환주의 능력에 따라서 기본 능력의 증폭율이 달라지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니 능력이 없으면 저런 마수를 얻을 수도 없고 다룰 수도 없고 오 히려 잡아먹히고 말지요. 마수는 주인을 잡아먹기도 하니까 말이죠.” “그런데 자이곱, 저 갑주형 마수 말이야. 저것들도 급이 다른가?” “그럼요. 당연하지요. 제가 부르는 크라튼은 대급 중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마수입니 다. 그리고 저기 서 있는 두 갑주형은 태급 마수에 해당하는 것들로 보입니다. 저 정 도면 주인과 완전 동화가 되면 초마수를 상대할 수 있을 겁니다.” 화아의 질문에 자이곱이 공손히 대답했다. “그런데 말이야 초마수급에 해당하는 갑주형 마수도 있나?” 다시 화아가 자이곱에게 물었다. “물론입니다. 그건 지금 이 암흑제국의 황제께서 부리는 마수가 바로 그것으로 알려 져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마계의 마족과 동급의 힘을 낼 수 있다고 하지만 직접 본 적은 없습니다.” 초마수급에 해당하는 갑주형 마수라. 정말 여러 가지로 신기한 녀석이 많군. 하지만 실제로 나로서도 초마수를 상대하는 것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예전 마르트라나 스컬프트의 경우라도 실제 실력으로 싸 워보지 않았던 것을 감안한다면 아마도 나 혼자라면 초환수는 상대하기가 쉽지 않은 존재일 것이었다. 그럼 같은 급의 초마수 역시 그럴 것인데 그 마수와 동화된 인물이라고 한다면... 내 가 확실하게 밀리는 입장이 된다. 그러고 보면 나도 우물 안 개구리였던 것인가? 제란도 그렇지만 어쩌면 저기 나와 있는 인물들 중에서 검이나 도를 든 상대와도 싸 우면 어찌 될지 모르는 상황이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태급의 갑주형은 초환수와 맞먹는 힘을 지니고 있다니 말이다. “정말 그동안 보이지도 않던 강자들이 어디서 이렇게나 많이 나타나는 거지? 이거 전력상으로 암흑제국은 완전히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월등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봐 야 겠군.” 나도 모르게 짜증이 나고 말았다. 그 사이에 6인의 최종 승자들은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저들은 이틀 동안 휴식을 취하고 30일째 되는 날 6대 귀족들과 쟁투를 벌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이 대쟁투 관광도 그렇게 끝이 날 것이었다. 제발 아무 일이 없이 지나가기를 빌고 또 빈다. 이제는 가족들과 일행들의 안전을 책임질 수 있다고 자신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면.... 나는 그 밤에 내 숙소에 거대한 이동마법진을 그렸다. 위치는 자이건의 성채와 가까 운 숲. 무슨 문제가 생기면 재빨리 이 방으로 순간이동을 한 후에 이 이동진을 따라 서 도.망.을 가야 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갑작스럽게 전개되는 이런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시 넥스 영지로 돌아가면 좀 더 수련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마법 쪽으로야 9써클을 완전하게 돌리는 써클 경지에 있으니까 이제는 9써클 의 마법들을 좀 더 연구를 하고, 그리고 하단전이 정체되었으니 중단전과 상단전도 어 떻게 활용을 해 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법이야 모르겠지만 일단은 좀 더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지금도 나는 인간들 중에는 최강인데... 이런 경우를 당해야 하다니. 내가 밥을 먹자 마자 방으로 들어가 두문불출 하고 있자, 일행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서 불안한 모양이었다. 몇 번이나 문 밖에서 별 일 없느냐고 물어보았던 것이다. 이런 관심과 걱정이 친인사이라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것이겠지. 그리고 28일과 29일째의 낮과 밤은 심심하고 긴장되고 불안하고 흥분되는 시간으로 지나갔다. 드디어 마지막 30일째의 쟁투가 있는 날, 나와 일행들은 중앙탑의 상층부가 잘 보이 는 14층에서 관람을 준비하고 있었다. 13층이 더 좋은 자리였지만 제국의 모든 권력이 모이는 날에는 아르미엘의 이름으로 도 자리를 만들기가 어려웠나 보다. 굳이 13층의 자리를 만들지 못할 것은 아니었지만 그보다는 14층의 좋은 자리가 13층 의 나쁜 자리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는 아르미엘의 설명이었다. 그런데 아르미엘은 어느 틈에 이런 모든 준비를 하는 것인지 정말 대단하다. 하기는 아르미엘이 정신체만으로 어딘가에 가서 무슨 일을 한다면 그것은 나도 전혀 감지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우리들이 자리를 잡고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서 중앙탑 지붕에는 6명의 도전자(어 제의 승리자가 오늘은 도전자가 되어 있었다.)가 나타났다. 별다른 차이 없이 순간이동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아서 준비된 출현인 듯 싶었다. 그리고 그 반대쪽에는 6개의 빈 의자가 놓여 있었고, 그 자리에도 오래지 않아서 주 인들이 나타났다. “왼쪽에서부터 서북지역, 중북지역, 동북지역, 서남지역, 중남지역, 동남지역의 주 인들입니다. 대체적으로 제국에서 실세로 자리 잡은 세력은 남부의 세력입니다. 철저 하게 실리만을 추구하는 그 지역의 인물들은 오랜 기간 전화에 휩싸이지도 않았고 독 특한 마수들의 서식지가 많은 까닭에 인구의 수도 많은 편이지만 특히 마수를 부리는 강자들이 많은 편입니다. 실제 신전에서 파악한 제국 100대 실력자 중에서 북부의 세 력은 35명, 남부는 60명입니다. 나머지 5인은 황제와 그 측근입니다. 이것만 보아도 제국에서 남부세력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으실 것입니다.” 아르미엘의 설명이 있었다. 우리가 있는 곳은 독립된 방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우리 일행들만 자리를 차지하고 있 었다. “이제 순서대로 나서서 상대를 골라 싸움을 하면 되는 것인가? 그것 참. 만만한 자 들이 아닐 테니 볼만한 싸움이 있겠군. 크흠.” 지토가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는 듯이 상기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다혈질인 화아도 그렇게 풍아도 상당히 긴장되고 흥분된 표정이었다. 다행한 것은 광 아와 수아는 별달리 흥분된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첫 싸움은 두룬이 되겠군. 순서대로라면 말이야.”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루탄님께서 관심을 가지신 제란은 세 번째 순서입니다.” 내 질문과 아르미엘의 대답이 이어지는 동안에 여섯 명의 도전자 중에서 두룬이 앞으 로 나가 왼쪽에서 세 번째 인물을 가리켰다. “중앙북부의 귀족이로군.” “그렇습니다. 대쟁투가 아닌 쟁투를 통해서 권좌에 오른 인물로 갑주형 마수를 사용 하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참고로 현재 여섯 지역의 주인들은 모두 갑주형 마수를 사 용 합니다. 그 이외에 다수 마수를 쓰기도 하지만 주 전력들은 갑주형 마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급은 태급마수로 알려져 있습니다.” 정말 웃기지도 않는 일이다. 태급마수라. 그 정도면 전에도 말했지만 초환수나 초마 수와 맞장을 뜨는 능력이 된다고 했다. 그건 나와도 비등한 실력이라는 말이된다. 물론 생각해보니 마법과 내공을 함께 쓴다는 이점이 나에게 있기 때문에 내가 좀 더 유리하긴 하더라... 나중에 생각난 것이다. 두룬의 지면을 받은 중북(중앙북부의 준말이다. 긴 것은 귀찮다.)귀족은 천천히 자리 에서 일어났고 가타부타 말이 없이 싸움 준비를 했다. 그의 가슴에서 뻗어오기 시작한 마수의 갑옷은 그의 전신을 감싸고 손 끝에서 검의 모양을 만들어 주었다. “호? 무기도 필요 없이 마수가 알아서 해 주는 거잖아? 저거 괜찮은 마수네? 나도 저런 거나 하나 키워볼까?” 가슴 부분에 커다란 눈 모양의 무늬인지 진짜 눈인지 모를 것이 생긴 그 마수는 주인 의 전신을 덮고 울퉁불퉁한 근육 모양으로 발달한 표피를 만들었다. 팔뚝과 정강이 부분에도 날카로운 돌기가 만들어지고 어깨에는 칼날은 방어하기 위 한 것인지 상당히 두꺼운 껍질이 만들어졌다. “저거 색도 예쁘네 오빠. 갈색이야. 그러고 보니 나무같은 느낌이 드는 녀석이네?” 풍아가 마수가 변한 갑옷을 보고 한 말이었다. “맘맘의 말로는 저 마수에게서 수목의 느낌이 온다고 하는군요. 아마도 그런 계통 의 마수인 모양이입니다.” 곧바로 광아의 설명이 이어졌다. 맘맘이 그런 쪽에서는 나보다도 더 민감한 편이다. 나는 거리가 있어서인지 그 마수의 기운을 확연히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가 그런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두룬은 별다른 준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준비가 끝난 중북귀족의 공격이 시작되자 느긋하게 검을 뽑아 반격에 나섰다. 두룬의 칼은 여전히 별다른 특징을 지니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것은 이상하게 도 모든 공격의 흐름을 읽고 그 흐름을 적절하게 끊어 낼 수 있는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어쩌면 저렇게나 정확할 수 있을까라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두룬의 검은 상대의 검 을 방어하고 공격점을 찾는 정석을 쫓아 움직이고 있었다. 거기다가 상대의 힘과 스피드가 만만찮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두룬의 검은 힘도 실려 있지 않은 것 같았고 속도고 빠르지 않은 것 같았다. 눈에 보이는 속도로 움직이며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검을 막는 것이 가능한 것일 까? 그건 두룬의 움직임이 최단거리만을 이동한다는 말고 같은 것이었다. 허튼 움직임이나 길은 없었다. 정확하고 간결한 움직임. 하지만 그런 여유도 이번에는 어려운 모양이었다. 중북귀족의 검이 더욱 힘을 가지고 검기가 최상에 이르자 두룬의 방어와 공격에도 조 금씩 무리가 오는 것이 보였다. 그의 검이 빨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검이 빨라지는 것은 그 만큼 여유가 없다는 말이라고 볼 수 있었다. 적어도 두룬의 평소 리듬이 깨어진 것이니 말이다. 그렇게 한 동안 서로에게 치명상을 주지 못하고 검과 검을 주고 받으며 작은 상처들 이 늘어갔다.(전적으로 두룬의 몸에만 생겼다. 상대는 갑옷 덕분에 피해가 전혀 없어 보였다. 갑옷에 작은 상처들이 있을 뿐.) “저러다가는 두룬이 지겠는 걸. 그런데 정말 대단하군. 저 검에 실리는 힘과 검기 는 무시무시해.” 화아가 그렇게 경기 결과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광아가 입을 열었다. “두룬이란 자, 조금 이상합니다. 사람의 기운보다 마수의 기운이 더 강합니다.” “응? 무슨 소리야? 마수의 기운이라니?” 나는 갑작스러운 광아의 말에 되물었다. 마수의 기운을 느낀다는 말인가? “얼마 전부터 마수들의 소환이 늘어나면서 이상하게 신경을 건드리는 느낌이 있었습 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니 그게 마수들이 지니는 독특한 기운 때문이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 두룬은 그 마수의 기운이 매우 강합니다. 거의 인간의 기운보 다 마수의 기운이 강합니다. 그리고 지금 그 기운이 더욱 강해지고 있습니다.” 그런 광아의 설명이 이어지면서 두룬의 몸에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의 사타구니에서부터 조금씩 그의 몸을 감싸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저것! 갑주형 마수잖아. 그럼 저런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지금까지 쓰지 않았다는 말이야?” 화아가 놀라서 소리쳤다. “지금 두룬의 실력에 저런 녀석까지 쓴다면 그건 엄청난 괴물이 되겠군요.” 풍아도 질린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두룬은 저 마수의 힘으로 여기까지 온 것 같 습니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저 마수의 능력으로 자신의 능력을 배가시키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지금은 아마도 두룬으로서는 상당히 무리하고 있는 것 같 습 니다. 거의 마수의 기운이 두룬의 기운을 잠식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광아가 조용히 상황을 알렸다. 그럼 결국 두룬의 실력이 늘어난 것은 마수 덕분이었다는 말이 되는 것 같다. 검기를 자유롭게 썼던 실력이면 마수의 힘으로 약하게 검강을 흉내 낼 수도 있었으리 라 싶긴 했다. 물론 마수의 능력이 아주 특별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겠지만 말 이 다. 아무튼 사타구니에서 시작한 마수의 갑주는 두룬의 배와 가슴을 겨우 가리고(꼭 여성 용 수영복을 보는 것 같다.) 그 움직임을 멈추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두룬의 움직임과 공격력은 엄청난 변화를 보였다. “검강이군. 약한 것이기는 하지만 검강을 싣고 있어. 얼마나 지속할 수 있을지는 모 르지만 아무래도 중북영주가 질 것 같군. 검기로 검강을 막는 것은 한계가 있어 아무 리 마수의 몸이라 버티고는 있다지만 말이야.” 내가 이렇게 생각을 말하는 순간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두룬의 검이 상대의 검 을 동강내어 버렸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서 두룬의 검이 상대의 가슴으로 들어갔다. 정확하게 상대 갑주의 가슴에 있던 눈을 깊숙하게 찔러버린 것이었다. “끝났군.” 화아가 그렇게 말했지만 두룬의 상대는 그렇게 쉽게 항복하지 않았다. 칼을 가슴에 꽂은 상태에서 팔뚝과 정강이에 솟아있던 날카로운 돌기들이 뻗어나가 두룬의 팔과 다리에 꽂혀 버린 것이다. “뭐야? 칼을 가슴에 박고서도 죽지를 않는다는 건가?” 지토가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게 아닌 것 같아. 저 눈이 문제야. 저거 아무래도 공간 주문이 들어 있는 것 같 아. 그러니까 저 눈을 통해서 상당한 부피의 이공간이 존재하는 것 같거든. 그래서 칼 은 가슴을 찌르지 못하고 이공간에 들어가 있는 셈이고 그 방심의 순간에 반격을 당 한 것이라고 봐야겠지.” 나는 간신히 파악해낸(그나마 그 눈이 마력을 이용해서 이공간을 만드는 능력이 있어 서 알았다. 다른 힘이라면 알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중북귀족의 갑주의 능력을 이 야 기했다. “그 참 대단한 놈이네? 그런 능력이면 상당히 요긴한 능력이겠는 걸?” 화아도 감탄을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 싸움은 아무래도 두룬의 승리가 될 것 같다. “이번 공격으로 두룬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지 못한 이상은 더 이상 다른 수단이 남아있지 않다면 방법이 없을 거야.” 나는 최종적인 승리를 두룬 쪽에 걸었다. 실제로 두룬의 몸에 꽂혀 있는 돌기들이 깊이 박히지 못했다는 것이 내 판단의 근거 였다. 아무래도 두룬의 갑주는 외부로 드러난 것 이외에도 상당한 효능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중북귀족도 그런 사실을 깨달은 모양인지 두룬의 몸에 박혀있던 갑주의 돌기 들을 회수하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패배를 인정했다. 그 사이에 두룬은 굉장히 어색한 모습으로 검을 들고 괴로운 표정을 지었지만 중북영 주에게 덤비거나 하지는 않았다. “위험했군요. 조금만 더 시간을 끌었으면 아마도 두룬이 마수에게 먹혀버리는 결과 가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죠. 물론 중북귀족도 그걸 알았겠지만 그랬다면 자신이 절대 살아남지 못하리란 것도 알았겠지요. 그러니 저렇게 빨리 항복을 한 걸 겁니 다.” 광아가 다시 두룬의 상태를 설명했다. 첫 싸움이 끝나고 잠시 장내를 고르는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도전자가 앞으로 나왔다. 그는 다섯 종류의 마수를 능숙하게 다루며 여섯 명의 승자에 끼었던 인물이었다. 칼 대신에 지팡이를 들고 있었고, 몸에 걸친 것도 로브 종류의 옷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다섯 마리의 마수 중에서 한 마리는 조개 모양의 마수였는데 소환주에 대한 물리적 인 공격은 물론이고 마법적인 공격도 상당히 방어를 해 주었고, 다른 한 마리의 방어 마수는 전문적으로 마법적인 공격을 무효화 시키는 능력이 있었다. 거기에 세 마리의 마수들은 두 마리의 접근전 마수와(한 마리는 인간형이고 다른 한 마리는 야수형이었다.) 한 마리의 원거리 공격 전문의 마수였으니 소환주가 직접 싸 움 을 할 일은 없었던 것이다. 두 번째 도전자는 서북귀족에게 도전을 했고, 결과는 비참한 패배로 끝이 났다. 역시 갑주형 마수라는 것이 같은 급의 마수들로서는 어찔 해 볼 수 없는 능력의 차이 를 만드는 모양이었다. 싸움이 시작됨과 동시에 접근전 마수들의 몸이 구멍이 나고(검이 아니라 봉 종류를 쓰는 녀석이었다.) 원거리 공격 마수는 신체의 상당 부분이 뭉개진 채로 역소환이 되 어 버렸던 것이다. 그러니 방어 마수만이 남은 녀석은 곧 패배를 시인하고 물러나 버렸다. 괜한 욕심으로 끝까지 싸워보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니 어찌보면 힘의 차 이를 느끼는 순간 꼬리를 내리고 머리를 조아리는 것은 야생 세계의 동물들을 보는 기 분이 들었다. 단지 그러면서도 머리 속으로는 온갖 암계를 꾸미고 있을 것이라는 점이 다르다면 다 를까? 싱겁게 끝이 난 두 번째 싸움 후에 곧 제란의 차례가 되었다. “형, 제란은 아마도 중앙 남부를 원하겠지? 그래야 어느 쪽으로든 세력을 펼치기가 쉬울 테니 말이야.”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형님. 아마도 황제의 자리를 넘보는 제란으로서는 주위의 세력들을 끌어 모을 수 있는 중앙남부가 지리적으로 제일 좋은 자리일 것입니다.” 화아와 광아가 제란이 어떤 귀족에게 도전을 할지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나도 화아나 광아의 생각과 같았다. 북부 지역들은 중앙의 두룬을 이용해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남부 지역은 자신이 중앙 에서 영향을 미친다면 그것이 제일 좋은 방향일 것이었다. 그리고 제란은 우리의 예상대로 중앙남부의 귀족에게 도전을 했다. “설마 아이슈마의 힘이 태급 마수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 싸움은 볼 것도 없을 텐데?” 내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가슴을 조이며 둘의 싸움을 지켜 보았다. 중남귀족은 그 동안 정보를 많이 얻었던 모양인지 시작과 동시에 완전한 형태의 변형 을 이룬 마갑주를 걸쳤다. “저건 파란 색이네? 성질이 뭐야? 마수들도 성향이 있는 것 같던데?” 풍아가 갑주의 색을 보더니 일행들에게 물었다. “언니, 저거 물의 속성이 강하게 나타나요. 아마도 수중 마수인 것 같아요.” 수중 마수라 어떤 능력이 있는 것일까? “그럼 저 갑주의 주 기능은 방어와 회복 같은 것일까? 수아는 그런 쪽에 능력이 있 으니 저것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흐흠.” 지토가 마수의 능력에 대한 예견을 했다. “중남 귀족의 마수는 수아님 말씀대로 물의 속성을 강하게 지니고 있습니다. 주된 능력은 공격 무효화와 빙계 혹은 수계의 다양한 공격입니다. 물을 이용해서 공격을 하 는 것으로 파악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소환주의 능력을 배가시켜주는 것이 중요한 기능입니다. 마수 자체의 공격은 대단할 것이 없는 것으로 파악되어 있습니 다. 다만 방어에서는 최상의 마갑주인 황제의 갑주에 비견된다는 소리가 있을 정도입 니다.” 아르미엘이 신전에서 파악하고 있는 정보인 듯 설명을 해 주었다. “역시 방어 쪽이 강하다는 말이네? 그럼 이제 제란은 어떤 방법을 쓸까?” 나는 다시 제란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제란은 이제 마력과 내력, 그리고 아이슈마의 힘까지도 전부 개방한 상태로 서 있었 다. 그리고 먼저 움직인 것 역시 제란이었다. 그의 몸 주위에서 엄청난 크기의 불덩이들이 생겨나서 중남 귀족에게 쏟아진 것이었 다. 파이어볼? 저건 그런 저급한 것이 아니었다. 형태는 같았지만 그 하나하나의 불덩이 들 이 8써클 화염계 마법의 총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었다. 처음 보는 형태였지만 그 압축된 파괴력은 거의 작은 메테오를 능가하는 것으로 보였 다. 불덩이의 수는 다섯, 하지만 그것들이 중남 귀족의 몸에 이르기도 전에 귀족의 몸이 사라졌다. 아니 잔상을 남기고 움직였다는 말이 맞다. 불덩어리들 사이를 헤집고 나간 중남 귀족의 손이(어느 틈에 얼음 같은 칼이 들려 있 었다.) 제란의 몸을 비스듬히 갈라가고 있었다. 제란은 그 검을 엉거추춤 피하기는 했지만 왼쪽 어깨를 내어 주어야 했다. 그리고 블링크. 제란의 모습이 경기장의 반대편에 나타났다. 중남 귀족은 자신의 일격이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는 것에 만족한 모양인지 제란의 항 복을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제란은 브링크 이후에 자신의 발밑에 떨어진 팔(어깨까지 붙은)을 들고는 다 시 자신의 어깨에 대고 재생을 시켰다. 완전히 다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저 떨어진 것을 붙이는 것이니 그렇게 어려울 것 도 없는 시술이었을 것이었다. 그런 제란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웃음? 그건 자조의 웃음처럼 보였다. 내가 저런 웃음을 짓는다면 이런 의미로 지었을 것 같다. ‘이런, 잠깐 방심을 했더니 쥐새끼에게 물렸군. 그것참...’ 아마 이런 의미로 웃으면 저런 웃음이 나오지 않을까? 그리고 그렇게 느낀 것은 나뿐이 아닌 모양이었다. 중남 귀족 역시 나와 같은 느낌을 받았던 모양인지 상당히 화가 난 모습이었다. 하지만 연륜일까? 무턱대고 제란에게 달려드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은 준다는 것은 유리할 것이 없는 일이란 것을 느낌 노양인지 곧 현란한 움직임을 보이며(사실 저런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저건 거의 습관과도 같은 것이다. 이미 상대에게 읽히는 움직임은, 많은 것이 도리어 체력만 떨어뜨리는 짓이 다.) 제란에게 접근해 갔고 예의 그 검이 제란의 몸을 갈가리 찢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찢은 것은 제란의 몸이 아니라 잔상이었다. 제란은 마법도 아닌 내력으로 잔상을 남기고 사라졌던 것이다. 아니 다른 사람에게는 사라진 것이지만 우리들에게는 굉장한 스피드로 상대의 뒤를 잡은 것이 되겠다. 중남 귀족도 그 정도는 읽을 수 있었던 모양인지 급하게 앞으로 내달아 제란의 사정 권 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뒤를 잡은 제란은 귀족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틈에 제란의 손에는 못 보던 검이 들려 있었다. 전에 싸울 때에는 평범한 검이었는데 지금 들고 있는 것 은 절대로 평범할 수 없는 검이었다. “굉장히 기분이 나쁜 검이네. 아이슈마의 느낌이 너무 강한데?” 내 입에서 그런 소리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정도로 그 마족 녀석의 기운이 뭉쳐진 검 이었다. 그리고 그 검은 중남 귀족의 갑주를 너무도 쉽게 찢고 들어갔다. 저런 것을 칼로 물 베기라고...가 아니구나. 그건 부부싸움을 말하는 거지? 그렇게 칼에 베인 상처를 입은 중남 귀족의 패색이 짖다고 생각했던 것은 우리 뿐이 아니라 제란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다. 어깨에서 가슴을 지나는 긴 검상을 입힌 제 란은 그 자리에 멈추어서 상대의 항복을 기다렸다. 처음과는 상황이 반대가 된 것이다. 하지만 역시 중남 귀족도 쉽게 항복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녀석의 가슴은 그야말로 칼로 물 베기를 한 것처럼 아무 흔적도 없이 아물어 버렸던 것이다. 그런 모습에는 제란도 상당히 놀란 모양이었다. “저거 대단하네? 그러니까 주인의 몸을 액체처럼 만들어서 물리 공격에 대한 타격을 없애는 거잖아? 그럼 무슨 방법이 남지?” 화아가 감탄하고 있었다. “방법은 많아. 일단 불로 태워서 날려 버린다가 있지. 그런데 저 마수가 물의 속성 을 지녔으니 상당히 힘들 것 같고, 그 다음은 얼려서 깨버리는 것도 있는데 그건 시 도 를 해 볼 가치가 있는 방법이고, 그 다음은 베는 것이 아니라 뭉개버리는 방법이 있 어 이건 타격이 상당할 테니 외상은 없어도 내상 때문에 항복하게 되겠지. 그리고 다 른 방법은 액체에 다른 것을 섞어 넣어 주는 방법도 있군.” 나는 화아의 말에 그렇게 답을 해 주었다. 제란은 잠시 놀람을 진정시키고는 다시 둘의 대치가 이루어졌다. 이젠 1:1로 비기고 있다고 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제란은 별로 자신을 드러낸 것이 없는데 귀족은 갑주의 중요한 기능 한 가지를 내 보였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였다. “역시 얼음이네요. 오빠.” 수아의 말대로 제란은 얼음 공격을 준비한 모양이었다. 그의 발밑을 중심으로 급속하게 서리가 끼어 가고 있었다. 저 정도면 그의 주위에 뜨거운 물을 부으면 그의 몸에 닿기 전에 얼음가루가 되어 떨 어질 것이었다. “하지만 귀족 녀석의 갑주도 얼음 공격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실효성이 없을 수도 있어. 지토가 한 마디 거들었다. 하지만 저 정도의 극한極寒에 가까운 온도라면 아무래도 상대에게 무리가 가기는 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서로에게 육탄전을 전개하는 방법으로 싸움이 이어졌다. 칼을 휘두르고 막고 피하고... 하지만 점차 중남귀족의 움직임이 조금씩 둔해 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변화가 없이 보인다고 하더라도 검과 검이 마주치는 부분에서 미 세한 차이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이야기하면 중남 귀족의 검이 제란의 검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비록 큰 차이는 아니었지만 미세한 차이가 승부를 가르게 되어 있는 것이 고수들의 싸움이었다. “저거... 형님 아무래도 중남귀족이 밀리는 것 같은데요?” 광아가 상태를 먼저 알아보고 말했다. “그래 조금씩 밀리고 있어.” “정말? 어디 어디? 별로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 “그래요 저도 차이를 잘 모르겠어요.” 비록 중급의 힘만 쓰고 있다지만 최상급 정령이라는 녀석들이 이렇게 느려서야... 하지만 곧 작은 차이가 큰 차이를 만들어 내었다. 공격을 받지도 않은 중남귀족의 갑주 한 부분이 터진 것이다. “어? 저거 얼어 있는 거잖아? 얼어서 유동성이 떨어지니까 움직임 때문에 터진 거 네?” “정말? 그럼 제란의 방법이 먹혀들고 있다는 말이네?” 화아와 풍아가 소리를 질렀다. 중남 귀족도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제란으로부터 떨어져서 거리를 벌 여야 된다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고 그러려고 노력도 하고 있었지만 제란이 쉽게 거 리 를 주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결국은 중남 귀족도 제란에게서 거리를 얻는 것은 어렵다는 결론을 내린 모양인지 공 격 형태를 바꾸었다. 도리어 제란과 접근전을 펼치면서 갑주의 공격기능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자이곱의 갑주가 그러했던 것처럼 갑주에서 촉수들이 뻗어 나와 상대를 공격하는 방 법 이었는데 귀족의 경우에는 촉수가 아니라 침과 같은 것이었다. 제란의 한기寒氣를 역이용한 방법이라고 할만 했다. 서로가 칼을 부딪는 순간 갑주에서 뻗어가는 날카로운 침들은 제란의 몸에 상처를 내 고 있었다. 비곡 깊은 상처는 아니라 하더라도 출혈이 적지 않았고 그것은 곧 체력의 저하로 나타날 것이었다. 제란이야 마법으로 회복을 하고 싶겠지만 그러려면 상대에게 거리를 주고 시간을 주 어 야 했다. 그럼 또 처음과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입장인 것이다. 그러자 제란의 공격에 변화가 생겼다. 아니 공격에 변화가 생긴 것이 아니라 그의 몸에 변화가 생긴 것이었다. 그가 잡고 있던 검의 손잡이 부분이 그의 손 등을 덮고 팔뚝을 감싸는 모습으로 변했 다. “응? 저거? 저것도 갑주형 마수였어? 이거 뭐가 이렇게 마수가 흔한 거야?” 나는 상당히 불만스러운 기분을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의 제란이라도 승리를 낙관하지 못한다. 그런데 저런 갑주를 이용해서 싸운다면 필패必敗였다. 그런데 아르미엘 사제는 내가 가진 불만과는 또 다른 놀라움을 표현했다. “저건... 황제의 마수와 같은 것입니다. 그저 힘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일부라도 착 용이 가능해졌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벌써 저 정도나 동화가 가능하다 니...” “응? 저게 황제의 것과 같은 종류의 마수란 말이야? 초마수급이라며? 그런 것을 저 녀석이 가지고 있단 말이야?” 풍아가 놀랐다는 듯이 아르미엘에게 물었다. “그건 나중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아마도 이젠 싸움은 끝이 났다고 봐야겠습니다. 저걸 사용한 이상은 제란 멜레시의 승리가 확실하니까요.” 뭐야? 겨우 저 정도의 동화만으로 지금까지 그렇게 팽팽한 싸움에서 확실한 승리로 바 뀐다는 거야? 나도 모르게 눈이 싸움터로 돌아갔다. 그리고 제란의 검에서 쏟아지는 무시무시한 마기魔氣를 느껴야 했다. 그것도 유형화된 마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제란에게서부터 중남 귀족에게로. 그리고는 끝이었다. 마갑주가 곳곳이 터져나가면서 간신히 땅을 굴러 목숨을 구한 것은 중남귀족이었다. 항복. 간단해도 너무 간단하다 싶은 결과였다. 지금까지의 싸움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젠장. 그럼 이제 남은 것은 다른 녀석들의 싸움인데 계속 보고 있을 생각이 있냐? 난 별로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이만 떠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나는 서둘러 일행들을 돌아보며 의견을 물었다. “오빠? 왜? 왜 그렇게 서두르는 건데?” 풍아가 일행들 대신한 듯이 물어왔다. 물론 다들 왜 그러느냐는 표정을 짓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불안해서 그런다. 만약 저 녀석이 우릴 알아보거나 하면 상당히 곤란하지 않겠냐? 그 전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이젠 내가 아무리 날고뛰어도 저 녀석을 상대해서 우리 일 행들 모두를 지킬 수 있다는 자신이 없다. 그러니 화가 미치기 전에 도망을 가야지. ” 나는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했다. “응? 도망? 형, 도망가자는 거야?” 화아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어 왔다. “그래, 도.망.을 가는 거야. 이길 수 없으면 피해야지 그럼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남아있을 이유가 있다는 거냐?” “그래도 도망간다는 것은 왠지 기분이 나쁘잖아. 오빠.” 풍아가 불만스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기분 때문에 여기 남아있는 것도 오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냥 빠른 시간 안에 여기를 벗어나는 것이 최선이야. 그리고 우리가 더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잖 아. 안 그러냐?” 내가 그렇게 말하자 다들 수긍을 하는 분위기였다. 여전히 남은 싸움을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은 화아와 풍아였지만 위험이 전혀 없지는 않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인지 반발의 수위가 낮아졌다. 나는 어느 정도 분위기가 잡히자 곧장 일행들을 이끌고 이동진을 이용해서 지상으로 올라왔다가 응접실 맞은편으로 다시 이동을 했다. 그리고 내 방으로 가서는 전에 만들어 놓았던 이동 마법진을 활성화시켰다. 그리고 실행을 앞두고 자이곱에게 눈길을 주었다. “자이곱, 보고 들었던 것처럼, 지금 우리는 도망을 가는 중이다. 이렇게 싸움을 피 해서 도망을 가는 우리들을 계속 따라 올 생각이냐? 그리고 이제 가면 암흑제국에는 다시 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싸움도 없을지 모르고 그저 장작이나 패면서 지내야 할 지 도 모르지. 그래도 따라 갈거냐?” 내가 그렇게 자이곱에게 물어보자 자이곱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말했다. “한 번 주인님으로 정한 이상은 무슨 일이 있어도 주인님이지요. 바뀔 수는 없습니 다.” 아무래도 떨어뜨려 놓고 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럼 출발을 하자. 가지고 가야 할 것들은 없지? 그리고 이번에는 이동진을 이용하 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환수들은 돌려보냈다가 다시 부르는 것으로 하자. 상당히 무리가 가니까 말이야.” 나는 그렇게 환수들을 신계로 보내도록 했고, 그 이후에 이동진을 실행 시켰다. 잠깐의 백광白光과 약간의 현기증. 그리고 우리들은 멀리 자이건의 성체가 보이는 숲에 들어와 있었다. “자 이제 된 것 같다. 자이건에게 가서 우리 마차를 찾고 말도 몇 필 빌려서 집으 로 돌아가도록 하자. 좋지?” 내가 그렇게 일행들을 보며(정확히는 가족들을 보며) 말하고 몸을 돌릴 때, 상당한 마나 유동이 느껴졌고 무언가 이동을 해 왔다. 나는 심상치 않은 힘에 일행들 앞으로 나서서 그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했다. “제, 제란?” “어머?” “이런!!” 그렇게 우리를 따라 이동을 해 온 것은 제란이었다. “이런 이런 걱정을 했습니다. 혹시라도 너무 멀리 가셨으면 어쩌나 하고 말입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저기 덩치를 빼곤 모두들 안면이 있는 분들이군요.” 산책이라도 나온 모양인가? 굉장히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제란, 오랜만이라고 해야겠군. 그 사이에 아주 거물급 인사가 되었더군 그래. 정 말 놀랐어.” 나는 먼저 제란에게 말을 걸어 제란의 관심을 나에게로 돌렸다. “반갑습니다. 루탄님. 그 모든 것이 루타님의 덕분입니다. 루탄님이 아니었으면 아 직도 쉬벡의 성, 그 조잡한 곳에서 여자들에게 군침만 흘리고 있었겠지요. 정말 감사 드립니다.” “그 말은 나에게 아직도 그 때의 앙금이 남았다는 말로 들리는데?” “그럴 턱이 있겠습니까? 그런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인과율이지요. 힘이 있는 자에게 약자가 덤벼서 생긴 결과인데 그것을 가지고 지금 뭐라고 할 생각은 없습니 다. 다만 제가 여기 나타난 것은....” “여기 따라 온 것은?” 나는 제란의 말꼬리를 물고 재촉했다. “저의 성장을 지켜보고 계셨던 루탄님 일행께 고맙다는 인사도 하고, 또 저기 계신 성녀님께도 인사를 전해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제란은 의외의 말을 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고맙다는 인사는 그렇다고 하고, 이루비아에게 무슨 용건이 있다는 것이 지?” “그건, 이루비아님께서 저에게 이런 힘을 주신 분이시니 당연히 인사를...” “제란 멜레시 그런 말도 되지 않는 소리는 하지도 마세요. 이미 당신에게 그런 힘 을 준 것이 성녀님이 아니라 아이슈마님이란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요? 그런데 이런 소동을 일으키는 이유를 알고 싶군요.” 아르미엘이 나서서 제란에게 일침을 놓았다. “아르미엘 사제님. 아니 이제는 사제라고 할 수 없겠군요. 오늘이 지나면 암흑교의 사제 명단에서 지워질 테니 말입니다. 아무튼 사제님의 말씀이 맞긴 합니다만 그래도 제게 힘을 주신 분이 아이슈마님이기는 해도 그 매개체가 성녀님이었다는 것은 변함 이 없지요. 물론 아르미엘 사제님과 함께 오늘로서 성녀의 지위도 없어지게 되었지만 말입니다.” “그런 것은 별로 상관없습니다. 저는 성녀라는 지위를 내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제가 제란님께 인사를 받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 는 아무 기억도 없는 일이니까요.” 말을 듣고 있던 이루비아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말에는 어떤 감정의 색체도 묻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나를 바라보는 천진한 눈빛과 닮아 있었지만 그것과는 또 명확 히 구별되는 점도 있었다. 적어도 차갑다라는 느낌은 나를 보는 눈에는 없었으니까. “역시 별로 환영을 받지 못하는 것 같군요. 그럼 제 방문의 진짜 목적을 이루고 사 라져야겠군요. 루탄님 그럼 한 번 어울려 볼까요?” 제란 녀석이 뜬금없는 소리로 겨우 안심되어가던(별로 싸움을 하려는 분위기가 아니 다 싶어서....) 내 가슴을 내려앉게 만들었다. “그 말은 지금 여기서 서로의 실력을 견주어 보자는 것인가?” 나는 조심스럽게(정말 소심해졌다.) 물어 보았다. “그거야 당연한 말씀이지요. 적어도 이 대륙에서 저와 맞상대를 할 수 있는 분이 루 탄님 말고 또 있겠습니까? 아이슈마님께서도 아마 루탄님이 제일 큰 걸림돌이 될 것 이 라 하셨거든요.” “나는 다른 사람의 일에는 별로 간섭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 사람인데? 그러니까 나를 건들지만 않는다면 서로가 불편한 관계가 될 일도 없다는 말이지. 그러니 그냥 편하게 지내는 것이 어떨까?” 나는 조금씩 저자세가 되어가는 내 자신이 싫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제란이라는 저 녀석의 힘이 나른 능가하는 것은 분명하니 말이 다. 깨질 것을 알고도 붙어보는 것은 무모한 일이지. “그건 너무 뻔한 거짓말이지요. 제가 하려고 하는 일에서 이 대륙의 어느 부분도 벗 어날 수는 없습니다. 저는 대륙 통일을 꿈꾸고 있거든요. 그런데 루탄님께서 이 대륙 을 떠나지 않으시는 이상은 언젠가는 부딪힐 것이라는 사실은 너무도 명백한 일이지 요. 저는 루탄님께서 아끼는 것들이라 해서 두고 지나갈 정도로 마음이 넓지 못하니 까 말입니다. 그것이 사람이든 물건이든 무엇이든 말이죠.” 결국 제란은 물러날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럼 여기서 하나가 죽어야 한다는 말인가?” 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루탄님이나 저나 지금 죽기에는 아까운 사람들이지요. 그리 고 아직은 도망가는 상대를 잡아 죽일 정도의 실력차는 나지 않을 것으로 압니다만? 그러니 저는 이건 전초전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빙긋 웃는 녀석의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는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서둘러서 자이건에게 가거라. 가서 기다리고 있어. 나는 제란과 조금 볼 일을 보 고 가야겠다.” 내 말에 화아가 대뜸 반대를 하고 나섰다. “그럴 필요 없잖아 형. 그냥 함께 싸우는 것이 좋지 않아? 함께 싸우면 힘도 덜 들 고 말아야.” “그래 오빠. 혼자 싸우는 것 보다는 함께 싸우는 것이 좋잖아. 그러고 지금까지 함 께 다녔는데 이런 상황에서 빠지라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래요. 오빠. 함께 싸워요.” “시끄럽다. 이놈들아. 남아서 무슨 도움이 된다는 거냐? 겨우 알량한 중급 정령의 힘으로 얼마나 도움이 될 것 같으냐? 그나마 멀리 떨어져 주는 것이 루탄에게 도움을 주는 일이야. 우리가 이루비아와 아르미엘, 그리고 자이건 쪽을 지켜 주는 것이 루탄 에게 도움이 될 거야.” “무슨 말이야? 우리가 최고로 힘을 쓰면 되잖아...” 갑자기 소리를 지른 것은 지토였고, 지토의 말에 반박하고 나선 것은 풍아였다. “풍아누님. 그렇지가 않아요. 우리가 힘을 쓰려면 루탄형님의 힘을 써야 한다는 걸 잊은 거예요? 이런 경우에는 루탄형님이 직접 힘을 쓰시는 것이 여러 면에서 이득 일 겁니다. 그러니 우린 남아있으면 짐이 되요. 그러니 그냥 가요.” 광아가 상황판단을 하고는 일행들을 재촉했다. “이이그. 가자!” 화아가 땅을 발로 차며 몸을 돌렸고, 그 뒤를 다른 일행들이 따랐다. 역시 둘째라는 위치가 크긴 큰 모양이다. 모두들 화아의 뒤를 따르는 것을 보면 말이다. 어쩌다 정해진 서열이 그래도 적용이 되는 듯 하다. 나는 한 번씩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보는 가족들과 일행들에게 미소를 지어 주었 다. 그리고 성채를 얼마 남기지 않은 숲 속에 나와 제란 둘이 남았다. 저기 멀리로 수아와 함께 와서 보던 돌담이 보였다. “그럼 시작을 해 볼까요? 많이 기다렸습니다. 저도 별로 시간이 없거든요. 오래 싸 울 생각은 없으니 간단하게 몇 번만 상대를 해 주시지요.” 나는 제란의 말을 들으며 쌍환검 중에서 우검을 풀어 쥐었다. “좋은 검이군요. 저는 이걸 쓰도록 하지요.” 제란의 검은 아이슈마의 기운이 풀풀 풍기는 검이었다. 그리고 그 검은 곧 팔뚝을 감싸는 모양으로 변했다. “시간이 없어서 중간을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이 제가 낼 수 있는 힘을 최대 한 끌어 올린 상태입니다. 그럼 갑니다.” 나는 저런 상태의 공격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온 몸에 금의 기운을 두르고 마법으 로 전면에 실드를 여러 겹으로 펼쳤다. 곧 제란의 칼끝에서 뻗어온 기운들이 실드를 두드렸고, 그야말로 종잇장 같이 실드들 이 찢겨 나갔다. 나는 순간적으로 위기를 느꼈다. 실드가 저렇게 될 정도라면 남은 몇 겹의 실드는 전 혀 의미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겨우 약간의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 전부다. 나는 급히 내력을 끌어 올려서 검강을 형성했다. 검강을 공격이 아닌 수비용으로 써야 하다니... 나는 최대한 검강을 펼쳐서 실드 형태로 만들어 몸을 보호했다. 검기로 이런 것을 만들면 검막이라 하는데.... 검강으로 펼치면 뭐라고 해야 하나? 투아아앙!! 실드와 부딪힐 때와는 전혀 다른 음향을 내면서 제란의 공격이 강기막에 부딪혔다. “크흑!” 나는 강기막과 금金의 기운으로 보호를 받으면서도 신음이 흘러 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을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 “대단하군... 굉장한 힘이야.” 나는 겉으로는 태연한 척 칭찬을 하며 마법력을 끌어 올려 콜드 에로우(얼음 화살) 을 만들었다. 물론 보통은 2써클 마법에 속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런 경우에 그런 마 법을 쓸 수는 없는 일이다. 화살은 겨우 다섯 개. 하지만 각각에 들어간 마력은 작은 호수 하나는 얼려 버릴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것으로 녀석의 털끝도 건들지 못할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일단은 얼음화살을 제란에게 날리고 쌍환검을 마저 풀어 양 손에 나누어 쥐 고 검에 금과 뇌의 기운을 최대한 집중시켰다. 그나마 쌍환검의 능력중에 이렇게 집적된 기운을 공격성향으로 바꾸어서 쏘아보내는 기능이 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그리고 금과 뇌의 기능은 속성상 잘 어울리기 때문에 좋은 효과를 내었다. 이를 테 면 상승 작용이라고 해야 하나? 우검의 금의 기운을 휘몰아 감싸며 좌검의 뇌의 기운 이 제란에게 쏘아져 갔다. 어느 틈에 제란도 실드를 펼치고 있었지만 적어도 실드 정도로 쉽게 막을 수 없는 공 격이기는 제란의 공격이나 나의 공격이나 마찬가지였다. 파아앙!! “윽!” 빙고!! 제란의 입에서도 신음이 나왔으니 비겼다고 우길 수도 있으려나? 하지만 아직도 내 공격은 끝이 난 것이 아니다. 얼음화살들이 제란의 등을 노리고 날 아든 것이다. 다섯 중에 둘은 실드에 막혀 깨졌지만 셋은 빗겨나갔다가 돌아온 것이 다. “차앗!!” 치치치징!! 차장! 역시 무리였나? 얼음화살들은 제란의 검에 막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역시 만만한 상대는 아닐거라고 생각했지만 기대 이상이군요. 루탄님.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말을 마친 제란의 검에서 스물스물 기어나오는 것은 어둡고 습하게 느껴지는 기운이 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고 펼쳐진 기운들은 어느 틈에 제란과 내가 있는 주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기운 속에 있으면서 어쩐지 기운이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건?” “일종의 결계입니다. 하지만 마력으로 펼치는 것이 아니라 아이슈마님의 마력으로 펼쳐진 것입니다. 그러니 상당히 힘겨우실 것 같습니다. 그럼 계속 해 볼까요?” 그렇게 말을 마친 제란이 택한 것은 접근전이었다. 말을 끝내고 움직인 제란의 몸이 말이 도착하기 전에 머리 위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 다. 챙! 제란의 검을 맞받고 뒤로 몸을 빼는 내 귀로 제란의 마직막 음운이 이상한 소리 로 늘어져 들리는 것은 착각일까? 하지만 이 이상한 결계는 마력 뿐이 아니라 내력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모양이었 다. 조금씩 조금씩 내 몸에서 기운이 흘러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정말 사정이 좋지 않게 된 것 같군. 이봐 이런 결계 따위를 쓰다니 말이야. 너무하는군.” “그거야 이것도 실력이니 너무 나무라지 마시길.... 차압!!” 제기랄. 좀 쉬엄쉬엄 하면 안 되나? 나는 제란의 검을 이리 저리 피하면서 최대한 검과의 충돌을 줄이려고 애쓰고 있었 다. 그것이 움직임이 많아서 더 힘이 들 것 같지만 사실은 제란과 검을 마주하면 내가 지 금 상당한 내력이 빠져 나간 것을 들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저러나 이런 괴상한 결계 속이라면 나에게 승산은 전혀 없었다. “읏차! 수. 금. 목. 토. 광.” 나는 좌검과 우검으로 번갈아가며 기운을 쏘아 내었다. 비록 검강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만 일단은 원거리 공격이 가능하고 빠른 시간에 발현 이 가능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견제의 효과가 있으리라 여긴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도 효과를 보아서 제란을 떨어뜨려 놓는데 성공을 했다. 아울러서 광의 기운이 이 칙칙한 결계를 약화시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마지막 광의 기운이 스친 자리에는 제란의 결계가 잘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비밀을 밝혀내신 것인가요? 하지만 아무래도 좀 늦으신 것 같군요. 상당히 힘 이 빠지신 것 같으니 말입니다. 그럼 이제 마지막으로 이걸 받아 보시지요.” 그 말과 함께 제란이 펼친 공격은 제일 처음 펼쳤던 그 공격이었다. 무언지 모를 기운으로 얽어진 투명한 공격, 하지만 그것을 분명히 느낄 수도 있었 고, 투명한 상태에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형상화된 것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이라는 말에 어울리게 이번에 오는 공격은 처음 공격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공격이었다. 속도도 위력도 엄청난 것이었다. 죽을 수도 있다. 이것이 내 머리를 짓치고 지나간 생각이었다.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내력으로 강기막을 만들고, 마력을 끌어 모아 블링크를 시도 했다. 비록 결계가 있기는 했지만 최대한의 블링크를 성공시켜야만 그나마 희망이 생기는 것이다. 퍼버버벙!! 휘이잉!! 콰곽!! “푸후훅!!” 나는 검강으로 제란의 공격을 막으면서 간신히 블링크를 성공시켰지만 충격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컥!! 울컥!” 나는 공격을 맞는 순간과 블링크를 성공시킨 순간 모두 입에서 피를 토했다. 젠장. 뱃속에 엄청나게 아프다. 이거 예전 장이 꼬였다고 할 때 보다 더 아픈 것 같 다. “쿨럭! 이거 아주 보기가 좋지 않겠군. 하지만 여기서 더 버티다가는 아무래도 무사 하지 못할 것 같으니 잠시 피해야겠네. 제란 그럼 다음에 다시 보세.” 나는 끝까지 그런 여유를 보이고는 순간이동을 시도했다. 비록 결계가 있기는 했지만 마력을 완전히 장악한 것은 아니어서 출발지의 좌표 설정 에는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도착지의 설정은 나도 알 수 없었다. 일단은 동쪽을 방향을 잡고 무작위 이동을 실행한 것이다. 온통 하얀 색으로 덮여 버렸다. 그건 내 머리도 마찬가지다. -집으로 돌아가자. - 퍼벅! 어딘가 부딪힌 것 같은데.... ... 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거야? 온 몸이 안 아픈 곳이 없군.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뒤집었다. 아직 눈도 뜨지 못하고 있지만 내가 흙바닥 위에 구겨지듯 처박혀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고, 얼굴이 땅바닥에 박혀 있는 것도 알 정도는 되었다. 겨우 정신이 들었다고 해야 할까? “끙!” 신음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팔 한 쪽의 감각이 없다. 그리고 머리도 엄청나게 아프고 배는 어째 남산 만하게 부풀어 오른 느낌이다. 굉장 히 아프다. 지금이 한 여름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지금의 이런 온도는 새벽이거나 혹은 깊은 산 속에 햇빛이 들지 않는 곳이거나 아니면 내 몸이 정상이 아니어서 생긴 기현상일 것 이 다. 그런데 왜 이렇게 어두운 것일까? 눈을 떴는데도 도무지 보이는 것이 없다. “이런 제기랄. 설마 눈이 멀기라도 한 걸까?” 어쨌든 나는 겨우 겨우 몸을 바로 눕힐 수가 있었다. 그 사이에 알게 된 것이데 일단 몸이 정상이 아니었다. 복부에는 상당한 출혈이 있었는지 죽지 않은 것이 용하다 싶은 정도로 부풀어 있었 다. 아주 띵띵하다. 팔은 한 쪽이 팔뚝 아래로 없다. 피가 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내 생각이 옳 다면 이 팔의 일부분은 순간이동 중에 다른 물질의 개입으로 중복되었을 가능성이 컸 다. 그리고 다리 쪽도 정상적이지 않았다. 한 다리가 부러진 것인지 어쩐 것인지 상당히 불편했다. 그나마 다행은 감각이 없다는 것이다. 난 지금 배가 아프다는 것으로도 죽 을 지경이고 팔이 끊어진 쪽에서도 아릿하게 통증이 올라와서 등골을 타고 흐르는 중 이다. 아주 죽을 맛이다. “윽~!” 팔뚝이 궁금해서 만진 나는 엄청난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세상이 노랗게 보인다. 눈 이 떠진 것인가..... 한동안 또 기절을 했던 모양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여전히 서늘하다. 그리고 아직도 앞은 보이지 않는다. 역시 눈이 멀어버린 것인가? 배가 너무 너무 거북하다. 아직도 배 속에서 출혈이 있는 것일까? 배가 더 불러 진 것 같다. 나는 누운 자세로 조심스럽게 단전의 내공을 모아 보았다. 증말 미치겠다. 배가 띵띵하게 불어 있어서 그런지 단전으로 호흡을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아니 완전히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주위로 마나을 움직여 보았다. “끄억! 그나마 다행이군. 이건 되는구나.” 하지만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인지 써클이 3써클을 넘지 못하고 간신히 만들어 졌다. 이래서는 치료 마법도 물 건너 간 것이다. 손도 한 쪽 뿐이라 란이를 소환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다른 방법이 있을지 모르지만 소환하는 것도 인을 맺어야 하는 것이라 지금으로서는 어렵다. 눈은 보이지 않고, 왼 팔은 팔뚝에서부터 없고, 다리 하나는 감각이 없고, 배는 띵 띵 불어서 숨쉬는 것도 정말 간신히 가능한 상태고... 문제는 점점 그것조차 어려워 지 고 있다는 것이지만 말이다. 3써클 마법으로 가능한 것이 무었이 있을까? 이 몸을 조금이라도 회복을 시킬 방법 이 있을까? 하지만 거의 기초마법에 속하는 3써클 마법으로는 도무지 적당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 았다. 가족들을 부르면?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었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아무리 소환을 해도 오지를 않는 것이다. 빌어먹을... 물질계에 나와 있는 상태니 다시 소환을 한다는 것도 불가능하고 눈앞 에 없으니 역소환을 시키는 것도 불가능하다. 역소환 다음에 다시 소환을 하면 될 텐데... 그것도 안되고... 배는 너무 아프고.... 다시 또 눈앞이 노랗게 변해간다. ....... 으윽. 숨이 막힌다. 숨을 쉴 수가 없어. 배가 너무 불러서 더 이상 폐로 숨을 끌어넣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 된 모양이다. 허허허. 이렇게 볼썽사납게 죽어야 하나? 그래도 아직까지는 짐승이 오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다. 만약에 피 냄새를 맡은 동 물들이라도 왔었으면 상당히 곤란했을 텐데... 어차피 이렇게 죽고 나면 그 몸뚱이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만... “끄윽. 끄-으-윽.” 도저히 숨을 더 이상 쉴 수가 없다. 누가 내 목을 조르는 것도 아니고 배가 띵띵한 상태라 숨을 쉬지 못한다니... 죽을지도, 죽을지도, 죽을 거야. 이러다간 죽을 거야. 나는 나도 모르게 오른손을 휘저어 주위를 더듬었다. “!” 그런 내 손에 잡힌 것은 마른 나뭇가지였다. 껍질이 모두 벗겨지고 알맹이만 남은 나뭇가지. 그리고 천운진지 그 끝은 제법 날카롭게(칼로 자른 것이 아닌데 날카로우면 얼마나 날카로울까.) 꺽여 있었다. “끄으윽!” 나는 온 힘을 쏟아서 숨을 들이쉬고는 최대한 힘껏 거꾸로 잡은 나뭇가지를 내 배에 꽂았다. 푸우욱! 익! 헤헤! 그래도 다행이야 몇 번이나 이 짓을 하라고 했으면 죽었을... 나는 그렇게 배에 박힌 나뭇가지를 뽑으며 또 정신을 잃었다. .... 춥다. 엄청나게 춥군. 몸속에서 피가 빠져서 그런 것이겠지? 정신이 들면서 처음 느낀 것은 춥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호흡이 상당히 편해졌다는 것은 잠시 후에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급히 오행심공을 시도했다. 엉망으로 엉켜 있는 내부기관들과 혈도들 덕분에 쉽지는 않은 일이었지만 하지 않으 면 죽을 수밖에 방법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 내 운공運功은 처절한 것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었다. 몸의 고통과 불편한 자세, 거기다가 정신적인 탈진까지. 나는 그런 것들을 넘어서고 간신히 무아지경에 이를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내가 깨어났을 때, 나는 지금껏 누웠던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여전히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내공이 회복된 상태에서 그런 것은 크게 문 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내 몸을 점검했다. 역시 예상대로 배 속에 상처가 나서 출혈이 있었지만 그건 운공 중에 거의 치료가 된 모양이었고, 팔뚝이 날아가고 없었고 왼쪽 다리가 부러져 꺾여 있었는데 오래 방 치 를 해서 아래 부분은 이미 괴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포기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최하 8써클의 마법이 아니고는 치료가 힘든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써클은 회복이 너무 더디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무리하게 결계 속에서 이동을 하면서 내 몸에 만들어졌던 써클의 원형들 이 많이 손상된 모양이었다. 이렇게 되면 처음부터라는 생각으로 재구성을 하는 방법뿐이었다. 물론 그래봐야 몇 달이면 회복이 되겠지만 지금 당장은 방법이 없었다. 나는 주위를 더듬어서 쌍환검을 찾아내고(한 쪽 뿐이었다. 다른 쪽은 아무래도 이동 중에 간섭현상으로 사라진 모양이었다.) 그 검으로 제일 먼저 내 다리를 잘라내었다. 치료 마법을 쓸 수 없었지만 혈도를 이용해서 출혈을 멈추거나 내력을 이용해서 외상 을 회복시키는 것이 어느 정도는 가능했기 때문에 출혈과다로 죽을 염려는 없었다. 그렇게 치료를 마친 나는 천천히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간단하게 나뭇가지를 꺾어 목발을 만들고 왼쪽 발에 묶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움직여 서 내가 있던 지역을 벗어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짐승들이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아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인가나 마을 혹은 도시가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주위에 나무들이 있고 숲이 있는데 동물들이 전혀 없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비록 내력을 회복해서 어느 정도는 물체들을 기로 감지하고 움직인다 해도 바 닥에 떨어진 돌멩이나 나뭇가지 같은 것들을 눈으로 보는 것처럼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덕분에 얼마 되지 않는 거리를 움직이는 데에도 상당히 시간이 걸렸고 피곤했다. 그렇게 움직이고 나서는 또 내 몸 상태가 엉망인 것도 문제였지만 굉장히 지저분하겠 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그래서 나는 창고에서 옷을 꺼내서 갈아입고(그 전에 클리어 마법을 썼다. 이건 4써 클이었지만 수식을 간단하게 만들어서 3써클로 겨우 성공했다.) 눈은 천으로 질끈 동 여 매었다. 팔과 다리도 붕대와 약으로 다시 치료하고... 왜 진작에 창고에 이런 물건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했을까? 나는 창고에서 빵과 음료(약한 포도주)를 꺼내 먹으면서 한심한 내 자신을 돌아보았 다. “이랴! 이 놈의 말은 왜 이렇게 굼뜬 거야? 안 그래도 늦었는데... 이럈!” 순간에 내 귀로 흘러드는 소리가 있었다. 상당히 먼 거리였지만 분명 사람의 소리였고 뒤이어 말의 발굽 소리와 마차의 바퀴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먹던 음식을 집어던지고 일어나 소리가 난 쪽으로 달렸다. 비록 눈이 보이지도 않았고 다리도 한 쪽 밖에 쓸 수 없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 최루탄이 죽은 것은 아니다. 중간에 간간히 나무들을 손으로 쳐 내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린 나는 마차가 일정 한 방향으로 달려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덕분에 길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었 다. 나는 다리에 힘을 주고 그 길을 향해 도약을 했다. 그리고 내가 내려선 곳에서 발로 느껴지는 감촉으로 잘 다져진 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 때, 마차는 마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마차를 몰고 있던 사람은 나를 길 위에서 치고 지나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던 모양인지 마차를 급히 세웠다. “워~! 워.” 말이 투레질을 하고 멈추었고 뒤이어 사내의 거친 음성이 달려들었다. “뭐야? 이 병신이 어디서 나타난 것야? 응? 죽으려면 곱게 죽지 어디서 발광이야? 응. 너 오늘 나한테 죽어볼래?” 상당히 다혈질인 모양이다. “미안하오. 내가 앞이 보이지 않아서 실례를 하였소. 그러니 너무 화를 내지 마시구 료. 그리고 어디까지 가시는지 모르지만 나를 태워주시면 그만한 사례는 하겠소.” 나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품속에서 작은 보석 하나를 꺼내 보였다. 눈에 잘 보이지 않아서 그게 값이 얼마나 나가는 것인지는 몰라도 생긴 것이 금강석 을 세공한 모양인 것으로 보아서 꽤나 할 것 같다. 나는 냉큼 보석을 품속에 다시 넣었다. 그리고 사내가 있는 쪽을 향해서 1000덴 짜리 동전 하나를 꺼내 던졌다. “헛!” 그리 방향을 잘못 잡지 않았는지 사내가 동전을 받아드는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들려 온 헛바람 삼키는 소리였다. “그 정도면 나를 가까운 마을이나 도시로 데려다 주는 데에 적지 않은 금액이라고 생각을 합니다만, 어떻습니까?” 나는 사내가 돈을 받아드는 것을 확인하고(기척으로 아는 것이다.) 이렇게 말을 던졌 다. “뭐, 이 정도라면 마차를 얻어 타는 액수로는 적지 않은 액수군요. 자 이리로 올라 오시오.” 마차에서 내려온 사내는 그렇게 대답하며 나를 마차로 끌어 태워 주었다. 역시 돈이란.... “그런데 어디를 가시는 길이십니까? 온 몸에 그런 상처를 입으시고 눈도 보이지 않 는 몸을 하시고...” 마차를 몰면서 사내가 물었다. “글쎄요. 저도 여기가 어딘지를 모르겠군요. 정말 여기가 어딥니까? 무슨 나라의 어 느 지역인지를 알 수가 없군요.” “예? 어떻게 어느 나라인지도 모르신다는 말씀입니까?” 사내의 목소리에 놀람이 가득했다. “하하, 그게 마법 순간이동 중에 사고가 있어서 이렇게 된 것이니 당연히 어딘지를 알 수가 없지요.” “예? 마법이요? 그렇겠군요.” 뭔지는 모르지만 일단 마법이라는 말에 기가 죽어가는 사내의 목소리였다. “그런데 여기가 어딥니까?” 나는 다시 사내에게 물었다. “여기는 한타왕국입니다. 지금은 자간으로 야채 배달을 가는 중이지요.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그리 오래지 않아서 도착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까 마차를 세웠던 곳 은 쉬벡의 성과 자간을 오가는 길 이었습니다. 그 옆에 작은 숲이 있지요. 아마도 그 곳에서 나오신 듯 합니다만.” “아~네. 그렇군요.” 나는 비로소 이 곳의 위치를 대략 짐작했다. “그런데 아무 도시에나 가시자고 하시니 도대체 어디로 가시려는 건지요?” “마법사 길드로 가려고 합니다. 아무래도 길드의 도움을 좀 받아야 할 것 같아서 말 입니다.” 내가 그렇게 대답을 하자 사내가 입을 닫았다. 아마도 내가 정말 마법사라는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마차가 한동안 달려갔을 때 드디어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웅성거리고 왁자지껄한 소리들이 들려오는 것이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것 같았다. “저 앞이 자간의 입구입니다. 경비병들이 검문이 있기는 하지만 문제는 없을 것입니 다.” 그리고나서 한동안 조금씩 움직이던 마차가 멈추고 낯선 음성이 들려왔다. “어서 오게. 이번에도 야채를 가득 실었군. 그런데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상 당히 몸이 불편해 보이는데?” “그게 여기 오는 길에서 마차를 탄 분인데... 마법사길드를 찾으시더군. 마법으로 이동 중에 사고를 당하셨다고 말이야.” “그래? 뭐 몸이 저러니 무슨 문제를 일으키거나 하지는 않겠지. 그럼 들어가 보 게.” “알았네, 저녁에 주점에서 보세. 내 한 잔 사지.” 나는 아무 말도 않고 앉아만 있었는데도 아무 무리 없이 그렇게 자간시로 마차가 굴 러갔다. “죄송하지만 저를 마법사 길드 앞에 좀 데려다 주시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사내에게 부탁을 했고, 이미 1000덴을 받은 사내는 별 거부 없이 나를 자간의 마법사 길드로 데려다 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어떻게 오셨습니까?” 내가 사내의 안내로 길드 건물로 들어서자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자 마법사라.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여자 마법사는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나는 그 여자의 몸에서 느껴지는 4써클에 가까운 마법 써클을 느끼고 신선하다는 생 각이 들었다. “여기서 마법사 길드의 우제푸와 연락이 되는지 알고 싶소. 만약에 연락이 된다면 최대한 빠르게 루탄이라는 사람이 찾는다고 전해주었으면 좋겠소.” 내 말에 길드를 지키던 여자는 상당히 놀란 듯이 숨을 멈추었고, 심장이 빠르게 뛰 기 시작했다. 아마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 흥분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숨소리가 거칠어지지는 않으니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런 마법사의 모습에 더 놀란 것은 나를 데리고 들어온 마부 사내인 모양이 었다. 오히려 그에게서 무척이나 빠른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로서도 무언게 굉장한 일이 벌어진다는 느낌을 받은 모양이었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일단 총길드에 연락을 취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 마법사는 나에게 의자를 권하고는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 여자는 그리 오래지 않아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뛰어 나왔다. “어, 어서 들어오십시오. 루탄님. 우제푸님께서 곧 이리로 오신다는 연락이..”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우제푸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얼마나 급했으면 이렇게 낮아진 내 마력에도 느껴질 정도로 엉크러진 수식으로 이동 을 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것이 우제푸에게 어떤 여향을 미칠 정도는 아닌 모양이었다. “이런, 루탄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어쩌다가 이런 모습이... 잠시만 기다리십시 오. 제가 소생을 시켜드리겠습니다.” 우제푸의 목소리였다. 그로서도 상상하지 못한 모습이었던 모양이었다. “아니, 그럴 것 없어. 우제푸 영감. 그냥 내 가족들에게 연락이나 해줘. 암흑제국과 의 국경에 자이건 선드라스와 함께 있을 거야. 최대한 빨리 내 일행들을 데려다 주면 좋겠어. 그 이외에는 별로 부탁하고 싶지 않아. 내 몸은 그대로 두라고. 나도 이런 내 몸에서 조금은 배울 것이 있는지도 모르니 말이야.” 나는 그렇게 우제푸 영감의 호의를 거절했다. 우제푸 영감은 평소와 다른게 가라앉은 내 분위기를 읽었는지 곧 길드 안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는 여자 마법사에게 내 시중을 명령하고는 금방 온다는 말과 함께 사라졌 다. 아마도 우제푸가 직접 일행들에게 갈 모양이었다. “미안하지만 이만 나가주겠나? 나는 피곤해서 좀 자야겠으니 말이야.” 내가 그렇게 여마법사에게 말하자 그녀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곧 문 밖으로 나갔다. 나는 힘겹게 침대에 몸을 뉘이고 어둠 속으로 정신을 내 몰았다. ....! 지금 내 머리에 무릎베개를 해 주고 있는 것은 누구일까? 익숙하지 않다. 그렇군 이 체향體香은 이루비아로군. 그럼 지금 내 손을 뺨에 대고 있는 이 녀석은 수아로군. 녀석 온통 얼굴이 물바다네. 나는 방안에 모여있는 녀석들을 느낄 수가 있었다. 수아는 내 오른 손을 잡고 울고 있었고, 풍아는 반대쪽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침대 발치에 화아 광아 지토의 기운과 이건 자이곱이겠군. 그리고 이건 자이 건? 자이건이 여기까지 무슨 일이지? 나는 슬며시 고개를 움직였다. “다들 모인 것 같구나. 걱정들 많이 했겠구나.” “흐흐흑! 오빠, 괜찮아요? 네?” “우아아앙 오빠.” 어째 수아가 풍아보다 더 점잖은 것 같군. “형!” “형님! 괜찮으신 겁니까?” “큼, 아주 걸레가 되었군.” 역시 성격이 들어나는 녀석들이다. 나는 다음 순간 내 이마에 떨어지는 뜨거운 눈물이 이루비아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얼굴도 눈물에 젖은 모양이었다. “하하, 괜찮아. 제란 녀석이 강했던 것뿐이야. 그나마 운이 좋았잖니. 조금 오래 요양을 하긴 해야겠지만 죽지는 않았으니 그리 큰 일이 난 것도 아니잖아. 그래도 이 대륙에서 손에 꼽는 실력자인 내가 이 정도에 무너지기야 하겠냐? 그저 좋은 것을 배 웠다고 생각하면 될 일이다.” 내가 그렇게 일행들을 진정시키는 중에 문이 열리고 우제푸와 아르미엘이 들어왔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이런 쪽으로 감각이 섬세해 지는 것 같다. “그 말씀이 맞아요. 제란 멜레시의 손에서 벗어난 것만 해도 다행이지요. 마지막에 제란 멜레시가 한도 이상의 힘을 쓴 것 같더군요. 제란도 내상을 입었는지 피를 토하 고 사라졌습니다.” 아르미엘 사제의 말이었다. 어째 그런 것도 알고 있을까나... “제가 루탄님께서 싸우신 곳을 면밀히 조사를 했습니다. 확실히 제란도 무사히 돌아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루탄님의 피가 아닌 다른 종류의 피가 있더군요. 그것도 마기 魔氣에 젖은 피가 제법 많이 떨어져 있더군요.” 아르미엘의 설명에 덧붙인 우제푸의 설명이었다. “하하, 그럼 내가 손해만 본 것은 아닌 모양이군.”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될 수 있으면 쾌활한 표정을 지으려했다. “그런데 오빠는 그 상처들 치료 않을 거야? 보기 싫은데... 그냥 우제푸 마스터에 게 치료 해달라고 해. 응?” 풍아가 왼 팔을 잡고 말했다. “그래요. 루탄님 상처를 빨리 치료하시는 것이...” 이루비아가 입을 열었다. 상당히 젖은 목소리였다. “아닙니다. 그냥 두세요. 이렇게 불편한 몸이 되었지만 덕분에 얻은 것도 있답니 다. 그리고 제 상처는 제가 치료를 하도록 하지요. 힘을 회복한 다음에 말입니다.” 나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눈으로 이루비아를 바라보며 말하고는 다시 고개를 숙여 일 행들에게 얼굴을 돌렸다. “저기, 대략적인 상황은 이해가 갑니다만 어떤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 를 좀 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내 귀를 울린 것은 우제푸의 목소리였다. “그것도 괜찮겠지. 나도 상황을 돌아볼 필요가 있으니 말이야.” 나는 그렇게 서두를 떼고 천천히 그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하려 했다. 제란의 능력(정확히는 아이슈마의 능력이거나 혹은 갑주형 마수의 능력이겠지만...) 에 대해서는 일단 말을 해 두어야겠기에 거기서부터 시작을 해야 했다. 하지만 적당한 비교 대상이 없었다. “이봐 우제푸, 당신이 예전의 나와 순전히 마법으로 붙으면 이길 수 있나? 나를 말 이야.” 내 물음에 우제푸는 대답을 망설이지 않았다. “그거야 당연히 어렵지요. 일단 마력의 차이가 너무 크니 말입니다.” “그래? 그런데 제란의 마력은 나의 마력보다 조금 적어. 그러니까 써클로 치면 9써 클 마스터의 마력보다 강한 마력을 지녔다는 말이지. 그가 얼마나 많은 수식을 알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그에게 아이슈마라는 마족이 붙어 있으니 수식에서도 절대 처 지지는 않겠지. 그런데 말이야 그 녀석은 마력이 그렇게 높으면서 검기가 아닌 검강 을 자유롭게 쓸 정도의 내력도 지니고 있어. 뭐 거기까지는 내가 그렇게 밀릴 이유도 없지. 그런데 녀석은 거기에 더해서 아이슈마라는 마족이 준 힘을 가지고 있거든. 물 론 마갑주를 통한 공격이 그 힘을 쓰는 방법이었고, 난 그 힘을 막을 방법이 없었어. 실드는 물론이고 강기까지 더해서야 겨우 막을 수 있는 것이었으니 말이야.” 나는 이렇게 최소한의 배경 설명을 하고나서 그 당시에 있었던 세세한 싸움의 내용 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결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에는 광아가 자기가 있었으면 조금은 상황이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탄식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마지막 공격에서 위기감을 느끼고 무리하게 순간이동을 했던 것인데 아무래 도 도착지 설정을 하지 못하고 간 것이 문제였던 모양이야. 더구나 내가 의식을 놓은 것도 큰 문제고 ... 정확히는 모르지만 팔은 다른 물질과의 간섭효과로 이렇게 된 것 같고, 다리는 높은 곳에서 정신을 잃은 상태로 떨어지면서 부러진 모양인데 많이 방 치 를 해서... 그런데 참. 내가 제란과 싸움을 하고 시간이 얼마나 지난 것야?” 나는 겨우 그런 질문을 할 여유가 생겼나 보다. 지금까지 그런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오늘까지 3일째입니다. 제란과 싸우고 실종된 것이 3일전 오후였고, 그저께는 모두 들 주위를 뒤지며 흔적을 찾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제 오후에 우제푸님이 오셨습니다.” 이루비아가 조용히 설명을 했다. 그녀는 내 머리를 무릎으로 받히고 조금의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이루비아님 그렇게 계시면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전 괜찮으니 편히 계시지요.” 나는 이루비아가 걱정되어 말했다. “제가 이러고 있어서 불편하지 않으시면 저는 이러고 있고 싶습니다. 그냥 이대로 있게 해 주십시오.” 불편? 몸이 편하다고 마음까지 편하겠냐? 이 여자야. 하지만 그렇게 대 놓고 말하면 안 되겠지? 나는 아무 말 않고 목에서 힘을 뺏다. 그렇게 잠시 휴식을 취하듯 입을 다물고 있자, 수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더니 음 식을 들고 왔다. 그렇고 보면 그 동안 먹을 것도 못 먹고 있었나 보다. 그런데 지금 배 속에 음식을 넣어도 될까? 내가 나무꼬챙이로 찔렀을 난 구멍이 다 막혔을까나? 나는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수아가 먹여주는 미음을 삼켰다. 그런데 왜 내가 음식 먹는 거 구경하고 있는 거야? 내가 곧 죽기라도 할 것 처럼, 음 식 먹는 것 처음보냐? 내가 아무리 눈이 안 보여도 니들이 뭐하고 있는지는 알 수 있 다. “니들... 빨리 나가라. 응. 누가 뭐 먹을 때, 빤히 쳐다보는 그거 아주 안 좋은 거 야. 알아?” 내가 그렇게 말로 일깨워 줘도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 녀석들이다. 이젠 내가 힘이 없다고 반항을? 역시 아프면 안 되는 거다. 하지만 내가 수아의 미음을 다 먹고 이루비아의 무릎 위에 머리를 내리고 눈을 감자 (원래부터 감고 있었던 눈이지만 휴식 상태로 들어갔다는 말이다.) 다들 조용히 일어 나 밖으로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루비아만 빼고 말이다. 이루비아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앉아있었다. 이럴 때 얼마나 조심스러운지 나는 안다. 혹시 내가 움직이면 이 사람이 깨지 않을까하는 마음에 몸속을 흘러 다니는 피의 흐 름까지도 신경이 쓰이고 폐를 들락거리는 공기의 움직임도 신경이 쓰인다. 늘어뜨린 손이나 팔에서 한 부분이라도 움직이면 따라 움직이는 몸의 근육들이 신경 이 쓰이고 내 몸이 아닌 다른 이의 몸(이 경우에는 이루비아의 입장에서 나의 몸)에 서 일어나는 작은 변화도 내 탓인가 싶어 긴장이 된다. 내가 그런 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묻지 마라.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다고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 다는 말은 아니니까 말이다. “많이 불편하지요?” 불쑥 나온 내 목소리 탓인지 이루비아의 몸이 경직되는 것이 느껴진다. “그렇게 긴장하지 말아요. 편하게 생각하세요. 이루비아 당신이 나를 보면서 어떤 마음일지 잘은 몰라도 짐작은 간답니다.” 내 말에 더욱 긴장하는 것 같은 이루비아다. 역효과인가? “루탄님, 그 상처 치료를 받으시는 것이 좋지 않아요? 많이 불편하실 텐데요.” 이루비아는 내 상처로 관심을 돌리고 싶은 모양이다. “왜요? 이런 모습이 많이 보기가 싫은 모양이죠? 혹시 평생을 이런 모습으로 살아 야 한다면 어떨까요? 치료가 불가능하다면?” 나는 슬며시 장난기가 돌아서(혹은 아주 야비하게 시험하고 싶은 마음인지도 모르겠 다.) 그렇게 물었다. “무슨 말씀이죠? 설마 고치지 못하는 건가요? 혹시 제란이 쓴 마기 때문에 상처 치 료가 안 되는 건가요? 그런 거예요?” 제법 상상력도 풍부하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아니, 아닙니다. 그저 만약 내가 이 모습으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면 이루비아님이 곁에 있어 주실 건가 궁금했어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슬쩍 웃어 주었다. “그런...” 잠시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을 끊은 이루비아가 잠시 후 차분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 었다. “그러고 보니 어쩌면 그것도 좋을지 모르겠네요. 다시는 누구와 다투지도 싸우지도 않고, 제게서 멀리 가 버릴 것 같은 두려움도 없을 테고... 가진 것이 적으면요 그럼 빼앗으려는 사람도 적은 것이 아닌가요? 루탄님이 힘이 없으시고 방해가 되지 않는다 고 여긴다면 제란도 더 이상 루탄님을 괴롭히지는 않을 테고, 제란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상하고 죽고 힘들고 하겠지만 루탄님이 힘이 없으면 그런 일에 관여하지도 않으 실 테니... 그저 저와 함께, 함께 계시기만 할 수도 있을 테니.... 그것도 좋을 수 있 겠네요.” 이루비아의 목소리는 차츰 잦아들었지만 나는 그녀가 원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건 내가 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인간이면 누구나가 가지는 이기심에서 비롯되는 삶의 방식 중에 하나였다.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지키며 살고 싶은 마음. 그것이 인간이 원하는 삶의 방향인 것이다. 이루비아에게는 내가 그 중에 가장 가지고 싶은 것인 모양이었다. 그럼 나에게는 무엇이 남을까? 내 가족들과 그 동안 인연을 쌓았다고 할 수 있는 몇몇의 사람들, 그것이 전부인가? 그 이외에 내가 가진 이기심은 무엇이 있을까? 제란에게 졌으니 언젠가 제란을 이겨야 겠다는 생각? 쥐뿔이... 난 그런 생각 따위 는 없다. 뭐하러 힘들게 가서 싸운다는 것인가? 그냥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것이 좋 지 않을까? 하지만 그렇게 피한다는 것에 내가 원하는 모든 사람을 넣을 수 있을까? 나와 인연이 닿았던 모든 사람들을 다 피하게 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들만을 가지고 피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 내 가족들과 평안과 안정을 가지고 도망을 가면... 그래서 숨어 살면 되지 않을까? 나는 이런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대의大義를 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잘 알고 있다. 그건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다. 내 것을 희생해서 다른 것을 살리는 것이다. 내가 제란의 앞을 막으려고 결심을 한다 면 그건 실제로는 나를 위한다기 보다는 나를 걱정하고 염려하는 사람들의 뜻을 저버 리고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나서는 것이겠지. 하지만 그것은 희생이다. 나를 염려하는 내 주위 사람들을 희생해서 아무 연관도 없 는 사람들을 위하는 것은.... 나는 그런 사람은 못 된다. 정말이다. 나는 그런 사람은 아닌 것이다. 나는 슬며시 침대 시트를 끌어 머리를 덮어 버리고 불편한 몸을 웅크리고 잠이 들었 다. 넥스 영지의 여름은 상당히 더웠다. 그리고 비가 적었다. 나는 내가 없는 동안 일데퐁소가 보살펴 온 채소밭과 울타리를 타고 오르는 야채들 을 보고(눈으로 못 본다. 만지고 냄새 맡고 하는) 있는 중이다. 우제푸는 내가 이 곳으로 돌아오려고 하자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자신이 우리들을 직접 넥스 영지로 이동을 시켜 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이건의 성 채에 있던 마차까지도 보내 주었다. 내가 자간의 마법사 길드에서 머문 시간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어느 정도 몸을 추스르자(내공이 회복되면서 그건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나 는 곧 이곳으로 돌아가자는 뜻을 보였고, 가족들 중에서 누구도 그것을 거부하지 않 았 다. 그래서 결국 이틀만인가 이 넥스 영지의 마법사 탑으로 이동되어 왔고 다시 이 언덕 위의 집으로 옮겨져 왔다. 내 모습이 상당히 처절했던 모양인지 길리어 남매들은 지금도 나를 피하는 모습이다. 하긴 아직 팔과 다리가 성치 못하고 눈에는 붕대를 감고 있으니 당연한 것이겠지만 말이다. 어린 아이들로서는 이렇게 평상적인 모습에서 벗어난 모습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 은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이다. 그것이 조금 시간이 지나고 적응이 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일단은 그 때까지는 시간 이 걸리기 마련이다. 아이들의 눈에 비친 불구의 모습은 그것이 주는 당황스러움으로 두려움을 주는 것이 다. 언제나 이것은 이건 이렇게 라고 생각하던 것이 어느 순간 그것이 아닐 때의 당황스 러움인 것이다. 우리가 어느 곳에서 다리가 다섯이나 셋인 사슴을 본다면 그것에서 느끼는 것은 부조 화일 것이다. 솔직히 셋이나 다섯이 무슨 문제겠는가? 하지만 넷 만을 보아온 우리들이 느끼는 그 부조화의 거부감은 무척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 거부감을 두려움으로 느낀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아직도 아이들이 가까이 오기 싫어하는 사람으로 남았다. 넥스 트리언 영주나 제레이나 부인은 그런 길리어 남매를 나무라는 눈치지만 나는 그 러지 말라고 하고 있다. 시간이 해결할 것이기에... 그래도 다행한 일이다. 어린아이들은 불구인 나의 몸을 낯설음에 기인한 두려움으로 바라보지만, 나이 먹은 많은 사람들은 혐오감으로 바라본다. 그나마 세상에 나처럼 다친 사람이 많았던 시절에는 그 상처가 누군가를 살리기 위 한 것이었든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든 의미를 부여했지만, 지금처럼 평화로우 면 그런 면도 상당히 약해지는 것이다. 그래도 예전 비틀림 전 시대에 비하면 참 나은 상황이다. 그 때엔 이유 없이 불구자 를 혐오스럽게 바라보던 시선들이 참 많았으니 말이다. 그 때도 순수한 어린아이는 낯 설음에 울음을 터뜨렸지만 나이든 자들은 근거 없는 혐오감을 표출하곤 했었다. 벌써 날이 기울고 있는 모양이다. 태양 빛의 각도가 상당히 낮아졌다. 멀리서 언덕을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적어도 저 발자국 소리가 일데퐁소의 것은 아니다. 일데퐁소는 오전 나절에 왔다가 갔다. 그리고 하나가 아닌 셋이다. “호호, 루탄님 또 여기 나와 계시네요? 뭐하고 계셨어요?” “오빠, 저희들 왔어요.” 언덕을 올라온 발자국의 주인들이 입을 열었다. 루아와 수아, 그리고 아르미엘이다. 이 셋은 가끔 영주 부인과 수다를 떨기도 하고 이런 저런 음식이나 옷들을 만들기 위해서 저택에서 모이곤 한다. “별로... 그냥 햇빛이 좋아서 이러고 있는 거야.” “호호, 네에. 그런데 오늘 저녁은 뭘 드시고 싶으세요? 드시고 싶으신 것이 있나 요?” 루아가 웃으며 물어왔다. 의외로 이루비아는 이곳에 온 이후로 상당히 활달해지고 또 무언가 불안이 없어진 모 습을 보였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과도 빨리 친해졌고 말이다. 거기다가 나에게 대하는 것도 이젠 스스럼없는 모습이 되었다. 가끔씩 팔짱을 끼거나 뒤에서 허리를 안는 기습을 하는데 그것도 별로 나쁘지 않다. “오빠, 저희 들어가서 저녁 준비 할게요. 조금 있다가 들어오세요.” 수아가 그렇게 인사를 마치고는 루아와 아르미엘을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다시 울타리에서 마당 중앙으로 발을 옮겨 중앙 탁자에 놓인 의자에 몸을 실었 다. 그동안에 내 몸의 내력은 거의 회복이 되었다. 그리고 마나 써클도 어느 정도는 회복 이 되고 있었다. 아직은 8써클에 겨우 닿은 것이지만 9써클을 만드는 것도 한 달 정도면 될 것 같다. 물론 몸속에 내력은 이미 완전히 회복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다만 이런 중에도 내 몸을 재생시키는 것을 미루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실제로 나는 내 눈의 시력을 거의 회복한 상태였다. 붕대를 풀면 그리 어렵지 않게 사물을 파악할 수 있었다. 물론 아직은 완전하지 않아 서 사물이 흐리게 보이기는 하지만 내력을 사용해서 눈을 조절하면 선명하게 사물을 보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나는 가족들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팔 다리의 재생도 자꾸만 미루는 중이다. 이유? 그건 내 마음을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오래지 않아 이 땅에 몰아올 피의 폭풍을 예감하고 있었다. 빅이 신계로 사라지면서 이야기한 그것이 시작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제란이 아직은 완전히 힘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지만 오래지 않아서(길어야 10년 일 것이다.) 암흑제국을 장악하고 대륙을 향한 침략을 개시할 것이었다. 내가 보았던 암흑제국의 힘이라면 아마도 어지간한 한 지역(여섯 지역 중 하나)으로 도 다른 네 개의 나라 중 한 국가를 상대하는 것이 가능할 것 같은 전력이었다. 아직 제대로 전력이 파악되지 않은 누웬을 제외한다면 한타나 그란드 신성제국은 너 무도 약체였다. 물론 나로서도 국가의 주요 전력에 대한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 한 타의 매직컬초의 힘이 어느 정도일지, 그란드의 힘이 어느 정도일지를 정확히 알 수 는 없었지만 겉으로 드러난 전력만으로 볼 때, 암흑제국의 힘을 감당할 수 없으리란 것은 분명했다. 그랬다. 나는 그런 미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는 이미 우제푸나 자이건, 아세트, 누웬의 황제, 이그왕과 로드 릴 재상 등에게 이야기를 해 주었다. 물론 신성제국의 나발리스 성기사에게도 이야기 를 전했다. 내 이야기를 듣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그들 나름의 사정과 판단에 따를 것이지만 아무튼 미래를 준비할 계기는 만들어 준 셈이었다. 하지만 정작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런지에 대한 판단이 서지 않았다. 예전 행문성의 싸움에서와 같이 나는 전면에 나서지 않고 대륙의 주역들이한 판 승부 를 벌이는 것을 지켜 볼 것인가? 아니면 제란의 힘을 꺾기 위해 노력을 할 것인가? 사실 제란도 나름대로의 야망을 불태우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남자가 대륙 제패의 꿈을 꾼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죄가 될까? 그것을 위해서 마족의 힘을 빌렸다는 것이 문제가 되나? 마신도 신이고 주신도 신이 며 정령왕도 신급 존재이며 신선이나 염라왕도 신급 존재가 아니었나? 나는 마족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선하지 않다. 그들은 사람의 고통과 괴로움에 서 기인하는 마이너스 에너지를 즐기는 존재들이다. 그렇다고 어둠 없는 빛이 있던가? 마족이라도 필요악임을 인정해야 한다. 악이 없이 선은 두드러질 수 없는 것이기에... 그래서 나는 제란의 뒤에 마족이 있다는 것을 문제 삼고 싶지는 않다. 내가 고민을 하는 것은 내가 대륙의 전화戰火에 개입하는 것이 내 정의에서 옳은 것 이냐 하는 것이다. 내 정의. 옳고 그름이 아니다. 내가 그러고 싶은가 아닌가에 있는 나의 정의. 사람을 죽이는 것이 싫다는 내 정의와 내 가족을 보호하고 아끼고 싶다는 내 정의와 내가 아는 사람들을 지키고 싶다는 내 정의와 세상에서 불행하게 고통 받는 사람들이 조금 적었으면 좋겠다는 얄팍한 내 정의와 별로 어떤 일을 위해서 내 자신을 희생하 는 것은 싫다는 내 정의.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란의 독주를 막아 야 하지 않겠느냐는 근거 없는 마음의 갈등 그 정의. 나는 이런 내 정의 앞에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결론을 내리기 전까지는 잠시 몸의 회복을 늦추어두고 싶은 것이었다. 아마도 이것은 나에게 하나의 화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살아가면서 무엇이 진정 필요한 것인가를 알기 위한 갈림길에 서 있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길이 하나 뿐이 아니고, 산의 정상은 알 수 없으니... 어느 길을 따라가도 정상은 나올 것인가? 저녁 식탁은 소란스럽지 않았다. 요즈음 가족들은(자이곱과 아르미엘, 루아를 포함해서) 상당히 차분해져 있었다. 나와 따로 따로 만날 때에는 그렇게 활발할 수가 없이 보이는 가족들이 이렇게 모이 고 나면 왠지 가라앉은 분위기가 되는 것이다. 딸가닥! 나는 젓가락을 그릇 위에 올려놓고(처음에 무척 고생했다. 눈으로 보지 않고 음식을 집어 먹어 보면 안다.) 고개를 들었다. 비록 내가 눈이 보이지는 않아도 이런 행동이 무언가 할 말이 있어서라는 것은 모두 들 알 수 있을 것이다. 순식간의 정적. “흠. 일단 좀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한 달 정도 지하실에 들어가 있을 생각이 다. 솔직히 말하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도 정리하고 몸도 회복을 하고 그 러고 나올 생각인데... 너희들도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말이다.” 내가 그렇게 입을 떼자 조금 소란스러운 느낌이 식탁을 훑고 지나갔다. “그럼 형, 얼마나 걸릴지는 기약이 없다는 거야? 전번처럼 그렇게 시간이 걸리는 것 은 아니고?” 아마도 화아는 1000년 전의 일을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러자 다른 가족들도 화아의 말에 근심이 된 모양들이었다. “정말 그렇게 오래 걸릴 수도 있나요? 네?” “오빠. 설마... 아니겠지요?” “루탄님, 무슨 말씀이죠? 전번처럼 이라니요?” 풍아 수아 루아의 말이다. “아니야.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약속하마.” “하지만 형님, 정확히 시간을 기약하지 못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럼 그 동안 무 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광아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을 줄였다. “크흠. 그거 꼭 해야 하는 일이냐? 안 하면 안 되는 일이야? 그냥 지금처럼 지내면 서 생각을 정리할 수도 있을 텐데? 굳이 그러는 이유가 뭐냐?” 지토가 물어왔다. “글쎄, 지금처럼 생활하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조금 내 자신을 다 잡을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고 하면 설명이 될까? 솔직히 말하면 조금 절박해졌다고 해 두자. 꼭 필요한 일이야.” 나는 지토의 말에 대한 답으로 모두에게 내 의지가 굳음을 보였다. “뭐, 형이 한다고 하면 해야지 어쩌겠어? 말릴 수도 없잖아. 어디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겨우 지하실에 들어가는 것뿐인데... 정작 안 되면 들어가서 끌고 나오면 되 는 일이잖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자.” 화아가 목소리를 높이며 하는 말이다. 아마도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한 허세일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혀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나 보다. 다들 조금은 차분해진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럼 루탄님 멀리, 오래 가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저는 많이 기다렸답니다. 다시 그렇게 기다리라 해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지만 이제는 제게 그렇게 많은 시간이 남은 것은 아닙니다.” 이루비아는 지간 1000년의 시간을 피부로 느끼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 시간을 잠시 감았던 눈을 뜨듯 보냈지만 이루비아는 그 오랜 시간을 깨어 보냈던 것이다. “걱정하지 말아. 루아.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될 거야. 그리고 내 사랑하는 동 생들 또, 지토. 내가 없는 동안 잘 지내. 그리고 자이곱 너는 둘째 주인을 잘 모시 고. 비록 종으로 따라 왔지만 너도 지금은 가족이니... 몸 건강해야 한다. 그리고 아 르미엘, 루아를 부탁합니다. 내가 당신의 신인 루시퍼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 신 다면 제 가족들이 루시퍼님의 품에 있지 않다해서 홀대를 하지는 마십시오. 부탁드립 니다.” 나는 그렇게 가족들과의 인사를 마치고 지하실(마법 연구실)로 들어왔다. 입구에 적당한 결계를 치고 나는 자리에 앉아(다리가 하나 없으니 상당히 어색한 모 양이다.) 잠시 멍~하게 있었다. 나는 한참 후에 자세를 바로하고 명상에 들었다. 화두라고 해야 하나? -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 - 내가 진정 원하는 정의는 어떤 것인가? - 내가 원하는 정의가 정의인가? - 정의란 있는 것인가? 대략 내 명상의 줄거리는 이런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이 그렇게 쉽게 정리가 될 턱이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내 몸을 도는 오행심공은 어느덧 태극의 기운을 몸으로 돌리 고 있었다. 몸속의 오행의 기운들이 서로 모여서 태극을 이룬 이 기운은 내 몸의 기운이었다. 하 지만 여전히 땅과 하늘의 기운은 움직임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굳이 몸속을 돌아다니는 기운들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로지 내 관심은 생각의 저 편에서 가물거리는 정의를 찾는 것이었다. 선계의 책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 자신을 잊고 세상을 잊고 우주를 잊으면 자신이 세상이 되고 우주가 되며 우주가 자신이 되고 세상이 자신이 되는 경지가 열린다. 참 재미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해석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선계에 들거나 열반에 든다는 것이 많은 경우에는 세속의 연을 끊지 않고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라고 하니 말이다. 저 말도 그런 것일까? 모든 것을 잊고 그 모든 것이 된다는 말은? 내 생각은 그야말로 좌충우돌하며 세상을 헤집고 있었지만 어디에도 답은 보이지 않 았다. 그래도 한 가지는 알 듯 했다. 모든 것으로부터 초연할 수 있는 마음이 신계로 들기 위해 왜 필요한지 하는 것 말이 다. 신계에 들어 내가 살던 세상을 보게 되면 참으로 많은 흠이 보일 것이고 그것들을 고 치고 다듬고 싶어질 것인데, 신계의 영역에서 인간계에 관여하는 것은 삼가야 할 일 일 것이고 때문에라도 신계에 들기 위한 조건으로 세상에 초연할 수 있는 마음이 먼 저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나는 신계에 드느니 하는 것들은 관심이 없는 일개인의 평범한 사람일 뿐이 니 결국에는 인간다운 것이 내 최선이 되는 것인가? 생각해 보면 답은 참 간단한지도 모르겠다. 내가 인간이니 인간다우면 될 일이다. 그럼 인간다움은 또 어떤 것일까? 적당히 속되며 적당히 고고하며 적당히 악하며 적당히 선하며, 어느 한 곳으로 치우 치지 못한 것이 인간이 아니던가. 누가 인간에게 극에 이르라고 하던가? 극에 이르면 이미 인간이 아니게 된다는 것이 지난 사람들의 족적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신선이 되던지 부처가 되던지 악마가 되던지... 인간이 극에 이르면 그것으로 인간 이 아니게 되지 않았던가? 극선極善과 극악極惡의 어느 것도 인간이 아니다. 그저 모든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인간일 뿐,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은 인간이기 를 원하는 것이지 극에 이른 다른 존재이길 원하는 것은 아니다. 휴우~~ 결국 내가 인간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으로, 아니 인간이기를 원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이 명상의 끝일까? 그런데 정작 내가 인간이기에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다시 원점인가? 하지만 달랐다. 내가 인간이라는 것을 자각한 상태에서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묻는다면 아주 간단한 답 이 나온다. 나를 포함한 세계가 움직이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나를 둘러싼 것들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움직이며, 그것들을 움직일 힘이 있으면 또 움직여주면 된다. 어떻게 움직여 줄지는 묻지 마라. 그것 역시 세계가 원하는 방법으로 움직여 주면된다. 다만 그 세계의 범위를 어느 정도로 볼 것인가가 문제이지만, 가족이냐? 가족과 친구 이냐? 가족과 친구와 지인知人(아는 사람)이냐? 가족과 친구와 지인과 부지인不知人 (모르는 사람)이냐? 내 세계의 범위만 정하면 내 행동을 쉬이 정하겠다. 그러고 보면 또 선택이 남았구나. 이제는 내 세상의 범위를 어느 정도로 할 것이냐가 남는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범위를 좁게 한정하고, 그보다 좀 나은 사람들은 범위를 좀 넓 히며, 그보다 위대한 사람들은 범위를 더욱 넓힌다. 그리고 인간 천체나 세상 전체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그것은 또 마음이 가는 대로 가면 될 일이다. 가족이 중하면 가족이 세계가 되어 다른 것들을 버릴 것이고, 가족과 친구가 중하면 또 다른 것을 버릴 것이고, 가족과 친구 중에 택해야 한다면 그 때 마음이 시키는 대 로 할 일이다. 그래 인간이니 많은 것을 구하지 말자. 그냥 내 세상(내가 정한 한정의 세상)이 원하 는 것을 하고 살자. 그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몸속에서 돌던 태극의 기운들이 스르르 몸을 한 바퀴 돌아 단전으로 모여들었다. 조금은 더 깨끗해진 힘이 느껴진다. 여전히 중단전과 상단전에 변화가 없는 것은 내가 인간이기를 고수하는 탓일지도 모 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내 주위를 돌고 있는 써클도 다시 9써클을 완성하고 돌아가고 있었 다. 뭐야? 써클이 자기 복원 능력이라도 있었나? 나는 내 몸의 상처들을 치료했다. 상당히 시간이 지나 다시 재생술을 펼쳐도 원형이 회복될까 걱정을 하기도 했지만 8 써클이 아닌 9써클의 부활수준의 재생마법은 불가능해 보이는 복원을 이루어 내었다. 그것은 아마도 내 몸이 오행의 기운이 변형되어 재구再構된 적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보통의 경우 상처가 나고 오랜 시간이 지난 경우에는 재생이 불가능한 것이다. 나도 그런 이유로 걱정을 했지만 마법력과 내공력이 합쳐지니 불가능도 가능이 되었 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지하실의 입구로 다가갔다. 그 동안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내가 천천히 1층 응접실로 올라갔을 때,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조금씩은 더 낡아 보이는 탁자와 그릇들이 놓여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것일까? 내가 밖으로 나갔을 때, 나를 맞이한 것은 초록으로 물들고 있는 들판과 서쪽으로 기 울어가는 태양이었다. “봄인가? 그럼 내가 못해도 8개월 이상은 저 안에 있었다는 말인가?”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오랜 동안 말을 잃고 있던 목은 텁텁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멀리 보이는 넥스의 저택을 바라보았다. 저택 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들이 들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 몸에 투명마법을 건 나는 슬쩍 몸을 바람에 싣고 저택 쪽으로 날아들었다. 블링크와 신법의 조화. 예전에 비해서 마법과 내공력의 사용이 더 자연스럽게 연결 이 되는 것 같다. 소란이 일고 있는 곳은 넥스 저택 뒤쪽의 연병장이었다. 예전에 지토가 만들어 주었던 것 보다는 족히 다섯 배는 더 넓어진 연병장이 보였 고, 그 주위로 한창 공사중인 건물들과 임시로 쳐진 것 같은 막사들이 보이고 있었다 . 그리고 연병장에는 한창 대련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한 여자와 한 남자가 서로를 견재 하며 검을 겨누고 있었고, 제법 오래 그런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는지 둘 다 땀에 젖 은 모습이었다. “이봐 테오도 그러다가 지면 무슨 개망신이냐? 그냥 적당히 하고 나와라. 꼭 결과 를 봐야 겠냐?” “무슨 말이냐? 이번에는 꼭 결론을 내라. 벌써 몇 번째냐?” “그래 맞다. 이번에는 화염기사단의 우위를 입증해라.” “무슨 헛소리냐? 안나, 그냥 쓸어 버려. 이겨 버리라구.” “그래 안나. 얼음기사단의 맛을 보여줘. 호호. 덕분에 화염기사단에게 술이나 좀 얻 어먹어 보자.” “무슨 소리를 테오도 이번에는 저 나긋나긋한 얼음기사단 단원들이 따르는 술을 먹 게 해 줄 거지? 만약에 진다면 각오하는 것이 좋은 거야.” 시끄럽게 떠드는 말들로 상황이 짐작은 갔다. 그런데 왜 안나가 여기 와 있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쉬레아와 미레나도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뿔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뿌우우웅~~ “이런 젠장. 또 결론을 못 냈단 말이야? 조금만 더 힘을 냈으면 되는데...” “안나, 뭐하는 거야? 또 무승부라니...” “자, 자. 빨리 자리를 정돈하자구. 이러다가 부단장님들 눈 밖에 나면 그야말로 죽 음이란 말이야.” 뿔피리 소리와 함께 장내는 순식간에 정돈이 되었고, 테오도와 안나는 칼을 허리춤 에 꽂고는 겨우 숨을 고르고 있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으면 둘 다 바닥에 눕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순식간에 정돈된 장내의 모습으로 인원파악이 되었다. 화염기사단이 76명, 그리고 여자들이 63명이었다. 그들은 정렬을 하고는 멀리서 먼지를 날리며 달려오는 일군의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 었다. 그리고 그렇게 달려오는 사람들의 선두에는 깃발 하나가 펄럭이고 있었다. ‘뭐야? 저거 야전대잖아?’ 그랬다. 내가 본 것은 예전 야전대가 그렸던 그 삼각의 깃발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말을 타고 달려오는 사람들은 바로 그 야전대의 인물들로 보였다. 1500명. 그리고 그 뒤로는 다시 수많은 사람들이 수레와 마차를 타고 혹은 걸어서 따 르고 있었다. 지금까지 야전대도 그들과 보조를 맞추고 있었던 모양으로 말들은 그리 지쳐보이지 도 않았고, 힘들어 보이지도 않았다. 야전대의 선두에는 넥스 영주가 앞서고 있었고, 그 뒤로 화아와 풍아, 자이곱이 보였 다. 함께 몰려 오던 사람들은 야전대와 넥스 영주, 그리고 내 가족들이 연병장으로 향하 고 나머지 인물들은 저택을 우회해서 마을 쪽으로 향해 방향을 틀어서 나누어졌다. 그리고 연병장 입구에 도착한 야전대는 말을 몰고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멈추었고, 넥스 영주 등이 정렬해 있는 화염기사단과 얼음기사단을 향해 왔다. “또 한바탕 한 모양이군. 그래 이번에는 결과가 나왔나?” 넥스 영주는 이미 짐작했다는 듯이 말했고, “하하, 그게... 이번에도 무승부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저 자가 오로한이었을 것이다. 화염기사단 2대의 책임자. 그러자 뒤에 있던 화아와 풍아의 시선이 화염기사단과 얼음기사단으로 쏠렸다. “이번에도 결론을 내지 못했단 말이지? 아무래도 좀 더 심도 있는 훈련이 필요한 모 양이군.” “그러게 말이야. 우리 기사단도 그래야 할 것 같은데? 오빠?” “풍아, 너무 무리하지 말아. 그냥 쉬엄쉬엄 하라고.” “그러는 오빠나 불쌍한 대원들 좀 그만 닦달을 하지 그래?” 아무래도 화아와 풍아가 화염기사단과 얼음기사단을 맡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 둘의 대화가 진행될 때 마다 몸을 흠칫 흠칫 떠는 것은 두 기사단의 단원 들이었다. “자, 일단 소개를 하겠다. 저기 있는 저 병사들은 누웬 왕국에서 황제가 보내온 병 력이란 것을 알 것이다. 명칭은 야전대. 수는 천 오백이다. 그 중에서 화염기사단의 세 대와 얼음기사단의 세 대에 각각 200명씩의 병사들을 할당하겠다. 그리고 남는 30 0 명은 특별히 야전대라는 이름으로 존속시킨다.” 넥스 트리언 영주의 말이었다. “각 대의 인원이 20명이니 각자 10명씩의 부하들을 책임지고 훈련시켜라. 이미 기본 은 철저하게 닦은 병사들이니 오히려 실력에서 밀릴 수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각 대 의 대장들이 알아서 통솔자를 바꿀 수도 있다. 그러니 알아서들 실력을 키워야 할 것 이다.” 이어진 영주의 말에 기사단원들은 어정쩡한 얼굴들이 되었다. 아마도 부하가 생긴다는 기쁨과 실력을 확인하지 못한 불안 때문일 것이었다. 혹시라도 부하에게 밀리는 날에는 그게 무슨 창피겠는가. 그리고 곧 화아와 풍아의 지휘에 따라 야전대를 각 기사단에 배속시키는 작업이 이루 어졌다. 그리고 임시로 마련된 막사들은 바로 이 야전대를 위한 것이었던 모양인지 그들에게 숙소가 배정되었다. 그리고 남은 300의 야전대는 자이곱에게 그 통솔이 맡겨졌다. 그렇게 소란을 떠는 중에 나는 슬쩍 자리를 피해서 저택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저택 정원에서 길리어 길리온 형제가 검술을 연습하는 것을 보고 그리로 발 을 옮겼다. “쯧쯔. 그게 아니다. 아직도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구나. 힘을 빼고 부드럽게 움 직여야 하는 것이야. 그게 중요한 거다. 길리어.” 두 형제가 검술을 연습하는 옆에는 두 명의 지토가 흔들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지토와 게브는 여전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 사이에 길리어와 길리온은 제법 많이 자라 있었다. 역시 아이들은 한 해가 다르게 크는 모양이다. 나는 다시 몸을 돌려 저택으로 향했다. “음? 이상하네? 게브. 뭐가 있는 것 같지 않아?” “응? 모르겠다고? 그래?” 뒤에서 들리는 지토의 목소리가 잠시 나를 긴장되게 만들었다. 역시 지토녀석 무시할 수 없는 녀석이라니까. 아까도 연병장이 그렇게 소란스럽지 않았다면 화아와 풍아도 이상한 느낌을 받았을 지 모를 일이다. 나는 더욱 조심스럽게 저택으로 스며들었다. “호호호,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언니?” 이건 루아의 목소리다. “어쩌기는 바보처럼 독을 마신 오빠에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나, 의사 전달을 할 수 가 있나, 그래서 그 때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힘을 써서 그 차에 들어 있던 독을 해 독했지. 그랬더니 겨우 이상을 느꼈는지 나에게 몸 속의 독을 해독해 달라고 시키더 라 니까...” “응? 그래서요? 그래서?” 루아가 다음 이야기를 제촉한다. “호호, 루아야. 벌써 10번은 더 들은 이야긴데 그렇게 제촉을 할 건 없잖아.” 수아의 말이었다. “그래도 언제나 이 부분이 중요하단 말이에요. 만약에 이 때 지심목이란 나무에게 붙잡히지 않았으면 루탄님을 만나지 못했을 거 아니에요? 호호.” “그래, 그래 알았다. 알았어.” 나는 목소리를 따라 그녀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예전 처음 이 저택에 왔을 때, 안내 되었던 그 응접실에 세 여자가 둘러앉아 바느질 을 하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루아도 한 살을 더 먹어서 그런가 조금은 더 성숙해 보인다. 수아는 변함없는 모습이고, 아르미엘은 절대 확인이 불가능한 그 상태로 있다. 이제 광아만 찾으면 되는데... 광아는 어디에 숨어있는 것일까? 나는 슬며시 응접실을 빠져 나가려고 했다. “루탄님?” 내 등을 잡아 끄는 소리가 있었다. “루탄님이죠?” “무슨 말씀이세요? 이루비아님. 여긴 아무도 없습니다.” “아니에요. 여기 있어요. 오빠가 왔어요. 아님 왔다 갔거나. 분명 오빠에요.” “그렇죠? 언니 언니도 느꼈죠? 루탄님이 오신 거 맞죠?” 나는 등 뒤로 들리는 소리를 멀리하고 다시 저택 밖으로 나왔다. 이런 이런 들킬 뻔 했다. 아니 들켰다. 어떻게 나라는 것을 알았을까? 루아와 수아는 나를 느끼는 다른 무엇이 있나? 나는 잠시 저택 입구에 서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퍼억! “어억! 누구야?” “아이고!!” 우당탕탕!! “어떤 녀석이냐?” “이놈이 오랜만에 만난 형한테 놈? 광아 너는 왜 몸을 감추고 돌아다니는 거냐? 응.” “에? 형님이세요? 그런데 여기서 뭐하고 계셨어요? 그것도 투명마법 같은 걸 쓰시 고... 설마 그런 모습으로 이루비나나 수아가 뭘 하는지 훔쳐보실 생각으로 오신 것 은 아니시겠지요?” 날카로운 놈. 역시. “뭐, 그렇다기 보다는....” 벌컥. “무슨 일입니까? 광아님... 아니? 루탄님?” 크라이안의 등장이다. 그리고 이런 소란에 조용할 턱이 없다. 정원 저 쪽에서 연습중이던 길리어 길리온 형제와 지토 둘이 정원을 가로질러 달려왔 고, 저택 안에서 수아와 루아 아르미엘이 달려 나왔다. “루탄, 이 녀석. 왔으면 인사를 하고 갈 것이지 슬쩍 보고 도망을 가?” 역시 지토도 내가 왔던 것을 뒤 늦게 알아챘던 모양이다. “역시 루탄님이었군요. 그런데... 아무 말씀도 없이 그냥 가시다니...” “오빠, 어쩌면 그러실 수가... 흐흑.” “.....” 차라리 이런 때에는 과묵해 보이는 아르미엘이 고맙다. 물론 꼭 쥔 주먹을 떨고 있 는 것을 보기 전까지의 이야기였지만... 끼이이익- 카다의 울음소리다. 그럼 풍아와 화아도 곧 달려 오겠군. 아마도 카다가 나를 보고 연락을 하는 소리일 테니 말이다. “자, 자. 들어가자. 내 집은 아니지만 일단 밖에서 이럴 수는 없잖니. 그냥 얼굴만 보고 집에 가서 기다리려고 했는데, 들켜 버렸구나. 하하하.” 나는 이상하게 무시무시해진 사람들의 눈초리를 피해서 그렇게 저택 안으로 들어갔 다. 피해야 한다. 지금의 이런 분위기는 아무래도 위험하다. 이런 상황에서 몰리다 보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모르는 일이다. 나는 상당히 속이 불편했다. 왠지 두려움이... -유비무환 - 준비 - 그리고 내가 응접실로 다시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기도 전에 응접실 문을 박차고 들 어오는 녀석들이 있었다. 화아, 풍아, 자이곱, 그리고 넥스 트리언과 일군의 떨거지들(기사단의 여섯 대장들) 이었다. “형.” “오빠, 나왔구나?” “큰 주인님.” “루탄님!!” “...” 등등등. 제발 그만 좀 불러라. 내가 어디 가는 것도 아니고, 멀리 갔다가 온 것도 아니고, 도대체 왜 이러는 거냐? 그리 좁지 않은 응접실이었지만 이렇게 사람들이 모이고 보니 그야말로 시장바닥 같 은 분위기가 되고 있었다. “저기 이러지 말고 우리 뭐 좀 먹으면서 이야기를 하지고. 나 지금 굉장히 배가 고 프거든?” 사실 별로 배가 고픈 것은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더 없이 좋은 핑계가 아닐 수 없었다. 덕분에 내가 제일 무서워하는 수아와 루아, 아르미엘이 음식 준비를 위해 나갔고, 더 불어서 풍아도 끌려갔다. 그리고 남은 녀석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지만, “그런데 밖에 그 많은 기사들과 병사들은 어쩌고 여기 지휘관들이 다 모여 있는 겁 니까?” 라는 말로 또 일곱을 내 보냈다. 여섯 명의 대장들과 자이곱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나 가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머지는 어찌 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 그 동안 많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네? 어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 좀 해 줄 래? 광아가 해라.” 나는 광아에게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물었다. 그리고 광아의 대답은 이런 것이었다. 우선 내가 지하실에서 지낸 시간은 일곱 달 정도 된다는 것이었다. 그 사이에 그란드와 한타 누웬은 각각 암흑제국의 발호에 대한 우려와 미래에 대한 준비를 숙의 했고, 각국 나름대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준비를 하기로 했다는 것 이다. 물론 여기에서 한타의 왕궁은 제외되었다. 한타를 대표하는 것은 매직컬초와 헤 이스런가문 그리고 강철기사단이라고 봐야 한다. 하지만 각국에서 어떤 준비를 하는지는 서로에게 비밀로 하고 있는 입장이라 자세히 알 수는 없다고 한다. 다만 그란드에서는 얼음기사단의 일부를 넥스 영지(다르게는 나에게)로 보내서 그 통 솔권을 넘겨주는 것으로 나에 대한 부채를 갚으려는 모양이었고, 누웬의 황제도 야전 대를 나에게 보내는 것으로 나에 대한 부채를 갚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부채란 다른 것이 아니라 피떡이 되도록 쥐어터지면서 얻어온 정보라는 것이 크게 작용을 한 것이었다. 그래서 얼음기사단은 겨울이 시작되기 전에 넥스 영지로 와서 합류를 했고, 야전대 는 그 가족들과 함께 와야 했던 까닭에 험한 산길을 따라 이동해야 하는 누웬과 신성 제국 사이의 교통로의 문제상 겨울이 지나고 눈사태의 위험도 없어지는 시기를 기다 려 서 이동을 해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야전대가 도착을 하게 된 것이라고... 그리고 한타의 매직컬초에서는 넥스 영지의 마법사들에 대한 특별 수련 프로그램을 마련해서 훈련을 시킨다는 명목으로 마법사 전원을 데리고 가서는 그 중에서 테스트 를 거쳐서 20명을 뽑고 나머지는 돌려 보냈다고 하는데 무슨 꿍꿍이인지는 알 수 없 다 고 한다. 덕분에 일데퐁소를 비롯한 20명의 마법사가 매직컬쵸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늘어난 병사들과 기사들은 각각 임시 총지휘를 넥스트린언 백작이 맡 고, 화염기사단 부단장에 화아, 얼음기사단 부단장에 풍아가 지명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은 군소리 없이 그 임무를 맡았는데 이유는 간단하게 재미있어서라고 한다. 그 이외에 오늘 도착한 야전대를 편성하고 남은 300명은 실력이 뛰어난 자들로만 구 성해서 자이곱에게 맡겼다고 한다. 그 사이에 자이곱도 다른 사람들에게 깊은 신뢰를 심어 준 모양이었다. 그리고 내가 나오면 상의하고 해야 할 것 같아서 미루고 있는 사안이 몇 가지 있다 고 했다. 내가 거기까지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에 식사 준비가 되었는지 루아가 우리들을 부 르러 왔다. 우리들은 예의 그 긴 식탁에 마주앉았고, 그 사이에 밖을 정리한 일곱명이 식탁에 합 류하고 제레이나와 리아도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식탁을 차지했다. 나와 내 형제 넷, 그리고 지토 그렇게 여섯에 넥스 부부와 아이들까지 다섯, 이루비 아와 아르미엘, 자이곱 이렇게 셋, 크라이안과 떨거지 여섯, 식탁에 마주한 사람들은 그렇게 스물하나라는 수를 채우고 있었다. 하지만 사십개의 눈동자는 왜 나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냔 말이다. 내 눈은 두개, 그것도 따로 놀지 않으니 한 곳만 볼 수 밖에 없고, 나는 음식을 먹으 려니 당연히 음식에 시선을 맞추는데 왜, 다른 사람들은 나에게 시선을 던지고도 그 렇 게 잘들 음식을 먹는 것인지... 내가 전에 눈이 안 보일 때, 음식을 보지 않고 입에 넣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경험을 해 봤는데... 저들은 그런 연습도 안 했을 텐데 너무도 잘... 이게 아닌데... 나는 그렇게 해서 너무도 불편한 식사를 해야 했다. 분명히 오늘 밤에는 배가 아프거나 혹은 채하거나 해서 고생을 해야 할 것이다. 식사가 끝나고 식탁을 치운(풍아가 그냥 식탁보 채고 뭉쳐서 들고 나갔다가 금방 들 어왔다.) 후에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잠시. “다들 건강해 보여서 좋구나. 그래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봐라. 시간은 많으니까 천.천.히.들. 물어라.” 나는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입을 열려고 하는 몇 사람들을 훑어 보며 뒷말을 급하 게 했던 것이다. 덕분에 봇물 터지듯 밀려 나올 뻔 했던 질문들이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처음 입을 연 것은 지토였다. “그래, 이제 마음 정리는 다 된 거냐?” “글쎄, 잘 모르겠어. 다만 이런 식의 정리를 했다. 뭐냐하면 내가 인간이니까 주위 사람들의 바람을 무시하고 살 수 없지 않을까? 그러니 주위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살 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일 거라는 결론을 내렸지.” “에? 뭐야 그게. 그럼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바라 는 대로 맞춰 살겠다는 거야? 오빠. 그 말이야?” 풍아가 대뜸 반박성 발언을 한다. “그건 좀 다르지. 그저 내가 독불장군식의 생각으로 살지 않겠다는 것이지 다른 사 람들의 생각에만 나를 맞추겠다는 것은 아니야. 내가 다른 사람을 바꿀 수 있으면 바 꾸면 되는 거지. 다만 너무 내 자신만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살겠다는 것 뿐이야.” “그럼 그건 예전의 형과 다른 것이 없잖아? 뭐가 달라?” 화아가 질문을 던졌다. “그 때는 내가 잣대로 삼을 것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어. 무언가 하려고 하는데 그 결정의 잣대가 없었다는 것이지. 하지만 이제는 최소한의 잣대는 생긴 거야. 바로 내가 속한 세계가 원하는 방향으로 행동하겠다고 하는 잣대가 말이야.” 내 말에 잠시 생각에 빠진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럼 루탄님이 속한 세계라는 것은 어떤 것이죠? 그 속에 저도 들어 있나 요?” 다시 입을 연 것은 이루비아였다. 내 자신이 생각하는 세계의 범위를 어느 정도로 할 것이냐는 질문이다. 가장 어렵운 질문. 나는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가 내가 생각하는 내 세계를 이야기했다. “내가 생각하는 내가 속한 범위의 세계는 나의 귀와 나의 손과 마의 마음이 미치는 곳, 그 곳까지야. 지금은 내 귀와 손과 마음이 이 식당에 있으니 그것이 내 세계지. 내 세계는 그 때, 그 때, 상황에 따라 많이 바뀔 거야. 단 나는 내 세계에 최선을 다 하려고 노력할 거란 것은 확실히 말할 수 있어.” “그럼 묻자. 간단히 말하지 제란의 문제에서 루탄 너의 세계는 어디까지냐?” 질문은 지토였다. 역시 외모에 따라서 정신 연령도 바뀌는 것일까? 지토는 이런 면에서는 진지하기도 하지만 깊이가 있는 질문을 가끔 한단 말이야. “그래, 제란. 제란이 문제지? 제란의 문제에서 내 세상은 넥스 영지와 그란드 왕실 과 매직컬초와 헤이스런가문과 강철기사단과 누웬의 황제, 그리고 그 사이 내가 여행 을 하면서 인연을 맺었던 모든 사람이 내 세상의 범위에 포함이 되.” “그럼 제란도 포함된 그 세상에서 제란이 문제를 일으키면 어떻게 할 거지? 그가 너 의 세상에 불협화음을 일으킨다면?” “그럼 당연히 그 시도를 막아야겠지. 제란을 막을 수 밖에.” 나는 간단하게 대답을 했다. “하지만 쉽지 않은 질문이 있다. 그 때, 제란을 막기 위해서 사람을 죽여야 할 때 가 있다면 어떻게 할 거지?” 여전히 계속되는 지토의 질문은 신랄하게 느껴졌다. 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것도 생각해 보았다. 살인이라. 그거 좋지 않지. 지금도 나는 살인을 좋다고 생 각하지 않고 최소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세계에 속한 사람들을 살리기 위 해서 다른 세계의 사람들을 꼭, 죽여야 한다면 망설이지 않겠다. 여기서 내 말을 오 해 하지 말아라. 나는 꼭 죽여야 한다면 이라고 했지 죽여야 한다면 이라고 하지 않았 다. 어쩔 수 없는 경우를 말하는 단서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건 너의 고집이다. 너를 둘러싼 세계는 너에게 꼭이 아니더라도 살인을 요구할 수 있다. 그런 때에 너는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겠다는 것이냐?” “그래, 들어주지 않는다. 내가 아무리 내가 속한 세계의 흐름에 나를 맡긴다고 했지 만 때로 내가 속한 세계를 내가 이끌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충분히 그럴 정도로 잘 난 사람이거든. 이런 사람은 혹자들은 일컬어서 선지자, 혹은 선구자, 선 각 자 등으로 부르곤 하지 하하하.” “잘났다. 정말.” 팽팽하던 지토와 나의 이야기를 그렇게 내 실없는 농담으로 조금 가벼워 졌다. 그때서야 잔뜩 긴장하고 있던 사람들이 남몰래 내 쉬는 숨소리가 여기 저기서 들려왔 다. 네스 길리어 남매에게는 너무 어렵고 또 무거운 이야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기억을 한다면 나중에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특히 길리어는 눈빛 이 초롱초롱했다. 아무래도 길리어는 무(武)보다는 문(文)에 어울리는 녀석인 것 같 다. “그럼 형님은 이제 제란이 싸움을 일으킨다면 그걸 막으실 결심을 하신 거로군요?” 조용하던 광아가 물어왔다. “그래,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뭐 다른 사람들이 그걸 웒하지 않는다면 나도 하고 싶 지 않은 일이지만 다들 원하는 일이니 그걸 해야 하지 않겠냐?” “다행입니다. 형님이 지하실에 들어가시고 지금까지 저희가 해 온 일이 허사로 돌아 가지 않아서 말입니다. 화염기사단이나 얼음기사단, 그리고 야전대와 마법사들이 우 리 에게 큰 힘이 되어 줄 것입니다. 그와 더불어서 형님께 여쭈어 보고 진행시켜야 할 일 이 있습니다.” 그리고 광아는 길리어 남매에게 시선을 던졌고, 제리니아는 눈치껏 그들을 데리고 밖 으로 나갔다. 그리고 여섯 명의 대장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들까지 일어나야 하는 일인가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말리지 않 았기 때문에 잠자코 있었다. 그나마 크라이안 집사가 남아 있었으니 문제가 될 것은 없어 보였다. “형님께 의논을 드려야 할 문제는 크게 세 가지 문제입니다.” 어느 정도 자리가 정리되자 광아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문제가 무엇인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은 다들 알고 있다는 듯이 나에게 시 선을 던지고 있었다. “이 일들은 모두 지금의 전력을 극대화 시킬 방안으로 연구하고 토론해서 집약해 낸 방법입니다. 그러니 될 수 있으면 이 세 방법을 모두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 다.” 그렇게 시작한 광아의 말은 길게 이어졌다. “첫 번째는 신계 환수의 소환과 귀속에 대한 것입니다. 실제로 환수들이 하급이라 하더라고 일반 병사 하나 보다는 월등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니 환 수를 소환하여 일반병이든 기사든 동화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지급하는 것이 필요하다 고 봅니다. 처음에 하급 환수를 준다고 해도 몇 년이 지나면 중급 정도의 환수를 귀 속 소환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되므로 장차 큰 전력이 될 것입니다. 물론 이 환수의 소환은 형님이 맡으셔야 할 것입니다.” 이런 죽일 놈 나에게 매일같이 앉아서 환수나 소환하고 있으라는 소리다. 그러니 나의 동의가 필요한 것이겠지. “다음은 기충의 활용에 대한 것입니다. 일단 아시는 바와 같이 기충을 주입받은 경 우에는 마법사의 경우 2써클, 검사의 경우에는 한 단계 높은 수준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마법사는 6써클 이상과, 검사는 검기 수련 이 상의 실력자에게는 기충의 침투가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하 더 라도 마법 써클 2써클과 검기를 활용하는 수준을 낮게 볼 수는 없습니다. 물론 기충 이 그 사람의 정신영역을 지배하는 단점이 있습니다만 한동안 기충이 침입한 상태에 서 검기와 두 단계 높은 수준의 써클을 운용했던 사람들이 기충을 제거하고 몇 달이 나 혹은 몇 년이면 기충이 있을 때와 같은 실력으로 성장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아 마도 이미 경험했던 것을 다시 한다는 점에서 이점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기충을 일반 병사나 마법사에게 투여하고 일정 시간이 지난 다음에 그 기충 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사람들의 실력을 키우자는 것이냐?” 나는 광아의 말을 중간에서 끊으며 물었다. “네, 바로 그것입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아무리 결과가 좋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그런 방법을 쓸 수가 있다는 말이냐?” “하지만 지금은 이 기충을 완벽하게 제거하고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 러니 반 년 정도 폐관 수련한다고 생각하고 기충을 지니고 생활하면 되는 것입니다. ” 의외로 광아의 반발이 심상치 않았다. “그럼, 만약에 기충이 투여된 상태에서 암흑사제에게 조종을 당해서 사람들이 상하 기라도 하면 어쩌려는 것이냐?” 확실히 이런 문제도 없을 것이라고 장담하지 못할 일이었다. “후후. 형님 우리에게도 암흑사제님이 계시잖습니까. 그것도 아주 고위 사제님이신 데요?” 광아는 그렇게 말하며 아르미엘을 가리켰다. “음? 그럼 아르미엘사제가 기충들을 다룰 수 있다는 말이냐? 아르미엘 사제님 사제 님께서 말씀을 해 보세요. 기충을 다룰 수 있습니까?” 내가 그렇게 아르미엘에게 직접 물어보자 아르미엘이 고개를 약간 들고(언제 저 후드 를 꼭 벗기고 말리라.) 말했다. “네, 이미 말씀 드렸지만 기충은 오래 전부터 저의 교단에서 교단의 방어 사제들에 게 투여하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방법은 기충 투여 후에 번식이 일어나면 그 번식된 기충들을 회수하고 몸속의 기충들은 자체 소멸시키는 것이어서 조금 다르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그 기충들은 상위 기충의 명령의 복종하게 되어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실제로는 상당히 위험합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기충도 최상위가 아니기 때문 에 다른 상위 기충의 명령이 있으면 저의 통제를 벗어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 만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이런 계획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아르미엘의 이어진 설명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기충들은 실제로는 최고위 마신의 힘을 이은 것이라고 한다. 즉 지금은 소멸되고 없 는 최고위 마신의 흔적으로 남은 기충의 우두머리가 있는데 그것이 번식을 해서 기충 을 만들어 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모태 기충 자체는 어느 누구도 몸속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고, 1세대 기충을 받아들인 사람도 역시 한 사람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1세대 기충에서 나온 2세대 기충이 바로 아르미엘이 가지고 있는 기충이고 그 아래로 3세대와 4세대 기충 이 있는데 우리가 잡은 기충들은 그 4세대 기충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한다. 물론 세대별로 기충들의 힘이 다른데 3세대 기충은 4세대 기충을 소유한 사람들의 정 신을 지배할 수 있다는 점이 다른 점이고 그 나머지는 4세대 기충과 같은 능력이 있 다 고 했다. 그리고 2세대 기충은 역시 4세대 기충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이 있는데, 이 때 차이가 있다면 3세대 기충은 자신이 낳은 기충만 지배가 가능하지만 2세대 기충은 4세대 기 충 이면 어느 것이나 지배가 가능하고 자신이 낳은 3세대 기충(정확히 20개의 3세대 기 충 이 나온다고 한다.)도 지배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또한 2세대 기충에는 특수 능 력이 있는데 그것은 기충들마다 다른 것이라 꼬집어 말할 수는 없다고 한다. 아르미 엘 의 기충도 역시 그런 능력이 있는데 그것이 정신체를 몸에서 분리할 수 있게 하는 힘 이라고 한다. “그럼 1세대 기충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지금 우리가 소유한 기충들을 이용해서 훈련 을 하는 것에 위험성은 없다는 말이군. 그리고 생각해 보니 1세대 기충이 나타난다고 해도 너무 많은 수의 사람들이 기충을 투여 받은 상황이 아니라면 피해가 크지 않게 할 수도 있을 테니 괜찮다는 것인가? 아무튼 이 문제는 좀더 상의를 해 보고 결정을 하자고. 그런데 아르미엘, 혹시 아르미엘도 3세대 기충을 다른 사람에게 준 것이 있 습 니까?” 내 말에 아르미엘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아직 제 기충은 번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20개의 3세대 기충을 그대로 가지 고 있습니다.” 아마도 아르미엘은 상당히 기분이 나쁠 수도 있을 것이었다. 혹시라도 우리들 중 누군가에게 기충을 넣은 것은 아니냐고 묻는 것이나 다름이 없 이 들릴 수도 있는 질문이니 말이다. 하지만 내 마음 속에 그런 의심은 없었다. 그런 의심을 하려면 아르미엘이 3세대 기 충의 수가 20개체라고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을 했을 것이다. 그보다 많이 않을까 하 는 의문을 가지지 않은 상태에서 누구에게 혹시 .... 이런 생각은 하는 것 자체가 바 보 소리를 들어야 할 일이다. “그리고 이 3세대 기충들은 루시퍼님의 사도가 아닌 누구에게 주는 것이 허락되지 않 습니다. 오직 루시퍼님의 종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아르미엘은 그렇게 뒤를 더하여서 우리들의 의구심을 불식시키려 노력했다. “그럼 이제 마지막 문제가 남았습니다.” 다시 광아가 말을 이었다. “마지막 문제는 제란의 암흑 제국에서 가장 두드러진 전력으로 떠오른 마갑주, 편의 상 그렇게 루탄형님께서 부르셨기에 그렇게 이름을 붙였습니다. 암흑제국에서는 갑옷 마수라 부르는 모양입니다. 아무튼 그 마갑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광아의 말에 흥미가 이는 것을 느꼈다. “아시는 것처럼 환수나 마수는 동화력을 지닌 사람이 그것을 제압하고 귀속 시키는 것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것은 무력이나 마력으로 좌우되는 것은 아닙니 다. 물론 그것은 저희와는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이유는 모르지만 오래전에는 마력 이 나 내력이 있으면 귀속이 가능했던 것들이 무슨 이유인지 동화력이라는 것을 필요로 하는 방식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거의 몇 백 년을 두 고 자연스럽게 일어난 일로 보입니다. 몇 몇 환수의 이야기로 확인한 것입니다. 하지 만 환수들도 그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절대 적 인 어떤 힘의 개입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만 그건 지금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디에나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문제이니 불평등은 없는 셈이니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잠시 말을 쉰 광아가 다시 말을 이었다. “어쨌든 지금 마갑주가 암흑제국의 큰 힘으로 작용하는 이 시점에도 우리들도 마갑 주의 사용이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역시 아르미엘 사제님과 자이곱의 확인으로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현재 기사단 총원 화염 77명, 얼음 63 명의 인원 중에서 마갑주의 착용이 가능하다는 판정이 난 사람은 화염 기사단에서 단 장님과 테오도 파비올 대장님을 포함 총원 24명입니다. 그리고 얼음기사단은 안나 대 장을 포함한 19명입니다. 또, 야전대에 대한 것은 아직 확인 되지 않았습니다만 이보 다는 많은 수가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잖아. 일단은 마갑주의 착용이 가능한 사람이 있다는 것 은 알겠는데 마갑주를 어디에서 얻느냐 하는 것과 그것의 부작용은 없느냐 하는 것도 생각을 해야 하지 않겠냐? 그게 더 중요할 것 같은데?” 나는 다시 광아의 말을 끊었다. “물론입니다. 마갑주의 첫째 부작용은 무리한 착용으로 마수에게 지배당할 수 있다 는 것이 문제인데 이것은 스스로가 조절 가능한 것이니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봅니 다. 물론 이에 대한 정신 교육은 강력하고도 지속적으로 시행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 합 니다. 그리고 두 번째 부작용은 마수가 제란에게 역으로 지배당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 인데 그것은 아르미엘 사제님의 말씀으로는 제란이 직접 나서지 않는 이상은 어려운 일이고, 더구나 암흑제국의 영토 밖에서는 쓸 수 없는 힘이란 말씀이셨습니다. 역시 4 계의 약속 때문인 듯 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역시 부작용에 대 한 문제도 약간의 위험을 감수한다면 그 위험에 비해 얻을 수 있는 이점이 큰 까닭에 포기하기는 아까운 것이 사실입니다.” 다시 말을 잠시 멈춘 광아가 내 눈치를 살피더니 내가 별 이야기 없이 앉아있자 다 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마갑주의 획득에 대한 문제인데 마갑주는 마수이기 때문에 직접 잡거나 혹 은 아르이엘님이 소환을 해 주시는 방법, 두 가지가 있는데 직접 잡으러 다니는 것은 적의 관심을 끌게 되는 난점도 있고, 그다지 많지 않은 마갑주를 쉽게 얻기도 어렵다 는 이유로 실행이 불가능하고 아르미엘님이 소환을 해 주시는 방법을 쓰기로 했습니 다 만 이 때에는 약간의 꺼림칙한 제사 의식이 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입니다.” 다시 광아가 나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라는 듯이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다만 크라이안만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 그 제사의식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냐?” 나는 조금 가라 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어린 여자 아이들의 피가 필요합니다. 그것도 마갑주 하나에 한 사람씩의 어린 여자 아이들의 피가...” “무슨 헛소리냐? 설마 마갑주 따위를 얻기 위해 어린아이를 희생해야 한다는 개소리 는 아니겠지? 광아 너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온 것은 아니겠지?” 갑작스럽게 소리를 지르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탓일까? 아니면 나에게서 일어나는 기세 탓일까? 식당안에 있던 사람들의 안색이 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루탄아 그렇게 화를 내지 말아라. 이것이 너에게 주어진 첫 시험이라 생각해라. 어 떠냐? 네가 속한 세상에서 너에게 이런 것을 요구한다면....” 쾅!! “헛소리. 그렇다면 내가 먼저 내 세상을 부수고 말테다.” 식탁의 한 귀퉁이가 날아갔다. 물론 그 원흉은 나였다. “킬킬킬, 그렇다니까. 역시 바뀔 수 없는 루탄 녀석이라니까...” “그래요. 역시... 오빠는 변할 수가 없는 사람이에요.” “뭐 저럴 거라고 생각했어. 그러기에 왜 루탄 오빠를 시험하고 그래? 그냥 이야기 를 하면 되지. 광아가 잘못 했네.” 뭔가 분위기가 내가 생각한 분위기는 아닌 것 같다. 아마도 내가 생각한 그것은 아닌 모양이다. “형, 그냥 앉아. 그래도 형이 저렇게 과격한 모습 보이는 것은 처음인 것 같지 않 아? 새롭네.” 화아가 유둘유둘한 웃음을 흘리며 그렇게 말했고 나도 뭔가 분위기가 아니다 싶어서 다시 자리에 앉아 광아에게 시선을 던졌다. “하하, 그럼 다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마갑주를 소환하는데 여자아이의 피가 필요 합니다. 하나의 마수에 한 명의 여자아이의 피가 약 두 컵 정도 필요하다는 말입니 다. 물론 목숨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고 피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그 피의 주인 에게 해가 되는 것은 없습니다. 영혼의 침해라거나 그런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다만 소환의 대가로 필요한 것이 어린 소녀의 피일뿐입니다. 그런데 한 아이 당 한 마수라 고 한 이유는 어린 아이의 몸에서 두 컵 이상의 피를 뽑으면 아무래도 무리가 갈 것 이 기 때문에... 그렇다고 두고 두고 한 아이에게서 피를 계속 뽑는 다는 것도 말이 되 지 않는 것이니 말이죠.” 그렇게 말을 끊은 광아가 나에게 시선을 던졌다. 뭐 할 말 없수? 이런 표정이다. “그런데 아르미엘 사제님께서 마수를 소환하신다면 그 마수의 등급이 어느 정도가 되는 것입니까? 혹시 마수가 나오는 것도 무작위로 소환이 되는 것입니까?” 내가 아르미엘 사제를 바라보며 물어보자 아르미엘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제가 소화할 수 있는 갑옷마수는 최하급에서 하급 중급 대급 태급까지 입니다. 하지만 대급과 태급의 경우에는 그 제물이 다른 까닭에 지금으로서 중급까지 만 소환이 가능한 상태입니다.” 나는 아르미엘에게 대급과 태급에 사용되는 제물을 묻지 않았다.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영혼일 것이다. 마족들이 너나없이 좋아하는 인간의 영혼.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대급이나 태급도 고려 대상에 넣어야 할 것이야. 어차피 강한 적과 맞서야 할 입장에서 이것저것 가리는 것도 배부른 소리에 지나지 않아.” 생각의 옆구리를 자르고 들어온 것은 지토의 칼날 같은 말이었다. “그렇습니다. 대급과 태급이 비록 수명을 깎는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고 해도 필요 에 따라서는 써야 할지도 모릅니다.” 뭐야? 오늘 왜 이렇게 예측이 벗어나는 경우가 많아? 그럼 대급이나 태급을 부리기 위해서는 자신의 수명 중에서 얼마를 포기해야 한다는 거야? “그런데 그 수명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나 줘야 한다는 거야?” “자이곱의 경우에는 10년의 수명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만약 태급정도라면 50년의 수명을 달라고 할지 아니면 앞으로 얼마의 시간만을 남기고 나머지를 가지고 가겠다고 할지 모른다는 것이 자이곱의 말이었습니다. 그것도 처음 계약을 할 때 정 해 지는 모양입니다. 일종의 흥정이지요.” 내 말에 대답을 한 것은 광아였다. 수명으로 흥정을 해서 대급이나 태급 마수를 부린다라... “하지만 그것도 역시 그 정도의 마수를 부릴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경우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를테면 동화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물론 마갑주의 경우에는 동화 비율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으니 처음부터 능력이 뛰어난 갑주를 얻는 것이 유리하다고 봐야겠지요. 그리고 일단 마갑주의 소환주라는 것으로 얻는 이득만 으 로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니 대급이나 태급에 대한 욕심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 것도 거짓말이겠군요.” 이어지는 광아의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재미있는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그런 마갑주 하나 얻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아울러 하지 않을 수가 없었 다. “아무튼 일단은 중급 마갑주까지는 그런 위험은 없는 것이라면 갑주들을 기사들과 병사들에게 지급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군. 그리고 기충에 대한 것도 아울러서 생각 을 해 보자.”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히 아까 부셔놓은 탁자의 한 귀퉁이에 눈길이 간다. “하하, 오늘은 나도 피곤하고 하니 나머지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합시다. 일단은 나도 가족들과 회포를 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우리 가족들을 데리고 서둘러 저택을 빠져 나왔다. 실제로 따지면 우리 일행이 여덟이고 식당에 남은 것은 넥스 영주와 크라이안 집사뿐 이었다. 나머지야 벌써 예전에 식당에서 쫓겨났으니 말이다. 아마도 크라이안은 식탁을 보며 저걸 어떻게 할까를 고민하고 있을 터였다. 응접실에는 오랜만에 가족들이 다 모였다. 처음부터 넓게 만들어 놓은 곳이라 그 많은 인원이(우리 가족 여섯과 루아, 아르미 엘, 자이곱, 5환수에 맘맘.) 다 모였어도 비좁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란이는 그야말로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대쟁투장에서 이동할 때 보내곤 다시 불러 주지 않고 있었던 것 이다. 그러니 당연히 화를 낼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응접실에 온통 란이의 울음소리가 가득 찼다. 내용이야 뻔한 것이다. - 너무해요. 주인님. 어쩌면 그러실 수가... 저를 잊고 계셨던 거지요? 제가 얼마나 심심하고 따분하고 무료하고 권태롭고..... 등등등. 그래서 너무해요. 주인님. 그러 니 까...... 등등등. 그래서 너무해요 주인님. 등등등. 하지만 곧 우리들이 분위기를 잡자 란이도 그 서슬에 조용히 조용히 쫑알거리기 시작 했다. 덕분에 우리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지금 와서 이런 말을 좀 늦었지만, 모두들 무사하고 건강하게 있는 것을 보니 반갑 구나. 너희들도 그렇고, 루아와 아르미엘 사제님. 그리고 자이곱. 또 너희들도.” 나는 가족들과 루아와 아르미엘, 자이곱과 더불어 환수들과 맘맘에게도 인사를 했다. 그리고 모두들에게 관심과 걱정 어린 인사들을 받았다. “그래도 들어갈 땐, 이상한 모양으로 들어가더니 멀쩡해 져서 나왔군.” 이라는 지토의 인사만 빼면 말이다. “그럼 이제 오빠는 좀 더 많이 세상일에 관심을 가지는 것인가요? 바빠지시겠군 요.” 수아의 말이었다. “그런데 형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데? 난 그저 형이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결론 을 가지고 나올 줄 알았는데? 뭐 아까 보니까 역시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하더구만. 그거야 다른 사람들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니.... 어쨌든 조금은 달라진 것 같은 데 그게 뭔지는 확실히 모르겠단 말이야.” 화아의 투덜거림이었다. “클클. 글쎄, 더 나아진 것인지 못해진 것인지는 몰라도 이제부터 상당히 바빠지게 되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기사들과 병사들 훈련을 시키는 것도 그렇지만 아무래도 광 아가 하는 일도 좀 더 탄력을 붙일 필요가 있겠어.” “광아가 하는 일? 그게 뭐야? 뭐 다르게 맡은 일이 있는 거야?” 나는 의외의 말에 이렇게 물었다. “별건 아니고, 마췬 길드를 좀 이용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한 몫 떼어주기로 하고 지금은 후불로 여러 정보를 모으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이제 형님께서 오셨으니 대금 을 지불할 수 있게 된 셈입니다.” 도둑길드를 이용한 정보 수집이야 짐작하고 있던 것이었지만 광아가 그런 일을 맡고 있었다는 것은 의외였다. 그런데 돈을 내 놓으라니... 모른 척 하자. 일단은. “그래 그 동안 다른 일은 더 없었어?” 내가 다시 화아 등을 보며 물어보자(광아와는 눈을 피했다.) 광아가 주먹을 쥐고 부 르르... “아참! 광아야 그런데 그 길드에 돈을 얼마나 줘야 한다구?” “음. 형님. 그러니까 우선은 약 1억 덴 정도의 돈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여유롭게 쓸려면 3억덴 정도는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러니까 예전으로 치면 약 3백억이 필요하다는 말이군. 그걸로 되나? 천 명 을 일을 시키면서 봉급으로 백만원씩 줘도 10억인데... 3백억으로 얼마나 쓸 수 있을 까? “그래? 생각보다 적게 드는구나. 그 정도야 별로 어려울 것 없지. 알았다.” “당연한 겁니다. 형님. 형님 돈이 제 돈인데 쉽게 줄 수야 없지요. 정말 실비만 주 고 일 시키고 있는 중입니다.” 이어진 광아의 대답이었다. 역시 광아도 무서운 녀석이다. “그리고 전에 부탁하신 정보는 수집이 되었습니다. 의외로 우리들 모두에 관련된 지 명들이 모두 있습니다. 먼저 지토아저씨는 지토의 벽이라는 제목으로 만들어진 곳이 있는데 지금은 바위정령족의 영토와 인간의 영토를 구분하는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장소는 신성제국과 그란드왕국의 경계입니다. 추월할 수 없는 길이 있는 산보다 더 동 북쪽에 있습니다. 그리고 화아의 숨결이란 곳이 있는데 이 곳은 누웬과 신성제국의 사 이에 있는 산악지대의 활화산을 일컫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광아의 손길이란 곳이 있는데...” “뭐냐? 다른 사람은 얼굴 붉어지게 만들고 너만 빠져 나가겠다는 거냐? 어서 말 못 해?” 말을 끄는 광아에게 지토가 한 소리를 질렀다. “그러니까 광아의 손길은 한타 북부지역의 곡창지대에 수확기가 되면 노랗게 물드 는 황금물결로 흔들리는 전체를 그렇게 부른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쉬 벡 님의 농간에 의한 것입니다. 작명자가 모두 쉬벡님이고 어느 정도는 그런 현상에 지 대 한 공헌을 했다고 하니 말입니다.” 광아는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아직도 쉬벡의 마법의 흔적이 남아있는 풍 교나 수아의 머릿결처럼 다른 곳에도 무언가 쉬벡의 흔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 언젠가는 한 번 가봐야 하겠는 걸? 언제 시간이 나면 한 번 들러보도록 하 자.” 내가 그렇게 말하자 모두를 좋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당사자들은 조금 이상한 표정을 짓기도 했지만 말이다. 뭐 실제로 풍아나 수아도 그것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다른 녀 석들도 그럴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여기에서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면 바위정령족을 찾아 봐야 할 필 요가 있습니다. 얼마전에 그란드의 이그왕에게서 바위정령족이 도움을 청해 왔다는 연 락이 있었습니다. 자세한 것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환수가 그 쪽으로 이동을 해 간 모양입니다. 그래서 환수의 영역에 바위정령족의 영역이 편입되어 곤란을 겪고 있는 모양으로 환수의 퇴치를 부탁해 왔습니다.” “그래? 알았어. 일단 그건 여기 문제를 해결하고 가기로 하자. 당장 무슨 일이 있 는 것이 아니라면 좀 늦어도 되는 일이겠지?” 내가 그렇게 묻자 광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말이야. 일데퐁소 등은 언제나 오는 거야? 오래 걸리는 거야?” 내가 그렇게 물어보자 역시 광아가 대답을 했다. “그건, 알 수 없습니다. 우제푸 마스터가 일데퐁소를 포함한 21명의 마법사들은 아 주 확실히 준비를 시켜서 보낼 테니 기대하라는 말만 하고 연락을 끊어 버려서....” “이 영감이 내가 없다고 아주 물로 보는구만. 언제 한 번 걸리기만 해봐. 아주 껍질 을 훌렁 벗겨 줄테니...” 나는 그렇게 혼자 중얼거렸다. 그런 내 모습이 뭐가 재미가 있는지 수아와 루아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또, 다른 사항은 없어? 혹시 암흑제국의 소식은 들어온 것이 없는 거야?” 내가 그렇게 물어본 것도 역시 광아였다. 이젠 정보에 대한 것은 모두 광아에게 묻는 것이 가장 빠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이다. “구체적으로 제란의 움직임을 물어 보신 것이겠지만, 실제로 그렇게 고급 정보는 별 로 들어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저 물자의 이동이나 평상시와 다른 변동사항을 모아서 녀석들의 동태를 살피는 중입니다만 별다른 움직임은 없습니다. 다만 두룬과 제란이 밀접하게 연관을 맺고 주위의 다른 지역들과 교류를 넓히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암흑제국의 황제는 여전히 아무런 움직임도 없습니다. 실제로 암흑제국 역시 누웬과 마찬가지로 황제가 각 지역에 관여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다만 모든 지 역 에 대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 정도이지만 그것도 6대 귀족이 반발 하 면 시행이 어렵게 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 경우에는 황제와 5대 친위가 나서서 모든 지역을 접수해버린다고 하는데... 황제든 5대 친위든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 습 니다. 때문에 일단은 제란이 암흑제국의 황제가 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낙관적인 견 해를 보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 낙관적인 견해라... 하지만 제란 뿐이면 걱정을 하지 않겠지만 아이슈마라 는 마족이 뒤에 있는 이상은 절대로 방심할 수 없는 일이야. 아니 그 마족의 힘이라 면 능히 암흑제국을 삼킬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마족들이 막고 나서지 않는다면 말이 야.” 나는 그렇게 말하며 혹시나 하여 아르미엘을 바라보았지만 아르미엘은 여전히 고개 를 숙이고 미동없이 앉아 있었다. 결국 다른 마족이 아이슈마의 앞을 막을 것 같지는 않다는 뜻이다. “그런데 아르미엘 사제님 그 제란의 마갑주 말인데... 사제님께서 무언가 알고 계셨 지 않았습니까? 그 때 나중에 말하겠다고 넘어간 것 같은데요.” 나는 마침 생각이 나서 아르미엘에게 물어보았다. 이런 중요한 것도 평상시에는 까맣게 잊어 먹는 경우가 있다. 내 질문에 아르미엘도 당황했는지 잠시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네, 그 갑옷 마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일단 제란 멜레시 가 가진 것은 본래 초마수급의 갑옷 마수의 알이었습니다. 그걸 아이슈마님이 제란 멜 레시에게 주었지요. 단지 그것을 복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전에 보신 것과 같은 능 력을 지닐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과 동화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 니다. 그건 인간의 마음보다는 악마의 마음에 가까워야 가능한 일이고 그것도 단지 악 하다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깊은 통찰을 겸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제란 멜레시가 그것을 착용했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깨 달음이 있었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이를테면 그의 정신세계가 열리고 그 마수를 받 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것과 같습니다. 초마수는 동화가 된다는 것은 곧 그것이 된 다 는 것과 같으니 말입니다. 인간과 완전히 동화된 초마수가 있다면 마신급에 이를 것 이 라는 이야기가 마족들 사이에 나돌 정도입니다. 그런 이은 있을 수도 없다는 확신과 함께 말이죠.” 마신, 인간이 마신이 된다는 소리다. 갑주형 초마수라는 것이 그렇게 대단한 것인가? “도대체 갑주형 초마수가 그렇게 대단한 것인가?” 나는 다시 아르미엘에게 물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알 수 있는 만큼 알아보자 싶은 마음이 들었다. “갑주형 초마수라... 그건 다른 마수와 존재가 다른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 수라고 불리지만 정확히는 마족의 유골이나 알이라고 보는 편이 옳습니다.” “뭐? 마족의 유골? 알?” “뭐야? 그런게?” “으라?” 마지막의 이상한 비명은 자이곱의 것이었다. “자세히 말씀드리면 이런 것입니다. 마족들도 수명이 있고 그 수명이 다하면 죽게 됩니다. 그런데 마족 중에는 영혼을 지닌 존재가 별로 없어 환생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고, 더구나 영혼이 있다고 해도 신계에 들게 되면 다시 마족으로 환생을 한다는 보 장도 없습니다. 그러니 마족들이 수명이 다하게 되면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 고 그렇게 남기는 것이 갑옷 마수라 부르는 바로 그것입니다. 혼자는 독립적으로 존 재 하지 못하지만 누군가 무엇인가에 의지하면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니까 말입니다. 물 론 그 중에서 뛰어난 힘을 가진 것은 마족들도 가끔 갑옷 대용으로 사용을 하기도 합 니다만 마족들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탐낼 정도의 것들은 아닙니다. 본래 능력에 많이 미치지 못하는 것들이니까 말이지요. 물론 초마수급의 알이라면 좀 다른 대우를 받기 도 하지만 그 정도의 힘을 지녔던 존재는 그리 많지도 않기 때문에 그 마족이 살아 있 을 때의 힘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그런 유골은 잘 건들지 않는 것이 묵계입니다. 물론 가끔 그런 유골을 취해서 하급 마족이 상급 마족의 지위를 얻기도 하지만 더 고위의 마족이 어느 날 마음에 들지 않아 하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그런 짓을 하는 녀석 은 별로 없습니다.” 아르미엘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응접실은 정적 속에 잠겨 있었다. 오직 아르미엘의 말에만 집중된 모습이었다. “우와! 대단해 아르미엘 어떻게 그런 것을 다 알고 있는 거야?” 수아가 감탄을 하며 물었다. 나도 그게 궁금해. 그런 분위기를 느낀 것일까? 아르미엘은 좀 더 차분해진(냉정해진 같은데...) 목소리 로 대답했다. “그건 제가 정신체로 여기저기를 다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정신체인 상태로 마계에도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물론 때로는 마족들에게 잡혀서 온갖 괴롭힘을 당하 기도 했지만 제가 루시퍼님의 종이고 살아있는 인간이었기 때문에 무사히 돌아 나오 곤 했지요. 그러면서 이런 것들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마계의 출입이 금 지되었습니다. 어느 날 아이슈마님께서 루시퍼님의 이름으로 그것을 금지시키셨기 때 문에.....” 그렇다는 말이군. 그래. 그럼 설명이 되는군. 하지만 여전히 의문투성이로 남는 아르미엘이다. 여하튼 적대적인 느낌은 전혀 없으니 그대로 두고 볼 수밖에... 나중에 문제가 생기 면 사람 보는 눈이 없었던 나를 탓하는 일이 있어도 하는 수 없는 일이다. “그렇군요.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보다는 그 마족들의 유골이든 알이든 하 는 것을 인간계에 많이 가지고 나와도 상관이 없는 것인가요? 혹시 그것들이 인간계 에 오래 머물게 되면 문제가 생기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겁니다.” 나는 다시 아르미엘에게 물었다. “실제로 갑옷 마수들이 인간계에 나와 있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일단은 소환을 해 줄 수 있는 존재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소환되었 다가 마계로 돌아가지 않고 인간계에 남은 경우는 더더욱 별로 없기 때문에 별달리 문 제가 되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대량으로 소환을 해서 생길 수 있는 문제 에 대해서는 저도 알 수 없습니다만, 중급과 하급 정도의 갑옷 마수라면 마계 전체에 볼 때는 거의 의미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니 별다른 문제는 없 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별다른 문제가 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는 것이로군요?” 광아가 그렇게 반문하자 아르미엘이 입을 다물었다. 아마도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그 전에 이야기가 없었던 모양이다. “모든 것은 불확실하지. 하지만 이런 경우는 하지 않으면 확실히 없을 문제를, 하 게 되면 불러들이게 된다는 점이 문제고, 여기서 다른 문제 하나는 하므로 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크다는 것이겠지. 별 수 없잖아. 급한 것은 우리들이니까 말이야.” 나는 그렇게 마갑주에 대한 결론을 긍정적으로 내렸다. 미래를 볼 수 없는 바에는 최대한 예견을 해 보고, 그 결과에 대비하면 되는 것이 다. 그리고 예견이 어려우면 현재에 최선을 다하고.... “자, 그럼 이제 대충 문제가 이야기가 끝이 난 거지? 세세한 것들이야 나중에 다시 이야기를 하면 되잖아. 안 그래?”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창고에서 술통 몇 개를 꺼냈다.(전에 할 일 없을 때, 미리 확 인해서 변한 것들은 전부 치워버렸다.)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이제 잔치를 벌이자. 하하하. 그냥 넘어가면 섭섭하지 않겠 어?” 나가 그렇게 말하자 수아와 루아가 주방으로 가서는 간단한 안주거리를 들고 왔고 자 이곱은 지금까지 비명을 지른 것 이외에는 쓸 곳이 없었던 입에 군침을 흘리고 있었 다. 그리고 우리들은 응접실을 난장판으로 만들면서 술을 마셨다. 나중에는 화아가 환수들 모두에게 술을 먹이는 짓을 벌였는데... 의외로 아눈은 술 한통에 완전히 맛이 가서 배를 하늘로 하고 뻗어 버렸고, 맘맘은 술을 쫄쫄 발아 먹더니(빨대 같은 모양을 만들어서 술통에 넣어서는) 잠시 멀쩡하더 니 만 불판위에 올려져서 소금 뿌려진 낙지처럼 꿈틀거렸다. 카다와 란이는 역시 술이 약한지 한 잔씩을 먹고는 응접실을 종횡무진 날아다니다가 벽에 부딪히곤 했다. 하지만 게브는 지토와 주거니 받거니 잘도 마셨고, 파울도 우아하게(?) 병아리 물먹 기(혹시 아는가 모르겠다. 땅 한 번 보고 하늘 한 번 보고....) 방법으로 주어진 술 잔 을 잘도 비웠다. 물론 술자리를 화려하게 장식한 것은 역시 수아와 루아 풍아였다. 수아는 오래지 않아서 의자에 길게 늘어져 버렸고(독한 술이라 견디지를 못한 모양이 다.) 루아는 자꾸만 어미에게 파고드는 새끼 새처럼 나에게 달려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풍아는 결국 시끄럽게 떠든다는 이유로 란이와 카다를 벽에 집어 던지고, 맘맘을 창밖으로 던져 버리고는 아눈의 배위에 엎드려 잠이 들어 버렸다. 그렇게 대충 정리가 되는가 했더니 자이곱이 크라튼에게 술을 먹여서 잠시 크라튼이 이상한 모습으로 변형이 되는 소란이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갑옷으로 변하는 중에 의 도적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조금 요염한 모양이 되었었다. 하지만 자이곱이 워낙 생긴 것이 그래서 크라튼의 시도는 잠시의 소란(속이 뒤틀린 화아가 신나게 두들겨 주는)으로 끝이 날 수 있었다. 나는 다행히 여자들이 다 잠들어서... 라고 가슴을 쓸어내리다가 소파 끝에 가만히 않아있는 아르미엘 때문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껴야 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의 상봉 잔치는 끝을 맺었다. 여전히 술독을 움켜준 자이곱과 화아 지토. 그리고 어느 틈에 누나와 동생들을 거두어서 방으로 데리고 가는 광아. 그리고 그걸 옆에서 돕는 아르미엘. 나는 남은 루아를 살짝 안아들고 루아의 방으로(예전 수아의 방이었는데 지금은 아르 미엘과 루아가 쓴다.) 데리고 갔다. 그리고 침대위에 이루비아를 가지런히 눕히고 시트를 끌어 목까지 덮어 주었다. 그다지 많은 시간이 흐른 것도 아닌데 제법 성숙해진 모습이다. 술을 먹어서 그런 가? 마법등이 희미한 방 안에 이루비아의 얼굴이 상당히 유혹적으로 느껴졌다. 역시 술은 사람의 이성을 흐리게 만드는 원흉이다. 나는 슬쩍 고개를 숙여 이루비아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며 가까이 얼굴을 들여다보았 다. “뭐 하시는 겁니까? 루탄님.” 허허걱. 깜짝이야. 아르미엘 사제는 정말 눈치도 없지. 나는 놀라지 않은 척 태연하게 고개를 돌리며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쉬이. 조용히, 아르미엘 사제님. 이루비아가 깨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하지만 아르미엘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깨긴 누가 깨요? 그렇게 술을 먹고 취한 사람이 쉽게 깨는 것 보셨습니까?” 뭐 그런 경우를 본 적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술 취했다가 잠깐 쓰러져서 정신을 잃었다가는 금방 깨어나서 말짱하게 술 마시는 사람은 본 적 있는데... “아~! 그렇지요. 저도 취했나 봅니다. 하하.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하하.” 나는 그렇게 조금은 멋쩍게 웃어주면서 방을 나왔다. 그런데 내가 뭔 잘못을 했다고 이렇게 등 뒤로 식은땀이 마구마구 흐르는 것일까? 응접실로 다시 내려온 나는 남자들만의 술자리를 이어가다가 그 자리에서 잠이 들었 다. 아침이 밝았다. 하루 종일 할 일이 태산일 터였다. 먼저 조용히 식사를 마친(어젯밤을 생각하면 조용한 것이 당연하다. 술 마신 다음날 은 왠지 꺼림칙한 것이...) 우리들은 다시 응접실에서 일과를 논의했다. “나하고 풍아는 새로 편입된 병사들과 기사들의 조화를 위해서 조금 심도 있는 훈련 을 시켜야 될 것 같아. 무조건 함께 구르다 보면 정이 들겠지.” “호호, 화아오빠 말이 맞아. 그게 최고의 방법이지.” “저는 마췬길드에 다녀와야겠습니다. 형님께서 자금을 주시면 전달도 하고 또 다른 정보가 있는지도 알아보고 돌아오겠습니다.” “저는 새로 들어온 야전대 중에서 갑옷 마수를 부릴 능력이 있는 사람이 있는지 먼 저 살펴보겠습니다. 아마도 화아님과 풍아님, 그리고 자이곱님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 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오전에는 저희 화염기사단의 병사들을 마법사의 탑 앞으로 보내 겠습니다.” “그럼 오후에는 얼음기사단을 보내야겠네요?” “그럼 저희 야전대는 제가 확인을 하겠습니다. 크라튼이 확인 가능할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진행하는 동안 나는 궁금증이 생겨서 이야기를 끊으며 물었다. “그런데 말이야. 환수와 동화력이 있는지 어떤지는 어떻게 알아볼 수 있지? 혹시 우 리들이 가지고 있는 환수들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나?” “네. 형님 환수들은 동화력이 있는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이 있으니 금방 찾아 낼 수 있습니다. 특히 그런 일은 파울이 아주 잘 하는 것 같습니다. 이미 화염기사단과 얼음기사단에서는 환수를 부릴 수 있는 사람들이 뽑혀져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 그럼 수아가 아르미엘 사제님과 함께 있으면서 병사들을 선별하는 일을 하 면 되겠구나?” “네, 오빠 그렇게 할게요.” 그런데 이루비아는 할 일이 없네? “그럼 루아는 나하고 함께 갈까? 오늘은 신계의 환수를 소환하는 영구마법진을 그려 야겠어. 자꾸 지워지면 피곤하니까 말이야. 어차피 마법진 만으로는 환수를 소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상관없겠지. 물론 결계도 필요하겠지만 말이야.” 내 말에 루아가 미소를 지으며(얼굴 표정의 변화. 나에게 보이는 눈빛의 변화에 난 속으로 놀랐다.) 대답했다. “네, 루탄님 재미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지토는 뭐 할거야?” 내가 대충 마무리가 지어진 일행들의 일과를 살피다가 빠진 지토에게 물었다. “나? 난 그냥 길리어 형제하고 놀 생각이야. 그러다가 리아가 오면 함께 놀고...” 겨우 한다는 짓이 애들하고 놀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그래? 그래. 그럼.” 어쩌랴. 이젠 늙은 티를 내고 싶어 하는 녀석인데, 특별히 할 일도 없을 때 놀라고 해야지. 하지만. “그런데 그렇게 놀다가 시간이 나면 연병장쪽에 공사장 가서 일 좀 도와줘라. 아직 건물들이 상당히 많이 남았던데...” 나는 지나가는 말인 듯 그렇게 말해줬다. 크흐흐. 놀면 몸에 녹슨단다 지토. 그렇게 맡은 일은 차근차근 진행이 되었고, 그 다음날부터 나는 환수 소환에 매달려 야 했다. 일데퐁소나 다른 능력있는 마법사가 있으면 도움을 받을 수도 있으련만 지 금 탑에 남아있는 마법사들은 대부분 5써클 정도였다. 그러니 그들에게 별다른 도움을 받을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코흘리게 과자 를 빼앗아 먹듯이 그런 녀석들의 마력을 빼앗아 쓴다는 것도 못 할 짓이었다. 그러니 결국에는 울며 겨자 먹기로 나 혼자 힘으로 환수를 소환하고 제압하고 귀속시 켜주는 일을 해야 했다. 그래도 란이가 옆에서 심부름을 많이 했다. 환수의 종류에 따라서 그 환수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달랐던 것인데 란이는 그런 사 람을 구별할 줄 알았던 것이다. 즉 하급 환수에 적당한 사람과 중급 환수에 적당한 사람을 나는 구별할 수 없었지만 란이는 구별할 수 있었고, 또 불려오는 환수의 수준도 어느 정도 가려낼 수 있었기에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일단 환수가 소환되면 나는 그 환수의 제압에 들어가고 란이는 환수의 등급 판별에 들어간다. 그리고 등급 판별이 끝나면 뾰로롱 날아가서 아무나 적당한 사람을 끌고 오 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환수를 귀속시키고 나면, 다시 처음부터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물론 그 중에서 귀속이 불가능한 수준의 녀석이 나온 경우도 없지 않았지만 그런 경 우에는 그냥 돌려보냈다. 솔직히 우리 가족에게는 더 이상 환수가 필요하지 않았고, 나 역시도 환수의 힘을 빌 리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다. 그리고 제란과의 싸움에서 환수는 별 도움이 될 것 같 지 않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점차 환수도 고급의 환수가 필요하게 될 것이었다. 지금은 동화력이 약한 사람들도 계속 환수를 소환한 상태로 생활을 하다보면 동화력 이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기사들과 병사들 중에서 환수를 가진 사람들은 이중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환수를 소환한 상태에서 일상적인 훈련을 감당해야 하는 까닭이었다. 그리고 환수를 소환하는 일은 일차적으로 한 달 정도가 걸려서 끝이 났다. 기사단 130명 중에서 환수를 부리는 사람은 오로한, 쉬리나 미레아등의 세 대장들과 화염기사단 6명 얼음기사단 8명이었다. 그리고 야전대 중에는 지역 특성인지 동화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비율적으로 많아서 1500명 중에서 300명 정도가 환수와의 동화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이번 경우에는 억지스러운 경우도 있었다. 동화력이 너무 낮아서 소환하는 것 도 힘들 정도의 인물에게도 환수를 지급하고 무조건 언제나 소환해서 동화력을 키우 도 록 했으니 말이다. 그러는 동안에 아르미엘 쪽에서도 성과가 있어서 30개 정도의 하급 마갑주와 10개의 중급 마갑주를 소환해서 지급했다. 중급과 하급의 마갑주의 경우에는 소환과 함께 지급 착용이 되었는데 자아의 발현이 별로 되지 않은 상태라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갑주를 착용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 갑주와의 동화력이 필요했는데 그것도 자주 착용하는 중에 커질 수 있는 것이라니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이러는 동안에 문제가 생겼다. 환수를 지급받은 병사나 기사와 마갑주를 지급받은 기사들이 일반 병사들과는 차이 가 나는 것이다. 환수를 가진 병사들은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주위에서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 라 우쭐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고, 마갑주의 경우에는 하급이라 하더라도 소환주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소환주에게 주는 이점이 나타나면서 다른 일반 기사들과 병사들 사이에 위화감이 조성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은 완전히 독립적인 부대로의 재편성이 불가피한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은 마갑주의 지급이 끝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단은 마갑주의 지급 이 끝나는 시기에 부대를 재편하기로 결정을 했다. 아르미엘의 말에 의하면 마갑주와 동화가 가능한 사람이 최대 400 정도는 될 것이라 고 했다. 하급 마갑주의 경우에는 그 동화에 큰 능력이 필요하지 않은 까닭도 있었고 약간의 동화력으로 일단 소환주가 되는 것만으로도 얻을 수 있는 이점이 있으니 될 수 있으 면 최대한 소환을 해서 지급할 생각이다. 하지만 그것도 거의 1년은 걸릴 일이었다. 실제로는 한꺼번에 소환이 가능하지만 영 지민의 어린아이들을 데려다가 피를 뽑는 것은 차마 하지 못할 일이라고 넥스 영주가 자청하는 사람들에게만 피를 뽑아서 소환을 하는 까닭이었다. 덕분에 리아는 아주 창 백하게 변해 버렸다. 나는 어느 날 그런 리아의 모습을 보고는 넥스 영주에게 한바탕 퍼부었던 적이 있었 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내 가족을 희생시킨다는 개소리는 하지 말라고... 적어도 내 가족도 다른 사람들만큼은 대우를 받아야 하는 것이라고. 다른 사람에게 빵 하나를 주려면 내 가족에게도 빵 하나를 주라고, 그리고 빵이 하나 뿐이면 가족부터 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나도 내가 왜 그렇게 소리를 질렀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가족들을 희생한다는 것은 나 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리아의 그런 모습 덕분이었을까? 영지민 중에 자발적으로 딸아이의 손을 끌고 탑을 찾는 사람들의 수가 늘긴 했다. 하지만 넥스 영주는 피를 뽑는 아이에게 맛있는 음식을 줄지언정 그 부모에게는 어 떤 작은 이익도 주지 않았다. 그리고 나도 그것에 찬성했다. 대가를 주고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린 아이의 피란. 어쨌든 조금 가속이 붙긴 했지만 그래도 마갑주의 지급은 늦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 고, 환수의 지급은 끝이 났다. 그리고 미루고 미루었던 일이 드디어 닥쳐왔다. 기충. 지금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기충은 30마리 정도였다. 내가 예전에 빨간 당구공으로 만들어 놓은 것들이었다. 조금 꺼림칙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너무 서둘러 빠른 길을 찾는다는 생각이 없지 않았지만 하는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에게는 많은 시간이 없었다. 겨우 10년, 10만 양병을 할 수 없는 처지라면 소수 정예라도 만들어 놓아야 할 일이 었다. 그것도 최강의 병사들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기충의 투입이 결정되었다. 대상은 환수도 마갑주도 지급받지 못한 일반병들을 대상으로 시행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6개월 동안 격리되어 생활하며 검기를 몸에 익힐 것이다. 그리고 6개월 후에는 60마리의 기충으로 60명의 병사들을 교육시킬 것이었다. 그리고 1년 후에는 120명의 병사를 그리고 그 6개월 후에는 240명. 하지만 그 이상은 수를 늘이지 않기로 했다. 대신에 격리 기간을 6개월에서 3개월로 줄여서 빠른 시간안에 모든 병사들이 검기를 체험하게 할 생각이었다. 아마도 길어야 5년이면 1500의 야전대 전원이 검기를 사용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를 것 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토의 심법을 전수할 계획이었다. 물론 나는 이미 자이곱에게 토의 심법을 전수했다. 자이곱은 야전대의 대장이었으니 까 말이다. -바위정령족 구출 작전 - 내가 지하실에서 나온 지도 벌써 3개월이 흘러가고 있었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 차근차근 진행이 되고 있었다. 마갑주의 지급도 그런대로 빠르게 진행이 되고 있었고 기충 때문에 격리된 병사들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우제푸 늙은이가 마법사들을 보내왔다. 1년 정도 우제푸에게 시달림을 받은 마법사들은 대부분 1써클 이상씩의 성장을 했 고, 일데퐁소는 어떤 훈련을 받았는지 아주 차분하고 냉정한 모습이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그렇게 성격이 바뀐 탓인지 마법도 7써클 유저가 되어 있었다. 덕분에 넥스 영지의 힘은 한 층 높아졌고, 나는 조금의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바위정령족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위해 그들의 영지를 방문하기로 결정 을 했다. 그것은 아무래도 바위정령족의 손재주가 뛰어나다는 것도 큰 이유가 되었다. 잘만 하면 우리 병사들과 기사들을 그들의 무기로 무장을 시킬 수 있을 지도 모른 다. 물론 갑옷이나 방어구도 ... 하지만 정작 출발을 하려니 걸리는 것이 많았다. 아무리 조금 여유가 생겼다고는 하지만 그 먼 거리를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것은 아 무래도 어려운 일이었고, 우리 일행들 모두가 함께 떠나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하고 있 는 터여서 누구를 데리고 가고 누구를 놓고 갈지 선택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넥스 영주의 제안을 받아들여 우리 가족들 모두가 휴가를 얻기로 하고 이동은 최단거리 이동마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그래서 내가 아는 최단거리인 ‘추월할 수 없는 길’의 그란드왕국 입구로 이동을 하 고 그 곳에서 이그가 마련해준 마차를 타고 바위정령족의 영토로 들어가는 방법을 쓰 기로 했다. 무론 그것을 준비하기 위해(이그가 마차를 그 지역에 가져다 놓고 준비를 하는데) 며 칠의 시간이 필요했고, 그 시간동안 우리들은 평소보다 더 바쁘게 돌아다니며 자신의 일을 마무리해 두고 또, 다른 사람에게 잠시 일을 맡기는 등 부산을 떨어야 했다. 그리고 드디어 다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이번 여행에는 우리 가족 여섯명과 루아, 아르미엘, 자이곱까지 동행을 하게 되었다. 넥스 영지는 일데퐁소와 넥스 영주, 크라이안 집사 그리고 여섯 명의 대장들이 잘 해 줄 것이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배웅 나온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그리고 우리 일행들은 미리 준비된 좌표에 도착했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세 대의 마차와 기마병들과 얼음기사단의 3단의 단장과 그의 수하들이었다. 전에 여관에서 한 번 부딪친 적이 있었기 때문인지 반가움이 이는 사람들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루탄님. 그리고 여러분.” 기사단 3단의 단장이 공손하게 군례로 인사를 해 왔다. “반갑습니다. 3단장님. 그런데 이렇게 병력들이 많이 오리라고는 생각을 못했는데 의외로군요. 설마하니 우리들을 호위하라고 왕께서 보낸 것은 아니시겠지요?” 내 말에 3단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듣기에 따라서는 너희들이 있으나 없으나 호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로 들릴 수 도 있었겠다. 하지만 3단장도 내 말이 그런 뜻이 아니었으리라고 생각했는지 곧 표정을 풀고 대답 을 했다. “아무래도 정령족들의 문제가 다급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함께 이동하면서 루탄님께 서 정령족과의 협상이 끝나는 때까지는 저희들의 힘으로라도 정령족에게 도움을 주라 는 명이 있으셔서 이렇게 출정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들은 뭔지 모를 그 환수를 상대로 시간 끌기를 하는 역할을 맡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정말 어떤 환수이기에 이렇게 갑작스럽게 문제를 일으키는 것인지... 광아의 보고로도 그 문제는 확인된 것이 없다고 했다. 도둑길드가 정령족의 땅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 정보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얼음기사단과 기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북동쪽을 향해 멈추지 않고 달렸다. 로드릴 재상이 보낸 정보에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환수에게 바위 정령족들이 상당수 희생된 것으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환수가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 고, 짐작도 가지 않는다는 말만 있을 뿐이었다. 환수라고 해도 어느 정도의 등급이 되면 이성을 지니기 때문에 이유없는 행동은 하 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이유 없는 난동이라.... 결국 부딪혀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결론만 남는다. 쩝. 바위 정령족의 영토는 그란드의 북동쪽 끝과 그 경계를 마주하고 있었다. 지리적으로 온통 산악지대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산맥은 다시 넥스 영지에까지 이어 진다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환수의 현재 영역이 바로 그 위치였다. 넥스 영지와 바위 정령족의 영토 사이 에 있는 산악지대. 물론 그 지역은 엄밀히 이야기하면 신성제국의 영토였지만 그 쪽으로는 거의 사람들 이 살지 않았다. 우리들은 쉬지 않고 말을 달린 끝에 3일째 오후에 드디어 바위 정령족과 그란드의 경 계인 지토의 벽에 도착했다. “우와, 오빠 저거 정말 대단한데요? 성벽이잖아요? 저렇게 높은 성벽이라니...” 풍아가 처음 지토의 벽을 보고 내 뱉은 감탄이었다. “정말 높군요. 그리고 길기도 하고...” “거기다가 저거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여요. 수아언니. 인공적으로 만든 것 이 아닌 것 같은데요?” “겉으로 보기에는 거의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것 같긴 하지만 실제로는 약간의 마법 적인 개입이 있었던 것이로군. 아마도 쉬벡이 한 것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저 정도 의 성벽이라니, 상상도 못한 것이로구나.” 그랬다. 우리가 보고 있는 지토의 벽은 하나의 자연적인 성벽이었다. 아니 성벽이 아니라 성벽처럼 생긴 산이라고 봐야 하겠지만 말이다. 듬성듬성 나무들이 자라난 산의 모습은 거의 수직을 이루면서 높이가 5백미터는 넘 어 보이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양쪽 끝이 주위의 높은 산의 허리에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완벽하게 계곡을 막고 있는 성벽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저기 저 봉우리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지토 아저씨의 머리 모양이네요? 호 호.” 풍아가 새로운 것을 발견한 듯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정말 지토의 모습과 흡사 한 두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니 예전 지토의 모습, 그러니까 돌하르방의 모습을 닮은 모습이라는 것이 더 정확 하겠지만.... “확실히 쉬벡이 여기 저기에 우리 일행에 대한 전설을 많이도 만들어 두었군요. 하 하 형님 이제는 화아 형과, 제 이름만 확인하면 되겠군요?” 광아가 지토의 두상을 바라보며(산봉우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말했다. 지금 우리들은 커다란 마차에 일행 모두가 타고 가는 중이었다. 특수 제작된 마차는 길죽한 모양으로 좌석이 10개나 되는 것이었다. 나는 앞자리에서 수아 루아와 함께 마차를 몰고 있다(물론 마차를 진짜 모는 것은 나 다.). “정말 기대가 되는구나. 어떤 모습일까?” “저기 루탄님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폐하께서 근심하시는 일이 니 빨리 서두르셔야 할 것 같습니다만.” 우리들이 지토의 벽을 감상하는 동안 가까이 다가온 얼음기사단 3단 단장이 입을 열 었다. 하긴 이 인간은 우리가 지금 어떤 기분인지를 알 턱이 없다. 이 지토의 벽이 저기서 뒷머리를 긁고 있는 지토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어찌 알겠는 가 말이다. 그저 국왕의 명령에 충실하려는 모습만을 보이고 있으니... 그런데 3단장은 결혼은 했나? 저렇게 딱딱하고 드센 여자와 결혼한 사람이 있을까 나...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대열을 정비한 3단장이 다시 행렬의 속도를 높이고 있었 다. 지토의 벽 아래로 난 동굴이 우리 일행들이 지나가는 통로였다. “여기는 유사시에 폐쇄를 하기도 한다는데, 그 방법이 간단합니다. 그냥 무너뜨리거 든요. 그리고 다시 처음부터 동굴을 만들지요.” 우리 옆을 따르며 행렬을 지휘하던 3단장이 그렇게 설명을 해 왔다. “뭐 바위를 다루는 능력이 뛰어난 종족이니 굴을 파는 것이 별로 힘들지 않아서인 모양이지만 아무튼 심심하면 한 번씩 동굴을 뚫고 무너뜨리고 하지요. 3단장은 그런 말로 우리 일행들에게 동굴이 무너지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를 하게 만 드는 만행을 저지르고는 태연하게 행렬의 선두로 말을 몰아갔다. 넓이 15미터 정도에 높이가 3미터 정도인 동굴의 좌우에는 어둠을 밝히는 광석들이 붙어 있었지만 그것에서 마법적인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아마도 정령 족 들이 사용하는 특수한 광석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정말 어떻게 생겼을까요? 바위 정령족이라는 그 종족 말이에요.” 수아가 검지를 관자놀이에 대고서 물었다. “그거야 지토 아저씨랑 비슷하다고 했으니까 그렇지 않을까?” 루아가 수아의 말에 대꾸를 했다. “그럴까? 그래도 뭔가 다르지 않을까? 전에 노옴이라는 종족도 지토 아저씨랑은 좀 달랐는데...” 풍아도 꼭 같지는 않을 것 같은 모양이다. “그건 곧 알 수 있겠군. 저기 동굴 끝이 보이고 있으니까 말이야.” 지토의 심드렁한 말과 함께 멀리 동굴의 끝을 알려주는 빛이 강렬해지고 있었다. “드디어 바위정령족의 영토에 들어 온 것인가? 그런데 어째서 지키는 사람이 하나 도 없는 거지?” 나는 입구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인간들의 영역과 바위 정령족의 영역을 구분 짓는 가장 중요한 곳에 정작 바위 정령 족들은 보이지 않는 것이 이상했던 것이다. “루탄님. 문제가 있는 모양입니다. 경비를 서고 있어야 할 정령족들이 하나도 보이 지 않습니다.” 결국 입구에 정령족이 보이지 않는 것이 정상은 아닌 모양이었다. 3단장이 말을 몰아 와서는 그렇게 이상을 알렸으니 말이다. 덕분에 우리 일행은 잔뜩 긴장을 하고 동굴을 빠져 나갔다. 그리고 동굴 밖으로 보이는 모습은 우리들의 예상대로 넓은 계곡이었다. 멀리로 길 게 뻗은 계곡은 양쪽 벽이 거대한 산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그 높이를 짐작하기 어려 웠 다. “이 길을 따라 달리면 이틀거리에 바위정령족의 족장이 있는 곳에 도착을 하게 됩니 다. 그리고 저희는 하루 정도 거리에서 루탄님과 헤어져서 환수의 출몰지역으로 이동 시간을 끌어 보겠습니다.” 3단장은 여전히 서두르는 모습으로 그렇게 이야기하고는 행렬의 속도를 높혔다. 끝없이 늘어선 계곡을 지나는 일은 점차 지루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꼬불꼬불 이어진 계곡 길은 이제는 자꾸만 반복되는 느낌에 식상해졌고, 보이는 것 이 온통 바위 뿐인 곳이고 동물은 물론이고 식물조차도 잘 보이지 않는 환경은 더욱 우리들의 마음을 지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나마 희망이 있다면 이것도 조금 있으면 끝이 나리라는 기대였다. 3단장 일행들이 중간에서 갈라져 나가고(이 계곡은 사방으로 거미줄처럼 갈라져 있었 다.) 우리들은 처음 알려준 그 길을 따라서 족장이 있다는 마을을 찾아가는 길이었는 데 예상대로라면 이제 그 도시가 나타나야 할 시간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바위 정령족은 동굴을 파고 산다고 했나요?” 루아가 물어왔다. “그렇다고 하더군. 주로 광석을 채굴하는 것이 일인 종족들이니 그렇게 파고 들어 간 동굴을 생활 터전으로 삼은 것도 이상할 것은 없지.” 나는 그렇게 루아의 말에 대답을 하고는 변함없이 펼쳐지는 풍경에 질린다는 생각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응? 가만, 혹시 저게 바위 정령족의 집인가?” 내가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다 입을 열자 모두들 내가 바라보는 곳을 보며 그것이 무 엇인가를 찾았다. “저기 작은 동굴 같은 것들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계곡 중간쯤에 뚫려 있는 저 구멍 들이요? 저건 사람 머리 하나 들락거리기도 힘들 것 같은데요?” 지금 우리들이 보고 있는 것은 계곡 높은 곳에 나 있는 구멍들이었다. 정말 사람 머리 크기의 구멍들이 나란하고도 규칙적으로 뚫려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저건 의도적으로 만들어 놓은 구멍인 것 같은데? 응? 그러고 보니 구멍들에 거 상당한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모양이네? 저렇게 아지랑이 같은 것이 피어오르는 것 을 보니 말이야.” “그러게요. 형님. 그리고 아주 조금씩이지만 연기도 나고 있는데요? 저거 혹시 굴뚝 이 아닐까요?” 광아가 내 말에 보충을 했다. “그러고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바위 정령족들이 모두들 대장장이들이라면 어딘가 에서 불을 피워야 할 것이고 그건 열기와 연기를 배출하기 위한 장치도 필요했겠지. ” “정말이요. 그렇겠네요. 오빠. 그럼 여기 어디 바위 정령족의 마을이 있어야 하는 데 전혀 흔적이 보이지 않으니 어쩐 일일까요?” 풍아가 주위를 세밀히 살피며 물어왔다. “글쎄, 나도 주위에서 마법적인 어떤 느낌도 느낄 수가 없으니 환상마법이나 그런 종류의 것이 있는 것 같지는 않고....” 나는 일단 굴뚝으로 보이는 그 구멍들이 있는 계곡 벽 앞에 마차를 세우고는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계곡의 돌 벽들은 지금까지와 전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우리 앞을 가로 막고 서 있었다. 퍽퍽! 퍽퍽! 나는 주위의 벽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이상한 것이 있는가를 살폈다. 그러자 모두들 벽에 붙어서 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퍽퍽! 뚝뚝! 툭툭! 텅! 텅! “여기다. 여기가 비었어.” 의외로 이상을 발견한 것은 지토였다. 그러고 보면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냥 지토가 알아서 살피면 이 정도는 충분히 찾을 수 있을 텐데... 어째 지토도 정령력을 쓸 생각을 않고 손으로 바위를 두드리고 있다니, 정말 가끔은 정령이라는 사실을 자신도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는 것일까? 그리고 곧 다른 사람들도 이상한 곳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공통점은 상당히 낮은 곳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었다. 지토가 먼저 발견을 했던 것도 그 작은 키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바위 정령족이 키가 작다고 했지? 그러니 그들의 통로도 이렇게 낮은 곳에 위치를 하고 있는 것이겠지.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전혀 표시가 나지 않게 입구 를 만들었을까?” 나는 속이 비어있는 바위 앞에서 천천히 그 곳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클클, 대단한 실력이다. 분명히 여기를 막고 있는 돌과 옆에 있는 돌이 원래 하나 는 아니었던 것들인데 이렇게까지 교묘하게 위장을 할 수 있다니 대단하군. 마법도 아 니고 정령력도 아니고 단지 손재주만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니... 대단해.” 지토가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고 있었다. “일단은 족장을 만나던지 아니면 누구를 만나던지 불러내야 될 것 같지? 우리가 이 안으로 들어가서 돌아다니기에는 좀 힘들 것 같으니 말이야.”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목소리에 내공을 실어 계곡 벽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바위 정령족의 족장님을 뵙고 싶어 온 사람들입니다. 그란드 왕국의 이그왕에게 부 탁을 받아 왔습니다. 제 말씀이 들리시면 마중을 나와 주셨으면 합니다.” 내공이 실린 목소리라고 거창하게 큰 것은 아니고 단지 멀리까지 퍼지도록 만든 것이 었다. 그리고 내 말이 끝나고 오래지 않아서 계곡의 바위 안에서 소란스러운 소리들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흡사 조용히 숨죽이고 있는 군중들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한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우리들이 서 있는 곳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계곡의 바위가 밀려 나오며 동 굴이 나타났다. 그 크기가 보통 사람들이 돌아다니기에 충분한 크기였기에 우리들은 우르르 그 앞으 로 몰려갔다. “오시오 어서. 있었소 기다리고 당신들을. 나는 이오 우리 종족의 족장.” 어째 말이 조금 어렵다. 아무튼 동굴 벽이 밀려 나오고 그 속에서 걸어 나온 사람은 키가 1미터 정도 되어 보 이는 사람이었고 전체적으로 통나무를 연상시키는 사람이었다. 지토와 다르게 대머리 가 아니었고 머리카락은 한 뼘 정도 길이가 뾰족하게 하늘을 향해 서 있는 모습이었 다. 전체적으로 얼굴에서 눈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보이는 왕눈이었고 눈썹은 란이의 눈썹처럼 일자 통눈썹을 달고 있었다. 눈으로 보고 나이를 짐작하기는 어려웠지만 대략 60대로 보이는 인물이었는데 그 겉 보기와는 달리 꼿꼿하고 탄력이 있는 피부를 지니고 있었고 특히 손이 독특했다. 굉장히 두툼하다는 인상을 주는 손은 여섯 개의 손가락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아 마 노옴의 후손이라 그런 모양이었다.). “반갑습니다. 제가 이 일행을 이끄는 루탄입니다.” “반갑소. 들어오시오 어서. 우리는 대하지 않소 손님을 밖에서 예의 없이.” 어순이 상당히 이상하게 발달한 모양이다. 일단 들어오라니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들이 그 족장을 따라 들어간 곳에는 우리들의 체구에 맞는 의자와 탁자들 이 준비되어 있었고, 족장에게 맞는 의자도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앉으시오. 많소 할 이야기가. 우리는 급하오 상황이 어렵게 되어서 당신들의 도움 이.” 우리들이 각자 의자에 앉자, 족장은 그것을 기다렸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많지 않소 우리 종족의 수는. 넘지 못하오 천오백을 전부 헤아려도. 그런데 칠백이 오 남은 인원이 지금.”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한 쪽 벽이 열리며 다섯 명의 여자 정령족들이(생긴 것 은 거의 같은데 그냥 머리카락만 하늘이 아니라 땅을 향하고 있었고 가슴이 좀 있는 것 같은) 돌로 된 예쁜 잔에 홍색의 반투명한 액체를 가지고 와서 앞에 놓아 주었다. “드시오 손님에게 대접하는 최고의 예의요 우리 종족의.” 아무튼 우리들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예의라고 하는 모양인데 먹지 않으면 실례겠 지? 나는 잔을 들고 입으로 가지고 갔다. 향이 별로 없고 그저 잔에서 나는 냄새인지 돌가루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나는 잔에 든 액체를 한 입에 털어 넣고 꿀꺽 삼겼다.(양이 별로 많지는 않았다.) 크흐흑. 이 작자가 누구를 죽이려고. 나는 급하게 목을 타고 흐르는 통증에 입까지 솟구친 욕설을 간신히 삼킬 수 있었다. 불덩이? 아니다. 돌덩이? 뜨거운 돌덩이. 분명히 액체를 삼켰는데 내 목을 타고 흘러 내려간(아니 굴러 내려간) 것은 돌덩이 같은 느낌이었고 눈에 눈물이 맺힐 정도로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내 이런 표정을 읽었는지 다른 일행들은 마시려던 잔을 다시 탁자에 내려놓고 내 눈 치를 살피고 있었다. “족장님. 이거 아주 독특한 것이로군요. 도대체 이게 뭔지 알 수 있겠습니까?” 나는 아주 정중하게(이건 내 인내의 한계에서 나온 소리였다.) 족장에게 물었다. “어떻소 맛이? 우리들 음료수요 최고급의. 주지 않소 일반적으로 인간에겐 절대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러니까 도대체 뭐로 만든 것인지...” 나는 다시 한 번 인내를 발휘하여 물었다. “그건 만든거요 바위의 원액을 추출하여. 기름이요 바위를 짜서 만드는 일종의.” 결국 뭐라는 소리인가? 내가 마신 것이 석유라는 말인가? 돌기름 석유石油. 이런 빌어먹을 영감탱이가 사람에게 석유를 먹여? 물론 색으로 봐서나 냄새로 봐서 그게 그 석유일 리는 없지만 아무튼 돌기름이라니... 하지만 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것일까? 늙으면 눈치가 빨리지지. “좋은 거요 몸에 굉장히. 높혀주오 체력을 상당히 많이. 소용은 없지만 한꺼번에 많 이 먹거나 여러 번 먹는 것이.” 뭐라는 거야? 열 받으니 말도 잘 안 들리네. 아무튼 체력을 높여주는 것이라는 말 같은데.... 많이 먹어서 좋은 것은 아니지만 효 과는 확실한 것 같으니... 그런데 정령들에게 도움이 될까? 그러는 사이에 일행들 중에서 자이곱이 냅쭉 그 음료를 마셨고(물론 인상이 뭐 씹은 것 같이 되었지만) 루아와 아르미엘도 미적미적 잔을 들고 눈을 감고 마셨다. 순전히 몸에 좋다는 말에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자들도 체력이 좋아진다 는 말에 저렇게 인상을 쓰면서까지 먹고 싶은 것일까? 아무튼 몸에 좋다면... 하지만 동생들은 별로 먹고 싶은 마음이 없는 듯 잔에서 손을 떼었고, 지토만 홀짝 홀짝 거리며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전혀 인상도 쓰지 않고 아주 맛이 있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이거 아주 좋은 것이로군. 피로가 다 풀리는 느낌이야. 클클.” 지토의 품평이었다. 어떻게 그 맛이 맛있다는 소리를 할 수 있는 것일까? 하긴 돌이든 모래든 바위든 먹 자고 맘 먹어서 못 먹을 것이 없는 녀석이니까... “그래 족장님 지금 족인들의 수가 칠백이 겨우 남았다면 팔백 가량이 희생되었다는 말입니까?” 나는 서둘러 본론으로 이야기를 이끌고 갔다. 괜히 오래 있다가 또 어떤 것을 내어 줄지 모를 일이었다. 음식이라고 바위를 가지고 와서 먹으라고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진 족장과의 대화를 간단히 줄이면 다음과 같다. 정령족들이 희생된 것은 맞지만 그들이 죽은 것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그들이 실 종된 마을들에서 알아본 바에 의하면 죽은 시체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겨우 몇 명 의 사체를 발견했을 뿐, 나머지 사람들의 사체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곳에서 확인한 바에 의해 정령족들을 위협한 것이 인간이나 다른 종족 이 아닌 환수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은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그 마을들에 공통적으로 환수가 나타난 흔적이 있었다고 하니 그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다만 그 환수를 어떤 사람이 부리고 있을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는 족장의 단순함은 어쩔 수 없는 점이긴 하지만.... 그리고 그런 족장의 정보를 그대로 전해 준 로드릴의 속셈도 짐작이 갔다. 우리가 복 잡한 문제에 끼어들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환수라는 말만으로 우리를 부려먹자는 수작 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왕 시작된 일을 끝을 맺겠지라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고 말 이 다. 여하튼 이 사건은 환수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것과 이상하게 정령족들을 죽이는 것 이 아니라 납치를 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분명한 사건이었다. “결국에 어떤 녀석이 바위 정령족을 납치하고 있다는 말인데?” “저도 그런 생각이 드는데요 형님.” 광아가 내 의견에 동의 했다. “그럼 어서 가서 어떤 녀석의 짓인지 살펴 보자구. 그 동안 몸을 움직이지 못해서 상당히 근질거리거든.” 화아였다. 하지만 서두르는 화아와는 달리 나는 그렇게 쉽게 출발을 할 수는 없는 문제가 있었 다. 비록 바위 정령족의 문제가 심각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챙길 것은 챙겨야 하는 것이 니 말이다. “그런데 족장님, 저희는 로드릴 재상으로부터 이 일을 의뢰받으면서 저희의 도움에 대해서 바위 정령족도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 줄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만.... ” 나는 말끝을 흐리며 슬쩍 족장의 눈치를 살폈다. 족장은 내 말이 그렇게 기분이 좋지는 않은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준비해 두었소 당신들에게 줄 대가를. 주겠소 갑옷과 무기를 다섯 벌씩 당 신들이 구해오는 일족 한 명당.” 그러니까 한 사람을 구해오면 다섯 명 분의 무기와 갑옷을 만들어 준다는 것이로군. 흐흐흐. “좋습니다. 족장님. 족장님께서 성의를 보여주시니 흥정 같은 것은 하지 않겠습니 다. 그럼 잠시만 준비를 하고 저희는 빨리 출발을 하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족장에게 부탁을 해서 적당히 넓은 장소를 얻어서(우리가 있 던 곳의 테이블과 의자를 치워 주었다.) 마법진을 그렸다. 우리들이 정령족을 구하게 되면 곧장 이 곳으로 그들을 보낼 것이었다. 그리고 마법이 발동하기 전에 이 방에 알람 마법이 울리도록 해서 마법의 활성화를 알리게 해 두고 알람이 울리면 이 방안에 아무것도 없어야 한다는 것을 주의 시켰다. 그리고 우리들은 곧장 마차가 있는 계곡으로 돌아 나왔다. 하지만 족장은 우리들끼리 가는 것은 불안하다며(다른 것은 문제가 아니었지만 길이 워낙 복잡했기 때문에.) 정령족의 젊은이 하나를 길잡이로 붙여 주었다. 그의 생김새도 족장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머리카락이 흰 빛에 가 까운 족장에 비해서 이 젊은 정령족은 짙은 회색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본 정령족들의 머리는 전부 회색 계열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머리카락은 종족 모두가 비슷한 색인 모양이다. “반갑습니다. 저는 모루정이라고 합니다.” “어? 모루정은 우리 말을 하네요?” “정말. 어순이 이상하지 않아요.” 풍아와 루아가 모루정의 말에 호들갑을 떨었다. “저는 인간들과 많이 함께 지내서 어느 정도는 대화에 익숙합니다.” “네~! 그렇군요. 그럼 길 안내 잘 부탁드려요. 저희는 여기 이 분이 루탄오빠. 그러 니까 우리 대장이구요. 저기 저분이 지토 아저씨. 화아 오라버니. 풍아 언니. 광아 오 빠. 수아 언니. 아르미엘. 자이곱. 음. 저는 이루비아라고 해요.” 루아가 꽤나 밝은 모습으로 모루정이라는 바위 정령족에게 일행을 소개했다. 물론 그러는 중에도 마차는 계곡을 돌아나가며 우리가 왔던 길을 되돌아 가고 있었 다. 하지만 곧 모루정이 고삐를 쥐고 우리들의 눈이 돌아갈 정도로 이리 저리 계곡 사이 를 돌아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나도 어는 정도는 그 길을 외울 수 있었지만 나중에는 포기하고 말았다. 이런 길을 헤메고 있느니 차라리 비행마법으로 산꼭대기로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편 이 편하겠다는 생각마저도 들었다. 그리고 곧 카다가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내가 카다에게 정찰을 부탁했기 때문이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중간에 야영을 하신다면 내일 아침에 그리고 야 영이 없이 가신다면 늦은 밤에 목적지에 도착하실 수 있을 겁니다.” 모루정이 마차를 몰면서 외쳤다. 혹시 모루정이 바위정령족 중에서 폭주족이 아니었을까? 상당히 험악하게 마차를 몰고 있었는데, 특수하게 만들어져서 앞 뒤의 길이가 상당 히 긴 마차를 좁은 계곡 사이로 잘도 몰아가고 있었다. “그럼 그냥 달려서 목적지로 가도록 합시다. 아무래도 먼저 가 있는 기사단과 병사 들이 걱정되니 말입니다.” 나는 모루정에게 그렇게 되받아 소리를 질렀고 모루정은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도 대체 뭐가 저리 좋은 것일까?) 다시 소리를 질렀다. “좋습니다. 어둠 속의 계곡을 질주하는 맛이 정말 짜릿하지요. 이럇. 이럇.” 역시 모루정은 폭주족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정말 어둠이 빨리 내리는 계곡에서 급한 굴곡 사이를 굉장한 속도로 달린다 는 것이 얼마나 스릴이 넘치는 일인지를 몸으로 느끼게 해 주며 모루정은 마차를 몰 았 다. 카다는 날이 어두워지자 다시 풍아의 검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게 한참을 달려가며 긴장을 한 탓에 몸의 경직으로 근육통이 생길 무렵에 우리들 은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을 했다. “여기가 목적지라는 건가요?” 수아가 모루정에게 물었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곳은 무너진 계곡이었던 것이다. “맞습니다. 여기가 목적지입니다. 저희는 적의 침입에 대해서 단호한 대처를 합니 다.” 그래 그 단호한 대처란 것이 계곡을 무너뜨리는 것이란 말이냐? 내참. “그럼 이 뒤로는 환수의 영역이라는 말이군요?” 내가 광아의 광구光球아래로 펼쳐지는 무너진 계곡을 보며 말하자 모루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바위 아래에도 저희의 터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째서 그렇게들 허무하게 당 해버린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만약의 사태에는 계곡을 무너뜨리고 바위 속으로 숨어 도 되는 것인데... 스톤웜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은 바위 안에서 우리들을 위험에 빠 트 릴 것은 존재하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모루정의 말소리에 비통함이 스며들면서 그 큰 눈에 습막이 어렸다. 상당히 직선적인 종족들인 모양이다.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흥정이나 타협을 싫 어하는 듯 보이는 종족이다. 아주 단순하고 고집이 세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일단은 여기에 마차를 세워두고 지나가야겠군. 그런데 루아는 괜찮을까? 전투가 있 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루아가 걱정이 되어서 물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루비아님도 자기 몸은 지킬 수 있으실 것입니다.” 아르미엘이 옆에서 루아를 두둔하고 나섰다. “에? 루아가 무슨 힘이 있다고 그런 말을? 그러다가 루아가 위험해지면 책임을 질 거야?” 풍아가 아르미엘에게 따지듯 물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절대로 위험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건 나중에 보시면 아시 게 됩니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그럼 루아에게 어떤 비밀이 있다는 말이잖아? 다른 동생들과 지토도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인 것을 보니 그 동안 한 번도 그런 모습 을 보인 적은 없었던 모양인데... “그렇게 서운해 하지 마세요. 절대로 속이려고 한 것은 아니에요. 그저 쓸 일이 없 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고, 또 지금까지는 쓸 일이 없었던 힘일 뿐이에요.” 이루비아는 굉장히 미안한 표정으로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렇게 미안해 할 필요 없어요. 일부러 숨기지 않았다는 것을 믿어요. 루아.” 광아가 루아를 다독이듯 부드럽게 이야기했다. “그럼, 그럼.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는데...” 도대체 어디서 저런 소리를 들은 것일까 풍아는... “자, 그럼 걱정 없다는 말이지? 그럼 출발을 하자.” 그렇게 우리들은 막혀버린 계곡을 타고 넘기 시작했다. 아무리 약해 보이는 수아라도 필요할 때는 힘을 쓰는데 무리가 없었기 때문에 치마 를 입어 약간 걸리적 거린다는 것을 빼면 어렵지 않게 바위를 밟고 넘으며 정상을 향 해 올라갔다. 그리고 무너진 계곡의 꼭대기에 올라서도 한참을 걸어서 우리는 다시 내리막길에 닿 을 수 있었고, 멀리 어둠 속에 빛나는 불빛을 발견했다. 거리가 꽤 되기는 했지만 그것이 기사들과 병사들이 있는 곳에 솟아오른 불빛이란 것 과 적어도 의도적으로 피워진 불빛은 아니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는 빛이었다. “상당히 급해 보이는데? 나 먼저 간다.” 화아가 급하게 내리막길을 뛰어 내려갔다. 그리고 그 뒤를 지토와 게브가 한 몸이 되어 굴러(?) 내렸다. 물론 풍아와 광아를 포함한 일행들의 속도도 당연히 빨라졌다. 그리고 나와 일행들이 그 곳에 도착했을 때, 남은 것은 쓰러진 몇몇의 병사들과 기사 들, 그리고 무너진 계곡과 불탄 천막들 가쁜 숨을 몰아쉬는 사람들 매케한 연기가 전 부였다. 화아와 지토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 모양이었다. “뭐야? 도착하자마자 도망을 가 버리다니...” 라고 불만을 터뜨리는 화아의 말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어서 환자들을 돌보고, 주위를 살펴봐. 그리고 화아야. 어떤 녀석이었는지 봤니?” 나는 일행들에게 환자를 돌보라고 시키고는 화아에게 물었다. “아니 못봤어. 저리로 들어간 것 같긴 한데...” 화아가 계곡의 한 쪽 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그 벽에는 지름이 1미터가되지 않는 구멍들이 수십개 뚫려 있었다. “저거 원래부터 있던 구멍은 아니겠지?” 내가 그렇게 물어보자 모루정이 옆에서 대답했다. “저런 구멍은 없었습니다. 저건 방금 전에 생긴 것입니다. 생긴지 얼마 되지 않았습 니다.” “그럼 그 녀석 땅 속을 마음대로 이동하는 능력이 있는 녀석이라는 말이잖아? 그러 니 바위 정령족들이 꼼짝없이 항복을 했겠지만...”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일이었다. 적이 나타난 것을 파악한 바위 정령족들은 계곡을 무너뜨리고 바위 속으로 숨었을 것 이다. 하지만 저런 능력을 지닌 녀석이 있었다면 아무리 바위를 능숙하게 다루는 정 령 족이라 해도 도망을 가는 것은 무리가 있었을 테니, 쉽게 정령족들이 제압당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오빠, 이리좀 오세요. 3단장님이 좀 뵙자는데요?” 풍아가 나를 부르는 소리였다. 그리고 내가 3단장이 있는 곳에 도착해서 본 것은 한 쪽 어깨가 날아가고 없는 3단장 이었다. “이런 모습을 보여 드리게 되어서 부끄럽습니다.” 3단장은 그런 상처를 입고도 흐트러짐 없는 목소리로 인사를 해 왔다. “아니 어쩌다가 이런 상처를... 잠시 기다리십시오. 조금 시간이 걸리기는 하겠지 만 상처를 치료 해야 겠습니다.” 나는 3단장의 상처를 치료하려고 다가앉았다. “아닙니다. 그게 급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래도 적들이 루탄님 일행이 이 일에 개입 한 것을 안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그 종적을 감출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지요? 3단장님께서 그걸 어떻게 아세요?” 옆에서 수아가 물었다. “저희들은 그 환수를 상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곧 전멸을 면하지 못할 상황이 었지요. 그런데 지토님과 화아님이 도착하는 순간 그 환수들이 꽁무니를 빼고 말았습 니다. 그건 그들이 지토님과 화아님을 알고 있다는 말과 같겠지요. 거기다가 그렇게 도망을 갔다는 것은 될 수 있으면 부딪히지 않으려는 의도를 지녔다는 말과도 같을 것 입니다. 물론 더 많은 준비를 해서 오겠다는 뜻이 될 수도 있지만 제 생각에는 어느 정도 목표를 달성한 녀석들이라면 충돌을 피해 몸을 숨길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됩 니다. 그러니 빨리 녀석들의 뒤를 쫓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제 상처는 나중에 보셔 도 상관없습니다. 시간이 급합니다. 루탄님 서둘러 주십시오.” 3단장이라는 이 여자, 상당히 능력이 있는 여자네. 검술도 제법이지만 상황을 분석하 고 판단을 내리는 데에는 광아나 나보다도 더 뛰어날 수도 있겠는 걸? 나는 3단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지토를 불렀다. “지토, 부탁좀 하자 아까 그 녀석 어디로 갔는지 좀 알아봐줘. 최대한 빨리.”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일단 환자를 돌보라고 시키고는 비행마법으로 계곡 위로 올 라간 나는 주위에서 일어나는 마력의 변화에 탐지 마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제법 넓은 범위에 탐지 마법을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력의 변화가 나타나는 곳이 없었다. “분명히 마법을 사용한 이동이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런 낌새가 느껴지지 않다 니... 이건 정말 이상한 일이로군.” 혼자서 그렇게 중얼거리는 나에게 지토의 음성이 들려왔다. - 지금 네가 있는 장소에서 정확히 남쪽으로 3킬로미터 지점 지하 100미터. 녀석들 의 본거지가 있다. 지금은 소규모 이동 마법진으로 바위 정령족들을 이동시키고 있는 데 주위에 결계가 상당히 강하게 만들어져 있다. 좀처럼 쓰지 않던 정령력을 이용한 의사소통이었다.(가까운 거리라면 정령력을 이용 한 의사 소통이 가능하다. 나는 다른 방법을 써야 하지만...) 아무래도 지토가 생각하기에 상황이 다급했던 모양이다. 나는 곧장 상황을 일행들에게 알리고 뒤따라오라는 말과 함께 몸을 날렸다. 장소는 알지만 순간 이동을 사용할 수 있는 죄표를 아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신법 과 블링크를 사용하며 이동했던 것이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서 지토가 말한 곳에 도착 할 수 있었고, 지토는 내가 도착한 것 을 느꼈던 모양인지 수직으로 만들어진 통로를 땅에 뚫어 주었다. 그리고 내가 뛰어든 지하에서 발건한 것은 지토와 싸우고 있는 괴물체였다. “이런 고생이군.” 나는 환검環劍(이젠 하나만 남아서 쌍雙을 붙이지 못한다.)을 변형시켜 쥐고 달려들 며 말했다. “이거 몸체가 따로 있어. 저 바위 안에 있는데 이런 것들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 어.” 지토가 입을 벌리고 달려드는 뱀 모양의 검은 색 덩어리를 도끼로 찍으며 소리를 질 렀다. 그러고 보니 수많은 검은 색 뱀, 아니 지렁이 같은 것들이 벽을 통한 구멍에서 쏟아 져 나와 있는 모습이었다. “파이어 월.” 좁은 공간에서 쓸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일단 벽면 전체를 불로 감쌌다. 하지만 내 생각이 잘못 된 모양이었다. 역시 땅 속에 사는 녀석이라 불에 강한 모양인지 별 타격이 없어 보였다. “이런 실수를 한 건가?” 나는 더욱 기승을 부리는 녀석들을 향해 빙계 범위 마법을 쏟아 주었다. “브리자드.” 얼음 폭풍이라 할 만 하지만 실재로는 주위의 마나를 극한점으로 냉각 시키는 방법이 다. 공기가 냉각 되면서 자연스럽게 수축이 되기 때문에 바람은 부수적인 효과로 생 겨 난다. “좋았어!” 지토는 움직임이 둔해진 검은 지렁이들을 깨부수며 벽으로 달려들어 벽을 허물어 버 렸다. 아무래도 그 전까지는 벽 자체에 환수의 힘이 더해져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허물어진 벽 속에서 나타는 모습은 의외의 모습이었다. 게브가 검은 색 자루 모양의 환수 몸체를 곤죽으로 만들어 놓고 있는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이런 게브가 한 발 빨랐던 모양인 걸?” “클클. 그러게 말이야. 아무튼 서둘러. 저 안쪽에 녀석들의 본거지가 있어. 내가 본 거지를 발견하자마자 이 녀석의 공격을 받았단 말씀이야.” “그래. 들어가자.” 내가 그렇게 말하고 환수를 게브에게 맡기고 지토와 함께 안쪽으로 몸은 날리는 순 간 뒤에서 다른 일행들이 쏟아져 내려왔다. “오빠, 좀 천천히 가. 겨우 도착했더니 또 어딜 가는 거야?” 풍아의 목소리가 내 뒷덜미를 잡았지만 나는 일단 급한 마음에 안쪽으로 몸을 날렸 다. “오빠!!” 대답도 없는 나에게 화를 내는 풍아의 목소리다. 못 들었다. 난 못 들었어. 그렇게 지토와 달려 들어간 안쪽에는 넓은 광장이 만들어져 있었다. “이거 상당한 규모인 걸? 그나저나 상당히 공을 들인 결계로군. 이러니 내가 아무 리 탐색을 해도 걸리지를 않지. 더구나 땅 속에 있었으니.” 나는 주위를 살피며 마력의 흐름을 차단하는 결계들이 만들어져 있는 것을 보고 중얼 거렸다. “저게 그 마법진이야. 그런데 벌써 모두들 이동을 한 것인가? 사람들이 하나도 보이 지를 않네?” 나는 지토의 말에 대답하기보다 마법진으로 달려가 진을 살폈다. 그리고 아직 남아있는 마나의 변화와 마법진의 내용으로 이동거리와 방향을 산출했 다. “음? 이거? 그리 멀지 않은 곳인데? 겨우 신성제국 쪽으로 옮겨간 것이 전부야. 그 럼 그 곳에서 이동을 다시 할 생각인가?” “뭐야? 어디로 간 건데?” “정확한 것은 좀 더 계산을 해 봐야겠지만 일단은 이 곳에서 서남쪽이야. 거리로 보 면 어쩌면 마르티낭 정도가 될 것 같은데?” 내가 그렇게 지토에게 대답하는 중에 풍아가 광장으로 뛰어 들었다. “오빠, 어떻게 그렇게 대답도 없이 도망을 갈 수가 있어? 그래도 되는 거야?” 당장에라도 내 머리카락이라고 뜯을 것 같은 분위기의 풍아. 그런데 내가 뭘 잘못했다고 저렇게 열이 받은 것일까? “하하, 풍아야. 상황이 급했으니 그렇지. 뭘 그렇게 화를 내고 그러니? 화 내지 마 라. 응? 예쁜 얼굴에 주름진다.” 쩝. 이런 아부성 발언을 해야 겨우 숨을 고르는 풍아. 도대체 내가 왜 이렇게 된 걸 까. 아무튼 그렇게 풍아를 필두로 해서 일행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그리고 그렇게 모인 일행에게 상황을 설명해야 했다. .... “그렇게 지금 여기에서 녀석들이 바위 정령족을 이동 시킨 모양인데, 먼 거리는 아 니지만 그 곳에서 또 다시 이동이 이루어지면 상당히 상황이 좋지 않을 수도 있어. 그 러니까 최대한 빠르게 녀석들을 따라가야 할 입장이란 말이야. 그리고 여기 이 동굴 들 도 자세히 살펴서 뭔가 단서를 찾아보기도 해야 하고...” 내가 그렇게 상황을 설명하자 광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이 곳의 문제는 저와 모루정이 알아서 살펴보고 뒤따라가겠습니다. 그러니 형 님께서 먼저 가셔서 상황을 해결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해. 나도 광아와 함께 남아서 이 곳을 좀 살피고 가도록 하지.” 광아의 말에 지토가 함께 남겠다고 나섰다. “그래? 알았어. 그럼 그렇게 하자. 대신에 지금 한꺼번에 이동을 하는 것은 좀 무리 가 있으니까 나와 화아 그리고 풍아가 먼저 이 마법진을 이용해서 이동을 하고, 별 문 제가 없으면 다시 이 마법진으로 마력을 넣어 줄 테니 따라 오도록 해. 알았지?” 나는 일단 셋이 이동을 하고, 루아와 수아, 아르미엘, 자이곱은 나중에 부르기로 하 고 마법진을 가동 시켰다. 퍼벙! 터더엉! 이런 이런 이럴 줄 알았다니까. 간단하게 우리를 내버려 둘 녀석들이 아니지. 그나 마 출발은 저쪽 마법진을 사용했지만 도착은 이쪽 마법진과는 상관없이 내 마력을 이 용한 것이 다행이지 만약 이렇게 망가진 마법진을 이용했으면 어느 공간의 틈에 끼어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거기다가 도착하자마자 날리는 이 숱한 마법 공격들은 또 뭐란 말이야? 나는 다시 한 번 이동 마법과 함께 실행되게 만든 실드를 대견스러워 하며 주위를 둘 러보았다. 우리가 도착한 장소는 어느 건물의 지하로 보이는 곳이었다. 예전 쉬벡의 성 지하에 내려갔을 때, 본 것과 분위기가 비슷하다. 그리고 우리가 올라선 마법진을 둘러싸고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방어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 뒤에는 우리가 올라서 있는 것 보다는 서너 배는 되어 보이는 마법진이 발동되며 바위 정령족을 어디론가 보내고 있었다. 정령족들은 모두 정신을 잃은 듯이 보였고 한 쪽에는 바위 정령족이 층층이 쌓여서 무더기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런 정령족을 들어서 마법진 위로 던지고는 이동을 실행 하 는 모양이었다. 마침 약 30명 정도의 바위 정령족이 새하얀 빛에 쌓여 사라지는 모습이 보이고 있었 다. “화아! 저기 저 마법진 좀 부셔. 그리고 풍아는 저 기사들 상대하고 나는 이 마법사 들을 맡지.” 마법사들이 그리 넓지도 않은 지하실에 이렇게 몰려 있으면 어쩌자는 것일까? 나는 곧장 주위의 마력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언젠가 이야기 했지만 내가 가진 기본 마력의 크기가 크고 상대의 마력이 작은 경우 나는 주위의 모든 마나들을 제압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쓰지 못하도록 말이다. 물 론 상대 중에서 아주 탁월한 마력 운용력을 지닌 사람이 있다면 어느 정도는 마력을 끌어 쓸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 지금처럼 겨우 6써클이 전부인 마법사들로서는 어 려운 상황일 것 같다. 나는 마력을 제압하는 순간 몸을 움직여 마법사들의 몸을 제압했다. 분위기로 볼 때에 이들이 암흑교의 교도들이란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 다. 그리고 그 사이에 화아는 다른 한 곳의 마법진을 사용 불능으로 만들어서 그 마법진 을 통해서 바위 정령족을 이동시키던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물론 그 주위에서 마력을 운용하던 마법사들이라고 마력의 운용이 가능한 것은 아니 었지만... 그러고 보면 그냥 내가 마력을 봉쇄하고 화아와 풍아는 기사들을 상대하도록 했으면 그만이었을 것을... 마법진의 일을 마친 화아가 풍아를 돕기 시작하면서 급격하게 전세가 기운 기사들은 자살이라는 극단의 방법을 택하기 전에 모두 제압이 되었다. 이들을 조종하는 사제는 이들에게 자살이라는 최후의 방법을 신중히 택하도록 했던 모양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급하게 마법사와 기사들을 모두 제압하고 화아가 손 본 마법진으로 가서 그 마 법진의 효과와 이동처를 알아보았다. 상당히 훼손이 되었지만(그게 다 내가 머리가 나쁜 탓이다.) 겨우 겨우 그 마법진이 향하는 방향과 거리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좌표를 간신히 복원해 낸 나는 그곳이 내가 아는 곳의 좌표라는 것은 깨달 았다. “이거 여기를 또 가야 하는 건가? 이번에는 좀 신중하게 움직여야 할 것 같은 데...” 내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던 모양인지 풍아가 물었다. “응? 오빠? 아는 곳이야? 어딘데? 설마하니 암흑제국으로 곧장 이동을 한 것은 아니 겠지?” “응? 무슨 소리야? 암흑제국이라니?” 옆에서 채 이동이 되지 못하고 묶여 있던 바위 정령족을 풀어 주던 화아가 물어왔 다. “너 같음 바위 정령족을 어디로 보내겠냐?” 나는 화아의 물음에 물음으로 답했다. “그거야 광석이 많은 곳, 대장간이 많은 ... 그럼 거기란 말이야? 미엔리도?” 화아도 대충 장소를 알아 낸 모양이었다. “맞아. 일단은 여기 있는 정령족들을 돌려보내고 서둘러가서 그들을 구해 와야겠 다. 시간이 없어. 만약 내가 그 곳으로 간다는 걸 제란이 안다면 정말 재미없는 일이 벌어질 지도 몰라.” 나는 그렇게 말하며 우리가 처음 도착한 마법진을 서둘러 보수했다. 조금 훼손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마법진에 장치되어 있는 마법저장석이 제법 성능 이 좋은 것들이라 여기 있는 바위정령족을 돌려보내는 데에도 필요할 것 같았기 때문 이었다. 하지만 마법진을 보수하기 전에 위층에서 내려오는 통로에서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 께 사람들이 내려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오빠, 사람들이야.” “음. 나도 알아.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지? 여기 있는 이 자들과 연관이 있는 자들이 겠지?” “그렇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상황에서 여길 내려올 이유가 없잖아.” 화아 역시 위층에서 내려오는 자들이 우리 편이 아니라는 데에 한 표를 던지는 모양 이었다. 나는 마법진 보수를 멈추고 위층을 향한 통로에 결계를 먼저 설치했다. 아무래도 바위 정령족을 돌려보낼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간단한 결계로는 위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결계를 부수며 나타난 인물은 의외의 인물이어서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꼼짝들 마라. 암흑의 사도들이여. 너희들을 주신의 이름으로 벌하노라.” 거대한 검을 가슴 앞에 세우며 결계를 가볍게 부수고 들어온 것은 성기사들이었다. 그것도 나발리스 성기사. 이 곳이 마르티낭에서 가까운 곳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설마하니 나발리스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멋들어지게 소리를 지르고 결계를 부수며 내려온 나발리스도 의외의 상황에 당황했는지 한동안 굳어 있는 모습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성기사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런데 조금 늦으신 것 같군요?” 화아가 이런 인사로 나발리스의 굳은 몸을 풀어 주었다. “안녕하십니까? 의외의 장소에서 뵙게 되는군요. 상황 설명을 좀 해 주시겠습니 까?” 나발리스는 검을 허리에 꽂으며 그렇게 물었고, 나머지 성기사들도 검을 거두었다. 나는 화아와 풍아에게 상황 설명을 일임하고는 다시 마법진의 보수에 들어갔다. 그리고 마법진의 보수가 끝난 후 먼저 기절해서 누워있는 정령족들을 족장이 있는 곳 으로 다시 돌려보냈다. 정령족들이 모두 돌아가고 나서 지토와 모루정이 광아 수아와 함께 이동해 왔다(루 아와 아르미엘, 자이곱은 부르지 않았다. 성기사란 자들과 마찰이 생길 것을 우려했 기 때문이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전에 보내주신 암흑제국에 대한 정보는 여러 각도에서 살 펴 본 결과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어 지금 제국 내에서도 대책을 준비 중인 것 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암흑교의 이교도들이 일으키는 문제에 대해서는 저희도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뿌리 뽑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만 시간이 좀 걸릴 것 같 습니다.” 나발리스가 어느 정도 상황 정리가 끝나고 우리 일행들만 남았을 때, 나에게 다가와 서 말을 걸었다. “그렇습니까? 그런데 여긴 어떻게 오시게 된 것입니까?” “그게, 실은 얼마 전부터 이 지역에서도 이교도의 활동이 감지되어서 여러모로 감시 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이교도의 근거지를 발견하게 되어 기사단을 이끌고 주신의 권능을 보이기 위해 달려 온 것입니다. 그런데 위에서 암흑교의 사제를 만나 실랑이를 벌이는 바람에 시간이 좀 늦고 말았습니다.” 나발리스가 대답했다. “암흑교의 사제요?” 나는 나발리스의 말에서 암흑교의 사제라는 말에 놀라 되물었다. 지그까지 사제가 직접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사제가 있었습니다만 마지막 순간에 불온한 힘을 사용하여 도주하는 바람에 잡지는 못했습니다.” 나발리스가 부끄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 그 사제가 쓰는 힘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어느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었습 니까?” 나는 다시 사제에 대해 물었다. “별다른 능력은 없었습니다. 그저 타락한 힘에 의지하여 하찮은 술수를 부리는 정도 였습니다. 감히 주신의 권능을 침범할 정도는 못되었지요.” 이런, 누가 그따위 입에 발린 소리를 듣자고 물어 본 줄 아는 거야? 그래 니들이 이겼으니 그렇게 말하겠지만 그래도 상대에 대한 정보는 정확히 전달을 해 줘야 할 것이 아니냔 말이다. 나는 속으로 일어나는 욕지거리를 참으며 조용히 나발리스의 말을 듣고 정보를 추리 해 내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 이후로 이어진 나발리스의 말에서 몇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는데 이번 에 나타난 암흑사제는 사십대 정도의 남자이며, 흑마법에 능한 자로 보였다. 그나마 성기사들은 흑마법 자체에 대한 방어력이 기본적으로 높은 자들이어서 크게 곤란을 겪 지는 않은 것 같았지만 내가 위층으로 올라가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8써클은 충분히 되어 보이는 공격의 흔적이 남은 것으로 보아서 사제의 능력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 다. 하지만 사제는 도망을 갔고, 우리들은 아직도 바위 정령족의 실종자 중에서 300명 가 량을 찾지 못했다. 그들은 암흑제국의 미엔리도에 있을 것이었다. 나는 나발리스 성기사에게 양해을 구하고 마법사와 기사들은 넥스 영지로 보냈다. 사실 우리 일행이 잡은 것이니 나발리스가 마법사와 기사들에 대해서 권리를 주장하 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지만, 실제로 이들이 기충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다는 사 실이 신성제국에서는 상당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상황이어서 굳이 포로들에 대한 이 야기는 나발리스도 피하려고 했다. 즉, 정신을 지배당해서 교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경우에 그 죄를 어떻게 물을 것인 가에 대한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때로는 즉결처분이 되는 경우도 있었고, 때로는 기충을 제거하는 시술을 받 는 경우도 있었고(이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충을 올바로 제거하지 못해 병신이 되 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이 아니면 비공식적인 경로를 통해서 기충을 안전하게 제거 하 고 석방시키는 경우도 있었는데, 나발리스로서는 어떤 방법을 취해야 할지 선택하기 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렵지 않게 포로들의 신병을 확보하고 넥스 영지로 보내는 작업을 마친 후 에 나발리스는 몇 가지 정보를 교환하고는 돌아갔고, 그 때에야 나는 루아와 아르미 엘, 자이곱을 불렀다. “지금 급한 것은 미엔리도에서 정령족들을 구해 오는 일이야. 하지만 그 곳이 암흑 제국이고 우리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 솔직히 그 곳에 제란이 직접 나타날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상당히 위험한 상황이라고 봐야 할 거야.” “이미 오백명에 이르는 종족들이 돌아왔습니다. 우리들이 기대했던 것에 비해서 상 당히 많은 수입니다. 그러니 루탄님과 다른 분들께서 위험을 감수하실 필요는 없습니 다. 그것은 너무 많은 빚을 지는 일입니다.” 모루정이 내 말에 토를 달았다. “그렇다고 자신의 종족을 버리겠다는 말입니까? 그게 어디 될 말입니까?” 광아가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따지듯이 한 말이었다. “저도 우리 종족들이 모두 무사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끌려간 종족들이 해를 입지 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솜씨가 필요해서 끌고 간 것이라면 부려먹기는 하겠지만 죽이지는 않겠지요. 조금 곤란한 지경이기는 해도 위험은 별로 없으리라고 생각합니 다.” 의외로 모루정의 상황 판단은 냉철한 면이 있었다. “그건 그렇지도 모르지만 그들이 언제까지나 안전하리란 보장은 없잖아요?” 풍아의 말이다. “그래요. 만약 어느 정도 장비를 갖춘 후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가장 중 요한 것은 당신의 종족들이 자유스럽지 못한 상태라는 것이지요.” 루아도 모루정에게 따지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솔직히 더 이상 그들을 자극하는 것이 더욱 우리 종족을 위험하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서두르지 않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나는 모루정의 이 말에 흠칫하고 말았다. 그랬다. 조금 여유를 가지고 그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계획을 세워 일을 진행하는 것 이 좋을 것도 같았다. 시간을 놓치지 않고 서둘렀으면 좋은 효과를 볼 수도 있었겠지만 일단 지금은 그 시 기를 놓친 것이다. 이미 상당한 준비를 하고 원군을 끌어 모을 시간을 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요. 맞는 말이군요. 지금 우리는 시간을 놓친 것이라고 봐야겠군요. 모루정 당 신의 말이 옳습니다. 너무 서두르면 더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지요. 우리나 당신의 종족 모두에게...” 나는 그렇게 모루정의 말을 인정했고, 잠시 흥분하던 일행들도 어느 정도 마음을 안 정시키는 모습이었다. “그럼 이젠 시간이 걸리더라도 확실한 정보를 가지고 행동을 해야겠군요? 일단 그 럼 미엔리도의 도둑길드 쪽을 통해서 정보를 모아 보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알 수 있 는 것은 정령족들이 미엔리도로 이동을 했다는 것뿐이고, 그 이후에 다시 어디로 움 직 였을지도 모르니까 말이죠.” 광아가 자신의 할 일이란 듯이 그렇게 도둑길드를 활용 한 정보 수집을 이야기했고, 별다른 방법이 없는 우리들로서는 광아의 정보를 기다리 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어? 그럼 이제 우리 어떻게 해요? 다시 족장님에게 가 봐야 하나요? 아니면 이대 로 넥스 영지로 돌아가야 하나요?” 풍아가 우리의 여정에 대해 물어왔다. “바위 정령족의 족장님이나 얼음기사단에는 모루정님이 말씀을 전해 주시면 될 듯 하니 일단은 넥스 영지로 다시 돌아가서 다음 일을 의논하기로 하지. 그리고 모루정 님 은 족장님을 뵙고 연락하실 것이 있으시면 이걸 사용하세요. 그럼 곧장 넥스 영지로 오실 수 있으실 겁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모루정에게 이동 스크롤을 하나 건네주었다. “예, 감사합니다. 루탄님. 가서 저희 종족들과 족장님을 뵙는 대로 곧 다시 찾아뵙 겠습니다.” 모루정은 그렇게 말하고는 이동진을 통해서 얼음기사단이 기다리는 바위 정령족의 영 역으로 사라졌다.(실제로는 내가 보냈지만...) “음. 그러고 보니 루아가 싸움에 끼어들 틈이 없었네? 그럼 결국 루아의 솜씨를 구 경하지 못한 거잖아? 아까운걸?” 나는 바닥에 있는 마법진들을 모두 지워버리며 중얼거렸다. “별로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이에요. 그러니까 보여 주기 싫어요. 어쩔 수 없는 상 황이면 모르지만...” 말꼬리를 줄이는 루아의 얼굴이 붉어져 있다. “그래, 알았다. 뭐 억지로 보자고 하지는 않을 테니 걱정마라.” 나는 그렇게 루아의 힘이나 능력에 대해서 유연하게 넘어갔지만 다른 녀석들은 아닌 모양이다. “그런게 어딨어? 난, 보고 싶단 말이야. 도대체 어떤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거야? 일 행끼리는 동료의 능력을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 거야. 그래야 쓸데 없는 걱정도 않고, 또 힘을 적절하게 사용할 수도 있는 거니까.” 풍아의 말이다. “나도 루아가 어떤 능력이 있는지 알고 싶어. 어쩐지 멋있을 것 같아.” 수아의 말이다. 하지만 다른 녀석들은 아무 말 없이 그냥 루아를 지긋이 바라보는 것으로 압력을 가 할 뿐이다. 아무래도 여자라는 점이 직접적으로 말을 하지는 못하게 하는 것인 모양이다. “자, 그럼 넥스 영지로 돌아가기로 하자. 예상보다는 일찍 돌아가게 됐지만 일을 마 무리 짓지 못하고 가게 되서 기분이 깔끔하지 못하네...” 나는 그런 말로 궁지에 몰린 루아를 구해주었다. 하지만 끈질긴 풍아와 은근한 수아와 눈에 보이지 않게 압력을 가하는 일행들의 시선 을 견디지 못한 루아가 끝내는 항복하고 말았다. 물론 우리가 넥스 영지로 돌아오고 며칠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그 덕분에 오늘은 연병장에서 루아와 풍아의 대련이 벌어지게 되었다. 루아는 평소와는 다르게 드레스 차림이 아니라 바지에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그리고 풍아와의 대련이 시작되고 나서는 루아의 모습이 완전히 변해버렸는데, 그건 갑주 탓이었다. “역시 루아도 갑주를 입고 있었군요. 그런데 상당히 예쁜 모양이네요. 은록색의 갑 주라니...” 광아가 루아의 갑주를 보고 한 말이었다. 마갑주의 특성상 갑주의 착용 수위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인지 루아가 입은 갑주의 형태는 부츠와 팔뚝 보호대 그리고 역시 수영복 모습의 몸통과 어깨 보호대로 이루어 진 모습이었다. “거기다가 무기까지도 갑주의 도움을 받아 만들었군요. 하지만 특이한 형태네요. 륜 輪이라니.” 화아가 한 마디 덧붙였다. 루아의 무기는 륜이었던 것이다. 나도 륜을 다루는 사람과 싸움을 해 본 적이 없었 다.(륜은 바퀴를 뜻하는 말이지만 무기로 쓰이면 바퀴의 축소형이 된다. 더 얇고 작 은 모양이고 밖으로 톱니나 날카로운 날을 세우는데 루아의 무기는 날이 서 있는 것 이 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적어도 륜을 제대로 다루려면 투척과 회수가 자유로 워야 하는데 그러려면 무기를 자유롭게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잘못하면 풍아가 낭패를 보겠군. 저 무기를 제대로 다루려면 상당한 능력이 필요한 데 말이야.” 화아의 말이다. “그래, 아마도 풍아가 힘겨운 대련을 하겠구나. 지금 느껴지는 루아의 내력이 상당 해. 제란을 빼고 루아의 내력 수준에 이른 사람을 본 적이 없을 정도다.” 나도 조금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화아의 말에 동의했다. “자, 그럼 시작해요. 언니. 조심하세요.” 루아의 선공으로 대련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별로 대단할 것 같지 않은 직접공격이었다. 륜을 손에 들고 휘두르는 것이다. 채챙! 륜과 검이 만났다. 하지만 그 한 번의 부딪힘이 풍아와 루아의 힘의 차이를 보여 주었다. 밀린 것이다. 풍아가. 한 발 밀려난 풍아도 의외라고 생각을 했던 모양인지 놀란 표정을 짓고는 루아에게 달려 들었다. “그래? 제법 인데? 그럼 이건 어때?” 풍아는 자신의 장기인 가벼운 몸놀림을 이용해서 사방에서 루아를 몰아가기 시작했 다. 작은 광풍狂風이 루아의 주위를 휘돌고 있는 모습이라고 할까? 하지만 루아도 차분하게 륜을 휘두르며 방어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하나의 륜으로 방어가 어려워지자 륜을 둘로 나누어 들었다. “어머! 무기가 둘로 나누어지네?” 수아가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그렇게 두 개의 륜을 가진 루아는 방어에 여유를 지니고 간간히 공격을 할 수 있었고 잠시 시간이 지나면서는 공격과 방어가 조화를 이룰 정도가 되었다. “좋아! 그럼 이젠 다르게 한 번 해 볼까?” 루아와 거리를 두고 물러난 풍아가 그렇게 말하고는 검에서 카다를 소환해 내었다. “자, 이젠 협공이다. 그리고 이건 선물이야.” 풍아의 말과 동시에 카다의 전격이 루아에게 날아갔고, 풍아가 휘두르는 검에서는 검 풍이 일어나 매섭게 쏘아졌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몸을 날리는 풍아. 결국 세 가지 공격을 한꺼번에 받게 된 루아였다. 루아는 카다의 전격 공격을 하나의 륜을 던져 막았고, 날아오는 검풍들은 남은 하나 의 륜을 휘둘러 해소 시켰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남은 풍아의 공격은 감히 받아치지 못하고 몸을 빼고 피하는 방법 뿐이었다. “호호, 도망을 간다고 될 일이 아니야.” 풍아는 루아를 바짝 따르며 핍박을 해 나갔다. 륜이 하나 뿐인 루아는 간신히 풍아의 검을 막으며 뒤로 밀리는 상황이 되었다. “어머! 풍아 언니 조심해!!” 수아가 풍아에게 경고의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풍아는 듣지 못한 것 같은데?” 화아가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걸로 풍아가 질 수도 있겠군.” 나도 상황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카다의 공격을 무효화 하고 날아갔던 륜이 풍아의 배후를 노리며 소리 없이 다가들 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순간 풍아가 등 뒤로 날아드는 륜의 기운을 느낀 모양이었다. 몹시 당황한 얼굴이 되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교묘하게 얽힌 루아의 룬과 검은 풍아가 몸을 피할 여유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풍아가 륜을 피하려면 하는 수 없이 루아의 륜에 어느 정도의 손해는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끼이이이익! 하지만 상황의 반전은 카다에게서 일어났다. 허공에서 내리 꽂힌 카다의 날카로운 부리가 륜의 진행 방향을 바꾸어 놓았던 것이 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당황한 루아의 빈틈을 노리고 풍아의 검이 루아를 제압해 버렸 다. “어머, 져버렸네요. 호호.” 루아는 륜을 내리고는 그렇게 웃어 버렸다. “뭐야? 뭐. 이렇게 긴장감이 없는 대련이라니. 져버렸네요? 그러고 웃어 버리면 이 긴 나도 힘이 나지를 않잖아?” 풍아는 루아의 반응에 검을 허리에 꽂으며 투덜거렸다. “뭐 죽여 살려하는 것도 아닌데... 호호. 응? 카다, 그 륜 빨리 가지고 오지 못해? 못살게 굴지 말란 말이야!” 갑자기 루아가 카다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날아드는 루아의 륜을 피해 카다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렇게 날아오른 카다의 뒤를 이어서 땅바닥에 떨어져 있던 륜이 스르르 떠올라서 루 아에게 날아갔다. “응? 그거 혼자서 날아다니고 그러는 거야?” 풍아가 물었다. “이거 마수거든요. 갑옷 하고 다른 녀석이라서요. 혼자 날아다니고 공격도 할 수 있 어요. 물론 제가 힘을 전해 주는 경우에는 더 강하고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거고요. 보통 때에는 이렇게 움직이는 정도 뿐이지만요.” 루아가 손에 든 두개의 륜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아무튼 놀랐네. 루아가 그런 힘이 있는 줄은 ....” 수아가 대련이 끝난 둘의 곁으로 다가가며 한 말이었다. “사실은 이 녀석하고 이 녀석은 아이슈마가 성녀 역할을 하는 제 몸에 붙혀 준 것인 데 제가 아이슈마와 계약이 끝났는데도 이 녀석들은 저와의 계약이 끝이 나지 않아서 따라 온 것들이에요. 호호 그냥 덤으로 얻은 녀석들이죠. 더구나 그 사이에 아이슈마 가 동화력을 상당히 높여 놓아서 착용하고 사용하는데 거의 무리가 없어요. 아마 완 전 착용하면 풍아 언니도 저 한테는 어려울 거예요. 호호호.” 루아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말하자 풍아는 발끈한 모양이 었다. “그래? 그럼 다시 한 번 해 보자. 응? 전력을 다해서 한 번 붙어 보는 거야? 어떻 게 생각해? 응? 해 보자. 응?” 하지만 그런 것은 보고 있은 내가 아니다. “풍아야! 그러다가 누구 한 사람이라도 다치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야? 적당히 하고 그만 해라. 적도 아니고 가족끼리 그렇게 싸워보자는 녀석이 어디 있냐?” 나는 될 수 있으면 마음 상하지 않게 가벼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고, 풍아도 잠깐 흥분했던 것을 깨달은 모양으로 입을 다물었다. “호호. 그럼 이제 남은 사람은 아르미엘 사제 뿐이네?” 풍아는 루아에게서 아르미엘로 표적을 바꾼 모양이다. “응? 무슨 소리야?” 수아가 풍아에게 묻는 말이다. “그거야. 이제 전력을 노출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 아르미엘이라는 거지. 호호호. 아르미엘도 분명히 상당한 실력자일 거야. 그치?” 풍아는 후드 깊이 얼굴을 감추고 고개를 숙인 아르미엘에게 직접적으로 물어 보았다. “저는 별 능력이 없습니다. 그저 흑마법을 조금 쓸 줄 아는 정도이고 특수 능력으 로 정신체인 상태로 이동이 가능한 것이 전부입니다.” 아르미엘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음. 그런데 한 가지 물어 볼 것이 있는데 아르미엘님은 정신체인 상태에서도 마법 을 쓰시는 것이 가능합니까?” 아르미엘의 대답을 들은 광아가 물어 본 말이었다. “그건, 거의 불가능합니다. 상당한 육체적 타격을 감수한다면 어느 정도의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할 것입니다만 평상시에 그런 것은 어렵습니다.” “그럼 정신체인 상태는 어느 정도나 유지가 가능하신 겁니까? 실은 아르미엘님의 능 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언젠가 정보 수집에 도움을 청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을 하 고 있었습니다만....” 아마도 광아는 아르미엘이 정신체인 상태로는 원하는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것을 생각 하고는 그 능력으로 정보를 수집하는 역할을 맡기고 싶은 모양이었다. “정신체로 있는 것은 하루에 몇 시간 정도는 가능합니다. 하지만 제가 광아님께 도 움을 드리는 것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저는 이루비아님을 돌봐야 하거든요. 요즈음 소환에만 해도 시간을 많이 빼앗기는 중이어서. 죄송합니다.” 이럴 때에 보면 아르미엘은 딱 부러지는 성격을 지닌 것 같다. “네에.. 그렇다고 하신다면 하는 수 없지요. 알겠습니다.” 광아도 미련을 길게 끌지 않고 단념을 해 버린다. 아무튼 그렇게 실력 확인을 위한 대련이 끝난 이후로는 루아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사들과 대련을 하기도 하고 적당하게 주물러 주기도 하면서 친분을 쌓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루정이 다녀갔다. 모루정은 족장이 500명의 종족들을 구해 준 것에 대해 감사하며 약속한 대가를 준비 해서 보내 주겠다고 한 말을 전했고, 언제든 암흑제국의 종족들을 구할 계획이 세워 지 면 자신도 빼 놓지 말고 불러 달라고 부탁하고는 돌아갔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2500벌의 갑옷과 무기가 보장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현재 우리 넥스 영지에 있는 병사의 수는 1500 야전대와 화염기사단 77명, 얼음 기사 단 63명. 넥스 영지의 영지민으로 구성된 예비군이 15000 정도 되었고, 마법사가 51 명 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인원은 다시 변할 것이었다. 얼마 전에 마르티낭에서 데리고 온 녀석들의 수가 마법사 20에 기사가 15였던 것이 다. 마법사들의 수준이야 가장 높은 녀석이 4써클이었지만 그래도 기충의 효과로 빠르게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자들이었다. 물론 그들도 기충이 제거되었고 지난날의 행동들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기충과 암흑교 에 대한 설명을 들은 후에는 그 전 사람들과 같은 과정을 거쳐서 기사단과 마법사의 탑에 소속이 되었다. “아무래도 미엔리도 쪽의 바위 정령족을 구해오는 일이 쉽지 않겠습니다. 도둑 길드 에서도 상당한 희생을 해서야 겨우겨우 알아낸 정보입니다만 그들은 미엔리도의 가장 깊은 광산에서 의식주 일체를 해결하며 지내고 있는 모양입니다. 현재 주로 만들어 내 는 것은 무기 종류들입니다. 검과 도, 창, 활 등의 무기를 만들고 있는 것으로 파악 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넥스 영지로 돌아오고 한 달이 지날 무렵에 광아가 바위 정령족에 대한 정보 를 모아서 보고를 해 왔다. “그래? 광산 안에서 감시를 받으며 있다는 말이지? 그것 참.” 나로서도 마땅히 방법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큼. 내가 갔다 오지. 생각해 보니까 그렇게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야. 이동 스크롤 을 대량으로 만들어 봐. 그거 내가 가지고 들어가서 모두 데리고 나오면 되는 일이잖 아?” 고민에 고민을 하고 있는 나와 광아를 허탈하게 만드는 지토의 말이었다. 이동 스크롤을 만들어서 지토에게 주어 보낸다. 그리고 바위 정령족을 설득해서 그 스크롤로 도망을 가게 만든다? “하지만 그 곳에도 결계가 상당할 텐데? 이동 스크롤을 쓰는 것이 어렵지 않을까?” 지토에게 물어본 말이다. “클클. 그럼 땅을 파고 더 깊이 들어가든지 아니면 결계 밖으로 나가면 되겠지. 설 마하니 땅 속에 만든 결계를 내가 피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지토의 능력이면 불가능하지는 않은 일일 것도 같았다. “형님 이거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요?” 광아도 지토의 제안에 가능성을 두는 모양이었다. “그럼 세부적인 계획을 세워보자. 일단은 여기에서 미엔리도로의 이동은 될 수 있으 면 주위의 시선을 끌지 않는 방법이 필요하겠지?” 나는 제란 측에서 우리들의 이동을 눈치챌 것을 걱정해서 말했다. “그럼 목식이 만든 그 숲으로 이동을 한 후에 도보로 이동을 하지요? 암흑제국의 영 역 안으로 순간이동을 하는 것은 아무래도 들킬 위험 부담이 있으니까 말이죠.” “그래 그 쪽으로 이동을 하고 그곳으로 바위 정령족을 이동해 오게 만든 다음에 다 시 대형 마법진을 이용해서 넥스 영지로 바위 정령족들을 이동시키는 방향으로 하 자.” 나와 광아는 그렇게 바위 정령족을 구해오는 방법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었고, 먼저 방법을 제시한 지토는 그 뒤로는 알아서 하라면서 자리를 비워 버렸다. 그리고 우리들의 세부 계획이 마련된 다음, 가족회의를 열었다. “자, 이번에는 미엔리도에 있는 바위 정령족을 구해오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해야 할 것 같다. 바위 정령족이 300명 정도 미엔리도의 광산 속에 감금된 상태로 무 기들을 만들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는데...” 나는 이렇게 이야기의 서두를 꺼내고는 이어서 광아와 의논한 계획을 가족들에게 털 어 놓았다. “그럼 이번에는 오빠하고 지토 아저씨, 그리고 광아 오빠가 가는 거야? 우리들이 전 부 필요한 일이 아니네?” 풍아가 내 이야기를 듣고 말했다. “지금으로는 나, 지토, 광아, 자이곱이 가면 될 것 같아. 될 수 있으면 싸움을 하 는 것은 피하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내 말에 놀란 것은 자이곱이었다. “저, 저도 말씀이십니까?” 자이곱의 놀람에는 자신을 일행 중에 끼워 준 것에 대한 감격 같은 것이 들어 있었 다. “뭐 자이곱은 그 곳에서 대형 마법진을 지켜주는 일을 했으면 해서...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누군가 마법진을 지키고 있어야 할 거니까. 자이곱에 게 그 일을 부탁하려고 해! 괜찮지?” 나는 그렇게 자이곱에게 말했고 자이곱은 꼭 자기를 데리고 가 달라면서 기뻐해 주었 다. 물론 수아와 풍아 광아 루아 등이 섭섭해 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들도 이제는 넥 스 영지에서 할 일들이 있었기 때문인지 그렇게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그럼 출발은 언제로 하실 생각이십니까? 루탄님.” 동행을 하게 된 자이곱은 어린아이가 놀이공원에 함께 가자는 약속을 받은 듯이 기 쁜 표정으로 날짜를 물어왔다. “오늘 밤에는 바위 정령족들을 위한 이동 스크롤을 만들어야 하니까 내일 저녁에 출 발을 하기로 하지. 목식의 숲에서 하루, 숲에서 미엔리도까지 이틀정도, 그리고 광산 안에서 준비를 하려면 하루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 테고, 일이 쉽게 성공한다면 4일이 나 5일이면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 거야. 물론 가기 전에 통신을 위한 수정구를 만들 어 둘 테니까 연락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그러면서도 나는 일행들과 나를 위해서 준비할 스크롤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았 다. 전에 제란과의 싸움에서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을 때, 스크롤 하나만 있었어도 그렇 게 구차한 모습을 우제푸에게 들키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 뒤로는 일 회용이라도 마법을 쓸 수 있는 도구들을 만드는 데에 남모르게 정성을 쏟고 있는 중 이 었다. 비록 스크롤 자체가 엄청난 마력을 견디게 만드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 8써클 이상 의 마법을 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뭐 성과라고 해 봐야 차곡차곡 쌓이는 마법 스크롤들이기는 하지만....) 가족회의라곤 했지만 거의 통보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고, 다들 크게 위험하다거나 하는 생각들은 없었던 모양인지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가족회의가 끝나고 바빠진 사람은 역시 내일 출발을 앞둔 사람들뿐이었다. 특히 스크롤들을 만들고 점검을 해야 하는 더더욱 할 일이 많았다. 처음에는 한 사람에 하나씩의 스크롤을 만들 생각이었지만, 그건 정말 비효율적이라 고 밖에는 할 수 없는 일이라, 5인용과 10인용 스크롤을 만들었다. 전체적으로 350명 정도의 인원을 이동시킬 수 있는 양을 만들었으니 부족하지는 않 을 것이었다. 물론 그 덕분에 나는 새벽까지 야근하는 노동자 같은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리고 다음날 하루 낮을 침대에서 보낸 나는 저녁 해가 지는 시간에 넥스 영지의 마 법사 탑에 마련된 이동마법진을 이용해서 예전 목식이 있던 자리로 이동을 했다(란이 와 게브는 장거리 이동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에 신계로 잠시 보내 놓았다. 맘맘은 수 아가 돌봐 주기로 했고.). “역시 후덥지근 한 날씨로군요. 밀림이란....” 도착과 동시에 광아가 한 말은 이것이었다. 넥스 영지에 비해서 남쪽에 위치해 있다는 이유일까? 그다지 먼 거리도 아닌 것 같은 데, 초목의 종류가 다르고 기후가 다르다. 그럼 암흑제국을 넘어서면 적도를 지난 것 같은 효과가 나타날까? 그렇게 먼 곳까지 대지가 몸을 펼치고 있을까? 이 대륙을 흐르는 강들은 어디로 흘러갈까? 바다가 있겠지? 어딘가에... 나는 그 동안에는 생각지도 못한 것을 갑자기 밀림에 떨어져 내리면서 생각하게 되었 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 당장에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 부지런히 이동을 해서 미엔리도에 가기 전에 거점을 확보하는 것이다. 잘못해서 누웬과 암흑제국을 오가는 상인이라도 중간에서 만나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면 귀찮은 일이 생길 것이다. “빨리 가 보자 일단은 예전에 만든 저 통로를 통해서 이동하다가 적당한 곳에서 사 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곳으로 숨어들기로 하자.” 나는 그렇게 말하곤 광아와 지토, 자이곱을 이끌고 굴속으로 들어갔다.(예전 아눈이 만들어 놓았던 그 길이었다.) “음. 역시 그 사이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오고간 흔적이 있는데요? 형님 이거 상 인들이 오고간 흔적들이겠지요?” 광아가 굴속으로 들어서며 광구를 만들어서 길을 살피며 말했다. “그렇겠지. 아무래도 1년 이상이 지났으니 상인들이 오가기도 했겠지. 단지 상인들 만 은 아니었겠지만 말이야. 황제라는 녀석이 그냥 상인들만 보내지는 않았을 거야. 물 론 제란이란 녀석도 그랬을 테지만... 아무래도 누웬에서는 첩자가 활동하는 것이 어 려웠을 것 같군.” 나는 나름대로 황제의 능력을 가늠하며 말했다. 녀석의 정보 수집 능력이라면 암흑제국의 첩자들은 누웬에서 활동하기가 어려웠을 것 이다. “그나저나 너무 미엔리도에서 멀리 떨어져 온 것 같다. 거기까지 가려면 예상보다 시간이 좀 더 많이 걸리겠는 걸?” 지토가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토, 뭐가 문제야? 게브가 좀 빨리 달리냐? 그냥 나하고 너만 태우고 미엔리도까 지 달리면 되는 일인데... 뭐가 걱정이냐?” 나는 처음부터 게브를 타고 미엔리도에 갈 생각이었지만 지토는 설마 내가 그런 생각 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게브를.... 그렇군. 게브가 당나귀로만 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지토도 내 말을 이해했다는 듯이 그렇게 말하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 뒤로 우리들은 상당한 속도로 달려서(지토는 게브를 타고, 나머지는 달렸다. 거 의 자이곱의 속도에 맞추었다.) 발걸음을 재촉했고 그 속도는 예전에 아눈을 앞세우 고 길을 가던 것에 비할 수 없이 빠른 속도였다. 그리고 드디어 나무들로 이루어진 동굴을 벗어난 우리들은 밀림 속으로 나 있는 길 을 벗어나서 나무들을 헤치고 들어갔다. 그렇게 한참을 달린 우리들은 다시 나무들이 하나의 벽처럼 만들어진 쪽으로 작은 구 멍을 파고 들어가서는 그 안쪽에 넓은 광장을 만들었다. “여기다가 마법진을 그릴 테니까 자이곱과 광아가 기다리면서 수고를 좀 해 줘야겠 다.” 나는 광장 안에 거대한 마법진(한번에 10명 정도를 이동시킬 수 있는 진을 만들었 다. 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기 때문에 진의 크기가 커질 수 밖에 없었다.)을 그리면 서 말했다. “이런 곳에 별 일이야 있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그 리고 무슨 일이 있다고 해도 입구 쪽을 잘 지키고 있으면 문제는 없을 겁니다.” 자이곱이 자신있는 투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제란에게 한 번 당한 후에는 작은 일에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 다. 그래서 안쪽의 마법진은 광아에게 지키게 하고, 우리가 들어온 입구 쪽에 마법과 결 계로 광장을 막고 그 앞쪽을 자이곱에게 맡겼다. “이 앞쪽에서 저 광장으로 들어가는 길은 이 길 뿐이야. 그러니까 자이곱이 잘 지 켜. 만약에 자이곱에게 문제가 생기면 광아가 나와서 도와주고 그리고 둘이서도 힘겨 운 상황이 되면 이걸 써라.” 나는 자이곱과 광아에게 스크롤을 두 개씩 주었다. “이 두개는 이동 스크롤이야. 그냥 찢으면 넥스 영지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건 공격 용이야. 자이곱에게 준 것은 전격마법 8써클이고, 광아가 가진 것은 빙계마법 8써클 이 야. 그 두개를 써서 시간을 벌고 이동 스크롤을 찢고 몸을 빼는 것야.” 내가 그렇게 말하며 스크롤을 맡기자 광아와 자이곱은 조금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형님, 이럴 준비까지 하실 정도로 위험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만...” 뭐 소심해졌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별로 기분은 좋지 않지만 하는 수 없는 일이다. “만사 불여튼튼이라 했다. 그냥 만약을 대비한 것이니까 꼭 가지고 있다가 필요하 면 써라.” 나는 그렇게 말을 해 주고는 광장 한 구석에서 식사 준비에 들어갔다. 오랜만에 멀리 나왔고 우리 넷뿐이었으니 당연히 식사는 내 몫의 일이었다. 하지만 미리 식단과 재료 준비를 마친 상태로 보존 마법을 걸어서 준비를 마친 상태 였기 때문에 식사 준비는 오래 걸리지 않았고, 식사가 끝난 후에는 미리 준비해 온 스 크롤(바위 정령족이 써야 할 이동 스크롤)에 마지막으로 이 광장 안의 좌표를 설정해 주는 일이 남아 있었다. 거의 준비를 마친 스크롤이었지만 도착지의 좌표를 설정하지 않은 상태였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중에서 다섯 개 정도의 스크롤의 좌표를 엉뚱한 곳으로 지정해 두었 다.(역시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그렇게 이런 저런 일을 하고 잠자리에 든 우리들은 여명이 밝아오는 초록 새벽에 나 와 지토가 게브의 등에 타고 미엔리도를 향해 달리는 발굽소리로 새로운 하루를 열었 다. 말의 모습을 한 지토는 정말 굉장한 속도로 달렸고, 나는 우리들의 앞쪽으로 난 길 위에 사람들의 모습을 탐색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너무나 빠른 속도 탓에 앞쪽의 기척을 놓치기 쉬운 까닭이었다. 지토는 내가 말 위에 타는 것을 처음 보았다면서 놀란 얼굴을 했지만 내가 말을 타 는 모습이 어색하지 않은 것이 신기하다는 표정이었다.(남모르는 노력이 필요했다. 다 른 사람들 모르게 숨어서 승마 연습을 했다는 것을 지토는 모른다.) 등 뒤에 붙은 지토를 업은 모습으로 우리들은 점심도 굶고 미엔리도를 향했다. 그리고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우리들이 미엔리도의 성벽을 앞에 둘 때까지 중간에서 누웬이나 암흑제국의 상인들을 만나는 악운은 없었다. 때문에 우리들은 숲을 출발한 다음날 점심때가 지날 무렵에 미엔리도에 도착할 수 있 었다. 물론 우리들은 미엔리도의 그 게으른 경비병들이 우리를 발견할 수 없는 곳에 멈추 어 있는 상태였다. “지토, 저기에 보이는 거 봉우리가 아마도 그 광산이 있다는 곳인 것 같은데 어떻 게 생각해?” 나는 광아에게 들은 정보대로 미엔리도의 계곡 중에서 왼쪽 벽의 봉우리 하나를 가리 켰다. “아마도 저게 맞을 거야. 하지만 여기서 저 곳으로 길을 뚫어서 루탄 너를 데리고 가는 것은 솔직히 힘의 낭비라는 생각이 든다. 나 혼자서 갔다 올 테니 기다리고 있 어. 일단은 상황 파악만 하고 돌아올게.” 지토는 그렇게 말하고는 땅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저렇게 물질을 무시하고(입고 있는 옷은 물질이다.) 정령의 능력을 쓰는 것을 보면 역시 최상급 정령답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덕분에 무료하게 앉아서 지토를 기다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게브녀석도 자기 주인이 땅 속으로 사라진 후에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아마도 주인을 따라서 땅 속을 헤집고 있을 터였다. 나는 지토를 기다리며 한 구석에서 저녁 준비나 하기로 했다. 언제 무슨 일이 있을지는 알 수가 없지만 그래도 뭔가를 하려면 힘이 필요한 법이 다. 힘은 든든한 배에서 나온다. 흠흠. 그리고 내가 거의 식사 준비를 마치고 보관을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좀 더 기다려 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중에 지토가 돌아왔다. “뭐야? 왜 이렇게 늦어?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내가 그렇게 물어보자 지토는 털썩 주저앉아 차려진 밥상에 손을 뻗으며 입을 열었 다. “별로 큰 문제는 아니고, 일단은 바위 정령족들이 한 장소에 모여 있는 것은 사실인 데, 그 넓이가 상당해. 그러니까 저 땅 밑에 있는 광산의 규모가 엄청나다는 말이야. 그래서 바위정령족 역시 여기 저기 흩어져 있어서 다 만나 볼 수가 없었어. 그래도 취 침시간에는 한 곳에 모아서 잠을 재우는 모양이지만 그것도 전부는 아니고 작업장이 먼 곳에 있는 정령족들은 그냥 작업장에서 잠을 자기도 하는 모양이야.” 지토는 우걱우걱 밥을 먹으면서도 할 이야기는 다 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겠어?” 광산 안의 자세한 상황을 모르는 나로서는 지토에게 물어보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었 다. “일단 모든 인원이 한꺼번에 움직여야 하는 일이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의 계 획을 종족 전체에게 알려서 우리가 스크롤을 전달하는 즉시 이동을 할 준비를 해 두 라 고 일렀어. 문제는 그들이 자신들의 종족들 모두에게 그 사실을 전할 수 있는가 하는 거야. 그게 안 되면 스크롤을 준다고 해도 말을 듣지 않는 녀석들이 생길 수도 있으 니 까 말이야.” 그건 그랬다. 바위 정령족의 성격이 상당히 직선적인 면이 있어서 마음에 들지 않으 면 쓸데없는 고집을 피우는 것이다. 뭐 시간만 넉넉하면 적당히 쥐어박으면 말을 듣 기 는 하지만 말이다.(암흑제국에 붙잡혀 와서도 시키는 일을 고분고분 하는 것을 보면 폭력에는 상당히 약한 면이 있는 모양이다.) “그럼 결국은 저들이 얼마나 빨리 그 일을 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겠네?” “그렇지. 그리고 연락이 닿지 않는 곳이 생기면, 그 곳에는 또, 내가 직접 가야 할 테니까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아. 내일 아침까지는 저들이 서로에게 정보를 알리는 시간으로 주어야 할 것이고, 하루 낮은 다시 재확인하고 연락이 되지 않은 사람들을 파악하는 시간으로 하고, 밤 동안에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까지 연락을 해서, 물론 그 건 내가 해야 하겠지만 말이야. 아무튼 모레 새벽에는 모두 이동을 하는 것으로 결정 을 하자구. 어떻게 생각해?” 지토가 내 말에 이어서 세부적인 시간계획을 내어 놓았다. “오늘 밤과 내일 밤이라... 뭐 시간을 좀 더 줄 수도 있지만 가능하면 빠른 것이 좋 겠지? 조금이라도 달라진 낌새를 저 쪽에서 알게 되면 피곤할 ㅌ니 말이야.” “크흘. 그렇겠지. 참, 그런데 말이야 비아더, 그 쌍둥이 중에서 욕심 부리다가 혼쭐 이 났던 녀석 말이야. 그 녀석 지금 광산 최하층의 감독으로 있던데? 그래도 완전히 힘을 잃은 것은 아닌 모양이지만 예전의 그 권력은 모두 빼앗긴 모양이야. 녀석 쌍둥 이 형제에게 굽신거리는 모습이더군. 크흐흐.” 나는 별로 기분이 좋은 소식은 아니었는데 지토는 무슨 모습을 떠올린 것인지 음흉 한 웃음을 흘렸다. 암흑제국에서도 가끔은 사람이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물론 그 경우 대부분이 하층민의 경우이고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많은 경우 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형제나 가족간에 칼부림을 하거나 쟁투를 하는 경우는 드물다 고 할 수 있다. 뭐라고 해야 하나? 그래도 인륜이라고 하는 것이 완전히 죽은 땅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형제 중 하나가 다른 형제를 부린다는 말을 들으면 암흑제국의 앞날 을 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씁쓸하다. 차근차근 인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도덕이나 정의라는 것이 이미 땅에 떨어진 곳이지만 최소한의 인륜마저도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이러다가 가족의 의미도 사라 지 고 마는 땅이 되는 것은 아닌지... 왠지 비아더 형제의 이야기에 기분이 우울해진 나는 입을 다물었고, 대충 마무리가 되었던 이야기였기에 지토도 내 기분을 느끼고는 담배 파이프만 빨며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미엔리도에서의 밤이 또 깊어갔다. 새벽, 지토는 다시 바위 정령족에게 갔고, 나는 아침을 준비하면서 지토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토는 어제 저녁과는 달리 일찍 돌아왔고, 대부분의 바위 정령족들이 소식들 알게 되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했다. 다만 오늘 밤에도 잠자리로 돌아오지 못할 작업장이 다섯 개가 있고, 그 인원이 60 명 가량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 두 곳에서 일하는 바위정령족들은 다른 정령족들과 거의 연락이 되 지 않기 때문에 이번 일을 알릴 수도 없다고 했다. 결국 지토가 그들에게 직접 가서 상황을 설명해야 했기 때문에 밤에 다시 움직이기 로 했다. 하지만 지토는 낮 동안에도 부지런히 광산으로 스며들어서는 이런 저런 소식들을 수 집해 왔다. 덕분에 연락이 쉽지 않은 작업장의 정령족들에게 대신 연락을 해 주기도 한 모양이었 지만 연락이 되지 않는다던 두 곳에 작업장에는 너무도 감시가 철저해서 가까이 갈 수 가 없었다고 한다. 두 작업장에는 각각 10명씩의 바위 정령족들이 있었는데, 정령족들 중에서도 실력이 뛰어난 자들만 엄선해서 일을 시키고 있는 곳이라고 한다. 최고의 재료를 가지고 갑옷과 무기들을 만들고 있다고 하는데 나는 그 용도가 몹시 궁금했다. 무기들은 그렇다고 해도, 암흑제국에서 마갑주가 아닌 일반 갑옷을 필요로 하는 이유 를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비록 바위정령족이 만든 갑옷이 상당히 뛰어난 것이라고는 해도 그 갑옷이 마갑주를 뛰어넘을 수는 없을 것 같았는데 굳이 갑옷을 만들게 하는 이유가 짐작되지 않았다. 아무튼 그 문제는 정령족을 구한 후에 알아봐도 늦지 않을 것이었다. 우리들은 다시 밤을 기다렸고, 출정식을 치르듯이 엄숙하게(?) 배를 채운 후 다시 지 토가 광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고 보면 이번 일에서는 거의 모든 일을 지토가 하는 것 같다. 그리고 또, 지루하게 기다리는 시간만 흘러갔다. 계곡 위로 검붉은 노을이 보인다 싶었더니 곧 계곡의 바닥부터 어둠이 아눈의 걸음처 럼 어슬렁거리며 기어와서는 맘맘이가 물건에 덮이듯이 사물을 덮어갔다. 결국 좁은 계곡 하늘에 별이 보이기 시작하고 내가 지겨움에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리 던 땅바닥에 알지 못할 선들이 무수히 생겨날 무렵, 지토가 돌아왔다. “왜 이렇게 늦었어? 무슨 일 있어?” 나는 고개를 내민 지토에게 물었다. “그게 문제가 있다. 다른 정령족은 괜찮은데, 그 두 곳에 있는 정령족들은 족쇄를 하고 있어. 그것도 마법 속성이 부여된 것들이라 나 혼자서 해결하기가 어려워.” 지토의 대답이었다. “그럼 결국 내가 들어가야 하는 거야? 그냥 그 정령족들을 여기까지 끌고 올 수는 없는 거야?” 내가 아무리 마법에 능하다고 해도 땅 속을 지토처럼 헤엄칠 수는 없는 문제였다. 그 러니 땅속으로 이동을 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게 안돼. 그 작업장 밖으로 나갈 수 없도록 만들어 놓은 족쇄거든.” 그렇다면 하는 수 없는 문제다. 내가 가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가야하나? “알았어. 그럼 일단 이거 들고 가서 작업장에 놓으면 내가 좌표 계산해 보고 들어갈 게.” 나는 작은 통신용 수정구를 하나 건네주면서 말했다.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을 것 같아. 그 작업장에는 결계가 심해서 순간이동으로 들 어오기가 어려워. 대신에 작업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기다리마.” 그것참, 힘들다. “알았다. 그럼 좀 있다가 보자.” 내 말이 끝나자 지토는 다시 땅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나는 지토가 지닌 수정구의 이동을 살피면서 이동이 멈추기를 기다렸고, 오래지 않아 서 수정구의 이동이 멈추었을 때, 수정구를 통해서 수정구가 위치한 좌표를 계산해 내 었다.(예전 일데퐁소와 처음 만날 때가 계기가 되어서 연구한 방법이었다. 상대의 위 치를 통신을 하는 중에 알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좌표 계산이 끝나고, 수정구를 통해서 지토에게 출발한다는 연락을 하고는 곧 순간이동에 들어갔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불상사를 대비해서(순간이동 중에 팔이 하나 날아가 보면 내 심정을 안다.) 약간의(?) 보호 장치들을 마련한 상태였던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내가 도착한 곳은 어두침침한 광산의 막다른 구석이었다. “여기가 어디야?” 나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어서 지토에게 물었다. “여긴 물품들을 보관하는 창고다. 그리고 이 벽 건너편이 첫 번째 작업장이야.” 지토는 창고 한 쪽 벽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서 벽을 살폈다. 뭐 바위나 흙을 내가 본다고 아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마력의 흐름을 살펴보았다 는 말이다. 그리고 그 벽에 만들어진 결계들을 알 수가 있었다. “이거 곤란한데? 결계의 중심이 작업장 안에 있어. 아마도 마력을 저장하는 저장석 이 있을 거야. 지토, 너 이 안으로 들어갈 수는 있지?” 내가 묻자 지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들어가서 그 마력 저장석을 찾아서 부숴버려. 대신에 난 결계가 깨어지면 울 리게 되어 있는 마법 경고를 무효화시켜 놓을 테니까 말이야.” 나는 그렇게 지토에게 부탁하고는 결계의 크기로 짐작되는 작업장의 겉부분에 내 마 력으로 만들어진 결계를 치고 지토가 마력 저장석을 없애기를 기다렸다. 원래는 결계에 문제가 생기면 경고 알람이 어디선가 울리게 되어 있었지만 내 마력으 로 그런 마법적인 신호를 통제하고 있는 이상 그런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었 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서 지토가 결계를 지탱하던 마력 저장석을 발견했는지 결계가 사 라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와 동신에 벽에 구멍이 생기면서 내가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었다. 구멍을 통해 들어간 작업장은 하나의 거대한 대장간이었다. 그리고 그 대장간의 한 구석에 작은 침대들이 있었고 그 침대 앞에 바위 정령족들이 한 명씩 서서 새로 출현한 나에게 관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은 거의가 족장과 비슥한 머리색을 지니고 있었는데, 아마도 바위정려족들 중에 서도 나이가 제법 많은 자들인 모양이었다. “오시오 어서. 고맙소 우리를 구하기 위해 여기까지 와 주어서. 들었소 이미 이야기 는 여기 지토님께.” 지토님? 그런데 나한테는 왜 하오체를 쓰면서 지토에게는 님이라는 거야? 은근히 열받네? 하지만 일단은 일이 먼저니까 나중에 따지자. “네, 먼저 족쇄부터 한 번 보기로 하지요. 그럼...” 나는 바위 정령족의 발에 매어진 족쇄를 살펴 보았다. 족쇄는 한쪽 발목에 채워져 있었고, 반대쪽은 침대 옆에 벽면에 박혀 있는 모습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음, 이건 강화마법과 충격식 폭파 마법을 함께 걸어 놓은 것이군요. 그런데 문제 는 그 룬어를 새기고 그 위에 다시 금속으로 한 번 꺼풀 덮어 놓았어요. 이래서는 룬 어를 없애거나 혹은 족쇄를 재거하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리겠어요. 충격을 주면 아 마 큰 폭발이 일어날 겁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지토를 돌아 보았다. “뭐냐? 나도 방법을 몰라서 널 불러왔는데 날 보면 어쩌라구?” 쩝. 할 말 없게 만드네... 나는 잠시 족쇄를 살피다가 문득 그냥 다리를 잘라 버릴까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가 머리를 흔들었다. 아무래 재생을 시킬 수 있다고는 해도 멀쩡한 사람의 다리를 잘라버릴 수는 없는 노 릇이었다. 그것이 완전한 재생을 전제로 한다고 해도 안 될 것은 안 되는 일이었다. “정말 상당히 잘 만든 족쇄네... 이걸 순간적으로 잘라서 충격을 주지 않으려면 상 당히 좋은 검이나 도에다가 더해서 검강을 써야 할 것 같은데, 내 환검은 그렇게 날 카 롭게 만들어진 것은 아니어서 말이야.” 나는 족쇄를 이를 저리 돌려보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내 말을 들었던 모양인지 족쇄의 주인이 입을 열었다. “됩니까 아주 날카로운 검이 있으면. 있습니까 이 족쇄를 풀어낼 수가.” 나는 고개를 들어 그와 얼굴을 마주하고(그는 서 있고 나는 무릎을 꿇고 있어도 내 얼굴이 더 높이 있다.) 말했다. “보통의 물건이 아니라 아주 날카로워서 물건을 자를 때, 충격을 주지 않고 잘라 낼 수 있는 것이라면 충분히 가능하지요.” 나는 그렇게 대다하면서 잠시 내가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이들은 그 어떤 존재 보다도 뛰어난 장인들이라는 사실을... 이들이라면 그런 물건 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었다. “오십시오 저기 중앙에 있는 화로 안에 들어 있는 물건을 가지고. 충분할 겁니다 그 것이면 원하는 물건으로.” 그 말에 다른 정령족들도 모두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저 화로 안에 들어있는 물건이 내가 원하는 그 날카로운 것인 모양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지토가 화로 안에서 무엇인가 길쭉한 것을 꺼내서 들고 왔다. 정령은 역시 다른 모양이다. 저 시뻘건 물건을 그냥 손에 들고 오다니 말이다. 뭐 불에 흙이 타는 경우야 드문 일이긴 하지만.... 지토가 꺼내 온 물건은 아직 손잡이가 달리지 않은 검이었다. 폭이 넓지 않고 길이는 좀 길게 생긴 물건으로 완성이 된 것은 아닌 모양인지 아무 문양도 들어 있지 않은 검신이었다. “아직 미완성인 것 같은데 이걸로 될까요?” 내가 그렇게 정령족을 보며 묻자 아까부터 대화를 주도하던 정령족이 입을 열었다. “충분합니다. 오던 것입니다 200년 동안 만들어져. 가지고 왔습니다 우리들이 납치 될 때에도. 많습니다 이 물건을 탐내는 사람들이. 숨겼습니다 이미 완성되어 있었지 만 그 사실을. 빼앗겼을 것입니다 저들이 이것이 완성되어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 다 면.” 그렇게 대답한 정령족은 자신의 허리에서 갸름한 원통을 꺼내더니 지토가 들고 있는 검의 손잡이 연결 부분에 끼워 넣었다. 저 정령족도 뜨거운 것에 대해서는 상당한 내성이 있는 모양이다. 아무리 두툼한 장 갑을 끼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이글거리는 쇳덩이에 그래도 작업을 할 수 있는 것인 지.... 하지만 과정이야 어찌되었든 결과는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원통의 물건은 미완성으로 보이던 검신에 꼭 맞게 연결이 되어 검의 손잡이가 되었 던 것이다. “되었습니다 준비가 모두. 주십시오 이걸로 우리들의 족쇄를. 않겠습니다 만약에 문 제가 생긴다고 해도 원망은 하지. 탓이겠지요 문제가 생긴다면 그것은 모두 검을 잘 못 만든 우리들의.” 그렇게 말을 마친 정령족의 우두머리(아무리 봐도 여기서는 이 사람이 리더의 역할 을 하는 모양이었다.)는 그 큰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나는 그가 건네준 검을 들고 살짝 휘둘러 보았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환검도 무척이나 뛰어난 검이었다. 하지만 환검이 마법적인 능 력을 가지도록 만들어져 검 자체의 날카로움이 좀 모자라는(평범한 검과 비교한 것이 아니라 눈앞의 이 검과 비교해서) 감이 있다면, 이 녀석은 그야말로 검이란 무언가를 베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려는 듯이 가까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피 부 가 애일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나는 검에 내력을 불어 넣어 슬쩍 옆에 높인 커다란 망치를 베어 보았다. 스걱! !!! 놀래라. 검은 그야말로 걸죽한 죽을 젓가락으로 휘젓는 느낌만을 주면서 망치의 머 리 부분을 반도막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정도면 충분하겠군. 자 그렇게 눈 감고 계시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이거 상상하 지도 못할 대단한 검이군요.”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바위 정령족의 발목에 채워진 족쇄를 ‘서걱!’ ‘서걱!’ 베어 내었다. 아무리 강화 마법을 걸어 놓은 쇳조각들이라 해도 이런 검과 거기에 더해진 검강에 견딜 수는 없었다. -바위정령족 구출 작전 - 잠시 후에는 모두들 족쇄에서 벗어난 모습으로 우리들과 마주한 정령족들을 구멍 밖 으로 내 보내고 스크롤을 쥐어 주었다. “잠시 후에 이 광산에 무슨 문제가 생긴다 싶으면 스크롤을 써서 이동을 하십시오. 그리고 만약에 누구에게 들키게 되더라도 그냥 스크롤을 써서 이동을 하시고요. 다른 분들께도 모두 스크롤을 지급했습니다. 이제 남은 곳이 한 곳밖에 없으니 그 곳을 들 렀다가 가겠습니다.” 정령족의 리더로 보이는 자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나는 다시 검을 잠시 빌리겠다는 말 과 함께 지토를 따라서 다른 한 곳의 작업장으로 향했다. 중간에 감시병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땅 속에서 혹은 벽 속에서 불쑥 나와서는 혈도를 점하는 지토를 당할 수는 없었고 나는 그렇게 멀쩡하게 점혈된 경비들을 어색 하지 않은 모습으로 바꾸어서 세워 두었다. 가까이에서 말을 시켜보지 않은 이상은 이들의 상태를 알아보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몇 번의 비슷한 과정을 거쳐서 우리는 다시 작업장 옆에 붙은 창고로 들어올 수 있었 고, 아까 작업장에서 했던 것과 같은 순서도 나는 작업장 안으로 들어 갈 수 있었다. 문론 이미 지토에게 상황을 듣고 알고 있었던 정령족들은 나를 반겼고, 내가 예의 그 검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놀랐습니다 그 검을 다른 사람에게 쓰도록 할 줄은. 입니다 오랜 시간동안 우리 종 족이 심열을 기울여 만들어 온 종족의 자랑. 모양입니다. 달군쇠님께서 루탄님을 마 음 에 들어 하셨던.” 달군쇠? 그게 아까 그 우두머리 정령족의 이름인가? 아무튼 나는 다시 바위 정령족의 족쇄를 제거해 주었고 구멍을 통해 창고 밖으로 그 들을 내 보냈다. 하지만 그들 역시 화로 안과 작업장 여기저기서 몇 가지의 물건들을 모아서 들고 나 갔다. “그건 뭡니까? 잠깐 보기에는 갑옷을 나누어 놓은 것으로 보입니다만?” 나는 그들이 주섬주섬 챙기는 물건에 관심을 가지고 물어 보았다. “맞습니다. 갑옷입니다 이것은 우리 종족이 그 검과 함께 만들어 오던. 왔었습니다 납치되어 올 때도 이것들만은 놓고 오지 못해서 분해해서 가지고. 것들이지요 우리들 에게 이것은 너무도 중요한 물건이니 말입니다. 자식같은.” 내 질문에 답을 한 것은 역시 처음 검에 대해 이야기했던 그 정령족이었다. 아무래도 이들은 연장자가 그 그룹의 리더가 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나이는 머리카락의 색으로 알아볼 수 있는 모양이다. 머리카락 색이 짙으면 젊은 것이고 색이 하얀 색으로 가까워지면 나이가 든 모양이었 다. 아무튼 그렇게 물건들을 챙긴 정령족들을 먼저 순간이동 시켜면서 지토에게는 다른 정령족들도 빨리 이동을 하도록 알리라고 했다. 그리고 첫 순간이동이 일어나는 순간 광산에는 급박한 경고 알람들이 울리기 시작했 다. 삐이이익! 삐리리리릭! 삐이이이익! “뭐야? 들어오는 것은 문제가 안 되는데 나가는 순간이동을 감지하는 마법인가?” 나는 혼자서 중얼거리며 마법의 패턴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좀처럼 이유를 알 수 없었던 나는 거의 산 전체를 더듬어 보고서야 광산이 있는 산 위에 순간이동을 감지하는 마법이 걸려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 같은 경우에는 산 아래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지하로 이동을 했기 때문에 별 문 제가 없었지만, 이번 경우에는 멀리 이동을 하는 것이어서 그 산 꼭대기의 탐지 마법 에 걸린 것이다. 그나마 탐지마법만 있었고 순간이동을 막을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곧 추격이 시작될 것이었다. 나는 서둘러 목식의 숲으로 순간이동을 했다. 이미 광장 안으로는 수많은 정령족들이 도착해 있었고, 여전히 도착이 이루어지고 있 었다. 교육을 잘 받은 것인지 순간이동으로 도착을 하는 즉시 광장의 벽 쪽으로 움직여서 다음 순서가 도착하는데 무리가 없도록 해 주고 있었다. “형님 오셨군요.” 광아가 반가운 얼굴로 맞았다. “응. 별일 없었지? 그런데 몇 명이나 남았어?” “지금 도착 인원이 225명입니다. 아니 지금 다시 230이 되었습니다.” 광장의 중앙에 다시 다섯 명의 정령족이 나타나면서 광아의 대답이 엇갈렸다. “그래? 그나저나 문제다. 순간이동이 들켰어. 오래지 않아서 녀석들이 뒤따라 올 거 야. 지금으로서는 녀석들의 추적을 막을 수가 없어. 정령족들이 모두 도착하지 않는 이상 결계를 칠 수도 없으니 말이야. 아마도 녀석들도 우리가 어디로 이동했는지 금 방 알아 낼 수 있을 거야.” 나는 광아에게 상황을 설명하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쌓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정령족들은 속속 도착했고, 마지막으로 지토가 돌아오면서 정령족 의 구출은 일단 끝이 났다. “자, 지금부터 최대한 빨리 넥스 영지로 여러분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 곳에서 바 위정령족의 영토로는 어렵지 않게 가실 수 있으실 겁니다. 하지만 한꺼번에 모두 보 내 드릴 수는 없기 때문에 한 번에 20명씩 마법진 위로 올라와 주십시오. 그리고 광 아 와 지토는 이제부터 경계를 철저히 해. 그리고 지토는 내가 시키는 일 했어?” 나는 지토에게 내가 준비했던 것에 대해 물었다. “클클 물론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오면서 품속에 있던 이동 스크롤을 허둥거리는 척 하면서 떨어뜨리고 왔지.” 지토는 즐겁다는 듯이 클클 거리며 대답했다. “무슨 말씀이에요? 형님?” “미안 지토에게 물어봐라. 나는 일단 이들을 넥스 영지로 보내는 것이 더 급하다.” 나는 광아의 질문을 지토에게 넘기고 곧바로 정령족들을 넥스 영지로 보내기 시작했 다. 15번 이상 반복해야 할 일이었고 실제로 상당히 힘겨운 일이었다. 마력의 소비가 엄 청난 일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렇게 정령족 사람들을 넥스 영지로 보내기 시작하자 지토는 광아에게 스크롤 에 대한 설명을 했다. 내가 지토에게 특별한 스크롤을 주었던 것이다. 그 스크롤은 이동 장소가 이곳이 아니라 암흑제국과 그란드 왕국의 경계인 강물 위 로 설정이 되어 있었다. 지토가 마지막으로 오면서 그 쪽으로 들이닥친 사람들 때문에 당황하는 척 하면서 떨 어뜨린 그 스크롤들은 우리들을 추적하기 위한 녀석들의 이목을 잠시 흩어 줄 것이었 다. 그래서 만약에 발각이 되면 지토에게 그 스크롤을 떨어뜨리고 오라고 부탁 했었다. 하지만 그런 방해 공작도 별 소용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내가 여덟 번째의 무리를 넥스 영지로 옮기고 난 직후에 드디어 추적자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들이 이 곳으로 들어오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이동에 간섭현상을 만들어 버리면 그야말로 비극이 발생한다. 조금의 좌표이동만으로 이곳으로 옮겨오는 사람들의 몸을 나무속이나 땅 속으로 옮 길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런 강제적인 이동 좌표의 변경이 상당한 마력과, 시간을 정확하게 맞추어야 하는 어렵기 그지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불가능하지는 않지, 하지만 그렇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럼 분명히 비극이 일어 난다. 상대가 준비를 잘 한 상태라면 간섭현상을 없애는 방어벽을 치고 있을 것이지 만 그것도 어느 정도의 간섭일 때나 가능하지 전면적인 간섭현상이 일어나면 막을 길 이 없는 것이다. 나는 광장으로 오고 있는 무리들의 이동 좌표를 강제 변형을 시켰다. 광장 밖의 밀림 상공으로 옮긴다고 옮긴 것이지만 상대가 사용한 마력의 힘도 만만 한 것이 아니어서 결국은 그렇게 먼 곳으로 보내지는 못했다. 그러고 보면 누군지 몰라도 상당히 뛰어난 실력을 가진 마법사가 있는 모양이다. 적어도 우리들이 순간 이동을 하는 장소에서 우리를 관찰한 것도 아니면서 우리의 좌 표를 정확히 읽었다는 것은, 미엔리도의 산 정상에 만들어져 있던 그 탐지 마법이 순 간이동의 좌표까지도 추적하도록 만들어져 있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었다. “아마도 다시 이곳으로 순간이동을 하려고 하지는 않을 테지만, 그래도 일단은 광아 는 여기 남아서 경계를 해 주고, 지토는 나가서 자이곱과 함께 입구를 막아줘.” 나는 다시 지토와 광아에게 그렇게 부탁을 하고는 정령족을 돌려보내는 일에 힘을 쏟 았다. 녀석들도 설마하니 다시 이 곳으로 순간이동을 하려고 들지는 않을 것이었다. 적어도 내가 그들의 이동을 순간적으로 좌표 조정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다 음에도 운이 좋아서 땅속으로 이동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정령족들을 다 보내기도 전에 입구 쪽에서는 싸움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암흑제국 녀석들도 상당히 기민한 움직임을 보여서 벌써 입구에서 대치상태를 만들 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금방 지토와 자이곱이 밀리는 모양으로 싸움 장소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광아야. 좀 나가 봐라. 아무래도 위험한 것 같으니까 말이야!” 나는 이제 세 번 남은 송환에서 손을 뗄 수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광아를 밖으 로 보내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의 송환을 끝냈을 때, 내 몸에서 상당한 힘이 빠져 나갔다. 급히 빠져 나가는 힘을 내공으로 바꾸기는 했지만, 덕분에 송환에 필요한 마력이 아 슬아슬하게 남아 버렸다. 줄기차게 빠져나가는 힘으로 보아서는 지토나 광아가 최상급의 힘을 쓰고 있는 모양 이었다. 아무래도 지토가 힘을 쓰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불안해지는 마음에 조급해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송환을 멈출 수도 없었다. 나는 또 한 번의 송환을 끝내고 마지막으로 남은 정령족을 보았다. “달군쇠님 이 검은 돌려 드리겠습니다. 그럼 준비 하십시오.” 역시 우두머리라는 자리는 이런 상황에도 끝까지 위험을 감수하게 하는 모양인지 달 군쇠라는 바위정령족이 남아 있었다. “물건입니다 이미 완성된. 일이지요 주인 없이 걸어두고 구경하기 위한 물건이 아니 니 주인이 나타났을 때 보내는 것도 장인들이 감수해야 할. 않겠습니까 다 키운 딸자 식을 품에만 안고 있다고 사랑인 것은 아니지?” 그는 검을 다시 돌려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럼 넥스 영지에서 다시 뵙고 이야기를 끝내기로 하고 일단은 빌리겠습니다.” 나는 말과 함께 마지막 송환을 시작했다. 그리고 하얀빛과 함께 바위정령족이 사라졌을 때, 광장으로 통하는 결계가 무너지며 지토가 구르듯이 튕겨져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광아가 자이곱을 안고 들어오고 있었다. 아마도 지토는 광아 앞에서 적들을 막다가 충격에 밀려들어온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지토가 받은 충격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으면 입구에 만들어 놓은 결계를 그렇게 무시하고 박살을 낼 정도가 되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서둘러 지토에게 뛰어가 지토를 들어 안았다.(키가 작아서 품에 꼭 들어온다.) 상당히 힘을 썼던 모양인지 지친 모습이었다. 몸 군데군데 상처가 있었고, 그 상처를 통해 정령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몸의 기운을 토의 기운으로 바꾸어 서둘러 지토에게 불어 넣었다. 상처를 아물게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토의 상태를 호전시킬 수는 있을 것이었다. “광아, 전에 내가 준 그 스크롤 준비하고, 자이곱과 함께 저 쪽에 있어라. 난 손님 을 좀 맞이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입구를 통해 걸어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입구를 통해 들어온 녀석들은 넷이었는데 모두들 낯이 익은 녀석들이었다. “이런 구면의 인물들이군.” 나는 그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제란과 두룬을 제외하고 대쟁투의 6강에 올랐던 나머지 녀석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비록 제란에 비해서 조금 못하다고 하지만 그래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인물 들이었다. 자이곱이 박살이 나고 지토가 최상급의 힘을 쓰면서도 밀린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상 황이었다. “이렇게 여기까지 왔는데 어쩌면 좋을까. 이미 상황은 끝이 난 것 같으니 말이야.” 나는 조금 거리를 두고 걸음을 멈춘 녀석들을 보며 말했다. “그런 것 같군. 그 사이에 벌써 모두 다른 곳으로 옮기다니 대단하군. 하지만 정령 족이 없다면 너희들이라도 잡아가야 되지 않을까? 그렇지 못하면 우리들도 채면이 서 지 않아서 말이야.” 대답을 한 녀석은 여러 마리의 마수를 다루던 녀석이었다. “하지만 나는 너희들과 별로 싸우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우리는 이만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솔직히 나는 빨리 이 곳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었지만 바닥에 그려진 이동진은 지우고 가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녀석들과 잠깐의 드잡이질을 할 각오를 하고 있 는 상황이었다. 만약 이 이동진을 그대로 둔다면 녀석들이 넥스 영지까지 치고 들어올 수도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정확한 좌표까지 알려주는 셈이 되기 때문에 이동진은 꼭 없애야 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그냥 도망을 간다면 막을 방법이 별로 없기는 하군. 만만찮은 상대니 말이 야. 하지만 잠시라면 이 곳의 마력을 마비시킬 재주는 있으니 그 시간동안 버티기만 한다면 괜찮겠지.” 녀석이 그렇게 말을 하는 순간 아이슈마의 동굴에서와 비슷하게 모든 마력이 묶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녀석의 뒤로 마수가 한 마리 생겨난 것은 같은 순간이었다. 사실 마력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고체화 되어 버린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 런 느낌이었기 때문에 필요한 마나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 “그래?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것인데 그 녀석이 얼마나 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지 물어보면 알려 줄 텐가?” 나는 피할 수 없는 싸움인 것을 느끼고는 해파리처럼 생긴 마수를 바라보며 검을 잡 은 손에 힘을 주었다. “흐흐흐, 아마도 나를 쓰러뜨리지 않는다면 꽤 오래 갈 거야. 나도 얼마나 갈지는 몰라. 한계를 본 적이 없거든. 이번에 새로 얻은 녀석이라서 말이야. 굉장하지?” 빌어먹을 녀석. 그럼 죽든 살든 싸워야 한다는 말이 되는군. 일단은 저 녀석을 없애 야 순간이동이고 뭐고 가능해진다는 말이다. “그래? 그럼 서두를 필요는 별로 없겠군. 그럼 우선 자기소개나 해 보는 것이 어 때? 난 루탄이라고 하는데.” 나는 조금 마음의 여유를 가지기로 했다. 어차피 피하지 못할 상황이 되었다면 여유 를 가지는 것이 좋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여유롭게 나가자 녀석들도 성급하게 굴지 않기로 했는지 대답을 해 왔다. “흐흐 좋지. 마지막 인사가 될지도 모르는데, 먼저 나는 트롤라이런이라고 하지. 그 리고 이 친구는 카튼, 그리고 차구므진, 마지막으로 붐저브라고 한다네.” 마수를 여럿 다루는 이 녀석은 트롤라이런, 그리고 마갑주와 검을 쓰는 녀석이 카 튼, 마갑주와 도를 쓰는 녀석은 차구므진, 마수와 인간의 동화형으로 보이는 녀석은 붐저브라는 말이다. “그렇군. 이런 자리에서 만나서 반갑다는 말을 할 수가 없구만. 참 저기 저 친구는 광아, 그리고 작은 친구는 지토,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이곱이지. 아! 자이곱은 알겠 지?” 나도 우리 일행을 소개했다. 사실 지금은 단순한 숨고르기에 지나지 않는다. 녀석들도 나도 이런 시간이 좀 많이 흘러간다고 해서 이익이 될 것도 손해가 될 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바위 정령족 이 넥스 영지에 가서 이야기를 전해서 원군들을 보내 오면 좋겠지만 일데퐁소의 능력 으로 이곳으로 사람들을 보낼 능력이 되지 못했다. “그럼 대충 소개가 끝이 났으니 한 번 싸워 볼까?” “그런데 한 사람을 넷이서 공격을 하는 것인가? 좀 비겁하군.” 솔직히 넷이 덤빈다면 승산이 없었다. “크흐흐. 우릴 어떻게 보는 것이냐? 너를 상대 하는 것은 나 혼자서도 충분하다.” 내 말에 답을 하고 나온 것은 카튼이라는 녀석이었다. “하지만 그래봐야 트롤라이런과 함동공격이 아닌가?” 내가 빈정대듯 말하자 녀석도 잠시 주춤한 표정이 되더니 트롤라이런을 바라보았다. “그 말이 맞군. 하지만 내가 너를 상대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단지 트롤라이런 의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서 갑주의 완전형은 쓰지 않기로 하지. 어떤 상 황에서도 헬멧은 쓰지 않는 것으로 하겠다. 흐흐 이 정도면 만족하겠지? 자 간다.” 말과 함께 검을 뽑아들고 달려드는 카튼이었다. 챙! 차창! “빌어먹을 녀석, 그냥 넷이서 처리하면 될 일이지 무슨 1:1이라는 거야?” 내가 카튼과 검을 마주하고 나서야 트롤라이런의 빈정거림이 카튼의 등 뒤에서 들려 왔다. 가까이 검을 맞대고 있던 카튼의 얼굴이 구겨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빠르게 날아드는 카튼의 검을 막아내는 것이 더 급한 문제였다. 한동안 나와 카튼은 서로의 빈틈을 노리며 검술을 위주로 공격을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검술에 있어서는 카튼 보다는 내가 앞서고 있었다. 역시 신계의 책 은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신계의 책 속에 있던 신법과 보법, 검법들이 나에게 큰 도 움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카튼이라는 녀석에게 크게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 다. 녀석은 싸움 중에도 조금씩 마갑주와의 동화를 높혀 가고 있었는데 그 비율이 높아질 수록 녀석의 검에는 힘이 넘쳤고, 속도가 빨라졌으며 서서히 얇은 검강이 형성되고 있 었다. 나는 시간을 끄는 것이 불리하다는 것을 느꼈다. 나에게는 이 녀석 이외에도 셋이나 되는 상대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비록 지금은 카튼이라는 녀석이 1:1을 원해서 싸움을 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트롤라이 런이란 녀석의 말에서도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언제 1:4의 상황이 될지 모르는 일인 것이다. 나는 검에 불어 넣는 힘을 키우며 카튼을 압박해 갔다. 카튼도 갑주와의 동화력을 높이며 대항해 왔지만 힘과 스피드를 따라오기에는 조금 모자란 면이 있었다. 물론 마갑주가 이 이외에 어떤 능력을 더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드 러내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목에까지 동화를 한 카튼이 나에게 조금씩 밀리면서 우 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물론 머리까지 완전히 동화를 한다면 어찌될지는 가늠할 수 없었지만 일단은 이 상황 에서는 내가 유리하다고 봐야 했다. 그리고 결국은 내 검이 카튼의 옆구리를 베고 지나가는 상황이 벌어졌다. 비록 갑주 때문에 큰 상처는 피한 모양이었지만 쉽게 회복될 정도의 것은 아니었다. “이제 그만 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나? 어차피 자신의 실력을 모두 드러내지도 못 하는 상황이라면 끝장을 본다고 해도 승복하기 어렵지 않겠나?” 내가 카튼의 옆구리를 베어내고 한 걸음 물러서면서 카튼에게 그렇게 말하자 카튼은 키득거리면서 말했다. “크크크. 이게 내 실력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마갑주가 지닌 특수 능력을 쓰 지도 않았는데? 하지만 어차피 마법을 쓰지 못하도록 한 상황이었으니 내가 마갑주의 능력을 쓰지 않은 것이 공평한 것이었다고 해야겠군. 크흐흐 하지만 다음에는 다를 것 이다. 오늘은 이만 하기로 하지.” 카튼이라는 녀석을 그렇게 말하고는 등을 돌려버렸다. “이봐 트롤라이런 나는 이만 가볼 테니 너희들이 알아서 처리하도록 해. 설마 내가 빠진다고 문제가 되는 것은 없겠지? 나는 한 사람을 여러 사람이 핍박하는 것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말이야.” 카튼은 자신의 동료들을 지나쳐 입구로 나가면서 그렇게 말하고는 모습을 감추어 버 렸다. 잠깐 의외의 상황이었던 모양인지 트롤라이런과 차구므진, 붐저브는 말을 잃은 표정 이 되었다가 그 모든 것이 내 탓이라는 듯이 우리들 쪽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뭐야?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런 분위기를 만드는 거야? 이크, 문제는 그게 아니군. 이거 잘못하면 여기서 뼈를 묻어야 할지도 모르겠는 걸? 하지만 녀석들은 그렇게 서두르고 싶은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자신감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암흑제국의 실력자라는 녀석이 셋이나 모였으니 나를 어떻게 하는 것은 어렵 지 않으리란 생각인가? 그렇다고 무작정 기다려 줄 녀석들도 아니었다. 드디어 차구므진과 붐저브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거 곤란한데? 이렇게 셋을 한꺼번에 상대하라니 이봐, 다음 기회로 미루면 안 될 까?” 나는 가슴속으로 스물스물 기어드는 불안과 두려움을 감추려 실없는 소리를 늘어놓았 지만 별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쩌다가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 저 트롤라이런의 마수만 없으면 어떻게 해서든 몸 을 뺄 수 있겠는데 말이야. “젠장! 제기랄!!” 나는 입에서 육두문자가 튀어 나오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피할 길이 없다. 그런데 지토와 광아 자이곱이 뒤에 있다. 결국은 어떤 수를 써서든 이 상황을 벗어나든 아니면 뚫고 나가는 길 뿐인데, 지금 은 도망가는 길은 막혀 버린 상황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좋다. 한 번 죽어보자.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한 번 보자구.” 나는 먼저 선공을 나섰다. 경쾌한 보법과 그 뒤를 따르는 잔상을 남기며 나는 차구므진과 붐저브에게 달려 들었 다. 하지만 역시 만만한 녀석들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게 빠르게 날린 내 검을 차구므진은 침착하게 도를 들어 막았고, 붐저브는 몸을 틀어 피했다. 하지만 선공의 묘란 아직 남아 있었다. 적어도 먼저 공격을 한 이상 한 번 정도의 기 회는 더 있는 것이다. 나는 저력을 다해서 붐저브의 어깨 위로 검을 떨어뜨렸다. 베었....!! 잔상!? 나는 마음속으로 외치던 쾌재를 삼키며 몸을 숙이고 전권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붐저브에게 공격을 가할 때, 나는 성공을 믿었고 때문에 차구므진에게 받을 약간의 타격을 감수할 생각이었지만 결과는 붐저브에게 아무 타격도 주지 못하고 차구므진에 게 허점을 드러낸 상황이었다. 숙인 머리 위로 차구므진의 도가 스치듯 지나가며 내 머리카락의 상당 부분을 잘라먹 었다. 몸을 숙인 채, 앞으로 뛰어나가는 등 뒤로 시원한 느낌이 따라왔다. 하지만 딴 곳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붐저브가 보이지 않았다. 잔상을 남기고 사라진 후에 그 모습을 아직 잡지 못한 것이다. 순간이다. 정말 1초 도 되지 않을 시간이었지만 적을 놓친 것은 치명적이었다. 나는 최대한 몸을 움직여 사방으로 몸을 틀었다. “클클클 혼자서 추는 춤도 봐 줄만 하군.” 내가 순식간에 사방을 밟고 돌아서 주위를 확인하고 제 자리에 섰을 때, 들려온 말이 었다. 차구므진 녀석이었다. 그리고 내가 종적을 놓쳤던 봄저브는 트롤라이런의 옆에 서 있었다. 한마디로 나는 혼자서 지랄발광을 했다는 말이 된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느낌이다. 슬쩍 광아 쪽으로 눈을 돌려 보니 광아와 지토가 못 볼 것을 봤다는 표정으로 떨떠름 한 표정이었다. “어쩌란 말이야?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말은 이렇게 하고 있어도 얼굴이 붉어진 상태일 테니 더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르겠 다. “크흐흐 그럼 이제 다시 시작을 해 볼까? 하지만 이번에는 오래 끌지 않을 테니 조 심해야 할 거야. 끝장을 봐야지.” 트롤라이런의 말이 끝나자 다시 차구므진과 봄저브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끝장을 보자는 말이지? 나로서도 몸을 뺄 재주가 없으면 최선을 다하는 방법 뿐이지. 나는 검에 최대한의 기운을 불어 넣었다. 차구므진이 쓰는 도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지금으로서는 아직 마갑주를 완전히 착용한 상태도 아니었고, 더구나 봄저브는 맨몸이었다. 바위정령족이 자랑으로 삼고 있던 검을 믿어 보는 방법 뿐이었다. 그리고 내 최대의 검강을 휘감은 검은 차구므진의 도와 부딪혔고 결과는 대단히 흡족 한 것이었다. 차창! 불꽃이 튀는 것과 동시에 차구므진의 도에 깊은 이빨 자국이 생겼다. 차구므진도 그것을 보았는지 한 번의 접촉 후에 서둘러 몸을 빼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여세를 몰아 봄저브를 밀어 붙였다. 비록 덩치에 맞지 않게(2미터 50은 되어 보이는 건장한 체구) 굉장한 속도를 자랑하 는 녀석이었지만 그렇다고 아까처럼 쉽게 녀석을 놓칠 생각은 없었다. 나는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봄저브를 휘몰아갔다. 봄저브는 무기를 쓰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그 속도와 권각술이 뛰어났던 것 으로 기억되는 녀석이었다. 그리고 녀석은 내가 혼신의 힘을 다해 휘두른 검을 서너 차례나 어렵잖게 피하고 있 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드디어 나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기 시작했다. 차구므진이 마갑주를 완전히 착용한 모습으로 싸움에 합류한 것이다. 차구므진의 갑주는 완전히 몸을 덮은 것은 아니었지만 어깨와 무릎, 발과 손, 가슴 과 등, 팔뚝과 머리를 덮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보니 갑주가 덮지 않은 부분은 팔의 윗부분과 허벅다리에서 허리까지가 남았 을 뿐이었다. 하지만 역시 갑주를 착용한 것은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모양이었다. 도에 어른거리 는 도강의 세기가 조금 전과는 판이한 모습을 보였다. 이 상태에서 녀석의 도와 힘겨루기를 해서 못쓰게 만들려면 제법 오랜 시간일 걸릴 것 같았다. 하지만 봄저브가 있는 이상 그것도 어려운 일일 것이다. 내가 잠시 차구므진의 갑주와 도에 신경을 쓰는 사이에 봄저브의 발길질이 횡으로 허 리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하지만 검을 내려 녀석의 발을 막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차구므진의 도를 막아야 할 상황이었기 대문이다. 결국의 봄저브의 발길질을 허리에 갈비뼈 아래에 허용하고 차구므진의 검을 막았지 만 나는 그 충격으로 몇 미터를 날아갔다. “크흑, 제기랄!” 나는 그래도 땅바닥에 퍼질 수는 없다는 오기로 바닥을 구르며(잘 구르면 멋있게 보 인다.) 입으로 욕지거리를 내 뱉었다. 하지만 곧 입을 꼬옥 다물고 이빨을 악물어야 했다. 배에서 비릿한 것이 솟구친 탓이었다. “크흐흐 이제 끝을 내. 시간을 끌 필요가 없잖아.” “클클클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니 너무 재촉하지 말아.” 트롤라이런과 차구므진은 내가 자신들의 손바닥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당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천천히 왼 속에 채워져 있던 환검을 풀어 쥐었다. “뭐냐? 검이 두개면 더 나을 것 같으냐? 클클클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지.” 나는 검을 손에 나누어 쥐고 녀석들이 듣지 못하게 광아에게 말을 전했다.(머릿속에 뜻을 전달하는 일종의 심어를 사용했다.) - 광아야 이번 공격에서 내가 저 마수를 처리할 테니까 마수가 쓰러지고 마력이 회복 되면 곧장 스크롤을 써서 넥스 영지로 돌아가라. 너희야 급하면 반지 속으로 들어와 도 된다지만 자이곱이 있으니까 그건 어려울 것 같고 그러니까 자이곱을 데리고 가도 록 해. 내 말에 광아의 답이 들려왔다. - 형님, 그럼 형님은 어쩌시려는 겁니까? 전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 저 혼자서 갈 수 는 없습니다. - 걱정하지 마라 마력만 돌아오면 난 어디든 갈 수 있어. 내 품 속에 스크롤이 아직 도 몇 장 있으니까 말이야. 나는 그렇게 광아에게 이야기 하면서도 녀석들이 우리들에게 이상한 느낌을 가지지 못하도록 신경을 써야 했다. 때문에 대화를 길게 할 여유가 없었고 스크롤이 나에게 몇 장 더 있다는 말을 하면 서 녀석들에게 달려들었다. “차앗! 받아라. 어디 한 번 붙어 보자.” 나는 녀석들이 당황할 정도로 최대한의 힘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내 목적은 오직 트롤라이런의 마수였다. 그 녀석을 어떻게든 처리를 해야 상 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아니 반전은 아니라도 도망이라도 갈 수 있는 것이었다. 차구므진의 도를 바위 정령족의 검으로 막고, 봄저브이 접근을 환검으로 막으며 다 시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차구므진의 도를 막으면서 나에게 허점이 생겼다. 역시 한 손으로 차구므진의 도를 막기에는 힘이 부족한 탓이었다. 그리고 그 빈틈을 다시 봄저브의 어깨가 파고 들어왔다. 그 어깨는 정확하게 내 안면을 쳤고 나는 뒤로 밀려 갔다. 하지만 내가 가는 방향은 트롤라이런이 있는 방향이었다. 물론 트롤라이런이 내가 자기 쪽으로 가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녀석은 아니었다. 벌써 내가 마수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거리를 두고 물러나는 것 이 보였다. 나는 간신히 몸을 세우고 다시 차구므진과 봄저브를 향해 섰다. 이제 트롤라이런은 내 등 뒤에 있게 된 셈이었다. “크흑, 대단하군. 정말 여기서 뼈를 묻게 될지도 모르겠는 걸?”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는 것으로 약간의 시간을 벌었다. 말없이 가만히 있으면 녀석들이 치고 들어왔겠지만 한 마디의 말이라도 하는 순간 약 간이라도 시간을 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상대로 차구므진과 봄저브는 몸의 경직을 풀고 나는 보았다. “오래 반항을 하지 말아라. 클클 반항을 할수록 고통만 커질 뿐이다. 뭐 이렇게 말 한다고 목을 내 밀고 죽여주십시오 하지는 않겠지만 말이야.” 나는 차구므진의 말을 들으며 양쪽 검에 최대한의 힘을 불어 넣었다. 그리고 오른 손에 쥔 바위 정령족의 검을 앞으로 내 밀고, 왼손에 쥔 환검은 칼의 손 잡이를 오른쪽 어깨 위에 올리는 방법으로 폼을 잡았다.(겉으로 보기에 멋있지 않은 가? 오른 손은 앞으로 내밀어 적을 가리키고, 왼손에 쥔 검은 언제든 휘두를 수 있게 어깨 위로 올리는 모습이 말이다.) “마지막 발악인가? 그래 그런 모습으로 무얼 하겠다는 것이지?” 차구므진은 내가 무슨 짓을 하려는 지에 흥미를 느낀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아무 대답도 없이 오른 손에 쥔 검에 천천히 내공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왼손으로 내공을 모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왼손에 모인 내공은 검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녀석들의 이목이 점차 강해지는 오른손 검의 검강에 집중되고 있을 때, “간닷 받아랏!! 차압!” 나는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소리를 지르며 오른 손의 검을 들어 올렸다가 수직으 로 내리그었다. 하지만 그 검 끝에서는 약간의 검강이 일렁이다가 곧 사라졌다. 대신에 왼 손에 쥐고 있던 등 뒤를 향한 환검에서 마법이 발동되었다. 환검은 내력을 마법으로 바꾸어 원거리 공격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용한 것이었다. 최대한 빠르고 날카롭게 만들어 쏘아 보낸 얼음의 속성을 지닌 마법은 전혀 딴 곳에 정신을 쏟고 있던(오른손에 신경을 쓰던) 트롤라이런의 의표를 찌르며 등 뒤의 환수 에 게 쏘아졌다. 그리고 내가 등을 돌려 확인했을 때, 해파리 같은 환수의 머리 한 쪽을 뚫고 지나갔 다. “이, 이런. 어서 잡아.” 트롤라이런이 소리를 지르자 차구므진과 봄저브는 예상 밖으로 내가 아닌 지토와 광 아 등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다행스럽게 간발의 차이로 지토와 자이곱이 스크롤을 찢으며(그 사이에 자이 곱이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사라졌고, 광아의 모습도 사라져 버렸다. “그럼 나도 그만 사라져야 겠군.” 나는 지토와 광아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곧 순간이동 스크롤을 꺼냈다. 하지만 트롤라이런의 공격이 나에게 스크롤을 찢을 시간을 주지 않았다. 언제 불러 낸 것인지 트롤라이런의 마수들이 공격을 해 왔던 것이다. 그리고 한 번 그렇게 기회를 빼앗기고 나서 차구므진과 봄저브의 공격을 피해 땅바닥 을 서너 번 뒹구는 사이에 나는 주위의 마력이 다시 굳어 버린 것을 알 수 있었다.( 손 에 칼을 쥐고 스크롤을 찢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크흐흐, 결국에 다른 녀석들은 놓쳤지만 넌 잡게 되는군. 뭐 그래도 그 정도만 해 도 다행이지. 아무렴.” 그렇게 상황이 다시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전개되는 것을 안 녀석들은 공격을 멈추고 나를 둘러쌌다. 젠장 이제는 정말 도망을 갈 곳이 없군. 이런 빌어먹을... 음? 아니지? 내가 마법을 쓰지 못하면 뛰어서 도망을 가면 되는 일이 아닌가? 이 포위만 풀면.... 나는 지토와 광아 등이 없는 상황에서 도망을 가는 것을 굳이 마력을 이용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사람은 상황이 급해지면 사고가 경직되는 모양이다. 마력이 봉쇄당하면 뛰어서 도망을 가면 되겠지. 나는 생각이 정리되자 곧장 만만한 마수쪽을 선택해서 달려 들었다. 주로 물리 공격을 하는 녀석이기는 하지만 트롤라이런의 세 마수 중에서 근접 공격에 서 주위의 다른 마수들을 도와주는 역할을 많이 했던 녀석으로 기억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내 움직임을 따라서 다른 떨거지들이 함께 덤빈 것은 말 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 다. 그리고 결과는 내 예상과 너무도 다르게 나타났다. 마수 셋과 차구므진, 봄저브의 포위를 뚫고 나가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도 아까 공격을 멈추었던 것도 이런 포위망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 다. 마수의 촉수와 집개발, 낫 같은 팔이 휘감고 지나간 자리에는 차구므진의 도가 파고 들었고, 봄저브의 공격이 작은 빈틈을 노리고 들어왔다. 차륜전車輪戰이었다. 성급하게 굴지도 않았지만 빈틈을 보이지도 않았다. 이런 모양이라면 역시 이길 도리가 없다. 하나 하나라면 그다지 어렵지 않을 녀석들이 셋, 넷이 모이니 감당할 수 없는 상황 이 되고 있었다. 나는 지쳐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를 할 수도 없었다. 움직임을 멈추면 죽게 되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요즘은 어디를 좀 움직였다 하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군. - 형님 접니다. 이번 공격에서 차구므진이란 녀석과 부딪히는 순간에 마력을 봉쇄한 마수를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아마도 오래는 아니겠지만 잠시동안 마법을 쓰실 수 있 게 하겠습니다. 광아의 목소리였다. 나는 광아의 위치를 찾을 수가 없어서 대답을 하진 못했지만 마수들의 공격에 이어 서 들어오는 차구므진의 도를 최대한 힘껏 받으며 광아의 공격을 기다렸다. 그리고 차구므진의 도와 내 검이 마주하는 순간 트롤라이런의 뒤에서 나타난 광아가 해파리에게 검을 휘두르는 것을 곁눈질로 보았다. 별다른 소리도 없이 스르륵 땅바닥에 떨어진 해파리 마수의 모습과 함께 마력이 움직 였다. “차앗 블링크.” 나는 마력의 힘을 빌어서 가장 빠르고 간단하게 할 수 있는 방법으로 포위를 벗어났 다. “광아야 가자!” 나는 광아 옆으로 나타나며 트롤라이런에게 검을 휘둘렀다. 피하지 못하면 죽겠지. 죽는다고 해도, 죽인다고 해도, 별로 후회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추우욱!! 바위정령족의 검은 별다른 저항없이 트롤라이런의 가슴을 길게 베고 지나갔다. “크아악!!” 하지만 녀석은 운이 좋았던지 깊은 상처를 입고 쓰러졌지만 즉사는 아니었다. 저런 녀석은 즉사만 아니라면 죽지는 않을 것이었다. “빨리 가자. 손을 잡아.” 나는 광아의 손을 잡고 다시 블링크를 시도했다. 목표는 광장의 입구. 그리고 광장의 입구에 도착한 나는 광아와 함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달렸다. 솔직히 녀석들을 어떻게 해 버리고 싶었지만, 마력이 돌아왔다고 해도 나는 공격 마 법이나 방어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바위정령족을 송환시키면서 대부분의 마력을 써 버렸던 것이다. 그러니 녀석들과의 싸움은 아무리 두이 남았을 뿐이라고 해도 아까와 상황이 나아질 것은 없었다. “자, 그만 돌아가자. 이거 들어.” 나는 여기 저기 무너지고 파헤쳐진 통로에서(지토와 자이곱이 이 곳에서 저들을 막 을 때 생긴 흔적들일 것이다.) 광아에게 이동 스크롤을 건네주었다. 생각해 보니 처음에 광아와 자이곱에게는 스크롤을 주었지만 지토에게는 넥스 영지 로 가는 스크롤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지토와 자이곱이 스크롤을 썼다면 그 중에서 한 장은 광아의 것이었을 터였 다. 광장 안에서 차구므진과 봄저브는 따라나오지 않고 있었다. 나와 광아는 한 장씩의 스크롤을 손에 들고 마주 보며 찢었다. -결혼식(1) - 뭐야? 왜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거야? 만약에 스크롤에 순간이동과 함께 그 도착 지역에 보호막을 만들어서 간섭효과를 막 는 기능이 없었으면 광아와 나는 저 수많은 사람들 중 몇과 합성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군. “오빠, 괜찮아요?” “형!” “루탄님, 흐흑. 걱정했어요.” “어? 그래도 전보다는 많이 양호한데? 어디 없어진 부분도 없잖아.” 이건 분명히 기억해 둘 테다 풍아. “죄송합니다. 루탄님 아직은 제가 그 곳까지 사람들을 보낼 수 있는 능력이 되지 못 해서... 마법사들을 동원하면 마력은 되겠지만 그 운용에 자신이 없어서 그렇게 먼 거 리는....” 일데퐁소가 한 쪽을 지키고 있다가 한 말이었다. “다행입니다 무사히 돌아와서 참. 했습니다 혹시 우리 때문에 무슨 일이 있으면 어 쩌나 무척 걱정을.” 달군쇠였다. “그저 조금 힘들었을 뿐 문제는 없었습니다. 모두들 무사하니 걱정은 하지 않으셔 도 됩니다.” 그렇게 달군쇠를 포함한 바위정령족에게 말도 되지 않는 소리도 안심을 시켜주고는 서둘러 그들에게서 벗어났다. “피곤하다. 좀 쉬었으면 좋겠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광아와 어깨동무를 하고는 마법진이 있던 탑을 나서서 우리들 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 틈에 지토가 옆에서 게브를 타고 터덜거리며 따라오고 있었다. “아? 그런데 지토, 아까 게브 안 보이던데 어떻게 된 거야?” 나는 옆에 나란히 걷는 지토에게 물어보았다. “내가 그 모양으로 박살이 나는데 게브라고 멀쩡하겠냐? 역소환당했었다.” 그렇게 대답하는 지토의 얼굴이 상당히 노여워보였다. 노여움이라. 화가 난다는 것이겠지. 역시 지토도 이젠 정령보다는 사람에 가까운 것 일까? 적어도 정신만은? 그렇게 셋이서 나란히 집으로 향하는 도중에 나는 몇 발자국 뒤에서 처진 어깨를 하 고 우리를 따라오는 자이곱이 있다는 것을 한참 후에야 알았다. 무어라 위로를 해 주고 싶기는 했지만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자이곱, 수고 많이 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 내가 자이곱에게 줄 수 있는 최대의 인사였 다. 솔직히 나도 그렇게 썩 기분이 좋은 상태는 아니었던 것이다. 전에는 제란에게 박살이 나더니 이젠 그 졸개들에게 곤란을 당했다. 힘이 부족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솔직히 여기서 내가 더 큰 힘을 얻고자 한다면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신계의 깨달 음을 추구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뭐 다른 방법도 많이 있겠지만 내가 아는 방법이며 실현 가능한 방법이 그뿐이었던 것이다. 10써클의 마법? 난 그런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또 있다고 해도 쉽게 쓸 수 있을 리가 없다. 9써클 마법도 마법을 준비해서 발현시키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 만약에 내가 제란과 맞붙게 된다거나, 조금 전과 같은 상황이 된다면 그런 9써클 마 법이란 준비시간의 길이 때문에 거의 쓰지 못할 것이었다. 여러 겹의 실드를 두르고 공격을 막아내면서 마법을 준비해서 쓴다면 쓰지 못할 것 도 없을 것 같지만 쉬벡의 마법서에도 그렇게 실용적인 대인 전투 마법은 없었다. 대 체로 9써클 마법들은 공격 마법이라 해도 범위 마법이었기 때문에 한 사람을 향한 마 법으로 9써클을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아무튼 지금의 나로서는 써클을 높여서 마법 공격력을 높이는 것은 불가능. 그래서 남는 것은 신계의 존재들과 같은 깨달음을 얻어서 힘을 키우는 방법, 다행히 나에게는 신계의 비밀이 담긴 책이 있으니 잘 연구하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 역시도 할 수 없는 방법이다. 나는 인간이고 싶은 것이지 인간을 벗어난 존재가 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초월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빈 몸이 되는 것이나 같은 이치이다. 모든 것으로부터의 초월이란 더 이상 연연해 할 것이 없는 상태가 된다는 말이겠다. 적어도 지금 현재에 가치를 지니는 것들 중에서는 연연할 것이 없다는 말이겠지. 그러니 내 가족과 내 세계의 사람들을 놓을 수 없는 나로서는 그런 깨달음을 얻고 싶 은 욕심은 없다. 솔직히 힘이 더 강해지는 것은 정말정말 원하는 것이지만,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다 면 그냥 불가능한 그대로 있고 싶다. 하지만.... 하지만 이렇게 가다가는 제란을 막을 도리가 없어진다. 제란의 갑주는 무궁무진한 발전가능성이 있다고 봐야 한다. 전에는 겨우 한쪽 팔뚝의 감싼 정도의 힘에 내가 밀렸었다. 그런데 만약 제란이 그 갑주와 완전히 동화를 한다면? 거기에 덤빈다는 것은 섶을 지 고 불에 뛰어드는 것과 다름이 없을 일일 것이다. 화톳불에 날아드는 날파리 같은 신세겠지? 나는 집으로 돌아와 몸을 씻고 침대에 누워서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보이는 여름 한 낮의 풍경을 보며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가 한 낮의 해가 천천히 기울어가며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때가 될 즈음 손을 저어 커튼을 치고는 눈을 감았다. 오전에 영지에 도착해서 피곤하다고 침대부터 찾은 내가 잠이 들기는 오후가 되어서 야 잠이 드는 것을 보면 나도 어지간히 속이 상한 모양이다. 별로 아닌 것 같으면서도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부분에서는 패배에 대한 분노가 크 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인지도.... 내가 잠에서 깨어난 것은, 아니 정확히는 침대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온 것은 다음날 새벽이었다. 아직 동생들이 깨지 않은 시간이라 조용히 걸음을 옮겨 현관을 열고 마당으로 발걸음 을 옮겼다. 세상 모든 것은 아직도 잠에서 깨지 않은 것 같았지만, 일찍 영근 이슬방울들은 제 무게를 견지지 못하고 풀잎 끝에서 떨어지기도 하는 시간이었다. 마당 옆에 만들어 놓은 채소밭에는 그 동안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도 깔끔하게 정리되 어 무성하고 씩씩하게 남새들이 자라고 있었고, 울타리를 감고 오른 넝쿨들도 푸릇푸 릇 생기를 뽐내고 있었다. 누군가 정성들여 키운 흔적이 역력하게 보였다. 작년에 내가 지하실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무척 신경을 썼던 것들인데, 올 해에는 거 의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작년 내가 키울 때보다도 더 잘 키워진 듯 보였다. 끼이익! 낮은 문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리고 이루비아의 모습이 나타났다. “어머, 루탄님 일찍 일어나셨네요?” 그런 이루비아의 손에 들린 물건이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던 의문을 말끔히 씻어 주 고 있었다. “여기 이 채소밭을 이루비아가 보살피고 있었던 거야?” 나는 이루비아의 손에 들린 바구니 안에 모종삽과 호미 같은 작은 농기구들이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저기, 루탄님이 아끼셨다고 언니들과 오빠들이 그래서.... 작년에 루탄님 기다리면 서 키웠는데 씨앗을 맺어서 봄에 다시 뿌렸었어요. 그런데 참 예쁘게 자라고.... 보 기 에 좋아서...” 무언가 비밀을 들킨 어린아이처럼 얼굴을 붉히는 이루비아의 모습이 방금 풀잎에서 떨어지던 이슬을 닮아 있었다. 나는 그런 이루비아의 어깨를 짚고 이마에 입맞춤을 해 주었다. 그리고 슬며시 이루비아를 끌어안았다. 시간도 참 많이 흘렀다. 이루비아를 처음 만난 날부터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날까지 의 시간도 길었고, 다시 이 여인을 만나고 이 곳으로 돌아온 후에도 많은 시간이 흘 렀 다. 하지만 그 동안에 내가 이 여인과 함께 했던 시간은 정말 너무나도 턱없이 짧기만 했 다. 그러는 동안에, 내가 가끔 이 여인을 잊고 있는 동안에도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 과 지내면서도 오직 의지할 사람은 나뿐이 없었을 텐데도, 한 마디 투정도 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 이 여인의 시간들이 불현듯 내 가슴으로 파고 들었다. 그 때문이었다. 내가 이루비아의 가냘픈 몸을 품에 안고 있는 것은 그런 이유였다. 미안하고 고맙고, 사랑스럽다는 이유. 잠시 후,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숙인 이루비아의 손목을 잡고 나는 넥스 저택과는 반 대쪽으로 산책을 나섰다. 발끝에 차이는 이슬방울들이 헐겁고 간편한 신발을 신은 발에 차갑게 묻어오는 것 도, 아직 채 깔리지 못한 안개이슬이 머리카락에 엉겨 붙는 것도 상관이 없었다. 우리들은 집이 있는 언덕을 걸어 내려가, 초지를 이루고 있는 들판을 걸었다. 이유? 그런 것을 묻는 사람이 있다면, 이유 같은 것은 없다고 해 주고 싶다. 그냥 걸었을 뿐이다. 함께 있는 시간과 조금 전의 그 느낌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라면 그 것도 이유겠지만 그런 따위의 이성적인 생각은 없었다. 그저 걸으며 넥스 영지를 둘러싼 거대한 성벽 위로 솟아오르는 태양을 얼굴과 몸 가 득 묻히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이유 없이 시작한 산책은 해가 떠올라 풀잎들의 이슬이 사그라들 때 쯤 끝이 났다. 그리고 그 아침에 나는 조금 더 나이를 먹었다. 아마도 난 마법이나 검술과 같은 쪽에서는 제법 나이를 먹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 다. 사람은 자기가 경험한 만큼 나이를 먹는 법이다.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일을 하 는 사람은 그것에 대한 나이가 무척이나 어리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연 애에는 그야말로 철부지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루비아의 기다림과 마음을 조금 알게 된 아침에 나는 연애에도 조금 나이 를 먹게 되었다. 그리고 내 머리카락은 이번 싸움에서 상당히 많이 잘려 버려서 이번에는 어쩔 수 없 이 짧게 잘라야 했다. 그래도 스포츠 형의 머리카락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루아와 아르미엘이 적당히 다듬고 난 후의 내 머리스타일은 멕가이버스타일이 되어 있었다. 할 일은 산더미처럼 많았다. 바위 정령족을 다시 그들의 영역으로 돌려보내야 했고, 더불어서 그들의 영역에 비 상 연락망과 순간이동을 위한 마법진을 설치해야 했다. 또한, 조금은 환수에 익숙해진 사람들을 위해서 다시 환수를 소환해야 할 일도 있었 고(신계에 보냈다가 바위 정령족을 구하는 일이 끝나고 다시 불러온 란이는 상당히 오 래 삐져 있었다. 그걸 달래는 것도 일이라면 일이다.), 기충의 번식이 얼마 남지 않 았 기 때문에 번식이 되는 대로 또,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리고 나도 나름대로 지금의 내 힘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방법들을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아침저녁으로 이루비아와 산책을 하고 사람들이 없는 으슥한 곳을 찾 아 두리번거리는 것을 빼먹을 수는 없는 일이다. 아직은 겨우 손목을 잡고 얕은 포웅을 하고 이마와 뺨에 입술을 대는 것으로도 얼굴 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두근거리지만 언젠가는...흠흠흠. 물론 그러는 사이에도 시간은 흘렀고, 동생들과 자이곱을 비롯한 다른 녀석들도 나 와 이루비아 사이의 변화를 눈치 챈 모양이었지만 그렇다고 그 눈치를 다 보면서 살 수는 없는 문제였다. 그래도 다행한 것은 수아와 풍아가 적극적으로 아르미엘 사제를 막아 주었기 때문에 그나마 이루비아와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럴 때에 시누이가 올케를 미워하느니 어쩌느니 하는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우 리 수아와 풍아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느냐고 해 주고 싶다. 아르미엘 사제는 내가 이루비아와 가까이 지내는 것을 반대하는 것 같지는 않으면서 도 우리 둘만 함께 있는 것을 꺼려했다. 질투를 하는 것도 아니고.... 아니 어쩌면 질투일지도 모른다. 흠, 오늘 일도 대충 마무리가 되었군. 환수를 다시 재보급하는 일도 오늘 로서 끝이 났고, 기충의 번식과 수거와 이식이 모두 잘 마무리가 되었고, 마갑주의 보급도 거의 끝이 났으니 이제 거의 모든 준비가 끝이 난 것이라고 봐야 하나? 앞으로 기충을 통한 수련만 무사히 끝을 내게 되면 기본적으로 준비를 할 수 있는 것 은 다 한 셈이 된다. 물론 지금의 인원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 봐야 넥스 영지를 무사히 지켜 내는 일 정도겠지만, 그런 소극적인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제란이 전쟁을 일으킨다면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 최전선으로 가야 할 것이었 다. 제란에게 대항하는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때, 그들과 힘을 모아야지 그렇지 않고 그들 이 각개격파를 당한 다음에는 이미 늦은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때문에 우제푸와 그란드, 그리고 재수 없는 누웬의 황제와도 가끔은 연락을 주고받으 며 상황을 점검하고 있는 중이고 말이다. 하지만 어쨌든 오늘의 일과는 끝이 났고, 모처럼 내일은 급한 일도 없으니 이루비아 와 오붓한 시간을 가져 봐야겠다. 그 동안 바빴기 때문에도 그렇고 아르미엘의 방해공작 때문에도 그렇고 이루비아와 산책을 하지 못한 것도 꽤나 오래 된 것 같다.(한 삼일 정도 된 것 같은데....크흠.) 벌써 여름은 거의 지나고 가을이 시작되는 시간이니 지난 3개월이 넘는 동안에 이루 비아와 나 사이의 진도가 어느 정도 나갔는지는 묻지 말기 바란다. 그저 어느 날, 단 둘이 아침 산책을 좀 멀리 나갔던 날, 갑작스럽고도 의외의 사태로 (이 분지에는 비가 그다지 많이 오지 않는 편인데, 장대 같은 소나기가 내렸었다.) 정 오가 지나고 태양이 머리 위에 높이 빛나는 시간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온 날이 있 었 다고만 밝혀 둔다. 크흐흠. 룰루 랄라라~. 빨리 이루비아를 보러 가야지. 이루비아는 지금쯤 얼음기사단의 안나, 쉬리나, 미리 아 등과 함께 훈련을 하고 있을 것이다. 요즈음의 기사단과 야전대들의 훈련은 상당히 복잡하다. 검술과 체술 등의 기본 무기와 공격술을 물론이고 각 개인의 개성에 따른 환수나 마 갑주의 능력을 키우고 사용하는 데에도 상당한 훈련이 필요한 때문이었다. 이루비아는 그 중에서 마갑주의 사용에 능한 편이었고, 마갑주를 착용한 상태에서는 화아나 풍아에게도 밀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 얼음기사단을 맡은 풍아와 함께 이루비아가 훈련을 돕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이곱 역시 야전대 300명 전원이 갑주를 착용할 수 있는 사람으로만 선별해 서 데리고 있었던 탓에 갑주의 사용과 동화력의 신장, 그리고 더불어서 토의 심공을 익히는 데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중이었다.(한 번 깨지고 나더니 눈에 불을 켜고 덤 비 고 있다.) 물론 화염기사단 역시 얼음기사단과 비슷한 훈련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각 기사들 은 예전 야전대였던 인원을 10명씩 거느리고 그들을 통솔하고 운용하는 훈련을 겸하 고 있기도 했다. 그러니 요즈음 넥스 영지는 거의 군사도시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물론 넥스 영지의 영지민들은 기존의 생활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곳곳 에서 벌어지는 모의 전투와 환수들의 모습은 여느 지역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보이지 않게 변화를 거듭하고 있는 곳은 바로 일데퐁소가 이끄 는 마법사들이었다. 그들은 기충의 힘으로 써클을 성장시켰기 때문인지 7써클 이상으로 올라가는 데에 힘 겨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대신에 숱한 토론과 연구 결과의 포괄적인 교류를 통해 마 법 의 새로운 영역들을 개척해 내고 있었다. 그들은 전혀 새로운 형태의 마법들을 만들어 내기도 했던 것이다. 때로 실수를 하고 때로 위험한 상황을 만들기도 했지만 그들의 탐구심은 그칠 줄을 몰랐고 다양한 응용마법과 합성마법, 그리고 새로운 마법들이 심심찮게 만들어지고 실 용화되고 있었다. 물론 나도 가끔은 그들에게 배울 것이 있었고, 그들에게 가르칠 것도 있었다. 이런, 이런 이게 아닌데 지금은 이루비아를 만나로 가야 하는데.... 나는 머리 속의 잡념들을 흔들어 떨치고는 서둘러 얼음기사단의 연병장으로 향했다. (야전대의 합류로 연병장이 새롭게 만들어져서 기사단과 야전대에게 각각의 훈련장이 지급되었다. 물론 지토가 한 힘 썼다.) “오빠!!” 연병장 구석으로 이어지는 지름길을 따라 연병장에 거의 다다를 무렵, 앞쪽에서 나 를 부르는 소리가 들였다. “아! 루아야!” “오빠!! 어떻게 부른 사람은 난데 대답은 루아야 하고 나오는 거야? 오빠 눈에는 루 아 밖에 안 보이는 거야?” 루아 옆에서 풍아가 입술을 뾰족이 내밀려 토라진 소리를 했다. “하하, 쩝.” 긁적긁적, 나야 머리를 긁고 있는 방법 밖에 더 있겠는가? 누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고 먼저 눈에 들어온 사람이 루아였던 것은 사실 이니 말이다. 루아가 부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알았어. 알았다구. 난 빠져 줄께.” 풍아는 내가 머리를 긁고 서 있자 그렇게 말하고는 팩 돌아서 몸을 날렸다. 역시 눈치는 빠르단 말이야. 그렇다고 풍아가 정말 화를 내거나 하는 것이 아니란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나에게 있어서 루아가 소중한 존재라면 내 동생들과 지토는 그 보다도 훨씬 더 가슴 깊은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걸 아는 수아와 풍아, 그리고 동생들과 지토였기 때문에 내가 루아에게 많은 시간 과 정을 쏟아도 조금 섭섭한 마음을 감추고 아무 소리도 않는 것일 터였다. “또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기다리고 계시면 제가 갈 텐데요.” 루아가 그렇게 말하면서 배시시 웃었다. 나는 루아에게 팔을 내밀고는 앞장서서 걸었다. 곧 뒤를 따라 온 루아가 팔짱을 끼고 매달려 왔다. 확실히 이 향기는 산더덕의 냄새를 닮아 있다. 산더덕과 라일락의 향. “오늘 몹시 힘들었던 모양이네?” 나는 유독 짙어진 이루비아의 체향을 맡으며 물어 보았다. 이루비아는 격한 운동으 로 땀이 흐르면 더욱 체향이 짙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조금이요. 이젠 기사단의 단장들도 제법 마갑주와 환수를 부리는 능력이 늘어서 상 대하기 쉽지 않아요.” 안나는 마갑주를 쉬리나와 미레아는 환수를 다룰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협공이라 면 만만찮았을 것이다. “그걸 혼자서 상대하고 있었단 말이야? 대단한데?” 나는 세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에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작은 배려가 상대를 기쁘게 하는 법이다. 언제나 같은 말이라도 칭찬에 행복해 하는 것이 루아였다. 누가 그랬을까? 좋은 소리도 여러 번 들으면 싫어진다고.... 우리 루아는 안 그러는 것 같은데.... 우리는 팔짱을 끼고 이제 서서히 잎맥을 닫고 잎들로의 통로를 막아서 겨우살이를 준 비하는 나무들 사이를 걸었다. “벌써 가을이 깊어지는 모양이네? 나뭇잎들이 물들고 있구나.” “그래요. 벌써 그렇게 되었네요. 루탄님과 여기 온 것이 벌써 1년이 넘었어요.” “그렇지?” “네. 정말 시간이 빠른 것 같아요. 특히 요즘은 더 빨리 가요.” 루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슬며시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대왔다. 나는 팔짱을 풀고 그녀의 어깨를 잡아 주었다. 이런 것이 행복하다는 것일 거다. 분명히. 미래에 대한 불안이야 누구나가 가지는 것이지만, 그 불안을 누를 수 있는 평안과 따 뜻함이 일어나는 이런 느낌을 행복이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사랑일 것이다. 이성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런 것일 것이다. 운명적인 사랑이나 한 눈에 빠지는 사랑은 아닐지라도 이 여인이 나에게 오롯이 소중 한 여인이라는 것을 느끼는 이것이 사랑일 것이다. 나는 행복했다. 내가 찾고자 하던 무엇인가를 하나 찾은 느낌이었다. 이제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을 정도로 행복하진 않았지만 예전에는 없던 것을 가진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진정 원하던 것들 중의 하나였음도 아울러... 마당의 채소밭도 시들고 있었고, 울타리를 타고 오르던 넝쿨도 시들어 말라가고 있었 다. 이런 풍경은 사람들에게 쓸쓸함을 안겨주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는 그 풍경 속에서 여러해살이 야채나 채소의 뿌리와 한 해 살이의 씨앗들 을 볼 수 있었고, 누렇게 시들어 생을 마치는 것들의 행복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지금 마당에 놓인 평상 위에 걸터앉아 여유로운 한 때를 보내고 있는 중이다. 벌써 겨울의 문턱에 닿아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들 무언가로 분주하게 오고가고, 나도 나대로 바쁜 일상을 보내며 살아 가고 있었지만, 또 한 고비가 지나고(바위 정령족들의 무기와 갑옷이 도착했다. 총 4000벌에 이르는 갑옷과 무기들이었다.) 나는 간만의 여유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 옆에는 루아와 수아가 양쪽에 앉아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오빠. 결혼식은 않으실 거예요?” 문득 수아가 물어 왔다. “음? 음. 글쎄.” “무슨 대답이 그래요?” 수아는 조금 맥빠진다는 말투였다. 그리고 루아도 역시 조금은 기대한 대답이 나오지 않아서인지 표정이 흔들린 것 같 다. 그 사이에 나도 루아의 표정을 읽는 것에 아주 능숙해졌다. 루아가 처음 이 곳에 오고 나서부터 조금씩 바뀌어서 내게도 많은 표정을 보였지만, 처음에는 그저 천진스런 표정만 있었을 때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루아의 표정 변화에 민감한 편이다. 하지만 결혼이라. 그리고 당연히 뒤를 따르는 아이들과 가족이라는 테두리.... 동생들과 친구 하나를 가지는 데에도 무척이나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겪은 나에게 결 혼이란 거대한 도전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것이 단순히 상징적인 행사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의미가 너무도 무거 웠다. 그렇다고 지금 내가 루아와 헤어진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수아의 질문에는 흔쾌한 대답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올 겨울이 지나고 나면 결혼식을 해요. 그리고 이왕이면 예쁜 조카는 속도 위반을 해도... 아얏! 오빠!?” 수아는 혼자서 중얼거리다가 꿀밤을 얻어맞고는 비명과 함께 소리를 질렀다. “속도 위반이란 말은 도대체 누가 가르쳐 준 거냐? 어디서 쓸데없는 말은 배워가지 고...” “헤~! 그래도 조카가 있으면 좋을 것 같지 않아요? 오빠? 오빠 닮으면 예쁠 것 같은 데....” 하지만 우리의 이런 대화에 루아는 끼어들지 못하고 있었다. 왠지 루아의 얼굴이 많이 어두워진 모습이었다. “루아, 어디 몸이 안 좋은 거야? 얼굴이 많이 창백해 보인다.” 수아도 그런 루아의 모습을 깨달았는지 루아에게로 다가앉으며 물었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괜찮아요. 그냥 조금 피곤한 것 같아요. 저 먼저 들어갈게 요.” “어머! 루아야!” 수아가 일어나 집으로 들어가는 루아를 따라 들어가고 나만 덩그렇게 평상에 남았다. 루아가 상당히 부끄럼을 많이 타는 모양이다. 하긴, 나도 이렇게 얼굴이 붉어지는데... 그렇게 잠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비식비식 웃고 있을 때, 언덕 아래에서 올라오 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형, 밖에 나와 있었네? 근데 뭐야? 그런 이상한 웃음을 짓다니... 무슨 일이야?” 그렇게 물어본다고 대답을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 않겠냐? 아무튼 화아 이 녀석 은 좀처럼 눈치라는 것이 좀 모자라는 편이다. 전에는 수아가 그런 감이 있었는데 파 울이 곁에 있게 된 이후로는 많이 나아졌는데... 화아는 전혀 변화가 없다. “응? 벌써 끝난 거냐? 오늘은 어땠어?” 화아는 여전히 화염 기사단의 부단장을 맡아서 열심히 훈련을 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조금 과격한 면이 없지는 않았지만, 반대로 화끈하고 뒤탈이 없는 성격 때문에 부하 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형편이었다. 화염기사단은 대체로 마갑주의 보급률이 환수의 보급률 보다는 높은 편이어서 그런 특성을 잘 살릴 수 있는 공방攻防의 훈련이 요즈음의 중심 훈련이었다. 그리고 예전에 왜 암흑제국에서 바위 정령족을 납치해서 갑옷과 무기를 만들게 했는 지는 마갑주를 부리는 사람에게 갑옷과 무기를 지급하고야 알 수 있었다. 같은 마갑주를 착용하고 같은 동화 비율에서 싸움을 하면 막상막하를 이루는 사람 도, 한 쪽이 무기와 갑옷을 바위정령족의 것을 사용하는 경우에는 백전백승이었던 것 이다. 한마디로 갑옷과 무기의 위력이 무시할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검을 보아도 알 수 있는 있이다.(결국 달군쇠는 나에게 이 검을 주고 갔었다. 검의 이름은 수수戍守였다. 지킨다라는 뜻의 한자어이다.) 예전 차구므진과 싸움을 할 때에도 무기와 검강의 우세가 결국은 차구므진의 도에 삼 각한 타격을 주었던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 덕분에 바위 정령족의 갑옷과 무기가 지급되고 나서는 기사단의 전력이 상당히 상승 한 상태였다. 마갑주를 입은 사람들도 환수를 부리는 사람들도 기충의 도움을 받는 사람들도 나름 의 특성이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각각의 장점을 잘 살린다면 굉장한 전력이 될 수 있 을 것이라는 것이 우리들의 기대였다. “뭐 여전하지. 그래도 처음에 비하면 정말 대단한 발전이야. 특히 세 명의 대장隊長 들은 대단해. 테도오와 파비올은 벌써 갑주와 상당히 동화가 되고 있고 오로한은 벌 써 중급환수 둘을 부리는 것 같던데? 좀 무리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말이야.” 화아는 별것 아니라는 투로 말을 꺼내놓고는 부하들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화아야 그런데 말이야 내가 루아와 결혼하는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 나는 불쑥 수아의 말이 생각나서 말을 꺼냈다. “결혼? 드디어 결심을 한 거야? 결혼해야지. 벌써 늦었잖아? 서로 좋아하면서 무엇 때문에 망설여? 그냥 하면 되잖아. 둘 사이를 가로 막는 무엇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 이야.” 화아가 이런 말을 할 때도 있군. “그래? 그럴까? 하지만...” 나는 책임과 의무에 대한 무게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뭐? 어차피 미래는 모르는 거 아니야? 그럼 지금 현실에 최선을 다해야지. 미래를 걱정한다면서 현재까지 어영부영하는 것은 형답지 않은 멍청한 짓이야. 행복 할 것 같다. 불행할 것 같다. 둘 중에 한 가지만 결정을 내려. 그래서 행복할 것 같 으 면 결혼을 하고 아니면 말아. 그럼 되잖아.” 정말 단순한 녀석. 그래도 그 말이 정답이겠지. 결혼을 하지 않아서 불행하지도 않고, 부족하다 느끼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왠지 상징적일 수밖에 없는 그 행사가 무척이나 중요한 것은 약속이기 때문이겠지. 세상 모든 것들에게 고하는 숭고한 사랑의 약속. 잠정적이고 암 묵적인 인정이 아닌 공공연한 인정을 받는 서로의 사람이라는 .... “어? 그 표정을 어째 곧 신혼부부가 탄생할 것 같은 징조로 보이는데? 그러고 보니 아까 실없이 웃고 있었던 것도 그것 때문이었군?” 화아의 놀림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결혼이라. 하지만 선수를 친 것은 어느 날 문득 날아든 한 장의 초대장이었다. 자이건 선드라스와 아세티아르 헤이스런의 결혼식이 열 번째 달의 마지막 날에 있다 는 연락이 왔던 것이다. 예전에 시월의 마지막 밤이 어떻고 저떻고 하던 노래가 생각나는 청첩장이었다. “어머, 자이건과 아세트가 결혼을 하는 거네? 그럼 두 공작가가 손을 잡는 거나 마 찬가지잖아? 이거 한타에서는 난리가 아니겠는 걸?” 풍아가 들떠서는 방방 뜨고 있었다. “그런데 왜 장소가 이런 이상한 자리에서 한다는 거야?” “그러게요. 지토 아저씨. 도대체 왜 결혼식을 이런 이상한 곳에서 하는 걸까요?” 지토와 수아는 결혼식장을 놓고 말이 많았다. 둘의 결혼식장이 일정한 건물이 아니라 평원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한타리아의 남쪽 에 위치한 평원이었다. 예전에 나와 서자치령주가 한바탕 붙었던 곳이기도 했고, 처음 루아를 만난 곳이기 도 했다. “그거야 알 수가 없지요. 하지만 제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 결혼식이 단순한 결혼 식의 의미 이상을 지닐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광아가 자이건과 아세트의 결혼식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들고 나왔다. “무슨 말이야? 결혼식 이상의 의미라나?” 성격 급한 화아가 그렇게 묻는 것이 이상 한 것은 아니었다. 모두들 광아에게 의아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게 지금 한타의 정세가 심상치를 않습니다. 먼저 한타의 국왕이 지금 상당히 노 쇠한 상황이라 언제 세상을 떠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태고, 세 왕자들 모두가 나름 대로의 세력을 가지고 왕권에 도전을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번 결혼은 1황 파 마르틸 후작과, 2황파 마롤 후작보다 다소 열세에 있었던 3황파의 선드라스 공작 가 가 헤이스런 공작가를 자신들의 확실한 편으로 만드는 것이 되는 셈인데... 그 사이 에 헤이스런 공작가는 스컬프트의 힘을 빌어서 상당히 많은 환수들을 제압해서 귀속 시 킴으로서 전력을 높인 상태고, 선드라스는 강철기사단의 자이건이 위세를 떨치는 중 이 라는 말입니다. 절대 무시할 수 없는 두 세력의 결합인 셈이지요. 어쩌면 이 기회에 1 황파와 2황파 모두를 축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광아의 긴 설명이 끝나면서 잠시 소란이 일었다. 그런데 왜 란이나 케브, 카다 같은 녀석들까지 웅성거리는 거야? “아니 그게 가능할까? 그들 가문의 힘이 아무리 커졌다고는 하지만 상대는 지금까 지 기득권을 지니고 있던 막강세력들일 텐데?” 나는 광아에게 다시 물었다. “그게 가능하다는 것이 저의 분석입니다. 우제푸 마스터가 헤이스런의 손을 들어 줄 것이 확실하다는 것이 먼저 두 공작가의 손을 들어주게 하는 이유입니다. 실제로 우제푸 마스터는 무슨 이유인지 헤이스런 공작가에서 머물면서 환수의 소환을 책임지 고 있는 상황입니다. 우제푸는 그야말로 완벽한 국왕파이기 때문에 우제푸의 힘이라 면 국왕의 힘과 맞먹을 수 있는 힘이지요. 보통은 이런 문제에 개입한 예가 없기는 합 니다만 그 힘이 더해진다면 공작가의 우세가 확실하다고 봐야 합니다만, 마지막 변수 는 따로 있습니다.” “마지막 변수라니? 거기에 또 다른 힘이 있든 거야?” 나는 광아에게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너무도 의외였다. “물론입니다. 바로 형님이지요. 형님과 우리 일행 전부가 간다면 그야말로 한 나라 의 중심 전력과 맞먹을 수 있으니 말이죠.” 광아의 말에 나는 순간적으로 머리를 맞은 느낌이었다. 미처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분석은 옳다고 봐야 할 것이었다. 내가 그 자리에 가 있게 된다면 만약의 상황에는 분명 개입을 하게 될 것이고, 그걸 아는 자이건과 아세트라면 당연히 그 자리에서 무리가 있더라도 사태를 종결지으려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2황파의 마롤 후작이 암흑제국의 비호를 받는다고 하지 않았어?” “정확히는 제2황자의 모친이 암흑제국의 출신입니다. 마롤 후작이 한타와 암흑제국 사이의 친선을 위해서 추진한 결혼으로 맺어진 여자입니다. 현 북동영주의 딸입니다. 뭐 암흑제국의 문화적 특성상 딸이라고 해서 특별히 대할 것이라는 예상을 할 수는 없 지만 대신에 그것을 빌미로 해서 무엇인가 구실을 만들기에는 더없이 좋은 표적이기 는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2황자의 모친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암흑제국과 한타 사이 에 심각한 외교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상황에 따라 전쟁의 빌미가 될 수도 있 지요.” 광아의 대답은 상당히 심각했다. “그럼 뭐야. 문제가 생겨도 그 여자는 무사해야 한다는 거잖아? 그것 참.” 지토가 마음에 안 든다는 투로 투덜거렸다. “아무튼 결국에 이번 결혼식이 그저 평범하게 끝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는 말이로 군. 뭐 그렇다고 자이건이나 아세트가 우리들에게 도움을 청한 것도 아니니 우린 가 서 구경이나 해 보도록 할까?” 솔직히 상황이 우습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자이건과 아세트의 결혼이라는 데 안 갈 수 도 없는 문제였다. “호호, 오랜만에 여행이네요. 이번에도 마차를 가지고 가실 건가요?” 수아가 대뜸 마차를 가지고 가냐고 물었다. “글쎄,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한타리아로 순간이동을 하고, 아세트 집에서 조금 신세 를 지다가 나중에 결혼식에 참가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그리고 곧 돌아와야 할 거고 말이야.” “그럼 하는 수 없지만, 그래도 여행하는 기분으로 음식도 해 먹고 그럼 좋은데... 아무래도 아세트네 집에 있으면 갑갑할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그렇지 풍아언니. 이번에는 그냥 우리끼리 가서 야영도 하고, 그러면서 여유가 있 었으면 좋겠는데...” “그래 맞다. 수아나 풍아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이야.”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괜히 아세트네 집에 가 봐야 좋을 것도 없을 것 같고 불편 할 것 같은데...” 화아와 지토도 의견을 같이 하는 모양이었다. “그럼 우리끼리 남쪽 평원에서 조용히 지내면서 결혼식을 기다리기로 하지 뭐. 한 삼일 정도 일찍 가서 평원 주변의 숲 속에서 소풍이라도 즐기다가 결혼식에 참가하면 되겠지. 그럼 되잖아. 대신 너희들도 이번에는 천막 안에서 잘 생각을 해야 한다. 알 았지? 그럼 마차는 없어도 되니까 이동에 힘이 많이 들지도 않을 테고 말이야.” “좋아요. 나도 천막에서 자는 것에 찬성. 역시 야영이란 그런 맛이 있어야 하는 거 야. 호호호.” “그래요 저도 찬성이에요. 대신에 맛있는 음식 준비를 많이 해 가지고 가야 해요. 재료가 모자라면 안돼요. 특히 자이곱은 많이 먹으니까, 화아 오빠나 지토 아저씨보 다 더 많이 먹는 거 같아. 호호.” 이런 때에는 자이곱만 불쌍하다 어디 한 곳에도 투덜거릴 사람이 없는 것이다. 처음부터 아랫사람으로 자신을 낮추었던 탓에 동등한 입장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별로 그렇게 대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도 자이곱은 여전히 자신을 낮추어 밑으 로 자리하기를 원했다. “그런데 루탄님, 이번에는 누구누구 가는 건가요? 전부 다 가는 건가요?” 이루비아가 물어본 말이었다. “글쎄, 사람은 가끔 휴가도 필요하고 그런 거니까. 일단 넥스 영지의 모든 기사들 과 병사들에게 휴가를 주기로 하지. 그래봐야 삼사 일 정도의 시간이겠지만 지금까지 상당히 오래 휴식다운 휴식은 없었으니까 말이야. 물론 기충 때문에 수련중인 사람들 은 제외하고 말이야. 그들은 밖으로 나오게 해서는 안 되니까 말이지. 그 정도면 넥 스 영주도 찬성을 할 것 같은데?” 지금 기충을 지니고 수련하는 사람은 60명 정도 되는 인원이었지만 그들은 넥스 영지 의 영지민이 거주하는 곳에서 상당히 떨어진 산맥의 계곡 안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특별한 명령 없이 아르미엘 사제가 열심히 수련을 하도록 하는 명 령만을 내린 상태여서 딴 생각 없이 오로지 수련만이 자기가 해야 할 일의 전부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수련 중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들에게는 그렇게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기충을 주입한 것이 었다. 그리고 그들은 처음 계획대로 일체 출입이 통제된 상태에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혹시라도 생길 수 있는 문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럼 형님께서는 이번 여행에 우리 여섯과 이루비아, 아르미엘 사제님, 그리고 자 이곱을 데리고 가실 생각이십니까? 아니면 다른 넥스 영주님과 기사단의 대장들도 함 께 데리고 가실 생각이십니까?” 아마도 광아는 내가 그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가기를 원하는 모양이었다.(그냥 느낌 이 그렇게 왔다. 말의 뉘앙스라는 것이 있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에게 더 큰 위세를 보일 수 있다는 생각도 있을 테고 말이다. 내가 보기에 광아는 자이건과 아세트의 손을 들어주고 싶은 모양이었으니까 말이다. “아니. 넥스 영주 등은 함께 가지 않을 거야. 그들은 이 곳을 지키고 관리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니까 말이지.” 나는 한 마디로 잘라 대답했다. 왜냐면, 그건 사람들이 많이 가게 되면 수아나 루아등이 원하는 소풍 같은 느낌의 야 영을 할 수 없는 탓이다. 단지 이유가 그것뿐이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을 해 주고 싶다. 하하 시간은 참 빨리도 흘러가는 것 같다. 초대장을 받은 것이 어제 같은데 벌써 보름이 넘게 지나고 드디어 결혼식을 나흘 앞 둔 날이다. 우리들은 이미 계획을 했던 대로, 넥스 영주에게 말미를 얻어 결혼식 참석 여행을 출 발하고 있었다. 이제는 순간이동으로 움직이는 것도 습관이 되었는지 모두들 환수는 신계로 돌려보내 고 맘맘만 광아가 안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물품들이야 모두 내 창고에 들어 있었으니 간편한 차림으로 그야말로 앞산에 산책 가는 폼으로 이동마법진에 오르는 일행이었다. 그나마 허리에 차고 있는 무기들이 생판 놀러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웅변하는 듯 이 보였다. 일행들이 마법진에 오르자 나는 마법을 발동 시켰다. 우리들의 목적지는 한타리아의 남쪽 지역에 위치한 평원의 동쪽 가장자리였다. 그 동안에 광아가 이동지역의 좌표를 알아 가지고 왔고, 내가 먼저 가서 위치를 확인 하고 돌아온 곳이었다. “우와!! 멋있다. 어떻게 이런 곳을 찾았어요? 정말 예쁜 곳이에요.” “정말 멋있어요. 수아언니. 호호.” “그래, 정말 아름다운 곳이구나. 이렇게 작은 호수도 있고...” 순간이동이 끝나면서 튀어나온 여동생들과 루아의 탄성은 그 동안 내가 이 곳을 찾 기 위해 남모르게 흘린 땀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되고도 남았다. “정말 마음이 편안하게 가라앉는 기분이군요. 형님. 어떻게 이런 곳을 찾으셨습니 까? 제가 알려 드린 곳과는 상당히 떨어져 있는 것 같은데요?” 광아가 옆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평원의 가장자리에 있는 숲 속이었다. 나무들이 제법 울창하게 자라 있었고 대부분이 활엽수로 이루어져 있어 제 철을 만 난 단풍들이 그야말로 최고조에 이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나무들로 둘러싸인 곳에 작은 연못이 하나 있었고 그 연못에서 시작한 물길이 졸졸졸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 연못 옆으로 널찍한 공터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아마도 커다란 나무 몇 그루를 몇 년 전에 베어낸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전에 이 곳을 발견하고는 그 나무 그루터 기를 보이지 않게 제거하고 천막을 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두었던 곳이었다. “그거야, 모처럼의 소풍인데 좋은 곳에서 지내야 하지 않겠냐? 그나마 남쪽이어서 아직 나뭇잎이 많이 떨어지지 않았고, 단풍도 한창이라 다행이구나.” “그럼 여기에서 지내실 겁니까? 다른 곳으로 옮기실 생각은 없으신 거지요?” “응, 그래. 그런데 그건 왜?” 나는 갑작스런 광아의 물음에 되물었다. “아닙니다. 그저 저는 마췬길드와 자이건에게 잠시 다녀와야 할 것 같아서 여쭤본 것뿐입니다.” “응? 그래? 하지만 모처럼의 휴가인데 일은 잠시 잊는 것이 좋지 않겠냐?” 나는 광아가 부쩍 길드와 한타의 일에 관심을 많이 가지는 것 같아서 한 마디 했다. (왠지 개인적인 감정으로 자이건과 아세트를 돕는 느낌이 든다. 그들을 아끼는 듯한 느낌이...) 새롭게 다른 무엇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것이 나쁜 것도 아니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무언가에 대해 눈을 뜨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마음속에 슬며시 스며드 는 이 휑한 느낌은 그 근원을 모르겠다. 어쩌면 나 이외에 다른 사람을 아끼는 마음을 가진 것에 대한 질투일지도 모르겠다. “네, 형님.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오래 걸릴 일도 아닌걸요. 그럼 갔다 오겠습니 다.” 광아는 내 말에 그렇게 대답하고는 스크롤을 찢어 사라졌다.(요즈음 새로 만들어 낸 스크롤이었다. 출발지와 도착지 모두가 설정되지 않고 이동만이 설정된 것으로 도착 지 의 좌표를 설정해 넣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것이 었다. 아니 좌표를 알기만 해도 누구나 사용이 가능한 것이다. 요령만 안다면....) “자, 그럼 여기서 쉬다가 결혼식에 가기로 하자. 일단은 내일과 모레 밤까지는 여기 서 지낼 테니 우선 화아하고 지토 자이곱은 나하고 같이 천막을 치도록 하고, 거기 여 자분들은 저쪽에서 음식 준비를 서둘러 주시겠습니까? 참, 풍아는 이쪽에 식탁을 좀 꾸며주고...” 역시 풍아를 요리에 참가시킨다는 것은 위험하다. 나는 창고에서 이것저것 필요한 물건들을 꺼내 놓기 시작했고, 천막을 치는 녀석들 과 음식을 준비하는 여자들이 제각각 필요한 물건들을 들고 나르기 시작했다. “겨우 삼일 밤을 잘 곳이라곤 하지만 그래도 튼튼하게 만들어야 해. 이번에는 천막 이고 뭐고 마법은 전혀 쓰지 않을 테니 말이야. 그러니까 그야말로 자연 속에서 지내 는 거야.” 나는 그렇게 말하며 천막들을 치기 시작했다. 여자들을 위한 4인용 천막이 하나, 그리고 남자들을 위한 3인용 천막과 4인용 천막 둘이 만들어 졌다. 사람의 수는 적었지만 이왕이면 넓게 지내자는 말에 따른 것이었 다. 그렇게 천막을 전부 치고 난 다음에는 서둘러 잊고 있었던 환수를 소환해 내었다. 정말 란이는 요즘 거의 잊혀진 녀석이 되어가는 것 같다. 소환을 해서 곁에 두어도 그저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뾰로롱 뾰로롱 거리는 것 이외에 는 나에게 별달리 말을 걸지도 않았고, 나도 란이에게 신경을 많이 쓰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뾰로롱 뾰로로 뾰롱 - 이번에는 그래도 일찍 불러 주시네요. 주인님. 역시 이 녀석도 맺힌 것이 많은 모양이다. “미안하구나 란아. 많이 서운한 모양이구나?” 뾰로로롱 뾰롱 - 별로 서운한 것은 없어요. 주인님이 이루비아랑 친하게 지내느라고 저는 옆에 있는 지 어떤지도 신경을 안 쓰시는 것도 이해할 수 있고, 둘이 있고 싶어서 저를 신계로 자주 보내시는 것도 이해할 수 있고, 신계에 보내 놓고는 며칠 까맣게 잊고 있는 것 도 이해할 수 있고 또..... “하하하, 라, 란아. 그러니까 그게... 하하.” 그러고 보니 내가 좀 심했나? 하지만 예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왠지 란이는 옆에 있는 지 없는지에 대한 자각이 별로 생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 뭐 루아와 함께 있을 때에는 유독 신경이 쓰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단 둘만의 시간 을 가지고 싶은 경우가 아니라면 란이의 존재에 대해 잊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이다. 그러니 신계에 보내놓고는 잊어 버리기도 하는 것이고 말이다. 뾰로로롱 뾰뾰롱. - 괜찮다니까요. 저기 이루비아가 오네요. 저는 저기 가서 따로 놀고 있을께요. 차라 리 아눈이나 게브랑 노는 것이 더 좋아요. 란이는 그렇게 팽하니 토라진 말을 하고는 풀풀풀 날아서 아눈이 엎드려 있는 곳으 로 가 버렸다. 녀석 많이 마음이 상한 모양인데 어쩌나.... “저기 오빠, 여기 음식 하는데 좀 도와주실래요?” 음식이라. 이제는 나도 손을 뗀지 오랜 일인데... 실제로 수아와 루아가 이젠 거의 모든 음식을 만들고 있었으니 말이다. 흐흐, 아마도 나를 부르는 것은 나하고 같이 있고 싶은 루아의 마음일거야. 흐흐흐. “오빠, 이상해요 그런 웃음은. 무슨 웃음이 그래요?” 루아가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말을 하고서야 나는 내 표정이 정말 가관이었겠 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옆으로 째지게 뜨고 입에 침을 흘리는 모습으로 흔히 표현되는 그런 모양이었겠 다는 생각이 드니 말이다. “뭐, 아무것도 아니다. 자, 그럼 가 보자. 오늘은 무얼 만들어 먹을 생각인데 나를 부르는 거냐?” 나는 루아의 눈을 피해 얼른 앞으로 걸어 나갔다. 뒤에서 루아가 조금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면 따라오고 있을 것이 뻔한 일이었지만 나는 모르는 척 수아에게 다가갔다. “수아야, 나 불렀니? 도와 줄 거라도 있어?” “아니요. 제가 오빠를 불렀겠어요? 루아가 오빠랑 같이 있고 싶으니까 괜히 부르러 간 거겠지요. 호호.” 역시다. 하지만 이젠 수아까지도 나를 놀리는 이상한 표정이다. 그래, 놀려라 놀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 뭐 어떻겠어 다들 즐거워하면 그만이지 솔직히 이렇게 놀림을 받는 것도 그리 기분 나쁘지도 않은 일이니까. 그 후로 나는 화아와 지토, 자이곱이 천막을 치는 동안에 수아와 루아가 음식을 하 는 것을 옆에서 거들면서(실제로는 별로 하는 일도 없이 얼쩡거렸다.) 빈둥거렸고, 식 탁 준비를 끝낸 풍아는 카다와 함께 주위 구경을 한다면서 날아갔다. 광아가 돌아오고 식사가 끝난 시간은 해가 지고 그 뒤를 따라 온 어둠들이 여기 저기 에서 몸을 부풀리는 시간이었다. “식사도 끝이 났으니까 이젠 중앙에 불을 피우자. 오늘 밤에는 마법으로 빛을 내는 것은 하지 말기로 하고, 모닥불을 피우고 둘러앉아서 이야기를 하도록 하자꾸나. 뭐 그러다가 피곤한 사람은 들어가 자면 될 거고 말이야.” 식사가 끝나고나서 내가 한 이런 제의 때문에 우리들은 천막들의 입구가 마주보며 만 들어 놓은 가운데 공터에 모닥불을 피우고 둘러앉았다. 루아는 내 옆에 앉았고, 아르미엘이 그 옆에 따라 앉았다. 그리고 그 옆에는 광아가 앉았고 다음이 지토, 풍아, 자이곱, 수아, 화아의 순이었다. 그러니까 내 오른쪽에는 루아가 있었고, 왼쪽에는 화아가 있는 셈이었다. 뭐 그 사이에 게브가 지토 곁에 있거나 아눈이 화아 뒤에 있거나 란이가 카다와 함 께 풍아 곁에(아직 많이 삐진 것 같다.) 있거나 하는 식으로 환수들이 끼어 있기는 했 다. 우리들은 음료수와 가벼운 알콜을 투박한 잔에 따르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사실 이런 자리를 가져 본 사람이면 누구나 알겠지만, 그런 자리에서 이야기 를 한다고 해도 거의 주변에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다. 작장에 다니는 사람들이 직장동료와 이런 자리를 만들면 그들의 일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우리들이라고 그리 다를 것은 없었다. 여기저기서 오가는 말들은 거의가 넥스 영지, 기사단, 훈련, 음식, 제란, 암흑제 국.... 이런 이야기들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마저도 중간에서 끊어지면 나중에는 그저 무료하게 모닥불을 바 라보며 멍-한 시선이 되기 마련이다. 그것은 우리들도 별반 다르지 않아서 한동안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우리들은 나 중에는 시들해져서는 타오르는 불꽃을 홀린 것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한 번 해 본 사람은 안다. 타오르는 불꽃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왠지 빨려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이상하게도 모두들 그런 분위기에 젖어들고 있었다. “저기, 저는 말입니다. 암흑제국의 남쪽 중앙지역의 한 구석에서 태어났습니다.” 의외로 침묵을 깨고 입을 열어서 불꽃에 사로잡혀 흐느적거리는 분위기에서 우리들 을 끌어낸 것은 자이곱이었다. 나는 슬며시 고개를 들고 모닥불에 가려져 조금은 일렁거리는 자이곱의 거대한 몸집 을 건너다보았다. “어린 시절은 누구나 그렇듯이 최대한 몸을 사리고 살아야 했습니다. 아버지란 작자 가 있었지만 어머니는 제가 누구의 자식인지 모르시는 분이었지요. 이를테면 어머니 는 아버지의 손님 접대로 보내지는 용도였으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별로 상 관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사는 곳에서는 그런 일이 너무도 흔한 일이고 유달리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렇게 제 유년이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문 제는 제가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몸집이 크고 힘이 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건 상당 히 돈이 될 만한 가치가 있었지요. 그래서 아버지란 작자는 제가 성인이 되는 순간 저 를 팔아버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노예로 팔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러니 저는 당 연 히 그런 경우를 당한 많은 아이들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밤을 틈타서 도망을 갔습니 다.” 그렇게 말을 하던 자이곱은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그렇게 마음이 격앙되지는 않았던지 목을 축이는 자이곱의 태도는 급하지 않고 느긋 한 모습이었다. “암흑제국에서 마을이 하나의 단위로 움직이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물론 더 상위 의 마을의 지배자에게 그 마을의 최고 권력자가 지배를 받는 것이야 당연한 것이지만 일단은 최소 단위가 마을 단위이지요. 하지만 도망을 나온 아이들은 그런 소단위의 마 을에 끼어있지 못합니다. 힘이 있으면야 어디에서든 발을 붙이고 살겠지만 그렇지 못 한 상태에서는 그럴 수가 없지요.” “그럼 어떻게 살아요? 나이도 많지 않은 아이가 가출을 해서....” 수아가 옆에 앉은 자이곱에게 묻는 말이었다. “그런 경우에는 밀림을 전전하며 지내게 됩니다. 밀림이란 죽음과 삶을 동시에 주 는 곳이지요. 정말 재수가 없으면 독충에게 물려 허무하게 죽기도 하지만 정신만 차 리 고 또 심각한 불운만 없다면 곳곳에 먹을 것이 넘치는 곳이니 쉽게 굶어 죽지는 않지 요. 물론 잡아먹는 것이 아니라 먹히는 경우도 있지요. 맹수뿐만이 아니라 괴수들도 많으니까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밀림에서 살아가는 것은 하나의 수련이라고 할 수 있 습니다. 그 속에서 생존을 배우고 약육강식을 배우고 또, 투술을 배우게 되는 것이지 요. 저는 밀림에서 그렇게 하나 하나 살아가는 방법들을 배웠습니다. 때로는 사람을 베고 필요한 물건들을 빼앗는 경우도 있었고, 때로는 부랑자들의 패거리에 끼어 살기 도 하면서 지낸 시간이었지요. 하지만 그런 시간들만이 저에게 있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 무슨 일이 있었는데? 응?” 풍아가 자이곱의 말을 서둘러 재촉했다. “어느 날 아까 말한 정말 심각한 불운에 빠진 사람을 발견했던 것이 저의 새로운 삶 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밀림 속에서 독충에게 물려 버린 어떤 녀석을 발견하게 되었 던 것이죠. 더구나 그 녀석은 제법 든든한 배경을 지니고 있었던 모양인지 상당히 많 은 호위병들을 거느리고 있었단 말입니다. 저는 척 보고서 그 녀석이 마수 사냥을 나 온 지체 높은 집안의 녀석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아비의 후광을 잔뜩 받 고 있는 녀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요. 어쩌면 질투였을 겁니다. 저의 처지와 녀 석 의 처지는 너무도 달랐으니 말이죠. 그래서 녀석이 잠든 깊은 밤에 녀석의 천막으로 스며들었습니다. 녀석은 독충에게 물려 상당히 약해진 상태였고 반응이 느렸지요. 그 저 목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입을 막고 숨을 끊어주는 것으로 끝이 났습니 다. 지금이야 그런 행동을 하지도 않겠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것이 그다지 양심이나 마음에 거리낄 것이 없었습니다. 그게 제 삶의 모습이었으니 말이죠.” 자이곱은 다시 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 놓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일 것이었다. 자이곱은 다시 모닥불로 눈길을 던지며 입을 열었다. “녀석을 죽이고, 저는 녀석을 바닥에 구겨 두고서 침대에 걸터앉았습니다. 그리고 조금 허탈한 마음에 칼을 의지해서 몸을 가누고 있었지요. 꼭 앞으로 쓰러져 버릴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그 때 구겨져 있는 죽은 녀석의 몸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이 있었 습니다. 녀석의 등에 붙어서 마지막 숨을 고르는 것처럼 죽어 가는 모습을 한 마법 갑 옷이었습니다. 저도 한 번도 본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게 뭔지 정도는 알 수 있었 습 니다. 저는 정신없이 그것을 녀석의 등에서 떼어 내었습니다. 그리고 어찌할 바를 몰 라 할때, 크라튼이 말을 걸어 온 것이죠. 자신과 계약을 하자면서 10년의 수명을 준 다 면 내가 죽을 때까지 나를 돕겠다는 것이 조건이었습니다. 저야 그런 계약에 대해 아 는 것도 없었지만 크라튼 역시 그 상황에서는 다시 마계로 소환되어 언제 다시 불려 나올지 모르는 어둠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서둘로 나와의 계 약 을 하고자 했던 것이지요. 그 때문인지 몰라도 그렇게 큰 대가를 치루지 않고 대급 마 수를 얻을 수 있었던 겁니다. 물론 처음부터 동화가 제대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지 만 다행하게도 동화력이 조금은 있었던 모양인지 크라튼을 소환하는 것이 가능했습니 다. 그렇게 크라튼을 얻었던 것이 제 나이 스물하고 둘의 일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에 는 서둘러 그 지역을 벗어나야 했습니다. 내가 죽인 녀석의 아비가 막강한 권력을 지 니고 있었기 때문에 도망을 가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뭐 들키지 않았다면 문제가 없 었겠지만 재수 없게도 병사들에게 들켜서 겨우겨우 도망을 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서 수배가 되더군요. 그래서 여기 저기 도망을 다니다가 결국에는 한타와 여인왕국에 까지 흘러 들어갔었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눈을 떳지요. 제가 그때까지 살아 온 것 만이 삶의 방법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저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 모습대 로 살아보려고도 했습니다. 참 많이 노력을 했지요. 하지만 결국에는 어릴 때부터 보 아오던 그 습성을 버리는 것이 쉽지 않더군요. 암흑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서 느꼈습니다. 역시 나는 이런 존재밖에 안 되는 것이구나 하고... 그래서 사람들도 많 이 상하게 만들고 대쟁투에 참가도 하고 그렇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대쟁투에서 12강에 들었으면 굉장한 권력이 생기지 않나? 왜 그런 권력을 누리지 않았지?” 화아가 물었다. “살아온 삶의 방법이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래서 다시 여기저기를 떠돌면서 마음 편한 대로 지내고 있었지요. 그런데 한타와 여 인 왕국에서 본 삶의 모습이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만 마음속에 걸리는 겁니다. 그렇게 살 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그런 갈등으로 술을 마시고 나면 다음날 어김없이 칼이 피에 젖어 있거나 물건이나 건물들이 흉측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겁니 다. 정말 많이 자제를 하려고 했지만 안 되는 것도 있었고, 꼭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 좋은 것이냐는 반발심도 있었습니다. 물론 제가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었고 그리움이었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생각한 것 이 있었습니다. 멋대로 살다 언젠가는 밀림의 작은 독충에게 물려 죽을 수도 있는 것 이 삶인데, 조금은 의미 있게 살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제 자신이 저를 끌고 나갈 수는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저 자신보 다 더 믿을 수 있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을 찾기로 했습니다. 내가 살아갈 의미와 방 법 을 줄 사람을 찾기로 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두 번째 대쟁투에 참가하려고 갔다가 화 아님을 만났고, 루탄 주인님을 만난 것입니다. 전 알 수 있었습니다. 루탄님이 암흑 제 국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과 욕심이 없다는 것과 믿을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그냥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턱대고 졸라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기회를 놓치면 안 될 것 같았지요. 솔직히 그 때는 지금 말씀을 드리는 것 같은 제 마음을 제대로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저 그래야 한다고 생각을 했고 혼란스러웠을 뿐이었지요. 그런데 루탄 님 곁에 있으면서 제가 왜 그랬을까를 생각하면서 조금전에 말씀드린 그런 마음속의 변화들을 깨달을 수 있게 되었던 겁니다. 저는 그래서 루탄 주인님을 만난 것이 너무 도 기쁩니다. 이제 제란이란 자와 싸우다가 어디에서 주인님 모르게 눈을 감게 되더 라 도 스스로를 불쌍하게 여기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자이곱의 이야기를 그렇게 잦아들고 있었다. 모닥불의 불꽃이 조금씩 시들어 가고 있는 것처럼. 하지만 내 가슴은 모닥불의 재 속으로 간직한 숯덩이의 뜨거움으로 달아오르고 있었 다. 자이곱도 참 많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살아가는 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고, 그가 나 를 그토록 믿고 의지한다는 것을 알았으며, 내가 그에게 주어야 할 관심을 게을리 했 음을 반성했다. “그런데 자이곱? 어머니는 어떻게 되었어요? 그 뒤로 찾아보지 않았나요?” 수아가 자이곱에게 물었다. 자이곱은 수아에게서 시선을 떼어 다시 모닥불에 던지며 부지깽이로 모닥불의 불길 을 살려 내었다. “한타와 여인왕국을 떠돌다가 제국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어머니를 제일 먼저 찾 아 갔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 저는 그 마을의 최고 우두머리가 되었지요. 어버지라 는 작자에게 쟁투를 청해서 그의 부하들과 함께 쓸어버렸으니까요. 어머니는 계시지 않았습니다. 노예로 팔려 가셨더군요. 어디로 가신 것인지도 모르게 되어 버렸습니 다. 어머니가 북서지역으로 갔다는 말을 마을 사람들에게 간신히 얻어들은 것이 전부 였습니다. 덕분에 제가 북서지역에 적을 두게 되었던 것이고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 은 기대하지 않습니다. 찾아 볼 만큼은 찾았는데 어디에도 없는 것을 보면 돌아가신 것이 아닐까 하고 있습니다.” “진작 이야기를 하지 그랬습니까. 그런 문제라면 제가 알아 볼 수도 있잖습니까. 도 둑길드라면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정보를 찾을 수 있겁니다. 특히 노예의 거래에 대한 기록이라면 노예관리를 책임지는 자들이 알고 있을 겁니다. 기록은 있겠 지요. 귀 뒤에 붙이는 그 마법 문신과 노예 문서에는 특별한 구별이 들어 있는 것으 로 알고 있거든요.” 광아가 자이곱에게 책망하는 투로 이야기를 했다. “그건 저도 알고 있지만 어머니는 노예 문서도 없이 팔려 가신 것입니다. 암흑제국 에서 여자는 노예 문서가 없이도 거래가 되지요. 특히 힘이 있는 자들에게 그런 일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찾을 수가 없었던 겁니다. 어느 마을 우두머리에게 팔 려 갔는지를 알 방법이 없으니 말이죠. 아버지란 작자는 몇 년이 지난 일을 어떻게 기 억하느냐고 나에게 따지다가 목이 잘려 버렸으니까요.” 자이곱은 광아의 말에 대답하면서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성격이 급하게 아비라는 작자의 목을 베었던 것을 후회하는 듯 보였다. 어머니에 대한 열쇄를 쥐고 있는 유일한 존재였는데 그렇게 쉽게 목을 자르다니... 라는 회한의 표정이 서려 있 었 다. “미안해요. 쓸데없는 것을 물어서.” “괜찮습니다. 수아님. 그런 것을 물어봐 주신 것으로도 고맙고 기쁘게 생각합니다. 저 같은 녀석에게도 관심과 걱정을 주시는 분들이 계시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습니 다. 저는 지금 무척이나 살아있다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자이곱은 그렇게 말을 마무리하고는 술병을 들어 주둥이를 입에 물었다. 언뜻 자이곱의 눈끝에 이슬방울이 맺힌 것 같았다. 이글거리는 모닥불의 열기가 그것을 감추어 주고 있었지만, 곁에 있는 수아와 풍아 가 자이곱을 외면하는 것으로 봐서는 내가 본 것이 헛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 후로는 모닥불의 열기가 사그라지는 동안 서로의 어깨에 기대거나 묵묵히 깜빡이 는 불꽃들을 바라보며 고요 속에 몸과 마음을 묻었다. 멀리서 이름도 모를 새가 중저음의 낮은 소리로 울고 있었다. “자이곱이 참 불쌍한 것 같아요. 오빠.” “자이곱이? 왜 그렇게 생각을 하지?” 나는 루아의 물음에 되물었다. 우리는 지금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어둑한 숲길을 산책(?)하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이렇게 산책을 하기 위해서 아르미엘 사제를 풍아에게 맡겨야 했지만 결국에는 루아만을 데리고 모닥불 곁을 떠날 수 있었다. 우리들이 걷는 길 앞에는 작은 광구光球하나가 두둥실 떠서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어려서도 그렇고, 나이가 들어서도 그렇고 평범하지 못한 삶이잖아요. 그리고 자이 곱이 그런 삶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아무튼 불쌍하지 않아요?” 루아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듯이 끝말을 떼쓰는 아 이처럼 맺어 버렸다. “글쎄, 지금 자이곱은 불행하지 않다잖아. 그리고 잠시 불행했던 때가 있다면 자신 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몰랐던 얼마간의 시간이었겠지. 젊어서 밀림을 헤매고 다닐 때는 그것이 자신의 삶의 전부라고 생각하며 다녔을 테니스스로 만족하지 않았을까? 그 사람이 불쌍하다 그렇지 않다는 것은 그가 자신의 삶에 만족하냐 그렇지 않으냐에 달려 있겠지. 다른 사람이 겉으로 보이는 것을 보고 판단하는 것과는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객관적으로 불쌍해 보인다는 것은 인정하지. 자이곱의 삶이 객관적으 로는 불쌍하군.” “피이! 오빠는 가끔 이상한 것 같아요. 이런 때에는 그저 ‘그래 불쌍한 것 같다.’ 라고 말하면 그만이지 그걸 꼬치꼬치 따져야 겠어요?” 루아는 왠지 김이 빠진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하하, 그런가? 하하.” 역시 이런 때에는 머리를 긁적거리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다. 우리는 다시 말없이 서로의 어깨 체온을 나누어 가지며 숲길을 거닐었다. 솔직히 어디를 간다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었다. 그저 둘만의 시간을 가진다는 것이 중요할 뿐이었다. “그런데 이루비아.” 낮게 깔린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왠지 조금은 갈라진 것 같다. “우리 결혼하면... 그러니까 결혼식을 하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을...” “싫어요.” 음?!! 시 싫다니. 겨우 겨우 어렵게 이야기를 꺼낸 건데 싫다니... “왜!? 아니 왜 싫다는 거야!” 나는 너무도 간단하게 나오는 루아의 대답에 기가 막혔다. 그래도 조금은 긴장하고 생각하고 그리고 대답을 해야 하는 것이 정상적인 경우의 답 일 것이다. 그런데 청혼을 하는 도중에 말을 끊고 ‘싫어요’라니. 나는 허탈한 마음마저 들었다. “오빠는 바보 같아요. 자이건을 만나면 물어보세요. 아세트라는 분에게 어떻게 청혼 을 했는지. 세상에 ‘우리 결혼하면... 그러니까 결혼을 하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 을....’이라니. 그런 식으로 청혼을 하는 경우가 어디 있어요?” 이게 문제였나? 낭만과 환상을 겸비한 청혼이 아니었다는 것이... 하지만 내가 언제 누군가에게 청혼을 하리라고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었어야 말이지. 겨우 떠듬떠듬 말을 한 건데. “그, 그래. 알았어. 나중에 나중에 다시 ....” 나는 그렇게 고개 숙인 남자가 되어서 산책길을 돌아 왔다. 그리고 아직도 모닥불 곁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그만 자자는 말고 함께 천막 안으로 들 어와 버렸다. 그래 나 상처 받고 충격 받고 삐졌다. 잠시 후에 내가 있는 천막으로 지토와 자이곱이 들어왔고 아무 말도 없이 자리에 누 워 있는, 내 눈치를 살피더니 곧바로 잠자리에 드는 모양이었다. 담요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있어서 확실히는 모르겠다. 그리고 건너편 여자들 천막에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루아의 웃음만 빠져 있는 것을 보니 분명 루아는 얼굴이 빨개져서 있을 것이고, 그 이야기의 중심에는 내가 있을 터였다. 불쌍한 루아는 풍아와 아르미엘의 등살에 견디지 못하고 조금 전의 어벙한 프로포즈 와 퇴짜에 대해서 털어놓았을 것이다. 아! 왠지 내일 아침에는 천막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다. 어쩌다가 이런 신세가 된 것일까. 그나저나 어떻게 청혼을 해야 잘 했다고 소문이 나지? 루아가 어떻게 하면 좋아요 라 고 할까? 그러면서도 이런 생각을 하는 나는 정말 못.난.이.인가? 흐흑 *** 다시 한 번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제 목: 내 가족 정령들 [268 회] 글쓴이: 탁목조 2003-02-18 605 1 결혼식(2) - 1 잠에서 깨어난 아침부터 나에게 쏟아지는 여자들의 호기심어린 눈빛을 애써 무시하 는 것은 그런대로 견딜 만 했다. 하지만 겨우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모두들 같은 눈빛으로 나를 보는 것은 정말 견 디기 힘들었다. 그래서 결국은 지금 내가 이런 곳에 와 있게 된 것이다. 다들 불쌍하고 측은하고 재미있어하는 눈빛이 되어서 쳐다보는 눈빛을 견디지 못하 고 뛰쳐나온 나는 갈 곳이 없어서 결국은 한타리아로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시장 구경도 하고, 또 꼬치구이도 사 먹고, 호객을 하는 장사 치의 유치한 놀이도 구경을 하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그것도 나 혼자서. 하지만 여기서도 가끔씩 이상한 사람을 보는 것 같은 눈빛으로 나를 보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 나이에 꼬치구이를 들고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는 검은 머리에 하얀 색 옷을 입은 사람을 상상해 보면 될 것이다. 아무리 젊어 보인다고 해도 나도 이제 겉보기 나이가 스물 서넛은 되어 보이는 나이 다. 그런 내가 꼬치를 들고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는 것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으면 도리어 문제가 있는 것이겠다. “저기 죄송합니다만 말씀좀...” 나는 갑작스럽게 등 뒤에서 들려오는 사람의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뒤에 누가 오는지를 몰랐냐고 묻지 마라. 누가 있다는 것이야 알지만 특별 하 게 살기를 느낀다거나 하지 않으면 신경을 쓰지 않는다.) “아! 맞군요. 루탄님. 루탄님 맞지요?” 내 앞에서 탄성을 지르는 사람은 건장한 체구에 허리에는 검을 차고 있는 사나이였 다. “그런데 누구신지... 저는 도무지 모르겠군요.” 나는 눈앞의 사내가 기억나지 않았다. “하하, 이런 죄송합니다. 강철기사단 제1대에 속해 있는 우티치라고 합니다. 저를 모르시는 거야 당연하지요. 하지만 이런 곳에서 루탄님을 뵙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더구나 그렇게 머리카락을 잘라버리셔서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습니다. 하지 만 검은 머리카락이 흔한 것도 아니어서 확인을 해보려고 했던 건데...” “그런데 기사단 복장을 하지 않고 있네요? 무슨 일이지요?” 우티치라는 기사단원은 평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저희들이 정식으로 기사작위를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왕궁이 있는 한타리 아에서는 기사단의 복장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귀족들의 반발이 심하다고 하니 그 러려니 하는 것이죠. 괜히 마찰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 단장님의 뜻이니까요. ”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우티치라는 인물의 눈빛에서는 재미있다는 표정이 나타나고 있 었다. “그래놓고는 결혼식 날에는 모두들 기사단 복장을 하고 나타날 준비를 하고 있겠군 요?” 나는 슬쩍 찔러보듯 물었고, 역시나 반응이 확실하게 왔다. “어떻게... 혹시 단장님을 벌써 만나신 건가요? 그건 정말 비밀인데...” 나는 그렇게 구시렁거리는 그에게 빙긋 웃어 주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런데 왜 여기에서 이러고 계시는 겁니까? 그러고 보니 옆에 일행분들이 아무도 없네요? 형제분들과 친구분은 어디 가셨습니까?”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것인지. 하지만 나는 여전히 얼굴에 말하고 싶지 않음, 대답을 들을 생각을 포기하기 바람, 이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말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는 것을 이 기사는 알까? “그래 자이건의 결혼식 준비는 잘 되고 있습니까? 아주 성대한 결혼식이 될 것 같은 데 말이죠.” “물론입니다. 이번 결혼식에는 축하 인사를 하기 위해서 3황자이신 루이스 마치 한 타님께서도 오신다고 했으니 정말 대단한 결혼식이 되겠지요.” 음? 루이스가 온다는 말이야? 인사라... 물론 그렇게 간단히 생각하면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한편 다르게 생각하면 상당히 골치 아픈 문제가 될 수도 있겠 군. “네, 왕자님이 오신다니 대단하군요.” 나는 머릿속으로 우리는 생각이야 어찌되었든 겉으로는 놀랍다는 표정을 지어주었다. “그런데 자이건은 어디에 있습니까? 선드라스 공작가에 있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제가 안내를 해 드릴까요? 공작가로 가시겠습니까?” 이거 왜 이러나, 내가 그런 자리에 가서 무슨 곤욕을 치루겠다고 제발로 걸어들어 간 다는 말이야? 그런 자리를.... “하하, 아닙니다. 전 그저 여기 구경이나 좀 더 하다가 일행들과 만나야 하기 때문 에 공작가에 갈 수는 없겠습니다. 그냥 결혼식이 있는 날 보도록 하지요. 그럼 나중 에 뵙겠습니다.” 나는 공작가로 가자는 말에 뜨악해져서 서둘러 인사를 하고는 자리를 벗어났다. 우티치기사가 얼빠진 모습으로, 사라지는 나를 잡지도 못하고 서 있는 것이 조금 안 돼 보이기는 했지만 하는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기사와 헤어진 나는 서둘러 그에게서 벗어나다가 조요하고 깨끗해 보이는 거 리로 나오고 말았다. 시장거리에 비해서 훨씬 산뜻하고 깨끗해 보이는(물론 사람들의 정겨움과 생기가 좀 부족한 느낌이 있지만) 거리에는 아주 고급스러운 가게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옷을 파는 곳도 있었고, 보석, 도검류, 마법물품, 식당 등등 그야말로 시장에 있는 모든 가게들이 있는 것 같았지만 물건들이 고급스럽게 포장되고 진열되어 있는 거리 였 다. 여기 저기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한 눈에 보기에도 평민들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 게 하기에 충분한 모습들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내가 문 안으로 들어서자 종업원인 듯한 여자가 종종종 달려와서 허리를 숙였다. “어떤 물건을 찾으시는지요? 저희 가게에는 최고의 물건들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유 명한 바위정령족의 공예품도 몇 점 있으니 구경하시고 마음에 드시는 것이 있으면 말 씀해 주십시오.” 내가 찾은 곳은 보석과 예술품을 다루는 곳이었다. 나는 진열된 물건들을 이리저리 살피며 시간을 보냈다. 진열된 물건들 하나하나가 굉장한 값어치를 지니고 있는 물건들이었지만, 내 마음에 드는 것은 없었다. 나는 지금 자이건과 아세트에게 줄 선물을 골라 볼 요량으로 이 곳을 찾은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무슨 물건을 찾아야 할지는 정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저 이리 저리 눈길이 닿는 대로 물건을 살피는 것이 전부였다. 음? 이건? 그러는 중에 내 눈길을 끄는 것이 하나 있었다. 보석들이 진열된 한 구석에 놓여진 반지였다. “이게 마음에 드시는 모양이지요? 잠시만요.” 대단한 눈치를 지닌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 반지를 보고 일으킨 약간의 변 화를 눈치 채고는 즉시 유리 상자 안에서 그 반지가 들어있는 보관함을 들어 내었다. “이 물건의 재질은 백금에 약간의 이질적인 광물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세공은 바 위정령족이 한 것이고 특히 여기 이 반지를 돌아가며 박혀있는 일곱 개의 보석들은 역 시 알려지지 않은 광석입니다. 인간들이 채취하고 세공한 예가 없는 것이지요.” 반지의 굵기는 굵은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반지의 중앙에는 반지의 폭을 넘지 않게 최대한의 크기로 세공된 적홍색의 보석이 박혀 있었고 그 양쪽으로 반지의 테두리를 따라서 점차 크기가 작아지는 같은 재질의 보석이 세 개씩 박혀 있는 모양이었다. 그 비율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도 나는 처음 보는 보석이라는 것에 흥미 가 끌렸던 것이다. “그래 이와 같은 것은 또 없습니까? 아무래도 반지인데 이것은 여성용 같습니다만, 남성용으로 만들어진 것이 함께 있으면 좋을 텐데요?” 나는 종업원에게 그렇게 물었다. 아무리 반지가 멋있고, 마음에 들어도 짝이 없으면 반지는 반지로써의 가치가 없어진 다. 단순히 미적인 것을 위한 반지가 아니라면 나는 반지란 쌍이 있고 짝이 있어야 한다 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더구나 이 반지는 꼭 짝이 있어야만 가치를 지니게 되는 용도로 쓰일 것이었다. “어머, 어떻게 아셨어요? 이 반지 쌍으로 만들어진 것이에요. 잠시만요. 지금 주인 님께서 이 반지의 한 짝을 가지고 상담을 하고 계시는 중이어서요.” 그렇게 말한 여자는 곧 한 쪽 문을 열고 사라졌다. 나는 보관함 속에 놓여진 반지를 이리 저리 살피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내가 본 적이 없는 종류의 보석이었다. 그냥 보면 그게 유리가 되었든, 보석이 되었든 구별이 가지 않지만 어느 정도 보석 을 가지고 놀아보면 알게된다. 루비와 사파이어 수정, 금강석의 차이를 말이다. “죄송합니다. 손님 이 반지의 짝이 되는 반지는 지금 거래 중이어서 보여드릴 수가 없습니다. 다른 물건을 보시면 안되겠습니까?” 내가 그렇게 반지를 살피고 있을 때, 문을 나온 종업원일 그렇게 말했다. “이런, 죄송하지만 지금 거래 중이라면 제가 그 반지를 사려는 분께 양해를 구해볼 수 없겠습니까? 마음에 드는 물건인데 그 분께서는 짝을 사지 않으실 모양이니 그렇 게 되면 여기 남는 이 반지는 너무 가엾지 안겠습니까?” 물론 반지가 가엾다는 말은 말도 안되는 소리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 일하는 사람이 라면 내 말의 의미를 알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은 지금처럼 안될 일도 되게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에~ 좀 곤란하기는 하지만 일단 들어가셔서 이야기를 해 보시도록 주선을 하겠습니 다. 이리 따라 오시지요.” 나는 그 종업원의 뒤를 따라서 문 안으로 들어갔다. “조송합니다. 주인님, 이 분께서 반지를 꼭 사고 싶다고 하시면서 후작님께 양해를 구할 수 없겠느냐고 하십니다만....” 후, 후작? 이런, 혹시 마롤이라는 그 작자가 아닐까? “음, 이런 실례를 하다니. 손님께서 계시는데 먼저 의중을 여쭈었어야하지 않겠습니 까?” 주인인 듯한 사람이 여종업원을 꾸짖는 소리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무리한 부탁을 떼를 써서 드리는 바람에 일이 이렇게 된 것 이니 너무 이 분을 나무라지는 마십시오. 잘못이 있다면 저에게 있는 것이겠지요.” 나는 한 걸을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여기서 주인이 계속 종업원을 야단치면 나중에 나올 이야기는 뻔 한 것이었다. 어서 손님을 모시고 나가라. 뭐 이런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하지만 내가 이렇게 말을 하고 나서면 그 때부터는 내가 이들과 직접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결혼식(2) - “무슨 말씀을.... 종업원의 잘못은 그런 손님에게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도 포함 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들어오셨으니 일단 앉으시지요. 손님을 맞는 주인 된 도리로 서 있으시게 할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하하, 그럼 용무가 있으니 사양 않고 앉겠습니다. 그리고 먼저 와 계신 분께 죄송 하다는 인사를 드립니다.” 나는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주인이 권한 자리에 앉았다. “그래, 내가 사고자 하는 반지에 관심이 있다고 들었다. 맞나?” 이런, 반도막. 어디에서 말을 짧게 끝내는 거야? 나는 슬쩍 녀석의 얼굴을 살폈다. 40대를 넘어선 얼굴에 화려하게 치장된(그렇다고 촌스럽다는 말은 아니다.) 옷을 걸 치고 있는 균형 잡힌 몸매의 인물이었다. 코밑으로 기른 멋스러운 수염이 인상적인 사내였다. “하하, 죄송합니다. 제가 마침 그 반지의 짝이 되는 반지를 보고 마음에 들어서 함 께 구할 수 없을까 하고 물어본 것입니다. 아무래도 반지가 짝이 없으면 안 될 상황 이 어서 말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내가 이 반지를 포기하는 대신에 나에게 무얼 줄 거지. 그냥 포기 해 달라는 것인가?” 좀스러운 인간 같으니. “그거야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달려 있는 것이지요. 그것이 과하다면 들어 드 릴 수가 없는 것이고 과하지 않다면 들어 드릴 수 있는 것이고 말입니다.” “크크, 그렇겠군. 그럼 나는 내가 이 반지를 포기하는 대가로 여기 이 녀석을 선물 로 받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을 하나?” 그는 앞에 놓인 탁자위에 올려져 있던 물건 하나를 골라 들었다. 여성용 목걸이로 보이는 그것은 굉장히 화려하고 세공이 뛰어나 보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르틸 후작님, 이 반지의 가치는 그 목걸이의 가치에 비하면 하찮은 것이 라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요구하시다니요. 이분께서 그런 가치의 차이를 모르신다면 섣불리 대답을 하실 수도 있다는 것을 아시면서....” 마르틸 후작이라. 그러니까 이 나라의 재상이며 동시에 1황자의 뒤를 밀어 준다는 그 작자인가? “이런 재상님이신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혹시라도 결례가 있었다면 용서해 주십 시오.” 나는 예의를 차렸다. 하지만 마르틸이란 작자의 얼굴에서 나타난 것은 불쾌함이었다. 나의 반응이 별로 대단하지 못한 데에서 기인한 것이 틀림없는 그런.... 그런 내가 니가 재상이라는 이유로 벌벌벌 떨면서 땅이라도 기어야 하냐? 나는 그런 재상의 표정에서 기분이 상당히 상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고개를 들고 등 을 의자에 기대었다. 그런 내 행동 변화에 당황한 것은 주인과 후작 둘이었다. 재상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는 정중히 사과를 하던 녀석이 갑자기 거만스럽게 등을 의 자에 대고 고개를 치켜드니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쩌겠는가? 왜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있느냐고 따지자니 체면이 상 하겠고, 그렇다고 마주하고 앉아있자니 화가 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니 지는 것 같은 느낌이라 싫을 것이고. “그래 어떻게 하겠나? 이 목걸이를 선물로 주고 이 반지를 택하겠나?” 그래도 재상이라는 자리가 딱지치기로 딴 자리는 아닌 모양인지 재상은 자신이 가진 패를 활용해서 나를 공격해왔다. 나야 물론 그 반지가 탐이 나긴 하지만 그 요구조건을 그래도 들어주고 반지를 얻기 에는 출혈이(금전적인 문제가 아니라 자존심이) 너무 심했다. 여기서 반지냐 자존심이냐가 문제였다. 자존심을 살리면 반지를 얻을 확률이 아주 작 아지는 것이다. 하지만 자존심을 꺾기만 하면 반지는 내 것이 된다. 그까짓 목걸이 값이야 문제도 아 니다. 그냥 줄 수도 있었다. 처음부터 이 작자의 행동이 마음에 들기만 했다면 지금 탁자위에 있는 모든 물건을 선물로 주고 반지를 챙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이젠 그럴 수도 없게 되었다. “뭐, 이렇게 되면 하는 수 없이 그 반지를 포기하는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역시 아 쉽군. 장신구의 의미도 모르는 자에게 저런 물건이 들어가게 되다니 말이야.”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마르틸 후작을 바라보았다. “뭐, 뭣이라? 장신구의 의미도 모르는 자? 네놈이 지금 나에게 한 말이 분명한 것이 냐? 내가 누구라고 그 따위 주둥이를 놀리는 것이냐?” 허어? 마르틸 후작이라는 이 작자, 역시나 인간이 덜된 자로군. 그러기에 처음부터 반말을 늘어놓을 때, 대접을 해 주는 것이 아니었어. 그냥 밟아 버리는 건데. “네놈? 그러는 네놈은 내가 누군지 알고 그따위 언사를 함부로 하는 것이냐? 니가 한타의 재상이라고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이냐? 웃기는 놈이로군. 이봐 마르틸 후 작, 난 말이야 한타의 백성이 아니어서 말이지 너 같은 녀석의 말에 기가 죽을 이유 가 없는 사람이야. 그리고 지금 그렇게 큰 소리를 치는 것이 허리에 매어진 그 검을 믿고 하는 행동이라면 잘 생각을 해 봐야 할 거야. 우리 얼음기사단의 단장도 나에게 는 이길 수가 없으니 말이야.” 내 말이 끝나자 마르틸 후작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마도 열심히 머리를 굴리면서 우리 얼음기사단의 단장이란 말의 뜻을 풀이하고 있 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나올 수 있는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이 자는 그란드의 인물이다. 이 자는 얼음기사단을 아래에 두고 있다. 이 자는 그란드의 상위 계층이다. 나는 거의 모든 그란드 인물들을 알고 있다. 내가 모르면서 그란드의 상위 계층일 수 있는 인물을 대공이었다가 그란드의 왕이 된 이그와 관련된 인물밖에 없다. 그런데 이자의 머리색은 검은 색이다. 루탄이라는 전설의 인물도 머리색이 검은 색이었다. 그러므로 이 작자는 그란드의 이그왕과 관련이 된 인물일 가능성이 많다. 뭐 이정도의 결론이 마르틸 후작의 머리에서 풀어지고 있을 것이었다. “음. 내가 조금 흥분을 했던 모양이군. 그래 자넨 누군가?” 조금 가라앉은 마르틸 후작의 목소리였다. “나? 난 보통 루탄이라고 부르지. 다들 그렇게 불러.” 순간적으로 마르틸 후작의 얼굴을 스치는 것은 역시나 하는 표정이었다. “그렇군. 그럼 일단은 내가 먼저 잘못을 한 것 같으니 사과를 하지. 그런데 그란드 의 인물이 여기는 무슨 일이지? 서로 적대적이란 것은 아니라도 그란드의 주요인물이 이렇게 멋대로 돌아다니면 문제가 될 수도 있을 텐데?” “사과를 한다니 받아주지. 뭐, 물론 사과의 의미로 그 반지는 나에 양보하겠지? 그 리고 외교적인 문제라고 할 것까지는 없을 거야. 자이건과 아세트가 결혼을 한다기에 구경을 왔을 뿐이야. 초대장이 날아왔거든. 분명히 개인적인 방문이니 굳이 국가간에 알릴 일은 아니었다고 봐.” 내 말에 얼굴이 구겨지는 마르틸 후작이었다. 나라는 인물의 비중으로 볼 때, 아무래도 정적인 선드라스 가문에 힘이 보태지는 것 을 느낀 때문일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한 편으로는 정말 내가 그란드의 인물일 것인가 하는 의심도 하고 있을 터 였다. 처음 얼음기사단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야 급하게 그 쪽으로 상상을 하고 이야기를 끌어 모야 상상을 해 봤겠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정말일까를 의심하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말이야 자네가 그란드의 루탄이라는 인물이라는 것을 어떻게 믿지? 솔직히 자네가 그 인물이라면 내가 이런 하찮은 반지 정도를 양보하지 못할 이유가 없 지만 말이야.” 이 작자가 아주 나를 가지고 놀려고 하는 모양이다. 그 말 한 마디로 나는 그란드의 고위급 인물이 되어서 한타의 재상에게 하찮은 반지를 양보받는 격이 될 수도 있는 것 이다. “머리가 나쁜 것인가? 적어도 한타에서 그란드의 루탄이라는 인물에 대한 정보를 가 지지 못해서 나에 대한 진위를 알지 못한다는 말은 아닐 텐데? 뭐 그렇다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말이야.”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조금 떼었던 등을 다시 의자 등받이에 기대었다. “크크크, 하긴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겠군. 어차피 공식적인 방문도 아닌데 내가 굳 이 신경을 써야 할 이유도 없는 것이고 대접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지. 그러니 여기 에 서 서로의 지위란 별로 상관이 없는 것이 되겠군. 그리고 서로에게 험한 소리를 할 만 큼은 했으니 사과를 한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해야 할 테고 말이야. 그러니 굳이 이런 하찮은 반지에 대해서 양보를 하라고 할 어떤 근거도 자네에겐 없는 것이 아닐까싶 군. 안 그런가?” 역시나 만만한 자가 아니다. 증거를 대고 서로의 신분을 드러낸다 하더라도 자신이 손해를 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뭐 그렇지만 그게 크게 틀린 말도 아니다. 솔직히 반지는 내 것도 재상의 것도 아니 고 팔려고 내어 놓은 물건이고, 그가 먼저 물건을 골랐다는 것은 변함이 없는 사실이 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그리고 생각을 해 보니까 말이야. 그 반지에 내가 연연할 이유도 별로 없군. 나도 알고 지내는 바위 정령족이 몇 되니 그들에게 부탁을 하는 편 이 더 좋을 것 같거든. 그럼 나는 이만 볼 일이 없으니 일어나지. 참, 자이건의 결혼 식장에서 보자구.” 마르틸 후작의 얼굴이 어떻게 구겨지든 나는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지금 나에게 급한 것은 일행들에게 돌아가서 해야 할 중요한 몇 가지의 일들이었다. 나는 밖으로 나와서 여 종업원에게 고마웠다는 인사를 해 주고는 가게 문을 열고 거 리로 나왔다. 그리고는 사람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사각지역에서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순간이동 을 해 왔다. “어디를 그렇게 돌아다니는 것이냐? 한동안 찾아다녔잖아.” 지토가 빛무리와 함께 나타난 나에게 투덜거리는 소리가 먼저 들렸다. “음? 다들 어디를 간 거야? 안 보이네?” “어딜 가기는 어딜 가? 다들 너 찾으러 나갔지. 아침나절에 나간 녀석이 점심 시간 이 되어서도 오지 않으니까 걱정이 되어서 이리 저리 찾으러 다니는 거잖아.” “그, 그래? 미안하다. 쩝.” 다시 머리를 긁적이는 내 모습. 왜 요즘은 이런 폼이 되는 때가 많은 것일까? 하지만 내가 채 머리에서 손을 내리기도 전에 다시 하나 둘 나타나는 동생들과 루 아, 자이곱, 아르미엘 등으로 인해서 나는 머리에서 손을 내릴 수가 없었다. 여전히 멋쩍은 모습으로 긁적 긁적 하고 있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하지만 일행들이 모두 모였을 때, 나는 그들 모두를 데리고 한타리아로 들어왔다. 이유는 쇼핑. 일단 결혼식을 앞두고 우리 일행들도 꾸밀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다들 이것 저것 옷을 고르고 그 자리에서 수선을 하고(돈이 많이 들었다. 시 간이 급했기 때문에...)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대체적으로 남자들이야 그리 많은 손길이 필요하지 않았지만(이건 순전히 여자들에 비해서이다.) 여자들은 그야말로 굉장히 많은 시간과 공이 들어가야 했다. 거기에 더 한심한 것은 지금 준비를 해 두고 당일 아침에 다시 여기에 와서 마무리 를 하고, 옷이며 장신구들을 착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서도 나는 또 한 번 실망을 하고야 말았으니 그건 아르미엘이 끝까지 로 브를 벗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아르미엘의 얼굴을 볼 수 있지 않을까를 기대하던 자들(나와 다른 모두들, 심지 어 아르미엘까지)은 실망의 표정을 감추지 않았지만 절대로 그것만은 할 수 없다는 비 장하기까지 한 아르미엘의 반응에 다들 몸을 사려야 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저렇게 로브에 얼굴을 숨기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전에 볼 때(그러니까 고개를 약간 들어서 턱선을 본 적이 있었다.) 그리 이상해 보이 는 구석도 없는 것 같았는데 말이다. 그렇게 일행들의 복장 점검이 끝나고 나서(저녁 시간이 훨씬 넘어 있었다.) 우리들 은 근처의 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하고 야영지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잠시 주춤했던 나에 대한 이상한 눈초리가 다시 시작되는 것을 느끼고(어벙 벙한 청혼에 관한, 그 이상하고 야릇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나는 곧바로 천막 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밖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를 듣다가 참지 못하고 (그게 그렇게 재미가 있나? 다들 한 번씩은 흉내를 내고 있었다.) 순간이동을 도망을 쳤다. 그것도 아주 장거리로.... “모루정, 모루정 있어요? 나 루탄입니다.” 나는 예전 우리 일행이 처음으로 바위 정령족의 족장을 만났던 계곡의 문 앞에서 큰 소리로 모루정을 부르고 있었다. 솔직히는 족장이나 달군쇠를 부르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그들은 이들 바위정령족의 우 두머리에 해당하는 인물들이라 함부로 부르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내가 그렇게 두어 번 소리를 지르고 나자, 예전에 우리들이 들어갔던 그 커다란 동굴 이 열리며 모루정이 달려(굴러!!)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루탄님.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서 무척 반갑습니다.” 본지 그리 오래 되지도 않았는데 모루정의 인사는 정중하고 반가움이 넘치는 것이었 다. “저도 반갑습니다. 그 동안 잘 지내지요?” “물론입니다. 루탄님. 그런데 이 늦은 시간이 여기는 무슨 일로...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뭐 물어 본다고 대답을 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 말을 돌리는 것이 최상 의 방법이다. 그래서 적당히 다른 이야기를 나누며 걸음을 옮겨 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우리는 예전 족장과 마주했던 그 방에서 탁자를 사이에 하고 마주 앉았다. “저기, 다른 것이 아니고 부탁이 좀 있어서 왔습니다.” “네? 부탁이라니요?” “그게....” 나는 모루정에게 오늘 낮에 한타리아에서 본 반지에 대해서 이야기했 다. “아! 기억이 납니다. 그게 어떤 것인지 알겠군요. 제법 잘 만들어진 반지들이지요. 더구나 한 쌍의 조화가 아주 뛰어나게 세공이 된 것들이지요. 뭐 약간의 하자가 있어 서 인간들에게로 흘러 들어간 것이긴 합니다만... 그 정도면 뛰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하자가 있는 물건이라고? 내가 이상한 표정을 짓자 모루정이 입을 열었다. “하자가 있다니까 놀라신 모양입니다. 솔직히 말씀을 드려서 우리 종족이 만든 물 건 중에서 하자가 없는 물건은 열 중에 하나를 넘기 어렵습니다. 실력은 되지 않으면 서 눈만 높다고 할까요? 하지만 기왕 만든 물건 다시 폐기하기에는 그래도 아까운 것 들이 있으면 인간들에게 팔기도 합니다. 솔직히 완전하지 못한 것을 파는 것이라 찜 찜 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인간들이 만든 어떤 물건보다 뛰어나다는 자부심으로 위로하고 파는 것이지요. 그리고 완전하다 싶은 물건들은 팔기 보다는 선물을 하거나 아니면 곱 게 모셔두는 것이 저희들의 습관입니다. 그러니 인간들이 가진 물건들 중에서, 그러 니 까 저희가 만든 물건들 중에서 선물이 아닌 거래로 받은 대부분의 것들은 하자가 있 는 것들이지요. 아주 미세한 것일지라도 말입니다.” “네, 그렇군요. 이제 알겠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그런데 부탁이 있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저기, 그러니까 제가 이번에 반지 한 쌍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나는 말을 꺼내기가 쑥스러워 머뭇거리다가는 모루정의 초롱이 눈빛에 어쩔 수 없이 다음 말을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청혼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멋진 반지를, 아니 아름다운, 아니 좋은, 아니 그냥 나와 루아에게 가장 잘 어울릴 반지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반지를 만들어 주실 수 있는지.... 될 수 있으면 빨리 만들어 주셨으면 하는 생각에 이렇게 부탁을 드리러 왔습니다.” 내 말에 모루정은 상당히 놀란 눈빛이 되었다. “결혼에 쓰실 반지, 아니 청혼에 쓰실 반지를 필요로 하시는 군요? 그래 그게 언제 까지면 되겠습니까? 제가 책임지고 세상에서 둘도 없는 반지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얼마전에 아주 희귀한 광석 하나를 발견했는데 이런 곳에 쓰게 되어 있 는 것이었던 모양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꼭 최고의 반지를 만들어 드리겠 습 니다.” 모루정은 놀란 얼굴을 결의에 찬 빛으로 바꾸며 나보다 더 흥분해서 다짐을 하고 있 었다.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루정님. 그런데 그 반지가 얼마나 오 래 걸릴까요? 최대한 빨리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만....” “글쎄요. 아무리 그래도 시간은 좀 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그게 워낙 희귀한 광 석이라 가공하는 데에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아무래도 한 달은 조금 더 걸릴 것 같습니다만...” 한 달이라... 어떻게 보면 정말 짧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내 경우 같으면 상 당히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다. 어찌되었든 모든 것에 대한 판단과 느낌은 주관적이며 상대적인 것이다. 물론 지금 의 경우 시간이란 나에게 상당히 조급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청혼, 한 번 시 작 을 했으면 끝을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정말 내가 싫어서가 아니라 만족할 정 도의 프로포즈가 아니었다는 것이 문제라면 남은 것은 노력이외에는 없는 것이다. 그 리고 그런 일을 미적 거리고 있을 수도 없는 문제고 말이다. “루탄님, 제가 전에 결혼을 할 때는 말입니다. 제 아내에게 상당히 무관심한 척을 했었습니다. 처음에는 청혼을 했다가 딱지를 맞았거든요. 그래서 다음에는 무관심한 것처럼 행동했더니 나중에는 알아서 기대 오던걸요? 지금 루탄님을 보니 너무 조급해 하는 모습이 드러납니다만.... 여유를 가지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내가 어떻게 보였는지는 모르지만 모루정이 그렇게 내게 충고를 해 왔다. 정말 내가 그렇게 조급하고 서두르는 모습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하하, 제가 그렇게 보였습니까? 이거 정말 그런지도 모르겠군요. 알았습니다. 모루 정님. 그럼 반지는 나중에 완성되면 주십시오. 참, 그리고 부탁이 하나 더 있습니다 만... 모레가 제가 아는 사람들의 결혼식입니다. 둘 모두 저와는 친분이 있는 사람들 인데 문제는 마땅한 선물이 없다는 겁니다. 혹시라도 적당한 선물이 있으시면 저에게 추천을 좀 해 주시겠습니까? 결혼 선물로 무얼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더구나 둘 모 두 한 나라의 공작가의 인물들이니 어설픈 선물을 하기도 뭣하고 고민입니다.” “핫핫, 루탄님께서는 아예 이번에 우리 종족들의 솜씨를 한꺼번에 다 보고 싶으신 모양입니다. 최고의 반지에 친구분의 결혼 선물이라. 그런데 결혼이 내일이면 지금 물 건을 만들 수는 없으니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 중에서 고르는 방법 밖에는 없겠군요. 물건들이야 얼마든지 있으니 그 정도를 못 드리겠습니까? 자 이리로 오십시오.” 모루정이 말은 이렇게 하고 있어도 분명히 내가 무언가를 자꾸만 요구하는 것이 기분 이 나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죄송합니다. 모루정. 제가 제 생각만 하느라고 당신과 당신의 종족에게 피해를 주 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혹시라도 부담이 되시면....” “아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저희에게 이런 말씀을 않으시면 그럼 누구에 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저희 말고 그 누가 있어서 루탄님의 이런 문제를 가장 멋지게 해결 해 줄 자들이 있다는 말입니까? 만약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야 저희가 양보를 할 일이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면 우리들이 루탄님을 돕는 것이 당연하지요. 그것이 나중 에 우리 종족이 루탄님께 무엇이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최선의 길이 아니겠습니까? 가장 자신있고 하기 쉬운 것을 드리고 나중에 저희가 가장 힘들고 어려워하는 것을 부 탁드릴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말씀이나 생각은 전혀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모루정은 나의 짧은 한 마디에 펄쩍뛰며 이렇게 열을 내었다. 나는 그 소리에 아무 말도 못하고 모루정의 뒤를 따라서 좁아지고 낮아진 동굴을 걸 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여기는 우리 종족의 자랑들이 있는 곳입니다. 전에 루탄님 께 드린 그 검에 비하면 조금 못하다 싶은 것들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최고라고 자부 하 는 물건들이 잠자고 있는 곳이지요. 제가 족장님께 열쇄를 받아 오겠습니다.” 모루정은 나를 문 앞에 세워 두고 몸을 돌렸다. “크흘흘. 없다 그럴 필요. 왔다 내가 족장에게 이미 열쇄를 받아. 생각했지 루탄님 과 네가 이쪽으로 간다는 연락을 받고 이게 필요할 거라고. 그리고 말씀이셨다 니가 결정한 일이라면 여기 있는 물건 전부를 내어 준다고 해도 간섭하지 않겠다는 족장님 의. 드립니다 아울러 루탄님께는 족장님의 인사를 전해. 하셨습니다 지금은 작업을 하 시는 중이라 망치를 놓을 수 없는 상황이라 인사를 드리지 못한다고 죄송하다는 말씀 도 함께 전하라고.” 목소리와 함께 나타난 것은 달군쇠였다. “어서 오십시오. 달군쇠님. 다시 뵙게 되어 기쁩니다.” “동감입니다 저도 역시 루탄님의 말씀과 기분에.” 우리의 인사가 끝나자 모루정은 넘겨받은 열쇄로 창고의 문을 열고 들어가 안쪽을 구 경시켜 주었다. 창고 안은 생각보다 넓은 모습이었다. 그게 단지 길게 뻗은 복도라는 것이 의외였지 만 말이다. 하지만 나는 곧 그 양 쪽으로 자리잡고 있는 입구들이 하나의 단위로 나누어져 있다 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에는 목재, 가죽, 돌, 금속, 보석, 합금, 희귀광석의 순서로 왼쪽에는 예술과 장식, 오른쪽에는 실용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일단 구경을 하시면서 마음에 드시 는 것들이 있으면 말씀만 하십시오. 제가 간단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모루정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나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옆으로 비켜섰다. 이런 장관을 구경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 나는 여기에 동생들과 지토를 데리고 오 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이런 구경은 평생에 한 번 하기도 어려울 것이었다. 키는 1 미 터가 겨우 되는 종족들이 어떻게 이런 것을 만들 수 있었을지 대단하다는 생각만 거 듭 거듭 떠올리는 나였다. 나무의 왼 쪽 첫 번째 방에는 나무로 만든 조각 목걸이에서부터 거대한 조형물에 이 르기까지 온통 나무들로만 이루어진 것들이 놓여 있었다. 그 중에는 정말 살아 있는 것 같은 동식물도 있었고,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을 보이는 것들도 있었는데, 예술이라는 것에 별다른 눈을 가지지 못한 내가 볼 때도 가슴이 울 리는 것들이었다. 그 반대 오른쪽 방에는 작은 목검에서부터 나무로 만들어진 병장기에서 바퀴, 술통 에 이르기까지 갖은 물건들이 놓여 있었는데 그 또한 실용적인 목적으로 만들었음에 도 불구하고 아름답지 않은 물건은 없는 듯 했다. 물론 나는 속으로 굉장히 놀라고 있으면서도 어서 다음 방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 간 절했다. 나무보다는 보석이나 희귀광석이라는 쪽에 흥미가 더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나는 다른 방들을 둘러보면서 나무든 돌이든 가죽이든 그 어떤 것도 작품아 닌 것이 없다는 모루정의 말을 인정해야 했다. 가죽으로 만든 칼을 본 적이 있는가? 나무 갑옷도 있었지만 그건 그러려니 했다. 하 지만 가죽으로 칼을 만들었다니... 그것도 어떤 보검에지지 않을 강도와 날카로움을 지녔다고 모루정이 말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은 가죽으로 만든 검은 피를 머금게 되면 그 강도와 탄성이 몇 배나 강해지고는 특성이 있다고 한다. 다만 조금 검 의 무게가 무거워지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더구나 만약의 경우 검에 손상 이 가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적으로 회복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 가죽이 지는 특 이 성 때문이라는데 검이 부러진 경우라 하더라도 검집에 넣고 피를 뿌려준 상태에서 일 주일 정도가 지나면 거의 완전하게 회복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완벽하게 되기 위해 서 는 보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설명이었다. 이건 내가 가죽으로 만든 물건을 두는 방에 놓인 검이 신기해서 들어 보았을 때, 모 루정이 해 준 말이었다. 나는 일단 마음에 드는 검으로 찍어 두었다. 그리고 다음은 돌이었다. 돌 역시 조각을 해서 만든 목걸이에서 돌로 만든 검과 방패, 갑옷에 이르기까지 숱 한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그 중에서 내가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달군쇠가 군침을 삼키며 바라보는 물건이 있 어 물어보았더니 안에 물을 부어 놓으면 조금씩 돌이 녹으면서 알콜 성분을 내어 놓 는 특이한 광석으로 만든 것이라고 했다. 물론 다른 바위정령족들도 그 돌을 일부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지금 눈 앞에 보이는 것은 그 중에서도 최고급의 향과 맛을 내는 것이라고 한다. 얼마전까지는 달군쇠도 저 돌을 가지고 있었는데 너무 자주 물에 녹이다 보니 이젠 거의 녹아서 별로 남지 않 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병을 보고 군침을 흘리는 것이라고.... 하지만 여기 있는 물건은 족장의 허락이 없이는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물건이기 때문에 군침만 삼키는 것 이란다. 나는 그런가 하고 다시 구경을 시작했다. 솔직히 뒤에서 달군쇠의 매서운 눈초리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아마도 내가 슬쩍 저걸 얻어서 자기에게 주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는 모양이었 다. 다음이 금속에 대한 것들이었는데 그야말로 양쪽의 방이 가득차고 넘치는 정도여서 안쪽 깊이 들어 있는 물건들은 제대로 살필 수 조차 없는 정도였다. 나는 이번에도 장식이나 예술 보다는 실용쪽에 더 관심이 많았고, 정말 대단하다고 밖에 표현하지 못할 갖가지 무기들과 방어구들과 보조 장비들을 보며 가슴이 두근거 리 는 것을 느꼈다. 나는 본래 갑옷 종류를 입지 않는다. 무겁기도 하지만 나에겐 별로 필요가 없기 때문 이었다. 하지만 여기 있는 갑옷들은 정말 한 번 입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 중에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평범하게 보이는 천이 금속실에 있다는 것이 었다. 내가 그것을 만져보자 모루정의 설명이 따라왔다. 그것은 금속을 아주 미세한 실로 만들어서 짠 옷입니다. 사실 금속이란 것이 연성이 크지 안기 때문에 급격한 휨이나 반복적인 휘어짐에 약한 면이 있고, 그렇게 얇은 금 속은 완전히 접히는 경우 펴지지 않거나 혹은 끊어지고 찢어지는 단점이 있어서 옷을 만들기 어렵지만 그런 모든 것을 거넌뛰어서 만들어진 걸작이 그 옷입니다. 뭐 조금 무겁다는 것과 다른 천에 비해서 조금 튼튼하다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특성이 없다는 것이 안타깝지만 그래도 금속으로 그렇게 천과 같은 효과를 내었다는 것은 기억할 가 치가 있는 작품이라 이 곳이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건 금속으로 된 옷이라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가치가 없다는 말이다. 뭔가 있을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조금의 실망감을(겉으로는 전혀 표시하지 않고) 느끼며 나는 다시 발길을 옮겼다. 보석. 그야말로 빛의 잔치에 온 것 같은 곳에서 나는 아세트에게 줄 선물을 고르기 시작했 다. 어차피 신부에게 줄 선물을 보석이... 하지만 나는 역시 다시 실용품이 있는 곳으로 들어왔다. 호? 이건 돋보기다. “그런 금강석으로 만든 돋보기 입니다.” 응? 이건 바늘이네? “역시 금강석 입니다.” 이건 겁인데 색이 붉은 색이군. “루비 입니다.” “그건 사파이어, 그건 자수정, 그건 토파즈, 그건....” 만지는 것 마다 보석이다. 하지만 내가 만지는 물건들은 겁이나 쟁반, 아니면 식기들에서 단추, 채찍, 부채 등 등의 물건들이었다. 그런데 하나같이 보석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응? 이건 마법사들이 들고 다니는 지팡이 같은데요?” 나는 한 구석에 놓여진 지팡이를 들었다. 생긴 것은 완전히 마법사용 지팡이었지만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전혀 아무런 마법적 인 적용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건 마법사를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특히 그 지팡이의 끝에 붙은 그 보석은 원 래는 희귀광물로 분류되어야 하지만 나머지 부분들이 그렇지 못해서 여기에 있는 물 건 입니다. 그 보석은 루탄님께서 잘 보시면 특이한 기능을 아실 수 있으실 겁니다. 바 로 마력을 증폭시키는 기능입니다. 한 번 시험을 해 보시지요.” 나는 모루정의 설명에 지팡이 끝의 보석을 자세히 살폈다. 그 보석은 이상하게도 주위의 마력을 보석 내부로 끌어들여 다섯배 정도의 크기로 저 장하고 있었다. 나는 슬쩍 보석을 통해 내 마력을 통과시켜 보았다. “헛!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니... 굉장히 신비로운 보석이군요.” 나는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마력이 보석의 내부를 지나가려하자 보석 내부에 있던 마력들이 덩달이 내 마력 을 따라 움직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움직여서 생긴 빈 자리 에 마나가 생겨난 것이다. 아니 주위의 마나라 끌려 들어간 것이다. 이건 정말 대단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보석이었다. 보석 안에 저장된 마력은 그 크기가 거의 7써클 마법을 쓸 때에 주위에서 끌어모아 사용하는 마력과 같은 크기였다. 그런데 그것이 어떤 마법이 이 보석을 지나는 동안 에 함께 융화되어 쏘아지는 것이다. 이건 다시 말하면 이 보석으로 1써클의 마법을 쓰게 되든 5서클의 마법을 쓰게 되든 위력은 7써클에 버금가는 위력이 된다는 말과 같은 것이었다. 그럼 이 보석으로 7써클을 쏘면 어찌되냐구? 그거야 8써클에 가까운 위력이 나오겠 지. 그럼 이걸로 8써클의 마법을 쓰면? 그거야 8써클의 본래 힘보다는 좀 더 강한 능 력을 쓸 수 있겠지. 어떻게 그렇게 되냐고 묻고 싶다면 마법에 대한 개론을 다시 봐야할 것 같다. 마력의 차이는 써클당 배로 늘어난다. 그런데 7써클의 힘에 1써클이나 2써클의 힘을 더한다고 그게 무슨 흔적이나 될 것 같 은가? 그냥 산술적으로 7써클이니까 거기에 7써클 더하면 14써클이 아니다. 7써클에 7써클 을 더하면 8써클에 가까운 것이다. 그것도 8써클이 안 되는 상태로.... 왜냐하면 7써클 둘의 힘의 총합과 8써클 하나의 힘의 합이야 같지만 그 깨달음의 깊 이가 다르고 마법을 쓰면서 소비되는 쓸데없는 낭비 마력이 8써클이 7써클에 비해서 현저히 적으니까 그렇다. 아무튼 어찌되었든 이 보석이 대단한 것은 사실이다. 적어도 7써클이 이 지팡이를 들 면 8써클에게 일방적으로 당하지는 않을 수 있으니 말이다. 물론 1써클이 이걸 들고 기본 적인 공격마법을 쓴다면 아주 웃긴 모습이 될 것이다. 7써클의 마력을 지닌 파 이 어 에로우가 날아갈 테니 말이다. 그건 다시 이야기하면 7써클 마법사는 거의 무한정으로 그런 7써클 파이어 에로우를 날릴 수가 있다는 말과 같다. 왜냐하면, 7써클 마법사는 파이어 에로우같은 기초 마법을 아무리 쓴다고 해도 지칠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나는 그 지팡이를 들고 상당히 망설이다가 모루정에게 물었다. “모루정, 이건 내가 사소하게 좀 가지고 가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물론 모루정이 내 부탁을 거절하지 않을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물어는 보고 챙 겨도 챙겨야 하니까 말이다. “물론이지요. 루탄님.” 그렇게 얼렁뚱땅 멋진 물건을 하나 건진 나는 다시 합금으로 된 물건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곳에서도 역시 눈이 돌아갈 정도로 멋진 물건들을 보고는(사실은 금속으 로 된 것들이라는 점에서는 금속실과 비슷했지만) 마지막으로 희귀광석들로 만든 물 건 이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정말 희귀하다는 말이 맞긴 맞는 모양이었다. 마지막으로 들어간 곳은 복도의 끝에 자리잡은 한 칸짜리 방이었는데 그 곳에 놓여 진 물건들도 그다지 많은 것은 아니었다. “여기는 제가 설명을 좀 드리겠습니다. 저희 종족의 최고의 자랑이라고 할 수도 있 는 곳이니 말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모루정의 말은 그 방에 있는 모든 물건들에 대한 설명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그 중에 몇을 예로 들어 보면, 저절로 자라나서 자신의 몸체 반 정도의 크기가 되면 자연스럽게 자라난 부분을 떨어뜨리는 금강석도 있었고, 혼자 있게 되면 엄청난 고열 을 발생시키거나 열을 흡수하지만 함께 보관하면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는다는 한 쌍의 돌이나, 땅과 반작용을 일으켜서 공중에 떠 있는 돌(이게 발견된 곳은 땅 속 이라는데 이게 있으면 주위의 지층이 불안정해 진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 억에 남는 것은 바둑돌 정도 크기의 돌들이 잔뜩 들어 있는 커다란 상자였다. “이 돌은 지금까지 발견된 어떤 돌들보다 무서운 녀석입니다. 솔직히 이걸 망치도 때리든 바위에 달아버리든 아무 상관이 없는 녀석인데 아주 특이하게 반응을 하는 녀 석입니다. 소금물에 젖으면 폭발을 하거든요. 그것도 소금물에 적시고 햇빛에 노출된 시간이 정확하게 20분이 지나면 폭발을 일으키는 녀석입니다. 그 폭발력이 엄청나기 때문에 위험한 녀석이지요. 하지만 우리들은 별로 쓸 일이 없습니다. 동굴 속에는 햇 빛이 들지 않기 때문에 굴을 파더나 하는 데에는 쓰지를 못하고 있지요. 어떻게든 다 른 조건에서 폭발이 일어나는 조건을 만들 수만 있다면 굴을 파거나 할 때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말이죠.” 정말 별의 별 물건들이 다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이들은 땅 속을 파고들어 무엇이든 새로운 것이면 가져다가 실험을 하고 연구 를 하는 자들이니 이런 물건을 가지고 있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이다. “그런데 루탄님, 친구분들의 선물을 정하셨습니까?” 모루정이 물었지만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자이건에게는 아까 봐 두었던 가죽으로 된 검을 선물하면 좋을 것 같았지만 생각해 보니 그의 심법이 금의 심법이라 가죽과 맞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어떤 선물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었다. “전부 뛰어난 물건들이니 선택하기가 쉽지 않군요. 모루정님께서 권해 주시면 안되 겠습니까?” 내 말에 모루정은 잠시 눈치를 살피더니 또르르 또르르 복도를 뛰어다니다가 몇가지 물건을 들고 왔다. “이 검과 방패, 그리고 이 갑옷을 남자분께, 그리고 신부에게는 이것을 선물로 드리 지요. 검과 방패, 갑옷이야 그 뛰어남은 말할 것도 없는 물건이고 특히 이 방패는 이 렇게 갑옷 흉부에 붙일 수도 있게 만들어진 것이라 양손으로 싸워야 할 때에는 갑옷 의 흉부를 보강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건....” 아세트에게 주라고 가지고 왔던 물건을 들고 모루정은 말아 놓은 천 같은 물건을 풀 풀 털어서 보여 주었다. “이렇게 생긴 물건입니다. 겉보기에 평범해 보이는 천이지만 실제로 아까 보셨던 그 한 쌍의 희귀광석 있지요? 냉과 열을 나타내는... 그것을 갈아서 짝수로 만들어 붙 인 것이라 화염과 빙계 마법에는 절대 어떤 경우에도 충격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뭐 물리적인 공격에야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실험적으로는 이 옷에 작 은 쥐를 말아서 넣고 우리가 쓰는 용광로에 하루를 넣어두었는데도 쥐는 살아 나왔습 니다. 그 정도면 대단한 물건이라고 할 수 있지요. 용암 속에 빠져도 살 수 있을 겁 니 다.” 자랑스러운 듯이 말하는 모루정의 말에 나는 입을 벌리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것을 숨겨두고 있었다니... “사실 그것을 만드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냉과 열을 내는 그 희귀 광석이 홀수 로 있으면 엄청난 고열이 나던지 아니면 냉기를 발산하기 때문에 처치곤란이 되지요. 그런 경우에는 어느 하나를 깨어서 짝수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옷을 만들 려 면 적어도 그런 돌을 수 백 번 깨어서 천의 곳곳에 박음질을 해 넣어야 하는데 그것 이 쉽지 않은 일이어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이 옷을 입을 때, 아주 조심해야 할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건 이 옷에서 만약 돌조각 하나를 빼서 멀리 서너 걸음 이상 떨어지게 되면 양쪽 모두가 엄청난 곤란을 겪을 거라는 겁니다. 사실 박음질을 할 때 언제나 두 개씩의 돌을 넣었기 때문에 하나의 돌조각만 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지만 말이죠.” 나는 그 옷을 보면서 아세트에게 주지 말고 내가 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 다. 왠지 내가 조금 계면쩍어지는 기분이기는 했지만 사실 이런 물건을 그냥 선물로 주기 에는 너무 아까운 것이다. “솔직히 너무 귀한 물건이라 받기가 좀 꺼려지는 물건이군요.” 나는 솔직히(솔직한 것이었을까? 귀한 물건이라 주기 아깝네요가 되어야...) 내 마음 을 털어 놓았다. “그럼 잠시만 기다리세요.” 모루정은 그 옷을 앞에 두고는 다시 또르르 달려가서 옷 하나를 더 들고 왔다. “그럼 이걸 선물하십시오. 거의 같은 효과가 있는 옷이지만 실험에 따르면 용광로 속에서 쥐가 한 시간이 넘으면 죽더군요. 문제는 돌조각의 수가 적은 탓이지만....”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이정도면 충분합니다. 하하하.” 나는 모루정의 손에서 그 옷을 빼앗듯이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전에 들고 왔던 옷을 집어서는 모루정에게 돌려주었다. “아닙니다. 이건 루탄님께서 요긴하게 쓰십시오. 굉장히 마음에 들어하시는 것 같았 는데....” 그렇게 권하는 모루정. 정말 모루정은 눈치도 빠르다니까.... 나는 사양하는 척도 하지 않고 날름 받아서 창고에 집어넣었다. 결국 여기서 두 가지의 물건을 덤으로 얻어가는 것이다. “그럼 시간도 많이 늦었으니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그리고 모루정님 제가 부탁 드린 반지는 완성이 되는 대로 연락을 주십시오. 대신에 다른 사람에게는 알리지 마 시 고 직접 저를 찾아서....” “물론입니다. 될 수 있으면 빠른 시간 안에 완성해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리 고.... 달군쇠님께서 저리도 섭섭해 하시니 제가 루탄님 이름으로 달군쇠님께 선물하 나 드리겠습니다. 뭔지는 아시지요? 나중에 족장님께 잘 좀 말씀을 해 주십시오.” “물론입니다. 저도 부탁을 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달군쇠님, 나중에 저도 한 잔 맛 을 보여 주셔야 합니다. 하하하. 그럼 저는 이만....” 나는 그렇게 짧지만 엄청난 이익을 얻은 방문을 마치고 다시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벌써 시간이 새벽을 가리키고 있었고, 다들 잠이 들었는지 천막 중앙에 피워진 모닥 불은 두툼한 재 속에 남은 숯불만이 살아 있었다. 나는 조용히 천막 안으로 들어가 잠들어 있는 지토 옆에 몸을 뉘였다. “큼, 어디를 갔다가 이제야 오는 것이냐? 다들 걱정을 한다가 어제 낮에도 이야기 를 했건만.... 오면 온가 가면 간다고 이야기는 하고 다녀야 걱정을 않을 거 아니 냐?” 자리에 누우려던 나는 화들짝 놀라서 튕기듯 일어났다. “뭐냐? 안 자고 있었단 말이야? 그냥 자지 뭐하러 기다려? 내가 한두 살 먹은 어린 아이도 아니고.... ” “그러니 더 문제지, 어린 아이도 아닌 것이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니까 말이야. 그 나마 다른 녀석들에게는 니가 잠시 볼 일을 보고 온다고 했다는 거짓말로 넘어가기는 했지만 앞으로는 이러지 말아라. 다들 내가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았으면 지금까지 잠 도 자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을 거란 걸 모르냐? 어째 점점 생각이 짧아지는 것 같으 냐?” 나는 지토의 말에 또 미안하다는 말로 머리를 긁적.... 정말 이런 자세는 싫다. 내일이 자이건의 결혼식이었지만 실제로 결혼식은 정오에나 있는 것이어서 서둘러 갈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내일 아침에 한타리아의 옷가게에서 준비를 마치고 느긋하게 움직이 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덕분에 새벽이 되어서야 돌아온 나는 늦게까지 나를 기다린 지토와 함께 천막 안에 서 오후가 저물도록 뒹굴어도 방해 받지 않을 수 있었다. 동생들과 자이곱, 루아, 아르미엘은 자고 있는 우리들을 방해하지 않고 마지막 소풍 을 나름대로 즐긴 모양이었다. 저녁이 되어 일어난 우리 둘을 맞이한 일행들은 별다른 말없이 일상적인 모습으로 나 와 지토를 대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숨기고 싶은 청혼에 대한 묘한 분위기도 거의 없어진 모양인지 별 로 내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눈빛들은 없었다. 풍아가 아직 조금 그런 모습을 보이기 는 했지만.... “그럼 오늘은 일찍 자기로 하자. 내일은 아침부터 할 일이 많으니까 말이다. 아무 리 결혼식이 정오에 있다고 해도 결혼식 전에 얼굴들은 한 번 봐야 하지 않겠냐?” 내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지만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마도 내가 어 제 밤에 어디를 갔다 왔는지 알고 싶은 때문일 것이었다. 나는 간밤에 바위정령족의 모루정을 만나서 자이건과 아세트에게 줄 선물을 준히해 왔다는 이야기를 하고, 더불어서 얻어 온 두 가지 물건들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것들을 요긴하게 쓸 때가 있을 거라면서 뿌듯한 마음이 되어서 자랑을 했다. 물론 반지에 대한 이야기를 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다만 마르틸 후작을 만나서 한바탕 했던 이야기도 해 주었는데 그 때 사려고 했던 물 건은 자이건과 아세트에게 주려던 선물이었다는 전제로 이야기를 풀어 갔기 때문에 내 가 루아에게 했던 멍청하고 바보 같은 청혼을 만회하기 위해 설치고 다녔던 것은 조 심 스럽게 덮여졌다. 그렇게 드디어 우리들의 짧은 소풍은 마무리가 되었다. 별로 한 일도 없으면서 시간은 참 빨리도 지나간다. 아침부터 무척이나 바빴다. 여자들의 치장 시간이 예상외로 오래 걸렸던 데다가, 남자들도 나름대로의 치장을 해 야 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번거로웠던 것이다. 하지만 역시 꾸미고 나면 뭐가 달라도 달라진다. 나는 평소에도 수수하고 꾸밈없는 모습을 선호하기는 하지만, 이렇게들 꾸미고 있는 모습도 언제나 그런 것이 아니라면 보기가 좋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언제나 꾸미기에만 바쁜 사람들에게서는 없는 신선함이 우리 일행들의 모습에서 나타 난다. 어찌 보면 조금은 힘이 들어간 듯한 몸짓이 조금 부자연스럽기는 해도 그도 나 름대로는 우리들의 모습을 돋보이게 하는 촉매역할을 하는 것 같아 보기 싫지 않았다 . 우리들의 몸단장이 모두 끝난 시간은 정오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덕분에 우리들은 결혼식 전에 자이건과 아세트를 만나 보기로 했던 계획을 수정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우리 일행들을 데리고 서둘러 순간이동을 했다. 이미 결혼식이 준비된 장소의 좌표를 준비해 두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는 우리들 아홉이 한꺼번에 순간이동으로 결혼식장의 하객들이 모여 있는 곳에 나타나자 모두의 이목을 한꺼번에 받았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식장의 모습은 야외 운동경기장을 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한 쪽에 사람들을 위한 경사를 이루게 조성된 좌석이 반원의 형태로 만들어져 있고, 반원을 이룬 중앙에 결혼식을 위한 식단이 놓여 있는 모양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다시 이야기하면 결혼식을 구경하기 위한 작은 경기장이 나무로 지어져 있 다고 하면 맞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좌석이 만들어져 있는 곳에 오르기 위한 식단의 뒤쪽에 마련된 입구 에서 초대장을 내 보이고 자리를 찾아 앉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나타난 곳이 바로 그 식단 바로 앞쪽이었으니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나는 우리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나에게 온 초대장을 입구에서 손님맞이 를 하는 집사차림의 인물에게 날려 보냈다. “루탄 최 한국님과 그 일행분들이십니다.” 내 초대장을 받은 집사가 그렇게 우리들의 신분을 알리자 하객들 사이에서 웅성거림 이 일어났다. 그들 대부분은 우리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기에 웅성거리는 것이었고, 일부의 인물들 은 우리들에 대해 짐작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에 웅성거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들에 대해 짐작을 하는 사람은 그야말로 소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놀람은 더욱 켜졌다. 집사차림의 인물은 우리들에게 지정된 좌석이 있음을 알리고 옆에 서 있던 사람에게 우리들을 안내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자리라는 것이 내가 보아도 특등석에 해당할 만한 자리였다. 아직은 사람들이 거의 없었지만, 신랑과 신부의 결혼식단이 가장 잘 보일 자리에 다 른 곳에 비해서 좌석의 크기와 꾸밈이 고급스러워 보이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런 자리는 다른 곳과는 분리가 되어 있어서 일행들은 다른 사람의 간섭을 받지 않고 편안하게 행동을 할 수 있도록 전면을 제외한 삼면에 칸막이들이 세워져 있 는 곳이었다. “완전히 귀빈 대접인걸? 자이건 마음에 드는군.” “정말이야. 나중에 귀여워 해 줘야지. 호호.” “화아 형, 풍아 누나 제발 사고 좀 치지 말아요. 명색이 오늘 결혼식을 하는 신랑인 데 함부로 대하면 안 되죠.” “원래가 결혼식을 하면 신랑이고 신부고 피로연을 하면서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동 서고금을 막론하고 있어 왔던 일이야. 그렇지 루탄형.” 광아의 말에 화아가 나의 도움을 청했다. “뭐 예전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결혼 풍습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니까 일단은 조 심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더구나 분위기를 보아하니 그냥 결혼식으로 끝날 것 같지 도 않아.” “그래요 오빠. 여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하객들이 무기를 소지하고 있어요. 그걸 아무도 막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고 봐요.” 수아가 내 의견의 동의표를 던졌다. “그거야 당연하지, 하객들 중에는 마르틸 쪽의 사람도 있고, 마롤 쪽의 사람들도 있 고, 자이건 쪽의 사람들도 있는데 주최자가 자이건 쪽이니 다른 쪽에서 쉽게 무장을 해제하려고 들지 않겠지. 그런데 그걸 가지고 실랑이를 벌이기에는 오늘이 결혼식이 라 는 좋은 날이거든 그러니 그냥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라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것이 지. 물론 내 생각에는 이런 것들도 모두 계산에 넣은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생 각 하지만 말이야. 그런데 먼저 일을 벌이는 쪽은 어느 쪽일까? 굉장히 흥미진진한 일이 야.” 나는 자리에 앉아 팔짱을 끼고 식장과 하객들의 모습을 번갈아 보며 느긋한 모습으 로 말했다. “형님, 재미라니요. 어쩌면 엄청난 유혈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렇 게 느긋하시다니....” 광아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하는 말에 나는 그저 빙긋 웃어 주었다. 유혈충돌이라.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특별한 악재가 겹치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 서는 서로의 힘의 우열을 가리는 것으로 사건이 마무리가 될 것이었다. 여기 모인 수많은 귀족들이 서로 피를 흘릴 생각이면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이지도 않 았을 것이다. 이들은 오늘 이 자리를 서로의 세력을 상대에게 직접적으로 내보이고 그 힘의 우열 로 앞으로의 왕국 후계자를 결정하려는 듯이 보였다. 그리고 이건 광아나 우리들 모두가 미리 예견한(여러 정황으로 짐작한) 일이었다. 그런데 광아는 그런 과정에서 유혈 충돌의 가능성을 나보다는 더 크게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유혈 충돌의 가능성을 10% 정도로 낮게 본다면 광아는 반반 정도의 확률로 보 고 있는 탓에 서로의 태도가 다른 것이었다. 그거야 두고 보면 알 일이다. 우리들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출구를 통해 들어오는 하객들을 보고 있을 때, 드디어 거물급 인물이 나타났다. “저자가 마르틸 후작이야. 재수 없는 놈이지.” 마르틸을 발견하고 얼굴을 찌푸리며 일행들에게 알려 주었다. “생긴 건 제법 멀쑥하게 생겼네.” “그러게.” “이젠 마롤이라는 작자를 볼 일만 남았군.” 일행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마르틸은 우리들이 있는 좌석의 아래 오른 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서 마롤 후작이라는 작자가 입구를 통해 들어왔다. 주요 등장 인물이 들어올 때 마다 신분을 알려주는 소리가 아니었다면 우리들은 그 가 마롤이란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꼭 염소처럼 생긴 사람이군요. 수염도 그렇고...” 한 마디로 생김새를 표현해 낸 루아의 탁견卓見에 박수를 보내며... 짝짝짝. 정말 염소를 무척이나 닮은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상당한 실력자로 보이 는 두 인물이 호위를 하고 있었다. “저 자들은..” “무슨일이야? 자이곱 혹시 아는 사람들이라도 있어?” “네, 저 마롤이라는 자가 거느리고 있는 두 사람은 암흑제국에서도 제법 이름이 알 려진 자들입니다. 예전에 여인왕국에서 암흑제국으로 들어오면서 서남지역을 지난 적 이 있었는데 저들이 그 곳의 귀족 밑에 있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에? 그럼 저 녀석들 암흑제국 녀석들이라는 말이잖아? 어떻게 저 녀석들이 여기에 와 있는 거지?” “그거야 마롤이 부탁을 했겠지. 아무래도 자신의 세력이 조금 부족하다 싶었거나 신 변을 확실히 보장하기 위해서 불렀을 것 같은데?” 풍아와 화아는 서로 자이곱의 말에 의견을 내 놓고 있었다. “그런데 저 녀석들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 거지?” “제가 알기로 대쟁투에서 12강에 들었던 녀석들로 알고 있습니다. 거의 저와 비슷 한 실력이라고 보시면 될 것입니다.” “그거 굉장하군. 그럼 오늘 이 자리에서 저녀석들을 제압할 실력이 되는 사람이 얼 마 없다는 소리네? 그런데 저 녀석들도 마갑주를 쓰나?” “그렇습니다. 둘 모두 마갑주를 쓰는 녀석들입니다. 그것도 거의 태급에 가까운 것 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크라튼도 태급에 가깝기는 하지만 녀석들의 마수에 비하면 조금 떨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 이길 수 없단 말이야?” “그건 아닙니다. 루탄님의 심법을 익힌 덕분에 크라튼 보다 조금 뛰어난 마갑주라 하더라도 충분히 이길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소환주의 힘을 증폭시키는 것이 마갑 주의 능력이지, 없는 능력을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니까 말입니다.” 자이곱과 화아 풍아는 새로 나타난 두 명의 실력자에 대해 무척이나 관심이 많은 모 양이었다. 그런데 우리들의 뒤쪽 좌석에서 돌맹이 하나가 광아에게로 날아들었다. 광아는 태연하게 그 돌을 잡아채고는 돌에 묶인 종이를 풀어 읽었다. “무슨 일이냐? 마췬 길드지?” 나는 심상치 않은 느낌에 광아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정말 문제가 간단하지 않겠습니다. 일단 기충에 의해 지배를 받는 암흑교 의 교도들이 단체로 이동 이곳으로 몰려오는 중이라는 전갈입니다. 그리고 마르틸 후 작과 제1황자의 지지층들이 사병을 이끌고 접근중, 강철기사단과 헤이스런 공작가의 인물들, 거기에 우제푸를 비롯한 고위 마법사들이 역시 신랑과 신부의 호위를 빌미로 평원으로 도착 중. 암흑교도는 남쪽에서 마르틸 후작의 지지세력은 동북 쪽에서, 자 이 건과 아세트 일행은 북쪽에서 접근중입니다. 도착순서는 자이건과 아세트가 제일 먼 저 이 곳에 도착 예정, 그 뒤 약 2시간 후면 다른 모든 세력들이 이곳에 도착할 것으 로 보인다는 연락입니다.” “정말 난리도 아니군. 이번 기회에 완전히 자신의 세력을 보여 주겠다는 말이잖아? 이거 정말 이러다가는 상당히 좋지 않은 상황이 될 수도 있겠는데?” “그럼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자이건 편을 들어 주어야 한다는 말이 되는 거야?” 광아의 정보에 다들 아연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게 문제가 아니다. 물론 자이건과 아세트를 돕는 거야 당연하지만, 나는 이 나라 의 왕이 루이스 3황자가 되어야 할지는 모르겠다. 우리는 황자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가진 것이 없으니 말이다.” “죄송합니다. 형님. 마췬길드도 황국 안의 소식을 자세히 알 수는 없는 상황이어 서, 그저 소문들과 몇 몇의 간세를 이용해서 정보를 수집하고 있지만 그 기간이 겨우 몇 달 밖에 되지 않아서 전체적으로 황자들에 대한 평가를 할 수는 없는 입장입니 다.” “아냐, 그거야 광아 네 탓이 아니지. 아무튼 오늘 결혼식은 무사히 끝이 났으면 좋 겠는데 말이다.” 내가 이렇게 말을 끝내고 있을 때, 또 한 사람의 주요 인물이 나타났다. 루이스 마치 한다. 3황자의 등장이었다. 그는 시종으로 보이는 늙은이 한 명과 두 명의 기사, 그리고 한 명의 마법사와 여자 시종 한 명을 대동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과 다르게 마차로 입구까지 와서는 입구에서 여러 사람들(마르틸 후작과 마 롤후작, 그리고 얼굴 모를 기사 몇 명과 귀족들 몇 명)의 영접을 받으며 들어와서 우 리들의 자리 위쪽(?) 또는 뒤쪽이라 해야 할 곳에 자리를 잡았다. 물론 벽 때문에 그 들 일행을 살피기는 어려웠다. “드디어 거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다 모인 것 같습니다. 형님. 제가 알기로 1황자와 2황자는 궁전에서 움직이지 않을 것으로 압니다.” 그렇군. 그런데 아까 모였던 귀족들 중에서 누가 선드라스 공작이고 누가 헤이스런 공작일까? 그러고 보니 아직 그 사람들과는 인사도 하지 못한 것 같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 자이건과 아세트의 결혼식이 진행되었다. 에? 그런데 식을 진행하는 사람이 왜 루이스 황자인 거야? ‘나이도 어린 것이 지위가 높다는 이유로 결혼식을 주관하는 주례가 되어 있다는 것 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라고 소리를 치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고... 무슨 이런 결 혼식이 다 있어? “한타에서는 결혼의 주관을 그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서 가장 명망있는 인물 이 맡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아마도 마롤이나 마르틸 후작에게 결혼식을 주관하게 하고 싶지 않은 이유 때문에 일어난 상황이라고 보여집 니 다. 만약 황자가 하지 않으면 둘 중에 누군가가 하게 될 테니 말입니다.”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겠다. 마롤이나 마르틸은 자이건과 아세트의 정적들이니 그런 사람들이 주관하는 결혼식을 하고 싶을 턱이 없는 것이다. 상당히 기분 나쁜 일일테니 말이다. 어떻게 보면 조금은 어색하게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결혼식은 차분하게 진행되고 있었 다. 신랑과 신부가 입는 웨딩 복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어서 평소의 무도회에서 볼 만 한 복장을 한 두 사람은 조금은 지루한(모든 행사에서 느껴지는 말 못할 짜증) 시간 이 지나고 드디어 루이스 황자의 결혼 성립 선언이 있었고, 둘은 깊은 키스를 나누었 다. 그리고 하객들이 않은 좌석에서는 일제히 환호성과 함께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둘이 자리를 잡은 이후에(결혼식단상 위에 나란히 섰다.) 하객들의 축하 선물이 이어졌다. 아마도 이 때는 지위가 낮은 인물들이 먼저 움직이는 모양인지 좌석의 가장 가장자리 에 앉았던 사람들이 먼저 일어나 선물 보따리를 단상 아래에 쌓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양쪽으로 기록관들이 서서 누구 앞으로 온 선물인지를 세세히 따져 서 장부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예전에 결혼식을 하면 앞에 책상을 놓고 앉아서 부조금이라고 해 서 축하금을 받던 생각이 난다. 그러고 보면 난 죽도록 친구들 결혼식에 따라다니면서 그 많은 부조를 하고 한 푼도 못 받고 이 세상에 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왠지 억울하다. 쩝. 한 시간이 넘도록 이어진 사람들의 행렬이 이제 거의 정리가 되고 있었다. 아직도 좌 석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전부 다 해봐야 채 열 무리가 되지 않았다. 나는 이제는 우리가 나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이제 선물을 주러 가 볼까? 얘들아 축하를 하러 가자.” 나는 그렇게 소리치며 우리 일행을 이끌고 자이건과 아세트가 서 있는 단상으로 우르 르 몰려갔다.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우리의 정체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들이 움직이자 모 두들 관심어린 표정으로 자이건과 아세트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었다.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루탄 대장님.” “저도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루탄대장님. 그리고 여러분 모두에게요.” 자이건과 아세트가 고개를 깊이 숙이며 인사를 해 왔다. “하하하, 결혼식이라는데 오지 않을 수가 있나? 그래도 명색이 제자라고 할 수 있 는 녀석의 결혼식인데... 그리고 그 대상이 아세트 아가씨라면 어디 안 오고 배겨낼 수가 있겠나? 아무튼 축하하네. 자 이건 자네에게 주는 선물일세. 한 번 입어 보게 나. 그리고 이건 아세트양에게 드리는 선물입니다. 지금 한 번 입어 보십시오.” 나는 그렇게 말하며 갑옷과 방패, 검을 자이건에게 건넸고, 로브처럼 생긴 옷을 아세 트에게 건네 주었다. “그거 그렇게 보여도 바위 정령족의 최고 보물들 중에서 얻어 온 것이니 아마 꽤 쓸 만 할거야. 하하하.” 나는 내친김에 단상에 올라가서 자이건에게 갑옷을 입혀 주었다. 그리고 방패를 흉부 에 부착시켜 주며 낮은 목소리로 남쪽과 북동쪽에서 다가오고 있는 마롤과 마르틸 후 작의 세력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자이건은 조금 얼굴이 굳어지는 듯 했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자신감을 보였 다. 아세트는 로브를 수아가 푸울(망토 상태)를 활짝 펼쳐서 둘러 준 공간 안에서 걸치 고 나왔다. “정말 잘 어울리는데? 멋있어. 그래 축하해.” “나도 축하한다. 다음에 한 번 화끈하게 대련이나 하자.” “큼. 보기 좋구먼. 행복하게 살아.” “축하합니다. 행복하게 사세요.” “축하드립니다.” 우리 일행들의 인사는 그렇게 끝이 났다. 우리야 계속 옆에 붙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다른 귀족들의 인사가 아직 남 아 있었던 탓이었다. 우리는 다시 우리들의 자리로 돌아왔다. 다른 하객들은 선물을 주고 인사가 끝나자 마차를 타고 한타리아로 거의 돌아갔고, 남은 사람들은 이제 세 세력의 중심인물들이라고 보면 될 것 같았다. 드디어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귀족들의 선물 증정도 끝이 나고 두 후작과 루이스 황자 의 순서만 남았다. 그러자 직위가 낮은 두 후작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입구를 통해 걸어나가 자이건 과 선드라스에게로 다가갔다. 그들은 서로 같은 방향으로 가는 것조차도 싫다는 듯이 마르틸 후작은 왼쪽으로 마 롤 후작은 오른 쪽으로 단상을 향해 다가갔다. 그들의 뒤를 따르는 수행원들의 어깨가 상당히 경직되어 보인다. 설마 여기에서 암살 시도야 없겠지만 적잖게 걱정이 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최대한 귀를 기울여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자이건 선드라스, 강철기사단의 젊은 단장 자네의 결혼을 축하하네. 내 그런 의미 에서 자네에게 아주 좋은 선물을 가지고 왔다네. 이제 자네는 자네의 아름다운 아내 와 함께 집에서 편안하게 쉬도록 하게. 강철기사단은 더 이상 존속시키지 않는 것으 로 귀족 회의에서 결정이 되었다네.” 마르틸 후작의 말이었다. 역시 많은 수의 귀족들을 이끌고 있는 그는 귀족들의 뜻을 반영하여 국가 정치 향방을 정하는 귀족회의를 무기로 선드라스와 헤이스런을 공격할 모양이었다. “켈켈, 이런 이런 마르틸 후작께서 그런 선물을 준비하셨다니 저도 좋은 선물을 하 나 준비 해 왔습니다. 헤이스런 공작가문도 이제는 그만 공작의 위를 넘기고 야인으 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저의 선물입니다만 잘 생각하시고 받으시기 바람니 다. 만약 받지 않으시면 상당히 곤란한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 말이지요.” 두 후작은 각각 단상의 왼쪽과 오른쪽에 서서 자이건과 아세트를 협박하고 있는 중이 었다. “강철기사단의 해체라는 말씀 잘 알겠습니다. 그럼 그 기사단은 제 개인 용병으로 하고 저는 용병단의 단장이 되도록 하지요. 뭐 굳이 국가의 녹을 먹을 필요가 있겠습 니까? 지금까지 변변한 지원도 받아 본 기억이 없는데 기사단을 그만 두도록 하겠습 니 다. 지금부터 저와 제 부하들을 강철용병단입니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이젠 왕국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 하하하.” “마롤 후작님. 저희 공작가에게 공작가의 지위를 내어 놓으라는 말씀은 누구에게 내 어 놓으란 말씀이신가요? 공작가의 지위 정도야 국왕폐하께서 마음만 정하시면 그냥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나요? 그렇다고 지금 저희 가문에서 나라의 녹을 받고 있는 것 도 별로 없으니 필요하시면 저희 가문의 작은 저택이 하나 있는데 가지고 가시렵니 까? 저야 이제 자이건님과 함께 지내면 될 일이니 별 상관은 없습니다만....” 간단하게 나라에서 받은 모든 것을 포기하는 두 사람이었다. “그럼 이제는 볼 일을 다 보신 것 같습니다만 더 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습니까?” 자이건이 두 후작을 번갈아 보며 물어본 말이었다. “크흐흐. 그런데 말이야 자이건, 선물을 주면 당연히 보답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나는 이 자리에서 자네와 자네 가문이 더 이상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대답을 해 주기를 원한다네 어떤가 그 정도의 선물은 나에게 줄 수 있겠지? 내가 준 선물을 받 았 으니 아주 적절한 보답이 아니겠나?” 마르틸 후작의 말이었다. 기사단의 지위를 포기했으니 이제는 귀족의 지위도 없는 것 이나 마찬가지인 자이건은 정치에 관여할 수 없는 것이고 그렇다면 선드라스 가문이 지닌 힘만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으니 그만 왕위 쟁탈전에서 빠지라는 말과 같은 것이 었다. “물론 저도 선물을 주었으니 선물을 받아야 겠지요. 아세티아르 헤이스런 공작님. 이제 공작의 위를 포기하신다면 당연히 개인적으로 지니신 무력은 너무 위험하지 않 겠 습니까? 그러니 그만 환수들의 귀속을 풀어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뭐 전부는 필 요 없습니다. 스컬프트의 귀속만 풀어 주시면 될 일이지요. 더불어서 그 환수를 저에 게 주시면....” “말도 안 되는 소리. 환수를 풀어 주는 것은 동의하지만 그 환수에 욕심을 부린다 면 나도 참지 않겠소. 마롤후작.” 역시 그 와중에도 서로의 세력 견제를 하는 작자들이다. 하지만 이번 선물은 자이건이나 아세트의 입장에서 주기가 어려운 것들이다. 양보할 수 없는 것들인 것이다. 그나저나 아세트가 헤이스런 가문의 수장이었단 말이야. 공 작. 그것도 여자가 공작이었어? 세습되는 것이니 그렇게 된 모양이지만 결과적으로 이 젠 자이건과 아세트 사이에 태어나는 아이가 공작의 위를 물려 받을 수도 있겠네? 물론 아세트가 공작의 자리를 끝까지 지킬 때의 문제겠지만... “두 분께서 바라시는 선물은 저희 부부에게는 너무 부담이 되는 것들이라 드리기가 어려울 것 같군요. 하하. 이거 받기만 하고 드리지는 못하니 아까 주셨던 선물을 그 냥 되돌려 드리겠습니다. 그나저나 아쉽군요. 좋은 선물이었는데 이렇게 돌려 드리게 되어서... 하하.” 자이건이 두 후작의 선물을 간단하게 거절하고 있었다 “크크, 그게 될 말인가? 선물을 받지 않겠다니 말이야. 성의를 무시하다니 그럴 수 는 없는 일이지. 그럼 어쩔 수 없이 내가 선물을 주는 수 밖에 없겠군.” 마르틸 후작이 말과 함께 손을 치켜들자 그것이 신호가 된 듯 멀리 평원의 끝에서 황 운黃雲 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상당한 숫자의 군대가 움직이고 있는 징후란 것을 충분히 짐작을 할 수 있는 일이었 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남쪽에서도 먼지구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준비한 또 다른 선물도 도착을 하는 모양이군. 그나저나 선드라스가와 헤이스 런가의 경사에 이렇게 많은 축하객이 몰리다니 대단하군. 대단해 켈켈켈.” 하지만 자이건과 아세트는 그런 모습에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주위를 살피고 있었 다. 아마도 적의 세력을 완전하게 파악을 해 놓자는 것인지 자이건쪽의 병사들과 우제푸 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서로간에 말이 필요 없다고 느꼈는지 마르틸후작과 마롤 후작, 그리 고 그들과 대치중인 자이건 부처夫妻 사이에는 별다른 말이 오고가지 않았다. “예상보다 수가 많은데요? 마르틸 후작의 병사는 대략 1만 정도로 보이는데요? 거기 다가 마롤 후작의 세력도 검을 들고 있는 녀석들이 3천 정도 되는 것 같고 마법사로 보이는 병력도 500은 되어 보이네요. 아무래도 객관적인 전력으로는 마롤 후작의 병 력 이 우세하군요. 저 3천의 병사들이 전부 검기를 쓰는 수준일 테니 말이죠.” 상황을 지켜보던 광아가 전력 분석을 내 놓았다. “그런데 자이건의 병력을 어느 정도나 되는 거야? 아까 연락이 왔을 때, 어느 정도 의 병력이라고 했어?” “기사단이 1500명 정도 되고, 마법사는 50명 정도 된다는 것 같았습니다. 화아형.” “그럼 완전히 열세잖아? 어느 한쪽만이라면 어떻게 상대를 할 수 있겠지만, 두 쪽 모두의 협공을 받는다면 아마도 승산이 거의 없을 것 같은데?” “정말이에요. 풍아 언니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그 정도의 병력뿐이라면 두 후작의 세력을 모두 막을 수는 없을 것 같은데요? 거기다가 분위기로 보니 두 후작은 서로 협 력을 하기로 한 것 같은데 말이죠.” 수아도 걱정스럽다는 듯이 점점 다가오는 병력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는 사람들의 모습이 뚜렷하게 보일 정도로 가깝게 다가온 병력들이었다. 마르틸 후작의 병력들은 기병들과 보병, 궁병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군대의 모습이 라면 마롤 후작의 병력들은 어중이떠중이를 모아 놓은 모습에 어디 한 군데 통일된 모 습이라고는 없는 혼란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나마 중간 중간에 끼어있는 검은 색 로브를 걸친 녀석들이 몇 명이 있었고, 그들 이 주위의 사람들을 지휘하는 듯이 보여서 체계가 전혀 없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말이 다. “교의 사제들이군요. 비록 하급의 사제들이기는 하지만.... 어떻게 루시퍼님의 뜻 이 있지도 않은 이 곳에 저들이 나타난 것인지 알 수가 없군요.” 아르미엘이 검은 로브의 인물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암흑교의 사제들이라면 저들을 물러나게 할 수는 없습니까? 사제님?” “그건 저로서도 곤란한 문제입니다. 저들이 비록 저보다 직급이 낮은 사제들임에는 분명하지만 저들이 자신의 행동을 루시퍼님의 뜻이라 믿는 이상 저의 어떤 말도 통하 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교의 사제들, 아무리 하급의 사제라 할지라도 견습 의 딱지를 뗀 자들은 스스로 루시퍼님의 뜻이라 믿지 않는 일에는 저렇게 모습을 드 러 내지 않지요. 그러니 저들을 설득하거나 강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신의 뜻 을 따르는 자는 오직 신의 뜻으로만 멈출 수 있는 것이니까요.” 역시 종교라는 것은 참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우리들이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 모든 병력들이 대열을 정비하고 멈추 어 섰다. 대략 500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 이동을 멈춘 두 세력은 그들의 수장의 명령을 기다 리는 듯, 조용히 대기하고 있었다. “이젠 준비가 다 된 듯 하군. 그런데 자이건, 자네도 이젠 숨겨 놓은 패를 보여야 하지 않겠나? 설마 아무런 준비도 없이 우리들을 맞이할 생각을 한 것은 아닐 테고 말 이야.” 살벌한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서도 느긋하게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자이건과 아세트 의 모습을 보며 마르틸 후작이 자이건을 재촉했다. “물론 보여 드려야 하겠지요. 하지만 조금 더 기다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아주 좋은 것을 보여 드릴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자이건은 그렇게 말하며 빙긋 웃어 보였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여유가 넘치는 자이건과 아세트를 보며 두 후작은 왠지 모 를 불안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무슨 일을 꾸미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다고 일을 꾸미고 있을 시간을 줄 수는 없는 일이지.” 마르틸 후작이 갑작스럽게 말을 뱉어내듯 하고는 빠르게 자신의 진영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혼자 남은 마롤 후작도 몸을 돌려 자신의 병력들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 다. “이거 아무래도 계획보다 빠르게 일이 진행되는데요? 어쩌지요? 자이건?” “어쩌긴 어쩌겠어. 여차하면 볼 것 없이 자리를 피해야지. 우리 둘이서 저들을 모 두 막을 수는 없는 일이잖아.” 그리 크지 않게 주고받는 말이지만 그 말이 우리들에게 들리지 않을 수는 없었다. 물론 그 말을 들은 우리들은 우르르 자이건에게 몰려가서 질문을 던졌다. “무슨 소리야. 둘이라니? 강철기사단과, 우제푸는 어쩌고 둘 뿐이라는 거야? 아까 분명히 1500 강철기사단과, 50명의 마법사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연락이 있었단 말이야.” “호호, 역시 성공이군요. 화아님 일행들을 모두 속일 정도라면 저들도 당연히 속았 겠지요. 호호호.” “무슨 말입니까? 속았다니요? 그럼 마췬 길드가 가지고 온 정보가 틀린 것이라는 말 입니까?” “그건 아니지. 그 때까지는 분명히 그 병력이 이 쪽으로 오고 있었고, 그게 저들이 생각할 때, 우리들의 병력이 먼저 움직였고 평원쪽에 더 가깝게 이동해 있었기 때문 에 저들도 자신의 병력들을 이 평원으로 집결 시켰겠지. 하지만...” 자이건이 그렇게 말을 하면서 말을 끊는 순간 내 머리 속에서 한 가지의 가설이 스치 고 지나갔다. “빈집을 터는 것이로군. 정확히 방법은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역시 루탄님은 당할 수가 없군요.” 내 말에 자이건이 놀랍다는 듯한 표정을 나를 바라보았다. “그 말이 맞습니다. 빈집 털이. 이 평원을 향해 오던 병력들은 다시 50명의 마법사 들의 도움을 받아 한타리아로 이동되었습니다. 조금 시간이 걸리고 미리 준비해 둔 마 법진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일이지만 불가능 한 것은 아니지요. 덕분에 50명의 마법 사 들은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피곤해 졌겠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돌아간 병력 들을 1황자와 2황자를 제압할 것입니다. 그럼 모든 것은 끝이 나는 것이지요. 지금 이 자리에 선드라스 공작가의 수뇌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 다 그런 이유 때문이지요. 솔직히 1황자가 정통성을 내세운다면 할 말은 없지만 두 황자는 아무리 생각을 해도 왕으로서의 자격을 갖지 못한 인물들입니다.” “그럼 지금 그 일이 진행이 되고 있는 중이겠군. 마롤과 마르틸 두 후작의 힘은 거 의 모두 이 곳에 모여 있는 셈이고, 두 후작의 힘이 아니고서는 강철기사단의 행사를 막을 생각을 할 병력은 거의 없을 테니 어려움을 없을 것 같군.” 내가 그렇게 앞으로의 상황을 예상하고 있을 때, “형님, 그 문제는 그렇다고 해도, 저들은 어떻게 막지요? 아무래도 저들이 더 이상 명분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까지는 저들을 막거나 혹은 도망을 가는 방법뿐일 것 같은데요?” 광아가 말하는 것은 우리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마르틸 후작의 병사들이었다. 자신의 진영에 도달한 마르틸 후작은 벌써 공격 명령을 내린 모양으로 병사들이 천천 히 앞으로 전진해 오고 있었다. “이런, 곧 화살이 쏟아지겠군. 자이건 어떻게 할 생각이야?” 나는 태연한 자이건을 보며 물었다. “글쎄요. 저와 아세트가 할 일은 여기에서 시간을 끄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니 거 의 목적 달성을 했으니 이제 신혼여행을 가야지요. 마침 우제푸 어르신이 이렇게 신 혼 여행에 쓰라고 멋진 선물도 주셨거든요. 그럼 저희는 이만 사라지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자이건이 내 보인 것은 다름 아닌 스크롤이었다. 볼 것도 없이 순간이동 스크롤. 그, 그럼 여기에 남는 우리들은 뭐가 된다는 것일까? 우리들이 저 많은 병력들을 상 대하고 있을 수도 없고 결국에는 우리도 도망을 가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다는 말인 데... “자이건, 혹시 이 계획, 우제푸 영감이 세운 거 아니야? 우리들이 이 곳에 올 거란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 너하고 아세트만 도망을 가라고 할 놈은 분명 우제푸 그 늙은 이 뿐이었을 것 같은데 말이야.” “저, 저기 그게... 우제푸 할아버지가 루탄님 일행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그러니 까 우리들만 빠져 나오면 된다고 하긴 했지만.... 사실 루탄님 일행이야 우리가 생각 하기에도 걱정은 없으니까...” 아세트까 떠듬떠듬 변명을 하기 시작했지만... 내 머리에서 열이 오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럼. 진작이 이런 계획이 있다고 이야기를 했으면 마음의 준비라도 할 거 아니냔 말이야...” “저기 오빠, 그런 소리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봐요. 벌써 화살이 쏟아지고 있 어요.” 루아가 그렇게 상황을 주지시키고 나서야 나는 우리들에게 쏟아지는 화살을 수아가 수막으로 막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튼 나중에 보자. 그리고 우제푸에게 전해 이번 일 절대로 잊지 않겠다고 말이 야.” 저 정도의 화살이 우리 일행에게 무슨 위협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아무래 도 우리들에게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저 병사들과 기사들과 직접 맞부딪히게 된다면 우리들로서도 피곤해질 수 밖에 없었다. “자, 이리들 모여라. 우리도 돌아가자. 그리고 자이건이 먼저 가라. 가는 걸 봐야 우리도 출발을 하지.” 역시 나는 어쩔 수가 없나 보다. 그래도 자이건과 아세트를 먼저 보내야 한다는 생각 을 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한바탕 붙어 보고 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재미도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클클.” “지토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말아. 우리가 저들과 싸워서 좋을 것이 뭐가 있다는 말이야? 저들도 모두 한타의 병력이란 말이야. 나중에 제란과 한 판 붙을 때, 힘이 될 병력들이라고.” 나는 쓸데없이 주절거리는 지토에게 한 마디 쏘아주고는 자이건과 아세트가 팔짱을 끼고 순간이동 스크롤을 찢고 사라지는 모습을 확인하고 우리 일행 전체를 처음 우리 가 도착했던 야영지로 이동 시켰다. 물론 그 사이에 루이스 마치 한타 3황자가 마법사의 도움을 받아 자취를 감춘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것은 마르틸 후작의 병력들이 결혼식장을 향해 진군을 시작한 것과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으니 우리들이 자이건과 아세트가 사라진 결혼식장에서 더 이상 시간을 끌 이유 라곤 없었다. 여러 가문에서 결혼 예물로 보낸 물건들이 아깝기는 했지만... “뭐야?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 버리다니... 아무 일도 없이 끝이 나 버렸잖아.” 순간이동으로 야영지에 무사히 도착하자마자 들려온 것은 지토의 투덜거림이었다. “지토 아저씨. 그래도 싸움을 하지 않게 된 것이 다행이지 뭐예요? 꼭 싸워야 될 이 유는 없잖아요.” “그렇지요. 지금 우리들이 싸움을 하지 않고 있다곤 하지만 한타리아의 왕성에서는 숨막히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고 보니 광아의 말이 맞겠네? 어떻게 되었을까? 1황자와 2황자 모두 신변을 확 보 했을까? 그랬다면 이젠 한타왕국의 왕권 분쟁은 끝이 나는 셈이겠지?” 그냥 도망을 왔다는 것이 불만인 지토에 비해서 다른 녀석들은 별 불만은 없어 보였 다. 다만 한타리아의 왕성에서 벌어지고 있을 싸움에 관심이 가는 모양이었다. “난 생각이 조금 달라. 이번에 만약 1황자와 2황자를 제압하고 3황자를 왕위에 올린 다고 해도 마르틸 후작이나 마롤 후작이 순순히 물러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아. 도대 체 자이건은 무슨 생각일가?” 내가 그렇게 미래를 점치자 일순간에 주위가 조용해졌다. “하지만 형님, 예전에도 말했지만 귀족들은 자신들의 피가 많이 흐르는 것을 반가워 하지 않는다고 했잖습니까? 비록 3황자가 왕이 된다고 하더라도 마르틸 후작을 중심으 로 한 파벌들은 그 나름의 결속력을 가지고 한타의 권력층을 유지할 겁니다. 그러니 차라리 그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물론 마롤 후작의 경 우에는 그의 지지 기반이 암흑제국과 2황자의 어머니인 왕비를 주축으로 한 것이기 때 문에 어떨지 모르지만 그가 거느린 귀족 세력도 만만하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그 역시 도 마르틸 후작과 마찬가지로 3황자가 왕이 된 이후에도 견제세력으로 남는 쪽을 택하 지 않을까요?” 조용해진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밝힌 것은 물론 광아였다. “글쎄, 그럴까? 나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마롤이라는 작자가 암흑제국의 그 신비세력 과 관련이 있는 것 같으니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잖아. 그게 문제야. 마롤 후작이 어 떻게 움직일지가 말이야. 거기다가 마롤이 움직이면서 마르틸 후작을 끌어들인다면 그 건 그야말로 설상가상이지. 그런 경우에 선드라스와 헤이스런 두 가문의 힘으로 한타 를 지탱하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어. 아니 어렵다고 봐야 겠지.” “정말 그렇겠네요. 마롤 후작의 세력이 암흑교의 사제들과 연관이 있으니 예전에 한 타의 귀족들이 보였던 모습을 기대하는 것도 무리일 수 있겠네요. 그럼 이제 어떻게 될까요?” “글쎄, 일단은 아까 그 결혼식장에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좋겠지? 풍아야, 카다에게 상황을 좀 보고 오라고 해 줄래?” 나는 풍아에게 평원에 오리알 신세가 된 마롤과 마르틸의 두 세력이 어떻게 하고 있 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풍아에게 부탁했다. 그리고 카다가 정보를 가지고 올 때까지 우리들은 서둘러 철수 준비를 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바쁘게 움직인 탓에 정리하지 못한 천막들을 정리하고 카다가 돌아 오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서서히 해가 기울어 갈 무렵에 우리들은 모든 준비를 마칠 수 있었고 카다가 돌아 와, 마롤과 마르틸 후작이 서로 별다른 충돌 없이 견제만 하다가 회군을 했다는 소리 를 듣고 넥스 영지로 돌아가기로 결정을 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한타리아의 왕성에서 일어나는 일을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었지 만 그렇다고 우리들이 전부 지리도 잘 모르는 왕성에 난입할 수는 없는 문제였다. 그러니 넥스 영지로 돌아가 우제푸와 마췬길드의 연락을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나는 일회용 마법진을 그리고 일행들과 함께 넥스 영지로 돌아 왔다. “어서 오세요. 호호.” “무사히 오셨군요. 조금 걱정했습니다.” 우리가 마법진을 통해서 넥스 영지에 도착하자마자 듣게 된 평범한 인사였다. 하지 만 그 파장은 자뭇 심각할 정도였다. “뭐? 뭐야!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어머, 어떻게 된 일이지? 왜 둘이 여기에 와 있는 거야?” “정말 깜짝 놀라게 만 드는군요. 어떻게 된 일이죠?” 이미 짐작하겠지만 우리들을 맞이한 것은 오늘 결혼식이라는 것을 하고 부부가 된 사 람들이었다. “저희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저 우제푸 영감님이 준 스크롤을 찢었는데 이리로 옮 겨 오게 되었거든요. 아마도 여기가 우리들의 신혼 여행지로 적합하다고 생각을 했던 모양입니다. 원래 신혼여행이야 귀족들이 결혼식을 하고 자신들의 영지를 둘러보는 것 이지만 저희야 어디 변변한 영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하니 아마도 이렇게 멀리 보내 신 모양이지요.” 태연스럽게 말을 하는 자이건이다. 그러고 보니 이제 결혼을 해서 그런지 한 집안의 가장이라는 것도 배려를 해 줘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자이건 네가 여기에 있으면 한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어떻게 처리를 할 생 각인 거야? 비록 선드라스와 헤이스런가문이 3황자를 왕위에 올린다고 하더라도 그 뒤 를 받칠 힘이 없으면 어떤 문제가 생길지 몰라서 이러고 있는 거야?” 나는 자이건에게 질책하듯 따졌다. “저도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을 했습니다만, 루이스 폐하께서 집권을 하신다고 해도 어차피 마르틸과 마롤이 힘을 유지한 상태에서의 견제가 만만하지 않을 것입니 다. 그건 예전부터 한타에서 유지되어 왔던 귀족들의 파벌을 모두 없애지 않은 한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래서 어쩌자는 생각인데?” “그건 이이와 우제푸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님이신 선드라스 공작님께서 심각하게 의논해서 내린 결론이 이런 것이었습니다. 이번에 어떻게 해서든 루이스 폐하를 옹립 하고 나머지 귀족들의 견제는 예전처럼 유지하기로 한 것이지요. 대신에 강철기사단 과 헤이스런가의 환수 군단은 이곳으로 자리를 옮겨 오자는 것입니다. 어차피 지금으 로선 제란이 일으킬 싸움을 대비하는 것이 가장 우선적인 일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집 약된 힘이 필요하니까 말이죠. 그러니 저와 강철기사단의 힘으로 마롤과 마르틸 후작 을 견제하던 것을 이제는 루이스 폐하와 아버님께서 맡기로 하시고, 실제로는 이것이 이번에 강수를 두면서까지 루이스 폐하를 왕위에 올리게 된 이유입니다만, 어쨌든 그 렇게 해서 여유가 생기는 강철기사단과 저희 가문의 환수사들은 모두 이곳으로 모이기 로 한 것입니다.” 아세트가 자기 남편을 닦달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장황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나는 그 말에서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제란과 암흑제국의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한타의 왕권 교체를 빠르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고, 강철기사단 과 헤이스런가의 힘으로 유지되던 균형을 이제는 왕권으로 균형을 맞추고 대신에 남 는 힘을 빼돌리는 방법을 썼다는 것이 된다. 물론 강철기사단이나 헤이스런의 힘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고 해서 전혀 무시 할 수 있는 것도 아닐 테고 실제로 강철 기사단을 제외하고도 선드라스 가문이 가지 고 있는 군사력에 대한 영향력은 상당한 것이니 루이스 마치 한타의 비호를 받는다면 한타가 겉으로라도 안정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 같긴 했다. “에휴~. 그럼 이제 자이건과 아세트가 이곳에서 지낸다는 말이야? 뭐 넥스 영주님 께 말씀을 드린다면 반대를 하시지는 않으시겠지만 여기서 한타에서의 지위를 내세울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뭐 그런 문제는 나중에 영주님과 자리를 같이 하면 서 해결을 하도록 하고, 그럼 강철기사단의 단원들과 헤이스런의 환수사들은 언제 어 떻게 도착을 한다는 거야?” 지금으로선 힘이 필요한 때이니 자이건과 아세트의 합류를 막을 이유가 없었다. 나 는 그저 어떻게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그렇게 자이건과 아세트의 합류를 허락했다. “일단 한타리아의 상황이 정리되면 우제푸님께서 마법사들을 이용해서 이곳으로 이 동을 시켜 주실 겁니다. 그것도 시간이 좀 걸리기는 하겠지만 하루 50명 정도씩 보내 신다니 한 달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환수사들도 함께 올겁니다. 수는 많지 않지만 상당한 전력이 될 겁니다.” “알았어. 알았다구. 이거 점점 머리가 아파지는 것 같네.” 나는 그렇게 대충 얼버무리고는 자리를 피하고 싶었지만 막상 자이건과 아세트가 첫. 날.밤.을 보낼 숙소를 찾을 때에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어째서 내가 그런 것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거야? 그런 건 넥스 영주님께 물 어보던지... 난 모르는 일이야.” 안 그래도 루아에게 청혼했다가 딱지를 맞아서 기분이 우울한데 거기다가 기름을 붓 고 불을 지르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우여 곡절을 겪고(아세트와 자이건은 넥스 영주의 저택 한 쪽에 자리를 잡고 신혼 살림을 차렸다.)난 후에 우리들은 또 한 달 이상을 힘들게 보내야 했다. 밀려오는 강철 기사단의 숙소를 만들어야 했고, 연병장도 만들어야 했고, 헤이스런 의 환수사들을 위한 숙소와 자리를 만드는 일도 남아 있었다. 그렇다고 그 전부터 해 오던 일을 하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정신없는 시간들 을 보냈다. 일단 한타의 왕권은 루이스 마치 한타가 차지했고, 1황자와 2황자는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유폐를 시켰다고 한다. 물론 내 생각에 그들이 살아있을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본다. 내가 만약에 이번 일을 계획했다고 하더라도 두 황자들의 흔적을 지우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뭐 그렇다고 나에게 그들을 죽였겠느냐고 묻 는다면 대답할 말은 없지만 말이다. 결국 한타의 정세는 마르틸 후작, 마롤 후작, 선드라스 공작의 3파전으로 돌아가는 모양이었지만 국가의 발전에 관한 문제에서는 그런대로 마르틸 후작이 호의적인 면을 보이는 모양이었고, 마롤은 그런 문제로 딴지를 걸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다만 서로에게 전력상의 이점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문제에서는 피터지는 언쟁이 벌 어지고 루이스 왕의 결제에 따라서 일이 처리되는 모양이었다. 물론 루이스 왕도 어느 한 쪽을 편애하는 모습을 보여서 마롤이나 마르틸의 심기를 크게 상하게 하지는 않는 모양이었고, 덕분에 두 후작도 겉으로 드러내고 시비를 거 는 일은 없는 모양이었다. 다만 문제는 2황자의 어미가 자신의 아들이 유폐(혹은 살해)된 것에 앙심을 품고 암 흑제국으로 가려는 것은 잡아서 역시 유폐를 시켰다는 것인데, 마롤 후작이 이 일을 빌미로 어떤 문제를 일으킬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직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있지만 언젠가는 불거져 나올 문제인 것은 분명하지만 일단은 한타왕국의 문제는 그렇 게 정리가 되었다. 하지만 넥스 영지에서의 정리는 좀처럼 마무리가 되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강철기사단의 단원들이 1500이었지만 그들의 실력이 기존의 화염기사단이나 얼 음기사단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문제였다. 때문에 자이건의 허락을 얻어 그들 중 뛰어난 인물들로 화염기사단과 같은 체제의 3 대를 만들고 인원을 660명으로 줄였다. 그리고 나머지 인원들은 다시 한타의 선드라 스 공작에게 보내기로 결정을 했던 것이다. 인원이 반으로 줄기는 하겠지만 도리어 효율적인 훈련과 집중력을 높일 수 있을 것이 라는 점에서 자이건도 승낙을 하는 수 밖에는 없었을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넥스 영지에는 화염기사단, 얼음기사단, 강철기사단의 세 기사단과 300 의 야전대, 100여명의 마법사와 30여명의 환수사로 이루어진 전력이 탄생하게 되었다. 물론 이 중에는 기사이면서 환수를 다루거나 마갑주를 다루는 인물들도 상당수 있었 지만 30명의 환수사을 따로 구분한 것은 그들이 헤이스런 가문의 정예들인데다가 그들 이 부리는 환수가 대급환수들이기 때문이었다. 비록 초환수는 아니었지만 대환수는 중급 환수에 비할 바가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아직도 파악되지 않는 하츠키라는 집사의 능력은 접어두고 하는 말이다.(젊은 하츠키 집사가 환수사들의 우두머리를 맡았다. 아세트는 내조를 해야 한단다.) 이렇게 늘어난 사람들에 대한 훈련은 이제는 틀이 잡힌 대로, 마갑주를 줄 사람들과 환수를 다룰 사람들, 그리고 기충을 써야 할 사람들로 나누어서 구분하고 계획을 세워 서 진행시켜 나가기로 했다. 그리고 당분간은 특별한 움직임이 없는 이상 우리들도 밖으로 우리들에 대한 정보가 유출되는 것을 막으며 힘을 기르는 데에만 전념하기로 했다. “어서 오십시오. 루탄님.” “네, 그 동안 잘 있었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저를 부르신 것을 보니 제가 부탁드린 것이 완성된 모양이군요?” 지금 내가 있는 곳은 바위정령족들의 영역 안이고, 나와 마주한 인물은 모루정이다. 물론 내가 여기에 온 이유는 이번 내 계획에서 꼭 필요한 물건을 받기 위해서이다. 지난 한 달이 넘는 시간동안 바쁘게 지내면서도 나는 루아에게 청혼을 했다가 딱지 를 맞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자이건과 아세트의 그 닭살스러운 짓거리들을 떠올리면 나도 빨리 결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닭살이 돋는 행동들이 무엇 인지는 구체적으로 말하고 싶지 않다. 그저 부비적부비적이라는 표현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그런 모습을 지난 한 달 동안 보면서 얼마나 열이 받았겠는가 말이다. 거기다 가 루아는 그 청혼 사건이 있고 난 이후로 조금 냉기를 품고 있는 모습이어서 난 상당 히 불편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는 조금 멋진 청혼으로 승낙을 받은 다음에 루아와의 행복한 신혼 을 만들고야 말겠다는 결심으로 단단히 무장을 하고 있는 상태다. “물론입니다. 자 여기 부탁하신 것입니다. 아마 세상에서 단 한 쌍만 존재하는 물건 일 겁니다. 아직까지 이런 광물이 발견되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거든요.” 모루정이 내 생각을 끊으며 손바닥 크기의 상자를 내밀었다. 은색으로 빛나는 상자 는 사각형 루비나 사파이어와 같은 모양으로 각을 이루고 있었는데 뚜껑이 열려져 있 어서 안의 내용물을 보여주고 있었다. 상자 안에는 두 개의 반지가 들어 있었고, 반지는 수수하게 새겨진 나선 모양의 문양 을 제외하면 장식도 되어 있지 않은 링에 종류를 알 수 없는 동그란 백색 광석이 붙 어 있는 모습이었다. 흡사 진주를 붙인 것 같았지만 광택이 없어서 그저 하얀 돌맹이 를 보는 것 같았다. “이런 말을 하면 조금 그렇겠지만 모루정님. 이건 별달라 보이지 않는데요? 어떤 특 별한 점이 있는지 설명을 좀 해 주시겠습니까?” 나는 조금은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모루정을 보며 말했고, 모루정은 내 마음을 이해한 다는 듯이 별로 화를 내는 표정도 없이 입을 열었다. “사실 이 반지의 링 부분은 별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저 조금 특이한 광석에서 추출 한 금속을 사용했다는 것 밖에는 없지요. 절대 색이 변하거나 혹은 마모가 되지 않으 면서 가볍고 탄성이 좋은 금속입니다. 워낙 그 양이 적어서 아직 이름도 없는 금속이 지요. 지금은 그저 다른 광석과 섞어서 합금을 만들 때에 사용하는 정도이지만 그 반 지의 백분의 일 정도의 양만 첨가시켜도 만들어져 나오는 무기나 방어구의 수준이 달 라질 정도로 굉장한 위력을 발위하는 금속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반지에 붙어있는 그 하얀 광물이지요. 그건 원래 하나였던 것을 둘로 나눈 것인데 그 것 때문에 아주 힘들었습니다. 둘로 나누기만 하면 사라져 버리는 특성이 있어서 말이 죠. 잘 발견도 되지 않는 녀석이지만 발견이 된다고 해도 어떻게 가공을 하는 것이 불 가능할 정도로 민감한 녀석입니다. 쪼개거나 상처가 나면 그 순간 가루가 되어서 공 기 중에 흩어져 버리는 녀석이 바로 그 광석이지요. 하지만 저는 해 냈습니다. 지금 보시는 것처럼 둘로 나누어서 한 쌍의 반지로 만들어 내었지요.” 순간 모루정의 얼굴에는 엄청난 자부심과 자랑스러움이 나타났다. “제가 그렇게 고생을 해서 그 광석을 반지에 담은 이유는 그 광석이 사람의 손에 닿 으면 화려한 변신을 하는 까닭이지요. 그건 직접 시험을 해 보셔야 알 수 있을 겁니 다. 하지만 지금은 여자분이 없으니 안 될 것 같고, 나중에 두 사람이 반지를 끼게 되 면 그 비밀을 알게 될 겁니다. 그리고 이건 확실하지 않은 것이지만 둘로 나누어진 이 광석은 아마도 서로 감응하는 능력이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어떤 식으로 나타날 지는 모르지만 어느 한 쪽이든 광석에 문제가 생긴다면 다른 광석에도 반응이 나타날 거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금강석보다 강도가 강한 광석이니 쉽게 상하지는 않겠지만 말이죠.” 상당히 장황한 설명이네. 설명대로라면 굉장한 반지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지금 으로선 너무 평범하고 또 다르게는 초라해 보이는 반지라서 루아가 어떻게 생각을 할 지 걱정이네. 아무튼 반지를 손가락에 끼게 되면 분명히 만족할 거라는 모루정의 장담을 믿고 나 는 반지를 품속에 챙기고 넥스 영지로 돌아왔다. 그 후로는 어떻게든 루아와 단 둘만의 시간을 만들 기회를 엿보며 시간을 보내야 했 다. 무턱대고 저번처럼 청혼을 했다가는 이번에는 어떤 꼴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 다. 최대한 분위기도 만들어야 하고, 또 멋지게도 보여야 하는 것이다. 나는 그런 청혼을 위해서 루아와 내가 자주 산책을 나가던 숲에 미리 여러 가지 준비 를 해 둔 상태였다. 하지만 기회가 좀처럼 오지 않는 다는 것이 문제였다. 풍아와 함께 얼음기사단을 훈련시키는 데에 재미를 붙인 루아는 낮에는 풍아와 함께 연병장을 누비고 있었고, 저녁이면 수아와 함께 음식을 만드느라 분주했다. 거기다가 아르미엘 사제가 붙어서 나의 접근을 방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간을 내기 가 더욱 힘들었는데 풍아나 수아도 예전처럼 아르미엘을 떼어내 주는 역할을 해 주지 않았다. 결국 시간은 자꾸만 흘러서 여름이 가고 가을이 깊어지고 있었다. 그 사이에 넥스 영지의 기사들이나 환수사 마법사들의 실력이 쌓인 것은 축하할 일이 었지만 이제는 새로 집을 짓고 독립해서 살림을 차린 자이건 부부의 작태에 매일같이 벽을 긁고 있는 나는 나날이 말라가는 기분이다. 그 동안에도 몇 번이나 청혼을 위해 준비한 장소를 들락거리며 미흡한 것은 없는지 또 준비해 둔 마법이나 보조 효과를 위한 장치들에 문제는 없는지 살펴보았지만 언제 그것을 쓰게 될지는 미지수였다. 나는 오늘도 청혼을 위해 준비한 장소에서 이것 저것 살펴보는 중이다. “큼, 도대체가 넌 어떻게 그렇게 멍청할 수가 있냐?” “무슨 소리냐? 왜 가만히 있는 나한테 시비냐?” 나는 지토가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별달리 놀라지 않고 지토의 말을 받았다. “여기 이렇게 준비를 한 것이 벌써 몇 달이 지났다. 그런데도 아직도 이루비아에게 는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그게 마음대로 되냐? 기회가 있어야 말을 하지.” “그러니 멍청하다는 거다. 솔직히 말해서 기회를 만들 생각은 하지도 않고 언젠가 기회가 생기겠지라는 생각으로 그러고 있으니 한심하지 않겠냐? 너 솔직히 아직도 결 혼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거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질질 끌고 있을 턱이 없잖아.” 그런가? 그럴지도 모르겠군. 결혼을 정말 꼭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기 회를 만들려고 했겠지. 아니 만들었겠지. “그러니까 요즈음 이루비아가 더 차가워지고 있는 거잖아. 니가 그렇게 망설이고 있 으니까 말이야. 확신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기회가 생겨서 청혼을 하게 된다고 해 도 아마 거절을 당하지 않을까? 내가 보기에 이루비아도 루탄 네가 아직도 확신을 가 지지 못했다는 걸 느끼고 있는 것 같던데 말이야.” 그렇겠지. 생각해 보면 그런 것을 모르는 것이 바보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곁에 있던 나무등걸에 걸터앉아서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지토와 마주 했다. “그래, 맞는 말이다. 결혼에 대해서 확신이 없어.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과 다른 사람들에게 둘의 관계를 확인시키는 방법이 결혼이라지만 왠지 그것 이외에도 무언가 더 있는 것 같거든. 그런데 그게 뭔지 모르겠어. 그래서 무섭기도 하고 확신이 생기 지 않는 것이기도 해.” “결혼이 가지는 의미를 모르겠다는 거야? 그거 가족이 생기는 거 아냐? 내 생각에 는 말이야. 결혼이라는 거. 그걸 루탄 네가 하면 가족이 생기는 거지. 우리처럼 형제 가 아니고 남편과 아내,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는 그런 가족이 생긴다는 거지. 난 그게 결혼이라고 생각해.” 지토의 말이다. 가족이라.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 그렇군. 어쩌면 나는 그런 것이 두려운 것인지도 모르겠군. 가족이란 것은 참 좋은 것이지만 책임과 의무가 그만큼 늘어난다는 말과도 같으니 말이야. 나는 멍하니 나무들 사이로 터진 하늘을 올려보았다. 내 나이가 이제 사십. 지심목에게 잡혀 있던 시간이나 쉬벡의 성 결계 안에서 보낸 천 년을 제외하고 정말 행동하고 살아 움직인 시간으로 보면 이제 내 나이는 사십을 바라보고 있었다. 겉보기 나이가 아무리 젊게 보인다고 해도 사십이라는 나이는 이제 조금은 철이 들어 야 할 나이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 가족이라. 좀 더 깊이 있는 가족. 좀 더 가족 같은 가족. 진짜 가족. 지금이 가짜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래, 그러고 보면 너희들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좀 더 변화가 필요하긴 하겠다. 좋다 너희에게 형수님을 만들어 주지. 하하하. 아이라. 그래 그러고 보면 나를 닮은 아이가 있으면 좋겠군. 하하.” 나는 벌떡 나무 등걸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저무는 해를 향해 뛰어갔다. 멀리 얼음기사단의 연병장에서 일과를 마치고 돌아오는 풍아와 루아의 모습이 보였 다. “잠깐 나좀 보자. 루아.” “어! 어! 왜 그래요? 오빠? 이거 좀 놓고 이야기 해요. 어딜 가는 거예요.” 나는 루아의 손목을 잡고 무작정 숲을 향해 걸었다. 원래는 여러 가지 준비를 해 둔 장소에서 멋지게 청혼을 할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그 런 격식을 따지고 싶지 않았다. 그저 빨리 내 마음을 루아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가족. 가족을 가지고 싶다. 더 많이 ... “오빠!!” 한참을 끌려오던 루아가 손목을 빼며 고함을 질렀다. 나는 고개를 돌려 루아를 보았다. 상기된 얼굴이 멀리서 비취는 저녁노을 탓에 더욱 붉게 보이는 루아는 조금 거칠어 진 숨을 고르며 나를 바라보았다. “이루비아. 나는 이루비아가 나 최루탄의 아내가 되어 주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 와 함께 가족이 되고 사랑이 되고 의지가 되고 믿음이 되고 행복이 되어 주기를 바랍 니다. 이것은 내가 지금까지 가져보았던 수많은 바람 중에서 비교할 것 없이 큰 바람 이며, 이 바람을 가질 수 있는 마음과 감정의 조각이 내 가슴속에 있다는 것에 감사하 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천 년 전에 나에게 왔었던 것을, 그리고 다시 천년을 넘어 당신을 만났던 것을, 그리고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 말했던 것을,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서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된 모든 것을, 이런 인연을 만든 존재가 있다 면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나는 정말 당신을 사랑하며 아끼고 원합니다. 이런 저에게 당신의 답을 알려 주십시오. 이루비아.” 나는 망설이지 않고 이루비아에게 한 발 다가가 두 손으로 이루비아의 손을 잡으며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아 올려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언젠가 청혼을 하면 이런 저런 말을 해야지 하고 준비했던 말들이 있었지만, 나는 지금 그런 것들을 떠올리지 않았다. 그저 가슴속에서 일어나는 감정과 떠오르는 생각들을 두서없이 늘어 놓을 뿐이었다.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의 전달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리고 숨소리가 조용해진 이루비아의 작고 붉은 입술이 열리며 내 청혼에 대한 답 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석양빛을 받은 이루비아의 얼굴이 붉은 것은 단지 석양 탓일까... 올려다보는 루아의 빨간 입술이 작게 떨리며 열리기까지 걸린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 껴지는지 모를 거다. 절대로 다른 사람은 이런 긴장을 알지 못할 것이다. 목으로 침을 삼키는 것 조차도 할 수 없는 경직된 내 몸은 오직 루아의 대답이 흘러 나오기를 기다리며 굳어 있었다. “일어나세요. 루탄님. 오래... 오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루탄님이 확신을 가지고 저에게 청혼을 하실 날을... 저는 다만 루탄님께서 굳은 마음으로 말씀을 해 주시기 를 바랐던 것이지 다른 것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충분히 만족합니다. 저를 사랑하시고, 저와 함께 하시고 싶어하시는 그 마음이 이렇게 제 가슴을 덮치는데 어 찌 모르겠습니까. 저는 이미 오래전에 루탄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님이시어 저 이루비아는 루탄님의 사람으로 남은 평생을 함께 할 것을 맹세합니다. 사랑합니 다. 루탄님.” 이루비아는 내 손을 잡아끌며 나를 일으켰다. 나는 무게 없는 몸뚱이처럼 그 이끌림을 따라 일어나 조용히 루아의 얼굴을 마주 했 다. 방금까지 석양을 받아 붉었던 얼굴이 내 그림자로 덮혀 있었지만 여전히 루아의 얼굴 은 상기된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천천히 루아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고 살며시 눈을 감는 루아의 입술에 부드럽 게 키스를 했다. 세상은 멈추어 있었다. 소리도 없었고, 바람도 없었고, 나무도 숲도 하늘도 없었다. 다만 나와 루아의 따듯한 체온과 두근거리는 맥박만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었 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우리는 조금씩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사랑해!” 낮게 귓가에 속삭여 주고 이마에 입맞춤을 해 준 나는 가슴으로 기대오는 루아의 어 깨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조금씩 정신이 들자 내가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깐만 놀라지 말아.” 나는 루아와 나의 몸에 부유 마법을 걸어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그리고 까마득히 하늘 위로 올라가면서 지평선으로 넘어가는 태양빛을 따라잡았다. 물론 우리들 주위에 보호막으로 기온 차이로 인해 생기는 문제는 미리 막아 둔 상태 였다. 그렇게 허공중에 떠올라 낮과 밤이 바뀌는 경계점에서 나는 품속에 있던 상자를 꺼내 고 루아의 왼손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그렇게 멋지게 보이는 반지는 아니지만 내 마음이라 생각하고 받아줘.” “고마워요. 아무리 싸구려라 해도 루탄님이 주시는 것이라면 그 의미만으로 충분해 요.” 쩝. 말은 그렇게 해도 조금은 실망하고 있을 테지. 하지만 곧 생각이 바뀔거야. 루 아.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반지를 루아의 손가락에 끼워 주었으 때, 반지에 붙은 하얀 광석은 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푸른색의 광채 속에 숨어있는 홍색의 보석이었다. 스스로 빛을 내는 보석. 그것도 전혀 반대되는 색을 동시에 내는 그런 모습은 정말 신비스럽게 보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이게?...” 루아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았지만 내가 그저 빙긋이 웃어주자 눈을 돌려서 내가 들고 있는 상자 속에 들어있는 또 다른 반지를 들었다. “제가 준비하지는 않았지만 제가 끼워 드리고 싶어요.” 루아는 반지를 들어 내 손을 잡고는 천천히 반지를 끼워 주었다. 물론 처음의 그 수수한 반지는 내 손가락에 끼워진 순간 광체를 내며 루아의 반지와 같은 빛을 내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고는 다시 한 번 긴 입맞춤을 하고 땅 으로 내려왔다. 룰루랄라. 그래, 그래. 그런 거야. 응? 상관없어. 음. 하하하. 괜찮아 괜찮아. 요즈음의 내 모습을 이야기하라면 이런 말로 정리가 될 것 같다. 지토나 화아 풍아들이 아무리 놀려도 괜찮았다. 기사단과 마법사들 환수사들의 훈련과 지원 문제로 업무량이 폭주해서 몸이 고달픈 것도 문제가 아니었다. 또 일데퐁소가 마법 연구를 하다가 탑을 거의 날려 먹은 것도 문제는 아니었다. 모든 것이 용서가 된다. 이루비아가 옆에 있으면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것이다. 우리 결혼식이 이제 일주일 남았다. 이루비아가 청혼을 받아들인 것이 벌써 2주일 전이니까 우린 청혼이 있고 3주만에 결 혼식을 하는 것이다. 뭐 생각같아서는 벌써 결혼식을 올렸어야 했지만 그래도 준비라는 것이 있고, 또 선 물을 제대로 받으려면 준비도 해야 한다고 해서.... 미루다보니 3주가 걸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일주일 남아있었다. 아르미엘 사제도 요즘은 모든 것을 포기했는지 별로 루아와 내 사이게 끼어 들지 않 는다. 아니 오히려 이제는 자리를 피해주는 것 같다. 하하하. 뭐 솔직히 일과가 많이 바뀐 것은 아니지만 일단은 나와 루아는 해질 무렵에 만나서 는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었다. 자이건과 아세트가 도리어 우리들을 보면서 닭살이라고 하긴 하지만 별로 개의치 않 는다. 그렇다고 우리들이 뭐 지네들처럼 부비적부비적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말없이 서로 를 바라보는 시간이 더 많은데 왜 우리들이 자기들 보다 더 심하다고 하는지 모르겠 다. 루아와 나는 그저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팔짱을 끼고, 어깨를 기대고, 때로 입맞춤을 하고, 그런 거야 누구나 다 하는 거잖 아. 푸하하하하. “야! 지토 화아. 너희들 똑바로 못하냐? 응? 만약에 집이 마음에 안들면 너희들은 나중에 조카가 생겨도 얼굴도 못 보게 할 테니 알아서 해. 푸하하. 나와 루아를 닮은 아이라면 얼마나 귀엽겠냐 안그러냐? 그런데 니들이 그렇게 어영부영하면 나중에 재미 없다. 절대로 우리 아이 가까이에 오지도 못하게 할 테다. 하하하.” “아잉. 부끄럽게 그러면 어떻게요? 루탄님도 정말....” 루아가 옆에서 얼굴을 붉히며 등 뒤로 숨었다. 뭐 들어서 알겠지만 나는 지금 우리들이 살 신혼집을 만들고 있는 지토와 화아를 놀 리고 있는 중이다. “킁, 저놈이 어떻게 저렇게 변하나 몰라. 이젠 아직 있지도 않은 자식놈까지 들먹이 며 구박을 하는군. 저게 정말 그 루탄이놈 맞는 거야?” “그러게 말입니다. 예전의 루탄형님이 조금 철이 없기는 했지만 저렇게까지 팔불출 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쩌다 저모양이 된 건지...” 뭐 조그맣게 구시렁거린다고 내가 못 듣는 것은 아니지만 그정도 투덜거리는 것 정도 야 내가 봐 주지. 푸헤헤 헤벌쭉. 흠. 정말 좀 심하기는 하다.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실없이 실실거리면 웃는 놈이 되었는 지.... 하지만 루아만 보면, 아니 생각만 해도 이렇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게 마 음대로 되는 문제가 아니니 말이다. “그럼 수고들 좀 해. 난 넥스 영주님께 좀 갔다 올께.”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루아와 함께 넥스 영주의 저택으로 향했다. “가서 루아는 제레이아 부인에게 부탁한 드레스 어떻게 되었는지 좀 알아봐. 빨리 루아가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보고 싶은데... 헤~” “루탄님, 그렇게 궁금해요? 드레스 입은 모습이? 나도 빨리 드레스 입고 루탄님께 보여드리고 싶은데... 호호.” 그러고 보면 나만 변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루아도 성격이 많이 바뀌어서 이제는 굉 장히 많이 밝아진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들은 넥스 영주의 저택에 도착해서 잠시 따로 헤어졌다. 루아는 제레이아 영주 부인과 함께 드레스를 살피기 위해 갔고, 나는 넥스 영주와 광 아와 자리를 함께 했다. “형님, 그 얼굴 보기에 좋습니다. 뭐 조금 심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나쁘지 는 않군요.” “루탄님도 결혼을 앞두고는 평범한 한 사람이 되시는 모양이지요? 하하 저도 예전 에 제레이아와 결혼식을 앞두고는 세상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은 기분이었지요. 그 때 는 정말 좋았는데...” “그 말씀은 지금은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이상하군요. 제레이아님께서는 여전히 행 복하신 모습이던데... 언제 한 번 여쭈어 봐야 겠군요.” “허험. 저, 저기 루탄님 그런 말씀은 농담이라도... 제가 루탄님께 섭섭하게 해 드 린 것도 없는데... 그런 말씀을...” 역시 당황하는 넥스영주다. 내가 알기로 제레이아 부인이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 리 아주 무서운 사람인 모양이던데... 뭐 그런 모습은 넥스 영주와 크라이안 집사밖에 는 볼 기회가 없는 모양이기는 하지만... 당황하는 영주의 모습에서 충분히 짐작하고 도 남을 일이다. “예? 무슨 말씀을... 제가 언제 뭐라고 했나요? 전 아무 말씀도 안 드렸습니다. 하 하하.” “형님, 시간이 많은신 모양이네요? 오늘 의논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지금은 그렇 게 장난을 하실 때가 아닙니다. 그러시다가는 형수님을 밖에서 오래 기다리도록 해 야 할지도 모릅니다.” 뭐? 루아를 기다리게 만들어? 안되지 안돼. “그, 그래. 빨리 야기를 하자. 의논 해야 할 문제라는 것이 뭐냐?” 그렇다고 그렇게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볼 것 까지는 없는 일이잖아. 쩝. “네, 일단 저희들이 보유한 전력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대략 기사들의 수는 2200명 마법사는 100명 환수사는 30명이 전력의 전부입니다. 그런 데 아무래도 이 인원으로는 훗날 제란을 막는 데에 무리가 있으리란 것은 분명한 사실 입니다. 예상되는 암흑제국의 병력은 약20만 정도 됩니다. 그것도 실제로 동원 가능 한 병력을 가늠해 본 것이 그 정도이니 전력을 다하는 경우에는 그 배에 이를 수도 있 습니다. 더구나 제 생각에는 마족이 뒤를 도와주는 상태라면 정상적이지 않은 힘의 개 입도 생각을 해야 할 것이라고 보면 저희의 전력은 그야말로 폭풍앞에 놓여진 모래성 과도 비길 수 있을 정도입니다. 거기다가 지금 인원들 중에는 10년 후면 40대 중반이 넘어서게 되는 사람들도 제법 있으니까 전력상으로 차질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겁니 다.” “그래서 뭐냐? 지금의 전력으로 도움이 안 되니까 더 많은 병력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거냐?” “그렇습니다 형님. 일단은 지금 당장은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조만간 1차적으로 지 금 병력들에 대한 훈련이 마무리되고 나서 대대적으로 전력을 증강시킬 필요가 있다 고 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병력들을 어디서 끌어 오냐? 거기다가 신성제국의 눈도 피해 야 하는데 잘못하면 제란과 붙기 전에 신성제국의 심기를 건드릴 수도 있다는 건 너 도 알고 있잖아. 지금 정도의 병력에 대해서야 말이 없다고 하지만 언제까지나 신성제 국의 눈을 가릴 수는 없다는 것을 너도 잘 알고 있잖아.” “루탄님 그렇지 않아도 그게 조금 문제입니다. 얼마 전에 받은 보고로는 신성제국 의 제국회의에서 우리 영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연락이 있었습니다. 지 금 당장에 우리 영지에 있는 병사들의 수에 대해서는 별다른 꼬투리를 제공하지 않는 한 간섭은 없을 것이지만 여기에 더 많은 전력이 모이게 된다면 그건 좀 문제가 될 겁 니다.” “그럼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말이군. 일단은 병력의 열세를 해결하기 위 해 수를 늘여야 한다는 것과 그 사람들이 이 영지에 있을 수 없으니 새로운 거점을 확 보해야 한다는 것. 이 두 가지가 문제의 핵심이네?” “그렇습니다 형님. 그래서 제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일단 적절한 지역을 찾는 데에 는 성공을 했습니다. 위치는 신성제국, 한타왕국, 누웬의 접점지역이 좋겠다는 생각입 니다. 그 쪽으로는 산림지대로 형성되어 있고, 또 세 국가에서 모두 다른 나라들의 신 경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 나름대로 간섭을 하지 않는 넓은 지역이 있습니다. 더구 나 환수들의 서식처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더더욱 몸을 숨기기에 좋을 것 같습니다.” 광아가 미리 지역을 거점을 알아 왔다는 말이었다. “그럼 남은 것은 병력을 모아야 한다는 거잖아? 그런데 그 문제는 어떻게 할 거 야?” “그건 제가 말씀을 드리지요. 일단 이번 계획에서도 엄청난 대군을 만들어 내는 것 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다만 개개인의 능력이 뛰어난 인재들을 발굴해서 정예화 하 는 것이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봅니다. 그러니 아예 군사학교와 마 법학교. 환수사 양성 학교를 만들어 젊은이들을 교육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입니 다. 물론 지금 열 다섯 정도 되는 나이의 아이들을 교육시킨다면 5년 후에는 자기 스 스로 인생을 결정할 정도의 나이는 될 수 있을 테니 어린 아이들에게 전쟁 준비를 시 킨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셔도 될 거라고 봅니다.” 넥스 영주의 말은 뜻밖의 말이었다. 아이들을 교육시키자는 말이다. “뭐. 그렇다고 치죠. 아이들을 교육시킨다. 인재를 양성한다. 좋다구요. 장소도 물색 을 해 두었고, 거기다가 건물을 짓고 제반 사항을 마련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 고 치죠. 하지만 아이들은 어디에서 나오는 겁니까? 도대체 어디에 가서 인재들을 찾 아오느냐 이 말입니다.” 나는 넥스 영주의 말을 듣고 물었다. 이 영지에 있는 사람들의 수를 다 합한다고 해도 겨우 4만에서 5만이 되지 않는 숫자 인 것이다. 그런데 새로 이 영지도 아닌 그 먼 곳에 자리를 마련해서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한다 면 겨우 몇 백 명 수준의 숫자를 가르치자는 것은 아닐 것이었다. 그리고 문제는 그 런 아이들이 이 영지에는 없다는 것이다. 아니 아이들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인재라고 할 수 있는 아이들이 그렇게 많은 수가 있을 수는 없는 일인 것이다. “그건 제가 생각을 해 봤습니다. 일단은 마췬 길드를 통해서 아이들을 구해 볼 생각 입니다. 더 나가서는 암흑제국에서 아이들을 사가지고 올 생각도 있습니다. 그리고 누 웬의 황제와 그란드 왕국, 선드라스 공작가 등의 도움도 받을 생각입니다. 문제는 신 성제국에서 도움을 얻을 수가 없는 것이 문제지만 일단 한타와 그란드, 누웬에서 어 느 정도 도움을 얻는다면 어렵지 않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만...” 광아가 계획을 털어놓았다. “그게 될까? 너 같으면 그런 인재를 우리에게 넘겨 주겠느냐는 말이야.” “글쎄요. 일단은 넘겨 줄 것 같습니다만... 제란과의 싸움이 끝난 후에는 모두들 자 기 나라의 전력으로 되돌아 올 것이라 생각할 테니 말입니다.” 넥스 영주는 광아의 계획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 말은 다시 이야기해서 그 왕국들에서 어느 정도 재정 지원을 받을 수도 있다는 말이겠군. 어차피 우리들을 위해서 전력을 가다듬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야.” 내 말에 광아는 조금 뜨악한 표정이기는 했지만 곧 대답을 했다. “아마도 가능할 것입니다. 물론 공식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어렵다고 하더라도 표나 지 않게 도움을 주기는 할 겁니다.” “좋아, 일단은 추진 해봐. 안된다고 손해를 보는 것도 별로 없으니까 말이야. 대신 에 인원 구성이 먼저야. 쓸데없이 사람도 없는데 준비만 했다가 일이 틀어지면 곤란하 니까 말이야.” “알았습니다. 형님.” 광아가 대답을 하고나자 넥스 영주도 그런대로 느긋한 표정이 되었다. 결국 이제부터는 넥스 영지에 더 이상의 전력이 늘어나는 일은 없을 테니(물론 겉으 로 보기에 그렇다는 것이지만.) 신성제국에서 꼬투리를 잡는 일도 없을 것이라 여기 는 모양이었다. “그럼 이야기는 모두 끝이 난 거지? 그럼 난 간다. 루아가 아까부터 기다리는 모양 이니까 말이야.”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부터 반지의 색이 짙어진 것을 보니 루아가 가까이에 와 있는 모양이었다. 반지는 특별한 점은 없었는데 루아가 가까운 거리(20미터 정도)에 다가오면 조금 더 빛이 나는 것이었다. 지금처럼 빛이 나는 것은 루아가 가까이에 와 있다는 말이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광아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형님, 너무 티를 내시는 것은...” “나 간다.” 나는 광아의 잔소리가 나오기 전에 후다닥 응접실의 문을 열고 나갔다. 현관으로 향한 복도 끝에 루아가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나는 후다다닥 루아에게 뛰어가서는 손을 잡고 현관을 나섰다. 루아는 내 손에 이끌려 나오면서도 자연스럽게 손을 빼고 내 팔에 매달려 왔다. 흐흐흐. 역시 인생은 즐거운 것이야.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결혼식. 새하얀 정장을 입고(화이트 스네이크의 가죽을 바위 정령족들이 다듬어 만들어준 결 혼 예복) 등에는 역시 바위 정령족이 신경써서 만들었다는 망토를 두른 모습으로 나 는 지금 화염기사단의 연병장에 마련된 결혼식장에 서 있었다. 내 뒤에는 결혼식을 주관하기로 한 넥스 영주가 서 있었고, 저기 멀리서 이루비아가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천천히 나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결혼식의 풍습에서 예전처럼 신부의 손을 아버지가 잡고 들어오는 것이 정해진 관습이 아닌 까닭에 지금 이루비아 를 데리고 들어오는 것은 아르미엘 사제였다. 처음에는 암흑교의 사제라는 이유로 많이들 반대를 했지만(아무래도 마신의 추종자 가 어떤 일에 축복을 준다는 것은 꺼려진 모양이다.) 결국에는 이루비아가 아르미엘 의 손을 잡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나를 포함한 모두가 양보를 했던 것이다. 그나마 아르미엘이 오늘은 깨끗하고 맑아 보이는 검은 사제복을 입고 있어서 다행스 럽게 느껴진다. 같은 검은 색이라도 칙칙하지 않은 느낌이라 좋다는 말이다. 어느새 이루비아가 내 앞에까지 다가왔고, 나는 이루비아의 손을 잡고 넥스 영주를 향해 돌아섰다. “흠, 흠. 에~ 또. 이제부터 루탄님과 이루비아님의 결혼식을 주관하시는 넥스 영주 님의 축하 말씀이 있으시겠습니다.” 지금 사회를 보고 있는 녀석은 테오도였다. “이렇게 기쁜 자리를 맞이 하게 된 것을 주신께 감사드리며 루탄님과 이루비아님의 결혼식에서 제가 이런 막중한 자리에 서게 된 것을 또한 기쁘고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여기 계신 루탄님은 그 지니신 능력과 인품의 뛰어남이야 여기 모인 모든 분들이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어쩌구 저쩌구 중얼중얼 구시렁구시렁 또, 그러니 까 사랑하여 결혼을 한다는 것은 어쩌구저쩌구 중얼중얼 구시렁구시렁 주절주절 하 여 여기 두 사람의 결혼은...어쩌구저쩌구 중얼중얼 구시렁구시렁 주절주절 떠벌떠벌 하기 때문에 어쩌구저쩌구 중얼중얼 구시렁구시렁 주절주절 떠벌떠벌 주저리주저리 하 여서 이제 루탄님과 이루비아님이 부부가 되셨음을 선포합니다.” 뭐? 응? 그래서 끝난 것야? 도대체 얼마나 오래 떠들었기에 내 왼쪽 뺨을 비추던 햇 빛이 오른쪽으로 기울고 있는 거야? “이제 부부가 되셨으니 신부에게 키스를 하십시오.” 응? 그건 마음에 드네. 진작 그럴 것이지. 나는 루아의 입술에 살짝 키스를 해 주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많은 하객들의 축하 선물 증정이 있겠습니다.” 테오도의 말에 따라서 내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선물을 가지고 다가왔 다. 이 세상의 결혼식 풍습으로 선물은 가깝고 친분이 깊은 사람일 수록 나중에 주는 것 이어서 우리에게 선물을 처음으로 준 사람들은 안면을 익히지 못한 영지민들과 야전대 의 가족들, 그리고 마법사들과 환수사들, 야전대, 강철기사단, 얼음기사단, 화염기사 단의 일반 기사들과 병사들의 대표. 그리고는 각 기사단의 대장隊長들, 그리고 그란 드, 한타, 누웬의 축하 사하사절들, 바위정령족의 대표로 온 달군쇠와 모루정의 순서 로 이어졌다. 솔직히 선물이 쌓이는 것은 마음에 드는 일이었지만 일일이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축하를 하는 데에선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넥스 영주 그 일행들이 선물을 주었고, 마지막으로 수아와 풍아, 화 아, 광아, 지토가 각자 작은 선물을 가지고 다가왔다. “축하한다. 클클 그래 조카는 언제나 안겨 줄 거냐 크흐흐.” “하하 걱정마라... 곧 윽!!” 나는 지토의 농담에 맞장구를 치다가 옆구리를 움찔 비틀며 낮은 비명을 질었다. “형 축하해.” “축하합니다. 형님.” “축하해 오빠.” “축하해요. 오빠.” 한꺼번에 입을 열고 축하를 해 주는 동생들이었다. 조금은 섭섭해 할 수도 있는 문제인데 다들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나 마 다행이었다. 만약 이 녀석들이 내가 자기들과 멀어진다는 느낌을 받으면 어쩌나 걱 정했는데 전혀 그런 마음은 가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 다들 고맙다. 이게 다 너희들 덕분이다. 나 지금 무척이나 행복해. 그걸 너 희들도 알지?” “그럼. 알지. 우리가 형 마음을 모르면 누가 알겠어?” “그럼 그럼. 당연하지.” “오빠가 행복해서 우리들도 행복해. 정말이야.” 웃음에서 금빛이 묻어날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녀석들이 너무나 고맙다. “이제는 화아 삼촌, 광아 삼촌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그리고 지토님과 풍아고모, 수 아고모가 되는 건가요?” 갑작스러운 이 소리는 이루비아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에~? 그러고 보면 그렇게 불러야 하는 거야? 내가 이젠 풍아 고모? 하지만 그럴려 면 조카가 있어야 하는데... 그러고 보니 이루비아가 아이가 빨리 가지고 싶은 모양이 지? 어? 아닌가 이젠 이루비아라고 부르면 안되는 건가?” 풍아가 잠시 헛갈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호칭에 신경 쓰지 말아라. 정상대로 한다면 도련님과 시누라고 불러야 한다지 만 그냥 예전처럼 편하게 불르도록 하자.” 나는 조금 난감해 질 것 같은 호칭을 간단하게 정리했다. “그럼 오빠는 이루비아를 뭐라고 부를 건데요?” 수아가 내 말에 꼬리를 달았다. “글쎄, 이제 결혼했으니까 여보? 자기? 당신? 하하 나중에 골라잡아야지. 하하하.” “어머, 루탄님...” 얼굴이 붉어져서 고개를 푹 숙이는 이루비아였다. “자, 자. 이제 선물은 대충 정리가 끝난 것 같으니까 이젠 축하 파티를 열어야지. 하하하. 어서 가세나 워낙 사람들이 많으니 집 안에서 다 모일 수는 없어서 다른 사람 들은 밖에 마련된 음식들을 즐기라 했으니 우리들은 안으로 들어가서 축하를 계속하자 고. 하하하.” 넥스 영주가 우리들을 저택쪽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아까부터 제레이아의 곁에 모여서 나와 루아의 모습에 입을 벌리고 있던 길리 어, 길리온, 리아 남매는 그렇게 모든 인사가 끝나고 나서야 쭈삣쭈삣 다가와서는 멋 지다느니 예쁘다느니 하는 말로 한동안 걸어가는 저택을 향한 길을 소란스럽게 채워 주었다. “꺄아~!!” “아부! 아부! 어붑!” “까르르 까르르르 까르!” “어쿵!” 두리번 두리번. “꺄하~~!” 아장아장아장. “어부. 어부. 빠아~!” 흐흐흐. 이 무슨 앙증맞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소리냐고? 그야 당연히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착한 아이가 놀고 있은 소리지... “빠아~ 라니. 라니! 라니.” “응? 그래. 그래. 알았어. 알았다. 하하 자 여기 란이 있잖니. 란아 널 찾는구나 같 이 놀아 줘라.” 뾰로롱 뾰로로로 - 알았어요. 주인님. 그래도 도련님 덕분에 저를 자주 불러 주시는군요. 꽤 오.래. 도.록. 신경 써 주지 않으시더니 말이죠. “하하. 내가 그랬나. 미안하다 란아.” 뾰로롱 뾰로 뾰뾰롤 - 됐네요. 전 작은 주인님이랑 놀 테니 신경쓰지 마세요. 란이는 폴폴 날아서 아들 녀석에게 가 버렸다. 물론 저 작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멋지게 생긴 녀석은 이루비아와 나 사이에서 태어 난 녀석이다. 이름은 타니. 타니 최 한국. 내 이름자 루탄에서 탄을 따고, 이루비아의 첫 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그래서 이름이 탄이가 되었는데, 어째 부르다 보니 타니라는 이름이 되고 말았다. 그 게 부르기가 더 좋다는 것이다. 어차피 특별한 뜻을 가지고 지은 이름이 아니었으니까 부르기 좋은 이름이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타니 녀석은 상당히 주위의 애간장을 태우다가 내가 결혼을 하고 새살림을 시작한지 3년이나 지나서야 소식이 있었던 녀석이다. 흔히들 태몽이라는 것을 꾼다고 하는데 나와 이루비아는 그런 꿈도 없이 타니를 가졌 다. 그리고 임신기간 동안의 고생이란 말로 다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어째 입덧이 내가 루아보다 더 심했던 것이다. 거기다가 루아가 별의 별 음식들을 다 먹고 싶어 해서 이 대륙의 곳곳을 순간이동으 로 날아다녀야 했다. 밤 늦은 시간에 꼬치 구이가 먹고 싶다면 대륙 어디에서 열리는 곳이든 야시장을 찾 아서 꼬치구이를 사 가지고 와야 했고, 한 겨울에 신선한 채소를 먹고 싶다면 위험을 무릅쓰고 암흑제국으로 스며들기도 했었다. 물론 루아는 그런 사실을 모르지만 말이 다. 그러면서도 입덧을 내가 하고 있었으니.... 아무튼 덕분에 결혼 4주년 기념식이 되기 전에 타니가 태어났고, 이제 첫 돌이 거의 되어가는 타니는 나와 루아 그리고 우리 형제들 모두에게 가장 소중한 준재가 되어 있 었다. 나는 지금 집무실에서 타니와 란이가 서로 어울려 노는 모습을 보며 잠시 쉬고 있는 중이다. 오늘 내가 해야 할 일거리는 모두 끝이 났고, 벌써 해는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깊은 산림지역이라 해가 빨리 기울기도 하지만 가을이 깊어가는 시기라 더욱 해가 짧 아지고 있는 것 같다. 창 밖으로는 산허리를 잘라 만든 연병장이나 학교 건물들이 보이고 있었고, 하루의 일과를 마친 학생들과 선생들, 교관들이 제각각 분주한 모습으로 그 건물들 사이를 오 가고 있었다. 나는 지금 대륙 종합 아카데미라 이름 붙은 학교의 교장실에 있었다. 뭐 어쩌다 보니 이제는 이 학교의 교장이 되어 있는 것이다. 처음 이 학교를 만들기로 했던 것은 결혼을 앞둔 얼마 전의 일이었고, 내가 결혼식 을 마친 후 1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첫 입학생들이 준비 되었다. 학생들의 수는 기사학부 500명 마법학부 200명 환수학부 200명 정령학부 100명으로 이루어졌고, 그 학생들을 교육시킬 선생들은 각 기사단과 야전대에서 각각 50명씩, 일 데퐁소를 비롯한 마법사 30명, 헤이스런의 환수사중 10명. 그리고 정령학부는 우리 형 제를 이 맡아 가르치기로 했었다. 환수나 정령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선생의 수가 모자라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몸 을 혹사시키는 방법뿐이었다. 처음 학생들이 모집되고 이 곳으로 옮겨 왔을 때에는 정말 난감하기까지 했었다. 험준한 산 속에 가끔씩 환수들과 마물들이 튀어나오는 곳이었으니 말이다. 그 곳에 건물을 세우고, 터를 닦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 함께 병행되어야 했기 때문에 그 후 1년 동안은 거의 죽어라 일만 했던 것 같다. 덕분에 루아와 나의 꿈같은 신혼은 넥스 영지에서 보낸 1년을 끝으로 더 이상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기도 했었다. 그렇게 1년을 보내는 동안에 학생들과 선생들과 교관들은 정말 가족같은 친밀감을 가 지게 되었고, 그것은 교육의 성과에도 지대한 여향을 미쳤다. 처음부터 입학생들이 거의 평민 계층에서 선발된 아이들이고, 어떤 경에는 암흑제국 의 노예 출신까지 있었기 때문에 힘겹고 어려운 출발에도 꿋꿋하게 따라올 수 있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만약에 귀족이나 부유층의 아이들이었다면 아마 어려웠을 것이라 고들 입을 모으고 있으니 말이다. 덕분에 이 학교 안에서 지위라는 것은 아무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4회 입학생들 중에는 귀족들의 자식들도 끼어있는 모양이었지만 그들은 이 학교에 들어오는 순간 자신들이 가진 지위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선배들에게 몸으로 배우는 경험을 해야 했다. 선후배의 관계는 아주 엄격했기 때문에 교사와 교환들을 제외하고 모든 규율을 통제 하는 것은 선배들이었다. 물론 능력이 뛰어난 학생들을 월반하는 제도가 있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입학 기수로 따지는 선후배의 관계가 바뀔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다보니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노예 출신의 선배에게 공손해야 했고, 그것은 귀족 의 자식이라 할지라도 예외는 없었다. 그러니 거들먹거리다가 무참하게 박살이 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한 경우가 기사학부의 경우였지만, 마법이나 환수, 정령학부라 고 예외는 아니었다. 마법이나 환수 정령학부에서는 선배들이 곧 후배들을 가르치는 교관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반발이 적을 수밖에 없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나 부드럽게 모든 일이 해결 되는 것은 아니었다. 덕분에 가을철 입학식이 있은 이후에는 약 두달 정도는 상당히 곤혹스러운 일들이 벌 어지고 특히나 회복이나 치료에 관계된 능력이 있는 선생들과 교관들은 몸살이 날 정 도가 된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시기인 것이다. 이제 입학식이 있고 2주가 흘러가고 있으니 이젠 본격적인 정비가 시작될 때였다. 지금까지는 이것저것 눈치를 살피면서 분위기에 적응을 하느라 반발이 없었겠지만 이 제 곧 입학생들과 선배들 사이의 충돌이 생길 것이다. 거기다가 4학년이 된 녀석들과 이번에 2학년이 된 녀석들 사이에는 아직도 남아 있는 앙금이 있을 테니 이제 곧 입학 생과 연대를 이룬 2학년들이 3학년과 4학년에게 반발을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주 재미있는 상황이 생길 것이었다.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개입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학교의 방침이었기 때문 에(물론 경우에 따라서 선생이나 교관이 개입하는 경우가 있다. 사태가 아주 심각해지 는 경우에는 말이다.) 나는 이번 1학년 2학년이 얼마나 버틸지에 상당한 기대를 하고 있는 중이다. 물론 이제는 조금 더 머리가 굵어진 3학년 4학년들이 어떤 방법으로 1,2학년을 제압 할지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빠~아!!” 이런 이런. 딴 생각을 하느라고 타니를 깜빡 했네. 나는 서둘러 타니 옆으로 가서 앉았다. 원래 여러 가지 가구들이 있었던 방이었지만 지금은 내가 쓰는 책상과 의자를 제외하 고는 아무것도 없이 그저 바닥에 카펫이 깔려 있을 뿐이었고, 여기 저기에 타니가 가 지고 노는 장난감들이 흩어져있었다. “타니야, 이제는 아빠랑 같이 엄마한테 가자. 자~아. 일어서야지 . 읏차. 그래 그 래 아주 잘 했어요. 가자 엄마 가자.” 나는 타니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물론 허리를 세우는 짓은 하지 못한다. 아직 아이의 손을 잡고 허리를 세울 정도로 아이가 크지 않은 탓이다. “어마. 어마.” “그래. 그래. 엄마 가자.” 내 말에 타니는 스스럼없이 발을 내 딛는다. 이제는 내가 자기를 잡아주면 절대로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모양인지 내가 손 을 잡으면 보통때와는 다르게 발을 재게 놀리는 타니였다. 나와 타니는 서로 손을 잡고 타니가 이끄는 대로 복도를 걸어서 타니 엄마에게로 발 길을 옮겼다. 타니와 나, 그리고 란이가 약간의 시간이 걸려서 도착한 곳은 실내 체육관이었다. 원래는 밖에서 모든 행사가 벌어지지만 때로는 날씨 때문에라도 안에서 행사를 해야 할 경우가 있을 거라고 우겨서 만들어진 건물이 이 건물이었다. 실재로는 산을 파고 들어가서 만들어진 곳이었지만 위대한 바위정령족의 솜씨(이건 모루정이 누누이 강조한 말이라 세뇌가 되었다.)로 만들어진 이 구조물은 바위 산 안 에 만들어진 것으로 그 넓이가 밖으로 드러난 학교 면적의 반이나 될 정도로 넓은 곳 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가는 곳은 그 구조물 중에서 가장 넓은 범위를 차지하는 곳으로, 보통 은 일반 학생들의 출입이 제한되어 선생님들과 교관들의 훈련장으로 쓰이고 있는 곳이 었다. 그것도 기사학부의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던 것이다. 수아를 비롯하여 화아, 풍아, 지토, 광아까지 모두들 정령학부의 선생들로 할 일이 넘쳐나다 보니 기사들에 대한 훈련을 맡을 사람들이 부족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자이 곱과 이루비아가 기사학부로 파견 나온 사람들을 훈련시키는 역할을 맡게 되었던 것이 다. 처음에야 이미 충분히 훈련이 된 녀석들을 이 학교의 선생과 교관으로 보냈지만 점 차 넥스 영지에 있는 녀석들은 훈련에만 전념하고 여기 있는 녀석들은 수업에만 신경 을 쓰다보니 실력에 차이가 생길 것이라는 우려가 생겨서 어쩔 수 없이 마련된 것이 일과 후 훈련이라는 방식이었다. 결국 하루 종일 학생들을 가르친 선생들과 조교들을 일과 후에 훈련을 받도록 하자 는 것이었는데 그건 실제로 너무 혹사에 가까운 처사라는 반발 때문에....(그래도 훈 련 그 안건은 통과 되었다.) 어느 정도 시행 되다가 여유가 생긴 후부터(그래봐야 1 년 전부터) 격일 단위로 묶어서 선생님들과 조교들을 훈련시키기로 했던 것이다. 어쩌면 우리 타니의 탄생이 늦어진 것도 다 이것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 탄이 엄마 를 그렇게 고생을 시켜서 나와 함께 있을 시간이 많이 줄였으니 말이다. 뽀드득. 가끔 루아와 나를 갈라놓으려는 사악한 존재들을 생각할 때마다 이렇게 이빨을 갈게 된 것은 정말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빠~?” “응? 아냐 아냐. 아무 일도 아니야. 우리 타니 무슨 일이 있었어? 응? 아빠가 이빨 소리를 낸거? 아무것도 아니야. 우리 타니가 옆에 있는데 아빠가 속상할 일이 뭐가 있 겠니. 그냥 우리 타니랑 엄마랑 오래 같이 있지 못하는 것이 화가 나서 그런 거야. 음. 이제 안 그럴게 타니야. 하하. 용서해 줄꺼지?” “꺄르르.” 벙긋 벙긋. 역시 우리 아들은 똑똑하고 착하고 마음씨도 좋아. 이렇게 아빠를 이해해 주니 말이 야. 뾰로롱 뾰로롱. - 주인님 작작 좀 하세요. 저기서 보고 있는 기사들 생각도 좀 하시라고요. 이 학교 에 끌려와서 결혼도 미루고 있는 사람들인데... 저 모습이 보이지도 않으세요? 란이 가 또 다시 나에게 주의를 준다. 하지만 이것도 이젠 거의 만성이 되어가는 것이다. 매번 이곳을 올 때마다(그게 매일 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니 말 이다. “어머, 당신 오셨어요. 오늘은 좀 일찍 오셨네요. 타니야. 잠시만 기다리렴. 호호 호.” 저기 멀리서 루아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하지만 곧이어 들려오는 소리는 전혀 분위기가 다른 소리였다. “어허! 이거 완전히 기합들이 빠졌구만. 거기 6조의 여섯 번째 죽고 싶냐? 똑바로 못해? 왜 인상을 쓰는 거야? 거기다가 우리 낭군님이랑 아들쪽으로 불만어린 시선을 보이는 그것은? 너 오늘부터 보조기구의 무게를 두 배로 늘인다. 알았어?” 순간 지명된 그 기사의 표정이 장난이 아니게 구겨지는 것을 보니 아마도 상당히 곤 란한 모양이다. 거기다가 이루비아의 목소리지만 평소와는 전혀 다르다. 뭐 이루비아가 기사들 훈련시킬 때는 보통 때와는 전혀 달라지기는 면이 있으니까 모 르는 척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그러는 사이에 이루비아는 자이곱에게 나머지 잔무를 맡기고는 서둘러 우리들에게 뛰 어왔다. “읏차. 우리 타니 아빠랑 잘 놀았어? 우르르르르.” 부비부비부비. “빠~~, 꺄르르르르. 어마. 마암.” 아직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녀석이 무에 그리 좋은지 자지러지는 웃음을 터뜨린 다. 그저 이런 모습을 보고 있는 것 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하다. “호호, 어서 타니야. 이제 집으로 가자꾸나. 오늘은 무얼 만들어 먹을까나... 당신 은 뭘 드시고 싶으세요? 오랜만에 수제비가 어떨까요?” 뭐 저녁으로 수제비는 좀 허하기는 하지만, 루아가 좋다는데야... “응? 수제비? 그거 좋지. 당신이 끓이는 수제비는 언제나 일품이잖아. 하하. 자, 타 니야 이제 집으로 가야지? 어서 앞장서거라.” 나는 타니를 엄마의 품에서 내려서는 바닥에 세웠다. 나는 타니가 걸음마를 시작한 후로는 절대로 타니를 안고 다니지 않는다. 어린 아이 에게는 좀 멀다 싶은 거리라도 타니는 걸어다녀야 했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절대로 타니를 안고 다니는 것은 용납이 되지 않았 다. 한마디로 자기의 일은 자기가 알아서... 스스로 어린이... 이게 아닌데... 아무튼 그 런 이유로 타니는 다른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의지하는 면은 없이 키우고 있는 중이다. 뭐 아프거나 다치거나 하는 경우에는 호들갑을 떨게 되는 것이 당연하지만 미리미리 다칠 상황을 제거해 주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이는 때로 다치면서 크는 것이다. 얼마 전에는 끙끙거리며 탁자위에 올라서서 놀다가 탁자 아래로 떨어져 머리와 어깨 를 심하게 다친 적도 있었지만 나는 탁자 위에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을 가지 고도 말리지 않았다. 경험보다 좋은 가르침은 없는 법이다. 물론 아파서 울음을 터뜨린 녀석을 안고 달래면서 상처를 치료해 주었지만... 아무튼 나는 내 아이를 과. 보. 호. 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물론 나의 이런 말에 대해서 헛소리라고 치부하는 지토같은 녀석도 있지만... 우리는 타니를 앞세우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타니는 조금 뒤뚱거리는 것 같기는 하지만 또래의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는 상당히 안 정적으로 발을 옮기고 있었다. 물론 옆에서 손을 잡아주는 루아의 세심한 배려가 도움이 되고 있었지만 말이다. 솔직히 타니는 좀 더 커봐야 알겠지만 일단은 환수에 대한 친화력이나 정령에 대한 친화력은 가지지 못한 것 같다. 그런 것은 핏줄을 타고 나는 것이 아닌 것인지.... 아니면 정령왕이 나에게 우리 형제들과 지토를 제외한 다른 정령들의 소환을 막은 탓 인지 타니는 정령들을 소환하지 못할 모양이었다. 그건 타니의 삼촌과 고모들에 의해 서 이미 입증이 된 것이었다. 거기다가 환수에 대한 것도 지금으로서는 별다른 친화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뭐 조금 시간이 지나고 오행심공을 익히고 나면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지만 지금으로 선 그렇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일데퐁소처럼 마나에 대한 친화력이 좋다는 것인데... 아마도 마 법을 배운다면 상당히 성장이 빠를 것 같다. 아무튼 지금으로서는 앞으로 5년 정도가 더 지나봐야 타니의 장래를 결정할 수 있을 것 같다. 일단 가전심공이랄 수 있는 오행심공을 익히고 마법을 익히게 될 것은 거의 확실하지 만 그것도 어려서 말을 잘 듣고 시키는 대로 할 때의 이야기지 저 녀석도 제 생각을 가지고 고집을 피우게 된다면 어떤 길을 걷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머, 당신 뭐해요? 빨리 오지 않고. 저 양반은 점점 느긋해지는 것 같아.... 타니 야 너는 아빠처럼 저렇게 만사태평으로 지내면 안 된다. 알았지?” 이 이봐. 다른 것은 몰라도 타니에게 내 흉을 보는 것은 안 될 일이야. 적어도 타니 는 아직 그런 말을 농담이라고 받아들일 나이가 되지 않았단 말이야. “다, 당신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거야. 타니는 아직 그런 농담을 이해 못한단 말이 야. 어떻게 타니에게 내 흉을 볼 수가 있어...” 물론 내 표정이 이 순간에 울상이 된 것은 절대 과장이 아니다. 이건 정말로 심각한 문제니까 말이다. 타니에게 흉이 있는 아빠가 될 수는 없단 말이야!! “호호, 그래도 타니가 무섭기는 한 모양이네요. 그리고 타니도 제가 한 말이 농담이 라는 것 정도는 알 거라구요. 그렇지? 타니야?” “꺄르르. 빠!!” 타니는 루아의 말을 듣더니 곧장 두 손을 치켜들고 뽀르르 달려와서는 내 다리를 잡 고 얼굴을 부비부비... 프하하하. 뭐가 더 필요하랴... 푸하하하하. 잠시 후 우리는 식탁에 타니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란이는 식사가 끝난 타니의 어깨에 올라앉아서 타니의 발그래한 뺨을 주둥이로 톡톡 건드리며 장난을 치고 있었고, 타니는 그런 란이의 장난에 가끔 눈을 뜨고 고개를 갸 웃거리고는 다시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다. “타니 좀 깨워서 방에 데려다 재워야겠군. 당신이 좀 재우고 오겠어? 난 설거지를 책임지지.” “그러세요. 그럼.” 내 말에 루아가 타니를 깨워서 방으로 데리고 간다. 물론 타니는 아장아장 걸어서 제 방으로 가야한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해야 하는 것이 다. 아까 저녁을 먹을 때에도 숟가락과 포크를 들고 얼굴에 여기 저기 국물을 묻히며 식 사를 했던 것처럼.... 나는 식탁위에 있는 식기들을 간단하게 마법으로 씻어 놓고 루아가 나오기를 기다렸 다. 루아는 오래지 않아서 타니를 재우고 나왔다. 어린아이들은 잠자리에 들 때는 옆에 누군가 그 자리를 지켜주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고 한다. 혼자 잠드는 것은 아직 어린 타니에게는 정서적으로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잠자리를 지켜주는 것이다. 뭐 일어날 때는 혼자서 일어나야 하기는 하지만... “다 됐어요. 이제 가지요. 오늘 넥스 영지에서 긴급회의를 소집했다지요? 벌써 삼촌 들과 고모들이 다 모였겠군요. 우리만 늦었다고 한소리 하겠네요. 서둘러가야 타니가 깨기 전에 돌아오지요.” “그렇지. 빨리 가자고. 그리고 란이는 우리 타니 잘 보살피고 있어라. 알았지?” 뾰로롱 뾰롱. - 알았어요. 주인님. 이젠 내가 타니의 유모라니까... 어서 다녀오세요. 나는 루아의 손을 잡고 아카데미의 비밀장소에 마련된 마법진으로 순간이동을 했다. “오빠. 늦었잖아요.” “어서 오십시오. 큰 주인님.” “크흠. 어서와라. 타니는 잠들었냐?” “형님 어서 가시지요.” 우리 부부가 나타나자 한마디씩 하는 녀석들은 같은 학교에 있으면서도 얼굴을 보기 도 어려운 화아, 풍아, 광아, 수아, 지토, 자이곱 그리고 테오도와 안나를 비롯한 아 카데미의 중요 인물들이었다. “일단 이동을 해서 이야기를 나누기로 하지요. 형님 그럼 부탁드립니다.” “응? 음. 이 정도는 일데퐁소가 할 수 있잖아. 일데퐁소 알아서 해.” “네.. 루탄님.” 일데퐁소는 내 말에 고개를 숙이고는 마법진을 활성화 시켰다. “그냥 형이 하면 빠르잖아. 그리고 이동후에 느끼는 울렁거림도 훨씬 덜하다구. 으 흑 또 죽어나게 생겼네...” 화아가 엄살을 피우는 소리와 함께 백광이 우리 일행을 감싸 안았다. “자, 이제 다들 모이신 것 같으니 긴급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식당. 전형적인 귀족들의 식당. 길게 뻗은 식탁이 놓여있고,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이 야기를 하려면 목청을 돋우어야 하는.... 물론 넥스 영지의 이 식당은 이미 식당으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린 지 오래 된 일이다. 여기처럼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기에 적당한 곳이 없었기 때문에 이 곳 은 이미 여러해 전부터 우리들의 회의장으로 쓰이고 있었다. “이번에 긴급 회의를 소집한 것은 드디어 우리들이 우려하던 일이 현실로 드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말을 이어가는 넥스 영주의 목소리를 비집고 약간의 소란스러움이 일어났다. “음.. 조용히들 하시고. 예상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드디어 제란이 암흑제국의 황 제의 자리에 올랐다는 소식입니다. 그러니까...” 와글와글. 웅성웅서. 버글버글. “아! 조용! 조용! 거기 너 입 안다물어? 어쭈? 야! 너. 너 오늘 회의 끝나고 나 좀 보자. 이것들이....” 넥스 영주는 그런데로 체통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렇게 목에 핏대를 올리는 것은 다 름 아닌 크라이안 집사였다. 아카데미로 주요 인물들이 빠져나간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크라이안이 집사 겸 유사시 영주 권한 대행이 되었는데... 그건 다시 말해서 넥스 영주 다음으로 권력을 지녔다는 말이 된다. 그래봐야 영지 내에 있는 기사들을 포함한 사람들을 못살게 구는 것이 하는 일의 전 부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특히 그 중에서 군기가 빠졌다는 이유로 병력을 차출해서 시 키는 특별훈련이라는 것은 영지 내의 모든 사람들이 치를 떠는 극악의 훈련 과정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아무튼 그 악명 덕분인지 장내는 순식간의 얼어붙었다. “흠흠. 고맙습니다. 크라이안 집사님. 그럼 계속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정보에 의하 면 제란은 지금으로부터 3일전에 전격적으로 북동, 북중, 북서와 남중의 자기 세력을 규합하여 일제히 황제에게 쟁투를 신청, 황제의 직속이라 알려진 친위대 모두를 몰살 시키고 황제와 꼬박 하루에 걸친 접전 끝에 쟁투에서 승리하여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고 합니다. 지금으로서는 남동, 남서의 두 귀족들을 제외하면 모든 세력들이 제란의 손에 들어가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남동과 남서도 황제라는 권위에 맞서서 내 란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으로 보이기에 이제 암흑제국은 제란의 손에 완전히 들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시간이 조금은 필요하겠지만 제란이 암흑제국의 힘으로 어떤 일이 건 벌이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은 걸리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말을 마친 넥스 영주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들의 예상으로 제란이 이 상태에서 전쟁을 일으킬 확률은 그다지 높지 않다고 봅니다. 문제는 제란이 어떤 방법으로 전쟁의 실마리를 만들어 갈 것이냐가 문제가 되 겠지요. 일단 한타 왕국의 폐왕비에 대한, 그러니까 암흑제국 남동 귀족의 딸이자 루 이스 국왕의 작은 형의 어머니인 그 여자에 대한 일을 꼬투리로 삼을 수는 있겠지만 그건 시기상으로 조금 억지스럽게 보입니다. 어찌되었든 전쟁이라 하더라도 명분을 세 우는 것은 필요하니까 말입니다. 그럼 이 문제에 대해서 정보부의 견해를 들어 보겠습 니다.” 넥스 영주의 말에 호흥해서 일어난 것은 광아였다. “죄송합니다. 요즈음 제가 정보부의 일에 소홀했던 까닭에 제대로 된 답변이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만 일단, 지금까지 나온 여러 가지 예상들 중에서 신빙성이 높은 것으 로 추려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하. 정보부장이 요즘 바쁜 것이야 여기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 지요. 학교일도 있고 하니 몸이 둘이라도 모자랄 텐데요? 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아 무도 믿지 않을 소리는 마십시오. 정보부장님이 언제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한 적이 나 있습니까?” 화염기사단 2대 대장 오로한이 얼굴에 웃음을 지으며 무거운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노력을 했다. “오로한 대장님, 대장님도 조금 있다가 회의 끝나고 나와 개인 면담을 좀 하도록 하 지요.” “히익!” 뭐 이렇게 크라이안의 한 마디에 다시 얼어붙어 버렸지만 말이다. “그럼 우선 정보부에서 준비한 간단한 전쟁 진행 예상을 들려 드리겠습니다. 그 첫 번째의 경우가 생각하기도 싫지만 제란이 아무 생각이 없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에는 선전포고나 기타 다른 명분이 없이 전면전이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경우 가 가장 전쟁이 빠른 시간 안에 일어날 수 있는 경우입니다. 그 예상 시간은 제란의 즉위 1달에서 3개월 이내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제란이 암흑제국의 전 력을 가다듬으면서 자신의 세력으로 완전 규합을 하고, 한타나 누웬, 혹은 그란드와 의 문제를 야기시키는 공작을 펼친 후에 순서를 밟아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시작하 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에는 약 2년에서 3년의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신성제국과 암흑제국의 전면전입니다. 이미 지난 역사 속에서 두 번에 걸 친 전면전이 있었기 때문에 확실히 가능성이 높은 방법으로 이는 루시퍼와 주신이 얽 힌 종교 전쟁의 성격도 가지게 되기 때문에 제란이 암흑제국의 힘을 장악하는데 좋은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는 방법입니다. 때문에 이 경우에는 1년 정도의 준비 기간이면 충분하리라고 봅니다. 이 경우 한타는 예전처럼 길을 빌려 달라는 암흑제국의 요청 을 심사숙고 해 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잠시 숨을 고른 광아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 이외에도 여러 가지 예견들이 있습니다만 그런 여러 예견들을 좋합하고 정리한 결과 이상의 세 가지 경우로 정리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첫 번째의 경우에 따 른 전쟁이 일어난다면 저희들은 전쟁 발발 일주일 전이면 그것을 파악할 수 있을 것입 니다. 그리고 두 번째의 경우에는 약 두 달이나 세 달 전에 상황을 알 수 있을 것이 고, 세 번째의 경우라도 한 달 정도는 미리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 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제란이 품은 마음으로 본다면 그건 어려울 것 같고 우리들에게 시간이 많이 주어지기를 바라는 것 밖에는 지금으로선 도리가 없다고 보여집니다.” 광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기다리면서 상대의 동정을 살피는 것 밖에는 뚜렷한 방법이 없는 것 같군. 그럼 여기서 잠시 우리들의 전력에 대해서 파악을 하고 지나가는 시간 을 가지도록 합시다.” 넥스 영주는 그렇게 말하고는 크라이안을 지명했다. “네, 영주님. 그럼 지금 저희의 전력을 간략하게 보고 하겠습니다.” 역시 크라이안도 공식적으로 마을 할 때는 예의바른 사람이다. “일단 저희들이 운용 가능한 기사단은 화염, 얼음, 강철기사단과, 야전대입니다. 흠, 야전대는 이름만 야전대 일 뿐 기사단과 동등합니다. 그리고 그 전체 인원은 야전 대의 인원을 다른 기사단의 인원과 비슷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총 2600명 정도의 인원 입니다. 마갑주를 착용하거나 환수를 다루는 병력들이 반 이상을 차지하는 병력 배치 입니다. 그리고 마법사들의 수는 120명. 하지만 지난 시간동안 상당히 많은 마법사들 이 써클을 높였고, 거기에 더해서 새롭게 개발된 마법들과 보조 기구들로 전력을 극대 화 시킨 경우입니다. 또 환수사는 30명. 그 동안에 틈틈이 전력 보강을 위해 환수서식 지를 돌면서 환수들을 제압 귀속 시키고, 가끔 루탄님이 불러내신 환수들 중에서 일 반 병들이 귀속 불가능한 환수들을 귀속 시켜서 상당한 전력으로 평가됩니다. 그리 고 이제 4학년이 되는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있습니다. 3학년을 마친 학생들이기 때문 에 그 능력은 영지에 남아있는 기사단이나 마법사, 환수사의 실력의 뒤지지 않는 것으 로 파악되었습니다. 다만 나이가 조금 어린 것이 문제이기는 합니다만 평균 연령이 19 세에 이르니 이미 성년이 지난 학생들이라 전력으로 편성하고 있습니다. 물론나머지 1,2,3학년들은 아직 전력으로 평가하지 않고 있습니다. 특히 아카데미 학생들 중에는 학년별로 100명씩의 정령사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전력의 보완에 큰 도움이 될 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이 우리들이 보유한 전력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더해서 넥스 영지의 상비군으로 유사시에 동원 가능한 예비 병력이 2만 정도 됩니다. 물론 그 2만 의 수를 모아도 저희 기사단 하나를 상대하기 어려운 오합지졸들입니다만... ” 그렇게 크라이안의 말이 끝났다. “그것 참, 4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군. 그나마 아카데미의 천 명 정도 되 는 학생들이 전력으로 늘었다는 말이잖아?” “그러게, 내년이나 되어야 첫 졸업생이 나오는데... 앞으로 5년만 어떻게 버틸 수 있으면 5천 정도의 전력 보강이 이루어 질 텐데...” “그래도 우리 전력에 다른 나라의 전력은 포함이 되지 않았잖아. 어차피 우리들이 제란을 전적으로 상대할 것도 아닌데... 한타나 그란드, 누웬의 수뇌들도 고민을 하 고 있겠지.” “그래 그렇겠지. 우리가 아무리 힘을 기른다고 이 작은 영지에서 암흑제국을 상대 할 전력을 만들 수는 없으니까....” “그렇지. 우린 우리 나름대로 최선의 준비를 하면 되는 거지. 안 그래?” “그럼, 그럼.” “큼. 맞는 말이다. 우리가 전면전을 벌일 것도 아니고. 유사시에 전쟁이 벌어지면 최대한의 도움을 주자는 것이니까....” 순식간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회의장 안을 채웠다. 하지만 이번에는 크라이안도 별 소리를 하지 않았다. 도리어 자신의 말에 이렇게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을 흐뭇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바 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는 머리가 완전히 탈색이 된 것 같다. 역시 세월은 속이지 못하나 보다. 나는 그러는 중에도 옆에 앉은 이루비아를 보며 느긋하게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있었 다. 제란의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이 놀라운 소식이기는 하지만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 을 뿐이다. “그럼 이제부터 정보부가 더 바빠지겠군요? 광아님이 힘들어 지시겠습니다?” 자이건이 멀찍이 앉아 있다가 광아에게 말을 걸었다. “뭐 내가 조금 힘이 들기야 하겠지만, 선드라스 부인은 거기에서 빠질 수 있을 거라 고 보는 모양이지? 나를 놀릴 생각보다는 부인이나 위로를 해 주는 것이 어떨까?” 광아가 자이건의 말에 농담을 던진다. 광아가 맡은 정보부는 아췬길드를 기반으로 움직이는 것이었지만 자그마치 세 개의 나라(신성제국과 누웬에서는 마췬길드가 힘을 쓰기 어렵다. 없지는 않지만...)에서 정 보를 모아서 이 영지로 가지고 오는 일도 장난이 아니었다. 때문에 그런 정보 전달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 아세트였다. 물론 급한 소식이야 마 법으로 전해지지만 그렇다고 모든 내용을 그렇게 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때문에 환수사들이 환수를 이용해서 그런 정보의 취합을 돕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광아의 말에 멀쑥해진 자이건은 슬쩍 옆자리에 앉은 아세트를 돌아 보았다. “쩝, 우리 빈체가 또 엄마를 찾겠군. 어쩐다지...” 자이건의 입에서 힘 빠지는 소리가 세어 나왔다. 빈체 선드라스는 자이건의 아들이었다. 지금 나이는 3살. 녀석이 제법 뼈가 굵어서 나중에 제법 힘을 쓰겠다고 주위에서 기대를 하고 있는 녀석이었다. 거기다가 자이건 과 아세트를 닮아서 시원스러운 이목구비를 지니고 있었다. 뭐 생긴 것이야 우리 타니 가 훨~신 더 멋지지만 말이다. “자, 자. 이렇게 떠들고 있을 것이 아니라. 빨리 빨리들 안건들을 처리합시다. 내 일 일과도 생각을 해야지요.” 넥스 영주가 그렇게 회의장의 사람들을 독려하고 나서 다시 회의장은 진지한 모습을 찾았다. 뭐 그 이후의 이야기는 각기 자신이 속한 부대나 소속의 활동과 문제점들, 또는 성과 들에 대해서 보고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고, 평소에도 하는 것들이라 별다른 것은 없었다. 그리고 밤이 늦어(거의 새벽이 되어서.... 내 밤을 돌려줘.) 우리들은 다시 제자리 로 돌아왔다. 물론 그 전에 제레이아가 언제나 길리어, 길리온, 리아를 만날 수 있는지를 눈물어 린 눈으로 물었고 곧 겨울이 되면 방학이 되니 그 때 모두 데리고 오겠다고 말해 주었 다. 넥스 길리어는 환수학부 4학년, 길리온은 기사학부 3학년에 다니고 있었고 이번에 리 아가 정령학부 1학년에 들어왔다. 지금 길리어가 열 여덟. 길리온이 열 일곱. 리아가 열 넷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정말 올망졸망한 어린 아이들이었는데 벌써 그렇게 나이를 먹은 것 이다. 하지만 제리이아는 그 세 아이들을 이제는 모두 아카데미에 보내 버려서 허전 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리아가 있을 때는 그렇게 아들들의 소식을 묻지 않더니 이번 에 리아까지 보내놓고는 마음이 불편한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길리어나 리아가 환수나 정령들과 친화력이 있는 것은 아마도 지토나 게 브가 그녀석들과 오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럼 타니도 나중에는 정령이나 환수에 친화력이 생길까? 모르겠다. 그런 능력이야 너뎃 살은 되어야 파악이 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뭐 아무래 도 정령은 부르기 어렵지 않을까 싶긴 하다. 정령왕들이 나에게 건 제약이 타니에게 도 걸려 있는 것 같으니 말이다. 휴~우. 드디어 수업이 끝났다. 명색이 교장인 내가 이렇게 여기 저기 뛰어다니면서 갖가지 과목에 땜빵을 해야 하 는 실정은 정말 비참하다 아니할 수가 없다. 아니다. 이젠 땜빵 수업이 아니라 고정 수업이라고 해야 하겠다. 그것도 마지막 4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들 중에는 내가 직접 해야 하는 수 업이 상당히 많이 있었다. 좋아, 좋아. 모든 것을 이해한다 이거야. 하지만 우리 타니가 혼자서 놀고 있을 것 을 생각하면. 이렇게 가슴이 아픈데... 이크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빨리 타니를 보 러 가야지. 나는 4학년들의 고급 마나 운용론 수업이 끝나고 교실을 나오자마자 곧 순간이동으 로 교장실로 날아왔다. 교장실에는 타니가 란이와 함께 뒹굴뒹굴 장난을 치고 있었다. “빠~~?” 내가 날아 온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고개를 휙 돌리며 나를 부르는 타니. “그래. 아빠다. 잘 놀았어? 뭐하고 놀았니? 또 란이하고 장난치고 있었구나?” 벙긋 벙긋. 누가 이렇게 웃고 있는 것이냐. 당연히 우리 부자가 동시에 짓는 웃음이다. “타니야. 그럼 아빠는 여기 앉아서 일을 마저 끝내야 하니까 조금만 더 란이하고 놀 고 있어라. 알았지?” “응!” 아직 말을 제대로 못하는 녀석이지만 알아듣고 대답을 하는 것만큼은 정말 탁월한 능 력을 보인다. 흐흐 역시 나를 닮아서 똑똑한 것이야. 나는 그런 타니의 모습에서 눈을 돌리는 것이 아쉽긴 했지만 책상위에 쌓인 서류들 을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학교의 재정문제에서 교육 방법에 대한 연구, 적용, 평가, 학생들의 특이 사항들이 서류별로 나열되어 있었다. 역시 이번에 가장 많이 다루어진 보고는 1,2 학년과 3, 4학년으로 나누어진 학생들 의 힘겨루기에 대한 것이었지만 대체적으로 선배들의 완승으로 막이 내려지는 모양이 었다. 특히 2학년 중에서 많은 수의 학생들이 3,4학년의 편으로 돌아 선 것이 주효했던 모 양이었다. 거기다가 1학년 중에서도 넥스리아와 같이 신분이라는 것에 구애 받지 않는 아이가 제법 있는 모양이어서 상황이 쉽게 해결이 된 모양이었다. 물론 학교 내에서의 생활이야 이렇게 이어진다고 해도 언젠가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또 각자에게 주어진 신분의 벽을 실감해야 할 것이지만 말이다. 나는 서류들을 대충 정리하고, 눈길을 타니에게로 돌렸다. 역시 요즘 내 생활의 모든 중심은 타니였다. 흐흐. 그걸 어쩌겠는가. 저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를 .... 하지만 아무리 타니에게 정신을 팔고 있다고 해도 암흑제국의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 는 것을 방관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음, 제발 시간이 좀 더 있어야 할 텐데...” “으응? 빠아?” 내가 혼잣말을 한 것을 들은 모양인지 타니가 고개를 들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다. “응? 아니야. 타니야. 그냥 아빠가 혼잣말을 한 거야. 사람은 때로 생각하는 것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입 밖으로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것을 혼잣말이라고 한단 다. 그러니까 지금 아빠가 한 말은 아빠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것들 중에 한 가지 란다. 그러니까 타니는 아빠가 방금 한 말은 신경쓰지 않아도 된단다.” 내가 그렇게 타니에게 설명을 해 주자(사실 모두 알아듣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 저 ‘몰라도 된다’라고 짧게 이야기하기 싫은 것 뿐이다.) 타니는 고개를 돌리고 손 에 들린 장난감에 다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에 오른쪽으로 만들어진 넓은 창문을 통해 붉은 노을이 쏟아지기 시작했 다. 벌써 하루가 저물고 있는 것이다. 나는 서류 정리와 결제를 모두 마치고 타니를 앞장세워 루아에게로 갔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이라 질릴 법도 하건만 아직도 끈질기게 질투의 오라를 뿌리는 기사들을 가뿐하게 무시해 주고 우리 가족은 상봉의 정을 나누고 타니를 앞세우고 집 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와서 식사를 마치고 타니를 재우고 나면 그 때부터 나는 또 다른 일에 매달려야 한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제란의 힘 앞에서 무력한 내 자신을 단련시키기 위해서 부단 히 노력했고, 지금도 그 노력은 그치지 않았다. 나는 타니를 재우는 루아에게 수고하라는 눈인사를 해 주고, 집의 지하실에 마련된 수련장으로 들어갔다. 실제로는 집의 지하실에서 나만의 공간으로 이동해 온 것이었지만.... “어제는 일이 있어 못 온다더니 오늘은 시간을 맞추어서 오는군. 그럼 또 시작을 해 볼까?” 내가 그 곳에 도착하자 들려온 목소리, 그건 마르트라의 목소리였다. 마르트라는 그 사이에 상당히 안정이 되어서(역시 장가를 들고 나서부터 바뀐 것이 다.) 다시 신계에 들기 위한 수련을 시작했었지만, 내가 그에게 도움을 청했기 때문 에 어쩔 수 없이 수련을 잠시 미루고 대련 상대가 되어주고 있었다. 처음에는 간단하게 대련을 부탁했었는데, 이성을 잃지 않은 마르트라의 힘은 솔직하 게 말하면 나는 상대도 되지 않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초환수라는 개념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리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마르트라의 능력 을 뛰어난 것이어서, 내가 처음 그와 대련을 했을 때, 나는 겨우 1분도 견디지 못했 던 것이다. 그것도 그가 자신의 힘을 모두 드러내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난 일이었으니 내가 얼마 나 허탈했겠는 지는 다시 말하지 않겠다. 비록 마르트라의 말로는 자신이나 빅과 같은 경우는 초환수의 개념을 뛰어넘는 존재 라고 봐야 한다지만(초환수라고 해도 신계에서는 그저 동물에 지나지 않는 존재라고 한다. 하지만 자신들은 환수가 아닌 신수에 해당하는 존재라나 뭐라나...) 아무리 그 래도 1분을 견디디 못하다니.... 덕분에 그 날부터 시작된 특훈이 벌써 3년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내가 지니고 있는 힘이 약한 탓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그 운용이 미흡 한 탓이 가장 컸다. 다시 이야기하면 실전에서 내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던 것이 다. 작은 힘으로 더 빠르게 움직이고, 큰 타격을 주는 것이 내가 처음 마르트라에게 받 은 훈련의 내용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 그 때는 숱하게 박살이 났다. 마법이라는 것이, 특히 회복 마법이라는 것이 진절머리가 나도록 싫게 느껴졌던 때이 기도 하다. 그리고 어느정도 내가 지닌 힘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자, 그 다음에 마르트라 가 준비한 것은 신계의 기운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예전에 란이가 누웬의 황궁에서 깨어나서 기운을 흡수할 때에 본 적이 있었던 그 황 금빛의 기운, 즉 신력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마르트라의 말로는 마계의 마족들이 지닌 힘, 그 암흑력은 정령계의 순수 정령력이 나 천사계의 성력, 신계의 신력이 아니고는 상대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인간인 나는 순수 정령력을 지닐 수가 없고, 성력은 천사계의 주신을 믿는 신 앙심과 관련된 것이라 도울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결국에는 신력을 키우는 방법 밖에는 도리가 없었는데 그래도 내가 인간치고 는 중단전과 상단전이 발달해 있기 때문에 신력을 키우고 이용하는 쪽에 더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결국 마르트라의 도움으로 나는 신력을 익히고 있는 중이었다. 사실 신력이라는 것은 몸 속의 내공과는 다른 것이라고 봐야 했다. 그것은 중단전 보다는 상단전에 힘을 키우는 것이었는데 어떻게 생각하면 정신력이라 고 봐야 할 것이었다. 정신의 힘을 사용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내가 쓰는 신력의 차원은 마르트라 의 표현을 빌리자면 갖 태어난 어린 아이의 정신과 다르지 않다고 한다. 정신의 힘이 라면 우주의 운행에까지 관여할 수 있는 것인데 그런 힘으로 겨우 자신의 몸을 지키 는 것도 하지 못하는 것이 말이나 되는 것이냐고 요즈음도 구박을 받고 있는 중이었 다. 어찌되었든 마르트라와의 특훈으로 그나마 제란의 제 삼의 힘에 대한 대비책을 준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 여기고 있다. 물론 아직도 미흡하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인데다가 제란의 경우에 그 힘을 어느정 도까지 끌어 낼 수 있을지를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여전히 불안하긴 마찬가지지만 말이 다. “그래, 잘 있었어? 그럼 오늘도 또 시작을 해 봐야지? 그래 오늘도 전과 같은 방법 으로 신력을 운용하는 연습을 하면 되는 거냐?” 나는 도착과 함께 들려온 마르트라의 인사에 그렇게 대꾸했다. “아니, 오늘부터는 다른 훈련을 할 거야. 그건 그렇고 어제 무슨 일이 있었냐? 역 시 제란인가 하는 그 마계의 하수인이 움직이기 시작을 한 건가?” 마르트라는 이 어두운 공간에 웅크리고 있으면서도 알 건 다 아는 녀석이다. “응, 그래. 드디어 제란이 암흑제국을 장악한 모양이더군.” 나는 그렇게 서두를 떼며 자세히 어제 있었던 회의 내용을 이야기 해 주었다. “그렇게 되었단 말이군. 그렇지만 내 생각에는 제란이 당장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 을 것 같군. 그렇다고 몇 년이나 시간이 있을 것 같지도 않지만 말이야.” “그건 어째서 그렇게 생각을 하는 거야?” “응? 그건 마계의 족속들이 인간계의 모습을 드러내면 나도 그 정도는 알 수 있는 데 지금으로선 직접 모습을 드러낸 녀석이 없으니 무차별적인 싸움은 없으리란 거 고....” “아니 어째서 녀석이 나타나면 무차별적인 싸움이 생긴다는 거지?” “이런, 그걸 모르는군. 음. 나도 요 근래에 알게 된 것인데, 내가 비록 이렇게 있어 도 신계에서 가끔 문이 열리거든. 아무튼 그래서 알게 된 것인데 말이야. 인간계를 제 외한 각 계의 존재들은 인간계의 직접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게 만드는 대단위 차원조약이 체결된 모양이야. 그러니까 조약이라곤 하지만 일종의 결계나 혹은 제약이 라고 봐야겠지.” “그게 무슨 소리야 자세히 말 좀 해봐.” “그러니까 400년 전인가? 인간계에서 전투가 있었던 것이? 그것도 마계와 천사계가 주축이 되어서 한바탕 피바람이 불었던 적이 있었지. 그 덕분에 인간계가 상당히 피폐 해 졌단 말이지. 그러니 각 계의 수장들이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 인간계의 또 다른 형태의 멸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거든. 그렇게 몇 번만 더 싸운다면 겨우 겨우 자리를 잡아가는 인간계의 균형이 또 흔들리게 되리란 것이었지. 그래서 각 계에 서는 인간들에 대한 간섭의 양을 또 다시 줄이기로 했던 것이지. 처음부터 인간계의 융성을 목표로 하기는 했지만 자네도 보다시피 암흑제국은 그들 나름의 방법으로 발전 을 하고, 신성제국은 또 그 나름으로 발전을 했지만 그것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곳은 한타 이외에는 없다고 봐야 겠지. 신성제국은 너무 차분하고 조용하고 경건하지. 암흑제국은 너무 폭력적이고, 비윤리적이고, 타락적이지, 누웬은 너무 분산 되어 있고 산만하지. 그란드는 조화롭지만 나약하지. 뭐 한타라고 해서 완벽한 것은 안지만.... 아무튼 각 나라들이 전부 이상하게도 각 계의 속성에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변해서 인간의 본래 모습을 잃고 있다고 여긴 것이지. 때문에 그렇게 인간계에 대한 간섭을 줄이기로 했던 것이고 말이야. 그래서 결론은 조약이 체결되었다는 거야. 그리 고 그 조약 때문에 만약에 마계의 마족이 인간계에 내려오게 되면 그의 이성을 빼앗 아 버리기로 한 것이지. 다시 이야기하면 이성적인 판단은 불가능하다고 봐야 하는 거 야. 오직 본성만이 남게 되는데 그것이 곧 피와 살육을 즐기고 군림하려는 본성이야. 문제는 이성적인 판단이 없다는 것이지만.... 물론 이성이 없는 힘은 그 전력을 다하 기 어렵기도 하지.” “아무튼 그럼 제란이 마족을 인간계에 불러 올 수도 있는데 지금은 그런 반응이 없 으니 제란이 이성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는 말이지? 그래서 지금 당장에 일어날 수 있 는 무차별적인 전쟁은 없을 것이란 말이고, 맞아?” “그래 맞는 말이다.” “그런데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은 또 무슨 말이야?” “그건 역시 제란이라는 그 인간 때문이다. 아무리 마족이라도 아무 인간이나 그 몸 을 빌릴 수 있는 것은 아니지. 무턱대고 계약을 한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야. 그러니 아주 귀한 녀석이라는 것이지. 문제는 제란이라는 녀석이 이성을 지니고 있는 상태가 오래 가지 못할 거란데에 있어. 왜냐하면 제란 안에 아이슈마라는 마족이 함께 있을 테니 곧 제란의 정신이 붕괴되겠지. 그리고는 아이슈마가 인간계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거지. 그 때는 그야말로 무차별적인 학살이 시작될 거야. 정신을 잃은 준마신급 의 마족이 인간계를 휘몰아치게 되는 거지. 솔직히 예상이긴 하지만 지금 마계에서도 상당히 골머리를 싸매고 있을 거야. 아이슈마라는 마족을 어떻게든 처리를 해야 할 텐 데 아이슈마가 쉽게 잡혀주지 않으니 이런 문제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겠지. 설마하니 알고도 이렇게 방치하고 있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되는데.... 아무튼 그 자세한 내막 은 모르겠지만 일단 아이슈마의 정신이 제란의 몸을 들락거리다가 어느 순간 제란의 정신이 붕괴되면 인간계의 역사가 다시 써지겠지.” “그참 말을 해도 어떻게 그렇게 재수 없게 하냐? 그걸 막겠다고 힘쓰고 있는 사람 앞에서....” “호? 그래? 그럼 열심히 해야지. 안 그래?” 역시 마르트라 이 녀석도 상당히 소름끼치는 녀석이다. 누웬의 황제와 거의 동급 수 준의 녀석이라니까.... “자, 그럼 이제부터 훈련을 다시 시작하자. 오늘부터는 자네가 가진 신력을 바탕은 그 신력을 증폭시키는 것을 훈련하자.” “뭐? 신력을 증폭시켜? 그게 무슨 소리야?” “별거 아니야. 예전시대에 무당이라고 있었지? 그거하고 같은 거야. 자기가 지닌 힘 을 바탕으로 신계의 존재에게서 힘을 빌려오는 것이지. 물론 그걸 자주 쓸 수는 없 어. 그랬다가는 제란처럼 자네도 역시 정신이 붕괴될 지도 몰라. 일단은 가장 쉽게 나 를 대상으로 해서 연습을 해 보고, 나중에 진짜 신계의 존재에게 부탁을 해 보는 방법 으로 하자구. 그럼 방법을 알려주지.” 그 이후에 나는 하룻밤의 시간이 모두 지나도록 마르트라에게서 신력을 바탕으로 신 력을 지닌 다른 존재의 힘을 빌려오는 것에 대한 설명을 들어야 했다. 보통은 새벽에 끝나고 올라와서 잠시 루아 옆에서 포근한 잠자리를 해야 하는데... 결국 나는 아침 식사 시작과 함께 문을 열고 나와서 루아의 눈총을 받아야 했다. 응? 그러고 보니 오늘이 그 날이었나? 무슨 날인지는 묻지 말아주기를... 19금이랍니다. 아무튼 또 하루가 시작되었다. 긴장된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암흑제국의 제란은 빠르게 제국 내의 정세를 안정시켜가고 있었고, 그에 따라 마췬길 드의 활동도 눈에 띄게 바빠지고 있었다. 벌써 가을이 저물고 있는 시간이었다. 그 사이에 타니도 생일을 있어서 얼마 전에 멋들어진 생일잔치가 벌어졌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그 사람들과 여러 가지 관계를 맺고, 그 관계에 알맞은 사람노 릇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 나는 인간관계가 그다지 활발하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 아들의 생일날, 성의표시를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또 그에 따 른 보복이 이어질 것이라는 것을 그들도 알았던 모양인지 나름의 성의 표시들을 해 왔 다. 크하하 역시 멋있는 아빠를 둔 덕분에 타니는 그야말로 소재벌이 되어버렸다.(어린아 이에게 무슨 보석을 선물로 준단 말인가....) 뭐 내가 준 선물이야 고민고민해서 만든 세발자전거였지만.... 하지만 지금은 타니의 생일이나 것을 회상하며 미소를 짓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다. 얼마 전부터 마췬길드의 소식들을 정리, 분석하던 사람들이 무언가 이상하다면서 보 내온 보고서가 앞에 있었다. 암흑제국 병력들의 이동. 북중지역의 병력과 북동지역의 병력이 북서지역으로 이동하 고 있었다. 그 이유는 북서 지역에서 이번에 대쟁투가 선포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루아를 다시 만난 것이 벌써 6년이 넘었다. 아무튼 대쟁투를 이유로 하는 그 이동이 새삼 문제가 될 것은 없었지만, 마췬길드는 그 안에서 숨겨진 이상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예전에 비해서 상당히 많은 수의 병 력이동이 북중과 북동에서 이루어 졌다는 것과, 예전에는 움직이지 않았던 후방 도시 와 성의 병력들이 움직였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은밀하게 움직인 것이었지만, 도시나 성에서 움직인 자들이 모두 우두머 리급에 해당하는 인물들, 다시 말해서 그 무력이 상당한 인물들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 었다. 비록 숫자로는 얼마 되지 않는 수였지만, 문제는 그 힘이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수준 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대략적으로 이 대쟁투를 중심으로 움직인 인원이 북서, 북중, 북동, 세 지역에서 북 중, 북동은 각각 1500명정도, 북서에서는 25000명 정도가 된다. 그런데 북중나 북동의 3000명의 인원이 지닌 힘이 북서 전체의 25000보다 강할 수도 있다는 보고만 보아도 문제가 심각하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우두머리들의 이동의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바로 대쟁투 관람. 사실 대쟁투가 벌어지면 여러 지역에서 관객이 몰리는 것이야 나도 이미 가 봐서 아 는 일이었고, 그 관객의 수 또한 엄청난 수였기 때문에 대쟁투 관람을 위해 각 지역 의 우두머리들이 움직인다는 것이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문제는 별로 이상할 것도 없어 보이는 이 상황에서 정보를 분석한 사람들이 발견한 것은 우두머리만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즉 예전에는 별다른 힘이 없고, 능력이 없는 자들도 대쟁투를 구경하기 위해 몰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에는 그것이 통제되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겉으로 드러내고 통제한 것도 아니고, 모든 도시와 성에서 우두머리들이 대쟁 투 관람을 위해 자리를 비우면서 그런 명령을 내렸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것도 모든 성과 도시에서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면 결국 그들이 누군가의 명령을 받 았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그것으로 전쟁의 징후를 점치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지금처럼 긴장된 상황에 서는 이런 사소해 보이는 것들에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그 보고서를 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다-다-다- 상당히 요란한 소리를 내며 복도를 달려오는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거칠어진 숨소리... 정말 아직까지도 일데퐁소의 저 버릇은 고쳐지지 않은 것일까? 성격이 많이 차분해 지기는 했지만 정작 상황이 다급해지면 그런 것이 사라져 버리 는 것이 문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서 8써클 초입에 들어 있다는 것은 정말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벌컥!! “히익!!” 뾰로롱 뾰료료료롱 타니와 란이가 와락 열리는 사무실 문에 조금 놀란 모양이었다. “루, 루탄님. 크, 큰일이... 큰일이... 났습니다. 그..그러니까..” “뭐야? 제란이 전쟁이라도 일으켰어?” “그, 그게 아니고... 한타왕국에서....” “뭐야? 차분히 숨을 고르고 이야기를 해. 차분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결국에는 지금 보다 더 빨리 상황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왜 모르나? 그렇게 서둔다고 빨리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말이야.” 나는 조금 목소리를 낮추며 느긋한 느낌을 주며 일데퐁소에게 말했다. 그러자 일데퐁소는 내 말을 이해했는지 잠기 심호흡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우제푸 마스터님께서 수정구로 연락을 하셨습니다. 루탄님은 요즈음 직 접 연락을 잘 받지 않으시기 때문에 저에게 연락을 하셨다고 합니다. 아무튼 그 내용 이 아주 심각합니다. 한타의 주요 도시들과 성들에서 동시 다발적인 무차별 살육이 벌 어짐. 둘에서 셋 정도의 인물들이 이유 없이 주위의 사람들에 대한 살인행각을 벌임. 그들은 자신들이 죽을 때까지 쉬지 않고 움직이다가 결국은 상당한 희생을 만들고는 대부분 경비나 마법사들에게 죽임을 당함. 그리고 간신히 제압된 인물들을 통해 밝혀 진 바로는 그들은 기충의 지배를 받는 인물들임. 각 도시와 성에서 제압되거나 죽은 암흑교인들은 100명 정도이며 피해를 입은 성과 도시의 수는 모두 12곳에 이르며 어 떤 성에서는 그런 자들이 다섯 무리가 나타난 곳도 있음. 이상 이런 내용이었습니 다.” “이런 내가 조금 늦은 모양입니다. 형님.” 내가 일데퐁소의 이야기에 정신을 쏟고 있는 동안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교장실에 들 어온 광아의 목소리가 입구에서 들렸다. “뭐야? 너도 같은 소식을 가지고 온 거냐? 그래도 조금은 더 정확한 소식이겠지?” “그게 문제가 그것뿐이 아닙니다. 이번에 일어난 이 일은 한타뿐만이 아니라 그란드 와 신성제국에서까지 벌어진 일입니다. 한타에서 총인원 113명에 성과 도시는 총 13 곳, 두 명에서 넷 까지의 수로 이루어진 무리가 서른 다섯입니다. 사상자는 대략 4500 명정도입니다. 다음 그란드는 총인원 95명, 7곳, 열아홉개의 무리 사상자는 3500정 도, 신성제국은 확실히 파악이 되지 않았지만 대략 비슷한 경우라고 보여집니다. 마췬 길드의 힘이 신성제국 안에서는 별로 크지 못해서 그런 상황이 있었다는 것까지만 확 인이 되었습니다. 일이 벌어진 시간은 정확하게 오늘 아침 해가 뜨는 순간부터였습니 다.” 역시 광아의 솜씨는 인정해 주어야 한다. 정보 수집을 위해서 마췬길드를 장악하고 운용하는 것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제 오래지 않아 해가 질 무렵이니 그 사이에 이런 정보를 수집했단 말이 다. 뭐 내 가 각 길드에 나누어준 통신용 스크롤(여기에 글을 적어서 귀퉁이부분을 찢으면 마췬 길드의 정보가 수집되는 곳으로 이동되는 것이다.)들 덕분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음... 심각하군. 그런데 말이야. 혹시 이 일이 암흑제국에서 일어난 것은 없어? 그 저 한타와 그란드, 신성제국의 문제인가?” “그게... 그렇지 않아도 말씀을 드리려고 했습니다만.... 이번 일은 암흑제국 내에 서도 일어난 것 같습니다. 누웬은 제가 연락을 해 보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날 수도 없 다고 큰소리를 치더군요. 아무튼 이번 일에서 암흑제국이 빠진 것은 아닙니다. 이것 이 암흑교의 사제들과 제란과의 사이를 숨기려는 의도인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우리 의 예상과는 다르게 암흑교의 사제들이 제란과 연관이 없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 다.” “정말 이상한 일이네요? 암흑교와 제란은 같은 편이 아니었나요?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을 해 왔는데...” 일데퐁소가 중얼거리는 소리였다. 나도 그냥 지나가는 생각으로 물어본 것이었지만 암흑제국 내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 졌다면 그건 굉장한 일이었다. 어찌되었든 세 나라에서 대대적으로 벌어진 무차별적인 살인행각은 대대적인 조사를 이끌어 낼 것이고 그 원인이 암흑제국의 국교인 암흑교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 것은 곧장 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다분한 사건이었기에 암흑제국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과 상관없이 현재의 상황이 급박한 상황이 되고 있었다. “어쨌든 이건 보통 일이 아니야. 이렇게 되면 한타나 그란드는 물론이고 신성제국에 서도 암흑제국에 대해 성토의 목소리를 높이게 될 것이고, 어쩌면 3국 연합으로 암흑 제국을 징벌하자는 소리가 나올 수도 있겠군. 그거야 그다지 말리고 싶은 생각도 없 고,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하고 싶지만, 결과적으로 전쟁이라는 소용돌이에 휘말리 게 되는 것은 피하고 싶었는데 말이야.” “그건 그렇고 암흑제국 내에서 암흑교와 제란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알아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일단 아르미엘 사제에게 도움을 청해 보겠습 니다. 지금은 형수님과 함께 떨어져 그저 기도나 하고 있으니 이번 기회에 좀 도움을 달라고 해야겠습니다.” “그래, 그건 네가 알아서 해라. 하지만 아르미엘 사제는 자신의 주관이 뚜렷한 사람 이야. 루시퍼의 뜻이라고 생각한다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사람이지. 지금까지야 내 가 지닌 루시퍼의 인장이 그에게 중요하게 여겨졌겠지만 언제까지나 그럴 거라고 생각 하진 않아. 아무튼 이번에 암흑교에서 벌이는 일이 제란과 관계가 없는 것으로 밝혀진 다면 아르미엘 사제도 암흑교의 행사가 루시퍼의 뜻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 수 도 있으니 조심해서 접근하도록 해. 휴우~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인지.” 나는 그렇게 광아에게 말하면서도 아직도 어정쩡한 자리에 있는 것 같은 아르미엘 사 제의 태도가 불만스러웠다. 신의 뜻이란 것이 인간이 가늠해 보기 어려운 것이다 보니, 지금은 든든한 아군인 아 르미엘 사제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을 끝까지 안고 있게 되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형님, 그리고 이 소식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달이 되었습니다만, 그 렇기 때문에 오늘 밤에는 다시 긴급회의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알았다. 뭐 당연한 이야기겠지. 그럼 오늘 밤에 다시 보도록 하자.” “네, 형님. 그럼.” 광아는 말과 함께 교장실 밖으로 사라졌고, 어벙하게 서 있던 일데퐁소는 급한 일이 있다며 다시 후다닥 광아의 뒤를 따랐다. “빠~!” 모두들 밖으로 나간 다음에야 타니는 소외되었던 자신을 나에게 알리기 위해 내 바지 를 잡고 흔들었다. “응? 타니? 왜? 응, 일데퐁소랑, 광아 삼촌이 아는 척을 안 해 줘서 그런거니? 왜 얼굴이 그렇게 울상이야? 응? 왜?” “압빠, 우아아앙!!” 나는 처음으로 거의 완벽한 아빠라는 발음을 들은 것에 대해서 희열을 느끼려던 정신 을 가다듬고 타니를 안아 올렸다. “응? 타니야, 왜 울어. 뚝. 뚝 그쳐야지. 내가 지금까지 타니 너에게 남자는 아무 때에나 그렇게 울면 안 되는 거라고 알려주지 않았니? 그런데 왜 갑자기 이렇게 우는 거야?” 하지만 타니는 아직 어렸다. 무언가 상당히 서러운 모양이었지만, 나는 그것을 알 수 없었다. 그저 서러움에 겨워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타니의 얼굴을 가슴에 안아 주 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이 녀석이 설마 앞으로 일어날 싸움이 걱정되는 것인가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해 보기도 하는 나였다. 실제로는 일데퐁소와 광아가 번개처럼 왔다 가면서 자신을 완전히 소외시켰던 것에 대한 서러움일 것이라고 짐작하면서도 말이다. 나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 이제는 울음을 그치고 약간의 딸꾹질과 함께 기진맥 진해 버린 타니를 안고 있었다. 오랜만에 타니를 안고 있는 것이다.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느라 이렇게 안아 주는 것도 오랜만이 되어 버렸나 싶다. 하지만 역시 마음은 편하지 못했다. 암흑교의 움직임. 그것은 상당히 신경이 쓰이는 것이었다. 적어도 암흑교가 제란의 편에 있는 것이라면 그런 식의 행동이 나와서는 안되는 것이 었다. 적어도 제란의 입장에서 3국의 동맹이나 연합이 이루어진다거나, 더 나아가서는 4국 의 동맹과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상당히 곤란한 것이다. 객관적인 전력으로도 그렇지만, 싸움의 기본적인 전술로도 적을 뭉치게 만드는 것은 절대 옳은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암흑교의 움직임이 삼국을 하나로 묶어가는 역할을 하게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바위 정령족을 납치하는 곳에 분명히 암흑교의 사제가 있었다고 했었고, 그 바위 정령족들은 암흑교의 전력 강화를 위해 납치를 했던 것임을 감안한다면 암흑교 와 제란이 전혀 무관하다고 볼 수도 없었다. 아니, 그 때는 아직 제란이 암흑제국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을 때의 일이니까 또 다 른 것인가?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군. “오늘도 같은 상황입니다. 형님. 벌써 피해자들의 수가 5만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제압된 암흑교도의 수는 총 2천정도 입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희생 이 생길지 알 수 없습니다. 열흘 가까이 이런 상황이 이어지니... 거기다가 처음부터 암흑교의 준동에 마땅찮은 심기를 드러내던 신성제국이 드디어 칼을 들고 나설 것 같 습니다. 한타와 그란드에 신성제국의 사절들이 도착했다고 합니다.” 광아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암흑교도의 첫 도발 이후로 지금까지 열흘 동안 광아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시 달리고 있었다. 뭐 그건 이번 일에 촉각을 세우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일 이겠지만 말이다. “여전히 암흑제국에서도 사상자가 생기고 있는 거지?” “그렇죠. 일단은 누웬을 제외한 모든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한마디로 이건 불특정 다수에 대한 무작위 살상이라니까요.” “그렇지... 그런데 아직도 그 이유는 도무지 짐작이 가지를 않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삼국 동맹을 막을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전면전 이 됩니다. 어쩌면 그것이 제란을 막기 위해서는 좋은 방법일 수도 있지만, 어쩐지 너 무 싸움의 규모가 커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고 그걸 막을 도리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 참, 그건 그렇고 암흑교의 거점 에 대한 정보는 아직도 없는 거야? 요즈음처럼 활동이 많으면 어딘가 빈틈이 있을 것 도 같은데 말이야.” 나는 벌써 몇 년을 투자하고도 별 소득이 없는 일에 대해서 지나가는 말투로 물어 보 았다. 암흑교의 본단이야 암흑제국에 있었다. 하지만 그 곳에 남은 것은 빈 껍질에 불과했고 실제 이번 일을 벌이는 녀석들은 그 행적이 묘연하기만 했다. 어딘가에서 암흑교의 사제들을 이끄는 녀석이 있을 텐데도 도무지 그 모습이 드러나 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아직... 겨우 겨우 암흑교의 사제들의 위치를 밝혀 낸 것이 몇 되지만 그들을 아무 리 감시해 봐도 다른 연결고리가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조그마한 오차도 없이 그들이 하는 일은 아귀가 맞아 들어가는 것을 보면... 분명 그들 전부를 움직이는 어떤 체계 가 있을 것도 같은데... 도무지 잡히지를 않습니다.” “휴우, 그래. 그렇게 쉽게 모습을 드러낼 것이었으면 지금까지 끌려오지도 않았겠 지. 아무튼 그래도 그 쪽에 계속 신경을 좀 써 주고. 오늘 밤에는 회의를 쉬자고 해 라. 어차피 거의 열흘을 같은 말만 되풀이 하고 있었으니 오늘이라고 달라지지는 않겠 지. 대신에 지토랑 너희들은 우리 집에 와서 함께 식사나 하도록 하자. 타니도 고모들 이랑 삼촌이랑 할아버지가 보고 싶은 모양이니 말이야.” 나는 알았다는 대답과 함께 교장실을 나서는 광아의 뒷모습이 닫히는 문틈으로 사라 지는 것을 보고는 의자를 돌려 창쪽으로 향하고는 멍하게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시선 을 고정시켰다.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언젠가는 벌어질 상황이기도 했다. 제란은 언젠가 대륙의 통일을 위해 움직였을 것이고, 그것은 곧 전쟁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물론 지금보다는 시간이 좀 더 지나고, 또 이렇게 대대적이고 전면적인 전쟁으로 치 닫게 되려면 시간이 좀 더 걸렸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예고된 싸움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상황이 왠지 나와 우리들이 예상하고 있었던 그것과는 다르게 느껴졌 다. 뭐랄까, 조금 더 피 냄새가 짙어진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어쩐지 예상보다 많은 희생이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이번 겨울은 왠지 더 길어질 것 같군.” 텅 빈 교장실에 낮게 깔리는 내 목소리가 낯설게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사흘 전부터 타니를 루아에게 맞겨서 그런지 교장실 안이 더 썰렁하게 느껴진다. “오늘은 시간이 좀 되는 것 같으니까 마르트라나 좀 만나야 겠군.” 마음속의 생각을 입 밖으로 흘린 나는 곧 마르트라가 있는 공간으로 이동해갔다. “응? 무슨일이야? 아직 올 시간이 안 되지 않았어?” “그냥 시간이 좀 남아서 말이야. 그건 그렇고 그 암컷은 그만 돌려보내는 것이 어 때? 뭐 예고 없이 찾아 온 내가 잘못이긴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많지 않아서 말이 야.” 나는 마르트라의 푸른 비늘과 교묘하게 비틀린 모습으로 꽈배기가 된 화이트 스네이 크를 보며 말했다. 빅의 주선으로 마르트라 녀석이 새장가를 든 대상이 바로 저 암컷이었다. 나이는 500살 정도 되었다는데 어느정도 영성도 생기고 해서 빅의 뒷자리를 이을 후 계자인 셈이었지만 아무래도 빅처럼 훌륭한 환수는 되기 어려울 것 같다. 어째 저렇 게 밝히는 것인지....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에 그 화이트스네이크는 공간 너머로 사라져 버렸 다. “이봐, 그렇게 이상한 눈으로 보지 말라구. 그나마 내가 이 정도로 정신을 차리고 너에게 도움을 줄 수 있게 된 것도 다 저 녀석 덕분이란 말이야.” 마르트라는 그렇게 변명같지 않은 말로 어색한 분위기를 털어 내었다. 하긴 맞는 말이었다. 마르트라에게 문제는 오직 뱀 특유의 성욕이었고 그것을 해결하 고 나서는 아무 문제도 없이 예전의 신력과 힘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덕분에 나도 상 대할 수 없는 녀석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그런데 무슨 일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어? 별일은 아니고 오늘 밤에는 내가 가족들과 함께 해야 할 것 같아서 훈련을 좀 일찍 하고 가려고 왔어.” “그래? 뭐 상관없는 일이지. 더구나 이젠 신력을 사용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능숙해 진 모습이니까. 그럼 오늘은 내 힘을 이용하는 것을 완성해 보도록 하자고. 일단 몸속 에 있는 신력을 매체로 해서 너와 연관이 있고 친밀도가 높은 환수의 능력을 끌어 쓰 는 거야. 그건 알지? 이건 환수를 소환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문제라는 것도 알겠 지? 그냥 신계의 존재에게서 힘만 빌리는 것이야. 그럼 시작을 해 보자고.” 나는 마르트라의 말을 들으며 몸속에 있는 신력을 매체로 마르트라의 힘을 끌어 오 기 시작했다. 물론 이것은 마르트라의 허락이 없다면 절대 불가능한 짓이다. 솔직히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방법은 일종을 강신과 비슷하다. 내가 지닌 작은 힘으로 신계의 존재로부터 힘을 빌려 쓰는 것이다. 웃기는 것은 이 방법에도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족의 힘을 빌려 쓰기 위해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처럼, 신계의 존재로부터 힘을 끌어 쓰기 위해서도 그런 것이 필요했다. 물론 마르트라가 나에게 그런 대가를 받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리고 신계의 존재에게서 힘을 빌리는 것에 지불하는 대가는 각각의 존재들 마다 다 르다고 하는데 그 이전 내가 살던 세계가 차원의 비틀림 속으로 사라지고 나서는 지금 과 같은 방법으로 신계의 존재에게서 힘을 빌리는 경우는 별로 없다고 한다. 거의 모 두가 환수를 소환하는 직접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힘만을 빌려오는 경우는 없다는 것이 다. 뭐 그래서 결론은 지금 내가 신계의 존재로부터 힘을 빌려 쓰는 방법은 잊혀진 방법 에 해당하는 것이다. 때문에 내가 신계의 존재에게 지불해야 할 대가도 그 예전의 경우와 비슷할 것이라는 고 했다. 뭐냐고? 뭐긴 뭐냐? 작게는 정갈하게 차려진 제상祭床에서 크게는 내 정기중에 얼마 를 빼앗기거나 더 심하면 수명의 단축이 되는 것이지. 하지만 그 대가가 크면 클수록 그 대상의 힘이 강하다는 것이니 꼭 손해가 가는 것 은 아니다. 당장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남은 수명 중에서 얼마 정도 잘라 준다고 문 제가 될 것은 없다 싶기도 하다. 아무튼 나는 부지런히 마르트라의 힘을 끌어 오는 데에 전력을 다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옷을 입는 연습과 비슷한 것이다. 자주 입어보지 않은 옷은 부자연스럽다. 그러다 보면 행동에 제약도 생기기 마련인 것이다. 실제로 나에게 힘을 전해주는 것에 동의한 경우에 그 힘을 끌어 오는 것은 일 정한 신력의 흐름으로 만든 통로 개방으로 끝나는 것이다. 통로를 개방하면 그 힘이 나에게로 넘어오는 것은 쉽게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다만 그 힘을 내가 제어하고 사용하는 것이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문제라면 문 제였고, 나에게 전해진 힘을 그 특성에 맞게 사용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마르트라는 뱀의 환수였지만, 그 성향이 날카로움과 독기를 지닌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나에게 전해지는 마르트라의 신력은 신력이 본연으로 지닌 독특한 힘에 더해서 공격에 날카로움과 독기를 머금게 되는 것이다. 나는 한동안 마르트라에게 받은 기운을 응용하는 연습을 하고 몸을 풀었다. 그 동안에 마르트라는 잠이 든 듯이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그의 힘을 내가 쓰는 동 안에는 거의 동면에 가까운 상태가 되는 것 같았다. 내가 어느 정도 연습을 마치고 나에게 옮겨왔던 힘을 마르트라에게 돌려 보내자 마르 트라의 커다란 머리가 들썩거렸다. “이젠 거의 완전하게 힘을 통제하는군. 하지만 너도 느꼈겠지만 실제로 내 힘을 가 져다 쓴다고 해도 별로 대단한 힘을 발휘하지는 못하는 것 같지? 내가 본체로 힘을 쓰 는 것에 비해서는 모자라는 감이 있을 거야.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이지. 다른 존재의 힘을 빌어 쓰는 것이지 그 정도의 손해는 감수를 해야 하는 것이고 말이야. 그 러니 이제는 나 보다는 좀 더 높은 존재의 힘을 빌려 놓아야 할 거야. 힘이 필요하다 면 노력을 해야지. 나는 지금으로선 신계에 속해 있지 않으니 그 쪽으로는 도움을 줄 수가 없겠고, 루탄 자네가 부리는 그 환수에게 부탁을 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군. 아 마도 신장급 정도의 힘을 빌릴 수 있다면 제법 도움이 될 것 같지만..... 나로서는 더 이상 도움을 주기가 어려울 것 같다.” 마르트라의 말은 이제 내게 자신이 줄 수 있는 도움은 모두 주었다는 말과 같은 것 인 모양이었다. “그래. 고맙군. 그 동안 나 때문에 번거로웠을 텐데.... 이제 돌아가서 푹 쉬도록 해. 나중에 다시 인사를 하러 찾아가지.” “알았다. 조만간 또 보겠군. 우리들에게 시간이라 참으로 여유로운 것이니....” 마르트라는 그렇게 인사를 하고는 스르르 모습을 감추었다. “휴, 조금 늦었나? 벌써 식사 시간이 된 것 같은데? 기다리고 있겠군.” 나는 곧, 타니와 루아가 기다리는 집으로 몸을 옮겼다. “어서 오세요. 오빠.” “좀 늦었네?” “응, 미안. 기다리게 했군.” “자아~ 타니야. 아빠 오셨네. 아빠.” “빠아.” “킁 이녀석 금방 지 애비를 찾아 가는군. 그렇게 내 수염을 못살게 굴더니만 그것 도 지 애비에 비하면 별 것 아닌 모양이지? 크흘흘.” “그래 우리 타니. 잘 놀았니? 그건 뭐야? 응? 지토 할아버지가 준 모양이구나? 그래 도 그렇지 정령을 장난감처럼 다루면 못쓰는 거다. 전에 이야기 했지? 아빠가. 살아 움직이는 것들은 함부로 다루면 안 되는 거라고?” “으응.” 얼떨결에 나를 보고 뛰어오느라 손에 힘을 주었던 모양인지 타니의 손에 들려 있던 작은 정령은 형체가 엉망이었고, 그것을 본 타니는 상당히 놀란 모양이었다. 평상시에 이런 경우가 없었으니 놀라기도 했을 것이다. 타니는 손에 쥐고 있던 땅의 최하급정령을 어쩔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울음을 터트 릴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자, 타니야. 이리오렴. 어서. 그렇지. 그래. 자 이걸 보렴. 이렇게 이렇게 .... 그 래 이젠 다 나은 것 같구나. 원래 이 녀석들은 몸이 튼튼해서 이런 것은 문제가 없단 다. 하지만 언제나 조심은 해 주어야 하는 거야. 그래야 친구가 되지. 알겠니?”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타니를 달랜 것은 역시 지토였다. 조용히 다독거리며 땅의 최하급 정령을 복원시켰던 것이다. 처음부터 타니가 불러 온 것도 아니었고 지토의 힘으로 물질계에 있는 것이니 그건 어려운 일도 아닐 터였 다. 그러면서도 타니에게 주의를 시키는 것은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가르 치고 싶은 내 마음을 알고 있는 지토의 마음씀씀이였다. “자! 자! 그만들 하고 이제 식사를 하세요. 당신도 그만 씻고 자리에 앉으시고요. 오늘은 시간이 그러니까 그냥 마법을 씻는 것도 봐 드릴께요.” 나는 서둘러 몸에 클리어 마법을 걸고는 자리에 앉았다. 뭐 그래봐야 모두의 시선은 타니에게로 쏠려 있었다. 언제나 함께 식사를 할 때면 벌어지는 상황이기는 했지만 조금은 어색한 느낌이 아직 도 남아 있었다. “어째 너희들은 오기만 하면 그렇게 타니만 찾는 거냐? 나도 있고, 루아도 있는데 말이야.” “형 얼굴이야 거의 매일 회의 때마다 봤잖아. 그리고 그건 형수님도 마찬가지고 말 이야.” “그래 맞아. 오빠나 루아는 매일 보는 얼굴이라고... 하지만 나나 수아는 요즘 눈 코 뜰 사이 없이 바빠서 타니를 볼 틈도 없었단 말이야. 뭐 광아는 자주 오빠 있는 곳 에 들락거리니까 타니도 자주 보겠지만....” “무슨 소립니까? 풍아누님. 저도 공적인 일로 갈 때는 그저 곁눈질로 보는 것이 전 부란 말입니다. 말도 걸지 못하고 나오는데....” “니들 조용히 안해? 난 타니 얼굴 볼 일이 없단 말이야. 내가 있는 곳이 타니가 주 로 다니는 길에서 제일 멀단 말이야. 거기다가 시간이 이상하게 꼬여서 타니를 만날 시간도 없고...” “그만하세요. 화아 오빠, 풍아 언니. 다들 그래도 은글슬쩍 타니가 자고 있을 때 창 문으로 오가는 거 알고 있어요. 뭐 오빠는 그 시간에 마르트라하고 있으니 모르겠지 만..” “크크. 똑 같은 놈들끼리 싸우지 마라. 어차피 틈만 나면 이 집 창문턱이 닳도록 들 락거리는 거 다 아는 일이니까 말이야. 뭐 서로 얼굴 마주친 경험들은 한 두 번씩 있 는 일이잖아.” 이런, 이런. 아주 분위기 썰렁하군. “하부지. 하부지.” 타니가 오랜만에 사용하는 포크를 들고 찍은 고기완자를 건너편에 있는 지토에게 내 밀고 있었다. “오호! 푸헬헬. 그래 그래 하부지 여기 있다. 응. 그래 그래. 아주 맛있겠구나.” “지토, 식탁에서 내려오지 못해? 뭐하자는 거야? 식탁위로 올라서다니..” “훌훌훌, 그럼 어쩌란 말이냐? 타니가 주는 걸 안 먹을 수는 없고, 내가 짧은 기장 을 지니고 있는데... 우물 우물 캬~ 맛있다.” 정말 분위기 가라 앉는군. 뭐 겉으로 보기에는 분위기 좋게 웃으며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지만 타니가 지토에게 만 먹을 것을 직.접. 주었다는 데에 상당히 충격을 받은 모습들이라니... 거기다가 지 토를 향한 저 질투의 오라들은 어쩌란 말인가. “빠바바. 빠빠.” 아직 정확하게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할 소리로 즐거워하는 타니, 하지만 타 니가 벌여놓은 이 무시무시한 상황은 어떻게 수습이 될까. 타니가 어느 정도 눈치가 있으면 삼촌들과 고모들에게도 응석을 부려주겠지만 아직 그것까지 바라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래서 결국은 즐겁고 행복하게 식사를 하는 지토와 질투에 눈이 먼 다른 네 명의 동 생들과 불안하게 그들을 지켜보는 우리 부부들의 아슬아슬한 식사가 이어졌다. 그나마 타니가 있으니 이성을 잃고 날뛰는 모습은 보이지 않아 다행이랄까. 딸깍. 식사를 마치고 포크를 내려 놓는 타니와 기대감이 무너진 얼굴로 침울해지는 동생 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는 잠시 실랑이 끝에 수아와 풍아가 타니를 재우기 위해 데 리고 들어가고 나와 지토, 광아와 화아는 오랜만에 간단한 술자리를 만들었다. “오랜만에 이런 자리를 만들기는 했지만, 역시 마음이 편하지는 않네. 그래 얼마나 될 것 같아? 앞으로 남은 시간이?” “글쎄요. 아마도 한 달 안에 시작이 될 것 같습니다. 뭐 지금으로서는 연합군의 형 태는 아닐 것 같고. 신성제국에서 한타와 그란드에 파병을 하는 쪽에서 결정이 될 것 같지만, 아무래도 이그왕이 조금 소극적인데 비해서 루이스 마치 황제는 호전적인 성 향을 보이고 있어서 한타와 암흑제국의 전면전이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신성제국의 원 병들도 한타로 몰릴 것 같고 말입니다.” “큼, 이제 어쩔 생각이냐? 아무래도 선드라스 가문에서 이번 전쟁을 책임지게 될 것 같은데... 도와줘야 하지 않겠냐?”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자이건과 아세트가 여기에 있으니 당연히 도움을 주기는 해야 하겠지만, 왠지 이번 싸움에 걸리는 부분이 없지 않아서 말이야.” “걸리는 부분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형?” “그러니까 전쟁의 원인이랄까? 주역이랄까 하는 부분이 명확하지 않다는 말이야. 이 게 어찌된 일인지 이젠 제란도, 우리도 싸움의 주역이 아니라 끌려 들어가는 느낌이라 는 이야기지. 결국에는 이용당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야. 아무래도 암흑교의 목적을 짐작하지 못하는 때문일까?” 내 말에 둘러 앉아 술잔을 들던 동생들과 지토가 모두 그런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암흑제국과 한타의 싸움에 뒷짐을 지고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 광아 너의 말도 맞는 말이지. 그러니 답답하다는 거야. 억지로 끌러 들어가 고 있는 느낌인데 피할 수는 없으니 말이야.” 또 한 덩어리의 돌들이 자리를 같이한 모두의 가슴위에 내려앉았다. “호호, 분위기가 아주 근사하네요? 도대체 모였다 하면 그렇게 분위기를 잡고 싶어 요? 오늘은 좀 잊어버리자고요.” 그 사이에 타니가 잠이 들었는지 수아와 풍아 루아가 응접실로 나왔다. “그래, 풍아의 말이 옳다. 자, 오늘은 그냥 기분 좋게 한 잔 하고 푹 쉬도록 하 자.” “하하, 그러지 뭐. 자 너희들도 와서 앉아. 형수님도 오십시오. 자 여기...” 화아의 너스레를 기점으로 우리들은 가벼운 술자리를 이어갔다. 모두들 묵직하게 가슴을 짓누르는 돌들을 치우지는 못했겠지만 그래도 잠시 잠깐 동 안 잊어버린 듯 밤이 늦도록 술자리를 이어갔다. 참전 - 정탐 지금 아카데미의 중앙 광장에는 나란히 줄을 맞추어 도열한 학생들의 모습이 잿빛 하 늘 아래에 무겁게 자리하고 있었다. 4학년 졸업반 1000명의 학생들이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학생들은 모두 5개의 단으로 구성했고, 그 단은 기사 100명, 마법사, 환수사, 정령 사 각각 40명, 40명, 2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제 이 아카데미의 학생들의 첫 출정식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 넥스 영지의 기사단은 이미 넥스 영주의 지휘를 받아 전선으로 떠났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이 학생들의 출정식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전쟁의 시작은 정말 모범적이랄 수 있을 정도로 순차적으로 이루어졌다. 한타왕국과 신성제국, 그리고 그란드 왕국의 연합 사신은 암흑제국에 암흑교의 토벌 을 빌미로 파병 동의를 요청했고, 당연히 제란은 이를 거절했다. 그는 암흑제국 역시 그들로 인해 피해를 입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을 축출하기 위해 노력 중이라는 말로 한 발 양보한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어떤 경우에도 제국 내로 의 타국 병사의 진입을 허락할 수는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취했고, 결국 삼국 공동의 선전 포고를 들어야 했다. 그 뒤, 오래지 않아 국경선에서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첫 싸움은 의외로 마르틸 후작의 세력권에 있는 부대가 일으킨 것이었는데, 광아의 판단으로는 마르틸 후작이 이번 전쟁에서 공을 세워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켜 보려는 의도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아무래도 이제 나이가 많이 들었기 때문에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 입지를 강화시켜 서 그의 후계에게 전하려는 욕심이 생긴 것 같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시작된 전쟁은 그야말로 전면전이었고, 전선은 고착상태였다. 전선의 고착상태, 그것은 엄청난 유혈사태의 다른 표현이었다. 밀고 밀리는 싸움은 일방적으로 밀리는 싸움에 비해 더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전쟁이 시작되고 이제 겨우 두 달, 하지만 그 사이에 희생된 병사들의 수는 어림잡 아 7만이 넘어서고 있었다. 암흑제국쪽에서 3만, 한타와 신성제국에서 3만5천, 그란드에서 5천 정도의 희생이 난 것이다. 그리고 그 싸움 중에서 객관적인 전력으로는 아무래도 암흑제국의 힘이 강한 것으로 파악이 되었다. 아직도 암흑제국에서는 남쪽 지역의 병력들이 움직이지 않고 있었는데도 전선은 고착 상태에 있는 것이다. 비록 한타의 매직컬초가 움직이지 않았고, 신성제국의 화염기사단의 주력이 움직이 지 않고 있다고 해도, 그건 암흑제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란을 위시한 주력들은 아 직 꼼짝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 동안 우리들은 언제 우리들의 전력을 싸움에 참가시켜야 할 것인가를 놓고 상당 한 이견으로 충돌을 벌였다. 전쟁 초기에 우리의 전력을 투입해서 빠른 시간 안에 싸움을 끝내야 한다는 주장이 자이건과 아세트를 중심으로 나왔고, 우리 힘으로 전쟁을 조기에 종식시키는 것은 거 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판단이 광아에게서 나왔다. 그리고 그 결정은 나에게로 모아졌고, 나는 우리 전력의 노출을 일단 보류한다는 판 단을 내렸었다. 하지만 결국 나도 우리들의 전력을 전선으로 보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고 말 았는데, 그것은 전선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상 현상 때문이었다. 제란의 제국 병사들은 그 주력이 마갑주를 착용한 자들과 마수를 이용한 자들로 구성 되어 있었는데, 전쟁이 시작되고 두 달이 흐르는 요즈음에 그들의 움직임이 이상한 형 태로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전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정확히는 파악할 수 없었지만 제국 병사들은 미 쳐가고 있었다. 기이하다고 할 정도로 그 능력이 상승하고 있었고, 마수들의 능력 또한 시간의 흐름 에 비례해서 강해지고 있다는 것이 전선을 지켜보는 지휘자들의 공통적인 판단이었다.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었지만 전체적으로 비정상적인 힘이 작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서 아르미엘 사제는 싸움터에 직접 가 보는 것이 그 원인을 정 확하게 아는 방법이겠지만 아무래도 전쟁터에서 만들어지는 살기殺氣와 공포恐怖, 절 망絶望, 적의敵意와 같은 인간들의 에너지가 마물과 마계의 존재에게 힘을 주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그 문제로 심각한 회의가 진행되었고 신성제국의 신성력을 이용한 정화를 전 장에 대대적으로 실시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러한 신성제국의 사제들을 호위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것은 신성제국의 제국회의에서 넥스 영주에게 부탁을 해 왔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신성제국에서도 이제는 어느 정도는 넥스 영주에게 숨겨진 힘이 있다는 것을 파악한 모양이었고, 그란드의 얼음기사단의 일부와 야전대에 대한 정보도 파악을 하고 있었던 지 그들의 정중한 부탁에는 그 병력들의 도움을 청하는 구절도 포함되어 있었다. 뭐 완전하게 힘을 숨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조금은 안이하게 방 심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넥스 영주가 화염기사단과 얼음기사단, 그리고 야전대의 일부를 이끌고 전선으로 떠났고, 이미 전력을 내 보인 이상에는 최대한 싸움을 일찍 끝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에 우리들의 마지막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아카데미의 1회 졸업예 정자들을 전장으로 보내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아카데미에 있는 교사들과 조교들을 제외하고 내려진 결정이었지만 이 번 출정에 동생들과 지토를 뺄 수는 없었다. 아울러서 자이건과 아세트, 그리고 자이곱과 나까지도 전장으로 떠나게 되었다. 이를테면 총력전이라고 할까. “이제 우리들은 전장으로 떠날 것이다. 그 곳은 지금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장면들 이 곳곳에서 벌어지는 장소이다. 죽음이란 사람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 것인지 그것 을 짐작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때로 죽음은 숙연하고, 때로 죽음은 의기로운 것이 지만, 전반적으로 죽음이나 그를 앞두고 있는 경우에 사람들은 추하게 변하기 마련이 다. 혹여 자신의 동료가 죽음 앞에서 추한 모습을 보여도 그를 용서하라. 어차피 사람 이란 환경에 적응하기 마련이기에 많은 이야기로 제군들의 사기를 꺽을 생각은 없다. 하지만 만만히 생각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하는 말이다. 그리고 언제나 생각하라. 전장 에서 싸움의 순간에는 가장 단순한 것이 좋다고 한다. 하지만 싸움이 끝나고 혹은 싸 움이 시작되기 전에는 끊임없이 생각하라. 의미를 생각하고 가치를 생각하고, 선후와 경중을 생각하라. 이제 너희의 졸업시험은 이 전쟁으로 대신하겠다. 너희는 아직 아카 데미의 학생이다. 나는 너희 모두가 무사히 졸업장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 이어진 수 많은 말들이 내 입에서 흘러 나왔지만 나는 그 내용을 알지 못하겠다. 그 저 실없는 주절거림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길고 긴 출정연설을 했다. “그럼 제군들 이제 출발하자.” 이 말을 조금이라도 늦게 하고 싶다는 이유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입에서 결국 학생들을 향한 출정의 말이 끝나고 화아를 선두로 첫 행렬 이 내 앞을 지나 행군을 시작했다. 일종의 열병식인 것이다. 화아의 뒤를 이어 풍아, 광아, 수아, 지토의 순으로 5개 부 대가 행군을 시작했다. 총원 1005명, 각 대의 구성은 200명. 각 대의 총 책임자는 동생들과 지토였다. 그리고 나는 자이곱과 단 둘이 단촐하게 길을 떠나기로 했다. 이미 루아와 타니에게는 작별 인사를 해 두었다. 루아에게는 타니를 부탁하는 것 이외에는 싸움에 나서지 말라고 했지만, 이 아카데미 를 지키는 것은 온전히 루아의 책임으로 맡겨진 일이었다. 그리고 아르미엘 사제와 자이건과 아세트는 암흑교를 파악하기 위해 따로 떠나고 없 었다. “자, 가자. 자이곱.” “네, 루탄님.” 커다란 덩치의 자이곱을 데리고 나만 혼자서 떠나는 것은 어쩌면 도피행인지도 모르 겠다. 전장에서 적을 죽여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지만, 사람의 몸에 칼을 박 고, 마법을 날리는 것은 별로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때문에 나는 아직도 방황하는 내 자신을 다잡기 위해 전장을 둘러 볼 결심을 했는지 도 모르겠다. 이런 내 모습에 대해서 지토를 포함한 몇몇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는 것을 알고 는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화아 등이 전장에 도착을 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신성제국의 성사제들은 마법으로 이동을 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신성력을 이용한 이동법이 없는 모양인지 그들은 신성제국에서 전장까지 말이 나 마차로 이동을 해야 했고, 화아 등은 그들을 호위해서 전장으로 올 것이었다. 그 전에 나는 전장을 돌아보며, 내가 검을 들고 싸움에 뛰어들어야 할 당위성을 찾 고 싶은 것이다. 나와 자이곱이 아카데미에서 모습을 감추었다가 다시 나타난 곳은 예전에 제란과 한 바탕 싸움을 벌였던 장소였다. “역시 기분이 별로로군. 제란에게 그렇게 박살이 났던 곳이니 말이야.” 나는 슬쩍 왼쪽 팔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 때, 도망을 치느라고 무리하게 순간이동을 한 덕분에 팔과 함께 쌍환검의 한 짝 을 잃었었다. 뭐 지금은 수수라는 멋진 녀석이 있기는 하지만... “루탄님, 이 곳은 그리 안전한 곳이 못됩니다. 현 상황으로는 이곳은 암흑제국의 점 령지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자이곱이 걱정스럽다는 듯이 주위를 경계하며 말했다. “괜찮아, 자이곱. 주위에 인기척은 없으니 말이야. 그러니 그렇게 긴장하기 말라 고. 보는 내가 힘드니까 말이야.” “네, 네.” 많이 바뀌기는 했지만 여전히 자이곱에게 나는 어려운 사람인가 보다. “화아들이 도착하려면 적어도 20일에서 한 달은 걸릴거야. 그러니 그 사이에 우린 전장의 모습을 실감해 보자고. 어차피 보기 좋은 모습이란 기대하지 않지만 말이야.” “네, 루탄님.” 나는 그렇게 꾸벅, 대답만 하는 자이곱을 등뒤로 두고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느긋하게 산책을 하려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들이 움직이는 속도는 상 당히 빠른 편이었다. 신법을 이용해서 이동을 하는 것이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말이다. 그런 나를 무리 없이 따라오는 것은 자이곱이 토의 심법을 상당한 경지에 이르도록 수련을 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물론 착용하고 있는 마갑주의 도움도 있겠지 만 말이다. “저기로 간다. 소규모의 싸움이 있는 모양이군. 마력의 흐름이 상당히 드세게 느껴 지니 말이야.” 나는 숲을 끼고 돌아가는 언덕 너머를 가리켰다. 그리고 우리들이 그 언던 위에 올라섰을 때, 언던 아래로는 지금껏 보이지 않았던 싸 움의 흔적들이 너저분하게 늘어져 있었다. 잘려나간 팔다리와 목. 찌그러진 방패와 휘어지고 이빨이 빠진 칼들과 창, 찢어진 깃 발과 여기 저기 고여있는 핏덩이들. 그 속에서 막바지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널부러져 누워 있는 사람, 아니 주검들의 수는 어림잡아 200정도, 그리고 아직 살아 숨쉬며 상대의 뼈를 가르고, 피를 뽑아내는 인간들의 수는 40명 정도. 하지만 이제 상대의 수는 30대10 정도로 보였다. 뻔하게 보이는 승부였지만 어쩐지 밀리고 있는 쪽은 30명의 사람들로 보였다. “이상하군요. 여기 쓰러져 있는 사람들의 열에 여덟은 한타의 병사들로 보입니다. 그리고 저기 싸우고 있는 사람들 역시 30명의 한타 군사들이 10명의 암흑제국 병사들 을 상대하지 못하는 모습인데요?” 자이곱이 상황을 파악하고 하는 말이었다. “어쨌든 싸움을 말려야겠군.” 나는 서둘러 몸을 날려 혼전중인 싸움터로 뛰어 들었다. 가까이에서 본 그들의 모습은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아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피에 엉켜붙은 머리카락과 수염, 그리고 눈썹 밑으로 드러나는 광기 어린 기운. 피아 를 막론하고 그들은 거의 미쳐가고 있었다. 오직 서로를 죽이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모든 움직임. 이들은 죽지 않기 위해서 움직 이지는 않는 것 같았다. 오직 죽여야 한다는 빛만이 남은 눈빛으로 서로에게 무기를 휘두르는 그 사이에서 나 는 서둘러 모두를 제압하기 시작했다. 아직 검기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병사들을 제압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 다. 더더욱 이제는 지쳐서 더 이상 움직이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오직 오기만으로 움직 이던 사람들이었다. 서둘러 지나가면 혈도를 점해 병사들을 쓰러트렸다. 의외의 상황이 벌어졌지만 이미 이성적인 판단이 어려워 보이는 병사들이 이상을 느 끼기도 전에 나와 자이곱은 병사들을 모두 제압할 수 있었다. “일단 여기서 벗어나야겠는데, 이들을 어떻게 옮긴담?” 나는 핏물 속에 쓰러져 있는 병사들을 보고 망연해졌다. “그래 녀석들은 좀 어때?” 나는 천막 안으로 들어오는 자이곱에게 물어보았다. “겨우 정신을 차린 모양입니다. 간단히 식사를 하는 녀석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 직은 대부분이 멍청하게 있거나 혹은 질질 짜고 있거나 맥을 놓고 있는 모습입니다.” “뭐, 인간이 그런 극한 상황에 내몰리게 되면 충격을 받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겠 지. 그럼 암흑제국 병사들은 어떤 모습이야?” “그 녀석들도 마찬가지이지만 공통적으로 혼이 나간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어쩐지 아까 싸움을 할 때 느껴지던 마물의 기운은 사라진 것 같지만, 그와 동시에 정 신도 나가 버린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 녀석들이 마계의 존재에게 몸을 빼앗겼던 것 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 그 아르미엘 사제님이 말씀하셨던 전장에서 만들어 진 그 에너지에 의해서 힘을 얻는다는 그 존재 말입니다.” “뭐, 아직 확실하게 파악을 한 것은 아니지만 일단은 그런 것 같긴 하더군. 참, 지 금으로선 무슨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내일 아침에는 한타의 병사들에게 제국 병 사들을 넘기고 우리들은 다른 곳으로 가보자고. 어디든 상황이야 비슷하겠지만, 자꾸 부딪히다 보면 뭔가 나오겠지.” “네, 루탄님.” 대충 짐작하는 바와 같이 우리들은 한타의 병사들과 제국의 병사들을 제압해서 근처 의 숲 속으로 자리를 옮긴 상태였다. 하지만 그렇게 제압된 병사들은 모두들 정신이 나간 것 같은 증세를 보이는 것이 문 제였다. 이상한 광기에 사로잡혔다가 그 광기에서 벗어나서는 온 몸의 힘이 빠진 듯한 모습 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상하게도 암흑제국의 병사들 쪽이 더 심각한 상태 를 보였는데,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음날 나와 자이곱은 그나마 정신을 차린 한타의 병사들에게 암흑제국의 병사들을 넘기고 그들의 자대로 복귀할 것을 명령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내가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우리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전쟁에 참가하 게 되면서 나에게 아카데미 학생들로 이루어진 특수부대의 지휘관이라는 거창한 신분 이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일종의 특수부대 부대장의 지위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었다. 문제는 그 부대가 어떤 국가에도 속해있지 않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지금처럼 사정이 급하면 그런 사소한 문제는 넘어가기 마련이었다. 뭐 싸움이 끝나거나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면 그런 사소한 문제들을 트집잡기 시작하 겠지만 말이다. 내 생각에는 아마도 그런 트집들이 나오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그 정도의 여유가 있다 는 이야기니까 더 이상 우리들이 힘을 보텔 필요가 없는 시점이 될 것 같다. 자이곱과 내가 전장을 떠돌기 시작한지 벌써 일주일이 지나고 있었다. 그 동안에 거의 하루에 한 번씩은 전투 상황을 맞이했고, 첫 날의 경험을 토대로 빠 른 시간 안에 양쪽의 병사들을 제압하고(물론 광기에 젖기 전이라면 굳이 우리쪽의 병 사들을 제압할 필요는 없었다.) 정신을 차리면 돌려 보내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러면서 조금씩 암흑제국과 한타의 병사들의 싸움에서 그들이 젖어드는 광기의 정체 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 정체를 지금으로서는 믿을 수가 없었다. 오래지 않아서 동생들과 지토가 도착하면 알게 되겠지만.... “저기 앞에 마을이 보입니다. 그러고 보니 상당히 왕국 안쪽으로 들어온 것 같습니 다.” “정말이네? 이거 전선에 변화가 있는 모양이지. 얼마전까지는 국경선을 중심으로 밀 고 밀리는 양상이더니 어째서 요 얼마 사이에 이렇게 많이 밀려 온 거지?” “그게 전부 그 이상한 현상이 문제가 된 것이겠지요. 루탄님도 보셨잖습니까? 대체 로 3대1정도의 비율로 싸움을 해야 백중세를 유지하는 것 같던데요?” “그건 그렇지.... 뭐 이렇게 밀려 온 것도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인가?” 나와 자이곱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마을 어귀로 들어섰다. “이거 전쟁터의 마을이란 이런 것인가?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정말입니다. 마을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미리 다들 피난을 간 것 같은 데요?” 그랬다. 우리가 들어선 마을에서는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이거 날씨도 추운데, 집을 떠난 사람들은 고생이 심하겠군.” “그러게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 집이나 들어가서 신세를 지고 내일 떠나기로 하지. 오늘은 벌써 날이 저물고 있으니까 말이야.” “그렇게 하지요. 루탄님.” 솔직히 밖에서 천막을 치고 잔다고 해서 그다지 불편할 것도 없었고, 힘들 것도 없었 지만 그래도 집 안에서 잠을 자는 것은 무엇보다 삼각으로 파여진 낮은 천정을 보고 잠이 드는 것 보다는 기분 좋은 일일 것은 분명했다. 우리들은 작은 마을의 중앙에 있는 여관을 찾아 주인 없는 여관에서 간단히 식사를 만들어 먹고는 푸근한 침대에 몸을 밀어 넣었다. 나는 자이곱이 잠자리에 드는 것을 보고는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 왔다. 그리고 탁자 위에 수정구를 꺼내 놓고 화아를 호출했다. 잠시 후 수정구의 건너편에서 광아의 얼굴이 나타났다. “형이 왠 일이야? 이렇게 나를 다 찾구?” “실없는 소리 하지 말고, 지금 위치가 어디쯤 되는 거야? 한타로 들어서기는 했 냐?” “그게 이제 겨우 국경선이야. 성사제들이 모두 모이고, 출발 준비를 하는데에 시간 이 좀 많이 걸렸거든. 그러데 말이야 이번에 사제들의 총 책임자가 누군지 알아? 레고 리오 사제야. 하하하. 예전에는 어린아이 같더니 이제는 어린티는 하나도 나지 않더라 고. 역시 크는 아이들은 내가 늙어간다는 것을 알려주는 척도라고 하더니만...” “또, 쓸데 없는 소리하고 있다. 그래서 언제 쯤이나 여기에 도착을 할 것 같아? 여 기 문제가 심각해지는 것 같아서 빨리 왔으면 하는데 말이야.” “응? 왜? 무슨 일 있어? 전선이 조금 밀리고 있다는 이야기는 광아를 통해서 듣기 는 했지만 그다지 문제가 심각한 것 같지는 않던데?” 화아가 내가 서두르는 모습에서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던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게 아무래도 문제가 간단하지 않을 것 같다. 여기 문제 중에 정령들이 끼어 있 는 것 같아. 그것도 원소계열의 정령이 아니고 정신 계열의 정령인 것 같은데, 문제 는 그 소환자가 없이 불려 오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 문제야.” “응? 무슨 소리야? 그건, 정신계의 정령들이라면 나도 알고는 있지만 원래가 정령들 은 소환자와의 계약이 없이는 인간계에 나올 수 없는 것 형이 더 잘 알잖아. 그건 정 신계열의 정령들도 마찬가지란 말이야.” “그래, 그건 나도 알지. 그래서 이상하다는 거야.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거든. 분명 정령인 것 같은데... 아무튼 확인이 좀 필요하니까 서둘러서 확인을 좀 해봐. 광아에 게 그 쪽을 신경을 좀 쓰라고 하고. 참 특별하게 나에게 할 이야기는 없어? 그 사이 에 별일 없었어?” “응. 별일 없어. 레고리오 사제가 형을 빨리 만나고 싶어 하는 것 말고는 없어.” “그래 알았다. 그럼 나중에 다시 연락하자. 이 통신 계속 열어두고... 그럼 이 만..” 나는 화아와의 통신을 끊고 다시 루아에게 연락을 하려다가 수정구에 모으던 마력을 풀어 버렸다. “휴~ 잘들 있겠지.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문제가 있으면 곧장 연락이 왔을 테니 말 이야.” 내 중얼거림이 낮은 저음으로 깔리며 텅 빈 테이블 사이로 흩어졌다. 하지만 그렇게 사라지는 내 목소리를 따라 잡으며 마을 밖에서 소란스러운 기척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방향이 남쪽인 것으로 보아서는 암흑제국 쪽에서 접근하는 병력들인 모양이었다. 나는 서둘러 1층의 기척을 지우고 2층으로 뛰어올라가 겨움 잠든 자이곱을 깨웠다. “일어나, 밖에 암흑제국 병사들이다. 뭐 그다지 도망을 가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그냥 숨어 있도록 하자. 여기 이렇게 환상마법을 펼치고 더불어서 진식을 겸하면 들키 지 않고 지나갈 수 있겠지. 뭐 저들이 굳이 이 마을을 수색하지는 않을 것 같긴 하지 만 말이야.” 나는 그렇게 말하며 혹시 모를 수색에 대비해서 마법과 결계를 만들었다. 자이곱은 잠에서 억지로 깨어난 것이 상당히 불만인 듯, 투덜거리는 표정이 얼굴에 역력하게 나타났지만, 나에게 그런 마음을 풀어 놓은 녀석은 아니었다. 그러는 사이에 암흑제국의 병사들로 보이는 녀석들이 우르르 마을의 중앙쪽으로 몰려 들었다. 그리고 지위자의 명령에 따라서 마을 건물들에 대한 수색이 벌어졌다. 말이 수색이지 먹거리를 찾기 위한 행동으로 보였다. 사방으로 흩어진 병사들은 마을의 집들을 엉망으로 만들며 약탈을 시작했다. 물론 우리가 머물고 있는 여관으로도 병사들이 들어왔지만 지휘자인 듯한 녀석이 이 여관에서 자리를 잡자 여관에 대한 기득권은 지휘자가 차지를 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 지 간단히 검사를 하고는 별다른 파괴나 약탈 없이 무사히 지나갔다. 그리고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나자 다시 마을 밖에서 소란스러운 기척과 함께 일군 의 병사들이 합류했다. 먼저 마을 안으로 들어온 병사들의 수는 어림잡아 150명 정도였고, 뒤이어 들어온 병 사들의 수는 대략 100명 정도 였다. 그리고 그 100명의 병사들은 200명 정도의 포로들을 끌고 있었는데, 차림세로 보아 서 한타의 병사들과 그란드의 병사들이 함께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는 것은 저 병사들은 평범한 부대가 아니라는 말과 같은 것이었다. 적어도 한타의 병사와 그란드의 병사가 연합을 하고 있을 정도라면 특별한 임무를 맡 은 부대였거나 혹은 주요 장소를 지키는 부대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거 상당한데요? 병사 200명이 포로를 200명이나 끌고 다닌다는 말이잖습니까? 그 런데 이상하네요. 포로라면 암흑제국 후방으로 호송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왜 저 렇게 포로들을 끌고 다니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도 이 마을은 최전선에서도 암흑제국 보다는 한타쪽에 더 치우친 지역인데 말입니다.” “글세 그거야 나도 알 수가 없는 일이지. 아무튼 좀 더 지켜보도록 하자고...” 그러는 동안에 포로들을 이끌고 온 암흑제국의 병사들이 마을의 중앙으로 모여들었 다. 이제 마을 중앙의 작은 광장에는 중앙쪽에 몰려 앉혀진 포로들과 그들을 둘러싸고 감 시하는 암흑제국의 병사들로 나누어졌다. 포로들은 손이 등 뒤로 돌려 묶여 있었고, 그들 중에 몇몇은 발목에도 쇠고랑을 차 고 있는 상태였다. 나는 이제 그들이 이 밤을 쉬기 위해 준비에 들어가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상태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듯 움직임이 없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스산히 밀려와 광장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몰려가며 작은 검불들을 날리는 것이 보였다. 여기 저기 밝혀든 횃불 밑으로 드러난 포로들의 얼굴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그렇게 또 잠시 시간이 흘러갔다. “자, 이제 준비들을 해라.” 인솔자로 보이는 자의 명령이 떨어지자, 곧 일단의 병사들이 무언가 준비를 하기 시 작했다. 2층 창문 안에 숨어서 바라보기에는 시각의 사각에 속하는 아래쪽에서 벌어지는 일이 라 알 수 없었지만, 그 모습을 보고 있을 포로들의 표정과 눈빛에서 스멀스멀 피어나 는 것은 진득한 공포였다. “무슨 일일까요? 도무지 밑이 보이지를 않으니 알 수 가 있어야 말이죠.”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지금 상황에서 쉽사리 움직이는 것도 좋지 않을 것 같군. 일단 잠시 더 기다려 보자.” “네, 루탄님.” 자이곱의 대답이 끝나는 순간 아래에서 또 다른 음성이 들려왔다. “이제 준비가 끝난 것인가?” “그렇습니다. 사제님.” 대답을 하는 쪽의 목소리는 병사들을 지휘하던 자가 분명했다. 하지만 그의 존대를 받는 사제라는 자는 어떤 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병사들 속에 사제는 없었다는 것을 확인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 사이에 사제가 이곳으로 올 수 있었다는 것일까? 분명히 마력이 특이하게 움직인 것도 없었고, 그렇다고 마족의 기운이 느껴진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럼 서둘러라. 아직도 해결해야 할 곳이 많이 남았다.” “네, 사제님. 어서 서둘러라. 시작해!” 지휘관의 명령이 떨어지자 암흑제국의 병사들은 포로들을 한 명씩 끌어내어 여관 쪽 으로 끌고 왔다. 공포에 젖어 버팅기는 포로의 몸짓은 서너명의 병사들이 합친 힘을 당하지 못하고 끌 려왔고, 곧 나와 자이곱이 볼 수 없는 사각으로 끌려 들어갔다. “으아아아아악!! 끄아아!” 비명성이 보이지 않는 사각에서 울려 나왔다. 어떤 고문이 행해지고 있는 듯, 그 소리를 길게길게 이어졌고, 수그러 들 줄 몰랐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보이지 않는 아래쪽의 사각지대에서 흘러나오는 핏줄기를 볼 수 있었다. “루탄님. 이대로 보실 겁니까?” “포로들을 구하자는 말이야? 그게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그 와중에도 어차피 희생 은 있을 거야. 지금은 도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방금 전에 사제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나? 여기뿐만이 아니라 여러 곳에 서 이런 일을 벌이고 있다고 말이야. 그러니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는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지휘관은 때로 소를 버리고 대를 취해야 할 때도 있 지. 나도 이런 내가 사람을 죽이기 싫어서 도망을 다닌다는 것이 모순 된 모습이라는 것은 알지만... 아무튼 지금은 저 병사들을 구하는 것 보다는 저들이 무슨 일을 꾸미 는 것인지를 밝히는 것이 더 중요할 듯 싶군. 그것이 다른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하는 일이 될 것 같으니 말이야.” 이렇게 말하는 내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고 있었을 것이다. 나와 자이곱이 2층 창문에 붙어 보이지 않는 아래쪽에서 일어나는 일에 신경을 곤두 세우고 있는 동안에 십여명의 포로들이 시각의 사각지대 안으로 사라졌고, 한결같이 비명과 흘러나오는 핏줄기를 남기고 사라졌다. 내 감각에 그 포로들의 심장소리와 기척이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기에 그들이 죽었음 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어두운 광장을 밝히는 횃불들이 바람에 펄럭거리고, 포로들의 얼굴에 두려움 과 공포심, 좌절과 절망이 뭉클뭉클 솟아오르는 중에 사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크흐흐. 좋군. 역시 공포와 절망감이란 것은 마음에 드는 기운이야. 거기다가 저렇 게 살아 있는 것들의 수가 많으면 이렇게 죽어가는 것들이 내 놓은 기운에 많은 도움 을 주거든. 크흐흐. 이제 여기는 어느 정도 준비가 된 것 같으니 빨리 나머지 순서를 밟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을 해라. 아직 남은 포로들이 많으니 적어도 열 곳 정도는 더 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없다. 서둘러라.” “알겠습니다. 사제님. 그럼 먼저 돌아가십시오. 저희들이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크흐흐. 알았다.” 나는 사제가 돌아간다는 말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계속해서 사제의 목소리가 들려오 던 쪽에 서 있던 인물의 이동을 살폈다. 하지만 그 인물은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어서 서둘러라. 준비된 것들을 저기 저 분수대 아래에 묻어라. 그리고 나머지는 다 시 이동을 한다. 정찰대의 보고로는 앞으로 두 세시간 거리에 작은 마을이 하나 더 있 다고 하니 그 곳에서 일을 진행하면 될 것이다. 그 정도 범위는 여기 묻은 것들로 충 분할 테니 말이다. 그리고 병사 서넛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 담긴 큼직한 상자를 마을의 분수대 아래에 깊이 묻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또 다시 병력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포로들은 그들을 이끄는 병사들의 몸짓에 저항도 하지 못하고 절망에 싸인 표정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으아악! 살려줘! 살려줘! 난 살고 싶어. 왜! 왜 이러는 거야. 살려줘! 집으로 가 게 해줘. 엄마. 어엄마!!” “이게 어디서 소란이야? 죽고 싶어? 그래? 그럼 죽어. 죽어!” 공포 속에서 끌려가던 한 포로가 소리를 지르며 몸부림을 치자 잠시 행렬이 멈추었 다.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 병사는 이성을 잃은 듯이 몸부림을 쳤지만, 곧이어 달려 와 창을 찌르는 암흑제국의 병사에게 어깨와 팔을 찔려서 피투성이가 되었다. “크흐흐. 죽이지는 말아라. 이번 마을에 가면 저 새끼를 제일 먼저 제물로 삼아버 려. 어차피 피를 조금 흘린다고 그 때까지 죽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야. 그리고 너희들 도 조금이라도 오래 살고 싶으면 지랄떨지 말고 순순히 따라와라.” 앞서가던 지휘관이 말을 돌려 포로들이 있는 곳으로 오더니 한 소리를 내뱉고는 다 시 선두로 달려 나갔다. 기절을 한 듯 쓰러진 포로를 그 동료들이 끌고 가면서 다시 행렬의 움직임이 이어졌 다. 그리고 그들이 마을 밖으로 모습을 감추고, 나와 자이곱은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그 곳에서 보인 것은 그저 피에 젖은 땅과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 탁자 몇 개 가 전부였다. 아마도 탁자를 붙이고 그 위에 포로들을 올리고 심한 고문을 해서 죽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탁자들은 여기 저기 잔해로만 남은 것일 터였다. 또 하나 이상한 것은 포로들의 시체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까 위에서 마법적인 어떤 마력의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사람의 모습은 보이 지 않다니.... 나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분수대 밑에 묻은 상자에 모든 답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분수대로 다가갔다. 꽤나 깊이 묻혀있던 상자를 파 내는 데에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보통의 관을 반드로 잘라 놓은 정도의 크기인 상자는 온통 검붉은 색을 보이고 있었 지만 그것이 여기 저기 널려 있던 나무 판을 이용해서 급조한 것이란 것은 충분히 알 수 있는 조잡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 상자의 표면에는 알지 못할 도형들이 새겨져 있었다. 아무래도 상자를 만들고 그 후에 서둘러 새긴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런 도형들은 일종의 보존마법과 송신과 수신 마법을 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송신과 수신은 무엇을 보내고 무엇을 받는 것인지 까지는 알 수 없었다. 여기에 사용된 도형들은 내가 알고 있는 마법진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것들이었 기 때문에, 내가 아는 범위를 넘어서는 것들은 해석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이미지 복제로 상자 표면에 그려진 도형들을 복사해 두고는 상자의 뚜껑을 열었 다. “헉! 이런. 루탄님 이건....” “글쎄, 내가 보기에는 아까 죽은 포로들 같은데?” “에? 죽은이요? 죽은 것 같지는 않은데요? 보세요. 움직이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 움직이고 있군. 죽었는데 움직인다고 봐야겠지. 일단 심장은 멎은 녀석들이 니 말이야.” “하지만 이렇게 표정이 살아 있잖습니까? 눈동자도 움지이고.... 저 호소하는 듯한 표정을 보십시오. 분명 살아있는 것입니다.” 나도 그들의 표정을 보고 있었다. 상자 속에 들어 있는 것은 사라진 포로들이었다. 그 포로들이 상자속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문제 어떻게 상자 속에 열 서넛의 포로들이 들어갈 수 있을까? 상자 속에는 포로들의 머리가 들어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포로들의 목이 잘린 상태라는 말은 아니다. 그들의 몸뚱이는 머리 아 래에 온전하게 붙어 있었다. 다만 문제는 그 몸통을 전부합해도 손바닥 크기 밖에는 안 된다는 것이 문제일 뿐이 다. 평범한 머리 크기 아래에 손바닥 크기의 신체가 붙어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헛구역질 이 날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얼굴들은 입을 벌리고 나오지도 않는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갖가지 표정 으로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고 있었다. “나는 당신들의 상태를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어떤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리 고 당신들이 앞으로 어떻게 변하게 될지도 알지 못합니다. 다만 혹시 당신들이 그 상 태로 오래도록 버틸 수 있다면 혹시 원래대로 돌아올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는 말 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당신들은 그런 희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원하는 대로 죽음을 택하고 싶습니까?” 내 질문에 그들의 답은 한결같이 그렇다는 것이었다. 말도 할 수 없었지만 그들이 보이는 표정과 눈빛은 순간순간의 시간이 그들에게는 말 못할 고통의 연속임을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당신들 중에 용감하고, 의지력이 강한 누군가가 있어서 당신들의 상태 를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며 당신과 같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는 데 에 도움을 줄 사람이 있었으면 합니다.” 하지만 내 말에 수긍을 하는 머리들은 하나도 없었다. 그저 모두들 죽음만을 원하고 있었을 뿐이다. 나는 그들이 어떤 고통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잠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됩니다. 나는 당신들을 일단 마법사들에게 보내서 당신들에 대한 연구를 해 봐야 겠습니다.” 나는 결국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이들을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를 상황에서 이들을 희생시킨 나였다. 그런 내가 이들의 고통을 줄여준다는 이유로 이들을 지금 죽여주는 것은 처음 내가 이들을 구하지 않았을 때 가졌던 생각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결정을 내리고는 나에게로 열려있는 몇 곳의 통로를 이용해서 이들을 전 송시켰다. 물론 이 머리들을 얻게 된 자세한 상황과 도형들의 복사판도 함께 전송을 시킨 것이다. 그런 나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며 아무 말이 없던 자이곱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 마디 불쑥 내밀었다. “이제 아까 그 사람들을 구하러 가시지요. 어차피 그들이 하는 짓이야 꼭 같은 짓 일 테니 말입니다. 이젠 포로들을 구해 주셔야지요. 그럼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실 겁 니다.” 자이곱의 말 대로 내 가슴은 너무 답답했다. 그들을 구하지 않았다는 것에서 그들의 마지막 소원도 들어주지 않았다는 것이 나를 아프게 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다른 포로들을 구한다고 이런 기분이 사라질까? 뭐 그렇다고 그 포로들을 그대로 두고 볼 수도 없는 일이긴 했다. 나와 자이곱은 서둘러 암흑제국의 병사들이 사라진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우리들이 앞서 간 암흑제국의 병사들을 따라잡았을 때에는 이미 앞서 마을에 서 벌어졌던 일이 재현되고 있었다. 아까 소리를 지르며 발광을 했던 녀석의 머리는 이미 한 쪽 탁자 위에 놓여 있었고 (이럴 때는 시력이 뛰어난 것이 싫다.) 암흑교의 병사 차림을 하고 있는 녀석 셋이 탁 자를 둘러싸고 끌려나온 포로의 몸을 만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만지는 것 이 아니었다. 그들의 손이 지나갈 때 마다 포로의 몸에서는 핏줄기가 뿜어져 나오며 몸이 수축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 따라 포로의 비명은 커져갔고 사지를 수축시킨 다음에는 아랫배부터 조금씩 위 로 올라가면서 몸을 수축시키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가슴이 줄어들기 시작하면서는 소 리를 지르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도 폐가 줄어들거나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된 것 같았 다. 나는 그렇게 포로들을 제물로 삼아 무슨 짓을 벌이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그 일을 진행하는 세 명의 병사들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그들을 제압하기로 했다. “자이곱이 일단 저 쪽에서 소란을 일으켜서 시선을 좀 모아줘. 조금 위험하기는 하 겠지만 여차하면 몸을 빼고, 나는 그사이에 저 병사들을 제압하도록 할 테니 말이 야.” “알겠습니다. 루탄님.” 내가 마을을 가로 지르는 십자로의 출구 중에 한 쪽을 가리키자 자이곱이 곧 몸을 날 려 마을 밖으로 빠져 나갔다. 아마도 마을 밖으로 우회해서 들어올 생각인 모양이었다. 나는 사라지는 자이곱을 보면서 몸을 움직였다. 될 수 있으면 마법을 쓰지 않고 내공을 쓰려고 했는데, 어쩌면 저 사제라는 자들이 마력의 흐름에 민감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또 다시 한 명의 포로가 머리가 되었다. 나는 한 번의 도약으로 사제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자이곱을 기다 렸다. 그리고 곧 자이곱이 포로들을 둘러싸고 있던 병사들의 뒤에서 기척도 없이 접근하여 몇 명의 병사들을 쓰러뜨리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곧 동료가 쓰러지는 것을 알아챈 암흑제국 병사들 틈에서 소란과 고함소리가 일어났다. “누, 누구냐? 저놈을 잡아라. 겨우 혼자서 여기를 뛰어들다니 미친지 않고서야...” “잡아라. 적은 하나다.” “잡아!” “으악! 내 팔!” “크흐흐, 죽어라 이놈들.” 자이곱은 병사들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그 거대한 도를 휘두르며 병사들의 팔다리를 잘라내고 있었다. 그렇게 제국 병사들의 시선이 자이곱에게 몰리는 순간 나는 몸을 날려 어설프게 만들 어진 제단으로 뛰어 들었다. 순식간에 움직인 내 손은 제단을 주관하고 있던 사제병사(사제의 역할을 하고 있는 병사들이라 달리 부를 이름이 없다.)들을 제압했고, 곧 이어 옆에서 검을 휘둘러 오 는 지휘관과 마주했다. 상당히 판단이 빠르다고 생각되는 지휘관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의 검술은 그의 판 단력 만큼이나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곧 오래지 않아서 지휘관의 팔과 다리에 상처가 나면서 제압되었고, 자이곱에게 몰리 던 병사들이 나에게로 분할되면서 양쪽에서 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포로로 잡혀 있던 병사들은 쉽게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아마도 죽음에 대한 공포에 시달리던 그들은 나와 자이곱이 어느 정도 확시한 우위 를 차지하기 전에는 도움을 주려고 움직이려 하지 않을 것이었다. 이럴 때에 이성이란 것은 참으로 무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죽음을 앞에 두고는 말이 다. 언젠가는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며 생을 연 장시키고 싶어하는 것이 사람이라면 당연히 가지는 마음이다. 물론 이들 중에도 언젠가 죽을 바에는 무슨 짓이든 해서 삶을 도모해 보자는 생각을 했던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아니 대부분의 포로들이 그런 생각을 한 두 번씩은 했을 것이고, 또 그걸 실행에 옮 기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번번이 그런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을 것이고 그 때마다 죽음이라는 것이 그들에게 가까이 발을 들이밀었을 것이었다. 그런 시간들이 중복되다 보니 저들은 저렇게 마지막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지도 모르는 지금의 상황에서도 조금 먼저 죽는 것이 두려워서 조금 나중에 죽는 것 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포로들의 도움을 바라고 싸움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평범한 병사들이야 나나 자이곱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 녀석들인 것이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자이곱과 나는 벌써 반이 넘는 병사들을 제압하고 있었다. 비록 자이곱 쪽에는 어쩔 수 없는 살생도 있는 모양이었지만 내 쪽에는 비교적 깔끔 하게 병사들이 제압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문제는 자이곱 쪽의 제국 병사들에게서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이 드디어 전장에서 제국의 병사들이 보였던 것과 비슷한 모습을 보이며 무기들 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그들의 외형이 바뀌었다는 말이 아니라 눈빛에 광기가 서리기 시작하는 것 이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평소의 서너 배는 넘는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것인 데... 이번에는 어째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의아해 하는 순간에 제국의 병사 들이 그런 증상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자이곱과 병사들의 치열한 격전으로 이어졌다. 하나 둘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다보니 자이곱도 그렇게 많은 병사들에 휩싸여서 고전 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자이곱 쪽에서 일어난 변화는 거의 전염되는 것처럼 제국 병사들을 휩싸고 돌 며 내 쪽의 병사들에게도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동안에 제압된 병사들은 그런 광기에 젖지 않았다는 것이었 다. 나와 자이곱은 광기에 젖은 제국 병사들을 상대하느라 상당히 오랜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그리고 결국 자이곱과 나는 모든 제국 병사들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자이곱이 많은 병사들을 베어(죽여)버렸다고는 하지만 그걸 탓하고 싶은 생각 은 없었다. 나는 제압된 병사들을 자이곱에게 맞기고 서둘러 제단 주위에 쓰러져 있던 사제 병사 들을 찾았다. 그리고 그들 중 한 녀석의 혈도를 풀었다. “이봐, 이제 나랑 이야기 좀 하겠나?” “.....” “이봐 그렇게 입을 다물고 있는다고 사건이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 뭐라고 말을 좀 해 보지 그러나?” “....” 하지만 여전히 그 병사는 말이 없이 멍한 눈빛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다른 두 사제 병사도 마찬가지의 모습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지휘관으로 보였던 녀석을 깨웠다. “이봐, 이거 조금 난감한데 말이야. 도대체 너희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인 지 이야기를 좀 해 주겠나?” 나는 혈도가 풀려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흔드는 녀석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그런 것을 대답할 거라고 생각하다니 나를 어떻게 보는 것이냐?” 내 말에 단호한 대답을 하는 녀석의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이런 녀석들은 고문이나 그런 방법으로는 입을 열수가 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 는 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이들을 포기하기에는 궁금한 것이 너무도 많았다. 나는 결국 평소 쓰지 않던 방법을 쓰기로 했다. 9써클 마법 중에서 상대의 기억을 읽어 내는 마법을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물론 이것을 사용하면 상대의 기억 중에서 여러 편린들이 무작위로 끌려 들어오는 단 점이 있기는 했지만 상대의 정신에 피해를 주지는 않기 때문에 별 거리낌은 없었다. 다소 마력의 소모가 크다는 단점도 있었지만 그건 나같은 녀석에게는 별로 상관이 없 는 것이었다. “그래? 대답을 않을 것이란 말이지?” 나는 녀석의 머리에 손을 올려놓으며 기억 읽기를 시도 했다. 녀석도 내가 자신에게 무언가 마법을 시전하는 것은 알았겠지만 상관은 없는 일이었 다. 사람의 두뇌란 마음대로 통제 할 수 없는 부분이 상당히 많은 것이다. “그래 여기서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말하고 싶지 않다고?” 나는 마법을 시전하면서도 녀석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내가 여기서 벌이는 일에 대한 질문을 하면 녀석의 머리에서는 그 내용이 터져 오르 는 불길처럼 일어났다가 이성에 의해 짖눌려 진다. 하지만 나는 그 기억이 불길처럼 일어날 때에 이미 그 기억의 상당 부분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 저기 있는 저 병사들에 대해서도? 그리고 사제라던 녀석들에 대해서도? 또, 포로들을 이용해서 만든 이 머리들에 대해서도? 말하기 싫단 말이지? 너희 말고 얼마 나 많은 부대가 이런 짓을 벌이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겠다는 말이지?” 내가 그렇게 녀석에게 질문을 마구 퍼부었을 때, 녀석의 머릿속에서는 폭죽이 터지 는 것처럼 그 질문들에 대한 답들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기억의 대부분이 나에게로 전해졌다. 나는 그런 방법으로 상당히 많은 정보를 찾을 수 있었다. 사실 이 기억을 읽어 들이는 마법은 일데퐁소의 마법사 탑에서 모여 있던 연구원들 이 아이디어를 내고 마법수식들을 만들기 시작했지만 아무래도 8써클의 마력으로는 실 현이 불가능한 것이라 일데퐁소가 미완성 수식을 나에게 가지고 왔던 것인데 아주 오 래 고민을 하고 시행착오를 거쳐서 완성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세상에 오직 나만이 실현 가능한 마법이라고 해야 할까? 일데퐁소에게도 이 마법은 알려 주지 않았다. 우제푸도 물론이다. 이것이 비록 공격마법은 아니었지만 공격마법 보다도 더 무서울 수 있는 것이었다. 실제로 정신계 마법은 그 영향이 너무도 큰 것이다. 내가 그렇데 지휘관 녀석을 잡고 고문 아닌 고문을 하고 있을 때, 자이곱이 병사들 을 처리하고 가까이 와서는 내가 하는 짓을 의아한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그저 손을 머리에 올려 두고 대답도 없는 녀석에게 이런 저런 질문을 하고 있으니 어 찌 웃기기 않을까. 하지만 내가 하는 짓에 대해서 이렇고 저렇고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 자이곱이다. 나는 자이곱이 오고 나서도 한동안 같은 짓을 하다가 드디어 더 이상 얻을 것이 없겠 다 싶어 심문을 끝냈다. 일종의 영역확장. 지금 암흑제국의 병사들이 벌이고 있는 일은 그런 것이었다. 이를테면 전선 전체를 대상으로 ‘죽음의 지역’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 옳을 것 같 다.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요즈음 암흑제국의 병사들이 일으키고 있는 이 상 현상의 주범은 정령 중에서 정신정령인 공포의 정령이었다. 하지만 정령은 소환자가 없이는 인간계에 나타나지 못한다. 그러니 누군가가 소환을 했다는 이야기인데, 소환된 정령은 동화력을 요구하게 된다. 지금의 나는 동생들이나 지토와의 관계에서 내 마력이나 내공력을 바탕으로 힘을 전해주지만 다른 정령사들은 친화력을 바탕으로 정령들을 움직인다. 이것은 익히 아는 것처럼 환수를 부릴 때의 경 우와 같은 것이다. 물로 마법사들이 정령을 부르는 경우도 있지만 이 경우에도 친화력 (동화력)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물론 친화력을 바탕으로 불러 낸 정령의 경우 마법사 는 자신의 마력으로 정령에게 조금 더 강한 힘을 부여할 수는 있지만 기본적인 것은 역시 정령과의 친화력이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정령이고 환수고 특정 이상의 힘을 쓰기 위해서는 소환자의 주위 를 너무 멀리 벗어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아무튼 지금 암흑제국에서 하고 있는 이 일은 소환된 정령을 소환주로부터 멀리 떨어 진 곳에서도 나타날 수 있도록 일종의 매개체를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아직 이 일의 주체는 알 수 없지만 암흑교의 사제가 이번 일을 주관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조금 다른 것이 있다면 이들이 믿는 암흑교의 신이 루시퍼가 아닌 아이슈마라 는 점이다. 즉 이름은 같은 암흑교인데 그 주신이 다르다는 말이다. 아르미엘은 루시퍼를 믿고 있는 암흑교의 사제였다. 그리고 그 예전에 나와 부딫히 며 기충으로 세력을 부리던 자들도 분명 자신들의 주신이 루시퍼임을 내세웠었다. 하 지만 이번 경우에는 아이슈마가 배후에 있었다. 어쩐지 마계에 내분이 일고 있는 것 같은데... 아무튼 아이슈마의 사제들 역시 그 위치가 밝혀지지 않고 있었고, 그들은 원거리에 서 인형들을 조종해서 일을 처리하는 모양이었다. 내가 제압한 제 병사들은 그런 필요에 의해서 사제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인형이었 다. 그저 혼이 나간 상태로 움직이다가 필요할 때 아이슈마의 사제들이 정신을 지배하 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인형들이 여러 곳에 있게 되면 한 명의 사제는 여러 곳에서 이건 작업 을 할 수 있게 된다고나 할까. 나는 잠시 지휘관으로부터 확보한 정보들을 정리했다. 누군지 모르지만 공포의 정령을 불러내었다. 그런데 이 공포의 정령이라는 것이 계급 이 없는 독자적인 존재라서 세상의 모든 공포가 그의 뜻대로 움직인다고 볼 수 있는 녀석이다. 그런데 이 녀석이 어떤 계약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전장에서 암흑제국 병사들의 힘을 강하게 하는 역할을 해 주고 있다. 그런데 그 지역이 한정적이라 특정한 매체를 이용해서 그 지역을 넓히고 있는 중이 다. 그리고 그 지역을 넓히는 일은 지금 전선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온통 공포와 절망으로 휩싸인 존재들을 땅에 묻어 줌으로 해서 그들이 죽을 때까지 는 그 존재들을 중심으로 공포의 정령이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그 머리로 만들어진 자들은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라 신체의 모든 기능을 정 지 시키고 공포와 절망을 느낄 수 있는 머리만을 남겨 둔 상태라는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신체의 부위가 작아진 것은 그 신체들이 에너지를 쓰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그 신체 에 있는 에너지를 두뇌의 활동에만 쓸 수 있도록 몸체에 저장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 고 보면 되었다. 그러니까 머리에 달려 있는 손바닥 크기의 몸체는 머리가 살아있게 만들기 위한 일종 의 영양소라고 보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태로 그 머리들은 약 100일 정도를 살게 될 것이었다. 즉 100일 동안 일정 지역을 ‘죽음의 지역’으로 만들어 놓는 것이다. 그리고 그 머리의 역할은 그것 이외에도 더 있었는데 지휘관도 정확히는 알지 못하 는 모양이었지만 아이슈마의 영향력을 넓혀주는 역할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건 지휘관이 자세히 알지 못해서 나도 자세히 파악할 수는 없었다. “저 루탄님, 이제 어떻게 하지요? 저 포로들과 병사들은 어떻게 해야...” 내가 지휘관의 심문을 마치고 이것 저것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을 때, 자이곱이 옆에 서 기다리기 지루했던 모양인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응? 음! 일단은 조금 쉬면서 한타와 그란드의 병사들이 정신을 차리도록 만들고 암 흑제국의 병사들은 모두 포로로 끌고 근처 가까운 부대로 복귀하도록 하면 되겠지. 그 리고 우리들은 일단 이 상황을 정리해서 알리고 지토와 동생들이 올 때까지 머리들 을 찾기로 하지.” “예? 머리들이요? 그런데 찾아서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쩌기는 고통을 덜어 주어야지. 방법이 없어 저 상태에서 원상태로 돌아오게 하 는 방법이 없어. 이런 짓을 벌인 녀석들도 방법은 없다고 했던 모양이야. 그리고 저것 들이 있는 이상 전력의 서너 배를 가지지 않으면 제란의 병사들을 이길 수가 없으니 빨리 찾아서 없애야겠지. 물론 적들도 우리들이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것들을 없애는 것을 알게 되겠지만 어쩔 수 없지. 지금 당장은 이 머리들을 찾아서 없애는 일을 가 장 최우선으로 해야 할 것 같으니 말이야.”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머리들은 독특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그것은 절망과 공포가 극대화된 것이었는데 아마도 신성제국의 신성사제들이라면 이런 기운을 좀 더 잘 파악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땅에 묻힌 상태에서는 상자에 그려진 도형들이 마력의 응집을 만들고 있었으 니 6써클 정도의 고위 마법사라면 상자를 찾아 낼 수도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방법이 최선의 방법이 될 수는 없었다. 정령의 경우에는 소환자를 처리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소환자와의 계약을 파기시키면 되는 문제니 말이다. 그리고 또 아이슈마, 아이슈마가 문제였다. 물론 그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있는 제란 도 문제지만.... 나는 잠시 지끈거리는 머리를 흔들고는 다시 현재의 상황을 정리해서 기록용 수정구 에 담고는 그것들을 복사해서 화아와, 아카데미, 우제푸, 그란드 왕국, 누웬왕국, 넥 스 영지의 마법사 탑으로 각각 보내고 전에 보낸 머리들에 대해서도 빠른 시간 안에 폐기를 할 것을 부탁했다. 뭐 마법사들이 내 말을 들을 지는 잘 모르지만 말이다. 워낙 새로운 것에 대한 탐구 심을 막을 수가 없는 인물들이니... 그렇게 대충 일을 마무리 지은 나는 밤사이에 설친 잠을 보충하기 위해서 잠자리에 들었다. 벌써 날이 어슴프레 밝아오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런 나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는지 자이곱은 포로(암흑제국 병사)들을 점검하고는 겨 우 조금씩 정신을 차리기 시작해서 상황을 인식했는지 울부짖는 것 같은 소리로 오열 하는 한타와 그란드의 병사들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솔직히 지금 내 몸이 피곤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복잡한 생각과 추리들로 머리가 혼란스럽다는 것이 옳은 말일 것이었다. 나는 오랜만에 편안하게 모든 것을 잊고 잠을 청했다. 내가 들어간 집에는 자이곱도 들어오지 못할 결계를 쳐 놓았다. 자이곱도 내가 그런 결계를 쳤다는 이야기를 했어도 편히 쉬시라는 말만 하고는 아마도 포로로 잡혔던 병 사들이 스스로를 주체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 같다는 말로 내가 오래 쉬어도 된 다는 말을 대신했다. 갑작스럽게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겨우 두 달이 조금 지났을 뿐인데도 이 인간계의 네 나라가 전화에 휩싸이고 있었다. 급작스럽게 암흑교의 교도들이 살육을 장을 열어서는 전면전을 만들더니 이제는 아이 슈마의 사제들이 ‘죽음의 지역’을 만들고 있다. 그리고 문제는 이제 오래지 않아서 넥스 영주를 포함한 사람들이 도착을 한다는 것이 었다. 다른 사람들의 죽음이란 나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않는다. 멀고 먼 곳에서 사람들 이 죽어가는 일이야 곁에서 기르던 강아지가 죽는 것만도 못하게 생각되는 것이 사실 이니까. 하지만 이제 오래지 않아서 그들의 손가락에 가시가 박히는 것에도 신경이 쓰이는 사 람들이 이 곳으로 오게 되는 것이다. 나는 갑작스럽게 이런 생각으로 잠을 설치고 있었다. 나의 수면은 내가 일어나는 순간까지 방해받지 않았다. 낮이 한창 기울어서 그림자가 길어진 시간이었지만 이만 출발을 서두르자는 내 말 에 자이곱도, 병사들도 말없이 따랐다. 처음에는 이들에게 알아서 근처의 부대를 찾아보라고 할 생각이었지만, 내가 잠을 자는 동안에 들어온 연락 중에서 광아가 보낸 내용이 내 계획을 약간 바꾸어 놓았 다. 광아가 보낸 내용은 어차피 전선에서 그 '머리'들을 찾아 폐기시킬 거라면 전선에 배치된 마법사들과 정령사, 환수사들의 도움을 받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내용과 내가 있는 지역 근처에 자이건이 와 있다는 내용이었는데, 실제로 머리들에 대한 것은 싸 움을 이끄는 사람들이 바보가 아니라면 이런 정보를 가지고도 알아서 하지 못할 일 은 아니니 신경을 쓸 것은 없었지만, 암흑교의 뒤를 캐는 것을 목적으로 떠난 자이 건과 아세트가 근처에 와 있다는 것은 내 관심을 끌었다. 자이건과 아세트는 아르미엘과 동행하면서 아르미엘이 원하지 않으면 그들 암흑교 의 정보를 유출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고 출발을 했었기 때문에 통신을 자제하고 있는 형편이어서 그들의 소식을 자세히 알지는 못해 궁금해하던 차였다. 나는 자이곱과 함께 병사들을 이끌고 출발했다. 비록 전선에서 가깝다고는 해도, 우리들이 곧장 적과 대치중인 부대를 찾아 갈 수 는 없는 형편이어서 광아의 도움을 얻어 약간 후방에 위치한 중급 크기의 도시 하 나의 위치를 알아내고는 그리로 이동을 하기로 한 것이다. 몇 필의 말이 있기는 했지만, 지치고 병든 병사들과 전투중에 부상을 입은 포로들 을 위해서 마차를 끌게 했던 탓에 나와 자이곱도 한 발 한 발 피부를 찌르는 겨울 바람 속으로 걸음을 옮겨야 했다. 짐작하는 것 처럼, 그런 날씨 정도가 우리에게 영향을 줄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그 바람이 훈풍薰風으로 느껴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몸보다는 마음이 더 움추려드는 상황이라고 할까. "젠장, 무슨 바람이 이렇게 불기 시작하는 거야?" "그러게 말입니다. 루탄님. 이거 병사들과 포로들이 고생이 심하겠는데요?" 자이곱은 뒤따르는 병사들에 더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마음에 상처가 심한 자들이었다. 조금은 훈훈하고 따뜻한 분위기가 필요할 터였지만, 여기서 꾸물거리고 있을 수도 없었다. 들리는 것은 오직 바람소리와 병사들의 발자국 소리와 말발굽 소리, 마차 바퀴가 찌그덕 거리며 구르는 소리와 정신을 잃은 자들이 내 뱉는 신음소리가 전부였다. 가야 할 길이 그리 먼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병사들의 선두에서 발을 놀리며 참 멀 기도 하다는 생각을 여러번 해야 했다. 그렇게 침묵 속에서 걸음을 재촉한 우리들은 새벽이 되어갈 무렵, 드디어 목적지에 가까워 지고 있었다. 낮은 성벽으로 둘러진 작은 도시였다. 하지만 그 도시의 성벽을 두르고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다시 도시가 확장된 모 습을 하고 있는 곳이었다. 이를테면 성벽으로 둘러싼 도시가 안에 있고 그 밖으로 또 다시 마을들이 생겨 뻗 어나간 모습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들이 그 마을의 초입에 드러서자 이미 우리들을 살피고 있었던지 일단의 병사 들과 민병들이 활과 창을 세우며 우리를 제지했다. "멈추시오. 신분과 용건을 밝히시오. 나는 이 노람의 임시 책임자인 스콘사이 남작 이오." 나는 의외라는 생각에 스콘사이 남작이라 밝힌 사람들 바라보았다. 한타에서는 전쟁이 시작되면서 귀족들을 위험 지역에 배치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오래도록 내려온 전통과도 같은 것이었다. 즉 귀족으로 권세를 누렸으면 위험이 닥 치는 순간 그 위험에 가장 먼저 다가가야 하는 것이 귀족이라는 일종의 암묵적인 규약과도 같은 것이었다. 권력에 따르는 책임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그 직분에 충실하리라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무슨 핑계를 대든 그런 자리에서 도망을 가려고 했고, 어쩔 수 없이 파견이 된다고 하더 라도 이렇게 위험의 전면에 나서는 자들은 많지 않은 것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어쩌면 이 남작은 이 정신을 제대로 이은 자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품속에서 군단지휘관을 뜻하는 신분패를 꺼내 들며 그에게 대답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특수임무를 맡은 군단의 책임자인 루탄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기밀에 속하는 것이라 말씀을 드리지 못함을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남작이라는 지위가 나에게 이런 존대를 받을 위치는 절대 아니었다. 더구나 군단의 지휘관이라는 것만으로도 이런 소도시의 책임자에 비할 바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정중했고, 그것은 그가 귀족으로서의 책임과 의무에 충실한 사 람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내 보인 패를 사람을 시켜 받아 들고 확인을 하더니 우리들을 막고 서 있던 사람들의 앞으로 나서서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해왔다. "죄송합니다. 미리 연락을 받기는 했지만, 확인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쪽 으로 들어오시지요. 공작각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공작이라. 아마도 아세트를 말하는 것일 터였다.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작위가 백작에 불과한(그것도 어거지로 받았다. 공작 남 편이라고) 자이건 보다는 공작인 아세트가 우위에 있었다. 나는 스콘사이라는 남작의 뒤를 따라 성안으로 들어갔고, 남작은 내가 데리고 온 병사들과 포로들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취했다. 이미 우리가 올 것을 알았으니 준비 를 해 두었던 모양이었다. "이곳에 공작님과 그 부군께서 계십니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공작께 서 루탄님의 일행만을 모시라는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그렇게 나와 자이곱이 안내된 곳은 도시의 관청으로 보이는 건물에 딸린 객청이었 다. "어서 오세요. 루탄님."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 투박하게 생긴 원목나무로 만들어진 문을 열고 들어선 접객실에는 아세트와 자이 건 그리고 아르미엘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간 잘 지냈습니까? 많이 걱정했습니다." 나는 아세트를 보고 말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아르미엘이 끼어 있어서 말을 쉽게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따. "그래, 이렇게 만나자는 연락을 한 것을 보니 뭔가 이야기를 할 것이 있는 모양인 데 무슨 일이야?" 나는 말을 놓기 어려운 아르미엘 대신에 자이건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게, 아르미엘 사제님께서 루탄님을 찾아서 연락을 드린 것입니다. 뭐 그 동안에 몇가지 사실을 밝히기는 했지만 어떤 내용을 말하고 어떤 내용을 말하지 말아야 할 지 몰라서 그냥 아르미엘 사제님이 알아서 하시라고 했습니다." 말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어느 정도 암흑교의 활동에 대한 실마리를 잡은 모양이지 만 아르미엘과 처음에 약속한 것이 있어서 자이건은 입을 열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어차피 나중에는 지금 공작님과 부군께서 보고 듣고 계신 것들이 모두 밝혀지게 되겠지만 아직은 시기가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번거로운 일을 벌이는 것이니 루탄 님께서 이해를 해 주셔야 겠습니다. 우선, 제가 루탄님을 청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아이슈마의 사제들에 대한 정보를 얻으셨단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그에 대 한 설명을 좀 드려야 할 것 같아서입니다." 여전히 깊은 후드 속에 모습을 감춘 아르미엘의 목소리는 미성이었다. "지금 마계의 통치자이시며 모든 권능의 발현자이신 루시퍼님께 반기를 들고 숨어 든 무리들이 생겼습니다. 마계에서 말입니다. 그리고 짐작하시는 것처럼 그 중심에 아이슈마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슈마는 감히 넘보지 못할 루시퍼님의 힘을 피해서 인간계에 발을 붙이려는 계획을 세운 듯 합니다. 사실 인간계는 다른 4계에서 직접 적인 개입을 할 수 없도록 묵계를 정한 상태이고, 다른 계들의 계입이 심각해 질 경 우에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붕괴될 소지가 다분한 곳입니다. 비록 예전에 4계의 힘으로 재구성해 내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본래의 인간계와 같은 힘을 지닐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나마 시간이 흘러가면서 조금씩 그 힘을 회복하고 있었지만 두 번 에 걸친 루시퍼님과 주신의 싸움으로 상당히 충격을 받은 상태입니다. 때문에 이번 에는 다른 4계에서 인간계에 어떤 간섭도 자제해야 하는 상황이니 아이슈마가 인간 계로 숨은 것은 참으로 탁월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그렇게 인간계의 지배자로 힘을 키울 수 있다면 언젠가는 한 계의 주인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 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 테고 말입니다." 그렇게 말을 끊은 아르미엘 사제는 잠시 내 눈치를 살피는 모양이었다. 아니 어쩌 면 내가 그 말들을 머리속에서 정리하기를 기다리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럼 일단 모든 문제의 중심에 아이슈마라는 웃기지도 않는 마족이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암흑교의 활동은 어떻게 된 것이죠? 예전에 활동을 하던 암흑교는 분명 루시퍼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건..." 내 당연한 질문에 잠시 아르미엘 사제의 대답이 느리게 끌렸다. "그건, 당시에 아이슈마가 인간계의 여러 문제들을 루시퍼님을 대리하여 처리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암흑교의 전력을 움직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렇 다고 해서 모든 사제들을 움직인 것은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그러다가 아이슈마가 그 본색을 드러내게 되자 루시퍼님의 종들은 당혹스러웠고, 그런 중에 아이슈마의 계획을 막기 위해서 움직이게 된 것입니다." "그럼 혹시 4국에서 동시에 살육을 벌이고 이렇게 전쟁을 3국 연합과 암흑제국의 대결로 몰아간 것이 루시퍼를 추종하는 쪽의 짓입니까?' 나는 아르미엘의 말을 듣고 언뜻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대로 아이슈마가 힘을 기를 시간을 주는 것은 좋지 못하다는 생각 을 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3국이 연합하여 암흑제국과 대립을 하게 된다면 싸움 이 유리하게 전개될 것이라는 것이 저희의 생각이었습니다." "잠깐 저희라고 하는 건, 아르미엘 사제도 이번 일에 연관이 있었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솔직히 제가 다시 암흑교의 교주가 된 것은 1년 전의 일입니다." "에~? 교, 교주?" 나도 놀랐지만 자이곱은 황당하다는 표정과 함께 지극히 공손한 모습이 되었다. 자 이곱이 비록 나를 따르고는 있지만 그의 종교를 따지자면 암흑교에 속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아르미엘의 곁에 앉은 아세트와 자이건은 이미 알고 있었던 듯 별다른 표정 의 변화가 없었다. "그럼 이제 좀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할까요?" 나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팔짱을 끼었다. 상황은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전선은 여전히 고착상태로 머물러 있었고, 양쪽의 희생자는 늘어만 갔다. 아이슈마의 사제들이 만든 ‘죽음의 지역’을 피해서 싸움을 해야 하는 아군들은 섣 불리 진격을 하지도 못하고, 적의 공격에 수동적으로 방어를 하는 것이 한계였다. 화아 등이 데리고 온 신성사제들이 그 ‘머리’들을 찾아내는 데에 도움을 주고 있었 지만, 그들이 그 머리를 찾기 위해서는 적진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난제難題가 있었다. 때문에 신성사제들을 보호하고 ‘머리’를 찾기 위해 일단의 부대들이 전선 곳곳에 배치되었다. 거기에 문제가 있다면 그 부대들이 바로 내 가족들이며 친구들이며, 제자들로 구성되 었다는 것이다. 이 전쟁을 수행하는 작자들, 한타의 왕실과 그란드의 왕실, 그리고 신성제국 회의에 서는 내 가족들과 친구들과 제자들을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들의 손아귀에 놓고 움직이 려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나날이 피해는 늘어가고 있었고, 때로는 이 진절머리 나는 짓거리에서 도 망을 치고 싶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아르미엘 주교가 준 정보는 그다지 실효성이 없었다. 물론 암흑교의 힘을 총동원하 여 아이슈마의 거처를 찾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어디에도 녀석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 다. 아이슈마는 마계를 벗어났으며, 완전히 물질계의 존재로 변신에 성공을 한 듯이 보인 다고 했다. 때문에 아이슈마의 능력은 마계의 준마신에 버금가는 능력에서 지금은 상당히 약화되 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도 했다. 마계에서 물질계로 완전히 소속을 바꾸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패널티를 받아야 한다 고 하는데, 그러면서도 용의 꼬랑지보다는 뱀의 대가리를 택한 아이슈마는 참 특이한 마족임에 분명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우리 가족과 친구와 제자들의 희생을 무릅쓰며 버티고 있는 것은 이유가 있었다. 전쟁의 종식은 아니더라도 아이슈마의 힘을 막아야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아르미엘의 이야기로 아이슈마가 인간계로 옮겨오면서 약화된 힘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복구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 ‘머리’들이 들어있는 상자에서 내가 파악하지 못한 도형들의 의미는 전장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어두운 기운들을 모아서 아이슈마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함께 하 는 것이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아이슈마는 언젠가는 힘을 회복하게 될 것이라는 것 이 아르미엘의 이야기였다. 뭐 말로는 정 안되면 루시퍼가 나서든 아니면 다른 계의 존재가 나서든 해서 해결을 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다른 계에서 허용할 리도 없었고, 더군다나 상당히 불안정 한 인간계의 축이 그로 인해서 흔들리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현재로서는 모 든 것을 인간계에서 해결을 하도록 직접적인 개입을 피하고 있는 것이라나 뭐라나... 어쨌든 지금으로선 그 ‘머리’들을 해결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고, 그와 더불어서 그 ‘머리’들을 만들 수 있는 아이슈마의 사제들을 처리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일을 우리들, 그러니까 내 가족들과, 친구들과 제자들이 해야 하는 이유 는 신성사제들의 호위에는 소수의 정예들이 필요한데 그런 의미에서는 넥스 영주의 화 염기사단, 자이건의 강철기사단, 그란드의 얼음기사단, 아카데미의 야전대처럼 소수정 예로 이루어진 부대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없다고 발뺌들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 고 해야 하나? 그리고 아직도 자국의 이익에 더 관심이 많은 3국 수뇌들의 약간은 미온적인 태도도 문제라면 문제였다. 물론 이 전쟁의 책임이 제란에게는 없다거나, 암흑교가 아이슈마와 루시퍼로 나뉘어 져 있다는 등의 이야기는 할 수도 없는 입장이니 답답하기만 하다. 그 덕분에 오늘도 한타왕국을 중심으로 그란드에 이르도록 길게 뻗은 전선에서 분전 을 하고 있는 것은 한타와 그란드의 병사들이 아니었다. 물론 ‘머리’들이 제거된 곳을 점령하고 유지해야 하는 것은 그 병사들이었지만, ‘머리’가 제거된 지역을 번번이 암흑제국에게 다시 내어 주는 것도 그들 병사들이었 다. “이런 빌어먹을, 또 빼앗겼단 말이야? 아니 어떻게 이렇게 매번 빼앗고 빼앗기고를 반복할 수 있는 거야?” “아무래도 병사들이 가지는 공포심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 전에 ‘머리’효과를 본 적이 있는 병사들은 그 비슷한 모습으로 위장만 해도 사기가 떨어지는 모습을 보이 니 말입니다.” “그렇다고 매번 이렇게 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어야 한단 말이야?” “이번에는 좀 더 새롭게 접근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형님.” “뭐? 어떻게 말야?” 나는 지금 광아와 함께 야전 천막 안에서 작전 회의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주로 광아가 모든 전선의 정보들을 취합해서 분석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렇게 광 아와 얼굴을 마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중에서 수아는 그란드와 암흑제국의 국경선에 나가서 적을 막으면서 ‘머리’들 을 정리 하고 있었고(국경선이 넓디 넓은 강이라는 것은 수아에게 엄청난 이점이 있었 다.) 화아, 풍아, 지토, 자이곱도 각각 부대를 인솔하고 ‘머리’ 제거 작업에 매달리 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아주 한꺼번에 밀어 붙이는 겁니다. 일정 지역을 빼앗아서 맡기 는 거지요. 그리고 그 지역을 빼앗기는 경우에는 더 이상 도움을 주지 않는 것이죠. 본보기로 몇 번만 그렇게 한다면 태도가 좀 달라지지 않을까요?” “그건 그럴지 모르지만 어차피 몸이 달 것은 한타 뿐이지 않을까? 신성제국이나 그 란드는 피해가 별로 없으니 말이야. 더구나 그들에게 암흑교가 나뉘어져 있다거나 혹 은 지금 싸우는 상대는 무차별 살육을 벌인 존재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릴 수가 없으니 아이슈마에 대한 이야기를 전부 말할 수도 없으니...” “하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전선의 사기를 좀 올려 주지 않으면 우리들의 의미없는 희 생만 늘어갈 겁니다. 벌써 기사단과 야전대에서 100명이 넘게 죽었습니다. 우리들이 싸움을 할 때는 그 ‘머리’효과 속에서 싸워야 한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비록 실력이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희생이 없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랬다. 전쟁은 전쟁이었다. 적들도 이제는 ‘머리’가 있는 곳을 굳이 숨기려고 하 기 보다는 그 지역에 고정 병력을 투입해서 방어를 하는 모습이었다. 다행히도 그 머리를 들고 이동을 할 수는 없었는데 그것은 머리가 묻히는 지역의 좌 표와 주위 마력의 분포가 머리가 들어있는 상자의 도형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었다. 즉 좌표가 바뀌면 곤란하다는 말이다. “그래, 알았다. 누구를 대신해서 희생을 한다는 것은 나로서도 별로 달갑지 않은 일 이지. 특히 돼지들을 위해서는 절대로 사양하고 싶은 일이야.” “맞는 말씀입니다. 형님.” 돼지들. 모든 정치가와 지도자가 돼지는 아니다. 하지만 그런 무리들 속에는 돼지가 비율적으 로 많았다. 가난하고 헐벋은 사람들은 돼지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풍요롭고 배부른 것들이 욕심 에 눈이 멀고, 이기주의에 익숙한 돼지가 된다. 물론 이번에도 적들을 막기 위해 피를 흘리는 대다수는 힘없는 병사들이겠지만.... 이런 딜레마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 인간들이 세상살이라면, 나도 이기적으로 살 아볼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내 범위 안의 사람들을 먼저 위하는 것. 할 수 있는 만큼만 아끼고 사랑해야지. 모 든 사람들을 다 아끼고 사랑 할 수야 없다. 때로 적에게도 동정심을 느끼는 오지랖 넓은 짓을 하기도 하지만... “각국 수뇌부에 전문을 보내. 이 시간부터 같은 지역에 대한 ‘머리’제거 작전은 없을 테니 알아서들 하라고 말이야.” “네 형님.” “그리고, 아르미엘과 자이건에게 연락해서 아이슈마의 사제들에 대한 거취를 빨리 파악하라고 해. 아무리 인형을 내세워서 움직인다고 해도, 인형과 너무 먼 거리를 떨 어져 있으면 인형을 조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으니 그 사제들도 전선 에 몇 군데 거점을 가지고 있을 거야. 빨리 좀 파악을 하라고 해. 그리고 광아 너도 그 쪽에 신경을 좀 쓰고. 참. 사람이 부족하면 마법사들의 페밀리어를 이용하거나 환 수, 정령들까지 총 동원해서 파악해. 이젠 정말 전력전이야.” “알겠습니다. 형님.” 그렇다고 지금까지 놀고 있지는 않았겠지만, 광아는 내가 하는 말에 각오를 새롭게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으이구. 내가 괜히 죄 없는 광아만 닦달을 하고 있군. 쩝. 그렇다고 모든 일을 광아 등에게만 맡겨 두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도 나름대로의 정보 수집을 위해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색다른 정보가 없으면 연락을 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나는 암흑제국에게 빼 앗긴 지역 안으로 정찰을 나가기로 했다. 홀가분하게 아무도 없이 움직인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전에 제란과 한 판 붙으 면서 날아갔던 때를 빼고나면 이렇게 움직인 것은 처음인가? 나는 지금 예전에는 암흑제국과 한타의 관문역할을 하던 곳에 와 있다. 물론 예전에 도 두 나라 사이에 왕래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를테면 국경선에서 가까운 마을 이라고 봐야 할 것이었다. 예전 자이건이 머물던 곳이 군사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곳이라고 한다면 이 곳은 그 래도 주민들이 거주하던 지역으로 암흑제국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하지만 벌써 암흑제국의 손아귀에 들어간 지 오래된 곳이라 한타의 힘이 미치지 못하 는 곳이다. 그리고 그 정도의 마을이었기 때문에 여기도 역시 머리가 묻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 머리를 해결하기 위해 이렇게 여기 저기 무너진 담으로 겨우 지 탱된 지붕위에 올라와서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니다. 솔직히 몸을 숨긴다기 보다는 잠시 쉴 곳을 찾았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지붕 밑으로 저 쪽에는 무너진 집들과 천막들을 이용해서 만든 막사와 병사들이 보였 다. 그리고 그 중에서 깨끗하달 수 있는 건물은 아마도 수리를 해서 지휘부가 사용하 고 있는 듯이 보이는 건물도 있었다. 조금 후 야음을 틈타서 내가 방문하려는 목적지는 바로 그 건물에 있는 지휘관의 숙 소였다. 아무래도 지위가 높은 자들을 닦달하는 것이 정보를 얻는 데는 제일 빠른 방법일 것 같으니 말이다. 가만히 지붕에 누워 해가 지고 달이 뜨는 것을 보고 있었다. 옆에는 화아도, 수아도, 광아도 없었고, 란이 조차도 없었다. 지난 몇 년간 모두들 자기 일을 맡아서 움직이는 시간들이 늘어나면서 함께 있는 시 간보다는 혼자 있는 시간들이 늘어났고, 란이도 타니가 태어난 이후로는 나와 함께 있 기 보다는 타니의 좋은 친구가 되는 쪽이 즐거운 모양으로 타니와 붙어 있으려고만 했 다. 몰론 나도 아내와 아이가 생기고 좀 더 가까운 가족이 생겼다는 느낌에 동생들이나 란이, 게브, 아눈 등과 소원해 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싸늘한 겨울 공기가 매섭게 허공에서 찢어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오로지 가슴속에서 느껴지는 서늘함만을 남길 뿐이다. 기온이 신체에 영향을 주었던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이야기니 말이다. 투명하게 푸르던 하늘이 점점 붉어 졌다가 짙은 감청색에서 검은 색으로 변해가고 그 하늘에 작은 틈들을 비집고 별들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겨울 밤하늘의 별들은 너무도 차가워서 오려 붙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나는 별들이 모두 제 모습을 드러내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기척을 감추고 목표한 건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겨울이라는 계절은 잠깐 동안 열리는 문이나 창문으로 스며드는 한기寒氣가 쉽게 들 키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건물로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아니다. 마법이란 이런 경 우에 아주 실용적이기 때문에... 하지만 나는 암흑제국의 영역권 안에서는 될 수 있으 면 마법 사용은 자제하고 있는 중이다. 마법의 사용은 흔적을 남긴다. 아니 능력이 뛰어난 마법사들은 아주 먼 곳에서 일어 나는 마력의 움직임도 찾아낼 수 있다. 뭐 그렇다고 내가 마법을 쓰면 곧바로 제란에게 내 위치가 들키지 않을까 하고 걱정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문제는 고급 마법을 사용했을 때에나 일어날 수 있는 것이 다. 즉 마력의 움직임이 아주 많은 경우라고나 할까? 마법을 쓰면서 멀리 있는 다른 마법사가 그것을 느끼게 하는 것은 엄청난 냥의 마력 의 움직임이 있을 때의 일이니 말이다. 뭐 같은 9써클이라도 기억을 읽어 들이는 마법 같은 것은 그런 의미에서 걱정없이 사 용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은 다행스럽다. 그것은 많은 마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섬세하고 복잡한 마력 운용 때문에 9써 클에 들어간 것이니까. 아무튼 내가 암흑제국 안에서 마법을 쓰지 않는 것은 대단위 마법은 제란이나 그 측 근들 중에서 위치를 파악하고 날아오는 것을 피하기 때문이고, 지금같은 경우에 작은 마법을 자제하는 것은 가까이에 있는 하위마법사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다. 물론 9써클이니까 낮은 써클의 마법사들은 내가 마법을 쓰는 것을 모르지 않겠냐고 하겠지만, 그게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잔잔한 수면에서 숟가락으로 물을 퍼 올리나, 두레박으로 물을 퍼 올리나 파문이 생 기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고요한 마력의 흐름에 생기는 그 파문은 마력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 파문의 크기가 작은 물력의 수준이냐 거센 파도나 해일의 수 준이냐는 마법에 따라 다른 것이지만... 아무튼 내가 느끼기에 이곳에도 몇몇의 마법사들이 있었고, 그 중에는 6써클에 이르 는 자도 있었다. 그러니 마법의 사용은 될 수 있으면 자제해야 한다. 나는 그 사이에 건물의 뒤쪽에서 간신히 들키지 않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을 찾았다. 원래는 창문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창을 막고 있던 나무판이 한 쪽 사라지고 없는 창 을 발견한 것이다. 설마 이런 마을에 달려 있는 창문이 모두 다 유리로 되었으리라는 상상은 하지 않기 를 바란다. 내가 아카데미에 있는 내 사무실의 거대한 창문을 유리로 만든 것은 마법 의 힘이었다. 물론 유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가격이 상당하다는 것은 벌써 오래 전에 누웬에서 암흑제국으로 유리 장사를 했던 내 경험을 미루어 본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건물의 전면이 아닌 때문인지 창문은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고, 그 중에 한 쪽 이 떨어져 나간 것이다. 그리고 그 창은 사람이 거처하는 곳에 달린 것이 아니었던 모 양인지 떨어져 나간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나는 그 창문으로 스며들듯(솔직히 빠르게 들어오기는 했지만 상당히 비좁은 창문이 다.) 들어왔다. 창문 안쪽에는 어둠 속에 묻혀있는 갖가지 기구들이 먼지 속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아마도 이 곳은 창고로 쓰이던 곳이었던 모양이다. 슬쩍 문 밖의 동정을 살핀 나는 곧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섰다. 건물 안에는 대략 20명 정도의 인물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잠자리에 들어 있는 상 태였고, 특히 2층 중앙에 있는 방에는 단 한 사람의 고요한 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 다. 혼자 방을 차지하고 잠자리에 든 사람이 내 목표라는 것은 불을 본 듯 뻔한 일이었 다. 1층과 2층의 계단엔 2층에만 두 사람의 경계병이 있을 뿐이었고, 그 이외에 이 건물 안에서 깨어 있는 인물은 없는 것 같았다. 건물 밖에서 추위에 떨면서 경계에 힘쓰고 있을 병사들이야 이젠 별로 상관하지 않아 도 될 일이었다. 나는 2층으로 통하는 계단 밑에서 2층에서 경비를 서고 있는 자들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고 몸을 날렸다. “누, 누구....” “엇!..” 낮은 소리로 울리는 경비병들의 목소리는 차가운 바람이 부는 건물 밖으로까지 흘러 가지 못하고 계단 아래를 지나기 전에 묻혀 버렸다. 나는 쓰러지는 병사들을 조용히 받아 세우고, 목표로 삼은 방의 문을 슬며시 열고 들 어갔다. 병사들은 벽에 기대고 서 있는 모습으로 한동안 버틸 것이다. 내가 들어선 문 안에는 근육질의 남자가 침대 위에서 낮은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 었다. 침대 옆에는 검이 세워져 있었고, 그것은 잠에서 깨에 손에 쥐기에 적당한 위치에 놓 여져 있었다. 나는 최대한 기척을 숨기고 침대로 다가가 잠에 취한 그 녀석을 제압했다. 휘-익 “읏차!” 기습적을 휘둘러진 것은 침대 시트 안에서 튀어나온 검이었지만 그걸 그대로 맞아 주 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내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잠깐 빨라진 녀석의 맥박을 내가 놓치지 않은 것이 이 기습에 당황하지 않고 대처해서 녀석의 행동이 이어지기 전에 이렇게 제압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이런, 많이 놀란 것 같군. 이봐 이렇게 방문을 해서 미안하다네.” 나는 쓸데 없는 말을 주절거리며 녀석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이미 몸의 혈도들이 제압된 녀석은 침대 위에 갓 잠이 깨에 일어난 것 같은 모습으 로 한 쪽으로 검을 늘어뜨린 자세로 앉아 있었다. “이봐, 미안하지만 말을 할 수 있게 해 줄 수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기 바라네. 여 긴 내 친구들은 없고, 오로지 자네 친구 뿐이니까 자네가 소리를 지르게 되면 나만 손 해거든. 거기다가 내가 자네를 죽이겠다고 협박을 한다고 해도 별로 자네는 그런 것 에 신경을 쓸 것 같지 않은 인물이라서 말이야. 지금도 이렇게 대단한 기세를 풍기고 있으니...” 이렇게 긴 이야기가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동안 내 손과 머리는 9써클의 기억 읽기 를 실현시키고 있었다. 이제 시간이 별로 없었다. 마법을 실현시키는 순간 마력의 파동은 퍼져 나가기 시작했고,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마법사들은 그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 낼 것이기 때문이다. “음, 내가 여기 들어온 이유가 궁금한가? 아니면 내가 누군가가 궁금한가? 일단은 내가 누군지는 별로 알려 주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이미 알고 있나? 뭐 알 수도 있 겠군. 그럼 내가 왜 왔는지도 알고 있겠군? 그래 그 사제님들은 어디에 있나? 여기서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것 같은데? 알려 줄 생각이 없나? 그럼 혹시 말이야 제란이 란 녀석에 대해서 알고 있나? 호오? 그렇게 눈을 부라리진 말아. 어차피 자네도 우리 쪽의 높으신 어른들을 존칭을 붙여서 부르지는 않지 않나? 참, 트롤라이런이란 녀석 은 알고 있나? 아니면 카튼이라든지. 왜 제란의 측근들 말이야. 아 그러고 보니 두룬 이라는 자는 잘 있나?” 나는 최대한 빠르게 여러 가지를 질문했다. 미리 준비했던 질문들이기는 하지만 제대 로 정리해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가 하는 이야기에 멋지게 반응해서 녀석의 머리 속에서 빠르게 솟아오르는 기억의 편린들을 주워담는 것은 말을 하는 것 보다는 몇 배는 더 힘들고 어려운 일이 었다. 밖에서는 벌써 소란스러운 발소리가 이 건물을 향해서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경비병을 만나고 문을 열고 계단을 뛰어 오르고 잠시 벽에 기댄 경비병들을 보고, 이 방의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순간 나는 모습을 감추었다. 도망을 가는 데에 있어서도 마법을 자제해야 할 필요는 별로 없었다. 더구나 그다지 먼 곳으로 이동을 하는 것이 아닌 블링크에 해당하는 마법은 간단하고도 실용적이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근처 건물의 지붕으로 옮겨와서는 녀석들의 움직임을 살피는 즐거움까지 누 릴 수 있으니 말이다. 나는 잠시 몇 곳을 경유해서 몸을 움직여서는 예의 그 건물이 잘 보이는 건물의 지붕 위에 자리를 잡고 방금 전에 얻은 정보들을 정리해 보았다. 먼저 대다수의 전방 지휘관들이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듣거나 정보를 받아서 알고 있 는 상태인 것을 확인했다. 그것은 암흑제국 내에서 나와 내 동생들에 대해서 어느 정 도 파악을 하고 있다는 말과 같을 것이다. 그 정보들이 어디에서 빠져 나가고 있는 것 인지는 다시 점검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리고 아이슈마의 사제라는 작자들이 몸을 숨기고 있는 곳은 다행스럽게 한 곳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위치를 토대로 하면 어느 정도는 다른 곳의 위치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제란이나 그의 측근들에 대한 정보는 별다를 것이 없었다. 제란이 이 제국의 실질적 인 지배자라는 것은 사실이었고, 당연히 그의 위치는 제국의 황성이라고 믿고 있는 것 이다. 뭐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이 불가능하다. 직접 들어가 보지 않은 이상 은 말이다. 다만 녀석이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것을 볼 때에 역시 황성에서 지휘를 맡 고 있지 않을까 하고 심정적으로 동의하는 마음이 들기는 한다. 그리고 다른 측근들에 대한 것은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사실 이 곳의 지휘자라는 녀석도 서열로 보면 제법 높은 편에 속하는 녀석이었지만, 사제들의 위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의외의 정보였다. 원래대로라면 이 지휘관 녀석은 이 정보를 모르고 있어야 하는 것인데, 이곳으로 병 사들을 이끌고 이동하는 중에 정찰병들이 수상한 곳을 발견해서 수색을 하려다가 알 게 된 곳이 바로 사제들이 머물고 있는 곳이었던 모양이었다. 사제들은 그렇게 위치를 들키고 나서는 당연히 이동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그들 이 사제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인물이 지휘관과 몇 명의 병사들 뿐이었기 때문에 몇 명 의 병사는 인형으로 만들고 지휘관은 입단속을 시키는 것으로 사건을 무마했던 모양이 었다. 아마도 내 생각이지만 전선에 일정하게 배치된 사제들이 어느 하나가 움직이면 다른 곳에서도 이동이 있어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그런 결론을 내렸던 것이 아닌가 한다. 아무튼 덕분에 나는 녀석들의 사제의 위치를 알 수 있게 되었으니 저 지휘관에게 고 맙다고 해야 할까? 만약에 녀석이 능력이 모자란 녀석이었으면 부임 중에 정찰병을 내보내서 주위를 경 계하다가 사제들의 거점을 발견하는 일은 없었을 테니 말이다. 지금 그 지휘관 녀석은 건물 밖으로 나와서 병사들과 부장들 그리고 마법사들을 닦달 하고 있는 중이었다. 녀석은 내가 자기가 자는 방에 들어와서 헛소리만 하다가 허겁지겁 달아난 것으로 생 각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야 녀석은 나에게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고, 내도 몇 마디의 질문만을 시작하려 고 하다가 도망을 간 것으로 보일 테니 당연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내가 지금 여기서 녀석을 감시하고 있는 것도 녀석이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 를 내가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느냐 아니냐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고, 상당히 떨어 져 있는 그 사제들의 거점으로 이번 일을 알리느냐 아니냐도 확인을 해야 하기 때문이 었다. 하지만 역시 녀석은 내 생각대로 판단을 내린 모양이었다. 그저 자객 하나가 들어왔다가 도망을 간 것으로 생각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물론 내가 상당히 요주의 인물이라고 알려진 루탄이란 것이 마음 한 구석에 걸리기 는 하겠지만, 별로 잃은 것도 없는 상황에서 상부에 이런 문제를 알려서 자신의 위치 를 흔들리게 만들 정도로 머리가 나쁘지는 않아 보이는 것이 다행이라고 할까. 아무튼 녀석은 병사들과 마법사들을 닦달하기는 했지만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흔적 을 찾지 못한 나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기로 결정을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녀석이 병사들과 마법사들에게 내리는 아침 명령에서도 알 수 있었다. “어젯밤에 불청객이 있었지만, 별다른 피해 없이 놈을 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일이 우리 부대의 근무 상태나, 훈련 상태, 경비 상태 등에서 좋은 점으로 작용할 수 는 없다는 것을 너희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번 일은 모두의 기억에서 지워 라. 다만,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정신들을 바짝 차리고 또, 훈련을 게을리 하지 말도록.” 이렇게 아침 점호에서 훈시 비슷하게 한 것으로 보아서, 녀석이 나에 대해서 상부나 사제들에게 알릴 걱정은 사라졌다고 봐야 했다. 나는 그렇게 그 녀석에게서 원하던 답을 얻은 후에 곧장 사제들의 거점을 향해서 출 발했다. 아이슈마의 사제들이 있다는 곳은 암흑제국의 영역 안으로 상당히 들어간 곳이었다. 그것은 다시 이야기하면 아이슈마의 사제들이 머리를 만들기 위해서 인형들을 부릴 수 있는 범위가 굉장히 넓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한 사제들의 거점이 전선 전역에 펼쳐진다 해도 그 수가 열 곳을 넘지 않을 것이라 는 것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내가 파악한 사제들의 거점 한 곳에서 현재 전선이 만들어진 곳까지를 반지름으로 하 는 원을 그려 보면, 그런 원이 전체적인 전선에 열개 이상이 들어가지는 못하는 것이 다. 덕분에 나는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출발해서 해가 질 무렵이 되어서야 목표로 했던 곳 에 도착을 할 수 있었다. 이 곳에 대한 기억을 선명하게 가지고 있었던 그 지휘관의 기억 덕분에 어렵지 않게 사제들이 머물고 있는 곳에 오기는 했지만, 아무도 모르게 안으로 스며드는 것이 쉬 운 일은 아닐 것 같았다. 작은 사원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 곳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암흑교의 신전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하고 흔하게 보이는 신전이었고 실제로도 겨우 서너개의 공간으 로 나누어질 정도의 작은 신전이었다. 거기다가 이미 오래전에 패쇠된 듯 제단이 무너지고, 의자들은 한 쪽 다리가 으스러 져 기울어 있있는 이 곳이 아이슈마의 사제들이 머물고 있는 곳이라니, 아마도 암흑교 의 아르미엘 주교도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처럼 짐작을 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사삭- 나는 조심스럽게 신전 안으로 몸을 옮겼다. 주위에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고, 의심스러운 것은 없었다. 완벽하게 버려진 신전의 모습일 뿐이었다. 내가 정보를 알아 낸 그 지휘관 녀석이 이 곳을 지나다가 버리진 신전에서 느껴지는 마력의 흐름을 발견하고 사제들이 숨어 있는 것을 밝혀 냈다고 하더니 그것 때문에 완 전하게 마법까지도 제거한 모양이었다. 주위에서 누군가 접근하는 것을 알리기 위한 아람 마법도 하나 깔려 있지 않으니 말 이다. 하지만 무턱대고 움직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했다. 내는 사제들이 출구로 사용한다고 했던 비밀문이 있는 곳으로 발을 옮겼다. 의외로 그 비밀문은 흔히 생각하기 쉬운 제단 밑이나 벽 안쪽같은 곳이 아니라, 신전 의 사제들이 식사를 하는 식당의 고정된 돌의자 밑에 만들어져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통로 밑을 지키는 사람이 있는지를 오랜 시간동안 세밀하게 살폈다. 하지만 돌의자 밑에서는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상당히오랜 시간 동안 동정을 살폈지만, 역시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그그극, 그극, 생각 같아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게 의자를 치우고 싶었지만 돌과 돌이 맞물려 있 는 통로는 낮은 마찰음을 내며 열렸다. 그리고 그 소음을 걱정했던 나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밑에서는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 나는 재빨리 밑으로 뛰어 내리며 의자를 본래의 모습으로 끌어 당겨 닫았다. 의자가 제자리를 찾고 나자 순식간에 암흑 속에 묻히는 통로였지만 그런 것에 구애 를 받을 내가 아니었다. 밝은 곳에서 보다는 제약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물을 파악하는 데에 지장 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내공이 괜히 있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통로는 앞으로 약간의 경사를 이루며 내려가고 있었지만 계단을 만들어 놓은 것은 아 니었다. 그저 비스듬히 경사를 만들어 놓았을 뿐이었고 통로는 곧게 뻗어 있었다. 나는 통로를 통해 몸을 움직이며 사람들의 기척을 느끼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아주 미약하게 잡히는 기척을 제외하고는 사람들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 았다. 어디 특별하게 만들어진 장소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 곳에 사람들이 없다는 말과 같았다. 방법은 직접 확인을 해 보는 것 밖에는 없었다. 곧게 뻗어가던 통로는 약 50걸음을 지나서 양쪽으로 나뉘어 졌고, 나는 그저 한 쪽 을 선택해서 걸음을 옮겼다. 왼쪽. 이유는 없다. 꼭 같이 생긴 곳에서 한 쪽을 선택하 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을 턱이 없다. 그냥 내 마음. 그렇게 뻗어가던 통로는 다시 양 쪽으로 나뉘었는데 양 쪽 모두 경사를 이룬 계단으 로 되어 있었다. 나는 다시 오른쪽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갔다. 그런데 그렇게 움직이는 동안에 갑자기 한 곳에서 사람들의 기척이 나타났다. 세 사람의 기척이 갑작스럽게 내 감각을 자극한 것이다. 심장이 뛰고, 폐를 통해서 숨이 들락거리는 소리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갑작스럽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최대한 내 기척을 감추었다. 도대체 저들은 어디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난 것일까? 나는 가던 길을 되돌려 아까 내려온 계단을 올라가서 반대쪽 계단을 통해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움직였다. “이번에도 무사히 처리했군.” “하지만 요즈음은 바인드들이 폐기되는 것이 너무 많은 편입니다. 정말 요즈음은 쉴 틈도 없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덕분에 바인드들을 이중 삼중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내가 막 통로가 막히는 부분에 이르러서 모서리를 돌아가려는 순간 아이슈마의 사제 들로 보이는 자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나는 모서리에 멈추어서 그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이것이 다 아이슈마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닌가. 조금 힘들다고 해도 오래 지 않아 끝이 날 것이니 불평들은 하지 말게.” “무, 무슨 말씀을 불평이라니 당치 않습니다. 어찌 그런 불경스러운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합니다. 어찌 그런 생각을... 다만 아이슈마님의 역사를 방해하는 자들에 대 한 분노일 뿐입니다.” 한 사람의 질책에 다른 두 사람은 말도 되지 않는다는 듯이 펄쩍 뛰고 있었다. “아, 알았네. 내가 말 실수를 했군. 그런데 이번 방법이 잘 먹혀 들어가야 할 텐 데?” “분명 잘 될 것입니다. 바인드를 비슷한 장소에 두 개를 묻어 두고, 그 중 하나는 지금같은 상태로 발각이 되도록 두고 나머지 하나는 일정 시간이 지나서 봉인이 풀리 도록 해 두었으니...” “분명히 놈들은 바인드를 폐기하고는 군대를 주둔시킬 것입니다. 전선 대부분에서 이런 작업을 하느라 시간이 좀 걸리기는 하겠지만, 이 작업이 완료되고 나면, 적들에 게 엄청난 피해를 줄 수 있을 겁니다.” 바인드는 머리들을 이야기하는 것일 터였다. 그런데 그것이 봉인되어 있는 상태라면 신성사제들이나 마법사들도 찾기 어려울 것이 고 결국에는 우리 병사들을 불러들인 다음에 한꺼번에 죽음의 지역을 만들어서 치고 나오겠다는 계획인 것 같았다. 물론 그렇게 되면 엄청난 타격을 입을 것이 분명했다. 죽음의 지역 즉, 머리들이 힘을 발휘하는 그 안쪽에서 암흑제국의 병사들은 평소의 세 배에서 네 배에 이르는 힘을 낸다. 물론 그것은 정령의 힘이었다.(아르미엘은 암흑 제국에서 사용하는 정신 정령이 공포, 분노, 절망의 세 정령이라 했다.) “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군. 벌써 다섯 번째 부대가 이동을 마친 모양이로 군. 그럼 준비들 하지.” 셋 중에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의 목소리가 들리고 조용해지고 오래지 않아서 그들의 기척이 사라졌다. 하지만 이제는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의 몸은 거의 완전히 죽음과 같은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최소한이라고 할 정도 의 신체기능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그들은 그들이 말하는 인형 속에 들어가 있는 동안에는 이렇게 신체가 죽은 듯이 변하게 되는 모양이었다. 그럼 이들은 이 상태에서 침입자의 기척을 알 수 있을까? 나는 문득 궁금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을 확인하는 모험을 할 수는 없었다. 아직은 알아 봐야 할 것이 많았던 탓이다. 나는 서둘러 이곳의 구조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적어도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동안에는 내 움직임을 그다지 조심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기 때문에 내 움직임은 상당히 대담해졌다. 그렇게 빠르게 움직인 나는 이 곳의 구조를 대략적으로 파악했다. 입구에서 곧게 뻗은 통로는 양쪽으로 갈라지고 그 양쪽의 끝도 두 쪽으로 나뉘어지 는 계단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총 4곳으로 나뉘어진 곳에는 각각 셋씩의 아이슈마 의 사제들이 있었고, 처음 내가 내려갔던 계단쪽에는 사제들이 있는 곳 말고도 곧게 이어지는 통로가 하나 더 있었다. 지금 나는 그 통로 안쪽으로 발을 옮기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안쪽에서 나는 사제들이 평소에 생활하는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 침대와 식탁, 그리고 음식물들을 조리하는 장소와 역십자에 X자를 더한 문양을 감싸 고 있는 원형의 상징을 붙여놓은 방(아마도 기도실인 듯)등이 있었다. 하지만 역시 그 곳에도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침대의 수는 12개를 훨씬 넘는 것이었지만, 내가 파악한 이 곳의 인원은 12명이었다. 그렇게 사제들의 생활 공간을 살피고 있을 때, 갑자기 눈 앞이 환하게 밝아지는 것 을 느꼈다. 그것은 지금까지 어둠에 잠겨있던 이 곳에 불이 켜진 탓이었다. 무슨 장치가 되어 있었던 것인지 천청에 붙어 있던 마법구들이 일제히 빛을 내기 시 작했던 것이다. 아마도 일정한 시간이 되면 자동적으로 빛을 내도록 만들어 놓은 것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건 이 곳으로 사제들이 몰려 온다는 말과 같은 것이었다. 나는 서둘러 몸을 숨겨야 했다. 하지만 어디로? 내 몸은 기도실에서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사제들이 그들의 생활 공간으로 돌아왔다. 그리 소란스럽지도 않았고, 별달리 많은 말을 주고 받지도 않았지만, 그들은 짜여진 각본에 따라 행동하는 것처럼, 음식을 준비하고 잠자리를 준비하고 또 간단히 모여서 기도를 하는 것까지의 모든 행동들을 좁은 공간 속에서 조금의 부딪침도 없이 해 내 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나를 둘러싸고 앉아서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지금 나는 그들의 식탁 밑에 붙어 있는 것이다. 보통 식탁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식탁 밑에 내가 붙어 있었다. 바닥에 있었으면 예전에 들켰을 것이지만 다행히도 이 식탁은 돌로 만들어진 것이었 고 그 크기에 걸맞게 두께도 상당했기 때문에, 밑 부분에 홈을 파서 손과 발을 고정시 키는 것이 가능했다. 물론 보통 사람들도 가능하냐고 묻는다면 절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 해 주고 싶다. 실제로 나도 이렇게 바닥에 붙어 있는 것이 쉽지는 않은 일이다. 아까부터 생전 흘리 지 않던 땀을 흘리고 있는 것만 보아도 몸에 얼마나 많은 무리가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적들의 전력을 상당히 약화 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 더해서 아이슈마님께서도 힘을 회복하고 계시니 오래지 않아서 적들을 쓸어버릴 수 있 을 것입니다.” “물론입니다. 아이슈마님께서 하시는 일을 미천한 인간들이 어찌 막을 수 가 있겠습 니까. 비록 이 인간계로 오시느라 권능을 많이 잃으셨다고는 하지만, 우리들을 위해 서 그 권능의 상실까지 무릅쓴 아이슈마님의 큰 뜻을 가슴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그 리고 아이슈마님께서 건설하실 세계에서 영광을 누릴 우리들의 모습을 그려 봅시다.” “오호! 생각만 해도 그 날의 영광이 온 몸에 전율을 주는 것 같습니다. 오호!!” “아이슈마님께 영광 있으라!” “영광이!!” 아무리 들어도 광신도들의 미친 소리였지만, 조금 궁금하기는 하다. 도대체 아이슈마 가 꿈꾸는 세상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아르미엘 주교의 말로는 아이슈마는 인간계를 지배하는 존재가 되려고 한다고 했다. 그것은 인간계를 일통해서 황제가 되는 따위의 일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종교의 통 일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모든 인간들의 신으로 군림하는 것. 그것을 바탕으로 다른 계의 존재들에 대 한 인간들의 믿음이나 신앙을 제거하는 것. 그것이 아이슈마의 목표라고 했다. 하지만 도대체 인간들에게는 어떤 삶의 모습을 주 려는 것일까? “미개하고 어리석은 인간들이야 몇 십 년이 지나기 전에 길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교육이란, 특히 반복이란 무서운 것이지요.” “맞습니다. 이성이 발달하는 것은 믿음에 대한 순수를 떨어뜨리지요. 그저 미개하 고 어리석은 것들이 맹목적인 추종을 하지요. 그리고 그것들을 통제하는 것이면 우리 들 아이슈마님의 자식들이면 족한 것이지요. 어차피 지금의 행정이나 군대들도 머잖 아 필요가 없어질 것입니다.” “그렇지요. 분명이 몇 십 년이 지나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할 일들이 많지요. 일단은 인간계의 모든 지식들을 묻어 버릴 필요 가 있습니다. 지식이라는 것은 독점할 필요가 있어요. 다른 것들은 확실하게 우민화 를 시켜야 합니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그것도 백년이 지나기 전에 가능할 것입니다. 물론 완전하 게 그런 상태를 만드는 것은 좀 더 시일이 걸릴 것이지만...” 식탁 밑에 붙어 이런 소리를 듣고 있는 나는 정말 황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로도 그들의 말은 이어졌지만, 앞으로의 장밋빛 꿈에 젖은 그들은 더 이상 도움 이 될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식사를 마치고, 뒷 정리를 마친 사제들이 각자 자리를 찾아 잠에 빠질 때까 지 나는 식탁 밑에서 나갈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간단히 정리하면 일단 인간계를 통일하고, 인간들이 가진 지식들을 폐기 시킨다. 그 리고 단순하고 반복적인 교육으로 아이슈만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심을 기른다. 그리 고 그렇게 단순해진 인간들 위에서 군림하는 것은 아이슈마의 사제들이다. 아주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물론 이들도 인간들의 지식을 없애버리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그것을 해결할 수 있다. 특히 격리라고 하는 방법은 이를 더욱 잘 해 결할 수 있는 방법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아이들을 격리 수용해서 가르친다면 이들이 목표로 하는 것이 불가능 한 것도 아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죽게 되어 있었다. 머리 속에 들어 있는 지식은 전수를 통해서만 후대에게 전해지는 것이다. 그 길을 막 는다면 지식은 사라져간다. 물론 인간들의 지식이 완전히 사라지고 모든 사람들이 미 개한 상태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딘가에는 어떤 형식으로든 아이슈마에 반 대하는 세력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아주 오랜 시간동안 어둠 속에. 하지만 거의 대다수의 인간들이 아이슈마의 계획대로 그를 추종하는 신자들이 되어가 는 것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은 이들의 계획이 차근차근 실행된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단순 무식하지만 효율적인 방법으로 아이슈마는 인간들을 자신의 수족으로 만들 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아이슈마는 그의 측근들에게 달콤한 꿀을 던져주면서 미래에 대한 꿈을 꾸게 하고 있 었다. 그리고 그 측근들이 나중에 그들이 꿈꾸는 대로 살 수 있으리란 것도 알 수 있었다. 어차피 아이슈마가 인간들 전체를 다스릴 수는 없으니 곳곳에 세워질 신전의 사제들 이 그런 일을 맡게 되겠지.... 하지만 도대체 그렇게 해서 인가들 전체의 신으로 추앙받으면 뭐가 좋다는 것인지 모 르겠다. 아마도 내가 모르는 어떤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인간계가 아닌 다른계의 존 재들에게 말이다. 뭐 믿음이라는 것이 사라진 아눈이나 게브 등을 볼 때에 혹시 다른 계의 존재들도 그 런 식을 힘을 잃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아이슈마는 인간들의 믿음을 바탕으로 신이 되고? 모르겠다. 나는 우선 식탁 밑에서 벗어났다.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더 알아야 할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이 곳을 제외한 다른 곳의 위치였다. 아이슈마의 사제들이 머물고 있는 거처 를 모두 파악하고 그 곳을 한꺼번에 정리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 곳만 어떻게 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여기 있는 사제들 중에 한 녀석에게 그런 정보를 빼내는 것도 무리가 있었 다. 제압해서 알아보는 것이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그 사제 녀석이 다른 거점의 위치을 알고 있으리란 보장도 없었고, 한 녀석이라도 이상이 생기면 다른 사제들이 그것을 알 아차리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최면술을 써서 어떻게 해 볼까도 생각했지만, 믿음이 강한 녀석들은 최면술이 잘 걸 리지 않거나 걸려도 부작용이 심하게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 적어도 이들은 아이슈 마라는 마족을 숭배하는 사제들이니 최면술이 완전하게 들어 먹힐 것이라고 생각하기 는 어려운 것이다. 나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신전을 빠져 나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 곳으로 다시 오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언제건 마음을 먹기만 한다면 어렵지 않은 일이니 일단 광아등을 만나보고 의논을 해 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슬며시 신전에서 몸을 뺀 나는 벌써 밝아오는 햇빛이 을시년스러운 신전에 생기를 불 어 넣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그러고 보면 내가 자리를 비운 것도 3일째로군. 이젠 돌아가 봐야 할 때도 되었군.” 나는 신전에서 꽤 멀리 몸을 날려서는 마법을 사용해서 내 사무실이 있는 곳으로 돌 아왔다. 그리고 내가 돌아왔다는 것을 광아 등에게 알리고 모두에게 소집 명령을 내렸다. 화아, 풍아, 광아, 수아, 지토 그리고 자이곱과 자이건이 한 자리에 모였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 근래에 머리들을 제거하고 새로 진격을 한 곳이 상당 히 많습니다. 어쩐지 녀석들이 반격을 해오지 않고 있어 이상하다 했더니 그런 음흉 한 계획이 있었군요?” “음. 그렇다고 지금 병사들을 후퇴시키라고 하는 것도 무리가 있잖아? 겨우 삼일 전 에 쥐어준 떡도 지키지 못한다고 상당히 구박을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말이야. 상황 이 우습게 되지 않겠어?” “뭐, 우리가 조금 민망한 것으로 어떻게 될 수 있으면 그렇게 해 보겠지만, 아무래 도 내 생각에는 병력을 뒤로 빼야 한다는 말에 순순히 응할 것 같지도 않아. 우리말 을 들을 것 같지 않다는 소리지.” “그럼 어떻게 해? 오빠는 무슨 대책이 있을 것 같은데?” “풍아야. 나라고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야. 거기다가 도대체 그 봉인이라는 것이 언제 풀리는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말이야. 아무튼 최대한 빨리 사제들의 은신처 를 모두 찾아서 없애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것 같다.” “그래서 형님 말씀을 듣고 제가 어느 정도 사제들의 거점이 있을 법한 곳을 추정해 봤습니다. 우선 정확하게 알고 있는 그 곳에서 양쪽으로 한 곳씩은 그나마 범위를 작 게 좁힐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여전히 넓은 범위지만 예전에 비해서는 훨 씬 수월하게 탐색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위치를 파악하다 보면 모든 위치을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 하나를 알면 양쪽으로 녀석들이 있을 법한 곳을 파악할 수 있지. 자. 그럼 일단 이 양쪽 지역을 수색해서 사제들의 거점을 찾아 나가는 일을 우선해서 하도록 하 자. 그리고 특히 암흑제국의 병사들의 움직임에 신경을 좀 써야겠다. 그들이 전체적으 로 움직이는 때가 바로 그 봉인된 머리들의 봉인이 풀리는 때가 될 것 같으니 말이 야.” “네, 형님.” “큼. 이래저래 뛰어 다녀야 되게 생겼군.” “지토 아저씨는 게브타고 다니잖아요. 우리들은 타고 다닐 것도 없어요.” “응? 수아 넌 요즘 강가에서 아주 신이 났다고 그러던데? 물가지고 장난 치느라 정 신이 없다고....” “무슨 소리야 언니? 내가 언제 장난을 쳤다는 거야? 그냥 강을 건너서 어영부영 달 려드는 암흑제국 녀석들을 다시 강 너머로 보내 준 것 뿐인데...” “오? 그러셔? 그런데 왜 그 쪽 병사들은 강에 엄청나게 큰 물의 환수가 살고 있다 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것도 뱀처럼 생긴 녀석이 다리도 네 개나 되는 모습으로? 아 주 미끈하게 잘 빠진 아눈이처럼 생겼다며?” “이젠 광아 오빠까지 그러기야? 다들 나만 가지고....” 오랜만에 수아의 표정에서 어리광이 묻어난다. 그렇게 나를 보면 내가 뭐라고 할 수 가 있겠니? “왜 다들 우리 막내를 못살게 구는 거냐? 심심하면 나가서 사제들의 은신처나 찾 아. 그리고 그 쪽은 화아하고 풍아가 맡은 지역들이지? 알아서들 위치 파악해서 연락 해라. 서둘러.” “칫 알았다구. 여전히 오빠는 수아만 감싸는 것 같아. 아, 난 왜 이렇게 버림받은 느낌일까...” 풍아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면 그렇게 떠들고는 문 밖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왜 창문으로 다니는 걸까? “그럼 나도 가서 좀 살펴봐야겠군. 형 나 갈께.” 화아도 자리를 떳고, 뒤를 이어서 다들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고 금세 회의장이 텅 비어 버렸다. 어쩌다보니 혼자가 되는 경우가 많아진 요즈음은, 타니와 루아가 많이 보고싶다. 그나저나 화아와 풍아에게 별일은 없어야 할텐데.... 참전 - 정탐 하지만 나의 우려와는 달리 일은 상당히 빠르고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광아가 처음 예측한 두 곳, 아이슈마 사제들의 은신처가 어렵지 않게 발견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발견된 세 개의 은신처 위치는 다른 은신처들의 위치와 위장 에 대한 추측을 더욱 보강시켜 주었고, 그렇게 채 열흘이 지나기 전에 우리들은 드디 어 아이슈마에게 결정타을 줄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물론 아이슈마의 위치까지 파악을 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일단 이들 사제들의 거 점을 제거하는 것만으로도 죽음의 지역이라는 공포는 씻을 수 있을 것이었고, 아울러 암흑제국의 병사들에게 심적인 타격을 줄 수 있을 터였다. 아울러 우리 병사들의 사 기 진작에도 도움이 될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 뒤에 이어질 두 진영의 병사들의 싸움을 예상했기 때문에 그다지 마 음이 편하지 않았다. 물론 우리 쪽, 그러니까 나에게 중요한 사람들의 희생도 걱정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한타나 그란드, 암흑제국의 사람들이 다치고 죽게 될 것은 별 로 걱정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말도 안 될 이유를 붙이면 서, 하지만 나와 연관이 있는 사람들의 상처는 역시 나를 힘겹게 했다. 그렇지만 그러는 중에도 차근차근 계획은 세워졌고, 파악된 9개의 아이슈마 사제들 의 은신처에 대한 일제 소탕작전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물론 그 소탕작전 역시 소수 정예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한타와 그란드의 손을 빌리 지 않고, 우리들의 힘으로 해결을 하기로 했다. 대신에 신성사제들의 도움을 약간 받기로 했다. 그것은 아이슈마의 사제들이 제압되 고 그들의 능력을 봉인하거나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무조건 들어가서 죽이는 것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제압해서 정보를 얻어야 한다는 주장이 먹히지 않았다면 신성사제들도 우리들 의 요구를 들어주었을지는 의문이다. 뭐 그들이 도와주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사제들을 제압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기운을 완전하게 감출 필요가 있었고, 마력과는 다르게 작용하는 사제들의 힘 을 봉인하는 것은 신성사제가 아니면 어렵다는 이유로 고개를 약간 숙여야 했다. 어째 그 순수하던 레고리오가 그 사이에 고지식한 사제의 전형이 되어 나타나게 되었 을까. 처음에 나를 보고 싶어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설마 그렇게 변했을 것이라는 생 각은 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사제들의 은신처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이 시작되었다. 물론 일이 계획대로만 이루어진다면 우리들의 피해는 거의 없을 것이었다. 사제들이 활동을 시작하는 저녁에 공격을 시작한다면 사제들이 정신을 차리고 반격 을 시작하기 전에 제압을 완료할 수 있을 것이었다. 나는 그 동안에도 몇 차례 사제들의 은신처에 숨어 들어 더 많은 정보를 얻어 보려 는 시도를 했었다. 물론 그 덕분에 조금 더 자세한 정보를 얻기는 했지만, 정작 알고 싶었던 내용들, 이 를테면 아이슈마의 현재 모습이나 위치, 혹은 제란과의 관계 그리고 현재 암흑제국의 정치 군사적 상황등에 대해서는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 밤에 확보하게 될 사제들로부터 상당한 정보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기 대하고 있다. “자, 그럼 출발하자.” 낮은 명령과 함께 우리 일행은 사제들이 숨어 있는 신전으로 움직였다. 아무래도 나는 내가 발견하고 살폈던 곳을 맡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일단의 사람들 을 이끌고 이 곳으로 왔다. 내 뒤를 따르는 사람은 화염기사단의 3단장인 파비올과 기사 3명, 그리고 마법사 두 명과 신성사제 두 명이었다. 의자를 밀고 안으로 들어간 나는 신중하게 사제들의 기척을 살피고는 일행들을 나누 었다. “계획대로 파비올이 기사들과 마법사, 사제를 데리고 오른쪽으로 가서 사제들을 제 압하고 나는 왼쪽으로 가서 일을 마무리 짓기로 한다. 그럼 움직여.” 이미 사전에 모든 행동 지침이 있었기에 별다른 명령없이 그렇게 우리들은 양쪽을 갈 라져서 사제들이 있는 방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아직도 사제들의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그들은 모두 인형 속에 들어 가 있는 모양이었다. 우리들을 빠르게 움직였다. 예기치 못한 사건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사제들을 제압하 는 것은 어려움이 없을 터였다. 우리가 사제들이 있는 공간에 들어서서 처음 본 것은 파리한 안색에 시체처럼 앉아 있는 세 명의 사람들이었다. 돌로 만들어진 의자에 앉아 있는 그들 주위로는 눈에 보 이지 않는 기운들이 흘러 움직이고 있었고, 그것은 그들이 앉아 있는 의자들 밑에 그 려진 기이한 문양의 도형들에서 피어 오르는 것이었다. 내가 그런 모습에 걸음을 멈추자 뒤를 따라 오던 기사와 마법사 사제가 덩달아 움찔 멈추었다. 나는 잠시 그 모습을 보다가 곧장 사제들이 있는 도형 위로 올라섰다. “큭!” “끄윽!” “...” 순간적인 일이었다. 내가 도형위에 올라서는 순간 의자에 앉아 있던 아이슈마의 사제들이 낮은 신음과 함 께 신체 활동이 완전히 멈추어 버린 것이다. 비록 이들의 모습과 상황을 지금까지 관찰해 왔지만 이런 일이 생길 것이라고는 상상 하지 못했던 나는 당황했다. 사제들의 숨이 끊어진 직후에 도형에서 피어오르던 기운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루탄님, 아무래도 이들은 죽은 것이...” 이름도 모르지만 얼굴만 익은 기사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 뭔가 불안한 느낌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모, 모두 피해!” 나는 본능에 따라 소리를 질렀다. 뭔가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나는 사제를 붙잡고 뛰면서 소리쳤다. “빨리 스크롤로 이곳을 벗어나라. 어서.” 내 목소리는 이곳으로 들어온 사람들이면 누구나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컸다. “파비올은 사제를 데리고 입구 쪽으로 최대한 빠르게 오고 다른 사람들은 스크롤을 이용해서 귀환하라.” 나는 최대한 소리를 지르며 입구 쪽으로 사제를 데리고 달렸다. 빌어먹을 사제들은 마법을 이용한 순간이동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까지 올 때도 사제들 덕분에 이리저리 적의 눈을 피해서 오느라 상당히 신경을 써야 했는데.... 지금처럼 상황히 긴박한 때에 사제들은 상당히 곤란한 존재들임에 분명했다. 내 말을 들었는지 파비올이 사제를 허리에 끼고 달려나오고 있었다. 뒤따르는 사람들이 없는 것과 마력의 움직임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서 다른 사람들 은 스크롤을 찢은 모양이었다. “무, 무슨일입니까? 루탄님.”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여기를 벗어난다. 어서.” “네, 네.” 그리 늦지는 않았다. 아니 최대한 빠르게 움직인 것이라고 봐야 한다. 사제들이 죽었 다. 누군가 사제들이 하는 일을 방해하면 그렇데 되도록 만들어져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상황에 대한 대비책이 없을 턱이 없는 것이다. 구구구궁 쿠국 쿠구구궁 빌어먹을 예감이 틀리지 않았군. “루탄님. 입구쪽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냥 빠져 나가기는 어려울 것 같 은데요?” “걱정하지 말아. 이런 정도를 나가지 못한다고 해서야....” 나는 끼고 있던 사제를 파비올에게 넘기며 소리쳤다. “눈 감아.” 그와 함께 내 손에서는 예전에 목식의 숲을 지날 때 한 번 써 먹었던 마법이 쏟어졌 다. - 라이트 파이어 파워. 명색이 9써클 마법이지만 그 동안 나도 놀고먹은 것은 아니었다. 이 마법을 개량하고 신속하게 사용하기 위해서 흘린 땀이 몇 동이는 될 것이다. 그나 마 내가 아는 마법 중에서 위력면에서 대인 공격 마법으로 쓸만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었기 때문이다. 직선 안에 있는 것이면 무엇이건 뚫고 지나가는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는데 아마도 내 생각에는 작은 산 정도는 뚫고 지나가지 않을까하고 짐작한다. 물론 이 빌어먹을 부작용(엄청난 빛이 난다는 것)은 아직도 해결을 하지 못했다. 뭐 마족의 힘에는 빛도 타격을 주는 모양이니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쿠아앙~ 재빠르게 마법을 구현시킨 탓에 통로에 깔리기 전에 머리 위로 시원스러운 구멍이 생 겼다. “어서 가자고, 파비올 뛰어.” “네? 네!” 눈을 감고 있던 파비올은 내 목소리에 눈을 뜨고는 훤하게 뚫린 하늘 위로 보이는 별 을 향해서 몸을 날렸다. 그렇게 깊은 곳이 아니었기에 몇 번 벽을 박차고 반대쪽을 밟으면서 파비올은 지상으 로 올라갔다. 그것도 사제를 둘이나 데리고 저 정도면 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곧장 지상으로 파비올을 따라 올라갔다. “루탄님, 이제는 어쩌지요?” “어쩌기는 뭘 어떻게 해? 최대한 도망을 가야지. 이제부터 적의 눈에 들키지 않고 도망가는 일이 최대 급선무야. 사제들이 있으니까 마법으로 이동이 불가능하잖아. 그 렇다고 사제들을 버리고 갈 수도 없는 문제고 말이야.” “그런데 이 밑에 있던 사제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글쎄? 혹시 내가 소리치기 전에 사제들 가까이 갔나?” “아닙니다. 마침 사제들에게 가까이 가려는데 사제들이 이상한 반응을 보이고는 죽 어버려서 당황하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밑에 있던 사제들은 모두 죽었다고 봐야겠군. 아마도 그 도형들은 연결 이 되어 있었던 모양이지군.”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파비올을 뒤로하고 나는 사제들 을 향해 돌아섰다. “상황은 아시리라 믿습니다. 우리들이 계획했던 것 중에서 암흑교의 사제들이 더 이 상 머리들을 만들지 못하게 하려던 것은 성공했지만 그 이외의 문제는 모두 실패인 것 같습니다. 거기에 더해서 지금 우리들은 상당히 먼 거리를 도망을 가야 하는 입장 입니다. 사제님들이 어느 정도까지 움직이실 수 있는지에 따라서 행동 방향이 정해질 것입니다. 사제님들의 육체 능력은 어느 정도입니까?” 내 말에 조금 얼굴빛이 창백해진 한 사제가 나서며 입을 열었다. “아시는 것처럼 저희는 신성교단의 교사제들입니다. 사제들은 주신께서 주신 신성력 을 중요시하며 수도를 하는 사람들이라 육체적인 능력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합니다. 저 희들은 성기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저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신성력을 이용 한 악력惡力의 퇴치 입니다.” 뭐 결국에는 평범한 사람들 정도의 육체력 밖에는 없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하는 수 없군요. 그럼 한 분은 파비올이 모시고, 다른 한 분은 제가 모시고 가기 로 하지요. 조금 불편하시더라도 업히셔야겠습니다. 벌써 적들이 가까이 오고 있군 요.” 미리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인지 벌써 주위로 다가 오고 있는 무엇인가의 기척이 느 껴지고 있었다. 아마도 사제들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움직이게 되어 있는 부대가 있었던 모양이었 다. “최대한 숲으로 들어가서 적들을 따돌리기로 하지.” “네, 루탄님.” “그럼 사제님 업히시지요.” 나는 아까 나에게 대답을 했던 사제에게 등을 내밀었다. 솔직히 사제의 이름을 듣기는 해지만 나는 여전히 사람들의 이름을 외우는 데에는 재 주가 없다. 잠깐 머뭇거리다가 등에 몸을 싣는 사제를 데리고 우리들은 어둠을 방패삼아 숲으로 움직였다. 아직 우리들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겠지만, 우리들의 발걸음 보다는 저들의 통신이 훨씬 빠를 것이다. 그리고 곧 우리들을 잡기 위한 경계령이 곳곳에 펼쳐질 것이었다. 우선은 여기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지만, 나는 가슴속으로 피어 오르는 불안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다른 곳으로 간 동생들과 지토, 자이곱, 자이건 등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그들이 몸을 빼고 안전하게 돌아오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도 사제 들을 데리고 와야 한다는 부담을 떠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지금 그들 모두가 나처 럼 이렇게 적지에 고립무원의 상태로 남아있을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나뭇가지들이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휘-익. 뒤를 따르는 파비올은 조금 전부터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있었지만 아직은 쉬고 있을 틈이 없었다. 내 감각에는 사방에서 우리들을 찾기 위해 움직이는 녀석들의 기척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상당히 광범위한 수색이 진행되고 있었다. 무언가 불안한 느낌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어째서 이렇게 광범위한 수색이 벌어지는 것일까? “다른 곳으로 간 분들도 여기와 비슷한 상황이겠군요?” 등 뒤에 있던 신성사제가 입을 열었다. 최대한 낮춘 소리가 사제의 긴장감을 대변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럴 겁니다. 전 전선에 걸쳐서 비상이 걸렸겠지요.” 그렇게 대답을 하다 보니, 지역 전체에 걸친 수색 범위에 대한 해답이 나오는 것 같 았다. 우리뿐만이 아니라 전선 전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터였다. 어떻게 해서든 우리들을 잡기 위해서 총력을 기울일 것이란 점도 알 수 있었다. 녀석들은 이번에 투입된 사람들이 누구라는 것 정도는 짐작하거나 파악할 능력이 있 을 테니 말이다. 좋지 않다는 생각은 여기에서 더 강해졌다. 아까 내가 썼던 마법이 비록 간소화되기는 했지만 9써클 마법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걸 감지했다면 내가 있는 쪽으로 상당한 녀석이 찾아올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 이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마력이 크게 출렁거리는 것으로 보아서 대단위 마법이나 장 거리 이동 마법이 가동된 것 같았다. 뭐 그런 현상은 여기 저기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내 기척에 잡히는 그런 움직임만 해도 거의 십여 개에 달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아주 멀리서 이동해온 인물들이 전선의 곳곳에 배치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어쩌면 제란의 측근들이 움직이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럴수록 동생들에 대한 걱정에 목이 말라오는 느낌이다. “잠시 여기서 쉬어간다.” 나는 거칠어지는 파비올의 숨소리에 강행군을 멈추었다. 벌써 해가 떠 오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 속도라면 아직도 이틀은 꼬박 달려야 안전지역으로 나갈 수 있을 터였다. 물론 나 혼자라면 반나절 정도면 주파가 가능한 거리였지만 파비올과 사제들이 있었 다. 특히 파비올이 사제를 업고 달리는 것이기 때문에 더더욱 속도는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뭐야? 파비올, 지금까지 마갑주를 입고 달린 거였어?” “루탄님. 저는 루탄님과 다릅니다. 어떻게 하룻밤 내내 일정한 속도로, 그것도 땅 위 보다는 나무와 나무 사이를 달려서 움직일 수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내 말에 파비올은 억울하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나는 우선 파비올과 사제들에게 적당한 먹거리를 꺼내 주고(동생들은 먹을 거나 챙 겨 먹을까), 주위에 간단한 진법을 설치했다. 마법을 이용한 결계는 자제했다. 될 수 있으면 마력의 흐름에 영향을 주는 짓은 삼가는 것이 좋았다. 아마도 녀석들은 조금이라도 마력의 흐름이 이상한 곳을 찾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 을 것이었다. 그냥 여기에 이들을 숨겨두고 나 혼자서 움직여 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땅굴 같은 것을 파고 이들을 숨기고 진법으로 가린다면 찾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아니면 아예 사제들만 숨기고 우리들은 간단하게 마법으로 도망을 가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루탄님, 그냥 저희들을 두고 가십시오. 그렇게 고민하실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모 든 것은 주신의 뜻입니다.” 아직도 나는 생각이 얼굴에 드러나는 것일까? “그런 말씀 마십시오. 주신의 뜻은 실현되고 나서야 확인이 되는 것입니다. 미리 여 기에 사제님들을 남기고 가는 것이 주신의 뜻일 것처럼 말씀하지는 마십시오. 아직은 주신께서 그런 뜻을 가시셨다는 생각이 안 드니 나중에 그렇게 생각되면 그렇게 하도 록 하겠습니다.” 나는 그저 의미 없이 빙긋 웃으며 그 사제를 바라보았다. 서른 살 정도 되었을까? 짧게 자른 머리에 하얀색 사제복을 입고 있는 순박한 얼굴이 었다. 아직은 기장은 있어도 두려움은 없는 얼굴표정이 자신의 믿음이 얼마나 강한지를 말 해주는 듯 했다. “쉿!” 나는 무어라고 입을 열려는 사제를 제지하며 몸을 낮추었다. 비록 진법이 있다고는 해도 모든 인기척을 가려 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약 간의 변형으로 주위에 펼쳐진 풍경들을 왜곡시켜 보이게끔 하는 것이 전부인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나타난 작자가 누구인지 몰라도 상당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 다가오도록 내가 느끼지 못했다는 것은 그가 상당한 경지에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것이 의도적으로 기척을 감춘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더더욱 심각한 상황이 다. 하지만 지금 움직임으로 보아 그자 역시 조심스럽게 기척을 감추고 움직이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면서 주위 기척을 탐지하고 있을 것이었다. 내가 조용히 몸을 낮추고 있자, 파비올과 두 사제 역시 그렇게 몸을 낮추고 숨을 죽 이고 있었다. 이제 녀석은 우리들이 있는 곳에서 불과 20미터도 되지 않는 곳을 지나고 있었다. 그 나마 다행이라면 녀석의 이동 방향이 우리들을 스쳐 지나고 있다는 것이라고 해야 할 까? 그렇게 긴장된 가운데 녀석이 조금씩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다. “흡!” 이 이런, 젠장. 숨을 죽이고 있던 사제가 숨이 가빠졌는지 호흡이 흩어진 것이다. 주춤. 움직이던 녀석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그리고 천천히 숲을 헤치고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빌어먹을! 겨울이 지나가는 시점이라 밀림이라고 해도 몸을 가려 줄 수풀이 무성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 거리까지는 진법이 시야을 가려 주겠지만 그 이상 가까이 온다면 들키는 것은 불을 본 듯 뻔한 것이었다. 나는 수수戍守의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제압을 해야 하는 것이다. 푸드드득- 녀석의 발치에서 날짐승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저 날짐승 역시 인간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 무던히도 힘겹게 인내심을 키우고 있었 을 것이다. 휘-익. 푸득. 체 날아오르지도 못하고 날짐승은 녀석의 발치로 떨어져 내렸다. “음. 너무 긴장했군.”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목소리가 낮게 깔려왔다. 카튼. 분명 카튼의 목소리였다. 제란의 측근 중에 한 녀석. 마갑주를 입고 검을 사용하는 녀석. 언젠가는 갚아아 할 빚이 있는 녀석이었다. 물론 지금은 때가 아니다. 그렇게 카튼이 우리를 스쳐 지나가고 나서는 조금 수색이 뜸해지고 있었다. 아마도 카튼이 지나간 곳은 수색이 별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거나, 아니면 카튼이 그렇게 명령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우리들이 쉽게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카튼 같은 녀석이 근처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움직임에 제약을 받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빠른 이동이 어려워졌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에 우리들은 그야말로 피 말리는 이동을 시작했다. 들키기 전에 적을 먼저 발견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지만, 우리가 지나가는 흔 적도 남기지 말아야 했던 것이다. 파비올이나 나 같은 경우에는 그것이 가능했지만 두 사제들은 절대 그런 것이 불가능 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이동을 천천히 하는 중에도 나는 일행의 앞뒤를 오가며 진행방 향의 적을 탐지하고 우리들이 지나가면서 남기는 흔적들을 제거하는 2중의 작업을 해 야 했다. 그렇게 다시 밤이 왔을 때, 우리들이 움직인 거리는 고작해야 어제 밤부터 새벽까지 움직인 거리의 반의반도 안 되는 거리였다. 그나마 낮 동안에 들키지 않고 그렇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것도 밀림지역이라는 이점 때문이라고 자위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멋진 동굴을 발견해서 모두들 편안하게 쉴 수 있게 된 것도 참 다행이 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젠 당분간 숨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이렇게 이동을 계속하는 것도 어려울 것 같고 말이야. 앞으로 갈 수록 감시망이 더 촘촘히 깔려 있을 테니 오히려 우리들 이 종적을 감추고 숨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인데 어떻게 생각해?” 내가 파비올에게 물어보자 파비올은 씹던 육포를 꿀떡 삼키고 대답했다. “그야 루탄님께서 하시자고 하시면... 반대는 없을 겁니다.” 뭐 그렇게 말하면서 사제들을 훑어보지는 말라고. “그럼 일단 오늘 밤을 여기에서 보내고 내일 동정을 살펴보기로 하지.” “네. 루탄님.” 대답하는 파비올은 그 사이에 벌써 빵 하나를 꿀꺽하고 포도주를 반잔 삼키고 있었 다. 비록 도망을 다니고 있지만 그렇다고 굶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나는 내 창고를 최소 한의 크기로 열어서(크게 열면 열수록 마력의 흔들림이 커진다.) 될 수 있는 한 진수 성찬으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뭐 먹고 남을 찌꺼지를 모두 다시 창고에 넣어야 하는 부담이 있기는 하지만... - 오빠. 오빠. 어디 있어요? ‘수아니? 괜찮은 거야? 그 쪽은 어떻게 됐니?’ - 오빠. 오빠. 어디 있어요? 무서워요. ‘수아야. 오빠 여기 있잖아. 말이 안들리니?’ - 오빠. 오빠. 오빠. .... ‘수아야! 수아야!’ “수아야!” 헉. 나는 내 목소리에 놀라서 잠이 깨었다. 갑작스럽게 소리를 질러서 놀랐는지 어둠 속에서 눈이 커진 파비올의 얼굴이 보였다. “무슨일입니까? 루탄님.” 파비올이 가까이 다가왔다. “아니 무슨 땀을 이렇게 흘리시는 겁니까?” “아, 아니야. 아니야.” 나는 파비올이 팔을 잡아 부축하려는 것을 제지하고 몸을 비스듬히 동굴 벽에 기대었 다. 꿈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수아가 나를 무척이 나 불렀는데. 단지 그것만 생각이 났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닐까. 가슴을 억누르는 불안감은 자꾸만 나를 안심시키려는 스스로의 위로를 갉아 먹으며 몸집을 부풀리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아무 일도. 녀석들이 보통 녀석들도 아니고. 최악의 상황이라 고 해도 정령들인데 무슨 일이 있겠어. 자이곱이나 자이건은 그렇다고 해도 지토와 동 생들에게는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누가 나에게 이기적이라고 해도 하는 수 없어. 자이곱과 자이건 보다는 동생들과 지토가 우선이니까. 내 생각은 그렇게 이기심으로 똘똘 뭉쳐져서 밤을 새웠다. 한 구석에서 새우잠을 자고 있는 사제들이 밉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인간이 언제가 자신의 기분대로만 행동하며 살 수 있는 것은 아 니지 않은가. 물론 그렇다고 이렇게 다급한 마음에 동굴 속에서 마음 편히 숨어 있다가 시간이 가 기를 기다리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나는 아침이 채 밝기도 전에 일행들을 추슬러서 이동을 시작했다. 단 하룻밤 사이에 말을 바꾸는 내가 스스로도 싫었지만 하는 수 없었다. 파비올은 그 런 나를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사제들을 독려해서 먼저 앞장을 서는 모습까 지 보였다. 때로 사람들은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던 곳에서 평소보다 성숙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 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화염기사단 3대 대장 중에서 가장 어려 보였던 파비올이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 아서 하는 말이다. 그렇다고 의욕만으로 우리들의 이동 속도가 빨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느끼기에는 거의 기어가는 수준으로 우리들은 전선을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가 고 있었다. 그렇게 또 하루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루탄님. 오늘 밤에는 그대로 이동을 계속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일단 밤에 움직 이는 것이 일반 병사들의 눈을 피하기에는 좋지 않을까요?” “뭐 그거야 그렇겠지만. 그럼 다시 나하고 3대장이 사제님들을 업고 가야하는데 괜 찮겠나?” 나는 파비올이 걱정되어 물었다. “뭐, 괜찮습니다. 마갑주의 힘을 빌린다면 가능할 겁니다. 물론 전날에 루탄님께서 움직이셨던 속도 이상이라면 어렵겠지만 말입니다.” 파비올의 얼굴이 저녁 어스름 속에서 조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자신이 나에게 짐이 된다고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지. 하지만, 밤이 낮보다 더 이동이 쉬울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수색하는 쪽에서도 이젠 밤에는 이동을 하지 않고 기척을 숨기고 움직임을 살피는 방법을 쓰고 있을 테니 말이야. 우리는 움직이면서 상대의 기 척을 찾아야 하지만, 상대는 아무 움직임도 없이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니 자칫하면 들 킬 수도 있어.” “알겠습니다. 루탄님.” “저희도 최대한 조심하겠습니다.” 파비올과 사제들이 긴장된 모습으로 대답을 했다. 그리고 다시 출발. 이번에는 내가 앞서고 파비올이 뒤를 따랐지만 우리들이 움직인 흔적(정확히는 파비 올이 남긴 흔적)을 지우면서 움직일 수는 없었다. 아무리 밤중에 사물을 분간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는 나라고 해도, 작은 흔적들까지 찾아 지우면서 이동을 한다는 것은 것의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우리들이 밤중에 이동을 자제했던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나중에 생각한 것이지만 우리들이 탈출하기 시작한 첫날에 카튼이 우리들의 뒤를 따 라왔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작은 흔적도 녀석의 눈은 피하지 못했던 것이다. 간간히 포착되는 경계병들의 기척을 피해서 움직이던 나는 어느 순간 더 이상 움직이 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다. 틈이 없었다. 어느 쪽으로 가도 녀석들의 기척을 완전히 피해서 간다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로 경계 병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심지어는 우리들이 밟고 뛰어 건널 정도의 나뭇가지 위에도 숨죽인 병사들이 올라가 있었다. “엄청난 경계로군. 정말 물샐 틈 없는 경계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겠군.” “하지만 어떻게 이렇게 많은 병사들을 풀어 놓을 수가 있는 겁니까? 아무리 암흑제 국의 병사가 많다고 해도 이런 정도로 모든 전선을 가로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 니다.” “그러게 말이야. 이건 정말 너무 병사들의 수가 많은 것 같은데?” “저기 혹시 이쪽으로 암흑제국의 고위층이 머물고 있는 진지가 있는 것은 아닐까 요?” 마지막 말은 내 등에 업힌 사제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고위층이 머문다라....” “그럴 수도 있겠군요. 루탄님.” 나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이라면 대단한 작자가 있는 모양이겠군. 거의 산 전체를 감쌀 정도의 경계라 니...” “하지만 지금 그걸 확인할 수도 없잖습니까. 어떻게 하지요? 일단 뒤로 갔다가 다 른 곳으로 방향을 잡아 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나는 파비올의 말에 잠시 생각을 했다. 앞쪽으로 누가 있는지 아니면 어쩌다 보니 중요 지역이라 생각해서 경계병을 이렇게 많이 배치했는지는 몰라도, 일단 뒤로 물러나는 것이 좋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럼 잠시 뒤로 갔다가 다른 방향으로 뚫어보자. 만약에 그 쪽도 상황이 이렇다면 하는 수 없이 강행돌파를 하는 수밖에는 없겠지. 어차피 여기서 한타의 군대가 있는 곳까지는 반나절 거리 밖에는 안 되니까 최악의 경우에는 두 다리를 믿고 뛰는 방법뿐 이겠지.” 그렇게 결정을 내리고 우리는 다시 후퇴했다가 방향을 틀어서 전진을 해나갔다. 상당히 먼 거리를 돌았기 때문에 이번에도 상황이 같은 것이라면 더 이상은 다른 방 향을 잡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음. 역시 상당히 많은 수자로군. 아까보다는 좀 느슨해진 것 같기는 하지만... 도 대체 이 많은 병사들이 어디에서 나온 걸까?” “어차피 이렇게 된 것, 뚫고 지나가지요?” “그래. 그래야겠지. 이제부터 두 사제님들은 파비올 3대장이 맡아. 내가 앞에서 경 비병들을 잠재우지. 만약 들켰다 싶으면 각자 사제님들을 다시 업고 달리기로 하고 말 이야. 아무튼 조심해서 뒤를 따라와.” 나는 내가 맡은 사제를 파비올에게 넘기고는 우리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경계병이 있 는 곳으로 다가갔다. 한 명만 잠재우면 충분히 그 사이를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잠재워야 할 병사들이 앞쪽으로 즐비하게 기다리고 있었지만 일단은 차근차근 진행해 나가는 방 법뿐이었다. 스슥! 이봐. 소리를 지르면 안 되지. 나는 작은 구덩이를 파고 풀잎들로 위장을 하고 있던 경계병을 최대한 소음이 나지 않게 아혈(어금니 혈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입을 놀리지 못하게 된다.)을 점하고 몸 전 체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내가 경계병을 구덩이 안쪽으로 구겨 넣고, 일행들을 데리고 왔을 때, 문제가 생겼 다. 짧고 낮은 신호음이 초소들을 타고 흐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신기한 것은 그 소리들이 다른 방향으로 퍼지지 않고 오직 초소가 있는 쪽으로만 흘 러다닌다는 것이었다. 어떤 방법을 쓰는지는 모르지만 초소들끼리만 연락이 되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모 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찾아서 대책을 강구하기에는 이미 늦어 버린 상황이었다. 멀리서부터 빠르게 다가온 소리는 순간 멎고 말았다. 내가 잠재운 초소에서 끊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숨 한 번을 내 쉬는 동안에 밤하늘 위로 날카로운 경계음들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삐-익. 삐이익! “최대한 달려야 겠군.” “네. 루탄님.” 머뭇거리는 것은 곧 더 큰 곤란을 불러들이는 것과 같았다. 우리들은 최대한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미 우리들의 위치는 발각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째 이번에는 뭐 하나도 계산대로 맞아 들어가는 것이 없는 것 같다. 어찌보면 불운 이 겹친다고 봐야 하나? 하필이면 경계병을 잠재우는 순간이 점호 시간과 겹치는 것 은 도대체 무슨 일이냔 말이다. 우리들이 움직이면서 호각 소리는 더욱 날카롭고 거칠어지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사 방에서 조명 마법이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저기다. 쫒아라.” “빠르다. 따라가기는 어렵다. 앞에서 막아라.” 여기 저기서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하고 금세 우리들의 앞을 가로막는 병사들이 나타 났다. 휘익! 퍼걱. “으악!” 아마도 충격이 상당했을 것이다. 비록 날을 드러낸 것은 아니었지만 수수에게 머리를 맞았으니 어쩌면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지도.. 하지만 상황이 급했기 때문에 나는 앞을 막아서는 병사들을 수숫단 쓰러뜨리듯 두들 겨 넘기며 전진을 했다. 아무리 주위에 숨어있다가 우리를 발견하고 앞을 막는 것이라 해도, 우리가 갈 방향 을 완벽하게 알고 막을 준비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내 발로 뛰는 것인데 무조건 직진만을 할 바보는 아니니까 말이다. 덕분에 앞으로 달리면서도 조금씩 조금씩 병사들이 적은 곳을 골라 달리던 나는 오래 지 않아서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달리는 방향이 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병사들이 포진하지 않은 곳은 일정하게 연결이 되어 있었고, 그것은 다시 말해서 우 리들을 어딘가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함정으로 달리고 있었군.” “네? 무슨?” “아니야. 따라와.” 나는 곧장 방향을 바꾸었다. 병사들이 있더라도 전선 앞으로 뚫고 나가야 했다. 이렇게 피해가다가는 어디선가 독안에 갇힌 쥐가 될 것이 분명했다. “아이스 볼” “파이어 에로우” “윈드 슬러시” 나는 막아서는 병사들을 향해서 마법을 양껏 뿌렸다. 그다지 써클이 높은 것은 아니었지만 써클이 낮은 만큼 많은 양의 발현체를 만들 수 있었고, 덕분에 우리 앞을 막는 병사들 전부를 범위에 넣을 정도로 광범위하게 마법 을 뿌릴 수도 있었다. 한 번에 40개에서 50개씩 날아다니는 마법 발현체는 하나 하나가 무시하지 못할 위력 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방패로 막으면 크게 다치지는 않을 정도였지만 방패를 다시 쓰지는 못할 정도 의 파괴력은 있는 것들이었다. 파바바박. 콰과과과과. “흐악!” “피, 피해라!” 이봐 이봐 그렇게 막으려고 하지 말고 좀 피하란 말이야. 피하란 소리가 안들리나? 나는 쏟아지는 마법 속에서 방패를 들고 버티고 있던 병사를 검집으로 두들겨 주고 는 서둘러 앞으로 달려 나갔다. 우리가 달려 나가는 뒤쪽에서는 벌써 화살과 마법들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실드.” 정말 피곤한 일이다. 실드를 치기는 했지만 이렇게 달리면서 뒤에 있는 파비올과 사 제까지 보호하는 실드를 펼치는 것은 힘겨운 일이었다. “실드는 저희가 하겠습니다. 주신의 권능 호박箔護.” 이름이 아주 웃기는 것이었지만 그 의미는 보호의 발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발이라고 하니까 이상한 상상하지 말고 여름에 창이나 문에 치고 안쪽의 상황을 은근 하게 가리는 데에 사용하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 호박이라는 것은 구형의 실드와는 달리 몸 주위를 원통형으로 감싸도록 되어 있었 는데 흐릿하지만 황금색과 청색이 번갈아가며 테두리를 위루고 돌고 있는 모습이 보였 다. 보기에 좀 엉성해 보였고, 이름이 좀 어색했지만 효과는 제법 괜찮은 모양이었다. 호박이 실현되고 곧이어 날아온 파이어볼 마법에 파비올의 등에 업힌 사제가 별다른 타격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얼굴이 새하얗게 변하고 입으로 약간의 피 가 흘렀지만 파이어 볼에 직격 당하고 그 정도면 양호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런 상태에서도 막이 깨지지 않은 것을 보니 한 번 실현되면 어느 정도의 타격이 있기 전에는 깨지지 않는 것인 모양이었다. 즉 시전자가 일일이 신경을 써야 하는 형식의 것이 아닌 것 같다는 말이다. 어차피 신성력을 이용하거나 믿음을 바탕으로 일으키는 힘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 이 없었으니 지금 고민한다고 답이 나오는 것은 아닐 터였다. 뒤따르던 적들의 화살과 마법들도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뜸해지고, 결국에는 멈추었 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위기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미 우리들의 위치는 발각된 상태였고, 오늘 경험한 그런 정도의 경계와 함정을 주 도한 녀석이라면 분명히 앞쪽으로 녀석이 준비한 화려한 환영 인파들이 기다리고 있 을 것이었다. 그것도 아마 우리들이 몸을 숨기기 어려운 지형이거나 몸을 빼기 어려운 지형을 골라 서 말이다. 이제부터는 될 수 있으면 적을 피해서 적의 진영 밖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 가장 중요 한 과제였지만 그것을 알고 있는 녀석은 느긋하게 거리를 두고 진형을 정비할 것이었 다. 연못 안에 있는 물고기는 낛시로 잡을 수도 있고 그물로 잡을 수도 있지만, 최선의 방법은 연못의 물을 빼는 방법이다. 만약 나라면 이렇게 우리안에 든 상대를 잡기 위해서는 연못의 물을 빼듯이 조금씩 조금씩 범위를 좁혀가는 방법을 택할 것이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마법으로 도망을 가지 않은 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 방법이 최 선의 방법일 테니 말이다. 나는 일단은 적들의 시야에서 벗어난 것 같은 생각이 들자 속도를 늦추었다. 이미 이렇게 앞을 향해 달려간다고 상황이 호전될 것은 없었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무모한 것과는 달랐다. 지금의 최선은 녀석의 머릿속을 읽어내 는 것이다. 내가 속도를 늦추고 사제를 내려 주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파비올은 이상 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루탄님 서두르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뭐 서둘러서 좋은 결과가 나올 것 같으면 나도 서두르고 싶지만... “이 근처에서 병사들을 움직이는 인물이 보통이 아닌 것 같아. 아마도 우리가 아무 리 빨리 달린다고 해도 우리 앞에는 이미 적병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물론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실력자들을 포진시켜 두었겠지.”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시는 거지요?” 내 등에 있던 사제였다. 나는 경계병의 배치와 우리들의 행적이 발견된 직후에 짜여졌던 병사들의 배치, 즉 함정으로 우리들을 몰고 가던 그 교묘한 배치를 이야기하고 그런 녀석이 취할 수 있 는 최선의 방책은 우리들을 찾기 위해 병력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거리를 두고 포위망 을 구축하는 것이라는 내 생각을 이야기 해 주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아무리 빨리 달린다고 해도 조금 멀리에서부터 좁혀지기 시작 한 포위망은 이미 완성되어 있을 거라는 말씀이군요?” “그렇지 우리들의 이동 속도는 그 동안 이틀에 걸쳐서 우리가 움직인 것을 보고 이 미 파악을 했을 것 같으니 말이야.”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다시 사제가 물어왔다. “방법은 간단하지요. 숨으면 됩니다. 깊이 숨어서 찾지 못하도록 하면 되지요. 우리 가 쉽게 들키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수색을 시켜야 할 텐데 그것은 이전의 상황과 같 아지게 되는 겁니다. 우리들이 종적을 감추면... 물론 우리들이 그들의 포위망 안에 있다는 것은 알겠지만, 오랜 시간동안 찾지 못한다면 이미 포위망을 빠져 나갔으리라 는 생각에 불안해지기 시작하겠지요. 물론 지금 이 상황을 지휘하고 있는 녀석은 지금 의 내 생각을 읽을 테지만 다른 녀석들도 그 생각에 언제까지나 동의하리라고는 생각 하기 어려우니 그 즈음에는 어디든 구멍이 생길 겁니다. 하지만 여기서 분명히 알 것 은 일정시간이 지날 때 까지는 절대로 허점이 보여도 움직이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미끼라는 것은 분명한 일이니까요.” “하지만 루탄님. 지금 루탄님은 그렇게 느긋하실 입장이 아니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요?” “물론 난 그렇게 여유롭게 숨어 있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어.” “네? 그럼 어떻게...” 파비올이 다시 물었다.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사제님들만 여기 두고 우리 둘은 마법으로 돌아가는 거 지.” “네?!!” “솔직히 사제님들의 위치나 신분이야 저들에게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저들이 잡고자 하는 것은 자네와 내가 되겠지. 물론 신성사제님 들을 잡으면 병사들의 사기도 높아지긴 하겠지만 말이야. 하지만 우리가 잡히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 내가 그렇게 말하는 동안에 사제들의 얼굴빛은 상당한 붉어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사제님들을 잡히게 하고 도망을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파비올은 자신의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 “하하. 그래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이 방법이 우리 모두가 안전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아줬으면 해.” 나는 그렇게 파비올의 말을 눌러주고는 자세히 계획을 설명했다. “정말 이 계획이 성공할 수 있을까요?” “그럼 이보다 더 좋은 계획이 있다는 거야?” “뭐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우리들은 사제들을 등에 업고 적진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벌써 숱하게 많은 병사들의 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하지만 내 예상대로 적들은 우리들을 공격하지 않고 일정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데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제 얼마 가지 않아서 완전히 포위가 될 거야. 내 생각에는 그 포위망에는 마력 봉쇄도 있을 것 같지만, 그에 대한 대비책도 어느 정도 세워 두었으니까 걱정하지 않 아도 돼.” “그건 루탄님께서 아까도 하신 말씀입니다. 사실은 루탄님도 긴장 되시는 것 같습니 다?” 쫒기면서 이런 잡담을 하고 있는 이유는? 그야 우리들이 도망가는 데에는 별 어려움 이 없으리란 믿음 때문이다. 긴장되는 것이야 하는 수 없는 것이지만 내 계획에서 잘 못될 소지가 있는 사람들은 사제들 뿐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드디어 우리들은 사방에서 조여 오던 포위망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 게 되었다. 그것은 저들이 우리들을 잡기 위한 포위망을 완전하게 구축했다는 말과 같 은 것이었다. 주춤. 지금까지 한껏 달리던 우리들의 움직임이 일순간 멈추었다. “이제 끝인 것 같지. 상당히 힘들었는데 말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좀 일찍 포위를 했으면 이렇게까지 많이 달릴 필요는 없었을 텐 데 말입니다.” “그렇지?” 나는 파비올과 이런 시답지 않은 말을 주고 받으며 적들의 모습이 나타나기를 기다리 고 있었다. “여기까지인가? 누군가 했더니 당신이로군. 그 때 이후로 꼭 다시 한 번 칼을 마주 해 보고 싶었지. 이제 기회가 생긴 것 같아 기쁘군.” 카튼이었다. “여기 책임자가 카튼 당신인가? 그 때는 고마웠다고 해야하나? 아무튼 다시 만나게 되어 기쁘다는 말은 못하겠군. 다만 언젠가 한 번 더 붙어 보고 싶었다는 말에는 나 도 동감이야.” “그것 참 다행이군.” 카튼은 내와 다시 붙을 수 있다는 것이 꽤나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다른 녀석들은 허탕을 치게 되겠군. 당신이 어느 쪽에서 나타날지 몰라서 나뉘게 되었으니 말이야. 특히 트롤라이런은 꼭 당신을 보고 싶어 했는데... 아니면 그때 옆 에 있던 그 녀석이라도 만나고 싶어 했지.” 역시나 이번에는 제란의 측근이랄 수 있는 녀석들이 전부 움직인 모양이다. “그런 그 쪽의 소식을 좀 알려 줄 수 있나? 솔직히 궁금하거든.” “이런 미안하군. 그런건 함부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말이야. 거기다 가 우리들은 별로 서로의 소식을 전하거가 하는 일을 하지를 않는 편이라 말이야.” 카튼은 그렇게 말하며 손을 치켜들었다. 순간 사방에서 요동을 치기 시작한 마력들이 곧 잠잠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이런, 이번에도 마력을 봉쇄하고 싸워 볼 생각인가? 별로 변화가 없는 패턴이군.” “그건 이해를 해야 할 거야. 알고 보니 9써클 마스터라고 하더군. 거기에 더해서 검 술도 검강을 마음대로 쓰는 수준이라니 어쩔 수 없이 한 쪽은 묶어 두어야 나도 칼을 나눌 여유가 생기지 않겠나?” “이, 이런 비겁한....” 파비올이 옆에서 한 마디 거들고 나섰다. “전장에서 비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네 어린친구.” 파비올을 나이가 어리다는 것일까 아니면 정신이 어리다는 것일까? 아무튼 파비올이 열 받은 모습이네? “이봐 카튼. 하지만 나는 지금 나 혼자도 아니고, 또 그 쪽을 때거지로 몰려와서 내 가 불리한 입장이란 말이야.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내가 굳이 싸움을 할 필요가 있다 고 보나?” “그럼 어떻게 할 텐가? 지금까기 업고 온 사제들을 여기서 버릴 텐가? 그리고 몸을 뺄 생각인가? 뭐 옆에 있는 그 친구도 함께 버려야 할 거야. 혼자라면 어떻게 빠져 나 갈 수 있을지 몰라도...” 카튼은 내가 그럴 수 없을 것이라고 예상하는 모양인지 은근히 놀리는 어감을 실어 말하고 있었다. “맞아. 난 이들을 버릴 수 없지. 그래서 이만 사라지려는 것이야.” 나는 품에서 스크롤을 꺼내서 양 손에 들고 찢기 시작했다. 옆에서 파비올 역시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스크롤을 찢었다. “사제들이 충격을 많이 받기는 하겠지만, 어차피 여기에 있어도 죽는 것은 마찮가지 야. 그리고 주위의 마력을 봉쇄한다고 이런 것에 대한 준비 정도도 없을 내가 아니 지. 예전에 당했는데 또 당할 수야 없지 않나? 그럼 다음에 보지.” 마지막 말을 카튼이 들을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다. 내가 말을 마쳤을 때에 우리들은 미리 준비되어 있었던 집결 장소에 나타나 있었다. “읏차.” 쿵! 파비올이 등에 업고 있던 사제를 땅에 내려(?) 놓았다. “이봐 파비올 사제를 그렇게 함부로 다루면 쓰나?” “하하, 루탄님 그렇게 말씀을 하시면서 사제님을 땅에 먼저 떨어 뜨려 놓으신 것은 루탄님 같습니다? 언제 사제님이 루탄님 발 밑에 가 있게 되었습니까? 다른 것은 몰라 도 사제복은 잘 챙겨 두어야 한단 말입니다.” “그, 그런가?” 우리들이 이렇게 쓰잘데기 없는 소리를 하고 있는 동안에 우리가 돌아온 것을 느낀 모양인지 한 쪽 문을 열고 일데퐁소가 뛰어 들어왔다. “루, 루탄님 돌아 오셨군요.” 그리고 그 뒤를 따라서 루아가 뛰어 들었다. “무사히 돌아 오셨군요. 걱정 많이 했어요.” 하지만 그 뒤를 따라 들어오는 사람들은 없었다. 갑작스럽게 다시 파고드는 불안감. “일데퐁소, 다른 곳을 갔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지?” 내 목소리가 마법진이 그려진 넓은 공간속을 무겁게 때리며 흘렀다. “결국. 자이곱과 자이건은 혈로를 뚫고 돌아왔다는 말이군. 사제들이 모두 죽고서 야 스크롤을 썼다고? 멍청이들...” 일데퐁소의 이야기는 그런 것이었다. 덕분에 그 둘은 지금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로 망가져 있다고... 다행히 목숨에는 지장 이 없겠지만 상당히 오래 누워 있어야 할 것이라 한다. 뭐 내가 손을 쓰면 좀 일찍 일 어나겠지만. 그리고 나머지 화아 풍아 광아 수아 지토는 연락이 끊겼다고 한다. 어디에 있는지 어 떤 상황인지 알 수가 없다고. 다만 아직도 그들이 간 쪽에서는 암흑제국의 병사들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상황이 끝이 난 것은 아니라는 것이 지금 가지 고 있는 정보의 전부라는 것이다. 분명 쫒기고 있을 것이었다. “내가 간다. 우선은 광아를 먼저 찾는다. 녀석이 있어야 정보가 제대로 돌아가니까 말이야.” “그럼 루탄님이 숨긴 그 사제들은 제가 신경을 쓰겠습니다. 좌표만 알려 주시 면....” 일데퐁소가 내 말을 받았다. 사실 카튼 앞에서 도망을 오면서 등에 업고 온 사람들은 사제복만 입은 암흑제국 병 사들이었다. 혈을 제압하고 사제복을 입혀서 등에 업고 있었던 것이다. 사제들이 마법 과 충돌을 한다는 것을 알면서 그들을 데리고 올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제들 은 내가 만든 은신처에 숨어 있는 중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일데퐁소와 파비올이 힘을 합하면 충분히 데리고 올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지금처럼 지토와 화아 등에 대한 수색이 진행되는 상황이라면 이미 그물을 벗 어난 나를 신경 쓰기보다는 그물 안에 있는 동생들과 지토를 더 신경 쓸 것이었다. “그럼 곧장 출발한다. 일단은 광아가 해결하기로 한 아이슈마 사제들의 은신처로 가 서 상황을 살펴야겠군.” “조심하십시오. 루탄님.” “저도 가겠어요. 당신에게 걸림돌은 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일데퐁소의 배웅인사에 이어서 이루비아가 함께 가겠다고 나섰다.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이란 그런 것이리라. 서로가 서로를 위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한 것. 이루비아 가 다른 동생들과 지토를 가족으로 여긴다면 그녀도 그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하고 싶 을 것이었다. 그것이 비록 힘겨운 일이라 할지라도... 나는 돌아와서 물 한 잔도 먹지 못하고 자리에 앉아 보지도 못하고 돌아온 장소에서 이야기만 듣다가 루아와 함께 광아가 갔던 곳으로 출발했다. “여기가 그 곳인 모양이군. 좌표가 틀리지 않았다면 말이야. 그리고 저기 저렇게 형 편없이 무너진 곳이 아마도 그곳이었을 거야. 역시 땅 속에 있었던 모양이지.” “그런 모양이네요. 그런데 광아 도련님은 어디서 찾지요?” “글쎄, 아마도 그건 우리들 보다는 여기서 수색을 하고 있는 녀석들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을까?” “그럴까요?” “그렇겠지.” 그래서 우리들은 우리에게 정보를 줄 똑똑하고 착실한 도우미를 구하기 위해 밝아오 는 새벽빛 속을 뚫고 은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10인장 정도 되어 보이는 녀석과 그 부하들을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녀석에게서 들은 정보는 조금 어이 없는 것이었다. 광아 일행은 여전히 이동중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전선을 향해서... 다만 그 속도가 일반 보행 속도와 비슷하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일 뿐 그들 일행은 아직 아무 피해 도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포위망 안에 그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직도 그 종적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동의 흔적도 있었고, 또 어떤 때에는 가까이에서 기척을 느낀 경우도 있 었지만 그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마법으로도 확인이 되지 않아서 트롤라이런도 어찌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라고 했 다. 나는 정보를 얻고 그들을 얌전하게 잠재운 후에 루아와 함께 광아의 이동 경로를 따 라 달리고 있었다. “여보, 어떻게 된 걸까요? 광아 도련님이 어떤 방법을 쓰고 있는 거지요?” “내 생각대로라면 녀석이 자기 일행들 전체를 빛의 틈 속에 감추었거나 혹은 빛의 영향을 받지 않게 만들었거나 그런 것 일거야.” “그게 무슨 말이죠? 빛의 영향을 받지 않게 만들거나 빛의 틈 속에 감추다니요?” “말 그대로야. 보이지 않게 하는 거지. 빛의 반사가 없다면 그 모습을 볼 수가 없 는 거니까 말이야. 하지만 이것도 눈에 의지하지 않아도 되는 경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는 별 효과가 없는 것이야. 그런데도 버티고 있는 것을 보면 무언가 다른 방법도 함 께 쓰고 있는 것 같군.” 나는 나름의 생각을 이야기하면서도 확실하게 광아가 어떤 방법을 쓰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긴 광아가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돌아다닐 때는 나도 아주 가까이에 있지 않은 이 상은 찾기 어렵다. 광아가 나의 계약자이기 때문에 가지는 기운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러니 단순하게 빛을 이용해서 몸을 감추는 것 이외에 다른 무엇도 있을 것이다. 나와 루아는 언제든 몸을 빼고 숨을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수색대에게 발 견이 되는 것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광아 일행의 이동 경로를 따라 달리고 있었다. 때때로 적의 경계병을 만나기는 했지만, 곱게 재워 버리던가 아프게 재우던가 하면 서 거침없이 발을 옮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반나절이 지날 무렵에 드디어 광아 일행이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 다. 아직 광아 일행을 발견한 것은 아니었지만 주위에 깔려 있는 병사들과 그 움직임이 멀지 않은 곳에 광아 일행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조금 조심해서 접근을 해야겠네요. 만약 우리들이 들키면 광아 도련 님과 합류하기가 어려워질 수도 있겠어요.” “그렇겠군. 뭐 이정도야 들키지 않고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들인데 말이야.” “그럼요. 당신하고 내가 이정도도 못하면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비웃는다구요.” “그럼, 그럼.” 오랜만에 만난 루아가 곁에 있으니 자연 마음이 풀어지는 것일까? 왠지 푸근한 마음 이 되어있는 것 같다. 이런 급한 상황에 이런 마음이라니... 그러면서도 우리들은 병사들의 감시망을 피해가면서 조심스럽게 포위망의 안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포위망은 안쪽으로 갈수록 산만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아마도 일정 지역 안에 있다는 것은 알기 때문에 그 범위의 포위망은 촘촘히 깔았던 모양이지만 그 안쪽은 도무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광아 일행 때문에 확실한 병 력 배치를 하지 못해서 산만해진 모양이었다. “이렇게 되면 우리들이 광아 도련님 일행을 찾아야 하는 걸까요?” “뭐 그런 것 같군.” “찾을 수 있겠어요?” “글쎄, 어려울 것 같긴 하지만 일정 범위 안에서는 광아의 기운을 느낄 수가 있으니 까 말이야. 아직까지 그 기운을 숨기는 것을 본 적은 없어. 숨길 수 있는지도 모르겠 고 말이야.” “그럼 좀 돌아다녀야 하겠군요. 상당히 긴장되는데요? 이렇게 곳곳에 병사들이 숨어 서 경계를 서고 있으니 말이에요.” 어쩐지 루아는 광아가 그다지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안 이후로는 느긋하게 산책을 나 온 듯한 모습이다. 다른 동생들과 지토도 광아처럼 안전하게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광아와 수색병들과 우리 부부의 숨바꼭질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해가 질 무렵까지 이어진 숨바꼭질에서 술래이면서 몸을 숨겨야 하는 두 가 지 역할을 맡은 우리 부부가 드디어 승리를 거머쥐게 되었다. “저기 있군. 광아야. 아주 느긋하게 지내고 있는 것 같군.” “어디? 어디 있어요? 전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루아가 내가 바라보는 곳을 보면서 말했다. “안보이긴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알 수는 있지 저기 있다는 것을 말이야.” “그래요?” “그럼 물론이지.” 그때 머릿속으로 광아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 형님 오셨습니까? 여기까지 뭐 하러 오셨어요? 하지만 나는 그 목소리를 듣고도 대답을 하기가 어려웠다. 정확한 위치를 몰랐기 때문에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 쉽지 않은 탓이었다. - 형님이 어디 계신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형님이 근처에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으니 말이죠. 일단 가까이에 수색병들이 없으니 아주 잠깐만 모습을 드러내겠습 니다. 보시면 곧 가까이 오십시오. 나는 광아의 말을 루아에게 전해주고는 광아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시선을 모으 고 있었다. 그리고 곧 그 곳에서 약간의 변화가 나타나면서 광아 등의 모습이 나타났다. 휘익-, 휙. 나와 루아는 곧장 광아가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고, 그런 우리를 발견한 광아가 싱 긋 웃었다. 그리고 우리 부부가 근처에 다가가자 다시 주위의 모습들이 바뀌었다. 그리고 사제 들 중 한 명이 나서서 신성력을 바탕으로 한 보호막을 형성했다. 그리고 마법사가 그 보호막의 표면에 실드를 입히는 것이었다. “아! 그렇군. 이렇게 해서 적들의 눈을 속인 것이로군. 대단해. 정말 멋진 방법이로 군. 정령력과 마법, 거기에 신성력의 결합이라니. 하하하.” 나는 그 모습에서 어떻게 적들에게서 기척을 숨기고 이동을 했는지를 알 수가 있었 다. 신성력과 마법을 서로 중화시켜서 그 기척을 최대한 줄이면서 그 효과는 그대로 얻 고 있었던 것이다. 신성력은 일행들의 마력을 감쪽같이 숨겨주고 있었고, 마법 실드 는 사제의 기척을 감쪽같이 숨기고 있었다. 나머지 기사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기척을 숨기고 있으니 왠만해서는 이들을 찾아 낼 수 없을 터였다. 거기다가 광아가 일행들 이 있는 장소를 시각으로 파악불가능한 상태를 만들어 주었으니... “정말 대단하군. 이런 방법은 도대체 누가 생각을 한 거야?” 내가 광아에게 물어보자 광아가 웃으며 대답했다. “이건 아주 오래전에도 썼던 방법이랍니다. 예전 신마전쟁에서 한타의 마법사들과 신성제국의 사제들이 서로 도와가면서 루시퍼와 싸울 때에 썼던 방법이라고 하더군 요. 그래서 암흑제국에서도 이 방법을 알고는 있는데 그렇다고 해도 이 방법을 깨트 릴 방법을 찾은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뭐 광범위 마력 봉쇄가 있지만 그것은 지금처 럼 범위가 너무 넓으면 쓸 수 없는 방법이지요.” “그래, 그렇군. 어째서 난 그런 것도 모르고 있었을까? 그리고 나와 함께 갔던 사제 들은 그런 소리를 않던데?” “그거야 사제들은 그 방법을 모르니까 그렇지요. 신성력과 마력의 조합이란 사제들 입장에서는 달가운 것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마법사들 사이에서만 전해진 모양입니 다.” “쩝... 그런 건가? 하긴 난 쉬벡의 마법을 중심으로 했으니 그 후에 나온 그런 방법 에 대해서 알 수 없을 밖에...”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약간은 짜증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만약 내가 이 방법을 알았 다면 조금 쉽게 사제들과 움직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럼 다른 형제들과 지토도 이런 방법을 쓰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아마도 이 방법을 알고 쓰긴 하겠지만, 이것으로 시야까지 차단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어떨지는 모르겠습니다. 가까이 붙게 되면 이런 방법은 별 쓸모가 없으니까 요.” “그도 그렇겠군.” “그런데 형님.” “왜?” 광아의 목소리가 낮아지며 진지해지고 있었다. “형님이 저를 먼저 찾으신 것은 아마도 정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시겠지 만, 저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이동이 가능합니다. 천천히 간다고 해도 오래지 않아서 여기를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문제는 화아 형님쪽이 문제입니다.” “왜? 화아가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거지?” 나는 의외의 말에 놀라서 물었다. “화아 형님의 힘이야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잔재주가 별로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구성이야 모두들 같은 구성으로 갔습니다만, 풍아 누나나 수아는 여러 가 지 잔재주를 가지고 있고, 또 카다와 파울이 곁에서 도움을 주겠지만, 화아 형님은 그 게 안 되거든요. 아눈도 화아 형님과 비슷하니 문제지요.” “그런 네 생각에는 화아가 다른 형제들이나 지토보다 더 위험할거란 말이냐?” “아마도 그럴겁니다. 거기다가 화아 형님이 간 곳이 루탄형님과 연결되는 은신처이 니 루탄형님이 빠져나온 후에 병력들이 그 쪽으로 몰려 갔을 겁니다. 다행히 반대쪽 의 수아는 그 곳으로 흐르는 강이 있으니 강까지만 도착을 했으면 아무 어려움 없이 돌아올 것입니다.” 광아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나와 파비올을 쫓던 병사들이 모두 다른 쪽으로 증원되었을 확률이 컸다. 거기다가 화아는 은신보다는 돌파를 할 녀석이었다. 뭐 처음에야 숨어서 이동을 했겠지만 오래 도록 그 상태를 유지할 수는 없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 형님은 서둘러서 화아 형님 쪽으로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여긴 제가 알아 서 빠져 나가겠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사제님들만 따로 숨기고 우리 일행들은 빠져나 가도록 하지요. 뭐 일단 생각해둔 방법도 있습니다.” “그거 혹시. 허수아비 데리고 가는 거 아니냐?” 나는 혹시나 해서 광아에게 물었다. “에? 아셨어요? 혹시 그 방법 쓰고 나오신 겁니까?” 역시나 광아도 나와 비슷한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사제들만 남기고 탈출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조금 거리낌이 있는 방법이기는 하지만 사제들을 안전하게 숨길 수만 있다면, 그리고 사제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마법을 통해 서 탈출을 했다는 인상을 줄 수만 있다면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으니, 광아가 그런 생 각을 했다는 것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역시나. 그렇군요.” “그럼 나는 화아에게 가 봐야 할 것 같군. 그럼 몸조심해서 무사히 돌아와라. 믿는 다. 그리고 내가 잠시 포위망을 흔들어 놓을 테니까 기회를 살 살려서 움직이도록 하 고. 알았냐?” “네, 형님. 그렇지 않아도 좀 부탁을 드리려고 했습니다. 하하.” “그럼 간다.” “같이 가요 여보. 그럼 광아 도련님 나중에 뵐게요. 몸 조심하시구요.” “네, 형수님도요.” 나와 루아가 광아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 밖으로 나오자 금세 그들의 기척이 사라 졌다. “정말 대단한 방법이군. 그러고 보니 마법과 신력이 합치면서 부수효과가 있는 것 같군. 내가 여기서 기사들의 기척을 제대로 느낄 수가 없다니 말이야. 흠...” “아니, 지금 그런 것에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요. 빨리 가요. 적당히 흔들어 주고 화아 도련님 찾으러 가야 한단 말이에요.” “응? 아, 알았어. 어 어, 그렇게 당기지 말라니까.” “아이참, 빨리 가요.” 목소리를 높이는 루아. “저기다. 저기 놈들이 있다. 잡아라.” “저기 있다. 잡아.” 발견되었군. 그와 함께 우리들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헤집고 날아가면서 적당히 흔적을 남기는 것을 잊지 않는 루아. “아이참, 그렇게 빨리 가면 어떻게 쫓아오라는 거예요? 좀 천천히 가요.” “아니야. 너무 티가 나게 그러면 안돼. 최대한 도망가는 척 해야지. 그리고 흔적도 적당히 남겨야지. 너무 남기면 도리어 의심하니까 말이야.” “그, 그런가요?” 그렇게 우리들은 다시 어두워 오는 숲 속을 헤집고 달렸다. 뒤에서 따라오는 마력의 흐름들이 우리의 움직임을 맹렬하게 추적하고 있었다. 어스름한 밤하늘을 수 놓는 마법 조명이 쏫아 오르고, 뒤를 이어 우리 부부의 전후좌 우에서 움직이는 병사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하지만 벌써 도망을 갈 수는 없었다. 우리는 최대한 병사들의 틈을 뚫고 들어가며 그 곳을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 최 소한 녀석들이 보기에는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완전히 기척을 숨기고 슬며시 포위망을 뚫고 나왔다. 아마도 녀석들은 그 포위망 안에 우리들이 없다는 것을 알아내는 데에 시간이 제법 걸릴 것이다. 광아 일행이 그렇게 번번이 숨었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광아는 그 틈에 조금은 수월하게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었다. 참전 - 유혈流血 “이렇게 다들 다시 모이니 반갑구나.” “형, 정말 아찔했다구. 아이슈마의 사제들이 그런 준비를 해 두었을 거라고는 생각 도 못했으니 말이야.” “이번에는 의외의 상황이 문제였습니다. 역시 정보의 부제가 문제였다고 생각합니 다.” “그래. 그 부분에선 내 잘못이 크다. 사제들이 인형들을 조종하는 데에만 쓰일거라 고 생각한 그 도형들에 그런 숨겨진 기능이 있다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게 왜 루탄 오빠 탓이야?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였다구요.” “그래요. 오빠 잘못이 아니었어요. 그리고 자이건과 자이곱 쪽에 좀 문제가 있었지 만 그래도 피해가 큰 것은 아니니까 다행이잖아요?” 지금 우리들은 원형의 낮은 테이블을 앞에 두고 식어가는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다들 고생했던 기색들을 다 지우지도 못하고도 이렇게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기 위해 모여 있었다. 모두들 피곤이 가득한 모습들이었다. 수아와 풍아, 지토가 해가 뜨고 오래지 않아서 순간이동으로 도착을 했었고, 점심시 간이 조금 지나서는 광아가 도착을 했다. 그리고 지금 조금씩 기울어가는 오후의 햇살이 비춰드는 창문을 조명삼아 우리들의 본부로 정해진 작은 성채의 본관 거실에 모여 앉아 있었다. “그래 수아는 어떻게 빠져 나온 거야? 이제부터 그 무용담들을 한 번 들어 보자.” 내가 그렇게 제안을 하자 다들 흥미로운 눈빛이 되었다. “그거 좋겠다. 아직 저녁을 먹으려면 시간도 남았고, 그렇다고 지금 들어가서 잘 수 도 없는 노릇이니 좀 피곤하긴 하지만 그 이야기나 하자.” 화아가 적극적인 찬성 표시를 했다. “그럼 그러죠 뭐.” 풍아도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럼 제가 먼저 할게요. 저는 무너지는 사제들의 은신처에서 간신히 일행들을 데리 고 나왔어요. 마법사들과 신성사제들의 힘이 컸지요. 그리곤 곧장 그 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죠. 암흑제국의 사람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은 곧 우리들을 찾기 위 해 올 거란 건 어렵지 않게 짐작 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올 때는 허술한 부분들 을 피해서 올 수 있었지만 일단 경계가 강화되기 시작하면 그게 어려울 거란 생각에 아예 암흑제국 쪽으로 방향을 정했어요. 솔직히 적의 의표를 찌르기 위한 것도 있었지 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방향에 제법 커다란 강이 있었거든요. 그란드와 암흑제국의 국 경선을 이루는 그 강으로 흘러드는 강이었어요. 저는 간단하게 그 강을 이용해서 적 의 포위망을 빠져 나왔어요. 우리 일행들은 강물 속으로 이동을 했거든요. 나중에 우 리 가족들도 한번 모시고 들어갈게요. 상당히 볼거리가 많아요. 아무튼 그렇게 강물 속으로 이동을 했기 때문에 좀 먼 거리를 돌아가야 했지만 안전하게 빠져 나올 수 있 었어요. 중간 중간에 폭포를 만나거나 하면 어쩔 수 없이 육지로 이동을 했지만 일행 들 모두가 실력들이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무사하게 여기 있게 된 거지요. 뭐 너무 힘 을 많이 써서 탈진 상태가 된 것이 문제기는 하지만요.” 그렇게 말을 마치면서 수아는 밝게 웃었다. “그래, 고생했다. 그래도 적들과 부딪히지 않은 것은 다행이구나.” “크흠. 그럼 다음은 내가 하지. 뭐 난....” 수아 다음은 지토가 말을 하겠다고 나섰다. “지토아저씨 이야기는 들을 것도 없잖아. 뻔하지 뭐. 땅굴 파고. 땅 속으로 땅 속으 로 걸어왔을 걸? 아마 아이슈마 사제들의 은신처에서부터 안전지대까지 땅 속으로 땅 속으로 왔을 거야. 맞죠?” 지토의 말을 끊은 것은 풍아였다. 지토는 발끈한 표정이 되었지만 곧 쥐었던 주먹에서 힘을 빼고는 의자에 깊숙이 몸 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맞다 맞어. 땅속으로 걸어왔다. 문제는 나보다 키가 큰 녀석들은 허리를 굽 히고 따라와야 했다는 거지만.... 솔직히 그 먼 거리를 땅을 헤치며 이동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거든. 에고 힘들다.” 마지막에는 엄살까지 피우는 지토다. 아주 늙은이가 다 되었다. 외모가 성격에도 영 향을 미치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기에 상급 상태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 좋잖아. “그럼 이제 내 차례지?” 지토를 쓰러뜨리고 기세를 올린 풍아가 나섰다. “그래 너 해라. 넌 어떻게 빠져 나온 거냐?” “그래 난 풍아 니가 어떻게 빠져 나왔을 지가 가장 궁금하다.” 모두의 시선이 흥미롭다는 듯이 풍아에게 집중되었다. “에? 모두들 그렇게 보지 말아요. 헤~ 부끄럽게...” “풍아야. 별로 안 어울리니까 평소대로 해라.” “그래.” 반응들이 썰렁하다는 것을 느낀 풍아는 곧 새초롬한 표정을 입을 열었다. “내가 갔던 방향이 누웬왕국 국경선과 한타, 암흑제국의 국경선이 마주하는 곳이었 잖아. 그래서 일단 일이 터졌다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 한타 쪽이 아니라 누웬 쪽을 방향을 잡고 달렸어요. 중간에 포위망이 좁혀오기 시작했지만 카다가 정찰을 했기 때 문에 미리미리 적의 포위망을 피해서 움직일 수가 있었지요. 하지만 그래도 모두 피 해 갈 수는 없어서 어떤 때에는 포위망에서 약해 보이는 부분을 뚫고 지나가야 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뭐 제법 사람들이 많이 상했지요. 비록 암흑제국의 병사들이었지 만, 아무튼 그렇게 적진을 뚫고 지나가다가 결국은 녀석들의 함정에 빠지고 말았어 요.” “함정이라니? 도대체 어떤 함정이라는 거야?” 성질 급한 화아가 참지 못하고 풍아의 말을 끊었다. 하지만 풍아도 그런 화아의 반응 이 마음에 들었는지 빙긋 웃더니 말을 이었다. “에, 그게, 카다 덕분에 지형을 미리 알고 있었지만 좁혀오는 포위망 때문에 결국 은 그 쪽을 갈 수 밖에 없었죠. 까마득한 절벽, 건너편까지의 거리는 500미터는 되어 보이는 곳으로 몰린 거지요.” “그래서? 어떻게 그 상황을 벗어난 거냐?” 이번에는 지금까지 잠잠하던 지토가 눈을 반짝거리며 의자에서 등을 떼며 관심을 나 타내었다. “어쩌긴 간단하게 건너편으로 넘어왔지. 녀석들은 사제들이 있으니까 마법으로 건너 가지 못하리라고 생각을 했던 모양이지만, 사제들도 자신의 몸에 직접적으로 적용되 는 마법이 아니면 상관이 없거든. 그래서 내가 신성사제들을 바람에 태워서 절벽 건너 로 날려버렸지. 뭐 다른 기사들과 마법사들도 내가 조금 도와주었지만 마법사들이 알 아서 그런 정도는 해결을 해 주더라고. 그래서 건너편으로 건너가서 암흑제국의 병사 들과 그 우두머리, 왜 있잖아 인간과 동물의 합작품같이 생긴 녀석 말이야. 아주 약 이 오른 표정이었어. 호호호.” “그리곤 더 안 쫓아 왔다는 말이야? 녀석들이?” “응. 아마 누웬의 영토까지 따라 들어올 생각은 못한 모양이야. 이 판국에 적을 하 나 더 늘이는 것은 피해야 할 테니까 말이야. 그 절벽 건너는 누웬의 영토였던 모양이 야. 아무튼 그렇게 도망을 나왔어. 그 곳에서 한타로 다시 돌아오는데 시간이 좀 걸렸 지만. 우리들도 상당히 먼 거리를 돌아와야 했거든.” “뭐야, 잔뜩 기대했더니 별 것도 아니었잖아.” “그러게 말입니다. 풍아 누님 장난에 속아 버린 기분이군요.” 화아가 광아가 실망스런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뭐가 별거 아니란 거야? 이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데... 거기다가 처음으로 사람 들도 많이 죽였다고. 뭐 들어 보니 화아 오빠도 만만찮게 죽였던 모양이고, 루탄 오빠 도 그랬던 것 같던데...” 풍아의 불만 섞인 목소리가 흘렀지만, 정작 우리들이 머문 공간을 얼려 놓은 것은 그 어투가 아니라 내용이었다. 사람들이 죽었다. 아니 사람들을 죽였다는 것이.... 사실 모두들 피하고 싶었던 부분이었을 것이다. 나도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은 피하고 싶었으니 말이다. 풍아는 말을 하고 나서는 아차 하는 표정이었지만 다시 고개를 발딱 세우고는 입을 열었다. “어쩌자구? 죽이지 않는 전쟁이 어디 있어? 어차피 전쟁이란 죽이고 죽는 거잖아. 더구나 나를 죽이려는 사람들을 죽이지 않고는 피할 수가 없는데 어떻게 하라는 거 야? 솔직히 어쩌면 피할 수 있는 죽음이 있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우리 일행의 안전 을 위해서는 죽이는 편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 거잖아. 그럼 어쩌란 거야. 혹시 나중에 위험해 질지도 모르는데 일단은 그 살인을 피해야 한다는 거야? 그런 거, 그런 거, 전쟁터에서 가능할 리가 없잖아. 나, 나도 죽이는 게 좋은 건 아니라 고.” 말을 이어갈수록 풍아의 목소리는 작아지고 울먹임이 섞이고 있었다. 수아가 일어나 풍아의 어깨를 안아 주었다. “어차피 한 번은 집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풍아도 진정하고 거기 앉아라.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내 말을 잘 들어.” 나는 입장을 정리하고 가족들의 어깨에 올려진 짐을 덜어 주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 풍아와 수아가 자리를 잡고 앉자 나는 가족들을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살인이란 어떤 경우에도 합리화 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죽이지 않고 문제를 해결 할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생기는 곳 이라는 것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모든 경우에 싸움은 승자와 패자가 있기 마련이고 패자는 승자에게 권리를 빼앗기게 마련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싸움이 벌어지면 승자가 되려고 하지. 더구나 그 승패의 결과가 생명과 결부된 경우에야 당연 히 승자의 자리를 추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겠지. 아니면 상대의 칼을 웃으며 받을 수 있는 성자聖者가 되던지 말이다. 뭐 그런 사람이 성자일지 바보일지는 모르겠지 만. 아무튼 중요한 것은 빼앗길 수 없는 것을 빼앗으려는 경우에 처하면 빼앗기지 않 기 위해 자기 방어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번에 우리들의 살인이 일어난 배경이다. 익숙하지 않았고, 꺼리던 일임에는 틀림없지만 하는 수 없는 일이다. 죽이지 않기 위 해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죽여야 할 경우가 생기면 죽인다. 작게 죽여서 많이 구할 수 있으면 죽이고, 많이 죽여야 내게 소중한 작은 것을 지킬 수 있는 경우에도 죽인 다. 그래 이미 손에 피를 묻힌 지금 그것을 후회하고 한탄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 다. 솔직히 말하면 언젠가는 닥칠 일이었다는 것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잖아. 이제부 터는 자기가 죽인 사람들을 빨리 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죽인 자들을 오래 기억하는 것은 정신 건강에 좋지 않아.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은 그것이 한 사람이든 백 사람이든 같은 무게를 지닌다. 하지만 언제나 내가 죽인 수 많은 사람들 전체의 무 게보다 내 옆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무게가 무겁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말을 마쳤다.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잘 모른다. 하지만 이게 내게는 한계다. 살인이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고 앞으 로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말고 죽이라는 말을 할 수도 없다. 내 말은 그렇게 끝이 났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 점점 기우는 햇빛이 작은 창문을 통해 들어와 탁자를 지나 반대쪽 벽면에 붉은 기운 을 드리운다. 방안이 온통 붉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는 느낌이다. 아마도 풍아나 화아도 나와 같은 느낌일 것이다. 하지만 털어 버려야 할 일이다. 식어버린 찻잔의 쓴 맛이 혀를 적신다. 누구의 시선도 누구에게도 닿아있지 않은 시간이 흘러간다. 생각이 깊은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자기자신에게로 향한다. 우리들은 쉽게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토나 수아, 광아는 별다르게 충격을 받을 일이 없을 것 같았지만, 나 때문인지(내 감정에 영향을 받는 듯) 어두운 표정으로 성채를 어슬렁거렸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는 동안에 그런 우리들과는 상관없이 세상은 그 톱니바퀴를 쉬지 않았고, 전선의 상황은 또 다시 변화를 일으켰다. 아이슈마의 사제들이 만들어 놓았던 ‘죽음의 지역’이라는 계획이 무산된 암흑제국 에서 드디어 강수를 들고 나왔던 것이다. 그러니까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움직였던 병력들, 북동과 북중에서 대쟁투를 빌미로 모였던 그들이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보이지 않다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것도 하나의 부대를 형성한 상태에서 말이다. 때문에 이제는 싸움이 전선에서 전반적으로 이루어지는 접전의 양상이 아니었다. 무조건 그 부대가 나타나면 한타와 그란드, 신성제국의 3국 동맹군은 박살이 나는 것 이다. 비록 3000명 정도의 소수 병력이었지만 그 여파는 엄청난 것이었다. 한마디로 전선은 양우리에 뛰어든 늑대 한 마리가 휘젖고 있는 모양이라고 보아야 했 다. 그 부대는 암흑제국의 북서지역에서 나타나서 전선을 따라 이동하며 삼국동맹군을 공 포로 몰아갔다.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라고 봐야 했다. 그들 하나 하나의 무위武威가 기 사 서넛을 상대할 정도였다. 그러니 일반 병으로 구성된 부대들이 상대를 할 수 있을 턱이 없었던 것이다. “형님, 문제입니다. 병사들 사이에서는 그 부대를 지옥대地獄隊라고 부르면서 두려 워하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우리 아카데미 학생들과 기사들의 피해도 제법 됩니다.” “얼마나 희생되었지?” “학생들이 50명정도, 기사단의 기사들이 80명 정도입니다. 그나마 그들과 싸우지 않 고 싸움을 피했는데도 미쳐 피하지 못했거나 시간을 벌기 위해 희생된 숫자입니다.” 광아의 대답이 가슴을 찌르고 지나갔다. 기사단과 학생들이라. 나는 분명히 이 싸움에서 우리 학생들과 기사단이 싸움의 전면 에 나서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이기적이라 할지라도 내가 지닌 대의大義보다는 내 주위의 사람들을 위한 마 음이 더 중요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는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었는지 내가 전장에 서 있게 되었 지만, 아직도 나는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런 나의 마음은 우리 학생들과 기사단을 후위로 놓게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130명 정도의 희생이 생기고 말았다. 학생이라고 해 봐야 1000명이 전투에 참여하고 있을 뿐이고, 기사단이라고 해도 2000 명을 겨우 넘는 수준일 뿐이다. 그런 숫자에서 130명이란 정말 큰 피해가 아닐 수 없 다. 아니 숫자상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그들의 주검을 어떻게 대한다는 말인가? 내 앞에 서 또랑또랑한 눈으로 수업들 듣던 녀석들도 있을 것이다. 나와 심심풀이 대련을 하 면 죽을 힘을 다하며 붉어 졌던 얼굴도 있을 것이다. 나와 루아의 결혼식에 작은 선물 을 해 주었던 사람도 있을 것이고, 타니를 귀여워하던 학생도 있을 것이었다. 그들이 주검으로 변해 있을 것이다. 복수. 그들의 죽음에 복수를 잠깐 생각해 본다. 하지만 복수를 위해서 또 그런 주검들을 늘여야 할까? 그냥 도망을 갈까? 내가 아는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어디 먼 곳으로, 아직 인간들의 발이 닿지 않은 누 웬의 서쪽으로 혹은 그란드의 동쪽으로 멀리 멀리 도망을 가 볼까? 다시 한 번 내가 왜 여기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인지 회의가 든다. 아이슈마가 인간계를 가지고 싶다면 그냥 가지라고 줄까? 하지만 아이슈마가 모든 나라를 평정하고 나서는 나와 내 가족과 친구들이 아무리 먼 곳에 있어도 찾아오겠지? 그리고 지금보다 더 강한 적이 되어서 나타나겠지? 끊임없이 되풀이 될까? 나타나면 도망가고 나타나면 도망가고.... 불가능 할까? “형님? 형님!” 광아의 목소리가 멍청한 나의 생각을 끊고 들어왔다. “지옥대에 대한 대책이 있어야 합니다. 그들은 평범한 부대로는 막을 수가 없습니 다. 우리가 가진 전력을 다해야 겨우 막을 수 있을 정도의 부대입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나는 기분이 나빠졌다. “어쩔까? 우리 기사단 2600에 학생들 1000명, 그렇게 3600이면 지옥대를 막을 수 있 다. 그래 그렇겠지. 그리고 얼마나 남을까? 몇 명의 학생들과 기사들이 남을까? 그들 을 죽음으로 몰고 가야 하겠냐?” “그렇다고 이대로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왜? 한타나 그란드, 신성제국의 실제적인 힘들이 움직이지 않은 상태에서 왜 우리 가 먼저 나서서 희생을 자처해야 한다는 것이냐?” “.....” 그랬다. 분명히 한타의 실세는 마법길드였다. 하지만 우제푸를 중심으로 한 그들은 아직 전쟁에 뚜렷하게 관여하지 않고 있었다. 뭐 어느 정도의 길드원을 부대에 파견하 고 있었지만 그것은 마법길드가 지니고 있는 힘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거기 에 그란드의 실세랄 수 있는 얼음기사단이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얼음기사단의 실제 적인 힘은 현역이 아닌 퇴역 기사들이었다. 특히 왕실의 보이지 않는 힘인 트렌스젠더 들. 그들이 실세인 것이다. 그 힘은 현재로선 가늠하기 어렵다. 겉으로 드러난 적이 없으니까 말이다. 마지막으로 신성제국에도 숨은 힘은 있었다. 겉으로 드러난 힘인 화 염기사단(흉측한 란이를 가슴에 달고 있는)과 함께 고위신성사제들이 버티고 있는 것 이다. 하지만 이들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힘을 숨기고들 있지. 아직 이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 사태인지를 모르는 것이야. 이 젠 어쩔 수 없겠지. 신계, 천사계, 마계, 정령계의 관계와 아이슈마의 인간계 평정, 그리고 마계와 아이슈마의 관계 등을 정리해서 각 국의 수뇌에게 보내라. 우리가 알 고 있는 것 중에서 숨길 것은 없다. 이번에는 암흑교와 아이슈마 사제들의 관계에 대 해서도 밝혀 버려. 물론 아르미엘 주교에게 통보는 먼저 해 주고.” “그런다고 삼국이 적극적으로 나설까요?” “그런 모를 일이지. 하지만 그들이 나서지 않으면 우리들도 움직이지 않는다. 이젠 싸움이 전선을 위주로 한 것이 아니라 주력부대를 이용한 국지전의 성격을 띠게 될 거 다. 우리도 흩어진 전력을 한 곳으로 모아라. 전선에서 조금 뒤로 물러난다. 매직컬쵸 를 지나서 ‘수아의 머릿결’까지 물러나서 사태를 관망해 보자.” “동맹군 지휘부에서 반발이 많겠군요.” “반발을 하든 말든. 어차피 이 싸움이 끝나면 아카데미는 삼국에서 공동으로 관리하 려고 들 것이고, 넥스 영지에 대해서도 제재가 있을 거다. 피할 수 없는 일이지. 우리 가 아무리 열심히 싸운다고 해도 결과는 같을 걸? 그럴바에는 우리들의 힘을 아낄 필 요가 있겠지. 굳이 우리가 앞장서서 희생을 해 줄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내 말에 광아는 잠시 침묵하다가 알았다는 대답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아마 알아서 잘 처리할 것이었다. 뭐 별로 할 일도 없다. 지금까지 수집된 정보들 중에서 숨기고 있던 몇 가지를 간추 려 삼국 수뇌부에 전달하고, 암흑교의 아르미엘 주교에게 통보하고, 우리 전력을 모 두 철수 시켜서 ‘수아의 머릿결’ 후방으로 이동을 시키는 것이다. 아직도 제란에게는 남은 힘이 많았다. 남부 지역의 힘은 현재의 싸움에 전혀 끼어들 지 않고 있었고, 아이슈마의 힘도 사제들을 내세웠던 것을 빼면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이제는 관망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닌 힘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숫자상으로 겨우 사천이 안 된다. 더구나 전쟁은 너무 혼잡스럽게 진행되고 있었다. 굵게 흐르는 줄기가 보이지 않았다. 어떤 싸움에도 중심이 있기 마련이다. 싸움을 끝낼 수 있는 중심. 하지만 지금은 그 런 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막연하게 진행되는 소모전일 뿐이다. 어디선가 실마리가 터지지 않으면 이런 상태가 지속될 뿐이다. 지옥대가 나타남으로 해서 드디어 싸움의 양상에 변화가 생겼다. 이젠 힘과 힘이 정면으로 맞붙게 될 것이었다. 숨어 있던 힘들이 드러날 것이다. 나는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아직도 살인에서 오는 충격이 가시지 않았건만 눈앞으로는 더 많은 피가 흐르는 미래 가 보이고 있었다. 내 손에도 더 많은 피가 흐를 것이다. 우리들은 모든 전력을 수습해서 일제히 전선에서 빠졌다. 삼국의 지휘부에서 거센 질타가 있었지만 우리들은 처음부터 어느 나라에 속한 부대 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은 명령권을 가지지 못했다. 더구나 지옥대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했던 그들은 우리들의 움직임에 오래 매달려 있 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광아가 전달한 내용에서 아이슈마라는 마족의 개입과 그 목표를 확인하고는 반신반의하는 혼란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때문에 나는 그들의 공동 회의에 참석해서 아이슈마의 사제들이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들려줌으로써 인간계를 점령하고 다스릴 아이슈마의 계획이 시제하는 것임을 알 려야 했다. 그래도 믿지 못하겠다는 놈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그왕과 우제푸 가 보증을 서고 나서자 상황은 달라졌다. 더구나 신성제국의 레고리오 사제가 내 말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임으로서 삼국의 수 뇌부들이 그나마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는 데에는 도움을 주게 된 것 같았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우리들은 모두 ‘수아의 머릿결’너머로 이동해서 진영을 갖추 고 휴식에 들어갔다. 다른 작자들이 뭐라고 하던지, 나는 그들의 숨겨진 힘이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서 움 직일 생각은 없었다. 겨우 4천도 되지 않는 병력으로 무엇을 하란 말인가? 나는 그들의 독촉에 언제나 이런 대답만을 돌려 줄 뿐이었다. 이제 전선은 급속도로 바뀌고 있었다. 지옥대의 활약은 삼국 동맹군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고, 연전연패 속에서 속수무책으 로 후퇴를 거듭하게 만들었다. 아마도 우제푸는 지금 상당히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지금처럼 밀리면 언젠가는 매직컬초까지 적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 다. 물론 그렇다고 암흑제국에서 매직컬초에 대한 공격을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 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고립시키고 우회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우제푸는 그렇게 두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자신의 힘을 숨기고 싶다고 해도, 한타가 망하는 것을 눈앞에 두고 볼 수는 없지 않을까? 숨겨진 마법길드의 힘을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두고 볼 것인가? 우제푸의 고민이 눈에 선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고민 앞에서 웃음을 지을 수는 없었다. 내가 우리 전력을 아끼는 것처럼 우제푸도 길드원들을 아끼고 보살필 것이기 때문이 다. 한 집단의 우두머리라는 자리는 언제나 이런 괴로움을 가지게 되는 것인가보다. “우제프, 어서 오게. 그렇게 모습을 감춘다고 내가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 니겠지?” 나는 여전히 강물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나는 흐르는 강물을 발끝에 아슬아슬하게 두고 강가에 서 있었다. 물결의 흔들림에 숨어 있는 법칙조차도 이제는 어느 정도 눈에 들어오는 나로서는 그 런 풍경들을 감상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자연의 법칙조차도 어쩌면 하나의 흐름에 속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를테면 조금 더 세상을 보는 눈이 커지고 있다고 해야 할까? 아직은 그것이 무엇인지 확연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눈 앞에서 강물이 솟아오르며 우제푸의 모습이 나타났다. “안녕하십니까. 루탄님.” “어서 오게.” 우제푸는 몸에 묻어 있는 물을 머리끝에서 발끝으로 끌어 내리고는 천천히 강물 위 를 걸어서 내 곁에 와서 섰다. 우리들은 나란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어쩌기를 바라나?” “관여 해 주시지 않으실 겁니까?” “나도 피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네만....” “제가 어쩌기를 바라십니까?” “그거야 자네가 결정할 문제가 아닌가?” “제란에게 아직도 남은 힘이 많을 것입니다.” “그 힘이 더 강하다면 우리 쪽이 지게 되겠지.” “그란드와 신성제국이 움직여 줄까요?” “아마 자네가 쓰러지고 나서야 움직일지도 모르지.” “너무하시는군요.” “어쩌겠는가? 암흑제국이 한타를 먼저 노리고 있는 것이니.... 그란드를 먼저 노렸 다면 그 쪽의 힘이 먼저 움직여야 했겠지.” “처음부터 3국 동맹에서 싸움을 한타의 국경선 위주로 시작한 것이 잘못이라는 말씀 이군요.” “지리적으로 그것도 어쩔 수 없는 문제였지.” “제가 매직컬초를 봉쇄하고 숨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한 방법이겠지. 그란드와 신성제국이 힘을 드러낼 때까지 버티는 것도 나쁘 지는 않아. 문제는 한타의 백성들이 당할 고통이 문제겠지만.” “그런데도 도와주시지 않으실 겁니까?” “우리 둘의 힘으로 지옥대를 막을 수는 있어도 제란의 나머지 힘을 막을 수 있다는 장담은 어렵지 않겠나?” “그렇다고는 해도 지옥대가 지나간 자리에 남는 것은 폐허와 시체뿐이란 것을 아시 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어쩌라는 것인가 자네도 자네 주위의 사람들을 아끼지 않는가? 나도 내 주위의 사람들을 아낀다네, 마을 하나가 통째로 날아간다고 해도 내 주위의 사람 하나 가 죽는 것 보다는 덜하지. 더구나 눈으로 보지 않으니 더욱 그렇지 않겠나?” “역시.” 우제푸가 무슨 말을 그 뒤에 더 하고 싶었는지는 모르겠다. 자신도 동감이라고 했을지. 너무 이기적이라 했을지.... 우리는 한동안 다시 말없이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매직컬초를 봉쇄하고 메테오를 쓸 생각입니다.”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친 짓이다. 이 쪽에서 그런 방법을 쓴다면 저 쪽에서도 그런 방법을 쓸 것이었다. 물론 9써클 마법을 쓸 수 있는 인물이 몇 되지 않는 것은 사실이고, 대단위 공격 마 법을 막기 위해서 대도시에는 대對마법진이 만들어져 있어서 유사시에는 한 번 정도 는 공격에 대항할 수 있게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이 도시 곳곳에 떨어져 내린다면 엄청난 희생이 생길 것이었다. 지금 우제푸는 나에게 은근히 협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그런 짓을 하기 전에 도와달라는 뜻일 것이다. “대륙 곳곳에 떨어지는 유성들을 볼 수 있겠군.” “보고 계실 겁니까?” “나에게 오는 것은 막을 생각이네. 다른 것들은 모르겠군.” “아마 많이 부서질 겁니다. 하지만 인명피해는 적을 겁니다. 하루 정도 전이면 메테 오가 떨어질 장소를 알 수 있을 테니. 도망을 갈 수 있겠지요.” “그럴 거야.” “정말 말리지 않으실 겁니까?” “지금은 방법이 없어. 차라리 나에게 말고 신성제국의 교황이나 그란드의 왕에게 이 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을 거야.” “....” “메테오를 쓴다고 해도 자네가 하루에 한 번 이상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암흑제 국에서도 하루 두 세 번 이상은 쓰지 못할 거라고 생각이 되는군. 그 정도라면 두 세 달은 지나야 모든 도시들이 날아가지 않겠나? 뭐 그래도 매직컬초는 무사할 것 같군. 워낙 튼튼하니 말이야." 나는 예전에 매직컬초에서 보았던 방어 마법진을 떠올렸다. “알겠습니다. 한타의 백성들의 고통으로도, 아니 모든 사람들을 볼모로 잡아도 루탄 님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군요. 하지만 루탄님이 루탄님 주위의 사람들을 아끼는 것처 럼 저도 제 주위의 제자들과 사람들을 아낍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이지요.” 무언가 섬뜩한 것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저는 매직컬초를 봉쇄하겠습니다. 메테오를 쓸 생각은 없습니다. 그랬다가는 암흑 제국에서 우리들을 곱게 두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우리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들은 절대로 우리를 먼저 건들지 않을 겁니다. 그럼 이만.” 우제푸가 눈앞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우제푸가 몸을 돌려 사라졌지만 왠지 나는 그의 모습에서 섬 뜩함을 느꼈다. 어느 틈에 강물 위로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피의 강이 흐르기 시작했다. 매직컬초가 사방 20키로미터 정도의 영역을 마법으로 봉쇄하고 외부와의 왕래를 차단 한 것은 내가 우제푸를 만나고 난 다음날의 일이었다. 그것은 한타로서는 엄청난 타격이었고, 삼국 동맹으로서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 다. 물론 각 부대에 배치되었던 마법사들은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 최고위 마법사가 겨우 6써클이었다. 전선을 누비던 암흑제국의 지옥대가 드디어 한타의 중심으로 방향을 바꾼 것도 마법 길드가 더 이상 이 싸움에 개입을 하지 않으리란 것을 알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지옥대의 뒤를 따라서 암흑제국의 병사들이 밀려들었다. 한타의 삼분의 일이 암흑제국의 수중에 떨어진 것은 세 번째 달이 시작될 무렵의 일 이었다. 오래지 않아서 암흑제국의 병력들이 ‘수아의 머릿결’에 이르게 될 것이었다. “정말 미치겠네. 오빠, 언제까지 이렇게 보고만 있을 거야?” 풍아가 따지듯 물었다. “글쎄, 그란드와 신성제국이 얼마나 버티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제란의 숨겨진 힘 이 드러나지 않는 이상은 나도 움직일 생각이 없다.” “하지만 너무 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걱정이네요.” 루아가 근심스러운 듯이 옆에서 내 팔을 잡았다. 루아는 아이슈마 사제들 소탕작전 이후로 자주 나에게 오더니 이즈음에는 아예 내 곁 에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물론 타니 때문에 반나절 정도를 나와 있다가 가는 것이었지만,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찾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불쌍한 타니는 그 동안에 란이와 함께 아카데미의 관사에서 놀고 있어야 했다. “힘이 있으면서도 움직이지 않는 그들의 잘못이야. 내 잘못이 아니란 말이지.” 나는 억지스러운 말로 고집을 부렸다. “그건 그렇고 아직도 아이슈마에 대해서는 들어온 정보가 없는 거야? 아르미엘 주교 는 뭐라고 하지 않아?” 나는 건너편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 광아에게 물었다.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아르미엘 사제의 암흑교도 이번 전쟁의 주범으로 지목되어 4개국 전체에서 쫓기는 입장이라 운신이 힘든 모양입니다.” 나는 광아의 대답에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암흑교가 이번 전쟁을 일으킨 과정과 목적에 대해서 이미 3국의 수뇌는 물론 누웬의 황제까지 자세히 알게 되었는데 그것이 나와 광아가 했던 일이기 때문이었다. 비록 먼저 그런 사실을 통보해 주었고, 그들이 한 일이 그만큼의 잘못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나에게 우호적인 아르미엘에게 죄를 지은 듯한 느낌이었다. “결국 이 싸움이 끝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 뿐이겠지. 아이슈마가 없어지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한 일인데... 아직 그 놈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있으니....” 한심스러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를 찾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그런 쪽의 일 이라면 암흑교의 아르미엘 쪽이 더 가능성이 많았다. 나는 솔직히 루시퍼와 소통이 가능하다는 아르미엘이 아이슈마의 위치를 모른다는 말 에도 상당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자꾸만 이 전쟁은 오리무중 속을 헤메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다. “루, 루탄님!!” 쾅! 우당탕! “무, 무슨 일이야? 이렇게 소란스럽게? 일데퐁소?” “나, 나타났습니다.” 일데퐁소의 특기인 말더듬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 중요한 문제가 닥친 모양이었 다. “나타나다니? 뭐가 나타났다는 거야?” 성질 급하기는 화아도 마찬가지다. “제. 제란이요. 제란이 나타났습니다.” 순간 우리들 중에서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들 벌떡 일어나 시선을 일데퐁소에게 맡기고 있었다. “이걸 보십시오. 지금 막 들어온 내용입니다.” 일데퐁소가 보여준 것은 마췬길드에서 지급으로 보낼 때 사용되는 통신 스크롤이었 다. 나는 급히 종이 조각을 받아 읽었다. - 암흑제국 제란 황제 출현. - 지옥대의 뒤를 이어 5개 부대로 나누어진 병력이 집결 이동중 - 각 부대는 4만 정도의 인원으로 구성. 그중 중앙군인 황제는 7만의 병력임. - 현재 한타 왕국 전선 전역에 걸쳐 이동. “아니 이런 사실을 어떻게 지금에서야 알 수 있다는 거야? 그 동안에 이런 병력의 움직임을 몰랐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이야?” 나는 종이 조각을 광아에게 넘기며 소리를 질렀다. 광아는 내가 넘겨준 종이를 훑어보고는 얼굴이 굳어졌다. “이십삼만의 병사들이란 이십삼만의 병력이 소리 소문 없이 움직였다는 말이군요. 아마도 지금까지 숨겨 놓았던 병력이 아니라면 새로 어딘가에서 솟아난 것이 분명하군 요.” “무슨 소리야? 숨겨 놓았거나 어딘가에서 솟아나다니?” “그러니까 이 병력들은 암흑제국에서 기존에 파악된 병사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전혀 파악되지 않았던 병력들이라는 거지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자그마치 이십삼만이 어디에서 숨어 있다가 나온다는 거냐? 우리 아카데미만 하더라도 겨우 전체 인원이 1만이 안되는 데도 다른 나라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눈치를 채지 않았냐? 그런데 마췬길드가 돌아가는데 그런 상황에 서 눈을 피할 수가 있단 말이냐?” “그럼 이 병력들은 일순간에 생겨난 것들이겠군요.” 광아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는 나에게 무표정하게 말했다. “하지만, 어떻게 23만의 병력이 나올 수가 있다는 거냐.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 냐?” “분명합니다. 새로 생긴 부대입니다. 길드에서 이런 큰 움직임을 놓칠 까닭이 없습 니다.” 광아는 분명한 확신하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와 함께 방의 한쪽 모서리에서 마력의 움직임과 함께 순간이동이 일어났다. 빛과 함께 나타난 것은 아르미엘 암흑교 교주와 아세트였다. “어서 오십시오. 소식을 들으신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루탄님. 아울러 전해드릴 말씀도 있고요.” 아르미엘이 입을 열었다. “우선 자리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요. 서서 이야기를 하고 떠날 정도로 짧 은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내 권유에 따라서 아르미엘 교주와 아세트가 의자를 끌어 앉았다. “우선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어느 것을 들으시겠습니까?” “나쁜 소식부터 듣고 싶군요. 좋은 음식은 남겼다가 나중에 먹는 습관이 있어 서...” “그럼 우선 나쁜 소식을 알려 드리지요. 아이슈마가 상당한 힘을 회복했습니다. 그 사이에 그 정도의 힘을 회복했다는 것이 의아하게 생각될 정도로 힘을 회복했더군요. 그 힘이 마계에서도 느껴질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그럼 아이슈마의 위치를 파악했다는 말입니까?” 나는 아르미엘의 말에 마음이 급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아르미엘은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나쁜 소식에 이어서 좋은 소식은 아이슈마가 회복했던 힘을 한꺼번에 쏟아서 제란 에게 힘을 실어주고 깊은 잠에 들었다는 것입니다. 마계에서 파악하기로는 약 400년에 서 500년 정도는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은 깨어나지 않을 것 같다고 합니다.” “아니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나는 어이없는 상황에 허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이게 좋은 소식만은 아닙니다. 불행하게도 아이슈마가 이번에 무슨 생각으 로 이런 일을 벌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이번 일로 해서 4계에서는 인간계에 간섭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혹시나 문제가 심각해지면 루시퍼님께서라도 나서실 생각이었지만 그리고 그 빌미로 루탄님의 손에 새겨진 인장을 사용할 생각이었 지만 그게 이젠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젠 완전히 각 계로 통하는 문들 닫게 생겼 으니 말입니다. 다른 계와의 의견수렴이 그렇게 되었다는 군요. 이젠 인간계에 대한 간섭을 금한다는... 거기다가 아이슈마가 마지막을 쏟아 놓은 힘이 지금 몰려오고 있 는 제란의 군대입니다. 실제로는 아이슈마의 마력으로 되살아난 언데드군단이라고 봐 야 합니다. 그 동안에 전선에서 죽었던 양 국의 병력들이 도합 10만에 가깝게 되는데 거기에 더해서 제란이 전선에 깔아 두었던 병력들이 합해져서 이루어진 것이 이번 제 란의 5개 부대들입니다. 그러니까 죽었던 병사들이 전부 되살아나서 제란의 병사들이 되었다고 보면 됩니다. 물론 한 번 죽었던 병사들이기 때문에 잘 죽지 않을 것이란 점 은 설명 드리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일단 그런 병사들에게는 신성사제들이 큰 힘을 발휘하겠지만 신성사제들이 전투력이 없기 때문에 성기사들이 효과적일 수도 있겠군 요. 아무튼 이젠 제란과 그 병사들만 막으면 당분간은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 는 좋은 소식이지요.” 나는 아르미엘의 말을 들으면서 어느 정도 머리 속을 정리했다. 이제 남은 것은 제란 뿐이다. 아이슈마를 걱정하지는 않아도 된다. 그것은 참으로 다 행스러운 일이다. 몇 백년 뒤에 일어날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설마 4계에서 함께 내린 판단인데 그것이 틀릴 리는 없으니 분명 그 쪽은 걱정이 없을 것이 었다. 하지만 아이슈마가 그렇게 숨어들기로 했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그것도 그냥 숨은 것이 아니라 그 정도의 힘을 쏟아 붓고 숨었다면 분명 무슨 계획 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 그것을 지금 파악할 수는 없을 것 같고, 그럼 제란을 막아야 하는데... “아르미엘 교주님, 혹시 제란의 군대가 지닌 힘이 어느 정도가 될지 예측할 수 있습 니까?” “글쎄요. 정확하지는 않아도 지금 앞에서 날뛰는 지옥대라는 부대가 제란의 1만 병 사와 붙으면 이기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됩니다만... 더구나 지금 몰려 오는 제란의 병사들 중에서 정상적인 병사들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겁니다. 모 두들 아이슈마의 기운을 받은 자들이니...” 젠장. 지옥대. 그 이름만으로도 한타와 그란드의 병사들이 꽁무니를 빼는 상황에 지 옥대가 이십삼 부대라고? “형님, 만약에 저들의 군세가 정말 그 정도라면 이젠 막을 도리가 없습니다. 우리들 이 가진 힘을 총 동원하면 한꺼번에 지옥대 2개 정도를 감당할 것입니다만, 그 이후에 는 전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스물 셋입니다. 상대가 안됩니다. 매직컬초가 한개 내 지는 두개를 책임지고 신성제국에서 두 개 혹은 네 개, 그란드에서 두 개. 대략 따지 고 봐도 제란의 이십 삼만 중에서 십만 정도가 전력을 다한 상태에서 막을 수 있는 한 계입니다. 거기에 더해서 3국이 전력을 다한다고 하면 삼에서 사만 정도.... 이길 수 없는 싸움이 되었군요. 아이슈마가 마음 놓고 동면에 든 것이 이해가 가는 군요. 이제 는 제란이 모든 인간들을 통제하며 아이슈마의 세상으로 만들어서 4백년 정도 지난 후 에 아이슈마에게 바치면 되겠군요. 그 사이에 이 땅위에 아이슈마의 사원들이 우후죽 순으로 늘어나겠지요. 잠들어 있는 아이슈마에게 힘을 주기 위해서...” 광아는 나름대로 그렇게 분석을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별로 가능성이 없어 보이지도 않는 추측이었다. 막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화아, 풍아, 수아, 지토가 모두들 입을 다물고 어두운 얼굴을 했다. 내 팔을 잡는 루아의 손이 떨리고 있다. “제란이 한타 쪽으로 들어오고 있단 말이지? 그란드 쪽으로는 부대를 보내지 않 고?” “그렇습니다. 아마도 한꺼번에 그렇게 넓은 전선을 구축하는 것은 낭비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래 그렇겠지. 이왕이면 각개격파를 하는 쪽이 좋겠지. 그럼 누웬은 제일 나중에 들어갈 생각일까? 황제녀석 그나마 오래 살겠군.” 아르미엘이 말해 준 전력이라면 그걸 막을 도리가 없었다. 아니다. 3국이 전력을 다해서 막는다면 그러니까 완전한 전력을 모두 동원한다면 겨 우 양패구상을 할 정도는 될까? 아니 그래도 지겠군. 거기에 누웬의 황제가 손을 보테 면 이길 수는 있을까? 하지만 암흑제국의 남부 지역의 전력이 동원된다면 그것도 어려 울 수 있었다. 아이슈마가 만들어 낸 그 군대의 힘이란 것은 그런 예측이 가능할 정도의 전력이었 다. 갑작스럽게 숱하게 많은 사람들이 순간이동을 곳곳으로 모여들어 회의와 토론이 이어 졌다. 그 동안의 여유로운 작전회의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남아있는 삼국의 불협화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모두들 위기감을 절실하게 느끼는 모습이었다. 그 예로는 드디어 신성제국의 제국회의 의장인 화염기사단의 단장과 그란 드 왕국의 노부인이 모습을 나타낸 것을 들 수 있었다. 그들은 실제적인 각국 무력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들을 모두 전했고(아르미엘이 알려준 내용이 대 부분이었다.) 그들은 그 정보를 바탕으로 그동안 산발적으로 제란의 부대와 벌인 전투 를 대입해 보고는 혈색이 빠진 얼굴이 되었다. 그렇게 제란의 군대는 천천히 한타를 거슬러 올라오고 있었다. 이미 매직컬초를 지난 제란의 부대였다. 내일이면 수아의 머릿결을 넘을 것이었다. 그런 중에 우리들도 후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비아더와 미아더 형제는 자신들의 여관을 떠나는 것을 안타까워 했지만 지금으로서 는 도망가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내일 우리가 만날 부대는 제란의 부대였다. 중앙-제란, 우익-카튼부대. 차次우익-붐저브. 좌익-트롤라이런. 차次좌익-차구므진. 이들은 이렇게 열을 지어서 이동중인 것이었다. 전열의 흐트러짐은 없었다. 좌표상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정확하게 일렬로 늘어선 가운데 한타 북쪽으로 거슬 러 오르는 것이다. “이젠 서둘러 이동을 해야겠군.” “이번에는 한꺼번에 이동을 하실 거지요? 따로 떨어져서 움직일 필요가 없잖아요. 전부 4천도 되지 않는 인원인걸요. 더구나 넥스 영주님은 따로 떨어져 계시니까.” 이 동을 앞두고 수아가 옆으로 말을 몰아 다가서며 물었다. “그래. 굳이 떨어질 필요가 없겠지.” “그런데 굳이 그렇게 멀리까지 이동을 할 필요가 있어? 아카데미까지 돌아간다 니...” 화아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불만을 토했다. “필요 있습니다. 형님. 우리들이 가까이 있으면 어떻게든 우리 부대를 이용하려는 생각들을 삼국의 수뇌들이 할 테니까 아예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겁니다. 싸울 생각이 있다면 함께 싸우자는 것이지요.” 뭐 광아의 대답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더 큰 이유가 있었다. 나는 이번에 후 퇴를 하게 되면 더 이상 이 전쟁에 개입을 하지 않고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봉인을 해 버릴 생각이었다. 반발하는 사람들은 내 보내고 결계를 사용해서 그 봉인진을 만들고 칩거를 해 버릴 생각인 것이다. 모든 사람들을 다 감싸고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싸움에 끼어들면 피를 보지 않을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렇다고 내가 자유롭게 살도록 세상이 나를 그냥 두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나와 우리 가족들을 격리시키기로 했다. 내가 무슨 영웅도 아니고 세상의 사람들을 모두 구하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할 생각도 없었다. 그 때문에 희생시키기에는 너무도 아쉬운 것들이 많았다. 그렇다고 내가 하고자 하는 대로 모두를 끌고 갈 생각도 없었다. 아카데미에 도착하면 나름대로 방법을 찾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일단은 조용히 일행들을 이끌고 가야 했다. 누구에게도 내 속내를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비겁한 짓이니까. 그와 함께 방의 한쪽 모서리에서 마력의 움직임과 함께 순간이동이 일어났다. 빛과 함께 나타난 것은 아르미엘 암흑교 교주와 아세트였다. “어서 오십시오. 소식을 들으신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루탄님. 아울러 전해드릴 말씀도 있고요.” 아르미엘이 입을 열었다. “우선 자리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요. 서서 이야기를 하고 떠날 정도로 짧 은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내 권유에 따라서 아르미엘 교주와 아세트가 의자를 끌어 앉았다. “우선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어느 것을 들으시겠습니까?” “나쁜 소식부터 듣고 싶군요. 좋은 음식은 남겼다가 나중에 먹는 습관이 있어 서...” “그럼 우선 나쁜 소식을 알려 드리지요. 아이슈마가 상당한 힘을 회복했습니다. 그 사이에 그 정도의 힘을 회복했다는 것이 의아하게 생각될 정도로 힘을 회복했더군요. 그 힘이 마계에서도 느껴질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그럼 아이슈마의 위치를 파악했다는 말입니까?” 나는 아르미엘의 말에 마음이 급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아르미엘은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나쁜 소식에 이어서 좋은 소식은 아이슈마가 회복했던 힘을 한꺼번에 쏟아서 제란 에게 힘을 실어주고 깊은 잠에 들었다는 것입니다. 마계에서 파악하기로는 약 400년에 서 500년 정도는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은 깨어나지 않을 것 같다고 합니다.” “아니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나는 어이없는 상황에 허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이게 좋은 소식만은 아닙니다. 불행하게도 아이슈마가 이번에 무슨 생각으 로 이런 일을 벌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이번 일로 해서 4계에서는 인간계에 간섭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혹시나 문제가 심각해지면 루시퍼님께서라도 나서실 생각이었지만 그리고 그 빌미로 루탄님의 손에 새겨진 인장을 사용할 생각이었 지만 그게 이젠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젠 완전히 각 계로 통하는 문들 닫게 생겼 으니 말입니다. 다른 계와의 의견수렴이 그렇게 되었다는 군요. 이젠 인간계에 대한 간섭을 금한다는... 거기다가 아이슈마가 마지막을 쏟아 놓은 힘이 지금 몰려오고 있 는 제란의 군대입니다. 실제로는 아이슈마의 마력으로 되살아난 언데드군단이라고 봐 야 합니다. 그 동안에 전선에서 죽었던 양 국의 병력들이 도합 10만에 가깝게 되는데 거기에 더해서 제란이 전선에 깔아 두었던 병력들이 합해져서 이루어진 것이 이번 제 란의 5개 부대들입니다. 그러니까 죽었던 병사들이 전부 되살아나서 제란의 병사들이 되었다고 보면 됩니다. 물론 한 번 죽었던 병사들이기 때문에 잘 죽지 않을 것이란 점 은 설명 드리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일단 그런 병사들에게는 신성사제들이 큰 힘을 발휘하겠지만 신성사제들이 전투력이 없기 때문에 성기사들이 효과적일 수도 있겠군 요. 아무튼 이젠 제란과 그 병사들만 막으면 당분간은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 는 좋은 소식이지요.” 나는 아르미엘의 말을 들으면서 어느 정도 머리 속을 정리했다. 이제 남은 것은 제란 뿐이다. 아이슈마를 걱정하지는 않아도 된다. 그것은 참으로 다 행스러운 일이다. 몇 백년 뒤에 일어날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설마 4계에서 함께 내린 판단인데 그것이 틀릴 리는 없으니 분명 그 쪽은 걱정이 없을 것이 었다. 하지만 아이슈마가 그렇게 숨어들기로 했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그것도 그냥 숨은 것이 아니라 그 정도의 힘을 쏟아 붓고 숨었다면 분명 무슨 계획 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 그것을 지금 파악할 수는 없을 것 같고, 그럼 제란을 막아야 하는데... “아르미엘 교주님, 혹시 제란의 군대가 지닌 힘이 어느 정도가 될지 예측할 수 있습 니까?” “글쎄요. 정확하지는 않아도 지금 앞에서 날뛰는 지옥대라는 부대가 제란의 1만 병 사와 붙으면 이기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됩니다만... 더구나 지금 몰려 오는 제란의 병사들 중에서 정상적인 병사들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겁니다. 모 두들 아이슈마의 기운을 받은 자들이니...” 젠장. 지옥대. 그 이름만으로도 한타와 그란드의 병사들이 꽁무니를 빼는 상황에 지 옥대가 이십삼 부대라고? “형님, 만약에 저들의 군세가 정말 그 정도라면 이젠 막을 도리가 없습니다. 우리들 이 가진 힘을 총 동원하면 한꺼번에 지옥대 2개 정도를 감당할 것입니다만, 그 이후에 는 전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스물 셋입니다. 상대가 안됩니다. 매직컬초가 한개 내 지는 두개를 책임지고 신성제국에서 두 개 혹은 네 개, 그란드에서 두 개. 대략 따지 고 봐도 제란의 이십 삼만 중에서 십만 정도가 전력을 다한 상태에서 막을 수 있는 한 계입니다. 거기에 더해서 3국이 전력을 다한다고 하면 삼에서 사만 정도.... 이길 수 없는 싸움이 되었군요. 아이슈마가 마음 놓고 동면에 든 것이 이해가 가는 군요. 이제 는 제란이 모든 인간들을 통제하며 아이슈마의 세상으로 만들어서 4백년 정도 지난 후 에 아이슈마에게 바치면 되겠군요. 그 사이에 이 땅위에 아이슈마의 사원들이 우후죽 순으로 늘어나겠지요. 잠들어 있는 아이슈마에게 힘을 주기 위해서...” 광아는 나름대로 그렇게 분석을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별로 가능성이 없어 보이지도 않는 추측이었다. 막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화아, 풍아, 수아, 지토가 모두들 입을 다물고 어두운 얼굴을 했다. 내 팔을 잡는 루아의 손이 떨리고 있다. “제란이 한타 쪽으로 들어오고 있단 말이지? 그란드 쪽으로는 부대를 보내지 않 고?” “그렇습니다. 아마도 한꺼번에 그렇게 넓은 전선을 구축하는 것은 낭비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래 그렇겠지. 이왕이면 각개격파를 하는 쪽이 좋겠지. 그럼 누웬은 제일 나중에 들어갈 생각일까? 황제녀석 그나마 오래 살겠군.” 아르미엘이 말해 준 전력이라면 그걸 막을 도리가 없었다. 아니다. 3국이 전력을 다해서 막는다면 그러니까 완전한 전력을 모두 동원한다면 겨 우 양패구상을 할 정도는 될까? 아니 그래도 지겠군. 거기에 누웬의 황제가 손을 보테 면 이길 수는 있을까? 하지만 암흑제국의 남부 지역의 전력이 동원된다면 그것도 어려 울 수 있었다. 아이슈마가 만들어 낸 그 군대의 힘이란 것은 그런 예측이 가능할 정도의 전력이었 다. 갑작스럽게 숱하게 많은 사람들이 순간이동을 곳곳으로 모여들어 회의와 토론이 이어 졌다. 그 동안의 여유로운 작전회의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남아있는 삼국의 불협화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모두들 위기감을 절실하게 느끼는 모습이었다. 그 예로는 드디어 신성제국의 제국회의 의장인 화염기사단의 단장과 그란 드 왕국의 노부인이 모습을 나타낸 것을 들 수 있었다. 그들은 실제적인 각국 무력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들을 모두 전했고(아르미엘이 알려준 내용이 대 부분이었다.) 그들은 그 정보를 바탕으로 그동안 산발적으로 제란의 부대와 벌인 전투 를 대입해 보고는 혈색이 빠진 얼굴이 되었다. 그렇게 제란의 군대는 천천히 한타를 거슬러 올라오고 있었다. 이미 매직컬초를 지난 제란의 부대였다. 내일이면 수아의 머릿결을 넘을 것이었다. 그런 중에 우리들도 후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비아더와 미아더 형제는 자신들의 여관을 떠나는 것을 안타까워 했지만 지금으로서 는 도망가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내일 우리가 만날 부대는 제란의 부대였다. 중앙-제란, 우익-카튼부대. 차次우익-붐저브. 좌익-트롤라이런. 차次좌익-차구므진. 이들은 이렇게 열을 지어서 이동중인 것이었다. 전열의 흐트러짐은 없었다. 좌표상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정확하게 일렬로 늘어선 가운데 한타 북쪽으로 거슬 러 오르는 것이다. “이젠 서둘러 이동을 해야겠군.” “이번에는 한꺼번에 이동을 하실 거지요? 따로 떨어져서 움직일 필요가 없잖아요. 전부 4천도 되지 않는 인원인걸요. 더구나 넥스 영주님은 따로 떨어져 계시니까.” 이 동을 앞두고 수아가 옆으로 말을 몰아 다가서며 물었다. “그래. 굳이 떨어질 필요가 없겠지.” “그런데 굳이 그렇게 멀리까지 이동을 할 필요가 있어? 아카데미까지 돌아간다 니...” 화아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불만을 토했다. “필요 있습니다. 형님. 우리들이 가까이 있으면 어떻게든 우리 부대를 이용하려는 생각들을 삼국의 수뇌들이 할 테니까 아예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겁니다. 싸울 생각이 있다면 함께 싸우자는 것이지요.” 뭐 광아의 대답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더 큰 이유가 있었다. 나는 이번에 후 퇴를 하게 되면 더 이상 이 전쟁에 개입을 하지 않고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봉인을 해 버릴 생각이었다. 반발하는 사람들은 내 보내고 결계를 사용해서 그 봉인진을 만들고 칩거를 해 버릴 생각인 것이다. 모든 사람들을 다 감싸고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싸움에 끼어들면 피를 보지 않을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렇다고 내가 자유롭게 살도록 세상이 나를 그냥 두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나와 우리 가족들을 격리시키기로 했다. 내가 무슨 영웅도 아니고 세상의 사람들을 모두 구하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할 생각도 없었다. 그 때문에 희생시키기에는 너무도 아쉬운 것들이 많았다. 그렇다고 내가 하고자 하는 대로 모두를 끌고 갈 생각도 없었다. 아카데미에 도착하면 나름대로 방법을 찾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일단은 조용히 일행들을 이끌고 가야 했다. 누구에게도 내 속내를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비겁한 짓이니까. 전쟁의 기운은 한타의 백성들을 공포에 떨게 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진행되던 전쟁은 그야말로 국경선에서 벌어지는 멀고 먼 이야기였지만, 이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이젠 국경선이 제란을 따라 북상하고 있었고, 제란의 군대가 지나가고도 무사히 남 아 있는 것은 매직컬초 하나뿐이었다. 그 이외의 모든 마을들은 파괴되었고 도망친 백 성들은 산으로 들로 숨어 다니다가 때로는 암흑제국의 병사들에게 잡혀 죽었고, 때로 는 갑작스럽게 늘어난 괴물들에게 잡혀 먹혔다. 그런 소문은 점차 공포를 몰고 북으로 북으로 제란을 앞서서 전격해 오고 있었고, 우 리 부대가 지나가는 마을들은 우리 부대 뒤로 더 이상은 자신들을 막아 줄 것이 없다 고 느끼는 듯 서둘러 피난 짐꾸러미를 꾸리곤 했다. 봄이 되고 이제 씨를 뿌려야할 농토에는 아직 쟁기질도 하지 않고 버려진 작년의 추 수 흔적이 썪어가고 있을 뿐. 어쩌면 앞을 내다보는 많은 사람들은 이번 가을에 있을 대기근大饑饉을 예상하고 있 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들은 빠르게 후퇴했고, 제란의 부대는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더구나 이제는 물러 설 수 없다고 느낀 한타의 왕실에서 조차도 한타리아 궁성을 버 리지 않고 수성을 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며칠이라도 제란의 북진을 막아 줄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 소식을 숨가쁘게 들으며 우리들은 ‘수아의 머릿결’에서 아카데미로 전속 이동 을 하고 있었다. 보통 25일 정도 걸릴 거리였지만 나는 18일 이내에 돌파를 할 생각이었다. 어쩌면 준비하는데 시간이 모자를 수도 있었다. 나는 하루하루 앞으로 전개될 싸움에서 내 사랑하는 사람들을 피하게 하는데에만 정 신이 팔려 있었다. 이성의 한 부분에서는 나를 향한 갖은 욕설들이 들려오고 있었지만, 그래 어쩌란 말 인가? 승산 없는 싸움을 위해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하라는 것인 가? 예전 아이슈마의 사제들이 머리를 만들기 위해 끌고 다니던 포로들이 생각난다. 그들은 오래지 않아 죽게 될 것을 알면서도 조금이라도 오래 살기 위해서 조용히 끌 려 다니는 쪽을 택했었다. 그런데 어쩌란 말인가. 나는 내 사랑하는 사람들을 살리고 싶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제란의 손아귀에 들어가도 내 가족과 친구들은 피하게 해 주 고 싶었다. 우제푸가 그의 제자들과 길드원을 이끌고 매직컬초를 봉쇄한 것처럼. 나도 그렇게 피하고 싶은 것이다. 동생들과 지토는 내 마음을 알 것이었다. 그들은 내 심정을 알고 있을 것이다. 언제나 그랬었다. 지금도 그들은 나를 안다. 그 렇지만 그들은 침묵하고 있었다. 차라리 욕을 하지... 그렇게 나는 피말리는 갈등을 겪으며 아카데미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한타리아는 단지 이틀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아니 실제로 싸움을 하기는 한나절이 고작이었다. 아침에 공격이 시작되어서 저녁을 넘기지 못하고 무너진 것이다. 루이스 마치 한타는 소수의 호위병과 함께 성을 탈출했다. 자이건 선드라스가 함께 움직이고 있다고 한다. 한타리아의 모든 것은 불길에 타올랐다. 사람들과 집들과 모든 재화가 불길에 타올랐다. 제란의 군대가 지나온 뒤로 남은 것이 없었던 것처럼 한타의 궁성조차도 남기지 않았 다. 그렇게 한타의 절반이 잿더미가 되었다. 사람들은 간신히 몸을 숨기고 살아남은 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몸뚱이 이외에는 남 은 것이 없었다. 그와 함께 제란의 포고령이 내렸다. - 일체의 무기와 도구의 사용을 금한다. 불의 사용을 금한다. 옷의 착용을 금한다. 한타의 백성들은 알몸으로 토굴 속에 사는 것을 허용한다. 이를 어기면 발견 즉시 처 형한다. 나는 제란의 포고령이 뜻하는 바를 알았다. 전에 아이슈마의 사제들이 나누던 이야기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미개하고 어리석은 인간들이야 몇 십 년이 지나기 전에 길들일 수 있을 것입니 다. 교육이란, 특히 반복이란 무서운 것이지요.” “맞습니다. 이성이 발달하는 것은 믿음에 대한 순수를 떨어뜨리지요. 그저 미개하 고 어리석은 것들이 맹목적인 추종을 하지요. 그리고 그것들을 통제하는 것이면 우리 들 아이슈마님의 자식들이면 족한 것이지요. 어차피 지금의 행정이나 군대들도 머잖 아 필요가 없어질 것입니다.” “그렇지요. 분명이 몇 십 년이 지나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할 일들이 많지요. 일단은 인간계의 모든 지식들을 묻어 버릴 필요 가 있습니다. 지식이라는 것은 독점할 필요가 있어요. 다른 것들은 확실하게 우민화 를 시켜야 합니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그것도 백년이 지나기 전에 가능할 것입니다. 물론 완전하 게 그런 상태를 만드는 것은 좀 더 시일이 걸릴 것이지만...” 제란이 원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자신이 점령한 모든 지역에서 인간의 문명을 말살하고 있는 것이다. 윤리와 도덕은 당연히 없는 것이다. 인간은 짐승처럼 살게 될 것이었다. 물론 그것이 언제까지나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에 시간이 지나고 자포자기한 인간들에게 약간의 선심을 쓰며 교육을 시킨다. 아마도 모든 자비는 아이슈마의 이름으로 행해지지 않을까? 그러면서 한쪽에서는 탄압이 이루어지겠지. 멋진 계획이다. 처음부터 아이슈마가 계획했던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공포는 더욱 빠르게 확산되었다. 이제는 우리가 달리는 속도보다 피난 행렬이 앞장서고 있었다. 피난은 북서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들의 목표는 누웬이었다. 아직 싸움에 휘말리지 않은 누웬으로 한타의 많은 백성들이 발길을 옮기고있었다. 하지만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한타로 가는 길은 환수들의 영역이었다. 그동안에 많은 환수들이 제압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안전한 지역이라고 할 수는 없 었다. 아니 몹시 위험한 곳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을 그 위험을 감수하고 누웬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우리 부대는 그런 피난 행렬을 추월하며 북서로 달렸다. 그리고 예정보다 하루 앞당겨 사월이 시작되고 이틀만에 아카데미에 도착할 수 있었 다. 아카데미에 도착하고 다시 일주일이 흐르는 동안에 나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바위정령족의 도움을 남모르게 받으며 나는 일주일을 순가도 쉬지 않고 돌아다녔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 아카데미의 학생들고 넥스 영지의 기사들을 모두 모아서 자리 를 만들었다. 산 안쪽으로 깎아 만든 바위정령족의 역작 중에 하나인 이 광장은 루아가 자이곱과 함께 기사단의 훈련장으로 쓰던 그곳이다. 지금 이 광장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혹은 서고, 혹은 앉아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 는 중이다. 물론 그 기다림의 대상은 바로 나였다. 나는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며 단상으로 향했다. “그대로들 있어요. 모두들 편하게. 오늘 이야기는 길어 질 겁니다. 그러니 어려운 자세를 취할 필요는 없어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단상으로 걸어가 두 다리를 단상 아래로 내리고 단상에 걸터앉 았다. “지금 여기 이 자리에는 아카데미의 학생 4천, 화염. 얼음. 강철. 야전대의 기사단 2600명. 그리고 그 지휘관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빠진 분은 자이건 선드라스 강철기사 단장. 아세트 공작님. 넥스 영주님. 아르미엘 교주님. 그리고 넥스 영지에 있는 크라 이안 집사님과 영지를 지키는 약간의 기사들이 전부입니다. 나는 이제 여러분들의 의 견을 물어볼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 라서 신중히 생각하고 결정하기 바랍니다.” 내 말에 약간의 소요가 있었다. 웅성거리는 소리는 바위정령족의 위해한 건축술로 만들어 졌다는 광장에서 자연스럽 게 흡수되어 방향이 생기지는 않았지만 점차 커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늘어나 고 있었다. “잠시 조용히 하시고 제 이야기를 마저 들어 주시기 바람니다.” 나는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제란의 부대에 대한 것은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군대에 대 해서 우리가 취할 행동이 무엇인지도 대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저들과 싸 워서 이길 수가 없습니다. 솔직히 삼국이 모두 일치단결 한다고 해도 가능성이 20%가 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거기에 누웬이 더해진다면 60%정도의 가능성이 생깁니다. 하지 만 이것은 5개국 전체가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난 상태가 되리라는 것입니 다. 결국 승자도 패자도 없게 되겠지요. 그것도 4개 나라가 일치단결을 한 경우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결론은? 우린 질 수 밖에 없는 싸움을 앞두고 있다는 겁니다.” 다시 한 번 소란이 광장을 휩쓸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의 소란이 멈추기를 기다려 말을 다시 이었다. “나는 결심을 했습니다. 매직컬초를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들은 무사합니다. 적어 도 아직까지는 말입니다. 비록 그들만의 안전이지만... 저도 그 길을 택할까합니다. 대단위 봉인과 결계를 만들고 외부와 단절된 상태로 소수의 사람들만이 살아가는 그 런 ....” 나는 사람들의 눈에서 허탈감을 읽을 수 있었다. 분노와 좌절과 조롱의 눈빛도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제란과 맞서 싸우자고 하는 분들이 계 실 것이고, 싸움을 피하지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신념입니다. 자신 이 옳다는 것을 위해서 어떤 일이든 하고자 하는 것을 막을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누구에게 강요하지 마십시오. 지금은 누구의 부하도 아니고 상관도 아 닙니다. 나는 여러분을 책임지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저 나일뿐입니다. 이 상태에서 스스로의 길을 결정하자는 것입니다. 시간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필패할 수밖에 없 는 싸움을 앞두고 있으며 나는 적어도 제란의 부대가 들어오지 못할 작은 결계를 칠 재주는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싸움을 피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지낼 장소는 넥스영 지가 될 것입니다. 넥스영지 전체에 결계를 칠 것입니다. 그 이상은 무리입니다. 세 상 전체에 결계를 칠 재주가 있었다면 넥스영지가 아닌 제란에게 결계를 쳤을 것입니 다. 아무쪼록 심사숙고 하시고 모레 해가 뜰 때까지 결정을 하시기 바랍니다. 이곳에 서 넥스 영지로 통하는 마법진은 열어 두겠습니다. 물론 넥스 영지에서 이곳으로 오 는 마법진도 열려 있습니다. 혹시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다녀오실 수 있 도록 배려한 것입니다. 시간을 많이 드리지 못해 미안합니다.” 나는 말을 마쳤다. “교장선생님. 그러니까 우리들에게 무얼 결정하라는 것입니까? 제란과 싸울 것이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넥스 영지로 가서 삶을 도모할 것이냐 아니면 자 신의 가족들에게 돌아가 운명에 순응하는 삶을 살 것이냐를 결정하라는 것입니까. 저 는 무엇을 결정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것은 스스로 결정하세요. 학생들의 경우에는 지금 가족들에게 돌아가고 싶다 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방학이면 집으로 가기위해 썼던 스크롤을 사용하면 되겠지 요. 그것이 없는 사람들은 나에게 오면 가까운 도시로 이동을 시켜 주겠습니다. 다만 한타리아 이남 지역의 한타왕국 학생들은 지금 돌아갈 집이 없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 고 싶군요.” 내 말에 학생들은 다시 한 번 소란을 일으켰다. “결계 안에 들어가면 언제 다시 나올 수 있습니까?” “아마 다시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럼 그 작은 영지가 세상의 전부가 된다는 말씀입니까?” “아마 그렇게 될 겁니다. 제란과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만약 밖에 남으면 어떻게 되리라고 예상하십니까?” “나는 미래를 볼 줄은 모릅니다. 그저 객관적인 전력에 따른 분석으로 예측한 추측 만을 이야기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 추측에 따르면 이 상태로 간다면 제란에 의한 거대 국가가 탄생할 것이고,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이 오랜 시간 항전을 할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다가 점점 제란의 국가가 안정을 찾기 시작하고 그 국가의 백성 들이 제란의 계획대로 아이슈마를 믿는 신도들이 된다면 그 상황을 뒤집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씀은 아주 오랫동안 희망을 꿈꾸는 사람들이 남아 있으리란 말씀이군요.” 나는 또랑또랑한 눈빛으로 질문을 던지는 학생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그는 아무리 제란이 모든 국가를 휩쓸어도 모든 인간을 굴복 시킬 수는 없으리란 점 을 들어 나의 행동이 비겁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렇지요. 완전히 모든 사람들이 아이슈마의 뜻에 따라 움직이게 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것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 될 겁니다.” 나는 그를 인정했다. 그가 다른 사람들의 결정에 영향을 줄 선동을 하고 있다는 것 도 묵인했다. “알겠습니다.” 그 학생은 그렇게 말하고는 앉았다. 더 이상 나를 곤란하게 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 다. “넥스 영지로 들어가는 것이 도피라는 것을 부인할 생각은 없습니다. 나는 대의를 따라 살기에는 가진 것이 너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럼 심사숙고하기 바랍니다.” 말을 마친 나는 단상에서 내려왔다. 내 뒤를 동생들과 지토, 루아와 자이곱이 따라왔다. “결국 그렇게 결정을 한 거냐?” “그래, 어쩔 수 없는 거 아니냐? 솔직히 이런 경우에 대의大義를 위해서 자신을 희 생하고 가족을 위험에 빠트리는 것만이 옳은 일이라고 할 수는 없는 거 아냐? 그러니 그런 눈빛으로 날 보지 마라.” “큼, 내가 무슨 눈빛을 했다는 거냐? 그냥 물어 본 것뿐이다.” 나와 지토가 이렇게 신경전을 펼치고 있는 것은 우리집의 거실이다. 물론 우리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나를 따라 온 사람들이 전부 함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조금 의외이긴 해요. 이럴 거라면 처음부터 기사들을 훈련시킬 필요도 없었고, 아 카데미를 만들 필요도 없었잖아요. 처음에는 제란에 맞서서 싸울 생각이었던 아니에 요?” 루아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맞아. 그랬었어. 지키고 싶었지. 내가 아는 사람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고 싶 었어. 하지만 지금은 지키려는 것이 도리어 위험에 빠트리는 결과를 가져올 게 분명 해 보이거든. 그래서 이런 결정을 내린 거야.” 나는 제란의 군대가 지닌 힘에 대해서 다시 한번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물론 나에게 비겁하다고 욕하거나 손가락질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해. 그것도 맞는 말이거든. 백에 하나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그 가능성을 위해서 노력해야 하지 않 느냐고 강변强辯하는 사람들도 있지.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가족을 희생하 고 다른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인물들이 되었지. 하지만 나는 내가 지닌 힘에 비해서 작고 소박한 꿈을 꾸는 사람이다. 다시 한 번 이야기 하지만 난 평범한 사람일 뿐이 야. 나와 내 가족과 친구의 죽음을 겁내는 그런 사람일 뿐이지.” “알고 있습니다. 형님. 어쩌면 형님에게 우리들과 형수님, 타니가 없었다면 차라리 제란에 맞서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요. 형님은 그런 분입니다. 자신이 사랑하고, 자 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면, 모두를 사랑할 수 있는 분이지만, 자기를 사랑하고 자 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들이 세상의 전부가 되시는 분이지요.” “그래, 맞아 루탄형은 그런 사람이지.” “우리들 중에서 누구도 루탄 오빠에게 욕하는 사람은 없을 거야.” “맞아. 그럼. 그럼.” 모두들 나를 이해해 주려는 마음들이 고맙다. 그렇다고 이렇게 가슴을 짓누르는 느낌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우리들은 그렇게 무거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지만, 곧 자기 방에서 란이와 놀다 가 견디지 못하고 거실에서 2층으로 오르는 계단 옆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 민 타니를 발견하고는 그런 분위기를 순식간에 날려 버렸다. 작은 손 발로 꼼지락 거리며 어떤 행동을 해도 시선을 집중시키는 타니는 우리가 모 든 근심을 내려놓을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일부러 그런 타니와 어울려 놀면서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신경을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또, 밤이 흘러가고, 약속한 아침이 되었다. “아카데미 안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네요. 모두들 떠난 모양이군요.” “그렇겠지. 넥스 영지에 있던가 아니면 자기들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갔겠지. 가족 들에게 갔을 수도 있고, 전선으로 갔을 수도 있고, 어떤 결정을 내렸든 그건 그들의 몫이지.” 우리들은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이동마법진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루탄님.” “일데퐁소?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루탄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루탄님께 인사는 하고 가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 다.” “뭐? 일데퐁소는 넥스 영지로 가지 않을 생각인 모양이지?”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저는 제란의 부대에 맞서서 싸워 볼 생각입니다. 아직 많이 모자라지 만 8써클 초입이라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야? 평소에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잖 아.” 사실이었다. 일데퐁소는 오로지 마법을 연구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고, 다른 것에 는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았었다. 이제 겨우 서른이 되어가는 일데퐁소였다. 이대로 조금만 더 있으면 9써클 마스터의 위치도 넘볼 수 있는 녀석이었다. 그런 녀 석이 무슨 이유로 전장에 뛰어 들겠다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루탄님, 지금의 제가 있기까지 루탄님과 우제푸님께서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셨는 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하고 싶은 일들이 많고 배우고 싶은 것도 많습니 다. 그런데 어느 정도 힘을 지녔으니 그 힘에 걸맞는 의무도 있다고 봅니다. 저는 제 가 마법을 배운 것이 그저 저의 만족만을 위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저에게 는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탑에 있는 많은 친구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 들도 제가 원하는 길을 갔다면 크게 나무라지 않을 겁니다. 루탄님 말씀대로 이건 제 의지입니다. 사람마다 다른 가치관에서 나온 결정이지요. 저는 제 힘을 다른 사람들 을 위해서 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다시금 시작되는 이런 상황이 싫었다. 내가 자꾸만 초라해지고 비겁해지는 상황이 싫었던 것이다. “알았어. 일데퐁소. 네가 원하는 일이라면 그렇게 하도록 해. 하지만 쉽게 죽거나 하지는 말아.” 그 뿐이었다. 나는 더 이상 그를 보지 않고 마법진 위로 올라섰다. “여러분들도 가세요. 이별은 길면 더 아픈 법이랍니다. 빨리 돌아서는 것이 모두에 게 좋아요. 여러분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일데퐁소가 그렇게 먼저 인사를 날리고는 순간이동으로 사라졌다. 그 빈 자리를 보던 일행들이 천천히 마법진 위로 올라섰다. 우리들이 넥스 영지로 돌아왔을 때, 의외로 영지에 와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화염기사단과 얼음기사단은 전원이 넥스 영지에 와 있었고, 강철기사단은 단 한 명 도 오지 않았다. 그들은 자이건이 있는 곳으로 간 모양이었다. 야전대도 전원 넥스 영지로 돌아와 있었는데 화염기사단과 얼음기사단에 속해있던 인 원들도 모두 이젠 본래의 야전대로 복귀를 시켰다. 강철 기사단을 따라간 야전대 소속의 병사는 없었다. 그 이외에 마법사의 탑에 속해 있던 마법사 중에서 20명 정도가 없는 것으로 보아서 일데퐁소를 따라 간 모양이었고, 환수사 30명도 모습을 감추었다. 아마도 아세트에게 간 모양이었다. 그 이외에 아카데미의 학생들 중에서 반 수 정도가 넥스 영지에 들어와 있었다. 특 히 3학년과 4학년의 비중이 높았는데, 처음부터 돌아갈 곳이 없는 녀석들이 많은 비중 을 차지했던 이유도 있는 것 같았다. 이미 넥스 영지에는 모든 상황이 전달된 상태였기 때문에 모두들 침울한 표정을 지우 지 못했다. 물론 영지민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전쟁에 휩싸이지 않게 될 거라는 것을 환영하는 분위기였지만, 머리에 든 것이 조금은 있어서 생각이라는 것을 하며 상황을 직시하는 눈을 조금이라도 가진 사람들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에 일일이 신경을 쓰고 있을 수는 없었다. 넥스 영지 전체를 거대한 결계로 봉인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많은 마법진을 그리고 진세를 만들기 위한 구조물을 세우는 일이 하루 이틀이 이루 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이 일은 나 말고는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일이었다. 단순 노동이 아닌 이상 은 모든 것이 내 손에서 처리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나마도 바위정령족의 힘이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이번에는 바위 정령족도 일부 넥스 영지로 옮겨 오기로 했다. 바위정령족의 족장이 혹시 자신들의 부족에게 닥칠지도 모를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부족을 나누어서 달군쇠에게 맡기고 넥스 영지로 보내기로 한 것이었다. 아직도 전황은 시시때때로 마췬길드를 통해서 전달되고 있었다. 물론 제란의 군대가 쓸고 지나간 곳에서는 참으로 힘겨운 소식들이 들어오고 있었지 만 말이다. 제란의 부대는 이제 한타의 삼분의 이를 쓸고 있었다. 그들의 뒤로는 어떤 것도 남아나지 않았다. 건물이든 무엇이든. 오직 벌거벗은 사람들이 살아남았다. 물론 제란군의 눈을 피해 숨어 있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옷을 입고 도구를 쓰는 것이 보이면 무조건 학살을 당했 기 때문에 그들은 최대한 몸을 감추고 있었다. 아직은 제란이 쓸고 지나간 자리에 암흑제국의 후속부대가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 지 역을 감당하고 있는 것은 제란이 흘린 것처럼 남겨두고 가는 병사들이었다. 덕분에 별다른 싸움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제란의 부대는 그 수가 18만 정도로 줄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부대를 상대할 수 있는 전력이 한타에게 있는 것은 아니었 지만 말이다. 그렇게 전황이 펼쳐지는 동안에도 나는 넥스 영지를 세상과 격리시키기 위한 작업을 하나하나 진행시켰다. 적어도 제란의 부대가 신성제국을 지나오기 전에는 완성해야 할 일이었다. 시간은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 제란의 부대가 특별한 저항을 받지 않는다면 봄이 가고 여름이 가기 전에 이곳까지 올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한타의 병력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서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애초 에 3국동맹 형식도 이미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시간이 모든 것은 해결 해 줄 것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물론 해결이라는 것이 제란 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형님, 드디어 한타 최후가 멀지 않았습니다. 자이건과 루이스 왕을 중심으로 한 약 5만 정도의 부대가 죽을 자리를 정한 모양입니다. 그래도 멍청하게 제란군의 중앙 을 치고 들어가지는 않을 모양입니다. 지금 차구므진의 군대와 일전을 준비하고 있습 니다. 지도상으로 한타의 북서쪽입니다. 어쩌면 후퇴를 하게 되면 아카데미로 후퇴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자이건은 그럴 생각을 가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아카데미 라면 소수로 다수를 막는 것이 가능할 테니 말입니다.” 광아가 소식을 가지고 나를 찾아 왔다. 요즈음은 나 말고 바쁜 사람은 오직 광아 뿐이었다. 모두들 할 일이 없었다. 그저 불안한 마음으로 묵직한 돌맹이 하나씩을 가슴에 얹고 지낸다고 해야 할까? 얼마 전에는 넥스 영주가 돌아왔다. 한타가 형편없이 무너지면서 삼국동맹이 유야무야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그들과 함 께 있을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이다. 자이건도 데리고 오려고 했지만 자이건은 고개 를 저었다고 한다. 대신에 빈체를 부탁한다는 말을 했단다. 웃기지도 않는 놈. 지 아들보다 대의가 더 중요하단 말인가? 도대체가 그런 영웅심리 는 어디서 나오는 거야? 물론 이렇게 주절거리는 내 자신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형님, 이번에 가서 조금 도와주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5만의 병사들이라면 차구 므진의 3만 병사들과 한 번 붙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으면 이렇게 도망을 갈 생각도 않았을 거다. 차구므진의 1 만 병사가 한타의 5만을 쓸어버릴 수 있을 거다. 별다른 변수가 없다면 말이다. 그리 고 그건 너도 알 텐데 왜 그런 말을 하는 거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싸울 테니까요. 사람들이란 때로 이해하기 어려운 힘을 발 휘하기도 하잖습니까? 저는 한타의 마지막 병사들이 그런 힘을 발휘할 것 같은 생각 이 들거든요.” “그래, 어쩌면 공포는 극복할지도 모른다. 덕분에 좀 더 잘 싸울 수 있을지도 모르 지. 하지만 객관적인 전력으로 다섯 배의 차이가 난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아직 아 이슈마가 되살려낸 병사들의 힘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그런 거야. 아이슈마가 400년 을 움직이지 못할 힘을 쏟아 부어서 만들어낸 것들이다.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 체가 말이 안 되는 거야.” “역시 도와주시지 않으실 생각이시군요. 자이건이 있는 데도 말입니다.” “글쎄, 자이건이 거기 있다고 해도 그건 그 녀석의 선택이었다. 그걸 존중해 주는 거지.” 내 대답에 광아는 물끄러미 나는 보다가는 등을 돌려 산을 내려갔다. 나는 다시 마법진을 바위에 새기는 작업에 열중했다. 자꾸만 선이 흔들리는 것 같다. 결국 한타의 병사들과 제란군의 차구므진은 작은 평원을 사이에 두고 대치에 들어갔 다. 누구도 돌보지 않아서 잡초만이 무성한 그 곳은 작년까지만 해도 곡물들을 길러내던 넓은 농지였음을 밟히는 말발굽 아래에 흐릿하게 남은 밭이랑으로 알 수 있는 곳이었 다. 굴곡 없이 펼쳐진 이 곳은 지난 오랜 세월 농부들이 땀흘려 가꾼 삶의 터전일 것이었 다. 그 삶은 농부들의 손에서 피어나 모든 이들의 소박한 식탁에까지 이르렀을 것임은 두 말 할 필요도 없는 일이겠지만, 지금 그 땅에 피가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 나는 멀찍이 떨어진 숲의 나무 위에서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지 않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 곳에 자이건이 있었고, 강철기사단이 있었다. 그들의 죽음이 나에게 작지 않은 가치를 지니는 까닭에 나는 여기 와 있었다. 그렇다 고 그들의 죽음을 막아 줄 방법은 없었다. 억지로 그들의 의지를 꺾어 강제하지 않는 이상은 여기가 그들의 무덤이 될 것이었다. 나는 그들의 눈빛에게 그것을 읽을 수 있었다. “루탄님, 덕분에 제 인생이 가치 없는 삼류는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자간의 경매장에서 루탄님을 만나지 못했으면 이런 자리도 없었을 겁니다. 더구나 아세티아르 와 빈체, 이 모두가 루탄님 덕분이라고 언제나 감사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도 여기서 벗어나 넥스 영지로 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습니다. 제 가족을 사랑하는 그 만큼이나 저는 저의 나라와 기사단을 사랑합니다. 왕실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라를 사랑하고 기사단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기사단의 정의를 지키고 싶습니다. 약 자를 위하여, 백성을 위하여, 정의를 위하여, 주군을 위하여 목숨이란 때로 가치가 없 는 것입니다. 다만 남겨진 이들의 슬픔이 발목을 잡지만 이해할 거라고 믿습니다.” 내가 어제 아무도 모르게 자이건을 찾았을 때, 그는 내가 선물한 갑옷을 단정하게 입 고 그렇게 말했다. 그는 이제 굵고 단단한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오늘 그가 전장에서 쓰러지면 나는 그가 죽기 전에 구해서 넥스 영지로 옮길 수 있 을 것이다. 그런 능력은 나에게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놓고 망설이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그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기에... 그의 품 속에 넣어준 한 장의 스크롤은 위급 한 상황에서 그를 살려 줄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그것을 쓸지는 자신이 없었 다. 복수를 기약하며 뒤를 돌아설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었다. 전투는 뜨거운 햇살이 손에 쥔 검과 창대를 달구고,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얼 굴을 감싼 투구 안으로 흘러내리기 시작하는 때에 시작되었다. 아직도 해는 머리 위에 오지 않았지만 5월의 햇살은 제법 따가웠다. 뿔고동 소리와 북소리가 울리고 화살이 솟아 올랐다가 하늘로 꼬리를 치켜세우고 떨 어지는 것을 신호로 3만명의 차구므진 부대와 5만의 한타 병력이 적의에 찬 시퍼런 날 을 세우고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일찍 화살에 쓰러진 병사의 몸을 짓밟고 동료의 말이 달려 나갔다. 한타 쪽에서 일제히 마력이 움직이며 마법 공격이 날아갔다. 최하 4써클이 넘어 보이는 마법들이 차구므진의 병사들을 휩쓸었다. 8써클의 파이어필드는 일데퐁소의 솜씨였다. 그의 마력패턴이 느껴졌다. 순식간에 달려나오던 차구므진의 병사들이 마법과 불길에 휩싸였다. 달려 나가던 한타의 병사들은 잠시 주춤했지만 용기백배하여 적을 향해 휘몰아쳤다. 하지만 작열하던 마법의 흔적들이 사라지고 드러난 차구므진의 병사들은 그다지 큰 피해가 없어 보였다. 그들은 둘 셋의 병사들이 뭉쳐서는 마법을 막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몸으로 마법을 막고 있었다. 가끔씩 무더기로 쓰러진 병사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성큼 성 큼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일순 달려 나가던 한타의 병사들을 공포가 휩쓸고 지나갔다. 하지만 곧 누군가의 고함소리가 전장을 울렸다. “우리가 오늘 살기를 각오하고 온 것이 아닌데 무엇이 두려우랴. 전장에서 죽음이 란 언제나 곁을 따라 다니는 불운일 뿐이다. 가자 전우들이여!” 누구일까? 소란한 중에서 저런 소리로 아군을 독려하는 인물은 낯익은 목소리의 저 주인공은. 하지만 내가 그것을 파악하기도 전에 한타의 병사들이 내지르는 고함소리가 전장을 메웠다. 잠시 주춤했던 화살들이 다시 날기 시작하고 마법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평원의 중앙에서 드디어 마주친 그들이었다. 마법에 달구어지고, 얼어터진 모습으로도 꿋꿋하게 움직이는 차구므진의 병사들을 가 까이에서 접한 한타의 병사들은 또다시 한 번 주춤거렸다. “죽여라.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어차피 죽더라도 죽이고 죽자.” “죽여라. 죽여!” 차차창! 삽시간에 검, 도, 창이 어울리며 싸움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나는 쓰러지는 대부분의 병사들이 한타의 병사들인 것을 보고 있었다. 차구므진 진영의 병사들은 팔 다리가 끊어져도 움직이고 있었지만, 한타의 병사들은 그렇지 못한 것이다. 물론 목이 잘리고 허리가 끊어진 차구므진의 병사들도 쓰러지고 있었다. 그들이라고 무적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그 대가는 쓰라린 것이었다. 하나의 적을 쓰러뜨리기 위해서 수많은 한타의 병사들이 쓰러지고 있었다. 5월의 해는 길기만 하다. 아직도 해는 머리 위에도 오르지 않았다. 싸움이 진행되면서 한타의 병사들은 더욱 불리해지고 있었다. 갈증, 사람은 오랫동안 움직이지 못한다. 전력을 다해서 달리기를 하는 육상선수들 이 100미터를 달리고 지키는 것과 같이, 전력을 다해 휘두르는 칼끝이 무디어지는 것 은 금방이었다. 상대 역시 그렇게 지쳐간다면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차구므진의 병사들은 지치지 않았다. 시종일관 같은 속도와 힘으로 한타의 병사들을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한타의 병사들은 앞뒤의 병사들이 자리를 바꾸었다. 전방의 병사들을 대신하여 후방에 있던 병사들이 자리를 메웠다. 죽어간 동료들의 수가 더 많았지만 살아있는 동료들에게 휴식이 필요했다. 이제 전장에서 피어오르는 흙먼지는 없었다. 싸움이 벌어지는 곳에서만큼은 이미 질척하게 젖은 황토가 발목을 잡을 정도가 되어 있었다. 피로 물든 대지. 그리고 내 눈은 하얀 갑옷을 입고 전장을 누비는 자이건에게 가 있었다. 방패를 흉부에 달고 검을 양손으로 잡은 자이건은 처음 전투가 시작될 무렵부터 지금 까지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를 중심으로 좌우로 늘어선 기사들은 강철기사단이었다. 강철기사단 모두가 그를 중심으로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란이를 그려 넣은 기사단의 깃대는 아직도 자이건의 뒤쪽에서 펄럭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자이건과 그의 기사단도 끝은 볼 때가 되어 있었다. 해가 한타 병사들의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어깨로 돌아가 있었다. 남은 병사들은 대략 차구므진 23000, 한타 20000. 한타의 3만 병사들은 차구므진의 7천 병사를 쓰러뜨린 것이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지금 쓰러지는 것은 전부가 한타의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너무 지쳤다. 지치지 않는다는 것은 차구므진 병사들이 지닌 가장 큰 장점이었다. 결국 한타 진영에서 불길한 뿔고동이 울렸다. 지금까지 듣지 못한 이 소리는 뜻을 모르는 내가 듣기에도 다급한 절규로 들렸다. 그리고 한타의 병사들은 서둘러 후퇴를 시작했다. 차구므진의 병사들은 그 뒤를 따랐지만 서두르지 않았다. 진영을 갖추고 뒤를 따르는 병사들의 모습은 후퇴를 결정한 한타의 병사들이 보기에 는 공포 그 자체일 것이다. 차라리 후퇴를 생각하지 않았으면 마지막까지 전의를 불태우며 싸움을 했을 것이지 만 한순간 후퇴를 생각한 그들은 더 이상 싸움에 대한 의지가 없었다. 미루고 미루어 두었던 공포가 그들을 덮친 것이다. 통제 불가능의 사태가 벌어졌다. 사방으로 갈갈이 찢어지는 병사들의 모습은 소나기를 만난 개미같은 모습이었다. 그렇게 병사들이 흩어지는 속에서 갑자기 돌아서며 진영을 갖추고 그 뒤를 막아서고 있는 것은 500명도 되지 않는 강철기사단이었다. 그리고 새롭게 도주하는 한타의 지휘부에서 모습을 드러낸 마법사들이 있었다. 넥스을 중심으로 강철기사단은 앞쪽에 마갑주를 입은 기사들, 뒤에 검기를 다루는 기 사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환수를 다루는 기사들이 열을 가다듬었다. 언제나 넥스 영지에서 훈련을 하던 그 진영이었다. 아마도 넥스 영지 밖에 있던 강철기사단들은 거의 전멸을 한 모양이었다. 이제는 넥스 영지에 있던 기사단이 주축이 되자, 그동안 연습했던 진영을 구축할 생 각을 한 모양이었다.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죽어가는 것에 후회는 없겠지? 한타의 수많은 귀족들이 제 자리를 지키지 못했을 때, 우리는 우리 자리를 지켰다. 나는 군인이었고, 너희도 군인 이었다. 아직 우리에게 지켜야할 무엇이 남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저기 저 너머에 우리를 믿었던 백성들이 아직 살아 있을 것이다. 그들을 위해서라고 생각하자. 군인 은 군인답게!” 자이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가 치켜든 피묻은 칼날이 햇빛을 반사시킨다. 환호하는 강철기사단의 칼날이 어지럽게 허공을 수놓는다. 강철기사단의 뒤쪽으로 다가온 한타의 마법사들이 주문을 외우기 시작한다. 일데퐁소의 모습이 그 속에 끼어 있다. 내가 마지막으로 선물했던 지팡이를 들고 있다. 7써클 마력을 더해주는 지팡이를 손 에 쥐고 눈을 감고 있다. 먼저 마법사들의 마법이 다가오는 차구므진의 병사들에게 날아갔다. 일데퐁소는 최대한 마력을 아끼기로 한 모양이었다. 수많은 파이어볼들이 그의 지팡이에서 날아갔다. 8써클인 그에게 파이어볼은 그다지 힘겨운 마법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하루 종일도 가능할지 모른다. 거기다가 각각이 7써클의 힘을 지니고 있으니 상당한 전력이 되겠지. 일데퐁소의 마법 탓이었을까? 첫 전투와는 상당히 다른 결과가 나타났다. 8써클의 대단위 범위 마법에서 꿋꿋하게 살아남았던 차구므진의 병사들이 일데퐁소 의 파이어볼에 직격당하고는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파이어볼 하나하나가 7써클의 힘을 지니고 있으니 당연할지도 몰랐다. 그 사이에 마갑주를 입은 강철기사단들은 최대한 동화된 모습으로 차구므진 병사들 을 맞이했고 하급에서 중급에 이르는 환수들이 전열을 가다듬었다. 저 정도의 전력이면 병사 5천의 전력은 될까? 결국 도망가는 한타의 병사들과 지휘부에 대한 마지막 충성인가? 다시 한 번 전투가 시작되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죽어 갈 때마다 그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사라지고 있 었다. 나는 몇 번이고 전장에 뛰어들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나는 전장에 뛰어들어 저들을 살릴 자신이 없었다. 모두를 구하지 못할 것은 분명했다. 더구나 지금 전장을 살피고 있는 것은 나뿐이 아니었다. 카튼, 트롤라이런, 붐저브, 거기에 두룬까지 전장을 살피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차구므진의 막사에서 전세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마도 혹시 있을지 모를 변수에 대한 준비이거나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 이 들었다. 제란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이곳에 없다고 장담하지도 못했다. 내가 카튼 등의 기운을 느낀다고 해서, 제란의 기운까지 느낄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 다. 서로 비슷한 실력이라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는 상태에서 서로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전장에 뛰어들었다가 도망을 갈 수도 없는 상황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는 않는다. 그럼에도 내가 이 전장에 뛰어들지 못하는 것은 내가 이들은 전부 이기지 못한다는 분명한 사실과 함께 제란이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나를 먼저 제거하기로 마음먹는 사 태를 피하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되면 제일 먼저 공격의 대상이 되는 곳은 넥스 영지일 것이다. 그곳을 제란이 모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내가 제란의 비위를 거스를 경우에 우리 가족에게 올 피해는 어떻게 감당을 할까. 그 전에는 제란이 암흑제국에서 그 먼 넥스 영지까지 손을 뻗칠 여유가 없으리라 생 각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제란이 마음먹어서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제란이 넥스 영지로 그의 측근들을 이끌고 온다면... 그건 제란이나 나나 피하고 싶은 일일 것이다. 제란이 모든 군대를 끌고 오지 않는 이상은 제란도 필승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나도 내 가족과 친구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 될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제란의 군세가 불어난 순간부터 될 수 있으면 제란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고 있었다. 아니 서로가 서로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라고 해야 할까? 제란이 넥스 영지에 대해서나 아카데미에 대해서 아직까지 손을 쓰지 않은 것도 나 와 비슷한 생각을 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래봐야 어차피 최후에는 제란의 승리가 될 것이긴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 자이건의 진영에도 변화가 생겼다. 드디어 차구므진의 수뇌부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이슈마의 힘에 영향을 받았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하나같이 마갑주를 착용 하고 도를 들고 있는 녀석들의 수는 줄잡아 100명 정도. 하지만 그 수는 무의미해 보였다. 마법사들의 마법은 별다른 충격을 주지 못했고, 심지어 일데퐁소의 마법조차도 무용 지물로 보였다. 그리고 강철기사단의 1열과의 싸움에서도 단연 우세한 싸움을 벌였다. 그나마 2열이 가세하고 3열의 환수들이 더해지고 나서야 팽팽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 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자이건은 차구므진과 검을 마주하고 있었다. 객관적인 전력으로 자이건은 차구므진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다행히 그가 입고 있는 갑옷이 바위정령족 최고의 작품 중에 하나라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이기는 했지만, 차구므진이 마갑주와 완전히 동화된다면 필패였다. 기회는 차구므진이 마갑주를 완전히 입기 전에 속전속결을 하는 것뿐이었지만 그것 도 자이건의 실력으로는 운이 따르지 않으면 어려운 상황이었다. 여유롭게 자이건을 상대하는 차구므진의 모습과 어울러져 이제는 무너지는 균형이 보 이기 시작했다. 이미 지친 강철기사단의 기사들이 하나 둘 쓰러지고 있었다. 한 명이 쓰러지면 그 만큼 남은 자가 감당해야 하는 힘이 늘어난다. 그것은 마치 둑이 터진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순식간에 균형은 무너지고 강철기사단들은 피로 젖은 땅에 혹은 전우의 시체위에 몸 을 뉘였다. 란이가 그려진 강철기사단의 깃발이 꺾이고 자이건의 가슴에 차구므진의 도가 파고들 고 마지막까지 마법을 날리던 일데퐁소의 지팡이가 가루가 되어버린 것은 순식간의 일 이었다. 그리고 정적이 찾아왔다. 일데퐁소와 마법사들은 강철기사단이 무너지는 순간 모두들 스크롤로 탈출을 감행했 고 대부분이 성공했다. 이제 전장에 서 있는 것은 차구므진과 그의 병사들이 전부였다. 피가 흐르는 전장 위로 다시 핏빛의 노을이 떨어지고 있었다. 차구므진과 그 병사들은 죽어 넘어진 동료들의 시체와 적군의 시체를 그대로 평야에 버려두고 떠났다. 한타의 3만 병사와 차구므진의 8천 병사들이 땅에 누워 있었다. 강철기사단은 마지 막 혼신의 힘으로 적1000명과 함께 산화했다. 빌어먹을. 끊어진 팔다리와 목이 널부러진 전장에 서면 무슨 생각이 들 것 같은가? 웃기지 않은가? 나는 지금 내 신발과 옷에 핏물이 닿는 것에 신경을 쓰고 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걸어가며 전장 깊이 강철기사단이 마지막으로 분전하던 곳을 향하 고 있다. 자꾸만 눈앞을 가리는 것은 자이건의 새하얀 갑옷이다. 녀석의 결혼식에 선물로 주었던 갑옷을 관으로 삼아 버린 녀석. 까마귀들이 날아오고 있다. 가장 먼저 시체의 약한 부분을 찾는 녀석들. 눈알을 가장 좋아 한다지? 어둠이 내린 전장에서 유독 눈에 띄는 자이건의 갑옷. 자이건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내 몸에 묻어오는 피와 살조각과 끈적한 뇌수들이 무 감각하게 느껴진다. 저기 내 사람이 죽어 있었다. 자이건은 벌어진 가슴으로 하늘을 향해 얼굴을 향하고 눈을 감고 있었다. 아직도 그의 한 손에는 검이 쥐어져 있었지만 다른 한 손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 다. 무릎을 꿇고 자이건의 상체를 들어 안아 올렸다. 아직도 자이건의 가슴에서는 피가 흘러나오고 있다. 잘려나간 팔에서도 아직 피가 흐른다. 갈라진 폐 사이로 피가 흐른다. “하하하하!” 자이건 선드라스. 빈체 선드라스의 아비는 살아 있었다. 비록 팔이 잘리고, 가슴이 벌어진 상태였지만 심장이 뛰고 있었다. 미약하게 뛰고 있었지만 죽은 것을 살리지는 못해도 죽어가는 것을 살릴 수는 있다. 나는 9써클 마스터이므로... 바위정령족의 갑옷에 다시 한 번 찬양을, 오로지 자이건이 살아남은 것은 바위정령족 의 갑옷 덕분이었다. 그것도 흉부에 달려있던 방패의 덕분이라 해야 한다. 돌아가면 바위정령족에게 몇 번이고 감사를 하리라. 나는 서둘러 넥스 영지로 돌아왔다. 자이건을 살리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닐터였다. 한타와 차구므진의 싸움터에서 목숨을 건진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 전장에서 자이건과 비슷한 경우로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300이 되지 않았다. 팔다리가 끊기고도 살아있었던 사람들, 그나마 목숨 끈질기게 이었던 탓에 그들은 넥 스 영지로 옮겨올 수 있었다. 내가 자이건을 데리고 넥스 영지에 나타났을 때, 놀란 사람들은 자초지종을 듣고 전 장으로 달려가서 그나마 목숨이 붙은 사람들을 데리고 왔다. 하지만 그 사이에 사상으로 흩어진 한타의 병사들은 곳곳에서 사냥을 당했다. 그들은 인적이 닿지 않았던 곳으로 멀리 멀리 숨어들었다. 한타의 국경을 벗어난 곳으로 차구므진의 병사들을 쫓지 않았다. 그렇게 한타는 제란의 손에 들어갔다. 아카데미를 마지막 보루로 삼아 항전을 하려던 루이스 왕은 마롤 후작에게 칼을 맞 고 목이 잘려서 제란에게 보내졌다. 마르틸 후작은 그 전에 이미 종적을 감추었다. 한타를 완전히 장악한 제란은 잠시 행군을 멈추었다. 그리고 새로운 포고령을 내렸다. - 일체의 무기의 사용을 금한다. 옷의 착용을 금한다. 한타의 백성들은 토굴 속에 사는 것을 허용한다. 이를 어기면 발견 즉시 처형한다. 라는 내용은 전과 동일했다. - 한타 지역에서 불의 사용을 허락한다. - 동물의 가죽으로 된 가리개를 착용하는 것을 허락한다. - 농사를 짓기 위한 최소한의 도구 사용을 허락한다. 단 금속의 사용은 불허한다. - 제국에 대한 일체의 반항은 사형에 처한다. 경우에 따라서 가족이나 마을 전체에 그 죄를 적용할 수 있다. 라는 내용은 새롭게 첨가된 내용이었다. 한타의 백성들은 노예가 되었다. 5월이 다 지나도록 제란은 신성제국과의 국경선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6월이 되자 신성제국을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미리 준비된 전쟁이었지만 신성제국도 별다른 방법은 없었다. 화염기사단의 수는 많았지만, 실력이 미치지 못했다. 성기사들은 제란의 군대에게 상 당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지만 성기사가 나타나면 가장 먼저 제란군의 수뇌들이 움 직여 섬멸시켰다. 신성사제들은 신성력을 이용해서 아이슈마의 기운을 받은 병사들을 어느 정도 약화시 킬 수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죽이지는 못했다. 때문에 신성사제들 역시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그러면서 조금씩 싸움의 방식에 익숙해진 신성제국은 삼분의 일 정도의 영토를 빼앗 기고, 그 영역 안에 있던 거의 모든 국민들이 죽음을 택하고 나서야 어느 정도 싸움다 운 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신성제국의 국민들은 대부분 투항을 택하지 않았다. 그들은 죽음으로써 천국에 들기 를 원하는 족속들이었다. 덕분에 제란은 신성제국에서 영토 이외에는 아무것도 얻은 것 없이 진격을 하고 있 는 셈이었다. 그의 병사들이 지나간 뒤로 신성제국에서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신성제국의 국민들은 자신들의 죽음에 대해서 한타의 사람들에 비해서는 담담하게 받 아들이고 있었다. 주신의 은총으로 천국에서 다시 태어나게 되리라는 희망이 그들에게 있기 때문이라고 는 하지만 나는 그들이 그렇게까지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또 다른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신성제국의 교황이 죽어가는 백성들을 독려하고 나섰던 것이다. -신의 뜻은 저 간악한 암흑의 무리에게 신의 의지를 보이는 것이다. 라는 교황의 한 마디가 제국의 모든 백성들에게 죽어가면서도 제란의 병사들에게 돌 을 던지게 만든 것은 정말 잘 한 것일까. 그냥 죽음을 택하는 것보다도 더 처절하게 느껴지는 죽음이 제란의 병사들이 들이닥 친 마을들과 도시, 성에서 일어났다. 이제 제란의 병사들은 신성제국의 모든 사람들과 싸워야 했다. 비록 그 저항의 거의 무의미할 정도로 약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렇게 신성제국 백성들의 싸움이 진행되는 동안에 성기사들과 신성사제들은 호흡을 맞추고 싸움에서 조금씩 제란의 군대에 피해를 주기 시작했다. 승리하는 싸움은 없었지만 일방적인 학살은 아닌 싸움이 되었다고 해야 할까. 그렇다고 전황이 좋아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제란의 군대는 16만이었다. 그 중에서 싸움에서 희생된 수는 고작 2만이 되지 않았고, 나머지는 점령지에 대한 관리의 필요에 의해 남은 것이었다. 그의 군대를 모두 모으면 아직도 21만이 넘는 병 력이었다. “신성제국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오래지 않아서 전멸할 겁니다. 일부 주신 에 대한 믿음이 강하지 않은 자들은 피난을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머지는 지금처럼 죽 어갈 것입니다. 아시잖습니까. 지금 신성제국의 백성들이 어떻게 제란군을 맞이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손에 돌을 들고 그 어미와 아비 옆에서 함께 죽어가 고 있습니다. 형님. 뭐라고 좀 해 보십시오.” 오늘따라 광아의 목소리에 질책이 강하게 묻어난다. 나는 그 소리에도 묵묵하게 바위에 마법진을 새겨 넣기에 여념이 없다. 아니 될 수 있으면 광아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이곳으로 이제 더 이상 아무도 들어오지 못합니다. 저희들이 나가서 사람들을 끌 고 오지 않는 이상은 그란드에서도 한타에서도 여기까지 제란의 병사들을 피해서 올 수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겁니다.” 광아는 그나마 피난민들도 올 수 없는 상황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드디어 또 하나의 마법진이 완성 되었다. 우드득. 허리와 척추에서 관절이 일으키는 마찰음이 들린다. “형님!” “다른 녀석들과 지토는 어쩌고 있냐? 요즈음은 얼굴을 볼 시간도 없구나.” “어쩌긴 어쩌겠습니까? 타니와 빈체 데리고 놀고 있습니다.” “자이건은 어떻게 지내고?” “입을 다물고 침묵으로만 일관하고 있습니다. 빈체에게만 가끔 희미하게 미소를 보 낼 뿐입니다. 그래도 예상과는 달리 미치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게 더 위험한 상태지. 지금은 조용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언제 무슨 짓을 벌일지 모 르는 놈이야. 언제 다시 칼을 들고 제란을 향해 달려 나갈지 모를 녀석이라는 말이지. “아르미엘과 아세트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냐?” “아직 아무 연락도 없습니다. 다만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말 뿐이었습니다.” “그래? 알았다.” “하지만 형님. 아르미엘의 이야기로는 지금 아이슈마를 찾아 죽인다고 해도 제란과 그의 부대에게 걸린 힘이 풀릴 가능성은 없다면서요? 그런데 왜 아이슈마를 찾으시는 겁니까?” 광아는 내가 제란에게 신경을 쓰지 않고 아이슈마에게 신경을 쓰는 것이 이상한 모양 이었다. “아이슈마는 힘이 없지. 하지만 그 녀석이 지금 이 상황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엄 연히 사실이야. 더구나 400년 뒤에는 녀석이 깨어난다. 그럼 그 때부터는 인간들의 의 지란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야. 다행히 녀석을 없앨 수만 있다면 제란에 의해서 세상 이 돌아가든 누구에 의해서 세상이 돌아가든 인간들의 자유의지란 언젠가 튀어오르게 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슈마가 존재해서는 그럴 가능성이 줄어들게 되는 거 지.” “그래서 아이슈마의 흔적을 찾으면 어쩔 생각이십니까? 어차피 형님에게 중요한 것 은 저희들과 형수님, 타니 아닙니까? 세상의 인간을 위해서라고 말씀하시면서 무언가 하실 이유가 없어 보입니다만...” 광아 녀석도 상당히 꼬인 것이 많은 모양이다. “그렇지, 내가 인간들을 위해서라는 말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 어울리지 않기는 하 지. 그런데 말이야. 아이슈마는 지금 별 힘이 없이 봉인된 상태잖아. 그럼 별다른 위 험 없이 녀석을 처치할 수 있지 않을까? 더구나 제란도 생각이 있는 놈이라면 내가 아 이슈마를 제거하는 것이 자신에게도 좋다는 것 정도는 알 것 같은데 말이야. 아예 아 이슈마의 인형이 되지 않았다면 말이야. 물론 나도 아이슈마가 발견되면 앞뒤의 상황 을 살피고 행동을 할 생각이다. 난 이기적인 놈이야. 세상이 모두 쓰러져도, 피바다 가 되어도 그 피를 내가 대신 막아줄 생각은 없다. 지금도 죽어가는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오지만 그것이 아프게 들리지만 그렇다고 나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는 거다. 나는 내가 할 수 있을 정도만 최선을 다한다. 내 힘에 넘치는 짓을 하다가 모두를 불 행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 불행한 것은 나만으로도 족하다.” 나는 완성된 마법진에서 등을 돌렸다. 이제 700개의 진이 완성 되었다. 앞으로 남은 것은 299개. 제란이 여기까지 오기 전에 완성을 봐야 했다. 여전히 제란은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드디어 큰 변화가 생겼다. 그란드기 전력으로 제란의 뒤를 친 것이다. 그것은 그란드의 전력이었다. 그란드 왕실의 모든 종친들이 포함된 얼음기사단의 퇴역 기사들이 모두 참가한 전력이 었으니 그것이 그란드의 마지막 힘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전개에 제란의 부대는 주춤했다. 더구나 제란의 부대에겐 보급로가 없었다. 모든 것은 점령지에서 해결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었다. 그나마 한타까지는 중간 중간에 관리차 남겨둔 병력들이 제법 있었지만 신성제국에는 관리 할 것이 없었다. 모두 죽고 파괴된 도시와 마을에서 숨어 있는 사람들도 없는 곳 을 관리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중간 중간 남긴 부대라고 해 봐야 몇 되지 않는 소규 모 부대들뿐이었다. 그런 뒤를 그란드의 군대가 치고 들어온 것은 의외의 상황이었다. 고립된 16만 제란군. 이렇게 표현을 해 주고 싶지만 그런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보급이 되지 않는 중에도 제란의 부대는 필요한 만큼을 신성제국의 마을들과 도시를 점령하면서 충당하고 있었고, 그렇게 이동하는 제란의 부대를 허겁지겁 그란드의 병력 들이 따라 붙었다. 하지만 그란드의 병사들도 보급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보니 그란드의 군대가 제란의 뒤를 완전히 잡을 수는 없었고 때때로 제란의 부 대가 반격을 가할 때에는 어김없이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 했다. 그란드의 병력은 15만이었지만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선두를 맡고 있는 얼음기사단의 여자들만이 그란드에서 내세울 수 있는 최고의 부대였 다. 대략 파악된 얼음기사단은 15000 정도였다. 그 중에서 현역은 기껏 8000명 정도. 나머지는 모두 퇴역 기사들이었다. 늙은 여자들 이 검을 들고 선두에 서 있는 것이다. 왕실의 종친을 제외하면 남자는 없었다. 서너 번의 격돌이 있은 후에 제란의 부대는 5천 정도의 피해를 입었지만 그란드의 병 력은 12만으로 줄었다. 그것도 대부분이 얼음기사단의 전과였다. 넥스 영지로 그런 소식들은 꾸준히 날아들었다. 신성제국에는 마췬길드가 없었지만 그란드의 병사들 틈에는 마췬길드가 존재했다. 덕분에 전에 비해서 더 상세한 전황이 날아들었지만 희망적이지는 않았다. 그란드와 신성제국이 무너지고 나면 남는 것은 매직컬초와 넥스 영지. 그리고 누웬밖 에 없었다. -완성된 결계 밖으로 - 그란드가 제란의 속도를 늦추어 주는 동안에 드디어 999개의 마법진이 완성되었다. 이 진을 발동시키면 넥스 영지는 완전히 바깥세상과 격리될 것이다. 신계의 진법과 내가 아는 모든 마법을 동원하여 만든 것이다. 더구나 이 진을 유지하는 것은 살아있는 생명체였다. 그 때, 그 때 변화에 맞추어서 진을 변화시키고 보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면 이 진 을 유지할 수 없었다. 때문이 이 진의 중앙에는 영원토록 진을 유지할 존재가 있어야 했다. 그리고 나는 그 준비를 시작했다. “이제 한 달 정도만 있으면 결계가 완성 될 거야. 이미 결계는 돌아가기 시작했지 만 별달리 힘을 쓰지는 못해. 특히 밖에서 들어오는 것은 강력하게 막을 수 있겠지만 안쪽에서 나가는 것은 막기 어려워. 물론 8써클 이상의 힘을 쓴다면 이 안쪽으로 들어 오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고, 지금은 밖에서 들어오는 통신마법이나 무생물 순간 이동은 가능해. 하지만 8써클이 넘지 않으면 생물체가 이 넥스 영지로 들어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하지만 한 달 뒤에 일이 마무리 된다면 넥스 영지는 인간계에 있으면 서도 인간계가 아닌 곳에 존재하는 그런 상태가 될 거야.” 나는 마지막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가족들을 모아두고 마지막 당부를 하고 있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한 달이면 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마도 제 란도 그 사이에 여기에 나타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되. 물론 조금 전부터 움직이기 시작한 결계의 힘을 느끼기는 하겠지만 매직컬초를 비껴왔던 제란이 여기를 치려고 생 각하지는 않을 거야. 나중에 해결을 하면 된다고 생각할 테니까 말이야. 물론 나중은 없어. 한 달 뒤에 우리는 제란이 아니라 신급 존재라 하더라도 들어오기 어려운 곳에 있게 될 테니까 말이야.” 내 말을 듣고 있는 모두는 어두운 표정이었다. 그들이 표정이 왜 그렇게 어두운 것인지 나는 대략 짐작하고 있었지만 다시 한 번 마 음을 굳게 잡았다. “그리고 너희들도 몸 조심해라. 이젠 정령도 아니잖아. 거의 물질계의 존재가 된 모 양이던데...” “에? 형 그거 어떻게 알았어?” “그러게 어떻게 알았지?” 화아와 풍아가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걸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너희들 내가 제란과 싸워서 박살이 난 다음부터 뭔가 달라지기 시작하더니 이젠 정령이 아니라 정령족이 되었잖아. 인간이 된 것은 아 니지만 바위정령족처럼 정령의 기운에 물질적인 기운이 함께 섞여 버렸단 말이야. 물 론 아직 정령의 기운이 많이 남기는 했지만 완전한 정령은 아니잖아. 거기다가 풍아 나 수아 같은 경우에는 조금씩 나이도 먹어가는 것 같고 말이야. 키가 크다니...” “큼. 그거 언제부터 알고 있었냐? 그동안 아는 척도 하지 않더니?” 지토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언제 알기는 뭘 언제 알아. 얼마 안 됐다. 겨우 한 달 조금 넘었나 보다. 그 전에는 그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전에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묻지 마라. 조금 얻은 것이 있다보니 알게 된 것 뿐이다.” 사실 나도 우연하게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수많은 마법진을 그리고 신계의 책자를 넘기면서 연구를 하는 동안에 조금씩 조금씩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야 할까. 덕분에 내가 원했던 것 보다는 훨씬 강력한 결계를 만들 수 있게 된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어쩌면 내가 제란을 막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볼 정도였지만 여전히 가 족들이 위험해 질 수 있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멍청한 동생들과 지토가 정령인 상태에서는 내 힘을 얻어야만 자신의 힘을 발 휘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제란과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아서는 자신들을 물질계에 동화시켜 버리는 짓거리를 한 모양이었다. 때문에 거의 물질계의 존재가 되어서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오행심법을 익힌 모양이 었다. 평소에는 각자가 지닌 정령력과 비슷한 기운을 수련했던 탓에 눈치를 채지 못했지만 이제 보니 풍아가 금의 기운을 광아가 목의 기운을 각각 익히고 있었다. 다른 녀석들은 각각 화, 수, 토의 기운이 자신의 기운이니 심법을 익히는 것이 어렵 지 않았겠지만 풍아와 광아는 무척이나 힘들었을 거고 별로 효과도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 녀석들이 이렇게 변해 버렸으니 예전처럼 최악의 경우에도 정령계로 돌아 가기 밖에 더 하겠느냐 하는 생각을 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아무튼 이젠 더 몸조심들 해야 한다. 알았냐?” “큼. 으흠.” 지토가 목에 무언가 걸린 듯이 헛기침을 하면서 무안함을 달래려는 듯이 시선을 피했 다. 다른 녀석들도 하나 같이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나 뿐이 아니라 자이곱과 루아도 놀란 표정으로 녀석들을 보고 있었으니 당연한 것이 다. 녀석들이 정령이라는 것은 이미 모두들 알고 있는 상태였지만 물질계의 존재로 변하 고 있었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니 당연한 일일까? “그럼 나는 이만 간다. 한 달 후에 보자.” “빠빠. 으응~” “하하. 그래 타니야 아빠 갔다 올께. 엄마 말 잘 듣고 고모랑 삼촌이랑 할아버지랑 재미있게 놀고 있어. 알았지?” “아빠~” “그래, 그래. 녀석 어느 틈에 이렇게 말을 하게 됐누. 하하하.” 나는 타니를 살짝 안아 주고는 넥스 영지의 지하에 만들어진 공동으로 들어갔다. 바위 정령족이 상당히 오랜 시간을 공들여 만든 이 곳은 어디에도 출입구가 없었다. 아주 정확한 좌표를 통해서 순간이동을 하지 않는 이상은 이곳에 들어올 방법이 없 는 것이다. 사방 50미터 정도의 원형으로 이루어진 바닥과 완전한 반구체로 만들어진 내부 공간 에 마법진을 만드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 마법진의 핵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밖에 있는 999개의 마법진들은 여기 만들어질 마법진과 연결되어서 완벽히 새롭게 태 어날 것이었다. 살아있는 결계의 탄생. 여기에 새겨지는 마법진은 오로지 마력을 얽어서 만들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한 치, 아니 터럭 만큼의 오차도 없이 만들어야 하는 마력을 꼬아 만드는 마 법진. 나는 정신을 모으고 마력들을 실처럼 짜기 시작했다. 시간의 흐름이 몸을 타고 전해지고 있었다. 모든 정신이 마력들을 얽어가는 중에 이상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무언가 내가 있는 이 공간에서 움직이는 것이 있었다. 오직 나만이 존재하는 이 곳에서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움직이는 무엇이 신경을 건드 리는 것이다.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조금씩 아주 조금씩 기척을 내고 있었다. 모래가 떨어지는 것일까? 나는 최고조에 이른 마력을 유지하며 마지막으로 바닥과 벽에 새겨 넣는 작업을 시작 했다. 순간적으로 응집된 마력을 부풀려서 벽에 새겨 넣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마력을 유지 하는 동안에는 넥스 영지는 완전한 철웅성이 될 것이었다. 찌직. 찌지직. 나는 마지막 순간 마력을 부풀리면서 들린 이상한 소리에 신경이 거슬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마력진에 보이지 않는 틈을 만들고 말았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미 허점이 생겨버린 마법진은 당장에 수리를 하기는 어려웠다. 수리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적어도 만드는 시간의 몇 배는 걸려야 허점을 보완 할 수 있을 터였다. 차라리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것이 더 쉬운 일일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게 쏟아지는 한숨을 터뜨리며 눈을 뜨고 내 신경을 건든 것이 무엇인지 찾 아 보았다. “이, 이런!” 나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헛바람을 내지르고는 곧장 순간이동을 했다. “어엇! 오빠.” “엇. 형님.” “무슨 일이냐? 루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냐?” 나는 화아의 얼깨를 잡고 흔들었다. 내 손에서 떨어진 것은 루아와 나의 결혼반지 였 다. 아니 결혼반지에 붙어 있던 반지의 광석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부서지고 있다는 것은 반대쪽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었다. “여보!” 나는 루아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루아가 거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옷맵시가 내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무, 무슨 일이지?” “그게, 형. 타, 타니가...” 나는 캄캄해지는 머리를 짚으며 의자 옆으로 주저 앉았다. 30일 동안이나 마력과 싸움을 해 온 정신력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온전히 버티기 어 려운데 타니, 타니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말인가? “그래, 무슨 일이냐?” “이걸 보십시오. 형님.” 언제 왔는지 광아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 루탄님께. 편지를 받고 놀라셨을 줄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루탄님을 용서 할 수 없었습니 다. 제 부하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제가 지키려던 백성들이 노예가 되었습니다. 하지 만 루탄님은 도망을 갈 생각만 하시더군요. 힘이 있으면 마땅히 그 힘에 대한 책임을 져야합니다. 루탄님은 ‘내가 지닌 힘으로 악을 행하지 않는 것도 내 힘에 책임을 지 는 방법이다.’라고 하시겠지요. 하지만 저는 더 많은 것을 바랐습니다. 하지만 결국 넥스 영지를 격리 시키고 숨겠다는 생각을 하신 모양이더군요. 하지만 안 될 겁니다. 타니와 빈체를 데리고 갑니다. 루탄님의 힘이라면 충분히 결계를 뚫고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루탄님께서 나오시지 못한다면 타니와 빈체는 제가 최선을 대해서 보호하겠습 니다. 제 목숨이 다할 때까지 숨어 살겠습니다. 멀리 멀리 가서. 하지만 루탄님께서 타니를 찾고 싶으시다면 제란을 막고 세상을 되돌려 주십시오. 그 럼 타니를 찾게 되실 겁니다. 저를 찾을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찾지 못할 겁니다. 만약 루탄님께서 나오시지 않으신다면, 그건 루탄님께서 나오시지 못하시는 것이라 생각하고 타니와 루탄님을 떼어 놓은 잘못을 평생 후회하며 타니를 위해 살겠습니다. 제가 타니를 지키고 제 아들 빈체가 타니를 지킬 겁니다. 죄송합니다. 루탄님. 자이건 선드라스. 손에서 종이 조각이 구겨졌다. 자이건. 자이건 이놈이 이런 짓을... 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목구멍을 집어 삼켰다. “잠깐만 기다려라. 갔다 올 곳이 있다.” 나는 다시 봉인진을 만들던 곳으로 돌아왔다. 완벽했으면 나갈 길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나갈 길이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둔다면 결계는 깨어지고 만다. 나는 창고에서 지심목을 꺼냈다. - 오랜만이다. 나에게도 1000년이라는 시간은 짧은 시간이 아니지. “그래도 밖에서 돌아가는 상황은 알고 있을 텐데?” - 그야 그렇지. 내가 아무리 그런 공간에 있다고 하더라도 나를 완전히 가둘 수야 없 지 않겠나? “그동안 많이 바뀐 것 같군.” - 나도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바뀌는 것이지. 내가 너의 곁에 머물러 있던 것이 벌 써 10년이 지났다. 그 시간이면 내가 조금 바뀐 것이 이상할 것도 없지 않은가? “그럼 내가 부탁할 것도 알겠군?” - 이 진의 유지를 나에게 부탁하려는 것인가? 창고에 갇혀 있는 것 보다는 좀 덜 무 료할 것도 같군. 비록 재미는 없겠지만 말이야. 하지만 아무리 나라고해도 결계를 유 지하면서 100년 이상은 무리일거야. 그 전에 나를 찾아야 할 거야. “100년이라 만약 내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게 한계겠군.” -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소리로 들리는군. “뻔히 알면서 되묻는 버릇도 생겼군.” - 크크크. 그래도 너를 따라 다니는 것도 재미있었는데 말이야. “이번 일이 잘 되면 다시 여행을 할 기회를 준다고 약속을 하지.” - 좋군. 좋아. 그런 조건이라면 이 결계를 유지하는 역할을 해 주지. “좋아. 그럼 부탁해. 지금은 내가 상당히 급하거든.” - 알았다. 나는 지심목의 대답을 듣고 나서 조심스럽게 결계의 중앙에 지심목을 박아 넣었다. 우웅~ 실제로는 내가 하루의 반나절은 이 곳에서 결계를 유지해야 할 것이었지만 이젠 지심 목이 그 역할을 해 줄 것이었다. “그럼 나중에 다시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결계를 세우고 - 나는 아무도 모르게 내 서재에 들어왔다. 그리고 몇 장의 편지를 썼다. 루아와 동생들과 지토, 자이곱과 넥스 영주에게 보내는 편지들을 써서 봉투에 넣고 서재 책상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내용은 별 것 없었다. 그저 내가 이제 넥스 영지를 벗어난다는 말과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리 란 말과 타니를 꼭 데리고 오겠다는 말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한다는 말과 서로를 서로에게 부탁한다는 말이 적혀 있는 것이었 다. 결계의 틈은 무척이나 작았다. 잘못하면 그 틈에 끼어서 산산 조각이 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능력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야 결계에 부딪혀서 반발력으로 튀어 나가는 것이 전부이겠 지만 능력이 뛰어날수록 그 파장은 커지는 것이다. 나는 결계를 벗어나지 못하면 죽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틈은 있었고, 그 틈을 잘만 노린다면 죽지는 않을 것이었다. “형님! 형니...” 광아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나는 망설이던 도약을 시작했다. 단순히 뛰어 오르는 도약이 아니었다. 공간을 넘어가는 것이다. 순간이동 이었지만 틈을 제대로 통과하지 못하면 끝장이 날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결계의 틈을 파고드는 것은 성공적이었다. 나는 결계 밖으로 나와 있었고, 등 뒤로는 그저 끝없는 산림이 펼쳐져 있었다. 그 산림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고 해도 넥스 영지로 갈 수는 없다. 넥스 영지는 인간 계에 존재하지만 흔적도 보이지 않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곳은 내 계산대로라면 신성제국의 북단 산맥의 중앙이었다. 넥스 영지에서 결계가 발동된 이후 그 곳에서 나오는 모든 사람들은 이곳으로 나오 게 되어 있었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자이건을 잡아야 했다. 아니 타니를 찾아야 했다. 흠칫! 나는 몇 발자국 걷지 못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곧게 자란 나무들 사이로 자연스럽게 생긴 통로 저 앞에 앉아있는 사람을 발견한 것 이다. 하얀 갑옷을 걸치고 검집채로 땅을 짚고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있는 그는 자이건이 었다. 휘익! 퍼벅! 순간적으로 자이건에게 달려든 나는 그의 목을 잡고 일으켰다. “타니는 어디에 있나?” 자이건의 눈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눈빛에 흥분이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그의 목을 놓았 다. “크윽, 목뼈 부러지는 줄 알았습니다. 루탄님.” 어울리지 않는 너스레를 떠는 자이건이다. 그의 행동은 가식이다. “말해라. 타니는 어디에 있나?” 가라앉은 흥분이 다시 일어나고 있다. “타니는 지금 넥스 영지에 있습니다.” 무슨? “무슨?” 생각을 따라 말이 흘러나온다. “처음부터 타니는 데리고 나올 생각도 없었습니다. 다만 타니는 달군쇠에에 데려다 주었습니다. 루탄님께서 잠시 맡아 달라고 했다고 속였지요. 그들은 우직한 종족이라 제 말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자이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무엇 때문인가? 나를 넥스 영지 밖으로 끌어내는 것이 목적이었나?” “그렇습니다. 루탄님. 단지 루탄님을 영지 밖으로 끌어내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바위정령족은 단 하루만 타니를 맡아주면 되는 일이었지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일인가 자이건 너에게 무슨 의미가?” 나는 그의 생각을 짐작 할 수 없었다. 불행에 동참해 달라는 것인가? 아세트가 넥스 영지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을까? 언제든 올 수 있었을 텐데도 오지 않은 것은 나의 탓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런 짓을 한 것일까? “루탄님. 괴롭지 않았습니까? 가슴속에 가득 돌덩이를 안은 듯이 괴롭지 않았습니 까? 하지만 가족들이 걸리셨겠지요. 그래서 넥스 영지의 결계를 만드신 것이 아닙니 까? 하지만 이제는 걱정하던 가족들의 안전을 모두 지키셨잖습니까. 물론 넥스 영지 안에 있는 가족들이 걱정을 하시겠지만 그 안에서는 밖의 상황을 알 수 없으니 믿고 기다리실 겁니다. 비록 루탄님께서 돌아가신다 하더라도 알지 못하실 것이니 만나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 하기는 하시겠지만 슬퍼하시지는 않으실 겁니다. 그리고 안전하 실 거고요. 그러니 루탄님께서도 이제 하시고 싶은 일을 하실 수 있잖겠습니까? 사람 들을 구해 주십시오.” 웃기는 일이다. 자이건 선드라스. 역시 단순한 무관에 지나지 않는다. 아주 간단하게 내 자신을 그의 잣대에 맞추어 판단하고 나에게 길을 제시하는 것이 다. 하하하. 웃기는 일이다. 이젠 나도 넥스 영지로 들어갈 방법이 없다. 아니 솔직히 몇 십 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죽치고 연구하면 가능성은 있을 것이 다. 특히 지심목과 소통을 할 방법을 찾게 된다면 그 가능성은 조금 더 커질 것이다. 하지만 지금 제란이 날뛰는 것을 알면서 그렇게 처박혀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자이건은 방법이야 어떻게 되었든 내가 제란과 맞붙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끌고 나 온 것이다. “아이들은 분명 넥스 영지 안에 있겠지?” “물론입니다. 루탄님” “그걸 어떻게 믿지?” “제 목을 스스로 잘라서라도 증명하겠습니다.” “난 그런 거 필요 없어. 잠시 머리를 빌리지.” 솔직히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타니에 관한 문제는 그렇게 쉽게 지나갈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아비다. 누가 나를 욕해도 하는 수 없는 문제다. 자이건이 섭섭 해 한다면 그것 역시 자이건이 자초한 일이다. 나는 자이건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그의 기억을 읽었다. “아르미엘까지 관련이 되어 있는 줄은 몰랐군. 거기다가 우제푸와 그란드의 왕실, 더구나 신성제국에 누웬의 그 영악한 황제까지. 대단하군 대단해.” 의외의 사실이었다. 자이건이 벌인 일은 혼자의 것이 아니었다. 나를 싸움에 끌어들이기 위해 계획된 일이었던 것이다. 그나마 타니를 볼모로 잡아서 나와 내 형제들과 지토까지 부려먹으려던 생각을 포기 하고 나만 끌어 들인 것이 다행이라고 할까? 아니 그런 경우에는 어느 쪽에 무게를 두어야 할지 내가 고민할 것을 걱정한 연놈들 의 잔머리가 다행이라고 여겨야겠지. “숨길 수 있다고 생각했나?” “들킬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넥스 영지에 있는 저에게 그런 계획을 알려올 때부터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하지만 자꾸만 눈앞에 밟히는 부하들의 모습이 저를 미 치게 했습니다. 복수를 하고 싶었지만 힘이 없었습니다. 아니 복수가 아니라 정의를 세우고 싶었습니다. 아니 제가 책임졌던 제 나라의 백성들을 구하고 싶었습니다. 루탄 님께서 도와주시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리석다. 내가 아무리 능력이 있다고 해도 제란 하나를 상대할 수 있을지 의문이 다. 그런데 그 거대한 군세를 어떻게 감당하란 말인가. “아르미엘 교주의 말로는 제란의 23만 병사들 중에서 지금까지 남은 병사는 15만입 니다. 물론 한타 지역의 관리를 위해 남은 병력들이 있지만 그들은 흩어져 있습니다. 그러니 한타와 신성제국에 넓게 퍼진 병력들을 하나씩 각개 격파하는 방법으로 별동대 를 구성해서 싸운다면 충분히 피해를 줄 수 있을 거라는 예상입니다. 솔직히 이제는 그란드도 신성제국도 한타도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거점 없이 지하로 숨어들 생각입 니다. 백성들이 고통을 겪겠지만 한동안 그렇게 유격전을 펼치면서 제란의 병사들을 줄여 나간다면 승산이 있을 겁니다. 거기에 최후의 결전에는 누웬의 황제도 도움을 주 기로 했습니다. 누웬의 황제가 자국의 모든 힘을 쏟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제란 을 막지 않으면 누웬도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이상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는 없 을 것입니다.” 자이건은 아르미엘과 누웬, 우제푸가 세운 계획이 그럴 듯 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인 지 자신 있는 목소리를 내었다. “가능하다고? 모든 병사들을 해산하고 능력 있는 기사들과 마법사들을 모아서 소수 로 치고 빠지는 작전을 하자고? 그렇게 적의 수를 줄여 나가자고? 말은 좋지만 그것 이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불가능한 일이야.” “하지만 해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어쩌면 요원한 일일지도 모르고 시작 도 하기 전에 어디서 날아온 것인지도 모를 눈 먼 화살에 목숨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포기 하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역시 웃기는 일이다 포기 하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겨우 그것 때문에 나의 행복을 빼앗은 것인가? 작은 행복마저도.... 물론 나도 알고 있다. 사람들마다의 가치관이 다르다는 것을. 그리고 보편적인 가치 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들의 가치를 위해 나를 이렇게 불행하게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어쩌면 다시는 타니를 보지 못할지 도 모르는데, 타니를 두고 눈을 감아야 하는 때가 올지도 모르는데, 빌어먹을! “내가 제란을 막으란 말인가? 결국 최후의 싸움에서 제란을 맡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로군. 그 하나를 막을 자신이 없었기에 내가 필요했던 것이란 말이지. 좋아 내가 제란을 맡아 주겠다. 하지만 최후의 결전까지는 너희들이 만들어라. 나는 관여하지 않 겠다. 도움도 주지 않겠다. 제란을 상대해야 할 최후의 순간에만 제란을 맡아 주겠 다. 하지만 너희들이 제란과의 마지막 자리를 만들지 못하고 실패한다고 해도 도움을 주지는 않겠다. 그렇게 전해라.” 어린아이같은 투정에 지나지 않는다. 어차피 시작한 싸움이라면, 피할 생각이 없다 면 함께 힘을 보테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싶 지 않았고, 그들의 요구에 이리저리 휘둘리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최후의 순간까지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 다. 상황은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때까지는 제가 루탄님을 모시 겠습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이건이 다시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고 해서 그가 나에게 주인에게나 바 치는 인사를 한다고 해서 그가 예전에 자이건이 될 수는 없었다. 이성과 감성이 언제나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신성제국의 최북단 산맥의 나무들 사이로 7월의 해가 저물고 있었다. 어디를 가도 보이는 것은 황폐한 풍경들뿐이었다. 몇 주일동안 비가 오지 않은 땅은 메말라 있었고, 나무와 풀들은 지쳐 있었다. 그리고 그런 대지에 발을 딛고 선 모든 것들도 힘을 잃고 있었다. 오직 기승을 부리는 것은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병이었다. 아직까지 이 인간계에 병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았었다. 병이 들어 아프다는 것은 생 각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에 사람이 죽는다면 그것은 그저 늙거나 혹은 사고로 죽는 것이었고 병들어 죽는다고 해도 그것은 평소에 몸 관리를 하지 못해서 생기는 육 체의 병일뿐이었다. 하지만 이 여름에 기승을 부리는 것은 죽은 자들에게서 흘러나온 죽음의 기운이었다. 그 병에 걸린 사람들은 시름시름 앓다가는 고열과 두통에 시달리며 죽어가는 것이 다. 그리고 그렇게 죽은 자들은 평범하게 죽은 자들보다 빠르게 부패되어 사라졌다. 그들은 대지로 다시 돌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병자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오로지 제란의 병사들만이 그 병을 피해가고 있었다. 아니 제란의 병사들 중에서도 죽음을 겪고 다시 살아난 자들만이 그 병을 피해갈 수 있었을 것이다. 아직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이것은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다. 누가 이 병에 걸릴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두려움이 인간들의 대지를 휩쓸고 지나갔 다. 나는 넥스 영지에는 이 병이 들어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물론 시름시름 앓는 이들이 모두 죽는 것은 아니었다. 그 중에서는 그 병을 이기고 일어나는 자들도 있다고 한다. 소문에는 신성사제들이 그 병을 치유한다는 말도 있었고, 암흑교의 사제들이 치유한다는 말도 있었고, 아이슈 마의 사제들이 치유한다는 말도 있었다. 하지만 소문보다 더 정확한 것은 자이건이 가지고 오는 정보였다. 암흑교와 신성제국의 신성사제들이 병을 치유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아이슈마의 사 제들도 역시 병을 치유할 수는 있는 모양이었다. 모두들 쉬쉬하고 있었지만 신의 힘을 빌리는 자들이 발휘하는 신성력의 힘이었다. 그러면서도 아이슈마의 사제들이 그런 힘을 발휘하는 것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버리 지 못했다. 아이슈마가 신격화되지 않은 이상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한 기색이라는 암흑교와 성교의 사제들이라고 자이건이 전했다. 아직도 자이건은 나를 따라다녔지만, 때로 그들로부터 연락을 받는 모양이었다. 아세트가 보내오는 연락을 자이건은 그의 품속에 들어있는 통신용 수정구로 받고 있 었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자이건은 그들에게 연락을 할 방법이 별로 없었 다. 그는 마법을 쓸 수 없으니 말이다. 아마도 품속에 비상시를 위한 스크롤이 있는 모양이지만 역시 내 관심 밖의 문제였 다. 나와 자이건은 신성제국을 가로질러 한타로 접어들고 있는 중이었다. 갑작스럽게 신성제국의 교황을 비롯한 주요 인물들이 사라져 버리고 제란은 공격 목 표를 잃었다. 더구나 교황은 신성제국의 백성들에게 제란의 병사들을 피해서 주신의 가피가 있을 그 날까지 때를 기다리라는 계시를 내렸다고 한다. 웃긴다. 아무튼 그 덕분에 제란은 여기저기로 숨어 다니는 신성제국의 백성을 잡아 죽이는 것과 점령지의 건물들을 파괴 하는 이외에는 별달리 할 일도 없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병력을 돌려 그란드로 향했고 그란드 역시 그의 꽁무니를 따르며 기세 를 올리던 병사들을 해산하고 사라져 버렸다. 이제 이 대륙에서 통치자로 남은 것은 제란과 누웬의 황제 뿐이었지만 제란은 다스 릴 것이 별로 없었다. 신성제국의 백성은 도망 다니거나 잡히면 죽음을 택했고, 그란드에는 아직 들어가지 도 않았는데 공격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란드를 점령한 것도 아니었고 말 이다. 그런 중에 제란의 군대는 이곳저곳에서 습격을 받았다. 흩어진 신성제국의 병사들과 그란드의 병사들이 유격전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도 제란은 약이 올랐을 것이다. 그는 최대한 신속하게 대항군들을 축출하려했지만 신성제국이나 그란드의 병사들은 잡아도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 그들은 오직 때가 올 때까지 숨어 다니며 항전을 한다는 것 이외에는 뚜렷한 목표조 차 없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어디에도 그란드와 신성제국의 핵심 전력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나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들이 어디로 숨어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제란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그들을 찾는 모양이었지만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제란이 그들에게 신경을 쓰는 동안에 나는 자이건과 단 둘이 신성제국을 종단 하고 있었다. 그 중에 만나는 제란의 병사들은 하나같이 명부에 이름을 올렸다. 제란이 자신의 점령지에 남겨 놓은 병사들은 많지 않았다. 특히 다스릴 것 없는 신성 제국에 병사들을 많이 남길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신성제국의 백성들과 그 지도자들이 종적을 감춘 지역을 경계로는 제법 군사 들이 남았지만 예전에 점령하고 지나간 곳에는 병사들이 별로 없었고, 그런 병사들은 자이건의 눈에 보이는 즉시 죽임을 당했다. 때로 힘에 부칠 때에는 나도 제란의 병사들을 대지로 돌려보냈다. 이미 그들 대부분은 죽었던 존재들이었다. 내가 손에 사정을 둘 이유는 없었다. 제란의 병사들 중에서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은 이제 거의 없었다. 어린 아이 하나도 남기지 않고 신성제국의 절반 이상을 불태우고 학살한 놈들이었 다. 그것들은 이미 껍질만 인간일 뿐이었다. 전투에서 살인은 역사 이래로 살인이라 불리지 않는다. 하지만 제란이 지나가는 곳에 서 전투란 형식에 지나지 않았다. 대지를 적신 피의 대부분은 선량하고 힘없는 자들의 것이었다. 내가 먼저 제란의 병사들을 손보지 않고 자이건에게 맡기는 이유는 귀찮기 때문이지 그것들의 숨을 끊는 것에 거리낌이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생긴 것이 사람을 닮았다고 모두 사람은 아니다. 이미 건너지 못할 강을 건넌 악귀에 불과한 것들이다. 제란과의 최후의 결전을 만들기 위해서는 최소한 제란의 병력을 10만 이하의 숫자로 만들어야 했다. 그러면서도 최대한 신성제국과 그란드의 전력은 유지 할 수 있어야만 최후의 한판 승부고 뭐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동안에 그들이 얼마나 숨바꼭질을 잘 하며 제란의 전력을 줄여 나갈지가 관건이었 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각개격파를 한다면 내가 하룻밤에 100명 정도씩은 죽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석달이면 1만은 죽일 수 있을 테니 3년이면 10만이 넘게 쓸어버릴 수 있 지 않을까? 하지만 만약에 내가 그런 짓을 하고 다닌다고 해도 어차피 제란을 쓰러뜨리지 않는 이상은 무의미한 짓이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제란이 암흑제국과 한타, 신성제국 그리고 그란드를 아우르 는 제국의 제계를 잡아 갈 것이고, 그것은 다시 제란의 힘으로 이어질 것이었다. 어차피 신성제국은 버려진 땅이었다. 한타와 그란드를 차지하고 체제를 갖추기 시작 하면 지하로 숨어 들어간 그란드와 신성제국의 지도부는 힘을 잃어갈 것이다. 차차 조 금씩 조금씩. 그러니 시간은 제란의 편이지 우리들 편이 아닌 것이다. 올해가 가기 전에 마무리를 지어야 할 일이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우제푸와 로드릴 주제푸 그리고 누웬의 황제 등, 나를 끌어내는데 머리를 모은 작자들이 어떤 방법으로 제란을 묶고 나와 제란의 한판 승부로 몰고 갈 것인지를 두 고 보기로 했다. 아니 흥미진진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할까? “또 다시 제란의 병사들인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앞쪽 마을에서 움직이는 병사들은 눈에 익은 복장을 하고 있는 제란의 병사들이었다. 시체같은 모습에 둥근 방패와 창을 들고 머리에는 놋쇠로 된 투구를 쓴 녀석들이다. 투구는 뺨과 콧등을 가리는 철판이 안면에 내려와 있었다. 자이건이 칼을 빼들고 저벅저벅 마을을 향해 걸었다. 아무런 경고도 없이 제란의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 나왔다. 그들은 온전한 복장을 하고 있고, 무기를 소지한 우리들은 즉결처분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필요가 없는 존재들인 것이다. 말도 없이 서로에게 검을 겨누고 휘두르는 것이 전부였다. 아무리 병사들이라 해도 제란의 병사들은 보통 기사들을 웃도는 실력이다. 그러니 저렇게 포위를 당하면 자이건이라 해도, 아무리 튼튼한 갑옷을 입고 있다고 해도 위험할 수밖에 없다. 나는 빠르게 마법을 시전했다. 움직임을 잡아주는 것이다. 제란을 제외한 병사들에게 중압의 주문을 걸면 갑자기 높 아진 중력에 짓눌린 병사들이 자세를 바로하기 전에 자이건의 검이 쓸고 지나간다. 자이건은 시간을 끌지 않는다. 그저 목을 자르거나 아니면 다리를 잘라 버린다. 다리 가 잘린 녀석은 살아 있지만 잘 움직이지 못한다. 때문에 자이건은 그런 녀석을 내버려 두고 멀쩡한 녀석들을 상대한 후에 차근차근 쓰 러져서 두 팔로 허우적 거리는 녀석들의 목을 자른다. 어떤 때에는 아무래도 일부러 그렇게 다리를 잘라 놓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 다. 싸움이 끝나고 유유자적 쓰러진 제란의 병사들을 돌아가며 목을 자르는 모습은 분명 광기에 젖어 있었으니 말이다. 마을에서 쏟아져 나온 병사들의 수는 도합 20명, 그럼 이 마을에는 고급 지휘관은 없 다는 말이 된다. 적어도 100명 정도의 병사들이 있어야 그나마 온전한 정신을 지닌 놈 이 있다는 것을 지금까지 지나온 마을에서 알게 되었다. 이 미친 제란의 병사들은 명령을 받는 것 이외의 것은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도둑질 이나 강간 등의 짓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시키는 대로 빼앗고, 죽이고 부수는 것이 전 부였다. 어찌보면 이미 인간의 본성조차 없는 것들인 셈이다. 그래도 조금 지위가 높은 자들은 아직 인성이 남은 모양인지 여자를 탐하기도 하고 기분에 따라 사람을 죽이기도 했다. 꼭두각시는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아직 인간 같다는 말이지 인간이라는 말은 물 론 아니다. 이를테면 이야기를 해 볼 수 있는 짐승이라고 할까. 오늘 이 마을에는 그런 녀석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나마 그런 녀석은 조금이라도 정보라는 것을 가지고 있었기에 때로 심문의 대상이 되곤 했는데... 나와 자이건은 다시 마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마을이라고 해도 남은 것은 흔적뿐이었다. “마을에 사람들이 있습니다.” “알고 있다. 병사들은 아닌 모양이군.” “한타에는 살아남은 백성들이 많이 있습니다.” 처음으로 보는 사람들이었다. 신성제국을 지나오는 동안 살아있는 사람이라곤 본 적이 없었다. 제란의 병사는 제외하고 하는 말이다. 가죽으로 허리를 두른 것은 남자였고, 허리와 가슴에 가죽을 두른 것은 여자였고, 아 무것도 두르지 않은 것은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예전에 집이 있던 집터에 땅을 파고 겨우 입구를 거적으로 가린 곳에서 기어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을 알지 못하는 그들에게 자이건과 나는 제란이 보낸 또 다른 존재들로 비춰지는 모양이었다. “흐흑.” 제란이 마을의 중앙로에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땅을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한타 왕국의 강철기사단 단장 자이건 선드라스가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여러분을 지키지 못한 것에 용서를 빕니다. 크흐흑.” 이런 것을 무엇이라 해야 할까? 이제는 조금씩 이성을 잃어가며 광기에 젖어드는 자이건의 미친짓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렇게 미쳐가면서도 마지막으로 지키고 싶은 마음이라고 이해해 주어야 할 까? 제기랄. “엄마, 저 아저씨 누구야?” “으응? 군인아저씨야.” “군인 아저씨? 그럼 무서운 아저씨네?” “아니야. 그 무서운 군인 아저씨랑 싸우는 아저씨야.” “하지만 이제는 무서운 군인 아저씨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면서? 그럼 저 군인 아 저씨는 나쁜 사람인거네?” 천막을 조금 걷고 밖을 내다보며 모녀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크흐흐흑!” 자이건이 통곡이 커지고 있었다. “어서 가십시오. 기사단장님. 우리들은 아무런 도움도 드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 리들이 이 곳을 떠나 단장님을 따라 갈 수도 없습니다. 죽음이란 두려운 것입니다. 더 구나 이 어린 것들을 데리고 죽음을 따라 갈 용기는 없지요. 기사단장님이 우리들을 구하지 못했다고 원망은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오래 머물러서 우리들을 더 욱 위험에 처하게 하신다면 우리들은 단장님을 원망할 겁니다. 아니 벌써 원망하고 있 습니다. 여기를 지키던 병사들이 죽었으니 어쩌면 우리들은 몰살을 당할지도 모르겠군 요. 아! 어찌해야 할까? 도망을 가야 하나?” 늙은 목소리가 자이건에게 말하다가 결국에는 혼잣말이 되어 들려왔다. 자이건과 내가 병사들을 죽였으니 이 마을 전체가 그 책임을 져야 할지도 모를 일이 었다. “자이건, 이렇게 될 것을 우제푸나 다른 녀석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제란 의 병사들을 하나하나 죽이면 그보다 많은 수의 백성들이 죽어갈 것임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희생을 감수하겠다고 했겠지. 정의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이렇게 죽어갈 사람들은 정의를 알지 못한다. 자이건 너와 그 녀석들이 나에게 한 짓은 오늘 너와 내가 이 마을 사람들에게 한 짓과 별로 다르지 않다.” 나는 말을 마치고 늙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돌아섰다. “어쩌시겠습니까? 이 마을에 그대로 계신다면 모두들 죽게 될 겁니다. 그나마 저희 와 함께 가시면 혹시 조금 오래 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제가 가고자 하는 곳까지 간다면 한동안은 안전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결코 여러분을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말은 못합니다. 어쩌시겠습니까?” 내 말에 그 늙은이가 화난 얼굴이 되어서 소리를 질렀다. “그냥 지나갔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따 라오려면 따라오고 말라면 말라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다는 말이오!” 하지만 어쩌겠는가 힘이 없는 자들은 자신을 불태우지 않는 이상은 빨리 체념하는 것 이 이익인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대답없이 몸을 돌렸다. “내일 아침에 떠날 겁니다. 결정은 알아서들 하시오. 여기 남아서 죽음을 기다리 든, 아니면 따라오다가 죽든 내가 참견할 일은 아니오. 대신 나와 함께 가면서는 그 런 차림으로 움직이지는 못하오. 제대로 된 옷을 입으시오.” 나는 여전히 엎드려 땅을 치며 흐느끼는 자이건을 지나 마을 중앙으로 걸어가 천막 을 치고, 저녁을 준비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마을 주민 50명의 저녁도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자이건은 밤을 새워 마을을 돌아다니며 주민들을 설득했다. 나를 신격화 할 정도로 추켜세운 결과인지 아침이 되어 길을 나설 때에는 마을 주민 들이 전부 나와서 줄줄이 뒤를 따라 오고 있었다. 나는 창고에 있던 옷과 천들을 꺼내 그들에게 건네주었다. 그나마 한 여름이라 대충 걸치는 것으로도 추위는 막을 수 있었고, 또 멋들어진 옷 은 아니어도 천 조각이라도 걸친 모습이 조금은 나아 보였다. 그들은 짐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눈길을 끄는 것은 늙은 촌장의 허리에 매어져 있는 작은 주머니 네 개가 전부 였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는 나도 알 수 없었지만 그는 그것을 몹시 소중하게 여기는 듯 했다. 하지만 그렇게 출발했다고 해서 그들의 생활이 더 나아 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먹을 것을 준비하려면 물이 있어야 했고, 물을 발견하기 전에는 50명에 이르는 마을 주민들이 먹을 음식을 마련한다는 것은 이 가뭄에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나는 언제든 그 정도의 물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았지만 마법으로 물을 만들어 음식을 만들어 먹기에는 마력 손실이 너무 많았다. 결국 우리들은 오후가 기울고 어둑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걸음을 멈추고 야영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그나마 깨끗한 물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신성제국에서는 이런 물을 발견한다는 것조차도 어려웠었다. 어디를 가나 썩은 시체들이 즐비했던 때문에 시즙屍汁이 흘러들지 않은 곳을 찾기 어 려웠던 것이다. 그런 때에는 차라리 들짐승과 마물들이 그리워지기도 했다. 적어도 그것들이 인육을 뜯어 먹으면 그나마 나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창고에 야전대를 치료할 때 썼던 도구들이 남아 있는 것을 감사히 여겼다. 전부 남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솥과 국자, 천막 같은 것이 충분하달 정도로 남 아 있었다. 어린 것들은 상황에 적응을 빨리하는 모양이다. 다시 옷을 입고, 음식다운 음식을 먹고, 마음껏 소리를 내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이랴. 아이들은 구김 없이 웃는 얼굴을 하루도 되지 않아 찾고 있었다. 나는 그런 아이들의 얼굴에서 다시 한 번 가슴을 누르는 돌덩이를 느꼈다. 타니. 타니를 위해서 그리고 내 가족들을 위해서 내린 결정이었지만 역시 내가 잘못했던 것 일까? 상황은 때로 굳게 자리하지 못한 내 결심을 뒤흔들기도 한다. 저녁을 먹고 나는 천막을 나누어주고 야영준비를 시켰다. 자이건은 한시도 주위 경계에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어쩌면 이 주민들을 한타 백성의 상징으로라도 여기는 모습이었다. 나는 야영을 준비하는 주변으로 결계를 치고 마법을 걸어두었다. “자이건 오늘만이 날이 아니다. 그러다 쓰러지면 더 이상 주민들을 보살필 사람은 없다. 나에게 그런 것을 기대하진 말아라.” 나는 한 마디를 던지고 천막 안으로 들어와 누웠다. 자이건은 여전히 모닥불을 지키며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밤사이에 들짐승 몇이 나타난 것 이외에는 별다른 일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더구나 그 들짐승들은 아침에 든든한 국거리로 제격이었다. 자이건이 잡아 놓은 것들을 재료로 아침에는 고깃국을 끓이고 밥을 지었다. 혹시 이것들이 사람의 몸을 뜯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것을 일일이 따질 필요는 없었 다. 비록 그 뱃속에서 단추나 반지 같은 것이 나왔다고 해도 이런 세상에서 그다지 놀랄 것도 아니었다. 또, 그런 것을 일일이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눈으로 보고 말았기에 주민들에게 국을 모두 양보하였을 뿐이다. 보지 않았으 면 거리낌도 없었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그러한 것처럼. 아침을 마친 우리들은 다시 남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또 다른 마을에 도착했다. 나는 뛰어나가려는 자이건의 어깨를 잡았다. “이번에도 병사들을 죽이면 주민들을 책임져야 할지 모른다. 언제까지 이런 짓을 할 거냐?” “목숨이 붙어 있는 한은 저들을 용서 할 수 없습니다.” “그럼 그 때마다 죽음을 앞두게 될 주민들을 어떻게 책임질 생각이냐? 그렇게 병사 들을 죽이는 것은 신성제국에서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벌써 경험을 하지 않았 나?” “하지만...” “언제건 한타에 퍼진 병력들을 처리하는 때가 오겠지. 그 때까지는 될 수 있으면 싸 움을 피하는 것이 좋을 거다. 너 혼자 날뛰다가는 네가 지나간 마을의 주민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고 말거다. 지금 뒤를 따라오는 주민들을 보고도 그런 생각을 못한다는 말 이냐?” 자이건은 내 말에 조금 이성을 찾은 모습이다. 어깨가 처진 모습으로 마을을 우회하는 행렬의 뒤를 따라왔다. 하지만 모든 것이 우리의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우리들이 마을을 돌아서 반나절을 가기 전에 앞쪽에서 다가오는 제란의 병사들과 마 주치고 말았던 것이다. 50명의 주민들을 모두 감추고 그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지만 의외의 사태가 자이건 을 광분하게 만들었다. 서른명 정도의 제란의 병사들은 약 12명의 포로들을 끌고 가고 있었는데 실오라기 하 나 걸치지 못한 여자들이었다. 아마도 어딘가에 있는 지휘관에게 데리고 가는 모양이었지만 맨발에 손이 묶인 채로 끌려가는 이들의 모습은 참혹한 것이었다. 여기에 자이건이 뛰어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결국 자이건은 여자들을 구해내었다. 참으로 다행한 것은 이들 하급병사들은 여자들을 인질로 삼는 것 같은 짓은 하지 않 는다는 것이다. 어쩌면 입력된 행동 패턴에 따라 움직이는 로봇과 같다고 할까. 결국 여자들은 주민들과 합류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여자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는 근처 제란 병사들을 지휘하는 녀석에게 달 려가려는 자이건을 말려야 했다. 그런 곡절을 겪고 난 후, 나는 최대한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길을 택해서 길을 잡았 다.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그게 이제야 궁금해 졌나?” “어딘지 목표가 있으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자이건이 우리들의 목적지를 궁금해 했다. “언제까지나 떠돌아다닐 수는 없으니까 정착을 해야지. 나는 아주 그럴듯한 장소를 하나 알고 있지. 그 곳이라면 넥스 영지만큼이나 수비하기에 좋은 곳이라고 할 수 있 을 걸?” 자이건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일일이 설명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동이 빠르지는 않았지만 다행히 순조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말이나 마차를 구할 수 있으면 더 좋았겠지만 지금으로선 그런 것들을 얻을 수 있는 곳은 제란의 병사들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이렇게 걸어서 이동을 하는 방법뿐인 것이다. 아니 방법은 또 있었다. 순간이동을 하는 방법.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의 좌표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순간이동을 갈 수도 있었고, 한 번에는 갈 수 없어도 서너 번 정도면 이동을 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위험했다. 눈에 불을 켜고 신성제국과 그란드의 사라진 지휘부를 찾는 제란에게 탐지될 위험이 컸다. 십여명의 인물들이 한꺼번에 순간이동을 한다면 그것이 제란에게 들키지 않으리란 보 장이 없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이렇게 도보로 이동을 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앞으로 보름 정도면 도착을 할 수 있을 것 같군. 의외로 튼튼한 몸을 하고 있을 것 같으니 말이야.” 나는 뒤를 따라오는 주민들을 보며 자이건에게 말했다. “요즈음은 걷는 것 이외에는 하는 일도 없이 먹기도 잘 먹고 잠도 편안하게 자니까 상태가 호전된 것입니다.” “아무튼.” 그리곤 다시 대화가 끊어졌다. 여전히 내가 선두에서 걸어가고 삼삼오오 짝을 지은 사람들이 그 뒤를 따라온다. 자 이건은 수시로 앞뒤를 오가며 그들의 불편을 살핀다. 앞으로 사 오일 정도면 목적지에 도착하게 될 것 같았다. 그 동안에도 그란드와 신성제국 반격은 산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주로 신성제국에 남겨진 소규모의 병력들에 대한 것들이었고, 한타에서는 별다른 움직 임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세트에 의하면 아직도 마췬길드가 움직이고 있다고 했다. 한타와 그란드, 암흑제국 안에서 마췬길드는 아직 건재하다는 것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한타쪽의 길드였지만 대부분의 길드원들은 항복을 하고 제란의 병사들 에게 복종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고, 그나마 그들 사이의 연락을 맡은 길드원들은 목숨 을 걸고 한타의 산과 숲을 누비며 정보를 수집하고 명령을 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런 마췬길드의 정보망에도 그란드와 신성제국의 모습은 잡히지 않는 모양이 었다. 아니면 모두들 알고 있으면서 자이건과 나에게만 정보를 주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한타 사람들 사이에 은근히 퍼진 소문이었다. 물론 아세트도 시인한 것이지만 마췬길드를 통해서 뿌려진 과장된 내용의 영웅담이었 다. 특히 자이건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이었는데 하얀 갑옷을 입은 기사와 역시 하얀 옷 을 입은 마법사가 한타에서 제란의 병사들과 맞서 싸우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들은 용감하게 단 둘이서 수많은 병사들을 물리치며 북쪽에서부터 남쪽으로 이동 을 하고 있는 중이다. 강철기사단의 자이건 선드라스와 9써클마스터의 대마법사가 함께 제란의 병사들을 쓰 러뜨리고 있다. 그들의 힘은 무적이다. 뭐 이런 내용을 한타의 백성들에게 흘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말로는 한타의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제란 의 시선을 나에게로 돌리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것이 아니라면 자이건을 한타의 영웅으로 만들어서 나중에 한타의 국왕으로 만들려 는 아세트의 계획일까? 하지만 그런 문제에도 별로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 제란에게 나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 탐탁치 않았지만 언젠가 한 번은 만나야 할 녀석 이었다. 제란이 나를 찾는다고 해도 나는 제란과 1:1의 상황을 만들 자신이 있었다. 곁에 따라 다니는 떨거지들과 함께 협공을 당하는 것은 피할 자신이 있는 것이다. 도망가는 것에 자신이 있는 내가 굳이 그런 소문이 나는 것을 두려워 할 이유는 없었 다. 이젠 제란이 내 발목을 잡을 방법은 없으니까 말이다.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도 겨우 나 하나의 죽음이면 끝이 날 문제였다. 물론 죽어 줄 생각은 전혀 없지만 말이다. “정지!” 나는 앞쪽에서 은밀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기척을 느끼고 일행들을 멈추게 했다. 여섯명의 인원이 숲의 그림자와 나뭇가지에 몸을 맡기고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제란의 병사들일까요?” “글쎄, 제란의 병사들은 저런 방법으로 움직이지 않았는데... 누구지?” “제가 가서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아서, 저쪽도 만만한 실력이 아니야. 특히 두 녀석이 솜씨가 제법이군. 거의 발소 리와 숨소리가 들리지 않아.” 나는 자이건을 만류하고 그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우리 일행들의 기척을 감추기 위해 마법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에 저 쪽에 마력 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우뚝! 역시나 저 쪽에서 무언가를 느낀 모양이었다. 시간이 없어서 기척을 숨기기만 하고 마력 자체를 골고루 분산시키는 것을 하지 못 한 탓이었다. 나는 자이건에게 눈짓을 보내 그들을 맞이하도록 시켰다. 자이건이 몸을 세우고 성큼 성큼 숲을 헤지고 앞으로 나가자, 저 쪽의 인물들도 긴장 했는지 맥박이 빨라졌다. “누구냐? 썩 나서라.” 자이건이 칼을 빼고 놈들이 은신하고 있는 것을 가리켰다. “화이트 아이론!” 숲속에서 낮게 터지는 목소리가 들리더니 몸을 숨기고 있던 인물들이 걸어나왔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희들은 화이트 아이론님의 적이 아닙니다. 저희는 마췬길드 의 길드원입니다.” 숲에서 걸어나온 자들이 그렇게 자신을 소개했다. 화이트 아이론? 백색 강철인가? 그럼 자이건을 그렇게 부르는 모양이군. 그러는 중에 제일 늦게 숲에서 걸어 나오는 두 사람을 본 나는 나도 모르게 자리에 서 일어나 숲을 헤치고 나갔다. “비아더! 미아더!” “루, 루탄님?” 그들은 비아더와 미아더였다. 마췬 길드의 길드마스터. 비록 광아에게 시달리고, 지금은 아세트에게 시달리고 있었 지만 그들은 실질적인 마췬길드의 주인들이었다. 나는 그들의 어깨를 한 번씩 안아 주었다. 수아의 머릿결에서 헤어지고 소식을 몰랐던 사람들이었다.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다.” 비아더와 미아더가 내 인사를 웃는 낯으로 끄덕이며 받았다. 비아더와 미아더 일행은 길드원들에게 명령을 전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일을 하고 있 다고 했다. 물론 자신들 이외에도 그렇게 돌아다니는 무리들이 제법 되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한타에서도 정보가 움직이고 소문이 퍼진다는 것이었다. 물론 소문이라는 것이 거의 전적으로 마췬길드에서 장악하고 있다고 봐야 하는 것이 지만 말이다. 그나마 제란의 병사들이 위에서 명령받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여를 하지 않 는 편이라 그들의 통제에 잘만 따른다면 큰 위험이 없는 생활들이라고 했다. 문제는 인간답지 못한 수준의 생활환경이 문제였고,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에 대 한 공포가 문제였고, 한타의 백성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살인과 강간같은 강력 범죄가 문제라면 문제였다. 제란의 병사들은 치안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되먹지 못한 것들은 자신의 힘을 믿고 온갖 패악을 저지르고 있는 모양이었 다. 인간들 사이에서 약육강식이 성립한다고나 할까. 비아더와 미아더를 통해서 알게 된 자세한 이야기들은 나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제란의 병사들은 여건을 만들고 인간들은 그 여건 속에서 점차 인간다움으로 여겨졌 던 가치관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조금씩 암흑제국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일까? “생각보다 심한 모양이군. 나는 그래도 백성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소요를 제란의 병 사들이 막을 줄 알았는데...” “전혀 치안에는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의 포고령을 어기는 경우에만 가혹 하게 처벌을 할 뿐이고 나머지는 그야말로 자율이지요. 가끔은 마을 사람들이 단결해 서 그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만들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입니 다. 그래서 요즈음은 보이지 않게 치안을 유지하는 데에도 신경을 쓰고 있는 중입니 다. 말썽이 많은 녀석들은 어둠 속에서 목이 떨어지는 것이지요. 덕분에 우리 길드가 제란군의 수뇌들의 신경을 건드린 모양인지 토벌이 진행되기도 했습니다. 큰 피해는 없지만 드러내고 활동을 자제해야 할 정도는 되지요.” 도둑길드가 마을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소매를 걷고 나섰다? 세상이 변하니 별 일 이 다 있다는 생각에 잠시 씁쓸한 웃음이 난다. “그런데 루탄님께서는 어디로 가시는 길이십니까?” “요즈음 화이트 아이론과 그의 마법사가 세간의 주목을 끌고 있다는 것은 알고 계시 죠?” 음? 그의 마법사? 그럼 내가 자이건의 마법사로 알려진 것인가? 아세트가 무리를 하는군. 아무리 자기 남편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라지만 나를 자이 건의 밑에 둔다? 흐흣. 거참! “그런 소문이 있다는 말을 들어서 알고 있는데, 내가 언제부터 자이건의 밑에 들어 가 있게 되었던가?” “그게, 루탄님이 그 마법사라는 걸 저희들이 몰랐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된 겁니 다. 내일부터 당장 정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굳이 제란의 주목을 끌 필요는 없겠지. 그대로 내버려 둬. 아세트도 나름대로 머리를 쓴 것일 텐데 말이야.” 나는 그냥 덮어 두기로 했다. 자이건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었던지 제란의 이목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던지, 그다 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아! 나는 지금 쉬백의 성으로 가는 중이야. 여기서 멀지 않지. 거기다가 사방이 막 혀 있으니 어느 정도는 방어에도 유리할 것 같고 말이야.” “네... 쉬백의 성. 하지만 그 곳은 지금 금지입니다.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고 있습 니다. 처음에 제란의 병사들이 주둔을 했었지만 곧 모두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의외 로 초환수가 살고 있더군요.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겠다 싶었던지 제란도 더 이상 병사들을 파견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도 귀찮은 일들은 나중에 처리하려는 생 각인 것 같습니다.” 마르트라의 힘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번에 내가 쉬벡의 성에 자리를 잡게 되면 마르트라와 화이트 스네이크 들에게 피해를 주게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대외적으로라도 불간섭 협정 같은 것을 맺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몰라. “그런 문제는 가서 해결을 하면 될 것이고. 아무튼 지금의 목적지는 그 곳이야. 그 런데 그 곳이 금지라면 쉬백의 성에 대한 소식은 아는 것이 없겠군?” “그렇습니다. 제란의 병사들이 쫓겨난 이후로는 풍교가 통행금지가 되어서 입구를 막은 제란 병사들 때문에 접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입구를 막은 병사들을 쓸어 버려야 한다는 결론이군. 쩝. 그 후에도 비아더, 미아더 형제와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특이할 만한 일은 없 었다. 결국 하룻밤을 우리 일행과 지낸 비아더 형제와 마췬길드의 길드원들은 새벽 이슬을 발끝으로 털어내며 숲속으로 사라졌다. 아직은 할 일이 많아서 회포를 달랠 시간이 없는 우리들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쏟아지는 폭염과 갈라진 대지를 밟으며 길을 재촉한 우리들은 며칠 후 드디어 쉬벡의 성으로 통하는 관문을 앞두고 있었다. “예상보다 수가 많군. 300이라니.” “그렇습니다. 단지 쉬벡의 성으로 통하는 길목을 막기 위해서 저런 정도의 병력을 배치했다니... 아마도 쉬벡의 성 쪽으로 사람들이 제법 많이 남아 있는 모양입니다. 이를 테면 한타에서 매직컬초와 함께 마지막 남은 보루라고 할 수도 있겠군요.” 300이라는 병사의 수는 일반적인 병사들로 본다면 2천에서 3천에 이르는 전력이라고 볼 수 있었다. 물론 그런 숫자를 쓸어버리는 것은 나에게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저 정도의 병력을 한꺼번에 쓸어버린다면 제란쪽에서 움직이는 녀석이 있겠군. 제 란이 직접 오지는 않는다고 해도, 카튼이나 트롤라이런 정도는 오지 않을까?” 걱정은 그것이었다. 하지만 결심과 행동은 빠를수록 좋았다. 어차피 제란과의 싸움을 피하지 않을 생각이라면 조금 신경을 건드리는 것 정도야... 나는 일행들을 기다리라고 하고는 혼자서 쉬벡의 성으로 통하는 풍교를 향해 걸었다. 정오를 넘어선 햇살을 등에 지고 짧은 그림자의 가슴을 밟으며 나는 진영을 갖추고 흐트럼짐 없는 모습으로 경계를 서고 있는 인간 아닌 인간들을 향해서 걸음을 옮겼다. 일체의 말이 없이 공격을 했던 다른 마을들과는 달리 제란의 병사들 쪽에서 말소리 가 들린 것은 의외였다. “누구냐? 뭣하는 놈이 감히 황제 폐하의 명을 어기고 돌아다니는 것이냐?” 이런 경우에 나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문답무용問答無用! 라이트 파이어 파워! 순간적으로 뻗어나간 빛줄기가 제란의 병사들을 덮쳤다. 다행스럽게도 풍교는 넓이가 넓었기 때문에 다리를 건드리지 않고 다리 앞을 막아서 고 있던 병사들을 훑고 지나가 반대편의 언덕을 강타했다. 콰콰콰광. 역시 쉬벡이 남긴 마법 중에서 이 부작용만 뺀다면 참 쓸만한 마법이다. 마법이 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없었다. 어림잡아 한꺼번에 모여 있던 병사들 절반 정도는 사라진 것 같았다. 그 속에 이들의 우두머리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일제히 침묵으로 달려드는 병사들을 보아서는 우두머리가 이번 마법에 날려 간 모양이었다. “그래, 어디 한 번 같이 춤을 추어 보자꾸나. 이미 오래전에 가야 했을 길을 아직 도 끈질기게 잡고 있는 너희를 편히 쉬게 해 주마.” 꼭두각시. 나는 수수를 빼어들고 그 속으로 뛰어들어 춤을 추었다. 사지 육신이 날아가도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들이었지만 손끝을 타고 흐르는 감촉 은 진절머리나는 것이었다. 사람의 육신을 가르고 지나가는 칼날의 떨림이 이리도 가슴을 파고 들 줄이야.... 이미 살아있는 것들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인간이 아니라는 것도 알지만, 겉모습이 지는 선입견을 쉬이 털어버리는 못하는 탓이다. 나는 그런 중에서도 칼을 휘두르며 한 겹 껍질을 벗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미 버렸어야 할 아집이고 고집이었다. 사람을 베는 것이 유쾌하지 않더라도 누구에게 미루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마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을 이토록 가까이에서 칼을 휘두르며 하는 것은 내가 걸 어가는 길에 방관자가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마법을 날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고, 내가 한 일 에 대해 무책임한 회피를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춤은 끝이 났다. 수수戍守를 타고 흐르는 핏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검신에는 핏기가 남아있지 않았다. 살짝 흔들어 검 끝에 매달린 핏방울을 털어 내었 다. 지토가 있었으면 땅에 묻어 버리라고 하면 좋을 것을.... 나는 마법으로 땅을 무르게 만들고 시체들이 늪에 빠지듯 땅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 을 바라 보았다. 잠시 후에는 핏자국만 남은 땅이 천연덕스럽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능청을 떨었 다. 나는 자이건과 일행들을 불렀다. 거의 넋이 나간 주민들을 이끌고 자이건이 다가왔 고, 풍교 위로 걸음을 옮겼다. 평소에는 누구라도 풍교 위로 올라서면 초환수인 마르트라 응분의 대가를 치루어 주 었겠지만, 내가 나타난 것을 알고 있다면 아무 간섭도 없을 것이었다. - 또 보게 되는군. 떨거지들을 데리고 온 것을 보니 당분간 여기서 머물 생각인 모양 인데, 나는 너에게 도움을 주지 않겠다. ‘알았다. 어차피 이 싸움은 인간들의 싸움이다. 더구나 신계에서도 나에게 힘을 보 텔 생각이 없는 모양이더군. 란이나 다른 환수들도 나에게 도움을 줄 존재를 찾기 어 렵다고 하더군.’ - 그런가?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워낙 자유분방한 존재들이고 어디 얽매이지 않는 존재들이니 말이야. 더구나 지금처럼 각 계가 인간계에 대한 개입을 금하고 있는 상태 라면 더더욱 힘들겠지. ‘그 말은 가능은 하다는 말로 들리는군.’ - 물론이지. 네가 살았다는 그 시대에도 무당들이 간혹 강신을 받았다면서? 아마 그 시대가 지금보다는 더 힘겨운 시대가 아니었을까? 강신의 경우에는 신계의 직접적인 개입이라고 볼 수 없지. 마계는 아이슈마 때문에라도 뭐라고할 입장이 못되고, 천사계 도 사제들과 성기사에게 힘을 주고 있고, 그러고 보면 루시퍼도 암흑교 사제들에게 힘 을 주는군. 정령계가 그나마 조금 조용한 편인가? 뭐 공포의 정령이 날뛴 것을 생각하 면 그쪽도 약점은 있군. ‘그런건가? 하지만 아직은 나를 도와줄 존재를 찾지 못했으니 조금 난감하군.’ - 기다리면 연이 닿겠지. 억지로는 안 되는 것이 아니겠지. ‘그렇겠지. 아무튼 쉬벡의 성에서 머물 생각이니까 괜히 인간들쪽에 신경쓰지 말 아. 나중에 한 번 찾아가지.’ - 알았다. 나중에 보자. 나는 풍교를 건너는 동안 아무도 모르게 마르트라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제 마르트라는 쉬벡의 성으로 오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관여하지 않을 것이었다. 괜 한 참견으로 제란과 같은 존재를 적으로 삼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마 르트라는 나 때문에 곤란하게 된 것이니 내가 미안해야 할 문제였다. 나는 마법에 엉망으로 뒤엉켜버린 언덕 위로 올라섰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며칠이 더 걸려서 쉬벡의 성에 도착한 우리들은 바깥과는 딴 세상인 성의 모습에 놀 랐다. 이미 한 번 제란의 병사들이 휩쓸고 지나간 덕에 무너지고 부서진 건물들이 보였지 만, 쉬벡의 마법으로 만들어진 성벽과 건물들은 외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성의 입구에서 주민들로 구성된 자치대가 앞을 막기는 했지만 별다른 문제없이 성 안 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더구나 성에는 성주나 관리들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들을 제한할 권한을 가 진 자들은 없었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 그런 자들이 있다고 해도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나는 성의 주민 대표에게 이제부터 마르트라가 쉬벡의 성으로 들어오는 제란의 병사 들을 막아주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전했다. 물론 사색이 된 주민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했지만, 나는 대신에 내가 그들을 막아주 겠다고 하고 대가를 요구했다. 대가란 다른 것이 아니라 다른 지역의 백성들을 이 곳으로 데리고 들어오는 것에 대 해서 왈가왈부 하지 말라는 것과, 비축분의 식량들을 나누어 주는 것이었다. 물론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돌아갈 여분의 토지는 넉넉했다. 깊은 계곡으로 둘러싸인 쉬벡의 성 영지는 넥스 영지보다도 더 넓었기 때문에 쉬벡 의 성에 살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경작하는 땅이라고 해 봐야 성 주변의 땅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이 영지에는 괴수나 사나운 짐승들이 없었기 때문에 어디에서 정착을 하든 위험은 없었다. 오히려 사람이 제일 위험한 곳이었다. 아무튼 나는 쉬벡의 성 주민대표들에게 영지를 보호하는 대신에 내가 요구하는 원조 를 해 줄 것을 약속받고 풍교 입구에 결계를 쳤다. 그리고 영지 주면을 돌면서 마법이나 공중으로 침입하는 자들을 탐지하기 위한 알람 마법을 걸어 두었다. 풍교로 들어오는 것들이야 제란의 병사들일 테니 별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만약에 다 른 곳으로 들어오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은 제법 능력이 되는 녀석들일 것이었다. 하지만 알람 마법이 그들을 막아주지는 못할 것이었기 때문에 마르트라에게도 주위 로 접근하는 존재들이 있으면 알려달라는 부탁을 했다. 마르트라는 직접적인 도움이나 개입을 할 수는 없지만 그런 정도라면 도와주겠다고 선뜻 승낙을 했다. 그 이후로 나와 자이건은 쉬벡의 성을 중심으로 작은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제란의 병 사들을 쓸어버리고 주민들을 구해오는 일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우리들이 하는 일은 그저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리 우리들이 돌아다니며 마을 사람들을 구해 온다고 해도 며칠동안 돌아다녀야 한 마을 주민을 구해오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다음에는 마을 주민들이 알아서 쉬벡의 성으로 가도록 하 기도 했지만, 중간에 가끔 순찰을 하는 제란의 병사들을 만나게 되면 몰살을 당했기 때문에 마음 편히 그들만 보내기도 어려웠다. 그런 때문에 8월이 다 가도록 나와 자이건이 구해온 주민들의 수는 겨우300명이 되 지 않는 숫자였다. 물론 가장 가까이에 있는 자간 시에는 많은 주민들이 있었지만 자간을 건드리는 것 은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적어도 사라진 신성제국과 그란드의 세력들이 일을 벌이기 전에는 제란의 모든 힘을 나에게 집중시키는 짓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했고, 또 신성제국이나 그란드 등의 녀석들에 대한 호감도 별로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녀석들에게 자청해서 도움을 주 고 싶은 생각도 없는 탓이었다. 그렇게 8월이 가고, 9월이 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이 하고 계시는 겁니까?” 자이건이 하루 종일 꼼짝도 않고 앉아 있는 나에게 물어왔다. 아마도 요즈음은 내가 주위의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주민들도 구해오지 않고, 그렇다 고 별달리 하는 일도 없이 자리만 지키고 있는 것에 내심 불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하면 결계를 깨고 넥스 영지로 들어갈 수 있을지를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나에게 제란과의 싸움보다는 타니와 루아, 그리고 동생들과 지토를 만나는 것이 더 중 요하니 말이다.” 내 대답에 자이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시 입구쪽으로 가서 문 옆에 서 있었 다. 별로 도움도 되지 않으면서 마치 호위나 종이라도 된 것처럼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이 다. 아마도 나에 대한 미안함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나는 자이건의 행동에 관여 하지 않았다. 9월이 깊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움직임이 없는 우제푸와 이그, 신성제국과 누웬이었다. 별로 시간이 많지 않았다. 제란은 현재 한타와 그란들의 접경에 군대를 멈추고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고, 그의 군단들 중에서 트롤라이런의 군단 이 그란드의 왕성을 점령하고 실제적인 통치를 시작했다. 트롤라이런이 점령한 그란드에서는 그렇게 잔혹한 살육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건물들이 파괴되고 최소한의 의복과 도구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몰수되고 폐기되었 다. 한타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조치가 취해진 것이다. 물론 작은 소요가 있어나는 지역이 없지 않았지만 반발이 일어나는 지역에 대해서는 어김없이 강력한 징계가 행해졌다. 피와 죽음만이 남는 징계는 의도적으로 트롤라이런이 퍼뜨린 것으로 짐작되는 소문 을 따라서 그란드의 곳곳으로 퍼졌고 소문을 들은 그란드 백성들은 순종을 택했다. 그렇게 제란은 자신이 점령한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많지 않은 것이다. 벌써 가을이었다. 그나마 전쟁으로 늦게 파 종된 작물들이 겨우 수확을 앞두고 있었고, 그것은 곧 제란이 곤란을 겪고 있는 보급 문제를 어느 정도 해소해 줄 것이었다. 아니 세금을 걷는다는 행위가 가지는 지배자로서의 자리매김이라는 상징적인 행위가 가능해진다는 것도 문제였다. 더구나 지금 몸을 숨기고 있는 신성제국이나 그란드의 지도부들도 마땅한 보급이 없 이 언제까지나 버틸 수는 없을 것이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되면 견디기 어렵게 되는 쪽은 분명 숨어있는 쪽일 것이다. 나는 그동안 쉬벡의 영지 주변 마을들의 사람들을 구하는 데에 신경을 쓰고 있었지 만, 실제로는 별 실효성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무슨 영웅이나 된 듯이 한타 전역을 돌아다니며 소규모 마을들에 파견된 제 란의 병사들을 쓸고 다니는 짓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일이야 내가 아니어도 우제푸 정도만 되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어쩌면 자이건이 나를 넥스 영지에서 끌어 낸 순간부터 나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마 음을 많이 잃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요즈음은 그저 넥스 영지도 어떻게 돌아갈까 하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자이건은 내가 조금 더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 것이 불만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식어버린 열정은 다시 타오르기 어려운 법이었다. 그렇게 쉬벡의 성에서의 시간은 흘러갔다. 하루, 하루... 하지만 내가 걱정하는 것을 그들도 걱정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삼국동맹이 드디어 움직였다. 망해버린 나라들이었지만 한타의 우제푸, 그란드의 얼음기사단, 신성제국의 화염기사 단과 성기사, 그리고 신성사제. 가장 주목할 만 한 것은 우제푸의 매직컬초가 결계를 풀고 마법사들을 사방으로 풀었 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한순간에 한타의 주요 도시들에 대단위 마법사들을 순간이동으로 보내서는 주 둔 병사들을 쓸어버리는 방법을 썼다. 비록 건물들은 무너지고 폐허가 된 도시들과 성이었지만 백성들의 수가 많은 곳이었 기 때문에 그 효과는 큰 것이었다. 그렇게 해방된 도시들과 성에서는 마법사들을 앞세우고 칼이나 창을 들 수 있는 자들 이 모두 나서서 주위 마을들에 있는 소규모 병력들을 처리해 나갔다. 어떻게 보면 어이없을 정도로 제란의 병사들은 한타의 곳곳에서 힘을 쓰지 못하고 쓰 러졌다. 물론 그 중에 희생이 적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 병사들이 몰려 있을 때와는 큰 차이 가 있었다. 수십에서 수백으로 흩어진 제란의 병사들은 마법사들의 마법과 수십 배에 이르는 백 성들의 몰매에 견디지 못하고 쓰러진 것이다. 물론 매직컬초의 마법사들의 수가 한타의 모든 도시들을 점령할 수는 없었다. 하지 만 매직컬초에서는 같은 방법을 반복해서 사용했고, 먼 거리에 떨어져 있던 제란의 지 휘부는 한타의 병사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했다. 더구나 모습을 감추었던 신성제국의 실세들과 그란드의 얼음기사단이 신성제국에 남 겨진 제란의 병사들에 대한 일제 공격을 감행했다. 그 곳 역시 제란의 본대와는 많이 떨어진 곳이었기 때문에 앞뒤에서 협공을 당한 제 란의 병사들은 카튼이 겨우겨우 병력을 추슬러서 제란의 본대로 귀환하기 위해 혈로 를 뚫고 있는 중이었다. 그 소식은 내가 쉬벡의 성에서 머리를 감싸고 넥스 영지로 들어가는 방법을 연구하 며 시간을 보내던 9월 중순에 들려온 것이었다. 덕분에 한타와 신성제국의 많은 부분을 회복하고 잔당을 소탕하면서 그란드와 한타 의 국경지역(그러고보니 예전의 마르트라의 영역과 겹치는 곳이다.)에 주둔한 제란을 압박하는 모습으로 세 개의 세력이 움직이고 있었다. 북쪽에서는 카튼이 신성제국 쪽에서 전선을 감시하던 25000 정도의 병력을 이끌고 제란에게 가고 있었고, 그란드에 트롤라이런의 3만 병력이 있었다. 그리고 제란의 5 만 병력과 붐저브, 차구므진의 병력이 합해서 5만에 가까운 숫자였다. 처음 23만의 숫자에 비하면 상당히 줄어든 숫자였지만 아직도 16만에 가까운 숫자가 남은 것이었다. “숫자를 얼마나 줄일 수 있을까? 이제 삼국동맹쪽에 보급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할 텐 데? 모든 것이 파괴된 상태에서 흔한 칼 하나 만들어 낼 방법이 없어. 그런 면에서 제 란이 점령지의 모든 것을 파괴한 것은 적절한 판단이었군. 하물며 그란드의 경우에도 주요 도시들과 성들은 남은 것이 없으니...” “하지만 원래부터 전장의 부대를 따라다니는 공병부대가 있으니 어느 정도는 문제 를 해결 할 수가...” “그럴까? 그것도 어디 남아있는 자원이 있을 때의 문제지. 지금 이 와중에 산을 파 서 철광석을 채취해서 무기를 만들 건가? 제란의 부대가 한타와 신성제국 그란드에서 철기의 사용을 금하면서 모든 철기들을 수거해 갔다. 그리고 그 철기들은 모두가 암흑 제국으로 흘러갔지. 이제는 무기를 만들 철도 무족한 상황이야. 지금이야 기세 좋게 밀고 올라왔지만 객관적인 전력도 부족한데 보급도 형편이 없는 지경이군. 이길 수 있 을까?” 나는 자이건을 바라보며 사기를 꺾는 발언을 해 주고는 손에 깍지를 끼고 의자에 몸 을 기대었다. “그나저나 아직도 16만이 남은 제란의 병사들을 어떻게 줄일 생각인지 모르겠군.” 이 순간의 내 눈은 어쩌면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는 아이와 같은 눈빛일지도 모르겠 다. 나는 점점 더 현실의 문제들에 대해서 흥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현실은 그저 나와 관계없는 동화책 속의 이야기 같다. 빌어먹을! 타니와 가족들이 보고 싶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면서 다시 피비린내가 대지를 덮었다. 매직컬초와 얼음기사단 신성제국이 제란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숫적으로 열세였지만 매직컬초의 마법과 신성사제들의 신성력의 결합은 상당한 위력 을 발휘했다. 처음에는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라고 펄쩍뛰면서 마법과 신성력의 조합을 반대하던 천교의 교황도 전세의 어려움에 어쩔 수 없이 마법사와 사제의 합동 작전을 수락했 고, 예전 두 차례의 싸움에서 만들어졌다는 신성력과 마법력의 조합이 제란과의 싸움 에서 사용되었다. 주로 방어를 마법사들이 맡으면 제란의 병사들에 대한 1차 공격을 사제들이 맡았고 신성력에 의해 약해진 제란의 병사들을 기사들이나 마법사들이 마무리하는 방법이었 다. 예전에는 마물들이나 소환된 마수들을 상대하기 위해서 쓰였던 방법이었지만 아이슈 마의 힘을 받은 제란의 병사들도 신성력에는 약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나름대로 효 과적인 공격 방법이었다.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밀렸던 것이 신성제국의 천교의 사제들이 주신의 힘과 마법의 힘이 어울리는 것을 꺼려하고 피했던 것에도 한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예전에도 썼던 방법을 다시 쓰는 것에도 신의 권위가 회손된다느니 어쩐다느니 해서 거부했던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조합을 이룬 삼국의 전력이 어느 정도 제란의 병사들을 상대하기는 했 지만 그것이 전황의 우세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분전이라고 할 수는 있어도 승리를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거기 다가 제란 쪽에서도 실력 있는 녀석들로 이루어진 부대를 내세워서 동맹군을 괴롭히 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신성력에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았고 마법에 대한 방어력도 우 수한 편이어서 동맹군 쪽에서도 실력으로 맞설 수밖에 없었고, 문제는 그런 실력자가 제란 쪽에 월등히 많았다는 것이다. 서로가 비슷한 실력의 경우에 숫자가 많은 쪽이 유리한 것은 당연했다. 그렇게 상황이 흘러가가 자이건은 말을 타고 전장으로 달려갔다. “어쩌면 다시 뵙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에 살아남는다면 전쟁이 끝나고, 그 때도 살아있다면 루탄님께 용서를 빌겠습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죽으려고 노력하지는 말아.” 나는 그렇게 자이건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뭐 다시 만나게 된다면 마지막 인사는 아니겠지만.... 쉬벡의 성에 혼자 남은 나는 가끔씩 날아오는 전황을 받아보고 있었다. 자인건이 떠난 뒤에 자이건이 남기고 간 통신 수정구의 좌표를 읽은 모양인지 하루에 도 서너 번씩 전황에 대한 보고서가 날아왔다. 탁자위에 쌓이는 전황은 갈수록 동맹 쪽이 힘겹게 변해가고 있었다. 희생이 생기면 그것을 만회할 방법이 없는 전쟁이었다. 순식간에 6써클 7써클 마법사가 목숨을 잃었고, 검기를 날리던 기사들이 목이 잘렸 다. 그야말로 소모전인 것이다. 그만한 마법사와 기사를 키우기 위해서 얼마나 오랜 시간 이 걸리고 노력이 들것인가. 하지만 전장에서 죽어 넘어진 그들은 그저 하나의 주검에 지나지 않았다. 조금씩 조금씩 전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맹군이 서쪽으로 후퇴를 한 것이었다. 일방적으로 쫓기는 것은 아니었지만 점진적으로 서쪽으로 서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아마도 누웬의 황제를 끌어들이려는 작전인 모양이었다. 제란이 그걸 모를까? 하지만 제란은 끈질기게 동맹군을 서쪽으로 밀어 붙이며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제란이 서쪽으로 조금씩 동맹군을 따라서(혹은 밀면서) 이동을 하고 그란드에 남은 트롤라이런의 병사들이 본대와 떨어지자 그란드 국민들의 항전이 시작 되었다. 이미 그란드 이그왕의 명령이 마췬길드를 통해서 전달되었고, 그에 따라서 지방에서 숨죽이고 있던 국민들이 움직인 것이다. 비록 모든 무기를 빼앗기고 남은 것이 없다고는 해도 트롤라이런이 그 짧은 시간에 모든 그란드 왕국을 장악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본보기로 몇 개의 마을이 불타 폐허 가 되었고 사람들이 죽었지만, 그란드의 백성들은 그것만으로 숨을 죽이고 복종하는 척 했기 때문에 많은 마을들이 그나마 피해 없이(물론 건물과 도구들을 빼앗겼지만) 무사할 수 있었다. 그 백성들이 일어난 것이다. 어딘가 숨겨 두었던 무기들을 들고 트롤라이런의 병사들 을 곳곳에서 습격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렇다고 트롤라이런이 제란의 군대가 받쳐주지 않는 상태에서 3만의 병사들을 이끌 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가만히 한 자리에서 경계를 하거나 혹은 제란을 따라 가는 것 뿐이었다. 다른 방법으로는 그란드 왕국 곳곳을 치달리며 마을과 도시들의 모습을 지우고 사람 들을 잡아 죽일 수도 있었지만 트롤라이런은 자신의 병사들을 모두 불러 모아서 한 곳 에 주둔지를 만들고 진지를 구출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전황이 진행되면서 9월이 가고 10월이 되었다. 나는 여전히 소모전 양상의 제란과 동맹군의 싸움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 사이에 거의 자유를 찾은 한타에서는 소문을 듣고 주민들이 하나 둘 쉬벡의 성으 로 몰려들었다. 처음에는 가까운 곳에 있는 마을과 도시의 주민들이 몰려 왔는데 그 중에는 자간시 의 경매장 주인이 끼어 있었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보면서 참 세월이 빠르다는 것을 느꼈다. 많이 늙어서 이제는 혼자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몰려온 사람들은 제각기 쉬벡의 성 영지 곳곳에 자리를 잡고 겨울을 날 준비 를 시작했다. 서로 힘을 합해서 함께 지낼 숙소를 만들기도 하고, 나무 열매나 뿌리들을 캐서 말리 고 동물들을 사냥하기도 했다. 그들은 다른 곳에 비해서는 이곳이 덜 위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은연중에 쉬벡의 성에 머물고 있는 내가 그들을 지켜 줄 것이라고도 생각하 는 모양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비아더 미아더 형제가 길드를 통해서 퍼뜨린 소문 때문인 것 같았다. 쉬벡의 성에는 쉬벡 만큼 위대한 마법사가 있다. 그래서 제란도 쉬벡의 성은 건들지 않는다. 뭐 이런 소문인 모양이다. 나는 가끔 밖으로 나가서 그들의 모습을 살펴보기는 하지만 그들에게 내 모습을 드러 내지는 않았다. 봄이 되면 만물이 소생하고 생기가 넘쳐 흐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가을은 그 보다도 더 많은 생기가 넘친다. 계절을 이어온 결실들이 열매를 맺 는 시기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올 가을 쉬벡의 성에 모인 사람들은 너나없이 겨우살이 준비에 걱정이 앞서 는 모습이다. 그래서 그런지 철모르는 어린 것들을 빼고는 모두들 지친 모습이다. 더구나 여름부 터 끌어온 가뭄탓에 더더욱 생기를 잃은 대지가 그런 그들을 더욱 힘들게 한다. 이나마 제란과 동맹군의 싸움이 누구의 승리로 돌아가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모습이었 다. “겨울은 넘기지 말아야지. 봄까지 이어진다면 누구도 승자는 없을지 몰라.” 나는 성체로 돌아오며 중얼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단지 1년도 되지 않는 싸움에 너무도 피폐해진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제란이 전장을 지나며 벌여 놓은 일들이 지금에야 큰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다. 보통의 경우에는 전쟁이 1년 동안 진행되었다고 이렇게까지 힘없는 평민들이 어렵지 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제란은 모든 것을 쓸어버렸다. 겨우 자리를 지키며 산다면 목숨을 유지할 정도로 농사를 짓는 것을 허락했을 뿐이었 다. 그러니 전쟁이 조금만 더 길어진다면 사람들은 전쟁이라는 것에 신경을 쓰기보다는 살아남는 것에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여유 있는 놈만 싸움에 끼어드는 것이고, 일반 백성들은 그런 것 에 신경을 쓸 여유도 없게 되는 것이다. 나라나 지도층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그 근간이 되는 백성들이 있기 때문이지만 살 아가는 데에 모든 것을 거는 사람들은 어느 나라의 백성도 아니다. 차라리 자신을 다스리려 하는 자들을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제란으로서는 손도대지 않고 코를 푸는 격이 된다. 더 이상 한타와 그란드에서 그 귀족이나 지도층은 힘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 이다. 그들은 백성들로부터의 작은 신망이라도 받아야 백성들에게 목소리를 높일 수 있다. 하지만 먹고 사는데 바쁜 백성들은 그런 귀족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다. 다만 제란이 병사들이 지니는 무력에만 신경을 쓰게 될 뿐이다. 빼앗아갈 힘이 있는 쪽이 무서운 법이다. 그렇다고 귀족이나 왕족들이 세금을 걷지 않는 것도 아니니 제란이든 한타와 그란드 의 귀족이든 상관이 없다고 여길 것이다. 우습지만 백성들은 단순하다. 멀리 내다보고 큰 것을 보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아직도 세상은 좁고, 좁다. 사람들의 가치관에는 봉건적인 생각이 뿌리내린 세상이 다. 지배를 받느냐 지배를 하느냐로 고민하긴 하지만, 모두가 평등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 는 세상이다. 어차피 지배를 받을 바에는 좋은 쪽에서 지배를 받는 쪽이 더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나라를 유지하는 힘일 뿐이다. 그 이상은 귀족이나 기사들이 자기 허울로 만들어 놓은 규범이며 제약이다. 왕에 대한 충성은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귀족과 기사들은 거기에 목을 멘다. 그것이 그들이 만들어 놓은 가치이며 기준이기에.... 아무튼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좋지 않다. 제란에게는 좋을까? 그것도 모르겠다. 암흑제국 절반의 힘을 모두 동원해서 전쟁을 하고 있지만, 나머지 절반의 힘을 움직 이는 자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그란드에서 트롤라이런이 소극적인 방어전을 펼치고, 제란과 그의 4군단이 동맹군을 서쪽으로 서쪽으로 밀고 가면 10월도 거의 마무리가 되었다. 피의 전선은 이제 한타와 누웬의 국경선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기 천만의 사태는 다시 누웬의 개입이라는 수순을 밟아 소강상태를 만들 었다. 제란은 자신의 점령지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 한타의 대부분은 매직컬초에 의해 회복이 되었고, 그란드는 트롤라이런이 움츠리고 있는 동안에 스스로 자유를 찾았다. 신성제국은 그 막대한 희생이 있었던 후에 숨어들었던 백성들이 모습을 드러내었지 만 조용하고 흔들림 없는 모습을 유지했다. 누웬에서 군사를 이끌고 전장으로 나온 것은 천왕야와 정왕야의 세력이었고 의외로 그 싸움의 총대장은 소란 천이었다. 모리요타가 함께 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탁자위에 올려진 전황보고에는 분명 소란 천이라는 이름이 누웬의 총사령관으로 되어 있었다. 그 사이에 아이들은 얻었을까? 심장을 고쳐 주었으니 충분했을 것 같은데... 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제 오래지 않아서 내가 나서야 할 때가 온다는 생 각을 했다. 소란이 끌고 온 병력은 7만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였지만 전황보고에서 그들이 상당한 무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정예를 보낸 것이려니 생각을 했다. 환수를 다루는 부대가 끼어 있는 모양이었는데 그 위력이 대단한 모양이었다. 아세트와 그 가문이 지니고 있는 환수의 힘도 무시할 것은 아닐 텐데 그러고 보면 아 세트의 가문은 이 전쟁이 시작되고 나서는 싸움의 전면에 나서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일족을 아끼는 것이야 나와 다를 바가 없으려니 하고 생각을 하긴 하지만, 나를 이 런 자리에까지 끌어낸 주역에는 아세트도 끼어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니 또 한 번 가슴 에서 울컥하고 치미는 것이 있다. -마을이구나. - "제가 장거리 호위를 한다는 것이 이상합니까? 제가 비록 등급이 낮긴 하지만 실력은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하는데요." 내 당당한 말에 그들은 약간의 미소를 짓는다. 그런데 그 미소가 왠지 믿지 못한데서 나오는 비웃음과 비슷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내 착각일까? "허허, 그래? 아직 잠자려면 시간도 좀 있겠다 우리랑 대련이나 한판 하지 않겠나? 어 차피 앞으로 며칠인지 몇 주인지 모르지만 한동안은 계속 같이 가야할 것 같으니 서로 의 실력도 좀더 확실히 알아보는 것도 좋을듯한데 말야." 메니텔이라는 이름의 용병은 내게 대련신청을 해왔다. 아무래도 내가 컨터급이라고 하 니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직접 검을 섞어봐야 내 실력을 믿을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내가 물러날 수는 없다. 하기 싫다고 하면 무슨 말을 해서든 날 화나게 할지도 모르니까. "좋습니다. 하죠 뭐. 몸도 풀겸 가볍게 하는 건 오히려 좋을 테니까요." 내 대답에 그들은 바로 몸을 돌려 문을 열고 밖으로 향한다. 그런 그들의 성급함이 싫 어져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내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힘을 갖게 된다면 나도 저들처럼 행동하게 될까?" 잠시이긴 하지만 혼자남게 된 방안에서 저들의 행동을 보며, 아니 저들의 행동보다는 저들이 날 바라봤던 그 웃음, 좋게 보이는 웃음은 아니었다. 어딘가 자신감에 찬 모습 으로 상대를 약한존재로 볼 때 나올듯한 미소, 나 역시 그런 미소를 지은적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선 내게 질문을 하는 말이 나왔다. 비록 중얼거림이었지만 먼저 가버린 그들의 모습을 떠올려보며 난 자꾸 이상 한 생각이 들었다. 좋은 쪽이 아닌 안좋은쪽으로. "여관 주인에게 말도 해뒀으니 안심하고 대련을 해도 될거야." 나중에 천천히 방에서 나온 나는 아래층으로 나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는데 그들중 한명인 괄란이라는 이름의 용병이 날 불러 세웠다. 그리고는 자신을 따라오라 면서 안내해준곳은 이곳여관의 뒷마당이었다. 정 사각형모양의 마당의 한켠에는 우물이 있었다. 생각보다는 넓지 않아서 몸을 움직 이며 대련을 하는 것은 불편할 정도로 좁은 뒷마당이었다. 하지만 저들은 그런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듯했다. "왜, 이곳이 마음에 안드나?" 내가 자꾸 주변을 둘러보는 것을 이상히 여긴 메니텔의 말이다. 나는 그렇다고 말을 하려다가 관뒀다. 일단 빨리 끝내고 들어가서 자야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나온 행동이 었다. "아닙니다. 여기서 그냥 하죠 뭐." "자네 혼자이니 우리쪽에서도 대표로 한명만 나서겠네. 우리 모두 나선다면 지쳐서 질 수도 있을테니 말이야. 그렇게 해서 이긴다고 무슨 이득이 있는것도 아니고, 게다가 싸움도 아니고 대련일 뿐이니 나머지는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하겠네." 메니텔의 말과 함께 그의 옆으로 한명이 두 자루의 목검을 들고 천천히 내 앞으로 걸 어왔다. "받게. 내 이름은 톰슨이네. A급용병으로 나이는 28살이고 용병경력은 8년이네." 상대의 말에 나 역시 그와 같은 형식으로 대답을 해야할것만 같아서 말을 해주려고 했 는데 약간 꺼림직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내 경력. 대체 얼마로 해야하지? "네. 전 코러스라고 합니다. 컨터급의 용병입니다. 나이는 25살이고 음... 경력은 대 충 4개월정도 된듯합니다." 됐다가 아니라 된듯하다는 대충의 기간을 말하자 상대는 눈이 커졌다. 그가 놀라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일까? 하긴, 경력이 일년도 안됐다고 하는 내 말에 놀랄 수도 있겠 다. "그래서 몸이 깨끗한 건가?" 경력이 짧으니 그만큼 위험한 경험도 적기에 생각한 말일 것이다. 하지만 실제의 내 경력은 그렇지 않지만 저자의 말을 부정할 수도 없었다. 이 밀탄제국에서 내가 활동한 경력은 솔직히 그것밖에 안되는건 사실이니까. "뭐, 그것도 그런걸까요? 그럴수도 있겠네요." 난 이상한 답을 그에게 해줬다. 아마 아리송할 것이다. "어이. 둘다 뭐하는거야? 빨리 해보라고. 시간이 더 늦으면 주위에서 시끄럽다고 항의 할지도 모른단 말이다. 빨리 끝내고 들어가야지." 메니텔의 말에 서로 목검을 겨누고 있던 나와 톰슨도 그의 말에 동감했다. 그리고 서 서히 서로의 간격을 좁히기 시작했다. 빨리 끝내야겠다는 생각은 나나 상대나 같은 생 각인듯했다. 그래서 우리가 취한 행동은 일격에 모든 것을 끝내자였다. 가장 빠르면서 도 상대의 실력을 대충이나마 알아볼수도 있는 방법이었다. 서로의 간격이 대략 3미터에서 2미터로 좁혀졌을 때였다.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기압 을 넣으며 나와 상대는 동시에 앞으로 나서며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타닥거리는 목검 끼리의 부딪침이 있었고 서로의 몸이 엇갈리더니 등을 보이면서 상대가 서있던 자리로 자신이 서 있게 되었다. "휘유... 실력들이 제법인데?" 나와 톰슨씨의 대련결과가 나왔다. 우선 톰슨은 어깨부위의 옷이 찢어져 있었고 그 부 위가 빨갛게 부어있었다. 어깨를 맞았다는 뜻이다. 하지만 목숨에는 지장이 없는 곳이 기도 하다. 전투시에는 좀 불리하겠지만 죽진 않았다. 그럼 나는 어디를 맞았냐하면 옆구리부위의 겉옷에 길게 그어진 자국이 있었다. 옷은 찢어지지 않았지만 아려오는 것이 꽤 강하게 맞은듯했다. 실제 검이었다면 치명타였다. "제가 진것같군요." 내 정중한 말에 톰슨은 고개를 젓는다. "아니야. 서로 비긴걸로 하세. 실제의 전투였다면 어떻게 됐을지는 모르는 것이니까. 게다가 검이 내 어깨를 맞은 건 사실이지만 그 전에 내 가슴을 한번 스쳐 지나갔잖은 가. 진검이었다면 아마 내 심장이 반쪽이 됐을거야." 그는 내가졌다는 말에 고개를 저으면서 내 어깨를 두드린다. 얼굴에는 불만보다는 만 족스런 표정이 가득했다. "이야. 그랬어? 제법이네가 아니라 실력이 상당하잖아? 톰슨은 우리 둘이서 상대해도 웬만해선 물러나지 않을 정도로 실력이 좋거든. 그런 자를 상대로 그 정도라니 말야. 검술실력은 우리랑 비슷한데 등급은 컨터라... 뭔가 있는 거 아냐?" 옆에서 나와 톰슨씨의 이야기를 같이 듣던 메니텔이 대답을 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 는 불만스런 표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본다면 톰슨씨처럼 웃고 있 었다. "나도 대련하고 싶은데... 안되겠지?" 옆에서 지켜보던 괄란이 작지만 자신의 의사를 확실히 말하자 그런 그의 말에 난 미소 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여줬다. "뭐 그러죠. 저도 몸을 푼것같지가 않은데 잘됐네요." 내가 흔쾌히 승낙하자 그는 좋아라 하며 톰슨의 목검을 빼앗듯이 하곤 나보다 먼저 앞 장서서 뒷마당 한가운데로 걸어간다. "저, 저기 그럼 나도..." 괄란의 행동에 뭐가 그리도 다급한지 메니텔도 내게 대련신청을 한다. 난 그저 재미있 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줬다. 체력이야 아직도 남아돌기에 그들과 몇 번이고 대련상대를 해줄 수 있을 거 같았다. 왠지 내가 진 대련인데도 기분은 좋았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대련신청을 거절하지 않고 웃으면서 받아주었고 그런 내 모습에 톰슨씨가 또 자기랑 대련하자고 했지만 난 그것도 흔쾌히 받아주었다. 그래서 그날 우 리는 대련을 밤늦게까지 하게 되어버렸고 여관주인이 문을 열고 와서는 손님들이 항의 하고 있으니 그만하고 잠자리에 들라는 말을 들어서야 멈추게 되었다. 물론 그 동안 내 옷은 거의 걸레가 되고 땀 때문에 냄새가 좀 걱정되긴 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정말 로... 나는 자이건도 떠나고 없는 빈 성체에서 호로 지내고 있었다. 그동안에 쉬벡의 성 영지를 감싸는 새로운 결계를 만드는 것이 내가 한 일의 전부였 다. 무턱대고 넥스 영지와 같은 결계를 만들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최대한 견고한 결계 를 만들기 위해 힘썼다. 아직은 결계를 발동시키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순간이동이나 마법을 통해서 쉬벡의 성 영지로 들어오는 것은 막을 수 있는 결계를 만들어 놓았다. 만약에 풍교가 무너지면 쉬벡의 성으로 들어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 될 것이었 다. 넓고 넓은 계곡을 넘어 올 방법이 그다지 많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무료한 시간을 때우고 있는 동안에도 전쟁은 계속되고 쉬벡의 성으로 밀려드 는 유민의 수는 늘어갔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어떤 참견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내가 쉬벡의 성, 성체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누구도 안으로 들어와 확인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물론 내가 작은 정원을 산책하거나 테라스에 나가 앉아 있는 모습을 그들이 볼 때도 있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자신들의 삶에 아무 관여도 하지 않는 나는 그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무슨 상징같은 존재로 여겨졌다. 나는 쉬벡의 성에서는 모든 주민들이 어려워하는 사람이 되고 있었다.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고 지낸 것이 벌써 한 달이 넘어가는 것 같다. 펄럭- 또 한 장의 보고서가 탁자위로 떨어졌다. 나는 창가의 의자에 앉았던 몸을 일으켜 탁자로 걸어와 보고서를 집었다. - 루탄님께. 드디어 마지막 결전이 될 것 같습니다. 저희들은 제란의 부대를 충분히 괴멸시킬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제란의 부대는 지금 10만 정도에 지나지 않으며, 저희 쪽의 병력도 9만에 이릅니다. 숫자상으로 저희가 약세이기는 하지만 기사나, 마법사, 환수사, 사제의 수가 월등하 게 많은 저희들은 승리를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에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다는 생각에 전면전을 펼칠 생각입니다. 장소는 현 전선이 있는 ‘광아의 손길’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아시는 것처럼 제란에게는 암흑제국의 남부지역의 힘이 남아있습니다. 때문 에 제란을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제거하지 못한다면 마지막 결전을 치룬 우리 동맹군 이 다시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부디 제란과의 마지막 일전에 루탄님께서 약속대로 도움을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삼일 후, 마지막 결전을 위한 전체 회의를 할 생각입니다. 회의 장소는 동맹군 지휘막사입니다. 그럼 그 때 뵙겠습니다. 짧은 내용이었지만, 그것은 지금까지의 모든 싸움의 끝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패배를 생각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종전을 상상하지도 못했지만 이들은 그걸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제란의 너무 서두르며 병력을 이동시켰던 탓이 컸다. 더구나 매직컬초를 무시하고 한타를 몰아붙인 것이 패착이라고 할까? 아니면 누웬을 무시했던 것이 잘못이었을까? 어째 싸움이 계속되면서 아이슈마가 사라지고, 제란의 부대가 강해진 대신에 유연성 이 없어진 듯한 느낌이었다. 그것이 제란이 지금과 같은 상황에 몰리게 된 이유일까? 하지만 아직도 제란에겐 암흑제국의 절반의 힘이 남았다. 한타와 그란드, 신성제국은 이 싸움에 모든 힘을 결집시킨 것이고 말이다. 두 세력이 양패구상을 하게 되면 누웬과 암흑제국의 힘이 남게 되는 것인가? 나는 어지럽게 엉키는 정세를 머리 속에서 정리했다. 무언가 가닥이 잡히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너무도 복잡하게 엉켜있는 싸움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쉬벡 영지에 만든 결계를 가동시켰다. 이제 오직 풍교만이 이곳으로 들어올 수 있는 통로가 될 것이다. 내가 쉬벡의 성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된다면 주민들이 불안해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에 작게 글을 써 붙이고 성을 나섰다.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결계를 만들어 놓았다는 것과 풍교를 뺀 다른 곳으로 이 영지 로 들어오는 방법을 모두 막았다는 것이 전부였다. 어쩌면 오랜 시간이 흐른다면 풍교도 마력이 떨어져서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할지도 모 르지만... 그렇게 성을 나선 나는 마르트라를 찾았다. - 어서 와라. “잘 있었나? 이제 가야 할 것 같다.” 나를 맞았던 마르트라는 곧 작은 크기로 줄어 인간형이 되었다. “그래 이제 제란인가하는 그 인간과 싸움을 하는 건가?” “그래, 그동안 도와줘서 고마웠다.” “가만히 들으니 꼭 마지막 인사를 하는 것 같군. 어차피 싸우다가 불리하다 싶으면 도망을 갈 생각이면서... 절대로 죽지 않을 거 잖은가?” 이런 것도 이 녀석 나름의 표현일 것이다. 죽지 말라는 말을 하기에는 낯 뜨거운가? “말하는 것 하고는.... 그래 도망갈 거다. 타니도 만나야 하고, 가족들도 만나야 하 는데....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지.” “그런데 왜 제란에게 가는 거냐? 그냥 모른 척 해 버려도 상관은 없을 것 같은데?” 마르트라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나를 보고 묻는다. “이젠 이유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아는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일이 니까 한 번 해 주는 것뿐이지. 무슨 의미를 두는 것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제란이 라는 녀석이 하는 짓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 주지.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 고, 너무 많은 것은 부수어버렸거든. 더구나 녀석이 아이슈마의 종이라는 것도 마음 에 들지 않아. 인간을 종으로 부리려는 녀석이 아이슈마잖아.” “지금 그 말이 너의 행동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은 너도 알고 있겠지?” 마르트라는 나를 보면서 한심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래 알고 있다. 나도 알고 있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많이 생각하고 행동해 왔지만 언제나 결과는 내 의지와는 다르게 흘러가는 것을 알게 되었지. 특히 내가 바라는 것 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잡지 않은 상태에서는 더더욱 그런 것 같더군.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지 않을 때 말이야.... 하지만 적어도 제란이 만들어가 는 세상이 내가 원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그나마도 분명한 것 같으니까....” “너는 참 웃기는 녀석이다. 별로 상관도 없을 것 같은 일들에 엉켜 다니니 말이 다.” “그런가?” “그렇지.” “그래도 하는 수 없잖아.” “운명인가 보다 하는 거로군. 그럼 하는 수 없다는 말도 맞는 말이지.” 거기까지 말을 마치 우리는 그냥 서로의 눈을 보았다. 멋쩍은 웃음만 나왔다. “그런데 어쩔 생각이냐? 신계의 도움을 받을 방법은 찾은 거냐?” “없다. 그런 방법은.” “도움을 줄 존재를 찾지 못했다는 말이냐?” “그래. 그리고 찾을 생각도 별로 하지 않았다.” “뭐냐? 그렇게 죽어라고 연습을 하더니...” “그냥 어찌 되겠지라는 생각이다. 내가 가진 힘도 무시할 수 없는 힘이고, 그 동안 에 조금 깨달은 것도 있고.” “아깝군. 어째 신계에서 너에게 힘을 줄 존재가 없는 걸까? 너 정도면 괜찮은 그릇 인데.... 신계에서 인간계에 영향을 주지 않기로 한 때문인가?” “모르지. 그걸 내가 어찌 알겠냐? 내가 처음에 너한테 이기고 너를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다가 다시 붙어서 엉망으로 졌을 때 있잖아. 황당했지. 그래서 신력을 쓰는 방 법을 배웠던 건데...” “신력이라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어서 문제지. 뭐 넌 다른 인간과는 달리 신 력도 제법 쌓은 것 같긴 하지만 정식으로 신력을 쌓으려고 쌓은 것이 아니고 오랜 시 간에 걸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이라.....” “됐다. 지난 이야기는 그만하자. 그래도 약간은 쓸 수 있으니까. 아예 도움이 안되 는 것도 아니고....” “그래. 알았다. 대신에 도움이 된다면 내 힘은 끌어다 쓸 수 있도록 해 주마. 필요 하면 써라.” 마르트라는 그렇게 선심쓰듯 말했다. “그래 알았다. 미친놈.” 나는 그렇게 대답을 해 주었지만 녀석의 마음이 고마웠다. “그만 가 봐야겠다. 여기서 그 곳은 먼 곳이거든.” “그래. 가 봐라.” 나는 마르트라에게 다시 한 번 눈길을 주고는 순간이동을 했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야 하겠군.” 난 혼잣말을 하고는 ‘광아의 손길’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시간은 아직도 이틀이나 남아있었다. 벌써 겨울인가 싶은 바람이 옷깃 속을 파고들었다. 참, 빨리도 계절이 바뀌는군. 올 겨울은 왜 이렇게 빨리 찾아오는 것일까. 사람들이 더 많이 힘들겠군. 작년에는 이곳에 온통 황금빛 물결이 출렁거리는 밀밭이었을 것이다. 이곳은 한타의 곡창지역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것은 잡초로 우거진 벌판의 모습이 전부였다. 그나마 일년밖에 지나지 않아서 사람들의 손길이 닿았던 흔적이 남아있긴 했지만 이 대로 몇 년이 더 지나면 농토로 거듭나려면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할 것이었다. 나는 천천히 평원을 걸어갔다. 텅 비어 있는 평원의 모습이 내 가슴을 훑고 지나간다. 자꾸만 내 가슴속의 것들을 비워내려 애쓰는 것 같아 가슴이 아렸다.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을 평원의 바람이 펄럭거리게 만들었다. 어쩌면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타니의 얼굴위로 겹쳤다. 그냥 세상살이에 끼어들지 않아도 좋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동생들과 지토의 얼굴위 로 겹쳐 지났다. 자이건이나 아세트, 우제푸 등에 대한 노여움이 루아의 얼굴에 겹쳐 지났다. 아무 이유도 없이 여기 서 있는 것은 아니냐는 생각이 자꾸만 나의 발길을 잡아채고 있었다. *제란. 타닥- 모닥불 안에서 불씨가 튀었다. 과학적으로야 나무 안에 들어있던 습기와 공기가 열에 팽창이 되고 그 팽창된 힘을 견디지 못한 나무 조각이 터지는 것이지만... 그런 것은 별 상관이 없다. 뒤적 뒤적. 부지깽이를 들고 모닥불을 뒤척여 불길을 살려 내었다. 평원 한 가운데서 하늘의 별과 달을 벗 삼아 모닥불을 피우고 혼자 앉아 있는 것은 실로 얼마만의 일인가. 투둑. 투둑. 나는 창고에서 꺼낸 뿌리감자를 서너 개 불속으로 집어 던졌다. 처음 이 세상으로 나왔을 때, 쉬벡의 성이 있는 그 곳에서 소금이 없이 먹을 수 있었 던 것은 이것이 최고의 먹거리였다. 불씨를 뒤적이면서 처음 넥스을 만났을 때를 생각한다. 참 많은 시간이 흘렀다.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살아가면서 모든 일들에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겠지만, 굵직굵직한 일들에는 나름대 로의 의미를 붙이기 마련인데, 어째 지금 이렇게 평원 가운데 모닥불을 피우고 앉아 있으려니 그리운 가족들 이외에는 아무것도 의미를 둘 만한 것들이 없다는 생각이 든 다. 나름대로 친구도 있고, 가까운 사람들도 있는데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 따지고 싶은 생각도 없다. 참 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허전한 것이 아니라 허무하다는 생각이.... !! 누구인가 평원의 저 쪽에서 오고 있었다.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이 녀석이 누구인지 알려 주고 있다. 적어도 저 정도의 존재감을 느끼게 할 녀석은 지금까지 단 한 녀석 뿐이었다. 그 사이에 또 다른 녀석이 생겼다면 모르지만.... 제란. 녀석이 오고 있었다. 그런데 곁에 다른 떨거지들은 보이지 않는데? 나는 모닥불을 뒤적이며 그대로 녀석을 기다렸다. 웃기는 녀석이다. 순식간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를 저리 미적거리며 걸어오는 이유 는 무엇일까? 녀석도 이 평원의 밤을 느끼고 싶은 것일까? 내가 생각하고도 웃긴다는 생각이 든다. 녀석이 그런 녀석이었으면 이 전쟁에서 피 는 조금 덜 흘렀을 것이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고 녀석은 드디어 내 모닥불 건너편까지 도착했다. “앉아도 됩니까?” “앉아.” 존대와 반말의 차이란 어떤 것일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마 세 번째인가요?” “난 네 번째야. 예전에 암흑제국을 여행하는 동안에 두룬과 함께 있는 너를 본 적 이 있었지. 그 때 너를 없애버리자는 말을 들었으면 오늘 이렇게 마주할 일은 없었을 것 같은데.” “그게 아깝습니까?” 제란은 내 말에 별 반응 없이 덤덤하게 물었다. “솔직하게 이야기한다면 아깝군. 하지만 후회는 아니야.” “다행입니다.” 우리는 잠시 말을 멈추고 모닥불에 집중했다. 뒤적뒤적, “음. 다 익은 것 같은데 하나 먹어 볼 텐가?” 나는 예전에 뿌리감자라 이름 붙였던 것을 꺼내서 제란에게 권했다. “고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출출했습니다.” 나는 하나를 집어 건네주었다. 손과 손으로 주고받는 중에도 제란과 나 사이에는 어떤 위화감도 없이 자연스러웠다. “이거 맛있군요?” “그거 다행이군.” 나는 조심스럽게 껍질을 까면서 대꾸했다. 껍질에 붙어 있는 속살이 얼마나 아까운 것인지는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몇 개 되지도 않는 고구마를 모닥불에 구워 놓고, 하나씩 까먹고 있을 때, 누군가 와 서 하나를 달라고 하면 쉬이 건네 줄 수 있는 여유가 있더라도 내 손에 들려 있던 고 구마 조각이 떨어져 재가 묻어 버리면 느끼게 되는 그 낭패감과 함께 껍질에 묻어나 는 속살은 정말 아쉽기 그지없는 것이다. 무식한 제란 녀석은 대충 껍질을 뜯어내고는 덥석 베어 물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런 녀석에게 다시 한 개의 뿌리 감자를 건네면서 참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하나 남은 것은 내 것이다. 몇 개 없을 때에는 아껴 먹어야 하는 건데... 저렇게 식성 좋게 먹어치우다니... “그렇게 본다고 내 몫을 줄 생각은 없다.” “뭘 겨우 그거 가지고 그러십니까? 그러지 말고 그 하나 남은 것도 마저 주십시오. 아직 손에 들고 있는 것도 다 드시지 않았잖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공평하게 두 개씩 나눈 것인데, 너에게 하나를 더 주면 나는 한 개 고, 넌 두 개가 되니 불공평하잖아.” “쩝... 아쉽군요.” 하지는 제란은 그 뒤로 내가 남은 한 개를 깨끗하게 먹어치울 때까지 별 말 없이 기 다려 주었다. “뭐 좀 더 먹을 것 없습니까? 이왕이면 술이라도 한 잔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어째 너는 모든 것을 나에게 내 놓으라는 말이냐?” “저는 손님이고 루탄님은 주인이시니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웃기는 놈.” 나는 조금 불만스러웠지만 모닥불의 주인으로서 창고에서 포도주를 꺼내어 제란에게 대접했다. “좋은 술이군요. 얼마나 된 겁니까?” “천년 좀 넘은 거다. 이젠 거의 남지 않은 거지.” “멋지군요.” 우리는 건배 없이 서로의 잔에 채워진 백포도주를 음미했다. 맛이야 어떻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향과 혀에 감기는 맛과 야금야금 목을 넘어가는 맛. 이렇게 와인을 마시라고 누군가 말했다. 하지만 난 그런 거 모른다. 솔직히 그렇게 하면 조금 있어 보이긴 한다. 하지만 조금 마시다 보면 술이란 것이 같아진다. 뭐랄까 술이란 가슴을 빗장을 녹이는 것이랄까....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까지 술을 마실 수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 아쉽게도. “이번에는 마지막 싸움이 되겠군요.” “그렇지.” “이길 자신이 있으십니까?” “아니.” “그런데 왜 오신 겁니까?” “몰라. 그냥.” 그리고 우리는 다시 한 잔을 채웠다. “아이슈마가 자네 주인인가?” 나도 제란에게 약간의 위치 변화를 주었다. 너무 말은 놓는 것도 보기에 좋지 않았 다. 그래도 일국의 황제라는데 말이다. “아닙니다.” “도움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아는데?” “이젠 제가 죽을 때까지는 저에게 힘을 쓰지 못할 테니 상관없습니다. 그가 깨어났 을 때까지 살 것도 아니고....” “배신인가?” “그가 원했던 것은 들어 주었습니다. 이제 나머지는 그의 추종자들의 몫이죠.” “자넨 상관이 없다는 말인가?” “이번 싸움이면 제가 할 도리는 다 한 겁니다.” “얻는 것이 뭔가?” “암흑제국의 황제라는 자리와 꿈을 펼칠 수 있는 기반입니다.” “꿈은 무엇인가?” “모든 나라를 발아래에 두는 것. 일통一統!” “지금도 가능하지 않은가?” “불가능합니다. 누웬의 힘이 고스란히 남았습니다.” “그럼 한타나 그란드, 신성제국은?” “이번 싸움으로 끝이 날 겁니다. 그 세 나라는 뿔뿔이 흩어지는 것이지요. 지배자 가 없으면 정복도 쉬워집니다.” 우리는 다시 술잔에 술을 채웠다. “아이슈마가 원한 것이 뭔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은 알려 드릴 수가 없습니다. 비밀이지요.” “이 싸움에서 자네가 죽을 수도 있지 않은가?” “절대로 죽을 일은 없습니다. 저나 루탄님이나 서로가 도망을 가려고 마음을 먹는다 면 잡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지금 서로 마주보고 태연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 도 싸움을 한다면 누군가 죽을 수도 있지만 한 쪽이 도망을 가려고 마음을 먹는다면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래도 자존심이 있지 도망을 가기야 하겠나?” “전 갑니다.” “나도 가야하네.” “하하하하하하.” “크하하하하하.” 우리는 다시 술잔을 채웠다. 빈 술병이 내 등 뒤로 날아갔다. 마주 앉은 제란의 얼굴에 홍조가 어린다. 벌써 여명이 트는 모양이다. “마지막 잔이군요.” “그렇군. 그럼 우린 싸울 필요가 없는 것인가? 서로가 도망을 갈 생각이라면 싸워 보아야 쓸모가 없지 않은가?” “그래도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그럼 다시 만나기는 해야 겠군.” “아마 조금 다치기도 해야 할 겁니다.” “그럼 누가 도망을 가는 것으로 할까? 아무래도 젊은 자네가 도망을 가는 것으로 하 는 것이 좋지 않겠나?” “그건, 아무래도 어렵겠군요. 그래도 황제인데...” “응? 안된다는 말인가? 난 황제는 아니래도 아.버.지.라네. 아들 보기에 민망한 짓 은 할 수 없지 않겠나?” “음... 그건 좀 그렇군요.” “양보하겠나?” “글쎄요. 어쩌면 제가 이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건 두고 보지요.” “그렇게 되는 건가? 우린 좀 많이 다치겠군. 누군가는 말이야.” “일찌감치 도망을 가셔도 됩니다. 적어도 쫓지는 않겠습니다. 저야 곧 제국으로 돌 아갈 것이고. 누웬과 한 판 붙으려면 조금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으니까 말이 죠.” “한 가지만 더 물어 보지. 누웬의 황제 녀석과 자네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인가?” “짐작입니까?” “그놈 참 싸가지 없는 놈이지.” “뭐 좀 그렇지요.” “그럼 잘 가게.” “내일 뵙겠습니다.” 제란은 아침 햇살을 등에 지고 천천히 걸어갔다. 이미 모닥불을 꺼져 있었다. 나는 와인잔을 마져 비우고 해가 뜨는 등 뒤로 잔을 던져 버렸다. 제란은 단지 아이슈마의 심부름으로 이 전쟁을 치룬 것이다. 아이슈마가 무얼 원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 전쟁에서 제란이 얻는 것은 삼국이 쓰러진 것과 폐허로 남은 땅덩어리와 피폐한 사람들이었고, 암흑제국의 황제라는 자리였다. 처음부터 빈 손으로 시작해서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필요했던 힘을 아이슈마에게 얻는 대신에 오늘의 이런 상황을 만들어 온 것이라면 참으로 엄청난 대가를 치루고 얻 은 힘이랄 수 있겠다. 하지만 거기에 더해서 누웬의 황제란 녀석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제란이 이렇게 날뛰도록 방관했던 것은 녀석도 야망이 있었던 탓일까? 아니면 제란과 어떤 거래가 있었던 것일까? 나가 잠시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에 제란은 모습을 감추었고, 태양은 평원 전체를 불 바다로 만들며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조금도 서두를 생각이 없었다. 때문에 내가 동맹군의 지휘부가 있는 곳에 도착한 것은 오후가 기울어갈 무렵이었다. 중간에 제란의 군대를 지나왔지만 아무도 내가 지나가는 것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 는 모습이었다. 덕분에 제란의 진영을 지나 동맹군의 진영까지 긴장감 넘치는 중간지역을 산책하듯 이 지나갔고, 그것은 동맹군 쪽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자들에게 의구심을 가지게 만 들었다. 하지만 내가 그들에게 그런 것을 설명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내가 막사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 길게 늘어선 의자에 서로 마주보고 앉은 수뇌부들 의 회의가 시작되었다. 자이건과 레고리오 사제, 우제푸 영감, 소란 천, 모리요타, 나발리스 성기사, 이그시 니아 넥스, 로드릴 주제푸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십여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 고, 그 뒤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엉거주춤 서서 회의에 참가하는 인원이 이십여 명 정 도 있었다. “이제 마지막 싸움을 앞두고 있습니다. 전력의 우세야 솔직히 미세하달 수 있는 것 이고, 우리들 중 모레 아침 해를 다시 볼 수 있을 사람이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습니 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싸움을 미룰 수 없는 여러 가지 상황이 있습니다. 피할 수 없는 일전이지요.” 나는 로드릴의 말을 들으면서 속으로 적잖게 웃었다. 어쩔 수 없는 싸움이라. 하지만 이 싸움은 이겨도 져도 남는 것이 없는 싸움이다. 한타와 그란드, 신성제국은 뿌리 채 뽑히고 있는 것이고, 여기 이들이 사라지고나면 삼국은 역사에서 다시 몸을 세우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끝까지 싸움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어지는 말들을 들었다. “어차피 죽음을 각오한 것입니다. 모두들 각오를 다진 마당에 길게 여러 소리를 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세부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내일을 위해서 편히 쉬도록 하지 요.” 우제푸 영감이 무표정하게 던진 말이었다. “어차피 각오는 했지만 그렇게 죽을상을 하고 있을 건 뭡니까? 하하 다들 웃으면서 회의를 하지요. 솔직히 회의랄 것도 없잖습니까? 내일은 전력을 다한 전면전일 텐데 굳이 세세한 것을 따진들 무엇하겠습니까? 한마디로 힘과 힘이 부딪히는 것인데 말입 니다. 약한 쪽이 깨어지는 것이지요.” 모리요타의 말이다. 역시 단순한 성격인가? “허긴 그렇기도 하군요. 이미 수차례 싸움을 해 오면서 서로의 장단점을 알고 있는 병사들이니 굳이 다른 명령이 없어도 알아서들 움직이겠지요.” “모든 것은 주신의 의지로 흐를 것입니다.” 아주 이제는 중구난방 난리도 아니군. 나는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를 털어내려 는 안간힘을 보았다. 모두들 내일 싸움 이후에 있을 시간들에 대해서는 별로 입을 열고 싶지 않은 표정이 었다. 다들 죽음을 각오하고 나니 그 죽음이후에 남는 것들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나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막사 안의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시선집중. 이런 난감하군 그래. “어디를 가십니까? 루탄님?” “무슨 언짢은 일이라도...” 표정이 바뀐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나를 향하고 있었다. “아, 아닙니다. 그저 제가 있어도 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서 산책이나 하려 고....” “기분이 상하신 것이 아니라니 다행입니다만 그렇다고 루탄님께서 빠지시다니요, 이 중요한 회의에....” “그럼요. 그렇지요.” 로드릴과 이그가 나를 보며 하는 말이다. “제가 굳이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을 듯 합니다. 적어도 내일 제란은 싸움에 나오 지 않게 해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머지야 여러분이 해결을 하셔야 할 문제 고, 그 이외에는 도움을 드리지 않기로 했던 것 같습니다만?” 나는 내 처지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 그렇게 장황한 설명을 해야 했다. “그, 그렇지만...” “소란, 내게 다른 도움을 기대한 것은 아니라고 보는데? 그렇지 않아?” “그렇기야 하지만...” “그럼 이야기는 된 것이고, 나머지는 여기 있는 사람들이 알아서 해결을 하도록 하 지. 솔직히 나야 싸움의 전반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니 말이야.” 나는 말을 마치고 막사 밖으로 걸어나왔다. 뒷머리에 꽂히는 시선들이 거북했지만 천막을 벗어나서는 신경쓰이지 않게 되었다. 다만 막사 안에서 몸을 일으킨 자이건이 뒤따라 오는 것이 신경이 쓰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나를 붙잡는 것도 아니어서 나는 천천히 진영의 뒤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제법 한참을 걸어서야 나는 진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기분 같아서는 마법이나 신법으로 빨리 벗어나고 싶었지만 묵묵하게 뒤를 따라오는 자이건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나는 평원을 가로 지르며 지나가는 관도 옆에 자라난 나무 몇 그루를 발견하고 그 밑 에 앉아 등을 기대며 자이건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그래? 하는 표정을 지어 보인 나는 고개를 떨구고 발끝에 닿을 듯이 있는 풀포기에 시선을 모았다. 이 녀석은 아마도 한해살이 일 것이다. 그럼 이제 겨울이 오는 시기이니 이 녀석은 죽은 것일까? 아니면 이렇게 노랗게 빛이 바래고도 뿌리에는 생기가 남아 있을까? 이 녀석은 한 생을 참 잘 살다가 간 것일까? 관도 위를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동물들의 발길에 채이고 마차의 바퀴에 밟히면서도 한 해를 버티고 살았으면 잘 살았다 할 수 있겠지. 제 영역을 지켰고, 보잘 것 없는 모양이나마 꽃도 피우고, 씨앗도 맺었으면 참 잘 살 았다고 해야 할 잡초의 한 생이었을까? “아세트가 루탄님께 전해 달라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자이건이 나의 상념을 깨고 말했다. 나는 별 말없이 고개를 들어 옆에 서 있던 자이건을 보았다. 녀석은 나를 보지 않고 앞만 보고 있었다. “아르미엘 교주님께서 한 번 뵙자고 한답니다. 내일 싸움이 끝나고 들러 달라고 하 셨습니다. 천년 전에 이루비아님이 가셨던 곳이라고 하면 아실 거라고 했습니다.” 칸타트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이루비아의 집안에서 이어지던 마족과의 계약을 위해 가던 곳. “알았다.” 짧은 대답과 함께 고개를 돌리고 나서 자이건은 잠시 머물러 있다가 소리없는 인사 와 함께 진영으로 돌아갔다. 그 후로도 나는 나무에 등을 기대고 해가 지는 모습과 별이 뜨는 모습을 지켜보고, 다시 차가운 서리가 내리고 햇빛이 서리를 씻은 듯이 감추는 것을 보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사이에 다른 녀석들이 어떤 작전을 짰던 그것은 별로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오늘은 이 ‘광아의 손길’에서 살아가는 것이 별로 없을 것이었다. 다시 진영으로 돌아갈 필요는 없었다. 나는 싸움이 시작되기도 전에 천천히 발길을 제란의 진영으로 옮겼다. 까마득히 멀리 있으니 아마 한 시간 정도는 걸어야 되지 않을까? 제란도 내가 가는 것을 알면 마중을 나오겠지. 날씨는 참 맑았다. 제란의 진영이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발걸음을 옮기는 얼굴에 붉은 아침 햇빛이 자꾸 만 간지럼을 태웠다. 한동안 발걸음을 옮기자 맞은편에서 제란의 기운이 느껴졌다. 서로 숨어서 기운을 숨기는 짓은 하지 않았다. 허리에 걸린 수수를 부드럽게 매만지며 나는 제란이 오기를 기다렸다.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가? 아직 비명은 들리지 않는군.” “곧 들릴 겁니다.” “우리도 시작을 해 볼까?” “서두를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렇군. 우리 둘은 서도 달라질 것도 없는데 서둘러 싸울 필요가 없겠군.” “그렇지요. 어차피 둘 중 하나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암흑제국으 로 도망을 간다면 따라오실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제가 암흑제국을 버려두고 언제까지나 루탄님을 쫓을 수도 없고 말입니다. 신성제국 북쪽에 아주 멋진 결계가 만 들어져 있더군요. 그 안에 루탄님을 잡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약점이 있을 것 같지만 결계를 어찌할 수는 없겠더군요.” “가 봤던 모양이군. 그래 잘 만들어 졌던가?” “최고였습니다.” “고맙군.” “병사들이 몰려오기 전에 잠시 자리를 피하지요?” “그럴까?” 나와 제란은 서로 마주보며 허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까마득히 올라가는 우리들을 양쪽 진영에서 보고 있을 것이지만 상관은 없는 일이었 다. 그렇게 올라간 우리들은 여간해서는 밑에서 알아보기 어려운 높이까지 올라와서 멈추 었다. 아래쪽에서는 수많은 병사들과 기사들이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환수가 나타나고 마수가 나타나고 마법이 날아가고 정령들이 부딪히고 마지막 으로 사람들이 서로 엉켰다. “생각보다는 많이 살아남겠군요.” “어쩐지 자네 쪽이 약하게 보이는군.” “하지만 카튼과 차구므진, 봄저브가 나서면 좀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그들을 막을 수 있는 인재가 별로 없지.” “하지만 그들이라고 무적은 아니지요. 한 손이 열 손을 막을 수는 없는 법이지 않겠 습니까?” “그도 그렇지. 그런데 자넨 그들을 도와주지 않을 생각인가?” “오늘 여기서 돌아가는 것은 저 뿐입니다.” “그런가?” 우리는 허공에서 발밑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을 바라보았다. 거의 20만의 사람들이 모여 싸우고 있었고, 수백의 환수와 마수, 정령들이 엉키고 마 법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아무래도 자네 쪽에 마법이 상당히 모자란다는 생각이 드는군. 어쩐 일인가? 마법 사가 거의 보이지 않으니 말이야.” “사정이 있습니다.” 말하기 싫은 모양이다. “이젠 우리도 시작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렇게 열심히 싸우는데 우리만 이렇게 느긋하게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제란이 천천히 몸에 갑주를 걸치며 말했다. “아직도 그런 것에 의지를 해야 한다는 말인가?” “죄송합니다. 이걸 얻기 위해서 상당히 힘들었습니다.” 그런 중에도 제란의 몸에서는 어둡고 습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묵빛의 검劍은 아이슈마의 이젠 기운은 거의 없었지만 초마수 등급의 갑주 형태로 변 해 제란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거 위험하군, 혹시 그러다가 그 녀석에게 잡아먹히지 않겠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완전히 동화가 되지 않는 이상은 그럴 위험은 없을 겁니다. 거 기다가 완전히 동화가 될 필요성을 느끼게 할 존재는 이 땅에 둘 뿐입니다.” 그럼 나 말고도 하나가 더 있단 말인가? “나 말고도 또 있다는 말인가?” “그건 알려드리기가 어렵군요. 그럼 시작할까요?” 얼굴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마갑주로 둘러싼 제란이 전투를 선언했다. “아쉽군. 여기서는 아이슈마의 그 힘을 쓰지 못할 것 같으니 말이야.” 나는 예전 제란과의 싸움에서 힘을 쓰지 못하게 하던 그 기운을 떠올리며 이야기했 다. “그런 편법이 아쉽지는 않습니다. 그 만큼 강해졌거든요.” 제란은 말과 함께 검을 휘둘러왔다. 나도 수수를 휘두르며 맞받았다. 퍼버벙!! 검과 검이 마주친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소리를 내며 서도 마주친 검날에서 보 이지 않는 파장이 우리 사이에서 수직의 원을 그리며 퍼져 나갔다. “역시 대단한 힘입니다. 전혀 밀리지 않으시는군요.” “자네도 만만찮군.” 하지만 그 대화를 끝으로 우리들은 서로의 빈틈을 찾아 쉼 없이 검을 휘둘렀다. 검과 검이 부딪힐 때마다 검강이 터져 올랐다. 아마도 밑에서 우리들의 싸움을 한가하게 바라볼 여유가 있는 사람이 있다면 화려한 불꽃놀이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리 검을 휘둘러도 나나 제란이나 서로의 약점을 찾기는 어려웠다. “하압!!” “핫!” 콰과과광!! 한 순간 힘을 모아서 검을 나눈 우리들은 약속을 한 듯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대치 상태에 들어갔다. “아무래도 검만으로 서로를 어찌 해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너무 시간이 오 래 걸릴 것 같군요.” “그렇지? 그럼 이젠 마법도 써 볼까?” “좋겠지요. 이젠 모든 전력을 다 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뭐 그러던지. 그럼 조심하게.” “조심하십시오.” 파팟! 다음부터는 신법과 더불어서 블링크, 순간이동이 아울어진 움직임으로 서로에게 칼 을 휘두르기 시작하는 우리들이었다. 확실히 수준 높은 마법을 쓰기에는 제란의 검이 무서웠다. 약간의 빈틈도 치명적인 상처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다시 이야기해서 상대에게 충격을 줄 정도의 큰 공격을 하지 못한다는 말과도 같았다. 권투로 생각하면 가벼운 잽을 날리면서 링 주위를 돌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아무리 마법까지 동원하기로 했지만 정작 쓸 수 있는 마법은 준비 시간이 거의 없다 고 할 수 있는 자잘한 마법들뿐이었고, 그것들은 우리 몸 주변에 자연스럽게 만들어 진 방어막을 뚫지도 못하는 것들이었다. 쉭-! 이런, 잠시 딴 생각을 하다가 큰일 날 뻔 했네. 쿠아앙! 조금 손해를 보기는 했지만 오랜만에 검과 검을 부딪힌 것 같군. 나는 제란의 검을 막으면서 아래쪽으로 상당히 밀려 내려갔다. 하지만 떨어지면서도 자세를 바로잡고 이어지는 공격에 대비를 했던 탓에 후속 공격 은 없었다. “이런 싸움 중에 딴 곳에 정신을 팔았군. 미안하네.” “조심하셔야지요. 그런데 이 방법도 필요가 없는 것 같습니다만? 그냥 정면 승부를 하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위험한 제안을 하는군. 하지만 피할 수도 없으니 한 번 해 볼까?” “그럼 먼저 검으로 하지요.” “그러지.” 실제로 서로 피하려고 마음을 먹는다면 서로를 어찌해 볼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상태였다. 제란이 비록 마갑주를 거의 착용할 정도가 되었지만 대신에 아이슈마의 직접적인 도 움은 이제 받지 못하는 것 같았고, 초마수의 마갑주가 그가 지닌 힘의 전부인 듯 보였 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나와 필적하고도 남음이 있어 보였지만 말이다. 서로가 피해서야 승부가 나지 않으니 정면으로 붙어 보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허긴 승과 패에 별달리 의미를 두지 않는다면 이렇게 미친 듯이 서로를 공격할 필요 는 없지만, 어느새 호승심이 생겼다고나 할까? 제란도 자신이 얻은 힘이 어느정도 되는 것인지를 알고 싶은 모양이었고, 나도 제란 에게 당했던 기억을 완전히 씻지는 못했던 모양인지 한 번 눌러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와 제란은 둘 다 검을 머리 위로 치켜 세우고 모든 힘을 모으고 있었다. 검과 검을 부딪힐 것인지. 검을 피해서 상대의 몸에 박아 넣을 것인지는 서로 부딪히 는 순간에 결정할 문제였지만 거의 모든 힘을 몰아넣은 검에서 피어나는 강기는 그 순 도를 더해가며 투명해지고 있었다. 오행의 기운으로 얽혀 있던 수수의 강기 색은 점차 투명해지고 있었고, 검붉은 색을 띠고 있던 제란의 검을 감싼 강기도 투명해지고 있었다. 점차 투명해지는 두 검의 모습은 결국 검날까지 감싸고 아지랑이 같은 형체만을 남기 고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이 너무도 느리게 흘러가기 시작하면서 나와 제란은 서로를 향해 날았 다. 일체의 허식도 없고 기교도 없이 그저 위에서 아래로 내리 긋는 검의 괘적을 따라서 검을 따르지 못한 잔상이 길게 남는 것이 보였다. 꽝! “하하하하.” “크하하하하.” 마지막 순간에 우리 둘 사이에서 부딪힌 것은 검과 검이 아니었다. 우리들은 서로의 검을 노린 것이 아니라 서로의 몸뚱이를 노렸던 것이다. 하지만 만 약 그렇게 서로 휘둘렀으면 지금쯤 나란히 두 개로 갈라진 몸뚱이가 지상으로 떨어지 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역시 생에 미련이 많은 우리들은 그렇게 서로를 죽이는 것으로 결말을 짓지 는 못했다. 제란이야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나는 가족들을 만나야 한다는 이유가 있었고, 죽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순간 제란도 나와 같은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상당히 많이 다쳤 을 것이고 어딘가로 도망을 갔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제란도 나와 같이 모든 기운을 몸을 감싸는 것으로 돌려 버렸고 서로의 몸을 감싼 기운이 부딪히며 엄청난 충격을 서로에게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죽지도 않았고, 대단한 상처가 생기지도 않았다. 나는 수수를 검집에 밀어 넣었다. 제란도 몸에 두르고 있던 갑주를 벗었다. “의미 없는 싸움이군. 어차피 서로가 목숨을 걸지도 못하는 싸움을 할 필요가 없을 것 같군. 승패를 나누는 것도 어려우니 그만 두도록 하지.”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그렇게 해야겠지. 하지만 저 아래의 싸움이 끝날 때까지는 자네는 나와 함 께 있어야 할 것 같군. 약속대로 이번 싸움에 관여하지 말아야 할 테니 말이야.” “솔직히 내려가서 끼어들고 싶지만 루탄님께서 막으실 것을 아니까 그만두도록 하겠 습니다.” “그럼 우린 그만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도록 하지. 저렇게 싸우는 것을 보고 있으 면 또 어떤 마음이 생길지 모르니 말이야. 저기는 내가 아끼는 사람들이 많이 있거 든.” “그렇군요. 그럼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따라오게.” 나는 등을 돌리고 허공을 날기 시작했다. 남동쪽을 향해 무턱대고 날아가는 내 옆으로 제란이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어디를 가십니까?” “자네 바다를 본 적이 있나?” “바다요?” “강이 흘러 흘러가면 언젠가는 바다로 가지. 끝없이 강으로만 흐르는 것은 아니지 않겠나?” “그렇습니까? 전 계속 흘러가면서 점점 넓어질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만?” “바다라는 것이 있다네. 강이 흘러 흘러가면 세상의 모든 강들이 흘러들어서 모이 는 바다라는 것이 있지. 우리는 지금 그것을 보러 간다네.” “정말 그런 것이 있습니까?” 솔직히 나도 장담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물질계를 예전의 지구와 비슷한 개념으로 만들었으니 바다도 있을 것이었 다. 따지고 보면 지금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다섯 개의 나라들을 다 합한다고 해도 한반 도 두 세 개 정도의 크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 좁은 곳에서 아웅다웅하는 것이 지금 인간들인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넓을 것이다. 나는 제란에게 바다를 보여주고 싶었다. 세상이 얼마나 넓은 것인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나서 제란이 무슨 생각을 하든 그건 그의 자유였다. 여정은 길었다. ‘광아의 손길’에서 어떻게 싸움이 전개되었는지는 나도 제란도 알 수가 없었다. 우리들은 암흑제국과 그란드의 국경을 이루고 있던 강을 따라서 하루로 하루로 내려 가고 있는 중이었다. 벌써 사흘을 날고 있었지만 아직도 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물론 중간중간 휴식도 취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도 하면서 쉬엄쉬엄 가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마지막 싸움의 결과를 알고 싶지 않아서 도피행을 택한 것인지도 몰랐 다. 그리고 제란은 왜 두말없이 따라 오느냐고 물어보는 나에게 자신도 털어버리고 싶은 것들이 많다는 애매한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또다시 어둠이 내리고 우리들은 강변에 모닥불을 피우고 앉았다. 길을 나서고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내가 먹을 것들을 주섬주섬 꺼내서 식사 준 비를 했다. 간단한 육포와 빵과 음료수. 솔직히 좀 굶는다고 문제가 될 것도 아니었지만 그냥 있기에는 허전했던 탓이다. 이제 건너편 강둑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강은 넓어져 있었다. “정말 넓은 세상이군요. 그렇게 오래 왔는데도 끊임없이 늘어선 땅덩어리라니.” “인간이 적은 거지. 그리고 멀리 멀리 가 보려는 생각들은 하지를 않아.” “그 이유가 뭘까요?” “그야 인간의 수가 많지 않아서 그렇지. 지금도 다섯 나라에서 인간들이 농사지을 땅이 모자라거나 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집을 지을 땅도 넉넉하고. 그러니 굳이 멀 리 나가서 살아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지.” “그럴까요?” “뭐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만 나로서는 그런 이유라고 생각이 드는군. 그것도 1000년 전에 비하면 참 많이 넓어진 것이야. 1000년 전에는 겨우 한타왕국 정도가 전 부였는데 말이야.” “점점 넓어지지 않을까요?” “글쎄, 특별한 계기가 없다면 힘들지 않을까? 지난 몇 백 년을 이렇게 유지해 온 것 을 보면 말이야.”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제란과 나는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내다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인간들의 영역에서 벗어나 멀리 나와서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는 것은 아마 도 제라과 나 정도가 되니 가능한 일일 것이다. 강을 따라 내려오면서 밀림을 지나고 초원을 지나고 사막도 거쳤는데 그 모든 곳에 는 인간을 제외한 온갖 생물들이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서 이빨과 발톱과 뿌리와 줄기를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각기 다른 지역마다 특이한 생명체들이 나타나곤 했다. 적어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여러 생물들이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말이야. 인간이 아니어도 인간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들이 있지 않을까? 그 런 생각이 드는데 말이야.” “글쎄요. 그건 모를 일이지요. 루탄님을 따라서 이렇게 나와보니 제가 모르는 것이 많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혹시 저를 데리고 오신 것이 그렇게 조그마한 한타나 그란 드 같은 것에 관심을 두지 말고 좀 더 넓게 보라는 의미였다는 어느 정도는 성공을 하 신 것 같군요.” “아니, 난 그런 생각은 없었어. 그저 내가 아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곳에 있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겨우 그런 이유가 전부였지.” “아무튼 좋군요. 이렇게 넓은 세상이라니... 하지만 다스리고 싶은 것은 땅이 아니 라 인간들이니 제 목표를 바꾸기는 어려울 것 같군요. 뭐 그 후에 더 넓은 나라를 건 설하려는 목표가 생기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해가 뜨는 끝에서 해가 지는 끝까지 모 두 발아래에 두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지금 밟고 서 있는 이곳도 언젠가는 제가 다스리는 땅이 될 겁니다.” “무슨 목표를 세우든 이제는 상관할 문제가 아니겠지. 자네가 일으킨 전쟁, 아 그러 고 보니 전쟁을 일으킨 것은 자네가 아니라 암흑교의 아르미엘이었군. 아무튼 그 전쟁 에서 죽어간 많은 사람들에게 자네가 진 빚을 내가 받아야겠단 생각도 이젠 없으니 말 이야.” “그럼 이번에 다시 돌아가시면 무얼하실 생각이십니까?” “글쎄, 자네에게 선물을 주도록 하지. 아무래도 아이슈마란 그 놈은 용서가 안 되거 든.” “힘에 벅찰 텐데요?” “그럴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봉인된 상태라니 어떻게 될 것 같기도 한데?” “한 번 해보시죠. 성공하면 좋겠군요. 저도 아이슈마가 있는 것은 조금 찝찝하거든 요. 이제 그와의 모든 계약은 끝이 났으니까 저하고는 상관이 없는 존재입니다만 없어 져 주면 좋은 존재기는 하지요.” “그렇겠지.” 우리는 그쯤에서 대화를 마무리했다. 강물 속으로 덩치 큰 생명체가 웅얼웅얼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예전 바다에 살았던 고래들 중에서 대형에 속하는 녀석들보다도 더 큰 것 같은 녀석 이었다. 고래를 곁에서 본 적이 없으니 비교가 어렵다. 빅이나 마르트라 보다는 크고 육중하게 느껴지는 몸집이 물속에서 지나갔다. 우리들의 방향은 이제 동쪽을 향하고 있었다. 새벽 일찍 출발한 우리는 강물 위를 날아가고 있었다. “바다로군.” “무슨 말씀입니까? 바다라니요?” “이 냄새, 뭔가 다르지 않나?” “짜군요. 냄새가 짠내가 나네요.” “그렇지. 내가 아는 바다란 말이야. 세상에서 흘러온 강물이 모두 모이는 곳인데 그 물이 짠물이란 말이지.” “그런....” “사실이야 짠물이지. 우리 조금 더 위로 올라가 볼까?” 우리는 비행마법의 고도를 높였다. “우화!! 대단하군요.” “겨우 그 정도의 감탄사 밖에 안나오는 건가?” “따지지 마십시오.” 우리가 고도를 높이자 멀리서 빠른 속도로 해가 떴다. 아니 우리들이 높이 올라가면서 수평선의 건너편을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이 옳다. 바람도 없이 잔잔한 푸른 바다, 수평선 너머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태양의 열기에 일그러진 공기들이 복수를 하듯 태양의 모습을 부정형으로 흔들어 놓 고 있었다. 앞쪽으로 보이는 모든 것은 수평선이었다. “멋지군요. 정말 멋있습니다.” “그렇지. 나도 정말 오랜만에 보는 바다로군. 우리 저기로 가세나. 이렇게 하늘에 서 바다를 보는 것은 바다를 올바르게 감상하는 방법이 아니지. 자 가세.” 나는 제란을 끌고 강물과 바다가 만나는 곳을 피해서 모래사장이 펼쳐진 해안가로 내 려갔다. 하늘에서 볼 때는 잔잔하게만 보이던 바다가 모래사장에 내려서 바라보니 작은 파도 를 끊임없이 밀어내며 본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렇게 내려오니 답답하군요. 바다는 저렇게 넓은데 제가 바라볼 수 있는 범위가 좁아서 그런지 너무 답답합니다.” “그런가? 난 차라리 이렇게 바다를 보면 내 자신이 얼마나 왜소한 존재인지를 느끼 게 되는데... 자네는 역시 정복자의 피를 가진 모양이군. 답답하다라... 바다를 볼 수 있는 범위가 너무 작아서 답답하다라.... 그것 참.” 나는 제란이라는 이 인물이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를 새삼 느꼈다. 쉬벡의 성에서 여자들이나 잡아다가 노리개를 삼고, 흔적없이 죽이는 짓이나 하면서 지내던 놈이 이제는 제법 굵직한 인물이 되어 있었다. 역사가 어떻게 평가를 하던 충분히 이름은 남길 가치가 있는 인물이 되어 있는 것이 다. 우리들은 아침해가 뜨는 해변에서 어둑어둑 땅거미가 깔리는 때까지 별다른 말도 없 이 바다를 보고 있었다. 생전 처음 바다를 보는 제란과 아주 오랜만에 바다를 보는 나에게 하루의 시간은 그 리 지루하지 않았다. “좋은 곳입니다.” “그렇지?” “내일은 돌아가야 할 것 같군요.” “그렇겠지.” “어떻게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양패구상 했겠지만, 자네 병사들은 전멸일 것이고, 동맹군 쪽에서는 제법 살 아남은 사람들이 있을 것 같군.”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이 있겠습니까?” “모르지. 일단은 힘을 얼마나 유지했는지가 관건이겠지.” “저는 암흑제국으로 돌아갈 겁니다.” “자기 자리로 가는 것이야 말릴 수 없는 일이지.” “한타와 그란드를 도모해야 겠지요.” “그렇게 하던지.” “방해하지 않으실 겁니까?” “이유가 없지.” “그 전에는 왜 막으려고 했습니까?” “주위에 사람들이 그걸 원했거든.” “지금도 그들은 도움을 원할 텐데요?” “이젠 그들이 내 주위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존재들이 되었지. 그들은 이제 나에 게 그저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 지나지 않아.” “다행이군요. 이젠 다시 싸울 일이 없을 테니 말입니다.” “솔직히 자네가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야. 너무 많은 사람들 죽였지. 말도 못하는 어린 아이들까지도....” “제겐 힘이 필요했고, 아이슈마가 그 힘을 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힘을 주는 대 가로 전쟁을 원했지요. 어쩔 수 없었습니다.” “뭐 지난 일이지. 그에 대한 빚은 내가 받을 생각이 없다고 했을 텐데? 그저 자네 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지. 자넨말이야 힘이 있으면 상대를 짓눌러야 직성이 풀 리는 사람이야. 아주 암흑제국과 어울리는 사람이지.” “그런가 봅니다.” “우린 악연이었어.” “저에게 행운이었습니다. 아니었으면 아직도 쉬벡의 성에서 지나가는 여자나 찾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가?” “이젠 가야겠습니다.” “그러게.” “다음에는 적이 아닌 상태로 찾아뵙겠습니다.” “기회가 닿으면 그렇게 하지.” “그럼.” 제란은 순간이동을 사라져 버렸다. 아마도 암흑제국으로 갔을 것이다. 나도 준비를 해야지. 아르미엘이 나를 보고 싶다고 했으니 가 봐야겠지. 하필이면 왜 그곳인지 모르겠지만 별로 상관은 없는 일이겠지. 문제는 내가 그 곳의 좌표를 모른다는 것이지만 말이야.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좌표 중에서 칸타트가 있는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를 찾았 다. 그리고 ‘수아의 머릿결’이 그나마 내가 짐작하는 칸타트의 위치와 가장 가까운 좌 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더구나 ‘수아의 머릿결’에는 마췬 길드의 본거지가 있었던 곳이니 혹시 그들을 통 해서 며칠 사이에 있었던 변화를 알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예전에는 참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며 제법 건물들도 있었던 곳이지만 이제는 폐허 만이 남았을 뿐이다. 제란과 갔던 바다 쪽에 비해서 북쪽인 이 곳은 확실히 바람이 매서워지고 있었다. 장거리를 이동해 오느라고 적잖게 마력이 소모된 나는 차분하게 들끓는 마력을 다스 렸다. 지금까지 했던 어떤 순간이동보다 먼 거리를 한꺼번에 날아온 것이니 이럴만도 하다 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9써클의 공격마법을 연속으로 몇 번 쓴 것처럼 마력의 고갈이 느껴졌다. 나는 잠시 마력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주위에서 사람들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 마췬길드의 사람들로부터 정보를 얻겠다는 계획도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수아의 머릿결에서 서쪽으로 강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카타트가 있을 것이다. 1000년 전에 대략적인 위치를 들었던 것이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나는 카타트를 향하려다 잠시 망설였다. 바로 건너편에 매직컬초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한타에서 마지막까지 남은 유일한 도시고 우제푸의 근거지이니 뭔가 이번 싸움에 대 한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곳에서 우제푸라는 인간의 얼굴을 다시 본다는 것은 별로 내키 지 않는 일이었다. 잠시 서성거리던 나는 그냥 칸타트로 발길을 옮겼다. 순간이동을 할 수는 없었지만 비행마법에 속도를 높이고 날아가는 나에게 걸리는 것 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 어디쯤일 것 같은데.... 내가 찾고자 하는 장소가 여기 어디쯤인 것은 알겠지만 정확한 위치는 모르겠군. 작은 산을 둘러싼 숲이 있다고 했지만, 그건 1000년 전의 이야기고 지금은 숲은 없 고 산을 끼고 도는 강이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딱히 산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하나뿐이니 저 산이 목적지 일 것 같기는 하 지만... 나는 산 정상으로 내려섰다. 그리고 주위에 무언가 특이한 곳이 있는지 탐색을 시작했다. 만약에 아르미엘이 있다면 암흑교의 다른 사제들이나 아세트가 함께 있을 것이고, 어 쩌면 스컬프트도 함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멀지 않은 곳에서 평범하지 않은 기운들이 얽힌 장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얼마나 오래전에 만들어진 것일까? 그다지 세련된 모습은 아니었지만 커다란 돌로 기둥과 도리를 만들고 지붕 또한 돌 로 올린 건물 한 채가 눈앞에 있었다. 생긴 것을 보면 그리스의 신화시대 건물처럼 생겼지만 온통 돌이끼가 묻어있고 곳곳 에 금이 가 있는 모습은 확실히 마족의 거처로 적당하다 싶은 곳이었다. 이 곳은 분명 아이슈마의 거처였던 장소다. 물론 지금 이 곳에 아이슈마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아르미엘이 나를 이곳으로 부른 것은 무언가 아이슈마에 대해서 알려줄 것이 있 다는 말일 것이다. 나는 반쯤 산언덕에 묻혀있는 건물을 향해 걸었다. 어쩌면 이렇게 밖으로 나와있는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산속으로 깊게 연결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예전에 이루비아가 누워있던 그 동굴이 이 건물 뒤에 있는지도 모를 일이라 는 생각도 들었다. 저벅 저벅 저벅. 발밑에 건물의 벽을 타고 내려온 습기가 얕게 깔리며 신발 밑에서 철벅거리고 있었 다. 혹시나 했던 것처럼 건물 안으로 들어서서 한참을 걸어도 복도가 끝이 나지 않았다. 아니 이제는 굴 속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이 정도를 걸었으면 이미 산 속으로 한참을 걸어온 것이니 말이다. 벽에는 흐릿하게 빛을 내는 광석들이 드문드문 박혀 있어 주위를 식별하는데 어려움 을 느끼게 하지는 않았다. ?! 하지만 조금전부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주위에 있던 마력들이 응고되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조금 전에 굴의 끝부분에서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원형의 길을 발견하고 길을 따라 내 려오는 동안에 조금씩 마력의 움직임이 힘겨워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끝없이 아래로만 이어지는 길은 벌써 몇 백 미터를 내려온 것 같았다. “꽤나 깊군.” 괜스레 입 밖으로 내 뱉은 목소리도 예상과는 달리 벽 속으로 스며든 것처럼 아무런 반향도 일으키지 않고 사라졌다. 보통은 이런 곳에서 한 마디 하면 여기 저기 울려오는 것이 정상일 텐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굴속에서 흔히 들리는 물방울 듣는 소리도 하나 들리지 않는 고요만이 머물고 있어 조금 불안해지기도 한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을 한 모양이다. 끝없이 내려가던 길을 끝나고 돌로 만들어진 문이 앞을 가로 막았다. 높이는 2미터를 좀 넘는 것 같고, 넓이는 1미터쯤 되는 문짝이 두개 달려있는 석문이 었다. 문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돌로 만들어진 고리가 하나씩 달려 있기 때문이다. 참 오래전에 만들어졌음직한 것이었지만 여기는 이끼자국도 하나 없이 깨끗했다. 그저 왠지 오랜 시간이 지났을 것 같다는 느낌으로만 연륜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었 다. 그르르르 문은 어렵지 않게 열렸고, 안쪽의 모습을 스스럼없이 드러내었다. 원형의 돌탁자와 주위를 돌아가며 놓여있는 의자들. 벽과 천정, 탁자와 의자 천정 중앙에서 빛을 내는 광석까지 모든 것이 돌로 만들어 진 곳이었다. 그리고 탁자를 둘러싼 의자에는 몇 명의 사람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루탄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입을 연 것은 문을 들어선 나와 정면으로 마주보는 위치에 앉아있던 아르미엘이었다. 그르르르륵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남은 자리는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나는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리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양쪽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 펴보았다. 로드릴 주제푸와 그란드 왕실의 종친 중의 한 사람인 노부인. 누웬의 황제와 교인 한 명. 아르미엘과 마갑주를 걸친 인물 하나. 레고리오와 천교의 사제하나. 그리고 우제푸. 나는 그들을 둘러보고는 아무 말도 없이 아르미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동안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일단은 제가 루탄님께 설명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저도 아는 것이 별로 없기 때문에 여기와서 들은 내용만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제푸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사정을 설명하자면 아르미엘이 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저 역시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싸움이 끝나고 여기로 오게 된 후의 일입니다. 일단 여기 계신 분들을 소개하겠습니다. 먼저 주신의 두 번째 종이신 게루빔 (Cherubim) 토마스님이십니다.” 그와 함께 레고리오 옆에 있던 사제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주신의 일곱 번째 종이신 권품천사(Principality) 레고리오님이십니다.” 그러자 레고리오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루시퍼님의 수족이신 베리얼(Berial)님이십니다.” 아르미엘이 고개를 들며 머리에 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아름다운 얼굴이었지만 눈속에서 아른거리는 사악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의심스러운 용모의 아르미엘 아니 베리얼이 매혹적인 웃음을 짓 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슈마의 아버지 아자젤(Azazel)님이십니다.” 아르미엘의 옆에 있던 마갑주의 인물이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물의 정령왕 엘라임님입니다.” 노부인이었다.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님입니다.” 로드릴 주제푸. “신계의 선인 월선月仙님입니다.” “신계의 선인 해선亥仙님입니다.” 누웬의 황제와 교인이었다. 나는 우제푸를 바라 보았다. 너는 도대체 뭐하는 놈이냐고 묻는 것이다. “루탄님 저는 그저 평범한 인간일 뿐입니다.” 나는 우제푸의 소개로 알게 된 이들의 신분에 상당한 혼란을 느끼면서도 상황에 빨 리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가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어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어째 존재감들이 없군요. 전에 가브리엘과 우림선 등이 왔을 때에는 굉장 한 존재감을 느꼈는데 말입니다.” 내 말에 대꾸를 한 것은 월선이었다. “그건 말이야. 우리가 지금 여기 있는 것은 실제의 우리들이 아니기 때문이지. 우리 는 지금 각 계에 존재하지 여기 있는 것은 아니야. 여기 있는 것은 그저 인간들일 뿐 이지.” 나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아서 의아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거야. 여기 있는 이 껍데기들은 사실 우리들이 쓰기 위해 만들기는 했지만 그 다지 성능이 좋은 것들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되지. 정말 인간의 능력에서 벗어나지 않 는 존재로 만들어진 껍데기들이거든. 워낙 각 계에서 인간계에 대한 간섭을 하지 못하 게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런 모양으로 인간계에 나와 있던 거지.” “다시 이야기하면 여기 있는 존재들은 껍데기라는 말이군. 그럼 내가 여기서 한꺼번 에 쓸어버린다고 해도 별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군그래.” 나는 왠지 모르게 가슴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로 흥분했다. “그런다면 여기서 그걸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없겠지만 그래도 우리들이 힘을 합한다 면 우리를 어떻게 하는 건 좀 어렵지 않을까?” 여전히 능글맞은 황제녀석이다. “좋아 나도 뭔가 이유를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설명을 한번 들어보기 로 할까?” 나는 잠깐 세웠던 허리를 다시 의자에 묻었다. “그럼 잠시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지금 상황에 대해서 설명을 해 줄 테니 말이야. 이미 알고 있는 것이겠지만 인간계를 둘러싸고 우리 4계는 언제나 반목을 해 왔고, 인간계에 좀더 많은 영향을 행사하고 그들로부터 힘을 얻기 위해서 무던히도 노력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거야. 또, 1000년 전에 균형에 문제가 생기면서 잠시 주춤하게 되었다가 다행히도 루탄 너 의 도움으로 계의 균형을 유지하게 되었다는 것도 알고 있을 거야. 그런데 그 후로는 인간계에서 조금 떨어져서 그 전과는 다르게 인간들의 자율에 발전 을 맡겨 두자는 합의를 보았던 사실은 모르겠지. 하지만 거기서 문제가 생겼지. 각 계에서는 최대한 서로의 약속을 어기지 않는 상태 에서라면 인간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전적으로 금지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 해야 했거든. 최소한 우리들의 존재를 인간들이 알고 있어야 한다는 거지. 뭐 데리고 다니는 환수 들 중에 신의 흔적들이 있으니 알거야. 인간들에게 잊혀지면 그런 모양이 되기 쉽지.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인간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 필요했고, 우리들처럼 인간계에 나와서 각 계를 알리는 역할을 할 존재들이 필요했던 것이지. 그 덕분에 사 이가 좋지 않은 천사계와 마계는 두 차례의 대전을 치루기도 했고 말이야. 물론 그것 은 분명 조약의 위반에 가까운 것이었는데 그것은 그 싸움으로 인해서 인간들의 뇌리 에는 천사계와 마계에 대한 인식이 깊게 각인되고 말았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것에 대 해서 우리 신계와 정령계는 인간계에 대한 간섭의 범위를 상당부분 축소하는 것으로 조약 불이행에 대한 제재를 가했고, 두 계에서도 그것을 수용했다. 물론 전적으로 신 계와 정령계에서 양보를 했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있었던 합의였다. 그런데 그 후로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한타를 제외한 나머지 나라들은 모두가 시간이 지나면서 인간의 자율성이 상당부분 없어지는 것을 느낀 것이다. 봐서 알겠지만 한타를 둘러싼 다른 나라들은 팽창이라는 것을 하지 않았다. 한타는 언제나 자신들의 영역을 넓히고 싶어했지만 주위를 둘러싼 나라들 덕분에 그 럴 수가 없었지. 언제난 각 나라들로 찾아들어 교역을 시작하는 것도 한타의 인간들 이 중심이었고, 그란드에서 신성제국으로 산길을 연 것도 처음에는 한타의 상인들이었 다. 물론 한타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서쪽의 누웬으로 길을 연 것도 한타의 인물들이었 지. 문제가 뭔지 알겠나? 정체停滯! 바로 그것이었지. 인간들은 발전하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들은 고민했고 생각했다. 왜 이런 문제가 생긴 것일까를. 그리고 결국은 또 다시 우리들이 시행착오를 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들의 영향을 오랫동안 받았던 지역의 인간들은 자유의지에 심각한 문제를 지니 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간섭하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우리들의 존재를 알리고 인간들에게 우리를 숭배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긴 했지 만 그 오랜 시간동안 인간의 개체수도 별로 증가하지 않았고, 그들을 위해 만들어놓 은 그 넓은 대륙도 전혀 쓸모가 없었다. 그런 문제가 있었던 것이지.” 월선은 그 즈음에서 말을 끊었다. 그리고 잠시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덕분에 머리를 정리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들은 내용으로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들고 좀 더 많은 정보를 요구했다. 내 눈빛을 받은 아르미엘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 미소 속에 야릇한 전율이 숨어있었지만 웃음과는 정 반대의 눈빛을 나는 다행히 놓치지 않았다. “그럼 다음 이야기는 제가 계속 하지요. 그렇게 인간계에 상당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우리들은 상당히 고민을 했습니 다. 그리고 그 해결을 위해서 많은 의견 교환을 했지요. 이를테면 완전히 엎어 버리 고 인간만 세롭게 만들어 내는 방법도 있었는데 그건 또 시간이 좀 필요한 것이었고, 4계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세상을 한꺼번에 쓸어버리고 한타만 남기자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논의가 한창 진행되는 동안에 예기치 못했던 문제가 생겼지요. 바로 아자젤의 덜떨어진 아들놈이 문제를 일으킨 것이지요. 원래 나와 함께 인간계 의 문제를 보살피고 있던 녀석이 바로 그 녀석이었는데 좀 덜떨어진 녀석이라 그런지 아니면 한타 지역에 오래 있다보니 그렇게 된 것인지 몰라도 인간들의 자유의지를 배 워버렸던 겁니다. 아주 웃기는 경우였지요. 뭐 따지고 보면 루탄님 옆에 있는 정령들도 그와 비슷한 경우라고 보여지기는 하지 만... 아무튼 여기에서 문제는 아이슈마 이 놈이 반역을 꾀했다는 것입니다. 루시퍼님의 영 역에 도전을 한 것이지요. 인간들의 기억 속에서 4계 전체를 지워버리고 자신의 존재를 알리겠다는 아주 기특 한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사실 성공한다면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건 여기 있는 어떤 존재도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지요. 아무튼 그 문제가 생기자 처음에는 제가 간단하게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 냥 마계로 소환을 해서 존재자체가 가루가 될 때까지 영원의 시간동안 고통을 안겨주 는 것이지요. 그런대로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에는 괜찮은 방법이었을 텐데... 그런데 이 문제를 가지고 인간계의 문제를 해결해 보자는 신계의 건의가 있었습니다. 때마침 루탄님께서 오랜 잠에서 깨어나신 때였기 때문에 잘하면 좋은 작품이 나오겠 다고 생각을 했지요.” 좋은 작품이라고? 순간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기운이 장내의 공기를 차갑게 얼렸다. 아르미엘도 내 상태를 파악했던 모양인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잠시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나는 다시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이슈마의 등장. 녀석이 문제를 일으켰다. 그래서 그 녀석을 이용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때 마침 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를 조금 이용해 보기로 했다. 뭐 이런 줄거리가 되는군. 그럼 난 어떻게 이용을 당한 것일까? 나는 다시 아르미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번에 입을 연 것은 해선이라는 여자(?)였다. “사실 문제가 좀 있었답니다. 우리들이 계획한 것은 아주 간단한 것입니다. 인간계 의 제편이지요. 사실 모든 것에서 손을 떼고 기다리는 방법도 있었지만 한타를 제외 한 나머지 나라들이 너무 경직된 상태였기 때문에 변화를 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 다. 그리고 그 변화는 어쩔 수 없이 추려내기 방법을 쓰기로 했지요. 경직의 원인이 되고 있는 지위부들을 쓸어버리고 어느 정도 사람들의 수도 줄이고, 그렇게 방향을 정했습니다. 그리고 그 가장 좋은 방법은 전쟁이었지요. 거기에다가 우리들로서는 루탄님과 같은 존재의 움직임을 살피는 것도 상당이 흥미로 운 일이었지요. 어찌보면 너무도 이기적인 면을 지니고 있는 루탄님이었지만 때로는 상당히 대범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거기다가 능력으로 따지자면 인간계에서는 단연 독보적, 더 구나 곁에 따라다니는 정령들의 변화도 상당이 흥미로운 것이었고 말입니다. 뭐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루탄님이 이 싸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휘말리게 된 것은 우 리들의 호기심이 한 몫을 했다고도 할 수 있겠군요. 그렇다고 루탄님께 많은 피해를 준 것은 별로 없으니 그렇게 화를 내실 이유도 없다 고 봅니다. 뭐 어쩐지 끈 달린 인형처럼 조종을 받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 도 있지만 절대로 우리들은 여건만 만들었지 결정에 관여한 적은 없으니 말이죠. 아무튼 우리들은 루탄님의 뒤를 따라다니며 나름대로 준비를 했습니다. 제란이라는 녀석을 발견한 것은 초기에 아주 획기적인 것이었지요. 상당히 자질이 뛰어난 녀석이 라 아이슈마가 모르게 그 쪽과 연결을 시켜주었지요. 그리고 루탄님이 누웬에 들러서 암흑제국을 지나게 되고 중간에 제란을 만나거나 아르미엘 사제를 만나거나 실피드와 엘라임을 만나거나 레고리오를 만나는 등의 준비된 작업을 하는 데에 상당히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하지만 1000년 전에 루탄님이 엮어 놓은 인연의 줄기들이 제법 굵었 기 때문에 그런 줄들을 이용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중간의 의외로 우제푸를 만나거나 아세트를 만나게 된 것은 더더욱 우리들에게는 좋 은 일이었지요. 그렇게 루탄님이 주위의 모든 존재들과의 연결고리를 만들고 난 이후에 싸움을 시작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아르미엘 아니 베리얼이 옆에서 전쟁의 준비를 알게 모르게 부추겨 나가는 역할 을 하고 전력의 균형을 맞추는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은 계획된 것이었지만 말이죠.” 결국은 전쟁을 일으켜서 4계의 영역에 속해있는 정체된 인간들을 솎아 내는 것이 목 적이었다는 말인가? “그런 싸움에 내가 필요할 이유는 없었을 텐데? 어차피 한타를 제외하고 나면 나머 지 나라들은 마음먹은 대로 움직일 수 있지 않았나? 굳이 이렇게 어렵게 할 필요가 있 었나?” “그건 제가 말씀을 드리지요.” 레고리오가 입을 열었다. “저희들이 싸움을 일으킬 수도 있었지만 솔직히 무턱대고 전쟁을 일으키기에는 조 금 무리가 있었다는 것이 정답입니다. 그나마 주신을 따르는 신성제국의 백성들이야 이유없는 전쟁도 가능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다른 나라들은 그렇지가 못하지요. 그러니 누군가 전쟁을 일으켜야 하는데... 그런 역할은 아무래도 마계가 어울리고 더 구나 아이슈마가 있으니 그의 힘을 이용한다면 상당한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 각했던 것입니다. 때문에 아이슈마가 멋대로 날뛰도록 내버려 두고 결국에는 자신의 힘을 모두 쏟아부 어서 제란에게 힘을 실어 주도록 하는 데에까지 갈수 있었지요. 문제는 그 직후에 녀석을 봉인시켜 버렸기 때문에 제란이 받은 아이슈마의 마지막 명 령은 여기있는 아자젤이 내린 것이었지만 말입니다. 원래 아이슈마는 제란에게 삼국의 힘을 막으면서 암흑제국에 자신의 신전을 세우고 사제들의 수를 늘이도록 하는 명령을 내렸지만, 그건 아자젤님이 바꾸었지요. 삼국을 초토화 시키고 아이슈마의 힘을 받은 군대 전체를 삼국의 수뇌들과 함께 양패구상을 시키라는.... 그렇게 하면 지금까지의 계약을 완료한 것으로 하고 지금 지니고 있는 힘을 그대로 가지게 해 주겠다는 조건을 건 것도 아자젤이었습니다. 제란으로서는 밀리는 전세를 뒤집을 수 있고, 삼국과 양패구상을 한다고 해도 암흑제 국의 전력의 절반이 남은 상태니 별로 손해는 아니라고 생각을 했겠지요. 덕분이 이렇게 전쟁이 진행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는 이야기가 그렇게 말이 끝난 후에도 한동안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근 십년이었다. 내가 쉬벡의 성에서 동생들과 여행을 시작한 것이 거의 10년 전의 일이었다. 그 동안에 나도 모르게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참 허무하기도 하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때로는 신적인 존재가 되기도 하고, 실제로 신계의 선인들 중에 는 인간으로 수행을 거쳐 경지에 이른 존재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보통의 경우에는 이렇게 한심하게 휘둘려지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가 신적인 존재들이 모여 있다는 4계에서 계산 착오를 했다느니 인간들의 속성 을 파악하지 못했다느니 하는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3500년 정도 지났나? 신계의 분열로 인간계를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었던 것이? 그리고 이번에는 인간들에게 가장 중요하다는 자유의지를 마비시켜 놓았다는 말이다. 그리고는 안 되겠다 싶어서 다시 쓸어버리고 새로 뜯어 고치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 인가? “그래, 대충은 알아듣겠군. 그런데 나를 여기에 부른 이유는 무엇이지? 우제푸도 마 찬가지고, 우리를 부를 이유가 있었나?” 나는 탁자를 둘러앉은 그들을 쓸어 보면서 물었다. “솔직히 너희를 불러야 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4계에서 벌여 놓은 일에 대해서 인간들도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을 했고, 형식상으로라고 다섯 개의 계가 모이는 자리 를 만들어서 지금의 상황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이런 것이 별로 의미가 없다고 생각을 했지만, 우리들도 벗어나지 못하는 우주의 법칙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뒤늦게야 깨닫게 되었다고 할까? 솔직히 신계의 분열 이후로 새롭게 만들어진 인간계는 아직도 많은 부분에서 불완전 하고 미흡한 면이 있다. 그 예전 루탄 네가 살아가던 그 인간계에 상당히 못 미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주와 차원의 창조자인 존재의 힘이 아직 이 인간계에 재대로 미치 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우리들이 인간계를 제외하고 독단적인 행사를 하면 할수록 문제가 커지는 것도 어느 정도 깨닫게 되었다. 때문에 지금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 너와 저 늙은이가 함께 있게 된 것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구색을 맞춘다고 하나? 나와 우제푸의 역할을 그런 것인 모양이다. 솔직히 무슨 말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자신들도 어쩔 수 없는 법칙이나 규칙이 있다는 말인 것 같다. 그리고 그것에 맞추기 위해서 이런 자리에 나와 우제푸가 끼어 있게 되었다는 말이 고, 아울러 이런 설명을 해 주는 것 역시 그런 이유라는 말인 것 같다. “그럼 이제 볼 일은 다 끝이 난 것인가?” 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렇게 물었다.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 지금 인간들은 암흑제국과 누웬사이의 마지막 전쟁이 벌어 지고 있다. 이번에는 누웬이 암흑제국을 정벌하는 것이지. 아마 이번 전쟁으로 두 나 라의 전력도 거의 바닥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어차피 최대한 소모전의 양상으로 전쟁 을 이끌 생각이니 말이야. 제란은 절대로 지금의 이 모임 내용을 알 수 없을 테니 끝 까지 가야겠지. 물론 인간들 중에서 제란 녀석을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존재는 없으 니 결국 승리야 녀석의 것이 되겠지만 겨우 100년 정도 녀석이 활개치고 다닌다고 해 서 우리들이 신경을 써야 할 것도 없지. 그 힘은 전승되는 것이 아니니까 말이야.” “그래? 하지만 아자젤,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과 여기서 볼일이 더 있다 는 것이 무슨 상관이지?” “그건 루탄님께서는 더 이상은 싸움에 개입을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 들었 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미 루탄님은 인간계에 속했다고 보기 어려운 분이시기 때문 입니다. 이해가 안 되실지 모르지만 루탄님이나 주위의 다섯 정령들이나 심지어는 이 루비아까지 이미 인간계의 흐름에 속하지 않은 존재들입니다. 다만 타니라는 그 아이 는 4계의 합의에 따라서 선물로 드린 것입니다. 인간계에 태어날 영혼들 중에 한 영혼 을 루탄님의 아들로 드렸던 것이지요. 솔직히 루탄님이나 이루비아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 말은 타니가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 당신들의 호의라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저 엘라임의 이름을 걸고 사실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물론 자식이 생 기면 바뀌게 될 루탄님의 생각과 행동에도 상당히 관심이 있었지만 말이죠.” 이젠 타니까지도 도마위에 올라가게 되는군. 아주 웃기는 일이야. “그런데 나와 이루비아 그리고 동생들과 지토가 인간계의 존재가 아니라면 어떻게 된다는 말이지?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은 아닌 것 같고?” “그건 아직 밝힐 수 없지만, 사후의 문제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알아 두십시오.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인간의 범위를 벗어난 존재라는 뜻일 뿐입니다. 사후에 겪게 될 문제는 일반적이 경우와 그다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해선의 대답이었다. 아마도 신계에서 영혼과 관련된 문제를 거의 책임지는 까닭에 대 답을 그가 했을 것이다. 나도 굳이 사후의 문제에까지 알아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뭐라고 하던지 나는 인간이고 인간은 불투명한 미래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 삶의 본연 의 모습이라 생각한다. 앞일을 알고 살아가는 것은 인간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영역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 가 생각하기에 축복이라고만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어쩌면 저주에 더 가까울지도... 바꿀 수 없는 미래란 얼마나 답답할 것인가. “좋아 그럼 밖에서 벌어지는 인간들의 싸움에 개입하지 않는다면 모든 문제는 끝이 나는 것인가?” “그것은 전부는 아닙니다.” 레고리오가 입을 열었다. 천사들 중에서 일곱 번째 계급이라는 권품천사라고 했던가? “여기에서 5계의 새로운 약속을 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이번 논의에서는 인간 계의 의견도 수렴을 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루탄님과 우제푸님을 모신 것입니 다.” “새로운 약속이라니요?” 우제푸가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이제 새로운 변화가 인간계에 필요합니다. 인간계의 변화를 막고 있던 4계의 간섭 이 완전히 사라질 것입니다. 그렇지만 앞에서도 이야기를 했던 것처럼 인간계에서 4계 의 존재 자체를 잊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계에서 존재가 잊혀진 계는 사라지게 될 것이나까 말입니다. 그러니 어떤 방법이든 계의 존재는 인간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그 래서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어떤 것이 좋겠는지 의견을 내어 보자는 것 입니다. 그 의견들 중에서 좋은 방법을 정해서 규약을 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이번에는 인간들의 의견도 첨가하는 것이니 조금 색다른 방법이 나올 것 같습니다 만....” 밖에서는 여기저기서 인간들이 죽어 가는데 그걸 조장한 무리들은 여기에서 새로운 미래를 계획하자고 떠들고 있는 것인가? 나는 그런 생각에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가도, 금방 내가 끼어들 문제가 아니라고 스스로를 달랬다. 그리고 나와 우제푸를 제외한 그들은 서로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기에 바빴다. 들어보면 하나같이 비슷한 주장들을 하고 있었고, 그것은 어느 한 쪽도 유리하지 않 은 방법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특히 천사계와 마계는 서로를 견제하는 데에 막대한 심력을 쏟아 붓 고 있었다. 저들이 정말 신적인 존재들이 맞는 것일까? 나는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간을 초월한 존재인 저들이 왜 이런 문제를 이렇게 중구난방으로 떠들면서 의견조 율을 하려고 드는 것일까? 설마 인간들이 나와 우제푸 때문일까? 아니면 저들도 역시 한계를 지닌 유한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일까? 아무리 나라고 하더라도 인간계의 존재가 아닌 다른 계의 존재들에게 이길 확률은 별 로 없을 것이다. 아니 솔직히 아이슈마 그 마족을 처음 보았을 때, 그 힘에 압도되었던 것을 기억한 다. 이길 수 없는 존재. 그것은 여기 있는 여덟 존재들 역시 같을 것이다. 비록 인간계의 껍질을 쓰고 있는 까닭에 드러난 힘이 없기는 하지만 말이다. 나는 자리를 지키고 앉아 아무 의견도 내지 않고 그들의 작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저들도 무한 존재는 아니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우주의 창조자에 대해 알지 못하는 영역을 가진 것을 스스로 말했으니 적어도 한계 를 지닌 존재라는 의미가 되는 것 같다. 결국에는 엄청나게 강한 존재일 뿐. 딱히 달라지는 것도 없는 것 같다. 그럼 나도 신계에 드는 훈련을 해 볼까나? 솔직히 신계의 책자를 보면서 신선이 되느니 어쩌느니 하는 것에 대해서는 상당히 거 부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 보니 그저 조금 더 강해진 존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그런 것이야 나중의 일이지만 말이다. 토론은 끝이 없이 이어질 것 같았지만 결국에 그들이 하는 말의 중심은 같은 것이었 다. 당분간 인간계를 방치 혹은 자유롭게 두어야 한다. 그렇게 인간계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4계에서의 개입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 필수 적이다. 때문에 이번 인간계의 싸움이 끝나면 4계의 영향을 받는 존재들을 최대한 인간계에 서 지워야 한다. 마수나 환수, 정령과 신성력을 인간계에서 지워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번 전쟁으로 상당히 많은 부분이 유실되기는 했지만 남은 것이 있다면 인간들 의 삶에 영향을 미칠 정도의 것들은 각 계가 알아서 지우도록 하자. 그리고 어느 정도 인간들이 본연의 모습을 찾고, 세상에 넓게 퍼지고 나서 각 계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들을 인간계에 보내도록 하자. 뭐 대략 이런 내용들이 오고가고 있었다. 하지만 마치 어린 아이들의 싸움과 같이 같은 이야기를 하는 데도 천사계와 마계는 양보를 할 줄 몰랐다. 어쩌면 이렇게 이야기가 길어지는 것도 두 계의 반목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이제 그만 결론을 내도록 하지. 뭐 서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지기는 싫은 것 같으니 내가 중재안을 내도록 하지. 어떤가?” 지긋지긋한 마음에 내가 그렇게 제의를 하고 나서야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그리고 한 동안 내가 내 놓은 의견에 대해서 각 계의 입장에 따라 조율이 있었고 결 과가 나오는 쾌거가 이루어졌다. 다른 내용은 앞에서 이야기 한 내용과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정령계의 경우에는 특 별히 인간들과 관계를 맺어서 계를 유지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어서 정령계를 유지하 기 위해 인간계의 오염을 자제하는 방향으로 발전을 유도하고, 정령의 존재를 알리는 것은 지금 인간계에 나와 있는 정령족을 조금 진화시켜서 역할을 맡도록 하기로 했다. 더구나 그 정령족들 역시 영혼을 지닌 존재로 어느 정도는 인간들과 비슷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정령계에서는 반갑게 그 방안을 받아 들였다. 그리고 다른 계 역시 정령계는 자신들과 반목이 없다는 이유로 별로 반대를 하지 않 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신계 역시 특이성이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지만, 인간들이 자유의지를 지 니고 스스로 자기 발전을 하려고 한다면 충분히 신계의 영역을 넘을 자들이 나올 것이 라는 낙관적인 견해를 가진 탓에 별 어려움 없이 의견 조율이 되었다. 비록 언제부터 4계에서 본격적으로 인간계에 모습을 드러낼 것인지에 대해서는 추후 에 결정을 하기로 했지만 당분간 이들이 인간계에서 사라질 것은 분명했다. 더구나 정령족 역시 인간계와는 독립된 지역으로 당분간 분리되어 진화하기로 결정 을 내렸다. “그럼 이제 마지막 문제를 상의해야 하겠군요. 아직도 인간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 칠 수 있는 존재가 있지요. 여기 우제푸 마스터와 루탄님, 그리고 이루비아와 다섯 정 령들, 제란도 포함이 되겠군요.” 대략 정리가 되었다 싶은 순간에 이런 말로 등골을 서늘하게 만든 것은 아르미엘이었 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우제푸가 당황한 목소리로 묻는다. 명색이 인간계의 대표로 왔다는 늙은이가 채신없이. 더구나 9써클도 이제는 거의 마 스터에 이른 경지로 보이는 작자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루탄님. 루탄님과 루탄님 가족의 힘은 상당히 위협적인 것이 라고 생각이 됩니다만, 물론 우제푸 마스터도 마찬가지고 말이죠.” 솔직히 이해하지 못하는 말도 아니다. 어쩌면 이들은 인간들을 조금 약화시킬 필요 가 있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솔직히 자유의지를 지니고 끝없이 무언가를 추구하고 개척하는 정신이 모자라는 인간 들이었지만 그 사이에 마법에서 본다면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으니 말이다. 그런 인간들을 오래도록 자신들의 관여 밖으로 내 놓으려니 불안하기도 했을 것이 다. 그렇다고 자신들에게 대들거나 하는 것을 걱정한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스스로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의 오만함은 언제나 절대적인 존재들에 대 한 부정을 동반하는 것이다. 예전 18-19세기에 서양에서 일어났던 근대화와 그 바탕이 되었던 이성주의 혹은 기계 론적 세계관과 같은 것들이 그 예가 될 것이었다. 이들은 그런 변화를 우려하는 것인지도.... “우리들이 더 이상 인간들과 교류하는 것을 금하고 싶다는 말 같군?” “말씀하신 그대로 입니다. 저희들 생각에는 인간계에서 7써클 이상의 마법이나 검 기 이상의 무력은 이제 쓸모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조금 자제를 해야 하겠지요. 솔직 히 마계가 개입하지 않고 여기 있는 두 분과 일데퐁소님만 동의를 하신다면 8써클 이 상의 마법들은 거의 사장되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겠지요. 어차피 고위 마법에 대한 자료들은 저희가 모두 폐기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별로 어려운 문제도 아니군. 어차피 누군가에게 내가 아는 것들을 가르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으니 나는 거기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별 상관없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젠 더 높은 경지를 꿈꾸며 혼자 연구를 하겠습니다. 제가 밝힌 것들이 후대에 전해지지 못하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굳이 제자를 두지 않더라 도 괜찮습니다.” 나와 우제푸는 간단하게 그들이 말에 동의해 주었다. 솔직히 나는 귀찮은 것이 싫었던 것이고, 우제푸는 어쩌면 그나마 남은 생이 아까웠 을지도 모른다. 쪼잔한 늙은이 같으니라고. “그리고 아울러서 루탄님의 정령들도 이젠 물질계의 존재가 되고 있으니 수명이 있 을 겁니다. 그들도 정령족이라 할 존재가 되었으니 나중에 저희 정령계의 필요에 쓸 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 물론 지금의 그들이 죽은 후의 일이 될 테니 그들의 후예들 을 말하는 것입니다.” 로드릴의 말이었다. 동생들과 지토의 후예라고?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보았다. “그렇게 궁금하게 생각할 것은 없습니다. 때가 되면 아시게 될 겁니다.” 물론 나는 그런 미적미적한 대답으로 만족할 수 없었지만 더 이상 입을 열 생각이 없 다는 그의 표정에 하는 수 없이 궁금증을 눌러야 했다. “그럼 이젠, 제란만 남았군. 나머지는 전부 루탄이라는 저 인간이 맡아 줄 것이니 제란만 해결을 하면 되겠군. 뭐 어차피 조금 강한 녀석이 남는다고 해도 문제가 되지 는 않겠지. 그 녀석의 힘은 누구에게 전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가르칠 수 있는 것 도 아니니 말이야. 다른 모든 문제들은 넥스 영지라고 했나? 그 결계 안으로 밀어 버 리면 되겠군. 우제푸라는 저 인간도 함께 말이야. 시간이 지나면 넥스 영지라는 그 곳 에서도 싸움이 없으니 마법과 검술도 시들해 지겠지. 특별한 몇몇을 제외한다면 말이 야.” 아자젤이라는 녀석의 말이었다. “자, 그럼 이제 모두 해결이 된 것인가?” “이 정도로 의견이 모아졌다면 더 이상의 시간낭비는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더욱 자세한 이야기는 인간계를 제외하고 실제적으로 움직여야 할 4계에서 세부 조율을 하 도록 하지요. 그 때는 계의 주인들께서 모이실 테니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겠지요. 자 그럼 이만 회의를 마치기로 하지요.” 레고리오가 마지막으로 산회를 제의 했고 모두들 동의하는 모양이었다. “참, 이젠 루시퍼님의 인장은 필요가 없을 듯 하군요. 루탄님께서 살아있는 동안에 는 다시 저희와 만날 기회는 없을 듯하니 말이죠. 더구나 마계는 더 이상 인간계에 개 입을 하지 않기로 했으니 그 인장은 거두어도 되겠지요?” 아르미엘이 나를 보며 물었다. 하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나는 손을 들어 보이지도 않는 루시퍼의 인장을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그냥 준다는 것은 아까웠다. “이 인장이 내가 마계에 어떤 잘못을 해도 한 번은 용서를 한다는 것이었지. 그럼 잘못을 하는 대신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겠나? 솔직히 그냥 돌려주기에는 아깝지 않은 가 말이야.” 내 말에 아르미엘과 아자젤이 이마에 주름을 만들었다. 하지만 아르미엘은 곧 웃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래 뭔하는 것이 뭔가요? 들어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들어 드리지요. 꼭 인장의 대가라고 하지 않더라도 말이죠.” “아이슈마의 소멸.” 나는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아자젤이 비록 아이슈마의 아비라 하더라도 나는 아이슈마를 곱게 돌려보내 주고 싶 지는 않았다. 뭐 마계에서도 그냥 두지는 않겠지만 이이슈마의 소멸에 내 의지가 포함 되기를 원한 것이다. “호호호, 좋습니다. 들어 드리지요. 솔직히 봉인으로 끝날 문제는 아니었으니까요. 루탄님이 바라시는 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와 함께 내 왼 손에서 어두운 빛이 나다가 사라졌다. “그럼 저도 부탁을 드려야겠군요. 처음 루탄님을 뵈었을 때부터 가지고 싶었던 것이 지만 주신님의 은총이 담긴 십자가를 돌려 주시겠습니까?” 아르미엘의 일이 끝나자 레고리오가 나섰다. 솔직히 한 번도 제대로 쓴 적이 없는 것이 이 물건이었는데, 결국 이렇게 빼앗기고 마는 것인가? “역시 그냥 주기에는 아까운데 뭐 대신에 줄 것이라도 있나? 이건 아직은 내 소유라 고.” 나는 창고 안에서 십자가를 꺼내며 말했다. 마력이 굳어 있는 곳이라 어려움이 있기 는 했지만 작은 통로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내 말에 레고리오는 잠시 고개를 돌려 토마스라는 인물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미흡하지만 그럼 제가 축복을 드리겠습니다. 루탄님의 아들인 타니에게 축복을 드 리지요. 주신의 사랑을 받을 겁니다.” “무슨 소리를 그건 약속 위반이다. 어떤 경우에도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더 이상 인간계에 관여하지 않기로 하지 않았나?” 반발을 하고 나온 것은 아자젤이었다. “맞는 말입니다. 그건 안 될 말이지요.” 해선 역시 반대를 하고 나섰다. 그럼 하는 수 없다. “어쩔 수 없군. 그럼 없었던 일로 하지. 어차피 이걸 내가 가지고 있는다고 해도 쓸 일도 없고, 이것 때문에 각 계의 다툼이 있다면 문제가 되겠지. 자, 가지고 가 라.” 나는 레고리오에게 십자가를 건넸다. “혹시 신계에서는 이 책자가 필요한가?” 내가 신계에서 받은 책을 들고 물어보자 월선이 웃으며 대답했다. “책이란 것이 내용이 중요한 것이지 거죽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 않을까? 이미 그 내 용이 머리 속에 들어 있을 텐데 책을 굳이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지. 다만 그 책이 다 른 사람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물론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도 마찬 가지로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지 않았으면 좋겠고 말이야. 물론 인간이 하는 일에 미래 를 약속받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기는 하지만 날이야.” 나는 녀석의 말을 들으면서 손에 들고 있던 책을 가루로 만들었다. “그럼 책은 이렇게 해결을 하고, 내 머릿속에 들어있는 것은 내가 죽으면 사라지겠 고, 다음은 정령계에서 받았던 선물인데 그건 소비품이었으니 돌려달란다고 해도 줄 수가 없겠군.” “뭐, 그런 것을 돌려받을 생각은 없습니다.” 노부인이었다. “내가 주었던 것이지만 돌려받을 생각은 없습니다. 덕분에 정령계를 알릴 좋은 존 재들이 태어나게 될 것이니 도리어 우리로선 환영할 일이지요.” 아까부터 동생들과 지토의 후예를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말을 두루뭉술하게 하고 있어 서 궁금증만 커지고 있었다. 물론 그들의 태도로 보아서 물어본다고 대답을 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럼 이제는 모든 이야기가 마무리되었으니 각자 갈 곳으로 돌아가야겠군요. 할 일 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렇겠지요. 그래도 제법 재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한 순간에 모든 것을 바꾸고 인간들의 기억을 개조하는 것 보다야 훨씬 재미도 있 고 효과적인 방법이지. 힘도 덜 들고.” “자, 자. 그래도 할 일이 많습니다. 자잘하게 해결을 해야 할 일이 많아요. 어서 갑 시다.” 그들은 그렇게 한 마디씩 하면서 내 눈앞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텅 빈 공간에 나와 우제푸가 남겨졌다. 허탈함만 남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넋을 놓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천천히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가기 시작했다. 아마도 내가 이 곳을 벗어나면 이 곳의 흔적도 지워지지 않을까? 인간계를 제외한 다른 계의 흔적들은 하나하나 사라질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하기로 했다면 그렇게 되는 것이니 말이다. 나는 다시 한 번 그들의 말을 곱씹으며 위로 올라왔다. 세상의 인간들을 모두 지우고 새로 만드는 것은 시간이 걸린다고 했던가? 아니, 필요 한 인간만 남기고 지우는 것은 재미가 없다고 하기도 한 것 같은데... 어떻게 보니 참 한심한 족속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란. 아니 저들의 존재를 너무 작게 보았던 것이 잘못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언제부터 인간이 신에 도전하는 것을 감히 상상이나 했던 것인지. 나도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인간으로서는 이미 한계를 벗어났다 싶은 순간에 신의 영역에 대해 힐끗거리는 마음을 가지지는 않았을까? 끊임없이 높은 곳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쉽게 이룰 수 없는 것이 인간이 꿈꾸는 것이다. 하늘은 너무도 높지만 그네 를 타는 춘향이가 아무리 발을 구르고 향단이가 등을 밀어도 가지 못하는 곳이라 했던 가. 갑자기 [추천사]라는 이름난 시인의 시가 생각이 난다. 한계를 지닌 인간. 벗어나지 못할 한계. [깃발]이라는 시도 있었다. 이제는 내 주위로 바람이 불지 않는다. 깃대에 매인 나에게 더 이상 바람이 불지 않으니 손짓도 없고, 펄럭임도 없겠지. 내 발걸음은 그렇게 느릿느릿 처음 들어선 석조 건물 밖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저기 루탄님. 어디로 가실 겁니까?” 우제푸가 따라왔던 모양이었다. 이제 제 갈 길을 가면 될 것을 무엇 때문에 나를 부르는 것일까? “글쎄,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그리로 가야 하지 않을까? 그러는 우제푸 당신은 어디로 갈 생각인가?” “저야 갈 곳이 있겠습니까? 아마도 매직컬초에 가야 겠지요. 뭐 남아 있는 것이 얼 마나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쩌면 이미 흔적도 없이 지워졌을지도 모르지요. 8써 클 이상의 마법에 대해서는 제재를 가하겠다는 의지가 있었으니 그렇게 되지 않았을 까 합니다.” “그럴지도 모르겠군. 그리고 나는 넥스 영지로 들어갈 생각이야. 아마도 결계 안으 로 들어갈 방법이 있을 것 같군. 내가 세상을 떠도는 것 보다는 안으로 그 안에서 칩 거하는 것을 더 바랄 테니 말이야.” “그렇습니까? 다시 뵐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글쎄, 볼 수 있었으면 좋겠군. 이번 일에 대해서 그나마 추억이라도 나눌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이니 말이야.” “그 말씀은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함구하라는 말씀으로 들리는 군요.” “뭐 좋을 대로 생각하면 될 일이고..... 나중에 보자구.” 나는 우제푸를 등 뒤로 두고 발걸음을 옯겼다. 밖으로 나오면서 마력의 흐름이 정상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언제든 마법을 쓸 수 있었 지만 조금 걷기로 했다. 어차피 쉬벡의 성에도 들렀다 갈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서둘러 움직인다고 넥스 영지로 들어가는 길이 열린다는 보장도 없는 일이었 다. 한 번 들어가면 다시 나오지 못할 것도 같았고 말이다. 아니 나오지 못한다는 것 보다는 나오지 않을 생각이라는 말이 맞을까? 더 이상 여행은 의미가 없었다. 너무도 작은 인간들의 세상은 볼만큼 봤으니 미련도 없었고, 사람들과 부대끼며 지내 는 것도 넥스 영지에서만으로도 충분하리란 생각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내가 거쳐 온 흔적들을 훑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자연스러 운 것이 아닐까? 며칠을 걸어 쉬벡의 성에 이르는 동안에 나는 아무런 소식도 들을 수가 없었다. 마췬 길드의 인물들을 굳이 찾으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소문이 퍼지지 않는다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었다. 하긴, 길드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바로 곁에 있는 마을의 소식도 직접 사람들이 오가 지 않으면 알 수 없을 테니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겠다. 도리어 지나는 곳마다 사람들이 불안한 기색으로 이런 저런 것들을 물어왔다. 나는 그런 그들에게 예전처럼 살아도 될 거라는 말을 해 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젠 제란의 부대가 암흑제국으로 밀려갔다는 말을 전하는 것이다. 앞으로의 미래를 알지는 못하지만 자신들의 자유를 강제하는 존재가 없어진 것이 사 람들에게 기쁨이었나보다. 그리고 나무를 베어 집을 지을 마땅한 톱과 망치도 제대로 없으면서도 토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한 그들의 모습이 왠지 측은해 보이 면서도 삶을 개척하려는 의지를 잃지 않은 것이 대견해 보였다. 나는 그런 마을들을 거치면서 쉬벡의 성에 도착했다. 마을들을 거치면서 끌어 모을 수 있는 철제들을 모아서 필요한 소소한 도구들을 만들 어 줄 수 있었던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겨울은 아직 그 모습조차 완전히 드러내지 않았고, 그를 기다리는 살아남은 사람들에 게 가혹한 한기寒氣를 뿌릴 것이지만, 그가 물러가는 때에는 동토를 비집고 일어서는 여린 싹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저 그렇게 스스로를 위안했다. 내가 지나며 만나는 마을의 사람들을 다시 품에 안고 보듬으려 생각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시련이 될 것이었다. 나에게나 그들에게나.... 쉬벡의 성에 가까워진 나는 풍교를 건너기 전에 마르트라를 찾았다. - 어서와라. “잘 있었나 보네.” - 얼마 되지도 않은 시간동안에 일이 많았지. 덕분에 나도 곧 신계로 들게 되었다. “응? 무슨 말이야?” - 신계와 마계, 천사계, 정령계에서 각 계와 관계된 힘들을 모두 불러 들이니 나라 고 어쩔 수 있나. 본래는 좀 더 시간이 걸릴 일인데, 나는 덕분에 좀 일찍 돌아가게 되었다는 말이지.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 나에게야 좋은 일이지. “그럼 축하해야겠군.” - 하지만 좋은 것만은 아니야. 내 짝은 함께 가지 못하게 되었으니 말이야. 아직 그 럴 수준이 되지 못한다는 거지. 아마도 앞으로 오 육백년은 더 있어야 신계에 갈 수준 이 될 녀석이라.... 마르트라는 조금 기운이 빠진 듯이 머리를 내렸다. “4계가 완전히 인간계에서 손을 뗀다는 것도 아니고 오 육백년 후면 신계와 인간계 의 통로가 생길지도 모르잖아.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아.” 나는 그런 마르트라를 이렇게 위로 할 수 밖에 없었다. - 그게 그렇지가 않아. 신계가 닫히면 인간계의 환수들은 더 이상 수련을 하기 어려 워져. 인간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어떤 형식으로든 신계의 영향이 없다면 신계를 향한 수련을 할 수도 없어지는 거야. 인간들은 끊임없이 4계의 영향을 받으면서 변화하는 것인데.... 물론 때문에 4계이 속성을 닮아간다는 문제 때문이 이번의 이런 조치가 취 해진 모양이지만 말이야. “그러니까 이런 것이로군. 4계와 인간계가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인간들은 4계에 대 한 것을 의식조차 하지 못한다는 그런. 어쩌면 사람들의 꿈이 많이 단순해 지겠군.” - 맞아 맞아. 꿈도 각 계에서 인간들에게 심어주는 암시의 한 방법이지. 아주 큰 역 할을 하기도 하고 말이야. “하지만 4계가 완전히 인간계와 단절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는데?” - 그야 그렇지만 그렇다고 우리같은 동물들이 수련을 통해서 신계에 이르는 것이 가 능할 정도로 신계의 영향력이 남아돌지는 않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그렇기도 하겠군.” - 하는 수 없는 일이지만 조금 섭섭해서 해 본 말이야. 그러면서도 마르트라는 그 화이트 스네이크와 헤어지는 것이 아쉬운 것 같았다. “나도 이젠 돌아가야 할 것 같아. 넥스 영지로 들어가면 다시 나오지 못할 거야. 그 래서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들렀어.” - 그거야 나도 그렇지. 이번에 신계에 들어가면 너와는 완전히 이별이겠군. 좋은 인 연이었는데 말이야. “그렇게 생각을 해 준다면 고마운 일이군. 그럼 이제 너의 힘을 빌려 쓰는 것도 할 수 없겠군. 겨우 배웠는데 아쉬운 걸?” - 크흐흐. 그거 농담이라고 하는 거냐? “하하하. 잘 가라. 혹시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잘 지내라.” - 그래. 너도 잘 지내라. 인간이니 언젠가 죽겠지. 혹시 죽어서 혼이 되면 또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죽어보지 못해서 알 수 없지만 그것도 한 방법이라면 기억해 두지.” - 잘 가라. “ 그럼....” 나는 다시 풍교 위로 올라왔다. 쉬벡의 성 영지에 내가 걸어 놓은 결계 때문에 영지 안으로는 마법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오래지 않아서 사라질 결계였다. 그리고 쉬벡의 성도 마찬가지로 마법이 사라질 것이고, 성벽에 만들어진 공간들도 어 쩌면 사라질지도 모른다. 물론 4계에서 생각이 있다면 지심목이 있는 쉬벡의 성벽을 건드리는 우를 범하지는 않을 것 같지만 말이다. 나는 쉬벡의 성에 돌아와서 주민 대표들을 불러 전황을 설명하고 여유가 생기는 대 로 영지 밖에 있는 사람들을 보살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당분간 볼 일이 있어 다시 떠나야 한다는 말과 함께, 오래 걸릴 것 같다는 말 을 하고는 쉬벡의 성을 나섰다. 어디든 중심이 있어야 하는 법이었다. 인간들은 소수의 사람들끼리는 어느 정도 배려를 하고 지낼 수 있지만 인원이 많아지 지 않으면 발전이 더디게 되는 단점이 있고, 인원이 많아지면 통제가 되지 않는 단점 이 생긴다. 어차피 오래지 않아서 나라가 생길 것이고 지배층이 생길 것이고 부富와 빈貧이 나 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두려워 뭉치면 서열이 생기고 지배와 피지배가 생긴다. 하지만 흩어지면 두려움에 떨 며 사냥감이 된다. 뭉치면 사냥꾼이 된다. 이것이 인간들이 원시시대부터 지녔던 딜레마가 아닐까. 나는 쉬벡의 성을 나와서는 곧장 넥스 영지로 장거리 이동을 했다. 하지만 아직도 영지의 결계는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안에서 밖으로 나올 때에는 미세한 틈으로 나왔지만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쉽 지 않았다. 아니 불가능했다. 나는 결계 입구에 작은 집을 지었다. 겨울이 찾아왔기 때문에 쉴 곳이 필요했던 것이다. 뚝딱 뚝딱 엉성하게 집 모양을 만들고 눈보라와 비바람은 결계와 마법으로 막아 놓았 다. 간간히 산 속을 헤매는 짐승들을 사냥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오직 결계의 틈을 열고 들어가는 방법을 차는 데에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다. 내 주위에 아무도 없고, 말 한마디 주고받을 이가 없는 상태에서도 결계의 흐름을 읽 고 그 틈을 찾기 위해서 정신을 모으다 보면 하루, 혹은 이틀, 혹은 그 보다도 많은 날들이 성큼성큼 지나가 버렸다. 나는 내가 만든 집 안에서 결계의 흐름을 살피고 있었다. 결계를 살피기 위해서 내가 집 밖으로 오갈 일은 없었다. 결계가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손으로 만져지는 것도 아니니 그저 결계를 감싸고 흐르는 기운을 느낄 수만 있다면 집 안에서든 밖에서든 상관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만들었다지만 결계는 너무 완벽에 가까웠다. 또 다른 차원을 만들어 놓은 듯이 완벽하게 삼켜버린 넥스 영지. 만약에 내가 이 곳 산맥의 중앙이 아니라 예전의 넥스 영지로 들어가던 그 곳을 찾아 간다면 나는 또 하나의 넥스 영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영지의 터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만든 결계는 그 영지 내의 모든 것을 결계안으로 숨겨 놓고 텅 빈 땅덩어리를 남겨 놓았다. 결계를 만들시 시작하면서 혹시 그 곳에 사람들이 들어와 눌러 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결계가 풀리면서 간섭효과가 일어나지 않을까? 나는 이 걱정 때문에 엄청난 심력을 소비해야 했었다. 결국에는 결계가 풀리는 것이 한 순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부분 부분, 점진적으 로 일어나면서 간섭효과를 없애도록 만들었었다. 물론 그것은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일어날 변화였지만 말이다. 아무튼 결계가 풀리는 것은 한 순간에 일어나지 않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곳에서는 결계의 모습을 살필 수가 없었다. 결계의 모습은 그 통로인 이 곳에서만 살필 수가 있었다. 오늘도 별다른 수확은 없었다. 그저 결계가 너무도 튼튼하고 완전하게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에 그쳤을 뿐이다. 하지만 크게 실망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직 시간은 많았고, 결계 안에 살고 있을 가족들이 나를 걱정할 것이라는 우려만을 뺀다면 별다른 걱정도 없었다. 가끔 가슴을 메이도록 만드는 그리움이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말이다. 삐그덕- 어설프게 달아 놓은 문짝을 열고 오랜만에 밖으로 나섰다. 그 사이에 겨울이 힘을 잃고 있었다. 굵은 나무둥치에 얽혀있는 잔설은 한 쪽 귀퉁이만 남았고 대지는 검은 흙을 드러내 고 있었다. 수많은 세월동안 굵은 나무들을 키워 내었던 대지는 그 나무들이 매 년 보답하는 나 뭇잎으로 덮여 검은 토양으로 변해있는 것이다. “호? 벌써 새 싹이 나는 것인가?” 나는 발밑에서 고개를 내민 연초록의 새싹을 보고 놀랐다. 지리적으로 암흑제국과 그다지 먼 곳은 아니지만 고지대에 위치했기 때문에 신성제국 과 그 북쪽으로는 한타에 비해서 훨씬 겨울이 긴 편에 속했다. 그런데 벌써 싹이 돋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여기에 자리를 잡은 후로는 날짜를 헤아리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아서 대충 몇 달이 지났다는 것만 알 뿐이었는데 벌써 봄이 오고 있는 것이다. 나는 문득 한타와 누웬, 그란드의 사람들이 어떻게 겨울을 보냈는지, 제란과 누웬의 싸움은 어떻게 되었는지, 자이건과 아세트, 그리고 행방이 묘연한 일데퐁소 등은 어떻 게 되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렇다고 이 곳을 떠나서 그들의 소식을 수소문하고 다닐 생각은 없었다. 비록 이곳에서 결계를 열기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을 머물러야 할지는 알 수 없었지 만, 벌써부터 지루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아니었고,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을 자이 건 등에 대한 궁금증이 누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오랜만에 밖으로 나와서 그동안 흘러간 시간을 체감하면서 불현듯 떠오른 생각 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집 주변을 살피며 잠시 잊고 있었던 시간의 흐름을 느껴 보았다.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 앉으면 또 얼마나 결계를 살피는데 정신을 쏟고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간만에 얻은 이런 즐거움을 조금 오래 누려보고 싶기도 했 다. 벌써 나흘 동안 나는 집 주변을 돌며 산책을 즐기고 있다. 물론 쉬지 않고 집 주면을 돌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 결계에 집중을 하지 않고 다가 오는 봄을 즐기고 있다고 하는 것이 옳은 말이다. 오랜만에 집 밖으로 나온 나흘 전에 잠깐 흔들린 마음이 춘기春氣를 이기지 못하고 산 속을 서성이게 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도 굵은 나무를 의지해 기대고 앉아 산 아래로 향하는 경사를 바라보고 있 었다. 안개가 가끔 흩어지고 뭉치기를 반복하는 골짜기 아래로 살짝살짝 보이는 모습이 이 미 봄기운은 산기슭에 완연히 찾아온 모양이었다. 오래지 않아서 이 곳으로도 저 기운들이 몰려오리라는 설렘을 가지게 한다. 봄이라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라 여길 불혹의 나이를 넘어선 내가 이렇게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외로움 탓일까.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봄이라는 계절에 마음이 흔들리고 있을 때, 나를 찾은 뜻밖의 사람들이 있었 다. 허긴 이 곳을 알고 찾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이건과 아세트였다. 그들은 제법 규모가 있는 행렬을 이끌고 왔지만 내가 있는 곳으로는 단 둘이서 걸어 올라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루탄님.” “오랜만입니다.” 그들이 나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오랜만이군.” 내 목소리에 그닥 온기가 없음은 당연한 것일까? 지금 내가 바라는 가장 중요한 것을 가로챈 것이 이들이었으니, 아니 이들이 그 일 에 관련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내 목소리가 품은 냉기를 눈치 챈 것인지 자이건과 아세트는 아무 말도 없이 마당에 서 있었다. 나와 그들 사이에 건조한 바람만 부는 듯 했다. 조금 가슴이 쓰려 왔다. “그래, 무슨 일인가?” 먼저 내가 입을 열었다. 그나마 경직된 분위기를 부드럽게 해 보려는 나의 배려였다. “루탄님,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희도 빈체를 보고 싶습니다.” 입을 연 것은 아세트였다.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들지 못하는 자이건에 비하면 아세트가 더 당차게 보인다. 하지만 나는 그런 아세트나 자이건의 마음을 곧이곧대로 믿어 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 다. “그래? 그 사이에 제법 귀한 사람이 되었던 모양이더군. 어쩌면 왕이 되었을지도 모 르겠군. 한타와 신성제국을 아우르는 왕이 되었을지도 모르겠군. 어차피 주인 없는 땅 덩이였던 신성제국을 차지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야. 거기다가 마췬 길 드를 장악한 아세트 공작의 힘이 있었으니 더더욱 쉽지 않았을까? 기댈 곳이 없는 한 타의 백성들에게 마췬길드의 부풀려진 정보는 자이건을 영웅으로 만들기에 부족하지 않았겠지. 거기에 나를 끌어들여 그 종으로 삼았으니 더욱 멋지지 않은가 말이야. 백 색의 기사와 그를 따르는 9써클 마스터의 시종이라... 그런데 왜 빈체는 넥스 영지에 두고 갔을까? 불확실한 미래에 자기 자식은 위험에 빠트리고 싶지 않았나? 자기의 욕 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모험을 하는 곳에 자식만은 끼어들게 하고 싶지 않았나? 그래 서 넥스 영지라는 안전한 테두리를 찾았나? 그래, 그런데 이제 꿈을 이루고 나니 자식 을 찾고 싶던가? 부귀영화를 함께 누리게 하고 싶어졌나? 따지고 보면 이번 싸움에서 목숨 걸고 뛰어다닌 것도 욕망을 이루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았겠지.” 내 목소리는 그리 격앙되지 않았다. 조용히 글을 읽는 것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다지 화를 내고 싶지도 않았고, 나름대로 그러리라고 생각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 다. 다만 이런 이야기를 이들에게 조목조목 하고 있는 이유는 이들이 나에게 자신들에 대 한 호감이 남아있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내 말이 이어지는 동안에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는 아세트와 더욱 붉어지는 자이건의 모습에서도 나는 연민을 느끼지 않았다. 자이건의 모습이 부끄러움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아세트의 모습이 당혹감 때문이라 고 하더라도, 혹은 반대로 자이건의 모습이 분노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아세트의 모습 이 절망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나에게는 별 차이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었다. “빈체를 만날 수 없겠습니까?” 아세트가 다시 물었다. “내가 여기에 무엇 때문에 남아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너희들을 기다려서 빈체를 만나게 해 주기 위해서 기다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를 기다 려서 함께 넥스 영지로 들기 위해서 기다린다고 생각한 것인가? 나는 하루하루 결계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내 자신을 자책하며 조금씩 말라가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리 고 만약에 결계 안으로 들어갈 방법이 생긴다면 그것이 나 혼자만 가능하다고 해도 주 저하지 않고 나는 결계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나오지 않을 생각이야. 물론 내가 결계를 해체하고 빈체를 너희에게 돌려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이 미 넥스 영지는 인간계와는 독립된 곳이니 말이야. 내 의지로 결계를 깨는 것이 가능 할지도 모르겠지만....” 이들은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 내 말이 이들에게 왜 저렇게 충격을 주는 말이 되는 것일까? “빈체는 잊는 것이 좋겠다. 어차피 빈체는 우리 타니의 종복으로 삼겠다고 그러지 않았던가? 자이건?” 그렇게 멍한 눈으로 나를 본다고 내가 무얼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이미 내가 저들에게 줄 것은 남지 않았다. “저를 함께 데리고 가 주실 수는 없습니까? 다시 나오지 못한다고 해도....” “자이건 그게 무슨 소리예요?” 역시 아세트는 빈체보다는 새로 생긴 권력과 지위가 더 마음에 드는 것일까? 아니면 빈체와 자리를 함께 지킬 방법을 생각하는 것일까? 하지만 나는 빈체를 줄 방법을 알지 못한다. “미안하지만 함께 갈 방법은 고사하고 나 혼자 갈 방법도 아직 없다. 그리고 둘 혹 은 그 이상이 함께 갈 방법을 찾는 것 보다는 나 혼자 가는 방법을 찾는 것이 더 빠 를 것 같군. 이젠 돌아가라.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이 끝이다.” 나는 더 이상 이들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한타와 그란드, 신성제국과 누웬, 암흑제국을 망라하는 소식들이 궁금하기는 했지만 궁금증을 해소한다고 해서 나에게 변할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게 굳이 그런 것들을 묻고싶지도 않았다. 자이건과 아세트 부부는 첫 날 내 차가운 태도에 별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 고 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그들은 그대로 행렬을 이끌고 돌아가지 않고 산 아래에서 머물면서 나를 귀찮 게 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내가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이상은 마주칠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가끔씩 문 앞까지 왔다가 발길을 돌리는 그들의 행동에 신경이 전혀 쓰이지 않는다면 그것도 거짓말이었다. 덕분에 나는 밖으로 나가는 일이 없어졌고, 자연스럽게 집 안에서 칩거하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또 다른 손님이 나를 찾아왔다. “루탄님, 접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세트와 자이건이 함께 왔다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문을 열어 주었다. 넷이 앉기에는 그리 넉넉하지 않은 방에 아세트와 자이건, 그리고 일데퐁소가 들어왔 다. “그래, 그동안 잘 지냈는지 모르겠구나. 일데퐁소.” 어찌보면 나에게 있어서는 제자와도 같은 녀석이었던 일데퐁소는 30대 중반에 가까 운 나이가 되어 있었다. 어느 누구보다도 마력에 대한 친화력이 높아서 마법이 금방금방 늘었던 녀석이었다. 물론 우제푸의 특훈에도 상당히 도움을 받았지만 말이다. 지금 그 일데퐁소가 내 앞에 있었다. “네, 덕분에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루탄님께서도 건강해 보이시니 다행입니다. 두 문불출하고 계시다는 말을 듣고 걱정했습니다.” 그런 일데퐁소 옆에는 아세트와 자이건이 불편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그래, 이렇게 함께 온 것은 일데퐁소 너의 문제로 온 것은 아닌 모양이구나. 물론 내가 어떤 대답을 할지도 짐작을 할 테고 말이다.” 나는 그들 부부의 태도나 표정에 신경을 쓰지 않으려 애쓰며 일데퐁소에게 물었다. “저도 루탄님께서 이러시는 것을 이해합니다. 더구나 아직도 결계 안으로 들어갈 방 법조차 알지 못하시는 상태에서 이렇게 심기를 어지럽혀 드리는 것도 죄송하게 생각하 고 있습니다. 다만 루탄님께서 결계 안으로 들어가실 때 자이건 폐하와 아세트 왕비님 께 먼저 연락이라도 주시면 빈체 왕자님께 전할 편지라도...” “못들은 것으로 하겠다. 일데퐁소.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다.” 잠시 일데퐁소의 말을 끊고 들어간 내 목소리가 격앙되었던 모양이다. 일데퐁소는 물론이고 부부의 어깨까지 흠칫 떨린 것을 보면 말이다. 나는 단호한 표정으로 그들에게서 고개를 돌렸고, 잠시 머뭇거리던 셋은 일어나 문 을 열고 나갔다. 역시나 왕과 왕비가 된 모양이었다. 그러면 일데퐁소는 그 일익을 담당하는 역할을 했을까? 허긴 일데퐁소 정도의 능력이라면 지금처럼 주인 없는 땅덩어리에서 아세트 정도의 정보력과 정보 조작력을 지닌 사람이 뒤를 받쳐 주는 상태에서 국가를 세우는 일이 어 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아세트가 일데퐁소를 필요로 했을 것이라는 게 옳은 걸까? 우제푸와 나를 제외하고는 최고의 마법사인 녀석이 아닌가? 또 그를 따르는 마법사 가 서른 명이 넘게 따라갔으니 희생이 컸다 하더라도 전력으로서도 상당한 가치를 가 지고 있을 터였다. 그런 일데퐁소를 아세트가 끌어들였겠지. 여전히 아세트 일행들은 산 밑에서 진을 치고 있었고, 그들은 시일이 오래 걸릴 것이 라 여겼는지 작은 건물을 지어 거처를 정할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아세트는 일이 바쁜 모양인지 쉼 없이 날아드는 정보들을 받고 있었다. 아무리 산 밑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이라 하더라도 정보를 담은 스크롤이 날아오고 날 아가는 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 도리어 내가 결계를 살피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고 있으면 저 망할 스크롤들이 날아들면서 내 감각을 흩어 놓기도 했다. 아마도 새롭게 만들어지는 왕국의 틀을 다지는 일을 미루어 둘 수 없기 때문일 것이 다. 일이 바빠서는 아니겠지만, 아세트와 자이건은 나를 찾지 않았다. 무슨 부탁을 받았 는지 모르지만 일데퐁소가 가끔 나를 찾아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붙여 보려고 했지 만 내가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음으로 해서 언제나 주위를 빙빙거리다 돌아가는 것 이 고작이었다. 오늘도 일데퐁속가 찾아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저 루탄님, 이제 거의 마무리가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두서없이 꺼낸 일데퐁소의 말이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누웬과 암흑제국의 전쟁도 거의 끝이 났고, 그란드도 어느 정도 제자리를 찾은 것 같습니다. 신성제국은 사라졌고, 이제는 선드라스와 누웬, 암흑제국, 그란드의 각축이 겠지만 당분간은 서로의 등을 노릴 힘도 없을 테니 자중하는 분위기가 될 것 같다는 말씀입니다.” 아직 그란드가 남았다는 말은 이그가 살아남았다는 말이겠군. 그리고 신성제국이 없 어졌다는 말은 아마도 마지막 싸움에서 신성제국의 고위 인사들이 많이 죽었거나, 신 성제국의 제국 회의의 힘이 아세트의 힘을 이기지 못했다는 말일 것이다. 지금 여기 선드라스 왕국의 주인이 와 있는 것으로 보아서 지난 겨울에 신성제국이 선드라스에 합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의 싸움에서 다른 나라들은 제란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다. 내가 보기에 제란은 이제 자이건이나 이그가 따라갈 수 없는 위치와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누웬에서 누가 나올지는 몰라도, 그 황제가 사라진 후라면 아마도 사분오열될 가능성 이 컸다.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어가니 4계의 존재들도 정리를 하려고 들겠군요.” 일데퐁소의 이 말은 나를 충분히 놀라게 할만 했다. “알고 있었나? 4계의 일을? 아니 그게 아니군. 어떻게 알았지?” 내가 그렇게 물어 준 것이 무척이나 반갑다는 표정이 된 일데퐁소는 예전처럼 흥분해 서 말을 더듬는 일 없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저에게도 4계의 인물들 중 한 분이 왔습니다. 해선이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것은 아니지만 제가 8써클에 해당하는 마법을 사용하거나 전 수하는 것에 제재를 했습니다. 솔직히 반항을 해 보고 싶기도 했지만 루탄님과 우제푸 님 역시 동의하신 것이라는 말에 그냥 승복하고 말았습니다.” 이 부분에서 일데퐁소는 불만스러운 면이 있는 모양이었지만, 나는 그의 그런 태도 를 모를 척 하고 넘어갔다. “아무튼 덕분에 4계의 음모에 대한 것을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누웬과 암 흑제국의 싸움이 그 음모의 마지막 절정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고 말입니다. 이제 그 절정이 끝났으니 마무리를 해야 하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루탄님이 이 인간계에서는 가장 문제가 되는 분이라는 것은 루탄님도 알고 계시리라 생각을 합니다.” “그래? 그런데 정리라고 했나? 4계에서 정리를 하는데 내가 포함이 될 거라는 이야 기로 들리는 데?” “그렇습니다. 이제 곧 누군가 여기를 방문하겠지요. 저 같은 경우는 인간계에 남아 서 활동을 하는 데에 8써클부터의 마법에 제약을 받은 것으로 끝이 났지만 루탄님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글쎄, 그럴까? 나는 그들이 나를 굳이 건드리지는 않을 것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내가 이제 더 이상 인간들과 어울리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테니 말 이다. 아닐까? 허긴 그것도 모를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아마도 넥스 영지의 결계가 루탄님께 관건이 될 것 같습니다. 어쩌면 넥스 영지 안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루탄님을 봉인하려 들지도 모르지만, 어쩌 면 최소한의 인원만을 봉인할지도 모르지요. 넥스 영지에는 거의 4만에 가까운 사람들 이 있으니 그들 전부를 루탄님 때문에 인간계와 단절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볼지 도 모르니까 말입니다.” 나는 일데퐁소의 이 말에 꽤나 충격을 받았다. 그러고 보면 처음에 넥스 영지에 결계를 칠 때와는 또 달라진 상황에서 그 많은 사람 들의 자유를 박탈할 자격이 나에게 있는가하는 질문이 나의 머리를 스친 까닭이었다.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한 스스로의 인생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원하지 않아서 넥스 영지를 벗어나지 않은 것은 그들의 자유일지 모르지만 결계 때문 에 후손들까지 자유를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잘못이었다. 그렇게 생각을 한다면 루아나 타니, 그리고 가족들만을 데리고 따로 살아간다고 하더 라도 그들에게 자유를 주지 않는다면 그것도 옳지 않았다. 그럼 결국에는 내가 4계로부터 받을 제약에 한정을 두어야 했다. 그저 결계 속으로 들어가서 남은 생을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그것이 타니와 그 후대에 이르도록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넥스 영지 안의 사람들도 문제였지만, 타니가 특히 문제였다. 녀석이 자라서 성인이 되면 장가도 가야 하는데.... 나는 복잡해진 머리를 흔들며 일데퐁소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이제는 내가 넥스 영지의 결계를 깨고 들어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영지로 들어가야 하고, 또 가족들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 니었지만, 그로 인해서 타니와 루아 그리고 동생들과 지토가 나와함께 제약을 받아야 한다면 그것도 옳은 일은 아니었다. 나는 다시 집 안에 틀어박혀 칩거에 들어갔다. 아니 나는 조용히 4계의 사자가 나를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4계의 사자들과 거래를 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봄이 깊어 드디어 내 집 앞까지 붉은 꽃들이 피기 시작할 때, 드디어 내가 기다리던 손님이 집안으로 찾아 들었다. “오래 기다리게 만드는군.” 나는 내 앞에 자리 잡고 양반다리로 앉은 녀석을 쳐다보았다. “좋은 인연이 아니었나보군. 우린 말이야.” “그렇지, 난 처음부터 네가 마음에 별로 안 들었거든.” “그런가? 난 정말 자네가 마음에 들었는데 말이야.” “아무튼 뭐라고 불러 줄까? 실피드? 아니면 로드릴?” “뭐 실피드라는 이름으로 반말을 듣는 것은 존재의 무게에도 치명적이니까 로드릴 로 불러.” “그러지, 로드릴. 그런데 나가 원하는 것을 들어줄 수 있나? 다른 계의 간섭을 받 지 않는가 하는 말이야.” 나는 로드릴에게 물었다. 나는 녀석과 줄다리기를 해서 좋은 조건을 얻어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봐, 루탄.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넌 나와 흥정이나 거래를 할 수 없어. 내가 내어 놓는 조건을 듣고 하나를 택하면 되는 거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 솔직 히 가장 편한 것은 너를 소멸시키는 것이니까 말이야. 그 쪽이 아무래도 편하거든. 신 경을 쓸 일도 없고 말이야. 하지만 역시 인간들의 문제에 깊이 개입하는 것을 자제하 라는 분위기여서 지금 너에게 몇 가지 방법을 제시할 거야. 그러니까 그 중에 하나를 선택해.” 순간 나는 울컥하는 기분을 간신히 달래야 했다. 울컥해서 덤비다가 죽으면 나만 손해인 것이다. 왜? 한 번 싸워보라고? 웃기는 말이다. 솔직히 여기 눈앞에 있는 로드릴이 바람의 정 령왕의 실체도 아니거니와 실체라고 하더라도 내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 리석은 일이다. 인간인 나와 신적인 존재와의 차이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는 것이 다. 조금씩 깨달음을 얻다보면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된다. 호랑이 무서운 줄 모르 던 하룻강아지가 조금 크면 호랑이를 무서워하게 되는 이치라고 할까. “좋아, 좋아. 그래도 말이 통하니 다행이군. 그럼 잘 듣고 어떤 것을 택할지를 결정 해라.” 나는 묵묵히 입을 다물고 녀석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고 보면 처음에 유소와 쉬벡 등과 함께 정령들이 만든 세상에 갔을 때, 눈앞에 나타났던 녀석도 바로 이 녀석이었지. 그 때는 이름도 모르고 그저 바람의 정령왕이라 고만 했었는데.... 정말 악운이로군.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다고 했던 녀석의 말은 그 때를 말한 것이었나? 내가 이런 쓸데 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에 녀석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먼저 가장 쉬운 방법은 네가 저 결계 안으로 들어가서 조용하게 사는 거야. 좀 좁 은 세상이기는 하지만 적당히 조율하고 산다면 괜찮을 것 같지 않나?” 뭐 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이 바로 이 방법이었으니 나쁠 것도 없군. “단지 그 경우에 영원히 그 결계의 범위를 벗어날 수는 없을 거야. 우린 아예 인간 계에서 그 공간을 분리시킬 생각이니까 말이야.” 또 다른 세상이 만들어지는군. 넥스 영지의 크기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문제는 단순해진다는 것이겠지. 너무도 단순하다. 나무도 꽃도 동물도, 사람들도... 아마도 발전이란 의미가 없겠지. 더 나은 것을 만들고 개척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잊 어 가겠지. “그 다음 방법은 너와 네가 원하는 몇을 봉인하는 방법이다. 그리 큰 범위는 필요 가 없겠지. 그래도 원한다면 넥스 영지 전체를 줄 수도 있다.” 루아와 타니, 그리고 동생들과 지토를 이야기하는 것이겠지만 그것은 첫 번째 보다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다. 겨우 영지 안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나와 내 가족들을 희 생시키라는 말과 같으니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루탄 너만 봉인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결계 안의 세상 을 너에게 주지.” 결국 이것도 저것도 중요한 것은 내가 인간계에서 분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네? “그럼 제란과 우제푸는 어떻게 하기로 했나? 그들도 만만찮은 녀석들일 텐데?” “아! 그거? 우제푸는 작은 탑을 하나 만들어서 은퇴를 하기로 했지만 솔직히 수명 이 얼마 남지 않아서 신경을 쓸 일도 별로 없고, 제란은 인간계에 마갑주들이 모두 없 어졌기 때문에 상당한 힘을 잃게 되었거든. 그러니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거 야.” “마갑주가 사라지다니?” “응? 몰랐나? 이제 인간계에는 마수도, 환수도, 정령도 남지 않아. 물론 사제들도 없지. 아니 사제는 있지만 신성력을 쓸 수 있는 존재는 없다는 말이야. 사이비들이 지. 물론 기충이라고 불렀나? 그것 역시 마수의 일종이니 남아나지 않겠지.” 그건 이해가 가는 일이다. 이젠 정말로 인간들만의 순수한 능력으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겠군. “참, 한 가지 더. 아마도 한꺼번에는 아니겠지만 심법도 상당히 약화될 거야. 마법 이 약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지. 세대를 흘러가면서 점차 사라지는 것이지. 아마도 앞 으로 600년 정도는 그런 추세를 지켜 나갈 거야.” “왜지? 인간들이 발전하기를 원하지 않는가?” “그거야 인간들은 혹독한 환경에서 더더욱 생존의욕을 불태우기 때문이지. 삶이 쉬 워지면 나태해지거든. 하하하.” 그래 웃어라. 웃어. “결국에는 나만 봉인이 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된다는 말이군.” “그렇지. 그리고 솔직히 우리는 네가 어떤 선택을 할지도 이미 알고 있어. 너야 믿 을 수 없을지 몰라도 말이야.” 뭐 그럴 수도 있겠지. 내가 너희들의 능력을 모두 아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자, 이제 결정을 해야 할 때가 온 것 같군. 어떤 결정일까. 하하하. 이미 알고 있 지만 그래도 확인은 해야겠지?” “빌어먹을 놈.” “이봐, 이봐. 아무리 그래도 그런 막말을 하면 되나?” “이미 알고 있을 테니 내가 원하는 것도 알겠지? 그 정도는 들어줄 수 있겠지?” “그야 물론이지.” 역시 선선히 내 말을 들어주는군. 이미 선택은 끝이 난 것이고, 결과만 남은 것이겠군. “하지만 시간은 많지 않다.” 로드릴 녀석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넥스 영지로 들어가는 결계의 문이 열렸다. 등 뒤로 결계의 문이 닫혔다. 오랜만에 돌아온 넥스 영지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봄의 생동감이 넘치는 들판과 부지런히 몸을 놀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넘쳐왔다. 내가 들어온 곳은 멀리 넥스 영지의 영주가 머무는 저택이 바라보이고, 반대쪽으로 는 루아와 산책을 즐기던 숲이 보이는 언덕. 바로 나와 동생들이 머물던 옛 집의 평상 앞이었다. 조금 떨어져서 나와 루아의 보금자리가 보였다. 결혼식을 앞두고 화아와 지토가 열심히 만들었던 바로 그 집이었다. 동생들과 지토의 집이 되어 버린 옛 집의 마당에는 올해도 누군가 낮은 울타리를 돌 아가며 무언가 심어 놓은 모양이었다. 어느 것은 벌써 줄기를 뻗어 앙증맞은 손길로 울타리를 감고 오르기 시작하는 녀석 도 있었다. 내가 없으면 이렇게 심고 가꿀 사람도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래도 이렇게 살가운 모습으로 잘들 지내고 있었던 모양이라고 마음속에서 반가운 마음이 일었다. 집 안에는 아무도 없는 모양인지 고요했다. 거의 정오를 지나가는 시간이지만 나는 그들이 어디에 가 있을지를 짐작할 수가 없었 다. 설마 기사단을 데리고 훈련을 하고 있지는 않을 것 같고, 그렇다면 무얼하고 있을까? 언젠가 일년 가까이 지하실에서 두문불출 하다가 나왔을 때처럼 가족들을 찾아보기 로 했다. 하지만 그 때처럼 몸을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천천히 울타리의 문을 열고 걸음을 옮겼다. 먼저 넥스 영주의 저택으로 가 보기로 했다. 넥스 트리언 영주나 제레이나가 있으면 가족들의 소식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루아와 풍아 수아는 제레이나와 수다를 떨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언덕을 내려가 마을의 외각을 지나서 저택을 향해 가는 동안에 마을 사람들이 간혹 나를 보면서 놀란 표정을 짓고 멍한 자세를 하고 있기는 했지만, 다행히 나를 붙들고 이것 저것 물어보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무사히 넥스 영지의 저택으로 갈 수 있었다. 문제라면 뒤를 따라오는 주민들이 제법 된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겠지만 말이다. 아마도 그들은 영주의 저택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고나면 무슨 일인가 하는 마음에 서성이다 돌아 갈 것이었다. 경비병 하나도 없는 영주의 저택에 대문도 닫혀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아무 제지 도 받지 않고 저택의 현관앞에 설 수 있었다. 주민들은 대문 안으로 따라오지는 않았다. 쿵!쿵!쿵! 제법 두꺼운 원목이어서 무거운 소리를 내는 문이었다. 잠시 기다리자 안에서 인기척이 나며 문이 열렸다. 그리고 놀란 표정의 크라이안의 모습이 보였다. “반갑습니다. 크라이안 집사님.” “어서 오십시오. 루탄님. 무사히 돌아오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일단 좀 들어오시지 요.” “아닙니다. 집사님. 그저 루아와 가족들이 어디에 있는지 좀 알려 주시면 고맙겠습 니다.” 내 말에 크라이안은 잔잔한 웃음을 짓고는 대답했다. “그렇군요. 가족들을 먼저 뵙고 싶겠군요. 그 분들은 지금 동쪽 들판에서 땅을 갈 고 계십니다. 얼마 전에 농사를 지을 땅을 만드셨지요. 이제는 군대도 필요가 없고, 기사도 필요가 없으니 농부가 되는 것이 좋겠다면서 말입니다.” 동쪽 벌판이라. “구체적으로 어디쯤인지 알려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거야...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리고 크라이안은 안으로 들어가서 길리온을 데리고 나왔다. 길리온도 나를 보고는 무척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크라이안이 내 안내를 맡기자 웃으 면서 저택의 대문을 향했다. 나는 크라이안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는 길리온의 뒤를 따라갔다. 저택에서 눈에 들어오지 않는 곳이라 제법 거리가 있을 텐데도 말을 타지 않고 앞서 서 부지런히 걸어가는 길리온의 뒤를 따라 산책하는 기분으로 한 참을 걸었다. 길 양쪽으로는 가지런히 정리된 농경지에 이미 파종이 끝난 밭이랑들이 끝없이 펼쳐 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 사이에 몇몇의 사람들이 아직 뚜렷이 구별도 가지 않을 잡초를 뽑거 나, 밭이랑 사이의 굴곡을 정리해서 물고를 내거나, 벌써부터 입맛을 다시며 농작물 을 노리는 작은 동물들을 잡기 위해 덫을 놓거나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는 동안 완만하게 휘어 돌아가며 경사가 졌는지 모습을 감추는 길을 따라 함께 모습을 감추곤 하는 길리온의 뒤를 따라가던 나는 드디어 가족들의 모습을 찾을 수 있 었다.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넓게 펼쳐진 밭에서 곡괭이와 삽, 호미를 들고 혹은 서고 혹 은 쪼그려 앉아서 김매기를 하는 나의 가족들. 한참 뒤쪽에는 넓은 자리를 깔고 타니와 빈체가 어울려 있었고 그런 아이들을 지토 가 돌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자이곱과 화아는 곡괭이를 들고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아직 일구지 못한 땅을 파고 있었다. 이미 파종을 마친 곳에 쪼그려 앉아 김을 매는 루아와 풍아, 수아. 그 곁에서 광아는 삽을 들고 밭이랑의 고랑을 다듬고 있었다. 얼굴이 햇빛에 많이 탔지만 애처롭기 보다는 건강해 보여서 좋았다. 나는 그런 가족들의 모습이 보이는 순간부터 길을 멈추고 가슴속에서 일어나는 감동 에 젖어 있었다. 지금 대지를 비추는 태양빛이 아무리 밝게 빛나고 하늘이 맑고 푸르다고 해도 내 가 슴에서 일어나는 이 잔잔하지만 막을 수 없는 기쁨과 환희에 비길 수 있을까. 저기 길리온의 모습에 고개를 들다가 돌아선 길리언의 시선을 따라 나를 발견하고 굳 어버린 듯 서 있는 저 여인과, 동생들과 지토, 자이곱의 표정보다 더 좋은 것이 내 생 에 있었을까? 아니 저렇게 밭이랑의 굴곡을 위험스럽게 종종거리며 달려오는 타니의 손짓처럼 나 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또 있을까. 나는 나를 향해서 달려오는 타니의 건강한 얼굴과 웃음과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에 서 하얗게 빛나는 타니의 작은 이빨들에 감동하며 마주 달렸다. 그 사이에 불쑥 커 버린 타니가 가족들과 나 사이의 시간을 알려주고 있었다. “압빠! 압빠! 아빠야~!” 그래, 그래 이녀석아 내가 니 아빠다. 내가 너의 아빠야. 못난이 아빠. “아빠야~ 우아앙~” 타니는 겨우 제 어미를 몇 발자국도 지나지 못하고 내 품에 안겼다. 그리고는 무에 그리 서러울 것이 많은지 눈물을 펑펑 쏟으며 가슴에 얼굴을 부비고 내 머리카락을 앙증맞은 손으로 잡아 당겼다. “그래, 그래. 착하지? 우리타니. 잘 있었지? 엄마랑 삼촌, 고모, 아저씨, 할아버지 말씀 잘 듣고? 어디 아픈데 없었니? 타니, 우리 타니야.” “우아앙~ 압빠. 아빠. 흐극.” 결국에는 딸국질까지 하는 아들의 모습이 가슴을 저리게 한다. 이 어린 것이 그동안에 아비라고 내 얼굴을 잊지 않고 기억해 준 것이 고맙고, 이렇 게 만난 것을 기뻐 해 주는 것이 고마워서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젖어들고 있었다. 아직 두 돌도 되지 않은 녀석이 그리움을 알면 얼마나 알고, 아비라고 있는 나를 알 면 얼마나 알았을까. 내심 그 사이에 이 녀석이 나를 잊지나 않을까 무던히도 마음을 졸였건만, 타니는 내 품에서 얼굴도 들지 못하고 울고 있다. 나는 그런 타니를 가슴에 안아 들고,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아내와 동생들과 친구를 돌아보았다. 그 동안에 걱정이 많았는지 모두들 눈에 눈물을 담고 있었다. 또 한 번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나는 모두에게 눈 인사를 해 주고 풍아와 수아, 루아를 한 번씩 한쪽 어깨로 안아 주 었다. “나, 조금 늦었지? 미안해. 미안하다.” 누구에게 특별히 가려서 할 말도 아니었다. 그저 모두에게 해야 할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가족들을 둘러 보다가 타니가 앉아있던 자리에 불안한 표정으로 서있는 빈체를 보았다. 5살이 된 녀석은 벌써부터 기골이 남다르게 보였다. 자이건을 닮아 무장으로서는 타고난 체질로 보였다. 아니 아비보다 나았다. 하지만 지금 나이에 비해 커다란 몸집의 아이는 불안한 표정으로 나와 내가 걸어온 길을 천천히 번갈아 보고 있었다. 아마도 제 부모를 찾는 것일 것이다. 자이건과 아세트. 나는 모질게 마음을 먹고 빈체에게서 고개를 돌리다가 다시 시선을 줄 수밖에 없었 다. 어리디 어린 이 녀석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제기랄. 나는 천천히 빈체가 있는 자리로 걸어가 허리를 숙이고 빈체와 눈을 맞추었다. 제법 의젓하게 보이려고 애쓰고 있지만 눈동자가 떨리는 것이 가엾어진다. “빈체야 너도 잘 있었니? 아저씨가 누군지 알겠니?” “네, 알아요. 루탄아저씨.” “그래, 그런데 아저씨가 빈체에게 나쁜 소식을 가지고 왔단다. 좋지 못한 소식이 지.”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말해도 되요.” 빈체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진다. 그런데도 이정도로 꿋꿋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 니 대견스럽다. “자, 울지 말고 아저씨 말을 잘 들어라. 오늘은 아저씨가 혼자만 여기 올 수 있었단 다. 너도 알고 있지? 우리가 여기서 나가는 것도, 또 다른 사람이 밖에서 들어오는 것 도 어렵다는 것 말이다.” “네, 알아요. 밖에는 나쁜 사람들이 많아서 아저씨가 모두를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사람들이 그랬어요.” “그래, 그래서 밖에 있는 빈체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단다. 이 아저씨도 겨우 겨우 들어왔거든. 미안하구나.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데려오지 못해 서.” 실상 내가 그들에게 함께 가자고 했으면 왔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이 오려고 했을까? “흑, 괜찮아요. 전에 아빠가 다시는 보지 못한다고 해도 울면 안된다고 했어요. 저 는 나중에 타니의 기사가 되어야 한다고요. 전 아빠 말을 들어야 해요.” 타니의 기사라. 그게 무슨 말인지 알고 하는 말일까? “그래, 그래. 울면 안 되지. 하지만 빈체야 아저씨가 약속을 하마, 시간이 좀 많이 걸리기는 하겠지만 꼭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날 수 있도록 해 주마. 알았지? 약속하 마.” “정말이요? 정말이지요?” 그게 사실이 될지 아닐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지만, 나로서도 빈체의 상심을 달래주 지 않을 수는 없었다. 저렇게 표정이 밝아지는 아이의 얼굴을 보면 내가 잘못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 다. “자, 이러지 말고 우리 점심을 먹어요. 당신 한 사람이 더 낀다고 해서 모자라지는 않을 거예요. 언제나 넉넉하게 가지고 오니까 말이죠.” “그거야 당연하지. 화아 오빠나 자이곱, 지토 할아버지가 좀 많이 먹어야 말이지.” “호호호. 그건 그래.” “뭐야? 내가 언제 그렇게 많이 먹었다는 거야? 그건 전부 할아범과 자이곱이 먹는 거란 말이야.” “이런 젊은 놈이 늙은이 핑계를 대다니...” “....” 이렇게 순식간의 분위기가 바뀌고, 우리들은 넓은 벌판에 깔아놓은 네모난 자리에 둘 러 앉아 점심 식사를 시작했다. 바람은 잔잔했고, 태양은 따사로웠으며, 대지는 은혜로웠고, 멀리 아지랑이는 명랑했 다. 내 가족들은 모두들 그렇게 잔잔하고 따사로우며 은혜롭고 명랑했다. 이 순간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 가슴속에 넘치는 많은 말들은 식사 중에도 끊임없이 눈맞춤을 하는 사이에 조금 조금 씩 전해지고, 전해져 왔다. 식사가 끝나고 나는 가족들과 함께 호미질을 하고, 삽질을 하고, 곡괭이질을 했으 며, 타니에게 목마를 태워주고, 빈체와 흙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해가 하루의 일과가 끝났음을 알리며 붉게 하늘을 물들이는 시간에 타니를 어 깨위에 태우고 석양을 향해 걸었다. 곁에는 내 아내가 팔짱을 끼고 있었고, 수아와 풍아는 바구니 하나씩을 끼고 한 걸 음 뒤에서 쳐져 따라왔다. 하지만 곧 무슨 꿍꿍이인지, 나와 루아, 타니만을 남기고 그들은 먼저 가서 할 일이 있다면서 자리를 떴다. 그런 모습에 루아마저도 의아한 표정을 짓는 것으로 보아서 예정에 없던 일임에는 분 명했다. 나는 다만 나와 루아에게 시간을 주려는 배려라는 생각에 녀석들이 고맙게 여겨졌다. “어쩐 일이에요? 당신이 타니를 그렇게 어깨위에 올려서 데리고 가다니 말이에요. 예전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 아니었어요?” 루아가 여전히 앞을 보는 모습으로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물어왔다. “특별한 날도 있는 거니까. 매일은 아니어도 이런 날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 내가 타니를 사랑한다는 것을 타니에게 알려 주고 싶으니까 말이야.” “그래요? 그렇기도 하겠네요. 당신은 그런 면에서는 조금 엄격한 아버지였으니까 말 이죠.” “그랬지. 그랬을 거야.” 나는 어깨 위의 타니를 조심하며 반대편 손으로 루아의 머리를 스다듬어 주었다. “압빠.” 놀래라. 녀석. “그래, 왜?” “아빠, 이제 안가?” “응? 으응! 이제 아빠 어디 안가고 타니랑 함께 있을 거야.” “으응. 그렇구나. 꺄르르.” 녀석 그게 그렇게 좋은가? “타니도 많이 컸네? 이제 겨우 두 살도 안 된 녀석이 제법 말도 잘 하고 말이야.”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조금 빠른 편이지만 그렇게 특출난 것은 아니니까 너무 팔불 출 같은 생각은 하지 마세요.” 루아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하는 말이다. “그, 그런가? 내가 아이들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어야 말이지.” “호호호.” 내 표정이 그렇게 웃긴 표정이었나? 뭐 이렇든 저렇든 상관은 없는 일이다. 저기 멀리 우리집이 보인다. 우리집. 나와 내 가족들이 사는 집이 보인다. -세월歲月은 유수流水라.- “아빠, 아빠! 다녀왔습니다.” “응? 그래. 녀석. 뭐가 그렇게 바쁘다고 서두르는 게냐?” “벌써 점심시간이 지났다구요. 우걱우걱. 켁. 꿀꺽꿀꺽.” “좀 천천히 먹어라. 그러다가 체하겠다. 저런저런 여기 물 더 있다.” “빨리 가야 해요. 지토 할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그래, 타니야. 그럼 새벽이나 되어야 돌아오겠구나? 지토랑은 새벽까지 함께 있어 야 할 테니 말이다.” “네, 모루정 아저씨가 많이 도와주지만 아직은 서툴러서 지토 할아버지가 요구하는 걸 다 만들려면 아직 시간이 오래 걸려요.” “그래, 그래도 대충 만드는 것은 안 된다. 알지?” “그럼요. 당연하지요. 그럼 저 갔다 올게요.” “그래, 그래.” 우당탕탕. 이런 이런 정신이 없군. 녀석도 참. 그러나 저러나 벌서 시간이 이렇게나 되었다는 말인가? 정오가 넘었다니... 내가 넥스 영지로 돌아온 것이 벌써 10년이 되었다. 여전히 넥스 영지의 사람들은 결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였지만, 그런 것을 문제 삼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물론 넓은 세상을 꿈꾸는 본성을 잃은 것은 아니겠지만 아직은 넥스 영지가 좁다는 것에 불만을 늘어놓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런 것이 인간들이다. 처음에는 죽음을 피해 넥스영지로 들어왔지만 지금은 그 죽음의 공포 보다는 바깥 세 상에 대한 그리움과 호기심이 더 클 것이다. 인간들은 쉽게 잊는다. 그리고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다. 아마도 사람들은 내가 그들을 넥스 영지에 가두어 두었다고 생각할 것이고, 그들을 벗어나게 해 줄 수 있으면서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그런 마음들을 먹게 되면 나와 내 가족들에 대해서도 적개심을 가질지도 모르 고 말이다. 쉽게 잊는 인간들. 물론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 한 가지의 은혜를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가 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까지 사람들이 나에게 보여준 보편적인 모습은 그런 것이었다. “어머, 여보 왜 여기까지 나와 있어요?” “응? 그냥 오랜만에 햇빛이나 좀 쏘일까 하고 나왔어.” “네. 그러고 보니 당신 밖으로 나오지 않은 것도 제법 된 것 같네요. 지난겨울에는 거의 집 안에만 있었잖아요.” “그래. 오랜만에 나오니 좋군.” “네, 이렇게 당신 어깨에 기대는 것도 오랜만이네요.” “그런가? 내가 남편 노릇을 많이 못했군.” “호호, 그걸 이제 알았단 말예요?” “읔, 꼬집지 말아. 당신 손이 얼마나 매운데....” “아프라고 꼬집는 거지....” “읔. 같은 자리를....” 모든 것들이 잠들어 있는 시간, 루아의 고른 숨소리가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가운 데,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슬며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오랜만에 몸 주위로 마나를 모으고 마법을 실행시켰다. 순간이동. 오늘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가고자 했던 곳에 어렵지 않게 도착했다. 넥스 영지의 결계의 중심. 오직 나만이 알고 있는 장소였다. “이봐, 오랜만이야.” - 오랜만은 무슨, 100년 정도 걸릴 것 같더니 어째 벌써 왔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지.” - 어쩌다보니가 아니라. 필연이겠지. 거기다가 나와의 약속도 지키지 못하게 된 것 같은데? 약속이라? 그래 이 녀석과 함께 여행을 다니기로 했었지. “이미 알고 있는 건가? 궁금하군. 어떻게 알고 있는지 말이야.” - 내가 아무리 이런 상태라고 해도, 이 세계의 균형을 유지하던 존재다. 한 곳에 뿌 리 박고 있으면서 세상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어 야 한다는 생각은 못하나? 그런 내가 비록 힘을 잃었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중요한 일 들도 모르리라고 생각하나? “그럼 그 전에 내가 그런 것들에 대해서 물었다면 대답을 해 주었을까?” - 물론 아니지. 지금이야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없지만, 예전 에는 상당히 많은 파란이 생겼을 것이니 내가 이야기를 해 주었을 리가 없지. “그렇겠군.” - 그래, 이제는 결계를 풀기로 마음을 먹었나? “그래, 그걸 위해서 내려온 것이니까.” - 그렇겠지. “그런데 넌 어떻게 할 거지? 이제 내가 돌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너를 맡길 수도 없잖아.” - 걱정하지 말아. 내가 힘을 쓰지 않는다면 몇 천 년도 버틸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새로운 인연을 만나겠지. “그럼 너를 어디에 두면 좋을까? 원하는 곳이 있다면 이야기 해봐.” - 그냥 여기에 둬라. 때가 되면 내가 알아서 움직일 테니 말이야. “그러지 그럼. 그럼 부탁을 한 가지만 하지. 앞으로 100일 정도 후에 결계가 완전 히 풀어지도록 해 줘. 그 정도 조정은 할 수 있겠지?” - 그러지. 별로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니까. “고맙군. 이제 인연이 끝나기는 하지만 정말 중요한 인연이었다 너는.” - 중요하다는 말에는 좋은, 혹은 나쁜의 의미는 없는 것 같군. 될 수 있으면 좋은 인 연으로 기억이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이만. 부탁한다.” - 잘 가라. 수많은 기호들의 중심에서 지심목 검은 잠시 희미한 빛을 내며 그렇게 인사를 하고 는 침묵 속에 잠겼다.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반구형의 결계 중심을 둘러보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100일이면 넥스 영지는 다시 인간들의 세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모두들 모였구나. 타니도.” 나는 내 침대 주위에 둥글게 모여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솔직히 이제는 힘도 없었다. 가야 할 때가 되었다고 할까. 욕심이야 끝까지 가족들과 함께 있고 싶었지만 웃기는 신이라는 족속들이 나를 그들 의 톱니바퀴 속에 넣어버렸다. 운명을 개척하고 미래를 내 의지로 열어갈 여지를 줄여놓은 것이다. 수명을 내 임의로 어떻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9써클 마스터에, 내공도 엄청나게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이 하나 둘 허무하게 풀려나 가기 시작한 것은 내가 넥스 영지로 다시 돌아온 10년 전부터였다. 그러면서 내 몸 속에 있던 생명력까지 몸에서 슬슬슬 빠져나가기 시작했었다. 얼마전처럼 무리해서 마법을 쓰거나 내공을 쓰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것은 더 빠르게 내 몸을 갉아먹는 짓이었다. 그래서 지금껏 잘도 버텨왔다 싶었는데, 역시 나에게 준 시간이 그렇게 길지 않으리 란 로드릴의 말이 맞는 모양이었다. 이제 타니의 나이도 12살이 되었다. 아직은 어리고 약한 녀석이었지만 그래도 가르친 보람이 있어서 굳은 아이로 자랐다. 마법에도 소질이 있었지만 타니는 겨우 3써클을 배웠을 뿐이었고, 오행심법도 배웠지 만 성취는 그리 높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모루정과 지토에게 배운 대장장이 기술이 앞으로 녀석의 갈 길이 될 것이었다. 나는 타니가 마법사가 되는 것도, 검사가 되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농부가 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녀석은 대장장이가 되고 싶은 모 양이었다. 허긴, 삼촌들과 고모들이 타니를 가만두지 않을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가 원하 는 것을 아는 녀석들이니 타니를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잘 인도해 줄 것이라고 믿었 다. 그래서 내가 타니에게 가르친 것은 알맹이가 빠진 심법이었고, 높지 않은 써클의 마 법이었다. 힘은 넘치게 가지는 것이 불행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내가 깨달은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감당하지 못하는 힘은 도리어 화가 되어 내게 소중한 것들을 빼앗아간다는 것을 지 난 시간들 속에서 절실히 알았으니 타니에게 그것을 전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때가 되었다. 너희도 알겠지?” 그래, 슬픔이 넘치는구나. 나는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천천히 돌아가며 보았고, 그 눈동자를 가슴에 차곡차 곡 쌓았다. 타니와 빈체는 어렸다. 그래서 그 슬픔을 감당하지 못하고 눈동자가 가엾게 흔들리 고 있었다. 루아와 지토, 그리고 동생들과 자이곱, 넥스 트리언 영주. 이들은 살아온 세월의 무게만큼 굳은 마음을 지녔기에 눈물이 흐르는 얼굴에 미소를 지으려 애쓰고 있었다. “사람이 태어나면 죽는 것은 당연하잖아. 거기다가 우리들이 살아가는 시대에 죽음 이란 너무 흔한 것이었잖아. 아! 나는 상상도 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죽음을 보았 지. 그리고 우리들은 모두 손에 많은 피를 묻혔다. 그것이 정의를 위해서든 개인의 이 익을 위해서든 어떤 것도 정당화 될 수 없는 것이었지. 그런 내가 이제 죽는다고 특별 할 것이야 있을까. 이별이 조금 슬프기는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공평해서 우리들이 서 로를 아끼고 위하며 사랑하는 행복이 컸기 때문에 지금 이별이 이렇게 슬픈 것이잖 아. 지난날 그렇게 행복했으면 지금 조금 슬픈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대신 내 가 가고 나서 남는 추억은 오늘같이 내가 죽는 시간이 아니라 나와 함께 있었던 지난 시간들이어서 추억이 남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이어주었으면 좋겠어. 없다고 슬퍼하지 말고 있었던 것이 행복하다고 행각해 주면 좋겠어. 우리 이미 준비를 해 왔잖아. 그렇 게 눈물을 흘리니까 내 마음도 아프군. 자, 생각을 해 봐. 나와 있어 행복했던 시간들 을... 나는... 모두들 함께 있어서 언제나 행복했거든. 타니와 이루비아와 화아, 풍 아, 광아, 수아, 지토. 자이곱, 그리고 모두들...” 나는 자꾸만 눈이 감기는 것을 느꼈다. 잠이 드는 것일까. “잠시만 쉬었다가 다시 이야기를 하자. 너무 졸리거든.” 그렇게 겨우 이야기를 한 나는 잠이 들었다. 그리고 꿈처럼 지난날들이 파노라마를 이루며 나타났다. 어느 그림은 빠르게 어느 그림은 느리게 흘러갔지만 너무도 뚜렷이 그동안 잊고 있었 던 기억까지 되살아나는 그 영상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나쁘지는 않았어. 그렇지?’ 나는 누구에게 묻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어느새 태어나 처음으로 내가 나를 살펴보는 기이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가족들과 친인들이 내 침대를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는 내가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내가 나와 가족들에게서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멀 어지는 속도가 빨라지고 한 순간 나와 내 몸을 이어주던 끈이 끊어졌다는 느낌을 받으 면서 세상은 까맣게 변하고 말았다. 어디선가 타니의 울음소리와 절규가 들려오는 것 같다. 이루비아의 목소리도... 동생들과 지토도.... 하지만 곧 모든 소리들이 끊어지고 나는 아무 것도 없는 공간에 있었다. 나는 그렇게 죽음의 공간속에 들어섰다. 땡깡-! 땡깡-! 땡깡-! 열기가 넘치고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한 이 곳은 넥스 영지의 대장간이었다. 아침부터 정오가 되어가는 지금까지 망치질 소리는 그치지 않았고 그것은 대장간이 이곳에 세워진 이후로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이 대장간의 화로에서 불이 죽는 경우는 없었다. 대장간은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작업장 지붕으로 올린 기와의 모습이 특이했고, 땅에 서 지붕까지의 중간 정도까지만 쌓아 올린 벽을 벽돌로 만들어 쌓아 놓아 주위에 있 는 다른 대장간들 보다 품위가 있어 보이는 모양이었다. 비록 열기에 타고, 연기에 절어 튀튀한 느낌을 주기는 했지만 제법 잘 만들어진 건물 이라는 것을 눈썰미가 있는 사람들은 곧잘 알아보곤 하는 곳이었다.. 겨우 나무판이나 흙으로 쌓아올린 벽과 지붕으로 만들어진 주위의 대장간에 비할 수 없을 정성과 노력과 기술이 필요한 건물이라는 것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 었다. 물론 이 대장간의 주인이 지닌 솜씨가 더더욱 중요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지금 대장간 안에서 쇠를 두드리고 있는 사람의 이름은 타니 최 한국. 루탄 최 한국의 단 하나 뿐인 아들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바랐던 대로 대장간을 하면서 나름의 행복을 일구고 있었다. 벌써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 14년이 되었다. 아니 내일이면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14년이 되는 날이었다. 때문에 오늘은 밀린 일거리를 빨리 마무리 하고 오후에는 집으로 가 있어야 했다. 삼촌들과 고모, 할아버지가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땡깡! 땡깡! 사뭇 강렬한 열기를 뿜어내는 화덕에서 달구어진 쇳덩이를 끄집어 내어서는 크고 작 은 망치를 번갈아 사용하며 모양을 잡아가고 때로는 물속에 담금질을 하는 모습이 영 락없는 대장장이였지만 타니는 건장하다는 말을 들을 모습이지 무식하다는 느낌이 올 정도로 우락부락한 몸을 가지지는 않았다. 유전 때문인지 그는 아버지처럼 선이 가는 몸을 가졌던 것이다. 물론 직업이 직업이 다보니 몸에 어느 정도의 근육이 붙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그것도 눈에 거슬릴 정도로 생기지는 않았다. 망치를 두드리던 타니는 집게로 잡고 있던 쇳조각을 다시 물에 살짝 담았다 빼면서 열기를 식히고 강도를 강하게 만들기를 반복하다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었다는 생각 을 했던지 아침부터 만들어 온 물건들이 있는 곳에 가지런히 내려놓고는 서글서글한 갈색 눈을 들어 대장간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젠 집으로 가 봐야겠는 걸? 어머니께서 많이 기다리실 텐데.” 혼잣말을 하듯이 중얼거린 타니는 자신의 대장간에서 기술을 배우는 일꾼 둘에게 마 무리 정리를 하고 쉬라고 하고는 대장간 뒤에 만들어진 우물로 가서 물을 한 동이 뒤 집어쓰고는 몸에 묻은 물기를 대충 닦아내고 작게 만들어진 탈의실에서 젖은 옷을 모 두 벗어 갈아입고는 젖은 옷을 들고 대장간으로 들어와서 대충 자리를 잡아 널어놓았 다. 아마도 몇 시간이 가지 않아서 옷은 바싹 마를 것이다. 타니가 입은 옷은 그다지 비싸거나 귀한 천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가죽으로 만들어진 바지와 천으로 만들어진 티에 가죽조끼를 입은 타니의 모습에서 대장장이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하급 귀족 집안의 도련님 정도로 보았을 것이다. 타니는 대장간을 나서면서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쓴웃음을 지었다. “어머니는 내가 대장장이를 하는 것이 그렇게 못마땅하신 걸까?” 이루비아가 타니의 직업에 대해서 불만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일이 좋은데... 그래도 요즈음은 옷이라도 이렇게 차려 입고 다니 면 조금 구박을 덜 하시니... 예전에는 웃통을 벗고 다니다가 걸려서 사흘은 어머니 의 마음을 풀어드리기 위해서 아양을 떨어야 했으니...” 들리지도 않을 소리로 중얼거린 타니는 곧장 일꾼들의 인사를 받으며 대장간을 나섰 다. 집으로 향하는 길은 그다지 멀지 않았다. 다만 그동안에 마을의 규모가 커지면서 집 이 있는 언덕 쪽으로도 마을의 범위가 넓어져서 타니의 집이 예전처럼 그렇게 마을에 서 멀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달라진 점이라면 달라진 점이었다. 루탄이 죽고나서 오래지 않아 넥스 영지의 결계는 씻은 듯이 없어져 버렸고, 밖으로 의 왕래가 자유로워지면서 자이건황제와 아세트황비가 찾아 왔었다. 그들은 예전의 한타와 신성제국을 아우르는 나라를 건설했고, 누웬과 그란드가 서서 히 몰락하면서 어부지리로 국토를 넓히고 있는 중이었다. 덕분에 당시의 대륙정세는 2강 2약의 모습으로 제편되어 있었고, 자이건의 뒤를 따라 서 빈체가 떠나고 오래지 않아서 선드라스 제국은 대륙에 남은 두 나라 중에 한 나라 가 되었다. 누웬과 그란드가 무너지고 정치 체계가 흩어졌기 때문이었다. 아니 다른 말로는 작은 지역으로 분할되면서 중앙의 힘이 지방에 미치지 못하면서 나 라라고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지역들은 하나하나 선드라스제국과 제란제국의 영향권 아래로 들어갔 고, 그렇게 복속되기를 거부한 사람들은 가족들과 부하들을 이끌고 멀리 멀리 이주의 여행을 떠났다. 세상은 넓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일가를 이끌고 머나먼 지역으로 자신들만의 세상을 개척하기 위 해 떠나는 것이 유행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유행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암흑제국의 아래쪽과 누웬의 서쪽, 그리고 그란드의 동쪽으로 무한 히 넓은 땅이 있으며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라는 소문이 나돌았고, 어떤 경우 에는 그렇게 개척을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오며 그들의 여정이 중요한 정보로 취급되기 도 했다. 그렇게 몇 십 년 동안 사람들은 활발하게 움직였다. 그 동안에 예전 그란드의 몇 배에 해당하는 땅이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개척되었고, 그 땅은 다시 제란이나 자이건의 지배아래로 들어갔다. 그 이후로 선드라스와 제란은 더 이상 서로를 갉아먹는 짓을 하기 보다는 더 넓은 영 토를 개척하고 많은 수의 사람들을 그들의 지배하에 두며, 굳건한 지배체계를 만드는 것에 신경을 썼고, 땅이 사람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서 국력을 높이는 데에 역량 을 집중했다. 그런 일들은 루탄이 넥스 영지에 들어오던 때부터 진행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근 25 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지금 그 변화는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선드라스 제국의 북쪽 끝에 있는 거대한 산맥 때문에 북쪽으 로 개척을 떠나는 사람들은 없다는 것이었고, 덕분에 넥스 영지는 예전처럼 사람들의 이목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었다. 때문에 루탄 사후에 한동안 넥스 영지의 주민들의 수는 급속하게 줄어들었다. 그들은 선드라스 제국에 속하기를 거부하고 새로운 세상을 찾아 떠나기도 했고, 혹 은 자신들의 능력을 펼치기 위해서 세상으로 나가기도 했다. 확실히 5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서 거의 대부분의 젊은 사람들이 넥스 영지를 떠났 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서 다시 사람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넥스 영지에서 살던 사람들이 바깥세상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 적응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 이 첫 이유였고, 다른 한 가지 이유는 넥스 영지가 선드라스 제국의 제국령에 속하면 서도 치외법권지역으로 선포되었기 때문이었다. 자이건은 넥스 영지를 넥스 트리언 백작에게 작위와 함께 영지로 주었고, 영지는 제 국의 지배하에 있지만 어떤 간섭도 받지 않는다는 치외법권을 인정해 주었다. 때문에 제국에서 새로운 삶을 찾아야 할 입장에 있는 사람들의 많은 수가 넥스 영지 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9년 전의 일이었다. 때문에 이제는 넥스 영지에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정착해서 살고 있었고, 그들은 자유 로운 넥스 영지 안에서 루탄이 풀어준 결계를 스스로 만들며 살고 있었다. 그나마 넥스 영지에서 산악지역에서 나는 약초와 분지 안에서 생산되는 포도로 만든 포도주가 인기를 끌면서 특산품이 되어 주민들의 생활이 안정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다 행스러운 일이고, 덕분에 오고가는 상인들과 용병들이 있어서 타니의 대장간에서 만들 어진 물건들이 팔리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타니의 대장간과 주위에 들어선 몇 몇의 대장간에서 만들어진 물건들을 도매로 사서 다른 지역에 파는 상인들이 생기기 도 했다. 이제 넥스 영지의 특산품은 약초와 포도주, 그리고 철광제품으로 대별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철제품의 중심에는 타니가 있었고, 타니의 뒤에는 북동쪽 산맥 자락에 자 리를 잡은 바위정령족의 도움이 있었다. “이봐, 타니. 오늘은 어쩐 일로 이렇게 일찍 나서는 거야?” “그러게, 아직 점심 먹을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복장을 보아하니 오늘 일은 끝 을 낸 모양인데?” “타니, 그냥 가지 말고 이번에는 말 좀 들어봐. 루에나가 너에게 관심이 있는 모양 인데 한 번 만나 보는 건 어때?” “야! 로트,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도 말아 루아나 보다는 내 동생 셀리타가 훨 낳 지. 타니 내 동생 한 번 사귈 생각 없어? 내가 다리는 근사하게 놓아주지. 하하하.” 오늘도 시장을 지나가는 일이 곤혹스러운 타니였다. 요즈음 들어서 부쩍 이렇게 짓궂은 사람들이 늘어난 것 같다. 하긴 얼마 전에 결혼을 한 토니 녀석도 타니 자기 보다는 나이가 세살이나 어렸으니 어쩌면 결혼 시기를 놓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타니는 별로 여자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고모들이나 어머니에 비하면 그다지 눈에 차는 여자들이 없는 것도 어쩌면 그 이유 중에 하나가 아닐까. 하지만 타니는 그렇게 말을 붙이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대꾸를 해 주거나 얼굴 표정으 로라고 반응을 보여 주면서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마을 어귀를 돌아 나서면서 멀지 않은 곳에 자신의 집이 눈에 들어왔다. 넥스 영주의 배려로 그나마 이제는 자기 집 쪽으로는 더 이상 건물들이 들어서지 않 는다. 건물들이 들어서려면 땅고르기를 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타니네 집은 어쩔 수 없이 옮기기 않을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언덕 꼭대기의 집이란 주위의 언덕을 깍아내면 버틸 수가 없으니 말이다. 물론 넥스 트리언 유소 백작이나 그의 아들인 넥스 길리어 유소도 루탄의 가족인 타 니와 이루비아에 대한 배려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언덕 위의 집을 포함한 일정지역 을 타니에게 주려고 했지만 타니는 그저 집을 옮기지 않게만 해 준다면 다른 것은 필 요없다라는 거절을 했었다. 타니는 집이 보이자 조금 더 재촉해서 발을 놀렸다. 낮은 울타리에는 올해도 어머니가 심어놓은 것들이 타고 올라 있었고, 색색의 꽃을 피우거나 아직도 못핀 기지개를 펴려는 엷은 초록의 새순들을 달고 흙을 터는 것들의 모습도 마당 주위를 돌아가고 있었다. 삐그덕! “다녀 왔습니다.” 집안으로 들어서면서 조금 어두워졌고, 짙은 음식 냄새는 응접시를 가득 채우고 있었 다. “그래, 늦지 않았구나. 일단 좀 씻고 옷도 갈아입고 내려오렴.” 부엌에서 이루비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어머니.” 타니는 곧 2층으로 올라갔고, 음식 냄새가 풍겨오는 곳에는 이제 50에 가까운 나이 가 된 이루비아가 앞치마를 두르고 커다란 솥에 들어있는 국을 젓고 있었다. 특별한 힘이나 능력을 가지지 못한 이루비아는 아직도 건강해 보였지만 얼굴에 진 주 름과 머카락에 보이는 백발들이 세월을 이야기 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이루비아는 자신도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만큼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자신은 이미 1000년도 넘게 살아있으니 말이다. 물론 1000년의 시간동안 만들어진 그녀의 정신세계는 너무도 넓고 컸지만 일상의 생 활을 살아가는 데에 그런 것들을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고, 그녀의 아들을 키우는데도 그다지 많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그녀의 남편이 원했던 것이 작고 소박한 삶에서 행복을 누리며 일생을 마치기를 원했 고, 아들 역시 그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런 삶에 합당하게 아이 를 키우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특별한 능력을 타고난 아이도 아니었다. 조금 뛰어나긴 했지만 엄청나게 뛰어난 아이 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저 그 아이가 원하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남편과 도 그렇게 의논을 했었다. 때문에 타니에게 줄 수 있는 힘을 모두 주지도 않았다. 그저 조금 도움을 주었을 뿐 이다. 원하지 않는 힘은 아들을 힘겹고 어렵게 만들 것이기에. 아이의 삼촌과 고모, 할아버지가 보통 인물들도 아니고, 그들이 마음을 먹는다면 타 니는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대행히 그들도 남편의 뜻을 거스르 지 않았다. 도리어 곁에 있어 타니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까봐 조금씩 거리를 주는 그들이었 다. 자꾸만 찾아와서 도움을 청하는 자이건과 아세트, 일데퐁소 등의 모습을 타니에게 자 주 보이는 것이 좋지 않겠다는 생각에 거리를 두었던 것이다. 다행히 별다른 힘을 지니지 않은 타니는 그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들도 타니를 이용해서 무슨 짓을 하려고 하지는 않았고 말이다. 그리고 오늘은 그런 그들이 어김없이 찾아오는 특별한 날이었다. 음식을 준비하는 이루비아의 손길이 더욱 바빠지고 있었다. “호호 우리 왔어. 루아.” “그 동안 잘 있었어?” 현관이 열리는 소리도 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놀란 이루비아가 고개를 돌린 응접실 쪽 에는 풍아와 수아가 나란히 서 있었다. 이제는 이십대 초반 정도의 나이로 보이는 그들은 예전의 모습에서 많이 변해 있었지 만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어머, 언제 왔어요? 오면 기척이라도 내지. 그렇게 놀라게 하면 어떻게 해요?” “미안, 미안. 어차피 이곳으로 오려면 마법으로 와야 하는데, 누구처럼 굳이 마을 밖에서 여기까지 걸어 올 필요는 없잖아?” “그러게 말이야 언니. 그런데 오빠들이랑 지토 아저씨는 아직 안 온거야?” “뭐, 곧 도착을 하겠지. 이렇게 모이는 날이 많은 것도 아니고 일년을 손꼽아 기다 리는 시간인데 늦을 리가 없잖아? 조금이라도 빨리 오려고 난리였을 텐데.” “그렇겠지? 언니나 나나 이루비아랑 타니 보는 오늘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그 치?” “그러게 말이야.” 이들 자매는 루탄이 죽고 나서 얼마 후에 다른 가족들과 함께 타니와 이루비아의 곁 을 떠나서 자리를 잡고 함께 살고 있었다. 루탄의 특별한 가족인 그들 다섯은 모두들 인간들의 영역과는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 았고, 제각각 특별한 존재들이 되었다. 그 중에서 이들 자매는 넥스 영지의 북쪽에 있는 거대한 산맥을 넘어 정착을 했는데 함께 오순도순 살고 있다고 했다. 아마도 무언가 특별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아는 것 이 없는 이루비아였다. 쿵!쿵!쿵! “어머머, 이 소리는 화아 오빠의 소리다. 화아 오빠가 아니면 이렇게 묵직한 노크 를 할 사람은 없으니 말이야.” “그럴꺼야. 수아야 가서 문이나 열어 줘라. 루아는 그런 손으로 왔다 갔다 하지 말 고, 그냥 화아 오빠 들어오면 인사나 해.” “네? 네에!” 수아는 곧 현관으로 가서 문을 열었고, 붉은 머리카락의 화아와 금발의 광아가 함께 문을 통해 들어섰다. “음? 함께 오는 거야?” “그러게?” “마을에 들어오면서 만났어. 그런데 일찍 왔네?” “풍아 누나는 더 예뻐진 것 같네? 수아도 물론이고.” “뭐냐? 광아 너? 요즘 들어서 점점더 능글능글해 지는 것 같다? 소문에 여자들 꼬시 느라 정신이 없다더니 정말인 모양이군?” “무, 무슨 소리야. 내가 여자를 꼬시다니?” “응? 그럼 아니란 말이야? 나도 광아 오빠가 여자를 많이 만난다는 소문을 들었는 데?” “설마요? 도련님이 그러시겠어요?” “에에에. 루아 그렇게 말하면 우리가 거짓말을 한 것 같잖아? 정말이야. 저 광아 녀 석 벌써 여러 여자를 울렸다는 소문이야.” “그말 정말이냐? 광아야. 나는 그런 이야기 못들었는데?” “으악! 어째 형까지 이러는 거야? 내가 무슨 여자를 울려 울리기는... 그저 내 외모 가 이러니까 모두들 나를 좋다고 따라다니는 거지. 내가 요즘음 선드라스 제국하고 제 란제국에 볼 일이 있어서 좀 다니느라 생긴 헛소문일 뿐이야.” “음? 그래? 그럼 그렇겠지.” “맞아요. 광아 도련님이 그럴 리가 없어요. 그럼요.” “호호호, 광아 너 좀 많이 늘었구나? 이젠 그럴듯하게 핑계도 댄단 말이지? 호호 호. 증거를 가지고 오지 못했으니 지금은 넘어가지. 하지만 증거만 생기면...” 광아의 표정이 상당히 불안해 보이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하지만 더 이상 그런 문제로 아웅다웅하는 일은 없었다. 4남매는 서둘로 자리에 앉았고, 이루비아는 거의 마무리가 되어가는 음식을 마저 하 기 위해 부엌으로 들어갔다. 풍아, 수아 자매도 도와주려고 했지만, 언제부터인가 루아의 부엌 살림을 그녀의 영 역으로 인정해 주는 분위기가 되었기에 나서지 않고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남자 형제 들과 자리를 같이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다시 문을 열고 들어온 지토를 맞이 해야 했고, 이어서 자이 곱과 빈체를 맞이해야 했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2층에서 타니가 깔끔한 차림을 하고 내려왔다. 평소에 잘 입지 않던 블라우스 계열의 옷 위에 정장 형식의 옷을 걸친 모습이 멋지 게 보였다. “어서 오너라. 아래층에서 왁자 지껄 떠들어도 내려오지 않아서 무슨 일인가 했더 니 그렇게 꽃단장을 하고 있었던 거냐?” 계단을 내려오는 타니에게 제일 먼저 말을 건 것은 현관을 들어와서 내리 뚱한 표정 을 짓고 있던 지토였다. 예전에도 늙은 모습이었지만, 이제는 더 많이 늙어 보이는 지토였다. 지금은 넥스 영지의 북동쪽에 있는 바위 정령족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지토는 제일 오랫동안 타니곁에서 이것 저것 챙겨주었었다. 물론 타니가 대장장이가 되려고 했기 때문에 바위 정령족의 도움이 많이 필요했던 이 유도 있었지만, 타니가 할아버지라면서 유독 따랐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도 다섯 중에서는 가장 인간들과 가까이 지내고 있다는 것과 함께 복잡한 이유 가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지토가 타니를 무척이나 아낀다는 것 뿐이다. “할아버지. 하하. 많이 보고 싶었어요.” 타니는 우선 지토에게 가서 허리를 숙이고 안겼다. 겉으로 보기에는 타니가 안아주는 것 같지만 언제나 타니는 지토에게 이렇게 안기는 것을 좋아했고, 지토도 이렇게 타니를 안아주는 것을 더없이 행복해했다. “끌끌끌. 그래. 그래. 녀석 가끔 찾아오기라도 하잖구선.” 섭섭한 듯 하는 말이었지만 그저 말 뿐임은 응접실에 있는 모두가 아는 일이었다. “대충하고 그만 삼촌들이랑 고모들도 좀 봐라. 녀석 이제 다 커서 우리보다 더 늙 어 보이니 걱정이네. 어디 함께 다니면 이젠 우리들이 네 여자친군 줄 알겠다.” “그러게 말이야. 언니. 이젠 우리들이 잘 안 늙는 것도 문제네. 그치?” “그래도 아직 나는 함께 다녀도 동생 소리는 듣지 않겠다. 형뻘은 되어 보이지 않 아?” “화아 형님, 하지만 저는 이제 거의 친구로 보인단 말입니다. 걱정이네요.” “삼촌, 고모. 뭐 그런 걸 따지고 그래요? 저에게는 영원히 삼촌이고 고모인데요. 이 렇게 오셔서 정말 기뻐요.” “도련님 저도 좀 봐 주십시오. 자이곱입니다.” “응? 그래요. 자이곱 아저씨. 그동안 별일 없으셨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혼자 오신 거예요. 작년에는 아이들이랑 아주머니도 데리고 오시더니.” “하하, 이번에 셋째를 가져서 아내가 움직이기가 어려워서 저 혼자 왔습니다. 하 하.”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머리를 긁고 있는 자이곱이었다. 자이곱은 7년 전 쯤에 결혼을 해서 넥스 영지의 입구에 해당하는 두 계곡 중에서 오 른쪽 계곡을 지키는 책임자로 나가 있었다. 비록 모든 마갑주들이 사라지는 바람에 더 이상 마갑주의 힘을 빌리지는 못했지만 타 고난 신력과 칼을 다루는 솜씨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 넥스 트리언 영주의 배려였 다. “안녕하십니까. 주군.” “......” “......” 순식간에 응접실에 정적이 찾아 들었다. 지금 주군을 찾으며 무릎을 꿇고 앉은 것은 대 선드라스 제국의 황태자인 빈체 선드 라스였다. “빈체형, 이러지 말라고 했잖아. 이럴 거면 다시 오지 말라고 했었잖아. 형은 매번 이렇게 분위기를 망치더라.” “주군께서 형이 아닌 수하에게 하신 명이라면 벌써 십여년 전에 이런 불편함이 없었 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한 번도 그런 명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형에게 하는 부탁 은 제가 들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저는 형이 아니라 수하입니다.” 이 문제는 자이건이 넥스 영지에 들어오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빈체를 만난 자이건은 빈체를 데리고 가려고 했고, 빈체는 자이건을 따라가려 하지 않았다. 그 때 벌써 어느 정도 생각을 할 나이가 된 빈체는 자이건과 아세트, 자신들의 부모 가 무슨 일을 했는지를 알고 있었고, 그것을 잘못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적어도 한 가지, 자신을 타니의 기사로 만든 것만은 참 잘 한 결정이라고 자 이건에게 말하고는 여전히 타니의 수하를 자청했다. 그 때문에 상당히 문제가 생겼지만, 자이건은 강제로 빈체를 데리고 궁으로 돌아가 는 것으로 사건을 무마시켰다. 어쩌면 그 당시에 자이건과 아세트가 루탄의 가족들 모두를 지워버리려고도 했을지 모르지만 타니의 삼촌과 고모, 할아버지 중 어느 누구도 만만한 존재는 없었고, 아직 나라의 기틀이 완벽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들을 건드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덕분에 몇 년의 시간이 지났고, 조금 더 나이를 먹고, 그 만큼 영특해지고 특 월한 능력을 보이는 빈체가 황태자로서의 권위를 내세우고 황제와 힘겨루기를 시작하 면서 더 이상은 넥스 영지를 어찌 할 수도 없게 되었다. 아마도 그 상황에서 넥스 영지에 대한 치외법권의 포고령이 내리게 되었던 것도 빈체 의 입김이 작용하여 황제와 거래를 했으리란 상상을 해 볼 수 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나에게 기사나 수하란 당치도 않아요. 그리고 더더욱 빈체 형은 어릴 때부터 나의 형이었어요. 이제 나를 그만 괴롭혀요. 절대로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절대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겁니다. 비록 언젠가 제가 선드라스 제국 의 황제가 되겠지만 제국의 황제는 모두가 한국 가문家門의 수하가 될 것입니다. 그 걸 막을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럼 저는 언제나처럼 밖에 나가 있겠습니다.” 빈체는 그렇게 말을 마치고는 현관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타니는 빈체를 잡지 않았다. 빈체는 자신을 수하로 대하지 않는 이상 어떤 말도 들어주지 않을 것이고, 그는 절대 로 함께 식사를 하지도 않고 앞으로의 작은 행사에도 참여하지 않을 것이란 것을 알 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그를 수하로 다룰 수는 없다고 고집을 피우는 빈체였다. 단 한번 수하로서 말을 들으라하고 이제부터 자신을 동생이라 생각하라고 하고 싶기 도 했지만, 타니의 고집은 절대로 한 번도 형을 수하처럼 대할 수 없다며 꺾이지 않았 다. 하지만 빈체로 인해서 잠시 주춤했던 분위기는 루아가 식탁으로 일행들을 부르면서 다시 화기애애하게 풀렸고 그들은 모두 이루비아가 정성껏 만들어 놓은 음식들에 집중 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서로의 안부를 묻고, 염려하고 걱정하는 말들이 오고간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해가 일찍 지는 넥스 영지에서도 아직 해가 많이 남아 있는 시간에 시작된 이 른 저녁 식사는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