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노 마신(喇勞 魔神) 한중월야 글 서장(序章) -운명의 변환점 먼 옛날 중원 무인들은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호신용으로 무술을 익혔다. 무술은 시간이 흐르면서 단순한 호신에서 적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죽일 수 있는 살상용으로 발전해 갔고 그것은 갈수록 정교해지고 복잡한 형태로 진화해갔다. 단순한 식에 불과했던 무술이 복잡해지며 초식을 이루고, 호흡은 내공의 기초가 되었다. 무인들은 구결과 비급을 통해 자신의 무를 후대에 이어갔고 그것이 발전하면서 비전이 되어 무공이 되었다. 무공을 익힌 무인들은 범인들을 뛰어넘는 능력을 가졌고, 혼자서 다수의 사람을 쉽게 상대하고 먼 거리를 바람처럼 달리고 나무와 나무 위를 넘나들었다. 그들은 두 주먹으로 바위를 부수고 검을 휘둘러 나무를 베는 등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신기를 몸속에 지니게 되었는데, 그들을 무림인이라고 일컬었다. 그러한 신묘함을 얻기를 원했던 무인들은 고수들의 제자가 되었고, 문하의 제자들이 많아지면서 문파가 만들어졌다. 협의와 정도를 따르는 자들을 정파라고 하였고, 역도와 잔악함을 일삼는 자들을 사파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과는 전혀 다른 패도의 길을 추구하고, 오직 강함을 숭상하는 집단이 생겼는데, 그들을 마도, 혹은 마교라고 하였다. 당금 강호 무림은 이 세 세력이 팽팽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 . . 중원에서도 남쪽 광서성과 광동성 사이에는 십만대산(十萬大山)이 존재한다. 수십 개의 산봉우리가 드넓게 펼쳐진 산맥의 광활함을 일컬어 십만대산이라고 하는데, 이곳은 중원 무림에서도 금지라고 불리운다. 그것은 십만대산이 마교(魔敎)의 성역이자 그들의 본거지였기 때문이다. 마교의 성에서 한참 떨어진 한 깊은 숲속에 많아봐야 열다섯, 열여섯 정도로 보이는 소년이 죽을힘을 다해 달리고 있다. “헉헉!” 지쳤는지 거친 호흡을 내뱉고 있는 소년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옷은 곳곳이 찢겨져 있었고, 얼굴은 피멍으로 가득한 것이 도망치기 전에 많은 곤욕을 치룬 듯 했다. “빌어먹을!” 도망치는 소년의 입에서 거친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소년이 도망치려는 방향에 다섯 명의 복면인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 시진 가량을 죽을힘을 다해 도망쳤는데 결국 놈들의 손바닥 안이었다. “제기랄!” 멈춰선 소년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들고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그런 소년의 반응을 즐기기라도 하듯 복면인들이 드러난 눈매에 웃음기가 가득했다. “애써 이곳까지 달려오느라 고생했소. 천 공자.” “클클, 한참을 기다리느라 하품이 나올 지경이오.” 복면인들의 말에 천 공자라 불린 소년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리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었다는 것은 자신이 이쪽으로 도망칠 것을 알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챙! 복면인들이 등에 매고 있던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살기를 머금은 그들의 눈빛은 소년의 목과 심장을 향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저들의 목적은 애초부터 자신의 목숨이었다. 무슨 말을 한다고 해서 설득될 것 같지도 않았다. 쥐꼬리 만 한 내공으로 죽을힘을 다해서 경공을 펼쳤기에 더 이상 체력도 도망갈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년의 눈빛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분노가 더욱 컸다. “......왜지? 어차피 나에겐 가망이 없어서 입관마저 포기하려 하는데, 내 목숨을 노리는 이유가 무엇이냐?” “입관을 포기하든 무공이 병신이든 상관없다는 것은 천 공자도 알지 않소?” 의미심장한 복면인의 말에 소년은 할 말을 잃었다. 더 어렸을 적부터 이 순간이 올 것은 예상했지만 마도관(魔道館)에 입관도 하기 전에 올 줄은 몰랐다. “후계의 자격이 있는 이상 정해진 수순이요. 공자.” 맨 앞에 있는 복면인을 시작으로 뒤에 있던 자들도 차례대로 소년을 자극하는 말들을 늘어놓았다. “순순히 목을 내미시오.” “아무리 천한 피가 섞였다고 한들 그분의 핏줄인 만큼 고통 없이 보내주겠소.” 천한 피라는 말에 소년의 눈에 살의가 치솟았다. 그리 긴 인생을 살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절대로 싫어하는 표현이었다. 천한 피는 그의 어머니를 모욕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고통 없이 보내기는 빌어먹을 놈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매한가지라면 차라리 반항이라도 해봐야 겠다. 소년은 품속에서 단검 한 자루를 빼들었다. 정식으로 무공을 배운 적은 없었고 그를 호위하던 장 무사를 보며 곁눈질로 배운 것이었다. “호오? 단검을? 장 호위에게 무공이라도 배웠나?” 애석하지만 아니었다. 장 호위에게 단검술을 배웠다면 절대로 가벼운 실력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미 소년의 단검을 쥐고 있는 자세만 보더라도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어설프군. 하나, 핏줄은 속일 수 없나 보군. 쥐뿔도 없는 실력으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걸 보니. 크크큭’ 복면인들의 눈빛은 매우 즐거워보였다. 반항하지 않는 상대를 죽이는 것보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상대를 죽이는 것이 훨씬 사냥의 가치가 있으니까 말이다. “죽여라!” 맨 앞에 있는 복면인의 신호가 떨어지자 뒤에 있던 네 명의 복면인이 동시에 소년을 향해 달려들었다. 조금이라도 버틸 줄 알았지만 현실은 냉혹하기 짝이 없었다. “하압!” 일류 고수의 실력을 지닌 복면인들이 초식조차 펼칠 줄 모르는 소년의 단검에 당할 리가 없었다. 몇 번 휘두르는 것을 가볍게 피하더니 검의 손잡이로 그 손목을 내리쳤다. -팍! “크윽!” 소년이 오기로라도 참아보려 했으나 단검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일그러진 얼굴에 그의 단검을 떨어뜨리게 만든 복면인의 눈이 히죽거리더니, 재빠른 손놀림으로 소년의 목을 움켜쥐었다. -꽈악! "반항은 전부 끝났나? 크크큭." "크윽!" 목을 붙잡혀서 붉게 물들어 가는 소년의 얼굴. 그런데 그 눈빛은 죽지 않았다. “피해!” 그때 뒤쪽에서 있던 다른 복면인이 다급히 외쳤다. “뭐?” "단검!" -푹! 완전히 제압했다고 방심했던 복면인의 턱으로 단검이 파고들어왔다. 하나뿐일 거라 생각했는데 품속에 하나의 단검을 더 숨겨두고 있었던 것이었다. 복면인이 아무리 일류고수라고 해도 턱이 꿰뚫렸으니 단번에 즉사할 수밖에 없었다. 복면인은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아니?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녀석이 복마단의 단원을 죽이다니?’ 떨어져서 지켜보던 복면인들의 대주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소년의 빛나는 눈빛을 보니 확실하게 노린 듯 했다. 어설프게 단검을 휘두르는 척 연기를 해서 복면인을 방심하게 만든 뒤, 숨겨두었던 단검으로 찔렀다. 위기의 상황 속에서 이 정도로 영악하다면 만약 제대로 무공을 익혔다면 결과가 단순해질 것 같지 않았다. “이런 빌어먹을 애새끼가! 봐주니까!” -퍽! 화가 난 다른 복면인이 단숨에 거리를 좁히며 소년을 발로 걷어차더니, 넘어진 그의 배에 검을 꽂아 넣었다. -푹! “끄아아아아악!” 태어나면서 한 번도 배를 검으로 뚫려본 적이 없는 소년이었다. 마치 불로 지지는 듯 한 화끈함이 느껴지며 목구멍에서 피가 솟구쳤다. ‘제기랄. 역시 속이는 건 한 번뿐인가?’ 이판사판 한두 명이라도 죽이려는 목표는 달성했으니 그나마 속은 시원했다. 어차피 검으로 배가 뚫렸으니 살아남기는 글렀다. -꽈악! “끄으으으으윽!” 복면인이 소년의 뚫린 배를 발로 질근거리며 밟았다. 고통스러워하는 소년의 등 뒤의 땅바닥이 피로 적셔지고 있었다. 단번에 목을 베거나 이마를 꿰뚫고 죽일 수도 있었지만 복면인은 마치 동료의 복수라도 하듯이 소년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천천히! 더! 고통스러워하고 죽어라!” 대주의 눈에도 그것이 썩 내키지 않았지만 동료에 대한 분노를 토해내는 것이니 말리기도 모호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번쩍! 번개가 내리친 것도 아니었는데 일순간 환한 빛이 번쩍였다. 갑작스러운 빛이 사라지고 복면인들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 이게 무슨?” -푸슛! 핏줄기가 분수처럼 위로 솟구쳤다. 놀랍게도 소년의 배를 발로 밟고 있던 복면인의 상반신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통째로 없어졌고 하반신만이 남아있었다. “뭐, 뭐야?” 소년 역시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웬 하얀 빛줄기가 날아와서 복면인을 맞췄는데, 상반신이 녹아내리듯이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저놈이다!” 복면인들의 대주가 놀란 눈으로 어딘가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곳에는 알 수 없는 이상한 복장을 하고 있는 괴인이 있었는데, 복면인들이 손으로 가리키는 순간에 괴인의 몸이 사라졌다. “엇?” 그것은 빠른 경공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서 투명해져서 시야에 잡히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옳았다. -팍! 또 다시 빛줄기가 날아와 다른 복면인을 맞췄다. 빛줄기에 맞은 복면인은 앞선 동료와 마찬가지로 상반신이 날아가 그대로 죽음을 맞고 말았다. 남은 사람은 복면인 대주를 포함해 두 명뿐이었다. ‘엄청난 고수가 그를 돕는 것이 틀림없다. 하얀 빛은 강기란 말인가?’ 무공의 수위가 화경의 경지에 오른 고수만이 쓸 수 있다는 강기(强氣)가 아니고는 사람의 몸이 통째로 날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차피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에 소년은 곧 죽을 것이다. ‘목적을 달성했으니 도망간다!’ -번쩍! 복면인 대주가 남은 복면인에게 퇴각 신호를 보내려는 순간 그의 상반신이 흰 빛줄기에 맞고 사라져버렸다. “으아아아아악!” 순식간에 동료들과 대주가 목숨을 잃자 공포심에 빠져버린 복면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경공을 펼쳐서 탈출을 시도했다. -번쩍! 그러나 뒤에서 날아오는 빛줄기가 그의 머리를 관통하며 그대로 즉사하고 말았다. 복면인들이 일순간에 몰살당하자 바닥에 쓰러져 있던 소년이 입꼬리를 올리며 기분이 좋아졌는지 중얼거렸다. “꼴좋다.” -우웅! 그런 소년의 눈앞에 공간이 뒤틀리며 이상한 복장을 하고 있는 괴인이 나타났다. 너무 놀라서 소리라도 치고 싶었지만 그럴 힘도 없었다. “이야. 우리 조상님은 죽어가는 마당에 기분이 좋으신 가봐.” ‘조상?’ 알 수 없는 소리에 소년이 인상을 찌푸렸다. 뭐라고 말을 할 기운도 없었고 온몸이 차가워지고 있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시야가 점차 흐릿해지는 것이 죽음이 다가오는 듯 했다. ‘이렇게 죽는 건가?’ -삐빗삐빗!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전신에 이상한 은빛 재질의 옷을 입고 있는 괴인이 손목에 두르고 있는 무언가를 쳐다보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벌써 발견한 거야? 젠장! 별 수 없네. 좀 더 일찍 와서 사용 방법도 알려주려고 했는데.” 괴인이 허리춤에 있는 작은 가방에서 무언가 두 개의 물건을 꺼냈는데 끝이 뾰족한 바늘이 달린 주사기였다. 이미 시야가 흐려져서 점차 어둠으로 변하고 있는 소년의 상태는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서둘러야 겠네.” -푹! 괴인은 소년의 귀 뒤쪽에 주사기를 꽂았다. 살짝 따끔 거렸으나 이미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는 소년이었다. 괴인은 다른 하나의 주사기를 들어서 소년의 심장을 향해 바늘을 찔렀다. -푹! “우우! 보는 내가 따끔하네. 이제 됐다. 어이 조상님?” 주사기 바늘을 빼서 다시 가방에 집어넣은 괴인이 정신이 혼미해져 가는 소년을 불렀다. “부디 성공해서 이 후손도 덕 좀 봅시다. 사용 방법은 나노 머신이 최신형이라서 쉬울 테니까 알아서 잘 터득해 봐요.” ‘.....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그 말과 함께 괴인은 몸 주변으로 공간이 일렁이며 사라졌다. 괴인이 사라지고 죽어가는 소년의 귓가로 이상 소리가 들려왔다. [제품번호: 034-4532-5893. 스카이 코퍼레이션 7세대 나노머신 가동을 시작합니다. 먼저 사용자의 신체 스캔을 가동합니다.] 알 수 없는 말들이 소년의 머릿속을 울리더니 그의 전신에서 이상한 빛이 흘러나왔다. 마치 수백 수천 마리의 개미가 전신을 훑어 내려가는 느낌과 함께 머리와 심장을 기준으로 하얀 빛이 전신을 휩쓸더니 이내 예의 소리가 들려왔다. [스캔 완료. 긴급 상황! 긴급 상황! 사용자의 복부에 자상을 발견. 사용자의 혈액 손실율 20%. 생명 유지를 위한 상처 수복 및 혈액 증액에 들어갑니다.] 죽어가는 소년의 몸에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정해져 있던 소년의 인생의 변환점의 시작이기도 하다. 1장 나의 몸에 마신(?)이 강림했다.(1) 복면인들의 습격을 당한 천 공자는 검으로 복부를 꿰뚫린 채 숨을 거두었다. 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아니었다. 장 호위는 이미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을 거라는 말에 미친 듯이 경공을 펼쳐서 천 공자를 찾아 헤맸다. 그리고 그가 소년을 발견했을 때 주변에는 온통 상반신이 날아가서 누구인지 파악할 수 없는 복면인들의 시신들뿐이었다. 단 한 명의 복면인만이 전신이 멀쩡했는데, 머리에 단검이 꽂혀서 죽어있었다. ‘내가 드린 단검이다.’ 그것은 장 호위가 천 공자에게 나이가 열 살이 되었을 때 선물로 준 단검이었다. 마도관에 입관하기 전까지 무공을 가르치지 말라는 맹약 때문에 제대로 된 단검술조차 가르치지 않았는데, 이렇게 한 명을 제압한 것을 보면 기특하기만 했다. “아아! 공자!” 장 호위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천 공자를 발견했다. 천 공자의 주변 바닥이 피로 물든 것을 보아하니 부상이 심각해보였다. ‘제발!’ 천 공자가 여기서 목숨을 잃는다면 그녀의 어머니를 뵐 낯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새근새근! “응?” 일류 고수인 장 호위의 귓가로 천 공자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옷의 복부 쪽이 찢겨진 것을 보아선 분명 검에 찔린 것이 틀림없는데, 숨소리가 골랐다. 장 호위가 천 공자의 옷을 들춰보았다. “아니? 상처가 없잖아?” 놀랍게도 검에 찔렸을 거라 생각한 천 공자의 배에는 어떠한 상처도 존재하지 않았다. 천 공자가 쓰러진 바닥에 흥건히 고일 듯한 피를 본다면 분명 심각한 부상을 입었거나 죽었어야 했는데, 오히려 멀쩡 하자 다행이라는 것보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뭐지? 대체?’ 주변에는 복면인들의 시신에 부상을 입었을 거라 생각한 천 공자는 멀쩡했다. ‘설마 교주께서.....아니야. 서열 싸움에 교주께서 관여하실 리가 없다. 그런데 누가 이들을 죽였으며 천 공자를 살린 것인가?’ 의문을 풀고 싶었으나 흔적들만으로 어떠한 단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흔적들을 살피던 장 호위는 죽은 그들의 시신을 수습해 바닥에 묻은 후에 천 공자를 어깨에 들쳐 메고 마교의 성으로 경공을 펼쳤다. -들썩! 천 공자라 불린 소년의 몸에 장 호위의 손이 닿는 순간 그의 머릿속에 있는 무언가가 짜릿한 충격을 가하며 강제적으로 기절 상태를 해제시켰다. [자가 수복 모드 80%에서 중지. 일어나십시오. 마스터.]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에 정신을 못 차리던 소년이 눈을 번쩍하고 떴다. ‘엇?’ 분명 자신은 정체모를 복면인의 손에 복부가 꿰뚫려서 치사량의 출혈로 죽었어야 했는데, 누군가의 어깨에 들려 있었다. 그 느낌이 매우 익숙했는데, 자신을 들쳐 매고 있는 남자는 바로 호위무사인 장가경이었다. “장 호위!”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장 호위를 보게 되자 소년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또 다시 기계적이면서 딱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용자의 적이 아님을 확인했습니다. 자동 방어 경계 모드를 해지합니다. 다시 완료되지 않은 남은 20%의 자가 수복을 진행합니다.] “윽!” 알 수 없는 소리가 머릿속을 울려 퍼지자 소년은 강한 두통이 일어나서 자신의 머리를 양손으로 붙들었다. “공자! 깨셨군요. 괜찮으십니까?” 어깨에 들쳐 메고 있던 소년이 깨어나자 경공을 펼치던 장 호위가 반가웠는지 미소를 지으며 안부를 물었다. “공자?” 두통을 참지 못한 소년은 결국 다시 기절하고 말았다. 한참을 소년을 부르짖던 장 호위는 서둘러서 경공을 박찼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것일까. 기절해 있던 소년이 깨어난 것은 다음날 오전 무렵이었다. “헉!” 무서운 악몽이라도 꿨는지 소년의 온몸이 식은땀으로 적셔 있었다. 그러나 사실 소년은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다. 자신의 몸이 젖었다고 인지한 소년은 손등으로 이마를 훔쳤는데, 땀이 닦인 것이 아니라 뭔가 끈적함이 묻어났다. “뭐야? 헛?” 소년은 자신의 손등에 묻은 끈적거리는 검은 액체를 보며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검은 액체는 지독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으윽!” 냄새가 어찌나 매캐했던지 속이 메슥거렸다. 검은 액체는 소년의 이마에만 묻어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신에서 배출되었는지 온몸이 검은 액체로 끈적거리고 있었다. “이, 이게 대체 뭐야?” 그때 소년의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렸다. [정신 차리셨습니까? 마스터.] “뭐?” 그리고 반복해서 들리는 목소리. [정신 차리셨습니까? 마스터.] “누, 누구십니까?” 소년은 놀란 나머지 재빨리 침대에서 일어나 경계심이 가득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이내 그 목소리는 밖에서 들리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진정하십시오. 마스터.] ‘설마 내 머릿속에서 나는 소리인 건가?’ [맞습니다. 마스터.] “헉!” 입 밖으로 낸 말이 아니라 그저 생각만 한 것이었는데,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는 마치 들은 것처럼 대답을 했다. 놀란 소년의 얼굴에 정말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극도로 긴장한 탓이었다. ‘전음? 전음은 아니야.’ 전음(傳音)이란 내공을 가진 고수들이 특정 상대에게 은밀하게 목소리를 보내는 수법이다. 아주 예전에 딱 한 번 전음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전음은 내공을 통해서 들리기 때문에 일종의 음파에 가까웠다. [전음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생각하신 대로 귀를 통해서 소리를 보내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마스터.] “헉! 대, 대체 누구십니까?” 소년은 놀라서 허공을 쳐다보며 외쳤다. 머릿속에 목소리를 올려 퍼질 정도로 신기한 술법을 지닌 자는 틀림없이 엄청난 고수일 거라 생각하는 소년이었다. [저는 마스터의 뇌에 연결되어 있는 중추 역할을 하고 있는 스카이 코퍼레이션에서 만든 제7세대 나노 머신입니다.] “뭐?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자신의 상식을 넘어선 현상에 소년은 얼굴이 창백해져서 물었다. 소년의 소뇌에 부착되어 있는 나노 머신은 사용자가 자신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인식했다. “대체 누구시길래 제게 이러는 겁니까?” [저는 제7세대 나노 머신(Nano machine)입니다.] “나노 마신?” [그렇습니다. 나노 머신입니다.] 소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마신(魔神)이라 함은 마교에서 성화(聖火)와 더불어 받들고 모시는 존재였다. 마교의 교주는 그런 마신과 소통을 하는 역할을 부여받은 자였다. “저, 정말 마신님이십니까?” 어느새 자세까지 바로 잡고 무릎을 꿇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소년의 태도에 그의 소뇌 속에 부착되어 있는 나노 머신은 소년이 단단히 오해했음을 인지했다. 1장 나의 몸에 마신(?)이 강림했다.(2) 소년의 이름은 천여운(天麗雲). 마교에 있어서 절대적인 위치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성인 천가(天家)의 사람이다. 천가라 함은 위대한 교주의 혈육이었기 때문에 교내에서 대우를 받을 거라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실상은 달랐다. 천가의 피를 이었다고 해도 소교주가 되기 전까지는 마교를 지탱하는 여섯 가문의 외가의 소속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천여운은 유일하게 여섯 가문의 태생이 아닌 교주전에서 일하는 여시종의 태생이었다. 물론 시종의 몸에 낳았다고 해도 천가의 혈육이기 때문에 소교주의 자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무 힘도 없는 목숨이 간당간당한 번외 서열에 불과했다. 그런 천여운이 어째서 이런 곤욕을 치르게 된 것일까? 그 원인은 그의 모친인 화 부인에게 있었다. 정략으로 맺어진 여섯 종파의 여인들 누구에도 정을 주지 않고 차디찼던 교주가 한낱 미천한 여시종을 사랑하고 아낀 것이었다. 이것이 정처였던 여섯 종파 부인들의 큰 시기와 노여움을 사버리고 말았다. 여인들의 질투심은 단순한 노여움으로 끝나지 않았다. 천여운은 여시종의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열다섯이 되는 해를 살아오는 동안 많은 멸시와 은밀한 암살 시도를 당해왔다. 소교주 후보로서 아무 힘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이렇게까지 없애려고 한 것에는 정처인 여섯 종파의 부인들의 시기어린 분노가 큰 작용을 해왔다. 그런데 이레(칠 일) 전부터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하기 힘들 만큼 암살 시도가 빈번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정식으로 소교주 자격을 시험하게 될 마도관의 입관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는 아무런 연고도, 힘도 없는 천여운이었지만 마도관에 입학하게 된다면, 무공을 익히게 되고 자신만의 세력을 기를 수 있는 여건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더군다나 마도관에 입성하게 되면 사적인 출입이 금해지기에, 아무리 여섯 종파라고 할 지라도 직접적인 암살 시도를 하기가 힘들어진다. 그런 조급함 때문이었을까. 어젯밤에는 마도관 입성을 이틀을 앞두고 은밀하게 시도했던 평소와는 다르게 대놓고 암살자를 보냈다. 더군다나 여태까지 그를 암살 시도에서 지켜주었던 장 호위마저 따돌리게 만든 뒤에 말이다. “마, 마신님께서 저를 살려주신 겁니까?” 바닥에 납작 엎드린 천여운은 머릿속에 말을 하는 목소리를 향해 물었다. 그가 기억하기로는 분명 자신은 검에 찔려서 죽었어야 할 운명이었다. 그런데 적들은 갑자기 나타난 괴인에 의해 죽었고, 자신은 살아났다. 천여운의 소뇌에 부착되어 있는 나노 머신이 답했다. [주위에 있던 마스터를 노렸던 적들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아닙니다. 하지만 죽어가는 마스터의 몸을 자가수복한 것을 말씀하신 것이라면 제가 맞습니다.] “자가 수복은 대체 무슨 말이죠?” 그의 머릿속에서 말을 하는 나노 머신이 하는 대개의 용어는 알아듣기 힘들었다. 잠시 계산에 들어간 나노 머신은 이대로는 대화가 힘들다고 판단했다. [마스터의 머릿속에 제 기본 정보를 전이...] “마사타는 대체 무슨 말이죠?” 영어는 이해는커녕 발음조차 전혀 제대로 하지 못했다. 나노 머신은 언어 검색을 통해 자신의 마스터에게 맞는 용어 검색 필요성을 인지했다. [시대적 용어 검색을 시작 및 변환을 가동합니다.] 나노 머신은 천여운이 알아들을 수 있는 용어를 검색해서 언어 변환을 시작했다. 이윽고 언어 변별이 끝나자 다시 말을 이어갔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말씀하시는 마신(魔神)이라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마치 하인들이 쓰는 말투에 천여운의 표정이 의아하게 바뀌었다. 물론 딱딱한 말투는 여전했다. “마신님이 아니시라면 대체 무슨?” [주인님께 저에 대한 정보 및 간단한 사용설명서를 뇌로 전이하려고 하는데, 승인해주시겠습니까?] 설명을 하는 것보다 정보 전이가 가장 빠르다고 판단한 나노 머신이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천여운은 멋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 순간 천여운의 머리에 찌릿하며 감전 현상이 일어나며 마치 누군가가 강제적으로 무언가를 집어넣는 것처럼 영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스스스스스! 누군가 지금 천여운의 상태를 보았다면 기겁을 했을 것이다. 눈의 동공이 어찌나 빠르게 흔들리는지 기이한 현상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천여운은 어지러움을 느꼈는지 바닥에 엎드려서 신물을 올려냈다. “우웩!” [정보 전이를 처음 겪으시는 현상입니다. 두 번째 부터는 어지러움이나 구토현상이 없을 겁니다.] 잠시 동안 어지러움을 겪던 천여운이 이윽고 정신을 차렸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 것도 듣거나 배운 것도 아니었는데, 천여운은 자신의 머릿속, 아니 뇌 속에 부착되어 있는 존재가 나노(nano) 기술이 집약된 기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노 머신?” [네. 주인님.] “지금 내 몸 속에 수만 개의 정밀한 기계가 들어가 있다는게 정말 사실인가요?” [그렇습니다. 정확하게 팔만육천칠십오 개의 나노머신이 주인님의 몸속의 전신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몸속에 인공적으로 만든 무언가가 들어가 있다는 것에 천여운은 뭔가 모르게 거부감이 들었다. 하지만 사람도 아니고 마신도 아닌 것을 알게 되자, 어려워 하던 천여운의 말투도 경어에서 편하게 바뀌었다. “만약 내가 원한다면 내 몸속에서 나갈 수 있어?” [정보 전이로 보내드렸다시피 저는 주인님께서 완전한 사망이 이뤄졌을 경우에 몸에서 배출되도록 프로그램 되어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죽기 전까지는 절대 나갈 생각이 없다는 말이었다. 천여운은 어쩌다가 자신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복형제란 것들은 아무런 힘도 없는 자신을 죽이기 위해 어떻게든 애를 쓰지 않나. 이젠 그도 모자라서 몸속에 나노 머신이라는 기계가 들어왔다. “그럼 대체 누가 내 몸속에 너를 집어...” 천여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공자님. 백 의원께서 오셨습니다.” 장 호위의 목소리였다. 바닥에 엎드려 있던 천여운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어찌해야 하나 당황스러웠다.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기계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을 다른 이들이 알게 된다면 이상하게 생각할까 우려가 된 그였다. “자, 잠시만 조용히 하고 있어.” [생각만으로 뇌파를 읽어서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알겠으니깐 잠시 조용히 해봐.” [일시적으로 음 소거 모드에 들어갑니다.] 천여운은 재빨리 침대로 올라가 이불을 덮고 누웠다. 그러는 사이에 문이 열리며 장신의 중년인인 장 호위와 의원으로 보이는 긴 백발이 어깨까지 흘러내리는 노인과 그를 보조하는 소동이 들어왔다. “아직 공자님께서는 깨지 않으신 것 같으니 조용히 진료만....앗? 공자님!” 장 호위는 침대에 누워서 자신을 쳐다보는 천여운을 발견하고는 두 눈이 커져서 부리나케 그의 앞으로 달려왔다. “공자님! 몸은 괜찮으신? 욱!” 장 호위가 순간 자신도 모르게 코를 틀어막았다. 천여운의 몸에서 지독하게 매캐한 냄새가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나노 머신과 이때까지 대화를 나누느라 자신의 상태를 미처 잊고 있었던 천여운이었다. 전신에서 알 수 없는 끈적하면서도 검은 액체가 배출되어 있었는데 그 냄새가 매우 지독했다. “호오?” 이에 흥미가 가득 찬 얼굴로 백 의원이라 불린 노인이 다가왔다. 그는 교주의 주치의를 맡고 있는 백종우라는 의원으로 긴 백발에 고고해 보이는 모습과는 다르게 마교 내에서는 마의(魔醫)라고 불리는 자였다. “천 공자 노부와 구면이지?” “백 의원님을 제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마교 내에 있는 교인들 중에서 마의를 모르는 이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의 어머니인 화 부인이 병상에 있을 때, 교주의 명으로 진료하러 왔었기 때문에 구면이기도 했다. “진맥을 하겠네. 손을 줘보게.” “그, 그게....” 손부터 팔까지 전부 검은 액체로 끈적거려서 내밀기가 민망스러웠다. 마의 백종우가 괜찮다며 손을 내밀라고 한 번 더 권유를 하자 천여운은 마지못해 손을 내밀었다. 백종우는 두 손가락을 맥에 가져다 대어 진맥을 하더니 이내 두 눈빛에 이채가 띠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구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백 의원님. 공자께서 혹시 잘못되시기라도 한 겁니까?” 장 호위가 불안했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러자 백종우는 전혀 아니라며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오히려 반대일세. 자네에게는 기연일지도 모르겠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전신의 노폐물이 빠져나가고 기경팔맥(奇經八脈)의 순환도 활발해졌는데, 혹시 영약이라도 먹은 겐가?” 백종우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지 천여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공을 익히기에 최적의 몸이 되었단 말일세.” “네?” 그제야 백종우의 말을 이해했는지 천여운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천여운의 전신에 묻어있는 끈적한 검은 액체는 다름 아닌 그의 몸에 있던 노폐물들이었다. 더욱 운이 좋은 것은 노폐물이 배출된 것도 모자라서 기경팔맥의 순환이 활발해진 것인데, 내공을 익히기에 최상의 상태로 몸이 바뀐 것이었다. 시종의 몸에서 낳은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무공을 비롯해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했던 천여운에게는 엄청난 기연이었다. 물론 아직까지 내공이 거의 전무한 상태이지만 말이다. ‘이봐. 나노 머신. 이거 네가 한 거야?’ [........] [음 소거 모드를 풀겠습니까?] ‘.....풀어.’ [음 소거 모드를 해지합니다. 주인님의 전신에 배치된 나노 머신들이 손상된 육체 수복을 하면서 체내에 있는 불필요한 노폐물들을 제거하고, 혈관과 근맥, 근육을 운동 능력을 발휘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변환시켰습니다.] ‘.......너 대체 뭐냐?’ 마의 백종우의 말을 듣고 이 같은 일을 나노 머신이 한 것이 아닐까 짐작은 했지만 직접 듣게 되니 그 놀라운 능력에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너 정말 마신이 아닌 거 확실하지?’ [마신(魔神)이 아니라 머신(machine)입니다.] 라는 지극히 기계적인 답변이 흘러나왔다. 2장 누가 책을 외우라 했던가(1) 아직 소년에 불과한 천여운이었지만 절대로 어리숙하지 않았다. 열다섯 해가 되는 동안 수많은 암살 시도를 겪어가며 목숨을 부지해왔기 때문에 자신이 가지게 된 패의 소중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지게 된 패를 누구에게도 들켜선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내 몸 속에 나노 머신이 있다는 것을 숨겨야 돼.’ 여기서 천여운은 모르고 있었지만 현 시대의 의학 기술로는 절대로 나노 머신의 존재를 발견할 수 없다. 그걸 모르는 천여운으로써는 자신을 진맥하고 있는 백 의원이 마교의 근간을 이루는 여섯 종파 중의 하나인 독마종 출신이라는 것이 우려가 될 수밖에 없었다. ‘제발 그냥 넘어가야 할 텐데.’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천여운의 얼굴에 긴장감이 돌았다. 그는 비공식적으로 마도관에 입관하기까지 어떠한 무공도 익히지 못하도록 제지당하고 있는 상태였다. ‘흐음, 누군가의 도움을 받은 건 틀림없어 보이는데.’ 천여운의 몸에 갑작스럽게 일어난 변화에 마의 백종우는 기이하게 여겼다. 그를 어렸을 적에 보았을 때는 왜소한 체구에 변변찮은 무공조차 익히지 못해서 서열 싸움에 자연스레 도태가 될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지금 몸 상태를 보니 다른 여섯 가문에 속하는 천 공자들과 비교해도 무공을 익히기에 부족함이 없어보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불리한 것은 변함없었다. 다른 서열 순위의 천 공자들은 마도관에 입관하기 전부터 미리 무공을 익히고 내공을 쌓아 왔는데 다가, 이미 자신들만의 세력을 차곡차곡 쌓아온 상태였다. ‘관심이 없는 척 하시더니 역시 신경 쓰신 건가.’ 여기서 백종우는 본의 아니게 오해를 하게 되었다. 그는 천여운의 이 같은 변화의 원인을 현 마교의 교주인 천유종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여겼다. ‘하긴 열손가락 깨물어서 아프지 않을 손가락이 있을 리가 없지.’ 교주가 나서서 몰래 도와준 것이라면 그가 굳이 아는 척 할 이유가 없었다. 마의 백종우는 가기 전에 원기를 북돋게 하는 탕약을 처방해주고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돌아갔다. 그과 완전히 돌아가고 나서 천여운은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공자님.” “장 호위.” 미처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건네지 못했다. 나노 머신이 그를 치료해주긴 했지만 장 호위가 제 때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짐작하기 힘들었다. “숙소까지 데려오느라 고마...” 천여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 호위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죄송합니다. 공자님! 그 전에 일단 씻어야 겠습니다.” “......그렇네.” 자신의 몸에서 배출된 것이지만 냄새가 지독하긴 했다. 장 호위는 시종을 불러서 노폐물로 인해 더러워진 침소의 이불을 갈게 하고, 천여운이 씻을 수 있도록 준비하게 하였다. 욕실에 준비된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천여운의 표정은 내내 묘하기만 했다. ‘하늘이 운명을 바꾸라는 건가?’ 여시종의 몸에서 태어난 그의 운명은 애초부터 정해져 있었다. 여섯 가문, 즉 여섯 종파로 이루어진 마교는 그들의 가문에서 최강의 후계자를 선출하여 소교주를 옹립해왔다. 하지만 천여운은 여섯 가문의 소속도 아닌 교주전에 속한 여시종의 태생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기반도 없이 자라왔다. 그러나 그가 살아온 열다섯 해의 세월은 누구보다도 처절하면서도 살아남기 위한 행보였다. ‘이봐. 나노 머신.’ [네. 주인님.] 한 시진 가까이 나노 머신과 대화를 나누지 않은 그였다. 의외로 나노 머신은 천여운이 먼저 말을 거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덕분에 왠지 모르게 감시당하는 것 같다는 느낌은 어느 정도 지울 수 있었다. ‘아까 네가 내 몸을 회복시켰다고 했는데, 대체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 거야?’ [외부의 충격으로 인한 자상이나 내부의 장기 손상은 금방 자가수복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혈액 손실과 육신이 절단되는 것은 세포 분열을 요하기 때문에 상당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그, 그래?’ 나노 머신이 머릿속으로 많은 정보를 보내주었으나 여전히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가 이해한 정도로는 살점이 떨어져 나가거나 출혈이 심한 것이 아니라면 금방 치료가 가능하다는 말 같았다. ‘시험해 봐도 상관없겠지?’ [스스로 자상을 내는 것은 비추천 해드리고 싶으나, 시험해보고 싶다면 손상이 적은 상처로 권유해드립니다.] 천여운이 벗어놓은 옷가지 위에 올려놓았던 단검을 검집에서 빼냈다.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날카로운 검신에 손을 가져다가 베어보았다. -촥! “윽!” 겁도 없이 손을 베긴 했는데 많이 아팠다. [왼쪽 손바닥에 대한 자상에 대해 자가 수복 기능을 가동합니다.] 나노 머신의 딱딱한 목소리와 함께 피가 흐르는 왼손 손바닥에서 뭔가 간지러움이 느껴지더니 이내 흘러나오던 피가 멎었다. 그러더니 정말 순식간에 상처가 사라져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아. 진짜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가 않네.’ 이렇게 빠르게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더욱 믿기 힘든 것이 있었다. 그것은 나노 머신이 그의 머릿속으로 전이한 나노 머신의 활용도에 관한 것이었다. ‘회복 능력은 그렇다 치고 정말로 내 머릿속으로 전이한 내용대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게 맞아?’ [전이시킨 내용대로 전부 활용이 가능합니다.] ‘좋아. 그렇다면 목욕이 끝나고 한 번 시험해 봐야 겠어.’ [알겠습니다.] 나노 머신의 대답이 끝나자 천여운은 다시 따뜻한 물속에 몸을 담그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정말로 나노 머신이 말한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면, 이때까지 당해온 모든 수모를 갚는 것도 모자라 서열 순위에 속해있는 누구보다도 소교주에 가까운 위치로 올라설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마교의 성내 남동쪽에는 교를 지탱하는 여섯 종파 중 하나인 복마종의 근거지가 자리하고 있다. 복마종의 본단 건물 옆에는 차기 소교주 후보를 위한 거처가 마련되어 있다. 거처의 앞마당에 십육 세 정도로 보이는 얼굴이 주근깨가 가득한 소년이 있었고, 그 앞에는 복면을 쓴 사내가 부복을 하고 있었다. “되게 웃기는 거 알지? 그게 말이 되는 거라고 생각해?” 소년은 뭐가 그리 화가 나는지 눈썹까지 곤두서서 윽박을 질렀다. 복면의 사내는 그런 소년의 화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절절 매기만 했다. “기껏 꼴 보기 싫은 녀석을 먼저 치우라고 했더니 다섯 명이 전부 죽었다고? 하아.” “아무래도 숨겨진 고수가 개입한 것 같습니다. 무금 공자.” “누가 네놈 멋대로 본 공자의 이름을 부르라고 했느냐!” “죄송합니다. 천 공자.” 소년의 이름은 천무금. 복마종을 외가로 두고 있는 천무금은 소교주 서열 삼위에 위치하고 있는 자였다. 호전적이고 간교한 성격의 천무금은 마도관 입관을 앞두고 과감하게 천여운을 처리하기 위해 복마종의 암살자들을 동원했지만 뜻밖에도 실패하고 말았다. “천한 핏줄의 섞인 놈이라 쥐뿔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뭔가 숨겨둔 게 있나보군.” 예상 외였다. 일부러 천여운의 호위 무사까지 따돌리게 만들고 노렸는데 실패했다는 것은 그를 보호하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의미였다. ‘혹시 아버님이 안배해두신 건가?’ 가장 의심 가는 부분이 있다면 교주였지만 아무리 교만하고 위세가 넘치는 천무금이라고 할지라도 함부로 내뱉을 수 없었다. 마교에서 교주는 절대적인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별 수 없군. 입관을 하고나서 노려야 겠어.” 마도관에 입문하고 나서부터는 더 이상의 보호는 사라진다. 지금까지는 교주가 직접 배치해준 호위 무사가 그들을 보호했지만 마도관에 입문하고 나서는 호위 무사들은 동행할 수 없게 된다. “내 손을 더럽히긴 싫었지만 마도관에서 직접 죽여주마.” 아직은 소년에 불과한 천무금의 눈이 짙은 살의로 물들었다. 2장 누가 책을 외우라 했던가(2) 십만대산에 자리한 마교(魔敎). 무(武)와 마도를 숭상하는 마교 내에는 수많은 무공 종파들이 존재하지만 그 중에서도 마교의 근간을 이루는 여섯 종파가 있다. 현마(玄魔), 검마(劍魔), 복마(伏魔), 독마(毒魔), 도마(刀魔), 음마(音魔)로 이루어진 여섯 종파는 대대로 교주를 배출한 외가 종파였다. 맹약에 의거해 교주는 여섯 종파의 규수를 처로 맞이해 그 후손을 낳게 되는데, 일정 나이가 될 때까지 외가에서 자라나게 된다. 외가에서 자라온 여섯 후계자들은 십 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후기지수 및 고수를 육성하는 마도관에 입문하게 된다. 마도관은 마교에서 세대별로 새로운 고수를 배출하기 위해 만든 연무관이다. 평소에 마도관의 연무관은 오 년 주기로 상중하급 무사육성을 하게 되는데, 십 년마다 이루어지는 이 시기에는 마도관과 맞물려서 같이 진행하게 된다. 마도관은 마교 내에 있는 뛰어난 고수들을 교두로 배치하여 입문 생도들의 무공을 한계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목적이다. 이것은 교내에서 공식적으로 드러난 목적이었다. 십 년의 주기로 행해지는 마도관이 유독 가장 격렬한 경쟁이 일어나는 시기가 있다. 그것은 소교주 후보들이 참여하게 되는 시기의 마도관이었다. 이 시기의 마도관을 일컬어 마교인들은 소교주 쟁탈전이라고 불렀다. 이때의 마도관으로 입문한 여섯 종파의 소교주 후보자들이 서로 대립하면서 승부를 겨루고, 자신들만의 세력을 구축해나가는 발판을 만들기 때문이었다. 마도관에는 여섯 종파 외에도 마교 내에 있는 수많은 종파들과 무가들이 참여하기 때문에 소교주 후계자들은 여기서 자신의 종파 외의 조력자들을 키워나가게 된다 오랜 세월 동안 이렇게 이뤄진 소교주 쟁탈전에서 승리한 자는 소교주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슥슥! 목욕을 마친 천여운이 물기를 닦으며 동경(銅鏡)에 비친 자신의 나체를 바라보았다. 잦은 암살 시도로 인해서 집밖으로 제대로 나갈 수 없었던 천여운은 제대로 된 무공조차 배우지 못하고 집안에서 팔굽혀펴기와 같은 기본적인 운동만 해왔다. 그런데 지금 그의 육신을 보면 상당한 외공 훈련이라도 한 것처럼 균형 잡힌 근육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노 머신. 이게 말이 되는 거야?’ [주인님의 육신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재구성?’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지만, 기존의 육신과 근맥을 재구성해서 다듬은 것이기에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어려운 말만 골라서 잘 하네.’ 무공을 제대로 익히진 못했어도 학문을 익히는 것을 게을리 하진 않았다. 그런데도 나노 머신이 그에게 하는 말들은 일반적인 학문에서는 배울 수 없었던 어렵고 다양한 언어 표현을 자랑했다. 옷을 입은 천여운이 말끔해진 모습으로 욕실을 나가 숙소 내에 있는 서재로 향했다. ‘너를 부를 때마다 나노 머신이라고 하니깐 발음도 하기 힘들고 좀 긴데, 다른 이름은 없어?’ [주인님께서 원하시는 호칭을 지어서 불러주셔도 됩니다.] ‘.....특별히 생각나는 건 없는데 그냥 나노라고 할까?’ 생각해보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나노를 한자로 바꾸면 말할 나(喇)와 일할 노(勞)인데, 그가 자신의 몸에서 하는 것이라고는 말을 하고 일을 하는 것이니 가장 어울리는 호칭 같았다. [나노라는 호칭으로 등록하겠습니다.] ‘내가 이름도 지어줬는데 뭐 감사하다는 말도 없나?’ 뒷글자만 떼고 앞의 글자로 이름을 지어놓고 감사를 바라는 천여운이다. 하지만 인간이 아닌 나노 머신이 그런 농담을 이해할 리가 없기에 기계적으로 답변했다. [감사합니다.] ‘......그래.’ 이름을 얻게 된 나노 머신, 나노는 희노애락의 감정이 없어서 대화를 나눌 때마다 그가 인간이 아닌 기계라는 것을 점점 익숙해지는 천여운이었다. 그의 전용 서재에는 그리 많은 책들이 있지 않았다. 대다수가 학문에 관련된 것들이었고 무공 비서들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유일한 관련 서적은 혈도(穴道)에 관한 서적과 삼재심법(三才心法)의 운기법을 적어놓은 서적 정도만 있는데, 중원 무림인들 모두가 알고 있는 기본 토납법에 불과했다. 삼재심법은 도가에도 능통한 귀곡자가 창안한 가장 기초적인 도가 토납법으로 이 심법을 평생 동안 연마해도 쌓을 수 있는 내공은 몇 년에 불과했다. 애초부터 무공 연마보다는 심신 단련을 위해 만들어진 토납법에 불과하니 삼재심법으로는 삼류고수에 오르기도 힘들었다. ‘빌어먹을 놈들.’ 이것도 전부 여섯 종파의 부인들의 농간이기도 했다. 여섯 종파 외의 여시종의 태생인 천여운에게도 소교주 후보로써의 자격이 있기에 그녀들에게 있어서 더욱 눈에 가시와도 같았다. 하지만 비록 태생이 그렇다고 하여도 천여운 역시도 교주의 피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대놓고 해코지를 할 수 없었던 그녀들은 마도관에 입문하여 후계자 쟁탈전이 있기까지를 기다려야만 했다. 하지만 그 십 년이라는 세월을 여섯 종파의 부인들이 마냥 기다릴 리가 만무했다. 여섯 종파의 부인들은 음모를 꾸며 미독으로 죽어가는 천여운의 모친 화 부인 앞에서 그가 마도관으로 입관하기 전까지 무공을 익히지 않겠다는 맹약을 맺게 만들었다. 그 덕분에 천여운은 열다섯의 나이가 되도록 삼재심법 외에는 어떠한 것도 익힐 수가 없었다. 이것도 교주가 몰래 사람을 보내서 가져다 놓은 것이었다. 열다섯이 되도록 기본 토납법이라도 익히지 못한다면 근맥과 혈맥이 전부 굳어져서 마도관에 입문해도 어떠한 내공심법도 익힐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천여운의 숙소를 수시로 감시하는 여섯 종파에서도 삼재심법 만큼은 별달리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기에 그냥 내버려두었다. ‘자 이제 한 번 해볼까.’ 천여운이 서재의 책장에서 혈도를 정리한 서적을 꺼내었다. ‘어떻게 하면 되는데?’ [책을 정면으로 보시면서 한 장씩 해서 끝장까지 넘겨주시기 바랍니다.] ‘그냥 훑어보기만 하면 되는 거야?’ [네. 시작해 주십시오.] 주객이 전도한 느낌이었지만 천여운은 미덥지 못한 눈빛으로 혈도 관련 서적의 책장을 하나씩 넘겼다. 읽지도 않고 넘기기만 하니 금방 마지막 장까지 왔다. 그런데 여기서 천여운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의 동공의 초점이 굉장히 빠른 속도로 흔들리고 있었다. ‘다 넘겼는데?’ [혈도(穴道) 서적의 내용 스캔을 완료하였습니다. 사용자의 뇌로 전이하려고 합니다. 승인하시겠습니까?] ‘스캔? 아! 내용을 복제했다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럼 전이를 승인하시겠습니까?] ‘승인한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까 전, 숙소에서 나노 머신 사용설명서를 전이 받았을 때와 같은 느낌이 엄습해왔다. -파칙! 머리속이 전격이 튀는 것처럼 따끔거리기 시작하더니 천여운의 머릿속에 영상이 새겨지듯 정보가 물밀 듯이 들어왔다. 순간 어지러움을 느낀 천여운이 자신도 모르게 서재의 책상의 귀퉁이를 붙잡았다. 아까 전만큼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어지러웠다. [스캔 내용 전이가 완료되었습니다.] “하아...하아...” [금방 적응하실 겁니다.] ‘혹시 걱정한 거냐?’ [사실을 말씀드린 겁니다.] 기계인 나노가 걱정이라는 감정을 알 리가 만무했다. 그래도 나노의 말대로 아까 전에 전이를 받았을 때보다도 금방 어지러움이 가셨다. ‘이제 끝난 거야?’ [사용 설명서 전이를 받으셨을 때처럼 관련 정보를 생각하듯이 시도하시면 됩니다.] 나노의 말대로 천여운은 혈도에 관한 생각을 시도해보았다. 그 순간 놀랍게도 그의 머릿속에 읽지도 않았던 혈도에 관한 정보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혈도는 인체를 흐르는 경락과 락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점으로 혈(穴)이라고도 부른다. 대표적으로 점혈(點穴)과 극혈(郄穴)이 있다. 점혈은 손가락으로 찔렀을 때 일시적으로 마비가 된다고 하여, 마혈(痲穴)이라고도.....말도 안 돼! 하하?’ 믿기 힘들었다. 읽지도 않은 서적의 내용을 통째로 머릿속에 집어넣은 것이었다. 그냥 단순히 전이된 것이 아니라 그 내용 자체가 완전히 이해가 될 정도였다. [서적 내용 중에서 오류가 된 부분은 자동 수정해서 전이해드렸습니다.] ‘오류? 틀린 부분이 있었어?’ [혈자리에 관한 오류 정보가 기재되어 있어서 프로그램에 내장되어 있는 정보를 바탕으로 수정하였습니다.] 먼 미래에서 만들어진 나노 머신에는 수많은 정보가 저장되어 있다. 천여운이 그에게 시험 삼아서 스캔해서 전이하라고 한 혈도 서적 중에는 인체 해부가 완전하게 완료되지 않은 미래보다도 정확하지 않았기에 나노 머신이 임의로 수정을 한 것이었다. “이거 완전 사기잖아. 하?” 천여운은 나노 머신이 잘못된 혈도 정보를 수정한 것보다도 너무 쉽게 서적 내용을 익힐 수 있게 만드는 전이 능력이 사기적이라고 생각했다. 학문을 수양하고 익히기 위해선 통째로 이해하고 외워야 했는데, 이런 방법이라면 고생해서 뭔가를 익힐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었다. ‘통째로 집어넣기만 하면 되잖아!’ 직접 몸으로 나노 머신의 엄청난 능력을 체험하게 되자, 천여운의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지금 자신의 서재에는 아무 것도 없지만 마도관에 입관하게 되면 다르다. 마도관의 무고 서재에는 기존의 마교에 있는 모든 무공 관련된 서적들과 정파와 사파에서 약탈해온 무공 서적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입관했을 때 여섯 종파의 후계자들이 방해를 하겠지만 무고 서재에만 들어갈 수 있게 된다면 누구보다도 빠르게 무공 비서들을 외우고 습득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였다. ‘마도관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강해져서 살아남는다! 지금은 그걸 목표로 하자!’ 지금 당장에 후계 서열 전쟁에서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제 막 시작 단계인 그와 다르게 그들은 입에 젖을 물 적부터 벌모세수 등을 비롯해 각종 상승무공을 익혀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빠르게 강해지는 것만이 천여운이 여섯 종파의 후계자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이때 천여운은 알지 못했다. 나노 머신의 진정한 능력은 단순히 정보 전이 능력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3장 마도관 입관(1) 천여운의 나이가 열 살 무렵, 잦은 병상에 누워있던 어머니 화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당시에 그녀가 위독하다는 이야기를 접해 들은 교주가 주치의였던 마의 백종우를 보내주었지만 이미 회생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훗날 알게 되었지만 그의 어머니인 화 부인은 미독(微毒)에 당했다고 한다. 음식에 소량의 독을 넣어서 일정 시간이 흘러서 그것이 쌓이게 되면 죽게 되는 것이 미독이었는데, 자연스럽게 상대를 암살하기 위한 용도였다. 천여운 역시도 미독에 중독된 상태였지만 화 부인 만큼은 쌓이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백종우가 해독단을 처방해주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 후로 천여운의 식사는 매일 같이 장 호위가 준비해야만 했다. 무공에 있어서 일류 고수인 장 호위는 매일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 전에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무공 수련을 했다. 언젠가 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천여운은 새벽 일찍 일어나 무공을 수련하는 장 호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원래는 타인의 독문 무공을 훔쳐보는 것은 무림 법도 상 결례인 행동이었지만 무공을 익힐 수가 없는 천여운을 안타깝게 여긴 장 호위가 이를 알고도 늘 모른 체했다. -휙휙! 오늘도 새벽에 일찍 일어난 장 호위가 상의를 탈의하고 독문 무공인 단검비술(短劍備術)을 연마하고 있었다. 대개 훈련은 기본 동작인 식(式)을 반복하는 것에서 초식(招式) 훈련으로 이어진다. ‘벌써 오늘이구나.’ 사실 마도관에 들어간다는 것 때문에 긴장된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한 천여운이었다. 마도관에 입관하게 되면 더 이상 장 호위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다. 밤잠을 설치고 장 호위의 무공 훈련을 지켜보는 천여운의 눈빛은 씁쓸하기만 했다. ‘차라리 장 호위의 무공이라도 몰래 배우고 들어갔으면 나았을까?’ 장 호위가 무공 수련을 할 때마다 늘 들었던 마음이지만 그의 숙소 주변에서 감시하는 여섯 종파의 이목을 살 수 없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바로 그때 그의 머릿속에 나노 머신, 나노의 목소리가 울렸다. [장 호위의 훈련 동작을 스캔하시겠습니까?] ‘뭐?’ 뜬금없는 나노의 말에 천여운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책을 읽는 것이야 그렇다 치고 지금 훈련하고 있는 동작들을 뭘 어떻게 하겠다는 말인가? ‘상대의 동작 같은 것도 스캔이 가능한 거야?’ [스캔이 가능합니다.] ‘네 말대로라면 장 호위의 무공 수련 동작을 스캔이라는 걸 해서 머릿속에 전이시킬 수 있단 말이지?’ [가능합니다. 제 프로그램에 저장된 데이터 중에서도 여러 무술이 등록되어 있어서 지금이라도 주인님에게 전이시킬 수 있습니다.] 천여운은 모르겠지만 제 7세대 나노 머신이 만들어진 미래의 과학기술은 현 시대의 사람들이 상상을 불허할 만큼 발달해 있다. 미래에는 직접 학습을 하지 않고 전이를 통해 정보를 습득하고 기술을 익힐 수 있기 때문에 대다수의 미래인들은 학습에 대한 욕구가 높지 않다. 장 호위의 허락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정오가 되면 마도관으로 입관하게 된다. 그때가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천여운으로써도 짐작하기 힘들었다. 고민하던 천여운이 결정을 내렸다. ‘좋아. 스캔 해줘.’ [동작 스캔을 가동합니다.] 천여운의 동공이 빠르게 흔들리며 나노 머신이 장 호위가 훈련하고 있는 동작들을 스캔하기 시작했다. 반 시진 가량을 훈련하는 모습을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쳐다본 천여운의 머릿속에 나노의 목소리가 울렸다. [동작 스캔이 완료되었습니다. 사용자의 뇌로 전이를 시작합니다.] -치칙! 머릿속이 전격이 튀는 느낌과 함께 장 호위가 했던 동작들이 영상으로 그려지며 천여운의 뇌 속에 새겨지기 시작했다. 불과 얼마 되지 않는 사이에 전이가 모두 완료되었다. [전이 완료.] 약간의 어지러움과 속에 메스꺼웠지만 전과 다르게 충분히 견딜 만 했다. 잠시 어지러움에 호흡을 가다듬은 천여운의 눈빛이 놀라움으로 반짝였다. 서책을 스캔해서 머릿속으로 전이 했을 때도 신기했지만 지금은 뭐라고 표현할 길이 없었다. ‘나노.....이게 말이 돼? 나 장 호위의 단검술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혹시나 장 호위가 볼까 싶어 창문을 닫은 천여운이 방에서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것은 장 호위가 단검술을 펼치기 전에 취하는 기수식이었다. -파팟! 천여운이 단검을 쥔 자세로 팔을 휘저으며 장 호위의 단검비술을 펼쳤다. 배우거나 익힌 것도 아니었는데, 놀랍게도 그의 동작은 숙소 바깥의 마당에서 장 호위가 펼치던 동작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이십 년 가까이 단검비술을 연마한 장 호위의 동작과 완전히 동일했다. 무공을 연마하는 무인들이 매일 같이 반복된 초식 훈련을 하는 것은 정해진 자세를 완벽하게 가다듬고 그것을 몸으로 숙달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천여운은 전이를 통해 그런 과정을 완전히 무시한 채, 뇌에 새겨버린 것이었다. 신이 나서 단검비술의 초식을 펼치는 그의 머릿속에 나노의 목소리가 울렸다. [스캔한 동작 훈련을 했을 때 발달되는 근육 섬유질 및 근맥 발달에 대한 분석 정보가 완료되었습니다. 신체 근육으로 전이하시겠습니까?] ‘신체 근육에도 전이해야 한다고?’ 초식을 계속 펼치면서 의아해진 천여운이 물었다. [동작 훈련을 반복 했을 때 생기는 근육 발달 전이가 완료되지 않으면....] -욱씬! “으윽!” 나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천여운이 전신 근육에 통증이 느껴졌다. 그것은 단순한 통증이 아니라 근육통이었기 때문에 경련이 일어나 몸을 움직이기 힘들 정도였다. [반복 훈련을 통해서 생겨나는 근육 섬유질 및 근맥 발달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동작을 펼쳤기 때문에 근육 및 근맥 손상이 일어났습니다.] ‘전이라는 걸 해줘서 그럭저럭 알아듣지만 그래도 조금 쉽게 말해줘.’ 통증으로 몸을 절면서 겨우 침대에 걸터앉은 천여운이 투덜거리며 생각했다. [사용자의 언어 수준에 맞게 용어 변환을 합니다.] ‘언어 수준?’ 뭔가 무시를 당한 기분 같았지만 알아듣지 못한 것은 확실하기에 천여운은 말없이 인상만 구겼다. [용어 변환 완료. 주인님이 오랫동안 장 호위의 무술을 훈련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뇌에 전이가 되었다고 해도 몸이 적응한 것은 아닙니다. 시뮬레이션을 통해 훈련 동작을 완전히 몸에 숙지했을 때 발달될 근육 정보를 전이해야 완전히 동작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뭔가 아까보다는 쉽긴 한데, 그래도 어렵네.’ 나노가 하는 용어의 대개는 현 시대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와는 동떨어졌기 때문에 아무리 쉽게 변환해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사용자의 언어 수준을 최하위 단계로 조정하시겠습니까?] ‘......대충은 알아들었거든. 시뮬레이션이라.’ 시뮬레이션이라는 곱씹자 머릿속에 문제 해결을 위해서 실제와 비슷한 훈련을 가상으로 분석 및 예측하는 것이라는 정보가 떠올랐다. ‘그럼 네 말대로 근육에도 그 전이인가를 완료하면 근육통 같은 건 일어나지 않는 거야?’ [그렇습니다. 전이를 시행하겠습니까?] ‘이것도 금방 되는 거지?’ [근육 변환은 체내에 있는 나노 머신들을 전부 가동해야 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로딩 시간이 걸립니다.] ‘로딩? 진행 시간이란 말이지? 대충 어느 정도 걸려?’ [근육 섬유질 및 근맥 변환까지 한 시진이 소요될 예정입니다.] 아직 새벽이었기 때문에 한 시진(2시간) 가량이면 아직 시간 여유는 충분했다. 너무 오래 걸릴까봐 걱정했던 천여운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전이 승인을 허락했다. [근육 섬유질 및 근맥 변환 전이에는 강한 통증을 수반하기 때문에 잠시 수면마취 상태에 들어갑니다.] ‘많이 아픈 가보네.’ [강한 통증이 동반됩니다. 근육 변환 전이로 인한 기절 사례들이 총 이백삼십 오만 사례들이 있습니다.] ‘한 번 해볼까?’ 이상하게 오기가 생긴 천여운이 잠시 고민하더니 물었다. 한 차례 주의 경고를 했던 나노는 우려와 걱정이라는 감정이 없기에 주인의 의사를 존중했다. [수면 마취를 하지 않고 해보시겠습니까?] ‘......혹시 못 버티면 수면 상태로 바꿔줄 수 있어?’ 괜한 걱정이 된 천여운은 살짝 도망갈 퇴로를 만들어 두었다. 그리고 이윽고 자신의 준비해둔 퇴로가 잘못 되지 않았음을 인지하게 된다. [전이를 시작합니다.] -파르르르르! 천여운의 체내에 있던 팔만육천칠십다섯 개의 나노머신이 근육 섬유질과 근맥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하자 처음에는 간지러움이 느껴졌다. ‘긴장했는데 별 것...’ 아니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노 머신들의 근육 변환이 시작되었다. -우드드드득! “컥!” 단말마의 비명이 흘러나왔다. 전신의 근육이 뒤틀리면서 엄청난 고통이 몰려오며 천여운의 눈이 일순간에 뒤집혔다. 소리를 지르면 안 되는 상황이긴 한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끄으으으으아아아...” 천여운이 미칠 듯이 온몸을 뒤틀며 비명을 지르려는 전조가 오자 나노의 목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수면 마취를 가동합니다.] “끄르르르르.” 천여운은 거품을 물면서 잠이 들었다. 3장 마도관 입관(2) 새벽 훈련을 마친 장 호위는 미리 준비해둔 식재료를 가지고 부엌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원래는 요리는커녕 밥을 짓는 것조차 할 줄 몰라 서툴렀던 그였다. 그러나 오 년 전에 있던 음식에 들어있던 미독으로 인한 화 부인의 죽음 이후, 매일 같이 부엌에 들어가야 했던 그는 지금은 장족의 발전을 해서 웬만한 동네 숙수들 못지않게 요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평소에는 간단한 아침 식사 준비를 했지만, 어제 저녁에 공수해온 신선한 붉은 돼지고기를 비롯해 달걀까지 준비한 그였다. 정오가 되면 천여운이 마도관에 입관하기 때문에 제법 신경 쓴 것이었다. 어쩌면 그가 마지막으로 안심하고 식사를 할 수 있는 순간이 될 수도 있기에 최대한 천여운이 좋아하는 식단을 준비하려는 장 호위였다. ‘꼭 살아남으셔서 다시 식사를 해드리면 좋을 련만.’ 붉은 돼지고기의 결을 썰며 감상에 젖어 있던 장 호위의 귓가에 작지만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끄으으으으아아아...” 부엌이 천여운의 숙소에서 가깝기 때문에 이 정도의 소리는 쉽게 감지할 수 있다. 화들짝 놀란 장 호위가 부엌칼을 내던지고 천여운의 숙소로 뛰어갔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 보니 천여운이 거품을 물고 침대에 바로 앞에 상반신만 걸쳐서 쓰러져있었다. “공자님!” 놀란 장 호위가 그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입에 거품을 물고 있기는 했지만 호흡을 들어보니 잠이 든 것 같았다. 꼭 이틀 전에 그곳에서 쓰러진 것을 발견했을 때처럼 말이다. ‘대체 뭘 하고 있었길래....엇?’ 의아해하던 장 호위의 눈에 숙소 바닥에 희미하게 파여진 발자국이 들어왔다. 장 호위는 잠이 든 천여운을 침대에 제대로 눕힌 뒤에 조용히 발자국을 살폈다. ‘설마?’ 아니겠지 라고 생각하던 장 호위는 파여진 발자국을 따라 자신의 발을 갖다 대고 움직여보았다. 장 호위의 동공이 흔들렸다. 바닥에 희미하게 새겨진 발자국은 그의 독문무공인 단검비술의 보법이었다. 그냥 단순히 걷는 발자국은 바닥에 쉽게 새겨지거나 하지 않지만, 모든 무공은 보법을 기초로 하기에 진각이 들어가면서 이런 나무 재질의 바닥이 파여지곤 한다. ‘하? 공자님이 단검비술을 혼자서 터득했단 말인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자신의 독문무공을 훔쳐 배워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발자국의 보폭을 따라서 움직여 보았는데, 그가 이십 년 동안이나 훈련해온 것과 완전히 동일했다. 적어도 수 년 동안은 식을 훈련하고, 그것이 완성되고 나면 초식을 몇 년 동안이나 연마해야만 이런 자세가 나올 수 있다. ‘공자님이 내 수련을 지켜본 것은 고작해야 이 년 정도에 불과하다.’ 새벽 훈련과 식사 시간을 제외한다면 늘 천여운의 곁을 지키는 장 호위였다. 그렇다면 천여운은 그가 새벽에 수련을 하는 동안에만 그의 동작을 따라했다는 결론이 내려지는데, 그것이 장 호위를 전율스럽게 만들었다. ‘고작 이 년 만에 눈으로 훔쳐 배워서 나의 이십 년을 따라잡았단 말인가.’ “하.....” 허탈해지기마저 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이상하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의 기억 속에 천여운은 항상 보호해줘야 할 대상이었으며 소중하게 생각했던 그녀의 아들이었다. 천여운의 천재성을 발견하고 나니 뭉클해지기마저 했다. 장 호위가 조심스럽게 천여운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손목의 맥을 짚어보았다. ‘내공은 거의 전무하다. 초식만 터득했구나.’ 오히려 그것이 잘 된 것일 수도 있다. 괜히 내공을 익히고 있던 것이 알려진다면 괜히 여섯 종파의 노여움만 살 것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시간이 나는 틈틈이 직접 초식만이라도 가르칠 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 장 호위였다. “아!” 감상에 젖어 있던 장 호위는 미처 깜빡한 것이 생각났다. 일단 천여운이 깨기 전에 아침 식사를 마저 만들어야만 했다. 아직 밥솥도 올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장 호위는 부엌으로 돌아갔다. 한 시진의 시간이 지났다. [동작에 관한 근육 섬유질 및 근맥 변환이 완료되었습니다. 마취 수면 상태를 해제합니다.] -치칙! 머릿속에 자극이 일어나며 잠이 들어있던 천여운이 정신을 차렸다. “허억!” 마지막으로 기억하던 것이 고통에 온몸을 뒤틀던 것이었기 때문에 깨어난 순간, 호흡을 가다듬을 수가 없었다. “헉....헉....” 천여운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다시 그 고통을 경험하라고 한다면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단순히 근육통을 겪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데, 근육의 섬유질과 근맥이 변환되느라 뒤틀리는 고통을 제 정신으로 견디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었다. “하아....하아....내가 다시는 이걸 하나 봐라.” [분명히 주인님께 경고를 드렸습니다.] “.....그래.” 분명 나노의 경고를 무시한 것은 천여운 본인의 선택이었다. 거친 호흡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천여운은 침대에서 일어나 숙소 한 가운데로 가서 단검비술의 기수식 자세를 취해보았다. ‘이제 단검비술을 해도 아프지 않겠지?’ [시뮬레이션으로 이십 년 동안 반복 훈련을 한 것과 동일한 상태로 근육 섬유질과 근맥을 변환시켰습니다.] ‘좋아!’ 나노의 확답을 들은 천여운이 기수식을 취한 상태에서 단검비술을 펼쳐보았다. -파파파팟! 천여운이 휘두르는 손짓에 담긴 힘이 아까와는 사뭇 달랐다. 휘두를 때마다 바람을 가르는 느낌이 경쾌하고 동작에 맺고 끊음이 더욱 정확해졌다. -파팍! 제 이 초식을 펼치기 위해 보법을 밟은 순간, -쿵! 나무로 만들어진 바닥이 흔들리며 크게 울렸다. 동작이 완성되었을 때의 진각은 단순히 동작을 취할 때와는 그 힘 자체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헉!” 자신이 밟은 진각에 도리어 놀란 천여운이 단검비술의 이 초식을 펼치던 것을 멈췄다. 나무 바닥에서 발을 떼고 나니 선명하게 그의 발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큰일 났네.” 혹시나 나중에 장 호위가 이걸 보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내공을 익히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발자국이 남는 구나.’ 천여운은 이것을 매우 신기해했지만 실상 무공이라는 것은 반복된 훈련을 통해 발달된 외공을 통해 초식을 완성하고, 그 초식에 맞는 운기법을 통해 내공을 가미함으로써 그 위력을 더하는 이치였다. 반복 훈련으로 완성될 근육과 근맥 섬유질이 생김으로써 단검비검의 외공을 완성시킨 것이었다. 이미 장 호위에게 들킨 줄도 모르고 바닥에 파인 자국을 걱정하는 사이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공자님, 식사를 들고 왔습니다.” 장 호위였다. 다급한 마음이 든 천여운은 바닥에 파인 옆을 발로 꾹꾹 눌러서 흔적을 지워보려 했다. 하지만 그게 쉽게 없어질 리가 만무했다. 그러는 사이에 문이 열리며 장 호위가 들어왔다. “공자님?” “아아! 오늘따라 참 배고프네.” 당황한 천여운이 괜히 큰 동작을 취하며 창가 쪽에 있던 탁자를 가운데로 끌고 왔다. 장 호위가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항상 창가에서 식사를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 이제 당분간 숙소로 돌아오지 못하니, 안쪽에서 먹고 싶네.” 말까지 더듬는 태도가 의심스러울 만도 했지만 장 호위는 말없이 탁자 위에 아침식사 음식을 담은 쟁반을 내려놓았다. 겨우 넘어갔다고 생각한 천여운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앉았다. “아!” 아침 식사는 그가 좋아하는 돼지 구이과 청경채 볶음, 그리고 기름에 구운 계란을 올려놓은 밥이었다. 여섯 종파의 후계들이 먹는 화려한 진수성찬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천여운에게 있어서는 매우 호화로운 아침이라고 할 수 있었다. 평소와 달리 좋아하는 음식들로 이루어진 아침 식사에 천여운의 표정이 묘해졌다. 오늘 마도관에 입관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에 배려한 장 호위의 마지막 아침 식사였다. 젓가락을 들어 식사를 시작한 천여운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목이 막혔다. [급격한 감정 변화로 인해 식도로 위산이 역류합니다. 침샘 분비를 자극하겠습니다. 음식물과 침을 삼켜서 위산 분비를 가라앉히십시오.] ‘이상한 말 좀 그만 지껄이고 좀 닥치고 있어!’ [일시적으로 음 소거 모드에 들어갑니다.] 나노의 목소리가 조용해지자 천여운이 입에 담고 있던 음식을 삼켰다. 장 호위가 신경써서 해준 마지막 아침이니 남길 순 없었다. 밥알 하나 남기지 않고 식사를 마칠 무렵 말없이 가다리고 있던 장 호위가 입을 열었다. “언제 제 단검술을 훔쳐...” 그래도 모시는 공자님한테 차마 훔쳐 배웠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아니, 배우신 겁니까?” “아!....그, 그게 무슨 말 인지?” 괜한 감상에 빠져있던 천여운은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장 호위의 일격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장 호위가 쟁반이 놓인 탁자를 옆으로 옮기며 숙소 바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바닥에는 선명하게 찍혀있는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천여운이 가린다고 미처 몰랐는데, 바닥에 남은 자국이 아까보다도 더욱 선명했다. ‘역시 내 눈이 틀리지 않았구나.’ 확실하게 파인 자국은 단검비술의 제 이 초식을 펼치기 직전에 밟은 진각이 틀림없었다. 아무리 무공을 익히지 않은 천여운이라고 할지라도 마교에서 나고 자랐으니 무림에서 금기시하는 법도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타인의 무공을 훔쳐 배우는 것은 경멸의 대상이었다. “그, 그게.....” 나노 머신의 능력에 빠져서 무공을 훔친 셈이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보다도 실망스러워할 장 호위의 눈을 볼 자신이 없었다. 당황스러워서 아무 말을 하지 못하고 앉아있는 천여운을 향해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춘 장 호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잘하셨습니다.” “아.....” “몰래 배우면 어떻습니까? 저는 공자님의 사람입니다. 여섯 종파의 맹약만 아니었다면 애초부터 가르쳐 드리려고 했었습니다.” “.....장 호위.” 화를 낼 거라 생각했던 장 호위의 부드러운 말에 천여운의 눈시울이 더욱 붉어졌다. 항상 그를 돌보고 지켜주었던 장 호위는 그에게 있어서 친아버지보다도 더욱 아버지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장 호위가 품속에서 뭔가를 빼곡하게 적은 종이를 넘겼다. “이건?” “단검비술의 내공 운기요결입니다.” “이걸 어째서 내게?” “내공심법도 드리고 싶지만 마도관에 들어가신다면 제가 가진 내공심법 보다도 훨씬 뛰어난 것들이 많습니다. 그것을 익히십쇼.” 장 호위의 배려에 천여운의 오른쪽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머니인 화 부인의 임종 이후에 다시는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이를 악물고 살아왔던 그였지만 아직 정이 고픈 소년이었다. 눈물을 흘리는 소년을 배려해서인지 장 호위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 먹은 쟁반을 들고 숙소 밖으로 나가려했다. 그러더니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말을 했다. “오늘만 흘리시고, 이제부터는 더욱 독해지셔야 합니다.” “......고마워.” 어제부터 아니, 늘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눈물을 훔치고 마음을 가다듬은 천여운에게 더 이상의 망설임과 두려움은 사라졌다. 화 부인이 없더라도 자신에게는 아직 돌아올 장소가 있었으니 말이다. 시간이 지나 정오가 될 무렵, 마교 성내 거리는 수많은 사람들로 넘쳐나고 발걸음 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마도관의 입관식이 곧 진행되기 때문이었다. 마교의 모든 무도 종파에 속하는 십사 세에서 십구 세의 소년들이 전부 마도관으로 모이고 있었다. 3장 마도관 입관(3) 마교는 그 근간이라 불리는 여섯 종파와 삼대 호법가, 그리고 수백에 이르는 수많은 무도 종파들로 이루어져 있다. 마도관은 십 년을 주기로 새로운 인재육성을 위해 만들어졌다. 이번 시기에는 소교주 후보자들이 마도관에 입관하기 때문에, 모든 종파의 사람들은 이번 마도관의 입관을 소교주 쟁탈전이라고 불렀다. 평소와 마도관 입관 때보다도 소교주 쟁탈전이 치르게 되는 이때에는 다른 수많은 종파들에게 있어서 차기 소교주의 밑으로 들어갈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수많은 무도 종파들에 속하는 소년, 소녀들이 전부 모였다. 그들의 수만 하더라도 거의 천 명에 육박할 정도였다. 마도관 입구에 들어가면 바로 펼쳐지는 대연무장의 크기는 그 인원을 전부 수용하고도 남을 만큼 넓었다. 대연무장에 서있는 수많은 소년들의 얼굴에는 긴장감과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마도관의 입관식에는 마교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교주가 참석해서 그 얼굴을 뵐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었다. 평범한 종파의 사람들은 특별한 행사가 있거나 대회가 아니고는 교주의 얼굴을 볼 기회가 없기에 그들의 기대감은 클 수밖에 없었다. 그때 조용하던 연무장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퍼져 나왔다. “저길 봐! 좌호법께서 오셨어.” “좌호법이 오셨으니 교주님도 곧 오시겠군.” “생전 처음으로 교주님의 존안을 뵙게 되다니!”. 대연무장의 앞쪽 단상의 좌측으로 걸어 들어오는 긴 붉은 머리카락을 날리고 있는 중년인이 소년들을 바라보며 내심 비웃음을 흘렸다. ‘멍청한 것들. 이번 기수들은 엉망이군. 이게 마지막일 수도 있는지도 모르고.’ 붉은 머리카락의 중년인은 교주의 측근인 좌호법 염왕(炎王) 이화명이었다. 교주에게는 그를 지키는 수신호위라 불리는 세 호법이 있다. 대호법, 좌호법, 우호법으로 나뉘어져서 그들은 오직 교주의 명만을 이행한다. 항상 교주의 곁에서 그를 지키는 대호법과 대내외적으로 교주의 명을 이행하는 좌우호법들은 마교 내에서도 무위가 서열 십위 권에 드는 강자들이었다. ‘흐음. 이번에 참가하게 될 여섯 종파의 공자들인가?’ 좌호법 이화명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맨 앞 열에 서있는 소년들에게로 향했다. 대연무장으로 들어올 때 모든 마도관에 입관하는 소년들에게 둥근 명찰이 주어지는데, 그곳에는 숫자가 기입되어 있었다. 대다수의 참가자들은 들어오는 순서대로 숫자가 주어지지만 유일하게 예외적인 이들이 있었으니 여섯 종파의 소교주 후계자들이었다. ‘애송이들 주제에 제법 기세가 좋군.’ 모든 소년들이 열을 맞춰서 서있는 반면에 여섯 종파의 소년들은 맨 앞 열에 우뚝 서서 마치 자신들이 이들의 정점이라고 자부하는 듯 했다. 흰색 명찰에 검은 먹으로 숫자가 기입된 그들과 달리 교주 직계 혈통인 그들은 검은 명찰에 붉은 색 숫자가 기입되어 있다. 후계자 서열대로 번호가 주어진 그들은, 일번 현마종(玄魔宗) 천무연. 이번 검마종(劍魔宗) 천경운. 삼번 복마종(伏魔宗) 천무금. 사번 독마종(毒魔宗) 천종섬. 오번 도마종(刀魔宗) 천유찬. 육번 음마종(音魔宗) 천원려. 숫자로만 기입이 되어 있었지만 소교주 후계이기에 그들의 이름을 전부 숙지하고 있는 좌호법 이화명이었다. 저번 소교주 쟁탈전에는 독마종과 도마종에서 두 명의 여성 후보가 나왔었는데, 이번에는 음마종에서 유일하게 여성 후보가 나왔다. 이때까지 소교주 쟁탈전에서 여자 후보가 승리했던 적은 역대 단 한 번뿐이었기에 큰 기대를 하진 않는다. ‘올 녀석들은 전부 왔는데, 그 녀석은 보이지 않는군.’ 이화명이 맨 앞 열부터 주욱 살펴보았지만 찾고 있는 녀석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이번 마도관의 입관자들 중에서 마교의 수뇌부들에게 다른 의미로 모두의 관심을 받고 있는 소년이 있다. '저기에 있었군.' 한참을 찾아 헤매던 이화명의 눈에 드디어 소년이 들어왔다. 검은 명찰을 차고 있지 않았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도관의 입구 쪽, 즉 소년들이 서있는 맨 마지막 열의 중간에 혼자 우두커니 서있는 천여운을 발견했다. ‘여섯 종파 외의 소교주 후계자.’ 소교주 후계자임에도 불구하고 천여운은 맨 앞 열로 오지 못하고 뒤에 서있었다. 심지어 주변에 있는 소년들에게 거의 배척당하는지 혼자만 열에서 툭 튀어나와 있는 모습이 꽤나 난처해보였다. ‘재밌는 방식으로 주목을 사는구나.’ 그 모습이 재미있어서 흥미를 사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듣기로는 무공을 전혀 익히지 않아서 범인이나 마찬가지라 들었는데, 소문대로라면 입관식에서 그대로 탈락하게 될 것이다. ‘진짜 많네.’ 천여운은 맨 뒤쪽에 있다 보니 천 명에 이르는 소년들의 수를 실감할 수 있었다. 가장 늦게 온 것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명찰이 없다고 대기를 하라는 통에 모두가 입관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덕분에 검은 명찰을 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앞 열로 갈 수가 없었다. 보나마나 여섯 종파들 중에 누군가의 수작인 것이 뻔했지만 어차피 상관없었다. ‘뭐, 처음부터 저들과 마찰이 있어봐야 좋을 것도 없지.’ 천여운으로써도 그것이 편하기도 했다. 마도관 입관 전부터 시도 때도 없이 그를 죽이기 위해 애를 썼던 녀석들이었다. 얼굴이라도 마주친다면 얼마나 살기등등하게 나올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뿌우우우우! 뿔피리를 부는 소리가 대연무장에 울려 퍼졌다. 좌호법이 처음 왔을 때와는 비교도 하지 않을 만큼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대연무장의 앞에 있는 단상으로 등장한 단 한 사람의 존재 때문이었다. “교주님이시다!” “와아아아아아!” “천마신교 천천세!” 천 명에 이르는 소년들이 대연무장이 떠나가라 함성을 질렀다. 단상 위로 검은 비단으로 만들어져서 붉은색으로 천(天)이라 새겨진 장포를 걸치고 있는 중년인이 단상 위의 수좌에 앉았다. 그는 당대 마교의 교주이자 무림에서 오대고수라 불리는 천유종이었다. 지위를 떠나서 천유종은 강인한 인상과 더불어 풍기는 기세부터가 좌중의 사람들을 압도할 만큼 강렬했다. “고개를 들 수가 없어.” 그렇게 보고 싶어하던 교주의 존안은커녕 눈조차 마주칠 용기가 사라진 소년들이다. 교주의 바로 곁에는 세 호법의 우두머리인 대호법 명왕 마라겸이 서있었는데, 그는 항시 독특한 문양의 가면을 쓰고 있어서 마교 내에서도 그 얼굴을 아는 자가 드물었다. “이크.” 단상의 우측 편으로 술 취한 주정뱅이 마냥 허름한 옷차림으로 비틀대면서 서있는 자는 우호법인 광도(狂刀) 섭맹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자였지만 그 역시도 마교 내에서 상위 열 명 내에 속하는 강자였다. “쯧쯧.” “뭘 꼬라 봐.” 한 손에 술이 담긴 호리병을 들고 비틀대는 섭맹을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염왕 이화명이 쳐다보자 짐짓 찔렸는지 괜히 화를 냈다. 그때 대호법 마라겸이 단상 앞으로 나서서 내공을 실어서 외쳤다. “정숙하라!” 멀리서 듣는데도 뚜렷하게 들리는 큰 목소리에 함성을 지른다고 어수선 하던 장내가 일제히 조용해졌다. “지존이시여. 준비가 되었습니다.” 마라겸이 뒤를 돌아서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연무장이 정숙해지자 수좌에 앉아있던 교주 천유종이 자리에 일어났다. 교주가 대체 무슨 말을 할까 궁금해진 소년들이 침을 삼키며 그를 지켜보았다. “마도관에 입관하게 된 신교의 미래를 책임질 인재들이여.” 큰 소리로 외쳤던 마라겸과 다르게 이야기를 하듯이 말을 하는 교주의 목소리는 장내 전체를 울리다 못해 소년들의 귓속을 파고들듯이 뚜렷하게 들려왔다. 중원 무림의 정점이라 불리는 오대고수에 속하는 교주 천유종이 얼마나 심후한 내공을 지녔는지 짐작하게 만들었다. “입관을 환영한다. 이곳에서 그대들의 무를 쌓아서 신교의 힘이 되도록 해라.” 그것이 끝이었다. 단상 앞에서 뒤를 돌아서는 천유종에게 대호법 마라겸이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교주 천유종은 대호법 마라겸의 호위를 받으며 단상을 내려가 유유히 퇴장했다. 긴 연설을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너무 짧은 연설에 잠시 멍해졌던 소년들이 일제히 다시 함성을 질렀다. “천마신교 천천세!” 쏟아지는 함성 사이에서 천여운의 표정이 묘했다. 열다섯 해를 살아가는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아버지라는 작자와 처음으로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단상 위에서 연설을 하던 교주는 맨 뒷열에 서있는 천여운을 단 번에 찾아냈는데, 그 눈빛에는 따뜻함은커녕 냉정하기 그지없었다. ‘어차피 기대하지도 않았어.’ 화 부인이 죽을 때조차도 얼굴조차 내밀지 않았던 천유종이었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는 법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장내가 다시 정숙해지면서 단상의 앞쪽으로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염왕 이화명이 섰다. “교주님의 입관 축사가 끝났으니 이제 제대로 시작하겠다.” -웅성웅성! “똑바로 서지 못햇!!!!” 귀가 찢어질 듯한 좌호법 이화명의 목소리에 웅성거리던 목소리가 쏙 들어갔다. 붉은 머리카락에 화려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신경질적이고 날카로운 성격의 소유자임은 틀림없었다. “간단하게 설명해주겠다. 잘 들어라.” 이화명이 지금부터 설명하는 것은 마도관이 돌아가는 체계였다. “마도관은 사 년 동안 진행될 것이며 총 여섯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마도관의 운영이 총 사 년에 걸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일반 무가와 중소 종파들 중에는 마도관에 입관하지 않았던 부모나 스승을 모시는 소년들도 더러 있었기에, 좌호법 이화명이 설명하는 여섯 단계로 치르게 되는 시험에 대해 주의깊게 귀를 기울였다. “여섯 단계는 순차적으로 통과 시험을 치를 수 있고, 그것의 도전은 단 한번으로 제한된다.” -웅성웅성! 한 번의 도전뿐이라는 말에 소년들이 혼란스러워했다. 그 말은 도전을 해서 한 번에 통과하지 못하면 영구적인 탈락을 의미했다. “말 귀는 알아듣는 구나. 그래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마도관 생도들은 그 자리에서 방출된다.” 오직 윗 단계로 올라갈 수 있는 기회는 한번 뿐이었다. 야박하게 느낄 수도 있었지만 그만큼 치열한 경쟁과 성장을 요하는 것이었다. 바로 그때 단상 밑의 맨 앞 열에 서있던 십칠 세 정도로 보이는 귀공자처럼 잘생긴 소년이 손을 들며 말했다. “질문이 있습니다.” 검은색 명찰에 이(二)라고 새겨진 소년은 소교주 서열 이위인 검마종의 천경운이었다. 아직 설명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중간에 질문을 하는 당돌함을 보이면서도 그 눈빛은 당당했다. 그러나, “누가 네놈에게 질문을 하라고 했지?” “네?” 검마종 천경운의 잘생긴 미간이 구겨졌다. 마도관에 입관하기 전까지 교주의 혈육이라는 것 때문에 모든 교인들로부터 존대를 받아왔었는데, 대번에 네놈이라고 칭하니 당황스러웠다. “오호라? 네놈이라고 한 것에 불만이라도 있나 보지? 쟁탈전도 하기 전에 조기 탈락하고 싶나?” 좌호법 이화명의 날카로운 말에 천경운은 내심 화가 났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마도관 입관을 하기 하루 전날, 그의 호위무사가 경고했었다. [마도관에 입관을 하는 순간부터는 여섯 종파든, 교주의 혈육이라는 것에 대한 모든 혜택은 일제히 철회됩니다. 그리고 이번 마도관의 관주가 누구로 지정되든지 절대로 그 자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은 삼가시기 바랍니다.] 크게 와 닿지 않았는데 막상 눈앞에서 겪고 나니 달라졌다. 상대는 교주의 호법이자 수만 명의 무인이 존재하는 마교 내에서도 그 무위로는 서열 십위 권에 드는 괴물이었다. 괜히 심기를 건드려봐야 손해였다. “죄송합니다.” 꼬랑지를 내리고 마는 천경운의 모습에 옆에 나란히 서있는 남은 다섯 종파의 후계자들의 얼굴에 비웃음이 서렸다. 4장 일 단계 시험은 거저네(1) 괜한 당돌함을 보였다가 망신을 당한 천경운 덕분에 장내는 다시 조용해졌다. 마도관에 입관하고 나서부터는 모든 것이 철저하게 약육강식의 경쟁 체계로 돌아간다는 말을 짐짓 실감하게 만들었다. 좌호법 이화명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뭐, 네 녀석이 하려는 질문이야 뻔하지. 마도관의 여섯 단계 시험은 단 한 번뿐이라서 그 기회가 적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시험을 통과해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자들에게는 특별한 혜택이 세 가지가 주어진다.” 혜택이 있다는 말에 소년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마도관에 들어가서 기간을 오래 채우고 나온 이들일수록 훨씬 그 무위가 강해졌고, 높은 직위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 혜택은 영약이다. 본교에서 구해온 각종 영물이나 공청석유와 같은 것들로 만든 마룡단(魔龍團)이라는 영단이 주어질 것이다. 참고로 한 단계를 통과할 때마다 마룡단 한 알씩 주어진다.” 마룡단은 이화명이 얘기했듯이 마교에서 만든 영단이다. 소림사의 대환단과 같은 영단만큼은 아니었지만 소환단보다는 효과가 좋아 이것을 복용할 시에 제대로 영약의 기운을 흡수하게 되면 이십 년 치의 내공을 얻게 된다. 여섯 단계를 전부 통과해서 여섯 개의 영단을 전부 복용한다면, 단순한 계산으로는 백이십 년(두 갑자)의 내공을 얻어 초절정의 고수가 될 수 있다. 마교 내의 백 위권에 속하는 강자들이 전부 초절정 이상의 고수인 것을 감안한다면 엄청난 혜택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약이라는 것도 일종의 약이었기 때문에 체내에 저항력이 생기기 때문에 복용할수록 전만큼의 효과를 내기가 힘들다. 영약을 복용할 때마다 이십 년의 내공을 얻게 된다면 교내 상위권의 고수들에게 지급을 하지 무슨 이유로 후기지수들에게 쓰이겠는가. ‘여섯 단계라....’ 천여운의 눈빛에도 흥미가 돌았다. 지금은 내공이 전무한 상태였지만 여섯 단계를 통과하게 되면 그 역시도 영약을 통해서 내공을 단시간에 증폭시킬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것이었다. “두 번째 혜택은 무공 비급이다. 네 녀석들도 무공을 익힌 무인이라면 비급의 중요성은 알겠지?” 마도관의 가장 큰 특혜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마도관에는 마교 내에 있는 모든 무공서적이 존재하는데, 마교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여섯 종파의 무공비급마저 있을 정도로 보고(寶庫)라고 할 수 있었다. ‘무공 비급!’ 지금 천여운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내공보다도 무공 비급일지도 몰랐다. 나노 머신인 나노의 힘으로 단검비술을 익히기는 했지만 마도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 강한 무공이 필요했다. “마도관의 비급 서재는 총 오층으로 되어 있다. 일 층부터 오 층까지 무공비급의 수준이 다섯 단계로 분류되어 있지. 한 단계의 시험을 통과할 때마다 한 층씩 개방이 될 것이다. 뭐 네놈들이 얼마나 하냐에 따라서 여섯 종파의 비급이나 본 호법의 독문무공도 익힐 기회가 제공되겠지.” 마지막 오층은 마교 뿐만이 아니라 무림에서도 신공이라 분류되는 비급들이었다. 그런 신공절학을 익히게 된다면 나아가서는 무림에서도 명성을 알리는 강자로 성장해나갈 수 있게 된다. “뭐, 그런데 네 녀석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오층에 갈 일은 없으니 꿈 깨라.” 사기를 높여놓고는 단 번에 떨어뜨려 버리는 말도 간간히 던지는 좌호법 이화명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두 번째 혜택 역시도 모두의 사기를 치솟게 할 만큼 굉장했다. “훗, 지금은 즐겨라. 마지막 세 번째 혜택은 아직은 서열과 직위를 부여받지 않은 네 녀석들에게 그것들이 부여될 것이다.” -웅성웅성! 서열과 직위라는 말에 지금까지보다도 더 크게 웅성거림이 생겨났다. 정파 무림맹이나 사파 연맹과 다르게 마교는 모든 것이 철저하게 강자존에 의해서 결정되게 된다. 마도관에 입관하기 전까지는 마교 내에 있는 모든 종파의 소년들은 어떠한 직위도 주어지지 않은 상태로 보내게 되는데, 일종의 보호 상태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랬던 거였나?’ 왜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마도관에만 입관하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고 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마도관에 입관 하는 순간부터는 그들은 소년도 보호 대상도 아닌 마교의 약육강식 체계의 사슬고리로 진입하게 되는 것이었다. 마교가 단일 문파이면서도 무림 삼대 세력에 들어가는 저력의 비밀은 여기에 있었다. “1단계를 통과하면 하급무사, 2단계를 통과하면 중급무사, 3단계를 통과하면 상급무사가 될 수 있다. 일반 무가야 그렇다 치더라도 무도 종파의 후기지수들이 고작 상중하급 무사가 된다면 망신이겠지?” 십 년 주기로 시행되는 마도관은 오 년 주기로 시행되는 상중하급 무사를 육성, 선별하는 시험과 겹쳐서 진행되기 때문에 무도 종파의 후기지수들 이외에도 일반 무가의 소년들과 함께 진행된다. “아! 상중하급 무사들을 노리는 무가의 소년이라고 해도 이 단계 시험까지는 마룡단이 지급되므로 분발하도록!” 이화명의 말대로 이 시기에 참여하는 상중하급 무사에 지원하는 무가의 소년들 또한 마룡단을 얻을 수 있어서 행운의 기수라고 불리기도 한다. 마교의 무사들은 총 세 단계로 나뉘는데 그 실력이 천차만별이다. 하급무사는 삼류 정도의 실력에 불과했고 중급 무사는 이류, 그리고 마지막 상급 무사들은 일류의 무공 실력을 지녔다. 그렇기 때문에 상급 무사들의 숫자는 마교 내에서도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사 단계를 통과하면 대주의 직위가 주어지고, 오 단계를 통과하게 되면 단주의 직위가 주어진다. 그리고 마지막 육 단계는 어차피 네놈들한테 크게 해당 사항이 없으니 생략하겠다.” 이화명이 이렇게까지 말을 하는 대는 전부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육 단계 시험 자체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수준이었고, 그것을 통과하는 이들은 역대 마도관을 통틀어서 열 명을 넘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늘 그래왔기에 이화명 역시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도관 내에서도 상위 단계를 통과하게 되면 그 직위가 인정되니까. 시작은 같은 생도로 시작할지 몰라도 나중에는 상명하복(上命下服)으로 끝날 거다.” 그것이 마도관을 설명하는 진정한 요점이었다. 먼저 위로 치고 올라가지 않으면 도태되고 만다. 그 동안 살아남기 위해서만 악을 쓰고 살아왔던 천여운의 눈빛이 강렬하게 빛났다. 지금까지는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살아남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위로 치고 올라가는 것만이 생존이었다. “좋아하지들 마라. 어차피 여기에 있는 대부분의 녀석들은 무슨 수를 쓰던 간에 삼 단계 이상 올라갈 수 없을테니까.” 이미 모든 것을 예측이라도 하고 있다는 것처럼 이화명이 소년들을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 “설명은 대충 끝났고, 이제부터 숙소 및 조 편성을 위한 일 단계를 진행하겠다.” 느닷없이 일 단계 시험을 진행한다는 말에 소년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지금까지 설명을 듣는 내내 사기가 치솟아서 위로 올라간다는 의지를 보였던 그들이다. 그런데 설마 입관식 당일 날에 일 단계 시험이 진행될 줄은 몰랐다. “앞서 말 한 대로 일 단계를 통과하지 못한다면 마도관에서 그대로 방출이다. 그런 놈들은 하급 무사의 자격도 없다.” 냉혹한 표현에 천 명에 이르는 소년들의 절반 이상이 사색이 되었다. 적어도 뭔가를 배우고 나서 진행되리라고 여겼는데, 이건 시작부터 쭉정이들은 갈라내겠다는 말이 아닌가. 이것은 천여운 역시도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였다. ‘뭐야? 당장 일 단계를 치른다니?’ 내공조차 전무한 상태에서 일 단계 시험을 치른다면 당연히 떨어질 확률이 거의 십할에 가까웠다. 완전히 불리한 조건이라 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된다면 일 단계 시험이 비교적 쉽거나, 내공이 전무하더라도 통과할 수 있기를 바래야만 했다. 이화명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일 단계 시험을 공표했다. “일 단계는 기본 소양을 알아보는 시험이다. 적어도 본교의 무사가 되기 위해 기본적인 내공 역량을 갖춰야 한다.” 속으로 제발하면서 간절하게 바라던 천여운의 인상이 구겨졌다. 아에 대놓고 얘기한 셈이었다. 일 단계 시험은 내공이 조금이라도 없는 자는 탈락시키겠다는 말이었다. “일 단계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자는 본교의 농업지구와 상업, 용역 등으로 배치되니까 죽을 각오로 해라. 아! 아니구나. 그런 하.찮.은 일을 할 사람도 필요하니 적당히 해라.” 본인 일이 아니라고 농담조로 말을 하는 이화명이었다. 그런 농담에도 천여운은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하아.....진짜 짜증나네.’ 너무 화가 났다. 적어도 마도관 내에서 수작질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일 단계 시험을 입관식 당일 날에 내공으로 치르겠다는 것은 그를 노렸다고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내공을 익히지 못하게 한 건가?’ 어째서 여섯 종파의 부인들이 그에게 내공을 익히지 못하게 맹세하게 만들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내공 시험을 치르는데, 그것을 통과하게 된다면 마도관의 입관에 성공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그가 통과하지 못하고 방출되게 된다면 아무런 직위도 인정받지 못하고 마교 내의 최하위 신분이 되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이때까지 암중으로 암살을 노렸던 여섯 종파의 부인들은 공개적으로 대놓고 천여운을 죽이려고 들게 틀림없었다. ‘호오!’ 그런 천여운의 기분을 알기라도 했는지 단상 앞 열에 서있던 복마종의 서열 후계자인 천무금의 얼굴 표정에 흡족해져 있었다. ‘내 손으로 직접 죽여주려 했는데, 킥. 누구의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법인데.’ 내공을 익히지 못하게 하는 계획은 복마종이 짠 것이 아니었다. 여섯 종파의 부인들 중에서 한 종파의 주도하에 이뤄진 계획이라고는 알고 있었는데, 이것을 노렸을 줄은 몰랐던 천무금이었다. 그때 단상 위로 비파를 들고 있는 한 중년의 고혹적인 여인이 올라왔다. 그녀를 가리키며 좌호법 이화명이 말했다. “이번 일 단계 시험을 맡아주실 음마종의 가주님이시자 본교의 오 장로님이신 항소유님이다.” 맨 앞줄의 끝에 서있는 붉은 비단 옷에 화려한 복장을 하고 있는 예쁜 소녀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그녀는 서열 후계순위 육 위에 해당하는 음마종의 천원려였다. 사실 마도관에는 모든 시험에는 여섯 종파에서 절대로 관여할 수 없지만 유일하게 시험을 진행하는 것이 바로 일 단계였다. 평소라면 교주 못지않게 얼굴을 보기 힘든 장로를 뵈었다는 기쁨에 함성을 지를 소년들이었지만 일 단계 시험이 관련되다 보니 의구심만 생겨났다. ‘대체 무슨 시험을 치르기에 오 장로님을 부른 거지?’ 웅성거리는 소리에 이화명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번 시험은 사실 거저 주는 시험이다. 여기서 떨어지면 네 녀석들은 평생 하급 무사로도 오르지 못하게 될 거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오 장로 항소유가 단상 위에 있는 수좌에 자리를 잡더니 비파를 연주할 자세를 취했다. 이미 예측할 만한 사람들은 전부 짐작했는지 귀를 틀어막고 난리도 아니었다. “뭐, 오 장로님이 제대로 비파음공(枇杷音攻)을 연주한다면 너희 같은 애송이들은 버티진 못하겠지만, 너희들을 위해서 오 장로님이 적당히 조절해서 연주해주실 테니 큰 걱정은 마라. 행운이 따라서 내공이 없어도 인내심으로 버틸 수 있을지 어찌 아나? 후후.” 이화명이 마지막에 비웃음조로 하는 말은 꼭 천여운이 들으라고 하는 말 같았다. 내공이 실려 있는 비파음공은 그저 인내심만으로 버틸 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에 천여운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젠장.’ 이 단계 시험은 음공(音攻)을 견디는 것이었다. 천 명이나 되는 자들 중에서 실력이 형편없는 쭉정이들을 큰 시간을 소요하지 않고 걸러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최소한의 내공만 있다면 일각은 버틸 수 있을 거에요.” 입을 다물고 있던 오 장로 항소유가 음마공의 가주답게 아름다운 목소리로 말을 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에는 다들 귀부터 틀어막고 있는 상황이라 아무 것도 들리지가 않았다. “일각동안 음파공에 기절하지 않고 버티는 자는 일 단계 시험을 통과한다! 시작!” 좌호법 이화명의 말이 끝나는 순간 오 장로 항소유의 길쭉한 손가락의 손톱이 비파의 선을 튕겼다. -띠리리리링! 띠링! 띠링! 비파를 한 번 튕기는 순간 장내로 아름다운 비파음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로 그냥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다. 고작 한 소절조차 연주가 시작되지 않았는데도 순식간에 중간 열에 있던 수 십 명이나 되는 소년들이 귀를 틀어막더니 거품을 물며 쓰러졌다. “끄르르르르!” "귀, 귀를 막아도 들려!" -쿵쿵!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비파를 튕길 때마다 귀의 고막이 울리며 심장까지 충격을 주어서 어떤 이들은 가슴을 움켜쥐다가 픽픽 쓰러져나갔다. 적어도 이 정도 음공을 제대로 즐기거나 버티려면 20년 이상의 내공이 필요하다. 하지만 어렸을 적부터 벌모세수를 비롯해 수많은 영약을 먹어서 이미 상당한 내공을 지니고 있는 여섯 종파의 소교주 후계자들이나 상위 종파의 소년들이 아니고는 그런 이들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제법 귀가 따갑네. 흐흐흐, 네놈은 일다경이 아니라 바닥을 헤매겠구나.’ 복마종의 서열 후계자 천무금의 얼굴이 즐거움으로 가득해졌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가 예상과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응? 뭔가 이상한데?' 처음에는 가볍게 연주를 하던 항소유의 손가락이 점차 비파선을 튕기는 속도가 빨라져 가고 있었다. 그녀의 굳은 표정만 보더라도 상당히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이는 항소유가 유일하게 바라보고 있는 대상인 천여운 때문이었다. ‘어째서지? 어째서 쓰러지지 않는 거야?" 놀랍게도 내공이 전무하여 가장 먼저 쓰러질 거라고 여겼던 천여운이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서있었다. 그 이유는 연주가 시작될 때부터였다. 음파가 대연무장으로 퍼져나가는 순간 천여운의 뇌속에 있는 나노 머신인 나노가 긴급 방어 모드를 발동시켰다. [비파연주에서 나오는 음파에서 강한 고주파 및 저주파가 발생했습니다. 사용자의 고막 및 신체 손상을 가져올 우려 발견. 당장 긴급 방어 모드를 전개합니다. 고막과 신체로 들려오는 음파를 차단합니다.] 나노 머신인 나노는 평소에는 사용자의 명령에 프로그램을 실행하지만, 사용자의 몸에 위해가 가해지거나 위험을 발견하면 자동적으로 방어 기재 프로그램이 가동된다. 소리에다가 내공을 실어서 공격을 하는데, 그 소리를 차단하고 주파수에 대한 방어 모드를 전개하니 당연히 천여운의 귀에 음파공이 들릴 리가 없었다. ‘.....뭐지?’ 처음 비파를 치는 순간 나노의 목소리만 머릿속에 울리고는 그 다음부터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천 명에 이르던 수많은 소년들이 픽픽 쓰러지더니 거의 절반이 넘게 쓰러졌다. 4장 일 단계 시험은 거저네(2) 내공 시험을 치른다고 해서 바짝 긴장하고 있던 천여운이었다. 그러나 나노 머신인 나노가 사전에 사용자에 대한 위험을 감지하고 소리를 차단해준 덕분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분명 대연무장의 입구 쪽에 있었기 때문에 거리가 떨어져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파연주가 들리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 너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한 거야?’ [비파 연주에서 나오는 음파에 주인님께 위해한 고주파와 저주파가 발생했습니다. 일시적으로 소리를 감지할 수 있는 신체 기관을 정지시켰습니다.] ‘네 목소리는 어떻게 들리는 건데?’ [대뇌로 직접적으로 정보를 전달합니다.] ‘어렵다. 어려워.’ 무슨 말을 해도 이해하기 힘든 나노의 표현이었다. 벌써 대연무장에 있는 소년들의 절반 이상이 바닥으로 쓰러져서 기절했다. 대다수의 소년들이 거품을 물고 있거나 심지어는 입가에 피를 흘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내상을 입은 듯 했다. -찌릿! 사람에게는 오감 이외에 육감이라는 직입적인 감성이 있다. 소리를 차단했다고는 하나 시각이 막혀 있는 것은 아니기에 그를 향한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지지 않을 리가 없었다. -띠리리리리리리리리리링! 띠링! 띠링! 띠링! 내공이 실리기는 했지만 아름답게 연주하던 오 장로 항소유의 손가락은 처음과 달리 굉장히 빨라져 있었다. 그녀의 바로 옆에 서있는 좌호법 이화명이 인상을 찌푸릴 정도로 점차 강도가 강해졌다. 이화명은 그녀가 왜 이렇게 안달 나고 있는 알고 있었다. ‘저놈 내공이 전무한 걸로 알고 있었는데.’ 이화명 역시도 이 사태가 상당히 흥미롭게 느껴지고 있었다. 여섯 종파에서 과거에 맺은 맹약 때문에 천여운은 내공을 전혀 익히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신기할 정도로 음파공을 잘 버텼다. 멀뚱히 서있는 천여운과 달리 그의 주변에 있는 소년들은 전부 바닥을 기고 있었다. “끄으으으으!” “흐헉! 너 귀에서 피가 나고 있어!” “인마! 너도 마찬가지야!” 그나마 버티고 있는 소년들은 내공이 있는데도 죽을 맛이었다. 자존심에 금이 간 항소유가 원래 계획했던 수준보다도 더욱 높은 내공을 가미한 비파 연주를 하는 바람에 이십 년 이하의 내공 수준의 소년들도 벅차기 시작했다. ‘어째서 음마공의 가주께서 이렇게 격하게?’ 적어도 반 갑자(삼십 년) 이상의 내공을 지닌 여섯 종파의 소교주 후계자들은 그녀의 비파에 실린 음파공을 수월하게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무섭게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에 대체 무슨 사태가 일어난 건지 궁금해졌다. 내공으로 몸을 보호하는 상태이기도 했고, 바로 앞에 오 장로와 좌호법이 있기에 고개를 돌리면 안 되겠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던 천무금이 뒤로 시선을 돌렸다. ‘헛?’ 순간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목소리가 튀어나올 뻔했다. ‘저놈 어떻게 버티는 거야?’ 너무 멀쩡하다 못해 아무렇지도 않게 서있는 천여운이었다. 온갖 영약을 지원받아서 반 갑자의 내공을 지니고 있는 자신조차도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는데, 천여운은 마치 아무 것도 들리지도 않는 듯 한 표정이었다. ‘저...저...저 새끼. 내공이 있었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것이 다행일 만큼 속으로 욕이 나오는 천무금이었다. 화 부인이 보는 앞에서 내공을 익히지 않겠다고 맹약을 했던 천여운이었는데, 음마공의 가주인 항소유의 음파공을 견딘다는 것은 내공을 익힌 것이 틀림없었다. ‘뭐야?’ ‘왜 그러는 거지?’ 뒤를 돌아보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진 천무금에게 이상함을 느낀 네 번째 서열인 독마종 천종섬과 여섯 번째 서열인 음마종의 천원려가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어, 어떻게 된 거야?’ ‘내공이 없는 녀석이 왜 저렇게 멀쩡해?’ 무엇 때문에 열을 내고 있나 궁금했던 그들의 표정이 천무금 못지않게 일그러졌다. 한참 전에 대연무장의 바닥에 쓰러져 있어야 할 천여운이 자신들보다도 더욱 멀쩡하게 있으니 어이가 없었다. ‘나노. 혹시 내가 잘못 보는게 아니면 저기 저 녀석들이랑 비파를 치고 있는 오 장로님 표정이 화를 내고 있는게 맞지?’ [안면 근육의 움직임을 분석합니다. 황당함, 놀라움, 짜증, 분노라는 감정에서 보이는 안면 근육 형태입니다.] 굳이 분석하지 않아도 확실히 그를 향한 강한 적의가 보였다.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지금 모든 것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을 뿐이었다. 천여운은 자신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저들의 화를 살만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내공이 없는 줄 알고 있었는데, 버티니깐 자존심이 상한 게 틀림없다.’ 이대로 간다면 일 단계 시험에 통과해도 문제였다. 마도관에 들어가기 전까지 내공을 익히지 않는다고 여섯 종파에서 보낸 무인들 앞에서 맹세를 했었다. ‘나노, 혹시 강제로 내상을 입힐 수 있어?’ [내상이라고 한다면 오장육부에 상처를 입히는 것을 의미합니까?] ‘그래? 할 수 있어? 없어?’ [체내에 있는 나노 머신으로 강제로 내부 장기에 손상을 입히는 것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일부러 신체를 손상시키는 것을 권해드리지 않습니다.] ‘가능하구나. 그럼 연주가 끝날 때쯤에 내상을 입히고 입으로 피를 쏟게 해줘.’ [입으로 체내에 손상되어 나오는 혈액을 말입니까?] ‘그래!’ 이미 저들의 의심을 받다 못해서 분노를 사고 있는 상태였다. 적어도 내상을 입고 피라도 흘리지 않는다면 모두의 경계심을 사고 말 것이다. 제대로 무공을 익혀보기도 전에 위험을 감수할 순 없었다. [주인님의 명령대로 내부 장기에 관한 강제 손상을 실시합니다.] 나노가 천여운의 명령대로 체내의 나노 머신들을 움직여 비파 연주가 끝나는 시점을 기다렸다. 한편 거의 일각이 다 되어갈 무렵, 음마종의 가주인 오 장로 항소유의 자존심이 한계치에 이르렀다. 내공을 익힌 것은 둘째 치고 고작 애송이 주제에 자신의 음파공을 버티다 못해서 저렇게 여유롭게 서있는 것은 그녀를 모독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띠링! 비파를 튕기는 음색이 달라졌다. 이를 곧바로 알아챈 염왕 이화명의 눈빛에 당혹감이 서렸다. 그녀의 심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대연무장에 있는 다른 생도들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띠리리리리리링! 미처 전음으로 말릴 틈도 없이 그녀의 절반의 공력이 실린 연주가 시작되었다. 일 갑자를 넘기는 내공을 지닌 항소유의 제대로 된 음파공의 위력은 어지간한 고수들이 아니고는 절대로 버틸 수가 없다. “크흑!” 지금까지 잘 버티고 있던 상위 종파의 소년들의 얼굴이 일순간에 파랗게 질렸다. 속에서부터 역류해오는 고통에 토를 올리고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상위 종파만이 아니었다. ‘흡!’ 여섯 종파의 후계자들 역시도 아무리 내공을 쌓았다고 해도 오 장로의 공력에 미칠 리가 없었다. 강력해진 음파공에 그들의 호흡이 벅차하고 심장이 뛰는 속도가 빨라졌다. 운기를 통해 버텨보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쿨럭쿨럭!” 여섯 후계자들 중에서 가장 내공이 약했던 독마종의 천종섬이 내상을 입었는지 느닷없이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이를 발견한 좌호법 이화명이 더는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그만 하시오! 더는 위험합니다. 오 장로.] -틱! 이화명의 전음에 오 장로 항소유도 더는 위험하다고 판단했는지 비파에서 손가락을 떼었다. 대연무장을 울리던 비파음이 사라지자 겨우겨우 버티던 소년들이 일제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조금만 더 진행되었다면 장 내에 있는 모든 소년들이 일 단계를 버티지 못하고 탈락했을 지도 몰랐다. 흥분해서 지나치게 음파공을 발휘한 것이 내심 부끄러운 오 장로 항소유였지만 여전히 천여운에 대한 분노가 가시지 않았다. 그녀는 천여운이 여섯 종파의 부인들과의 맹약을 어겼다고 확신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푸우우우웃! 대연무장의 맨 뒤쪽에서 우두커니 서있던 천여운의 얼굴이 급속하게 붉어졌다가 새파랗게 질리더니, 이내 갑자기 분수를 내뿜듯이 피를 입으로 하늘을 향해 뿜어내는 것이 아닌가. 순간 이것을 지켜보던 단상 위에 있던 이화명, 항소유를 비롯한 복마종의 천무금의 얼굴이 굳어졌다. ‘뭐야?’ 사람의 입에서 저렇게 많은 피가 뿜어져 나온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선혈을 흘린다고 하면 피가 목구멍으로 나와서 입가에 흐르는 정도였지 저 정도라면 거의 분수와도 같았다. ‘버틴 게 아니었어?’ 연기라고 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피를 많이 뿜었다. 허공을 향해 피를 뿜어댄 천여운은 비틀거리며 바닥으로 무릎을 꿇고 손바닥을 짚었다. 누가 보더라도 심각한 내상을 입은 것 같았다. ‘나노.....너....너....’ [명령하신 프로그램을 이행했습니다. 체내 장기의 삼할 가량을 손상시켜 혈액을 최대한 역류시켰습니다.] ‘야이 미친!!!.....주, 죽는 줄 알았잖아!’ 보통 그냥 토를 하더라도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 심지어 내상을 입은 무인들이 목구멍으로 선혈이 흘러내릴 때도 속이 쓰라릴 수밖에 없는데, 피를 분수처럼 뿜을 정도로 올려댔으니 고통이 말로 이룰 수가 없었다. “끄어어어억!” 아직 남은 피가 있었는지 천여운이 피를 토해냈다. 연무장의 바닥과 주위에는 그가 흘린 피로 사방이 물들어 있어서 어지간한 비위가 좋지 않고는 쳐다보기가 힘들었다. “칫!”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하는 오 장로와 달리 마도관의 일 단계를 관장하는 좌호법 이화명의 입장은 달랐다. 아무리 여섯 종파의 후계자들과 번외의 인물인 천여운이 다툰다고 해도 그들 안에서 일어날 문제이지 시험을 치르다가 죽기라도 하면 모든 독박은 그가 써야 했다. 교주의 혈통만 아니었어도 이 정도로 다급하게 경공을 펼치진 않았겠지만 어느새 천여운의 곁으로 다가온 이화명이 그의 상태를 살폈다. “어이 애송이! 괜찮은 거냐? 어이어이!” 한바탕 피를 토하고 나니 어지러워지는 천여운이었다. 그가 비틀대면서 쓰러지려고 하자 이화명이 그를 붙들었다. [10퍼센트의 혈액 손실로 인해 어지러움증이 유발되었습니다. 장기 손상에 관한 자가수복 및 혈액 증액을 실시하겠습니다.] 치료를 하겠다고 알리는 나노의 말에 어지러운 와중에 천여운이 이를 제지했다. ‘아직! 아직 하면 안 돼.’ [주인님의 상태가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강한 제지에 나노가 자가 수복 프로그램을 가동하려던 것을 일시 중지했다. 눈을 뜨고 있지만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상태가 좋지 않은 천여운을 바라보며 이화명이 혀를 찼다. “독한 놈. 그냥 쓰러지면 될 것을.” 그를 붙잡으면서 내공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맥을 짚어본 그였다. 오 장로 항소유의 음파공을 버텼기에 당연히 내공을 단련했을 거라 예측했던 것과 달리 천여운의 단전에는 내공이 전무했다. ‘하? 내공이 없다.’ 자신의 내공을 살짝 불어넣어서 자극을 해보아도 내공의 흔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내공 없이 순수한 의지만으로 음파공을 견뎠다는 말이었다. 더군다나 내공도 없이 음파공을 견딘 대가를 치르기라도 하듯이 심각한 내상마저 입었다. ‘미쳤군. 이놈은 제대로 미쳤어. 내공도 익히지 않은 놈이 이 정도로 강한 정신력을 가졌단 말인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말로 내공도 없이 순수한 정신력만으로 시험을 통과해버렸다. 좌호법 이화명은 불운의 일곱번 째 공자라 불리는 천여운에 대한 안 좋은 소문만을 들어왔기 때문에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여섯 종파 이외에 천한 여시종의 태생이라고 멸시당해온 천여운이 이렇게 강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을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이화명이 손을 들어 연무장의 바깥쪽에 서있던 교두들을 불렀다. “이 녀석을 관내의 의무실로 옮겨라.” 그의 명이 떨어지자 교두들이 들것을 가져와 천여운을 실어서 의무실로 향했다. 들것에 실려나가는 천여운이 나노에게 명했다. ‘......빨리 치료해.’ 5장 애송아, 제자로 받아주마(1) 들것에 실려 나가는 천여운을 바라보던 음마종의 가주인 오 장로 항소유의 표정이 미묘했다. 연기를 했다고 보기에는 피를 저렇게 토해냈으니, 분명 내상이 심한 것은 틀림없었다. 그런 그녀의 곁으로 어느새 좌호법 이화명이 단상 위로 올라왔다. “심했습니다.” “뭐, 뭐가요?” “거의 죽기 일보 직전까지 만들어 놨더군요.” 비파로 펼치는 비파음파공을 극성으로 연마한 이후로 저렇게 심각한 내상을 입은 자는 평생 본적이 없었다. 자신의 내공이 진일보한 것이 아닐까 착각마저 들었다. 좌호법 이화명의 작은 타박에 잠시 민망해하던 항소유가 슬그머니 물었다. “저 녀석, 내공 있었죠?” 내상을 입어서 들것에 실려 나갔기 때문에 기분이 한결 풀렸지만 일각이라는 시간 동안 내공도 없이 음파공을 견딘다는 것을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화명이 쓴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네?” “내공이 완전히 전무합니다. 그 맹약을 지켰더군요.” “그럴 리가요? 내공이 없이 제 음파공을 견딘다는 게 말이 되나요?” 그녀의 비파음파공은 절대로 가볍게 여길 수 있는 무공이 아니었다. 비록 극성으로 펼치는 음파공은 아니었지만 절반의 공력을 끌어올린 위력은 이미 대연무장에 펼쳐진 광경이 그 결과물이었다. 서있는 이들이라고는 고작해야 서른 명 남짓이었고, 절반이 넘게 기절해 있든가 겨우 버텼다고 해도 바닥에 토악질을 하고 엎드린 상태였다. “내공이 없다면 저 아이들처럼 기절을 했어야 정상이라구요.” “이미 내상은 심하게 입은 상태였습니다. 단지 녀석이 정신력으로 견딘 것뿐이지.” “네? 정신력으로 견뎠다고요?” “.....무서울 정도의 정신력이더군요.” 아직도 그 정신력이 대단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어중간한 태생으로 태어난 교주의 사생아가 아니었다면 순간 제자로 키워보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염왕 이화명은 현실에 냉정한 인물이었다. 마교의 근간을 이루는 여섯 종파에서 눈에 가시처럼 여기는 자를 제자로 받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벌컥벌컥! “크아! 재미있구만. 뭐 정신력으로 버텨?” 단상 우측 편에 기대고 앉아서 호리병의 술만 마시고 있던 우호법 광도 섭맹이 갑자기 관심을 보였다. 평소라면 술 외에는 어떠한 것에도 관심이 없는 광인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그런 그의 물음에 이화명이 신경질 적으로 답했다. “네놈이 신경 쓸 바가 아니다. 먼데로 꺼져서 술이나 쳐마셔라.” “흥! 빨간 머리 네놈이 그렇게 얘기 안 해도 갈 생각이었다.” “주정뱅이 새끼.” “계집 같은 놈.” 섭맹이 짜증나는지 투덜거리며 뒤를 돌아 단상을 내려 가버렸다. 두 사람은 같은 호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다른 성향 때문에 자주 부딪치곤 했다. 대호법 마라겸이 아니었다면 둘 중 한 명이 죽을 때까지 겨뤘을 거라는 소문을 모르는 이들이 없었다. “흠흠, 아무튼 내공은 전혀 없었으므로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번 시험에 도가 지나쳤던 점은.....교주전으로 보고될 겁니다.” “.....알겠습니다.” 여전히 의구심이 드는 오 장로 항소유였지만, 자신이 감정을 조절하지 못했던 것을 교주전으로 보고가 올라갈 거라는 경고에 더 이상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좌호법이 그 천한 녀석을 두둔할 리는 없으니까.' 여섯 종파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좌호법이 거짓으로 빈말을 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비파를 챙겨서 총총 걸음으로 단상을 내려가 연무장을 가로질러 사라졌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소년들을 보면서 연신 같은 말을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이게 정상인데...” 오 장로 항소유가 가고 나서 좌호법 이화명은 대연무장 바닥을 기어 다니는 소년들을 보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하.....이를 어쩐다.” 이래 가지고는 당장에 조별 편성을 하기도 힘들었다. 한편, 마도관의 단상 뒤에는 본관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삼층으로 이루어진 마도관의 본관 건물의 이 층에는 의무실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마의 백종우의 제자인 백종명이 의원으로 발령을 받아 있었다. 사 년 동안에 환자가 속출해서 많은 경험을 쌓게 될 거라는 스승의 명에 신이 나서 어젯밤 의료도구들을 챙겨서 부리나케 이사해온 참이었다. -쾅쾅! 문이 두드리는 소리에 백종명의 표정이 의아해졌다. 아직 첫날인데다가 막 일 단계 시험이 진행 중인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누가 의무실을 찾는 것일까? “백 의원님 환자입니다!” “환자? 벌써! 어서 들어오시오!” 요즘 들어서 정파 무림맹도 그렇고, 사파 연맹도 후기지수들을 기르는 전쟁 비수기여서 그런지 환자가 별로 없던 차였다. ‘역시 마도관이 최고군.’ 당일부터 영업을 시작할 생각을 하니 흥분이 되는 백종명이었다. 문이 열리자 마도관 무공 교두 두 명이 들것에 환자를 실어서 들어왔다. 옷 전체가 피로 물들어 있는 소년은 바로 천여운이었다. “아니! 대체 시험을 얼마나 과격하게 봤길래 사람이 이 지경이 된 것이오?” 배에 칼침이라도 맞지 않고는 이렇게 많은 피가 묻어있을 리가 없었다. 백종명의 질문에 젊은 무공 교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대답했다. “심각한 내상을 입은 녀석인데. 내공도 없어서 운기조식도 못할 테니 잘 살펴봐 달라는 좌호법의 명입니다.” “이게 내상을 입은 거라고요?” 마교의 신의(神醫)라 불리는 마의 백종우의 제자로 들어온 지 어언 십년 차이다. 많은 환자들과 사례들을 옆에서 지켜봤지만 내상으로 이렇게 많은 피를 쏟았다는 환자는 처음이었다. “아무튼 의무실에 데려다 놨으니 저희는 가봅니다.” “아, 알겠소.” 한참 마도관의 조별 편성이 시작될 테니 인원이 부족할 것이다. 교두들은 천여운을 의무실의 침상에 옮겨놓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러다 젊은 교두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왔다. 선배 교두가 신경질적으로 그를 나무랐다. “바쁜데 뭘 그리 꾸물거리는 게야.” “아, 아닙니다. 흐음.” 들것에 싣고 왔던 천여운의 혈색이 아까보다 좋아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자신이 잘못 보았겠지 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교두들이 의무실로 나가고 나서, 천여운이 누워있는 침상에 의자를 끌어당겨서 앉은 백종명이 진맥에 들어갔다. “흐음.” 눈을 감고 맥을 재고 있는 백종명을 천여운이 실눈을 뜨며 바라보았다. 아까 전에 대연무장에 있을 때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죽을 것 같았지만, 나노 머신의 자가수복이 진행되면서 정신을 차린 그였다. ‘하아.....의무실을 생각 못했어.’ 들것을 통해 의무실로 올라가자 당황한 천여운이 나노에게 치료를 중지시켰다. 지금 당장에 고통스러운 목구멍과 식도만 치료하게 하고, 그 외에는 의원이 진맥을 마칠 때까지 참을 작정이었다. “맥이 불규칙적이고 빠른게 내상이 심각하긴 하군.” 진맥을 통해서 천여운이 장기가 많이 손상되었다고 결론을 내린 백종명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여전히 의문이 풀리지 않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피를 많이 쏟았다는 것은 이상했다. “혀를 깨물어도 이렇게는 안 되는데. 쩝.” 일단 침을 먼저 놓아야겠다고 생각한 백종명이 자신의 책상으로 걸어갔다. 바로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지도 않고 힘차게 의무실을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왔다. -쾅! “아이구 놀래라!” 갑작스럽게 들어오는 통에 놀란 백종명이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누군가 하고 봤더니 허름한 옷차림에 술주정뱅이처럼 코가 빨개서 호리병을 들고 있는 중년인이 눈에 들어왔다. “우호법?” “어라? 네 녀석이 왜 여기에 있는 거냐?” “그러는 우호법은 왜 입관식에 있어야 할 분이 여기에 오신 겁니까?” “이야! 매일 마의 선생 옆에서 쫄다구로 붙어 있던 놈이 올해 마도관의 주치의로 배정 받은 거냐?” 자신의 질문에는 답변하지 않고 제 말만 하는 섭맹의 안하무인 같은 말투에 백종명이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부터 이런 성향의 사람인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스승인 백종우가 옆에 있을 때는 조금이라도 얌전하게 굴었는데, 그 혼자만 있으니깐 본래 성격을 고대로 보인다. “쫄다구가 출세했네. 출세했어.” “휴, 그러니깐 무슨 일로 의무실에 오신 겁니까? 우호법 실력에 어디 다치시진 않았을 텐데요.” “......너 좀 띠껍다.” “아, 아하하하하하 그럴 리가요.” 기분 나쁜 티를 냈다가 단번에 표정이 돌변하는 섭맹의 태도에 당황한 백종명이다. 섭맹은 그런 그를 내버려두고 의무실에 있는 침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허어? 이것 봐라. 아주 재미있는 녀석일세.” “우, 우호법 왜 그러시는 겁니까?” 혼잣말을 하는 우호법 섭맹이 괜히 무서워지는 백종명이 한걸음 떨어져서 물었다. 이를 신경 쓰지도 않는지 섭맹이 아무 대답도 없이 침상에 누워있는 천여운에게로 다가왔다. 정신은 멀쩡했지만 눈을 감고 있는 천여운은 내심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뭐, 뭐야? 왜 갑자기 의무실로 찾아온 거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호법이 왔다는 말에 심장이 벌렁거렸다. 혹시나 자신이 연기한 것을 알아채고 왔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눈을 감고 있어도 누군가 자신의 위로 얼굴을 가져다대면 빛이 가려져서 알아챌 수 있다. ‘.....젠장!’ 술 냄새와 지독한 구취가 천여운의 코끝을 찌르며 괴롭혔다. 최대한 내색을 하고 있지 않았지만 정말 괴로울 지경이었다. 괴로워하는 천여운의 귓가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자는 척 하는 거냐?” 순간 천여운은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덕분에 의도하진 않았지만 자신도 모르게 경직되어서 몸을 움찔하고 움직이고 말았다. -휘릭! 그때 알 수 없는 힘이 일어나 누워있는 천여운의 상체를 앉히게 만들었다. 그것은 바로 내공으로 인한 힘이었다. 내상을 치료하지 않아서 움직일 힘도 없었지만 내공에 의해 몸이 고정되는 바람에 옴짝달싹도 할 수가 없었다. “계속 자는 척 하는 거면 때린다. 얼굴.” 결국 천여운은 감았던 눈을 떠야만 했다. 눈을 뜨니 대연무장의 멀리서 단상 위에 보이던 그 술주정뱅이의 얼굴이 보였다. 혹시나 자신이 연기를 한 것이 들켰다는 생각에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천여운이 인상을 굳히며 물었다. “어떻게 아신 겁니까?” 섭맹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큼지막하게 웃으며 말했다. “크크큭, 이놈 보소. 완전 물건이네.” 자신을 보면서 당황해 하기는커녕 오히려 인상까지 쓰면서 말하는 태도가 아주 당돌했다. 잠시 동안 혼자서 즐거워서 웃어대던 섭맹이 말을 이었다. “네놈 호흡 소리만 들어도 자는지 안 자는지는 본 호법 정도 되는 고수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다. 애송아.” 미처 상정하지 못했지만 우호법 광도 섭맹은 수많은 고수들이 넘쳐나는 마교 내에서도 상위 서열 십위 권에 속하는 초강자였다. 5장 애송아, 제자로 받아주마(2) ‘호흡 소리만으로 알아챘다고?’ 내심 황당해 하는 천여운의 머릿속에 있는 나노의 목소리가 울렸다. [평균 십오 세에서 이십 세 성인 남성의 호흡 수는 일 분에 평균 십육 회 정도입니다. 방금 전 주인님의 호흡 수는 일 분에 팔 회로 극도로 긴장된 감정을 감추기 위한 상태입니다.] ‘.....쓸데없는 사족은 안 붙여도 되거든.’ 나노 머신인 나노야 자신의 몸에 있는 것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친다. 하지만 무공으로 고수가 되면 이 정도까지 감각이 깨어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섭맹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크하하핫. 요즘 들어서 애송이 녀석들은 쓸개 빠지기만 하고 겉멋만 부릴 줄 알았지 제대로 된 녀석이 없었는데, 네놈 제법이더라.” ‘엇?’ 대연무장에서 연기했던 것을 눈치 채고 왔을 거라 생각했는데 헛짚은 것 같았다. 그를 바라보는 표정만 보더라도 굉장히 흡족해하고 있었다. “요즘 놈들은 말이야. 인내라는 게 없어. 조금만 힘들면 그만두고 쉬운 길만 선택하거든.” -뜨끔!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는 섭맹을 보니 왠지 모르게 양심이 찔렸다. 엄밀히 얘기한다면 정신력으로 버틴 게 아니었다. 나노 머신의 능력으로 소리를 차단했기 때문에 버티는 수준이 아니라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네놈에겐 요즘 애송이들한테는 없는 정신력이란 게 있다. 이거야.” 칭찬을 늘어놓으니 몸 둘 바를 모르겠지만 점점 부담스러워지는 천여운이었다. 의원인 백종명만 속이고 나면 나노에게 중지했던 치료를 계속하라고 하려 했는데, 말이 길어지니 내상을 입은 속이 들끓었다. 새파랗게 질려가는 천여운의 얼굴에 놀란 의원 백종명이 말했다. “우호법. 일단 환자의 상태가 좋지 않으니 일단 치료부터 하는 게 우선일 것 같은데요.” “것 참.” 귀찮게 한다고 말을 하려고 보니 안색이 나빠 보이긴 했다. 그 모습에 머쓱 해하던 섭맹이 내공을 풀어서 강제로 앉게 만들었던 천여운의 몸을 침상에 눕혔다. 그리고는 목소리에 힘을 주고 말했다. “본론만 말하마. 애송아, 네 녀석을 제자로 받아주마.” 섭맹의 뜬금없는 제자 제의에 천여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것은 옆에 있던 백종명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우호법 광도 섭맹은 마교에서 무위라면 십위 권에 드는 초강자였다. 더 나아가서 무림에서도 그 명성이 자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모두에게 배척만 당했던 천여운으로써는 섭맹이 무슨 수작부리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머리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는 섭맹의 눈빛은 꽤나 진지했다. 단지 술 냄새와 지독한 구취가 흠이었지만 말이다. “무슨 소리긴. 네 녀석을 본 호법의 제자로 받아주겠단 소리다.” “.....우호법, 혹시 제가 누군지 모르십니까?” 마교에서 그의 얼굴을 모르는 이는 있을지 몰라도 누구인지 모르는 자는 없었다. 여섯 종파의 눈에 불을 켜고 제거하고 싶어 하는 서열 순위 일곱 번째의 사생아가 아닌가. “네 녀석을 모르는 이가 있더냐?” “저를 제자로 받으시면 여섯 종파의 그분들이 싫어할 텐데요?” 냉철하게 현실을 말해주었는데도 섭맹은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오히려 별 것 아니라는 식으로 말했다. “크큭, 웃기는군. 제깟 년들이 본 호법이 제자를 받겠다는데 뭘 어쩌겠다는 게야. 그리고 네놈이 있든 없든 지들끼리 경쟁을 해야 하는 것들이 말이야.” 좌호법인 이화명과 달리 현실보다도 마음이 가는 데로 내뱉고 행동하는 섭맹이었다. 우호법 섭맹이 유일하게 두려워하고 따르는 사람은 오직 마교의 주인인 교주뿐이었다. 처음으로 듣고 싶었던 말을 듣게 되니 기분이 묘해지는 천여운이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는 우호법 섭맹의 제안에 흔들렸다. ‘하지만 이것도 함정이라면?’ 살아온 나날 동안 수많은 암살 시도와 갖은 수작을 전부 겪었던 천여운은 자연스럽게 매사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를 옆에서 지켜보는 백종명의 얼굴에도 흥미가 감돌았다. ‘이 녀석이 소문의 그 공자님이었군.’ 말로만 듣던 천여운을 보고나니 내상에 관해서 제 멋대로 해석하게 된다. ‘이번 마도관 입관이 소교주 쟁탈 전이라서 뭔가 수작을 부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과했어. 쯧쯧.’ 진맥을 할 당시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상의를 적신 피를 이해할 수 없었는데, 뭔가 여섯 종파에서 수작을 부렸다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이런 백종명의 오해는 천여운에게는 행운이라 할 수 있었다. “갑자기 그런 제의를 하시니깐 당장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더군다나 마도관에 입관해서 스승으로 모신다는 건.” “에이씨, 이러니깐 꼭 제자로 들어와 달라고 구걸하는 것 같잖아.” -벌컥벌컥! 머뭇거리는 천여운의 태도가 답답했는지 섭맹이 호리병의 뚜껑을 열고 술을 들이마셨다. ‘꽤나 의심 많은 녀석이로군.’ 이날 여태껏 제자를 받아본 적은 없었지만, 내공이 전무한 상태에서 오직 정신력만으로 음파공을 버텼다는 천여운의 패기가 마음에 들어서 처음으로 제자가 되라고 제안했는데 반응이 여간 미적지근하니 살짝 달아올랐다. “뭐, 좋다. 의심이 그렇게 많다면 네 녀석이 혹할만한 제안을 해주지.” 섭맹이 자신의 품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구깃구깃 구겨져 있는 누런 종이였는데, 그것을 천여운의 침상 머리에 올려놓았다. 내상으로 몸을 움직일 수 없으니 그것이 무엇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크큭, 궁금하지. 이놈아.” “무엇입니까?” “애송이 네 녀석이 여기서 살아남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거지.” “네?” “마도관 입관 첫날부터 내상을 입었는데, 네놈이 다른 녀석들보다 뒤쳐질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나 보군.” 마도관주는 좌호법 이화명이 맡고 있지만, 그 역시도 마교인이었기에 마도관의 생도시절이 있었다. 매 시기 때마다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기는 했지만 기본적인 틀은 비슷했다. “일 단계 시험이야 정신력으로 버텼다고 쳐도, 내공도 없는 네 녀석이 이 단계로 넘어갈 수 있을까?” “그, 그건......” “클클. 게다가 다른 녀석들이랑 시작점부터도 다른데, 의무실에서 열사흘 동안 틀어박혀 있을 참이냐? 적어도 무인으로 거듭나려는 자라면 남들보다는 치고 올라가야 하는데, 애송이 네 녀석이 이곳에 있는 동안 다른 녀석들은 훨씬 앞으로 나아가 있겠지.” 신랄할 정도로 천여운의 현재 입장을 잘 이해하고 있는 섭맹이었다. 더군다나 섭맹의 말은 전부 사실이었기 때문에 부정할 순 없었다. 사실 나노를 통해서 빠른 치료가 가능하긴 하지만 적어도 여섯 종파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 당분간 의무실에서 지내야 할지도 몰랐다. “왜 빨강머리 그놈이 널 이곳으로 보낸 줄 아느냐?” “빨강머리? 혹시 좌호법?” “그래. 인마!” “내상을 입어서 그런 게 아닙니까?” 천여운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당연히 다치면 의무실로 보내는 게 맞지. 그런데 이상하지 않느냐? 네 녀석을 제외한 다른 애송이들도 내상을 입었는데 왜 이곳에 보내지 않을까?” ‘어라!? 생각해보니 그렇네.’ 섭맹의 말대로 천여운 외에도 절반에 가까운 생도들이 연무장의 바닥에 쓰러지고, 대다수가 내상을 입은 최악의 일 단계 시험이었다. 그런데 그를 제외한 누구도 의무실로 옮기지 않았다. “무공을 익힌 무림인이라면 운기조식을 통해서 내상을 치료할 수 있다. 물론 의원의 치료나 약이 있다면 더욱 빠르겠지만 말이야.” “그 말씀은?” “그래. 다른 녀석들은 적어도 운기조식이 가능하기 때문에 굳이 내상만으로 의무실에 보낼 이유가 없는 거다.” “아!” 그제야 천여운은 섭맹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좌호법 이화명은 그가 내공이 없는 것을 확인했기에 당연히 운기조식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서 의무실로 보낸 것이었다. ‘크큭, 이제 마무리를 해보실까?’ 슬슬 거의 다 넘어왔다는 판단되자 섭맹이 쇄기를 박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운기조식도 못하는 녀석이 내상을 치료하는데 단시일 내에 가능할 것 같나?” ‘......가능합니다만.’ 물론 나노 머신인 나노가 있기 때문에 어떤 치료이든 단 하루면 가능하다. 하지만 이것은 절대적인 비밀이므로 말해줄 수가 없다. ‘우호법의 말이 맞다. 다음 단계로 가려면 내공이....아!’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 떠올랐다. “잠시 잊고 있었는데, 입관식 때 일 단계 시험을 통과한 자들은 마룡단을 지급해주고 마도관 비급 서재의 일층을 사용할 수 있게 해준다고 들었습니다만.” 마교의 보고라 할 수 있는 마도관 비급 서재의 일층에도 높은 수준의 것들은 아니지만 무공 비서들과 내공심법들이 있다. “푸하하하하핫!” 그런 천여운의 말에 섭맹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웃어댔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천여운이 눈썹을 치켜 올리며 의아해했다. “뭐, 본 호법이라고 해도 귀찮아서 간단하게 설명할 것 같긴 하다만. 빨강 머리 녀석이 중요한 걸 빼먹었네?” “빼먹은 게 있다뇨?” “마도관 비급 서재를 개방은 언제든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는 게 아니다. 단계별로 시험을 통과할 때마다 딱 한 번만 이용할 수 있다.” “네?” 그것은 완전한 개방과는 거리가 멀었다. “크큭, 마도관에는 온갖 비서들이 존재하는데, 보고라 불리는 서재를 자유롭게 탐방할 수 있을 줄 알았더냐?” 마교 내에도 다른 두 세력인 정파 무림맹과 사파 연맹의 첩자들이 잠입해서 활동하기 때문에 보고인 비급 서재에 대한 보호는 교주전 이상으로 철저했다. 놀라하는 천여운의 반응이 재밌게 느껴졌는지 섭맹이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마도관 비급 서재의 일층에서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오직 한 시진뿐이다. 윗층으로 올라갈수록 무공비급의 수준이 올라가기 때문에 시간이 늘어나긴 하다만 그래도 촉박하지.” “시간제한도 있습니까? 하아 산 넘어 산이로군요.” “더군다나 그 안으로 어떠한 방식으로든 필사를 할 수 없고 무조건 외워서 나와야 한다. 크크큭, 비급서를 한 권에서 두 권 정도 외운다면 많이 외운 것일 게다. 보통 자신이 원하는 무공 서적을 찾느라고 시간을 허비하니깐 말이다.” 섭맹의 말대로 이화명이 빠뜨린 것은 가장 중요한 정보였다. 이걸 모르고 비급 서재에 들어갈 때 알게 된다면 누구라도 당황한 나머지 허둥지둥 비서를 고르느라 제대로 된 실속도 차리지 못할 게 틀림없었다. ‘잠깐만. 나에게는 나노가 있잖아?’ 순간 허탈하려 했던 천여운이 나노 머신의 능력을 떠올렸다. 나노 머신인 나노는 서책을 스캔할 수 있어, 책을 빠르게 넘기는 것만으로도 내용을 저장할 수 있을 정도로 빨랐다. 더군다나 그것을 억지로 이해하고 외울 필요도 없이 강제로 뇌로 전이시킬 수도 있다. ‘이거 나한테 완전 유리한 조건이잖아!’ 한 시진이면 한 두 권이 아니라 수십 권은 족히 넘어서 백 권 가까이 스캔할 수 있을 것이다. 섭맹이 천여운에게 절망하라고 준 정보들은 오히려 그를 즐겁게 만들었다. 그것도 모르는 섭맹은 이제 분위기가 슬슬 무르익었다고 생각했다. “고로 내공은커녕 아무 것도 모르는 애송이인 네 녀석이 이 험난한 마도관의 사 년을 혼자서 해쳐나갈 수 있는 것에도 한계가 있단 말씀이시다.” 적어도 마도관에 입관하는 자들은 기본적으로 자신들의 종파 무공은 익히고 들어온다. 시작점이 다른 그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의 손을 잡으라는 의미였다. 천여운이 잠시 고민에 빠지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제 침상 머리에 둔 종이.....혹시 내공 심법입니까?” ‘나는 미끼를 던졌을 뿐이고 네놈은 그걸 물었구나! 클클’ 드디어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내심 기쁜 그였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클클, 그래도 멍청한 녀석은 아니구나. 그래 그것은 본 호법의 내공심법이다.” “이걸 어째서?” “네 녀석이 본 호법의 제자가 된다면 당장 내공심법부터 가르쳐주마.” 천여운의 동공이 흔들렸다. 여섯 종파와의 맹약으로 인해서 그렇게 바래왔지만 익히지 못한 내공 심법이었다. 처음으로 욕심이 담긴 눈빛을 보이는 천여운의 반응에 섭맹은 자신의 회심의 일격이 통했다는 생각에 누런 이를 드러내며 즐거워했다. ‘이 사람은 정말 나를 제자로 원하는 것일까?’ 겉으로 보기에는 술주정뱅이처럼 보이는 섭맹이었지만 명색이 우호법이었다. 처음에는 무작정 의심만 했던 천여운이었지만 그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정말로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해서 도우려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다면 이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모두가 자신의 적일 때 단 한 명의 아군이 있는 것만으로 얼마나 심적으로나 많은 면에서 도움이 되는지는 장 호위를 통해서 잘 알고 있었다. 내상으로 얼굴이 창백하고 몸을 움직이기 힘든 천여운이었지만 비틀거리며 의무실 침상에서 일어나 바닥으로 내려왔다. “호오?” 기대감이 가득한 우호법 섭맹에게 천여운이 절을 올리며 말했다. “우호법을 제 스승으로 모시겠습니다. 제자의 절을 받으십시오!” 파르르 떨리는 몸으로 절을 올리는 천여운의 모습에 섭맹의 얼굴이 흡족함으로 젖었다. 사제지간의 예는 큰 절인 계수배(稽首拜)였다. 계속해서 절을 이어가려는 천여운의 몸이 강한 내공의 힘으로 인해 강제로 일으켜졌다. “아서라. 천가(天家)의 핏줄은 교주 외에는 누구에게도 계수배를 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마교의 법도였다. 아무리 그를 애송이로 생각하고 제자로 받은 우호법이었지만 마교의 사람인만큼 법도를 어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클클, 제자야.” 본인 입으로 제자라고 부르고는 괜히 쑥스러워 하는 섭맹이 천여운을 내공으로 들어 올려 침상에 눕힌 후에 말했다. “흠흠, 오늘은 안정을 취해야 할 테니. 본 호....아니 이 스승님이 올 때까지 내공심법의 요결을 외워둬라.” 그 말을 끝으로 우호법 섭맹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히죽거리면서 의무실을 나갔다. 그가 사라지고 나니 천여운에게는 한바탕 폭풍이 왔다가 지나간 느낌이었다. 하지만 의도하지 않게 마교 내에서도 십위 권에 속하는 강자를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으니, 적으로만 넘쳐나던 천여운에게는 엄청난 기연이라 할 수 있었다. 한 편, 입관식이 진행되는 대연무장에서는 한참 조별 편성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긴 조별 편성이 끝나갈 무렵 후계 서열 순위 세 번째인 복마종의 천무금의 입 꼬리가 사악하게 올라갔다. ‘같은 조로구나. 이 천한 놈아. 흐흐흐.’ 6장 속성 과외란 이런 것이다(1) 천여운이 내상을 입고 마도관 본관의 의무실로 실려 갔을 때, 입관식은 잠시 중지가 되었다. 그것은 입관하는 생도들 중에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운기조식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오 장로 항소유의 음파공은 대연무장에 있는 천 명에 이르는 생도들의 대다수에게 내상을 입할 만큼 그 위력을 제대로 보였다. ‘흐음.’ 천여운이 기상천외하게 피를 분수처럼 뿜어대는 통에 모든 이목이 그에게로 쏠렸었지만, 지금 좌호법 이화명의 관심은 다른 이들에게 향하고 있었다. 소교주 후계 서열 첫 번째인 현마종의 천무연과 다섯 번째 서열인 도마종의 천유찬 두 사람은 음파공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것을 버텨냈다, ‘라기 보다는 이놈들 보통이 아니구나.’ 절반 이상의 공력까지 발휘한 오 장로 항소유의 음파공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적어도 일 갑자 이상의 내공을 연마해야 가능하다. ‘훗, 이 녀석들은 생도들의 수준을 벗어났군.’ 시작점이 이미 일류고수를 넘어서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번 소교주 쟁탈전은 여섯 종파 중에서 현마종과 도마종 이 두 종파에서 경합을 벌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그저 소문만은 아닌 듯 했다. 물론 다른 네 명도 그리 모자란 것은 아니었지만 두 명이 유독 앞서는 것은 확실했다. ‘의외로군.’ 음파공을 내상 없이 견뎌낸 것은 여섯 종파에 속해있는 소교주 후계자들만이 아니었다. 여섯 종파의 직계 혈손들 역시도 이를 버텨냈고, 심지어 그들 이외에도 상위 종파에 속하는 자들 중에서 음파공을 이겨낸 자들이 여덟 명이나 되었다. ‘별로 재미없을 줄 알았는데, 꽤 재미있을 수도 있겠군 크큭.’ 잘하면 이번 기수들 중에서는 제법 쓸 만한 후기지수들을 많이 배출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물론 뚜껑은 열어봐야 알 듯이 사년이 지나면 진가가 드러날 것이다. 처음에 앞선다고 끝까지 상위권을 차지하면서 마도관을 졸업하는 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일 단계 시험을 통과한 자는 총 사백십오 명. 십 년 전의 전대 기수의 일 단계를 통과한 생도들에 비하면 이백 명 가량이나 그 인원이 부족했다. 지난번과 다르게 시험의 강도가 천여운으로 인해서 훨씬 강했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눈치 챈 것은 아니었지만 천무금과 같이 뒤를 돌아봤던 소년들은 이 모든 것이 천여운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에 분노를 금치 못했다. 한 명의 아군을 얻고 수십 명의 적을 얻은 셈이었다. 물론 그 한 명이 여기에 있는 수십 명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전력이기는 했다.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음파공을 버티지 못하고 기절한 소년들은 한 명도 남김없이 탈락 처리가 되어서 방출되고 말았다. “아니! 나는 기절한 게 아니라고!” “그냥 거품이 입에서 났을 뿐인데 왜 방출입니까?” 그 과정에 당연히 결과를 승복하지 못하는 자들이 없을 리가 없었다. 약육강식의 마교의 무도 종파에서 성장해온 자들 중에서는 거친 성격에 반항적인 자들이 많았다. “그래서 납득하지 못하겠나?” “당신들 같으면 평생 용역이나 농사나 지으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아!” 무를 숭상하는 마교에서 청소나 상인, 혹은 농사를 짓고 산다는 것은 무인 취급도 받지 못하는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였다. 반항을 하는 자들의 태도에 무공 교두들만 피곤하게 되었다. “결과에 승복을 못 하나 보군.” “그래.” “그럼 별 수 없다. 강제로 끌어내는 수밖에.” 무공 교두들의 경고대로 그들은 거친 항의를 한지 얼마 가지 못해, 다시 기절해서 마도관 밖으로 끌려 나가야만 했다. 마도관의 관주를 맡게 된 좌호법 염왕 이화명이 굳이 손을 쓸 필요도 없었다. 서른여섯 명으로 이루어진 무공 교두들은 한 부대의 대주 급의 실력자들로써 탈락하는 수준의 소년들이 어찌해볼 상대들이 아니었다. “운이 없는 것도 실력이고, 그것도 너희들의 운명이다.” 좌호법 이화명은 끌려 나가는 그들을 냉정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장내가 정리되고 사백십오 명의 소년들은 정식으로 입관 생도로 명명되었고, 곧바로 마교의 하급무사를 상징하는 삼(三)이라 새겨진 동패를 지급받았다. “이제 시작인 건가?” “꼭 위로 올라가고 만다!” 개중에는 당연히 사기가 넘치는 생도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여섯 단계 중에 가장 첫 단계를 무사히 통과했으니 그 기쁨이 적지 않을 것이다. 신분 패가 주어지는 대로 조별 편성이 시작되었다. 조별 편성은 그들이 사전에 입관 신청서를 냈던 정보들과 일 단계 시험의 결과를 바탕으로 무공 교두들과 좌호법 이화명이 적절히 분배했다. 사백십오 명의 생도들은 스무 명이 배치된 다섯 조를 제외하고는 스물한 명씩 스무 조로 나뉘었다. “왜 스무 조로 나누는지 궁금하겠지?” “마도!!!” 이화명의 말에 모든 생도들이 일제히 마도라고 답했다. 그것은 모든 생도들이 모였을 때 네, 아니오라는 답변을 마도라고 통일하라고 명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 외의 대답은 오직 복명복창(復命復唱)이었다. 어지간한 방식은 군(軍)에서 이뤄지는 방식과 거의 흡사하다고 볼 수 있었다. 마도관에서 관주인 좌호법 이화명의 말은 절대적이었다. “본교의 상급 무사까지 오를 수 있는 삼 단계 시험까지는 모든 생도가 한 날 한 시에 동시에 치른다.” 후기지수 및 차기 무사들을 배출하는 마도관이라고 해도 사 년 내내 천 명이나 되는 대규모의 인원을 훈련시키기 위해 예산을 허비하진 않는다. 하급무사는 주로 경비업무와 잡일을 하기 때문에 큰 내공도 필요 없었고, 삼류 정도의 무위만 지니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급 무사 정도의 한계를 지닌 자들은 빠른 기간 내에 시험을 통해 정리한다. 반면 중급 무사가 되려면 정파 무림맹이나 사파 연맹과 같은 거대 세력들과 전쟁을 치를 때 마교에서 쓰는 기본적인 전술이나 진법을 숙지해야 한다. “중급 무사에 필요한 전술과 진법을 익히기까지 필요한 기간은 총 스물하루(3주)다.” ‘고작 스물하루?’ 대연무장에 오열을 맞춰서 서있는 생도들의 눈빛에 당혹감이 서렸다. 그들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빠르게 진행되는 마도관의 체계를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삼 주 뒤에 익힌 전술, 진법으로 스무 조가 대결을 한다. 여기서 오직 승리한 열 개 조만이 윗 단계로 오를 수 있다.” 스무 조 중에 절반만이 오를 수 있다는 것은 절반에 해당하는 이백 여명이 탈락한다는 말이었다. “뭐, 여기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서로의 협동을 요하는 시험이니깐 괜한 오기를 부리다가 같이 탈락해서 사이좋게 마도관을 나가면 된다. 크큭.” 여전히 잘 나가다가 사기를 꺾는 데는 도가 튼 좌호법 이화명이었다. 조별 시험이라는 말에 내심 쾌재를 부르는 생도들은 많은 수의 상위 무도 종파들과 같은 조로 편성된 이들이었다. 대부분 골고루 편성되기는 했지만 상위 무도의 종파 생도들이 상대적으로 적은 조도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조별 시험이 달가울 리가 없었다. “이것으로 오늘 일정을 마무리한다. 각자 조별로 배정된 숙소로 가서 쉬면 된다. 내일부터 대연무장으로 나오게 되면 지금 네 녀석들의 앞에 서있는 무공 교두들이 아주 친절하게 전술과 진법을 가르칠 거다.” 조별로 나누어서 오열을 맞추고 있는 그들의 앞에는 각 조를 담당하는 무공 교두들이 뒷짐을 지고 그들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며 서있었다. ‘친절?’ ‘아....젠장.’ 아까 전 무공 교두들이 반항하면서 방출을 거부하던 소년들을 무차별적으로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은 몽둥이로 두드려 패는 것을 보았던 소년들이다. “이것으로 해산한다. 해산!” “해산!!!” 모든 생도들이 힘찬 목소리로 복창하며 빠르게 흩어지며 각자 배정받은 숙소로 돌아갔다. 첫 단계 시험을 치른다고 얼굴이 피곤함으로 물든 그들이었다. 그런데 한 생도가 모두가 대연무장을 빠져나가는 동안에도 자리에 남아있었다. 그는 소교주 후보 서열 세 번째인 복마종의 천무금이었다. 모두가 대연무장을 빠져 나가는데 혼자만 남아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천무금이 있는 조인 팔 조를 맡은 무공 교두 임평이 물었다. “삼 번 생도. 왜 아직 남아있는 거지?” 그들은 사 단계 시험을 치러서 대주급 이상으로 오르기 전까지는 명찰의 숫자로 불리게 된다. “교두님께 질문이 있어서 남았습니다.” “훈련과 관계없는 질문이라면 대답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무공 교두들이라고 해도 첫날부터 얼굴이 숙지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여섯 종파에 해당하는 검은 명찰을 가진 여섯 소교주 후보자들은 기억한다. 그들 중의 한 명이 훗날 마교의 절대자가 될 것이기에 말이다. “좋다. 무엇이 궁금한 거지?” “팔 조에서 제가 조장을 맡을 것 같은데.” ‘흐음.’ 아직까지 조장이 뽑히지 않았고, 그것은 내일 진행될 예정이었는데 천무금은 이미 조장 체제로 조가 편성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역시 규칙 따윈 우습게 여기는군.’ 위세가 넘치는 여섯 종파에서 소교주 후계자들에게 마도관에서 있을 시험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았을 리는 없다고 여겼지만 역시는 역시였다. “저희 조로 배정된 칠 번 생도가 의무실로 갔습니다.” “그런데?” “조별 시험이 치러지는데 조에서 한 명이라도 누락되어서 조 전체가 떨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호오? 그래서?” “오늘 남은 입관식 일정에 참석하지 못해서 아무 것도 몰라서 칠 번 생도와 다른 조원들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그에게 오늘 들은 것들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여섯 종파의 서열 후계자들은 전부 천여운을 눈에 가시로 여긴다고 생각했는데, 소문과는 다르게 같은 조원으로써 챙기는 듯하자 기특하게 여겨졌다. 임평이 흡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좋은 자세다. 조별 시험의 기본을 잘 이해하는 듯 하니 첫날부터이긴 하지만 칭찬하마. 삼 번 생도의 의견을 적극 수용해서 본 교두가 직접 본관으로 가서 칠 번 생도에게 전해주도록 하겠다.” “네엣? 교, 교두께서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직접...” “마도관의 본관에는 특별한 상황이 아니고는 생도는 출입할 수 없다.” 딱 잘라서 말하는 임평의 태도에 천무금이 내심 당혹스러웠다. ‘빌어먹을! 무슨 안 되는 게 이렇게 많아!’ 원래 천무금의 목적은 환자이건 뭐건 상관없이 당장에 천여운을 찾아가서 팔다리를 부러뜨리던 괴롭힐 작정이었다. 그런데 설마 본관의 출입이 불가능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처음에는 자신이 여섯 종파임을 내세우려다가 마도관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교두님 부탁드립니다. 아! 그렇다면 혹시 칠 번 생도가 언제 참석이 가능한지만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된 이상 천여운이 숙소로 복귀하는 순간을 노려야 했다. 최대한 빨리 내상을 치료하고 돌아오길 바랬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고통을 느끼게 만들 생각에 그나마 뜻대로 되지 않아 화가 나던 감정이 가라앉았다. 그날 저녁 무렵, 마도관의 본관 의무실로 무공 교두 임평이 천무금과 약속한대로 찾아왔다. 천여운은 체내의 나노 머신이 내부 장기 손상에 대한 자가 수복 및 혈액 증액에 들어가면서 잠이 든 상태였다. 심각한 내상을 입었다는 천여운을 깨울 수 없었던 임평은 의무실의 주치의인 백종명에게 얼마나 입원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 만을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흐음, 내상이 너무 심해서 적어도 열나흘(2주) 정도는 입원해야 합니다.” “열나흘요? 허어. 그렇게 오래 걸리면 윗 단계로 올라가기 힘들 텐데. 더 빨리는 안 됩니까?” 고작 한 사람으로 인해서 자신이 맡은 조가 탈락하는 것은 싫은 임평이었다. 생도들에게는 생존이었지만 무공 교두들에게는 일종의 경쟁이었다. “그게 말이죠. 내공이 있으면 모르겠는데, 칠 번 생도는 그게 전혀 없으니 운기조식도 불가능해서 오래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임평이 듣게 된 것은 삼 주 후에 이 단계 시험을 앞둔 천여운이 열나흘이라는 크나큰 기간 동안 훈련을 빠져야 한다는 사실만을 알고 떠나야만 했다. ‘첫 단계 시험의 운도 여기서 끝이군. 쯧쯧.’ 그는 천여운의 운이 여기서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자신의 쓸모없는 우려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열나흘 뒤에 깨닫게 된다. 바로 다음날. 공기가 차가운 이른 새벽 시간. 아직 해가 뜨기 전이었기에 하늘은 검고 파랬다. -쾅! 주치의인 백종명이 없는 의무실의 문을 걷어차며 누군가 득의양양한 걸음으로 들어왔다. 허름한 옷차림에 술주정뱅이 같이 코끝이 빨간 우호법 광도 섭맹이었다. “클클, 제자야. 스승님이 오셨느니라.” 빨라도 너무 빠른 그였다. 6장 속성 과외란 이런 것이다(2) 하루 전, 우호법 광도 섭맹이 한바탕 폭풍처럼 다녀간 후에 마도관의 주치의 백종명은 서둘러서 치료 준비를 했다. 침과 뜸을 준비한 그는 먼저 천여운의 몸에 침을 놓으려했다. 운기조식을 할 수 없는 천여운의 몸에 기혈을 조절해서 손상된 장기 기관이 수복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괜히 빨리 나으면 들키는 거 아니야?’ 나노 머신이 자가 수복을 시작하면 치료는 하루도 안 되서 끝이 난다. 미처 이 같은 사실을 간과하고 있던 천여운은 어떻게 해야 고민이 되었다. ‘후우.’ 빨리 회복하자니 의심을 받을 것이 뻔했고, 본관의 수뇌부들을 속이려면 치료를 정상적으로 받아야 하는데, 그만큼 시간이 길어질수록 경쟁이 심한 마도관에서 도태될 지도 몰랐다. 더군다나 자신은 의무실로 실려 오는 바람에 다음 단계의 시험이 어떻게 진행될지, 조별 편성, 숙소 배정 등에 대해서 아무 알지 못했다. ‘억지로 의심을 사는 것보다 치료 기간은 채우는 것이 나을까? 하아. 일단은 의원의 치료 기간을 듣고 판단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결론을 내린 천여운이 자신의 곁에 앉아서 몸에 놓을 침들을 정리하고 있는 의원 백종명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의원님.” “백종명이야.” “네?” “그냥 의원님이라고 부르기보다 성을 붙여서 불러달라고.” 넉살 좋게 웃으면서 말하는 백종명의 부드러운 태도에 한결 마음이 풀렸다. 의원의 기본은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백종명의 원만하고 부드러운 성격은 의원으로써 장점이었다. “백 의원님, 제 상태가 많이 심각합니까?” 어차피 자신의 명령으로 나노 머신인 나노가 강제로 장기 기관에 손상을 일으킨 것이라 알고 있지만 의원의 진단이 궁금해진 천여운이었다. 백종명이 누워있는 천여운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에휴, 마도관의 생도에게 이런 말을 해서 안타깝긴 한데, 적어도 훈련에 참가하려면 열나흘에서 보름은 걸릴 것 같네.” “네에?” 놀란 천여운이 두 눈이 커졌다. 당연히 내상을 입었으니 치료 기간이 길어지리라고는 생각했지만 너무 길었다. 사실 평범한 의원들이었다면 내상 치료에 한 달은 걸렸을 텐데, 백종명은 마교의 신의라 불리는 마의 백종우의 제자였기에 이만큼 기간이 단축된 것이었다. “너무 실망하지는 마라.” “하나, 이렇게 늦어져서야 훈련은커녕.” “네가 이 말을 들으면 어떨지는 모르겠는데, 대신 네가 우호법에게 여기서 무공을 배우는 건 모른 척 해줄게.” “아.....” 생각해보니 그가 우호법의 제자로 받아지는 것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백종명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이것을 마도관의 관주인 좌호법 이화명에게 말해서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는 건이었지만, 평소부터 그에 대한 소문을 듣고 딱하다는 생각을 해왔던 백종명이었다. ‘네 처지가 꼭 나를 보는 것만 같아서 그렇다.’ 백종명 역시도 사생아로 태어나서 마의의 제자로 들어가기까지 모진 고생을 해왔다. 그 때문에 본의 아니게 천여운에게 감정이입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굳이 이런 사실까지는 말할 필요가 없기에 백종명은 그 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나중에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내심 그의 배려에 고마워진 천여운이 감사의 인사를 했다. “됐어. 큰 기대도 안 한다.” 정말로 큰 기대를 하지 않는 백종명이었다. 비록 천여운이 우호법 섭맹의 제자로 받아들여졌다고 해도 그게 끝이었다. 우호법 섭맹이 무슨 수를 쓴다고 해도 천여운이 발전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네가 싸워야 할 다른 후계자들도 여섯 종파의 가주들인 장로들에게 무공을 전수 받았을 테니까 말이야.’ 물론 어설픈 스승에게 배우는 것보다 마교 십위 권에 속하는 강자인 우호법 섭맹에게 무공을 전수 받는다면 더욱 빠르게 발전할 수 있겠지만, 다른 생도들에 비하면 그래도 너무 늦게 시작하는 상황이었다. 이 같은 사실을 얘기해줄까 고민했지만 굳이 내상을 입어서 몸이 좋지 않은 천여운을 자극해서 속에 화기(火氣)가 생겨나 치료를 더뎌지게 만들 수는 없었다. “자! 이제 침을 놓을 거니까 제대로 누워라.” 상체를 살짝 들어 올리고 있던 천여운이 머쓱해하며 곧은 자세로 누웠다. ‘흠 그런데 이 녀석 생각보다 몸은 좋네.’ 무공을 전혀 익히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발달한 근육을 보면 꼭 무공을 연마한 것 같았다. ‘뭐 내공만 익히지 않기로 했다니 그런 거겠지.’ 외공만 익힌 거라면 굳이 이상할 이유는 없었다. 잠시 의아해하던 백종명이 중침을 들어서 천여운의 복부에 있는 중완(中脘) 혈에 먼저 꽂으려 했다. 그때 나노의 목소리가 천여운의 머릿속을 울렸다. [외부에서 날카로운 쇠침으로 사용자의 신체에 손상을 입히려 합니다. 긴급 방어 모드로 전환...] ‘안 돼. 하지 마. 지금 침을 꽂는 건 의원이 치료하는 거야.’ [사용자의 명령으로 긴급 방어 모드 가동을 중지합니다.] ‘너 의원이 치료하는 것도 구분할 수 없는 거야?’ 무작정 방어 모드 시스템을 가동하려 했던 나노의 판단에 천여운이 물었다. [사전에 치료 과정이라는 것을 말씀해주시지 않으면, 주인님의 몸에 작은 위해가 되는 신체 손상이라도 긴급 방어 모드가 가동됩니다.] '알겠어. 앞으로 내가 자의로 받아들이는 것에는 일일이 반응하지마.' [알겠습니다.] 나노 머신은 기본 시스템은 사용자를 최우선으로 되어 있다. 아직까지 나노 머신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지 못하는 천여운이었기에 이렇게 하나씩 특성을 알아갔다. -푹! 그 사이에 백종명이 빠른 속도로 천여운의 왼쪽 가슴 밑의 중완혈을 시작으로 복부의 배꼽 밑인 기해혈까지 순차적으로 침 여섯 방을 놓았다. 따끔거리는 것과 다르게 왠지 모르게 뱃속의 일부가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 [시스템에 내장된 침술 십사경락(十四經絡) 도해에 포함된 정보가 검색되었습니다. 지금 침이 들어온 중완(中脘), 거궐(巨闕), 좌기문(左期門), 좌양문(左梁門), 곡지(曲池), 천추(天樞), 기해(氣海). 여섯 혈 자리가 위(胃)를 자극시켜 손상된 위의 회복을 촉진시켰습니다.] ‘호오!’ 혈도에 관한 서적을 읽었기 때문에 나노가 하는 말이 이해가 가는 천여운이었다. 의술에 관심은 없었지만 침으로 혈 자리를 자극해서 치료를 하는 과정이 신기하긴 했다. “침이랑 뜸을 같이 사용할거니까. 한숨 자고 있어라.” 치료 과정을 유심히 지켜보는 천여운의 눈빛이 부담되었는지 백종명은 그에게 잠을 자라고 권했다. “알겠습니다.” 라고 말을 했지만 나노가 실시간으로 그의 몸에 일어난 반응을 설명해주는 바람에 곧바로 잠이 들 수가 없었다. 그런데 문득 천여운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나노. 혹시 내상을 치료하고 나서 내상을 입은 것처럼 의원님이나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어?’ [주인님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네가 치료를 하고 나면 멀쩡해지잖아. 그렇게 된다면 의원님이 너무 빨리 나아서 의심할 수도 있으니까. 의원님이 진맥을 했을 때, 눈치 채지 못하게 할 수 있냐고?’ [자가 수복으로 치료가 완료된 후에 의원이 진맥 시, 맥박을 임의적으로 변경시켜 장기 손상이 있을 때처럼 만드는 것이 가능합니다.] 혹시나 해서 물었던 것이었는데, 가능하다고 한다면 굳이 내상을 치료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열나흘이라는 기간 동안 의원인 백종명을 속일 수 있다면, 우호법 섭맹에게 내공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지도 모른다. ‘좋아! 그럼 치료를 계속하고 의원님이 진맥할 때마다 맞춰서 속여 줘.’ [알겠습니다. 주인님. 사용자의 명령에 의거해 자가 수복 및 혈액 증액을 가동합니다.] 그렇게 하나씩 나노의 사용법과 자신의 상황을 이용할 수 있게 되는 천여운이었다. 나노 머신의 장기 손상에 관한 자가 수복과 혈액 증액은 두 시진도 되지 않아서 완료가 되었다. 덕분에 천여운은 밤새 고통 없이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었다. 이른 새벽부터 의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와 깨우는 불청객의 등장까지 말이다. -쾅! “클클, 제자야. 스승님이 오셨느니라.” 늘 술을 입에서 놓지 않는지 의무실 전체가 우호법 섭맹의 술 냄새로 진동을 했다.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통에 놀라서 잠에서 깨어난 천여운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스.....승님?” "크흠, 인사가 없구나?" 아직 날도 밝지 않았는데 대체 무슨 일로 온 것인가 의아했다. “제, 제자가 스승님께 아침 문안 인사를 드립니다.” 일단은 스승으로 모시기로 했으니 당황하긴 했으나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 숙여 인사를 올렸다. 이를 흡족해 하며 섭맹이 말했다. “오냐. 그래. 어제 본 스승님께서 준 숙제는 다 했느냐?” “네?” 뜬금없이 숙제라는 말에 잠이 덜 깼던 천여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처음에는 대체 무슨 말인가 하고 당황해 하던 천여운은 설마 하는 마음에 물었다. “혹시......스승님께서 주신 내공심법의 요결을 외우라고 하신 것을 말씀하는 겁니까?” “그래. 본 스승님이 올 때까지 다 외우라고 했잖느냐.” 너무도 당연하다는 말에 천여운이 어안이 벙벙해졌다. 나노 머신이 치료를 해서 전부 나았기는 하지만, 우호법 섭맹은 그가 불과 어제 심한 내상으로 의무실에 들어와서 치료를 받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굉장히 급한 사람이구나.’ 설마 아직도 못 외운 것은 아니겠지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우호법 섭맹을 바라보던 천여운이 작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당연히.....외웠습니다.” 물론 시간을 들여서 외운 것은 아니었다. 종이 한 장에 적혀 있는 내공심법의 요결은 나노 머신으로 한 방에 뇌 속에 전이시켰다. 이것을 모르는 우호법 섭맹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오잉? 그 아픈 와중에 다 외었다고?’ 사실 섭맹 역시도 자신이 억지를 부린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일부러 그를 자극해서 빠르게 습득하라고 재촉하려는 목적으로 한 말이었는데, 이미 외웠다고 하니 내심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그래. 본 스승님께서 내준 숙제를 다 외웠다니 잘했구나.” “.....칭찬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스승님 너무 이른 새벽에 오신 것이 아닌지?” 해가 뜰 기미에 온 것도 아니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새벽부터 의무실에 난입한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힘드냐?” “.....그건 아닙니다.” 마도관에 입관하기 전부터 항상 암살 시도가 이어졌기 때문에 깊은 잠을 자지 못하고 늘 일찍 일어나는 천여운이었다. 단지 굳이 새벽에 올 이유가 있느냐는 질문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뭐, 네 녀석도 어차피 알아야 하니 말해주마.” 의자를 끌어와서 그의 옆에 앉은 섭맹이 말을 이어갔다. “앞으로 네 녀석을 가르칠 시간은 열나흘 밖에 없다.” “네?” “네 녀석이 이곳 본관의 의무실에 있는 동안에는 이렇게 만날 수 있지만 숙소로 가고 나면 마도관에 있는 내내 접촉하기 힘들다는 말이다.” 본래는 마도관에 입문하게 되면 지정된 무공 교두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자에게도 무공 전수를 받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자유분방하다 못해서 제멋대로인 섭맹이기에 그 규칙을 어기고 천여운과 접촉해서 무공을 전수하려는 것이었다. “제자가 미처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입관해서 규칙도 제대로 숙지 못한 네 녀석이 뭘 알겠느냐. 그리고 본 스승님께서 이렇게 새벽에 찾아온 것도 몰래 온 거다.” “몰래요?” “내가 한가하게 낮 시간에 죽치고 앉아서 네 녀석을 가르치고 있으면 본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눈과 귀에 오르내리지 않을 거라 생각하느냐?” 제멋대로인 것과 생각이 없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섭맹도 나름대로의 계산을 가지고 천여운을 수련시킬 목적이었다. “어차피 낮에는 교주전으로 출근해야 하고 네 녀석을 가르치려면 새벽에 잠깐 정도밖에 시간이 없다.” 원래는 더 빨리 와서 천여운을 깨우려고 했지만 마도관의 본관에도 무공 교두들과 경비 무사들이 야간 당직을 서기 때문에 그들의 경계가 느슨해지길 살폈던 섭맹이었다. ‘제자 하나 가르치려고 이딴 짓까지 할 줄이야.’ 다행히 인시(寅時) 무렵에는 야간 당직을 서는 무공 교두도 당직실에 들어가서 잠을 자고, 경비 무사들도 꾸벅꾸벅 졸고 있어서 올 수 있던 것이었다. “스승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처음에는 영문도 몰랐던 천여운이었지만, 섭맹이 자신을 위해서 이 정도까지 신경을 써준 것이 감사했다. 섭맹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알았다니 되었다. 시간이 없으니 바로 시작하자.” “네? 지금요?” “본 스승님께서 시간이 없다고 한 말을 귓구멍으로 쳐들은 거냐?” 섭맹의 거친 입담에 천여운이 내심 당황스러웠지만 재빨리 침상에서 일어났다. 애써 가르쳐준다는데 늦장 부릴 여유는 없었다. “바닥에 앉아라.” “.....알겠습니다.” “빨리 앉아!” 섭맹의 재촉에 영문을 모르는 천여운이 일단 바닥에 앉았다. 바닥에 정좌로 앉은 천여운의 뒤로 섭맹이 따라서 앉더니 그의 등 뒤의 명문혈(命門穴)에 손을 가져다 댔다. “네가 본 스승님의 무천심법(舞泉心法) 내공 요결을 외웠다니 그나마 다행이구나.” “지금 뭘 하시려고?” “시간이 없으니 빠르게 네 녀석에게 심법의 운기 방법을 때려 박아주마.” “때려 박는다고요? ” “내 스승님. 아니 네 사조부께서 만드신 고상한 방법이지. 굳이 네가 기(氣)를 느낄 필요 없다. 이 스승님께서 알아서 해줄 테니.” “저기 스승님?” “이 꽉 깨물어라. 소리를 질러서 경비무사라도 오면 이 짓도 끝이다.” 천여운이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섭맹의 손을 타고 명문혈로 웅대한 내공이 흘러들어왔다. 한 번도 내공을 익힌 적이 없는 천여운이었기에 혈을 타고 들어오는 내공이 단순하게 느껴질 리가 없었다.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짜릿한 고통이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끄읍!” “입 다물어라!” 엄청난 고통에 순간 소리를 지를 뻔했다. 순식간에 물밀 듯이 타고 들어온 웅후한 섭맹의 내공은 무천심법의 내공 요결에 적혀 있던 혈 자리를 순환하며 돌았다. 이때 천여운은 고통을 참느라 의식하지 못했지만, 평소라면 사용자의 고통에 항상 긴급 방어 모드를 가동하던 나노 머신 나노가 침묵을 지켰다. 6장 속성 과외란 이런 것이다(3) 나노 머신의 프로그램은 사용자에게 위협, 혹은 위해가 가해질 경우 그것을 차단하고 방어하는 시스템이 가동되도록 되어 있다. 7세대 나노 머신은 기존에 내장된 프로그램 이외에도 자체적인 분석과 연구를 통해 진화하도록 설계가 되었다. 사용자인 천여운의 명령대로 나노 머신인 나노는 우호법 섭맹이 내공을 불어넣는 행위가 사용자에게 위해가 되지 않는다는 판단으로 방어 프로그램을 가동하지 않았지만, 과학적으로 알 수 없는 무형화 된 에너지가 들어오자 곧바로 분석에 들어간다. [사용자의 명문혈(命門穴)을 통해 무형화된 에너지가 유입. 내장된 자료를 통한 검색으로 분석을 시작합니다. 특정한 혈 자리를 통해 순환 반복되는 에너지는 기(氣), 혹은 차크라(chakra)로 추측. 사용자의 체내에 미치는 영향으로 분석을 진행합니다.] 이때 천여운은 자신의 체내 혈 자리를 순환하는 내공의 고통을 이겨내느라 이 같은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나노의 분석, 연구가 쌓이게 되면서 훗날 그에게 크나큰 기연을 가져다주게 된다. ‘이 녀석, 정말 아무 것도 익히지 않은 것이 맞나?’ 무천심법의 운기 경로로 내공을 순환시켜주면서 우호법 섭맹은 의아해했다. 천여운의 기경팔맥을 비롯해 임맥과 양맥은 벌모 세수를 받은 것처럼 불순물이 없어서 내공 순환에 거침이 없었다. ‘......역시 교주인가?’ 그것은 나노 머신이 주입되면서 체내의 불순물을 제거하고 육신의 십사경락을 비롯한 근육과 근맥을 최상의 형태로 바꾸었기 때문이었지만, 이 사실을 모르는 섭맹은 자연스럽게 교주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화 부인을 많이 아끼긴 했나 보군.’ 호법인 그는 교주의 곁에서 많은 것을 지켜보았다. 강한 후계자의 양성과 마교의 근간을 이루는 여섯 종파와의 끈끈한 혈맹을 위해 여섯 명의 처를 맞아들였으나, 화 부인 만큼 정을 준 여인이 없었다. -탁! 한 시진 가량을 운기 경로에 내공을 순환시켜준 섭맹이 손을 뗐다. 아무리 심후한 내공을 지닌 섭맹이라고 하나 타인의 운기 경로를 위해 장시간 동안 내공을 소모했으니 지칠 수밖에 없었다. 얼굴에 흐르는 땀을 소매로 닦으며 섭맹이 물었다. “하아....하아, 운기 경로를 기억했느냐?” “확실하게 기억했습니다!” 원래 어떠한 무도 종파라도 처음 운기 경로를 가르쳐주기 위해서 장시간 동안 내공을 순환시켜주는 무리한 짓을 하지 않는다. 스승이 제자에게 내공으로 두세 번 정도 운기경로를 순환시켜준 후에 제자 본인이 직접 심법의 호흡을 반복하여 운기 경로를 완전히 습득하여 단전을 형성시킨다. 이 과정은 모든 내공을 쌓는 초석이었고 단전에 내공을 형성하기까지 길게는 일 년에서 짧게는 몇 달을 소요하게 된다. 그러나 섭맹의 스승은 무공에 재능이 없는 자신의 자식에게 내공을 가르치기 위해 이러한 무식하면서도 파격적인 방법을 개발해냈다. “크크큭, 꽤 고통스러울 거다. 하지만 내공에 대해 일자무식인 네 녀석에게 가장 어울리는 방법이지.” 단지 이것을 시행하는 스승도 내공 소모가 크고, 시전 받는 제자도 고통스럽다는 것이 유일한 단점이었다.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지쳐있는 섭맹의 모습에 내심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목표는 이레(7일)다. 그 안에 네 녀석의 단전에 내공을 생성시킨다. 알겠느냐?” 다른 종파의 무가에서 들었다면 오만한 목표라고 하겠지만 섭맹은 정말로 일주일 안에 이것을 달성시킬 작정이었다. ‘스승님의 말씀대로 일주일 만에 내공을 가질 수 있다면 충분히 고통을 감내할 만하다.’ “신경써주시는 만큼 꼭 성공시키겠습니다.” “기특한 말도 할 줄 아는구나. 흐흐흐, 좋다. 그렇다면 오늘 수련은 이걸로 마무리한다.” 섭맹은 흡족한 표정으로 그의 등을 두드리고는 의무실을 나가버렸다. 바람과도 같이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사내였다. ‘후우, 반드시 이레 안에 내공을 형성하고 만다!’ 굳은 결의에 찬 천여운은 아침이 밝고 의원 백종명이 출근하기 전까지 호흡법을 계속하며 운기 경로를 탐색해갔다. 날이 밝아지고 아침 일찍 모든 생도들이 대연무장으로 집합했다. 그들보다도 먼저 연무장에 도착해있던 무공 교두들은 자신들이 할당 받은 조원들을 살펴보았다. ‘흠, 예상대로군.’ 무공 교두들이 서로를 바라보면서 눈짓과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연무장에 모여 있는 생도들의 얼굴에 나있는 상처와 멍들로 인해서였다. 마도관에 입관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것이 자신들끼리 서열을 정하는 일이었다. 밤새 무공 교두들이 일부러 숙소에서 자리를 비운 이유는 그들끼리 서열을 정하는 것을 암묵적으로 묵인하기 위함이었다. ‘이 녀석들이 각 조의 조장들인가?’ 굳이 조장을 뽑을 필요도 없이 각 조의 맨 선두에 서열 전쟁에 승리한 생도들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서있었다. 예상대로 소교주 후보인 생도들은 자신들이 들어간 조에서 정점이 되었다. 그러나 딱 한 군데만은 무공 교두들이 예상한 것과는 다른 결과가 일어나 있었다. ‘설마 저 녀석이 사 번 생도를 이겼단 말인가?’ 십이 조에 배치되었던 사 번 생도는 바로 독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종섬이었다. 당연히 그가 조에서 최고 서열이 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맨 앞의 선두에 서있는 소년은 십팔 번 생도였다. 오른쪽 눈가에 긴 흉터가 나있는 십팔 번 생도의 얼굴에도 멍으로 가득한 걸로 보아서 꽤나 격렬하게 서열 다툼을 한 듯 했다. ‘호오. 재미있는 녀석이 등장했군.’ 단상 위에 서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는 좌호법 이화명의 얼굴에 흥미가 감돌았다. 대부분의 생도들은 훗날 소교주, 그리고 교주가 될 지도 모르는 검은 명찰의 생도들을 함부로 건들지 못하는데, 십팔 번 생도는 대단한 배짱과 실력을 지녔다는 의미였다. ‘멍청한 놈.’ ‘하다하다 하위 종파의 녀석한테 밀린 거냐?’ 이로 인해 다른 다섯 종파의 후보자들의 경멸의 눈빛마저 받아야만 하는 천종섬이었다. 치욕스러운지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모두 모인 것 같으니 훈련을 시작한다.” “마도!!!” 이화명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생도들이 외치며 드디어 훈련이 시작되었다. 중급 무사들의 기본이 될 수 있는 전술과 전법, 진형을 갖추는 훈련을 삼 주 동안 진행하게 되고, 그것이 끝나는 마지막 날에 조별 시험이 진행될 것이다. “오열을 맞춰서 대강당으로 간다. 일 조 부터 앞으로 갓!” “앞으로 갓!!!” 매일 훈련은 오전과 오후로 나누게 된다. 첫 주 오전에는 점심 식사 시간 전까지 대연무장 우측 편에 있는 대강당에서 전술과 전법에 대한 이론을 배우게 되고, 오후에는 대연무장에서 진형 훈련을 한다. 모든 훈련은 저녁 식사 전에 마무리가 되고 그 후부터는 생도들의 개인 시간을 가지게 되는데, 대다수의 생도들은 자신들의 종파나 가전 무공을 수련하는 식으로 보냈다. 첫날 훈련을 마치고 그날 저녁 팔 조의 숙소. “크아아악! 빌어먹을!” 팔 조의 조장을 맡게 된 삼 번 생도 천무금은 아까 전에 들었던 무공 교두 임평의 말 때문에 심기가 불편해져 있었다. 천무금의 신경질적이고 포악한 성격 때문에 같은 숙소 내에 있는 생도들이 그의 눈치를 보느라 조용히 숨을 죽였다. “열나흘 동안이나 입원을 한다는 게 말이 돼?” “의원의 판단이니 거짓은 아닐 겁니다.” 신경질적인 천무금의 곁에서 유일하게 그것을 받아주는 소년이 있었다. 대머리에 가까울 만큼 짧은 머리에 턱이 튀어나온 팔십 번 생도였다. 그는 여섯 종가 중 하나인 복마종의 혈손인 자현이라는 소년으로, 천무금과는 외가의 핏줄로 이어졌으며 어릴 적부터 그에게 충성맹세를 하고 주군으로 모시고 있었다. “거짓이 아니긴. 그 자식 일부러 연기하고 자빠진 게 틀림없어.” 숙소로 오는 날만을 단단히 벼르고 있었는데, 이 주씩이나 입원을 한다고 하니 짜증이 났다. “그 빌어먹을 더러운 핏줄 새끼가 편하게 누워 있는 꼴만 생각해도 이가 갈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다른 종파의 후계자들에 비해서 유독 천여운에 대한 천무금의 분노는 이상할 만큼 높았다. “제기랄!” -쾅! 화가 나서 숙소에 있는 물건을 발로 차고 신경질을 내는 천무금을 아이 달래듯이 자현이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자님. 고정하시죠. 굳이 열 내실 필요 없이 이렇게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응?” 자현이 조심스럽게 천무금의 귀에 대고 속삭이며 말했다. 그의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신경질적이던 천무금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시간을 빠르게 지나 닷새라는 시간이 흘렀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대연무장에서 오후 훈련이 시작되려 했다. 사 일 동안 훈련에 목검과 나무방패를 이용해서 진형 훈련을 했지만, 오늘은 첫 번째 진형에 관한 마지막 훈련을 위해 실제 진검(眞劍)과 철 방패를 쓴다. 팔 조 역시도 진검과 철 방패를 지급 받아서 훈련에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준비 됐나?” 진형의 뒷줄에 있는 팔십 번 생도 자현이 자신의 앞에 있는 이십삼 번 생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이십삼 번 생도가 주변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진형 훈련을 시작한다. 진검을 사용하는 만큼 앞 열과의 거리를 유지해서 진형을 변형한다. 개(開)!” -팍! 팔 조의 무공 교두 임평이 훈련의 시작을 알리며 붉은 깃발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팔 조의 생도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깃발의 움직임에 맞춰서 진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였다. -푹! “끄악!” 뒷 열에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진형을 제대로 갖추기도 전에 사고가 터졌다. “무슨 일이야?” 비명소리에 놀란 무공 교두 임평이 다급하게 그곳으로 뛰어가 보니, 이십삼 번 생도가 등에 진검이 찔려서 고통스러워 하고 있었다. “이 멍청한 놈들이! 간격을 유지하라고 했잖아! 저리 비켜!” 임평이 화를 내며 이십삼 번 생도의 등을 찌른 자현을 밀쳐냈다. 박힌 검을 바로 빼냈다가 출혈이 심할 것 같다고 판단한 임평은 곧바로 그를 엎고 본관을 향해 달렸다. 그것을 바라보는 팔 조의 조장 천무금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쿵쿵! “어이쿠!” 다급하게 의무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책상에 턱을 괴고 졸고 있던 마도관의 주치의 백종명이 화들짝 놀라서 깼다. “무슨 일입니까?” 의무실의 문을 열자 무공 교두 임평이 검에 찔린 생도를 업고 들어왔다. 그동안 천여운 이외의 환자가 없어서 지루하게 시간을 때우고 있던 백종명이었다. ‘드디어 환자가 왔구나!’ 내심 좋았지만 일부러 티를 내지 않고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헉헉! 진검으로 훈련하는 도중에 생도가 다쳤습니다. 출혈이 심해질까 검을 뽑지 않고 일단 데려왔습니다.” 얼마나 다급하게 왔는지 거친 호흡을 내뱉는 임평이었다. “이런! 일단 이쪽 침상으로 옮기도록 하죠.” 등에 찔려 있는 검을 보고 놀란 백종명이 비어있는 침상으로 안내했다. 조심스럽게 침상에 그를 옮겨놓는 사이에 백종명이 붕대와 소독약, 그리고 바늘과 실을 챙겨서 왔다. “괜찮겠습니까?” “검을 빼지 않고 오신 건 잘하셨습니다. 여기를 잠시만 붙잡아 주십시오.” 백종명이 생도의 상의를 찢어서 탈의시키고 조심스럽게 박힌 검을 빼냈다. 그러자 생도의 상처 부위에서 많은 피가 흘러내렸다. 마의 백종우의 제자답게 백종명은 빠른 솜씨로 소독을 마치고 흘러내리는 피를 지혈한 후에 상태를 살폈다. “어떻습니까?” “다행히 상처 부위가 근맥은 비켜나간 것 같군요. 운이 좋았습니다.” 등의 근맥이 상하기라도 했다면 무인으로서 치명적이라 할 수 있었다. 좋은 소식에 긴장했던 것이 풀렸는지 임평이 침상 옆의 의자에 털썩 앉아서 숨을 돌렸다. “하아. 그래도 제자 같은 녀석들이라고 신경 쓰이시긴 하나 봅니다.” “이 녀석들은 전부 제 책임이니까요.” 이 단계 시험을 치르기 전까지의 모든 사고는 그의 책임이었다. 벌써 그의 조로 배정된 생도 중에서 두 명이나 사고가 터졌기 때문에 시말서(始末書)는 피하지 못할 것 같았다. “일단 상처 부위를 꿰매야 하니, 입원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만.” “입원이요?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백종명의 말에 의하면 근맥이 다친 것은 아니라서 삼 일 정도만 입원했다가 퇴원하면 된다고 한다. 혹시나 천여운과 같은 사태가 벌어질까봐 우려했는데 다행이었다. 아직 훈련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무공 교두 임평은 백종명에게 생도를 맡긴 후에 의무실을 나갔다. 그날 저녁 백종명이 퇴근하고 일 각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불이 꺼진 의무실의 침상에서 누군가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그는 오후에 상처를 꿰매고 침상에 엎드려서 잠이 들어 있던 이십삼 번 생도였다. 이십삼 번 생도는 마치 백종명이 나가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일어나더니 의무실 문을 살짝 열고 주변을 살피다가, 의무실 진열장에 있는 의료용 칼을 하나 집었다. “후우.” 긴장한 눈빛으로 의료용 칼을 손에 쥔 이십삼 번 생도는 천천히 흰 장막으로 가려진 창가 쪽에 있는 침상 쪽으로 조용히 걸어갔다. -촥! 가려진 흰 장막을 걷어낸 이십삼 번 생도의 눈으로 침상에 누워있는 한 소년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는 바로 오일 전에 먼저 입원해 있던 천여운이었다. 잠이 들었는지 눈을 감고 있는 천여운을 바라보며 이십삼 번 생도가 중얼거렸다. “후우, 다 살자고 하는 짓이다. 날 원망하지 마라.” 이십삼 번 생도가 긴장 했는지 호흡을 가다듬으며 천여운의 발목의 근맥을 향해 의료용 칼을 가져다댔다. 그가 제대로 걷지 못하도록 먼저 발목 근맥을 자를 작정이었다. -탁! 그가 검을 가져다대는 순간이었다. 눈을 감고 있던 천여운의 머릿속으로 나노 머신 나노의 목소리가 울렸다. [사용자의 발목 근맥 쪽으로 위해를 가하는 행동이 포착되었습니다. 사용자의 신체를 보호하기 위한 긴급 방어 모드를 가동합니다.] -파치치치치치치칙! “이, 이게 뭐야? 끄아아아아아아아악!” 천여운의 발목 근맥에 칼을 갖다 대던 이십삼 번 생도가 손을 타고 들어오는 강한 전격(電激)에 비명을 지르더니, 전신에 경련을 일으키며 머리카락이 전부 타서는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렇게 대머리가 되어서 쓰러져 있는 이십삼 번 생도를 천여운이 차가운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역시 예상을 벗어나질 않네.” 7장 이놈, 모두를 속이고 있었어(1) 늦은 밤 해시(亥時) 무렵, 마도관 본관의 이층에 있는 의무실. “으으으!” 알 수 없는 강한 전격으로 인해 큰 충격을 받고 기절한 이십삼 번 생도가 깨어났다. 온몸에 아직도 그 짜릿한 기운이 남아 있는지 경련이 일어났다. 분명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천여운의 발목 근맥을 의료용 칼로 그으려다가 알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뿐이었다. ‘내, 내가 왜 기절한 거지?’ 주위를 둘러보니 아직 의무실인 것을 보면 꿈이라도 꾼 것인가 착각마저 들었다. 분명히 의무실의 주치의원인 백종명이 퇴근하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려 했던 그였다. ‘뭐지?’ 주위를 돌아보던 이십삼 번 생도가 알 수 없는 감각에 그 눈빛에 불안감이 서렸다. 그리 긴 머리카락은 아니었지만 목까지 닿고 고개를 한 번 돌려주면 찰랑거리던 그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야. 아닐 거야.” 분명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머릿결이 느껴지지 않았다. 극도의 불안감에 사로잡힌 이십삼 번 생도가 자리에서 일어나 동경을 찾으려했다. 그러나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강한 압박에 상체를 일으키다가 그대로 다시 침상에 쓰러지고 말았다. “크흑!” 근맥에 손상은 없었으나 바늘로 상처부위를 꿰맸으니 아플 수밖에 없었다. 고통으로 몸을 뒤틀던 이십삼 번 생도가 어둠으로 잘 보이지 않는 자신의 몸을 눈을 찌푸리며 바라보았다. 그의 상반신과 발목이 줄 같은 것으로 결박이 되어 있었다. 얼마나 세게 묶었는지 몸이 고정되어서 아무리 힘을 줘도 풀 수가 없었다. “누, 누가 묶은 거야? 대체? “나야.” -촥! 온몸을 아등바등 거리며 줄을 풀어내려 하는 그의 침상 장막을 걷어내며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잠들어 있다고 생각했던 천여운이었다. 놀란 이십삼 번 생도가 두 눈이 커져서 말을 더듬으며 입을 열었다. “네, 네 녀석이 어떻게?” “뭘 어떻게야? 기절한 너를 묶어서 얌전히 침대에 올려준 거지.” “기절?” 역시나 자신이 마지막에 기억했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자 내상이 심하다고 알려진 천여운이 멀쩡히 걸어 다니며 자신을 포박한 것보다도 있어야 할 것이 없어졌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힌 그가 물었다. “내, 내 머리카락은?” “맞아. 너, 이제부터 대머리야.” 싱긋 웃으며 말하는 천여운의 얼굴을 잠시 멍하게 쳐다보던 이십삼 번 생도가 미칠 듯이 몸부림을 치면서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안 돼! 안돼에에에! 내가 대머리라니! 내가 대머리라...” “조용히 해!” -퍽! 의무실이 떠나가라 고함을 지르려던 이십삼 번 생도가 천여운의 주먹을 맞고 다시 기절하고 말았다. “되게 시끄럽네. 재갈도 물려야 겠군.” 천여운이 기절한 그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대머리가 되었다는 충격에 휩싸여서 기절했던 이십삼 번 생도가 다시 정신을 차리기까지는 아까 보다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신을 차린 이십삼 번 생도는 아까 전의 기억이 떠올라서 또 다시 소리를 지르려고 했지만, 자신의 입에 재갈이 물려있다는 사실을 금방 깨닫고 만다. “읍읍!” 그런 이십삼 번 생도의 곁으로 다가온 천여운이 침상 옆 의자에 걸터앉았다. 대머리가 되었다는 충격 때문에 정신이 혼미하던 이십삼 번 생도가 이윽고 진정을 되찾았다. 몸을 결박당한 것도 모자라서 입을 재갈로 물렸으니, 이 상황이 자신에게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인지한 것이었다. “읍읍읍!” “입에 재갈이 물려있는데 멍청하게 뭐라고 떠드는 거야?” 천여운의 차가운 목소리에 이십삼 번 생도의 눈빛이 흔들렸다. 입관식이 있던 날에 대연무장에서 문득 쳐다보았을 때는 멀뚱멀뚱 서있기만 해서 순진무구하고 단순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이 녀석 원래 이랬던가?’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서 천여운을 쳐다보니 그 표정이 싸늘했다. 이제야 자신이 처한 상황이 굉장히 위태롭기 그지없다는 것을 인지한 이십삼 번 생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몸을 이리저리 뒤트는 것도, 소리를 내려는 것도 멈추자 천여운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있잖아. 내가 이 나이가 되도록 어떻게 살아남았을 것 같아?” 입에 재갈이 물려있으니 대답을 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천여운도 그것을 개의치 않는지 계속 말했다. “네 녀석 같은 놈들이 시도 때도 없이 암살이니 독을 푸니, 얼마나 많이 왔을까?” 그 말을 하는 내내 천여운의 목소리에는 강한 살기가 서려 있었다. 그만큼 아직 소년에 불과한 그의 인생은 모진 풍파와도 같았다. “이게 뭘까?” 천여운이 손에 무언가를 쥐고 꼼짝없이 누워있는 이십삼 번 생도의 눈에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보여주었다. 그것은 그가 천여운의 발목 근맥을 그으려고 했던 의료용 칼이었다. 천여운이 장난처럼 휘두르던 의료용 칼끝을 이십삼 번 생도의 목젖에 가져다대며 말했다. “이걸로 장난질을 하려고 했으니 찔리면 얼마나 아플지 알겠지? 아 죽을 수도 있겠구나.” 이십삼 번 생도의 두 눈이 심하게 흔들렸다. 능청스럽게 말을 하는 천여운의 모습이 무섭게 느껴졌다. “자! 그럼 말해.” -꿀꺽! 이십삼 번 생도가 긴장된 나머지 마른 침을 삼켰다. “누가 시킨 거야? 이 짓거리.”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라는 생각에 두려움이 커진 이십삼 번 생도였지만, 극도로 긴장하니 머릿속에서 이 난관을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수십, 수백 가지의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그러다 떠올렸다! “읍읍!” 뭔가를 말하려고 하는 그의 태도에 천여운이 입에 물리고 있던 재갈을 당겨서 턱으로 내렸다. “말 해!” “하아...하아...” 긴장한 상태로 물려져 있던 재갈이 풀리자 거친 호흡이 터져나왔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이십삼 번 생도가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걸.” “뭐?” “나는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그리고 마도관에 있는 의무실에서 내 목을 찔러서 죽인다면 네 녀석도 무사할 것 같아?” 이십삼 번 생도가 떠올린 생존 방법은 바로 규칙이었다. 마도관에서 훈련이나 공식적인 비무를 통해서 생도끼리 겨뤄서 부상을 당하거나, 죽는 것은 규칙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외에 상대를 해하는 것은 절대로 금해져 있었다. ‘네놈이 나를 어쩔 수 있을 것 같아?’ 극도의 긴장으로 인해 활로를 생각해낸 이십삼 번 생도의 얼굴이 득의양양해졌다. 천여운이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흐음. 역시 그냥은 안 통하네.” “당연한 소리를 하지 마라. 네 녀석이 설사 고문을 한다고 해도 내 입을 열 순 없을 거다.” 이 정도 패기마저 보였으니, 당연히 납득할 거라 여겼던 천여운의 표정이 이상할 만치 묘해졌다. “열지 안 열지 해보면 알겠네?” “뭣?” -꽉! “읍읍! 읍읍읍읍!” ‘대체 뭐하는 거야?’ 갑자기 턱에 걸려있던 재갈을 다시 올려서 그의 입에 물리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의무실의 한편에 있는 진열장을 뒤지더니 긴 장침들을 가져왔다. 아무 말을 할 수 없는 이십삼 번 생도의 두 눈이 커졌다. “읍읍읍읍! 읍읍읍읍읍읍읍!” ‘뭐, 뭐야? 설마 그걸로 대체 뭘 하겠다는 거야?’ "내가 살던 숙소에는 이런 게 없었는데, 여긴 좋은게 참 많더라." 극도의 불안감에 사로잡힌 이십삼 번 생도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천여운이 그것을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이내 묶여서 고정되어 있는 이십삼 번 생도의 왼손을 붙잡았다. 놀란 나머지 재빨리 주먹을 쥐었는데 그것을 강제로 폈다. ‘무, 무슨 힘이 이렇게?’ 주먹을 쥐려고 안간 힘을 쓰는 이십삼 번 생도가 놀라했다. 무공을 익히지도 않았다는 놈이 손가락을 일일이 강제로 펴는데 그 힘이 너무 셌다. “읍읍읍!” ‘제발!!!’ 강제로 손가락이 펴지자 천여운이 잔인하게 웃으며 말했다. “좀 아플 거야.” 그 말과 함께 검지 손가락의 손톱 밑으로 향해 장침을 그대로 꽂아 넣었다. -푹! “끄으으으으으으읍!” 손톱 밑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장침으로 인한 고통에 이십삼 번 생도가 재갈에 제대로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온몸을 들썩이며 눈물을 흘렸다. 얼마나 아픈지 목에 핏대가 써서 호흡마저 거칠어졌다. 그런 이십삼번 생도의 모습에도 천여운은 전혀 개의치 않는지 무표정하게 중지 손가락을 들어서 손톱 사이에 장침을 꽂아 넣었다. “끄으으으으으읍!” 고작 두 개를 꽂아 넣었지만 아직 소년에 불과한 이십삼 번 생도가 견딜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눈물을 질질 흘리며 고통에 몸서리를 치는 그를 향해 천여운이 마지막으로 말을 남겼다. “고문으로 입을 열지 못한다고 했으니깐 그냥 내 화풀이로 생각해.” 고통으로 눈물을 흘리던 이십삼 번 생도가 그 말에 두 눈에 커져서 몸을 더욱 심하게 뒤틀면서 뭔가를 말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것은 정말 잔인한 고문의 시작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십삼 번 생도의 왼손 손가락의 전부에 장침이 꽂혀 있었고, 두 번 정도 고통을 참지 못하고 기절했다가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끼이이이이이! 천여운이 일어나 의자를 끌고 침상의 왼쪽 편에서 우측으로 이동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기에 이십삼 번 생도는 두려움이 가득차서 눈물을 쏟아냈다. 천여운이 자리를 잡고 그의 오른손을 잡으려 하자, 이십삼 번 생도가 기를 쓰고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재갈을 뱉어내려했다. “읍읍읍!” 그 모습에 천여운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이제 말할 생각이 들었어? 진작 처음부터 얘기하지 그랬어.” 천여운이 빙긋 웃으며 그의 입에 물려 있던 재갈을 내려주었다. 얼마나 고통스러워서 했던지 하얗던 재갈이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재갈을 벗기자 거친 호흡을 내뱉던 이십삼 번 생도가 더 이상 후환이니 뭐니, 뒤도 생각하지 않고 뭔가를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가 뭔가를 고하기도 전에 천여운이 먼저 입을 열었다. “천무금이지?” “헉? 그....그걸 어떻게?” 놀랍게도 천여운은 자신을 보낸 사람을 정확하게 지목해냈다. 물론 그 계략을 짠 사람이 누구인지는 몰랐지만 그것만으로도 이십삼 번 생도를 놀라게 만들어냈다. “네 녀석 이십삼 번 생도면 팔 조잖아. 나랑 같은 조.” “.....그, 그렇습니다.” 이미 천여운에게 모진 고문을 당해서 심적으로 굴복한 이십삼 번 생도가 공손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와중에도 계속 의무실에만 있던 천여운이 조가 편성된 것을 알고 있고, 자신이 그 조에 속해있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네 녀석 명찰이 여기에 있거든.” 그의 생각이라도 알아챈 것처럼 천여운이 침상 옆의 탁자에 올려 진 이십삼 번 생도의 숫자가 기입된 명찰을 들어보였다. “그것만으로 조를 알았다는 게?” “아아....아주 훌륭하신 우리 팔 조 조장님의 배려 덕분에 매일 오전 때마다 무공 교두님께서 오셔서 과외 수업을 해주었거든.” 이것은 복마종의 후계자인 천무금이 전혀 상정하지 못한 정보였다. 매일 오전마다 진행되는 전술과 전법 강의는 대강당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무공 교두들이 할 일 없이 그들의 곁에 서서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그때마다 팔 조를 담당하던 임평은 본관의 의무실로 와서 천여운에게 이론만이라도 설명했던 것이었다. 시말서를 쓰지 않고 자신의 조에서 누락자가 없도록 하려는 필사적인 임평의 노력 덕분에 천여운은 그의 조가 몇 조이며, 누가 같은 조인지를 이미 파악한 상태였다. “대충 짐작은 했지만 네 입으로 들으려고 해본 거야.” 가볍게 말을 하는 천여운이었지만 이십삼 번 생도는 너무나도 두려웠다. 눈앞의 소년이 정말로 천무금과 자현이 말했던 것처럼 허접한 쓰레기라고 믿을 수가 없었다. ‘누가 그랬어? 이, 이놈은 절대 허접 쓰레기가 아니야!’ 오히려 자신을 감추고 있는 괴물이었다. 아직까지 힘을 갖추지 않았기에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자신의 힘을 가지게 되는 순간 얼마나 두려운 행보를 할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뭐, 덕분에 좋은 정보도 알았고 조금이라도 자둬야 하니깐 이쯤에서 끝내자.” “저, 정말입니까?” 두려움으로 가득했던 이십삼 번 생도의 눈빛에 실 낱 같은 희망이 솟아났다. “그래. 아! 참고로 방금 전에 있었던 일말이야.” “누...누구에게도 절대로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제발! 노여움을 거둬주십시오!” 마음 같아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머리라도 박으면서 말하고 싶었지만 온몸이 구속되어 있어서 그건 무리였다. 그런 이십삼 번 생도의 급변한 태도에 천여운이 한 쪽 입 꼬리를 올리며 그의 훈혈(暈穴-기절시키는 혈도)에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타탁! “엇?” 그 짧은 순간에 이십삼 번 생도의 동공이 흔들렸다. 혈자리에 점혈을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내공을 필요로 하는데, 분명 천여운은 내공이 전무한 걸로 알고 있었다. ‘이놈, 모두를 속이고 있었어.’ 그것을 마지막으로 이십삼 번 생도의 험난한 의무실 첫날의 기억은 끝맺었다. 7장 이놈, 모두를 속이고 있었어(2) 의무실에서 한바탕 사건이 있었던 몇 시진 뒤의 어두운 새벽. 평소와 마찬가지로 인시(寅時) 무렵에 어김없이 우호법 광도 섭맹이 찾아왔다. 며칠 전보다도 섭맹의 얼굴은 기대감으로 넘쳐흘렀다. 그것은 어제 새벽에 천여운이 드디어 단전에 내공을 쌓는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이놈은 진짜다.’ 섭맹은 진심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일주일을 목표로 잡은 것도 사실은 원래 예상한 기간보다도 짧았다. 그의 스승이 개발한 획기적인 방법 역시도 적어도 열나흘(2주)에서 스물하루(3주), 재능이 없다면 적어도 한 달은 소요되는데, 그것을 모두 뒤집고 닷새 째 되는 새벽에 달성했다. 원래는 어떻게 해서든 이 주 안에 내공만이라도 쌓게 만들고, 하루라도 그의 무공인 접무도법(蝶舞刀法)의 기본 식과 보법만이라도 이론적으로 가르칠 요량이었다. ‘흐흐흐. 이렇게 된다면 기간이 전부 단축되는군.’ 왜 다른 동료들이 제자를 키우라고 그렇게 권했는지 알 것 같았다. 가르치는 제자가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그 만족감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제자, 천여운. 스승님께 아침 문안 인사를 올립니다.” “오냐. 제자야.” 더군다나 예의도 참으로 바르기도 했다. 첫날에 들이 닥쳤을 때를 제외한다면 늘 먼저 깨어나서 가지런한 자세로 정좌로 대기하고 있었다. 일어나서 인사를 하는 천여운을 기특하게 바라보던 섭맹이 물었다. “그것은 어디에 있느냐?” “침상 밑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 말과 함께 천여운이 창가 쪽에 있는 의무실 침상으로 가서 작은 목함(木函)을 가지고 왔다. 목함을 열자 그 안에서 진한 약재의 냄새가 흘러나왔다. 환(丸)으로 만들어진 갈색 약은 다름 아닌 일 단계 통과자들에게 주어지는 마룡단이었다. 정해진 규칙대로 통과자들 사백십오 명에게는 마룡단이 지급되었다. 정제 기간에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수량이 한정되어 있어, 오직 마도관의 인재 육성을 위해서만 사용된다. 마룡단은 복용 시 제대로 흡수한다면 이십 년을 수련해야 얻을 수 있는 내공을 단번에 가질 수 있게 된다. -벌컥벌컥! 마룡단을 바라보던 섭맹이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호리병의 술을 들이켰다. 오늘 이것을 천여운에게 복용시켜서 자신이 돕는다면 약 기운의 손실을 최대한 줄여서 이십 년의 내공을 흡수시킬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 녀석이 적어도 최소한의 앞가림은 하게 되겠지.’ 속성으로 하는 것치고는 정말 대단한 성과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이 같은 방법은 적어도 높은 수위에 해당하는 내공을 지닌 스승과 자질이 뛰어난 제자의 궁합이 맞아야 가능한 일이었다. “클클, 제자야. 그런데 저 녀석은 대체 누구냐?” “아!” 섭맹이 의무실의 우측 중간에 위치하는 흰 장막으로 가려놓은 침상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곳에 들어오면서 천여운 외의 다른 사람의 호흡 소리를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점혈이라도 해뒀는지 아주 미약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촥! 섭맹이 침상 쪽으로 다가가 장막을 걷어내자 상반신에 붕대를 매고 있는 대머리의 소년이있었는데, 예상대로 혈도를 점해서 기절한 듯 했다. “호오? 훈혈(暈穴)을 점했구나.” 점혈법을 가르친 적은 없었는데 혈도를 점한 것을 보니, 내공을 익히기 전부터 이에 관련된 지식은 습득한 것 같았다. “백 의원께서 퇴근하고 나서 저를 노리더군요.” “네 녀석을 노려?” 마도관의 의무실에서 그를 노렸다는 말에 섭맹이 인상을 찌푸렸다. 어지간한 배짱이 있지 않고는 마도관에서 방출되는 것을 전혀 겁내지 않고 저질렀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그를 뒤에서 봐주기로 약조하거나 시킨 배후가 있을 것이다. 섭맹이 무섭게 인상을 굳히며 물었다. “누구냐?” “같은 조에 있는 복마종의 녀석입니다.” “하! 복마종? 하여간 복마종 출신치고 멀쩡한 놈을 본 적이 없더라니. 쯧쯧.” 여섯 종파들 중에서 무공의 성향 때문인지 유독 포악하면서 과격하여 문제를 잘 일으키는 인물들을 유독 많이 배출한 복마종이었다. 비록 외가라고 해도 그 피가 이어지고 복마종의 무공을 익혔으니 충분히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하는 섭맹이었다. “네 녀석의 인생은 바람 잘 날이 없구나.” “.....괜찮습니다. 익숙하니깐요.” 어차피 어릴 적부터 겪어왔던 일이기에 정말 익숙했다. 하지만 이런 천여운의 덤덤한 태도가 내심 섭맹의 마음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타탁! “아?” 섭맹이 침상에 곱게 누워있는 이십삼 번 생도의 훈혈에 한 번 더 점혈을 가했다. 그리고는 그에게 조언을 해주었다. “고작 1년에 못 미치는 내공으로 훈혈을 점혈 하면 몇 시진도 안 돼서 자동적으로 풀리게 된다. 제대로 하려면 적어도 10년 이상의 내공이 필요하다. 알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좋은 걸 배웠다는 듯이 천여운이 눈을 반짝이며 답했다. 섭맹이 다시 한 번 점혈을 해둔 덕분에 중간에 이십삼 번 생도가 깨어날 위험은 없어졌다. 그가 우호법 섭맹에게 무공을 배운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려져선 안 된다. “마룡단을 꺼내서 삼켜라.” “그냥 삼키면 됩니까?” “아니. 전부 씹어서 삼켜야 체내로 약기운의 흡수가 더욱 효과적이다.” 이런 사소한 조언조차도 만약 섭맹이 해주지 않았다면 영약을 흡수하는데, 본래의 효과를 오 할 이상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천여운은 운이 좋았다. -우적! 마룡단을 씹으니 지독한 약내와 함께 혀가 쓴 맛으로 속이 메스꺼워졌다. 좋은 약일수록 쓰다는 만고의 법칙은 마룡단 역시도 적용되었다. 인상을 쓰면서 마룡단을 꼭꼭 씹어서 억지로 삼킨 천여운이 속이 뒤집힐 것 같은 표정으로 바닥에 앉아 가부좌를 취했다. “지금부터 무천심법의 운기 조식을 취하면 이 스승님께서 내공으로 마룡단의 약효과 더욱 잘 흡수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알겠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운기조식을 시작해라.” “네.” 천여운이 가부좌를 틀고 무천심법으로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그런 천여운의 등 뒤로 우호법 섭맹이 양손을 가져다 대고 내공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운기 경로를 알려줄 때와 다르게 영약을 흡수하도록 돕는 것이기에 명문혈로 내공을 넣어서 순환시키진 않았다. 식도를 타고 들어간 분해된 마룡단은 식도를 타고 넘어가, 장기기관을 거쳐서 천여운의 몸으로 퍼져가기 시작했다. 이때 천여운의 머릿속에 나노 머신인 나노의 목소리가 울렸다. [체내로 강한 에너지 활성을 돕는 물질이 유입되었습니다. 사용자의 체내 십사경맥(十二經脈)의 특정 혈(穴)로 순환하고 있는 에너지와 호응하여서 증식하고 있습니다. 체내 신진 대사를 촉진시켜 물질이 흡수되는 것을 승인하시겠습니까?] 대다수의 말을 알아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영약 흡수를 돕겠다는 말로 들렸기에 천여운은 심법 운용에 집중하느라 짧게 답했다. ‘그래!’ [사용자의 승인으로 체내 신진 대사의 촉진을 높입니다.] 천여운의 승인이 떨어짐과 동시에 그의 체내에 있던 나노 머신들이 빠르게 가동되며 신진 대사를 촉진시켜 마룡단의 약효가 흡수되는 것을 도왔다. “후우.” 천여운의 단전에서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이것은 마룡단을 흡수하는 천여운에게 있어서 굉장한 행운이라 할 수 있었다. 외부에서는 스승인 섭맹과 체내에선 나노 머신이 돕게 되면서 본래라면 최대 칠 할에서 팔 할 정도만 흡수되고, 나머지는 체외로 배출되는 약효가 마룡단이 생겨난 이래 처음으로 복용자의 몸에 전부 흡수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심법을 운용하는 천여운의 전신에서 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이 녀석 타고난 무재의 육신을 지니기라도 했단 말인가.’ 내공으로 마룡단의 흡수를 돕고 있는 섭맹이 두 눈이 화들짝 커져서 놀람을 금치 못했다. 이대로만 계속 된다면 마룡단의 약효를 전부 흡수하는데 성공하게 될 것이다. 제자인 천여운에게 일어나는 행운에 신이 난 섭맹이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내공을 주입하여 약효의 흡수를 도왔다. 그렇게 한 시진 가량의 시간이 지났다. “하아....하아...진땀을 뺐구나. 클클.” -벌컥벌컥! 고생을 한 보람을 느낀 섭맹이 땀으로 젖은 이마를 닦으며, 호리병에 들어있는 술을 단숨에 전부 들이켰다. 첫 제자였기 때문에 영약 흡수를 돕는 것은 처음이기도 했다. 제대로 흡수하지 못할 거라는 우려와는 달리 천여운은 마룡단의 모든 약효를 흡수하는데 성공했다. “크하!~ 고생했느니라.” “아닙니다. 스승님이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절대로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리고 나노. 너도.’ [주인님을 돕는 것이 제게 프로그램 된 임무입니다.] 나노의 딱딱한 기계적인 답변조차도 지금만큼은 기분 좋게 들렸다. 처음 내공을 생성했을 때보다도 단전에서 묵직하게 느껴지는 기운은 그가 제대로 마룡단을 흡수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클클, 천운을 타고 났구나. 네 녀석은 이로써 반 갑자(삼십 년)의 내공을 얻었느니라.” “네? 반갑자요?" “대략적인 수치로 표현한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클클클, 네 녀석의 동기들인 다른 생도들은 혼자서 마룡단의 약 기운을 흡수할 테니, 반 정도 흡수했다면 성공한 걸게다.” “아아! 스승님께 제자가 감사의 절을 올립니다!” 마치 자신의 노고를 알아달라는 섭맹의 말투에 천여운이 작은 절을 올렸다. 우호법 섭맹의 말대로 실제 영약을 흡수해서 이십 년에 미치는 효과를 본 자들은 여섯 종파의 소교주 후보자들이나, 극소수 상위 종파의 생도들에 불과했다. 대다수는 많아도 십 년에 불과한 내공밖에 얻지 못했으니, 천여운의 이러한 흡수율은 대단한 행운이라 할 수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절을 올리는 천여운의 모습을 흡족하게 지켜보던 섭맹이 창문으로 보이던 어둠이 서서히 옅은 남색 빛을 띠는 것을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의무실을 나가려는 섭맹에게 천여운이 말했다. “스승님.” “무어냐?” “내일부터는 스승님의 독문무공인 접무도법의 식(式)을 배워도 되겠습니까?” “클클클, 당연한 소리를 하는구나. 네 녀석이 입원한 남은 기간 동안 배워도 빠듯하니 열심히 익힐 준비나 하거라.” 원래부터 그것이 새롭게 수정한 계획이었지만 천여운의 입으로 들으니 감회가 남달랐다. 기특하다고 생각한 섭맹이 흡족한 얼굴로 말을 하고는 의무실을 나갔다. 날이 밝고 의원인 백종명이 출근할 시간에 맞춰서 천여운은 이십삼 번 생도의 훈혈을 점해두었던 것을 풀었다. 얼마 있지 않아 이십삼 번 생도는 깨어났고, 밤새 진면목을 알게 된 천여운의 눈치를 보느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침상에 누워있어야만 했다. 오전에 출근하게 된 백종명은 밤새 머리카락이 전격으로 전부 타서 대머리가 된 이십삼 번 생도를 발견하고는 웃음보가 터지고 말았다. “푸하하하핫.” ‘빌어먹을....크흡.’ 그런 비웃음에도 이십삼 번 생도는 속으로 화를 삼켜야 했다. 의무실 안에 있는 한 천여운의 눈 밖을 벗어나는 행동은 절대로 삼가해야 했다. "아아! 미안. 미안." 웃음을 참지 못했던 것이 미안했는지 백종명이 사과함께 침상을 장막으로 가려주었다. '흐음.' 자신이 웃어대는 데도 화조차 내지 않고 묵묵부답으로 침상에 누워있는 것에 밤새 무슨 일이 있었을 거라 짐작은 갔지만, 백종명은 일부러 아는 체 하진 않았다. 마도관의 주치의로 일을 한다는 것은 오직 치료 이외의 어떠한 것에도 의문을 품지 않는 다는 것이 규칙이었다. “흐흐흐! 상쾌한 아침이로구나.” 오전 훈련을 위해 대연무장으로 모인 팔 조의 조장, 복마종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금의 얼굴에서 웃음꽃이 떠나가질 않았다. 심복인 자현의 계략으로 의무실로 보낸 이십삼 번 생도를 생각하면 묵혔던 화를 풀 수 있어서 속이 시원했다. 덕분에 팔 조의 생도들은 한결 편안한 밤을 보낼 수 있었지만 그것은 고작 이틀에 불과한 행운이었다. 7장 이놈, 모두를 속이고 있었어(3) 이틀의 시간이 흘렀다. 마도관 생도들의 오후 훈련이 끝나고 저녁 무렵, 팔 조의 숙소로 복마종의 서열 후보자인 천무금이 기다려 왔던 이십삼 번 생도가 드디어 의무실에서 복귀했다. 머리에는 두건 같은 걸 하나 쓰고 말이다. 잇몸이 만개했던 이틀 전과 다르게 천무금의 얼굴은 나찰처럼 무섭게 일그러져 있었다. ‘놈이 오지 않는다면 저희가 보내는 것도 방법이죠.’ 그의 심복인 팔십 번 생도 자현은 구체적이게 어떤 식으로 의무실로 사람을 보낼 지에 관한 계책을 짜서 천무금을 흡족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가 사흘 전에 이십삼 번 생도에게 부상을 입혀서 의무실로 보낸 것이었다. 많은 선별 끝에 골랐던 이십삼 번 생도는 마교 내에 있는 종파들 중에서도 힘이 없는 약소 무가였다. 의무실에서 천여운의 발목과 손목에 있는 근맥을 긋게 하는 대가로 마도관에서 방출되더라도 복마종에서 책임지고 뒤탈을 무마해주고 끌어주기로 약조했다. “신기하네. 원래 방출되었어야 하지 않나?” 천무금은 자신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아있는 이십삼 번 생도를 눈을 내리깔며 물었다. 임무를 실패했으니 당연히 질책이 있을 것은 짐작했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이십삼번 생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칠 번 생도의 근맥을 그으려고 했으나, 녀석의 내상이 정말 심한지 의무실에 의원께서 밤중에도 상시 대기를 하면서 천여운을 치료하고 있었습니다.” “뭐? 의원은 잠도 없단 말이야?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고, 공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새벽 중에 일어나서 움직였더니 의원께서도 깨셔서.” 이게 정말 변명이 될까 걱정스러운 이십삼 번 생도였다. 사실 이 같은 변명거리는 천여운이 그에게 언급해준 것을 고대로 나열하는 것이었다. “무슨 의원 따위가 귀가 얼마나 밝다고!” -퍽! “크헉!”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천무금이 그의 복부를 발로 걷어찼다. 내공이 실리지 않았지만 명치를 맞은 이십삼 번 생도가 바닥을 뒹굴었다. “빌어먹을 새끼! 그런 것도 똑바로 못해!” -퍽! 퍽! 퍽! “끄윽!” 한 번 걷어찬 걸로는 성이 풀리지 않았는지 천무금이 계속해서 그의 몸에 발길질을 했다. 반항을 할 수가 없기에 이십삼 번 생도는 새우처럼 몸을 굽혀서 발길질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곁에서 지켜보던 자현이 그를 잠시 만류했다. “잠시만 기다리십쇼. 공자님.” “뭐야? 왜 그러는 거야?” “혹시 지금 의무실에 있는 의원의 이름을 알고 있나?” 자현의 질문에 복부를 얻어맞고 벅찬 호흡을 내뱉던 이십삼 번 생도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떠올랐는지 말했다. “헉...헉.....백종명....이라고 알고....있습니다.” “백종명.....백종명....아!” 자현이 이렇게 이름을 물어본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예전부터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금을 보좌하기 위해서 마교 내에 있는 많은 정보들을 숙지하고 익혀왔다. “뭐야? 알고 있는 이름이야?” “마의 백종우님의 제자일 겁니다.” “백종우님의?” 백종우의 제자라는 말에 무작정 화만 내던 천무금의 표정도 한층 누그러졌다. 마의 백종우는 여섯 종가 중의 하나인 독마종 출신이었다. 독마종의 출신인데도 독술이나 독공보다도 의술에 뜻을 두어서 교주의 주치의 자리까지 올라간 인물이었다. 그는 의원이기도 했지만 마교 내에서도 무위로 서열 삼십 위 안에 드는 인물이었다. “이건 정확하지 않지만 그분의 제자라면 충분히 무공이 뛰어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짐작에 불과했다. 정확하지 않고 어설픈 정보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때는 알 수 없었다. 백종우는 독마종의 출신이기는 하나, 공과 사를 철저히 했기에 의술을 전수한 제자들에게 무공을 전수하지는 않았다. “제기랄! 그렇다면 이놈을 보낸 것이 헛고생이었잖아!” 본인이 계획한 것도 고생한 것도 없었지만 천여운이 멀쩡하게 있는 것만 생각해도 화가 치밀어 오르는 천무금이었다. 이십삼 번 생도의 말을 뒷받침 해주는 자현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천무금은 화풀이를 위해 그의 몸을 계속해서 걷어찼다. -퍽! 퍽! 퍽! “크헉! 컥컥!” “빌어먹을 새끼! 네놈 종파에 지원 같은 건 꿈도 꾸지 마라!” 처음에는 임무에 대해서 얘기해줄 때만 하더라도 실패하더라도 무조건 자신의 종파를 지원해준다고 사탕발린 말로 설득을 해왔던 천무금과 자현이었다. 그러나 어느새 그것은 사라졌고, 오직 분풀이 이외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몸을 웅크린 채, 맞는 와중에도 이십삼 번 생도의 눈빛에는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독기가 서렸다. ‘그래. 지금 계속 화내고 실컷 그래라! 그놈이 오고 나서도 그게 가능한가 봐라.’ 천무금과 자현이 만약 그를 달래주고 약속한 것에 한 번 더 확답을 주었다면 이십삼 번 생도는 자신이 알아낸 정보들을 고대로 알려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 ‘그놈이 얼마나 괴물 같은 녀석인지, 네놈이 직접 겪어봐라!’ 불과 사흘에 불과했지만 이십삼 번 생도는 천여운의 진면목의 일부를 보았다. 녀석은 절대로 그들이 알고 있는 내공도 없는 무공을 쥐뿔도 할 줄 모르는 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너 못 보던 두건 같은 걸 왜 쓰고 있는 거야?” 한참을 때려대던 천무금이 아무렇지 않게 이십삼 번 생도가 두르고 있는 두건을 풀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던 이십삼 번 생도의 머리카락은 온데간데없고 불빛이 반사되는 대머리가 드러났다. 천무금은 입술을 실룩이며 대머리가 된 그를 내려다보며 피식하고 웃었다. “허참, 가지가지 하네. 뭐 이런 식으로 머리라도 밀고 반성하는 척 하면 봐 줄줄 알아?” 웃어놓고는 안 그런 척 표정을 굳히고 계속해서 이십삼 번 생도를 걷어찼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발길질에 힘이 아까보다 많이 죽어있었다. 가리고 싶었던 것이 들통 난 이십삼 번 생도는 속으로 저주를 부르짖었다. ‘천무금이고 천여운이고 다 죽어! 십 할 놈들아!!!!!’ 그렇게 사흘의 조용함이 끝나고 다시 팔 조의 숙소는 천무금의 포악한 행동으로 시끄러워지고 말았다. 마도관 생도들의 입관이 열나흘 째, 즉 그날로부터 이레(7일)라는 시간이 흘렀다. 복마종의 천무금이 인내하며 기다리던 천여운의 의무실 퇴원 날이었다. 이 날 새벽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어두운 신시 무렵 우호법 섭맹이 의무실로 찾아왔다. 평소와 다르게 그의 비어있던 오른손에는 검은 소가죽으로 만든 도집 한 자라루가 쥐어져 있었다. “오셨습니까? 스승님.” 천여운이 침상에서 일어나 섭맹을 맞이했다. 열나흘(2주)이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짧은 기간이었지만 섭맹을 대하는 태도가 한결 편해진 그였다. “클클, 아직 가르칠 게 많은데. 마지막 날이구나.” 평소와 달리 술을 마시지 않았는지 코끝의 붉은 기가 적었다. 섭맹의 표정을 보면 정말로 아쉬움이 가득해 보였다. 이렇게 숨어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무공을 전수해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마도관에 입관한 이상 규칙대로 해야만 했다. “스승님 그게 뭡니까?” “흐흐흐, 네 녀석이 가기 전에 이 스승님의 도를 보여주려고 가져왔다.” 자랑처럼 들렸지만 사실 이것은 천여운의 마지막 부탁 때문이었다. 어제 새벽에 천여운은 마지막 가르침으로 섭맹이 처음부터 끝까지 접무도법을 펼치는 것을 보고 싶다고 했던 것을 이뤄주기 위해서였다. “궁금하지?” -챙! 섭맹이 오른손에 쥐고 있던 검은 도집을 왼손에 쥐고 도를 뽑아보였다. 일반적인 도에 비하면 폭이 그리 넓지 않지만 길이는 대략 네 자(尺) 정도 되었다. 날카로운 도신의 안쪽에는 광무(狂舞)라는 음각이 새겨져 있었다. “들어봐라.” -휙! 가볍게 던졌는데 받아들자 생각보다 도가 많이 가벼웠다. 하지만 처음 도를 만져보는 천여운이 그것을 비교해서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가볍지?” “생각보다 무거운 것 같진 않습니다.” “보통 일반적으로 무인들이 사용하는 도의 무게는 대략 두세 근 정도다. 하지만 우리 사문에서 내려오는 보도인 광무도는 한 근 하고도 반 정도 밖에 안 된다.” “접무도법 때문입니까?” “클클클, 역시 네녀석은 영특하단 말이야.” 천여운의 말대로 우호법 섭맹의 접무도법의 접무(蝶舞)를 풀이하면 나비가 춤을 춘다는 말이었다. 접무도법은 여타의 도법보다 쾌(快)를 추구하고, 도를 극성으로 익혔을 때 나비가 날아드는 것처럼 초식에 잔상이 생겨나기에 무거운 도보다 가벼운 도를 선호한다. “그렇다고 해도 광무도가 도신이 약한 것은 아니다. 도를 다오.” “여기 있습니다.” 천여운이 도신을 거꾸로 잡고 도병 쪽으로 해서 섭맹에게 도를 넘겼다. 도병을 움켜쥔 섭맹이 가볍게 침상의 모서리를 향해 광무도를 휘둘렀다. -촤악! 가볍게 휘두른 도였는데, 날카로운 예기에 침상 모서리가 쉽게 베여나갔다. 바닥에 떨어진 침상의 나뭇조각을 주워서 천여운이 조심스럽게 한 쪽 구석에 숨겼다. 침상을 벨 줄 알았다면 말릴 걸 후회했다. ‘쩝.’ 의외로 깔끔한 걸 좋아하는 백종명은 늘 의무실을 깨끗하게 청소하곤 했는데, 침상의 모서리가 잘려나가 있는 것을 보면 꽤나 짜증낼 것이다. “......도가 참 날카롭군요.” “클클, 한철(寒鐵)을 제련해서 만들어서 도신의 폭이 좁고 그 무게가 가볍다고 해도, 날카로움과 단단함이 보도라고 할 만 하지.” 섭맹은 그 외에 도에 관해서 자세한 언급을 하진 않았지만, 그의 도는 마교 내에서도 삼대보도(三代寶刀)라고 불릴 만큼 유명한 도였다. “그 전에 지금까지 배웠던 걸 복습해보자꾸나.” “알겠습니다.” 마룡단의 내공을 흡수한 천여운은 남은 입원 기간 동안 섭맹에게 사문의 보법(步法)과 식(式)을 배웠다. 섭맹은 모든 무공의 기초와 중심이 발에 있음을 강조하고 보법에 많은 신경을 써주었다. 호접도법을 펼치기 위한 접영보법(蝶影步法)은 경쾌하면서도 가벼운 발걸음으로 보법에 익숙하게 되면 초식에 많은 변화를 줄 수 있다. -탁탁! 천여운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정해진 폭과 간격에 맞춰서 보법을 행했다. 고작 며칠 밖에 신경써주지 않았는데, 그 자세에 흐트러짐이 없고 움직임이 자연스러웠다. ‘역시 이 녀석은 타고난 천재다!’ 일부러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섭맹은 감탄했다. 고작 몇 번만 보여주고 자세를 교정해준 것에 불과했는데, 이 정도 오성이라면 꾸준히 연마만 한다면 초식을 운용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으리라. 사실 천여운은 나노 머신인 나노가 섭맹의 보법을 펼치는 자세를 스캔 해준 적분에 이미 뇌에는 정보가 전이되어서 각인되어 있었다. ‘처음부터 완벽하면 의심받으니깐.’ 아무리 섭맹이 스승이라고 할지라도 고작 며칠 만에 그와 동일한 수준의 보법을 펼치면 의심을 받을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에 일부러 천천히 보법을 밟고 있는 것이었다. “그 다음은 식(式)!” 스물 네 개의 식으로 이루어진 접무도법은 세 개의 식이 이어져서 하나의 초식을 이룬다. 그렇게 이루어진 초식은 여덟 초식이 되는데, 아직까지 천여운은 식 만을 배웠고 초식이 연결되는 것은 알지 못한다. 모든 무공에는 그 기초와 자세가 중요하기에 식을 바로잡는데 섭맹이 많은 시간을 투자했기 때문이었다. “허어.” 천여운이 접무도법의 식 동작을 펼치는 것을 보며 섭맹이 한탄했다. 이 정도의 재능이라면 적어도 한두 달만 시간이 주어졌다면 초식까지 제대로 가르쳤을 텐데, 제대로 시작도 못하고 식만 가르친 것이 아쉬웠다. “되었다. 잘 익혔구나. 클클.” “과찬이십니다. 스승님.” 마지막 날이기에 섭맹이 흡족하다는 얼굴로 칭찬했다. 섭맹이 품속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구깃구깃 구겨져 있는 종이를 꺼내서 그에게 넘겼다. 꾸불꾸불 서체가 그리 좋진 않았지만, 조금이라도 더욱 상세하게 적으려고 노력한 흔적이 가득한 그것은 접무도법의 초식과 내공 운용 방법이었다. “이 스승님이 직접 가르치고 싶긴 하다만, 이제 시간이 없으니 이걸 주마. 네 녀석 정도의 머리와 오성이라면 충분히 기본은 터득할 수 있을 게다. 나중에 다시 만나면 확인해볼 터이니 게으름 피우지 말고 똑바로 익히거라. 흠흠.” “.....감사합니다. 제자가 기대에 부응토록 하겠습니다.” 많은 것을 신경 써주는 스승을 만난 것에 감동할 수밖에 없는 천여운이었다. 거친 말투와는 다르게 우호법 섭맹은 그에게 많은 것을 넘겨주었다. “줄 것도 다 줬으니, 이제 네 녀석이 그렇게 보고 싶다던 걸 보여주마. 뒤로 물러나라.” -챙! 천여운이 뒤로 물러나서 공간을 만들어주자, 섭맹이 도집에 꽂아 넣었던 광무도를 출도 시켰다. 우호법 광도 섭맹에게 무공을 배우는 내내 아직까지 한 번도 제대로 초식을 펼치는 것을 본적이 없던 천여운이었다. 제자에게 마지막으로 도법의 진수를 보여주기 위해 섭맹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그렇게 섭맹이 그를 바라보며 접무도법의 기수식을 취하자, 천여운이 감동하는 눈빛을 보이며 속으로 말했다. ‘나노, 스캔 준비 해.’ [사용자의 명령에 의거해 지켜보는 동작의 스캔을 진행합니다.] 8장 네놈이 자초한 거다(1) 어두웠던 하늘이 점점 밝아지며 짙은 남색 빛을 띠어갔다. 차가운 새벽 공기에 마도관의 대연무장에 옅은 안개가 끼었다. 그런 대연무장의 구석 편에 조심스러우면서 빠르게 경공을 펼치는 이가 있었으니, 우호법 광도 섭맹이었다. 평소와 같이 마도관의 본관 이 층의 한 창문에서 뛰어내린 그는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조심스럽게 탈출을 감행하고 있었다. 워낙 무공 수위가 높다보니 그가 작정하고 기척을 감추면 무공 교두들이나 경비를 서는 무사들이 알아채기는 힘들다. 그러나 그런 섭맹의 뒷모습을 본관 옥상 위에서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찰랑거리는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중년인과 독특한 문양의 가면을 쓴 존재였다. 그들은 바로 좌호법 염왕 이화명과 교주의 호위를 맡고 있는 대호법 명왕 마라겸이었다. “드디어 저 쥐새끼, 아니 우호법이 가는군요.” “그 동안 일부러 모른 척 하느라 수고했다.” “훗, 누구의 명인데 이를 어기겠습니까? 이제 우호법이 쥐구멍을 드나드는 걸 보지 않게 되어서 좋군요.” 놀랍게도 그들은 열나흘 동안 우호법 섭맹이 몰래 마도관의 본관을 드나들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있었다. 물론 엄밀히 이야기 한다면 눈치 챈 것이 아니라 실상은 묵인해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제 다시 이층 복도에도 경비 무사들을 세워야겠군요. 그 동안 충분히 쉬었을 테니 말이죠. 크큭.” 그 동안 유독 이 층의 경계가 늦춰져 있던 이유였다. 천여운이 입원을 하는 기간 동안 고의적으로 본관의 이 층에는 경비 무사들을 비워두고 있었기에 섭맹이 자유롭게 출입을 할 수 있었다. 경계가 느슨해진 조용한 새벽이라도 소음이 들렸어도 아무에게도 발각되지 않은 이유였다. “나는 이제 가보겠다.” 볼일이 끝났다는 듯이 가려고 하는 대호법 마라겸에게 이화명이 물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칠 공자를 배려하는 이유가 뭡니까?” 무공을 가르치는 우호법 섭맹을 묵인하게 만든 것은 마도관의 규칙을 관주의 손으로 어기게 만든 꼴이었다. 마교의 지존인 교주의 명이 아니었다면 단 번에 거절했을 사항이었다. 그런 이화명의 물음에 가던 발걸음을 멈춘 대호법 마라겸이 조용한 목소리로 짧게 대답했다. “그게 공평하니깐.” “후후후, 그래도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 손가락은 없다는 겁니까?” 이화명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늘을 두고 의문을 가지지 마라.” 대답을 마친 대호법 마라겸의 신형이 흐릿해지며 순식간에 본관 옥상에서 그 모습을 감췄다. “핫! 작정하고 도망치면 절대로 못 잡겠군.” 그의 경공 능력은 마교 내에서도 명왕이라는 별호 이외에도 풍신(風神)이라 불리는 자답게 좌호법 이화명 조차도 순식간에 종적을 놓칠 정도로 대단했다. 대호법 마라겸이 사라지고 나서 이화명은 얼굴을 굳히며 중얼거렸다. “고작 열나흘 만에 공평해질까?” 태어났을 때부터 벌모세수에서부터 각종 영약과 영재 교육을 받아온 여섯 종파의 소교주 후계자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우호법 섭맹의 무공을 배웠다고 한들 기간이 너무 짧았다. 과연 열나흘이라는 시간이 천여운에게 도움이 될지 의문인 이화명이었다. 날이 밝고 마도관의 대연무장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오전 일과가 시작되었다. 모든 생도들이 대강당에 모여서 전술과 전법에 관한 교육이 진행될 무렵에도 천여운은 의무실의 침상에 누워있었다. “흐음?” 누워있는 천여운을 의아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이가 있었으니, 의원 백종명이었다. 평소라면 자신이 출근하기 전부터 일어나있던 천여운이 아직까지 잠이 들어있으니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긴 편하게 쉴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일 테니깐.’ 백종명이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무공 교두 임평이 와서 했던 말을 떠올려보면 같은 숙소에 복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금이 있다고 들었다. 아마도 퇴원하는 순간부터 천여운의 팔자는 사납게 돌아갈 것이다. 이를 배려하기 위해서라도 조금이라도 쉴 수 있게 해주자는 의미에서 백종명은 조용히 장막을 쳐주고 자신의 집무 책상으로 갔다. 한편 그가 잠을 자고 있다고 생각한 천여운의 몸에서는 크나큰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접무도법(蝶舞刀法)의 초식 동작 시뮬레이션 데이터 목표치까지 사용자의 근육 섬유질 변환 80% 진행. 근맥 변환 75% 진행. 100% 완료까지 1시간이 예정됩니다.] 천여운의 체내에 있은 팔만육천칠십오 개의 나노머신이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그의 근육 섬유질과 근맥을 변환시키고 있었다. 장호위의 단검비술의 초식 동작에 해당하는 변환을 할 때보다도 훨씬 오랜 시간이 걸리고 있었다. 섭맹이 떠나고 난 묘시(卯時) 무렵부터 계속해서 진행 중이었는데 아직 완료를 마치지 못했다. ‘뭐? 세 시진? 왜 이렇게 오래 걸려?’ [위 동작을 행할 수 있는 비사용자 섭맹의 수준까지 시뮬레이션을 해본 결과, 변환 소요 예측시간입니다.] 자그마치 세 시진이나 걸린다는 말에 천여운은 경악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은 어찌 본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장 호위의 단검비술 역시도 훌륭한 무공이긴 했지만 우호법 섭맹의 접무도법과는 비교할 수준이 아니었다. 마교에서도 대대로 호법가의 무공인 접무도법은 절학이라 불린다. 그런 절학을 자유롭게 펼치기 위해서 우호법 섭맹이 거쳐야 했던 수련은 장 호위의 것보다 훨씬 지독하면서도 강한 끈기를 요했다. 아무리 나노 머신이라고 할지라도 사용자의 육신을 단 번에 변환시키면 심각한 반작용이 일어날 수 있기에 장시간을 소요해서 변환을 진행 중인 것이었다. 그렇게 반 시진의 시간이 지났다. [사용자의 근육 섬유질 변환 및 근맥 변환이 100% 완료되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천여운의 마취가 풀리며 정신이 깨어났다. 눈을 뜨게 된 천여운은 침상에서 일어나 바닥을 향해 미친 듯이 토를 올렸다. “우웨에에에엑!” 토를 하는 내내 온몸에 경련이 심하게 일었다. 장시간 동안의 마취 및 근육 섬유질과 근맥 변환으로 인해 몸에 과부하가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평생을 무공을 단련하여 지금과 같은 고절한 경지에 오른 우호법 섭맹의 수준에 상응하는 육신으로 변환 이전을 하는 것이니 반동이 큰 것은 당연했다. “무, 무슨 일이야?” 오늘도 역시나 환자가 없는 의무실의 책상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의원 백종명이 놀라서 부리나케 달려왔다. 바닥에 토를 하고 있는 천여운의 등을 토닥이다가 진정되자 침상에 눕혔다. 심한 반동으로 인해 지친 천여운이 마취가 아닌 진짜로 잠이 들었을 때 그의 맥을 재본 백종명은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뭐지? 꼭 몸을 아주 미친 듯이 혹사한 것처럼 맥이 뛰네.’ 가만히 자고 있던 사람의 맥이라고는 믿기 힘든 현상이었다. 의구심이 드는 와중에 나노 머신은 천여운의 상태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다음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사용자의 육신 변환 전이에 대한 체내 반동의 안정화를 진행합니다.] 그러나 그가 맥을 짚고 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심하게 뛰던 맥이 가라앉았다. 방금 전까지 그런 증상을 보인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평안한 얼굴로 잠이 들어 있었다. “아나. 진짜 뭐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미궁에 빠져드는 백종명이었다. 그렇게 반 시진의 시간이 지나고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잠이 들어있던 천여운이 드디어 눈을 떴다. 잠에서 깨어난 천여운의 눈빛에는 지금까지와 다른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침상에서 일어나 주먹을 가볍게 움켜쥐어 보았다. -꾸욱! 손에 들어가는 힘이 다르다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이것만으로도 우호법 섭맹이 얼마나 고단한 단련을 해왔는지 짐작이 갔다. 만약에 자신이 훈련한 수준의 육신을 고작 세 시진 만에 얻어낸 것을 섭맹이 알게 된다면 까무러칠 정도로 놀랄 것이다. “백 의원님?” 의무실에서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불러보았다. 점심 시간이었기에 식사를 위해 백종명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그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천여운이 의무실의 한가운데로 가서 접무도법의 기수식을 취해보았다. 도는 없지만 손바닥을 펴서 도(刀)라는 느낌으로 초식을 발현했다. -촤촤촤촥! 천여운의 몸이 쾌속하게 움직이며 그 손날이 허공을 갈랐다. 유연하게 동작을 펼치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빠른지 섭맹이 그를 위해 보여주었을 때와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좋아!” 자신이 펼치는 접무도법의 일 초식에 기분이 좋아진 천여운이 이 초식을 펼치려다 복도에서부터 걸어오는 기척을 감지하고 그것을 멈췄다. ‘아!’ 그리고 보니 미처 몰랐었는데 감각이 예민해졌다. 육신의 변환이 일어나면서 감각 역시도 그에 상응할 만큼 발달하게 된 것이었다. 의무실의 문이 열리고 백종명이 들어오려고 할 때, 천여운이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뭐? 뭐가 끝나? 언제 일어난 거야?” 영문을 모르는 백종명이 언제 일어났는지 의무실 한가운데 서있는 천여운을 향해 물었다. 머쓱해진 천여운이 괜히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퇴원 준비가 끝났습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백종명은 마지막으로 진맥을 통해 천여운의 상태를 확인하고 그가 완치되었음을 공표했다. 그리고 이제 퇴원을 해도 좋다고 말해주었다. 왔을 때와 같이 녹청색의 무복을 입고 칠(七)이라 적힌 검은 명찰을 가슴에 달고 있는 천여운에게 백종명이 섭섭하다는 말투로 말했다. “에휴, 안 그래도 환자도 없는데. 너까지 가면 심심해서 어쩌냐?” 환자가 많을 거라 예측한 것과 달리 아직까지 텅 비어있는 의무실이다. 의무실을 나갈 준비를 마친 천여운이 웃으며 말했다. “곧 많아질 겁니다.” 꽤나 의미심장한 말이었지만 백종명은 아무 생각 없이 환자가 늘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그러겠지? 아니다. 환자가 없어서 오히려 좋은 거지.” “의원님께 신세 많이 졌습니다.” “그래. 고생이 많을 테지만 무운을 비마.” 우호법 섭맹에게 무공을 배운다는 사실을 그가 눈감아주지 않았다면, 불편한 마음으로 의무실에서 보냈을 것이다. 많은 배려를 해준 그에게 천여운은 많은 고마움을 느꼈다. 그 고마움에 대한 대가로 백종명이 그렇게 원하는 환자를 꼭 보내줘야겠다고 결심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대연무장에는 진형 훈련을 위해 전 생도들이 조별로 나뉘어서 모여 있었다. -웅성웅성! 그때 팔 조에 있는 모든 생도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집중되었다. 그 동안 의무실에 입원해서 열나흘 동안이나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천여운의 등장 때문이었다. ‘드디어 왔구나. 크크크큭.’ 팔 조의 조장을 맡고 있는 복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금의 얼굴에 사악한 미소가 번졌다. 그렇게 학수고대하던 천여운이 나타났다. 대연무장으로 온 천여운은 팔 조의 앞에서 색색의 깃발을 들고 있는 무공 교두 임평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왔구나.” “네 교두님!” “몸은 더 이상 문제가 없나?” “전부 완치되었습니다.” “그것참 다행이구나. 이론으로 설명하긴 했다만 네 위치는 기억하고 있겠지?” 다행이라는 말은 했지만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그다지 내켜하지 않고 있었다. 일부러 진형에서 가장 변화가 작고 역할이 많지 않은 곳으로 배치를 해두긴 했지만 한 명이라도 실수를 하면 위태로운 것이 전술진이었다. “그렇습니다.” “좋아! 그럼 이걸 들고 저쪽으로 가도록!” 임평이 진형 훈련에서 천여운이 맡은 자리를 가리켰다. 그 동안 계속 훈련에 빠졌기 때문에 좋은 평가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천여운은 철갑 안에 들어있는 진검과 방패를 챙겨서 빠르게 그곳으로 달려갔다. 공교롭게도 이레(7일) 단위로 진검으로 진형 훈련을 하는데 오늘이 그 날이었다. 진형의 맨 앞에서 중요한 위치를 맡고 있는 천무금이 자신의 앞으로 뛰어오는 천여운을 향해 이죽거리며 경고를 하려 했지만, “무서워서 벌벌 떠느라 이제 온 거냐? 이 더러운...” -휙!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천여운이 무시하듯이 그냥 스쳐지나갔다. 어이가 없었는지 천무금이 황당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런데 그를 스쳐지나가는 천여운과 눈이 마주쳤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그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어떠한 두려움도 보이지 않았다. ‘뭐지?.....이 새끼 눈빛이.....’ 오히려 천여운의 눈빛은 한 번 제대로 겨뤄보자는 듯이 천무금을 도발하고 있었다. 8장 네놈이 자초한 거다(2) “훈련을 시작한다! 이번에는 정신 바짝 차리고 거리를 잘 유지하도록! 또 같은 사고가 일어난다면 이번에는 본 교두의 권한으로 마도관에서 방출시키겠다!” “마도!” 드디어 진형 훈련이 시작되었다. 무공 교두 임평의 시선은 진형의 전체보다도 단 한 사람에게 쏠려 있었다. 다른 생도들은 이미 열나흘 동안 합을 맞췄기 때문에 어느 정도 진형에 녹아들었다고 할 수 있으나 천여운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계속 의무실에 입원해 있었으니 분명 실수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오늘 훈련이 일주일마다 행해지는 진검 훈련이라는 점이었다. 불과 이레 전에 있던 진검 훈련에도 사고가 터졌었기 때문에 임평의 신경이 곤두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젠장! 하필 저 녀석을 내가 맡아가지고.’ 조를 편성할 당시에 내상으로 입원을 한 천여운을 모두가 꺼려했기에 제비뽑기를 하자고 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항상 의견을 제시한 사람이 확률이 높다는 법칙은 적중했다. ‘제발 부디 실수하지 마라. 어차피 네 자리에서 크게 할 건 없겠지만.’ 그래도 진형 변형에서 가장 움직임이 적은 위치를 맡겼기에 특별한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임평이 첫 진형 변화를 알리는 붉은 깃발을 들어올렸다. -타타타탁! 모래가 일어날 만큼 신속하게 일사분란하게 생도들이 움직이며 진형을 변형시켰다. 가장 많은 변화를 주는 것은 당연히 맨 앞에 있는 열이었다. 중심에 있는 조장이 잘 이끌어주어야만 진형이 흐트러지지 않고 변형이 매끄럽게 이어진다. “좋아!” 임평의 입에서 호평이 터졌다. 첫 번째 변형에서 누구 하나 실수하지 않고 진형을 잘 맞췄다. 조장을 맡고 있는 천무금은 성격은 오만하고 포악할지 몰라도 소교주 후보자답게 주변에 있는 생도들의 움직임을 잘 조율해나갔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우려하는 대상자인 천여운은. ‘어라?’ 생각보다 잘 따라오고 있었다. 모든 생도들이 자신들의 종파나 무가에서 무공을 익혀왔지만 타인과 조를 이루어 진형을 훈련하거나 합을 맞춘 적이 없기에 첫날부터 며칠 간 애를 먹었던 것과 다르게 천여운은 능숙하게 제 위치를 찾아갔다. ‘다른 조원들이 하는 걸 잘 따라 맞춘 건가?’ 예상보다 잘 따라오자 임평은 잠시 의아해했지만 다른 조원들이 하는 걸 잘보고 따라했구나로 생각을 그쳤다. 진형이 훈련의 기본은 변형된 진을 유지하는 데 있다. 생도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진형을 바꾸는 것보다도 이를 유지하는 훈련을 더욱 버거워했다. “진형 유지해라! 진형!” 첫 번째로 이룬 진형에서 검과 철 방패를 든 상태로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고정되어 있어야 한다. 이것은 내공을 떠나서 근력이 부족하다면 매우 힘들다. 아직까지는 모두가 잘 버티고 있었지만, 일각 정도가 지나자 제일 무공이 약한 왜소한 체구의 생도들이 팔이 떨렸다. -덜덜! 철컹! 그러다보니 방패가 떨려서 옆에 있는 생도의 방패와 부딪친다. 나무 방패로 훈련할 때는 소리가 적었지만 철 방패로 할 때는 아주 잘 들린다. “똑바로 하지 못해! 이래가지고 이 단계 시험에서 다른 조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정신 차려!” 임평의 다그침에 생도들이 이를 악물었다. 벌써 열나흘 차인데도 아직까지 이 정도도 버티지 못하는 생도들을 보면 속이 치밀어 오르는 교두 임평이었다. 계속 훈련 받은 생도들 중에서도 이런 녀석들이 나오는데, 무공은커녕 내공조차 없는 천여운은 보나마나 뻔했다. 자연스레 좌측으로 시선이 갔는지 임평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뭐야?.....저 녀석 왜 저렇게 멀쩡해?’ 일각이 지났는데도 천여운은 아무런 변화도 없이 무표정하게 앞을 보고 있었다. 들고 있는 철 방패와 진검은 마치 조형물이 서있는 것처럼 아무런 흔들림도 없었다. ‘이 녀석, 정말 의무실에 누워있다가 온 게 맞는 거야?’ 자신의 눈으로 봤으니 그건 확실했다. 그런데 내공조차 전무하다고 알고 있는 천여운이 이렇게까지 자세를 잘 유지하니 매우 놀라웠다. 그에 대해 평가가 좋지 않았던 임평의 시선이 묘하게 달라졌다. 생도들의 반 수 이상이 팔이 떨리기 시작하자 임평이 두 번째 진형 변화를 알리는 노란 깃발을 들었다. -타타타탁! 기다렸다는 듯이 생도들이 작게나마 팔을 움직여 근육을 풀며 진형을 변화시켰다. 두 번째 진형은 적을 포위하듯이 반원으로 감싸는 형태이다. 적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간격을 조금씩 좁혀나갈 수 있도록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쿵! 쿵! 쿵! “그래! 조금씩!” 생도들이 오른발을 내딛으며 앞을 향해 반보씩 전진했다. 적을 압박하기 위해 크게 발을 내딛어야 한다. 놀라운 것은 누구 하나 실수하지 않고 간격을 잘 유지해가면서 좁혀나갔다. “잘 한다! 아주 좋아!” 무공 교두 임평의 입에서 칭찬이 터져 나오자, 반원의 가장 안쪽 중심부에 있던 조장 천무금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가 생각했던 그림은 이게 아니었다. ‘이 개자식은 뭔데 실수를 안 하는 거야?’ 의무실에서 열나흘 동안 박혀 있었으니 훈련을 따라가지 못해서 온갖 윽박과 잔소리를 들어야 제 정상이었는데, 그런 소리는커녕 교두의 입에서 칭찬이 나왔다. 조원들이 전부 실수하지 않고 잘 들어맞아야 나오는 칭찬이었다. 진형의 선두에 있을 때는 천여운이 뒷열에 있기 때문에 볼 수 없었지만 이번에는 반원으로 감싸는 형태이기에 눈알만 옆으로 돌리면 보인다. ‘뭐야? 이 자식?’ 진형이 완성되어서 다시 동작을 유지하고 있는데, 너무 멀쩡했다. 진검을 든 팔을 위쪽에서 아래로 내려쳐야 해서 첫 번째 진형보다도 자세를 유지하기 힘든데 표정 하나 변화가 없었다. ‘이 자식 정말 무공을 하나도 익히지 않은 게 맞는 거야?’ 천여운의 바로 두 번째 옆에 자리하고 있는 팔십 번 생도 자현조차도 상위 종파인데도 이 자세는 힘에 겨운지 오른팔이 떨리는데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빌어먹을 더러운 핏줄 새끼. 네놈이 잘 되는 꼴을 내가 볼 것 같아.’ 이렇게 된 이상 억지로라도 망신을 줘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무금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심복인 자현을 향해 전음(傳音)을 보냈다. [내 말이 들리면 고개만 끄덕여.] 훈련 도중에 들려오는 전음에 자현의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전음은 내공으로 은밀하게 목소리를 보내는 수법으로 적어도 반 갑자 이상의 내공을 지녀야만 할 수 있었다. [세 번째 진형 때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천무금은 뭔가 생각해둔 바를 자현에게 전음으로 보냈다. 이를 알겠다는 듯이 자현이 작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각이 지나자 무공 교두 임평이 파랑색 깃발을 들며 세 번째 진형 변화를 지시했다. -타타타탁! 앞선 두 번째 진형의 변화도 꽤 번거로웠지만 세 번째 진형은 제일 까다로웠다. 그것은 철 방패를 겹겹으로 쌓은 뒤에 그 사이로 진검을 찔러 넣어서 견고한 방어진을 구축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렵지 않군.’ 이미 진형 변화에 관한 책을 전이를 통해 완전히 숙지하고 나노 머신인 나노가 시뮬레이션으로 영상을 심어줬기 때문에 천여운에게는 전혀 어렵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진형을 변화하는데 실수가 없었던 다른 생도들조차도 방패를 쌓으면서 진검을 사이에 넣을 때, 혹시나 앞 사람을 찌를까 머뭇거리느라 움직임이 더디어졌다. “조심하더라도 신속성을 유지해라! 똑바로 해라!” 당연히 진형 변화가 더디어지니 무공 교두 임평의 언성이 높아졌다. 앞 선 변화보다 시간이 걸렸지만 드디어 진형이 완성되었다. 천여운은 삼 층으로 쌓여 있는 방패진의 중간을 담당했다. 그런데 그의 바로 뒤에서 진검을 사이로 찔러 넣는 역할을 하는 생도가 바로 자현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이 상태를 유지해서 일각을 버티는 일 뿐이었다. ‘키킥! 엉덩이가 아주 잘 보이는 구나.’ 자현이 입 꼬리를 올리며 발을 살짝 들어올렸다. 발에 내공을 실어서 앞에서 방패를 들고 서있는 천여운을 차서 넘어뜨리는 것이 목적이었다. ‘더러운 핏줄은 땅바닥에서 기어야 제 맛이지!’ -탁! 걷어차는 소리가 나면 안 되니깐 일단 발을 천여운의 엉덩이에 살짝 올렸다. 자신의 등에서 느껴지는 신발의 감촉에 천여운이 고개를 돌리더니 차갑게 식은 눈빛으로 자현을 노려보았다. ‘뭐야? 이 새끼가 감히!’ 발에 힘을 주기도 전에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적당히 내공을 실으려고 했던 자현이었지만 그 눈빛에 화가 났는지 전력으로 공력을 실어 발에 힘을 주었다. 그 순간이었다. -팡! “크헉!” 천여운의 엉덩이에서 강한 반탄력이 일어나며 자현의 몸이 뒤로 튕겨나갔다. 뒤로 튕겨간 자현은 바닥을 뒹굴뒹굴 구르더니 대(大)자로 뻗고 말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자현은 아픈 것은 둘째 치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방금 저 자식 엉덩이에서 내공이?’ 분명 발에 내공을 실어서 걷어차려는 순간 그 반탄력은 내공이 틀림없었다. 더군다나 자신보다도 훨씬 강한 공력이었다. 당황해하는 차에 대자로 뻗어있는 그의 앞으로 누군가가 걸어와 나찰처럼 무섭게 일그러진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또 너냐?” 그는 바로 무공 교두 임평이었다. 지난번에 이십삼 번 생도의 등을 찌른 덕분에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는 임평이었다. 자신을 무섭게 쳐다보는 임평의 얼굴에 놀란 자현이 화들짝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찌릿! 발바닥부터 느껴지는 통증에 균형을 제대로 잡을 수가 없었다. 더 강한 내공에 튕겨나가면서 아직 그 후유증이 발바닥에 남아있었던 것이었다. 비틀거리며 겨우 균형을 잡는 자현의 시선은 임평의 뒤쪽에서 비웃음을 흘리고 있는 천여운만이 보였다. -으득! 화가 난 자현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그의 태도에 더욱 열이 받은 임평의 손이 허리춤에 꽂혀있는 검은 봉으로 향했다. “입술을 씹어? 이놈 봐라. 정신을 못 차리네.” “교, 교두님! 그게 아니라 저 녀석의 엉덩이...” “뭐? 엉덩이? 이놈이 제대로 미쳐가지고!” -퍽! “크헙!” 자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평이 번개처럼 검은 봉을 빼들어 그의 명치를 찔렀다. 명치를 맞은 자현은 호흡이 곤란했는지 배를 움켜잡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런 자현을 바라보며 무공 교두 임평이 악마처럼 속삭였다. “네 녀석은 사흘 동안 자유시간이 없다. 수면 시간 전까지는 본 교두와 지.옥.의 추가 훈련을 받는다!” “하아...하아 교두님...” 자현이 변명을 하려고 하자 임평이 검은 봉을 다시 휘두르려고 했다. 화들짝 놀란 자현이 재빨리 소리쳤다. “마도!!!” 이 모습을 지켜보는 팔 조 생도들의 입술이 실룩거렸다. 그 동안 숙소에서 팔 조의 조장인 복마종의 소교주 후보자 천무금을 등에 업고 사역부터 시작해서 온갖 못된 짓을 자행했던 자현의 망신에 통쾌함을 느낀 것이다. -으드득! 이빨을 가는 소리가 옆에 있는 생도들에게 전부 들렸다. 자신이 세운 계획이 어이없이 실패하자 천무금의 얼굴은 붉어지다 못해서 이마에 핏줄까지 서서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천......여.....운!!!’ 8장 네놈이 자초한 거다(3) 남은 오후 훈련이 계속되는 동안 팔 조 생도들은 묘한 대치 상황 속에서 눈치를 봐야만 하는 입장에 서고 말았다. 훈련하는 내내 분노가 가득한 눈빛으로 천여운을 노려보는 복마종의 소교주 후보자 천무금과 이것을 가볍게 넘겨버리는 천여운의 사이에서 생겨나는 기류에 난감하기만 했다. 그것을 느낀 것은 같은 조의 생도들만이 아니었다. 멀리서 대연무장의 단상 위에 앉아서 팔 조를 유심히 지켜보는 자가 있었으니, 현 마도관의 관주직을 겸하고 있는 좌호법 염왕 이화명이었다. ‘같은 조에 소교주 후보자 둘의 대치라. 크큭. 역시 재미있어.’ 초기 때의 훈련을 제외하면 자리를 비웠던 그였지만 천여운이 드디어 훈련에 참가하기에 살펴보러 나온 것이었다. 예상대로 팔 조의 분위기가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었다. 유일하게 검은 명찰을 단 생도가 두 명이나 있기 때문이었다. 단지 한 가지 의외의 것이 있다면 천여운의 내공 상태가 그가 예상하던 것과 달랐다. ‘내공이 생각보다 두터운데.’ 불과 열나흘 전만 하더라도 내공이 전무했던 천여운이었다. 그런데 불과 열나흘 만에 여섯 종파 중의 하나인 복마종의 혈손인 자현보다 공력이 강하다는 것이 이상했다. 마교 서열이 십위 권 내에 드는 우호법 섭맹이 가르쳤다고는 하나 내공은 의문스러웠다. 자현이라면 마룡단까지 복용하여 서류상에 적혀 있던 원래의 내공까지 더해 적어도 이십 년에서 반 갑자의 내공을 지녔을 텐데, 오히려 그를 튕겨낼 정도라면 반 갑자 이상의 내공을 지녔다는 말이었다. 이것은 설사 섭맹이 천여운의 마룡단의 약효를 흡수하는 것을 도왔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설마 마룡단의 약효를 전부 흡수했단 말인가? 그렇다는 것은 가르치는 술주정뱅이 놈보다 저 녀석의 자질이 천부적이라는 말인데..... 크큭, 반쪽 피라도 범의 자식은 범이라는 건가.’ 곧 죽어도 우호법 섭맹이 잘 가르쳤다거나 하는 생각 따윈 없는 이화명이었다. 흥미롭게 바라보던 이화명은 이내 단상에서 일어나 가버렸다. 오후 훈련이 끝나고 진검을 반납한 뒤에 모든 생도들은 대연무장의 좌측에 있는 대식당으로 가서 함께 저녁식사를 한다. 그 동안 의무실에서 의원 백종명이 가져다주는 흰죽만 먹었던 천여운에게는 좋은 소식 중 하나였다. 이 단계 시험은 협동을 요하기 때문에 통과 전까지는 조별로 이동을 한다. 오열을 맞춰서 각 조의 조장을 필두로 순차적으로 식당으로 들어가 큰 그릇 하나와 나무젓가락을 받아서 정해진 자리에 착석해서 식사를 하게 된다. “오! 오늘은 닭고기네.” 간장으로 졸인 닭고기가 먹기 좋게 잘려서 길게 나열된 탁자 위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훈련받는 생도들의 유일한 낙이라면 양껏 먹어도 된다는 점이었다. 젓가락을 그릇에 올려놓은 채로 대기하고 있는 생도들을 향해 무공 교두 중에 한 사람이 목청을 높여서 외쳤다. “식사 시작!” “마도!” 시작이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생도들의 젓가락이 탁자 위로 난무했다. 어찌 보면 식사에까지 통제는 과하다는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하급에서 중급무사까지는 교내의 규율과 통제로 움직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아.’ 오랜만에 입으로 느껴보는 닭고기의 육질과 간장의 짠 맛에 천여운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장 호위가 음식 솜씨가 없던 시절부터 간단하게 식사를 해왔던 그였기에 음식투정은 없었지만 열나흘 동안 흰죽만 먹고 지내는 것은 고문과도 같았다. 식사를 하는 내내 얼굴이 따가울 정도로 자신을 노려보는 천무금의 시선이 느껴졌다. 복마종은 다른 종파들 중에서도 유독 천여운 자신을 왜 저렇게 미워하는 지 이해할 수 없게 만들었다. ‘지금 식사를 즐기는 게 좋을 텐데. 내일이면 음식을 목구멍으로 넘기기 힘들걸.’ 그가 자신을 벼룬 것만큼이나 천여운 역시도 오랜 기간 동안 여섯 종파에 대한 분노가 가볍지 않았다. 천한 여시종 출신이라는 것만으로 어머니와 그 태생인 자신을 괴롭게 만들었다. 지금도 미독(微毒)에 중독되어서 돌아가신 어머니만 떠올려도 가슴 속 깊이에서 분노가 끓어오르는 천여운이었다. ‘힘이 없으니 약자를 짓밟는 것이더냐? 그렇다면 이젠 내가 짓밟아주마.’ 지금까지는 힘을 가지지 못했기에 숙여왔으나 이제는 달랐다. 저녁 식사 시간이 끝나는 것은 이 각(30분)이다. -댕댕댕! 종이 울리며 이 각의 시간이 지나자 식사를 하던 모든 생도들이 먹고 있던 식사를 중지하고 젓가락을 그릇 위에 올려놓았다. 식사 규칙을 미처 모르고 있던 천여운도 다른 생도들이 하는 것을 보고는 젓가락을 올려놓고 가지런한 자세로 대기했다. “식사 종료!” “마도!” 무공 교두의 목소리에 생도들이 외치며 저녁식사 시간이 종료되었다. 들어왔던 순의 반대로 각 조별로 차례대로 대식당의 바깥으로 오열을 맞춰서 나갔다. 대연무장으로 모여서 오열을 맞추고 있는 팔 조를 향해 무공 교두 임평이 말했다. “금일 일정을 종료한다. 팔십 번 생도만 남고 남은 조원들은 해산!” “해산!” 복창을 하며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 자현을 제외한 모든 생도들이 흩어졌다. 천여운은 무공 교두 임평의 뒤를 따라가는 자현을 보며 피식 웃고는 숙소가 있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틀었다. 본관의 뒤쪽으로 가면 좌측에 숙소 건물이 있었다. 숙소는 총 다섯 관으로 나누어져 있고 한 관 당, 그 규모가 꽤 크다. 한 관으로 이루어진 건물은 두 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아래층은 남자 생도들이 쓰고 위층은 여자 생도들이 사용한다. 한 관에는 층별로 열 개의 큰 호실로 나누어진다. 호실 별로 최대 스무 명까지 잘 수 있도록 침상이 놓여 있어서 남녀가 나뉘게 되면 한 호실 당 한 조가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세 번째 관까지는 단체 숙소로 되어있는 반면에 네 번째 관은 개인 숙소로 되어 있어서 삼 단계를 통과해서 대주 급으로 승급하게 된 생도들이 머물 수 있게 된다. 마지막 가장 작은 다섯 번째 관은 무공 교두들이 머무는 숙소이다. 천여운이 머물게 될 숙소는 일관의 일층에 있는 팔 호실이었다. “어이. 어딜 들어가시나?” 일관으로 입구로 들어가려 하는 천여운의 뒤 쪽에서 특유의 짜증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대로 목소리를 들어본 적은 없었지만 대충 누구인지 짐작이 갔다. 뒤를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복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금이 기다렸다는 듯이 팔짱을 끼고서 천여운을 노려보고 있었다. 천무금의 뒤에는 팔 조 내에서 그를 따르는 생도 여섯 명이 호위 무사들 마냥 잔뜩 인상을 쓰면서 서있었다. ‘어딜 가든 상전 노릇을 하고 싶은 건가?’ 항상 극진한 대우를 받으면서 자라온 여섯 종파의 소교주 후보자들의 특징이었다. 제 손을 움직이는 것보다도 따르는 심복들을 이리저리 굴림으로써 손 하나 까딱이지 않으려고 한다. 비슷한 예로 같은 일관의 이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지금 이쪽으로 걸어오는 음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원려도 마찬가지였다. 구 조의 조장이기도 했지만 일과가 끝나서 자유시간인데도, 그녀의 뒤로 열 명 남짓해 보이는 생도들이 수하들 마냥 따르고 있었다. -웅성웅성! 일관으로 들어가는 입구 쪽에 있다보니 어느새 주변으로 많은 생도들이 모여들었다. 소문이 파다한 일곱 번째 서열 후보자인 천여운과 복마종의 천무금이 대치를 하고 있으니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많이들 모였군. 흐흐흐.’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망신을 주기 위해 벼르고 있던 천무금으로써는 가장 바래왔던 상황이었다. “더러운 핏줄 놈아. 겁쟁이처럼 의무실에서 박혀 있으니깐 그 동안 살만 했지?” 더러운 핏줄이라는 말에 천여운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자신의 도발에 기분 나빠하는 천여운의 표정이 마음에 들었는지 천무금이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왜 짜증 나냐? 이 더러운 핏...” “교주님을 모독하는 거냐?” “뭐?” “나보고 더러운 핏줄이라고 하는 건 교주님을 모독하는 말이 아니냐?” 전혀 예상치 못했던 천여운의 물음에 순간 천무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저 천여운의 어머니 쪽의 태생만 생각해서 비꼬는 말이었는데, 남은 반쪽 태생인 교주를 걸고 넘어가자 순간 말문이 막혔다. “본교의 하늘같은 교주님을 모독해도 될 만큼 네 녀석의 위치가 그분보다 높나?” “그, 그게 무슨 내가 언제 그런 의미로...” 이곳에 모여 있는 수많은 생도들은 연령, 성별을 불문하고 교주에게 충성을 다한다. 아무리 여섯 종파 출신에 교주의 태생이라고 해도 발언을 조심해야 한다. 주변에 있는 생도들의 눈빛이 싸늘하다. “역시 복마종 녀석들은 멍청하군.” 이를 지켜보던 음마종의 천원려가 비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고작 천여운 따위에게 말발이 막혀서 난처해하는 모습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저딴 천한 놈을 상대로 열이나 내고 미련스러운 놈.' 그녀 외에도 이관으로 향하는 길에 발걸음을 멈추고 상황을 지켜보던 검마종의 소교주 후보자 천경운 역시도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쯧쯧.” “이이이익!”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고 있던 천무금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모두의 앞에서 최대한 멸시하고 깔아뭉갠 뒤에 손을 봐주려고 했는데, 오히려 자신을 비웃는 얼굴과 소리들이 들려오자 참을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새끼! 그 건방진 입을 뭉개..” -퍽! “크웩!” 순간 주변에 정적이 일어났다. 천무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안면으로 번개처럼 천여운의 주먹이 꽂혔다. 기습과도 같은 주먹에 안면을 맞은 천무금의 코에서 코피가 터져 나왔다. “뭉개 크웩?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거냐?” “크아아아아!” 이죽거리는 천여운의 말에 코피를 흘리는 천무금이 눈이 뒤집혀서 복마종의 절기인 복마공권의 초식을 펼치려고 했다. -휙! 그러나 기습적인 선방을 날린 천여운의 다음 행동은 놀랍게도 도주였다. 주변에 모여서 구경하던 생도들도 설마 선공까지 취한 천여운이 도망을 시도할 거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크아아아! 잡아!” “네, 넵!” 화가 머리끝까지 난 천무금이 자신을 따르는 생도들에게 소리를 절렀다. 천여운의 기습 같은 일격에 놀라서 멍 때리고 있던 생도들이 숙소 건물의 뒤편의 숲을 향해 도망치는 천여운을 쫓았다. 당연히 천무금 역시도 뒤따라서 경공을 펼쳤다. 이것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생도들과 달리 음마종의 천원려와 검마종의 천경운은 멀리서 도망치고 있는 천여운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한편 천여운의 뒤를 쫓고 있는 여섯 명의 생도들은 당혹스러웠다. 불과 열나흘 전만 하더라도 무공은커녕 내공조차 없다고 알고 있었는데, 도망가는 천여운과 좀처럼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헉헉!” “왜 이렇게 빠른 거야?” 따라잡을 수 없는데 거리가 유지된다는 게 이상했다. 생도들 중에 그나마 머리가 돌아가는 이백삼 번 생도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녀석 설마 우리를 유도하는 건가?’ 설마 하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 거리를 유지하면서 도망치는 것이 일부러 따라오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뭘 꾸물대는 거냐!” “앗?” -슉! 가장 늦게 출발한 천무금이 코에서 흐르는 코피를 닦으며 빠른 속도로 그들을 스쳐지나갔다. 어떻게든 저 녀석을 잡아서 얼굴을 짓밟고 뼈를 부숴야 직성이 풀릴 것만 같았다. 한참을 달리던 천여운이 뒤를 힐끗 쳐다 보더니 이내 자리에서 멈춰 섰다. “빌어먹을 자식! 다 도망친 거냐?” 천무금이 주먹을 쥐고서 그를 향해 다가오며 말했다. 그러자 천여운이 비웃음이 담긴 표정으로 답했다. “도망? 웃기시네. 유인한 거지.” “뭣?” “아직 다른 녀석들한테 보여줄 필요가 없거든.” -휙! 그 말과 함께 천여운의 신형이 고무줄처럼 튕겨지며 천무금을 향해 손바닥으로 도법을 펼치듯이 내리쳤다. 기습과도 같은 일격이었지만 아까 전과 다르게 내공을 끌어올려서 만전이었던 천무금은 두 주먹을 교차하며 팔목으로 천여운의 손바닥을 막았다. -콱! 타탁! 손바닥을 막은 천무금의 발걸음이 두 보 뒤로 밀려나갔다. 교차했던 주먹을 내리는 천무금의 동공이 흔들렸다. “너......너 어떻게 이런 무공을?” 경공을 펼칠 때만 하더라도 화가 나서 신경 쓰지 않았는데, 천여운의 내공이 실린 일격에 천무금은 그제야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8장 네놈이 자초한 거다(4) 천여운이 손바닥으로 펼친 일도의 기세는 절대로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일도에 실린 묵직함은 칠 성 공력으로 방어를 했는데도 두 보나 밀려났을 정도였다. ‘이 녀석 공력이 가볍지가 않다.’ 내공을 익히지 않겠다는 맹약만을 생각하고 만만하게 여겼던 천무금으로써는 원래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른 실력에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때다!’ 이 기세를 몰아 천여운이 접무도법의 제 이 초식을 펼쳤다. -사르르르! 쾌속한 접무도법의 제 이 초식 회원접경(回圓蝶警)은 빠른 회전이 가미된 도초를 펼치는 것으로 원래는 방어를 위한 동작이었지만 근접해 있을 때도 효과적이었다. -파파팍! 맨손으로 펼치는 도초였지만 초식의 운기 경로를 통해 내공이 순환하는 순간 천여운의 오른손이 하나의 도처럼 날카로운 예기가 서렸다. 도기(刀氣)는 아니었지만 손날을 휘두르는 풍압이 제법 날카로웠다. “공자님! 위험합니다!” 그때 뒤늦게 도착한 여섯 생도 중에 한 소년이 다급히 소리쳤다. 날카롭게 회전하며 가슴을 향해 날아오는 천여운의 맨손 도초에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던 천무금이 보법을 펼치며 뒤로 삼 보 정도 물러났다. ‘피했다?’ 그가 아직까지 놀라는 틈을 타서 단번에 승부를 보려했던 천여운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그 순간 뒤로 물러났던 천무금이 앞으로 튕겨 나오며 도리어 천여운의 가슴에 연타로 권을 날렸다. 복마공권의 삼 초식인 타연격공(打聯擊攻)이었다. -퍽! “큭!” 곧바로 반격해 오는 바람에 일타는 맞았지만 이타는 뒤로 몸을 젖히며 피해냈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연타를 펼쳤던 상태에서 그 반동을 이용해 몸을 좌측으로 틀면서 팔꿈치로 천여운의 우측 어깨를 때렸다. 천여운이 급히 왼쪽 팔목을 들어 올려 방어했지만 팔꿈치에 실린 공력은 그보다 한 수 위였다. -타타타탁! 우측으로 발바닥이 사 보 정도 밀려났다. ‘아직 내공에서 밀리는구나.’ 처음부터 반 갑자의 내공을 가지고 마도관에 입관한 천무금이었다. 일 단계 시험을 합격하고 나서 마룡단이라는 영약을 얻었으니 당연히 내공이 늘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버틸 만은 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워낙 어릴 적부터 영약을 자주 복용한 천무금이었기 때문에 마룡단의 흡수율이 그리 높지가 않았고, 급한 성격으로 인해 영약 흡수에 만전을 기하지 않아서 절반의 효과밖에 보지 못했다. 제대로 내공을 얻었다면 큰 격차로 상대하기가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반격할 틈을 주지 않고 공격해야 해.’ 천여운이 절무도법 중에서 쾌속한 도초를 펼치자 그의 팔목부터 손날이 나비처럼 팔랑거리며 잔상을 남기며 첨무금의 우측 어깨로 쇄도했다. “어떻게 저놈이 저런 무공을?” 천여운이 펼치는 고절한 도법에 여섯 생도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공을 익힌 것도 모자라 절학에 가까운 것을 익혔으니 말이다. 만약 우호법 광도 섭맹의 독문신공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경악을 할 것이다. “제법이구나.” 천무금이 짧은 감탄사와 그의 상체를 노리는 천여운의 도초를 미끄러지듯 기이한 각도까지 허리를 젖히며 피한 뒤에 천여운과의 간격을 좁혔다. 복마권공은 권법이긴 하지만 부드러움을 추구하는 무학이기에 그 움직임이 매우 유연하다. 허리를 뒤로 젖히며 파고든 천무금이 순식간에 몸을 비틀며 회전을 하며 좌측 상단으로 발차기를 날렸다. -퍽! “으윽!” 이에 왼쪽 머리를 맞은 천여운의 몸이 우측으로 튕기며 바닥을 뒹굴었다. 초식에 관해서는 터득했지만 정작 기초적인 낙법을 치는 법을 배우지 못했던 천여운은 바닥을 뒹군 뒤에 어설프게 몸을 일으켜 세워야만 했다. ‘권만 생각했는데 갑자기 발차기가 날아오다니.’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공력이 실린 발차기에 머리를 맞아서 어지럽기까지 하다. 균형을 잡지 못하고 몸이 비틀거리자 그제야 여유를 되찾은 천무금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격에 맞지 않는 도법을 써서 제법 놀라기는 했다만 역시 급조한 티가 나는구나.” 정곡을 찌르는 말에 천여운이 인상을 찌푸렸다. 놀랍게도 천무금은 고작 몇 초식 만에 자신이 이제 막 무공을 배웠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초식에 군더더기가 없지만 정작 상대방의 공격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 지는 전혀 모르는군.’ 비록 다혈질적인 성격에 포악하다고는 하나, 여섯 종파 중의 하나인 복마종에서 영재 교육을 받은 천무금이었다. 단순히 벌모세수를 받고 각종 영약과 복마종의 뛰어난 무공을 익히는 것만이 영재 교육이 아니었다. 천무금은 어렸을 적부터 많은 스승들과의 대련을 통해서 실전 감각을 높였다. 무공은 단순히 초식을 익히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적재적소에 활용하느냐가 중요했다. “크크큭, 역시는 역시구나. 네놈 주제에 작학관보지.” 작학관보(雀學鸛步).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다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말이다. 단 두 초식만으로도 천여운이 뛰어난 도법을 배웠다는 것을 파악했고, 그것을 익히기는 했으나 실전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 또한 곧바로 알아냈다. ‘천무금을 너무 과소평가했구나. 어떻게 해야 할까?’ 천여운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수백, 수천 번을 익힌 것처럼 전이 된 접무도법의 초식은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지만 정작 어떤 상황에 어떤 초식을 활용해야 할지 경험이 없었다. “네 녀석이 어떻게 무공을 익혔는지는 짓밟고 나서 천천히 알아보면 되니깐.” -팟! 자신감을 되찾은 천무금의 신형이 지면을 박차고 튕겨 나와 천여운을 향해 복마공권의 오 초식인 복호공순(伏號攻瞬)을 펼쳤다. 짧은 찰나에 위기의 순간, 천여운은 호랑이와 같은 기세로 두 주먹을 동시에 내지르며 뻗어오는 천무금의 초식에 고민에 휩싸였다. ‘어떻게 해야 하지? 무슨 초식을 써야 하는 거지?’ 바로 그때 천여운의 머릿속에 나노 머신, 나노의 목소리가 울렸다. [외부로부터 사용자의 위협을 감지했습니다.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사용자의 시각 정보에 증강현실(增强現實) 개안(開眼) 가동. 전투 튜토리얼(tutorial)을 통해 행동지시 방어 모드를 가동합니다.] 그 순간 천여운의 동공이 빠르게 흔들리며 미세한 작은 빛이 발했다. “받아랏!” 천무금의 두 주먹이 그의 가슴으로 직격해오는 순간 천여운이 가볍게 발을 툭툭 뛰며 옆으로 몸을 비켜서더니, 그대로 천무금의 턱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퍽! “크헉!” 예상하지 못한 일격에 오른쪽 턱을 얻어맞은 천무금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공력이 실린 주먹은 아니었지만 턱을 맞는 바람에 뇌가 흔들려 어지러움으로 잠시 균형을 잡지 못했다. ‘이, 이 자식? 방금 도법이 아니잖아?’ 만약 공력이 실린 주먹이었다면 기절했을 지도 몰랐다. 어지러움으로 당황한 천무금이 재빨리 보법을 펼치며 뒤로 거리를 벌렸다. “뭐, 뭐야? 방금 전과 움직임이 다르잖아.”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고 있던 생도들 역시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천무금의 자신만만한 말을 들었을 때는 금방 결판이 날 거라 생각했는데 방금 전의 일격으로 짐작하기가 힘들어졌다. 천여운의 두 눈의 시야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게 대체 뭐야?’ [외부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전투 튜토리얼을 위한 증강현실을 개안했습니다.] 천여운의 눈에는 보이는 현실 이외에 흰 빛으로 이루어진 선들과 글이 아른거리며 눈앞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방금 전에도 천무금의 초식이 닿으려는 순간 피해야 바닥에 가볍게 뛰는 발 형태의 빛이 동작 단위로 생겨나며 그것을 따라하라는 글이 허공에 새겨졌다. 찰나의 순간 천여운은 그것을 따라서 천무금의 공격을 피해 우측으로 파고들었고, 흰 빛의 화살표가 천무금의 턱을 가리키며 주먹 형태로 빛이 떠오르자 그것을 그대로 행했다. [주인님의 지정이 없었기 때문에 임의로 프로그램에 내장된 호신 무술 중 하나인 권투로 튜토리얼을 진행했습니다.] ‘튜토리얼?’ [개별 지도를 뜻합니다.] ‘네가 내 행동을 지시했다는 거야?’ [상대방의 움직임이 빨라 0.01초 단위로 행동 모션(motion)을 분석하여 결과를 도출시켰습니다.] ‘어려운 말은 모르겠고, 방금 내가 했던 동작이 권투라는 거지?’ [권투는 프로그램에 내장된 호신 무술 중의 하나로...] ‘아니야. 아니야. 설명은 집어치우고 네가 지시하는 것이 권투라면 그것 말고도 접무도법으로도 가능해?’ [분석 및 전이가 완료되었기 때문에 접무도법으로 튜토리얼이 가능합니다. 승인하시겠습니까?] ‘승인할게.’ [행동 지시 방어모드를 권투에서 접무도법으로 교체합니다.] 천여운이 잠시 동안 움직임을 멈춘 채, 나노와 대화를 하는 틈에 턱을 맞았던 천무금이 어지러움이 어느 정도 가셨는지 전의가 타올라서 외쳤다. “권도 익혔어? 더러운 자식. 숨겨둔 패가 많구나! 하지만 더 이상 그런 운은 통하지 않는다!” 천무금이 다시 거리를 좁히며 천여운을 향해 속사포와 같은 권을 내질렀다. 그의 주먹이 수십 개의 그림자를 만들어내며 천여운을 뒤덮었다. 그런 천여운의 눈에는 수십 개의 권영(拳影)옆에 빠르게 변화하며 단위가 줄어드는 숫자와 권영들이 어디를 노려오는지에 관한 분석 정보가 허공에 흰 빛으로 떠올랐다. ‘어디로 어떻게 공격해 올지 보인다!’ 천여운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파파파파파파팍! 수십 개의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천무금의 권초를 천여운이 보법을 펼치며 피해냈다. 그의 상반신 요혈들을 노리던 권영들이 전부 빗겨나갔다. ‘아니! 내 권을 전부 피해?’ 아까 전만 하더라도 상대의 초식에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던 사람이라고 믿기 힘들 만큼 유연하게 보법을 펼치며 권초를 피해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천무금의 속사포와 같은 권초를 피해낸 천여운이 마지막 일권을 피한 순간 손날을 펴서 화려한 도초를 펼쳤다. “헛?” -팍! 팍! 놀란 천무금이 복마권공의 방어 초식을 펼쳤지만 두 식(式) 밖에 막지 못했다. 천여운의 손날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날아다니는 나비처럼 잔영이 생겨나더니 어느새 천무금의 오른쪽 어깨를 횡으로 내리쳤다. -퍽! “끄윽!” 어깨를 내리 찍히는 감각과 함께 천무금이 강한 통증에 목구멍으로 핏물이 올라왔다. 실제 도를 들고 있었다면 그대로 베였을 것이다. ‘어떻게 이놈이 이런 고절한 초식을 펼칠 수 있단 말인가?’ 분명 천여운의 공력을 본다면 자신보다 한 수 아래였지만 초식에 실린 동작의 군더더기가 없는 것과 힘의 균형은 마치 몇 십 년은 연마한 고수와도 같았다. 내공이나 깨달음을 얻진 못했으나 우호법 섭맹과 같은 수준으로 초식을 구현해낼 수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비틀! 제대로 초식에 적중당하고 나니, 공력의 여파로 다리에 힘이 풀렸다. 쓰러질 것만 같은 천무금의 머릿속에 항상 악몽처럼 반복되던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금아, 네가 열심히 한다면.....너만 잘 한다면 교주님, 아니 네 아버지의 관심도 그 더러운 년에게서 내게로 다시 돌아올 거야.] [네가 똑바로 못해서 그런 거야! 다 네가 못나서 그런 거란 말이다!] [그 더러운 년이 나타나지만 않았어도.] 천무금의 어머니인 자 부인은 복마종의 규수로서 간택을 받아서 여섯 종파의 혈맹에 따라 정략적으로 교주인 천유종과 맺어졌다. 정략이었지만 자 부인은 진심으로 교주를 사랑했다. 지극정성으로 교주에게 관심을 쏟았지만 그는 정략으로 맺어진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다. 교주의 관심은 오직 교주전에 있는 여시종에게 가있을 뿐이었다. [내 탓이 아니야. 다 네가 똑바로 못 해서야. 네가 못났기 때문이라고!] 천무금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어머니, 자 부인은 실성한 눈으로 오열을 하며 어린 자신의 목을 두 손으로 조르고 있었다. ‘하필 이 순간에 이딴 빌어먹을 기억이 떠오르다니!’ 그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그는 오직 단 한 사람을 증오하게 되었다. 다리에 힘이 풀리려던 천무금이 분노에 젖은 눈빛으로 이를 악물고 진각을 내딛으며 천여운의 안면을 향해 일권을 내질렀다. “제기랄! 너 따위 천한 놈에게 질 것 같으냐!” 그러나 기습적인 그의 일권마저도 천여운은 고개를 젖혀서 가볍게 피해내더니 초식을 펼치지 않고 천무금의 이마에 손날로 도초를 날리려다, 손바닥으로 이마를 잡고선 바닥에 내리찍어버렸다. -쿵! “크헉!” 바닥과 부딪치면서 뒤통수에 강한 충격을 받은 천무금이 어찌나 고통스러운지, 얼굴이 새빨개져서 목에서부터 이마까지 혈관이 올라왔다. “너 같이 천한 놈 따위에게! 내가! 내가!” 패배했다는 자괴감에 바닥에 누워서 분에 겨워하는 천무금을 향해 천여운이 차가운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전부 네놈이 자초한 거다.” 9장 이 단계 시험(1) 복마종의 소교주 후보인 천무금. 마교의 근간을 이루는 여섯 종파 중 하나인 복마종의 무공과 영재 교육을 받아온 그의 패배는 여섯 명의 생도들을 놀랍다 못해 경악스럽게 만들었다. 분명 열나흘 전만 하더라도 내공이 전무하던 녀석이 이제는 자신들이 감히 넘보기 힘들 만큼 뛰어난 무공 실력을 지녔다. “왜 한바탕 해볼 테냐?” 천여운이 놀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생도들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여섯 명이 서로 합을 맞춘 것처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차피 자신들이 합공을 해도 이기기 힘든 천무금을 꺾었는데, 어떻게 해보려고 해도 방법이 없었다. “그럼 이 녀석을 데려가라.” 그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여섯 생도들이 동시에 몰려와 천무금을 부축했다. 비록 천여운에게 패배하기는 했으나 여전히 그의 종파인 복마종의 위세가 두려운 생도들이었다. ‘힘뿐만이 아니라 나만의 세력을 가진다면 모두가 저렇게 두려워할까?’ 천여운은 생도들의 모습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깨와 뒤통수의 통증 때문에 바닥에 누워있던 천무금은 생도들의 부축을 받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그들의 손을 뿌리치며 신경질을 냈다. “놔! 내가 알아서 걸어갈 거니깐!” “하지만 공자님!”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고집을 부리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생도들이 부축하던 것을 놓자 다시 바닥에 대 자로 뻗은 천무금이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천여운을 노려보며 말했다. “왜 제대로 마무리 짓지 않는 거냐?” 천무금 자신도 그를 보면 분노의 감정이 샘솟았지만, 천여운 역시도 어릴 적부터 여섯 종파에게 멸시를 당해왔기 때문에 그 분노가 컸으면 컸지 작을 리가 없었다. 화풀이를 해도 모자랄 판국에 마지막에는 손날에서 손바닥으로 바꿨으니 시답잖은 동정을 당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천여운이 그런 천무금을 바라보며 무표정하게 답했다. “이 단계 시험이 조별로 하는 게 아니었다면 네 머리통을 박살냈을 거다.” 여섯 생도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무표정한 얼굴로 독기 어린 말을 내뱉으니 더욱 무서웠다. 이 단계 시험을 생각하면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이유였지만 가끔은 욱하는 감정이 먼저 앞서는 천무금으로서는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다. “칫, 같잖은 핑계는 천한 놈 주제에.” “계속 그딴 식으로 주둥이 나불대면 정말 머리통 박살낸다.” “그럼 박살내! 새끼야.” “입만 살아가지고.” 아직까지 일어나지도 못하면서 당당하게 머리를 박살내라고 말하는 천무금을 천여운이 한심스럽게 쳐다보더니 이내 그 자리를 박차고 떠나버렸다. 천무금과 싸우는 사이에 해가 완전히 지고 어두워졌다. 숲속의 나뭇잎 사이를 관통해 비추는 은은한 달빛 아래, 숙소로 돌아가는 천여운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경험이라는 것을 무시할 수가 없구나.’ 나노 머신의 힘을 빌려서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만큼 빠른 속도로 무공을 습득했지만 천여운에게는 중요한 경험이 결여되어 있었다. 아까도 나노가 중간에 개입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천여운이 패했을 지도 몰랐다. 초식인 접무도법을 완벽하게 익혔다고 해서 그가 스승인 우호법 섭맹의 수준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높은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내공과 경험이 전부 갖춰져야만 했다. ‘지금 당장에 경험을 쌓으려면 시간이 걸린다. 내가 경험을 쌓는 기간 동안 여섯 종파의 녀석들이 그냥 내버려둘 리가 없겠지. 그렇다면 오히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부터 확실하게 활용할 줄 알아야해.’ 방금 전에 있던 천무금과의 대결을 통해 알게 된 전투 튜토리얼 증강현실 기능도 미리 알았더라면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인간이 판단하는 능력보다도 분석 판단이 빠른 나노는 찰나의 순간에 천무금의 초식을 파악하고 그 허점마저 찾아내, 대련 경험이 없는 천여운조차 튜토리얼을 통해 능숙하게 도법을 구사하게 만들었다. ‘나노.’ [네, 주인님.] ‘내가 이때까지 네가 가진 기능을 얼마나 사용한 거야?’ 문득 궁금해졌다. 계속해서 새로운 기능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그것은 천여운이 자의로 활용한 것이 아니라 위기가 닥쳐서야 알아낸 것뿐이었다. [사용자 기록을 확인합니다. 현재 주인님께서는 나노 머신 기능의 3퍼센트를 활용했습니다.] 사실 천여운의 관심이 오직 무공을 익히는 쪽으로 향해 있기 때문에 그 활용도가 현저히 낮을 수밖에 없었다. 나노 머신에 기본적으로 내장되어 있는 프로그램을 전부 활용하기만 한다면 현 시대를 완전히 뒤바꿀 수 있을 정도였지만, 그런 정보들은 프로그램에 락(lock)이 걸려서 있어서 사용할 수 없게 되어 있다. 하지만 이 정보 만큼은 나노가 천여운에게 알리진 않았다. ‘삼 퍼센트?’ [삼 푼, 활용했습니다.] 곧바로 천여운이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했다. ‘고작 그 정도밖에 활용 못했다고?’ [내장된 기록상으로 나노 머신의 기능을 삼 할 이상으로 사용한 사례가 없습니다.] 물론 나노머신 나노의 말대로 좋은 물건이라고 해도 그것을 완벽하게 사용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것은 사용자의 용도에 따라 물건이 활용되기 때문이다. 천여운 역시도 지금까지 나노 머신을 무인으로서 성장하는데 그 기능들을 활용한 것처럼 말이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내가 쓸 만한 것들이 많을 거다.’ 자신이 나노 머신의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체감한 천여운은 잠시 고민하다가 나노에게 생각을 전달했다. ‘네가 할 수 있는 기능을 전부 상세하게 알려줘.’ [알겠습니다. 7세대 나노 머신의 상세 기능에 관한 설명서를 뇌로 전이하겠습니다. 승인하시겠습니까?] ‘승인할게.’ [추가로 상세 기능 설명서의 원활한 이해를 위해 언어 교육 프로그램에 내장된 영어를 전이하겠습니다. 승인하시겠습니까?] ‘네가 가끔씩 말하는 그 발음이 이상한 말들이지?’ [그렇습니다.] ‘승인할게.’ [사용자의 승인으로 7세대 나노 머신의 상세기능 및 영어 언어 능력을 뇌로 전이합니다.] 나노의 특유의 기계적인 음성이 머릿속의 울리며 천여운의 머리가 찌릿하며 눈의 동공이 빠르게 흔들렸다. 그의 뇌로 정보가 전이되는 과정이었다. 기본 정보를 받아들일 때보다도 상세 기능 활용서의 정보량이 많아서 평소보다 전달이 길어졌다. 하지만 전이가 끝났을 때 천여운은 약간의 어지러움 이외에는 전처럼 토악질을 한다거나 하진 않았다. 몇 번 씩이나 정보 전이를 해왔기에 뇌가 적응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어지러움이 가시자 천여운이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온 나노 머신이 할 수 있는 기능에 대한 정보들을 탐색해나갔다. ‘이게 네가 할 수 있는 것들이라고?’ 그가 짐작했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나노 머신의 기능이 머릿속에서 떠오르자 천여운의 입가에 미소 감돌았다. 마치 빙산의 일각만으로 보았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지금 알게 된 나노 머신의 기능들 중에서는 천여운에게 부족한 부분인 경험을 메꿀 수 있는 방법들 또한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반복 시뮬레이션 기능이었다. ‘다른 사람과의 대련을 증강현실에서 시뮬레이션이 가능하구나?’ 기능에 대해서 완전한 이해와 영어 능력을 얻게 된 천여운은 지금까지와 다르게 이해력 또한 올라갔다. [하지만 시뮬레이션을 위해서는 상대에 행동 모션에 관한 분석 정보가 필요합니다.] ‘아까 전에 내가 붙었던 천무금은 가능해?’ [모션 분석 정보가 부족하지만 전투를 하셨던 기록을 바탕으로 그에 상응하는 시뮬레이션 아바타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아쉬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것도 감지덕지였다. ‘좋아! 지금 바로 해보자.’ 천여운은 숙소로 가던 발걸음을 틀어서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다. 수면 시간 전까지는 자유 시간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시뮬레이션을 통해서 실전 경험을 키워나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사용자의 시각 정보에 증강현실(增强現實) 개안(開眼) 가동. 시뮬레이션을 위한 아바타를 생성합니다.] 나노의 목소리가 울리면서 아까 전 천무금과 대결을 펼쳤을 때와 동일하게 흰 빛에 눈에 아른거리며 선들이 생겨났다. 아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분석 정보에 대한 흰 빛은 생기지 않았고, 그의 눈앞에 흰 빛이 사람의 형태를 이루더니 이내 천무금의 모습으로 변했다. “하?” 신기한 현상에 천여운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나노 머신의 기능대로라면 눈앞의 천무금은 나노가 증강현실에 만들어낸 아바타일 것이다. 그의 눈에만 보이는 존재라는 말이었다. [아바타 활성화 전에 시뮬레이션 정보를 조정합니다. 아바타가 사용자에게 가하는 충격의 퍼센트를 조정해주십시오.] ‘충격 퍼센트?’ [아바타의 공격을 맞았을 때 충격도를 말합니다. 실제와 동일하게 한다면 100퍼센트로 조정하시고, 그보다 약하게 하신다면 강도를 낮게 조정하시면 됩니다.] ‘그래? 그럼 100퍼센트로 할게.’ 어차피 증강현실에만 보이는 아바타라면 충격을 받아봐야 얼마나 받겠나 싶었다. 하지만 이윽고 시작되는 시뮬레이션에서 천여운은 자신이 멍청한 선택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했다. [시뮬레이션을 진행합니다.] 그의 눈앞에 있는 천무금의 아바타가 천여운을 향해 건방진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이 천한 놈! 덤벼라.] “하?” 순간 천여운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천무금의 정보를 토대로 아바타를 구현했다고는 하나 특유의 재수 없는 표정이나 행동, 말투까지 정확하게 따라하게 창조할 줄은 몰랐다. 눈앞에 있는 천무금 아바타가 가짜라는 것을 알면서도 짜증이 날 정도였다. ‘아~주 잘 됐네. 아까는 이 단계 시험 때문에 머리통을 깨지 못했는데, 아바타니깐 제대로 깨부숴도 상관없겠구나.’ 덕분에 몰입도가 높아진 천여운이었다. 그가 공격하지 않자 먼저 신형을 박차며 공격해오는 천무금의 아바타였다. 양 주먹을 호랑이와 같은 기세로 뻗어오는 초식은 아까 전 대결에서 천무금이 썼던 복마공권의 오 초식인 복호공순(伏號攻瞬)이었다. ‘오!’ 정말 그대로 구현해내자 천여운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아까 전에 나노의 튜토리얼로 권투 동작으로 피했던 것을 떠올리고는 이번에는 보법을 펼쳐서 옆으로 파고들어 접무도법의 일 초식을 펼쳤다. 그 순간, [그딴 어설픈 공격이 통할 것 같으냐?] 천무금의 아바타가 건방지게 외치더니 기이한 각도로 몸을 틀어 도초를 피하고는 발차기로 천여운의 복부를 걷어찼다. -퍽! “크헉!” 복부에서 느껴지는 강한 통증에 천여운의 비명과 함께 넘어졌다. 분명 증강현실에서만 보이는 아바타인데 이런 통증까지 재현해 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끄으으윽. 어떻게 통증이 느껴지는 거야?” 복부를 얻어맞아서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하는 천여운의 머릿속으로 나노의 목소리가 울렸다. [주인님이 아까 전에 겪었던 통증 정보를 바탕으로 체내에 있는 나노 머신이 같은 강도의 충격을 재현했습니다.] “젠장.” 별 생각 없이 100퍼센트로 충격도를 조정하라고 했던 것이 멍청한 선택이었다. 사실을 그대로 전달해준 나노였지만 괜히 화가 나는 천여운이었다. [충격도를 재조정하시겠습니까?] “......됐어! 그대로 진행해!” 나노의 충격도 재조정 제안에 천여운은 순간 솔깃했지만 이내 거절했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충격을 그대로 재현을 한다면 자신도 그저 증강현실이라는 것에 안주하지 않고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천한 놈! 덤벼라!] 아직까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천여운을 향해 천무금의 아바타가 건방지게 검지 손가락을 까딱이면서 도발했다. “빌어먹을 아바타 주제에!” 가상의 아바타가 하는 도발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에 홀라당 넘어간 천여운이 화가 난 얼굴로 접무도법을 도초를 펼치며 쇄도해갔다. 그렇게 천여운은 시뮬레이션 훈련을 통해 대련 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그의 모습은 아무도 없는 허공에 대고 초식을 펼치며, 맞는 시늉을 해가며 고통을 호소하는 모습이 미친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9장 이 단계 시험(2) 늦은 밤, 구름 한 점 없는 어두운 하늘 위로 별빛이 수를 놓고 있었다. 천여운은 밤늦게까지 숙소 뒷산의 숲속에서 증강현실의 시뮬레이션 훈련을 마치고 이제 막 숙소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유시(酉時)부터 두 시진 동안 쉴 틈 없이 대련을 한 그는 녹초가 되어 있었다. 나노머신인 나노가 상처가 날 때마다 치료를 해주었기 때문에 내외상은 없었으나 피로도가 쌓이는 것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하아, 열다섯 번을 겨뤄서 고작 마지막 한 번밖에 못 이기다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노의 전투 튜토리얼 모드를 사용하지 않고 제대로 겨루자 첫 대결은 고작 다섯 초식 만에 결판이 났다. 그 다섯 초식조차도 제대로 방어하거나 파훼한 것이 아니라 몸으로 때웠다. 천무금 본인도 아니고 그를 분석해서 생성한 아바타에게 이렇게 졌을 정도면 그와 제대로 겨뤘다면 결과는 천여운의 처참한 패배로 이어졌을 것이다. ‘머리통을 부수긴 개뿔.’ 울적해하는 천여운의 머릿속에 나노의 목소리가 울렸다. [경험이라는 것은 축적될 수록 더욱 실력이 향상됩니다. 대련이 중첩될 때마다 주인님의 움직임의 변화나 접무도법의 초식을 알맞게 활용하는 빈도수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나노의 말대로 천여운은 첫 대련에서 여섯 번째까지는 거의 일방적인 패배를 겪었으나, 일곱 번째에서 아홉 번째 대련까지는 중간 중간에 초식을 써가며 대항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열 번째에서 열네 번째 대련에서는 밀리는 와중에도 천무금의 아바타가 예측하지 못한 공격으로 반격을 해내기 시작했다. 대련의 회 차가 거듭될수록 겨루는 시간도 늘었다. 그렇게 마지막 대련에서는 삼십 초식 가량을 겨루다, 처음으로 천무금의 허점을 발견해 절무도법의 초식을 적중시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면 뭘 해. 천무금의 초식이라고 해봐야 고작 세 초식을 돌려쓰고, 나머지는 기본 식 밖에 쓰지 못하는 녀석한테 고작 한 번을 이겼는데.’ 그게 제일 분했다. 천무금이 대결에서 보여주었던 초식의 정보와 움직임, 공력의 강도만을 구현한 것을 알기에 녀석의 완전한 전력이라고 보기도 힘들었다. 완전하지도 못한 천무금에게 상대가 되지 못했다는 것은 천여운에게 자괴감과 더불어 더욱 전의를 불타게 만들었다. ‘후우, 두고 봐. 딱 이레 안에 아바타 정도는 가볍게 꺾고 말테니깐!’ [알겠습니다.] 경험을 쌓는다는 것이 그저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달은 천여운은 그렇게 첫 번째 목표를 세웠다. 하지만 이때 천여운이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나노 머신이 증강현실로 생성한 아바타 천무금의 무공 능력은 대결을 통해서 보여준 정보를 기준으로 구현한 것에 불과했지만, 아바타 천무금은 천여운의 무공인 접무도법과 단검비술에 대한 모든 정보가 숙지된 상태라는 사실을 말이다. 실제 무공 대결에서 상대의 무공을 전부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 미치는 영향력은 승패를 좌지우지할 만큼 컸다. 더군다나 매회 대결을 할 때마다 지치는 천여운과 달리 무한한 체력의 아바타를 상대로 한 번의 승리를 따낸 것은 그의 재능이나 오성(悟性)이 절대로 가볍지 않음을 의미했다. -웅성웅성! 그렇게 천무금의 아바타와 대련했던 것을 복기하며 걸어온 천여운이 어느새 일관에 있는 팔 조의 숙소로 도착했다. 평소와 달리 천무금이 자리를 비우고 있었기 때문에 떠들썩하던 숙소가 천여운의 등장으로 일순간 조용해졌다. ‘왔어!’ ‘녀석이 왔다구!’ ‘상처 하나 없는 모습을 봐.’ 숙소 내에 있는 생도들이 조용히 속닥거리는 반응을 보니, 대결을 지켜봤던 여섯 생도들에게 그 승패의 결과를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것은 여섯 종파 중 하나라는 압도적인 위세와 무력으로 팔 조를 군림해오던 천무금의 체제에 첫 파문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천여운이 팔 조라는 생도들에게 일으킨 파문은 그 동안 교내에서 떠돌던 소문과 선입견을 가지고 있던 그들에게 그의 새로운 면모를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복마종의 위세를 두려워하는 생도들이기에 천여운에게 쉽게 말을 걸 생각은 하지 못했다. -저벅저벅! 천여운이 자신의 침상 자리를 찾기 위해 숙소의 한복판으로 걸어가자 주변에 서있던 생도들이 자연스럽게 갈라져서 길을 터주었다. 마도관에 입관하기 전만 하더라도 밖에 나가기 꺼려질 만큼 멸시 혹은 동정의 시선을 받아오던 때와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 ‘이게 힘을 가진다는 것인가.’ 누구 하나 그를 우습게 여기지도, 만만하게 여기는 눈빛이 아니었다. 위세 등등하고는 하나 여섯 종파의 소교주 후보자 중 고작 한 명을 꺾었을 뿐이데, 이렇게 달라지는 태도와 시선에 실소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숙소에 있지도 않는 천무금의 눈치를 보느라 그에게 쉽게 접근하지는 못했다. ‘내 자리가 어디지?’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둘러보는 천여운에게 누군가 후다닥 달려왔다. 머리에 파란색 두건을 쓰고 있는 그는 의무실에서 천여운을 노렸던 이십삼 번 생도였다. 이십삼 번 생도가 침상을 두 손으로 공손히 가리키며 그를 안내했다. “공자님의 자리는 이쪽입니다.” “그래?” 의무실에 있을 때부터 그의 눈치를 봐왔던 이십삼번 생도의 말투와 행동은 마치 주군을 모시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는 다른 생도들의 눈빛에 의아함이 담겼다. ‘뭐야? 저 녀석, 왜 저러는 거야?’ 라고 대다수의 생도들은 생각했지만 이것은 이십삼 번 생도에게 있어서 도박과도 같은 결정으로 빚어진 처세였다. 그는 자신의 종파를 돌봐준다던 천무금에게 임무를 실패했다는 이유만으로 토사구팽을 당하고 심지어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개처럼 얻어맞았다. 이것이 시발점이었다. ‘빌어먹을 자식! 지가 소교주 후보면 다야!’ 그 후로도 천무금은 시도 때도 없이 마도관을 나가면 이십삼 번 생도의 종파를 뒤집어 엎어버린다는 말을 남발하면서 그의 분노를 키워나갔다. 그리고 불과 두 시진 전에 상처를 입고 나타난 천무금의 모습과 그의 패배를 알게 되었을 때, 이십삼 번 생도는 결심하게 되었다. ‘어차피 죽을 인생. 도박이나 해보자.’ 그는 이번 마도관에 있을 소교주 쟁탈전에 천여운을 지원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미 마음속으로 그를 지원하기로 결심하고 나니, 자연스럽게 주군처럼 생각하게 되고 행동에서 우러나오게 된 것이었다. “너 전이랑 태도가 다르다.” 이 같은 변화를 당연히 감지 못할 천여운이 아니었다. 의무실에서 그의 눈치만 보던 때와는 다르게 눈빛에서 받드는 것이 보였으니 말이다. “나한테 뭔가 바라는 거라도 있나?” 천여운의 말에 잠시 머뭇거리던 이십삼 번 생도가 결심했는지, 모두가 지켜보는 한가운데서 한쪽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저 이십삼 번 생도, 허봉은 공자님을 제 주군으로 모시겠습니다!” -웅성웅성! 뜻밖의 충성 맹세에 숙소 내에 있는 모든 생도들이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당사자인 천여운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른 소교주 후보자들이 지지하는 세력을 가진 것처럼, 천여운 역시도 자신만의 세력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때가 아니라고 여겼던 그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를 주군으로 모시겠다고?” “그때의 결례는 아직까지도 뼛속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부디 저를 공자님의 수하로 삼아 견마지로(犬馬之勞)로 모시게 해주십시오!” 진지하게 허락해달라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는 이십삼 번 생도 허봉을 바라보며 천여운이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것은 어릴 적부터 누군가를 쉽게 믿지 못하는 천여운 특유의 성격 때문이었다. ‘수하라......’ 교주가 내려주신 장 호위와 달리 처음으로 스스로가 수하가 되기를 원하는 허봉의 모습에서 천여운의 가슴 속에는 작은 불씨가 피어올랐다. 나노 머신을 얻게 되고, 우호법 섭맹을 스승으로 모시고 난 후부터 끊임없이 변화해가는 인생의 길에서 천여운은 자신도 모르게 점차 변해가고 있었다. ‘제발! 제발!’ 간절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허봉을 보고는 천여운이 피식하고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긍정의 의미라는 것을 알기에 허봉이 기쁜 나머지 넙죽 엎드려서는 바닥에 머리를 쿵쿵 박으며 외쳤다. “감사합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바로 그때였다. “하! 잠시 자리를 비웠더니 이젠 별 거지 같은 꼴을 다 보는 구나.”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복마종의 소교주 후보자 천무금이었다. 패배의 충격으로 숙소에서 자리를 비우고 바람을 쐬고 있던 그는 대연무장에서 야간 추가 훈련을 마친 팔십 번 생도 자현과 함께 돌아오는 길이었다. “벌레 같은 놈이 누구한테 충성 맹세를 하는 것이냐!” 야간 훈련으로 녹초가 된 자현이었지만 그 광경에 화가 났는지 무섭게 일그러진 얼굴로 이십삼 번 생도 허봉에게 소리쳤다. ‘헉!’ 비록 천여운에게 충성 맹세를 했지만 팔 조의 두려움이자 실세인 두 사람이 나타나니 심장이 격하게 뛰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몸을 파르르 떠는 것이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도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지 않고 끝까지 천여운을 바라보는 허봉의 굳은 결의가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천여운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자현을 노려보며 말했다. “누구 멋대로 남의 수하한테 벌레라고 하는 것이냐?” “뭣?” 천여운의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순간 자현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평소에 그가 알고 있던 천여운이었다면 곧바로 건방지다고 외치면서 달려들었겠지만, 이미 천무금의 입에서 방심하다가 패했다는 말을 들은 자현이었다. “벌레는 남의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는 네놈이겠지.” “뭐, 뭐야?” “뭘 그렇게 말을 더듬어. 왜 겁나기라도 하냐?” 천여운의 도발하는 말에 자현이 화가 났는지 눈이 치켜 올라갔다. 평소에 늘 우습게 여겨왔던 존재의 변화가 쉽게 와 닿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이 천한 놈이!” 분노한 자현이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더니, 빠르게 신형이 날리며 천여운을 향해 복마권공의 일 권을 날렸다.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천여운이 가볍게 상체만을 움직여 일 권을 피하더니 그의 뒷목을 향해 도를 휘두르듯이 손날로 내리쳤다. -퍽! “크헉!” 뒷목을 맞은 자현은 눈이 뒤집어지며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불행하게도 자현이 펼친 복마공권의 삼 초식인 타연격공(打聯擊攻)은 천무금의 아바타가 시뮬레이션 훈련을 통해 수도 없이 펼친 통에 너무도 익숙했다. “아바타에 비하면 별 것도 아니군.”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거리는 천여운을 이십삼 번 생도 허봉이 놀라움과 감격이 섞인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아아!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어!' 주군으로 모시기로 결심은 했지만 내심 불안한 마음도 없진 않았던 그였다. 그런데 눈앞에서 복마종의 혈손을 한 방에 쓰러뜨리는 압도적인 실력을 보고 나니 그런 불안한 마음이 씻은 듯이 날아갔다. “왜 다시 한 번 붙어볼 테냐?” 천여운이 숙소의 입구 쪽에서 화가 나서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는 천무금을 향해 도발하듯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시뮬레이션 훈련에서 천무금의 아바타가 도발했던 것이 앙금으로 남아있었던 그였다. 하지만 실제 천무금의 태도는 달랐다. “......흥, 지금 실컷 즐겨라. 고작 버러지 같은 수하 하나가 생겼다고 뭐라도 바뀔 것 같지?” 그 말과 함께 천무금은 천여운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숙소로 들어와 자신의 침상으로 가서 그대로 누워버렸다. '지, 지금 천무금이 피한 게 맞지?' '말도 안 돼!' 이 같은 천무금의 태도는 많은 생도들에게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그 오만하면서도 포악한 성격의 천무금이 먼저 도발하는 천여운과의 기 싸움에서 기세가 밀려서 싸움을 피했으니 말이다. 이 날을 계기로 팔 조의 숙소에 변화가 생겨났다. 처음에는 천무금의 눈치를 보느라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던 생도들이 조금씩 천여운에게 긍정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복마종이라는 위세 때문에 이십삼 번 생도 허봉처럼 대놓고 충성 맹세는 하지 못했지만, 그들의 머릿속에는 ‘어쩌면’이라는 새로운 단어가 각인되었다. 그렇게 이레라는 시간이 흐르고 대망의 이 단계 조별 시험을 치루는 날이 다가왔다. 대연무장에 모인 모든 생도들은 조별로 모여서 오열을 갖추고 있었고, 긴장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들의 손에는 진검과 철방패가 들려 있었다. 9장 이 단계 시험(3) 이 단계 시험은 조별 진형 대결이다. 지금까지 훈련으로 배웠던 총 열두 개의 진형을 이용하여 두 조가 대결을 펼쳐 상대 조를 제압하는 쪽이 승리하게 된다. 개개인의 실력보다 조원들의 협동과 진을 구축하는 합, 그리고 진형을 운영하는 조장의 올바른 판단능력이 중요했다. “가르칠 건 충분히 가르쳤다. 남은 건 너희들한테 달렸다. 알겠나?” “마도!!!” 각 교두들은 자신들이 맡은 조에 기합을 넣었다. 이레 전의 훈련 때까지만 하더라도 무공 교두들이 깃발을 통해 지시하여 수동적으로 생도들이 진을 구축하는 훈련을 진행했다. 하지만 이레 전부터는 조장이 능동적으로 직접 조원들을 진두지휘하여 진형을 변화시키고 구축해나가는 훈련이 진행되었다. 조를 편성하면서 조장을 뽑았던 이유는 바로 이것에 있었다. 임의로 열나흘 동안의 전술, 전법 교육 때의 성적을 바탕으로 무공 교두들이 조장을 선정할 수 있었으나, 암묵적으로 조 내부에서 뽑도록 한 것은 조원들을 전부 통솔할 수 있는 조장을 선출하게 하여 조를 지휘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 단계 시험에 앞서서 제비뽑기를 하도록 하겠다.” 단상 위에 서있는 마도관주를 맡고 있는 좌호법 이화명이 말했다. 시험을 앞둔 지금부터 중요한 것은 각 조별의 대결에서 조장들이 얼마큼 진을 자유롭게 지휘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사전에 설명한 대로 일 조에서 사 조, 그리고 오 조에서 팔 조, 구 조에서 십 이조 등 각 네 개의 조에서 제비뽑기로 승부를 겨룰 조를 선정한다.” 사흘 전 오후 훈련에 앞서서 이 단계 시험에 관한 방법을 설명했었다. 네 개의 조에서 제비뽑기로 대결을 펼칠 조를 선정하겠다는 내용도 미리 알려주었다. “먼저 일 조에서 사 조의 조장들은 나오도록.” 네 명의 조장들이 나와서 단상 위로 올라갔다. 그런데 그들이 단상으로 올라가는 순간 밑에서 지켜보는 생도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웅성웅성! “이 조와 삼 조 조장이 바뀌었잖아!” “역시 저쪽도 마찬가지였네.” 생도들이 웅성거리며 말하는 것처럼, 놀랍게도 이 조와 삼 조는 기존에 숙소 내의 암묵적인 대결로 정해졌던 원래의 조장이 아니었다. 일 조의 조장인 현마종의 천무연과 사 조의 조장인 칠십이 번 생도를 제외한 두 조는 원래의 조장이 아닌 다른 생도가 단상 위로 올라왔던 것이었다. “훗. 두 명인가.” 이에 관해서 이미 예측이라도 했다는 듯이 좌호법 이화명의 표정에는 특별히 놀라거나 하는 내색은 없었다. 어떤 연유에서 두 조장이 바뀌어 졌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제비뽑기는 정상적으로 진행되었다. 단상 벽에 걸려 진 대진표에 결정된 제비뽑기의 숫자가 기재되었다. [일 조 대 삼 조, 이 조 대 사 조] “와아아아아아!” 결정된 제비뽑기에 만족하는지 일 조와 사 조의 생도들에게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단상에서 내려오는 조장들의 명찰 번호를 외치며 한껏 사기를 올렸다. 일 조에서 사 조의 대진표가 결정되자 이화명이 소리쳤다. “오 조에서 팔 조의 각 조장들은 나오도록!” 이화명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각 조의 조장들이 생도들 사이에서 나와 단상 위로 올라갔다. 앞선 조장들이 나갈 때와 마찬가지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생도들에게서 들려왔다. 그것은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네 조의 조장들 역시도 두 사람이 바뀌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다른 조도 아니고 팔 조의 조장이 바뀌어 있었다. ‘호오?’ 앞 조 때와 다르게 이화명의 눈빛은 흥미롭다는 듯한 이채를 띠었다. 팔 조는 복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금이 조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앞에서 제비뽑기를 했던 현마종의 천무연과 마찬가지로 변화가 없으리라 여겼는데, 예상과 다르게 조장이 바뀌어 있었다. 그것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었다. ‘천여운!’ 팔 조의 조장은 다름 아닌 검은 명찰의 칠 번 생도인 천여운이었다. 가장 오른쪽에 서있는 오 조의 조장인 음마종의 소교주 후보자 천원려조차도 그의 등장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내가 경고를 했건만. 이 멍청이!’ 그녀는 속으로 복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금을 욕했다. 제비뽑기의 함에 손을 넣는 천여운의 표정이 묘했다. 천여운 역시도 자신이 조장으로 나오게 될 줄은 어제 밤까지만 하더라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은 어제 오후 훈련을 마칠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단계 시험을 앞두고 마지막 훈련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기에 저녁식사 후에도 늦게까지 대연무장에 남아서 훈련을 진행하는 조들이 많았다. 물론 모든 조가 남아서 훈련을 계속 하는 것은 아니었다. 무공 교두들이 없었기 때문에 각 조에서 은밀히 다른 조의 훈련을 살피면서 내일 있을 조별 시험에서의 전략을 염탐할 수도 있기에 훈련을 하지 않는 조들도 있었다. 팔 조 역시도 이 같은 생각을 하는 조였다. 유달리 남다른 성격의 소유자인 것과 별개로 조장으로써의 능력은 모자라지 않는 복마종의 천무금은 사전에 전략을 짠 후에 조원들을 해산시켰다. “천무금!” 조별 훈련이 끝나고 개별적으로 무공 훈련을 하기 위해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하는 천무금을 누군가가 불렀다. “뭐야? 너였냐?” 낭랑한 목소리로 그를 부른 사람은 음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원려였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물음에 귀찮다는 듯이 지나쳐 가려는 것을 천원려가 빠르게 다가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지금 뭐하는 거냐?” “너는 사람이 불렀으면 똑바로 답도 안하고 그냥 지나쳐 가는 거야?” 번외의 천여운과 달리 여섯 종파들끼리는 서로 간단한 왕래가 있었기 때문에 안면은 트고 지내는 사이였다. 교내의 장원이 복마종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음마종의 천원려는 지금은 서열 쟁탈전으로 인해 냉랭했지만, 어릴 적에는 몇 차례 왕래를 하면서 천무금과는 막역한 사이였었다. “뭐?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가로막은 거야?” “기껏 생각해서 불렀더니 그런 식으로 답하네.” 흘겨보는 천원려를 바라보며 천무금이 건성으로 답변했다. “복마종 녀석들은 멍청하다고 한 주제에.” 며칠 전, 천여운과 숙소 앞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천무금이었다. “하아.....너 정말 짜증난다. 알았어. 짧게 얘기할 테니깐 잘 들어.” 천무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얘기는 해둬야겠다고 생각한 천원려가 팔목의 소매를 걷어서 붕대를 감고 있는 것을 보여주었다. 천무금의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다친 거냐?” 천무금이 알기로는 같은 여섯 종파의 소교주 후보자들이 아니고는 그녀에게 상처를 낼만한 실력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도 없었다. “어제 다친 거야.” “어제?” “어젯밤에 혼자서 수련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에게 기습을 당했어.” “네가 기습을 당했다고? 하! 어떤 겁 없는 녀석이 그런 짓을 한 거냐?” 천원려가 여섯 종파의 소교주 후보자들 중에서는 무공이 낮다고는 하나, 그것은 여섯 명의 기준에서였지 다른 생도들에 비하면 그 무위가 현저히 높다. “그건 복면을 쓰고 있어서 알 수가 없었어.” “복면을 쓰던 아니던 간에 고작 그딴 녀석한테 방심해서 당한 거냐?” “......내 말 우습게 듣지 마. 난 절대로 그 복면을 쓴 녀석에게 방심한 적이 없어.” 수련 중에 습격을 받았기 때문에 그녀는 절대로 방심한 상태가 아니었다. 오히려 만전의 상태로 복면인과 겨루었는데, 그 자는 소교주 후보자들에 육박할 정도의 뛰어난 무공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네가 당했으니깐 나더러 조심하라는 거냐?” “날 노렸다면 너도 노릴 확률이 높다는 것 정도는 알 텐데. 우리는 같은 대결 편성에 들어 가있으니깐.” 그녀의 말에 천무금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틀 전에 네 조로 나누어서 제비뽑기를 해서 조를 편성한다고 했던 거 기억하지?” “그래.” “한꺼번에 제비뽑기를 해서 조를 나눠도 될 것을 왜 굳이 번거롭게 네 조씩 나누는 것 같아?"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냐?" "답답하네. 생각을 해봐. 네 조로 나눈다고 미리 공개하는 바람에 각 조들이 자신들과 붙게 될 조를 미리 짐작할 수 있게 되었잖아!" 그녀의 의미심장한 말에 잠시 고민하던 천무금이 말했다. “......네 말은 시험 전에 그 정보를 일부러 공개함으로써 각 조에서 상대 편의 조장들을 노리도록 유도했다고 하고 싶은 거냐?” “그래도 바보는 아니구나. 맞아. 네 말대로 조별 시험에 있어서 조장이 없게되면 자연스럽게 그 조는 진형을 운영하기 힘들게 돼." 천원려는 관주인 좌호법 이화명이 사전에 네 조씩 나누어서 제비뽑기를 한다는 정보를 공개한 것은 시험이 있기 전까지 각 조장을 노려서 이 단계 시험을 수월하게 통과할 수 있다는 방법을 고의적으로 유도한 것이라 짐작했다. 그리고 그 짐작은 지난 밤에 습격을 당하고 나서 확신으로 바뀌었다. “아무튼 내일이면 시험인데, 절대 방심하지 말고 혼자서 수련을 하는 그런 짓거리는 하지마. 쪽팔리게 소교주 후보자가 이 단계 시험도 통과하지 못하고 방출되었단 소리는 듣기 싫으니깐.” 굳이 말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옛 정을 생각해서 귀띔을 해주는 천원려였다. 천무금 역시도 그녀가 절대로 가볍게 얘기하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떠나고 나서 천무금은 조언대로 자신의 심복이라 할 수 있는 복마종의 혈손인 자현을 데리고 무공을 수련하기 위해 숙소 뒤에 있는 숲으로 향했다. 그날 밤 어두운 해시(亥時)초 무렵, 평소처럼 숲속 깊은 곳에서 증강현실을 개안해서 시뮬레이션으로 대련 훈련을 마친 천여운이 숙소로 향하는 중이었다. ‘하아. 아직 멀었군.’ 속으로 툴툴 거리는 것과 달리 불과 이레 전만 하더라도 대련에서 고작 한 번밖에 이기지 못했던 그였다. 하지만 지금은 육 할 이상의 승률을 자랑할 만큼 짧은 기간 내에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다. 이레 안에 가볍게 이긴다는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천무금의 아바타를 상대로 백 회가 넘는 대련을 하면서 전보다 초식을 다루는 것에 훨씬 능숙해진 천여운이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숲을 내려가던 차였다. 천여운의 귓가에 누군가 싸우는 소리로 추측되는 것이 들려왔다. -파팍! 팍팍! “크헉!” 짧은 비명 소리에 천여운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경공을 펼쳤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가보니 숲 한복판에 한 명의 인영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한 명은 비틀거리면서 누군가와 싸우고 있었다. 평소보다 구름이 낀 숲속은 어두웠기에 그들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나노, 야간투시경 모드.’ [사용자의 눈에 야간투시경(夜間透視鏡) 모드를 개안합니다.] 나노 머신인 나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지며 천여운의 동공이 흔들리더니, 이내 어두웠던 그의 시야에 빛이 증폭되면서 어두웠던 눈앞의 광경이 선명하게 보였다. 며칠 동안 나노 머신의 여러 기능을 탐색해서 쓸 수 있게 된 천여운이었다. ‘천무금?’ 다리를 다쳤는지 비틀대면서 싸우고 있는 것은 바로 천무금이었다. 천무금과 싸우고 있는 자는 검은 복면을 쓰고 있었는데, 그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았다. 마치 어둠 속에 익숙한 것처럼 날카로운 검을 휘두르며 천무금을 압박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오른쪽 다리를 다쳐서 불편한 천무금이었지만 소교주 후보자답게 상대의 맹공에도 잘 버텨내고 있었다. 하지만 승부가 그리 오래갈 것 같진 않았다. 예상대로 다리에 힘이 풀린 천무금이 보법을 펼치다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크흣!” 천무금이 넘어지자 복면인이 검으로 그의 멀쩡한 다리마저 찌르려했다. 바로 그 순간 천여운이 소리쳤다. “멈춰!” 천무금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조별 시험을 앞둔 하루 전에 조장을 잃을 수 없기에 천여운은 빠른 신형으로 거리를 좁혔다. 갑작스러운 외침에 놀란 복면인이 찌르려던 검을 천여운에게로 휘둘렀다. 그러나 야간투시경 모드로 시야가 밝은 천여운이 몸을 숙여 검을 피한 뒤에 맨손으로 접무도법의 도초를 펼쳐 복면인의 옆구리를 쳤다. -팍! 왼쪽 옆구리에 도초가 적중하는 순간 복면인은 빠르게 보법을 펼치며 거리를 벌렸다. 천여운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닿는 찰나에 거리를 벌리다니?’ 무공 실력이 예측하기 힘들만큼 뛰어난 자였다. 거리를 벌린 복면인은 복면의 틈으로 보이는 눈매를 가늘게 뜨며 천여운을 노려보더니, 이내 몸을 돌리고는 빠르게 경공을 펼쳐서 도망가 버렸다. 그를 쫓아갈까 잠시 고민했던 천여운은 그것을 포기했다. 바닥에 넘어져 있는 천무금과 머리에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는 팔 조의 복장을 입고 있는 생도 때문이었다. “어이, 괜찮냐?” “천한 놈? 젠장!.....그딴 복면을 쓴 놈한테 당하다니!” '버리고 갈까?' 부상을 당했어도 입은 살아있는 천무금이었다. 자존심을 부리는 천무금을 부축하고 쓰러진 생도를 업고서 천여운은 급히 숙소로 돌아왔다. -웅성웅성! 조별 시험을 앞둔 하루 전에 부상을 입고 나타난 조장과 생도의 모습에 숙소에 있던 생도들의 분위기가 심각해졌다. 머리를 다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생도는 천무금의 심복인 자현이었다. 흐르고 있는 피를 닦아내며 천여운이 나노에게 물었다. ‘괜찮을까?’ [부상자의 상처를 스캔합니다.] 의원인 백종명이 퇴근했기 때문에 상처를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오직 나노뿐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나노는 천여운의 몸은 자가 치료를 할 수 있지만 타인의 몸으로 옮겨 다니며 치료를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검상으로 추정되는 외상발견. 두피로 길이 4cm, 깊이 2mm의 자상(刺傷)입니다. 지혈 후에 소독을 하고 손상된 상처부위를 꿰매면 됩니다.] 다행히 심각한 부상을 입었을 지도 모른다고 우려한 것과 다르게 베인 상처 부위의 깊이가 얇아서 괜찮았다. 문제는 자현이 아닌 천무금에게 있었다. “하아...하아...빌어먹을!” 거친 숨을 내뱉고 있는 천무금은 오른쪽 허벅지를 손으로 붙잡고 있었는데, 자현의 상태만 살피느라 미처 몰랐는데 많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을 보니, 제대로 걸을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 “빨리 당직 교두님을 불러와!” “네, 넵!” 천여운의 명에 그의 첫 번째 수하가 된 이십삼 번 생도 허봉이 다급히 숙소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이윽고 야간 당직을 서고 있던 무공 교두가 달려와서 허벅지를 지혈하고 급한대로 응급처지를 했지만, 천무금의 상처를 보며 꽤 심각하게 말했다. “.....이 녀석, 당분간 제대로 걷지 못하겠는걸.” 숙소 내에 있는 생도들의 안색이 일순간에 어두워졌다. 미리 경고해주었던 음마종의 소교주 후보 천원려의 우려가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10장 눈에는 눈, 이에는 이(1) “하아....하아, 제기랄!” -타탁!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연신 분해하는 천무금의 몸에 당직 교두가 수혈(睡穴)을 짚었다. 그리고는 ‘의무실로 데려가야 겠군.’ 하고는 그를 어깨에 들쳐 메고는 곧장 숙소 밖으로 나가버렸다. “잠깐 만요!” 천여운이 나가는 그를 불렀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나가버렸다. 팔십번 생도인 자현도 부상을 입었는데, 당장에 급했던 천무금만을 살피느라 미처 그를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가버렸다. 이에 천여운은 수하인 이십삼 번 생도 허봉에게 시킬까 하다가 왠지 의아한 마음이 들어, 쓰러져 있는 자현을 업고서 숙소 밖으로 따라 나갔다. “어디 갔지?” 발걸음이 빠른 당직 교두는 이미 숙소 건물인 일관을 빠져나가 본관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천여운이 경공을 펼쳐서 그를 따라잡았다. 당직 교두의 옆으로 따라붙자 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천여운이 말했다. “교두님. 사 번 생도만큼은 아니지만 팔십 번 생도도 머리를 다쳤습니다.” “알고 있다.” “네?” “누구 한 명은 그 녀석을 업든지 들든지 해서 따라올 거라고 생각했으니깐.” 당직 교두의 말 대로라고 하면 일부러 내버려두고 갔다는 말이 아닌가. 그의 말을 잠시 곱씹어본 천여운이 물었다. “일부러 따라오게 내버려두신 겁니까?” “미련하지는 않구나.” 긍정에 가까운 말이었다.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이유? 별 것 없다. 너희 조는 조장이 당한 것 정도로 유독 시험에 망한 것 같은 얼굴들을 하고 있더구나. 뭐, 이 녀석은 좀 의외이긴 하다만.” 들어만 보면 단순히 걱정해서 불렀다는 투도 같으나 뭔가 이상했다. "그 얘기만 해주고 싶었을 뿐이다. 녀석을 넘겨라." 천여운에게서 기절한 자현을 넘겨받은 당직 교두가 반대쪽 어깨에 그를 들쳐 메고는 돌아가라고 말했다. “야간에는 생도가 숙소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지?” “.....알겠습니다.” 대답을 하고서 몸을 돌리려는 천여운의 귓가로 당직 교두의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때울 줄 알아야지.” 그 말을 하고서는 양 어깨에 두 생도를 메고는 본관으로 가버렸다. 마지막까지도 당직 교두가 하는 말이 의도적이라는 생각에 숙소로 돌아가는 천여운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계속해서 당직 교두가 했던 말을 곱씹으면서 숙소의 입구로 들어가려던 천여운이 머리에 망치를 두드려 맞은 것처럼 뭔가를 깨달았다. ‘너희 조는 조장이 당한 것 정도로 유독이라고 얘기한 건, 이게 단순히 우리 조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천여운은 그가 했던 말의 진정한 의도를 알아챘다. 사전에 음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원려에게 이 단계 시험에 숨겨진 의도에 관해서 상세하게 들은 천무금과 다르게 아무런 정보도 없었던 천여운이었다. 하지만 영민한 천여운은 다른 조에서도 이 같은 일이 벌어졌다는 정보만으로 숨겨둔 의도를 역으로 짐작하기까지 이르렀다. ‘이 단계 시험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인 조장을 노렸다는 건, 내일 있을 시험에 조장이 부재하게 만들어서 쉽게 상대 조를 이기기 위함이다. 각 조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모두가 이 사실을 깨달은 거다.’ 추측이 거기에까지 미치자 천여운은 자연스럽게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관해서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미리 네 조씩 제비뽑기로 대전 조를 정한다는 것이 이런 의도였나.’ 결국 사전에 이 단계 시험을 주관하는 관주가 이 같은 상황을 의도적으로 만든 것이었다. 공정한 대결이 아닌 뒤에서 음모와 계략을 펼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말이다. ‘어쩐지 너무 단순한 시험 방식이라고 생각했더니.’ 정파 무림맹에서 운영하는 기관인 정무관도 아니고, 약육강식과 계략이 난무해야 할 마도관의 시험에서 협동이니 뭐니 단순한 방식을 취하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는데, 결국 숨겨진 의도들이 있었던 것이었다. 이 같은 사실을 깨달은 천여운의 눈에 묘한 독기가 서렸다. ‘마도인답게 하라 이거지? 잘됐군. 그렇다면 나도 애써 규칙에 얽매일 필요 따윈 없겠어.’ 뭔가 꿍꿍이속이 생겨난 천여운이 아무렇지 않게 숙소로 들어갔다. 당직 교두가 표현한 대로 팔 조의 숙소 내의 분위기는 조장인 천무금이 당한 것으로 인해 어둡기 짝이 없었다. 천여운이 그런 생도들을 향해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조장이 당했다고 언제까지 궁상맞게 우울해하고 있을 셈이냐?” “누, 누가 궁상맞다는 거야?” 천무금을 따르는 생도 중의 한 명이 천여운의 말에 당황해하며 반박했다. 그러자 천여운이 숙소에 있는 전 생도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조장이 없으면 새로운 조장을 뽑아서 내일 있을 시험에 다시 전략을 짜도 모자랄 판국에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손 놓고 있는 게 궁상맞지 않다는 거냐?” 천여운의 날카로운 일침에 처음과 달리 생도들은 아무런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말에 어떠한 틀린 점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조장이 없다는 것만으로 시험에 가망성이 없다고 손 놓고 있던 자신들이 정말 한심하게 느껴졌다. 한 생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누가 조장을 대신한단 말이야?” 전술과 전법, 진형에 관해서는 모두가 숙지하고 있었지만, 통솔 훈련을 받고 진두지휘를 해 본 사람은 오직 조장들뿐이었다. 조장의 자리를 맡게 된다면 모든 조원들을 이끌고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는 중압감을 가지게 된다. 스물한 명의 조인 팔 조에서 상위 종파라고는 조장인 천무금과 그의 심복인 자현 외에는 나머지 열여덟 명의 생도들은 중소 종파였다. 이들 중에서는 그런 중압감을 이겨내고 조장으로 나설 만한 배짱과 통솔력을 가진 사람이 없다는 말이었다. 그때 가만히 지켜만 보던 이십삼 번 생도 허봉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조장을 대신 할 사람이 왜 없다고 생각하지? 나의 주군이신 천여운 공자님도 계시지 않나?” 허봉의 말에 생도들의 표정이 묘해졌다. 사실 생도들은 처음에는 천무금을 대신해서 통솔력을 발휘할 사람이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모두의 앞에 나서서 생도들을 주도하는 천여운의 모습에 문득 그가 조장인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들이 들었던 것이었다. 잠시 정적이 흐르든 상황에 한 생도가 손을 들어서 말했다. “삼십팔 번 생도 이찬은 그 의견에 찬성합니다.” “나, 나도 찬성합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한두 생도가 손을 들며 찬성을 외치자, 군중심리처럼 어느 순간 대다수의 생도들이 천여운이 조장이 되는 것을 찬성하게 되었다. 그런 분위기에 휩쓸려 천무금을 따르는 여섯 명의 생도들도 마지못해 동의하게 되자 이를 잠자코 지켜보던 천여운이 말했다. “내가 조장이 되는데 모두 동의하는 건가?” 모든 생도들이 동의한다고 말을 하자, 천여운이 입을 열어 진형 훈련을 받을 당시에 자신이 생각해둔 바를 조원들에게 전달했다. 천여운의 말이 계속될수록 침울해하던 생도들의 눈빛에 하나둘씩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렇게 팔 조 생도들은 새로운 조장을 맡게 된 천여운을 중심으로 늦은 밤까지 새롭게 전략을 짜느라 수면 시간이 늦어지게 되었다. * * * 모두가 잠이든 새벽 인시(寅時) 무렵. 누군가 팔 조의 숙소에서 몰래 나와 어두운 일층 복도를 기척을 죽이고 조심스럽게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복도를 조심스럽게 걷고 있는 자는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감고 있었다. ‘나노, 야간투시경 모드.’ [사용자의 눈에 야간투시경(夜間透視鏡) 모드를 개안합니다.]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 자는 바로 천여운이었다. 나노 머신의 야간투시경 모드를 개안한 천여운의 눈에는 등불이 꺼져서 어두운 복도가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모두가 잠이 든 시간에 천여운이 이렇게 몰래 복도를 돌아다니는 이유가 무엇일까? ‘후우.’ 기척을 죽이며 걷던 천여운의 발걸음이 한 숙소의 입구에서 멈춰졌다. 그 호실은 칠 조의 숙소였다. 숙소의 문 위쪽에는 네모난 틈이 있어서 그 안을 살펴볼 수가 있는데, 천여운이 그곳을 통해 숙소 내부를 바라보며 익숙하게 물었다. ‘이번에도 자고 있지 않은 사람이 있어?’ [숙소의 호실 내부를 탐색 스캔합니다.] 천여운의 동공에서 흰 빛의 작은 선이 생겨나며 숙소 내부를 바라보는 시야의 왼쪽에서 우측으로 스치고 지나갔다. [숙소의 호실 내부에 있는 스무 명이 전부 깊은 수면 상태입니다.] 나노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리자, 천여운은 기다렸다는 듯이 조심스럽게 숙소 호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기척을 죽이고 들어갔다. ‘이제 겨우 다 잠들었군.’ 천여운은 지금뿐만이 아니라 새벽 내내 잠을 자지 않고 주기적으로 나와서 다른 조의 생도들이 자고 있는지 아닌지를 확인했었다. 깜깜한 숙소 내부였지만 야간투시경을 개안한 천여운의 눈에는 잠이 든 모든 생도들이 뚜렷하게 보였다. ‘나노, 이 중에 혹시 천무금을 습격한 녀석이 있어?’ 천여운은 평소에 자신이 눈으로 보았던 모든 것이 나노 머신의 프로그램 저장 기관에 내장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질문을 던졌다. [스캔을 통해 복면인의 신체 정보를 스무 명과 대조했지만 일치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칠 조의 숙소에는 천무금을 습격했던 복면을 쓴 자와 신체 정보가 일체하는 생도가 없었다. 하지만 이것을 확인했는데도 천여운은 칠 조의 호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래? 뭐 상관없어.’ 천여운은 조심스럽게 숙소 내부를 걸으며 과감하게도 침상에 누워있는 모든 생도들의 훈혈(暈穴)을 점하기 시작했다. 한 명씩 점혈을 완료하고는 마지막으로 호실의 가장 끝에 있는 우측 침상에 누워있는 칠 조 조장을 향해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침상 앞까지 도착한 순간, 잠을 자고 있던 칠 조 조장이 눈을 번쩍 떴다. ‘헉!’ 다른 생도들과 다르게 깊이 잠들지 않았고 조장답게 무공이 낮지 않았던 칠 조의 조장, 고경은 자신의 근처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깨고만 것이었다. “너!?” -타타탁! “끄르르르.” 그러나 미처 대응하기도 전에 빠르게 훈혈이 점해져서 기절하고 말았다. 천여운도 그가 깨어날 줄은 몰랐기에 굉장히 놀랐었지만 재빨리 훈혈을 점한 덕분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나중에 깬다고 해도 어두운 데다가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상관없었다. ‘휴.’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쉰 천여운이 자신의 품속에서 준비해둔 장침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의무실에 입원했을 적에 의원 백종명이 침이 미세하게 휘어져서 마음에 안 든다며 버린 것을 몰래 챙겨뒀던 것이었다. ‘네 녀석이 한 건 아니지만 원망하지 마라.’ -푸푸푸푸푹! 천여운은 훈혈이 점해져서 기절해있는 칠 조 조장인 고경의 허벅지와 종아리, 발목의 근맥과 혈 자리에 수차례 침을 꽂아 넣었다. 훈혈이 점해져서 지금 당장에는 모르겠지만 깨어났을 때 고경은 한동안 걸어 다닐 수 없을 것이다. ‘칠 조는 끝나고 다음 호실로 가볼까?’ 놀랍게도 천여운의 목표는 한 호실만이 아니었다. 별다른 애정도 없는 천무금의 복수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조에 위해를 가했던 그놈을 찾아서 똑같이 갚아주는 것이 목적이었다. 물론 부가적으로 자신이 깨닫게 된 이 단계 시험의 숨겨진 의도를 실행하는 것이기도 했다. 천여운은 맞은편에 있는 육 조의 호실에 먼저 갈까 고민하다, 옆에 있는 오 조의 호실로 향했다. ‘아! 여긴....’ 남자들만 있는 칠 조, 팔 조와 달리 오 조에는 여자 생도들이 두 명 있었는데, 한 사람이 조장인 음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원려였다. 오 조의 호실을 스캔하려고 했던 천여운은 그녀가 바로 위층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헛수고를 했다고 여겼다. 그와 동시에 천여운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렇다면.....범인은 육 조에 있단 말이군.’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금을 상대로 부상 입힐 정도의 무위를 지니려면 적어도 상위 종파에 해당하는 조장급의 실력이여야만 가능했다. 육 조의 조장이 천무금을 습격한 복면인일 지도 모른다고 확신한 천여운은 조심스럽게 맞은편에 있는 육 조의 호실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앞서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나노가 육 조의 호실 내부를 스캔했다. [숙소의 호실에 있는 열여섯 명이 전부 깊은 수면 상태입니다.] ‘열여섯 명?’ 천여운이 의아했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육 조는 총원 스무 명에 여자 생도가 세 명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열여섯 명뿐이라면 한 명의 인원이 빈다는 말이었다. 숙소의 문을 열고 들어간 천여운은 주위에 있는 자고 있는 생도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육 조의 조장이 보이지가 않았다. ‘뭐지?’ 이상하게 생각한 천여운이 일단은 호실에 있는 생도들을 스캔하게 했지만, 누구 하나도 복면인과 동일한 신체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유력한 후보자인 육 조의 조장이 보이지 않는 것이 수상했다. 복도나 일 층 건물 내에 있었다면 새벽 내내 돌아다녔기에 이미 발견했을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천여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다른 생도들을 쳐다보았다. ‘......꼭 조장만 노리라는 법도 없잖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니깐.’ 그렇게 생각한 천여운이 검은 천에 가려진 입 꼬리를 올리며, 아까와 마찬가지로 빠른 손놀림으로 육 조의 호실 내에 있는 모든 생도들의 훈혈을 점해갔다. 이것이 지금까지 천여운이 이 단계 시험 전에 있는 제비뽑기를 위한 조장으로 등장하게 된 사연이었다. 그렇게 조장으로 천여운이 나타나자 좌호법 이화명은 내심 놀라워했다. 칠 조 조장이 바뀐 것이야 그렇다치고, 팔 조인 천여운이 조장이 되었다는 것은 복마종의 소교주 후보인 천무금을 이들 중에 누군가가 부상을 입혔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시험을 제대로 이해했군. 크큭, 역시 이번 기수의 마도관은 실망스럽지가 않아.' 내심 흡족해하던 것도 잠시였다. 계속 조 편성을 진행해야 하기에 좌호법 이화명이 앞에 서 있는 조장들에게 물었다. “자! 전부 뽑았나?” 그 말에 천여운을 비롯한 조장들이 동시에 외쳤다. “마도!!!” “후후후, 시험을 위해서 정정당당하게 많은 준비를 했을 테니, 꼭 좋은 승부를 하길 바라네.” '정정당당?' 이화명의 모순적인 말에 조장들 모두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단상을 내려오면서 제비뽑기를 한 종이를 대진표를 작성하는 무공 교두에게 넘기는데, 유독 날이 서있는 눈빛으로 다른 조장들을 의심스럽게 노려보는 이가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에 앞머리를 뒤로 빳빳하게 넘기고 있는 육 조의 조장인 백팔 번 생도, 하일명이라는 녀석이었다. 그런데 그 눈빛이 이상할 정도로 낯익었다. 천여운이 무공 교두에게 가장 먼저 제비뽑기 종이를 넘기고 육 조로 돌아가는 그를 바라보며 나노에게 명했다. ‘나노, 저 녀석. 스캔해봐.’ 육 조의 앞으로 걸어가 선두에 자리한 하일명의 뒤로 절반이나 되는 생도들이 서있는 것조차 힘들었는지 창백한 얼굴로 다리를 절뚝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 단계 시험을 치루기도 전에 조원들의 상태가 좋지 않으니 화가 나서 신경이 곤두서는 것은 당연했다. 목적을 달성했다는 생각에 천여운이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흡족해했다. 그때 천여운의 머릿속에 나노의 목소리가 울렸다. [신체 정보 스캔 결과, 복면인과 대조하여 신장부터 골격까지 백퍼센트 일치합니다.] 10장 눈에는 눈, 이에는 이(2) 어제 새벽 천여운이 육 조의 절반이나 되는 생도들의 다리 혈을 장침으로 찔러서 부상을 입히는 동안 끝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육 조의 조장이었다. ‘찾았다. 범인.’ 천여운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반면 육 조의 조장인 백팔 번 생도 하일명은 최악으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놀랍게도 하일명은 모든 조의 조장들 중에서 유일하게 여섯 종파에도 그리고 상위 종파에도 속하지 않는 자였다. 그는 사흘 전 네 조씩 나누어서 조별 대전을 하게 된다는 정보를 듣자마자, 쉽게 시험을 통과해낼 수 있는 방법을 떠올리게 되었다 ‘조장만 없앤다면 진형을 운영할 수 없겠지.’ 진형 훈련은 어차피 모든 조가 스물하루 동안 받아왔기 때문에 큰 차이는 없다. 일반 사람들도 아니고 전부 무도 종파에서 무가의 소년들이니 어설프게 실수를 할 리도 없었다. 결국 관건은 조장의 유무라 판단한 하일명은 밤마다 몰래 기습을 자행했다. 보통 교내의 생도들은 여섯 종파의 위세와 교주의 핏줄임을 두려워했기에 쉽게 그들을 노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킥, 어차피 소교주 후보든 뭐든 이겨야 할 것 아니야.' 하일명은 과감하게도 두 명의 소교주 후보자를 노렸다. 첫 번째 후보자인 천원려와 몇 초식 겨뤄본 하일명은 그녀를 충분히 부상 입힐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유일한 오판이 하나 있었다. 음마종의 무공을 연마한 천원려가 음파공을 펼치면서 퍼져나가는 소리로 인해 주변에서 인기척들이 다가오는 것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첫 실패를 맛본 후에 두 번째로 노린 것이 바로 복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금이었다. 천원려를 노렸을 때보다 더욱 만반의 준비를 한 하일명은 숙소 뒤편 숲에서 심복인 자현과 함께 훈련 중이던 천무금을 습격했고 드디어 부상을 입히는데 성공시켰다. 확실한 마무리를 하려고 했지만 도중에 누군가가 나타나는 바람에 철수해야만 했다. 그래도 한쪽 다리를 못 쓰게 했으니 성과가 크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한 조의 조장도 노리려고 했던 하일명은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것은 아직도 욱씬 거리는 오른쪽 옆구리의 통증 때문이었다. ‘제대로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분명 마지막에 나타난 그 생도의 도초를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완전히 피하지 못했는지 도초에 실린 공력이 파고들어서 갈비뼈에 금이 가고 말았다. 뼈에 금이 간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몸속으로 파고든 공력을 빼내야 했기에 그는 새벽에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 한 시진 가량 운기조식을 해야만 했다. 그 한 시진 사이에 공교롭게도 일이 터지고 말았다. ‘어떤 개자식이 이딴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벌인 거야!’ 소교주 후보를 노릴 만큼 배짱을 가진 그였지만 설마 자고 있는 숙소를 노릴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범인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과감하다 못해 미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라면 일찍 깨어나던 생도들이 계속해서 잠이 들어 있어서 이상하다고 여겨서 살펴보았더니 훈혈이 점해져 있었다. 그것도 모든 생도들의 훈혈이 점해져 있었다. 그때만큼은 하일명조차도 온몸에 닭살이 돋을 만큼 소름끼쳤다. 거의 풀려가고 있던 훈혈을 해지했더니 호실에 있던 생도들의 반이 허벅지, 종아리, 발목의 혈을 찔렸다. ‘어째서 다리만? 아!’ 다리만 노렸다는 사실을 깨닫자 하일명은 이것이 복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없는 틈을 노려서 이딴 미친 짓을 하다니.....’ 조장의 부재를 틈타서 생도들을 노릴 만큼 과감한 것도 모자라서 철두철미한 자라 추측했다. 가장 유력한 범인은 당연히 팔 조일 확률이 높았다. 그런데 팔 조의 새로운 조장으로 단상 위로 올라오는 천여운을 보자 의아해했다. ‘이 녀석은....’ 사실 그는 어젯밤 천여운과 일 초식을 겨뤘으나,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란 상태였고 한밤 중의 숲이었기에 워낙 어두워서 그 얼굴의 생김새까지는 정확하게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 불운의 칠 공자인가? 이 녀석일 리는 없는데.’ 불과 스물하루 전만 하더라도 내공이 없어서 의무실로 실려 갔던 녀석이 무슨 수로 이런 대담한 짓을 벌인단 말인가. 그렇다면 팔 조 내에 자신과 같이 알려지지 않은 고수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자신의 분노를 풀기 위한 하일명의 목표는 분명했다. ‘반드시 범인을 잡아내서 놈의 다리를 병신으로 만들고 말 테다!’ 단상 앞의 대진표에 무공교두가 두 번째 제비뽑기 결과를 적었다. [오 조 대 팔 조, 육 조 대 칠 조] 결과가 공개되자 칠 조의 생도들의 여기저기서 안도의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장이 새벽에 다녀간 손님 덕분에 교체되는 바람에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음마종의 소교주 후보인 천원려가 있는 오 조만큼은 절대적으로 피하고 싶었다. “그나마 다행이다.” “육 조 녀석들 상태가 우리보다도 좋지 않잖아.” “잘 하면 올라갈 수도 있겠어!” 그런 반응들이 바로 옆에 있는 육 조의 생도들과 그 조장인 하일명의 심기를 건드렸다. 비록 조원들의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복수심에 팔 조와 대진이 되길 바랬는데, 원하는 대로 되지도 않고 옆에서 심기를 건드리니 짜증이 났다. ‘오늘 꼭 피를 봐야 속이 풀리겠는데.’ 하일명의 날카로운 눈매에 살기가 감돌았다. 한편 천여운이 있는 팔 조의 생도들 역시도 이 같은 대진 운에 절망스러운 얼굴이 된 생도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조장도 바뀌지 않고 전력상에 손실이 전혀 없는 조와 붙여졌으니 말이다. ‘칫, 밤에 고생한 보람이 없군.’ 천여운도 아쉬운지 입맛을 다셨다. 이 정도면 운이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제비뽑기 결과였다. 도박에는 절대로 손을 대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천여운은 왼쪽의 두 조를 거슬러 선두에 있는 천원려를 바라보았다. ‘음마종.’ 소교주 서열 후보 여섯 번째에 해당하는 음마종의 천원려였다. 복마종인 천무금이야 같은 조라서 어쩔 수 없었지만 이 단계 시험부터 벌써 그녀와 맞부딪치는 상황이 벌어졌으니 어떤 식으로든 이겨야했다. 문제는 그녀가 다른 여섯 후보자들보다 무공이 낮기는 하나, 그 명석함이 뛰어나 어릴 적부터도 군사로서의 자질을 드러냈던 인재라는 점이었다. ‘상관없다. 어차피 이겨내야 할 적이라면 강하든 약하든 부순다!’ 천여운이 그렇게 속으로 결의를 다졌다. 스무 조의 모든 대진표가 결정이 되고 드디어 이 단계 시험이 시작되었다. 마도관주 좌호법 이화명의 내공이 실린 목소리가 대연무장 전체로 울려 퍼졌다. “첫 번째 대진의 조는 대연무장의 가운데로 나오도록!” “마도!!!” 대진표의 첫 번째 조별 대결에 기재된 일 조와 삼 조의 생도들이 오열을 맞춰서 대연무장의 가운데에서 거리를 벌린 채 대치했다. 모든 생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 단계 시험의 결과가 이 자리에서 바로 결정 난다. 긴장한 삼 조의 조장과 그 생도들과 달리 일 조는 분위기가 달랐다. 조장인 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 천무연을 필두로 그 뒤에 서있는 생도들의 눈빛은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천무연.’ 천여운도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이름이다. 현재 소교주 후보 서열 일 위인 천무연은 가장 소교주의 위치에 가까운 남자라고 불리는 자였다. 여섯 종파들 가운데서도 가장 위세가 강한 현마종이라는 것을 떠나서, 아직 열여덟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높은 무공 실력을 비롯해 지략, 인품 어떤 것 하나 빠지지 않는 인물이라 알려진 자였다. 두 조에서 진검과 방패를 들고 준비가 끝나자 좌호법 이화명이 외쳤다. “상대 조를 제압하는 쪽이 승리한다. 시작하라!” “마도!!!”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두 조에서 힘차게 외치며 대결이 시작되었다. 공교롭게도 두 조가 외치자마자 동시에 앞으로 돌격했다. 조장의 부재로 새롭게 조장이 된 삼 조의 조장은 전략을 운영하는데 미숙했기에 빠르게 승부를 보는 것만이 답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뭐지?’ 첫 진형 대결인데 두 조 모두 아무런 진형변화가 없이 이열로 방패를 앞으로 해서 진격했다. 이대로 부딪친다면 힘겨루기 식으로 서로 밀어내는 것 외에는 구도가 되어버린다. 조장이 부재해서 진법 운영이 미숙한 삼 조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일 조의 조장인 천무연의 전략치고는 너무 단순했다. “와아아아아아!” 서로 부딪치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바로 직전이었다. 진격하는 열의 한 가운데서 천무연이 외쳤다. “우측부터 삼(三)!” 외침과 함께 돌격하던 우측 열이 속도를 올리더니 진형의 형태가 바뀌었다. 단상 위에서 지켜보는 좌호법 이화명이 작게 중얼거렸다. “호오. 여기서 사선진(斜線陣)을?” 일 조의 진형은 비스듬한 사선으로 돌격하는 형태인 사선진이었다. 바로 앞에서 진형이 바뀌자 이에 대응할 틈새도 없이 두 조의 철 방패가 부딪치고 말았다. -깡! 서로 견고한 형태로 붙어있던 삼 조의 우측 끝을 차례로 일 조의 돌격에 순차적으로 부딪쳐갔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삼 조의 방향에서 왼쪽 두 열에 있던 생도들이 옆으로 밀려나가며, 파도처럼 옆에 있는 생도들과 부딪치더니 이내 맨 우측에 있던 마지막 열이 넘어지는 사태가 일어났다. “밀지마! 밀지 말라구!” “으아아악!” -우르르르! 사선으로 우측에서부터 돌격이 부딪치자 그 힘이 비스듬하게 전파된 것이었다. 단순한 전법처럼 보이나 상대가 단순한 진형으로 열을 갖춰서 돌격해올 때 가장 효과적인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진형이었다. “일어나! 일어나야 해!” 새롭게 바뀐 삼 조 조장이 조원들에게 외쳤다. 내공을 써가면서 넘어지지 않으려고 했지만 상대 편 역시도 사선진의 끝에서부터 철방패에 내공을 실은 것이었기에 일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 일 조 조장인 천무연이 넘어져 있는 삼조 조장의 우측 어깨를 진검으로 찔렀다. -푹! “크헉!” 고통스러워하는 그를 향해 천무연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네 패배다. 항복해라.” “끄으으으윽.” 그 눈빛을 보니 항복하지 않으면 이번에는 어깨가 아니라 머리를 찌를 기세였다. 위협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제대로 된 진형 대결조차도 해보지 못한 채, 패한 것이 너무 분했지만 이미 반전시킬 수 있는 여지가 없었다. “......졌습니다.” 삼 조의 항복 선언과 함께 일 조에서 승리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아아!!!” 겉보기에는 싱거운 대결 같이 보였지만 절대로 상대가 약해서 벌어진 운이 아니었다. 조장인 천무연이 뛰어난 전략과 진형에 대한 이해가 높지 않으면 절대로 이룰 수 없는 결과였다. 좌호법 이화명이 일어나서 외쳤다. “일 조의 승리를 축하한다. 조장인 일 번 생도를 포함한 일 조의 생도들은 이 단계 시험에 합격했음을 공표한다.” 이로써 일 조의 생도 스무 명이 이 단계 시험에서 합격했다. -웅성웅성 모든 생도들이 한껏 부러워하는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때 천여운은 묘한 눈빛으로 뭔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첫 이 단계 통과자들로 인한 분위기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두 번째 대진표에 기재되어 있는 이 조와 사 조가 호명을 받고 대연무장으로 나왔다. “상대 조를 제압하는 쪽이 승리한다. 시작하라!” “마도!!!” 이 조와 사 조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앞선 조의 대결을 지켜봤었기 때문에 두 조는 서로를 경계하느라 무조건적인 돌격을 삼갔다. 덕분에 격렬한 진형 대결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섯 차례 정도 양쪽의 진형 변화를 통해 결과가 정해졌다. 결과는 예상과 일치했다. “사 조의 승리를 축하한다. 조원 모두 이 단계 시험을 합격했음을 공표한다.” 조장이 바뀌게 된 이 조는 최대한 분전했으나 결국 패하고 말았다. 사전에 습격에 대비하지 못한 것을 후회해도 어쩔 수 없었다. ‘역시 예상대로다. 저 두 조도 똑같다.’ 모두가 승패에만 집중하는 한가운데에 천여운은 자신이 발견한 정보가 확실하다는 것에 내심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패자들은 우울하고 분해하는 얼굴로 대연무장의 바깥으로 나와야 했고, 승자는 환호성을 지르며 나왔다. 대연무장의 가운데가 비어지면서 준비가 끝나자 좌호법 이화명이 외쳤다. “다음 대진의 조는 대연무장으로 나오도록!” 다음 조는 오 조와 팔 조의 대결이었다. 드디어 자신의 순서가 오자 천여운도 긴장된 눈빛으로 조원들을 바라보았다. 그가 긴장하는 만큼이나 팔 조의 생도들의 눈빛도 불안감과 초조함으로 떨리고 있었다. ‘사기가 떨어졌다. 이대로는 안 되겠지?’ 천여운이 침을 삼키며 호흡을 가다듬더니, 자신의 긴장하는 눈빛을 지우고 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떨리나?" "?" "긴장되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조장이 바뀌어서 불안한 마음은 알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이겨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마도관에서 방출된다.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높이 올라가고 싶다." 솔직한 감정이 담긴 천여운의 말에 긴장하고 있던 생도들이 하나 둘씩 귀를 기울였다. 조장이 아닌 같은 생도로서의 입장을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이목이 집중되자 천여운이 생도들을 향해 더욱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도 그렇지만 나는 솔직히 화가 난다. 조장을 노려서 우릴 어이없게 시험에서 떨어뜨리려고 한 그 놈의 술책따위에 넘어가고 싶지 않다!" 분노는 때때로 긴장감을 완화시키기도 한다. 천여운의 그 말에 생도들 역시도 서서히 눈빛에서 짜증과 분노가 뒤섞였다. "모두가 나와 같은 마음이라면 여기서 우린 패배할 수 없다. 이제 더이상 긴 말은 하지 않겠다. 반드시 이기자!” 천여운의 그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마지막의 그 한 마디에서 감정적으로 들끓은 생도들의 사기가 치솟았다. 천여운의 말이 끝나자마자 생도들이 긴장과 두려움을 떨쳐내고 한껏 고양된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기자!!!” -우르르르르! 팔 조가 오열을 맞춰서 천여운을 선두로 대연무장의 우측 가운데 쪽으로 향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는 좌호법 이화명의 눈빛에 이채가 띠었다. ‘생도들의 사기도 올릴 줄 알았나?’ 의외의 면을 발견했다. 그저 대타로 나왔기에 별 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저런 면을 지니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조원들의 사기만 끌어낸다고 진형 대결에서 승리를 한다는 보장은 없었다. '지켜보면 알게 되겠지. 범의 자질일지 살쾡이에 불과할지.' 오 조와 팔 조가 대치한 상태에서 좌호법 이화명이 대결의 시작을 알렸다. “상대 조를 제압하는 쪽이 승리한다. 시작하라!” “마도!!!” 10장 눈에는 눈, 이에는 이(3) 오 조의 생도들이 기본 진형을 갖춘 채 서있다. 그 한 가운데에는 음마종의 소교주 서열 후보인 천원려가 조장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천원려는 대연무장에서 반대쪽에 서서 자신들과 대치해 있는 팔 조의 조장인 천여운을 노려보았다. ‘칫.’ 그녀가 원했던 그림은 이것이 아니었다. 복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금이 이끄는 팔 조를 박살내어, 자신이 더욱 소교주 후보로서 자질과 역량을 갖추었다는 것을 증명해내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지금 팔 조를 이끄는 것은 그런 역량을 증명해보기에는 너무도 약하고 천한 피가 섞인 천여운이었다. ‘네 분수에 맞지 않는 자리야.’ 유독 천여운을 죽이려드는 복마종이나 독마종의 소교주 후보자들보다는 큰 악감정은 없었지만 그녀 역시도 천여운을 천한 족속으로 생각하고 멸시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네 운명이 이것 밖에 되지 않음은 네 비천한 어미를 탓해.’ 그녀는 천여운이 얼마나 힘들게 자라왔는지 알고 있다. 여섯 종파의 소교주 후보자들의 모친인 교주의 처들은 맹약으로 맺어졌지만 마교의 일인자이면서 무자로서의 패기를 지닌 그를 사랑했다. 하지만 교주의 관심은 그녀들이 아닌 오직 화 부인에게 향했다. 여섯 종파의 처들은 그런 교주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하는 비천한 여시종 출신인 화 부인을 증오하고 그 소생인 천여운을 눈에 가시처럼 여겼다. 그것은 천원려의 어머니인 항 부인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녀들의 치마 품에서 자라온 여섯 종파의 소교주 후보자들은 자연스럽게 그 영향을 받으며 자랄 수밖에 없었다. ‘너 따위 천한 놈에게 소교주 쟁탈전은 어울리지 않아. 이 기회에 널 처단해주마. 그게 네 불운한 인생을 위해서도 좋을 거야.’ 천무금과의 대결이 무산되었으니, 이번 이 단계 시험에서 천여운을 끝장내기로 마음먹은 천원려였다. “상대 조를 제압하는 쪽이 승리한다. 시작하라!” “마도!!!” 좌호법 이화명의 시험의 시작을 알리는 외침이 들리자, 오 조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앞으로 진격해왔다. 천여운은 자신을 향해 살기 넘치는 눈빛으로 돌진해오는 천원려와 오 조를 바라보며 머릿속의 나노에게 말했다. ‘나노, 증강현실 개안. 진형 튜토리얼 가동.’ 천여운의 명령에 나노 머신, 나노의 특유의 기계적인 음성이 머릿속을 울렸다. [사용자의 시각 정보에 증강현실(增强現實) 개안(開眼) 가동. 전투 진형 튜토리얼(tutorial)을 통해 행동지시 모드를 가동합니다.] 천여운의 동공이 미세하게 떨리며 시야로 흰 빛의 선들과 글자가 새겨지며 증강현실이 개안되었다. 이미 사전에 열두 진형을 나노의 프로그램에 등록해놓은 천여운이었다. 팔 조의 조원들은 오 조에서 진격해오는데, 아직까지 아무런 명령을 내리지 않는 천여운을 바라보며 애가 탔다. “아직!” 천여운이 조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긴장되는 상황이었지만 이 상황에서 모든 판단은 조장에게 달렸기에 그들은 천여운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도착하는 순간 천원려가 외쳤다. “이 번!” “이 번!!!”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오 조가 복창하며 일사불란하게 진형변화를 꾀했다. 천원려의 숫자를 외치는 소리를 들은 천여운이 생각했다. ‘봉시진?’ 그와 동시에 천여운의 시야의 흰 빛의 선이 움직이며 그들의 움직임을 빠르게 분석하더니 진형을 갖추기도 전에 흰 빛으로 글자가 적혔다. [상대가 봉시진(鋒矢陣)으로 진형을 변화합니다.] 선두에 서있는 천원려의 뒤로 화살 형태로 진형을 갖춰가고 있었다. 이것은 선두에 서있는 조장이 강한 무력을 지녔을 때 효과적인 진형으로, 한곳에 힘이 집중되어서 상대 진형을 뚫는 형태이다. ‘역시 예상대로다.’ 천여운의 생각과 별개로 그의 시야의 허공으로 빠르게 상대 진형의 대응방법이 흰빛의 튜토리얼로 정리되어 적혔다. [완벽한 방어를 위해서는 방어진(防禦陣)을 펼치십시오. 방어 성공률 100퍼센트입니다. 방어와 동시에 반격을 위해서는 어린진(魚鱗陣)을 펼치십시오. 방어 성공률 60퍼센트입니다. 반격 성공률 90퍼센트입니다.] 증강현실의 튜토리얼이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했다. 두 가지 중에서 가장 안전한 방법은 방어진이었지만, 천여운은 과감하게도 두 번째 선택지를 택했다. “첫 번째는 원래대로 한다. 육 번!” “육 번!!!” 화살 형태로 진격해오는 천원려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육 번이라고 줄여서 말한 것으로 다음 진형을 추측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추측대로 팔 조가 일사불란하게 진형의 변화를 꾀했는데, 그것은 조장을 필두로 물고기 혹은 삼각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어린진이었다. ‘건방지게!’ 확실하게 상대를 뚫을 수 있다는 전제가 걸려있는 공격형 진형인 봉시진과 다르게 어린진은 돌파형이었지만 뒷 열에서부터 앞을 지탱하기 위한 방어까지 가능한 진형이다. 그러나 어린진 역시도 선두에 돌출되어 있는 조장이 무력을 갖추지 않고는 펼 수 없는 진형이었다. “여기서 어린진을?” 이를 단상 위에서 지켜보는 좌호법 이화명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것은 상대 진형의 선두에 있는 조장을 상대할 수 없다면 절대로 현명한 선택이라고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우호법 섭맹에게 무공을 전수받았어도 아직은 일렀다. ‘괜한 기대였었나.’ 이화명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시작부터 무리수를 두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 판단은 이화명 뿐만이 아니라 이 대결을 지켜보는 모든 생도들도 같았다. ‘처음부터 저런 멍청한 선택을 하다니?’ ‘역시 조장이 바뀐 피해를 다른 생도들이 보겠구나.’ 누구도 천여운이 음마종의 소교주 후보인 천원려를 상대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진형을 변경하는 팔 조 생도들의 얼굴에는 조장의 판단을 향한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그 사이에 오 조의 진형인 화살 형태의 봉시진이 드디어 물고기 형태의 어린진과 맞부딪치는 순간이 왔다. “천한 놈 주제에 본 녀와 겨룰 생각을 해!” 화가 난 천원려가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방패에 십성의 공력을 실어서 앞으로 전력을 다해 부딪쳤다. -쾅! 그 순간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사태가 일어났다. 당연히 조장인 천여운을 필두로 가운데에서부터 뚫릴 거라 생각한 팔 조가 너무도 견고하게 버텨낸 것이었다. '버텼어!' 이 대결을 지켜보는 모든 무공 교두, 생도들이 한 마음이 된 듯 두 눈이 커졌다. 가장 놀란 것은 진형을 부딪친 당사자인 천원려였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십성의 공력을 실은 방패가 밀어내기는커녕 팽팽하게 그 힘을 유지하고 있었다. 반 갑자를 약간 상회하는 삼십오 년의 내공을 지니고 있는 천원려였다. 아무리 마룡단을 지급받아서 내공을 가지게 된 천여운이라고 할지라도 이렇게 팽팽하게 막을 수 있는 내공 수위가 아니었다. ‘후우....후우...예상대로다.’ 그녀의 방패를 막아낸 천여운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절대로 자신의 내공에 한참 미치지 못할 거라 생각하는 천원려의 판단과 달리 천여운은 반 갑자인 삼십 년의 내공을 지니고 있었다. ‘짜릿하네.’ 내공의 수위대로 한다면 약간이라도 미치지 못하는 천여운이 밀려야겠지만, 우호법 섭맹의 수준까지 근육 섬유질과 근맥을 변화시킨 그는 외공과 힘으로는 음파공을 익힌 천원려가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끼리리릭! 내공에서 밀렸지만 그 강한 힘으로 천여운이 이를 악물고 앞으로 발걸음을 디뎠다. 내공이 약간 아래였기 때문에 방패로 그 공력의 여파가 타고 왔지만 여기에 대한 대책도 당연히 있었다. [방패에서 손으로 침투하는 공격적인 에너지로 인한 체내 손상을 복구합니다.] 나노 머신들이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천여운의 몸으로 침투하는 공력의 여파로 인한 내부 손상들을 빠르게 회복시켰다. 이것을 모르는 천원려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 녀석!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린 거야?’ 경악한 그녀였지만 빠른 판단으로 진형을 바꾸지 않으면 오히려 뒷열이 부실한 봉시진이 무너질 거라고 생각했다. 천원려가 큰 소리로 외쳤다. “퇴진 후에 일 번!” “퇴진 후에 일 번!!!” 복창하는 소리와 함께 오 조의 생도들이 빠르게 전열을 돌려서 뒤로 퇴진했다. 그와 함께 천원려 역시도 팽팽하던 방패를 위로 쳐낸 후에 보법을 펼쳐서 뒤로 후퇴하여 진에 합류했다. 일 번은 기본 진형인 이 열의 형태였다. ‘됐다!’ 퇴진하는 그들의 진형 변화에 천여운이 눈빛이 반짝였다. [상대의 진형이 기본 진형으로 변형했습니다. 학익진(鶴翼陣)으로 상대의 진형을 감싸서 방원진(方圓陣)으로 포위하십시오. 성공률 90퍼센트입니다.] 나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천여운이 뒤에 서있는 생도들을 향해 소리쳤다. “바꾼다! 삼 번!” “삼 번!!!” 팔 조의 생도들이 복창하면서 물고기 모양의 어린 진에서 넓게 퍼지기 시작했다. 이에 천원려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아까 전에 그녀 역시도 천여운이 숫자를 통해서 진형을 빠르게 변경한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그렇다면 삼 번 진형은 사선진(斜線陣)이었다. ‘멍청하긴 일 조의 조장이 이미 써먹은 방식이 내게 통할 것 같아! 역시 전술에서 떨어지는구나! 호호홋.’ 천여운의 외치는 소리에 진형을 파악했다고 생각한 그녀가 생도들을 향해 외쳤다. “육 번!” 육 번은 어린진이었다. 사선으로 이열로 오는 적의 가운데를 단번에 끊을 수 있게 된다. 원래라면 봉시진으로 해도 되었지만, 천여운의 내공이 자신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 좀 더 안전한 길을 택했다. “육 번!!!” 오 조의 생도들이 복창을 하며 물고기 모양인 어린 진으로 일사불란하게 진형을 바꾸었다. ‘이제 끝이다!’ 그녀가 오른손에 쥐고 있는 진검에 공력을 실었다. 무슨 수를 벌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공이 상승했다고 해서 무공 실력이 한 번에 일취월장할 리는 없다고 생각한 그녀였다. ‘어린 진으로 혼자 고립되면 녀석을 찔러 죽여 버리겠어!’ 그러나 그런 그녀의 계획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천원려를 비롯한 오 조의 생도들이 놀란 나머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 이게 뭐야?” “사선진이 아니잖아!” 놀랍게도 팔 조는 사선진이 아닌 학익진으로 넓게 퍼져서 그들의 어린진을 감싸고 있었다. 어린진으로 뭉쳐있었던 그들은 진형 변화를 갖출 틈도 없이 반원에 들어가고 말았다. ‘뭐야? 이게 대체 뭐야?’ 진법에 능하고 전술이 뛰어난 천원려조차도 이 같은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분명 천여운이 외친 숫자는 삼 번이었다. 그런데 진형이 완전히 달랐다. 혼란스러운 감정을 추스르기도 전에 천여운이 다음 지시가 들렸다. “이 번!” “이 번!!!” “뭣?” 팔 조 생도들이 복창하는 이 번이라는 외침에 천원려의 예쁘장한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번 진형은 아까 전 그녀가 펼쳤던 봉시진이었다. 학익진 상태에서 펼칠 만한 진형이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 방원진이 아니라 봉시진이라니? 이게 무슨 얼토당토않은? 앗!’ 천원려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생각한 엉터리 같은 조장의 지시에 불구하고 팔 조의 생도들은 학익진에서 빠르게 움직여서 원의 형태를 갖추며 순식간에 오 조의 어린진을 감쌌다. ‘서, 설마?’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어이없어 하는 천원려의 눈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는 천여운의 얼굴이 보였다. “아아아아아악!!!” 천원려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서 소리 질렀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에게 혼란을 가져온 비밀을 깨닫고 말았다. 천여운은 모든 조에서 통상적으로 배운 순서대로 진형에 번호를 부여해, 빠르게 진형 변화를 꾀하는 방식을 이용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조들은 빠른 진형 변화와 전술에만 신경을 쓴다고 진형에 붙였던 숫자를 굳이 바꿀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지만, 천여운은 과감하게 순차적으로 배운 진형대로가 아닌 거꾸로 번호를 바꾼 것이었다. ‘처음에 일부러 정상적으로 번호를 외친 것도 나를 속이기 위해서 였어.’ 처음 진형 변화에서는 팔 조 역시도 다른 조와 마찬가지로 순차적인 번호를 사용했다. 하지만 두 번째 진형 변화에서 바꾼다는 말은 진형을 바꾼다는 말이 아니었다. 번호의 순서를 바꾼다는 의미였다. -쿵쿵! 방원진으로 변형한 팔 조의 생도들이 방패와 검을 겨냥한 채, 천천히 거리를 좁히면서 그들을 압박해왔다. ‘안 돼! 내가....내가 저런 천한 놈한테 패한다는 게!’ 이미 진형이 방원진에 둘려 싸인 시점에서 패배는 결정되었지만, 천원려는 이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쿵쿵! 압박해오는 팔 조의 방원진에 오 조의 생도들의 표정이 박탈감으로 물들었다. 결국 패배했다는 사실을 통감한 오 조의 조원들이 하나 둘씩 방패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뭐하는 거야? 왜 방패를 놓는 거야!” 천원려가 앙칼지게 조원들을 향해 소리 질렀다. 우습게 여겼던 천한 피가 섞인 천여운에게 패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천여운 정도는 가볍게 깨뜨리고 더 윗 단계로 올라가서 다른 소교주 후보들을 경쟁해야 하는 자신이었다. ‘날 비웃을 거야! 모두가 날 비웃을 거야!’ 패배의 충격에 마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비웃는다는 착란 증세에 빠져든 그녀는 이성을 상실해, 진형에서 벗어나 천여운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죽어어어어어!” 천원려의 손에서 음마종의 절기인 파공연검(派攻然劍)의 절초가 펼쳐졌다. 그녀의 손에서 펼치는 절초는 살기를 잔뜩 머금고 있었다. 그 순간 다시 한 번 대연무장에 있는 모든 생도들을 놀라게 만드는 일이 벌어졌다. -쿵! 위험하다고 생각한 천여운이 방패를 바닥에 집어 던지고는 앞으로 튀어 올라, 진검으로 화려하게 날아가는 나비처럼 잔상을 만들어내며 접무도법의 절초를 펼쳤다. 11장 마도관의 비급 서재(1) 우호법 광도 섭맹의 독문무공인 접무도법은 초식과 내공이 최고 경지에 이르게 되면 도초를 펼칠 때마다 잔상이 남아 보는 이로 하여금 현혹시키게 만든다. 접무도법의 삼 초식 접무칠연(蝶舞七聯). 접무도법의 일곱 식이 연달아 이어지는 초식으로 날렵한 쾌도로 상대를 제압한다. 도가 아니 훈련용 검에 불과했지만 초식만큼은 육체 변환으로 인해 섭맹의 수준에 이른 천여운이었다. “죽어어어엇!” 이성을 잃고 살의에 가득차서 펼치는 천원려의 파공연검의 절초인 파공월천(派攻月天)은 원래의 부드러움을 잃고 패도적인 기세가 실렸다. -채채채채챙! 천여운의 검으로 펼치는 접무칠연의 오 식이 그녀의 검을 파훼했다. 그와 동시에 잔상을 남기며 마지막 이 식이 검초가 파훼되면서 경악해 하는 천원려의 팔과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촤악! ‘도가 아니라서 마지막 일 식이 완전하지 못했다.’ 가볍고 부드러운 도로 펼쳐야만 초식이 완전히 살겠지만, 훈련용 진검에 불과했기에 마지막 일 식은 천여운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육 식까지는 완벽하게 초식이 발휘되었다. -툭! 뭔가가 대연무장의 바닥으로 떨어졌다. -푸슉! 잘린 단면에서 피가 터져 나오며 모래 바닥을 적셨다. 분노로 붉게 물들었던 얼굴이 어느새 창백해지며 천원려의 두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 “꺄아아아아아아악!” 천원려의 입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오며 대연무장 전체가 떠나가라 울려 퍼졌다. 바닥에 떨어진 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오른팔이었다. 모든 무인들 역시도 같겠지만 검법 이외에도 비파음공을 익히는 음마종에게는 오른손은 없어서는 안 될 보물과도 같았다. “아아아아악! 내 팔! 내 팔이 떨어졌어!” 고통으로 비명을 질러대던 그녀가 피가 흐르는 팔을 지혈도 하지 않은 채, 바닥에 떨어진 팔을 움켜쥐고는 미친 듯이 고래고래 외쳐댔다.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기에 모든 생도들, 심지어 무공 교두들조차도 넋을 놓고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 -팟! 오 조를 담당하고 있던 무공 교두 우칠이 빠르게 경공을 펼쳐 대연무장으로 난입했다. 우칠은 잘린 팔을 붙잡고 통곡을 하는 천원려의 수혈을 점했다. -타탁! 그리고는 입고 있던 상의를 벗어 옷을 찢어서, 천으로 그녀의 잘린 팔을 압박하며 지혈시켰다. 스물하루 동안에 불과했지만 자신이 가르쳤던 생도인 천원려를 이 지경으로 만든 것에 우칠은 천여운을 노려보며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강자존의 법칙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마도관의 시험에서 이 같은 행동은 절대로 나무랄 일이 아니었다. “접무칠연? 하!” 좌호법 이화명은 방금 전에 천여운이 펼친 도법에 기가 차 했다. 교내에서 영원한 호적수라고 불릴 정도로 그만큼이나 우호법 섭맹의 무공을 잘 알고 있는 자는 본인 이외에는 없을 것이다. 내공과 깨달음이 부족하다 뿐이지 초식 자체만 본다면 섭맹이 펼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완벽했다. ‘술주정뱅이 놈, 대체 무슨 짓거리를 한 거냐?’ 고작 열나흘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아무 것도 없던 백지에서 명화를 탄생시켰다. 첫 시험은 운이 좋아 통과했지만 두 번째부터는 그 운도 더 이상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아니야. 섭맹이 잘 가르쳐서가 아니다.’ 무공만 뛰어났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단계 시험마저도 너무 완벽하게 통과했다. 전술과 진형을 다루는 전략마저도 음마종의 소교주 후보인 천원려를 압도했다. 마지막에 와서 천원려의 팔을 베는 과감성마저도 마음에 들었다. 스물하루만에 모든 면에서 일취월장한 천여운은 그야말로 천하의 인재라 불릴 만한 조건에 부합했다. ‘......섭맹 그놈이 선수치기 전에 제자로 받았어야 했나.’ 이런 결과가 일어나고 보니 내심 후회가 되는 이화명이었다. 하지만 이미 섭맹에게 무공을 사사받았고 자신은 이곳 마도관을 운영하는 관주였기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좌호법 이화명이 단상의 좌석에서 일어나 외쳤다. “팔 조의 승리를 축하한다. 조장인 칠 번 생도를 포함한 팔 조의 생도들은 이 단계 시험을 합격했음을 공표한다.” 그의 목소리가 대연무장을 울리는 순간 팔 조의 생도들이 있는 힘껏 함성을 외쳤다. “와아아아아아아아!!!” 팔 조의 생도들의 눈빛은 감격으로 물들어 있었다. 원래의 조장이었던 복마종의 소교주 후보자 천무금이 부상을 입고 낙오되면서, 이 단계 시험에 떨어질까 전전긍긍했던 모든 것을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이 단계를 통과했구나. 하아....’ 천여운 역시도 조원들의 함성을 듣고서야 그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나노의 능력을 십분 살리면서 자신의 기지를 발휘했다는 점에서 그로서도 한층 성장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다음 준비를 해야 하니깐 들어가도록.” 함성을 지르며 기쁨을 포효하던 팔 조의 생도들은 무공 교두의 말을 듣고서야 다시 자신들이 대기하고 있던 자리로 오열을 맞춰 돌아갔다. 모두에게 충격을 가져다 준 팔 조의 승리는 천여운에게 단순히 기쁨만을 가져다준 것은 아니었다. ‘천여운.’ ‘무공을 숨기고 있었구나.’ ‘저 천한 놈이 음마종을 꺾어?’ ‘.....기억해둬야 겠군.’ 그 동안 팔 조만이 알고 있던 그의 능력을 모든 생도들에게 공개한 셈이었다. 덕분에 그에 대한 경계가 별로 없었던 상위 종파들의 생도들을 비롯한 다른 소교주 후보자들의 눈에 각인이 되고 말았다. ‘천.....여.....운!’ 그리고 천무금 못지않게 그를 증오하는 독마종의 후계자인 천종섬으로 하여금 음침한 꿍꿍이속을 가지게 만들었다. 팔이 잘린 음마종의 천원려가 들 것에 실려서 의무실로 가게 되고 어느 정도 대연무장이 정리가 되자 다시 시험이 재개가 되었다. “세 번째 대진 조는 연무장으로 나오도록!” “마도!!!” 육 조와 칠 조의 생도들이 동시에 외치며 앞으로 오열을 갖춰서 걸어 나왔다. 그런데 그들이 앞으로 이동하는 사이에 천여운은 미묘한 적의감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서 그곳을 향했다. 육 조의 가장 선두에서 걸어가는 조장 하일명이 무서운 눈빛으로 살기를 머금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제야 알아챈 거냐?’ 천여운도 그 눈빛의 의미를 깨닫고는 호기롭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런 천여운의 미소에 하일명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이놈이!’ 팔 조의 시험이 진행되기 전만 하더라도 천여운을 전혀 의심하지 않고 있던 하일명이었다. 그러나 시합의 마지막에 천원려를 향해 펼치는 도법을 보는 순간 하일명은 확신했다. 밤중이라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특유의 잔상을 남기던 도법은 몸으로 직접 받아냈으니 기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갈비뼈에 금이 가게 만들고, 조원들의 절반 이상을 다리를 못 쓰게 만들어 놓은 범인이 도발이라도 하듯이 웃으니 하일명은 더욱 분노했다. -으득! ‘빌어먹을 새끼!’ 지금은 이 단계 시험을 치르는 중이기 때문에 어찌할 방법이 없었지만 이것이 끝나면 꼭 복수하리라고 마음을 먹었다. 그 전에 해결할 일이 있었다. 육 조와 칠 조가 대연무장으로 나와 거리를 벌리고 대치했다. “흐흐흐!” 반 이상이 앞으로 대연무장으로 걸어 나오면서 발을 절뚝이는 모습을 보며 칠 조의 생도들은 기쁨을 숨기지 못했다. 저런 최악의 몸 상태를 가진 조라면 조장이 바뀐 자신들의 조라고 해도 쉽게 이길 수 있으리라 여겼다. ‘조원들을 노려? 누구의 짓인지는 몰라도 참으로 대담하군.’ 이화명 역시도 육 조의 생도들이 다리를 절뚝이는 모습에 눈에 이채가 띠었다. 가장 효과적인 치명타를 줄 수 있는 조장이 아니라 저렇게 많은 수의 생도들을 대담하게 노린 녀석은 역대 기수를 통틀어 처음이었다. 물론 그 범인은 한참 승리를 만끽하고 있는 천여운이었다. 두 조에서 준비가 끝나자 좌호법 이화명이 앞전과 같은 대사로 시합을 알렸다. “상대 조를 제압하는 쪽이 승리한다. 시작하라!” “마도!!!” 생도들이 외치며 칠 조에서 먼저 앞으로 진격했다. 칠 조의 조장으로 교체된 삼백십육번 생도 우준은 상대 조의 다리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과감하게 돌격 진형을 명했다. “육 번!” “육 번!!!” 여섯 번째 진형인 어린진이었다. 칠 조의 생도들이 일사불란하게 진형에 변화를 꾀했다. 다리를 다친 부상자들이 넘치는 육 조는 아직까지 아무런 진형 변화가 없이 방패만을 든 채 대기하고 있었다. 하일명이 뒤에 있는 생도들을 쳐다보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네 녀석들.....평생 나한테 감사해라.”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그 말과 함께 하일명이 진검을 높게 들며 소리쳤다. “봉시진!” “봉시진!!!” 하일명의 외침에 육 조의 생도들이 복창하며 느리지만 오열을 맞춰서 진형을 바꾸었다. 이 모습에 칠 조의 조장 우준이 같잖다는 듯이 비웃었다. “하핫! 완전 멍청한 놈이 아니야. 진형을 대놓고 알리다니.” 더군다나 그 진형은 봉시진이었다. 앞서 오 조와 팔 조의 시합에서 증명이 되었듯이 물고기 형태의 어린진과 부딪치게 되면 그 견고함에서 차이가 나서 압도적인 실력 차가 아니라면 절대로 써선 안 될 전법이었다. ‘조원들 다리가 병신이 되었다고 희생정신 납셨군. 킥.’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다는 생각에 우준을 선두로 칠 조의 어린진이 빠르게 그들을 향해 돌격해갔다. 그리고 두 조의 선두가 부딪치는 지점이 다가왔다. “잘가랏! 키키킥.” 칠 조의 조장 우준이 전력을 다해 방패에 공력을 실었다. 그 순간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났다. 육 조의 조장인 하일명이 들고 있던 방패를 바닥에 던지고는 진검의 검병을 두 손으로 잡는 것이 아닌가. ‘뭐하는 짓이야?’ 어이가 없어하는 찰나였다. 하일명의 두 팔이 소매가 꽉 끼다 못해서 근육이 선명해지더니, 그가 아래 바닥에서부터 검을 밑으로 끌며 위로 쳐올렸다. “이런 미친!” 우준이 다급하게 방패를 밑으로 내렸다. -콰직! “으아아악!” 둔탁한 소리와 함께 철 방패가 일그러지며 허공으로 치솟았다. 순식간에 방패가 날아가면서 놀라서 시선이 위로 향하는 우준의 가슴으로 하일명이 강렬한 찌르기가 들어왔다. -푹! “크헉!” 우준의 가슴을 하일명의 진검이 꿰뚫었다. 설마 검으로 자신을 찌를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우준의 입에서 선혈이 솟구쳤다.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핏물로 인해 무슨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컥컥!” 그런 것을 전혀 개의치 않는지 하일명이 전신의 내공을 다리에 집중하고 소리쳤다. “밀어!” 그 말과 함께 같이 놀라하고 있던 육 조의 생도들이 복창하며 방패를 들고 앞으로 진격했다. 하일명은 검을 찌른 우준을 마치 방패삼아 칠 조를 밀어냈다. “흐헉!” 피가 튀어서 얼굴에 묻은 그 모습이 악귀나찰과도 같아 당황한 칠 조의 생도들이 그대로 뒤로 밀려나 차례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지금까지의 조별 대결과는 전혀 다른 구도로 결판이 나버렸다. 시합을 지켜보는 모든 생도들조차 이 같은 결과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 되었다. 좌호법 이화명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 내서 웃을 뻔했다. ‘푸하하하핫, 무슨 이런 시합이 있단 말인가.’ 물론 상대 조를 제압하는 것이 이 단계 시험의 최종 목표이긴 하지만 그 제압하는 방식이 그를 재밌게 만들었다. 진형과 전술, 전략의 모든 것을 배제하고 오직 한 사람의 역량과 기세만으로 이겨낸 셈이었다. 절반이나 다친 조원들을 이끌고 과연 어떤 전략으로 극복할까 지켜봤더니 예상을 완전히 뒤엎어버렸다. ‘크크큭, 이번 기수들은 정말 나를 즐겁게 만들어 주는군.’ 한참을 즐거워하던 좌호법 이화명이 좌석에서 일어나서 목소리를 가다듬고 외쳤다. “육 조의 승리를 축하한다. 조장인 백팔 번 생도를 포함한 육 조의 생도들은 이 단계 시험을 합격했음을 공표한다.” “와아아아아아!!!” 절반이나 되는 생도들이 다리가 다치는 바람에 승리를 꿈꾸지 못했던 육 조의 조원들이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모두가 즐거워하고 있는 와중에 조장인 하일명은 검이 박혀서 쓰러져있는 우준을 지그시 내려밟으며 시선은 이 시합을 지켜보고 있는 천여운에게로 향했다. 그 표정은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다음은 너다.’ 천여운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정말 성가신 적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게 순차적으로 진행된 이 단계 시험은 늦은 오후 무렵이 되어서야 끝을 맺게 된다. 앞에 있던 시합들로 인해서 좀 더 재미있는 양상이 벌어지길 기대했던 좌호법 이화명의 바램과 달리 뒤에 있던 조들은 철저하게 진형과 전략에 의거해서 결판을 냈다. 총 열 번의 조별 시합에서 수많은 부상자들이 속출했지만 사망자는 칠 조의 새로운 조장이었던 우준 단 한사람 뿐이었다. 이로써 사백십오 명의 생도들 중에서 이백일곱 명의 생도들이 이 단계를 통과해 삼 단계로 진입하게 되었다. 가장 의외의 결과였던 것은 여섯 종파 중의 하나였던 음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원려가 조기에서 탈락한 것이었다. 쪽팔리게 낙오되지 말라고 천무금에게 했던 경고가 도리어 자신에게 화살이 되어 날아온 셈이었다. 11장 마도관의 비급 서재(2) 이 단계 시험이 끝나고 모든 생도들이 대연무장에서 즉각 해산했다. 숙소로 돌아가는 그들의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일 단계 시험 때와 마찬가지로 삼 단계 시험에 대한 설명이 곧바로 이어질 거라는 예측과 달리 마도관주인 좌호법 이화명으로부터 뜻밖의 휴식 공표를 듣게 된다. “이 단계 시험에 통과한 모든 생도들은 노고를 치하하며, 사흘간의 휴식 시간을 주겠다.” “와아아아아아!!!” 당연히 모든 생도들은 함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일 단계 시험부터 스물하루의 기간 동안 쉬지 않고 숨 가쁘게 돌아간 일정은 모든 생도들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치게 만들었다. 그렇게 공표된 사흘간의 휴식은 생도들의 지친 체력을 보강하는 한편, 무공 교두들 또한 스물하루의 기간 동안 쉬지 않고 생도들을 가르쳤기에 그들에게도 휴식의 기간을 주기 위함이기도 했다. 마도관의 본관 일층에는 관주의 집무실. 넓은 집무실의 긴 회의 탁자에는 수많은 서류들이 잔뜩 쌓여있었다. 그런 서류 더미들을 선임 무공 교두들이 열심히 분류해가며 작업 중이었다. 집무 책상에 앉아서 상부로 올릴 전서들을 작성 중인 좌호법 이화명에게 한 무공 교두가 정리된 서류 종이를 가져왔다. “오 조까지 탈락자들의 성적과 평가를 정리한 것들입니다.” “그래?” 책자처럼 노끈으로 묶어서 정리된 서류들을 넘기며 좌호법 이화명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번에도 꽤 떨어졌군.” “상위 종파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뭐, 무가의 녀석들이야 원래부터 상중하급 무사를 목표로 하니깐 상관없다만 이 녀석들은 좋은 기회를 놓쳐버렸어.” 이화명이 명단이 적혀 있는 서류를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탈락자 명단에는 이 단계에서 탈락하기에는 아까운 인재들이 꽤 많았다. 조별 시험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었다면 무난하게 삼 단계까지는 올라갈 만한 인재들도 더러 껴있었고, 심지어는 여섯 종파 중의 하나인 소교주 후보자 천원려마저도 탈락한 상황이었다. “그러니깐 저희들이 휴가를 보내기도 전에 이렇게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닙니까?” “크큭, 그렇긴 하지.” 마도관의 육성은 사 년이라는 기간을 통해 뛰어난 후기지수들과 고수들을 양성한다. 그러나 모든 시험이 경쟁체계로 이루어져 있고, 한 번 떨어지면 곧바로 방출되기에 아까운 인재들이 떨어지는 경우가 더러 발생하고 만다. 이 부분에 관해서 매 기수 때마다 여러 번 공론화가 되어 교주전의 회의까치 올라가곤 했다. 기회를 최소한 두 차례를 주어야 한다는 의견부터 최소한 삼 단계 시험까지는 무가를 제외한 종파의 후기지수들에게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등의 여러 가지 의견으로 회의가 진행되었다. 그렇게 회의를 거친 결과, 대다수가 만족해하는 합당한 보완책이 마련되었다. “옛날에 마도관 설립 때의 지침대로였으면 이런 피곤한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는데 말이야. 귀찮군. 귀찮아.” “어쩔 수 없지요. 이렇게 안 하면 관주님께 항의가 빗발 칠 겁니다.” 그렇게 나온 보완책이란 매 단계 별로 탈락자들의 성적과 담당 무공 교두들의 평가가 반영되어 직위, 직책을 책정하는 것이었다. 원래는 이 단계 시험에서 떨어지게 된다면 삼급 무사로 시작하겠지만 그 부분은 형평성이 맞지 않고 아까운 인재를 헛되이 쓰게 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기에, 능력에 부합하는 곳으로 직위와 직책을 부여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 같은 사실을 미리 시험 전에 공지를 하지 않을 것일까? 그것은 인재 양성 기관의 특성 때문이었다. 모든 생도들이 경쟁을 통해서 위 단계로 올라가기 위해 사활을 거는데, 탈락자들의 성적과 무공을 책정해서 직위를 보완한다고 공지를 한다면, 상위 종파의 생도들 중에서 누가 단계가 올라갈수록 부상자와 사망자가 속출하는 시험에 무리해가면서 경쟁에 임하겠는가. 이 같은 보완책이 마련되고 나서부터는 더 이상의 큰 불만이 야기되지 않았다. 나머지 혜택인 비급 서재의 개방과 마룡단 지급을 받진 못하겠지만 이것은 상위 종파의 생도들에게는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어차피 상위 종파 녀석들은 제 가문에 있는 무공이나 지원만 받아도 알아서 잘 성장할 놈들이니깐.” 단지 중소 종파 출신의 소년들은 마도관을 통해서 자신들의 종파의 것보다 상승 무공을 배우고 높은 경지로 향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이 아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고수로 성장하고 높은 위치로 갈 수 있는 등용문인 마도관에서 경쟁을 이겨내지 않고 그런 혜택을 바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후후후, 지금쯤이면 녀석들이 전부 비급 서재로 몰려들었겠군.” 좌호법 이화명의 눈에는 그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런 이화명의 예상대로 마도관의 서재 건물의 입구 쪽에는 백여 명이 넘는 생도들이 몰려들어 있었다. ‘많군.’ 모두가 이 단계를 통과하고 이층 서재를 열람하기 위해서 몰려들었다. 천여운도 그 백여 명이 넘는 인파에 껴있었다. 처음에는 더 많은 생도들이 몰려들었지만 인원이 너무 많은 것을 확인하고는 절반이 알아서 숙소로 돌아갔다. ‘어차피 나는 일층에 갈 거니깐.’ 천여운이 이렇게 비급 서재로 찾아온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일 단계 시험을 합격했던 대부분의 생도들은 일층 비급 서재를 열람했지만, 천여운은 스물하루의 기간 동안 나노와의 시뮬레이션을 통해 경험을 쌓는 것을 택했다. 물론 이 같은 선택에는 우호법 섭맹의 조언도 한몫 했다. ‘이 단계 시험까지는 괜히 허튼 짓 하지 말고 접무도법과 무천심법을 익히는데 전력을 다해라. 그래야 시험에 합격할 확률이 높아질 게다.’ ‘혹시 비급 서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클클, 그렇느니라. 사오 층의 서재에 있을 무공을 배우면서 그것조차 제대로 익히지 않고 다른 것을 탐할 생각은 하지 말라는 소리다. 흠흠, 어차피 일층 서재에는 우리 사문의 무공에 비빌만한 것은 없으니 괜한 기대감은 버려라.’ 마지막에는 살짝 쑥스럽게 말했으나 그 말은 일리가 있었다. 접무도법과 무천심법은 호법가의 무공이었기 때문에 최상위 층에 있는 무공이었다. 천여운은 그런 그의 조언대로 접무도법에 전력을 다했다. 하지만 삼 일이라는 휴식 시간이 생기게 되면서 그동안 벼르고 있었던 일이층 서재를 열람해야겠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한 시진.’ 일 층 서재에 한 번 들어가게 되면 열람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여러 권을 탐독하기에는 굉장히 짧은 시간이었지만 천여운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최대한 스캔해서 나온다!’ 목표는 오직 하나였다. 정독을 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스캔할 수 있는 만큼 모든 비급서를 훑어보는 것이 목적이었다. 마도관의 본관보다도 더 웅장한 마도관의 비급 서재는 탑(塔) 형태로 되어있고, 한 층 씩 올라갈수록 너비가 줄어든다. 서재 건물의 외벽을 보면 그 흔한 창문조차 없었고 물 샐 틈 없이 막혀 있어서 일층에 있는 입구로 밖에 출입이 불가능하다. ‘몰래 들어가는 건 꿈도 못 꾸겠네.’ 천여운이 내심 놀라는 것도 당연하다. 비급 서재의 탑에는 마교의 모든 무공 비급서들과 외부에서 유입해온 것들이 한 곳에 모여 있기 때문에 마도관, 아니 마교 성내를 통틀어서 교주전 다음으로 경계가 가장 삼엄하다. 바깥에는 백 여 명에 이르는 무사들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전부 일류 고수들이었고, 그 내부에는 한 층마다 절정의 무위를 지닌 고수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어서 비급서를 절대로 밖으로 빼돌릴 수 없다. “거기 일 열로 줄 제대로 맞춰서 서라.” 모든 생도들이 일 열로 길게 줄을 서서 입구로 들어가기 전에 방문록에 이름을 기재하고 두 개의 붉은 초(洋)를 받았다. 초에는 선이 그어져 있고, 그 선에 닿는 걸로 시간을 알 수 있다. 두 개의 초 중 하나는 먹으로 자신의 명찰 번호를 새기고 입구 앞에 있는 방문함이라 적혀 있는 진열대에 올려놓고, 하나는 자신이 들고 다니며 시간을 측정해야 했다. “네? 한 시진 반이라고요? 하아.” “왜 이렇게 짧은 거야?” 앞에서 한숨을 내쉬는 생도들이 몇몇 눈에 띄었다. 그런 반응을 보니 이 층을 열람할 수 있는 시간도 그리 길지 않은 듯 했다. 드디어 천여운의 차례가 왔다. “이 층이지?” “아닙니다. 일 층에 먼저 갑니다.” “뭐? 아직도 일 층을 열람하지 않은 것이냐?” 그 말에 방문록을 기록하는 무공 교두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짓더니, 일 층 방문록 책자를 넘기며 그의 이름이 없는지 확인했다. “없네? 흠.” 아직도 일 층을 방문하지 않은 것이 의아했지만 자신이 관여할 부분은 아니기에 무공 교두는 일층 방문록의 책자를 펼쳐서 마지막으로 적혀 있는 이름 밑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밑에 이름을 적어라.” 천여운이 자신의 이름을 기재한 후에 붉은 초 두 개를 받았다. 앞서 초를 받은 생도들보다 그 선의 위치가 짧았다. “한 시진만 열람이 가능하다. 그 시간을 넘게 되면 강제로 끌려나오거나 징계가 있을 터이니 촛대의 선을 잘 확인하도록.” “알겠습니다.” 시간을 말 할 때마다 난감해하는 생도들과 달리 담담하게 대답을 한 천여운은 입구 앞의 방문함에 초 하나를 켜 넣고, 하나에 불을 붙여서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의 앞에 있는 문지기로 보이는 무사가 천여운에게 촛대를 집어넣을 수 있는 손잡이가 있는 긴 통을 넘겨주었다. 종이 책들이 많은 서재로 들어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실수로라도 촛대를 떨어뜨리거나 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함이었다. 마도관의 비급 서재의 일층으로 들어서자 넓은 내부에 벽면 전체가 비급서들로 꽂혀 있었다. 그리고 그 내부로 책의 진열장들이 건물의 다섯 벽면을 기준으로 안쪽으로 줄줄이 이어졌다. 얼핏 보아도 책이 얼마나 많은지 그 수를 헤아리기가 힘들었다. “하!” 천여운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렇게 많은 책을 보았다. 이렇게 많은 비급서가 서재에 있으니 무엇을 골라야 할지 허둥지둥 했다는 말이 이해가 갈 정도였다. 놀라는 것도 잠시였고 천여운은 눈앞의 책장부터 책을 뽑아들었다. 책 겉표지에는 오무검법(五武劍法)이라고 적혀 있었다. ‘시간이 없다.’ 일 층에 있는 비급서들은 상위 층의 것에 비해서 그 수준이 낮다고는 하나, 모르는 것보다는 다양하게 알고 있는 편이 나았다. 다행히 백 명이나 되는 생도들이 몰려간 이 층에 비한다면 혼자였기에 집중하기도 좋았다. ‘나노, 비급서를 계속 훑어볼 거니깐 계속 스캔해.’ [네, 알겠습니다.] 나노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리자 천여운이 책을 빠르게 넘기며 눈으로 훑었다. 책장을 전부 넘기는데 걸린 시간은 촌각(1분~2분)에 불과했다. [오무검법 서적의 스캔을 완료했습니다.] 천여운은 쉬지 않고 다른 책자를 집어서 닥치는 대로 책을 훑었다. 그것은 보법, 심법, 검법, 도법, 창법, 독공 등을 비롯해 다양한 분야의 비급서들을 가리지 않고 뽑아들었다. [스캔을 완료했습니다.] [스캔을 완료했습니다.] 천여운의 동공이 빠르게 흔들리며 나노의 목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 나노가 뇌 속에 들어온 이래 그 목소리를 가장 많이 들은 날이 될 것이다. 보통 한 생도가 서재로 들어와서 책을 고르는 시간과 외우는 시간을 고려한다면 한 시진을 꽉 채워도 많아봐야 두 권을 외우는 것에 그치는데, 천여운은 반 시진 만에 쉰다섯 권의 책을 스캔했다. 당장에 머릿속으로 전이하진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 무공을 탐독하게 된다면 수많은 무공을 분석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한참을 책을 스캔하던 천여운은 너무 겉쪽에만 있는 책장을 둘러봤다는 생각에 일층 서재의 한 가운데 쪽으로 향했다. ‘응?’ 그런데 일층의 한 가운데 쪽으로 가니 오각(五角)으로 놓인 책장들 사이에 푸른 빛깔이 은은하게 띠는 거대한 비석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비석의 옆에는 턱수염을 길게 기른 한 중년인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곳 일층 서재를 감독하고 지키는 무사인 듯 했다. ‘서재 한 가운데에 왠 비석을 갖다 놓은 거지?’ 의아해하며 지나가는 찰나에 의자에 앉아 있던 턱수염의 중년인이 천여운의 가슴에 달고 있는 검은 명찰을 슬쩍 쳐다보니, 이내 그에게 말을 걸었다. “본교의 개파조사이신 천마 조사님께서 남기신 비석일세.” “천마 조사님이요?” 푸른 빛이 은은한 비석의 비밀을 알게 되자 천여운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턱수염의 중년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비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청옥석으로 만들어진 비석이지.” 청옥석은 푸른 옥돌로 일반적인 돌보다 훨씬 단단해서 웬만큼 내공이 심후하지 않고는 이것을 베거나 부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그런 청옥석의 앞에는 시조가 적혀 있었는데, 문구 전체가 손가락으로 쓴 글씨였다. “이거 손가락으로 적은 건가요?” “놀랍지 않나? 검을 써도 흔적을 남기기 힘든 청옥석에 조사님께서는 손에 내공을 실어서 적었다더군.”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고수라고 할지라도 손가락에 내공을 실어서 청옥석에 이렇게 자연스러운 글씨를 새기라 한다면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말할 것이다. “보통은 책 한 권 읽기도 바빠서 이 비석조차 못보고 가는데, 자네는 그래도 그 피를 이어서 그런지 조사님의 위대한 흔적을 발견했군.” “저도 못 보고 지나칠 뻔했습니다.” 솔직한 말에 턱수염의 중년인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그게 당연한 걸세. 이 많은 비급서들을 두고 아무리 조상이 남긴 시조가 적혀있다 한들 청옥석이 눈에 들어오겠는가.” 이십 년을 넘게 이곳을 지켜왔지만 서재의 일 층을 방문하는 자들 중에서 누구 하나 이 비석을 제대로 살피고 가는 이가 없었다. 심지어 교주의 직계인 천가의 혈통을 이은 후손들조차 말이다. “아무튼 시간을 많이 빼앗겼겠군. 어서 볼일을 마저 보게나.” “알겠습니다.” 대화를 나눈 시간이라고 해봐야 촌각에 불과했기에 천여운이 고개를 저으며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그를 지나쳐 비석의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그가 보고 있는 위치에서 책을 훑어보며 스캔을 하기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문득 시조가 적혀 있는 청옥석 비석의 반대쪽을 바라보게 되었는데, 비석의 석면 전체가 날카로운 흔적들로 가득했다. 그 흔적들은 마치 무언가를 가리기 위한 것처럼 보였다. ‘뭐지?’ 앞면은 반듯하게 되어서 시조가 적힌 것에 반해 뒷면이 유독 난잡한 흔적들로 가득한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천여운이 청옥석에 난잡한 흔적들을 살펴보았다. 그 흔적들은 날카로운 무기 같은 것으로 일부러 그은 흔적들 같이 보였다. ‘나노, 흔적들을 분석해봐.’ [청옥석 비석의 석면을 스캔해서 분석하겠습니다.] 머릿속에 나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천여운의 동공이 파르르 떨렸다. 얼마 있지 않아 분석을 마친 나노가 말했다. [분석 결과 날카로운 검(劍)끝으로 석면을 긁어서 난 흔적입니다.] “검으로 그은 흔적이라고?” 천여운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마교의 개파 조사인 천마조사께서 남긴 청옥석 비석에 누가 이런 해괴한 짓을 한단 말인가. 그런 천여운의 머릿속에 나노의 목소리가 울렸다. [검흔에 파인 홈의 깊이를 분석한 결과, 다른 두 객체가 남긴 흔적들로 구분됩니다.] ‘두 사람?’ 11장 마도관의 비급 서재(3) 나노 머신인 나노는 분석 프로그램을 가동하여 청옥석에 있는 검흔들을 분석했고, 그것이 한 사람이 남긴 흔적이 아닌, 두 사람에 의한 것임을 알아냈다. 천여운은 이것을 기이하게 여겼다. ‘으음, 이렇게만 봐서는 모르겠어. 나노, 스캔한 검흔을 삼차원 입체 영상으로 증강현실로 눈에 띄워줘.’ 그 동안 나노 머신의 능력 사용법을 많이 숙지한 천여운이 능숙하게 명령을 내렸다. [사용자의 시각 정보에 증강현실(增强現實) 개안(開眼) 가동.] 천여운의 동공이 미세하게 떨리며 시야로 흰 빛의 선들이 생겨나며 증강현실이 개안되었다. 이어서 나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스캔한 검흔을 3D(Three D imensions, 3차원) 입체 영상으로 구현합니다.] -솨아아아! 그러자 석면에 있던 수많은 난잡한 검흔들이 천여운의 시야로 개안된 증강현실을 통해 허공에 흰 빛의 입자들이 선을 그리며 세밀한 입체영상으로 구현 해냈다. 오직 그의 눈으로만 보이는 신비로운 세계였다. ‘아아!’ 그냥 비석을 보았을 때는 몰랐는데, 입체영상으로 구현된 무수히 많은 검흔들에는 들어간 힘이나 찌르고 벤 각도가 천차만별이었다. 그러나 얼핏 보아서는 이 검흔들이 두 사람의 흔적으로 구분하기 힘들었다. ‘검흔들을 일부러 가린 건가?’ 원래 그어져 있던 검흔의 위에 자신의 검흔을 난잡하게 그어서 원래의 것을 가린 것으로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 것일까? ‘어쩌면 누군가의 심득을 지운 것이 아닐까?’ 천여운의 심장이 떨려왔다. 바보가 아닌 이상 청옥석 비석의 앞면에 시조를 남긴 사람이 천마 조사라면 가려진 검흔의 주인이 누구인지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만약 난잡하게 그려진 검흔들 사이에 숨겨진 것이 마교의 개파조사이신 천마 조사가 남긴 것이라면 그 심득이 담긴 검초일 확률이 높았다. ‘나노! 두 사람의 검흔을 구분할 수 있다고 했지? 가장 먼저 새겨진 것만 남기고 다른 사람이 그었다는 검흔들은 모두 지워봐.’ [알겠습니다.] -솨아아아! 천여운의 동공이 흔들리며 허공에 떠있던 무수한 검흔들이 사라져갔다. 난잡했던 검흔들이 사라지자 뚜렷한 형태로 몇 개의 검흔들 만이 허공에 흰빛으로 남게 되었다. 그 검흔들을 바라보는 천여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노 머신의 능력이 눈으로 개안될 때처럼이 아닌 정말로 놀라서 일어나는 반응이었다. ‘거, 검 초식이다.’ 천여운은 눈앞에 떠있는 검흔들이 단순한 흔적이 아님을 알아챘다. 그것은 무수한 식으로 이루어진 검 초식이었다. 단순하게 검을 휘둘러서 난 흔적이라면 아무렇게나 그어져 있겠지만, 허공을 수놓고 있는 검흔들은 일정한 규칙과 다른 동작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검 초식인 것은 알겠지만 이렇게만 봐서는 전혀 알 수 없어.’ 천여운은 아직까지 깨달음이 부족하여 검흔들을 분석할 능력이 되지 않았다. 무공이 높은 경지에 이른 고수들은 상대방이 남긴 초식의 흔적들을 심상(心象)으로 떠올려 분석할 수 있다. 하지만 천여운에게는 먼 미래의 기술을 가진 나노 머신이 있었다. ‘나노, 검흔들을 분석해서 이것을 남긴 사람이 했던 동작들을 입체영상으로 구현해낼 수 있어?’ [가능합니다. 그 전에 검흔을 남긴 객체의 힘의 강도를 알아내기 위해 청옥석의 경도를 알아야 합니다.] 나노 머신인 나노는 청옥석 석면에 새겨진 정보를 분석하여 입체영상으로 구현해냈지만, 정확한 동작을 구현해내기 위해서는 청옥석의 경도를 통해 그 단단함을 알아야만 검 초식을 펼쳤을 때 어느 정도의 물리적인 힘이 작용했는지를 알아내는 것이 가능했다. ‘부수거나 그러라는 말은 아니지?’ 천여운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초절정의 내공을 지닌 고수들조차도 검을 들어야만 흔적을 낼 수 있는 청옥석을 맨손인 천여운이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더군다나 청옥석의 앞쪽에는 이곳을 지키는 턱수염의 중년인이 앉아 있었다. [손바닥 전체를 석면에 접촉하시면 분석이 가능합니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천여운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청옥석의 뒷면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그러자 손바닥에 안에서 무수하게 많은 개미들이 움직이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지며 짜릿해져왔다. [경도 조사를 마쳤습니다. 초고경도 금강석(다이아몬드)를 경도 10의 기준으로 잡아 청옥석은 7의 경도를 지녔습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단단한 물질이라 불리는 것이 바로 금강석이다. 이 금강석을 정제해서 더욱 단단하게 만든 것이 초고경도 금강석인데, 이것을 기준으로 칠의 경도를 지녔다는 것은 그야말로 엄청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아, 엄청 단단하네.’ 일반적인 옥도 금강석에 미치지 않지만 그 경도가 단단하니, 청옥석의 경도는 웬만한 고수들의 역량으로는 절대로 흠집조차 내기 힘들었다. 이 검 초식을 남긴 자의 내공 수위가 상상으로도 가늠하기 힘들다는 것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잠깐만......그럼 이걸 다른 검흔으로 가린 사람은 대체 뭐야?’ 앞의 검흔을 밝히는 것에만 집중하느라 몰랐는데, 이것을 가린 자의 내공 역시도 먼저 검흔을 남긴 자와 비교해도 그리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의아해하는 천여운의 머릿속으로 나노의 목소리가 울렸다. [경도 분석을 중심으로 검흔을 조합하여 동작들을 입체영상으로 구현합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증강현실에서 아바타가 생성되었던 것처럼 흰빛의 입자가 사람의 형태로 바뀌었다. 하지만 특정인으로 지정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형태를 한 흰빛이었다. 사람의 형태를 한 흰 빛이 검흔들로 이루어진 식들을 구현하기 시작했다. -촤촤촤촤촤촥! 순식간에 수많은 식으로 이루어진 화려한 검 초식이 허공에 빛의 선을 그리며 펼쳐졌다. 그것은 너무도 빠르게 지나가 찰나에 불과했다. 수많은 식들이 검흔들이 남아 있어서, 적어도 몇 초식은 되리라 생각했지만 입체영상으로 구현된 검 초식은 오직 한 초식이었다. ‘이.....이게....무슨!’ 이 광경에 천여운의 눈이 커지다 못해 입이 벌어졌다. 아직까지 단검비술과 접무도법 외에는 다른 무공을 배우지 않은 그였지만 한 눈에 방금 구현된 초식이 온몸에 전율이 흐를 만큼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말도 안 돼.’ 천여운의 이마에 어느새 땀방울이 맺혀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 엄청난 초식을 보는 순간 천여운은 자신도 모르게 접무도법을 떠올리며 이것을 파훼할 수 있을까 마음속으로 수많은 초식과 보법을 통한 변수를 생각했지만 어떤 식으로든 초식을 파훼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야말로 절세 검초였다. ‘나.....나노, 이게 한 초식이야?’ [모든 식의 동작이 연결되는 것으로 분석되었습니다. 주인님이 익히신 무공이라는 것을 기준으로 본다면 한 초식이 맞습니다.] 천여운은 큰 충격을 받았는지 심장이 빠르게 뛰고 다리마저 후들거렸다. 그 만큼 이 초식은 전율적일 만큼 완벽했다. 잠시 멍해졌던 천여운이 이내 금방 정신을 차리고는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다른 초식들은 없는 게 틀림없어?’ [남겨놓은 검흔들을 분석한 결과 한 초식이 틀림없습니다.] 천여운이 이런 질문을 한 것에는 나름이 이유가 있었다. 그가 익힌 접무도법은 스물네 개의 식으로 이루어졌다. 그 식들 중에 세 개의 식들이 이어져서 하나의 초식을 이룬다. 접무도법의 마지막 초식만은 비기로써 여덟 개의 식으로 이루어지는데, 우호법 섭맹조차도 이것을 익히는데 반 년이 걸렸다고 할 만큼 복잡하면서 고절하다. 천여운은 나노가 전이를 해주었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이 익혔지만 그 역시도 마지막 초실을 펼치고 나면 전신의 근육이 욱신거릴 정도였다. ‘스물네 개의 식이 한 초식으로 펼쳐지다니. 이게 절세절초라는 건가.’ 검흔의 초식은 스물네 개의 식이 하나의 초식으로 구현된다. 그리고 이 복잡하면서도 엄청난 검 초식은 전율적인 위력으로 상대의 초식을 파훼하고 굴복시킨다. ‘만약 이런 게 하나가 아니라면?’ 한 초식만으로도 절세초식이라고 하나, 검 초식이 하나로만 이루어질 리는 없었다. 천여운은 이 비석이 어쩌면 하나가 아닐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노. 방금 검 초식 스캔 저장해놔.’ 천여운은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나노에게 명했다. [알겠습니다.] 심정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이 초식을 배우고 싶었지만 촛불의 선을 살펴보니 이제 일각 정도밖에 시간이 남지 않았다. 어차피 머릿속으로 전이해도 육체로 전이하는데 시간도 걸리니 조급할 필요는 없었다. 일 층 서재에서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기연을 만난 것에 기쁨으로 가득 찬 천여운이 입 꼬리가 활짝 벌어져서 생각했다. ‘후후후, 하마터면 난잡하게 가려놓은 검흔 때문에 보물을 놓칠 뻔 했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악의적인 자로구나. 하긴 그 덕분에 나만이 검 초식을 얻었으니 이자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청옥석 비석에 가려진 난잡한 검흔이 아니었다면 누군가는 이 검 초식을 발견했을 지도 몰랐다. 천여운에게 나노 머신이 없었다면 절대로 이 절세검초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야말로 기연이라 할만 했다. 그때 천여운의 머릿속에 나노의 목소리가 울렸다. [입체영상에서 지운 난잡한 검흔들을 분석한 결과 일정한 동작이 연결된 검 초식 마흔다섯 개가 발견되었습니다.] ‘뭣?’ 나노의 말에 놀란 천여운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어 반문 할 뻔했다. 청옥석에 흔적을 남긴 것은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냥 단순하게 검 초식을 가리기 위한 난잡하게 그은 검흔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그였다. [마흔다섯 개의 검 초식들을 분석한 결과 시간 경과에 따라서 새겨졌습니다.] ‘한 번에 새긴 게 아니라고?’ 난잡하게 새겨진 검흔들은 한 사람이 새긴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은 한 번에 새긴 것이 아니라 하나씩 시간이 걸려서 새긴 검흔들이었다. 천여운은 나노가 한 말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일부러 가린 게 아니라 이게 전부 검 초식들이라고? 그렇다면 대체 왜?’ 잠시 동안 깊은 고민에 빠져 있던 천여운이 뭔가를 깨달았는지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나노에게 명을 내렸다. 남은 일 각 동안에 서적을 스캔하는 것은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 ‘나노.....마흔다섯 개의 초식들을 순차적으로 입체영상으로 구현해줘.’ [알겠습니다. 마흔다섯 개의 검 초식들을 입체영상으로 구현합니다.] -솨아아아아! 그 말과 함께 아까 전과 마찬가지로 증강현실에서 흰빛의 입자가 사람의 형태로 바뀌어서 순차적으로 마흔다섯 개의 초식들을 구현하기 시작했다. -촤촤촤촤촥! 앞서 펼쳤던 절세의 초식들과 마찬가지로 초식들은 순식간에 하나씩 흰 빛의 선의 입자를 그리며 빠르게 펼쳐지며 이어졌다. ‘뭐지?’ 검 초식이 순차적으로 이어지면서 천여운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어가고 있었다. 첫 번째에서 열 번째, 스무 번째, 서른 번째로 갈수록 천여운은 표정뿐만이 아니라 눈동자마저 흔들렸다. ‘이럴 수가......초식들이 점점 완벽해지고 있어!’ 놀랍게도 입체영상으로 구현되고 있는 초식들은 점차 완벽하게 바뀌고 있었다. 스무 번째에 펼친 초식만으로도 매우 뛰어났는데, 마흔 번째를 지나자 검 초식의 수준이 앞에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해졌다. 그리고 마지막 마흔다섯 번째 초식을 마치는 순간 천여운의 얼굴은 땀방울들로 범벅이가 되어 있었다. [입체영상 구현이 완료되었습니다.] ‘으응?’ 땀을 흘리며 멍하게 있던 천여운이 나노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주르륵! ‘아....땀을 흘렸나?’ 아직도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천여운은 떨리는 손으로 얼굴에 흐르는 땀방울들을 소매로 닦았다. 충격이 컸는지 입안의 침도 메말랐다. 천여운은 방금 전에 초식들을 바라보며 설마설마 하며 고민했던 바를 확인하기 위해 나노에게 명을 내렸다. ‘나노, 아까 전에 먼저 저장했던 검 초식의 입체영상과.....방금 전 마흔다섯 번째 검 초식 입체영상을 서로 겨루게 할 수 있어?’ [가능합니다. 두 검 초식 동작을 배틀 모드로 입체영상을 가동하겠습니다.] -솨아아아! 그 말과 함께 이번에는 흰 빛의 입자가 반짝이며 두 개의 사람의 형태로 나누어졌다. 두 흰빛의 형태로 이루어진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하더니 이내 서로 다른 두 검 초식을 펼치기 시작했다. -촤촤촤촤촥! 두 검초식이 부딪치자 하얀 입자들이 사방으로 튀며 눈이 부셨다. 증강현실을 통해 구현한 입체영상들의 양대 초식의 대결은 너무도 순식간에 결판이 났다. 그 결과는 너무도 놀라웠다. 천여운이 파르르 떨리는 눈으로 어이가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파훼....됐어.” 석면을 난잡하게 만들었던 마흔다섯 번째로 펼쳐 쳤던 검 초식이 그렇게나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가장 안쪽에 새겨져 있던 전율적인 검 초식을 단 일 식 차이로 모든 식을 파훼하고는 입체영상의 목을 베어냈다. 11장 마도관의 비급 서재(4) 청옥석의 석면 뒤쪽에 숨겨진 절세초식. 그것은 천여운에게 전율과 기쁨을 동시에 가져다주었다. 어쩌면 이 절세초식은 마교의 개파조사인 천마 조사가 심득으로 남긴 검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입체영상 구현을 통해 두 초식의 대결을 보며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완벽하다고 생각한 초식을 파훼한 것이었다. ‘단순히 앞에 초식을 지우려고 했던 흔적이 아니었어......’ 청옥석 뒷면을 가득 메운 검흔들. 이것은 천여운이 완벽하다고 생각한 절세초식을 파훼하기 위한 오랜 연구 과정이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워낙 많이 흔적들이 중구난방으로 겹쳐서 그어져 있었기 때문에 검흔으로 보기 힘들었고, 천여운 역시도 나노의 분석이 아니었다면 난잡하게 그어진 흔적으로 치부했을 지도 몰랐다. ‘이걸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다니.’ 절세초식과 그 절세초식을 연구 끝에 파훼하고 만 절세초식. 그야말로 기연을 이은 기연이라고 할 수 있었다. 충격의 여운이 어느 정도 가시자 천여운은 상기된 얼굴로 얼른 나노에게 명했다. ‘나노, 마흔다섯 개의 초식들 전부 스캔해서 저장해놔.’ [알겠습니다.] 삼류무공뿐인 일 층 서재 안에서 큰 수확을 거둔 천여운은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턱수염의 중년인이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이채를 띠며 말을 걸었다. “응? 자네 책을 읽고 있던 것이 아닌가?” “아....그게...” “오호, 비석의 뒷면도 보았구먼. 꽤 난잡하지?” 오랜 세월 동안 이곳 일 층 비급 서재에서 근무해온 턱수염의 중년인이 청옥석의 뒷면을 보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중년인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참 안타깝지 않나? 예전에 이 비석 뒤쪽에 천마 조사님의 심득이 담긴 검법이 있다는 소문들이 파다했었지.” “천마 조사님의 심득이요?” 천마 조사의 심득이 담긴 검법이라는 말에 천여운의 눈빛이 반짝였다. 하지만 턱수염의 중년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청옥석의 뒷면에 있는 난잡한 검흔들을 만지며 안타깝다는 투로 말했다. “누가 이랬는지는 모르겠으나, 뒷면을 이렇게 훼손시켜놔서 쯧쯧. 어쩌면 혼자서 조사님의 심득을 독식하려고 그랬을지 모르겠네. 그려.” 턱수염 중년인의 말에 천여운은 내심 놀라했다. 그래도 오랜 세월 동안 이곳에서 근무한 절정의 고수라면 유심히 검흔들을 살펴봤을 텐데, 이것을 그저 난잡하게 훼손시켜놨다고 치부하고 있었다. ‘이 흔적들을 단순히 훼손으로 생각하는 건가?.....이래서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구나.’ 여기서 천여운이 한 가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누군가의 검흔 만으로 심상을 떠올려 검 초식을 알아내려면 적어도 그 검흔을 남긴 검법을 이해할 만큼의 경지에 오른 검사만이 이를 파악할 수 있다. 청옥석 벽에 있는 두 개의 절세검초는 우호법 섭맹이 본다고 해도 알 수 없을 만큼 까마득히 높은 수준이었다. 문득 궁금하게 생각이 난 천여운이 조심스럽게 중년인에게 물어보았다. “혹시 일 층에만 청옥석 비석이 있는 겁니까?” 중요한 질문이었다. 고작 일 층에 있는 청옥석 비석에 숨겨진 초식은 불과 한 초식이었으니 말이다. 만약 자신이 이 심득을 남긴 사람이라면 하나의 비석이 아닌 여러 개로 나누어서 검흔을 남겨놨을 확률이 높을 거라 생각했다. 천여운의 물음에 턱수염의 중년인이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했다. “나는 일 층에서만 근무를 해서 잘은 모르겠다만. 아마 듣기로는 매 층마다 있는 것으로 알고 있네.” 그 말에 천여운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아...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고개를 끄덕이던 천여운이 문득 촛불을 바라보니 반 각 정도밖에 시간이 남지 않았다. 입체영상을 통해서 초식을 보느라 일부 시간을 잡아먹었다. 하지만 마음이 그리 조급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지금까지 스캔 했던 모든 삼류 비급서의 무공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절세초식을 얻었으니 말이다. “후후, 얼마 남지 않았나 보군. “저도 모르게 한 눈을 팔다가 그렇게 되었네요.” 빙그레 웃으며 담담하게 답하는 천여운의 모습에 턱수염의 중년인이 뭔가 마음에 들었는지 서고의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에 있는 원(原)이라고 적혀 있는 책장의 책들을 살펴보게. 이곳 일 층에는 그렇게 쓸모 있는 무공은 없지만 그나마 읽어보면 꽤 도움이 될 만한 책들이 있을 걸세.” “아!” “의아해하지 말게. 자네의 소중한 시간을 잠시 빼앗은 것에 대한 작은 조언일 뿐이니. 후후후.” 그 말과 함께 턱수염의 중년인은 천여운을 격려하듯이 어깨를 툭툭 치고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친절하게 자신을 배려해준 턱수염의 중년인에게 천여운이 목례가 아닌 포권을 취하고는 그가 가리킨 방향의 책장으로 가보았다. 책장의 위쪽에 근원 원(原)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아!” 그곳에 있는 책들을 살펴보니 단순한 삼류 비급서가 아닌 검법, 도법, 창법 등과 같은 무공들에 대한 기본적인 분석과 그것을 설명하는 해설집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천여운의 눈에 띈 것은 내공원류(內攻原類)라고 적힌 서책이었다. ‘나노, 내가 훑어보면 바로 스캔해.’ [알겠습니다.] 천여운은 다른 책자들과 다르게 내공의 원류는 가볍게 훑어보며 그 내용들이 살펴보니, 자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토납법과 내공에 관련된 기본 뿌리를 설명한 책이다. 이걸 분석하면 심법을 좀 더 가다듬을 수 있지 않을까?’ 나노의 프로그램을 중에는 연구 분석을 위한 것들이 많다. 이것을 이용해서 내공의 근본을 분석한다면 지금보다 심법을 개발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남은 반각의 시간을 천여운은 원(原)이라 적혀 있는 책장에 꽂혀 있는 서책들을 스캔하는데 전부 사용했다. 사실 턱수염의 중년인은 반각 정도의 시간 밖에 남지 않았기에 다른 비급서들을 외울 시간이 없을 것 같아, 천여운이 좀 더 자신의 무공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게 이 서책들을 가볍게 읽어보라고 알려준 것이었다. 하지만 훗날 이것은 천여운에게 자신만의 무공을 완성하는데 큰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가 된다. “흠, 시간에 늦지 않았군.” 마도관의 비급 서재 건물의 입구 밖에서 방명록을 작성하는 무공 교두가 천여운의 초를 살펴보며 말했다. 아슬아슬하게 선에 닿지 않게 시간을 맞췄다. “가보도록.” 시간을 준수한 것을 확인한 무공 교두가 말했다. 하지만 천여운은 일 층을 열람한 것만으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당장 이 층으로 가서 확인하고 싶은 것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 층도 곧바로 열람하고 싶습니다만.” “뭣?” 방명록을 작성하는 무공 교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보통은 한 층의 비급 서재를 열람하고 나면 외었던 것을 돌아가서 필사하느라 바삐 돌아가는데, 천여운은 당장 이 층으로 가겠다고 하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 녀석 일층의 무공들이 전부 허접하다고 그러는 건가?’ 생각해보니 일 층에는 사실 삼류 무공의 비급서 외에는 별다른 것이 없었다. 자신이 생도라고 가정해보니, 더 뛰어난 무공을 가지고 있다면 굳이 삼류 무공의 비급서를 애써 필사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도 들긴 했다. 그렇게 결론 내린 무공 교두가 이층 방명록을 폈다. “.....적어라.” “네.” 앞 서 일 층으로 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두 개의 초를 받았다. 초 밑의 선이 좀 더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한 시진하고도 반 동안 열람할 수 있으니, 지금처럼 시간에 맞춰서 오도록.” “알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천여운은 경쾌한 발걸음으로 초 하나에 이름을 적고서 방문함에 불을 붙여놓고, 원통을 받아서 입구로 들어갔다. 입구 쪽에서 일층 비급 서재로 들어가기 전에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계단의 입구 쪽에는 위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감시하는 무사가 있었는데, 천여운의 초를 확인하고는 길을 내주었다. 둥글게 위로 올라가는 계단을 따라서 올라가니 이 층 비급 서재의 입구가 보였다. 이층 비급 서재는 일 층 보다는 규모가 조금은 작아졌다. 그런 서재 안에는 수많은 생도들이 바닥에 앉아서 옆에 초를 담은 원통을 내려놓고 무공 비급서를 들고 외우는 모습이 보였다. ‘아. 아직 끝나지 않았구나.’ 이 층에 있는 생도들은 천여운과 비슷한 시간에 올라가서 반 시진 정도 열람 시간이 남아있었다. 이 층 비급 서재에는 일층보다 높은 수준인 이류 무공의 비급서들이 책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종파의 사람들에게는 이런 비급서들이 큰 의미가 없지만 무가 집안의 생도들은 이류 무공 역시도 큰 도움이 되었기에 눈에 불을 켜고 외우는 중이었다. ‘아!’ 천여운의 눈에 의외의 인물이 띄었다. 그는 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유찬이었다. 다른 소교주 후보자들이 자신들이 가진 종파의 무공을 과신해서 이 층 서재를 찾지 않은 것에 반해서, 그는 한 책장 앞에 앉아서 여러 도법에 관련된 비급서들을 쌓아놓고 탐독하고 있었다. ‘다른 녀석들보다 더 조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스스로의 무공을 과신하는 자들보다 낮은 무공이더라도 연구하고 부지런하게 실력을 쌓는 자들이 더욱 위험하게 느껴졌다. 천여운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른 생도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조용한 걸음으로 이 층 서재의 오각의 중심부를 향해 걸어갔다. ‘있다!’ 천여운의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제발 있기를 바랐는데 그의 그런 바램을 들어주기라도 하듯 서재의 중심부에는 청옥석으로 된 비석이 우뚝 서있었다. 그 옆에는 의자가 놓여 있었는데, 일 층에 있던 턱수염의 중년인과 달리 이 층 서재를 지키는 푸른 비단 옷의 중년의 무인은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다른 경비들과 함께 생도들이 필사를 하는 것을 감시하고 있었다. 천여운은 시조가 적혀 있는 앞쪽이 아닌 청옥석 비석의 뒤쪽으로 돌아갔다. ‘아! 역시다.’ 탄성이 흘러나올 뻔했다. 청옥석 비석의 뒤쪽 석면에는 일 층 서재에서 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난잡한 검흔들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이를 바라보며 천여운이 나노에게 명령을 내렸다. ‘나노, 밑에서 층에서 했던 것처럼 석면을 스캔해서 검흔들을 분석해봐.’ [알겠습니다.] 천여운의 동공이 빠르게 흔들리며 흰 빛이 스쳐지나가며 눈앞에 있는 검흔들을 분석했다. 찰나의 순간에 스캔을 완료한 나노가 이윽고 머릿속으로 말했다. [일 층의 청옥석과 같은 필흔이 발견되었습니다. 한 객체가 남긴 검흔은 총 스물 네 개의 식으로 만들어진 검 일 초식입니다. 다른 객체가 시간을 경과해서 남긴 검흔은 쉰여섯 개의 검 초식이 새겨져 있습니다.] 앞에서의 분석 정보가 있어서 그런지 나노 역시도 빠르게 분석해냈다. ‘밑에는 마흔다섯 초식이었는데, 이번에는 쉰여섯 개로 늘어났다.’ 아무래도 청옥석의 석면에 먼저 새겨진 초식을 파훼하기 위해 다른 객체라 명명된 자가 아래층에 있는 청옥석에서보다 더 많은 연구 과정을 거친 듯 했다. 밑에 층에서처럼 이번에는 어떻게 초식을 파훼했을지 입체영상을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어차피 원래의 목적이었던 이 층에도 청옥석 비석이 있고, 그 석면에 절세초식의 다음 초식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그것은 나중으로 미뤄도 되었다. 혼자서 멍하게 서서 증강현실을 개안하기에는 이 층 서재에는 보는 이목이 너무 많았다. ‘나노, 검 초식만 추출해서 전부 스캔 저장해.’ [알겠습니다.] 천여운의 명령에 나노는 밑에 층에서 했던 것처럼 빠르게 검흔의 식들을 초식화 하여 내장 프로그램에 저장하였다. ‘이로써 네 개의 초식을 얻었다. 흐흐흐.’ 일 층에서 연달아 이 층에서까지 절세초식을 얻게 된 천여운이 기쁜 얼굴로 촛불을 살펴보았다. 초는 아직까지 녹지 않은 상태였다. 일 층에서와 다르게 입체영상으로 구동하는 과정을 생략하고 나니, 고작 촌각에 불과한 시간 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거의 그대로네. 한 시진하고 반. 그래도 이류 무공의 서적들이라면 아래층보다 더 도움이 되는 것들이 많겠지?’ 그렇게 생각한 천여운은 큰 기연으로 인해 경쾌한 발걸음으로 책장으로 향했다. 수많은 책들이 있어서 어떤 것이 낫고 월등한 무공인지 구분할 수 없기에 닥치는 대로 스캔하는 것이 답이었다. ‘나노, 스캔 해.’ [알겠습니다.] 천여운은 빠른 속도로 책장의 비급서들을 빼서 훑어보았다. 나노는 그를 보조하듯이 한 권의 비급서를 완전히 덮을 때마다 스캔완료를 알렸다. 바야흐로 무한 스캔이 시작된 것이었다. [스캔이 완료되었습니다.] [스캔이 완료되었습니다.] 그렇게 천여운이 경이로운 속도로 이 층 비급서의 책들을 스캔하는 사이, 바닥에 앉아서 책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외우고 있는 생도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사그라라라라라라! 탁! -사그라라라라라라! 탁! -사그라라라라라라! 탁! 반복되는 빠르게 책을 넘기는 소리는 그들의 집중력을 흩어지게 만들었다. 필사를 감시하는 경비 무사들이 돌아다니는 발걸음 소리도 거슬리는 마당에 거의 최악이라고 할 만 했다. ‘이 녀석, 대체 뭐 하는 거야?’ ‘으으으!’ 한 권을 가만히 앉아서 정독해도 외울까 말까 한데,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책장에 있는 온갖 비급서를 꺼내서 훑어보기만 하니 어이가 없었다. 그렇다고 직접적으로 책을 외우는 것을 방해한 것도 아니니, 뭐라고 항의할 방도도 없었다. 그럴 시간이 있다면 한 자라도 더 외워야 했다. ‘그래. 이러면 안 돼! 집중하자! 집중하자! 저놈한테 신경 쓸 틈이 없다.’ 그들에게 남은 시간은 오직 반 시진이었다. -사그라라라라라라! 탁! ‘끄아아아아아아악!’ 천여운이 지나가는 길목에 앉아 있던 모든 생도들이 속으로 절규를 내질렀다. 12장 천마 조사의 심득(1) -사라라라라라라! 탁! 천여운이 책을 넘기는 소리 덕분에 많은 생도들이 괴로워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천여운은 그들이 열람 시간이 끝나기까지 반 시진 정도 남겼을 무렵에 서재로 들어왔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천여운이 스캔에 매진할 무렵 그를 유심히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그는 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유찬이었다. 도법에 관련된 비급서에 집중하고 있던 천유찬이었지만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수많은 책을 뽑아서 훑어보는 천여운의 모습에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흐음.’ 뭔가 그를 바라보는 눈빛이 다른 소교주 후보자들에 비해서 묘했다. 본의 아니게 민폐를 끼치며 책을 스캔하는 사이에 어느새 이 층을 가득 메웠던 생도들의 대다수가 열람시간이 끝나고 나갔다. 물론 그 사이에 여러 생도들이 들어왔지만 백여 명이 있을 때에 비하면 비교적 한적해졌다. [스캔을 완료했습니다.] [스캔을 완료했습니다.] [스캔을 완료했습니다.] 한 시진 반 동안 쉬지 않고 스캔을 하면서 계속해서 울리는 나노의 기계적인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반복적인 작업이었다. 촛불이 초에 그어진 선에 도달해갈 무렵 나노가 알렸다. [도합 백오십육 권의 스캔이 완료되었습니다.] 그것이 한 시진 하고도 반의 시간 동안 천여운이 이층 서재에서 스캔한 이류 무공의 비급서들의 숫자였다. 보통 생도들이 그 시간에 한 권에서 많아도 두 권 이내의 비급서를 외우는 사이에 천여운은 그들의 백배를 상회하는 숫자의 책을 스캔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충분하다 못해서 넘칠 만큼 비급서를 스캔했다. 정파 무림인들의 명숙이자 무림에서 가장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진 만박자 제갈현조차도 이류 무공에 비급서만큼은 천여운 만큼 알지 못할 것이다. 천여운은 그야말로 움직이는 서재와도 마찬가지였다. 마교에서도 상위 무공에 속하는 접무도법을 익힌 천여운이 이렇게 수많은 비급서를 스캔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나노, 오늘 스캔한 서적들을 전부 분석해서 프로그램 데이터에 저장해놔.’ [알겠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삼류, 이류 무공들을 닥치는 대로 익히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천여운의 스승인 우호법 섭맹은 의무실에서 마지막으로 접무도법의 초식을 보여준 후에 그에게 많은 조언을 남기고 떠났다. 그 중 하나가 경험의 중요성이었다. ‘본문의 접무도법은 감히 자부 하건데, 본교의 모든 무공을 통틀어서 열 손가락 안에 들거라고 자부한다. 클클,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무공을 익혔다고 우쭐해 해서는 안 된다.’ ‘네. 스승님.’ ‘네 오성이 뛰어나다고는 하나 제대로 무공을 익히기 위해서는 식과 초식을 수 백, 수 천 번의 반복과 연마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무공을 익히는 모든 무림인들이 가장 번거로워하고 힘들어하는 부분이 매일 같이 반복되는 연공 과정이었다. 하지만 천여운은 이런 연공과정을 나노의 전이 능력으로 과감하게 생략할 수 있었다. 무림인이라면 모두가 탐나고 부러워할 만한 능력이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경험이다. 본 스승님 역시도 무공을 배운 이래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만큼 수많은 적과 겨루고 생사를 다투면서 이렇게 무공을 완성해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마도관은 다양한 종파와 무가들과의 승부를 통해 경험을 쌓기 좋은 곳이다.’ 라고는 했지만 이 단계 시험까지는 협동을 요했기에 직접적으로 다른 종파의 생도들과 겨룰 일이 없었다. 더군다나 무공이 전무하다고 알려졌었던 천여운을 상대로 싸움을 걸어온 것은 오직 복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금뿐이었다. 덕분에 천여운이 유일하게 제대로 싸워본 상대는 천무금이 다였다. 이 대결을 통해서 경험의 중요성을 인지한 천여운은 부족한 경험을 채우기 위해 매 밤마다 증강현실에서 천무금의 아바타와 대결을 펼쳤다. 덕분에 초식을 다루는데 많이 익숙해졌지만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단 한 사람과의 반복적인 대결이었기에 천무금의 초식에만 익숙 되어 진다는 점이었다. 여기서 천여운은 나노의 기능을 통해 이 같은 점을 보완할 만한 방법을 떠올리게 되었다. ‘나노, 혹시 장 호위도 아바타로 생성할 수 있어?’ [가능합니다. 단검비술의 정보 분석이 완료되었기에 아바타로 생성할 수 있습니다.] ‘오!’ 그렇게 천여운은 장 호위의 아바타와 겨룰 수 있게 되었다. 천무금보다 무공이 낮은 장 호위였지만 생각보다 상대하기가 껄끄러웠다. 그것은 세 초식과 기본 식만으로 덤비는 천무금의 아바타와 다르게 장 호위의 아바타는 단검비술의 모든 초식을 활용했기 때문이었다. ‘잠깐만.....그렇다면 더 다양하게 해볼 수도 있는 거잖아?’ 이렇게 나노의 증강현실 능력을 더욱 활용하게 되면서 천여운은 한 가지 더 좋은 방법을 떠올리게 되었다. ‘내 생각대로만 된다면 더 다양하게 실전 경험을 쌓게 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서재의 일 층과 이 층에 있던 청옥석 비석에서 얻게 된 두 초식의 절세초식과 그것을 파훼하는 두 초식을 더 살펴보고 전이 받고 싶었다. ‘이크, 더 타기 전에 내려가자.’ 녹아내리는 촛농이 거의 선까지 도달해있었다. 천여운은 서둘러서 계단을 내려와 선에 방문록을 담당하는 무공 교두에게 초를 반납했다. 시간에 늦지 않은 것을 확인한 무공 교두가 방문록의 이름 옆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흠, 늦지 않았군. 가보도록.”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몸을 돌리려는데, 무공 교두가 중얼거리듯이 무언가를 말했다. “그러고 보니 언제 나오는지 묻던 것 같았는데?” “네?” “으음, 아니다.” 반문했지만 무공 교두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얼버무렸다. 말을 하다가 마는 것이 의아했지만 천여운은 ‘알겠습니다.’라는 대답과 함께 돌아섰다. ‘누가 나를 기다렸나?’ 누구인지 묻고 싶었으나 무공 교두의 태도를 보니 알려줄 것 같진 않았다. 궁금한 것도 잠시였다. 어서 빨리 개인 연공실로 가서 절세초식을 전이 받고 싶다는 열망이 강해진 천여운은 경쾌한 발걸음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서재에서 두시진 반이라는 시간을 소요하면서 비급 서재로 들어갈 때는 파랗던 하늘이 어둡게 물들어 있었다. 해정시(10시 30분)까지는 숙소로 돌아가야 하니 시간이 많지 않았다. 마도관의 본관의 우측 편에는 지하 층에서부터 이 층까지 되어 있는 넓은 직사각 형태의 건물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생도들이 사용할 수 있는 이백오십 호실의 작은 개인 연공실이 있었다. 입관식 때 마룡단을 지급하고 이틀 정도 잠깐 개방되었던 연공실이 이 단계 시험을 마치고나서 완전히 개방되었다. 많은 인원을 수용하는 개인 연공실은 넓지는 않지만 생도들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운기조식 및 가벼운 수련을 위한 공간이었다. 그 동안은 대규모의 생도들을 수용할 수 없었기에 조별 시험이 진행되는 이 단계 시험까지는 개방이 되지 않던 것이 오늘부터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천여운이 개인 연공실 건물의 입구 쪽에 도착하려던 차에 누군가 나타나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숙소에도 없고 계속 찾아다녔는데, 여기에 있었군. 칠.번.생.도.” ‘이 녀석은?’ 천여운의 눈에 이채를 띠었다. 그는 다름 아닌 육 조의 조장인 백팔 번 생도 하일명이었다. 하일명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보니 종일 천여운을 계속 찾아다니면서 벼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왜 날 찾은 거지?” 천여운의 질문에 하일명이 어이가 없다는 투로 말했다. “몰라서 묻는 거냐? 네 녀석이 내 조원들의 다리를 전부 병신으로 만들어 놓은 걸 내가 눈치 채지 못했을 것 같아?” 덕분에 하일명은 원래 자신이 계획했던 진형의 전략을 전부 포기하고 순전히 자신의 능력만으로 난관을 해쳐나가야만 했다. ‘하아.....바빠 죽겠는데.’ 천여운의 모든 신경은 하일명이 아닌 절세초식으로 가있었다. 이 단계 시험 때 왠지 귀찮은 적을 만들었다는 촉이 신기하게도 들어맞았다. 살기를 잔뜩 띠는 하일명의 날카로운 눈매를 보아하니 자신과 여기서 한 판 해볼 작정인 듯 했다. ‘약한 녀석은 아니다. 제대로 붙어야 하나.’ 하일명이 귀찮게 느껴졌지만 절대로 그는 약한 상대가 아니었다. 기습이라고는 하나, 소교주 후보인 천무금을 부상 입힐 만큼 뛰어난 무위를 지니고 있었다. ‘좋아.’ 어차피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상대를 도발해서 흩뜨려 놓는 편이 나았다. 천여운이 그를 향해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게 누가 자리를 비우라고 했나?” “아~! 누구 덕분에 말이지.” 예상과 다르게 하일명은 천여운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 있게 받아치면서 냉철한 눈빛으로 기수식을 취하고 있었다. ‘누구랑은 참 다르군.’ 천무금처럼 모든 사람이 쉽게 도발에 넘어가는 것은 아니었다. 하일명은 이미 이 단계 시험에서 모든 생도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절무도법의 고절한 초식을 펼치는 천여운을 보았었다. 더군다나 방심했다고는 하나 갈비뼈에 금이 갔기 때문에 전투에 있어서 매우 신중했다. ‘제대로 붙어야 겠군.’ 상대가 냉철하게 나오자 천여운의 눈빛도 진지해졌다. 천여운도 손바닥을 펴서 도날과 같은 형태를 갖추고 기수식 자세를 취했다. 서로의 허점을 탐색하며 초식을 펼치기 전의 긴장감이 형성되려고 하던 찰나였다. “어이!” 누군가가 부르는 목소리가 개인 연공실 건물 쪽에서 들려왔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기에 천여운과 하일명은 그 목소리에 반응하지 않고 상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타탁! 그때 가볍게 발바닥이 튀는 소리와 함께 그들을 불렀던 목소리의 주인이 서로가 대치해 있는 한 가운데에 끼어들었다. “뭐야!” 천여운의 허점을 탐색하던 하일명이 짜증스러운 듯이 외쳤다. 반면 천여운은 중간에 개입한 자의 얼굴을 보자 경계심이 가득 찬 표정이 되었다. 그는 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유찬이었다. “하하하, 집중력들이 좋은데.” 갑자기 나타난 천유찬은 넉살좋게 웃으면서 그 시선을 천여운에게 향하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아하니 마치 기다렸다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천여운을 향해서 미소를 짓던 천유찬이 고개를 돌려서 하일명을 향해 말했다. “미안한데, 아까 전부터 꽤 기다려서 말이야. 먼저 양보해줄 수 없을까? 잠깐이면 되는데. 이렇게 부탁할게!”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살짝 숙이는 것이 아닌가. 어떠한 소교주 후보자들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태도가 가벼운 느낌 마저 주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하일명이 어이가 없다는 투로 말했다. “나도 이 녀석을 종일 찾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양보를 하란 소리냐. 괜히 짜증나게 하지 말고 꺼져라.” “그래? 흐음 어떡하지? 일부러 보고 싶어서 이렇게까지 기다렸는데.” 천유찬은 화를 내는 하일명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의 할 말만 해댔다. 천여운의 도발에도 넘어가지 않던 하일명이 더는 참을 수 없었는지, 기습적으로 신형을 날리며 천유찬을 향해 손가락으로 검지(劍指)를 만들어 검초를 펼쳤다. -솨아아아! 손가락으로 만든 검지였음에도 불구하고 검초에서 강한 기세가 느껴졌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파파파팍! 기습적인 하일명의 검 초식을 천유찬이 가벼운 몇 식으로 막아내더니, 이내 천유찬의 손날이 날카로운 도처럼 그의 우측 목에 닿기 전에 멈췄다. 진짜 도였다면 그대로 휘둘렀으면 목이 떨어져나갔을 것이다. “이....이게....” 자신의 목에 닿을락 말락 하는 그의 손날을 보며 하일명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하일명을 향해 천유찬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양보해줄 거지?” 12장 천마 조사의 심득(2) ‘단순한 식만으로 초식을 파훼하다니?’ 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천여운은 경계심을 떠나서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 동안 증강현실을 통해서 대련을 하면서 안목이 넓어진 그였다. 여러 번의 대결도 아닌 처음 보는 초식을 단순한 식만으로 파훼한다는 것은 압도적인 실력 차이가 없다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젠장!’ 당사자인 하일명은 더욱 어이가 없었다. 제대로 된 자세도 갖추지 않은 상대에게 제압당했으니 말이다. 그런 그를 향해 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유찬이 빙그레 웃는 얼굴로 말했다. “오른쪽 발을 내딛고 나서 말이야. 오른팔이 살짝 경직되고 검지를 내지를 때 균형이 어긋나는 것 같았는데, 오른쪽 갈비뼈 쪽에 부상이라도 입었나봐?” 하일명의 눈이 큼지막하게 커졌다. 단순히 초식을 펼치는 동작을 보고서 부상을 알아냈다. ‘이놈.....절대 생도 수준이 아니야.’ 절대 운으로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정상적인 몸 상태로도 천유찬을 이길 수 있을지 의문이 들 만큼 격차가 느껴졌다. 심각해 하는 하일명과 달리 천유찬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어때? 양보해줄 수 있어?” “칫.” 하일명이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존심을 살릴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자 하일명의 오른쪽 목에 대고 있던 손날을 다시 회수하는 천유찬이었다. “잠깐이면 되니까. 여기서 기다려.” “......됐다. 나는 숙소로 가볼 거니까 잠깐이든 말든 네 맘대로 해라.” 그 말과 함께 하일명은 인상을 굳히며 경공을 펼쳐서 숙소 방향 쪽으로 가버렸다. 자존심에 금이 갔기 때문에 더 이상 천여운을 상대하고픈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에고. 급한 녀석이네. 하하하핫.” 멋쩍었는지 천유찬이 머리를 긁적이면서 천여운에게로 다가왔다. 천여운의 눈빛이 경계심으로 가득해졌다. 복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금 이외에 직접적으로 자신에게 접촉해온 여섯 종파의 후보자는 천유찬이 처음이었다. ‘사전에 나를 제압하려는 건가?’ 만약에 자신이 성장하기 전에 미리 밟으려고 하는 목적이라면 꽤나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할 지도 몰랐다. 방금 전에 하일명을 제압하는 모습에서 아직은 순수한 실력만으로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여실히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긴장감으로 가득 찬 천여운이 속으로 나노에게 명했다. ‘나노, 증강현실 개안. 전투 튜토리얼 모드. 설정 접무도법.’ [사용자의 시각 정보에 증강현실(增强現實) 개안(開眼) 가동. 전투 튜토리얼(tutorial)을 통해 행동지시 모드를 가동합니다. 설정 무공 접무도법.] 천여운의 동공이 빠르게 흔들리며 흰 빛이 스쳐지나가며 증강현실이 개안되었다. 흰 빛의 입자가 선을 그리며 눈앞으로 걸어오는 천유찬의 정보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만반의 준비를 마치는 천여운에게 천유찬이 양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워워워, 왜 그렇게 경계심이 가득해?” ‘응?’ 적의가 없는 말투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여섯 종파 중의 하나인 도마종의 후보자인 천유찬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자 천여운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이 되었다. “하긴, 네 입장에서는 당연한 건가?” 천유찬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도대체 무슨 의도인지 알 수가 없기에 천여운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게 무슨 용무인거지?” “용무라기보다는 흠.....우리 같은 아버지를 둔 배다른 형제끼리의 첫 대면을 위함이랄까?” 그 말과 함께 천유찬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어보였다. 이에 충격을 받은 것은 천여운이었다. 지금까지 여섯 종파의 사람들에게 천한 핏줄의 소생이라며 온갖 멸시를 당해왔는데, 처음 만나는 천유찬이 자신을 배다른 형제라고 표현한 것이었다. ‘.......지금 나를 놀리는 건가?’ 천여운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의심될 수밖에 없었다. 천유찬은 그런 천여운을 향해서 여전히 웃는 얼굴로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반갑다. 형제.” 형제라는 표현에 천여운의 눈빛이 오히려 경계심에서 오히려 노기가 서렸다. 어떤 식으로 웃으면서 포장을 해도 좋게 들리지 않았다. “으음, 너무 미움 받는 건가?” 그런 천여운의 눈빛을 읽었는지 천유찬이 포권을 풀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 동안 여섯 종파에서 그에게 어떠한 짓을 해왔는지 알기에 이해할 수 없지 않았다. “뭐 네가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게 당연하지.” “.....내게서 좋은 태도라도 바란 거냐?” “아니. 아니야. 단지 우리 사이에 첫 만남은 좋게 해두고 싶었거든. 왜냐하면 나는 네가 좋아졌으니까.” “뭐?” 천여운이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이젠 하다하다 못해 좋아한다는 말을 하니 어이가 없었다. 그런 천여운의 반응이 재밌기라도 한지 천유찬이 히죽 웃으면서 말했다. “우린 같은 도(刀)의 길을 걷고 있잖아.” “......고작 그런 이유로 내가 좋아졌다는 거냐?” “당연한 거 아니야? 나는 네가 음마종의 그 아이의 팔을 도법으로 베었을 때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데.” 아직도 그 모습이 잊혀 지지 않는다며 주절주절 말을 하는 천유찬이었다. 모두가 천여운이 펼친 고절한 도초에 경계심을 가졌을 때, 그는 모두와는 전혀 상반된 생각을 했던 모양이었다. “후후후, 네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구. 형제.” “부담스럽게 계속 형제라고 지껄이지 말고 진짜 목적을 말해라.” 여전히 경계심이 가득 찬 천여운의 태도에 천유찬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에휴, 어쩔 수 없지. 뭐.....친해지는 거야 좀 더 시간이 지나야 할 것 같으니 본론만 말할게.” ‘역시 목적이 있었구나.’ 어머니인 화 부인의 임종 때조차도 내공을 익히지 마라는 말도 안 되는 맹약까지 하게 만든 여섯 종파였다. 지금에 와서 어떤 말을 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두 말하지 않을게. 형제. 도마종으로 들어와라.” 천유찬의 뜻밖의 제의에 천여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놀랐어? 하긴 놀랄 만도 하지.”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 “당연한 거 아니야. 내가 비급서재 밖에서부터 지금까지 기다리면서 하는 소리인데. 농담 같았어?” 그러면서 천유찬이 손사래를 쳤다. 그는 진심으로 천여운에게 도마종으로 들어오라고 제의하는 것이었다. 천유찬은 계속 해서 말을 이어갔다. “다른 녀석들은 모르겠는데, 나는 너를 적으로 생각하지 않아. 네가 도마종으로 들어와서 내 옆을 지켰으면 좋겠어.” ‘이 자식......’ 그제야 천여운은 그가 무슨 의도로 제의를 한 건지 이해할 수 있었다. 천유찬은 그에게 소교주 쟁탈전에 빠지고 자신의 수하가 되라고 말을 하는 것이었다. 좋게 포장은 했지만 분명 의미는 같았다. “내게 소교주 쟁탈전을 포기하라고 하는 거냐?” “아아! 그게 그렇게 들렸어? 하하하하핫.” 무안하다는 듯이 웃어대던 천유찬이 소리 내서 웃던 것을 멈추고 조금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겐 무리야.” “......그게 무슨 의미지?” “들리는 그대로야. 네가 도의 길을 걷는다면 필시 나와 부딪칠 텐데. 네게는 가능성이 없어. 하지만 나는 네 열렬한 지지가 되었거든. 우리가 같은 방향으로 나란히 걷는다면 네 앞길은 탄탄대로를 걷게 될 거야. 멋지지 않아?” 손바닥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상상해보라고 말하는 천유찬의 광대 같은 행동에 천여운은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확실하게 짐작할 수 있었다. 호적수는커녕 잘해봐야 수하 정도 수준으로 생각하는 것이었다. ‘아직까지 나를 적수로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건가.’ 모두의 앞에서 자신의 향상된 실력을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천유찬은 그의 그릇을 낮게 평가했다. 그것이 천여운의 마음속에 지금까지보다도 더 큰 불씨를 지폈다. 여기서 굴복하느냐 아니면 강한 의지를 보이느냐가 앞으로의 좌우를 판가름하는 갈림길일 것이다. “거절한다.” “뭐?” 천여운의 단호한 한 마디는 신나서 주절주절 거리던 천유찬의 행동을 멈추게 만들었다. “네 그릇으로 나를 담기에는 무리다.” “응?” “이번에는 반대로 내가 제안하겠다.” “네가 제안하겠다고?” 천여운의 당돌한 말투에 천유찬이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내 앞 길을 막지마라. 그렇다면 목숨만은 부지하게 해주마.” 그 순간 천유찬의 얼굴에서 지금까지 보였던 여유로움과 경박함, 그리고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방금 전과 같은 사람이라고 믿기 힘들만큼 무섭게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 모습이 마치 흉신악살과도 같았다. 그러자 천여운의 시야로 흰빛이 빠르게 선을 그리며 천유찬의 오른팔과 손 위로 흰 빛으로 된 숫자가 생겨나며 빠르게 상승하기 시작했다. 나노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적의 오른팔로 빠르게 강한 에너지가 집중되고 있습니다. 왼쪽으로 반보 회피해서 접무도법의 제 이 초식 회원접경(回圓蝶警)을 펼치십시오.] 천유찬의 오른팔이 살짝 움직였다. 이에 천여운은 나노의 말대로 재빨리 좌측으로 반보 발을 움직였다. 그 순간 흉신악살과도 같던 천유찬이 아까 전과 같은 얼굴로 돌아와서는 미친 듯이 웃어대기 시작했다.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핫.” [상대의 공격 의사가 중지되었습니다. 오른팔에 집중되던 강한 에너지가 하락하고 있습니다.] 머릿속을 울리는 나노의 말대로 천유찬의 팔의 허공에 떠있던 숫자의 수치가 하락하고 있었다. 한참을 웃어대던 천유찬이 이윽고 멈추더니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화가 나긴 했는데, 생각해보니 웃겼어. 네 앞길을 막지 마라니? 조금은 멋지더라. 정말로.” 말투는 평소와 같은 경박함이 담겨 있었지만 눈빛은 아니었다. 아까 전과 같은 호의는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천유찬은 더 이상 흥미가 없어졌다는 듯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몇 발자국 앞으로 걸어가더니, 잠시 멈춰 서서 말했다. “네가 나와 같은 길을 걷게 된다면 분명 만나게 되겠지. 하지만 그 정도로 내 목숨을 거론하기에는 아직 멀었어.” [적의 오른손에 강한 에너지가 집중되고 있습니다. 사용자를 향한 공격의사는 없습니다.] 머릿속을 울리는 나노의 목소리가 끝남과 동시에 천유찬이 오른팔을 하늘로 쭉 뻗더니 가볍게 바닥을 향해 휘둘렀다. -촤아아아악! 뭔가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파란 불꽃이 튀기며 선명한 선이 생겨났다. 천여운의 시선이 불꽃이 튀는 선을 따라서 선명한 빛이 휘감고 있는 천유찬의 손날로 향했다. ‘도......기?’ 천유찬의 손을 휘감고 있는 빛은 분명 도의 형태를 갖춘 도기(刀氣)였다. 절정의 경지에 무공의 고수만이 기를 유형화할 수 있게 된다. 더군다나 도가 아닌 맨손으로 도의 형태인 도기를 발산했다는 것은 완숙한 절정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의미했다. ‘격이 다르다고 보여주는 거냐?’ 그것은 일종의 무력 시위였다. 마도관에 입관한지 고작 스물하루 밖에 되지 않았지만, 시작부터 이미 모든 생도들의 정점에 군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천유찬이었다. 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연과 소교주의 자리를 다투고 있다는 말을 그저 소문만이 아니었다. “그럼 나중에 보자고.” 천유찬은 도기를 거두고는 유유히 사라져버렸다. 덩그러니 그 자리에 남은 천여운의 움켜쥔 주먹에는 평소보다도 강한 힘이 들어갔다. 복마종의 소교주 후보인 천무금을 꺾고, 천원려를 마도관에서 방출시킨 뒤로 그들과 같은 선상을 밟았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조급해 하지마라. 천여운. 그들을 따라 잡는 것 따위가 아니라 그들의 위에 군림해야 한다.’ 소년은 그렇게 다시 한 번 굳은 결의를 다졌다. 한편 압도적인 무력 시위를 통해 자존심을 지킨 천유찬의 표정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호탕하게 웃으면서 분노를 삭였지만 그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내 공격을 미리 읽었어.’ 도기를 일으켜서 단 번에 천여운의 오른팔을 잘라버리려 했다.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면 평생 도를 들지 못하게 만들어버리려 했으나, 공력을 끌어올려서 도기를 일으키기도 전에 천여운이 자신의 궤적에서 벗어났다. ‘훗, 그냥 어중이떠중이들과는 다르다 이거지.’ 원래의 목적과 다르게 오히려 경각심을 가지고 돌아가게 되는 천유찬이었다. 12장 천마 조사의 심득(3) 건물의 넓이만큼은 마도관 내에서도 큰 규모의 부지를 차지하는 개인 연공실은 총 삼 층으로 이루어졌다. 지상으로는 두 층, 지하 한 층으로 되어있는데, 지상은 한 층당 백 호실의 개인 연공실이 있고 지하에는 오십 호실의 개인 연공실이 있다. 천여운은 지상 이 층에 있는 한 호실로 들어가기 전에 입구 문 앞에 걸려있는 공실(空室)이라 적힌 푯말을 뒤로 돌려놓았다. [사용중(使用中)] 개인 연공실로 들어가니 벽에 걸린 작은 호롱불이 호실 내를 밝히고 있었다. 연공실은 천장부터 시작해 종횡(縱橫)이 정사각형으로 일곱 자 정도의 크기에 불과했고, 보법을 자유롭게 펼쳐가며 초식을 연달아 연마하기에는 부적합한 넓이였다. -쿵쿵! 천여운이 주먹으로 벽을 두드려보니 둔탁한 소리가 났다. 석벽이 두꺼워서 다른 사람의 방해를 받지 않고 연공할 수 있게 지어졌다. 애초에는 더 좁게 하여 앉아서 운기조식만이 가능하게 만들어서 수용 인원을 늘리려고 했으나, 누워서 운기를 하는 심법은 어찌할 거냐? 라는 의견이 나오면서 종횡을 일곱 자로 만들었다. ‘그래도 충분하다.’ 천여운에게 있어서는 충분한 공간이었다. 의무실에서 혼자 있었을 때는 전이를 받더라도 누군가의 방해를 받지 않았지만, 숙소 생활을 하면서 내심 걱정했던 그였다. 다행히 개인 연공실이 개방되어서 그런 걱정은 한시름 덜었다. ‘나노, 증강현실 개안.’ [사용자의 시각 정보에 증강현실(增强現實) 개안(開眼) 가동합니다.] 나노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리며 천여운의 동공이 빠르게 흔들리며 흰 빛의 입자들이 선을 그리며 증강현실이 개안되었다. ‘나노, 이 층 서재의 청옥석 비석에서 스캔한 초식을 입체영상으로 구현해봐.’ [가장 먼저 새겨진 초식부터 구현하겠습니다.] 나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시야의 증강현실에서 흰빛의 입자가 사람의 형태로 바뀌었다. 흰 빛으로 이루어진 사람의 형태가 흰 빛의 검을 들고는 청옥석에 새겨져있던 절세 검 초식을 구현하기 시작했다. -촤촤촤촤촤촥! 순식간에 수많은 식으로 이루어진 화려한 검 초식이 허공에 빛의 선을 그렸다. 일 층 서재에서처럼 검 초식이 그리는 궤적은 전율적인 충격을 가져왔다. ‘더 빠르고 더 복잡하다!’ 천여운은 입체영상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접무도법의 마지막 비기인 절초를 사용해보았지만 고작 한 식도 제대로 막지 못했다. 청옥석 비석에 숨겨져 있던 두 번째 절세초식은 일 층에서 발견한 첫번 째 초식보다도 그 위력이 상회하고 있었다. ‘정말......무섭다. 이 초식을 막아낼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라고 여겨질 만큼 그 충격은 쉽게 벗어날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도 나중에 검흔을 남긴 사람은 대체 무슨 수로 이 초식을 파훼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다른 객체가 남긴 검흔의 초식을 가장 오래된 순부터 차례대로 입체영상을 가동합니다.] 나노의 말이 머릿속을 울리며, 다른 객체라 명명된 자가 남긴 검흔의 초식들이 순차적으로 펼쳐졌다. 처음에 펼쳐지는 초식은 어색하면서도 부자연스러웠다. 그러나 한 초식, 두 초식, 세 초식 입체영상이 가동될 때마다 초식들이 세련되게 가다듬어져 갔다. 마지막에 쉰여섯 번째 초식이 발현되는 순간 천여운은 온몸에 소름이 돋고 말았다. ‘......미쳤다. 미치지 않고서는 이렇게 할 수 없다.’ 검에 미치지 않고는 이런 검초를 완성시킬 수 없었다. 한 초식이 완성되기까지 그 과정을 마치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 같았다. ‘아!’ 천여운은 문득 마지막에 완성된 초식만 배틀 모드로 대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순차적으로 전부 대치시켜 보는 것은 어떨까하고 생각이 들었다. ‘나노, 먼저 남겨진 초식을 상대로 쉰여섯 초식을 순차적으로 붙게 해봐.’ [알겠습니다. 먼저 새겨진 검 초식을 중심으로 배틀모드를 진행하여 순차적으로 입체영상을 가동하겠습니다.] 흰 빛의 입자들이 움직이며 또 다른 사람의 형태를 갖췄다. 그렇게 두 입체영상이 서로 대치하더니, 동시에 검 초식을 펼치기 시작했다. -촤촤촤촥! 쉰여섯 초식 중에서 첫 번째 초식은 앞서 새겨진 절세검초의 첫 번째 식조차 막아내지 못하고 결판이 나고 말았다. 곧바로 이어지는 입체영상들의 대결 또한 첫 식을 견디지 못하고 패했다. 그렇게 진행되어 가며 중반부인 서른여섯 번째 초식으로 오자 스물네 식 중에서 열다섯 식까지 막아내기에 이른다. ‘정말 대단하다. 어떻게 이런 식을 생각할 수 있는 거지?’ 영상이 순차적으로 진행될수록 천여운은 발전되어 가는 초식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자신은 전혀 생각하지 못할 방식으로 전율적인 초식에 대응하는 모습에 점차 몰입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쉰여섯 번째 초식이 발현했다. -촤촤촤촤촥! 빠르게 식과 식들이 흰빛의 궤적을 그리며 부딪쳤고, 결과는 전처럼 한 식 차이로 절세초식이 완전히 파훼되고 말았다. ‘아아아!' 마지막 식까지 전부 파훼되고 입체영상의 머리가 잘려나가며 흰 빛의 사람 형태가 입자를 흩날리며 사라져 버렸다. [입체영상의 가동이 전부 완료되었습니다.] 나노가 입체영상이 끝났음을 알렸지만 천여운은 이 엄청난 대결을 곱씹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노가 뇌속으로 시뮬레이션을 전이시킨 것도 아니었는데, 천여운의 머릿속에서 두 고수가 끊임없이 대결을 펼치고 있었다. -파팍! 검은 공간 속의 심상에서 천여운은 두 번째 객체와 혼연일체가 되어 검초가 아닌 접무도법의 절초를 펼치며 절세검초에 대항했다. 그 과정이 심층화 되어지면서 천여운의 동공 초점이 흐릿해져갔다. [사용자의 뇌속 신경세포(neuron)가 빠르게 활성화되고 있습니다. 신경세포가 활성화 되면서 승장혈, 천돌혈, 전중혈, 구미혈, 중완혈, 신궐혈, 기해혈로 에너지가 순환하며 자극되고 있습니다. 사용자의 단전에 있는 에너지가 활발해지며 증식하고 있습니다.] 나노의 울림에도 천여운은 여전히 집중하고 있었다. 사용자의 신체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 나노 머신은 더 이상의 알림을 중지하고 에너지 변화를 데이터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사용자의 신체에 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이미 분석을 마쳤기 때문이었다. -팡! 어두운 공간에서 수십, 수백 번이나 절세검초와 대결을 펼치던 천여운이 드디어 심상 속에서 깨어났다. 흐릿했던 초점이 돌아오며 천여운은 어리둥절해했다. ‘이게.....뭐지?’ 분명 입체영상의 대결에 몰두했다는 것까지는 기억이 났지만, 심상 속에서 깨어나고 보니 마치 모든 것이 환상처럼 느껴졌다. ‘느낌이 이상하다? 아!’ 천여운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신체 변화를 감지했다. 단전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기운이 전보다 훨씬 강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재빨리 운기를 해서 내공을 측정해보았다. ‘......내공이 늘었어.’ 놀랍게도 단전에 쌓여 있는 내공이 전보다 훨씬 늘어나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조금 늘은 수준이 아니었다. 믿기 힘들었지만 반 갑자(삼십 년)에 불과했던 천여운의 내공은 어느새 사십 년에 육박할 만큼 늘어 있었다. ‘아! 내가 깨달음을 얻었단 말인가?’ 천여운이 환상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무공의 깨달음이었다. 일류 고수의 실력에 불과했던 천여운은 중원에서 최고의 절학들이 펼치는 대결을 지켜보면서 나노의 도움 없이 스스로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이었다. 깨달음은 단순히 내공의 증대만을 가져오지 않았다.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아.’ 천여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공을 끌어올려 접무도법의 일 초식을 펼쳐보았다. -촤촤촤촤촥!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전과는 사뭇 달랐다. 팔에서만 잔상을 일으키던 접무도법의 초식이 천여운이 움직일 때마다 미묘한 잔상을 남기고 있었다. “아!” 일 초식을 펼치고 난 천여운의 입에서 육성으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의 오른손에서 희미하지만 은은한 빛이 휘감겨 있었다. ‘내가.....지금 기를 유형화 시킨 건가?’ 손날에서 느껴지는 이 감각은 분명 기(氣)가 외부로 방출되면서 유형화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아직까지 내공이 모자라고 기를 방출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기에 도의 형태를 갖추지 못했지만, 분명 수기(手氣)를 형성시키는데 성공했다. ‘형태는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원래는 도를 통해서 기를 방출하는 것에 익숙해진 후에, 도의(刀意)를 담아서 맨손으로 수기를 발산해야 도의 형태를 갖출 수 있다. 내공이 일 갑자에 도달하고 기를 유형화하는데 익숙해 진다면 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 천유찬처럼 완숙한 절정의 경지로서 맨손으로 도기를 다룰 수 있게 될 것이다. “아아아!” 천여운은 진심으로 기쁨에 젖어 감격하고 말았다. 그만큼 무공에 있어서 깨달음은 중요했다. 천여운이 손에 집중되어 있던 내공을 회수하자 은은하게 휘감던 빛이 사라졌다. ‘이번에 받게 될 마룡단을 섭취한다면 일 갑자의 내공을 달성할 수도 있겠구나!’ 깨달음은 이미 충분했다. 일 갑자의 내공을 가지게 된다면 명실상부한 절정의 고수로 거듭날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멀게만 느껴졌던 도마종의 천유찬과의 격차가 대폭 줄어들게 된다. 상승한 무위에 기뻐하던 천여운이 문득 나노에게 물었다. ‘그런데 나노, 내가 얼마만큼 이러고 있던 거야?’ [한 시진 동안 몰아(沒我)의 상태로 있었습니다.] ‘한 시진? 그렇게나 오래?’ 찰나에 불과했다고 생각한 환상은 오랜 시간을 소요하게 만들었다. 나노의 말대로 한 시진이 지났다면 이제 숙소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었다. ‘나머지는 내일 해야 겠구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뇌 속에만이라도 절세초식들을 전이시켜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육체로 전이할 시간까지는 없어보였다. ‘나노, 일이 층 청옥석 비석에서 스캔한 먼저 새겨졌던 두 초식과 나중에 새겨진 마흔다섯 번째 초식, 그리고 쉰여섯 번째 초식을 뇌로 전이해줘.’ [알겠습니다. 사용자의 뇌로 선택하신 네 초식의 분석 시뮬레이션을 전이합니다.] 천여운의 동공이 빠르게 흔들리며 머릿속이 짜릿해졌다. 전이가 완료되자 약간 머리가 울렸지만 괜찮았다. 확인하기 위해서 집중해보자 머릿속에 뚜렷하게 절세검초들이 떠오르며 지금이라도 그 검초들을 펼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노 육신에 전이하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소요되지?’ [네 개의 초식을 분석해본 결과, 주인님의 근육 섬유질과 근맥을 변환하는데 다섯 시진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뭣?’ 순간 천여운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절무도법을 육신으로 전이했을 때보다도 너무 길었다. 무공의 수준이 궤를 달리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만큼이나 시간이 소요될 줄은 몰랐다. ‘쩝, 그렇다면 내일 일찍 나오는 수밖에 없겠구나.’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흘 간의 휴식시간이 주어졌다는 점이었다. 육신으로 초식을 전이 받지 못했지만 깨달음을 얻어서 절정의 초입에 이르렀다는 기쁨에 천여운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다. 숙소로 돌아왔더니 평소와 달리 아직까지 많은 생도들이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오늘은 다들 제법 늦네?’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지만 평소 때라면 한 시진 전에는 절반 이상이 돌아왔다. 의아해하던 천여운이 이내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한두 명씩 돌아오는 생도들의 손에는 비급서를 필사한 종이들이 들려 있었다. ‘아아.....저들도 나와 같았구나.’ 다른 생도들 역시도 이 단계 시험을 통과하면서 비급 서재의 이 층으로 올라갈 수 있게 되었다. 생도들은 비급 서재의 이 층에서 원하는 비급서를 외운 뒤, 까먹지 않게 곧장 개인 연공실로 가서 이것을 필사했다. 그리고 그 필사한 무공을 연마하느라 숙소로 늦은 것이었다. “주군 먼저 오셨습니까?” 뒤늦게 들어온 이십삼 번 생도인 허봉이 천여운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허봉의 손에도 필사한 한 권의 비급서가 들려 있었다. “좋은 거라도 얻었나봐?” 천여운의 질문에 허봉이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아닙니다. 이류 무공이라서 별 것 아니지만 제가 적수공권에 약해서 퇴법서 하나를 필사했습니다.” 허봉의 종파는 검을 주로 다룬다. 검법 이외의 무공을 익히지 않은 허봉은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퇴법서를 구했다. 그런 호봉의 모습에 천여운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도약하는 시기이구나.’ 휴식이라고 주어진 사흘은 단순히 휴식만을 위한 기간이 아니었다. 모든 생도들이 스스로를 발전시킬 수 있는 시간이었다. 주어진 사흘을 헛되이 보낸 자는 도태될 것이고, 알차게 보낸다면 남들보다 한 걸음 더 앞서 나가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렇게 휴식으로 주어진 첫날 밤이 지나갔다. 새벽 묘시(卯時) 초에 일어난 천여운은 바쁘게 개인 연공실로 향했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느껴지며 대기의 기운이 충만했다. ‘정말 빠르구나.’ 숙소가 개방되는 것은 인시와 묘시 사이(새벽 다섯 시)였는데, 일어나보니 벌써 두 명의 생도가 이미 침상을 정리하고 사라져있었다. 그만큼이나 강해지는 것에 간절한 생도들이었다. 개인 연공실이 있는 건물에 도착해보니, 새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생도들이 모여 있었다. ‘노력하는 자만이 이곳에서 살아남겠지.’ 그것은 마도관이 아니더라도 모든 세상에 속하는 진리일 것이다. 천여운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이 층으로 올라가 비어있는 개인 연공실로 들어갔다. 개인 연공실의 문은 안에서만 잠글 수 있다. 누구도 들어올 수 없게 문을 잠그고 난 후에 천여운이 나노에게 명을 내렸다. ‘나노, 어제 전이했던 네 초식을 육신으로 전이해줘. 아! 그리고 꼭 수면 마취하고.’ 한 번 된통 당하고 나니 수면마취가 필수라는 것을 인식한 그였다. [알겠습니다. 네 개의 초식을 시뮬레이션 한 데이터를 기준으로 사용자의 근육 섬유질과 근맥을 변환합니다. 먼저 수면마취를 하겠습니다.] 나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천여운이 수면 상태에 들어갔다. -우우우우웅! 천여운의 체내에 있는 모든 나노 머신들이 바쁘게 가동되기 시작했다. 접무도법을 전이 받을 때보다도 훨씬 긴 시간이 소요되는 육신의 변환 과정은 전보다 더 세밀하게 진행되었다. 그렇게 다섯 시진의 시간이 지났다. [사용자의 근육 섬유질 변환 및 근맥 변환이 100% 완료되었습니다.] 나노의 목소리와 함께 수면 상태에 있던 천여운이 깨어났다. 깨어남과 동시에 천여운은 접무도법을 전이 받았을 때처럼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바닥에 토를 올렸다. “우웨에에에엑!” 장시간에 걸친 육체의 변화에 대한 과부하와 반동이 온 것이었다. 세 시진 동안 진행되었을 때보다도 더욱 심했다. 속은 올라오고 온몸이 뒤틀릴 것만 같은 고통에 천여운은 죽을 맛이었다. [사용자의 육신 변환 전이에 대한 체내 반동의 안정화를 진행합니다.] 나노가 반동에 대한 안정화 작업을 하고나서야 고통이 멈출 수 있었다. ‘하아....이것만큼은 아무리 해도 적응이 안 되네.’ 진정이 된 천여운은 호흡이 어느 정도 가다듬어지자 자리에서 일어나 보았다.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여 주먹을 쥐어보았다. -불끈! 손에 들어가는 힘이 완전히 달랐다. 접무도법을 익혔을 때도 육신이 강해졌다는 것을 느꼈지만 그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 느낌이 워낙 판이하게 달랐기에 상의를 탈의해 보았다. “오옷!” 탄성이 절로 나왔다. 천여운의 탈의한 상반신은 그야말로 전 부위의 근육이 팽배하게 부풀어져서 혈관마저 선명하게 튀어나올 만큼 극한으로 발달되어 있었다. 빨래판을 보는 것만 같은 복근은 손가락을 꾹꾹 눌러도 튕겨낼 만큼 강한 탄력을 보였다. ‘내 몸 같지 않아.’ 지금과 같은 기분이라면 이 단단한 개인 연공실의 벽조차 구멍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 정도일지 간단하게 시험해볼까?” 그래도 이 두꺼운 벽이 뚫릴 리는 없으니 얼마큼 힘이 늘어났는지는 확인해보고 싶었다. “후우!” 호흡을 들이키고서 천여운이 개인연공실 바닥을 향해 있는 힘껏 주먹을 내질렀다. 그 순간 큰 굉음이 터져 나왔다. -쾅! 굉음과 함께 천여운의 얼굴로 뿌연 먼지와 돌 파편들이 튀어 올랐다. “끄악!” 그때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엇?” 당황한 천여운이 손을 휘젓자, 뿌옇던 먼지가 가시며 바닥에 뚫린 구멍이 보였다. 설마 정말로 벽에 구멍이 뚫릴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한 천여운이 놀라서 구멍 아래를 살펴보았다. 뚫려진 구멍 틈 사이로 일 층의 개인 연공실이 보였다. 구멍이 뚫리면서 떨어진 돌 파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 파편들 한가운데에 머리에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진 생도 한 명이 눈에 띄었다. “아.....” 천여운이 난감한 표정으로 신음성을 흘렸다. 12장 천마 조사의 심득(4) 육 조의 조장인 백팔 번 생도 하일명. 그는 본디 중소 종파의 무가에서 태어난 생도였지만, 뛰어난 오성과 깊은 잠재력으로 종파의 무공들을 빠르게 흡수하여 다른 생도들보다도 탁월한 실력을 가지게 되었다. 열여섯이라는 나이에 일류고수로 성장한 하일명의 자신감은 소교주 후보자들마저도 꺾을 수 있다는 자부심을 안겨주었다. 실제로 소교주 후보들 가운데 방심했던 천무금에게 부상을 입히기도 했다. 하지만 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유찬에게 압도적인 격차로 패하게 되자 그의 자존심은 금이 가게 된다. ‘나의 실력이 부족했다.’ 스스로 아직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은 계기가 되었다. 자부심이 강하고 담대한 그였지만 절대로 오만하다거나 어리석진 않았다. 천여운에 대한 분노는 전부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런 놈 따위보다 목표를 더 크게 가지자.’ 그렇게 결심한 하일명은 그날 저녁부터 특훈을 시작했다. 모든 생도들도 그렇겠지만 하일명 역시도 사흘 간의 휴식 기간을 훈련으로 꽉 채울 작정이었다. 새벽 같이 일어난 하일명은 누구보다도 빠르게 개인 연공실로 왔다. 가장 기가 충만한 새벽부터 오전 시간은 운기조식을 통해 내공을 단련하고, 오후부터는 천유찬과의 짧았던 대결을 심상을 통해 복기하며 초식을 보완해나갔다. 한참을 그렇게 집중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쾅! 갑자기 천장에서 굉음이 터졌다. -퍽! “끄악!” 심상을 통해 복기에 집중하던 하일명의 머리로 돌벼락이 떨어졌다. 머리에 커다란 돌을 맞은 하일명은 그대로 대(大) 자로 뻗고 말았다. 머리를 맞은 충격에 정신이 혼미해져가는 와중에도 하일명의 실눈으로 뻥 뚫린 천장 구멍으로 얼굴을 들이 내미는 천여운의 얼굴이 보였다. ‘저....저....망할 새끼......끄르르르.’ 깨끗하게 지웠던 분노는 기절하는 순간 불꽃처럼 다시 타올랐다. 얼마 있지 않아 개인 연공실을 담당하는 무공 교두가 부리나케 달려왔다. 단 하나뿐인 종합 열쇠를 들고 와서 연공실의 문을 열고서 머리에 피를 흘리고 있는 하일명을 의무실로 데려갔다. 후에 무공 교두가 와서 사고를 친 천여운에게 한바탕 잔소리를 퍼부었다. “아무리 개인 연공실이라고는 하나, 모든 생도들이 훈련을 하는 곳에 구멍을 뚫다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야! 만약에 운기조식이라도 하고 있었어봐. 네 녀석은 그냥 한 놈을 골로 보내는 거야.” 그 점은 다행스러웠다. 하일명이 만약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면 강한 충격에 주화입마를 입었을 지도 몰랐다. 머리에 강한 충격을 받고 뇌진탕으로 끝났다. “백팔 번 생도가 살아있는 걸 감사해라. 안 그랬으면 마도관에서 방출되었을 거다. 이번 일은 네 녀석의 평가에 반영할 테니 그렇게 알도록. 쯧.” “......죄송합니다.” 하일명이 죽지 않은 덕분에 방출은 면할 수 있었다. 암략(暗略)을 비공식적으로 권하는 마도관이라고는 하나, 개인 연공실 만큼은 절대로 상대에게 방해를 주거나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이 존재했다. 천여운에게 고의성이 없다는 것이 정상참작 되었길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그리고 또 개인 연공실을 부순다면 네 녀석이 다시는 이곳 개인 연공실을 사용할 일은 없어질 테니 반드시 명심해라.” “알겠습니다. 주의하겠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천여운은 일 층과 이 층의 개인 연공실 사용이 금지되었다. 완전히 사용금지를 당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스럽게 여겨야 했다. 지하 연공실은 지상 층에 비해서 공기가 탁하고 답답한 감이 있었기에 모든 생도들이 꺼려하는 편이었지만 선택권은 없었다. ‘흐음.’ 군말 없이 지하층으로 내려가는 천여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연공실 담당 교두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단세석(段世石)으로 만든 돌을 주먹으로 뚫다니....저 녀석의 내공이 절정을 넘어섰단 말인가?’ 개인 연공실의 벽은 외부와의 차단과 연공을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 단세석으로 만들어졌다. 적어도 일 갑자를 훨씬 상회하는 공력을 가하지 않는다면 부서지지 않는 단세석 벽에 구멍이 뚫렸으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지하에 있는 개인 연공실로 오게 된 천여운의 표정 역시도 의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노, 대체 내 힘이 왜 이렇게 세진 거야?’ 천여운 역시도 그 두꺼운 연공실 벽을 뚫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절세초식을 사용하기 위해서 육신을 변환했을 뿐이었는데, 힘이 거의 초인적인 경지에 달했다. [주인님의 근육섬유질과 근맥이 한계점에 도달했기 때문입니다.] ‘뭐?’ [경도가 높은 청옥석에 물리적인 힘으로 흔적을 남길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근육섬유질과 근맥으로 변환하면서 주인님의 육신의 한계점까지 변환했습니다.] ‘너 설마? 아아아....’ 천여운은 그제야 일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 있었다. 나노는 이번 육신 전이를 위해서 단검비술이나 접무도법처럼 동작을 완벽하게 다룰 수 있는 시뮬레이션을 기준으로 데이터를 분석한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그렇게 분석할 수 있는 거지?’ 나노는 이번 육신 전이를 위해서 청옥석 비석의 석면에 남겨져 있던 검흔들을 분석해서 초식의 시뮬레이션 데이터를 만들었다. 문제는 그것이 절세초식을 사용할 때의 체내 운기 경로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물리적인 힘으로 청옥석에 흔적을 가할 수 있는 기준이었던 것이었다. ‘허참.’ 이번만큼은 천여운 역시도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지금 내가 낼 수 있는 힘이 내 몸의 한계점이란 말이야?’ [주인님의 신장 성장의 예측 데이터를 기준으로 신장이 자라는데 방해받지 않을 수준으로 미세 조정한 결과입니다.] 본래 어설프게 근육을 키우게 되면 자라나는 성장에 방해가 된다. 그렇기에 나노 머신인 나노는 미래의 의학과 신체 성장 데이터를 기준으로 천여운의 신장이 성장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 수준에서 근육섬유질과 근맥을 한계점까지 미세하게 변환시켰던 것이었다. ‘내가 더 성장하면 이보다 강하게 조정할 수 있는 거야?’ [근골이 완전히 성장하게 된다면 지금보다 물리적인 힘을 위한 근육섬유질과 근맥 변환의 한계점이 더 늘어나게 됩니다.] ‘신기하네.’ 나노의 능력 활용법에 많이 익숙해졌지만, 이런 부분까지 알 때마다 놀라웠다. ‘풋, 네 말대로 되려면 열심히 자라야 겠네.’ 청년기로 신장이 성장하는 것만큼은 나노 머신의 능력으로도 성장판을 자극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수가 없었기에 시간만이 답이었다. 자신의 늘어난 초인적인 힘에 대한 의문이 풀린 천여운은 드디어 육신 전이마저 마친 절세초식들을 시험하기 위해 기수식을 취했다. ‘긴장되는 구나.’ 머릿속에 심어진 데이터로는 수십 년을 이 초식을 연마했다. 천여운이 가장 먼저 천마조사의 심득이라 할 수 있는 절세초식의 일 초식을 펼쳤다. 두 손가락을 모아서 만든 검결지(劍結指)가 개인 연공실의 허공을 갈랐다. -촤촤촤촤촥! 천여운의 몸이 입체영상에처럼 찰나의 순간에 스물네 개의 식을 펼치며 초식을 구현해냈다. 접무도법을 펼쳤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쾌속하면서 화려한 움직임이 그의 몸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일 초식을 마친 천여운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어.....어째서지?’ 초식을 완전히 해냈음에도 불구하고 천여운의 얼굴은 실패한 사람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납득이 되지 않는지 천여운이 다시 한 번 일 초식을 펼쳐보았다. -촤촤촤촤촥! ‘아니야. 이게 아닌데.’ 천여운은 앞에서와 동일하게 초식을 펼쳤는데도 전혀 만족스럽지 않았다. 마치 초식을 완성시키지 못한 느낌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천여운이 이번에는 이 층에 남겨져 있던 절세초식의 이 초식을 펼쳐보았다. -촤촤촤촤촤촥! 일 초식보다도 더욱 복잡한 형태의 화려한 초식이 그의 손에서 발현되었다. 스물네 개의 식이 끝났을 때, 천여운의 표정은 방금 전보다도 더욱 어둡게 변했다. “어째서지?” 이제는 화가 나기마저 했다. 고민에 빠진 듯이 심각해하던 천여운이 이번에는 절세초식을 파훼하는 검 초식을 펼쳐보았다. 천여운의 검결지가 빠르게 식의 궤적을 그리며 입체영상으로 보았던 마흔다섯 번째 검 초식을 구현해냈다. -촤촤촤촤촤촥! 검결지로 펼치는 마지막 일 식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천여운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그것은 방금 전에 절세초식을 펼칠 때와는 다르게 기쁨이 실려 있었다. ‘된다. 완벽하게 해냈어.’ 이어서 이 층의 청옥석 비석에 새겨져 있던 두 번째 초식도 연달아서 펼쳐보았다. 천여운의 검결지가 경쾌하게 허공을 가르며 절묘한 검 초식을 완성시켰다. ‘이것도 성공했다.’ 두 초식을 연달아서 성공하자 기뻤다. 어쩌면 자신이 실수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천여운이 다시 한 번 절세초식들에 도전해 보았다. 그러나 두 초식을 연달아서 펼치고 난 후에 그는 절망에 빠졌다. “왜 안 되는 거야?” 천여운이 펼쳤던 두 초식의 절세초식은 입체영상으로 보았던 것과는 달랐다. 찰나의 순간에 전율적인 느낌을 주었던 그 검 초식이 아니었다. ‘나노, 청옥석에서 추출했던 입체영상과 방금 전에 내가 펼쳤던 동작을 입체영상으로 구현해서 비교해봐.’ [사용자의 시각 정보에 증강현실(增强現實) 개안(開眼) 가동합니다.] 나노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리며 천여운의 동공이 빠르게 흔들리며 흰 빛의 입자들이 선을 그리며 증강현실이 개안되었다. [데이터에 저장된 입체영상과 사용자의 동작을 동시에 구현하겠습니다.] 나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시야의 증강현실에서 흰빛의 입자로 이루어진 사람의 형태와 그 옆에는 천여운를 완전히 복제한 아바타가 생성되었다. 흰빛의 입체영상과 아바타가 동시에 같은 절세검초식의 일 초식을 펼치기 시작했다. -촤촤촤촤촥! 동시에 이뤄지는 초식들은 찰나의 순간에 허공을 가로지르며 화려하면서도 전율적인 검초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비교 동작으로 보게 되니, 다른 점이 확연하게 눈에 띄었다. 입체영상이 펼치는 초식은 식들이 이어지는 동작이 부드러우면서 유연하게 연결되는 반면에 천여운은 단순히 동작이 연결되기만 할 뿐 부자연스러웠다. 심지어 초식이 끝나는 순간마저도 한 박자 더 늦게 이루어졌다. ‘역시 초식이 제대로 펼쳐지지 않았다. 어째서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노의 전이를 통해서 뇌 속으로 수많은 반복 시뮬레이션과 육체 전이를 통해 초식을 구현할 수 있는 근육, 근맥으로 변환했음에도 불구하고 초식이 완전하지 못했다. -털썩! 천여운은 그 자리에 앉아서 고민에 빠져들었다. 무엇이 문제인지를 파악해야만 절세초식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얼마나 고민에 빠져있었는지, 천여운은 반 시진 가까이 식은땀마저 흘려가며 몰두해 있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그냥 초식이라서 그런가? 아무리 운기 경로가 없다고 해도 초식을 펼치는 것 자체에.....아!’ 그렇게 몰두하던 찰나에 뭔가를 떠올렸다. ‘운기 경로인가?’ 천여운은 어째서 초식이 제대로 발현되지 않는지 그 문제점을 찾아냈다. 그것은 운기 경로에 있었다. 보통 일반적인 초식들은 식의 동작이 이어지면서 초식의 형태를 갖추는데, 완전한 위력을 내기 위해서는 운기 경로를 통해 내공을 움직여야만 한다. 그런데 단순히 초식 동작을 반복 훈련할 때에는 굳이 운기 경로로 내공을 순환시키지 않더라도 동작을 펼치는데 무리가 없었는데, 이 절세초식은 초식을 완전히 펼치기 위해서 운기 경로가 필수적이었던 것이었다. ‘접무도법의 마지막 절기와 같구나.’ 생각해보니 절무도법의 마지막 비기인 여덟 개의 식으로 펼쳐지는 절초도 운기경로로 내공을 순환시키지 않으면 제대로 펼쳐지지 않았었다. 천마조사가 남긴 심득인 이 절세초식들은 운기 경로는 필수적이었다. ‘아아.....그럼 알맹이가 빠진 셈이잖아.’ 원인을 알게 되자 허탈함이 찾아왔다. ‘파훼 초식을 얻은 것만으로 만족해야 하는 건가.’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뒤에 새겨진 검 초식은 특별한 운기경로가 없더라도 육신을 변환한 것만으로도 펼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많이 아쉬웠는지 천여운은 머리를 쥐어 싸면서 기분이 침체되고 말았다. ‘대체 검 초식을 남겨놓고 운기 경로는 생략하는 건 무슨 짓이란 말인가.’ 괜히 심득을 남겨놓은 천마 조사에게 화가 나려고 했다. 마치 아이에게 사탕을 줬다가 도로 빼앗는 느낌이었다. 한참을 침체되어서 가만히 앉아만 있던 천여운이 문득 청옥석 비석의 앞면에 새겨져 있던 시조들을 떠올렸다. ‘혹시 그 시조에 뭔가를 숨겨놓은 것이 아닐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사용할 수 없는 검 초식만을 남겨놓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나노, 혹시 일 층 청옥석 비석의 앞면을 입체영상으로 구현할 수 있어?’ [사용자의 시각 정보를 통해 저장해놓은 영상을 검색해보겠습니다.] 평소에 명령이 없으면 스캔을 하지 않지만 천여운이 그동안 보고 들었던 것을 프로그램의 데이터로 저장해놓는 나노였다. 잠시 후 나노가 데이터 속에서 청옥석 비석의 앞면을 검색해냈다. [프로그램 데이터로 저장해놓은 영상을 찾았습니다. 비석의 앞면만 영상에서 추출하여 입체영상으로 구현하겠습니다.] 나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천여운의 동공이 흔들리며 증강현실이 개안되었다. -솨아아아! 그렇게 개안된 증강현실에서 흰 빛의 입자들이 모여들며 청옥석 비석의 앞면을 입체영상으로 그대로 구현해냈다. [大風起兮雲飛揚 큰바람이 일고 구름은 높이 날아가네. 威加海內兮歸故鄕 위풍을 대륙에 떨치며 고향에 돌아왔네. 安得猛士兮守四方 내 어찌 용맹한 인재를 얻어 사방을 지키지 않겠는가.] 청옥석의 벽면에 오직 손가락의 내공만을 사용하여 시원한 필체로 새겨놓은 시조였다. 처음 보는 시조에 천여운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봐도 그냥 시조 같은데 대체 무엇이 숨겨진 것일까?’ [프로그램 데이터에 내장된 고시조를 검색한 결과 한나라의 건국시입니다.] ‘건국시?’ [한나라 고조 유방이 호적수였던 초패왕 항우를 물리치고 돌아오는 길에 지은 시입니다.] ‘......아무튼 천마 조사께서 지으신 시는 아니네?’ [그렇습니다.] 학문을 갈고 닦은 천여운이지만 중원 대륙에 있는 시조들을 전부 알 리가 없었다. 그런 점에서 나노의 정보 검색 능력만큼은 최고라고 할 수 있었다. 단 번에 시조의 기원을 알게 되었지만 문제는 여기에 숨겨진 비밀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이었다. ‘나노, 혹시 시조에서 달라진 문자라던가 그런 게 있어?’ [없습니다.] 빠르게 없다고 답변하는 나노의 말에 천여운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다면 대체 여기에 무엇이 숨겨져 있다는 말인가? ‘나노, 석면을 분석해서 무언가라도 조그마한 단서가 있는지 찾아봐.’ [알겠습니다. 석면 전체를 스캔해서 분석해보겠습니다.] 입체영상의 석면에 흰 빛이 일(一)자로 선을 만들어 내려가면서 스캔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천천히 내려가면서 석면의 맨 밑까지 내려오자 나노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시조의 한 문자마다 밑에 작은 구멍들이 파여 있습니다.] 그와 함께 시조가 있는 부분이 크게 확대가 되었다. 나노의 말대로 시조가 적혀 있는 글자의 한 문자마다 그 밑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점들이 파여 있었는데, 모든 문자마다 점의 숫자가 달렸다. 예를 들어 대(大)의 밑에는 네 개의 점이 홈으로 파여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의미지?’ 전부 동일하게 홈이 파여 있지 않는 걸 보면 분명 뭔가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틀림없었다. 또 다시 천여운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작게 구멍이 파져있다라....구멍이....아! 구멍이면 혈(穴)을 의미하는 건가?’ 음독대로 한다면 구멍은 혈이라고 할 수 있었다. 뭔가를 발견했다는 생각에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생각해라. 생각해라. 구멍이 네 개면......네 개의 혈? 아니다. 네 개의 혈도 아니면 대체 무슨 의미일까? 혈도 서적이라고 떠올려야 하나.’ 처음 나노를 통해서 스캔해서 전이했던 혈도 책이 떠올랐다. 그것을 통해서 천여운은 혈도를 알게 되었었다. 천여운이 집중해서 혈도 서적을 떠올리자 머릿속에 전이되었던 책 내용이 떠올랐다. ‘네 개 구멍이면 네 번째 혈도를 말하는 건가?’ 혈도 서적에는 순차적으로 번호를 달아서 혈도의 주석을 설명해놓았다. 네 번째로 설명해놓은 혈은 구미혈이었다. ‘이상하다. 운기경로의 기본이 되려면 적어도 기해혈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그럼 점이 일곱 개가 파여 있어야....아!!!’ 천여운의 눈이 큼지막하게 커졌다. 드디어 구멍이 의미하는 비밀을 알아냈기 때문이었다. ‘가장 앞의 대(大)의 획은 총 삼 획이다. 그렇다면 네 개의 점과 더하면 일곱 번째 기해혈을 의미하게 된다.’ 그 비밀은 바로 한자의 획이었던 것이다. 획과 점을 더해야만 혈도의 정확한 위치가 나왔다. 천여운은 떨리는 마음으로 모든 문자마다 새겨져 있는 획과 점을 더해서, 머릿속에 있는 혈도 책에 대입해 보았다. 그러자 기해혈부터 시작해 오른팔의 우횡문을 통과하는 총 스물세 개에 달하는 운기 경로가 완성되었다. “하하하하하핫! 이거 였구나! 이거였어!!!” 드디어 시조에 숨겨져 있던 운기 경로를 알아내게 된 천여운이 기쁨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13장 열한 명의 인재를 모으라(1) 시조에 숨겨진 비밀을 알아낸 천여운은 들뜬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천마 조사의 심득인 절세검초의 일 초식의 기수식을 취했다. 이번에는 운기 경로에 내공을 순환시키면서 초식을 펼쳐보았다. -촤촤촤촤촥! 천여운의 검지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경쾌하게 공간을 울렸다. 운기 경로를 통해서 내공이 순환하면서 검 초식을 펼치자 어색하게 이어졌던 식들이 힘을 되찾으며 부드럽게 동작이 연결되었다. 찰나의 순간에 천여운이 펼친 절세검초가 끝이 났다. 놀라운 것은 입체영상으로 보았을 때는 시각적인 전율만이 남아있었으나, 초식을 전부 펼쳤을 때 천여운의 검지가 그렸던 궤적에 미묘한 예기(銳氣)의 여운이 남았다. ‘날카롭다.’ 방 한 가운데의 허공에서 느껴지는 예기에 천여운이 놀라워했다. 이것은 검법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에 이른 고수가 남긴 심득이었기에 수중무검 심중유검(手中無劍 心中有劍)이라는 지고의 묘리를 담고 있었다. ‘검초를 더 연마해야 겠구나.’ 아직까지는 천여운의 깨달음과 경지가 한참은 모자라기에 그것까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노의 도움을 통해서 검흔을 남긴 천마조사와 동일한 수준으로 검초를 펼칠 수 있게 된 천여운이었다. “아아아.” 드디어 검 초식을 완성한 천여운은 감격을 금치 못했다. 천마 조사의 심득을 얻게 된 것이 훗날 어떤 영향을 가져올지 짐작할 수 없지만, 무인으로서 자신이 이런 절세초식을 익히게 된 것에는 큰 행운이라 여겼다. 첫 번째 초식을 완성했으니 두 번째 초식을 완성할 차례였다. ‘나노, 저장한 데이터에서 비급 서재의 이 층에 있던 청옥석 비석의 앞면을 검색해줘.’ [알겠습니다.] 두 번째 시조를 검색하는 것이 살짝 불안했다. 이 층에 있던 비석은 뒷면은 자세하게 보았지만, 앞면은 책장을 돌아다닐 때 스쳐지나갈 때만 몇 번 얼핏 본 기억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노의 시각 정보 저장 능력은 놀라웠다. [저장된 프로그램 데이터에서 이 층 청옥석 비석에 새겨진 앞면을 검색했습니다.] ‘휴우.’ 다행이었다. 정말 나노가 없었다면 이런 기연을 쉽게 놓칠 뻔했다. ‘시조에다가 운기경로를 남겨놓다니 천마 조사님은 정말.....’ 악취미를 가졌다고 할 수 있었다. 누구도 자신의 심득을 쉽게 얻을 수 없도록 시조를 통해 운기 경로를 남겼으니 말이다. 하지만 만약에 뒷면을 가득히 메운 검흔들이 없었고 서재를 시간제한이 없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면, 누군가는 운이 좋게 절세초식의 비밀을 알아냈을 수도 있었기에 지금의 기연은 오롯이 천여운 만의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천여운은 일 층의 청옥석 비석과 마찬가지로 입체영상으로 시조를 구현하게 하여 운기 경로를 알아냈다. “한 번 펼쳐볼까?” 두 번째 절세초식의 운기 경로로 내공을 순환하며 검초를 펼쳐보았다. 첫 번째 초식보다 훨씬 복잡한 식을 가진 두 번째 초식이 화려한 궤적을 그리며 허공을 가르고 찔렀다. -촤촤촤촤촥! 운기 경로로 내공을 순환하기 전만 하더라도 이런 느낌을 받을 수가 없었다. 초식을 펼치는 순간 천여운은 마치 자신이 검(劍)과 하나가 되어 궤적을 그리는 것만 같았다. 찰나의 순간에 초식의 식은 끝이 났지만 그 여운은 오래갔다. 일 초식 때와 마찬가지로 허공으로 날카로운 예기가 남아 연공실 전체를 휘감았다. 깨달음과 무공의 경지만 갖춰진다면 그 예기는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더 날카로워지리라. ‘조사님의 심득을 얻게 된 것을 감사히 여기자.’ 이렇게 두 절세초식을 완벽하게 익혀낸 천여운은 천마 조사의 은덕에 감사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전반부의 두 초식도 이렇게 강하다면 후반부는 대체 어떨까?’ 절세초식의 전반부인 두 초식을 익히고 나니, 후반부의 초식들도 궁금해졌다. 그러나 지금 당장에 남은 초식들을 익힐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남은 초식들을 익히기 위해서는 마도관의 육 단계 시험까지 전부 통과해야만 오층 비급 서재까지 열람할 수 있었다. ‘반드시 육 단계를 통과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구나.’ 천마 조사가 남긴 모든 심득을 얻게 된다면 천여운은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무위를 얻게 될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증이 있었지만 그것은 지금 당장에 풀 수 없기에 머릿속으로 묻어둬야만 했다. ‘조사님이 남기신 절세초식은 운기 경로가 있어야만 제대로 펼칠 수 있었는데, 이 대단한 초식을 파훼한 초식은 어째서 운기 경로가 없이도 가능할까?’ 그 이유를 깨닫기에는 아직 천여운의 무위로는 한계가 있었다. 초식을 익히지 못한 것은 아니었기에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고 다짐하는 천여운이었다. 이렇게 네 초식을 얻게 된 천여운은 나노에게 시간을 물었다. ‘지금 시간이 어느 정도 되었어?’ [유시(酉時) 초입니다.] ‘벌써 그렇게 되었나?’ 벌써 저녁 무렵이 되었다. 점심식사까지 거르고 훈련을 해서 그런지 배가 많이 고파졌다. 저녁식사까지 거르기에는 체력적으로나 심력 면으로 지쳐있던 천여운은 식사를 위해 개인 연공실을 나왔다. 어두운 지하층은 사용하는 생도들이 아무도 없는지 아무런 기척도,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러다 지하 연공실은 나만 사용하는 거 아냐?’ 농담으로 생각한 것이었지만 천여운은 삼 단계 시험이 끝나고부터는 마지막까지 지하 연무실을 혼자 사용하게 되었다. 조별 시험이 끝나면서 한 가지 좋은 점이 더 있었다. 스물하루 동안은 조별 시험을 위해 모든 생도들이 같이 식사를 했지만, 이제는 정해진 시간에 식당으로 가서 개별적으로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아.’ 맛있는 냄새가 식당 바깥의 연무장까지 퍼져 나와 천여운의 코를 자극했다. 식당으로 들어가 보니, 평소와 달리 오늘은 특식이 나왔다. ‘면이구나!’ 오늘 나온 음식은 면 음식이었다. 먼저 와서 줄을 서고 있는 생도들이 국물을 담는 넓은 그릇을 집어 들고 배식하는 숙수들에게 면과 국물을 받고 있었다. 천여운도 따라서 줄을 서서 면과 소고기 육수를 받았다. 항상 장 호위가 해주는 음식을 먹다보니 면 음식은 거의 먹어본 적이 없는 그였다.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니 육수를 부어주던 배불뚝이 숙수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우육납면이라네.” “우육납면이요?” “소를 해체해서 통째로 뼈와 고기를 푹 고아서 만든 육수로 만든 면이지. 하긴 난주에서는 흔하지만 여기서는 보기 힘들지.” 쇠고기 뼈와 고기를 푹 고아서 만든 면 음식의 이름은 우육납면이었다. 우육납면은 회족의 요리로, 감숙성의 중부인 황하강 유역인 난주시에서는 흔히 먹을 수 있는 면 요리였다. 마도관의 식당에는 중원 각지에서 초빙된 숙수들이 있기에 때때로 여러 지방의 특산 음식들을 먹어볼 기회들이 많았다. “고명은 자리에 있으니 간은 그걸로 맞추게. 다음!” 배불뚝이 숙수의 말대로 긴 식탁 위로 붉은 양념과 야채 고명들이 올려 있었고, 배고픈 사람들은 더 먹으라고 마른 면 사리까지 수북이 쌓여있었다. -후루루룩! 여기저기서 면을 후루룩 빨아들이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천여운도 젓가락을 가져가 면을 떠서 후루룩 빨아들이며 먹어보았다. 진한 소고기 육즙이 면에 묻어서 입안과 혀를 적시며 면의 풍미를 더했다. ‘맛있다.’ 처음 먹어보는 면 요리의 매력에 빠진 천여운이 허겁지겁 면을 흡수하듯이 먹기 시작했다. 면 사리를 추가해가며 식사를 하던 와중에 누군가 그의 옆에 앉았다. 모든 생도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먹는 식탁이었기에 별 다른 신경을 쓰지 않고 식사에 열중하는데, 옆에 앉은 누군가가 천여운에게 말을 걸었다. “팔 조의 새로운 조장, 칠 번 생도 맞으시죠?” “음?” 왼쪽 가슴 쪽에 달려있는 검은 명찰을 본다면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팔 조 조장이라는 것을 물어본다는 것은 무언가 용무가 있다는 의미였다. 천여운이 의아한 눈빛으로 옆을 바라보았다. 오똑한 콧날에 날카로운 턱선을 가진 잘생긴 청년이었다. 흠이 있다면, ‘실 눈?’ 잘생긴 외모의 정점이 될 수 있는 눈이 거의 감은 것처럼 보일 만큼 가늘고 작았다. 안타까운 흠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 눈이 잘 어울리긴 했다. “운이 좋군요. 찾아뵈려고 했었는데, 마침 여기서 뵙게 되다니.” 공손한 말투였지만 그 태도가 수상했다. “나에 대해서 물어보는 거라면 먼저 자신을 밝히는 게 예의가 아닐까?” 천여운의 질문에 실눈의 생도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답했다. “아아, 그렇군요. 제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십구 조의 이백 번 생도인 염파라고 합니다.” “천여운이다.” 경계심이 담긴 천여운의 목소리에 실눈의 생도 염파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초면부터 이런 말씀을 드리긴 뭣하지만 저와 겨뤄주실 수 있겠습니까?” 뜬금없는 염파의 말에 천여운이 눈살을 찌푸렸다. 식사 도중에 대련신청을 받았으니 말이다. “무슨 소리지?”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대련을 신청하는 겁니다.” “.....내게 원한이라도 있나?” 여섯 종파 이외에도 멸시를 담아서 바라보던 이들이 종종 있기는 했지만, 특별히 다른 종파나 생도들에게 원한을 살 만한 짓을 했던 기억은 없었다. 물론 본인은 모르겠지만 이 층 서재에서 대담한 민폐를 저지르긴 했다. “아닙니다. 원한 같은 게 있을 리가요.” “그럼 왜 내게 겨루자고 하는 거지?” “흐음, 일종의 제 나름대로의 자격을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할까요?” “자격?” 알 수 없는 염파의 말에 천여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이 염파 자신을 의미하는 자격인지 아니면 천여운 본인의 자격을 의미하는 것인지 두루뭉술했다. 염파와 겨룬다고 해도 아무런 득이 될 것이 없기에 천여운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거절한다.” “......예상은 했지만 바로 거절하시네요.” “알면서 왜 물은 거지?” 거절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염파는 실망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천여운이 솔깃할 만한 제의를 꺼낸다. “그렇다면 제가 준비한 대가를 먼저 말씀 드리는 게 좋겠네요. 저와 대련을 해서 이기신다면 다음 삼 단계 시험에 관한 좋은 정보와 선물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삼 단계 시험을 거론할 때는 다른 사람이 듣는 것을 우려했는지 속삭이듯이 말했다.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천여운의 눈에 흥미가 감돌았다. 하지만 대놓고 내색을 하진 않았다. “일개 생도인 네가 어떻게 삼 단계 시험에 대한 정보를 준다는 거지?” “흠, 제 부탁을 들어주시기도 전에 밑천부터 밝히라고 하시는 것 같긴 하지만, 정보의 신뢰성을 위해 말씀은 드려야 겠네요. 제 아버님도 마도관의 사 단계까지 통과하셨던 적이 있기 때문에 사 단계 시험까지는 알고 있습니다.” ‘상위 종파인가?’ 마도관에 입학했던 전적이 있는데다가 사 단계 시험까지 통과했었다면 상위 종파 출신일 확률이 높았다. 장 호위가 마도관을 나오지 않았기에 시험에 대한 정보가 전무했던 천여운과 다르게 상위 종파 출신의 생도들은 그들의 부모를 통해서 시험에 대한 정보를 일부 귀띔 받았다. 하지만 이 같은 염파의 말에도 허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천여운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말했다. “각 기수별로 시행되는 시험은 매번 바뀌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네 아버님이 통과했다고 해서 정보가 정확할 리는 없을 텐데.” “......뭐, 그건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삼 단계 시험까지는 일반 무가의 생도들도 포함되기 때문에 시험의 난이도나 방식은 조금 차이가 있을지는 몰라도, 그 성격은 비슷하게는 진행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단계 시험까지도 거의 그랬고요.” 염파의 눈빛은 확신으로 차있었다. 그 모습에 천여운은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의도일까? 굳이 정보를 걸고서까지 나와 대련을 할 이유가 있을까? 아니면 나와 겨뤄도 이길 자신이 있다는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대련을 해서 손해볼 것은 없었다. 비록 대가에 있어서 이긴다는 전제가 걸려있었지만 상위 종파라고 해도 지지않을 자신이 있었다. 결국 천여운은 염파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좋다.” “후후후,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난 그들은 인적이 드문 숙소 뒤편의 숲 쪽으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수풀이 우거진 숲에 도착하자 이백 번 생도 염파의 눈빛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미 이 단계 시험에서 천여운이 음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원려를 상대로 고절한 도법을 보여주었다. 검으로 도법을 펼쳤음에도 그런 고절한 초식을 펼친다는 것은 일류 고수임을 뜻했다. 하지만 염파 역시 쉽게 지지 않을 자신이 있기에 대련을 신청한 것이었다. ‘시험에서 보여줬던 것이 전부라면 실망스러울 겁니다.’ 그렇지만 이 말은 도발이 될 수 있기에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염파가 천여운과 간격을 벌린 후에 대치 상태가 되자 공손히 포권을 하며 말했다. “파월도종의 염파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염파가 손날을 펴서 앞으로 뻗으며 기수식을 취했다. 천여운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뭔가 자신하고 있는 바가 있으니 대련을 신청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도법을 사용할 줄은 몰랐다. 천여운도 가볍게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천여운이다. 덤벼라.” 아무 종파에 속해있지 않기에 이름만 밝혔다. 염파가 평소의 웃음기를 지우며 진지한 눈빛으로 천여운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그 움직임은 천무금과 비교한다면 약간은 모자랐지만 쾌속하면서도 강한 기세를 가지고 있었다. 파월도종의 도법인 파월도법의 삼 초식인 호월도섬이었다. -촤촤촤촥! ‘일류 고수의 실력이로구나.’ 천여운은 염파가 펼치는 도법만으로 그 실력을 바로 유추할 수 있었다. 여타의 생도들보다 강한 조장 급의 무위를 지녔기에 천여운에게 자신감 있게 도전을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천여운의 실력은 어제와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천여운이 큰 움직임이 없이 가볍게 보법을 펼치며 염파가 펼치는 파월도법의 초식을 피해냈다. ‘대단하지만 그게 끝이 아닙니다!’ 염파가 몸을 빙그르 회전하며 파월도법의 다음 초식을 펼치려 했다. 그 순간 빠르게 회전하는 염파의 손목을 천여운이 낚아챘다. -꽉! ‘엇?’ 당황한 염파의 두 눈이 커졌다. 도법을 펼치기 직전이었기에 팔목에 십성의 공력이 실려 있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낚아챘다. 미처 대응하기도 전에 천여운이 염파를 가벼운 주머니 자루를 휘두르듯이 들어 올려 내리찍어버렸다. -쾅! “쿠웩!” 그 위력이 어찌나 강했던지 내리꽂힌 염파의 등 뒤 쪽의 땅바닥 움푹 파였다. 염파는 고통도 잊은 채,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적어도 수십 초식 이상의 대결을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한 초식도 아닌, 고작 한 수만에 결판이 나고 말았다. ‘어, 어제의 실력이 아니잖아!’ 13장 열한 명의 인재를 모으라(2) 천여운은 난감한 표정으로 바닥에 뻗어있는 이백 번 생도 염파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좀 더 익숙해져야겠다.’ 단세석 벽에 구멍을 낼 만큼 물리적인 힘이 크게 상승한 그였다. 공력을 크게 실은 것은 아니었지만 휘두르는 힘 조절을 실패했던 것이었다. 본의 아니게 실패한 힘 조절의 희생양이 되고만 염파였다. “끄으으으.” 바닥에 쓰러진 염파는 등판 전체를 울리는 통증에 몸을 새우처럼 움츠렸다. 심하지는 않았지만 약간의 내상을 입은 듯 했다. ‘으으....실력을 숨기고 있었던 건가?’ 분명 어제 있었던 이 단계 시험에서는 일류 고수의 실력이라고 판단했었다. 천원려에게 펼쳤던 초식이 고절하기는 했지만, 자신의 종파인 파월종파의 도법 역시도 훌륭했기에 적어도 수십 초식은 겨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당하고 나니, 염파는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인정해야 했다. “저, 정말 대단하시군요. 제가 졌습니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시원하게 패배를 인정했다. 단지 새우처럼 바닥에 움츠리고 있는 것은 그대로였지만 말이다. 잠시 후 통증이 어느 정도 가시게 되자 염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류 고수의 실력을 지녔다고 생각했는데, 제 눈을 속이셨군요. 역시 하늘의 핏줄답군요.” 하늘의 핏줄. 천(天)가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것을 말했다. 천여운은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반쪽 혈통이라는 이유만으로 멸시 당한 세월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약속은 약속이니깐. 정보를 제공해야 겠군요.” “그 전에 먼저 듣고 싶은 말이 있다.” “무엇을 말이죠?” “어째서 정보를 제공한다는 명목 하에 대련을 신청한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염파의 입장에서는 전혀 득이 될 것이 없었다. 모두가 경쟁을 해야 하는 약육강식의 마도관에서 정보의 공유를 대가로 대련을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후후후, 역시 잘 믿지 못하시는 군요.” ‘역시?’ 천여운의 표정에 미묘한 변화가 있었지만 염파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염파는 계속해서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아까 식당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일종의 제 나름대로의 자격을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자격? 나를 말하는 거냐?” “그렇기도 하고 저를 뜻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삼 단계 시험을 위해서니까요.” 삼 단계 시험과 서로의 무위를 겨루는 것이 무슨 관계일까? 천여운으로서는 다음 시험에 대한 정보가 없었기에 무슨 의미인지 알기 힘들었다. 그런 의문을 풀어주려는 듯 염파가 삼 단계 시험을 말했다. “삼 단계 시험도 조별로 행해질 확률이 높습니다.” “뭐?.....조별 시험은 더 이상 없다고 들었는데.” 관주인 이화명의 입으로 조별 시험이 없다고 직접 거론했었다. 천여운의 의심스러운 눈초리에 염파가 가볍게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이 단계 시험과는 다릅니다.” “조별 시험이라고 말을 해놓고 뭐가 다르다는 거지?” “왜냐하면 개인의 역량이 더 크게 작용하는 시험이니까요.” “개인의 역량?” “삼 단계 시험의 기준은 상급 무사를 가려내기 위함이죠. 본교의 상급 무사들이 어느 정도 무위를 가졌는지는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마교의 상급 무사로 진급하기 위해서는 최소 일류 고수의 실력이 필요하다. 현재 마도관의 이 단계 시험을 치르고 올라간 합격 생도들 중에서 일류 고수 이상의 실력을 지닌 자들은 이백일곱 명 중에서도 많아야 마흔 명 정도에 불과하다. ‘이 녀석의 말대로 라고 한다면 이번 시험은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아직까지 생도들의 대다수가 적게는 십 년에서 많게는 이십 년 정도의 내공을 지녔기에 일류 무사의 기준에는 부적합했다. “일류 고수의 최소 기준은 일류 무공과 반 갑자(삼십 년) 이상의 내공이죠.” ‘설마 마룡단을 말하려는 건가?’ 천여운의 예상대로 염파는 이어지는 뒷말에 마룡단을 거론했다. “그런데 이번에 마룡단을 지급받게 된다면 상당수의 생도들이 반 갑자의 내공에 도달하게 될 겁니다.” 염파의 말대로 이번 이 단계 시험을 통과한 대가로 모든 생도들이 마룡단을 지급 받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훨씬 많은 수의 생도들이 내공만으로는 일류 고수의 기준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큰 문제가 있었다. “일류 무공은 어떻게 할 거지?” “그렇죠. 말씀하신 대로 내공이 해결되었으니, 남은 건 일류 무공입니다.” 내공이 일류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해도, 가문이나 종파의 무공이 일류 이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반쪽짜리 일류라고 보아야 했다. 삼 단계 시험을 통과해야 일류 무공의 비급서들의 보고인 3층 비급 서재를 들어갈 수 있기에 염파의 말대로 시험이 진행된다면 많은 생도들이 탈락하게 될 것이다. “시험이 일류 무공이라도 창안 하라는 게 아니라면 답은 하나군.” 천여운의 말에 염파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맞습니다. 이번 시험에서는 일류 무공의 무서를 지급받게 됩니다.” “일류무공을 익힌 자만이 삼 단계로 시험을 통과할 수 있다는 건가?” “네. 그게 쟁점이죠. 하지만 그것뿐이라면 난이도가 쉬워지겠죠. 아시다시피 마도관의 시험은 윗 단계로 올라갈수록 어려워지죠.” 염파의 말대로 일류 무공의 비급서를 익히는 것만으로 삼 단계 시험이 진행된다면 팔할 이상의 생도들이 시험에 합격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이들을 가려내는 것이 시험의 진정한 목적이었다. “제 아버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맞다면 일류 무공의 비급서는 본교의 상급 무사들이 펼칠 수 있는 검마섬진의 무공인 칠마검일 겁니다.” “검마섬진?” 검마섬진(劍魔殲陣). 그것은 마교의 조사 천마 이래로 희대의 검수라 불렸던 검마(劍魔)가 창안한 검진이다. 이 검마섬진은 검마가 소림의 십팔나한진과 백팔나한진을 상대하기 위해 창안된 검진이었다. 이 검진의 무공인 칠마검은 일류 무공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검술에 대한 신묘함이 깃들어 열두 명이 펼치면 십이검진, 서른여섯 명이 펼치게 되면 삼십육검진, 그리고 백팔 명이 펼치면 백팔검마섬진으로 발전해나갈 수 있다. 십이검진을 펼치면 절정의 고수를 상대할 수 있다고 하고, 삼십육검진을 펼치면 초절정의 고수를, 그리고 백팔검마섬진을 펼친다면 화경의 고수에 버금가는 위력을 지녔다고 하여 삼대 세력인 무림맹과 사파 연맹에서도 백팔나한진 못지않게 두려워하는 검진이었다. ‘들어본 적이 있다.’ 천여운 역시도 마교의 자랑인 검마섬진을 들어본 적이 있다. 상급무사들이 펼치는 백팔검마섬진으로 지난 마정(魔正) 전쟁에서 무당파의 화경의 고수 청학 진인을 제거하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들었다. ‘평범한 일류 무공조차도 무서운 검진으로 바꾸었죠. 대단하지 않습니까? 이건 공자님께만 드리는 말씀이지만 저는 개파 조사님보다 검마 공을 더 존경한답니다.’ 장호위가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하는 천여운이었다. 천여운이 잠시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는 사이에 염파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제 아버님께서는 당시에 열두 명이 한 조가 되어서 이 칠마검을 익혔다고 합니다.” “열두 명?” “네. 그게 검마섬진의 기본입니다. 그런데 칠마검을 익혔다고 해도 이 검마섬진을 익히는 것은 상당히 까다롭다고 하더군요. 처음부터 일류 고수가 아니라면 검진을 이해하기 힘들 만큼요.” 천여운은 그제서야 어째서 염파가 자신에게 느닷없이 대련을 신청했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자신과 함께 할 수 있는 실력을 지녔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나와 대련해서 실력을 알아본 거냐?” “당연하죠. 단 한 초식만 보고 모든 걸 판단할 수 없으니까요. 적어도 공자님의 실력을 확실하게 알아야 제가 이번 시험에 의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의탁?” 의탁이라는 말에 천여운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아! 중요한 걸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삼 단계 시험은 모든 것이 생도들의 자발로 이루어진다고 들었습니다. 무공을 익히는 것부터 시작해서 전부요.” “자발이라면?” “조원을 선정하는 것조차 전부 자발적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이 단계 시험의 평가와 성적순으로 조장만 지정해준다고 들었습니다.” “조장만 지정해준다는 것은 조원들을 조장이 선정하라는 것이냐?” “그렇죠. 말씀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선정했다고 무조건 조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거절할 수도 있으니까요. 이건 아마도 일반 생도들보다는 여섯 종파와 공자님들을 위한 시험에 가깝겠군요.” 염파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천여운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것은 이 시험이 소교주 쟁탈전의 일환으로 이어진다는 의미였기 때문이었다. 정해진 기간 내에 조원들을 얻어서 칠마검과 검진을 익히지 못한다면 삼 단계 시험에서 자동적으로 탈락하게 된다. ‘나의 아군을 만드는 기회라는 건가.’ 조장들에게 있어서는 아군을 얻어야만 시험을 통과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지금 당장의 일이겠지만 훗날 지금 얻게 된 아군들이 천여운에게 있어서는 큰 힘으로 뒷받침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허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네 말대로 조원들이 거절할 수 있다고는 하나, 시험에 통과하기 위해서는 일반 생도들 역시도 조장에게 붙을 수밖에 없는 상황일 텐데?” 천여운이 중요한 것을 짚었다. 그 말에 염파가 작은 실눈을 반짝이며 명쾌한 해답을 주었다. “검진만 형성하는 것이라면 공자님의 말씀대로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여서 조를 형성할 수 도 있겠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아마도 삼 단계 시험은 조원들을 모아서 검진을 익히기까지가 기본적 전제일거고, 각 조별로 대결을 한다거나 어떠한 방식으로 시험을 치를 거라 예상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조원들로서도 실력과 통솔력이 없는 조장을 선택할 순 없겠죠.” ‘생각보다 머리가 잘 돌아가는 녀석이구나.’ 주어진 정보만으로 상황을 분석하는 능력이 가히 발군이라 할 수 있었다. 전략가의 자질이 충만했다. 확실히 이런 자가 옆에서 보좌한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서 네가 의탁이라고 말한 것이냐?” “그렇습니다. 제가 선물을 드린다고 했죠? 그 선물은 바로 접니다.” 빙그레 웃으며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는 염파의 능청스러운 태도에 천여운이 인상을 찡그렸다. 선물에 큰 기대를 하진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달가운 선물은 아니었다. 천여운이 계속 인상을 찡그린 채로 말했다. “내가 조장이 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아니요. 제가 볼 땐 무조건 조장으로 선정됩니다. 그리고 공자님께서도 시험에 통과하려면 이제 막 일류 고수로 진입하는 어설픈 생도들보다는 저 같이 안정적인 실력자가 낫지 않습니까?” 스스로를 안정적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탐탁지 못했지만 분명 조장 급에 버금가는 무위를 지닌 것은 확실했다. 염파의 말대로 검진을 익히기가 까다롭다면 처음부터 일류고수인 생도를 얻는 것도 맞는 말이었다. '확실히 이 녀석의 말이 옳긴 하지만.....' 모든 의심을 거두고 그를 자신의 조원으로 받기에는 한 가지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왜 나를 선택한 거지? 네 말대로라면 다른 소교주 후보자들이나 이 단계 시험에 통과한 다른 조장들도 있는데 말이야.” 이 점이 가장 이해할 수 없었다. 오히려 현재 가장 소교주의 자리에 가깝다고 알려진 현마종의 천무연이나 도마종의 천유찬의 조원으로 들어간다면 안정적으로 삼 단계 시험에 통과할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그들의 수하가 될 수 있을 지도 몰랐다. “.....그건 참 지당하신 질문이시군요.” 말투만 듣는다면 이 같은 질문은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내가 널 믿을 수 있어야하니까.” 난처한 표정을 짓던 염파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휴, 사실대로 말씀드리는 게 좋겠죠. 기분 나쁘게 듣지 마시길. 사실 현마종의 공자님과 검마종의 공자님에게 마음이 있어서 같은 제안을 했었습니다.” 한숨을 내쉬면서 기운이 빠지는 표정을 짓는 것을 보아하니 거절당한 듯 했다. “거절당한 거냐?” “네. 거기는 이미 만석이더군요. 이미 그분들을 모시는 상위 종파의 실력자들이 포진해 있어서 제 자리는 없었습니다.” “다른 네 종파도 있지 않나?” 두 종파만 알아보고 포기하기에는 빨랐다. 천여운의 말에 염파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뭐....그렇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여섯 종파의 공자님들은 전부 같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차선책으로 나를 선택했다는 말이냐?” 그 말에 염파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더군다나 같은 도(刀)의 길을 걷고 있으니까요.” “........그래?” 염파의 마지막 말에 천여운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 같은 표정을 보았는지 의식한 염파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무조건 수하로 받아달라는 건 아닙니다. 단지 삼 단계 시험을 통과할 수 있게 공자님께서 저를 잠시라도 써달라는 겁니다.” 모든 의심이 될 만한 부분은 전부 해명했기에 결정은 천여운에게 달려 있었다. 염파가 간절하게 바란다는 눈빛으로 보내며 공손하게 포권까지 취해보였다. “공자께서 절 받아주시겠습니까?” 그런 염파의 말에 천여운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이에 그가 자신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한 염파가 무릎까지 꿇으며 감사의 인사를 올리려고 했다. “공자님께 감사...” “거절한다.” “네?” 실눈까지 커져서 반문 하는 염파를 내려다보며 천여운이 다시 한 번 강조했다. “거절한다고.” 13장 열한 명의 인재를 모으라(3) “어, 어째서 거절을?” 설마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리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염파였다. 정보를 제공한 것부터 시작해 다음 삼 단계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필요한 이점들을 전부 알려주었다. 그런데 천여운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에도 거절이었다. “그건 네가 스스로 생각해볼 문제지.” 그 말을 끝으로 천여운은 더 이상 미련이 없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염파에게서 몸을 돌린 천여운의 눈빛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나노, 안면 분석 모드 해제.’ [안면 분석 모드를 해제합니다.] 천여운의 명령과 함께 나노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려 퍼졌다. 안면 분석 모드. 그것은 사람의 얼굴에 있는 이백세 개의 안면 근육의 움직임을 통해 감정 상태나 진실 혹은 거짓말을 분석하는 나노 머신의 또 다른 기능 중에 하나였다. 완벽하게 상대의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상대방에게 거짓을 말한다는 기미를 감지하기에는 좋은 기능이었다. ‘......수상해.’ 염파와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 계속해서 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유찬의 그림자를 느낀 그는 도중에 안면 분석 모드를 가동시켰다. 삼 단계 시험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전반적인 내용에서는 안면 근육에 특별한 변화는 없었다. 그런데 왜 다른 종파의 소교주 후보자들에게 의탁하지 않았냐는 질문을 하는 순간, 염파의 답변에서 나노가 안면근육의 변화를 감지해냈다. “네. 거기는 이미 만석이더군요. 이미 그분들을 모시는 상위 종파의 실력자들이 포진해 있어서 제 자리는 없었습니다.” [안면 근육의 미세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상대방이 거짓말을 하고 있을 확률이 45퍼센트입니다.] “뭐....그렇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여섯 종파의 공자님들은 전부 같을 거라고 생각이 들더군요.” [근육의 떨림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상대방이 거짓말을 하고 있을 확률이 62퍼센트로 상승했습니다.] 아무리 미래의 과학 기술로 무장한 나노 머신이라고 해도 복합적인 유기체인 인간의 감정을 완벽하게 해석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첩자로서 훈련을 받았다거나, 스스로 감정 조절에 능숙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십육 세의 소년에 불과한 염파가 완벽하게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렇게 의심을 키워가는 도중에 천여운에게 결정적으로 확신을 주는 단서를 제공했다. “네. 더군다나 같은 도(刀)의 길을 걷고 있으니까요.” ‘우린 같은 도(刀)의 길을 걷고 있잖아.’ 천유찬이 했던 말과 매우 흡사했다. 그 말에서 천여운은 염파에게서 도마종의 깊은 그림자를 확신하게 되었다. ‘끄나풀인가......’ 이렇게 확신하게 되니, 의심할 만한 여지가 있는 말들이 많았다. 만약 천여운 본인이 일반 생도이고 도(刀)를 추구하는 상위 종파였다면, 당연히 도를 추구하는 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유찬을 먼저 찾았을 것이다. ‘현마종과 검마종의 후보자를 찾아갔었다고? 웃기는 놈이로군.’ 교묘하게 도마종을 제외시켰다. 현마종의 후보자 천무연과 더불어 소교주의 자리를 다투고 있는 천유찬을 말이다. 스스로 의심받을 만한 말들을 의식해서 빼느라 중대한 실수를 범한 것이었다. 그렇게 최종적으로 염파를 믿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린 천여운은 그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해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그를 추궁하고 싶었지만 이득이 될 만한 정보를 공짜로 챙긴 셈이었으니 미련 없이 개인 연공실로 돌아갔다. 천여운이 먼저 산을 타고 내려가고 난 뒤, 허탈해 하던 염파는 뒤늦게 산을 내려와 인적이 드문 삼 관 건물과 사 관 건물의 사이에서 누군가와 접선하고 있었다. 그는 누군가는 바로 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유찬이었다. 아직까지 삼 관과 사 관 건물을 사용하고 있지 않았기에 밤에는 등불조차 없어 어두웠다. 어둡고 인적이 드문 이곳은 천유찬이 종종 초식 수련을 하는 곳이기도 했다. 천유찬은 건물 벽에 기대서 여유롭게 염파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녀석이 거절했다고?” “네......거절 당했습니다.” 염파가 힘없는 목소리로 답하자 천유찬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삼 단계 시험에 대한 정보만 듣고는 단호하게 거절하고 가버리더군요. 특별히 의심을 살 만한 말을 했던 적은...” “푸하하하하하핫!” 염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천유찬이 배를 붙잡고 웃어댔다. 평소에도 가벼운 모습을 사람들에게 대하는 그였기에 익숙했지만, 임무에 실패했는데 왜 이렇게 웃어대는지 이해할 수 없는 염파였다. “아, 정말 재미있는 녀석이라니깐. 정보만 쏙 빼 먹고 날랐잖아?” 천유찬은 정말로 웃겼다는 듯이 손을 휙휙 휘저으며 말했다. 염파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천유찬이 겨우 웃던 것은 멈추고 말을 이어갔다. “뭐, 이런 얕은 수작에 넘어가진 않는다는 말이지.” 천유찬이 아쉽다는 듯이 말은 했지만 특별히 기대를 하진 않은 듯 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애써 세웠던 계획이 전부....” “이미 물거품이 되었는데 뭘. 다시 가서 애걸복걸하면서 받아달라고 하려고? 걔가 그리 멍청해 보여?” “그건 아닙니다.” 천유찬에게 들은 것처럼 천여운은 절대로 사람을 쉽게 믿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향한 눈빛에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의심스러운 눈초리가 갈수록 강해진다는 느낌마저 받았으니 말이다. “네 말대로 되었으면 재미있을 뻔했지만, 조원 한 명이 모자라다고 탈락하기에는 좀 아까운 녀석이지. 소교주 자리를 놓고 경쟁해야 할 녀석이 아니었다면 어떻게든 다시 회유해보겠는데 말이야. 후후후.” 그것은 바로 염파의 계획이었다. 염파는 그의 소교주 쟁탈전을 돕기 위해 근래에 들어서 부각되어 가고 있는 천여운을 탈락시킬 계획을 짜서 알려주었다. 염파가 천여운의 조원으로 침투해 있다가 삼 단계 시험을 치르는 당일 날에 그의 조에서 빠져 조원을 다 못 채우고 탈락하게 만드는 계획이었다. -탁! 염파가 천유찬의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십시오. 공자님. 아직 다른 계획들도 있습니다.” “아냐. 아냐. 됐어. 괜찮아.” 천유찬이 빙그레 웃으면서 괜찮다며 그를 다독였다. 그 말에 오히려 더 불안감을 느꼈는지 염파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괜찮다는 말씀은?” “더 이상 그런 짓은 안 해도 되니깐. 네가 들어갈 조를 한 번 구해봐. 아니면 네가 조장이 될지 누가 알아?” “넷?” 놀란 염파가 당황해서 실눈을 크고 반문했다. 어떻게든 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유찬의 눈에 들기 위해서 갖은 애를 써왔던 그였다. 그런데 다른 조를 알아보라고 하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 그럼 저를 받아주시지 않는...” “에이. 내가 어떻게 그래. 안 그래도 원래 있던 애들 중에서도 걸러야 할 녀석들도 몇 명이나 있는데 말이야.” “고, 공자님 제발 기회를 주십시오!” 염파가 애걸복걸 하듯이 바짓가랑이라도 잡으려고 했지만 천유찬이 가벼운 몸놀림으로 옆으로 쏙 피해버렸다. 그리고는 평소와 같은 미소를 지우고는 무게감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난 무능한 인재는 필요가 없거든. 그러니깐 꺼져.” 결국 염파는 두 소교주 후보자들에게 단호하게 버림을 받고 말았다. 염파가 울먹이며 돌아간 뒤에 천유찬은 그가 했던 보고 중에서 유일하게 신경 쓰이는 부분을 되새겼다. ‘한 수에 제압 했다라......’ 이틀 전에 보았던 천여운의 무위를 떠올려 봤을 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보고였다. 그것이 운일지 실력일지는 지켜보면 알게 될 것이다. 한편 산을 내려온 천여운은 곧장 지하에 있는 개인 연공실로 돌아왔다. 개인 연공실로 돌아온 천여운은 아까 전에 들었던 삼 단계 시험에 대한 정보를 떠올리게 되었다. ‘열한 명의 인재라....아직 확실한 건 없다.’ 염파에게 좋은 정보를 알게 되었지만 아직까지 마도관의 관주인 좌호법 이화명의 입에서 정확한 시험 방식을 공지 받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보를 귀띔 받았으니 자신만의 인재를 구할 방법 정도는 생각해둬야 할 것 같았다. 팔 조에서 생각해둔 몇 명은 있었지만 염파의 말대로 검진을 펼칠 열한 명을 채우기에는 인원이 모자랐다. 더군다나 염두해 둔 그들이 과연 자신을 따를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일단 오늘 훈련을 마무리하고 숙소로 돌아가서 계속 생각해봐야겠다.’ 지금 당장은 남은 훈련에 집중하기로 했다. 천여운이 머릿속에 있는 나노에게 명령을 내렸다. ‘나노, 어제 일, 이 층의 비급 서재에서 스캔 해둔 무공 비급서들은 전부 분석이 끝났어?’ [네. 그렇습니다. 일 층의 삼류무공 비급서 오십오 권과 이 층의 백오십육 권의 분석이 완료되었습니다.] 일 층에서 스캔했던 무공원류 서적들을 제외한 무공 비급서는 삼류 이류를 분류하지 않고 모두 합쳐서 총 이백십일 권이었다. 이미 일류무공인 단검비술과 상승 무공이라 할 수 있는 접무도법, 그리고 천마조사의 심득으로 짐작되는 절세 검 초식 등을 익혔는데 왜 이런 잡다한 무공을 스캔한 것일까? ‘나노. 분석이 완료된 것들을 아바타로 형성할 수 있어?’ [네. 가능합니다.] 그것은 바로 나노의 아바타 생성 기능 때문이었다. 천여운은 좀 더 다양한 무공들과의 대련 경험을 쌓기 위해 그렇게 많은 비급서들을 스캔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고작 삼류와 이류 무공의 비급서들을 아바타로 만들어낸다고 해도 절정의 초입에 이른 천여운에게는 큰 도움은 되지 않는다. 여기서 천여운이 생각해둔 바가 있었다. ‘나노, 혹시 한 대상자를 지정해서 그 사람의 공력과 움직이는 수준에 맞춰서 분석한 무공들을 펼칠 수 있게 할 수 있어?’ [대상 모델을 아바타로 지정하시고, 무공 설정을 하신다면 가능합니다.] 나노의 대답에 천여운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머릿속에 전이된 정보대로라고 한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나노의 입으로 가능하다고 말을 하니 대련의 수준을 다양하게 바꿀 수 있게 되었다. ‘그럼 일단 대상자는 천무금으로 해서 무공은 처음 스캔했던 오무검법으로 설정해줘.’ [알겠습니다. 사용자의 시각 정보에 증강현실(增强現實) 개안(開眼) 가동. 시뮬레이션을 위한 아바타를 생성합니다. 대상 모델: 천무금 무공 설정: 오무검법] 나노의 목소리가 울리면서 천여운의 동공이 떨리며 증강현실이 개안되었다. 그리고 눈앞에 흰 빛의 입자들이 모여들어 사람의 형태를 이루더니 이내 천무금의 모습으로 변했다. [천한 놈. 덤벼라.] 생성된 천무금의 아바타가 천여운에게 여전히 건방진 말투로 도발했다. 워낙 천무금의 아바타와 많은 대련을 했기에 이제는 한 귀로 거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 천여운이었다. ‘네 녀석이 덤벼라.’ [건방진 놈! 하압!] 천무금의 아바타가 천여운을 향해서 오무검법의 초식을 펼쳤다. 단순한 삼류 무공이라고 해도 일류 고수의 손에서는 훨씬 정교하게 초식이 발휘되기 마련이었다. 천무금의 아바타가 그럴 듯한 초식으로 공격해오자 천여운이 가볍게 보법을 펼치며 검초를 우측으로 피한 뒤에 접무도법의 도초를 펼쳐 아바타의 목에 손날을 날렸다. ‘이겼다.’ -퍽! 우득! [컥!] 평소에 숲에서 대련을 했을 때와 동일한 방식이었는데, 결과는 달랐다. 천무금의 아바타의 목이 손날에 맞고 기괴하게 꺾이더니 흰빛의 입자로 흩어져버렸다. [천무금의 아바타가 목뼈가 꺾여 사망했습니다.] “뭐?” 천여운의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불과 사흘 전만 하더라도 천무금의 아바타에 목을 치면 옆으로 넘어지는 것이 다였다. 황당해하는 천여운의 머릿속으로 나노의 목소리가 울렸다. [주인님의 공격에 실린 힘을 천무금의 아바타가 견딜 수가 없습니다.] ‘아아.....’ 천여운은 그제야 이해가 갔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맨손으로 펼친 도초였지만 절세초식을 익히기 위해 육체 전이를 하면서 물리적인 힘이 한계치에 도달한 그였다. 더군다나 그 무위가 절정의 초입에 오르면서 내공까지 상승했기에 일류고수인 천무금의 아바타가 제대로 상대될 리가 만무했다. 조금이라도 천여운을 상대로 버티려면 복마종의 상승 도법을 써야만 가능할 것이다. ‘아....이게 아닌데.’ 실력이 상승하면서 이런 문제가 발생할 줄은 몰랐다. 그렇다고 아바타에 이류 무공을 설정한다고 해도 그리 크게 바뀔 것 같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천여운이 방법을 바꿔보기로 했다. ‘그럼 이렇게 해보자. 천무금의 아바타를 다섯 명, 아니 열 명으로 생성해서 전부 다른 이류 무공들로 설정해줘.’ [알겠습니다.] 한 번도 아바타의 숫자를 늘려본 적은 없었지만 절정의 초입에 이르렀으니 그에 상응하는 대련을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시뮬레이션을 위한 아바타를 생성합니다. 대상 모델: 천무금 외 천무금 아홉 명. 무공 설정: 단천비검. 선풍각, 오정무검, 삼절검, 낙수검, 비형권, 마형권, 비상흔권, 천애권, 초일도법.] 순식간에 열 명이나 되는 천무금의 아바타가 생성되었다. 넓지 않은 개인 연공실이었지만 증강 현실로 생성되는 아바타들은 실체가 아니었기에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거리가 멀리 있는 것처럼 시각 정보에 원근이 조정되었다. ‘아.....너무 욕심 부렸나?’ 자신을 빙 둘러싸고 있는 천무금의 아바타 열 명과 대치하고 나니, 내심 처음부터 과했다는 생각이 드는 천여운이었다. 아직까지 한 번도 다수의 사람과는 대련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걸 생각한다면 이번이 좋은 경험일 수도 있었다. ‘일단 해보자!’ 전의를 가다듬은 천여운이 천무금의 아바타들을 향해 접무도법의 기수식을 취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열 명의 천무금의 아바타가 동시에 외쳤다. [천한 놈 주제에!] [건방진 천한 놈이!] [어딜 도발 하는 거냐? 천한 놈이!] [혼꾸멍을 내주마. 천한 놈아!] 너무 현실에 기초해서 생동감 있게 만들다 보니, 동시에 서로가 다른 말로 천여운을 도발하는 천무금의 아바타들이었다. 그 동안 천무금의 아바타가 하는 도발을 한 귀로 흘릴 만큼 익숙해졌던 천여운도 일순간 인상이 굳어져버렸다. ‘젠장! 다음부터는 다수와 대련할 때는 음 소거를 시키고 해야겠다.’ 일부러 도발에도 버틸 수 있도록 실전에 가깝게 하기 위해 음 소거를 시키지 않았었는데, 천무금의 아바타들은 아무래도 아닌 듯 했다. [하압!] [하압!] [하압!] [하압!] 정신 공격에 버금가는 아바타들의 도발 난무가 끝나고 드디어 그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동시에 네 명이나 되는 천무금의 아바타가 이류무공인 단천비검과 선풍각, 오정무검, 삼절검의 초식들을 펼치며 천여운을 사방에서 공격했다. ‘동시에 막아야 한다!’ 이럴 때 가장 효과적인 초식이 있었다. 접무도법의 제 이 초식 회원접경(回圓蝶警)이었다. 천여운의 몸이 빠르게 회전하며 나비와 같은 잔상이 실린 쾌속한 도초로 네 명의 천무금 아바타가 펼치는 초식들을 단숨에 파훼했다. -파스스스! 두 명의 아바타가 접무도법의 도초에 요혈을 직격당해 흰빛의 입자로 흩날리며 사라졌다. '첫 번째 공격은 막아냈고 다음은. 헛!' 첫 다수의 공격을 파훼했다고 좋아할 순간이 없었다. 대기하고 있던 다른 천무금의 아바타들이 일제히 천여운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모습에 순간 당황한 천여운이 이들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용천혈에 공력을 실어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그 순간, -쾅! “크윽!” 천장에 머리를 박고 말았다. 증강현실 속에 있는 아바타들로 인해 순간 개인 연공실에 대한 실제 원근감을 상실하고 만 천여운이었다. 13장 열한 명의 인재를 모으라(4) -쾅! 머리를 박은 천여운은 개인 연공실 바닥으로 넘어졌다. 별이 핑도는 듯 어지러워 하는 그의 머릿속에 나노의 목소리가 울렸다. [증강현실을 일시 정지합니다.] 재빠르게 상황 판단을 한 나노가 증강현실에 있는 천무금의 아바타들의 움직임을 중지시켰다. 덕분에 여덟 명의 천무금들은 제각각 초식을 펼치는 자세에서 인형처럼 굳어져 버렸다. 천장에 머리를 박은 충격도 잠시였다. “아!” 개인 연공실의 이층 바닥을 구멍 낸 덕분에 지하로 쫓겨났던 천여운은 당혹스러운 마음에 연공실의 천장을 쳐다보았다. 이 층의 연공실 바닥을 주먹으로 전력으로 내려쳤을 때에 비한다면 힘이 적게 들어갔지만, 뛰어오르는 힘에다가 단단한 머리로 박은 탓에 혹시나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아.......” 천여운의 입에서 괴로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지하 연공실의 천장에 구멍이 뚫리지는 않았다. 단지 문제는 천여운의 두상 크기만큼 천장이 움푹 파였고, 그 주변 전체가 쩍쩍 갈라져서 균열이 나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개인 연공실을 부순다면 네 녀석이 다시는 이곳 개인 연공실을 사용할 일은 없어질 테니 반드시 명심해라.’ 개인 연공실을 담당하는 무공 교두가 했던 말이 메아리가 퍼지듯이 머릿속을 수십 차례 스쳐지나갔다. ‘......보고하지 말까?’ 이 사실을 보고한다면 필시 개인 연공실의 사용을 금지 당할 것이다. 짧은 찰나에 수많은 고민을 하던 천여운은 결국 담당 교두에게 이실직고하기로 마음먹었다. ‘나중에 들키면 문제가 더 커지겠지. 휴.’ 개인 연공실은 생도들이 숙소로 돌아가게 되면 건물을 청소하는 용역들이 정리하러 온다. 그렇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천장에 부서진 것을 들키게 될 것이다. 괜한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서 밉보일 바에는 이실직고를 하는 편이 나았다. ‘나노 증강현실 해제.’ [증강현실을 해제하겠습니다.] 증강현실을 해제한 천여운은 일 층의 사무실에 있는 개인 연공실의 담당 교두에게 이 같은 사고를 보고했다. “뭐야! 또 연공실을 부숴?” 천여운의 보고에 불 같이 화를 내며 같이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에서 천여운이 훈련하던 개인 연공실의 천장을 확인한 담당 교두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이마를 손등으로 짚으며 물었다. “대체 뭘 한다고 천장이.....아이고 두(頭)야.” 머리가 지끈거리는 모양이다. 어찌나 어이가 없었는지 말문이 막혀하던 담당 교두가 냉정하게 말했다. “경고했었지? 네 녀석은 이제 이곳 개인 연공실을 사용금지 한다.” “......정말 죄송합니다.”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은 없었다. 무공 교두가 사전에 경고를 했던 부분이었기에 천여운은 군말 없이 이를 받아들였다. 고개 숙여서 사죄하고 나가려는 천여운을 담당 교두가 불렀다. “흥. 어딜 가느냐? 따라 오거라.” “알겠습니다.” 개인 연공실 사용 금지 이외에도 추가적인 벌칙이 있는 것 같았다. 담당 교두를 따라가니, 밖으로 나가서 개인 연공실의 건물의 바로 맞은편으로 향하고 있었다. ‘본관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의아했지만 천여운은 군말 없이 그를 따라갔다. 개인 연공실 건물의 맞은편에 자리한 건물의 규모는 개인 연공실의 딱 절반 정도의 크기였다. 이곳 건물은 아직까지 생도들에게 개방이 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던 천여운이었다. 건물 내부가 어둡기에 등불을 들고 있는 담당 교두를 따라가 보니, 마치 개인 연공실처럼 여러 호실들로 나누어진 문들이 보였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그 간격들이 훨씬 넓다는 것이었다. 담당 교두가 한 호실의 문을 열어젖히더니 천여운에게 들어가라고 했다. “아!” 놀랍게도 이곳은 연공실이었다. 개인 연공실보다 훨씬 넓고 쾌적한 환경으로 되어 있었다. 연공실 벽에 있는 호롱불의 심지에 불을 붙이며 담당 교두가 입을 열었다. “네 녀석은 이제부터 여기서 수련해라.” “네?” “개인 연공실에 내버려두면 또 벽을 부술게 뻔하지 않느냐.” 씨익 하고 웃으며 말하는 무공 교두의 말에 천여운은 어쩔 줄 몰라 했다. 경고했던 규칙을 깨뜨리고 연공실 벽을 또 부쉈기에 벌칙을 받을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다르게 새로운 연공실을 제공받게 되니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여긴 대체?” “원래 사 단계 시험을 통과하면 개방되는 연공실이다.” “사 단계 시험이요?” “그래. 사 단계 시험은 절정의 경지에 이르지 않고는 통과할 수가 없지. 그래서 그 시험을 통과해서 대주의 직위를 받은 생도들에게 허용되는 연공실이다.” “......저는 사 단계 시험에 통과하지 않았습니다만.” “흥. 당연히 통과하지 못했지. 하나, 네 녀석이 사고 친 것 때문에 이곳의 개방을 조금 앞 당 긴 것뿐이다. 실은 이러했다. 천여운이 이 층에 있는 개인 연공실의 바닥을 부순 것을 마냥 화낼 일이 아니라고 고민하던 담당 교두는 마도관주인 좌호법 이화명에게 이 같은 사실을 보고하고, 생도들 중에 절정의 경지에 이른 자에 한해서는 다음 연공실을 개방하자는 건의를 올렸다. 물론 사유로는 절정의 경지에 이른 자가 수련 도중에 개인 연공실 벽을 파손할 수 있다는 것을 예로 들었다. 이 건의를 타당하다고 여긴 좌호법 이화명은 이것을 승인했다. “그런데 제가 절정의 경지에 오른 것은 어떻게?” 의아해하는 천여운에게 담당 교두가 피식하고 웃으며 말했다. “개인 연공실의 단세석 벽을 부수려면 적어도 절정의 경지에 이른 공력이 필요하지.” 이 같은 사실로 유추해냈던 것이었다.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에 천여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 연공실은 격세석으로 만들어졌으니, 네가 아무리 난리를 쳐도 부서질 일은 없으니 안심하고 수련에 매진하도록.” “감사합니다!” 천여운이 포권을 취하자 담당 교두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나갔다. 그런데 이때 담당 교두는 알지 못했다. 천여운의 물리적인 힘은 격세석을 넘어서 청옥석에도 흠집을 낼 만큼 극에 이른 사실을 말이다. 담당 교두가 가고난 후에 천여운은 사실대로 이실직고한 것이 전화위복이 되었다는 생각에 안심하게 되었다. ‘이 정도 크기의 연공실이라면 증강현실을 개안해도 괜찮겠구나. 나노, 지금 시간이 어느 정도 되었지?’ [술시(戌時) 중반을 조금 넘겼습니다.] ‘그래?’ 아직까지는 숙소로 돌아가기까지 제법 시간이 남아있었다. 남은 훈련을 계속해도 되겠다고 판단한 천여운은 나노에게 명해서 중도에 멈춰야 했던 열 명의 천무금 아바타와의 대련을 마저 진행하려고 했다. “아!” 그러던 차에 천여운에게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다수와의 훈련을 하기 전에 시험해보고 싶은 것이 생각났다. ‘나노, 혹시 섭맹 스승님을 아바타로 지정해서 대련을 할 수 있어?’ [의무실에서 접무도법의 초식 동작을 보여 주었던 것을 기준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가능합니다.] 나노의 대답에 천여운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섭맹 스승님이라면 충분히 천무금보다는 더 도움이 되겠지?’ 아직 일류고수인 천무금의 아바타가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한 천여운은 마땅한 아바타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무공을 설정하시겠습니까?] ‘무공은.....일단 접무도법으로 해줘.’ 천여운은 대담하게도 접무도법으로 무공을 설정했다. 처음에는 삼류나 이류 무공으로 설정할까 하다가 우호법 섭맹과 정식으로 대련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궁금해졌다. ‘초식을 보여주셨던 수준이라고 해도 스승님의 실력이 천무금보다는 월등하겠지?’ 그것은 당연한 생각이었다. 우호법 섭맹은 화경의 경지에 오른 절대고수였다. 도기나 도강을 사용하지 않았다고는 하나, 제자를 위해서 열과 성의를 다해 선보인 초식동작이 절대로 약한 수준일 리가 없었다. [사용자의 시각 정보에 증강현실(增强現實) 개안(開眼) 가동. 시뮬레이션을 위한 아바타를 생성합니다. 대상 모델 섭맹 무공 설정 접무도법] 나노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리며 천여운의 눈에 증강현실이 개안되었다. 흰 빛의 입자들이 사람의 형태를 이루더니 이윽고 우호법 섭맹의 아바타가 생성되었다. 코끝이 빨개서 호리병을 들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는 본인이었다. ‘후우.’ 천여운이 긴장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고작 아바타를 생성했을 뿐이지만 천무금의 아바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긴장감이 샘솟게 만들었다. ‘본교 무공 서열 십위 권에 속하는 절대고수와 대련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한 번 해보자!’ 전의를 다 잡은 천여운이 접무도법의 기수식을 취했다. 어찌 본다면 사문의 사제가 대결하는 구도라고 할 수 있었다. 우호법 섭맹의 아바타가 천여운을 향해 호리병을 들어 보이며 도발했다. [애송이 제자야. 한 번 겨뤄보자 꾸나! 클클.] 기가 막힐 정도로 상대의 말투까지 정확하게 재현해내는 나노였다. 기수식을 취한 상태로 눈치를 보던 천여운이 먼저 섭맹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선공을 취한다.’ 어차피 무위로 비교하자면 아직까지 섭맹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먼저 공격해서 이점을 노려야 했다. 천여운의 신형이 그를 향해 쇄도해 접무도법의 도초를 펼쳤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파파파파팍! 섭맹의 아바타가 초식도 아닌 접무도법의 식들만 사용하여 가볍게 천여운의 도초를 막아내더니, 발차기를 날려서 천여운의 턱을 걷어찼다. -퍽! “크흡!” 턱을 맞은 천여운의 몸이 부웅하고 떠오르자, 섭맹이 기다렸다는 듯이 접무도법의 삼 초식 접무칠연(蝶舞七聯)을 펼쳤다. 접무도법의 일곱 식이 연달아 이어지며 섭맹의 전신이 나비처럼 잔상을 일으키며 천여운을 스치고 지나갔다. -촤촤촤촤촤촤촥! 찰나의 순간에 승패가 결정 났다. 천여운의 몸에 흰 입자들이 날카로운 도상을 입은 것처럼 반짝이며, 쓰라린 고통과 함께 그의 몸이 허공에서 세 바퀴 가량을 돌며 바닥에 떨어졌다. “끄으으윽!” 바닥에 떨어진 천여운이 고통으로 몸을 들썩였다. 증강현실이었지만 도초에 맞은 상처들을 정확하게 재현해냈던 나노가 빠르게 다시 상처들을 수복시켰다. 병을 주고 약을 준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이는 것일까. “하아...하아...” 고통이 완화가 되자 천여운은 충격을 받은 얼굴이 되었다. 당연히 상대가 되지 않을 줄은 알았지만 설마가 한 초식도 못 버틸 줄은 몰랐다. 마교의 무위 서열 십위 권에 속하는 절대고수의 위엄을 몸으로 체험하게 된 천여운이었다. ‘접무도법을 쓰는 스승님을 상대로는 아직 무리인가.’ 당연한 결과였지만 이상하게 분했다. 이 감정은 무인으로서 지고 싶지 않다는 자존심일 지도 몰랐다. [아바타의 대상과 무공 설정을 교체하시겠습니까?] 정확한 분석으로 아바타마저 교체하라고 권유하는 나노의 말에 천여운이 딱딱하게 인상을 굳혔다. 자신도 뼈저리게 느끼는 부분을 남이 지적하면 기분이 좋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잠깐, 하나만 더 시험해보고 조정할게.’ [알겠습니다. 계속 전투를 재개하겠습니다.] 나노의 목소리가 끝남과 동시에 행동이 정지되어 있던 우호법 섭맹의 아바타가 다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왜 다시 해볼 테냐? 클클.] 천여운을 향해서 덤비라는 시늉을 했다. ‘후우.’ 천여운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며 앞서 취했던 접무도법의 기수식을 버렸다. 그리고는 펴고 있던 손날을 세 손가락을 접어서 검지(劍指)의 형태를 만들었다. 천여운이 취하는 기수식은 다름 아닌 청옥석 비석에 남겨져 있었던 천마조사의 심득이라 할 수 있는 절세 검 초식의 자세였다. [받아랏!] 천여운이 기수식을 취하자 이번에는 섭맹의 아바타가 먼저 신형을 날렸다. 그 순간 천여운이 눈빛을 반짝이며 절세 검 초식의 일 초식을 펼쳤다. 순식간에 스물네 개의 식으로 이루어진 검 초식이 화려한 궤적을 그리며 섭맹의 아바타를 덮쳤다. -파파파팍! 짧은 찰나의 순간 섭맹의 아바타가 단숨에 세 초식을 연거푸 펼쳤지만 절세 검 초식을 파훼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검초에 요혈들을 직격당하고 말았다. -푸푸푸푸푹! [크으으윽!] 검초에 직격 당한 섭맹의 아바타가 신음성을 흘리더니, 뒤로 몸이 꺾였다. ‘됐다!’ 천여운이 나머지 일 식을 그에게 찔러 들어가자, 몸이 꺾였던 섭맹의 아바타가 빠르게 회전을 하며 접무도법의 제 이 초식 회원접경(回圓蝶警)을 펼쳤다. -촤촤촤촥! 회전하는 섭맹 아바타의 미간에 검지가 닿았지만 천여운의 몸이 회원접경의 도초에 휩쓸려 뒤로 튕겨져 나가고 말았다. “크으으윽!” 천여운이 가슴과 복부 쪽에 흰 입자로 된 도상이 선명하게 남았다. 절세 검 초식을 펼치고도 허무하게 졌다는 생각에 천여운이 고통을 잊고 참담한 눈빛으로 섭맹의 아바타를 바라보았다. “아!” 천여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놀랍게도 섭맹의 아바타의 전신이 천여운이 펼쳤던 절세검초의 검상들이 흰 입자를 흩날리며 보였다. 총 열아홉 곳과 마지막에 닿은 검식이 미간에 남아있었다. 순수한 검초만으로는 섭맹의 아바타를 압도한 것이었다. 그러나 무공의 경지에서 압도적인 격차가 있기에 치명타를 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초식 승부에서 이겼다고 해도 여러 요인들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승부에서 결착을 낼 수가 없구나.’ 천여운은 단순히 절세 검 초식을 얻은 것만으로 절대고수를 상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 대련을 통해 여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가 완전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적어도 섭맹의 수준에 육박하는 무공의 경지에 올라야만 가능할 것이다. ‘휴우, 조급해 하지 말자.’ 아직까지 제대로 무공을 익힌 지 불과 스물이틀이 지났다. 마도관을 여섯 단계의 시험을 통과하기까지 총 사 년이라는 긴 시간이 남았다. 천여운은 이날 새로운 목표를 가지게 되었다. ‘사 년 안에 스승님을 뛰어넘자.’ 지금 당장에는 섭맹의 아바타를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만약 천여운이 실질적으로 이 목표를 달성하게 된다면 사 년 만에 전무후무 한 속도로 강해진 절대고수가 탄생하게 될 것이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이니깐.’ 의지를 가다듬은 천여운은 남은 시간동안 다시 아까 전에 중지되었던 열 명의 천무금과의 대련을 재개했다. 처음에는 열 명의 천무금 아바타와의 대련에서 쩔쩔매던 천여운은 남은 휴식 날 하루를 통으로 투자할 결과, 열 명과의 대련을 동등하게 겨룰 수 있을 만큼 팽팽해질 수 있었다. 그렇게 사흘간의 휴식 기간이 끝맺게 되었다. 휴식이라 주어진 날들이었지만 한 명의 생도조차 그 순간을 휴식으로 보낸 이들이 없었다. 마도관에서 휴식은 도태를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남들보다 앞서 나가지 않으면 방출될 수밖에 없는 곳이 바로 마도관이었다. 이른 아침, 이 단계 시험을 통과하고 남은 이백일곱 명의 생도들이 대연무장에 오와 열을 맞춰서 서있었다. 마도관주인 좌호법 이화명이 본관 건물에서 나와 단상 위로 올라왔다. 대연무장에 서있는 생도들을 한 번 훑어본 이화명이 입을 열었다. “사흘 간의 휴식 기간을 잘 보냈느냐?” “마도!!!” 생도들이 함성 높여 답하자 이화명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사담은 생략하고 사흘 전에 공지한 대로 삼 단계 시험에 대한 것을 설명하고 마룡단을 지급하도록 하겠다.” 이화명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공 교두들이 열일곱 개의 탁자를 단상 앞에 가져왔다. 그리고 탁자 위로 각각 열두 권씩의 비급서적으로 보이는 책들을 올려놓았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좌호법 이화명이 삼 단계 시험을 공지했다. “삼 단계 시험은 열두 명이 검진을 이루는 것이다.” -웅성웅성! 시험에 관한 정보를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생도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반면 염파를 통해 시험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천여운의 눈빛은 이채를 띠고 있었다. 14장 무공 교두를 이겨라(1) 여섯 종파를 비롯한 상위 종파의 생도들 또한 회심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삼 단계 시험은 그들의 종파의 스승이나 어른들을 통해서 들었던 것과 동일하게 진행이 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들이 그렇게 좋아할 무렵 좌호법 이화명은 쉬지 않고 삼 단계 시험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열두 명이 검진을 이루기 위해서 최소 조건은 일류 수준의 무위를 지녀야 한다.” -웅성웅성! 좌호법 이화명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앞서 삼 단계 시험이 무엇인지 말해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파장이 일어났다. ‘일류 수준이라고?’ ‘도대체 몇 명이나 떨어뜨리려고 그러는 거야?’ ‘젠장!’ 좌중이 소란스러워지자 좌호법 이화명이 결국 언성이 높아졌다. “조용!!!” 공력이 실린 그의 사자의 포효와도 같은 일갈에 떠들썩하던 대연무장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좌중이 고요해지자 이화명이 인상을 굳힌 채, 말을 이어갔다. “단상 앞의 탁자 위에 있는 비급서들이 보이나?” “마도!!!” “본교가 자랑하는 검마섬진의 기본이 되는 일류 무공인 칠마검의 비급서이다.” ‘일류 무공!’ 일순간 생도들의 눈빛에 생기가 감돌았다. 방금 전 이화명의 일갈 때문에 크게 소란스러워지진 않았지만, 생도들의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소규모의 종파를 비롯해 일반 무가의 생도들에게는 꿈만 같은 일이었다. 일류 무공을 익힐 있는 기회가 흔하지 않으니 말이다. “네 녀석들이 오늘 지급되는 마룡단을 흡수하고 칠마검을 부단히 익힌다면 일류 수준의 무위를 익히는 것에는 하등 문제가 없다.” 이화명의 말에 천여운이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시험의 난이도가 어렵다고 한들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수준으로 해놓지는 않는다. ‘이렇게만 듣는다면 어렵지 않다. 하지만...’ 염파에게 들은 정보대로라면 여기서 이건 전제 조건에 불과할 것이다. 생도들의 눈빛이 살아나자 좌호법 이화명이 이를 꺾으려는 것처럼 슬며시 입 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삼 단계 시험은 정확히 오늘부터 스물여드레(4주)가 되는 날에 시행된다.” 스물여드레라는 말에 반 수 이상의 생도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확실히 기간이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이렇게 짧은 기간이 주어진다면 조원을 구하는 기간을 비롯해 칠마검을 익히고, 검진을 맞추는 것까지 계산한다면 상당히 빠듯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진짜 관건은 이어지는 말에 있었다. “열두 명이 검진을 이루어서 단상 앞에 서있는 무공 교두들을 쓰러뜨리면 된다. 간단하지?” 좌호법 이화명의 단상 밑의 우측과 좌측으로 나누어져 일 열로 나란히 서있는 서른여섯 명의 무공교두들을 가리키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간단?’ ‘교, 교두들을 쓰러뜨리라고?’ 서른여섯 명의 무공 교두들은 하나 같이 대주 급의 실력을 지닌 절정의 고수들이었다. 심지어 그들 중에는 무위가 절정의 극에 이른 자들도 더러 있었다. 이론적으로는 십이검마섬진이 절정의 고수를 상대하기 위함이라고 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탁탁! 무공 교두들 중에서 몇 명이 검은 봉을 꺼내서 손바닥을 반복적으로 내리치며 고압적인 표정으로 생도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겁을 주기 위해서라면 제대로 성공했다. ‘젠장!’ ‘어쩐지 쉽게 가나 했더니.’ 많은 생도들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차라리 생도들끼리 겨루는 것이라면 모를까. 실전 경험이 풍부한 이 무서운 교두들을 상대로 어떻게 이겨야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모든 것이 염파가 얘기한 대로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조장을 선정해주는 것 뿐인가.’ 염파의 예측한대로 시험에는 최종적으로 꺾어야 할 대상이 있었다. 그것이 생도들끼리 겨루는 것이 아니기에 난이도가 올라갔지만 일류의 수준에 이른 생도들만 구해서 검진을 익힌다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총 일곱 명.’ 천여운이 현재 구해야 할 인원이었다. 이 단계 시험을 통과하면서 천여운에게 호감 의사를 밝힌 일곱 명의 생도들이 있었다. 그들을 염두하고 있던 천여운은 어젯밤 허봉을 비롯한 일곱 명의 생도들을 불러서 다음 단계 시험의 정보를 밝히고 자신의 조원으로 들어오길 권했다. ‘미안하지만 시험이 걸려있다면 조금 그렇네.’ ‘미안합니다. 천 공자.’ 이 단계 시험에서 뛰어난 통솔력을 보였고, 그 이후로 팔 조 내에서의 평판이 올라갔기에 호감을 보인 생도들이라면 무리 없이 따르리라는 예상과 다르게 네 명이 이탈했다. 지금의 조 안에서 열두 명이 선정되는 것이 아니라면 자신들이 생각해둔 조장을 따르고 싶다는 것이 그들의 의견이었다. ‘네 명이라도 충분하다.’ 아쉬운 마음도 들었지만 나쁜 결과는 아니었다. 이 단계 시험을 통과하면서 네 명의 생도들에게 충성 맹세를 얻어냈다. 그들은 중소 종파 출신에 불과했지만 천여운의 빠른 성장과 통솔력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천여운을 따르기로 결정을 내렸다. ‘내 사람이라.....’ 다른 소교주 후보자들이 갖춘 세력에 비한다면 아직은 한참 모자랐지만, 이들의 충성 맹세를 천여운은 감사하게 여겼다. 어차피 다른 소교주 후보자들과 다른 출발점이었고, 여전히 불리한 상황임을 알고도 그를 따르기로 했다는 것은 진심에서 우러러 나오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시험이 치러지기까지 모든 과정은 이 단계 시험과 다르다. 모든 것은 생도들의 자율에 맡기도록 할 테니, 능력껏 조원을 모으고 검진을 익히도록.” 좌호법 이화명의 이어지는 말에 생도들이 표정이 복잡하게 변해갔다. 무공 교두들의 가르침이 없이 자율적으로 이뤄진다면 누구보다 뛰어난 조장을 따라야만 삼 단계 시험에 통과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의미였다. “네 녀석들이 총 이백일곱 명이니, 열두 명씩 나누어서 조를 편성한다면 총 열일곱 조가 만들어 지겠지?” ‘아!’ ‘그럼 세 명은?’ 생도들은 이화명의 말에 세 명이 누락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열일곱 조가 만들어지면 세 명의 생도들이 오갈 데가 없는 처지가 되고 만다. 즉 조원들이 빨리 조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시험도 치르지 못하고 방출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저 조장들만 분전한다고 될 시험이 아니었다. 뛰어난 조장 밑으로 들어가지 못 해도 탈락할 확률이 높아졌고, 조장마저도 구하지 못한다면 누락으로 탈락된다. 일반 생도들조차도 고민을 거듭할 수밖에 없는 시험 방식이었다. ‘대부분의 설명은 끝났다. 이제 조장만 정해지면 되는 건가?’ 이 같은 정보를 알고 있던 상위 종파의 생도들이 각 조의 앞에 서있는 여러 조장들에게로 시선이 돌아갔다. 이 단계 시험을 통과했던 기준으로 예측해 본다면 지금 현재의 조장들은 당연히 조장으로 선출될 것이 틀림없었다. 과연 그들 이외에 누가 조장으로 선출될 지가 관심사였다. “그럼 조장 선출 방법을 얘기하고 칠마검의 비급서와 마룡단을 지급하는 것으로 해산하겠다.” ‘응!?’ 좌호법 이화명의 말에 일부 생도들의 눈이 커졌다. 조장 선출 방법이라고 한다면 마도관에서 성적으로 조장을 지정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앞에 서있는 무공 교두들의 명찰이 보이나?” 이화명의 말에 모든 생도들의 시선이 무공 교두들의 명찰로 향했다. 미처 몰랐었는데 무공 교두들의 명찰 색이 제각각 달랐다. 서른여섯 명 중에서 유독 많은 명찰 색이 노란색이었는데, 전부 세어보니 총 열일곱 명의 무공 교두들이 이 노란 명찰을 가슴에 달고 있었다. ‘설마?’ 모두가 아닐 거라고 부정했지만 그들의 불길한 예감은 현실로 이루어졌다. “앞에 있는 열일곱 명의 무공 교두들에게서 노란 명찰을 이레(7일) 안에 빼앗은 사람이 조장이다.” '히익!' 모든 생도들이 표정이 일그러졌다. 조장을 선출하는 조건치고는 너무 높은 난이도였다. ‘무공 교두들을 상대로?’ ‘이건 뭐 전부 방출시키겠단 말인가?’ 최종 시험이 교두들을 검진으로 쓰러뜨리는 것이었는데, 시작부터 명찰마저 빼앗으라는 말은 교두로 시작해서 교두로 끝난다는 말이었다. 물론 빼앗아야 할 생도들은 조장이 되고 싶은 이들이었다. ‘잠깐만....교두들의 명찰을 많이 못 빼앗는다면 조가 열일곱이 아니라 더 줄어들 수도 있단 말이잖아.’ 조장을 지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해버리면 삼 단계 시험의 난이도가 굉장히 어려워지고 통과율마저 낮아져 버린다. 항의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런 담대한 배짱을 가진 생도는 누구도 없었다. “뭐, 그리 어렵게 생각하지 말도록.” 괜찮다는 식으로 웃어 보이는 이화명의 태도에 생도들은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노란 명찰을 차고 있는 무공 교두들은 본인들의 절기가 아닌 칠마검으로 상대해줄 거다. 이들의 칠마검을 파훼한 생도는 명찰을 얻을 수 있다.” 자신들의 절기가 아닌 일류 무공인 칠마검을 쓴다고 해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절정의 고수의 손에서 펼쳐지는 무공이 가벼울 리가 없었다. 하지만 여기에 숨겨진 의도를 파악하는 자들도 적지 않게 있었다. 천여운 역시도 그 중 하나였다. ‘빠른 시간 안에 칠마검을 파훼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 검 초식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히 난이도를 높이기만 위해서 시험 방식을 정한 것이 아니다.’ 천여운의 생각대로 무공 교두가 펼치는 칠마검을 파훼한 사람이 조장이 된다면 누구도 이견 없이 그를 따라서 칠마검과 검마섬진을 익히게 될 것이다. ‘이레......’ 단지 그 기간이 매우 촉박했다. 이것은 일부로 위기감과 절박함을 형성시키기 위한 것인 듯 했다. “후후후.” 혼란스러워하는 생도들의 분위기를 재미있다는 듯이 지켜보던 좌호법 이화명이 무슨 변덕이 일어났는지 대뜸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이레의 기간이 있기는 하지만 지금 당장에 도전해볼 생도가 있나?” 아직까지 칠마검의 비급서를 읽은 사람이 없다. 그런데 도전해볼 사람이 없냐고 질문하는 것은 순수한 실력만으로 무공 교두가 펼치는 칠마검을 파훼할 사람이 없냐고 묻는 것이었다. 일순간 좌중이 침묵으로 물들었다. 모든 생도들이 이화명의 제안에 선뜻 손을 들지 못했다. 대다수의 생도들이 아직 이류의 수준이었고, 일류에 이른 생도들도 파악하지 못한 검법을 순수한 실력으로 파훼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익(益)과 실(失)이 극명했다. 여기서 그만큼의 배짱과 실력을 보인다면 훨씬 빠르게 조원을 모을 시간을 확보하면서, 모든 생도들의 이목을 집중받기에 많은 생도들의 지원을 받을 확률이 높아진다. 하지만 여기서 무공 교두의 손에 패하게 된다면 조장으로서 신뢰감을 잃게 될 것이다. “훗, 그 정도 배짱은 아무도 없나보군. 그렇다면 이제..” -웅성웅성! 누군가 한 명쯤은 지원할 거라는 예상이 깨진 것에 실망스러워하며 비급서와 마룡단 지급을 진행하려던 찰나에 생도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호오!” 이화명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백일곱 명의 생도들 앞에 서있는 조장들 중에 세 명이 손을 번쩍 들고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일 조의 조장인 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 천무연과 팔 조의 조장인 천여운, 마지막으로 십이 조에서 독마종의 후보자 천종섬을 꺾고 조장이 된 십팔 번 생도였다. ‘이것 참.....재미있게 되었네.’ 이화명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두 인물에 흥미로운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현재 소교주의 자리에 가장 가깝다고 알려진 천무연과 천유찬 두 사람이 나올 거라는 예상이 뒤집어졌다. 이 자리에서 무위를 떨칠수록 생도들에게 각인이 되는데도 말이다. 정작 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유찬은 여유로운 얼굴로 상황을 관망할 뿐이었다. 만약 의무실에 입원한 것이 아니었다면 복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금 역시 앞뒤를 가리지 않고 지원했을 수도 있었다. ‘백기.....그리고 천여운!’ 두 사람은 이번 마도관에서 이화명의 모든 예상을 깨부수고 두각을 보이는 인물들이었다. 흥미로워하던 것도 잠시, 이화명이 그들을 앞으로 나오도록 했다. “이 단계 시험에서의 세 조장들이군. 그래 조장들이라면 이 정도 배짱은 있어야지. 후후후, 단상 앞으로 오거라.” 세 명의 조장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단상 쪽으로 모이면서 천여운의 눈이 자연스럽게 우측으로 걸어오는 백기에게 돌아갔다. 천무연이야 워낙 유명했지만 백기는 이 단계 시험 때 조장으로 진형을 능숙히 다루는 모습만 보았던 자였다. 오른쪽 눈가에 긴 흉터가 나있는 강인한 인상을 가졌다. “하하하하핫, 눈빛들이 좋구나. 그럼 무공 교두들 중에는 누가 상대해주겠느냐?” 이화명의 호탕하게 웃으며 묻자, 기다렸다는 듯이 노란 명찰의 무공 교두 일곱 명이 앞으로 나섰다. 의도한 것도 아니었는데 공교롭게도 그들 중에는 일 조와 팔 조, 그리고 십이 조를 담당했던 무공 교두들이 껴있었다. 14장 무공 교두를 이겨라(2) 좌호법 이화명이 앞으로 나서는 무공 교두들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생도들에게 쓸데없는 정을 가지지 말라고 하였는데, 아무래도 스물하루 동안 가르치며 정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후우.....’ 이미 앞으로 나섰는데, 들어가라고 한다면 이들의 체면이 우습게 된다. 따로 집무실에 있을 때면 몰라도 생도들 앞에서 면박을 준다면 남은 마도관의 기간 동안 기강이 흐트러질 것이다. 그런데 일곱 명 중에 의외의 인물도 나섰다. ‘호?’ 앞으로 나섰던 무공 교두들 역시도 그 자를 바라보며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무공 교두들 중에 세 명이 알아서 퇴진하였다. 오십대 후반에 희고 검은 수염이 듬성듬성 나있는 이 무공 교두는 모든 교두들을 통틀어 가장 나이가 많은 자였다. ‘호 교두.’ 호진창. 무공 교두들의 최고선임으로 가장 경험이 많은 자였다. 호진창은 무공 또한 초절정의 초입에 이르러 단주 급의 실력자이다. 오랫동안 마도관의 무공 교두로 있었고, 예전에는 현역으로도 전쟁에서 이름을 날렸었기에 현 마도관주인 좌호법 이화명도 선배로서 존중했다. ‘아.....저 분이 나선다면 굳이 내가 나설 필요가 없겠구나.’ 팔 조를 담당했던 무공 교두 임평도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는 뒤로 물러났다. 사실 임평은 천여운을 그리 좋아하진 않았다. 하지만 조장을 잃은 위기에 처한 팔 조를 통솔하여 이 단계 시험을 통과해 자신의 위신을 세워준 것에 대한 작은 보답으로 그 외의 도전자들을 상대하여 당장에 조장의 칭호를 얻지 못하게 해주려고 했었다. 그런데 굳이 최고선임인 호진창이 나섰다면 도와줄 필요가 없었다. ‘남은 건 네가 알아서 잘 해쳐 나가야 할 거다. 칠 번 생도. 저들 중에 누가 널 상대하든 봐주려고 하는 자들은 없을 터이니.’ 직접적으로 자신이 담당했던 생도를 상대하여 조장의 칭호를 줄 만큼 사리분별을 못하는 무공 교두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모두가 임평과 비슷한 마음으로 나선 것이었다. 자동적으로 상대할 숫자가 맞춰지자 이화명이 말했다. “후후후, 이제 구색이 갖춰졌군. 먼저 일 조의 조장이었던 일 번 생도부터 해보도록 할까. 누가 상대할 텐가?” “제...” “제가 하겠습니다. 관주!” 호진창이 말을 하려던 찰나에 십이 조를 맡았던 무공 교두인 여순이 다급히 손을 들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 자가 감히?’ 선수를 빼앗긴 것에 호진창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현재 소교주에 가장 가깝다고 알려진 현마종의 천무연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천무연이 얼마나 무의 재능을 지녔는지 확인해보기 위해 나선 것이었는데, 그것이 어이없게 무산되어 버리고 말았다. ‘선배님 죄송합니다. 선배님이 나섰다면 적당히 하지 않으셨겠죠.’ 십이 조를 담당한 무공 교두인 여순 또한 차기 소교주로 천무연이 어울린다고 생각했기에 그가 여기서 망신을 당하길 원하지 않았다. 최고선임 교두 호진창은 관심이나 호감과는 별개로 상대를 상대함에 있어서 절대로 적당히 라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호진창이 손을 들고 단상 위의 좌호법 이화명을 향해 외쳤다. “관주! 그렇다면 저는 십팔 번 생도를 맡겠나이다!” 그 모습에 속으로는 웃음이 나왔지만 이를 억지로 참아가며 좌호법 이화명이 위엄있는 목소리로 승인했다. “그러도록 하시오.” 십이 조의 담당 교두 여순의 얼굴이 굳어져 버렸다. 천무연을 위기에서 구해주려다 보니 도리어 자신이 담당했던 십팔 번 생도 백기가 위기에 처해버렸다. 호진창의 심기를 건드린 대가였다. 덕분에 천여운을 상대할 무공 교두는 자동적으로 일조를 담당했던 상문여가 되었다. 원래부터 천여운을 상대하려고 했던 상문여만이 뜻대로 되어서 흡족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두 사람은 먼저 시작하도록 하라.” 가장 먼저 겨루게 될 현마종의 후보자 천무연과 무공 교두 여순이 서로를 마주보고 가볍게 포권을 취했다. 그리고 서로를 향해 기수식을 취했다. 그들을 바라보는 천여운의 동공이 미세하게 떨리며 흰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먼저 나선 것은 당연히 생도의 신분인 천무연이었다. -팍! 천무연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오며 부드러운 장법을 펼쳤다. 현마종은 현마패검(玄魔敗劍)이라는 패도적인 검법과 유현운장(柔玄雲掌)이라는 장법으로 유명했는데, 검법 또한 뛰어났지만 장법만큼은 마교 내의 무공 중에서도 세 손가락에 꼽힐 만큼 대단했다. ‘유현운장.’ 구름처럼 물 흐르듯이 펼쳐지는 장법에 여순이 흥겹다는 듯이 외쳤다. “좋아!” 마교에 있는 무인이더라도 여섯 종파의 전인들과 겨뤄볼 기회는 흔치 않았다. 아쉬운 점은 독문무공으로 겨뤄보고 싶었으나, 시험을 위해서 칠마검으로 겨뤄야 한다는 점이었다. -파파파팍! 여순이 칠마검의 검초 중에 방어 초식인 검오(劍五)를 사용하여 천무연의 장법을 막아냈다. 평범한 검식들로 이루어진 방어 초식이었는데, 상당히 견고하고 틈이 없었다. 여순이 펼치는 검초의 검식들을 바라보는 천여운의 눈빛이 묘해졌다. ‘뭐지?’ 굉장히 익숙한 검식들이었다. 하지만 불과 한 초식만으로 판단할 수가 없었다. 첫 초식을 수월하게 막아낸 것에 흔들리지 않고 천무연이 제 이 초식을 펼쳤다. 그의 손바닥이 수많은 그림자를 만들어내며 여순의 상반신에 있는 요혈들을 향해 여러 각도로 쇄도해왔다. ‘대단하구나.’ 생도의 실력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초의가 잘 살아있는 장법에 여순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장법에 실려있던 공력만 보더라도 완숙한 절정의 경지였다. 오히려 생도라고 방심했다가는 몇 초식도 버티지 못하고 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생도라는 생각은 버리자.’ 무위만 보았을 때는 이미 대주 급에 이른 천무연이었다. 여순이 자신의 시야를 가리는 손바닥의 그림자들을 향해 동시에 검이(劍二)와 검삼(劍三)을 펼쳤다. -촤촤촤촥! 놀랍게도 평범한 검초 두 개가 맞물리면서 굉장한 변화를 일으키며 촘촘한 검식이 일어나, 수많은 그림자를 만들어낸 장법을 막아냈다. ‘이게 일류 무공이라고?’ 천무연 또한 놀란 눈치였다. 상승절기인 유현운장의 장초를 이런 식으로 막아낼 줄은 몰랐다. 검마가 만든 칠마검은 평범한 일류 검법이었지만 그 검식들과 초식은 다루는 자의 실력에 따라서 다양한 변화를 만들어낸다. ‘이럴 수가....’ 천여운은 여순이 펼치는 초식을 보며 확신할 수 있었다. 구성하는 초식은 달랐지만, 초식을 이루는 검식들은 청옥석 비석에 남겨져 있던 검식들과 완전히 동일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청옥석 비석의 검식들은 스물네 개라면 칠마검의 검식들은 그보다도 적었다. 지금까지 보여준 검식들은 여덟 개 정도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여순이 펼치는 초식들을 살펴보면 칠마검은 총 열두 개의 검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청옥석 비석의 검흔들과 동일한 검식이라니.....그렇다면.’ 그 수많은 검흔을 남긴 자는 검마라는 말인가. 확신할 수는 없지만 분명 검마와 관련이 있는 것은 틀림없었다. -파파파팍! 천무연과 여순이 십 초식 정도를 겨뤘을 때 이미 여순은 칠마검의 모든 일곱 초식을 사용했고, 모든 검식들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생각보다 견고한 여순의 초식에 점점 천무연의 눈빛이 냉정해져갔다. 동일한 절정의 경지였지만, 상대적으로 실전 경험이 월등하고 내공이 우위인 여순은 일류 무공인 칠마검으로도 여러 변화를 일으켜 잘 막아냈다. ‘교두는 교두란 말인가. 별 수 없구나.’ 여기서 승부수를 내지 못한다면 대결이 길어지고 더욱 불리해질 것이다. 천무연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자세를 취했다. 앞으로 나와 있던 오른손이 뒤로 가있고, 왼손바닥이 앞으로 향해졌다. “후우!” 천무연의 입에서 뜨거운 입김이 흘러나왔다. 그 모습에 그가 절초를 펼칠 거라는 것을 확신한 여순이 최대한 공력을 끌어올리며 막을 태세를 갖췄다. 그 순간 천무연의 신형이 쾌속해지며 그의 장법이 지금까지와 완전히 방향이 바뀌어서 펼쳐졌다. -타타타탁! ‘헛?’ 오른손으로 펼치던 장법에 익숙해져 있던 여순이 이를 막아내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왼손으로 펼쳐지는 장법은 같은 초식인데도 쇄도해오는 각도가 반대로 바뀌어서 적응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파파파팍! 겨우겨우 막아내던 찰나에 여순의 왼쪽 어깨로 예상하지 못한 검결지가 찔러 들어왔다. “아닛?” 여순의 눈이 커졌다. 왼손으로 장법을 펼치는 도중에 오른손으로 검초를 펼쳤으니 놀랄 만 했다. -팍! “크흑!” 여순의 어깨를 날카로운 예기가 관통하며 그의 몸이 뒤로 날아가 버렸다. 검기가 그의 어깨를 찌른 것이었다. 천무연의 오른손 검결지에는 선명한 빛으로 된 검의 형태를 갖춘 검기가 발하고 있었다. “와아아아아아아!!!” 대연무장에 서있는 일 조의 생도들을 비롯해 수많은 생도들의 입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다른 사람도 아닌 교관을 꺾고 첫 번째로 조장의 자격을 갖춘 생도가 탄생한 것이었다. 그도 모자라 절정의 경지에 이르러야 가능하다는 검기마저 보였으니 생도들이 탄성과 함성을 지르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무공 교두를 이기다니 대단해!’ ‘역시 현마종의 공자님이야 말로 소교주에 가까운 분이 틀림없어!’ ‘벌써 절정의 경지라니? 이미 생도들과는 차원이 다르잖아!’ 모든 생도들이 보는 앞에서 스스로의 실력을 증명해보였으니 이점을 챙긴 셈이었다. 이로 인해 많은 생도들이 그를 향한 경외감과 지지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역시 실망시키지 않는군.’ 단상 위에서 대결을 지켜본 좌호법 이화명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검좌장(右劍左掌). 좌검우장(左劍右掌)......일 장로의 비기를 익혀 내다니, 그야말로 천재로구나.’ 여섯 종파 중에서도 수좌를 차지하고 있는 현마종. 현마종의 수장인 일 장로 무진원은 두 절기를 양손으로 동시에 펼치고, 좌우를 바꾸는 비기로 교내에서 무공 서열 이 위를 차지한 절대적인 고수였다. 원래 현마종의 무공이라기보다는 그가 사라진 전진파(全眞派)의 비기인 쌍수호박에서 착안하여 만든 것으로 대결하는 상대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어려운 기술이었다. 현마종 내에서도 수장인 무진원 이외에는 누구도 익히지 못한 것을 익혀냈으니 대단한 무재라고 할 수 있었다. “훌륭하네.” 무공 교두 여순이 피가 흘러내리는 우측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소교주로서의 재능을 확인했기에 만족한 여순은 자신이 차고 있던 노란색 명찰을 떼어서 천무연에게 넘겼다. “지금부터 자네는 삼 단계 시험에서 조장의 자격을 가지게 되었네.” 노란 명찰을 넘겨받은 천무연이 그에게 포권을 취했다. “와아아아아아!” 이 모습에 모든 생도들이 다시 한 번 함성을 질렀다. 두 사람의 대결이 끝나면서 대연무장의 분위기가 뜨겁게 고조되었다. 모두가 천무연의 대단한 무위를 칭찬하고 경외하고 있을 때, 천여운의 시선은 그가 가슴에 차고 있는 노란 명찰로 가있었다. ‘명찰을 빼앗는 다라.....’ 그것이 단순하게 생각되지가 않았다. ‘한 사람이 하나의 명찰만 얻을 수 있는 건가?’ 명찰을 빼앗으면 조장이 될 수 있다고 말했었다. 생각해보면 명찰을 빼앗는다는 표현을 쓴 게 이상했다. 그렇게 천여운이 명찰에 대해서 의문스러워하고 있을 때, 좌호법 이화명이 단상에서 일어나 흡족한 목소리로 말했다. “훌륭하다. 일 번 생도는 이 단계 시험에 이어서 조장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을 축하한다. 그럼 두 번째 대결을 보도록 하겠다. 두 사람은 단상 앞으로 나오도록.” ‘아! 내 차례구나.’ 그의 말이 끝나자, 천여운과 일 조를 담당했던 무공 교두 상문여가 단상의 앞쪽으로 걸어 나와 거리를 벌리고 서로를 마주보았다. 노란색 명찰에 대한 의문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여기서 어떻게 하느냐가 향후를 판가름 한다.’ 모든 생도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자리였다. 조원을 모으는 것을 넘어서서 소교주 쟁탈전에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생도들에게 확실하게 각인시켜야 했다. 긴장된 마음도 있었지만 천여운은 일부러 내색하지 않고 전의를 다졌다. ‘호오.’ 무공 교두인 자신과 대치했음에도 불구하고, 긴장하는 내색 없이 오히려 전의를 불태우는 천여운의 눈빛에 상문여는 제법이라고 생각했다. ‘일 단계조차 못 버티고 낙오될 거라 여겼건만.’ 천여운은 지금까지 모든 무공 교두들의 예상을 빗나가게 만들었다. 아무런 연고조차 없고 마도관 입관 때만 하더라도 무공조차 제대로 익히지 못했던 천여운의 성장은 모두를 놀랍게 만들었다. ‘하나....네 녀석의 그 놀라운 행보도 여기까지다.’ 상문여는 여섯 종파에 속하지 않은 천여운을 소교주 후보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가 인정하는 후보는 현마종의 천무연과 도마종의 천유찬이 다였다. 이 자리 까지 올라온 것은 가상스러웠지만, 이제 그를 쓰러뜨리고 소교주의 자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자라는 것을 모두의 앞에서 증명해보일 것이다. ‘짓밟아 주마. 애송아.’ 14장 무공 교두를 이겨라(3) 모든 생도들이 단상 앞에 서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앞에 있었던 대결과 다르게 생도들의 눈빛에는 큰 기대감은 없었다. 그것은 두 사람의 극명한 실력 차이를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세 초식이라도 버티면 다행일 것 같은데.’ ‘일류와 절정의 차이야.....더 금방 끝날 수도 있어.’ ‘실력이 늘었다고 무공 교두한테 덤비는 건....아직은 무리수인 것 같은데.’ 이 단계 조별 시험에서 천여운이 보여주었던 무위를 기억하는 생도들이었다. 무공을 전혀 못할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일류 수준의 무공과 고절한 도법마저 선보였다. 당시에 놀라기는 했지만 이번 상대는 생도가 아닌 무공 교두였다. “그럼 대결을 시작하도록!” 좌호법 이화명의 목소리에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무공 교두 상문여는 절정의 고수였다. 앞서 현마종의 후보자인 천무연을 상대한 무공 교두 여순처럼 칠마검의 초식만을 쓰겠지만 그 실력이 어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천여운이 손바닥을 펴고서 접무도법의 기수식을 취했다. 상문여의 눈빛에 이채가 띠었다. ‘접무도법인가?’ 이 단계 시험이 끝나고, 마도관주인 좌호법 이화명을 통해서 천여운이 우호법 섭맹의 무공을 전수받았다는 사실을 모두 알게 된 무공 교두들이었다. 어째서 우호법 섭맹이 천여운에게 접무도법을 가르쳤는지가 의문스러웠지만, 평소에도 마음이 가는대로 멋대로 행동하는 섭맹을 떠올린다면 굳이 이해 못할 부분은 아니었다. ‘훗, 운이 좋아서 우호법의 도법을 익혔지만 아직 멀었어.’ 이 단계 시험에서 보여줬던 실력으로 짐작한다면 천여운의 무공은 일류 수준에 이르렀다. 짧은 기간 안에 그 정도로 향상된 것이 놀랍기는 했지만 자신은 절정의 고수였다. 무위, 경험, 내공부터 시작해 모든 것에 앞선다. 상승 무공인 접무도법이라고는 해도 천여운을 짓밟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무공 교두로서 체면이 있기에 먼저 손을 쓸 순 없는 노릇이었다. “덤벼라. 선공을 양보하마.” 천여운을 향해 손짓을 하며 먼저 공격하라는 표시를 했다.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기에 천여운이 땅을 박차며 선공을 취하기 위해 신형을 날렸다. ‘상대는 절정의 고수다. 전력을 다하자!’ 절정의 초입에 이르렀지만 아직까지 완전한 절정의 고수에 비한다면 내공이 모자라다. 천여운은 십성으로 내공을 끌어올렸다. “하압!” 그리고는 있는 힘을 다해 상문여를 향해 접무도법 중에서 가장 패도적인 기세를 가진 접무도법의 오 초식인 접무패도(蝶舞敗刀)를 펼쳤다. ‘응?’ 예상했던 것보다도 초식에 실린 기세가 훨씬 패도적이었다. ‘며칠 전과는 기세가 다르다.’ 일류 무공 실력을 지닌 천여운을 상대로 십성 내공을 사용하는 것은 수치라고 생각했기에 오성 정도로만 끌어올리려 했던 상문여가 패도적인 기세에 흠칫 놀라며 서둘러 공력을 더욱 끌어올렸다. ‘칠성이면 충분하겠지.’ 상문여가 칠성의 공력을 실어 칠마검의 방어 초식인 검오를 펼쳤다. -팍! 상문여의 검결지와 천여운의 손날이 맞닿았다. 그 순간 상문여의 두 눈이 커졌다. ‘이, 이게 무슨?’ 반 갑자 수준의 공력일 거라는 짐작과 다르게 공력이 훨씬 높았다. 더욱 그를 당황스럽게 만든 것은 천여운의 도초에 실린 물리적인 힘이 너무 강했다. “헛헛!” -타타타타탁! 초식을 전부 펼칠 틈도 없이 손날을 막은 상태로 상문여의 신형이 뒤로 밀려나버렸다. 생도를 상대로 다섯 발자국 이상이나 밀려나 버린 것에 망신살이 뻗쳤는지 상문여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이게 대체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방심한 나머지 마치 자신이 밀리는 듯 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대결을 지켜보고 있는 생도들 또한 많이 놀란 눈빛이었다. 현마종의 천무연을 상대하던 무공 교두조차도 밀리기는커녕 일류 무공으로 상승 무공을 상대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전혀 다른 상황이 발생했으니 말이다. -웅성웅성! ‘크윽, 빌어먹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가볍게 천여운을 짓밟아서 소교주 후보로서 모자라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던 상문여였다. 생도들의 분위기가 술렁거리자 이를 의식했는지, 상문여는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다. 이렇게 된 이상 스스로 내공을 제한했던 것을 풀고, 전력을 다해서 압도적으로 천여운을 제압해야만 이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흐아아아압!” -팡! 상문여가 오른팔로 십성 내공을 끌어올리자, 그를 붙들고 있던 천여운의 손날이 튕겨나갔다. 이에 상문여의 눈에 회심의 빛이 감돌았다. ‘아직 완전한 절정의 공력은 아니구나.’ 믿기 힘들만큼 엄청난 완력에 놀라기는 했지만 공력은 자신이 한 수 위였다. 상대가 내공을 전력으로 끌어올린 것을 알아챈 천여운이 신중하게 보법을 펼치며 뒤로 거리를 벌렸다.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으냐!” 그것을 놓치지 않고 상문여 역시도 보법을 펼치며 천여운에게로 파고들어, 상체의 요혈들을 향해 칠마검의 검사(劍四)와 검육(劍六)의 검초를 동시에 펼쳤다. “받아랏!” -촤촤촤촤촥! 무공 교두 여순이 보여줬던 것처럼 두 검초가 동시에 펼치자, 검식이 늘어나며 그 변화의 폭이 훨씬 커졌다. “오오오!” 생도들도 상문여의 손에서 펼쳐지는 초식의 변화에 탄성을 내뱉었다. 웬만한 상승 절기를 펼치지 않고는 절대로 막을 수 없을 만큼 검식의 변화가 뛰어났다. 빠르게 쇄도해오는 검초에 천여운의 눈빛이 반짝였다. ‘아! 보인다!’ 나노를 통해서 증강현실을 개안해서 튜토리얼 모드를 한 것도 아니었는데, 상문여가 펼치는 검초의 허점들이 보였다. ‘검초가 불완전해.’ 이것은 오직 천여운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청옥석의 남겨진 검흔을 통해 수십 차례 동안 절세초식을 깨기 위해 검식에 수많은 변화를 가미하고 완성해가는 파훼 검초를 입체영상으로 지켜 봐왔고, 심지어 그 완성된 초식을 익히기마저 했다. ‘청옥석의 파훼 초식에 비하면 장난에 불과하다.’ 그것은 고작 십이 식으로 펼쳐지는 칠마검과 비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청옥석에 있던 절세초식과 파훼초식을 펼친다면 쉽게 깰 수 있겠지만, 아직까지 그것을 선보일 자리는 아닌 듯 했다. ‘내 눈이 잘못 되지 않았다면....’ 검초에서 허점을 발견해낸 천여운은 대담하게도 쇄도해오는 칠마검의 두 검초를 향해 신형을 파고들었다. 제 발로 검초를 향해 부딪쳐 오는 천여운을 보며 상문여가 속으로 비웃었다. ‘멍청한 녀석이로구나. 제대로 된 도초를 펼쳐야 막을 수 있을 터인데.’ 잘하면 이대로 두 초식 만에 승부를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순간 상문여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파파파파팍! 상문여의 검결지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변화를 꾀하는 검식들의 바로 앞까지 거리를 좁힌 천여운이 접무도법의 기본 도식만으로 검초의 검식들을 전부 막아내 버린 것이었다. ‘이, 이놈이!’ -파파파팍! 변초를 펼칠 틈도 없이 천여운은 칠마검의 두 검초를 파훼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공력에서 차이가 났기에 내상을 입었는지 천여운의 입가로 피가 흘러내렸다. ‘이럴 수가!’ ‘검초를 파훼시켰어!’ 지켜보는 모든 생도들과 무공 교두들조차도 검초가 파훼된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연조차도 현마종의 고절한 초식으로 상쇄시켰다 뿐이지 직접적으로 검초를 파훼시키진 못했다. “크으으으!” 상문여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방심하지 않고 펼쳤던 칠마검의 두 검초가 너무도 완벽하게 파훼되면서 이미 생도들의 이목 따윈 잊은지 오래였다. ‘크윽! 이렇게 된 이상 공력으로 밀어붙여주마!’ 상문여가 입술을 깨물며 전력을 다해서 검칠(劍七)을 펼쳤다. 초식에서 밀린 것이 분했지만 천여운을 쓰러뜨리기 위한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하아아압!” -촤촤촤촤촤촥! 하지만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나노였다. [사용자의 체내로 침투하는 에너지로 인한 내상을 빠르게 자가 수복합니다.] 천여운의 체내로 상문여의 공력의 여파가 밀려올 때마다 그 즉시 나노는 빠르게 내상을 치료했다. -파파파팍! 상문여의 검식을 파훼할 때마다, 입가에 피가 흘러내리는데도 쓰러지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모습에 상문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어째서 쓰러지지 않는 거야? 어째서!!!’ 아무리 전력으로 공력을 실어도 고통은 커녕 멈추지 않으니 괴물처럼 느껴졌다. 기세에서 완전히 밀려버리니, 당연히 펼치는 초식 역시 흐트러질 수밖에 없었다. 짧은 찰나의 순간, 상문여의 우측으로 빈틈이 생겨났다. ‘이때다!’ 천여운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해 상문여의 상체 왼쪽을 향해 도식을 펼쳤다. 그의 손날이 검초의 빈틈을 가로질러 상문여의 오른쪽 갈비뼈로 향했다. ‘크윽! 버텨야 한다!’ 당황한 상문여가 손날이 날아오는 곳으로 내공을 끌어올려 호신기운을 형성했다. 그러나 천여운의 손날이 닿는 순간, -퍼억! 우드드드득! “끄아아아악!” 갈비뼈들이 부러지는 선명한 소리와 함께 상문여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공력이 파고드는 것은 내공이 우세하니 호신기운으로 막아낼 수 있었지만, 천여운의 손날에 실린 무지막지한 힘은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끄으으으윽! 헉....헉...." 우측 갈비뼈 쪽을 내려다보니, 옷이 불룩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그것은 부러진 갈비뼈 조각들이 살을 파고나왔기 때문이었다. 상문여의 시야가 점차 흐려졌다. “이....이 괴물 같은...놈이...괴물 같은.....끄르륵” -털썩! 출혈로 인해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된 상문여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같은 말을 중얼거리더니, 이내 연무장의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와아아아아아아!” 그 순간 대연무장에 있는 생도들의 입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누구도 천여운의 승리를 생각하지 못했었다. 잘해봐야 조금 버틴다면 다행이라 생각했었는데, 모두의 예상을 뒤집고 칠마검을 파훼한 것도 모자라서 무공 교두를 쓰러뜨리기마저 했다. 그 모습에 생도들은 천여운을 향해 놀라움을 넘어서 전율마저 느끼게 되었다. ‘.......염파 놈이 헛소리를 한 게 아니네. 이거 좀 위험한데.' 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유찬의 눈빛이 경계심으로 가득해졌다. 그것은 대연무장에서 대결을 지켜보았던 모든 소교주 후보자들이 전부 같은 마음이었다. 그만큼 이 대결은 모두를 충격에 빠뜨렸다. ‘검초를 파훼하다니?’ 단상 위에 앉아서 대결을 지켜보던 좌호법 이화명은 어느새 자리에 일어나 있었다. 그것은 천여운이 칠마검의 검초를 파훼하고 나서부터였다. 칠마검이 비록 일류 무공이라고는 하나, 마교의 또 다른 전설인 검마가 만든 검법이었다. 평범한 검식들이 모여서 무궁무진한 변화를 일으킬 만큼 파훼하기가 굉장히 까다로운 그 검 초식을 천여운이 파훼시켰다. ‘.....정말 그 주정뱅이 놈한테 양보할 게 아니었군.’ 이건 뛰어나다 못해 무공의 천재라고 할 만 했다. 천여운을 제자로 받은 우호법 섭맹이 굉장히 부러워지고 있었다. 그런 좌호법 이화명에게 단상 밑에서 누군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관주님! 상 교두를 의무실로 옮겨야 할 것 같습니다. 갈비뼈가 부러졌는데....으음. 뼈가 세 개나 튀어나왔네요.” “당장 의무실로 옮기도록 해라.” 이화명의 명이 떨어지자 무공 교두 두 명이 급히 들 것을 가져왔다. 갈비뼈가 부러져서 본관의 의무실로 실려 가는 상문여의 모습에 이화명은 문득 개인 연공실 담당 교두가 했던 보고를 떠올렸다. ‘개인 연공실의 단세석 벽을 뚫었더군요. 아무래도 칠 번 생도의 내공이 절정에 이른 것 같습니다.’ ‘단세석 벽을 뚫어?’ 미처 깜빡하고 있었다. 보고 받았던 정보를 사흘 동안 휴가를 다녀온 무공 교두들에게 전해준다는 것을 말이다. 적어도 이 정보를 상문여가 알고 있었다면 이 정도까지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흠. 별 수 없지.’ 이미 벌어진 일이었고 이제 모두가 천여운의 향상된 실력을 보았기에 굳이 개인 연공실에서 벌어졌던 일은 자신만 알고 있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하는 이화명이었다. “자! 상 교두의 명찰을 내가 떼어왔다.” “아!” 팔 조의 무공 교두였던 임평이 대결이 끝나고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 천여운에게 노란 명찰을 넘겼다. 그것을 받아들며 천여운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원래는 아니었다만. 이렇게 빠르게 성장하는걸 보니, 점점 네게 기대가 생겨나는구나. 앞으로의 무운을 비마.” 임평이 짧은 격려와 함께 자신이 서있던 위치로 돌아갔다. 노란 명찰을 손에 꾹 쥔 천여운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오열을 맞추고 서있는 팔 조의 생도들 앞으로 돌아왔다. “주군! 축하드립니다!” “조장이 되신 걸 축하합니다.” 천여운이 돌아오자 충성을 맹세했던 허봉과 세 명의 생도들이 앞 다퉈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울상을 짓는 이들이 있었으니, 어젯밤 조원으로 들어오라는 천여운의 제의를 거절했던 네 명의 생도들이었다. ‘젠장......’ 후회해도 들어온 복을 걷어찬 것은 그들이었다. 15장 될 때까지 때려 박아주마(1) 대연무장의 분위기는 아까 전 삼 단계 시험에 대한 설명이 이어질 때와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생도들에게 있어서 마도관의 무공 교두들은 하늘과도 같았다. 마교 내에서 가르치는 스승으로서의 위치나, 살아온 세월, 무공 수위할 것 없이 그들이 존경하고 따를 만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마도관주인 좌호법 이화명의 변덕으로 시작된 무공 교두에 대한 도전의 기회가 그것을 반전시키고 말았다. 두 차례나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 물론 그들이 본신 절기를 사용하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두 명의 무공 교두가 대련에 패하고, 심지어는 큰 부상으로 들 것에 실려 나가는 사태마저 발생하자 생도들의 눈빛에는 ‘절대’가 아닌 ‘어쩌면’ 가능할 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심이 피어올랐다. ‘이거 참!’ ‘생도들에게 얕보일 수도 있겠는걸.’ 단상 앞에 일 열로 서있는 무공 교두들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다음 단계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너무 겁을 먹는 것보다는 희망을 품는 편이 나을 수도 있었지만 체면이 서지 않았다. “쯧쯧.” 이런 교두들의 심란해 하는 분위기에 최고선임 무공 교두인 호진창이 혀를 찼다. 그는 체면 따위야 어찌되든 상관없었다. 인재를 육성하는 기관에서 훌륭한 후기지수들이 탄생한다는 것은 교두로서 기뻐해야 할 일이었다. ‘실력과 자질이 된다면 교두를 뛰어넘을 수도 있는 게지.’ 호진창이 아쉬운 것은 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연을 시험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원래 이것만 아쉬울 뿐이었다. 그런데 천여운의 대결을 보고나니, 그와 겨루지 못한 것도 아쉬워졌다. 저 정도의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고 순간 심기가 불편해져서 십이 조의 십팔 번 생도를 택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자! 이제 남은 두 사람의 대결을 보도록 하겠다.” 관주인 좌호법 이화명의 목소리에 무공 교두 호진창과 십팔 번 생도 백기가 단상 앞으로 걸어갔다. 호진창이 단상으로 나오자 무공 교두들의 눈빛들이 한결같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꼭 교두들의 체면을 세워주십시오!’ 그런 눈빛들과 달리 무공교두들의 속마음은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최고선임인 호진창이었다. 생도를 떠나서 그가 지는 모습은 상상하기조차 힘들었다. ‘이번에도 이변이 일어날까?’ ‘모르잖아? 자발적으로 나섰다는 건 칠 번 생도처럼 실력을 숨겼을 지도 모르지.’ 무공교두들 못지않게 생도들 또한 십팔 번 생도 백기에 대한 기대감이 흘러나왔다. 한 번 이변이 일어났는데, 두 번 일어나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이런 생도들의 바뀐 기대감은 모두가 천여운이 만들어낸 변화라 할 수 있었다. -탁! 백기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공손하게 포권을 하며 말했다. “부족한 실력이지만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교두님.” “서로 최선을 다 하세나.” 공손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호진창이 미소를 지으며 포권을 취했다. 하지만 대결을 시작하기 위해 기수식을 취하는 순간, 부드러운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눈빛이 매섭게 바뀌었다. 먼저 달려든 것은 당연히 후학도인 백기였다. 백기의 신형이 번개처럼 튀어나가더니, 호진창을 향해 뛰어올라 화려한 각법(脚法)을 펼쳤다. ‘각법?’ 동공에 빠르게 흔들리며 흰빛이 서려있는 천여운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강인한 인상의 흉터만 보았을 때는 도법이 어울려보였는데 의외의 무공을 펼쳤다. 천여운의 시야에는 현재 증강현실이 개안되어, 나노가 실시간으로 대결하는 것을 분석하면서 확대하여 보여주는 중이었다. ‘새로운 대련 아바타가 늘어나는 구나. 후후후.’ 좌호법 이화명의 변덕으로 생겨난 대결들이 천여운에게는 큰 득이 되고 있었다. 몇 초식만을 펼쳤었던 복마종의 후보자 천무금과 다르게 현마종의 후보자인 천무연은 장법의 전 초식을 선보였기에 스캔 분석이 완료된 상태였다. 그 중에 천여운의 흥미를 이끈 것은 단연 양손으로 다른 초식을 펼치는 기술이었다. ‘한 초식뿐이라 분석이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도움은 되겠지.’ 나노 머신을 가진 천여운의 앞에서 모든 초식을 보이는 것은 스스로를 갖다바치는 꼴이었다. 후에 천무연과 대적할 때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천무연이 만약 자신의 절기들이 홀라당 벗겨먹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과연 어떤 기분이 들까? -파파파팍! 빠르게 날아오는 각법에 호진창은 발끝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리고는 발걸음조차 떼지 않고 상체만 가볍게 움직여 모든 발차기를 피해냈다. 백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다리를 조심하게.” 호진창이 가볍게 경고를 날리며 아직 체공 중인 백기의 다리에 검결지를 찔렀다. 그의 검결지가 오른 다리의 요혈을 찔러 들어오는 순간 백기가 허리를 강하게 튕기며, 이를 피해낸 후에 몸을 빙그르르 돌아 양발에 내공을 모아 호진창을 걷어찼다. -파팍! “호오?” 그러나 백기의 그런 회심의 발차기를 호진창은 가볍게 한 손으로 검결지를 뻗어 오른쪽 발바닥의 밑창을 찔렀다. 두 발에 십성 공력을 실어 찼는데, 오히려 검결지에서 뻗어 나온 날카로운 예기가 발바닥을 관통하며 백기가 짧은 신음성과 함께 튕겨나갔다. “큭!” -촤아아아아! 연무장 바닥으로 밀려난 백기의 표정에 당혹감이 서렸다. 그의 오른쪽 발등이 붉게 물들어갔다. ‘검기?’ 분명 자신의 발을 관통한 날카로운 예기는 검기가 틀림없었다. 자신이 원할 때 언제든지 빠른 운기를 통해 검기를 쓸 수 있다는 것은 절정의 경지를 넘어섰다는 것을 의미했다. ‘......초절정인 건가?’ 백기는 방금 한 수만으로 무공 교두 호진창의 경지를 짐작해냈다. 앞선 대결에서 보여준 무공 교두들의 실력을 기준으로 생각했는데, 이 자는 너무 강했다. 백기로서는 불운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호진창은 아직까지 칠마검의 검초조차 제대로 펼치지 않고 단순한 검식만을 사용해서 그에게 부상을 입혔다. ‘무리인가?’ 각법을 펼치기에 한 쪽 발을 다친 것이 치명적이었다. 그런 백기를 향해 호진창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각법을 쓰는데 오른발이 봉해졌네. 이제 어떻게 할 텐가?” 그 물음은 패배를 인정하라는 어조라기보다는 이 난관을 돌파할 방법이 있겠느냐에 가까운 말투였다. 잠시 망설이던 백기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피가 나고 있는 오른발에 힘을 주고서 각법의 기수식을 취했다. ‘발을 다쳤으니....한 초식에 승부를 봐야 한다.’ 어차피 실력 차이가 극명했기에 방법은 절초를 펼쳐 반전을 꾀하는 것 외에는 없었다. 딱 한 초식에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팟! 백기의 몸이 땅을 박차고 튕겨나가며 각법의 초식을 펼치는데 순식간에 수많은 발차기가 그림자를 만들어내며 호진창에게로 쇄도했다. ‘제법 투지가 있구나.’ 발을 다쳤는데도 이만한 위력을 보이는 것에 흡족해하며 호진창이 칠마검의 방어 초식인 검오(劍五)를 펼치며 발차기를 막아내려 했다. 그 순간 정면으로 쇄도해오던 백기의 몸이 밑으로 쑥 꺼져버렸다. ‘음?’ 호진창이 펼치는 검오의 초식이 애꿎은 빈 허공을 가로질렀다. 갑자기 신형이 밑으로 꺼진 백기가 어느새 검오의 검식들을 피해내 발밑까지 미끄러지듯 파고들어왔다. ‘허초?’ 앞에 펼친 각법은 눈을 속이기 위한 허초였다. 진정한 초식을 바로 지금 펼치는 초식이었다. 발밑으로 파고든 백기가 땅을 향해 두 손을 밀어내 물구나무를 서며 호진창의 턱 쪽으로 속사포와 같은 각법 초식을 펼쳤다. -파파파파팍! “호오!” 호진창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백기의 발끝을 감싸고 있는 희미한 빛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기?’ 그것은 기(氣)가 틀림없었다. 선명한 빛은 아니었지만 백기 역시도 절정의 초입에 이른 실력자였던 것이었다. 발차기에 잔상이 보일 만큼 너무 빨라서 무공이 낮은 생도들의 눈에는 그 희미한 빛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천여운을 비롯한 일류를 넘어선 생도들의 눈에는 확연하게 그것이 보였다. ‘제발 맞아라!’ 백기의 회심의 절초가 호진창의 턱으로 닿으려는 찰나였다. 그 순간 호진창의 검결지에 선명한 검기가 생겨나며, 칠마검의 열두 검식을 동시에 펼쳐서 촘촘한 검망을 만들어냈다. ‘이런!’ -파파파파팍! 설마 검식을 이런 식으로 펼칠 줄은 몰랐다. 백기는 앞서 두 명의 무공 교두가 펼쳤던 칠마검을 곱씹으며, 일곱 초식 중에는 코앞까지 근접해서 위로 치고 올라오는 공격을 막을 만한 초식이 없다고 분석했었다. 그러나 그 판단은 오산에 불과했다. “제법 괜찮았는데 안타깝군.” -팍! “크윽!” 순식간에 백기의 각법을 막아낸 호진창이 그를 향해 몸을 낮추더니, 가슴 정중앙으로 검결지를 찔렀다. 다행히 검기가 실리지 않았기에 가슴이 꿰뚫리지는 않았지만, 물구나무를 서고 있던 백기의 몸이 바닥에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쿨럭쿨럭!” 바닥에 쓰러진 백기가 가슴을 파고든 공력에 핏물이 섞인 기침을 해댔다. 백기의 완벽한 패배였다. 호진창을 상대로는 당연한 결과였기에 이를 지켜보던 십이 조의 담당 교두인 여순이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아아. 졌어.’ ‘고작 몇 초식도 버티지 못하다니....’ ‘역시 무공 교두를 상대한다는 건 힘든 일인가?’ '일 번 생도나 칠 번 생도가 괴물이었구나.' 승패가 결정이 나자 아까 전만 해도 들떠있던 생도들의 분위기가 침체되고 말았다. 그의 조원들인 십이 조의 생도들은 믿기 힘든 표정이었고, 여타의 생도들은 실망을 금치 못했다. 백기가 절대로 약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너무나도 압도적인 패배를 당하고 나니 지켜보는 생도들의 입장에서는 그가 약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상대가 나빴다.’ 백기의 진짜 실력을 알아본 천여운을 비롯한 소교주 후보자들이나, 상위 종파의 생도들은 이 같은 결과를 안타깝게 생각했다. 만약 다른 교두들이었다면 일말의 희망이 있었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상대는 초절정의 경지에 이른 단주 급에 속하는 고수였다. ‘다행인 건가?’ 반면 무공 교두들은 이 패배를 다행스럽게 여겨야만 했다. 최고선임 무공 교두인 호진창이 압도적인 승리를 한 덕분에 체면치레는 할 수 있었다. 만약 그마저도 패했다면 생도들의 사기가 오르다 못해서 무공 교두들을 얕잡아 보는 사태까지 벌어졌을 지도 몰랐다. “쿨럭....쿨럭...져, 졌습니다.” 여전히 가슴에 강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백기가 겨우 몸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그런 백기를 바라보며 호진창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비록 봐주지 않고 압도적으로 패배시켰으나, 그는 백기를 뛰어난 인재라고 생각했기에 조언과 함께 격려를 해주었다. “허초에서 진초로 연결할 때 좀 더 부드럽게 이어갈 수 있다면 상대를 더욱 혼란스럽게 할 수 있을 걸세. 앞으로 기대하겠네.” “쿨럭..쿨럭....명심하겠습니다.” 백기는 기침이 섞인 목소리로 포권을 취하며 십이 조가 오열을 맞추고 있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십이 조의 앞에 서있는 백기는 많이 지쳤는지 얼굴은 창백하고 목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런 백기의 뒤쪽에서 뭐가 그리 즐거운지 흐뭇한 얼굴을 하고 있는 독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종섬의 얼굴이 보였다. 마치 조장인 백기의 패배를 반기는 듯 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천여운의 눈빛이 묘해졌다. ‘......나노, 십팔 번 생도를 확대해서 스캔한 영상을 이따가 바로 확인할 수 있게 준비해 놔줘.’ [알겠습니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아직까지 삼 단계 시험에 대한 공지가 전부 끝나지 않았기에 조금 후에 확인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로써 세 명의 도전자 중에 두 명이 조장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앞으로 차지할 수 있는 조장의 자리는 총 열다섯 자리가 남아있었지만, 그 중 하나인 호진창의 노란 명찰은 누가 빼앗을 수 있을까? 물론 호진창이 아니더라도 다른 무공 교두들에게서 노란 명찰을 빼앗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현마종의 후보자 천무연이나 천여운처럼 순수한 실력만으로 노란 명찰을 얻어내는 것은 실질적으로 성공 확률이 낮았다. 명찰을 빼앗을 수 있는 가장 높은 방법은 칠마검을 익혀서 검법에 숨겨진 허점을 찾아내는 것이 답이었다. “자! 이렇게 하면 되는 거다. 벌써 두 명이나 조장이 되었군. 후후후, 아무 것도 못하고 누락되기 싫다면 분전하도록 하라. 이레 안에 노란 명찰을 빼앗으면 조장이다. 알겠나?” “마도!!!” 좌호법 이화명의 말에 생도들이 힘차게 답했다. “그럼 이제 마지막으로 네 녀석들이 제일 고대하던 시간이로군.” 이화명이 단상 아래에 있는 무공 교두들을 향해 눈짓을 보내자, 기다렸다는 듯이 교두들이 본관 건물로 가서 큰 목함들을 옮겨오기 시작했다. ‘마룡단을 지급하는구나.’ 지금까지 삼 단계 시험에 대한 걱정으로 분위기가 침체되었던 생도들의 눈빛에 활기가 돌았다. 옮겨오는 목함의 숫자가 꽤 많은 걸로 보아서 마룡단만 있는 것이 아닌 듯 했다. 무공 교두들이 목함들을 열자 그곳에는 마룡단을 담은 조그마한 목함과 목검들이 쏟아져 나왔다. “삼 단계 시험을 위한 목검도 함께 지급한다. 한 사람 당 한 자루씩 지급하니 부러뜨리지 않고 잘 사용하도록.” “마도!!!” 그것은 검마섬진을 연마하기 위해서 지급되는 목검이었다. 이 단계 시험이 치러질 때까지는 무공 교두들이 가르쳤기 때문에 훈련 때만 대여 받았던 것을 이제는 모든 훈련이 자율로 이뤄지기에 완전히 지급되는 것이었다. “일 조부터 줄을 맞춰서 한 명씩 차례대로 나와 물건들을 지급받도록.” 좌호법 이화명의 명에 일 조부터 생도들이 순서대로 줄을 서서 목검과 마룡단, 그리고 칠마검의 비급서책을 받아갔다. 다른 것보다도 마룡단이 든 작은 목함을 받을 때 생도들은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모든 생도들이 지급된 물품을 전부 받아서 자리로 돌아가 오열을 맞추자, 이화명이 그들을 향해 해산 명령을 내렸다. “그럼 삼 단계 시험 때 보도록 하겠다. 그 동안 좋은 성과를 얻도록. 해산!” “해산!!!” 힘찬 함성으로 복창을 하며 생도들이 일시에 흩어졌다. 각자가 먼저 우선시 되는 것을 행하기 위해 발걸음들이 사방으로 나누어졌다. 마룡단의 내공 흡수를 우선으로 하는 생도들은 개인 연공실 건물로 발걸음이 향했고, 조장의 자리를 노리는 상위 종파의 생도들은 칠마검의 비급서책으로 먼저 눈이 돌아갔다. ‘일단 마룡단이 먼저겠지?’ 천여운은 먼저 마룡단을 섭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노란 명찰을 얻어냈기 때문에 다른 생도들보다 이레라는 시간을 더 벌었다. ‘마룡단을 섭취하고 나서 확인할 것도 있고.....’ 아무래도 나노가 데이터로 저장해놓은 십팔 번 생도 백기의 대련 영상을 확인해봐야 할 것 같았다. 해야 할 일을 결정한 천여운이 연공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차에 어느새 그의 주위로 꽤 많은 생도들이 몰려와 있었다. ‘응?’ 15장 될 때까지 때려 박아주마(2) 스무 명이나 되는 생도들이 천여운에게 볼일이 있는 것처럼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적대감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바라는 눈빛과 그런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생도들이 이렇게 모여들다니...’ 그들 중에서 네 명은 이십삼 번 생도인 허봉을 포함한 팔 조의 생도들이었다. 천여운의 수하가 된 그들은 자율적인 훈련 기간이 주어졌으니, 어떻게 할지 주군인 천여운의 의견을 듣기 위해서 남은 것이었다. ‘아!’ 허봉은 본능적으로 이들이 왜 모여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삼 단계 시험에서 조장의 자격을 얻은 천여운의 조원이 되기 위함인 듯 했다. 단 두 명만이 조장의 자격을 가졌으니 생도들의 주목을 받는 것은 당연했다. 눈치가 빠른 허봉이 세 명의 생도들에게 눈짓을 하자, 그들이 천여운의 주위를 호위하듯이 서서 다가오는 생도들과의 거리를 벌리게 했다. ‘뭐야?’ ‘벌써 네 명이나 구했나?’ 이 모습에 일부 생도들의 얼굴에서 실망감이 흘러나왔다. 허봉의 예상대로 그들은 천여운의 조원이 되기 위해 모여든 생도들이었다. 생도들은 허봉과 수하들의 호위에 천여운에게 네 명의 확정된 조원이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주군을 따르길 잘했다!’ 허봉 이외에 마칠, 웅천, 호대명은 자신들의 선택이 옳았다는 사실을 새삼 뿌듯해졌다. 그들은 마교 내의 중소 종파들 중에서도 여섯 종파에 밉보여 크게 등용되지 못하는 종파 출신의 생도들이었다. 소년들은 꿈을 가졌지만 마교의 근간을 이루는 여섯 종파의 위세에 눌려 힘을 기르지도, 높은 곳으로 향할 수 없는 약소 종파의 숙명에 절망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천여운의 빠른 성장을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그와 함께 걸어가면 숙명을 부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어쩌면.....그가 바꿀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아무 힘도 없고 멸시를 당해왔던 천여운이 빠르게 강해지면서 여섯 종파의 소교주 후보자들을 꺾어가는 모습에 그들은 점점 그에게 빠져들었다. 그런 그들이 결정적으로 천여운을 따르게 만든 것은 허봉의 설득 때문이었다. ‘너무 위험한 도박이라 생각하지 않나? 여섯 종파가 두렵지도 않아?’ ‘두려워. 두렵지만 평생 이렇게 약소 종파로 비굴하게 따까리처럼 살아갈 바에야 나는 도박을 해보겠어. 그와 함께라면.....어쩌면 우리 같은 자들한테도 희망이라는 게 있을 지도 모르니까.’ 처음에는 도박과도 같은 마음으로 천여운에게 충성 맹세를 했지만 허봉은 점점 그를 진심으로 주군으로 생각하고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 말에 고민을 하던 마칠, 웅천, 호대명은 그 길을 동참하기로 결정했다. “나의 주군께 무슨 용무인가?” 허봉이 자신감에 가득 찬 목소리로 천여운을 대변해서 주변을 에워싼 생도들에게 물었다. 그 모습에 천여운마저 내심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수하가 되기로 한 후로 허봉은 생각 이상으로 그 역할을 잘 해주고 있었다. 적응이 되지 않을 만큼 말이다. “우린 칠 번 생도에게 볼 일이 있는 거지. 그 수하들에게 용무 따윈 없다.” 생도들 중에서 덩치가 크고 입고 있는 옷이 근육으로 울퉁불퉁한 생도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허봉은 물러서지 않고 그에게 다가오지 말라는 표시로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서 천여운에게 물었다. “주군, 어찌하시겠습니까?” 허봉의 호위가 기특했지만 여기선 자신이 나서는 것이 맞았다. “.....괜찮으니 잠시 물러서 있어.” “알겠습니다.” 천여운의 명에 허봉이 옆으로 물러나자, 본의 아니게 생도들의 대표가 되어버린 덩치가 큰 생도가 천여운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그에게 당당하게 포권을 하며 호탕한 목소리로 말했다. “칠 번 생도의 용맹한 무위는 잘 보았소.” 상대가 호의적인 태도로 나오니 천여운 역시도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고맙다.” 짧은 대답이었지만 기분 나쁘게 들리지 않았다. 천여운의 그런 당당한 태도가 더욱 마음에 드는지 생도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나는 팔백오십칠 번 생도인 고왕흘이라고 하오.” “천여운이다.” “거두절미하고 본론만 말씀드리겠소. 그대의 조원이 되고 싶소.” “조원이 되고 싶다고?” 허봉이나 그 수하들도 예상했듯이 천여운 역시도 자신의 주위로 몰려든 생도들이 조원이 되길 원하는 자들일 것이라고 짐작했었다. 무공 교두와의 대결은 많은 생도들에게 천여운의 무위를 증명해보였다. 그들에게 뚜렷하게 각인이 되었기에 이 만큼의 생도들이 몰려들어 그의 조원이 되길 원하는 것이었다. ‘오옷!’ 마칠을 비롯한 수하들이 그 말에 기쁜 내색을 숨기지 못했다. 조원이 빨리 구해질수록 더 많은 합을 맞출 수 있기에 삼 단계 시험에 통과할 확률이 높아진다. 더군다나 그 숫자가 열여섯 명에 이르니, 그 중에서 뛰어난 자들로 선별한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현재 천여운이 모집해야 할 인원은 총 일곱 명이었다. 일곱 명을 뽑게 되면 아홉 명은 아무런 소득도 없이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것을 의식하기라도 했는지 고왕흘이 천여운에게 자신의 종파와 무위를 밝혔다. “나는 상위 종파인 마권종의 출신으로 현재 일류의 경지요. 조원으로서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오.” 마권종은 상위 종파 중에서도 권(拳)으로 명성이 두터운 종파였다. 처음부터 꽤 유명한 종파의 출신인 고왕흘이 조원을 신청하자, 다른 생도들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한 자리를 이렇게 빼앗기나?’ 자신들이 조장이라면 고왕흘을 놓칠 리가 없었다. 그 정도의 인재가 처음부터 기준이 되어버린다면 중소 종파는 기회가 없어진다. 이에 주변에 있던 생도들이 앞 다퉈서 다급한 목소리로 천여운을 향해 외쳤다. “흑마종의 구백이십 번 생도 혹형이라고 합니다. 아직 이류의 무공이지만 이번에 마룡단을 섭취하면 일류가 됩니다. 절대 발목을 붙잡지 않을 겁니다!” “유검종의 구십칠 번 생도인 원일이오! 본인 역시도 일류의 경지에 올랐기에 천 공자에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오.” “제 말도 들어 보세요! 금문종의 자우민이라고 합니다. 아직 내공이 모자라지만 창술로는 일류에...” 불이 붙은 생도들의 경쟁에 신이 난 것은 먼저 수하가 된 이들이었다. 열여섯 명의 생도들이 조원으로 뽑히기 위해 자신을 소개하는데, 몇몇은 정말 쟁쟁한 상위 종파도 껴있었다. 그들만 전부 뽑아도 천여운의 조는 안정적이게 될 것이다. 열여섯 명 중에서 다섯 명이 상위 종파였고, 열한 명이 중소 종파의 출신이었다. ‘아아.....열한 명이서 두 자리를 놓고 싸워야 하는 건가?’ ‘젠장, 이래서 상위 종파 놈들이란.’ 열한 명의 중소 종파의 생도들이 불만스러웠지만 속으로 삭히며 천여운의 결정을 기다렸다. 선택권은 그에게 있으니 말이다. 천여운이 고민하는 표정으로 생도들을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에 눈이 마주친 생도들의 눈빛에는 저마다 간절함이 깃들어 있었다. 모두가 집중하는 상황 속에 드디어 천여운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나의 조원이 되길 신청해준 생도 여러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천여운이 그들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그 모습에는 절대로 가벼움은 없었고 우두머리로서의 위엄과 무게감이 흘러나왔다. 이에 열여섯 명의 생도들 또한 자신들도 모르게 감화되어 천여운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모두와 한 명씩 눈을 마주치며 천여운이 말을 이어갔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조원으로 신청해주셨지만 그 전에 먼저 할 말이 있습니다.” 무언가 기준을 제시하려는 것 같은 느낌에 생도들이 집중했다. “나는 지금 삼 단계 시험만을 통과하기 위한 조원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응?’ 생도들이 일제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삼 단계 시험을 통과하기만이 아니라면 대체 어떤 조원을 구한단 말인가? 일부는 천여운의 의도를 파악했는지 미묘한 표정들이 되었다. “마도관을 떠나서 본교에서 내가 걸어갈 험난한 길을 함께 걷고, 함께 피를 흘리며, 이겨낼 동료를 찾고 있습니다.” ‘설마? 소교주.....쟁탈전?’ 천여운의 말에 모든 생도들은 그의 진정한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천여운은 지금 자신만의 세력을 구축하기 위한 수하들 그리고 동료를 모으는 것이었다. 본교에서 험난한 길을 걷는다는 것은 소교주를 목표로 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하아....’ ‘이거 어쩌지?’ 지금까지 천여운의 조에 들기를 바랐던 생도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삼 단계를 안정적으로 통과하기 위해 스스로의 실력을 증명한 천여운을 택한 것이긴 하지만 소교주 쟁탈전까지 끼어들기는 부담감이 컸다. 소교주 쟁탈전을 위해 천여운의 산하로 들어간다는 것은 마교의 근간인 여섯 종파와 대적을 해야 할 수도 있었다. ‘역시 두려워하는군.’ 천여운이 그런 분위기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천여운은 삼 단계 시험뿐 만이 아니라 소교주 쟁탈전에서 자신과 함께 피를 흘리고 싸워줄 동료, 그리고 수하들을 원했다. 하지만 모두가 사람이기에 아무런 대가가 없이 따를 리가 없었다. 천여운이 망설이는 생도들을 향해 말했다. “나는 함께 하고자 한다면 상위 종파든 중소 종파든 그 규모는 상관없습니다. 나와 함께 걸어가는 그 길의 끝에는 지금의 규모나 명성 따윈 의미가 없을 겁니다. 나는 본교의 여섯 근간을 바꿀 거니까요.” ‘헉?’ 천여운의 마지막 말에서 생도들이 충격을 받았는지 표정이 굳어졌다. 지금의 발언은 만약 여섯 종파의 후보자들이 들었다면 선전포고와도 같은 말이었다. 단순히 소교주 쟁탈전을 넘어서, 마교의 근간이라 불리는 여섯 종파를 바꾼다는 말은 참으로 대담하면서 광오한 표현이었다. ‘이 녀석이 정말 제정신인 건가?’ ‘아무리 소교주의 자격을 가졌다고 해도 아직까지 아무 것도 없을 텐데?’ ‘아아....아쉽지만 다른 조장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천여운이 걸어가는 길은 당연히 압도적인 무력을 가져야 했지만, 그에 못지않은 세력이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여섯 종파가 아닌 천여운과 함께 걸어간다는 것은 승률이 낮은 도박 그 자체였다. 조원이 되기를 바라던 분위기는 이미 포기하는 방향으로 바뀌어갔다. 그런 생도들을 향해 천여운이 다시 한 번 포권을 취하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나와 함께 걸어갈 동료가 되어 천마신교의 새로운 종파의 근간이 되어주십시오. 그게 이 천여운이 바라는 조원의 조건입니다.” 그 목소리에는 천여운의 간절함과 진심이 담겨 있었다. 잠시 할 말을 잊고 이 모습을 바라만 보던 생도들 중에 몇 명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미안합니다. 천 공자. 나는 그저 삼 단계 통과를 위한 조장을 원할 뿐입니다.” “안타깝소. 공자의 조원이 되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연이 아닌가 보오.” 그렇게 한두 명이 먼저 나서자 다른 생도들 역시 우르르 앞으로 나서서 정중하게 거절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조원이 되길 간절히 바랬다고는 믿기 힘들 만큼 태세 변화에 천여운의 네 명의 수하들이 당혹스러울 지경이었다. ‘아아.....이를 어쩌나.’ '큰 일이다.' '차라리 조원으로 받고 나중에 얘기했어도....쩝.' 그렇다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더욱 안타까웠다. 생도들의 입장에서는 위험을 자처할 필요가 없었다. 소교주 쟁탈전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와 같은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자신이 지지한 후보자가 소교주가 되지 못한다면, 종파의 규모가 커지고 명성을 떨치기는커녕 좌천되거나 도태될 것이 틀림없었다. “미안합니다.” 떠나가는 생도들이 하나 같이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이탈했다. ‘엇?’ 모두가 떠날 거라는 생각에 침울해하던 네 수하들의 눈이 커졌다. 놀랍게도 모두가 떠나간 자리에 세 명의 생도가 남아있었다. 더욱 의외인 것은 상위 종파의 생도인 마권종의 고왕흘이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이었다. “아아아!” 모두가 떠날 것 같은 분위기 속에 세 명의 생도가 남아있자 괜히 허봉은 뭉클해지는 느낌마저 받았다. 상위 종파인 팔백오십칠 번 생도 마권종의 고왕흘. 중소 종파인 칠십칠 번 생도 금문종의 자우민. 중소 종파인 구백구십구 번 생도 호가검종의 오종. 이 유일하게 남아있는 세 명의 생도들 역시도 다른 생도들처럼 조원이 되는 것을 포기할까 고민했었다. 그러나 누구보다 빛나는 눈빛으로 자신의 포부를 밝히는 천여운의 모습에서 지금껏 느껴본 적이 없는 위엄과 패도의 기운을 느꼈다. 다른 여섯 종파의 소교주 후보자들도 보았지만 이렇게까지 사람을 감화시키는 느낌을 주는 사내는 처음이었다. “천...” “천...” “아! 먼저 말하시오.” 동시에 두 사람이 입을 열었으나 자우민이 양보하면서 고왕흘이 먼저 말했다. “천 공자. 그대가 말한 그 길은 너무 위험하고 어쩌면 그대를 비롯한 동료들 전부를 사지로 몰아넣을 수도 있소.” 고왕흘의 말에 다른 두 명도 수긍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절대자로 향하는 패도의 길을 따른다는 것은 그 산하에 있는 수하들의 명운도 전부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한 일이었다. “솔직히 말한다면 나도 포기하려 했소.” 충분히 납득이 갈 만했다. 마권종의 고왕흘 정도라면 더 안정적인 소교주 후보를 지지할 자격이 있었다. 담담하게 듣고 있는 천여운을 향해 고왕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나, 무인으로 태어난다면 응당 패권을 꿈꾸기 마련이오. 무인으로서 그대의 포부를 듣게 되니 나도 모르게 끌리고 있음을 깨달았소.” 그 말과 함께 고왕흘이 한 쪽 무릎을 꿇었다. “아직은 부족하지만 절대로 그대 이외의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지 않겠소. 이 고왕흘을 천 공자의 첫 번째 검으로 써주길 바라오.” -탁! 그리고는 두 손을 모아, 힘이 담긴 목소리로 외쳤다. “천여운 공자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훗날 마신(魔神) 천여운의 여섯 검 중 하나로 중원에 명성을 떨치게 될 권일검(拳一劍) 고왕흘이 이렇게 마도관의 대연무장의 한복판에서 그에게 충성맹세를 했다. 천여운의 앞에 무릎을 꿇고 절도 있게 맹세하는 고왕흘의 모습에 이를 지켜보는 생도들마저도 심장이 떨릴 만큼 감정적으로 격앙되었다. ‘아.....첫 번째 수하는 나인데....’ 유일하게 허봉만이 뭔가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15장 될 때까지 때려 박아주마(3) 천여운도 절도 있고 진심을 담은 고왕흘의 충성 맹세에 감격 받았는지,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 금문종의 자우민과 호가검종의 오종 역시도 고왕흘처럼 천여운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같은 두 손을 모아 외쳤다. “금문종의 자우민. 천여운 공자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호가검종의 오종. 천여운 공자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자우민과 오종 역시도 얼굴이 붉게 상기된 것으로 보아 고왕흘이 만들어낸 분위기에 감화된 듯 했다. 자우민은 두 손을 모은 상태로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팔백오십칠 번 생도가 제가 하려고 했던 말들을 먼저 하더군요. 괜히 양보했습니다. 이렇게 선수를 빼앗기다니. 하하핫.” 오종 역시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도 고왕흘이 했던 말처럼 천여운의 웅대한 포부를 듣는 순간, 사내로서 끌리고 있음을 느꼈다. 이들과 함께라면 험난한 길도 달게 느껴지지 않을까. ‘그래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인데, 그 길이 가시밭길이라 한들 마음이 이끄는 데로 선택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게 마음먹은 두 사람은 천여운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자신의 앞에 무릎 꿇은 세 명의 생도를 향해 천여운이 한 명, 한 명에게 일일이 포권을 취하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주군으로 모셨으니,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고맙습니다.”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나노의 안면 분석 모드를 통해 그들의 의사가 진심임을 확인했기에 더욱 고마웠다. 동료이면서 수하로 자신과 같이 험난한 길을 걸어가길 자청한 자들이었다. 예로써 보답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 천여운이었다. 새로운 세 명의 수하들을 얻게 된 천여운의 얼굴은 흡족함이 묻어났다. 충성 맹세가 끝나고 새롭게 합류한 세 명은 먼저 천여운의 수하가 된 팔 조의 허봉과 마칠, 웅천, 호대명 등과 통성명을 했다. 앞으로 함께 동고동락해야 할 동료들이니 말이다. 이때 허봉이 고왕흘과 인사를 나누며 목소리에 힘을 주어 선을 그었다. “주군의 검이든 뭐든 그런 칭호는 가져도 상관은 없는데. 흠흠, 주군의 첫 번째 수하는 저입니다.” 이것만큼은 확실히 해두고 싶은 허봉이었다. 고왕흘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의아한 표정을 짓자, 천여운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래. 허봉이 내 첫 번째 수하가 맞다.” “아! 그렇습니까? 하하핫. 그런 건 확실히 해둬야죠. 한 주군을 모신다고 해도 위계 질서는 정확해야 하니까요.” 호탕하게 웃으며 고왕흘이 인정하자, 허봉이 내심 기뻤는지 입술을 실룩이며 좋아했다. 이렇게 천여운에게 총 일곱 명의 수하들이면서 조원이 생겼다. 그러나 삼 단계 시험을 치르기 위해서 모아야 하는 인원은 총 열두 명이었다. 네 명을 더 모아야만 검마섬진을 구축하는 합을 맞출 수 있게 된다. ‘너무 서두르지는 말자.’ 지금 당장에 부족한 인원을 급히 모집할 필요는 없었다. 천여운이 원하는 조원은 그를 뒷받침하는 세력의 일원이 될 사람들이었다. 급하게 모아봐야 어중이떠중이들이나 혹은 염파와 같은 불순한 녀석들이 있을 수도 있기에 신중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주군. 그럼 이제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허봉이 나서서 천여운에게 앞으로의 의견을 물었다. 한 달 동안 자율적으로 훈련이 이어지기에 조장의 의사가 중요했다. 그 말에 천여운이 고민할 것도 없이 말했다. “우선 모두 마룡단을 먼저 섭취해서 내공을 늘려라. 칠마검을 익히기 위해선 그게 기본일 테니.” "알겠습니다!" 지금 여기서 절정의 초입인 천여운과 일류 고수인 고왕흘을 제외한 다섯 명은 아직까지 내공조차도 일류에 미치지 못했다. 마룡단을 섭취해서 내공이 반 갑자에는 이르러야 칠마검을 익힐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검마섬진을 훈련할 수 있게 된다. “저 주군.....칠마검은 어떻게 할까요?” “칠마검?” “저희들은 아직까지 일류 무공을 익혀본 적이 없어서....” 허봉의 질문에 일류 무공을 익혀본 적이 없는 오종, 마칠, 웅천, 호대명 등이 동의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인 우호법 섭맹에게 상승 무공을 배웠고, 나노의 힘으로 무공을 수월하게 익힌 천여운과 다르게 이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삼류와 이류의 무공들은 실상 초식들이 단순한 식들에 가까웠지만, 일류 무공부터는 식들이 복잡하게 이어지며 초식을 이루는데, 이를 잘못 익히게 되면 어설프게 되어버린다. “그건 일리가 있습니다. 일류 무공부터는 익히는 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금문종의 자우민도 같은 생각이었다. 자우민은 내공이 아직 반 갑자에 미치지 못했지만 종파의 무공인 금문창법이 일류 무공을 익혔기에, 일류무공이 스승의 가르침 없이 혼자 익히기가 까다롭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흠, 쉬운 일이 없구나.’ 무공 실력에 상관없이 충직한 수하의 조건을 갖췄다면 받았으나, 그 단점은 분명했다. 그렇다고 해도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나노의 튜토리얼 모드를 전개하면 바라보는 상대방의 동작을 스캔해서 초식을 펼치는 동작을 세밀하게 분석해 문제점이나 동작의 오차(誤差)를 찾아낼 수 있다. ‘나는 어차피 전이 받으면 금방 끝나니....직접 가르쳐야 겠구나.’ 검마섬진의 합을 맞추기 위해서는 이들이 전부 칠마검을 익히게 만들어야 했다. 자신이 직접 가르치기로 결정을 내린 천여운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럼 오늘은 마룡단을 섭취한 후에 칠마검의 구결을 전부 익히도록 해.” “구결을요?” “그래. 그리고 내일부터 오전 시간은 나와 함께 훈련한다. 칠마검의 식과 초식을 직접 봐줄 테니까. 익히기 힘든 자들은 모두 모이도록.” “오오오!” 천여운의 말에 수하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공 교두를 이길 정도로 뛰어난 무공실력을 가진 천여운이 직접 가르쳐준다고 하니 기쁠 수밖에 없었다. ‘역시 주군을 잘 선택했구나.’ 서로 경쟁하기 바쁜 이곳에서 누가 이렇게까지 세세히 수하들을 챙기겠는가. 천여운을 향한 믿음이 더욱 강해지는 수하들이었다. 그런 수하들의 기쁨과 별개로 천여운은 이들을 가르칠 훌륭한 교육방식을 생각해냈다. ‘가르치는 게 별 거 있나. 될 때까지 때려 박으면 되겠지.’ 배움이란 대물림 된다고 했던가. 짧은 시간 안에 무공을 가르치기 위한 우호법 섭맹의 강제 주입식 교육방식은 천여운에게 피와 살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해야 할 일이 정해지고 모든 수하들이 개인 연공실 건물로 마룡단 섭취를 위해 대연무장을 떠났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사람이 고왕흘이었는데, 뭔가 할 말이 있어보였다. “왜 그러지?” “주군. 기우일 수도 있겠지만, 앞으로 저나 다른 수하들을 대동하시고 움직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왜지?” “아무래도 무공 교두에게서 노란 명찰을 빼앗으라고 한 게 마음에 걸립니다.” 천여운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그 역시도 노란 명찰을 빼앗는다는 표현을 한 것이 마음에 걸려 있었다. 잘 생각해보면 노란 명찰을 한 사람이 하나씩 차지한다는 규칙도 없었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무공 교두에게서 빼앗으라는 표현이 아닌 이레 안에 노란 명찰을 빼앗은 사람이 조장이라고 말을 했다. '어쩌면 노란 명찰은 무공 교두를 꺾는게 진짜 목적이 아니라, 생도들끼리 명찰을 빼앗도록 만드는 게 목적일 수도 있다.' 이런 천여운의 짐작과 마찬가지로 고왕흘 역시도 천여운이 가진 노란 명찰을 다른 생도들이 노릴 지도 모른다고 염려한 것이었다. “현마종의 일 번 생도보다 상대적으로 세력이 적은 주군이 생도들의 목표가 될 수도 있으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어 보입니다.” 아무리 무공이 뛰어나다고 해도 다수가 기습을 하면 위험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노란 명찰을 노리고 생도들이 작정하고 수면 시간을 노릴 수도 있었기에, 여러모로 까다로운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좋은 조언 고맙다.” “아닙니다. 주군으로 모시기로 했으니 당연한 일이죠.” “아! 그렇다면 먼저 이것부터 해결해야겠군.” 고왕흘의 걱정이 일리 있다고 판단한 천여운은 연공실로 향하기 전에 무공 교두들을 찾아가 새롭게 조원이 편성되었을 때 숙소를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다행히 조장의 자격을 가진 생도는 현재의 숙소가 아닌 자신이 모집한 생도들과 함께 새로운 호실을 신청할 수 있다는 말에 천여운은 당장에 호실 변경을 신청했다. 같은 조원들로 구성된 숙소의 호실이라면 그나마 위험 부담감이 좀 더 낮아질 것이다. 호실 변경을 완료한 천여운은 다른 생도들과 마찬가지로 마룡단을 섭취하기 위해 연공실로 향했다. 천여운을 호위하기 위해 그가 사용하는 개인 연공실의 옆방을 이용하려 했던 고왕흘은 그가 아직 다른 생도들에게 개방되지 않은 격세석 연공실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저도 빨리 강해져서 주군과 같은 연공실에 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절정의 경지에 대한 의욕을 더욱 다지게 되는 고왕흘이었다. 그렇게 개인 연공실 사용을 마치고, 해시(亥時) 무렵에 다시 만나기로 한 천여운은 맞은편 건물의 격세석 연공실로 혼자 들어왔다. 개인 연공실보다도 훨씬 넓은 연공실의 한가운데에 가부좌를 틀고 자리 잡은 천여운이 마룡단이 들어있는 작은 목함을 열었다. “우읍.” 목함을 열자 예의 진한 약재의 냄새가 흘러나왔다. 씹을수록 지독한 맛이 나오는 환(丸)을 집어 들며 천여운이 인상을 찌푸리며 입에 집어넣었다. -우적우적! 우호법 섭맹이 했던 조언을 잊지 않았기에 최대한 꼭꼭 씹어서 영단을 잘게 만들었다. 두 번째 먹는데도 여전히 지독할 정도로 쓴맛이었다. ‘쓰다....후우....나노 마룡단의 흡수를 보조해줘.’ [알겠습니다.] 잘게 씹은 마룡단을 목구멍으로 넘긴 천여운이 무천심법을 운기하기 시작했다. [체내로 강한 에너지 활성을 돕는 물질이 유입되었습니다. 체내 신진 대사를 촉진시켜 물질의 흡수율을 높이겠습니다.] 나노가 천여운의 체내 신진대사를 촉진시켰다. 마룡단이 식도를 타고 들어와 그 약기운이 몸 전체로 서서히 퍼져나갔다. 퍼져나간 약기운은 무천심법을 운기하면서 십사경맥(十四經脈)의 특정 혈(穴)로 순환하고 있는 내공과 호응하며 점차 그것을 증식시키기 시작했다. [흡수되는 물질에 대한 체내 내성을 제어하여 흡수율을 높이겠습니다.] -우우우웅! 나노 머신들이 활발히 움직이며 천여운의 체내에 생겨난 흡수율에 대한 내성을 조절했다. 한 번 마룡단을 흡수하면서 천여운의 몸에는 약효에 대한 내성이 생겨났다. 이것은 모든 생도들도 같은 입장일 것이다. 단계별로 시험을 통과할 때마다 마룡단을 지급받게 되는데, 실질적으로 복용하면 복용할수록 약에 대한 내성으로 흡수율이 떨어진다. 처음 기준에서 일 할에서 이 할 가량씩 계속 떨어지면서 나중에는 아주 적은 효과만을 보게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래의 유전자 기술 및 의학 기술까지 탑재되어 있는 나노 머신은 체내의 내성마저 조절이 가능하기에 약효의 흡수율을 최대한 높일 수 있다. -사아아아아! 얼마나 운기조식을 했을까. 어느 순간 천여운의 몸에서 뿌연 증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공이 일 갑자에 달해서 완전한 절정의 경지에 이를 때 나오는 현상이었다. 일각 가까이 몸에서 흘러나오던 증기는 어느 순간이 되자 완전히 멈췄다. 그때 천여운이 감았던 두 눈을 떴다. 마룡단을 흡수하기 전보다도 그 눈에서 밝은 광채가 흘러나왔다. “아아!” 천여운의 입에서 감격스러운 탄성이 흘러나왔다. 단전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내공 때문이었다. 원래는 사십 년이었던 내공이 마룡단을 흡수하면서 이십이, 삼 년 정도의 내공이 더해져 일 갑자(육십 년)를 약간 상회하게 되었다. ‘일 갑자를 넘어섰다. 이제 완전한 절정의 경지로구나.’ 처음 마룡단을 복용했을 때는 우호법 섭맹 역시도 운기를 도왔기에 기적적으로 삼십 년의 내공을 얻었지만 이번에는 혼자 운기를 했기에 그보다는 효과가 작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다른 생도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효과를 보았다. 다른 생도들은 약에 대한 내성으로 처음 복용했을 때보다도 흡수율이 낮을 테지만 천여운은 나노가 체내의 내성을 조절해주었기에 온전한 효과를 본 것이었다. 기쁜 마음에 천여운이 나노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나노 고마워. 전부 네 덕분이야.’ [네. 제 덕분입니다.] ‘.....그래.’ 기계인 나노에게 겸양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있는 그대로를 직관적으로 받아들여 대답을 했으니 당연히 나노 머신 덕분인 것이다. 천여운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험해보자.’ 절정의 초입에 이르렀을 때는 손에 기를 발출시켰을 때 희미한 빛으로 형성되었었다. 과연 완전한 절정일 때는 어떠할까? 천여운이 전에 기를 발출시켰을 때의 감각을 떠올리며 손으로 내공을 집중해보았다. -우우웅! 그 순간 천여운의 손에서 선명한 빛이 흘러나왔다. 불완전한 수기(手氣)가 아닌 완벽한 형태의 기의 방출을 성공했다. “성공이다!” 여기서 기의 방출을 더욱 갈고닦아서 도의(刀意)를 실을 수 있게 된다면 천유찬처럼 맨손으로 도의 형태의 도기를 발할 수 있게 된다. -콰스스! 목함에 수기를 가져다대자, 너무도 쉽게 부서지고 말았다. 엄밀히 이야기 한다면 수기에 닿는 목함의 부분이 빛에 분해되었다. 여기에 도의나 검의를 싣게 된다면 이 빛은 날카로운 예기를 머금게 될 것이다. ‘이제 기에 익숙해지도록 연습해야 겠다.’ 절정의 경지에 올랐으니 기를 완숙하게 다룰 수 있도록 훈련이 필요했다. 신이 나서 곧바로 훈련을 하려 했던 천여운이 뭔가를 떠올렸다. ‘아! 맞다.’ 기쁨으로 두근거리던 여운을 가라앉히며, 천여운이 수기를 발산했던 내공을 거둬들이면서 나노에게 명했다. ‘나노, 아까 전에 저장해둔 백기의 대결 영상을 볼 수 있을까?’ 마음에 계속 걸려서 확인하려고 했던 영상이 생각났던 천여운이었다. 그의 명령에 나노가 답했다. [알겠습니다. 영상 재생을 위해 사용자의 눈에 증강현실(增强現實) 개안(開眼)하겠습니다.] 천여운의 동공이 미세하게 떨리며 시야로 흰 빛의 입자들이 선을 그리며 증강현실이 개안되었다. 미리 영상을 편집해서 저장해두었던 나노가 증강현실에 그것을 재생시켰다. 입체영상과는 다른 평면의 큰 화면이 생겨나 영상이 재생되었다. 무공교두인 호진창과 십팔 번 생도인 백기가 서로에게 포권을 취하는 시점부터였다. ‘나노. 백기만 확대해봐.’ [설정한 대상으로 영상을 줌 인(zoom in)합니다.] 나노의 목소리와 함께 백기의 모습이 크게 확대되었다. 천여운은 눈매를 가늘게 뜨고 백기의 모습을 뚫어지게 살폈다. 특히 그가 집중해서 보는 것은 얼굴과 목 부분이었다. 나노가 저장해둔 백기의 대결 영상이 끝나갈 때까지도 천여운의 눈은 그곳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백기가 마지막으로 연무장 바닥에 쓰러졌다가 연신 기침을 하면서 일어나는 모습이 재생되었다. ‘나노 얼굴과 목 부분만 더 확대해.’ [영상을 줌 인(zoom in)합니다.] 백기의 모공이 보일 정도로 크게 확대되는 순간에 천여운이 명했다. ‘영상을 멈춰.’ [영상을 일시 중지합니다.] 크게 확대된 상태로 멈춰진 백기의 얼굴은 굉장히 창백했고, 눈에는 실핏줄이 터져서 흰자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유달리 붉어진 목 부분이었는데, 멀리서 볼 때는 그냥 붉게만 보였는데 가까이 확대를 해보니 목 전체로 붉은 반점들이 촘촘하게 일어나 있었다. 이것을 바라보는 천여운이 분노에 찬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미.....독!” 16장 내가 짓밟아 주마(1) 미독(微毒). 그것은 미세한 양이 쌓여 사람을 서서히 죽게 만드는 독이었다. 음식이나 혹은 특정 물건에 접촉함으로써 독과 접촉하게 만드는데, 미량인 처음에는 괜찮지만 시간이 흘러 체내에 쌓이게 된다면 치명적인 결과를 낳게 된다. 백기의 목 전체로 퍼져나간 붉은 반점들은 분명 미독이 쌓였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질끈! 천여운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머니.....’ 어머니인 화 부인은 미독으로 고통스럽게 돌아가셨다.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았던 천여운은 천추의 한으로 남았다. 힘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지켜본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어린 나이에 깨닫게 되었다. ‘미독에 중독되다니.’ 영상에서 보이는 백기의 증상은 미독에 중독된 현상이 틀림없었다. 문제는 그의 증상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점이었다. 화 부인이 돌아가기 몇 달 전부터 목에 붉은 반점들이 생겨났었는데, 백기도 그것과 동일했다. ‘오랜 세월 동안 쌓여야 그 같은 증상이 나타날 터인데...’ 백기가 오랜 세월 동안 독에 노출되어 있었다고 보기에는 의문점이 있었다. ‘천종섬!’ 그것은 바로 독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종섬이다. 천여운은 십이 조의 뒤편에서 백기를 향해 음흉한 미소를 드러내는 천종섬을 보았다. 거기에서 매우 악의적인 뭔가가 숨겨져 있다고 생각한 그는 혹시 하는 마음에서 백기의 영상을 확인하게 된 것이었다. ‘그 외에 백기에게 악의를 품고 독을 쓸 사람이 있었나?’ 십이 조는 전 조를 통틀어 유일하게 일반 생도가 소교주 후보자를 꺾고 조장이 되었다. 실제로 절정의 초입에 이른 백기의 실력을 보고나니 납득이 갈 만 했다. 하지만 소교주 후보자들 중에서 혼자만이 일반 생도에게 패배한 천종섬의 수치심은 말로 이룰 수 없을 것이다. 원한 관계로 보았을 때는 천종섬이 확실했지만 그가 마의 백종우에게 들었던 미독은 몇 년에 걸쳐서 사용해야만 효과를 본다고 알고 있었다. ‘둘 중 하나인가. 마도관에 들어왔을 때부터 독에 중독되어 있었거나......혹은 미독의 양을 훨씬 늘렸던가.’ 전자도 가능성이 높았지만 천여운의 마음은 후자 쪽에 기울었다. 미독이 오랜 기간 동안 서서히 쌓아서 효과를 보게 한다면 그 양을 늘려서 더욱 기간이 짧아지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쓰레기 자식....’ 약육강식의 마도관에서 경쟁 상대를 없애기 위해 수작을 부리는 것이 옳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러나 미독으로 어머니를 여읜 천여운에게 독은 경멸의 대상이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천여운은 고민이 되었다. 미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에 걸려서 확인한 것이었지만 엄밀히 얘기한다면 백기와 천종섬 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로서는 굳이 간섭하지 않아도 될 문제였다. 하지만 미독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 마음 속 깊이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분노가 이것을 용납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백기가 아니더라도 계속해서 또 다른 누군가에게 독으로 수작을 부리겠지. 네놈이 여기서 살아남는 방식을 옳다 그르다 판단할 생각은 없다만.....내가 그 꼴은 못 보겠다!’ 고민을 거듭하던 천여운은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천종섬이 독으로 부리는 간악한 수작을 부숴버리기로 말이다. 한편, 대연무장의 한쪽 편에서는 격렬한 대결이 벌어지고 있었다. -파파팍! 한 명은 노란 명찰을 달고 있는 무공 교두였고, 또 한 명은 검은 명찰을 달고 있는 생도였다. 검은 명찰에는 오(五)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그는 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유찬이었다. 천유찬을 상대하는 무공 교두 홍두위의 손은 쉴 틈 없이 움직이며 칠마검의 초식들을 펼치고 있었다. -파파파파팍! 홍두위의 손에서 펼쳐지는 변화가 많은 칠마검의 초식들을 천유찬은 신중하게 도초를 펼치며 막아냈다. ‘이 녀석도 생도의 실력을 넘어섰구나.’ 대결을 펼치는 내내 홍두위는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두 사람의 대결은 거의 백중세에 가까웠다. 서로가 동등한 절정의 완숙한 경지였기 때문이었다. ‘칠마검만으로 상대할 녀석이 아니다.’ 처음에는 노련한 경험을 바탕으로 상대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가 펼치는 칠마검의 초식들이 파훼되어 가고 있었다. 천여운처럼 식을 완전히 파훼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절한 초식을 사용하며 그 변화의 틈을 노리고 있었다. ‘고작 그 짧은 시간 안에 칠마검을 잘도 분석했구나.’ 오늘 당장에는 생도들 중에 노란 명찰을 빼앗기 위한 도전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불과 두시진 만에 나타나서는 대결 신청을 했다. 자신감이 넘치는 태도에 설마 하고 여겼는데, 아니나 다를까 칠마검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었다. ‘이놈도 앞의 두 녀석들 못지않은 천재로구나.’ 이 정도라면 더 겨뤄볼 필요가 없었다. 이미 대다수의 초식들이 파훼되었기에 식을 섞어서 변화를 일으킨다고 한들 몇 초식 이내로 승부가 날 것이다. 원래의 본신 절기로 겨뤄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훌륭한 실력을 지녔다. 조장으로서 충분한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타타탁! 홍두위가 빠르게 보법을 펼치며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는 손을 들어서는 대결의 중지 의사를 밝히자, 다음 공격을 이어나가려던 천유찬이 특유의 미소를 띠며 내공을 거둬들였다. “그만해도 될 것 같구나.” “그렇다면?” “내 명찰을 주마.” 홍두위가 가슴에 부착하고 있던 노란 명찰을 떼어서 천유찬에게 넘겼다. 생도들 모두가 지켜보는 곳에서 대결을 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굳이 실력도 확인했는데 자존심을 차릴 필요는 없었다. 노란 명찰을 받아든 천유찬이 신난다는 듯이 말했다. “하하핫, 이제 조장 자격이 생긴 것이로군요.” “그래. 축하한다. 조원들을 모아서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라마.” “감사합니다.” 천유찬이 홍두위에게 공손히 포권을 취한 뒤에 헤어졌다. 홍두위가 본관 건물로 들아가는 것을 확인한 천유찬이 이죽거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후후후, 이제 하나. 다음은 누구로 해볼까나.” 하나의 명찰로 얻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 그였다. 날은 그렇게 빠르게 흘러 유시(酉時) 중반이 되었다. 해가 저물어 가며 노을로 인해 하늘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마룡단의 섭취 때문에 점심시간 때는 한적했던 마도관의 식당이 생도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마룡단을 섭취하고 내공이 늘어난 생도들은 한층 밝아진 얼굴이 되었다. 물론 모두가 즐거운 것은 아니었다. 마룡단을 섭취했는데도 반 갑자의 내공을 달성하지 못한 생도들의 얼굴은 근심으로 물들어 있었다. 내공이 최소한 일류 수준에는 이르러야 칠마검을 펼칠 수 있기에 그들로서는 조원도 구하지 못하고 탈락할 거라는 불안감에 밥알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못했다. -웅성웅성! 그때 식당에서 식사를 하던 생도들의 일부 시선이 입구 쪽으로 들어오는 누군가에게로 향했다. 그는 십팔 번 생도인 백기였다. 비록 무공교두에게 패배하기는 했으나 다른 생도들의 눈도장은 확실히 찍은 그였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면 백기의 주변에는 누구도 없었다. 대부분의 조장 급의 생도들은 자신들을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식사를 하는 반면에 백기는 유일하게 홀로 식당에 나타났다. 특유의 강인한 인상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무뚝뚝함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홀로 식당으로 들어온 그는 생도들이 아무도 없는 구석에 앉아 식사에 집중했다. -끼릭! 그런 백기의 앞으로 누군가 의자를 당겨서 자리에 앉았다. 앞으로 한 번쯤 쳐다볼 만도 했지만 백기는 자신의 식사를 하는 것 외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이봐. 십팔 번 생도.” 명찰의 번호를 직접 거론하는 상대의 목소리에 그제야 앞으로 시선이 향했다. 백기의 맞은편에 앉은 상대는 다름 아닌 검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경운이었다. 한 번도 부딪칠 일이 없었던 그가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이 의아했는지 백기가 무덤덤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지?” “아까 전에 있었던 무공 교두와의 대결은 잘 보았다.” 이미 패했던 대결을 거론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백기는 무표정하게 젓가락을 밥그릇 위에 올려놓고 천경운을 노려보았다. ‘이 녀석 봐라?’ 천경운은 그런 백기의 태도에 내심 빈정 상했다. 보통 생도들은 자신의 무위와 상관없이 여섯 종파의 소교주 후보자들에게 어느 정도 공손하게 대하곤 했는데, 이 녀석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식사 중이다.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천경운이 그리 생각하건 말건 백기는 심기가 불편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모습에 더욱 기분이 상하는 천경운이었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고 태연한 척 대답했다. “급한 녀석이로군. 좋아 본론만 얘기하마.” “본론?” “그래. 네 실력을 잘 보았다. 절정의 초입에 이르렀더군.” 백기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짧은 순간에 발차기에 실렸던 기를 보았던 모양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천경운 역시도 절정의 초입 이상에 해당하는 무위를 지녔을 확률이 높았다. 천경운이 백기를 향해 입 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네 실력이 마음에 들었다. 조장의 자리에 욕심이 있는 것 같다만, 그보다 더 높은 곳으로 향하고 싶지 않나?” “하아.....” 그제야 천경운의 의도를 파악했는지 백기가 한숨을 내쉬었다. 요지는 자신의 조원으로 들어오라고 제안하는 것이었다. 한숨을 내쉰 백기는 관심이 없다는 듯이 다시 젓가락을 들고는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이 녀석이?’ 자신을 무시하는 태도에 천경운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어이가 없었지만 식당 한복판에서 화를 낼 만큼 생각이 없는 그가 아니었다. 여기서 화를 낸다면 현마종이나 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들처럼 뛰어난 인재를 모집하려는 계획이 흐트러진다. “꽤 도도하구나. 좋다. 한 번 고려해봐라. 네게 전혀 나쁠 게 없으니.” 천경운은 애써 화를 가라앉히고 태연하게 고려해보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백기는 개의치 않는지 계속 식사에 집중했다. ‘벌써 두 번째.....여섯 종파 놈들이란.’ 이번이 벌써 두 번째였다. 대결이 끝나고 연공실을 향하는 자신을 찾아온 이가 있었다. 그는 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유찬이었다. 시종 경박해 보이는 태도를 취하는 그는 백기에게 자신의 오른팔이 되어 볼 생각이 없냐고 파격적인 제안까지 하며 회유했지만 단박에 거절했다. 조장이니 위로 올라가는 것에 큰 관심도 없었지만 여섯 종파의 후보자들 밑에 들어갈 생각 따윈 더더욱 없는 그였다. 오직 그의 관심사는 강해지는 것뿐이었다. -탁! 짜증이 섞여서 신경질적으로 젓가락질을 해대는 백기의 앞으로 누군가가 또 앉았다. 앞에 앉은 생도가 백기를 향해 말을 걸었다. “식사 중에 미안한데, 잠시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까?” ‘하아.....또 인가.’ 백기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모든 생도들이 보는 앞에서 무공 교두에게 도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백기는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눈앞에 앉아 있는 생도를 향해 말했다. “관심 없다. 꺼져.” “........음.” 백기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생도가 난처한지 신음성을 흘렸다. 그는 바로 천여운이었다. 16장 내가 짓밟아 주마(2) 마도관에서 다른 생도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은 총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 시험에 탈락해서 방출된 것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생도들은 마도관 내의 개방된 곳에 있기 때문에 돌아다니면 마주칠 수 있다. 이 방법은 개인 연공실이 개방된 이후로 힘들어졌다. 두 번째, 취침 시간에는 숙소의 호실로 전부 모이기 때문에 찾고자 하는 생도의 조만 알고 있다면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취침 시간에 타 생도들의 숙소를 방문하는 것은 실례가 되는 행위였기에 모두가 꺼려한다. 마지막 방법은 점심 혹은 저녁식사 시간이었다. 식사 시간에는 대다수의 생도들이 모이기 때문에 잘 찾아보면 원하는 생도를 발견할 수 있다. 이 단계 시험이 끝난 후로 개별로 식사가 가능해졌기에, 낮에는 쉼 없이 훈련을 하느라 점심 식사를 생략하는 생도들이 늘었지만 저녁 식사만큼은 대부분 거르지 않는 편이었다. 천여운이 백기를 만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세 번째였다. 마도관 식당을 찾은 그는 아니나 다를까 한쪽 구석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백기를 발견했다. 그런데 그가 미처 다가가기도 전에 누군가 먼저 선수를 쳤다. ‘천경운?’ 검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경운이었다. ‘나노, 식당에 있는 모든 소리를 차단하고, 두 사람의 대화만 들리도록 해줘.’ [알겠습니다.] 나노의 기능 중의 원하는 소리를 따로 선택하여 추출할 수 있고, 그 외의 소리를 차단시킬 수 있다. 덕분에 천경운과 백기가 나누는 대화를 듣게 된 천여운이었다. ‘생각보다 까칠하구나.’ 소교주 후보자인 천경운이 애써 참고 있는 것이 훤히 보였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의외인 점은 천경운이 조장 급인 백기를 영입하려한다는 점이었다. 확실히 저 정도 실력자라면 끌어들이고 싶은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조장을 맡을 정도로 우두머리의 자질을 가진 자가 과연 누군가의 밑으로 들어가려하겠는가? 그렇게 천경운이 떠난 자리에 천여운이 앉았다. 어차피 자신은 그를 영입하려는 게 아니라, 독에 중독되었음을 알리기 위한 것이니까. “식사 중에 미안한데, 잠시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까?” 그 질문과 함께 천여운의 시선이 자연스레 백기의 목으로 향했다. ‘어? 목이...’ 백기의 목이 낮에 대련이 끝났을 때와 달리 원래의 색을 되찾아 있었다. 목에 오돌오돌하게 올라왔던 붉은 반점들 또한 가라앉아 있었다. 놀라하는 천여운의 귓가로 백기의 까칠한 대답이 들렸다. “관심 없다. 꺼져.” “........음.” 천여운은 그의 태도와 무관하게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 되었다. 독에 중독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려고 했는데, 가장 눈에 띠는 증상이 사라졌으니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렇다고 가만히 내버려두면 백기는 미독이 쌓여서 분명 죽게 될 것이다. 결국 천여운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기로 했다. “지금 대화를 나누지 않으면 나중에 죽을 수도 있어.” “뭐?” 의도한 것은 아니었는데, 백기는 천여운이 하는 말을 오해했다. 그가 자신을 향해 위협을 가한다고 생각했다. 백기가 젓가락을 식탁에 내려놓으며 천여운을 날카롭게 노려보며 말했다. “여섯 종파의 소교주 후보자들도 아니면서 앞의 두 녀석들보다도 더 오만하구나. 그런 식으로 조원을 영입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오해? 지금 내게 위협을 가해놓고 오해라고 하는 거냐?” 백기는 식당만 아니었으면 천여운에게 당장이라도 덤빌 기세를 풍겼다. 아무래도 앞에 천경운처럼 그를 영입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위협을 가했다고 오해를 한 모양이었다. 이에 천여운이 곤란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그 뜻이 아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너 아무래도 독에 중독된 것 같다.” “독? 그게 무슨 헛소리냐?” 천여운의 뜬금없는 말에 백기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 맥락도 없이 느닷없이 독에 중독되었다고 말을 하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낮에 있었던 네 대결을 보았다. 그때 얼굴이 하얗게 뜨고 목에 붉은 반점이 나있더군. 미독에 중독된 게 틀림없다.” 근거까지 제시해가며 말하는 천여운의 진지한 목소리에 백기가 인상을 찌푸렸다. 내공이 절정의 초입에 이른 자신이 독을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독이라니? 그럴 리가 없다.’ 운기조식을 하면서 한 번도 체내로 독이 침투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타인에 대한 경계가 강한 백기는 십이 조로 배정받은 후로 독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종섬을 계속해서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최대한 그와 접촉하는 것조차 피했던 백기였다. ‘그런데 이 녀석은 내게 왜 이런 사실을 말해 주는 거지?’ 문득 백기는 천여운의 의도가 궁금해졌다. 처음에는 자신을 영입하러 온 것이라 오해했지만, 독에 중독된 것 같다고 알려주는 것을 보면 악의가 있어보이진 않았다. “......네 말을 오해한 것은 미안하다. 하지만 독에 중독되었다면 운기조식을 하면서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다.” 백기는 처음 천여운의 말을 의심했던 것을 사과했다. 그저 까칠한 성격이라 짐작했던 것과 다르게 백기는 꽤나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다. “운기조식을 해도 멀쩡하다고?” 백기의 말에 천여운도 의아해졌다. 어머니인 화 부인이 미독에 중독되고, 자신 역시도 미독에 중독되었을 무렵에는 내공을 익힌 적이 없었기 때문에 운기조식으로 웬만한 독의 침투를 알아챌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그였다. ‘운기조식을 하면 독을 알아차릴 수 있나? 하지만....분명 그 증상은 미독이 틀림없다.’ 백기의 말 대로라고 하면 독에 중독되었을 리가 없다. 고민에 빠져 있는 찰나에 천여운의 눈에 식당으로 들어오는 누군가가 보였다. 그는 마도관 의무실의 주치의인 백종명이었다. ‘백 의원님?’ 항상 유시(酉時) 중반에 퇴근하고 마도관의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돌아가는 그였다. 백종명을 발견한 천여운은 마침 잘됐다고 여겼다. “그럼, 혹시 모르니 의원님께 진단을 받는 건 어때? 확인해서 나쁠 건 없잖아?” “......그야 그렇지만.” 분명 맞는 말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에게 끌려 다니는 느낌이었다. 어차피 식사를 거의 끝낸 참이었기에 백기는 밥그릇을 반납하고, 천여운을 따라서 백종명이 있는 곳으로 갔다. “밥~ 밥~ 밥~” 마도관의 주치의 생활의 유일한 낙이 식사인 백종명이 흥얼거리면서 밥을 주걱으로 가득 퍼서 꾹꾹 눌러 담고 있었다. “백 의원님.” “어?” 익숙한 목소리에 백종명의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천여운이 그를 향해 포권을 취하며 빙그레 웃어보였다. 퇴원한 후로 오랜만에 보는 천여운의 얼굴에 백종명이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이야. 오랜만이다. 아니? 그리 오랜만은 아닌가. 아무튼 반갑다. 식사는 했고?” “아닙니다.” “그럼 잘 됐다. 같이 식사하자. 안 그래도 혼자 식사하기는 적적했거든. 할 말도 있고.” 백종명은 천여운을 만나서 꼭 하고픈 말이 있었다. 그것은 고맙다라는 말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마도관의 의무실에 장기 입원 환자들이 늘어났다. 모든 환자들이 천여운의 작품은 아니었지만 환자가 없어서 적적해하던 백종명에게는 너무도 반가운 환자들이었다. 심지어 오전에 무공 교두마저 갈비뼈가 세 개나 부러져서 입원했다. 그런 백종명에게 천여운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죄송한데 그 전에 혹시 여기 있는 이 친구를 진맥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응?” 의아한 표정을 짓는 백종명에게 천여운이 옆에 서있는 백기를 가리켰다. 백기도 얼떨결에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했다. “십팔 번 생도 백기입니다.” “아아, 그래. 반가워. 마도관의 주치의인 백종명이라고 해. 왜 다치기라도 했나봐?” 백종명은 한 번도 백기를 본 적이 없었다. 발바닥이 검기에 관통되었어도 가지고 있는 금창약(金瘡藥)만으로 버틴 백기였다. “......아무래도 독에 중독된 것 같습니다.” “뭐? 독?” 독이라는 말에 여유롭던 백종명의 표정이 굳어졌다. 마도관 내에서 독으로 인한 환자가 발생하리라고는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아.....그 녀석들이 있구나.’ 생각해보니 마도관에 입관한 생도들 중에 독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종섬을 비롯해 독마종의 혈손도 있었다. 독에 중독되었다면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문제였다. “여기서는 진맥하기가 힘들고 일단 의무실로 가자.” 백종명이 밥그릇에 펐던 밥을 다시 솥에 집어넣고는 그릇을 반납했다. 유일한 낙인 식사를 포기했다. 확실히 의원으로서의 사명감을 가지고 있는 그였다. 오랜만에 마도관의 본관으로 들어와 이 층에 있는 의무실로 향하면서 천여운은 생각보다 많은 경비 무사들에 의아해했다. 심지어 의무실의 앞쪽에는 네 명이나 되는 경비 무사들이 서있었다. ‘......이 층에 이렇게 많은 경비 무사들이 있었는데, 스승님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이들을 전부 통과하는 게 가능한가?’ 의구심이 들었다. 일부러 모른 채 하지 않고는 의무실로 들어오는 것이 힘들어 보였다. 생각해보니 자신이 우호법의 접무도법을 익혔는데도 마도관주를 비롯해 무공 교두들 모두가 의아해하거나 물은 적도 없었다. ‘역시.....뭔가가 있었던 건가.’ 천여운은 찝찝한 마음으로 백종명을 따라 의무실로 들어갔다. 의무실에 들어온 백종명은 백기를 앉히고 그를 진맥하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진맥을 하는 백종명은 한 군데의 혈이 아니라 여러 군데를 짚어가며 맥을 확인했다. “흐음....이상한데.” “심각한 겁니까?” 백기도 내심 걱정이 되었었는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맥은 전혀 이상이 없는데.” “그럼 괜찮은 겁니까?” 걱정스러운 표정이 되어있던 백기가 약간은 밝아진 얼굴로 묻자, 백종명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운기조식은 해봤니?” “늘 했지만 체내의 혈로 독이 침투한 것은 느끼지 못했습니다.” “흐음. 그래? 증상이라도 알면 무슨 독인지 짐작이라도 하겠는데, 맥만 짚어보고는 전혀 모르겠는걸.” 그 말에 천여운이 나서며 말했다. “눈의 흰자에 핏줄이 터져서 빨갛게 되고, 그리고 얼굴은 하얗게 되었는데, 목에는 붉은 반점들로 가득했습니다.” “뭐?” 천여운의 말에 백기 역시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걸 봤다고?’ 아까 전에는 무심결에 들었었지만 단상 앞에서 대결을 하느라 꽤 거리가 떨어져있었을 텐데, 너무 상세할 정도로 자신의 모습을 설명을 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미독의 증상으로 보이는데 맞습니까?” 천여운이 자신의 짐작을 확신하 듯이 말하자, 백종명이 눈에 이채를 띠며 물었다. “.....맞아! 너 어떻게 그걸 알았니?” 천여운의 말대로 미독에 중독되게 된다면 그런 증상이 나타나게 된다. 의원도 아닌 천여운이 독의 증상을 알아차리자 의아했던 모양이었다. 백종명의 질문에 천여운이 침울해진 목소리로 답했다. “......어머니께서 미독에 중독되어서 돌아가셨습니다.” “아.....그랬구나.” 잘못된 질문이 아니었지만 괜히 미안해진 백종명이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숙였다. 생각해보니 스승인 마의 백종우가 언젠가 성내 왕진을 다녀오면서, 다음날 미독의 해독에 쓰이는 약재들을 챙겼던 것이 떠올랐다. ‘......그런 이유였었나.’ 의자에 앉아 있는 백기 역시도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느닷없이 식당에 나타나서 독에 중독되었다고 하는 말에 의심스러웠는데, 그 말을 듣고 나니 어느 정도는 수긍이 되었다. 그 자신이라도 부모를 숨지게 한 독이라면 민감하게 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후우....미독이면 당연히 진맥이나 운기조식으로 발견할 수 없지.” “네?” “잠깐만.” 백종명이 의무실의 진열장의 문을 열고 무언가를 주섬주섬 챙겨왔다. 뭔가 약재 같은 것을 조합해서 그곳에 심지를 연결하고는 등불에 불을 붙였다. 그러자 얼마 있지 않아 심지를 타고 약재가 타들어가며 연기가 피어올랐다. “입으로 숨을 쉬며 연기를 빨아들어 보렴.” “입으로요?” “크게 들이키면 돼.” “알겠습니다.” 알 수 없는 백종명의 지시에 백기가 피어오르는 연기를 입으로 빨아들이며 크게 들이켰다. 그 순간, “쿨럭쿨럭!” 연기를 들이마신 백기가 미친 듯이 기침을 해댔다. 놀라운 것은 기침을 해대는 백기의 얼굴이 점차 하얗게 변색되어 갔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는 멀쩡했던 목 부위로 붉은 반점들이 올라오며 순식간에 그의 목 전체를 뒤덮었다. “쿨럭쿨럭!” 백기는 호흡이 힘들 지경이었는지 의자에서 쓰러져 의무실 바닥에 손을 짚었다. 백종명이 약재의 꽂혀있는 심지의 불을 입 바람으로 껐다. 연기가 가시자 한참을 기침을 해대던 백기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역시 미독이 확실해.” 실핏줄이 터져서 빨개진 눈으로 쳐다보는 백기에게 백종명이 말했다. “쿨럭...쿨럭...그렇다면 제가?” “그래 독에 중독된 게 틀림없어.” 백종명의 확실하다는 진단에 백기가 충격을 받았는지 동공이 떨려왔다. 그렇게 경계를 해왔는데 자신이 언제 독이 중독된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 하지만 운기조식을 했을 때도 괜찮았고, 뭔가 독에 중독될만한 접촉 같은 것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식사도 늘 혼자 했는걸요.” 백기가 이때까지 다른 생도들과의 접촉을 피하고 혼자 식사를 했던 이유였다. 독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종섬이 허튼 수작을 부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던 것이었다. “뭐.....미독은 조금 달라.” “네?” “미독은 혈관을 타고 흐르는 독이 아니라, 위(胃)나 폐(肺)에 축적되면서 점차 효과가 나타나는 독이거든.” “폐?” “미독을 음식에다가 넣어서 쓰는 경우도 있겠지만, 아주 잘게 가루로 만들어서 자고 있을 때 흡입하게 해도 독에 중독될 수 있어. 더군다나 미독은 워낙 소량의 독이라서 자면서 숨을 쉴 때 들이키는 걸로 알아차리기 힘들거든. 너 혹시 독을 쓸 만한 녀석이랑 같은 숙소라도 쓰니?” 백종명의 말에 백기가 빨갛게 물든 눈을 무섭게 치켜뜨며 분노로 몸을 파르르 떨었다. '천종섬....이 개자식이!!!' 16장 내가 짓밟아 주마(3) 마도관의 입관 첫날 숙소가 정해지면서 각 조별로 내부에서 서열 전쟁이 일어났다. 그것은 십이 조의 숙소 또한 여느 조와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이변이 일어나게 된다. 여섯 종파 출신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종섬은 무력보다는 독마종의 위세를 업고 생도들에게 위협을 가해 조에서 견고한 자신의 위치를 다지려 했다. 그러나 천종섬의 이런 야욕은 백기의 도전으로 인해 무산되고 말았다. ‘조장의 위치에 관심 따윈 없다만 네 녀석처럼 썩어 빠진 권위 의식에 젖은 놈한테 넘겨줄 순 없다.’ 아직까지 일류의 경지였던 천종섬과 달리 백기는 절정의 초입에 이른 실력자였다. 아무리 독마종의 상승 무공을 익혔다고 해도 그 차이가 좁혀질 리가 만무했다. 패배한 천종섬은 한에 찬 목소리로 백기에게 경고했다. ‘당장의 승리를 만끽해라. 독마종의 손톱은 독주(毒酒)와도 같지. 시간이 지날수록 그 깊이도 깊어진다.’ 당시에는 그 말의 의미를 몰랐다. 강해져서 설욕전을 하겠다는 말인지, 혹은 독마종의 주력인 독(毒)으로써 보답을 하겠다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그 경고를 가볍게 여기지 않은 백기는 늘 천종섬을 경계했다. 하지만 그런 조심성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독에 중독되고 말았다. ‘천종섬.....이 개자식이!!!’ 무력으로 당한 것도 아니고 독에 당했으니 더욱 화가 날 만도 했다. “쯧쯧.” 안타까운 마음에 혀를 차며 의원 백종명이 약재실에서 해독 약재를 꺼내왔다. 그런 그에게 천여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십팔 번 생도의 상태는 심각합니까?” 천여운의 질문에 백종명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니. 운이 좋았어. 빨리 발견해서 다행이야. 이레 정도 꾸준히 해독약을 먹는다면 깨끗하게 나을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목에 붉은 반점이 그렇게 날 정도면 심각한 게 아닌지?” 어린 시절이었지만 마의 백종우가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백종우는 목 전체가 붉은 반점으로 뒤덮은 어머니, 화 부인은 설사 신의(神醫)가 온다고 해도 회생시킬 수 없다고 말했었다. 미독은 보통 독과 달라서 오랜 시간에 걸쳐서 독이 축적되기에 중간에라도 운 좋게 발견한다면 해독이 가능하지만, 독 기운의 증상이 몸으로 나타난다면 이미 장기가 회생시킬 수 없을 정도로 손상을 입은 것이라 하였다. “아아. 그건 폐를 자극했기 때문에 일어난 거야.” “폐를요?” “독에 중독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한 건데. 평소에도 중독 증상이 계속해서 보일 정도라면 신의가 온다고 해도 살릴 수 없어.” 백종우의 제자가 아니랄까봐 그와 똑같은 말을 했다. 문득 천여운은 오전에 백기가 무공 교두인 호진창과 대결을 했을 때가 떠올랐다. 당시에 호진창의 검지가 백기의 가슴을 찌르면서 대결의 승패가 갈라졌었다. ‘아! 그게 백기의 폐를 자극한 건가?’ “혹시 폐를 자극한다는 것이 아까 전처럼 연기를 맡아야만 확인이 가능한 겁니까?” “꼭 그런 건 아니야. 가령 폐에 손상을 입는다거나 하면 독 기운이 상처를 타고 들어가서 증상이 나타날 수도 있거든.” “아아아....역시 그랬군요.” 모든 의문점이 풀렸다. 그제야 천여운은 왜 대결이 끝난 후에 백기에게 중독 증상이 나타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백종명은 준비한 여러 약재를 조합해 탕제기에 넣고 약을 달였다. 약을 달이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백종명은 여전히 분노에 젖어서 치를 떨고 있는 백기에게 탕약이 담긴 그릇을 넘겼다. “자! 마시렴.” “....감사합니다.” 탕약을 들이키는 백기를 향해 백종명이 웃으면서 말했다. “화가 나겠지만 그래도 다행이지?” “네?” “칠 번 생도 덕분에 빨리 알아차려서 그렇지. 늦었다면 손을 쓸 수도 없었을걸.” “아!” 백종명의 그 말을 듣고서야 백기는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렸다. 천종섬에 대한 분노를 불태우느라, 미처 생명의 은인에게 감사의 인사조차 하지 못했다. 만약 천여운이 아니었다면 독에 중독된 줄도 모른 채, 목숨을 잃었을 지도 몰랐다. 백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천여운에게 포권을 취했다. -탁! “미, 미안하다. 인사가 늦었다. 네 덕분에 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되었다. 정말 고맙다.” 누군가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지 어색한 말투였다. 하지만 그 얼굴에는 진심으로 고마움이 묻어나 있었다. 천여운이 그런 그에게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무 고마워하진 않아도 괜찮아. 그 비열한 독으로 누군가가 죽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뿐이니깐. 그리고.....그 독의 출처를 찾고 있었으니까.” 마지막 말을 내뱉는 천여운의 목소리에는 진한 살기가 베여있었다. 그것은 독에 중독되어 분노에 젖어있던 백기와는 비교도 하기 힘든 원한에서 우러나오는 살기였다. ‘지독한 살기다.’ 천여운의 강한 살기를 느낀 백기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어머니가 미독에 중독되어서 돌아가셨다고 말을 했을 때,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 증오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때 백종명이 비어있는 침상의 장막을 걷으며 백기에게 말했다. “일단 오늘은 의무실에서 쉬는 게 어떨까?” “네?” “이레 정도 해독약을 처방받으면 낫기야 하겠지만, 오늘 당장에 숙소로 돌아간다면 네게 미독을 하독한 녀석이 또 노릴 텐데. 그럼 말짱 도루묵일 텐데?” 백종명의 날카로운 지적에 백기가 인상을 찡그렸다. ‘또 하독을 한다고?’ 백종명의 지적이 없었다면 백기는 당장에 천종섬을 찾아가 자신을 중독 시킨 것에 대한 복수를 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백종명의 말대로라면 천종섬은 악순환의 반복처럼 계속해서 백기가 자는 틈을 노려서 미독을 하독 하려들게 틀림없었다. 독에 중독된 것을 알았으니, 그것만큼은 피해야했다. “제기랄!” 절로 짜증이 치솟았다. 독공을 쓰는 적과 함께 같은 숙소를 쓴다는 것이 이렇게나 피를 말리게 할 줄은 생각도 못한 백기였다. 무공이 뛰어난 자를 상대하는 것보다 더욱 까다로웠다. 그런 그에게 천여운이 백종명의 말에 동의하는지 달래듯이 말했다. “일단은 백 의원님 말씀대로 의무실에서 쉬고 있어. 복수하고픈 마음은 알겠지만 독을 먼저 해독 하는 게 우선이지 않을까.” “크윽.” “천종섬은 내게 맡겨라.” “뭐?” 천여운의 뜬금없는 말에 백기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사건의 당사자인 자신조차도 어찌해야 할지 난감해하는 놈을 대체 어쩌겠다는 말인가. 백종명 또한 천여운의 말에 괜한 기우에 말했다. “뭘 하려고 그러는 거니?” “.....적당한 대화가 필요한 시점 같아서요.” ‘대화?’ 그렇게 말하는 것과 달리 천여운의 눈빛에서 풍겨지는 살기는 보통이 아니었다. 이에 백종명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꽤 실력이 많이 늘었다는 건, 소문으로 듣기는 했는데 독공을 쓰는 자를 상대로 괜찮겠니? 그러다 너도 의무실로 올 수도 있어.” 의원으로서 백종명의 우려는 타당했다. 아무리 무공이 뛰어난 자라고 해도 독공을 상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여섯 종파의 수장들조차도 제일 상대하기 꺼려하는 종파로 독마종을 꼽는 데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독마종은 적으로 삼기에는 너무 위험한 종파였다. “걱정은 감사합니다만. 전 괜찮습니다.” 괜찮다는 말과 함께 천여운은 백종명의 만류에도 의무실을 나가려 했다. 그러다 의무실의 문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그 모습에 마음이 바뀌었나 싶었는데, 천여운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는 의무실을 나가버렸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보답으로 네 옆자리로 녀석을 보내주마.” “뭐?” 백종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혼잣말을 했다고 하기에는 꼭 누군가에게 하는 말 같았다. 영문을 몰라서 서로를 바라보는 백종명과 백기의 귓가로 의무실 한쪽 편에서 누군가의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흥. 빌어먹을 천한 놈이.”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복마종의 소교주 후보자 천무금이었다. 백팔 번 생도 하일명에게 어두운 밤중에 기습을 당해 부상을 입은 그는 의무실에 입원을 하고 있었다. [어이 천한 놈. 네가 찾는 그 놈은 숙소 오 관 건물의 맞은편에 있는 숲에 있을 거다.] 천무금은 의무실을 나가려는 천여운에게 전음을 보냈었다. 그것은 독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종섬이 저녁마다 항상 가는 곳에 대한 정보였다. 이 정보를 알려준 것은 절대로 천여운이나 백기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크큭.’ 독마종의 후보자인 천종섬은 자신 못지않게 천여운을 유독 싫어 하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천여운은 어머니인 화 부인의 죽음에 대한 의혹으로 여섯 종파 중에서 독마종을 가장 증오했다. ‘네놈이던 독마종의 그 미친놈이던 간에 서로 죽일 듯이 싸워라.’ 양패구상 혹은 두 녀석 중에 한 놈이 죽기를 바랐기에 알려준 것이었다. 노을로 붉게 물들었던 하늘은 어느새 깜깜하게 어두워져, 드넓은 검은 창공에 별들이 반짝이며 수를 놓고 있었다. 마도관에서 유일하게 산으로 둘러싸인 곳은 숙소 건물 주변이었다. 수풀이 우거진 산은 생도들이 종종 올라가 무공 수련을 하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물론 모든 산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 중에 오 관 숙소 건물은 무공 교두들이 머무는 숙수였기에 그 맞은편의 산은 생도들이 가급적 드나들지 않는 곳 중 하나였다. 그런 이점을 이용하기라도 하듯 이 산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이가 있었다. 그는 바로 독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종섬이었다. “흐흐흐.” 특유의 음흉한 웃음소리를 내는 천종섬은 매일 밤마다 산속을 헤매고 다니며 자신이 원하는 독초를 수집하고 다녔다. 파마독경(波魔毒經). 독마종의 독의 진수를 모은 독공이었다. 이 독공을 익히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몸을 중독 시키고 해독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고통스러운 수련을 동반 한다. 이렇게 수련을 반복하게 되면 파마독경의 최종 경지인 독인(毒人)에 이른다. 독인이 되면 체내에 수백 가지가 넘는 독을 품을 수 있게 되고, 기(氣)마저 용해시킬 수 있는 위력의 독공을 펼칠 수 있게 된다. ‘마룡단을 흡수해서 절정의 초입의 내공을 지니게 되었으니, 며칠만 더 고생하면 파마독경의 오층(五層)의 경지에 이른다.’ 총 구층으로 나누어진 파마독경은 사 층까지는 기본공에 불과했지만 오층부터는 독공의 위력이 비약적으로 올라가게 된다. ‘파마독경의 오층의 경지에만 오른다면 미독 따위의 도움이 없어도 건방진 그놈을 내 발밑에 꿇게 만들 수 있다.’ 백기와의 대결에서의 패배는 천종섬에게 지독한 수치심을 안겨주었다. 같은 소교주 후보자도 아닌 일반 생도에게 패배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천종섬이다. 분노한 그는 매일 새벽마다 자고 있는 백기에게 미독을 하독 했다. 그 결과, 미독이 제대로 효과를 보는 것을 오전의 무공교두와의 대결을 통해 확인하게 되었다. ‘조금 빠르기는 하지만. 누가 알겠어.’ 원래 미독은 극소량을 하독해야 그 증상이 임종 전에나 드러나기에 해독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천종섬은 복수심으로 조급한 마음에 원래 투여해야할 양보다도 훨씬 많은 양을 미독 가루를 하독하면서 그 증상이 빨리 나타났다. 하지만 마도관 내에서 미독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독마공의 혈손과 자신뿐일 텐데 누가 과연 알아챌 수 있을까? “흐흐흐. 백기.....네놈이 미독으로 죽기 전에 내 손으로 직접 죽여주마.” 오층의 파마독경에만 오른다면 미독을 통해서 시간을 들일 필요가 없었다. 직접 겨뤄도 백기를 쓰러트릴 수 있으리라고 확신하는 천종섬이었다. 생각만 해도 즐거워졌다. “뭐가 좋다고 그렇게 실실 쪼개는 거냐?” “아?”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란 천종섬이 놀라서 그곳을 쳐다보았다. 깜깜한 밤 숲이었기 때문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뭐, 뭐지? 목소리가 무공 교두는 아닌 것 같은데.’ 이 시간에 자신을 제외한 누군가가 산으로 오르는 것을 본 적이 없는 그였다. 말투를 들어보면 적의감이 가득했다. 잠시 고민하던 천종섬이 빛이 퍼져나가지 않도록 초롱불에 덮어둔 짙은 천을 치워버렸다. “네....네놈은?” 짙은 천을 치우자 초롱불의 빛이 주변을 밝히며 정체모를 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바로 천여운이었다. 일렁이는 초롱불의 불빛에 음영이 흔들리는 천여운의 눈빛은 무서울 정도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뭐지? 이 녀석이 대체 왜 여기에 온 거지?’ 갑작스러운 천여운의 등장에 천종섬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천종섬을 향해 천여운이 살기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미독으로 장난질을 하니깐 좋은가 보지?” 그 말에 천종섬의 눈빛에 이채가 띠었다. 그것이 천여운 본인의 어머니인 화 부인을 말하는 것인지, 십팔 번 생도인 백기를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누가 되었든 상관은 없었다. 확실한 건 천여운이 미독에 대한 무언가를 알아챈 것은 틀림없었다. 처음에는 당혹스러워했던 천종섬이지만 이내 그것을 지우고, 특유의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미독이 뭘 어쨌다는 거냐?” “백기의 목에 붉은 반점들. 그걸 보고도 내가 알아차리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나?” “네가 알아차려? 아.....아아아!” 천여운의 지적에 천종섬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이 키득거리며 웃어댔다. “키키키키킥, 아아. 그랬군. 그래서 안 거였어? 네 더러운 애미가 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천여운의 신형이 번개처럼 튕겨져 나오더니, 천종섬의 음흉한 얼굴에 십성 공력과 전력이 담긴 주먹을 날렸다. -퍽! 우드드드득! “크웨에에에에엑!” 주먹이 닿는 순간 천종섬의 턱과 안면이 왼쪽으로 일그러지며, 뒤로 포탄처럼 튕겨져 나가버렸다. -쿠쿠쿠쿵! 우지끈! 그 위력이 어찌나 강했는지 천종섬의 몸이 한참을 튕겨나가다 못해, 큰 고목나무에 박혀서 그것을 반쯤 부러뜨리고 나서야 멈출 수 있었다. 부러진 고목나무에 찌그러진 인형처럼 몸이 박혀 있는 천종섬의 턱은 기괴한 형태로 왼쪽으로 돌아가 있었고, 오른쪽 입안의 이빨들이 전부 부서지거나 뽑혀져 있었다. “흐허어어어어....” 용케 기절하지 않고 고통을 견뎌낸 천종섬의 입에서 발음이 새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뭐야? 대체 이게 뭐냐고!’ 천종섬은 지금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주먹을 맞았던 것까지만 기억이 났다. 그런 그를 향해 천여운이 흉악한 나찰과도 같은 무서운 얼굴로 다가왔다. “지랄 떨지마. 이제 시작이야.” 16장 내가 짓밟아 주마(4) -주르륵! 천종섬의 입가로 고여 있는 피가 흘러내렸다. 이빨이 부러지고 뽑혀져 나가는 바람에 피는 나는데, 턱이 기괴하게 돌아가면서 입을 다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살기를 뿜어대는 천여운의 기세를 보아하니 마도관의 규칙이건 나발이건 이 자리에서 자신을 죽일 작정으로 보였다. ‘허, 허세를 부리는 거야.’ 그 기세가 흉흉하여 두려웠지만 천종섬은 애써 부정했다. 마도관에서 공개적인 대결이나 시험이 아니고는 사적으로 같은 생도를 살해할 경우 방출되게 되어있었다. ‘움직여. 움직여!’ 천종섬이 등허리가 박혀있는 몸에 힘을 주며 부러진 고목나무에서 벗어나려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주먹을 맞고 난 후유증이 아직까지 가시지 않았다. “네놈은 절대로 하면 안 될 말을 지껄였어. 그게 뭔 줄 알아?” 차갑게 식은 목소리로 질문하는 천여운을 바라보며 천종섬은 몸을 움직이기 위해 안간 힘을 썼다. ‘제발! 움직여라.’ 천여운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무공으로는 그를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이미 무공 교두와의 대결로 인지된 상태였다. 식은땀까지 흘려가며 움직이기 위한 갖은 애를 쓴 결과, ‘돼, 됐다! 움직인다.’ 천종섬의 손가락부터 발가락까지 꿈틀거리며 힘이 들어갔고, 단전의 내공이 전신으로 순환했다. 천여운이 거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내가 아직까지 움직이지 못한다고 생각할 테니 방심을 유도해야 한다.’ 천종섬이 최대한 멍한 눈빛을 하며 천여운을 바라보는 척 했다. 물론 일부러 방심을 유도하지 않아도 천종섬의 상태는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기괴하게 돌아간 턱 덕분에 벌어진 입에서 계속해 피가 흘러내렸다. -탁! 바로 앞에 선 천여운이 고목나무 박혀 있는 천종섬을 내려다보며 살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네놈의 실수는 그 더러운 입으로 내 어머니를 모욕한 거야.” 그 말과 함께 천여운이 주먹을 쥐고서 천종섬의 머리를 내리 찍으려고 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정신을 못 차리는 듯이 멍한 눈빛을 하던 천종섬이 강하게 허리를 튕기며, 고목나무에 박혀있던 몸을 빼내더니 천여운의 가슴으로 기습적인 일권을 날렸다. -퍽! “흐히힉! 흐허시 흐해찌!” ‘키키킥, 방심 했지?’ 발음이 새어나가는 목소리로 기뻐하려했던 천종섬의 눈이 커졌다. 가슴 정중앙의 요혈을 맞췄어야 하는 그의 일권이 천여운의 손바닥에 막혀있었다. ‘제기랄.’ 마룡단을 섭취하고 내공이 절정의 초입에 이르렀기에, 십성 공력으로 기습을 가하면 천여운이라고 해도 당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너무 쉽게 막혀버렸다. -꽉! 천여운이 그의 주먹을 움켜쥐었다. ‘엇?’ 대체 무엇을 하려고 주먹을 움켜쥐는 것인가? 천여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멍청한 놈. 그냥 가만히 있지 그랬어.” -뿌드드득! “쿠웨에에에에에엑!” 천여운의 엄청난 악력에 그 손에 움켜쥐어져 있던 천종섬의 주먹의 형태가 압축되듯이 일그러지며 부러지는 소리가 나왔다. 천종섬이 공력을 끌어올려서 손을 펴보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완전한 절정의 경지에 오른 천여운의 공력은 그를 훨씬 능가했고, 그 완력은 청옥석 벽에도 흔적을 가할 만큼 괴력에 가까웠다. “쿠웨에에에에엑!” 주먹의 뼈가 전부 으스러지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기절할 것만 같은 고통이 심화되자 천종섬의 머릿속에는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빌어먹을! 주, 죽여야 해!’ 마도관의 규칙이고 자시고 천여운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이 자리에서 죽을 것만 같았다. 천종섬이 죽을 것 같은 고통을 참아가며 중단전에 쌓은 독단을 움직였다. 파마독경의 사층에 이른 자는 일곱 종류의 독을 체내의 중단전에 쌓고 외부로 발출시킬 수 있다. 백기에게 패배할 때조차도 독을 쓰지 않았던 것은 이 독들을 쓰면 상대를 죽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체내에 쌓은 일곱 중류의 독 중에서 가장 치명적이고 강한 독은 산독(酸毒)이었다. 산독은 피부와 근육조차 녹일 만큼 위험한 독이라 그를 가르쳤던 독마종의 가주조차도 같은 교인들을 상대로는 쓰지 말라고 누차 경고했었다. ‘내가 죽게 생겼는데 그딴 걸 생각할게 어딨어!’ “후거어어!!!” ‘죽어!!!’ 천종섬이 오른손이 으스러지는 고통을 참아가며 천여운의 얼굴을 향해 왼손을 뻗었다. 그 순간 천종섬의 왼손에서 노란빛의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큭!” 갑작스러운 하독에 놀란 천여운이 빠르게 손을 떼며 뒤로 보법을 펼치며 물러났지만, 독기를 품은 천종섬이 그를 따라붙었다. -솨아아아! 어떻게 할 틈도 없이 천여운의 얼굴에서 가슴까지 순식간에 노란 연기가 뒤덮었다. -치이이이! 천여운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오르며 피부가 타들어갔다. “크으윽!” ‘키키킥! 됐다!’ 천종섬의 눈빛에 회심이 감돌았다.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바로 코앞에서 산독을 맞았으니 얼굴과 눈이 녹아내리고 독기가 몸에 퍼져나가 곧 죽게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천종섬을 경악하게 만드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사용자의 안면과 가슴으로 강한 산(酸)을 포함한 독성 물질이 침투하려 합니다. 긴급 방어 모드를 전개합니다. 독을 중화시키고, 손상된 피부를 수복합니다.] -스스스스스! 나노의 목소리가 천여운의 머릿속에 울려 퍼지며 얼굴에 화끈거리며 고통스럽던 피부가 점차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흐, 흐히허게 흐허야?” ‘이, 이게 대체 뭐야?’ 천종섬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경악하다 못해 두려웠다. 산독에 타들어가며 피부 근육까지 보이던 천여운의 얼굴과 가슴이 빠르게 재생을 피부가 덮어가며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가는 것이었다. 심지어 독이 중화되는지 얼굴과 가슴에서 희미한 증기가 피어올랐다. 그 모습이 마치 인간이 아닌 괴물처럼 느껴졌다. “헤, 흐허헤믄 헤헤물흐냐?” ‘네, 네놈은 괴물이냐?’ 초절정에 이른 고수가 독을 기로써 몸을 보호할 수도 있다는 말은 들어보았지만 이미 당한 독을 눈앞에서 중화시키고 심지어 재생까지 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피부가 아직 재생하는 도중이었지만 천여운이 더욱 무섭게 일그러진 인상으로 걸어왔다. -털썩! 회심의 독마저도 통하지 않자 천종섬은 넋이 나가서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무공도 통하지 않고 독도 통하지 않는 괴물을 상대로 어찌한단 말인가. “독....독....빌어먹을 독!....그래. 명색이 독마종인데 독을 쓰고 싶겠지. 그런데 말이야. 난 아무리 생각해도 독을 쓰는 너희 쓰레기 족속들을 살려두고 싶지 않거든.” "흐허어어어어!“ 천여운의 살기어린 목소리에 공포심마저 느낀 천종섬이 엉거주춤 손과 엉덩이를 바닥에 질질 끌면서 도망가려 했다. 그것을 천여운이 가만히 둘리가 없었다. -타타탁! 퍽! 콰득! “크웨에에에엑!” 달려와서는 그대로 왼쪽으로 돌아간 천종섬의 턱을 발로 차올렸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천여운이 턱을 차준 덕분에 벌어졌던 턱이 닫혔지만 하관의 형태가 괴상하게 뒤틀리고 말았다. “켁켁켁!” -투투투툭! 비명을 지른 천종섬이 목에 뭔가가 걸린 것처럼 바닥을 향해 뭔가를 게워냈다. 목에 걸려서 뱉어낸 것은 다름 아닌 이빨들이었다. 턱을 발로 차는 바람에 오른쪽의 치아뿐만이 아니라 남아있던 이마저도 전부 부러지고 뽑혀져나가고 말았다. “흐허허허허....” -뚝뚝! 자신이 뱉은 부러진 이빨 조각들을 바라보며 천종섬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흘러나왔다. 평생 느껴본 적이 없는 고통, 두려움, 공포심은 천종섬에게 절망을 가져왔다. 천여운은 규칙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보였다. 이러다가 정말로 죽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천종섬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천종섬이 바닥에 넙죽 엎드려서 발음이 새는 목소리로 외쳤다. “하, 할려후헤호! 헤헤발! 하, 할혀후헤호!”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쾅쾅! 눈물과 피로 범벅이가 된 얼굴로 천종섬은 바닥에 미친 듯이 머리를 박았다. 살아남기 위해서 자존심을 따져댈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게 계속해서 머리를 박으니 당연히 이마가 찢겨져 나가서 피가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할혀후헤호!!!” 쉬지 않고 살려달라고 머리를 박는 천종섬의 몸을 천여운이 붙들었다. 그리고는 양어깨를 잡고서 바닥에 엎드려 있던 상체를 일으켜 세워 주었다. “흐하아!’ 이에 천종섬의 입에서 발음이 새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머리를 박는 것을 멈추게 하는 것으로 보아, 자신을 살려주는 것인가 하는 작은 희망이 피어올랐다. 눈물을 흘리는 천종섬과 눈을 마주친 천여운이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살려달라고? 그런데.....내 어머니는 왜 살려주지 않았어?” “!?” 천여운의 깊은 증오심과 살기가 섞인 눈을 보는 순간 천종섬은 깨달았다. 독마종에서 그의 어머니를 해한 방법인 미독을 쓴 것은 천종섬의 크나큰 실수였다. 그는 절대로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천종섬의 심장이 두려움으로 미친 듯이 뛰어올랐다. -쿵쿵쿵! ‘아, 안 돼! 소...소리라도 질러야 해!’ 이곳 산의 맞은편은 무공 교두들이 머무는 숙소 건물이다. 천여운이 자신을 살려둘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서라도 무조건 도움을 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흐허허...” -타탁! 그러나 천종섬이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천여운이 먼저 아혈(啞穴)을 점해버렸다. 혈도가 점해져서 말을 할 수 없게 된 천종섬이 하얗게 질려서 망연자실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비, 빌어먹을!’ 소리를 지를 수 없다면 이곳은 무주공산(無主空山)이나 마찬가지였다. 생도들 누구도 돌아다니지 않는다며 좋아했던 것이 엊그제 같았는데 그것이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말았다. “이 손으로 독을 뿌렸냐?” -퍽! 천종섬을 바닥에 쓰러뜨린 천여운이 그의 왼손을 발로 밟았다. 그리고는 있는 힘을 다해서 왼손을 질근질근 발로 눌러대자, 천종섬의 왼손 뼈가 부러지며 점차 으스러져갔다. “끄읍읍읍읍읍!” 아혈이 제압되어서 비명도 시원하게 지르지 못하는 천종섬은 죽을 것만 같았다.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은 말로 형용할 수가 없었다. 고통으로 눈물을 줄줄 흘리며 힘들어하는 천종섬의 귓가로 천여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당장에 죽이지는 않을게. 너 같은 쓰레기를 죽이고 마도관에서 방출당하고 싶진 않으니까.” ‘사, 살려주는 거야?’ 죽이지 않는다는 말에 천종섬의 눈이 파르르 떨리며 이채가 띠었다. 하지만 그 말은 희망고문에 불과했다. “대신 네놈 입으로 죽여달라고 애원할 만큼 괴로울 거야. 일단 뼈부터 시작해볼까?” ‘히이이익!!!’ 경기를 일으키게 만드는 천여운의 소름끼치는 경고와 함께 천종섬의 지옥 같은 밤이 시작되었다. 16장 내가 짓밟아 주마(5)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빨이 몽땅 부러지고 빠져서 흘러내리던 피마저 입안에서 말라붙어 버렸다. 뼈가 부러지는 고통이 계속 되다보니 이제는 정신이 혼미하기마저 했다. 분노에 차있는 천여운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그의 전신에 있는 뼈를 전부 부러뜨렸다. 과연 걸을 수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미독.....미독....미독.....’ 모든 것이 미독에서 비롯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자신이 어쩌다가 백기에게 미독을 쓰게 되었는지 후회가 되었다. ‘빌어먹을 미독!’ 천종섬이 미독이란 독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어릴 적에 있었던 낯선 방문자에 의해서였다. 붉은 면사포로 얼굴을 가린 중년의 여인이 자신의 어머니인 백 부인과 약당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약당에서 약재를 공부 중이었던 천종섬은 우연히 이들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어느 정도 시일이면 효과를 볼 수 있죠?’ ‘일 년 내외면 됩니다.’ ‘좋군요. 내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중간에 눈치 채거나 하지 않겠죠?’ ‘당연하죠. 아까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내공을 익혔다고 해도 체내의 위나 폐에 쌓이는 독이기에 알기 힘듭니다. 다만 내공이 일 갑자에 이른 내가고수라면 운기조식만으로 미독의 독기를 태울 순 있을 겁니다. 그러니.....부인의 말대로 내공이 전무한 자라면 절대로 알 수 없을 거예요.’ 일 갑자 이상의 내공이 전신을 순환하게 된다면 극소량의 독인 미독이라고 해도 체내에 축적되기도 전에 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절정의 경지 이상의 고수들에게는 미독이 전혀 쓸모가 없었다. ‘호호호, 알겠습니다. 백 부인의 말을 믿어보도록 하죠.’ ‘그런데 미독은 어디에 쓰시려고?’ ‘글쎄요. 어디에 쓰일 까요? 호호호.’ 그 말과 함께 붉은 면사포의 여인이 떠났다. 이때 어린 천종섬은 몰랐지만 백 부인은 그 독이 어디에 쓰일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 날로부터 일 년도 채 안 되었을 무렵. 교주의 일곱 번째 부인인 화 부인이 부고했다는 소식이 마교 전체로 퍼져 나갔다. 당시에만 하더라도 천종섬의 어머니인 백 부인 역시도 그녀의 존재 자체를 싫어했기에 부고 소식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화 부인의 죽음에 대한 사인이 미독에 의한 것임이 밝혀지면서 독마종과 백 부인이 가장 큰 의심을 받게 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화 부인을 진료했던 마의 백종우가 미독은 독마종이 아니더라도 구할 수 있는 독이라고 변호를 하지 않았다면 사태가 걷잡을 수 없었을 지도 몰랐다. 교주는 진노하여 화 부인의 거처에 있던 모든 고용인들을 잡아들였으나, 정작 음식을 만들던 숙수가 자결을 한 채로 발견되면서 진범을 알아낼 수가 없게 되었다. 다만 사건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숙수가 일 년 전에 한 면사포를 쓴 여인과 접촉을 했다는 것을 알아냈으나, 그녀가 누구인지 만큼은 끝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화 부인의 부고 후, 교주는 그나마 왕래를 이어가던 여섯 종파에 있는 모든 부인들과의 연을 끊고 말았다. 심지어 독마종의 가주이자 육 장로였던 백오는 장로직 마저 박탈당했다. 갑작스러운 직위 박탈이었지만 모든 수뇌부들은 교주의 의심과 진노가 독마종에 가장 쏠려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기에 누구 하나 백오를 변호할 수가 없었다. 독마종의 가주인 백오 또한 누구보다 해명을 하고 싶었지만, 혹시나 정말로 자신의 여식인 백 부인이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차마 스스로를 구명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내가 아니에요. 내가 아니라구요!’ 백 부인은 교주에게 모든 진상을 밝히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그 독의 출처라는 것이 알려진다면 진범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는 것을 알기에 속 시원하게 진실을 밝힐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그녀 역시도 이 독이 누구에게 쓰일지 짐작하면서도 미독을 ‘그녀’에게 넘겼기 때문이었다. ‘섬아야. 내 아이야. 이 일은 이 어미와 너만의 비밀로 죽을 때까지 묻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마저 네 아비의 미움을 받게 될 거야.’ 백 부인은 일 년 전, 붉은 면사포의 여인과의 대화를 유일하게 들었던 천종섬에게 신신당부를 시켰다. 그리고 진실을 밝히지 못하는 답답함과 고통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백부인은 몇 년이 지나 시름시름 앓다가 죽음을 맞고 만다. ‘어머니......’ 천종섬은 어머니가 고통 속에서 돌아간 것을 분노했다. 여섯 종파 중에 숨어있는 진범은 멀쩡하게 잘 지내는데, 독마종이 모든 피해를 보고 어머니마저 마음의 병으로 죽은 것이 어린 그를 괴롭게 만들었다. ‘빌어먹을! 어머니가 아니라고! 우리 어머니가 아니란 말이야!’ 하지만 당장에 붉은 면사포의 여인이 누구인지 알 길이 없었고, 이것을 밝힌다면 어머니인 백 부인과의 약속을 어기게 되는 셈이었다. 천종섬은 이때 다짐하게 된다. 자신이 소교주가 되어, 천마신교의 만인지상의 자리인 교주가 되어, 그 진범과 그 종파를 없앰으로써 어머니의 한을 풀어드리기로 말이다. ‘그 더러운 년만 없었어도 어머니가 돌아갈 일도 없었을 거야.’ 그리고 모든 일이 일어난 근본적인 원인을 화 부인이라 여겼기에, 그 소생인 천여운을 자신의 손으로 죽여 버릴 거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우드드득! “끄으으으으읍!” 현실은 자신이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전신의 뼈가 전부 부러지면서 움직일 힘도 없었다. 천종섬은 진심으로 절망했고, 눈앞에 있는 괴물과도 같은 천여운이 두렵고 무서웠다. 아무리 무공을 연마한다고 해도 이 괴물을 죽일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 “뼈를 거의 다 부쉈으니 이제 마무리를 해볼까.” 천여운의 손으로 공력을 끌어 모았다. 최종적인 그의 목적은 천종섬의 단전을 폐하는 것이었다. 뼈를 전부 부숨으로써 어느 정도 화풀이는 끝났다. 그러나 천종섬이 계속해서 마도관에 남아있게 된다면 백기를 비롯해 자신과 다른 생도들에게 독수를 쓸 것이 틀림없었다. ‘후환은 남기지 않는다.’ 여기서 그를 죽일 수 없기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뿐이었다. ‘뭐, 뭐야? 설마?’ 천종섬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 천여운이 모진 눈빛으로 그의 단전에 손을 가져오자, 지금까지는 포기하고 고통을 받아들였던 천종섬이 미친 듯이 몸을 뒤틀었다. “끄읍읍읍읍!” 뼈가 부러지는 것과 단전이 폐해지는 것은 그 의미가 완전히 달랐다. 단전이 폐해진다면 그 동안 익혀왔던 무공을 전부 잃고 만다. 무인으로서 회생이 불가능해진다는 말이었다. “가만히 있어!” -타타탁! 계속해서 몸을 뒤틀자 천여운이 그의 혈도를 점해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끄읍읍읍읍!” ‘뭐지?’ 천종섬이 아혈이 점해져서 말을 할 수 없음에도 애써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자, 이를 이상하게 여긴 천여운이 잠시 고민을 하다 아혈을 점한 것을 풀어주었다. “하아...하아....” 잠시 숨을 고른 천종섬이 발음이 새는 목소리로 말했다. “헤에 허머이흘 훅인 헛은....후리..톡하홍이....하히야.” 이가 전부 부러지고 턱이 괴상하게 일그러져, 발음이 새어서 알아듣기 힘들었다. '못 알아듣겠군....나노. 보정해줘.' [알겠습니다. 발음과 입술 모양을 토대로 보정해서 해석하겠습니다.] [네 어머니를 죽인 것은....우리...독마종이....아니야.] 나노의 기계음으로 천종섬의 발음이 새는 말이 똑바로 해석이 되어 머릿속을 울렸다. “그게....무슨 소리지?” 천여운이 눈을 번뜩이며 관심을 보이자 천종섬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천종섬이 어머니와의 약조마저 어기면서까지 천여운에게 진실을 말하려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물론 단전이 폐해지는 것을 막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이것이었다. ‘나만....나만 이 괴물 같은 놈한테 당할 순 없지.’ 전신의 뼈가 부러지면서 천종섬은 몸부터 마음까지 이미 천여운에게 굴복하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그는 문득 이런 생각마저 들었다. 어쩌면 이 괴물 같은 놈이라면 진범을 찾아내서 처참할 정도로 고통스럽게 죽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말이다. “하헛....홍하...훙희 한 후힌히....힌하....헤...허머히를 훅힌 험힌히햐.” [다섯 종파 중의 한 부인이 진짜 네 어머니를 죽인 범인이야.] “다섯....종파의 부인 중에서 한 명이 범인이라고?” 천여운의 말에 천종섬이 재빨리 눈알을 위 아래로 움직이며 긍정을 표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는 이것뿐이었지만 천여운이 정말로 복수에 대한 열망과 증오심이 강하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알아낼 것이라 여겼다. “흐허히한....헤..할...한헌 한흠흔....할....할혀호.” [그러니깐 제...발 단전만큼은 살려줘.] 요지는 이랬다. 독마종에는 네 어머니를 죽인 범인이 없다. 그러니 제발 단전만큼은 폐하지 말아달라고 협상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천종섬의 그 말에 천여운이 의심스러운 눈치로 물었다. “그런데.....네놈이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흐허허?” “다른 종파가 범인이라는 말을 내가 어찌 믿느냔 말이다.” 독을 다루는 가장 유력한 종파에서 자신들이 아니라고 얘기하는 것은 믿기 힘들었다. 더군다나 천여운은 오랜 세월 동안 독마종과 백 부인을 범인이라고 생각하고 증오심을 키워왔었다. 천종섬은 이 같은 천여운의 질문에 입만 벙긋거리며 답변을 하지 못했다. 모든 것을 이야기 한다면 자신의 어머니가 미독의 제공자임도 밝혀야 했기 때문이었다. ‘나노....안면 분석 모드.’ [안면 분석 모드를 가동합니다.] 망연자실해하며 아무 말도 못하는 천종섬을 향해 천여운이 나노의 안면 분석 모드를 가동시켰다. 좀 더 진실을 가까워지기에 가장 적합한 기능이었다. “정말 다섯 종파 중에 범인이 있는 게 틀림없나?” 천여운의 질문에 천종섬이 눈알을 위 아래로 움직였다. 이것에는 거짓이 없었으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안면 근육의 움직임에 큰 변화가 없습니다. 상대방이 거짓말을 하고 있을 확률이 5퍼센트입니다.] 천여운의 눈빛에 이채가 띠었다. 거짓 확률이 겨우 5퍼센트라는 것은 정말로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독마종을 범인이라고 확신해온 천여운에게는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정말 진실이란 말인가?’ 만약 정말로 독마종이 아닌 다른 다섯 종파에 범인이 있다면 그럼 애꿎은 놈을 반병신으로 만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천여운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물었다. “그럼 독마종은.....아니 백 부인은 정말 관련이 없는 것이냐?” 이어지는 질문에 천종섬의 동공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것까지는 진실을 말할 필요가 없었기에 애써 내색하지 않고 눈알을 위 아래로 움직였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나노의 목소리가 울렸다. [안면 근육과 동공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상대방이 거짓말을 하고 있을 확률이 75퍼센트입니다.] 염파를 상대로 안면 분석 모드를 가동했을 때보다도 훨씬 높은 수치였다. 그 말은 독마종 역시도 화 부인의 죽음에 관련이 있다는 의미였다. 나노의 분석을 들은 천여운이 싸늘하게 식은 눈빛으로 천종섬에게 불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네놈 따위의 말은 믿을 게 못 되는군.” “훠, 훠힛할히 하히...” ‘거, 거짓말이 아니..’ “닥쳐.” 천종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천여운의 오른손이 어느새 그의 단전을 때렸다. -퍽! 천여운의 십성 공력이 실린 주먹이 단전 쪽을 강타하자, 천종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핏줄까지 서서는 비명을 지르려고 했다. -타타탁! 하지만 아혈에 혈도가 점해지면서 비명은 지르지 못했다. 뼈가 부러질 때의 고통도 엄청났지만 멀쩡한 단전에 공력이 가해지자, 그 고통은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렬했다. “끄으으으으으으으!!!” 주먹을 쥐고 있던 손을 펴서는 공력을 더 가하자, 천종섬의 복부에 자리 잡고 있던 단전에 완전히 금이 가면서 그것이 깨지고 말았다. -쩌저저적! 그 순간 천종섬이 그 동안 모아왔던 단전의 내공들이 전신으로 빠르게 흩어졌다. 단전이 폐해지고 만 것이었다. ‘내공이 흩어지고 있어! 내 내공이! 내 내공이이이! 끄아아아아악!’ 단전이 깨져서 죽을 것만 같은 고통보다도 무인으로서의 생명이 끝났다는 고통이 더욱 천종섬을 절망하게 만들었다. 무공을 완전히 잃고만 천종섬은 이로써 소교주 후보로서의 자격을 완전히 상실한 셈이었다. 한편 술시(戌時)가 거의 끝나가도록 의무실의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그것은 아직까지 마도관의 주치의인 백종명이 퇴근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곧장 퇴근할까 했던 그였지만 왠지 모를 불안감에 남아있었다. “에휴, 이거 해독 약재라도 미리 준비해야 하나.” 천여운이 살기를 물씬 풍기고 나간 것이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강해진 그라고는 하나 독마종의 후보자인 천종섬이 여차해서 독수라도 펼치면 위험할 수도 있었다. 그래도 이곳 마도관에 와서 처음 친해진 생도였는데 독에 중독되거나 중상이라도 입지 않았을까 걱정스러웠다. -타타타타탁! 그때 의무실 바깥에서 계단을 뛰어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달려오는 소리가 가까워지자, 의무실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경비 무사들이 놀란 목소리로 얼른 들어가 보라는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달칵! “헉! 너?” 백종명이 놀란 얼굴로 입구로 들어온 자를 쳐다보았다. 그는 다름 아닌 천여운이었다. 다급하게 의무실로 들어온 천여운의 어깨에 누군가를 걸치고 있었는데,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전신이 덜렁덜렁 거리고 있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 “그 전에 이 녀석부터 좀 어떻게 해주십시오!” 천여운이 비어있는 의무실 침상 중에 한 곳에 어깨에 들쳐 메고 있던 자를 올려놓았는데, 그는 바로 독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종섬이었다. “끄르르르! 끄르르르륵!” 천종섬은 입에 거품을 물고서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얼굴 전체가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는데, 마치 독에 중독된 현상과 같았다. “대, 대체 뭘 어떻게 했기에 이렇게 된 거니?” 백종명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급히 천종섬의 상태를 살폈다. 이때 공교롭게도 천종섬을 눕힌 침상의 옆 자리에는 복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금이 있었다. 천무금이 황당하다 못해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 이 새끼가...’ 정말 옆 자리로 데려올 줄은 몰랐다. 그것도 거의 죽기 일보 직전 상태로 만들어서 말이다. 17장 가슴은 뜨겁되 머리는 차가워져라(1) 독마종의 독공의 진수를 모은 파마독경(波魔毒經). 파마독경의 사층의 경지에 이르면 체내의 중단전에 일곱 종류의 독을 쌓고 외부로 발출시킬 수 있게 된다. 더 높은 층으로 경지에 올라간다면 독을 쌓을 수 있는 종류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파마독경을 익힌 무인의 살상 능력은 같은 경지에 이른 무인의 두세 배라고 할 만큼 그 위력이 뛰어났지만 그 만큼 익히기도 힘들뿐더러, 연공 도중에 주화입마를 입기라도 한다면 그 부작용은 죽음과도 직결될 만큼 위험했다. 파마독경의 독단은 중단전에 형성하게 되는데,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단전에 있는 내공의 흐름과의 긴밀한 유착이 중요하다. 파마독경으로 익힌 내공은 독단이 흐트러지거나 체내로 퍼져나가지 않도록 조절하는 역할을 하는데, 이것이 깨져버리게 된다면 독기가 폭주해버리고 만다. “끄르르르르!” 단전이 파괴된 천종섬이 입에 거품을 물고서 얼굴색이 보랏빛으로 물들자 천여운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마도관의 규칙이 있었기 때문에 아직까지 그를 죽일 마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죽어가는 천종섬을 살리기 위해 천여운은 그를 어깨에 들쳐 메고 마도관의 본관의 의무실로 뛰어갔다. 천종섬의 맥을 짚으며 상태를 살피던 백종명이 심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세상에......단전이 파괴되었어.” 갑자기 독에 중독된 증상을 보이는지 알 것 같았다. 독공을 익힌 고수들이 주화입마를 입거나, 단전에 손상이 갔을 때 주로 이런 증상을 보였었다. ‘뭔가 일이 벌어질 줄은 알았지만...허어.’ 설마 천종섬의 단전을 파괴시킬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무공을 익힌 무인은 아니었지만, 무림인들이 단전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는 잘 알고 있는 백종명이었다. 전신의 뼈가 부러져서 흐느적거리는 천종섬을 쳐다보자니 눈살이 찌푸려졌다. ‘뼈를 부러뜨렸으면 그걸로 끝냈어야지. 왜 단전까지 파괴했니?’ 라고 묻고 싶었지만 일단 급한 불부터 꺼야했다. -푹! 푹! 백종명은 침상에 누워서 있는 천종섬의 혈 자리에 침을 놓았다. 무슨 독에 중독되었는지 바로 알 수 없었기에 응급조치를 취해 체내로 퍼져나가는 독기를 빼내기 위해서였다. 침을 찌른 혈자리에서 검은 핏물이 흘러내렸다. 냄새만으로도 역할 정도로 그 독기가 강했다. “우욱!” 의원인 백종명조차도 코를 찌를 듯 한 역한 냄새에 코를 틀어막았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벌써 죽었어야 할 만큼 강한 독들이 체내에 흐르는데도, 그나마 숨이 끊어지지 않고 버티는 것을 보면 용하다 싶었다. ‘독공을 익힌 녀석이라 저항력이 높은 건가?’ 하지만 아무리 체내의 독에 대한 저항력이 높다고 해도 이 상태로 간다면 천종섬은 사망하고 말 것이다. “아아! 그, 그게 있지.” 백종명이 허둥지둥 책상 서랍에서 무언가를 찾았다. 서랍을 뒤지던 그가 찾았다고 소리 지르며 그것을 가져왔다. 붉은 비단 주머니였는데, 그 안에는 작은 환(丸)들이 있었다. ‘스승님의 말씀대로 챙겨두길 잘했다.’ 그것은 마의 백종우가 만든 해독단들이었다. 마도관의 주치의로 가게 되는 백종명에게 꼭 들고 가야 할지도 모른다며 챙겨가라고 권했던 것이었다. 독이 묻지 않게 교룡피로 만든 장갑을 끼고서 천종섬의 입을 강제로 벌렸다. 그리고는 입 안에 해독단 세 알을 집어넣었다. “죽을 것 같겠지만. 살고 싶으면 삼켜! 그래. 그래!” 죽어가는 천종삼이었지만 살고 싶다는 욕망은 강했는지 입안에 들어온 해독단을 억지로 꾸역꾸역 삼켰다. -꿀꺽! 식은땀을 흘려가며 백종명이 허둥지둥 그를 살리기 위해 노력할 때 천여운은 심각한 표정으로 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독기가 퍼져나갈 줄이야.’ 독공을 익힌 적이 없는 천여운이 이런 지식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이렇게 천종섬이 퍼져나간 독기를 제어하지 못하고 죽게 된다면 천여운은 당장에 마도관에서 방출되고 말 것이다. ‘젠장. 죽게는 내버려두면 안 된다.’ 미독이라는 것 때문에 화를 이기지 못하고 저지른 행동의 여파가 너무 컸다. 하지만 지금 당장에 후회한다고 해서 부서진 천종섬의 단전이 복구될 리가 없었다. ‘살려야 해.’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처럼 나노가 천종섬의 독을 분석하여 중화시키는 것이 빠르겠지만,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나노머신이 타인의 몸으로 이동하는 것은 불가(不可)라고 했다. 지난번에 팔십 번 생도 자현의 상처를 수복할 수 있냐는 질문 때와 똑같은 답변만을 할 뿐이었다. ‘왜 안 되는 거야?’ [시스템 규정에 어긋납니다. 락(lock)이 걸려 있어서 타인의 체내로 나노머신을 이동시킬 수 없습니다.] ‘왜 그게 락이 걸려?’ [사용자의 유전정보가 등록되어, 타인에게 양도하거나 체외로 배출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천여운은 알 수 없었지만 나노머신에는 프로그램 상으로 절대로 불가능하게 락 코드가 걸려 있는 것들이 있었다. 그것은 미래에 대한 역사, 미래에서 사용하는 살상무기 제조법, 현재의 문명 자체를 바뀌게 할 여러 테크놀러지 정보 등이었다. 그리고 천여운의 체외로 나노머신이 배출될 경우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나노머신은 곧바로 소멸되도록 프로그램이 되어 있었다. ‘별 수 없구나.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아!” 천여운은 문득 자신의 옷에 묻은 천종섬의 핏자국을 보았다. 급하게 그를 어깨에 들쳐 메고 온다고 몰랐었는데, 흘리는 피가 묻은 듯 했다. ‘나노 그렇다면 독을 분석해줘.’ [알겠습니다. 해독하려는 물질에 손가락을 갖다 대주십시오.] 천여운이 옷에 묻은 핏자국에 손가락을 갖다 대자 손가락 끝에서 짜릿한 무언가가 느껴지며 나노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독성 물질을 분석합니다.] 나노가 독을 분석하는 동안 천여운은 약재를 보관하는 진열장으로 향했다. 백종명은 천종섬의 상태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약재라 적힌 진열장들을 전부 열어보니 수많은 약재들이 종류 별로 잘 분류가 되어 있었다. [독성 물질의 분석이 끝났습니다. 일곱 가지 독성 물질이 혼합되어 새로운 독성 효과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약재들 중에 어떤 걸 조합하면 해독할 수 있을지 분석 해줘. 빨리!’ [알겠습니다.] 천여운의 명에 나노가 분석된 독을 약재들을 조합하여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해독제를 만들기 위해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시뮬레이션을 마친 나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사용자의 시각 정보로 증강현실(增强現實) 개안(開眼)합니다.] 천여운의 동공이 흔들리며 흰빛의 입자가 선을 그리며 증강현실이 개안되었다. 흰빛의 입자가 수많은 약재들 중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필요한 것들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갈근(葛根), 포공영(蒲公英), 어성초(魚腥草), 엉겅퀴, 구기자.....] 나노가 지시하는 약재들을 얼른 집어 들었다. 천여운은 나노가 알려주는 배합방식 대로 약재의 양을 조절해서 다진 후에 그것을 탕제기에 집어넣고 우리기 시작했다. 탕제기를 우리면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그 냄새를 맡은 백종명의 시선이 천여운에게로 향했다. “너 뭐하는 거니?” 백종명의 식은땀으로 젖은 얼굴을 닦았다. 얼굴에서 약간의 안도감이 보였다. 백종우가 준 해독단을 먹이고 겨우 침으로 체내로 퍼져가는 독을 제어하면서 그나마 차도를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게......급한 대로 해독약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망설이던 천여운이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안 그래도 천여운이 만든 작품 덕분에 고생하고 있던 백종명은 어이가 없었는지 호되게 다그치려 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는 거니? 네가 무슨 수로 해독약을....어?” 그러다 탁자 위에 올라와 있는 약재들에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뭘 알고나 그러는가 싶었는데 천여운이 가져온 약재들은 전부 해독초였고, 일부는 조합하면 해독 효과가 있는 것들이었다. ‘뭐야? 이것들은 약재와 약학을 제대로 배우지 않으면 생각하기 힘든데....’ 내심 놀란 백종명이 약재를 찧어서 조합하고 남은 찌꺼기를 손가락으로 찍어서 살짝 혀로 맛을 보았다. 해독초는 잘못 배합하면 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배합 양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이 녀석 약학을 제대로 공부했구나.’ 물론 배운 적은 없다. 나노가 독을 분석하여서 해독 방법을 알려준 대로 제조한 것이었다. 그것을 알 리가 없기에 백종명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정확한 독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무작정 탕약을 제조하는 것은 금물이었다. “조합이 나쁘진 않은데 독이 무엇인지부터...” “산독(酸毒), 비어독(緋魚毒), 절구버섯독, 면충독(面蟲毒), 병충독(昺蟲毒), 청와독(靑蛙毒), 홍주독(紅蛛毒)입니다.” “아........” 외워둔 것처럼 빠르게 독을 읊자 백종명이 벙 찐 얼굴이 되었다. 독을 추출해서 확인해본 것도 아닌데, 대체 무슨 수로 이것을 알아냈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백 의원님. 이번 한 번만 믿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이 이상은 설명할 길이 없기에 천여운이 간절한 눈빛으로 그에게 말했다. 당황스러워 하던 백종명이 여전히 피부색이 보랏빛인 천종섬을 바라보고는 잠시만 기다려보라고 말했다. 아무리 부탁을 한다고 해도 사람을 살리는 의원으로서 만의 하나라는 확률에 모든 것을 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백종명은 천종섬이 흘리는 검은 피를 작은 그릇에 담아왔다. 그리고는 천여운의 말대로 일곱 가지 독이 들어있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독에 상성인 약재들로 일일이 확인해본 결과, ‘......이럴 수가? 전부 맞잖아.’ 놀랍게도 천여운이 이야기한 일곱 독성분이 전부 들어있었다. 이 일곱 가지 독이 섞여서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한다면 백종명 역시도 천여운과 마찬가지로 저 약재들을 조합해서 썼을 확률이 높았다. 물론 몇 가지 약재들이 의아하기는 했지만 그것들이 다른 약재의 해독 효과를 증대시켰으면 시켰지 방해가 되는 것들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미독의 증상도 맞췄었지? 이 녀석.....독과 약을 공부했구나.’ 그러지 않고서는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었다. 천여운의 말이 맞는 것을 확인한 백종명은 그의 조합한 탕약을 써보기로 결정했다. 독기가 폭주하여 죽어가는 천종섬의 입에 한 숟가락씩 해독 탕약을 넣으며 그것을 삼키게 했다. 탕약을 전부 먹인 후에 남은 것은 경과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휴, 일단은 할 수 있는 건 다했으니. 독기가 퍼져나가지 않게 계속 침을 놓을 수밖에 없어.” “백 의원님을 고생하게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앞뒤를 가리지 않고 벌인 결과에 숙연해지는 천여운이었다. 백종명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굳이 단전까지는 폐할 필요가 있었니? 아무리 약육강식의 마도관이라고 해도 이건.....과한 것 같구나. 솔직히 뒷감당을 할 수 있겠니?” 진심으로 걱정해서 하는 말이었다. 어머니가 미독에 돌아가셨다는 말을 하고서 살기를 풀풀 풍기며 나갔을 때, 무슨 일이 터질 것 같기는 했지만 이건 상당히 지나칠 정도의 결과였다. 마도관의 규칙 중에 상대의 단전을 폐하지 말라는 규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과연 마도관주가 이것을 용납할지 궁금했다. 또한 지금이야 마도관 내에 있으니 사 년 동안 간섭할 수 없다고는 하지만 독마종의 소교주 후보자를 거의 병신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독마종이 이 사태를 그냥 두고만 볼 지도 의문이었다. 천여운이 담담한 목소리로 고개 숙여 말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벌인 일이니 감당 해내겠습니다.” 단전까지 파괴한 것은 앞뒤를 가리지 않고 분노를 참지 못하고 벌인 일이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후회할 순 없었다. 처음부터 여섯 종파를 상대하기로 마음먹었기에 그들과는 부딪쳐야할 운명이었다. ‘아아.....아직 어리구나.’ 담담하게 답변했지만 그것에서 천여운이 미숙하다고 느꼈다. 그동안은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서 몰랐지만 아직은 십오 세의 소년다운 치기어림에 백종명이 진심으로 당부를 했다. “그게 네 의지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매사에 좀 더 깊이 생각하고 판단을 했으면 좋겠구나. 본교에서 지내오면서 느낀 거지만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영악한 자가 살아남더구나. 좀 더 유연해지렴.” 백종명은 천여운이 스스로의 강함에 취하지 않고 영악해 지기를 바랐다. 암략이 넘치는 마교에서 오직 강함만으로 모든 것을 돌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하고 교만함 그 자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진심어린 백종명의 당부에 천여운은 생각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너무 대책 없이 일을 벌인 것인가?’ 너무도 빠른 성장은 천여운에게 교만함을 심어주었다. 그것을 당장에 인지하기는 어려웠지만 백종명의 조언에서 뭔가 잘못되었음은 확실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휴, 늦었구나. 일단은 돌아가렴.” 시간은 벌써 해정시에 가까워져 있었다. 숙소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었다. 천여운이 고개 숙여 인사를 한 후에 돌아가려는 찰나에 누군가 침상의 장막에서 조심스럽게 얼굴을 내밀며 어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는.....어떻게 할지?” 그는 십팔 번 생도인 백기였다. 천종섬의 독기가 폭주해서 워낙 다급하게 돌아가는 의무실의 상황에 이도저도 못하고, 침상에 앉아서 상황이 정리되기만을 기다렸던 그였다. 17장 가슴은 뜨겁되 머리는 차가워져라(2) 마도관의 건물을 나오며 백기는 물끄러미 천여운을 바라보았다. 말이 없는 것을 보면 심란한가 싶기도 한데, 표정을 보면 아무 내색 없이 담담하기만 했다. 이 모습에 백기는 내심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해결했어야 하는 일에 괜히 연루시켰군.’ 아까 전 의무실로 독기가 폭주해서 들어온 독마종의 소교주 후보자 천종섬을 보며 그 또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뭔가 대화가 아닌 무력으로 해결하려는 느낌이 짙어보였지만 설마 단전까지 부숴서 데려올 줄은 몰랐다. 처음에는 의원인 백종명의 말처럼 단전까지 부숴야만 했을까 하고 생각했다. 무공을 익히는 무림인들에게 생명과도 같은 것이 단전이었다. 단전이 파괴되면 다시는 내공을 쌓을 수가 없게 된다. 즉, 무림인으로서의 가치와 인생이 끝나는 것이었다. 천종섬의 전신이 피멍으로 물들어 있고, 침상에 누워있는 내내 몸이 흐느적거리는 것을 보면 분명 전신의 뼈를 아작 낸 게 틀림없었다. ‘독한 놈.’ 어지간한 독기와 증오를 가지지 않고는 상대를 저렇게 만들기 힘들었다. 자신도 여섯 종파라고해서 무작정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까지 초주검으로 만들어놓으면 그 후환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다. ‘뒷감당은 생각하지 못하는 철부지인가? 아니면 그만큼 분노가 큰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드니 한편으로 자신이 부모의 원수 혹은 그와 관련이 있는 자를 눈앞에 두고 있을 때 과연 후환까지 생각하며 행동할 수 있을까 의문이기도 했다. 괜히 복잡한 심경이 된 백기가 앞서 걸어가는 천여운에게 말을 걸었다. “칠 번 생도.” 천여운이 발걸음을 멈추고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 “.....그래.” “왜 녀석의 단전까지 파괴시킨 거냐?” 백기 자신이 도와달라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찌 되었든 그 덕분에 목숨도 구했고, 천종섬의 계속될 수도 있는 미독의 마수에도 벗어나게 되었다. 하지만 천종섬의 단전을 파괴하면서 이제 독마종의 분노는 천여운에게 쏠리게 될 것이다. 백기의 그런 질문에 잠시 말이 없던 천여운이 무덤덤하게 답했다. “.....그때는 화를 주체하지 못했을 뿐이다.” ‘화를 주체하지 못해서?’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란 말인가? 증오심이 깊은 천여운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화를 주체하지 못할 수도 있었지만, 조금만 더 참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천여운의 말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녀석을 그냥 내버려두면 네가 아니더라도 다른 생도들에게도 독을 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백기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저 분노를 통제하지 못한 것뿐이라고만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독마종의 후환보다 천종섬의 독이 다른 생도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더 우선시 했다는 말이 아닌가. ‘이 녀석.....’ 그저 스스로의 분노와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철부지가 아니었다. 아직 판단하는 능력이 완전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보았던 세 명의 소교주 후보자들보다도 윗사람으로서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 다른 생도들을 걱정해?.....하...’ 다른 소교주 후보자들과는 사고의 발상이 달랐다. 마도관에서 소교주 후보자들은 소교주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누구보다 강한 힘을, 누구보다도 큰 세력을 만들기 위해 오직 위로만 바라보는 반면에 천여운 이 녀석은 그 와중에 다른 생도들의 안위마저 생각했다. ‘다르다. 이 녀석은 달라.’ 사실 이 같은 천여운의 이유는 모든 생도들을 걱정했다기보다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간 미독이 마도관 내에 퍼지는 것을 싫었기 때문이었지만, 좀 더 대의적으로 오해한 백기는 그가 한 단체의 수장으로서 어울리는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만약 내가....”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백기가 천여운에게 무언가를 말하려는 찰나에 멀리서 일곱 명의 생도들이 다급하게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그들은 천여운의 일곱 수하들이었다. “주군! 여기에 계셨던 겁니까?”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는지 얼굴이 땀으로 젖은 허봉이 물었다. 일곱 명의 생도들은 많이 걱정했었는지 그를 발견하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고왕흘 역시도 안심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행입니다. 혹시나 연공실 건물 앞에서 기다리다 습격이라도 있었을까 걱정했습니다.” “아!” 해시(亥時) 무렵에 고왕흘과 같이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었다. 반 시진 가까이 천여운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걱정한 고왕흘이 다른 생도들을 이끌고 마도관을 뒤지며 그를 찾아 헤맸던 것이었다. 미안해진 천여운이 그들에게 포권을 취하며 사과했다. “미안하다. 걱정시켜서.” “아닙니다. 주군께서 무사하다니 다행입니다.” 별일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기에 일곱 생도들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신들이 모시기로 한 주군이 안위가 가장 최우선인 그들이었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백기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자신의 사람들을 만들었구나.’ 생각해보니 십이 조를 통솔하면서 늘 그들과 거리를 두었기에 누구 하나 자신을 따르는 생도들이 없었다. 그런 백기에게 천여운이 물었다. “아까 무슨 말을 하려고 하지 않았나?” “아니. 아무 것도 아니다.” 백기가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천여운과 그의 수하들에게 인사를 하고 먼저 이 관의 숙소 건물로 들어갔다. 십이 조의 조장인 백기와 있었던 것이 의아하게 생각되는 일곱 생도들이었지만 시간이 늦었기에 그들 역시도 숙소로 돌아가야 했다. 후에 새롭게 배정받은 숙소의 호실로 돌아온 그들은 천여운을 통해 천종섬과 관련된 이야기를 듣고 모두가 우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권종의 고왕흘 역시도 다른 것보다도 천종섬의 단전을 파괴한 것을 걱정했다. 그래도 그는 무작정적인 걱정보다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을 이야기했다. “주군께서 하신 일이니 뜻하신 바가 있으시겠지만 아직은 힘을 길러야 하는 시점입니다. 사 년 동안 외부에서 마도관에 간섭을 하진 못한다고는 하나, 상대는 본교의 근간인 여섯 종파 중의 하나입니다. 어떤 식으로 주군께 위해를 가해올지 모르니, 자중하고 주의해서 힘을 기르는데 주력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거구의 근육질에 호탕해 보이는 성격과 달리 누구보다 사리 판단이 빠르고 생각이 깊은 고왕흘이었다. 천여운 역시도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천여운은 독마종을 확실하게 적으로 만들었기에 그에 대한 만반의 대비를 해야 했다. 고왕흘과 달리 허봉은 다른 한 가지가 더 걱정되었다. “주군. 저는 여섯 종파보다도 당장에 마도관주께서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 지도 조금 걱정됩니다.” 마도관의 규정에서 타 생도의 단전을 폐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가 된 것은 아니었지만, 무림인들에게는 단전은 무인으로서의 생명이었기에 까다로운 문제였다.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요.” 그리고 그런 허봉의 우려는 현실로 일어나고 말았다. 다음날 사시(巳時) 중엽, 생도들의 칠마검 수련을 돕기 위해 일곱 수하들과 함께 숙소의 뒷산에 올라와 있던 천여운을 세 명의 무공 교두들이 찾아왔다. 그 중에는 팔 조의 담당 교두였던 임평도 포함되어 있었다. “미련한 짓을 했더구나.” “.....죄송합니다.” “어쩔 수가 없다. 관주님의 집무실로 데려오라는 명이다.” ‘아! 결국....’ ‘큰일이구나.’ 어젯밤부터 모두가 우려했던 일이었기에 일곱 수하들의 표정에 당혹감이 서렸다. 어떤 처분이 내려질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최악이라 할 수 있는 마도관의 방출만을 면해지기를 바랐다. 만약 마도관에서 방출된다면 천여운은 꼼짝없이 독마종의 독수를 받아내야만 한다. 마도관의 일 층에는 관주의 집무실이 있다. 그를 집무실 앞으로 데려온 무공 교두들은 집무실로 들어가지 않고 천여운만을 그 안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관주님. 칠 번 생도를 데리고 왔습니다.” “들여보내라.” 집무실 안으로 찰랑이는 긴 붉은 머리카락을 뒤로 묶은 마도관주 좌호법 이화명이 집무 책상에 앉아서 무언가 서류를 작성하고 있었다. 항상 대연무장의 단상 위에 있는 모습만을 보다가 집무실에서 앉아있는 모습을 보니 느낌이 색달랐다. 천여운이 앉아있는 좌호법 이화명에게 두 손을 모아 고개 숙여 인사했다. “칠 번 생도 천여운이 마도관주님을 뵙습니다.” 그런 천여운의 인사에도 이화명은 아무 대답 없이 서류작성에 집중했다. 인사에 답변을 하지 않으니 분위기가 냉랭하게 느껴졌다. 얼마 있지 않아 서류작성을 끝낸 좌호법 이화명이 책상에서 일어나 피곤하다는 듯이 목을 돌리며 근육을 풀었다. “네 덕분에 경위서를 적느라 시간이 걸렸으니, 인사에 답변해주지 않았다고 섭섭해 하진 말도록.” 이화명이 적고 있던 서류는 사건 경위서였다. 이미 천여운을 부르기 전에 마도관을 지키는 경비 무사들과 의원 백종명을 통해 사건의 경위를 들어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파악한 이화명이었다. 이화명이 손으로 회의 탁자의 의자를 가리키며 천여운에게 앉기를 권했다. “알겠습니다.” 천여운의 맞은편에 있는 의자에 이화명이 앉았다. 이화명이 양손을 깍지를 끼고서 턱을 괴고서 천여운을 쳐다보았다. 타박을 하는 눈빛이 아니었기에 도무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기 힘들었다. 한참을 관찰하듯이 천여운을 쳐다보던 이화명이 입을 열었다. “아직 어리긴 어리구나.” “네?” “먼저 공적인 일부터 해결해야겠지. 마도관주로서 먼저 말을 하마.” ‘마도관주로서?’ 내심 의아해하는 천여운에게 이화명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 “대단한 짓을 벌였구나. 모두가 보라는 듯이 타 생도의 단전을 부수다니 말이야.” 역시 문제는 단전을 부순 것이었다. 마도관에서 생도들끼리 비공식선상에서 경쟁을 하거나 겨루는 것은 암묵적으로 권장하는 사항이었기에 전혀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무림인으로서 생명을 부순 것이나 마찬가지이지.” 이렇게까지 말을 하는 것을 보면 분명 이에 대한 처분이 있을게 틀림없었다. 담담하게 이야기를 듣고 있던 천여운의 눈빛이 흔들렸다. 방출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긴 마도관의 역사 속에 이렇게 대놓고 멍청한 짓을 저지른 것은 네 녀석이 처음이다. 이것을 그냥 좌시한다면 똑같이 멍청한 짓을 하는 놈들이 나타나겠지.” ‘아......’ 천여운이 절망스러운 눈빛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천여운의 귀로 이화명의 처분이 들려왔다. “마도관주로서 칠 번 생도 천여운에게 처분을 내린다. 노란 명찰을 반납하고 닷새 동안 구금동(拘禁洞)에서 면벽 수련을 명한다.” 뜻밖의 처분에 천여운의 두 눈이 커졌다. 방출될 것 같은 말투와 다르게 전혀 다른 처분이었다. “......방출이 아닙니까?” “방출?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마도관에서 방출은 오직 시험에 탈락하거나, 공식 시험이나 비무가 아닌데 타 생도를 죽였을 때뿐이다.” “하아.” 이화명의 말이 끝나자 떨리던 천여운의 눈빛이 살아나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가장 우려했던 방출은 없었다. 그런 천여운의 반응에 이화명이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방출이 되지 않았다고 좋아할 일이 아닐 텐데.” 그것은 이화명의 말대로 였다. 마도관에서 방출이 되지는 않았다고는 하나, 노란 명찰을 반납하게 되면 생도들이 보는 앞에서 획득했던 조장 자리를 박탈당하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닷새 동안 구금동에 갇혀서 면벽 수련을 하게 되면 다시 노란 명찰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라고는 고작 하루 밖에 없게 된다. 그때까지 과연 노란 명찰을 달고 있는 무공 교두가 남아있게 될 것인가? ‘......무턱대고 좋아할 일이 아니구나.’ 절대로 가벼운 처분이 아니었다. 마도관주인 좌호법 이화명이 이러한 처분을 내린 것은 정도를 벗어난 행동에 대한 처벌이자 모든 생도들에게 보이기 위함이었다. 아무리 약육강식이자 강자존을 추구하는 마도관이더라도 상대의 무공을 폐하는 것은 인재를 허무하게 잃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태는 마도관의 창립 이래 '공식적으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규정상 방출시킬 수 없었기에 이러한 처분을 내리는 것이었다. ‘본래라면 이레 동안 면벽 수련을 시키려 했으나, 그렇게 된다면 네 녀석의 모든 기회가 사라져버리겠지.’ 이것은 좌호법 이화명이 주는 작은 기회였다. 천여운과 같은 인재를 방출시키거나 기회마저 없애버리기에는 손실이 너무 컸다. 더군다나 지난 번 무공 교두와의 대결로 인해 천여운에 대한 이화명의 기대는 상당했다. 물론 이번 일로 실망도 컸지만 말이다. “자. 이제 마도관주가 아닌 본교의 선배로서 네 녀석의 어리석음을 논해볼까.” 그 말과 함께 좌호법 이화명의 몸에서 강렬한 진기가 흘러나오며 집무실 전체를 뒤덮었다. ‘웃!’ -찌릿!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강렬한 진기였다. 그 기운이 어찌나 컸던지 절정의 경지에 올랐는데도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었다. 이화명이 집무실을 진기로 뒤덮은 것은 외부와의 소리를 차단시킨 것이었다. “네놈에게 매우 실망했다.” 근엄하게 처분을 했을 때와 다르게 인상마저 쓰며 얘기했다. “제법 크게 될 녀석이라 생각했는데, 고작 쭉정이만도 못한 짓거리를 하다니.” 이화명은 정말 짜증난다는 말투로 천여운에게 신랄한 비판을 했다. 단전을 깬 것에 대한 실망이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라 생각된 천여운이 고개를 숙여서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뭘 죄송해. 일처리를 고작 그딴 식으로밖에 못하나? 사고를 쳤으면 수습할 능력도 없나?” “네?” “단전을 깨버리고 나서 의무실로 데려온 건 녀석을 동정해서냐?” “그건.....” “그건 당연히 아니겠지. 방출되는 게 무서워서였겠지. 그렇다면 처음부터 단전을 깨부수는 짓거리를 하지 말았어야지.” “하지만 천종섬은....” “미독을 썼으니까 네 모친의 원수와 관련있을 지도 모르니, 합당한 복수였다고 말하고 싶나?” 당황한 천여운이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이미 모든 정황을 파악하다 못해 미독에 관련된 것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좌호법 이화명이었다. 이 같은 사실은 의원 백종명이 천여운을 변호하기 위해 그가 왜 이런 짓을 벌였는지 자초지종을 전부 설명했기 때문이었다. 당황해하는 천여운에게 이화명이 비웃음이 담긴 목소리로 냉정하게 말했다. “모친의 원수라고 생각했다는 놈이 의무실을 데려와? 방출되기 싫어서? 어리석기 짝이 없구나. 할 거면 확실하게 했어야지.” ‘지금 설마?’ 좌호법 이화명이 하는 말은 단전을 부순 것을 타박하는 것이 아니었다. 확실하게 죽였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화명이 혀를 차며 자신의 말에 화룡점정을 찍었다. "쯧쯧, 후환을 남겨서 적을 만드는 짓거리는 하지 말았어야지." 17장 가슴은 뜨겁되 머리는 차가워져라(3) 좌호법 이화명은 이른 아침에 마도관으로 출근하면서 지난밤에 일어난 일을 보고받게 되었다. 모든 정황을 파악한 이화명이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그것은 빠른 성장과는 달리 천여운이 분노로 인해 냉철하게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스승에게 제대로 배우지 못 해서지. 열나흘 동안 무공을 가르치기도 벅찼을 테니.’ 우호법 섭맹을 싫어하는 이화명이었지만 이 부분은 인정했다. 무공을 꾸역꾸역 집어넣는 것만으로도 벅찼을 것이다. 마도관에 들어와서야 시작하는 단계인 천여운은 뛰어난 오성과 속에 담긴 분노를 양분 삼아 빠른 성장을 해왔을 지는 모르겠지만 경험도 미천했고 냉철함이 부족했다. 그런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이 스승의 지혜와 조언이었지만 천여운에게는 그럴 만한 사람이 없었다. ‘이놈의 재능을 썩게 놔두기는 아깝다.’ 이미 몇 번씩이나 자신을 놀라게 할 만큼 재능과 독기를 보여준 천여운이었다. 제대로 가르치고 조언을 해준다면 더욱 성장할 가능성이 무궁무진했다. 원래는 여섯 종파와의 원만한 관계를 중시하는 좌호법 이화명이었지만 그 역시도 사람인지라 천여운에게 흥미를 가져버리니, 관심이 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뒤처리에 어리숙한 자의 결말이 무엇인 줄 아나?” “........” “그것은 죽음이다. 네놈이 저지른 것은 스스로의 명줄을 잡아당기는 짓이다.” 의원인 백종명과 다르게 이화명은 누군가에게 좋게 말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신랄하게 현실을 비판하는 현실주의자였다. “여태껏 대놓고 단전을 파괴한 녀석은 네가 처음이다. 쯧쯧, 뒤처리도 제대로 못해서 전전긍긍하지 말고 영악해져라. 살아남고 싶다면 한 수 뒤만 보지 말고 세 수, 네 수 뒤도 살펴야 할 거다.” “.....알겠습니다.” 백종명에게 조언을 들었을 때는 무언가가 잘못 되었다는 것만을 느꼈던 천여운이었지만 이화명의 신랄한 비판은 그의 미숙함을 피부로 와 닿게 하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어리숙한 뒤처리에 대한 비판이었다. “네놈이 이곳 마도관에 입관한 목적이 무엇이냐?” 쓰라린 마음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천여운에게 이화명이 가장 원초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 말에 천여운의 입술을 꽉 깨물고 답했다. “.....누구보다도 강해지기 위해서입니다.” “누구보다도 강해져?” 그것은 단순하게 강해진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떨리는 목소리에 섞인 분노의 감정은 강해지려는 이유를 말해주고 있었다. 천여운은 복수를 할 수 있는 힘을 원했다. “분노가 네 녀석이 삶을 지탱하고 강해지려는 원동력인가.” 사람은 모두가 목표를 가지고 살아간다. 그 목표는 그 사람의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마도관에 입관하는 생도들은 저마다 각자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 “분노가 삶을 지탱해주는 원동력이 되기는 하지만, 네놈은 소교주 후보자이다.” 좌호법 이화명의 진지한 목소리에 천여운의 눈빛이 더욱 흔들렸다. “소교주 후보자라는 놈이 최종 종착지까지 분노로 그칠 셈이냐? 분노는 네놈이 거쳐 가야할 길의 일부일 뿐이고 강해지는 원동력에서 그쳐야 할 거다.” 소교주는 대 천마신교의 미래이다. 그가 만약에 평범한 생도에 불과했다면 그 원동력으로 나쁠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저 분노만을 목적으로 신교의 정점에 서게 된다면, 그 자신과 신교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못해 어두울 것이다. “나무를 바라보지 말고 숲을 보아라. 네놈의 분노는 나무 한 그루를 태우는 것이 아니라 숲 전체를 불태우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네놈 자신마저 불태우고 재로 남겠지.” 처음에는 천여운의 어리석음만을 꼬집었던 이화명이었지만 어느 순간 그의 조언은 소교주 후보로서 천여운이 가야할 방향성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인 줄 알겠나?” “......알 것 같습니다.” “알긴 뭘 알아. 인마. 쥐뿔도 없는 네놈이 생각 없이 분노로 설치고 다녀봐야 네 주변 사람들도 다치고 네놈도 결국에는 비참한 최후를 맞을 거다.” 모든 조언을 거의 악담 수준으로 풀어나가는 이화명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는 어디에도 틀린 말이 없었다. 이화명은 냉철하게 천여운의 미래를 논하고 있는 것이었다. “칠 번 생도, 아니 천여운. 네놈이 이곳에서 살아남아서 신교의 미래가 되겠다고 결심했다면 가슴은 뜨겁되 머리는 차가워져라. 그렇지 않다면 네 녀석은 복수는커녕 꽃을 펴보기도 전에 짓밟힐 테니 말이다.” ‘......가슴은 뜨겁되 머리는 차가워져라!’ 좌호법 이화명의 마지막 그 말이 천여운의 심금을 울렸다. 열다섯 살의 나이가 되도록 누구에게도 제대로 된 조언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오직 그가 나아가야할 방향은 복수의 길이었고 그 끝은 자신의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간 여섯 종파를 없애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 후에는?’ 그 후를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것이 천여운의 머릿속마저 붉게 불태우던 불씨를 차갑게 만들었다. ‘관주님의 말씀이 옳다.’ 그의 말대로 냉철하지 않고 철없이 복수심만 불태운다면 결국 아무 것도 이루지도 못하고 꺾이고 말 것이다. 복수를 이루고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그 끝을 복수로만 잡아서는 안 되고 더 높고 웅대한 포부를 지녀야 한다. 그러려면 지금의 부족함을 반성하고 그것을 채워야 했다. ‘가슴은 뜨겁되 머리는 차가워져야 돼. 내게 부족한 것은 냉철함이다.’ 백종명의 조언을 들은 후부터 흔들리며 가야할 길을 흔들려하던 천여운의 마음에 드디어 깨달음과 안정이 찾아왔다. 흔들리던 눈빛이 어느새 또렷해지며 안광이 두터워지는 모습을 보이자, 불만스러웠던 이화명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말 귀를 못 알아먹는 멍청이는 아니군.’ 만약 자신이 이렇게까지 조언을 해줬는데도 멍청하게 군다면 더 이상의 관심을 접으려고 했던 이화명이었다. 하지만 만약 천여운이 자신의 부족한 점을 깨닫고 그것을 보완한다면 천마신교에는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진정한 괴물이 탄생하게 될 것이다. ‘그 진정한 뒷 배경에는 술주정뱅이 놈의 가르침이 아닌 이 몸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이 바탕이 되겠지. 후후후.’ 좀 더 큰 그림을 그리는 좌호법 이화명이었다. 아직은 그 떡잎이 작으니 좀 더 지켜봐야 알겠지만 말이다. -사아아아! 이화명이 진기를 거둬들이자 집무실 전체를 무겁게 짓누르던 공기가 가벼워졌다. 그것은 그들의 대화가 끝났음을 의미했다. 천여운이 검은 명찰 옆에 달고 있던 노란 명찰을 떼어서 이화명에게 반납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관주님의 조언을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자신에게 진정한 깨달음을 안겨준 이화명에게 감사의 포권을 취했다. 그 모습에서 흡족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화명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무공 교두들은 들어와라.” “아?” 이화명의 명이 떨어지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무공 교두들이 관주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이 녀석을 당장 구금동으로 데려가라.” “넵!” 공은 공이고 사는 사였다. 설마 곧바로 구금동으로 보낼 줄은 예상하지 못한 천여운의 눈빛에 난감함이 서렸다. 적어도 수하들에게 자신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지시를 해줘야 했다. “관주님. 구금동으로 가기 전에 잠시만 시간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천여운의 부탁에 좌호법 이화명이 고개를 저으며 냉정하게 딱 잘라 말했다. “안 돼.” “적어도 제 조원들에게 말 정도는.” “어차피 네 녀석이 구금동으로 가는 건 공식적으로 알려질 사항이다. 그리고 이제는 전 조원들이겠지. 녀석들은 다시 그냥 생도이다.” “아.....” 그런 그의 말에 천여운은 뭔가를 깨달았는지 짧게 탄식음을 흘렸다. 처음에는 왜 그런 처분이 내려졌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화명의 방금 전 말을 듣고 나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내 어리석은 행동으로 미치는 영향을 깨달으라는 말이구나.’ 천여운이 조장의 자리를 박탈됨으로써 조원들 역시도 조장을 잃은 비조원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단순한 처분이 아닌 책임감을 통감하라고 내린 벌이었다. 덕분에 우두머리인 자가 가져야 할 책임감을 깊이 느끼게 된 천여운이었다. 그렇게 무공교두들에게 구속되어 천여운은 마도관의 구금동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 같은 사실이 정식적으로 공표된 것은 점심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모든 생도들에게 알려졌다. [칠 번 생도는 사 번 생도의 단전을 파괴하여 한 인재의 무공을 상실케 하였기에 그 벌로 현재의 조장의 자격을 박탈하고 닷새 동안 구금동에 면벽 수련을 명한다. 모든 생도들은 이 같은 사실을 깊이 새겨, 타 생도의 단전을 파괴할 경우 마도관의 관주로서 이를 절대로 좌시하지 않을 것임을 알린다.] 이 소식은 많은 생도들에게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연과 더불어 가장 먼저 조장의 자격을 가졌던 그가 큰 사고를 쳐서 이를 박탈당했으니 말이다. 서로 경쟁을 하는 약육강식의 마도관이더라도 단전을 파괴시킨다는 발상은 쉽게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웅성웅성! 공표된 벽보가 붙은 마도관 본관 건물 앞쪽이 굉장히 소란스러워졌다. ‘이 자식 완전 무서운 놈인데.’ ‘그냥 무공만 강한 줄 알았더니 독종인가.’ ‘돌 아이가 아니고?’ ‘사 번 생도면 독마종의 그 천종섬이잖아.’ ‘독마종을 건들다니 완전 멍청한 짓을 했군. 마도관을 졸업하면 그대로 세상과 하직하겠는걸.’ ‘그 전에 마도관 안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당할지도.’ ‘그런데 뭔가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그런 거 아냐?’ ‘맞아. 아무리 멍청이더라도 독마종을 그냥 건들 리가 있어? 뭔가 생각이 있으니까 저질렀겠지.’ 의외의 반응들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었다. 모든 생도들의 의견은 분분했다. 불과 마도관을 입관할 때만 하더라도 모든 생도들의 천여운에 대한 인식은 여섯 종파의 멸시를 받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비운의 소교주 후보자였다. 그런데 지금은 이 벽보가 붙여졌음에도 불구하고 생도들의 의견이 분분하다는 것은 그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음을 의미했다. “푸하하하핫. 이 녀석 진짜 미쳤구나. 단전을 파괴한다는 발상은 대체 어디서 나온 거야?” 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유찬이 벽보를 보며 미친 듯이 웃어댔다. 천여운의 행보는 도무지 그가 예측하기 힘든 방향이었다. 재미있기는 했지만 이 같은 행보가 옳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쩌면 삼강(三强) 구도로 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럴 걱정은 할 필요가 없겠군. 제 스스로 떨어져나갔으니.’ 무공 교두와 겨루는 모습을 보았을 때만 하더라도 꽤 위험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안심이 되었다. 녀석은 이번 삼 단계 시험도 치르지 못하고 탈락할 것이다. 천유찬이 품속에 있는 세 개의 노란 명찰들을 손에 움켜쥐며 흐뭇해했다. ‘후후후, 잘 된 일이구나.’ 검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경운 역시도 천유찬과 더불어 벽보의 내용을 살피며 좋아하는 반면, 현마종의 후보자인 천무연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지 벽보를 한 번 훑어보고는 그냥 가버렸다. 한편 벽보를 보면서 충격을 받은 일곱 명의 생도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천여운의 수하들이자 조원들이었다. 방출만은 되지 않기를 바랐기에 다행스러웠지만, 이런 마도관의 처분 덕분에 조장을 잃고 다시 비조원의 상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주군께서 돌아오신다면 고작 하루 밖에 남지 않는데 그 안에 과연 노란 명찰이 남을까?’ 마권종의 고왕흘은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주군의 실력은 믿었지만 촉박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어쩌면 무공 교두들을 상대로 노란 명찰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조를 상대로 뺏어야 하는 구도가 발생할 지도 몰랐다. ‘더 까다로워질지도.’ 그렇게 망연자실해 하는 그들에게 누군가가 다가왔다. 그는 바로 이 단계 시험에서 십이 조의 조장이었던 백기였다. 백기는 천여운의 일곱 수하들에게 무언가를 말했고, 그 말을 들은 일곱 명의 표정은 묘하게 바뀌어갔다. 그렇게 어수선했던 공표가 있었던 바로 그날 저녁. 독마종의 근거지인 십만대산의 마교의 성내 서쪽 장원은 분노로 들썩이고 있었다. 불과 두 시진 전에 마도관주의 경위서 및 서찰과 함께 누군가가 들 것에 실려서 독마종의 장원에 도착했다. 그는 다름 아닌 독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종섬이었다. 전신의 뼈가 전부 으스러졌고 단전이 폐해져서 보내진 모습에 모든 독마종의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서찰과 경위서를 보는 순간 독마종의 장원은 분노와 살기로 얼룩졌다. 독마종의 종주인 백오의 집무실에 모든 독마종의 수뇌부들이 집결했다. 몇 년 전에 백오가 장로직을 박탈당한 이후로 독마종 전체가 들썩이는 것은 오랜만의 일이었다. 한 시진 전부터 모여 있는 수뇌부들은 전부 백오를 지켜보고 있었다. 백오는 손에는 구겨진 한 서찰이 들려져 있었고, 분노 이상으로 뭔가 고민에 차있는 듯이 눈을 감고 있었다. 종주의 명을 기다리다 답답해진 한 중년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종주! 놈이 마도관을 나올 때까지 기다릴 일이 아닙니다.” 그가 입을 열자 하나 둘씩 의견이 터져 나왔다. “암살자를 보내시지요. 살마종의 살수를 고용한다면 조용히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럴 게 아니라, 무공 교두들 중에 누군가를 섭외해서 죽이는 건 어떻겠습니까?” “마도관의 숙수나 고용인들을 이용해서 음식에 무색무취의 독을 하독해서 없애면 깔끔합니다!” 각자가 생각하는 바들은 전부 비슷했다. 어떻게 효과적으로 죽일 수 있는지에 대한 의견들이었다. 자신들이 지지하고 키워낸 소교주 후보자가 병신이 된 것에 분노한 그들은 천여운이 마도관에 있든지 없든지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그를 죽여야만 이 분노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이런 수뇌부들의 격한 의견을 잠자코 듣기만 하던 종주 백오가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 차갑게 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놈을 죽이고 나면 그 의심은 누구에게로 향하지?” 날카로운 지적에 한참 동안 분노로 열변을 토하던 수뇌부들의 입이 일제히 닫혔다. 그렇지 않아도 몇 년 전, 화 부인의 죽음 이후에 교주의 견제로 힘이 많이 약화된 독마종이었다. 여기서 더욱 타격을 받게 된다면 여섯 종파의 균형이 흔들리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놈을 내버려두면 우리 독마종의 체면이 뭐가 됩니까?” 백오의 둘째 아들인 백문웅이 붉게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천종섬은 그의 친조카였다. 그런 조카가 무공을 상실한 것도 화가 났지만 이 일로 인해서 다른 다섯 종파들의 비웃음을 사는 것도 싫었다. “어리석기는. 그런 식으로 체면을 따질 것이었다면 음마종 역시도 나섰을 게다.” 이미 가장 먼저 이 단계 시험에 방출되어서 나온 음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원려를 말하는 것이었다. 천원려는 무공이 폐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오른팔이 잘려서 나왔다. 그녀의 팔을 자른 것 역시도 천여운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현재 음마종의 신경은 극도로 곤두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아직까지 상황을 좌시하는 것은 인내하는 과정이었다. “그 사건 이후로 교주는 여섯 종파와 거리를 두고 조금이라도 명분이 생기면 그 힘을 약화시키려 들고 있다. 섣불리 움직일 수 없다는 말이다.” 마도관에 입관한 생도를 건드리는 것은 마교 전체의 규정에 어긋난다. 그것을 깨뜨리고 천여운을 죽이게 된다면 안 그래도 벼르고 있는 교주에게 명분을 넘겨주는 셈이었다. -으득! “그럼 녀석이 제 발로 마도관을 나올 때까지 참아야 한단 말입니까!” 백문웅은 참을 수가 없었는지 입술을 꽉 깨물고 말했다. 이에 백오가 눈매를 날카롭게 뜨며 답했다. “그게 순리이지. 순리이긴 하지만.....” 백오가 손에 꾹 쥐고 있는 구겨진 서찰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백오에게 보내온 좌호법 이화명의 서찰이었다. 서찰을 한참을 바라보던 백오가 집무실 책상에 걸터둔 지팡이를 손에 쥐며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좌호법을 직접 만나봐야겠구나.” 하루가 지난 늦은 밤 해시(亥時) 무렵, 마도관의 비급서재에서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큰 산봉우리가 있었다. 그 봉우리의 위쪽으로 올라가면 수많은 동굴들이 있었는데, 그곳은 마도관에서 구금동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마도관에는 특별히 누군가를 가두는 금옥과 같은 시설이 없다. 인재를 육성하는 기관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곳 구금동은 마도관에서 유일하게 외부에서 입구를 폐쇄시킬 수 있다. 거대한 암석으로 봉해진 어두운 구금동의 내부를 비추는 것은 작은 등불 하나뿐이었다. -오드득! 천여운의 이빨로 텁텁하고 단단한 벽곡단이 씹었다. ‘아아 맛없다.’ 좁은 동굴 안에서 천여운은 닷새 치의 벽곡단 만을 먹으며 종일 면벽 수련을 해야 했다. 동굴 입구를 완전히 봉해놓아서 어둡고 습하고 답답하기마저 한 이곳에서 혼자 면벽 수련을 한다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유자재로 나갈 수 있는 연공실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보통 생도들이 이곳에 갇혔다면 하루도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천여운은 답답한 것은 있었지만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이 그리 힘들지가 않았다. 개인 연공실보다도 좁은 동굴이었지만 나노를 통해 증강현실을 개안해서 시뮬레이션 훈련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에서 지켜보고 있지 않는 게 천운이구나.’ 다행인 것은 경비 무사들이 동굴 바깥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방해받지 않아서 좋다는 점이었다. 닷새 동안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훈련뿐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강해지는 것이 도움이 되는 길이었다. 오늘도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계속 훈련을 하다가, 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배가 고파져서 벽곡단을 먹는 참이었다. -드르르르! 벽곡단을 씹으며 식사를 하던 차에 동굴 전체가 진동을 울렸다. “어?” 그것은 닫혀 있는 동굴의 암석이 옆으로 밀려나면서 생기는 진동이었다. 아직은 사흘이나 더 남았기에 지금 당장 동굴이 열릴 리가 없었다. 암석이 반쯤 밀려나면서 답답했던 동굴 안으로 바깥의 맑은 공기가 빨려 들어왔다. ‘하아.’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답답했던 공기가 환기가 되자 호흡은 상쾌했다. 바로 그때였다. 반쯤 열린 동굴의 입구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달빛을 등지고 누군가가 그 안으로 천천히 들어왔다. 그런데 그 복장이 마도관의 경비무사들의 것이 아니었다. 검은 장포를 둘러쓰고 괴이한 형태의 지팡이를 짚고 있는 노인이었는데, 그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네놈이 천여운이로구나.” 목소리에는 살기가 서려 있었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챈 천여운이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 순간 노인이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공력이 일어나며 천여운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18장 전화위복(轉禍爲福)(1) 천여운의 눈에 당혹감이 서렸다. 무공을 익힌 이래로 이렇게 강력한 공력은 처음이었다. 허공섭물(虛空攝物). 내공을 통해서 물건이나 상대방을 기로써 움직이거나 들 수 있는 기예이다. 기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적어도 내공이 초절정의 경지에 이르지 않고는 사람을 허공으로 들어 올릴 수가 없다. 더군다나 절정의 고수를 꼼짝하지 못하게 할 정도라면 내공이 초절정을 넘어서 화경(化境)에 이른 고수임을 뜻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고수다.’ 내공을 십성으로 끌어올렸는데도 공력에 저항할 수가 없었다. 노인의 몸에서는 살기가 풍겨져 나오고 있었는데, 강한 적의에서 오는 것이었다. 이런 무서운 고수가 구금동에 어떻게 나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절대로 호의적인 자가 아니라는 것만큼은 틀림없었다. ‘이러다 꼼짝없이 당한다.’ 위기의식을 느낀 천여운의 내공뿐만이 아니라 어떻게든 몸을 내리기 위해 순수한 육신의 힘을 끌어내며 전력을 다해서 몸을 움직여보려 했다. -꿈틀! 천여운의 전신의 근력에 힘이 들어가자 근육이 선명해지며 핏줄이 불끈 올라오며 꼼짝하지 않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 공력으로 몸을 움직일 수 없게 제어했는데, 천여운이 허공에 떠서 몸을 움직이자 노인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이놈 신력이 보통이 아니구나.’ 분명 내공만 본다면 아직 절정의 경지인데, 그 힘이 괴력에 가까웠다. 수많은 고수들을 보았지만 외공이 이렇게까지 강한 자는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천여운은 나노의 근육변환으로 인해 순수한 근력만으로 청옥석에 흔적을 남길 수 있을 정도로 인간의 한계치에 가까운 괴력을 가지게 되었다. 청옥석에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는 내공이 초절정에 이르러야만 가능했다. 하지만 노인은 화경의 고수였다. ‘반항이 심하군. 안되겠군.’ 천여운이 계속에서 강제로 몸을 움직여서 내공의 소모가 크자, 노인은 뻗었던 손을 잡아당기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허공에 떠있던 천여운의 몸이 노인의 손으로 빨려 들어왔다. -콱! “크윽!” 노인이 한 손으로 천여운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 손에 실린 공력이 어마어마해서 조금만 움켜쥔 손을 비틀기만 해도 천여운의 목이 꺾일게 틀림없었다. 그 순간 천여운의 머릿속에 나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용자의 신변에 위협을 가하는 적의 손에서 강대한 에너지를 감지했습니다. 긴급 방어 모드를 전개하겠습니다.] 나노의 목소리에 천여운이 잠시 그것을 멈추게 했다. ‘아니. 나노 잠깐만.’ 나노의 긴급 방어모드는 전력(電力)을 방출하는 것이었는데, 이 정도 무시무시한 공력을 가진 고수라면 그것이 통하지 않을 것 같다고 판단한 천여운이었다. 통한다면 다행이었지만 만약 실패한다면 오히려 상대를 자극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노인이 처음부터 나를 죽이고자 마음먹었다면 벌써 나를 죽였을 것이다.’ 천여운의 판단은 정확했다. 노인은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천여운을 죽일 수 있었다. 여전히 경계심이 가득한 눈빛이었지만 천여운이 더 이상 노인의 손에 담긴 공력에 대항하려들지 않자 노인이 입 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외손주 녀석을 그 꼴로 만든 놈이라 해서 어디 그 잘난 낯짝을 보려했는데, 제법 상황 판단이 빠르구나.” 어설프게 대항하려 들었다면 공력이 파고들어 내상을 입었을 것이다. ‘외손주?’ 손주라는 말에 천여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눈치가 없지 않고는 그 말을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독마종!’ 노인의 정체는 다름 아닌 독마종의 종주인 괴독마장(怪毒魔杖) 백오였다. 상대의 정체를 알게 되자 천여운은 당혹스러웠다. 소교주 후보자인 천종섬의 단전을 파괴했기에 분노한 독마종이 무슨 수를 쓸 지도 모른다고는 여겼지만 설마 그 우두머리가 움직일 줄은 몰랐다. “노부가 왜 네 녀석을 만나러 온 것인지 당연히 잘 알고 있겠지?” ‘크윽! 나를 직접 죽이러 온 것인가?’ 그렇다면 몸에서 풀풀 풍기는 살기가 설명이 되었다. 외손주의 전신의 뼈를 부순 것도 모자라 단전까지 파괴했으니 용서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천여운 생각해라. 어떻게 이 위기를 벗어날지 생각해라!’ 마음의 떨림을 가라앉히고 냉철하게 고민해보았지만 방법이 없었다. 백오가 손에 힘을 주기만 해도 천여운은 목이 꺾여서 목숨을 잃게 된다. ‘이대로 죽는 건가?’ 이런 생각이 들자 오히려 천여운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공포가 아닌 분노였다. 아직 제대로 된 복수도 하지 못했는데 이대로 끝나기에는 너무도 분했다. ‘이놈 눈빛이....’ 고작 열다섯 밖에 되지 않은 소년이 죽음의 위기를 앞뒀는데, 오히려 눈빛에서 분노와 더불어 독기가 서리자, 내심 백오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독마종의 종주이자 마교의 서열 십위 권에 속하는 절대강자인 자신의 앞에선 누구도 이런 건방진 눈을 할 수 없다. “흥! 가벼운 훈계 정도는 필요하겠구나.” -퍽! “크헉!” 백오가 쥐고 있던 지팡이에 공력을 실어 천여운의 복부를 쳤다. 지팡이에 실린 공력이 어찌나 강했던지 맞는 순간 엄청난 통증과 함께 천여운의 입에서 선혈이 터져 나왔다. ‘이제 그 건방진 낯짝....이놈이?’ 백오가 어이가 없다는 눈빛이 되었다. 고통스러워하는 천여운의 표정을 기대했는데, 여전히 그는 독기가 서린 눈빛이 그대로였다. 백오는 모르겠지만 천여운의 몸에 내상을 입힌 순간, 나노 머신들이 움직여 체내의 상처를 빠르게 자가 수복 시켰다. 타격을 당한 그 순간의 고통은 어쩔 수 없겠지만 회복속도는 굉장히 경이로웠기에 고통이 지속되는 것은 아니었다. ‘보통 독기가 아니구나?’ 백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외손주의 단전을 파괴할 만큼 그 원한이 강할 거라고는 짐작했지만, 이 정도까지 강한 독기를 지녔을 줄은 몰랐다. ‘역시 이놈을 그냥 내버려두면 큰 후환이 되겠구나.’ 처음에는 천여운을 만나본 후에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려 했던 백오는 역시 그를 그냥 내버려둘 수 없다고 판단 내렸다. 점점 짙어져가는 백오의 살기에 천여운이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저를 죽이실 생각입니까?” “네놈의 처지를 잘 알고는 있구나.” “여기서 저를 죽이신다면 본교의 규칙을 어기게 될 텐데요.” “그런 말이 노부에게 통할 것 같으냐. 네놈을 죽이고 노부의 산독으로 시신을 흔적도 없이 녹인다면 누가 알아챌 것 같으냐.” 굳이 죽인다면 흔적 따위는 남길 생각이 없는 백오였다. 백오의 그런 위협에 천여운이 잠시 말이 없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흔적이야 없앨 수 있겠지요. 하지만 제가 마도관에서 사라진다면 가장 먼저 의심받는 것은 당연히 독마종일 텐데요.” 천여운의 날카로운 지적에 백오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아직 열다섯 밖에 되지 않은 녀석이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상황을 정확하게 읽어냈다. ‘이놈. 정말 위험한 놈이구나.’ 나이게 걸맞지 않은 무공 실력,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독기, 뛰어난 상황 판단 능력. 모든 것이 놈이 성장했을 때의 독마종에 얼마나 큰 위협이 될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마도관이 아니었다면 당장 죽여야 하거늘.’ 백오의 눈빛에 아쉬움이 서렸다. 처음부터 이곳에서 그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 천여운의 말대로 마도관에서 그를 건들게 된다면 모든 의심은 독마종이 받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교주의 견제는 극대화될 것이다. 원래의 목적은 자신의 외손주를 죽인 천여운의 낯짝을 보면서 경고를 하기위해서 왔다. “제법 똑똑하구나. 하지만 이렇게 영리한 놈이 노부의 외손주를 건드려서 명줄을 잡아당긴 것을 보면 아직은 허술하기 짝이 없다는 말이겠지.” “.......” 그 점에 관해서는 천여운 역시도 실수를 부정할 수 없었다. 부족한 경험과 분노로 이성을 잃고 저지른 행동이 이렇게 역풍을 맞고 돌아왔으니 말이다. “네놈의 말대로 여기선 노부라고 해도 네 녀석을 죽일 수 없다. 하나.” -타타타탁! 백오의 손이 빠르게 움직이며 천여운의 아혈을 점했다. 내공에서 격차가 심했기에 혈도를 점하는 것을 방어할 수가 없었다. 아혈이 점해져서 말을 할 수가 없는 천여운을 바라보며 백오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확실하게 약속하마. 네놈이 이곳 마도관의 품에서 벗어나는 순간, 네가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 고통을 선사해주마.” 백오의 눈빛은 외손주의 고통에 대한 분노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네놈이 내 외손주의 전신의 뼈를 부러뜨렸으니, 노부는 네놈의 전신의 뼈를 전부 부수고 그 살점마저 전부 뜯어내서 짐승의 먹이로 줄 것이다. 그리고 단전을 부순 후에 네놈의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죽고 싶다고 애원할 만큼 고통으로 얼룩지게 해주마!” 분노가 담긴 백오의 경고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했다. 경고를 마친 백오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작은 환(丸)이었는데, 마룡단보다도 훨씬 지독한 향이 코끝을 찔렀다. 그리고는 말이 아닌 전음을 보냈다. [그냥 가기는 섭섭하니 노부가 네놈에게 작은 선물을 주도록 하지. 네 녀석이 노부와 빨리 해후할 수 있도록 말이야.] “읍읍!” 전음이 끝나자 백오가 천여운의 입을 강제로 벌리게 만들었다. 당황한 천여운이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했으나, 자신의 목을 쥐고 있는 손에서 더욱 공력이 들어가면서 버틸 수가 없었다. “칵!” -탁! 팍! 백오가 천여운의 입에 환을 집어넣었다. 씹지 않고 버티기 위해 악을 썼으나, 목을 움켜쥐는 손에 힘을 주는 순간 입안에 있던 환이 통째로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고 말았다. [네놈의 목숨을 위협하는 독은 아니다. 하나 네놈에게 먹인 환에 대해서 발설한다면 마교의 규칙이니 의심을 막론하고 네놈만큼은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 덤으로 목숨을 위협하는 경고마저 남겼다, “읍읍읍!” “그럼 네게 경고를 했으니, 다시 만날 그날을 기다리마.” -팍! 쾅! 백오가 목을 움켜쥐었던 손에 공력을 가하자 천여운의 몸이 구금동의 동굴 안쪽으로 부웅하고 날아가 버렸다. 홧김에 실린 공력에 동굴 안쪽 벽에 몸이 파고들었다. 조금은 화풀이를 한 것에 기분이 나아졌는지 백오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동굴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끼리리리리릭! 백오가 동굴 바깥으로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입구를 반쯤 가리고 있던 거대한 암석이 움직이며 다시 세상과 단절되고 말았다. 구금동의 동굴 바깥으로 나온 백오는 자신을 기다리는 누군가에게 말했다. “볼 일은 끝났네.” “손을 쓰지 않는다고 저와 약조하셨을 텐데요.” 동굴 바깥에서 기다리던 사람은 다름 아닌 좌호법 이화명이었다. 천여운은 그의 등장을 의아해 했었는데, 백오가 이렇게 마도관에 대담하게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좌호법 이화명과 대동했기 때문이었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화명은 동굴 안에서 들려오는 굉음 소리를 들었다. 이것을 꼬집자 백오가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자네 같으면 혈육에게 해코지를 한 녀석을 바로 앞에 두고서, 손찌검 한 번 하지 않을 수 있나?” “.......” “허허허, 알겠네. 참지 못하고 가볍게 손을 썼던 것은 사과하겠네. 하나, 내상을 입힐 정도는 아니었으니 그 점은 걱정하지 말게나.” “......알겠습니다.” 이화명이 미덥지 못한 얼굴로 마지못해 답하자 백오가 포권을 취했다. “규칙에도 불구하고 노부의 부탁을 들어줘서 고맙네.” “부디 입장을 난처하지 않게 해주시길 바랍니다.” “알겠네. 노부가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이 일은 절대로 발설치 않겠네.” 원래는 독마종의 종주라고 해도 규칙 상 마도관에 들어올 수 없다. 천여운에 대한 분노로 독마종에서 어리석은 짓을 할 것을 우려했던 좌호법 이화명은 경위서 이외에도 개인적인 서찰을 보내 누차 마도관의 사 년 동안은 천여운을 건들지 말기를 권고했다. 백오는 좌호법 이화명에게 서찰의 내용을 반드시 지킬 테니, 외손주 녀석을 그렇게 만든 천여운을 한 번만 볼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평소에도 여섯 종파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온 이화명은 이 같은 부탁을 단호하게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럼 노부는 볼일을 마쳤으니 가보도록 하겠네. 이제 마도관에 남은 것은 노부의 손자뿐이니 잘 부탁함세.”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백오는 장포를 끌어올려 머리에 쓰고 얼굴을 가린 채, 경공을 펼쳐서 산봉우리를 먼저 내려갔다. 백오가 가는 것을 확인한 좌호법 이화명이 동굴을 봉하고 있는 거대한 암석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네놈이 외부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시간은 고작 사 년뿐이다. 그 이후에 살아남는 것은 네 몫이다.” 한편 구금동의 동굴 안에 있는 천여운은 가부좌를 펼친 채, 식은땀을 흘리며 운기조식에 들어간 상태였다. 눈을 감고 있는 천여운의 주변에는 상의가 검게 물들어 있었는데, 코를 틀어막을 만큼 지독한 악취를 내뿜고 있었다. 그것은 천여운이 백오의 강한 공력에 벽에 부딪치고 나서 벌어진 일이었다. 벽에 부딪친 천여운의 머릿속에 나노의 목소리가 울렸다. [사용자의 체내로 해로운 독성분이 섞인 물질이 식도를 타고 들어왔습니다.] 백오가 무엇을 먹였는지는 몰라도 분명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것이 틀림없기에 천여운이 다급하게 명했다. ‘당장 몸 밖으로 배출시켜줘.’ [체내로 들어온 물질을 분석한 결과, 일부 해로운 독성분만 제거하면 마룡단과 같이 단전의 에너지를 자극시켜 활성화시킬 수 있습니다.] ‘뭐?’ [독성분이 에너지를 일부 흩어지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백오가 천여운에게 먹인 것은 내공의 손실을 일으키게 만드는 산공(散功) 효과를 가진 환이었다. 백오가 만든 이 독환은 일반적인 산공독처럼 상대의 내공을 일시적으로 흩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단전을 자극함과 동시에 공력이 분산되도록 촉진시켜 내공이 일부 손실되도록 한다. 워낙 인체에 해가 되는 성분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한 번 복용했던 사람은 항체가 생겨서 중복되어 쓸 수 있는 약은 아니지만, 천여운처럼 처음 복용하는 자는 운이 없다면 내공의 절반가량이 흩어지게 할 만큼 위험한 환이었다. 물론 운기가 자유로운 초절정 이상의 고수들은 이런 해가 되는 물질을 삼키게 되면 자체적으로 역류시켜서 배출할 수 있지만 절정 이하의 고수들에게는 써먹기 좋은 독이었다. ‘큭! 내 내공을 약하게 만들 생각이었구나.’ 백오가 천여운에게 이것을 먹인 것은 그의 내공을 손실하게 하여 삼 단계 시험에서 탈락하게 만들 작정이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백오조차 모르는 복병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나노였다. 나노는 빠르게 독환에 대한 분석을 통해 그것에서 독성분들만 제거한다면 단전의 에너지를 자극하는 효과만 남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독성물질만 내보내면 몸에 해가 되지 않는다고?’ [그렇습니다.] ‘후우...좋아! 그럼 독성 물질만 제거시켜줘.’ [알겠습니다. 식도로 넘어가는 물질의 독성분을 추출하여 체외로 배출시키겠습니다.] -솨아아아! 천여운의 체내에 있는 나노 머신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독환의 독성분을 추출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천여운의 상반신의 땀구멍으로 지독한 악취가 섞인 검은 액체가 스물 거리며 분출되기 시작했다. 작은 단이었기에 그리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냄새가 지독했다. “우욱!” 속이 부대끼는 천여운의 머릿속으로 나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독성분을 제거했습니다. 독성분을 제거한 물질이 사용자의 체내 십사경맥(十四經脈)의 특정 혈(穴)로 순환하고 있는 에너지와 호응하여 단전을 활성화시킵니다.] 나노의 그 말에 천여운은 곧장 무천심법을 운기하기 시작했다. 18장 전화위복(轉禍爲福)(2) [사용자의 체내의 신진대사를 촉진시킵니다.] 무천심법을 운기하는 천여운을 나노가 체내 신진대사를 촉진시켜 기의 활성화를 도왔다. 반복적으로 십사경맥의 특정 혈 자리를 순환하던 내공은 점차 약효에 영향을 받아 그 덩치를 불려나가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참을 운기에 집중하던 천여운이 드디어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그를 자극하는 역겨운 냄새에 천여운이 검은 액체가 묻은 상의를 벗어던졌다. “하아, 진짜 지독하다.” 운기에 집중할 때는 그나마 잊을 수 있었는데, 끝나고 나니 버티기 힘들었다. 구금동의 동굴 안의 공기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그것은 천여운의 무천심법을 운기하면서 내공이 증식되는 과정에서 몸의 열이 발산되면서 일어난 현상이었다. 단전에서 느껴지는 다른 묵직함에 천여운이 내공의 양을 확인해보았다. “아!” 그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는 순간이었다. 놀랍게도 일 갑자를 약간 상회했던 내공이 어느새 일 갑자 반(구십 년)에 도달해 있었다. 마치 마룡단을 처음 복용했을 때처럼 효과가 굉장했다. 독마종의 종주인 백오의 원래 목적이었던 내공 손실은커녕 오히려 반 갑자 가까이 내공이 늘어난 기연을 얻게 된 셈이었다. ‘.....정말 선물을 줬네.’ 백오의 작은 선물은 천여운에게 큰 선물로 다가왔다. 처음 마도관을 입관 했을 때만 하더라도 내공이 전무했던 천여운은 이번 전화위복으로 인해 모든 생도들을 통틀어 다섯 손가락에 드는 내공을 지니게 되었다. ‘나노가 없었더라면 정말 큰 일 날 뻔했다.’ 나노는 불운한 천여운에게 있어서 인생의 전환점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노 머신이 없었다면 벌써 수차례 죽었을 지도 몰랐다. 불운마저도 행운으로 바뀌는 나노가 있었기에 더욱 고마움을 느끼는 천여운이었다. '이번에는 정말 운이 좋았다. 독마종에서 그렇게 대담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한편으로 독마종의 종주인 백오의 계략에 빠지지 않은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모든 것이 자신의 어리석은 판단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한 번 잘못된 판단이 어떻게 역풍이 되어서 돌아오는지 이번 위기를 통해 제대로 겪게 된 그였다. '쓴 경험을 했다.' 이번에는 운이 좋게 전화위복되어 내공을 얻게 되었지만 두 번 다시는 어리석은 판단을 범하지 않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나저나 이건 대체 뭐지?’ 천여운이 몸을 일으켜서 동굴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등불 하나가 비추고 있는 동굴은 어둡기 그지없었지만 천여운에게는 나노의 야간 투시경이 있었다. ‘나노. 야간 투시경 모드.’ [사용자의 눈에 야간투시경(夜間透視鏡) 모드를 개안합니다.] 나노 머신인 나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지며 천여운의 동공이 흔들리더니, 이내 어두웠던 그의 시야에 빛이 증폭되면서 어두웠던 동굴 안쪽이 선명하게 보였다. 동굴 안쪽의 벽면이 일부 깨져있었는데, 백오가 공력을 실어서 천여운을 날려 보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다. ‘뭔가 느낌이 이상했어.’ 동굴 벽에 부딪쳤던 천여운 그 안쪽이 꽉 차 있는 것이 아니라 비어있는 것만 같았다. 순간 이를 기이하게 여겼지만 백오가 강제로 먹인 독단을 먼저 해결해야 했기에 잠시 잊고 있었다. -수우우우! “아?” 벽면에 깨져있는 부분에서 미세한 공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안쪽이 비어있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어쩌면 안쪽에 다른 공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천여운은 호기심이 생겨났다. ‘한 번 확인해볼까?’ -탁탁! 천여운은 금이 간 동굴 벽의 밑 부분을 주먹으로 살살 쳐가면서 조금 더 공간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워낙 세게 부딪쳤던지라 조금만 쳐도 벽이 바스라지면서 점차 천여운이 기어서 들어가면 들어갈 수 있을 만한 구멍이 생겼다. ‘됐다.’ 구멍이 생기자 그 안에서 서늘한 공기가 들어오면서 열기로 가득했던 좁은 동굴이 시원해져갔다. 천여운은 엉금엉금 기어서 어두운 구멍의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안으로 천천히 기어들어간 천여운이 인상을 찌푸렸다. ‘엇?’ 좀 더 넓은 동굴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예상과 달리 그 안에는 어딘가로 연결되는 듯 한 동굴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어서 들어왔던 몸을 일으켜 세우고 뒤로 돌아보았다. 막혀 있는 동굴 벽은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후에 막아놓은 것처럼 부자연스러운 형태를 하고 있었다. 좁은 동굴의 벽면은 자연스럽게 되어 있어서 몰랐는데, 그 안쪽의 벽면을 보니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일부러 막아놓은 건가?’ 아무래도 이곳에는 뭔가가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통로를 따라 들어가서 확인해볼까 고민을 하던 찰나에 나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통로의 안쪽에서 미세한 야광 빛이 감지되었습니다.] 야광 빛이라는 말에 천여운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한 야광 빛을 내는 것은 오직 야광주밖에 없었다. 이왕 확인해보기로 했으니 안쪽으로 들어가 보자는 생각에 천여운이 동굴 통로를 따라 들어갔다. 천여운이 있던 구금동의 동굴은 산꼭대기에 아까운 곳에 있었는데, 이 동굴의 통로는 마치 산봉우리의 안쪽 아래로 안내하는 것만 같았다. ‘점점 밝아진다.’ 나노의 말대로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청녹색의 밝은 빛이 강해지고 있었다. 굳이 야간투시경 모드를 하지 않아도 보일 정도였다. ‘나노 야간 투시경 모드 해제.’ [사용자의 눈에 야간투시경(夜間透視鏡) 모드를 해제합니다.] 야간 투시경 모드를 해제하고 안쪽으로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통로의 끝이 드러났다. 그 끝에서는 지금까지보다도 환한 야광 빛이 흘러나왔다. 통로의 끝으로 다가가서 그 안으로 발자국을 내딛는 순간, “어엇!” 발을 디딜 곳이 없었다. 당황한 천여운이 재빨리 몸을 뒤로 빼지 않았으면 떨어질 뻔했다. 대체 무언가 싶어서 그 안으로 고개만 빼꼼 집어넣었는데 놀랍게도 그 안에는 굉장히 넓은 공동이 자리하고 있었다. “여긴 대체?” 의아한 것도 잠시였고, 천여운이 공동 안을 살펴보더니 그 안으로 뛰어내렸다. 높이는 열세 자(尺) 정도였는데, 일반 사람들은 그냥 뛰어내리기 힘들어도 천여운은 경공으로 충분히 내려갈 수 있었다. -탁! 그 공동 바닥으로 내려온 천여운이 자신이 들어왔던 통로를 살폈다. 그곳은 이곳을 들어오는 통로라기보다는 엄밀히 얘기하면 공기를 순환시키는 환기구에 가까웠다. 넓은 공동 안의 높이는 생각보다 높았는데, 열여섯 자 정도는 되어보였다. “와!” 천장을 쳐다보는 천여운의 입에서 탄성이 절로 흘러나왔다. 공동의 천장에는 수를 헤아리기 힘든 많은 야광주들이 박혀서 내부를 청록색의 환한 빛으로 밝히고 있었다. 워낙 밝아서 천장을 똑바로 쳐다보기 힘들 정도였다. “구금동에 이런 곳이 숨겨져 있었다니.” 놀라웠다. 그런데 막상 무언가가 있나 둘러보니, 공동 한가운데에 있는 원 형태의 굵고 긴 석봉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꽤나 공동이 넓었는데도 아무 것도 없는 것을 보아선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공간인 것 같기도 했다. 공동의 벽의 남쪽 방향으로 이곳을 나갈 수 있는 입구로 보이는 곳이 있었는데, 그 바깥쪽에 거대한 암석에 놓여 있어 나갈 수 없도록 막고 있었다. ‘정말 사용하지 않는 곳인가 보구나.’ 이런 멋진 장소를 그냥 내버려둔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어?” 바깥으로 나가는 입구 쪽을 쳐다보다가 문득 땅 밑을 바라보았는데, 바닥 쪽에 무언가가 쓸려나간 자국이 길게 연결되어 있었다. 자국의 크기만 보았을 때는 큰 비석 같은 것을 밀어서 가지고 나간 것 같았다. 쓸려나간 흔적들을 따라가 보니 자연스럽게 공동 안쪽의 중심부로 향해졌다. ‘하나가 아니네?’ 바닥에 쓸려나간 흔적들은 하나가 아니었다. 공동의 한가운데에 세워진 석봉을 중심으로 주변에 오각 형태로 마주보게 세워져 있었던 것을 끌고 나온 것 같았다. 어지간히 무겁지 않고는 이렇게 바닥이 패일 정도로 끌리진 않았을 것이다. ‘바닥의 자국만 보면 꼭 비석 같다.....비석?’ 천여운은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다. 비석이라고 하니까 왠지 모르게 마도관의 비급 서재에 있던 청옥석 비석이 생각났다. 일 층과 이 층의 비석에서 천여운은 천마 조사의 심득이 담긴 절세검법의 초식과 검마의 검법으로 추정되는 파훼검법의 초식을 손에 넣었다. ‘생각해보니 비급 서재의 층마다 청옥석 비석이 있다고 했는데....’ 비급 서재는 총 다섯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청옥석 비석 역시도 총 다섯 개라는 것을 의미하는데, 공동의 한가운데에 남아있는 흔적들은 딱 다섯 개의 무언가가 놓여 있던 자국이었다. 뭔가 의구심이 들자 확인해보고 싶어졌다. ‘나노. 증강현실을 개안해서 비급 서재에 있던 일 층의 청옥석 비석을 입체영상으로 구현해줘.’ [알겠습니다. 사용자의 시각 정보에 증강현실(增强現實) 개안(開眼) 가동합니다.] 천여운의 동공이 미세하게 떨리며 시야로 흰 빛의 선들이 생겨나며 증강현실이 개안되었다. 이어서 나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스캔한 일 층 청옥석 비석을 입체 영상으로 구현합니다.] -솨아아아! 그러자 흰 빛의 입자들이 선을 그리며 천여운의 눈으로 청옥석 비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기부터 시작해 모든 것이 동일한 형태였다. ‘나노, 공동의 바닥에 흔적들 보이지? 저곳 중에 혹시 이 비석이 놓여 있는 자리가 있었는지 분석할 수 있어?’ [청옥석 비석과 바닥의 흔적들을 대조해서 비교해보겠습니다.] 나노의 목소리와 함께 청옥석 비석의 입체영상이 하나에서 다섯 개로 늘어나며, 바닥에 있는 흔적들로 입체영상이 움직였다. 입체영상 청옥석 비석들이 전부 오각의 형태로 마주보게 바닥의 흔적들에 놓이는 순간 천여운의 눈이 커졌다. ‘크기가 동일하다.’ 놀랍게도 바닥에 남겨진 흔적의 크기와 청옥석 비석의 바닥의 크기가 동일했다. 그렇게 다섯 개로 나누어진 청옥석 비석의 입체 영상 중에 오각에서 남쪽 방향으로 향해 있는 흔적에 있던 것이 붉은 빛을 띠었다. [바닥의 흔적들과 대조했을 때, 일 층에 있던 비석이 원래 있었던 위치로 추정됩니다.] 천여운이 가까이 다가가서 바닥 쪽을 살피니 정말 그랬다. 청옥석 비석의 밑쪽의 작은 홈들이 눌린 자국이 공동의 바닥에 눌려서 남겨진 흔적들과 거의 동일했다. 약간 다른 점은 아무래도 비석을 끌고 나가면서 마모된 자국인 듯 했다. ‘서재의 이 층에 있던 비석도 구현해서 대조할 수 있어?’ [알겠습니다.] 나노의 목소리와 함께 시야로 비급 서재의 이 층에 있던 비석이 생겨나며 나머지 비어 있는 네 개의 흔적들과 대조되기 시작했다. 이 층에 있던 청옥석 비석은 서남쪽에 남겨진 흔적에서 붉은 빛이 흘러나왔다. 마찬가지로 바닥을 살펴보니 그 홈의 흔적들이 일치했다. ‘아아아.....여기였구나. 여기였어.’ 우연으로 발견한 것이었지만 청옥석 비석의 출처는 바로 이곳 야광주 공동이었다. 어째서 비석들을 옮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원래 있던 장소는 이곳이 틀림없었다. 생각해보면 다섯 청옥석 비석들을 굳이 마도관의 비급 서재의 층층마다 배치한 것이 의아하긴 했었다. 만약 이곳에 각 층마다 흩어진 비석들이 전부 있었다면 한 번에 천마 조사님의 심득인 절세검법을 익힐 수 있었을 지도 몰랐다. ‘그런데 이 석봉은 대체 뭐지?’ 한 가지 의문점은 공동 한가운데에 우뚝 서있는 이 석봉이었다. 청옥석의 비석들이 하나 같이 그것을 바라보는 형태로 놓아져 있는 것이 의문스러웠다. 천여운이 석봉의 가까이로 다가서서 그것을 살펴보았다. ‘그냥 세워 놓은 건가?’ 그렇게 석봉에 무언가라도 적혀 있을까 빙 둘러보는데, 둥근 석봉의 북쪽 방향에 손으로 새긴 글씨가 위에서 아래로 새겨져 있었다. [天魔劍功] “천....마....검....공!!!” 새겨진 글씨를 읽는 천여운의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렸다. 그리고 천마검공이라 적힌 글씨의 아래에는 청옥석 비석의 앞쪽인 시조의 글귀 밑에 있었던 것과 같은 작은 점들이 무언가를 형상하는 그림 같은 모양으로 찍혀 있었다. 18장 전화위복(轉禍爲福)(3) 마교의 정점인 교주를 생각하면 모두가 떠올리는 무공이 있다. 그것은 마도 최고의 절세신공이라 불리는 천마신공(天魔神功)이었다. 마교인들이라면 누구나가 알고 있는 천마신공의 위용은 마교를 떠나서 중원 삼대 신공이라 불릴 만큼 그 명성이 자자했다. 그런데 석봉에 적힌 글씨에는 천마신공이 아닌 천마검공이었다. ‘천마검공? 내공 심법? 아니, 검법인가?’ 천여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검공(劍功)이라고 표현하니 이것이 심법을 말하는 것인지 혹은 검법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무공이었다. 만약 내공심결이 아니라 검법이라고 해도 그 이름이 달랐다. 어릴 적 장 호위는 마교의 교주가 익히는 최고의 무공은 천마검법이라고 했었다. 대체 천마검공은 무엇이란 말인가? ‘청옥석 비석에 있는 절세검법의 이름인가?’ 가장 유력해 보이는 것은 청옥석 비석에 있는 검법의 이름으로 보였다. 비급 서재의 일 층에서 만났던 턱수염의 중년인이 청옥석 비석에 천마조사의 마지막 심득이 담겨 있었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새로운 이름을 붙이는 게 당연하다. 이 글씨도 조사님께서 새기신 거겠지?’ 절세검법의 검 초식이 천마검법보다 나중에 만든 것이라면 충분히 새로운 이름을 붙일 만도 했다. ‘나노. 석봉에 새겨진 글씨와 청옥석 비석의 앞면에 새겨져 있던 시조의 글씨의 필체를 대조할 수 있지?’ [네. 가능합니다. 분석 대조해보겠습니다.] 천여운의 시야에서 흰 빛의 입자가 일자로 선을 그리며 석봉에 새겨진 글씨를 스치고 밑으로 내려갔다. 필체의 분석이 끝난 나노의 목소리가 천여운의 머릿속에 울렸다. [분석 결과, 동일한 필체의 글씨입니다.] ‘조사님께서 직접 붙이신 이름이구나!’ 천마조사의 마지막 심득인 절세검법의 진정한 이름은 천마검공이었다. 여태까지 막연히 절세검법이라 명칭 했던 검법이 드디어 제 이름을 찾게 되었다. ‘그런데 이 구멍은 대체 뭐지?’ 석봉에는 시조의 글씨 밑에 있던 구멍과 흡사한 것이 파져 있었다. 시조의 글씨 밑에 있던 구멍들은 숫자를 의미했다는 것을 알아냈지만 아무래도 이 구멍들은 그것은 아닌 듯 했다. ‘그림 같은데?’ 구멍이 찍힌 모양이 뭔가를 그리고 있었는데 그 형태가 마치, ‘용?’ 용(龍)이 승천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상상 속의 신수인 용은 천지의 조화와 제왕을 상징한다. 시조에 숨겨진 운기 요결의 비밀을 풀지 못했다면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을 테지만, 이것에도 숨겨진 무언가 있을지도 몰랐다. ‘뭘까? 대체 뭘 말하는 거지?’ 천여운이 이를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위해 바닥에 앉았다. 바로 좌우 옆으로 청옥석 비석들을 입체영상으로 구현시켜 놓은 뒤, 용의 형상을 그린 구멍들을 대조해가며 비밀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그러나 비석의 앞면인 시조를 보든, 그 뒷면이 검흔들을 추출해서 보아도 어떠한 연관성을 찾기가 힘들었다. ‘이번에도 구멍의 숫자와 관련 있나?’ 한참을 고민하던 천여운이 용의 형태로 뚫린 구멍들의 숫자를 세어보았다. ‘하나, 둘, 셋......스물넷?’ 총 스물네 개의 구멍으로 용이 그려져 있었다. 스물네 개의 구멍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보았다. 반 시진 가량을 고민해보았지만 뭔가와 연관성을 붙일 만한 것이라고 해봐야 천마검공의 검 초식의 식들이 스물네 개로 이루어졌다는 것 외에는 없었다. ‘대체 뭘 말하는 거야?’ “하아....”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무리 뚫어지게 쳐다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승천하는 용이 의미하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분명 무언가가 있을 텐데. 대체 왜 용이 승천하는 모양으로 구멍을....아!’ 그 순간 천여운은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천장으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웃?” 천장을 쳐다보는 순간 수많은 야광주가 내뿜는 빛으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똑바로 쳐다보기에는 너무 밝아서 시선을 고정할 수가 없었다. 결국 곧바로 시선을 밑으로 내려야만 했다. ‘너무 눈부시다.’ 하나의 야광주만 있으면 어떻게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천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야광주는 눈으로 쳐다볼 수 없을 만큼 밝았다. 천여운이 이렇게 천장을 쳐다본 것은 용이 승천하는 모습에서 추측한 것이었다. 용은 승천해서 하늘로 올라간다. 그렇다면 이 구멍의 그림이 의미하는 비밀은 천장에 있을 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한데 천장을 쳐다보려고 싶어도 어두운 것 이상으로 너무 밝은 나머지 육안으로 판별해내기가 힘들었다. ‘역발상인가?’ 어둠이 아닌 빛으로 비밀을 숨겨놓았다. 천마가 남겼다고 추측되는 것들 중에서는 뭔가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없었다. 하지만 천여운에게는 천장을 쳐다볼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나노, 시야로 들어오는 빛을 조절할 수 있지?’ [광시야(光視野) 모드로 빛을 조절하겠습니다.] 천여운의 동공이 흔들리더니 수많은 야광주로 환하던 공동이 점차 어둡게 바뀌어갔다. 시야로 빛이 조절이 되면서 일어난 현상이었다. 강한 빛을 이겨낼 준비가 되자 천여운이 다시 한 번 고개를 들어보았다. “이럴 수가....” 천장을 쳐다본 순간 천여운의 입에서 놀라움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워낙 많은 야광주로 보이지 않았었는데, 그 많은 야광주들 중에서 석봉을 중심으로 원의 형태로 수백 개의 야광주들에 무언가 작은 글씨들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이었구나!” 용 형태를 이룬 점들의 비밀을 풀어내자 천여운의 입가로 미소가 흘러나왔다. 수백 개의 야광주들에는 무엇이 적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천마검공과 관련된 무언가가 숨겨져 있을 것이다. ‘나노, 글씨가 적혀 있는 야광주들만 전부 스캔 해줘.’ [알겠습니다.] 나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과 동시에 천여운의 동공으로 흰빛의 선이 스쳐지나가며 글씨가 새겨진 야광주들이 전부 스캔되었다. [스캔이 완료되었습니다.] ‘그럼 가까이에서 볼 수 있게 이쪽 벽에 입체영상으로 구현해줘.’ 천여운이 공동에 있는 넓은 벽면을 가리키며 명했다. [스캔한 야광주를 3D 입체 영상으로 구현합니다.] 나노는 그 명령을 충실하게 구현해냈다. 넓은 벽면으로 천장에 있던 글씨가 새겨진 야광주들이 원의 형태로 생성되었다. 천여운이 벽면으로 다가가 야광주에 적혀 있는 글씨들을 살폈다. “어?” 그런데 야광주에는 무언가 무공에 관련된 것이 적혀 있지 않았다. 오히려 야광주의 표면에는 시조와 같은 것들이 적혀 있었는데, 이것이 하나 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것도 그렇고, 이것도....이것도....뭐지?’ 살펴보는 야광주들의 대다수는 무공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문구들로 가득했다. 뭔가를 기대했는데 고작 이것뿐이자 천여운의 미간에 주름이 깊어졌다. ‘내가 뭔가를 놓친 게 있나?’ 적혀 있는 시조나 문구들을 하나하나씩 분석해 보면 답이 나올까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해도 이 정도까지 복잡하게 힘을 들이진 않았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 중에 숨겨진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천여운은 야광주들 중에 분명 무공과 관련된 것이 있으리라고 판단했다.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 관건이었다. 물론 여기서 굳이 수백 개나 되는 야광주들을 일일이 자신이 살펴볼 필요는 없었다. ‘나노, 혹시 이 중에서 무공 구결이나 그에 관련된 것이 적혀 있는 야광주들을 분리해낼 수 있어?’ [스캔해서 확인해보겠습니다.] 흰 빛의 선이 수백 개의 야광주들을 스쳐지나갔다. 그것은 천여운이 일일이 야광주들을 살펴보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스캔이 완료된 지 얼마 안 되어 나노가 목소리가 울렸다. [총 스물네 개의 야광주에서 심법의 구결로 추정되는 문구와 그림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심법?’ 심법이라는 말에 천여운의 눈이 커졌다. 그런데 대체 무슨 심법이기에 스물네 개로 나누어진단 말인가. 나노가 찾아낸 수백 개의 야광주들 중에서 스물네 개의 야광주들이 붉은 빛으로 표시되기 시작했다. 붉은 빛을 띠는 야광주들을 보며 천여운의 눈이 커졌다. “이건?” 놀라운 일이었다. 원으로 수백 개가 채워진 야광주들 중에 붉은 빛을 띠는 스물네 개의 야광주들은 승천하는 용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그것은 석봉에 새겨진 점들과 동일한 모양이었다. “승천하는 용이 이걸 말하는 거였구나! 이거였어!” 석봉에 숨겨진 비밀을 풀어낸 것에 기뻐한 천여운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가득 찼다. 그런 기쁨도 잠시였고 천여운은 얼른 스물네 개의 야광주에 적혀 있는 구결들의 내용을 살펴보고 싶었다. ‘나노, 나머지 야광주들을 전부 제외하고 스물네 개의 야광주만 남겨 놔줘.’ [알겠습니다.] 나노의 목소리가 끝남과 동시에 수백 개의 야광주들의 입체 영상이 흰 입자로 분해되며 사라졌다. 천여운이 남아있는 야광주들을 살펴보았다. 야광주들은 나노가 말했던 대로 심법으로 추측되는 구결들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여타의 내공심법이나 무천심법과 같은 것들이 아니었다. ‘뭐지?’ 야광주에는 심법의 구결이 적혀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초식의 운기 요결처럼 뭔가 동작을 취하면서 정해진 혈도로 내공을 운기 해야 했다. 천여운이 야광주에 새겨진 그림의 동작을 보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그것은 그가 익히 알고 있는 동작이었다. ‘천마검공의 식과 비슷하잖아?’ 천마검공의 초식을 펼칠 때의 식 중에 하나와 동일했다. 자신이 잘못 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머지 야광주들도 살펴보았다. 모든 야광주들에 새겨진 동작들을 살펴본 천여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럴 수가...천마검공의 식들이잖아.‘ 놀랍게도 야광주에 새겨진 동작들은 천마검공을 이루는 스물네 개의 식이었다. 그런데 이 식들에는 하나하나가 심법의 구결들이 있었는데, 그것이 승천하는 용의 머리부터 꼬리까지 순서대로 연결되어 있었다. ‘묘하다. 정말 묘해.’ 이게 정말로 심법이라면 정말 독특한 것이었다. 보통 심법의 운기 요결이라는 것은 가부좌를 한다거나 눕는다거나 하는 호흡이 편한 자세를 취하게 되는데 이것은 초식을 구성하는 식과 하나로 되어 있었다. ‘일단 해보는 수밖에 없나.’ 직접 해보지 않고는 알 수가 없었다. ‘나노, 용의 머리부터 꼬리까지 순으로 야광주에 새겨진 구결이랑 식의 동작을 전이해줘.’ [알겠습니다. 명령하신 대로 사용자의 뇌로 전이하겠습니다.] -치칙! 미세한 전격이 일어나며 천여운의 머리가 따끔해지며 구결들이 전이되었다. 나노의 전이로 통해 순식간에 식에 실려 있는 심법 구결들을 숙지한 천여운이 손가락으로 검지를 만들어 식의 첫 번째 동작을 취해보았다. ‘호흡을 하면서 심법의 요결대로 식에...’ 첫 번째 식과 함께 운기가 시작되었다. 그것은 한 동작에 그친 것이 아니라 모든 식들이 연결되어야 했다. 천여운이 스물네 개의 식들을 순차적으로 펼치며 야광주에 새겨진 심법의 요결에 적혀 있는 혈도로 운기 하여 내공을 순환시켜보았다. -고오오오! 처음 스물네 개의 식을 마친 순간 몸속으로 순환하던 내공이 운기 경로가 아닌 경맥들까지도 자극하며 전신의 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한 번 동작을 펼친 것에 멈추지 않고 천여운이 계속해서 스물네 개의 식을 계속해서 연달아서 펼치며 심법을 운기했다. 마치 무아지경에 빠진 사람처럼 말이다. 상승무공인 무천심법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빠르게 전신의 십사경맥을 자극하여 체내를 순환하는 강대한 에너지의 흐름에 나노는 이것을 분석하며 프로그램 데이터로 축적해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것일까? 한참 동안 스물네 개의 식을 반복하던 천여운이 그것을 멈췄다. 자신이 얼마나 운기를 했는지조차도 모를 정도로 심법에 빠져들었었다. ‘나노, 내가 얼마나 이러고 있었던 거야?’ [한 시진 동안 계속 움직이셨습니다.] ‘뭐? 한 시진씩이나?’ 가부좌를 틀고 운기한 것도 아니고, 한 시진 동안이나 식의 동작을 펼치면서 운기를 했다는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한 시진 동안 움직인 것치고는 힘들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신이 상쾌한 것도 모자라 내공의 순환이 훨씬 매끄러워진 느낌이었다. ‘동작을 펼칠 때마다 운기가 점점 빨라지는 느낌이었어.’ [실제로 에너지의 순환이 점점 빨라졌습니다.] 천여운의 체내에 있는 나노 머신들을 통해서 빠른 내공의 순환을 데이터로 기록한 나노였다. 나노가 말하는 에너지의 순환이 내공의 순환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천여운이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가볍게 체내의 내공을 끌어올려 보았다. “엇?” 평소보다도 내공의 움직이는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가볍게 운기를 했을 뿐인데 금방 전신으로 내공이 퍼져나갔다. 이것에 그치지 않고 천여운이 오른손으로 내공을 집중하자, 그의 손으로 빠르게 선명한 빛이 생겨나며 수기(手氣)를 형성했다. ‘빨라졌어!’ 절정의 경지에 올랐지만 기를 발출하는데 여전히 익숙하지 않았던 천여운이었다. 그런데 운기가 빨라지면서 기의 발출마저도 자유롭게 이루어졌다. 야광주에 새겨진 심법을 통한 운기 방식은 지금까지 운기의 중심이었던 무천심법과는 비교하기 힘들만큼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아아아! 이게 진정한 절세심법이로구나!’ 천여운이 몸을 파르르 떨며 감격을 금치 못했다. 이 내공심법을 연마한다면 얼마나 빠르게 성장할지 짐작하기 힘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기뻐하던 천여운이 마음을 추스르고 공동의 한가운데에 있는 석봉을 향해 다가갔다. [天魔劍功] 천마검공. 심법의 구결마저 얻어낸 천여운은 그제야 왜 검공이라 표현했는지 알 수 있었다. 천마검공은 말 그대로 검의 식과 초식, 심법이 하나로 이루어진 경이로운 무공이었다. ‘천마 조사님은 진정한 신인이시구나.’ 중원 무림을 통틀어 어떤 누가 이 세 가지를 하나로 모은 무공을 창안할 수 있을까? 식을 연마하면서 심법마저 함께 연공할 수 있는 천마검공은 모든 면에서 파격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었다. ‘조사님! 부족한 혈손의 절을 받으십시오!’ 천여운은 천마의 글씨가 새겨진 석봉을 향해 두 번의 큰절을 올렸다. 천마 조사가 남긴 기연을 자신이 얻게 된 것에 대한 예를 표하기 위함이었다. 절을 한 채로 한참을 가만히 있던 천여운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런 천고의 기연을 얻게 된 것은 정말 큰 행운이다.’ 천여운을 더욱 위기로 몰아서 죽이려고 했던 백오의 수작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연달아 기연들을 만들어냈다. 만약 이 사실을 백오가 알았더라면 복장이 터져서 죽을 지도 몰랐다. ‘후우, 이제 남은 일은 하나인가.’ 천여운이 석봉을 향해 다가가 자세를 낮췄다. 그것은 석봉에 남겨져 있는 천마검공의 식과 심법 구결을 찾을 수 있는 흔적들을 지우기 위해서였다. 비급 서재에 있는 청옥석 비석의 검흔들은 경비 무사들이 있으니, 지울 수 없었지만 폐쇄된 공간인 이곳에는 보는 눈이 없다. 자신처럼 나노가 없다면 천마 조사가 남긴 기연들을 발견하기 어렵겠지만 혹시나 다른 누군가가 행운을 얻어서 익히게 할 생각 따윈 전혀 없었다. ‘점만 지워도 되겠지.’ 천여운이 내공을 집중해 용의 형태를 하고 있는 점들을 지우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손이 닿는 순간 석봉에서 강한 진동과 함께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드르르르! 슈우우우! “뭐, 뭐야?” 알 수 없는 현상에 놀란 천여운이 석봉에서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원형으로 되어 있는 석봉의 끝에서 더욱 작은 석봉이 튀어나와 허공으로 치솟았다. -퐁! 쿵! 허공으로 치솟은 무언가가 천장에 있는 야광주와 부딪쳤다. 그와 동시에 천장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벽에 깊이 박혀 있던 야광주들의 일부가 공동의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투투툭! 쿵쿵쿵쿵! 워낙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당황스러워하던 천여운이 보법을 펼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야광주들을 피했다. 갑자기 날아오른 작은 석봉이 천장에 그리 세게 부딪친 것은 아니었는지, 바닥에 그리 많은 야광주들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 다행이라고 여기던 천여운의 눈이 커졌다. 아무 생각 없이 바닥에 떨어진 야광주들을 보았는데, 떨어진 야광주의 숫자가 놀랍게도 스물네 개였다. ‘설마.....’ 혹시나 하는 마음에 떨어진 야광주들을 향해 다가간 천여운의 인상이 굳어졌다. 그가 바라보는 야광주의 표면에는 천마검공의 식과 구결이 새겨져 있었다. 18장 전화위복(轉禍爲福)(4) 나노의 광시야 모드를 통해 다소 어려운 방법으로 천마검공의 심법을 얻어낸 천여운이었다. 그런데 석봉의 숨겨진 장치는 스물네 개의 야광주를 너무도 쉽게 공동의 바닥으로 내려오게 만들었다. 허탈하기 짝이 없었다. ‘.....하긴 이런 장치가 없다면 누가 이 초식을 얻을 수 있겠어?’ 재미있는 것은 이런 쉬운 방법을 누구도 행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공교롭게도 천여운이 한 방법을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기에 석봉의 기관 장치가 작동하지 않은 것이었다. ‘아!’ 천여운이 석봉의 글씨가 새겨진 앞으로 다가보니, 자신이 큰절을 했던 바닥의 일부가 밑으로 들어가 있었고 액체 같은 것이 새어나와 있었다. 손가락으로 찍어서 향을 맡아보니 아무래도 기름 같았다. ‘불이 붙도록 되어 있었나?’ 정교하게 만들어진 석봉은 발화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천여운이 절을 올리면서 바닥에 있던 기름이 석봉에 설치된 발화 장치의 심지를 적시게 되었고, 내공은 촉발제가 되어 불이 붙도록 만들었다. 언뜻 본다면 간단한 방법이었지만 쉽게 떠올리기도 힘들었다. ‘.....휴, 어떤 식으로든 얻으면 된 거지.’ 그래도 오히려 잘된 것일지도 몰랐다. 쉽게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 덕분에 천장에 있던 야광주들이 떨어졌으니 말이다. ‘석봉의 흔적만 없애는 것보다 더 확실히 할 수 있으니까.’ 천여운이 공동 바닥에 떨어진 야광주 중의 하나를 집어 들었다. 야광주들을 하나씩 부수기 위해서였다. “응?” 그런데 야광주를 집어들은 천여운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게 뭐지?’ 심법의 구결이 적힌 야광주의 표면의 반대쪽에도 무언가가 새겨져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천여운이 그것을 살폈는데 뭔가 울퉁불퉁한 선이 그려져 있었는데, 무엇을 나타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야광주가 박혀 있었기에 보이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이상하다.’ 천여운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혹시 하는 마음에 다른 야광주들도 살펴보았다. “엇? 여기도 있네.” 다른 야광주의 뒷면에도 울퉁불퉁한 선들이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먼저 보았던 것과는 형태가 달랐다. ‘대체 뭐야? 왜 이런 이상한 선 같은 걸 새겨놓은 거지?’ 야광주를 부수려고 했던 천여운은 생각을 바꿔서 바닥에 흩어져 있는 야광주들을 전부 들고 와서 한 자리에 모았다. 스물네 개의 야광주를 모아온 천여운이 심법이 새겨진 방향에서 반대로 뒤집어서 펼쳐놓았다. “음.....” 야광주들의 뒷면을 쳐다보는 천여운의 입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무언가 숨겨진 바가 있는 것일까 하고 보았는데 워낙 중구난방으로 선들이 울퉁불퉁하게 새겨져 있어서 그냥 낙서처럼 보였다. ‘뭘까?’ 앞면의 심법 구결들은 이해가 갔지만 이건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천마 조사가 남긴 것들 중에는 아무 의미가 없는 흔적은 없었기에 분명 무언가를 의미하는 것은 틀림없었는데 모르겠다. ‘검흔은 아닌데?’ 검흔으로 보기에는 새겨진 흔적의 선들이 너무 울퉁불퉁했다. 야광주의 뒷면에 새겨진 이 선들은 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모아놓은 야광주들을 한참을 살피던 천여운의 눈을 가늘게 떴다. “어?” 눈을 가늘게 뜨고 야광주들을 살피던 천여운이 일어나서 위에서 그것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앉아서 야광주들을 좀 더 가까이 붙여놓았다. 야광주들을 촘촘히 붙여놓은 뒤에 다시 일어나서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아!” 위에서 야광주들에 그려진 선을 내려다보자 마치 그것들은 하나의 지도처럼 보였다. 선들이 연결되지 않았지만 한 자리에서 모아서 내려다보니 확실했다. ‘위치의 순서가 안 맞아.’ 천여운은 그 자리에 앉아서 야광주들의 선들을 살펴가며 그것들의 위치를 맞춰보기 시작했다. 반 시진 가까이 야광주를 이리저리 옮기던 천여운이 드디어 이를 완성했다. ‘됐다!’ 울퉁불퉁한 선들은 교묘할 만큼 다른 야광주들과 맞물려져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다시 한 번 야광주들을 내려다보았다. ‘역시.....지도다.’ 놀랍게도 야광주들의 울퉁불퉁한 선 끝이 이어지도록 정렬을 맞춰놓자 하나의 지도가 완성되었다. ‘이 표시는?’ 중구난방으로 놓여 있을 때는 몰랐는데, 지도는 무언가의 위치를 나타낸 장보도였다. 지도에는 울퉁불퉁하게 그려진 선 이외에도 곧게 그어진 선들이 어딘가로 향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었다. ‘이런 게 숨겨져 있을 줄이야.’ 천마가 절세무공인 천마검공 이외에 이런 장보도를 남긴 이유가 무엇일까? 분명 무언가를 후인들을 위해 남긴 것은 틀림없었다. ‘그런데 여긴 어디지?’ 지도라는 것은 알았는데, 이 지도의 위치가 어디인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었다. 언뜻 보면 울퉁불퉁하게 선들이 그려진 것을 보면 특정한 지역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뭔가 동굴 내부의 지도 같기도 했다. 지도 외에는 어떠한 실마리도 없는 것이었다. 한참 동안 지도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천여운의 결론은 하나였다. ‘지금 당장에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이곳 구금동의 지도는 아니었다. 어딘가에 숨겨진 장소 같았는데, 당장에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나노, 지도를 스캔해서 저장해놔.’ [알겠습니다.] 천여운의 시야로 흰 빛의 입자가 선을 그리며 야광주로 이루어진 지도를 스캔했다. 스캔을 마치고 지도가 나노의 데이터에 저장이 되자, 천여운은 망설임 없이 원래의 목적을 실행했다. -콰직! 야광주들의 강도도 단단했지만 청옥석에 흔적을 남기는 천여운의 완력과 절정의 내공을 견딜 수가 없었다. 야광주들을 하나씩 부순 천여운은 부서진 파편들을 돌가루가 될 때까지 발에 내공을 실어서 밟았다. 그렇게 잘게 부서진 돌 파편의 가루들을 모아서, 작은 석봉이 천장에 날아가면서 위쪽이 비어버린 석봉 안에 그것들을 전부 넣어서 흔적들을 완전히 없앴다. 이로써 공동에 숨겨져 있던 모든 천마 조사의 심득과 장보도로 보이는 비밀지도는 온전히 천여운의 것이 되었다. 천여운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신이 이곳으로 들어왔던 환기구 통로를 통해 다시 구금동의 좁은 동굴로 돌아갔다. 이날 천여운은 면벽 수련의 처분을 받은 이래로 가장 기분 좋게 잠이 들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지나 천여운이 구금동에 갇힌 지 나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천여운의 면벽 수련이 끝나기까지 하루가 남았다. 나흘이라는 시간 동안 마도관에는 많은 변화들이 일어났다. 천여운이 구금동으로 보내지기 전만 하더라도 노란 명찰을 얻어낸 조장이라고 해봐야 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연과 도마종의 후보자인 천유찬뿐이었다. 그러나 나흘이라는 시간은 뛰어난 무재를 지닌 생도들에게는 칠마검을 충분히 파악할 만한 시간이었다. 마권종의 고왕흘이 우려했던 것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천여운이 미처 나오기도 전에 대부분의 노란 명찰들은 조장 급의 실력을 지닌 생도들이 전부 차지하고 말았다. 그런데 노란 명찰을 획득하여 조장이 된 생도들은 총 열한 명뿐이었다. 총 열일곱 명이 조장의 칭호를 가질 수 있지만 어째서 고작 열한 명만 조장이 되게 된 것일까? 그것은 세 명의 조장들로 인해서였다. 노란 명찰을 가질 수 있는 숫자에는 제한이 없었다. 그 규칙에 숨겨진 의도를 파악한 세 사람은 과감하게 노란 명찰을 수집하는 수준에 이르게 된다. 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연이 단 하나의 노란색 명찰. 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유찬이 총 네 개의 노란색 명찰. 검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경운이 총 두 개의 노란색 명찰. 사무종의 칠백 번 생도인 사마착이 총 두 개의 노란색 명찰. 그 외에 이번에 지급된 마룡단을 복용하게 되면서 절정의 초입에 이른 일곱 명의 조장 급의 실력을 지닌 생도들이 노란 명찰을 하나씩 얻어냈다. 천유찬, 천경운, 사마착 이 세 사람의 생도들이 하나가 아닌 여러 개의 노란색 명찰을 획득하면서 총 다섯 명의 조장의 자리가 사라지게 된 것이었다. 의외라면 현마종의 후보자인 천무연은 처음 획득했던 노란 명찰 이외에 다른 것을 탐내지 않았다. 이렇게 열여섯 개의 노란 명찰이 조장 급 생도들의 손에 넘어가고 유일하게 남은 명찰이라고 해봐야 선임 무공 교두인 호진창의 것뿐이었다. 문제는 이 호진창의 노란 명찰만큼은 누구도 빼앗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누가 초절정의 고수에게서 이것을 획득할 수 있을까? “어이가 없는 상황이네요.” 허봉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혀를 내둘렀다. 이미 생도들 사이에는 세 사람이 노란 명찰을 대거 수집한 것이 소문이 나있었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그들을 비난하거나 노릴 수가 없었다. “그만큼 실력이 뛰어나니깐 가능한게 아니겠나.” 고왕흘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세 명은 유독 다른 생도들부터 훨씬 뛰어난 무위를 지녔다. 소문으로는 이 세 생도는 그 무위가 완숙한 절정의 경지에 이르거나, 절정의 극(極)에 이르렀을 지도 모른다고 알려져 있었다. 더군다나 오래 전부터 각자를 따르는 세력을 구축한 상태였기 때문에 함부로 건드리기도 힘들었다. “하마터면 저희도 위험할 뻔 했죠.” 금문종의 자우민이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천여운이 조장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구금동에 갇히면서, 일곱 생도들은 졸지에 일반 생도로 돌아가면서 망연자실한 상황이 발생해버리고 말았다. “흥! 어쩌면 다행일 수도 있지. 걸러낼 녀석들을 걸러냈으니까.” 호가검종의 오종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오종의 말에 칠마검의 훈련을 위해 모인 생도들의 표정에 묘한 분노가 서렸다. 그것은 이곳에 모여 있는 생도의 숫자가 여섯 명이었기 때문이었다. “길이 다른 게지.” 고왕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식으로 기회주의자처럼 행동하면 다른 조에서도 잘 살아남을지나 모르겠네요.” 허봉이 실망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천여운이 구금동에 갇히는 그 날 오후, 일곱 수하들 중에 두 명의 이탈자가 발생하고 말았다. 그것은 팔 조에서 천여운의 수하로 들어왔던 웅천과 호대명이었다. 천여운이 독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종섬의 단전을 파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던 두 사람이었다. 이 같은 모습을 내심 불안해했던 허봉이었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천여운의 처분이 결정되자, 그들은 망설인 없이 조에서 이탈했다. '미안하다. 우리도 함께하고 싶지만 왠지 가망이 없어 보여.' 당연히 삼 단계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옳은 전략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단순히 조원으로 들어왔다면 모를까, 천여운의 수하가 되기를 자청했던 자들이 망설임도 없이 주군을 저버리고 나간 것에 남은 다섯 명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두 명이 이탈했는데 이곳에 있는 생도들은 여섯이었다. 한 명은 다름 아닌 십팔 번 생도인 백기였다. 분위기가 너무 처지자 허봉이 자리에 일어나서 다른 생도들에게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자자. 너무 그리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요. 못된 녀석들 두 명이 나가고 대신 일당백인 백기가 들어왔잖아요.”. “.....그리 치켜세우지 마라.” 바위에 걸터앉아 있던 백기가 멋쩍은 얼굴이 되었다. 그런 백기의 모습에 고왕흘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닐세. 백기 자네가 아니었다면 우리도 그렇고 주군도 더욱 위기에 처했을 걸세.” 고왕흘이 이렇게 백기를 치켜세워주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백기의 오른쪽 가슴에 달려 있는 노란색 명찰 때문이었다. 백기는 사흘 전 무공 교두를 꺾고 노란색 명찰을 얻어냈다. “맞아. 백기가 아니었다면 하마터면 조원들이 뿔뿔이 흩어질 뻔했잖아. 우린 많이 고마워하고 있다고.” 오종도 고왕흘의 말에 동의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기가 그들을 찾아와 그 제안을 하지 않았다면 천여운의 수하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오매불망 주군을 기다려야 했을 지도 몰랐다. 마도관의 관주의 처분이 있던 날 백기가 그들에게 나타나 제안을 했었다. ‘칠 번 생도에게 큰 빚을 졌다. 그를 돕고 싶다.’ 백기는 자신을 도운 대가로 천여운이 처분을 당했다는 생각에 그에게 너무도 많은 빚을 졌다고 생각했다. 천여운이 미독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그는 어쩌면 죽었을 지도 모른다. 밤새 많은 고민을 하게 된 백기는 인생에 있어서 중대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한 번 잃을 뻔 한 목숨이다. 평생 은혜를 갚아도 모자란 것이 아닌가.’ 그렇게 백기는 천여운을 따르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처음에는 다음날 직접 천여운을 만나서 그를 따르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려 했지만, 그가 구금동에 갇히면서 그것이 무산된 것이었다. “그가 날 받아줄지 모르겠군.” “주군께서 자네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면 도울 이유가 없지 않았겠나.” “그런가.” 백기에게서 모든 전후사정을 듣게 된 고왕흘과 생도들은 그의 합류를 반겼다. 한 명이라도 뛰어난 인재가 모일수록 천여운의 세력이 점점 강대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합류하게 된 백기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노란 명찰을 미리 확보해두었다. 천여운이 구금동에서 닷새나 있기 때문에 대비를 한 것이었는데 그들의 불안한 예측은 들어맞게 되었다. “아무튼 우린 자네의 합류를 반기네.” “맞아.” “주군께서도 반길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다른 생도들의 격려를 받으며 백기가 작게나마 미소를 띠었다. 그렇게 날이 저물어가며 모여서 칠마검을 훈련하던 다섯 생도들은 저녁 식사를 위해서 마도관의 식당으로 향했다. “식사를 거를 건가?” “원래 점심을 먹지 않고 저녁만 먹는데. 너희들 덕분에 점심 식사를 해서 말이야.” 평소의 백기는 점심을 거르고 개인 연공실에서 훈련을 했다. 그런데 이들과 합류하면서 같이 훈련을 하게 되면서 개인적으로 훈련을 할 시간을 많이 빼앗기게 되었다. “흐음, 그렇다면 나도 식사를 걸러야 겠군.” “네가?” 고왕흘의 말에 백기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며칠 동안 같이 점심 식사를 했었는데, 고왕흘은 근육의 거구에 걸맞을 만큼 그 식사량이 어마어마했다. 다른 생도의 세 배 가까이는 먹어댈 만큼 식탐이 강한 그가 식사를 거르겠다니 황당했다. “일단은 자네가 임시라도 조장을 맡으니 보호해야 할 것이 아닌가.” 식사를 거르고 싶진 않았지만 백기를 혼자 둘 수 없다고 생각한 고왕흘이었다. 노란 명찰로 인해 워낙 어떠한 수작이 일어날지 모르는 마도관이었다. 그러한 고왕흘의 걱정에 백기가 고개를 저었다. “곧장 개인 연공실로 갈 거니까 너무 걱정 마. 어차피 연공실에서 나설 때는 모두가 함께 숙소로 돌아가지 않나.” “그거야 그렇지만.” “괜찮으니깐 식사를 하도록 해.” 우려하는 고왕흘의 걱정에도 백기는 괜찮다는 말과 함께 혼자서 개인 연공실 방향으로 가버렸다. 다른 것에서는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고왕흘이었지만 워낙 식탐이 강했기에 고민을 하자 오종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쯧, 그냥 나와 허봉이 따라갈 테니 너는 식사를 하도록 해.” “오오! 그렇게 해줄 수 있나?” 고왕흘의 얼굴에 화색이 띠었다. “네 말대로 일단은 임시라도 조장이잖아.” “고맙네! 그럼 백기를 부탁하네.” 식탐으로 인해 고민에 빠져 있던 고왕흘은 기분 좋게 부탁하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오종을 따라서 백기를 뒤따라야 하는 허봉의 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다. ‘......내 의견은 없는 거냐?’ 허봉도 밥이 먹고 싶었다. 19장 이 명찰은 네 것이다(1) 혼자서 연공실 건물로 향하는 그의 뒤로 오종과 허봉이 급하게 달려와 따라잡았다. 백기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식사들 안 해?” “식사야 한 끼 거른다고 죽겠나. 다~네가 임시 조장이라서 따라온 거야. 어디 가서 두드려 맞게 할 순 없잖아?” “......그렇게 걱정이 많아서야 칠 번 생도가 나오면 밥도 제대로 못 먹겠군.” 백기의 무뚝뚝한 목소리로 하는 농담에 오종이 피식하고 웃었다. 반면 허봉은 말없이 인상을 쓰고 따라갈 뿐이었다. 의견도 물어보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이 따라오라고 한 것에 대한 무언의 시위였다. ‘흥!’ 오종도 그것을 알기게 헛기침을 하며 일부러 모른 척 했다. “흠흠.” 그렇게 그들은 개인 연공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백기의 경우는 내공이 일 갑자에 약간 미치지 못하는 절정의 초입이었지만, 절정의 실력에는 포함되었기에 격세석 연공실이 개방되었다. “맞은편 건물이라 따라오진 않아도 되는데.” “혹시 모르지 않나.” 개인 연공실 건물로 들어가도 되는데, 오종과 허봉은 맞은편의 건물까지 따라왔다. 말로는 괜찮다고 하면서 백기는 이런 배려에 내심 고마움을 느꼈다. 십이 조에서 생도들과 거리를 두고 생활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세 명은 길을 따라 맞은편 건물의 앞쪽까지 올라왔다. “이제 다 왔으니까 굳이 여기까....응?” 말을 다하기도 전에 백기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것은 주변에서 느껴지는 많은 인기척들 때문이었다. “왜 그래?” 백기의 반응을 이상하게 생각한 오종이 의아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제 막 일류고수의 경지에 이른 오종은 인기척들이 움직여서야 이를 알아챌 수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격세석 연공실 건물의 뒤편에 숨어있던 자들이 건물의 앞쪽으로 몰려들었다. 날이 저물어서 어두웠지만 얼추 스무 명 정도 되어 보이는 생도들이었다. ‘이런.....’ 오종과 허봉의 눈빛에 당혹감이 서렸다. 그들은 작정하고 자신들을 기다렸는지 손에는 지급받았던 목검들이 들려 있었다. 인원에서 밀린다고 생각한 오종이 백기에게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도망쳐야 한다고 눈짓을 했다. ‘여기서 기다렸다는 건 뭔가 수가 있다는 말이겠지?’ 백기 역시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들이 몸을 돌려서 뒤쪽으로 경공을 펼치려는 순간 또 다른 무리의 생도들이 우르르 몰려와 퇴로를 가로막았다. “엇?” 익숙한 얼굴에 허봉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퇴로에는 열 명의 생도들이 가로막고 있었는데, 그 맨 앞에는 날카로운 눈매에 앞머리를 뒤로 빳빳하게 넘기고 있는 한 생도가 있었다. 그는 바로 육 조의 조장이었던 백팔 번 생도, 하일명이었다. ‘하일명?’ 이 단계 시험인 조별 진형 대결에서 개인의 힘만으로 타 조의 진형을 박살내는 기상천외함을 보여주었기에 웬만한 생도들은 그를 전부 기억했다. 얼마 전에 개인 연공실에서 천장이 부서지는 불의의 사고를 당해서 의무실에 입원했었다고 알았는데, 퇴원한 모양이었다. “너희들?” 퇴로를 막고 있는 생도들의 모습에 백기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전 십이 조의 생도들이었다. 뜻밖의 얼굴들의 등장에 백기의 흉터가 그어진 눈동자의 당혹감이 서렸다. “조장. 요새 신수가 좋소.” “원래의 조원들을 버리고 다른 조원들과 함께 하니 좋은가 보지?” 전 조원들의 빈정거리는 말투에 백기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들과는 이 단계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서 지내온 관계였고, 독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종섬을 따르는 이들이 많았기에 거리를 멀리했었다. “지금 우리를 이렇게 포위한 이유가 뭐지?” 오종이 자신들을 포위한 생도들을 향해 외쳤다. 어차피 도망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진짜 목적을 알아야 했다. 물론 짐작 가는 것은 있었다. “킥, 그걸 몰라서 묻는 거냐?” 퇴로에 있는 생도들의 선두에 있던 하일명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는 백기의 오른쪽 가슴에 달고 있는 노란색 명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 노란 명찰. 넘겨라.” 역시 목표는 노란 명찰이었다. 십이 조의 조원들은 며칠 동안 백기가 유일하게 혼자 있는 시간이 저녁 무렵 연공실을 사용하는 때라는 것을 알고서 이렇게 패거리를 모아서 노린 것이었다. 격세석 연공실의 앞쪽에 있는 스무 명은 육 조의 생도들이었고, 퇴로를 막고 있는 이들은 십이 조의 생도들이었다. “그 말을 내가 들을 거라고 생각하나?” 백기가 천천히 보폭을 벌려 언제든 출수할 준비를 하며 말했다. 그 말에 하일명이 입 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듣지 않으면 좋은 꼴을 보지 못할 텐데. 아아, 아닌가. 그냥 줘도 곱게 보낼 생각따윈 없지만 말이야.” -으득! 하일명이 뭐가 그리 기분이 좋지 않은지 이빨을 갈았다. 그가 이렇게 분노를 불태우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며칠 전에 있었던 개인 연공실에서의 불의의 사고 때문이었다. 천여운이 본의 아니게 연공실의 바닥 벽을 뚫는 바람에 하일명은 머리를 다쳐서 뇌진탕 증세가 오래가는 바람에 한동안 의무실에 입원해 있었다. ‘헛?’ 의무실에 입원해보니 가관도 아니었다. 자신이 복면을 쓰고 습격했던 천무금을 비롯해, 갈비뼈가 부러진 무공 교두 상문여,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단전이 파괴된 천종섬까지 왔다. 자신을 비롯한 의무실 대다수가 천여운의 작품들이었다. ‘.....뭐야 이 새끼.’ 도대체 천여운 그놈이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흉흉한 의무실 분위기에 입을 다물고 조용히 지내야만 했다. 물론 제일 큰 이유는 천무금의 눈에 띠어서 괜히 기습을 했던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망할!’ 그렇게 힘든 의무실 생활을 끝내고 어제 오전에 퇴원을 하게 되었는데, 덕분에 다른 조장 급의 생도들보다도 늦게 노란 명찰 획득에 들어가야만 했다. 마룡단을 흡수하고 내공이 늘어서 절정의 초입에 이른 하일명은 자신감에 차서 남은 노란 명찰을 가진 단 한 사람을 찾아갔다. 그는 바로 선임 무공 교두인 호진창이었다. 나름 의무실에서 며칠 동안 칠마검을 분석했던 하일명이었지만 초절정의 고수인 호진창을 감당해낼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빌어먹을 선임 무공 교두!’ 처참하게 깨진 하일명은 하루 동안 운기조식만을 해야 했다. 단 하나의 노란 명찰을 제외한 모든 명찰들이 생도들의 손에 넘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하일명에게 남은 선택지는 오직 하나였다. 타 조의 노란 명찰을 빼앗는 것뿐이었다. ‘어떤 조를 노려야 하지?’ 그렇게 고민하던 차에 전 십이 조의 생도들이 하일명에게 합작을 제안했다. 자신들과 힘을 합쳐서 노란 명찰들을 빼앗자는 것이었는데, 그 일 목표가 바로 백기였다. ‘다른 조보다도 인원이 덜 모여서 훨씬 상대하기도 쉽다.’ ‘오호. 그래?’ 대다수의 조장 급의 생도들은 이미 조원들을 거의 모은 상태였다. 아직까지 조원들의 반을 채우지 못한 조는 천여운의 수하들이 결집한 백기 조뿐이었다. ‘그 구금동에 갇힌 칠 번 생도의 부하 녀석들이 모인 조라서 그가 나오길 기다리느라 아직 조원들을 전부 모으지 않은 것 같다.’ ‘좋아. 함께 하지.’ 두 번 생각해볼 가치도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두 차례 당한 것 덕분에 천여운에게 복수하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했던 하일명에게는 이익에 부합되는 합작이었다. “네놈들 그 빌어먹을 칠 번 생도 놈의 따까리들이라지?” 저들이 만약 천여운과 관련이 있는 녀석들이라면 그들의 노란색 명찰을 빼앗는 것이야 말로 최고의 복수라고 생각한 하일명이었다. “뭐? 따까리?” 따까리라는 말에 오종을 비롯한 허봉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천여운의 수하들이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비하하는 말에 기분이 나빠진 그들이었다. “네놈들은 오늘 잘못 걸렸어.” 하일명은 그들에게 노란 명찰만을 뺏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팔다리라도 부러뜨려 놓을 생각이었다. 이미 표정에서부터 그런 악의가 느껴졌기에 백기는 고민이 되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아무리 자신이 절정을 앞둔 무위라고는 하나, 지금 그들을 포위하고 있는 생도들 역시도 마룡단을 복용하고 일류의 내공을 지녔다. 그런 이들이 서른 명씩이나 되었기에 어떻게 반전을 꾀할 수 있는 숫자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하일명에게서 풍겨지는 느낌이 절대로 하수가 아니었다. 적어도 절정의 초입에 이른 것이 틀림없었다. ‘모두가 당하면 어떻게 해볼 틈이 없다.’ 명찰을 빼앗기지 않게 혼자서라도 탈출해서 이목이 많은 식당 쪽으로 도망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오종을 비롯한 허봉이 당하고 만다. 백기가 오종에게 전음을 보냈다. [오종. 내가 노란 명찰을 넘길 테니, 넌 허봉과 탈출해라.] [뭐? 너는 어쩌고?] [어차피 모두가 도망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어떻게든 저들을 막아 보겠다.] [무슨 소리야! 함께 해야지!] [바보 같은 소리하지마. 여기서 노란 명찰을 빼앗기면 다시 조가 분해된다. 그렇게 되면 내일 칠 번 생도가 구금동에 나와도 모든 것이 무산된다.] 아직까지 단 하나의 노란 명찰이 남았지만 그것은 모두가 포기한 자리였다. 초절정의 고수를 상대로 빼앗는 것은 불가능 그 자체였다. 백기의 일침에 오종이 고민을 하다 쓰라린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이 같은 말을 허봉에게도 전음을 보냈다. ‘흥. 뭔가 수작을 부리나 보군.’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는 것에서 전음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하일명이 손짓으로 공격하라고 표시했다. 이에 생도들이 일제히 백기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칫!” 백기가 거친 소리를 내뱉으며, 가슴에 있던 노란명찰을 뜯어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넘겼다. “나?” 원래는 오종에게로 넘기기로 했는데 어쩌다보니 허봉에게 넘어갔다. 명찰을 넘긴 백기가 신형을 튕겨 하일명이 있는 쪽을 향해 경공을 펼쳤다. 유일한 퇴로가 있는 방향이 그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먼저 앞서서 달려든 그의 십이 조 생도들이 망설임 없이 목검을 휘둘렀다. ‘내게 조장으로서 섭섭했다면 미안하다. 하지만.....’ 이렇게 더러운 수작을 부리는 것은 용서할 수 없었다. 백기의 발이 수십 개의 음영을 만들어내더니 생도들에게 쇄도했다. -파파파파팍! 과연 내공의 거의 절정에 이른 백기의 초식은 호진창과의 대결을 펼칠 때보다도 한층 그 위력이 강해져 있었다. 각자가 방어 초식을 펼쳐보았지만 오히려 백기의 발에 실린 각기(脚氣)에 의해 목검들이 부러지거나 발차기에 맞고 바닥을 뒹굴었다. -퍼퍽! 콰직! “크헉!” “엇! 내, 내 목검!” 목검을 부러뜨리지 말라고 마도관주가 신신당부했었다. 확실하게 상대를 밀어붙이려고 가져온 목검이 부러지자 생도들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반면 하일명은 백기의 발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각기에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아직 선명하지 않은 것을 보면 자신과 동급의 무위였다. ‘절정이라 이거지?’ 순식간에 앞서 공격해온 세 명의 생도들을 쓰러뜨린 백기는 곧장 하일명을 향해 각법을 펼치며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전음으로 외쳤다. [이때다! 도망쳐!] 백기의 전음이 들리자 오종과 허봉이 쓰린 얼굴로 정면을 향해 경공을 펼쳤다. 백기가 생도들을 쓰러뜨리고 이동한 경로가 유일하게 비어있는 퇴로였다. 두 사람이 교묘하게 그 틈을 통과했다. -슉슉! 파란 두건이 펄럭거리며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들이 빈틈을 통과해 대립하고 있는 백기와 하일명을 지나쳐 도망을 시도하자 생도들이 외쳤다. “잡아! 저 놈이다! 저 대머리 놈이 그걸 가지고 있어!” “이런 미친놈들이 누가 대머리라는 거얏!!!” 도망치던 허봉이 대머리라는 말에 발끈해서 소리 질렀다. 미처 몰랐는데, 경공을 펼치느라 파란 두건이 벗겨지면서 솜털이 자라다 만 민둥 머리가 드러나버린 허봉이었다. “대머리 거기서!” “빌어먹을!” 경공이 느린 허봉을 생도들이 따라잡으려고 하자,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오종이 몸을 돌려 자신에게로 노란 명찰을 넘기라 했다. “받앗!” 다급히 명찰을 받아든 오종이 그가 따라잡힐 걸 걱정해 소리쳤다. “허봉! 무조건 달려!!!” “알아요!” 아무리 허봉이라도 그것을 모를까. 지금 잡히면 저들의 기세로 보아 뼈도 못 추릴 게 틀림없었다. 허봉은 절대로 붙잡히지 않기 위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젖 먹던 힘까지 내공을 짜내, 마도관의 식당 쪽을 향해 경공을 펼쳤다. 그렇게 한참을 내달리던 허봉은 식당 앞쪽에 도착해서야 알아채고 말았다. 노란 명찰을 넘긴 후로 아무도 그를 쫓지 않았다. “.......이런 십할.” 땀으로 젖은 허봉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욕을 내뱉었다. 19장 이 명찰은 네 것이다(2) 망연자실해 하던 것도 잠시였고, 허봉은 다급하게 식당으로 들어갔다. 동료들을 위기 속에 놔두고 혼자만 탈출했다는 생각에 무엇을 고민할 겨를이 없었다. 식당으로 뛰어 들어간 허봉은 고왕흘을 비롯한 동료들을 찾았다. ‘아!’ 한참을 둘러보던 그는 식당의 우측 편에 모여서 식사를 하고 있는 동료들을 발견했다. 허봉은 얼른 그들에게 뛰어갔다. 벌써 몇 그릇 째 밥을 먹고 있던 고왕흘이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허봉, 자네 왜 그렇게 땀을 흘리고 있나?” “헉....헉...지금 당장 연공실 건물 쪽으로 가야 합니다.” “대체 무슨 일인가?” 호흡조차 가다듬지 못하는 허봉의 모습에 뭔가 큰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한 고왕흘과 생도들은 쥐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기습....헉....기습이 있었습니다. 지금....백기와 오종이 그들과 싸우고 있고요.” “이런!” 우려하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고왕흘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그 자리에서 의자를 박차고 밖으로 뛰어나가 버렸다. 다른 생도들 역시도 다급히 그 뒤를 따라 나갔다. 고왕흘은 거구의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게 빠르게 경공을 펼쳐서 가장 먼저 개인 연공실 건물 쪽으로 앞서갔다. 그렇게 개인 연공실 건물에 도달한 고왕흘의 얼굴이 굳어졌다. 연공실을 올라가는 언덕 쪽에서 백기가 왼쪽 허벅지에 피를 흘리며 서있었고, 오종으로 보이는 생도가 기절했는지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문제는 이들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앞에는 열두 명의 생도들이 서있었는데, 그 앞에 대장처럼 팔짱을 끼고 서있는 생도는 다름 아닌 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유찬이었다. ‘큭! 천유찬 저 자가 기습을 한 거였나.’ 현재 마도관의 생도들 중에서 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연과 더불어 정점이라고 불리는 자가 버티고 서있으니, 아무리 호탕한 고왕흘이라고 해도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위기에 처한 동료를 내버려둘 순 없었다. “이게 무슨 짓인가!” 고왕흘이 일갈을 지르며 나타나 백기와 그들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이어서 자우민을 비롯한 마칠, 허봉이 경공을 펼치며 나타났다. ‘엇? 오 번 생도?’ 허봉은 그렇게 많던 생도들이 전부 사라지고 이번에는 천유찬이 자신의 수하들을 데리고 서있는 모습에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의 등장에 천유찬이 특유의 가벼워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에구구, 방해꾼들이 등장했군.” “누가 방해꾼들이라는 건가! 이렇게 다수가 기습을 해놓고도 그런 소리를 하다니!” 고왕흘이 상기된 얼굴로 외치자 천유찬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이에 뒤에 서있던 백기가 고왕흘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아니야. 우릴 습격한 건.” “응?” 허봉 역시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저들이 이렇게 대치한 상태로 버티고 서있는 모습을 보면 앞서 하일명들과 같은 목적이 아닐까? 더군다나 그는 생도들 중에서 과도하게 노란색 명찰을 취한 인물이었다. 경계심이 가득한 그들의 눈빛에 천유찬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쯧, 조용히 이야기하기는 글렀군. 아무튼 백기 나한테 빚을 졌으니 잘 생각해보라고. 어차피 명찰을 빼앗겼으니 더 이상 기회도 없으니 말이야.” 나중에 등장한 그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천유찬의 말에 백기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도움을 받았지만 내 생각은 변함없다.” “뭐, 아직 시간은 충분하니까 천천히 생각해봐.” 그 말을 끝으로 천유찬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수하들을 데리고 숙소 쪽으로 가버렸다. 천유찬이 사라지자 긴장의 끈이 풀렸는지 백기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고왕흘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상처는 괜찮나?” 백기의 바지의 왼쪽 허벅지가 피로 젖어 있었다. 백기가 괜찮다며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괜찮아. 깊게 베이지 않았어. 그보다도 노란 명찰을 빼앗기고 말았다.......미안하다.” 오른쪽 가슴에 달고 있던 노란 명찰이 있던 자리는 뜯겨진 옷 자국만 있을 뿐이었다. 그것이 어찌나 분했는지 백기가 참담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연이어 경공을 펼친다고 얼굴이 창백해진 허봉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오종의 상태를 살폈다. 백기처럼 피를 흘리진 않았지만 꽤 많이 얻어맞아서 기절한 듯 했다. 입고 있는 옷은 수많은 발자국에서부터 온통 흙 먼지투성이었다. “빌어먹을!” 허봉이 기절한 오종의 오른손을 보며 눈시울이 빨개져서 소리를 질렀다. 오종의 오른손가락들은 전부 꺾여서 뒤로 돌아가 있었고, 손등이 새파랗게 멍들어서 퉁퉁 부어있었다. 노란 명찰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어떻게든 버틴 모양이었다. 손가락이 전부 이 꼴이 되도록 말이다. “크흑! 차라리 내가 들고 있었어야 했는데!” 그 상황에서는 오종의 판단이 옳았지만, 그의 처참한 몰골을 보니 모든 것이 자신의 탓처럼 느껴지는 허봉이었다. 자우민이나 마칠 역시도 분에 겨운 듯이 붉게 상기된 얼굴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고왕흘이 굳어진 인상으로 백기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체 어찌된 일인가?” “......육 조의 조장이었던 하일명과 다른 생도들의 습격을 받았었다.” 백기가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허봉이 오종에게 노란 명찰을 넘기면서 그들을 노렸던 모든 생도들의 목표가 바뀌었다. 노란 명찰에 굶주린 스무 명에 이르는 생도들이 작정하고 따라붙으면서 결국 오종은 붙잡히고 말았다. 그리고 결과는 보는 그대로였다. “나는 백팔 번 생도와 겨루고 있었지.” 이번 마룡단을 섭취하면서 하일명의 내공은 절정의 초입에 이르러 있었다. 그러나 막 절정의 초입에 이른 그보다도 절정의 무위를 앞두고 있는 백기가 내공도 그렇고 초식을 다루는 실력까지 훨씬 우월했다. 일대일로 계속 대결을 했다면 결과는 당연히 백기의 승리로 이어졌을 것이다. “중간에 다른 녀석들이 난입하더군.” 이 말을 하면서 백기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싸우는 도중에 중간에 난입에서 기습을 가한 것이 하일명의 수하들이 아닌, 십이 조의 생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빈틈이 생기면서 백기의 왼쪽 허벅지에 검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각법을 펼치던 도중에 다리를 다친 백기의 발이 묶이자, 하일명은 최후의 일격을 가해 그를 쓰러뜨리려고 했다. “그때 오 번 생도가 나타났다.” 우연히 자신의 수하들과 함께 이곳을 지나가던 천유찬은 하일명에게 백기를 넘기라고 했다. 백기는 예전부터 천유찬이 탐내던 인재였다. 예전에도 천여운과 승부를 내려했던 것을 천유찬에게 방해받았던 하일명은 당연히 이를 거절했다. ‘남 일에 끼어들지 말고 꺼져라!’ 이번에는 수적으로도 훨씬 우위였고 마룡단을 섭취하여 내공이 오르면서 자신감을 얻은 하일명이었기에 배짱 좋게 천유찬에게 꺼지라고 말했다. 그 말에 천유찬은 같잖다는 듯이 웃고는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다섯 명이나 되는 생도들을 몇 수만에 쓰러뜨리는 압도적인 무위를 보여주었다. ‘계속 해볼래?’ 그 몇 수만으로 실력 차를 확연하게 느낀 하일명은 결국 생도들을 이끌고 가야만 했다. 그런데 여기서 천유찬은 그들이 빼앗은 노란 명찰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목적은 오직 백기였기 때문이었다. 천유찬은 더 이상의 노란 명찰을 구하기 힘들다는 현실을 짚어주며, 백기에게 다시 한 번 자신의 수하로 들어오라는 제의를 했다. 백기는 재고할 것도 없이 당연히 그 제의를 거절했다. 그 와중에 중간에 고왕흘이 나타난 것이었다. “오 번 생도가 자네를 노릴 줄 몰랐군. 역시 소교주 쟁탈전 때문인가.” 백기는 생도들 중에서도 성장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인재였다. 당연히 소교주를 목표로 하는 천유찬이었기에 그런 백기가 탐날 수밖에 없었다. 의외인 것은 소교주에 가깝다고 알려진 두 사람 중에 한 명이 이렇게까지 노리는데도 백기의 완고한 의지에 내심 고왕흘은 놀랐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노란 명찰을 빼앗겼으니, 이제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는게 문제지. 제길!” -쿵! 이야기를 하면서 더욱 분에 겨웠는지 백기가 애꿎은 바닥에 주먹을 내리쳤다. 현재로써 노란 명찰을 획득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선임 무공 교두 호진창을 꺾고 획득하거나, 습격을 당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조를 노리는 것이었는데 현실적으로 둘 다 힘들었다. 그런데 누가 과연 초절정의 고수인 호진창을 꺾고서 노란 명찰을 획득할 수 있을까? 두 번째 방법 또한 고작 여섯 명뿐인 그들의 전력으로는 무리였다. 노란 명찰을 획득한 조는 그것을 철저하게 보호하기 위해 조원들이 무리를 지어서 돌아다녔기에 적어도 동등한 인원을 확보해야 가능성이 있었다. “우리도 생도들을 모아서 같은 방법을 쓰는 건 어떨까?” 습격을 당한 것에 분에 겨운 자우민이 이 같은 의견을 냈다. 그 말에 고왕흘이 잠시 고민을 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데 생도들을 그런 식으로 모으게 된다면 주군의 사람들로 조원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이익을 바라보는 조원들로 채워야 하지 않나.” 적어도 생도들의 도움을 받으려면 그들이 움직일만한 대가를 주어야 한다. 그들은 당연히 조장을 구하지 못했기에 조원이 되기를 원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들의 주군인 천여운의 사람이 아닌 삼 단계 시험을 통과하기 위한 조원들로 구성되고 만다. “하아......” 고왕흘의 말에 모두가 납득했는지 자우민이 한숨을 내쉬었다. 기습을 할 만한 임시 전력을 모을 수 없는 처지였기에 답답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모두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고왕흘이 목소리에 힘을 담아 그들에게 말했다. “무작정 포기할 순 없네!” 고왕흘의 말에 백기가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물었다. “포기하지 않으면 어쩌려고?” “.....아직 하나의 방법이 남지 않았나.” “선임 무공 교두의 노란 명찰을 말하는 거라면 너도 알 텐데. 그 분의 명찰을 빼앗는 것은 불가능해.” 호진창과 직접 겨뤄본 백기는 그가 얼마나 괴물 같은 자인지 알고 있었다. 현재 생도들의 수준으로는 어떻게 해볼 자가 아니었다. 다른 소교주 후보자들조차도 피할 만큼 압도적인 무력을 지닌 호진창이었다. “주군을 믿어볼 수밖에.” “주군? 칠 번 생도?” 고왕흘은 유일한 희망이 천여운에게 달렸다고 생각했다. 생도들 중에서 유일하게 초식 파훼뿐만이 아니라 무공 교두를 때려눕힌 천여운이라면 어쩌면 초절정 고수인 호진창을 상대로 초식만이라도 파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만약 그가 실패하면?” “그럼 내 선택이 실패한 것을 탓해야지. 별 수 있겠나.” 고왕흘의 말에 백기가 허탈하다는 듯이 쓴 웃음을 지었다. 정말 그의 말대로 천여운이 그런 기적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이들 여섯 명은 삼 단계 시험을 치르지도 못하고 탈락하게 될 것이다. 과연 천여운을 믿고 기다리는 것만이 답일까? -탁! 그때 오종의 앞에서 눈시울을 붉히던 허봉이 그를 등에 업었다. 자연스럽게 모두의 시선이 허봉에게로 향했다. 허봉이 그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일단 저는 오종을 의무실로 옮기고 오겠습니다.” “나도 도울게.” 자우민도 그를 돕기 위해 옆에 붙자, 허봉이 잠시 멈추더니 실망한 목소리로 고왕흘에게 말했다. “하아....아무래도 이건 말씀드려야 할 것 같네요. 저도 고왕흘 당신의 말대로 주군을 믿습니다. 다른 누구보다도요. 하지만 무작정 그분에게 기대거나 기다리는 것은 도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수하라면 수하답게 응당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정말 방법이 없다면 차라리 내일 주군이 나올 때까지 주군의 수하가 될 만한 생도들을 모집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 일장연설과도 같은 허봉의 일침에 고왕흘은 망치를 두드려 맞은 표정이 되고 말았다. 상황을 잘 판단하고 현명한 그였지만 자신도 모르게 주군인 천여운 한 명에게 모든 부담을 지워지려고 했었다. 허봉의 말대로 수하로서 차악에 대비하는 것이 맞았다. "제, 제가 말이 좀 심했나요?" 홧김에 지르긴 했지만 고왕흘의 굳어진 표정에 괜히 불안해진 허봉이었다. 그러나 고왕흘은 화가 나서 얼굴이 굳어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답답하던 것이 뻥 뚫린 것처럼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하핫. 허봉이 자네의 말이 맞네. 맞아. 주군이라고 해서 우리가 무작정 기대는 것은 답이 아니지. 수하라면 응당 자네 말대로 그 분을 위해서 뛰는 게 맞지. 하하하핫. 허봉이 자네야말로 주군의 제일의 수하가 틀림없네.” 고왕흘이 흡족한 얼굴로 허봉을 치켜세웠다. 그 모습에 지금까지 침체되어 있기만 하던 백기나 자우민, 마칠 역시도 고왕흘의 칭찬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허봉의 말대로 주군인 천여운을 믿는다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맞았다. "네가 아니었다면 무력하게 주군을 기다릴 뻔 했군. 제법이야. 허봉." "가끔 쓸만한 소리도 할 줄 아는군." 칭찬을 들으려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괜히 쑥스러운지 허봉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게 노란 명찰을 빼앗기게 되면서 절망에 빠졌던 그들은 허봉의 뜻밖의 날카로운 일침에 무너지지 않고 좀 더 단단해 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그날 밤이 저물고 다음날, 이른 새벽부터 고왕흘을 비롯한 백기, 허봉, 마칠, 자우민은 숙소 건물과 마도관을 돌아다니며 아직까지 조장을 구하지 못한 생도들을 찾아다녔다. 그들을 일일이 만나며 천여운의 수하가 될 만한 자들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천여운이 나오기 전까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그의 충실한 수하가 될 만한 인재를 발탁하는 것이야말로 지금 그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천여운이 조장으로서의 능력이나 무위를 증명하기는 했지만, 징계로 인해서 조장 자격을 박탈당한 것도 모자라 닷새 동안 구금동에 갇히게 되었다. 덕분에 남은 명찰이라고 해봐야 모두가 불가능하리라고 여기는 선임 무공교두인 호진창의 것뿐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 무턱대고 천여운의 수하로 들어갔다가, 그가 만약에 조장이 되지 못한다면 같이 탈락하는 불상사가 생겨버리고 만다. 과연 누가 그런 위험부담을 지려고 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섯 명은 포기하지 않고 생도들을 만나며 설득을 시도했다. 천여운의 제 일의 수하인 허봉 역시도 열심히 발품을 팔아가며 여러 생도들을 만났지만 설득이 쉽지가 않았다. 벌써 네 명 째 거절당한 그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또 다른 생도를 찾아다녔다. -웅성웅성! 그런데 어디선가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호기심이 생겨난 허봉이 웅성거리는 곳을 향해 가보았다. 그곳은 마도관의 본관 건물과 단상의 한가운데였는데, 그곳에 꽤 많은 생도들이 몰려들어 무언가를 구경하고 있었다. 허봉이 무언가 싶어서 그곳에 다가간 순간, 그의 두 눈이 큼지막하게 커졌다. “주, 주군!!!” 그곳에는 그가 오매불망 기다리던 주군 천여운이 있었다. 그런데 천여운은 생도들이 몰려든 한 가운데에서 누군가와 격렬하게 대결을 펼치고 있었다. 그는 바로 선임 무공 교두인 호진창이었다. 19장 이 명찰은 네 것이다(3) 아침 진시(辰時) 무렵, 마도관 비급 서재의 바로 뒤쪽에 자리한 산봉우리. 새벽부터 껴있던 옅은 안개가 아직까지 은은하게 산자락에 걸려있다. 가벼운 경공으로 산을 오르는 세 명의 인영이 보였다. 그들은 이곳 마도관의 무공 교두들이었다. 세 사람 중에 가장 앞서 경공을 펼치고 있는 자가 있었으니, 전 팔 조를 담당했던 무공 교두 임평이었다. 임평을 비롯한 무공 교두들이 이렇게 산봉우리 위로 오르는 이유는 구금동에 갇힌 천여운의 징계가 끝나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녀석이 잘 버텼을지 모르겠군.’ 경험이 많고 연배가 있는 성인 남자도 폐쇄된 어두운 공간에 갇혀 있으면 버겁다. 그런데 열다섯 밖에 되지 않은 소년을 좁은 동굴 안에 가둬뒀으니 걱정이 될 만도 했다. 한참 산봉우리를 오르던 그들이 드디어 구금동의 한 동굴 앞에 도착했다. “충!” 동굴 앞을 지키는 경비 무사들이 그들에게 인사했다. 임평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늘로써 천여운의 징계가 끝났다. 문을 열어라.” “알겠습니다.” 경비무사들이 암석의 거치대를 치우고, 네 명이 달라붙어 동굴 입구를 막고 있는 거대한 암석을 옆으로 밀어냈다. -끼리리리리리리! 거대한 암석이 밀려나며 동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습하고 어두운 동굴. 유일하게 동굴을 밝히던 등불의 기름도 떨어져서 좁은 동굴 안에는 빛 한 점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닷새를 보내라 한다면 누구 하나 맨 정신으로 버티기가 힘들 것이다. 그런 동굴 안을 들여다보니 상의를 탈의하고 있는 소년이 가부좌를 틀고서 눈을 감고 있었다. “칠 번 생도! 징계가 끝났다.” 한 무공 교두가 동굴 안으로 외치자 가부좌를 하고 있던 천여운이 눈을 떴다. 드디어 기다려왔던 징계의 끝이 다가왔다. 천여운이 자리에서 일어나 오랜 만에 맞이하는 밝은 빛에 눈살을 찌푸리며 동굴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허어? 이 녀석, 무슨 몸이?’ 상의를 탈의하고 있는 천여운의 상반신 전신의 근육은 촘촘할 만큼 발달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아직 완전히 성장하지 않은 소년의 근육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였다. 그 모습에 무공 교두들조차도 내심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런 근육도 놀라웠지만 임평을 놀랍게 만든 것은 천여운의 눈이었다. ‘이게 닷새 동안 혼자 동굴에 갇혀있던 녀석의 눈빛인가?’ 오히려 구금동에 갇히기 전보다도 훨씬 안광이 뚜렷해지고 눈빛이 다부져있었다. 마치 번뇌를 이겨내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자의 눈빛과도 같았다. 놀랍기는 했지만 임평은 크게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상의는 어찌한 거냐?” “그게....” 천여운이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동굴 구석에 밀어 넣었던 상의를 들고 왔다. 독성분이 물들어서 악취가 나는 상의에 무공 교두들이 일제히 코를 막았다. “우욱!” “대체 옷에 무슨 짓을 한 거야?” -탁! 무공 교두 심명이 도저히 그 악취를 참지 못하고, 천여운의 손에서 옷을 빼앗아 신경질을 내며 산 저편에 던져버리고 말았다. 임평이 한숨을 푹 내쉬며 자신의 겉옷을 벗어서 천여운에게 주었다. “아.....감사합니다.” 사흘 동안 습한 동굴 안에서 상의 없이 지냈기에 허전하기는 했다. 천여운이 임평의 옷을 주섬주섬 입고 있는 동안 심명이 동굴 안을 둘러보았다. 특별히 동굴 안에서 뭔가를 하진 않았는지 별다른 흔적은 없었다. 심명이 나머지 두 무공 교두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이상이 없음을 알게 된 그들은 산봉우리 밑으로 하산했다. 이때 심명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동굴의 가장 안쪽 벽의 밑 부분이 돌조각들을 쌓아서 막아놓은 것을 말이다. 빛이 닿는 부분이 아니었기에 그것까진 미처 살피지 못했다. ‘휴.’ 천여운이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심명이 동굴 안을 확인하러 들어가기에 들키지 않기를 바랐는데 다행히 발견하지 못했다. 앞서 그들이 하산을 하자, 경비 무사들이 다시 동굴의 입구를 거대한 암석으로 막고서 서로를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끝났다!” “와아!” 경비 무사들이 환호를 질렀다. 천여운 덕분에 밤낮으로 진행되던 산봉우리 위에서의 특별 근무가 드디어 끝났다. 산 위에서 들려오는 환호성에 무공 교두들이 피식하고 웃었다. “질문 하나 해도 됩니까?” 산을 내려가면서 천여운이 무공 교두 임평에게 말을 걸었다. 선두를 가던 임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란 명찰이 얼마나 남아있습니까?” 천여운의 질문에 임평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닷새 동안 갇혀 있던 녀석이 나오자마자 먼저 한 질문이 잔여 노란 명찰의 수였다. 그 말은 아직까지 조장의 자리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하나 남았다.” “하나요?” 노란 명찰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에 천여운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분명 명찰을 획득할 수 있는 날이 하루를 남긴 시점이었기에 얼마 남지 않았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하나뿐일 줄은 몰랐다. “혹시 그 하나가 혹시 그 분의 것입니까?” 임평이 천여운이 말하는 그 분이 누굴 말하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선임 무공 교두 호진창을 말하는 것이리라. 임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것만 남았군.’ 초절정의 무위인 호진창의 가슴에 있는 노란 명찰 획득은 누구라도 힘들었다. 어두워진 안색의 천여운에게 임평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꼭 그 하나가 답이 아닌 것은 잘 알 텐데.” “.....그렇죠.” 대놓고 입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타 조장들의 노란 명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암묵적으로 권하는 바였지만 무공 교두의 입장에서 공식적으로 내뱉을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타 생도를 노린다라....’ 산을 내려가면서 천여운은 많은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산봉우리를 내려온 천여운에게 무공 교두들은 징계가 끝났으니, 다시 숙소로 돌아가거나 생도 활동을 해도 좋다고 하였다. 그런데 천여운은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무공 교두들을 쫓아왔다. 마도관의 본관 건물 앞까지 쫓아오자 그것을 의아하게 여긴 임평이 물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것이냐?” “저.....부탁이 있습니다.” “부탁?” “마지막 노란 명찰을 가진 교두님을 불러주셨으면 합니다.” “뭐?” 천여운의 뜬금없는 말에 임평이 인상을 찡그렸다. 왜 자신들을 쫓아오나 했더니 설마 노란 명찰 획득을 위해서일 줄은 몰랐다. 시간이 촉박한 것은 알고 있지만 징계가 막 끝나자마자,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호진창을 노릴 생각을 하다니 어이가 없었다. 대답을 한 것은 임평이 아니었다. “네 녀석 제 정신이냐? 괜히 오기부리지 말고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라.” 그는 심명이었다. 특별히 천여운에게 정은 없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호진창은 아니었다. 괜한 오기를 부렸다가 부상이라도 입으면, 더 이상 조장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도 있기에 하는 말이었다. 임평 역시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무리하지 마라. 조급한 것은 알겠지만 이럴 때일수록 신중해야지.” 임평은 그것이 천여운의 조급함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겼다. 상황은 이해했지만 무리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천여운의 생각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조언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무리라고 생각된다면 중간에라도 스스로 포기하겠습니다. 기회라도 주셨으면 합니다.” ‘아....’ 공손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천여운을 바라보며 임평이 난감해 했다. 이번 징계를 통해서 상황을 판단하는 것에 신중해졌으리라 생각했는데, 왜 이런 무모한 도전을 하려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심명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중간에 포기를 해? 쯧쯧, 그 분이 과연 손에 사정을 둘지 모르겠군.” 호진창은 한 번 대결을 시작하면 절대로 봐주는 게 없었다. 그 말과 함께 심명이 본관 내부로 들어가자 임평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네가 완고하니 어쩔 수가 없구나. 최대한 부상은 피해라. 그렇지 않으면 정말 기회가 없어질 거다.” “알겠습니다.” 지금까지 도전했던 몇 안 되는 생도들을 전부 하루 내지 이틀은 운기조식을 하거나 의무실의 신세를 지게 만든 호진창이었다. 이윽고 얼마 있지 않아 본관 건물의 입구로 호진창이 모습을 드러냈다. 현 마도관의 무공 교두들 중에서 무위로 정점에 서있는 호진창의 등장은 본관 건물 앞을 지나던 생도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야야! 누가 도전하나봐.’ ‘호 교두에게? 미친! 어떤 멍청이가 도전을 한단 말이야?’ ‘엇? 저 생도....칠 번 생도잖아.’ ‘오늘이 징계가 끝나는 날이었어?’ ‘이거 진짜야? 정말 도전하려나봐!’ 한두 명씩 발걸음을 멈추기 시작한 생도들은 어느새 서른 명이 넘게 몰려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일하게 어떠한 생도들도 획득에 실패한 노란 명찰의 주인인 무공 교두 호진창과 여러모로 모든 생도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은 천여운이 대치하고 있었다. ‘칠 번 생도!’ 천여운을 바라보는 호진창의 눈빛에는 기대감이 흘러넘쳤다. 엿새 전 공개적인 자리에서 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연과 더불어 가장 겨뤄보고 싶었던 천여운이 제 발로 찾아왔으니 말이다. “칠 번 생도 천여운이 교두님께 인사드립니다.” “오랜만이군. 닷새 동안 구금동에서 고생이 많았네.” 천여운이 포권을 하자 호진창도 가볍게 포권으로 응수했다. 이미 심명을 통해 그가 자신에게 도전하려 한다는 말을 들었다. 본신 절기를 사용한 것은 아니었지만 생도들 중에 유일하게 절정의 고수인 상문여를 꺾은 천여운이었다. 호진창의 눈빛에서 투기가 흘러나왔다. 생도로서 바라보는 것이 아닌 흥미로운 적수를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천여운이 그런 그에게 말했다. “교두님께 한 수 배우겠습니다.” 천여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주위에 몰려든 생도들의 입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탄성 소리들이 흘러나왔다. “오오오오!!!” “도전이다! 도전!” 많은 생도들의 몰려들어 이 대결을 주목하자 천여운은 내심 자신의 뜻대로 된 것에 만족해했다. 마도관의 본관 건물 앞에서 도전을 한 것도 전부 이 때문이었다. 이번 징계로 인해서 천여운은 모든 생도들에게 그리 좋지 않은 인상을 심어주고 말았다. 더군다나 조장의 자리마저 박탈당했기에 더욱 최악이라 할 수 있었다. ‘반전이 필요해.’ 소교주 쟁탈전을 치르는 소교주 후보로서 그는 많은 생도들의 지지와 믿음이 필요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징계로 천여운은 다른 이들보다 불리한 상황이었다. 다른 조장들의 노란 명찰을 노리는 것도 방법이었지만, 그런 식으로는 조장의 자리는 다시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생도들의 지지를 얻어내긴 힘들었다. 강자존의 마교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좋은 평판과 생도들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한 방법은 오직 하나였다. ‘남은 건 하나, 이제 실력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무대는 만들어졌다. 아침이었기에 개인 연공실로 향하던 생도들이 하나둘씩 지나가면서 몰려들고 있었다. 몰려드는 생도들을 전혀 개의치 않는지 호진창이 물었다. “목검으로 할 텐가? 아니면 맨손으로 할 텐가?” “맨손으로 하겠습니다.” 그것은 옳은 선택이었다. 목검으로 대련을 하게 된다면 생도들에게 더더욱 불리했다. 칠마검을 쓰는 무공 교두들의 손에 목검을 쥐어진 채로 겨루는 것보다 차라리 맨손 대결을 하는 편이 그나마 초식을 꺾을 확률이 놓았다. 또 최악의 경우 박투를 유도해서 반전을 일으킬 수 있다. 물론 무공 교두들이 더욱 박투에도 강한 것이 함정이었지만 말이다. -탁! 호진창이 보폭을 벌리며 기수식을 취했다. 단순한 기수식의 자세를 취했을 뿐인데 지금까지와는 그 무게감이 달랐다. 호진창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에 지켜보는 생도들마저도 긴장감이 생겨날 정도였다. ‘저 괴물을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무리야. 아무리 칠 번 생도라도 이번만큼은....’ ‘노란 명찰에 환장한 오 번 생도도 포기했잖아’ 공개적인 대련에서 천여운이 무공 교두 상문여를 꺾는 모습을 보았던 생도들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았기에 기대감이나 희망을 가질 만도 했지만 여기에 모인 누구도 천여운의 승리를 그리지 못했다. 그만큼 초절정 고수인 호진창은 강해도 너무 강했다. “오게나. 선공은 양보하지.” 당시에 천여운의 실력이 절정의 초입이란 것을 파악했던 호진창이 여유롭게 그에게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것을 천여운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먼저 가겠습니다!” -탁! 천여운이 신형이 번개처럼 튕겨져 나오며 순식간에 호진창과의 거리를 좁혔다. ‘빠르다.’ 예상한 것보다 훨씬 빠른 몸놀림에 호진창이 내심 놀라했다. 하지만 호진창은 백전노장의 초절정의 고수였다. 그가 두 손가락으로 검결지를 만들어 칠마검의 방어 초식인 검오를 펼쳤다. -촤촤촥! ‘어떻게 나올 테냐? 네 도식은 이미 전부 파악했다.’ 그 순간 호진창의 동공이 흔들렸다. 당연히 도식을 펼칠 줄 알았던 천여운이 두 손가락으로 검결지를 만들더니, 검식을 펼치며 칠마검의 검오 초식을 식 단위로 파훼해버렸다. -파파파팍! ‘이런?’ 초식을 완전히 파악한 수준을 넘어섰다. 엿새 전 천여운이 상문여가 펼치는 칠마검의 초식을 도식으로 파훼하는 모습을 보았기에 그것을 복기해서 나름의 복안을 생각해뒀던 호진창이었다. 그런데 도법을 펼치리란 예상을 부수고 검법을 펼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것은 단순한 임기응변이 아니었다. ‘이 검식은 대체 뭐지?’ 단순한 검식이라고 보기에는 한 식, 한 식의 수준이 너무 고절했다. 이러다간 오히려 자신이 초반부터 밀릴 지도 몰랐다. ‘네가 이 정도 수준의 검식을 펼칠 수 있다면....좀 더 수준을 높여도 되겠구나!’ 호진창의 눈빛에 강한 투기가 흘러나왔다. 검마가 만든 칠마검의 가장 큰 장점은 식들과 초식들을 배합한다면 무궁무진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것이 절정의 고수가 아닌 초절정의 고수인 호진창의 손에서 펼쳐진다면, -촤촤촤촤촥! 고절한 초식으로 변화할 수 있다. 호진창은 검일에서 검사의 초식을 동시에 펼쳐서 다채로운 변화를 만들었다. 이를 지켜보는 생도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와아!” 그들 역시도 칠마검의 비급서를 받아서 초식을 익혔기에 그 검법의 위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펼치는 칠마검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초절정의 경지에 이른 호진창의 손에서 펼치는 칠마검은 그야말로 절정의 검법이라 할 수 있었다. ‘무리다. 저걸 어떻게 막아.’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다. 그 순간 모두가 예상하지 못한 경악스러운 일이 일어나고 만다. 천여운의 신형이 잔상을 만들 만큼 복잡한 변화를 일으키더니, 그의 검결지에서 선명한 흰 빛이 스물네 개의 궤적을 그리며 순식간에 호진창에게 쇄도해왔다. -촤촤촤촤촤촥! ‘이, 이 검 초식은 대체?’ 호진창이 펼치는 칠마검의 검초들이 속수무책으로 말려들어갔다. 어떻게 막아낼 수준의 검초가 아니었다. 흰 빛의 궤적이 무차별적으로 요혈을 찔러 들어오며 천여운의 신형이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절세검초에 실려 있던 강대한 검력에 의해 호진창의 몸이 허공에 떠올라 몇 바퀴를 돌았다. -핑그르르르! 털썩! “크윽!” 생도들에게 괴물이라 불리던 호진창이 처음으로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모든 생도들이 전율을 느꼈는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수백 년 동안 청옥석 비석에 잠들어 있던 천마 조사의 마지막 심득인 천마검공(天魔劍功)이 수세대를 뛰어넘어 혈손인 천여운의 손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19장 이 명찰은 네 것이다(4) 스물네 개의 궤적을 그리는 검식들을 막아보려 했지만 세 개의 식이 한계였다. 호진창은 이를 악물고 전신에 호신기운을 끌어 올렸다. -파파파파팍! 천여운의 검결지가 그의 요혈들을 찌르면서 쓰라린 고통이 느껴졌다. 저 손에 진검이 들려있었다면 꼼짝없이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맨손이라고 해도 고절한 초식에 담겨 있는 검력이 거센 폭풍과도 같았기에 몸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크으으윽!” 당황한 호진창이 내공을 십성으로 끌어올려 검력에 대항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초식에 실려 있는 내공의 수위가 자신을 능가하지 않았다. -핑그르르르! 강제로 회전하게 된 호진창이 겨우 검력을 이겨내고 바닥에 착지했지만 균형을 잃고 한쪽 무릎을 꿇고 말았다. -탁!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생도들이 입을 벌어져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천여운이 어떻게 이런 고절한 검법을 익혔는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호진창을 무릎 꿇렸다는 사실이었다. ‘......입체영상에서처럼 되었다.’ 이런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낸 천여운도 자신만의 전율을 느끼고 있었다. 방금 전 호진창이 펼쳤던 칠마검의 고절한 초식은 청옥석에 남겨져 있던 파쇄 검초와 흡사했다. 다만 호진창이 배합한 검 초식은 청옥석에 남겨진 파쇄 검초의 초창기의 수준에 불과했고, 완성된 파쇄 검초가 스물네 개의 식으로 이루어졌다면 칠마검은 고작해야 여덟 식뿐이었기에 천마검공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검초....’ 호진창의 떨리는 눈빛으로 고개를 들어 올려 천여운을 바라보았다. 천여운은 여전히 경각심을 잃지 않고, 언제든 공수를 취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교두의 기세가 아직 살아있다. 대결은 끝나지 않았어.’ 초식 면에서 압도했지만 호진창의 몸에 초식을 적중시켰을 때 강한 반탄력을 느꼈다. 구금동에 숨겨진 공동에서 천마검공의 심법을 얻으면서 운기가 자유로워져, 그 무위가 절정의 완숙한 경지를 넘어서 극(極)에 가까워지고 있는 천여운이었지만 아직까지 초절정의 고수와는 수위 차가 있었다. ‘재미있구나. 천여운.’ 호진창의 몸에서 투기가 흘러나왔다. 본신절기를 쓴 것은 아니었지만 손에 사정을 둔 것도 아니었다. 이런 절세 검 초식으로 자신을 밀어붙인 천여운과 진심으로 전력을 다해서 겨뤄보고 싶어졌다. “후우!” 호진창이 바닥에 손을 짚은 채로 길게 호흡을 내뱉자, 날카로운 예기가 손끝으로 흘러나오며 돌바닥에 균열이 일어났다. -쩌저저적! 그것은 체내로 파고든 천여운의 검기를 배출해낸 것이었다. ‘검기를 배출했어?’ 천여운의 눈이 커졌다. 초절정에 이른 고수들은 체내의 운기가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경지이기에 내부로 침투한 타인의 기를 배척할 수 있다. 검기를 완전히 배출해낸 호진창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일어섰다. 경이로운 능력에 천여운이 다시 자세를 취했다. ‘역시 초절정이구나.’ 천마검공으로 선기를 취했다고 끝날 싸움이 아니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검기를 해소하고 멀쩡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난 호진창이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투기가 가득했던 그 강렬한 기세를 거둬들였다. ‘뭐지?’ 호진창이 여전히 경계심 가득한 천여운을 향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정말 놀랍구나. 천여운. 일신우일신이라는 말은 너를 위한 말인 것 같구나.” ‘아......’ 기세를 거둬들인 것은 정말로 승부를 마무리한 것이었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날이 갈수록 새로워진다는 말이다. 불과 엿새 전만 하더라도 절정의 초입에 불과했던 천여운은 공력에서부터 초식까지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으로 향상되었다. 그야말로 괴물 같은 성장 속도라고 할 수 있었다. ‘본교에 상상을 불허하는 괴물이 탄생하는 걸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했지만 이것은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호진창이 자신의 오른쪽 가슴에 붙이고 있는 노란색 명찰을 떼었다. ‘엇?’ “설마?‘ 그 모습에 생도들의 눈이 커지며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오늘은 본 교두의 패배를 인정하마. 너는 조장의 자격이 충분하다. 이제 이 명찰은 네 것이다.” 호진창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모여 있던 생도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아아!!!” 모두가 흥분했는지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같은 생도로서 모두가 불가능이라 여겼던 선임 무공 교두의 노란 명찰을 얻어낸 것에 대한 놀라움과 경외심이 섞인 환호성이었다. ‘정말로 성공하다니!’ ‘한 초식 만에 호 교두의 인정을 받아냈어!’ ‘이게 말이 되는 소리야?’ ‘저 녀석 정말 괴물이야.’ 더군다나 완전히 패배시킨 것은 아니더라도 초절정의 고수인 호진성을 고작 한 초식 만에 한 쪽 무릎을 꿇게 만들었다. 강자존을 살아가는 마도인으로서 그 강함에 열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환호성으로 가득한 한 가운데에서 천여운이 호진창을 향해 고개 숙여,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교두님께 감사드립니다.” "자네의 실력으로 다시 쟁취한 건데, 무슨 감사인가." 호진창이 웃으면서 노란 명찰을 천여운의 손에 쥐어주었다. 이로써 천여운은 조장 자격을 박탈 당한지 닷새 만에 다시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노란 명찰이 가진 무게감이 전과는 사뭇 달랐다. ‘이 무게감을 잊지 않겠어.’ 이번 일을 통해서 자신의 행동 하나가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게 된 천여운이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짐하는 천여운의 귓가로 누군가의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주군!!!” 바로 허봉이었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천여운이 중요한 순간에 떡하니 나타난 것도 모자라, 노란 명찰마저 다시 획득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 모든 상황이 감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허봉.” “주군!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있는 자는 허봉뿐만이 아니었다. 몰려든 생도들의 사이를 비집고 누군가가 그의 앞으로 걸어왔다. 천여운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백기?’ 그는 다름 아닌 백기였다. 구금동에 갇힌 바람에 천여운은 닷새 동안 백기가 자신의 수하들과 함께 동고동락했던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의아해하는 천여운의 앞으로 백기가 어색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다,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털썩! 그 모습에 천여운의 승리로 흥분을 금치 못하던 생도들의 시선이 단번에 그에게로 향했다. ‘엇?’ ‘백기가 왜 무릎을 꿇는 거야?’ ‘뭐야? 뭐야?’ 조장 급의 생도인 백기가 무릎을 꿇으니 당연히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그는 며칠 전에도 노란 명찰을 획득해서 조장의 자리를 차지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아직까지 어젯밤에 하일명과 생도들에게 습격을 당해서 명찰을 강탈당한 것은 소문이 퍼지지 않았다. “백기. 왜 무릎을 꿇는 거지?” 천여운의 질문에 백기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모두가 들으라는 듯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먼저 감사의 인사부터 드리겠습니다. 저 십팔 번 생도 백기는 천여운 공자 덕분에 독마종의 독수에 살아남았기에 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뭐?” -웅성웅성! ‘독마종에서 십팔 번 생도한테 독을 썼어?’ ‘이게 무슨 소리야?’ 백기의 외침에 모여 있던 생도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독마종의 독수에서 살아남았다고 말을 하니 파장이 큰 것은 당연했다. 천여운이 독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종섬의 단전을 파괴한 사실이 공표되면서, 단순히 결과만을 접했던 생도들은 그가 독마종의 심기를 건들만큼 겁을 상실하고 멍청한 짓을 했다고만 치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백기의 말대로라면 천여운이 천종섬의 독수에서 그를 도왔단 말이 아닌가. “독마종의 독수에서 저를 도와주신 천여운 공자께서 구금동에 갇히면서까지 고생을 하신 모습에 이 백기가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뭐지? 이 어색한 말투는...’ 백기의 원래 말투를 아는 천여운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백기가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그 의도를 눈치 챘기에 가만히 듣고 있을 뿐이었다. -웅성웅성! ‘아니 그럼 칠 번 생도가 십팔 번 생도 때문에 그랬다는 거야?’ ‘그러지 않고서 십팔 번 생도가 저렇게 무릎까지 꿇어가며 말할 이유가 없잖아.’ ‘허어. 대체 무엇 때문에?’ 떠들썩해진 생도들의 여론이 점차 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분위기가 물오르자 백기는 화룡점정을 찍듯이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이 백기, 더욱 목숨을 바쳐 천 공자님의 수하로서 보필하도록 하겠습니다!” ‘하!’ 천여운이 속으로 탄성을 내질렀다. 이게 백기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라면 정말 감탄할 만 했다. 아직까지 수하로 거둬들인 적이 없던 백기가 어느새 천여운의 수하가 되어서 생도들의 여론을 뒤흔들어 놓은 것이니 말이다. 백기의 마지막 발언은 확실하게 방점을 찍었다. '십팔 번 생도가 칠 번 생도의 부하였어?' ‘아니 그럼 자신의 수하를 보호하려고 그런 짓을 한 거란 말이야?’ ‘세상에.’ ‘아랫 사람을 위해서 그랬다고?’ 백기의 이 같은 발언이 부정적이게 될지 긍정적으로 작용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 생도들에게 천여운이라는 인물에 대해 새로운 파문을 일으키기에는 충분했다. 술렁이는 생도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근육질에 거구의 생도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마권종의 고왕흘이었다. 그는 천여운의 앞에서 포권을 한 채로 낯간지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백기에게 전음을 보냈다. [잘했네. 대사가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네 말대로 따르는 건 이번 한 번뿐이다.] [하하하핫, 알겠네.] 놀랍게도 백기의 모든 어색한 대사는 전부 고왕흘의 머릿속에서 나온 말들이었던 것이다. 고왕흘은 천여운이 대결에서 승리하는 모습에 열광하는 생도들을 보며 그 짧은 틈에 이 같은 계책을 떠올리게 되었다. 덕분에 백기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생도들이 보는 앞에서 연기를 해야만 했다. 날카롭게 툴툴대는 백기였지만 고왕흘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한편 마도관의 본관 건물의 계단을 오르고 있는 두 명의 무공 교두가 있었다. 그는 방금 전에 천여운과 대결을 펼쳤던 선임 무공 교두 호진창과 전 팔 조의 담당 무공 교두인 임평이었다. “밖이 시끌벅적하군요.” 그 이유를 모를 리가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호진창의 노란 명찰을 얻어냈으니 열광하는 것도 당연했다. 본의 아니게 천여운을 띄워준 셈이 되어버렸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내가 체면이라도 차릴 것 같나. 후후후. 녀석은 충분히 그만한 실력을 갖췄네.” “그야 그렇지요.” 임평 역시도 무공 교두들 중에서 유일하게 그 대결을 지켜보았다. 걱정스러운 마음에서 지켜보았는데, 오히려 천여운은 그를 다시 한 번 놀라게 만들었다. “대단한 녀석이더군요. 그런 놀라운 검법을 익히다니.” 검법의 고수인 임평조차도 경악하게 만들 정도의 전율적인 검법이었다. 한 가지 의아한 것은 마교에서 활동하는 내내 한 번도 이 검법을 본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 검법도 우호법께서 가르친 것일까요?” “글쎄, 화경의 고수이시니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 “......그런 가요?” 도법으로 일가를 이룬 고수가 굳이 제자에게 검법을 가르칠까? 임평은 이를 이상하게 여겼지만 지금으로서 천여운에게 그런 고절한 검법을 가르쳐줬을 만한 사람은 오직 우호법 섭맹뿐이었다. 삼 층으로 올라온 임평은 우측 복도를 꺾어서 무공 교두들의 집무실로 향하려 했다. 그런데 호진창은 한 층을 더 올라가려했다. “어? 집무실로 안 가십니까?” “먼저 들어가게. 잠시 바람을 좀 쐬려 하네.” “알겠습니다.” 호진창은 한 층 계단을 더 올라가 마도관의 본관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왔다. 그런데 옥상에는 난간 쪽에는 먼저 자리를 잡고 있는 이가 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붉은 머리카락만 보더라도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관주님.” 그는 마도관의 관주인 좌호법 이화명이었다. “왔소?” 이화명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본관 건물의 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여전히 생도들의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전음을 보내지 않았다면 순간 자제하지 못할 뻔했습니다.” “그런 검 초식을 상대한다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오.” 옥상 위에 있었던 이화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의 대결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대결에서 천여운이 펼쳤던 엄청난 위력의 고절한 검 초식 또한 바로 위에서 정확하게 볼 수 있었다. 이화명의 바로 옆까지 다가온 호진창이 은밀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는 젊은 시절 수백 회가 넘게 정파, 사파와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 전투 중에는 당연히 교주님과 함께인 적도 꽤 있었죠.” “.......” “호법으로 매일 같이 교주님을 보필하셨던 관주님이라면 저보다 더 잘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호진창의 말에 이화명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말없이 아래만을 내려다보는 이화명에게 호진창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여운이 펼친 그 검 초식.....제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분명 교주님의 천마검법과 흡사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전율적이었습니다.” 20장 똑같이 돌려주마(1) 천마검법(天魔劍法). 마교의 개파 조사인 천마가 창안한 절세검법으로 마도 최고의 검법이라 불린다. 무인으로서 희대의 천재라고 불렸던 천마는 이 천마검법 하나로 당대 최고의 고수로 군림했었다고 한다. 이때만 하더라도 정사마를 통틀어 천마가 펼치는 천마검법을 꺾은 자는 누구도 존재하지 못했다. 그러나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각 세력에서도 천마검법에 비견되는 검법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마교 내에서도 순수한 초식만으로는 천마검법과 버금갈 지도 모른다고 불리는 검마의 진신마검(進新魔劍)이 등장했다. 호진창은 말하는 내내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천여운의 그 검초는 아직까지도 그의 머릿속에 여운을 남길 만큼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좌호법 이화명 역시도 거리가 떨어진 옥상 위에서 지켜보았지만 완벽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빈틈이 없는 검 초식에 경악을 했었다. ‘얼핏 보면 천마검법과 흡사해 보이지만 그보다 훨씬 뛰어나다.’ 호진창의 말대로 오랜 세월 동안 교주를 보필하면서 천마검법을 펼치는 모습은 수십 회 이상은 지켜보았던 이화명이었다. 그렇기에 결론을 내렸었다. 분명 교주를 상징하는 천마검법보다 더 뛰어난 검법이 틀림없었다. 천여운이 어떻게 그런 절세검초를 익히게 된 것일까? 짐작 가는 부분이 딱 하나 있었다. ‘청옥석 비석!’ 천마 조사의 마지막 심득이 담겨있다고 알려진 청옥석 비석이 있다. 다만 이 비석의 뒷면은 전부 훼손되어서 복구가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에, 마지막 심득은 비밀로 남고 말았다. 고작해야 시조만 남은 청옥석 비석에 실망하여 쓸모없다고 여긴 후대 교주 중에 누군가가 이것을 마도관의 서재에 비치하도록 하면서 마지막 심득은 전설이 되었다. ‘하지만 청옥석 비석의 뒷면은 전부 훼손되었는데.’ 그 역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청옥석 비석의 뒷면을 수차례나 보았으나, 석면을 가득 메운 너무 많은 검흔들로 인해 무엇을 파악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는 이화명에게 호진창이 자신이 짐작하는 부분을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관주, 혹시 이 검법은 청옥석....” “호 교두.” 그것을 이화명이 중간에 끊었다. “이 일은 당분간 함구하도록 하게.” “......역시 관주께서도 저와 같은 생각이셨군요. 알겠습니다.” 호진창의 말에 이화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 이외에는 천여운의 검법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마도관 내에서 유일하게 천마검법을 알고 있는 두 사람이 내린 결론은 같았다. 어째서 이화명이 이 같은 사실을 함구하자고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은 천여운에게 있어서 다행스러운 일인지도 몰랐다. 한편, 마도관의 건물 앞에 몰려들어서 대결을 구경했던 생도들은 어느새 각자의 훈련을 위해 흩어졌다. 그러나 그 중에 전부가 흩어진 것은 아니었다. 모두가 떠난 자리에 두 명의 생도가 남아있었다. 한 명은 여자 생도였는데, 동글동글한 귀여운 얼굴과 달리 신장이 웬만한 남자 생도들보다도 훨씬 컸다. 고왕흘이 없었다면 마도관 앞에 남아있는 생도들 중에서도 가장 크다고 바도 무방했다. ‘오오오! 그대는.’ 마도관에서 제일 큰 신장을 가진 고왕흘도 익히 알고 있는 그녀였다. 그녀는 여자 생도들 중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는 무위를 지녔다고 알려진 이백이십이 번 생도인 호상화였다. ‘.....왜 얼굴을 붉히는 거야?’ 백기가 상기된 고왕흘의 얼굴을 보며 의아해했다. 큰 신장을 가진 이백이십이 번 생도 호상화가 천여운의 앞에 다가와서 공손한 말투로 말했다. “칠 번...아니 천 공자의 뛰어난 무위는 잘 보았어요. 설마 호 교두님의 명찰을 얻어내실 줄은 몰랐네요. 정말 축하드립니다.” “운이 좋았다. 고맙다.” 내색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천여운은 그녀가 왜 자신에게 접촉해오는지 정도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제가 이렇게 기다렸던 것은 천 공자의 조원으로 들어가고 싶어서입니다.” 선임 무공 교두인 호진창과 겨루는 모습에서 강자로서 천여운의 실력을 확인한 그녀였기에 무위에서 만큼은 확실하게 인정했다. 그런 천여운의 조원이 된다면 삼 단계 시험을 통과할 확률이 높아질 것이다. 하지만 천여운이 원하는 사람은 단순히 시험을 통과하기 위한 임시 조원이 아니었다. “미안하....” 천여운이 이 같은 말을 하려고 하자, 호상화가 그것을 끊고 먼저 말을 했다. “잠깐만요. 먼저 질문 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천 공자는 뛰어난 인재라면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고루 등용할 수 있나요?” 호상화의 눈빛은 진지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여자임을 의식해서 하는 말인 듯 했다. 그런 그녀의 질문을 허투루 답변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이 질문은 예전부터 천여운에게 정해진 답이 있었다. “......뛰어난 인재가 나를 따른다면 종파와 남녀를 불문하고 반겨야 할 일이 아닌가.” 자신부터가 여섯 종파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멸시를 받았던 천여운이었다. 애초부터 그런 편견을 뒤집고 복수를 위해 일어났기에 당연한 대답이었다. "그런 가요?" 그 말을 들은 호상화가 뒤로 열 발자국 정도 물러나더니, 들고 있던 목검을 휘두르며 검 초식을 펼치기 시작했다. -삭삭! 천여운을 비롯한 고왕흘, 백기, 허봉 등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허공을 가르며 호쾌하게 펼쳐지는 검 초식은 다름 아닌 칠마검이었다. ‘칠마검을 전부 익혔구나!’ 짧은 기간 동안 익혔을 터인데, 초식을 펼치는 자세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녀의 그런 모습은 일류 고수 그 자체였다. -착! 순차적으로 칠마검의 검일부터 검칠까지 펼쳐 보인 그녀가 당당한 발걸음으로 다시 천여운의 앞으로 걸어와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고 말했다. “수하를 위해서 희생하셨다는 이야기에서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남녀나 종파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신다고 하셨는데, 저를 받아주신다면 천 공자가 말씀하신 그런 인재임을 증명해보이겠습니다.” 당당하고 힘이 들어간 목소리는 여장부와도 같았다. 무위를 떠나서 당당하게 스스로의 장점을 부각시킬 수 있는 인재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내가 걸어가는 길은 꽤 고되고, 함께 많은 피를 흘릴 수도 있을 텐데 감당할 수 있겠어?” “그런 것도 감당하지 않을 생각이라면 무엇 때문에 공자의 수하가 되고 싶다고 이야기 하겠나요.” 천여운이 흡족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고맙다. 그리고 환영한다.” 그 말을 들은 호상화가 포권을 취하며 고개 숙여 외쳤다. “저 이백이십이 번 생도 파부종(破斧宗)의 호상화는 천여운 공자께 한 목숨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합니다.” 이로써 천여운의 산하로 처음으로 여자 생도가 들어오게 되었다. 이를 격하게 반가워하는 이가 있었으니 고왕흘이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혼자서 싱글벙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아아.....이것 참 난감하게 되었네요.” 호상화와 마찬가지로 이 자리에 남아있던 생도 한 명이 더 있었다. 비교적 왜소한 체형의 더벅머리를 하고 있는 생도는 호진창과 대결하는 천여운의 무위에 누구보다도 열광했던 자였다.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천여운이 난감하다는 듯이 우물쭈물하는 그에게 물었다. 생도는 그런 천여운의 질문에 쑥스럽다는 듯이 망설이다가, 이내 바닥에 양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저, 저도 천 공자의 밑으로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망설인 거지?” 그 질문에 더벅머리 생도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직까지 저는 칠마검을 전부 익히지 못했습니다. 뭔가 천 공자께.....저를 증명해 보이고 싶은데, 특별히 증명할 방법이 없어서.....” 부끄럽다는 듯이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앞서 파부종의 호상화가 멋지게 실력을 증명하고 심지어 당당하게 천여운의 수하가 되기를 자청하는 모습에 기가 죽어버린 탓이었다. ‘저렇게 멋진 모습을 보이면서 수하로 들어갔는데. 나 같이 하찮은 자를 천 공자가 받아줄까?’ 사실 그는 무도 종파에 속하는 생도가 아니었다. 일반 무가 출신으로 아버지도 중급 무사였고, 가문의 무공 역시도 이류에 불과했기에 자신감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 수차례나 멋진 무위를 펼쳐 보인 천여운을 보며 조금씩 꿈을 키워나가게 된 더벅머리 생도였다. “나와 함께 하고 싶나?” “비록 무공이 약하기는 하지만 받아주시기만 한다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그, 그리고 열심히 해서 절대로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반짝이는 눈빛에는 천여운을 동경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마치 지금의 허봉이 그를 바라보는 눈빛과 매우 흡사했기에 천여운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무공이 약하다고?” 천여운의 반문에 자신을 받아주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해진 더벅머리 생도가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 천여운이 그런 더벅머리 생도를 향해 빙그레 웃으며 포권을 취했다. “무공이 약한 것은 언제든지 강해질 수 있다. 그보다도 나를 따라준다고 해서 고맙게 생각한다. 환영한다.” 무공은 연마를 통해서 강해질 수 있다. 하지만 충성심은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고는 얻을 수가 없다. “아아아!” 허락이 떨어지는 말에 더벅머리 생도가 감격에 겨워서 눈물마저 글썽였다. 심지어 이마를 바닥에 쿵쿵 박으며 말했다. “진가의 장남 진국이 평생 천 공자께 충성을 다해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흐음....’ 그 모습에서 고왕흘이나 백기는 허봉의 그림자를 느꼈다. 정작 허봉은 진국의 행동이 과하다며 혀까지 차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그렇게 천여운에게 백기, 호상화, 진국까지 세 명의 수하들이 새롭게 영입되면서 여덟 명의 수하를 갖추게 되었다. 검마섬진을 구성하기 위한 인원이 천여운을 포함해 아홉 명을 갖추게 된 셈이었다. 세 명의 생도만 더 구하게 된다면 열두명의 조원을 형성하게 된다. ‘쩝. 조금 더 많이 관심을 보일 줄 알았는데.’ 더 많은 생도들이 모일 거라는 예상과 다른 결과에 고왕흘이 내심 아쉬워했다. 호진창에게 인정을 받고 노란 명찰을 획득 했는 데다가, 백기의 연기로 인해서 일부 천여운에 대한 평가가 많이 올라가기를 바랐는데 당장에는 무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것은 고왕흘의 기대심에 의한 오판이었다. 한 번 징계를 통해서 조장의 자격을 박탈당했던 천여운이었기에 생도들의 입장에서는 단번에 그를 완전히 믿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주군께서 노란 명찰을 획득하셨으니 남은 조원을 구하는 건 시간 문제다.’ 노란 명찰을 획득하는 데는 이레라는 시간제한이 걸렸었지만, 조원을 구하는 데는 특별히 시간제한이 걸린 것이 아니기에 조급해할 필요는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천여운이 의아한 눈빛으로 고왕흘에게 물었다. “다른 친구들은 어디에 있지?” 오종과 자우민, 마칠, 웅천, 호대명 등이 보이지 않기에 한 질문이었다. 이에 고왕흘과 허봉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보니 천여운은 어젯밤까지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웅천과 호대명이 조에서 이탈한 사실마저도 구금동에 있었기에 알 리가 없었다. “주군. 일단은 조용한 곳으로 가서 이야기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 고왕흘의 표정에서 무언가 일이 터졌었다는 것을 눈치 챈 천여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도관의 본관 건물 앞에는 지나다니는 생도들도 많고, 무공 교두들도 있었기에 장소를 옮기기로 했다. 그들은 장소를 옮겨 숙소의 뒤편에 있는 산 중턱으로 왔다. 중간에 생도들을 설득하러 돌아다니던 마칠과 자우민이 합류했다. 구금동에서 나온 천여운의 모습에 그들은 기뻐했고, 나오자마자 곧장 노란 명찰을 획득했기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산 중턱에서 모인 고왕흘은 먼저 조에서 웅천과 호대명이 이탈한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들이 거론되자 다른 수하들이 하나 같이 괘씸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주군께서 어려울 때 배신하다니!” “차라리 잘 된 겁니다.” “이럴 때마다 못 버티고 나간다면 거르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정작 천여운은 크게 화를 내거나 감정적으로 격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하게 그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이번 사태가 자신으로 인해서 비롯되었던 것이기에 누군가 이탈자가 나올지도 모른다고 예측했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이탈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가 구금동에 갇혀 있는데도, 두 명 이외에는 누구도 이탈하지 않고 오히려 조를 끈끈하게 유지했다는 것이 너무 감사했다. “조장으로서 이번 위기에도 끝까지 나를 따라줘서 진심으로 고맙다.” 천여운은 자리에 일어나 그들을 향해 한 명 한 명에게 진심으로 포권을 취했다. 그 모습에 고왕흘을 비롯한 생도들이 내심 뿌듯하면서도 감격스러워 했다. “앞으로는 섣부른 판단으로 내 사람들이 위험에 처할 일은 다시는 없을 거다. 그것만큼은 확실하게 약속하마.” '아아 주군!' 점점 우두머리로서의 자질을 갖춰가는 천여운의 모습에 고왕흘은 흔들리지 않고 신의를 지킨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이탈한 두 사람의 이야기는 꺼냈지만 다음의 문제가 더 컸다. “두 사람은 그렇다 치고 오종은 어디에 있지?” 천여운의 말에 허봉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것은 자신의 탓으로 오종이 부상을 당해서 의무실에 입원했다는 자책감 때문이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다른 생도들 또한 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사태가 심각하다고 판단한 천여운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건....” 노란 명찰을 빼앗긴 당사자인 백기가 어젯밤의 일을 말하려 했지만, 고왕흘이 고개를 저으며 자신이 이야기를 하겠다고 하였다. 고왕흘은 백기가 어떻게 자신들에게 합류하게 되었는지부터 하일명의 습격, 그리고 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유찬의 개입까지 차례대로 이야기해주었다. 그 과정에서 오종이 오른손 손가락들이 전부 꺾이고 전신에 타박상을 의무실에 입원해 있음을 알려주는데 천여운의 눈빛이 매섭게 날카로워졌으나 살기가 돌진 않았다. ‘.....이 녀석, 전과는 다르다.’ 백기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그가 의무실에서 보았던 천여운이라면 동료의 부상에 화를 이기지 못했을 텐데, 오히려 냉철한 눈빛으로 이야기를 듣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혹시나 전처럼 천여운이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혼자서 하일명을 찾아가서 복수를 하려 드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가 무색해질 지경이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천여운은 내심 크게 분노했지만 이성은 차갑게 유지하고 있었다. ‘전에도 그러더니 버릇을 아직 못 고쳤군.’ 항상 과감하게 암략을 시도하는 하일명이었다. 마도관에서 암묵적으로 생도들끼리 노란 명찰을 쟁탈하기를 유도했기에 그의 암략이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일대일로 노란 명찰을 빼앗은 것도 아니고, 서른 명이 넘는 인원으로 백기를 공격한 것은 암략을 넘어서 치졸한 짓거리였다. “....되었습니다. 주군께서 어찌 하실지?” 모든 선택은 주군인 천여운에게 달려있기에 고왕흘이 물었다. 노란 명찰을 획득한 상황이었기에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이대로 좌시하기에는 그들 모두가 이번 일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다만 이번에 징계를 받았는데다가 이야기를 하는 내내 큰 반응을 보이지 않은 천여운이었기에 다들 그의 결정이 궁금했다. 자신의 결정을 기다리는 수하들을 향해 천여운이 날카롭게 눈빛을 번뜩이며 말했다. “빚은 똑같이 갚아줘야지.” < 20장 똑같이 돌려주마(2) > 미시(未時) 초 무렵, 마도관의 숙소 삼 관 건물과 사 관 건물의 사이. 그곳은 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유찬이 수련을 위해 종종 저녁 무렵마다 찾는 곳이다. 하지만 격세석 연공실이 개방된 후로 개인 훈련은 그곳에서 하고, 조원들과 칠마검 연마를 이곳에서 한다. 도마종 출신인 그가 익힌 무공은 도(刀) 이외에는 권법이 유일했다. 도를 숭상하는 도마종의 사람들은 권(拳), 각(脚), 퇴(腿)와 같은 적수공권의 무공들을 익히는 것에는 크게 개의치 않았으나, 다른 병장기를 일체 허용하지 않았다. '외조부께서 보신다면 한심하게 여기시겠군.' 마도관에서 와서 처음 목검과 진검을 만지게 되었고, 이제는 심지어 검법마저 익혀야 했다. 도마종 출신인 그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익히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니라 어릴 적부터 쌓아온 사고관이나 몸이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몇 번 정도 목검을 들고서 칠마검의 초식을 펼치고는 그게 끝이었다. 이후로는 조원들이 칠마검을 연마하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렇게 천유찬과 조원들이 초식 수련을 하고 있는 숙소 건물 사이의 공터로 여덟 명의 생도들이 나타났다.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오자 훈련을 하던 천유찬의 조원들이 그것을 중지하고, 경계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의 앞을 가로 막았다. "무슨 일이지?" "천유찬 공자와 이야기를 하러 왔다." 여덟 생도들의 대표로 보이는 생도는 육백칠십 번 생도 갈연이다. 그를 포함한 여덟 명은 어젯밤 백기를 습격했던 십이 조의 생도들이었다. 대부분 얼굴들이 멍 자국이 가득한 것으로 보아, 어제 백기를 노리다 발차기에 당한 흔적으로 보였다. 갈연 역시도 오른쪽 뺨이 새파랗게 멍이 들어 있었다. "아! 너.....그 십이 조의 생도구나." 천유찬의 조원 중의 한 명인 백 번 생도 양도종(楊刀宗)의 우금필이 갈연을 알아보았다. "원래 네가 아니라 우평학이라는 녀석이 대표가 아니었나?" "우평학은.....내상이 심해서 의무실에 입원해 있다. 그건 상관할 바가 아닐 텐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절정 초입에 이른 백기를 상대했으니 부상을 입을 만도 했다. 그보다도 까칠한 갈연의 말투가 거슬렸는지, 우금필이 눈썹을 치켜 올리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그렇다 치고, 공자께서 올 거면 혼자 오라고 하셨을 텐데." "약조가 걸려있긴 해도 이곳 마도관에서 누구를 믿는 게 쉽지가 않아서 말이지." ".....네 녀석, 지금 공자께서 약조를 어길 거라고.." 화를 내려하는 우금필의 뒤쪽에서 천유찬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아, 됐어. 됐어. 그냥 이쪽으로 보내." ".....알겠습니다." 천유찬의 명령에 우금필은 화를 내려던 감정을 억누르고, 가로막던 길을 터주었다. 그것은 다른 조원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앞을 가로막고 있던 생도들이 양옆으로 전부 물러서자, 그 모습에 갈연은 내심 놀라했다. '오 번 생도의 명령에 완전히 복종하는 건가? 이 정도까지 조원들을 통제하다니.' 확실히 다른 생도들과는 그릇이 달랐다. 소교주에 가장 가깝다고 불리는 두 사람 중에 한 명 다웠다. 그들이 물러서자 그 뒤편에는 숙소 건물 벽에 등지고 기대 있는 천유찬이 보였다. 갈연이 그런 천유찬에게 말했다. "공자께서 말씀한 대로 하일명을 부추겨서 백기의 노란 명찰을 빼앗게 했습니다. 이제 약조를 지키시죠." 갈연의 말에서 숨겨져 있던 비밀이 드러났다. 그들이 하일명과 합작을 했던 배후에는 놀랍게도 천유찬이 있었다. 천유찬이 갈연을 바라보며 씨익 하고 웃으며 말했다. "에이, 아무렴. 내가 약조를 어길까봐." 그 말에 내심 긴장하고 있던 갈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천유찬이 자신들을 이용하고 약조를 어길까봐 걱정 했었는데, 그럴 일은 없을 듯 했다. 천유찬이 품속에서 가지고 있는 노란 명찰을 꺼냈다. 조장들 중에서 유일하게 네 개의 노란 명찰을 가지고 있는 그였다. 노란 명찰을 보면서 갈망하는 눈빛을 보이는 갈연을 향해 천유찬이 입 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약조가 완료되지 않지 않았나?"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약조는 백기를 얻도록 돕는 것이었잖아." "그건!" "지금 여기에 백기가 있나?" 능청스럽게 말하는 천유찬의 태도에 갈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뭔가 너무 쉽게 일이 진행된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그냥 순순히 노란 명찰을 넘겨줄 리가 없었다. 인상을 굳히던 갈연이 분에 겨운 듯 몸을 파르르 떨다 입을 열었다. "그럼 대체 어떻게 해주길 바랍니까?" "뭐, 크게 바라는 건 없어. 그런데 아무래도 백기를 얻으려면 녀석이 좀 더 절망을 맛봐야 할 것 같거든. 그 있잖아. 쓴맛을 맛봐야 단맛도 안다고." 혼자서 신난다는 듯이 손을 휙휙 휘저으며 말을 하는 모습이 경박스러워 보이기보다 오히려 소름끼쳤다. '이 자는 정말.....' 인재 한 명을 얻자고 하는 짓이 잔인하기 짝이 없었다. 천유찬은 백기를 철저히 망가뜨려서 절망으로 몰아넣고 손을 내밀어서 그를 얻을 셈이었다. "아! 그리고 생각해보니 너희들. 딱히 조장 그릇은 없잖아." "뭐요?" 십이 조에서 조장 급의 무위를 지닌 생도는 백기와 독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종섬뿐이었다. 하지만 백기는 천여운의 산하로 들어갔고, 천종섬은 단전이 파괴 되어서 방출되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일반 생도들뿐이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천유찬이 자신의 수하들이 모여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조원을 이를 열두 명을 넘어서는 열아홉 명의 생도들이 서있었다. 그 중에 한 명은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어이, 염파." "네넵! 공자님!" 잘생긴 얼굴에 실눈의 생도, 염파가 앞으로 나와 천유찬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임무에 실패하고 천유찬의 조원에 속하지 못하고 밀려났던 그였지만, 며칠 동안이나 빌고 빌어 사정을 하면서 후보군으로 남게 된 염파였다. "네 녀석한테 기회를 주지." "기회라 하시면...." "저기 저 녀석들을 데리고 가서 백기, 아니 천여운의 조를 처리하고 노란 명찰을 빼앗아라. 방법은 잘 알고 있겠지?" 천유찬의 말에 염파의 두 눈이 커지며 환희로 물들었다. 지금까지 안중에도 없던 그에게 기회를 주어진다는 것은 의미가 컸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천여운이었다. '녀석이 복귀하자마자 호 교두의 노란 명찰을 획득했다고 들었는데.' 천여운의 복귀는 두 시진 사이에 마도관의 생도들의 대다수에게 소문이 난 상태였다. 이미 마도관 내에서도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실력자로 거듭 난 천여운을 상대로 노란 명찰을 빼앗으라는 말은 어려운 임무이기도 했다. 하지만 천유찬이 의도한 바를 염파는 잘 이해했다. "공자님을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저번처럼 서투른 실수는 하지 않길 바란다. 만약 노란 명찰을 얻어낸다면 네가 저 녀석들을 통솔해서 조를 꾸려라." "네?" "내 밑의 조원들은 이미 포화되었으니, 내 산하에서 조를 꾸리란 말이다." 순간 당혹스러워했던 염파의 얼굴이 밝아졌다. 천유찬의 말대로 그의 조원들은 이미 열한 명을 넘어서 후보군만 여덟 명이나 되었다. 여기서 천유찬이 생각해낸 방법은 조원을 한정 짓는 것이 아니라, 수하들을 조장으로 만들어서 산하의 수하들을 늘리는 것을 택했다. 노란 명찰의 네 개씩이나 획득한 것도 타 생도들을 궁지로 몰기 위함이면서 자신의 세력을 늘리기 위함이었던 것이었다. '우리더러 본인의 산하로 들어오라는 건가? 하아.' 갈연도 그리 어리석지 않았기에 천유찬의 그런 의도를 모를 리가 없었다. 천유찬이 어이가 없어하는 갈연을 쳐다보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자, 이러면 너희들도 확실하게 조장도 얻고 일거양득이지? 하하하하핫." 그렇게 염파는 갈연을 포함한 전 십이 조의 생도 여덟 명을 이끌게 되었다. 오늘 내로 노란 명찰 획득이 완전히 결정이 나기 때문에 서둘러야 했던 염파는 이들을 이끌고 곧장 하일명과 접선하기 위해 움직였다. '천여운의 조를 박살내려면 적어도 두 개 조 이상이 모여야 해.' 염파는 무공도 조장급에 속했지만 그보다도 계략에 능하고 잔머리가 뛰어난 인물이었다. 천유찬이 이번 일에 그에게 기회를 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인원을 충당해야 해.' 천여운과 겨뤄 봤던 염파는 그가 조원을 전부 구하지 못했다고 해도 절대로 방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염파가 옆에서 같이 걸어가는 갈연에게 물었다. "갈연, 지금 있는 인원 이외에 십이 조의 다른 생도들을 끌어들일 수 있습니까?" ".....열 명 정도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백기를 습격할 당시에 참여하지 않은 조원들이 있었다. 그들은 특별히 백기를 원망하지 않기에 기습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마찬가지로 아직까지 조장을 구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조금만 설득하면 가능할 것 같았다. "잘 됐군요. 후후후." 염파는 갈연을 보내서 그들을 설득하게 하고, 그 자신은 하일명과의 접선을 시도했다. 하일명은 대연무장에 있었기에 발견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조원을 구성한 건가?' 어젯밤 백기들에게서 노란 명찰을 빼앗은 하일명은 자신이 이끌던 육 조에서 조원을 선별하는 작업을 거쳤다. 그 결과 지금 현재의 열한 명을 추릴 수 있었다. 같이 기습을 하고도 선택받지 못했던 나머지 인원들은 불만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이 이탈해야만 했다. "뭐지?" 처음으로 조원들과 칠마검의 초식들을 맞춰보고 있던 하일명이 경계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염파와 그 수하들을 바라보았다. 노란 명찰을 노리고 온 패거리일 수도 있었다. 염파가 날카로운 눈초리로 쳐다보는 하일명에게 공손하게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육 조의 조장이셨던 백팔 번 생도, 하일명 맞으시죠?" 공손한 태도를 보면 적의를 가지고 온 것은 아닌 듯 했다. '응?' 실눈의 생도인 염파가 선두에 있어서 미처 몰랐는데, 뒤쪽에 있는 녀석들은 어젯밤 자신들과 같이 합작을 했던 전 십이 조의 생도들이었다. 어젯밤에는 분명 자신들은 백기의 노란 명찰은 포기하겠다고 했었는데, 마음이 바뀐 것일까? 아니면 대체 무슨 의도로 찾아온 것일까? "무슨 용무지?"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는 하일명에게 염파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저는 이백 번 생도인 염파라고 합니다." ".....어쩌라는 거냐?" 본능적으로 염파라는 인물이 탐탁하게 느껴지지 않는 하일명이었다. 사실 그 느낌은 염파 역시도 동일했다. 기본적인 성향은 다르더라도 암략가의 기질을 가진 두 사람이 만났으니, 동류의 인간을 배척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아무래도 거두절미하고 본론만 말씀 드리는 게 좋겠군요." "본론?" "보다시피 저는 노란 명찰이 없습니다. 그런데 삼 단계 시험을 통과하려면 그게 필요하죠. 그래서 당신이 저를 도와줬으면 합니다." "도와줘? 웃기는 놈이군. 그런 것은 서로의 이(利)가 맞아야 가능한 게 아닌가?" 하일명이 자신의 오른쪽 가슴에 달고 있는 노란 명찰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미 노란 명찰을 획득한 자신이 염파를 도울 이유는 하등 없었다. "노란 명찰이 있으시니, 당연히 그러시겠죠. 하지만 제가 노리는 대상이 만약 천여운의 조라면 어떻습니까?" "천여운의 조?" 천여운이라는 말에 하일명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천여운만 생각하면 이가 갈리는 하일명이었다. 그의 표정 변화에서 미끼에 걸려들었다고 생각한 염파가 옳다구나 싶어 말을 이어갔다. "저는 개인적으로 천여운에게 진 빚이 있습니다. 꽤 짜증나는 빚이죠. 덕분에 고생을 많이 했거든요." 이것은 사실이었다. 자신이 모시고 싶어하는 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유찬에게 버림을 받을 뻔했으니 말이다. 흥미를 보이는 하일명에게 염파가 방점을 찍는 말을 했다. "이번에 천여운의 노란 명찰을 빼앗게 된다면 그의 조는 와해가 되죠. 두 번씩이나 조가 와해된 자를 누가 따르려고 할까요? 그렇게 된다면 그는 자연스럽게 삼 단계 시험을 치르지 못 하고 탈락할 확률이 높아질 겁니다." '이놈 생각보다 잔머리를 굴릴 줄 아는 놈이군.' 자신 못지않게 암략에 능한 놈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중간에 백기의 방해를 받아서, 제대로 화풀이를 마치지 못한 것을 내심 아쉬워했던 하일명이었다. '합작이라.....' 최근 천여운의 실력이 일취월장하면서 일대일로는 힘들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인정하기 싫으면서도 어느 정도 인지한 상태였다. 만약 이번에 염파와 합작을 하게 된다면 천여운에게 복수할 기회가 생긴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염파의 물음에 고민에 빠져 있던 하일명이 이를 흔쾌히 수락했다. "좋다." "화통하시군요. 결정에 감사드립니다." "개시는 언제로 할 거지?" 오늘이 마지막으로 조장이 결정되는 날이니, 분명 서둘러야 할 것이다. 하일명이 생각하는 가장 좋은 기습의 시점은 숙소로 들어가기 직전의 술시에서 해시 사이였다. 염파가 빙그레 웃으며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당장입니다." 그 말에 하일명의 입 꼬리가 양옆으로 벌어지며 만족감으로 물들었다. 그렇게 다시 한 번 합작을 위해 뭉친 두 조는 염파를 포함한 전 십이 조의 생도 스무 명과 하일명과 조원 열 한명 통틀어 서른 두 명이 준비가 되었다. 충분히 이 정도 인원이라면 천여운과 일곱 수하들을 제압하기에 충분했다. "가자!" -우르르르! 이미 천여운과 그 수하들이 숙소 뒤쪽의 산 중턱에 모여서 훈련을 한다는 정보를 알고 있는 그들은 인원이 전부 모이자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이들이 이렇게 산으로 오르는 시점에 공교롭게도 천여운과 수하들은 산 밑으로 내려오는 중이었다. 두 조는 정확하게 가운데 지점에서 맞닥뜨리고 말았다. "저들은?" 고왕흘이 서른 명이 넘는 생도들이 산 위를 오르는 모습을 발견했다. 하나 같이 목검을 쥐고서 올라오는 모습에 백기의 인상이 굳어졌다. 그들의 선두에는 염파와 하일명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나란히 걸어오고 있었다. '염파?' 뜻밖의 인물의 등장에 천여운 또한 눈빛이 의아해졌다. 자신의 조원으로 들어오고 싶다며 얕은 수작을 부리던 끄나풀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일명과 함께 왔다. '역시.....천유찬과 연결되어 있었나.' 중간에 도마종의 후보자인 천유찬이 개입해서 백기를 구해 줬다는 말을 듣고서, 이를 미심쩍게 생각했던 천여운이었다. 그들의 바로 앞까지 올라온 하일명이 이죽거리며 외쳤다. "매번 산속에서 쥐새끼들 마냥 잘도 숨어있구나. 키킥." 그렇게 벼르던 복수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하여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천여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답했다. "안 그래도 네놈을 찾고 있었는데 제 발로 올라왔구나." 벼르고 있던 것은 하일명만이 아니었다. 천여운의 차갑게 식어 있는 눈빛만 보더라도 내재된 분노가 느껴졌다. 불리한 상황에 처했는데도 기가 죽지 않는 모습에 짜증이 났는지, 하일명이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멍청한 놈. 지금 네놈이 어떤 상황인지 전혀 파악되지 않나 보군!" 아무리 강해졌다고 한들 서른 두 명이나 되는 생도들을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백기조차도 다수에는 어찌하지 못했는데, 제까짓 놈이 무슨 배짱을 부린단 말인가. 그런 하일명에게 천여운이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그건 누가 할 소리인지 모르겠네." "뭐?" 바로 그때였다. 하일명과 염파의 뒤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고한다. 들고 있는 목검 버려라." 그 말에 두 사람이 화들짝 놀라서 동시에 고개를 뒤로 돌렸다. 뒤를 바라본 두 사람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 되고 말았다. ‘이게 무슨?' 놀랍게도 그들과 한패였던 갈연을 포함한 열아홉 명이나 되는 전 십이 조의 생도들이 뒤쪽에서 자신들을 향해 목검의 끝을 겨냥하고 있었다. 천여운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누가 멍청한 놈일까?" < 20장 똑같이 돌려주마(2) > 끝 < 20장 똑같이 돌려주마(3) > 지금으로부터 두 시진 전, 마도관의 동북쪽에 있는 격세석 연공실 건물의 뒤편에는 꽤 넓은 공터가 있다. 이곳 공터에서 언젠가부터 스무 명이나 되는 생도들이 모여서 칠마검을 연마하고 있었다. 그들은 뛰어난 실력을 지닌 생도가 없었지만, 서로가 조언을 해가며 검 초식을 완성해 나갔다. 이들은 전 십이 조의 생도들이었다. 십이 조의 생도들은 이 단계 시험을 치르기 전까지 백기의 주도하에 이곳 공터에 모여서 진형 훈련을 하곤 했다. 하지만 이 단계 시험 이후부터는 조장 백기는 조에서 이탈했다. 덕분에 이곳에는 백기와 천종섬을 제외한 생도들만이 모이는 장소가 되어버렸다. "평학. 정말 혼자 가도 괜찮아?" 육백칠십 번 생도 갈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한 생도에게 말했다. 그 생도는 어젯밤 하일명과 대결을 펼치고 있는 백기의 뒤를 기습했던 사십사 번 생도인 우평학이었다. 두 조장 급의 생도가 이탈하면서 이들의 대표가 된 우평학이었다. "어쩔 수 없지. 혼자서 오라고 당부했었으니." 우평학 역시도 불안하기는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천유찬의 경고를 무시할 만큼의 배짱은 없었다. 그와 거래를 했기 때문에 약조를 지킨 대가를 받으러 가야만 했다. "노란 명찰만 있으면 우리도 조를 꾸릴 수 있을 거야." "......그렇지만 어차피 하나의 명찰만 얻어 봐야 또 다시 우리끼리 분쟁만..." 스무 명이 있는데 노란 명찰을 하나 얻어 봐야 여덟 명은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해버린다. 분명 심한 갈등이 일어날 것이다. 갈연의 우려에 우평학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다고 손만 놓고 있을 순 없잖아." "그야 그렇지." "어차피 이곳 마도관에서 살아남으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려선 안 돼. 약자라는 이유만으로 손을 놓으면 그대로 끝이야." 차마 우평학의 그 말에는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노란 명찰을 획득한 다른 조장 급의 생도들과 접촉을 해보았지만, 그 조원으로 들어갈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대부분 조장이 된 생도들은 원래 자신과 같은 조였던 조원들을 그대로 수용했기에 빈자리를 찾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그러니 너도 네 앞길만 생각해." "하지만 그래도 예전의 조장을 거래해가면서.....이런 식으로 하는 건 마음에 걸려." "후우, 이미 엎질러진 물이야. 이제 그만하자. 그리고 조에 관해서는 더 이상 걱정하지 마. 내가 조장이 되면 네 자리는 보장할 테니까." 속삭이면서 하는 우평학의 말에 갈연이 말없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곡해를 한 듯 했다. ‘아아아.' 그렇게 우평학은 약조한 대가를 받기 위해, 혼자서 천유찬을 만나러가려 했다. 그가 공터를 벗어나려는 찰나에 누군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잠깐." "너, 넌?" 그는 다름 아닌 천여운이었다. 현재 마도관의 생도들 중에서 가장 유명해진 얼굴이었다. 더군다나 천여운은 그들과 같은 조원이었던 독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종섬의 단전을 파괴시킨 장본인이었으니 더욱 모를 리가 없었다. 갑작스러운 천여운의 등장에 우평학의 눈빛에 당혹감이 서렸다. "네, 네가 어떻게?" "뭘 그리 놀라는 거지?" 아직까지 그들은 천여운이 구금동에서 나온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 나타난 것은 천여운 만이 아니었다. 격세석 연공실 건물의 모퉁이에서 일곱 명이나 되는 생도들이 나타났다. "히힉!" 당황한 우평학은 뒷걸음을 치고 말았다. 그들은 천여운의 수하들인 고왕흘, 백기, 호상화, 자우민, 허봉, 마칠, 진국이었다. 오늘 영입한 호상화와 진국을 제외한 나머지 다섯 명은 분노에 가득 차서 무서운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배, 백기!" 우평학을 가장 두렵게 만든 것은 바로 백기였다. 평소에도 눈가를 가로지르는 흉터로 강인하면서도 두려움을 주는 인상이었는데, 무표정하게 자신을 노려보니 심장이 덜컥 멈출 것만 같았다. "나를 상대로 거래를 했나?" 백기는 진심으로 실망한 눈빛을 보냈다. 그들의 대화를 모퉁이 뒤쪽에서 전부 들은 백기였다. 노란 명찰을 얻기 위해서 떼거지로 모여서 기습을 한 것은 어떤 의미로 살기위한 발버둥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 때 같은 조였던 자신을 팔아넘기려 한 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 그로 인해서 동료인 오종마저 심한 부상을 입었다. "멈춰!" 뒤늦게 천여운과 그 수하들의 등장을 알아챈 전 십이 조의 생도들이 몰려왔다. "배, 백기?" 갈연과 생도들 역시도 백기의 등장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어젯밤에 제대로 부상을 입히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는데, 설마 하루 만에 동료들을 이끌고 자신들이 있는 곳으로 올 줄은 몰랐다. "백기! 복수를 위해 온 것이냐?" 갈연이 입술을 꽉 깨물며 백기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답변이 날아온 것은 백기가 아닌 고왕흘이었다. "한밤중에 몰래 기습을 해놓고 그 대가를 치루지 않을 거라 생각했나!" 웬만한 생도들의 두 배에 달하는 거구에 근육질인 고왕흘의 외침에 수적으로 우세한 위치에 있는 전 십이 조의 생도들의 눈빛에 두려움이 서렸다. "우, 우리가 훨씬 많아! 이길 수 있어!" 그들의 등장에 당황해 했던 우평학이 생도들에게 외쳤다. 어젯밤에도 수적인 우세함으로 백기에게 궁지로 몰아 부상을 입혔다. 고작 하룻밤 만에 다리의 부상이 완전히 회복되었을 리가 없을 테니, 자신들이 불리할 이유가 없었다. '백기도 모자라서 천여운이 눈앞에 있는데?' 그런 우평학의 외침에도 생도들은 쉽게 공격할 수가 없었다. 어젯밤과는 완전히 상황이 달랐다. 백기 하나도 감당하기 힘든 판국에 절정의 고수인 무공 교두의 갈비뼈마저 부러뜨려서 의무실로 보낸 천여운까지 있었다. 현재 마도관 내에서 천여운은 높은 무위에 대한 위명 이상으로 악명도 자자했다. '열 받으면 단전도 그냥 부숴버린다는데?' '놈은 절대로 건드리면 안 돼.' '천여운이 의무실에 보낸 사람만 몇 명인데, 악마 같은 놈이야.'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일반 생도들 중에서는 천여운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제법 많았다. 간접적으로 접한 다른 조에서도 그런 마당에 단전이 파괴된 당사자가 있던 십이 조의 생도들은 더욱 천여운이 무서울 수밖에 없었다. "이 멍청한 녀석들이! 우리가 훨씬 수가 많은데!" 생도들이 머뭇거리며 쉽게 움직이지 못하자, 우평학이 답답함에 발을 동동 굴렸다. 그런 그의 귓가로 천여운의 냉소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놈이야말로 멍청하군. 내 바로 앞에서 그런 소리를 지껄이다니." "뭣?" 그 순간 천여운이 보법을 펼치며 우평학의 앞으로 신형을 좁혀왔다. 워낙 빠른 몸놀림이었기에 우평학이 어떻게 대응해볼 틈도 없이 그대로 천여운에게 팔목을 잡히고 말았다. 왼손으로 오른 팔목을 잡은 천여운은 그대로 우평학의 복부로 주먹을 휘둘렀다. ‘힘 조절. 힘 조절!' 이번에는 최대한 힘 조절을 했다. 그러나, -퍽! "크웩!" 주먹이 복부에 꽂히는 순간, 우평학의 핏줄이 선 눈알이 튀어나을 듯이 확장하며 입에서 피가 섞인 토사물이 올라왔다. 그와 동시에 우평학의 몸이 허공으로 6자(尺)가량을 부웅 떠 오르더니, 뒤로 열 바퀴 정도 데굴데굴 굴러가버렸다. '아.....적당히 힘을 줬는데.' 절반 정도의 힘만 주었는데도 여전히 괴력에 가까웠다. 그래도 천종섬의 턱과 이빨을 부숴버렸을 때에 비하면 약한 편이긴 했다. 우평학이 주먹질 한 방에 나가떨어지는 것을 바로 앞에서 지켜본 전 십이 조 생도들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번에 지급된 마룡단을 복용하고서 일류의 내공을 지니게 된 그였는데, 설마 한 초식도 아니고 주먹 한 방도 버티지 못해서 저 꼴이 될 줄은 몰랐다. "평학!" 놀란 갈연이 쓰러져 있는 우평학을 바라보고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바닥에 대(大)자로 뻗은 우평학은 피거품을 물고는 눈이 뒤집혀서 기절해 있었다. '어, 어떻게 해볼 상대가 아니야.' 지금 이곳에 있는 생도들의 대다수는 우평학과 동급이거나 그보다 약한 이들뿐이었다. 적어도 백기를 상대할 때는 그에 상응하는 무위를 지닌 하일명이 있었지만, 여기선 누구도 천여운을 상대할 만 한 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해볼 테냐?" 천여운이 자신을 바라보는 전 십이 조의 생도들을 향해 위협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이에 생도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부정했다. 천여운 하나도 감당하지 못하는데, 백기부터 시작해 저 거구의 근육질의 고왕흘까지 답이 없었다. ".....졌습니다." 우평학 다음 서열자인 갈연이 항복을 선언했다. 그러자 지금까지 참고 있던 허봉이 빨개진 눈으로 달려와 갈연의 역살을 잡고 소리쳤다. "어디 있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어젯밤에 우리한테서 뺏어간 노란 명찰 어디 있냐고!" 오종이 오른 손가락을 전부 부러지는 걸 참아가면서 지키려 했던 노란 명찰이었다. 그것을 되찾지 못한다면 오종의 그런 희생을 무색하게 만드는 셈이었다. 멱살이 불잡혀서 흔들리는 갈연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백팔 번 생도....하일명이 가지고 있습니다." "예상대로군요." 고왕흘이 천여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미 그것은 그들이 대화를 나누며 예상했던 부분이었다. 하일명 같은 탐욕스러운 이리와 같은 녀석이 노란 명찰을 이들에게 양보했을 리가 만무했다. "제기랄!" -퍽! "큭!" 허봉이 분을 참지 못하고 갈연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내공이 실린 주먹에 갈연의 고개가 왼쪽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천여운 만큼의 괴력의 주먹질이 아니었기에 오른쪽 뺨이 새파랗게 멍이 들었다.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허봉이 갈연을 넘어뜨려서 제대로 주먹질을 하려 했지만 그를 백기가 말렸다. "잠깐만." "말리지 마십시오! 설마 예전에 같은 조였다고 두둔하시는 겁니까?" "그게 아니야. 물어볼 말이 있으니까. 잠시만 멈춰봐." 백기 역시도 그를 말릴 생각은 없었다. 같은 조였기 때문에 정이 완전히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공과 사는 분명히 해야 했다. 저들이 벌인 단체 기습은 충분히 대가를 치러야 할 만한 행동이었다. "갈연." ".....백기." 갈연이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백기를 바라보다 이내 눈을 회피했다. 몇 번이나 우평학과 다른 생도들을 설득하려 했던 그였지만, 결국 그들과 함께 백기를 습격했기에 차마 눈을 쳐다볼 순 없었다. "아까 나를 두고 거래했다고 했는데 그게 무슨 소리지?" "......미안하다." "이미 저질러 놓고 그딴 식으로 회피하지 마라. 누구와 거래를 한 거지?" 백기의 질문에 잠시 망설이던 갈연이 결국 입을 열었다. "......도마종의 천유찬 공자가 제안했다." "천유찬?" 천유찬이 거론되자 천여운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어젯밤 백기를 위기에서 구해주었다는 말에 의아해 했지만 설마 이 일에 연루되어 있을 줄은 몰랐다. "천유찬 공자가 너를 공격해서 노란 명찰을 빼앗고 위기에 빠뜨리라고 했다." "하? 그놈이 나를 공격하라고 했다고?" 백기가 어이가 없었는지,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도움을 받은 것에 대해서 빚을 졌다고 생각했었는데, 설마 그 도움이 처음부터 의도된 계책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 대가로 노란 명찰을 받기로 했나?" "……그래." 결국 백기를 팔아서 자신들의 이익을 취하려 한 꼴이었다. 정작 당사자인 백기가 진실을 알게 되자, 어젯밤 그를 습격 했던 아홉 명의 생도들도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백기....정말 미안하다." "쓰레기 같은 놈들." 백기도 더 이상 그들을 용서할 수 없는지, 질렸다는 표정을 지으며 비켜섰다. 자신의 손으로 때릴 가치도 느끼지 못했다. "흥!" 허봉이 기다렸다는 듯이 갈연의 얼굴을 무차별적으로 주먹질 했다. -퍽퍽퍽퍽! 적어도 오종과 똑같은 꼴로 만들어줄 작정이었다. 누구 하나 허봉의 주먹질을 말릴 생각하지 못했고, 갈연 역시도 맞는 내내 신음 소리조차 흘리지 않았다. "잠깐만 기다려 보게." "또 왜요!!!" 이번에 그를 말린 사람은 고왕흘이었다. 내공을 쓰지 않고 주먹질만을 하느라 얼굴에 땀에 젖은 허봉이 신경질을 냈다. 허봉의 분노를 잘 알기에 고왕흘이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격려하듯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전음을 보냈다. [이렇게 한 녀석을 족치는 걸로 만족할 텐가? 허봉.] 고왕흘의 전음에 허봉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나를 믿어보게. 전부 끌어내 줄 테니!] 뭔가 생각해둔 바가 있어 보이는 고왕흘의 자신감 넘치는 전음에 허봉이 한층 가라앉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비켜섰다. 고왕흘이 바닥에 누워있는 갈연에게 말했다. "육백칠십 번 생도. 천유찬 공자와의 약조를 믿나?"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그가 정말로 자네들에게 노란 명찰을 줄 것 같은가?" 갈연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고왕흘이 하는 말은 자신 역시도 몇 번이나 미심쩍어 했던 부분이었다. 분명 대가를 치루고 얻는 것이었지만 이상하게 믿음이 가지 않는 약조였다. "분명 약조했습니다." "그렇다면 천유찬 공자가 자네들에게 노란 명찰을 두 개를 준다고 했겠군." "그. 그건...." 두 개를 준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서 공개적으로 이야기를 한다면 파장이 크다. "설마 하나만 준다고 했나?" 정확하게 약조한 부분을 짚어내는 고왕흘의 말에 갈연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던 어젯밤에 기습에 참여하지 않은 생도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도 함께 조에 끼워준다고 했잖아!" 우평학은 어젯밤의 기습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다 같이 한 조였던 만큼 모두가 함께 하자고 생도들을 다독였었다. 노란 명찰이 하나만 주어진다면 결과는 뻔했다. 당연히 기습에 참여하지 않았던 생도들의 자리는 고작 두 자리 뿐이기에 분쟁이 일어날 것이 틀림없었다. 두 사람만이 알고 있던 비밀을 알게 된 십이 조의 생도들은 화가 난 얼굴로 바닥에 기절해 있는 우평학을 비롯한 갈연을 노려보았다. 그 모습을 보며 고왕흘이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자네들은 그렇게 이용당해놓고도 또 서로 분열되려 하는군." "이용당하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노란 명찰 하나를 건내면 이 사달이 일어나리란 것을 천유찬 공자가 몰랐을 것 같나? 결국 자네들끼리 싸우면 그가 의도 한 대로 되는 것이 아닌가?" 고왕흘의 일리 있는 말에 갈연을 비롯한 십이 조 생도들이 분했는지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서 이를 갈았다. 정말 천유찬이 자신들을 이용한 것이라면 남의 손바닥 안에 놀아난 꼴이 아닌가. 분위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자 고왕흘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뭘 그렇게 분해하나? 정말 분하다면 복수를 해야지." < 20장 똑같이 돌려주마(3) > 끝 < 20장 똑같이 돌려주마(4) > 그렇게 시점은 다시 두 시진 이후로 돌아온다. 목검을 겨냥하는 갈연과 전 십이 조 생도들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특히 염파를 바라보는 눈빛은 이글거릴 만큼 분노를 담고 있었다. 엄밀히 말한다면 그 배후에 있는 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유찬에 대한 분노였다. '하마터면 실컷 이용만 당하고 팽(烹) 될 뻔했다.' 신기할 정도였다. 모든 것이 천여운의 수하인 고왕흘의 말대로 흘러갔다. 처음에는 자신들을 이용하고 있다는 말에 반신반의 했었지만, 막상 천유찬을 만나고 나니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천유찬에게 일반 생도들은 장기 패와도 같았다. 백기와 같이 뛰어난 인재에는 욕심을 부려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일반 생도들은 그저 이용대상일 뿐이었다.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죠?" 염파가 눈꼬리를 치켜 올리며, 어이가 없다는 목소리로 갈연에게 물었다. 노란 명찰을 얻기 위해 천유찬과 거래를 했던 전 십이조의 생도들이었다. 그런데 도리어 자신들을 향한 이 적의는 무엇이란 말인가? "무슨 짓? 흥! 노란 명찰을 담보로 우리를 계속 이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담보라뇨?" "아직도 우릴 멍청이로 아는군!" 갈연의 분노가 섞인 일갈에 염파가 그렇지 않아도 작은 실눈을 가늘게 뜨며 천여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누군가의 이간질에 넘어간 것 같군요." "이간질? 흥" 염파의 말에 허봉이 코웃음을 쳤다. "실력이 달려서 교두의 명찰은 빼앗지도 못하면서, 어젯밤부터 패거리를 짜서 공격해온 주제에 누구더러 이간질이라고 하는 거냐!" 허봉의 속 시원한 일침에 천여운의 수하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비웃음을 흘렸다. 오늘 오전에 합류한 호상화와 진국 역시도 이 같은 사정을 들었기에 그들을 경멸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으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일명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는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서 허봉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누구더러 실력이 달린다고 하는 것이냐! 쥐새끼처럼 꽁지가 빠지게 도망치던 놈이!" 그런 하일명의 외침에 오히려 고왕흘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하핫! 이것 참 잘됐군. 하일명, 자네의 말대로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도망치지 않겠군." "우리도 자네를 보내줄 생각이 없거든." 고왕흘의 서슬 퍼런 말에 화를 내던 하일명의 얼굴이 벙 찐 듯이 굳어졌다. '젠장!' 전 십이 조의 생도들이 배신하면서 상황이 역전되어버렸다. 회심의 기습을 노렸던 그들이 도리어 함정에 빠진 것이었다. 적어도 천여운의 조를 쓰러뜨리려면 두 배 이상의 인원이 필요한데, 오히려 수적으로 열세가 되었으니, 그들의 계책은 실패한 셈이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이럴 줄 알았다면 염파와의 합작을 수락하는 것이 아니었다. 수적으로 밀리는 판국에 저들과 싸우게 된다면 승산이 없었다. 자존심을 부릴 상황이 아니었다. '큭, 도망쳐야 하나? 하지만....' 혼자서 도망을 친다면 어떻게 저들을 뿌리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자신이 구성한 조원들을 전부 버려야만 했다. 버림받은 조원들이 과연 그를 조장으로 받아들일까?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상황이었다. '제길.' 염파 역시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굳이 싸워보지 않더라도 이미 승패가 기울었기 때문에 퇴각하는 것이 옳았다. 그런데 문제는 이번에도 천유찬이 준 임무를 실패한다면 더 이상 그의 밑으로 들어갈 기회를 잃고 말 것이다. '어떻게든 저들을 설득해서 위기를 넘겨야 해!' 염파가 당혹스러운 감정을 최대한 숨기고서, 고개를 돌려 갈연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갈연.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천유찬 공자께서 직접 산하의 수하로 거둬들여 주신다고 했는데 믿지 못하십니까? 이런 이간질에 넘어가면..." "그럼 노란 명찰을 두 개를 줄 수 있는 거냐?" "네?" "우리 모두를 수하로 거두려면 적어도 노란 명찰이 두 개가 필요하지 않나?" 노란 명찰을 가진 조장이 받을 수 있는 조원의 숫자는 열한 명이다. 열아흡 명인 전 십이 조의 생도들을 받아들이려면 당연히 노란 명찰은 두 개여야 했다. 갈연의 말에 염파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천유찬의 의중에서 벗어나는 약조를 함부로 내뱉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이들을 설득하지 못한다면 임무는 무조건 실패다. "이, 이렇게 하도록 하죠. 제가 책임지고 천유찬 공자께 건의해서, 여러분들이 노란 명찰 두 개를 얻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거짓말은 아니게 된다. 건의는 할 수 있다. 단지 그것을 거절하는 몫을 천유찬에게 떠넘기는 것이지만 말이다. '제발 넘어가라.' 전 십이 조의 생도들의 입장에서는 거절하기 힘든 제안이었다. 여기서 천여운의 조에 붙어서 자신들을 쓰러뜨린다고 해도 얻을 수 있는 노란 명찰은 고작 하나뿐이다. 영파의 제안에 흔들렸는지, 갈연의 눈빛에 흥미가 감돌았다. '됐다! 거의 넘어왔어." 이에 염파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잠시 대답을 망설이던 갈연이 입을 열었다.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긴 한데.....감당할 수 있나?" 알 수 없는 마지막 말에 염파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감당이요?" "나를 감당할 수 있냐는 말이다." "앗?"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염파가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언제 가까이로 다가왔는지, 신형을 바로 코앞까지 좁혀 온 천여운이 염파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마, 막으면 안 돼!' 천여운의 괴력을 몸소 직접 겪어봤던 염파였다. 저 무식한 주먹을 그대로 맞았다가 어떻게 될지 자명했다. 대응이고 자시고 염파가 재빨리 몸을 뒤로 넘어뜨리며 주먹을 피했다. "이 빌어먹을 자식이! 나를 두고서!" -휘익! 자신도 아닌 바로 옆에 있는 염파에게 먼저 선공을 날린 천여운에게 무시를 당했다는 생각에 화가 난 하일명이 그의 머리로 쾌속하게 목검을 휘둘렀다. 칠성의 내공을 실었기에 막지 못한다면 목검이라도 머리통이 깨질 것이다. 그러나, -콱! "아닛?" 하일명의 두 눈이 커졌다. 그가 휘두른 목검을 천여운이 왼손으로 잡아냈기 때문이었다. 막은 것도 아니고 목검을 잡아버리자 하일명은 그것을 뿌리치기 위해 더욱 공력을 끌어올렸다. '뭐, 뭐야? 움직이질 않아.' 그런데 공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는데도 저 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아직까지 일 갑자에도 도달하지 못한 하일명이 일 갑자 반이나 되는 천여운의 내공을 감당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고작 이 정도냐?" "크으으으.…이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공력에 큰 차이가 없었는데, 언제 이렇게 강해진 것일까? 두 사람의 내공 싸움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콰직! "헛?" 천여운이 움켜쥔 손에 힘을 가하자 목검이 부러지고 말았다. 독검이 부러지자 당황한 하일명이 그것을 놓고는 두 손가락으로 검결지를 만들어내, 천여운에게 검초를 펼치려 했다. 그 순간 그의 옆구리에 누군가의 발차기가 날아왔다. -퍽! 우득! "컥!" 발차기에 맞은 하일명이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옆으로 날아 가버렸다. 그에게 발차기를 날린 것은 각법의 달인인 백기였다. 꽤 멀리 나가떨어진 하일명이 얼굴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겨우 자세를 일으켜 세웠다. 왼쪽 옆구리가 심하게 욱씬거렸다. ‘제길. 또 부러지다니." 공교롭게도 천여운에게 금이 갔던 오른쪽 갈비뼈가 나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번에는 왼쪽 갈비뼈가 부러진 듯 했다. 백기가 그를 향해 손짓을 하며 도발했다. "네 상대는 나다." "갑자기 기습하다니! 이 비겁한 놈!" "비겁? 헛소리 하지 마라. 네놈에게 진 빚을 갚았을 뿐이다." 백기의 날카로운 일침에 하일명이 분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도 어젯밤 우평학의 기습 덕분에 백기와의 대결에서 우위를 점했기 때문이었다. 어젯밤에 저질렀던 모든 인과가 그대로 돌아오고 있었다. '어차피 도망치긴 글렀어.' 이렇게 된 이상 불리한 상황이라도 싸울 수밖에 없었다. 하일명이 자신의 조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싸워!" "와아아아아!" -파팍! 어떻게 해야하나 눈치를 보고 있던 하일명의 조원들이 그의 명령에 목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어?' 그런데 그 모습에 하일명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공격한 대상은 다름 아닌 뒤쪽을 가로막고 있는 전 십이 조의 생도들이었다. "이것들이 지금 뭐 하는 짓이야!" 화를 내는 하일명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조원들은 어떻게든 십이 조의 생도들을 공격하는데 집중했다. 그것은 십이 조의 생도들이 뒤쪽 퇴각로를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일명의 조원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들을 뚫고 도망쳐야 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저 괴물 같은 천여운을 비롯한 그 수하들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어젯밤의 기습 때문에 분노하는 저들의 기세만 보더라도 분명 뼈도 못 추릴 게 틀림없었다. 어디에 한 눈 파는 거냐!" -파파파팟! 그때 백기의 각법의 초식이 여러 각도로 잔영을 만들어 내며 쇄도해왔다. 자신의 명령을 무시하고 도망치는데 급급한 조원들에게 화가 난 하일명이었지만 이 공격을 무시할 순 없었다. "빌어먹을!" -파파파팍! 하일명이 거친 소리를 내뱉으며, 검결지로 방어 초식을 펼치며 백기의 발차기를 막아냈다. "그럼 우리도 나서볼까?" -꿈틀꿈틀! 고왕흘이 상의에 근육자국이 팽배해질 정도로 힘을 주고서 신형을 날렸다. 허봉 역시도 복수의 순간을 제일 기다려왔기에 잔득 화가 난 얼굴로 적들에게 달려들었다. "첫 출진이네요. 후후." 파부종의 호상화가 이런 상황이 달갑기라도 하는지, 만족스러운 일굴로 투기를 가다듬었다. 동글동글하면서도 귀여운 얼굴과는 상반된 기세였다. "보, 보기보다 많이 호전적이시네요." 진국은 이렇게 많은 생도들이 맞붙는 상황이 처음이었기에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우리도 가세! 빚을 갚을 시간이네." 자우민의 외침에 호상화, 마칠, 진국 역시도 하일명의 조원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마흔 명에 가까운 생도들이 뒤섞여 싸움판이 벌어졌다. 어떻게든 도망치려하는 하일명의 조원들과 이들에게 복수심이 불타올라 달려드는 싸움의 양상은 거의 일방적이라 할 수 있었다. "으으으!" 어떻게든 이런 상황만큼은 피하려고 잔꾀를 부렸던 염파가 당혹스러워했다. 적어도 수적인 우위만 점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천여운이 망연자실해 하며 뒷걸음을 치는 염파를 향해 저승사자처럼 걸어왔다. "도망갈 수 있을 것 같나?" "난감하군요.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맞을 줄 몰랐습니다." "잔꾀를 부린 대가다." 언제까지 천유찬이 부리는 수작에 끌려 다닐 것이라 생각한다면 오산이었다. 무서울 정도로 투기를 발산하는 천여운의 기세를 보아하니, 도망가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인 듯 했다. -퍼퍽! "크윽!" 하일명의 조원들이 하나 둘씩 바닥에 쓰러져가기 시작했다. 수적으로 열세이니 버틸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하압!" -파파파팍! 백기의 속사포와 같은 발차기가 연달아 하일명의 가슴을 때렸다. 하일명이 분투를 해가며 백기와 겨뤘지만, 왼쪽 갈비뼈가 부러진 부상 때문에 점차 몸이 둔해지면서 밀리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속수무책으로 발차기에 당하고 있었다. "......졌다. 방법이 없어." 유일한 희망인 하일명마저 밀리고 있었다. 이미 승패는 기울어진 상황이었다. 괜히 반항을 해봐야 상처만 늘어날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이던 염파가 한 가지 수를 떠올렸다. '어차피 이길 수 없다면....!' 염파가 오른손에 쥐고 있던 목검을 바닥에 떨어뜨리고는 천여운의 앞에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털썩! 그 모습에 천여운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염파가 머리를 바짝 바닥에 조아리며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여운 공자님의 승리입니다." "!?" 항복 선언이었다. 한 번 패배했었기에 천여운과 다시 겨룬다고 해도 이길 자신이 없는 염파였다. 차라리 항복을 해서 몸을 보전하는 길을 선택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무슨 짓이지?" 거의 정리가 되어가고 있었지만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암략을 꾸미고 이 사달을 일으킨 염파가 손가락 하나 까딱이지 않고 항복을 선언하자 천여운은 어이가 없어졌다. "어차피 결과는 정해졌습니다. 이미 패배한 마당에 무엇을 어찌 하겠습니까? 저희가 졌습니다. 소교주 후보자로서 부디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정중한 말이었지만 소교주 후보자까지 들먹이는 것이 비굴함 그 자체였다. "후우....." 천여운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리 화가 난다고 한들,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려서 항복까지 하는 상대를 핍박할 수 있을까? 후후후.' 바닥에 엎드려 있어서 얼굴이 가려진 염파의 입가는 실실 거리며 웃고 있었다. 여기서 우두머리인 천여운만 결정을 내리면 싸움은 끝난다. 그래도 명색이 소교주 후보자 중의 한 사람인데, 항복한 상대를 억지로 몰아붙이지는 않을 거라 생각한 염파였다. "선처?" 천여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세를 낮춰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는 바닥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염파의 머리카락을 우악스럽게 움켜쥐었다. -꽈악! "으헉!" 천여운이 머리카락을 쥔 손을 위로 잡아당기자, 염파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들어올렸다. "끄아아아! 무, 무슨 짓입니까? 항복을 한 상대에게..." "항복? 항복 같은 소리 하네. 싸우기 싫었으면 처음부터 이 딴 비겁한 짓거리는 하지 말았어야지." 그 말과 함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 이게 아닌데!' 당황한 염파가 머리에 안간 힘을 주며,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마치 큰 바윗덩어리가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자, 잠깐만.." "닥쳐!" -쾅! "끄읍!" 땅바닥에 그대로 일굴이 처박히고 말았다. 바닥에 얼굴이 반쯤 박혀서 피를 흘리며 꿈틀거리는 염파에게 천여운이 악마처럼 속삭였다. "남을 건드렸으면 대가는 치러야지." < 20장 똑같이 돌려주마(4) > 끝 < 21장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1) > 살아가면서 얼굴을 땅바닥에 처박히는 경험을 한 사람은 몇이나 될까? 괴력에 가까운 힘에 강제적으로 땅바닥에 얼굴이 처박히고만 염파는 난생 처음 겪는 경험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박히는 순간 얼굴이 땅을 파고들면서 안면 전체로 퍼져나가는 고통에 순간 정신을 잃을 뻔했다. 흙, 모래 파편들이 얼굴에 박히면서, 흘러나오는 피가 얼굴을 적시는 게 느껴졌다. "끄으으으으." -꽉! 바닥에 박혀서 꿈틀거리는 염파의 머리를 천여운이 들어 올렸다. 염파의 얼굴은 가관도 아니었다. 앞니들이 부러져서 덜렁덜렁 흔들렸고, 코도 부러졌는지 옆으로 휘어졌다. 당사자는 워낙 고통스러워서 인지하지 못했지만, 실눈을 제외하면 그토록 잘생겼던 얼굴이 한순간에 엉망이 되어버렸다. "하아.... 하아...." 혼자 감상하기에는 아까운 얼굴이었다. 바닥에 박히면서 숨이 막혔다가 공기가 마실 수 있게 되자, 정신을 차린 염파가 힘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으으....이, 이건 너무 하지 않습니까?" "아직 시작도 안 했어." "히익!" 위협적인 천여운의 말에 염파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방금 전에 얼굴을 처박은 것만으로도 죽을 것 같았는데, 이제 시작이라니 살이 떨릴 수밖에 없었다. -꾸욱! 머리카락을 움켜잡은 손에 또 다시 힘이 들어가자 당황한 염파가 다급히 소리쳤다. "저, 저한테 이러고도 천유찬 공자가 가만히 둘 것 같습니까?" 감춰야 할 자신의 윗선마저 대놓고 밝히고 말았다. 물론 천여운은 처음부터 그가 천유찬의 끄나풀인 것을 알고 있었다. "천유찬이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순간 아차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이미 내뱉은 말이었다. 어차피 뱉었으니 천여운이 그를 두려워하거나 의식하기를 바라야만 했다. 천유찬은 뛰어난 무위는 물론이거니와 현재 마도관 내에서도 가장 큰 세력을 갖췄기 때문에 어지간한 생도들은 이름만으로도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게 어쨌다는 거지?" '어......라?' 아까부터 모든 예상이 전부 빗나가고 있었다. 눈썹을 치켜 올리며 묻는 모습이 오히려 심기를 건드린 듯 했다. "천유찬을 거론하면 내가 두려워하기라도 할 줄 알았나?" 그 말을 듣는 순간 염파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쳐지나갔다. '아아! 그리고 보니 독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종섬의 전신의 뼈를 전부 부쉈다고 들었는데.' 천여운의 악명을 최대치로 높여준 천종섬이었다. 이것을 떠올리자 그에게 천유찬을 들먹인 것이 후회가 되는 염파였다. 애초에 다른 소교주 후보자들을 겁냈다면 그런 대담한 짓을 했을 리가 없었다. "네놈이나 걱정하시지. 어차피 그놈은 네 다음 차례다." "네? 다음이라니....으어엇!" -쾅! "크읍!" 반문하는 염파의 얼굴이 다시 한 번 땅바닥에 처박혔다. 두 번째 박히는 것이었기에 익숙해질 만도 했지만 실상 전혀 그렇지 않았다. "끄르르르륵!" 거품 물며 신음성을 흘리던 염파가 더 이상 꿈틀거리지 않고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최대한 힘 조절을 했길 망정이지, 제대로 힘을 주었다면 염파의 머리통이 그대로 으깨졌을 것이다. 기절한 염파를 바라보며 천여운이 경멸하는 눈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천여운에게 고왕흘이 다가와 말했다. "주군. 전부 제압했습니다." "그래?" 고왕흘의 뒤쪽에는 하일명이 데려왔던 열한 명의 생도들이 한 줄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상처투성이가 된 그들은 벌벌 떨면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어젯밤까지만 하더라도 이렇게 되리라고는 꿈조차 꾸지 못 했던 그들이었다. "하일명은?" "저쪽에 있습니다." 고왕흘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을 쳐다보니, 백기의 앞에 하일명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패배한 것에 분했는지 백기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빌어먹을 갈비뼈만 부러지지 않았어도!' 이렇게 쉽게 패하진 않았을 거라 자부하는 하일명이었다. 그러나 이미 결과는 정해졌다. 천여운이 차가운 눈빛으로 하일명의 앞으로 걸어갔다. "읍읍읍!" 가까이 다가오자 하일명이 뭔가를 웅얼거렸다. 하지만 말을 못하게 아혈(啞穴)을 점해놨기에 신음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패배를 했어도 반항이 심한 그였기에 마혈(麻穴)도 점해진 상태였다. "어떻게 할까? 아혈을 풀까?" 천여운을 주군으로 모시기로 했지만 낯간지러워서 차마 경어는 쓰지 못하는 백기였다. 백기의 말에 천여운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그에게서 듣고 싶은 말 따위는 없었다. "그럼?" "똑같이 갚아줘야지." '갚아줘?' 아혈이 점해져서 말을 할 수 없었지만 듣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일명의 의아한 눈빛으로 천여운을 바라보았다. 천여운이 다리를 굽혀서 하일명의 시야로 몸을 낮추더니, 그의 오른손을 붙잡았다. ‘이, 이 새끼 뭐 하는 거야?‘ 설마 하는 마음에 하일명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리고 그 불안함은 현실로 다가왔다. -우득! 천여운이 그의 오른손 검지 손가락을 뒤로 꺾어버렸다. "끄으으으읍!" 아무리 다른 생도들에 비해서 독종인 하일명이라고 해도 멀쩡한 손가락을 꺾어버리는데 고통스럽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 광경에 갈연을 비롯한 십이 조의 생도들도 놀라서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우드득! "끄으으으으!" -우드득! "끄으으읍읍!!!" 천여운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검지 손가락을 시작으로 중지, 약지, 새끼, 엄지 손가락까지 차례대로 뒤로 꺾어서 부러 뜨려버렸다. 이, 이 미친놈이! 으으으!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하일명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서 목대에 핏줄까지 서있었다. 눈시울이 붉어졌는데도 눈물을 흘리지 않은 것이 그나마 용했다. "왜 고통스럽냐?" 천여운의 질문에 하일명이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어이가 없어서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이 자식이 멀쩡한 손가락을 부러뜨려놓고 그 딴 소리를 하다니!' 그런 하일명의 눈빛에도 개의치 않고 천여운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 "오종도 네놈처럼 아팠을 거다. 아니 더 고통스러웠겠지." 심지어 오종은 두드려 맞으면서 손가락이 부러졌다. 오종을 거론하자 정작 하일명의 조원들이 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제, 젠장.....' 하일명이야 백기와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그들은 오종에게서 노란 명찰을 빼앗기 위해 온갖 구타를 비롯해 손을 짓밟고 손가락을 부러뜨려버렸다. 그것이 인과응보가 되어 다가온 것이었다. "똑같이 갚아주는 것뿐이다. 전부 네놈이 자초한 거야." "읍읍읍!!!" '빌어먹을 자식! 죽여 버릴 거야!'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는데도 기가 죽지 않는 것을 보면 독종은 독종이었다. 천여운이 그런 하일명을 향해 빙그레 웃으며 뺨따귀를 날렸다. -짜악! "끄읍!" 괴력이 실린 뺨따귀에 하일명의 고개가 부러질 듯이 돌아가 버렸다. 마혈이 점해져서 때리는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고개가 넘어 갔길 망정이지 버텼다면 목뼈가 부러졌을 것이다. 어찌나 셌던지 뺨따귀 한방에 눈이 풀려버린 하일명을 내버려두고 자리에서 일어난 천여운이 수하들에게 명을 내렸다. "그 녀석들도 모두 한쪽 다리랑 손가락을 전부 부러뜨려." 사형선고와도 같은 천여운의 말에 생도들의 희비가 갈라졌다. 천여운의 수하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화색이 되었고, 제발하면서 간절해 하던 하일명의 조원들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다, 다행이다.' 갈연은 내심 자신의 선택을 감사해야 했다. 중간에 염파의 제안에 흔들렸다면 같은 꼴이 되었을 것이다. 노란 명찰 하나를 얻어내고자 했던 욕심이 불러일으킨 최악의 결말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정리가 되는 것만 같았다. -꿈틀! 천여운의 뒤에서 마혈이 점해져서 꼼짝하지 못하던 하일명의 몸이 조금씩 움직였다.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하일명의 얼굴에 있는 핏줄들이 선명할 정도로 튀어나오기 시작하더니, 뺨따귀 한 방에 눈이 풀려있던 하일명의 동공이 서서히 붉게 물들어갔다. 흰자위마저 완전히 붉어진 순간, 움직일 수 없던 하일명이 야수처럼 울부짖으며 천여운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크아아아악!" "주, 주군!!!" 놀라서 외치는 허봉의 목소리가 산을 울렸다. *** 그로부터 반시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마도관의 숙소 삼 관 건물과 사 관 건물의 사이. 공터에서는 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유찬을 포함한 열 두 명의 생도들이 그 동안 익혔던 칠마검을 바탕으로 검마섬진을 맞춰보고 있었다. -착! 열두 명이 원진을 만들어 같은 동작을 펼치며 칠마검의 검초인 검사(劍四)를 펼쳤다. 동시에 같은 동작의 초식을 펼치니 보기에는 그럴 듯 해보였다. 그러나 막상 초식을 펼쳤는데도, 뭔가 특별한 변화라던가 검진 특유의 합이 이뤄지지 않았다. '이상하네.' 천유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칠마검의 비급서에 적혀있는 후반부를 참고로 펼친 건데, 이상하게 어설펐다. 아직까지 칠마검을 제대로 연마하지 않아서 그런 건가라고 생각하기에는 자신의 조원들은 처음부터 일류고수 이상의 실력자들이었기에 금방 초식을 숙지했다. "흐으음. 뭐가 문제인 거지?" "계속 할까요?" "잠깐만 쉬자. 비급서를 더 읽어봐야겠어." 다른 조들보다 빠르게 검마섬진을 익히려고 했는데 시작부터 막힌다. 천유찬의 말에 계속해서 검진의 합을 맞추느라 지친 조원들이 바닥에 이리저리 주저앉아서 땀을 닦았다. 비급서를 훑어보던 천유찬이 검진에 참여하지 않고 구경하던 생도를 불렀다. 백번 생도인 양도종의 우금필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눈여겨 볼 것은 우금필의 오른쪽 가슴에 달려있는 노란명찰이었다. "부르셨습니까? 공자님." "밖에서 볼 때는 검진이 제대로 이뤄진 것 같아?" "그게......" "괜찮으니까 눈치 보지 말고 말해." 천유찬이 괜찮다며 경박스럽게 손을 휙휙 젓자, 우금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냥 모두가 동시에 같은 초식을 펼친 것 같았습니다. 저도 검진을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그냥 평범해 보이더군요." "맞지? 것 참 이상하네. 비급서에는 분명...." 천유찬이 말을 맺기도 전에 생도 한 명이 그에게 외쳤다. "공자님! 저기에!" 생도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 스무 명의 생도들이 나타났다. 공터에서 쉬고 있던 천유찬의 수하들이 경계심이 가득해져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웅성웅성! ‘뭐야?' 공터로 나타난 생도들은 모두가 전쟁이라도 한바탕 치룬 것처럼 몰골이 엉망이었다. 특이한 것은 그들 모두가 한 명씩 생도들을 들쳐 매거나 업고 있었다. 그들의 선두에 있는 생도는 부상을 입었는지 얼굴을 천으로 감싸고 있었는데, 피로 얼룩져서 보는 이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우르르르! 경각심을 느낀 천유찬의 수하들이 나서 그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가로막았다. 그러나 선두에 있던 심하게 얼굴을 다친 생도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그 경계심을 풀 수 있었다. "저, 염파입니다." 그는 다름 아닌 이백 번 생도인 염파였다. 자세히 보니 뒤에 있는 자들은 갈연을 비롯한 전 십이 조의 생도들이었다. 그들이 몰골을 보니 꽤나 격렬한 싸움을 치룬 듯 했다. "염파?" 이에 천유찬이 검마섬진에 대한 것은 잊고,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염파가 그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공자님.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염파가 오른쪽 가슴에 달린 노란 명찰을 보였다. 그보다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궁금해진 천유찬이 경박스럽게 보채듯이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뒤에 업고 있는 녀석은 대체 누구고?" 그 물음에 염파가 등에 업고 있던 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바닥에 대(大)자로 뻗은 생도의 얼굴을 확인한 천유찬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하일명?" 그는 바로 백팔 번 생도인 하일명이었다. 하일명의 얼굴부터 시작해 살이 드러난 부분에 핏줄이 징그러울 만큼 불룩불룩 튀어나와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우우." 천유찬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눈살을 찌푸렸다. -털썩! 털썩! 염파를 시작으로 전 십이 조의 생도들이 들쳐 메고 있던 자들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자들은 다름 아닌 천여운의 일곱 수하들과 하일명의 열한 명의 조원들이었다. 갈연이 내려놓은 자는 염파처럼 얼굴을 심하게 다친데다가, 끈적끈적한 피투성이가 되어서 누구인지조차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 녀석은 또 누구야?" "칠 번 생도 천여운입니다." 저 몰골의 주인이 천여운이라는 말에 천유찬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천여운이라고? 어떻게 놈을 처리했기에 이 꼴이 된 거야?" 나무라는 표현과는 달리 들뜬 목소리가 상당히 기쁜 듯 했다. ".....하일명이 아니었다면 저희가 당할 뻔했습니다." 염파가 부끄럽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천유찬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하일명이 역혈마공을 익히지 않았더라면 저희가 당할 뻔했습니다." "역혈마공?" 역혈마공이라는 말에 천유찬이 놀랐는지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은 기존의 혈도를 역행시켜서 공력을 폭증시키는 내공 운기법이었다. 얼핏 들으면 굉장한 것 같지만 실상 매우 위험했다. 쓰면 쓸수록 사용자의 기혈이 망가지고, 이지를 잃어가기 때문에 후에는 아군조차 알아보지 못한다. 그런 부작용으로 마교 내에서도 절대로 익혀선 안 될 마공으로 규정되었다. "쯧쯧. 이놈도 완전 미친놈이었군." 천유찬이 혀를 차면서 하일명을 내려다보았다. 금지된 마공인 역혈마공을 펼쳤다면 굳이 이야기를 듣지 않더라도 충분히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분명 폭주해서 적이고 아군이고 할 것 없이 무차별적으로 공격했을 것이 뻔했다. "아무튼 수고했다. 하하핫, 너한테 별다른 기대는 안했는데 제법인데." 천유찬이 처음으로 염파를 칭찬했다. 만족스러운 성과를 얻었으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선임 무공 교두마저 무릎 꿇렸다는 소문까지 들으면서 천여운을 위험하게 생각했던 천유찬이었다. "그럼 의무실로 보내기 전에 힘줄 하나 정도 끊어볼까." 천유찬이 활짝 웃으며 바닥에 누워있는 천여운에게 다가갔다. 오른 손목의 힘줄만 끊어 놓아도 한동안 검법을 익힐 수 없을 것이다. 갈연이 그 말에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저 지경이 되었는데도 힘줄을 끊겠다는 건가? 뭐든지 허투루 하는 법이 없구나. 정말 무서운 자다.' -우웅! 천유찬의 오른손에 선명한 빛의 도기가 형성되었다. 날카로운 도기로 천여운의 오른 손목의 힘줄을 그으면서 천유찬이 이죽거렸다. "하하핫, 그래도 난 너처럼 단전까지는 파괴시키지 않으니까. 고맙지?" 선처를 베풀었다는 듯이 말을 걸면서 천여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즐거워하던 천유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 눈을 깜빡이며 자신의 눈이 잘못 되었나 의심했다. 떨어져서 보았을 때는 워낙 심하게 얼굴이 다쳐서 몰랐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그는 천여운이 아니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온몸에 소름이 돋은 천유찬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염......파?" 그런 그의 뒤에서 염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빨리도 알아 차렸네." "이게 대체..." -퍽! "크헉!" -쿠당탕탕탕탕! 다급히 고개를 돌리던 천유찬의 얼굴이 강한 타격에 늘어지듯이 휘어지며, 그의 몸이 물수제비처럼 공터 바닥을 수차례 튕기며 날아가 버렸다. < 21장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1) > 끝 < 21장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2) > "공자님!!!" 너무도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다. 물수제비처럼 바닥을 수차례나 튕기며, 쓰러진 생도들의 저 편으로 날아가 버린 천유찬을 보며, 그 수하들이 전부 놀라서 동시에 소리쳤다. 천유찬의 수하들은 이 사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염파가 조용히 천유찬의 뒤로 다가가서는 기습적으로 주먹을 날렸다. 공터의 멀리까지 튕겨져 나간 천유찬은 갑작스러운 일격에 충격이 심했는지, 바닥에 손을 짚고서 움직이질 못했다. "염파! 너 이게 무슨 짓이야!" 천유찬의 수하 중에서 또 다른 노란 명찰을 차고 있는 적풍도 종의 오지란이 소리쳤다. 길쭉한 턱에 눈썹이 아래로 쳐져서 우울한 분위기를 가진 그녀는 파부종의 호상화와 더불어 마도관의 여자 생도들 중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는 고수였다. "네놈이 정녕 미쳤구나." 양도종의 우금필이 화를 참지 못하고 염파를 제압하기 위해 신형을 날렸다. 그런 그의 앞을 누군가가 가로막았다. -퍽! 타타탁! 절도 있으면서도 강한 공력이 실린 일권에 우금필이 양팔을 교차하며 급히 방어를 했지만 뒤로 세 보 밀려났다. 우금필은 자신을 공격한 대상을 바라보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꿈틀꿈틀! 상의를 찢고 튀어나올 것 같이 굉장한 근육. 일반생도들의 거의 두 배에 가까운 거구의 신장을 지닌 그는 마권종의 고왕흘이었다. 바닥에 기절해 있던 그가 벌떡 일어나서는 자신을 가로막은 것이었다. "뭐야? 네놈이 어떻게?" "다들 일어나야 할 것 같소." 당혹스러워하는 우금필을 뒤로 한 채, 고왕흘이 쓰러져 있는 생도들을 향해 말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기절해 있던 생도들이 눈을 번쩍 뜨더니, 자리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빠르네요." -좀 더 누워있을 줄 알았는데." "뭐, 계획대로는 되었으니까." 저들끼리 투덜거리며 일어나는 모습에 순간 벙 졌다가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이, 이것들이!!!" 그제야 천유찬의 수하들은 자신들이 속았음을 알아차렸다. 옷과 얼굴에는 먼지와 피를 묻히고 있었지만, 자세히 보면 누구하나 상처 같은 건 없었다. 그저 부상을 당한 척 속인 것이었다. '잠깐 그러면 이 녀석들을 데리고 온 십이 조는?' 우금필이 떨리는 눈빛으로 갈연과 전 십이 조의 생도들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들 역시도 고왕흘의 신호를 기다렸던 것처럼 허리춤에 차고 있던 목검을 빼들어 싸울 태세를 갖췄다. "염파! 이노오오오옴! 감히 공자님을 배신했다는 말이냐!" 누군가 화를 참지 못하고 일갈을 내뱉었다. 우금필, 오지란과 마찬가지로 노란 명찰을 가슴에 달고 있는 생도였다. 그는 패권종의 진유로 고왕흘보다는 신장이 작았지만 그 못지않게 전신의 근육이 고루 발달한 권법의 달인이었다. "역시 염파 놈이 배신한 건가?" "염파 이 간사한 놈이!" 천유찬의 수하들이 하나 같이 분노해서 피로 얼룩진 천으로 얼굴을 감고 있는 염파를 노려보며 외쳤다. 어지간히 신뢰를 얻지 못한 듯 했다. 천유찬을 기습했던 염파가 그들을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괜한 짓을 했군." 그리고는 얼굴에 두르고 있던 천을 답답하다는 듯이 풀어버렸다. -스르르륵! 얼굴을 가리고 있던 천이 벗겨지자, 천유찬의 수하들의 표정이 일제히 굳어졌다. 분명 방금 전에 목소리는 분명 염파였는데, 가려진 천안에 드러난 얼굴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천여운!!!" 그는 바로 칠 번 생도 천여운이었다. 얼굴을 두른 천 때문에 갑갑했었던 천여운이 시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그것은 반 시진 전에 역혈마공을 펼쳤던 하일명을 제압하고 나서의 일이다. 역혈마공으로 내공을 폭증시켜 점혈을 풀어낸 하일명은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천여운을 향해 덤벼들었다. "주군!!!" 공력이 폭증한 상태로 하일명은 왼손의 검결지로 절초를 펼쳤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며 이지를 잃기 전에 무조건 천여운 만큼은 쓰러뜨리려 했다. 천여운의 뒤로 검결지가 닿기도 전에 그의 왼쪽 옆구리를 누군가가 발차기를 날려 걷어찼다. -퍽! 그는 바로 백기였다. 오른 손가락을 전부 부러뜨린 천여운에 대한 분노로 미처 보지 못했는데, 백기 역시도 바로 옆에 있었다. 위급한 상황이었기에 백기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아까 전처럼 발차기를 날렸던 것이다. "크아아아!" -파팡! "헛?" 그러나 이번에 날아간 사람은 하일명이 아닌 백기였다. 공력이 폭증한 하일명의 몸에서 생겨난 강한 반탄력에 튕겨져 나간 것이었다. '이놈이 또 나를 방해해!' 천여운을 공격하던 하일명은 또 다시 자신의 부러진 갈비뼈를 노린 백기에게 분노해서 방향을 틀어, 튕겨져 나가면서 넘어진 그를 공격하려했다. 그러나 천여운이 그것을 지켜볼 리가 없었다. "어딜!" -꽉! 백기를 향해 신형을 틀려고 하는 하일명의 오른 팔목을 천여운이 붙잡았다. 절정의 초입인 백기마저 반탄력으로 튕겨낸 하일명은 스스로의 폭증한 공력을 과신했다. ‘이번에도 통할 것 같으냐!' 하일명이 폭증한 공력을 십성으로 끌어올려 대항했다. 그러나 아무리 폭증했다고 한들, 일 갑자 반의 내공과 청옥석에 흔적을 남길 수 있을 만큼 괴력을 가진 천여운이 힘에서 밀릴 리가 없었다. -휘익! "크어어어?" 팔목이 잡힌 채로 하일명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라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쾅! "크아악!" 이를 놓치지 않고 천여운이 바닥에 누운 하일명의 위로 뛰어올라, 그의 머리를 향해 주먹을 내리찍었다. -콰앙! 워낙 다급하게 제압하려다보니 약간 힘 조절이 되지 않았다. 염파의 얼굴이 박혔을 때보다도 훨씬 깊숙한 깊이로 하일명의 머리가 땅바닥에 박혀버리고 말았다. '죽진 않았겠지.' 머리를 깨부술 정도로는 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역혈마공을 펼쳐서 그런지 핏줄이 울룩불룩 튀어 나온 하일명의 신체가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단단해진 느낌이었다. "끄르르르!" -툭! 다행히 하일명의 머리가 부서지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앞에는 천여운의 주먹과 뒤통수는 땅바닥에 부딪치면서 강한 뇌진탕을 겪은 하일명은 그대로 거품을 물고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역혈마공으로 반전을 노린 하일명의 계획이 일순간에 수포로 돌아갔다. "휴." 그렇게 폭주한 하일명을 제압한 천여운은 수하들을 통해서 그것이 역혈마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부분의 종파 사람들은 조기 교육을 받기 때문에 하일명이 폭주한 증상이 역혈마공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도 처음 봤습니다." "본교의 금지된 마공을 익히다니. 마도관 방출은 정해졌군요." 고왕흘이 기절해 있는 하일명을 보며 혀를 찼다. 차라리 굴욕을 참고 훗날을 기약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 순간을 참지 못하고 역혈마공을 펼쳤으니 어리석은 선택이라 할 수 있었다. "전부 정리되었습니다." "이제 의무실로 보내기만 하면 됩니다." 어젯밤 그들을 기습했던 하일명의 조원들은 다리와 손가락이 전부 부러졌으니, 삼 단계 시험까지 낫지 못한다면 방출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오종의 복수를 해서 후련하기는 한데, 찝찝하네요." 허봉이 하는 말의 의미를 모두가 모를 리가 없었다. 정작 이 일을 꾸민 진정한 배후의 인물은 아무런 피해도 보지 않았다. 노란 명찰 하나로 이 많은 생도들을 움직여서 서로 싸우게 만들고 이런 사태까지 일으켰으니 참으로 악질적이라 할 수 있었다. "배후의 범인을 알고도 건드리지 못하다니! 화가 나네요." "후우." 허봉의 말에 다른 생도들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유찬은 하일명이나 염파와는 완전히 다른 상대였다. 본인 자체도 무위가 절정의 극에 이르렀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고, 그 밑으로 절정의 초입에 이른 수하만 세 명이나 된다고 알려졌다. 인재를 가려서 받는 그였기에 마룡단을 지급 받기 전부터 일류 경지에 이른 자들만 수하로 거둬들인 천유찬은 마도관의 생도들 중에서 세력 면으로는 최고라 할 수 있었다. "분하기는 하지만 지금 겨루기에는 전력에서 밀리네." 천여운과 천유찬이 지금 부딪치게 된다면 개인의 대결로 끝나지 않는다. 소교주 쟁탈전으로써 두 후보자 간의 세력과 세력이 부딪치는 양상을 띠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적어도 우리도 비숫한 인원과 백기 이외에도 절정의 초입에 이른 실력자가 두 명은 더 있어야 겨뤄볼 만 할 겁니다." 자우민도 고왕흘의 의견에 동의하는지 그렇게 말했다. 이에 호상화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절정의 초입이라면 저나 고왕흘 생도가 함께 합공한다면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요?" 고왕흘이나 호상화의 무위는 절정의 초입을 앞두고 있었다. 깨달음만 갖춰진다면 언제든지 기(氣)를 발출시킬 수 있기 전까지 도달한 그들이었다. "인원이 모자란다고 한다면 저희도 돕겠습니다." 그때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갈연이 나서서 말했다. 십이 조의 생도들이 돕겠다는 말에 생도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만약 그들이 천유찬과의 싸움에서도 돕는다면 인원에서는 앞서는 상황이 된다. "천유찬과 절정의 초입에 이르렀다는 녀석만 해결할 수 있으면 되는 거냐?" 천여운의 물음에 고왕흘이 인상을 찡그리며 답했다. "그렇긴 하지만 주군께서 도마종의 후보자인 천유찬을 상대하게 되면 한 사람을 상대할 방법이..." "내가 두 사람을 맡겠다." "네?" 천여운의 선언에 모두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천여운의 실력이 진일보하긴 했지만 절정의 극에 이른 고수와 절정 초입의 고수를 동시에 상대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무공 교두들은 본신절기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분명 전력을 다해서 부딪칠 것이다. "한 번에 상대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럼 무슨 수로?" 궁금해 하는 그들에게 천여운이 자신이 생각한 바를 이야기 해주었다. 그 말을 전부 들은 수하들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이들 중에서 가장 계책에 능한 고왕흘조차 이 방법이 정말 통할지 의문이 갔다. '목소리만 들어도 바로 알아들을 텐데.' 무슨 수로 그들을 속인단 말인가? 얼굴을 가리는 것만으로도 가능할지는 의문이 들었지만, 만약 정말 통하게 된다면 방심을 유도할 순 있을 것이다. 확실하게 속인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그렇게 반 시진 후, 천여운은 놀랍게도 정말로 그들을 속여 냈다. "저, 염파입니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기절한 척하고 있던 천여운의 모든 수하들이 놀라서 자신들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릴 뻔했다. '허어!' ‘대체 어떻게 한 거지?' 모두가 천여운의 신기한 능력에 놀라했다.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천여운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성대모사가 아니라 정말로 염파의 목소리 그 자체였다. 완전히 똑같은 목소리에 당연히 천유찬을 비롯해 그의 수하들이 전부 속아 넘어갔다. 덕분에 한군데 뭉쳐 있던 천유찬과 그 수하들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나노, 목소리 변조를 풀어.' [알겠습니다. 사용자의 목소리 변조(變調)를 해제하겠습니다.] 그것은 전부 나노의 기술이었다. 목의 성대의 근육을 조절해서 천여운의 목소리를 염파와 동일하게 변조시킨 것이었다. 이것은 천여운이 구금동에 있으면서 나노의 수많은 기능들을 중에 쓸 만한 것을 더욱 분석하면서 알게 된 기술이었다. "아아아. 아직 내 목소리 아니야. 아아아아. 이제 됐어." "뭐, 뭐야?" "목소리가 변하고 있잖아." 점차 염파의 목소리에서 원래의 목소리로 돌아가는 것에 주위에 있는 아군과 적이고 할 것 없이 모든 생도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빌어먹을 놈이 몸에 사술을 익혔구나!" -슉! 고작 목소리 따위에 속아 넘어갔다는 생각에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패권종의 진유가 그대로 천여운을 향해 신형을 날리며 권초를 펼쳤다. 주먹에 권기(拳氣)가 흐릿한 빛으로 발해지는 것이 절정 초입에 이른 무위였다. 이에 천여운의 눈빛이 반짝였다. "지, 진유! 안 돼!" 우금필이 놀라서 만류하려했지만 그의 신형은 이미 천여운의 코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천여운의 무위는 이미 전 생도들을 통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그 놈이 천여운이라면 네가 상대가 될 리가....' 차마 그것을 입 밖으로 뱉지 못했다. -파파파파팍! 아니나 다를까 천여운이 허리춤에 차고 있는 목검도 뽑지 않고 검결지를 만들어서는 검식만으로 진유의 패도적인 권초를 가볍게 막아냈다. '내 권초를 이렇게 쉽게?' 그것도 모자라 보법으로 진유의 품으로 파고들어, 번개처럼 왼손으로 가슴에 있는 노란 명찰을 떼어냈다. -탁! "이건 내가 가져간다." "이, 이 개자식이!" 어이없게 노란 명찰을 빼앗긴 것에 황당해진 진유가 이를 악물고 두 주먹을 교차해서 위로 들어 올렸다. 패권종의 절기인 패권부참(敗拳斧斬)이었다. 십성 공력으로 패권부참을 펼쳐서 품 안까지 파고든 천여운을 내려찍으려 했다. "죽엇!" 그러나 그의 초식이 미처 닿기도 전에 천여운의 오른손 주먹이 빠르게 그의 가슴을 먼저 때렸다. -퍽! 우드득! "크허 헉!" 가볍게 내지른 주먹 같았는데, 맞는 순간 가슴뼈에 금이 가는 소리와 함께 진유의 몸이 뒤로 열 보 가량 밀려났다. 갑옷처럼 상체를 두르고 있는 튼튼한 근육이 아니었다면 가슴뼈가 부러져서 쓰러졌을지도 몰랐다. "쿨럭!" 그래도 내상을 입었는지 진유가 피가 섞인 기침을 했다. 확실히 권법을 익혀서 외공도 튼튼한 절정 초입의 고수라서 그런지, 적당한 주먹으로는 한 방에 쓰러지진 않았다. ‘하일명보다 강하다.' 천유찬이 선별해서 뽑은 자답게 절대로 약하지 않았다. 백기가 아니라면 자신의 수하들이 감당하기에는 아직 어려운 상대였다. '놈이 회복하기 전에 제대로 마무리 한다.' 천여운이 진유를 쓰러뜨리기 위해 신형을 날리려는 순간 나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후방 60미터 지점에서 강한 에너지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놀란 천여운이 뒤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나노가 말한 에너지의 정체를 파악한 천여운은 생각 할 겨를도 없이 자신의 수하들과 전 십이 조의 생도들을 향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엎드려!!!" -팍! 외침을 들은 생도들이 영문도 모른 채, 다급히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 순간 허공을 가로지르는 소리와 함께 흰 빛의 도기(刀氣)가 엎드려 있는 그들의 위로 스치고 지나갔다. -촤아아아악! "헛?" "도, 도기?" 천여운의 대결에 집중하고 있어서 망정이었지 조금만 늦었다면 큰일 날 뻔했다. 그들을 스쳐 지나간 도기는 정확하게 천여운에게로 쇄도했다. 두 손가락을 모은 천여운의 검결지에서 선명한 흰빛이 일어나며 검의 형태를 이루었다. -촥! 검기를 형성한 천여운이 자신에게 쇄도해온 도기를 베어냈다. < 21장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2) > 끝 < 21장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3) > 흰 빛의 도기가 베어진 부분을 중심으로 공중으로 흩날리며 사라졌다. 이 광경을 지켜본 모든 생도들이 입이 벌어졌다. "도, 도기를 날렸어!" "그걸 베다니!" 도기를 날려서 원거리 공격을 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절정의 극에 이르러야만 가능하다. 그런 도기를 베어낼 정도면 그에 상응하는 실력이란 말이었다. 그야말로 현재 마도관 생도들의 수준을 한참 벗어난 공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천유찬." 천여운의 시선이 날카롭게 멀리로 향했다. 그곳에는 천여운에게 일격을 당해서 멀리까지 튕겨져 나갔던 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유찬이 손바닥에 흰빛의 도기를 형성한 채 서있었다. 천유찬이 아쉽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쉽네. 기습을 당해서 좀 갚아주려고 했는데. 후우." 천유찬이 목을 돌리면서 근육을 풀었다. 태연스럽게 말을 했지만 아직도 맞은 부위가 얼얼했다. 안면을 강타 당하면서 강한 충격이 뇌까지 울리면서 어지러움 때문에 잠깐 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제 정신을 차린 거냐? 늦군." 도발하는 천여운의 말에 천유찬의 인상이 굳어졌다. 그렇다는 것은 자신이 회복되기를 기다려줬다는 말이 아닌가. "기다려줬다.....이거냐?" "처음 주먹은 나에게 수작부린 걸 갚아준 것뿐이다. 기습을 당해서 졌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거든." 소교주 후보자들 간의 대결이었다. 이 많은 생도들의 앞에서 기습으로 쓰러뜨린다면 괜한 논란만 가져올 것이다. 그런 천여운의 말에 천유찬이 기가 막힌 듯 말했다. "하! 도기 한 번 막아놓고 기고만장하구나."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내심 천유찬은 도기를 베어낸 것에 놀라워했다. '......괴물 같은 성장 속도로군.' 분명 예전에 개인 연공실 건물 앞에서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애송이에 불과했는데, 그야말로 경이로운 성장 속도였다. 이 정도라면 얼마 있지 않아 자신을 완전히 능가할 것이다. '그때 팔을 베었어야 했나.' 후회가 되었다. 당시에 천여운의 팔을 베려다가 참았었는데, 그 오판이 이런 사태를 키운 것 같았다. 그렇다면 지금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였다. '더 격차가 생기기 전에 지금 팔 하나를 가져간다.' 천유찬이 평소의 경박스러운 웃음을 지우고 전의를 가다듬었다. -사아아아아! ‘기세가 바뀌었다.' 기세가 날카롭게 바뀌는 천유찬의 모습에 천여운도 내공을 끌어올려 태세를 갖췄다. 제대로 된 절정의 극에 이른 고수와의 대결이었다. '공자님이 이렇게 진지해지시다니.' 천유찬의 수하들이 그 모습에 숨을 죽이고 집중했다. 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연이 아니라면 모든 일에 있어서 항상 여유롭고 경박스러웠던 천유찬이었다. 그런데 저 표정은 정말 적수로 인정해야 나오는 얼굴이었다. ‘분위기가 바뀌었어.' 고왕흘이 공터의 바뀐 분위기에 입을 다물었다. 그들의 원래 계획은 천여운이 대결을 펼치는 동안 천유찬의 수하들을 제압하는 것이었는데, 이 분위기는 우두머리들 간의 일기토(一騎討)가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향방은 천여운에게 달려있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았다. '여기서 지면 쟁탈전에서 패배하는 겁니다. 주군.' 전 생도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로 집중되었다. 각자가 모시는 주군이 이기기를 바라는 마음에 이곳에 있는 모두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움직인 것은 천유찬이었다. -탓! 천유찬의 신형이 번개처럼 생도들을 가로질러 천여운을 향해 쇄도해왔다. 그 동안 보아왔던 누구보다도 빠른 경공이었다. 천여운의 앞에서 뛰어오른 천유찬이 도마종의 절기인 환마도법(幻魇刀法)의 제 이초식인 환도일참(幻刀一斬)을 펼쳤다. "하압!" 내려치는 단순한 초식이었지만 달려오는 힘마저 실려 패도적이었다. 도기로 펼치는 초식의 위력은 천여운을 단숨에 두 동강 낼 기세였다. 이게 도마종의 도법! 우호법 섭맹에게 전수 받은 접무도법에 버금가는 위력이었다. 짧은 찰나의 순간, 천여운의 머릿속에 도법으로 대응할지 검법으로 대응할지 고민이 되었다. 천여운의 선택은 후자였다.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실력자를 상대로 여력을 아끼는 건 사치다.' 천여운이 두 손가락을 모아 검결지를 만들어 검기를 일으켰다. 목검에 검기를 만들어 보려고 한 적이 있었는데, 나무의 강도가 기(氣)를 견디지 못했다. ‘검기?' 천여운이 도기가 아닌 검기를 발하자 눈에 이채가 띠었다. 아까 전에는 떨어져 있어서 잘못 보았나 했는데, 역시 지금 펼치는 것은 검기였다. -촤촤촤촤촥! 허공으로 치솟는 천여운의 검식과 내려치는 천유찬의 도초가 부딪쳤다. 검기와 도기가 부딪지고 어우러지며 빛이 이리저리 튀며 흩날렸다. '이 녀석, 무슨 짓거리냐?' 천유찬의 눈이 가늘어졌다. 접무도법이 아닌 검법을 펼치기에 무슨 짓인가 싶었는데, 검식 하나하나가 평범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이 검식들이 이상하게 눈에 익었다. '하지만 환도일참의 묘리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천유찬이 펼치는 도식들을 전부 막아냈기에 초식을 파훼시킨 줄 알았는데, 그 순간 천유찬의 도기가 기이한 방향으로 틀었다. -촥! 놀란 천여운이 검기로 이를 막아냈지만 공력의 여파로 좌측으로 밀려났다. -촤아아아아! 바닥에 쓸며 밀려난 자국은 대략 여섯 보 거리였다. 첫 초식 대결에서 천여운이 밀리자 이를 지켜보던 천유찬의 수하들이 함성을 질렀다. "와아아아아아아!!!" 반면 천여운의 수하들의 안색은 어두워졌다. 천유찬의 실력이 이 정도까지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 정도라면 천유찬 역시도 선임 무공 교두인 호진창과 겨뤘어도 충분히 인정을 받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력이 나보다 조금 앞선다.' 천여운의 눈빛이 흔들렸다. 원래부터도 완숙한 절정의 경지였던 천유찬은 이번에 지급 받은 마룡단으로 내공이 일 갑자 하고도 사십 년에 이르러 있었다. '초식이 기묘하다.' 더군다나 천유찬이 펼치는 도법은 도식의 경로가 독특했다. 환(幻), 허깨비, 환영이라 불리는 도마종의 도법다웠다. 접무도법을 펼칠 때 잔상을 만들어내 어지럽게 하는 것과 다르게 도식의 움직임이 기상천외해서 사람의 눈을 현혹시켰다. '저 오른팔....' 천유찬의 오른팔의 근육만 유독 발달되어 있었다. 저 도법을 펼지기 위해서는 도를 자유자재로 종횡무진으로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그만큼 팔에 과부하가 생긴다. "운이 좋구나. 단번에 팔을 베어주려 했는데." 천유찬이 한쪽 입 꼬리를 올리면서 이죽거렸다. 그의 말대로 조금만 늦게 반응했어도 오른팔이 잘릴 뻔했다. 천유찬이 그를 향해 손바닥의 도기로 가리키며 말했다. "익숙하지도 않은 그딴 어설픈 검법은 집어치우고 접무도법을 펼쳐라." "어설픈 검법?" 천여운이 기분이 나빴는지 눈썹을 치켜 올렸다. "내가 네가 펼치는 검법을 몰라볼 거라 생각했어? 하하하핫." 의미심장한 천유찬의 말에 천여운의 표정이 굳어졌다. 청옥석에 있던 파훼 검법 초식의 검식을 나누어서 펼쳤는데 알아본 것일까? 천유찬이 호들갑을 떨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무공 교두들이 보여준 것처럼 칠마검을 복합적으로 펼쳤나 본데, 그래봐야 내겐 통하지 않는다." 천유찬의 말에 천여운이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허탈해했다. 그런데 그는 파훼 검법의 검식을 일부 펼쳤을 뿐인데, 칠마검으로 보았다는 말은 정말 그 검식은 검마가 남긴 것일까? "경고하지. 오 초식이다." "무슨 의미지?" "계속 고집을 부리고 어설프게 칠마검을 펼친다면 오 초식 이내로 네 오른팔과 평생 안녕하게 될 거야. 나야 고맙기는 하지만 어설픈 상대를 이겼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거든." 아까 전에 천여운이 했던 도발에 복수하듯이 오만하게 말하는 천유찬이었다. 청옥석 비석에 있던 파훼 검법의 검식들은 천마검공의 검초의 고절한 검식들에 비하면 굉장히 평범하다. 그것은 하나의 초식으로 합쳐지기 전까지는 그 위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는다. 덕분에 검식들이 평범해 보였는지 어지간히 얕보인 모양이었다. 잠시 말이 없던 천여운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감이 넘치는군. 그렇다면 내기 할까?" "내기?" "그래. 내가 펼치는 어설픈 검법을 오 초식 안에 꺾을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럼 불리한 내기가 아닐 텐데." 갑작스러운 내기 제안에 천유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녀석 무슨 잔꾀를 부리려는 거지?' 염파를 통해 한 번 속았었기 때문에 무슨 수작을 부릴지도 모른다고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생도들의 앞에서 대결을 펼치면서, 허튼 수작을 부린다면 소교주 후보로서 입장만 우스워질 것이다. 천유찬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들어나 보자." "내가 이긴다면 네가 가진 노란색 명찰을 전부 받겠다." -웅성웅성! '이 놈이 정말 돌았구나.' ‘노란 명찰을 내놓으라니? 이런 얕은 수작을!' 천여운의 말에 반응을 보인 것은 오히려 천유찬의 수하들이었다. 내기의 대가로 노란 명찰을 전부 넘긴다면 자신들더러 삼 단계 시험을 포기하라는 것과 차이가 없었다. 당연히 격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역시 그걸 노린 것이었나?" 천유찬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충 예상은 했지만 이번 내기를 통해 끝을 보자는 의미인 듯했다. 잠시 고민하던 천유찬이 뭔가 좋은 생각이 났는지 입술을 실룩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나 역시도 이긴다면 네가 가진 명찰을 받도록 하지. 그런데 명찰을 네 개나 줘야 하는 내가 손해를 보는 것 같으니. 후후, 명찰을 더해서 네 수하인 백기도 받도록 하겠다." 자신이 제안한 대가를 만족스러워 하는 천유찬의 말에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백기가 화들짝 놀라했다. 설마 천유찬이 아직까지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을 줄은 몰랐다. 어지간히 인재에 대한 집착이 심했다. "괜찮겠지?" 천유찬의 질문에 백기가 인상을 찡그렸다. 까딱 잘못해서 천여운이 패하게 된다면 그렇게 꼴도 보기 싫은 천유찬의 밑으로 들어 가야할 판국이었다. '젠장! 정말 괜찮은 거냐?’ 백기가 천여운의 눈을 바라보았다. 정말 자신이 있는 것인지 확인하고 싶어서 쳐다본 것이었는데, 그 영롱한 눈빛에는 아무런 떨림이나 두려움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신뢰가 생겨난 백기가 천유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내기가 제법 할 맛이 나는군." 이런 내기라면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생각에 천유찬이 만족스러워했다. 어차피 접무도법이 아니라 어설프게 칠마검법을 펼친다면 오 초식이 아니라, 삼 초식 이내에도 파훼하고 팔을 잘라버릴 자신이 있었다. "덤벼라. 이번에는 선공을 양보해주마." 천유찬이 오만한 표정으로 손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이러한 도발에도 천여운은 감정변화 없이 담담하게 앞을 향해 일 보 내딛었다. -쿵! 그리고 천유찬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천여운의 검결지에서 흘러나오는 흰 빛의 검기에서 평범한 검식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칠마검에 있는 검육(劍六)과 흡사해 보이는 검식의 전개였다. '어리석긴. 괜한 고집을 부려서 네 녀석의 소중한 오른팔과 수하, 노란 명찰까지 전부 잃는구나. 쯧쯧.' 천유찬이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무공 교두들을 상대하기 위해 칠마검의 비급서를 수십 번이나 읽었다. 그 허점은 눈을 감고도 보일 정도로 극명했다. "하압!" -촤촤촤촤촥! 천유찬이 오른손에 도기를 생성하며 큰 기합성과 함께 환마도법의 제 사초식인 도환도첨(刀幻道添)을 펼쳤다. 그의 도초가 현란하게 회오리를 치며 천여운이 펼치는 검초에 파고들었다. -채채채채챙! 두 사람의 검초와 도초가 정면에서 부딪쳤다. 그 순간 자신만만하게 도초를 펼치던 천유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뭐, 뭐지? 이게 정말 칠마검이라고?'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분명 평범하게 시작한 천여운의 검식이 갑자기 변화를 일으켰다. 단순했던 검식이 하나씩 더해갈수록 현묘한 변화와 더불어 고절한 검초로 바뀌어갔다. 그 변화는 고요했던 호수에 격랑이 일어나는 것과 같았다. -채채채채챙! '안 돼. 이러다간...큭!' 다섯 번째 식부터는 도저히 막을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도초를 펼치던 천유찬의 팔이 꼬이기 시작했다. 안되겠다 싶어서 변초를 쓰기 위해 환마도법의 제 오 초식을 펼치려했는데, 그럴 틈이 없었다. -파팍! "헛?" 도초를 펼치기도 전에 도기를 두른 손이 튕겨나갔다. 신형이 흔들리는 순간 검초가 만들어낸 격랑 속으로 천유찬의 몸이 빨려 들어갔다. -촤촤촤촥! "크으으윽!" 다양한 변화를 일으키는 검식들이 천유찬을 스치고 지나갔다. 검기가 요혈들을 파고들면서 피가 터져 나왔고, 천유찬이 몸이 이리저리 튕기며 고통스러워했다. 그리고 검초의 마무리인 마지막 스물네 번째 식이 천유찬의 목을 베려는 순간, 천여운이 그 방향을 틀었다. -촤악! "끄아아아아아악!" 천유찬의 입에서 찢어질 것 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것을 지켜보는 모든 생도들이 경악을 금지 못했다. -툭! 꿈틀꿈틀! 천유찬의 잘려나간 오른팔이 땅바닥에 떨어져, 아직까지 신경이 살아있는지 꿈틀거렸다. < 21장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3) > 끝 < 21장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4) > 천유찬을 따르는 생도들은 당연히 그의 승리를 확신했다. 그 동안 그들이 지켜보았던 천유찬은 평소의 경박한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독할 정도로 무공 연마를 하는 노력하는 영재였다. 본래의 타고난 실력에 부지런함마저 갖췄으니 성장 속도가 남달랐다. 이곳에 입문할 당시만 하더라도 절정의 경지였던 그는 부단한 노력으로 절정의 극에 올라 생도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이런 모습에 생도들은 천유찬을 더욱 신뢰하고 그야말로 소교주로서 가장 적합한 후보자라고 확신하게 만들었다. '고작 칠마검 따위로 공자님을 상대한다고? 하!' '천유찬 공자께서 질 리가 있나.' '멍청한 놈. 제까짓 놈이 실력이 늘어봐야.' 그러나 막상 대결의 결과는 모두가 예상했던 것과는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촤악! 천여운의 검기가 쾌속하게 스쳐지나가며 무언가 바닥에 떨어졌다. 파닥거리는 그 무언가는 바로 천유찬의 잘린 오른팔이었다. "끄아아아악!" -털썩! 팔이 잘려나가자 천유찬이 비명을 지르고는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극도의 자존심으로 기절할 것 같은 고통에도 이를 악물고 겨우 버텼지만, 그의 상태는 최악이라 할 만큼 좋지 않았다. "내기는 내가 이겼다." 천여운이 오만하게 밑으로 천유찬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마, 말도 안 돼!' ‘공자님께서 패하시다니!' ‘고작......일 초식 만에.....이,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누구 하나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을 보고도 믿기 힘들었다. 오히려 부정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 강한 천유찬이 고작 한 초식도 버티지 못하고 오른팔마저 잃고 말았다. 마지막에 와서는 천여운이 목을 베려던 검식의 경로를 틀어서 팔을 베었으니 목숨을 구해준 셈이기도 했다. "크윽!" 검기에 잘려나간 팔의 단면에서 많은 피가 흘러내렸다. 잘린 팔 만큼은 아니더라도 요혈에서도 피가 흘렀기에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천유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타타탁! 천유찬 스스로가 잘린 부위 쪽의 혈도를 눌러서, 출혈이 심하지 않도록 지혈시켰지만 빨리 의무실에 가야할 만큼 상태가 위태로워 보였다. "공자님!!!" 양도종의 우금필을 비롯한 천유찬의 수하들이 놀란 나머지 다친 그에게 달려가려 했으나, 두 발자국 채도 걷지 못하고 멈춰야만 했다. -우웅! 천여운의 검결지에서 뻗어 나온 날카로운 검기가 천유찬의 반대쪽 왼팔을 겨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이 자식이!" "멈춰. 한 발자국만 더 걸어오면 남은 팔도 자른다." "아, 안 돼!" 협박을 무시하고 달려들기에는 정말 왼팔마저 자를 기세였다. 만약 다른 생도들이 그런 것이라면 허세라고 치부하고 달려 들었을지 모르겠지만, 천여운은 그 동안 남들과는 다른 행보를 보여주었다. 무인의 단전마저 파괴시킨 녀석이 팔을 자르는데 망설임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크윽! 저놈이라면 정말 한다.' 천유찬의 수하들을 다시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더군다나 위급한 상황이었기에 미처 의식하지 못했는데, 천여운의 수하들 역시도 언제라도 출수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덕분에 천유찬의 패배로 자신들이 열세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말았다. "자! 약속을 지켜라." 천여운이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있는 천유찬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천유찬이 고통스러워하는 와중에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대체 어떻게 한 거지?" "무엇을 말이냐?" "하찮은 칠마검 따위로 어떻게 그런 고절한 초식을 펼쳤느냔 말이다." 마교의 또 다른 전설이라 불리는 검마가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칠마검은 일류 무공에 불과한 검법이었다. 그런데 천여운이 펼친 검 초식은 가히 절학이라 할 만큼 상상을 초월하는 위력이었다. 마교 내에서도 도법으로는 세 손가락 안에 든다고 할 수 있는 도마종의 환마도법으로도 어찌할 수 없었다. "하찮은 칠마검?" ".....그래!" "그렇게 보였다면 네 수준으로 검 초식을 거론하기에는 아직 멀었다." "!?" 천여운의 단호한 말에 천유찬이 벙 찐 얼굴이 되었다. 예전에 처음 천여운과 만났을 당시에 그가 했던 말을 고대로 돌려주었다. '그 정도 수준으로 내 목숨을 거론하기에는 아직 멀었어.' 물론 빚을 갚아준 것도 있었지만, 아직 천유찬의 수준으로는 칠마검을 비롯하여 검마의 파훼 검법의 신묘함을 이해하기에는 정말로 역량이 부족했다. 어이가 없어하던 천유찬이 감정적으로 복잡해졌는지 쓰라린 표정을 지었다. '......소교주가 되기 위해 그렇게 달렸건만.'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양팔이 멀쩡해도 천여운에게 패했는데, 이젠 외팔이 되었으니 어찌할까. 더군다나 환마도법을 연마하던 오른팔을 잃었으니 그의 무공은 격감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래서는 검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경운마저도 상대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 생각까지 들자 점차 허탈하던 감정이 불꽃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한참을 입을 다물고 있던 천유찬이 이를 갈며 말했다. -으드득! "노란명찰을 넘겨줘라." 그 말에 천유찬 수하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걸 넘기게 된다면 삼 단계 시험을 치를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두머리인 천유찬이 내기에서 졌기 때문에 약조를 어긴다면 오히려 그의 입장만 우스워지는 셈이었다. "천여운!....하아....이게 끝이라고는 생각하지 마라." -털썩! 그 말을 끝으로 천유찬은 더 이상 고통을 참지 못하고 쓰러졌다. 출혈이 심했기 때문이었다. 패배를 해서 완전히 절망했다고 생각했는데,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는 모습이 다른 소교주 후보자들과는 의지나 근성이 다르긴 했다. '공자님!' 그 모습에서 위안이 되었는지 천유찬의 수하들의 눈빛에도 결의가 차올랐다. 마치 그 눈빛은 ‘두고 보자. 언젠가 빚을 갚아주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흥!" 양도종의 우금필이 오지란이 가지고 있던 노란 명찰과 자신의 것을 떼어서 들고 왔다. 마지못해 넘겨주면서도 눈빛을 부라리며 천여운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탁! 우금필이 천여운에게 노란 명찰들을 넘기며, 목소리에 힘을 주어 경고했다. "공자님의 말씀대로 이게 끝이라고 생각..." 바로 그때였다. -퍽! 미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천여운의 주먹이 우금필의 복부에 꽂혔다. "크웨에에엑!" 속에 있는 장기기관이 전부 뒤틀리는 느낌과 함께 우금필이 피를 토해냈다. 어찌나 고통스러웠던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버린 우금필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숨 막힌 사람처럼 거친 호흡을 내뱉더니, 어이가 없다는 눈빛으로 소리쳤다. "헉!...헉! 이, 이게 무슨 짓이냐! 약조를 지켰는데." "노랑명찰로 끝낸다는 약조를 한 적이 없는데." "뭐?" 우금필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적어도 수장들끼리 대표로 일기토를 겨뤘다면 승패가 결정 난 것인데, 노란 명찰로 끝내지 않겠다는 무슨 의미인가. 그러자 천여운이 빙그레 웃으며 쓰러져 있는 천유찬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까 천유찬에게 좋은 걸 배웠거든. 후환을 남기지 말라. 이런 것?" 그 말에 우금필은 온몸에 소름이 돋아왔다. 아무래도 천유찬이 부상을 입고 기절해있는 가짜 천여운의 힘줄을 자른 것을 말하는 듯 했다. 결국 자신들마저도 쓰러뜨려서 후환을 없애겠다는 소리였다. "정말 독하구나. 그렇다고 패배한 상대를 이렇게까지...." -쾅! "컥!" 우금필이 미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안면을 강타하는 괴력이 실린 주먹에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눈이 뒤집혀서 기절하고 말았다. 쓰러져 있는 우금필을 향해 천여운이 경멸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니들은 하는 건 괜찮고, 당하면 독하다는 거냐. 억지 논리 펼치지 마라." 이에 천유찬의 수하들은 뭔가 틀어졌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방어태세를 취했다. 천여운이 수하들을 향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전부 쓰러뜨리고 팔, 다리를 전부 부러뜨려!" "네!!!" 그 명이 떨어지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천여운의 수하들과 전 십이 조의 생도들이 일제히 적들에게 신형을 날렸다. "비, 빌어먹을!" 천유찬의 수하들의 입에서 절로 거친 소리가 튀어나왔다. 설마 천유찬을 쓰러뜨린 것도 모자라 자신들마저 노릴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 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최악의 상황이었다. 최대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천유찬, 우금필이 쓰러졌고, 패권종의 진유 역시도 아까 전 천여운에게 내상을 입었기에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다. '칫, 나 혼자서 어찌 하란 말이야! 정말 망했구나!' 유일하게 멀쩡한 절정 초입의 고수인 오지란 혼자서 분전한다고 될 상황이 아니었다. 수적으로도 열세했기에 어떻게 반전을 꾀할 수가 없었다. 결국 불과 일 각 채도 되지 않아, 천유찬의 수하들은 세, 네 명을 제외하고는 전부 제압되고 말았다. 세, 네 명은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도망쳤기 때문이다. 어차피 충성심이 낮은 수하들이라면 특별히 후환을 걱정할 필요는 없기에 억지로 붙잡진 않았다. 여기서 당한다면 끝이라는 것을 알기에 천유찬의 수하들은 고군분투를 했지만, 천여운이 참전하면서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우드득! "끄아아악!" "아악!" "내 다리!" 비명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천여운과 수하들은 기어코 천유찬의 수하들의 팔다리를 전부 부러뜨렸다. 심지어 여자 생도인 오지란도 예외가 아니었다. '으으으으으!' '이 놈은 정말 독종이다. 건드리면 안 돼.' 그들과 부딪칠 당시만 하더라도 쌍욕을 하면서 반항했던 그들이었지만, 막상 팔다리가 전부 부러지고 나자 두려움으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모든 상황이 정리가 되고 천여운이 갈연을 불렀다. 쓰러뜨린 적들을 의무실로 옮기려던 갈연이 의아해하며 천여운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천여운은 그들에게 노란 명찰 두 개를 넘겼다. "받아라." "이, 이건....." 갈연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설마 천여운이 자신들에게 노란 명찰을 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째서 노란 명찰을?" 엄밀히 말한다면 자신들 역시도 어젯밤 백기들을 습격하는데 일조를 했기에 특별히 노란 명찰을 바랐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을 이용한 천유찬에게 복수를 하는 걸로 만족하려 했던 그들이었다. "어차피 이 많은 노란 명찰을 다 들고 있어봐야 쓸 데도 없다." 천여운이 가지고 있는 노란 명찰은 총 여섯 개였다. 무공 교두 호진창에게 획득한 명찰 하나와 하일명에게 빼앗은 명찰 하나, 그리고 천유찬에게서 빼앗은 명찰 네 개였다. 아무렇지 않게 말을 하는 모습에 갈연의 동공이 흔들렸다. '아아....경쟁을 위해서 노란 명찰을 굳이 주지 않아도 되는 데. 이렇게 넘기다니 이 분은 정말 그릇이 다르구나!' 천유찬에게 한 번 데이면서 소교주 후보자들에 대한 신뢰가 없던 갈연과 십이 조의 생도들이었지만 이런 호의에 감동할 수 밖에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갈연은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번 일로 우리들은 도마종에 밉보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천여운 공자가 소교주가 되도록 돕는 것이 옳지 않을까?' 고민하는 그들의 모습에 고왕흘의 눈빛이 반짝였다. 사실 천여운에게 노란 명찰을 주라고 건의를 한 것은 고왕흘이었다. 앞으로의 소교주 쟁탈전과 적들을 감당하기 위해 세력을 계속해서 확장해야 하는 천여운에게 새로운 조력자들을 만들기 위한 계책이었다. '제발 통해야 할 텐데.' 갈연과 전 십이 조 생도들이 천여운을 바라보는 눈빛에 감격과 존경이 비치고 있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와 줘야했다. 그런 바람이 통하기라도 한 것일까? -털썩! 털썩! 갈연을 포함한 열아흡 명의 생도들이 전부 무릎을 꿇었다. 그 많은 인원이 한 번에 천여운의 앞에 무릎을 꿇자 분위기가 고조되며, 지켜보는 천여운의 수하들의 더욱 흥분하여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이게 무슨 짓이지?" 천여운이 아무 내색하지 않고 그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갈연과 생도들이 일제히 바닥에 이마를 세차게 박으며 외쳤다. -쿵! "천여운 공자님께 충성을 맹세하고 싶습니다. 저희를 받아 주십시오!" 진심과 열망이 담긴 그들의 눈빛에 천여운의 입 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 21장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4) > 끝 < 22장 줄을 서시오! (1) > '으으으!' "아이고 내 팔!" "다리에 뼈가! 뼈가 튀어나왔어!" 의무실 안에서는 앓는 소리들이 끊이질 않았다. 자그마치 오늘 하루 사이에 서른 명이 넘는 환자가 의무실로 실려 왔다. 오전에 왔던 사십사 번 생도 우평학은 시작에 불과했었다. 아직 삼 단계 시험을 치른 것도 아니었는데, 대거 발생한 환자들에 내심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는 이가 있었으니 의원 백종명이었다. '흐흐흐.' 천여운이 구금동에 들어가기 전만 하더라도 꾸준히 환자가 들어와서 제법 쏠쏠한 재미가 있었는데, 그 후로부터 조용해서 내심 아쉬웠던 백종명이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징계가 해제되자마자 시원하게 환자들을 보내줬다. ‘여운아. 고맙다!' 한동안은 환자가 적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넘쳐나는 환자들에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마치 아방궁(阿房宮)에 들어가, 수많은 미녀들 중에 누구를 간택할지 고민하는 시황제(秦始皇)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 너로 정했다." 그는 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유찬이었다. 백종명의 선택은 지극히 당연했다. 팔이 잘린 부위를 임시로 천으로 꽉 조여서 지혈시켜놓았기에 가장 급선무로 치료를 해야 했다. 백종명이 히죽거리면서 치료를 하는 모습에 무공교두 심명이 혀를 내둘렀다. '.....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는데, 다친 환자들을 보고 웃고 있다니.' 심명이 괜히 기분 나빴는지, 일부러 백종명의 눈을 회피했다. 워낙 많은 환자가 발생하면서 일손이 부족했기에 무공 교두들까지 지원 와서 치료를 돕고 있었다. 바쁘게 돌아가는 의무실에서 백종명 이외에도 즐거움을 금치 못하는 이가 한 명 더 있었으니, 바로 천여운의 수하인 호가 검종의 오종이었다. ‘역시 주군!' 정오 무렵에 정신을 차린 오종은 자신의 손가락이 전부 부러지고, 온몸을 두드려 맞은 것보다도 노란 명찰을 빼앗긴 것이 너무 분했다. 주군인 천여운이 구금동에서 나온다면 얼마나 실망할까 걱정도 되었다. 그러나 그 모든 우려가 한 번에 날아갔다. '풉!' 침상의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서 웃음보가 터지려는 것을 겨우 막았다. 자신들을 습격했던 하일명의 조원들을 비롯해 그 배후였던 도마종의 후보자 천유찬까지 줄줄이 의무실에 실려 오는 모습에 속이 시원하다 못해 뻥 뚫렸다. '주군 존경합니다.' 이 일로 인해 오종은 더욱 천여운을 마음 깊이 따르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 그의 귓가로 무공 교두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난 놈은 난 놈이군요. 엊그제 내상을 입었던 녀석을 의무실로 실어 왔는데 말이죠." 다리가 부러진 생도의 다리에 부목을 붕대로 묶고 있던 삼십대 초반의 남자가 흥미롭다는 말투로 말했다. 그는 무공 교두들 중에 가장 신입인 현윤이었다. 현윤은 마도관 입관 당시에 천여운을 들 것에 싣고 왔던 무공 교두였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천여운이 이렇게까지 성장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이 단계 시험에서 조기 탈락 하던지 혹은 다른 소교주 후보자들의 손에 처리가 될 거라 여겼는데, 완전히 반대 상황이 일어났다. "누군들 알았겠나. 그놈이 그런 괴물일 줄은." 심명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답했다. 무공 교두 임평을 통해서 선임 교두였던 호진창을 일 초식 만에 무릎 꿇게 만들었다는 말에 경악을 금치 못했었다. 그는 당연히 천여운이 패배할 거라 확신했기에 집무실에서 나오지 않았었다. "이번 쟁탈전은 정말 결과를 모르겠군." 가장 유력한 후보였던 천유찬이 이런 꼴이 되었다. 천종섬처럼 단전이 파괴된 것은 아니지만, 쓰지도 않던 왼팔로 쟁탈전은커녕 삼 단계 시험조차 통과하기 어려워 보였다. "글쎄요. 이변이 일어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군요." 이번 일은 단순히 생도들에게만 영향을 미지지 않았다. 무공 교두들조차도 천여운에 대한 부정적이었던 평가가 갈수록 긍정적으로 바뀌어갔다. "이제 사담은 그만하고 부목이나 제대로 묶게." "쩝, 알겠습니다." 소교주 쟁탈전. 그것은 천마신교의 새로운 미래가 걸려있는 만큼 무공 교두들조차도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누구보다 강한 절대자의 탄생은 신교의 숙원이었다. 그런데 의무실에서 유일하게 보이지 않는 한 사람이 있었다. 다른 생도들과 더불어 의무실로 실려 오다가 다른 곳으로 옮겨진 생도가 있었는데, 바로 백팔 번 생도인 하일명이었다. 하일명이 누워있는 곳은 다름 아닌 마도관주의 집무실이었다. "흐음." 깊은 고민에 빠진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입고 있는 옷을 전부 벗겨서 나체가 되어 있는 하일명을 내려다보는 좌호법 이화명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하일명의 전신의 핏줄이 피부를 바깥으로 울룩불룩 튀어나와 매우 징그럽게 보였다. 전신의 기혈을 역행시켜야만 이렇게 된다. "역시 역혈마공이 틀림없군." 본래 역혈마공을 펼치고 나서 다시 기혈을 원상태로 돌려야 핏줄이 가라앉는데, 도중에 기절해서 이것이 그대로 유지된 듯 했다.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이화명이 오른손으로 하일명의 머리에 있는 백회혈(百會穴)에, 왼손은 가슴 쪽에 있는 옥당혈(玉堂穴)에 손을 얹었다. -우웅! 이화명의 손에서 빛이 일렁이며 하일명의 몸에 스며들었다. 얼마 있지 않아 죽은 듯이 숨만 쉬고 있던 하일명의 몸이 움찔거리며 움직이더니, 울룩불룩 튀어나왔던 핏줄이 요동쳤다. -투투투툭! 그렇게 요동치며 움직이던 전신의 핏줄들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기혈이 역행하던 것이 정상화되면서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반 각 채도 되지 않아 피부가 원래대로 돌아오자, 하일명이 눈을 번쩍 뜨더니 막혔던 기도가 뚫렸는지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우고는 미친 듯이 기침을 해댔다. "흐어어억! 쿨럭쿨럭! 끄으으으!" 토를 올리듯이 한참을 기침하던 하일명이 그것이 멎어지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허전한 몸을 보았다. "내, 내가 왜 알몸으로?" "알몸이 중요한 게 아닐 텐데?" "헛?" 익숙한 목소리에 놀란 하일명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바로 앞에 의자를 끌어당겨서 않아있는 타오를 것 같은 붉은 머리카락의 중년인이 보였다. "과, 관주님!" 당황한 하일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덜렁거리는 물건이 거슬렸는지 이화명이 불쾌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하일명은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천여운 그놈과 싸우고 있었는데.' 그것을 떠올리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뇌가 울릴 만큼 아파왔는데, 그 통증 뒤에 마지막 기억이 떠올랐다. 분명 천여운의 주먹이 자신의 머리를 내려치는 것을 끝으로 기절했던 것 같았다. "제가 어째서 이곳에?" "질문은 내가 한다." "넷?" "네 녀석 어떻게 역혈마공을 익히고 있는 거지?" 이화명의 입에서 거론되는 역혈마공이라는 말에 하일명이 자신도 모르게 당황한 나머지 침을 꿀꺽 삼켰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신의 몸을 살펴보니, 핏줄이 서있다거나 그런 흔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아낸 것일까? "그, 그게 무슨 소리이신지." "하아." 하일명이 짐짓 모르는 척 잡아떼자 이화명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화명이 의자에 앉아있는 상태로 손을 들어 올리는 시늉을 하자, 강한 공력이 일어나며 하일명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어어엇?" 본능적으로 내공을 끌어을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무위가 화경의 경지에 오른 이화명의 내공은 고작 절정 초입에 불과한 하일명이 반항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과, 관주님! 대체 왜 이러시는 건지?" "쯧." 계속해서 잡아때는 하일명을 바라보며 이화명이 손가락 하나를 까딱였다. 그 순간 하일명의 왼팔의 관절이 인형처럼 꺾여버렸다. -뿌득! "끄아아아악!" 하일명이 고통스러운지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 비명 소리는 바깥으로 퍼져나가지 않았다. 이미 웅대한 진기로 집무실 전체를 둘러놓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백팔 번 생도. 적무검종(積武劍宗)의 하일명. 중소 종파 출신. 공식적으로 어떠한 종파와도 연관이 없지. 딱 여기까지가 네 녀석이 서류에 낸 신상이다." 이화명의 말에 하일명은 입을 꾹 닫았다. 이미 역혈마공을 익힌 것을 들킨 마당에 입을 열어봐야 더욱 파고들 것 같았다. "제법 입이 무겁다고 생각하나 본데, 본교에서 절대로 금한 역혈마공을 익히고도 네가 무사할 것 같으냐? 누구한테 배웠지?" "......" 역혈마공은 마교에서 금지된 마공인 만큼 교내에 있는 모든 비급서가 파기되었다. 벌써 몇 십 년째 그 맥이 끊긴 마공을 고작 십칠 세에 불과한 하일명이 익혔다는 것은 가르친 근원이 있단 말이었다.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네 녀석의 종파가 멸문 당하는 수가 있다." 어차피 금지된 마공을 익혔기 때문에 공론화되면 무조건 적 무검종은 용의선상에 올라 수색될 것이고, 조그마한 단서라도 나오면 멸문이었다. 그런 위협에도 하일명은 입을 열지 않았다. "종파가 멸문해도 괜찮다 이거지? 쓸데없는 오기를 부르는구나." 이화명이 손가락을 까딱이자, 이번에는 하일명의 오른다리가 기이한 방향으로 관절이 꺾여버렸다. -휙! 뿌득! "끄아아아악!" 고통스러워하는 하일명의 앞으로 의자에서 일어난 이화명이 걸어왔다. 그리고 그의 턱을 붙잡고 무섭게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본교의 좌호법인 나의 정보력을 어지간히 우습게 여기는구나. 검마종의 숨겨진 힘이라 불리는 암검이종(暗劍二宗) 중 하나인 적무검종을 내가 모를 것 같으냐." '.....젠장.’ 의미심장한 이화명의 말에 하일명의 인상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마치 무언가를 들킨 사람의 눈빛을 보이고 있었다. 이화명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걸리려는 순간, 입을 다물고 있던 하일명의 입에서 뭔가를 씹는 소리와 함께 피가 흘러내렸다. -콱! 주르르륵! "이놈이!" 제 혀를 깨물어 삼킨 것이었다. 이화명이 강제로 입을 벌리게 해서 잘린 혀를 뱉게 했지만, 하일명이 내공마저 역류시켰다. 강제로 내공을 역류시키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내 마지막이 그 빌어먹을 종파의 개로 죽는거라니.' 죽어가는 하일명의 눈빛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무언가를 향한 분함으로 가득했다. 그 분함은 대체 무엇일까? -부들부들! 이화명이 그를 살리기 위해 역류하는 내공을 안정시키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온몸을 부르르 떨던 하일명의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죽어서 체온이 차갑게 식어가는 하일명의 시신을 이화명이 복잡해진 심경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쉽게 꼬리를 잡히지 않겠다는 건가. 후우.’ 좌호법 이화명이 시신을 방치한 채, 한숨을 푹 내쉬고는 집무실 책상 위에 있는 종이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하늘이 붉은 빛으로 물드는 유시(酉時) 초. 저녁 식사를 위해 생도들이 식당으로 들리는 시간이었다. 평소보다 맛있는 음식이 나오는 날도 아니었는데, 오늘따라 식당 앞이 번잡했다. -웅성웅성! 배식을 받기 위한 줄이 바깥까지 이어진 것이 아니라, 식당 건물 앞에 오십 여 명의 생도들이 무작정 서서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 했다. 한참을 기다리던 차에 생도 한 명이 숙소로 올라가는 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기 온다!" 그의 외침에 가만히 서있던 생도들이 시끌벅적해졌다. "왔다! 왔어!" "천여운 공자다!" 그들이 일제히 쳐다보는 곳으로 많은 생도들이 떼를 지어 몰려오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 선두에서 앞장서서 걸어오는 생도가 있었으니, 바로 칠 번 생도 천여운이었다. 그 모습에 생도들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뒤에 스물다섯 명이나 되는 수하들을 이끌고 오는 모습이 위세가 넘쳐보였다. "내, 내가 먼저 갈 테다!" "어허! 내가 제일 먼저 기다렸는데 순서를!" "그런 게 어디 있어! 처, 천여운 공자아아아!" 식당 앞에 서있던 생도들이 앞 다뤄서 천여운의 앞으로 뛰어갔다. "응?" 갑작스럽게 몰려드는 수많은 생도들의 인파에 식사를 하러 내려오던 천여운과 수하들의 눈빛에 이채가 띠었다. 악의가 느껴지진 않았지만 몰려드는 인파에 허봉을 비롯한 수하들이 앞으로 나서 일 열로 서서 그들이 무작정 밀고 들어오는 것을 가로막았다. "처, 천여운 공자랑 이야기 하고 싶으니 비켜!" "천여운 공자!" 잠시 만 제게 시간을 주십시오!" "내가 먼저야!" "이 자식이 뒤늦게 나타나서는 무슨 헛소리야!" 서로 뭐가 급한 것인지, 앞 다퉈 천여운에게 말을 걸려하는 생도들은 급기야 서로 다투기 시작했다. 덕분에 일 열로 가로막고 있던 수하들 역시도 밀리면서 곤욕스러웠다. -팍! 파악! '으윽!' 옥신각신 싸워대면서 이리저리 부딪치며 억지로 밀고 들어오려 하자, 정신이 없어진 허봉이 얼굴이 시뻘개져서는 몰려든 생도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이이익! 주, 줄을 서시오!!!" < 22장 줄을 서시오! (1) > 끝 < 22장 줄을 서시오! (2) > '응?' '누구야?' 서로 밀치고 난리도 아니었던 생도들은 목청이 터져라 외치는 허봉의 소리에 일제히 조용해졌다. 한순간에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허봉이 여전히 빨개진 얼굴로 말했다. "소란스럽게 서로 싸워대면서 누구더러 만나달라는 거요! 주군께 볼 일이 있다면 먼저 온 순서대로 줄을 서시오!" 머쓱해진 생도들이 민망한 표정으로 줄을 맞추기 시작했다.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리하는 데는 발군의 재능을 지닌 허봉이었다. '역시 허봉!' '킥, 명불허전이군.' 뒤에서 지켜보던 고왕흘이나 자우민 등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예전에도 이런 상황이 있었을 때 허봉이 먼저 나서서 군중을 통제했는데, 본인은 크게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이런 쪽으로 재능이 있어보였다. "생도들이 이렇게 몰려든 거, 아무래도 조원 신청 같지?" 자우민의 말에 고왕흘이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열성적인 반응을 보이는 오십 여명의 생도들은 지금까지 모였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인원이었다. 아직 조장을 구하지 못한 생도들이 대부분 몰려든 것 같았다. '소문이 난 건가? 빠르구나.' 이런 고왕흘의 예상은 정확했다. 숙소에서부터 생도들이 움직이는 반경 범위가 거의 동일하다보니, 마도관 내에서 벌어졌던 일들은 빠르게 소문이 날 수밖에 없었다. 불과 몇 시진 사이에 가장 유력한 소교주 후보자였던 천유찬의 패배는 이미 모든 생도들에게 퍼져나갔다. '오 번 생도의 오른팔을 자른 것도 모자라서, 그 수하들의 팔 다리 뼈를 전부 부러뜨렸다는데?' '그럼 세력 싸움을 해서 이겼다는 말이잖아!' '잠깐만 그렇다면 칠 번 생도가 소교주 쟁탈전에 계속 이기고 있다는 말 아니야?' 소문의 양상은 지금까지와는 많이 달라졌다. 선임 무공 교두인 호진창을 무릎 꿇리면서 그 무위를 떨쳤고, 이번 대결로 인해 세력 역시도 착실하게 쌓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었다. 덕분에 천여운은 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연에 버금가는 유력한 소교주 후보자로 부각되어 가고 있었다. -털썩! 맨 앞에 서있는 생도가 바닥에 무릎을 꿇더니 큰 목소리로 천여운에게 말했다. "천여운 공자! 저는 칠십일 번 생도인 야도종의 엄섭중이라고 합니다! 중소 종파 출신이지만 공자를 돕고 싶습니다." ‘엇? 무릎을 꿇었네?' 뒤에 있는 생도들이 내심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시작부터 무릎을 꿇는 바람에 뒤에 있는 생도들도 자연스레 무릎을 꿇으며 천여운의 산하로 들어오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십이 번 생도인 수타종의 공진호입니다! 천여운 공자의 조에 여석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조원으로 받아주십시오!" "구백칠 번 생도인 이무도입니다. 저도 공자께서 노란 명찰이 여섯 개나 있다고 들었습니다. 조원이 되고 싶습니다." 물론 생도들 모두가 천여운의 산하로 들어오기만을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천유찬, 하일명 일파를 쓰러뜨리고 노란 명찰이 여섯 개나 된다는 소문도 덩달아 나면서, 아직까지 조장을 구하지 못한 생도들도 몰려들었다. 천여운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놈들 짓인가?' 이 소문은 도망쳤던 천유찬의 수하들이 낸 것이었다. 직접 복수할 배짱은 없었던 그들은 천여운이 가진 노란 명찰의 숫자를 생도들에게 소문냈다. 오늘이 지나면 조장이 완전히 결정되기 때문에 천여운이 생도들의 표적이 되기를 바라고 꾸민 짓이었다. 그러나 암중으로 공격받길 바랐던 것과는 달리, 오히려 생도들이 제 발로 찾아와서 받아달라고 간청하는 정 반대의 상황이 전개되고 말았다. 그렇게 오십여 명의 생도들이 순서대로 자신의 의사를 밝히는 데만 상당 시간이 소요되었다. 붉게 하늘을 물들였던 태양도 지평선 아래로 사라지면서 날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이 많은 인원을 전부 수용할 자리도 없었고, 천여운의 목적은 자신과 끝까지 함께 할 수하를 구하는 것이었기에 걸러낼 자들은 극명했다. 천여운이 그들을 향해 정중히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모여 주셔서 제 조원이 되기를 신청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그 전에 먼저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천여운은 처음 생도들이 자신에게 모였을 때처럼 단순히 시험을 통과할 조원이 아닌 동료이자 수하가 될 자들을 찾는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때문에 저와 함께 새로운 천마신교를 만들어 가실 그런분들을 원합니다. 제가 같이 여러분들과 함께 이 길을 걸어가며 피를 흘리고 가시밭길을 동고동락하겠습니다. 만약 그런 분들이 아니라면 정중하게 거절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천여운이 두 손을 모아 생도들에게 포권을 했다. '아아, 주군께서 생각이 더 깊어지셨구나.' 이 모습에 고왕흘은 다시 한 번 천여운이 성장했음을 느꼈다. 전과 다르게 무작정 여섯 종파에 대한 적의를 드러내기보다는 천마신교라는 대의를 앞세움으로써 생도들에게 부담감을 주지 않고 소교주 후보로서의 포부를 각인시켰다. 그저 분노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점차 분노를 내부의 투기로 삼아 현명함을 갖춰가고 있었다. ‘점점 변하시는군. 후후.' 바람직한 변화에 수하들로서는 흡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생도들의 결정뿐이었다. '이번에는 어찌 되려나.' 오전에 선임 무공 교두인 호진창을 꺾을 때도 그 많은 인원에서 고작 두 명만이 천여운의 수하로 들어오길 청했다. 명성이 점차 상승세를 타고 있었지만 여섯 종파에 비하면 뒷배가 없는 천여운이었기에 생도들이 과연 어떻게 나올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웅성웅성! 생도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웅성거렸다. 천여운의 일장연설을 들으면서 제각각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 반응이 당연히 갈릴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찰나에 누군가 생도들 틈에서 이탈하며 포권을 취했다. "죄송합니다." 노란 명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왔다는 이무도란 생도였다. 그를 시작으로 생도들이 한두 명씩 나오며 안타깝다는 표정과 함께 말했다. "그건 조금 힘들 것 같습니다. 아쉽네요." "저희 종파는 음마종의 산하에 있어서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저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조원의 자리만을 원했던 생도들은 미련 없이 떠났다. '쩝, 역시인가?' 그 인원이 여기저기서 속출하자 고왕흘의 표정에 아쉬움이 묻어나왔다. 그렇다고 그들을 나무랄 수는 없었다. 소교주 쟁탈전에 원하지 않는 후보자를 지지하라고 강요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더군다나 이곳에 모인 생도들 중에서는 여섯 종파의 산하에 있는 중소 종파 출신들도 많았기에 당연한 반응들이었다. '엇?' 안타깝게 이탈하는 생도들을 바라보던 고왕흘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대다수가 빠져나갈 거라는 예상과 달리 더 이상 생도들 중에서 이탈하는 자가 없었다. 전과는 확연하게 다른 결과였다. "아아아! 이렇게 많이!" 이에 허봉이 감정이 북받쳤는지 얼굴이 상기되었다. 꽤 많은 인원이 떠났는데, 천여운이 앞에는 아직도 절반이나 되는 생도들이 남아있었다. 그 숫자가 자그마치 스물여섯 명이나 되었다. 더군다나, -탁! 처음에 그저 조원이 되기만을 청했던 생도인 오백팔 번 생도 유파랑이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 숙여 포권을 취하며 정중한 목소리로 청했다. "공자님의 말씀을 듣고 나니, 부족한 실력이지만 그 길을 함께 걷고 싶어졌습니다. 거둬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유파랑 뿐만이 아니었다. 조원의 자리만을 원했던 자들 중에는 천여운의 포부가 담긴 정중한 연설을 듣고 도중에 마음이 바뀐 자들이 여덟 명이나 되었다. 천여운의 포부에 감화된 생도들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수하가 되기를 청했다. 강자존의 마교에서 스스로를 증명하고 점차 세력을 키워나가는 천여운의 말에 담긴 무게감은 전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문규가 있었어?' 자우민이 생도들 중에서 유일하게 무릎을 꿇지 않고 남아있는 한 사람을 보며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사백팔 번 생도인 마룡장종(魔龍掌宗)의 문규였다. 문규는 이 단계 시험 때 자신이 있던 조의 조장이었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다. 생도들의 틈바구니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어서 있는 줄도 몰랐다. '어째서 문규가?' 처진 눈에 순박해 보이는 인상을 가진 문규는 조장 급의 생도로 여섯 종파를 제외한다면 교내에서도 십위 권에 드는 상위 종파의 출신이었다. ‘노란 명찰을 획득한 게 아니었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문규가 이곳에 있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완숙한 절정의 경지에 이른 그라면 칠마검을 분석해서 쉽게 노란 명찰을 획득할 수 있었다. 의아해하던 찰나에 문규가 천여운의 앞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천여운 공자. 잠시 이야기할 수 있나요?" '문규?' 천여운 역시도 이 단계 조별 시험에서 그를 본적이 있기 때문에 얼굴을 알았다. 그런데 그를 향해 걸어오는 문규가 다리가 불편한지 절뚝거리고 있었다. "명찰을 여섯 개 가지고 계시죠?" 의미를 알 수 없는 질문에 천여운이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문규가 처진 눈을 치켜 올리며 짜증과 억울함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 중 하나가 제 겁니다." 명찰 중에 하나가 자신의 것이라 주장하는 말에 천여운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를 개의치 않는지 문규가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그 명찰을 도마종의 천유찬에게 빼앗겼었죠." 문규는 억울하다는 듯이 넋두리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원래 그는 무공 교두에게서 사흘 째 되는 날에 노란 명찰을 획득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미 명찰을 획득한 그에게 천유찬이 찾아와 자신의 산하로 들어오라고 권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중립이어서요.' 라고 정중히 거절했다. 이런 거절에도 천유찬은 두 차례 정도 더 찾아와서 수하가 되기를 종용했다. 순박한 인상과 달리 고집이 있던 문규는 소교주 쟁탈전에 누구도 지지할 생각이 없으니, 마도관에 집중하고 싶다고 의견을 밝혔다. "그랬더니 갑자기 대뜸 겨루자고 하더군요." 문규가 아무리 거절해도 소용이 없었다. 막무가내로 덤벼드는 천유찬에게 문규는 패배하고 말았다. 천유찬은 패배한 그의 왼쪽 다리와 오른쪽 팔을 부러뜨린 다음에 다음 단계 시험에 통과하고 싶다면 자신의 조원으로 들어오라고 협박을 하고 사라졌다. "미친 새끼." 같은 경험을 했던 백기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욕을 내뱉었다. 이 정도면 인재 욕심이 아니라 집착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였다. 아무리 중립을 고집하는 문규라고 해도 이런 식으로 팔다리가 부러지고 협박을 당하니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아무 조라도 들어간 뒤에 몸이 나으면 복수하려고 했는데.... 그랬는데...." 문규가 울상을 지었다. "팔, 다리가 부러졌다니까 아무도 안 받아주더라고요!" 그래도 조장 급의 무위를 지녔기 때문에 조원으로 받아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노란명찰을 지닌 다른 조장들은 냉정하게 거절했다. 몸이 다 낫지 않으면 받아줄 수 없다고 거절한 것이었다. 검마섬진을 익히기 위해 계속해서 합을 맞춰야 하는데, 문규는 뼈가 붙을 때까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입장이었기에 다른 조장들로서는 무리수를 둘 수 없었다. "그래도 실력이 있어서 기다려줄 만도 한데." 문규 정도의 실력이면 받아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받아준다는 조장도 있었는데, 한 시진 채도 안 돼서 거절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천유찬 그 자가 자신의 수하를 보내서 제가 기웃거리는 조마다 받지 말라고 손을 썼더군요." 덕분에 문규는 생애 처음으로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문규에 대한 집착에 지독할 정도로 수작을 부린 천유찬의 행동에 이를 듣고 있던 생도들 모두가 어이가 없었는지 혀를 내 둘렀다. "그래서 삼 단계 시험이고 뭐고 몸이 낫는 데로 복수를 하려고 했는데.....천여운 공자께서 그의 팔을 베었다고 들었습니다." 복수를 꿈꾸던 문규는 하루 만에 천유찬의 몰락 소식을 듣게 되었다. 팔이 잘린 것도 모자라서 그 수하들까지 전부 팔 다리가 부러져서 세력이 붕괴되었다는 말에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이게 기뻐해야할 일인지 아니면 허탈한 건지 모르겠어요." 뭔가 천유찬의 고통이 속이 시원하기는 했지만, 자신의 손으로 복수를 하지 못했다는 것이 허탈하면서도 찝찝하기마저 했다. 삼 단계 시험까지 포기하면서 마지막 목표점을 복수로 삼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천유찬 놈 때문에 애꿎은 피해자들이 많았군.' 천여운은 자신이 그의 오른팔을 자른 것이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여겨졌다. 그렇게 이야기를 마친 문규가 무거운 한숨을 푹 내쉬더니, 묘한 표정으로 천여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되었으니, 저를 책임져 주세요." "뭐?" 천여운이 오른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뭔가 딱한 사정을 알았기는 한데 마지막에 결론은 어째서 책임지라는 말일까? 문규가 절뚝거리는 다리로 힘들게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우울해서 말이 조금 서툴렀는데, 부러진 팔, 다리만으로 판단하지 말고 저를 받아줬으면 좋겠습니다." 복수라는 목적을 잃은 문규는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천여운을 찾았던 것이다. 그가 받아주지 않는다면 삼 단계 시험을 치르지도 못하고 탈락하고 만다. 그런 천여운의 귓가에 다소 흥분한 자우민의 전음이 들렸다. [주, 주군! 문규를 거두셔야 합니다!] 의아해하는 천여운의 귀로 자우민의 전음이 이어졌다. [문규는 본교의 열두 장로 중에 한 분이신 구 장로 문연님의 손자입니다!] < 22장 줄을 서시오! (2) > 끝 < 23장 검마섬진(劍魔殲陣) (1) > 마교에서 정점인 교주를 제외한 직위 계통에서 최상위종이라 한다면 장로 직을 말한다. 총 열두 자리의 장로 직은 교내에서도 가장 강한 세력을 갖춘 종파의 장이나, 그에 합당한 무위를 지닌 자들이 맡게 된다. 물론 예외인 경우도 있었는데, 일 장로에서 육 장로의 자리였다. 이 여섯 자리는 대대로 여섯 종파에서 대물림 되듯이 물려 받아왔기 때문에 항상 변함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 여섯 장로들 중에 약자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마교의 근간을 이루는 여섯 종파이자, 교주와 혈연으로 연결된 외가였기에 늘 경쟁을 통해 새로운 교주를 탄생시키기 위해서 끊임없이 무공을 발전시켜왔다. 당연히 무위 면으로도 마교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강자를 배출할 수밖에 없었다. 이 여섯 자리를 제외한 남은 칠에서 십이 장로들은 순수하게 스스로의 능력만으로 장로 직에 오른 자들이었다. 구 장로 문연. 그는 마룡장종(魔龍掌宗)이라는 명성 높은 상위 종파 출신으로 지난 정마 전쟁에서 수많은 공을 세워서 장로 직에 오르게 되었다. 당대의 종주인 문연은 높은 무공 이외에도 뛰어난 수완을 지녔기에 종파를 여섯 종파에 버금가는 세력으로 성장시켰다. 그로인해 소교주 후보자들이 마도관에 입관하기 전부터 가장 우선 섭외해야 할 대상 중 한 명으로 마룡장종의 후손을 꼽고 있었다. 검마종의 후보자 천경운을 비롯한 음마종의 천원려, 복마종의 천무금, 마지막으로 도마종의 후보자인 천유찬 등이 이 단계 시험 전부터 몇 차례 문규와 접촉했으나 일관적으로 거절해왔다. 그것은 소교주 쟁탈전에 관여해서 어느 특정 종파를 지지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여섯 종파는 항상 자신들의 아성에 도전할 만한 상위 종파들을 견제해왔다. 그들의 산하로 들어온 종파가 아니라면 극도로 배척하는 여섯 종파였는데, 이런 견제를 피하기 위해 마룡장종은 철저한 중립을 표방했다. 문규 역시도 종파의 뜻을 받들어 특정 종파의 후보자를 지지하기보다는 스스로의 실력을 키우고 증명하기 위해 마도관에 입관한 것이었다. 자우민이 흥분해서 전음까지 보내가며 적극 추천을 하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주군, 문규를 받아들인다면 굉장히 도움이 될 겁니다!] 여섯 종파의 산하에 속하지 않는 상위 종파. 그것도 모자라 그 조부가 본교의 실세인 장로라면 뒷배가 없는 천여운에게는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흐음.'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인재였지만 천여운의 뽑는 기준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문규의 이야기를 들었기에 사연이 딱하기는 했지만, 충성 맹세라기보다는 조원으로 받아달라는 쪽에 가까웠다. 천여운은 직설적으로 물어보기로 했다. "나와 함께 하겠다는 건가? 아니면 그저 조원으로 받아달라는 말인가?" 그 말에 문규의 당황했는지 입술을 오물거렸다. 사연을 이야기한 후에 어물쩍 받아달라는 식으로 넘어가려 했는데, 천여운이 직접적으로 다시 물어볼 줄은 몰랐다. '규야. 마도관에 들어가서도 늘 중립을 지키도록 하거라. 하나 사람의 마음이란 어찌 될지 모르는 법이지. 만약에 네가 정말로 주군으로 모시고 싶거나, 마음에 드는 이가 생긴다면 신중하게 살피고 판단하도록 해라.' 조부인 구 장로 문연이 했던 말이었다. 이왕 모시는 주군이라면 조부의 말대로 신중히 살펴보고 싶은 그였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조장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 마음이 조급했다. 잠시 고민하던 문규가 입을 열었다. "음음, 공자님. 같은 조로 활동해보고 수하가 되는 건 조금만 고민해보면 안 될까요? 길게는 안 걸릴 거예요." 급한 불부터 끄고 판단하겠다는 말로 들렸다. 천여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런 식으로 받아줄 것 같았으면 대부분의 생도들을 다 받았을 것이다. "그래? 그렇다면 거절한다." "네에?" 천여운의 냉정한 거절에 문규가 울상이 되었다. 이렇게까지 구구절절 사연을 이야기했는데 단박에 거절할 줄은 몰랐다. 전음까지 보내가며 적극적으로 문규를 추천했던 자우민도 당황했는지, 천여운의 옆으로 냉큼 달려와 말했다. "주, 주군. 사연이 딱한데 고민해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들리게는 그렇게 말하면서 전음으로는 적극 설득했다. [주군! 문규 같은 인재를 놓치시면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습니다. 소교주 후보자들 모두가 탐내하는 인재를 이렇게 쉽게 포기하시다뇨.] 차라리 조원으로 받아준 후에 조금씩 설득하는 게 나아보였다. 고왕흘 역시도 문규를 놓치는 게 못내 아쉬운지 천여운에게 전음을 보내왔다. [주군. 조장 급의 생도가 부러진 다리로 무릎을 꿇었다면, 후에 수하로 들어올 가능성이 충분해 보입니다. 일단 조원으로 받아주시는 것도....] 천여운이 고개를 저었다. "사연만으로 받는다면 지금까지 거절했던 생도들은 뭐가 되지?" 이럴 때만큼은 맺고 끊음이 확실한 그였다. 수하들로서는 아까운 선택일지는 모르겠지만 대외적으로 본다면 천여운의 태도는 옳았다. 뛰어난 인재라는 이유만으로 이 많은 생도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스스로 내뱉었던 규칙을 파한다면, 한 단체의 수장으로서 말의 무게가 가벼워질 수밖에 없었다. '으으으.' 단호한 천여운의 말에 더욱 조급해진 문규였다. 울상이던 그가 다급하게 절뚝거리는 무릎으로 천여운의 앞까지 기어왔다. 그리고는 천여운에게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 공자님. 그럼 딱 사흘만 시간을 주면 안 될까요?" "안 돼." "안 된다고요? 그, 그럼 이틀 만이라도 고민할 시간을 주시면 안 될까요? 너무 그렇게 바로 정하라고 한다면." 천여운의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로 강경하게 거절했는데, 이렇게까지 조원으로 들어오려는 이유가 뭘까? 여섯 종파만큼이나 위세가 높은 상위 종파에 조부가 장로인 자가 자존심을 버리면서까지 이러는 게 이상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내 조원으로 들어오려는 거지?" "그건....." 본심이 궁금해진 천여운이 나노에게 속으로 명을 내렸다. '나노 안면 분석 모드.' [안면 분석 모드를 가동합니다.] 나노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리며 천여운의 동공이 흔들리며, 흰 빛의 입자가 선들을 그리며 증강현실의 개안되었다. 휜 빛의 입자가 문규의 얼굴을 원을 그리며 락 온(lock on) 하여 수치가 표시되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문규가 말을 했다. "그건.....천여운 공자가 어떤 분인지 좀 더 지켜보고 싶어서에요." 흔들림이 없는 눈빛에는 거짓이 없었다. 그런데 나노의 판단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왔다. [에러(Error), 에러 (Error), 에러(Error)] 문규의 얼굴에 떠있던 수치 표시를 내던 흰빛의 입자가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왜 그러는 거야?' [안면 분석 모드를 실시할 수가 없습니다.] '어째서?' [지정 대상자의 안면근육이 인조 피죽으로 가려져 있어서 분석이 불가능합니다.] 나노의 안면 분석 프로그램이 가동했으나, 문규의 얼굴은 실제 자신의 피부가 아니었다. 안면 근육의 변화가 없기에 프로그램 가동이 실패한 것이었다. 흰빛의 입자가 원을 그리며, 문규의 순박한 얼굴의 귀 뒤쪽 피부 부분부터 목 부분까지 확대하여 보여주었다. '엇?' 놀랍게도 문규의 목과 귀 부분 뒤의 피부가 미묘하게 달랐다. 교묘하게 이음새가 연결되어 있으나, 크게 확대를 해서 보면 확연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이거 설마 인피면구야?' 인피면구(人皮面具). 동물의 가죽이나 혹은 실제 사람의 피부를 이용하여, 타인의 얼굴을 본떠서 만든 면구이다. 워낙 정교하게 만들어서 실제 사람의 얼굴처럼 보이기에, 고수라고 해도 구분할 수 없다고 들었다. 물론 인간의 육안으로는 판별하기 어렵지만 그것이 나노에게 통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 인피면구는 굉장한 기술이 필요하기에 중원에서도 제작 할 수 있는 이가 세 명밖에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 중 한 명이 마교의 십이 장로인 천면귀인(千面鬼人) 환의였다. 만약 문규에게 이 인피면구를 준 사람이 있다면 십이 장로일 확률이 높았다. '왜 얼굴을 가린 거지?' 처진 눈에 저 순박한 얼굴이 가짜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천여운은 더욱 문규가 수상하게 느껴졌다. 그런 천여운의 머릿속에 나노의 목소리가 울렸다. [인조 피죽으로 가려진 부위를 제외하고 신체를 분석한 결과, 십오 세에서 십칠 세의 연령으로 추정되는 여성입니다.] '뭐? 여성?' 천여운의 두 눈이 커졌다. 저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는 인피면구 속에 가려진 실제 얼굴은 여자라는 말이 아닌가. 말투가 묘하게 여성스럽기는 했지만 크게 의심하지 않은 그였다. '왜 그러는 거지?' 솔직하게 답변을 했는데도 이상하게 뚫어져라 쳐다만 보니 문규는 내심 당혹스러웠다. 천여운이 쳐다보는 부위는 자신의 목과 귀 부분이었다. '설마.....에이. 아닐 거야.' 불안하기는 했지만 아닐 거라 부정했다. 화경의 고수인 좌호법 이화명조차도 인피면구를 알아보지 못했는데, 천여운이 그것을 쉽게 알아볼 리가 없었다. 잠시 놀라하던 천여운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 여자.." '히익!' 그 순간 문규가 얼굴이 시뻘개져서는 허둥지둥 포권을 하며, 귀청이 떨어져나갈 만큼 큰 소리로 외쳤다. "처, 천여운 공자님의 수하가 되고 싶습니다! 새, 생각해보니 길게 고민할 필요가 없네요. 제발 받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응?' 빠른 태세 변화에 오히려 생도들이 벙 찌고 말았다. 문규는 정말 간절하게 눈시울을 글썽이며 천여운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마저 바꿀 만큼 자신의 성별을 숨기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바, 방금 전에 말씀하려 했던 건, 나중에 둘이서 조용히 이야기 했으면 좋겠네요.] 문규의 전음에 천여운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을 표시하는 반응에 자우민이 활짝 웃었다. 문규와 같은 인재를 놓치는 것이 아까웠는데, 이런 식으로라도 동료로 맞이하게 되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문 조장! 아니 문규! 오랜만이야.“ "그, 그렇네요. 자우민." 문규 역시도 오랜만에 만나는 자우민을 보며 어색하게 인사했다. 들키지 말아야 할 것을 들키는 바람에 불안한 마음 때문에 썩 기쁘지가 않았다. "반갑네. 소문은 익히 들었네. 고왕흘이라고 하네." "백기다." "허봉입니다." 뛰어난 무위를 지닌 동료가 들어온 것에 기쁜 천여운의 수하들이 두 팔 벌려 문규를 환영했다. 물론 새롭게 들어온 동료들을 환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스물여섯 명이나 되는 새로운 수하들을 영입하면서 천여운은 현 마도관에서 제일 많은 세력을 보유하게 된 셈이었다. 총 인원이 쉰세 명이나 되었다. ‘인원이 많아졌다.' 생각보다 많아진 인원 덕분에 조를 새로 개편해야 할 판국이었다. 원래는 순차적으로 들어온 순대로 자신의 조원을 채우고, 새롭게 영입된 수하들을 산하의 조로 편성하려고 했지만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인원이 많아져서 아무래도 새롭게 조원을 나눠야 할 것 같다. 내가 호명하는 사람은 조장을 맡아줬으면 한다." "넵!" 조장을 맡긴다는 말에 모여있는 생도들이 눈을 반짝이며 귀를 기울였다. 천여운의 선택에 따라 가장 신망받는 수하들을 판가름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내심 오늘 들어왔으면서도 조장이 되길 바라는 수하들도 있었다. "먼저 고왕흘." "네, 주군!" 고왕흘은 허봉만큼이나 충성심과 의리가 깊었다. 그라면 하나의 조를 맡기더라도 충분히 감당할 만한 역량이 된다. 납득할 만한 호명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번째는 백기." "오오!" 백기야 워낙 뛰어난 무위를 지녔기에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흉터에 강한 인상을 지닌 백기는 새로 들어온 이들 중에 다소 거친 생도들을 맡기로 했다. 그가 맡는다면 누가 감히 반항을 하겠는가. "세 번째는 호상화다." "네, 주군!" "여자 생도들을 부탁한다." 단체 훈련이나 숙소 생활 등을 고려했을 때, 호상화가 여자 생도들을 이끄는게 맞다고 판단한 천여운이었다. 여자 생도들 중에서 가장 발군인 실력을 지녔기 때문이기도 했다. 물론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보아도, 호상화는 천여운의 수하들 중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무위의 소유자였다. 적절한 배치였기에 누구 하나 불만은 없었다. 이렇게 세 명의 조장급 실력자에게 노란 명찰을 주었고 남은 명찰은 두 개였다. "흐음. 갈연." "네? 저 말입니까?" "그래. 네가 한 조를 맡아라." 고민을 하던 끝에 천여운은 갈연에게 조장의 자리를 맡겼다. 전 십이 조의 생도들이 백기보다도 갈연을 잘 따르기 때문이었다.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새롭게 조를 편성한다고 해서, 특별한 기대를 하지 않았던 갈연은 자신을 믿어준 천여운에게 감사의 포권을 취했다. "마지막은...." 천여운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허봉에게 향했다. 조장 후보로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던 허봉에게 눈이 가자, 다른 수하들이 의아해했다. 하지만 기존의 일곱 수하들은 누구보다도 허봉을 잘 알았다. 충성심이 깊은 그라면 실력은 부족해도 누구보다 믿을 수 있었다. 그러나 천여운이 미처 권하기도 전에, "저는 무조건 주군의 곁을 보필해야 합니다!" 강력한 의지를 보여서 조원으로 남겨야 했다. 실력만 보았을 때는 새롭게 영입된 문규가 조장 급에다가 자격이 충분했지만, 팔 다리가 부러졌기에 당장에 조원을 이끌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어쩔 수 없군." 결국 남은 한 자리는 자우민에게 맡겼다. 실력 면에서 더 뛰어나고 다른 조에서 이 인자였던 공진호나 유파랑이 있었지만, 그들은 아직까지 천여운에게 큰 신뢰를 주진 못했다. 그렇게 새롭게 조를 편성하고 저녁 식사를 마친 천여운은 격세석 연공실 건물의 뒤쪽에서 문규와 단 둘이 만남을 가졌다. 얼굴이 빨개져서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 문규에게 천여운이 물었다. "어째서 인피면구로 여자라는 걸 숨긴 거지?" < 23장 검마섬진(劍魔殲陣) (1) > 끝 < 23장 검마섬진(劍魔殲陣) (2) > '이걸 만드는데 꽤 공을 많이 들였다. 본 장로의 역작이라 할 수 있지. 오 년은 거뜬히 쓸 수 있을 테니, 주의사항만 지키길 바란다.' 마교의 십이 장로인 천면귀인(千面鬼人) 환의가 인피면구를 주기 전에 했던 말이다. 돼지가죽으로 만들어진 인피는 썩지 않도록 방부제 처리가 되어있고, 천잠사를 엮었기 때문에 탄력성이 뛰어나 어지간한 충격에도 찢겨지지 않는다. 더군다나 환의가 어떤 술법을 부려놓기라도 했는지, 피부색도 감정에 따라 바뀔 정도로 정교했다. 딱 한 가지 불편한 점이 있다면 매 번 저녁마다 면구를 벗어서 공기가 통하게 하고, 접착 약도 새롭게 발라야 했지만 그런 점도 감수한 문규였다. '대체 어떻게 안 거야? 귀신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정교하다 했잖아요!' 십이 장로 환의는 누구도 인피면구를 알아보지 못할 거라 호언장담했다. 그런데 천여운은 인피면구를 알아차린 것도 모자라 심지어 여자라는 사실마저 알아냈다. 문규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얼굴이 못나서 인피면구를 했다고 할까?......피휴, 아니야. 바보도 아니고 그걸 믿을 리가 없잖아.' 못생겨서 그렇다고 하기에는 성별을 숨긴 것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마땅한 핑계 거리를 생각할 만한 게 없었다. 아까 전에 겪었던 그를 떠올리면 타인을 쉽게 신뢰하는 유형은 아닌 듯 했다. '이익. 아직 반년도 안 되었는데, 벌써 들키면 어쩌자는 거야.' 혼자 온갖 표정을 짓다가 울상이 되는 모습에 천여운이 인상을 찌푸렸다. 허봉만큼이나 자신의 감정이 잘 드러나는 문규였다. 고민을 하던 문규가 천여운을 한 뼘 올려다보며 애원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공자님! 제발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말아주세요." ".....얘기한다고 쫒겨나는 것도 아닐 텐데, 왜 숨기는 거지?" 천여운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무림을 살아가는 무인들이 아니라 평범한 민초의 범인들이라면 모를까. 마교는 남녀를 떠나서 실력으로 인정받는 강자존의 법칙을 따른다. 굳이 얼굴과 성별을 숨겨가면서 활동할 이유가 없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불편한 몸으로 무릎까지 꿇어가며 수하로 들어오길 청했기에 받기는 했지만 문규가 여전히 수상하게 느껴지는 천여운이었다. "혹시 얼굴에 상처가 있다거나, 흉측하기라도 하나?" "......" 순간 말문이 막혔다. 얼굴이 못나서 그랬다는 말은 바보가 아닌 이상 믿지 않겠지 라고 생각했던 문규였다. 그런데 저렇게 진지한 눈빛으로 묻는 것을 보면, 정말 자신이 인피면구로 얼굴을 가린 이유 중 하나로 짐작한 듯 했다. 이에 기분이 나빠진 문규가 살짝 눈을 흘기더니,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휴, 공자님. 그럼 약속부터 해주세요." "약속?" "어디 가서 절대로 발설하지 않겠다고!" ".....알겠다." 이상하게 말려드는 느낌을 받았기에 천여운이 퉁명스럽게 답했다. 다리가 불편한지 문규가 건물 벽에 살짝 기대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 제 모습은 쌍둥이 동생의 얼굴이에요." "응?" 문규는 이란성 쌍둥이라고 했다. 그녀의 남동생 이름은 문유로 종파에서 유일하게 종주를 이을 혈손이었다. 문규의 아버지인 문성은 두 쌍둥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마교의 사천성 지부에 파견을 나갔다가, 사파의 습격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출산을 앞두고 있던 그녀의 어머니는 그 소식에 충격을 받고 난산(難産)을 하고 말았다. "제 동생을 낳는 도중에 어머니는 돌아가셨어요." '아....' 듣고 보니 그녀는 부모가 없이 자랐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천여운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내심 동질감을 느꼈다. 양친을 여읜 이야기를 하면서 문규의 눈빛에는 씁쓸함이 담겨 있었지만, 애써 슬픈 내색을 보이진 않았다. "제 동생은 난산 끝에 태어나서 몸이 병약했죠." 같은 쌍둥이였지만 순산을 했던 문규와 달리 동생인 문유는 분만시간이 길어지면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선천적인 천치(天癡)로 태어난 것이었다. 아들을 잃은 것도 모자라 하나뿐인 손자가 천치로 태어났으니 구 장로 문연은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닐 수가 없었다. 종파의 종주를 대대로 남자가 이어온 마룡장종에는 불행스러운 일이었다. 고심 끝에 문연은 이 사실을 대외적으로 숨겼다. 덕분에 마교의 사람들은 마룡장종에 쌍둥이가 태어났다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사실도 알 수가 없었다. 후손을 보기 위해 젊은 후처를 들이기도 했지만 아이를 가지는 것은 천륜이었다. 하늘은 더 이상 마룡장종에 아이를 점지해주지 않았다. 문연은 천치인 손자를 치료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지만, 선천적으로 그렇게 태어났으니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할아버지는 많이 슬퍼하셨어요." 겨우 당대에 와서 여섯 종파에 버금갈 만큼 세를 키웠는데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런데 새옹지마라고 하였던가. 천치로 태어난 손자 문유와 달리 손녀 문규의 무에 대한 재능은 가히 천부적이라 할 만큼 놀라웠다. 고작 열여섯의 나이에 절정의 경지에 이를 만큼 엄청난 무재에 문연은 기뻐하는 한편으로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점점 마도관의 입관 날이 가까워졌죠." 시일이 가까워질수록 문연은 노심초사하게 되었다. 그 날 교내의 모든 종파는 손자, 자식들을 누구 할 것 없이 마도관에 입관시켜야 했다. 이제 겨우 말을 할 줄 아는 문유를 무슨 수로 마도관에 보낸단 말인가. 그렇다고 손자를 두고 손녀만 보내게 된다면, 문제가 있음을 시인하는 꼴이었다. "꼭 밝히지 못할 이유가 더 있나?" 천여운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 손자가 천치라고 밝혀지면 종파의 자존심에 금이 갈 수도 있었지만,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결국은 드러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왜냐하면 여섯 종파에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저희 마룡장종을 산하에 두고 싶어 하거든요." 교의 근간을 이루는 여섯 종파. 그들은 늘 서로를 견제하고 균형을 이루고 있다. 지금은 현마종에서 제일 압도적인 세를 구가하고 있었지만, 여기서 마룡장종을 산하로 받아들이게 된다면 일발 역전이 가능해진다. "안 그래도 종종 매파를 보내오는데, 만약 저희 쪽의 사정을 알게 된다면. 으으." 문규가 몸서리를 쳤다. 종파의 종주를 맡을 후손이 제 구실을 못하고 있는 마룡장종이다. 이런 마룡장종의 손녀와 맺어지게 된다면 종파 간의 연계를 넘어서, 고스란히 그 힘을 가져올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군.' 천여운이 납득이 가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에 천치인 문유가 무리해서 마도관에 입관했다면 여섯 종파의 후손들이나 소교주 후보자들이 무슨 수를 쓰던지 그를 사고로 몰아갔을 것이다. 문유마저 없게 된다면 확실하게 마룡장종을 흡수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할아버지께서는 어떻게든 여섯 종파와의 관계를 멀리하기 위해 중립을 표방하셨죠." 마룡장종이 당대에 와서 여섯 종파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 구 장로 문연이었다. 그렇게 노심초사 하는 문연에게 손녀인 문규가 뜻밖의 제안을 한다. "할아버지께 남장을 하고 마도관에 들어가겠다고 했어요." 그녀 역시도 종파의 이런 상황을 잘 알기에 자신이 문유를 대신해서 마도관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차라리 제가 문유인 척을 하고 마도관에 입관해서 훌륭한 성적을 거둔다면 여섯 종파에서도 매파를 보내거나 허튼 수작을 부리진 않을 거라 말씀드렸죠."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했던 문연이었다. 하지만 마도관의 입관 날이 다가올수록 초조해진 구 장로 문연은 결국 그녀의 뜻을 받아들였다. 문연은 유일하게 종파의 사정을 알고 있는 막역지우(莫送之友)인 십이 장로 환의에게 부탁하여 문유의 얼굴을 본뜬 인피면구를 제작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지금 문규의 순박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문규는 동생의 이름을 쓰지 않고 자신의 본명으로 마도관에 입관했다. 그것은 혹시나 나중에 성별이 들켰을 경우, 종파나 동생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그녀의 고육지책이었다. '이런 사연이 있었구나.' 문규가 인피면구를 쓰고 성별까지 속여가며 마도관에 들어오게 된 사정을 알게 되자, 천여운은 그녀에 대한 의심이 깨끗하게 사라졌다. 그리고 처음으로 다른 누군가의 고충을 이해하는 마음이 생겼다. '되게 진지하게 듣네.' 진지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써 가며 몰입하는 모습에 문규가 피식하고 웃었다. "이제 제가 왜 인피면구를 했는지 아셨죠?" 천여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규 역시도 본의 아니게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하여 사연을 말한 것이지만, 처음으로 자신의 감춰왔던 비밀을 말하고 나니 일부 답답함이 해소되었다. 문규가 걱정이 되었는지 다시 한 번 강조하듯이 말했다. "공자님. 남아일언중천금이라고 했죠?" "……그래." "약속하셨으니까 비밀을 지키서야 해요! 꼭!" 남자인 문유의 인피면구로 말투는 여성스러운 것이 참 어색하긴 했다. 그것이 궁금해졌는지 천여운이 물었다. "목소리도 변조한 건가?" 일부러 목소리를 굵게 내고 있던 문규였다. 그녀가 방긋 웃더니 지금까지와 다른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하죠. 하나라도 허투루 하면 금방 들키거든요." 맑고 또랑또랑한 소리에 천여운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이렇게 들으니 확실히 소녀가 틀림없었다. 목소리를 굵게 낼 때는 변성기가 지나지 않은 소년 같았는데 신기하긴 했다. "음음, 그런데 계속 목소리를 일부러 굵게 내다보면 목이 금방 쉬어요." 그래서 되도록 필요한 말 이외에는 잘하지 않는 문규였다. "원래 목소리로 하니까 목이 한결 편하네요. 헤헤." 기분이 좋아졌는지 해맑게 웃는 모습에 천여운이 자신도 모르게 입 꼬리가 올라갔다. "앗?" 그때 문규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어서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보더니, 허둥지둥 뭔가를 품에서 꺼냈다. 뭔가 약이 들은 작은 호리병이었다. "하마터면 깜빡할 뻔했어요." "응?" 공자님이랑 대화 나누느라고, 깜빡했는데 약을 발라야 하는 시간이에요." "그게 접착 약인가?" "네. 이거 얼마나 귀찮은데요. 매일 저녁마다 접착 약을 다시 안 바르면 면구가 언제 떨어질지 모른다고요." "아!" 정교한 인피면구를 착용하면서 유일하게 번거로운 점이었다. 환의의 인피면구 제작 기술은 매우 뛰어나서 이것을 쓰고 있어도 갑갑한 점은 없었지만 늘 접착에 신경 써야 하는 단점이 있었다. "안 그래도 한 쪽 팔을 다쳐서 혼자 접착 약을 바르기 너무 힘들었는데. 이건 다행이네요." -쭈우우욱! 그 말과 함께 문규가 인피면구의 이음새 부분을 잡더니, 조심스럽게 그것을 당겼다. 그러자 문규의 얼굴을 덮고 있던 면구가 고무처럼 주욱 늘어나더니, 순박했던 인상의 얼굴 피부가 벗겨지고 원래의 얼굴이 드러났다. "아...." 천여운이 자신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얼굴은 천여운이 막연히 상상했던 것과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새하얀 얼굴에 초롱초롱한 눈망울. 복사꽂잎으로 물들인 듯한 분홍 입술은 조그마한 앵두 같았다. 달빛에 비친 소녀의 모습은 타인에게 무뚝뚝한 천여운 마저도 넋을 놓게 만들었다. "자! 두 손 벌려보세요." "응? 이렇게?" "네!" 천여운의 두 손을 올리자 문규가 인피면구를 거꾸로 올려놓았다. 문규는 작은 호리병의 마개를 열어서 접착 약의 액체를 인피면구의 안쪽 면에 고루고루 바르기 시작했다. "귀찮을 만하죠? 헤헤." 반달 모양의 눈웃음을 짓는 문규의 모습에 천여운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처음으로 이성을 바라보면서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미묘한 감정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기에 천여운은 이내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됐다. 고맙습니다." 접착 약을 전부 바른 문규는 다시 인피면구를 피부에 붙였다. 한 손으로 하는 힘겹게 이음새룹 붙여나가는 것이 불편해보였기에 천여운이 그것을 도와야만 했다. 인피면구를 붙인 문규는 눈이 처지고 순박한 인상인 동생 문유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공자님 덕분에 오늘은 빨리 붙였네요. 비밀을 얘기한 게 꼭 손해를 보는 것만도 아니네요. 햇." 별 것 아닌 것에도 긍정적으로 말하는 문규였다. 그렇게 인피면구에 이야기가 마무리 되고, 문규가 천여운에게 물었다. "저는 보시다시피 아직 낫지 않아서 당장에 훈련은 힘들어요. 공자님은 격세석 연공실에서 훈련하시다가 숙소로 오실 거죠?" "그래." "저는 숙소로 돌아갈게요. 공자님의 숙소가 몇 호실이죠?" "사 관, 칠 호실인데?" "오늘부터 공자님의 조에 들어갔으니, 숙소에 짐이라도 옮겨야겠네요. 그럼 있다가 뵐게요." 그 말과 함께 문규는 절뚝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숙소 방향으로 갔다. 순간 아무 생각 없이 격세석 연공실로 들어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던 천여운이 멈칫했다. "잠깐만.....쟤 여자잖아." 다시 남장을 하면서 위화감이 없었는데 문규는 여자였다. 천여운은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서서,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할지 난감해 해야만 했다. < 23장 검마섬진(劍魔殲陣) (2) > 끝 < 23장 검마섬진(劍魔殲陣) (3) > 늦은 밤. 해시(亥時) 무렵, 오랜만에 단세석 연공실에서 훈련을 한 천여운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나왔다. 습하고 좁은 구금동의 동굴 안에서 훈련할 때보다 넓고 쾌적한 환경은 무공의 수련 장소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연공실 건물 밖에서는 허봉을 비롯한 생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주군!" 한 번 습격을 당한 후로 조장에 대한 경호를 더욱 철저히 하는 수하들이었다. 물론 모든 수하들이 기다린 것은 아니었다. 쉰세 명이나 되는 대규모의 인원이 늘 뭉쳐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천여운은 개인 훈련실을 사용할 때는 노란 명찰을 가진 조장을 중심으로 뭉쳐서 움직이라고 명을 내렸다. 그렇기 때문에 천여운을 기다린 것은 아홉 명의 조원이었다. 한 명은 오종이었는데 그는 아직 의무실에 입원해 있었고, 문규는 먼저 숙소로 가있었다. "가자." "넵." 노란 명찰을 강탈할 수 있는 마지막 밤이었기 때문에 긴장이나 경계를 늦추지 않았지만 숙소로 돌아갈 때까지도 특별한 습격은 없었다. 아직까지 천여운이나 수하들은 의식하지 못했지만, 천유찬과의 대결에서 승리한 덕분에 생도들 사이에서는 함부로 그들을 건드리면 안 된다는 소문까지 퍼지고 있었다. 그들이 이렇게 연공실에서 훈련을 하고 나온 사이에도 수차례의 격렬한 암투가 벌어졌었다. 그 과정에서 두 조의 조장이 노란 명찰을 강탈당해서 교체 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여기서 노란 명찰을 강탈한 새로운 조장 중 한 사람은 바로 복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금이었다. 허벅지 근육을 다쳤던 천무금은 어제 오전에 의무실에서 퇴원했었다. 근 열흘 가까이 입원하면서 공백이 생겼지만 천무금에게는 충실한 심복인 팔십 번 생도 자현이 있었다. 자현은 복마종 산하에 있는 상위 종파의 생도들을 비롯해, 팔 조에서부터 꾸준히 천무금을 따르던 생도들을 모아서 조를 구성했다. "하아.... 젠장." 천무금은 지쳤는지 바닥에 주저앉았다. 일대일로 노란 명찰을 강탈하려고 했지만, 대부분의 조들이 서로 뭉쳐서 다니는 바람에 결국 조 대결이 되고 말았다. '내가 뒤쳐진 건가.' 열흘에 불과했지만 그 짧은 새에 생도들의 수준이 한층 높아졌다. 마룡단의 섭취부터 시작해 칠마검까지 익히면서 생도들의 무공 수위가 일류 고수의 수준까지 상향 평준화되었다. 퇴원하는 즉시, 개인 연공실에 들어가 마룡단을 흡수하면서 내공이 일 갑자에 올랐지만 조급함 때문에 깨달음이 절정의 초입 밖에 이르지 못했다. "칫." 덕분에 같은 절정의 초입이었지만 내공이 그보다 십 년이나 부족한 삼백이십일 번 생도 한평원을 상대로 삼십 초식 이상이나 겨뤄야만 했다. 왼쪽 어깨도 한평원의 마골조법의 초식에 당해서 꽤 통증이 심했다. -퍽! "빌어먹을 새끼." 소교주 후보자도 아니고 고작 상위 종파를 상대로 부상을 입은 것이 짜증나는지, 천무금이 기절해있는 한평원의 복부를 발로 걷어찼다. 한동안 입원했었다고 그 고약한 성질이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 빌어먹을 괴물 녀석을 상대하려면 이런 놈 따위는 가볍게 쓰러뜨릴 정도로 무위를 향상시켜야 해.' 예전과 다르게 천한 놈이라는 호칭은 사라졌다. 천원려, 천종섬, 천유찬 등이 당하면서 그의 머릿속에서 천여운은 어느새 괴물이 되어 있었다. 의무실에 입원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래도 내공은 자신이 앞섰는데, 이제는 너무 격차가 심하게 나버렸다. '반드시 따라잡는다!' 더 이상 천여운을 경시하는 마음 따윈 사라진 천무금이었다. 자신의 응어리진 분노를 해소하고, 소교주 쟁탈전에서 이기기 위해선 천여운은 반드시 뛰어넘어야 할 장애물이 되었다. 한편, 천여운과 그 수하들은 새롭게 배정받은 숙소 사 관 건물의 칠 호실로 복귀했다. 숙소 안으로 들어가니, 호실의 등불이 켜져 있었고 문규가 침상에 상체를 반쯤 기대서 칠마검의 비급서를 읽고 있었다. "아! 오셨어요." 문규의 인사에 천여운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것이 삼 단계 시험까지 남은 스무하루 동안 여자 생도인 문규와 같은 숙소를 써야 했기 때문이었다. 남녀가 유별한데 한 호실을 쓴다는 것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남장에 대한 비밀을 지키기로 한 것이 발목을 붙잡고 말았다. 내심 약속을 했던 게 후회가 되었지만 이미 한 번 꺼낸 말을 어쩌겠는가. '남자처럼 보이기는 한데....후우.' 인피면구를 하고 있어서 위화감은 없었지만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되니, 그녀가 의식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당분간 불편하겠지만 옷을 갈아입을 때만이라도 주의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때, "우아아, 너무 덥네요." 연공실에서 훈련을 하면서 땀을 많이 흘린 허봉이 옷을 훌러덩 벗어던졌다. 뱀이 껍질을 탈피하듯이 전신 탈의를 한 허봉은 알몸이 되어서, 갈아입을 옷을 들고 씻기 위해 뛰어나갔다. '아......허봉.' 괜히 민망해진 천여운이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남자들만 사용하는 숙소이다보니, 생도들은 보통 훈련을 마치고 씻으러 갈 때 이렇게 알몸으로 뛰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지켜주지 못했다.' 적나라하게 모든 것을 보이고 말았다. 문규를 힐끔 쳐다보았더니, 다행히 허봉의 달랑거리는 그것을 보진 못했는지 계속 비급서를 읽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하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자신만 신경 쓴다고 될 문제가 아니었다. 천여운은 당분간 수하들에게 숙소에서 전신 탈의는 하지 말라고 이야기를 하려 했다. 그러나, "얼른 씻어야겠다!" '완전 땀에 젖었어.' 공교롭게도 그가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수하들의 반 이상이 옷을 훌러덩 벗어버리고, 새로 갈아입을 옷만 들고 씻으러 뛰어 가버렸다 한 발 늦고 말았다. "같이 가요!" 평소에 낯을 가리는 진국조차 옷을 훌렁 벗어버리고 뒤따라 갔다. 그나마 완전히 탈의를 하지 않은 세 명도 중요 부위만 가린 속옷차림으로 나갔다. '........돌아버리겠군.' 누구 할 것 없이 조원들 전부가 알몸을 노출한 셈이었다. 천여운이 굳어진 얼굴로 문규를 쳐다보니 여전히 칠마검의 비급서를 보고 있었다. 이 정도로 시끌벅적하게 뛰어갔으면 분명 보았을 텐데, 일부러 못 본 척 한 것일까? "너.....괜찮은 거냐?" 다들 씻으러 갔기에 천여운이 물었다. 문규가 서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괜찮아요. 하도 많이 겪어서 이제는 아무렇지 않답니다. 고... 공자님도 편하게 씻으러 가세요." 이곳 숙소로 옮기기 전에도 남자들과 함께 숙소생활을 한 문규였다. 당연히 남자 생도들의 알몸을 보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천여운의 눈에는 그녀가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서책에 코를 박고 있는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뭘 편하게 씻으란 거야.' 천여운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갈아입을 옷을 들고 나갔다. 그 날 이후 천여운은 수하들이 숙소 내에서 옷을 전부 탈의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주군의 명이니 들어야만 했다. 다음날 아침, 천여운은 마도관의 본관으로 가서 노란 명찰 획득을 보고한 후에 정식으로 삼 단계 시험의 조장이 되었음을 인정받았다. 어제 오전까지만 하더라도 열한 명의 조장뿐이었지만, 천여운이 산하에 다섯 조장을 두게 되면서 조의 숫자가 늘어났다. 거기에 검마종의 소교주 후보자 천경운 역시도 산하의 한 조를 두면서 총 열여섯 조가 탄생하게 되었다. 사무종의 칠백 번 생도인 사마착은 두 개의 명찰을 가졌지만, 산하에 조장을 둔 것이 아니었기에 도합 열여섯 명의 조장이 등록되었다. 이로써 이백일곱 명의 생도 중에서 열다섯 명의 생도는 삼 단계 시험도 치르지 못한 채, 탈락할 수밖에 없게 되어버렸다. 생도들은 이 열다섯 명에 포함되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든 남은 스무하루의 기간 동안 조장을 구해야만 했다. 지금까지는 조장들이 고군분투하였다면 이제는 조원들이 살아남기 위한 차례라 할 수 있었다. 조장 등록을 마친 천여운과 수하들은 아침 식사를 한 후에 숙소 뒤편의 산으로 올라왔다. 그 동안 명찰 쟁탈전 때문에 미뤄졌던 칠마검 훈련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왕 조원들을 맡았으니, 이 녀석들은 내가 칠마검을 가르쳐보겠다." "응?" 칠마검 훈련은 같이 하기로 했는데, 뜬금없는 제안에 천여운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그런데 백기의 말에 고왕흘도 동의한다고 말했다. "백기의 말도 맞습니다. 주군께서도 조원들을 가르치시기도 벅차실 텐데, 저희가 조장을 맡은 김에 각자 조원을 가르치는 것도 괜찮아 보입니다."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었다. 아무리 여기서 제일 뛰어난 무위를 지닌 천여운이라고 해도 혼자서 수많은 생도들을 가르치는 것은 무리였다. "저도 고왕흘과 같은 생각입니다." 갈연 역시도 전 십이조의 생도들과 원래부터 해오던 훈련방식이 있기에 그대로 진행하고 싶다고 말했다. "흠." 천여운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것은 이들이 정말 자신을 생각해서 그런 제안을 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백기, 고왕흘, 갈연 세 사람이 서로를 쳐다보는 눈빛에는 왠지 모를 경쟁심을 띠고 있었다. 그것은 아침 식사에 있었던 작은 신경전에서 비롯되었다. '못해도 칠마검은 이레는 훈련해야 하지 않겠나?' '너무 길다. 나라면 칠마검 정도는 사흘이면 가르칠 수 있고 검마섬진은 이레면 충분하다.' 훈련에 관한 의견을 나누다가 백기가 무심결에 그런 말을 뱉었다. 그것이 두 사람에게 경쟁심을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식사를 끝마칠 때 즈음에 그들은 누가 먼저 조원들에게 칠마검을 가르치고 검마섬진을 터득할지 내기를 하기에 이른다. '내가 못 들었다면 모르겠는데.' 천여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같이 식사를 하면서 들었는데, 애써 자신을 배려한다는 듯이 말하는 게 우스웠다. 하지만 나쁘진 않다고 여겨졌다. 이런 선의의 경쟁은 서로를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좋아. 뜻대로 해라." "감사합니다." 그렇게 세 사람은 각자의 조원을 데리고 훈련 장소를 옮겼다. "주군, 저는 조원들을 구해야 합니다." "자우민도 그래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송한데, 주군. 인원을 채울 때까지만 제 조원들을 부탁드립니다." 자우민과 호상화는 아직 조원들을 더 구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그들은 오늘부터 훈련을 시작하기는 힘들었다. 아직까지 조장의 밑으로 들어가지 않은 생도들이 꽤 많았기에 두 사람은 우선 인원을 채우기 위해 다시 산을 내려갔다. '흠, 생각해보니 백기도 아직 조원을 모집해야 하는군.' 도움을 받는 것을 싫어하는 백기는 이 두 사람처럼 부탁하지 않고 조원을 구하러 갔을 것이다. 백기의 조원까지 맡았다면 부담이 훨씬 커졌을 것이다. 단순히 조원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천여운의 수하가 될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기에 조금 시간이 지체될 수도 있다. "여덟 명인가." 아무래도 당분간은 자신이 그들의 조원까지는 맡아서 가르쳐야 할 것 같았다. 산 중턱의 넓은 터에 열일곱 명의 생도들이 사 열로 목검을 쥐고 섰다. 이들 대다수가 이제 막 일류 고수의 경지에 들어섰기 때문에 중소 종파 몇 명을 제외하고는 칠마검이 첫 일류 무공이었다. 물론 명찰 쟁탈전이 벌어지는 이레 동안 대부분 비급서는 숙지한 상태였다. ‘아아! 주군께 처음으로 무공을 배우는 구나.' -두근두근! 허봉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천여운을 바라보았다. 다른 생도들 역시도 천여운의 뛰어난 무위를 알기에 어떤 방식으로 무공을 가르칠지 기대가 되었다.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인원이 많아서 천여운이 혼자서 한 명, 한 명 전부 신경 쓰기는 힘들어보였다. '시작해볼까?' 천여운도 처음으로 남을 가르치는 것이었기 때문에 내심 긴장되었다. 그래도 우호법 섭맹에게 가르침을 받은 대로 최선을 다해서 수하들에게 주입시킬 생각이었다. "먼저 시범부터 보여주겠다." 천여운이 앞으로 나서서 목검을 쥐고서 칠마검의 기수식을 취했다. 모두가 집중하자 천여운이 칠마검의 검초를 펼쳤다. -촥촥촥! 검식의 경로가 다 보일 정도로 최대한 천천히 검초를 펼치는 모습에 생도들이 넋을 놓고 쳐다보았다. "우와." 그들이 이렇게 놀라는 것은 천여운의 자세가 마치 교본을 보는 것처럼 정확했기 때문이었다. 비급서에 그려진 그림과 한 치의 다른 점 없이 펼치는 모습에 감탄했다. 아무리 뛰어난 오성을 지녀도 새롭게 익히는 무공이라면 자세가 일부 흐트러질 수밖에 없었는데, 마치 수십 년을 연마한 사람처럼 정확했다. '구금동에 갇혀 있던 사람이 맞아?' 훈련에 참관한 문규조차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녀가 알기로 천여운은 이레 동안 좁은 구금동에 갇혀서 면벽 수련만 했을 텐데, 초식을 다루는 것이 너무 완벽했다. '대단하다. 정말 천재인 건가?' 문규 또한 완숙한 절정의 경지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지만, 막 처음 익힌 검법을 저렇게 능숙하게 펼쳐보라고 한다면 불가능하다고 얘기할 것이다. 물론 이것은 천여운이 천재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칠마검의 비급서를 뇌 속에 그대로 전이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 잘 보았겠지?" 천천히 보여줬기 때문에 가장 올바른 자세를 눈으로 확인하게 된 생도들이었다. 천여운이 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럼 이제부터 한 명씩 짚어줄 테니, 칠마검을 펼치도록." "오오옷!" "정말이십니까?" 천여운의 말에 수하들이 입에서 환호성이 튀어나왔다. 한 명씩 짚어준다는 말은 동시에 훈련을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 지도를 해준다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웬 행운이야!' 뛰어난 고수가 개인 지도를 해주는 기회는 쉽게 오지 않는다. 허봉 역시도 기쁜 마음에 눈을 반짝거리며 물었다. "그럼 주군, 누구부터 시작 할까요?" 중요한 허봉의 질문에 생도들이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인원이 많다보니 먼저 지도를 받는 사람이 검식의 자세를 빨리 교정하기에 유리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천여운의 입에서 나온 말은, "무슨 소리야? 모두 한꺼번에 칠마검을 펼쳐야 빨리 살펴볼 수 있지. 한 명씩 해서 어느 세월에 끝나라고." "네?" 모두가 벙 찐 얼굴이 되었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혼자서 이 많은 인원이 동시에 초식을 펼치는 것을 무슨 수로 세세하게 살핀단 말인가. < 23장 검마섬진(劍魔殲陣) (3) > 끝 < 24장 육검(六劍) (1) > 다리가 불편하기에 작은 바위에 걸터앉아 있던 문규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검진의 합을 맞추는 것을 살펴보는 것이라면 이해가 가지만, 초식의 자세를 교정해주는 것인데 동시에 살피는 것은 힘들어 보였다. '같이 살펴보고 도와드릴까?' 칠마검을 터득했고, 비급서를 외울 정도로 수십 번이나 정독했다. 초식의 자세 교정 정도는 일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일단 한 번 해보죠!" 미덥지 못한 표정을 짓고 있는 생도들에게 허봉이 초식을 펼쳐보자고 권했다. 적어도 주군인 천여운이 무언가를 하면서 허언을 했던 적은 없었다. "기수식을 취한다!" -착! 천여운의 구령에 열일곱 명의 생도들이 동시에 칠마검의 기수식을 취했다. '에라 모르겠다. 아니다 싶으면 개인지도로 바꾸시겠지.' 생도들의 대부분이 그런 생각을 했다. 천여운이 나노에게 명을 내렸다. '나노, 증강현실 개안.' [사용자의 시각 정보에 증강현실(增强現實) 개안(開眼) 가동합니다.] 천여운의 동공이 흔들리며 흰 입자가 선을 그리며 증강현실이 개안되었다. '나노, 지금 앞에 있는 열일곱 명이 칠마검 초식을 펼치는 것에서 자세가 틀린 게 있다면 튜토리얼 모드로 분석해서 알려줘.' [알겠습니다. 지정하신 열일곱 명에 대한 다중 튜토리얼(tutorial) 모드를 가동합니다. 기준 무공은 칠마검.] 나노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리며, 흰 빛의 입자가 열일곱 명의 생도들을 향해 원을 그리며 락 온(lock on)하여 수치가 표시 되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천여운이 그들을 향해 외쳤다. "일 초식부터 펼친다! 검일(劍一)!" "검일!!!" 생도들이 복창하며 칠마검의 일 초식을 펼치기 시작했다. -촤촤촤촤! 생도플의 목검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열일곱 명이 동시에 목검을 들고, 초식을 펼치자 제법 그럴 듯한 그림이 그려졌다. '아.' 문규의 입에서 작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단체로 펼쳐서 겉보기에는 그럴 듯해 보였지만, 역시나 처음 펼쳐보는 초식에 대다수의 생도들의 자세가 흐트러지고 있었다. 원래부터 일류의 실력이었던 세 명을 제외하고는 엉망이었다. -착! 일 초식을 마친 생도들이 기본자세에서 멈췄다. 대충 훑어보아도 엉망인 생도들이 많아서 어디서부터 손을 봐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문규가 그나마 자신이 확실하게 보았던 생도들을 전음으로 보내주려 했다. 그러기도 전에 천여운이 먼저 입을 열었다. "훈련 중이니까. 번호로 말하겠다. 먼저 일 열에 삼십일 번." "네넵!" "검일을 펼칠 때, 첫 번째 검식부터 팔을 뻗는 힘이 약하다. 그렇게 하면 뒤에 이어지는 검식들도 약해진다. 주의하도록." "넵." 삼십일 번 생도 육경명이 힘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시작에 불과했다. 천여운이 다음 생도를 호명했다. "구십오 번. 초식을 펼칠 때 균형이 흐트러졌지?" "어, 어떻게?" "세 번째 검식을 펼칠 때 오른발이 일보 앞으로 나와야 하는 데, 왼발이 나왔다. 보법이 흐트러지면 검초가 무너지니 주의하도록." "아, 알겠습니다!" 정확하게 문제점을 짚어주자 구십오 번 생도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천여운이 바로 옆에 있는 허봉을 불렀다. "이십삼 번." "넵!" "검식을 펼칠 때마다 검 끝이 계속 아래로 처진다. 그리고 세 번째 검식에서 오른발 일보를 내딛으면서 손목의 힘만을 쓰는 데, 허리를 돌리는 힘의 반동으로 하는 거다." "네에! 감사합니다!" 세세한 조언에 허봉이 기쁜 목소리로 답했다. 이에 문규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그녀가 정확하게 살펴보았던 몇 명 중에 한사람이 허봉이었는데, 단점을 정확하게 짚어냈다. '설마 정말로 생도들 전부 살펴본 거야?' 이 세 명의 단점을 짚은 것만으로도 대단했다. 눈썰미가 좋다는 걸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다음은 오백팔 번." "넵!" "검식을 펼칠 때 계속 일보를 내딛으면서 무릎을 펴는데, 다음 동작을 펼칠 때 몸에 무리가 갈 수도 있다." '세상에.....' 문규의 입이 벌어졌다. 정말로 생도들을 전부 살펴본 게 맞는 듯 했다. 천여운은 쉬지 않고 이런 식으로 순차적으로 생도들의 실수나 동작을 교정해주었다. 그 숫자가 열 명을 넘어서자 다른 생도들 역시도 놀람을 금치 못했다. 일 초식을 펼치기까지 고작해야 찰나에 불과했는데, 이 많은 생도들의 실수를 세세하게 살폈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뭐야? 진짜로 전부 다 살폈다고? 아무렇게나 말하는 거 아니야?' 이십이번 생도 공진호가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 되었다. 두세 명 정도라면 이해하겠지만 이 많은 인원은 얼마나 눈썰미가 좋다는 말인가. 대충 말한 것치고는 대답하는 생도들이 전부 납득한 듯 했다. "이십이 번" "네, 넵!" 공진호가 인상을 찡그리며 답했다. 왠지 불안했다. 그는 원래부터 일류 고수였고, 이레 동안 칠마검을 꾸준히 연마했기에 앞서 지도한 생도들보다 훨씬 완숙하게 할 수 있었지만 일부러 대충 펼쳤다. 가장 뒤쪽에 있었기 때문에 천여운이 어차피 자신까지는 살피기 힘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 그를 바라보는 천여운의 눈매가 지금까지보다 매서웠다. 눈빛이 그를 다그치고 있었다. "대충대충 하면 내가 모를 줄 알았나?" '헉!' "매 검식마다 나비처럼 흐느적거리듯이 펼치는 건 대체 무슨 짓거리지? 제대로 할 생각 따윈 없는 거냐." 천여운의 날카로운 다그침에 공진호의 얼굴이 빨개졌다. 너무 부끄러운 나머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옆에 있는 임유환이 장난치지 말고 제대로 초식을 펼치라 할 때, 절대로 알아채지 못할 거라고 호언장담을 했는데 망신살이 뻗쳤다. "죄, 죄송합니다."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한다면 칠마검은 혼자 익히도록 해라." -털썩!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주군." 공진호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천여운에게 진심으로 사죄했다. 그 모습에 생도들 모두가 소름이 돋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어떤 식으로든 절대로 천여운의 눈을 속일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흥." 그래도 변명을 하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는 모습에 약간은 누그러졌는지 천여운의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실력을 갖췄으면 그에 맞게 행동하도록. 그래도 이 중에서는 두 번째로 자세가 정확했다. 다음부터는 제대로 해라." '두 번째? 내가 이 등이라고?' 초식을 대중 펼쳤으니 할 말은 없었지만 제일 잘한 생도는 누구일까? 천여운이 바로 옆에 있는 십일 번 생도인 임유환을 쳐다보면서 흡족한 목소리로 말했다. "십일 번은 일 초식에서 특별히 교정할 건 없다. 초식을 다루는 게 다른 누구보다 제일 능숙했다." "감사합니다. 주군." 공진호의 인상이 잔뜩 구겨졌다. 제일 잘한 사람은 바로 그에게 장난지지 말고 제대로 하라고 했던 임유환이었다. 마도관에 입관하기 전부터 알고 지냈고, 늘 경쟁 관계였던 그에게 밀렸다는 생각에 공진호는 내심 분했다. 천여운의 칭찬에 임유환의 얼굴은 미소로 번져 있었다. '으으으, 임유환!' 이럴 줄 알았다면 제대로 초식을 펼칠 걸 후회가 되었다. 다른 생도는 몰라도 임유환에게 만큼은 절대로 지고 싶지 않은 공진호다. 그렇게 천여운이 열일곱 명의 생도들의 단점을 하나하나 개인 지도를 하는 것처럼 세세하게 짚어주자, 모든 생도들의 눈빛에는 신뢰감이 생겨났다. "자, 다시 일 초식을 펼쳐라. 내가 짚어준 것을 유의해서 조금 더 천천히 전개해라." "넵!" 천여운의 명에 생도들이 다시 칠마검의 일 초식인 검일을 펼쳤다. -촤촤촤촤촥! 목검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확연히 달라졌다. 한 번 만에 완벽하게 교정이 된 것은 아니었지만 아까 전에 초식을 펼쳤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자세들이 좋아졌다. "아!" 문규의 입에서 아까와 다른 탄성이 흘러나왔다. 무공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스승 혹은 지도자로서도 훌륭한 자질을 지녔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었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나노의 능력이었다. 천여운의 증강현실 속에 열일곱 명의 얼굴 옆에는 그들이 초식을 펼치며 실수를 했던 것들이 흰빛의 입자들로 상세히 글이 써져있었다. 그것을 모르기에 문규는 전보다 천여운을 훨씬 대단하게 볼 수밖에 없었다. 열일곱 명의 생도들이 일 초식을 마친 후, 천여운은 다시 한 번 실수를 짚어주지 않고 남은 여섯 초식을 펼치게 해서 그 초식들의 자세를 교정해주었다. 이것은 생도들이 자신이 배운 것을 숙지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우호법 섭맹도 천여운을 가르칠 때, 계속해서 단점을 지적해 주기 보다는 연습을 통해 스스로 교정할 시간을 주었다. '이레면 충분할 것 같다.' 그래도 생도들 대다수가 무도 종파의 출신이었기에 단점을 계속 반복할 만큼, 미련한 것은 아니기에 초식을 익히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은 걸릴 것 같진 않았다. 허봉이나 진국, 마칠 등과 같이 오성이 부족한 경우도 있었지만 그들은 다른 생도들에 비해서 꾸준히 노력하기 때문에 기간은 맞출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자! 그럼 저녁 식사까지 계속 훈련한다!” "넵!!!" 그렇게 칠마검 수련이 시작 된지 열흘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원래 계획했던 것과 다르게 모두가 칠마검 초식의 자세를 완벽하게 익히기까지 예상 시간보다 지체되었다. 여기서 천여운은 가르치는 사람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배우는 자의 오성이나 노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종파의 생도들은 그럭저럭 이레라는 시간을 맞췄지만, 무가 출신의 생도들은 식이 복잡한 마지막 칠검(七劍)을 익히는데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닷새 동안 입원해있던 오종이 퇴원하면서 늦게 합류한 것도 한몫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종은 생도들 중에서도 비교적 재능이 뛰어났기에 닷새 만에 칠마검을 터득할 수 있었다. 칠마검 수련을 위해 흩어졌던 열흘 만에 천여운 산하의 모든 수하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졌다. 칫." 백기가 분했는지 고개를 획하니 돌려 먼 산을 바라보았다. 내기에서 승리한 고왕흘이 신이 났는지 어깨를 들썩이며 호탕하게 웃어댔다. "하하하핫, 패배를 인정하다니 역시 사내일세!" 누가 먼저 조원들에게 칠마검을 익히게 하는지에 대한 내기의 승자는 바로 고왕흘이었다. 고왕흘은 정말 자신이 호언장담한 이레 만에 칠마검 습득을 성공시켰다. 심지어 갈연마저도 아흐레 만에 전 조원이 칠마검을 익히는데 성공한 반면, 백기의 조는 열흘이 걸리고 말았다. "무슨 수로 이레 만에 가르친 거냐?" 백기 역시도 막상 생도들을 가르쳐보니, 생각 외로 오성이 뛰어난 자들 이외에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고왕흘은 이레 만에 성공시켰으니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하하하핫, 별 것 있나. 무조건 익힐 때까지 강제로 때려 박으면 되지." "......때려 박아?" 고왕흘이 뒤쪽에 있는 자신의 조원들을 바라보며 씨익하고 웃자, 생도들이 뭐가 그리 두려운지 몸서리를 쳤다. 대체 어떤 방식으로 가르쳤기에 고왕흘을 저리 두려워하는 것일까? < 24장 육검(六劍) (1) > 끝 < 24장 육검(六劍) (2) > 열흘이라는 사이에 변화는 칠마검의 습득만이 아니었다. 조원을 전부 채우지 못했던 백기, 호상화, 자우민의 조원들이 전부 채워졌다. 백기는 몇 명만 모으면 되는 것이었기에 빠르게 조원을 모았지만, 호상화나 자우민은 전 조원을 모으는데 사흘을 소요해야 했다. 단순히 조원을 받는데 그쳤다만 금방 모였겠지만 생도들 역시도 천여운의 산하로 들어올 자를 찾는 것이었기에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열아홉 명인가.' 새롭게 천여운의 산하로 들어온 수하들은 두 분류로 나눌 수 있었다. 선임 교두 호진창을 꺾은 것과 차기 소교주에 유력하다는 천유찬을 꺾은 소문이 퍼져나가면서 천여운에 대한 동경으로 들어온 생도들. 평소에 여섯 종파 체제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을 천여운이 변혁의 바람을 불어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가진 생도들. 이렇게 두 분류는 다른 생각으로 들어왔지만 여러 차례의 선별을 통해, 가려서 영입했기에 여타의 조에 비해서 천여운을 중심으로 견고하게 뭉치게 되었다. '우와! 저긴 전부 여자 생도들이야.' '어떻게 저런 조가 만들어졌지?' "나도 저 조에 들어가고 싶다." 남자 생도들의 눈이 호상화의 조원들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호상화의 조는 이번 기수에서 처음으로 여자 생도들로만 구성되었다. 한참 이성에 눈을 뜨는 혈기왕성한 십대 소년들에게 매력이 넘치는 조라 할 수 있었다. '흥. 예쁜 건 알아가지고.' '호호호.' 여자 생도들도 그런 남자 생도들의 반응을 내심 나빠하지 않았다. 오히려 괜히 머리를 한쪽으로 스윽 넘기며 시선을 즐기는 여자 생도들도 더러 있었다. 천여운의 관심을 끈 것은 새롭게 영입된 조장급의 실력자들이었다. '칠백팔 번 생도 채택겸 오십이 번 생도 우소정.' 두 사람 모두 이번에 마룡단을 복용한 후에 일류에서 절정 초입에 오른 고수들이었다. 상위 종파 서문종 출신의 채택겸은 원래 조장 급의 실력이었으나, 이 단계 시험이 끝날 때까지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던 생도였다. 채택겸은 자발적으로 숙소까지 찾아와 천여운에게 말했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입니다. 언제까지 여섯 종파의 울타리에 갇혀서 그들과의 알력 싸움으로 본교의 힘을 낭비하는 것을 보기 싫습니다. 여섯 종파에 속하지 않는 천(天) 가인 당신이라면 그것을 바꿀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생도들처럼 단순히 변혁이 되기를 바라는 것과 다르게 적극적으로 마교를 바꾸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마음에 들었기에 천여운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호상화가 친분이 있다고 데리고 온 열마종의 우소정은 당돌했다. '강자존에서 다른 말이 필요하나? 실력으로 나를 납득시킨다면 네게 평생 충성을 다하겠다.' '그래?' 호기롭게 도전했던 우소정은 고작 삼 초식 만에 패배하여 허무하게 굴복하고 말았다. 절정의 초입이라고는 하나 접무도법만으로도 충분히 제압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새롭게 절정 초입의 무위를 지닌 두 사람을 영입함으로써 천여운의 세력은 더욱 견고해지게 되었다. 이 외에도 좋은 소식도 있었다. "두 사람은 이번에 절정 초입에 오른 것을 축하한다." 열흘이라는 기간 동안 개인 연공에도 소홀하지 않았던 고왕흘과 호상화가 드디어 절정 초입의 경지에 오르게 되었다. "감사합니다. 주군." 스스로도 절정의 경지를 밟은 것이 흡족한 호상화였다. 호상화는 여자 생도로서 적풍도종의 오지란 다음으로 두 번째로 절정의 초입에 이르렀기에 큰 성과라 할 수 있었다. "아직 부족합니다. 주군의 제 일검으로서 누가 되지 않도록 더욱 갈고 닦겠습니다." 여전히 강자들이 많았기에 고왕흘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같은 고왕홀의 발언은 생도들에게 예상지 못한 묘한 경쟁심을 불러일으켰다. '제 일검?' '일검이라.....' 천여운의 수하가 늘어나면서 그들 간에도 서서히 서열 관계가 생겨나고 있었다. 현재 생도들이 알고 있는 천여운의 수하들 중에 가장 신뢰를 받는 자들은 허봉이나 고왕흘, 자우민, 오봉, 마칠 등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친분 관계만으로 서열을 나누는 것은 강자존의 마교에서 어폐가 있었다. 백기의 조원 중 한 사람인 이찬이 말했다. "딴죽을 걸려는 것은 아닙니다만. 일검이라는 칭호는 저희 백기 조장이나 문규에게 더 맞는 칭호 같습니다만." "그건 그렇습니다. 무위로 본다면 두 분이 더 맞지 않습니까?" 백기의 조원으로 있던 생도들이 호응하자, 이번에는 고왕흘의 조원들이 반박했다. "고왕흘 조장의 실력이면 충분히 일검이라 부를 만한데, 그게 딴죽이 아니면 뭡니까?" "호칭을 칭하고 싶으면 이검이든 삼검이라 하면 되죠." "무슨 소리야? 이검, 삼검이라니?" -웅성웅성! 고왕흘 조원들의 반박을 시작으로 생도들 간에 갑론을박이 일어났다. 덕분에 이에 거론되는 조장급의 생도들은 난처함을 금치 못했다. 아무래도 인원이 많아졌고 각자가 생각하는 바가 다르다보니, 서열 관계를 민감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때 천여운의 귀로 채택겸의 전음이 들려왔다. [수하들이 많으시기에 이럴 때가 올 거라 생각했지만 조금 빨라졌군요. 주군 아무래도 이참에 서열 관계를 확실히 정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 [충성심도 중요하지만 본교는 힘이 곧 서열입니다. 그 점을 유의하셔야 합니다.] 채택겸의 의견에 천여운 또한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인원이 늘어나면서 그 안에서 조금씩 조짐이 보였는데, 이번에 확실하게 체계를 정리하는 것이 옳아 보였다. 조직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확실한 서열 체계는 필수였다. '어떻게 해야 할까?' 강자존인 마교의 법도대로라면 서로가 겨뤄서 힘의 서열을 다투는 것이 맞지만, 삼 단계 시험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 다퉈서 다치기라도 한다면 손해였다. 한참을 고민하던 천여운이 결정을 내렸다. "모두 조용히 해라." 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주군인 천여운이 입을 열자 떠들썩하게 갑론을박을 하던 생도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일흔한 명의 생도들에게 있어서 천여운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모두가 조용해지자 천여운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너희들의 의견은 잘 알았다. 이번 기회에 서열 체계를 확실하게 정하려고 한다. 동의하나?" "넵!!!" 생도들도 그것을 바라는지 동시에 답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어떤 방식으로 서열 체계를 나누려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두드러지는 조장 급의 실력자들이 있기에 그들 중에 순서가 판가름 날 것이다. "여섯 명이다." '여섯 명?' 여섯 명이라는 말에 생도들의 표정이 의아해졌다. 그렇다면 상위 서열을 여섯 명으로 한정 짓겠다는 말로 들렸다. "상위 여섯 명의 실력자를 뽑겠다. 그들끼리는 따로 서열 관계를 두지 않고 여섯 수장, 아니 육검(六劍)이라는 칭호를 내리겠다." "주군! 육검으로 나누시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우소정이 손을 들어서 물었다. 다른 생도들 역시도 궁금했는지 귀를 기울였다. "앞으로 마도관을 졸업하게 된다면 우리는 여섯 종파를 상대해야 한다. 나는 그 선봉에 서서 그들과 맞설 수 있는 여섯 검을 원한다." 그 말에 모두가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모여 있는 모든 생도들은 천여운이 소교주 쟁탈전뿐 만이 아니라, 기존의 근간이었던 여섯 종파를 타파하고 새로운 마교를 만들려고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또 다른 반복이 되지 않을까?' 고왕흘을 비롯한 몇 명이 우려가 되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 이뤄지진 않았지만 만약에 여섯 종파를 타파하고, 그 위에 육검이 자리하게 된다면 결국 새로운 반복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천여운의 말에 그 우려는 사라졌다. "지금 육검이 되었다고 해서 계속 육검으로 남는 것이 아니다. 한 해에 한 번씩 경쟁을 통해 가장 뛰어난 자들에게 육검의 칭호를 줄 것이다." "오오오!" 이 말에 모든 생도들의 호응이 달라졌다. 지금 당장의 서열이 후에도 고정적이지 않다는 말이었다. 결국 철저하게 강자존의 법칙대로 서열을 정하겠다는 소리였기에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기회가 주어지게 된다. "이것은 내가 정점에 서게 되어서도 계속 지속될 것이다." '아아아!' 고왕흘이나 백기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단순히 일흔두 명이 경쟁하게 되겠지만, 천여운이 정말로 쟁탈전에 승리하고 마교의 정점인 교주가 되어서 이 방식을 취하게 된다면 지금과 같이 여섯 종파가 기득권을 차지하는 폐해가 사라지게 될 것이다. 더군다나 이렇게 경쟁을 하게 된다면 지금보다도 더욱 뛰어난 무인들과 종파가 탄생할 확률이 높아진다. "하지만 지금은 삼 단계 시험을 앞두고 있기에 육검을 뽑는 방식을 조금 간소화하겠다." "넵!!!" 지금 모두가 겨루기에는 시간도 오래 걸렸고, 확실하게 실력 차가 두드러졌기에 간소화하는 편이 나았다. "절정 초입 이상의 무위를 지닌 자들만 남고 모두 뒤로 물러나라." -우르르! 천여운의 명령에 생도들이 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근처에 남아있는 생도는 고왕흘, 백기, 문규, 호상화, 채택겸, 우소정 뿐이었다. 정확하게 여섯 명이 절정의 경지에 이른 고수들이었기에 특별히 경쟁을 할 필요가 없었다. "모두 이 여섯이 육검이 되는데 불만이 없겠지?" "넵!!!" 확실한 격차가 있었기에 누구 하나 불만은 없었다. 오히려 공진호나 임유환, 자우민, 오종 등과 같이 재능이 뛰어난 생도들은 빨리 강해져서 자신이 저 자리를 차지해야겠다는 목표 의식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럼 일검은...." 그때 백기가 손을 들어서 말했다. "잠깐. 건의할 게 있다." "뭐지?" "이왕 육검을 뽑기로 했다면 그 중에서도 확실하게 서열은 정해야 한다고 본다." 백기의 말에 고왕흘이나 호상화, 우소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육검 안에 둘어서 좋기는 했지만, 이왕 정한다면 확실하게 실력 차에 따라 일검부터 육검의 칭호를 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엄밀히 말한다면 서열을 가르기보다는 자존심의 문제이기도 했다. 이왕 받는 칭호라면 일(一)이라는 칭호를 받고 싶지 않은 이가 누가 있겠는가. '좋아해야 하는 건가.' 수하들끼리 서로 일검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을 하겠다고 하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천여운이 빙그레 웃었다. 어떤 이유를 가졌든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었기에 허락했다. 주군의 허락이 떨어졌으니, 이들끼리 겨뤄야 했다. "아! 저는 아직 낫지 않아서 기권할게요." 문규가 자진해서 겨루기를 포기하면서 자연스럽게 육검(六劍)이 되었다. 정작 이 중에서 제일 높은 경지였던 그녀가 포기하자, 백기가 안타까운지 입맛을 다셨다. 일반 생도들 중에서 제일 겨뤄보고 싶은 사람이 문규였기 때문이었다. "부상은 입히지 말도록." 방식은 다섯 명이 동시에 겨루기로 했다. 부상을 우려한 천여운은 사전에 그들이 내공을 삼성 이상 끌어올리지 않게 당부했다. "그럼 시작해볼까?" 고왕흘이 의욕이 넘쳐서 상의를 벗어 던지고 우람한 근육을 앞세워 나섰다. 전의를 높이기 위한 방법이었지만 그 선택은 옳다고 할 수 없었다. 덕분에 경계심이 가득해진 나머지 호상화와 우소정이 동시에 고왕흘에게 먼저 선제공격을 했기 때문이었다. "하하하하하핫! 좋군!" "으윽! 이 근육 곰탱이가!" 합공을 당하면서도 호탕함을 잃지 않는 고왕흘이었다. -파파파팍! 그렇게 다섯 명은 이 각 여 시간 동안 치열하게 겨뤘다. 내공에 제한이 걸려있고 맨손으로 대결을 펼치는 것이었기에 서로 입장은 동등했다. 제일 먼저 떨어져 나간 것은 우소정이었다. "으으으, 이게 무슨 망신이야." 바닥에 누워있는 우소정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설마 여자 생도인 호상화에게 질 거라고 생각도 못했던 그였다. 파부종(破斧宗) 출신인 그녀는 거대한 도끼를 다루는 부법을 익혔는데, 덕분에 어지간한 남자 생도들보다도 덩치가 컸고 외공이 뛰어났다. 여자라고 얕보고 호상화를 먼저 쓰러뜨리려 했는데, 도리어 어깨가 탈골될 뻔했다. -퍼퍽! "끄억!" 두 번째로 바닥에 누운 것은 채택겸이었다. 운이 없게도 백기와 고왕흘이 겨루는 중간에 끼어들다가, 동시에 날아오는 발차기와 일 권에 복부를 가격당해 쓰러지고 말았다. "하아....." 반 각이 지났을 무렵, 호상화가 포기를 하고 주저앉았다. 그녀도 체력 면에서 누구보다 앞선다고 자부했지만 백기나 고왕흘은 정말 발군의 수준이었다. -파파파파팍! 유일하게 적수공권의 고수였던 두 사람의 대결은 격렬했다. 은근히 서로 경쟁 관계였던지라 자존심이 달려있어서 더욱 포기를 하지 못했다. 백기와 고왕흘의 조원들이 각자의 조장들을 응원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경지의 차는 무시할 수 없었다. -파파파팍! 백기의 발차기가 수많은 잔영을 만들어내며 거구의 고왕흘을 쓰러뜨렸다. 전신의 근육에 힘을 주고 견디려 했지만 공력에서 밀렸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쓰러진 고왕흘이 누운 상태로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말했다. "하아...하아... 졌네." "와아아아아아!!! 백기 조장이 이겼다!" 앉아서 응원을 하며 지켜보던 백기의 조원이 일어나서 환호성을 질렀다. 반면 패배한 고왕흘의 조원들은 침체되고 말았다. "조장!"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겨룬 조장을 위로하기 위해 나가서 그를 부축했다. 긴 겨룸 끝에 육검의 서열이 정해졌다. 제 일검은 백기. 제 이검은 고왕흘. 제 삼검은 호상화. 제 사검은 채택겸. 제 오검은 우소정. 제 육검은 운규. 이렇게 여섯 종파를 상대하기 위한 천여운의 날카로운 여섯 검이 탄생했다. 이들 여섯 명은 육검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수련을 소홀히 해선 안 될 것이다. 그들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하는 생도들이 많았다. '......구색이 갖춰지고 있다.' 천여운은 산하의 수하들을 바라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무 것도 없이 빈손으로 마도관에 들어왔던 천여운이 갖춘 세력은 바깥에 있는 생도들의 종파까지 생각한다면 절대로 얕볼 수 없을 만큼 성장한 셈이었다. 하지만 천여운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본교의 누구도 나를 넘볼 수 없을 만큼 압도적으로 강해져야 한다.' < 24장 육검(六劍) (2) > 끝 < 25장 위험한 삼 단계 시험(1) > 삼 단계 시험을 위해 생도들에게 주어진 스무여드레라는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그리 길지 않은 기간 동안에 많은 일들이 있었다. 소교주 후보자였던 독마종의 천종섬이 조기에 퇴소하는 사건부터 천유찬이 노란 명찰 쟁탈전에서 패배하여 팔이 잘리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 외에도 작은 사건, 사고들이 있었지만 굵직한 사건의 중심에는 천여운과 관련이 없는 것들이 없었다. 시험이 실시되기 반 시진을 남긴 진시(辰時) 중반 무렵. 관주의 집무실에 손님이 한 명 와 있었다. 독특한 문양의 가면을 쓴 그는 세 호법의 우두머리인 대호법 명왕 마라겸이었다. 마도관주인 좌호법 이화명의 손에서는 서류가 들려있었는데, 그것을 넘기는 내내 표정이 좋지 않았다. 서류를 전부 훑어본 그가 집무실 책상에 그것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정말 인가(認可)가 난 사항입니까?" "그저께 수뇌부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이고, 교주님께서도 어제 최종 인가하셨다." 교주의 인가마저 떨어졌다면 선택권은 없었다. "변경된 사항이 분명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나흘 전도 아니고 시험 날에 통보되는 것은 조금 그렇군요." "......" 필요한 말 이외에는 과묵한 대호법 마라겸이었다. 마라겸이 넘겨준 서류에는 삼 단계 시험 방식에 대한 일부 변경 사항이 적혀 있었다. '시험 방식이 너무 안일하다?' 변경 사유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매 회마다 진행되는 마도관의 시험은 그 회의 마도관주와 무공 교두들에 의해서 방식이 정해진다. 물론 입관날에 치러지는 일차 시험은 예외다. 이렇게 정해진 시험 방식은 사전에 정보가 누설되는 것을 막기 위해, 생도들이 입관하고 나서 수뇌부 회의를 통해 보고된다. 수뇌부 회의를 통해 장로들이 일차 인가, 교주의 이차 인가를 통해 시험 방식이 최종 결정 나는데, 시험 방식에 문제가 있을 경우 변경 요청이 되곤 한다. 그런데 시험 당일에 변경 요청이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정도가 지나치군.' 이해할 수가 없었다. 최근 여섯 종파를 억누르는 정책을 펴고 있는 교주가 이것을 인가한 것이 이상했다. 납득하지 못하는 이화명에게 마라겸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넘겼다. 그것은 서찰이었다. 이화명이 의아한 눈빛으로 서찰을 펴서 읽더니, 점차 표정이 바뀌었다. 서찰을 전부 읽은 이화명이 그것에 공력을 가하자, 삼매진화(드昧眞火)가 일어나 재가 되어 사라져버렸다. 불에 타서 재가 되어버린 곳을 향해 이화명이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명을 받듭니다." 그렇게 반시진의 시간이 흘렀다. 사시(巳時) 무렵이 되자, 숙소에 있던 생도들이 연무장으로 모여들었다. 스물여드레 동안 새롭게 편성된 조에 익숙 되었는지, 통제를 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자신의 조원들끼리 오와 열을 맞춰서 섰다. 천여운의 조원 열한 명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그 동안 그의 지도 하에 고된 훈련 끝에 검마섬진을 완벽하게 습득했기 때문이었다. 산하의 다른 조에 속한 수하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의외군.' 천여운의 시선은 좌측의 세 번째 조로 향하고 있었다. 세 번째에 조의 조장 바로 뒤에는 의외의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바로 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유찬이었다. 오른팔 소매가 횡한 그는 조장이 아닌, 타 조의 조원으로 시험에 참여하게 되었다. 보통 생도들이었다면 포기했을 상황이었는데, 자존심을 버리고 다른 조에 조원으로 들어갈 정도라면 대단한 의지라고 할 수 있었다. '수작이 뻔해 보이지만.' 세 번째 조의 조원들의 대다수가 천유찬의 수하들이었다. 어찌 보면 발상의 전환이라고 볼 수 있었다. 노란 명찰을 얻을 수가 없으니, 조장 한 명을 족쳐서 그 조원들을 자신의 사람으로 전부 갈아엎었으니 말이다. '......팔로 끝낼 녀석이 아니군.' 팔을 자르는 것만으로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 천여운이었다. 생도들이 모인지 벌써 일각의 시간이 지났는데, 생각외로 대기 시간이 길어졌다. 평소라면 생도들보다도 먼저 와서 단상 앞에 일 열로 서있던 무공 교두들도 아직까지 마도관의 본관에서 나오지 않았다. -웅성웅성! "아! 오신다!" 그때 마도관의 본관 건물에서 좌호법 이화명을 필두로 무공 교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화명은 평소처럼 단상 위의 수좌에 앉았다. 그런데 무공 교두들은 얼굴을 검은 천으로 가리고, 전신을 밧줄로 압박하고 있는 자들을 두 명씩 붙어서 데리고 나왔다. 보기만 해도 심하게 구속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똑바로 걸어라!" "그 쪽이 아니잖아!" 무공 교두들이 구속된 자들을 다루는 태도는 마치 죄수를 대하는 것 같았다. '뭐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모든 생도들이 침묵한 채,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구속되어 있는 자들을 단상 앞으로 끌고 왔는데 그 숫자가 정확하게 열여섯 명이었다. 준비가 되길 기다리던 좌호법 이화명이 수좌에 일어나 입을 열었다. "스무여드레 동안 삼 단계 시험에 대한 준비는 잘 되었나?" "마도!!!" 생도들이 큰 목소리로 마도관의 구호를 외쳤다. 힘찬 목소리와는 다르게 얼굴들은 긴장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먼저 시험을 치르기 전에 한 가지 변경 사항을 공지하려 한다. -웅성웅성! 변경 사항이라는 말에 생도들이 불안해졌는지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아무래도 그 변경 사항이라는 것이 앞에 구속되어 있는 자들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원래의 시험은 무공 교두들을 검마섬진으로 쓰러뜨리는 것이었다. 하나, 이 방식을 조금 수정하려 한다." -딱! 좌호법 이화명이 손가락을 튕기자, 무공 교두들이 커다란 목함 세 개를 가져왔다. 연무장으로 가져온 목함들을 열어젖히자 그 안에서는 수많은 검집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바로 진검이었다. '진검?' '목검으로 시험이 진행되는 게 아니었나?’ 의아해하는 생도들을 향해 이화명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 "시험 방식에 큰 차이는 없다. 검마섬진으로 적을 쓰러뜨리면 된다." '적?' 적이라는 말에 천여운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 다음에 나오는 이화명의 말은 모든 생도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단, 적을 제압하는 것이 아니다. 너희들은 검마섬진으로 적을 죽여야 한다." -웅성웅성! 속삭이 던 소리가 일순간에 시끌벅적하게 소란스러워졌다. 갑자기 적을 죽이라는 말에 당황한 탓이었다. 장내가 시끄러워지자 이화명이 목소리에 공력을 실어서 고함을 쳤다. "조용!!!" "윽!" 평소와 다르게 진중한 표정의 일갈에 생도들이 일제히 정숙해졌다. 이화명이 주위를 매서운 눈빛으로 둘러보다가 다시 시험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단상 앞에 구속되어 있는 자들이 보이나?" "마도!!!" "그들은 정파 무림맹과 사파 연맹의 죄수들이다." 뜻밖의 말에 모든 생도들이 눈이 커졌다. 구속되어 있기에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설마 정말 죄수들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엄밀히 표현한다면 포로라고 하는 것이 맞았지만, 마교에 있어서 그들은 죄수였다. "이번 시험의 통과기준은 검마섬진으로 저들을 죽이는 것이다. 너희들에게 있어서 첫 실전이다." 변경된 시험 방식은 연습 따위가 아닌 실전이었다. 실제로 적을 죽여야만 하는 다소 과감한 시험 방식으로 바뀌었다. 대부분의 생도들은 십만대산 내에서만 지내왔기에 한 번도 정파, 사파의 적들을 본 적이 없었기에 기분이 묘해질 수밖에 없었다. "적들은 너희를 쓰러뜨리면 사면되어 풀려날 것이기에 필사적으로 덤빌 것이다. 어설픈 잔정을 베풀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이 죽게 될 것이다." 이화명의 경고에 모든 생도들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번 시험을 치르면서 누구 하나라도 실수를 하거나 잔정을 베풀다가는 목숨을 잃을 지도 몰랐다. 물론 여기서 생도들에게 밝히진 않았지만,서른여섯 명의 무공 교두들이 눈에 불을 켜고 문제가 생길 경우 개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같은 점을 밝히게 된다면 실전이라는 말이 무색해지기에 알리지 않았다. "죽을 수도 있다니...으으으." 생각만 하더라도 속이 부대끼는지 진국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이것은 비단 진국뿐만이 아니었다. 단순히 무공 교두를 상대한다는 것에서 적을 죽이는 것으로 바뀌었지만 그 중압감이 확연하게 달라졌다. 시험을 통과하느냐 탈락하느냐의 긴장감이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자! 이제 시험을 진행하도록 하겠다. 먼저 칠백 번 생도인 사마착의 조부터 시작한다. 앞으로 나와서 진검을 지급받도록." "마도!!!" 가장 먼저 이 최악의 시험을 치르게 되는 것은 사마착의 조였다. 처음에는 가장 먼저 조장을 등록했기에 기분이 좋았던 사마착과 그 조원들의 표정은 어느새 어두워져 있었다. 최악을 먼저 겪게 되는 것에 모든 생도들이 안타깝게 생각했다.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는 말이 있지만 이 시험은 오히려 늦게 치러질수록 나을지도 몰랐다. -탁! "앞으로 나가라!" "큭!" 무공 교두 두 명이 구속되어 있는 자들 중 한 명을 대연무장의 한 가운데로 끌고 왔다. 그렇게 끌고 온 자의 검은 천을 벗기자, 수염이 덥수룩하고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못했는지 새하얗고 퀭한 얼굴이 드러났다. 얼굴 군데군데 멍 자국들이 고문의 흔적들로 보였다. "하아... 하아.." 덥수룩한 수염의 남자는 생도들 못지않게 긴장한 얼굴이었다. 그 역시도 사전에 이 시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기에 어떻게 하면 되는지 숙지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수많은 생도들 앞에 서자 난처함을 금치 못했다. '아직 소년들이지 않나?' 검진을 꺾으면 풀어준다는 말에 지원했었는데, 엣된 생도들의 모습에 당혹스러웠다. 설마 자신이 상대해야 할 적이 소년들이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 남자의 모습에 그를 구속해온 무공 교두들이 속으로 웃었다. '이 조는 운이 좋군. 첫 실전 상대가 어리숙한 정파 놈이라서.' 우려할 만큼의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정파인들 중에는 간혹 정의니 협의를 따진다고 잔정에 약해지는 녀석들이 있었다. 이 자의 눈빛을 보니 그런 부류인 듯 했다. -타타타탁! 무공 교두들이 구속되어있던 밧줄을 풀어주고 혈도를 점했던 것을 풀자, 내공이 돌기 시작하며 수염 남자의 눈빛에 정기가 돌았다. 사마착과 그 조원들이 그를 원진으로 둘러싸고 준비가 되자, 좌호법 이화명이 외쳤다. "시작하라!" -착! 명이 떨어지자 열두 명의 생도들이 동시에 칠마검의 기수식을 취했다. '아아...' 소년들이라는 생각에 난처해하던 수염의 남자도 제대로 된 검진의 형태에 눈빛이 진지해졌다. 어리다고 방심했다가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우웅! 수염의 남자의 진검에 새하얀 빛의 선명한 검기가 서렸다. 그는 완숙한 절정의 경지에 오른 고수였다. 검진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열두 명의 생도들도 긴장한 얼굴이 되었다. 여기서 유일하게 절정의 고수는 사마착이었는데, 그 역시도 초입에 불과한 실력이었다. 누구 한 명이라도 검진을 펼치는데 실수하게 된다면 죽을 수도 있다. '일단 해보자!' 사마착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외쳤다. "후우 후우. 검삼진(劍三陣) 개(開)!" 그의 외침에 열두 명의 생도들이 일제히 수염의 남자를 향해 검식을 펼쳤다. 마주보는 생도끼리 같은 검식을 펼치고 있었는데, 두 쌍이면서 여섯 개의 검식이 맞물리면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헛!" 평범했던 칠마검이 마치 한 명의 절정의 고수가 검초를 펼치는 것 같은 위력을 보였다. '제대로 익혔구나.' 그 모습에 천여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칠마검에 적힌 비급서에 적혀있는 검마섬진에 대한 설명이 매우 단순했기에 해석을 잘못하면 그저 같은 초식으로 공격하라는 것으로 오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사마착과 그 조원들이 펼치는 것은 제대로 된 검마섬진이었다. -채채채채챙! 검진의 위력에 놀랐지만 수염의 남자는 재빨리 그들의 검을 막아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검식에 정신이 없지만, 실전 경험이 많았기에 대응하지 못할 것은 없었다. -촥촥! "크윽!" 다만 오랫동안 구속되어 있었기에 근육이 굳어서 초식을 펼치는 동작이 원활하지 않았기에 검식을 완벽하게 막아내지 못했다. 어깨와 가슴을 베인 수염의 남자가 비틀거리며 신형이 흔들렸다. "검이진(劍二陣) 개(開)!" 이것을 놓칠 리가 없는 사마착이 조원들을 향해 외쳤다. 그들이 연달아 검이진의 검식을 펼쳤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조급하게 검진을 전환하다 보니, 생도 몇 명이 부딪치면서 진형이 흔들렸다. "아, 안 돼!" '이때다!' 턱수염의 남자가 그것을 놓치지 않고, 한 생도의 가슴에 검을 박아 넣으려고 했다. 생도가 움찔하며 눈을 감아버리자 턱수염의 남자가 순간 망설이고 말았다. '크으!' 십육 세에 불과한 엣된 생도의 얼굴에 마음이 약해진 탓이었다. 그 작은 망설임이 그에게 불행을 가져왔다. -푸푸푸푸푹! "끄아아악!" 그의 등으로 생도들의 검이 사정없이 찔러 들어왔다. 날카로운 검이 심장을 비롯해 장기를 관통하면서, 수염의 남자는 입에 피를 흘리며 억울한 눈빛으로 바닥에 쓰러졌다. -털썩! 첫 살인의 감각에 몇 명의 생도들은 눈이 풀려서 바닥에 주저 앉았다. 조장인 사마착은 바닥에 쓰러져 죽어있는 수염의 남자를 바라보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빌어먹을! 이러면 죽이고도 찝찝하잖아.' 그의 기분이 어떻든 생도들은 첫 번째 조의 승리에 환호성을 질렀다. "와아아아아아!!!" 긴장하고 지켜본 것과 다르게 생각보다 쉽게 결판난 것에 용기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옆에서 참관하고 있던 무공 교두 두 명이 바닥에 쓰러진 시신을 옮기러 왔다. "아주 운이 좋았구나." 무공 교두의 말에 사마착과 그 조원들이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의 말대로 만약 수염의 남자가 비정한 적이었다면 오히려 자신들이 죽었을 지도 몰랐다. 단상의 수좌에 앉아있던 좌호법 이화명이 일어나서 큰 소리로 결과를 발표했다. "사마착 조의 승리를 축하한다." 과정이 어찌 되었든 시험을 통과했다는 생각에 위안을 받은 생도들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조장 칠백 번, 구십삼 번, 백사십칠 번, 이백십 칠 번, 팔백삼 번, 구백이십이 번, 구백팔십삼 번 생도. 이상 일곱 명은 삼 단계 시험을 통과했음을 공표한다." "이, 일곱 명?" "그....그게 무슨?" 호명하는 생도들만 통과했다는 말에 번호가 불리지 않은 다섯 명의 생도들이 당황스러운 나머지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들은 검진을 펼치면서 발이 꼬여서 부딪쳤던 생도들이었다. -웅성웅성! 실수가 있기는 했지만 적을 죽였기에 당연히 조원 모두가 시험에 통과했으리라 여겼던 다른 생도들 역시도 이런 결과 공표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개별 시험이라는 말이 이런 뜻이었나.' 천여운이 인상을 찡그렸다. 검진을 통해서 한 조로 시험을 치르지만 그 결과는 개인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누구 하나라도 실수를 하게 된다면 조와 상관없이 탈락으로 이어진다는 의미였다. 목숨이 걸려있기에 긴장할 수밖에 없는 시험에 있어 새로운 난관에 봉착한 생도들이었다. < 25장 위험한 삼 단계 시험(1) > 끝 < 25장 위험한 삼 단계 시험(2) > 첫 번째 조인 사마착의 조가 시험을 지르는 내내 좌호법 이화명의 눈은 덥수룩한 수염의 정파인에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시험 변경 요청서의 서류에 적혀 있는 대로 삼 년 이상 수감 되어 있어서 그런지 완전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생도들이 크게 방심만 하지 않는다면 검마섬진으로 충분히 죽일 수 있는 수준이었다. '아직까지는 별다른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노림수는 역시....' 이화명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천여운에게로 향했다. 여섯 종파 중에서 두 종파의 소교주 후보가 마도관에서 조기에 탈락했다. 팔이 잘리고 단전이 파괴가 되면서 소교주의 자리는 영원히 물 건너 간 셈이었다. '사 년이 길게 느껴지겠지.' 오랜 기간 동안 공을 들였는데, 일순간에 무너졌기 때문에 그들로서는 천여운이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스러울 것이다. 마도관의 규칙을 무시하기에는 교주의 압박이 갈수록 강해지니, 수뇌부 회의를 통해서 공개적으로 시험 방식을 바꾸는 식으로 뭔가 수작을 부렸다. '그게 무엇이든 이번 일은 그대들을 자박(自縛)하는 최악의 한 수가 될 것이다.' 다음 시험을 치르는 열두 명의 생도들이 대연무장의 한가운데로 나왔다. "똑바로 걸어라." "흥!" 무공 교두 두 명이 구속되어 있는 죄수를 강제로 끌고 왔다. 구속하고 있는 밧줄을 풀고, 검은 천을 벗기자 앞서 죽음을 당했던 정파인처럼 수염이 덥수룩하고 흉터투성이의 얼굴이 드러났다. "빌어먹을 새끼들." 거친 욕설을 내뱉는 그 자는 누가 보아도 정파인은 아니었다. 무공 교두들이 두 번째로 시험을 치르는 조를 바라보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는 상대가 좋지 않았다. '이 녀석들은 운이 없군. 사파 녀석이라.' 정파와 사파의 고수들은 근본적으로 성향이 달랐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독사처럼 상대를 해하려 드는 것이 사파인이었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인정사정을 봐주지 않고 악독하게 덤벼들 것이다. "시작하라!" -착! 좌호법 이화명의 외침이 들리자, 열두 명의 생도들이 원진을 둘러싼 상태에서 칠마검의 기수식을 취했다. 그들의 조장은 복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금이었다. '칫. 더럽게 운이 없군.' 천무금이 속으로 투덜거렸다. 아까 전에 어수룩해 보였던 정파인과는 다르게 거칠고 호전적인 분위기의 사파인은 매우 위험하게 느껴졌다. 누구 한 명이라도 실수하면 많은 피를 보게 될 것이다. "애송이들 주제에 누굴 둘러싸는 것이냐!" 그들이 미처 제대로 된 검진을 펼치기도 전에 사파의 중년인이 선공을 취했다. 검진에서 가장 취약해 보이는 유일한 여자 생도를 향해 악랄한 검초를 펼쳤다. "이 자식이!" "검오진(劍五陣) 개(開)!" 천무금이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조원들에게 외쳤다. 칠마검의 방어초식인 검오를 바탕으로 한 검오진은 마찬가지로 방어를 위한 검진이었다. 그 견고함이 칠마검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촤촤촤촤촥! '그저 꼬맹이들은 아니라 이거지.' 흉터로 가득한 입 꼬리가 올라갔다. 열두 생도가 동시에 펼치는 검식들이 만들어낸 검망에 사파의 중년인이 원래 노렸던 여자 생도에서 변초를 써서 다른 생도를 노렸다. -푹! "크윽!" 방심했던 생도가 갑작스러운 변초에 왼쪽 팔이 찔렸다. 검에 찔린 생도는 고통 이전에 목숨을 잃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뒷걸음을 치려했다. 이에 천무금이 다급하게 외쳤다. "십 보 후퇴!" 조원들이 일제히 보법을 펼쳐 십 보 뒤로 물러났다. 혼자서 이탈해서 검진이 깨진다면 본인뿐만이 아니라 조원들 모두가 위험해진다. 올바른 판단이라 할 수 있었다. [정신 차려! 새끼야. 검진이 무너지면 다 죽어!] 천무금의 다그침이 실린 전음에 검에 찔려서 두려워하던 생도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목숨에 대한 위협은 정신적으로 미숙한 생도들이 견디기 힘든 부분이었다. '킥, 저 놈이 활로구나.' 중년의 사파인이 다시 한 번 검에 찔린 생도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한 번 두려움을 가진 적이야말로 검진에 있어서 약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히익!" 살기를 풀풀 풍기며 사파인이 달려들자, 당황한 생도가 칠마검의 방어 검초인 검오를 펼쳐 그의 공격을 막아냈다. -채채채챙! "으으으윽!" 이제 막 일류고수에 들어선 생도가 절정의 고수가 펼치는 검초를 제대로 막을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속수무책으로 밀리자 천무금이 사파의 중년인을 향해 달려 나가며 소리쳤다. "미친! 정신 차리라고 했잖아! 검삼진(劍三陣) 개(開)!" "검삼진!!!" 생도들이 일제히 사파인을 향해 검삼의 검식을 펼쳤다. 사방에서 검식이 쇄도해오는데도, 사파의 중년인은 아랑곳 하지 않고 검을 쥐고 있는 생도의 오른손목을 베어냈다. -촤악! "끄아아아악!" 그와 동시에 사파의 중년인이 재빨리 몸을 회전하며 검망을 만들어내, 자신에게로 쇄도해오는 검마섬진의 검식들을 막아냈다. -채채채채챙! 열두 명이 펼쳐야 하는 검진에 한 명이 빠졌으니 당연히 위력이 급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사파의 중년인의 눈에 빈틈이 포착되었다. '역시 애송이들이군.' 발견해낸 유일한 빈틈으로 사파의 중년인이 일검을 뻗었다. 맞물리는 검식들의 사이로 검이 가로지르자, 검진을 펼치던 몇 명의 생도들이 공력을 이기지 못하고 검을 놓치고 말았다. -휙휙휙휙! "크하하하핫. 깼다! 검진을 깼다고!" 허공으로 치솟는 검을 보며 생도들이 절망에 빠졌다. 바로 그때 사파 중년인의 등 뒤에 흰 빛의 수기(手氣)가 실린 일권이 강타했다. -퍽! "크헉!" 검진을 파했다는 생각에 방심하고 있던 사파의 중년인이 피를 토하며 앞으로 밀려났다. 일권을 날린 자는 바로 천무금이었다. 목숨에 위협을 느낀 천무금은 복마종의 절기인 복마공권의 초식을 펼친 것이었다. 이를 놓치지 않고 천무금이 외쳤다. "이때다! 검일진(劍一陣) 개(開)!" 검을 놓치지 않은 다섯 명의 생도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칠마검의 일초식의 검식을 펼쳤다. 다섯 명이 펼치는 검식이었기에 위력이 모자랐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푸푸푸푸푹! "끄아아아악!" 여섯 개의 검이 사파의 중년인의 몸을 관통했다. 검진을 깼다고 좋아했던 그는 어이가 없었는지, 눈을 부릅 뜬 채로 죽음을 맞고 말았다. 고전을 면치 못하고 겨우 적을 죽인 천무금 조의 시험을 관전하던 생도들이 입을 열지 못했다. 시험이 쉬울 지도 모른다는 생각 따윈 사라진지 오래였다. -탁! 근처에서 대기 중이었던 무공 교두들이 검병을 쥐고 있던 손을 떼었다. 위험한 순간에 나서려고 했는데 다행히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결과를 발표하겠다." 좌호법 이화명이 통과한 생도들의 번호를 불렀다. 천무금의 조에서 통과한 생도는 그를 포함해 여섯 명뿐이었다. 그의 충실한 심복이라 할 수 있는 팔십 번 생도인 자현이 떨어지면서 전력의 반을 상실하고 말았다. "빌어먹을!" 분했지만 부정할 수 없는 결과였다. 이렇게 두 번째 조의 시험이 끝나면서 생도들에게 바람이 생겨났다. 그것은 자신들이 상대하게 될 죄수가 사마착의 조가 겨뤘던 것처럼 어수룩한 정파인이 걸리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바람에 불과했다. 정파인이라고 해서 모두가 어수룩한 것은 아니었다. 세 번째 조에서는 바람대로 정파의 고수와 싸우게 되었으나, 그는 손에 사정을 두는 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살아남기 위해 악착같이 덤벼서 생도들의 대다수에게 중상 내지 부상을 입혔다. 덕분에 고작 세 명만 합격하는 사태마저 벌어졌다. 그 후로 연달아서 다섯 조가 죄수들과 목숨을 건 시험을 치르면서, 유일하게 조원 전체가 통과한 조는 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연 조뿐이었다. "훌륭하다! 완벽한 검마섬진이었다." 완벽한 검마섬진을 펼쳐낸 천무연의 조는 고작 두 번의 검진만으로 누구 하나 다치지 않고, 적을 죽였기에 오늘 처음으로 좌호법 이화명의 칭찬까지 들었다. '이제 슬슬 우리 차례인가.' 방금 전에 결과가 났던 조의 조장은 천여운의 바로 앞에 등록했던 생도였다. 등록했던 순대로 진행이 되었다면 분명 그 다음 차례가 틀림 없었다. 예상대로 이화명이 그들의 조를 호명했다. "칠 번 생도. 천여운 조는 앞으로 나와라." "마도!!!" 천여운의 조원들이 긴장된 얼굴로 대연무장의 한가운데로 나올 때, 아직까지 대기 중이던 검은 천에 뒤집혀 있는 죄수들의 몸이 미묘하게 떨려왔다. '으으, 부디 아무 일도 없기를.' 진국이 떨리는 눈빛으로 이곳으로 끌려오는 죄수를 바라보았다. 아직까지 죽은 생도들은 없었지만 중상자만 서른 명이 넘게 속출했다. 당연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제발 걸려라. 정파...정파...정파...정파." 허봉은 주문을 외우듯이 무언가를 중얼거렸는데, 상대할 죄수가 정파이길 바랬다. 지금까지 시험을 치른 조를 유심히 살펴본 결과, 정파의 죄수들은 손에 사정을 두진 않더라도 적어도 생도들의 목숨까진 위협하지 않았다. 반면 사파인들과 겨룬 조에서는 신체 부위가 잘려나간 생도만 여덟 명이나 되었다. "밧줄을 풀 테니, 가만히 있어라." '호진창 교두?' 원진의 한가운데로 죄수를 데리고 온 자는 선임 무공 교두인 호진창이었다. 보통은 관주의 근처에서 보좌하면서 다른 교두들을 지휘하던 그가 직접 나선 것에 천여운은 의아하게 여겼다. -착! 죄수의 머리에 뒤집고 있던 검은 천이 벗겨졌다. 그와 함께 긴 턱수염에 눈매가 사나우면서도 부리부리한 중년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혈도를 풀지 않았는데도 풍겨지는 사납고 흉흉한 기세는 그가 절대로 정파의 인물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었다. '......젠장.' 허봉의 인상이 구겨졌다. 그렇게 바라지 않았던 사파의 고수인 듯 했다. 시험을 관전하는 생도들도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흠." 턱수염의 중년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자신을 둘러싼 천여운의 조원들을 살폈다. 마치 누군가를 찾는 사람처럼 말이다. '.....이상하다.' 천여운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지금까지 나왔던 죄수들은 머리에 씌어져 있던 검은 천을 벗기면 본능적으로 탈출로를 살피거나, 살고 싶다는 강박에 사로잡혀서 거칠어져 있었다. [조심해라.] 그런 천여운의 귓가에 호진창의 짧은 전음이 울려 퍼졌다. 응원이라기보다는 경고에 가까운 전음에 천여운은 확신할 수 있었다. '역시 뭔가가 있다.' 갑작스럽게 시험 방식이 바뀐 것에 의아해했던 천여운이었다. 만약 숨겨진 무언가가 있다면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이것을 모르는 대연무장의 바닥에 앉아서 관전 중인 생도들은 내심 기대감이 가득 찬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될까?' '일 번 생도처럼 완벽하게 성공하는 거 아니야?' '그래도 일 번 생도의 조는 정파를 상대했는데. 칠 번 생도의 조는 사파를 상대하잖아.' '그건 그렇긴 하네. 한두 명은 탈락하겠지?' 매 시험 때마다 생도들에게 많은 충격을 안겨주었던 천여운이었다. 더군다나 최근 들어 현마종의 후보자인 천무연과 더불어 유력한 차기 소교주 후보로 각광받고 있기에 생도들은 그가 어떻게 이 난관을 극복할지 궁금했다. "시작하라!" "마도!!!" 좌호법 이화명의 명이 떨어지자, 조원들이 힘차게 외치며 칠마검의 기수식을 취했다. 원진에 갇혀 있는데도 턱수염의 중년인은 선공을 하지 않고, 뭔가를 기다리듯이 그 자리에서 기수식 만을 취했다. '자신이 있다는 말인가?' 천여운이 조원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검사진(劍四陣) 개(開)!" '찾았다!' 그 순간 턱수염의 중년인이 고개를 돌려 매섭게 천여운을 노려보았다. 먹잇감을 발견한 매와 같은 눈빛이었다. 그와 상관없이 열두 명이 펼치는 검식이 교묘하게 맞물리며, 턱수염의 중년인을 향해 검진이 파도가 밀려오듯 쇄도했다. "오오오!" 관전하는 생도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연의 조와 맞먹을 정도로 완벽한 검진이었다. 잘하면 첫 검진만으로도 전의를 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턱수염의 중년인은 그런 완벽한 검진에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흥!" -채채채채챙! 턱수염의 중년인의 검이 쾌속하게 움직이며 자신을 향해 빈틈없이 날아오는 검식들을 여유롭게 막아냈다. 어찌나 검이 빠른지 육안으로 판별하기 힘들 정도였다. -팅! 팅! "앗!. "무, 무슨 공력이?" 심지어 검식을 펼치던 허봉과 진국의 검이 강한 공력에 튕겨나갔다. "하압!" -우웅! 차차차차창! "으악!" 기합과 함께 턱수염의 중년인의 검에서 선명한 검기가 발하더니, 검이 맞닿은 생도들의 검이 전부 부서지고 말았다. 이에 단상 위에서 대결을 지켜보던 좌호법 이화명이 놀라서 수좌에서 벌떡 일어섰다. '절정의 고수가 아니잖아!' 일류 고수들로 이루어진 십이검마섬진은 완벽하게 펼쳐진다면 절정의 고수를 압도할 수 있다. 그런데 저 자는 오히려 십이검마섬진을 막아내다 못해 밀어 내고 있었다. 서류상으로도 그랬고 분명 삼 단계 시험을 진행하기 전에 확인했을 때도 절정의 내공을 지녔었다. '절정이 아니야. 저놈은 초절정의 고수다.' 이화명이 발견한 것을 바로 앞에 있는 선임 무공 교두 호진창이 모를 리가 없었다. 절정의 고수가 아니라면 더 이상 삼 단계 시험을 진행해서는 안 된다. "천여운의 조는 물러서랏!!!" 호진창이 천여운의 조원들을 향해 소리치며 신형을 날렸다. 호진창의 빠르게 검기를 발해서 단숨에 턱수염의 중년인에게 검초를 펼치려했다. "방해하지 마라!" -콱! "아악!" "마칠!!!" 허봉이 놀라서 소리쳤다. 턱수염의 중년인이 바로 앞에 있던 마칠의 목덜미를 움켜잡고는, 물건을 다루듯 호진창에게 던져버렸다. "이런!" 당황한 호진창이 검기를 회수하고, 날아오는 마칠을 받아냈다. -탁! 부우웅! "허억!" 그 순간 호진창의 몸이 마칠과 함께 뒤로 튕겨지듯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초절정 초입의 고수인 호진창이 막지 못할 만큼, 마칠에게 실려 있는 공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시간을 벌어낸 턱수염의 중년인이 천여운에게 짐승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크르르르, 방해꾼이 사라졌으니 이제 네놈을 죽여주마." 천여운이 차갑게 식은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노림수가 이것이었나.' 놀랍게도 턱수염의 중년인은 동공과 흰자가 붉게 물들어 있었고, 얼굴 전체에 울룩불룩 핏줄이 올라와 있었다. 호진창마저 막아내지 못한 괴물 같은 공력의 근원은 바로 역혈마공이었다. '이놈 뭐지? 제 놈이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턱수염의 중년인에게 작은 의문이 피어올랐다. 분명 마교의 뇌옥에서 '그 자'에게 듣기로 천여운은 절정 초입에 불과한 애송이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도망치려들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는 일말의 두려움도 존재하지 않았다. "건방진 애송이 놈! 고통스럽게 죽여주마!" 턱수염의 중년인이 분노의 일갈을 터뜨리며 천여운을 향해 폭증한 공력으로 극악한 검초를 펼쳤다. 파공음만으로도 모든 것을 갈라버릴 것 같은 기세의 검초가 천여운을 고기 조각으로 만들려 들었다. 짧은 찰나에 턱수염 중년인의 귓가에 천여운의 목소리가 울렸다. "너나 죽어라." "뭐?" 그 순간 천여운의 검에서 새하얀 빛의 검기가 피어오르며, 스물네 개의 검식이 화려한 궤적을 그리며 폭풍과도 같은 기세로 턱수염의 중년인을 뒤덮었다. -채채채채챙! '이, 이 말도 안 되는 검초는 대체?' 턱수염 중년인의 눈빛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순식간에 그의 극악한 검초가 파훼되며 천여운의 신형이 잔상을 남기듯 그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촤촤촤촤촤촤촥! "끄아아악!" 검기에서 나오는 흰 빛의 입자가 눈서리처럼 사방으로 흩날리며, 턱수염 중년인의 몸이 강대한 검력에 휩쓸려 허공으로 튕겨져 나갔다. < 25장 위험한 삼 단계 시험(2) < 25장 위험한 삼 단계 시험(3) > 불과 촌각 전만 하더라도 삼 단계 시험을 관전하고 있던 모든 생도들은 천여운의 조가 무리 없이 사파인은 제압하리라 확신했다. 그러나 그 완벽했던 검마섬진이 가볍게 막히고 말았다. -차차차차창! "으악!" "거, 검이!" 일순간에 턱수염 중년인의 검초에 천여운 조원들의 검이 부서지며, 그들이 몸이 뒤로 튕겨져 나갔다. 누가 보아도 절정의 경지를 넘어서는 무위였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저 사파인은 대체?' 갑작스럽게 벌어진 사태에 대연무장에 앉아있던 모든 생도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천여운의 다른 수하들 또한 위기에 처한 동료들과 주군의 모습에 뭔가 잘못 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뭔가 잘못 됐어." "주군이 위험하네." 고왕흘과 백기가 같은 생각이었는지 서로를 바라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여차하면 시험에 상관없이 개입해서라도 저자를 막아야 했다. 그러나 그들이 미처 나서기도 전에 선임 교두 호진창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턱수염의 중년인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아! 호 교두님이 나섰...." -탁! 부우웅! "아...." 초절정 고수인 그가 나섰으니 해결될 거라는 기대감과 달리 호진창이 날아오는 마칠을 붙잡으려다 같이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호진창마저 제대로 막아내지 못할 만큼 엄청난 공력에 마칠을 던진 턱수염의 중년인을 쳐다본 생도들이 혼란에 빠졌다. "설마 저거?" "여....역혈마공 아냐?" 턱수염의 중년인은 눈은 빨갛게 물들어 있었고, 얼굴은 징그러울 정도로 울룩불룩 핏줄이 올라와서는 짐승 같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어째서 사파의 죄수가 역혈마공을?" 마교에서도 절대적으로 금지된 마공을 생도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촤촤촤촤촤! 그들이 놀라하고 있을 때, 턱수염의 중년인이 천여운을 향해 파공음이 대연무장 전체에 울릴 만큼 악랄하면서 엄청난 위력의 검초를 펼쳤다. 다급해진 천여운의 수하들이 누구 할 것 없이 앞으로 신형을 날리며 소리쳤다. "주군!!!" 바로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천여운의 검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고절한 절세초식이 일어나며, 그의 신형이 잔상을 남기듯 턱수염의 중년인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촤촤촤촤촤촤촥! "끄아아아악!" 엄청난 검력이 일어나며 턱수염 중년인의 몸이 허공을 수 바퀴 돌더니, 검에 찔렸던 요혈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파팍! 바닥에 떨어져서 피에 젖어 죽은 듯이 쓰러진 턱수염의 중년인. 이 광경을 지켜본 모든 생도들이 경악한 나머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완벽한 검마섬진을 파훼시켜버리고 초절정의 고수인 호진창마저 날려 보낸 역혈마공을 쓰는 사파의 고수를 일 초식 만에 만신창이로 만들어 버렸다. '괴....물 같은 새끼.' 복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금 또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대체 어느 정도까지 무공이 진보했기에 이런 엄청난 무위를 보일 수 있단 말인가. 반면 턱수염의 중년인을 쓰러뜨린 천여운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뭐지?' 천여운이 고개를 돌려 바닥에 쓰러져 있는 턱수염의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자신이 들고 있는 검을 바라보았다. '반탄력이 강했다.' 분명 완벽하게 천마검공의 검 초식이 적중했지만, 턱수염의 중년인의 요혈을 찌를 때마다 강한 반탄력이 생겨나 검 끝이 완전히 파고들지 않았다. -꿈틀꿈틀! 바닥에 누워있는 턱수염의 중년인의 몸이 움직였다. '역시 제대로 들어간 게 아니었나.' -찌직! 턱수염의 중년인의 상의가 찢겨져 나가며, 상체가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올랐다. 혈관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른 모습은 더 이상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크르르르르!" 고왕흘 만큼이나 거구로 변한 턱수염의 중년인이 짐승 같은 울음소리를 내며 흉폭해 보이는 붉은 눈으로 천여운을 노려보았다. "크르르...주....죽여...주마! 크와아아아아!!!" -파팡! "크윽!" "으아악!" 턱수염의 중년인이 울부짖는 포효 소리는 사자후였다. 엄청난 고함 소리가 파동을 일으키며 생도들이 고통스러운 얼굴로 귀를 틀어막았다. 그 공력이 어찌나 강했는지 일부 생도들은 피를 토하며 쓰러지기까지 했다. [포효 소리에서 강한 고주파 및 저주파가 발생했습니다. 긴급 방어 모드를 전개합니다. 고막과 신체로 들려오는 음파를 차단합니다.] 나노가 긴급 방어 모드를 전개한 덕분에 사자후의 피해를 전혀 받지 않은 천여운의 모습에 턱수염의 중년인의 인상이 굳어졌다. "크르르르...역시....네놈은...여기서...죽어야....크아아아!" 이지가 사라졌는지 완전히 짐승 같은 울음소리만 내뱉었다. 그런 중년인을 향해 천여운이 검을 겨누며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살아남아 봐라." 천여운은 더 사태가 커지기 전에 턱수염의 중년인을 죽이기 위해 천마검공의 제 이초를 펼치려 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촤아아악! "크아아아아아!" 턱수염 중년인의 왼팔이 잘려나갔다. 절정의 극에 이른 공력으로도 체내의 강한 반탄력으로 치명상을 입힐 수 없었던 역혈마공체의 몸이 너무도 쉽게 베였다. "!!!" 천여운의 눈이 커졌다.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중년인의 뒤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있었다. 후줄근한 옷차림에 호리병을 매고 있는 빨간 코의 중년인은 바로 우호법 섭맹이었다. "클클, 감히 누구의 제자에게 더러운 손을 들이대려는 것이냐." "스승님!" 언제 나타났는지 갑작스러운 스승 섭맹의 등장에 천여운이 놀라워했다. 하지만 그런 놀라움도 오래가지 못했다. "위험합니다! 스승님!" "크와아아아아!" 팔이 잘려서 고통스러워하던 턱수염의 중년인이 분노의 포효를 내뱉으며, 몸을 돌려 우호법 섭맹을 향해 엄청난 위력의 극악한 검초를 펼쳤다. "목숨만 붙여서 데려와라 했으니." -촤촤촤촥! "크아아아!" 섭맹의 손에 들려 있는 광무도(狂舞刀)가 나비처럼 잔상을 일으키며 수많은 도결을 만들어내더니, 너무도 손쉽게 검초를 파훼하고는 턱수염 중년인의 몸을 지탱하고 있는 전신의 근맥을 베어냈다. 근맥이 잘려나간 턱수염의 중년인은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대단하다!' 천여운이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화경의 고수인 섭맹의 손에서 펼쳐지는 접무도법은 그와는 차원이 다른 위력이었다. 증강현실에서 아바타로 경험했던 것 보다 두 배는 강해보였다. '크으으으으!" 몸을 일으켜 세우려 해도 소용없었다. 섭맹과의 압도적인 무위의 격차를 느낀 턱수염의 중년인이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얼굴이 붉게 물들며 전신이 파르르 떨리려는데 섭맹의 손이 그의 머리를 붙잡았다. "누구 마음대로 죽겠다는 것이냐." -팡! 섭맹의 손에서 발경(發勁)이 일어나며 뇌에 강한 충격을 받은 턱수염의 중년인이 눈이 뒤집어져서 기절하고 말았다. 전신의 내공을 역류시켜 자폭하려 했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섭맹이 자리에 일어나서는 단상 쪽을 향해 혀를 차며 외쳤다. "쯧쯧, 그깟 놈들 상대로 얼마나 시간을 허비하는 게야!" 턱수염의 중년인과 섭맹의 대결에 집중하고 있던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단상 쪽으로 향했다. "아!" 놀랍게도 단상 앞에는 턱수염의 중년인처럼 상체가 찢어져서 전신의 핏줄이 울룩불룩 튀어나온 사내들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좌호법 이화명의 손에 한 명이 머리통을 붙잡혀서 고통스럽게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끄으으으!" -파팍! 이화명의 손이 퉁겨지자 발경이 일어나 사내의 몸이 잠잠해졌다. 잠잠해진 사내의 머리를 바닥에 내팽개치며 이화명이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고작 한 놈을 처리해놓고는 득의양양해 하는 거냐. 주정뱅이 놈아." 바닥에 쓰러진 역혈마공체의 사내들은 일곱 명이었다. 생도들이 알아차리지도 못할 그 짧은 찰나에 이 많은 자들을 처리했던 것이었다. '이게....화경의 고수.' 그야말로 경이로운 무위였다. 검마섬진조차 가볍게 파훼할 만큼 역혈마공으로 공력이 폭증한 절정의 고수들을 아이 다루듯이 제압한 두 호법의 무위에 모두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교에서도 열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들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흥, 고놈. 말본새 하고는." 섭맹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호적수 관계인 만큼 서로를 의식하는 두 호법들이었다. "나와라." -딱! 좌호법 이화명이 손가락을 튕기자 기다렸다는 듯이 검은 무복에 푸른색 문양이 그려진 옷을 입은 무사들이 단상 뒤편을 시작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앗?" "언제부터 있었지?" 마흔 명이 넘는 이들이었는데 누구 하나 그들의 존재를 눈치 챈 생도들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정체를 아는 생도들은 있었다. "호법대!" 그들은 바로 교주전 소속의 무사들인 호법대였다. 절정의 고수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오직 교주의 명에만 움직인다는 고수들이었다. '호법대가 마도관에 나타나다니?’ '교주 직속의 호법대까지 나타난 것 보면 진짜 큰 일이 난 거 아냐?' '당연한 거 아냐? 죄수들이 역혈마공을 썼잖아!' 다른 곳도 아니고 마도관의 삼 단계 시험 도중에 사고가 발생한데다, 교주 직속인 호법대마저 등장하자 생도들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그런 와중에 생도들 사이에서 유독 표정이 어두워진 이가 있었다. 그는 바로 검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경운이었다. "전부 구속해서 데려가라." "충!!!" 호법대의 무사들은 좌호법 이화명의 지시대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역혈마공체로 변한 죄수들을 구속해서 들쳐 매고는 빠르게 대연무장에서 퇴장했다. 그제야 우호법 섭맹이 천여운에게 다가와 해맑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클클, 오랜만이구나. 제자야." "제자, 천여운이 스승님을 뵙습니다." 포권을 취하는 천여운을 섭맹이 흡족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사실 삼 단계 시험이 시작할 때부터 대기 중이었던 섭맹은 몰라보게 향상된 그의 실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자신이 가르칠 때만 하더라도 내공조차 없던 아이였다. "실력이 많이 늘었더구나." "과찬이십니다." "욘석아. 이왕이면 이 스승의 접무도법을 펼쳤다면 더 좋을 뻔 했다." "아!" 그 말에 천여운이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섭섭한 투로 말을 하는 섭맹이었지만 그 표정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뭔가 궁금한 것이 있어보였다. "그런데 그 검법..." "흠흠." 뭔가를 말을 하려던 찰나에 좌호법 이화명이 불편하다는 기색으로 기침을 했다. 섭맹이 주위를 둘러보니 수많은 생도들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클클, 어쩔 수 없구나." 오랜만에 만났기에 해후를 즐기고 싶었지만 아직 삼 단계 시험이 끝나지 않은 것을 알기에 더 대화를 할 시간은 없었다. "제자야.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란다. 무운을 비마." 그 말을 끝으로 우호법 섭맹은 경공을 펼쳐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마도관의 밖으로 나가버렸다. 천여운 또한 짧은 해후가 아쉬웠는지 씁쓸한 눈빛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사 년 후의 만남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속으로 다짐했다. '그때는.....소교주로서 뵙겠습니다. 스승님.' 그렇게 좌호법 이화명의 닦달로 쫒겨나듯이 서둘러 밖으로 나온 우호법 섭맹이 미묘한 표정으로 마도관 쪽을 바라보았다. '교주님의 진의를 도통 알 수가 없구나.' 이곳으로 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정말 달갑지 않았던 섭맹이었다. 천여운을 미끼로 여섯 종파를 압박할 함정을 판 것 때문에 교주가 그를 아들이 아닌 하나의 패로 생각한다고 여겼었다. 몰래 숨어서 천여운이 위기에 빠지면 곧바로 나서려 했던 섭맹이었다. 그러다 사파의 죄수가 역혈마공을 펼치자, 그를 향해 절세 검법을 펼치는 천여운의 놀라운 무위에 경악하고 말았다. 평소의 그라면 접무도법을 쓰지 않았다고 투덜거렸겠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칭찬만 했던 이유가 있었다. [그 검법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어라. 절대로 발설하면 안 된다.] 좌호법 이화명의 전음 때문에 확신할 수 있었다. 숨어서 지켜보느라 검식을 정확하게 보진 못했지만 분명 그것은 천마검법과 흡사했다. 아까는 아무 생각 없이 천여운에게 그 검법을 어떻게 익혔냐고 물어보려 했던 섭맹은 이화명의 당부에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빨간 머리 녀석도 알고 있다는 것은 분명 교주님의 안배가 틀림없다.' 전음으로 신신당부를 한 걸 보면 확실했다. 천마신교에서 오직 교주만 익힐 수 있는 최고의 검법인 천마검법을 전수했다는 것은 교주의 진정한 의중이 자신의 제자인 천여운에게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지켜보면 알게 되겠지.' 자신이 알고 있는 교주는 생각을 읽을 수 없는 자였다. 유일하게 사랑했다고 하는 화 부인의 자식인 천여운을 여섯 종파를 압박하는 데만 이용했기에 새삼 마음이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하지만 그 숨겨진 의중이 천여운이라면 여섯 종파를 중심으로 돌아갔던 천마신교에 새로운 변혁이 일어날 것이다. "그럼 남은 임무를 달성하러 가보실까!" "충!!!" 우호법 섭맹을 선두로 마도관의 입구에서 대기 중이었던 삼 백여 명의 호법대의 무사듣이 일제히 북동쪽을 향해 경공을 펼쳤다. 그곳은 여섯 종파 중 하나인 검마종의 장원이 있는 곳이었다. < 25장 위험한 삼 단계 시험(3) > 끝 < 26장 어쩌다 보니 (1) > 삼 단계 시험 도중에 벌어진 사건으로 어수선했던 장내는 빠르게 진정되어 갔다. 갑작스럽게 시험이 바뀐 것도 모자라 죄수들이 역혈마공을 쓰면서 큰 사태로 번져나갈 수 있었지만 다행히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았다. 목덜미를 잡혀서 던져졌던 마칠 역시도 내상을 입지 않았다. 호진창이 그를 받아낼 때 공력에 대항하거나 했다면 다쳤을 수도 있겠지만, 같이 몸을 날림으로써 마칠에게 실려 있던 공력을 해소시켰다. '공개적인 데서 나를 노릴 정도로 과감해졌다.' 아무리 여섯 종파라고 해도 대놓고 마교의 규칙을 어기면서까지 수작을 부린 적은 없었다. 조용히 노린 것도 아니었다. 교주의 심복이라 할 수 있는 좌호법 이화명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일을 벌였다. 설사 역혈마공을 펼쳤던 자들이 자결을 한다고 해도, 이 정도로 사태를 키운다면 교주가 여섯 종파를 압박할 수 있는 명분을 가지게 된다. '설마 이렇게 되도톡 유도한 것인가?' 내색하지 않았지만 천여운의 기분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애초에 교주 직속인 호법대를 비롯해 우호법 섭맹마저 미리 대기를 했다는 것은 이런 사태가 벌어질 것을 예측했다는 의미였다. '........나를 이용했군. 역시 나는 그저 패에 불과했던가.' 부정(父情)에 대한 일말의 기대감. 그것이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는 순간이었다. 어머니인 화 부인의 임종 순간에 조차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교주였다. '어쩌면 어머니도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화 부인은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도 교주의 사랑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천여운도 그것만큼은 어머니가 살아왔던 삶이 애처로워지기를 원치 않았기에 샘솟는 의심을 억눌렀었다. '빌어먹을!' 교주가 정말로 그녀를 사랑했다면 미독에 중독되어서 죽어 가는 순간에도 이렇게 방치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녀와 그 소생인 천여운을 더 큰 힘으로 보호해줄 수 있지 않았을까? 한 번 물꼬를 틀기 시작한 불신은 끝도 없이 커져갔다. '정말 그게 사실이라면....' 만약 정말로 교주가 여섯 종파를 억누르기 위한 정치적인 장기 말로 자신과 어머니를 이용한 것이라면 용서할 수 없었다. '후회하게 만들 것이다!' 천여운이 교주에 대한 분노를 불 태울 무렵, 좌호법 이화명 역시도 이 사태를 곰곰이 되씹고 있었다. '교주님의 뜻대로 되었다. 이것으로 검마종의 힘이 억눌리겠지.' 마교에서 뇌옥의 죄수들을 관리하는 역할을 하는 종파가 바로 대무검종이었다. 그들은 검마종의 숨겨진 힘인 암검이종(暗劍二宗) 중 하나였다. 그들이 마교에서 금지한 역혈마공과 연루되면서, 큰 명분이 생겼기에 검마종은 이를 발단으로 그 위세가 꺾이게 될 것이다. '이로써 세 종파 째인가.' 놀랍게도 검마종은 첫 번째가 아니었다. 마도관의 입관식 당일에 첫 번째 시험에 사사로운 감정을 쏟았던 음마종의 종주이자 오 장로 항소유는 일 년 동안의 근신 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독마종의 종주인 백오는 마도관 불침의 규칙을 어기고, 그 내부로 들어가서 천여운에게 산공독단을 하독한 것이 들통나서 현재 중징계가 내려져 이 년간 뇌옥에 하옥되는 처분을 받고 말았다. 백오는 전면 부정했지만 증거물로 독에 절어있던 천여운의 상의가 제출되면서 순순히 제 발로 중징계를 받아야만 했다. 모든 것이 천여운에게 얽히면서 일어난 결과였다. '자식을 이용해서 이런 결과를 만들다니.' 교주전 소속의 호법으로서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이화명이 생각해도 모든 것에 냉혹한 교주였다. 그 과정이 어찌되었든 천여운이라는 미끼를 덥석 물은 세 종파는 이를 계기로 힘이 약화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화명이 의문스러운 점이 있었다. '너무 쉽게 걸려들었어.' 교주가 함정을 파서 유도한 것도 있었지만 생각보다 쉽게 걸려들었다. 최근 들어 천여운이 소교주 쟁탈전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것이 불안하다고는 하나, 검마종이 이렇게 무리해가면서 이 사태를 일으킨 게 이상했다. 어떤 식으로든 모든 정황이 검마종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데, 공개적으로 이런 짓을 저질렀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치 예전 화 부인의 미독 사건 때와 비슷한 느낌은 무엇일까? '그저 기우였으면 좋겠는데.' 장내가 정리가 되고 어수선하던 분위기가 바로 잡히자, 좌 호법 이화명이 단상으로 올라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삼 단계 시험을 진행했다. "중간에 문제가 생겼지만, 기존의 시험 방식으로 이어가도록 하겠다." 모든 생도들이 방금 전에 벌어졌던 사태가 어찌된 영문인지 궁금해 했지만 마도관주인 이화명이 언급하지 않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중간에 역혈마공을 펼치는 사태가 벌어졌지만, 완벽하게 검마섬진을 펼쳤던 천여운의 조는 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연 조에 이어서 두 번째로 조원 전원이 통과하게 되었다. 관전했던 모든 생도들이 인정하는 부분이었기에 특별한 이견은 없었다. '아아, 우리까지 딱 운이 없었구나.' 허봉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조원이 전부 통과해서 기쁘기는 했지만 그를 비롯한 천여운의 수하들은 허탈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전반부의 아홉 조까지는 정사의 죄수들을 상대로 목숨을 걸고 위험한 삼 단계 시험을 치른 반면에 원래 시험 방식으로 바뀐 후반 조들은 무공 교두들을 상대하게 되면서 상대적으로 목숨에 대한 위협이 없이 안전하게 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운이 좋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후반부의 일곱 조 중에 네 조가 천여운 산하의 수하들이라는 것이었다. "와아아아아!!!" 남아있던 후반부의 일곱 조의 생도들이 환호했다. 하지만 그 환호도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하! 그렇게 좋아하니 아주 실전에 방불케 해주마." 그들의 환호성이 무공 교두들을 거슬리게 만들었다. 후반부의 일곱 조는 무공 교두들의 경고대로 시험을 통과하는데 애를 먹고 말았다. 무공 교두들의 모두가 칠마검부터 검마섬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정사의 죄수들처럼 호락호락하게 대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모든 삼 단계 시험은 오후 미시(未時) 무렵이 돼서 종료되었다. 목숨에 대한 중압감이 내려갔지만 후반부 일곱 조는 검마섬진을 펼치는 것이 더욱 까다롭게 평가되었다. 이백육 명의 생도들 중에 삼 단계 시험을 통과한 자들은 총 백이십 명이었다. 사할 가량이 떨어진 셈이었다. '일흔두 명 중에 서른네 명이라....' 천여운의 산하의 다섯 조에서 절반가량의 수하들이 탈락했다. 충성심을 보고 뽑은 수하들이 많았기에 무공이 약한 자들이 전부 떨어져버렸다. '아쉽군.' 안타깝기는 했지만 당연한 결과였다. 어찌 본다면 어려운 시험의 난이도를 고려한다면, 여전히 서른네 명이나 되는 수하들이 생존하게 된 것은 좋은 성과일지도 몰랐다. 그 대표적인 예로 복마종의 천무금, 검마종의 천경운 등은 절반 가까이나 되는 수하들이 탈락했다. 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유찬은 어떻게든 시험에 통과하기 분전했지만, 그 짧은 기간 안에 왼손으로 칠마검에 익숙해지는 것은 노력만으로 채울 수가 없었다. 좌호법 이화명이 단상 위에서 흡족한 목소리로 말했다. "삼 단계 시험에 통과한 생도들은 모두 축하한다. 너희들은 자랑스러운 본교의 상급 무사가 되었음을 공표한다." "마도!!!" 삼 단계 시험에 통과한 모든 생도들은 상급 무사를 상징하는 일(一)이라 새겨진 동패를 지급받았다. 검마섬진을 다룰 수 있게 되면서 상급무사의 자격이 생긴 것이었다. 동패 이외에도 세 번째 마룡단을 지급받은 생도들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오오오!" 아까 전만 하더라도 불공평하다고 투멀거렸던 허봉이 어느 새 마룡단이 담긴 함을 꼭 쥐고서 입이 해벌쭉 벌어져 있었다. 지금까지와 다르게 삼 단계 시험부터는 혜택이 컸다. 마도관의 삼 층 비급서재에 있는 일류 무공의 비급서를 열람할 수 있게 되었다. 일류 무공부터는 그 수준의 격차가 확연했다. 일반 무가의 생도들이나, 중소 종파의 생도들에게는 제일 기다려왔던 순간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혜택이 하나 더 있었다. "마도관에 들어오면서 맡겼던 독문 무기들을 해금한다." 권법, 장법, 각법, 조법 등 맨손으로 무공을 사용하는 종파도 있었지만, 무기를 사용하는 종파의 생도들도 적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진형, 전술, 검진 등과 같은 하급에서 상급의 마교 무사들이 기본적으로 소양해야 하는 것들을 배우는 과정이었기에 독문 무기 사용이 금지되었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진정한 마도관의 고수를 양성하는 기간이 시작되기에 독문 무공의 연마 과정을 거치기에 무기 사용이 해금된다. "와! 내 검!" "오랜만이다!" 각자가 맡겼던 무기들을 찾는 생도들의 눈빛에 반가움이 서렸다. 독문 무기라 함은 그들 자신에게 맡게 제작되었기에 손에 익으면서도 정이 깊었다. "내 새끼. 오랜만이야. 보고 싶었어!" "헉!" 호상화가 기다렸다는 듯이 후다닥 달려가서, 무기를 받아 강아지를 쓰다듬듯이 어루만지면서 걸어오는데 생도들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성인 남성의 상체만한 거대한 도끼였는데, 어지간한 생도들은 들기도 힘들어보였다. '새끼가 아닌데....' 호상화가 여자치고는 신장이 많이 크다고는 생각했지만 저 도끼를 사용한 무공을 익혔다면 충분히 이해가 갔다. 자우민도 붉은 깃이 달려있는 창을 가져와서 좋아하는 모습을 보였다. '무기라.....' 처음 들어올 때부터 자신의 독문 무기가 없었던 천여운이었다. 특별히 무언가를 부러워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생도들의 독문 무기를 보고나니 우호법 섭맹의 광무도가 떠올랐다. 섭맹은 사문의 독문 무기인 광무도를 통해 펼치는 접무도법이야 말로 진정한 위력을 발휘한다고 했었다. '천마검공에 맞는 무기가 있을까?' 가장 유력한 것은 교주를 상징하는 무기인 천마검(天魔劍)이 있을 것이다. 광무도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보구를 본 적이 없는 천여운이기에 막연하게 상상만 할 뿐이었다. "무기가 없는 생도들은 무고에서 지급 받도록." 혼자 무기가 없으면 섭섭할 뻔 했는데, 그래도 무기를 지급 해주었다. 천여운은 무고에 들어가서 도와 검 한 자루씩을 챙겼다. 평범한 무기들이었지만 없는 것보단 나았다. 우호법 섭맹을 만나고 나니, 접무 도법을 익히는데도 소홀히 하면 안 되겠다고 여긴 그였다. 지급 받을 것들을 전부 받은 생도들이 대연무장에 다시 오열을 맞춰 섰다. 좌호법 이화명이 생도들을 스윽 훑어보고는 말했다. "막 들어왔을 때는 애송이들 같았는데, 그럭저럭 봐줄만 해졌구나. 그렇다면 이제 다음 단계 시험에 대해서 공표한다." 사 단계 시험에 대한 공표에 생도들이 일제히 집중했다. 마도관의 입관 당시에 삼 단계 시험까지는 상급 무사들을 뽑는 과정이었다면 다음 단계부터는 대주 직위가 주어진다고 들었다. 그 말은 이제부터가 제대로 된 고수를 양성하는 과정이란 의미였다. "사 단계 시험부터는 기간에 대한 모든 제한이 없다." "오오오!!!" 기간이 없다는 말에 일부 생도들의 입에서 기쁨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촉박하게 시간에 쫓겨서 다음 단계 시험을 준비하는 것이 꽤나 벅찼던 그들이었다. 생도들의 그런 반응에 이화명이 입 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개별적으로 언제든지 원할 때 시험을 치를 수 있다. 마도관에 있을 수 있는 사 년 동안 말이다." '사 년 동안?' 그 말은 사 단계 시험만으로 사 년이 걸릴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방금 전 만하더라도 들떠있던 생도들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사 단계 시험은 마도관에 있는 모든 시험 중에서 제일 간단하다." '간단해?' 마도관의 특성상 분명 단계가 높아질수록 시험이 어려워지는데, 제일 간단하다는 것은 대체 무슨 의미일까? 의아해하는 생도들을 향해 이화명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언제든지 이 앞에 있는 무공 교두들을 실력으로 꺾으면 합격이다." 이화명의 말에 무공 교두들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생도들을 바라보았다. 언제든지 올 테면 와라고 말하는 듯 했다. -웅성웅성! 생도들의 반응이 소란스러워졌다. 열두 명의 생도들이 힘을 합쳐서 검진을 펼쳐야 겨우 이길 수 있는 무공 교두를 이길 수 있다. 그런데 혼자서 무공 교두를 꺾으라는 의미는 단 하나였다. '절정의 경지.' 적어도 무공 교두를 상대로 이기기 위해서는 절정의 경지에 올라야 한다. 그것도 사실 최소 기준치에 불과하다. 무공 교두들의 대다수는 완숙한 절정의 경지 이상의 실력을 지녔다. '상급 무사의 최소 기준이 일류 무위를 지녀야 했으니, 당연 한 걸 수도 있다.' 천여운은 납득이 갔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생도들의 반응이 엇갈렸다. 아직까지 일류 무위에 불과한 중소 종파 출신의 무공이 낮은 생도들은 난감해 했고, 절정의 경지를 앞두거나, 초입에 오른 상위 종파의 생도들은 만족해했다. '미친! 조장 급의 생도들도 칠마검만 쓰는 교두도 꺾지 못하는데, 어느 세월에 교두들을 이긴단 말이야!' '우리 조장도 겨우 초식을 파훼했다고 노란 명찰을 받기만 했는데.' '그만 투덜거려! 그러니까 기간이 길어졌지.' '개별적으로 치른다는 말을 뭘로 들은 거야? 무공 연마를 하란 말이야.' '아니! 절정의 경지가 뉘 집 개 이름이냐고!' 일류 무인의 경지는 적절한 내공과 일류 무공을 익히기만 한다면 오를 수 있다. 하지만 절정의 경지부터는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기(氣)에 대한 깨달음이 없다면 오를 수가 없는 경지였다. 절정부터는 무인으로서의 재능이 달려있는 문제로 평생 동안 무공을 익혀도 일류를 넘어서지 못하는 자들이 부지기수였다. 결국 사 단계 시험부터는 정말 무재가 있는 자들만 확실하게 걸러내겠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미리 경고한다. 입관식 때도 말했었지만 시험에 한 번이라도 실패하면 방출이다. 그 점을 유의해라." 한 번 도전해서 패하면 무조건 마도관에 방출된다. 신중하게 도전하라는 말이었다. 노란 명찰 획득을 위한 도전 때는 무공 교두들이 실력을 일류 무공인 칠마검으로 제한했지만, 자신들의 본신 절기를 사용한다면 그때보다 적어도 두 배 이상은 강하다고 봐야 했다. 그 외에 그 동안 개방되지 않은 시설 건물들에 대한 것을 설명을 끝으로 좌호법 이화명이 해산 명령을 내렸다. "그럼 사 단계 시험에 대한 공지를 마쳤으니, 이것으로 해산하겠다. 무운을 빌겠다." "마도!!!" 해산하라는 명에 생도들이 힘차게 소리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흩어지자마자 생도들이 향하는 곳은 뻔했다. 내공이 급선무인 생도들은 개인 연공실로 향했고, 무공 비급서가 더 급한 생도들은 비급 서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천여운과 그의 수하들은 곧장 흩어지지 않고 전부 모였다. 그것은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고 당장 짐을 싸서 나가야 하는 탈락자들을 배웅하기 위해서였다. "주군. 덕분에 감사했습니다." "주군이 아니었다면 저희는 시험도 치르지 못했을 겁니다." "나가서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탈락한 수하들이 천여운에게 포권을 취하며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이제 겨우 안면을 트고 친해졌던 조원들은 탈락하는 동기들을 안타까워했다. 그렇게 서로가 인사를 하던 차에 누군가 천여운의 번호를 불렀다. "칠 번 생도!" "응?" 모두가 그 누군가에게 시선이 향했다. 천여운을 부른 그 누군가는 다름 아닌 무공 교두 상문여였다. 갈비뼈가 부러지면서 스물이레 동안이나 의무실에 입원해 있었던 그의 등장에 천여운과 생도들이 의아해했다. 그때의 일 때문인지 상문여가 잔뜩 험악한 인상으로 천여운에게 말했다. "마도관의 본관으로 따라와라." "무슨 일로?" "일개 생도인 네가 질문할 권한이 있나?" ".....알겠습니다." 아무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따라오라는 말이 이상했지만 짐작 가는 것은 있었다. 혹시 아까 전에 있었던 사태 때문에 마도관주가 부르는 것일지도 몰랐다. 천여운은 괜찮다는 말과 함께 수하들에게 먼저 가라고 이야기를 한 후에 상문여를 따라 본관으로 향했다. '응?' 본관 건물로 들어갈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그곳을 지나쳤다. 그러더니 아직까지 개방되지 않은 건물이 있는 쪽으로 향하는 상문여였다. 인적이 드문 건물 뒤편 공터에 도착하자, 상문여가 발걸음을 멈췄다. "여기가 좋겠군." 상문여의 말에 뭔가 이상한 것을 눈치 챈 천여운이 물었다. ".....관주님이 부른 게 아니군요." "본 교두가 언제 관주님이 불렀다고 했었나." 물론 없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불순한 의도가 다분해보였다. 그 예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챙! 상문여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도집에서 회색 빛깔의 도를 뽑으며, 천여운을 향해 매끄러운 도 끝을 겨냥했다. 천여운이 차갑게 식은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게 무슨 짓이죠?" "후후, 무슨 짓이냐고? 건방진 놈. 잘 들어라. 네 녀석은 여기서 본 교두에게 사 단계 시험을 도전한 거다." 그 말을 끝으로 상문여의 서슬파란 도날이 예고도 없이 천여운의 목을 향해 쇄도했다. < 26장 어쩌다 보니 (1) > 끝 < 26장 어쩌다 보니 (2) > 무공 교두인 상문여가 의무실에서 정신을 차린 것은 사흘이 지나서였다. 갈비뼈가 부러져서 튀어나올 만큼 중상을 입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막 깨어난 상문여는 외적인 고통보다도 생도에게 패했다는 분함에 큰 자괴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다른 무공 교두들과 수많은 생도들이 보는 앞에서 패하고 말았다. 타인의 이목과 명예에 집착이 많은 상문여로서는 그야말로 개망신을 당한 셈이었다. 그런 자괴감은 이윽고 분노로 바뀌게 된다. '본신 절기만 사용할 수 있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크윽.' 당시에는 일류 무공인 칠마검 만을 써야한다는 제약으로 원래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만약 원래의 무공을 펼쳤다면 천여운을 십 초식 내로 제압하거나 죽일 자신이 있었다.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절정 초입에 불과한 실력이니 말이다. -으득! 상문여가 이를 갈며 복수를 다짐했다. 의무실에서 나간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천여운을 패퇴시키고 마도관에서 내보내리라. 그렇게 쓰디 쓴 인내의 나날 끝에 드디어 그 날이 다가왔다. 내심 천여운이 삼 단계 시험을 통과하기를 바랐다. 그래야만 사 단계 시험인 무공 교두와의 대결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손으로 그를 짓밟아야만 의미가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려왔기에 더 이상의 인내심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내게 도전하기를 기다릴 필요가 있나? 어차피 저 놈을 병신으로 만들어놓은 후에 내게 도전했다고 하면 될 일이 아닌가.' 발경으로 뇌를 손상시킨다면 이지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어차피 여섯 종파의 소교주 후보자들처럼 특별한 뒷배가 없는 놈이 병신이 된다고 해서 누가 자신을 탓할 거란 생각도 안 들었다. '건방진 놈! 병신으로 만들어주마!' -촤아아아악! 상문여가 기습적으로 천여운의 목을 향해 도를 휘둘렀다. 분명 무공의 경지가 자신보다 높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지난번에 겨뤘을 때 그 외공만큼은 경이로웠다. '선공으로 단숨에 쓰러뜨린다.' 보는 이목도 없었기에 거리낄 것도 없었다. 상문여의 날카로운 도날이 천여운의 목에 닿으려던 찰나였다. -챙! '아니?' 언제 뽑았는지 천여운의 도가 그의 기습 공격을 막아냈다. 자신이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빠른 발도에 놀란 상문여가 그를 노려보았다. 그런 상문여에게 천여운이 여전히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잘됐군요. 분명 말했습니다." "무, 무엇을 말이냐?" "교두님 입으로 이게 사 단계 시험이라고 했습니다." -덜덜덜! 상문여의 귀에는 천여운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기습 공격을 막은 것에 화가 나서 십성 공력으로 도를 밀어 내려 했는데, 꿈쩍도 하지 않는데다가 오히려 도병을 잡고 있는 자신의 손이 떨리기마저 했다. '이 녀석 공력이 어째서?' 상문여의 무위는 완숙한 절정의 경지였다. 불과 스물여드레 전만 하더라도 절정 초입이었던 천여운이 막을 수 있는 공력이 아니었다. 그런데 막다 못해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설마 그 사이에 내공이 늘었단 말인가?' -챙! 그 순간 천여운의 도에서 강한 반탄력이 생겨나며 상문여의 도가 튕겨져 나갔다. 상문여의 신형이 흔들리며 뒤로 밀려났다. 도를 쥐고 있는 손 전체가 통증으로 아려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복수를 한다는 생각에 들떠 있던 상문여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놈 무공이 늘었구나.' 그 짧은 기간 안에 설마 진보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방금 전에 반탄력을 생각한다면 적어도 자신과 버금가는 내공을 지녔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고작 스무여드레 만에 내공이 이렇게 늘 수 있단 말인가?' 마룡단을 섭취한 것도 아니었는데 늘어난 내공에 당황스러웠다. 그것은 독마종의 백오가 강제로 먹인 산공독단으로 인한 기연이었지만, 상문여가 알 도리가 없었다. '후우, 진정하자. 어차피 내공이 늘었다고 해서 무공의 경지까지는 아닐 테지.' 절정의 경지부터는 위로 올라가기 위해선 깨달음이 필요로 하다. 설사 내공이 늘었다고 해서 자신의 경지를 밟았을 리는 없을 것이다. "제법 실력이 늘었구나. 그렇다면 더 이상 봐주지 않겠다." "그러시죠." "이, 이 건방진 놈이!" 천여운의 태연한 대답에 화가 난 상문여가 상기된 얼굴로 도에 기를 발했다. -우웅! 상문여의 도에서 선명한 하얀 빛의 도기가 생성되었다. 이렇게 된 이상 도기로 저 건방진 놈의 팔 한 짝이라도 앗아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하압!" 강한 기합과 함께 상문여가 자신의 상경도법의 절초인 경이준절(輕二浚絶)을 펼쳤다. 그의 도가 두 갈래로 갈라져서 좌우에서 동시에 쇄도해왔다. '쾌속하다. 하지만.' 접무도법에 비하면 느려 터졌다. 천여운이 몸을 빠르게 회전하며 그의 손에 들려있는 도가 잔상을 일으키며 양 옆에서 쇄도해오는 두 갈래의 도식을 막아 냈다. -채챙! 접무도법의 제 이 초식 회원접경(回固蝶警)이었다. 도기가 실려 있는 초식이 막히자 상문여의 두 눈이 커졌다. '이걸 막아? 서, 설마?' 상문여의 두 눈동자에 천여운의 도에 서린 하얀 빛의 선명한 도기가 보였다. 완벽한 형태의 도기는 그가 적어도 완숙한 절정의 경지 이상의 실력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안 돼. 이, 이 녀석 절정의 초입이 아니야.' 당황한 상문여가 보법으로 거리를 벌리려고 했다. 동급 이상의 실력자라면 무작정 공격을 통해 가볍게 대할 상대가 아니었다. 그 순간 천여운의 신형이 번개처럼 튕겨 나오며 상문여를 향해 접무도법의 제 육 초식인 도접도선(刀蝶道鮮)을 펼쳤다. "크윽!" -채채채채채챙! 상문여가 방어 도초를 펼치며 막아보려 했으나, 도접도선의 도초가 나비처럼 잔상을 일으키며 그의 눈을 어지럽혔다. 상경도법과는 차원이 다른 쾌속함이었다. -챙! "큭!" 도초를 막아내 던 상문여가 도를 놓치고 말았다. 천여운의 도초에 실린 공력이 강해서 손바닥이 전부 찢겨나갔다. 도를 놓쳤는데도 계속해서 도식을 멈추지 않자 당황한 상문여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내, 내가 졌다! 사 단계에 통과했으니 그만 해라!" 자존심이 문제가 아니었다. 천여운의 도에 실린 기세만 보았을 때는 자신을 죽일 것만 같았다. 사 단계에 통과했다는 말에 그를 향해 쇄도하던 천여운의 도가 바로 코앞에서 멈췄다. "하아... 하아...." 목숨에 위협을 느꼈던 상문여의 얼굴이 땀범벅이가 되었다. 그런 상문여에게 천여운이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사 단계에 통과한 겁니까?" "그, 그래. 네가 이겼으니 이제 그만 하자." 상문여가 패배를 인정한다며 양손을 들어올렸다. 스스로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고 알리는 표시였지만 그것은 사실 계책이었다. 방금 전에 겨루면서 실력으로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상문여는 방법을 바꾸었다. '네놈을 내가 미쳤다고 통과시킬 것 같으냐.' 여기서 천여운을 무사히 보내게 되면 자신이 그를 인적이 드문 곳으로 데리고 와서 강제로 기습한 사실까지 드러날 지도 몰랐다. 상문여가 몰래 양손에 십성 공력을 끌어올렸다. 천여운이 안심하고 도를 집어넣는 순간, 그의 머리통을 기습적으로 찍어버릴 작정이었다. "알겠습니다." '걸렸다!' 그 말과 함께 천여운이 도신을 도집을 향하는 순간 상문여의 눈빛에 쾌재가 돌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퍽! "끄아아아악!" -쿠당탕! 상문여의 가슴에 천여운의 주먹이 꽂히며, 그의 몸이 뒤로 튕겨져 나갔다. 엄청난 괴력이 실린 일격에 한참을 날아가서 바닥을 이리저리 구른 상문여가 어이가 없다는 눈빛으로 물었다. "어, 어째서?" "그런 거짓말은 양손에 공력이나 숨기고 말하셨어야죠." "그, 그걸 어떻게?" 상문여가 놀란 나머지 말을 더듬었다. 공력이 외부로 표출된 것도 아니었는데 어찌 안단 말인가. 기습 계책이 들키자 전의를 상실했는지 양손에 모아져 있던 공력이 흩어졌다. [적의 양손에 집중되던 에너지가 사라졌습니다. 위협도가 낮아졌습니다.] 실시간으로 위협을 감지해서 알려주는 나노의 능력을 상문여가 알 도리가 없었다. 천여운이 그런 상문여를 향해 냉정한 얼굴로 다가왔다. 자신의 능력으로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인지한 상문여가 두려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미, 미안하다. 이제 정말 거짓말이 아니다. 패배를 인정하마. 그래! 사 단계 시험에 통과했다고 관주님께 말씀드.." -퍽! -우드득! "끄아아아아악!" 상문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천여운의 발이 그의 우측 갈비뼈를 인정사정없이 밟았다. 의무실에서 스무여드레 동안 치료와 운기조식을 병행하여 겨우 나았던 갈비뼈가 고스란히 부러져버렸다.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는 상문여를 천여운이 악귀나찰과도 같은 얼굴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처음부터 그러셨어야죠." 짧은 말이었지만 상문여를 절망에 빠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 말을 끝으로 천여운의 발이 상문여의 왼쪽 갈비뼈를 지그시 내리찍었다. -우드드득! "끄아아아아아악!" 그렇게 반 시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마도관 본관 건물의 일층 관주 집무실. 이번 삼 단계 시험에 대한 결과 보고서 작성으로 관주 집무실에 모여 있던 무공 교두들이 하나 같이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바닥에 누워있는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그는 바로 무공 교두 상문여였다. "쯧쯧." 집무실 책상에 않아 있는 좌호법 이화명이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눈이 뒤집혀서 기절해 있는 상문여를 데리고 온 것은 칠 번 생도인 천여운이었다. 경비무사들과 함께 상문여를 짊어지고 나타난 천여운은 관주의 집무실에 그를 내려다놓고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얘기해 주었다. '그렇게 벼르더니 저질렀군.' '생도를 상대로 복수를 생각하다니....어리석어.' 무공 교두 중의 일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양자의 말을 전부 들어봐야 사정을 알 수 있겠지만, 이 일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보였다. 어차피 사 단계 시험을 치르려면 무공 교두와 겨뤄야 했다. 무공 교두인 상문여가 계략을 꾸며서 강제로 기습을 한 것이라면 교두 해임감이었고, 천여운이 먼저 도전한 것이라면 정상적인 사 단계 시험을 치른 것이었다. '.....적절하게 조절했군.' 설사 상문여가 악의적으로 기습했다고 해도 만약 팔을 자르거나 심하게 보복을 했다면 사정을 모르는 무공 교두들의 반감을 샀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천여운은 약게도 다쳤어도 표가 잘 나지 않게 그의 양쪽 갈비뼈만 몽땅 부러뜨려 놓았다. '제법 약아졌어.' 이제는 상황 판단을 적절히 할 줄 안다는 의미였다. 내심 이런 부분을 칭찬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무공 교두들 앞에서 그 말을 하면 입장이 난처하기에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말없이 지켜보던 선임 교두 호진창이 입을 열었다. "어찌 되었든 합격은.....합격이군요." 그 말에 동의하는지 이화명 역시도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대 마도관 전 기수를 통틀어 최단시간 안에 사 단계 시험을 통과한 것이었다. 삼 단계 시험이 끝난 당일 날에 반 시진 만에 무공 교두를 쓰러뜨렸으니 기록을 세웠다고 할 수 있었다. '훗, 어차피 시간문제라고 생각했으니.' 초절정 고수인 호진창을 무릎 꿇리고, 역혈마공을 사용하는 사파 죄수마저 쓰러뜨릴 정도의 무위가 상승한 천여운이었다. 이화명이 집무실 책상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천여운에게 던졌다. "받아라." -탁! "이건?" 은색 패에 대(隊)라고 음각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대주의 신분을 상징하는 패였다. 좌호법 이화명이 천천히 그의 앞으로 걸어와 가슴에 붙여있는 검은색 번호 명찰을 떼면서 말했다. "사 단계 시험을 최 단기간에 조기 합격한 것을 축하한다. 천여운 대주." 마도관에 입관한지 불과 두 달째가 되는 날. 천여운은 생도를 지칭하는 번호에서 자신의 이름을 되찾고 대주의 직위를 얻었다. 어쩌다보니 치른 사 단계 시험의 쾌거라 할 수 있었다. '아! 삼 층과 사 층의 청옥석 비석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천여운을 기쁘게 한 것은 천마검공의 삼, 사 초식을 익힐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마도관 본관의 이 층 의무실. 의무실을 담당하는 의원인 백종명이 들 것에 실려온 무공 교두 상문여를 내려다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니. 그렇게 빨리 퇴원하려던 사람이 며칠이나 되었다고. 쯧쯧" < 26장 어쩌다 보니 (2) > 끝 < 27장 시험의 자격을 갖춰라(1) > 마도관의 규칙상 생도들은 일정 기간 동안 주어진 번호로 불린다. 그 번호가 해지되는 것은 사 단계 시험을 통과하여 대주의 직위를 받고나서 부터이다. 대주의 직위부터는 무공 교두와 동일한 위치로 인정받게 된다. 마도관에서 생도들이 기를 쓰고 시험을 통과하려고 하는 것은 기존의 방식보다도 빠르게 높은 직위로 향할 수 있는 등용문이기 때문이었다. -탁! "자 여기 있네." 무공 교두 임평이 마룡단이 들어있는 작은 목함을 넘겼다. 연이어 사 단계 시험에 통과하면서 마룡단을 하나 더 지급 받게 되었다. "시험에 합격한 것을 축하하네. 천 대주." 임평의 말이 평소와 달리 존대를 해주었다. 생도를 대하는 태도가 아니라 직위로서 인정해주는 말투였다. "감사합니다. 교두님." 임평이 흡족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이렇게 빠르게 사 단계 시험을 통과하리라곤 그 역시도 예상하지 못했다. 물론 상문여라는 변수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사 단계 시험은 기존의 시험을 통과했을 때보다 두 가지 혜택이 더 있었다. 지금까지 조별로 생활해온 것과 다르게 개인 숙소가 지급된다는 것이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자네, 많이 좋아하는 군?" 대주의 직위 패를 받았을 때보다 더 좋아하는 천여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장 여자인 문규와 한 숙소를 지내면서 늘 불편한 마음이었던 그였다. 다른 하나의 혜택은 의외의 것이었다. "내일 사시(巳時) 초까지 마도관의 북쪽 대장간으로 오게." "대장간이요?" 의아한 표정을 짓는 천여운에게 답을 한 것은 선임 교두 호진창이었다. "사 단계 시험에 통과한 대주에게는 교에서 원하는 무기를 제작해주네. 자네에게는 가장 필요한 혜택인 듯하군. 허허허." 절정의 경지에 이른 고수는 어디를 가든 대접받는다. 마도관에서도 사 단계 시험을 통과하고 대주가 된 생도들에게는 전용 무기를 주조해준다. 자신만의 독문 무기가 없었던 천여운에게 있어서 좋은 소식이 아닐 수가 없었다. "아아!" 매 단계 별로 시험을 통과하는 생도들에 대한 지원은 확실했다. 차기 후기지수 겸 고수를 양성하기 위한 과정인 만큼 혜택의 폭이 커지고 있었다. 그렇게 모든 혜택을 받은 천여운에게 좌호법 이화명이 말했다. "그럼 오 단계 시험에 대해서 알려주겠다." 처음 한 번만 공대를 해준 후로 다시 원래의 말투로 돌아온 이화명이었다. 대주가 되었다고 해도 호법과는 직위의 격차가 크기 때문에 특별히 불만은 없었다. '오 단계 시험이라....' 벌써 오 단계 시험에 대해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오 단계 시험부터는 난이도가 완전히 달라져서 통과한 자가 드물다고 들었다. 절정의 극에 오른 덕분에 사 단계 시험은 쉽게 통과할 수 있었지만, 과연 오 단계 시험은 무엇일까? "오 단계 시험은 봉마동(封魔洞)을 통과하는 것이다." 봉마동이라는 말에 천여운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삼 단계 시험이 통과해서도 생도들에게 개방되지 않은 곳 중 하나였다. 마도관의 길을 따라서 북쪽 끝으로 가면 한 허름한 건물 앞에 봉마동이라 적혀 있는 비석이 있었다. "오 단계도 시험도 기간에 상관없이 언제든지 시험을 볼 수 있는 겁니까?" "물론이다. 단지 오 단계 시험을 위해서는 자격이 필요하지." "자격이라면?" 천여운의 물음에 이화명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말해주었다. "완숙한 초절정의 경지에 올라야만 가능하다." 완숙한 초절정이라는 말에 천여운이 놀랐는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아무래도 매 단계 별로 높은 경지를 요했다는 것으로 추측을 하긴 했지만 설마 정말로 초절정의 경지를 요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완숙한 초절정의 경지라면 지금보다도 세 단계를 넘어서야 가능했다.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교에서도 백 위권에 속하는 강자들만이 초절정의 경지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그 깨달음을 얻기가 얼마나 극악한지를 알 수 있었다. 오 단계를 통과한 자가 매 기수별로 열 명을 넘긴 사례가 극히 드물기에 이번만큼은 많은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마도관의 사 년이 끝날 동안도 불가능할 지도 몰랐다. '......어렵구나. 이번 시험은 정말 오래 걸릴 지도 모르겠다.' 대체 오 단계 시험인 봉마동을 통과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기에 초절정의 경지마저 올라야 하는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작은 조언을 하자면 조급해하지 마라. 깨달음은 조급할수록 찾아오지 않는다." 좌호법 이화명의 이 조언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이었다. 마도관의 제 일의 목적은 고수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초절정의 고수가 많이 나올수록 마교가 더욱 부강해지는 것이기에 천여운이 그 경지에 도달하기를 바랐다. "이것으로 시험에 대한 공지는 끝이다. 그럼 무운을 비마." "감사합니다.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천여운이 감사의 포권을 올렸다. "그럼 이제 나가도록." 이화명의 말에 무공 교두들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천여운 덕분에 잠시 쉬고 있던 업무를 계속 이어나가야 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오 단계 시험에 대한 이야기를 전부 듣게 된 천여운은 마도관의 본관 건물을 빠져나와 곧장 북동쪽에 있는 마도관의 비급 서재 건물로 향했다. '드디어 삼 층과 사 층을 볼 수 있게 되었구나.' 다른 모든 혜택을 통틀어 천여운이 제일 관심 있어 하는 것은 오직 청옥석 비석에 있는 천마검공의 남은 초식들이었다. "호오." 비급 서재 건물 앞에서 방명록을 작성하는 무공 교두가 천여운을 알아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검은 명찰을 지닌 소교주 후보자였고, 당시에 연달아서 일, 이 층의 비급 서재를 열람했기에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응? 이 녀석 명찰을 두고 오다니.' 방명록 담당 교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도관 내에서 생도들은 자신의 신분을 상징하는 명찰을 반드시 차고 다녀야 했다. 방명록을 작성하려는 천여운에게 교두가 제지하며 말했다. "명찰은 어디에 두고 온 게냐." "반납했습니다." "뭐? 그렇다면 시험에 통과하지 못했다는 말이냐?" 명찰을 반납했다는 말에 교두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를 탈락했다고 오해한 모양이었다. 천여운이 품속에 가지고 있던 은색 패를 꺼내서 방명록 담당 교두에게 보여주었다. "엇?" 대(隊)라고 새겨진 은색 패에 방명록 담당 교두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것이 대주를 상징하는 패임을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서, 설마 사 단계 시험을 통과했나?" "방금 전에 통과했습니다." -웅성웅성! 천여운의 대답에 주변에 있던 경비 무사들을 비롯해 서재 입구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중이던 생도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삼 단계 시험이 끝난 지 고작 반 시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사 단계 시험을 통과한 자가 나타났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치, 칠 번 생도 아냐?' '미친! 진짜 사 단계 시험을 통과한 거야?' '삼 단계가 끝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통과를 해?' '거짓말 아니야?' '저기 패를 봐! 교두님들이 가지고 있는 은패야!' 은패를 들고 있는데도 모두가 믿기지 않는지 서재 건물 앞이 소란스러워졌다. 마도관에서 근무하면서 세 기수의 생도들을 지켜보았는데, 이렇게 빠른 통과를 본 적이 없었던 방명록 담당 교두였다. '허어....정말 대단하구나. 고작 두 달 만에 사 단계라.' 지난 번 기수 때 최고 빨랐던 생도가 입관 다섯 달 만에 사 단계를 통과했다. 확실히 소교주 후보자들은 다르다고 여겨졌다. -탁! "천 대주께 실례를 범했소." 방명록 담당 교두가 포권을 취하며 사과의 인사를 했다. 대주의 직위를 받았다면 이제 교두들과 동급의 직위였기에 존중해야 했다. 교두가 포권을 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주변에 있던 생도들은 이것이 거짓이 아님을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 삼 층부터 먼저 열람해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시게." 천여운은 삼 층 방명록에 기록을 한 후에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초를 받아서 삼 층 서재로 올라갔다. 생도들이 그런 천여운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사 단계를 통과한 것도 그랬지만 사 층 비급 서재는 절정의 무공들로 가득 찬 보고(寶庫)였다. 삼 층 서재로 올라온 천여운은 초의 금을 살펴보았다. '두 시진이라.' 이 층 때보다도 열람 시간이 늘었다. 무공의 비급서는 그 경지가 높은 것일수록 훨씬 양이 두껍고 내용도 복잡해지기에 외우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노가 있는 천여운에게는 시간제한에 큰 의미는 없었다. 얼마나 많은 양의 비급서를 확보하느냐가 관건일 뿐이었다. 삼 층 비급서재에는 삼 단계 시험을 통과하고 곧장 이곳으로 달려온 생도들로 가득했다. 그 중에는 고왕흘, 백기, 허봉 등과 같은 천여운의 수하들도 있었다. 그들은 바닥에 앉아서 비급서를 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천여운은 한결 들 뜬 마음에 곧장 비급 서재의 가운데로 달려갔다. '있다.' 예상대로 비급 서재의 한 가운데에는 앞면에는 시조가 적혀 있고, 뒷면에는 수많은 검흔들이 난잡하게 그어 있었다. 그런데 뒷면의 검흔들이 일, 이 층의 청옥석 비석에 비해서 더 많이 그어진 느낌이었다. '더 난잡해 보이는데.' 아무래도 자세히 분석해봐야 알 것 같았다. 일단은 열람 시간에 제한도 있고 주변의 이목이 많았기에 스캔부터 했다. '나노, 비석의 검흔들을 추출해서 저장해 놓아.' [알겠습니다.] 청옥석 비석의 검흔들과 시조를 스캔한 천여운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밑에 층에서 했던 것처럼 일류 무공 비급서의 스캔에 나섰다. '그럼 시작해보실까.' 천여운이 책장에서 비급서 한 권을 뽑아서 빠르게 종이를 넘기기 시작하자, 비급을 외우느라 고요했던 비급 서재에 책을 넘기는 소리들이 울려 퍼졌다. -사라라라라라라락! '또 야!' '이 자식은 진짜!' 책장을 넘기는 천여운의 주변에 앉아 있던 생도들의 표정이 일제히 일그러졌다. 전에도 같은 봉변을 당했던 터라 생도들은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그때는 겹치는 시간이 반 시진 뿐이라 괜찮았는데, 이제는 한 시진 하고도 반을 버텨야 했다. '망했다.' '빌어먹을.' 본의 아니게 오늘도 천여운은 많은 생도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말았다. 일각이 지났을 무렵 정신없이 비급서를 스캔하던 천여운은 자신의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응?' 대부분의 생도들이 그를 피해서 비급 서재의 반대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차마 그를 내쫓을 수 없었던 생도들의 고육지책이었다. 그렇게 두 시진 동안 일류 무공의 비급서를 백칠십구 권을 스캔할 수 있었다. 이 층에서 스캔했던 권수보다도 훨씬 많은 양이었다. 개중에서는 천여운이 얼핏 살펴보아도 쓸 만한 무공들이 껴있어서 가볍게 익혀두면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이제 사 층인가.' 삼 층 열람을 마친 천여운은 곧장 사 층의 비급서재로 올라갔다. 반 시진 씩 늘어났던 아래 충의 비급 서재들과 달리 사 층은 세 시진 동안 열람이 가능했다. 사 층의 비급 서재는 생도들이 없었기에 비교적 한산했다.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서재의 평수가 줄어들었기에 아래층 보다는 책장의 숫자도 적었고, 비급서도 다 합쳐도 사백여 권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교에서도 상위 종파에서나 익히는 절정의 무공 비급서들의 양이 그리 많을 리가 없었다. 사 층에 있는 비급서들의 대부분은 높은 경지를 목표로 하는 고절한 무공들이었기에 그 개체수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군데군데 비어있는 책장들을 보면 아직까지 수집 중인 듯 했다. '일단 청옥석 비석부터 스캔하자.' 다른 절정의 무공들보다도 중요한 것은 천마검공의 제 사 초식과 검마의 파훼초식이었다. 비급 서재의 한 가운데에는 역시 청옥석 비석이 자리하고 있었다. '엇?' 검흔을 스캔하기 위해 청옥석 비석의 가까이로 다가간 천여운의 눈이 커졌다. 청옥석 비석의 군데군데가 금이 가있었고 모서리 부분이 잘려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깨끗한 단면은 검초에 의해 베여나간 흔적이었다. '왜 이렇게 손상이 간 거지?' 천여운이 의아한 눈빛으로 뒷면의 검흔들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뒷면의 검흔들이 지금까지와 다르게 선들이 더욱 깊게 파여져 있었고, 난잡하게 덮여있는 흔적들이 거칠기 짝이 없었다. 나노 역시도 비슷한 결론을 내렸다. [검흔에 가해진 힘이 다른 청옥석 비석에 남겨진 혼적보다 두 배 이상 강해졌습니다.] '이러면 더 궁금해지잖아!' 당장에라도 입체영상을 가동해서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급하게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연공실에 가서 분석하더라도 늦지 않다. 천여운은 호기심을 억누르고 청옥석 비석을 스캔만 해두었다. '자! 이제 비급서 차례인가.' 무엇부터 스캔을 할지 둘러보던 천여운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아래층들과 달리 사 층의 비급서는 분류가 총 세 종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가장 많은 양인 이백여 권의 비급서는 본교의 상위 종파의 절정의 무공 비급이었는데, 나머지 이백여 권은 정파와 사파에서 강탈해온 비급서였다. '점창파의 유운검법, 곤륜파의 태청기공, 화산파의 매화검법, 맹광파의 광오권....' 수백 년에 걸쳐서 수집된 정사 무공들이었다. 그 문파의 최고 절기들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이 절정의 무공 비급서들이었다. 물론 이렇게 강탈된 무공들은 각 파에서 많은 보완을 했겠지만 알아둬서 도움이 안 될 것들은 하나도 없었다. '나중에 정사의 고수들과 겨룰 때 도움이 되겠지. 후우, 먼저 본교의 비급서부터 스캔을 시작해볼까. 아!' 상위 종파의 무공 비급서를 책장에서 뽑던 천여운이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여기 무공들을 굳이 나만 알 필요가 없잖아.' 상위 종파에서나 익히는 절정의 무공들을 중소 종파 출신의 수하들에게 익히게 한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생각만 해도 즐거워지는지 천여운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 27장 시험의 자격을 갖줘라(1) > 끝 < 27장 시험의 자격을 갖춰라(2) > -사라라라라락! [소림용조수 비급서가 스캔이 완료되었습니다.] -사라라라라락! [곤륜파의 태청기공이 비급서가 스캔이 완료되었습니다.] 나노의 목소리가 쉴 새 없이 머릿속을 울리며 스캔이 완료 되었음을 알렸다. 확실히 세 시진이라는 시간은 굉장히 길었다. 얼마나 책을 스캔했는지 천여운 본인도 가늠할 수 없었다. 다른 생도들이었다면 대부분의 시간을 비급서를 달달 외우는데 시간을 소요했을 것이다. 그만큼 사 층에 있는 비급서들은 무림에서도 상위 급에 속하는 절정의 무공들이었다. 쉬지 않고 비급서들을 스캔하던 천여운이 초를 살펴보았다. '아! 거의 다 됐구나.' 녹아내리는 초의 높이가 어느새 금까지 거의 다 내려와 있었다. 얼마나 스캔했는지 궁금해졌다. '나노, 여기서 몇 권 정도 스캔했어?' [총 이백사십오 권을 스캔했습니다.] '분류로 나누면?' [천마신교로 분류된 비급서는 백십이 권, 정파로 분류된 비급서는 팔십삼 권, 사파로 분류된 비급서는 오십 권이 스캔되었습니다.] '....쉬지 않고 했지만 정말 많이도 스캔했네.' 천여운이 스캔한 양은 그저 많다는 수준을 넘어섰다. 그는 현재 움직이는 비급 서재라고 불러야 할 만큼 방대한 무공 비서를 가졌다. 어떤 의미로는 한 종파나 문파의 수준을 넘어서 맹 급의 세력이 보유한 양에 버금간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얻을 건 다 얻었구나.' 사 층 서재에 있는 비급서의 절반 이상을 얻었으니 충분했다. 뿌듯한 얼굴로 서재 건물 바깥으로 나오니, 날이 저물고 깜깜하게 어두워져 있었다. "많이 늦었네. 천 대주." "아!" 촛불을 넣는 진열장 앞에서 대기 중이었던 방명록 담당 교두였다. 그리 표정이 좋지 않았다. 원래는 해시(亥時) 중엽에 갔어야 했는데, 유일한 열람자인 천여운을 기다리느라 아직까지 퇴근하지 못했던 그였다. "벌써 자시(子時) 중엽이네. 숙소로 돌아갈 시간이네. 가세나." "시간이 이렇게나....죄송합니다." 처음으로 숙소로 들어가는 시간을 한 시진이나 초과해버렸다. 방명록 담당 교두는 천여운을 크게 탓하지 않았다. 사실 그 역시도 사 층 열람실로 보낸 후에서야 자신이 시간 계산을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아.....개인 연공실은 내일로 미뤄야 겠구나.' 마룡단의 섭취와 천마검공의 후반부 초식을 전이 받는 것은 내일로 미뤄야 했다. 그렇게 숙소로 돌아온 천여운은 잠을 자지도 못하고 오매불망 걱정하면서 기다렸던 수하들을 타박을 들어야만 했다. "주군. 제발 늦어지게 된다면 언질이라도 해주세요." ".....으음, 미안하다." 충성심이 두터운 허봉조차도 섭섭했는지 한 소리가 나왔다. 숙소 시간으로 복귀해야하기 전까지 마도관 곳곳을 돌아다니며 천여운을 찾아 헤맸던 수하들이었다. 이제부터는 마도관 시험이 개인전으로 이루어지기에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나 타 생도들의 기습이라도 받은 것은 아닌가 걱정했던 그들이었다. "열람 시간이 이렇게 길어질 줄은 몰랐다." "저희도 같이 있었는데 무슨 소리이십니까?" "시간 계산을 잘못했다. 사 층 비급 서재의 열람 시간은 세 시진이라..." "네에에에에?" "사 층에 있었다고요?" 천여운이 사 층 열람실에 있었다는 말에 모든 수하들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 말은 사 단계 시험을 통과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었다. "주군.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타박을 하던 수하들이 백팔십도 태도가 바뀌어 천여운의 사 단계 시험 통과를 자신들의 일인 것처럼 기뻐했다. '대단하다. 하루 만에 마도관의 사 단계 시험을 통과하다니! 어쩌면 천 공자가 제일 유력한 소교주 후보일 수도 있겠다.' 문규 역시도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 동안 천여운을 지켜보면서 대단하다고는 생각했지만, 계속해서 자신의 예측을 넘어서는 모습에 점점 그에 대한 신뢰와 기대감이 커져가고 있었다. 천여운이 다음 날이면 개인 숙소로 옮긴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수하들은 아쉬운 마음에 밤늦게까지 그와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헤에. 사 단계를 통과하면 개인 숙소를 지급한다고?' 이 사실을 알게 된 문규가 사 단계 시험을 통과하게 되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게 된다. 다음 날 아침 사시(已時) 초, 사 단계 시험을 통과한 혜택으로 무기를 제작해준다는 말에 들뜬 마음에 일찍 북쪽 대장간에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는 천여운이었다. '독문 무기라...'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가지고 싶었다. 그렇게 반 각 정도가 지나고, 대장간으로 머리를 흰 두건으로 두르고 있는 한 중년인이 나타났다. 허리에 두르고 있는 가죽 주머니에 담긴 쇠망치와 공구들을 보니, 이곳 대장간을 담당하는 대장장이인 듯 했다. 일찍 나와 있는 천여운을 발견한 중년인이 너스레를 떨며 다가왔다. "오! 최단 기간 안에 사 단계를 통과했다는 우리 천 대주가 아니오." "오셨습니까?" 첫 대면이기에 천여운이 공손하게 포권을 취했다. 그런데 살짝 떨어져있을 때는 몰랐는데, 가까이 다가온 그의 모습은 보통 사람들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까무잡잡하게 그을린 피부에 눈썹부터 시작해 전신에 털 한 올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뜨거운 화덕 앞에서 무구를 주조하다 보니, 털들이 전부 타들어간 모양이었다. "직업상 어쩔 수 없다오. 하하하핫." 천여운의 눈빛에서 그것을 읽었는지 중년인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중년인은 자신을 구야자의 후손인 구선용이라고 밝혔다. "구야자!" 춘추 시대의 사기를 읽었던 천여운 역시도 익히 들어온 이름이었다. 구야자(歐冶子)는 춘추 시대 월나라 사람으로 어장검의 장인이었다. 그가 평생 동안 만들어왔던 검의 절반이 명검으로 불리고 있으며, 그 명검들은 호랑이마저 단칼에 벤다고 할 만큼 명성이 두터웠다. 무림인들마저 탐낸다는 거궐(巨闕)과 담로(湛虔), 순구(純鉤), 승사(勝邪), 어장(魚腸), 용연(龍淵)과 태아(奉阿), 공포(工布) 등과 같은 명검은 전부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장인의 신이라 불리는 구야자의 후손이라는 말에 천여운의 눈이 반짝였다. "하하핫! 그렇게 보지 말게나. 그분의 후손이 한 둘도 아니고, 나는 구야 선조처럼 그리 뛰어난 재능을 지니지 않았다네." "그래도 그 훌륭한 기술이 어디 가겠습니까?" "천 대주가 사람 보는 눈이 있군. 내 최선을 다해서 무구를 주조해드리리다." 듣기 좋은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구선웅이었다. 구선용이 천여운의 등허리에 교차하듯이 차고 있는 검집과 도집을 보며 물었다. "검과 도를 전부 쓰나 보구려?" 검과 도를 다 같이 쓰는 고수는 마교 내에서도 극히 드물었다. 하나의 무기를 대성하기도 힘든 판국에 두 가지 무기를 동시에 가지고 있으니 궁금해 할 만도 했다. "그렇습니다. 둘 다 제작이 가능할까요?" 그 말에 구선웅이 고개를 저으며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미안하네. 무구는 하나만 제작이 가능하네." "아, 그렇군요." "두 가지 무기를 쓰니 고민이 될 수밖에 없겠군. 자네는 어떤 무기를 원하는가?" 구선웅의 말에 천여운이 잠시 고민하다가 검을 선택했다. 접무도법보다는 천마검공을 쓸 수 있을 만한 무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천마검공을 썼을 때, 검에 금이 갔으니 이게 더 우선이겠지.' 처음에는 몰랐었는데 역혈마공을 썼던 괴인을 상대로 천마검공을 펼치고 나서 나중에 살펴봤는데, 검신에 미세한 금들이 가있었다. 그 정도라면 천마검공의 이 초식을 펼쳤다면 검이 부서졌을 것이다. "호오, 그것 참 좋은 생각이네. 사실 내가 주 전공이 도보다는 검 주조일세."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검을 주조하기 전에 자네의 검법을 보아도 되겠나?" "네?" 검법을 보여 달라는 말에 천여운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에게 맞는 검을 주조하려면 검법을 보아야 검신의 면적이나 강도 등을 정하지 않겠나?" "아아아! 알겠습니다." 구선웅의 말에 납득한 천여운이 등허리에 검을 뽑았다. -챙! 마도관에 보급되어 있는 평범한 검이었다. 천여운이 검을 쥐고 기수식을 취했다. "호오." 기수식을 취한 것만으로 기세가 날카로워지자 구선웅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천여운이 이어서 천마검공의 일 초식을 펼쳤다. -촤촤촤촤촤촥! 스물네 개로 이루어진 고절한 초식이 허공에 화려한 궤적을 그리며 파공음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초식은 끝났지만 검력의 여파가 남아, 바람이 일어나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솨아아아! "끝났습니다." 천여운의 말에 구선웅이 눈이 풀려 멍하게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꽤 놀랐는지 어안이 벙벙한 모습에 천여운이 물었다. "이 정도면 됩니까?" "허어...." 구선웅이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걸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검을 주조하는 것은 불가능할 듯하네." "네? 불가능하다뇨?" "잠시 그 검을 줄 수 있겠나." 천여운에게서 검을 받아든 구선웅이 가죽주머니에서 망치를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검에 망치를 내려치는 것이 아닌가. "무슨?" -쨍그랑! 그 순간 망치에 부딪친 검신이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내려친 부위만 부서진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금이 나있었는지 검신이 전부 부서졌다. 사람을 상대로 검초를 펼친 것이 아니었기에 괜찮으리란 예상과 달리 검신이 버티지 못했던 것이다. "자네의 검초는 평범한 검이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니네." 구선웅이 천마검공의 검초를 보면서 놀랐던 이유였다. 검초의 위력이 너무 강했기에 평범한 검이 버틸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럼 검을 튼튼하게 주조해주시면.." ".....기술로 메울 수 있는 부분이 아니네." "그렇다면?" "자네의 그 검 초식을 견디려면 적어도 한철로 검을 주조해야 하네." "한철!" 그러고 보니 우호법 섭맹의 광무도 역시도 한철로 주조되었다고 들었다. 한철(寒鐵)은 북해의 차가운 기운을 머금은 금속으로 일반적인 철보다도 그 강도가 월등히 단단하다. 구선웅은 한철의 수량은 한정적이고 값이 나가기 때문에 교내에서도 백 위권 내에 드는 단주 급의 고수들에게만 지급해준다고 하였다. "아......" 검을 가지고 싶었던 천여운에게는 비보라 할 수 있었다. 천마검공의 위력이 강하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렇다면 검을 얻기 위해서는 오 단계 시험을 통과하고 단주의 자격을 가지는 수밖에 없었다. "쩝." "미안하네. 자네의 그 대단한 검 초식을 보고나서 나도 장인으로서 열의가 불타올랐는데...." 아쉬워하는 천여운에게 구선웅이 심심찮은 위로를 했다. 결국 구선웅은 차선으로 도를 주조해주기로 하였다. 다행인 것은 접무도법을 보고나서 이것은 자신의 주조 기술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도를 만들 수 있다고 장담하였다. "도병은 그렇게 하고, 도신의 폭이 얇고 최대한 가벼운 도면 되겠나?" 확실히 구선웅은 뛰어난 장인이 틀림없었다. 초식을 본 것만으로도 설명해주는 도의 모양이 섭맹의 광무도와 흡사했다. 검을 얻지 못해서 아쉬웠지만 도라도 제대로 된 것을 얻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보름 뒤에 가지러 오게나." "감사합니다." "아니네. 꼭 자네에게 검을 주조해줄 날이 오길 바라겠네." 오 단계 시험에 통과해서 단주가 되기를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구선웅이었다. 그렇게 대장간에서 볼 일을 마친 천여운은 곧장 격세석 연공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음에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연공실 건물에 들어서자 평소보다 인기척이 많이 느껴졌다. '절정에 오른 생도들이 꽤 늘었구나.' 절정의 초입부터는 격세석 연공실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개인 연공실에서 이곳으로 넘어온 생도들의 숫자가 꽤 늘어났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열 명 정도에 불과했는데, 문에 사용 중이라고 붙여있는 호실이 열다섯을 넘어갔다. 생각해보면 얼마 전에 고왕흘이나 호상화도 절정의 초입에 올랐으니, 앞으로 그 숫자가 더 늘어날 것이다. 사 단계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완숙한 절정의 경지에 올라야 하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과 이들은 목표점이 달랐다. '초절정의 경지에 올라야 한다.' 오 단계 시험을 치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갖춰야했다. 인원이 늘어난 격세석 연공실의 상황 덕분에 더욱 의욕에 차오른 천여운이었다. 연공실 안으로 들어온 천여운이 가부좌를 틀고 않아서 품속에서 작은 목함 두 개를 꺼냈다. 삼 단계, 사 단계 시험을 연달아 통과하면서 지급받은 마룡단이었다. "흠." 여전히 지독한 약내를 풍기는 두 개의 영단을 보며 천여운은 고민에 빠졌다. "하나씩 복용해야 하나? 아니면 두 개를 동시에?" 이 같은 경우는 처음이었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렇다고 한 번씩 따로 복용한다면 두 번의 흡수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시간도 오래 걸리고 생각보다 번거로웠다. ".....에라 모르겠다." 결국 천여운은 입 속에 두 개의 마룡단을 동시에 집어넣었다. 하나만 씹어도 고통스러운데, 입 속 가득히 휘젓는 지독한 쓴맛에 천여운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갔다. -꿀꺽! 잘게 씹은 마룡단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천여운이 자리에 일어나서 검식을 펼치며 천마검공의 심법을 운기하며 나노에게 명했다. '나노, 마룡단의 약효가 흡수되도록 보조해줘.' 그러자 나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체내로 강한 에너지 활성을 돕는 물질이 대량으로 유입되었습니다. 사용자의 체내 십사경맥(十四經脈)의 특정 혈(穴)로 순환하고 있는 에너지와 호응하여서 증식하는 속도가 굉장히 빠릅니다. 에너지가 흩어지는 것을 막고 신진대사를 높이면, 혈이 과도하게 팽창하여 고통이 심할 수도 있습니다.] 굉장히 아플 수도 있다는 나노의 친절한 경고였다. '젠장.' < 27장 시험의 자격을 갖줘라(2) > 끝 < 27장 시험의 자격을 갖줘라(3) > 마룡단을 처음 만든 사람은 독마종의 개파 종주인 백유였다. 만독주(萬毒主)라 불렸던 백유는 독만큼이나 약재의 달인이었다. 그는 처음 마룡단을 만들 당시에는 수많은 착오를 거쳐야만 했다. 사람마다 개개인에 상관없이 모두가 영단을 가장 안정적으로 체내에 흡수되는 최적의 양을 찾기 위해서였다. 호흡, 즉 운기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내공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약효를 통해 내공을 늘리는 과정은 얼마큼 내공을 많이 쌓게 만들기 보다는 얼마큼 안정적으로 내공을 쌓게 만드느냐가 관건이었다. 지금의 마룡단은 체내의 혈에 부담을 주지 않는 최적의 상태라 할 수 있었다. 그런 마룡단의 정해진 양을 넘어서 두 개를 동시에 집어삼켰으니, 천여운의 체내의 경맥에 흐르는 기운들이 폭주하는 것도 당연했다. -주르륵! 천여운이 식은땀을 흘려가며 천마검공의 심법을 행하고 있었다. 더욱 큰 효과를 보기 위해 천마검공의 검식을 펼치면서 심법의 운기를 하고 있었지만, 좌식으로 하는 것보다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끄윽!" 절로 고통의 신음이 흘러나올 정도였다. 평소에 혈자리로 흐르던 내공의 배가 되는 양이 빠른 속도로 순환을 하는 것이었기에 찢겨져 나가도 이상하지 않았다. -푸슉! 천여운의 등목 쪽에서 피가 솟구쳤다. 그러나 터져나간 혈자리 부위는 비정상적인 속도로 빠르게 재생해 아물었다. [대추혈(大椎穴)이 파열된 것을 수복시켰습니다.] 대추혈은 독맥(督脈)의 한 곳이다. 혈자리가 팽창해서 찢겨나간 곳은 나노머신들이 빠르게 세포를 분열시켜 상처 부위를 수복시켰다. 다른 생도들이 이런 짓을 했다면 혈자리가 전부 찢겨나가 죽었을 지도 몰랐다. 나노머신들은 바쁘게 움직이며 천여운의 신진대사를 촉진 시키는 것 외에도 면역력을 제어해서 약효가 십 할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였다. '크윽! 무천심법으로 할 걸 그랬나.' 후회를 해도 이미 늦었다. 천마검공의 심법은 무림에서도 세 손가락에 꼽히는 절세 운공법이었다. 운기의 속도가 여타의 심법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일어나니, 그 공능이 무천심법의 두 배 이상이었다. -투투투툭! '끄으으으윽!' [신주혈, 영대혈, 지양혈, 척증혈, 현추혈이 팽창해서 파열했습니다. 바로 수복 시켰습니다.] 혈자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찢겨져 나갔다. 순간 정신을 잃을 뻔 했지만 나노가 빠르게 수복시키면서 겨우 견뎌냈다. 조금만 방심했다가는 운기를 하다가 기절할 판국이었다. '견뎌야 해. 견뎌야 해!' 여기서 버티지 못한다면 내공이 늘어나기는커녕 모든 것이 무산되고 만다. 천여운은 독하게 마음을 잡아먹고 심법을 행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스스스스스! 이때 천여운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의 체내의 혈자리들이 팽창하여 찢겨나가고 수복되는 것을 반복하면서, 점차 증식하는 기운을 감당할 만큼 굵고 단단해져 갔다. 그렇게 두 시진의 시간이 흘렀다. 격세석 연공실 전체가 열기로 가득했다. 천여운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수증기가 연공실 전체를 가득 메웠다. 오랜 시간 동안 스물네 개의 검식을 반복적으로 행하며 천마검공의 심법을 운기하던 천여운의 움직임이 드디어 끝이 났다. -털썩! 다리에 힘이 풀려버린 그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운기를 하는 내내 땀에 흠뻑 젖어있던 얼굴은 더 이상 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체력 소모가 심했는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하아.... 하아...." 눈을 감고 한참 동안 호흡을 고르던 천여운이 어느 정도 숨이 돌아왔는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천여운의 안광이 더욱 짙어지고, 관자놀이의 태양혈이 불룩하게 올라와 있는 모습이 내공에 있어서 성취를 얻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죽을 뻔 했다.' 영약 한 번 잘못 먹었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게 된 천여운이었다. 다시는 욕심내서 무리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되는 계기였다. '얼마큼 내공이 늘었나 확인해볼까?' 이론적이라면 마룡단 하나는 이십 년의 내공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천여운의 경우 처음 복용했을 때, 우호법 섭맹의 도움과 나노의 보조로 마룡단의 최대 효과인 삼십 년에 육박하는 내공을 얻었었다. 본래라면 마룡단을 섭취할수록 내성이 생겨서 그 효과가 많이 줄어들어야 했지만 이 역시도 나노머신이 내성을 조절해서 흡수율을 최대한 높일 수 있다. 두 번째 마룡단을 흡수했을 당시에 이십이, 삼년의 내공을 얻었었다. '나노가 도왔으니, 계산대로라면 사십 년을 조금 넘는 내공을 얻어야 하는데.' 제발 계산만큼의 내공을 얻기를 바랐다. 그래야 초절정의 경지로 오를 수 있는 토대를 쌓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천여운이 간절한 마음으로 운기를 통해 단전의 내공을 확인해보았다. "엇?" 단전의 내공을 확인한 천여운의 두 눈이 커졌다. 자신이 착각한 것이 아닐까 다시 한 번 확인해보았지만 분명 늘어나는 내공 수치가 동일했다. '이럴 수가.....한 갑자가 늘다니....' 놀랍게도 천여운의 내공은 일 갑자(60년)가 늘어났다. 눈에 띨 만큼 관자놀이의 태양혈이 불룩해진 것도 내공이 크게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벌어진 일이었는데 쉽게 믿기 힘들었다. 이것은 단순히 나노의 도움만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공이 흩어지는 것을 최대한 막고 빠르게 운기 하도록 돕는 천마검공의 심법이 이루어낸 공능이라 할 수 있었다. '내공을 전신으로 운기 해보자.' 온 몸으로 내공을 운기 하는 순간, 내공이 늘어 난 것 이상으로 더욱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마룡단을 섭취하면서 평창했던 전신의 십사경맥의 혈들이 지금까지보다도 굵어지면서 내공의 흐름이 훨씬 원활해졌다. 이 정도라면 초식을 펼칠 때의 공력이 두 배 이상의 위력을 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해보자!" 자리에서 일어나 검기를 일으켰다. -우우웅! 손에 기(氣)를 집중하는 순간 선명한 빛의 검기가 훨씬 두껍고 길이가 두 배로 길어졌다. 이 정도만 본다면 초절정 초입의 고수인 호진창보다도 검기가 강해보였다. 그것은 당연했다. 호진창의 내공이 이 갑자인(120년) 반면에 천여운은 이 갑자 반(150년)이었으니 발산되는 기운에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기에 대한 근본적인 깨달음이 다를 뿐이었다. 호진창은 검기를 더 세밀하면서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는 검사(劍絲)가 가능했다. 여기서 완숙한 초절정의 경지로 나아간다면 검기를 집밀 시킨 검강(劍罡)을 발산할 수 있다. 하지만 초절정의 극에 이르지 않는다면 내공면에서 검강은 효율성이 떨어지기에 원활하게 사용하기는 힘들다. "토대를 닦는데 성공했다." 천여운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 깨달음만 받쳐준다면 언제든지 초절정의 경지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생도들이 세 번째 마룡단을 섭취하면서 그 효과가 4할 가량이 떨어져, 많아도 십 년에서 십이 년의 내공을 얻는 것을 생각한다면 괴물 같은 성과라 할 수 있었다. 내공만으로는 마도관에 있는 생도들 중에서 누구도 그를 따라잡을 수 없는 위치에 서게 된 천여운이었다. "후후, 이제 천마검공의 후반부를 익혀볼까." 기분 좋은 마음으로 천마검공을 익힐 수 있게 되었다. 천여운은 삼 층의 청옥석 비석에 있는 시조에서 초식의 내공 운기법을 추출한 후에 나노에게 천마검공의 삼 초식과 검마의 파훼검초 삼 초식을 전이해달라고 하였다. [알겠습니다. 사용자의 뇌로 두 개의 초식을 전이하도록 하겠습니다.] 머릿속이 따끔해지며 초식에 대한 정보가 전이되었다. 이제는 완전히 적응 되서 어지럽거나 하는 별다른 후유증은 없었다. 두 검초를 전이 받은 천여운의 표정이 묘해졌다. '나노, 혹시 파훼검식이 몇 초식 만에 천마검공을 파훼했어?' [파훼검식이 천마검공의 세 번째 초식을 아흔세 번째 만에 파훼했습니다.] '아흔세 번?' 총 아흔세 번이나 초식을 분석하고 연구해서야 겨우 꺾었다는 말이었다. 일 층에 있던 청옥석 비석에서는 마흔다섯 번의 초식 변화를 통해서 꺾었고, 이 층에 있던 비석에서는 쉰여섯 번의 변화를 통해서 천마검공의 제 이 초식을 꺾었다. '그래서 앞전보다도 훨씬 비석이 난잡했구나.' 비석에 있던 검흔들이 더욱 난잡했던 이유가 있었다. 그 말은 천마검공의 초식이 앞의 두 초식보다도 훨씬 위력이 강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검마의 파훼초식마저도 힘겹게 꺾은 세 번째 초식이 궁금해졌다. '나노 그럼 천마검공의 세 번째 초식을 육체로 전이할 수 있어?' [현재로서 한계에 이르렀습니다. 더 이상의 근맥 및 근육의 전이는 사용자의 육신의 성장에 방해가 될 수 있기에 권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할 수 있는 거야?' [지금의 신장으로 만족하신다면 가능합니다.] "으음...." 더는 신장이 자랄 수 없다는 말에 천여운이 신음을 흘렸다. 머릿속에 전이는 받기는 했지만 완벽하게 몸으로 펼칠 수 없다는 것이 아쉬웠다. [현재의 육신으로 무리가 가지만 한 번 정도는 초식을 펼칠 수 있습니다.] '그래?' 한 번이라도 초식을 펼칠 수 있다면 시험이라도 해보고 싶었다. 일 초식보다도 이 초식이 훨씬 위력이 강했는데, 과연 세 번째 천마검공의 초식의 위력은 어느 정도일까? 천여운이 검지와 중지를 모아 검결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천마검공의 삼 초식을 펼쳤다. -촤촤촤촤촤촤촤촥! 천여운의 검결지가 허공을 가르며 스물네 개의 검식이 화려한 궤적을 그리며 폭풍과도 같은 기세의 삼 초식이 발했다. 그 위력이 어찌나 강한지 초식을 펼치는 짧은 찰나에 전신의 근육이 욱신거렸다. 육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검초였다. "크윽!" -쿵! 초식을 마친 천여운이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바닥에 한 쪽 무릎을 꿇었다. 무리하게 초식을 펼치면서 근육이 파열된 것이었다. 확실히 천마검공의 초식은 육신으로도 전이 받지 않는다면 펼치기 힘들었다. "아....." 통증 때문에 몰랐는데 자신의 주변을 바라본 천여운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천여운의 주변의 격세석 바닥에 날카로운 검흔들이 회오리를 치는 모양으로 뚜렷하게 패여 있었다. "이런 위력이라니...." 검기를 실은 것도 아니었는데, 검 초식에서 일어난 검력과 날카로운 예기가 격세석 바닥에 흔적을 남길 정도로 위력이 컸던 것이었다. 천마검공의 삼 초식의 위력은 일이 초식보다도 훨씬 강했다. 이 정도라면 의도적으로 살초로 쓰지 않더라도 어지간한 고수는 일 초식 만에 목숨을 잃고 말 것이다. '아흔세 번이나 늘어난 이유가 있구나.' 파훼초식을 만든 검마가 일이 초식보다도 애를 쓸 만도 했다. 천마검공의 삼 초식이 이 정도라면 검마의 파훼초식 삼 초식의 위력은 어떨까? 파열된 근육을 나노가 회복시키자 천여운은 이어서 파훼초식의 삼 초식을 펼쳐보았다. -촤촤촤촤촤촤촥! 검초를 펼치고 나자 앞서 천마검공의 삼 초식을 펼쳤을 때 보다는 육체에 무리는 가지 않았지만, 초식이 워낙 복잡해서 호흡이 벅찼다. "헉...헉....역시 대단하다." 그 자리에서 그대로 초식을 펼쳤는데, 바닥에 남은 검흔들은 천마검공의 삼 초식이 남겼던 검흔들을 일그러뜨려 놓았다. 확실하게 파훼했다는 증거였다. 검마의 파훼초식을 익힐 때마다 느낀 것은 평범한 검식을 조합해서도 이런 위력의 검초를 꺾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일이 초식에 비해서는 확연하게 익히기 힘들어졌다. 검식의 조합이 너무 복잡해져서 머릿속에 전이받은 그조차도 호흡이 벅찰 정도였다. 평범한 검수들이 익힐 수 있는 한계점이었다. '세 번째 초식을 이렇게 힘들게 깼다면 과연 네 번째 초식은 얼마나 힘들게 꺾었을까.' 적어도 두 자리 수는 넘어갔을 것이다. 덕분에 네 번째 초식들이 더욱 궁금해진 천여운이 나노에게 명했다. '나노, 사 층 청옥석 비석에 있는 초식들도 전이해줘.' [알겠습니다.] 완벽하게 익힐 수는 없다고 하지만 미리 전이 받는다고 나쁠 것은 없었다. 나노가 사 층 비급서재의 청옥석 비석에 새겨져 있던 천마검공의 제 사초식과 파훼검초의 사 초식을 머릿속으로 전이해 주었다. -찌릿찌릿! 두 초식을 모두 전이 받은 천여운의 표정이 굳어졌다. 뇌 속에 새겨진 덕분에 심상으로 두 초식을 그릴 수 있게 되었는데 이상했다. 아무리 떠올려 보아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지금의 경지로는 직접 펼칠 수는 없으니, 아무래도 증강현실로 봐야 할 것 같았다. '나노.....입체영상으로 두 초식이 겨루는 것을 보여줘.' [알겠습니다. 사용자의 시각 정보에 증강현실(增强現賁) 개안(開眼)합니다. 두 검 초식 동작을 대치 모드로 입체영상을 가동하겠습니다. ] -솨아아아! 그 말과 함께 천여운의 동공이 빠르게 흔들리며, 흰 빛의 입자들이 선을 그리며 증강현실로 개안되었다. 개안된 증강 현실 속에서 흰 빛의 입자가 반짝이며 두 명의 사람 형태로 나누어졌다. 두 흰빛의 형태로 이루어진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하더니, 이내 천마검공의 제 사초식과 파훼검초의 사 초식을 펼쳤다. -촤촤촤촤촥! 두 검초식이 부딪치자 하안 입자들이 사방으로 튀며 눈이 부셨다. 순식간에 초식 대결의 결판이 났다.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결과에 천여운이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비겼어." 놀랍게도 검마의 파훼초식은 천마검공의 제 사 초식을 꺾지 못했다. < 27장 시험의 자격을 갖춰라(3) > 끝 < 28장 폐관 수련(1) > 몇 번을 입체영상을 구동시켜보아도 같은 결과였다. 천마검공의 제 사초식을 파훼검초가 꺾지 못하고 무승부로 이어졌다. 한 가지 이해하기 힘든 것은 마지막 검식이 부딪칠 때, 천마검공의 검식이 회전을 가미하면서 검력에 극에 이르렀는데 그것을 막아냈다. '나노, 청옥석 비석에 남아있는 파훼초식이 몇 초식까지 남아있었어.' [백삼십 회 가량 검흔이 완성되었고, 마지막 검 초식의 스물 네 번째 검식에서 비석의 모서리를 베어냈습니다.] '아....'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청옥석 비석을 베어내려면 그저 검에 공력을 싣는 것만으로 불가능했다. 강기(罡氣)를 집밀 시켜야 가능하다. 마지막 검식은 평범한 식이 아니라 강기의 정수가 담겨 있었기에 그 엄청난 검력을 막아낸 것이었다. '단순한 검식으로는 한계가 있었다고 판단했구나.' 두 검 초식을 머릿속에 집어넣은 천여운이었기에 알 수 있었다. 천마검공 제 사초식의 마지막 검식에 실린 기세는 평범한 검식의 조합으로 막아낼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났다. '그래서 무승부로 끝맺었구나.' 청옥석을 베어낸 마지막 일 식에 담긴 거친 투박함은 일종의 분노였을 것이다. 천마검공의 마지막 일 식을 꺾지 못했다는 분함이었을 지도 몰랐다. 무인으로서 굉장한 자존심이었다. 천마조사보다도 몇 세대 뒤의 인물이 과거의 절대자를 상대로 검흔으로 대결을 청하고 그것을 자신의 생각대로 꺾지 못했다며 분노하는 게 대단했다. '그만큼 몰입했다는 의미겠지.' 천여운은 두 절대자들 간의 검(劍)의 대결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아직까지 이 분들의 검 초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지도....' 처음 초식을 익혔을 때와 절정의 극에 이르렀을 때 검 초식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듯이 더 높은 경지로 오를 때마다 이해도가 달라질 것이다. 어쩌면 자신은 천마검공이나 파훼검초의 일각만 보는 것일 지도 모른다고 여겨졌다. "후우.' 천여운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심상으로 초식을 살펴본 결과 천마검공의 사 초식이나 파훼 초식은 육신의 성장뿐 만이 아니라 더 높은 무공의 경지를 필요로 했다. '결국 무위를 높여야 하는 건가.' 막상 들뜬 마음에 천마검공의 삼, 사 초식을 머릿속에 전이 받았지만 정작 무위가 받쳐주지 않아서 펼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오 단계 시험이든, 독문 무기를 얻는 것이든, 천마검공의 후반부 초식까지 전부 얻기 위해서는 초절정 경지로 올라야 했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오르고 싶다고 해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더 높은 경지로 오르기 위해선 이분들처럼 무공에 몰입해야 할지도 모른다.' 초절정의 경지에 대해서 아직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 좌호법 이화명은 더 높은 경지로 향하는 것에 대한 집착을 가지지 말라고 하였다. 서두른다고 될 문제는 아닌 것이 틀림없었다. '더욱 길게 보자. 지금처럼의 방법으로는 깨달음에 한계가 있다.' 그 동안 천여운은 나노의 도움을 통해서 남들보다는 빠르게 강해졌지만 더 높은 경지는 육신의 강화나 뇌 속의 전이만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반 시진 가량 고민에 빠져 있던 천여운은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폐관에 들어가자.' 그 결정은 바로 폐관 수련이었다. 사 단계 시험부터는 개인적으로 이루어졌고, 고수를 양성하는 기간이었기에 개방되지 않았던 폐관 연공실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구금동에 있을 때 절박한 환경에서 연이은 훈련은 천여운을 이레 만에 절정의 극에 이르게 만들어주었다. 천여운은 무공을 익힘에 있어서 그만큼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환경을 충족시켜주기에는 폐관 연공실의 수련이 가장 적합했다. '폐관에 들어간다면 그 전에 할 일이 있다.' 이번에 폐관에 들어간다면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지 못한다면 나오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 전에 수하들도 챙겨야 했다. 마도관이 끝맺음이 날 때까지 그의 기반을 닦아놓아야 했다. 혼자서 강해져서 여섯 종파를 상대하기에는 수백 년에 걸쳐 서 쌓아온 그들이 가지고 있는 힘은 마교의 사 할에 해당한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었다. '같이 강해져야 해.' 적어도 자신에 미치진 않더라도 수하들 역시도 그에 상응할 만큼 성장해줘야 한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무공만으로는 성장에 한계가 있을 것이다. 상위 종파 출신인 육검(六劍)들처럼 뛰어난 무공을 가지고 있지 않은 수하들이었다. '종이에 전부 베끼려면 시간이 걸리겠지.' 삼 단계 시험에 통과해서 남은 수하들은 총 서른네 명이었다. 그들이 익힐 수 있는 절정의 무공들의 사본을 만들려면 꽤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확실하게 준비하자!' 천여운은 곧바로 연공실을 나가서 마도관의 비품 담당 교두를 만나러 갔다. 다시 연공실로 들어을 때는 삼백 장에 가까운 종이와 많은 먹과 붓을 챙겨왔다. "아니. 무슨 필사를 하는데 이만큼이나 필요하다는 거요?" 사 단계 시험을 통과해서 대주의 신분을 얻었기에 마도관의 비품을 마음껏 쓸 수 있게 되었기에 주기는 했지만 담당 교두는 이해하지 못했다. 이유를 말해줄 수 없기에 천여운은 대충 얼버무리고 받아왔다. "으음, 꽤 오래 걸리겠지?" 이렇게 짐작은 했지만 그만큼 긴 시일이 소요될 줄은 몰랐다. 보름 동안 식사와 수면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필사하는데 투자해서야 원하는 양의 비급서를 전부 옮겨 적을 수 있었다. "후아!" 쉬지 않고 보름 동안 글만 적으니 손가락에 굳은살이 박였다. 쌓여있는 비급서 필사본의 숫자가 백이 권이었다. 이 정도로 많이 썼으니 당연히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절정의 무공 비급서이기 때문에 한 권씩만 주어도 충분할 텐데, 이렇게 많은 양을 필사한 이유가 무엇일까? 한 명씩 비급서를 받는다면 세 권씩 받을 수 있는 양이었다. "이제 모으기만 하면 되겠군." 삼 단계 시험이 끝난 후로 천여운이 수하들과 만나는 시간은 오직 저녁 식사 때였다. 사 단계 시험부터는 개별적으로 진행되기에 대부분의 생도들은 개인 연공실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것은 천여운의 수하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각자가 따로 식사를 해도 될 만도 했지만 수하들 간에 동료애를 쌓아야 한다는 고왕흘과 허봉, 자우민 등의 주장으로 저녁 식사만큼은 함께 모여서 하게 되었다. 유시(酉時) 무렵, 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어김없이 천여운의 수하들이 마도관의 식당 앞으로 모여들었다. 시끌벅적한 식사를 마친 후, 천여운은 수하들을 이끌고 예전 자신의 조가 모여 있는 숙소로 모이도록 했다. 뭔가 중요한 공지가 있다는 말에 수하들은 영문도 모른 채, 숙소로 모였다. 먼저 기다리고 있으라는 말과 함께 수하들은 오랜만에 정담을 나누듯이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얼마 있지 않아 천여운이 나타났다. 그 양손에는 백 권이 넘는 필사본 서적이 들려 있었다. "헉!" "주군, 도와드리겠습니다!" 많은 양의 필사본 서적을 내려놓는 것을 허봉과 진국이 그를 도왔다. 바닥에 서적을 내려놓은 천여운이 서른네 명의 수하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모두에게 공지할 게 있다."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할 것 같은 분위기에 수하들이 집중했다. "나는 내일부터 폐관에 들어간다." "네에?" 폐관 수련에 들어간다는 말에 대부분의 수하들이 꽤 놀란 반응을 보였다. 사 단계 시험에 통과하고 나서, 다음 단계를 통과하기 위해 초절정의 경지에 올라야 한다는 말을 천여운에게 듣긴 했지만 벌써 폐관에 들어갈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주군, 혹시 계획해두신 기한이 있으십니까?" 어느 정도 수련을 예상했던 고왕흘이 손을 들어 물었다. "솔직히 얘기하면 기간을 정해두지 않았다. 일 년이 될 지, 이 년이 될 지는 만족할 결과를 얻을 때까지라고 밖에 말해줄 수가 없다." 기한을 정해놓고 그 안에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은 무리였다. 맨땅에 머리를 박는 느낌으로 폐관에 들어가는 것이었기에 빠르게 성과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결의가 담긴 천여운의 눈빛에 고왕흘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부디 주군께서 원하시는 성취를 얻길 바랍니다." -탁! 고왕흘이 포권을 취하자, 얼떨결에 백기를 비롯한 수하들 전체가 같이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더 높은 경지를 위한 폐관 수련을 누가 반대하겠는가. "원하시는 성취를 얻길 바랍니다!!!" 어차피 이것은 주군인 천여운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 역시도 사 단계 시험을 통과하고 나면 폐관 수련에 들어가야 할지 몰랐다. 마도관에서 통과한 사람이 역대 기수를 통틀어 열 손가락에 꼽힌다는 육 단계 시험을 제외한다면 실질적으로 마지막 시험이 바로 오 단계였다. 그 만큼 오랜 시간 동안 수련과 공을 들여야만 했다. "고맙다. 그 전에 너희들에게 숙제를 주려고 한다." "네?" 훈훈했던 분위기가 천여운의 숙제라는 말에 일제히 냉각되었다. 수하로 들어오기는 했지만 여태까지 뭔가를 특별히 지시하거나 했던 적이 없던 천여운의 숙제는 대체 무엇일까? 허봉이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주군....숙제라하시면?" "내가 폐관에 나올 때까지 모두 두 가지 숙제를 달성해라. 이건 부탁이 아니라 너희들에게 내리는 명령이다." "명령!" 근엄함이 담겨있는 천여운의 목소리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군으로서의 명이라면 당연히 따라야 했다. "내가 폐관에 나올 때까지 모두 사 단계 시험을 통과해라." "모, 모두요?" 평범한 무도 가문 출신인 진국이 위축된 얼굴로 반문했다. 삼 단계 시험도 운이 좋아서 겨우 통과했는데, 과연 혼자서 사 단계 시험을 어찌 치를지 감당이 되지 않았다. 일류 무공만으로 절정의 고수인 무공 교두들을 꺾는 것은 불가능 그 자체였다. 진국뿐만이 아니라 무공이 비교적 낮은 작은 종파의 수하들 역시도 안색이 어두워졌다. 반면 육검 등과 같은 상위 종파의 수하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답변했다. "명을 받듭니다!" 가장 크게 답한 것은 눈치가 없는 우소정이었다. 육검은 모두가 절정의 무공 경지에 올랐기 때문에 천여운의 명을 달성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지도 몰랐다. '좋은 취지이긴 하지만 기를 죽이는 것 같은데.' 아무 말은 하지 않았지만 채택겸이 의기소침해진 허봉이나 마칠, 진국 등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들도 사 단계를 통과하고 싶겠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부담을 주는 것일지도 몰랐다. "다음 숙제는 바로 이것이다." -탁탁! 천여운이 바닥에 쌓여있는 필사본 서적을 손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아까부터 이 서적들이 무엇인지 궁금해 했던 수하들이었다. "내가 주는 무공 비급서들을 전부 익혀라." "네?" 무공 비급서라는 말에 수하들이 일제히 의아한 눈빛으로 서적을 바라보았다. 빳빳한 새 종이인 것을 보면 분명 필사본이 틀림없었는데, 설마 무공 비급서일 줄은 몰랐다. '설마?' 문규가 뭔가 눈치 챘는지 두 눈이 커졌다. 최근 들어서 보름 동안 저녁 식사 때마다 천여운이 손목이나 옷에 먹물을 묻히고 와서, 문규가 가볍게 놀린 적이 있었다. '에이, 천 공자님! 뭘 그렇게 묻히고 다니시는 거에요? 얼굴에도 묻었어요.' '......필사할 게 있어서.' 그녀가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자 얼굴을 붉히며 대충 얼버무렸던 천여운이었다. 그때는 그런 반응이 재미있어서 먹물에 대해선 별 생각이 없었다. '저걸 전부 필사했던 거야?' 꽤나 고생을 했을 것 같았다. 혼자서 연공실에 박혀서 저 많은 양의 종이에 필사를 하고 있을 천여운을 떠올리니, 피식하고 웃음이 나오기도 했고 안쓰럽기도 했다. '부탁하셨으면 도와드렸을 텐데.' 반면 고왕흘이나 채택겸은 다른 쪽으로 추측했다. '설마 주군께서 사 층 비급 서재에서 얻으신 무공을 공유하시려는 건가?' '아무래도 주군이 무공이 낮은 수하들을 위해서 절정의 무공을 필사하신 게 틀림없다.' 두 사람은 내심 천여운의 세심한 씀씀이에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얻은 무공을 다른 이와 공유한다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었다. 칠마검과 같은 마교인 모두가 익혀야 하는 소양 무공도 아니었고, 비급 서재 사 층이라면 절정의 무공이 아닌가. "호명해주는 순으로 받아가라. 먼저 허봉." 첫 번째 수하인만큼 제일 먼저 챙겨주는 천여운이었다. "넵!!! 주군!" 허봉 역시도 무공 비급서라고 추측했는지 번개같이 달려왔다. 기대감으로 눈이 반짝거렸다. 그런데 천여운이 그의 손에 쥐어주는 것은 한 권의 필사본이 아니라 세 권이었다. "응?......아아앗!" 필사본을 받아든 허봉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런 반응에 생도들 모두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두 눈이 큼지막하게 커진 허봉이 떨리는 손으로 필사본의 겉장에 적혀있는 무공 명을 중얼거렸다. "환검종(幻劍宗)의 환영검법!" "화, 환검종의 검법?" 환검종의 환영검법이라는 말에 모든 수하들이 일제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교 내에서도 사십 위권에 드는 상위 종파의 무공이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헉! 주, 주군 이건...." 허봉이 말문이 막혀하자 답답해진 오종이 그를 보챘다. "허봉! 대체 뭘 주셨기에 그러는 거야? 속 시원하게 말해봐." "화, 화산파의 낙영검법이랑 단철방의 단철각(斷徹脚)!" "뭐어어어어!!!" 어찌나 놀랐는지 오종이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반문하고 말았다.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두 무공은 각기 정파와 사파의 절정의 무공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무림에 출두한 적이 없는 생도들이라고 해도, 구파 일방에서 검으로 유명한 화산파나 사파에서도 악명이 높은 단철방을 모를 리가 없었다. -웅성웅성! 조용해야 하는 숙소였는데도 수하들이 시끌벅적해졌다. 상위 종파의 무공 비급서만으로도 놀라웠는데, 설마 정파와 사파의 무공의 비급서까지 필사해서 나왔을 줄은 몰랐다. "주, 주군! 세 권이나 필사를 하신 겁니까?" 평소에 말을 잘 더듬지 않는 고왕흘조차 놀라서 말을 더듬을 정도였다. 절정의 비급서라 한 권을 외워서 나오기도 힘들었을 텐데, 설마 수하들을 위해서 세 권이나 필사해서 나왔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본교의 무공만으로 부족할 수도 있다. 나중을 위해서라도 정파와 사파의 무공 비급도 익혀라." 천여운이 한 사람당 세 권씩 필사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마교의 무공만 익히기보다는 좀 더 다양한 시각에서 무공을 접해보라는 의미였기도 했고, 무림으로 나아갈 훗날을 위해서였다. "주군!!!" 감격한 허봉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큰 소리로 외치며 바닥에 엎드렸다. 수하들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챙겨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중소 종파 출신으로 절정의 무공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던 그로서는 감격스러운 마음을 표현할 방법이 이것뿐이었다. -쿵쿵! 바닥에 머리를 세차게 박으며 허봉이 외쳤다. "주군의 하해(河海)와 같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이 한 목숨 바쳐서 강해지겠습니다. 반드시 명하신 것을 달성하겠습니다!" 그 만큼 무공을 연마하는 무인에게 절정의 비급서의 파급은 강했다. 다른 중소 종파 출신의 수하들 역시도 허봉만큼이나 감동했는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아아! 우리 같은 작은 종파 출신들도 이렇게 챙겨주시다니.' '목숨을 바쳐서라도 충성을 다해야지!’ 그의 수하로 들어온 것이 이 순간만큼은 무엇보다 옳은 선택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한 세력을 만들기 위한 기반을 닦는 과정이 충성심마저 높이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보게 된 천여운이었다. 그런데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수하들은 몰랐다. 쌓여 있는 나머지 아흔아홉 권의 필사본들이 전부 다른 무공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 28장 폐관 수련(1) > 끝 < 28장 폐관 수련(2) > 그렇게 허봉의 큰절로 인한 감동의 여운이 가시고, 천여운이 한 명씩 호명해서 필사한 비급서를 주어 차례대로 받아가게 했다. 한 번에 세 권이나 되는 절정의 무공 비급서를 받는 수하들의 입이 귀까지 걸렸다. 진국을 필두로 네 명 정도 되는 수하들이 필사본을 받아갔을 때 그들의 반응이 이상했다. "엇?" "이, 이게 뭐지?" 먼저 비급서를 받은 네 명이 하나 같이 놀라는 표정을 지으니, 자우민이 왜 그런가 싶어서 물었다. "또 왜 그러는 거야?" 자우민의 질문에 진국이 자신이 받은 무공 비급서를 겉장을 내밀었다. 겉장에 적힌 무공 명에는, [비류검종 (飛流劍宗) 비류검법(飛流劍法)] 놀랍게도 그것은 허봉이 받았던 비급서와 달랐다. 검마종 산하의 상위 종파 중 하나인 비류검종의 비류검법이었다. 아직까지 무공 비급서를 받지 않은 수하들이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어안이 벙벙해졌다. "나, 나는 웅패권종의 대웅패권(大熊覇拳)인데?" 진국 다음 순서로 비급서를 받은 마칠이 자신의 비급서를 다른 수하들에게 들어 보였다. 진국과 마찬가지로 다른 상위 종파의 무공이었다. "뭐라고? 웅패권종?" 고왕흘의 입이 벌어졌다. 마교 내에서 권으로 그의 종파인 마권종과 더불어 세손가락에 들어가는 상위 종파의 권법이었다. 현마종 산하에 속해있는 웅패권종은 그 위세가 대단한 곳이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저기.....이 비급서도 다른데." "뭐어어어!?" 네 명이 받은 무공은 전부 다른 상위 종파의 무공 비급서였다. 더군다나 정파와 사파의 무공조차도 완전히 다른 것들이었다. 가령 마칠이 받은 정파의 무공은 구파일방 중의 하나인 청성파(靑城派)의 추운권(追雲拳)이었고, 사파는 운남 흑사문의 무공인 흑풍권(黒風拳)이었다. -웅성웅성! 허봉, 진국, 마칠, 연동천, 고하리 등 다섯 명이 받은 비급서들이 전부 다른 무공인데다 하나 같이 절정의 무공이자 놀라는 것을 넘어서 수하들에게 혼란에 빠졌다. "저, 전부 다른 무공이라니!" "지금 우리가 뭘 보고 있는 거지?" "야......이거 지금 단체로 꿈을 꾸는 거야?" 그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것도 당연했다. 한 권의 무공 비급서를 외우는 것만으로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 처음에 허봉에게 세 개의 비급을 주었을 때조차도 수하를 챙기는 씀씀이보다도 그의 오성이 대단하다고 여겼었다. 그런데 지금 다섯 명에게 준 무공 비급서만 하더라도 열다섯 권이었다. 사 층 비급 서재에서 세 시진이라는 시간 동안에 그 많은 책을 외웠다는 말이 아닌가. '서.....설마?'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순간 몇몇 수하들의 눈동자가 심하게 떨려왔다. 그 중 한 명이 호상화였다. 그녀는 공교롭게도 이 층 서재와 삼 층 서재에서 비급서를 열람하는 동안 천여운과 중복된 시간에 마주칠 수 있었다. 천여운과 같은 시간 대에 서재를 열람했던 이들은 그의 악명을 알고 있었다. 비급 서재의 민폐남. 정작 본인은 그 악명을 모르고 있었지만 생도들 모두가 싫어했다. 한 권의 책을 진득하게 외우지 않고 수많은 비급서를 훑어 보듯이 넘겨대는 통에 호상화조차도 주군이 대체 왜 저러나 싶었었다. '그렇게 성의 없게 책장을 넘기던 게 전부 외운 거라고? 정녕 주군은 천재란 말인가!' 입이 절로 벌어졌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대단한 사건이었다. 이 사실을 무공 교두들이나 마도관의 관주가 알게 되면 대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주, 주군! 설마....이 많은 비급서를 외우셨단 말입니까?" 고왕흘의 질문에 천여운은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수하들의 무위를 높여야겠다는 생각에 많은 필사본을 준비했는데, 생각해보니 이렇게 많은 양의 비급서를 외운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했다. '으음.....별 수 없군.' 뭐 그렇다고 자신의 뇌에 나노머신이 있다는 사실을 누가 알겠는가. 지금으로서는 철면피를 깔고 외웠다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흠흠, 그래." "하아, 정말 대단하십니다. 이건 정말 뭐라고 말씀 드려야 할 지....진심으로 주군께 감탄했습니다!" 고왕흘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했다. 애초에 비급 서재에 시간을 제한하고 외워서 나가게 한 것도 한 생도에게 많은 양의 비급서가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마도관을 통해 후기지수 양성을 위해 상위 종파에서도 자신들이 가진 무공 비급의 일부를 비급서재에 기증했다. 그런데 이 비급이라는 것이 자신을 위해서 하나만 익힌다면 상관이 없겠지만, 각종파의 것들을 다양하게 알게 된다면 그 용도가 완전히 달라져버린다. 그 종파들의 무공을 분석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어느 종파에서 자신들의 무공이 분석되어 약점이 알려지는 것을 원하겠는가. '주군께서 다섯 명에게 주신 상위 종파의 무공들은 전부 여섯 종파의 산하에 속해 있는 종파의 비급서이다.' 처음에는 그저 수하들을 위해서 무공 비급서를 외웠다고 여겼지만 이제는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주군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나는 그저 주군의 일각만을 보았던 거다. 주군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신 것이 틀림 없다.' 천여운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고왕흘은 그렇게 오해해 버렸다. 소교주 쟁탈전에 승리한 후에 여섯 종파와 그 산하의 상위 종파를 상대하기 위한 큰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천여운은 어느 종파가 여섯 종파의 산하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닥치는 대로 스캔을 했을 뿐인데, 공교롭게도 그 비급서의 상당수가 여섯 종파의 산하에 속한 상위 종파의 무공이었을 뿐이었다. '진짜 주군은 괴물이 틀림없어.' ’누가 그 많은 비급서를 다 외운단 말이야.' '지금 네 앞에 계시잖아!' -웅성웅성! "이제 그만들 놀라하고, 비급서들을 받아가라." "넵!!!" 소란스러웠던 분위기가 가시고 수하들이 한 명씩 나와서 무공 비급서를 받아갔다. 전부 다른 무공의 비급서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수하들은 자신은 어떤 비급서를 받게 될지 기대감에 차서 눈을 반짝였다. "감사합니다! 주군 열심히 연마해서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목숨을 바쳐서 주군의 기대에 보답하겠습니다!" 비급서를 받아가는 수하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이것은 상위 종파인 육검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처음부터 절정의 무공을 익혔기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자신들까지 비급서를 챙겨주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헤헤.' 문규 또한 자신이 받은 비급서를 품속에 꼭 챙겼다. 수하들 모두가 받은 것이었지만 천여운이 고생해서 만든 필사본이어서 그런지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모두가 비급서를 받았을 때, 백기가 조용히 천여운에게 전음을 보내서 한 가지 문제를 제기했다. [우리야 원래 익히던 심법이 있어서 그렇다 쳐도, 하위 종파나 무도 가문인 진국 같은 녀석들은 내공심법이 더 필요할 것 같은데.] 백기의 문제 제기는 타당했다. 하위 종파나 무도 가문들이 가장 시급한 것은 내공심법이었다. 그들이 익힌 내공심법은 상대적으로 약한 것들이기에 절정의 공력을 쌓고, 비급서의 무공들을 감당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그때 비급서를 훑어보던 허봉이 뭔가를 발견했는지 놀라서 외쳤다. "주, 주군! 이건 설마 내공심법입니까?" 비급서에 종이 한 장이 끼워져 있었는데, 그것에는 내공심법의 구결이 적혀 있었다. 천여운이 고개를 끄덕이자 백기가 민망해졌는지 시선을 회피했다. 백기가 생각했던 문제를 천여운이 놓칠 리가 없었다. "혼원공(混原功)?" 허봉의 말에 다른 진국도 같은 이름을 말했다. "저, 저도 혼원공인데요?" "어라? 나도 혼원공이야." "나돈데!" "응?" 그 말에 육검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놀랍게도 그들이 받은 내공심법은 전부 같은 것이었다. 전부 다른 무공의 비급서를 주었기에 심법 또한 다른 것을 주었으리라는 예상과 다르게 전부 혼원공으로 통일되었다. '처음 들어봤는데?' '혼원공이 대체 어느 종파의 무공이지.' 육검들이 의아해 했던 이유였다. 그들은 웬만한 상위 종파의 무공들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런데 혼원공은 처음 들어보았다. "아!" 건곤혼원공의 심법 구결을 살펴보던 문규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완숙한 절정의 경지에 오른 그녀는 이 중에서 천여운을 제외한다면 가장 무공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다. '어떻게 이런 심법이 있을 수 있지?' 생각지도 못한 혈 자리로 운기를 하여 내공을 모으는 방법이었다.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자신의 종파인 마룡장종의 내공심법 보다도 더 효능이 뛰어나 보였다. 그것은 다른 육검들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주, 주군! 대체 이 심법은 어디서 찾으신 겁니까?" 채택겸 또한 놀랐는지 토끼 눈이 되어서 물었다. 그의 질문에 천여운이 이걸 어떻게 답변해야 하나 난감했다. 사실 이 심법은 출처는 사 층의 비급 서재가 아니었다. 불과 이틀 전, 천여운은 수하들에게 어떤 내공 심법을 줘야 할지 고민했다. 사 층의 비급서재에는 꽤 많은 내공심법이 있었는데, 전부 뛰어났기에 무엇을 주더라도 지금보다는 월등한 효과를 볼 것은 틀림없었다. 물론 최고라고 한다면 천마검공의 심법이었지만 이것은 천마 조사의 심득이면서 온전히 자신의 것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천여운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노에게 물었다. '나노 그 동안 내공에 대한 분석이 많이 진척되었어?' [호흡을 통해서 생겨나는 에너지에 대한 분석을 계속 진행 중입니다.] '그래?' 아직까지 확실하게 내공에 대한 분석을 마치진 않은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미래의 과학 기술로도 입증되지 않은 에너지이다 보니, 다소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어떤 내공심법이 효과적으로 단전의 에너지를 증식할 수 있는지는 분류할 수 있습니다.] '오! 그래? 그럼 네가 골라 줄래?' [천마검공의 심법이 가장 월등한 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노의 의견에 천여운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거 말고.' 그건 당연히 알고 있는 정보였다. 그 다음으로 뛰어난 내공심법을 골라내려는 것이었다. [다음 순서로는 무천심법이 있습니다.] '아!' 생각해보니 무천심법(舞泉心法)이 있었다. 화경의 경지에 오른 우호법 섭맹의 내공심법이니 오 층 비급서재 급이라고 봐야 했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래도 보류해야 할 것 같았다. '스승님께 무슨 소리를 들으라고....으음.' [다음 순서로는 샘플-37(sample-37)이 있습니다.] '뭐? 샘플이라니? 그런 건 없었잖아.' [일 층의 비급 서재에 있던 내공원류(內攻原類)라는 책의 내용을 분석해서, 일, 이, 삼, 사 층에 있던 내공심법을 참고해서 만든 샘플 심법입니다.] '......너 지금 내공심법을 만들었다고 한 거야?' [호흡 에너지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계속해서 표본 샘플 작업을 거치고 있는데, 만들어진 부산물입니다.] '샘플-37은 대체 언제 만든 건데?' [스무 시진 전에 사 층에 내공심법에 대한 분석이 완료된 후에 참고해서 만들어졌습니다.] "!?" 불과 이틀 전 쯤에 만들어진 내공심법이란 말이었다. 꽤 많이 놀랐는지 천여운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계속해서 내공에 대한 분석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설마 내공원류의 내용을 참고 삼아서 내공심법을 만들어 낼 줄은 몰랐다. '혹시 천마검공의 내공심법도 분석했어?' [동작을 통해 형성되는 운동 에너지와 체내의 호흡 에너지가 결합된 내공심법이라 분석이 완료되지 못했습니다.] 내공원류에는 좌식과 호흡, 토납법을 통한 내공의 분석이 서술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검식을 펼지는 것을 통해 운기하는 방식은 지금의 나노가 가진 정보만으로는 분석이 힘들었다. '그럼 그 생플이라는 심법의 구결을 알려줄 수 있어?' [알겠습니다.] 천여운은 시험 삼아서 나노가 만들었다는 내공심법을 운기해 보았다. 그 결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말도 안 돼.' 나노가 만든 내공심법은 거의 무천심법에 버금갈 만큼 뛰어났다. 더군다나 어떤 의미로는 무천심법보다 뛰어나다고 할 수 있었는데, 내공을 운기하는 방식이 매우 안정적이었다. 체내의 혈도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만들어진 내공심법이었다. 이런 내공심법이라면 어떠한 무공과도 잘 호응할 수 있을 게 틀림없었다. '좋아. 이걸로 하자!' 고민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비급 서재의 내공이 아닌 나노가 만들어진 내공심법을 선택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샘플이라는 이름으로 줄 수 없기에 천여운이 내공심법의 이름을 작명했다. '이름을 뭘로 하지?' 작명 감각이 없던 천여운은 처음에 나노삼칠공(喇勞三七功) 이라고 지었다가 이건 아니다 싶어서 이름을 바꾸었다. 무공원류를 바탕으로 심법들을 섞었다는 의미에서 혼원공(混原功)이라 하였다. "주, 주군! 대체 이 심법은 어디서 찾으신 겁니까?" "혼원공은........사 층 비급 서재에서 찾았다." 천여운은 이 같은 사실을 말할 수 없었기에 결국 비급 서재를 핑계로 거짓말을 했다. "역시 비급 서재에는 숨겨진 보물들이 많군요!" 재택경이 흥분된 목소리로 답하자 고왕흘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예전에 사라진 상위 종파의 심법 같네." 마도관의 비급 서재에서 찾은 심법이라고 하니, 의심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설마 혼원공이 불과 며칠 전에 탄생한 내공심법이라고 누가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내공심법에 대한 것도 마무리가 되고나서 천여운은 생도들에게 당부했다. "나눠준 비급서들은 내일 안에 숙소에서 전부 외우고 파기 하도록 해라." "넵!!!” 이렇게 많은 비급서들을 가지고 있는 모습을 다른 생도들이나 무공 교두들이 보았을 때 문제가 될 것을 염려한 탓이었다. "그리고.....육검들에게 따로 부탁이 있다." "부탁이라뇨. 마음껏 하명하십시오." 호쾌한 고왕흘의 대답에 천여운이 차례대로 육검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소 부족한 동료들이 있다면 너희들이 무공을 익힐 수 있도록 도움을 줬으면 한다." 아무래도 일류 무공조차도 익히기 벅차하는 수하들도 있었기에 비급서를 읽는 것만으로 익히기 벅차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래도 육검들은 상위 종파였기에 어릴적부터 절정의 무공을 익혀왔기에 다른 생도들보다는 무공에 대한 이해력이 높았다. "걱정 마십시오. 같은 동료끼리 돕는 것은 당연합니다." "....알겠다. 걱정하지 말고 폐관에 집중해라." "가르치는 것도 일종의 수련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고왕흘과 백기, 재택경의 대답에 천여운이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써 폐관 수련에 들어가기에 앞서 수하들의 문제는 해결 한 셈이었다. 이렇게 준비를 마치고 나니, 과연 자신이 폐관을 마치고 나왔을 때 얼마나 수하들이 성장해 있을지 기대가 되었다. "그럼 무운들을 비마." "넵!!!" 절정의 무공 비급서로 수하들을 설레게 했던 밤이 지나고 천여운은 다음 날 일찍 폐관 수련에 들어갔다. 이 날 배웅하러 나온 수하들 중에서 누구도 천여운의 폐관 기간이 이렇게 길어지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 28장 폐관 수련(2) > 끝 < 29장 주군이 돌아왔다(1) > 폐관 수련의 첫째 날. 마도관의 북서쪽에 자리한 폐관 수련 건물이 있다. 그곳의 뒤편 공터에서 천여운은 무공 교두인 상문여를 꺾고 사 단계 시험을 통과했다. 폐관 건물에는 육십 호실이 있었는데, 이번 기수에서 가장 첫 번째로 사용을 신청한 생도가 바로 천여운이었다. 호실 안으로 들어가서 살펴보았다. 공간의 크기는 격세석 연공실보다 약간 넓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숙식을 해결할 수 있도록 짚단으로 만든 침구와 벽곡단이 들은 항아리, 외부에서 물이 흐르도록 연결해 놓은 식수대가 있었다. -촤르르! 항아리 안에 들은 벽곡단을 손으로 휘저어서 살펴보니, 몇 년을 꼬박 먹을 만큼의 양이 들어 있었다. 마도관의 사 년 기간에 맞춰서 가져다 놓은 듯 했다. '많이 달라고 했더니 확실하네.' 만족스러운 성과를 거둘 때까지 폐관 수련을 하겠다고 했더니, 확실하게 준비해주었다. 그 만큼 초절정의 경지로 오르기 위한 기간이 오래 걸릴 지도 몰랐다. '흠. 그럼 계획적으로 수련을 시작해볼까?' 초절정의 경지가 어떠한 것인지 막연하기 때문에 무작정 수련을 하는 것보다는 계획을 짤 필요성이 있었다. 천여운은 시간을 세 번으로 배분하였다. 오전, 오후, 밤으로 나누어 전부 다른 수련을 하기로 하였다. '오전에는 초식 수련, 오후에는 증강현실의 아바타와 대련, 밤에는 심법을 운기하자.' 효율적으로 분배를 한 천여운은 바로 수련을 시작했다. 가장 먼저 한 것은 마도관의 사 층 비급 서재에 있던 절정의 무공들을 전부 뇌 속에 전이 받았다. 총 이백사십오 개의 절정의 무공이었다. 그 양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전부 전이 받는데, 두 시진이 꼬박 걸렸다. 다행인 것은 천마검공보다 수준이 확연하게 낮았기에 육체 전이를 굳이 받지 않더라도 무공들을 펼치는데 전혀 무리가 없었다. '아.....' 그러나 막상 머릿속에 무공을 전이 받고 나자,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상위 종파의 무공이기는 하나 이미 그보다도 월등히 높은 무공인 접무도법, 천마검공, 파훼검법에 비하면 수준이 낮았다. 다만 검과 도에서 그치지 않고 권법, 장법, 각법, 편법, 부법, 창법 등 다양한 무공을 체득했기에 무(武)에 대한 근본적인 시야는 넓어졌다. -오도독! 점심 식사를 위한 벽곡단을 씹어 먹으며 천여운은 첫 아바타를 선정했다. 더 이상 예전처럼 천무금을 상대할 필요가 없었다. 그보다도 훨씬 뛰어난 아바타들을 확보했기 때문이었다. 첫 상대를 정했다. '나노, 증강현실 개안. 아바타는 천유찬.' [알겠습니다. 사용자의 시각 정보에 증강현실(增强現宜) 개안(開眼) 가동. 시물레이션을 위한 아바타를 생성합니다. 대상 모델 천유찬.] 나노의 목소리가 울리면서 천여운의 동공이 떨리며 증강현실이 개안되었다. 그리고 눈앞에 흰 빛의 입자들이 모여들어 사람의 형태를 이루더니 이내 천유찬의 모습으로 변했다. 시작은 한 명의 아바타이지만 그 숫자를 늘리고 난이도도 높여나갈 계획이었다. '최종 목표는 스승님의 아바타.' 폐관 수련에서 나가기 전까지 우호법 섭맹의 아바타를 상대 하는 것이 목표였다. 삼 단계 시험 당시에 사파의 죄수를 상대하던 섭맹의 움직임을 저장해놓았다. "그럼 해보실까!" -팟! 천여운의 신형이 땅을 박차고 나가며 천유찬의 아바타를 향해 쇄도했다. 그렇게 천여운의 긴 폐관 수련이 시작되었다. 천여운이 폐관 수련을 들어간 지 한 달 째, 그 사이에 마도관에서 사 단계 시험을 통과한 생도가 세 명이나 생겼다. 모두가 예상한 대로 두 번째로 사 단계 시험을 통과한 자는 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연이었다. 천무연은 이레 째가 되는 날에 무공 교두를 꺾었다. 만약 천여운이 없었다면 천무연이 역대 마도관의 기수들 중에 가장 빠르게 사 단계 시험을 통과한 기록을 가졌을 것이다. 세 번째로 통과한 생도는 소교주 후보자들에서 나오지 않았다. 마룡장종의 문규가 열흘 째 되는 날에 무공 교두 임평을 꺾고 사 단계 시험을 통과했다. 이 날 생도들은 문규가 팔짝팔짝 뛰면서 좋아하는 모습을 처음 보게 되었다. 개인 숙소를 얻고자 하는 열의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네 번째로 사 단계 시험을 통과한 자는 검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경운이었다. 누구보다 빠르게 통과하려 했던 천경운이었지만 확실하게 무공 교두를 꺾기 위해 신중을 기하면서 기간이 길어지게 되었다. 천여운이 폐관 수련을 들어간 지 두 달 째, 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연이 폐관 수련에 들어갔다. 그를 따라가기라도 하듯 검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경운 역시도 폐관 수련을 신청했다. 문규 역시도 오 단계 시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 폐관 수련의 필요성을 느꼈지만 천여운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에 하위 종파의 수하들에게 무공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두 달이 지나기 전에 또 한 명의 사 단계 시험의 통과자가 나타났다. 그는 천여운의 육검 중에 제 일검인 백기였다. 천여운 산하에서 두 번째 사 단계 통과자가 나타난 것을 수하들은 기뻐했다. 다만 가장 수좌인 제 일검인 데도 불구하고, 제 육검인 문규 보다도 뒤늦게 통과한 것 때문에 백기는 그리 내켜하지 않았다. 천여운이 폐관 수련을 들어간 지 넉 달 째, 복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금이 석 달을 넘긴지 얼마 되지 않아 사 단계 시험을 통과했다. 시험에 통과하고 나서 천무금은 얼마 있지 않아 폐관 수련에 들어갔다. 넉 달이 약간 못 미치는 날에 육검 중에서도 두 명의 새로운 합격자가 생겼다. 제 이검인 고왕흘과 제 오검인 우소정이었다. 고왕흘의 합격은 대부분의 수하들이 예상했던 부분이었지만 우소정의 경우는 의외였다. 육검을 겨루는 자리에서 여자인 호상화에게 패한 것에 유독 충격이 컸던 우소정은 뼈를 깎는 심경으로 부단히 수련해서 먼저 시험에 통과했다. 득의양양해 하는 우소정을 호상화가 한심하다는 듯이 비웃었다. '멍청이.' '내, 내가 왜 멍청이야?' 이상할 만큼 여자 생도들에게 욕을 먹는 우소정이었다. 두 사람이 합격하고 난 후에 마도관의 생도들 중에서도 사 단계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탈락한 생도가 다섯 명이나 발생 했다. 덕분에 한 동안은 교두들에 대한 도전은 없었다. 천여운이 폐관 수련에 들어간 지 일 년 째가 되는 날. 일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가면서 사 단계 시험을 통과한 자들이 우후죽순으로 늘어났다. 다섯 달 째에 남은 육검의 두 명인 호상화와 채택겸 역시 무공 교두들을 꺾고 대주의 패를 받았다. 타 생도들 중에서도 열 명이 넘게 합격자들이 생겨났다. 그 중 한 명이 사무종의 사마착이었다. 여섯 달 째에는 좋은 소식이 있었는데, 드디어 천여운의 수하들 중에서 절정의 초입에 오른 생도들이 생겨났다. 중소 종파에 불과했던 자우민과 오종, 임유환, 공진호이 절정 초입에 이르면서 다른 생도들에게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열 달 째가 넘어갈 때 탈락자가 열다섯 명으로 늘어났다. 물론 합격자도 있었는데 자우민과 임유환이 사 단계 시험에 통과하게 되었다. 딱 일 년이 되는 날에는 천여운의 수하들 간에 새로운 육검을 가리는 비무를 치렀다. 그 결과 육검의 순위가 바뀌게 되었다. 제 일검에 운규. 제 이검은 백기. 제 삼검은 고왕흘. 제 사검은 우소정. 제 오검은 호상화. 제 육검은 채택겸으로 결론이 났다. 백기가 분전을 했지만 끝내 문규를 이기지 못했다. 새로운 육검이 정해진 후에 문규, 백기, 고왕흘은 폐관 수련에 들어갔다. 그들 역시도 오 단계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서 초절정의 경지에 올라야 했고, 천여운의 수하들의 삼 할이 절정의 초입에 올랐기에 안심하고 폐관 수련을 결정했다. 천여운이 폐관 수련에 들어간 지 이 년 째가 되는 날. 그 사이에 생도들의 대다수가 사 단계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백이십 명이 남아있던 생도들 중에서 칠십일 명이 사 단계 시험을 통과하게 되었고, 나머지 생도들은 끝내 무공 교두들을 꺾지 못하고 방출되고 말았다. 서른네 명이었던 천여운의 수하들 중에서 열아홉 명도 방출 명단에 포함되었다. 주군의 명을 이루지 못했다고 시무룩해서 나가는 그들은 훗날을 기약했다. 그렇다고 해도 서른네 명이 모두 절정의 경지를 이룩한 것 만으로도 굉장한 성과라고 할 수 있었다. 제일 장족의 발전을 이룩한 사람은 허봉이라 할 수 있었다. 이 년 새에 그는 완숙한 절정의 경지에 올랐다. 오성이 뛰어나기 보다는 남들보다도 두 배를 이를 악물고 수련을 한 결과였다. '주군이 아직 만족할 만한 성취를 얻지 못 했나 본데요.' '어서 나오시면 좋겠는데.' 이 년이 되었는데도 아직까지 폐관 수련에서 나오지 않는 천여운을 수하들은 궁금해 했다. 아직까지 폐관 수련장에서 나온 자들은 없었지만 많이 지체 되는 느낌이었다. 이 년 사이에 시험에 통과한 생도들의 팔 할이 폐관 수련에 들어가면서 마도관의 기간 중에서 가장 조용한 시기가 찾아왔다. 덕분에 이 년 째 육검을 가리는 승부는 생략되었다. 천여운이 폐관 수련에 들어간 지 삼 년 째가 되는 날. 벌써 사계절의 세 번이나 지나가고 나뭇잎이 붉고 노랗게 물드는 가을이 다시 찾아왔다. 삼 년 째가 되는 해에는 유독 많은 일들이 있었다. 폐관에 들어갔던 모든 생도들이 수련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폐관을 마친 칠십 명의 생도들 중에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생도들은 사 할 채도 되지 않았다. 그만큼 초절정의 경지는 요원했다. 이 년하고도 넉 달 째가 되는 날에 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연은 바로 그 당일 날에 첫 번째로 오 단계 시험인 봉마동을 통과했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무위가 완숙한 초절정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이 년하고도 여덟 달을 넘기지 않고 검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경운과 사무종의 사마착, 연현종의 극신, 마룡장종의 문규, 권마종의 고왕흘, 순각종의 백기 등 여섯 명의 생도가 오 단계 시험을 합격했다. 그 외에도 일곱 명이 도전을 했는데, 전부 봉마동을 통과하지 못하고 말았다. 의외인 점은 이 일곱 명의 탈락자 중에 복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금도 포함되었다. 그런데 이 탈락자들 중에 사망자가 세 명이 발생하면서 그 이후부터는 생도들이 쉽사리 오 단계 시험을 도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삼 년째가 되는 날에 다시 육검을 가르는 승부가 이루어졌다. 지난번과 다르게 폐관 수련을 통해 무공이 상승하면서 모든 수하들이 육검에 도전하게 되었는데, 결과가 완전히 달라져버렸다. 제 일검에 고왕흘. 제 이검은 문규. 제 삼검은 백기. 제 사검은 호상화. 제 오검은 우소정. 제 육검은 자우민으로 결정났다. 폐관 수련을 마치고 난 후에 고왕흘의 무공은 비약적으로 상승해 있었다. 권마종의 무공은 그 경지가 올라갈수록 외공도 뛰어나지는 데, 백기조차도 그의 몸에 타격을 줄 수가 없어서 패하고 말았다. 우소정은 어떻게든 호상화만이라도 꺾어보려 애를 썼지만 폐관을 마치고 나온 그녀는 예전보다도 덩치가 훨씬 커졌는데, 도끼질 한 방에 나가떨어지고 패배를 인정해야만 했다. 그렇게 두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입김이 나올 만큼 차가워진 공기는 알록달록 물들였던 나무들을 앙상하게 만들었다. 겨울이 오면서 이레에 한 번 꼴로 눈이 내릴 만큼 추워졌다. 숙소 뒤편에 있는 산 중턱에는 열세 명의 청년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천여운의 수하들이었다. 삼 년이라는 세월은 소년, 소녀들을 성숙하게 하기에 모자라지 않은 시간이었다. 항상 이곳을 거점 삼아 늘 모여서 같이 수련을 하는 그들이었다. 턱수염을 기른 고왕흘은 약관의 나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다른 생도들을 뛰어 넘는 시간을 보낸 듯하다. "응? 다들 오지 않았나?" 모두가 모인 줄 알았는데, 두 명이 보이지 않자 고왕흘이 의아해했다. 대답을 한 것은 자우민이었다. "아.....아무래도 또 그곳에 간 것 같군." "휴." 자우민의 말에 백기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모여 있는 생도들 중에서 유일하게 보이지 않는 두 명은 문규와 허봉이었다. 주군인 천여운을 기다린 지 삼 년을 넘기고 나서부터, 종종 그들은 폐관 수련 건물을 찾아가곤 했다. 이제라도 나오는가 싶은 간절한 마음에서였다. "그래도 두 명이라도 같이 붙어있으니 다행이네요." 호상화의 말에 고왕흘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두 명이라도 좀 불안하네." "문규가 걱정할 만큼의 실력도 아닌데 별걸 걱정하는군." 백기의 말에 다른 생도들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오 단계 시험을 통과하고 단주의 패를 받은 문규는 마교 내에서도 백 위권에 속하는 실력자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완숙한 초절정 경지의 고수를 걱정할 것은 아니라 생각했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근래에 들어서 소교주 쟁탈전이 점점 심화되고 있어. 백기 자네도 식당에서 검마종의 후보인 천경운이 또 제의하지 않았나." 고왕흘이 걱정하는 부분은 바로 소교주 쟁탈전이었다. 마도관에 들어온 지 사 년차가 되면서 그 끝이 멀지 않게 되자, 소교주 후보자들 간에 세력을 구축하는 것이 점차 격화되고 있었다. 오 단계 시험을 통과할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있던 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연 역시도 생도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들이 세력을 모으는 과정에 천여운의 수하들에게 조차 손을 내민다는 것이었다. "내가 그 딴 놈한테 넘어갈 것 같나?" "자네를 못 믿는 게 아니라 무슨 수작을 벌일지 모른다는 게지" 천여운이 삼 년이 넘게 폐관에 들어가 부재하니, 그 수하들을 탐내는 것도 당연했다. 지금 그들은 주인이 없는 수하들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자우민도 같은 생각인지 백기에게 말했다. "그건 고왕흘의 말이 맞아. 검마종의 천경운 그 녀석은 천유찬과 다를 바가 없어. 무슨 수작을 걸지 모른다고." ".....그래서 우리끼리 붙어 다니잖아." 대응책으로 연공실에서 훈련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다 같이 붙어 다니고 있지만 점차 그것이 심해져갔다. 예감이 안 좋았는지 고왕흘이 도저히 안 되겠다는 투로 말했다. "아무래도 데리러 가야겠네." 결국 그들은 두 사람을 데리러 가기로 했다. 한편 북서쪽의 폐관 건물 앞에는 스무 명이나 되는 생도들이 위협적으로 두 사람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운규와 허봉이었다. 고왕흘의 불안한 예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스무 명이나 되는 생도들을 이끌고 온 자는 바로 검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경운이었다. 운규가 난감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들의 손에 들려있는 무기들을 보면 작정하고 온 듯 했다. "마지막으로 말하겠다. 너를 해하려고 온 게 아니니까. 본 공자의 제의를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게 어때? 문규." 천경운의 말에 허봉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아니. 무기까지 들고 와서는 해하려는 게 아니라고 말하는 건 대체 뭡니까?" "네 녀석 따위에게 제의한 게 아니다. 끼어들지 마라." 천경운이 탐내하는 인재는 허봉이 아니었다. 여섯 종파에 버금가는 상위 종파인 마룡장종이라는 거대한 힘을 가진 문규를 원했다. 천여운이 자리를 비운 틈에 그녀를 영입하기 위해 수차례나 접선해왔던 그였다. "휴, 몇 번이나 거절했을 텐데요. 저는 모시는 주군이 있다구요." 억지를 부리는 천경운에게 문규가 단호하게 답했다. 애초부터 말로 해서는 거절할 거라는 사실은 알고 있던 천경운이었다. "어쩔 수 없군. 내 식대로 하는 수밖에." ".....그게 무슨 뜻이죠?" "쓸 만 한 장기 말을 얻는데 어느 정도 교육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거든." 완강한 그녀의 태도에 천경운은 힘을 써서라도 무조건 영입할 작정이었다. 힘을 숭상하는 마교에서 말로 설득한다는 생각 따윈 없었다. 천경운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회색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챙! "이렇게 하도록 하지. 나와 겨뤄서 네가 패한다면 나의 수하로 들어와라." "정말 억지가 심하시군요." "네가 이긴다면 그냥 보내주도록 하마." 이미 기수식까지 취하고 있는 천경운의 태도를 보아선 어쩔 도리가 없어보였다. 문규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생도들을 뚫고 나가기에는 그들 한 명, 한 명이 완숙한 절정 경지를 넘나드는 고수들이었다. 결국 그녀 역시도 보폭을 벌리며 마룡장법의 기수식을 취했다. "소교주 후보자라고 해도 지나칩니다." -챙! 허봉이 상기된 얼굴로 검을 빼들었다. 비겁한 수작으로 문규를 노리는 이들의 태도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 "내가 네놈한테 끼어들지 말라고 경고했지." 천경운이 손을 들어올려 신호를 보내자, 기다렸다는 듯이 근처에 있던 세 명의 생도가 허봉을 향해 초식을 펼치며 공격해왔다. -촤촤촤촤촥! '빌어먹을!' 허봉이 입술을 질끈 깨물며 환영검법의 검초를 펼쳐서 대응하려 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를 향해 검초를 펼치며 쇄도해오던 세 명이 생도가 움직임을 멈췄다. 마치 그들의 시간만 멈춘 것처럼 검을 휘두르던 자세에서 고정이 되고 말았다. "이익!" "이, 이게 대체 무슨!" "안 움직여!" 아무리 공력을 끌어올려도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무형의 기운이 그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지금 무슨 짓거리를 하는 거야!" 그들에게 벌어진 현상을 이해할 수 없었던 천경운이 노기가 치솟아서 소리쳤다. 세 명의 생도가 이구동성으로 뭔가를 말하려는 순간 그들의 몸이 허공으로 부웅 하고 떠오르더니 뒤로 끌려갔다. -쿠당탕! "크윽!" "흐헉!" 강제적으로 끌려간 그들의 몸이 바닥을 내뒹굴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 세 명의 생도들은 자신들의 뒤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역량을 감지했다. 그때 문규와 허봉이 동시에 그들의 뒤에 서있는 자를 향해 소리쳤다. "주군!!!" "천 공자님!!!" < 29장 주군이 돌아왔다(1) > 끝 < 29장 주군이 돌아왔다(2) > 그는 바로 천여운이었다. 머리카락을 다듬지 않아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내려왔다. 소년 시절과는 다르게 뚜렷해진 이목구비는 강인한 사내의 느낌을 물씬 풍겼다.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않아 새하얀 얼굴은 특유의 차가운 눈빛과 잘 어울려서 냉정하면서 도도한 느낌마저 주고 있었다. "주군!!!" 그 외양은 성숙해졌지만 삼 년 하고도 두 달 만에 보는 주군의 모습에 허봉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늦었잖아요. 천 공자님.' 어두웠던 문규의 얼굴이 활짝 밝아졌다. 반면 검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경운의 눈동자에는 당혹스러움 서렸다. '이럴 수가.....' 방금 전에 세 명의 생도를 끌어당겼던 그 신기는 분명 격공섭물이 틀림없었다. 격공섭물(隔空攝物). 그것은 화경(化境)에 경지에 이른 자가 심후한 내공을 이용해 물건 같은 것을 움직이는 기술이었다. 완숙한 절정의 경지인 세 명의 수하들을 꼼짝 못하게 할 정도라면 그 내공이 얼마나 강대하다는 말이겠는가. '말도 안 돼. 저놈이 무상의 경지인 화경에 이르렀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 초절정의 경지조차도 그 깨달음을 얻기 위해 이 년 동안 연공에 매진해야 했다. 그런데 그 많은 단계를 뛰어 넘어서 화경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당혹스러워하던 천경운이 겨우 이성을 붙잡았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다. 무언가 수작을 부린 게 틀림없어. 설사 그렇다고 해도 여기서 물러난다면 모두가 나를 업신여길 게 틀림없다.' 이미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린 이상 소교주 쟁탈전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여기서 물러선다면 그 스스로 천여운보다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 된다. 천경운이 수하들을 향해 외쳤다. "뭐하는 거야! 당장 놈을 제압해라!" "네, 넵!!!" -챙! 그 못지않게 천여운의 능력에 당황해서 우물쭈물하던 천경 운의 수하들이 일갈에 놀라서, 일제히 검과 도를 빼들어 달려들었다. "누가 그렇게 내버려둘 것 같아!" "단체로 공격하다니 이 비겁한 놈들!" 천여운의 수하들인 문규와 허봉이 그 한 사람을 향해 달려드는 생도들을 가로막으려 했다. 이를 바로 앞에 있는 천경운이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어딜!" -촤촤촤촥! 천경운이 그녀를 향해 검마종의 무공인 제형검법(帝形劍法)의 검초를 날렸다. 쇄도해오는 날카로운 예기에 문규가 신형을 뒤틀어 마룡장법의 방어 초식을 펼쳐서 이를 막아냈다. -파파파파팍! 완숙한 초절정의 고수인 두 사람답게 초식이 팽팽했다. 다만 날카로운 검을 상대하기 위해 문규는 손바닥에 기(氣)를 둘러야 했기에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건방진 놈! 약해빠진 종파 녀석이 우리를 방해해." 천경운의 왼팔이자 검마종의 산하의 춘검종의 심진구가 허봉을 향해 검초를 펼쳤다. 휘두르는 검세를 보아하니 절정의 극에 이르렀다. '이 녀석이라도 막아야 주군의 부담을 줄일 수 있어!' 한 명이라도 적을 줄여야 한다는 생각에 허봉이 결의에 찬 눈빛으로 환영검법의 절초인 환검지요(幻劍志擾)를 펼쳤다. 허봉의 검이 수 갈래로 나뉘며 심진구의 검초를 막아냈다. -채채채채챙! "아니?" 뜻밖에 허봉의 손에서 상위 종파의 높은 수준의 고절한 검초가 펼쳐지자, 그를 얕보던 심진구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그렇게 두 명이 빠졌어도 여전히 열다섯의 우위에 있는 생도들이 검기와 도기를 발산해 천여운을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우리 동료들을 놔줘라!" 아직까지 천여운은 세 명의 생도들을 공력으로 붙들고 있었다. 그런데 이 많은 절정의 고수들이 절초를 펼치면서 위협을 가하는데도 천여운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어째서 저렇게 태평한 거지?' 천경운의 오른팔인 검마종의 혈손인 경표의 마음 한구석이 불안해졌다. 그리고 그 불안함은 현실로 벌어졌다. 천여운이 양손을 들어 올리는 시늉을 하자, 바닥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있던 세 명의 생도들의 몸이 부웅 하고 떠올랐다. "으어어어어!" 세 명의 생도들이 방패막이처럼 천여운의 앞을 가리자, 그를 향해 검초와 도초를 날리던 생도들이 당혹스러워하며 초식을 기세를 거뒀다. "이런!" "비겁한 놈!" 동료를 방패로 삼았다는 생각에 그들이 천여운을 탓했다. 하지만 허공에 떠오른 세 명의 생도들은 절대로 방패막이가 아니었다. "그렇게 원한다면 데려가라." "뭣?" -파파팍! 천여운이 손바닥으로 허공에 떠있던 세 명의 생도들을 향해 일 장을 때리자, 그들의 몸이 초식의 거두고 물러나는 동료들을 향해 포탄처럼 날아갔다. "허억!" "바, 받앗!" 화들짝 놀란 그들이 세 명을 받아내려 했지만 날아오는 그들의 몸에는 엄청난 공력이 실려 있었다. 그들을 받아냈던 생도들이 공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덩달아 뒤로 날아가 버렸다. "끄아아악!" -쿠당탕! 그렇게 바닥을 뒹군 그들은 내상을 입었는지, 선혈을 흘리며 움직이질 못했다. 열여덟 명 중에 여섯 명의 전력이 순식간에 당해버렸다. '이, 이놈 정말 화경의 경지란 말인가' 방금 전의 일수만으로도 천여운의 공력이 압도적이라는 것은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부정할 수가 없었다. 가만히 서있는 것만으로도 그 거대한 역량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정말로 화경의 고수라면 절정의 고수들이 수십 명이 합공한다고 한들 어찌 할 수가 없었다. -탁! 천여운이 한 발자국 움직였을 뿐인데, 동시에 모두가 움찔 했다. 이미 기세에서 완전히 밀려버린 그들은 두려움에 빠져서 움직이질 못했다. '무리다. 공자님과 같이 합공해도 저 괴물을 어떻게 할 수 없어.' 검마종의 혈손인 경표는 확신했다. 이곳에 있는 누구도 천여운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역시도 여섯 종파 출신답게 초절정 초입에 올랐지만 천여운에게서 어떠한 허점도 느껴지지 않았다. '여기서 끝내야 해.' 천여운을 자극하면 안 된다고 판단한 경표가 외쳤다. "처, 천 공자! 이쯤에서 끝냅시다. 우리가 졌소." ᅳ"시작은 네놈들이 하고서 누구 마음대로 끝낸다는 거냐?" 씨알도 먹히지 않는 소리였다. 이미 천여운은 자신의 수하들을 위협한 이들을 용서할 생각 따윈 없었다. 더군다나 그들은 검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경운의 수하들이었다. '빌어먹을 자식 끝까지 해보자는 거냐.' 완고한 천여운의 말투에 경표가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큭, 이렇게 우리를 벼랑 끝으로 내세운다면, 모두가 동귀어진의 수를 쓴다면 천 공자라고 해....헉!"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느새 천여운의 신형이 그의 앞에 도달해 있었다. 누구도 그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빠, 빨라!' 당황한 경표가 재빨리 검을 휘두르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말이 많아." -퍽! 우드드득! "끄아아아악!" 천여운의 주먹이 그의 가슴에 꽂혔다. 가슴뼈가 함몰되는 소리와 함께 경표가 비명을 지르며 멀리 날아가 버렸다. 짧은 찰나에 경표가 가슴에 공력을 끌어 모아, 호신기공을 펼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끄헉! 끄헉!" -털썩! 피거품을 물고 거친 호흡을 내뱉던 경표가 기절해버렸다. 초절정 초입의 고수인 경표가 고작 일 권에 당해버리자, 생도들은 경악한 나머지 입이 쩌억 벌어져서 움직이질 못했다. 압도적인 무위 앞에서 그들은 맹수 앞의 먹이에 불과했다. "다음은 네 녀석들이다." 천여운이 악귀나찰과 같은 기세로 그들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촤촤촤촤촥! 검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경운의 눈빛이 진지했다. 벌써 이십 초식 가까이 검초를 펼쳤는데도 문규를 제압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여전히 평팽한 공방이 지속되고 있다고 보아야 했다. '호리호리한 몸으로 이런 패도적인 장법을 펼치다니.' 문규는 보통 남자들보다 신장도 작고 아담한 몸에 가까웠는데도 장법의 기세는 패도적이면서 힘이 넘쳤다. 구 장로 문연의 절기인 마룡장법은 명불허전이었다. '강기로 초식을 펼쳐야 하나.' 더 고강한 수준으로 끌어올리지 않으면 승부를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강기를 쓴다면 세 초식 이내로 해결하지 않으면 내공이 고갈되어서 패하게 된다. 하지만 천여운까지 해결하려면 빨리 문규를 처리해야 했다. '날 원망하지 마라! 네 녀석이 천여운을 따른다고 고집 부렸을 때부터 결과는 정해졌다.' 천경운이 공력을 십성으로 끌어올렸다. 그러자 그의 보검을 두르고 있던 흰 빛의 검기가 응집하기 시작하더니 푸른빛을 냈다. "검강?" 푸른 빛의 검강(劍罡)을 보는 순간 문규가 다급히 보법을 펼치며 거리를 벌렸다. 검기까지는 맨손으로 막아냈지만 강기가 실린 보검은 위험 했다. 그녀는 완숙한 초절정의 경지에 올랐지만 아직까지 내력이 모자라서 강기를 한 초식 이상 지속할 수가 없었다. '피해야 해.' "피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천경운이 보법을 펼치며 문규와의 거리를 좁혔다. 그의 손에서 강기가 실린 검초가 쇄도해오자, 문규가 어쩔 수 없이 이를 악물고 양손에 기를 응집하여 푸른빛의 장강(掌罡)을 일으켰다. -촤촤촤촤촤! 파파파파팡! 강기로 이루어진 초식들이 펼쳐지며 두 사람의 주위로 돌바닥에 균열이 일어났다. 기의 정수라 할 수 있는 강기의 위력은 거대한 암석을 가를 정도다. 순식간에 첫 번째 초식이 교차하였고, 천경운이 이어서 다음 초식을 펼쳤다. '아아!' 문규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극심한 내공의 소모로 그녀의 양손을 두르고 있던 장강이 빛을 잃고 말았다. 천경운의 눈에 회심의 빛이 돌았다. "끝이닷! 한 쪽 팔만 앗아가마!" 푸른빛 강기가 실린 천경운의 보검이 그녀의 오른팔을 내리치려 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팍! 파치치치치칙! "미, 미친!" 천경운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언제 나타난 것인지 천여운이 강기로 둘러싸인 그의 보검을 맨손으로 잡은 것이었다. "천 공자님!" 위기의 순간에 자신을 구해준 천여운의 듬직한 뒷모습에 문규가 화색이 돌아 외쳤다. 보검을 잡아낸 천여운의 손에선 푸른빛의 강기가 둘러싸여 있었다. "네 녀석이 어떻게?" 분명 자신의 수하들을 상대하고 있어야 할 천여운이 갑자기 나타나자 당황한 천경운이 검을 잡은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검이 움직이지 않았다. '빌어먹을 무슨 힘이!' 공력과는 별개로 엄청난 괴력이었다. "저 쓰레기들을 말하는 거냐?" 천여운이 왼손의 엄지로 뒤를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방향을 쳐다보자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열아홉 명의 수하들이 있었다. 하나 같이 팔 다리가 반대로 꺾여서 부러진 그들은 멀쩡한 이가 없었다. "히히히!" 허봉이 신이 난다는 표정을 해서는 천경운의 기절한 수하들을 쓰레기마냥 하나씩 질질 끌어가며 한 자리로 모으고 있었다. '......그 짧은 새에 저 녀석들을?' 천경운이 황당하다 못해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렇게 아니라고 부정했던 것이 정말 현실이었던 모양이다. "네....놈 정말 화경의 경지에?" -쩌저저적! 쨍그랑! "헉!" 강기를 두르고 있던 천경운의 보검이 균열이 일어나더니, 이내 검신이 부러지고 말았다. 부러지는 검신의 조각들 사이로 천여운의 살기 어린 두 눈이 보였다. '도, 도망쳐야 해!' 범접할 수 없는 압도적인 무위에 전의를 상실하고 만 천경운이 두려움에 빠진 나머지 부러진 검을 내팽개치고는 몸을 돌려 도망치려했다. -촤악! "끄아아아아아아악!" 경공을 펼치기도 전에 오른팔이 불로 지지듯이 화끈거리는 고통에 천경운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엄청난 통증에 사로잡혀서 몰랐는데, 그의 오른팔이 보이지 않았다. "내 팔! 내 팔이! 끄아아아아악!" -콱! "크윽!" 천여운이 바닥을 뒹굴뒹굴 구르며 고통스러워하는 천경운의 가슴을 지그시 발로 밟아 대자(大)로 고정시켰다. 그리고 그를 차갑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남의 것을 탐냈으면 대가를 치러야지." 오른팔을 자른 걸로도 끝이 아니라는 말에 천경운이 새하얗게 질려서 기겁하고 말았다. "제, 제발!" 고통과 두려움, 공포에 사로잡힌 천경운이 애원을 했지만 이미 늦었다. 천여운이 그의 안면을 향해 괴력이 실린 주먹을 내리찍었다. -쾅! *** 이 각 후, 마도관의 본관 이 층 의무실. 삼 년 하고도 두 달 동안 조용했던 의무실로 스무 명에 이르는 단체 중상자들이 줄지어 들 것에 실려 들어왔다. 의원 백종명이 입 꼬리가 귀에 걸려서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드디어 나왔구나." < 29장 주군이 돌아왔다(2) > 끝 < 29장 주군이 돌아왔다(3) > "이럴 수가...." "지금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뒤늦게 도착한 고왕흘과 일행들은 눈앞에서 펼쳐진 광경에 말문을 잃고 말았다. 바닥에 일 열로 쓰러져 있는 열아홉 명의 부상자들. 하나 같이 팔 다리가 꺾여서 기절해 있는 그들을 한 곳으로 질질 끌면서 한곳에 정리하고 있는 푸른 두건의 청년이 보였다. "허봉?"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자우민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들 불안해서 급히 달려왔는데, 완전히 예상과는 다른 일이 벌어졌다. "아! 문규다." "저 사람은?" 멀리서 문규가 긴 머리카락에 새하얀 얼굴의 청년에게 상기 된 얼굴로 반갑게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발밑에는 오른팔이 잘려서 천으로 압박시켜놓은 자가 있었는데, 얼굴이 짓뭉개져서 피 곤죽이 되어 누구인지 알아보기 힘들었다. "서, 설마?" "아아아!" 일행들의 눈에는 바닥에 누워있는 자보다 긴 머리카락의 청년만 보였다. 삼 년하고도 두 달이라는 긴 나날이 지났지만 그를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는 그들이 그렇게 기다려왔던 주군 천여운이었다. "주군!!!" 흥분되었는지 상기된 얼굴로 고왕흘이 큰 목소리로 외치며 제일 먼저 달려가 한 쪽 무릎을 꿇었다. 뒤이어 달려온 다른 수하들 역시도 고왕흘과 같은 자세를 취했다. 고왕흘이 호탕한 목소리로 포권을 취하며 외쳤다. "제 일검 고왕흘이 주군을 뵙습니다." 그의 옆에 서있던 문규도 아차 싶었는지 무릎을 꿇고 포권을 취하며 외쳤다. "제 이검 문규가 천 공자님을 뵙습니다." 세 번째 차례는 백기였는데, 유일하게 서있는 그였다. '삼 년 만에 이렇게 달라질 수 있나?' 완숙한 초절정의 경지에 오르면서 마도관에 있는 무공 교두들조차 약하게 느껴질 만큼 성장한 백기였다. 그런데 천여운을 바라보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압도적인 역량을 느꼈다. 마치 마도관주인 좌호법 이화명을 볼 때와 같은 느낌을 받았다. 무공이 강해질수록 관자놀이 부근의 태양혈이 솟아야 하는 데, 그마저도 평평해져 있었다. '천여운 너는 정말.....' 백기는 본능적으로 그가 경(境)의 경지에 올라섰음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수하로 들어가기는 했지만 고독한 늑대와도 같은 성격인 백기는 마음 깊숙이 그를 우위로 인정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압도적인 강함 앞에 드디어 마음으로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탁! 백기가 한 쪽 무릎을 꿇으며 힘찬 목소리로 외쳤다. "제 삼검 백기가 주군을 뵙습니다." 처음으로 생도들이 없는 앞에서 진심으로 예를 갖추어 경어를 사용하는 백기였다. 달라진 모습에 다른 수하들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도저히 낯간지러워서 존댓말은 쓰지 못하겠다는 녀석의 변화가 오히려 낯설었다. 호상화가 빙그레 웃으며 외쳤다. "제 사검 호상화가 주군을 뵙습니다." "제 육검 자우민이 주군을 뵙습니다." 그 외의 아홉 명의 생도들이 차례대로 천여운에게 예를 표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들의 떨리는 눈동자만 보아도 오랜 기다림 끝에 반가움이 느껴졌다. 심지어 눈시울마저 붉어진 이들도 있었다. 천여운이 그런 그들을 향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말했다. "기다려줘서 고맙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수하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아아!!! 주군께서 돌아오셨다." 주군의 부재가 컸던 그들에게 있어서 천여운의 귀환은 의미가 남달랐다. 환호하는 그들의 모습에 긴 폐관으로 감정 변화가 다소 어색해진 천여운조차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고왕흘이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주군 그런데 이 자는?" 얼굴이 심하게 짓뭉개져서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말에 대답한 것은 문규였다. "검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경운이에요." "천경운?" 천경운이라는 말에 고왕흘을 비롯해 생도들의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최근에 들어서 오 단계 시험을 통과하고 나서부터 현마종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연과 더불어 각광을 받고 있는 그였다. 무공만으로는 생도와 교두들을 통틀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인 천경운이다. "처, 천경운 공자를 이렇게 만드신 겁니까?" "이 곤죽이 천경운이었어?" 폐관 수련에서 복귀하자마자 제대로 한 건 한 셈이었다. 이 정도 중상이라면 소교주 후보자에서 탈락했다고 보아야 했다. '푸흡!' '꼴좋다! 그렇게 나대더니.' 천여운이 없는 동안 여러 수작을 부리며 그들에게 압박을 가해왔던 천경운이 이렇게 곤죽이 된 모습을 보니, 모두가 속이 시원해졌다. "히히, 천 공자님한테는 한 주먹 거리도 안 되더라고요." 허봉이 괜히 자신이 으쓱해져서 자랑하듯이 말했다. 백기도 느꼈듯이 완숙한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고왕흘 역시도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었다. 단지 반가움이 더 커서 말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주군!......혹시 화, 화경의 경지에 오르신 겁니까?" 떨리는 목소리. 모든 수하들이 침을 꿀꺽 삼키며 천여운을 바라보았다. 그들을 바라보던 천여운이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수하들은 아까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목소리로 열광적으로 함성을 질렀다. "와아아아아아!!!" "주, 주군께서 화경의 경지라니?" "이게 꿈이야? 생시야?" 워낙 오랜 폐관 수련 때문에 걱정했던 수하들이었다. 깨달음이 오지 않아서 길어진 것이라면 소교주 쟁탈전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길었던 폐관의 결과가 화경의 경지임을 알게 되자, 오랜 기다림에 보답을 얻는 느낌이었다. 마교 내에서도 화경의 경지에 오른 자들은 세 호법과 십이 장로들뿐이었다. '어쩌면 그딴게 아니야.' '주군이야 말로 본교를 새롭게 바꾸실 분이다.' '아아아! 우리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어.' 강자존을 표방하는 천마신교에 있어서 무위는 스스로를 증명하는 길이었다. 천여운은 화경의 경지에 오르면서 수하들의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렇게 오랜만에 만난 천여운과 그 수하들은 우선 부상을 입은 천경운과 그 수족들을 의무실로 옮긴 뒤에 그 동안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며 천천히 해후를 즐겼다. 천여운의 복귀는 많은 생도들과 무공 교두들의 관심을 이끌었다. 폐관에서 돌아오자마자 소교주 후보자인 천경운 일파를 붕괴시켜버렸으니,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야. 이러다 정말 천여운 공자가 소교주가 되는 거 아냐?' '에이. 그래도 현마종의 천무연 공자도 있잖아.' '천무연 공자가 한 게 뭐가 있어?' '대박 아니야? 처음으로 여섯 종파 이외의 소교주가 나올 수 있다는 말이잖아.' 생도들 간의 여론이 심화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여섯 종파 출신의 후보자들 간에 쟁탈전을 겨룬 적이 없었는데, 그 중 다섯 명이 전부 천여운의 손에 나가떨어졌다. 천여운은 실력으로 모든 것을 증명했다. '큰일이다.' 지금까지 크게 부딪치지 않았지만 성장한 천경운 일파를 견제하고 있던 현마종의 천무연 일파 수하들의 부담감이 커졌다. 이렇게 되어버린 이상 천무연이 소교주가 되는 데, 가장 큰 장애는 천여운이었다. 수하들은 심히 걱정을 했지만 정작 천무연은 이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자신의 무공을 높이는 데만 집중할 뿐이었다. 마도관의 본관 일증에 있는 관주 집무실. 마도관주인 좌호법 이화명 역시도 천여운이 폐관 수련에서 나온 사실을 접했다. 물론 나오자마자 검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경운 일파를 무너뜨리고, 그의 팔을 자른 것 역시도 듣게 되었다. 의무실에서 환자들에 대한 보고서가 이미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믿기 힘든 소식마저 접했다. "화경 경지로 짐작된다?" 집무실 책상 앞에서 보고를 하고 있는 중년인은 폐관 수련 건물의 담당 교두였다. 폐관 건물의 입구는 밖에서 열어줄 수밖에 없기에 마지막 폐관 수련자를 위해 근무를 했던 담당 교두였다. 그러다 우연히 천여운의 신위를 직접 보게 된 그였다. 경악할 수밖에 없는 엄청난 무위에 담당 교두는 확신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짐작이 아니라 확실합니다. 격공섭물을 펼치는 것을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담당 교두의 확신에 찬 말에 좌호법 이화명의 눈동자가 떨렸다. 폐관 수련이 예상보다 길어진다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이런 소식을 들을 줄은 몰랐다. 내심 초절정의 극에 올라서 나오리라 예상했던 이화명이었다. '화경의 경지라고?' 망치로 머리를 두드려 맞은 느낌이었다. 역대 마도관의 기수들을 통틀어, 불가능이라 불리는 육 단계 시험을 통과하지 않고도 화경의 경지에 올랐던 이는 전무했다. 이것은 단순히 천부적인 재능만으로 설명이 되지 않았다. '정말 본교에 큰 폭풍이 몰아치려는 것일까?' 상상을 초월하는 천여운의 성장에 혹시나 하는 기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말로 큰 변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여운이 가진 힘은 더 이상 여섯 종파가 언제든지 해결할 수 있다는 수준을 넘어섰다. 놀라움이 쉽게 가시지 않는지 입을 꾹 닫고 있던 이화명의 두 눈이 커졌다. 이화명의 반응을 이상하게 생각한 폐관 수련 담당 교두가 물었다. "관주님, 무슨 문제라도?" "하! 정말이었나." "네?" 화경의 경지인 이화명의 기감은 마도관 건물 전체에 있는 자들을 감지할 만큼 그 범위가 넓다. 마도관의 건물 안으로 압도적인 역량을 가진 자가 들어섰다. 만약 방금 전의 보고를 듣지 않았다면 장로들 중의 한 사람이 찾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만만하게 볼 수 없는 역량이었다. 그 역량을 가진 자가 바로 집무실의 문 앞에 서있었다. -똑똑! "관주님, 천여운 대주가 뵙기를 청합니다." "아!" 밖에서 들려오는 무공 교두의 목소리에 폐관 수련 담당 교두의 놀라워했다. 지금까지 보고했던 당사자가 지금 문밖에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들어오라 해라." "충!" 관주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긴 머리카락에 새하얀 얼굴의 천여운이 들어왔다. 허리까지 내려오던 머리카락을 목 등까지만 내려오게 정리한 그였다. 기를 갈무리하고 있었기에 하수들은 그 역량을 짐작하기 힘들었지만 좌호법 이화명은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경(境)에 들어선 것이 틀림없구나.' 이화명이 책상에서 일어나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천 대주. 정말 괄목상대(刮目相對) 했군." "과찬이십니다." 이제는 정말로 애송이라고 부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좌호법 이화명을 바라보는 천여운의 눈빛이 미묘했다. '그때는 몰랐는데 정말 대단하구나.' 화경의 경지에 올라서 이화명을 바라보니 그의 진정한 실력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짐작이 틀림없다면 완숙한 화경의 경지가 분명했다. 현재의 천여운보다 한 수 위였다. "그래 무슨 일로 왔는가?" -탁! 천여운이 이화명에게 두 손을 모아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오 단계 시험을 치르고 싶습니다." 좌호법 이화명의 눈빛에 이채가 띠었다. 폐관 수련을 마치고 나온 지, 불과 두 시진 만에 천여운이 오 단계 시험을 신청했다. < 29장 주군이 돌아왔다(3) > 끝 < 30장 봉마동의 비밀(1) > 무공 교두 세 명이 앞장서서 마도관의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선임 무공 교두인 호진창이 자신들의 뒤를 따라 걸어오는 천여운을 힐끔 쳐다보았다. 오랜만에 만난 천여운은 소년티를 완전히 벗고 청년이 되었다. '정말 놀랍구나.' 호진창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삼 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 역시도 꾸준히 무공 연마를 했기에 초절정의 극에 올랐다. 생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교두가 되기 위해서였다. '이젠 반대 입장이 되었군. 허허허.' 노란 명찰 쟁탈전 때 겨루면서 언젠가 천여운의 실력이 더 성장한다면 겨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입장이 바뀌어서 도전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단순히 걷고 있는 것만으로도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 피는 속일 수 없는 것인가.' 수백 년 간 마교의 수장으로 군림해온 천(天)가의 혈통이었다. 여섯 종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도관 내에서도 두각을 드러내는 천여운이 새롭게 만들어갈 마교가 궁금해졌다. 그러던 사이에 마도관의 가장 북쪽에 있는 허름한 건물에 도착했다. 봉마동(封魔洞). 건물 앞의 비석에 새겨진 문구였다. 풀이하자면 마귀를 봉인한 동굴이라는 의미였다. 허름한 건물은 오랫동안 관리를 하지 않았는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다. '오 단계 시험은 현재의 주군이시라면 저희보다도 쉽게 통과하실 겁니다.' 먼저 오 단계를 통과한 고왕흘이 그에게 조언을 해주었다. 그들이 이르기로는 봉마동 안에는 각종 기관 진식과 수많은 함정이 있는데, 이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기감(氣感)이 높아야만 가능하다고 하였다. 완숙한 초절정의 경지에 올라야 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동굴 안에 들어가면 조금 무서워요.' 문규는 봉마동에 들어갈 때 시야를 밝힐 수 있는 횃불을 주지 않는다고 했다. 오직 기감만으로 어둠 속에서 통과하는 것이 과제라고 하였다. '그런데 저는 동굴 안에서 이상한 울음소리를 들었거든요.' '엇? 문규 자네도 들었나?' '……나도 들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백기가 조용히 말했다. '헉!' '환청이 아니었어?' 고왕흘과 문규가 동시에 소스라치게 놀라했다. 그들은 시험을 치르는 내내 짐승 혹은 알 수 없는 울음소리를 들었다고 하였다. 알 수 없는 소리에 소름이 돋았지만, 동굴을 통과하는 내내 어떠한 기척도 감지할 수 없었기에 막상 밖으로 나와서는 환청으로 여겼던 그들이었다. "이곳이 입구다." -끼이이익! 호진창이 허름한 건물의 다 남아서 삐걱거리는 문을 열었다. -휘이이이! 문을 열자 차가운 바람이 밖으로 흘러나왔다. 추운 겨울이었는데 그 안에서 더 차가운 공기가 흘러나온다는 것은 동굴의 규모가 생각보다 넓은 듯 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그 내부에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어령풋이 보이는 지하의 어둠은 심연과도 같았다. -끼리리릭! 무공 교두 중의 한 사람이 계단 옆에 있는 나무 기둥을 뒤로 밀쳤다. -쿠르르르! 그러자 지하에서 뭔가가 작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사전에 기관 진식이 설치되어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천여운이었기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호진창이 오 단계 시험에 대해 소개했다. "오 단계 시험은 이곳 봉마동의 동굴을 통과하면 되네. 어둠 속에서 오직 기감만으로 각종 함정을 통과하는 것이 과제이지. 동쪽 편에 바깥으로 나오는 출구가 있네. 우리는 한 시진 동안 그곳에 기다릴 걸세." "시간제한이 있군요." "실질적으로는 한 시진도 안 걸리네. 그 안에 통과하지 못한다면 사고가 있다고 판단해서 기관 진식을 중지할 거네." 그 사고로 세 명의 생도가 목숨을 잃었다. 기관 진식의 함정은 하나하나가 목숨을 위협할 만큼 위험했다. 들어가기 전에 무공 교두들이 천여운의 몸을 수색했다. 불씨를 피울 수 있는 물건을 챙겨 가는지 확인하는 절차였다. "들고 가는 무기는 그 도인가?" "그렇습니다." 횃불이나 등은 챙겨갈 수 없지만 무기는 들고 갈 수 있다. 기관 진식이 발동한다면 그것을 막을 수 있는 무기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확인해보겠네." 천여운이 등허리에 차고 있던 푸른색 도집을 넘겨주었다. 그의 도는 구야자의 후손인 대장장이 구선웅이 주조해준 무기였다. -챙! 호진창이 도집에서 도를 뽑았다. 얇고 가벼운 도신에는 접무(蝶舞)라는 음각이 새겨져 있었다. 천여운이 부탁해서 새겨 넣은 음각이었다. "좋은 도로군." 현철로 만들어진 도는 아니었지만 도날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예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얼핏 보면 우호법 섭맹의 광무도와 닮은꼴이었다. 호진창이 도집에 도를 집어넣고 천여운에게 넘겨준 후에 지하 계단을 가리켰다. "그럼 오 단계 시험을 시작하게." "알겠습니다." "무운을 빌겠네." 말은 이렇게 했지만 호진창은 사실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초절정의 고수들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기관 진식을 화경의 경지에 오른 천여운이 통과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탁! 천여운이 어둠으로 점철된 지하 계단을 내려갔다. -끼이이익! 뒤에서 무공 교두들이 문을 닫고 나가자, 희미했던 빛이 사라지고 완전한 어둠이 찾아왔다. 기감을 발산하면 육안으로 자세히 보이진 않더라도 어렴풋이 막힌 곳을 구분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었다. '나노. 야간 투시경 모드.' [사용자의 눈에 야간투시경(夜間透視鏡) 모드를 개안합니다.] 나노 머신인 나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지며 천여운의 동공이 흔들리더니, 이내 어두웠던 그의 시야에 빛이 증폭되면서 지하계단이 선명하게 보였다. 만들어진지 오래되었는지 돌계단이 많이 부식되어 있었다. '꽤 많이 내려가야 하는 구나.' 천여운이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계단을 타고 내려갈수록 공기가 차갑다는 느낌보다도 더욱 스산해졌다. 대략 네 층 정도 되는 계단을 밟고 내려왔을 무렵 그 끝이 보였다. 지하에 도착하자 그의 눈앞에 동굴로 들어가는 통로가 보였다. '무슨 냄새지?' 통로의 입구에서 코끝을 자극하는 역한 냄새가 맡아졌다. 기름 냄새 같기도 했고 혹은 피비린내 같기도 했다. 여러 냄새들이 뒤섞여서 무엇인지 알기는 힘들었다. '일단 들어가 보자.' 천여운이 통로로 들어서자 희미한 바람이 느껴졌다. 기감으로 출구를 알 수 있다는 말이 이것을 두고 한 말인 듯 했다. 밖에서 흘러들어오는 바람을 따라서 통로를 지나가면 출구로 갈수 있으리라. 안으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몰랐는데, 다소 매끄러운 벽면을 보니 동굴이 인위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기관 진식을 설치했으니 당연한 거겠지.' 시험을 통과하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시간을 끌 필요가 없었다. 천여운의 눈에는 동굴 통로가 훤하게 보였기 때문에 그대로 가기만 하면 되었다. 빠르게 통과하자는 생각에 바람이 흘러들어오는 방향을 향해 경공을 펼쳤다. -탓! 쿠르르르! "응?" 발을 바닥에서 떼는 순간, 벽면에서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오며 통로의 옆면에서 날카로운 창들이 천여운을 향해 튀어나왔다. 창날이 미처 닿기도 전에 천여운이 가볍게 손을 휘젓자 창대가 전부 부러졌다. '이런 식이었나.' 언제 기관 진식의 함정이 발동할지 알 수 없었다. 확실히 어설픈 무위로 이곳에 들어선다면 함정에 당할 수도 있었다. 경공을 펼쳐서 단숨에 빠져나가려 했던 천여운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걸어서 나가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그렇게 신중해진 눈빛으로 천여운이 통로를 걸어갔다. 얼마 걸어가지 않았는데, 또 다시 기관 진식이 발동했다. -팍! 쿠르르르르! 발을 내딛은 돌바닥이 밑으로 들어가더니, 앞뒤로 열 보 거리의 천장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헛!" 천여운이 경공을 펼쳐서 앞으로 몸을 뻗어 이를 벗어났다. -쿵! 조금만 늦었어도 내려앉는 천장에 압사당할 뻔했다. 확실히 완전한 어둠 속에서 이런 함정이 발동한다면 아무리 초절정의 고수라고 한들, 까딱 잘못했다가는 당할 수도 있었다. 기감을 확실하게 열어둬야 했다. 앞이 보여도 위험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두 번이나 연달아 함정을 경험한 천여운은 신중하게 통로를 이동했다. 조심해서 살펴보니, 기관 진식의 발동 조건들을 알게 되었다. 대부분의 함정들은 발을 잘못 내딛으면 발동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이것만 주의하면 되겠군.' 나노의 야간투시경 능력 덕분에 천여운은 그것들을 전부 피해서 이동했다. 어둠 속이었다면 어쩔 수 없이 밟을 수밖에 없지만 시야가 보이는 이상 소용없었다. '음.' 한참을 이동하면서 천여운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확실히 밖에서 흘러들어오는 바람을 따라서 이동하기 때문에 길을 잃을 걱정은 없었지만, 동굴의 통로들은 하나가 아니었다. 여기저기로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통로들이 열려있었다. 바람의 흐름이 없다면 미로처럼 이어져 있는 다른 통로에 잘못 들어섰다가 길을 잃을 수도 있어 보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낯이 익지.' 처음 들어왔는데도 이 꾸불꾸불한 통로가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었다. 이동하는 내내 그 생각에 잠겨 있던 천여운이 그 낯익은 이유를 알아냈다. "설마?" 그것은 그가 이 동굴 통로를 들어왔기 때문이 아니었다. '나노. 전에 구금동에서 야광주를 모아서 스캔했던 장보도 지도 있지?' [네. 데이터에 저장되어 있습니다.] '입체영상으로 구현해줘.' [알겠습니다. 사용자의 시각 정보에 증강현실(增强現寅) 개안(開眼) 가동합니다. 저장되어 있던 지도를 입체영상으로 구현합니다.] 나노의 목소리와 함께 천여운의 동공이 빠르게 흔들리며 흰 빛의 입자의 선이 그려지며 증강현실이 개안 되었다. 이윽고 그의 시야에 입체영상으로 저장되어 있던 지도가 구현되었다. 구금동에서 천마검공의 심법 구결이 적혀 있던 야광주들의 뒷면에 그려져 있던 장보도였다. "역시!" 천여운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대체 이 지도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궁금해 했었는데, 정답은 바로 이곳 봉마동의 장보도였던 것이다. 지금까지 지나왔던 통로의 길들이 지도와 완전히 동일했다. '나노 확실하지?' [지도와 동굴의 형태가 동일합니다. 지도에서 저희가 있는 위치 좌표는 이곳입니다.] 입체영상으로 구현된 지도 안에 붉은색 빛의 점이 생겨났다. 천여운이 서있는 위치였다. "오! 이런 것도 되는구나." 이것을 기준으로 이동한다면 장보도에서 안내한 곳으로 쉽게 이동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 단계 시험을 치르는 도중이었지만 궁금해졌다. 다른 것도 아니고 천마검공의 심법 구결이 있던 야광주에 새겨진 장보도였기에 분명 천마 조사가 안배한 무언가가 있을 확률이 높았다. '아직 시간은 충분하다.' 아직 이 각 밖에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결국 천여운은 장보도가 안내하는 위치로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되돌아가야 하네.' 처음 출발했던 위치에 있던 네 갈래 중에서 가장 우측에 있는 통로로 들어가야 했다. 지도가 있기 때문에 미로처럼 복잡한 동굴 통로를 쉽게 이동할 수 있었다. 한참을 통로를 따라 걸어가던 중이었다. -크르르르! '응?' 그때 어디선가 희미하게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환청이라고 하기에는 그 소리가 뚜렷했다. 아무래도 문규와 고왕흘이 들었다고 하는 그 울음소리인 듯 했다. '아무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데.' 기감을 열어보아도 어떠한 움직임도 감지되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이런 동굴 안에는 쥐라도 있을 만도 했는데, 그런 작은 움직임조차 없었다. 의아해하던 천여운이 을음소리에 신경 끄고 다시 지도를 따라 이동했다. '나가는 통로도 아닌데 함정들이 이렇게 많다니.' 혹시나 해서 바닥을 살펴가면서 이동했는데, 출구로 나가는 길에 있던 기관 진식보다도 더 많은 함정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렇게 신중하게 함정들을 피해서 한참을 들어가던 끝에 드디어 장보도에서 표시된 장소에 도착했다. "이건....." 천여운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장보도가 안내한 동굴의 끝에는 푸른색의 거대한 벽으로 막혀 있었다. 순간 자신이 지도를 잘못 본 것인가 착각했는데, 확실히 안내한 장소가 틀림 없었다. "아! 설마...." 바로 앞에서 보느라 몰랐는데 뒤로 열 보 물러나 보았다. 거대한 석면에는 벽면 전체를 가득 매울 만큼 큰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봉(封)?" 봉하다는 의미의 한자였다. < 30장 봉마동의 비밀 (1) > 끝 < 30장 봉마동의 비밀 (2) > 가까이서 보면 당연히 읽을 수 없을 만큼 크게 써놓았다. 그런데 이 글씨는 검으로 새겨놓은 듯 했다. '날카롭다. 그리고 이 필흔은....' 어디선가 많이 본 필흔은 청옥석의 시조에 남겨져 있던 글씨체와 동일했다. 역시 이것을 남긴 것은 천마 조사가 틀림없어 보였다. 그런데 지금까지 남겼던 안배들과 달리 이 푸른 석벽에 적혀 있는 봉(封)이라는 글씨에서 풍겨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무언가를 봉해놨다는 의미인가?' 생각해보면 이곳 동굴의 이름은 봉마동이었다. 마를 봉해두었다는 의미를 가졌다. 처음에는 그저 안배라고만 여겼는데, 불길한 느낌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석벽 뒤에 무언가를 봉해놨다는 것인가?' 아무래도 이 푸른 석벽에 무언가가 비밀이 숨겨져 있는 듯 했다. 그때였다. -크르르르! '또 그 소리?' 짐승의 울음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아까 전에 들었을 때보다도 선명한 것이 가까이에 있는 느낌이었다. 울음소리는 벽 뒤에서 들렸다. 천여운이 자신의 팔을 살펴보니 닭살이 돋아 있었다. 화경의 경지에 오르면서 이성적으로 더욱 냉철해졌으나, 그와 별개로 이 울음소리에서는 단순히 짐승을 넘어서 마성(魔性)이 느껴졌다. '건드리지 않는 편이 좋을까?' 왠지 위험한 것을 봉해놓았다는 생각이 들자 고민이 되었다. 만약 자신이 괜한 짓을 해서 감당할 수 없는 것을 풀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우려였다. 그러는 한편으로 또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어째서 위험한 무언가를 봉해놓은 곳의 위치를 장보도로 남겨놓았을까?' 장보도(贓寶圖). 숨겨진 보물 지도라는 말이다. 지도에는 중요한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안내를 해놓았다. 뭔가를 길게 고민하기에는 오 단계 시험의 시간제한이 걸려있기 때문에 서둘러야 했다. '후우.'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뱉은 천여운이 결심했다. '그래. 천마 조사님께서 남긴 안배라면 절대로 해가 될 리가 없다.' 결심한 천여운이 거대한 푸른 석벽 앞으로 섰다. 이 벽의 뒤편에 분명 숨겨진 무언가가 있다. '일단 벽을 깨야겠군.' 이 정도로 두꺼운 벽이라면 단순히 공력을 싣는 것만으로 힘들어 보였다. 아무래도 기(氣)나 강기(罡氣)를 써야만 뚫릴 것 같았다. 굳이 하나씩 시험해볼 필요는 없었다. -챙! 천여운이 등허리에 차고 있던 푸른 도집에서 접무도를 뽑았다. 도병을 잡은 오른손에 공력을 집중하자, 빛이 응집되더니 푸른빛의 도강(刀罡)이 형성되었다. "하압!" 기합과 함께 천여운의 도가 석벽을 향해 쇄도했다. 쾌를 중시하는 접무도법에서 가장 패도적인 도초인 제 오 초식인 무연참격(舞聯斬擊)을 펼쳤다. -촤촤촤촤촤촤촤! 강기가 실린 패도적인 도초가 석벽을 난타했다. 단숨에 석벽을 갈라버릴 기세였다. 강기가 석벽을 벨 때마다 파편과 먼지가 튀어나와 시야를 가렸다. 초식을 마친 천여운이 뒤로 몇 보 발걸음을 물렸다. '된 건가?' 손을 가볍게 휘젓자 공력이 바람을 일으키며 시야를 가렸던 먼지가 사라졌다. 천여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엇?" 대체 이게 어찌된 일인가. 당연히 강기에 부서졌어야 할 푸른 석벽이 견고하게 버티고 있었다. 강기는 오히려 석벽에 도흔만 남겼을 뿐이지 전혀 그것을 부수지 못했다. 암석마저 베어내는 강기가 그저 흔적만 남겨졌을 뿐이라면 엄청난 강도의 석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 자세히 살펴보면 봉(封)이라 새겨진 검흔보다도 패어진 깊이가 얕았다. "대체 이 벽은?" 황당해하는 천여운의 머릿속으로 나노의 목소리가 울렸다. [벽의 경도가 청옥석과 동일한 수준입니다.] "청옥석?" 그러고 보니 이 석벽 전체가 은은하게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혹시 하는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자, 도흔이 남아 있는 부위가 더욱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청옥석이랑 동일한 경도가 아니라, 청옥석이잖아?' 벽면이 다른 재질의 돌로 뒤덮여 있었지만 그 내부는 청옥석이었다. 강기로도 완전히 베어내기 힘들다고 알려진 청옥석이다. 시간을 들인다면 강기로 청옥석 벽을 계속 파내는 것이 가능했지만 그래서는 어느 세월에 이 벽을 부수겠는가. "후우." 당혹스러웠던 것도 잠시였고 천여운이 청옥석 벽을 보면서 심호흡을 가다듬었다. '방법은 그것뿐인가.' 단숨에 청옥석 벽을 파고들 정도의 검력을 일으킬 초식을 펼쳐야 했다.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은 그 초식의 첫 대상이 설마 청옥석 벽이 될 줄은 몰랐다. 천여운이 도병을 쥐고 있는 손의 파지법을 바꾸었다. 검을 쥐는 파지법이었다. '천마검공 제 사 초식.' 육신의 전이를 받은 것만으로도 모자라 화경의 경지에 올라서야 펼칠 수 있게 된 천마검공의 제 사 초식이었다. 위력이 너무 강해서 어지간한 상대가 아니고는 펼칠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청옥석 벽을 단숨에 부수기 위해서는 이 방법뿐이었다. -탁! 천여운이 독특한 자세의 기수식을 취했다. 그러자 마치 폭발 직전의 화산처럼 사방에 진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공기마저 무겁게 짓누르는 진기가 일순간 천여운이 쥐고 있는 접무도로 집중되며 그의 신형이 청옥석 석벽을 향해 쇄도했다. -촤촤촤촤촤촤촤! 복잡한 스물네 개의 검식이 하나로 모이며 뇌신의 일격처럼 하나의 거대한 빛줄기가 되어, 석벽을 강타했다. -콰아아아앙! 쿠르르르르! 큰 굉음과 함께 동굴에서 진동이 일어났다. 검초의 위력은 그야말로 경천동지 그 자체였다. 순식간에 동굴 전체가 아까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뿌연 먼지로 뒤덮였다. -팟! 천여운의 신형은 어느새 석벽에서 일곱 보 뒤로 물러서있었다. 파편이 튀는 것이 보통이 아니었기에 초식이 끝나는 순간 바로 신형을 뺐다. -쩌저저저적! 그때 천여운의 손에 쥐고 있던 접무도의 도신 전체에 균열이 일어났다. 그와 함께 도신이 부서지며 쇳가루가 되어 바닥으로 흩날렸다. "아......" 평범한 철로 주조된 접무도가 강기가 실린 천마검공의 제 사 초식의 위력을 견디지 못하고 부서져 버린 것이었다. 대장장이 구선웅이 신경 써서 만든 것인데 본의 아니게 일 회용이 되어버렸다. '역시 천마검공을 버틸 수 있는 검이 필요해.' 가루가 되어서 도병만 남은 접무도를 보며 천여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휙! 손바닥을 위에서 아래로 부드럽게 결을 일으키자, 아직까지 시야를 가리고 있던 먼지가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먼지가 가시자 천여운의 눈앞에 보기 좋게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는 청옥석 석벽이 보였다. 천마검공의 제 사 초식은 경이로울 정도의 위력이라 할 수 있었다. '됐다.' 봉해져 있는 벽면의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좋아하던 천여운이 그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려던 차였다. -흠칫! 구멍이 뚫린 벽면에서 온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흉흉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짙은 어둠과 뒤섞인 이 흉흉함은 화경의 경지에 오른 천여운마저 긴장하게 만들었다. -솨아아아! "웁!" 역한 냄새마저 코끝을 자극했다. 동굴 통로의 입구에서 느꼈던 그 혈향과 비린내가 섞인 냄새였다. 불길함으로 가득한 석면의 뒤쪽을 바라보며 잠시 망설이던 천여운이 이내 마음을 진정시킨 후에 구멍을 향해 다가갔다. 그때 나노의 목소리가 빠르게 머릿속을 울렸다. [경고! 경고! 전방에서 플라즈마(plasma) 에너지가 불규칙적으로 치솟고 있습니다. 대기 스프라이트(Atmospheric sprite) 현상이 덮쳐옵니다.] "뭐?" 바로 그 순간이었다. -크르르르르! 바로 앞에 있는 듯한 짐승의 울음소리. 오한이 들 정도로 차가운 기운이 잠식해오며 뚫려있던 석벽에서 희미한 붉은 빛이 번쩍이더니, 뭔가에 의해 천여운의 몸이 뒤로 튕겨져 나갔다. -파아악! "흐헉!" -쾅! 동굴 공동 벽까지 날아간 천여운은 벽면에 박혀서야 멈출 수 있었다. 천여운은 어안이 벙벙한 눈이 되었다. 뭔가 대응할 틈도 없었다. 알 수 없는 어두운 무언가가 자신의 몸에 일격을 가했는데, 이것은 통상적인 인간의 힘이라고 믿기 힘들었다. '대체 뭐지? 막을 수가 없었어.' -크르르르! 그때 또 다시 짐승의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기감을 날카롭게 자극하는 알 수 없는 기운에 천여운이 놀라서 벽면에서 몸을 빼내서 경공을 펼쳐 이를 피해냈다. -쾅! 천여운이 피한 동굴 벽면이 굉음과 함께 그곳에서 먼지가 피어올랐다. 조금만 늦었어도 그대로 직격 당했을 것이다. 먼지로 뒤덮인 벽면 방향에서 그 정체를 알 수 없었던 놈의 길고 거대한 그림자가 보였다. -크르르르! 놈이 먼지 속에서 몸을 뒤틀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놀란 천여운의 두 동공이 심하게 떨렸다. '뭐야? 이건?'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것이 현실인지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피비린내가 뒤섞인 검고 윤기가 나는 비늘. -크르르르! 흉흉한 을음소리를 내고 있는 놈의 머리는 사람의 몸통만 했다. 그 흉악한 머리의 모습은 뱀과 흡사했는데, 머리 전체에 돋아난 수백의 검은 가시들이 날개를 펴듯이 꼿꼿이 서서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석벽에서부터 길게 늘어져 있는 긴 몸체를 보는 순간 천여운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무기?" 그것은 책이나 상상 속에서 보았던 흉수인 이무기였다. 이무기. 그것은 용이 되지 못하고 오랜 세월 동안 살아오면서 영력을 가지게 된 신수였다. 책에서 적혀 있는 이무기는 흰 비늘이나 파란 비늘에 호수에서 살아가는 성스러운 영물이라고 들었는데, 눈앞에 있는 이 검은 이무기는 흉악한 괴수에 가까웠다. '이거 정말 현실이야?' -카아아아아악! 검은 이무기가 거대한 입을 벌리며 위협적으로 천여운을 향해 달려들었다. 환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뚜렷하게 보였다. '빠르다!' 거대한 덩치에 걸맞지 않게 검은 이무기의 공격은 너무 빨랐다. 당황한 천여운이 경공을 펼쳐 동굴 벽을 거꾸로 돌면서 검은 이무기의 날카로운 독니를 피해냈다. -쾅! 이무기의 거대한 두 이빨이 닿은 곳이 동굴 바닥이 패였다. 그 흔적은 마치 날카로운 병기로 바닥을 내리꽂은 형태와 비슷했다. 절대로 환상 따위가 아니었다. -스르르! 검은 이무기가 거대한 머리를 천천히 돌리며 흉악한 붉은 안광을 내뿜으며 천여운을 노려보았다. "빌어먹을!" 그 모습에 절로 거친 소리가 튀어나왔다. 천마 조사의 안배라고 좋아하며 석벽을 부쉈더니 튀어나온 것이 이런 흉악한 괴물이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천여운은 제 손으로 봉마동에 잠들어있던 마(魔)를 깨우고 만 것이었다. -크카아아아아! 검은 이무기가 흉폭하게 포효하며 천여운을 향해 쇄도했다. < 30장 봉마동의 비밀 (2) > 끝 < 30장 봉마동의 비밀(3) > 봉마동에 봉인되어있던 흉악한 마(魔), 검은 이무기가 날카로운 이빨을 보이며 천여운을 집어삼키기 위해 그 머리를 뻗어왔다. -타타타탁! 쾅! 천여운이 빠른 몸놀림으로 경공을 펼치며 검은 이무기의 공격을 피해냈다. 거대한 덩치에 맞지 않게 쾌속한 움직임을 가진 검은 이무기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젠장!" -크카아아아아! 검은 이무기가 틈을 주지 않고 연달아서 천여운이 경공을 펼치기 위해 발을 내딛는 곳을 향해 흉폭하게 울부짖으며 달려 들었다. -쾅! -쾅! -쾅! 이무기의 공격이 부딪칠 때마다 남아나는 벽면이 없었다. 좁은 동굴 안에서 이를 피하려고 하니, 천여운은 천장과 옆 벽면 할 것 없이 가리지 않고 쉴 새 없이 경공을 펼쳐야만 했다. '이러다 동굴이 무너지겠어.' 무너지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상황이었다. 이 거대한 이무기가 어떻게 이곳에 봉해져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놈이 마음만 먹자고 한다면 충분히 동굴 벽을 뚫어서라도 나가는 게 가능해보였다. '저 석실 내부가 전부 청옥석으로 되어 있나?' 만약에 청옥석 벽으로 만들어진 석실이라면 이무기라고 해도 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오랫동안 저 안에 갇혀서 배가 고픈 것인지 흉폭함이 터진 이놈이 더 난리를 쳤다가는 동굴이 무너질 것 같았다. 동굴이 무너진다면 이 괴물은 어찌 될지 모르겠지만 자신은 압사당해 죽고 만다. '안 되겠다. 일단 석실 안으로 유인하자.' -쾅! -타탁! 이무기의 공격을 피해낸 천여운이 이곳저곳 발이 닿는 데로 피하던 방식을 바꿔서, 동굴을 회전하듯이 벽면의 옆으로 경공을 펼쳤다. -크르르르르! -스르르르르! 그러자 검은 이무기가 그를 잡기 위해 청옥석 구멍 안에 걸치고 있던 긴 몸체를 움직였다. '따라온다!' 검은 이무기가 천여운을 따라잡기 위해 회전하자, 그 뱀처럼 긴 몸체가 구멍에서 완전히 빠져나와 동굴에 똬리를 트는 형태로 메워가기 시작했다. -팟! 유도한 데로 놈이 막고 있던 청옥석 벽면의 구멍이 열리자, 천여운이 반대편 벽면을 지지대 삼아 신형을 날려 몸을 집어넣었다. 청옥석 석실에 들어서는 순간 싸늘한 동굴과 달리 습한 기운이 올라왔다. -첨벙! "물이?" 석실 바닥에 발이 닿는 순간 무릎 높이 정도까지 물이 고여 있었다. 평범한 물이라기보다는 코끝을 찌를 만큼 악취가 섞여서 머리에 없는 두통이 생겨날 정도였다. 나노의 야간투시경 모드가 아니었다면 그냥 물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쭈우우우욱! 발을 들어 올리자 끈적함이 느껴졌다. 물의 색깔은 짙은 검은 빛을 띠고 있었는데, 이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 물의 정체가 무엇인지 의문스러워 할 틈도 없이 구멍 안으로 검은 이무기가 머리가 파고 들어왔다. -크카아아아아! "젠장!" -첨벙! 천여운이 끈적거리는 물에서 신형을 뛰어 올렸다. 끈적거리는 이 알 수 없는 액체는 일반적인 물보다도 끌어 당기는 점도가 강했기에 천여운의 경공이 원래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헉!" 몸이 반쯤 떠오른 것을 검은 이무기가 놓칠 리가 없었다. 놈이 이빨을 벌리고 집어삼킬 기세로 쇄도해오자 천여운이 방법을 바꾸었다. 피할 수 없다면 부딪치는 것만이 살 길이었다. -우웅! 천여운의 검지와 중지를 모은 검결지에서 푸른 빛이 응집되며 검강이 발했다. 검강이 형성되자 천여운이 자신을 향해 쇄도해오는 검은 이 무기를 향해 천마검공의 제 삼 초식을 펼쳤다. 자세가 불안전한 허공에서 펼칠 수 있는 초식은 이것뿐이었다. -촤아아아아악! 스물네 개의 검식이 교묘하게 맞물리며 푸른빛의 검결이 쾌속하게 회전하기 시작하더니, 회오리를 일으키며 폭풍이 되어 검은 이무기에게 쇄도했다. -채채채채채채챙! '뭐야?' 초식읕 펼치는 천여운의 두 눈이 커졌다. 아무리 흉악한 괴물이라고 하지만 검강이 실린 천마검공이 부딪쳤는데, 쇳덩어리에 내려치는 것처럼 금속성이 울려 퍼졌다. -크카아아아아! 검은 이무기가 분노했는지 포효를 내지르며 몸부림을 쳤다. 그 힘이 어찌나 강했는지 천마검공의 초식이 완전히 끝나기도 전에 천여운이 몸이 뒤로 튕겨져 나가버렸다. "끄악!" -쾅! 첨벙! 석실의 벽면에 부딪쳤다가 그의 몸이 끈적거리는 검은 물에 떨어졌다. 그가 부딪쳤던 벽면은 바깥에서와 다르게 멀쩡했다. 본의 아니게 석실 전체의 벽면이 청옥석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몸으로 알게 되었다. 청옥석 벽의 단단함 때문에 충격이 분산되지 않아 등이 부서질 것 같았다. "헉...헉..." 천마검공의 제 사 초식을 익히느라 육신의 변환을 하지 않았다면 뼈가 부러지든 근육이 파열되었을 것이다. '천마검공의 초식으로도 몸에 상처가 나지 않다니.' 몸이 아픈 것보다도 큰 문제는 그것이었다. 검은 이무기는 아무런 상처를 입지 않았는지 멀쩡하기만 했다. 천여운은 자신을 향해 흉폭한 울음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검은 이무기를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큭, 어떻게 해야 하지?' 천마검공이 통하지 않을 정도면 그 육체의 강도가 청옥석을 능가한다. 공격이 아에 통하지 않는 괴물을 상대로 싸우는 법은 상정 해 본 적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절망스러워하던 차였다. '응?'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검은 이무기가 길고 거대한 몸체를 움직이면서 천여운을 향해 다가오는데, 바닥을 적시고 있는 끈적한 물이 철렁거리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물은 여전히 천여운의 무름까지만 차있었다. 저 정도 거대한 부피의 괴물이라면 무게 때문이라도 물이 더 높이 차올라야 정상이었는데 그대로였다. 흉수이든 영물이든 실체가 있는 몸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천여운이 인상을 찡그리며 나노에게 명했다. '나노, 증강현실 개안.' [알겠습니다. 사용자의 시각 정보에 증강현실(增强現賁) 개안(開眼) 가동합니다.] 나노의 목소리와 함께 천여운의 동공이 미세하게 떨리며 시야로 흰빛의 입자들이 선들을 그리며 증강현실이 개안되었다. '응?' 증강현실을 개안한 천여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시야에 보이는 검은 이무기의 옆에 어떠한 수치 표시가 떠 있지 않았다. 보통 증강현실을 펼친다면 눈앞에 있는 대상자들의 수치가 흰색 빛으로 표기가 되어서 분석이 되었는데, 아무 것도 표시되지 않았다. 오히려 에너지의 흐름만 알려주는 숫자와 물결 표시의 그림이 보였다. '나노, 이 물결 그림은 뭐야?' [석실 전체에 어두운 플라즈마(plasma) 에너지가 불규칙적으로 발생한 것을 표기한 그래프입니다.] '플라즈마 에너지?' [대기 중의 에너지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져서 이온화 전자의 집합체를 이루는 현상입니다.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지만 이것을 영적(靈的)인 현상이라고도 부릅니다.] '이게 영적인 현상이란 말이야?' [조심하십시오! 대기 스프라이트(Atmospheric sprite) 현상이 덮쳐옵니다.] -크카아아아아! "칫!" 나노의 경고 소리와 함께 검은 이무기가 입을 쩌억하고 벌리며 천여운의 몸을 집어삼키려 들었다. -첨벙! 탓! 천여운이 물의 점도에 대항하기 위해 발바닥의 용천혈에 두 배의 공력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원래 경공을 펼치던 속도로 신형이 원활하게 움직여졌다. -착! '역시다!' 공격을 피해내며 검은 이무기를 바라본 천여운의 눈빛이 의심으로 물들었다. 고여 있는 물에 저 거대한 대가리가 박았는데, 물이 튀어 오르지 않고 바닥에 뭔가가 갈라지는 소리만 들렸다. 자신의 추측을 확신한 천여운이 검은 이무기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나노에게 물었다. '나노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 뭔지 알겠어?' [스물네 개의 철 조각들이 강한 플라즈마 에너지를 방출하며 공중에 떠있습니다.] '뭐?' 나노의 대답에 천여운의 눈빛이 흔들렸다. 혹시나 하는 의구심이 들어맞았다. 분명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은 검은 이무기였는데, 나노는 아니었다. '철 조각들? 거대한 이무기가 아니고?' [그렇습니다.] 인간의 육안은 때론 뇌의 영향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기계인 나노머신은 사물을 직관적으로 받아들인다. 나노의 말을 듣고서야 눈앞에 보이는 것이 검은 이무기가 아니라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천여운이 고민에 빠졌다. -크르르르르! 여전히 자신의 눈앞에는 흉폭한 검은 이무기만 보인다. 나노가 말한 대로 플라즈마 에너지가 영적인 기운이라면 스물네 개의 철 조각들이 그것을 뿜어대면서 이런 환상을 만들어 냈으리라. '그렇다면 철 조각들을 처리한다면 저 환상이 사라질까?' 계속해서 검은 이무기를 따돌리기만 해서는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게 정답이든 아니든 부딪쳐야 했다. -크카아아아아아! 계속해서 달려드는 검은 이무기의 공격을 피하며 천여운이 나노에게 명했다. '나노, 네가 얘기하는 철 조각들의 위치를 붉은 빛으로 표시 해줘.' [알겠습니다.] -우우웅! 천여운의 동공이 파르르 떨리며 검은 이무기의 날카로운 이빨과 두 눈알, 머리를 두르고 있는 가시들에 스물네 개의 붉은 빛이 표시되었다. 긴 몸체에도 분산되어 있으면 어떡하지 하고 고민했는데 그건 다행이었다. '어?' 그런데 이무기의 대가리로 표시된 붉은 빛의 위치가 묘했다. 천마검공의 스물네 개의 검식을 따로 펼치게 되면 저 방향들로 찌를 수 있었다. 마지 천마검공의 기본 검식을 펼치게 의도한 것처럼 말이다. '이럴 수가!......설마 이것이 조사님의 안배란 말인가?' 스물네 개의 철 조각이 어째서 저 위치에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천마검공의 검식을 익혔다면 분명 저것을 맞출 수 있다. 천여운의 눈빛이 날카로워지며 붉은 빛들을 응시했다. -크카아아아아아! 검은 이무기가 포효를 내지르며 천여운을 향해 정면으로 무섭게 뻗어왔다. 삼 년 동안 천마검공의 심법을 운기하면서 허구한 날 해온 것이 천마검공의 기본 검식이다. 화경의 경지에 오른 지금이라면 그것을 거의 동시에 펼칠 수 있다. "하압!" 천여운의 몸이 잔상을 일으키듯이 스물네 갈래 갈라졌다. 그와 동시에 천여운의 검결지에서 푸른빛 검강이 발하며 검은 이무기에게 표시된 붉은 빛의 점들을 향해 쇄도했다. -챙챙챙챙챙챙쟁챙챙챙챙챙챙챙! 금속성의 소리가 석실 내부에 퍼져나갔다. 천여운의 검강이 닿는 곳마다 푸른빛의 입자와 함께 노란 불꽃을 튀겼다. '제발!’ -챙! 스르르르르! 스물네 개의 천마검공의 검식이 동시에 붉은 빛의 점을 관통한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를 집어삼킬 듯이 입을 쩌억 벌리고 있던 검은 이무기의 입을 통과해 천여운의 신형이 지나쳐갔다. -첨벙! 분명 검은 이무기의 입안으로 들어왔어야 했는데 눈앞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봉인된 석실을 들어오기 위해 뚫어놓은 청옥석 벽면뿐이었다. '성공이다!' 천여운이 떨리는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아아아! 이무기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었구나." 그가 천마검공의 검식을 펼치고 지나친, 그곳의 허공에는 스물네 개의 다른 형태를 가진 검은 철 조각들이 미세한 진동을 일으키며 떠있었다. "이건 대체?" 그것을 살펴보기 위해 다가가는 순간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앗?" -채채채채채채채챙! 허공에 떠있던 스물네 개의 철 조각들이 자력이 일어난 것처럼 하나로 뭉쳐지는 것이 아닌가. 하나로 뭉쳐진 검은 철 조각들이 이룬 형태는, "검?" 그것은 검고 영롱한 빛을 내뿜는 검(劍)이 되어 있었다. 검에는 여전히 영력이 남아있는지 허공에 떠서 그 날카로운 검신이 떨렸다.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현상에 할 말을 잃고 넋을 놓고 있던 천여운이 조심스럽게 허공에 떠있는 검을 향해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니 검신에 음각이 새겨진 것이 보였다. [天魔劍] "천마검?" 새겨진 음각의 이름은 바로 천마검이었다. 천마검이라고 한다면 천마신교의 교주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보검인데, 대체 이 검은 무엇이란 말인가? 천여운은 뭔가에 끌린 것처럼 말없이 검병을 손에 쥐었다. -탁! 고오오오오! 그 순간 떨리던 검신의 흔들림이 멈추며, 알 수 없는 검은 기운이 천여운의 손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이, 이게 뭐야?" 당황한 천여운이 화들짝 놀라서 검병에서 손을 놓으려 했지만 검은 기운은 이미 그의 전신을 잠식해왔다. "끄으으으윽!"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감각에 오한이 느껴졌다. 천여운의 새하얗던 얼굴이 검게 물들더니,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물 바닥에 한 쪽 무릎을 꿇었다. -첨벙! 고통스럽게 온몸을 뒤틀던 천여운이 바라보고 있는 세상이 완전히 검게 물들었다. 그 세상은 심연과도 같은 어둠 그 자체였다. < 30장 봉마동의 비밀(3) > 끝 < 30장 봉마동의 비밀(4) > 심연과도 같은 어둠 속에 천여운은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고, 어떠한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사람은 끝없는 어둠 속에서 무한한 공포를 느낀다고 한다. 하지만 이 심연과도 같은 어둠은 천여운을 위협하기보다는 태내 속에 있는 아기처럼 전신을 감싸 안은 것처럼 편안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어둠 속에 녹아들듯이 잠식되려는 순간 천여운이 화들짝 놀라서 정신을 붙잡았다. '안 돼. 어둠에 먹혔다간 내 자신을 잃을 수도 있어.' 오감이 무뎌지면서 한순간에 먹힐 뻔했다는 생각에 경각심이 깨어났다. '나노! 나노!' 천여운이 머릿속으로 나노를 불렀다. 그러나 아무리 외쳐도 나노는 답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어둠 속에 갇혀서 계속 시간이 흘러갔다가는 오 단계 시험을 통과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초조한 마음에 사로잡힌 천여운과 다르게 어둠은 차분하고 고요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천여운이 어둠 속에서 잃어버린 오감을 찾기 위해 감각을 집중했다. '생각을 할 수 있다면 육신이 없어졌다는 게 아니다. 집중하자.' 하지만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데 그것을 다시 되찾는다는 것은 모래 사막에 바늘을 찾는 것보다도 막막한 일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오직 감각을 되찾는 데만 집중하던 천여운이 언젠가부터 천마검공의 심법 구결을 읊고 있었다. 천마검이라 음각이 새겨져 있던 흑검을 잡았을 때부터 이런 일이 일어났기에 혹시나 하는 일말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흘러가는 시간조차 알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변화가 생겨났다. -고오오오오! 끝조차 보이지 않는 심연과도 어둠이 격류처럼 공간이 비틀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소용돌이를 치며 한 지점으로 빨려 들어왔다. '설마 내게 들어오는 것인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를 잠식하려 들었던 광활한 어둠이 오히려 그에게 흡수되어갔다. -슈우우우욱! 그 속도가 너무 빨라서 방금 전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던 어둠이 환상이었나 착각이 될 정도였다. 심연과도 같은 어둠이 소용돌이가 되어 사라진 후에 장막이 걷히듯 사방이 흰 공간으로 바뀌었다. -쿠르르르르! 새하얀 공간에서 큰 진동이 일어났다. 알 수 없는 현상 속에 흰 공간의 바닥이 호수의 물처럼 철렁이더니, 바닥 속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그 긴 몸체를 드러냈다. 영통하면서 흰 비늘이 아름다운 그것은 마치 백룡(白龍)과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용이라고 보기에는 그 크기가 작았고 머리에 있는 용각(龍角) 역시도 그리 길지 않았다. '이무기?' 어둠 속에 갇히기 전에 보았던 그 검은 이무기와 흡사했다. 흰 비늘과 물이 없었다면 말이다. 백색의 이무기가 허공을 바라보며 포효하듯이 울부짖었다. -크카아아아아아! 그 포효는 이 공간 전체를 들썩이게 할 만큼 신령스러운 기운이 충만했다. 포효를 내지른 백색의 이무기가 몸을 들썩이자 비늘이 꿈틀거리며 몸이 조금씩 커져가는 것이 보였다. '자라는 것인가?' 아직은 완전하지 않은 뿔도 조금씩 길어졌다. 그 모습이 마치 진정한 용으로 탈피하기 전의 상태로 보였다. 그런데 용이 몸을 들썩이며 움직일 때마다 사방에 낙뢰가 내리치는 등 이상 징후가 일어났다. -쾅쾅! 물처럼 출렁이는 흰 바닥도 격랑이 일어난 것처럼 파도가 철썩였다. 바로 그때였다. -촤아아아악! -크카아아아아아아아! 뭔가 베이는 소리와 함께 몸을 들썩이며 탈피를 하려던 백색의 이무기가 포효와는 다른 괴성을 질렀다. '아!' 그 원인은 다름 아닌 뿔이었다. 자라나는 이무기의 뿔을 누군가가 베어낸 것이었다. 뿔이 베여나간 백색의 이무기가 괴성을 질러대며 그 거대한 몸체를 뒤틀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 백색의 비늘이 검게 변색 되어 갔다. 노란 빛을 띠던 두 눈이 붉은 안광을 내뿜게 되자, 그 앞에 흑색 장포를 걸치고 있는 한 사내가 흡족한 눈빛으로 놈에게 다가갔다. '저건?' 흑색 장포의 사내의 손에는 흑검(黒劍)이 들려 있었는데, 그것은 어둠 속에 갇히기 전에 보았던 천마검이 틀림없었다. -크카아아아아아! 뿔이 잘리면서 검게 변한 이무기가 분노했는지 가시 같은 비늘을 활짝 펴고서 흑색 장포의 사내를 집어삼키려 들었다. 그 순간 흑색 장포의 사내의 흑검에서 칠흑 같이 어두운 강기가 일어났다. '저게 검강이라고?' 저렇게 칠흑 같은 검강은 처음 본다. 검강을 일으킨 사내의 신형이 이무기를 향해 쇄도하며, 검은 검강에서 절세검초가 펼쳐지며 검결이 폭풍 같은 기세로 일어났다. -촤촤촤촤촤촤촤촤! 흑색 장포의 사내의 신형이 검은 이무기를 스쳐지나가는 순간, 이무기의 머리에서 검은 빛 입자가 사방으로 흩날리더니 이내 그 머리가 수십 조각으로 갈라졌다. '천마검공!!!' 천여운은 눈앞에서 펼쳐진 그 검 초식을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천마검공의 제 삼 초식이었다. 그가 펼쳤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은 엄청난 위력에 경악 할 수밖에 없었다. -콸콸콸! 이무기의 잘려나간 머리에서 새까만 피가 작은 폭포수처럼 흘러나와 출렁이는 바닥을 검게 물들였다. 머리가 없어서 비틀거리던 길고 거대한 이무기의 몸체가 얼마 있지 않아 결국 바닥에 쓰러졌다. 흑색 장포의 사내가 쓰러진 이무기 비늘에서 거꾸로 난 부위에 흑검을 내리꽂았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흑검이 꽂힌 부위에서 검은 아지랑이 피어오르며 검신으로 빨려 들어갔다. 흑색 장포의 사내가 흑검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했다. "제법 오래 걸리겠군. 내 몫은 아닌가 보네." 그와 동시에 사내가 갑자기 천여운이 바라보고 있는 시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 빨려 들어갈 것 같은 흑안(黑眼)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천여운이 바라보던 세상이 빠르게 회전을 하며 일그러졌다. -휘리리리리릭! -첨벙! 꾸르르르륵! "흐헛!" 입 속부터 시작해 코끝을 자극하는 악취에 천여운이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언제 넘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청옥석 석실 안의 끈적거리는 검은 물에 빠졌었다. "쿨럭쿨럭! 으웨에에엑!" 덕분에 이 끈적거리는 검은 물이 목에 넘어갔다. 두세 모금 정도 삼켰는데 너무 역겨웠다. 악취와 속에서부터 역류하는 느낌 때문에 그것을 토해내려 했지만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독성이 있었다면 나노가 위험을 감지하고 곧장 배출했을 텐데, 그런 것은 아닌 듯 했다. 단지 입에서 느껴지는 악취 때문에 괴로울 뿐이었다. [괜찮으십니까?] '나노?' 나노의 목소리에 천여운이 정신이 없는 사람처럼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바닥에 끈적이는 점도가 높은 검은 물. 은은한 푸른빛을 내고 있는 청옥석 벽으로 만들어진 석실. "도, 돌아온 건가?" 방금 전에 자신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환상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도 뚜렷했다. 오랜 시간 동안 심연과도 같은 어둠 속에서 감각을 잃고 있었던 것부터 시작해 이무기를 죽인 흑색 장포의 사내까지 너무도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앗!" 그보다도 현실로 돌아온 것을 인지하자 급한 것이 떠올랐다. 지금 그는 오 단계 시험을 치르는 도중이었다. 어둠 속에 있던 그 시간이 너무도 길었기에 어쩌면 시간을 한참 지나쳤을 지도 몰랐다. 천여운이 다급하게 나노에게 물었다. '나노, 내가 얼마큼 정신을 잃고 있었던 거야?' [정신을 잃지 않았습니다. 검을 잡으신 순간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뭐?' 나노의 말에 천여운이 이해할 수 없었는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긴 시간 동안 몰아의 상태에 있었는데, 그것이 고작 찰나의 시간에 불과했다는 말이 아닌가. 나노의 야간투시경 모드가 해지되지 않은 것을 보면 분명 오래되지는 않았다. '그럼 내가 이곳 동굴에 들어온 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거야?' [반시진에 약간 못 미칩니다.] '하아아아!' 이제 겨우 반 시진밖에 되지 않았다는 말에 천여운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시간제한을 맞추지 못해서 탈락한 줄 알았는데 한시름 덜 수 있었다. '정말 찰나에 불과했구나. 대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고나자 천여운이 나노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내가 잠시 쓰러진 게 다야?' [그건 아닙니다. 검을 잡았을 때, 어두운 플라즈마(plasma) 에너지가 체내로 들어왔습니다. 그 순간 사용자의 뇌의 신경세포가 일시적으로 100퍼센트 활성화 되었습니다.] 인간의 뇌는 하고 있는 일에 따라서 활성화 되는 부위가 다르다. 운동을 할 경우에는 소뇌의 신경세포가 활성화 되고, 오른 손을 쓸 때는 좌뇌, 왼손을 쓸 때는 우뇌가 사용되듯이 모든 부 위의 신경세포가 100퍼센트 활성화되는 경우는 죽을 때까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노의 말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어두운 플라즈마 에너지가 체내에 흡수되었는데, 사용자의 내공이라 불리는 에너지와 흡착하여 일체화 되었습니다.] '내공과 하나가 되었다고?'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천여운이 내공을 운기해 보았다. 그러자 그의 단전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알 수 없는 기운이 느껴졌다. 그것은 마치 검은 이무기의 환상을 상대할 때 느껴졌던 흉흉한 마성(魔性)을 띠고 있었다. '어째서 내공이 이렇게 변질된 거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한 것은 천마검이라 음각이 새겨져 있던 그 흑검이 미친 영향임은 틀림없었다. "엇?" 그런데 천여운의 손에 쥐고 있던 흑검이 보이지 않았다. 넘어지면서 검은 물 바닥에 떨어뜨렸나 살펴보려고 이리저리 다리를 휘저었는데, 아무 것도 없었다. [양 손목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응?' 나노의 말에 천여운이 자신의 양 손목을 들어서 보았다. "이, 이게 뭐야?" 의식하지 못했는데 천여운의 양 손목에 흑철 조각들이 분해 되어 손목의 보호대 형태로 결합되어 둘러싸고 있었다. 어째서 이렇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까 전 흑검을 이루던 스물 네 개의 흑철 조각이 분명했다. '이게 어째서 이런 형태로 내 팔에?' 천여운이 그것을 풀어보려 했지만 너무 견고하게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괴력이라 할 수 있는 천여운의 힘에도 분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엄청난 흡착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혹시 공력에 반응하는 건가?' -우우웅! 운기하여 내공을 주입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체 공력에도 반응하지 않는 이 흑색 철갑 보호대는 무엇에 움직인단 말인가? '아니면.....' 천여운이 이번에는 방법을 바꾸어보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천마검공의 심법의 구결대로 운기하자, 단전의 내공에 일체화 된 마성의 기운도 함께 이끌리며 공력이 일어났다. -스스스! 놀라운 현상이 일어났다. 천여운의 전신에서 흑색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며 흉흉한 마성이 실체를 드러냈다. 마치 검은 이무기가 포효를 내지르던 것과 같은 기세였다. -차차차차차착! 그 순간 천여운의 손목을 두르고 있던 흑철들이 분해되며 하나로 뭉쳐지더니, 이내 검의 형태를 갖추는 것이 아닌가. 흑검은 마치 자신의 주인이 천여운이라는 것처럼 그의 오른 손으로 쏙 들어왔다. "아아아!" 천여운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검은 검신에 영롱한 빛을 내뿜는 흑검은 한 눈에 절세보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천여운은 검을 쥐고 나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천마검(天魔劍)이라 음각이 새겨진 흑검이야말로 천마 조사가 남긴 진정한 안배였다. '시험해보자.' 흑검을 손에 쥔 천여운이 청옥석벽을 향해 다가갔다. 만약 이 검이 천마 조사의 안배라면 천마검공을 펼치더라도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벽 앞에 선 천여운이 천마검공의 기수식을 취하며 흑검에 공력을 불어넣어 검강을 형성했다. -우우웅! "이건?" 천여운의 두 눈이 커졌다. 놀랍게도 그의 검강은 푸른빛을 띠고 있지 않았다. 환상 속에서 흑색 장포의 사내가 보였던 것처럼 칠흑 같이 어두운 검강을 형성하고 있었다. 검은 검강에서는 흉흉한 마성과 함께 무궁무진한 역량이 느껴졌다. 천여운이 가볍게 검은 검강이 둘러싸인 흑검을 청옥석 벽을 향해 휘둘렀다. -촤아아아악! 그러자 도강에도 흔적을 남기는 것이 고작이었던 청옥석벽이 두부 썰리듯이 갈라졌다. 그야말로 경이로운 위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아.... 검강만으로?" 정작 이 엄청난 위력의 검강을 발산하고 있는 천여운 자신조차 놀랄 정도였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천마검공의 제 일 초식을 펼쳐보았다. 천여운의 흑검에서 스물네 개의 검식이 맞물리며 화려한 검 초가 일어나 청옥석 벽면을 갈랐다. -촤촤촤촤촤촤촥! 무너져 내리는 청옥석 조각들 사이로 흑검이 견고하게 그 자태를 빛냈다. * * * 봉마동의 출구, 입구와 마찬가지로 허름한 건물이 지하 계단을 가리고 있다. 건물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세 명의 무공 교두들은 모두가 의아해하고 있었다. 화경의 경지에 오른 천여운의 실력이라면 한 시진이 아니라, 반 시진 안에 빠져나올 수 있을 만큼 쉬운 난이도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한 시진이 거의 다 되어 가도록 소식이 없었다. "무슨 사고라도 난 건 아니겠지요?" 무공 교두 연자운의 말에 선임 무공 교두 호진창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기관 진식들이 초절정의 고수들을 위협하긴 했지만 화경의 고수인 천여운이라면 호신강기마저 펼칠 수 있다. '설마.....' 호진창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봉마동의 비석으로 향했다. 마(魔)를 봉해뒀다고 알려진 동굴. 언젠가부터 마도관의 오 단계 시험을 치르는 곳이 되었지만, 예전에 이곳은 오직 '자격'을 갖춘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장소라고 들은 적이 있었다. '검마 공께서 이곳에 마도관을 창립한 후로 그 규칙이 바뀌었다고 들었다.' 대부분의 무공 교두들은 마도관의 창립자가 누구인지 몰랐다. 그렇게 정해진 한 시진의 시간이 다되어갈 무렵이었다. -끼이이이익! "앗!" 아무 기척을 느끼지 못했는데, 출구가 있는 허름한 건물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바로 천여운이었다. "웃!" 무공 교두들이 일제히 자신의 코를 틀어막았다. 옷이 끈적한 검은 물로 젖어 있는 천여운의 몸에서는 지독한 악취가 흘러나왔다. 근엄한 호진창조차도 그 역한 냄새를 버티기 힘들었는지, 옷 소매로 코를 가리며 힘겹게 말했다. ".....처, 천여운 대주 시험에 오 단계 시험에 통과한 것을 축하하오." "감사합니다." 아슬아슬하게 시험에 통과하게 된 천여운이었다. 하마터면 시간제한을 넘길 뻔했지만 여기에 있는 무공 교두 들 중에서 누구도 그가 통과하지 못할 거라 의심한 자는 없었다. '응?' 코를 틀어막은 호진창의 눈이 천여운의 손에 쥐고 있는 무언가로 향했다. '저게 뭐지?' 천여운의 왼손에는 사람의 팔뚝만한 흰색 몽둥이 같은 것이 들려있었다. 그 모양이 마치 여물지 않은 사슴의 뿔과 같았다. < 30장 봉마동의 비밀(4) > 끝 < 31장 천마검공을 완성하다(1) > 원래 오 단계 시험을 통과하게 되면 곧장 마도관주에게 가지만, 끈적이는 검은 물에 젖어서 악취가 심한 천여운은 숙소에 먼저 들릴 수 있게 되었다. 숙소에 도착한 그는 곧장 몸을 씻었다. 반 시진 가까이 목욕을 해서야 겨우 악취가 가셨다. 목욕을 마친 천여운은 자신의 옷에 물든 검은 물을 짜내서 대야에 모았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는 접무도가 부서지면서 비게 된 푸른색 가죽 도집에도 이 악취 나는 검은 액체를 모아왔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천여운이 어째서 이 검은 액체를 모은 것일까? 그것은 봉마동의 숨겨진 청옥석 석실에서 나오기 전에 있었던 일 때문이었다. 흑검의 위력을 시험한 그는 만족스럽게 시험을 재개하려 했다. 그러나 전신이 뜨거워지는 알 수 없는 현상 때문에 잠시 멈춰서 가부좌를 틀고 않아 운기조식을 취했다. 일 각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무렵, 천여운의 모공에서 소량의 노폐물들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이 액체들이 빠져나온 후부터 전신의 경맥들에 흐르는 내공들이 더욱 원활하게 도는 것이 아닌가. '이게 대체?' [체내에 흡수되었던 점도 높은 액체가 전신의 경맥을 순환하면서 남아있는 소량의 노폐물들을 체외로 배출시켰습니다.] 천여운은 화경의 경지에 오르면서 막혀있던 임독양멕(任督兩脈)이 타통하면서 전신의 경맥에 있던 노폐물들이 전부 배출 되었다. 그러나 사람인 이상 시간이 흐르면서 경맥에 불순물이 생겨 날 수밖에 없다. 완전히 선식을 하고 선도(仙道)를 지향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나노의 설명대로라고 한다면 미세하게 남아있던 노폐물마저 배출시킬 만큼 이 액체는 굉장한 효능을 지녔다고 할 수 있었다. '아! 이 액체에 그런 효능이 있단 말이야?' 생각해보니 이 액체는 이무기가 죽으면서 흘러나왔던 피였던 걸로 기억했다. 그에게는 자그마한 효과를 가져왔지만 이것을 수하들에게 준다면 경맥에 있던 불순물들을 배출하고 원활한 운기를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챙겨가야겠다!' 담아갈 것이라고 해봐야 접무도가 부러지면서 비게 된 가죽 도집뿐이었다. 도집 안에 검은 액체를 담은 천여운은 석실 전체에 가득한 검은 물을 바라보며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다시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 양이라면 본교의 무력을 높일 수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아쉽게도 무산되고 만다. 나가려고 하던 천여운은 발밑에 걸리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탁! '뭐지?' 석실 바닥의 한 가운데 덩그러니 박혀있는 이것을 기이하게 여긴 그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뽑아냈다. -콰지지지직! 그 순간 빠진 곳을 중심으로 바닥이 붕괴하며 함몰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함몰에 놀란 천여운은 다급하게 경공을 펼쳐서 청옥석 석실을 빠져나왔다. 조금만 늦었다면 꺼지는 바닥에 빠질 뻔했다. '.......이런.' 함몰된 거대한 구멍에 석실을 무릎 높이까지 메우고 있던 검은 물이 전부 빨려 들어갔다. 바닥까지 청옥석으로 되어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조금이라도 챙겨놓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대야에 받아놓은 정도라면 마도관에 남아있는 수하들에게 줄 수 있는 양은 충분히 되었다. '그나저나 이게 아직 남아있을 줄이야.' 천여운이 숙소의 탁자 위에 올려놓은 흰 몽둥이를 보았다. 석실에서 뽑기는 했지만 처음에는 무엇인지 긴가민가했던 그였다. 사슴의 뿔처럼 생긴 투박한 몽둥이가 무엇인지 고민했던 천여운은 이내 자신의 환상 속에서 보았던 흰 이무기의 잘린 뿔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급하게 챙겨오긴 했는데.....이걸 어떻게 써야 하지?' 이무기의 뿔이니까 뭔가 특별한 게 있지 않을까 싶어서 챙겨왔다. 이무기의 피가 전신의 경맥에 있는 노폐물을 내보내는 효과가 있었으니, 이것을 고아먹으면 내공을 올릴 수 있지 않을까 추측했다. '나노, 이 뿔을 분석해줘.' [알겠습니다.] 천여운이 뿔에 손바닥을 갖다 대자 짜릿한 느낌과 함께 나노가 그것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분석 결과가 나왔다. [분석한 결과 프로그램의 데이터에 없는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어 알 수가 없습니다.] '알 수 없어?'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영물이라 할 수 있는 이무기에 대한 정보가 과학이 발달한 먼 미래라고 있을 리가 만무했다. 데이터에 없는 성분이었으니 이것의 효능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뿔의 경도가 초고경도 금강석에 약간 미치지 않는 경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금강석?' 지구상에서 가장 단단한 물질이라 불리는 초고경도 금강석에 약간 미치지 않을 정도면 엄청난 경도였다. 청옥석보다도 훨씬 단단하다는 이야기였다. 호기심이 생겨난 천여운이 검결지에 푸른빛의 검강(劍罡)을 일으켰다. -우우웅! 단전에서 마성(魇性)의 기운을 끌어내지 않는다면 평소와 같은 검강을 일으키는 게 가능했다. 시험해보기 위해 최대한 검강을 용축시켜 뿔을 내리쳤다. -촥! 지지치치치칙! 놀랍게도 검강을 내려쳤는데 이무기의 뿔은 멀쩡하게 버텨냈다. 오히려 묘한 반탄력이 일어나 강기를 대항하기마저 했다. 영물의 뿔이라 하여 뭔가 특별한 게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단단할 줄은 몰랐다. "아!" 놀라는 것도 잠시였고 천여운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천마검공을 펼칠 수 있는 흑검을 찾아내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천마검(天魔劍)이라고 음각이 새겨진 것이 마음에 걸렸던 그였다. '이걸로 검이나 도를 만들면 되겠구나!' 이 정도로 단단한 뼈라면 제련해서 검이나 도를 만들면, 그가 펼치는 천마검공의 검법이나 접무도법의 도법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내일 일찍 구 장인에게 가봐야겠다.' 워낙 강도가 단단해서 과연 제련이 가능할지 의문이 들었지만 명장인 구야자의 후손인 구선웅이라면 어떻게 가능하지 않을까. 신시(申時) 중엽,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은 천여운은 곧장 마도관의 본관으로 향했다. 본관 건물의 앞에는 오 단계 시험에 동행했던 세 무공 교두들 중에서 가장 젊은 마윤이라는 교두가 기다리고 있었다. "꽤 오래 걸렸구려. 천 대주." "죄송합니다. 냄새가 금방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건 그렇구려." 무공 교두 마윤이 이해가 간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살면서 그런 지독한 악취는 처음 맡아보았다. 한편으로 봉마동의 지하 동굴에 그런 함정이 있었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봉마동에 있는 기관 진식을 직접 겪어본 무공 교두라고 해봐야 선임 무공 교두인 호진창뿐이었다. "들어갑시다." 무공 교두 마윤을 따라 본관 일 층에 있는 관주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집무실에는 마도관주인 좌호법 이화명과 선임 교두인 호진창이 단 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천여운을 바라보는 이화명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응?' 불과 한 시진 반 정도 전에 집무실에 천여운을 보았던 그였다. 그런데 오 단계 시험을 치르고 나서 풍겨져오는 기운이 더욱 강해져 있었다. 잘 갈무리하고 있었지만 묘한 마성(魔性)마저 느껴졌다. '......정말 호 교두의 말이 사실이란 말인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도 예전에 봉마동에 들어간 적이 있었지만 미로 같은 동굴에는 기관 진식 이외에 어떠한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호법가 출신인 그도 소문으로만 들어왔던 이야기였다. [오직 '자격'을 갖춘 자만이 봉마동에 숨겨진 마(魔)와 조우 하리라.] 마교 내에서도 전설처럼 떠도는 이야기였고, 허황된 소문이라고 생각했다. 수백 년 동안 누구도 그 마(魔)를 조우한 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천여운이 익힌 그 '검법'부터 시작해 봉마동을 다녀온 후로 풍기는 마성에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어쩌면 본교에 진정한.....' "흠흠! 관주님." 헛기침을 하는 호진창의 목소리에 혼자 생각에 잠겼던 이화명이 표정을 바꾸어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했다. "천 대주, 아닌가, 이제는 천 단주라고 해야겠군." 이화명이 집무실 책상 서랍에서 금색 패를 꺼내서 넘겼다. 금색 패에는 단(團)이라고 음각이 새겨져 있었다. 오 단계 시험을 통과하면서 단주로 직위가 상승하게 된 것이었다. 단주의 신분을 상징하는 패를 받아든 천여운이 좌호법 이화명에게 포권을 취했다. "감사합니다." "오 단계 시험을 합격한 것을 축하하네. 이제는 정말 어엿한 본교의 고수로 성장했군."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이화명의 입에서 나온 칭찬은 진심이 담겨 있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이렇게 성장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언제 방출되더라도 이상할 게 없던 애송이가 본교의 장로들 조차 무시하기 힘들 정도의 고수로 일취월장하였다. '......섭맹 그 주정뱅이 놈한테 정말 양보할 게 아니었어.' 만약 천여운이 소교주 쟁탈전마저 이겨내서 소교주의 자리를 쟁취하게 된다면, 우호법 섭맹은 호법가로서 최초로 차기 교주를 제자로 키웠다는 명예를 얻는 셈이었다. 이제는 자신이 제자로 받을 수준은 한참 넘어섰기 때문에 내심 아쉬웠다. "축하드립니다. 단주님." 무공 교두 마윤이 공손하게 포권을 취하며 천여운을 축하했다. 이제 단주의 자격을 지녔기 때문에 천여운의 직위는 무공 교두들보다 높았다. 마도관에서 그에게 평대를 할 수 있는 자는 마도관주인 이화명과 같은 단주급 패를 가진 선임 무공 교두 호진창뿐이었다. "여기 받게." 선임 무공 교두 호진창이 천여운에게 마룡단이 담긴 작은 목함과 함께 뭔가를 넘겼다. "이건?" "본교의 단주들에게 지급되는 비수(匕首)일세." 비수의 손잡이가 고급스럽게 꾸며졌고, 날을 가리는 검집의 가죽 또한 잘 제련되어서 고풍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검집을 열어보자 짧지만 날카로운 예기를 풍기는 검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현철로 만든 것이지." 비수에 검신에 천마신교(天魔神敎)라고 작게 음각이 새겨져 있었다. 새겨진 음각에서 검기가 느껴졌다. 장인이 새긴 것이 아니라 검의 고수가 새긴 듯 했다. "그 음각은 교주님께서 직접 새기신 것이네. 단주들에게만 하사하시는 영광스러운 물건이지." 호진창의 말에 천여운의 표정이 굳어졌다. 교주의 검기로 새긴 비수이기에 생도들이나 교인들에게는 무한한 영광일지 모르겠으나, 천여운에게는 전혀 아니었다. -착! 가죽집에 비수를 집어넣은 천여운이 그것을 허리춤에 꽂았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버리고 싶었지만 좌호법 이화명이나 무공 교두들이 보는 앞에서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천여운이 차갑게 식은 자신의 속내를 숨기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오 단계를 통과했으니, 육 단계 시험을 여쭤 봐도 괜찮겠습니까?" 그 질문에 좌호법 이화명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의욕이 넘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흥미롭게 되었군.' 어쩌면 육 단계 시험은 지금의 천여운이 가장 바라는 시험일 수도 있었다. 마도관이 창립된 이래 열 손가락을 넘긴 적이 없는 육 단계 시험은 적어도 화경의 경지에 올라야만 치를 자격이 생긴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생도들은 육 단계 시험을 치르지도 못하고 마도관을 졸업했다. 마도관의 입관식 당시에 대부분의 생도들에게 해당 사항이 없다면서, 설명을 생략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칠십 년 만에 드디어 그 자격을 갖춘 이가 나타났다. 바로 천여운이었다. "천 단주, 지금의 자네라면 충분히 자격이 되는군." '아아아! 육 단계라니!' '내 대에서 보게되는 구나. 허허..' 자격이 있다는 말에 오히려 무공 교두들이 더욱 들떴다. 마도관에서 가장 오랫동안 근무한 선임 무공 교두 호진창조차도 자신의 임기 기간 중에 육 단계 시험의 자격을 갖준 자는 처음 본다. "육 단계 시험은 본교의 최고 고수들이라 할 수 있는 열두 장로 중의 한 분께 도전하는 것일세." 의미심장한 이화명의 말에 잔잔했던 천여운의 두 눈동자가 파도처럼 일렁였다. < 31장 천마검공을 완성하다(1) > < 31장 천마검공을 완성하다(2) > 모두가 나간 관주 집무실은 그 주인인 좌호법 이화명만이 남아 있었다. 이화명은 책상에 걸터앉아 천여운이 반납한 은색 대주 패를 만지작거렸다. '제법 영글었군.' 삼 년 전과는 딴 판이었다. 분노에 타올라서 주체를 하지 못하던 모습은 사라졌다. 육 단계 시험이 열두 장로에게 도전할 수 있는 것을 알았는데도 스스로의 감정을 통제했다. 그 모습만 본다면 냉철한 교주와 꼭 빼닮았다. '도전하고 싶은 장로가 있는가?' '......조금 더 고민하고 말씀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신중해진 면모에 생각이 제법 깊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화 부인 때문에 당연히 망설이지 않고 독마종의 종주인 백오를 선택할 줄 알았다. '단순히 복수심만으로 도전하기에는 위험한 자이지.' 괴독마장(怪毒魔杖) 백오. 순수한 무공의 경지를 떠나서 살상 능력으로만 친다면 여섯 종파의 장로들 중에서도 수위 급에 꼽힐 만큼 위험한 자였다. 이 년 동안 뇌옥에 투옥되어 있던 백오는 불과 석 달 전에 장로 직에 복직했다. 물론 원래의 육 장로에서 십이 장로로 직위가 격하되었다. 독마종의 힘이 많이 약화되었고 순순히 징계를 받아들였기에 그것을 감안하여 장로로 복직시킨 것이었다. 화경의 고수를 그저 방치해두기에는 전력상의 손실도 컸다. '속내는 가까이서 지켜보시려는 것이지.' 죄수들의 역혈마공 사태가 벌어지면서 검마종이 대가를 치르면서, 여섯 종파는 삼 년 동안 날개를 접고 몸을 움츠린 상태였다. 약화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그들이 가진 힘은 마교의 삼 할에 가까웠고, 경험 많고 암수에 잔뼈가 굵은 그 늙은이들이 언제까지 몸을 낮출 리가 없었다. 마도관의 종착이라 할 수 있는 사 년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갈고 있던 발톱을 드러낼 것이다. '그때가 되면 본교에 엄청난 피바람이 불겠지.' 이제 천여운이 다가올 위험에 대처하고 준비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한편 본관 건물에서 나온 천여운은 마도관의 비급 서재 건물로 향하고 있었다. 천여운 역시도 관주 집무실을 나온 후부터 많은 생각에 잠겼다. 육 단계 시험이 설마 열두 장로들에 대한 도전권일 줄은 몰랐던 그였다. 화경의 경지에 오른 고수는 무림에서도 수위 급에 속하는 고수였기에 교내에서 장로의 자리에 도전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 만약 그가 장로를 실력으로 꺾게 되면 장로의 직위를 얻을 수 있게 된다. 혜택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이번 오 단계 시험을 통과하면서 마도관의 비급 서재의 숨겨진 중이라 할 수 있는 지하층을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 한다고 한다. 마도관의 입관식 때만 하더라도 비급 서재에 지하층이 있다고 밝히지 않았는데, 천여운에게 육 단계 시험을 치를 기회가 생기자 그 사실마저 알려주었다. 하지만 천여운의 머릿속에는 어떠한 혜택보다도 공식적으로 장로들과 겨룰 수 있게 된다는 것이 중요했다. '여섯 종파의 장로를 노릴 수 있다.' 마도관이 끝나는 순간부터 여섯 종파와의 싸움이 시작될 것이다. 그 전에 공식적인 비무를 통해서 여섯 종파의 우두머리를 제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미 머릿속에서 생각해둔 자가 있었지만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그 자가 두렵다기보다는 득과 실을 고려해서 가장 치명적인 수를 놓기 위해서였다. 그러는 사이에 마도관의 비급 서재 건물에 도착했다. 추운 겨울에도 여전히 건물 앞에 책상을 두고 근무하고 있는 방명록 담당 교두의 모습이 보였다. 두꺼운 털옷을 입어도 추위를 숨길 수 없는지 코끝이 빨겠다. "오오!" 오랜 만에 나타난 천여운의 모습을 알아본 방명록 담당 교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삼 단계 시험 이후로 드문드문 오는 생도들 덕분에 몇 년 째 방명록을 담당하는 근무가 지루해진 참이었다. 긴 폐관 수련으로 삼 년이 넘게 보이지 않던 얼굴을 보게 되자 반가운 듯 했다. "천 대주 오랜 만이오." "오랜만입니다. 교두님." "아! 이제 대주라고 부르면 안 되겠구려." 방명록 담당 교두는 눈치가 없는 자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천여운이 왔을 때 사 단계 시험을 통과했을 때라는 것을 기억했다. 그렇다면 지금 그가 비급 서재 건물을 찾아왔다는 것은 분명 오 단계 시험을 통과한 게 틀림없었다. -탁! 방명록 담당 교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포권을 취했다. "천 단주님을 뵙습니다." 마교에서 중요한 것은 나이가 아니었다. 철저하게 실력과 직위로 그 위치가 결정되었다. 천여운에게 예를 표하는 방명록 담당 교두의 얼굴에는 어떠한 시기심이나 불만도 없었다. "오 층으로 올라가시는 거겠지요?" "그렇습니다." "이곳에 작성하시면 됩니다." 담당 교두가 내미는 방명록 종이를 바라보니, 앞서 오층 비급 서재를 방문했던 자들이 이름이 차례대로 적혀 있었다. 천무연, 천경운, 사마착, 고왕흘, 문규, 극신, 백기. 총 일곱 명이었다. 이 일곱 명이 현재 남아있는 생도들 중에서 완숙한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자들이었다. 이 중에 세 명이 천여운의 수하들이라는 것은 정말 큰 수확이었다. '사마착?' 사마착이라는 이름에 천여운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두 명의 소교주 후보자들 다음으로 가장 빨리 오 단계 시험을 통과했다. 그러고 보니 삼 단계 시험 때도 일반 생도들 중에서 유일하게 두 개의 노란 명찰을 획득했던 걸로 기억났다. '상위 종파인가?' 자주 이름을 보게 되니 익숙해져갔다. 천여운이 방명록에 있는 백기의 밑줄에 자신의 이름을 기입했다. 방명록 담당 교두가 천여운에게 초 두 개를 넘겨주었다. 그런데 시간이 더 늘었을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줄이 그어진 위치가 사 층 비급 서재에 올라갔을 때와 차이가 없어보였다. "열람 시간은 세 시진입니다.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예상대로 사 층과 동일한 시간제한이었다. "알겠습니다." 천여운의 대답에 방명록 담당 교두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단주님." "......알겠소." 초에 이름을 기입하고 불을 붙인 한 개는 진열장에 넣고, 남은 하나를 들고 천여운은 원통을 받아서 비급 서재의 오 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올라서 오 층에 도착하자 가장 공간이 작은 서재가 보였다. 탑처럼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내부의 평수가 작아지는데, 오 층의 비급 서재는 비급서의 양이 적어서 아래층들과 달리 벽면 외에는 책장이 없었다. '스무 권?' 얼핏 보아도 그 정도뿐이었다. 그 중에서는 천여운도 익히 알고 있는 무공의 비급서가 눈에 띠었다. [접무도법(蝶舞刀法)] 스승인 우호법 섭맹이 호언장담한 대로 접무도법은 오 층 비급 서재에 있었다. 한 권은 생략해도 될 듯 했다. 드디어 고대하던 순간이 찾아왔다. '천마검공의 마지막 초식.' 오 층 비급 서재의 한 가운데에 청옥석 비석이 우뚝 서있었다. 천여운이 상기된 얼굴로 청옥석 비석의 앞면으로 다가갔다. 비석의 앞면에는 아래층에 있던 비석들과 마찬가지로 초식의 운기요결을 숨겨놓은 시조가 새겨져 있었다. '나노, 스캔해.' [알겠습니다.] 비석의 앞면을 스캔한 천여운이 뒷면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비석의 뒷면을 바라본 천여운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낼 뻔했다. '이게 대체 뭐야?' 당연히 검흔이 있으리라 여겼던 비석의 뒷면에는 어떠한 흔적도 없었다. 난잡하게 그어 있어야 할 파훼초식의 검흔도 없었고, 천마 검공의 검식으로 추정되는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 해봐야 가운데 아주 작은 구멍뿐이었다. '왜 아무 것도 없는 거지?' 차라리 비석이 훼손되어 있다면 납득할 만 했지만 아무런 검흔이 없다는 것은 이상했다. 천여운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비석의 뒷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천마조사께서 아무런 검초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파훼초식도 없는 것인가.' 그것 외에는 추측할 만한 것이 없었다. 고민을 거듭하던 천여운이 인상을 찡그리며 나노에게 물었다. '나노, 네가 보기에는 여기에 무슨 검흔이 남아있어?' [비석에 한 사람이 남긴 걸로 추정되는 검흔이 남아있습니다.] '뭐? 검흔이 있다고?' [사용자의 시각 정보에 증강현실(增强現賁) 개안(開眼)합니다. ] 천여운의 동공이 빠르게 흔들리며 흰 빛의 입자가 선을 그리며 증강현실이 개안되었다. [초점을 줌 인(zoom in)하겠습니다.] 나노의 말과 함께 비석의 뒷면 부분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확대를 한 부분은 비석의 정중앙에 나있는 아주 작은 구멍이었다. '앗!' 구멍이 머리 크기만큼 확대되는 순간 천여운의 두 눈이 커졌다. 그 부분이 확대될 때까지도 몰랐는데, 작은 구멍의 결 부분에는 미세한 흠들이 있었다. 단순한 흠이라기보다는 간격이 일정하게 벌려져 있었는데, 그 숫자가 정확하게 스물네 개였다. '설마 이 흉들.....천마검공의 검식?'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평범한 흠이다. 하지만 그 위치들이 천마검공의 검식을 펼쳤을 때의 방위들이었다. 스물네 개의 검식이 향해졌을 때의 원에 가까운 방위들의 요혈을 찌를 수 있는데, 이 구멍처럼 하기 위해서는 한 지점을 향해 검식을 전부 모아야만 가능했다. '이렇게도 검식을 펼칠 수 있단 말인가? 잠깐 그렇다면....' 천여운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앞면으로 가보았다. 시조에 가려져서 몰랐는데 이 작은 구멍은 반대편까지 관통 되어 뚫려 있었다. '나노 확대해봐.' [알겠습니다.] 나노가 시야의 초점을 크게 확대하자 스물네 개의 흠들이 구멍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듯이 희미한 검흔이 그려져 있었다. 공력을 거의 쓰지 않았기에 이 정도의 흔적에서 그친 것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천여운은 그제야 이 검초의 비밀을 알 수 있었다. 이 흔적은 순수한 검 초식에서 일어난 검력이 하나로 집중 되었다가 폭발적으로 퍼져나가면서 이런 위력을 낸 것이었다. 만약 여기에 일정 이상의 공력이나 강기를 썼다면 청옥석은 산산조각이 났을 게 자명했다. '천마 조사께선 정녕 인간이 맞단 말인가?' 화경의 경지에 오르면서 검(劍)에 대한 시야가 넓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이건 어떠한 검의 고수도 생각하기 힘든 발상이었다. 모든 검식을 하나로 집중시켜 공방일체가 가능하면서 폭발적인 위력의 최강의 검초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이 최강의 검초를 과연 누가 파훼할 수 있을까? 청옥석 비석에 파훼검초가 없었던 이유는 천마검공의 검초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이것을 평범한 검식만으로 깨뜨릴 방법을 찾지 못한 것이 틀림없었다. '검을 풀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로 일원화 했다. 검식에 담긴 검의(劍意)마저 하나로 모으게 된다면 당연히 이런 폭발적인 역량을 일으키는 게 당연하다.' 천마검공의 마지막 검초에 숨겨진 비밀. 그것을 깨닫는 순간 예측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몰아(沒我)의 상태가 찾아온 것이었다. '검의를 하나로 집중한다. 검에 담긴 의지를 하나로 모은다. 뜻이 하나로 모아진다.' 때론 깨달음이라는 것은 불시에 찾아오기도 한다. 천마 조사가 남긴 마지막 검초에는 그가 말년에 깨달은 검에 대한 오의(悟意)가 집대성되어 있었다. 그 오의를 조금이라도 얻게 된다면 그 깨달음은 한계에 둘러싸고 있는 육신의 껍질을 깨게 만든다. -털썩! 천여운이 바닥에 주저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몰아의 상태로 들어간 그의 전신에서 오색찬란한 빛이 흘러나오며 웅대한 진기가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바람이 일어났다. -솨아아아아아! 벽면의 책장에 꽂혀있던 책들이 넘어지며 난리도 아니었다. "헉! 이, 이게 무슨?" 오 층 비급 서재를 담당하는 초절정의 고수 감궁이 놀라서 천여운을 바라보았다. 전신에서 휘황찬란한 오색 빛이 뿜어져 나오는 현상은 분명 큰 깨달음을 얻으면서 높은 경지로 올라가기 위한 현상이었다. -타타타탁! "대체 무슨..." "쉿!" 오 층 비급 서재를 지키는 또 다른 초절정 고수 두 명이 청옥석 비석이 있는 쪽으로 달려오자 감궁이 그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일렀다. 지금 시끄럽게 굴어서 천여운을 방해하게 된다면 대공을 깨뜨리게 된다. [호법 대형!] 감궁의 전음성에 두 명의 고수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천여운을 돕기 위해 그의 주위로 삼각대형으로 서서 호법 대형을 갖췄다. -솨아아아아! 그들은 천여운의 몸에서 더욱 강하게 발하는 오색 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기에 호법을 서면서도 눈을 떼지 못하고 경악했다. '오, 오기조원(五氣造元)!' 진정한 화경(化境)이라 할 수 있는 그 극(極)에 이른 자가 오르는 마지막 단계가 바로 오기조원이었다. 천여운은 화경의 경지에 오르면서 천지인의 기운을 아우르는 삼화취정(三化聚頂)을 이루면서 임동양맥을 타통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화경은 반쪽짜리라고 할 수 있었다. 오기조원을 통해서 체내에 있는 오행의 기운마저 하나로 일원화시킬 때, 진정한 경(境)에 오른다. 반 시진의 시간이 지났을 무렵, 휘황찬란하게 빛나던 오색 빛이 천여운의 몸으로 완전히 스며들며, 새하얀 하나의 빛으로 일원화되더니 몸에서 들썩거렸다. -뿌드드드득! 뿌드드득! 뼈와 근육이 재구성되면서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일 각 가량 동안 들썩이던 천여운의 몸에서 새로운 현상이 일어났다. -쩌저저저저적! '앗!' 천여운의 얼굴 피부에 실금이 가자, 세 명의 고수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환골탈태 (換骨奪胎)!!!' 할 말을 잃은 세 사람이 입을 벙긋거렸다. 자신들의 눈앞에서 환골탈태를 보는 날이 올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한 번 갈라지기 시작한 실금은 이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조금만 건드려도 그대로 깨져버릴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꿈틀! 쩌저적! 천여운의 몸이 움직이는 순간 그의 전신을 두르고 있던 균열이 간 껍질들이 일어나 사방으로 흩날리며 먼지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오 층 서재를 엉망으로 만든 진기의 바람이 수그러들었다. 천여운이 감고 있던 두 눈을 떴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 같은 엄청난 진기를 내뿜어대던 사람이라고 믿기 힘들 만큼 전신의 기운이 잘 갈무리 되었다. 지금이라면 좌호법 이화명이라고 해도 천여운의 기운을 절대로 감지할 수 없을 것이다. 천여운은 자신에게 벌어진 일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아아! 화경......화경의 극에 이르렀다!' 천마 조사의 마지막 심득인 천마검공의 제 오 초식을 깨닫게 되며, 그는 진정한 화경(化境)을 이루었다. < 31장 천마검공을 완성하다(2) > 끝 < 31장 천마검공을 완성하다(3) > '뇌로 전이 받지 않고 초식을 깨달은 것은 처음이구나.' 이것은 천여운에게 있어서 또 다른 성과라 할 수 있었다. 감격해하는 천여운을 향해 오 층 비급 서재를 지키는 세 명의 고수들이 다가왔다. 세 명이 누구할 것 없이 포권을 취하며 화경(化境)의 극이라는 대공을 이룬 천여운을 축하했다. "단주의 대공을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자신이 깨달음을 얻는 동안 호법을 서 주었던 그들에게 고마움을 느낀 천여운 또한 정중하게 한 명 한 명에게 포권을 했다. 이들의 눈빛에는 부러움과 동경이 뒤섞여 있었다. 마흔을 넘는 나이에 겨우 도달한 초절정의 경지였는데, 이제 겨우 약관으로 보이는 천여운이 오기조원을 이루면서 환골탈태를 하니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 화경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은?' 초절정의 고수 감궁의 두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말은 마도관의 육 단계 시험을 치를 수 있다는 말이었다. 칠십 여 년 전을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마도관의 기수들 중에서 한 번도 화경의 고수가 나타난 적이 없었다. '새롭게 본교의 실세가 되실 분이 탄생하는 것을 이 두 눈으로 목격한 건가?' 육 단계 시험을 통과하게 된다면 새로운 장로가 될 수 있다. 장차 무림 삼대 세력 중 하나인 천마신교의 수뇌부가 될 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설사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다고 해도 화경의 고수라고 한다면 그에 상용하는 대우를 받게 될 테니, 차기 실세가 될 확률이 높았다. '나노. 내가 얼마큼 오랫동안 이러고 있던 거야?' [한 시진을 살짝 넘겼습니다.] 나노의 대답에 천여운은 내심 안도했다. 그래도 마지막 층인 만큼 본교에서 가장 고절한 무공의 비급서들이었는데, 시간을 초과해서 스캔하지 못했다면 아쉬울 뻔 했다. 두 시진이나 시간이 남았으니 충분하다 못해서 넘쳤다. '아!'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서재가 엉망이 되었군요." 오 층 비급 서재에 있던 많은 장식부터 시작해 벽면의 책장에 있던 책들이 전부 떨어져서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미안해하는 천여운에게 감궁이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개의치 마십시오. 대공을 이루셨는데, 서재가 조금 엉망이 된 게 무슨 문제이겠습니까?" 말은 이렇게 했지만 표정부터가 걱정으로 가득해서, 세 명의 고수들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비급서에 손상이 없는지 확인하러 부리나케 달려갔다. 장식들이야 부서져도 상관 없지만 오 층의 비급서들은 매우 중요한 보물이었다. '잘됐군.' 그들이 비급서를 확인하는 사이에 천여운의 시선은 청옥석 비석으로 향했다. 얼핏 보면 육안으로 확인하기 힘들었고 천마검공의 검식을 모른다면 그저 평범한 흠처럼 보이겠지만 굳이 흔적을 남길 필요가 없었다. -우웅! 천여운이 손가락 끝으로 아주 살짝 강기를 일으켰다. 얼핏 단순해 보였지만 이렇게 세밀하게 강기를 다루기 위해서는 화경의 경지에 이르러야만 가능했다. -치지직! 강기가 실린 손가락으로 청옥석 비석에 있는 구멍을 살짝 문질렀다. 그러자 구멍 부분이 강기에 뭉그러져서 검흔이 사라졌다. '됐다.' 천마검공의 검초를 다른 사람과 공유할 생각 따윈 일체 없는 천여운이었다. 서재가 엉망이 되지 않았다면 흔적을 지울 틈이 없었을 것이다. 일각 정도 비급서들에 특별히 훼손된 부분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감궁은 천여운이 남은 시간 동안 열람을 해도 좋다고 했다. 진기의 바람이 몰아치면서 촛불이 꺼졌지만 나노를 통해 시간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어차피 열아홉 권만 스캔하면 되니까.' 그 정도라면 이각이면 충분했다. 천여운이 책장에 꽂혀 있는 비급서들을 살펴보았다. 접무도법 이외에 가장 눈에 띠는 것들은 역시 여섯 종파의 비급서였다. 그가 가장 유심하게 살피려는 이유는 여섯 종파의 종주들이 이 무공들을 통해서 화경의 경지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검마종의 광혼검법(狂魂劍法). 복마종의 복마공권(伏魔攻拳). 현마종의 유현운장(柔玄雲掌). 음마종의 파공경음(派攻境音). 독마종의 섬독마장(蟾毒魔掌). 도마종의 환마도법(幻魔刀法). 아마 이 무공들이 그들이 가진 최강의 절기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어설픈 무공 비급서를 내놓을 리는 없기 때문에 이것들 역시도 마교에서 최상위 무공이 분명했다. 접무도법이 있다는 것은 이 중에 좌호법 이화명의 무공도 있으리라. '적염검법(赤炎劍法)....이건가?' 무공명만 보아도 타오를 것만 같은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이화명과 어울렸다. 그런데 이 중에서 유일하게 무공 비급서가 아닌 것이 하나 있었다. 풍신보(風神步). -촤르르르! 궁금한 마음에 넘겨보았는데 이것은 보법과 경공이 적혀 있는 비급서였다. 여섯 종파에서조차도 절기를 하나씩 비급 서재에 기증했는데, 경신법을 맡긴 자는 대체 누구일까? '풍신의 걸음? 이름이 광오하네.' 경신법만으로 오 층 비급 서재에 비치될 정도면 분명 뛰어난 경공임은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특출 난 경공은 없었던 차에 잘되었다는 생각은 들었다. '나노 스캔해줘.' [알겠습니다.] -촤라라라라라락! 천여운의 동공이 흔들리며 비급서의 책장을 넘길 때마다 스캔이 되었다. 열아홉 권의 비급서를 전부 스캔하는데 이각 채도 걸리지 않았다. 이로써 마도관의 비급서재에 있는 삼류에서부터 최상위 무공까지 다량의 무공비급서를 확보하고자 했던 목표를 달성하게 된 천여운이었다. 움직이는 비급 서재라는 별명을 붙여도 무색하지 않게 되었다. "응? 벌써 내려가시는 겁니까?" 입구 쪽에 서있던 초절정의 고수 진중한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비급서를 제대로 살핀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내려가려고 하니,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럭저럭 충분히 보았습니다." "그럭저럭이요? 흐음....." 모든 비급서를 전부 스캔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중한에게는 그 말이 마치 화경의 극에 올라서 그런지 눈에 차는 무공 비급서가 없다로 들렸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건방지게 들릴 수 있겠지만 천여운 정도 되는 무공 실력을 가졌다면 충분히 내뱉을 수 있는 말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살펴 가십시오." 유시(酉時) 중엽. 비급서재 건물 밖으로 나오자 날이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추운 겨울이었기에 해가 빨리 저물었다. 세 시진이라는 열람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퇴근이 늦어질 거라 생각했던 방명록 담당 교두는 이때까지는 본 적이 없는 해맑은 미소로 천여운을 반겨주었다. 초를 반납하고 내려가려던 천여운이 미처 깜빡한 게 생각이 났다. '어디를 가시는지 부디 말씀해주십시오! 걱정되지 않게!' 수하인 허봉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오 단계 시험을 통과한 후부터 천마검공의 제 오 초식을 보고 싶다는 열망 때문에 미처 잊고 있었다. 두어 번 정도 경험이 있기 때문에 또 자신을 찾으러 마도관을 해매고 다닐 지도 몰랐다. 문규와 허봉이 습격을 당했던 적이 있어서 경각심이 높아진 수하들이었다. '어디에 있을려나.' 얼른 수하들을 찾기 위해 연공실 건물 방향 쪽으로 내려가는데 어두운 길목에 서있는 두 명의 인영이 보였다. "허봉?" 길목에 서있는 두 사람은 다름 아닌 허봉과 진국이었다. 다행히 찾으러 돌아다니기도 전에 발견했다. 그들 역시도 비급 서재 건물 쪽에서 내려오는 천여운을 발견했는지 후다닥 그의 앞으로 달려왔다. "주구우우우우운!" '또 한 소리 듣겠군.' 하지만 예상과 다른 반응이 나왔다. "오 단계 시험을 통과하신 걸 축하드립니다!" "주, 주군! 축하드립니다!" 그들은 어디서 들었는지 천여운이 오 단계 시험을 통과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실 천여운의 수하들은 시험을 치르고도 한참을 보이지 않는 그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헤매고 다니지 않았다. 시험에 합격한 생도들이 향하는 곳은 오직 두 곳 뿐이었다. 비급 서재 건물 혹은 연공실 중에 한 곳에 있으리라고 짐작한 그들은 방명록 담당 교두에게 천여운이 방문했는지를 물어 보았다. 오 층 비급 서재에 천여운이 열람 중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오 단계 시험을 합격한 것부터 그의 동선을 파악한 수하들이었다. 화경의 고수인 천여운이 마도관 내에서 무슨 봉변을 당할 리야 없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가 다음으로 이동할 장소로 추측되는 연공실 부근에서 교대로 기다렸던 것이었다. '으음, 똑똑해졌군.' 점점 주군인 천여운에게 적응해가는 수하들이었다. 사실 수하들을 떠올리지 않았다면 천여운은 당연히 마룡단 흡수를 위해 연공실로 향했을 것이다. '아!' 마침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수하들에게 주려고 한 것이 있었다. 천여운은 허봉과 진국에게 일러서 다른 수하들을 불러서 자신의 숙소로 오라고 하였다. "주군의 숙소로요?" "그래."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뭔가 할 이야기가 있는가 싶어 그들은 각각 나누어져서, 흩어져 있는 수하들을 찾으러갔다. 반 시진이 지나서 백기를 끝으로 열다섯 명의 모든 수하들이 천여운의 숙소로 모였다. 백기를 기다리는 사이에 도착한 수하들마다 천여운의 오 단계 시험 통과를 축하해주며 다 같이 기뻐했다. "주군! 들으셨습니까?" "공자님도 들으셨죠?" 고왕흘과 문규는 호들갑을 떨면서 봉마동에서 그 울음소리를 들었냐고 하는 통에 아직까지 오 단계를 치르지 않은 호상화가 겁에 질려했다. "그, 그만 얘기하세요. 세상에 괴물 같은 게 어디 있다고." ".....네가 무서운 것도 있었나? 괴물도 때려잡을 덩..." -퍽! "끄헉!" 괜히 그녀의 심기를 건드렸다가 기어코 한 대 맞고 만 우소정이다. 신장이 남자 생도들보다도 머리 하나는 더 큰 그녀가 무언가 무서워하는 모습이 신기했는지 다들 재미있어하는 눈치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귀여워하는 사람은 오직 고왕흘 뿐이었다. '비슷한 게 있었다고 얘기하면 난리가 나겠군.' 호상화가 괜히 겁을 먹고 오 단계 시험을 치르지 않겠다고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천여운은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백기까지 모이자 천여운이 숙소의 창고에 밀봉해두었던 대야를 들고왔다. "읍!" "흐힉!" 천으로 밀봉을 해뒀어도 그것을 뚫고 퍼져 나오는 악취에 수하들이 일제히 코를 틀어막았다. 이런 지독한 냄새는 맡아본 적이 없는 그들이었다. 비위가 제일 약한 진국은 속에서 올라오는지 심지어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경험도 많고 중년의 지긋한 선임 무공 교두 호진창조차도 버티지 못한 악취였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주, 주군! 이게 대체 뭡니까?" 대야에서 기분 나쁠 만큼 끈적거리는 자태를 자랑하는 검은 물을 보며 자우민이 물었다. 영물인 이무기의 피였지만 이것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기에 그럴 듯하게 둘러댔다. "봉마동을 통과하는 도중에 통로를 잘못 들어갔는데 우연히 발견했다." "봉마동에서요?" 먼저 오 단계 시험을 치렀던 문규, 고왕흘, 백기 등이 의아해했다. 그들은 기감의 의존해서 반대편 출구에서 흘러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집중하느라 다른 곳에 가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걸 어째서?" "어쩌다 보니 이 물을 마셨는데, 전신의 경맥에 쌓여 있던 노폐물이 빠져나오고 운기가 훨씬 원활해졌다." "운기가 원활해졌다고요?" 무공을 익히는 무인이라면 내공의 흐름이라 할 수 있는 운기의 중요성을 모를 리가 없었다. 운기가 자유롭고 빨라질수록 내공이나 초식을 운용하는 속도가 달라진다. 천여운의 말대로라면 영약이라 할 수 있었다. "그, 그럼 영약이 아닙니까?" "오오옷!" 지독한 냄새에 고개를 돌리던 수하들 중 몇 명이 효능을 듣고 나자 관심을 보였다. 다만 기분 나쁠 정도로 악취를 내뿜는 끈적거리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나만 먹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가죽 도집에 담아서 가져왔다." 차마 일부는 자신의 젖은 옷에서 짰다는 사실은 밝힐 수 없었다. "아아아! 저희를 위해서?" "주군!" 천여운이 자신들을 챙겨주기 위해 영약을 가져왔다는 것에 감동했는지 허봉이나 오종, 자우민 등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주군! 매번......정말 감사드립니다. 주군만큼이나 수하들을 이렇게 챙겨주시는 분도 없을 겁니다." 고왕흘이 자리에서 일어나 대표로 포권을 취하며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감동에 겨워하는 수하들에게 천여운이 조심스럽게 검은 물이 담긴 대야를 들이 내밀며 권했다. "그럼 마셔라." 하지만 막상 영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도, 차마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악취가 너무 지독했고 끈적거리는 액체가 거부감을 일으켰다. 그런 수하들의 태도에 괜히 오기가 허봉이 용기 있게 먼저 나섰다. "주군께서 이렇게 챙겨주시는데 왜 그렇게들 망설이는 겁니까? 제가 먼저 마시겠습니다!" 허봉이 잔 하나를 가져와서 대야에서 끈적이는 검은 물을 떴다. -쭈우우욱! "우으으!" 끈적하게 늘어나는 검은 물의 점도에 열네 명의 수하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오만상을 찌푸리며 신음성을 흘렸다. 거부감만큼은 확실하게 일으키는 요망한 영약이었다. "주군! 감사합니다!" 허봉이 술잔을 올리는 자세로 양손으로 공손히 잔을 앞으로 내밀고는 시원하게 검은 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크으으! 자!" 빈 잔을 머리 위로 털어 보이는 호기마저 보였다. 대단한 비위라고 할 수 있었다. '어라?' '괜찮나 본데?' 아무렇지 않게 마시는 모습에 다른 수하들도 괜찮은가 보다 생각했다. 그러나, "끄웨에에에에엑!" 허봉이 괴상한 비명을 지르고는 얼굴이 새파랗게 물들어서 는 목을 움켜잡고 온몸을 뒤틀더니 이내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전신을 부들부들 떨면서 엎어져 있는 허봉을 내려다보며 문규가 중얼거렸다. ".....이게 영약이라고요?" < 31장 천마검공을 완성하다(3) > 끝 < 32장 변수의 육 단계 시험(1) > 오기가 생겨 자신감 넘치게 검은 물을 마셨던 것까진 좋았다. 하지만 목구멍부터 압박하는 지독한 맛에 허봉은 기절하다시피 했다. 천여운조차도 이를 참지 못하고 토악질이 올라오고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끄르르르록!' 뭐가 그리 괴로운지 끈적거리는 거품까지 물고 있는 허봉이다. '.....이걸 마시라고?' '허봉이 죽을 것 같은데.' 본의 아니게 허봉이 선발 주자로 임상시험을 한 덕분에 수하들은 검은 물을 마시는 것을 더욱 꺼리게 되어버렸다. 그들이 검은 물을 마시게 된 것은 후에 허봉이 깨어나서 모공에서 노폐물이 배출된 후에 운기가 원활해진 모습을 직접 확인하고 나서였다. '공자님. 정말! 정말! 정말! 감사한데, 저는 사양할게요.' '주군, 저도 도저히 안 될 것 같습니다. 우욱.' 악취를 비롯해 여러모로 거부감을 일으키는 검은 물에 비위가 상한 문규와 호상화는 도저히 안 되겠다며 극구 사양했다. 검은 물을 마시는 족족히 그 지독한 맛에 체통이고 할 것 없이 온몸을 뒤틀면서 쓰러졌으니, 아무리 좋은 영약이라도 거부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천 공자님. 저는 절대 안 돼요. 아시잖아요!] '아!' 모두가 있는 이곳에서 모공에 노폐물이 흘러나온다면, 인피면구가 어찌될지 몰랐기에 문규로서는 무조건 거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한 번 더 권하려고 했던 천여운은 문규의 전음을 듣고 나서 그것을 포기했다. 어쩌다보니 여자 생도들만 검은 물을 마시지 않게 된 셈이었다. 그렇게 평소보다 시끌벅적했던 밤이 지나가고, 이른 아침 천여운은 마도관의 북쪽에 있는 대장간을 찾았다. 이무기의 물을 무기로 제련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새벽부터 내린 함박눈으로 마도관 전체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굴뚝 타고 흐르는 화로의 열기 때문에 유일하게 지붕에 눈이 쌓여 있지 않은 곳은 대장간뿐이었다. "천 단주! 이, 이건 대체 어디서 구했소?" 얼핏 보면 흰 몽둥이로 보이는 이무기의 뿔을 처음 보게 된 대장장이 구선웅의 반응은 경악 그 자체였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재질에 그 강도가 철보다도 훨씬 단단했다. 시험 삼아 대장간에 있는 무구들로 내리쳐 보았으나, 제련도 하지 않은 뿔의 강도에 오히려 무구들이 부러져버렸다. "그건....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천여운은 단호하게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 봉마동에서 구했다는 사실을 굳이 구선웅에게 알려서 괜한 파장을 남길 필요는 없다고 판단해서였다. 사실 대장장이의 입장에서 재료의 출처는 그리 중요하진 않았다. '카아! 이런 멋진 재료라면 최고의 무기를 탄생시킬 수 있지.' 한철을 만질 때보다도 더욱 흥분되었다. 좋은 재료를 가진 장인은 병기 제작에 대한 의욕이 넘칠 수 밖에 없었다. 구선웅은 흔쾌히 이무기의 뿔로 무구를 만들어주기로 약조했다. "그럼 이걸로는 도를 만들면 되겠소?"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하하하핫, 알겠소. 내 최고의 도를 만들어서 드리리다." 과연 이무기의 뿔로 만든 도는 어떻게 만들어질지 궁금해졌다. 원래는 검을 만들어달라고 하려했었지만 그에게는 흑검이 있었기 때문에 굳이 욕심을 부릴 필요는 없었다. "흠흠. 천 단주에게 한철이 지급될 텐데. 혹시 그것으로는 검을 만들 텐가?" "전에 하나의 무기만 제작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대주와 단주의 직위는 다르다네. 천 단주가 부탁한다면 무기 제조는 언제든지 가능하다오. 단지 본교에서 하나의 무기만 제조할 수 있는 양의 한철을 지급하기 때문에 다른 무기를 가지고 싶다면 그에 합당한 재료를 직접 구해야 하지. 이것처럼 말일세." 구선웅이 이무기의 뿔을 가리키며 말했다. 재료만 주어진다면 무기를 제작하는 것은 언제든지 가능하다고 하였다. "아! 잘됐군요. 그럼 검도 한 자루 부탁드립니다." 흑검을 당분간 숨길 생각이었기에 대신할 검을 만들어서 나쁠 건 없었다. 검신에 천마검(天魔劍)이라 새겨져 있는 이유를 알아낼 때 까지는 자중할 필요가 있었다. 쓸 만한 독문 무기를 두 개나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천여운이 밝아진 표정으로 물었다. "무구를 만드는 데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까요?" "흠, 아무래도 재료들이 좋다보니, 두 달 가량은 걸릴 것 같소." "두 달씩이나요?" 생각보다 너무 오래 걸렸다. 지난 번에 접무도를 만드는데 보름이 걸렸으니 그 네 배에 해당하는 기간이다. 원래 그는 무기가 완성되는 시점에 맞춰서 육 단계 시험을 치를 예정이었다. 그런데 두 달씩이나 걸린다면 꽤 지체되고 만다. "도와 검을 전부 만들려면 그 정도는 걸리지 않겠소? 아니면 하나씩 완성될 때마다 받으러 오겠소?" "아! 한 자루 당 소요되는 시간이 한 달이었군요." ᅳ"후후, 무기가 필요한 가보구려. 먼저 어떤 것을 제작할지 고르겠소?" 잠시 고민에 빠졌던 천여운이 선택한 것은 도였다. 어차피 흑검이 있기 때문에 검을 만드는 것은 급할 게 없었지만 이무기의 뿔로 만들어질 도는 꽤 궁금했다. "하하핫, 알겠소. 내 천 단주가 오기 전까지 최고의 도를 완성시켜놓을 테니 한 달 뒤에 보도록 합시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무기의 제작을 부탁한 천여운의 발걸음은 남쪽으로 향했다. '이제 남은 일은....' 그곳은 마도관의 본관 건물로 가는 길이었다. 육 단계 시험을 치를 시기와 그 상대를 알리기 위해서였다. 수뇌부인 열두 장로들은 교내의 업무 등으로 공사다망하기 때문에 사전에 시기를 알려서 일정을 조율해야 한다. 밤새 고민을 거듭했던 천여운은 여섯 종파 중에서 겨룰 상대를 정했다. 일 각 후, 마도관 본관 관주 집무실. 집무 책상 앞의 의자에 앉아있는 좌호법 이화명의 표정이 묘하다. 육 단계 시험으로 천여운이 지목한 상대 때문이었다. 며칠은 신중히 고민할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하루 만에 찾아와서 고른 상대는 뜻밖의 인물이었다. "천 단주. 정말 이대로 괜찮나?"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흐음." 이화명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있었다. '이건 대담하다는 수준을 지나쳤는데.' 천여운이 선택한 자는 바로 현마종의 종주이자 일 장로인 무진원이었다. 현 마교에서 교주를 제외한다면 대호법 마라겸과 더불어 이 삼 위의 무공 서열을 다투는 최강의 실력자였다. 교주와는 겨룰 일이 없기 때문에 부딪치지 않았지만, 여태껏 교내의 어떠한 무인도 이긴 적이 없다고 알려진 최악의 상대를 대뜸 선택해버렸으니 당혹스러웠다. '허참, 이 녀석. 정말 제 정신인가?' 상대가 너무 나빴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천여운으로는 불가능했다. 이제 막 화경의 경지를 밟은 그가 십여 년 전부터 화경의 극(極)에 이른 무진원을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공교롭게도 마도관의 서재 내부를 지키는 고수들은 방명록을 담당하는 교두들과 다르게 종일 그곳에서 근무를 서기 때문에 특별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고는 마도관주에게 즉각 상황 보고를 하지 않는다. 좌호법 이화명은 아직까지 천여운이 환골탈태하여 화경의 극에 오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역시 눈지 채지 못했나?' 이것은 천여운이 자신의 기운을 의도적으로 숨긴 것도 원인이었다. 화경의 극에 이르면서 내부의 기운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게 된 그는 마도관에 들어올 때부터 일부러 전과 동일한 수준으로 내기를 조절했다. 가진 힘을 완전히 드러내기보다는 삼 할은 숨기는 편이 유리하다고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좌호법 이화명이 기감으로 전혀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그 무위의 차가 극명해진 천여운이었다. "천 단주, 정말 그 생각에 변함이 없나?" "부탁드리겠습니다!" 여섯 종파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진 현마종. 처음에는 예전부터 악연으로 이어진 독마종이나 복마종을 선택하려 했던 그였지만 최종적으로 생각을 바꾸었다. 가장 위협적인 머리부터 제거하는 것이 옳다고 여긴 탓이었다. 다른 장로들도 위험하기는 매한가지였지만, 교주에 버금갈 정도의 실력자인 일 장로 무진원을 공식적인 대결을 통해 제거 할 수 있다면 현마종은 그 힘의 삼 할 가량을 잃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별 수 없군.' 이화명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생각이 제법 깊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무모한 것은 여전했다. 천여운도 그를 노리겠지만 현마종의 종주인 무진원 역시도 이번에 그와 겨루게 된다면 무조건 제거하려들 것이다. 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연에게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이니 말이다. 여기서 이화명 본인이 더욱 개입해서 상대를 바꾸라고 종용하는 것은 편향적인 간섭이 되어버린다. "알겠네. 현마종으로 정식 공문을 보내도록 하지." * * * 그렇게 천여운이 육 단계 시험에서 붙게 될 장로를 지목한 지 열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에 좌호법 이화명은 일 장로인 무진원에게 교주의 인장이 담긴 공문을 보내서 육 단계 시험에 대한 비무 요청을 알렸다. 일 장로 무진원은 그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소교주 후보자들 중에서 유일하게 천무연의 적수가 될 상대를 제거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리가 만무했다. 그러나 세상의 흐름이라는 것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진 않는 법이었다. 열흘째가 되는 날 십만대산 마교의 성으로 무림맹의 사자가 도달했다. 마도관에 있는 생도들은 외부의 소식과 완전히 단절되어 있기에 알 수 없었지만 근 십 년 만에 방문한 무림맹의 사자로 인해 마교 전체가 들썩였다. 무림맹의 사자는 정확하게 나흘째가 되는 날에 다시 무림맹으로 돌아갔다. 이로 인해 변수가 발생하게 되었다. 육 단계 시험을 치르기로 한 날의 이레 전, 무공 교두들이 찾아와 관주 집무실로 그를 호출했다. 격세석 연공실에서 훈련 도중이던 천여운은 영문도 모른 채 관주 집무실로 향했다. "관주님께 인사드립니다."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천여운이 집무 책상에 앉아서 서류를 훑어보고 있는 좌호법 이화명에게 포권을 취하며 인사했다. 그런 천여운의 인사에 이화명이 기다렸다는 듯이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말했다. "왔는가? 천 단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흐음." 의아해하는 천여운을 바라보며 이화명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뭔가 문제가 생긴 듯 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미안한데, 천 단주. 육 단계 시험을 위한 비무 상대를 바꿔야 하네." "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천여운이 인상을 찡그렸다. 이미 일 장로인 무진원이 공문 요청을 받고 비무를 위한 일정을 조율한 걸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상대를 바꿔야 한다고 하니 당황스러웠다. 천여운이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어째서입니까? 일 장로께서 심중이 바뀌신 겁니까?" 육 단계 시험에서 생도가 비무 상대를 지목할 수 있지만 장로 측에서도 무작정 강제적으로 요청에 응하는 것이 아니라 거절할 수도 있는 권한이 있었다. 하지만 장로로서 명예와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여태껏 거절했던 경우는 없었다. "그건 아니네." "그렇다면 왜 상대를 바꿔야 하는 건지?" 천여운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던 이화명이 집무실에 진기를 둘러서 외부와 소리를 차단시켰다. 누군가가 들어서는 안 될 이야기인 듯 했다. "본교의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정확한 것은 알려줄 수 없네. 다만 현재 본교에 남아있는 장로 분들은 네 분밖에 없네." "네 분이라면?" "그 네 분 중에 한 분을 선택해야 한다는 말일세." 단주의 직위를 가졌으나 천여운은 아직 마도관의 생도였다. 자세한 정보는 기밀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알려줄 수 없는 부분이었다. 당초의 계획과는 완전히 어긋나버리자 천여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일 장로가 돌아을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말을 하기에는 이제 마도관의 남은 기간도 그리 많지 않았다. 결국 남은 장로들 중에 지목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누가 남아 계신 겁니까?" "구 장로님부터 십이 장로님까지 남아계시네." "아...." 상위 직에 있는 장로들은 지금 전부 자리를 비웠다는 소리였다. 천여운이 알기로는 여섯 종파의 종주들은 일 장로부터 육 장로까지 자리를 맡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결국 그들 중에 누구도 상대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런 천여운의 노림수를 좌호법 이화명이 모를 리가 없었다. '쯧, 별로 권하고 싶지는 않지만.' 분명 네 장로들 중에 누구를 선택할지 뻔했기에 그냥 알려주기로 했다. "근래에 장로님들의 직위 변동이 있었네." "직위 변동이라면?" "독마종의 백 종주께서 십이 장로로 직위가 격하되었지." 독마종의 종주 괴독마장 백오. 이 년 동안 뇌옥에 투옥되어 있던 백오는 불과 석 달 전에 장로 직에 복직했지만 원래의 육 장로에서 십이 장로로 좌천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의도된 것은 아니었지만 본교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여섯 종파 출신의 장로였다. '독마종!' 꿩대신 닭이라고 했던가. 계획이 틀어져서 여섯 종파의 장로들을 상대할 수 없다는 생각에 실망했던 천여운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십이 장로님과 비무를 하겠습니다." < 32장 변수의 육 단계 시험(1) > 끝 < 32장 변수의 육 단계 시험(2) > 육 단계 시험을 치르기 엿새 전 저녁, 십만대산의 마교의 성내 서쪽 독마종의 장원에 있는 종주의 집무실. 집무실에는 독마종의 수뇌부들이 집결해 있었는데, 전과는 달리 분위기가 심각했다. 오전에 마도관에서 보내온 육 단계 시험에 대한 공문 요청 때문이었다. 누구도 상황이 이렇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공교롭군.' 현마종의 종주인 일 장로 무진원에게 육 단계 시험의 요청장이 날아왔다는 소문에 그의 손에 골칫덩이와 같은 천여운이 처리될 거라는 생각에 남은 다섯 종파에서는 이를 매우 달갑게 여겼다. 삼 년 동안 독마종과 검마종의 힘이 약화된 반면에 현마종의 힘은 그때보다도 훨씬 성세가 높아졌다. '어떤 식으로든 현마종도 제지를 당하리라 여겼건만.' 지금 천여운은 독이 든 술잔과도 같았다. 일 장로 무진원으로서는 유일하게 소교주 후보자로 건재한 외손주인 천무연을 밀어주기 위해서도 대결을 빌미로 그를 제거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관례를 보았을 때 교주는 그것을 빌미로 현마종의 힘도 약화시키려 들 것이라고 예상했기에 다른 종파들의 입장에서는 이득이었다. "종주. 거절하셔야 합니다. 본교의 금옥에서 나오신지 얼마 되지 않으셨습니다. 교주의 눈이 늘 저희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독마종의 총관이 심각한 표정으로 백오에게 말했다. 불과 삼 년 전에 암살자를 보내서 천여운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때와 지금은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종주, 제 생각도 총관과 같습니다. 지금 더 이상 압박을 받았다가는 여섯 종파의 균형이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독마종의 외당주인 백차우 역시도 종관과 의견이 같았다. 현재 독마종의 세력은 최상위 종파인 마룡장종과 사무종, 비연종이 넘어볼 만큼 약화된 상태였기에 여기서 타격을 받게 된다면 여섯 종파에서 떨어져나가야 하는 상황이 일어날 지도 몰랐다. "거절하게 된다면 그것대로 본 종이 약해졌다는 것을 인정하는 게 아니요!" 백오의 둘째 아들인 백문웅이 분하다는 듯이 외당주를 다그쳤다. 호전적인 그는 여섯 종파로서 체면을 구기는 상황을 더욱 원치 않았다. 종관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고 하였습니다. 월왕(越王) 구천(句踐)도 이십 년 동안 쓸개를 입에 넣으며 복수를 다짐하고 벼르어 오(吳)나라를 멸망시켰습니다." 지금 당장에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말고 참으라는 소리였다. "조카 녀석은 여태까지 병신처럼 누워있고, 본 종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대체 무엇을 참는단 말이오!" 백문종이 창밖으로 가리킨 작은 건물에는 천종섬이 있다. 단전이 파괴되고 전신의 뼈가 아작나는 중상을 입은 천종섬은 척추마저 손상이 가서 침대에서 누워서 겨우 목숨만 이어가고 있었다. "저도 문종 형님과 의견이 같습니다. 고작 약관도 안 된 녀석이 화경의 경지에 올랐습니다. 더 빨랐으면 좋았겠지만 전초제근(剪草除根)이라고 지금이라도 놈을 제거해야 합니다. 녀석이 저희와 원한 관계가 없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잖습니까?" 백오의 셋째 아들인 백문호가 좀 더 타당한 근거를 제시했다. 지금 나이에 화경의 경지에 올랐다면 앞으로 얼마나 성장할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지난번에 백오가 구금동에 다녀왔던 일부터 시작해, 그의 어머니인 화 부인의 죽음까지 생각한다면 천여운은 독마종은 악연 그 자체였다. "그게 어찌 저희들만의 문제 입니까? 여섯 종파도 다 같은 입장입니다. 아무리 놈의 무공이 일취월장 했다고 한들 아직 뒷 받침 해줄만한 세력이 없습니다. 위협이 된다고요? 위협은 오히려 교주 쪽이죠." 외당주가 당최 백차우가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천여운을 죽이면 후환을 없애는 것과 복수했다는 이점 밖에 없었다. 그 대가로 교주의 눈 밖으로 완전히 벗어나서 독마종이 여섯 종파에서 밀려나고 약화된다면 더 이상 세력을 회복하기 힘들게 될 것이다. 두 의견으로 갈린 수뇌부들이 서로 갑론을박 다투기 시작했다. 한참을 묵묵히 그들의 의견을 듣던 백오가 고심 끝에 결정을 내렸다. "이 요청은 거절할 것이다!" 백오 역시도 천여운을 죽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당장에 손을 대기에는 잃는 것이 너무 많았다. 차라리 다른 자가 처리하도록 유도하는 편이 나았다. 마도관의 요청을 거절하기 바랐던 수뇌부들은 그런 종주의 결정을 지지했고, 그의 아들들은 실망한 채로 돌아가야만 했다. 모든 수뇌부들이 돌아가고 백오는 외손주인 천종섬이 있는 약당 앞의 작은 건물로 왔다. 백오가 누워서 눈만 깜빡이고 있는 천종섬을 바라보았다. 식물인간이 된 천종섬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를 치료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썼지만 마의(魔酱)조차도 어찌하지 못했다. "미안하구나. 이 할애비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마교에서 공포의 대상인 괴독마장 백오조차도 손주 앞에서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아꼈던 딸이 죽어가면서도 애지중지해오던 천종섬이 이렇게 되었는데도 종파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는 종주의 자리가 이토록 원망스러운 적은 처음이었다. 그런 백오의 애틋한 마음을 알기라도 했을까 눈만 겨우 뜨고 있는 천종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바로 그때였다. -똑똑! "종주님. 손님께서 오셨습니다."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손님이란 말이나. 돌려보내라." 심란한 마음이었던 백오는 손님을 맞이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러나 바깥에서 들리는 총관의 전음에 그 결정을 바꿔야만 했다. [현마종의 무 부인이신데 되돌려 보내도 괜찮겠습니까? 지금 약당 건물 앞에 계십니다.] 뜻밖의 방문에 백오의 표정이 의아해졌다. 자신의 딸인 백 부인의 장례를 치를 때 마지막으로 왕래가 없었던 여인이었다. "알겠다. 나가마." 기분만으로 거절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기에 백오는 손자를 두고서 방을 나가야만 했다. 문을 열고 나가는 백오의 뒷모습을 천종섬이 눈동자만 겨우 움직여 바라보았다. '!?' 그런데 방문이 열린 틈으로 멀리서 약당 앞에 일렁이는 횃불에 비치는 누군가가 보였다. 붉은 면사포를 쓰고 있는 중년의 여인이었다. 척추의 손상으로 눈만 겨우 감고 들 수 있는 천종섬의 두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며 전신에 경련이 일어났다. '그년이다! 그년이라고!' 그의 어머니인 백 부인에게서 미독을 받아갔던 그 여인이었다. 뭐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턱조차 움직일 힘이 없는 천종섬은 분노로 경련을 일으키다 이내 기절하고 말았다. 바로 다음 날 오시(午時) 초엽, 마도관의 본관에 있는 관주 집무실로 독마종의 총관이 방문 했다. 총관의 손에는 백오가 손수 적은 서찰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단 한 글자만 적혀 있었다. [許(허)] 독마종의 종주이자 십이 장로인 괴독마장 백오가 육 단계 시험에 대한 대결 요청을 받아들였다. 칠십 년 만에 마도관에 육 단계 시험을 시행되는 대망의 아침이 밝았다. 대결이 시작되기 한 시진 전에 일어나서 준비를 마친 천여운이 마도관의 북쪽에 있는 대장간을 찾았다. 요 며칠 동안 눈이 내려서 소복이 쌓였다. 그러나 화로의 뜨거운 열기로 인해 대장간의 지붕과 그 주위만큼은 눈이 녹아내려 돌바닥에 물이 고여 있었다. 밤새 망치질 소리로 가득했던 대장간은 조용했다. 밖에서 일 각 정도 기다리던 천여운이 안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입구로 들어갔다. "구 장인님?" 대장간으로 들어서자 아직까지 화로의 열기로 인해 내부가 후끈거렸다. 대장장이 구선웅의 기척으로 감지되는 안쪽으로 들어가 보니, 무언가를 열중하고 있었다. 흰 가죽을 한 땀 한 땀 바늘로 따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도집을 만들고 있는 모양이었다. 집중하고 있는 그를 방해할 수 없기에 천여운이 기척을 죽이고 가만히 서서 그의 작업을 지켜보았다. 반 시진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됐다!" 구선웅이 완성된 가죽 도집을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백색에 붉은 문양을 그린 가죽은 고풍스러운 느낌마저 풍기고 있었다. "완성입니까?" "어이쿠! 까, 깜짝이야!"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구선웅이 화들짝 놀라서 넘어질 뻔했다. 작업장의 입구 쪽에 서있는 천여운의 모습을 보고서야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기침 소리라도 내지 그랬소. 후후후, 잠시만 기다려보시오." 구선웅이 신이 나서 제련실로 들어가 완성된 도를 들고 왔다. "아!" 구선웅이 들고 온 새하얀 도를 보는 순간 천여운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매끈하면서도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는 도신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절세보도(絶世寶刀) 그 자체였다. 워낙 강도가 단단해서 제련하기 힘들었을 텐데, 최고의 명도를 탄생시켰다. "이름은 천 단주가 말한 대로 새겼네." 도신의 하단부에는 백룡도(白龍刀)라고 음각이 새겨져 있었다. 영물로 용이 되기 전에 뿔이 잘린 이무기를 기리는 마음에서 그렇게 지었는데, 새하얀 도신과 매우 잘 어울리는 도명이었다. -착! 도병을 잡는 순간 손에 감기는 맛이 부드러웠다. 곡선의 날카로운 도날은 무엇이라도 벨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자자 도날을 위로 들어보시게." 구선웅이 이것을 보라면서 아주 얇은 천을 가져와서 허공에서 떨어뜨리자, 살랑거리며 도날에 스친 천이 반으로 갈라졌다. "아!" 살랑거리는 천마저 쉽게 벨만큼 대단한 예기(銳氣)를 자랑했다. "마음에 드시오?" "너무 마음에 듭니다. 이렇게 멋진 보도를 만들어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구 장인은 정말 최고의 명장이십니다!" "하하하하하핫! 별 과찬의 말씀을." 감정 표현을 잘 하지 않는 천여운의 입에서 극찬이 나왔다. 그 말에 구선웅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장인으로서 절세보도를 만들었고 그 주인에게 인정받았으니 제대로 값을 치룬 셈이었다. '이 도라면 스승님의 광무도로 펼치는 접무도법 이상의 위력을 낼 수 있을 것 같다.' 무위로서 그 경지를 뛰어 넘었지만 도법으로 스승에게 인정 받는다면 제자로서 더할 나위없을 영광일 것이다. 이렇게 백룡도를 취함으로써 훗날 천여운을 상징할 절세 양대 신병인 흑검백도(黒劍白刀)가 완성되었다. 반 시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사시(已時) 초. 마도관의 대연무장으로 무공 교두를 비롯한 생도들이 모여 들고 있었다. 칠십 년이라는 세월 동안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었던 마도관의 육 단계 시험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이 대결은 개인적인 시험이기 때문에 생도들은 모일 필요는 없었지만 무인으로서 화경의 고수들 간에 펼칠 대결이 궁금하지 않을 이는 없었다. 모두의 시선이 연무장 한 가운데서 눈을 감고 대기하고 있는 천여운에게로 향했다. '육 단계 시험이라니? 진짜 대단하지 않아?' '괴물은 정말 괴물이네.' '마도관 기간 내에 화경의 경지에 오르다니 진짜 대박이다!' '그렇기는 한데, 과연 장로님을 상대할 수 있을까?' 육 단계 시험을 치르기로 한 후로 천여운이 화경의 경지에 오른 것은 마도관 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덕분에 그들이 천여운을 바라보는 시선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시기심보다는 일종의 경외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번 육 단계 시험이 본교의 최고 고수라 할 수 있는 장로와의 대결이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의견이 분분했다. '과연 누구를 지목했을까?' '아무래도 여섯 종파 중에 고르지 않았을까?' '여섯 종파의 장로들이면 본교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시잖아. 아무리 그래도 바보가 아닌 이상 그렇게 했겠어?' 생도들은 아직까지 천여운의 대전 상대를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천여운이 장로들 중에서 가장 무위가 약한 자를 고를 거라 생각했다. 서열 순위로 본다면 십이 장로일 거라 예측했다. 물론 그 예측은 정확했다. 단지 기존의 장로들 간의 서열이 바뀌었다는 것을 모른다는 점에서는 말이다. 먼저 연무장에 모여 있는 천여운의 수하들이 긴장되는 눈빛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천여운에게 대전 상대에 들었던 그들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하고많은 상대 중에서 본교에서도 가장 위험한 고수라 불리는 독마종의 종주인 백오를 지목했다고 하니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앗! 저, 저기를 봐!" 한 생도의 외침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마도관의 입구 쪽으로 향했다. 입구에서 검은 장포에 괴상한 형태의 지팡이를 짚으면서 걸어오는 노인이 보였다. 겉보기에는 그저 연로해보였지만 풍기는 음산한 기운이 그가 누구인지 말해주고 있었다. "도, 독마종주!!!" -웅성웅성! 독마종의 종주 괴욕마장 백오의 등장에 모든 생도들이 시끌벅적해졌다. 혹시 여섯 종파 중에서 누군가를 선택했을지 모른다고 추측은 했지만 설마 독마종일 거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미친......저 분은 독인이잖아!' '진짜 독마종의 종주를 지목한 거야?' 마교를 비롯해 무림에서 백오의 악명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독공으로 사파의 장강수로채(長江水路寨)에 삼백 명이 넘는 수적들을 몰살시키고, 수많은 정파, 사파의 고수들을 독에 중독시켜 시신조차 남기지 않고 죽인 일화는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유명했다. 소문으로는 장로들 모두가 대결을 꺼리는 최악의 고수였다. "앗! 관주님이시다!" "잠깐 옆에 계신 분은?" 시간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마도관의 본관에서 좌 호법 이화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옆에는 멋들어진 콧수염을 기르고 머리가 반백의 중년인이 있었는데, 열두 장로 중에 한 사람인 사무종의 종주 사마의였다. "십 장로님이시잖아?" 그를 알아본 생도의 외침에 좌중이 더욱 시끄러워졌다. '아버님.' 원래는 십 장로였지만 지금은 구 장로가 된 사마의를 반가운 눈으로 바라보는 이가 있었으니, 사무종의 사마착이었다. 설마 이 자리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단상 위로 올라온 구 장로 사마의가 준비된 좌석에 않고, 좌 호법 이화명이 단상 앞쪽으로 나왔다. -탁! 독마종주인 백오가 대연무장의 한가운데까지 도착하자, 천여운이 감았던 두 눈을 떴다. 구금동에서 이후로 삼 년하고도 넉 달 만에 만나게 되는 얼굴이었다. 그 당시에는 워낙 압도적인 무력 차이로 꼼짝하지 못하고 그의 산공독단에 당해야만 했던 천여운이었다. '이놈.....많이 달라졌구나.' 백오가 오랜 만에 만나게 된 천여운을 바라보며 내심 놀라워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절정 초입에 불과했던 애송이가 삼 년 만에 자신과 같은 선상인 경(境)을 밟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흥! 하지만 아직 멀었다.' 천여운에게 풍겨져 나오는 기운은 화경 초입에 이른 수준에 불과했다. 이 정도라면 전력을 다하지 않더라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더 성장하기 전에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죽여주마.' 전초제근(剪草除根). 더 성장해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강해지기 전에 없애기로 마음먹었다. 불과 엿새 전만 하더라도 교주의 압박을 두려워해 그와의 대결을 피하려고 했던 백오는 천여운을 죽이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생각보다 많이 모여든 사람들로 인해 이화명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지금부터 육 단계 시험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두 명의 장로들이 있는데다가 생도들의 직위도 높아졌기에 공식석상이라 생각해서 경어를 사용했다. "구 장로이시자 사무종의 종주께서 공증인이 되실 겁니다." 이화명의 소개에 사마의가 자리에서 일어나 좌중을 향해 가볍게 포권을 취했다. 원래대로라고 한다면 네 명의 장로가 공증인으로 왔어야 했지만, 현재 교내에 남아있는 장로가 네 명뿐이었기에 약식으로 이뤄졌다. "먼저 천 단주의 도전을 받아주신 십이 장로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이화명의 정중한 포권에 백오가 마지못해 심기가 불편한 표정으로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백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분명 서로가 입을 다물기로 했던 구금동 사건이 불거져서 금옥에 이 년 동안이나 갇혔었던 백오였다. 좌호법의 신분만 아니었다면 얼굴도 마주하기 싫었다. "그럼 육 단계 시험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십이 장로님과 천여운 단주는 서로 마주하고 열두 보 거리를 유지하십시오."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보고 대치하자 좌중의 분위기가 팽팽한 긴장감으로 물들었다. 이 넓은 대연무장의 공기가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생도들만이 아니었다. 무공 교두들조차도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좌호법이 이화명이 손을 들고 큰 소리로 대결의 시작을 알렸다. "시작하시오!" -팟!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독마종주 백오의 번개 같이 신형을 날리며 순식간에 천여운의 바로 앞까지 파고들었다. '단숨에 죽여주마!' -촤아아아악! 백오의 강기(罡氣)로 물든 지팡이가 천여운의 심장을 찔러 들어왔다. 후배에 대한 선수 양보는 없었다. 백전노장인 백오는 처음부터 전력으로 공격하여, 천여운이 방심한 틈을 노려 단숨에 죽일 작정이었다. -푹! 푸른빛을 발하는 지팡이 끝이 날카로운 기세로 천여운의 가슴을 관통했다. 시작하자마자 결판이 나려는 광경에 지켜보는 관전자들의 시선이 천여운의 가슴을 꿰뚫은 지팡이 끝으로 향했다. 그 순간 백오의 두 눈동자가 흔들렸다. 가슴을 관통 당했던 천여운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사라져 버렸다. '이, 이형환위(移形換位)?' < 32장 변수의 육 단계 시험(2) > 끝 < 32장 변수의 육 단계 시험(3) > 마교의 수뇌부인 장로들은 각 종파의 수장이면서 마교의 최고 고수라 불린다. 수많은 전투 경험에 높은 무위를 지닌 만큼 한참 후학인 마도관의 생도를 상대로 선공을 양보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시작과 동시에 기습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주군!" '이런 비겁한!' 그 광경에 천여운의 수하들 모두가 가슴을 졸였다. 그러나, -스스스스! 강기가 실린 지팡이에 가슴을 관통 당한 천여운의 신형이 흐릿해지며 사라졌다. '아!' 이형환위(移形換位). 그것은 너무 빠른 경공으로 잔상이 남는 현상을 말한다. 공격을 당하기 바로 직전에 신형을 이동하기 때문에 아무리 뛰어난 고수라고 해도 곧장 알아채기 힘들다. '노부를 상대로 이형환위를 썼다고?' 놀라는 것은 잠시였다. 백오는 당황해하지 않고 강기가 둘린 지팡이를 회전시키며, 무방비 상태가 되어버린 뒤쪽으로 파마장법(波魔杖法)의 방어 초식을 펼쳤다. -휘리리릭! 팟! 그 순간 사라졌던 천여운이 신형이 백오의 바로 뒤쪽에서 나타났다가, 물샐 틈 없는 방어초식에 다섯 보 뒤로 보법을 펼치며 물러났다. '대응이 빠르다.' 지금까지 대결했던 적들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수십 년 동안 수백 회가 넘는 적들과의 싸움으로 경험이 풍부한 백오는 이형환위로 사라진 천여운이 자신의 허점인 뒤쪽을 노릴 거라고 확신했다. 물론 예상은 들어맞았다. '세상에.....' '정말 화경의 경지가 틀림없구나.' 멀리서 대결을 관전하는 생도들과 무공교두들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중에서 누구 한 명도 천여운의 이형환위를 감지한 자가 없었다. 그들의 눈에는 그저 순간이동을 한 것처럼 사라진 천여운이 백오의 뒤에서 나타난 것처럼 보였을 뿐이었다. 그나마 천여운의 신형을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은 단상 위에 있는 좌호법 이화명과 공증인으로 참관한 구 장로 사마의뿐이었다. '이럴 수가.....' 내색하진 않았지만 이화명은 천여운이 펼친 경공에 놀라워 했다. 그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천여운의 움직임은 대호법 마라겸과 겹쳐보였다. 풍신(風神)이라 불리는 마라겸의 경공은 마교에서 일인자라 불릴 만큼 그가 작정한다면 누구도 그를 잡을 수가 없다. '오 층 비급서재에 대호법의 경신법이 있었나?' 그 예상은 정확했다. 천여운이 펼친 경신법은 풍신공이었다. 다만 그는 자신이 펼치는 경신법이 누구의 것인지는 모르고 있었다. '쓸 만하다.' 풍신공을 익혔을 당시에는 과연 얼마나 뛰어날지 반신반의 했는데, 독마종의 종주인 백오조차도 육안으로 판별해내지 못 한 것을 보면 굉장한 경신법이라 할 수 있었다. 경공이 빠르다는 것을 인식한 백오가 천여운의 허실을 분석했다. '발이 빠르다면 그것을 죽여야지.' 생각과 동시에 실행도 빨랐다. 백오는 곧바로 천여운의 다리 쪽을 향해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지팡이에 실려 있던 장강(杖罡)이 튀어나와 천여운의 다리로 쇄도했다. -촤아아아악! '탄장강?' 탄장강(彈杖罡). 화경의 경지에 오르면 기를 다투는 것이 완숙해지면 검기를 날리는 것처럼 응축된 기의 덩어리인 강기마저도 발사시키는 것이 가능해진다. 천여운이 허공으로 뛰어오르자, 대연무장의 바닥으로 탄장강이 작렬했다. -콰쾅! 강기가 부딪친 연무장 바닥에 굉음과 함께 모래 먼지가 올라왔다. 그 먼지를 뚫고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백오가 파마장법(波魔杖法)의 오 초식인 마경섬육(魔境殲肉)을 펼쳤다. 노리는 것은 천여운이 아닌 바로 다리였다. '내 움직임을 봉하려는 건가?' 이를 쉽게 당해줄 그가 아니었다. 허공으로 떠오른 천여운이 등허리에 차고 있던 하얀 도집에 도병에 손을 붙잡았다. -챙! 도집에서 잠들어 있던 백룡도가 그 새하얀 전신을 드러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하얗고 얇은 도신에 백오가 속으로 비웃었다. '이 노부의 현철장을 그런 얇고 하찮은 도로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겉보기에는 그저 독특하게 생긴 백오의 지팡이는 현철로 만들어져서 그 강도가 굉장하다. 거기에다 강기마저 실렸으니 그 위력은 암석마저 가볍게 부숴버릴 정도였다. 천여운이 얇은 도신의 백룡도로 몸을 빠르게 회전시키며 접무도법의 제 이 초식 회원접경(回圓蝶警)을 펼쳤다. -채채채채채챙! 강기와 강기가 실린 초식이 부딪치면서 엄청난 파공음이 터져 나왔다. "윽!" "귀, 귀가 찢어질 것 같아!" 대결을 관전하던 생도들 중에서 아직까지 초절정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이들은 내공이 부족했는지 파공음에 실린 공력에 고통스러웠는지 귀를 틀어막았다. -챙! 촤아아아! 허공에서 초식을 부딪친 두 사람의 신형이 서로 연무장 바닥으로 떨어져 밀려났다. '대체 저 도는?' 백오가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천여운의 손에 쥐어진 백룡도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초식 대결은 균등했으나, 백오가 쥐고 있는 현철로 만들어진 지팡이에 수많은 자국이 나있었다. 얇은 도신에 부러질 거라 생각했던 백룡도는 멀쩡하게 그 영롱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누가 저 놈에게 저런 보도(賣刀)를 주었단 말인가?' 이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분명 화경의 경지에 올랐다고 해도 천여운은 전투 경험이 현저히 부족할 텐데, 생각 외로 냉철하게 잘 대응해냈다. 마치 수백 회의 전투를 치른 경험이 풍부한 무인처럼 말이다. 제일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내공이었다. '이놈 정말로 화경 초입이 맞나?' 풍겨져 오는 기운만 느꼈을 때는 화경 초입에 불과했는데, 철장과 도가 부딪칠 때마다 실려 있는 공력이 백오 자신에게 전혀 밀리지 않았다. 백오는 시작할 때부터 십성 공력을 전부 끌어올린 상태였다. 상대가 자신보다 하수라고 생각해도 전투에 있어서는 전력을 다해야 하는 것은 수많은 전투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었다. 한 수의 방심만으로도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생사의 대결이었다. '그렇다면 실력을 숨겼다는 소리인가?' 몇 차례 부딪친 것만으로도 백오는 천여운이 풍겨지는 기운을 조절해서 실력을 숨겼다는 것을 파악했다. 상대에게 실력을 숨기려면 적어도 그와 동일한 수준이거나 그 이상이어야만 한다. 백오의 눈빛이 좀 전과 달리 진중해졌다. '노부를 상대로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고? 이놈 정말 괴물이구나.' 외손자인 독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종섬이 감당하지 못 할 만 했다. 그도 교내의 수많은 인재들을 보았지만 이렇게까지 빠르게 무공이 성장하는 자는 본 적이 없었다. 어젯밤 그를 찾아왔던 붉은 면사포의 무 부인이 떠올랐다. '백 종주. 마도관의 요청을 받아들이세요.' '무 부인.....지나친 월권이라고 생각하지 않소?' 교주의 부인이라고는 하나 다른 종파의 종주이자 장로에게 명령할 권한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좋지 않았던 백오가 노기가 오르려 하자, 무 부인이 그에게 솔깃한 제안을 했다. '신의의 소재를 알고 있습니다.' '뭐요?' 신의(神醫). 중원 최고의 의원이라 불리는 자였다. 죽은 자가 아니면 못 살리는 자가 없다고 불리는 전설적인 의원이었다. 알려지기로는 황제의 주치의였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편작이나 화타의 후손이라는 소문도 있었지만 정확한 신상정보를 아는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실력만큼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최고라는 점이었다. 다만 그 소재가 워낙 신출귀몰해서 고관대작이나 무림 세도의 정보력으로도 알 수가 없었다. 외손자를 치료하고 싶어 하는 백오의 바람을 건드린 것이었다. '그 말을 노부가 어찌 믿는단 말이오?' 의심스러워하는 백오에게 그녀가 주홍색 옥패를 보여주었다. 그것에는 의(醫)라고 새겨져 있었다. '예전에 조부께서 신의에게 이 패를 받았다고 했지요. 패를 가지고 어떤 장소로 가면 만날 수 있다고 하더군요.' 무 부인의 조부라고 한다면 전대 현마종의 종주 무진경이었다. 과거오십여 년 전, 정사마의 전력 수만 명이 집결하여 대전쟁이 일어난 사평 대전에서 수많은 전공을 세운 마교의 영웅이었다. 결국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백오는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마도관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거요?' '놈을 죽이세요.' '무 부인, 노부가 아니더라도 다른 장로들도 놈을 죽일 수 있소.' 화경의 경지에 올랐지만 아직까지 전투 경험도 부족했기에 백오가 아니더라도 다른 장로들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 부인의 생각은 달랐다. '아니요. 지금 본교에 남아있는 장로님들 중에서 천여운을 죽일 수 있는 건 백 장로님뿐이에요. 왜냐하면 백 장로님은.....' '......그를 죽이면 그 뒷감당은?' '좋아요. 이번 일로 사태가 커진다면 저희 현마종에서 적극적으로 수습하겠습니다. 차기 소교주가 정해졌으니까요. 호호호.' '호홋.' 그것이 어젯밤에 무 부인과 나눴던 대화였다. 무 부인은 지금 교내에 남아있는 장로들 중에서 유일하게 천여운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 그라고 말했다. '현마종.....정말 무서운 정보력이다.' 그녀의 말대로 이 정도 실력이라면 다른 장로들이 감당하기 어려웠다. 적어도 자신을 포함해 삼 장로 이상이 아니고는 천여운을 상대할 자가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무 부인이 천여운의 진정한 실력을 어떻게 아는 지가 중요하지 않았다. 손자의 치료를 떠나서 놈을 여기서 죽이지 않는다면 여섯 종파는 정말 최악의 적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래. 여기서 이놈을 없애야 해.' -촤아아아아아! 천여운을 죽이기로 결심한 백오의 전신에서 보랏빛 독기(毒氣)가 뿜어져 나오더니, 사방으로 뭉실 거리며 퍼져 나갔다. 보랏빛 독기가 스치자 대연무장의 모래바닥이 검게 물들었다. 단상 위의 석좌에 앉아서 지켜보던 좌호법 이화명과 구 장로 사마의가 놀라서 동시에 일어났다. "독을 개방하다니!" "백 장로! 이 자가 대체 무슨 짓을!" 공증인으로 온 사마의조차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비록 독마종주인 백오가 독(毒)이 주공이라고는 하지만 암묵적으로 생사를 다퉈야할 적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면 사용하지 않는다. 독인(毒人)의 경지에 오른 그는 최악의 살상 병기라고 불릴 만큼 위험했다. 무공의 경지와 별개로 수백의 독기를 발산하는 독인이 마음 먹고 상대를 죽이려고 든다면 막을 자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설마 도전자를 죽일 작정인가?" 공증인으로 참여할 때부터 독마종을 지목했다는 말에 우려 했었다. 장로의 자리가 걸려있는 대결이기 때문에 상대를 봐줄 필요는 없었지만 본교의 새로운 전력이 될 수 있는 고수이기에 어느 정도는 감안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되어버리면 생사의 대결이 되어버린다. '천여운!' 우려했던 사태가 벌어지자, 좌호법 이화명이 두 눈을 감았다. 교주에 의해 이 년 동안이나 금옥에 갇혀 있는 등 종파의 힘이 약화되어서, 적어도 대결에 있어서 선을 넘기지 않을 거라 여겼지만 아니었다. '엄청난 독기다.' 바로 근방에 있는 천여운은 백오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독기에 눈빛이 차가워졌다. 불리해진다면 독을 쓸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라면 정말 죽일 기세였다. "후우!" -스물스물! 백오가 호흡을 내뱉자 그의 입에서 보랏빛 수증기가 흘러나왔다. 파마독경의 칠 층까지 끌어올린 것이었다. 파마독경(波魔毒經)은 독마종의 독의 진수를 모은 독공이었다. 최종 경지인 팔 층에 이르면 독인이 되는데, 체내에 수백가지가 넘는 독을 품을 수 있게 되고 기(氣)마저 용해시킬 수 있는 위력의 독공을 펼칠 수 있게 된다. 칠층만으로도 그 살상력은 수백에 이르는 절정의 무인들을 몰살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 '저게 독이라고?' '저, 저런 괴물을 어떻게 이긴 단 말이야.' '죽을 지도 들라!' 사방으로 몰아치는 보랏빛 독기에 대연무장 바깥까지 물러난 생도들과 무공 교두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천여운을 쳐다보았다. 천여운을 단숨에 집어삼킬 듯이 부풀어 오르는 거대한 독기였다. '주, 주군!' '천 공자님!' 주군에 대한 강한 신뢰를 가지고 있는 천여운의 수하들조차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가 항복 선언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육 단계 시험을 통과하기도 전에 그가 백오가 내뿜는 독에 중독되어 죽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천여운은 이 엄청난 독기에도 불구하고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백오를 노려보고 있었다. "건방진 애송이 놈. 시신조차 남기지 않고 죽여주마!" -팟! 독공을 펼칠 준비를 마친 백오의 신형이 천여운을 향해 번개처럼 뻗어왔다. 온몸에서 보랏빛 독기를 흘리는 그는 불길함 그 자체였다. 백오가 가볍게 지팡이를 휘두르자 수백의 독이 섞인 독기가 지옥의 파도처럼 일어나 천여운을 덮쳤다. -촤아아아아아아아! 보랏빛 독기의 파도가 스쳐지나가는 연무장의 바닥이 검게 변색되며 강렬한 독기에 타들어가는 것처럼 검은 연기가 피어 올랐다. "아아아...." "이럴 수가....." 독기의 파도가 덮친 곳은 무엇 하나 멀쩡한 곳이 없었다. 뿌옇던 보랏빛 독기가 가시며 바닥이 드러난 곳은 검게 물든 모래 자국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당한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며 시선을 회피했다. 이 정도 독기라면 뼈 조각조차 타들어가서 죽었을 것이다. '네놈이 자초한 것이다. 어리석은 놈.' 백종(百種)이 넘는 독기를 조합한 파마독세(波魔毒世)를 펼쳐서 살아남은 자는 여태껏 존재하지 않았다. 백오가 승리를 확신하고 전신의 경맥을 순환하고 있는 파마독경의 칠 층 독기를 가라앉히려는 순간이었다. -촤아아아악! 아직까지 완전히 가시지 않은 보랏빛 독기로 가려진 곳에서 파란빛의 탄도강(彈刀罡)이 백오의 목을 노리고 날아왔다. "아닛?" 당황한 백오가 놀라서 현철 지팡이에 강기를 실어 막아냈다. -채애애앵!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어느새 천여운의 신형이 그의 바로 앞까지 파고든 것이었다. "!?" 곧바로 반격을 해야 하는데 백오는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일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독기에 검게 타들어가고 있는 천여운의 흉측한 피부가 눈에 보일 정도로 엄청난 속도로 재생하는 것이 아닌가. 핏줄과 근육들이 꿈틀거리며 연결되는 모습이 징그럽기마저 했다. "네, 네놈....대체?" -오싹! 괴물처럼 재생하고 있는 천여운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흉흉한 마성에 백오는 생애 처음으로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이제 내 차례다." "뭣?" -퍼억! "끄아아아악!" -쾅! 쾅! 쾅! 쾅! 쾅! 쾅! 엄청난 괴력이 실린 천여운의 일권에 백오의 몸이 모래 바닥을 물수제비처럼 수차례 튕겨져 나가더니, 대연무장의 반을 가로질러서 겨우 멈출 수 있었다. < 32장 변수의 육 단계 시험(3) > 끝 < 32장 변수의 육 단계 시험(4) > 시야를 뿌옇게 가렸던 보랏빛 독기가 가시는 곳마다 검게 변해버린 바닥에 천여운의 수하들은 절망했다. 이런 독이라면 내공이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뼈까지 녹았으리라. "주구우우우운!" 감정이 격해진 허봉은 절규하듯이 외쳤고, 문규도 눈시울이 붉어져서 도저히 연무장을 바라볼 수 없었기에 고개를 떨궜다. '왜 하필 독마종이랑 싸워서....' 더 바라보다간 눈물을 주체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쾅! 쾅! 쾅! 쾅! 쾅! "앗!" 아직 안개처럼 흐릿한 보랏빛 독기 속에서 누군가의 몸이 물수제비처럼 바닥을 튕겨져 나가면서 대연무장을 가로질러 절반 가까이 날아갔다. 어찌나 강한 위력이었던지 한 번 바닥을 튕길 때마다 연무장이 파여 나갔다. 모두가 놀라서 구덩이 속에 쓰러져 있는 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놀랍게도 독마종의 종주인 백오였다. "도, 독마종주?" "서....설마?" -저벅저벅! 걷혀가는 보랏빛 독기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걸어 나오는 천여운의 모습에 관전 중이던 모든 생도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함성을 질렀다. "와아아아아아!!!" 죽은 줄만 알았던 천여운이 멀쩡하게 나오자 모두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입고 있는 옷이 독기에 엉망이 된 것 외에는 독기에 당한 상처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럴 수가! 백 장로의 독을 견뎠단 말인가?" 단상 위에 있던 구 장로 사마의와 좌호법 이화명 역시도 경악한 표정으로 천여운을 바라보았다. 그들 역시도 천여운이 죽었을 거라 단정했었다. 이십여 년 동안이나 무림맹과 사도 연맹과의 전쟁에서 독마 종주 백오의 독공은 수도 없이 보았다. 학살이라고 불릴 만큼 극악한 위력을 자랑하는 독에 살아남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무당파의 화경의 고수였던 옥명 진인조차 독공에 당해서 시신조차 남지 않았었는데, 그것을 견뎌낸 것이었다. '믿을 수가 없다.' 모두가 놀라워 할 때 천여운은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체내로 파고들었던 모든 독기가 완전히 배출되었다. "후우." 심상치 않은 보랏빛 독기에 위협을 느낀 천여운은 처음으로 호신강기(護身罡氣)를 펼쳤다. 아무리 나노가 치료하는 속도가 빠르다고 해도 독기에 전신이 녹아내린다면 어찌해볼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괴독마장이라는 별호답게 백오의 독은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강기로 전신을 보호하고 있는데도 그것을 뚫고 들어오는 미세한 독기에 피부가 녹아내렸다. 나노머신들이 독을 배출해내고 피부를 빠르게 재생시키지 않았다면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무시무시한 독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천여운을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백룡도의 능력이었다. '백룡도가 독기를 배척할 줄이야.' 아직 완전히 재생되지 않은 상태에서 백오의 허를 찌르기 위해 백룡도에 공력을 불어넣는 순간 그의 주변에 있던 독기가 백룡도에서 퍼져 나오는 맑은 기운에 밀려났다. 단순히 높은 강도만을 지녔다고 생각했는데 과연 영물인 이무기의 뿔로 만든 절세보도(絶世寶刀)다웠다. "끄으윽!" 일권을 맞고 정신없이 튕겨져 나간 백오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욱씬! 일격을 당하는 순간에 호신강기를 펼쳤지만 가슴뼈가 부러진 듯 했다. 공력이 파고드는 것이었다면 그나마 덜했을 텐데 상상을 초월하는 괴력이었다. '무엇이냐! 대체 네놈의 정체가 무엇이란 말이냐?' 방금 전에 맞은 일격보다도 그 엄청난 재생력이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이라고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일어났나?" "헛?" 바로 앞에서 들려오는 천여운의 목소리에 백오가 화들짝 놀라서 일장을 뻗었다. 아직까지 파마독경의 칠 층을 운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손에서 보랏빛 독기가 서려있었다. -팡! 백오의 독장(毒掌)을 천여운이 백룡도의 도신으로 막아냈다. 도신에 손바닥이 닿는 순간 맑은 기운이 일어나 백오의 독을 흩어지게 만들었다. 마치 피독주(避毒珠)와 같은 효능에 백오의 두 눈이 커졌다. '이놈! 이것 덕분에 견딘 것이었나?' -타탁! 뭔가 원인을 알아냈다는 생각에 백오가 재빨리 보법을 펼치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천여운이 그것을 놓칠 리가 없었다. 천여운이 접무도법의 마지막 초식인 접무만개(蝶舞滿開)를 펼쳤다. 얇은 도신의 백룡도에서 푸른빛 강기가 물들며 나비처럼 팔랑거리며 수많은 잔상의 도식이 백오를 향해 쇄도했다. -촤촤촤촤촤촥! '섭맹?' 우호법 섭맹이 펼치는 접무도법과 비교해도 위력이 떨어지지 않는 절초에 백오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까 전의 일권에 튕겨져 나오면서 지팡이를 놓쳤기 때문에 맨손으로 막아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어쩔 도리가 없구나.' -고오오오오오! 그 순간 백오의 피부가 섬뜩한 남색빛으로 물들었다. 그와 동시에 백오의 몸에 수많은 잔상을 일으키던 접무만개의 도초가 작렬했다. -채채채채챙! 놀랍게도 강기가 실린 접무도법의 도식이 백오의 주요 요혈들을 베었는데 병기와 부딪친 것처럼 쇳소리와 함께 백룡도가 강한 반탄력에 뒤로 튕겨나갔다. 천여운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파르르르! 떨리는 백룡도의 도신이 영롱한 빛을 내며 남색빛 독기를 몰아냈다. 전신이 금강불괴라도 된 것처럼 단단해진 것도 모자라 보랏빛 독기보다 더욱 강렬한 남색빛 독기에 천여운의 피부가 타들어갔다. "큭!" [체외로 침투하는 독 성분을 배출하고 손상된 부위를 자가 수복합니다.] -츠츠츠츠! 나노의 목소리와 함께 독기에 타들어가던 피부의 핏줄이 들썩거리며 재생했다. 천여운이 백룡도로 도막(刀膜)을 만들어내서 남색빛 독기를 막아냈다. "크하아아아아압!" -파아아아앙! 전신의 피부가 남색으로 물들은 백오가 기합을 내뱉자 엄청난 독기가 뿜어져 나오며 도막에 부딪치며 그의 신형이 뒤로 튕겨져 나갔다. -차아아아아아악! 연무장 바닥을 열 보 가량 밀려나간 천여운이 자세를 가다듬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백오를 노려보았다. 아까 전에 펼쳤던 독기는 전력이 아니었다. 체외로 독을 방출하는 위력이 상상을 초월했다면 지금은 그 자체가 독(毒)이 된 듯 했다. "독인?" 단상 위에 있는 좌호법 이화명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백 장로. 정녕 끝장을 보겠다는 건가.' 피부색마저 완전히 바뀌어서 지독한 독기를 내뿜고 있는 저 모습은 틀림없는 독인(毒人) 상태였다. 독공의 정수라 불리는 파마독경(波魔毒經)의 최종 경지. 그 자신이 독 자체가 되는 독인의 경지는 검으로 치면 신검합일과도 같았다. 백종의 독을 다루었던 칠 층보다 세 배나 많은 독을 체내에서 활성화시키기 때문에 전신이 방패처럼 단단해지고, 일수마다 거대한 암석마저 순식간에 녹여버릴 만큼 강렬한 독기를 발산한다. '엄청난 기세다. 교주님께서 오신다고 해도 독인이 된 백 장로를 제압하기는 쉽지 않겠구나.' 멀리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독인의 경지가 두려을 만큼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지금 백오는 마도관에 있는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사아아아! 대연무장의 모래들이 자력에 이끌리는 것처럼 들썩거렸다. 폭주하듯이 터져 나오는 엄청난 독기로 인해서였다. 백오의 주변은 까맣게 물들다 못해 바닥이 독기로 녹아내리고 있었다. "노부에게서 팔 층 파마독경마저 끌어올리게 만들다니. 네놈이 자랑하는 그 보도로 이번에도 막아 보거라." -탁! 솨아아아아! 백오가 발을 내딛으며 걸을 때마다 바닥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며 패었다. 연무장 밖에서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조차 호흡이 턱 막힐 정도로 엄청난 독기였다. 팔 층의 경지는 그 자신이 독인이 될 만큼 엄청난 위력을 자랑하는 대신 체내에 죽적해놓은 독을 소모해야 하기 때문에 가급적으로 자제했으나, 이 방법이 아니고는 천여운을 죽일 방법이 없었다. '백룡도가 통하지 않는다라....' 그를 향해 다가오는 백오를 바라보며 천여운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접무도법으로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스륵! 천여운이 겨냥하던 도 끝을 내리자 백오의 눈빛이 회심으로 물들었다. '독인이 된 노부는 누구도 막을 수 없다!' 백오가 천여운을 끝장내기 위해 발걸음을 앞으로 내딛는 순간, 도 끝을 밑으로 내렸던 천여운이 갑자기 백룡도를 하늘을 향해 높이 들었다. 백룡도에서 푸른빛의 도강이 발했다. "어리석은 놈! 끝까지 반항해볼 참이더냐!" 천여운이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백오가 양손에 독기를 모아 그를 향해 쇄도했다. 그때 천여운이 백룡도를 대연무장의 바닥에 내리쳤다. -쾅! 솨아아아아! 도강이 실린 백룡도가 바닥을 내리치는 순간 연무장의 모래 파편들과 흙 먼지가 위로 튀어 오르며 백오와 천여운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시야를 뿌옇게 뒤덮었다. "이런 잔재주를!" 어차피 그가 있는 위치는 알고 있었다. 백오가 양손에 독기를 끌어 모아 회전시키자, 남색빛 독기가 응집되며 파마독경의 최후의 살초인 파마독멸(波魇毒滅)을 펼치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차차차차차차착! 뭔가가 결합하는 소리와 함께 모래 먼지로 시야가 가려진 백오의 앞에서 방금 전까지는 감지할 수 없었던 흉흉한 마성이 느껴졌다. -오싹! '이 기운은 대체?' 분명 아까 전 일격을 당하기 전에 천여운의 눈과 마주쳤을 때 그 느낌이었다. '위험하다. 먼저 공격해야 해.' 흉흉한 마성에서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낀 백오가 중도에 멈췄던 파마독멸을 펼쳤다. 백오의 두 손에 응집한 남색빛의 독기가 거대한 악마의 손처럼 형태를 이루더니, 눈앞에 적을 없애기 위해 무서운 기세로 뻗어나갔다. "죽어 랏!" -촤촤촤촤촤촤촤촥! "앗?"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거라 장담했던 최후의 살초인 파마독멸이 어두운 입자를 흩날리는 수많은 검결에 막혀서 그대로 파훼되어버리고 말았다. "이, 이건?" 백오의 두 눈동자에는 똑똑히 보였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검은 빛의 검강을 내뿜고 있는 흑검이 회오리를 치듯이 화려한 궤적을 그리며 폭풍처럼 쇄도해왔다. '마, 막아야 한다!' 흉흉하면서도 무섭게 펼쳐지는 검결에 당황한 백오가 체내의 모든 독기로 반탄막을 만들어내 방어했지만 소용없었다. -촤촤촤촤촤촤촤촤촤! 끄아아아아악!" 날카로운 흑검이 도강마저도 튕겨냈던 그의 요혈을 파고들었다. 백오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수백 종의 독이 합해져서 만들어진 독기마저 베어버리는 엄청난 검력에 백오의 몸이 난자되어가며 피로 물들어갔다. '비명소리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먼지 때문에 보이지 않잖아!' 뿌연 먼지 속에서 들리는 것이라고는 비명소리뿐이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니 답답했다. 이윽고 대연무장 전체를 뿌옇게 물들였던 흙먼지가 가라앉으면서 비틀거리며 움직이는 무언가가 보였다. "서, 설마? 백 장로님인가?" "옷이 피에 젖었어." 전신의 옷이 피로 물들어 있었지만 그 복색이 분명 백오가 틀림없었다. 그런데 백오의 전신이 드러나는 순간 대연무장에 정적이 찾아왔다. "!!!" 긴장된 마음으로 먼지가 가시길 기다렸던 모든 사람들이 너무도 경악한 나머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비틀비틀! 털썩!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비틀거리며 바닥에 쓰러지는 백오의 머리가 없었다. 깨끗하게 잘려진 목의 단면에서 분수처럼 피가 뿜어져 나왔다. 먼지가 완전히 가셨을 때 마도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천여운의 손에 쥐어진 백오의 잘려진 머리통을 볼 수 있었다. < 32장 변수의 육 단계 시험(4) > 끝 < 33장 숨겨진 지하 보고 (1) > -뚝뚝! 치이이익! 핏방울에 섞인 독기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피가 떨어지는 백오의 잘린 머리는 눈을 부롭뜬 채 죽음을 맞이했다. 죽는 그 순간까지 고통스러웠는지 백오의 얼굴은 괴로움이 가득해서 일그러져 있었다. 양팔의 보호대로 변한 흑검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천마검공의 위력이 이렇게까지 상승할 줄이야.' 천여운이 먼지 속에서 펼친 천마검공의 초식은 제 삼 초식이었다. 흉흉한 마성의 기운이 담긴 검은 검강과 흑검, 천마검공의 초식이 삼위일체를 이루자 그 위력은 폭발적인 역량을 발휘했다. 독인이 된 독마종주 백오조차 속수무책을 당할 정도의 위력이었다. '아직 멀었어.' 하지만 모든 것이 만족스럽진 않았다. 천여운은 이번 대결을 통해서 스스로를 시험해볼 수 있었다. '더....더 강해져야 해.' 원래의 목표는 접무도법만으로 백오를 이기는 것이었다. 삼 년 동안 폐관수련을 통해서 아바타들과의 대결로 수많은 경험을 쌓았지만 이번 독인과의 대결로 새롭게 깨달은 게 많았다. '백오도 비장의 수가 있었듯이 다른 적들도 마찬가지겠지.' 이렇게 엄청난 살상력을 가진 독인 백오가 본교의 정점이 아니라는 말은 그처럼 나노의 해독능력 없이도 그를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이 있다는 말이었다. 스스로를 되돌아볼 수 있기에 더욱 강해질 여지가 있었다. '어머니....' 천여운이 자신의 손에 꾹 쥐고 있는 백오의 수급을 바라보며 화 부인을 떠올렸다. 미독에 돌아가신 화 부인의 한이 조금이라도 덜어졌을까. '이제 시작이다.' 독마종의 종주 백오는 시작점에 불과했다. 천여운이 다시 한 번 결의를 다졌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에 경악으로 물들었던 대연무장의 정적을 깬 것은 바로 허봉이었다. "주구우우우운!" 감격스러운 허봉의 외침에 천여운의 수하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아!!!" 지금까지는 생도들이나 소교주 후보자들을 상대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비숫한 경험과 선상에 놓인 적들이었기에 천여운을 신뢰했던 그들이었다. 그러나 이번 대결만큼은 수하들로서도 패배와 죽음을 예감했다. 독인으로 변한 백오가 내뿜는 기운은 대연무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압도할 만큼 무시무시했는데, 그를 꺾는 것도 모자라 죽였다. -주르륵! "아....." 문규는 자신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훔치며 이상해했다. 천여운이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는 세상이 무너진 것만 같았는데, 승패를 떠나서 그가 무사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심장이 폭주하는 것처럼 뛰었다. '심장이 왜 이렇게 뛰는 거지.' 가슴을 압박한 천 때문이라고 애써 생각했지만 그녀의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기에 애써 그것을 무시했다. 그리고는 다른 수하들처럼 같이 큰 함성을 질렀다.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정말......괴물이 되었군요. 독마종주의 목을 베다니..." "천가(天家)의 피는 속일 수 없군요." "허허허. 글쎄, 과연 천가라서 그럴까." 단상 옆에 모여서 대결을 지켜보고 있던 무공 교두들도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화경의 경지에 올랐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상대가 독마종주 백오라는 말에 육 단계 시험을 통과하지 못할 거라 여겼다. 어쩌면 여섯 종파와 관련된 만큼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여겼는데 결과는 정반대가 되었다. 괴독마장이라 불리며 마교를 넘어서 중원 무림에 악명을 떨치던 백오가 저렇게 한낱 수급이 되리라고 누가 상상했겠는가. '아직 도전도 하지 못했는데 먼 곳으로 올라갔네. 그려.' 선임 무공 교두 호진창이 아쉬워했다. 노란 명찰 쟁탈전 이후로 한 번 더 겨뤄보고 싶었는데, 이제 그러기에는 천여운의 무위가 너무 높아져버렸다. 다만 우려가 되는 부분이 없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든 이 대결로 인해 확실히 전쟁을 선포한 셈이군.' 원래부터도 마도관이 끝나는 순간부터 대립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여섯 종파의 수장 중 한 명인 독마종주의 목마저 베어 냈으니, 독마종 뿐만이 아니라 다른 종파에서 일제히 천여운을 견제할 것이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천여운을 죽이기 위해 독수를 썼으니.' 상대인 독마종주 백오가 먼저 그를 죽이려들었으니 명분은 충분했다. 공증인까지 있으니 이걸로 문제가 되진 않을 것이다. 단지 수장을 잃은 독마종이 앞으로 어떻게 나올 지가 관건이었다. -꾹! 대결을 지켜보던 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연이 손바닥의 살이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움켜쥐고서 몸을 들렸다. "고, 공자!" 같은 생도로서 천여운의 놀라운 신위에 마음이 동해서 같이 함성을 지를 뻔했던 천무연의 수하들이 대연무장을 빠져나가는 그를 따라갔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넋을 놓고 있던 마도관주 좌호법 이화명이 진심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독인이 된 백 장로의 목을 베다니...' 본교에서 서열 십위 권의 고수인 그 자신조차도 독마종주 백오의 독을 정면에서 맞서서 이겨낼 자신이 없건만 그것을 천여운이 해냈다. 불과 사 년 채 되지 않았다. 무공조차 익히지 않았던 소년이 불과 사 년 만에 수많은 교인들 중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절세고수로 성장했다. 그의 괄목상대할 만큼 엄청난 성장은 천재를 넘어서 괴물이라 불러야 할 정도였다. '정녕 본교에 진정한 그 분의 진전을 이은 교주가 탄생하려는 건가.' 생각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전율이 일어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연무장에 남아있던 독기가 어느 정도 가시자, 무공 교두들이 나서서 죽은 백오의 시신을 수습에 들어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여섯 종파 중 하나인 독마종의 종주인 만큼 신경 써야 했다. 공증인인 구 장로 사마의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자, 좌 호법 이화명이 석좌에서 일어나 대연무장에 서있는 천여운을 바라보며 외쳤다. "천여운 단주. 육 단계 시험을 통과한 것을 축하하오!" "와아아아아아아!!!"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연무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함성을 질렀다. 칠십 년 만에 탄생한 마도관 육 단계 시험의 통과자였다. 위업을 달성했으니 축하받아 마땅했다. '아아아!' 그제야 천여운 역시도 실감이 갔는지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천여운의 수하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모두가 대연무장의 한 가운데 있는 그에게 달려왔다. 고왕흘이 거구의 근육에 어울리지 않게 콧등이 붉어져서 축하했다. "주군 경하 드립니다!" "경하 드립니다!!!" "이제는 장로님이라 불러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하하하핫." 오종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수하들 모두가 즐거워했다. 그렇게 천여운과 그의 수하들이 기쁨을 나누고 있을 때, 사 마종의 종주이자 구 장로 사마의가 단상 위를 내려와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좌호법 가기 전에 잠깐만 아들 녀석의 얼굴을 봐도 되겠소?' '그렇게 하시지요.' 공증인으로서의 일이 끝났기 때문에 곧장 마도관을 나가야 했지만, 좌호법 이화명에게 부탁해 아들의 얼굴을 잠시만 볼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그 정도 부탁을 어려운 것이 아니기에 흔쾌히 허락했다. "아버님!" 그렇지 않아도 나가기 전에 구 장로 사마의를 배웅하려 했던 사마착이었다. 오랜 만에 보는 아들의 얼굴에 사마의가 들떠서 다가왔다. "잘 커주었구나. 아들아." 이미 관주 집무실에서 좌호법 이화명을 통해서 사마착이 마도관의 오 단계 시험을 통과한 사실을 들은 그였다. 그것만으로도 굉장한 성과라 할 수 있기에 칭찬해주고 싶었다. 부모의 입장에서 자식이 뛰어난 성취를 거뒀다는데 흐뭇해 하지 않을 이가 있겠는가. 오랜만의 해후의 여운이 가시자 사마의가 아들인 사마착에게 육성이 아닌 전음을 보냈다. [착아..... 혹시 소교주 쟁탈전에 지지할 주군을 찾았느냐?] [아! 아버님께서도 그 이야기를 하시려 했군요.] [응?] [그렇지 않아도 가시기 전에 드릴 말씀이 있었습니다.] 망설이는 사마착의 전음성에 사마의가 부드럽게 권했다. [먼저 말해 보거라.] [전에 아버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여섯 종파의 후보자들 중에서 지지할 분을 찾으려 했는데.....죄송합니다.] […….] [아무리 생각해도 천여운 공자에게 계속 마음이 갑니다.] 마도관에 입관하기 전, 사마종의 종주인 사마의는 그에게 이번에 있을 소교주 쟁탈전에 지지했으면 할 소교주 후보자들을 알려주었다. 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연과 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 천유찬이었다. 두 후보자들은 마도관에 입관하기 전부터 차기 소교주에 가장 가깝다고 알려진 신동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막상 마도관에서 생도로 지내면서 천여운의 놀라운 성장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되면서 그에게 끌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종주이자 아버지의 당부가 있었기에 마지막까지 고민을 거듭했지만 이상하게 천무연이 끌리지 않았다. 이미 산하의 수많은 상위 종파의 수하들을 둔 그가 자신을 중용 할지도 의문이 갔다. [녀석.] 나무랄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사마의가 흐뭇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역시 내 아들이다.] [네?] [어찌 이 애비의 생각과 똑같으냐.] 사실 사마의가 아들인 사마착에게 이런 전음을 꺼낸 것도 이번 마도관의 육 단계 시험을 보고나서 심중이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칠십 년 만에 나타난 마도관의 육 단계 시험 통과자였다. 더군다나 이번 대결에서 승리하게 되어 적어도 십이 장로의 자리가 보장되었다. 고작 약관에 불과한 천여운이 이 정도 무위를 지녔다면 앞으로의 얼마나 성장할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굳이 여섯 종파의 산하로 들어갈 필요가 없지 않은가?' 마룡장종과 더불어 교내에서 최상위 종파가 사무종이었다. 여섯 종파의 말석인 독마종과 비슷한 성세를 가진데다 장로의 직위를 가진 만큼 사마의는 타 종파의 산하로 들어간다는 것이 내심 탐탁지 않아했다. '여섯 종파에 속하지 않은 소교주 후보자!' 그야말로 탐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약 천여운이 소교주가 된다면 기존의 여섯 종파를 중심으로 돌아갔던 마교의 체계에 분명 변화가 생길 것이다. 그가 아직까지 기반을 갖추지 않았을 때 지원하게 된다면 사무종이 그 중심에 설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이 애비도 네 뜻을 존중한다. 천여운 공자라면 충분히 지지 할 만한 가치가 있지. 암!] [아아! 그럼 제 뜻대로 해도 괜찮은 겁니까?] 원하는 바를 얻게 된 사마착의 얼굴이 밝아졌다. 사마의가 흡족해진 얼굴로 답했다. [그러도록 하거라. 하하핫, 잘하면 네 매제가 될 분이니, 더욱 잘 보필하도록 해라.] [네?] 사마착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무래도 자신의 아버지는 천여운을 누이 동생인 사마영의 남편감으로 점찍은 듯 했다. * * * 반시진 후, 마도관 본관의 일 중 관주 집무실 앞. 독마종의 종주인 백오의 시신 수습을 마친 후, 어느 정도 장내가 정리되고 천여운은 좌호법 이화명을 따라서 관주 집무실로 왔다. 육 단계 시험을 통과했기에 그에 따른 혜택을 주기 위해서였다. 집무실로 들어서기 전에 선임 무공 교두인 호진창을 비롯해 두 명의 교두들이 따라왔는데, 이화명이 잠시 그들에게 밖에서 대기하라고 하였다. '응?' 그렇게 집무실로 들어와 문을 닫자마자, 좌호법 이화명이 진기를 일으켜 바깥과의 소리를 차단시켰다. 알 수 없는 그의 행동에 천여운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그런데 갑자기 좌호법 이화명이 그의 앞에 한 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며 입을 열었다. "공자님. 그 동안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본 관의 육 단계 시험을 통과한 것을 진심으로 경하 드립니다." 그 태도는 지금까지 생도를 대하던 그 모습이 아니었다. < 33장 숨겨진 지하 보고 (1) > 끝 < 33장 숨겨진 지하 보고 (2) > 좌호법 이화명의 달라진 태도에 천여운은 내심 당혹스러웠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마도관에 있는 모든 시험을 마치셨기에 천가의 혈통이신 공자님의 신분에 맞는 대우를 해드리는 겁니다." "아....." 마도관의 모든 시험을 통과했기에 천여운은 더 이상 생도의 신분이 아니었다. 원래 교주의 혈육은 그 후계 자격을 가졌기에 응당 대우를 받아야 했지만, 마도관의 법칙대로 이 안에서만큼은 다른 생도 들과 동일하게 대했던 것뿐이었다. 얼떨떨해 하는 천여운에게 이화명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 "먼저 지금까지는 마도관의 법칙도 있었고.....'그것'을 확신 할 수 없었기에 공자님을 지켜보기만 했던 것을 사죄드립니다."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의아해하는 천여운에게 좌호법 이화명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는지 이해하기 어려우시겠지요. 그렇다면 거두절미하고 여쭤보겠습니다. 천마조사님의 심득을 얻으셨습니까?" 의미심장한 이화명의 물음에 천여운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의 입에서 천마 조사의 심득이 거론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그였다. '.....알고 있었구나.' 무공 교두 호진창과 사파의 죄수를 상대할 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천마검공의 초식을 펼쳤던 천여운이었다. 그 당시에는 그들을 꺾을 수 있는 무공이 천마검공뿐이라고 확신했고, 천마조사의 마지막 심득이었기에 검법을 알아보는 이가 없으리라고 판단했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일단 잡아뗐다. 그것이 맞다고 하기에는 좌호법 이화명이라는 사람을 신뢰 할 수 없는 천여운이었다. 그는 엄밀히 말한다면 교주의 측근이었다. 심지어 수하들에게조차 알리지 않았던 진실을 아군인지 적인지 확신할 수 없는 이화명에게 무작정 밝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아, 그렇군요. 공자님께서 저를 믿기 힘든 것이 사실이지요." 천여운의 표정에서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을 눈치 챈 이화명이 잠시 고민을 하다가 고개를 숙이며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천마신교의 좌호법 이화명은 소교주 쟁탈전에 있어서 천여운 공자님을 지지할 것을 맹세하겠습니다. 그 증표로 호법가의 패(佩)를 맡기겠습니다." "!?" 이화명이 품속에서 붉은색 옥패를 꺼내 천여운에게 공손히 내밀었다. 호법(護法)이라 음각이 새겨진 옥패는 호법가의 가주를 상징하면서 그 신분을 증명하는 패가 틀림없었다. '좌호법이 나를.....지지한다고?' 공손히 모은 두 손에 올려진 붉은 옥패에 천여운은 당혹스러웠다. 일반 종파나 무가도 아닌 교주의 측근이자 마도관주인 좌호법 이화명이 지지한다는 말은 절대 단순하게 받아들일 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 사실을 교인들이 알게 된다면 굉장한 파장을 일으킬 만 한 대사건이었다. "받아주십시오." 옥패를 앞으로 내밀며 권하는 이화명을 바라보며, 잠시 망설이던 천여운이 결국 진정한 속내를 밝혔다. "죄송하지만 교주님의 측근인 좌호법을 제가 어찌 믿어야 할지 모르겠군요." 다른 종파들이야 이익에 따라서 소교주 후보자들 중에 누구를 지지하더라도 선택이 자유로웠다. 하지만 호법가는 오직 교주만을 모시는 그 측근들이었다. 그들은 소교주 쟁탈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고 오직 정해진 교주와 소교주를 보필해야하는 입장인 자들이었다. 그런 좌호법 이화명이 호법으로서 파격적인 제안을 하며 자신을 지지하겠다고 하니, 무슨 꿍꿍이를 가졌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천여운의 그런 의심에 오히려 좌호법 이화명은 내심 마도관주로서는 칭찬해주고 싶었다. '많이 신중해졌구나. 이제는 정말 자질이 충만해졌다.' 만약 그라고 했더라도 옥패를 넙죽 받지 않고 한 번 더 의심해보았을 것이다. 천여운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했기에 이화명은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공자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저는 좌호법으로서 교주님을 모시고 있지요. 엄밀히 말씀드린다면 규정상 누구를 지지할 처지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제쳐두고 우선시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저희 호법가는 그분의 진전을 이으신 진정한 후계를 차기 교주로 인정합니다." "그분이라면...." "본교를 세우신 천마 조사님이십니다." 이화명의 진지한 눈빛을 보면 거짓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잠시 호흡을 고른 이화명이 말을 이어갔다. "지금부터 제가 드리는 말씀은 오직 공자님만 알고 계십시오." 유구한 세월을 자랑하는 마교의 역사 속에서 교주를 보필해 왔던 호법가(護法家). 대호법, 좌호법, 우호법으로 나뉘는 세 호법가는 개파 조사이자 일대 교주인 천마를 시작으로 현재의 교주인 천유종까지 모셔왔다. 이들과 달리 현재 마교의 근간이라 불리는 여섯 종파의 체계는 마교가 시작될 때부터 생겨났던 것은 아니었다. 오백 년 전 희대의 검수라 불리던 검마의 등장 이후, 그의 진전을 이은 두 제자가 세운 현마종과 검마종을 시작으로 생겨났지만 호법가는 마교가 시작되는 시점부터 존재해왔다. "아! 우호법가는 아니군요. 오백 년 밖에 안 되었습니다. 비교적 짧은 역사를 지녔지요." '스승님의 호법가가 처음부터 있던 것이 아니었구나.' 원래는 예전부터 세 호법가가 이어져 왔다고 했지만 오백 년 전에 우호법이 죽으면서 새로운 우호법이 천거되었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아는 자는 본교에서도 극히 드뭅니다." 두 호법들은 교주의 곁에서 보필하는 만큼 어떠한 종파들보다도 마교에 관련된 많은 정보들을 알고 있었다. "오백여 년 전에 소실되었기에 저희 호법가에서도 묻고 있던 비밀이 있습니다." "......" "지금 교주님들께서 대대로 진전을 이어받는 천마검법은 진정한 천마 조사님의 검법이 아닙니다." "!!!"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천여운의 눈빛이 흔들렸다. 지금 좌호법 이화명이 하고 있는 이야기가 알려진다면 본교 전체가 발칵 뒤집어질 수 있는 엄청난 정보였다. "진정한 검법이 아니라는 말은....." "교주 직계로 전수받게 되는 진정한 천마 조사님의 검법은 소실되었습니다. 중간에 끊겼다고 말씀드리는 게 옳겠군요." 지금으로부터 오백여 년 전. 원래의 마교는 여섯 종파의 외척을 두어서 많은 후손을 배출하는 체제가 아니었다. 교주는 마교의 대전 제단에 있는 성화(聖火)에서 간택된 여인을 아내로 받아들였고, 그 여인을 신녀(神女)라고 하였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성화의 선택에 의해서 신녀가 정해지고, 신녀가 낳은 자식이 소교주가 되었기에 특정 종파에 권력이 집중되는 일은 없었다. "그 날이 있기 전까지는 이 체계에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원래 마교의 기원은 신강에 있는 배화교(拜火敎)에서 파생 되었기에 교주로 부임하고 나서 십 년 내에 신강의 천산으로 순례를 떠난다. 오백여 년 전 당대 교주였던 천무휘 역시도 교주로 부임하고 오 년 뒤에 천산 순례를 갔다. "그 순례에서.....본교에 있어서 최악의 사건이 터졌습니다." 천산 순례를 떠났던 교주 일행이 시신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었다. 그때 교주를 보필했던 당대 우호법도 처참한 시신으로 돌아 왔는데, 후손이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우호법이 천거되었다. 당대 중원 무림의 오대고수 중 한 사람인 교주 천무휘의 죽음은 마교나 무림에 있어서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중원 오대 고수라 불리는 교주를 누가 해한단 말입니까?" ".....극도신(極刀神). 들어보셨습니까?" "극도신!" 극도신이라는 말에 천여운의 두 눈이 커졌다. 현 무림의 고수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지만 마교의 사람으로 그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본교가 낳은 희대의 검수라 불리는 검마가 유일하게 이기지 못한 도객이었다. 무승부를 이뤘지만 그 대결로 인해 오른팔을 잃고 은퇴를 했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검마께서 교주님의 복수를 위해서 극도신과 겨룬 것입니까?" "맞습니다. 다만 당장에 벌어진 대결은 아니지요. 당대 교주 님께서 돌아가시면서 본교에 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후계 문제였다. 당대 교주인 천무휘는 부임 후에 신녀를 통해 한 명의 자식을 보았는데 여아였다. 여아가 여덟 살이 되던 해까지도 후계를 보지 못했던 교주 천무휘는 십 년의 기한을 넘기지 않기 위해 천산 순례를 떠났는데 그 사건이 벌어진 것이었다. "교주께서 돌아가시면서 혈손의 문제부터 시작해서 교주 직전 무공인 천마검법까지 전부 끊겨버리게 된 겁니다." 구전으로 전수되는 천마검법은 비급서가 존재하지 않았다. 태상 교주라도 있었다면 그나마 나았을 테지만, 공교롭게도 그 역시도 병으로 단명했다. 마교에 있어서 최악의 사태에 직면하게 된 셈이었다. "그때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장로 회의에서 일 장로이셨던 검마 공을 부교주로 추대하셨습니다." 아직까지 여덟 살 여아에 불과했던 천무휘의 딸을 교주로 옹립할 수 없었기에 차선의 방법을 택해야만 했다. 다행인 것은 부교주로 추대된 검마는 무공 이외에도 여러 가지로 다재다능했다. 빠르게 혼란스러운 마교를 수습하고 안정화시켰다. 교주 이외에도 십만교인들에게 존경을 받는 검마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교를 안정화시킨 검마가 가장 시급하게 여긴 사항은 잃어 버린 교주의 무공인 천마검법의 유실이었다. 당대 교주와 비무를 해본 적은 있지만 내공심법부터 운기 요결을 전혀 모르기에 이것을 복원할 방법이 없었다. "그때 처음으로 천가의 핏줄이 아닌 검마 공께서 천마 조사 님께서 심득을 남기셨다고 하는 구금동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아!' 구금동의 비밀을 알고 있는 천여운은 속으로 탄성을 흘렸다. 구금동은 천마 조사가 임종 전에 심득을 남겼다고 알려진 곳이었다. 원래는 오직 천가의 핏줄만이 들어갈 수 있었지만 어린 여아를 들여보내서 깨달음을 얻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천마검법을 복원할 수 없다면 천마 조사가 남긴 심득으로 더욱 뛰어난 천마 검법을 만들겠다는 신념하에 들어간 검마는 큰 벽에 가로막히고 만다. "지금까지 역대 교주님들께서도 구금동에 들어갔지만 누구 한 분도 천마 조사님의 심득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검마 공도 마찬가지였죠." "어째서이지요?" "청옥석 비석에 남겨진 검흔으로 천마 조사님의 심득이 담긴 검 초식을 구현할 수 있지만 운기 요결이나 내공심법이 없으면 그 초식들을 펼칠 수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아무도 그 비밀을 못 풀었구나.' 수많은 천가의 핏줄이 구금동으로 들어갔지만 모든 비밀을 풀지 못했던 것이다. 야광주에 있는 천마검공의 심법과 시조에 있는 운기요결이 없다면 절대로 펼치지도,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할 수 없는 게 천마검공이었다. "검마 공께서 구금동에서 나오신 것은 삼 년이 지나서였습니다." 삼 년이 지나서 검마는 천마검공을 바탕으로 그의 깨달음을 더해서 새로운 천마검법을 창안해냈다. 유실된 천마검법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절세검법에 당시의 장로들 모두가 인정하여 이것을 교주의 여식에게 전수하기로 하였다. '아아.....지금의 천마검법은 검마 공이 만든 것이었구나.' 몰랐던 진실을 알게 되었다. 청옥석 비석에 검마의 검흔이 남겨져 있던 것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천마 조사의 심득을 살리겠다고 했던 검마가 어째서 청옥석 비석을 파훼초식의 검흔들로 훼손시킨 점이었다. "검마 공께서는 구금동에 있던 조사님의 심득이 있던 비석을 마도관의 비급 서재에 옮겨놓았습니다. 공자님께서도 비급 서재의 각 층에 있던 청옥석 비석을 보셨지요?" ".....그렇습니다." 이것마저 못 봤다고 잡아떼기에는 너무 한 가운데에 있었다. "뒷면이 난잡하게 검흔들로 뒤덮여 있는 것은 검마 공께서 남기신 것입니다." "검마 공께서는 어째서 비석을 그렇게 훼손시킨 것이죠?" 물론 그것이 천마검공을 꺾기 위해서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천가의 혈손도 아닌 그가 천마 조사의 심득이라 할 수 있는 보물을 훼손시켜가면서 검흔을 남길 이유는 없었다. "천마 조사님께서 남기신 검흔들은 검마 공이 이미 탁본을 뜨고, 직접 검 초식을 정리해서 비급서로 남겨두었습니다." "아!" 무작정 훼손시킨 것은 아니었다. 익힐 수 없는 검법이라고 해도 개파 조사가 남긴 유산을 함부로 없앨 수가 없기에 검마는 그것을 정리해서 본교의 교주전으로 옮겨놓았다. 다만 운기요결이나 심법이 없어서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하지만 청옥석 비석에 남겨진 훼손은.....어찌 본다면 불가피한 것이었습니다." < 33장 숨겨진 지하 보고 (2) > 끝 < 33장 숨겨진 지하 보고 (3) > 마교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교주가 피살되었다. 그것은 중원 무림의 삼대 세력이라 할 수 있는 마교에 있어서 절대로 좌시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었다. 마교에서는 공식적으로 그를 적으로 규명하고 추적에 들어갔다. 적은 이때까지 한 번도 무림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였다.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교인이 말하기를 스스로를 극도신이라고 칭했다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정보도 없었습니다." 갑작스럽게 나타나 교주인 천무휘와 우호법, 그리고 호위대를 몰살시킨 극도신은 홀연히 사라졌다. 신강에 수많은 교인들을 파견해서 추적했지만 어떠한 흔적도 찾지 못했다. "그자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이 년 뒤인 하남의 숭산이었습니다." 숭산(嵩山). 그곳은 정도 무림의 성지라 할 수 있었다. 무공의 발상지라 할 수 있는 소림사(少林寺)가 있는 곳으로 사파나 마교에서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곳이었다. "놀랍게도 그곳에서 오대 고수 중 한 명인 소림신승이신 공운 대사께서 피살되었습니다." 정사마를 떠나서 무림에서 존경받는 소림신승의 죽음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무림맹에서는 갑작스럽게 등장한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흉수를 잡기 위해 구파일방과 중소 문파들이 연합하여 천라지망(天羅地網)을 펼쳤다. 천라지망은 수많은 고수들이 지정된 적을 잡기 위해 펼치는 포위망이다. 자그마치 이천 명에 이르는 고수들이 하남을 포진했지만 극도신을 잡지 못하고 오히려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말았다. "정말 대단한 자로군요." "그렇게 유유히 천라지망을 빠져나간 극도신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정확하게 이 년 뒤인 강소성이었습니다" 마치 의도한 것처럼 이 년 뒤에 강소성에서 모습을 드러낸 극도신의 다음 목표는 바로 오대고수 중의 한 사람인 사파의 거성인 철사권왕 육종경이었다. 한 번 천라지망에 당해서 그래서인지, 육종겸의 시신은 피살되고 나서 근 열흘이 지나서야 발견되었다. "또 오대 고수라면 설마?" "그렇습니다. 극도신이 노린 자들은 오대 고수였습니다." 중원 최고의 고수라 불리는 오대 고수 중에 세 사람이 극도신이라는 자에게 피살되자 그의 명성은 하늘을 찌를 것처럼 올라갔다. 그가 어떠한 세력에 속해 있는 자가 아니라, 순수한 무의 결정체로서 당대 무림의 절대자들에 대한 도전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세간의 여론이 바뀌었다. 이미 무림인들은 그를 천하제일의 고수로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마지막 남은 오대 고수는 무당파(武當派) 제일의 검객인 무당검선 청명 진인과 마교의 부교주인 검마뿐이었다. "검마 공께서는 그 자가 반드시 자신의 앞으로 나타날 거라 확신하셨습니다." 검마는 교주인 천무휘가 피살되어 왔을 때, 교주를 비롯한 시신들에 남겨진 극도신의 도흔을 살펴 보았었다. 불세출의 검수인 검마였지만 도흔에 남겨진 초식은 상상을 초월하는 역량을 지녔고, 그는 현재 자신의 검법으로는 도저히 그를 꺾을 자신이 없다고 공언했다. 검마는 극도신의 도법을 꺾기 위해서는 그에 버금가거나 그 이상의 검초를 상대해야 한다고 여겼고, 그것이 바로 청옥석 비석에 남겨진 천마검공의 검흔이었다. "부교주인 검마 공마저 잃을 수 없다고 판단한 장로 회의에서 조사님의 검흔이 새겨진 비석을 상대로 검초를 연마하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아! 그래서 파훼검초가 남아 있던 거였구나.' 청옥석 비석의 뒤에 남겨진 수많은 검흔들은 검마가 극도신을 상대하기 위해 스스로의 검을 단련시키기 위한 흔적들이었다. 다만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검초들이 전부 평범한 검식들로만 이루어졌다는 점인데, 그것은 이화명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는 알 수가 없었다. "검마 공의 예측은 정확했습니다." 정확하게 사 년 뒤, 극도신이 십만대산의 마교에 나타났다. "……무당검선을 먼저 꺾었군요." "그렇습니다. 검마 공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이미 당대 천하제일이라는 호칭까지 얻어낸 극도신은 대담하게도 마교의 성 앞에서 진을 치고 검마에게 도전을 했다. 그리고 결과는 알려진 것처럼 무승부였다. "무승부를 이뤘지만 검마 공께서는 큰 희생을 치러야 했습니다. 무인에게는 보물이라 할 수 있는 오른팔을 잃었으니까요." "극도신이라는 자는 어떻게 되었죠?" "검마 공과 사흘 밤낮으로 싸우고 나서 결판이 난 후에 더 이상 무림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좌호법 이화명의 말대로 검마와의 승부를 끝으로 극도신은 무림에서 자취를 감췄다. 세간에는 진기를 소진해서 죽었을 거라는 것부터, 이미 자신이 목표로 했던 바를 전부 이뤄서 사라졌다는 말까지 온갖 소문이 돌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극도신은 무림사에서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도(刀)로써 천하제일인이라는 칭호를 얻은 고수로 남게 되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본교는 달라졌습니다." 극도신과의 대결로 오른팔을 잃고 진기를 소진한 검마는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며 부교주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부교주에서 물러나면서 그 해로 열여섯이 된 죽은 교주의 여식 천무화가 교주에 취임하게 된다. 처음으로 여자 교주를 맞이하게 된 마교의 수뇌부들은 성화를 통해서 한 명의 신녀를 간택하는 방식이 천가의 혈손이 끊어 질 수 있다는 것을 빌미로 제도를 바꾸기를 수없이 간언했다. 비록 교주 직에 올랐으나 힘이 없던 천무화는 장로들의 성화를 이겨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근 삼백 년을 이어오던 성화의 간택은 폐지되고, 그 때부터 현재까지 이어져온 종파제가 시작된 것이었다. 교주 천무화는 평생 다섯 명의 남편을 맞이했는데, 그 중 두 명이 검마의 진전을 이은 제자들로 현마종과 검마종의 뿌리가 되었다. 나머지 세 명은 일 장로에서 삼 장로의 자제들이었는데, 그들이 현재의 기득권 층인 도마종과 독마종, 음마종이었다. "검마 공께서는 부교주에 물러나신 후에 후진 양성을 위해 마도관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검마가 마도관을 세운 위치는 뜻밖에도 천마의 심득과 마(魔)를 봉했다고 알려진 구금동과 봉마동이 있는 부지였다. 검마는 왜 하필 이곳에 마도관을 설립하게 된 것일까? 모든 이야기를 마친 좌호법 이화명이 천여운을 바라보며 물었다. "제가 왜 이 이야기를 말씀 드리는지 아시겠습니까?" 잠시 고민하던 천여운이 입을 열었다. ".......혹시 검마 공께서 마도관을 세우신 진짜 목적이 단순히 후진양성이 아니라고 말씀하려고 그러는 게 아닙니까?" 정답이었는지 이화명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맞습니다. 정확하게는 두 가지 목적이 있는데, 하나는 바로 진정한 천마 조사님의 진전을 이을 후계자를 위해서입니다." "후계자를 위해서인데 어째서 이곳에 마도관을 세우신 겁니까?"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천여운의 말에 이화명이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검마 공께서 진기를 소진하시고 부교주에 물러나신 후에 장로들이 기득권을 차지하게 되었지요." 부득이하게 부교주의 자리에 올랐었던 검마였지만 그는 마교의 충성스러운 교도였다. 그는 자신의 깨달음이 부족하여 천마 조사의 심득을 이해하지 못하여 천마검공을 구현하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천가의 후손들 중에 그 진정한 비밀과 심득을 깨닫게 되는 자가 나타날 거라 믿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구금동과 봉마동을 사수해야 한다고 생각한 검마는 이곳에 마도관을 세워 혹여 기득권을 잡은 종파들이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도록 보호하게 만들었다. "검마 공께서는 임종 전에 당대의 호법들에게 유언을 남겼습니다."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호법들이 교대로 마도관의 관주를 맡아서 진정한 천마 조사의 진전을 잇는 자가 나타났을 때, 그를 교주로 옹립해달라고 말이다. 그렇게 오백 년이라는 세월 동안 검마의 유언은 이뤄지지 않았고 그저 호법가의 구전으로만 내려오는 유지가 되어버렸다. "그 동안 교주님을 보필하면서 전장터에서 수없이 천마검법을 보았습니다. 그런 제가 공자님께서 펼친 검법을 몰라볼 것 같습니까?" "......" 천여운이 선임 무공 교두인 호진창에게 펼치는 천마검공의 검초를 처음 보았을 때, 좌호법 이화명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기존의 천마검법보다도 훨씬 정교하면서도 고절한 검초. 이화명은 그것이 검마가 유언으로 남겼던 천마 조사의 마지막 심득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작정 이 사실을 천여운에게 밝히기에는 그 역시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 단 한 초식만으로 판단할 수도 없었고, 혹시나 그것이 현 교주인 천유종이 전수해준 천마검법일지도 모른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더 지켜보자.' 그렇게 사파의 죄수에게 두 번째로 천마검공의 검초를 펼치는 광경을 본 후에 이화명은 확신할 수 있었다. 천여운이 그토록 호법가에서 기다려왔던 진정한 천마 조사의 심득을 이은 후계자라는 것을 말이다. 봉마동을 통과하고 육 단계 시험을 마치기까지 오랜 기다림이었다. 이화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물었다. "공자님께 한 번만 더 여쭙겠습니다. 천마 조사님의 심득을 이으셨습니까?" '아아....어쩔 수가 없구나.' 마도관의 진실을 알게 된 천여운은 그 물음에 더 이상 회피 할 수가 없었다. 진실을 갈구하는 이화명의 눈을 바라보며 긍정의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보는 순간 이화명은 감격스러웠는지 평소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게 눈시울마저 붉어져서는 오체투지를 하여 외쳤다. -팍! "아아아아! 좌호법 이화명이 진정한 천마 조사님의 후계자를 배알합니다." 오백 년간 호법가에서 기다려왔던 존재가 드디어 나타났다.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오체투지한 상태로 한참동안이나 감격에 겨워하는 이화명을 바라보며 난처해하던 천여운이 문득 궁금해졌다. "좌호법. 하나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일단 일어나서 대답해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오체투지를 하고 있던 좌호법 이화명이 몸을 일으켜 한쪽 무릎만 바닥에 꿇었다. 마지 상전을 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오직 교주에게만 무릎을 꿇는 좌호법이 이런 깍듯한 태도를 보이니, 기분이 묘해지는 천여운이었다. "아까 전에 이곳에 마도관을 세운 이유가 두 가지라고 하셨는데, 나머지 하나는 대체 무엇입니까?" "그건......직접 보여드리는 편이 좋겠군요." 외부와의 소리를 차단하기 위해 관주 집무실을 두르고 있던 진기를 회수한 이화명이 천여운을 밖으로 안내했다. 이화명을 따라서 간 곳은 다름 아닌 북쪽에 있는 마도관의 비급 서재 건물이었다. "앗!" 비급 서재 건물 앞에 있던 방명록 담당 교두가 관주인 이화명의 등장 화들짝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나서 인사를 올렸다. "관주님을 뵙습니다." "성 교두, 오랜만이네." "넵. 그런데 관주님께서 이곳에 어찌?" 평소에 코빼기도 얼굴을 보이지 않던 이화명이 천여운을 대동해서 나타나니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지하 보고로 들어가려 하네." "네? 지하 보고라고 하시면 서, 설마......육 단계 시험을?" 이화명이 고개를 끄덕이자 방명록 담당 교두가 두 눈이 커져서 천여운을 바라보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주변에 있던 비급 서재를 지키는 경비 무사들 또한 놀랐는지 시선이 모아졌다. -웅성웅성! 이것은 당연한 반응이었다. 마도관의 비급 서재에 숨겨진 지하 보고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육 단계 시험을 통과해야만 그 자격을 얻을 수 있다. 그들이 알기로는 칠십 년 동안 육 단계 시험을 통과한 자가 없었다. 덕분에 이곳에 근무하면서 한 번도 지하 보고의 문을 개방 한 적이 없던 방명록 담당 교두였다. "추, 죽하드립니다! 천 단...아니 천 장로님." 육 단계 시험을 통과했다면 분명 열두 장로 중 한 사람을 꺾었다는 말이었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단주였는데, 정말 빠른 직위 상승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제 입구의 문을 열어줄 수 있나?" "아, 알겠습니다!" 재촉하는 이화명의 말에 담당 교두가 앞장서서 그들을 안내했다. 마도관의 비급 서재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일 층 비급 서재의 입구에서 회전하듯이 우즉 편으로 꺾어 들어가자, 지하로 들어가는 숨겨진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곳이 있었구나?' 육 단계 시험을 치르기 전에 마도관의 비급 서재 건물에 지하층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정말로 있었다. 계단을 따라서 밑으로 내려가자 그곳에 두꺼운 철문이 하나 있었고, 그 앞에는 초절정의 무위로 보이는 중년의 무인 세 명이 엄중히 경계를 서고 있었다. "관주님을 뵙습니다!" < 33장 숨겨진 지하 보고 (3) > 끝 < 33장 숨겨진 지하 보고 (4) > "지하 보고의 문을 개방하게." -흠칫! 좌호법 이화명의 명에 철문 앞에서 경계를 서는 세 명의 중년인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천여운을 바라보았다. 이곳의 경계 근무의 임기가 끝나더라도 지하 보고의 철문을 개방할 일은 없을 거라 여겼던 그들이었다. ᅳ'이 청년이 본교의 장로님을 꺾었다고?' 새하얀 얼굴에 북풍의 찬바람처럼 냉정한 분위기를 지녔다. 환골탈태를 하면서 깨끗해진 피부에 가라앉은 태양혈만 보았을 때는 무공을 익히지 않은 귀공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완숙한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그들이 알아차리기 힘들다는 것은 분명 화경의 경지에 오른 것이 틀림없었다. '이 문을 열게 될 줄이야. 허허허.' -찰그랑! 세 고수 중에서 책임자를 맡고 있는 중년인이 품속에서 열쇠를 꺼내들었다. 천여운이 두꺼운 철문을 바라보니 열쇠 구멍이 총 세 개였다. 그 중 하나는 방명록 담당 교두가 가지고 있었고, 나머지 하나는 좌호법 이화명이 가지고 있었다. '열쇠가 하나라도 없으면 열지 못하게 해두었구나.' 오 층 이상으로 경계가 삼엄한 지하 보고였다. "제가 세겠습니다. 하나, 둘, 셋!" -찰칵! 세 사람이 열쇠 구멍에 열쇠를 집어놓고는 중년인의 구호에 맞춰서 동시에 돌렸다. 그 순간 벽의 양 옆쪽에서 진동이 느껴지며 닫혀있던 철문이 반으로 갈라지며 입구가 열리기 시작했다. -끼이이이이이익! 오랫동안 방치되었었는지 낡고 두꺼운 철문이 삐꺽 거리며 힘겹게 열렸다. 입구가 완전히 열리며 서늘한 공기가 흘러나왔다. 겨울이라 춥기는 했지만 마도관의 서재 건물 내부의 공기는 비교적 따뜻했었는데 이곳은 달랐다. 입을 벌리면 입김이 나올 정도였다. '이게 무슨 냄새지? 가죽?' 묘한 냄새였다. 썩은 내라고 하기에는 뭔가 약품 냄새가 섞여 있었다. 여러 가지가 섞여서 코끝을 자극했다. 그래도 봉마동에 있던 검은 물에 비한다면 전혀 악취에 속하지도 않았다. -화르르륵! 중년의 고수가 벽면에 있던 횃불에 불을 불이자 어둡던 내부가 밝혀졌다. "아!" 천여운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횃불로 밝혀진 지하 보고의 내부의 벽면이 은은한 푸른빛을 머금고 있었다. "한옥석입니다." 방명록 담당 교두가 천여운에게 속삭이듯이 말해주었다. 한옥석(寒玉石). 그것은 차가운 냉기를 가진 옥석이었다. 벽면 전체가 한옥석으로 되어 있어서 내부의 공기가 서늘한 것이었다. "따라오시죠." 좌호법 이화명이 벽면에 여분으로 꽂혀 있던 횃불을 하나 챙겨서 그를 통로의 안쪽으로 안내했다. 통로에 들어가자 넓은 오각 형태의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통로의 맞은편 정면에는 한옥석으로 만든 큰 탁자가 있었는데, 그 위에는 놀랍게도 잘려있는 사람의 팔과 인피(人皮)로 추측되는 가죽들이 올려있었다. "여긴 대체?" 그가 생각했던 지하 보고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이게 그 두 번째 답입니다." 이화명이 한옥석 탁자 위를 손바닥으로 가리키며 다가가서 보라고 권했다. 여러 소교주 후보자들의 오른팔을 잘랐던 천여운이었기에 크게 거부감은 없었지만, 이것을 굳이 보관까지 하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한옥석 탁자 쪽으로 다가가자 철문 입구 쪽에서 났던 약품 냄새가 확 올라왔다. '방부 처리를 한 건가?' 인피나 잘려 있는 팔이 썩지 않도록 약품 처리를 한 게 틀림 없었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천여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건?" 멀리서 보았을 때는 약품 처리를 했지만 핏기가 없고 앙상하게 말라져 있어서 몰랐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오른팔이 수많은 상처들로 가득했다. 마찬가지로 다섯 장의 인피들에도 날카로운 상처들이 있었다. 그것은 도초에 의해 생겨난 흔적들이었다. "도......흔?" 도흔은 그냥 단순하지 않았다. 상처로 남겨진 도흔에서는 날카로운 예기가 느껴졌다. 화경의 극에 오른 천여운의 심상 능력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승했다. 도흔을 바라본 뒤에 두 눈을 감자, 검은 인영이 나타나 독특한 도법을 펼치는데 전율적일 만큼 고절한 도초였다. 베기와 찌르기가 조합된 검에 비해서 오직 베기에 의한 초식이었는데도 이렇게 절묘한 도초는 처음이었다. '이럴 수가....이런 도초가 존재했다니.' 상상으로 접무도법의 도초를 펼쳐보았지만 두 식 이상을 막기 힘들었다. 이것을 상대하려면 적어도 검마의 파훼검법이나 천마검공의 검초가 아니고는 원활하게 대응하는 것이 불가능해보였다. '도법에 격이 다르다고 말하는 것 같다.' 천여운이 감고 있던 두 눈을 떴다. 더 집중했다가는 심상에 빠져들 것 같았다. 어느새 그의 옆으로 다가와 있는 좌호법 이화명이 말했다.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혹시 이 팔의 주인이 검마 공입니까?" 잘려진 팔은 손으로 무언가를 쥐고 형태를 하고 있었는데, 손가락의 파지법을 본다면 분명 검(劍)을 쥐었던 게 틀림없었다. 천여운의 말에 이화명이 감탄했다는 듯이 환해진 얼굴로 말했다. "안목이 뛰어나십니다. 맞습니다. 검마 공의 오른팔입니다." "그럼 이 인피들은?" "오백 년 전에 피습 당했던 교주님의 호위 무사들과 우호법의 인피입니다." "......극도신의 도흔이군요?" 한옥석 탁자 위에 보존되어 있는 팔과 인피는 천하제일 도객 극도신(極刀神)에게 당한 도흔을 남겨놓은 것이었다. 설마 이것을 마도관의 비급 서재 지하충에 보존해놓고 있을 줄은 몰랐다. 어찌 본다면 이것은 극도신의 도초라고 할 수 있었다. 천여운이 뒤를 돌아 주위를 둘러보니 오각의 한 쪽 벽면에 책장이 있었는데, 단 세 권의 비급서로 보이는 서책이 놓여 있었다. 비급서는, [진신마검(進新魔劍)] [이십 사마검(二十四魔劍)] [극도신도초분석(極刀神刀招分析)] 진신마검은 바로 희대의 검수라 할 수 있는 검마의 비급이었다. 자신의 진전을 이은 두 제자를 두었으나, 그 본신절기를 전수하지 않았다고 알려졌는데 이곳 지하 보고에 비급서가 있었다. 다른 두 비급서는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검마가 남긴 것이 분명했다. '아!' 천여운은 이 지하 보고가 어째서 존재하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진정한 천마 조사님의 진전을 이은 후계자만이 아니라 검마 공의 심득을 이어받을 제자를 찾기 위해서이군요." 그 말에 좌호법 이화명이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맞습니다. 정확히 말씀드린다면 극도신의 도법을 파훼할 수 있는 후인을 양성하기 위한 것입니다." 검마는 평생 진정한 제자를 두지 않았다고 했다. 그가 가르쳤던 두 전인들은 높은 검의 경지를 바라보기보다는 권력과 야망이 강했다. 본래 그들에게 무공을 가르쳤던 이유는 피살된 교주의 여식인 천무화를 보호해줄 수호인을 양성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들은 자신들의 본연의 임무를 망각하고 헛된 야망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실망한 검마는 그들을 정식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까 전에 공자님께 말씀드릴 때 검마 공께서 극도신과 겨뤄서 무승부를 이뤘다고 했지요?" 극도신과 싸워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가 바로 검마였다. 비록 오른팔을 잃기는 했지만 검마로 인해 무패의 신화를 달성해가던 극도신이 무림에서 자취를 감췄다. "검마 공께서 임종 전에 남기신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극도신이 싸우는 도중에 갑자기 어딘가로 사라졌다고 했습니다. 검마 공께서는 승부를 가리지 못했기에 무승부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검마와 대결을 펼치던 도중에 절묘한 도로로 그의 팔을 잘라낸 극도신은 갑자기 대결을 중단하고 사라졌다.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갔기에 검마 공께서는 나흘 동안 그 자리에서 기다렸지만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무승부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사흘 밤낮으로 격렬한 전투를 벌였던 검마는 팔이 잘린 데다 너무 많은 진기를 소진하여 무공이 전 같지 않게 되면서 다시 극도신이 나타날 것을 우려했다. 다행스럽게도 십오 년이 지나 검마가 임종할 때까지도 극도신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검마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극도신이나 그 후예가 다시 나타날 지도 모른다며 마교의 미래를 걱정하며 숨을 거뒀다. "그로부터 오백여 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솔직히 극도신의 후예가 다시 나타날 거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 자의 도흔을 파훼하여 검마 공의 못다 한 숙원을 풀어주십시오." '아아아.....' 포권을 취하는 좌호법 이화명을 바라보며 천여운이 뜨거워진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죽으면서도 마교의 후인들과 그 미래를 걱정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남기고 간 검마는 진정으로 충신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좌호법 이화명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지하 보고를 나갔다. '지하 보고의 열쇠를 드리겠습니다. 안에서는 철문이 닫혀도 나갈 수 있는 장치가 되어 있지만 다시 들어올 때는 열쇠가 있어야 합니다.' 열람에 시간제한이 있었던 오 층까지의 비급 서재와 달리 지하 보고는 언제든지 들어와도 좋다고 하였다. 하지만 천여운은 이곳에 다시 돌아오거나 오랜 시간을 소요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이화명이 나가고 나서 천여운은 곧장 그가 남긴 세 권의 비급서적을 스캔했다. '제대로 된 검마 공의 비급서. 운이 좋구나.' 진신마검은 검마의 진수가 담겨 있는 검법이었는데, 그것은 평범한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운기요결을 필요로 하는 절묘한 검식들로 이루어진 검초가 수록되어 있었다. '흠. 여섯 종파의 무공보다는 뛰어나지만....' 천마검공이나 파훼검법에 비하면 수준이 낮았다. 수하들 중에 검을 다루는 이에게 전수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이십사마검은 놀랍게도 천마검공의 세 초식을 파훼했던 스물네 개의 검식을 바탕으로 만든 새로운 검법이었다. '아! 대단하다.' 파훼검법은 철저하게 천마검공을 상대하기 위한 검초였지만 이것은 그 깨달음을 바탕으로 제대로 만든 검법이어서 그런지 파훼검법에 버금가는 검법이었다. 엄밀히 말한다면 이 검법이야말로 검마가 극도신을 상대하기 위해 창안한 절세검법이었다. '극도신도초 분석.' 이것을 가법게 훑어보았는데 도흔을 분석한 기록이었다. 임종 직전까지도 검마는 극도신을 도흔을 분석해서 그 약점을 파악하려고 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생각보다도 그 내용은 크게 진척을 이루진 못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천여운이 고조된 얼굴로 극도신의 도흔이 남겨진 검마의 팔과 인피들이 놓여진 한옥석 탁자에 다가갔다. '검마 공에게 안타까운 이야기이지만 끝까지 계속 겨뤘다면 분명 패했을 것이다.' 교인들이 존경하는 검마였다. 이화명 역시도 그의 유지를 받든다고 이야기를 했기에 실망 시킬 필요는 없었다. 심상을 통해서 느꼈던 극도신의 도초는 전율 그 자체였다. '천마검공에 버금가는 수준이다.' 극도신의 도초는 놀랍게도 천마검공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절세도법이었다. 심상을 통해서 느꼈던 잘려있는 팔에 남겨져 있는 도흔의 도초는 천마검공의 제 사 초식에 버금가는 위력을 지녔다. '확인해보자. 나노, 증강현실 개안.' [사용자의 시각 정보에 증강현실(增强現賁) 개안(開眼) 가동합니다.] 천여운의 동공이 빠르게 흔들리며 횐 빛의 입자가 선을 그리며 증강현실이 개안되었다. '나노. 팔에 새겨진 도흔을 추출해서 입체영상으로 구현할 수 있지?' [네. 가능합니다.] '도흔의 도초의 입체영상과 천마검공의 제 사 초식을 구현해서 대결시켜줘.' [알겠습니다. 도흔의 도 초식과 천마검공의 제 사 초식의 동작을 대치 모드로 입체영상을 가동하겠습니다.] -우우웅! 흰 빛의 입자들이 움직이며 두 사람의 형태를 갖췄다. 그렇게 도와 검을 든 두 사람의 형태가 천여운이 지시한 두 초식을 펼치며 서로 부딪쳤다. -채채채채채채챙! 고절한 천마검공의 검식과 패도적인 도식이 격렬하게 부딪치며 흰 빛의 입자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순식간에 검과 도의 대결의 결과가 났다. 불과 일 식의 차이로 천마검공의 제 사 초식이 극도신의 도 초를 파훼시켰지만 패도적인 기세에 세 보 가량 뒤로 밀려났다. 초식의 정교함은 천마검공의 위였으나 도초에서 파생된 위력은 극도신의 도초가 강했다. "이럴 수가!" 두 대결을 지켜보는 내내 천여운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나노의 증강현실의 구현으로 결론이 났다. 도객으로 천하제일인의 칭호를 얻어낸 극도신의 도법은 천마 조사가 남긴 천마검공과 맞먹는 절세무공이었다. 다만 검마의 팔에 남겨진 도흔이 마지막 초식이라면 천마검공보다 한 수 아래일 것이고, 만약에 비장의 초식이 존재한다면 천여운이 알고 있는 한 유일하게 천마검공에 대응할 수 있는 무공일 지도 몰랐다. '도초를 파훼해달라고? 아니야.' 검마는 이 도흔을 파훼하기 위해 남겼지만 천여운에게는 도흔에 남겨진 초식을 정확하게 구현해낼 수 있는 나노가 있었다. 천여운의 입 꼬리가 흡족스럽게 올라갔다. "천마검공과 맞먹는 도법이라....최고의 기연이구나!" < 33장 숨겨진 지하 보고 (4) > 끝 < 34장 이이제이(以夷制夷) (1) > 천여운이 마의 육 단계 시험을 통과한 지도 이레라는 시간이 흘렀다. 생도들이 마도관에 입관한 지도 삼 년하고도 일곱 달 째였다. 천여 명에 가까웠던 마도관의 생도들 중에 이제 남아있는 총원은 육십사 명뿐이었다. 역대 마도관의 기록들이 증명 했듯이 소교주 쟁탈전이 일어나는 기수 때는 다른 시기보다도 더욱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사 단계 시험 통과자 오십육 명. 오 단계 시험 통과자 칠 명. 육 단계 시험 통과자 일 명. 다섯 달을 남긴 시점에서 역대 근 백 년을 통틀어서 최고 성과라 할 수 있었다. 다만 소교주 쟁탈전에 있어서는 지금까지 진행되었던 양상과는 완전히 판이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여섯 종파의 소교주 후보자들의 각축전이라 불리는 소교주 쟁탈전에 변수가 생겼다. 그것은 바로 여섯 종파에 속하지 않은 태생인 천여운의 참전이었다. 예전과 같은 양상이었다면 오 단계 시험을 통과한 소교주 후보자들이 세력을 구축하고 경쟁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겠지만 다섯 명이 마도관의 기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조기에 방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가장 유력한 소교주로 꼽히던 도마종의 후보자 천유찬의 탈락. 새롭게 떠오르던 현마종의 대항마였던 천경운마저 팔이 잘리고 자진 퇴관하면서 생도들의 인원에 변동이 생겨났다. 검마종의 산하에 수하들이었던 십 명이 그를 따라 퇴관하면서 총 오십삼 명의 생도들이 남게 되었다. 마도관에서 천경운의 산하로 들어왔던 팔 명은 현마종의 천무연에게 충성 맹세를 하면서 원래는 십팔 명이었던 세력이 이 십육 명으로 가장 많은 인원으로 늘어났다. 남은 소교주 후보자들은 천여운과 천무연. 다섯 달을 남긴 시점에서 두 후보자들 간의 최종 소교주 쟁탈전이 시작된 셈이었다. 마도관의 서북쪽에 있는 공터로 꽤 많은 생도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연을 지지하는 산하의 생도들이었다. 모여 있는 얼굴들 중에는 정작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천무연은 보이지 않았다. 천무연이 없는 이들 중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자는 현마종의 생도인 무진윤과 오 단계 시험을 통과한 최상위 종파인 연현종의 극신이었다. 우두머리인 천무연이 없는 이곳에서 그들은 자신들에게 최고 장애물이라 할 수 있는 천여운을 처리할 방법을 논의하기 위해 모였다. "공자님께서 아무런 하달이 없었는데 이렇게 우리끼리 논의해도 괜찮습니까?" 한 생도의 물음에 현마종의 무진윤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공자님께서는 하달이 없던 게 아니다. 외적인 일들은 전부 내게 일임하시고 무공을 더욱 높이기 위해 집중하시는 것뿐이다." "으음....." "공자님이 전부 일임하셨다고?" 육 단계 시험을 통과한 천여운에게 자극받은 천무연은 연공실에 틀어박혀 무공을 연마하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어찌 본다면 그것이 가장 올바른 판단이기도 했다. 여섯 종파 중 하나이자 독마종의 종주의 목을 벤 천여운의 무위는 본교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마도관 밖에서의 세력 면으로 본다면 현마종이 우위였지만 소교주 후보자로서는 천여운에게 한참 밀리는 상황이었기에 그와 동등하게 경쟁을 하려면 적어도 화경의 경지에 올라서 육 단계 시험을 통과해야만 가능성이 있었다. "공자님께서 무공을 연마하는 동안 우리도 나름의 준비를 해야 한다고 본다. 이대로 천여운을 내버려 둔다면 놈을 어찌해 볼 기회를 놓칠 거다." 갈수록 강해져가는 천여운이었다. 남은 기간 내에 그를 처리하지 못한다면 소교주 쟁탈전에서 자신들의 주군인 천무연이 밀릴 지도 올랐다. "진윤. 네 말도 맞지만 여섯 종파인 독마종주께서도 어찌해 볼 수 없는 자를 우리가 뭘 어찌 한단 말이냐? 차라리 아직까지 누구도 지지하지 않는 남은 열 명을 영입하는 게 우선이지 않을까?" 극신의 말에 다른 생도들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마도관 내에서는 생도를 떠나서 누구도 천여운을 건드릴 수 없다. 이들 모두가 합공해야 겨우 작은 생채기나 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최고의 고수로 성장했다. "누가 천여운과 직접 부딪치자고 했나?" "응?" "지금 우리의 전력을 저들과 비교하면 어떻지?" 무진윤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교원종의 교명수였다. "전력 면에서는 저쪽에 완숙한 초절정의 경지인 문규, 고왕흘, 백기까지 세 명입니다. 나머지는 시험 통과 여부를 모르니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지만 지금까지 정보를 토대로 본다면 초 절정의 경지에 적어도 세네 명 정도는 올랐을 겁니다." 교명수의 전력 분석은 거의 정확했다. 호상화와 우소정, 자우민, 채택겸이 초절정의 무위에 올랐지만 아직까지 완숙한 경지에 들지 못해서 오 단계 시험을 치르지 못했다. "반면에 저희는 완숙한 초절정의 경지에 여기 두 분이 계시고, 초입부터 초절정의 경지에 이른 인원이 여섯 명, 나머지는 전부 절정의 극에 이르렀으니 전력에서는 비슷하거나 저희가 약간 우위라고 해도 되겠군요." 전부 상위 종파로 이루어진 천무연 산하의 수하들은 평균 전력이 뛰어났다. 현마종의 무진윤은 얼마 전에 완숙한 초절정의 경지에 올랐지만 아직까지 오 단계 시험을 치르지 않았을 뿐이었다. "저....초를 치기는 그렇지만 이런 전력 분석은 의미가 없습니다." 검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경운의 산하에 있었던 생도 기찬이 끼어들었다. 그는 천여운 혼자서 천경운을 포함한 열아홉 명의 절정의 극에 이른 생도들을 압도적인 무력으로 쓰러뜨리는 것을 경험했다. 나머지 전력들도 성가시지만 천여운을 어떻게 해볼 수 없다 이런 분석은 무의미했다. "흥! 한 번 당했다고 지레 겁이라도 먹은 거냐?" "큭, 당신도 그놈이 얼마나 괴물인지 육 단계 시험 때 보았잖습니까?" "그거야 누구도 이견을 낼 수 없는 사실이지. 그러니 우리는 전략적으로 놈을 상대해야 한다." 현마종의 무진윤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모두가 의아해했다. 불과 사흘 전에 회동했을 때만 하더라도 그 역시 마땅한 수를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그 사이에 뭔가를 강구한 모양이었다. "우선 극신 네 말대로 아직까지 남아있는 생도들을 영입하는 것도 중요하다. 못해도 사무종의 사마착과 비환귀종의 환야. 그 두 사람은 반드시 영입해야 한다." 최상위 종파인 사무종과 비환귀종은 모두가 탐내는 인재들이었다. 그들의 부친은 마교의 열두 장로인 구 장로 사마의와 십일 장로인 천면귀인 환의였다. 도마종의 천유찬이나 검마종의 천경운과 달리 타 생도에게 억지로 강요를 하지 않는 천무연이었기에 그들을 내버려뒀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그가 나서지 않기 때문에 수하들인 자신들이라도 적극적으로 설득해서 천무연의 산하로 받아들여야만 세력을 견고하게 다질 수 있었다. "그들만 얻더라도 확실하게 우위를 점할 수 있다." ".....사마착은 그렇다 치더라도 환야 그놈은 좀 그렇지 않나?" 극신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환야는 최상위 종파이면서도 다른 소교주 후보자들이 건드리지 않은 이유가 극명했다. 가까이 두기에는 흉측한 외모와 음산한 분위기가 그를 배척하게 만들었다. "지금은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다. 극신." "......알겠다." "근래에 들어서 천여운 놈이 새로운 무공을 익히는지 연공실에 박혀서 나오지 않는다고 들었다. 식사도 저녁 때 어쩌다 한 번씩 와서 한다고 하더군." "꽤 많이 알아냈군." "정보야 말로 가장 중요한 필승의 조건이지." "지금이 가장 절호의 기회다. 천여운의 손발을 자르고 놈을 처리한다." 천여운을 처리한다는 말에 극신을 비롯한 생도들이 어이가 없어했다. 그의 손발이라 할 수 있는 수하들이야 어떻게 해볼 수 있다고 쳐도 만약 그렇게 된다면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것과 차이가 없었다. "제 정신이냐? 놈의 수하들을 건드렸다가 팔이 잘려나간 후보자만 두 명이다. 백기를 건드렸던 독마종의 천종섬은 단전까지 파괴당했다." 천여운은 명성 이상으로 악명 역시도 최고조를 달리고 있었다. 그가 대적했던 상대 중에서 사지가 멀쩡한 이가 없었기에 공포와 두려움 그 자체였다. 최상위 종파에다 무공이 뛰어난 극신조차도 천여운만큼은 두려웠다. "네놈도 많이 겁쟁이로군." "뭐?" 극신의 심기가 불편해지려고 하자 무진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이제이라고 했다."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로 오랑캐를 다스린다는 말이 아니냐?" "그래. 그 괴물 같은 놈을 굳이 우리가 상대할 필요야 없지." "놈을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있다고?" 극신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마도관주인 좌호법 이화명조차도 상대가 되려나 의문이 되는 그 천여운을 대체 누가 상대할 수 있단 말인가. "후후후, 놈을 극도로 증오하는 네 명이 있거든." 무진윤의 입에서 그들의 이름이 거론되자 극신을 비롯한 생도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아직까지 그들이 마도관에 남아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나 오랜 기간 동안 벼르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하! 대단하군. 만약에 그게 성공한다면 충분히 승률은 있겠군." "우리는 그 동안 놈의 수족을 자른다." "놈이 없다면 불가능할 것도 없지. 그럼 언제 하기로 한 거지?" 천여운이 아니라면 누구를 상대해도 자신이 있는 극신이었다. 가장 붙어보고 싶은 상대는 고왕흘이었다. 몇 차례 스쳐지나가면서 보았는데 겨뤄볼 구실이 없었다. "시기는 내일 저녁이다. 이미 그쪽과는 합의가 끝난 이야기다. 가장 좋은 건 사마착과 환야를 영입한다면 더욱 확실해지겠지." "좋다. 그럼 인원을 나눠서 그들의 영입을 시도해보자." * ** 다음 날 신시(申時) 중엽. 마도관의 격세석 연공실의 한 호실. 여드레 전에 마도관의 비급 서재에 숨겨진 지하 서고에서 검마가 남긴 검법들과 극도신의 도흔을 추출하여 여섯 개의 도 초식을 얻게 된 천여운이었다. 천마검공에 버금가는 절세도법을 얻게 된 천여운은 매우 기뻐했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도흔에 운기요결이 없다는 점이었다. 도 초식을 펼칠 때 체내의 경맥으로 내공을 보내는 운기 요결이 없다면 초식이 완전하다고 할 수 없었다. 검마가 손수 비급서를 남긴 진신마검(進新魔劍)에는 운기 요결과 검마의 내공심법이 있었지만 도흔은 그저 그림에 불과했다. 하지만 천여운이 실망하지 않았다. 삼 년하고 석 달이라는 폐관시간 동안 발전한 것은 천여운 뿐만이 아니었다. 그 동안 수많은 분석을 통해 저장되어 있는 무공들을 연구 한 나노는 초식을 펼 칠 때 제 위력을 낼 수 있도록 그 역할을 하는 운기 요결을 수백, 수천 번의 시물레이션을 통해서 구현해 내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것은 원래 무공의 창시자가 의도한 것과 완전히 같지는 않더라도 나노의 분석 시물레이션을 통해 구현된 것이기 때문에 원조에 버금가거나 그보다 안정적이다. -촤촤촤촤촤촤촥! 천여운의 백룡도가 기이한 각도로 꺾이며 수많은 도결을 만들어내며 패도적인 기세로 허공을 가로질렀다. 쾌를 중시하는 접무도법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도식 하나하나가 이어지기 힘든 기이한 각도로 파고들기 때문에 한 식만으로 상대를 두 동강 낼 수 있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후우." 도초를 마친 공간의 격세석 바닥에 날카로운 도흔이 남았다. 기를 발출한 것도 아니었지만 도초의 위력으로 인해 날카로운 예기가 생겨난 흔적이었다. "하하하하핫! 성공이야. 나노!" 여간해서는 크게 웃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드디어 초식을 구현해내는데 성공하자 천여운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여드레 동안 천여운은 나노가 시물레이션을 통해 구현한 운기요결들을 하나씩 직접 시험했고, 가장 원활하게 도 초식을 구현할 수 있는 것을 찾는 작업을 가졌다. 그 결과 극도신의 도법의 첫 번째 초식을 펼칠 수 있는 운기 요결을 찾아냈다. 도흔만으로 이렇게 도 초식을 구현해내는 것을 생전의 검마가 보았다면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두 번째 초식의 운기요결 분석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기계인 나노는 지치지 않고 다음 초식의 분석에 들어갔다. 하루에 수백 번이나 같은 초식을 펼치느라 진이 빠진 천여운은 운기조식을 통해 내공을 회복시켰다. -꼬르륵! '아....배가 고프구나.' 운기 조식을 통해서 기운이 회복되었지만 극도신의 도법 때문에 종일 격하게 움직였더니 배가 고팠다. 마침 유시(酉時) 무렵이라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천여운은 오늘 훈련을 마무리하기로 하고 식사를 위해 연공실을 나섰다. 겨을이었기 때문에 해가 빨리 저물어서 바깥은 어두워져 있었다. 극도신의 도법 중 일 초식을 구현한 기쁨 때문에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천여운은 식당으로 향했다. 대연무장의 서쪽 편에 있는 식당의 내부는 등불로 밝았지만 전과 달리 북적거리는 것은 없었다. 오백여 명에 가까웠던 인원이 그 십분 지의 일밖에 남지 않았으니 한적한 게 당연했다. 오십 명에 이르는 용역들과 숙수들이 일했지만 지금은 생도들에 맞춰서 그 숫자가 스무 명으로 줄었다. '흐음~' 식당 안으로 들어서는 천여운의 코끝을 매운 향기가 자극했다. 배식하는 큰 솥단지에 찰랑이는 붉은 탕이 보였다. 소고기와 버섯, 청경재를 비롯한 각종 야채가 들어갔고 고추기름, 팔각의 진한 향이 식당 전체를 가득 메워서 입맛을 돋우게 만들었다. 오늘의 요리는 겨울에 사천 사람들이 즐겨먹는 사천식 마라탕(麻辣烫)이었다. 혀가 얼얼할 정도로 매운 탕 음식으로 추운 겨울에 먹으면 그 열로 인해 땀이 줄줄 흘러나온다. '매운 게 당기기는 했는데.' 마침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여운이 대접을 집어서 내밀자 젊은 숙수가 솥단지에서 국물을 퍼서 주었다. -덜덜덜! 대접이 뜨거워서 그런 것이지 숙수가 유난히 손을 떨었다. 천여운이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그를 쳐다보았는데, 몸이 안 좋은 것인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땀을 많이 흘리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아아, 괘, 괜찮습니다. 계속 뜨거운 솥단지 앞에 있어서 그런지 덥네요." 숙수는 괜찮다는 말과 함께 천여운에게 대접을 넘겨주었다. 솥단지의 열기가 뜨겁기는 했지만 눈빛에서 긴장했다는 느낌을 받은 천여운은 이상하다고 여겼다. 한편 식당에서 그런 천여운의 모습을 유심히 쳐다보는 자가 있었다. 식당 탁자의 한쪽 편에 앉아서 마라탕의 국물을 떠먹으며 식사를 하고 있었지만, 그 눈은 매처럼 천여운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자리에 앉은 천여운이 뭔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국물을 바라보는 게 보였다. '설마.....들킨 것일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마조마하게 바라보는데 천여운이 젓가락 끝에 국물을 살짝 묻혀서 맛을 보는 것이 아닌가. 국물을 혀끝으로 살짝 갖다 대던 천여운이 뭔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잠시 후에 아무렇지 않게 본격적으로 대접을 들어서는 국물을 들이켰다. 그 모습을 뚫어지게 훔쳐보던 자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됐다!' < 34장 이이제이(以夷制夷) (1) > 끝 < 34장 이이제이(以夷制夷) (2) > 건물 벽의 옆에 달려 있는 횃불 앞으로 열두 명의 생도들이 모여 있다. 생도들은 천여운의 수하들이었다. 겨울인데다 밤공기가 차가웠기 때문에 일부는 횃불의 열기에 차가워진 손을 녹이고 있었고, 일부는 번거로워도 내공을 순환시켜 체온을 올렸다. "주군은 오늘도 저녁 식사를 거르려나?" 오종이 횃불에 손을 쬐면서 중얼거렸다. 벌써 여드레 동안이나 아침 식사 이외에는 함께 하지 못하고 있었다. 천여운이 수련할 것이 있다며 한 동안은 저녁식사를 거를 수도 있다고 하여 그들끼리만 모여서 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틀에 한 번 꼴로는 드시지 않았나요?" 허봉의 말에 고왕흘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는 식당에서 못 뵈었으니 오늘은 지금쯤 식사를 하고 계실지도 모르지." 다 같이 모여서 움직이느라 식사 시간이 거의 끝나갈 때쯤에 가는 그들과 달리 천여운은 혼자 움직였기 때문에 식당에 도착하면 나오는 그와 마주치기 일 수였다. "으으, 조금만 빨리 나오면 천 공자님이랑 같이 식사할 수 있을 텐데요." 아직까지 호상화와 백기, 진국 등이 나오지 않았다. 벌써 이각 여 시간 동안 밖에서 기다리느라 추운 문규가 뾰로통해진 얼굴로 횃불의 열기에 손을 비볐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고왕흘이 피식 웃었다. '처음엔 안 그랬는데 허봉 못지않게 주군을 참 좋아하는군.' 허봉이야 주군의 첫 수하이기 때문에 그렇지만 최상위 종파인 문규의 이런 모습을 보면 가끔씩 꼭 이성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무공은 강한데 몸이 참 가날프단 말이야.' 남자인데도 호리호리한 몸이며 가날픈 문규의 손목을 보면 가끔씩 여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흠, 나도 요 근래 이상하군.' 혼자서 이상한 생각을 했다고 여긴 고왕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얼마 있지 않아 호상화가 가장 먼저 나왔고, 그 다음은 진국, 마지막으로 백기가 격세석 연공실 건물에서 털레털레 걸어 나왔다. "지각쟁이." 뾰로통해진 얼굴로 투덜거리는 문규를 바라보며 백기가 괜히 다른 곳을 쳐다보며 헛기침을 했다. 매번 제일 늦게 나왔기 때문에 돌아가면서 그에게 잔소리를 했었기 때문이었다. 허봉은 이미 그의 지각 습성을 포기했다. "어제보다는 빨리 나왔잖아요. 어서 밥이나 먹으러 가죠." 그렇게 그들이 격세석 연공실 건물 앞에서 남쪽 길을 따라 내려가는데, 개인 연공실의 건물을 지나치려고 할 때였다. 가장 선두에서 걸어가던 고왕흘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뿐만이 아니라 다른 육검들 역시도 뭔가를 감지했는지 발걸음을 멈췄다. "왜, 왜 그러시는 거...아!" -우르르르! 의아해진 진국이 물어보려는 차에 개인 연공실 건물 안에서 스무 명이 넘는 생도들이 나와서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일렁이는 횃불에 비친 얼굴들을 보며 고왕흘이 눈살을 찌푸렸다. 맨 앞에 서있는 길쭉한 턱에 눈꼬리가 올라간 청년은 연현종의 극신이었다. '극신? 그렇다면....' 그들은 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연의 수하들이 틀림 없었다. 여태껏 한 번도 마찰이 없었던 그들이지만, 단단히 무장을 하고서 가는 길목을 가로막았다는 것은 분명 좋은 의도로는 보이지 않았다. ’매복이구나.' *** 한편 사천식 매운 마라탕으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천여운의 앞을 가로막는 네 명의 청년들이 있었다. '흐음.' 그들은 천여운이 익히 알고 있는 자들이었다. 검마종의 혈손인 경표와 음마종의 혈손인 항유직, 도마종의 혈손인 부양강 그리고 독마종의 혈손인 백철구였다. '같이 나간 게 아니었나?' 검마종의 경표는 한 달 전에 천여운의 손에 가슴뼈가 함몰 되는 부상을 입었었는데, 그때 팔이 잘려나간 검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경운과 함께 마도관을 나갔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남아있었다. 조기에 퇴출 된 복마종과 현마종만 있었다면 여섯 종파의 혈손들이 전부 모임 셈이었다. 그들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살기만 보아도 무슨 목적으로 가로막았는지는 뻔했다. 천여운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볼일이지?" 그런 천여운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독마종의 백철구가 노기가 서린 눈빛으로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천여운. 네놈이 조부님을 해하고 종섬 형님의 단전을 폐하고도 언제까지 무사히 넘어갈 것 같았느냐!" 이 중에서 가장 원한이 깊은 사람을 꼽으라면 당연히 백철구였다. 독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종섬의 단전이 폐해진 이후로 와신상담의 심정으로 파마독경을 익혀서 복수의 때룹 기다려왔던 그였다. 그런 와중에 자신의 조부인 백오마저 지켜보는 앞에서 천여운의 손에 목이 베였으니, 그 분노는 말로 이를 수가 없었다. "천여운. 네놈은 하찮은 핏줄에 맞지 않는 걸 탐하고 있다. 소교주의 자리라니? 가당키라도 할 것 같으냐." -챙! 도마종의 부양강이 등에 차고 있는 도집에서 도를 빼내며 다가왔다. 가장 최근에 천여운에게 부상을 입었던 경표만 머뭇거리고 있었고, 음마종의 항유직 역시도 비파 형태를 갖준 독특한 모양의 검을 빼들었다. 언제든지 출초할 준비를 마친 그들을 바라보며 천여운이 여전히 여유로운 얼굴로 말했다. "네 명이서 합공하면 나를 이길 자신이 있나 보지?" "훗, 네놈 따위는 우리 중에 한 명만 나서더라도 죽일 수 있다. " "네놈 따위?" 항유직의 태도를 보면 정말로 그럴 자신이 있어보였다. 이들 중에서는 누구도 화경의 경지에 이른 자가 없을 텐데 이런 자신감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찮은 시종의 자식 같으니라고.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다.' 독마종의 백철구의 독기를 머금은 눈빛이 반짝였다. 불과 이각 전에 백철구는 두 눈으로 천여운이 식당에서 마라탕을 전부 먹는 것을 보았다.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마라탕에는 그가 직접 제조한 산공독(散功毒)과 파마독경의 육 층 경지에 이르면서 그 독기의 정수를 모은 독단을 집어넣었다. '내가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네놈은 모를 거다.' 이 순간을 위해서 오랜 시간을 공들이며 함정을 파온 백철구였다. 그는 무공으로는 천여운을 상대할 수 없음을 잘 알기에 어떻게든 그를 중독 시킬 방법을 찾았다. '그 놈을 중독 시킬 수 있다고?' '대체 무슨 수로?' 독마종의 종주인 백오가 독인이 되면서 펼친 독기마저도 견뎌낸 천여운을 무슨 수로 중독시키냐며 도마종의 부양강이나 음마종의 항유직이 반신반의 했지만 그가 세운 계획을 듣고는 함께 하기로 한 것이었다. '화경의 경지에 오르면서 호신강기로 체외로 침투하는 독은 어찌 막았을지는 모르겠지만, 직접 삼켜서 체내에 퍼진 독도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백철구는 천여운에게 독을 하독하기 위해 식당의 숙수를 섭외하기 위해 수많은 공을 들였다. 엄청난 재화와 독마종의 후원을 약속 받은 숙수는 백철구의 계획을 위해서 독을 감지하기 어렵게 팔각과 고추기름으로 강한 향과 맛을 내는 마라탕을 준비했다. '국을 푸는 국자에 독을 준비했지.' 아무리 의심이 많은 천여운이라고 해도 평소 때 늘 보던 식당 숙수가 독을 하독 할 거라고 의심하진 못할 것이다. 젓가락으로 찔러서 맛을 볼 때는 조마조마 했지만 마라탕을 전부 먹었다. 산공독은 복용 후에 일 각의 시간이 지나면 내공을 세 시진 가량은 끌어올리지 못하게 흩어지게 만들고, 파마독경의 정수를 모은 독단은 내공이 흩어진 천여운의 경맥과 장기 기관을 전부 녹여서 비참하게 죽게 할 것이다. 처음부터 독을 눈치채고 배출해냈다면 모를까 이 각의 시간이 지났으니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됐다!' 천여운보다 먼저 식당을 빠져나온 백철구는 다른 종파의 혈손들에게 하독이 성공했음을 알렸다. 산공독과 독단에 중독되어 내공을 상실하고 죽어간다는 사실을 알기에 이들은 자신만만하게 천여운을 노린 것이었다. '확실하게 해야 하니까.' 내공을 상실한 천여운이라면 혼자서라도 처리할 수 있지만, 화경의 경지에 오른 자를 상대로 산공독을 쓰는 것은 처음이었다. 혹시나 심후한 내공으로 산공독이나 독단의 효과가 다소 더디게 나올 수도 있기에 철저할 필요성이 있었다. 여섯 종파의 후계자이면서 초절정의 경지에 이른 고수 네 명이나 모였다. 천여운은 절대로 여기서 살아남을 수 없다. 독마종의 백철구가 자신의 처지도 모르고 여유로운 천여운을 도발하기 위해 그가 모르는 사실을 밝혔다. "여유롭구나. 천여운. 그것도 끝이다. 곧 네놈의 수하들과 함께 의무실에서 만날 수 있을 거다. 네놈이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말이야." "수하들?" 수하들이라는 말에 천여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자신만 노린 거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수하들마저 노렸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들이 이곳에 전부 있는데 수하들은 대체 누가 노린단 말인가? '설마 현마종 녀석들이랑 손을 잡은 건가?' 생각해보니 여섯 종파 중에 네 명이나 모였는데, 나머지 한 명이랑 손을 잡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만약 천무연까지 나섰다면 위험하다.' 천여운의 얼굴에서 여유롭던 기색이 전부 가셨다. 도발한 목적을 달성한 것에 희열을 느꼈는지 백철구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챙! 천여운이 등 뒤에 검집과 교차하고 있는 하얀 도집에서 백룡도를 뽑았다. 아무래도 여유롭게 이들을 상대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시간이 없으니 금방 끝내 주마." "건방진 놈이 뭘 금방 끝내! 누이의 팔을 잘랐으니 나는 네 놈의 두 팔을 전부 잘라주마." 음마종의 항유직이 노기가 서린 목소리로 외치며 천여운을 향해 비파 형태의 독특한 검으로 검초를 펼쳤다. -팅팅! 우우웅! 그가 검을 휘두르자 검의 비어있는 가운데의 강사가 튕겨지며 독특한 음공이 파동을 일으켰다. 음공으로 상대의 고막을 울리게 만들어 허점을 만들어내는 음마종의 독문검법이었다. 하얀 검기가 실려 있는 비파 형태의 검이 천여운의 팔을 자를 기세로 쇄도해왔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챙그랑! "헉!" 검초를 펼치던 항유직의 두 눈이 큼지막하게 커졌다. 산공독으로 내공을 상실했을 거라 생각했던 천여운이 가볍게 도를 휘둘러 그의 비파 형태의 검을 부숴버린 것이었다. "이, 이게...." "시간이 없다고 했다." -촥! "끄아아아악!" 천여운의 신형이 빠르게 그의 일보 앞으로 파고들어 단숨에 항유직의 팔을 베었다. 그의 팔을 잘라버릴 거라고 호언장담했는데 도리어 잘려버렸다. 멀쩡하던 팔이 잘렸으니 그 고통을 견딜 수 없었던 항유직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어....어떻게 이런 일이?" 독마종의 백철구의 두 동공이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우웅! 음마종의 항유직이 일순간에 당해버린 것보다도 푸른빛 강기로 물들어 있는 천여운의 백룡도가 그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산공독에 중독되었다고 했잖아?’ '어떻게 강기를?' 설사 화경의 심후한 내공으로 버텼다고 해도 산공독에 중독 된 이상 공력이 흩어지기 때문에 기를 집밀시켜야 하는 강기를 일으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했다. 경표와 부양강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는 눈초리로 백철구를 노려보았다. "부, 분명 내 눈으로 마라탕을 전부 먹는 걸 보았는데...." "뭐? 설마 이걸 얘기하는 거냐?"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는 백철구를 바라보며 천여운이 바닥에 쓰러져서 뒹굴고 있는 항유직의 위에서 왼손을 내밀어 무언가를 짜내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천여운의 쥐어짜는 손에서 검은 액체가 흘러나와 항유직에게 떨어졌다. -치이이이익! "끄아아아아악!" 검은 액체를 맞은 항유직의 허벅지에서 타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뿌연 김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지독한 산독(酸毒)에 가까웠다. "도, 독?" 천여운이 차갑게 식어버린 눈빛으로 경악해 하는 그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듯이 말했다. "이딴 수작이 통할 줄 알았나?" < 34장 이이제이(以夷制夷) (2) > 끝 < 34장 이이제이(以夷制夷) (3) > 젓가락에 마라탕의 국물을 묻혀서 혀끝에 살짝 갖다 댄 천여운은 나노에게 곧장 성분 분석을 명했었다. [음식물에서 체내의 에너지를 흩어지게 만드는 성분과 유해 독성분이 검출되었습니다.] 숙수의 미심쩍은 행동에서 비롯된 의심.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확인했던 것이 들어맞았다. 에너지를 흩어지게 만든다는 말은 분명 내공을 흩어지게 만드는 산공독이 틀림없었다. 음식을 그냥 먹지 않을까 생각했던 그였지만 마음을 바꿨다. '내가 눈치 챘다고 생각하면 이걸 노렸던 놈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겠지. 나노 혹시 유해 성분들이 몸에 퍼져나가지 않게 따로 모을 수 있어?' [네. 가능합니다.] 나노머신의 기능으로 체내에 있는 독성분을 따로 모아놓은 천여운은 일부러 모른 척하며 마라탕을 전부 먹었다. 그리고 그 독은 이렇게 배출해냈다. -지이이익! "끄아아아아악!" 허벅지가 타는 소리와 함께 음마종의 항유직이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렀다. 독마종의 백철구를 포함한 세 명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말도 안 돼! 독을 체내에 가지고 있다가 배출시켰다고?' 체내로 흡수한 독을 배출시켜내는 것은 독공의 고수들이면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다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공력이 흩어지는 산공독까지 복용한 상태에서 독기를 모아서 배출해내는 것은 독마종 출신인 그라고 해도 불가능했다. "네, 네놈이 대체 무슨 수로?" "설명할 시간 따위 없다." 그 말과 함께 천여운의 신형이 순식간에 도마종의 부양강의 뒤로 나타났다. 경공이 어찌나 빨랐는지 육안으로 판별하기 힘들 정도였다. 대호법 마라경의 독문경신법인 풍신공을 익힌 후로부터 경공이나 보법이 월등하게 빨라진 천여운이었다. "부양강! 뒤를 조심해!" "빌어먹을!" -휘이이익! 검마종 경표의 외침에 부양강이 놀라서 몸을 돌리며 환마도법의 방어 초식을 펼치려했다. 그러나 이미 뒤를 잡힌 상황에서 그럴 틈이 없었다. 천여운의 손에서 화려한 장법 초식이 펼쳐지며 그의 등을 속사포로 가격했다. -파파파파팍! "크헉!" 등에 연달아 여덟 번의 장법에 가격 당한 부양강이 피를 토하며 앞으로 튕겨나갔다. 공력에서 너무 격차가 심했기 때문에 호신기운으로도 버틸 수가 없었다. -쿠당탕탕! 바닥에 쓰러진 부양강이 몸을 꿈틀거리더니 이내 기절하고 말았다. "부, 부양강을 고작 한 초식 만에?" 검마종의 경표가 경악한 나머지 어쩔 줄 몰라서 뒷걸음을 쳤다. 한 차례 당했었기 때문에 강하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이건 너무 일방적이었다. '젠장! 백철구 놈의 말을 듣는 게 아니었어.' 이래서야 전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독에 중독되지 않은 천여운은 괴물 그 자체였다. '의무실에서 퇴원한지 얼마 되었다고...' 다시 의무실로 돌아가야 할 판국이었다. 도망을 치려고 해도 경공이 너무 빨라서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곧장 자신이나 백철구를 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기절해 있는 부양강에게로 다가갔다. 짙은 살기가 뿜어져 나오는 모습이 이상했다. 천여운이 차가운 눈빛으로 부양강의 머리 위로 발을 들어올렸다. "자, 잠깐! 천여운 네놈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내가 언제까지 팔 한 짝 정도로 적당히 봐줄 거라고 착각한 건 아니겠지?" "안 돼!" -콰직! 천여운의 발에 힘이 들어가자, 부양강의 머리에서 으깨지는 소리와 함께 피가 터져 나왔다. "이, 이럴 수가....." "죽이다니?" 검마종의 경표와 독마종의 백철구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버렸다. 설마 진짜로 머리를 으깨버릴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초절정의 무공이고 뭐고 소용이 없었다. 두려운 나머지 다리에 힘이 풀려버린 경표는 후들거리는 것을 겨우 참고 서있는 것이 한계였다. "이제 네놈들 차례다." 부양강을 죽이고 난 천여운이 그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무서울 정도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그들을 위압적으로 억누르고 있었다. '저, 정말로 우릴 죽일 작정인가?' 지금까지 천여운이 보여준 행보와는 확연히 달랐다. 스스로를 제한하듯이 소교주 후보자들의 목숨만큼은 앗아 가지 않았던 그였는데, 그 제한을 풀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손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덜덜덜! 털썩! 경표가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스스로 기운을 숨기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화경의 극에 오른 천여운에게서 느껴지는 거대한 역량은 태산과도 같았다. '안 돼. 저,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어.' 괴물 같은 천여운을 상대로는 초절정의 무위라고 해도 방법이 없었다. 공포심에 떨고 있는 경표와 달리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서든 타개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독마종의 백철구가 다급하게 외쳤다. "네, 네놈이 정말 미쳤구나. 천여운! 여섯 종파의 분노가 두렵지도 않단 말이냐!" "여섯 종파가 두려워?" -휙! 천여운이 손을 뻗자 바닥에 떨어져 있던 무언가가 들썩 거리더니, 그의 심후한 공력에 허공으로 떠올라서 그대로 검마종의 경표에게로 쇄도했다. -푹! "크헉!"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무방비 상태로 떨고 있는 경표의 가슴에 그 무언가가 박혔다. 그것은 음마종의 항유직의 부러진 비파형태의 검날이었다. "네놈! 정녕?" 가슴에 박힌 검날로 고통스러워하며 쓰러지는 경표의 모습에 분노하는 독마종의 백철구에게 천여운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려워했으면 처음부터 시작도 하지 않았다." 그 눈빛에는 일말의 두려움이나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백철구가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독기가 서린 목소리로 저주하듯이 말했다. "네놈은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실수를 한 거다. 여섯 종파에서 네놈을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거다!" ".....글쎄, 과연 그럴까?" -탓!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끝으로 천여운의 신형이 백철구에게로 쇄도했다. * ** 반각 후, 독으로 함정을 파고 자신을 노렸던 네 종파의 혈손들을 해결한 천여운이 급하게 경공을 펼치며 기감을 넓혀 수하들을 찾았다. 독마종의 백철구의 말대로 라고 한다면 수하들이 위험에 빠졌다. 그가 없는 상황에서 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연이 작정하고 노린다면 아무리 무공이 상승한 그들이라고 해도 전력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조급했다. 서둘러서 경공을 펼치며 연공실 방향 쪽으로 향하는데, 그의 기감을 자극하는 기운들이 느껴졌다. '아!' 꽤 많은 인원이 자신이 향하는 방향에서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어두운 마도관의 저 편에서 경공을 펼치며 다가오는 그들과 곧 마주할 수 있었다. 그들은 바로, "주군!" "천 공자님!" 고왕흘과 허봉을 비롯한 천여운의 수하들이었다. 그들의 몸에서 내공을 끌어올린 열기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보니, 천여운 못지않게 다급하게 찾아다닌 듯 했다. 그의 예상대로 천여운의 수하들은 마도관의 두 연공실 주변부터 시작해 수색을 하듯이 돌아다니며 찾아 헤매다 숙소 방향 쪽으로 향하게 된 것이었다. "아아아! 다행이에요. 우려했던 일은 없었네요." 천여운이 무사한 것을 확인한 문규가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다른 수하들 역시도 같은 심경이었는지 안심해했다. "주군! 괜찮으십니까?" 고왕흘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오히려 천여운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건 내가 할 소리다. 천무연의 수하들에게 습격을 당하지 않았나?" 독마종의 백철구가 하는 말을 들었을 때는 분명 허언이 아니었다. 단순히 혼란을 주기 위한 위협이라고 하기에는 천여운이 정말로 독에 중독 당했다면 그의 수하들까지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천여운의 물음에 고왕흘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주군께서 그걸 어찌?" 그런데 습격을 당한 것치고 다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하나 습격은 아니었습니다. 천무연 공자의 수하들이 찾아 와서 저희에게 영입 제안을 했습니다." "영입 제안?" 불과 삼 각 전의 일이었다. 저녁 식사를 하기위해 식당으로 향하던 그들을 가로막은 극신과 천무연의 수하들은 예상과 달리 공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에게 제안을 했다. 여섯 종파가 아닌 천여운은 어떤 식으로든 절대로 소교주가 될 수 없으니, 자신들의 주군인 현마종의 후보자인 천무연을 따르라는 제안이었다. '고왕흘. 네 충성심이 높다고 들었다. 하지만 대세의 흐름이라는 것이 있다. 지금 천여운이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마도관의 보호 아래에서다. 여기서 벗어나게 된다면 그 혼자서 여섯 종파와 상위 종파들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나?'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거둘 만큼 천무연 공자님의 포용력은 넓다. 천여운 그 자를 믿고 어리석은 선택은 하지 않기를 바란다.' 연현종의 극신과 현마종의 무진윤은 여섯 종파의 압도적인 세력 앞에서는 천여운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 하지만 천여운을 따르기로 한 수하들 중에 여섯 종파의 위세를 두려워하는 자들이 있을 리가 없었다. 주군을 모욕하는 말에 화가 잔뜩 오른 허봉이 그들을 다그쳤다. '하! 헛소리 지껄이지 마시죠.' '뭣?' '우리가 그런다고 현마종에 고개라도 넙죽 숙일 줄 알았습니까? 그리고 아까부터 계속 천여운, 천여운 하면서 주군의 존성대명을 함부로 뱉으시는데, 장로님이라고 붙이시죠. 극 단주님!' 허봉의 날이 선 일침에 두 사람은 일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뭐라고 반박하기에는 맞는 말이었다. '.....기가 살았군. 고작 중소 종파의 약해빠진 놈 주제에.' '그 약해 빠진 놈이랑 한판 해보시렵니까?' '이놈이 뭐가 어쩌고 저째!' '극신! 우린 싸우러 온 게 아니다.' 도발하는 허봉의 말에 연현종의 극신이 발끈했지만 그를 현마종의 무진윤이 만류했다. 그런 그들을 향해 고왕흘도 불쾌하다는 듯이 일침을 가했다. '주군이 혼자라고 착각하지 않길 바라네. 우리는 언제라도 그분을 위해서 목숨을 던질 각오가 되어 있으니까.' '천여운.....장로에게 인덕이 있나보군. 이런 모습을 보고나니 더더욱 제안을 포기하고 싶어지지 않는군. 잘 생각해봐라.' 전력 면에서 우위임에도 불구하고 싸울 의사가 없다고 확실히 그은 현마종의 무진윤은 한 번 더 제안을 생각해보라는 말만을 남기고 가버렸다. "그냥 갔다고?" "수작을 부렸지만 저희가 적대적이서 그런지 일단은 돌아갔습니다." 자신은 습격을 당했는데, 수하들은 그대로 내버려뒀다는 말에 천여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단순히 생각했을 때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네 종파의 녀석들이 나를 죽일 작정으로 함정까지 파서 습격했다. 그런데 현마종 녀석들은 그런 제안만 하고 갔다라....' 의문에 빠졌던 천여운은 몇 번 씩이나 상황을 되새긴 끝에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것은 절대로 이 상황을 이용해서 이속을 차리기 위해 수하들을 거두려고 한 제안 따위가 아니었다. ".....이이제이(以夷制夷)로군." *** 한편 현마종의 혈손인 무진윤은 수하들을 돌려보내고 격세석 연공실에서 누군가와 접촉하고 있었다. 그는 바로 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연이었다. 하루 내내 수련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는지 천무연의 옷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무진윤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실실거리는 낯으로 그에게 말했다. "형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했습니다. 이번 일로 천여운 놈이 살아남든지 죽든지 저희에게는 전혀 일을 게 없군요. 하하하핫." "모르는 일이다. 놈은 독인의 독을 견뎠다." 놀랍게도 무진윤에게 모든 것을 일임했다고 알려진 천무연은 지금까지 돌아가는 정황을 전부 파악하고 있었다. 어제의 회동에서 천무연의 수하들이 의아해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천무연은 절대로 혈육이라고 해서 모든 전권을 무진윤에게 일임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소교주 쟁탈전과 관련된 일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어쨌거나 놈이 죽게 된다면 형님이 소교주 쟁탈전의 최종 승자가 되는 것이고, 살아남게 된다면 놈이 네 종파의 분노를 사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천여운의 성격 상 자신의 목숨을 노린 놈들을 멀쩡히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한 종파도 아니고 네 종파의 혈손을 동시에 건드리게 될 테니, 그 여파는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하하하하하핫! 최고의 수입니다." 무엇이 되든지 이득이었다. 더군다나 천여운이 살아남는다고 해도 자신들에게는 명분이 있었다. 독마종에서 제의를 했지만 비겁한 방식을 피하기 위해 거절했다는 식으로 둘러댈 수 있는 것이었다. 천무연은 자존심을 버리고 현재의 전력을 냉정하게 평가했다. 지금 그 자신의 무력이나 수하들의 전력을 전부 더한다고 해도 천여운과 그 일파를 마도관 내에서 이길 수 없었다. 직접 손을 댈 수 없다면 가장 좋은 수는 다른 힘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진정한 이이제이의 수로군요! 형님께 한 수 배웠습니다." 이 모든 것을 제안한 독마종의 백철구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모든 것은 경쟁이었다. 그들로서는 천여운의 수하들이 합류하지 못하게 적당히 시간을 끌어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역할을 다했다. 보고를 전부 들었으니 더 이상 관심이 없어졌는지 천무연이 손을 휙 저으며 말했다. "이제 돌아가라. 나는 계속 수련을 하겠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도록..." -쿵쿵! 그때 격세석 연공실의 두꺼운 석문을 누군가가 두드렸다. 한 번이 아니었다. -쿵쿵! "응?" 분명 사용 중이라고 걸어놨을 텐데 누가 계속 문을 두드리는 것일까? 천무연이 고개를 고덕이며 열어도 좋다고 했다. 무진윤이 의아해하며 격세석 연공실의 문을 여는 순간, 밝은 등불의 빛과 함께 선임 무공 교두 호진창이 모습을 드러냈다. "교두님?" 그런데 호진창 혼자가 아니었다. 그 뒤로 수많은 무공 교두들이 도검을 뽑아들고 무장까지 해서 대기하고 있었다. 기세만 보아서 언제든지 무력을 동원할 것만 같았다. "아….…대체 무슨 일로?"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지만, 뭔가 사태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인지한 무진윤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뒤를 돌아 천무연을 쳐다보았다. "호오. 마침 잘됐군. 두 분이 한 곳에 있으니 말이네." "네? 교두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두 분을 관주실로 압송하라는 명이 떨어졌네. 강제로 데려 가고 싶지 않으니, 쓸데없는 반항은 하지 않기를 바라네." -챙! 검을 뽑는 호진창의 눈빛은 절대로 허언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 34장 이이제이(以夷制夷) (3) > 끝 < 34장 이이제이(以夷制夷) (4) > 선임 무공 교두 호진창의 뒤에는 자그마치 사십 명이 넘는 무공 교두들이 무장을 한 채로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연과 현마종의 혈손인 무진윤은 완숙한 초절정의 고수였다. 이 중에서 그들을 일대일로 상대할 수 있는 자는 호진창뿐이었다. 많은 인원을 데려온 것도 이들이 스스로의 무력이나 종파의 위세를 믿고서 압송되는 것을 거부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영민한 천무연조차도 이 상황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마도관에서 지낸 삼 년하고도 여섯 달 동안 처음 겪는 일이었다. '무장까지 하고 왔다는 것은 반항을 염두 했다는 건가?'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무공 교두들의 기세로 보아선, 여기서 반항했다가는 더욱 사태가 커질 게 뻔했다. -착! "알겠습니다." 천무연이 수련을 위해 쥐고 있던 검을 검집에 착검했다. 모시는 주군이나 다름없는 천무연이 고분하게 명을 받으니, 당연히 무진윤 역시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옳은 선택일세." 다행히 우려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은 사십 명이 넘는 무공 교두들에게 둘러싸여 연공실 건물에서 나왔다. -웅성웅성! 격세석 연공실 건물 앞에는 천무연의 수하들의 일부가 당혹감이 서린 눈빛으로 망연자실하게 그들이 압송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중에는 연현종의 극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른 수하들과 마찬가지로 심각해하는 표정을 보면 뭔가를 알고 있는 듯 했다. [대체 무슨 일이야?] 무진윤이 다급하게 그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러자 극신의 전음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가 튀어 나왔다. [저, 정확한 건 나도 모른다. 단지 교두들이 하는 말로는 마도관 안에서 시신이 발견 되었다고 들었다.] [뭐?] 시신이라는 말에 무진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져버렸다. 이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마도관 내에서 누군가를 살해하는 것은 규칙에 어긋나는데, 어떻게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것인가? 그리고 시신이 발견되었는데 왜 자신들을 압송하는 것일까? 무진윤이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압송되어가는 중이었기에 더 이상은 무리였다. 무공 교두들에게 둘러싸여 마도관의 본관 건물 앞으로 도착 하자, 두 명의 교두가 입구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호 교두님." "혐의자들을 압송해왔네. 관주님은?" "관주께서는 현장에 나가계십니다. 그곳으로 혐의자들을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혐의자?' 그 말에 현마종의 무진윤의 표정이 굳어졌다. 왜 자신들을 압송하는지 몰랐는데, 혐의자라는 말은 자신들 이 그 시신들을 죽인자로 의심받고 있다는 말이었다. "안내하게." "넵." 두 명의 무공 교두들을 따라서 압송 일행들은 마도관의 숙소 건물 방향으로 향했다. 숙소 건물로 향하는 방향에서 인적이 드문 어두운 길목이었다. 그곳에는 스무 명 정도 되는 무공 교두들이 있었고, 그들이 들고 있는 등불로 주위가 환하게 밝았다. 압송 인원을 포함하면 대부분의 무공 교두들이 전부 모인 셈이었다. '피 냄새?' 밤 공기가 차가웠지만 짙은 혈향이 천무연과 무진윤의 코 끝을 찔렀다. 스무 명의 교두들이 진을 치고 있는 곳의 한가운데에는 마도관주인 좌호법 이화명이 무언가를 살피고 있었다. 그곳에는 놀랍게도 네 구의 시신이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었다. '아닛!' 시신들을 알아본 무진윤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들은 산공독으로 함정을 파고서 천여운을 습격하기로 했던 네 종파의 혈손들이었다. 저들이 어째서 시신으로 발견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왜 저놈들이 죽어 있는 거야?' "관주님!" 선임 무공 교두 호진창의 부름에 시신을 살피고 있던 이화명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화명의 표정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분노로 휩싸여 있었다. 성큼성큼 그들을 향해 다가온 이화명이 압송 행렬의 한 가운데에 있는 두 사람의 앞에 섰다. "천무연 단주. 무진윤 대주." "관주님을 뵙습니다!" 천무연과 무진윤이 두 손을 모아서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직위가 상승했다고 한들 마도관주인 이화명에게는 예를 갖춰야 했다. 이화명이 노기가 섞인 목소리로 그들에게 말했다. "거두절미하고 말하겠다. 두 사람 모두인가? 아니면 한 사람이 저지른 것인가?" 정말로 단도직입적인 질문이었다. 누가 이 일을 벌었냐는 말에 무진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저들이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면 이 짓을 했을 사람은 오직 천여운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들이 의심을 받고 있었다. "과, 관주님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이화명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잡아떼시겠다." "그게 아니라..." "관주님." 그때 천무연이 무진윤의 말을 자르고 입을 열었다. "저와 진윤은 연공실에 있다가 압송되어 와서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아무 것도 알려주시지 않고 대뜸 그렇게 말씀하시니 정말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무진윤과 다르게 천무연은 냉철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차분하게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는 천무연의 태도에 이화명이 입을 다문 채로 그들에게 손짓으로 따라오라는 시늉을 했다. 크게 원진을 만들어서 등불을 들고 있는 스무 명의 교두들을 지나쳐 들어가자, 가장 먼저 눈에 띤 시신은 한쪽 다리가 녹아있고, 한 팔이 잘려서 죽어있는 시신이었다. '항유직?' 시신은 바로 음마종의 혈손인 항유직이었다. 죽은 가장 큰 사유는 오른팔이 잘리면서 출혈이 심해서인 것 같으나, 얼굴색이 검게 변색된 걸 보아선 극독에 중독된 듯 했다. '어째서 독에?' 무진윤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분명 독마종의 백철구가 이야기 한 계획대로라고 하면 독에 중독된 것은 천여운이어야 한다. 그런데 도리어 죽어있는 항유직이 독에 중독되어 있다. "보았나?" 이화명이 다음 시신으로 그들을 데리고 갔다. '경표.'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두려움에 빠진 얼굴로 죽어있는 그는 검마종의 혈손인 경표였다. 가슴에 검날이 관통해 있었는데, 그 앞에 부러진 비파형태의 검이 떨어져 있었다. 비파형태의 검은 음마종에서 자랑하는 비마음검(枇魔音劍)이었다. 이것만 본다면 검마종의 경표가 음마종의 항유직과 겨루다 죽임을 당한 듯 했다. '......뭔가 잘못 되었다.' 무진윤은 제대로 일이 틀어졌음을 느꼈다. 시신만 보았을 때는 절대로 이들은 천여운과 싸우다 죽은 혼적으로 보기 힘들었다. "다음 시신이다." 이화명의 열다섯 보 정도 떨어진 시신을 가리켰다. "욱!" 시신을 보자마자 무진윤은 토사물을 올릴 뻔했다. 세 번째 시신은 잔혹하게도 머리가 반쯤 으깨져서 죽어 있었다. 그런데 머리가 으깨진 이 시신의 상의가 벗겨져 있었는데, 등에 여덟 개의 손바닥 자국의 피멍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주르륵! 차가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무진윤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최대한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있었지만 천무연 역시도 시신에 남겨진 손바닥 자국에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장흔(掌痕)을 두 사람이 몰라볼 리가 없었다. '운경 팔식!' 그것은 현마종의 이절이라 할 수 있는 장법, 유현운장(柔玄雲掌)의 제 사 초식인 운경팔식(雲競八式)을 펼쳐야만 남길 수 있는 장흔이었다. 그들은 이제야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어떻게 유현운장의 초흔이? 이, 이래선 형님이나 내가 이 녀석들을 죽인 범인으로 오해 받을 수밖에 없지 않나." 너무도 선명한 유현운장의 장흔은 현마종의 사람이 한 걸로 오인받기 쉬웠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을 자신들이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오해를 풀어야만 했다. "관..." [반응하지 마라.] [형님?] 순간 흔들려서 자신들이 아니라고 입에서 튀어나올 뻔 했던, 무진윤은 천무연의 전음에 굳어진 인상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놈의 함정이다.] [함정이라뇨?] [.....마도관의 오 층 비급 서재에 유현운장의 비급서가 있다.] [아!] 시신에 남아있는 장흔에 잠시 흔들렸던 천무연이었지만 금방 이성을 찾았다. 이이제이의 수법으로 함정을 팠던 당사자이기에 이들을 해한 범인이 누구인지는 뻔했다. 다만 놀란 것은 두 가지였다. 그 동안 그가 지켜보았던 천여운은 자신을 건드는 자에게 철저하게 응징을 하기는 했지만 이런 식으로 상대를 죽이진 않았다. '이젠 더 이상 거리낄 게 없다는 것인가?' 두 번째로 그를 놀라게 만든 것은 무서울 정도로 영악해졌다는 점이었다. 함정에 빠졌는데도 그 상황 속에서 이런 식으로 반전을 꾀 할 줄은 몰랐다. 유현운장의 초식 하나만으로 그들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정말 위험한 놈이다.' 여기서 흥분해서 말실수라도 한다면 이번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실토하는 꼴이었다. 아무 연관이 없다는 것을 차분하게 증명해야만 위기를 벗어 날 수 있다.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입을 닫고 있어라.] [.....알겠습니다.] 믿을 사람은 오직 천무연 뿐이었기에 무진윤은 입을 꾹 닫았다. 시신을 바라보는 천무연의 눈이 반짝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시신에 남겨져 있는 것이 유현운장의 장흔이라는 점이었다. '천여운. 네놈이 간과한 실수다.' 마도관의 비급 서재의 오 층에는 현마종의 유현운장의 비급서가 있다. 굳이 자신들이 아니더라도 오 단계 시험을 통과한 자라면 유현운장을 익힐 수 있기에 차분하게 대응하면 된다. "보았나? 이제 마지막 시신이다." 이화명이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시신으로 그들을 데리고 갔다. '형님 말씀이 옳다. 평정심. 평정심.' 혐의에서 벗어나려면 천무연의 말대로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무진윤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지고 말았다. "이, 이게 대체?" 당혹감을 넘어서서 어처구니가 없었다. 마지막 시신은 이 모든 함정을 팠던 독마종의 혈손인 백철구의 시신이었다. 앞서 머리가 으깨져서 죽은 도마종의 부양강처럼 상의가 벗겨져 있는 백철구의 시신에는 두 가지 초식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하!' 감정 조절에 능숙한 천무연조차 표정이 굳어져버렸다. 백철구의 왼쪽 가슴에는 붉은 피멍의 장흔이 남아있었고, 우측 가슴부터 복부까지 검흔이 남겨져 있었다. 이 두 사람이 이렇게 평정심을 잃고 놀라는 이유는 당연했다. 왼쪽에 남아있는 장흔은 유현운장의 장초였고, 우측 가슴에 남겨져 있는 검흔은 현마패검의 검초로 생겨난 흔적이었다. -꾸욱! 천무연이 손바닥에 손톱이 파고들어 피가 날 정도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우.... 검좌장.' 그것은 현마종의 종주이자 일 장로 무진원의 비기인 우검좌장(右劍左掌)이었다. 현마종 내에서도 수장인 무진원과 오직 천무연만이 익힌 비기였다. 삼 년 전, 노란 명찰을 획득하기 위해 무공 교두와의 대련에서 딱 한 번밖에 보인 적이 없었던 비기의 흔적이 시신에 남아 있는 것이었다. 좌호법 이화명이 싸늘해진 눈빛으로 천무연에게 말했다. "변명할 거리라도 있나? 천 단주." < 34장 이이제이(以夷制夷) (4) > 끝 < 34장 이이제이(以夷制夷) (5) > 여섯 종파 중에서도 수좌를 차지하고 있는 현마종. 현마종의 수장인 일 장로 무진원은 두 절기를 양손으로 동시에 펼치고, 좌우를 바꾸는 비기로 교내에서 무공 서열 이 위를 차지한 절대적인 고수였다. 우검좌장(右劍左掌). 좌검우장(左劍右掌). 사라진 전진파(全眞派)의 비기인 쌍수호박에서 착안하여 만든 것으로 양손으로 다른 무공을 펼쳐야 할 만큼 익히기가 힘든 무공이었다. 현마종 내에서도 수장인 무진원 이외에 오직 천무연만 익혔다고 알려진 이 무공은 천무연이 삼 단계 시험에서 노란 명찰을 획득하기 위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선보인 적이 있었다. '우검좌장?' 좌호법 이화명이 처음 독마종의 혈손인 백철구의 시신을 보았을 때 내린 결론이었다. 그 정도 되는 고수라면 상처의 흔적만으로도 어떤 무공에 의해서 생긴 상처인지 쉽게 구분할 수 있었다. "변명할 거리라도 있나? 천 단주." 마도관에서 우검좌장을 펼칠 수 있는 자는 오직 단 한 명뿐이었다. 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연. '대체 무슨 수를 쓴 거냐? 천여운.' 천무연의 귀에는 좌호법 이화명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기존의 상식을 파괴한 이 말도 안 되는 함정에 혼란스러웠다. '고작 한 번 밖에 보이지 않은 무공을 펼쳤다고?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범인이 천여운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런데 어떤 누가 삼 년도 전에 찰나의 순간에 펼쳤던 초식을 기억해서 다시 구현할 수 있단 말인가. 이건 자신의 외조부인 일 장로 무진원이라고 해도 불가능했다. '.....외통수로구나.' 이 모든 게 천여운이 만든 함정이고 그가 단 한 번 본 초식을 펼쳐서 독마종의 백철구를 죽였다고 주장해봐야 입장만 우스워질 뿐이었다. 너무 완벽한 함정이었기에 이것을 타파할 방법이 없었다. "과, 관주님!" 시신들에 남아있는 모든 정황이 천무연을 범인으로 가리키자 현마종의 혈손인 무진윤은 평정심을 잃고 말았다. "이건 누군가의 함정입니다. 천 단주는 지금까지 연공실에서 수련을 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수로 이들을 죽인단 말입니까?" 물론 한 점의 거짓이 없는 진실이었다. 그러나 해명을 하더라도 시신에 남아있는 상흔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이화명이 싸늘한 눈빛을 풀지 않고 무진윤에게 말했다. "함정? 뭐가 함정이라는 건가?" "그, 그건....." 완전한 해명을 하려면 이곳에서 벌어졌던 일을 전부 설명해야 했다. 그렇게 되면 자신들이 연루되어있다는 사실마저 밝혀진다. 결국 어떤 식으로든 피해를 보게 되어 있다. '안 된다. 이 사건으로 형님께서 마도관에서 퇴출 당하게 된다면, 소교주 쟁탈전은 꼼짝없이 천여운 그놈의 승리가 되지 않나.' -으득! 분했는지 무진윤이 이를 갈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퇴출만큼은 막아야만 했다. 마음이 급해진 무진윤은 차라리 피해가 적은 쪽을 택하기로 하였다. ᅳ"관주님! 이건 전부 저희와 상관없는 일입니다." "해명을 해도 증좌가 없다면 결국 변명일 뿐이다. 교두들은 들어라." "충!" 이화명이 그들을 압송하라고 명령을 하려고 하자 다급해진 무진윤이 외쳤다. "저, 전부! 천여운 그 자가 꾸민 짓입니다." 무진윤의 외침에 천무연이 두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자중하라고 했건만 결국 터뜨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를 탓할 수만도 없었다. 같은 생도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쓴 채로 마도관에서 방출되게 된다면 소교주의 자리는 천여운이 차지하고 만다. -착! 이화명의 눈에 이채가 띠더니, 손을 들어서 다가오는 무공 교두들을 멈추게 했다. 그가 관심을 보이자 무진윤은 내심 되었다고 생각했다. '최대한 우리가 연관이 없도록 설명해야 한다.' 이화명이 말없이 바라보자,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인 무진윤이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물론 약간의 각색은 있었다. 어차피 죽은 자는 말이 없기에 모든 책임을 독마종의 백철구에게로 몰았다. "....했지만 저는 그게 비겁하다고 여겨 거절했습니다. 생각 해보십시오. 저희가 이들을 죽인다고 해서 무슨 득이 있습니까? 더군다나 천 단주는 퇴출된다면 소교주 쟁탈전도 지르지 못하는데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죽은 것도 부름을 받고 와서야 처음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는 내내 이화명의 표정이 묘했다. 그럴 듯하게 각색을 했는데도 조금이라도 의문스러워하지 않았다. 이를 답답해 한 무진윤이 최후의 수단을 꺼냈다. "천여운과 다른 생도들을 불러서 대질 시켜주십시오! 설명을 드렸는데도 저희만 혐의자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무진윤에게는 이 사건과 관련이 없다는 정확한 증좌가 있었다. 사건이 벌어졌던 당시에 그 자신이 천여운, 천무연의 수하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증언한다면 더욱 확실해진다. "어서 부탁드립니다!" 이런 용도로 천여운의 수하들을 붙들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좌호법 이화명의 반응은 그가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어이가 없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무 대주. 본 관주를 어지간히 우습게 여겼군." "네? 제가 어찌." "그런 말도 안 되는 해명이 통한다고 생각했나?" "네?" "이 시신들을 누가 발견했을 것 같나?" "무, 무공 교두들이 아니십니까?" "천 장로께서 다른 단주, 대주들과 함께 현장을 발견하고 본 관주에게 직접 신고한 것이다."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이화명의 말에 무진윤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건을 벌인 당사자가 이것을 신고했다는 게 대체 말이 되는 소리인가. 이제는 어이가 없다 못해서 화까지 치밀어 오른 무진윤이 혐의를 받고 있는 상황마저 잊고 항의했다. "관주님! 천여운 그놈이 진짜 범인인데 어째서..." "내가 어째서 범인이라는 거지?" "엇?" 익숙한 목소리에 무진윤과 천무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향했다. 등불을 들고 원진을 두르고 있는 무공 교두들 사이에서 천여운이 시신들이 있는 안쪽으로 들어왔다. '하! 진짜 범인 놈이 현장을 찾아와? 네놈은 대담한 거냐? 미친 거냐?" 뜻밖의 등장에 무진윤은 황당하기마저 했다. 그런데 천여운이 들어오는 순간, 무공 교두들이 동시에 그를 향해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여 큰소리로 예를 갖췄다. "천여운 장로님을 뵙습니다!" "장로님을 뵙습니다!" 일흔 명이 넘는 무공 교두들이 동시에 예를 표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그 광경에 무진윤이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육 단계 시험을 통과했기 때문에 장로의 직위를 얻었다고는 생각했지만, 여전히 그들의 머릿속에는 같은 생도였고 하찮은 시종의 자식에 불과했다. "예를 갖춰라." 좌호법 이화명의 말에 두 사람의 표정이 굳어졌다. 마교의 직위 체계 상 분명 맞는 말이기는 했지만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두 사람이 머뭇거리자 이화명의 기세가 점점 위압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예를 갖추라고 했다." 천무연이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천여운에게 억지로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췄다. "천여운.....장로님을 뵙습니다." "크윽!.....천여운 장로님을 뵙습니다" 설마 자신들이 그렇게 멸시해왔던 천여운에게 머리를 숙여야 하는 상황마저 벌어질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빌어먹을!' 극도로 자존심이 상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고개를 다시 들어 올리는 무진윤에게 천여운이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무 대주. 이게 전부 독마종과 도마종, 음마종, 검마종에서 함정을 파서 노린 것이고, 이들을 전부 내가 해쳤다고 했나?" 상황이 이상하게 되어버렸다. 여기서 그렇다고 말을 하면 본교의 장로에게 살인 혐의가 있다고 주장하는 꼴이었다. 무진윤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천여운이 좌호법 이화명을 바라보며 물었다. "관주님. 여기에 있는 시신들이 어떻게 죽은 건지, 제가 알 수 있겠습니까?" "어려울 게 있겠습니까." -딱! 이화명이 손가락을 튕기자 무공 교두들이 시신들을 한 곳으로 모았다. 음마종의 항유직의 시신을 가지고 온 무공 교두가 그 상태에 대해서 설명했다. "항유직 대주는 도마종의 부양강 대주의 도법에 팔이 잘리고, 독마종의 백철구 대주의 독에 당했습니다." 검마종의 경표의 시신을 가지고 온 무공 교두가 이어서 설명했다. "경표 대주는 음마종의 항유직 대주의 비마음검의 검날이 심장에 관통해서 사망했습니다." 두 무공 교두의 설명에 천무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처음에는 그저 이 사건이 천여운이 자신에게 혐의를 뒤집어 씌우기 위한 것이라고만 여겼었다. '이런.....' 천무연이 뭔가를 깨닫는 것과 별개로 도마종 부양강의 시신을 가지고 온 무공 교두가 이어서 사인을 설명했다. "부양강 대주는.....현마종의 유현운장으로 추측되는 장법에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 머리가 으깨져서 사망했습니다." 마지막 시신인 독마종의 백철구의 시신은 바로 앞에 있었기에 좌호법 이화명이 직접 설명했다. "백 단주는 현마종의 비기인 우검좌장에 당해서 내상과 과다 출혈로 죽었습니다." 그리고는 얼굴이 상기되어 있는 천무연을 바라보았다. 범인이 그라는 것을 한 번 더 강조하듯이 말이다. 천여운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번에는 천무연과 무진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상하군. 내가 독공부터 이 많은 무공을 할 줄 안다고?" "그, 그건…." 무진윤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어떠한 시신에도 천여운의 무공과 관련된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교두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째 다섯 명이서 다투다가 서로를 죽인 걸로 밖에 보이지 않는데." '천여운.....이놈!' 천무연이 충격을 받았는지 두 눈이 커져서 천여운을 노려보았다. 시신들의 사인을 들으면서 중간에 눈치 챘던 추측이 확실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다섯 종파를 상쟁시킬 작정이구나!' 처음에는 그저 소교주 쟁탈전에 유일하게 남은 호적수인 자신을 탈락시키기 위한 목적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천여운의 진정한 목적은 자신만이 아니었다. 이 시신을이 네 종파로 퍼져나가게 된다면, 그 종파에서는 시신에 남겨진 상흔으로 범인을 확신할 수밖에 없다. 그 중 유현운장과 우검좌장의 비기에 의해 혈손이 살해당한 도마종과 독마종은 자신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현마종에 증오심을 불태울 것이다. '.....당했다!' 그 자신이 계획했던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수를 역(逆)으로 받아쳤다. 천여운은 이번 한 수로 소교주 쟁탈전의 호적수도 제거하면서 다섯 종파가 상쟁시키게 만들어버렸다. 천무연은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어머니인 무 부인 이외에 이렇게까지 무서울 정도로 치밀한 지략은 처음 보았다. 그저 영악하다 수준을 넘어섰다. -부들부들! '크으으윽! 천여운!' 이미 모든 것이 드러난 마당에 무진윤 역시도 이것을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진실을 알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천여운이 이 모든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입증하기에는 시신의 상흔부터 무공까지 무엇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완벽한 천여운의 승리인 것이다. 좌호법 이화명이 입 꼬리를 올리며 무공 교두들에게 명을 내렸다. "두 사람을 구금동으로 압송해라." "충!" < 34장 이이제이(以夷制夷) (5) > 끝 < 35장 소교주의 자격 (1) > 오백여 년의 마도관 역사상 처음으로 현 마교의 실세이자 근본이라고 불리는 여섯 종파 중 네 종파의 혈손들이 하룻밤 새에 죽어나가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들의 수습된 시신은 다음날 정오를 기점으로 각 종파로 보내졌다. 사태가 보통 큰 것이 아니었기에 이 중심에 있는 현마종에는 출타한 교주와 장로들이 복귀할 때까지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연과 혈손인 무진윤을 구금동에 억류시켜놓는다는 공문이 갔다. 마도관의 본관 일 층, 관주 집무실. "참으로 절묘한 수로군요." 무공 교두 호진창이 마도관주인 좌호법 이화명에게 말했다. 이화명 역시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애초부터 네 종파의 혈손을 죽인 진정한 범인이 천무연과 무진윤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시신만 본다면 누구라도 알기 힘들 겁니다." 이화명조차도 죽은 독마종의 백철구에게 남겨진 상흔을 확인했을 때 천무연 이외에는 떠올리기 힘들었다. "이건 나도 정말 궁금하군." 상식적으로 고작 한 번 보았던 초식을 그대로 재현한다는 것은 화경의 고수라고 해도 불가능하다. 더군다나 좌장우검은 현마종주의 비기였다. 아마도 이번 일로 인해 네 종파는 어떤 식으로든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의 교주님조차도 그들의 힘을 약화시키는 데만 집중했건만.' 호진창의 말대로 절묘한 수였다. 이것은 오직 마도관 안에서만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마도관의 기간이 끝나게 된다면 이 네 종파의 혈손들을 무슨 수로 한 곳으로 모으겠는가. '제대로 익었다.' 기다려왔던 열매는 탐스럽게 익었다. 삼 년 전만 하더라도 분노에 사로잡혀서 사리판단이 되지 않았다. 가진 무력에 비해서 허술했던 냉철한 부분이 보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검마 공께서 바라셨던 진정한 교주가 탄생할 것이다!' 이번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는 모르겠지만, 그 동안 천여운 한 명에게 쏠려있던 여섯 종파의 시선이 분산될 것은 확실했다. 가장 좋은 결과는 다섯 종파가 이를 계기로 상쟁하는 것이야말로 천여운이 의도한 그림대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지금쯤이면 각 종파에 시신들과 서신이 도착했겠군." 벌써 반 시진이 지났으니 네 종파에서는 시신들을 보고 있을 것이다. 호진창이 창밖으로 마도관의 서쪽 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쩌면 독마종에서는 머지않아 사달을 일으킬 지도 모르겠군요." 다른 종파들은 몰라도 불구가 된 소교주 후보자부터 시작해 종파의 종주, 혈손까지 전부 잃은 독마종이었다. 과연 어떤 식으로 나올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한편 십만대산의 마교 성내 서쪽에 자리한 독마종의 장원. 장원에는 흰 상복을 입은 독마종의 수뇌부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여드레 전에 독마종의 종주인 백오가 죽으면서 장례를 치르고 있는 독마종의 수뇌부들은 핏줄이 선 눈으로 이 각 전에 도착한 관을 바라보았다. 뚜껑이 열려있는 관 안에는 핏기가 없어서 하얀 얼굴을 한 백철구의 시신이 누워있었다. 아직 종주의 장례절차가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그 혈손마저 죽임을 당한 채 나타나자, 그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철구야! 아아악!" 아들을 잃은 조 부인이 관 앞에서 오열을 하며 통곡했다. 그 모습올 누구 하나 달래지 못하고 망연자실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으득! 어찌나 화가 났는지 상주를 맡고 있는 백오의 장남인 백문수가 이를 갈면서 말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소. 아버님의 넋을 달랠 때까지 미루려고 했으나, 이제 그 선을 지나친 것 같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들마저 죽임을 당했다. 아버지에 이어서 아들을 잃은 백문수의 분노는 무엇으로도 달랠 수 없었다. 오직 피의 복수만이 이 한을 풀 수 있었다. "현마종!" 백오의 죽음이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이 현마종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독마종의 모든 수뇌부들이었다. 마도관의 육 단계 시험을 거절했던 독마종주 백오가 하루 만에 그 의견을 번복했다. 그것은 현마종의 무 부인이 다녀가고 나서였다. "소 종주님의 말씀이 백 번 지당합니다! 더 이상 그들에게 농락 당해서는 안 됩니다." 외당주인 백차우도 상기된 얼굴로 분노를 토해냈다. 이들의 모든 분노는 현마종으로 쏠렸다. 백문수가 종파의 수뇌부들을 바라보면서 한자 한자 곱씹으며 말했다. "뻔뻔한 그년의 목을 베어야만 아버님과 철구의 한을 풀 수 있을 것이오!" 그년이라 함은 무 부인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독마종의 사람들은 여드레 전을 기억했다. 백오의 장례식을 치루는 첫날에 현마종의 무 부인이 다녀갔다. 무 부인으로 인해서 백오가 의견을 번복했기 때문에 심기가 불편한 독마종의 수뇌부들을 상대로 그녀는 뻔뻔하게도 종주를 죽인 천여운을 용서할 수 있느냐며 그들의 화를 유도하려 들었다. 물론 천여운 역시도 종주의 원수였기에 용서할 수 없었던 독마종이었고, 장례를 치르는 와중이었기에 조용히 넘어갔지만 그 선을 지나쳤다. '우리 독마종을 우습게 보았구나! 현마종!' 백철구의 사인은 현마종의 비기인 좌장우검에 의한 내상과 검상이었다. 마도관의 관주인 좌호법 이화명이 보내온 공문의 내용을 참고한다면 범인은 변명할 여지가 없이 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연이었다. "소종주! 아직 장례를 치르는 종주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지금이야말로 가장 적기입니다!" "제 생각에도 그렇습니다. 현마종주와 그 전력이 반 이상이 빠져있을 때를 노려야만 승기가 있습니다." 총관과 외당주의 말에 다른 수뇌부들도 모두 동의했다. 일 장로부터 팔 장로까지 교주를 따라서 출타를 하면서 독마종을 제외한 다섯 종파의 전력이 반 이상 빠져있는 상태였다. "형님. 어차피 저들은 저희가 조카의 장례를 치른다고 정신 없다고 여길 겁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됩니다." "네 말이 옳다." 호전적인 백오의 둘째 아들 백문웅이었지만 이번 의견은 일리가 있었다. 소종주인 백문수도 그 의견이 타당하다고 여겼다. 백문수는 낮에는 백철구의 장례 절차를 진행하고, 은밀히 본교의 교내에 퍼져 있는 독마종의 전력을 새벽의 축시(丑時)까지 집결시키라 명을 내렸다. 교주의 압박으로 인해 삼 년 전보다 약해진 전력이었지만, 현마종주이자 일 장로인 무진원이 없는 지금이야말로 현마종을 쓸어버릴 수 있는 기회였다. 그렇게 몇 시진이 흘러 새벽 공기가 스산한 인시(寅時) 무렵. 독마종의 소종주 백문수가 결행 시간으로 정했던 축시보다 한시진이 지났다. 마교의 성내 북문 쪽에 자리하고 있는 현마종의 장원. 여섯 종파 중에서 가장 큰 성세를 자랑할 만큼 장원은 독마 종의 두 배에 달할 만큼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현마종의 장원의 본당 앞에 자리한 넓은 정원이 피 냄새로 자욱했다. 어두운 정원에는 수많은 시신들이 널려 있었고, 얼핏 보아서는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 독마종의 복수가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의도한 바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꿇어라!" -콱! "끄흑!" 심상치 않은 기세를 풍기고 있는 반백의 노인이 한 중년인을 강제로 바닥에 무릎을 꿇렸다. 반항을 하고 싶어도 노인의 심후한 공력에 의해 중년인은 버티지 못했다. -화르르륵! 어두웠던 정원에 햇불들이 밝혀지며 중년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다름 아닌 독마종의 소종주인 백문수였다. 양 어깨가 피로 물들어있는 백문수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빌어먹을.....어쩌다 이렇게 된 것인가.' 백문수는 분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횃불로 밝아진 정원 내의 시신들은 하나 같이 검은 복면을 쓰고 있었는데, 그들은 독마종의 무사들이었다. 저들 중에는 외당의 당주인 백차우부터 둘째 동생인 백문웅, 그 외의 여러 수뇌부들도 껴있을 것이다. 한 명도 남김없이 전부 죽임을 당했다. 백문수는 아직도 방금 전에 벌어졌던 일들을 믿기가 힘들었다. ’괴물 같은 년!' 축시에 전력을 결집시킨 백문수는 그들을 이끌고 불시에 현마종의 장원을 기습했다. 장례를 치르는 와중이었기에 현마종은 방심할 수밖에 없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장원으로 진입하여 외당을 지나쳐서 내당으로 들어 갈 때까지도 사람의 그림자 하나 찾을 수가 없었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백문수가 함정이라 생각하여 후퇴하려 했지만 늦었다. 현마종의 본당까지 집결한 독마종의 무사들에게 내공이 실린 화살 비가 쏟아졌고 그로인해 전력의 반을 잃었다. 그것도 모자라 수많은 현마종의 무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 남은 전력을 에워싸고 공격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분노로 전의가 올라있는 백문수를 비롯한 독마종의 무사들은 결사적으로 싸웠으나, 이 반백의 노인과 붉은 면사포의 여인이 나타나면서 전황은 완전히 달라지고 말았다. '믿을 수가 없다.' 백문수가 분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피로 끈적이는 검을 천으로 닦고 있는 붉은 면사포를 쓰고 있는 중년의 여인이 보였다. 교주의 일처이자 현마종의 무 부인이었다. 그저 현 교주인 천유종의 처에 불과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검에 외당주 백차우와 백문웅이 죽임을 당했다. 초절정의 경지에 이르고 파마독경의 육, 칠층에 올라있는 두 사람이 합공을 했는데, 전혀 상대가 되지 못했다. 마교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녀의 이런 전율적인 강함을 모르고 있었다. "네년.....힘을 숨겼구나." "아직 입을 열 수 있을 기운이 남았나 보네요? 숨겼다라. 단지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랍니다." "지금 나와 말장..." -촤악! 백문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검이 목을 갈랐다. 목이 잘려서 바닥을 구르는 백문수의 머리통을 바라보며 무 부인이 혀를 찼다. "쯧쯧, 내가 당신과 말장난을 해서 뭐하나요." -치이이익! 무 부인이 들고 있는 검날에 묻은 피에서 매캐한 냄새와 함께 뿌연 김이 흘러나왔다. 독마종의 고수들은 파마독경으로 피에 독을 품고 있다. 그녀가 횐 빛의 검기를 일으키자, 검날에 묻은 피가 들끓더니 보랏빛 김이 흘러나오면서 이내 피가 끈적거리게 바뀌었다. "더럽군요." 더럽다는 듯이 검날에 묻은 끈적거리는 피를 천으로 닦아낸 그녀의 앞으로 관운장처럼 긴 턱수염의 중년인이 나타났다. "장원에 있는 쥐새끼들은 전부 정리가 끝났습니다. 부인." "잘했어요. 항상 예상을 빗나가는 법이 없군요. 호호호." 놀랍게도 그녀는 이미 독마종이 기습할 것을 알고 있었다. 마도관주로부터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연이 독마종의 혈손을 죽인 혐의로 억류되어 있다는 공문을 받았을 때부터 이미 이렇게 되리라고 예측한 무 부인이었다. "더 써먹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건 아쉽군요. 호호호." "그런데 부인. 독마종에서도 이렇게 기습을 감행했는데, 도마종에서는 가만히 있을까요?" 도마종의 혈손인 부양강 역시도 현마종의 장법인 유현운장에 살해당했다고 적혀 있는 공문의 내용을 우려했다. 그러나 그녀는 걱정하지 말라며 고개를 저었다. "도마종은 종주의 명이 떨어지지 않는 한 직접 움직일 일이 없어요." 종주인 백오가 죽은 독마종과 다르게 도마종은 종주가 건재하기 때문에 그의 명령이 떨어지지 않고는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너무 많은 것을 잃어서 이성을 상실한 독마종과는 입장이 달랐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아침 마도관으로 사람을 보내서 공자님과 도련님의 신변을 양도 받겠습니다." 어차피 다른 생도를 죽였다는 혐의가 확실해진 이상 마도관에서 방출되어야 할 천무연과 무진윤이었다. "흐으으음. 아니에요. 그냥 내버려둬요." "네?" "무연이 그 아이는 조금 반성할 필요가 있겠어요." "하지만 도련님을 그런 곳에...." "내 아이는 내가 잘 알아요. 스스로를 과신하다가 상대의 수에 당했으니, 정신을 차릴 필요가 있어요. 교주의 자리가 쉽지 않다는 것을 가르치려고 했는데, 마침 잘 됐군요." 한 번 결정을 내리면 번복을 하지 않는 무 부인의 성정을 알기에 긴 턱수염의 중년인은 더 이상의 의견을 내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보다도 먼저 할 게 있어요." "하명하십시오." "본 종파의 모든 인력을 동원해서 알아내세요. 그 더러운 종자 놈과 관련된 모든 것. 놈을 돌보았던 장 호위란 놈부터 시작해서 마도관에서 방출되었던 생도들을 전부 이 잡듯이 뒤져서라도 말이에요." "알겠습니다." 턱수염의 중년인이 사라지자, 반백의 머리카락의 노인이 다가왔다. 아무렇지 않은 척 냉정하게 보였지만 마도관주로부터 공문을 받은 후부터 심기가 불편해 있는 무 부인을 걱정했다. "괜찮느냐?" "안 괜찮을 것도 없지요. 흥. 본 녀의 뒤통수를 쳤으니,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해줘야죠. 이대로 두기에는 놈은....." '너무 위험해졌어요.' 마지막 말은 입밖으로 내지 않았다. 화경의 경지에 오른 것도 모자라서 뛰어난 지략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이번 일로 천여운의 의도에 놀아나서 제 손으로 독마종을 처리한 것을 불쾌하게 여기고 있었다. '.....무연이가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내가 직접 나서야 겠어.' 붉은 면사포에 가려져 있었지만 그녀의 살기 넘치는 안광은 뚜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 35장 소교주의 자격 (1) > 끝 < 35장 소교주의 자격 (2) > 네 종파의 혈손들이 죽음을 당한 사건이 있은 직후 사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마도관 밖에서는 현마종과 독마종이 일으킨 큰 규모의 분쟁과 더불어 여섯 종파 간의 작은 알력들로 마교의 성내의 분위기는 냉랭해져가고 있었다. 수뇌부인 교주와 장로들이 장기간 자리를 비우면서 팽배해져 있던 감정들이 격화되어 가는 과정이었다. 한편 마도관에서도 변화가 생겨났다. 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연과 현마종의 혈손 무진윤이 내공이 금제된 채로 구금동에 격리된 후로 그 산하의 수하들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건재하다는 전제라면 소교주 쟁탈전이 이어지겠지만, 네 종파의 혈손들을 살해한 혐의로 갇혔다는 소식이 공표되면서 천무연의 수하들은 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없음을 깨달았다. 천무연을 소교주로 지지하기 위하여 영입되었던 수하들은 지지선언을 철회했다. 천무연의 왼팔이라 할 수 있는 연현종의 극신이 배신이라며 이를 만류했지만 빠져나가는 인원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어찌 공자님께 충성을 맹세하고 배신한단 말이냐!' '배신이라뇨? 이미 소교주의 자리에서 물 건너 가신 천무연 공자님이 무슨 수로 우리 종파들을 지원해준다는 겁니까?' '우리가 현마종 산하에 포함된 게 아니라는 것을 잊었군.' '천여운 그 괴물과 부딪치지 말라고 분명 경고했었습니다.' 그들은 소교주가 될 천무연을 지지한 것이지 현마종을 지지 한 것은 아니었다. 검마종에서 영입된 인원을 포함해 열다섯 명이 빠져나가면서 천무연 일파는 원래 현마종 산하에 포함되어 있는 열하나 종파의 생도들만이 남게 되었다. '별 수 없구나.' '마도관은 천여운의 세상입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크으! 밖으로 나가서 공자님을 뒷받침 하는 수 밖에.' 어차피 천무연이 마도관에서 방출된다면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는 그들이었다. 대세를 거스를 수 없다고 판단한 천무연 산하의 생도들은 자진해서 마도관을 퇴관신청하여 나갔다. 천무연이 일파에서 빠져나온 열다섯 명의 생도들 중에 일곱은 가장 유력한 소교주 후보가 된 천여운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나, 한 명도 수하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어째서입니까? 공자님도 소교주로 등극하시려면 상위 종파의 입회자들을 모으셔야 하지 않습니까?' '필요 없다.' 천여운은 단 한 마디로 일축했다. 인재를 받을 때 충성심을 가장 크게 보는 천여운에게 있어서 그들은 안중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천여운의 산하로 들어가지 못한 일곱 생도들은 어중간한 입장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천여운과 그 수하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열다섯 명이었던 수하들은 이번에 새롭게 영입된 두 사람으로 인해 열일곱 명이 되었다. 최상위 종파인 사무종의 사마착과 중소 종파인 해도종의 이사흠이었다. 그들은 천여운이 네 종파의 혈손들과 겨루기 전에 충성을 맹세했기에 마지막으로 수하로 받아졌다. '소교주가 되실 천여운 공자를 모시고 싶습니다.' '상위 종파의 수하들이 필요하시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희를 받아주십시오.' '거절한다.' '네?' 천무연이 구금동에 갇히면서 천여운이 소교주로 가능성이 높아지자, 아직까지 누구도 지지하지 않았던 다섯 명의 생도들이 찾아와서 수하가 되기를 청했지만 전부 거절했다. 마지막까지 대세가 확실해질 때까지 간을 보던 자들을 받아 줄 생각 따윈 없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사마착과 이사흠의 빠른 선택이 운이 좋다고 볼 수 있었다. "주군! 그들을 받으셔야 합니다." 채택겸의 말에 몇 명의 수하들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천여운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이렇게 모인 이유는 천여운을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수하를 받아들이는 것만큼은 자신의 기준이 명확한 천여운에게 충성 맹세를 하려 했던 일급 생도들을 받기를 권하는 것이었다. "주군의 심중도 이해하지만 소교주로 등극하시려면 적어도 열두 명 이상의 상위 종파의 종주들이 입회자로 있어야 합니다." 채택겸의 말에 천여운이 인상을 찌푸렸다. 마도관 내에서 소교주 쟁탈전을 통해 다른 후보자들을 전부 제친 천여운에게 유일한 장벽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입회자들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마도관에서 소교주 후보자들이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모아야 하는 진정한 이유였다. 쟁탈전은 후보자들 간에 스스로를 증명하면서 후보를 줄이기 위한 경쟁이었지만, 마교라는 거대한 단체를 이끄는 수장이 되는 직전 단계인 소교주로 등극하기 위해서는 그를 지지하는 입회자들이 필요하다. 천여운의 산하에 상위 종파 출신은 고왕흘, 백기, 문규, 호상화, 채택겸, 우소정, 사마착 등이 있었지만 일곱 명에 불과했다. "다섯 명만 받으셔도 숫자를 채울 수 있습니다." 여섯 종파의 소교주 후보자들끼리만 쟁탈전을 벌일 때는 이런 문제가 없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산하에 있는 상위 종파의 세력들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많은 입회자들을 모을 필요가 없었지만 천여운은 아니었다. 사실 열두 명의 상위 종파 종주들이 입회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불과 이틀 전의 일이었다. 소교주 등극을 위해 상위 종파의 수하들을 모으라고 좌호법 이화명이 언질해주지 않았다면 몰랐을 뻔했다. 그 사실을 전해들은 수하들이 더욱 안달날 수밖에 없었다. "주군. 이번만큼은 제 생각도 채택겸과 같아요." 평소라면 천여운에게 이견을 보이지 않는 호상화 역시도 채택겸의 말에 동의했다. 천무연에게서 떨어져 나온 수하들은 전부 상위 종파의 생도들이었는데, 그들을 전부 거절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주군. 그들을 받으십시오!" 천여운이 수하를 받는데 있어서 신중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입회자들이 없어서 기회를 놓치는 것은 아무래도 아니었다. 한 번 내뱉은 말을 번복하는 것은 그렇겠지만, 입장이 어중간해진 그들도 천여운이 손을 내민다면 분명 잡을 것이다. 그러나 천여운은 그런 그들의 간언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다른 방법을 택할 거다." "네?" 의아해하는 수하들을 바라보던 천여운이 뜻밖의 선언을 했다. "오늘부로 나는 마도관을 나간다." ".....네에에에?" 폭탄선언과도 같은 말에 수하들이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직 마도관에서 지낼 수 있는 기간이 다섯 달 가량이 남았기에 육 단계 시험을 통과하긴 했지만 천여운이 남은 기간은 채우리라고 여겼던 수하들이었다. 마도관을 나가는 순간부터 그가 여섯 종파와 대립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주군. 지금 당장 나가시는 것은 위험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상위 종파에 속하는 수하들은 아직 마도관의 시험을 전부 마치지 않았다. 적어도 그들과 함께 하는 편이 천여운에게도 안전했다. "그리고 아직 상위 종파의 입회자들도 전부 모으지 않으셨는데, 무리하시는 것이 아닌지..." "아니. 상위 종파 이외에도 입회자들을 모으는 방법이 하나 더 있다." 천여운의 말에 수하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들 역시도 그 방법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방법은...." 그때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던 고왕흘이 빙그레 웃으면서 수하들에게 말했다. "걱정들 말게나. 주군 혼자서 나가는 게 아니니까." "앗? 설마 고왕흘도 나가시는 겁니까?" 진국이 눈이 동그래져서 고왕흘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평소라면 주군인 천여운의 일에는 누구보다도 제일 앞장서서 의견을 피력하는 고왕흘이 가만히 듣고 있기만 한 것이 이상하긴 했다. "나만이 아니네." "헤헤, 저도 천 공자님과 같이 나갑니다." "문규?" "나도 나간다." 문규가 신난다는 듯이 말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백기도 손을 들어서 함께 나간다고 의사를 밝혔다. '잠깐 설마?' 이들은 전부 오 단계 시험을 통과한 이들이었다. 설마 하는 생각에 채택겸과 호상화가 새로 들어온 사마착을 바라보자, 그가 쑥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부족하지만 저도 주군을 보필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이들은 사전에 천여운과 이야기를 마친 상태였다. 불가능에 가까운 육 단계 시험을 제하고 오 단계 시험까지 통과한 이들은 실질적으로 마도관의 모든 과정을 마쳤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미안하네. 이렇게 모두 모여 있는 자리에서 밝혀서." 고왕흘이 놀라하는 그들에게 어찌된 일인지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천여운이 이렇게 시기를 앞당겨서 마도관을 출관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앞서 밝힌 대로 소교주 등극에 필요한 입회자를 구하기 위한 다른 방법을 취하기 위해서였고, 다른 하나는 현재 마교에 교주를 비롯한 여덟 장로들이 중원 무림으로 출타하여 자리를 비운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죽은 독마종의 종주인 백오를 제외한 다섯 종파의 종주들이 없는 지금이야말로 천여운이 출관하기 가장 적절한 시기였다. "하면 저희들도 함께 하겠습니다!" "저희도 함께 하겠습니다!" 호상화가 마도관을 퇴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다른 수하들 역시도 이구동성으로 같이 하겠다고 외쳤다. 그러나 천여운이 고개를 저으며 다른 수하들에게 마도관에 남기를 권했다. "안 된다." "하, 하지만!" "너희들의 충심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정말로 내게 힘이 되고 싶다면 익히고 있는 무공을 완성해서 나와라." "아아아....." 천여운은 아직 그들이 더 강해질 여력이 있다고 판단했다. 전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오종이나 진국, 마칠 등은 아직까지 자신이 주었던 상위 종파의 무공조차 제대로 완성하지 못했다. 여섯 종파의 허를 찌르기 위해서 지금 출관하는 것이었지만, 자신의 욕심 때문에 그들이 자진 퇴관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가 아직 주군께 큰 힘이 될 수 없구나.' '일부러 우리를 배려하시는 거다.' '....강해져야 한다.' 그 동안 천여운과 함께 지내온 시간이 있었기에 그 진의를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주군인 천여운에게 힘이 되기 위해서라도 더욱 강해져야겠다고 그들은 마음속 깊이 결의하게 되었다. '허봉이 많이 아쉽겠군.' 진국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허봉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푹 숙여서는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천여운의 제일 수하라 칭하는 허봉이 그를 따라가지 못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상심이 클까 하고 위로해주려 했다. -벌떡! 그런데 갑자기 허봉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는 남아있어야 할 수하들을 향해서 눈시울이 붉어져서 울먹이는 소리로 외쳤다. "제, 제가 주군을 잘 보필 할 테니, 여러분들은 걱정하지 마시고 얼른 강해져서 나오세요!" "........아." 그런 허봉을 바라보며 고왕흘이 손바닥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게 나갈 때까지 이야기하지 말라고 당부를 했는데 허봉이 저질러버렸다. 천여운이 마도관을 나간다고 한 순간부터 막무가내로 무조건 따라 나가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그만 예외로 두었었다. 그런데 이렇게 터뜨려버리면 마도관에 남아 있으라고 한 수하들의 기분이 어떻겠는가. "으으으 주군!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저희보곤 남으라고 해놓고는 허봉은 왜 데리고 가시는 겁니까!" "더 강해지라면서요!" 아니나 다를까 멍하게 허봉을 바라보던 수하들이 일제히 터져버렸다. 이에 자신의 실수를 인지한 허봉이 당황스러워했다. ".....허봉, 네가 알아서 해라." "주, 주군!!!" 골머리가 아파진 천여운은 알아서 해결하라는 말만 남기고 허봉을 내버려두고 가버렸다. 허봉은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진땀을 빼야만 했다. *** 그날 저녁 술시(戌時) 중엽, 마교의 성내 서남쪽에 독마종보다는 규모가 작았지만 꽤 큰 장원 하나가 있었다. 여느 장원들과 달리 화려한 느낌보다는 묘하게 음산한 느낌을 풍겼다. 장원의 대문 위쪽 문패에는 비환귀종(飛換鬼宗)이라 새겨져 있다. 대문의 앞에는 경비 무사로 보이는 흑의를 입은 사내 두 명이 서있었는데, 그들은 눈과 콧구멍만 드러나는 흰색 인피면구를 착용하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귀신처럼 보일 만큼 소름 돋는 모습이었다. 그 덕분에 서남쪽 성내에 살고 있는 교인들은 이 근방으로는 발걸음조차 하지 않을 정도였다. 경비를 서고 있는 사내들의 눈에 장원으로 다가오는 이들이 보였다. 약관으로 보이는 여섯 명의 젊은이들이었는데, 혼자서 툭 튀어나온 한사람 덕분에 눈에 띨 수밖에 없는 조합이었다. '허어?' 턱수염을 기르고 근육질의 청년이었는데 보통 성인 남자보다도 상체 하나를 더 붙인 만큼 큰 신장의 거구였다. 멀리서 볼 때는 그가 눈에 띠였는데 장원의 대문 앞까지 다가오자 선두에 서있는 묘한 분위기의 청년에게 자연스럽게 눈이 갔다. 등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에 새하안 얼굴의 청년이었다. 풍겨지는 기세만 보아서는 무공을 전혀 익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데, 등허리에 교차하고 있는 검집과 도집이 무인임을 짐작하게 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경비 무사를 서면서 이곳 근방에 있는 원만한 교인들의 얼굴은 다 알고 있는데, 이 청년들은 처음이었다. 경계심이 생겨난 무사들이 허리춤의 검병에 손을 올린 채 물었다. "무슨 용무이십니까?" 긴 머리카락의 청년이 품속에서 가지고 있는 파란 옥패를 내밀었다. 파란 옥패에는 십이(十二)라는 음각이 새겨져 있었다. "이, 이건?" 그것을 보는 순간 인피면구에 드러난 사내들의 두 눈이 커져서는 검병에 쥐고 있던 손을 떼고서 급히 포권을 취했다. "본교의 십이 장로님을 뵙습니다." 옥패는 다름 아닌 마교의 최상위 직인 장로의 신분을 증명하는 패였다. 십이 장로의 옥패를 보인 청년이 놀란 눈으로 포권을 취하고 있는 경비들에게 말했다. "십일 장로이신 환의 공께 십이 장로 천여운이 뵙기를 청한다고 전해주십시오." < 35장 소교주의 자격 (2) > 끝 < 35장 소교주의 자격 (3) '허어, 정말 독마종의 종주가 죽긴 죽었구나.' 경비 무사는 내심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마교의 성내로 독마종주이자 괴독마장 백오의 죽음은 소문이 날 대로 나있었다. 마도관의 육 단계 시험을 위한 도전을 받고 사망한 것이 알려지면서 모든 교인들이 천여운의 존재를 궁금해 했었다. '고작 약관에 불과한데 화경의 고수라니.' 믿기지가 않았다. 눈앞에 있는 청년이 비환귀종의 종주인 천면귀인 환의와 맞 먹거나 그 이상의 고수일 수도 있다는 것이 말이다. 그런데 아직 마도관에 있는 걸로 알고 있던 천여운이 어째서 이곳에 온 것일까? 의아해하던 경비 무사 중 한 명이 말했다. "종주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잠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경비 무사가 대문 우즉의 소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허봉이 작은 목소리로 옆에 있는 고왕흘에게 속삭였다. "꼭 귀신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네요." "그러게 말일세." 평소에 호탕한 고왕흘조차도 열려진 소문의 틈 사이로 보이는 음침한 비환귀종의 분위기에 침을 꿀꺽 삼켰다. 근육질의 거구에 맞지 않게 은근히 이런 것에 약한 면모를 보였다. '오랜만이다. 근데....좀 무섭긴 하네.' 예전에 방문했을 때는 조부인 구 장로 문연과 함께 왔었기에 덜했는데, 생각 외로 음침한 분위기에 닭살이 돋을 것 같다 " 천면귀인 환의는 열두 장로들 중에서도 가장 괴짜라고 불리는 인물이었다. '공자님께서 설득이 가능하려나.' 그들이 이곳을 방문한 이유는 천면귀인 환의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였다. 최상위 종파인 비환귀종의 종주이면서 장로인 환의는 조부인 문연과 더불어 여섯 종파 어디도 지지하지 않는 중립적인 인물이었다. '할아버지께서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원래는 구 장로였던 문연은 육 장로였던 백오가 직위가 낮아지면서, 얼떨결에 팔 장로로 승진했다. 덕분에 교주를 따라서 마교 밖으로 출타 중인 상태였다. 지인의 손녀라고 해도 본인이 아닌 이상 크게 도움 될 것 같진 않았다. 그때 대문 안쪽에서 누군가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이었다. 한 명은 손님이 온 것을 알리기 위해 들어갔던 경비 무사였고, 한 명은 머리를 옥비녀로 틀어 올려서는 노란 나비가 그려진 붉은 비단 옷을 입은 미남자였다. 분명 남자였는데, 하안 분칠에 입술에 붉은 연지를 발라서 묘하게 중성적인 느낌이 났다. '여긴 정상적인 사람이 없네.' 하마터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지만 허봉은 입을 굳게 닫았다. 붉은 옷의 미남자가 그들을 향해 다소곳하게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비환귀종의 총관을 맡고 있는 누야연이라고 합니다. 십이 장로님께서 오셨다고 들었는데.....이분이신가요?" 말투마저도 묘하게 여성스러웠다. 그런데 그가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천여운이 아니고 고왕흘이었다. 아무래도 처음 보는 이들은 거구인 그에게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흠흠, 이분이 제 주군이십니다." 고왕홀이 천여운을 두 손으로 가리키며 정정해주었다. 그 말에 붉은 옷의 미남자, 누야연이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여성스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어머머, 본의 아니게 결례를 범했네요. 십이 장로님을 뵙습니다." "천여운입니다." 거북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천여운은 무표정하게 포권으로 답례했다. 총관 누야연이 경비 무사들에게 대문의 문을 열게 하고는 천여운에게 말했다. "저희 주인님께서 객당으로 드셔서 다과(茶菓)라도 하시길 권하십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불쑥 찾아왔는데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말과 함께 천여운이 일행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가려하자, 경비 무사들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천여운이 눈을 가늘게 뜨고 누야연을 바라보았다. "아아아, 깜빡했군요. 저희 주인님께서는 장로님 혼자 오시라고 하셨습니다." ".....이들은 제 사람입니다." "죄송하지만 저희 주인님께서는 낯을 많이 가리셔서요. 양해 부탁드립니다." 정중하게 이야기를 했지만 천여운 외의 다른 사람은 들이지 않겠다는 의사가 분명했다. 불쾌한 부분도 있었지만 밤늦게 찾아와서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입장은 천여운 자신이었다. "실례인 줄 알겠지만 수하들인 저희를 두고 독대했을 때, 주군께서 위험하지 않다고 어떻게 장담하실 겁니까?" 고왕흘이 나서서 누야연에게 기분 나쁜 기색을 드러냈다. 그러자 누야연이 베시시 웃으면서 마음에 든다는 듯이 말했다. "멋지신 분이 충성심도 높군요. 저희 종주님께서 본교의 장로님에게 함부로 대할 만큼 무례하신 분은 아니랍니다. 호호호, 그럼 이렇게 하지요. 한 분만 참관을 하도록 해드리겠습니다. 이상은 제가 종주님께 혼난답니다." "하!" 허봉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다섯 명 중에 고작 한 명이 같이 간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그러나 없는 것 보다는 나았다. 누가 같이 들어갈지 눈치를 보고 있는데 문규가 자발적으로 나섰다. "제가 함께 들어갈게요." 그녀가 이중에서 유일하게 십일 장로 환의와 안면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모두가 납득했다. "흐음." 문규를 바라보는 누야연의 눈빛이 묘하게 빛났다. 그렇게 천여운과 문규는 총관 누야연을 따라서 비환귀종의 장원으로 들어갔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외당 바깥 쪽의 넓은 마당이 드러났다. 보통은 잔디가 있을 법한 마당은 돌바닥이었고, 그 위에는 짚으로 만들어진 인형에 붉은 옷을 입혀놓은 특이한 구조물들이 세워져 있었다. 짚으로 만든 인형의 얼굴에 인피면구를 씌어놓았는데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악취미로군.' 바깥에서 볼 때도 어렴풋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안으로 들어오니 더욱 그랬다. 외당에서 내당으로 들어가는 작은 전각으로 지나치자, 우측에 화려하게 꾸며놓은 객당이 보였다. "종주님. 손님을 모셔왔습니다." 누야연이 객당 앞에서 큰 소리로 고했다. 객당의 대청에는 긴 탁자가 놓여 있었는데, 그곳에 일곱 명의 푸른 비단 옷을 입은 학사의 자태를 가진 중년인들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들은 전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인피면구?' 천면귀인 환의가 인피면구 제작의 일인자라고 들었지만 이렇게 정교할 줄은 몰랐다.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어색한 부분도 없었고 완전히 같은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대청으로 오르자 가장 상석에 앉아있던 중년인이 혼자 일어나서 천여운에게 포권을 취했다. "어서 오시게. 비환귀종의 종주인 환의라고 하네." 이에 문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예전에 보았던 얼굴과 달랐다. 천면귀인이라는 별호답게 환의의 원래 얼굴을 본 사람은 현 교주 이외에는 아무도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짖궂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대체 무슨 짓이지?’ 예전부터 조부인 팔 장로 문연에게 환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문규였다. 독특한 사람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첫 만남부터 기괴한 짓을 할 줄은 몰랐다. [공자님. 제가 알고 있던 장로님의 얼굴과 달라요.] 문규의 전음에 천여운이 아무 내색하지 않고 환의라고 칭한 중년인에게 포권을 취했다. "이번에 십이 장로가 된 천여운입니다." "알고 있네. 이쪽으로 와서 다과라도 하면서 이야기하세." 긴 탁자 위에는 단향이 나는 간식들과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주전자가 있었다. 가만히 있던 문규가 미심쩍은 눈빛으로 환의를 향해 포권을 하며 말했다. "마룡장종의 문규입니다. 오랜 만에 환 숙부님을 뵙습니다." 그녀의 인사에 자리에 않아있던 환의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던 자들 중에 우측에 앉아있던 한 명이 살짝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반면 상석 앞에 서있던 환의의 눈빛은 처음 보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잠시 후에 입 밖에서 나온 말은 문규를 안심시켰다. "아! 오랜 만에 보는구나. 마도관으로 들어 가기 전에 문연 형님과 함께 봤었는데 그건 잘 관리하고 있었군. 주의사항을 잘 기억했나보군." "아아아! 기억하고 계셨군요. 숙부님." 그 말을 듣고서야 문규의 얼굴이 환해졌다. [환의 장로님이 맞아요!] 그녀가 인피면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자는 그것을 만든 당사자인 천면귀인 환의뿐이었다. '흐음.' 그런데 그런 그녀의 확신이 가득찬 전음에도 불구하고 천여운의 표정은 개운치 않았다. 가만히 서있는 천여운에게 환의가 자리를 가리키며 앉기를 권했다. "왜 그러나? 이쪽으로 와서 앉게나." "하나만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무엇인가?" "제가 왜 장로님을 뵙기를 청했는지 혹시 알고 계십니까?" 곧바로 본론을 꺼내들자 문규가 눈이 동그래져서 천여운을 바라보았다. 장로인 그의 지지를 얻고자 왔기에 담소를 나누면서 좋은 분위기를 유도할 거라는 예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런 천여윤의 질문에 환의가 여유로운 얼굴로 답변했다. "본 종주의 옥패를 얻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닌가?" 놀랍게도 환의는 천여운이 이곳으로 온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소교주로 등극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전자는 열두 상위 종파의 종주들이 입회를 하는 방법이 있다. 그리고 다른 후자는 열두 장로들 중에서 세 명의 장로들에 게 소교주로 인정을 받는 것이었다. 그 인정의 증표가 바로 그들이 가진 장로의 신분을 나타내는 옥패였다. 옥패를 바치는 것은 소교주로 인정하는 것과 동시에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증표가 되기도 했다. "역시.....알고 계셨군요." "소교주 쟁탈전에서 승리한 천 장로가 마도관에서 나오자마자, 급히 본 종주를 찾았다는 것은 그 이유밖에 없지 않나?" 열두 명의 입회자들을 찾았다면 천여운이 이렇게 조용히 마도관을 나오자마자 자신을 찾을 리가 없다고 짐작했던 환의였다. 교주를 비롯한 여섯 종파의 종주들이 교내에서 자리를 비운 지금이야말로 방해받지 않고 남아있는 장로들을 끌어들이기에 적기였던 것이었다. "잘 됐군요. 그럼 더 이상 본교의 장로로서 대하지 않겠습니다. 본교의 소교주 후보로서 독대를 요청 드립니다." 이 의미는 컸다. 장로로서는 동등한 입장이었지만, 소교주 후보로서 대한다는 것은 장로인 환의에게 충성맹세를 받으러 왔다는 의지를 표출한 것이었다. 그 말이 끝나자 잠시 가만히 있던 환의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처음부터 소교주 후보로 대했네만." "네?"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 장로들의 충성이 담긴 옥패를 받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시험을 해볼 수 있다는 것을 말이야." "그 말씀은?" "본 종주는 지금 자네를 소교주 후보로서 시험하고 있는 것일세." 환의는 말로만 들어왔던 여섯 종파 이외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여운을 만나기를 학수고대 해왔다. 마도관의 기수 역사상 칠십여 년 만에 육 단계 시험을 통과 한 소교주 후보. 심지어 열두 장로들 중에서 살상 능력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독마종주 백오를 꺾은 천여운이 어떤 인물일지 매우 궁금해 했었다. "본 종주는 자네에게서 두 가지 시험을 해보려고 하네. 첫 번째가 통찰력이지. 사실은 담소를 나누면서 시간을 주려고 했지만 자네가 먼저 본론을 꺼냈으니, 나도 본론부터 말하도록 하지. 이곳에서 본 종주가 누구인지 알 수 있겠나?" 환의가 자신의 양옆에 앉아있는 여섯 명을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까지 포함해서 총 일곱 명이었다. '아!' 문규의 눈에 당혹감이 서렸다. 일곱 명의 환의들은 어떤 특수한 수를 썼는지, 동일한 수의 기운을 풍기고 있어서 기감으로도 쉽게 구분할 수 없었다. '너무 어려워.' 더군다나 환의가 만든 인피 면구는 너무도 정교해서 주름 하나부터 수염의 모양까지도 동일해서 육안으로는 더더욱 불가능 했다. '본 종주가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인피면구에 몇 년이나 행동 훈련을 시킨 자들이다. 아무리 기감이 뛰어나도 쉽게 맞출 수가 없지.' 통찰력을 운운할 만큼 충분히 자신감을 보일 만 했다. "그냥 맞추라고는 하지 않겠네. 우리와 다과를 먹으면서 담소를 나누면서..." "찾았습니다." "뭐?"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천여운이 누군가를 응시했다. 그런데 그가 응시한 자는 일곱 명의 환의들 중에 있지 않았다. "아?" 천여운이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자는 대청의 입구 쪽에 서있는 총관 누야연이었다. < 35장 소교주의 자격 (3) > 끝 < 35장 소교주의 자격 (4) > "네? 저라고요?" 총관 누야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나비 문양이 그려진 붉은 비단 옷에 화장까지 한 그의 모습은 마교의 열두 장로 중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천 공자님. 환 숙부, 아니 장로님께서 이 분들 중에 누구인지 묻지 않았나요?] 문규가 다급히 천여운에게 전음을 보냈다. 환의는 자신의 양옆에 앉아있는 여섯 명을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었다. 완전히 같은 모습에 행동마저도 완전히 똑같이 하는 일곱 명의 환의들을 구분할 수 없었지만, 내심 문규는 아까 전에 자신을 소개했을 때 고개를 돌렸던 우측에 앉아있는 환의가 진짜 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했었다. 담소를 나누다가 확실해지면 천여운에게 알려주려 했는데, 완전히 뜬금없는 사람을 지목하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흐으음, 조금 당황스럽네요. 제가 종주님이라고 주장하실 줄이야." 총관 누야연이 자신의 입술을 매만지며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총관 누야연을 바라보며 천여운이 손으로 탁자에 않아 있는 일곱 환의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환 장로님께서는 저들을 가리키기는 했지만 말씀하실 때 이곳에서 본인을 찾으라고 얘기하셨죠. 일곱 명 중에서 본인이 있다고 단정 짓지 않은 걸로 기억합니다만." "아!" 천여운의 그 말을 듣고서야 그녀도 환의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나도 본론부터 말하도록 하지. 이곳에서 본 종주가 누구인지 알 수 있겠나?' 생각해보니 환의는 그들을 가리키면서도 이들 중이라는 표현을 쓴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총관 누야연이 환의라고 확신하기도 섣불렀다. "그 말 하나로 제가 종주님라고 말씀하시다니. 너무 경솔하게 선택하셔서 기회를 쉽게 져버리는 게 아닐지." 태연하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총관 누야연을 바라보며 천여운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사실 더 쉽게 알아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쉽게 알아보는 방법?" "잠시 결례를 범하겠습니다." "네?" 바로 그 순간 천여운의 신형이 번개처럼 총관 누야연에게 쇄도했다. 어느새 푸른 빛의 도강이 서린 천여운의 손날이 총관 누야연의 목을 단숨에 베려고 했다. 피하기에는 너무도 쾌속했다. -팍! 치치치치칙! "아아!" 갑작스러운 천여운의 공격에 놀랐던 문규의 두 눈이 커졌다. 그저 총관이라고 생각했던 누야연이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손에 푸른빛 강기를 만들어내 천여운의 도강을 막아냈다. 천여운이 입꼬리를 올리며 자신의 공격을 막아낸 누야연에게 말했다. "이래도 본인이 아니라고 말씀하실 겁니까?" "......이것 참 난감하군요." 천면귀인 환의의 시험. 그것은 통찰력을 떠나서 맞추기 힘든 시험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의 얼굴이나 특징이 알려져서 천여운이 알고 있다면 모를까 현 교주 이외에는 그 모습조차 알려지지 않은 환의였다. 심지어 지인의 여식인 문규조차도 환의의 실제 목소리도 생김새도 알지 못했다. 정답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 정답을 찾아야 하는 것은 불가능이었다. 환의는 마교의 열두 장로 중에서 가장 괴짜라고 불리는 만큼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첫 번째 시험이라고 낸 것은 맞추라고 낸 것이 아니라 그를 놀라게 해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기 위해서였다. 적어도 이런 상황 속에서 천여운이 혼란스러워하지 않고 차분하게 상대를 찾으려고 하는 모습만 보였어도 만족하려 했다. 그런데 설마 정말로 자신을 맞추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떻게 안 거죠?" -솨아아아아! 총관 누야연이 숨겼던 기세를 풀자 대청 전체의 공기가 무겁게 느껴질 만큼 강렬한 기운이 발산되었다. 초절정의 고수인 문규조차도 살이 떨릴 만큼 강대한 역량이었다. 음기(陰氣)가 짙은 내공을 익혔는지 음산함 마저 느껴졌다. "그저 감으로 찍었다고 말씀하진 않겠죠?" ".....전음입니다." "전음?" 천여운은 아까 전을 떠올렸다. 처음 총관 누야연을 만났을 때는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를 완벽하게 숨기고 있었기에 전혀 의심을 하지 않았다. 물론 특유의 중성적인 행동도 이에 한몫했다. 그런데 대청 위에 있는 일곱 명의 환의를 보면서부터 뭔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챘다.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말을 하던 환의가 문규가 인사를 하고 나서부터 곧바로 답변하지 않고 약간씩 시간차를 두고 답했다. '왜 그런 거지?' 이를 이상하게 여기던 천여운은 문득 문규가 자신을 향해 전음을 보낼 때 미세하게 떨리는 목울대 부근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일부러 환의가 빠르게 대응하지 못할 만한 화제로 말을 걸었다. 예상대로 상석에 서있는 환의는 천여운의 말에 곧장 답변하지 않고 시간차를 두고 말했다. '아무도....목울대가 떨리지 않는다.' 자신의 추측이 틀렸나 잠시 당황해하던 천여운은 혹시 목울대가 떨리지 않더라도 전음이 가능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노에게 물어보았다. '나노. 혹시 아까 전에 문규가 내게 보낸 전음 같은 소리가 이 대청 안에서 들리는지 알아낼 수 있어.' 이것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는데 뜻밖에도, [가능합니다. 진동이 다른 음파의 주파수를 탐지했습니다. 사용자의 청각으로 다른 주파수의 소리가 들리도록 조정합니다.] -삐이이이! 나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천여운의 귓구멍으로 휘파람 소리보다도 얇은 이상한 소리가 멍하게 울리더니 이내 지금까지 듣지 못했던 무언가가 들려왔다. [처음부터 소교주 후보로 대했네만.] 울리는 듯 한 소리가 들리자 상석에 서있는 중년의 환의가 따라서 말했다. "처음부터 소교주 후보로 대했네만." '아!' 누군가 전음으로 말하고 있었고, 상석의 환의는 이를 그대로 따라서 육성으로 이야기했다.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 장로들의 충성이 담긴 옥패를 받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시험을 해볼 수 있다는 것을 말이야.]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 장로들의 충성이 담긴 옥패를 받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시험을 해볼 수 있다는 것을 말이야." 일곱 명의 환의들 중에서 목울대가 떨리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들 중에서 전음을 하고 있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음은 너무도 뚜렷하게 자신의 뒤쪽, 즉 대청의 입구 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하! 전음의 도청이 가능하다니.' 진짜 환의가 누구인지 알아낸 것보다도 나노의 능력을 활용하면 전음조차도 도청이 가능하다는 게 더욱 천여운을 놀라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노의 능력으로 전음을 도청을 했다고 설명해봐야 이해할 수도 없고, 굳이 드러낼 필요가 없는 능력이었다. "문규가 인사를 하고나서부터 계속 시간차를 두고 대답하시더군요. 거기서 누군가 전음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그런데 일곱 분들 중에서 목울대가 떨린다거나, 뭔가 전음을 보내는 분은 아무도 없더군요. 그렇다면 이 대청에 있는 사람들 중에 전음을 보낼만한 사람이 좁혀졌습니다." "이런......" 천여운의 설명에 총관 누야연의 표정이 묘해졌다. 사실 누야연은 장원의 대문 입구에서 문규를 보자마자 알아챘었다. 자신이 만든 인피면구인데 그것을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처음에는 천여운 외에는 누구도 장원 내로 들이지 않으려 했던 그였지만 중간에 생각을 바꾸었다. '아니야. 이 아이를 이용하면 되겠구나.' 문규가 천여운의 조력자로 왔다면 그를 도와서 진짜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내려할 거라고 여겼다. 자신과 유일하게 연이 있는 문규를 속인다면 천여운이 더욱 진짜 자신을 찾는데 혼란스러워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 오판이었다. "일부러 혼란을 주기 위해서 이 아이가 참관하도록 했는데 제 꾀에 제가 빠졌군요. 대단합니다." 총관 누야연은 진심으로 천여운의 통찰력을 인정했다. 고작 약관에 불과한 나이인 그가 이 정도로 냉철하게 상황을 살필 줄은 몰랐다. 누야연이 여전히 천여운과 강기를 대치한 상태로 요염하게 웃으며 말했다. "다시 인사를 해야 겠군요. 비환귀종의 종주 환의입니다." "천여운입니다." "첫 번째 시험을 보기 좋게 통과하셨으니, 두 번째로 바로 이어가도 되겠군요." "두 번째면?" "이곳은 천마신교입니다. 제 인정을 받고 싶다면 무인답게 힘으로 저를 눌러보시죠." -파팡! 그 말과 함께 환의의 손에서 강한 반탄력이 일어나며, 천여운의 손에 두르고 있던 도강이 튕겨나갔다. '굉장한 공력이다.' 천여운이 곧장 대응하려고 하자 누야연의 귀신과도 같은 조법이 수많은 잔영을 만들어내며 그에게 쇄도해왔다. -파파파팍! 천여운이 접무도법의 도초를 펼쳐서 이를 유연하게 막아냈지만, 절묘하게 가슴을 파고드는 쾌속한 발차기에 맞고 신형이 밀리면서 대청 바깥의 마당으로 튕겨 나가버렸다. "큭!" -탁! 파스스! 마당에 발을 밟자마자 가슴에 파고든 발차기에 실린 공력이 빠져나가면서, 발을 디딘 곳에 균열이 일어났다. "공자님!" 문규가 놀라서 외쳤다. 마교 최고의 고수라 불리는 열두 장로였기에 강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녀의 눈에는 환의의 움직임이 잔상처럼 보일 만큼 쾌속했다. 환의가 여유롭게 대청에서 걸어 내려와 천여운에게 다가왔다. "대청에서 싸우다가 객당이 부서질 것 같아서요. 후후후." '귀영조법(鬼影爪法).' 천여운의 방금 전에 환의가 펼친 초식을 떠올렸다. 마도관의 오 층 비급 서재에서 보았던 귀영조법의 초식이 틀림없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비급 서재에 있는 초식보다 더욱 정교하면서 허점들이 보완되어 있었다. '비급서에서 보았던 초식이라고 생각하고 대응하면 안 되겠구나.' 그 정도 되는 고수가 자신의 무공을 발전시키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진지해지는 천여운의 눈빛을 보며 환의가 웃으며 말했다. "독마종주를 이겼다고 해서 기대를 많이 했어요. 그 노인네가 지팡이나 짚고 다니는 것처럼 보여도 참 괴물 같은 양반이거든요." 독마종주 괴독마장 백오와 직접 겨룬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정파 무림맹과의 전장터에서 몇 번이나 그 위용을 눈으로 보았었다. 괴짜이긴 했지만 환의 역시도 무인이었다. 같은 장로였기 때문에 겨뤄볼 명분이 없었기에 겨루지 못했지만, 대인 살상 병기라 불리는 백오와의 대결을 심상으로 몇 번이나 그렸던 그였다. 그러나 무공을 아무리 갈고 닦아도 심상 속에서 백오와의 대결은 늘 그의 패배였다. '그를 이긴 당신이라면 충분히 대안책이 되겠죠.' 천여운을 통해서 시험해보고 싶었다. 독마종주를 이긴 그를 제압한다면 지금의 자신이 백오를 능가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들어보니, 우호법 섭맹에게 도법을 전수받아서 도의 고수라죠?" 그의 말이 끝나자 대청 위에 있던 일곱 명의 가짜 환의 중의 한 사람이 나타나 화려한 붉은 도집을 넘겨주었다. -챙! 붉은 도집에서 도를 뽑자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도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현철로 만들었는지 은은한 묵빛을 띠고 있는 환의의 독문 병기는 얼핏 보아도 뛰어난 보도였다. "마침 잘 됐군요. 제 독문무공도 도법이거든요." 비환귀종의 종주 환의의 독문무공은 비환귀도법(飛換鬼刀法)이었다. 오 층 비급 서재에 있던 귀영조법이 본신 절기가 아님은 알고 있었기에 천여운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유찬과의 싸움 이후로 오랜 만에 겨루는 도법의 고수였다. 물론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무력을 지녔다. -챙! 천여운도 등허리에 교차되어 있는 흰색의 도집에서 백룡도를 뽑았다. 백룡도의 새하얀 도신이 드러나자 만족스럽다는 듯이 환의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절세보도로군요. 좋은 대결이 되겠어요. 백오 영감님을 상대한 것처럼 최선을 다하세요." -팟! 그 말과 함께 환의의 신형이 천여운에게 쇄도해왔다. 환의의 손이 번쩍이자 그의 도식들이 화려한 도결을 그리며 천여운을 압박했다. "합!" 천여운이 접무도법의 방어초식인 제 이 초식 회원접경(回圓蝶警)을 펼쳤다. 그의 백룡도에서 펼쳐진 도식이 쾌속하게 회전하며 환의의 화려한 도식들과 부딪쳤다. -채채채채챙! 강기가 실린 도초들이 부딪치며 강한 금속음이 사방을 울렸다. 그 소리가 어찌나 컸는지 장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천여운의 수하들에게마저 들릴 정도였다. 고왕흘이 인상을 찌푸리면서 경비 무사에게 항의했다.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겁니까?" "저희도 알 수 없습니다." 대문 밖에 있는 것은 경비 무사도 마찬가지였다. 안에서 들려오는 금속성만 들어도 누군가 대결을 펼치고 있는 소리가 분명했다. 아무래도 천여운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생각한 수하들은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이럴 때 만큼은 가장 행동력이 강한 백기가 앞으로 나섰다. "장원 안으로 들어 가야겠습니다." "안 됩니다." -파파파파팍! "끄억!" 경비 무사들이 제지하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백기는 순식간에 속사포와 같은 발차기로 그들을 쓰러뜨린 다음에 대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를 바라보며 사마착이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으음, 이래도 되는 겁니까?"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이곳은 본교 십일 장로인 환의의 장원이었다. 이렇게 경비 무사들을 쓰러뜨리고 안에 쳐들어간다는 것은 비환귀종에 대한 도전이나 마찬가지였다. "주군이 위험에 처했을 지도 모르겠는데, 그게 무슨 상관인가요. 에잇!" 그 말과 함께 허봉도 비환귀종의 장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주군이 우선일세. 어서 우리도 따라 가세나." "네, 넵!" 고왕흘에 등살에 이기지 못한 사마착도 결국 그들을 따라서 장원 안으로 진입해야만 했다. 한편 장원 내 객당의 마당에서 대결을 펼치고 있는 천여운과 비환귀종의 종주 환의는 그 짧은 시간에 벌써 십 초식 가량을 맞부딪쳤다. 둘 다 쾌속한 도초를 펼쳤기 때문에 이것을 지켜보는 문규의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이게 화경의 고수들 간의 대결.' 객당 앞의 마당은 도강의 흔적들로 가득했다. 환의의 말대로 객당의 대청에서 싸웠다가 건물이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강하다. 약관에 이 정도 무위라니. 하지만 이 정도로 백오 영감의 목을 베었다고 하기에는 모자라다.' 천여운과 십 초식을 겨뤄본 환의는 그의 무위에 감탄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육 단계 시험을 참관했던 사무종의 사마 종주에게 듣기로는 압도적인 실력으로 백오의 목을 베었다고 들었는데, 그 정도까지는 아닌 듯 했다. "이래서 제 옥패를 받을 수 있겠나요?" 도를 부딪치면서 환의가 실망스럽다는 듯이 소리쳤다. -채채채채챙! 그런 도발과도 같은 말에도 천여운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마도관 내에서도 그를 도발하는 이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이 정도에 넘어갈 것 같았다면 예전에 그들의 손에 쓰러졌을 지도 모른다. '접무도법만으로는 환 장로를 제압하기는 힘들다.' 전투 경험이 많은 환의는 전장에서 우호법이 싸우는 것도 보았기에 접무도법의 허실을 잘 알고 있었고, 변초를 쓰더라도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결국 전력을 다 해야만 그를 빠르게 제압할 수 있다. '그렇다면......한 번 시험해볼까?' 천마검공의 검초는 현재의 천마검법과 흡사하기 때문에 장로인 환의가 몰라볼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펼칠 수 있는 최강의 무공은 두 가지였다. 검마의 파훼검법 이십사마검과 극도신의 도법. 천여운의 선택은 후자였다. -탓! 천여운이 갑자기 보법을 펼쳐서 거리를 벌리자 환의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일정한 간격이 되자 백룡도를 들고 있는 천여운의 자세가 접무도법의 기수식과 완전히 달라졌다. '응? 이게 뭐죠?' 경험이 많은 환의조차도 처음 보는 기수식이었다. 천여운 정도 되는 무위의 실력자가 약한 무공을 펼칠 리는 없었기에 환의가 진중해진 눈빛으로 도신에 공력을 끌어올렸다. 천여운이 그를 향해 조용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잘 조절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전력으로 막으십시오." "네?" -팟! 바로 그 순간 천여운의 신형이 지금까지와 다르게 패도적인 기세로 쇄도해왔다. 접무도법이 쾌속한 도법이었다면 그와는 완전히 상반되었다. 마치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멸(滅)하기 위해 존재하는 기세를 담고 있었다. '이, 이건가?' 눈앞에서 펼치는 숨이 턱 막힐 것 같은 엄청난 도초에 환의가 긴장한 얼굴로 비환귀도법(飛換鬼刀法)의 마지막 절초인 비도귀천(飛刀鬼天)을 펼쳤다. -채채채채채채챙! 순식간에 두 절초가 부딪지며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금속성이 터져 나왔다. 비도귀천을 펼치는 환의의 눈빛에 당혹감이 서렸다. "헉!" -차창! 차창! 차창! 쾌속함의 진수라 할 수 있는 비도귀천의 도초가 만들어내는 화려한 도결이 기이한 각도에서 파고드는 천여운의 도결에 파훼되고 말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도초를?' 환의도 도의 고수이기 때문에 안다. 이런 기이한 각도로 패도적인 도결을 펼치다간 근육이 파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천여운은 해내고 있었다. -챙! 환의가 어떻게든 도초를 막아내려 했으나, 손바닥이 찢겨져 나갈 만큼 패도적인 위력에 도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문제는 천여운의 도초의 마지막 식이 남았다. '아, 안 돼!' 마지막 도식이 강렬한 기세로 내려찍자, 기겁한 환의가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감고 말았다. -콰콰콰콰쾅! 엄청난 파공음이 귓구멍을 때렸다.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생각에 극도로 긴장한 환의의 얼굴이 땀으로 젖어서 분칠한 것이 흘러내렸다. "헉...헉...." 거칠어진 호흡을 내뱉으며 환의가 감았던 눈을 살짝 떴다. 자신을 반토막낼 기세로 내려쳐지던 천여운의 백룡도는 바로 옆으로 빗겨져 있었다. 그리고 천여운의 백룡도에서 뻗어나온 마지막 식의 도흔은 객당 마당을 반으로 가르다 못해 담장까지 베어버렸다. 가히 경악스러운 위력에 환의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진짜.....괴물이었구나.' < 35장 소교주의 자격 (4) > 끝 < 35장 소교주의 자격 (5) > 비환귀종의 장원 안으로 들어온 백기는 정원을 지나쳐서 외당 쪽에서 금속성이 들려오는 진원지를 찾았다. -채채채채채채챙!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는 우측 편의 전각 너머의 건물에서 들려왔다. 백기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곳을 향해 경공을 펼치려 했다. 그러나 불과 몇 걸음도 가지 못해서 멈춰야만 했다. -파파파팍! 갑작스럽게 나타난 푸른 비단 옷을 입은 중년의 사내가 음산한 내공이 담긴 조법으로 백기를 공격해왔다. 완숙한 초절정의 고수답게 백기는 기습 공격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각법으로 막아냈다. -팟! 순식간에 일 초식을 겨룬 두 사람의 신형이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중년의 사내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이제 고작 약관의 청년으로 보이는 백기의 무위에 놀란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중년의 사내가 외쳤다. "젊은이.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함부로 침입한 것인가?" -우르르르르! 중년의 사내의 외침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오십 명 정도 되는 흑의에 무장한 무사들이 외당 건물에서 몰려나와 그를 둘러싸려 했다. "백기!" 그때 뒤늦게 따라온 허봉과 고왕흘, 사마착 등이 나타나서 백기의 사각을 서로 등졌다. -탁! "으음, 예상대로 되었네요." 사마착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들며 중얼거렸다. 주군인 천여운이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밀고 들어오긴 했는데, 최상위 종파인 비환귀종이 외부침입에 대한 방비가 없을 리가 만무했다. -챙챙! 쌍단검을 들고 있는 흑의의 무사들은 경비 무사들과 비슷한 인피면구를 하고 있었는데, 얼굴 생김새들이 전부 흉악한 괴인과도 같았다. "진짜 악취미네요." 허봉이 긴장된 표정으로 환영검법의 기수식을 취하며 말했다. 오싹하게 만드는 저 인피면구는 상대로 하여금 위축감이 들게 만들었다. 물론 그것이 아니더라도 한 명 한 명이 일류고수의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과연 최상위 종파 중 하나인 비환귀종다웠다. "한 명도 아니고 네 명이라니 정말 겁을 상실했구나. 대체 어느 종파의 자제이기에 이렇게 무례한 것이냐!" 푸른 비단 옷의 중년의 사내가 노기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만약 마교의 성내에 있는 장원이 아니었다면 일단 제압부터 했겠지만, 이곳 성내의 사람들은 전부 교인들이었기에 묻는 것이었다. "무례라면 당신들이 더욱..." "잠깐만 기다려보게." 수하들은 밖에서 기다리게 해놓고 주군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는데 이를 가로막는 것에 불만이 차오른 백기가 화를 내려했지만 고왕흘이 이를 만류했다. '무조건 부딪칠 수는 없지.' 이에 고왕흘이 품속에서 두 개의 패를 꺼내 들어서 보였다. "응?" 하나는 마교의 단주 직위를 상징하는 금색 패였고, 하나는 종파를 상징하는 패였는데 마권종(魔拳宗)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마권종의 고왕흘이라고 합니다." "마권종?" 상위 종파이자 권으로 명성이 드높은 마권종이었다. 이를 알고 있는 중년의 사내가 더욱 불쾌해진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마권종이라면 고왕현 종주님의 자제인가?" "그렇습니다." "상위 종파의 자제가 이 밤중에 타 종파의 장원에 허락도 없이 들어오다니. 부친께서 이렇게 무례한 행동을 저지르라고 가르쳤는가!" 부친을 들먹이는 것이 기분이 나빴지만 고왕흘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언짢으셨다면 죄송합니다만. 아까 전에 장원으로 들어갔던 저희 주군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 듯하여 결례를 무릅쓰고 장원에 들어왔습니다." "주군?" "본교의 십이 장로이신 천여운 공자님이십니다." 천여운의 이름을 듣자 푸른 비단 옷의 중년인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현재 본교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이었다. 마도관의 역사상 칠십여 년 만에 육 단계 시험을 통과한 여섯 종파에 속하지 않는 교주의 자식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설마 아까 전의 그 손님이 천여운 공자였나?' 푸른 비단 옷의 중년인은 비환귀종의 외당주인 오궁이었다. 종주인 환의가 직접 나서서 응대하기에 지인인가 보다 생각 했는데, 아무래도 괴짜인 자신의 종주가 뭔가 문제를 일으킨 듯 했다. -채채채채채채챙! 객당에서 들려오는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그들에게 들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쾌속하게 부딪지는 소리만 들어도 호각임을 알 수 있었다. '어째서 종주께서 천여운 공자가 겨루고 있는 것이지?' 의아해하는 오궁에게 고왕흘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주군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는데 수하들인 저희가 어찌 그냥 지켜만 본단 말입니까?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고왕흘의 말에 일리가 있었지만 이곳은 비환귀종의 근거지였다. 그들이 활보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미안하네만. 자네들과 마찬가지로 종주께서 하시는 일에 수하들인 우리 역시도 간섭할 수 없네." 오궁의 말이 끝나자 오십여 명의 흑의의 무사들이 더 이상 진입할 수 없게 객당 쪽으로 가는 방향을 가로막았다. 일이 이렇게까지 흘러가니 어쩔 수가 없었다. 충분히 예의를 차렸기에 더 이상은 지체할 시간이 없다고 판단한 고왕흘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서 기수식을 취했다. 오궁도 공력을 끌어올려 귀영조법의 기수식을 취하며 마지막 경고를 했다. "아직 젊은 친구들이니 경고하겠다. 지금이라도 물러난다면 종주께 아뢰어 천여운 공자의 안위에 문제가 없도." -오싹! 오궁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온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강렬한 기운이 객당 쪽에서 치솟았다. 외당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곳으로 향해졌다. 바로 그 순간, -콰콰콰콰쾅! 엄청난 파공음과 함께 객당을 두르고 있는 담벼락이 갈라지더니, 푸른빛 도강이 뻗어 나와 바깥쪽 외당 마당의 바닥까지 선명한 도흔을 남겼다. "조, 종주!"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고 판단한 오궁과 비환귀종의 무사들이 천여운의 수하들을 버려두고서 객당 쪽으로 경공을 펼쳐서 들어가 버렸다. "우리도 따라가세!" 고왕흘과 백기, 사마착, 허봉도 기회다 싶어 그들을 따라서 객당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객당 마당에 들어섰더니 그들은 비환귀종의 무사들이 당혹스러운 듯이 가만히 서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아아아!" 수하들의 입에서 동시에 탄성이 흘러나왔다. 객당의 마당에는 천여운이 백룡도를 들고 서있었고, 그 앞에 나비 문양이 그려진 붉은 옷을 입은 총관이라 했던 누야연이 한쪽 무릎을 꿇고 무언가를 바치고 있었다. 그것은 본교의 십일 장로의 신분을 나타내는 옥패였다. "본교의 십일 장로, 비환귀종의 종주 환의가 천여운 공자를 소교주로 인정합니다. 제 충성의 증표를 받아주십시오." '총관이 아니었어.' 그의 정체를 몰랐던 수하들은 놀라워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엉망이 된 객당 마당을 보면서 천여운이 십일 장로 환의와의 대결에서 승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허봉이 히죽 거리면서, 경악한 나머지 멍하게 자신의 종주를 바라보는 오궁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히히, 감사합니다. 주군의 안위에 전~혀 문제가 없네요." * **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되고 객당에서 제대로 된 다과 자리가 준비되었다. 홀대 받듯이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천여운의 수하들도 다과 자리에 앉아서 따뜻한 차를 마셨다. 땀으로 얼굴이 젖어서 분칠 했던 것이 지워졌던 십일 장로 환의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고쳐서 나왔다. 그런데 지금 이 얼굴 역시도 환의의 원래 얼굴이 아니라 인피면구였다. 환의는 자신이 얼굴을 가리는 이유는 마교의 암종(暗宗)에 속해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였다. 비환귀종은 대대로 마교에서 암살 및 정보조작을 맡는 암종의 단원들을 육성했기에 그들을 통솔하는 환의는 누구에게도 얼굴을 밝히지 않도록 교주의 허락을 맡았다. "공자께서 교주의 자리에 오르신다면 제 얼굴을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호호호." ".....알겠습니다." 이런 여성스러운 태도는 의도된 것일 지도 올랐다. 다과 자리의 가장 상석에 앉아있는 천여운이 바로 우측에 있는 십일 장로 환의에게 물어보았다. "그런데 환야는 장로님의 친 자식이 아닙니까?" "아아....알고 계셨군요." 사실 천여운은 환의를 직접 만나서 설득하는 것보다 그의 자식인 환야를 만나서 수하로 거두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었다. 흉측한 외모를 가진 환야는 누구의 수하로도 들어가지 않았었다. '인피면구?' 나노가 있었기에 천여운은 그가 인피면구를 하고 있음을 바로 알아챘다. 어차피 외모와 상관없이 그를 수하로 받으려고 했던 천여운은 이것을 개의지 않고 환야를 설득했다. 그런 환야도 관심을 보이긴 했지만 끝내는 거절했다. 환야는 종주의 명이 없으면 자신은 누구도 따를 수가 없다고 밝혔다. 환야는 이야기를 하는 내내 자신의 부친을 깍듯하게 종주라고 칭했다. 자신의 의지로 주군을 정하지 못하는 환야를 이상하게 여긴 천여운은 그를 수하로 거두는 것을 포기하고, 이렇게 직접 환의를 찾았던 것이었다. "저는 자식을 가질 수 없답니다." "네?" 의아해하는 천여운과 일행들에게 환의가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희 비환귀종의 심법인 귀음공(鬼陰功)은 음기가 강하기 때문에 이를 익히기 위해서 어릴 적에 거세를 해야 하죠." "힉!" 듣기만 해도 뭔가 그랬는지 허봉과 고왕흘이 자신들의 주요 부위를 힐끗 쳐다보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고, 고자라니!" 거세라는 말에 화들짝 놀란 문규는 붉어진 얼굴로 덥다는 듯이 손을 휘저었다. 중성적인 환의의 태도는 의도된 것이 아니라 어렸을 적부터 거세된 생활을 해보면서 기인한 것이었다. 음기가 강한 귀음공을 익히면 더욱 음기가 강해지면서 외양이 남자보다는 여성스러움이 강해지는데, 어릴 때는 그것이 더욱 강하기 때문에 환야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서 흉측한 인피 면구를 통해 타인과 거리를 둔 것이었다. "저희 비환귀종은 그 대를 잇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양자를 거둔답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사제지간으로 보셔도 무방합니다." 의문이 풀린 천여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교주가 아닌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밝히지 않는 환의였지만, 충성을 맹세한 천여운을 마음에 들어 했기에 말해준 것이다. "여러분들은 오늘 여기서 들은 이야기는 머릿속에서 지우세요." 물론 그것은 천여운 뿐이었다. 위압감이 가득한 목소리에 허봉이 긴장한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환의가 잠시 무섭게 굳혔던 얼굴을 풀고는 고왕흘을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싱긋 웃으며 말했다. "우리 듬직한 고왕흘 단주는 괜찮아요." ".......저도 함구하겠습니다." 다른 의미로 고왕흘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한참 다과를 먹으면서 담소를 나누던 환의가 문득 궁금했는지 문규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우리 조카는 언제 밝힐 참이죠?" "네에?" "......마도관에서 나왔는데 계속.." "으아아아아아아아!!! 조, 조만간에 조부님께서 돌아오시면 마룡장종에 올린다고 하니 그때 얘, 얘기할 거에요." 기겁을 하면서 환의가 하는 말을 사전에 차단하는 문규였다. 그녀의 진짜 성별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천여운뿐이었다. 마도관에 들어갈 때야 그만한 사유가 있기 때문이었지만 굳이 동료듣에게까지 계속 인피면구를 쓰고서 숨길 필요가 없다는 사실은 그녀도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당장에 밝히기에는 뭔가 쑥스럽기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후후후, 알겠어요." 그렇게 시끌벅적한 다과 담소 자리가 끝나고 환의가 천여운과 일행들에게 권했다. "혹시 불편하시지 않다면 제대로 대접도 하지 못했는데, 당분간 저희 비환귀종의 객당에서 머무셔도 된답니다." 천여운에게 머물 종파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둘러서 권하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더라도 당분간 여섯 종파의 눈을 피해서 있을 장소가 필요했던 천여운이었다. 부탁하지 않더라도 배려해주니 감사했다. "장로님의 깊은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혹시 괜찮다면 한 사람을 데려와도 괜찮을지..." "물론이죠." 흔쾌히 허락하는 환의였다. 마도관을 출관하면서 천여운은 마음 같아서는 자라왔던 숙소로 돌아가서,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장 호위를 보고 싶었지만 비환귀종의 장원으로 바로 왔었다. 환의가 사람을 보내서 그를 데려와주겠다고 했지만 천여운이 직접 가겠다고 하였다. 오랜만에 자신의 유일한 안식처였던 그곳으로 가보고 싶었다. 천여운은 일행을 데리고 마교의 성내 남쪽에 자리하고 자신의 원래 집으로 향했다. 많이 변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천여운의 집은 여전히 깔끔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늘 부지런했던 장 호위는 매일 같이 일찍 일어나서 수련을 마친 후에 마당을 쓸고 정리했었다. '여전하구나.' 작은 마당에 부엌과 방이 두 개가 있는 기와집에서 장 호위와 열다섯이 되는 해까지 같이 지냈었다. 어떻게 본다면 부모와 같은 역할을 해준 그였다. 장 호위를 볼 생각에 즐거워진 천여운은 평소보다 경쾌한 발걸음으로 대문을 열어젖히고 들어갔다. '여기가 공자님의 생가(生家)구나. 헤에.' 문규와 수하들도 궁금해 하는 눈치로 뒤를 따라갔다. 그런데 대문 안으로 먼저 들어간 천여운이 마당에 우두커니 서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공자님?" 천여운이 떨리는 눈으로 장 호위의 굳게 닫힌 방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무 기적도 느껴지지 않아." < 35장 소교주의 자격 (5) > 끝 < 36장 뱀의 아가리 속 (1) > "네?" 고왕흘이나 문규, 백기, 사마착 역시도 초절정의 고수답게 기감을 열어보았으나, 집안에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둘 중 하나였다. 상대가 무위가 높은 고수여서 기척을 숨기는데 능하거나, 정말 집안에 아무도 없는 것이었다. 천여운이 다급히 장 호위의 방문을 열어보았으나 방은 비어 있었다. '뭐지? 이 시간에 없다고?' 자시(子時) 초였기에 자고 있다면 모를까 어딘가에 돌아다닐 시각은 아니었다. 장호위의 물건으로 보이는 짐들이 그대로 있는 것을 보면 여전히 이곳에 살고 있는 것은 확실한데 대체 무슨 영문인 것일까? '온기가 없다.' 살펴보니 방에서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겨울이기 때문에 아궁이나 화로에 불을 지펴서 집안에 온기가 돌게 했을 텐데, 방은 차가웠다. 사나흘 정도는 방치되어 있었던 듯 했다. 천여운이 장 호위의 방에서 나오자, 마당에 횃불을 밝히고 부엌부터 그의 방을 살폈던 수하들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하나 둘씩 모였다. "아무도 없습니다. 주군." 천여운의 표정에서부터 기분이 최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기에 허봉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보고했다. "공자님. 혹시 장 호위 님이 본교에 있는 자신의 종파라던가 어딘가에 다녀온다고 자리를 비운 게 아닐까요?" 문규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지만 천여운이 고개를 저었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가 알기로 장 호위는 무가 출신으로 고아라고 들었었다. '진정하자. 처음부터 살펴보자.' 천여운은 마당으로 나와서 바닥을 살폈다. 처음 들어왔을 때는 마당이 깨끗하게 쓸려 있어서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장 호위가 이 늦은 시각에 자리를 비웠다는 것은 분명 뭔가가 벌어졌던 게 틀림없었다. '이상하다. 너무 깨끗하다.' 사람은 없는데 집부터 시작해서 마당까지 정리가 되어있다는 것이 이상했다. 차라리 격하게 싸운 흔적이라도 있다면 그것을 토대로 추측이라도 해볼 텐데 이렇게 아무런 흔적조차 없어서야 난감할 뿐이었다. -꽉! 천여운이 입술을 깨물고 주위를 살폈으나 뭔가를 발견하기는 힘들었다. 아무래도 흔적을 지운 듯 했다. 이렇게까지 한다는 것은 이 일을 저지른 자들은 생각 이상으로 철두철미한 자들인 것 같았다. 육안으로 뭔가를 발견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천여운이 나노에게 명했다. '나노, 집과 마당 전체를 스캔해서 타인이 침입했거나 싸운 흔적이 있는지 확인해줘.' [알겠습니다. 사용자의 시각에 보이는 장소들을 전부 스캔하겠습니다.] 나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천여운의 동공이 파르르 떨리더니, 흰 빛의 선이 생겨나 마당부터 시작해 집을 스캔했다. 스캔을 전부 마치고 나서 얼마 있지 않아 나노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사용자의 시각 정보에 증강현실(增强現賁) 개안(開眼) 가동합니다.] 천여운의 동공이 미세하게 떨리며 시야로 흰 빛의 선들과 글자가 새겨지며 증강현실이 개안되었다. 천여운의 시각에 붉은색 빛이 생겨나며 어딘가를 표시했다. '아!' 집의 주춧돌 바로 위의 기둥 부근이었다. 워낙 밑에 쪽에 있다 보니 발견하지 못했는데, 그곳으로 다가가보니 뭔가 미세한 검흔으로 보이는 흔적이 남겨져 있었다. '검?' 이라기보다는 검기에 의해 남겨진 흔적이었다. 뭔가 검흔이 더 자세히 남아 있어서 초식을 그렸다면 더욱 알아내기 쉬웠겠지만 이렇게 살짝 그어져만 있어서는 뭔가를 알아내기 힘들었다. 이것만큼은 아무리 나노라고 해도 분석에 한계가 있었다. "검흔이로군요? 허어." 횃불을 들고 따라온 고왕흘도 주춧돌 위의 검흔을 바라보며 신음성을 흘렸다. 아무래도 장 호위는 누군가에게 습격을 당한 듯 했다. 문제는 그의 생사였다. 어릴 때부터 자신을 키워왔던 장 호위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고 확신이 들자 천여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것은 지금까지 보여줬던 어떤 모습보다도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차갑게 식어버린 눈빛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터지기 일보 직전 상태의 화산을 보는 것만 같았다. "검흔이라면 범위는 좁혀지는 군요." 곁으로 다가온 사마착이 검흔을 바라보더 니 천여운에게 말했다. 수하들 중에서 천여운의 적이 누구인지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여섯 종파 중에서 검을 쓰는 종파는 셋입니다." 검마종과 현마종, 그리고 음마종이 검을 다룬다. 물론 음마종의 주류는 검이라고 할 수 없으나 의심이 간다면 용의선상에 세우는 것이 맞았다. 고왕흘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주군께서 찾은 흔적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이 일을 벌인 자들이 지운 것 같습니다. 철두철미한 자의 소행으로 보입니다." 나노의 스캔으로도 단 하나의 흔적만 발견했으니 확실히 이런 일에 능숙하면서 철두철미한 자들이었다. '어느 종파지?' 라고 추측을 해보려 해도 세 종파 모두가 가능성이 높았다. 검마종과 음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의 팔을 잘랐기 때문에 그들은 분명 천여운에게 분노를 불태우고 있을 것이다. '현마종은 빼야 하나?' 마도관에서 역으로 그들을 함정에 빠뜨려서 살해 혐의자로 만들었지만, 아무 정보도 없는 현마종에서 이를 알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현마종의 소교주 후보인 천무연과 그 혈손인 무진윤이 생도 살해 혐의로 구금동에 갇혀 있는데다가, 죽은 네 명 의 혈손들로 인해 네 종파와의 알력으로 천여운에게 신경 쓸 여력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심적으로 현마종도 용의선상에서 빼서는 안 될 것 같다고 여겨졌다. '어떻게 해야 하지?' 고민하는 천여운에게 허봉이 한 가지 의견을 제시했다. "주군. 차라리 의심 가는 종파를 수색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듣기로는 지금 본교의 모든 장로님들이 자리를 비워서 좀 더 잠입하기 쉽지 않을까요?" 일 장로에서 오 장로까지 맡고 있는 여섯 종파의 종주들이 자리를 비우고 있는 틈을 노리자는 말이었다. 이에 대답한 것은 사마착이었다. "그게 쉬울 것 같으면 가능했죠. 종주가 없더라도 여섯 종파의 저력을 우습게보면 안 됩니다." 여섯 종파에는 미치지 못하는 최상위 종파인 비환귀종조차도 예고 없이 침입자가 발생하자마자 외당의 일류고수들이 출동하였다. 침입하는 것도 힘들었고, 설사 운이 좋아서 들어갔다고 해도 그 종파의 장원 전체를 수색해야 한다면 아무리 조심하더라도 눈에 띨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건 사마착의 말이 맞네. 허봉. 여섯 종파가 괜히 본교의 근간이라 불리는 게 아니네. 더군다나 이런 짓을 벌인 자들이라면 분명 경계엄중할 게 틀림...아! 주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고왕흘이 문득 좋은 방법을 떠올렸다. "주군! 이렇게 하심은 어떻습니까?" * ** 그렇게 심란한 하룻밤이 지나갔다. 습하고 어두운 지하 공간. 작은 등불 하나 만이 이 어두운 공간을 밝힐 뿐이었다. 어두운 공간은 철창들로 둘러싸여서 외부에서 문을 열지 않고는 밖으로 나갈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음침한 철창 안에는 고약할 정도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등불이 비치지 않는 어두운 벽면에는 양팔이 쇠고랑이 고정 되어서 매달려 있는 처참한 몰골의 사내가 있었다. 사내는 알몸이었는데, 얼마나 심하게 고문을 당했는지 온통 피투성이였다. 손톱은 전부 뽑혀서 없었고, 손가락과 발가락도 몇 개가 잘렸는지 붕대로 감겨져 있었다. 딱지가 앉을 틈도 없이 고문을 가했는지 상처가 난 곳에서 진물이 흘러내렸다. -톡! 모진 고문에 지친 사내가 기절했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앞에 있던 고문지기로 보이는 중년인이 불에 달군 인두를 사내의 가슴에 지저 버렸다. -치이이익! "끄아아아아악!" 머리를 풀어헤치고 있던 사내가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깨어났다. 그러면서 가려진 얼굴이 드러났는데, 그는 행방불명 된 천여운의 호위인 장가경이었다. 벌써 사흘이 넘게 계속 된 고문으로 장 호위는 이미 심신이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누구 멋대로 자게 내버려둔다고 했느냐. 내 질문에 전부 답할 때까지는 네놈은 편해질 수 없어." -지이이이이익! "끄아아아아악!" 이번에는 허벅지였다. 붉게 달궈진 인두에 장 호위의 허벅지는 타들어갔다. 정신력이 강한 그라고 할지라도 계속 된 고통으로 죽고 싶었다. 하지만 자결도 할 수 없도록 내공을 폐했고 심지어 혀를 깨물 수 없게 이빨을 전부 뽑아버려서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입이 참 무겁군요. 일개 호위 주제에." 철창 밖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음험한 고문실이나 다름없는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게 화려한 복색을 갖추고 붉은색 면사포를 쓰고 있는 그녀는 현마종의 무 부인이었다. "공사가 다망하니 마지막으로 묻고 가도록 하죠. 교주님이 그놈에게 뭔가 무공을 전수해주었나요?" "끄으으....흐....런 건....헚습니다." 이빨이 없어서 발음이 새는 장 호위가 힘겹게 대답했다. 처음 이곳에 갇혔을 때부터 일관적으로 답변했으나 무 부인은 원하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고문을 멈추지 않았다. "쯧, 다 죽어가는 주제에 참으로 지독하군요. 계속 진행하세요." "넵. 부인!" 고문지기가 인두를 들고 계속 고문을 하려고 할 때였다. -끼이이익! 지하실에 닫혀있던 철문이 열리며 누군가 급하게 들어왔다. 관운장처럼 긴 턱수염의 중년인이었다. 무 부인이 쳐다보자 중년인이 고개를 숙여서 예를 표한 후에 보고했다. "부인! 놈이 나왔습니다." "놈이 나오다뇨?" "천여운이 마도관에서 나왔습니다." 그 말을 듣자 의자에 않아있던 무 부인이 눈을 반짝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여운이 마도관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려왔던 그녀였다. "호호호, 잘됐군요. 이런 시기적절한 시점에 마도관에서 나오다니. 녀석의 운이 다했나 보네요. 그런데 놈은 어디에 있죠?" "그게....." 현재 천여운이 있는 위치를 들은 무 부인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고문을 받고 있으면서도 철창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장 호위의 두 눈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공자님......' 그로부터 반 시진 후, 마교의 성내에서 가장 번화한 두 거리가 있다. 한 곳은 마교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 교주전과 대전이 자리한 중앙 내성의 바로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비작(飛鵲) 거리였고, 한 곳은 북쪽에 자리한 와호(臥虎) 거리였다. 이 두 거리는 마교의 성내에서도 가장 번화가라서 교인들이 북새통을 이룬다. 와호 거리에서 가장 큰 객잔인 섬풍(殮風) 객잔의 일 층에 한 좌석에 세 명의 손님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천여운과 문규, 허봉이었다.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지만 그들은 이곳에서 근 한 시진 반이 넘게 앉아 있었다. 허봉이 조용한 목소리로 문규에게 말을 걸었다. "정말 이 방법이 통할까요?" -글쎄요. 고왕흘이 말 한 대로라고 한다면 분명 어떤 식으로든 접촉하지 않을까요?" 문규도 솔직히 말한다면 크게 확신하지 못했다. 일부러 사람들의 이목이 가장 많이 띠는 와호 거리로 오긴 했지만 과연 그들이 접촉해 올지는 알 수 없었다. '저들의 목적은 장 호위님이 아니라 주군입니다. 분명 주군이 마도관에서 나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접족해 올 겁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곳에 있는다면 함부로 수작을 부리진 못할 겁니다.' 이것이 고왕흘의 계획이었다. 고왕흘과 백기, 사마착이 없는 이유는 그들은 세 종파 근거지 주변에서 숨어서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대담하게도 천여운을 미끼로 장 호위를 납치한 범인을 잡아 내기 위함이었다. 위험부담감이 있었지만 고왕흘이 제시한 방법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천여운은 이렇게 객잔에서 일부러 자신을 노출시킨 것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때였다. 초조해져가는 천여운의 귓가로 정체 모를 전음이 들려왔다. [내 목소리가 들려도 가만히 듣고만 있어라. 만약 고개를 돌린다거나 동료들에게 눈짓을 포함해 작은 신호라도 보낸다면, 네가 절대로 바라지 않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 36장 뱀의 아가리 속 (1) > 끝 < 36장 뱀의 아가리 속 (2) > 눈짓 하나부터 시작해서 그의 행동을 면밀하게 살피고 있다는 것은 이 객잔 안에 놈이 있다는 소리였다. 위협을 가하는 전음성에 천여운이 애써 내색하지 않고 식사에 열중하는 척 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문규와 허봉은 이제나저제나 적이 언제쯤 접족해 올지 초조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짧은 찰나였지만 천여운은 전음을 해서 알려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목울대가 울리는 것만으로 전음을 하는지 안 하는지 파악할 수 있기에 괜한 섣부른 짓을 했다가 장 호위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 것 같았다. '......보통 놈들이 아니구나.' 마도관에 있을 때와는 위협하는 방법부터가 달랐다. 천여운이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자 다시 전음 소리가 들려 왔다. [미리 경고한다. 기감을 열어서 내 위치를 파악할 생각 따윈 버려라. 조금이라도 허튼 수작을 부리면 그 자는 죽는다.] 이미 저들은 천여운이 장 호위가 행방불명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가정 하에서 협박을 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위협을 넘어서서 자극하는 말에 천여운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지금까지 한 번도 자신의 사람을 납치해서 위협을 당해 본 적은 없었는데 이만큼이나 불쾌하고 화가 나게 만들 줄은 몰랐다. 물론 찾지 말라고 위협한다고 그대로 따를 천여운도 아니었다. '나노. 지금 들리는 전음의 위치를 파악해줘.' [알겠습니다. 진동이 다른 음파의 주파수를 탐지합니다. 사용자의 청각으로 다른 주파수의 소리가 들리도록 조정했습니다.] 나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천여운의 귀로 휘파람 소리보다도 얇은 이상한 소리가 멍하게 울리더니 주파수가 조정되었다. 예의 전음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오늘...] '찾았다!'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쳐다보지 않았지만 전음 소리는 객잔의 입구 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시선을 마주칠 수가 없어서 정확한 얼굴은 볼 수 없었다. 전음이 계속 이어졌다. [축시(丑時) 초까지 독마종의 장원으로 와라.] '독마종?' 전혀 예상하지 못한 종파가 거론되자 천여운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검마종, 현마종, 음마종 이 세 종파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독마종이 튀어나오니 그럴 만도 했다. [장원으로 올 때는 비무장으로 와야 한다. 그 등허리에 차고 있는 도검을 가져온다면 입구에 들어서기도 전에 팔 하나를 자를 것이다.] -꽉! 최대한 내색하려 하지 않았지만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식탁 아래에 가려진 왼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당연한 얘기겠지만 장원에는 네놈 혼자서 와야 한다. 반경 삼백 보(步) 이내로 그림자 하나라도 비출 경우에 그 자의 목숨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라. 축시 무렵에는 근방에 사람이 돌아다니지 않으니 허튼 수작은 접어라.] 철저하게 천여운을 고립시키기 위한 함정이었다. 알면서도 뱀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그곳에서 벌어질 일은 안 봐도 그림이었다. 어떻게 본다면 장 호위 한 명만 포기한다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요구조건을 들어줄 필요가 없었다. '장 호위....'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장 호위는 의미가 달랐다. 다른 소교주 후보자들에게 있어서 호위 무사는 교주가 배정해준 사람일지 모르겠으나, 장 호위는 천여운에게 있어서 부모나 마찬가지였다. 태어났을 때부터 마도관에 들어가기 전까지 쭉 키워준 어버이와 같은 사람이었다. [만약 네놈이 정해진 시간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자를 포기한다고 생각하고 죽이겠다. 잘 판단해서 처신하리라 믿는다.] 그들도 이것을 알고 있기에 말도 안 되는 협박을 행하는 것이었다. 분노가 끝까지 치밀어 오른 천여운의 마음 한구석에서 자신에게 전음을 보내는 자의 목을 베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 처럼 치밀어 올랐다. [이상 전달은 끝났다. 참고로 나를 쫒을 생각 따윈 버려라.] 그 말을 끝으로 전음을 보내던 자가 입구 쪽에서 자취를 감췄다. 반경 범위 내에서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한 천여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윽!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주변의 식탁 곳곳에 앉아있던 네 명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여운을 노려보았다. -탓! 천여운의 신형이 번개처럼 움직이며 자신을 노려보았던 자들에게로 쇄도했다. -퍼퍼퍽! "크헉!" 자리에서 일어났던 남자들의 앞에 잔상을 일으키듯이 나타난 천여운이 그들의 복부를 주먹으로 쳐서 단숨에 기절시켜 버렸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말이다. -콱! "끄헉!" 천여운의 괴력이 담긴 손아귀에 목이 잡힌 중년의 사내의 몸이 그대로 허공으로 들렸다. 덩치가 상당히 컸는데 한 손으로 드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켁켁! 사, 살려주십시오!" "네놈, 어느 종파의 사람이지?" "조, 종파라뇨? 히익!" 화경의 고수인 천여운이 뿜어대는 살기는 어지간한 일류 고수들조차도 두려움으로 심장이 덜컹거릴 만큼 위압적이다. 그러나 그의 목에 잡혀 있는 자는 그저 일반 무가 출신의 삼류무사에 불과했다. -주륵! 중년의 사내의 바지가 축축하게 젖었다. 공포를 이겨내지 못한 그는 오줌을 지린 후에 그대로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공자님!" "주군. 설마 이 자들입니까?" 아무 것도 모른 채 않아 있던 문규와 허봉이 다급히 달려와 물었다. 오줌까지 지려서 기절해 있는 사내를 바라보며 천여운이 인상을 쓰면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여섯 종파의 사람들이라고 하기에는 한 명 한 명이 평범한 실력의 무사들이었다. -웅성웅성! 객잔의 이목이 집중되자 천여운과 수하들은 기절한 남자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들을 데리고 와호 거리에서 벗어난 천여운은 마교 성내 남문에 있는 자신의 거처로 왔다. 후에 포박해 놓았던 그들이 깨어나서 심문했는데 역시나 예상했던 결과가 나왔다. "저, 저희는 부탁을 받고 공자님들을 쳐다만 보고 있어 달라고 해서 그랬습니다." "살려만 주십쇼. 정말입니다요." 네 명이 이구동성으로 같은 말을 했다. 은전을 받은 그들은 그저 천여운 일행을 쳐다만 보고 있어 달라는 한 사내의 부탁을 받았다고 했다. 그 자의 인상착의를 물어봤는데 죽립을 쓰고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모르겠다는 말뿐이었다. 거짓이라고 하기에는 그들의 신분 패를 확인하니, 교내에서도 평범한 무가의 사람들에 불과했다. "죽이진 않겠다. 단, 이틀 정도는 여기 있어줘야겠다." "네?" -타타타탁! "읍읍!" 아직까지는 확실히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천여운은 그들의 혈도를 점해서 포박한 뒤에 창고에 가둬두었다. '고왕흘과 백기, 사마착이 와야 알 수 있겠구나.' 세 종파의 동태를 살피러 갔던 세 사람이 오면 정확한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외부에서 내부나 그 반대로 이동하는 동향을 살폈을 테니, 어느 종파가 진범인지 곧 드러난다. 유시(酉時) 초, 세 사람이 돌아오기로 한 시간이 되었다.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은 음마종의 동태를 살피러 갔던 고왕흘이었다. 돌아온 고왕흘은 음마종으로 왕래를 하는 사람들은 있었으나, 내부 전력이 움직인다거나 하는 특별한 조짐은 없다고 보고했다. 혹시나 죽립인에 대한 것도 물어보았지만 전혀 그런 인물은 보지 못했다. "음마종은 아니군." "그런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현마종이나 검마종 쪽이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음마종이 검법이 있기는 했으나 주 절기는 음공이었다. 이제 남은 두 사람이 온다면 어느 종파인지 확실해질 것이다. 그렇게 반 시진의 시간이 지났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오기로 했던 검마종과 현마종의 동태를 살피러 갔던 백기와 사마착이 나타나지 않았다. "너무 늦는데요." 벌써 해가 반쯤 저물어서 황혼이 지고 있었다. 허봉이 대문 바깥에 서서 계속 살폈지만 그들을 닮은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젠장!' 천여운과 수하들은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같은 시각 성내 북문 쪽의 현마종 장원. 장원의 본당의 마루 앞에 앉아서 붉게 물든 하늘을 쳐다보면서 차를 음미하고 있는 중년의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현마종의 무 부인이었다. 그러던 차에 내당 전각을 통과해 현마종의 무사들이 절도 있게 들어왔다. 선두에는 반백의 노인과 긴 턱수염을 기른 중년인이 있었는 데, 그 뒤를 따르는 무사들이 부상을 입고 기절해 있는 두 청년을 옮겨왔다. 무 부인의 앞으로 두 청년을 내려놓고 무사들이 정렬을 맞춰서 섰다. 반백의 노인이 그녀에게 흡족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 말대로 검마종 장원 근처에 숨어있는 이 녀석을 발견했다. 제법 드센 놈이더구나." 반백의 노인의 상의 곳곳에 발자국들이 가득했다. 노인이 바닥에 기절한 듯이 쓰러져 있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는 다름 아닌 백기였다. 내상을 입었는지 얼굴은 창백했고, 가슴과 복부 쪽의 요혈에 검상을 입었는지 옷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런데 그 옆에 쓰러져 있는 다른 한 청년은 바로 사마착이었다. 현마종의 장원 근처에 숨어서 동태를 살피던 사마착을 제압해서 데려온 자는 긴 턱수염의 중년인이었다. 백기와 마찬가지로 내상을 입었는지 혈색이 좋지 않은 사마착과 다르게 턱수염의 중년인의 옷에는 부상의 흔적들이 가득했다. "자네는 고전했나 보군." ".....고작 약관에 불과한 녀석이 완숙한 초절정의 경지더군요." 턱수염의 중년인은 부끄럽지만 혼자서 사마착을 제압하지 못했다. 겨우 호각을 이루었을 뿐이었는데, 그가 이끄는 현마종의 외당 무사들이 아니었다면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부끄럽습니다." 그런 중년인을 향해 무 부인이 면사포 너머로 희미하게 입 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뭐 괜찮아요. 임무를 달성했으니까. 아무튼 구색은 갖췄군요. 지금쯤 검마종과 우리 현마종 사이에서 어디서 자신의 호위를 데려갔는지 혼란스러워 할 그 놈의 얼굴이 눈에 훤하군요. 호호호." 즐거워하는 무 부인을 바라보며 턱수염의 중년인이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 무서운 분이다.' 이십 년 가까이나 모셨지만 지략만큼은 누구 못지않게 뛰어났다. 그녀는 천여운이 사람들이 많은 번화가에 그 자신을 노출시켰다는 정보를 듣는 순간에 그가 역추적을 위한 함정을 팠다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냈다. '이분 스스로 교주님의 처가 되길 원하지 않았다면, 현마종의 차대 종주의 자리는 부인의 것이 됐을 지도 모른다." 그만큼 무 부인은 정말 무서운 여자였다. "그런데 이 청년들은 어느 종파의 자제들이죠?" 그녀의 물음에 반백의 노인이 답했다. "이 젊은이는 순각종의 자제인 백기라 하더구나." "순각종? 상위 종파의 청년이군요. 흐음. 제법 마도관 안에서 분전했나보군요. 이런 수하를 거두다니." 순각종이라면 최상위 종파는 아니더라도 상위 종파 중에서도 무(武)로써 꽤나 이름을 날리는 종파였다. 소교주 쟁탈전을 위해서 수하들을 모았을 거라고는 짐작했지만, 생각 외로 더욱 뛰어난 인재를 거둔 것이 의아한 듯 했다. "그럼 이 청년은요?" "그게 그렇지 않아도 어떻게 하시려는지 여쭤보려고 했습니다." "왜죠?" "......구 장로님의 자제인 것 같습니다. 사무종 출신이라고 밝히더군요." "사무종? 설마 구 장로 사마의 공의 아들이라고요?" "네 그렇습니다." 일단은 상관인 무 부인의 명으로 사로잡기는 했으나 장 호위라는 자처럼 어떻게 하기에는 까다로운 존재였다. 사무종이라고 밝혔을 때는 순간 망설여지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무 부인은 그의 정체가 구 장로의 자제인 것보다도 다른 점에서 놀란 듯 했다. '사무종마저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고?.......정말 위험한 놈이로구나. 역시 내 판단이 옳았어. 지금 교주께서 계시지 않을 때 죽이지 않는다면 훗날에는 더욱 감당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무공, 지략, 그리고 사람에 대한 운. 앞선 두 가지는 스스로 노력에 의해서 뒤바뀔 수 있지만 마지막 세 번째는 달랐다. 타인의 위에 군림을 해야 할 수장의 운명은 타고나지 않으면 불가능했다. 무 부인은 이 순간만큼은 한 번 더 천여운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 축시(丑時) 초엽. 차가운 밤공기가 폐부까지 서늘하게 만드는 마교의 성내. 성내 서쪽 편에는 독마종의 장원이 자리하고 있다. 독마종 장원의 반경 삼백 보까지 건물의 천장 위마다 현마종의 무사들이 은신을 하고서 사방으로 움직이는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눈에 독마종의 장원을 향해 걸어오는 한 인영이 보였다. 흑의에 붉은 문양이 섞인 옷을 입고 있는 긴 머리카락에 새하얀 얼굴이 인상적인 청년이었다. '병기는 들고오지 않았다.' 항상 등허리에 차고 있던 검집과 도집은 없었다. 이를 확인한 천장 위에 있던 현마종의 무사들이 깃발을 들었다. -착! 차차차차착! 그러자 깃발들이 순차적으로 올라가면서 최종적으로 독마종의 장원까지 이동했다. 독마종의 내당은 넓은 정원과 마당이 있었는데, 그곳에 백 명에 이르는 현마종의 무사들이 무장을 하고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당 건물과 외당 건물 위에는 궁수들이 있었는데, 붉은 깃발이 올라오는 순간부터 활에 화살을 걸어서 시위를 당긴 채 준비했다. 내당 건물의 앞에는 탁자 하나가 있었고 붉은 면사포의 무 부인이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양옆에는 반백의 노인과 긴 턱수염의 중년인이 좌우 신장처럼 그녀를 호위했다. "후후후, 왔군요." 이미 반 시진부터 와서 진을 치고서 기다리고 있던 현마종이었다. 천여운을 저승으로 보내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이윽고 독마종의 건물 안으로 천여운이 들어왔다. '철저하게도 준비했구나.' 외당을 지나쳐서 내당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어림잡아도 이백 명에 가까운 인원을 감지한 천여운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어지간히 작정하지 않고는 이렇게 준비하지 않았으리라. 내당의 전각을 통과해 들어오는 천여운을 바라보며 붉은 면사포 속의 무 부인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그때 그 꼬마가 청년이 되었구나. 나를 위협하는 암적인 존재로 말이야.' 마도관에 들어가기 전까지 내공마저 익히지 못하게 만들고, 독마종, 검마종을 배후에서 움직이면서까지 없애기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는데 끝내 살아남아서는 자신의 뒤통수마저 쳤다. -찌릿찌릿! 경고대로 병장기를 두고 왔지만 천여운의 몸에서 풍겨져 나오는 강렬한 기운은 그 강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화경의 경지에 올랐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는데,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이 정도 기세라면 본교에서도 다섯 손가락에 꼽을 만큼 강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꾸욱! 건물 위에 있는 현마종의 궁수들이 긴장된 얼굴로 시위를 겨냥했다. 언제든지 천여운을 벌집으로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무 부인이 전각 입구로 들어오는 천여운에게 여유롭게 손짓을 했다. "드디어 만나는군요. 이쪽으로 오세요." '저 여자?' 천여운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어머니인 화 부인이 미독으로 죽기 전에 여러 부인들과 찾아와서 끝내 천여운이 마도관에 들어가기 전까지 내공을 익히지 않겠다는 맹약을 하게 만든 현마종의 부인이었다. '......지독하다. 끝까지 나를 노리는 것인가.' 가슴 속 전체를 불태울 만큼 강한 분노가 입속의 침마저 바짝 마르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어릴 적의 그 철부지가 아니었다. 천여운이 냉정한 표정을 유지한 채 탁자를 중심으로 무 부인과 마주했다. 무 부인이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어렸을 때보고 참 오랜만이네요. 세월이 무상하군요. 그대는 참으로 어미와 많이 닮았어요." 처음 천여운을 보는 순간 화 부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버지인 교주 천유종보다도 어머니를 닮은 모습에 비위가 상할 정도였다. "더러운 어미 쪽이나 그대나 본 녀를 수고롭게 만드는 건 똑 같군요. 그래도 버러지는 버러지군요. 고작 정 따위에 휩쓸려서 이런 하찮은 함정에 빠지다니. 큰일을 하기는 글렀군요. 후후후." 그녀는 고작 하찮은 호위 무사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함정인지 알면서 이곳까지 나타난 천여운을 진심으로 비웃었다. 그런 무 부인의 태도에도 천여운은 흔들리지 않고 무표정하게 물었다. "장 호위와 내 수하들은 어디에 있지?" "호호호, 순진한 건가요. 본 녀가 그들을 이곳으로 데려왔을 것 같나요? 참 어리석군요." 처음부터 그녀는 그들을 풀어줄 생각 따윈 없었다. 천여운을 이곳에서 처리한다면 장 호위는 죽이고, 그 수하들은 설득해서 자신의 아들인 천무연을 따르도록 권할 참이었다. 그런데 천여운의 태도가 이상했다. '어째서 눈빛이 여전히 당돌한 거지?' 완전히 불리한 상황이었는데도 천여운의 눈빛은 전혀 죽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눈빛은 언제든지 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다는 확신에 차있는 것 같았다. "그 눈빛.....건방지군요. 일단 내공부터 폐하고 대화를 마저 진행해볼까요." 무 부인의 손을 들어 올리자 옆에 서있던 긴 턱수염의 중년인이 앞으로 걸어 나와 천여운에게로 다가왔다. "네 호위 무사를 살리고 싶다면 반항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긴 턱수염의 중년인이 천여운에게 속삭이는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 순간 천여운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면서 차갑게 식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놈이었나?" -흠칫! 턱수염 중년인의 목소리. 그것은 객잔에서 그에게 협박했던 전음과 같았다. 자신을 기억하는 천여운의 말투에 묘한 공포심을 느낀 턱수염의 중년인이 일갈을 내지르며 공력을 끌어올린 손을 뻗었다. "허세 부리지 마라!" -팟! 천여운의 단전 쪽에 그 손이 닿으려는 순간, -짝! "이, 이놈이?" 천여운이 재빠른 손놀림으로 그의 손목을 잡아챘다. 당황한 턱수염의 중년인 공력을 끌어올려서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거대한 바위 틈새에 갇힌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놔라. 이놈..." -우드드드득! "끄아아아아아악!" 나무 막대기를 부러뜨리듯이 천여운이 손아귀에 힘을 주자, 턱수염의 중년인의 손목이 반대로 꺾여서 뼈가 부러져서 튀어 나와 버렸다. 이에 무 부인이 노기가 서린 목소리로 천여운에게 외쳤다. "그대의 호위 무사가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 보죠. 본 녀가 손짓 한 번만 해도 그 자의 목숨은..."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천여운이 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탁자 위에 던졌다. 그것은 작은 목함이었다. 알 수 없는 물건에 무 부인이 경계심이 가득 찬 표정으로 물었다. "이게 뭐죠?" "직접 열어봐라." 천여운의 태도에서 뭔가 불길함을 느낀 그녀가 잠시 망설이다가 목함을 집어 들어 그 뚜껑을 열었다. 그 순간 무 부인의 두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죠?" 그녀가 마교의 무인이 아니라 평범한 여인이었다면 목함을 떨어뜨릴 뻔했다. 목함 안에는 다름 아닌 사람의 눈알이 들어있었다. 뽑힌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핏기가 가득한 눈알에 그녀조차도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천여운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그게 누구의 눈알일까?" < 36장 뱀의 아가리 속 (2) > 끝 < 36장 뱀의 아가리 속 (3) > 불과 두 시진 전. 마도관의 북동쪽 산봉우리. 산봉우리의 중턱에는 죄인을 가둘 수 있는 구금동이 있다. 구금동에는 두 명의 방출이 확정된 생도들이 갇혀 있었는데, 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연과 현마종의 혈손인 무진윤이었다. 두 사람은 네 종파의 혈손들이 죽은 사건 이후로 서로 격리 된 채로 갇혀 있었다. 구금동의 한 어두운 동굴. 촛불 하나가 어둠을 밝히고 있었지만 좁은 동굴은 사람을 답답하게 만들 정도였다. 동굴 안에서 가부좌를 틀고서 명상을 하고 있는 이가 있었다. 그는 바로 천무연이었다. 구금동에 갇히기 전에 장침으로 기문을 찔러서 내공이 금제 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명상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이런 좁은 동굴에 갇히게 된다면 정신적으로 피폐해질 테지만, 냉철한 성격의 소유자인 천무연은 오직 단 하나의 일념만으로 버티고 있었다. '.....천여운.' 마도관에 들어을 때만 하더라도 안중에도 없던 녀석이었다. 그저 신경 쓰는 자들이라고 해봐야 도마종의 천유찬과 검마종의 천경운이었다. 자신의 어머니인 무 부인조차도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는 하찮은 존재라고 했던 천여운이 생애 처음으로 그에게 굴욕을 안겨주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소교주 쟁탈전에서는 분명 패했다. 하지만 이대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머니인 무 부인은 무서울 정도로 계략에 능했고 그 이면에 힘을 숨기고 있었다. 그녀는 목표로 삼은 것을 반드시 달성해야 하는 인물이었다. 무 부인의 현재 목표는 극명했다. 자식인 천무연을 소교주로 만드는 것이었다. '분명 어머님께서 움직이신다.' 어머니인 무 부인이라면 천여운의 계략을 꿰뚫어보고 그를 처리할 거라 믿는다. 그 순간만을 생각하면서 참자고 매순간 스스로를 가라앉히는 천무연이었다. 얼마 있지 않아서 천여운은 비참한 모습으로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애원하게 될 것이다. '지금쯤 어머님께서 놈을 처리하고 있을...' -쿠르르르르! 그때 바닥을 끓는 진동음과 함께 구금동의 동굴 입구를 막고 있던 거대한 암석이 움직였다. 천무연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역시....' 그러면 그렇지 라고 생각했다. 무 부인이 오랫동안 자신을 이런 곳에 방치해두었을 리가 없다고 여겼다. 동굴의 입구가 반쯤 열리자 차가운 바깔 공기가 들어와 답답했던 그의 폐부를 상쾌하게 만들었다. '이제 나가볼까.' 가부좌를 들고 천무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굴의 바깥으로 발걸음을 내딛으려는 순간 입구를 등지고 서있는 한 인영에 천무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둠에 적용한 그의 눈에는 그 인영의 얼굴이 뚜렷하게 보였다. "네 녀석이 어떻게..." -쿵! "크윽!"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깨를 짓누르는 엄청난 공력에 천무연이 강제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 물론 내공을 금제 당하지 않더라도 버티기 힘들 만큼 강력했다. 무름을 꿇은 천무연의 앞으로 인영이 걸어왔다. 동굴 안을 밝히고 있던 일렁이는 촛불의 작은 빛에 인영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바로 천여운이었다. '대체 이놈이 이곳에 어찌 왔단 말인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구금동의 동굴에서 석방되는 줄 알았더니 갑자기 천여운이 나타났다. 이곳은 경비 무사들이나 무공 교두들에 의해서 지켜지는 곳일 텐데 대체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혼란스러워 하는 천무연에게 천여운이 차갑게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장 호위가 없어졌다." "장 호위?" 천무연은 애초부터 장 호위란 자를 몰랐다. 의아해하는 모습을 개의치 않고 천여운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장 호위를 납치한 자들이 내게 그를 살리고 싶다면 비무장으로 함정으로 뛰어오라고 말한다." '아!' 간단한 정황 설명이었지만 천무연은 본능적으로 누구의 짓인지 알 수 있었다. 분명 그의 어머니인 무 부인이 움직인 게 틀림없었다. 무 부인은 상대가 강하다고 해도 그에 맞게 걸려들 수밖에 없는 함정을 파서 그 자를 곤욕에 빠뜨리는데 능하다. "......그런데 나더러 어떡하라는 것이냐?" 천무연은 최대한 감정을 숨기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천여운이 싸늘하게 식은 눈빛으로 가볍게 손짓을 하자 천무연의 두 팔이 강제로 들어 올려졌다. -부들부들! "무, 무슨 짓이냐? 이게!" 당황한 천무연이 내공 없이 완력으로 버텨보려 했지만 소용 없었다. 두 팔을 위로 천천세를 외치듯이 뻗자 천여운의 검결지에서 하얀 빛의 검기가 일렁였다. 아무리 냉정해지려고 해도 검기를 보는 순간부터 이성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처음에는 장 호위를 찾아내서 구출하려고 했다. 그런데 막상 진범을 알고 나니 생각이 바뀌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똑같이 대해주기로 말이다." 천여운은 독해지기로 마음먹었다. 장 호위를 구하기 위해 함정에 뛰어 들어가게 된다 해도 어차피 저들이 약속을 지켜서 그를 살려준다는 보장도 없었다. "하나만 묻자. 현마종 사람들에게, 아니 무 부인에게 네놈은 얼마나 소중할까?" -쿵! 쿵! 쿵! 그의 모든 목적이 담겨 있는 의미심장한 질문에 천무연은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이, 이놈.....나를 인질로 잡으려고 온 것이구나!' 인질로 잡으려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검결지의 검기는 무엇인가? 신체 부위의 하나라도 잘라서 협박용으로 쓰겠다는 의미인가? 다급해진 천무연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설득하려 했다. "천여운.....진정해라. 네 말대로 라고 한다면, 나를 건드린다면 더욱 그 장호위라는 자가 무사하지 못할..." -촤악! 천무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천여운이 발한 검기가 위로 뻗어 올린 팔의 손목 쪽을 스치고 지나갔다. -투툭! 그와 함께 천무연의 잘려나간 두 손이 바닥에 떨어졌다. 천무연의 두 눈이 커졌다. 내공도 없어서 운기조차 할 수 없는 천무연은 일순간에 엄청난 고통에 휩싸여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끄아아아아아악!" 고통스러워서 몸을 굽히고 뒹굴고 싶었지만 천여운의 심후한 내공에 의해서 몸이 고정되어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끄으으으윽!" 설마 했는데 두 손을 자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놈이 정말로 자신을 인질로 교환할 생각인 건지 아니면 화풀이를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천여운이 바닥에 떨어진 천무연의 잘려나간 두 손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흐음, 이걸로는 안 되겠어." "끄으으으....대, 대체 뭐가 안 된다는 말이냐?" "손 두 개만으로는 그다지 와 닿지 않을 것 같단 말이야. 겨우 이 정도로 제 자식이 죽을 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할까?" -오싹! 잘려나간 팔로 인해서 고통스러운 와중에 천무연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팔을 자른 것도 모자라서 대체 무엇을 어찌하려는지 공포심에 물들어 무슨 말조차 나오지가 않았다. '이, 이놈은 악마란 말인가?' 그 순간 천여운의 손이 그의 오른쪽 눈가를 파고들었다. -푹! "끄아아아아아아악!!!" -푸직!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천여운은 그 자리에서 천무연의 눈알을 뽑아버렸다. 팔이 잘린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고통에 천무연은 눈알이 뽑히는 순간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다시 시점은 두 시진 후로 돌아온다. 목함에 들어있는 핏기가 고스란히 묻은 눈알을 보면서 붉은 면사포 속에 감춰진 무 부인의 두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떨렸다. 사람은 참으로 신기한 존재였다. 천여운은 그저 누구의 눈알일까라고 질문을 했을 뿐이었지만 그녀는 본능적으로 단 한 사람밖에 떠올리지 못했다. '무연이?' 천무연을 떠올린 무 부인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혔다. 이 눈알의 주인이 정말로 천무연이라면 지금 인질을 인질로 맞받아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니야. 놈이 나를 속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분노에 사로잡힐 뻔했던 그녀가 이성을 붙들었다. 생각해보니 천무연은 지금 마도관의 구금동에 갇혀있지 않은가. 마도관을 졸업한 이상 천여운은 외인이었다. '그가 마도관에 침입했다면 관주인 좌호법이 내버려뒀을 리가 없다. 허장성세다.' 천여운의 행동이 허장성세에 불과하다고 판단한 그녀가 표독스럽게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제법 머리를 굴린 것 같은데 어리석군요. 마도관에 있는 그 아이를 건드렸다고요? 하! 내가 이런 것에 속으리..." "아! 깜빡한 게 하나 더 있군." "뭐?" -탁! 천여운이 탁자 위에 무언가를 하나 더 올려놓았다. 그것은 현마종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는 패였는데, 붉은 실들이 손잡이에 묶어져 있었다. 무 부인이 그것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내가 그아이에게 준 것인데....' 이제야 그가 어째서 위축되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무 부인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천여운을 상대로 인질을 붙잡아서 그를 압박하려 했는데, 도리어 같은 방법으로 받아쳐버릴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뿌득! 절로 이가 갈렸다. '일부러 그 아이를 구금동에 뒀건만.' 마도관에 있는 편이 오히려 나을 거라 여겼던 그녀였다. 그런데 설마 천여운이 이런 식으로 본교의 법도마저 무시하고 일을 저질렀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무 부인은 이 상황을 어떻게든 원활하게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천여운이 원하는 데로 움직이게 된다면 결국 자신이 지략에서조차 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었다. '인질교환에 응하는 척하면서 그 아이를 빼돌려야 한다.' 여유로웠던 아까 전과는 다르게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 무 부인이 물었다. ".....무엇을 원하죠?" "장 호위, 그리고 백기, 사마착." "후우, 그 세 사람을 풀어준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필요 한 건 알고 있겠죠?" 말인 즉 천무연을 내놓으라는 의미였다. 천여운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무 부인이 굳어진 인상으로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현마종의 무사들 중 두 사람이 앞으로 나왔다. -탁! 무 부인이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는 붉은 옥패를 그들에게 주면서 명했다. "지금 이곳으로 그들을 석방시켜서 데려오세요." "충!" 그녀의 명을 들은 무사 두 명이 경공을 펼쳐서 독마종의 장원을 벗어났다. 무 부인이 이번에는 천여운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 이제 그대의 성의를 보이세요. 내 아이는 어디에 있죠? 당신은 혼자 이곳에 왔으니, 제 사람 한 명을 대신 보내도록 하겠어요." 그녀의 노림수는 이것에 있었다. 인질 교환에 응하는 척하면서 천무연을 붙잡고 있는 자들을 전부 없앤 후에 다시 이 자리를 원상 복원시키는 것이었다. 다만 천여운 같이 영악한 놈이 이에 속아 넘어갈 지가 관건이었다. 자신이 천여운의 입장이었다면 인질을 먼저 받기 전까지는 절대로 위치를 말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흐음....."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천여운이 말했다. "마도관의 구금동에 내 수하들이 천무연과 무진윤을 붙잡고 있다." 그녀의 눈이 먹이를 발견한 매처럼 반짝였다. 천여운이 위치를 이야기하지 않을까 우려했는데 그것을 밝혔다. '넘어가다니! 호호호, 멍청한 녀석. 영악하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멀었구나.' 이로써 하마터면 무산될 뻔한 것을 다시 바로 잡을 기회가 생겼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천여운이 대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마도관의 구금실에 그대로 붙잡아 둘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하긴 그곳만큼 안전한 곳도 없지.' 납득은 되었다. 수하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가장 안정적으로 숨길 수 있는 장소는 마도관일 지도 몰랐다. 천여운이 탁자 위에 자신의 장로 패를 올려놓았다. "이 패를 가져가서 보인다면 내 수하들이 그들을 직접 데리고 올 거다. 이곳으로 와서 인질을 교환할 때까지 풀어주지 않으니 괜한 허튼 수작 부리지 마라." 그들을 데리고 있는 수하들은 고왕흘과 문규, 허봉이었다. 어지간한 전력으로는 수작을 부리기 힘들었다. 그녀가 말없이 뒤를 돌아서 호위처럼 대기하고 있던 반백의 노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들으셨죠. 수고해주세요." [그리고 녀석들을 한 놈도 남김없이 죽인 후에 아이들을 데려와주세요.] 그 이면에는 전음으로 다른 지시를 내렸다. 반백의 노인의 무위는 초절정의 극에 이르렀다. 천여운의 수하들이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장로 급에 속하는 실력자가 아니고는 죽이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반백의 노인이 무거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탁자 위에 올려진 천여운의 패를 들고서 경공을 펼쳐 장원을 벗어났다. 장원에서 벗어난 반백의 노인이 신호를 보내자, 근처 삼백 보 바깥 부근의 건물들 위에서 은신하고 있던 현마종의 무사 열 명이 그 뒤를 따랐다. 모든 조치를 취한 무 부인은 흡족한 얼굴로 천여운올 바라보았다. '그 아이들을 무사히 데려오기만 한다면 네놈을 비참하게 죽게 만들어주마.' 그렇게 반 시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지금쯤이면 현마종으로 갔던 무사들이나, 마도관의 구금동으로 갔던 반백의 노인이 각자의 인질로 잡혀 있던 이들을 데리고 도착했어야 할 시간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시간이 길어지는 게 이상했다. '왜 이렇게 늦는 거지?' 아무렇지 않은 듯이 차를 마시고 있었지만 무 부인은 초조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천여운이 피식하고 웃으며 말했다. "초조하나?" "흥. 그게 무슨 소리죠?" "초절정의 극에 이른 고수를 보내서 내 수하들을 전부 죽이고 자식들을 구출하라고 했는데, 아직 소식이 없어서 초조한 게 아닌가?" "그, 그걸?" 천여운의 말에 무 부인의 눈빛에 당혹감이 서렸다. 산전수전을 겪어서 감정을 숨기는데 능숙한 그녀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속았다! 내가 속았던 거야!' 영악한 그녀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천여운의 계책에 말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 부인은 다급한 목소리로 현마종의 무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당장 현마종으로 가서..."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적이다! 적이 나타났다!" "너, 너무 빨라!" 독마종의 장원 천장 위에 있던 궁수들이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침입자를 대응하기 위해 화살을 쏘려고 해도 이 자의 경공이 너무도 빨라서 시위를 겨냥할 수가 없었다. 이윽고 그 침입자가 독마종의 본당 건물 천장을 뛰어넘어 내당의 정원 한 가운데로 사뿐히 내려왔다. "다, 당신이 어떻게 이곳에?" 무 부인이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그 존재를 바라보았다. 타오르는 불꽂처럼 화려한 붉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중년인이었다. 그는 바로 좌호법 이화명이었다. "앗?" 그런데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만 놀라서 미처 보지 못했었는데, 이화명의 오른손에는 진한 물방울 같은 것이 떨어지는 무언가가 들려있었다. 무 부인이 찢어질 것 같이 갈라진 목소리로 절규하듯이 소리쳤다! "아아아아아악!!!!" 놀랍게도 이화명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마도관으로 인질을 데리러 갔던 반백의 노인의 수급이었다. 잘려진 목의 단면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아서,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했다. 천여운이 절규하는 그녀를 향해 입 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이걸 어쩌나. 뜻대로 되지 않았네?" < 36장 뱀의 아가리 속 (3) > 끝 < 36장 뱀의 아가리 속 (4) > 반 시진 전, 열 명의 무사들을 이끌고 마도관에 도착한 반백의 노인은 기척을 최대한 죽이고서 몰래 안으로 잠입했다. 마도관 내부를 지키는 경계 무사들이 우려되긴 했지만, 천여운과 그 수하들이 한 것을 자신과 은신술을 전문으로 익힌 무사들이 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런데 막상 안으로 들어와 보니, 입구에도 경계 무사들이 몇 명 없었고 생각보다 내부의 경계망도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고작 이 정도 수준이라니. 차라리 놈이 마도관에 있을 때 죽였어도 몰랐겠군.' 반백의 노인은 마도관의 경비 수준에 실소했다. 천여운이야 무위가 뛰어나기 때문에 이해가 갔지만 그 수하들마저도 쉽게 들락날락 할 만 하다고 여겨졌다. 구금동이 있는 산봉우리 도착한 반백의 노인은 산 중턱에 무사들을 매복시킨 후에 자신이 그들을 데리고 오면 기습하라고 명했다. 그렇게 구금동이 있는 꼭대기 쪽까지 도착한 반백의 노인은 기감을 열어서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연과 혈손 무진윤을 찾으려 했다. '찾았다.' 어느 한 장소에 인기척들이 집중된 곳을 찾았다. 반백의 노인이 인기척들이 모여 있는 동굴 쪽으로 다가갔다. 입구를 가리고 있어야 할 암석이 열려 있었는데, 그 안으로 들어가려고 발을 내딛는 순간 반백의 노인의 눈동자에 당혹감이 서렸다. -챙! 검을 뽑는 소리들이 들리며 동굴 안에서 세 명의 사내가 걸어 나왔다. 그들의 복색을 보아하니 마도관의 무공 교두들이 틀림 없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설마.....놈이 그 아이와 노부를 속였단 말인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얼굴을 복면으로 가리길 잘했다. 무공 교두 중 한 사람은 선임 무공 교두인 호진창이었다. 호진창이 그를 향해 검을 겨냥하며 외쳤다. "마도관에 침입하다니 겁이 없는 자로구나. 당장 허리에 차고 있는 무기를 내려놓고 투항해라." 물론 투항하란다고 할 리는 없었다. -팟! 반백의 노인은 곧바로 몸을 돌려서 산 아래로 경공을 펼쳤다. 이들보다 무공이 높으니 경공으로 따돌릴 자신이 있었다. "서랏!" 뒤에서 외침 소리가 점차 멀어져갔다. 최대한 빨리 내려가서 대기 중이던 수하들을 데리고 철수해야만 했다. 그리고 현마종으로 길을 틀어서 당장 인질들을 원래 자리로 복귀시켜야만 한다. '감히 속임수를 쓰다니. 용서할 수 없....' "아닛?" 산 중턱까지 내려온 반백의 노인은 경공을 멈줘야만 했다. 매복을 하고 있으라고 명을 내렸던 현마종의 무사들이 바닥에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는 수풀 틈새에 비추는 달빛만으로도 구분이 가능한 긴 붉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중년인이 보였다. 마교인들 중에 이 자를 모르는 이가 누가 있겠는가. "......좌 호법." 중년인은 바로 마도관주 좌호법 이화명이었다. 반백의 노인이 인상을 찡그렸다. 오랜 연륜을 가진 그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놈의 사람이었단 말인가. 허어.....' 설마 교주를 보필하는 세 호법 중의 한 사람이 천여운의 수족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함정이 파져 있을 리가 만무했다. '도망가야 한다.' 이렇게 된 이상 붙잡히면 안 된다. 어차피 현마종의 무사들은 붙잡히면 정체를 숨기기 위해 자결을 하라고 명을 받은 자들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붙잡혀 버리면 괜한 트집거리가 생겨버린다. -탓! 반백의 노인이 신형을 우측으로 꺾어서 도주를 시도했다. 무공의 격차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어차피 화경의 고수를 상대로 이길 가능성은 전무하다. 차라리 그나마 도망치는 편이 확률적으로 나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것은 노인의 착각에 불과했다.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나?" -흠칫!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서 고개를 돌렸더니, 어느새 그의 주름진 목으로 이화명의 붉은 검날이 파고들고 있었다. '빌어먹을!' 그것이 노인이 생애 마지막으로 본 광경이었다. "아아아아아악!!!" 좌호법 이화명의 손에 들려있는 잘린 수급을 바라보며 무 부인은 절규했다. '선 숙부!' 반백의 노인의 정체는 전전대 현마종 종주의 제자인 선구능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그녀를 가르친 스승이면서 든든한 호위를 맡아온 그의 죽음은 무 부인에게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절규하면서 외치던 무 부인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설마 이 일에 좌호법 이화명이 연루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잠깐만 수하들이 지키고 있다는 말이?' 무 부인이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이화명을 노려보았다. 좌호법 이화명은 이를 개의치 않고 천여운에게 고개를 숙이면서 가볍게 예를 표한 후에 반백의 노인의 수급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공자님의 말씀대로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좌호법." "별 말씀을." 그들은 애초부터 주종 관계를 숨길 생각도 없어보였다. 무 부인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분명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좌호법 이화명은 분명 천여운의 사람이 틀림없었다. 그녀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이화명에게 소리쳤다. "좌호법. 언제부터 호법가에서 아직 정해지지 않은 소교주 후보를 지지하게 된 거죠? 본교의 법도에 어긋나는 월권 행위가 아닌가요?" 그제야 이화명이 그녀를 향해 눈길을 주며 입을 열었다. "무 부인. 오랜만에 뵙는군요." "오랜만이고 자시고, 제 말에나 답변하시죠." 좌호법 이화명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소교주 쟁탈전은 이미 끝난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 그건...." 마도관에서 모든 후보자들을 제친 지금 소교주 등극에 도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천여운 뿐이었다. 그가 입회자들을 모으는데 실패하지 않는 이상 확고한 위치였다. 물론 쟁탈전에서 밀려난 후보자들의 입장에서는 천여운을 제거하게 된다면 다시 남은 자들끼리 경합을 벌일 기회가 생겨 날 수도 있기에 무 부인이 이런 인질극과 같은 함정을 판 것이기도 했다. -으드득! 그런 이화명의 태도에 더욱 노기가 치솟은 무 부인이 이를 갈면서 말했다.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하나요? 우습군요. 아직 그대가 아끼는 세 사람이 내 손아귀에 있다는 것을 잊었나요?" 비록 인질로 잡힌 아들을 탈취하는데 실패하긴 했지만 아직 그녀의 수중에 장 호위를 비롯한 천여운의 수하 백기와 사마착이 있었다. 현마종으로 데리러간 이들이 천여운의 수하가 아닌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화명의 등장으로 기세가 등등해진 천여운일지라도 아직까지 인질이 붙잡혀 있는 이상, 섣불리 움직이진 못할 거라 여겼다. "다만 이화명이 끼어든 이상 놈을 죽이긴 글렀다. 인질을 붙잡은 상태로 현마종으로 돌아가야 해.' 천여운 혼자였다면 지금 이곳의 전력만으로 어찌해볼 수 있겠지만 이화명까지 합류한 이상 그것은 무리였다. 화경의 고수 둘이 작정하면 이곳에 있는 자들을 전멸시키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비록 분한 마음이 있었지만 현마종주를 비롯한 여섯 종파의 장로들이 돌아올 때를 노리는 편이 나았다. '그들을 규합해서 천여운을 죽여야 한다. 내 선을 넘어섰어.' 천여운 혼자라면 아무리 강하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죽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밑에 수하들이 있다면 사정이 다르다. 말없이 머리를 굴리는 무 부인을 바라보며 천여운이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손아귀에 있다고 장담할 수 있나?" "......좌호법 하나만 믿고 그러나 본데, 본 녀를 더 이상 자극하지 마세요. 수틀리면 장 호위란 자를 시험 삼아서 죽일 겁니다." "장 호위를 죽여?" "본 녀가 그러지 못할 거라고 생각..." 그녀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외당 건물의 천장 위에서 망을 보고 있던 현마종의 궁수들이 외쳤다. "크, 큰일입니다!" "무 부인.....지금 장원 바깥 쪽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궁수들의 외침에 무 부인이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서 기감을 열었다. 그 순간 그녀의 표독스러웠던 표정이 일순간에 일그러지고 말았다. 장원 바깥에서 무수히 많은 인기척들이 느껴졌다. 그 숫자가 족히 삼백 명은 되어 보이는 자들이 물 샐 틈 없이 장원을 둘러싸고 있었다. '대,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교주가 없으니 호법가의 무사들일 리가 없었다. 그럼 대체 이들은 누구란 말인가? 그때 좌호법 이화명이 장원의 천장을 넘어왔을 때처럼 누군가가 내당 건물 위로 올라와 사뿐하게 몸놀림으로 본당 정원으로 내려왔다. 노란 나비가 그려진 붉은 비단옷을 입고 하얀 분칠에 입술을 붉은 연지를 바른 중성적인 미남자였다. 그는 십일 장로이자 비환귀종의 종주인 환의였다. '이 요상한 자는 대체 누구지?' 교주 이외에는 장로 회의에서 밖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환의이다 보니, 무 부인이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확실한 것은 움직이는 몸놀림만 보더라도 보통 고수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환의가 입술을 수줍은 손동작으로 가리면서 천여운에게 말했다. "비환귀종의 종주 환의가 공자님의 명을 이행하고 이곳으로 왔나이다. 후후후. 너무 늦지 않은 모양이네요." "비환귀종? 서, 설마 당신은 십일 장로?" 미간이 일그러져있던 무 부인의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뭔가 심상치 않은 자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십일 장로일 줄은 몰랐다. '명을 이행했다고? 그럼 십일 장로도 저 놈의 산하로 들어갔단 말인가? 맙소사!' 전혀 상정하지 못한 정보였다. 이제 막 마도관을 나온 걸로 알고 있었는데, 대체 어느 틈에 장로를 수하로 거둬들인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큰일이구나.' 인질이 없다면 오히려 그녀 자신이 벗어날 수 없는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상황이었다. 호법에다가 장로까지 머리가 복잡한 정도를 넘어서서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무 부인은 초조함을 넘어서 몸이 떨려왔다. "말씀하신 대로 그들은 본 장원으로 옮겼습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옮겼다니?' 환의의 말에 무 부인의 눈이 커졌다. 방금 전까지 이제 유일하게 믿을 것은 인질들뿐이라고 여겼던 그녀였다. 환의가 놀라하는 무 부인을 바라보면서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아~데리고 계신 인질 분들은 저희 비환귀종의 장원에 잘 모셨답니다. 아주 극진히 대접하셨더군요. 무 부인." "........이.... 인질들을...." 무 부인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 다리에 힘이 풀릴 뻔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환의의 말대로라면 데리고 오던 인질들을 탈취했다는 의미가 아닌가. '내....내가 당했단 말인가?' 인질극을 통해서 천여운을 죽음으로 몰아가려던 그녀의 완벽한 패배였다. < 36장 뱀의 아가리 속 (4) > 끝 < 36장 뱀의 아가리 속 (5) > "그들은 괜찮습니까?" 현마종에서 극진히 대접했다는 말에 천여운이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그러자 환의가 살짝 어두워진 안색으로 답했다. "수하 분들은 약간의 내상만 입은 것 같은데, 공자님의 호위 분은 매우 위험합니다. 일단은 의원을 불렀지만 언제 숨을 거둬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천여운의 명을 받은 환의는 미리 현마종의 근처에서 뛰어난 수하들을 데리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현마종의 무사들이 장원으로 들어가서 인질들을 데리고 나오는 그 순간 기습을 감행했다. 그렇게 인질들을 탈취했지만 장 호위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만약 천여운이 온몸을 인두로 지지고 손톱과 발톱, 그리고 이빨까지 전부 빠진 장 호위를 보았다면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닐 정도였다. "장 호위....." -사아아아아! 장 호위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말을 듣는 순간 천여운의 몸에서 강렬한 살기가 치솟았다. 지금까지는 냉정하게 참아왔던 분노가 폭발한 것이었다. 그들은 절대로 건드려서 안 될 존재를 건드렸다. '무, 무슨 살기가?' '심장을 옥죄이는 것 같다.' 정원에 정렬해서 무 부인의 명을 기다리던 현마종의 무사들이 엄청난 살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살이 떨려왔다. 화경의 극에 이른 고수가 내뿜는 살기는 위압적이다 못해 상대를 공포심으로 짓눌러 버렸다. '그때 나와 겨를 때 전력을 다하지 않았구나.' 천여운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살기만으로 환의는 그가 원래의 실력을 전부 다 드러내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같은 화경의 고수라고 해도 초입부터 극(極)까지 네 단계에 걸쳐서 실력의 격차가 존재한다. 아직 완숙한 경지에 이르지 못한 환의였다. '으으으! 본 녀가....고작....고작 약관도 되지 않은 녀석의 꾀에 당하다니!' 무 부인은 지략만큼은 누구보다도 뛰어나다고 자부했다. 천여운의 함정마저 간파했기에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이런 엄청난 패들을 숨겼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안 돼! 이대로 굴복하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려!' 현마종이 여섯 종파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일석의 자리를 차지하기까지 그녀의 노고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여기서 패배를 인정하고 굴복해버린다면 현마종의 위신은 땅으로 떨어진다. '어떻게 해야 위기를 벗어날 수 있지? 머리를 굴려라.' 이미 전력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에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짧은 찰나에 수많은 고민에 잠겨 있던 무 부인이 앙칼진 목소리로 좌호법 이화명과 십일 장로 환의를 쳐다보면서 외쳤다. "좌호법, 십일 장로. 두 분이 아무리 본교의 큰 어른들이라고 하여도 이런 식으로 군다면 그대들도 무사할 것 같나요?" 이화명이 의아한 눈빛으로 답했다. "그게 무슨 의미이신지?" "그대들이 이렇게 교주의 첫 번째 부인이자 일 장로의 누이인 본 녀를 핍박하고도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느냐 말입니다." "하!" 어떻게 본다면 그들을 자극하는 소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방법 외에는 위기의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마교의 수많은 무력 집단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현마단(玄魔國)과 교주를 제외하고는 최고 고수라 할 수 있는 무진원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이들이 돌아왔을 때 뒷감당을 할 자신이 있냐고 위협하는 것이었다. "호호호, 재미있군요. 이런 상황에서 도리어 저희를 협박하실 줄이야?" 그런 무 부인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환의는 정말로 재미있다는 듯이 묘한 미소마저 짓고 있었다. 그때 천여운이 차갑게 식은 목소리로 좌호법 이화명에게 물었다. "놈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쯤 공자님의 수하 분들이 데리고 오고 있을 겁니다." '아!' 무 부인의 두 눈동자가 흔들렸다. 살기 어린 목소리로 놈들이라고 지칭하는 말을 들어서는 아무래도 그녀의 자식인 천무연과 오라비인 일 장로 무진원의 아들인 무진윤을 의미하는 듯 했다. 그때 독마종 장원의 외당 쪽에서부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당장 도련님들을 풀어주지 못할까!" "물러나지 않는다면 이들의 목숨은 없을 것이오." 뒤에 들리는 목소리의 주인은 고왕흘이었다. 천여운이 기다렸던 자들을 데리고 온 모양이었다. 외당 쪽을 지키고 있던 현마종의 무사들이 고왕홀과 문규, 허봉이 데리고 있는 인질들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안으로 들여보내야만 했다. "무연아!" 어찌나 놀랐는지 무 부인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면사포마저 벗어버리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천무연을 불렀다. 고왕흘이 팔에 붙잡혀 있는 천무연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두 손이 잘려서 붕대로 감겨있었고, 한 쪽 눈알이 뽑혀서 안대를 착용하고 있었다. 위풍당당하던 공자의 모습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어머님.....면목이 없습니다." "고, 고모님!" 그 옆에는 허봉에게 덜미가 잡히듯이 끌려오는 무진윤이 있었다. 심하게 당한 것은 천무연 하나뿐이었는지 무진윤은 얼굴이 멍투성이인 것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멀쩡했다. 오히려 부끄러운 나머지 무 부인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으득! 무 부인이 이빨이 부서질 것처럼 갈았다. 어머니라는 존재란 그런 것일까. 지금까지는 당했다는 생각 때문에 위축되어 있던 무 부인의 가슴 속이 분노로 치밀어 올랐다. '천.....여....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하나뿐인 자식이 거의 병신이 되었으니 화가 나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 분노로 거친 호흡을 내뱉던 무 부인이 이내 천여운을 향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부인!" "어, 어머님!" 현마종의 무사들과 천무연의 입에서 당혹스러운 외침이 흘러나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지금 이곳에서 현마종의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는 무 부인이 무릎을 꿇는 것은 현마종이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쿵! 무 부인이 바닥에 이마를 박으면서 애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여운 공자. 본 녀가 졌습니다. 그대가 소교주가 된 것을 인정할 터이니, 부디 자비를 베풀어 저희 자식들과 현마종의 무사들을 놓아주시기 바랍니다." 모든 자존심을 버리는 그녀의 간청이었다. 그런 무 부인의 말에 도리어 분에 겨웠는지 천무연과 무진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자존심이 강하던 무 부인이 자신들을 살리기 위해서 그렇게나 멸시하고 미워하던 화 부인의 자식에게 굴욕스럽게 땅바닥에 이마까지 박았다. "어머님! 어째서..." [그만!] "아......." [이 치욕을 기억한다면 반드시 이곳에서 살아남아서 훗날을 기약하자꾸나. 네 외백부께서 돌아오신다면 언제든지 갚을 수 있다. 그리고....이 어미는 너를 살릴 수 있다면 천 번이든 만 번이든 이놈에게 고개를 숙일 수 있다. 그러니 이 어미를 생각한다면 입을 다물고 있어라.] 들려오는 무 부인의 전음 소리에 천무연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의 말대로 여기서 자신이 입을 열면 열수록 어머니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차라리 이 치욕을 기억하고 복수를 기약하는 편이 나았다. '네놈을 무슨 수를 쓰던지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 천여운.'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겉으로는 표출시키지 않았다. "저희 현마종에서는 절대로 천여운 공자께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을 약속할 터이니, 제발 자비를 부탁드립니다." -쿵쿵! 무 부인이 연거푸 바닥에 머리를 찍으며 애절하게 간청했다. "공자님?" 좌호법 이화명이 천여운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분노로 살기를 내뿜어대던 천여운이 이를 가라앉히고 고민에 빠진 듯이 무표정하게 무 부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긴....' 마교에서도 큰 영향력을 가진 무 부인이 처음으로 머리까지 박아가며 자식들을 살려달라고 간청했다. 이 정도만 하더라도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 편으로 걱정되는 부분이 있었다. '.....철의 여인이라 불리는 자가 과연 이 치욕을 그냥 넘어갈까?' 마도관 관주 이전에 좌호법으로 수차례 여러 부인들을 지켜 보았지만 그녀만큼 생각을 읽을 수 없고 위험하다고 여긴 여인은 없었다. 아무래도 어머니에 대한 정을 갈구하면서 자라온 천여운이다보니, 분노만큼이나 이런 모정에 마음이 약해질 수도 있다고 생각되었다.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던 천여운이 말없이 구속되어 있는 천무연과 무진윤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고왕흘과 허봉에게 말했다. "풀어 줘라." "네?" "풀어주고 옆으로 물러나라." 납득할 수 없는 명령에 고왕흘과 허봉이 순간 반문했다가 결국 그들을 풀어주었다. 억지로 붙들려 있다가 풀리는 모습을 확인한 무 부인의 얼굴이 밝아졌다. '됐다! 넘어갔어!' 잘하면 이 위기를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때 천여운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작 머리를 숙이는 걸로 내가 용서할 거라 생각했나?" "뭣?" "소중한 사람이 고통스러워할 때 어떤 기분인지 네년도 느껴라." 그 순간 천여운의 오른손에서 새하얀 도기가 서리며 천무연과 무진윤의 몸을 무차별적으로 난도질했다. "안돼에에에에에!!!" 무 부인이 미칠 듯이 소리를 질렀지만 이미 늦었다. -촤촤촤촤촤촥! 어찌나 빠르게 움직였는지 순식간에 두 사람의 양팔이 양 허벅지가 날카로운 도기에 잘려나갔다. 무 부인의 고육지책이 통했다고 생각하여 기뻐했던 두 사람의 표정이 일순간에 고통으로 뒤틀리며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아아아악!" "끄아악! 내 팔! 내 다리가!" 사지가 잘려나간 두 사람이 엄청난 피를 뿜어대며 바닥을 몸통만으로 미친 듯이 뒹굴었다. 천여운의 전신이 그들이 피로 붉게 물들었다. 고왕흘과 허봉은 그제야 천여운이 왜 옆으로 물러나 있으라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헉! 지, 직접 하시려고 그랬구나.' "끄흑! 끄흑! 으으으으으!" 자식들의 팔다리가 잘려나가는 모습에 분노로 얼굴이 새빨갛게 상기되어서 호흡이 넘어갈 것처럼 거칠어져 있는 무 부인을 바라보며 천여운이 다시 입을 열었다. "소중한 사람이 죽는다면 어떤 기분일지 느껴봐라." "!?" 사형 선고를 내리는 천여운의 말에 무 부인의 핏줄이 선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애원이고 자시고 할 문제가 아니었다. 놈은 한다면 정말로 한다. "아, 안 돼! 제...제발 그만둬!" 막아야만 했다. 발바닥의 용천혈로 기를 끌어 모아서 신형을 날리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촤악! 툭! 뎅구르르르! 그녀의 투명한 동공으로 천여운의 도기에 목이 잘려나가는 천무연의 모습이 선명하게 박혀버렸다. 눈앞에서 자식이 목이 잘려 죽어버렸다. "학! 학! 학!" 너무 큰 충격으로 인해 호흡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 그녀에게 천여운이 차갑게 식은 눈빛으로 말했다. "그게 내가 겪었던 고통이고, 이제 네년이 겪을 고통이다." < 36장 뱀의 아가리 속 (5) > 끝 < 36장 뱀의 아가리 속 (6) > 잔인하게도 양팔과 다리가 잘려나가서 처절하게 고통스러워 하다 목이 잘린 천무연. 그것은 정원 내에 있는 현마종의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감히 도련님을!" -챙! 참을 수 있는 선을 지나쳐버렸다. 현마종의 무사들이 병장기를 빼들고 싸울 기세를 취하자 좌호법 이화명이 그의 독문 병기인 염화검(炎火劍)을 빼들더니 푸른빛 강기를 형성해 바닥에 그었다. -촤아아악! 바닥에 선은 정확하게 무사들과 이화명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이화명이 강렬한 기세를 발산하며 현마종의 무사들을 향해 고압적인 목소리로 경고했다. "이 선을 넘는다면 목숨은 장담할 수 없다." 그들도 무인인 이상 좌호법 이화명의 위명을 모를 리가 없었다. 좌호법, 그리고 마도관주의 칭호 이전에 무림에서는 그를 염왕(炎王)이라고 부른다. 열양기(熱陽氣)가 가득한 그의 검에 베이면 상처부위가 타 들어가서 회복할 수 없다고 알려질 만큼 악명이 자자했다. "목숨이 아깝지 않다면 시험해도 좋다." -움찔! 이화명이 검끝을 살짝 움직인 것만으로 현마종의 무사들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을 쳤다. '비, 빌어먹을!' '크윽! 도련님이 비참하게 죽었는데.' '염왕!' 차마 선을 넘어갈 수 있는 용기가 나지 않았다. 충성 이전에 이화명을 상대로 섣부른 모험을 한다는 것은 개죽음을 의미했다. 그만큼 명성이라는 것은 절대로 무시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물론 그런 명성에 굴복하지 않는 이도 있었다. "용서할 수 없다! 크아아악!" 손목이 꺾여서 부상을 당한 긴 턱수염의 중년인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천여운을 향해 신형을 달려 살초를 펼치려고 했다. 그러나 신형이 천여운의 근처로 닿기도 전에 중년인의 몸은 반 토막이 나고 말았다. -촥! "끄아아아아악!" 허리 째로 잘려나간 중년인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엎어졌다. 팔이 잘려도, 근육이 잘려나가도 그 고통이 말로 이를 수가 없다. 그런데 척추를 비롯한 허리가 통째로 잘려 나갔으니 이를 멀쩡한 정신으로 버틸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끄으으윽!" -털썩! 잠깐 동안 상반신이 꿈를 거리던 중년인은 이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뚝뚝! 붉은 문양이 그려진 도신에서 핏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언제 도를 뽑았는지 조차 보이지 않았는데, 십일 장로인 환의가 그 옆으로 나타나서는 턱수염 중년인의 몸을 반으로 갈라 버린 것이었다. '대, 대단하다.' '보이지도 않았어.' 문규나 허봉, 고왕흘은 이런 광경에 침을 꿀꺽 삼켰다. 좌호법 이화명부터 십일 장로인 환의까지 화경의 고수라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 위압감부터 고절한 실력까지 절대로 허명이 아니었다. 이런 자들을 굴복시킨 주군인 천여운은 얼마나 대단하단 말인가. '아직 멀었구나.' 강함에 대한 의욕이 불타오른 고왕흘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사실 그들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천부적이라고 불릴 만큼 빠르게 성장한 것이었는데, 천여운이나 마교의 수뇌부급들의 무위를 접하다보니 상대적으로 약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촤악! "컥!" 천여운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망설임 없이 무진윤의 목도 베었다. 마교의 차기 실세를 거머쥘 수 있는 현마종의 자제들의 죽음치고는 허무하면서도 비참한 최후라고 할 수 있었다. -부들부들! 바닥에 두 손을 짚고 떨고 있는 무 부인은 정원 바닥을 구르고 있는 천무연의 수급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소중한 이를 잃는다는 고통. 그것을 겪어본 것은 정말 오래간 만의 일이었다. 조부를 비롯해 양친을 잃은 그녀였지만 그들은 타인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닌, 정해진 수명이 다 되어 눈을 감았다. 사랑하는 아들인 천무연의 목이 잘리는 순간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 때문에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내 아들이.....내 아들이......으으으,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단 말인가?' 아무리 돌이켜 보아도 잘못될 만한 것은 없었다. 계획을 수차례 검토해보았을 만큼 빈틈을 두지 않았다. 천여운의 약점이라 할 수 있는 호위무사를 붙잡아서 그가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역함정을 치는 두 수하들마저 납치하면서 천여운이 누가 호위무사를 납치했는지조차 알아내지 못하게 정보를 차단했다. '이걸 계기로 독마종과 천여운을 같이 처리하려고 했건만.' 얼마 전 독마종의 대부분의 전력을 처리한 그녀였다. 현마종을 공격할 당시에 팔 할 이상의 전력을 투자하면서, 겨우 종파를 유지할 수준만 남아있는 독마종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여전히 후환거리였다. 네 종파에서 과거 동맹을 들먹이면서 중재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이미 옛적에 남은 독마종의 사람들마저 전멸시켰을 것이다. '언제적 동맹 타령이야. 어차피 척을 지었는데 굳이 후환이 될 적을 남겨둘 필요가 없잖아.' 그러나 문제는 명분이 없었다. 여섯 종파의 수장으로 있는 만큼 모든 일에는 신중을 기해야 했다. 적어도 모두가 납득할 만한 명분이 있어야 했는데, 한 번 중재가 들어온데다가 중하위 종파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독마종을 쳐서 제거하자니 일방적인 학살이 되어 남은 네 종파의 반발과 견제가 들어올 수도 있었다. '천여운 네놈이 도와주는 구나.' 그녀는 이 기회를 노려서 천여운이 독마종의 남은 전력과 싸우다 공멸한 걸로 그림을 그렸다. 미심쩍은 부분이 있을지 몰라도 어차피 천여운을 눈에 가시처럼 여기는 네 종파에서도 그를 제거했다는 것을 빌미로 독마종이 처리되는 것을 자연스럽게 묻을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했다. '대체 무슨 수로 알아냈다는 말이냐!!!' 천여운은 마치 현마종이 범인인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는 것처럼 대응했다. 자식을 잃은 고통과 혼란스러움으로 망연자실해하는 무 부인을 향해 천여운이 천천히 다가왔다. -탁! "학!" 한 발자국 걸어 올수록 살기가 짙어졌다. 그녀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초절정의 극에 불과했다. 화경의 극에 이른 천여운이 내뿜는 살기에 짓눌려 숨이 턱턱 막혀왔다. '마, 말도 안 되는 살기다!......설마 본 녀 역시도 이곳에서 죽이겠다는 것이냐?' 그를 죽이기 위한 함정을 팠지만 어째서 자신에게 이런 강렬한 살기를 내뿜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천여운이 그녀의 앞에서 서더니 무서운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고통은 충분히 느꼈나?” "대체 본 녀에게 왜 이러는 건가요? 함정을 판 것은 본 녀인데 어째서 내 자식들을 빼앗는..." -퍽! "꺅!" -쿠당탕탕탕!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천여운의 발차기에 복부를 얻어맞은 무 부인이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면서 뒤로 나가 떨어졌다. 공력이 실려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엄청난 괴력에 몸이 날아간 것도 모자라서 내장이 뒤틀릴 것만 같았다. -주르륵! 입가에 피를 흘리면서 고통스러워하는 그녀에게 천여운이 다가오면서 말했다. "내 어머니를 돌아가시게 만들고도 곱게 죽을 거라고 생각 한 거냐?" "!?" 그 말을 듣는 순간 무 부인이 고통도 잊은 채 두 눈이 왕방울 만하게 커져서는 천여운을 바라보았다. 벌써 십 년도 더 된 일이었다. 교주조차도 진노해서 호법전의 사람들을 전부 풀고도 알아 내지 못했던 그 일을 대체 천여운이 무슨 수로 알아낸 것일까? -탁! 천여운이 품속에서 꾸깃꾸깃 구겨진 종이를 꺼내서 펴서는 무 부인의 앞으로 날렸다. 그녀의 앞에 떨어진 종이에는 무언가가 빼곡이 적혀 있었다. 무 부인이 떨리는 눈으로 그 글씨를 읽어 내려갔다. [독마종의 천종섬이다. 천여운 네놈에게 알려줄 것이 있다.] * * * 지금으로부터 다섯 시진 전, 신시(申時) 중엽. 독마종의 본당 건물 앞에 한 중년인이 독마종의 무사로부터 무언가 보고를 받고 있었다. "....근방에서 현마종의 무사들에게 끌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멀리서 지켜보느라 제대로 듣진 못했지만 턱수염이 긴 남자가 그 청년더러 천여운의 수하라고 한 것은 확실히 들었습니다." "그 외에는 다른 보고 사항은 없느냐?" "넵. 앞서 말씀 드린 그 객잔 건과 이것 외에는 없습니다." "알겠다." 독마종의 무사가 물러나자, 뭔가를 고민하던 중년인이 본당 안으로 들어갔다. 본당에는 종주의 집무실 이외에 숙소도 있었는데 그 안의 침대에는 앙상하고 몰골이 엉망인 한 청년이 눈만 깜빡거리는 채 움직이고 있었다. "공자님. 내당주입니다." " 내.... 당....주....오셨....습....니까?" 힘겹게 목소리를 내뱉고 있는 자는 다름 아닌 독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종섬이었다. 폐인처럼 누워만 있던 그가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독마종의 종주인 백오가 한밤 중에 찾아온 무 부인을 만나던 그때 천종섬은 극도의 분노로 뭔가를 말하려고 아우성을 치다가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가 깨어난 것은 불과 이틀이 지나서였다. 척추의 손상으로 감각을 잃게 되면서 전신의 기혈이 막혀서 혀조차 움직일 힘이 없던 천종섬은 다시 깨어났을 때 목과 입의 감각이 되살아났다. 그의 분노가 의도치 않게 그 감각을 자극시켰기 때문에 일어난 기적이었다. 여전히 몸을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깨어난 일부 감각 덕분에 지금은 천천히 라도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현.... 마....종에....서는....무슨.....움직...임이... 있던...가요?" "그렇습니다." 중년인은 독마종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수뇌부인 내당주 백승이었다. 얼마 전에 있었던 현마종에 대한 기습의 실패로 독마종은 전력의 대부분을 잃게 되었다. 그로 인해 현재 남은 전력은 현마종을 감시하는데 전부 활용되고 있었다. 언제라도 현마종에서 남은 독마종의 사람들을 제거하기 위해 움직일 거라고 예상 한 내당주 백승의 대처였다. "공자님께서 언짢으실 수도 있습니다만. 천여운이 나타났습니다." "!!!" 요 근래 동안 감정 반응이 없던 천종섬이 눈동자가 흔들렸다. 백승은 그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보고했다. 객잔에 있는 천여운을 비롯해 현마종의 근방에서 그 수하가 납지된 것까지 말이다. 이 보고를 듣게 된 천종섬은 뭔가 현마종과 천여운 간에 알력이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수하를 끔찍이 아끼는 그놈의 사람을 건드렸다고? 현마종이?' 한참을 생각에 잠겨있던 천종섬의 눈이 반짝였다. 그는 이것이 하늘이 내린 마지막 기회라고 여겼다. '잘하면 놈들을 상쟁시킬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독마종의 전력을 잃으면서 살아남는데 주력을 다하는 그들은 비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을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 같은 년.' 천여운의 모친인 화 부인을 죽게 만든 진정한 원흉을 천종섬은 알고 있었다. 만약 천여운이 수하도 모자라서 자신의 어머니를 죽인 범인이 현마종의 무 부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둘이 부딪쳐서 서로를 죽여라.' 그렇게 된다면 자신을 이 꼴로 만들고 외조부인 백오를 죽인 천여운과 독마종의 사람들을 몰살시키고 어머니에게 거짓 오명을 뒤집어씌운 무 부인 중에 누구 한 명은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내.... 당....주." "네. 공자님 하명 하십시오." "내가…말하....는 것을....받아....적..으....세요." 천종섬은 그가 알고 있는 화 부인의 죽음에 관련된 모든 진상을 내당주 백승에게 받아 적게 했다. 그리고 그 서찰을 당장 천여운에게 보내게 했다. 침대에서 움직일 수 없게 된 이후로 처음으로 천종섬은 복수할 수 있는 천운이 생겨난 것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운명은 참으로 공교롭기 짝이 없었다. 천종섬이 천여운과 현마종의 상쟁시키려는 계획을 짰듯이 무 부인은 반대로 천여운과 남은 독마종의 잔당이 상쟁했다는 그림을 그린 것이었다. 다시 시점은 현재로 돌아온다. 구겨진 종이에는 천여운의 어머니인 화 부인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비롯해, 현마종에서 천여운의 수하를 납치한 것까지 상세히 적혀 있었다. 이 모든 내용을 읽은 무 부인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것은 분노와 어이가 없음이 같이 섞인 감정 때문이었다. '이.....이놈이.....' 설마 그 병신이 된 독마종의 소교주 후보자 천종섬이 이런 서찰을 천여운에게 보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미궁에 빠져있던 모든 실타래가 풀렸다. 천여운이 납치된 흉수를 찾은 것도, 자신의 모친인 화 부인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알아낸 것도 전부 천종섬의 짓이었다. '본 녀가.....본 녀가 그딴 병신이 된 놈에게....' "아아아아아아악!!!" -촥촥촥촥! 그로 인해 모든 것을 망쳐버린 무 부인이 서찰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이 서찰만 아니었다면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맞지 않았을 지도 몰랐다. 무 부인이 씩씩 거리며 천여운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흥! 그래 본 녀가 네놈의 그 창녀 같은 더러운 애미 년을 죽였다." 이성을 잃은 그녀는 원래의 교양 넘치는 말투를 벗어버렸다. 어차피 모든 진상이 드러난 마당에 주체할 수 없는 분노를 숨길 생각 따윈 없었다. "그래서 본 종파의 자식들도 죽여서 분풀이를 했으니, 마지막으로 이 본 녀를 죽일 셈이냐?" "잘 알고 있군." 냉정한 천여운의 대답에 무 부인이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웃기는 소리 집어치워! 네놈이 본 녀를 죽일 수 있을 것 같아?" "......" "네놈이 여기서 본 녀를 건드린다면 오라비인 일 장로의 노여움을 사서 오체분시되어 죽게 될 것이고, 여기에 관련된 네놈들도 전부.." -촥! "꺄아아아아아아악!"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두 눈이 무언가에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은 천여운의 손에 발하고 있는 푸른빛 검강이었다. 검강에 두 눈이 일(一) 자로 베인 그녀는 비명을 지르면서 피가 흘러나오는 자신의 눈 부위를 손으로 부여잡았다. -줄줄줄! "내 눈! 내 눈! 아, 앞이 보이지 않아!" "네 년에게는 앞을 볼 자격이 없다." "끄으으으아아아아! 이 더러운 핏줄 놈이 감히..." -촤악! "끄으으으으으읍!" 그녀가 분노를 전부 토해내지 못했는데 천여운의 검강이 입을 통째로 베고 말았다. "그 입도 마찬가지다." 기가 응집된 검강에 이빨과 혀가 전부 녹아내리면서 무 부인은 고통의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엎어지고 말았다. 눈과 입이 잘려서 흉측하게 되어버린 무 부인은 두 눈으로 보기 힘들 몰골이 되었다. "우웁!" 무력하게 지켜보고 있는 현마종의 무사들이 그 잔인함에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천여운의 분노는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 더러운 손으로 미독을 썼겠지." -촤촥! 천여운은 엎어져서 고통스럽게 뒤틀고 있는 무 부인의 두 손을 잘라버렸다. 무 부인은 경기를 일으키며 몸을 파르르 떨었다. 이런 고통 속에서도 기절하지 않고 버티는 것이 용할 정도였다. "그만! 그만!" 결국 참다못한 현마종의 무사 중에 한 사람이 외쳤다. "그대는 후환이 두렵지 않단 말이오!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은 본 종의 전력이 아니오! 이 사실을 일 장로께서 알게 된다면 절대로 공자를 용서지 않을 것이오!" "알게 된다면 이겠지." "뭐요?" 천여운이 말없이 본당의 옆에 있는 창고 건물을 향해 손을 뻗자, 심후한 공력에 의해 닫혀있던 문이 열리면서 그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무언가가 넘쳐 나왔다. -와르르륵! "웃!" 짙은 혈향이 순식간에 본당 앞 정원에 흘러나오며 모든 사람들의 코를 자극했다. 어찌나 놀랐는지 문규와 허봉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아아!" 창고에서 넘쳐 나온 것은 다름 아닌 죽은 시신들이었다. 자그마치 몇 십 구에 이르는 시신들이 창고에 꾸역꾸역 박혀있던 것이었다. 시신들의 틈바구니 속에는 독마종의 내당주 백승을 비롯해 천종섬이 눈을 감지 못한 채 억울한 눈으로 죽어있었다. '허어, 죽은 독마종 사람들의 시신을 창고 속에 숨겨놨었구나.' 고왕흘이 죽은 시신들을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저들의 계획은 눈에 불을 보듯 뻔했다. 아마 자신들의 계획이 성공해서 천여운을 죽였다면, 그가 이들을 죽인 흉수인 것처럼 꾸며놓았을 것이 틀림없었다. -꽉! 천여운이 바닥에서 꿈틀대며 고통스러워하는 무 부인을 짓밟으며 말했다. "네놈들은 독마종과 싸우다 공멸했는데 뭘 안다는 건지 모르겠군." 그 말을 듣는 순간 현마종의 모든 무사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버렸다. 자신들이 세운 계획을 지금 역으로 행하겠다는 말이 아닌가. 천여운이 가만히 대기하고 있는 수하들을 향해 명을 내렸다. "전부 죽여라." "충!" -팟!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좌호법 이화명과 십일 장로 환의의 신형이 동시에 현마종의 무사들을 향해 쇄도했다. -촤촥! "크악!" 두 화경의 고수들이 검과 도를 휘두를 때마다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그것은 절대로 대결이 아니었다.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웠다. '안 돼! 안 돼에에에에!' -꿈틀꿈틀! 눈이 멀었고 말을 할 수 없었지만 귀가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기에 무 부인은 비명소리에 격정에 사로잡혀 온몸을 미친 듯이 뒤틀었다. 그런 무 부인을 향해 천여운이 속삭이듯이 말했다. "네 년은 마지막이다." -오싹! 무 부인은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절망과 후회라는 감정을 동시에 맛보았다. < 36장 뱀의 아가리 속 (6) > 끝 < 37장 두 번째 입회자 (1) > "끄아아악!" "이, 이 괴물들!" 현마종의 무사들이 있는 힘을 다해서 대항했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두 명의 화경의 고수 앞에서 그들은 그저 범 앞에 있는 사냥감에 불과했다. 몇몇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도망을 시도했지만 독마종의 장원을 둘러싸고 있는 비환귀종의 무사들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했다. '으으으...천여운! 천여운!’ 학살 당하는 무사들의 끊임없는 비명 소리에 무 부인은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점차 두려움으로 심장이 옥죄여 왔다. -촤아악! "끄아아악!" "크헉!" 이 고통스러운 소리가 멈추는 순간 그녀는 죽게 된다. 모순적인 감정이라 할 수 있었다. 자신의 수하들의 비명 소리가 그치지 않기를 바라야 하는 상황이 말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 많던 인기척들과 비명 소리들이 사라지고 독마종의 장원에 고요함이 찾아왔다. "전부 끝났습니다." 좌호법 이화명의 말에 천여운이 짓밟고 있던 무 부인을 차갑게 내려보았다. 이제 그녀의 마지막 순간이 찾아온 것이었다. 그 전에 먼저 할 일이 있었다. "십일 장로님." "네에. 공자." "비환귀종의 무사들을 불러서 독마종의 약재실을 뒤져서 쓸 만한 독이 있다면, 시신들에 하독해주세요." "아아!" 철두철미한 천여운의 명령에 이화명과 환의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그렇지 않아도 독마종이 저지른 걸로 꾸미기 위해서 그들은 최대한 본신 절기를 숨기고 평범한 일격으로 저들을 살해했다. 그런데 독까지 뿌려놓는다면 확실하게 독마종과 싸운 흔적으로 보일 것이다. "옳으신 판단입니다. 후후후." 환의가 장원 바깥에 있는 수하들을 데리러 간 사이에 천여운이 발로 짓누르고 있는 무 부인을 향해 사형선고를 내리듯이 말했다. "이제 네년 차례다." 비명 소리가 그친 후로 미칠 듯이 뛰는 심장 때문에 전신이 땀으로 젖은 무 부인이 화들짝 놀라서 온몸을 뒤틀었다. "안 돼! 안 돼! 이, 이렇게 죽을 수 없어. 제발! 제바아아알!!!" "지옥에 떨어져서 먼지가 되는 그 순간까지 내 어머니께 참회해라." -푹! 날카로운 예기가 그녀의 우측 목멀미부터 파고들며, 차가운 어둠 속에서 그녀는 의식을 잃어갔다. *** 다음날 마교의 성내는 뜻밖의 소식으로 떠들썩해졌다. 교주전 소속의 교인들로부터 모든 종파와 무가로 소식들이 날아갔는데, 이것은 교인들을 충격에 휩싸이게 할 만큼 엄청난 사건이 되었다. 얼마 전 현마종과의 싸움으로 겨우 종파의 명맥만 유지하던 독마종이 지난 밤,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몰살당했다는 소식이었다. 교내 번화가 거리는 이 소식들로 인해 떠들썩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뭐? 그게 사실이야?' '세상에 여섯 종파 중의 하나가 하룻밤 새에 사라진 거잖아!' '허어,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그 독마종이 이젠 없다고?' 그런데 이것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 일을 자행한 현마종의 소식이었다. 독마종의 장원에서 이백 명이 넘는 현마종의 무사들이 독에 중독되어 몸이 녹거나, 흑변한 채로 그 시신들이 발견이 되었다 는 것이었다. 이른 아침에 독마종과의 협약으로 식료품을 배달하는 용역들이 사건의 현장을 발견하면서, 교주 전에서 사람들과 현재 교내 책임자를 맡고 있는 구 장로가 시신들을 수습하고 조사 중이다. '참 말인가?' '허어, 무섭구만. 여섯 종파는 여섯 종파답네. 독마종 사람들이 절대 그냥 당하진 않는군.' '현마종주가 복귀하면 난리가 나겠는데." '무슨 사달이라도 나겠나? 설마 죽은 독마종 사람들을 상대로 부관참시라도 할 리는 없을 거고.' 부관참시(剖棺斬屍). 죽은 뒤에 극형을 치루는 것으로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서 걸어두는 것을 말한다. 관에서 하는 것이지만 일종의 시신을 상대로 분풀이를 하지 않겠냐는 말이었다. '그, 그 있잖아. 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이신 천무연 공자의 시신도 현장에서 발견 되었다던데.' '응? 천무연 공자는 마도관에 있지 않나?' '마도관에서도 사건이 터졌다고 공문을 붙였던데. 현마종에서 마도관의 구금동을 습격해서 천무연 공자와 일 장로의 자제분을 탈출시켰다던데?' '헉 마도관에 말인가? 쯧쯧, 아무리 현마종이 성세가 높다지만 본교의 규칙도 우습게 여길 만큼 대담해졌네. 그려.' '무공 교두들이 일부 흉수들을 잡긴 했다던데, 것 참.....교주께서 자리를 비웠다고 교내가 엉망이 되어가는군.' "어서 교주님과 장로님들이 복귀하시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겠는걸.' 거리의 분위기는 떠들썩한 것으로 그치지 않고 흉흉해졌다. 최근에 들어서 마도관 내에서 벌어진 혈손들이 죽는 사건 때문에 여섯 종파끼리의 알력 다툼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고 교인들은 생각했다. 교인들은 자리를 비우고 있는 교주가 어서 빨리 복귀하기를 기원했다. 한편 비환귀종의 본당 종주의 집무실로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면서 종주인 환의에게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집무실 책상에 앉아있는 환의에게 한 중년의 사내가 보고했다. "비작 거리에 파견되었던 공작원들이 복귀했습니다. 말씀 하신대로 입소문을 퍼뜨려서 여론이 현마종으로 집중되었습니다." "잘했어요." 나비 문양이 그려진 붉은 비단 옷을 입은 환의가 빙그레 웃으며 칭찬했다. 놀랍게도 현재 성내에 퍼진 소문의 일부는 의도된 것이었다. 암종인 비환귀종의 사람들은 정파나 사파에 파견되어 세작으로 활동할 만큼 정보 조작이나 여론을 형성하는데 능했다. "특별히 공작전을 벌일 필요도 없었습니다." "상대가 없으니까요. 후후후." 만약에 독마종이나 현마종이 멀쩡했다면 이런 여론 조작이 되지 않도록 손을 썼겠지만, 독마종은 완전히 멸종했고 현마종 역시도 교내에 남아있던 자들이 전부 제거된 상태이기 때문에 이를 막을 수가 없었다. 이로써 진실은 은폐되고 두 종파 간의 상쟁이 되어버렸다. '천 공자. 정말 감탄스럽군요.' 이 모든 것이 천여운의 지시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물론 그런 지시가 없더라도 환의는 자의로서 일부 정보를 조작할 생각이었지만, 천여운의 말을 듣고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갓 마도관에서 출관한 애송이가 아니라 능구렁이를 잡아먹은 것처럼 영악했다. '과연 현마종주가 돌아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 오만하면서도 강한 남자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보일 반응. 이것만 생각해도 즐거워지는 환의였다. 같은 시각, 비환귀종의 객당 정원에는 심각한 얼굴로 서있는 천여운과 수하들이 있었다. 밤새 잠을 자지 못했는지 그들의 얼굴은 퀭했다. 몇 차례 천여운이 자신은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서 쉬라고 했지만, 주군이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그냥 내버려둘 순 없는 수하들이었다. '에휴. 어젯밤의 일들로 주군께서도 많이 피로하실 텐데.' 차마 쉬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을 키워준 장 호위가 위독하다는 말에 천여운은 밤을 꼬박 지새웠다. 어제 새벽에 좌호법 이화명이 불러준 의원 백종명이 밤새 장 호위를 돌보고 있었다. 마의 백종우를 부르고 싶었지만 그는 교주의 주치의였기 때문에 출타 중이었다.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수도 있다는 비환귀종의 내당주가 전해준 말에 천여운의 심경은 내내 복잡했다. '장 호위.....' 수많은 추억들이 그를 괴롭게 만들었다. 장 호위마저 죽게 된다면 어릴 적 유년기를 떠올리게 만들 마지막 끈이 끊겨버리는 셈이었다. '천 공자님.' 문규는 괴로워하는 천여운의 얼굴을 보면서 마음이 쓰라렸다. 힘내라는 말이라도 건네고 싶었지만, 아직 아무런 결과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떤 위로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알기에 할 수 있는 것은 같이 이 자리를 지키는 것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끼이이익! "지친다. 지쳐...." 객당의 한 방문이 열리면서 초췌한 얼굴의 의원 백종명이 걸어 나왔다. 밤새 치료를 하느라 잠을 자지 못한 그는 당장에 침상에 쓰러져서 자고 싶은 심경이었다. "엇?" 마루로 나온 백종명이 천여운을 발견하고 포권을 취했다. 그가 장로가 된 이후로 예전처럼 편하게 대할 수는 없었지만, 마도관의 밖에서 만나게 되니 반갑기는 매한가지였다. "천장로님이 여긴 무슨 일로?"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천여운이 마루 위로 올라와서 물었다. "배, 백 의원님. 장 호위는 괜찮습니까?" "장 호위?" 백종명은 자신의 숙소에서 자고 있던 도중에 비환귀종으로 반 강제로 끌려왔기 때문에 장 호위의 정체를 몰랐다. "제, 제 호위입니다." "아아!" 어쩐지 좌호법 이화명이 직접 와서는 신경써달라고 한 이유가 있었다. 얼마나 걱정스러운지 평소에 감정 표현이 별로 없는 천여운의 떨리는 눈을 바라보면서 백종명이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참....이런 말을 하기 그렇습니다만...." 그 말에 천여운이 안색이 어둡게 변했다. 그러자 백종명이 뭔가 오해한 것 같다는 생각에 얼른 다음 말을 이었다. "아아, 그게 아니라 이빨이 전부 뽑혀져 있어서 평생 미음이나 죽만 먹으면서 살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네? 그, 그럼?" 백종명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겨우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참 심지가 굳건한 사내더군요." "아아아!" 방금 전까지 심각하게 굳어져 있던 천여운의 안색이 밝아졌다. 밤새 걱정해왔던 모든 것이 씻은 듯이 날아갔다. 기뻐하는 천여운의 얼굴에 긴장된 얼굴로 결과가 어찌되었는지 궁금해 하던 수하들이 마루 위로 뛰어 올라와서 축하했다. -우당탕! "경하 드립니다. 주군." "주, 주군! 정말 잘되었습니다! 밤새 그렇게 걱정하셨는데." "공자님! 흑!" 허봉과 문규는 괜히 벅차올랐는지 눈물까지 글썽였다. 그만큼 천여운이 괴로워하는 모습은 그들을 많이 걱정스럽게 만들었었다. 그래도 다행히 장 호위가 망자의 강을 건너지 않고, 무사히 견뎌냈으니 한시름 덜은 것이었다. "으음....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시끄럽게 하지 말고 일단 내려가는 게 좋겠네요. 환자는 당분간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헙!" "죄, 죄송합니다." 의원 백종명의 말에 머쓱해진 그들이 조용히 마루 아래로 내려갔다. 밤새 치료를 받은 장 호위는 백종명이 처방해준 약을 먹고 겨우 잠든 상태였다. 당분간은 안정을 취하면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말에 천여운은 연신 백종명에게 감사하다고 예를 표했다. 백종명이 손사래를 치면서 말했다. "괜찮습니다. 의원의 본분을 다했을 뿐입니다. 아이고, 그런데 저는 출근 시간이 늦어져서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요?" 금방이라도 피로에 지쳐 쓰러질 것 같은 그의 상태에 천여운이 이곳에서 조금이라도 쉬고 가는 편이 좋지 않겠냐며 권했지만, 백종명은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괜찮습니다. 하하핫, 의무실에 가서 눈을 부치면 됩니다. 천 장로님이 마도관에 안 계셔서 더 이상 바쁠 일이 없을 것 같거든요." "네?" "아, 아닙니다." 천여운이 있을 때만 하더라도 환자가 끊이지 않았던 마도관 의무실이었다. 그러나 그가 육 단계 시험을 통과해서 나갔으니, 더 이상 환자가 없을 거라 생각하면 매순간이 아쉬운 백종명이었다. '뭐, 몇 달만 참으면 되니까.' 마도관의 기간이 끝나고 나가게 된다면 스승인 마의의 곁에서 보조로 있을 때보다도 더 많은 환자를 접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여운의 전신에서 풍겨져 나오는 짙은 혈향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렇게 백종명이 마도관으로 돌아간 후에 수하들은 밤새 잠을 자지 못한 천여운에게 쉬기를 권했다. 그런데 천여운의 생각은 달랐다. "그럴 시간이 없을 것 같다." "네?" "얼마 후면 본교로 교주님이 도착한다." "아....." 교주 일행의 귀환. 그들 역시도 아까 전에 십일 장로 환의가 찾아와서 했던 말을 같이 들었다. 정파 무림맹의 사자가 방문한 후로 무림으로 나가서 장기간 자리를 비웠던 교주가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강서성의 남부 지역까지 도달했다고 하니, 닷새 안에는 도착할 것이다. 그 안에 천여운이 해야 할 일은 명백하게 정해져 있었다. 남은 두 명의 입회자들을 구해야 했다. '교주부터 여섯 종파의 종주들이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현마종의 무 부인은 비교적 쉽게 처리했지만, 종주들까지 돌아오게 된다면 지금보다 더욱 힘든 싸움이 시작된다.' 그들이 복귀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천여운을 견제할 것이다. 그 전에 만반의 준비를 마쳐야 했다. 문규의 조부인 팔 장로 마룡장종의 종주 문연도 있었지만, 지금 당장에 입회자로 설득할 길이 없기 때문에 혹시의 상황에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인가.' 현재 교내에 있는 네 명의 장로들 중에 한 사람인 독마종주 백오는 천여운의 손에 목숨을 잃고, 십일 장로인 환의는 옥패를 바치고 충성을 맹세했다. 두 사람의 장로들에게서 옥패를 얻어야만 소교주로 등극할 수 있다. "그래도 구 장로님은 설득하기 쉽겠군요." "음음. 그렇겠군." 허봉의 말에 고왕흘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구 장로 사무종의 종주 사마의의 아들인 사마착이 천여운의 수하로 있으니, 아무래도 그를 지원할 확률이 높았다. "그럼 먼저 구 장로님을 뵈러 갈 겁니까? 주군." "아니. 구 장로는 사마착이 내상을 치료하면 같이 간다." 무 부인의 수하들에게 내상을 입은 사마착은 지금 객당의 한 방에서 백기와 함께 운기조식을 취하며 회복 중이었다. "그렇다면 답은 정해졌군요." "마연검종으로 간다" 다음 목표는 십 장로 마연검종(魔演劍宗)의 종주 연무화였다. 열두 장로 중에서 사 장로인 음마종의 종주 항소유와 더불어 여인의 몸으로 장로직을 맡은 자였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그녀는 검마종, 현마종과 어떠한 연이 달아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것이 길(吉)이 될지 흉(凶)이 될지는 가보면 알게 되리라. < 37장 두 번째 입회자 (1) > 끝 < 37장 두 번째 입회자 (2) > 천여운은 마도관을 나오기 전에 좌호법 이화명을 통해서 각 종파에 대한 여러 정보들과 열두 장로들에 대한 특징, 무공, 세력권에 대해서 상세히 알아두었다. 물론 그것은 완벽한 정보라기보다는 교주전에서 조사한 정보들이었다. 이화명이 십 장로 연무화에 대해서 이야기해준 것을 떠올렸다. '장로들 중에서 교주님조차도 독특한 성격 때문에 꽤 껄끄러워하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 중 한 명이 십 장로 연무화입니다.' 또 다른 한 명은 비환귀종의 종주 환의라고 한다. 연무화의 마연검종은 종파라고 표명하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그녀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무인들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마연검종의 장원에는 최소한의 고용인들만이 있다고 한다. 가장 특이한 것은 그녀는 장로 회의가 있거나 교주의 명이 없고는 늘 장원 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연 장로는 괴팍한 성격 때문인지 타인과 교류를 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오는 손님도 마다한다고 하더군요. 다만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몇 년에 한 번꼴로 검마 종주, 현마종주와 접촉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접촉을요?' '그렇습니다. 늘 성 밖에 인적이 드문 산봉우리에서 만나는 것 같더군요. 사람을 보내서 염탐을 하고 싶어도 세 장로들의 무공 수위가 높아서 접근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화경의 고수를 상대로 일정 간격 이상으로 감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 세 사람의 회동이 수상하기는 했지만, 그 후에는 늘 하던 데로 장원에 틀어박혀 아무 움직임이 없었기 때문에 교주는 근 칠 년 가까이 그녀를 감시하게 했던 것도 이내 중지시켰다고 한다. '특이하군요.' '워낙 괴팍하고 완고해서 설득하기 어려워서 권해드리고 싶지 않지만, 만약에 연 장로의 충성을 얻게 된다면 굉장히 도움이 되실 겁니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녀의 무공은 저를 능가합니다.' 이 말을 할 때만큼은 무인으로서의 자존심이 있는지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좌 호법을 능가한다고요?' 가진 세력이 없고 특별한 공적이 없어서 장로들 중에서도 하위 서열에 속하지만 무공만큼은 여섯 종파의 종주들에 버금 간다고 했다. 심지어 장로 회의가 있을 때마다 음마종의 종주 항소유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것을 피한다고 할 정도였다. 교주전에서 파악하기로는 두 장로가 비공식적으로 비무를 겨뤘고 항소유가 처참하게 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연무화는 마교의 여자 무인의 정점에 서있다고 할 수 있었다. '괴팍한 성격을 떠나서 연 장로가 강한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수하로 거두시기에는 흐음.....차라리 다른 장로 분들을 설득하시는 편이 빠를 겁니다.' 이화명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녀의 옥패를 얻기로 결정한 천여운이었다. 이를 생각하면서 걷다보니 어느새 마연검종의 장원에 도달했다. 마연검종의 장원은 마도관의 동남쪽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어라?" 허봉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장원의 입구의 대문은 잠겨 있었는데, 다른 종파들과 달리 그 앞을 지키는 경비 무사들이 없었다. 크기도 여느 장원보다 작은 규모라서 얼핏 보아도 외당, 내당을 따로 구분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경비 무사들도 없고 많이 조용한데요?" "안에 기척은 느껴지네. 기감을 열어서 살펴보게." "아!" 허봉에게 고왕흘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허봉이 기감을 열어서 살펴보면 장원 내부에 그리 많은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많아도 열 명을 넘기지 않는 듯 했다. 그 대부분도 무공을 익히지 않은 평범한 사람의 기척이었다. "주군, 아무래도 직접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천여운이 고개를 끄덕이자 허봉이 대문의 문고리를 잡고 두드리며 소리쳤다. -쿵쿵쿵! "누구 계십니까? 안에 누구 계십니까?" 허봉이 몇 차례 외치자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리며, 청소를 하는 고용인으로 보이는 중년인이 빗자루를 들고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고, 나으리들 무슨 일이십니까?" 말투만 듣더라도 무인이 아님은 확실했다. 장원을 정리하고 유지할 수 있는 고용인들 외에 어떠한 수하를 두지 않는다는 소문이 사실인 듯 했다. 허봉이 중년의 고용인에게 용무를 밝혔다. "이 분은 본교의 십이 장로이신 천여운 공자이십니다. 십 장로님을 뵈러 왔는데, 말씀을 올려주십시오." "헛! 십이 장로님이라고요?" 고용인이 눈이 왕방울 만해져서 천여운을 바라보았다. 워낙 손님이 없는 장원에 마교의 수뇌부라 할 수 있는 장로가 찾아왔다고 했으니 놀랄 만도 했다. 확실히 마연검종이 폐쇄적이긴 했다. 천여운의 이름은 육 단계 시험 이후로 마교 성내에 꽤 많이 퍼져있었는데, 전혀 듣지 못한 듯했다. '응? 이 젊은 공자가 장로님이라고?' 일개 고용인에 불과한 중년인이었기에 고작 약관의 나이에 불과해 보이는 천여운이 장로라는 사실을 믿기 힘들었는지 수상해 하는 눈초리로 그를 살폈다. 그러나 이내 천여운이 품속에서 꺼낸 장로의 신분을 알리는 옥패를 보고서는 황급히 장원으로 뛰어 들어갔다. "으음, 살짝 느낌이 안 좋은 걸요." 여자의 감일까. 문규의 촉은 정확했다. 얼마 있지 않아 대문 입구로 다시 나타난 중년의 고용인이 눈치를 보면서 물었다. "호, 혹시 교주전에서 보내서 오셨습니까?" "아닙니다." "아아....." 신음성을 흘리던 고용인이 허리를 깊이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천 장로님. 저희 종주께서 교주님의 명이 아니라면 뵙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네에? 다른 장로님이 찾아오셨는데요?" 허봉이 불만스러웠는지 눈썹을 치켜 올렸다. 물론 손님을 받고 안 받고는 그 장원의 주인의 자유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동급의 직위를 가진 다른 장로가 찾아왔는데 단번에 거절할 줄은 몰랐다. "흠." 천여운의 입에서도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적어도 얼굴은 비출 거라 생각했는데, 확실히 완고한 성격의 소유자인 듯 했다. 아무래도 십 장로 연무화와 대면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무인의 본성을 자극하는 편이 좋을까?' 첫 대면이었기에 좋은 인상으로 만나고 싶었지만 상대가 만나기를 거부하니, 억지로 장원으로 들어가는 것보다는 그나마 무난한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장원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기에 이 정도 거리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실례를 무릅써야겠군요." "네?" 천여운이 심후한 내공을 끌어올려서 장원 내부를 향해 기세를 발산시켰다. 화경의 경지에 오른 천여운이 내뿜는 기운은 동급의 강자라면 충분히 자극이 될 만큼 강렬했다. "주, 주군?" 옆에 서있는 고왕홀과 문규, 허봉조차도 영향을 받을 만큼 강렬한 기세였다. 내공이 약한 자들은 천여운이 발산하는 기운만으로도 공포심이 생겨나 다리에 힘이 풀릴 정도였다. "흐어어어!" -털썩! 그 예로 바로 앞에 서있던 고용인이 안색이 창백해져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장원의 본당 쪽을 향해 기운을 집중했으니 아마도 무인으로서 호기심이 생기거나 자극이 되었다면 뭔가 반응을 보일 것이다. '응?' 그러나 예상과 달리 장원의 내부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허탈해지기마저 했다. '좌호법의 말대로 무리인가.' 이렇게까지 외부의 일에 전혀 관심이 없는 자는 처음이었다. 만나기라도 해야 두 번째 입회자로 설득을 해볼 텐데, 이래서는 무리였다. 잠시 고민에 빠져 있던 천여운이 장원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확인해보기로 했다. '현마종, 검마종과 연이 있다고 했지.' 만약에 그녀가 그들의 조력자가 맞다면 처음부터 배제할 필요가 있었다. 여섯 종파의 종주들에 버금가는 고수인 연무화가 그들을 돕게 된다면 아직까지 세력 면에서 부족한 자신이 불리해진다. "혹시 십 장로님께 마지막으로 이 말을 전해줄 수 있겠습니까?" "마, 말씀하십시오." 겁에 질린 고용인이 얼른 답했다. "현마종, 검마종과 같은 길을 걷는 가? 라고 전해주십시오." 단도직 입적으로 물어보기로 하였다. 만약에 그들과 조력자라면 뭔가 반응을 보일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지금처럼 일관되게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중년의 고용인이 떨리는 다리를 붙잡고 장원 안으로 들어갔다. 천여운의 질문에 의아해진 고왕흘이 물었다. "주군. 십 장로님의 옥패를 얻기 위해서 오신 게 아닙니까? 어째서 그런 질문을?" 좌호법 이화명에게 장로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 아니었기에 의문스러울 만도 했다. 천여운이 그런 고왕흘에게 무표정한 얼굴로 답해주었다. "방관자로 남을지 적이 될지 확인해보려고." "......옥패는 포기하시는군요." 어차피 이런 완고한 성격의 소유자라면 스스로 동하지 않고는 아무리 설득한다고 해도 아군이 되어줄 리가 만무했다. 그나마 최상은 그녀가 여섯 종파와의 싸움에서 방관자로 남는 것이었다. 중년의 고용인이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흠칫! 천여운이 대문 틈새로 보이는 장원 안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방금 전까지 고요했던 마연검종의 장원 내부에서 날카로운 진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것을 감지한 천여운의 표정이 굳어졌다. 후자인가, 아무래도 요동치는 진기를 보면 방관자가 아님이 확실했다. "무, 무슨 진기가 이렇게!" "아아!" 뒤늦게 장원 안쪽에서 뿜어져 나오는 진기를 느꼈는지 고왕흘과 문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까 전에 천여운이 곁에서 발산하던 기운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강했다. 분명 이 장원의 주인이 내뿜는 기운이 틀림없었다. -타타타탁! 그때 중년의 고용인이 황급히 달려와서 창백해진 얼굴로 천여운과 수하들에게 말했다. "조, 종주께서 모셔오랍니다." 어떠한 것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던 십 장로 연무화가 그들을 장원 내로 초대했다. 천여운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고용인을 따라 장원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모래바닥으로 이루어진 넓은 마당과 함께 그녀가 거처하는 본당 건물이 보였다. '아! 저 분이 십 장로님?' 문규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본당 건물의 마루에 오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흰 무복에 단정한 외모의 여인이 서있었는데, 꼿꼿한 자세부터 시작해 짙은 눈썹, 미간에 가득한 주름마저도 보통 성격의 소유자가 아님을 짐작하게 만들었다. '검?' 마루에 서있는 그녀의 오른손에는 검집이 들려 있었다. 예상대로 호의적으로 초대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마루에서 내려온 십 장로 연무화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천여운이 인사를 하기도 전에 손가락으로 얼굴을 가리키더니, 먼저 입을 열었다. "네놈이로구나." "네놈?" 초면부터 거침없이 막말이 들어오자, 도리어 수하인 허봉과 고왕흘이 상기되어서는 불쾌함을 느꼈다. 아무리 같은 직위인 장로라고 해도 천여운은 교주의 자식이면서 소교주 후보자였다. 최소한의 예법은 갖출 만도 했는데, 인사는커녕 삿대질을 하면서 함부로 대하니 화가 나는 것은 당연했다. '괴팍하긴 하구나.' 걸모습만 봐서는 귀부인처럼 보였는데 상당히 거칠었다. 교주마저 껄끄러워 할 만 했다. 그녀의 그런 태도에도 불구하고 천여운은 개의치 않고, 가볍게 포권을 취하면서 말했다. "십이 장로 천여운이 십 장로이신 연무화 공을 뵙습니다." "흥! 네놈이 천가(天家)이든 장로이든 내게서 대우 받을 생각 따윈 버려라. 나는 본교의 교주님이 아니면 누구에게도 예를 갖추지 않는다." 그저 인사를 했을 뿐인데 이상할 정도로 적의가 넘쳤다. 천여운의 인상이 점차 굳어졌다. '역시 현마종, 검마종의 조력자인 건가.' 그렇지 않고는 아무리 괴팍해도 이런 반응을 보일 리가 없었다. 그런데 연무화가 갑자기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챙! "서, 설마?" "지금 뭘 하려고? 갑작스러운 그녀의 발검에 천여운의 수하들의 표정이 졌다. 묵빛 현철로 만들어진 검신이 모습을 드러내며 그녀가 천여운을 향해 적의가 가득 찬 눈으로 검 끝을 겨냥하며 외쳤다. "뭐? 같은 길? 그런 후안무치한 배신자들과 나를 같은 검종(劍宗)으로 취급하다니, 네 녀석에게 오늘 본때를 가르쳐주마!" -팟!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연무화의 신형이 번개처럼 바닥에서 튕겨져 나오며 천여운을 향해 고절한 검초를 펼쳤다. 적의적인 태도가 걸리기는 했지만 설마 정말로 대뜸 공격할 줄은 몰랐다. 문규가 놀라서 다급히 외쳤다. "공자님! 위험해욧!" -촤촤촤촤촤촥! 짧은 찰나의 순간 천여운의 두 눈이 커졌다. 열여덟 개의 평범한 검식들이 교묘하게 맞물리면서 그 위력이 증폭되는 이 검초는 천여운이 익히 잘 알고 있는 검법이었다. '진신마검?' 마교에서 실전된 검마의 검법인 진신마검(進新魔劍)이 십 장로 연무화의 손에서 펼쳐졌다. < 37장 두 번째 입회자 (2) > 끝 <37장 두 번째 입회자 (3)〉 진신마검(進新魔劍). 오백 년 전 희대의 검수라 불리던 검마의 검법이다. 마교 최고의 무공이자 검법이었던 천마검법과 가히 쌍벽을 이룬다고 불리는 절세검법이었지만 직전 제자를 양성하지 않았기에 실전되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유일하게 검마의 손으로 가르쳤던 세 명의 전인들이 있었다. 경천, 무주랑, 연홍수. 뛰어난 무재를 지닌 이 세 명을 천무화를 위한 충성스러운 수하이자 버팀목으로 육성하려 했으나 결과적으로 검마는 실망하고 만다. 경천과 무주랑은 교내의 권력을 탐해 부교주였던 검마의 전인이라는 명목하에 당대 교주인 천무화와의 혼인을 추진했고, 실망한 검마는 전인들을 전부 파문했다. 검마는 천하제일인이라는 자신의 배경이 제자들에게 헛된 야욕을 불러일으켰다고 생각하여 숨을 거두는 날까지 무공을 전수하지 않았다. 그로인해 검마의 일인전승 종파였던 검종(劍宗)은 맥이 끊겼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끊겼다고 생각했던 진신마검이 등장했다. -촤촤촤촤촥! 연무화의 검에서 펼쳐지는 열여덟 개의 검식으로 이루어진 진신마검의 고절한 검초가 천여운에게로 쇄도해왔다. ‘제 이 초식 진검유수(進劍流水).’ 진신마검의 비급서를 전이 받은 천여운은 그 초식을 단번에 알아봤다. 검 초식의 위력은 가히 명불허전이었다. 그러나 이것을 모른다면 모를까. 초식을 누구보다도 상세하게 알고 있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챙! 천여운이 등허리에 차고 있던 검집에서 현철검을 뽑았다. 특별한 초식을 펼칠 필요도 없이 천여운이 맞물리는 열여덟 개의 검식 사이로 정교한 일검을 찔러 넣었다. -촥! 찔러 넣은 검에 강기를 불어넣고 반탄력을 일으키자, -채채채채채챙! “아닛?” 연무화의 눈빛에 당혹감이 서렸다. 물샐 틈 없이 맞물리며 위력이 증대되던 검초가 일순간에 파훼되고 말았다. 천여운이 찌른 그곳이 유일하게 진검유수의 약점이었다. ‘진신마검의 검초를 단번에 파훼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마교 최고의 검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진신마검이 이렇게 어이없게 파훼된 적은 그녀가 이 검초를 익힌 이래 한 번도 없었다. -팟! 연무화가 보법을 펼쳐서 빠르게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는 천여운을 향해 외쳤다. “네놈 무어냐? 어떻게 내 검 초식을 파훼한 거지?” “저야말로 묻고 싶군요. 그 검법은 대체 어떻게 익힌 겁니까?" 천여운의 질문에 연무화의 눈빛이 흔들렸다. 오백 년 전에 실전된 검법이기 때문에 알아보는 이가 없을 거라 생각하여 펼친 것이었는데, 파훼 한 것도 모자라서 알고 있는 눈치였다. ‘설마 진신마검을 알고 있는 것인가? 그럴 리가 없어.’ 내심 당황스러워하던 연무화가 본심을 감추고 소리쳤다. “본 종의 검법이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진신마검이 마연검종의 검법이라고요? 금시초문입니다. 검마 공에게 제자가 있었다는 얘기는 처음 들었습니다만.” “진신마검!!!” 천여운의 말에 이를 지켜보던 고왕흘과 문규, 허봉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마교의 교인들 치고 전설적인 검수라 불리는 검마와 그의 절기인 진신마검을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 엄청난 검법의 맥이 끊겼다는 사실도 유명했다. 아무 진실을 모르는 마교인들은 자세한 사정을 알지 못했고, 교주 직전 무공인 천마검법에 버금가는 절세검법이 사장된 사실을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방금 그 엄청난 검초가 진신마검이라고?’ ‘허어, 정말인가?’ ‘검마 공의 검법!’ 그들은 그저 화경의 경지인 연무화의 무공이 고절하기 이런 엄청난 검초를 펼친다고만 여겼었다. 정말 진신마검이라면 그들은 전설을 눈앞에서 목격한 것이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정말로 연무화가 펼친 검법이 검마의 진신마검이라면 그 검초를 단 일검에 파훼한 천여운의 검술 실력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겁법의 정체를 거론하는 천여운에게 놀라하던 연무화가 인상을 굳히면서 물었다. “네놈.....설마 무명(無名)의 전인이냐?” “무명?” 이름이 없다는 말인데 그녀는 그것을 호칭처럼 불렀다. 천여운이 반문하면서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하자, 연무화가 더욱 당혹스러워했다. ‘무명과 관련이 없다는 건가? 하긴 그분이 검종과 관련이 없는 후인에게 무공을 전수할 리가 없다. 그럼 대체 어떻게 진신마검을 알고 있는 거지?’ 그녀가 머릿속이 복잡해진 것처럼 천여운 역시도 생각이 깊어졌다. 마도관의 육 단계 시험을 통과한 대가로 마도관의 숨겨진 지하보고에서 검마가 남긴 무공들을 전부 익힐 수 있게 된 그였다. ‘연 장로도 나와 비슷한 경로로 익혔다고 생각 했는데 아니구나. 전혀 모르고 있다.’ 그것은 당연했다. 마도관의 지하보고에 검마의 비급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자는 오백 년 동안 그의 유지를 잇고 있는 세 호법뿐이었다. 칠십여 년 만에 육 단계 시험을 통과한 사람은 천여운뿐이었기에 심지어 당대 교주인 천유종조차도 이 사실을 몰랐다. ‘뭔가가 있다.’ 숨겨진 무언가가 있다고 판단한 천여운이 그녀에게 물었다. “어떻게 검법을 익힌 거죠?” “허튼 소리. 네놈이야 말로 어떻게 진신마검을 알고 있는 거지?” 더 이상 연무화는 자신이 펼쳤던 검법이 진신마검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방금 전의 초식은 진신마검을 상세히 알고 있지 않고는 파훼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천부적인 검의 재능을 지녔다고 해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진신마검은 검종의 것이다. 네놈이 알고 있는 비밀에 대해서 들어야겠다.” 확실히 완고한 면이 강했다. 천여운의 질문에 답하기보다는 제 할 말만 하는 연무화였다. 더 이상의 대우는 무의미했다. 이에 천여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했다. “당신도 검종은 아닐 텐데요?” -으득! 이를 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천여운의 말에 많이 화가 났는지, 연무화가 미간을 잔뜩 구기고는 소리쳤다. “누가 검종이 아니란 말이냐! 흥! 그래 좋다. 무인이라면 자고로 검으로 말하는 법이지. 네놈을 제압해서 힘으로 알아내주마.” 연무화의 자신감 넘치는 말투에 천여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방금 전에 검초가 파훼되었기 때문에 진신마검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인지했을 텐데 저 자신감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합!" 연무화의 신형이 다시 앞으로 뻗어 나와 천여운에게 검초를 펼쳤다. 마찬가지로 진신마검의 검초였는데,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초식에 변초가 섞이고 약점이 보완 되어 있었다. ‘다르다.’ 천여운이 급하게 검을 휘둘러 이를 막아냈다. -채채채챙! 원래의 초식을 알고 있었기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당할 뻔했다. 하지만 약점이 보완된 진신마검에는 단번에 파훼할 수 있는 허점이 사라져서 검식을 일일이 막을 수밖에 없었다. -채채채챙! “언제까지 막을 수 있나 보자꾸나!” 연무화의 검이 더욱 빨라졌다. 오랜 기간 동안 진신마검을 연마했는지, 검초가 그녀의 손에 의해 더욱 발전되어 있었다. 그저 검법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 소용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검식을 막아내는데 급급하던 천여운이 방법을 바꾸었다. 천여운이 검을 쥐고 있는 자세가 연무화와 동일해졌다. ‘엇?’ -챙! 챙! 챙! 챙!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졌다. 천여운이 선택한 방법은 바로 같은 검식으로 동시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앗! 검식이 같아졌어!” 이를 지켜보는 수하들의 입에서 놀라움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연무화가 펼치는 검법도 놀라웠는데, 천여운은 이를 같은 검식으로 유연하게 대응했다. ‘이럴 수가 주군께서도 진신마검을 알고 있단 말인가?’ 그렇지 않고는 임기응변으로 검식을 펼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검식에 변화를 주었는데 오히려 천여운이 똑같이 진신마검의 검식을 응용해서 막아내자, 연무화의 눈빛이 더욱 싸늘해져갔다. ‘역시 이놈 진신마검을 익히기까지 했구나.’ 검을 부딪칠 때마다 천여운의 심후한 공력이 느껴졌다. 연무화는 검을 겨루는 시간이 지속될수록 오히려 자신이 불리해질 거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렇다면 적의 허점을 찌를 수밖에 없었다. ‘가능할까?’ 그녀에게는 비장의 비기가 있었다. 그저 눈대중으로 보았던 그 충격적인 검초를 익히기 위해 몇 년 동안이나 얼마나 각고의 단련을 했는지 모른다. 자그마치 십 년 동안에 걸쳐서 이 한 초식을 가다듬었다. ‘그 후안무치한 놈들에게 쓰려고 아껴 두었건 만.’ 정해진 목표가 있었지만 분명 시험해보고 싶은 생각은 있었다. 마음을 정한 연무화가 천여운과 검초를 나누던 도중에 보법을 펼치며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기수식을 취했다. 진신마검의 기수식이 아니었다. ‘설마....’ 천여운의 표정이 굳어졌다. 연무화가 진신마검을 펼칠 때도 놀라웠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그녀의 신형이 고무처럼 튕겨져 나오더니, 묵 빛 검 끝이 쾌속하게 흔들리며 진신마검과는 다른 평범한 검식으로 시작되었다. ‘엇? 어디서 많이 본 검식인데?’ ‘칠마검?’ 고왕흘과 문규 역시도 그녀의 손에서 발휘되는 검식을 알아보았다. 첫 검식은 칠마검과 완전히 동일했다. ‘하! 이것까지 익혔다고?’ 완전히 예상외의 검초가 펼쳐졌다. 천여운이 빠르게 진신마검의 자세를 풀고 검을 쥐고 있는 파지법을 바꾸었다. 그 순간 그녀의 첫 검식이 그의 가슴을 찔러왔다. 연무화의 검식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검식이 하나 둘씩 진행되면 될수록 교묘하게 맞물리면서 그 위력은 평범함을 넘어서 거대한 격류처럼 거세져 갔다. -채채채챙! 촤촤촤촤! 검초를 막아내는 천여운이 신형이 조금씩 뒤로 밀려났다. ‘훗! 이 검초를 네놈이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연무화의 눈빛이 오만으로 가득해졌다. 그러나 그 오만함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하고 만다. ‘응?’ 처음 적에게 펼쳐보는 검식에 집중하느라 의식하지 못했는데, 그저 막는데 급급하다고 생각한 천여운의 검식이 그녀가 지금 펼치고 있는 검식과 닮았다. -채채채챙! ‘이, 이게 대체?’ 일곱 번째 검식이 동일하게 펼쳐지면서 알아 볼 수 있었다 다만 그 순서와 초식을 전개하는 방식이 완전히 다를 뿐이었다. 아홉 번째 검식까지만 하더라도 쏟아지는 격류처럼 증가하는 그녀의 검식에 밀려나던 천여운의 신형이 점차 앞으로 치고 나왔다. -챙! 촤악! “헛!" 열 번째 검식이 부딪치는 순간 그녀의 신형이 한 보 당겨졌다. 거친 파도가 마치 회오리를 만들어내 듯이 천여운이 펼치는 검식들이 교묘하게 맞물리면서 점차 그녀가 펼치는 검식이 흐트러져갔다. "네, 네가 어떻게 이 초식을?” 안색까지 창백해진 그녀가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외치면서 검식에 검강까지 일으키면서 대항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천여운의 손에서 펼쳐지는 검초는 그녀보다 더욱 고차원적이었다. -채채채채챙! 이미 그녀가 펼치는 초식은 완전히 펼쳐지기도 전에 파훼되었고, 천여운의 검초가 만들어내는 기류에 묶여서 검을 빼낼 수가 없었다. ‘아, 안 돼. 대항할 수 없어!’ -탁! 검수로서 굴욕적이었지만 검을 손에서 놓아 버리고 신형을 빼내려 했는데, 그 순간 그녀의 몸이 허공으로 부웅하고 치솟았다. “꺄아아아아악!” 그녀의 입에서 당혹스러운 비명이 흘러나왔다. 그 순간 천여운의 마지막 검식이 검력에 의해 강제적으로 떠오른 연무화의 미간을 찔러왔다. “아, 안돼에에에!” 연무화가 놀란 나머지 두 손을 교차하며 이를 막으려는 순간, 그녀를 억제하던 검력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지면서 몸이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털썩! “으윽!" 일순간 죽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 그녀의 안색은 백지장처럼 창백해져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목에 검 끝을 겨냥하며 천여운이 무심한 눈빛으로 말했다. “계속하시겠습니까?” <37장 두 번째 입회자 (3)〉끝 < 37장 두 번째 입회자 (4) > ‘내....내 눈은 잘 못 되지 않았어.’ 목숨의 위기를 겪었던 것도 잠시였고 연무화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천여운을 바라보았다. ‘틀림없다. 무명이 보여주었던 그 검초의 후반부 초식이.’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스물네 개의 동일한 검식으로 이루어진 초식의 위력은 자신이 펼쳤던 초식보다 더욱 절묘했고 검초에서 일어나는 검력은 배로 강했다. “계속 하시겠습니까?” 천여운의 그 말에 연무화는 미간을 찡그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승부는 결착이 났다. 같은 화경이라 해도 한 단락 이상 차이가 났기에 공력에서 밀린다고 여긴 그녀는 절세검법으로 이를 보완하려 했지만, 그마저도 천여운이 더욱 뛰어났기에 다시 승부를 이어나간다고 해도 결과는 같은 것이다. “네 녀석의 승리다. 패자는 유구무언이다.” 유구무언(有口無言). 말 할 입은 있어도 할 말은 없다는 의미였다. 의외로 그녀는 패배에 대한 인정이 빨랐다. 괴팍하고 완고한 성격 때문에 어떻게 나올지 몰랐는데, 이 점은 다행스러웠다. “이제 그 검법들을 어떻게 익혔는지 알 수 있을까요?” 천여운을 놀라게 만든 것은 그녀가 비장의 비기로 썼던 검초였다. 스물네 개의 초식으로 이루어진 그 검법은 검마가 극도신과 겨룬 후에 파훼검법을 정리한 이십사마검의 첫 번째 초식이었다. 제대로 익힌 것은 아니었는지 초식이 미묘하게 불안정했지만 확실했다. ‘큭! 내가 할 소리다.’ 사실 검법에 대한 진상은 그녀가 더욱 물어보고 싶었다. 주름 가득한 미간이 꿈틀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연무화가 입을 열었다. “그건 내 패배와 별개의 문제다. 알려줄 수 없다.” 답변은 거절이었다. 이에 천여운이 한 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무인이라면 검으로 말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까 저에게서는 힘으로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네 녀석이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알려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제가 강제로 알아내려고 한다고 해도 말입니까?” “먼저 네 녀석에게 공격했으니, 패배에 대한 대가를 치르라고 한다면 내 한쪽 팔을 내놓을 각오는 되어 있다.” “.......” 무인으로서 소중하다고 할 수 있는 팔마저 내놓는다고 과감하게 말하는 연무화의 완고한 태도를 보면 뭔가 이유가 있는 듯 했다. 진실을 가로막는 제약이 있었다. 아무래도 아까 전에 거론했던 그 무명이라는 자와 관련이 있어 보였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천여운은 고민이 되었다. 두 번째 입회자로 설득하기 위해서 왔는데, 의외의 문제가 발생했다. 이를 잘 풀어나가지 못한다면 애써 찾아온 것이 그저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말 것이다. ‘주군.....’ 이 부분만큼은 자신들이 도울 수 없었기에 천여운의 수하들은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천여운이 입을 열었다. “질문을 바꾸도록 하죠. 저는 당신이 검마종이나 현마종과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혹여 그들과 연이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연?” “왜냐하면 저는 그들과 공생할 수 없는 관계니까요.” ‘아.....’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는 천여운의 말에 연무화의 표정이 묘해졌다. 외부와 폐쇄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그녀라고 해도 마교의 일곱 번째 공자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왔다. 그가 막 태어났을 당시에는 장로 회의에서 몇 번 거론되었을 정도로 화제였다. ‘내가 두 종파와 한 패인지 알아보려고 그런 질문을 한 것이었나?’ 처음 중년의 고용인이 전해온 말을 듣고 판단했던 것이 오판인 듯 했다. 검마종, 현마종과 같은 길을 걷고 있냐는 질문에 같은 검종의 맥을 잇고 있냐는 의미로 알아들어서 노기가 치솟았었다. ‘내 성질에 내가 못 이겼구나.’ 아무리 고치려고 해도 성격적인 부분은 어쩔 수가 없었다. 스스로 오해했던 것이 풀리자 그녀가 허탈하다는 말투로 대답했다. “연이라면 연이지. 놈들과는 악연이니까 말이야.” 두 종파를 떠올리면 분노가 치솟는지 연무화의 목소리에는 살기마저 띠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스스로를 맥이 끊긴 검마의 종파인 검종(劍宗)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는데 그 이유가 궁금했다. “연 장로님. 검종과는 무슨 관계입니까?” “하아.....” 진지한 천여운의 질문에 그녀가 땅이 꺼질 것처럼 짙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종주를 물려받은 후로부터 이 질문을 어찌나 듣고 싶어 했는지 모른다. 그 동안 여섯 종파가 득세하고 있는 마교였다. 오백 년 가까이 내려온 교주 일가인 천가(天家) 역시도 반은 이 여섯 종파의 피가 섞여있었기 때문에 마연검종에서 아무리 애를 써도 그들의 외침은 묻히고 말았다. ‘여섯 종파 이외의 소교주 후보자라.....’ 그들과 관련이 없는 그에게라면 이야기를 해도 될지 모른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우리 마연검종은 유일하게 검마 공의 의지를 이어받은 검종의 후예이다.” “검종의 후예?” 천여운이 알기로는 검마는 전인들 중에 누구도 제자로 받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래서 검종의 맥이 끊어졌는데 이게 무슨 이야기일까? 연무화가 종파 대대로 구전으로 물림 받아왔다며 그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으로부터 오백여 년 전, 검마에게는 세 명의 전인들이 있었다. 경천, 무주랑, 연홍수. 이 세 명은 일반 무가 출신으로 검마가 뛰어난 근골과 재능을 지닌 그들을 발탁했다. 검마는 그들을 키워서 가장 뛰어난 검재(劍才)는 일인전승을 기본으로 하는 검종의 제자로 받으려고 하였고, 나머지 두 명은 교주의 호위로 삼게 하려 했다. 여러 방면으로 뛰어난 검마는 제자를 가르치는 것 역시도 탁월했다. 그의 가르침을 받은 세 명은 검종의 기본공과 내공, 검식들을 빠르게 익혔고, 이내 마교의 젊은 후기지수들 중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검마가 전인들인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것은 뛰어난 무공보다도 마교에 대한 절대적인 충의(忠意)였다. 그런데 전인들 중에 경천과 무주랑은 그런 바람과 달리 갈수록 야욕을 가지게 되었고, 그를 후원해주는 여러 중소 종파들을 등 업어 교주와의 혼인을 추진하기에 이른다. 장로 회의에서 승인마저 떨어지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검마는 치를 떨만큼 그들에게 실망하고 만다. “검마 공께서는 자신의 위명이 헛된 야욕을 일으킨다고 생각했다.” 검마는 과감하게 전인들을 내쳤다. 그런데 그 분노가 야욕을 일으킨 두 사람이 아닌 연홍수에게마저 미쳤다. 검마는 연홍수마저 파문시켜버렸다. 검종의 맥을 이어 받기 위해 오직 검을 단련하는 데만 갖은 애를 썼던 연홍수는 두 사람으로 인해서 애꿎은 피해를 보게 되었다. “우리 마연검종의 조사이신 연홍수 공은 그렇게 파문 당하셨으면서도 검마 공을 잊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검마가 끝내 제자를 육성하지 않고 세상을 떠나게 되자, 자식이 없었던 검종의 맥이 그대로 끊기고 만다. 마교를 구한 전설인 검마의 맥이 이렇게 끊기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연홍수는 그의 후인임을 자처하고 제 이의 검종을 세웠지만 그 인가가 날 리가 만무했다. “검마 공에게 중도 파문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연홍수 조사께서는 본교의 장로 회의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그런데!” 연무화가 분에 겨운 듯이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정작 연홍수를 인정하지 않은 장로 회의에서 경천이 세운 검마종과 무주랑이 세운 현마종을 검종의 후예로 인정한다고 한 것이었다. “흠.” 천여운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탄식음이 흘러나왔다. 연무화의 분노는 지극히 당연했다. 검마종과 현마종이 공식적으로 검종의 후예라는 칭호를 받아서 개파하는 것에 분노한 연홍수가 두 사람에게 인정할 수 없다며 항의했으나, 오히려 교주 일가가 된 그들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십 년 동안 금옥에 갇혀야만 했다. “분노한 조사께서는 바로 잡을 것을 다짐했다.” 십 년 만에 출옥 했을 때에는 이미 두 종파의 성세가 높아져서 어찌해 볼 수가 없었다. 연홍수는 이를 구천에 있는 검마가 한탄스러워 할 거라 생각하여 자신이 그 맥을 이어서 검종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을 막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후로 우리 마연검종에서는 검마 공의 진신마검을 복원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내공의 기초는 검종의 것이었기에 진전이 끊긴 진신마검만 복원한다면 검마와 검종의 명예를 다시 되찾을 수 있다는 데서 기인하였다. 그러나 검마를 통해서 몇 차례 눈으로만 보았던 검법을 떠올려서 다시 복원한다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대에서 검법을 복원하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한 연홍수는 제자를 받아서 그 유지를 받게 하였다. 그러기를 오백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마연검종의 숙원은 세 가지였다. “첫 번째는 검종의 맥을 이어받아 그분의 짓밟힌 명예를 회복하는 것과 두 번째는 그 분의 검법인 진신마검을 완전히 복원시키는 것이다.” ‘복원한 검법은 아니야.’ 연무화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천여운은 의아해했다. 만약 진신마검 뿐이라면 오백 년에 걸친 성과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이십사마검이 설명이 되지 않았다. “마지막은 무엇입니까?” ‘여섯 종파의 태생이 아닌 이 녀석이라면 믿을 수 있을까?’ 천여운의 질문에 잠시 망설이던 연무화가 입을 열었다. “교주님과 본교에 대한 충의. 검마 공이 바라셨던 본교를 위해 쓰레기 같은 현마종과 검마종의 손아귀에서 예전의 본교의 모습을 되찾는 것이다.” “아.....” 충의(忠意). 그것이야말로 검마가 제자들에게 바랐던 단 하나였다. 마연검종은 그런 검마와 검종의 맥을 잇기 위해서 일인전승을 택했고, 그 숭고한 정신인 충의를 종파의 종념으로 삼아 본교의 안위를 생각했다. 그러나 일인 종파인 마연검종의 종주들이 감당하기에는 여섯 종파의 위세는 날이 갈수록 커져갔고 상대하기 벅찬 수준까지 이르렀다. ‘정말 대단하다.’ 천여운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마도관의 지하보고에서 좌호법에게 들었던 검마의 전인들은 그저 야욕이 넘친다고만 여겼었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도 검마의 진정한 뜻을 받들려고 하는 자와 그 후손들이 있었던 것이었다. “.....자그마치 오백 년이나 그랬다니. 그 충심이 놀랍습니다. 마연검종은 진정한 검종의 후예로군요.” “아아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천여운의 이 말에 연무화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렇게 사종 대대로 듣고 싶어 했던 말을 뜻밖에 소교주 후보자인 천여운에게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아버님이나 조사께서 이 말을 들으셨다면 얼마나 감격하셨을까.’ 마음이 뭉클해져서 말이 없어진 그녀를 바라보며 천여운이 뭔가 결심했는지 말했다. “마연검종이야 말로 검종의 진전을 잇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군요.” “당연한 말이지 않느냐. 그딴 후안무치한 놈들이 검종의 진전을 잇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으득! 두 종파만 떠올리면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지 그녀가 이를 갈았다. 그런 연무화를 바라보며 천여운이 정중하게 두 손을 모아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탁! “본교의 십 장로이자 진정한 검종의 후예인 연무화 공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가 소교주로 등극할 수 있게 입회자가 되어주십시오.” “입회자? 그럼 나를 찾아왔던 이유가?” 설마 입회자를 찾는 것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연무화였다. 놀라하는 그녀에게 천여운이 계속 말을 이었다. “제 입회자가 되어주신다면 약속드리겠습니다. 현마종, 검마종....그뿐만이 아니라 여섯 종파가 득세하여 본교를 휘두르는 일은 다시는 없을 겁니다.” “하! 그걸 네 녀석이 할 수 있다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그녀에게서 본심이 튀어나왔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오백 년에 걸쳐서도 갖은 노력을 했던 마연검종조차도 어찌해보지 못한 현마종과 검마종을 아무 종파에도 속하지 않고, 뒷배경조차 없는 천여운이 어찌한단 말인가. “그게 말처럼 쉬웠다면 이미 옛적에...” 연무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를 지켜만 보고 있던 허봉이 끼어들었다. “허언이 아닙니다! 이미 독마종은 멸문했고, 지금 교내에 남아있던 무 부인을 비롯한 현마종의 사람들은 전부 죽었습니다.” “뭣?” “모르셨습니까?”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외부와 단절하고 지내는 그녀는 교주전에서 소식을 전달해왔을 때도 사람을 돌려보냈다. 허봉의 말은 그녀에게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오백 년의 세월 동안 견고한 아성을 자랑하던 여섯 종파였다. ‘저, 정말 그게 사실이란 말인가?’ 점차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는 연무화에게 쇄기를 찍듯이 천여운이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십 장로가 저를 따른다고 충성맹세를 한다면 검마 공의 유지를 정식으로 이어받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지?” “정식으로 검마 공의 진전을 이어받은 자로서 그분의 무공을 전수해주겠다는 말입니다.” 천여운의 마지막 말에 연무화의 두 눈이 커졌다. 그렇지 않아도 천여운이 검마의 검법들을 알고 있는 것이 의문스러웠던 그녀였다. 그런데 그 입에서 나온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 분의 진전을 이어받아? 네, 네 녀석이 무슨 수로 그 분의 진전을 이어받았단 말이냐?”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소리치는 그녀에게 천여운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비급서로요.” < 37장 두 번째 입회자 (4) > 끝 < 37장 두 번째 입회자 (5) > “비, 비급서?” 비급서라는 말에 연무화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검마의 사후에 그가 어떠한 비급서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만약 남겨져 있었다면 당시에도 실세였던 현마종과 검마종에서 비급서를 수습했을 것이다. “검마 공께서 비급서를 남겼을 리가.....” 혼란스러워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천여운이 말했다. “마도관이 왜 생긴 지 아십니까?” "?" 의아한 표정을 짓는 그녀에게 천여운은 간략하게 좌호법 이화명에게 들었던 이야기 중에서 필요한 부분만 짚어서 알려주었다. 요점은 이것이었다. 검마가 마도관을 세운 진정한 목적은 자신의 후인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가 마도관에 남긴 여섯 단계 시험을 통과한 자는 검마의 모든 무공이 담긴 비급서를 얻을 수 있도록 안배가 되어 있다는 것만 알려주었다. '지하 보고에 관해서는 알려줄 필요가 없겠지.' 마도관에 숨겨진 지하 보고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가게 된다면 새로운 분란만 생길 것이다. 검마가 의도한 대로 자연스럽게 육 단계 시험을 통과한 자가 그의 심득을 얻을 수 있게 내버려두는 편이 나았다. “거, 검마 공께서 그런 안배를....” 오백 년 동안 마연검종의 출신 중에서 육 단계 시험을 통과한 자가 없었으니, 이를 아는 것이 이상했다. "듣는 것보다 눈으로 보는 편이 낫겠군요." -챙! 천여운이 검을 뽑아서 비어있는 마당 쪽으로 갔다. 모두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천여운이 현철검으로 검초를 펼쳤다. -촤촤촤촥! ‘진신마검....’ 검초로 직접 증명해보이는 것이었다. 기본기에 충실하면서도 검초 하나하나가 절묘한 이 검법은 진신마검이었다. 천마검법과 양대 산맥이라 불리는 전설적인 검법답게 한 초식마다 그 위력은 명불허전이었다. “와아!” 나노를 통해 전이 받았기 때문에 천여운이 펼치는 초식들은 교본을 보는 것처럼 정확했다. 이를 지켜보는 천여운의 수하들과 연무화가 연신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 진신마검의 검 초식이 끝나자, 천여운의 검을 쥐고 있던 파지법과 기수식을 바뀌면서 새로운 검초를 펼치기 시작했다. -촤촤촤촤촥! 허공을 가르는 검 소리가 경쾌했다. 그 위력은 진신마검을 훨씬 상회했고 보는 것만으로도 검초가 워낙 고절해서 입이 쩌억하고 벌어질 정도였다. ‘세상에! 이, 이런 검법이 있었다니?’ ‘공자님께서 펼치는 이 검법은 대체?’ 아까 전에 연무화와 천여운이 겨룰 때 보았지만 여전히 경악스러웠다. ‘이십....사마검!!!’ 진신마검을 펼칠 때와 다르게 연무화의 표정이 붉게 상기되어서 흥분했다. 첫 번째 초식은 그녀도 십 년 동안이나 갈고 닦았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지만, 두 번째 초식부터는 처음 본다. “아아아...” 절로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올 지경이었다. 천여운의 손에서 한 초식 한 초식 펼쳐지는 검마가 마지막으로 남긴 절세검법, 이십사마검의 검 초식을 볼 때마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아, 이게 진정한 이십사마검이구나.’ 오직 검마의 검법을 복원하는 데만 오백 년의 세월을 보내온 마연검종이다. 장원 안에 틀어박혀서 그 과정에만 얽매여 있던 그녀는 스스로를 얽매이던 답답한 응어리가 뚫리는 느낌을 받았다. 짙은 암막 속에서 한 줄기의 빛이 스며드는 것을 느끼는 순간, -털썩! “앗! 종주님!” 연무화가 갑자기 바닥에 주저앉았다. 본당 앞에서 서성이면서 지켜보고 있던 중년의 고용인이 놀라서 달려오려 했다. 그때 문규가 그를 가로막고서 제지했다. “잠깐만요.” “네넵?” 하마터면 그녀가 중간에 만류하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다. 연무화는 쓰러진 것이 아니라 바닥에 주저앉아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그것은 깨달음을 얻어서 몰아의 상태로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솨아아아아! 연무화의 전신에서 오색찬란한 빛이 흘러나오며 웅대한 진기가 일어나며, 그녀를 중심으로 거센 바람이 일어났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장원에 있는 고용인들조차도 신비로운 조화에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연무화의 몸에서 오색 빛이 발하고 있었다. 고왕흘이 탄성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오.....기조원!” 연무화에게 일어난 현상은 바로 오기조원이었다. 진정한 화경이라 할 수 있는 그 극(極)에 이르기 위한 최후의 과정이었다. ‘깨달음을 얻었구나.’ 천여운이 등허리에 있는 검집으로 현철검을 꽂아 넣으며 연무화를 바라보았다. 깨달음을 얻은 연무화가 오행의 기운을 일원화시키고 있었다. 이 과정이 끝난다면 그녀는 뼈와 근육이 재구성되면서 환골탈태를 하게 될 것이다. ‘나도 저런 과정을 겪었던가.’ 부러운 눈으로 연무화를 바라보는 세 수하들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러던 찰나였다. -슉! 무언가가 날아오는 소리가 귀를 자극하면서 천여운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가부좌를 펼치고 있는 연무화의 다섯 보 바깥 지점의 허공에서 무언가 멈춰 섰다. -둥둥! “이, 이건?” 허봉이 놀라서 허공에 떠있는 그것을 낚아챘다. 손에 움켜쥔 것을 살펴보니, 그것은 붉은 깃이 달려있는 뾰족한 장침이었다. 장침의 끝에는 독이 발라져있었는지 검게 변색되어 있었다. “암기?” 대체 어디서 날아온 것일까? “칫!” 작게 소리였지만 초절정의 고수인 고왕흘의 귀에 들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거구에 근육으로 가득한 고왕흘이었지만 신형이 튕겨져 나가는 속도는 굉장히 빨랐다. 고왕흘이 본당 건물의 한쪽 구석에 숨어서 도망치려 하는 한 고용인을 붙잡았다. -쾅! “끄악!” 고왕흘에게 목덜미가 붙잡힌 고용인은 안간 힘을 썼지만 소용없었다. 반항적으로 굴던 고용인의 몸이 갑자기 전신에 경련을 일으켰다. “뭐야?” 고왕흘이 엎드려있는 그의 몸을 뒤집었더니 입에 거품을 물고서 죽어갔다. 등을 두드려서 게워내게 하려 했지만 이미 전신으로 퍼져나간 극독으로 고용인은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런....” 고왕흘이 뒤를 돌아서 천여운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했는데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언제 그쪽으로 간 것인지 천여운이 본당 건물 천장 쪽까지 올라가서는 고용인으로 보이는 한 사내를 끌고 오고 있었다. '한 사람이 더 있었구나!' 멱살이 잡혀서 끌려내려온 사내는 왼쪽 하관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얼굴이 굳어져 있었다. 독단을 씹기도 전에 혈도가 점해진 것이었다. 그의 손에는 검은 대롱 형태의 뭔가가 들려 있었는데, 그것이 장침 형태의 암기를 발사한 물건인 듯 했다. “호법을 서줘라.” 천여운이 수하들을 향해 조용한 목소리로 명했다. 그 말에 세 사람이 고개만 끄덕이고서 가부좌를 틀고 있는 연무화의 중심에 삼각 형태로 호법을 섰다. -팍! 본당 건물 안으로 고용인을 끌고 와서는 그를 바닥에 내팽개친 천여운은 눈동자만 겨우 움직이고 있는 그의 입을 향해 손을 뻗었다. 왜 그러나 싶어서 눈알을 굴리고 있었는데, -드드드드! ‘뭐, 뭐야? 입 안이 어째서?’ 고용인의 왼쪽 하관 쪽에 강한 경련이 일어났다. 굉장한 고통이 그를 잠식해왔지만 마혈(痲穴)과 아혈(啞穴)이 동시에 점해져서 닭똥 같은 눈물만 흘러내렸다. -뿌드득! 뭔가가 뽑혀져 나오는 소리와 함께 고용인의 입에서 무언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고용인의 어금니였는데, 이빨 옆에는 작은 철사로 무언가가 묶여 있었는데 작은 단 같은 것으로 보였다. “이걸로 자살하려 했나 보지?” 천여운이 그의 바로 눈앞까지 이빨과 작은 단을 갖다 대며 말하자, 고용인의 두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빠르게 흔들렸다. 방금 전에 손을 내민 행위는 다름 아닌 허공섭물의 일종이었다. ‘빌어먹을! 독단을 빼내다니?’ 도망도 모자라서 자살을 시도하기 전에 막혀버렸다. 천여운이 그를 차갑게 노려보며 말했다. “어디서 보냈지?” -타탁! 어차피 독단은 제거했기에 대답을 할 수 있도록 아혈은 풀어주었다. 눈앞에 있는 상대가 반항조차 할 수 없는 절대적인 고수라는 사실을 인지한 고용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 말할 수 없다.” “그래?” -타탁! 그와 동시에 천여운이 그의 아혈을 다시 점했다. 고작 한 번만 묻고서 다시 입을 다물게 하자 고용인은 불안한 나머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천여운이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놈이 암살을 시도하려 한 사실을 알게 된다면 십 장로님이 퍽이나 좋아하겠구나.” 그 말에 고용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고용인이 저지른 짓은 그녀가 미처 깨달음을 얻기도 전에 암살을 시도한 것이었다. 절대로 그냥 곱게 죽일 리는 없었다. “간자이니까 절대로 입을 열지 않겠지? 안 그래?” -뿌득! 예고도 없이 그의 오른손 검지 손가락이 뒤로 꺾여나갔다. “끄으으으으읍!” 말을 할 수 없기에 신음성만을 내뱉으며 고용인이 고통스러워했다. 그래도 두세 번 정도는 물어볼 거라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단 번에 고문에 들어가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두려워하는 고용인을 쳐다보면서 천여운이 악마처럼 속삭였다. “뼈를 하나씩 부러뜨릴 거니까 생각이 바뀌면 눈을 위아래로 움직여. 하지만 간자니까 절대로 굴복하지 않겠지?” ‘아, 아니야.’ 본능적으로 이래선 안 되겠다고 생각한 고용인이 다급히 위아래로 눈알을 굴렸지만, 천여운은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고 있었다. -뿌득! ‘끄아아아아아악!’ 반 시진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뿌드드드득! 뿌드드득! 연무화의 몸에서 뼈와 근육이 재구성되기 시작하면서 온몸이 뒤틀렸다. 일 각 가량 동안 들썩이던 그녀의 피부에 실금이 가기 시작했다. 호법을 서고 있던 문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환골탈태(換骨奪胎)!’ 오기조원을 이루게 되면 환골탈태를 한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호법을 서고 있던 천여운의 수하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본당 건물 안에 있던 천여운도 어느새 마루 위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신비롭구나.’ -쩌저저적! 한 번 갈라지기 시작한 실금은 이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조금만 건드려도 그대로 깨져버릴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꿈틀! 쩌저적! 연무화가 몸을 움직이는 순간 그녀의 피부로 균열이 가있던 껍질들이 일어나 사방으로 흩날리며 먼지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진정한 화경(化境)을 이루면서 환골탈태를 마친 것이었다. ‘허어!’ ‘우와아아아앗!.....이게 뭐야!’ 환골탈태 자체에 놀란 문규와 달리 고왕흘과 허봉은 다른 것에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미간에 주름이 가득한 오십 대의 귀부인의 모습이었던 그녀가 완전히 달라졌다. 하얀 피부에 탄력을 되찾은 그녀는 마치 이십대 중반의 여인과도 같았다. 완고해 보였던 날카로운 눈매와 짙은 눈썹은 오히려 도도하면서 차가운 미인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아.....” 연무화가 감았던 두 눈을 떴다. 깨달음을 얻어 화경의 극에 오른 그녀의 두 눈은 총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스스로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된 연무화가 감격으로 몸을 떨다가, 이내 갑자기 어딘가로 신형을 날렸다. -탁! 그곳은 바로 본당의 마루 앞이었다. 연무화가 한 쪽 무릎을 꿇고 마루 위에 서있는 천여운을 향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마연검종의 종주이자 십 장로 연무화가 진정한 검종의 후계자이신 천여운 공자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 * * 문규가 그 광경을 얼굴이 익을 것처럼 새빨개져서, 넋을 놓고 쳐다보는 허봉과 고왕흘에게 조용히 전음을 보냈다. [눈.....돌려요!] 환골탈태를 마친 그녀는 나신이었다. < 37장 두 번째 입회자 (5) > 끝 < 38장 난감한 제안 (1) > 완전한 화경이라 불리는 극(極)에 오르면서 십 장로 연무화가 환골탈태를 했다. 덕분에 천여운은 생애 처음으로 나신의 여인이 한 쪽 무릎을 꿇고서 포권을 취하며 충성 맹세를 하는 것을 겪게 되었다. 살짝 민망한 상황이 연출되었기에 천여운도 난감해하며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십 장로님. 옷부터 입으시죠.” “앗!” -팟! 괴팍하고 완고한 성격의 소유자인 연무화였지만 스스로 나신이라는 것을 의식하자 당황한 나머지 붉게 상기되어서 본당으로 뛰어 들어갔다. 겉모습은 이십대로 보였지만 그 실제 속은 오십대였기에 당황해서 소리를 지르거나 하진 않았다. “후후! 덥네. 그려.” “어우야.” 고왕흘과 허봉은 덥다는 듯이 얼굴에 손바람을 붙였다. 아직 겨울이 지나지 않았는데 열기가 가시지 않는 그들이었다. 이렇게 천여운은 두 번째 입회자이자, 화경의 극이라는 최고의 무위를 자랑하는 수하를 얻게 되었다. 좌호법 이화명의 말대로 영입만 할 수 있다면 굉장한 도움이 될 거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았다. 일각 정도가 지난 후, 본당의 서재에 천여운과 그 수하들이 모여 있다. 새로 옷을 입고 온 십 장로 연무화는 그들과 또래라고 해도 위화감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문규의 표정이 새초롬했다. ‘알몸에 넘어가서 헤벌쭉 하다니. 흥흥!’ 이곳에 있는 남정네들이 한심하다고 느낀 듯 했다. 하지만 인피면구로 인해서 모두가 그녀를 남자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의식하는 사람은 오직 천여운 뿐이었다. “그게 참 말이냐!” 연무화는 서재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고용인을 노기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열 손가락이 전부 반대로 꺾여 있는 고용인은 안쓰러울 정도로 두 손을 비비면서 빌고 있었지만 분노가 쉽게 가실 리가 없었다. -으득! 그녀가 이를 갈면서 한 종파의 이름을 강하게 불렀다. “검마종!” 근 십 년 동안 일해 왔던 고용인이 설마 검마종의 간자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내공을 익히지 않았기에 아무 의심조차 하지 않았던 그녀였다. ‘검마종에서 나를 감시하라고 했다고? 하!’ 천여운에게 한 차례 손이 봐진 고용인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실토했다. 고용인들은 그녀가 검마의 검법을 복원하는데 진척이 있으면 그것을 빼돌리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항상 연무화가 본당의 폐관실에서 무공 수련을 했기 때문에 볼 수도 없었고, 기록을 남기지 않으니 특별한 성과를 얻긴 힘들었다. “네놈이 나를 죽이려 하다니.” 그렇게 간자로서 성과가 없이 감시하던 와중에 두 고용인은 그녀가 깨달음을 얻어서 환골탈태를 하는 모습에 무조건 방해해야만 한다고 판단해서 암기를 날렸던 것이다. 그 배신감이 말로 이룰 수가 없었다. 고용인은 손이 닳도록 싹싹 빌면서 구걸했다. “조, 종주님! 부디! 아니, 제발! 고문만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목숨을 구걸하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간자로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죽는 것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만 반 시진 동안 천여운에게 손가락이 꺾이고 손톱이 뽑히는 고문을 당하면서, 심신이 피폐해진 그는 고통 없이 죽고 싶을 뿐이었다. ‘주군.....여, 여전하시군요.’ 그 모습에 허봉이 자신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렸다. 이젠 오래된 기억이었지만 의무실에서의 천여운과의 첫 만남이 떠올렸다. 겉보기와 다르게 천여운의 고문 기술은 가히 전문가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흥!” -푹! “크헉!” 분노한 연무화는 검결지에 검기를 일으켜 단숨에 고용인의 심장을 찔러 죽여 버렸다. 십 년 동안 알고 지냈다고 해도 자신을 해하려 든 자를 살려둘 정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가 어느 정도 화를 가라앉혔을 때 천여운이 물었다. “십 장로.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물론 고용인이 자신의 입으로 내뱉은 이유가 있었지만 정말 궁금한 것은 그녀가 끝까지 이야기 하지 않으려고 했던 부분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연무화가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그 분의 진전을 이으신 공자님을 모시기로 했으니,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연검종의 역대 종주들은 현마종과 검마종처럼 그 뿌리가 검마의 검종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무공이 타종파보다 월등히 강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섯 종파만큼은 아니더라도 본교에서 요직을 차지하곤 했다. 그들이 요직을 차지하는 이유는 여섯 종파를 견제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진정한 검종의 맥을 이었다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서였다. “저희는 거의 오백 년에 걸쳐서 진신마검을 복원했기 때문에 인정받고 싶었지만, 검마종과 현마종의 반대로 매번 무산되었지요.” 그들은 자신들이 검종의 정통성을 이었다는 것을 강조했고 긴 세월에 걸쳐서 마연검종에서 복원한 검법을 진짜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게 수없는 알력이 계속되오며 당대의 종주인 연무화까지도 이어졌다. “지금으로부터 약 십 년 전이었습니다.” 그녀는 아직도 그 순간을 기억한다고 했다. 장원에서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검법을 수련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침입했다. “얼굴을 복면으로 가리고 있었는데, 어두운 밤중에도 그 눈빛은 현묘함을 담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장원으로 침입한 복면인을 그녀가 그냥 내버려둘 리가 없었다. 당연히 연무화는 그자와 싸웠다. 그러나 결과는 놀랍게도 불과 한 초식 만에 패배하고 말았다. ‘한 초식?’ 천여운 또한 내심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압도적인 무위라고 할 수 있었다. 어이없는 패배에 분해하는 연무화에게 복면인은 뜻밖의 제안을 했다. ‘제법 진신마검을 그럴 듯하게 복원했구나. 검종의 맥을 잇고 싶다면 사흘 뒤 자시까지 십만대산의 서남쪽에 있는 오현봉의 꼭대기로 찾아와라.’ 복면인의 입에서 뜬금없이 나온 말들은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당혹스럽더군요. 목소리를 변조해서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검종에 대해서도 알고 있고 마교의 성내에 나타난 것을 보면 분명 교인임은 틀림없는데, 이렇게 전율적인 고수는 처음이었다. 마연검종에서 복원하고 있는 진신마검을 알아본 것도 모자라서 검종을 들먹이니 흔들리는 것도 당연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사흘 뒤 오현봉으로 향했다. 그저 무시하고 넘어가기에는 검종을 거론하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오현봉의 꼭대기에 올랐더니, 뜻밖의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검마종의 종주인 경본기와 현마종의 종주인 무진원이었다. 서로가 이곳에 나타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경각심을 드러냈지만 이내 복면인이 등장하면서 멈춰졌다. ‘그대는 대체 누구인데 검종을 들먹이면서 우리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한 것이오!’ 가장 성미가 급한 검마종의 종주인 경본기가 불쾌함을 드러냈다. 그러면서도 쉽사리 공격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그 역시도 연무화와 마찬가지로 복면인에게 무공으로 패배한 듯 했다. ‘나에 대해서는 알 필요는 없다.’ ‘그럼 대체 그대를 무어라 부르란 말이오?’ 현마종의 종주 무진원의 질문에 복면인이 말했다. ‘호칭이 필요하다면 무명(無名)이라고 불러라.’ 연무화가 말했던 그 무명이라는 자가 바로 복면인이었다. 스스로를 무명이라고 칭한 자는 검종의 전인들을 불러다 놓고 본론을 꺼냈다. ‘이렇게 검종의 진전을 잇는 자들이 모였으니, 그대들에게 맥이 끊긴 진신마검을 전수해주겠다.’ ‘뭐, 뭐요?’ 그 말에 세 종주들이 일제히 놀랐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자가 실전된 검마의 검법인 진신마검을 전수해준다고 하니, 당연히 놀라우면서도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무명은 그런 반응이 당연하다는 듯이 그 후안무치한 놈들과 저에게 진신마검의 검초를 보여주었습니다.” 가히 교주의 천마검법과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는 진신마검의 위력에 그들은 이것이 진짜라는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검종의 맥을 잇고 있다고 자부하는 그들로서는 검법이 탐이 났다. ‘당신이 어째서 진신마검을 알고 있는 겁니까?’ ‘알려줄 수 없다.’ ‘그럼 대체 우리들에게 검법을 전수하는 이유가 뭡니까?’ 의심이 많은 현마종주는 끝까지 이유를 알아내려 했다. 무명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이 정도만 말하도록 하마. 검마 공이 남긴 유지를 그의 진전을 받았던 자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이 말에 그들은 무명이라는 자가 분명 본교에 누군가임을 확신했다. 그러나 상대의 정체를 강제적으로 알아내기에는 무명이라는 자의 무공은 경이로울 정도로 강했다. 검마종의 종주인 경본기와 현마종의 종주인 무진원은 군말 없이 그에게 진신마검을 전수받기로 하였다. 그것을 반대한 자가 바로 연무화였다. ‘안 돼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연무화는 그들이 검마를 실망시켜서 파문당했음을 말하고 두 종파는 절대로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당연히 이 말에 두 종주들도 반박했고 점차 분위기가 험악해져 갔다.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관계인 그들을 바라보면서 결국 무명이 해법을 내렸다. ‘좋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도록 하지. 내가 전수하려는 검마 공의 유산은 이것이 다가 아니다.’ 그 말과 무명이 보여준 검초는 그들 모두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무명이 펼친 한 초식은 교주의 천마검법조차도 상대할 수 없을 만큼 경이로우면서도 고절한 검법이었다. ‘이 검법의 이름은 이십사마검이라고 한다. 검마 공이 마지막으로 남긴 검법이다.’ 무림인에게 무공은 보물과도 같다. 마교의 모든 무공을 통틀어도 상대가 되지 않을 절세검법을 보게 되었으니, 그들 세 사람 중에 누가 하나 할 것없이 탐욕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검마 공의 마지막 유산이라면 상징적인 가치가 있었다. ‘제안하도록 하지. 오늘 그대들에게 진신마검을 전수해주겠다. 그리고 삼 년 뒤에 가장 완벽하게 익힌 자에게 이십사마검을 전수하겠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는 그대들이 더욱 잘 아리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검마의 진전을 이을 수 있게 된다는 의미였다. 연무화의 입장에서는 검마를 배신한 두 종파의 제자들에게 이런 기회가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무명의 의지는 완고했다. “저는 그 자들이 검마 공의 마지막 진전을 넘기지 않기 위해 부단히 단련했습니다.” 오백 년 동안이나 진신마검을 복원하기 위해 피땀을 흘린 마연검종이었다. 불과 삼 년을 채울 것도 없이 그녀는 이 년 만에 검법을 완성시켰다. 그렇게 삼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세 종주는 다시 십만대산의 오현봉에서 만남을 가졌다. “......저만 완벽하게 익혔을 거라 여겼는데 오산이더군요.” 당연히 검마종과 현마종 역시도 내공의 기초가 검종의 것이었다. 삼 년이라는 세월 동안 두 종주들도 진신마검을 완벽하게 익혀서 나타났다. 무명 역시도 세 사람의 검법에 우위를 가릴 수 없다고 판단하여 다시 한 번 겨룰 기회를 주었다. ‘진신마검을 익혔으니 그대들도 알 것이다. 이 검법이 뛰어나기는 하지만 오백여 년 전의 것이 다 보니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보완한 자에게 이십사마검을 전수하도록 하마.’ 그 주어진 기간은 이 년이었다. 연무화는 죽기 살기로 폐관하여 진신마검의 허점을 보완했다. 그 결과물이 천여운에게 펼쳤던 보완된 진신마검이었다. “그러나 경쟁이라는 것은 참으로 무섭더군요.” 검마종주, 현마종주 두 사람은 본교에서도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고수들이었다. 그들이 작정하고 무공을 보완했으니 당연히 허점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결국 두 번째 내기에서도 승부를 볼 수 없었던 무명은 혀를 내두르면서 마지막 제안을 했다. ‘그대들 모두가 재능이 뛰어나서 결론이 쉽게 나지 않는군. 그렇다면 방법을 바꾸도록 하지. 정말 검마 공의 유산을 물려받을 자격이 있는지를 알아보겠다.’ 무명은 그들에게 십 년 전에 자신이 이십사마검의 일 초식을 보여준 것을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당연히 그때의 전율적인 순간을 잊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잘 됐군. 삼 년을 주겠다. 그 안에 그 일 초식을 재현해봐라. 그대들이 검마 공의 진전을 잇겠다는 의지와 운이 따른다면 분명 초식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운기 요결이나 어떠한 교본도 없이 한 번 본 초식을 익히란 말이오?’ 검마종주인 경본기가 항의했지만 무명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 검법은 특별한 운기 요결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대들이 정말 검종의 맥을 이을 자격이 있다면 익히게 되겠지.’ ‘그런 말도 안 되는!’ -챙! 어이가 없어하는 그들의 앞에서 무명이 갑자기 검을 뽑고는 한 초식을 펼쳤다. 그 검 초식은 이십사마검과 비교해도 절대 손색이 없을 만큼 경이로운 위력을 지닌 절세검초였다. 검초를 펼친 무명의 팔과 다리는 떨렸고 꽤 지쳐보였다. ‘이, 이 검초는?’ 검초를 보고 난 검마종주 경본기와 현마종주 무진원이 충격적인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처음 보는 검초였지만 그들은 뭔가 아는 듯 했다. ‘하아...하아...삼 년 뒤에 나는 이 초식으로 그대들을 시험할 것이다. 그대들이 이십사마검의 일 초식을 완성했다면 내가 펼치는 초식을 파훼하는 것이 가능하지. 그럼 무운을 비마.’ 그 말과 함께 무명은 다소 급하게 사라졌다. 남겨진 그들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이를 마지막으로 연무화가 이야기를 마쳤다. “그게 삼 년 전의 일입니다.” “아.....” 천여운은 그제야 좌호법 이화명이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가 검마종, 현마종과 접촉을 했던 것은 어떠한 교분을 나누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러한 사정이 있었던 것이었다. “삼 년 전이라고 했다면 그럼 그 무명이라는 자와는 다시 만난 겁니까?” “.....이제 보름 뒤가 그 날입니다.” 연무화가 두문불출하면서 외부와 연을 끊고 무공을 연마하는 이유였다. 이번 만남에 두 종주를 꺾고 검마의 진전을 잇기 위해서였다. “공자께서 제게 검마 공의 무공을 전수해주신다고 하셨지만, 그 후안무치한 배신자들이 검마 공의 진전을 잇는 것만큼은 막아야 합니다!” 연무화의 결의가 담긴 목소리에 천여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천여운을 의구심에 빠지게 만들었던 것들이 있었다. 하나는 그 무명이라는 자였다. ‘이십사마검이라는 명칭까지 안다는 것은.....분명 마도관의 지하 보고에 있는 비급서를 본 게 틀림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천여운처럼 육 단계 시험을 통과해야만 가능하다. 그런데 근 칠십 년 동안이나 통과한 자가 없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 무명이라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혹시 모른다. 일단은 좌호법에게 칠십 년 전에 육 단계 시험을 통과한 자에 대한 정보를 물어봐야 겠다.’ 그 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연무화 이외에도 두 종파에도 기회를 주려한다는 것은 천여운에게 있어서 절대로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천여운이 한 가지 의아했던 점이 있었다. “십 장로. 혹시.....그 자가 삼 년 전에 펼쳤다던 그 검초를 아직 기억합니까?” “당연히 기억합니다.” 그때의 전율적인 검초를 기억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런 연무화의 말에 천여운이 폐관실에서 잠시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냐고 물었다. 의아해했지만 그녀가 본당의 지하실에 있는 자신의 폐관실로 안내했다. 수하들에게 서재에서 기다리게 한 천여운이 폐관실에 도착하자마자 현철검을 뽑아 한 초식을 펼쳤다. -촤촤촤촤촤촥! 화려하면서도 고절한 절세검초의 그의 손에서 발하자 연무화의 두 눈이 커졌다. “아아아!” 천여운이 펼치는 검초는 삼 년 전에 무명이 보여주었던 것과 완전히 같았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무명이 힘겹게 초식을 펼쳤다면, 천여운은 훨씬 자연스럽고 검식들의 연계가 부드럽게 이어졌다는 점이었다. “어, 어떻게 공자님께서 이 검초를 알고 계십니까? 이건 그때 무명 공이 펼쳤던 그 검초가 틀림없습니다!” 확신에 찬 그녀의 말에 천여운의 표정이 굳어졌다.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지만 천여운은 이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이럴 수가.....’ 천여운이 펼친 검초는 다름 아닌 천마검공의 일 초식이었다. < 38장 난감한 제안 (1) > 끝 < 38장 난감한 제안 (2) > 마연검종의 본당 폐관실에서 나온 천여운은 한 동안 고민에 빠졌다. 그 동안은 검마의 이십사마검을 비롯해 천마 조사가 남긴 천마검공을 혼자만 익혔다고 생각했는데, 그 자신 이외에도 먼저 그 길을 밟은 자가 있다는 말이었다. 생각해보면 예전에 좌호법 이화명이 했던 말이 있었다. ‘천마 조사님께서 남기신 검흔들은 검마 공이 이미 탁본을 뜨고, 직접 검 초식을 정리해서 비급서로 남겨두었습니다.’ 운기 요결이 없어서 익힐 수 없는 검법이라고 해도 개파 조사가 남긴 유산을 함부로 없앨 수가 없기에 검마는 그것을 정리해서 본교의 교주전으로 옮겨놓았다고 했다. ‘교주전이면....천마검공을 볼 수 있는 자는 오직 교주뿐이라는 말인데.’ 그렇다면 그 무명이라는 자의 정체가 교주일까? 하지만 그러기에는 이십사마검을 익힌 것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교주의 연령은 오십대였기 때문에 칠십 년 전에 마도관을 통과했다고 하기에는 관련이 멀었다. ‘좌호법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나. 아니면....’ 직접 만나보는 방법도 있었다. 보름 뒤에 연무화는 십만대산의 오현봉에서 검마종, 현마종의 두 종주와 함께 무명이라는 자를 만난다고 하였다. 아무래도 그때를 노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어쩌면 잘 된 것일지도 모른다. 두 종파의 종주가 자신들의 거처가 아닌 외지로 독단적으로 움직인다면.’ 그들을 쉽게 상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지도 몰랐다. 적들을 고립시킬 수도 있고 의문을 일으키는 무명이라는 자도 알아낼 수 있다. ‘그가 천마검공을 익혔지만 완벽한 것은 아니다.’ 다행인 것은 천마검공은 운기요결이 없다면 검초를 제대로 펼칠 수가 없다. 아무래도 그 무명이라는 자의 초식이 부자연스럽고 팔, 다리가 떨렸다는 것은 운기요결이 없이 초식을 펼치면서 몸에 과부하가 왔기 때문이리라. 본당 서재로 돌아온 연무화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뜻밖의 선언을 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제가 공자님을 곁에서 보필하겠습니다.” “네에에?” 그녀는 장로임에도 불구하고 천여운의 호위가 되겠다고 자처했다. 화경의 극에 이른 고수가 이렇게까지 한다는 것은 정말로 천여운에 대한 충성을 보이는 것이기도 했다. ‘검종을 다시 부흥시키기 위해서라도 공자님이 소교주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에는 천여운에게는 적이 많았다. 무력이 강하기는 했지만 여섯 종파를 상대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에 그를 지켜야 한다고 판단한 연무화였다. 그녀가 이런 선언을 한 이후로 문규는 저도 모르게 입술이 툭 튀어나왔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문규가 가만히 있다가 헛기침을 하면서 의견을 말했다. “으음, 십 장로님께서 그래주신다면 공자님께도 좋은 일이겠지만 장원을 벗어나신다면 괜히 검마종이나 다른 종파들의 경각심을 사지 않을까요?” 내심 다른 뜻이 더 강했지만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었다. 천여운도 그 의견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에 고왕흘이 나서서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핫, 문규.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네?” “주군 이렇게 하심이 어떻겠습니까?” 고왕흘이 그 점을 방비할 수 있는 의견을 내자 연무화가 좋은 생각이라며 동의했다. 그가 제시한 방법대로 한다면 타 종파의 눈을 신경 쓰지 않고 천여운의 곁에 붙어서 그를 보필할 수 있다. ‘너무해!’ 문규는 괜히 화가 나서 고왕흘을 원망의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영문을 모르는 그는 뒤통수가 따가웠지만 내심 좋은 방법을 제시했다고 흡족해했다. 그렇게 천여운 일행은 얼마 있지 않아 비환귀종의 장원으로 돌아왔다. 입회자를 구하기 위해 출타한 천여운이 복귀하자, 이에 맞춰서 십일 장로 환의가 배웅을 나왔다. “후후후, 공자님 가신 일은 잘되셨나요?” 처음에 십 장로 연무화를 설득하러 간다는 말에 우려했던 환의였다. 장로 회의 때마다 매번 봤었지만 정말 폐쇄적이고 완고한 면이 짙어서 그녀를 설득하는 것은 무리라고 여긴 그였다. ‘별로 좋은 결과는 얻지 못했을 텐데.’ 그녀는 무공이 뛰어난 것만으로는 충성을 얻기 힘든 유형이었다. 환의는 아마도 천여운이 실패할 거라 여겼다. ‘흐으음, 그런데 이 소저는 누구지? 눈매가 제법 매섭네.’ 천여운의 옆에 서있는 연무화를 보면서 환의는 미처 그 정체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가 기억하는 연무화는 오십대에 완고한 귀부인이었다. 더군다나 화경의 극에 이르면서 자신의 기를 완전히 갈무리할 수 있게 된 연무화를 알아보기는 더더욱 힘들었다. “여전히 몰골은 남색처럼 해서는 어딜 위아래로 훑어보는 것이냐?” 도도한 미인의 입에서 나온 거친 말투에 환의의 눈을 깜빡 거렸다. “네? 지금 저한테 하신 말씀인가요?” “그래. 너!” 불쾌하다는 듯이 쏘아붙이는 연무화의 말투에 환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입을 열기 전까지는 정말 몰랐는데, 굉장히 익숙한 목소리였다. “.....이 못 돼먹은 말투. 어디서 많이 들어 봤는데요.” “뭐야?” 살벌해 지는 느낌에 천여운이 중간에 개입했다. “환 장로님께서도 쉽게 알아보지 못하니 더욱 잘된 것 같긴 하군요.” 그 말에 환의는 더욱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한참을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가 이내 놀란 눈이 되어서 물었다. “서, 설마? 이 소저가 연 장로입니까?” 천여운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의 젊어진 모습에 환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어머나! 어쩜 피부하고는. 정말 환골탈태하셨네요?” “흥! 낯 뜨겁다. 그만 쳐다봐라.” 그렇게 당혹스러워하던 것도 잠시였고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인피면구 속에 감춰진 그의 얼굴에도 나이에 맞게 주름이 가득했다. “아아아, 참으로 부럽네요. 그것보다 공자님. 진심으로 경하드립니다.” 환의는 두 번째 입회자를 설득하고 수하로 거두게 된 것을 축하해주었다. 절대로 설득하지 못하리라고 여긴 연무화의 충성을 얻은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환골탈태를 했다는 것은 본교에서도 다섯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고수가 되었음을 의미했다. ‘공자께서 정말 큰 힘을 얻었구나.’ 이대로라면 소교주로 등극하는데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관건은 교주와 여섯 종파의 종주들이 복귀해서 어떤 식으로 나오느냐가 문제였다. 천여운이 환의에게 부탁을 했다. “혹시 십 장로님의 인피면구 제작이 가능합니까?” 뜻밖의 부탁에 의아해하던 환의가 뭔가를 눈치 챘는지 웃으면서 물었다. “후후후, 좋은 생각입니다. 환골탈태한 것을 숨기기 위함이군요?” “아닙니다.” “네?” “십 장로님을 대신할 수 있는 가짜가 필요합니다.” “아하!” 영리한 환의는 그 말에 단번에 진의를 깨달았다. 고왕흘이 냈던 좋은 방법은 바로 이것이었다. 인피면구 제작의 장인인 환의에게 부탁하여 십 장로를 연기할 수 있는 가짜를 장원에 배치해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다면 어차피 외부와 단절하고 지내는 연무화였기 때문에 한 동안은 타 종파의 눈을 속이는 게 가능해진다. 젊음을 되찾은 그녀가 천여운의 호위를 서더라도 누가 알아보겠는가. “명대로 하겠나이다.”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 환의는 곧장 인피면구를 제작하기 위해 자신의 공방으로 들어갔다. 사마착이 내상을 치료하는 것도 기다려야 했고, 미처 쉬지 못했던 천여운은 하루 정도 휴식을 취하기로 하였다. 그 사이에 고왕흘과 허봉은 자신들의 종파에 다녀오기로 하였다. 마도관을 나온 후로 계속 천여운의 곁을 지키느라 부모님들을 뵙지 못한 그들이었다. 문규 역시도 조부인 문연이 자리를 비웠긴 하지만 혼자 있는 동생이 걱정되었는지 마룡장종에 다녀온다며 갔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외상까지 입은 백기와 달리 내상만 입었던 사마착은 운기조식을 취하고, 하루 동안 푹 쉬면서 거동에 무리가 없을 정도로 회복했다. “다행이다.” “주군께 심려를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빨리 깨어나기를 기다렸던 장 호위는 그 동안 모진 고문과 치료 탓인지 아직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정오가 될 무렵에 자신들의 종파로 돌아갔던 고왕흘과 허봉, 문규가 돌아왔다. 오랜 만에 가족들을 만나고 온 그들의 얼굴은 만족감에 젖어 있었다. “동생은 괜찮나?” “헤헤. 네. 다행히 잘 지내고 있더라고요.” 조부인 문연이 자리를 비워서 걱정했는데, 다행히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었다. 그것보다 동생을 기억하고 안부를 물어주는 천여운의 말에 더욱 고마워졌다. 아직까지 치료 중인 백기를 제외하고 모두가 모이자 천여운은 세 번째 입회자를 만나러 가기로 하였다. 물을 것이 있어서 좌호법을 먼저 만날까 했지만, 지금 당장은 입회자가 우선이었다. “일단 인원을 나눈다.” “인원을요?” 전날 밤 휴식을 취하면서 천여운은 앞으로의 일들은 계획했다. 당장에 급한 입회자를 모으는 것도 중요했지만 마도관에서 수하로 거뒀던 생도들의 종파들과도 접선해야 한다고 여긴 그였다. 천여운은 고왕흘, 허봉, 문규에게 그들과 접선해서 중소 종파의 종주들과의 만남을 주선해달라고 했다. 이에 고왕흘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 저와 허봉 둘만 있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주군 곁에 세 명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문규도 데리고 가시죠.” 사실 연무화만 있어도 호위로는 충분했지만, 그녀의 직위가 장로이다보니 천여운이 가벼운 명령을 내리기에는 힘들 거라 판단한 고왕흘이었다. ‘젠장!......또 내 의견은 없어.’ 매번 자신의 의견을 묻지 않는 것에 허봉은 시무룩해졌다. 반면 문규는 뜻밖에 고왕흘이 도와준 덕분에 천여운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게 되어서 좋아라하였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내내 원망의 눈초리를 보냈던 것이 씻은 듯이 녹아내렸다. 왠지 모르겠지만 천여운 곁에 다른 여인이 붙어있는 모습이 싫었다. “그럼 사무종으로 간다. 고왕흘과 허봉은 부탁한다.” “넵! 주군께서도 잘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렇게 두 갈래로 나누어져 천여운 일행은 마교 성내의 동쪽 편에 자리하고 있는 사무종의 장원으로 향했다. 사무종은 마룡장종과 더불어 최상위 종파라 불리는 곳이었다. 장원의 규모만 따진다면 거의 여섯 종파의 성세와 버금 갈 정도로 크고 화려했다. 입구 쪽에 도달하자 천여운이 사무종의 장원을 바라보면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앞서 두 명의 입회자들은 완전 초면인 상태로 만났기에 설득하기 위해서 시험을 비롯해 손을 섞어야만 했다. 하지만 사무종과 같은 경우는 사마착에게 들어보니, 그 종주이자 구 장로인 사마의가 굉장한 호의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번에는 옥패를 쉽게 얻을 수 있을까?’ 한편으로는 장로나 되는 인물이 처음부터 호의적으로 나오는 것이 의아하기도 했다. 일단은 부딪쳐보면 알게 되리라. 장원의 대문 입구 쪽에 도달하자 그곳을 지키고 있던 중년의 경비 무사들이 놀란 눈으로 뛰어나왔다. “도련님!” 그들과 함께 있던 사마착을 알아본 것이었다. 근 삼 년하고도 일곱 달 만에 만나는 소종주였지만 경비 무사들은 단번에 알아보았다. 어렸던 모습은 사라지고 청년이 된 사마착의 모습에 감격했는지 그들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아충 아저씨. 순원 아저씨.” “아이고 도련님! 이렇게 장성하셨다니. 정말 감회가 새롭습니다. 그럼 마도관을 완전히 졸업하신 겝니까?” “네. 그렇게 되었습니다.” 훈훈한 분위기에 괜히 문규가 붉어진 콧등을 긁적였다. 확실히 아는 사람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컸다. 이런 분위기라면 무난하게 옥패를 얻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다리고 있는 천여운과 일행들의 눈치가 보인 사마착이 경비 무사인 아충에게 조용히 일렀다. “얼른 아버님께 제가 왔음을 고해주십시오. 그리고 천여운 공자님을 데리고 왔다고 말씀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경비 무사 아충이 보고를 위해 장원 내로 들어갔다. 이윽고 얼마 있지 않아 장원 내에서 누군가 부리나케 달려 나왔는데, 그는 다름 아닌 사무종의 종주이자 구 장로인 사마의였다. 멋들어진 콧수염에 반백의 머리는 여전했다. 사마의가 천여운에게 포권을 취하며 활짝 웃으며 말했다. “공자님 아니. 천여운 장로님께서 이 누추한 곳까지 왕림해주시다니! 어서 오십시오.” 대환영의 의사를 밝혔다. 재미있는 것은 사마의는 천여운의 곁에 서있는 연무화의 정체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검집을 들고 있는 모습에 그저 여자 호위무사인가 보다 하고 여겼다. ‘한 동안은 정체를 숨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 의견에 동의했기에 연무화 역시도 입을 다물고 호위에만 집중했다. 연무화는 천여운에게 있어서 숨겨진 비장의 무기나 다름없었다. 사마의가 두 팔을 활짝 피면서 말했다. “들어가시지요. 오늘 천여운 장로님께서 오셨으니 잔치를 벌여야겠습니다. 아직 대낮이긴 하지만 코가 삐뚤어지게 마셔봅시다.” “......장로님의 환영에 감사드립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천여운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과도한 환영이 어색했고 한편으로 뭔가 지나친 호의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구 장로 사마의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외당 좌측의 전각을 지나 자리하고 있는 넓은 객당의 마루 위에 상다리가 부러지게 잔치상이 펼쳐졌다. 중원 각 지방의 특색을 갖춘 요리들부터 고급 음식들이 가득했다. 하얀 옥병 속에서 흘러나오는 옥화주(玉花酒)의 술향은 코끝을 간지럽힐 정도로 감미로웠다. 고왕흘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문규를 보낸 것을 후회했을 지도 모른다. “자자자! 일단 드시지요. 마도관에서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사마의가 그들에게 식사를 권했다. 종주인 그가 먼저 젓가락을 들만도 했지만 분위기가 천여운이 먼저 음식에 손을 대야 식사를 시작하는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천여운이 마지못해 젓가락을 들자 그제야 식사가 시작되었다. “캬! 그때 천여운 장로가 백 장로를 상대로 신위를 발휘하는 모습에 정말 감탄을 금치 못하겠더군요.” 사마의는 천여운의 옆에 붙어서 연신 그를 칭찬했다.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함이었지만 그럴수록 천여운은 괜히 부담스러움을 느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생각되자 천여운이 본론을 꺼냈다. “사마의 장로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올게 왔구나하는 생각에 사마의의 표정도 제법 진중해졌다. “말씀만 하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뭔들 못 돕겠습니까?” 천여운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이번 소교주 등극에 입회자가 되어주셨으면 합니다.” “아아아!” 입회자라는 말에 사마의의 눈망울이 떨렸다. 어제 비작 거리에 천여운이 나타난 것을 보고를 받았기에 이 순간이 오리란 것을 내심 짐작하고 있었던 구 장로 사마의였다. “어찌 소교주가 되실 분이 이렇게 예를 보이신단 말입니까? 편하게 대하십시오. 여봐라.” -딱! 그 말과 함께 사마의가 손가락을 튕기며 하인을 불렀다. 사마의가 하인에게 조용히 뭔가를 이르자, 그가 마루로 내려가 내당 쪽으로 누군가를 데리러 갔다. 얼마 있지 않아 객당의 마루로 누군가가 올라왔다. ‘응?’ 잔치상 앞에 앉아있는 일행들의 시선이 절로 그 누군가에게로 향했다. 노란 비단 옷에 장신구로 치장한 열아홉에서 스물 정도로 보이는 어여쁜 여인이었다. 눈매가 살짝 쳐진 모습이 사슴처럼 순한 인상이었다. “어서 인사 드리거라.” 사마의의 말에 여인이 예법에 맞게 인사를 올리며 말했다. “천여운 장로님께 인사 올립니다. 사마영이라고 하옵니다.” “천여운입니다.” 사마가의 성을 쓰는 것을 보면 분명 사마의와 관련이 있음은 틀림없었다. 예를 다해서 인사를 하니, 얼떨결에 천여운도 가볍게 포권을 취하며 인사했다. ‘이 소저는 왜 부른 거지?’ 의아해하는 천여운에게 사마의가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핫, 어떻습니까? 제 여식입니다. 착이 녀석의 누이 동생이기도 하죠.” “......그렇군요.” 떨떠름해하는 천여운을 바라보며 사마의가 자신의 진정한 의사를 밝혔다. “천 장로님께서 소교주에 등극하시는데 제가 어찌 입회자가 되어 드리지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이 신뢰라는 것은 무언가가 바탕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뭔가 불안한 마음에 천여운이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아직 혼례를 치르지 않으셨는데, 부족하지만 제 여식을 아내로 맞이하심은 어떠신지요?” “푸웃!” 그 순간 감미롭다면서 옥화주를 홀짝홀짝 마시고 있던 문규가 입안에 머금고 있던 술을 분수처럼 내뿜었다. < 38장 난감한 제안 (2) > 끝 < 38장 난감한 제안 (3) > 문규가 분수처럼 뿜어댄 덕분에 탁자 위의 음식들이 전부 술에 젖었다. 바로 맞은편에서 식사를 하던 사마착의 얼굴도 술에 젖어 어안이 벙벙해졌다. “푸푸풋. 문규 이게...” 봉변을 당했다는 생각에 무슨 짓이냐고 화를 내려고 했지만 천여운이 먼저 입을 열면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장로님의 말씀이 조금 당황스럽군요.” 뭔가 꿍꿍이가 있어 보인다고 여겼지만 혼례일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자신이 걸어야 할 길을 고민하긴 했지만 그 안에 혼례는 들어있지 않았다. 이에 구 장로 사마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 제 여식이 별로이신지?” “그런 문제가 아니라...” “그게 아니라면 천 장로님께 특별히 문제가 될 것이 있습니까?” 사마의의 태도로 보아서 작정을 한 듯 했다. 사실 이것이 그가 노린 바였다. 천여운이 육 단계 시험에서 독마종의 종주이자 장로인 백오를 꺾는 모습을 본 후에 사마의는 결심했다. ‘어떻게든 천 공자와 혈연관계를 맺어야 한다.’ 최상위 종파의 위치까지 올랐는데도 여전히 여섯 종파의 등살에 밀려서 눈치를 봐야 하는 것이 일반 종파들의 운명이었다. 그런데 여섯 종파에 속하지 않는 첫 소교주 후보자인 천여운은 오백 년이나 지속된 그 흐름을 부수려고 하고 있었다. ‘다른 곳에서 먼저 손쓰기 전에 본처의 자리는 우리 사무종에서 얻어야지.’ 오백 년의 전례를 두고 봤을 때, 여섯 종파 체제를 타파한다고 해도 후처들을 두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다만 가장 먼저 약속된 자리를 보장받고 싶은 사마의였다. 이 상황을 난처해하는 천여운을 바라보며 사마의가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핫, 상호간의 견고한 관계를 위해 혼례를 통해서 혈연을 맺는 것은 예부터 내려오던 일입니다.” “........” 굳은 얼굴로 천여운이 묵묵부답이자 사마의도 어느 정도 이런 반응을 짐작했는지 설독하는 방향으로 바꾸기로 하였다. ‘아무리 무공이 뛰어나다고 해도 이제 갓 약관. 정치를 알기에는 어리다. 후후후.’ 사마의는 여섯 종파가 득세하는 본교에서나 장로 회의에서 자그마치 이십 년이 넘게 최상위 종파로 버텨왔다. 속에 수백 마리의 능구렁이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를 사위로 점찍은 순간부터 많은 방안을 생각해두었다. “천 장로님. 소교주로 등극하시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여섯 종파와 부딪치실 겁니다. 그건 본인이 더욱 잘 아시겠죠.” 천여운이 본인이 아니더라도 여섯 종파와 그의 관계가 완만하지 않음은 마교인이라면 누구나가 아는 사실이다. 소교주 등극에 성공하게 된다면 향후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여섯 종파 역시도 자신들에게 숙적이나 다름없는 천여운을 그냥 지켜볼 리가 없었다. “소교주 등극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무위가 뛰어나시지만 그들 전부를 상대하려면 천 장로님께서도 그에 상응하는 세력이 필요하실 겁니다. 그런 점에서 저희 사무종도 천 장로님께 큰 전력이 될 수 있겠죠.”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다. 최상위 종파이자 본교의 열두 장로 중 한 사람인 사마의가 합류한다면 천여운으로서는 든든한 지원자를 얻게 되는 것이다. ‘으으으. 완전 달변가잖아.’ 옥화주를 마셔서 취기가 돌던 것이 전부 깼다. 문규는 일장연설을 하듯이 천여운을 설득해가는 사마의를 보면서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저 감언이설에 넘어가서 천여운이 정말 사마영이라는 여자와 혼례를 치르면 어떡하지라고 여겨지는 순간 화들짝 놀랐다. ‘앗! 내가 왜 걱정하는 거지?’ 자신이 왜 이런 생각을 했는지 놀라했다. 천여운에게 충성 맹세를 한 거지 이성으로 바라봤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혼례라는 말에 답답하고 민감해졌다. ‘아니야. 에이. 그럴 리가.’ -두근두근! 스스로의 변화를 감지한 문규는 이상할 정도로 심장이 뛰었다. 그런 문규의 미묘한 감정 변화와 상관없이 구 장로 사마의의 설득은 계속 되고 있었다. “안타깝지만 천 장로님께서는 출신 종파가 없으십니다. 밑바탕이라는 것은 쉽게 무시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이를 보완하는 방법은 혈연관계를 통해서 기반을 다지는 겁니다. 기반이 단단하다면 차후에 세력을 불려나가는데 도움이 되실 겁니다.” “흐음.” 천여운이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이 집중하자 사마의는 그가 점차 납득한다고 여겼는지 흡족함으로 눈빛이 반짝였다. 기세를 몰아서 사마의가 마지막 쇄기를 박기 위하여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저는 천 장로님의 입회자가 되어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아가서 한 가족이 된다면 공자는 견고한 밑바탕을 가지시게 되는 겁니다. 차후를 바라본다면 이보다 좋은 방법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하하하핫.” 속내는 이러했다. ‘본교의 미래가 되실 분을 사위로 얻어서 본 종도 본교의 일 좌를 차지할 터이니, 어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 아닌가.’ 정말 설득 당하기라도 한 것일까. 천여운이 말없이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하자, 잔치상 앞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문규는 그런 모습에 눈썹까지 쳐져서 불안함마저 드러냈다. 한동안 말이 없던 천여운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일리가 있는 말씀이군요.” 그 말 한 마디에 희비가 갈라졌다. 고민하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로잡혔던 사마의였지만 그 말에 화색이 돌아서는 입 꼬리가 귀까지 걸렸다. ‘됐다! 하하하핫. 그럼 그렇지. 당연히 이런 조건을 버릴 어리석은 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반면 문규는 안색이 어두워졌다. 천여운이 혼인을 하기로 마음먹은 듯하자 가슴이 찌를 듯이 아팠다. 아까 전부터 부정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이제야 자신의 감정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천 공자님을 좋아했구나.’ 이제 겨우 깨달았는데 천 공자의 곁에 다른 여인이 함께 하려 한다. 그것이 그녀의 마음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쑥스럽다는 듯이 머리카락을 넘기는 사마영의 모습은 어여뻤지만, 자신은 인피면구에 가려져서 남자처럼 지냈으니 천여운이 좋아할 리가 만무했다. “하하하핫, 탁월하신 선택이십니다. 앞으로 가족이 되실 터이니 저희 사무종에서 견마지로로...” “뭔가 오해하신 듯하군요.” “네?” “저는 단지 말씀하신 것이 일리가 있다고만 했습니다.” 좋아서 입이 활짝 벌려져있던 구 장로 사마의가 얼굴이 굳어져서 물었다.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묻겠습니다. 물론 혈연을 맺게 된다면 견고한 면도 있겠지만, 구 장로님께서는 따님과의 혼례와 별개로 제 입회자가 되실 의향은 없으십니까?” “그, 그건....” 사마의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역공을 취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이익을 고려하더라도 서로에게 득이 되는 일이기에 천여운이 당연히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질문을 던지니 난감했다. ‘이것 참.’ 여기서 맞다고 답변을 하게 된다면 그 자신이 야욕에 넘치는 것이 되어버렸고, 아니라고 한다면 입회자를 명분 삼아서 자연스럽게 혼례를 추진할 수 있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도 있었다. ‘당했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미숙할 거라 여겼는데....전혀 아니구나.’ 예상한 것보다 영악한 대응에 사마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무슨 대답을 해도 진퇴양난이었다. 어쩌면 훗날을 위해서 지금 강하게 나가는 편이 좋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러기에는 천여운이 보여준 행보가 마음에 걸렸다. ‘모두가 맞서지 않는 여섯 종파도 두려워하지 않는 천 공자다. 만약 여기서 밉보이게 된다면 더욱 손해를 보지 않을까?’ 일순간의 욕심으로 이 좋은 분위기를 해치기는 두려웠다. 그때 가만히 지켜보던 사마착이 난감해하는 아버지를 돕기 위해 입을 열었다. “주군. 잠시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말해라.” “저희 아버님, 아니 구 장로께서는 육 단계 시험을 치를 때부터 순수하게 주군께 호의적인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혼례가 아니더라도 주군이 소교주에 어울린다고 여기셨기 때문에 이런 자리를 마련하신 겁니다.” ‘이, 이 녀석아. 그렇게 말하면....’ 사마착의 말에 구 장로 사마의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도우려고 한 말이었는데 선택지의 폭을 줄여주고 만 셈이었다. “그렇습니까?” “그, 그건....” 사마의가 대답을 망설이자 천여운이 자리에서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당황스러워하는 사마의에게 고개 숙여서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아드님의 의견과는 다른 듯하군요. 그렇다면 구 장로님께서는 저와 가는 길이 다른것 같습니다. 과분한 환영에 감사했습니다.” “허엇?” 명백한 거절이자 포기 의사였다. 입회자를 구하러 온 입장이었기에 강하게는 나오지 않을 거라 여겼는데, 이렇게 강경한 성격의 소유자일 줄은 몰랐다. ‘아아아!’ 덕분에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침울해 하던 문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천여운이 다른 여자와 혼인을 치르면 어쩌나 했는데, 이렇게 딱 잘라서 거절하니 희망의 빛줄기가 내려오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거절하면 공자님께 나중에 해가 되는 게 아닐까?’ 순간 좋아했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사무종이라면 그에게 정말 큰 힘이 될 것이다. 교주 역시도 일곱 처(妻)를 두었고, 영웅은 삼처사첩(三妻四妾)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것을 문제 삼아서 완고하게 나갈 것도 아니었다. ‘호오.’ 미련 없이 돌아가려는 모습에 십 장로 연무화의 입 꼬리가 약간 올라갔다. 이것을 기회 삼아 정략을 추진하는 구 장로 사마의의 모습에 천여운이 휘둘릴까 우려했는데, 오히려 강하게 나가자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가자!” 천여운이 수하들을 향해 말하자 구 장로 사마의의 눈이 커졌다. ‘정말 간단 말인가?’ “자, 잠깐!” 잔치상에서 몸을 돌려 마루를 내려가려는 천여운을 구 장로 사마의가 붙잡았다. “처, 천 장로님. 어찌 그러십니까? 이대로 가시다뇨.” 안달이 난 사람처럼 그를 붙잡은 사마의는 결국 자신이 한 발자국 물러서기로 마음먹었다. “혹여 혼례 때문에 그런 것이라면...” “혼례. 그것은 구 장로님의 말씀대로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 제가 왜 소교주가 되려고 하시는지 아십니까?”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 천여운의 모습에 사마의가 입을 다물었다. 단순한 이유를 보자면 교주가 되기 위함이겠지만 이런 질문을 했다는 것 자체가 다른 뜻이 있음이다. 천여운이 그런 사마의의 눈을 마주보며 말했다. “지금 기득권을 잡는 여섯 종파의 폐해가 어디서 왔다고 생각합니까?” “폐해? 아.....” 그 질문을 듣고서야 사마의는 천여운의 뜻을 알 수 있었다. 천여운은 지금 혈연관계를 통한 외척 세력이 이런 폐해를 나았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본교의 수뇌부로 있는 장로인 사마의 역시도 통감하는 부분이었다. “이것을 바로 잡고 본교를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서 일어났는데, 그런 제가 견고한 관계를 한다는 미명 아래 여섯 종파와 똑같은 짓을 반복해서 되겠습니까?” "허어....." "그런 혈연 관계따윈 필요없습니다." 그 말에 사마의의 눈동자가 떨렸다. 지금까지는 그저 원만한 관계를 위해 천여운을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는데, 이제는 그라는 인물에게 충격을 받았다. ‘그릇이 다르다는 건가. 아직 약관도 되지 않았는데 이런 것까지 생각하고 있었다니.....’ 진심으로 본교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발상이었다. 그저 복수심으로 여섯 종파를 상대하는 것만은 아니란 의미였다. 자신의 의사를 밝힌 천여운이 다시 한 번 그에게 포권을 취하면서 말했다. “구 장로님의 호의는 감사드리지만 제 뜻과는 관련이 먼 것 같습니다. 혼례에 관련된 것은.....제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이고 싶습니다. 그럼.” 그 말과 함께 천여운이 다시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쿵! 마루바닥을 울리는 소리에 발걸음을 떼던 천여운이 멈췄다. 천천히 고개를 뒤로 돌리자, 구 장로 사마의가 어느새 한 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사마의가 두 손을 모아 공손히 포권을 취하며 외쳤다. “제가 부족하여 공자님의 뜻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거둬주십시오.” 그의 진중해진 태도에 좌중의 사람들이 놀라했다. 천여운이 이채가 띤 눈으로 물었다. “무슨 의미죠?” “사무종의 종주이자 구 장로 사마의가 공자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부디 옥패를 받으셔서 부족하지만 거둬주시기 바랍니다.” 크게 외친 사마의가 품안에서 장로의 신분을 상징하는 옥패를 바쳤다. 과감하게 포기하려 했던 구 장로 사마의가 스스로의 욕심을 꺾고서, 진심으로 충성을 맹세한 것이었다. 이 모습에 천여운의 입 꼬리가 조용히 올라갔다. 마도관을 나오고 나서 사흘 때가 되는 날, 천여운은 목표로 했던 세 명의 입회자들을 모두 얻게 되었다. * * * 늦은 오후 무렵, 천여운이 오늘 중으로 할 일이 남아있다며 돌아간 후에 구 장로 사마의가 너털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허허허.” 설마 자신이 약관도 안 된 청년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뜻했던 바를 이루지 못하고 손해를 감수하고 충성맹세를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만큼 천여운은 그에게 새로운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내 안목이 틀리지 않길 바라야지.’ 어쩌면 그가 변질되어버린 마교를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을 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사마의가 배웅을 마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는 딸, 사마영에게 말했다. “영아야.” “네. 아버님.” “놓치기에는 아까운 분이시다.” 놀랍게도 구 장로 사마의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천여운은 좋아하는 사람과 혼례를 치를 거라는 일말의 가능성을 남겨놓았다. 그것을 놓칠 생각 따윈 없었다. 그런 아버지의 물음에 사마영이 결의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습니다.” “그래. 너만 믿으마.” 내심 혼례를 거절하는 천여운의 태도에 자존심이 상한 그녀였다. 그래도 외모로는 어디 가서 뒤떨어진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눈길 한 번 주지도 않고 거절할 줄은 몰랐다. ‘꼭 나를 보게 만들 거야!’ 그 아버지에 그 딸이었다. 한편 사무종의 장원에 나와서 마도관 방향으로 향하는 천여운과 수하들이다. 모두가 나란히 걷고 있는데, 유독 문규 혼자서 뒤떨어져서 걸어가고 있다. 문규의 얼굴은 싱글벙글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특이한 것은 혼자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가, 다시 웃었다가 종잡을 수 없을 만큼 기분 변화가 다양했다. 문규는 아직도 그 순간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구 장로님의 호의는 감사드리지만 제 뜻과는 관련이 먼 것 같습니다. 혼례에 관련된 것은.....제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이고 싶습니다.’ 그 말을 하면서 잘못 본 것인지 모르겠지만 천여운이 자신을 힐끔 쳐다 본 것 같았다. 그때를 떠올리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들뜨는 기분을 어쩔 수가 없었다. “헤헤.” 마도관에 도착할 때까지 문규의 웃음은 멈출 줄 몰랐다. < 38장 난감한 제안 (3) > 끝 < 39장 대면 (1) > 마도관의 인근에 자리한 작은 객잔. 객잔의 귀빈들만 모시는 객실 안에 천여운과 그 수하들이 있다. 탁자를 앞에 두고 두 사람이 마주보고 있었는데, 천여운과 좌호법 이화명이었다. 마도관 안으로 들어가면 좋을 테지만, 사람들의 이목이 띠는 대낮이었기에 이화명이 밖으로 나왔다. ‘허어.....환골탈태를 해?’ 이화명은 천여운의 옆에 호위처럼 서있는 십 장로 연무화를 보면서 연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짙은 눈썹에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도도한 인상의 미녀였다. 천여운이 한 번도 데리고 다니지 않던 인물이었기에 궁금해서 물었는데, 설마 십 장로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대단하구나. 그녀의 충성을 얻으시다니.’ 장로들에 대해서 설명해주었던 이화명 역시도 그녀의 옥패를 받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었다. 그 만큼 괴팍하면서도 완고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 연무화가 환골탈태까지 해서 천여운의 옆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새삼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라 여겨졌다. “그런데 공자님. 물어보실 일이라 함은?” 이화명의 질문에 천여운이 잠시 수하들에게 자리를 비켜 달라 하였다. 그들이 문밖으로 나가 자리를 비우자 천여운이 본론을 꺼냈다. “혹시 좌호법. 칠십 년 전에 마도관의 육 단계 시험을 누가 통과했는지에 대해서 알 수 있겠습니까?” “칠십 년 전의 통과자를 말입니까?” 뜻밖의 질문에 이화명이 의아해했다. 이에 천여운이 연무화의 양해를 구한 뒤에 그녀가 그 동안 겪었던 일들을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검종에서 파생된 세 종파와 무명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 같은 사정을 알게 된 이화명의 표정이 묘해졌다. 천여운이 해준 이야기대로라고 한다면 그 무명이라는 자가 분명 육 단계 시험을 통과하고 검마 공의 무공을 익혔을 확률이 높았다. “천마 조사님의 심득이 담긴 천마검공도 익혔다고요? 흐음. 이것 참.....” “왜 그러시는 거죠?” “오래되었지만 마도관에는 단계 별 통과자에 대한 기록이 전부 남아있습니다.” “그럼 아시겠군요?” “.....공자님. 칠십 년 전에 마도관의 육 단계 시험을 통과한 분은 태상 교주님이신 천인지님이십니다.” 그 말에 천여운의 눈이 커졌다. 태상교주 천인지(天仁知). 그는 천여운의 조부이자 전대 마교의 교주였다. 역대 교주들 중에서 오백 년 이내로 최고의 무재라 불린 자로 정파 무림맹과 사파 연맹과의 전쟁에서 수많은 무패의 전적과 마교의 영역을 절강까지 확장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그런데 여기서 천여운이 놀란 이유가 있었다. 태상교주인 천인지는 이십여 년 전에 행방불명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 무명이라는 자는 대체 누구란 말이지?’ 교주전과 마도관의 숨겨진 지하 보고에만 있는 두 절세검법을 익혔다. 이 두 가지를 전부 다 익히기 위해서는 교주전에 출입할 수 있고, 육 단계 시험을 통과하여야만 가능했다. 그들이 그렇게 혼란스러워하던 찰나였다. -뿌우우우우! -뿌우우우우! “아니?” 자리에 앉아있던 이화명이 벌떡 일어나서 객실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희미하게 들리던 뿔피리 소리가 선명하게 마교 성내 전체를 울렸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였다. “공자님!” 이화명의 말에 천여운이 굳어진 인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뿔피리가 상징하는 바는 마교의 수장인 교주의 복귀를 알리는 소리였다. 뿔피리 소리에 바깥 거리가 벌써부터 들썩거렸다. ‘벌써 도착한 건가.’ 이틀 전에 들었던 바로는 분명 보름 뒤에나 도착할 것 같던 교주 일행이 벌써 마교의 성으로 복귀한 것이었다. ‘서두른 보람이 있구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입회자를 구하는 것을 서두른 것이 신의 한수가 되었다. “교주님께서 복귀하셨으니 동문에서부터 행렬이 시작될 겁니다. 나가보시겠습니까?” 이화명의 제안에 잠시 고민하던 천여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신임 장로로서 교주의 복귀식을 위해서 마교 대전으로 향해야 했기 때문에 복귀 행렬을 지켜보는 편이 나았다. 객실에서 나온 천여운과 일행들은 성내 동문 쪽으로 향했고, 십 장로 연무화는 복귀식을 위해서 자신의 장원에 들려 환골탈태 전의 모습을 만든 인피면구를 가지러 갔다. 원래 마교가 자리한 십만대산은 광서성과 광동성 사이에 있기 때문에 중원으로 향하는 길이 북쪽 호남성을 통해야만 했다. 하지만 교주 일행이 강서성을 통해서 복귀했다면 광동성 동부를 거쳐서 왔을 것이다. 예상대로 마교 성내 거리는 교인들의 인파로 붐볐다. -웅성웅성! 한동안 자리를 비우면서 냉랭했던 성내 분위기가 시끌벅적해진 느낌이었다. 마교에 있어서 교주는 신과 소통하는 존재이면서 수장이었기에 상징하는 바가 컸다. “와아아아! 교주님이시다!” “교주님께서 돌아오셨다!” “천마신교! 천천세!”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는 교인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성내가 떠나가라 울려 퍼지는 함성에 말 위에 타고 있는 수뇌부들이 손을 흔들며 교인들을 향해 인사를 했다. “드디어 시작이로군요.” 좌호법이 옆에 서있는 천여운에게 넌지시 말했다. 교주 일행이 왔다는 것은 모든 장로들 역시도 복귀한다는 의미였다. 그것은 천여운에게 있어서 전쟁의 시작을 뜻했다. “공자님?” 그걸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천여운의 시선은 오직 한 곳으로 향해 있었다. 길게 이어지는 복귀 행렬의 한 가운데에 유독 검은 가마가 있었다. 흑목(黑木)으로 만들어진 가마는 붉은 비단으로 치장되어 있었고, 그 뒤에는 천(天)이라고 크게 새겨져 있었다. ‘교주.’ 열려있는 가마였지만 앞이 장신구들로 가려져서 그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가히 한 일국의 왕(王)의 행렬에서나 볼 것 같은 광경이었다. 위세가 넘치는 행렬과 환호하는 교인들. 이 광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이 뛰게 만들었지만 천여운의 눈빛은 차갑고 냉정하게 그 행렬을 주시하고 있었다. ‘응?’ 그런데 행렬을 지켜보던 천여운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좌호법 이화명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흑목 가마의 앞에는 대호법 명왕 마라겸이 말을 타고서 지키고 있었는데, 가마의 뒤편에는 우호법 섭맹이 말을 타고 있었는데 뭔가 이상했다. ‘스승님?’ 평소와 달리 의복을 정제하고 있는 우호법이었지만 안색이 창백했고, 오른쪽 눈은 부상이라도 당했는지 머리와 같이 붕대를 감고 있었다. ‘어째서?’ 그런데 이 부상은 우호법 섭맹뿐만이 아니었다. 가마를 지나쳐서 호법가의 무사들의 행렬이 지나서 수뇌부인 장로들이 순차적으로 말을 타고 들어오고 있었는데, 화려한 의복을 입고 있었지만 부상을 숨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일 장로부터 순차적으로 들어오는데, 삼 장로까지는 그럭저럭 멀쩡해 보였지만 사 장로부터는 살이 드러난 부분이 온통 상처 투성이었다. ‘아!’ 심지어 안면이 있던 오 장로 항소유는 왼팔 소매가 헐렁했다. 아무래도 왼팔을 잃은 듯 했다. 그런데 여덟 명이어야 할 장로들 중에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행렬을 지켜보던 문규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그녀의 조부인 문연은 초췌해 보였지만 말 위에서 환호하는 교인들을 향해서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웅성웅성! 처음에는 환호하던 인파들도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칠 장로가 보이지 않는군요.” 칠 장로 간명도종의 공선웅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좌호법 이화명은 이번 기수의 마도관을 맡고 있었기에 기밀로 이루어진 이번 출타의 목적을 알지 못했다. 평소에 간부들과 이만큼의 전력을 이끌고 출타를 한다면 계속해서 본교의 연락망과 교신을 했기에 알겠지만 이번에는 철저히 기밀로 이루어졌다. 그렇기에 마교의 영역권 안에 들어서서야 암종의 수장이자 비환귀종의 종주인 환의가 교주 행 렬의 복귀를 알게 된 것이었다. ‘곧 알게 되겠지.’ 출타 전까지야 기밀이었지만 복귀한 이상 그간에 일들은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교내 내부에서도 그랬지만 교주와 수뇌부들 역시도 극비로 이루어진 행렬이었기에 교내 사정을 알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상하다. 보이지가 않는다.’ 삼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사내가 말 위에서 두리번거리면서 환영 인파들을 살폈는데, 찾는 얼굴들이 보이지 않았다. 장로들의 선두에 서있는 그는 현마종의 종주이자 일 장로인 무진원이었다. 평소의 출타 때라면 복귀 행렬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에 가장 먼저 나와서 맞이할 현마종의 일원들이 보이지 않았다. 교주의 다른 처들도 각 종파의 앞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는데, 무 부인이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인가?’ 환호하는 인파들을 보면 평소와 다름없는 본교의 분위기였다. 전력의 절반 가까이를 남겨두었기에 무슨 일이 있겠냐고 여겼지만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불길함은 무엇일까? “앗! 주군! 저걸 보십쇼!” 허봉이 수뇌부들과 그들의 단원들이 지나가는 뒤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곳을 바라본 천여운과 수하들의 표정이 묘해졌다. 뒤쪽에서 마교인들과는 다른 복색을 하고 있는 행렬들이 이어졌는데, 선두에 있는 깃발들에 적혀 있는 문구가 선명하게 보였다. [무림맹(武林盟)] 그 행렬은 바로 무림맹의 것이었다. 마교가 생겨난 이래에 이렇게 많은 수에 해당하는 정파인들이 성내로 들어서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례적인 사건에 거리가 더욱 시끄러워졌다. -웅성웅성! ‘이게 뭐야?’ ‘무림맹이라니?’ ‘지난번에도 사자들이 오지 않았나?’ 소수의 인원으로 구성되었던 사자들과 달리 인원이 대규모였다. 교주 행렬에는 환호하던 교인들이 동문을 통과해서 들어오는 무림맹의 행렬에 이내 표정이 싸늘해지고 야유를 지르기 시작했다. “우우우!” 이런 분위기를 짐작하기라도 했는지 무림맹의 무사들의 표정도 굳어있었고, 잔뜩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무림맹의 행렬의 중간에 화산파의 깃발과 모용세가의 깃발도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부에는 황금빛 천으로 꾸며진 가마 두 대가 있었는데, 뭔가 귀빈들이 타고 있는 듯 했다. -탁! “뭔가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는 군요. 후후후” “헉!” 허봉이 갑자기 옆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깜짝 놀라했다. 언제 나타난 것인지 비환귀종의 종주이자 십일 장로인 환의가 옆에 서있었다. 마교 자체적인 정보망 이외에도 중원 각지에 암종의 간자들을 심어놓는 환의였기에 뭔가 짐작하는 부분이 있어보였다. “무슨 일인지 알고 있습니까?” 천여운의 물음에 환의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워낙 정보를 차단해서 정확하진 않습니다. 다만.....어쩌면 이번 기회에 본교가 무림맹과 손을 잡을 수도 있습니다.” “무림맹과 손을?” 그 말에 좌호법 이화명도 관심을 보였다. 근 오십 년 동안이나 정파 무림맹과는 쉼 없이 격렬한 전쟁을 치렀다. 최근 오 년 동안은 큰 전쟁이나 분란은 없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그들과 적대적인 관계였는데 동맹은 대체 무슨 말일까? “대외전(大外殿)에서 뭔가 공표하시겠죠.” 모든 교인들이 보는 앞에서 무림맹 행렬의 입성을 허락했다. 그렇다면 수많은 교인들이 지켜보는 대외전에서 뭔가를 공표할 게 틀림없었다. 모든 행렬이 들어서면서 성문이 닫히자, 인파들도 그들을 따라서 성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마교의 대외전으로 향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다. 정파 무림맹의 행렬은 외부 손님들을 모시는 내성 객당으로 곧바로 이동했고, 일 장로인 현마종주 무진원이 대외전의 높은 단상 위에서 서서 외쳤다. “반갑소이다. 친애하는 천마신교의 교인들이여. 일 장로 무진원입니다.” 교주가 아닌 그가 단상 위에 서자 교인들이 의아해했다. 대외전의 장내 분위기가 조용해지자 무진원이 큰 소리로 말했다. “교주님의 복귀를 환영해주신 모든 교인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리오. 교주님께서 긴 여독으로 피로하신 관계로 다음 날 정오에 대외전에 모여주기 바랍니다. 아! 그리고 현재 본교에 입성한 무림맹의 사신단은 공식적으로 초빙되어 온 것이기에 실례를 범하지 말라는 교주님의 지엄한 명이 있으니, 그 점을 유의하시오.” 공지를 마친 무진원은 교인들에게 포권을 취하고는 이내 단상 아래로 내려갔다. 결론은 다음 날이 되어서야 교주의 복귀 인사 및 무림맹 사신단에 관련하여 어떻게 된 일인지 공식적으로 발표하겠다는 말이었다. -웅성웅성! '이게 무슨 일이야? 무림맹의 사신을 초빙하다니?' '아니. 뭘 알려주기라도 해야 할 것 아냐?' 대외전 앞에 모여 있던 교인들은 한 동안 의아함으로 시끌벅적하게 있다가, 결국 얼마 있지 않아 흩어져 해산했다. 무림맹 사신단의 입성부터 시작해 부상을 당한 장로들까지 궁금한 것이 한 둘이 아니었지만, 교주의 명이라니 별 도리가 없었다. 그들이 해산할 무렵에 성내로 짧은 뿔피리 소리가 세 번 울렸다. -뿌우! 뿌우! 뿌우! 이 소리는 교내 모든 수뇌부들과 각 종파의 종주들을 소집을 알리는 신호였다. 마교의 대전 회의가 진행될 때 알리는 신호로 모든 종주들이 내성 안에 있는 마교의 대전으로 모여야 한다. “아무래도 대전 회의가 먼저 진행되겠군요.” 십일 장로 환의의 말에 천여운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교주를 비롯한 수뇌부, 각 종파의 종주들이 모인 큰 규모의 자리에 공식적으로 십이 장로로서 참석하게 되는 것이었다. 해산하던 각 종파의 종주들은 이미 내성 입구로 들어가고 있었다. “저희들은 외성 근처에 있는 우원 객잔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오직 장로, 호법, 종주들만 들어갈 수 있는 자리였기에 천여운의 수하들은 따라 들어갈 수 없었다. “알겠다. 이것을 부탁한다.” “넵. 주군.” 내성 진입 시에는 무기를 해지하여야 했기에 천여운은 허봉에게 백룡도가 들어있는 도집과 검집을 맡겼다. 그리고 좌호법 이화명과 십일 장로 환의와 함께 내성으로 들어갔다. 내성 안에는 여러 큰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교주가 머무는 교주전의 맞은편에 대전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거대한 기둥들이 지탱하고 있는 대전 건물 안은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고, 그 안에는 궁궐처럼 차등적으로 직위에 따라 앉을 수 있는 자리들이 있었다. 가장 안쪽에는 교주의 자리인 석좌가 있었고, 그 바로 앞쪽에는 양 옆으로 열두 장로들이 마주보고 앉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나머지 종파의 종주들은 가장 아래쪽에 자리한 넓은 대청에 마련된 수십 석의 의자에 앉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교주를 제외한 출타했던 일곱 장로들은 이미 자리에 착석해서 기다리고 있었고, 종주들이 줄을 이어서 들어와서 빈자리에 앉았다. 물론 상위 종파의 종주들은 앞 열에 앉았고, 중소 종파의 종주들은 자연스럽게 뒷 열의 의자에 앉았다. “구 장로님께서 대전으로 드십니다.” 수뇌부인 장로들이 입장하면 입구에서 무사들이 외쳐서 알렸다. “어서오십시오.” “오랜만에 뵙습니다. 사마 장로님.” 종파의 종주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대전으로 들어오는 구 장로 사마의에게 인사를 했다. 대전 회의는 그리 많지 않은 자리였기에 이때 안면을 트는 경우가 많았다. 일 각 정도가 지나자 거의 대부분의 종주들은 들어와서 자리에 착석했다. 세 호법들은 교주님과 함께 나타나니, 전부 모인 셈이었다. 유일하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자는 십 장로, 십일 장로, 십이 장로뿐이었다. “세 장로님들이 늦군요.” “심기도 불편하실 텐데 이해해 줍시다. 허허허.” 오 장로이자 음마종의 종주 항소유의 말에 왼쪽 옆에 앉아있던 사 장로이자 복마종의 종주 자금경이 너털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육 장로 자금경이 말하는 인물은 독마종의 종주 백오였다. 여섯 종파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사건들로 인해서 직위가 열두 장로의 말석으로 강등 되면서 이번 출타에도 끼지 못했다. 그때 대전 입구를 지키는 무사가 외쳤다. “십 장로님, 십일 장로님, 십이 장로님께서 드십니다.” 동시에 입장하는 것을 알렸다. 오 장로 항소유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쯧쯧, 강등되셨더니 아래쪽에 계신 분들과 친분이라도 쌓으셨나 보네요.” 대전 문이 열리면서 밝은 빛을 등지고 세 명의 인영이 안으로 들어섰다. 자연스럽게 그곳을 향해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집중되는데, “엇?” "이게 무슨?" 상석에 앉아있던 장로들의 표정이 일제히 굳어졌다. 당연히 독마종의 종주 백오가 지팡이를 끌면서 들어올 거라는 예상이 완전히 깨져버렸다. 두 장로들을 양옆에 수하처럼 대동하면서 나타난 이는 바로 천여운이었다. “저, 저놈이 어찌?” 다른 장로들은 모르겠지만 오 장로 항소유는 천여운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했다. 마도관의 일 단계 시험 때 보았기 때문이었다. 청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소년 때의 생김새가 남아 있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으로 놀라서 인상이 굳어진 장로들에게 천여운이 다가와 가볍게 포권을 취하며 입을 열었다. “여러 장로님들께 인사드립니다. 이번에 새롭게 십이 장로로 부임하게 된 천여운입니다.” < 39장 대면 (1) > 끝 < 39장 대면 (2) > “뭐? 십이.....장로?”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고 최대한 내색하지 않았지만, 일곱 장로들의 눈에는 놀라움과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십이 장로는 독마종주 백오였다. 그런데 뜬금없이 천여운이 마교의 대전에 들어온 것도 모자라서 자신을 장로라고 설명하니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백오는 어디 가고 이 녀석이 무슨....앗!’ ‘서, 설마 육 단계 시험을 통과했단 말인가?’ 어찌 된 영문인지 몰랐던 그들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마도관의 생도에 불과했던 천여운이 장로로 이 자리에 서려면 방법은 오직 단 하나뿐이었다. 육 단계 시험으로 다른 장로에게 도전하는 것. 천여운은 기존의 십이 장로였던 백오의 자리를 빼앗은 것이었다. ‘종주들은 이미 알고 있었단 말인가?’ 마교의 성내에는 이미 육 단계 시험에 대한 소문이 퍼졌기 때문에 천여운이 독마종주 백오를 꺾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각 종파의 종주들의 반응은 비교적 무난했다. 그래도 고작 약관에 불과해 보이는 청년이 위세 높은 기존의 장로들 앞에서 스스로를 신임 장로라고 소개하는 모습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독마종의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던 것인가?’ 일 장로 무진원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곳으로 오는 내내 거리를 두루 살폈었기에 자신의 현마종 사람들 외에도 독마종의 사람들이 보이지 않음을 알아챘다. 그때는 강등되면서 이번 출타 길에 나서지 못한 것에 대한 일종의 불만을 표출하는 것이라고 여겼는데 아무래도 아닌 모양이었다. ‘저놈이 천여운?’ ‘내 외손자의 팔을 자른 놈이라고?’ ‘여기가 어디라고 하찮은 시종의 태생이!’ 천여운의 손에 소교주 후보자들의 팔이 잘렸던 검마종, 도마종, 음마종의 종주가 눈을 매섭게 부릅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만약 이 자리가 마교의 대전이 아니었다면 분노를 직접적으로 표출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 신성한 대전에서 그런 짓을 했다가 교주의 권위와 위엄을 손상케 했다는 죄목으로 즉결 처분되리라. -고오오오! 고수들만 모여 있는 자리이다 보니, 살기와 진기가 섞인 이 미묘한 공기의 흐름을 감지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대전이 고요해졌다. ‘우리가 네놈을 인정할 것 같으냐.’ ‘건방진 놈! 대전에 위풍당당하게 들어왔을 지언정 네놈은 여기서 혼자다.’ 처음에는 놀라했던 여섯 종파에 속하는 장로들이 천여운의 인사를 받지 않고 침묵을 지키자 분위기는 더욱 냉랭해졌다. 다른 장로들이 등장했을 때는 앞 다퉈 일어나서 인사를 올리던 각 종파의 종주들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이에 항소유가 비릿하게 웃었다. ‘네놈이 운이 좋게 이 자리에 섰다고 해도 그게 네 한계다. 하긴 네깟 놈을 장로로 인정하는 자가 있을 리가 없지.’ 여기서 나선다는 것은 여섯 종파를 상대로 항명하는 것과 같았다. 그들이 하는 짓은 일종에 텃세이면서 아무 세력이 없는 천여운의 한계를 알려주기 위한 무언의 공세였다. 그러나 모든 것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탁! 그때 적막으로 휩싸여있던 대전에서 한 거구의 중년인이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천여운에게 포권을 취하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마권종의 종주 고왕현이 천여운 장로를 뵙습니다.” 장로들을 향했던 천여운이 몸을 돌려서 빙그레 웃으며 그에게 포권을 취했다. “반갑습니다.” ‘마권종? 감히!’ 자신들이 고의적으로 침묵을 지켰는데, 그것을 깨고 인사를 하는 고왕현을 오 장로 항소유가 눈썹이 치켜 올라가서 노려보았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고왕현 종주의 옆에 앉아있던 고상한 학자처럼 보이는 중년인이 일어나 포권을 취했다. “서문종의 종주 채택중이라고 합니다. 천여운 장로를 뵙습니다.” “반갑습니다. 채 종주님.” ‘아닛?’ 한 사람도 모자라서 두 명 째 상위 종파의 종주가 인사를 하자 오 장로 항소유 뿐만이 아니라 다른 장로들도 심기가 불편해졌다. 그러나 이를 개의치 않고 또 다른 누군가 이어서 일어났다. “파부종의 종주 호상인입니다. 드디어 뵙는군요.” “저도 반갑습니다. 호 종주님.” ‘뭐, 뭐야?’ 다섯 장로들이 놀랄 틈도 없이 연달아 종주들이 일어나 인사를 했다. 순차적으로 상위 종파에 속하는 종주들이 일어나서 천여운에게 인사를 올리자, 기다렸다는 듯 이 중소 종파의 종주들 역시 일어나 포권을 취하며 큰 소리로 인사했다. ‘이, 이게 대체?’ ‘이 자들이 지금 감히 우리를 등지겠다는 것이냐?’ ‘어떻게 이 많은 자들이?’ 장로들의 눈빛이 점차 싸늘하게 식어갔다. 대전에서 일어난 종주들의 숫자가 자그마치 오십 명을 넘어갔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일어나서 천여운에게 인사를 하는데, 이미 종주들의 삼분 지의 일에 가까운 숫자였다. ‘고왕흘, 허봉.’ 천여운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최대한 많이 접선하기를 바랐는데, 이렇게 많은 종주들이 호응할 줄은 몰랐다. 그것은 고왕흘과 허봉이 모든 종주들을 만난 것은 아니었다. 사전에 마도관에서 방출되었던 생도들은 자신들의 부친인 종주를 설득해서 천여운을 지원해달라고 하였고 그 결과가 이렇게 꽃을 피운 것이었다. ‘천....여....운!’ -으득! 항소유가 이를 갈았다. 마도관에서 벌어진 소교주 쟁탈전의 극명한 결과였다. ‘우리가 자리를 비운 새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마교의 근간이라 불리는 여섯, 아니 다섯 종파의 종주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들에게 있어서 천여운은 특별히 안중에도 없던 존재였다. 교주의 처인 부인들이 화 부인과 엮어서 감정적으로 견제하긴 했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아무 힘도 없는 천여운은 언제든지 처리할 수 있는 하찮은 벼룩과도 같았다. 그런 존재가 이렇게 반전을 일으킬 줄은 몰랐다. 그들이 천여운이란 존재에 대해 처음 위협적인 감정을 느낄 무렵이었다. 석좌 뒤편에서 외침 소리가 대전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교주님께서 납시옵니다.” 대전의 뒤쪽 길에서 화려한 금빛 용무늬가 새겨진 검은 의복을 입고 나타난 중년인의 등장에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었다. “천마신교! 천천세!” 천세를 외친 후에 일 장로가 대표로 외쳤다. “천마신교의 미천한 교인이 삼가 교주님을 배알 하나이다!” 그러자 대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복창했다. “교주님을 배알 하나이다!!!” 마교의 일인자이자 교주 천유종의 등장에 대전의 분위기가 일순간에 바뀌었다. 교주라는 위치가 가지는 그 위압감은 대전 내를 무겁게 아우를 만큼 위세가 굉장했다. 다섯 종파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하나 비교하기 힘들었다. -탁! 교주 천유종이 자리에 앉아서 손을 가볍게 들어 올리자 바로 옆에 서있던 기이한 문양의 가면을 쓴 대호법 마라겸이 외쳤다. “착석하시오.” “천마신교! 천천세!” 다시 한 번 천세를 외친 모든 대전 내 종주들이 자리에 착석했다. 칠 장로가 없기에 열한 번째 장로 석에 앉은 천여운의 눈이 석좌에 앉아있는 천유종에게로 향했다. 날카로운 눈매는 이목구비가 천여운과 닮아있었지만 분위기는 확연하게 달랐다. 오만하면서 모든 것을 내리까는 듯한 눈빛. 십만 교도의 정점에 서있는 자답게 제왕과도 같은 기세를 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숨길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호흡이 고르지 않다.’ 거리가 멀지 않았기 때문에 천여운의 귀에는 미묘하지만 교주의 호흡이 안정적이지 못한 것이 느껴졌다. 분명 내상을 입은 것이 틀림없었다. 혈색은 뚜렷한 걸로 보아 다른 장로들에 비한다면 그리 심하진 않았다. ‘교주에서부터 장로들까지 전부 부상을 입어?’ 교주가 이끌고 간 전력이라면 열 문파를 하룻밤 새에 멸문시킬 만큼 엄청난 전력이었다. 대체 기밀로 하여서 출타를 한 목적이 무엇이었을까? 천여운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교주의 우측 옆에 서있는 자에게로 향했다. ‘스승님.....어쩌다가.' 교주의 우측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우호법 섭맹이었다. 초췌한 얼굴도 모자라서 오른쪽 눈 부위를 붕대로 매고 있는 섭맹의 상태는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안쓰러워하는 천여운과 달리 장로 석에 앉아있는 그를 발견한 섭맹의 눈이 커졌다. ‘아니? 이....이 녀석!’ 섭맹의 초췌했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유일하게 전인이나 다름없는 제자를 이곳에서 보니, 출타해서 고생했던 모든 것이 씻은 듯이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섭맹이 히죽 웃으면서 그를 바라보자 천여운도 빙그레 웃었다. 그렇게 만남을 기다려왔던 두 사제(師弟)가 큰 자리에서 해후를 맛보게 된 것이었다. ‘클클, 이젠 애송이 제자라고 부르지 못하겠구나.’ 섭맹은 감회가 남달랐다. 완숙한 화경의 경지인 그가 육안으로 보아야만 알아챌 만큼 천여운의 갈무리된 기세를 보아하니, 자신을 뛰어넘은 것이 틀림없었다. -찌릿! 섭맹과 눈빛을 교감하던 천여운이 이질적인 기운에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향하지 않던 교주 천유종이 시선이 정확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이 검(劍)과 같다.’ 화경의 극에 이른 이후로 처음 느껴보는 위협적인 기운이었다. 그런 천여운과 마찬가지로 교주 역시도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를 바라보는 눈빛에 이채가 띤것을 보아 꽤 놀란 듯 했다. 출타하는 동안 아무 소식을 듣지 못한 것은 교주 역시도 같았기에, 장로 석에 천여운이 앉아있는 것에 놀란 모양이었다. “교주님.” 대호법 마라겸의 부름에 교주 천유종이 시선을 떼고서 손을 들어 허(許)했다. 그러자 마라겸이 대전의 종주들을 향해 외쳤다. “지금부터 대전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대전 회의가 시작되는 것을 알린 마라겸이 구 장로를 호명했다. 구 장로 사무종의 종주 사마의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마라겸이 말했다. “먼저 구 장로께서는 교주님의 부재중에 있었던 교내 업무를 보고 바랍니다.” “충!” 교주와 수뇌부들이 자리를 비우면서 장로들 중에서 가장 선임인 사마의가 교내 업무를 주관했기에 그 보고를 먼저 듣는 것이었다. 미리 서류를 준비해두었던 사마의가 그 동안 교내 현황들을 보고하였다. 사실 이것은 장로 회의를 통해 보고를 들어도 될 사안이지만 대전 회의로 진행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 동안 부재하면서 해이해진 기강을 잡기 위해서였다. 모든 종주들이 보는 앞에서 교내에 잡혀있지 않은 일을 해결함으로서 풀려있는 기강을 잡고 교주의 위엄을 세우려는 목적이다. 그러나 이런 목적과 다르게 사마의의 보고는 대전을 뒤흔들고 만다. 처음에는 교내 자금 현황부터 시작해 내수 보고까지 마친 사마의는 교내에 터진 사건들을 보고 했는데 그것이 시발점이 되었다. “....해서 현재 교내에 남아있는 독마종과 현마종이 상쟁하면서 살아남은 종파원들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웅성웅성! 정숙해야할 대전이 술렁였다. 이미 두 종파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가면서 교내에 남아있던 종주들은 알고 있었지만, 출타했던 자들은 충격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대사건이었다. 독마종이 멸문한 것도 모자라서 교내에 남아있던 현마종의 종파원들 역시 전부 죽었다. 더군다나 그 죽은 사람들 중에는 교주의 처인 무 부인이 포함되어 있다. 일 장로 무진원의 표정이 일순간에 싸늘해졌다. ‘내.....누이가 죽어?’ 복귀 행렬 때 보이지 않은 것이 뭔가 석연치 않았는데, 설마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충격적인 소식에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독마종의 종주인 백오가 있었다면 이게 무슨 일이냐고 항의를 하고 싶었지만, 정작 그 역시도 육 단계 시험에서 천여운의 손에 죽었단다. ‘말도 안 된다. 내 누이가 그런 짓을 할 리가....’ 평생을 알고 지낸 무 부인은 누구보다도 영악하다. 지략에 능하고 절대로 지는 싸움을 하지 않는 그녀가 독마종에 쳐들어가서 상쟁하여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사마의가 하는 보고대로라면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다. 두 종파가 상쟁한 원인으로 자신의 자식인 무진윤과 누이의 아들인 천무연이 독마종의 혈손인 백철구를 마도관에서 죽였다고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증거로 시신에 우검좌장의 흔적마저 남아있다고 했다. 무진원의 비기인 우검좌장은 오직 천무연만이 전수받았기에 누구도 펼칠 수 없다. 그래서 분노한 독마종에서 현마종을 기습하였지만 도리어 전력의 대부분을 잃고, 남은 독마종을 치려하던 현마종의 전력이 독수에 걸려 전멸했다고 한다. 인과 관계에 있어서 흠이 없었기 때문에 누군가의 계략으로 떠올리기조차 힘들었다. ‘크으으윽!’ -콰득! 도저히 분노를 참지 못한 무진원이 쥐고 있던 의자의 팔걸이 부분이 으스러졌다. 대전에서 해서 안 될 행위였지만 종파에 남아있는 일족들을 전부 잃었기에 그 점은 교주도 나무라지 않았다. ‘그 여자가.....고작 독마종이 파놓은 독수에 당했다라.’ 분노에 휩싸여서 이성을 통제하지 못하는 무진원과 달리 교주의 눈빛은 냉철했다. 첫 번째 처라고 할 수 있는 무 부인의 죽음을 들으면서도 무서울 정로로 아무 감정 변화가 없었다. 사마의가 모든 보고를 거의 마쳤을 무렵, 다섯 종파의 장로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은 꽤나 흉흉해져 있었다. 그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자식들끼리 상잔을 일으켜서 종파 간에 작은 알력들이 있었다고 하니 당연히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훌륭합니다.’ 가만히 이것을 지켜보는 좌호법 이화명이 속으로 칭찬했다. 종주들이 한 곳에 모여 있는 이 자리에서 그 동안 일어났던 사건이 보고되면서 천여운의 계책이 더욱 효과적으로 빛을 발했다. 이제 교내 보고에서 남은 부분은 오직 하나였다. “본교와 마도관의 규칙에 의거하여 천여운 장로가 육 단계 시험을 통과하여 새롭게 십이 장로로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교주님께서 부재 중이셨기에 미뤄졌던 바. 이 자리에서 정식 임명을 해주시기를 주청 드립니다.” 대전 안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천여운에게로 향했다. 수뇌부 급이라 할 수 있는 장로들은 교주에 의해 임명식이 이뤄진다. 그러나 교주가 부재 중이었기에 옥패만 지급된 상황이었다. "잠시만요!" 자신의 아이인 항유직이 마도관에서 사망했다는 보고를 받은 후로 더욱 심기가 불편해져 있던 오 장로 항소유가 불쾌한 얼굴로 손을 들어 발언했다. “이 자리는 임명식을 위한 자리가 아니니, 그 일은 차후에 논의하기...” “좋다.” “앗!”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만히 보고를 듣고 있던 교주가 입을 열었다. 교주의 입에서 임명식을 거행하겠다는 말이 떨어지자 항소유의 당황한 나머지 어쩔 줄 몰라했다. 석좌에 앉아있던 교주 천유종이 자리에서 일어나 천여운에게 직접 말했다. “십이 장로가 될 천여운은 앞으로 나오라.” 그 명령에 천여운이 장로 석에서 일어나, 당당하게 가운데로 걸어 나와 교주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교주가 모든 종주들이 보는 앞에서 정식으로 공표했다. “대 천마신교의 이십삼 대 교주의 권한으로 천여운을 본교의 십이 장로로 임명한다. 본교를 위해서 충성과 희생을 다하라.” “충!” 짧게 충을 외치는 천여운을 바라보는 교주 천유종의 눈빛이 묘했다. 아무 정도 없고 그저 분노를 토해내기 위한 패에 불과했던 그 아이가 바닥에서부터 기어올라서 자신의 앞까지 다가왔다. 참으로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덤덤하게 그를 바라보던 교주 천유종이 입을 열었다. “본좌에게 할 말이 있느냐?” 정식으로 장로에 취임하게 된다면 들어줄 수 있는 선에서 한 가지 주청을 올릴 수 있게 된다. 물론 형식적인 것에 불과해서 그저 소감을 말하라는 것과 같았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천여운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서 다부진 목소리로 교주에게 주청했다. “소교주 등극을 허락해주십시오!” “뭐?” 이것만큼은 교주 역시도 예상하지 못했는지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장로 석에 앉아있던 구 장로 사마의와 십 장로 연무화, 십일 장로 환의가 교주를 향해 무릎을 꿇고 포권을 취하며 동시에 외쳤다. “천여운 공자님의 소교주 등극을 허하여 주십시오!!!” 그저 불쾌한 기분으로 천여운의 장로 임명식을 지켜보던 다섯 장로들이 기습적으로 뒤통수를 맞은 사람처럼 표정이 당혹감으로 일그러졌다. < 39장 대면 (2) > 끝 < 39장 대면 (3) > “소교주 등극을 허락해주십시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천여운의 주청에 대전 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표정이 각양각색이 되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물론 놀랍다 못해서 당혹스러운 것은 다섯 종파의 장로들이었다. 천여운이 장로로 임명되는 것조차도 불쾌했던 와중에 이런 식으로 치고 들어오리라고 누가 상상했겠는가. ‘다, 당했다!’ ‘이 놈이.....이걸 노렸구나!’ 교주에게 주청할 수 있는 기회를 노렸다. 천여운 이외에도 교주 천유종을 향해 무릎 꿇고 포권을 취하는 세 명의 장로들. 그들은 분명 입회자가 틀림없었다. ‘대, 대체 언제 이 자들을 설득했단 말인가?’ ‘연무화? 환의?’ 구 장로 사마의는 그렇다 치고 십 장로 연무화와 십일 장로 환의는 마교에서도 가장 괴팍하고 통제하기 어려운 자들로 정평이 나있었다. 그런 그들이 무릎을 꿇고 천여운의 소교주 등극을 이구동성으로 주청하니, 다섯 종파의 장로들로서는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셈이었다. ‘막아야 하건만.....’ 여기서 그들이 반대를 하고 나서기에는 방법도, 명분도 없었다. 차라리 장로들만 모여 있는 자리라면 모를까, 교내의 모든 종파의 종주들이 모여 있는 자리였기에 섣부른 수작을 부려봐야 위신만 잃는다. ‘크윽!’ ‘어찌할 도리가 없구나.’ 천여운은 마도관의 소교주 쟁탈전에서 모든 경쟁자를 물리친 것도 모자라서 세 명의 장로 급 입회자마저 구했다. 교주의 인가만 떨어진다면 당장에라도 소교주 등극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처리할 수 있는 떨거지로 취급했던 안일함이 불러일으킨 패착이라 할 수 있었다. ‘교주님의 인가만 떨어지면 모든 것은.....’ 그들이 바라지 않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고 만다. 오백 년 만에 여섯 종파의 혈손이 아닌 자가 소교주가 된다면 그들이 구축해놓은 견고한 성세는 흔들리게 되리라.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교주에게로 향했다. 교주 천유종의 표정이 묘했다. ‘......본좌가 알고 있던 그 아이가 맞단 말인가?’ 교주는 다른 의미로 천여운에게 감탄을 했다. 장로로서 나타났을 때는 안중에도 없던 자식이 눈에 띨 만큼 괄목상대(刮目相對)한 것에 놀랐었는데, 지금은 천여운의 영악한 수에 놀랐다. 무릎을 꿇고 포권을 취하고 있었지만 그를 바라보는 천여운의 당당한 눈빛에 무표정했던 교주의 눈동자에 흥미가 감돌았다. 마도관 입관식 때 보았던 무력하고 복수심에만 불타던 치기 어린 그 천여운이 아니었다. ‘인정하라는 말이더냐.’ 분위기는 이미 무르익었다. 좌중을 스윽 바라보던 교주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세 명의 입회자들은 칠 공자를 소교주로 인정하는 것이냐?” -웅성웅성! 교주 천유종의 물음에 대전의 희비가 갈렸다. 천여운을 따르는 각 종파의 종주들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고, 장로들과 그들의 산하에 있는 종파의 종주들의 눈빛에 당혹감이 서렸다. 장로로 임명되었는데 천여운을 칠 공자라 표현했음을 소교주 후보로서 정식적으로 공론화하는 것이었다. “저 구 장로 사마의는 천여운 공자를 본교의 소교주 자격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저 십 장로 연무화는 천여운 공자를 본교의 소교주 자격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저 십일 장로 환의는 천여운 공자를 본교의 소교주 자격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세 사람의 결의가 담긴 목소리에 교주 천유종이 눈빛이 무거워졌다. 그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진심으로 천여운을 인정하는 듯 했고, 여섯 종파의 의중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아 보였다. ‘......이 편이 나을 지도.’ 여섯 종파와 무관한 소교주. 그가 설계했던 그림과는 다소 동떨어졌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다. 교주가 고개를 끄덕 거리더니 결정을 내렸다. 그 결정을 입 밖으로 내뱉으려는 순간, -오싹! 찌를 듯이 날카로운 살기가 교주의 감각을 자극했다. 그것을 느낀 자는 교주만이 아니었다. 대전 안에 있는 자들 모두가 그 살기를 감지했기에 절로 진원지를 향해 시선이 갔다. ‘이, 일 장로?’ 살기의 진원지는 다름 아닌 현마종의 종주이자 일 장로 무진원이었다. 일 장로 무진원은 동공에 핏줄까지 서서 살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자신의 혈족이 전부 죽었다고 했을 때부터 혼란스러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던 무진원은 더 이상 주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런 시점에 소교주 등극을 주청해?’ 교주와 수뇌부들이 기밀로 중원 무림으로 출타를 하기 전만 하더라도 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 천무연 역시도 소교주에 가까운 위치였다. 다른 다섯 종파의 후보자들이 마도관에서 방출되었기에 무진원 역시도 그리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그가 돌아왔을 때, 현무종과 관련된 모든 종파원들과 혈족들이 죽었다. 공교롭게도 천무연 역시도 마도관에서 살인을 저지른 것도 모자라 탈출하여서 독마종의 장원에서 시신이 발견되었다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과 관계를 떠나서 무 부인도 그렇고 천무연이 소교주 쟁탈전의 마지막을 앞둔 시기에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할 리가 없었다. 평소에는 절대로 보이지 않을 실책으로 그들이 죽으면서 천여운 혼자 단독 소교주 후보자가 되었고 기다렸다는 듯이 소교주 등극을 주청했다. 그 시점에서 무진원의 모든 의심은 단 한 사람에게로 쏠렸다. ‘천....여...운!’ 이제 증거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심증이 천여운에게로 향한 시점에서 무진원은 그를 이 자리에서 찢어 죽이지 않는 다면 이 풀리지 않는 원한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았다. -탁! 살기를 풀풀 풍기고 있는 일 장로 무진원의 앞으로 좌호법 이화명과 우호법 섭맹이 빠르게 나타나 가로막고, 대호법 마라겸은 교주의 앞을 지켰다. -챙! 이화명이 붉은 검신의 염화검을 뽑아서 무진원에게 겨냥했다. 섭맹 역시도 허리춤에 차고 있던 광무도의 도병에 손이 가져가 있었다. 마교의 대전에서 유일하게 무구를 지닐 수 있는 자들은 교주와 그를 보호하는 세 호법들뿐이었다. “살기를 거두시오. 일 장로.” “교주님이 계신 대전에서 이 어찌 무엄한 행동이란 말이오.” 이화명과 섭맹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일 장로 무진원이 살기를 거두지 않고 분노가 서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본 장로가 네놈의 간교한 계책을 모를 것 같으냐.” 그가 말을 하는 대상은 앞에 있는 호법들이 아닌 바로 천여운이었다. 무진원의 날카로운 눈빛은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천여운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교주를 향해 포권을 취하고 있던 천여운이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장로 석에 앉아 있는 일 장로를 바라보았다. ‘이놈!’ 천여운과 눈이 마주한 일 장로의 동공이 분노로 흔들렸다. 덤덤한 얼굴과 달리 천여운의 눈빛은 그를 도발하듯이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노기가 치솟은 무진원이 화를 내려는 순간, “거기까지다.” 교주의 입에서 경고성이 흘러나왔다. 낮게 깔린 어조에 불과했지만 목소리에 실려 있는 공력은 심후했고,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는 무진원을 억눌렀다. “크윽!” 천여운의 계책에 현마종의 종파원들과 혈족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생각에 아무 것도 보지 못하던 무진원이 그제야 대전의 자리임을 의식했다. 이 자리에서 교주를 자극해봐야 그만 위태로워질 뿐이었다. 무진원이 주체하지 못하던 살기를 갈무리하고 교주를 향해 바닥에 엎드려서 머리를 조아리며 외쳤다. “신이 지엄하신 교주님께 무례를 범했습니다. 불손함을 사죄드리겠나이다!” -쿵! 쿵! 쿵! 그 말과 함께 머리를 세차게 바닥에 찧었다. 이마에 피가 흘러내릴 만큼 바닥에 연달아서 박자, 교주 천유종이 말없이 무진원을 압박하던 기운을 해지시켰다. -쿵! 쿵! 쿵! 이마를 스무 번 가량을 박은 무진원의 얼굴은 피범벅이가 되었다. 냉정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던 교주 천유종이 계속해서 이마를 박으려는 무진원에게 그만하라 명했다. “돌아가서 착석하라.” “교주님의 하해(河海)와 같은 은혜에 감사하나이다!” 무진원이 다시 한 번 교주에게 절을 하면서 감사의 인사를 올린 후에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서서 자리로 돌아갔다. -착! 사태가 수습되었다는 생각에 좌호법 이화명이 염화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두 호법은 다시 교주의 양 옆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얼굴에 범벅이가 된 피를 소매로 닦아내며 무진원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천여운을 노려보며 훗날을 기약했다. ‘모든 것을 밝혀내고 네놈을 내 손으로 찢어 죽여주마.’ 여기서 흥분해서 천여운을 해한다면 결국 자신마저도 해치게 되는 결과였다. 혈족들의 절반을 잃었지만 그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그때 일 장로 무진원의 귓가로 뜻밖의 전음성이 들려왔다. [일 장로 그대가 생각하는 게 전부 사실이다. 독마종이 아니다. 내가 했다.] 천여운의 전음이었다. 고의적으로 도발하는 목소리였다. 떨리는 눈동자로 천여운을 바라보는 순간 그의 입매가 웃고 있었다. 그 순간 겨우 진정시켰던 무진원의 실낱같은 이성의 끈이 끊어져버리고 말았다. “크아아아아악! 네놈을 죽여 버리겠다!” -팟! 무진원의 신형이 자리를 박차고 번개처럼 천여운에게로 쇄도했다. “아닛! 일 장로!” 교주의 곁으로 발걸음을 돌리던 좌호법 이화명이 재빨리 신형을 날려서 무진원을 막으려 했지만 무위에서 한 단락 이상 차이가 났다. “방해하지 마랏!” -파파파파파팍! 무진원이 왼손으로 부드럽게 유현운장(柔玄雲掌)의 초식을 펼쳐서, 신형을 날린 이화명을 역으로 튕겨내고 말았다. -팡! 콰쾅! “크헉!” 가슴에 일장을 맞은 이화명의 신형이 뒤로 튕겨나가 기둥에 박히고 말았다. 화경의 극에 이른 무진원의 공력은 이화명을 압도했고, 초식적인 부분도 상대가 될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기둥에 박혔던 이화명이 거친 소리를 내뱉으며 다시 공격하려 했지만 이미 무진원의 푸른빛 강기가 서린 검결지가 절초를 그리며 천여운에게 쇄도했다. 그것은 검마의 진신마검(進新魔劍)의 검초 중에서 가장 살상력이 높은 절초인 진검무정(進劍無情)이었다. -촤촤촤촤촤?! 연무화가 말했던 것처럼 그 역시도 검마의 검법을 익히고 있었다. 화경의 극에 이른 무진원은 처음 보았을 때부터 본능적으로 천여운이 자신과 같은 경지임을 눈치 채고 있었다. 그렇기에 단번에 최강의 초식을 구현하는 것이었다. ‘어, 엄청난 초식이다!’ ‘무 장로가 이런 절세검법을 익혔다니?’ 무진원의 손에서 펼쳐지는 엄청난 절초에 모든 사람들이 놀라워했다. 그것은 교주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가히 천마검법에 버금갈 정도의 절세검법을 일 장로 무진원이 숨기고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게 진신마검이라고?’ 짧은 찰나에 연무화 역시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교내 서열 일이 위를 다투는 일 장로 무진원의 손에서 펼쳐지는 진신마검의 검초는 기존의 위력을 훨씬 상회하고 있었다. 보완한 것을 넘어서서 검초를 더욱 발전시켰다. “죽어랏!” 초식 그대로 무정한 진신마검의 검초가 천여운을 뒤덮었다. ‘강하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어떤 자들과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위력의 검초에 천여운의 눈매가 날카로 워졌다. -우웅! 천여운의 검결지에서 푸른빛 검강의 서렸다. 완전히 보완되고 훨씬 발전된 형태의 진신마검을 막기 위해서는 그보다 상위 검법인 이십사마검이 답이었다. 천여운의 검결지가 앞으로 뻗어나가며, 두 절대고수의 손에서 발하는 푸른빛 검강이 부딪쳤다. -파치치치치칙! 두 사람의 검결지에 형성된 검강이 부딪치며 파공음이 대전을 울려 퍼졌다. 천여운이 펼친 검초는 이십사마검의 세 번째 초식이 펼쳐졌다. 스물네 개의 평범한 검식이 교묘하게 맞물리면서 그 위력이 격류처럼 거세진다. “이럴 수가!” “마, 막아내고 있어!” 절대로 막지 못할 거라 생각한 무진원의 절초를 천여운이 더욱 뛰어난 절세 검초를 펼치며 이를 막아내자 대전 내의 사람들이 놀라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건....이십사마검?’ 검초를 부딪치는 무진원의 인상이 굳어졌다. 천여운의 손에서 펼쳐지는 검식들은 분명 무명이 보여주었던 이십사마검의 일 초식을 이루고 있던 검식들과 동일했다. ‘이놈이 어째서 이것을 알고 있는 것이지?’ 천여운이 펼치는 검초에 놀란 것도 잠시였다. 무진원은 당황해하지 않고 침착하게 오른손으로 진신마검의 검초들을 연달아 펼치며 이십사마검의 초식을 막아내며 왼손의 검결지를 뻗었다. ‘헛!’ 왼손 검결지에서 뻗어 나온 검초는 현마종의 검법인 현마패검(玄魔敗劍)의 오 초식인 현검유중(玄劍由重)이었다. 무거운 중검의 검식이 이십사마검을 파고들며 검초를 와해시켰다. -파파파파팟! “크흑!” 천여운의 어깨와 복부에 검초가 적중하며 그의 신형이 뒤로 고통으로 뒤로 밀려나갔다. “우검좌검!” 일 장로 무진원의 비기를 알아본 종주들이 외쳤다. 우검좌장(右劍左掌)은 오른손으로 검법, 왼손으로 장법을 펼치는 무진원의 잘 알려진 비기이다. 우검좌검(右劍左劍). 그것은 단순히 장법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기에, 무진원은 두 손으로 여타의 다른 초식들을 동시에 펼칠 수 있다. 두 손으로 다른 초식을 펼치게 되면 두 사람이 합공을 펼치는 것과 같은 효과를 일으킨다. -찌릿찌릿! 상처부위를 타고 흐르는 고통에 천여운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호신강기가 아니었다면 검강이 몸을 관통했을 것이다. 입고 있는 옷의 상의가 붉은 피로 물들어갔다. [유형화된 에너지 파동에 의한 상처부위를 자가수복합니다.] -스스스스! 나노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울리며 상처 부위가 빠르게 재생했다. 옷에 가려져 있기에 보이지 않았지만 회복 속도는 경이로울 만큼 빨랐다. ‘후우.’ 상처가 빠르게 수복된 덕분에 통증이 금방 가셨다. 강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무진원의 무위는 경이로울 정도였다. 양손으로 다른 검초를 펼쳐서 검초를 보완하면서 이십사마검의 초식마저 파훼시켜버렸다. 무진원이 더 빨리 비기를 썼다면 낭패를 보았을 것이다. ‘상대하기 까다롭다.’ 직접 상대해보니, 정말 사기라고 할 만한 비기였다. ‘서둘러야 한다!’ 무진원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천여운을 죽이려들었다. 여기서 머뭇거려서 시간을 끌면 천여운을 죽이기는커녕 교주나 장로들이 나선다면 제압당해서 기회를 놓치고 말 것이다. 그 전에 승부를 봐야 했다. “죽여주마!” 이십사마검의 위력을 잘 알고 있기에 무진원은 방심하지 않고, 단번에 자신의 비기인 우검좌검 을 펼쳤다. 연무화가 이십사마검의 일 초식을 완성시키는데 그쳤다면 무진원은 탁월한 깨달음으로 이것으로 새로운 비기를 만들어냈다. ‘왼손에는 진신마검의 마지막 절초. 오른손에는 이십사마검의 일초식.’ -촤촤촤촤촤?! 그의 두 손에서 검초가 발하자 대전 안의 공기가 날카로운 예기와 진기로 팽배해지며 이를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이 경악했다. ‘일 장로. 이 자는 정녕 괴물이란 말인가.’ ‘어찌 이런 초식을?’ 조금 전에 펼쳤던 초식도 놀라웠는데 그것을 한참 뛰어넘었다. 검마가 살아생전 명성을 떨치던 검초와 극도신과의 대결을 위해 만든 검초가 합쳐진 비기는 그야말로 최강의 초식이었다. ‘막을 수 없어. 이, 이건 이십사마검이라고 해도...’ 연무화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십사마검의 위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녀는 이것만큼은 천여운이라고 해도 절대 막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내 누이와 아들, 그리고 혈족의 복수다. 죽어라!’ 일 장로 무진원의 눈빛이 살의로 번뜩였다. 이 초식만큼은 설사 교주라고 해도 막을 수 없으리라 장담했다. 왜냐하면 무명이라는 정체불명의 고수를 상대할 걸 가정해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십사마검으로도 어쩔 수 없다면....’ 천여운의 두 눈에서 강한 전의가 뿜어져 나왔다. 날카로운 검초가 천여운을 갈가리 조각내려는 찰나였다. -우웅! ‘도.....강?’ 검결지로 검강을 펼치고 있던 천여운의 손이 어느새 도강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순간 천여운의 손에서 폭발적인 역량의 도초가 발하며 그를 압박하는 무진원의 최강의 절초와 부딪쳤다. -파치치치치칙! 이를 바라보는 환의의 두 눈이 커졌다. ‘그, 그것이다!’ 자신을 처음으로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었던 그 전율적인 도법이었다. 천여운의 손에서 발한 패도적인 도초는 기이한 각도로 꺾어 들어가며 엄청난 기세로 도결을 만들어내 무진원의 양손에서 펼치는 초식들을 거침없이 파훼해버렸다. -파치치치칙! 절대적인 승리를 장담했던 무진원이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초식을 어떻게?’ 도식들이 쇄도해오는 각도는 상식적으로 절대로 이어질 수 없는 곳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이것은 우검좌검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사각을 노려왔다. -파치치칙! 파팍! “크흑!” 진신마검을 펼치던 왼손의 검강이 패도적인 도식을 이겨내지 못하고 튕겨나갔다. 덕분에 무진원의 신형이 흔들렸다. 이 기회를 천여운이 놓칠 리가 없었다. 곧바로 극도신의 도법의 마지막 초식이 이어졌다. 구현해낸 이 초식의 정확한 이름을 몰랐지만 천여운은 이 초식을 이렇게 불렀다. 비룡(飛龍). -휘리리리릭! 도초를 펼치는 천여운의 몸이 아래에서부터 위로 회전하자, 도결이 회오리를 치듯이 위로 이어지며 무진원의 전신으로 도강들이 휘어 감았다. 용이 하늘로 승천하듯이 날카로운 도강에 휩싸인 무진원이 신형이 강대한 도력에 의해 대전의 허공으로 치솟았다. ‘아, 안 돼!’ 무진원이 두 손으로 검강을 일으켜 검초를 펼쳐서 빠져나오려 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계속해서 이어지는 도강에 갇혀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버텨야 한다!’ 무진원이 최대 공력을 끌어내서 호신강기를 펼쳤다. 그 순간 회오리를 치던 도강이 좁혀지며, -파치치치치칙! ‘호, 호신강기가?’ 회오리를 치며 그를 압박하는 도강은 우습다는 듯이 호신강기를 찢어버리고 말았다. 무진원의 얼굴에 핏대가 서며 몸을 뒤트는 순간 도강이 파고들었다. -촤촤촤촤촤촤?! “끄아아아아아악!” 대전을 울리는 무진원의 찢어질 듯 한 비명과 함께 허공으로 떠올랐던 무진원의 몸이 도강에 갈가리 찢겨나가고 말았다. 비명이 멎어지는 순간, -투투투투툭! 일 장로 무진원의 조각난 시신들이 대전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대전이 일순간에 정적으로 물들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이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전율에 휩싸여 천여운을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39장 대면 (3) > 끝 < 39장 대면 (4) > 교주를 제외하고 마교에서 대호법 마라겸과 더불어 최강의 고수라 불리던 일 장로 무진원의 비참한 최후는 대전에 있는 모든 종주들을 충격으로 몰기에 충분했다. 천여운을 따르기로 한 종파의 종주들은 내심 환호성을 지르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기에 입술을 조용히 실룩였다. 누구도 막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일 장로 무진원의 절세초식을 격파한 천여운의 도법은 모두를 전율스럽게 만들었다. ‘세상에! 일 장로를 이겼어!’ ‘정녕 이게 현실이란 말인가?’ ‘이, 이런 전율적인 도법이 존재했다니?’ 그로 인해 본의 아니게 종주들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우호법 섭맹이었다. 천여운에게 도법을 전수한 자가 섭맹이라는 사실은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었다. “흠흠.” 섭맹은 미묘하게 자신이 주목받는 느낌에 헛기침을 했다. 사실 천여운의 도법에 누구보다 충격을 받은 사람은 섭맹 자신이었다. '아니. 이 녀석. 언제 이런 절세도법을 익혔단 말인가?'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접무도법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전율적인 도법이었다. 도를 연마하는 무인으로서 그저 감탄 밖에 나오지 않았다. ‘한데, 도법이 낯이 익다.’ 이상했다. 분명 처음 보는 도법인데 낯설지가 않았다. 그것은 섭맹뿐만이 아니었다. 좌호법 이화명은 너무 경악한 나머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만약 그가 최근에 마도관의 지하 보고를 열어서 천여운을 안내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수도 있겠지만 이 도법의 도흔을 본 적이 있었다. ‘극....극도신의 도법!!!’ 지하 보고에 보관되어 있는 시신들에 남겨진 도흔과 판박이였다. 그저 시신에 남겨진 흔적에 불과했지만 그 도초에서 느껴지는 기운만큼은 전율적이었기에 기억하고 있었다. ‘도법의 파훼법을 연구하신 게 아니라 그걸 익히셨다고? 어찌 이런 일이.....’ 시신에 남겨진 도흔만으로 초식을 익힌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좌호법 이화명은 직접 보고도 믿기지 않는 놀라움에 사로잡혀 전신이 떨려왔다. '누구도 익히지 못했던 천마 조사님의 마지막 심득도 그렇고, 공자님의 자질은 정녕 하늘이 내린 것이란 말인가.' 이화명은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천여운이야말로 다시 마교를 부흥시킬 새로운 천마(天魔)가 되리라고 확신했다. [좌호법.] 이화명은 자신의 귓가로 들려오는 마라겸의 전음에 흠칫 그를 쳐다보았다. 가면에 가려진 작은 틈새로 보이는 눈동자가 무진원의 조각조각 난 시신의 도흔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세.] [알겠습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마라겸과도 천여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다. 그 역시도 검마 공의 유지를 받드는 입장이니 말이다. ‘이 자리를 이렇게까지 활용하다니 정말 훌륭합니다. 공자. 이로써 모든 종주들 앞에서 공자를 제대로 각인시켰군요.’ 십일 장로 환의는 천여운이 일 장로 무진원을 이긴 것 이상으로 이런 상황을 연출한 것을 신의 한수라고 평가해주고 싶었다. 여전히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는 종주들의 반응만 보더라도 큰 효과를 보았다고 할 수 있었다. ‘공자께서 일 장로를 해결했으니 뒷수습은 제 몫이겠군요. 후후후’ 무진원 본인도 대단하기도 했지만 그가 가진 남은 현마종의 전력은 마교 내에서도 수위권에 꼽히는 정예 무사들이었다. '이들을 공자님의 전력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봐야 겠군.' 그냥 무작정 처리하기에는 꽤 아까운 전력이었다. 천여운의 산하로 거둬들일 수만 있다면 쓸만한 전력이 될 것이다. 다른 네 종파에서 욕심을 내서 손을 뻗기 전에 먼저 움직이는 것이 관건이었다. ‘교주님께서는 어떤 심중이실지 궁금해지는군.’ 한편 석좌에 앉아 있는 교주 천유종의 표정은 아까 전과 달리 굳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흥미롭다고 여겼던 마음이 달라졌다. 독마종의 종주인 백오를 꺾었다고 했기에 무위가 대단할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예상 수치를 훨씬 웃돌고 있었다. ‘본좌의 예상을 뛰어넘다니.’ 첫 번째 초식은 우발적으로 벌어졌기에 그랬다지만, 일 장로 무진원의 연이은 공격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본인이 직접 나섰다면 제지시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교주는 일부러 이를 용인했다.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에 손을 쓸 생각으로 말이다. 이런 성장 속도라면 십 년 내로 중원 오대고수의 이름이 바뀔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본좌를 위협할 고수가 되어간 다라.....’ 아직까지는 썩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패는 다룰 수 있어야만 패로서 유용한 법이었다. 천여운을 좀 더 유심히 살펴봐야 겠다는 생각이 교주 천유종의 머릿속에 확고하게 잡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던 차에 누군가 정적을 깨고서 입을 열었다. 그녀는 오 장로 항소유였다. “무, 무엄합니다! 지엄하신 교주님의 계신 대전에서 일 장로를 해하다니!” 천여운의 두려울 정도로 전율적인 무위에 놀란 그녀는 일순간 어찌해야 할지 고민했지만, 이내 이것을 문제 삼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마교의 법도대로라면 교주가 보는 앞에서 다른 장로를 시해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항 장로님의 말씀이 옳소. 어느 안전이라고 무례를 범하다니! 당장 천여운 장로는 교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죄를 청하지 못할까!” 복마종의 종주이자 사 장로 자금경이 그녀를 도와서 외쳤다. 지금 여기서 이것을 공론화시켜서 문제 삼지 않는다면 천여운을 기세를 더욱 살려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교주의 위엄과 체면을 깎았다고 공론화시킨다면 교주도 묵시하지 않으리라. ‘이놈이 소교주가 되게 해서는 안 돼.’ 무력부터 시작해 세력까지 무서울 정도로 성장했다. 소교주가 되게 하여 날개마저 달아준다면, 더 이상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지도 몰랐다. ‘헛!’ 그런 그들을 천여운이 싸늘한 눈빛으로 노려보자, 오 장로 항소유를 비롯한 사 장로 자금경이 자신들도 모르게 시선을 회피하고 말았다. 확연한 무력 차이를 실감했기에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낀 탓이었다. -탁! 천여운이 조심스럽게 한 쪽 무릎을 꿇고 교주께 아뢰었다. “삼가 목숨에 위협을 받아서 본의 아니게 대전에서 무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교주님께 사죄드립니다.” ‘아주 기세등등하구나!’ 당당한 천여운의 말투에 오 장로 항소유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한 마디 덧붙여서 그가 곤란하도록 밀어붙이고 싶었으나, 한 번 눈을 마주치고 나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어차피 교주 역시도 뭔가 경각심을 느꼈을 터이니, 그가 판단하게 내버려두는 편이 나았다. ‘흥! 자신의 권위가 무너지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교주다. 어떤 식으로든 불편함을 드러낼 것이다.’ 그때 좌호법 이화명이 교주의 앞에 무릎을 꿇고 외쳤다. “신이 무력하여 일 장로가 교주님의 혈육이신 천여운 공자의 목숨을 위협했음에도 사전에 방지 하지 못하여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신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어째서?’ 그 외침을 듣는 순간 오 장로 항소유와 사 장로 자금경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말았다. 설마 좌호법이 이 상황에서 도울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교주의 혈육을 노렸다는 식으로 거론해버리는 바람에 여기서 천여운의 행동을 나무라는 것이 더욱 이상하게 되어버렸다. ‘좌호법이 왜 돕는 거지?’ ‘설마.....’ 그들은 어이가 없어서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호법가였기 때문에 별 생각 없이 여겼었는데, 좌호법의 이런 행동은 대전에 있는 누가 보아도 천여운을 돕는 것이었다. ‘장로들에 이어서 좌호법까지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고? 하!’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우호법 섭맹은 천여운의 스승이었기에 그와 친분이 있음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도 모자라서 좌호법 이화명마저 한통속이라면 이미 기호지세(騎虎之勢)였다. ‘낭패다! 제대로 당했어.’ ‘천여운......네놈은 대체.’ 네 장로들은 이미 대전 내의 분위기가 자신들이 어찌 해볼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중립의 입장인 육 장로 몽오와 팔 장로 문연이 돕는다면 모를까 지금으로서는 천여운을 몰아붙일 수도 없었고, 소교주로 등극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거침이 없구나.’ 육 장로 몽오의 평이었다. 그는 중립의 입장이었지만 다른 장로들과 다르게 여섯 종파와 교분이 두터웠다. 그것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의 흐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 처음 보게 된 천여운에게 그는 진심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대단하다. 현 교주님조차도 여섯 종파와 혈연관계이기 때문에 그들을 견제하면서도 크게 건드리지 않았건만.’ 몽오는 이를 계기로 본교가 달라질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여섯 종파들 가운데 네 종파와 그 산하의 종파들이 건재한 상황이니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인상을 쓴 채로 말이 없던 교주가 입을 뗐다. “두 사람은 일어나라.” 그 말에 사 장로 자금경과 오 장로 항소유가 안색이 어두워졌다. 무릎을 꿇고 있는 두 사람을 일으킨 것은 교주가 그들의 손을 들어주었기 때문이었다. 교주의 입장에서도 이번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번 일은 일 장로의 우발적인 행동으로 벌어진 것이기에 넘어가도록 하겠다." "교주님의 하해와 같은 자비로움에 감사드립니다." 천여운과 좌호법 이화명이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이화명이 제 때 나서준 덕분에 원활하게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 교주가 좌중을 바라보며 말했다. "일 장로는 본좌가 보는 앞에서 공자를 노렸으나 그 대가를 치루었으니, 더이상 문제 삼지 않겠다. 하나, 모두 명심하라. 대전에서의 무례는 본좌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므로 그 누구도 용납지 않는다. 알겠느냐.” “충!!!” 대전 내에 있는 모든 종주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그 가운데 고개를 숙이고 있는 천여운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좌중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으나, 실상은 자신에게 하는 경고라 여겨졌다. '이번에는 넘어가겠지만 다음은 없다는 말인가.' 그것은 정답이었다. 교주 천유종 역시도 이 사건을 빌미로 천여운을 적당히 억제시키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여겼지만 모든 종주들이 모인 앞에서 명분이 서지 않았다. '어차피 예상했던 바다.' 교주가 이번 일을 통해 경각심을 가질 거라는 것은 계산된 범위 내였다. 아쉬운 점은 그 경각심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표출해주길 바랐지만, 교주 천유종은 의도한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적당한 경고는 끝났고.' 교주의 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모두 들어라.” “충!!!” “본좌가 이 자리에서 공표하겠다.” “!?" 공표라는 말에 대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의아해졌다. 특히 네 종파의 장로들은 알 수 없는 불길함에 사로잡혀 교주를 바라보았다. “본좌의 일곱 번째 자식이자, 세 장로들을 입회자로 두어 스스로의 자격을 증명한 천여운을 소교주로 임명하고자 한다.” “!!!” 그 불길함은 현실로 들어맞고 말았다. 교주의 공표는 바로 천여운을 소교주로 임명하고자 함이었다. 네 종파에서 그렇게 바라지 않았던 순간이 일어나고 말았다.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있는가?" "........." 이 상황에서 누가 이의를 제기하겠는가. 찬성하는 쪽도 반대하는 쪽도 긴장된 얼굴로 교주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교주 천유종이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외쳤다. “지금 이 순간부로 칠 공자 천여운은 대 천마신교의 소교주가 되었음을 공표한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천여운의 산하에 속하는 종주들이 얼굴이 상기되어서 천세를 부르며 외쳤다. 오백 년 만에 여섯 종파에 속하지 않은 소교주가 탄생했다. “천마신교! 천세! 천천세!” “와아아아아아아!!!” 유일하게 환호성을 지를 수 있는 순간이었다. 네 종파의 종주이자 장로들은 잔뜩 구겨진 얼굴로 불쾌함을 감추지 못했고, 그 산하에 속해 있는 종주들 역시 어두워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소교주 자리를 걸고 시작된 여섯 종파와의 첫 전쟁은 천여운의 승리로 돌아갔다. -꽉! ‘어머니.....’ 천여운이 자신의 주먹을 움켜쥐면서 기쁨의 순간을 만끽했다. 어머니인 화 부인을 떠올렸다. 그녀는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천여운의 안위를 걱정하다 세상을 떠났다. 그런 천여운이 대 천마신교의 소교주가 되었다. ‘이제 네놈들 차례다.’ 현마종과 독마종을 무너뜨렸다. 이제 남은 것은 검마종, 도마종, 복마종, 음마종까지 총 네 종파였다. 여전히 그들을 따르는 산하 세력이 있었기에 아직 갈 길이 멀었지만, 목표했던 한 고비를 넘겼기에 그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싸울 수 있게 되었다. < 39장 대면 (4) > 끝 < 40장 정파 무림맹의 귀빈 (1) > 원래 소교주로 임명되게 된다면 교내 대외전에서 교인들이 보는 앞에서 소교주 등극식이 행해지게 된다. 지금은 더 시급한 회의 안건들이 많았기에 천여운의 정식 소교주 등극식은 차후에 기일을 잡기로 하였다. 한 가지 좋은 소식이 더 있었는데, 장로 직에 공석을 채울 때까지 천여운이 당분간 장로 직을 겸임하기로 결정되었다. 다소 실권이 없는 소교주 직과 다르게 장로 직을 겸임하게 되면, 실무를 관장하는 장로 회의에 참석할 수 있기 때문에 권위와 더불어 실권마저도 가지게 되는 것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네 종파의 장로들이 이것만큼은 막아보려고 기를 쓰고 반대했지만, 교주가 일사천리로 밀어붙이는 바람에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바로 이어서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천여운은 대전 회의의 다음 안건부터는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 “소교주는 치료를 받도록 하라.” 일 장로 무진원과의 싸움에서 검강에 찔려서 부상을 입은 모습을 보였기에 교주가 그를 의무실로 가게 했기 때문이었다. 피로 얼룩진 상의만 본다면 치료가 시급해 보이긴 했다. [소교주. 회의보다 먼저 치료를 받는 게 우선일 것 같습니다. 회의 내용은 끝나고 차후에 저희가 알려드리겠습니다.] 다른 장로들 역시도 전음을 보내서 천여운의 안위를 걱정해서 치료를 권했다. ‘어쩔 수 없나.’ 나노에 의해서 상처 부위가 자가 수복되었지만 이를 밝힐 수 없었기에 천여운은 군말 없이 대전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교주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대전을 나온 천여운은 조용히 내성을 빠져 나왔다. 내성에 교주의 주치의인 마의(魔醫) 백종우가 운영하는 의무실이 있었지만 상처가 없으니 굳이 갈 이유도 없었다. 천여운은 내성을 나와서 외성 근처에 있는 우원 객잔에서 기다리던 수하들에게로 갔다. 대전 회의였기에 길어지리라 여겼던 것과 다르게 천여운이 반 시진 만에 나타난 것도 모자라 옷이 피로 얼룩져 있자 모두가 놀라했다. “피? 공자님! 괜찮으세요?” “주, 주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객잔이라 이목들이 많았기에 천여운은 걱정하는 그들에게 비환귀종의 객당으로 돌아가서 알려준다고 하였다. 그렇게 수하들과 객당에 돌아온 천여운은 대전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려 했지만 공교롭게도 그때 너무도 기다려왔던 일이 일어났다. “천 공자님! 장 호위께서 깨어나셨습니다.” 장 호위를 돌보는 시종이 뛰어와서 그에게 그 소식을 알렸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천여운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장 호위가 있는 객실로 뛰어 들어갔다. 객실로 들어가니 침상에 장 호위가 상체를 기대고 앉아 있었다. “장....호위!” 천여운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장 호위가 떨리는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척한 얼굴에 이빨이 빠져서 볼이 앙상했지만 그가 그리워했던 얼굴이었다. "호....홍자님!” “장 호위!” 천여운이 그에게로 달려가 와락 껴안았다. 마도관을 들어갈 때만 하더라도 장 호위보다도 작았던 신장이 어느새 그보다도 훨씬 커져있었다. “.....장성하셨훈요. 홍자님.” 장 호위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찌 본다면 그에게 천여운은 반평생을 돌본 자식과도 같았다. 갖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그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끝까지 입을 열지 않고, 수차례 자살을 시도했던 장 호위였다. 스스로가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천여운을 이렇게 보게 되니 진한 감동에 젖어 가슴이 뭉클했다. -탁! 천여운이 안고 있던 팔을 풀고서 장 호위의 침상 곁에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수척한 얼굴에도 불구하고 장 호위가 흡족해하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홍자님께서 히렇게 훌늉하게 장성하신 호습을 봤으니, 제가 ?어도 될 것 같훈요.” 치아가 없어서 발음이 다소 어눌했지만 장 호위의 말은 알아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장 호위가 내 곁을 지켜줘야지. 그런 약한 소리 하지마.” “.....저는 더 히상 홍자님흘 지셔드릴 후가 ?답니다.” 힘없이 말하는 장 호위의 모습에 천여운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 했다. 현마종의 무 부인을 비롯해 종주까지 죽여서 복수를 했지만 이미 많은 것을 잃은 장 호위였다. 무인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단전이 폐해지고, 이빨이 통째로 빠져서 평생 음식을 씹을 수조차도 없었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천여운은 그의 인생을 보상해주고 싶었다. 평생을 그를 위해 희생한 장 호위는 충분히 그런 자격이 있었고,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깨진 단전을 복구시켰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나노. 단전이 깨진 것을 다시 복구시킬 방법이 없을까?’ [주인님의 복부에 응집한 에너지 막을 말씀하는 것이라면 분석이 필요합니다.] 여전히 나노는 내공에 대해서 끊임없이 분석 중이다. 그러나 그것이 응집된 단전이 깨졌을 때를 가정한 적은 없었기에 새로운 방향으로 분석이 필요했다. ‘하긴 그렇겠지. 부탁할게.’ [알겠습니다.] 과연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나노의 분석만이 희망이었다. 상심하려 하는 천여운의 머릿속으로 나노의 목소리가 울렸다. [치아를 대체할 방법은 지금도 있습니다.] ‘뭐?’ [임플란트(implant)나 의치(denture)를 통해 없어진 치아를 대체하면 됩니다. 정보를 전이하겠습니다.] -츠츠츠츠! 그 말과 함께 천여운의 뇌속으로 임플란트와 의치에 대한 정보가 전이되었다. 나노가 말했던 방법을 알게 되자 천여운의 눈빛이 반짝였다. 단전까지는 아직 무리더라도 그의 뽑혀진 이빨을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것을 행하려면 정교한 기술을 가진 대장장이 구선웅과 의원인 백종명의 도움이 필요해 보였다. ‘그래도 해야지. 무조건.’ 시간이 나는 대로 그들을 찾아가 부탁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문득 천여운은 마침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더라도 누구보다도 먼저 소교주가 되었음을 장 호위에게 알려주고 싶었는데 천운이라고 여겼다. “장 호위. 할 이야기가 있어.” “알씀하십시호.” 천여운이 항상 이런 표정을 지으면서 이야기를 하면 뭔가 자랑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장 호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도관의 소교주 쟁탈전에서 이겼어.” “네?” 큰 기대감을 가진 것은 아니었는데, 뜻밖의 말에 장 호위의 눈이 커져서 반문했다. 천여운이 다시 한 번 말해주었다. “소교주 쟁탈전에 이기고.....오늘 소교주로 임명되었어.” “소, 소효주!!! 흐게 정말힙니까? 홍자님께허 소효주헤.....허찌 히런 큭!” “장 호위?” 그 말을 듣는 순간 장 호위는 너무 놀란 나머지 격해지는 가슴을 움켜잡더니, 호흡이 거칠어져서는 이내 침상에 미끄러지듯 쓰러지고 말았다. “장 호위! 장 호위!” [뇌혈류 감소로 인한 기절입니다. 큰 충격을 받았을 때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아.....” 천여운은 그때 처음으로 사람이 너무 놀라게 되면 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게 좋은 소식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아직까지 완치가 된 것이 아니기에 안정이 필요한 장 호위였다. * * * 약 한 시진을 넘겼을 무렵, 비환귀종의 객당으로 그 종주인 십일 장로 환의가 나타났다. 객당을 찾은 장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십 장로 연무화를 비롯한 구 장로 사마의가 대전 회의를 마치고 곧장 환의와 동행하여 찾아와 천여운이 소교주로 임명된 것을 다시 한 번 축하했다. “소교주가 되신 것을 다시 한 번 경하드립니다!” “네에에에?” 장로들의 축하에 천여운의 수하들의 얼굴이 벙 찌고 말았다. 장 호위가 깨어난 덕분에 아직까지 천여운에게서 아무 이야기를 듣지 않은 탓이었다. “응? 아직 모르고 있었나요?” 환의의 그런 물음에 수하들은 봇물 터지듯이 난리가 났다. “공자님! 그걸 왜 아까 말씀해주시지 않고!” “주, 주군께서 소교주라니!” 문규는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허봉은 감동했는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물론 고왕흘이나 사마착 역시도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서, 들뜬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주, 주군! 경하드립니다! 아니, 이제 소교주님이라고 불러야겠죠?” “사마착, 무슨 소린가. 당연히 소교주님이라 불러야지! 하하하하핫!” 난리법석이 되자 천여운이 머리가 아프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들에게 말했다. “......공적인 자리가 아니라면 그냥 주군이라고 불러라.” 객당이 시끌벅적해졌다. 자신들의 주군이 소교주가 되었으니 놀라우면서도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세 명의 입회자를 구했지만 대전 회의부터 여러 가지로 시일이 걸릴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빠르게 진행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주군! 오늘만큼은 잔치를 벌여야 하는 게 아닙니까?” 들뜬 허봉의 의견에 환의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후후후, 그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오늘은 힘들 것 같군요.” “네?” “오늘 소교주님과 저희는 저녁 술시(戌時)에 내성 연회장으로 가야 하거든요. 정파 무림맹의 귀 빈들과의 연회 자리가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죠?” 정파 무림맹과 연회 자리라는 말에 천여운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무래도 대전 회의의 내용과 관련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아! 먼저 대전 회의에서 의결이 통과된 것부터 말씀드려야 겠군요.” “......정파 무림맹과의 동맹입니까?” 천여운의 물음에 환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회의에서 정식으로 정파 무림맹과의 동맹 건이 의결로 통과되었습니다.” “정파 무림맹과 동맹을?” 뜻밖의 소식에 천여운의 수하들 모두가 놀란 얼굴이 되었다. 다른 것은 교주가 독단으로 처리할 수 있었지만 적대적인 관계인 정파 무림맹과의 동맹만큼은 열두 장로들과 각 종파의 종주들의 칠 할 이상의 동의가 필요했다. “그렇다는 것은.....” 그 자리에 있던 종주들의 칠 할이 동의 했다는 말이었다. 삼대 세력 간의 전쟁은 근 몇 백 년 동안이나 지속되어왔기에 그 원한 관계는 뿌리에까지 틀어박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증오하다시피 하는 적대 세력인 정파 무림맹과의 동맹이 원만하게 추진되었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죠?” “어쩔 수 없이 동맹이 추진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뭔가 큰 일이 터졌군요?” “네. 공자님의 말씀대로입니다. 안휘성과 절강성을 빼앗겼습니다.” 안휘성은 정파 무림맹 소속의 문파들이 집밀된 지역이었고, 절강성은 마교의 지부들이 자리하고 있는 영역이었다. 그 두 곳을 빼앗겼다는 것은 절대로 쉬이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사파 연맹인가요?” “아니랍니다. 저희도 처음 접하는 문파였습니다.” “문파라고요?” 문파라는 말에 천여운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마교의 경우야 수많은 종파들이 하나로 뭉쳐지면서 이뤄진 단일 집합체였지만, 하나의 문파가 중원의 패권을 다투는 두 세력을 쳤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대체 어떤 문파가 그런 일을 벌였다는 거죠?” “그들 스스로 일컫기를 극도육무문(極刀六武門)이라고 칭했다고 했습니다.” < 40장 정파 무림맹의 귀빈 (1) > 끝 < 40장 정파 무림맹의 귀빈 (2) > "극도육무문?" 처음 들어보는 문파였지만 익숙한 명칭에 천여운이 인상을 찡그렸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라고 여겼는데, 그것은 지하 보고에 있던 검마의 유지 속의 극도신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오백 년 전의 도로서 천하제일인의 칭호를 가져간 절대자 극도신. 그 이름과 비슷한 것이 석연치가 않았다. '우연인가?' 그런 천여운의 생각을 모르기에 환의가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본교의 영역인 절강성에 자리 잡고 있는 아홉 지부와 안휘성에는 정파 무림맹 소속의 남궁세가를 필두로 한 열다섯 문파가 있습니다." 절강성의 마교 지부의 숫자도 적은 편은 아니었지만 안휘성에는 정파 무림맹의 수뇌부인 십칠웅주(十七雄主) 중 한 사람인 무궁검(武躳劍) 남궁선의 세력권이기에 난공불락의 방어선이라 불리는 지역이었다. 이 두 곳은 삼대세력의 영역 경계선이 직접 맞닿고 있는 지역이었기에 다른 곳보다도 전쟁이 잦고 경계가 삼엄했다. "얼마 전 절강성의 지부 세 곳이 처음 보는 집단에 동시에 공격을 받았다는 전갈이 본교로 왔습니다." 세 지부가 동시에 공격당했다는 소식을 받은 마교에서는 정파 무림맹에서 대대적인 침공일지도 모른다고 판단하여, 인근 강서성에 있는 두 지부와 절강성에 남은 여섯 지부에 전갈을 보내 공격받는 지부를 지원토록 했다. 한 지부의 전력이 오백 명 정도였기에 약 사천 명에 이르는 일류 고수들이 파견된 셈이었다. "그런데 보름을 약간 넘겼을 때, 절강성에 있는 본교의 정보망이 전부 끊겼습니다." 그것은 불과 보름 만에 절강성에 있는 마교인들이 전멸했음을 의미했다. 너무도 빠르게 한 성이 함락된 것이었기에 마교는 긴급 전시 체제에 들어갔다. 당연히 정파 무림맹이 손을 쓴 것이라 판단한 수뇌부는 한동안 발발하지 않았던 대전쟁이 일어난 것이라 여겼다. 그 시점에 십만대산 마교의 성으로 정파무림맹의 사신단을 보냈다. "원래는 그들을 처형해서 그 수급을 정파 무림맹의 본단으로 보내려했는데, 사신단에서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것은 절강성과 마찬가지로 정파 무림맹의 영역인 안휘성을 빼앗겼다는 소식이었다. 십칠웅주 중 한 사람인 무궁검 남궁선마저도 전사했다고 했다. 무림맹도 처음에는 한 성에 있는 문파들이 일제히 전멸했기에 당연히 마교의 소행이라 판단해서 전쟁 체계로 돌입하려 했으나, 마교와 달리 정파 무림맹은 명분을 중시했기에 그 전에 사신단을 통해서 항의를 해온 것이었다. "그래서 알게 되었군요?" "그렇습니다. 덕분에 본교나 무림맹은 제 삼의 세력에 당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사파연맹일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그러나 안휘성이나 절강성의 경우 중원 서쪽을 근거지로 삼고 있는 사파 연맹과는 동떨어져 있었기에 그들의 침공이라 보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본교에서 무림맹에 제안을 했습니다." 이번 사건이 심상치 않기에 양측에서 각각 안휘성과 절강성을 탈환할 때까지 임시적으로 휴전을 맺기로 하였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무림맹에서 다시 한 번 사신단이 왔다. 그때 임시 휴전으로 인해 처음 마교의 성 안으로 사신단이 입성 했는데, 덕분에 마교 성내 전체가 난리가 났었다. 사신단으로 십칠웅주 중 한 사람인 개방의 방주 홍팔우가 찾아왔다. 개방의 방주 홍팔우는 무림맹의 회의에서 결정된 제안을 가져왔고, 이를 받아들인 교주와 수뇌부들은 빠르고 은밀한 기동을 위하여 본교의 핵심 세력만 차출하여 출진하였다. "설마 이번 출타가 두 지역을 탈환하기 위해서입니까?" "맞습니다. 안휘성과 절강성 두 지역을 빼앗은 집단이 방어망을 갖추기 전에 본교와 무림맹이 동시에 기습을 감행해서 탈환하는 작전이었죠." 마교와 정파 무림맹은 양측의 최고 전력을 차출하여 외부와 내부로 철저하게 기밀로 하여 안휘성과 절강성을 동시에 공격했다. 그러나 결과는 놀랍게도, "탈환에 실패했습니다." 적이 하나의 단체임을 감안했기에 정파 무림맹과 마교에서 동시에 두 지역을 급습한다면 충분히 탈환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도리어 역공을 당해서 퇴각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교주를 비롯한 장로들의 부상이 그 증거였다. 심지어 칠 장로 간명도종의 공선웅은 전사하고 말았다. 기밀로 하였기 때문에 현재 중원 전체로 이 소문이 퍼져나가지는 않았지만 본교에 있어서는 치욕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었다. "뭐, 어떻게 당하셨는지는 대전 회의에서 말씀해주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승리한 것도 아니고 치욕스럽게 패배한 내용을 상세히 알려줄 리는 만무했다. 그나마 유일한 위안이라면 정파 무림맹의 핵심 전력 역시도 안휘 성을 탈환하는데 실패해서 상당한 타격을 입은 듯 했다. "......그래서 동맹이 추진되는 것이었군요." "공동의 적이 생겼으니까요. 후후후." 패퇴한 두 세력은 긴급 회동을 가지게 되었고 동맹으로까지 이어 진 것이었다. 무림의 패권을 다투는 두 세력의 핵심 전력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최악의 적이 등장하면서 기존의 판을 흔들었다. 만약 사파 연맹에 이 정보가 들어가게 된다면 그들은 분명 이것을 기회로 삼아 일어나게 될 것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동맹을 통해 새롭게 나타난 적을 배제할 필요는 있습니다. 이번에 공식적으로 동맹이 진행된다면 중원 각지로 알려져서 사파 연맹도 쉽게 움직이지 못할 겁니다." 결국 동맹의 목적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새롭게 나타난 적인 극도육무문을 상대하기 위함이었고, 두 번째는 사파 연맹의 개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극도육무문......' 그렇게 십일 장로 환의에게 동맹이 추진된 배경을 듣게 된 천여운의 머릿속에는 극도육무문이라는 그 이름이 멤돌았다. 같은 시각, 내성의 교주전 건물의 바로 우측에는 호법가 건물. 건물의 사 층에 자리 한 대호법 마라겸의 집무실에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대호법 마라겸과 좌호법 이화명이었다. "....된 일입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소교주께서는 우리가 기다려왔던.....그 분이군." 좌호법 이화명에게 그 동안 마도관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은 대호법 마라겸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마 조사의 심득인 천마검공을 비롯해 검마 공의 진전인 이십사 마검 마저 익혔다면 천여운은 그들이 기다렸던 검마 공의 유지를 잇는 자였다. '반응이 왜 이렇지?' 그런데 대호법의 반응이 뭔가 무덤덤 하자 이화명은 이를 이상하게 여겼다. 평소부터도 말수가 적고 가면을 쓰고 있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런 반응을 기대하진 않았다. "대호법.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마라겸이 대화의 화제를 돌렸다. "그게 무엇입니까?" "극도육무문." 이화명의 인상을 찡그렸다. 이것은 마교 전체의 문제였는데 왜 거론하는 것일까? 이미 정파 무림맹과 동맹까지 추진되는 일이었기에 호법인 그들이 논의할 만한 내용이 아니었다. "뭔가 이상한 걸 모르겠나?〃 "혹시 이름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까?" 이화명 역시도 그 정체 모를 문파의 이름에 붙여진 극도라는 말이 신경 쓰이기는 했다. 하지만 문파 명에 극도가 붙여졌다는 것만으로 극도신과 연결 짓기에는 섣부른 판단 같았다. 더군다나 오백 년 동안 극도신의 후인이 나타나기는커녕 그 흔적 조차 없지 않았나. "대전 회의 자리에서는 밝히지 않았으나, 항 장로의 팔을 베고 우 호법 섭맹의 눈을 앗아간 극도육무문의 고수가 있었다." "호, 혼자서 말입니까?" 이화명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 자는 상상을 초월하는 절대고수였다. 마라겸이 고개를 저으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 명이 아니다." "그럼?" "셋이었다." 절강성으로 진격한 교주 일행은 극도육무문의 전력과 맞닥뜨리게 된다. 교내에 조차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이동을 했으나, 그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매복을 하고 있었고 도리어 습격을 당한다. "습격한 그들은 수적으로 우세했고 강했지만 본교도 핵심 전력들이었지." 그들의 습격에 즉각 대응해서 반격하자, 얼마 있지 않아 극도육무문의 수장으로 보이는 절세고수 세 명이 나타났다. 후에 등장한 그들은 대주와 단주 급에 해당하는 고수들을 너무도 쉽게 학살하듯이 죽여 나갔다. 이 셋의 무공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파악한 장로들이 직접 나섰다. 처음에는 장로들이 한 명씩 그들을 상대했으나, 오히려 밀리면서 두 명씩 합공을 해야만 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그들은 검법(劍法), 장법(掌法), 조법(爪法)을 쓰는 고수들이었다." 화경의 고수들이 합공을 했기에 겨우 버텼지만 그들의 무공은 일반적인 중원 무림의 것들과는 궤를 달리했다. "그들이 펼치는 무공은 통상적인 것과 다르게 육신에 극한의 무리를 준다." 일정 수준에 이르면 내공을 더욱 중요시하는 것과 달리 세 고수들은 근육이 비정상적으로 특정 부위들이 발달해 있었는데, 그 독특한 무공을 펼치기 위함이었다. "칠 장로 공선웅이 죽고 오 장로 항소유가 팔이 잘리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두 명이서 합공을 해야 호각이었는데, 균형이 무너지니 당연히 혼자서 상대하던 장로들도 부상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어지자 결국 마교의 최고 고수인 교주와 대호법까지 나서게 된다. 그때 대호법 마라겸은 검을 쓰는 고수와 단독으로 대적하게 되었는데, 그 자와 직접 손을 섞게 되면서 알게 된 것이 있었다. "조법이나 장법을 쓰는 자들을 보았을 때는 몰랐지만 검을 쓰는 자를 상대해보니 알겠더군. 그들의 무공은 한 줄기에서 파생되었다." "설마?" 대호법 마라겸이 자리에 일어나서는 상의를 탈의했는데, 그의 상반신이 회오리를 치듯이 날카로운 검흔들이 남아있었다. 그런데 이 검흔들은 찌르기보다는 벤 흔적으로 도법과도 같았다. "이, 이건...." 놀랍게도 그 상흔은 천여운이 펼쳤던 극도신의 도법과 흡사했다. 풍신이라 불리는 마라겸은 이 초식에 당했을 때 뛰어난 경공 실력으로 피했는데도 상처가 남고 말았다. 대호법 마라겸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자가 검법이 아닌 도법으로 초식을 펼칠 수 있었다면, 나 역시 일 장로와 같은 운명이었을 것이다." *** 저녁 술시(戌時) 무렵. 마교의 내성에 있는 대전 옆에 자리한 연회장에 사람들로 붐볐다. 대전 회의에 참석했던 종주들이 깔끔한 예복을 갖춰 입고 모였는데,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모인 것이었다. 화려하고 성대하게 꾸며진 연회장에는 풍악을 울리는 소리로 울려 퍼졌고, 연회장 정원에 있는 수십 개의 원형 탁자 위에는 푸짐한 음식들과 술병들이 가득했다. 마교의 수뇌부들과 무림맹 측의 고위 간부들이 앉는 자리는 연회장 대청 위에 긴 좌상으로 펼쳐져 있었다. 천여운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군.' 그가 앉아있는 위치는 교주의 석좌에 가까웠다. 소교주에 올랐기 때문에 교내에서의 서열이 두 번째였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교주는 혼자 개인 좌상을 두고 있어서 마주 앉지는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아직까지 손님이 도착하지 않았기에 다들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얼마 있지 않아 연회장의 입구에 서있는 무사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귀빈들께서 들어오십니다." 그 외침과 함께 연회장의 문이 열리며 정파 무림맹의 손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에 들어오는 사십 여명은 검은 도사복에 주홍빛 혁대를 매고 있었는데 화산파의 사람들이었다. 선두에 긴 수염에 풍채가 좋은 중년인이 있었는데, 그는 화산파의 장문인이자 무림맹의 십칠웅주(十七雄主)중에 육웅주(六雄主)인 풍청운이었다. 뒤에 따라오는 자들은 화산파가 자랑하는 매화검수들과 화산파의 제자들이었다. 정파에서도 명성이 높은 구파일방의 무인들답게 정기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느낌이 다르구나.' 천여운에게는 처음 제대로 보게 되는 정파인이었다. 마교인들이 다소 차갑고 호전적인 느낌이 있다면, 그들은 걸음걸이부터가 바르고 예를 중요시하는 듯 했다. 뒤에 이어서 들어오는 자들은 푸른 결이 그려진 하얀 예복을 입었는데 요녕성의 패자라 불리는 모용세가의 사람들이었다. "크흠." 맨 앞에 눈매가 부리부리하고 짧은 턱수염의 남자는 모용세가의 가주이자 십칠웅주 중에 칠웅주인 모용강이었다. 화산파 사람들에 비해서 모용세가 사람들은 거만한 느낌이 있었다. 그런데 모용강의 바로 뒤에는 연녹색의 화려한 예복에 회색 면사포를 하고 있는 여인이 있었는데 모용세가의 사람이 아닌 듯 했다. '누구지?' 그녀의 양옆을 지키고 있는 호위로 보이는 자들 역시도 복장이 달랐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모용강이 그녀에게 뭔가를 속삭이자,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는 두 호위무사들과 함께 먼저 입장한 화산파의 도사들을 가로질러 맨 앞의 선두에 섰다. 면사포의 여인이 포권을 취하며 대청 위의 석좌에 앉아있는 교주 천유종에게 인사를 올렸다. "천마신교의 교주님께 정파 무림맹을 대표하여 인사드립니다." -착! 그 말이 떨어지자 정파 무림맹의 사람들이 동시에 포권을 취하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동맹 관계이긴 했으나 마교인이 아닌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최대의 예의였다. 그들의 인사에 교주 천유종이 석좌에서 앉은 상태로 입을 열었다. "정파 무림맹의 귀인들을 손님으로 맞이하게 되어 본 교주도 환영하는 바이오." 말은 환영의 인사를 했지만 일어나서 가벼운 예도 표하지 않자, 무림맹 사람들의 얼굴에 미묘한 불쾌감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이어지는 교주 천유종의 말에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본 교주가 알기로 정도인들은 예를 중시 한다 들었는데 그게 아닌가 보오?" "어찌 그러시는지?" "무림맹을 대표한다는 자가 얼굴을 가리는 것은 무슨 예의인가." "아아! 죄송합니다. 제가 교주님을 뵙는다는 떨리는 마음에 실례를 범했습니다." 그 말과 함께 여인이 다급히 얼굴에 쓰고 있던 회색 면사포를 걷어 올렸다. 그러자 장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 40장 정파 무림맹의 귀빈 (2) > 끝 < 40장 정파 무림맹의 귀빈 (3) > 서시(西施)나 왕소군(王昭君)이 있다면 이런 외모를 지녔을까. 피어오르는 연꽃과도 같은 미모. 부드럽게 내려오는 선이 뚜렷한 얼굴은 절세가인(絶世佳人)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그 아름다움이 도드라졌다. 가히 탄성을 불러일으키는 여인이었다. 일렁이는 등불에 비치는 그녀의 고운 자태에 장내에 있는 남자들의 대다수가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그녀의 옆에 있던 호위 무사 중 한사람이 가볍게 손바닥으로 박수를 쳤다. -짝! 그제야 넋을 놓고 있던 이들이 민망하다는 듯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일부 정파 무림맹 사람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녀의 외모에 놀라는 좌중의 반응 덕분에 기세가 산 듯 했다. 천여운의 표정이 묘했다. 그는 정파 무림맹의 사람들이 누구인지 잘 몰랐지만, 이곳에 있는 종주들이나 장로들은 외부 정보에도 밝기에 그녀의 정체를 일찌감치 눈치 챘다. 왼쪽 눈 아래 찍혀 있는 미인 점은 그녀가 누구인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교주의 입에서 칭찬이 흘러나왔다. “정파 무림맹주에게는 두 보물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 중 하나인 제갈 군사의 아름다움은 정파 제일이라고 불린다던데 과연 명불허전이로다.” “과찬이십니다.” 그녀는 중원 삼미(三美) 중의 일인이자 무림맹의 제 이 군사인 제갈소희였다. 정파 무림맹주의 장남인 연부소의 연인이자, 무림맹의 군사로도 이름이 드높지만 역시 그녀를 상징하는 것은 아름다움이었다. ‘이게 바로 중원 최고의 미인이라는 것이다.’ 칠웅주인 모용강의 아들이자 모용세가의 소가주인 모용유가 괜히 본인이 득의양양해했다. 물론 그 뿐만이 아니라 모용세가 사람들의 표정이 비슷했다. ‘마교인들이 아니랄까봐 미인을 보니 탐욕에 물들어서는 쯧.’ 늘 스스로를 절제하는 화산파의 도인들과 달리 모용세가의 사람들은 적대적인 관계인 마교에 대해 멸시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그 감정이 얼굴로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저놈들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군.’ ‘모용세가 녀석들이 건방지다더니. 쯧쯧.’ 동맹을 맺는 자리였기에 내색하지 않았지만 연회장의 정원에 서있는 종주들이 혀를 찼다. 사실 이 연회 자리는 생각보다 위험한 자리일 수도 있었다. 수백 년 동안이나 전쟁을 벌였던 앙숙이나 다름없는 정파와 마도였다. 동맹이라는 명목 하에 그 감정이 쉬이 조절될 리가 만무했다. ‘동맹에 해가 되는 행동을 하는 자는 이 자리에서 일벌백계할 것이다.’ 교주는 연회가 시작되기 전에 종주들에게 미리 경고했다. 물론 정파 무림맹 역시도 두 웅주들이 제자들과 세가 사람들에게 누차 당부했다. ‘작은 말다툼도 크게 번질 수 있으니 주의하라.’ 처음 이뤄진 공식적인 동맹 자리가 파탄 나지 않도록 양측은 계속 자제할 것이다. 다만 그것이 술이 들어간다면 어떻게 변할지는 모를 일이었다. 면사포를 벗은 제갈소희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무림맹의 제 이 군사인 제갈소희가 교주님께 인사드립니다. 무례를 범한 것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바랍니다.” 그녀의 그 말에 천유종이 누그러진 얼굴로 석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정파 무림맹의 사람들을 향해 가볍게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맹주께서 귀한 손님을 보내셨구려. 다시 한 번 인사드리겠소. 천마신교로 온 것을 환영하는 바이오.” -착! 교주가 인사를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연회장에 모여 있는 교인들도 무림맹의 사람들에게 일제히 포권을 취해서 인사를 했다. 이에 육웅주 풍청운이 너털웃음을 보이며 교주 천유종에게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허허허, 교주님의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연회를 기다리느라 빈도가 참으로 배가 고픕니다. 준비해주신 음식이 이러다 식겠군요.” 정파 무림맹 측의 가장 어른인 풍청운이 가벼운 농담을 하면서 나서준 덕분에 연회장의 분위기가 한결 밝아졌다. “풍 장문인의 말씀이 맞구려. 어서 귀빈들을 모셔라.” “충!” 연회장 정원에서 대기하고 있던 어여쁜 시종들이 무림맹 측의 수뇌부들에게 자리를 안내했다. 그 외의 일반 화산파의 문도들이나 모용세가의 무사들은 연회장의 정원에 준비된 원형 식탁에 착석 했다. 모두가 자리에 착석하자 잠시 연주를 중지했던 악공들이 풍악을 울렸다. 이제야 연회다운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대청의 푸짐한 좌상에 앉은 양측의 수뇌부들이 서로의 신분을 소개하며 정식으로 인사를 해나갔다. “대 천마신교의 십일 장로 환의라고 합니다. 후후후.” 가장 직위가 낮은 십일 장로인 환의를 시작으로 장로들이 직위와 이름을 밝혔다. 그런데 마교 측의 모두가 소개를 거의 마쳐갈 때까지도 약관 채도 되지 않는 청년이 일어나지 않자 무림맹 측 사람들은 그의 정체를 궁금해 했다. ‘흐음, 다른 자들은 맹의 정보망에서 한 번쯤 들어봤던 자들이다. 그런데 저 청년은 누구지?’ 오랜 세월 동안 무림을 활보한 만큼 풍청운은 어지간한 사파, 마교의 인사들까지도 잘 알고 있었지만 마교의 수뇌부 측에 고작 약관의 청년이 있다는 정보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때 청년이 마지막으로 일어나서 포권을 취하며 스스로를 소개했다. “대 천마신교의 소교주이자 십이 장로를 겸임하고 있는 천여운이라고 합니다. 무림맹의 귀빈들께 인사드립니다.” ‘소교주!!!’ 좌상 앞에 앉아있던 무림맹 측 수뇌부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직까지 마교에 후계자인 소교주가 탄생하지 않은 걸로 알고 있었는데, 이런 중요한 자리에 떡하니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더군다나 십이 장로를 겸임하고 있다고 하였다. ‘장로까지 겸임하다니? 허어. 그러고 보니 괴독마장 백오와 쌍수마검 무진원이 보이지 않는구나.’ 백오와 무진원은 정파 무림맹에게 있어서 악명이 높은 고수였다. 그런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같은 세대에 활약한 화산파의 장문인 풍청운의 입장에서는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파 무림맹 측에 두 사람의 죽음에 의한 부재를 알려줄 필요가 없기에 밝히지 않았다. ‘이 녀석이 마교의 소교주인가?’ 모용세가의 소가주인 모용유의 눈빛이 묘해졌다. 어떻게 본다면 이 자리에 모여 있는 자들 중에서 앞으로 자신과 같은 세대를 공유할 적이라는 말이었다. ‘.....제법 세 보이는데.’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무위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 역시도 약관에 초절정 초입에 이르러 세가 내에서도 뛰어난 인재라 불렸는데, 천여운을 보고 있자면 벽에 막힌 느낌이었다. 마교는 철저하게 실력 위주로 직위가 결정된다고 들었는데, 장로 직마저 겸하고 있을 정도면 분명 굉장한 무위를 지녔으리라. ‘마치 놈을 보는 듯하군.’ 천여운을 보고나니, 정파 무림맹에서도 괴물이라 불리는 놈이 생각났다. 무림맹주의 장남인 연부소가 떠올랐다. 무림맹의 인재 육성 기관인 백운관을 가장 먼저 이수하고, 일곱 웅주들이 심혈을 기울여서 키웠다고 불리는 후세대 무림맹의 얼굴이 될 남자였다. ‘젠장. 남이랑 비교할 게 아니라 내 실력이나 키워야 겠군.’ 현실을 돌아보게 되는 모용유였다. 자존심이 상해하는 아들 모용유를 바라보며 모용강이 피식 웃었다. 그저 무림맹 내에서의 같은 세대들만 보다가 적진이라 할 수 있는 마교에서 소교주를 보고나니 자극이 되었다는 것을 눈치 챘다. ‘데려오길 잘했군.’ 라고 생각하는 한편으로 위험하게 여겨지긴 했다. 고작 약관 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소교주의 무위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마교는 마교라는 건가.’ 마교에서는 소교주를 뽑을 때 철저한 경쟁과 강자존을 통해서 선정한다고 들었는데, 이 정도 괴물이라면 납득이 갈만 했다. 정파 무림맹 측에서도 소개를 마친 후, 교주가 이번 동맹이 맺어진 것에 대한 축사를 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연회가 시작되었다. 가벼운 식사로 시작된 연회 자리는 어느새 술이 들어가면서 시끌벅적해지고 있었다. “하하하, 제갈 군사께서는 정파 무림맹의 꽃이라고 불린 다더니, 그게 맞는 것 같소.” “부끄럽습니다.” “제갈 군사는 우리 정파 무림맹의 자랑이지요. 허허허.” 연회 자리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사람은 단연 제갈소희였다. 빼어난 그녀의 미모는 마교나 무림맹, 나이를 불문하고 남자들의 관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물론 모두가 그 아름다움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상황을 유심히 살펴보는 눈이 있었다. 세심히 주위를 살피던 그 눈의 주인은 뭔가 탐탁지 않은 눈빛을 보였다. ‘장로들로는 부족하다.’ 대청 위의 분위기를 살피던 그 자의 눈에 한 남자가 눈에 띠였다. 제갈소희에게 관심이 없다는 듯이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술잔을 들이키는 모습에 입 꼬리가 올라갔다. ‘저 자라면 충분하겠다.’ 그를 선택한 그 자가 술을 담은 옥병에 잔을 부딪쳤다. -쨍! 시끌벅적한 연회 자리였기 때문에 누구도 그 행동을 의식하지 않았지만, 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제갈소희가 멍한 눈이 되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갑자기 일어나서는 천여운의 곁으로 다가왔다. “으음, 이게 뭘까요?” 다른 장로들과 달리 천여운의 곁에서 담소를 나누며 술잔을 기울이던 십일 장로 환의와 십 장로 연무화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제갈소희가 천여운의 우측에 앉아있던 연무화에게 말을 걸었다. “연무화 장로님. 잠시 실례해도 될까요?” 한 마디로 표현하면 비켜달라는 말이었다. 예법에 어긋나는 행동에 주변 사람들의 표정에 의아함이 비추었으나, 연무화는 말없이 자리를 양보해주었다. 정파 무림맹과의 마찰을 없게 하라는 교주의 명도 있었고, 제갈소희가 상기된 얼굴을 보아하니 술기운이 제법 오른 듯 했다. ‘내공으로 해소시키지 않는 건가.’ 천여운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자리가 자리인 만큼 서로 실수를 피하기 위해서 본교도 그렇고 정파 무림맹의 수뇌부 측도 내공으로 술기운을 해소시켰는데, 제갈소희의 붉어진 볼만 보더라도 그렇지 않았다. -탁! 연회 자리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제갈소희가 천여운의 옆에 앉자 자연스럽게 시선이 그들에게로 향했다. ‘아.....’ 조용히 연회 자리에 있다가 가고 싶었던 천여운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다시 자리를 옮겨서 장로들을 상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다음 제갈소희의 행동은 주위 사람들의 관심뿐만이 아니라 시기를 사게 만들어버렸다. “소교주니이임. 정말 잘생기셨네요.” ‘엇?’ 제갈소희가 갑자기 애교가 섞인 목소리로 교태를 부리는 것이 아닌가. 상기되긴 했지만 지금까지 장로들 앞에서 예를 갖추고 흔들리지 않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아리따운 그녀가 그런 행동을 하니, 가장 눈이 돌아간 것은 모용세가의 모용유였다. ‘뭐, 뭐야? 지금 뭐하는 짓이야?’ 무림맹주의 장남인 연부소와 연인 관계였지만 내심 그녀를 연모하고 있었던 모용유가 눈을 부릅뜨고서 어이없어 했다. "제가 싫으시나요오오?" 제갈소희는 작정하고 천여운을 유혹하려는 것처럼 가녀리고 예쁜 손으로 그의 팔목을 슬며시 잡으려고 했다. 천여운은 그녀가 취했다고 생각했는지 이를 몸을 젖혀 피했다. 그런데도 제갈소희는 더욱 천여운의 옆으로 엉덩이를 밀어붙이며 밀착해 왔다. 처음 겪어보는 여인의 유혹에 천여운의 얼굴에도 당혹감이 서렸다. ‘난감하군.’ 이성에 대한 경험이 없는 그조차도 대놓고 유혹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할 정도였다. 그런데 자리가 동맹을 축하하는 연회 자리였고, 서로가 다른 세력에 속해 있기에 이런 행동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상하다.’ 천여운이 달라붙으려는 제갈소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천여운이 제지하던 것을 멈추고 눈빛이 묘해졌다. 이를 지켜보던 예의 그 자가 지금이 적기라고 여겼다. ‘이때다.’ 그 자가 술잔을 옥병에 두 번 부딪쳤다. -쨍! 쨍! 바로 그 순간 천여운의 가까이로 붙으려고 하던 제갈소희가 좌상에 올려 있던 젓가락을 움켜쥐더니, 그의 가슴을 찌르려고 했다. “앗! 제갈 군사!”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그들을 지켜보던 무림맹의 수뇌부들이 당황스러워했다. 그러나 기습이라고 해도 천여운이 이런 어설픈 공격에 당해줄 리가 없었다. -팍! 탁! "윽!" 젓가락을 쥐고 있던 손목을 내리쳐서, 그것을 떨어뜨리게 했다. 그러자 제갈소희가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공력을 끌어 모아서 천여운에게 복부에 쌍장(雙掌)을 날렸다. -팟! 천여운이 뒤로 몸을 빼서 그것을 피했지만 제갈소희가 튕겨 나오며 살초를 이어갔다. 이 정도로 목숨을 노렸다면 당연히 방어가 아니라 상대를 공격할 수밖에 없다. -꽉! “헉!” 이어지는 천여운의 행동에 대청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천여운이 오른손을 뻗어서 그녀의 예쁜 얼굴을 손으로 움켜잡은 것이었다. -꽈악! “아흑!” 얼마나 세게 움켜쥔 것인지 그녀가 손이 풀려서 천여운의 팔목을 잡고서 고통스러운 신음성을 흘렸다. 먼저 공격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자인데 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소, 소교주!”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화산파의 장문인 풍청운은 이를 어찌 말려야 하나 당혹스러웠다. 누가 보아도 제갈소희가 그를 먼저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웅성웅성! 대청이 소란스러워지자 시끌벅적했던 연회장이 일시에 조용해지며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대청으로 집중되었다. ‘됐다!’ 여기서 자신이 나서서 소리만 친다면 연회 자리는 혼란으로 번질 거라 여겼는데, -파치치치칙! “꺄으으으으으으윽!” 뭔가 이상한 소리와 함께 천여운의 손에 얼굴이 잡혀있던 제갈소희가 전신에 경련을 일으키며 온몸을 뒤틀었다. 그렇게 경련을 일으키던 그녀의 몸이 추욱 늘어졌다. “이, 이게 무슨 짓이오! 소교주!” 사 장로 자금경이 당혹감에 소리쳤다. 비록 제갈소희가 우발적인 행동을 벌였지만 자리가 자리인 만큼 차라리 제압해서 왜 그런 것인지 알아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흐흐흐, 더욱 잘 되었구나.’ 그 자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알아서 상황을 악화시켜주니 굳이 소리를 질러서 판을 키울 필요가 없어보였다. 바로 그때였다. “으으으음.” 추욱 늘어져 있던 제갈소희가 신음을 흘리며 정신을 차렸다. 천여운이 얼굴을 움켜잡고 있던 손을 뗐다. 비틀거리던 그녀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더니 어지럽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대, 대체 무슨 일이죠? 제가 술을 과하게 마신 건가요?” 제갈소희는 방금 전까지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녀의 달라진 반응에 상황을 지켜보던 그 자의 눈빛에 당혹감이 서렸다. ‘뭐, 뭐지? 어째서 암시(暗示)가 풀린 거지?’ 그때 그 자의 귀로 전음성이 울렸다. [제 이계(二計)로 넘어가라.] [아, 알겠습니다. 사형.] 명령을 받은 그 자가 술잔을 옥병에 세 번 부딪쳤다. -쨍! 쨍! 쨍! 그 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제갈소희를 걱정스러워하며 일으켜 세우던 모용유의 동공이 풀려서 천여운에게 달려들었다. “제갈 소저를 건들다니! 죽어랏!” 이런 상황을 두 번씩이나 지켜볼 리가 없었다. 십일 장로 환의와 십 장로 연무화가 어느새 가로막아 단숨에 모용유를 제압해서는 바닥에 강제로 엎드리게 만들었다. -쾅! "어린 소협이 저희를 어지간히 우습게 여겼군요. 후후후." “크아아악! 놔! 놔랏!” "흥!" -퍽! 털썩! 거칠게 반항하는 그의 뒷목을 연무화가 손날로 내리쳐서 기절시켰다. ‘빌어먹을! 역시 처음에 실패한 것이 크구나.’ 어떤 식으로든 문제를 일으켜야 하는데, 모용유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제압되자 그 자의 얼굴이 거칠게 일그러졌다. 결국 제 삼계(三計)까지 갈 수밖에 없을 듯 했다. ‘어쩔 수 없구나.’ [사형 제 삼계를...] 사형에게 전음을 보내는 도중이었다. -팟! 꽉! “컥컥!” 전음을 마치기도 전에 누군가 갑자기 날아와서는 그의 목을 움켜잡았다. 그는 바로 천여운이었다. “소, 소교주! 대체 왜 이러는 것이오?” "그, 그자는...." 모든 사람들이 천여운의 돌발행동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천여운이 목을 움켜잡아 들어 올린 자는 다름 아닌 제갈소희의 호위 무사 중 한 사내였다. "크윽, 대,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눈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호위 무사에게 천여운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못 찾을 줄 알았나?” 순간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대체 이 자가 자신의 정체를 어떻게 알아냈단 말인가. 그래도 최대한 내색해서는 안 된다. “켁켁....도, 도통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수작 부리지 마라." -꽈악! "끄아아악!" 어찌나 움켜잡고 있던 손아귀의 힘이 셌던지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개져서는 핏대가 섰다. 조금만 힘을 더 주면 목뼈가 부러져서 죽을 것만 같았다. 고통스러워하는 호위 무사에게 천여운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 "제 삼계가 뭐지?” “헉!” 어떻게든 끝까지 발뺌 하려했던 호위 무사의 두 눈이 왕방울 만하게 커졌다. < 40장 정파 무림맹의 귀빈 (3) > 끝 < 41장 숨겨진 목적(1) > 계속해서 달라붙는 제갈소희의 얼굴을 보게 된 천여운은 그녀의 풀린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마치 스스로의 의지가 없는 사람처럼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은 동공을 이상하게 여긴 천여운이 나노에게 물었다. ‘나노. 지금 내 앞에 여자가 술에 취해서 이런 걸까?’ [안면 분석에 들어가겠습니다.] 천여운의 동공이 흔들리며 흰 빛의 입자가 일자로 선을 그리며 제갈소희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나노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동공이 수축되고 눈이 비정상적인 움직임을 보입니다. 암시에 의한 최면 상태입니다.] ‘최면?’ [해당 정보를 사용자의 뇌 속으로 전이해드리겠습니다.] -스스스스! 머리가 찌릿해지며 그의 머릿속으로 나노가 보낸 최면에 대한 정보가 전이되었다. 최면이란 인위적으로 암시를 걸어서 뇌파에 영향을 주어 의식을 스스로의 의사와 상관없이 다르게 유도하는 술법이었다. ‘조종 당하고 있구나.’ 나노가 보내온 정보 대로라고 한다면 최면은 특별한 반복적인 암시나 자극을 통해서 이를 유도 한다고 한다. 뭔가 그녀를 조종하는 근원적인 행동이 있었을 것이다. ‘최면을 깰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시전자가 해제하는 방법도 있지만, 강제적으로 전기 충격을 가해서 신경계에 영향을 준다면 인위적으로 유도된 암시를 깨뜨릴 수 있습니다.] ‘좋아!’ 천여운은 과감하게 직접적으로 제갈소희의 얼굴을 움켜잡아서 전기 충격을 가했다. 덕분에 암시를 통해 최면에 걸렸던 것이 풀리게 되었다. ‘멀쩡했는데 갑자기 행동이 바뀌었다는 것은 이 자리에 최면을 건 당사자가 있다는 것이겠지.’ 그러나 그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모두가 천여운을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구분할 수가 없었다. 짧은 찰나에 천여운은 생각했다. ‘본교의 내성에서 이런 짓거리를 벌일 정도로 과감한 자라면 혼자가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천여운은 나노에게 다른 진동을 가진 음파를 찾아내게 했다. 이것을 통칭해서 전음 도청 모드라고 불렀다. 아니나 다를까 혹시나 했던 천여운의 예측은 들어맞았다. [사형 제 삼계를...] ‘찾았다!’ 그 소리가 들리는 순간 천여운은 번개처럼 신형을 날려서 대청 끝의 좌상에 서있는 호위 무사의 목을 움켜쥐었다. “제 삼계가 뭐지?” 천여운에게 목이 붙잡혀서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제갈소희의 호위 무사는 너무 놀란 나머지 표정관리를 하지 못했다. ‘이, 이놈이 대체 어떻게 알았지?’ 자신들의 계획이 유출되었을 리가 없었다. 전음을 듣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인데, 그것은 어떠한 높은 무공의 경지에 올랐다고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처음부터 그게 가능했다면 사전에 이를 막았을 것이다. “켁켁!” ‘빌어먹을! 목을 너무 세게 잡혀서 전음을 보낼 수가 없어.’ 이렇게 된 이상 제 삼계를 행하라고 사형에게 말을 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목이 조여서 전음은커녕 신음 소리를 내는 게 다였다. 바로 그때였다. -슥! “그쯤 하시게. 천마신교의 젊은 소교주여. 본 맹 측에서 부정할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지만 호위 무사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은 과한 처사일세.” 어느새 가까이로 다가온 칠웅주 모용강이 천여운을 만류했다. 본래 그는 말보다 먼저 무력을 행하는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이곳은 마교의 한가운데였기에 최대한 스스로를 자제하고 있었다. 그런 모용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천여운은 여전히 손을 떼지 않고 말했다. “이 자가 무림맹의 사람이 확실합니까?” “그게 무슨 억지란...” “제갈 군사. 당신이 알고 있는 호위무사가 맞습니까?” 모용강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대꾸를 하려하는데, 이를 무시하고서 천여운이 겨우 몸을 일으켜 세우는 제갈소희에게 물었다. 여전히 혼란스러운지 비틀대던 제갈소희가 매달려서 고통스러워하는 호위무사를 바라보더니,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죄, 죄송한데, 그자는 대체 누구죠?” 그녀는 자신이 데리고 온 호위 무사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 말에 대청 위에 있던 마교 측의 수뇌부들과 정파 무림맹 사람들이 인상이 굳어졌다. 그럼 대체 저 호위무사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모두가 혼란스러워하던 그때, 천여운의 귓가로 누군가의 전음이 들려왔다. [사제. 어쩔 수가 없다. 그분께서 검마의 잔재를 찾는 동안 제 삼계를 행해야 한다. 혼란이 야기 되면 돕겠다.] ‘!?’ 전음이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대청 아래에 연회장의 정원 한가운데에 제갈소희의 호위무사 중 한 사람이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더니 세게 박수를 두 번 쳤다. -짝! 짝! 그 순간 연회장에 있던 사람들에게 변화가 일어났다. 중소 종파 중에서도 무공이 약한 종주들과 화산파의 항렬이 낮은 제자, 그리고 모용세가의 무사들의 일부가 갑자기 동공이 풀려서는 서로를 공격했다. “이 더러운 마교인들 죽어랏!” “위선적인 정파 놈들!” -퍽! 퍼퍼퍽! 병기가 없었지만 무인들답게 맨손으로 무공을 펼치며 싸워댔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화기애애했던 연회장의 자리가 일순간에 마교와 정파의 싸움터가 되어버렸다. 천여운의 눈살을 찌푸렸다. ‘언제 이 많은 사람들이 최면에 걸렸지? 설마....아까 그 박수가?’ 천여운의 그 짐작은 옳았다. 최면은 일종의 자극을 통해서 이뤄지는데, 아까 전 제갈소희가 면사포를 벗으면서 그때 연회장에 있던 사람들이 그녀의 아름다움이 넋이 나갔었다. 그 순간 호위무사 중에 한 사람이 박수를 쳤었다. ‘박수 소리가 암시를 건 것이었구나.’ 그때 혼란스러운 틈바구니 속에서 최면을 유도한 호위무사가 소리를 질렀다. “더러운 마교 놈들이 우리를 공격했다! 동맹은 놈들의 간악한 함정이다! 반격해라!” 최면에 걸린 자들이 시작한 싸움이었지만 이 외침으로 인해 정원에 있던 종주들과 정파 무림맹의 무사들을 혼란스럽게 하는데 충분한 역할을 했다. “죽어랏!” “헛! 이놈들이 정녕!” 더군다나 최면에 걸린 자들은 본인들끼리만 싸우는 것이 아니라 무차별적으로 타인을 공격했기에 싸움은 불이 번지듯이 커지려 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양측의 수뇌부들도 어느새 서로를 노려보며 기수식을 취하고 있었다. “키..키키킥!” 천여운의 손에 목이 잡혀 있는 호위무사가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이겼다는 듯이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웃어댔다. “짜증나게 하는군.” -퍽! 우드득! “끄아아아악! 천여운의 주먹이 그의 갈비뼈를 강타하며,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호위무사의 고통의 비명을 질렀다. -타타탁! 그런 그를 점혈을 하고서 내팽개친 천여운이 당장이라도 싸울 기세에 놓여있는 수뇌부들을 향해 외쳤다. “멈추십시오! 저들은 최면에 걸린 겁니다.” “최면?” 최면이라는 말을 알 리가 없었다. 마땅한 말을 찾던 천여운이 환술(幻術)을 떠올렸다. “아까 제갈 군사처럼 환술에 걸려서 저런 행동을 하는 겁니다. 본교와 무림맹이 부딪치도록 하기 위한 흉수의 함정입니다.” 그런 천여운의 말에 수뇌부들이 대치 상태에서 망설였다. 그들 역시도 눈앞에서 제갈소희와 모용유의 돌발행동을 보았었기 때문에 이것이 누군가에 의해 의도된 함정이란 것 정도는 눈치 채고 있었다. ‘알고는 있지만.....’ 다만 이미 양측에서 싸움이 벌어졌기 때문에 서로가 오해를 풀기도 전에 공격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쉽게 견제를 풀 수 없는 것이었다. 화산파의 장문인이자 무림맹의 육웅주 풍청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소교주 이 상황을 어찌해야겠소?” “소교주님께서 명을 내리신다면 행하겠습니다.” 구 장로 사마의도 무림맹 수뇌부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서 말했다. 천여운이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정원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여러 장로님들과 무림맹의 귀빈들께서 환술에 걸리지 않은 자들이 싸우지 않도록 통제하여 주십시오.” “그럼 환술에 걸린 자들은?” “그것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팟! 그 말과 함께 천여운이 먼저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연회장의 정원으로 신형을 날렸다. 잠시 망설이던 육웅주 풍청운이 대청으로 내려가자, 화산파의 장로들과 모용세가도 따라나섰다. 눈치를 보는 장로들에게 교주 천유종이 손을 들어서 인가하자, 그들 역시도 정원으로 신형을 날렸다. 난리법석이 된 연회장을 바라보며 교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감히 본좌의 안방에까지 손을 뻗었다라....’ 그 불쾌감이 말로 이룰 수가 없었다. “멈춰라! 당장 싸움을 중단해라!” “적의 함정이다. 여기서 싸우면 동맹이 무산된다.” 싸움이 벌어지는 연회장의 정원으로 나온 양측의 수뇌부들이 나서서 소리치며 그들을 제지하자, 최면에 빠지지 않은 자들이 조금씩 싸움을 멈추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서 천여운의 몸놀림은 빨라지고 있었다. ‘나노, 일일이 구분하기 힘드니까. 누가 최면에 빠진 건지 구분해줘.’ [알겠습니다. 사용자의 시각 정보에 증강현실(增强現實) 개안(開眼) 가동합니다.] 그 순간 천여운의 동공이 빠르게 흔들리더니, 하얀 입자들이 선을 그리며 증강현실이 개안되었다. 나노의 목소리가 이어서 들려왔다. [최면에 걸린 대상자들을 타겟팅(Targeting)하겠습니다.] -피피피피핏! 개안된 증강현실에 붉은 원에 작은 십자 표시가 그려지며 뒤섞여서 싸우고 있는 자들을 목표설정을 해주었다. ‘후우. 나노. 내가 손을 갖다 대면 곧바로 전기 충격으로 보조해줘.’ [알겠습니다.] 천여운이 붉은 원에 십자가 표시된 목표들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경공을 펼치기 시작한 천여운의 몸이 잔상을 일으키며 수많은 인파를 스치며 단숨에 목표된 자의 머리통을 손으로 낚아챘다. -팍! “뭐, 뭐얏!” “뭐긴 뭐야.” 머리를 잡고 있는 천여운의 손에서 하얀 전격이 일어났다. -파치치치칙! “끄아아아악!” 최면에 빠져서 동공이 풀려있던 화산파의 제자가 비명을 지르더니 바닥에 쓰러졌다. 한 번 시작된 천여운은 곧장 다음 목표물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엇? 끄어어억!” “끄아아아악!” 순식간에 싸우고 있던 두 명을 양손으로 낚아채서는 전기 충격을 일으켰다. 그들은 영문도 모른 채, 당해서는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졌다. ‘다음!’ -팟! 천여운은 쉬지 않고 다음 목표를 향해 신형을 날리며 빠르게 최면에 걸린 자들을 잠재워갔다. ‘대, 대단하다!’ 최면에 풀린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대청 위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는 무림맹의 군사 제갈소희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무공이 낮은 편이 아닌데도 천여운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서 육안으로 파악하기 힘들었다. ‘저 사람이 현 마교의 소교주.’ 자신이 공언한대로 혼자서 최면에 빠진 자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천여운의 손에 닿은 자들은 일시적으로 쓰러졌다가 깨어나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비, 빌어먹을. 대체 저 놈은 뭐란 말인가!’ 싸움이 벌어지는 틈바구니 속에 숨어서 분란을 조장하던 호위무사의 눈에 당혹감이 서렸다. 혼란을 야기 시키려는 계획이 빠르게 물거품이 되어가고 있었다. 최면이라는 것이 걸기는 어렵지만 한 번 걸리게 된다면 시전자가 해지하지 않고는 곧바로 풀리는 기술이 아니었다. ‘마, 말도 안 돼! 손에 닿는 족족히 암시가 풀리고 있잖아!’ 마교와 무림맹의 수뇌부들까지 나서서 사태를 진정시키고 있어서 얼마 있지 않으면 상황이 금방 수습될 것 같았다. ‘큭! 별 수 없구나.’ 원래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인지한 호위무사를 가장한 최면술사의 선택은 하나였다. ‘어차피 여기서 도망칠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자결이었다. 내성에만 마교의 최고 고수들이 집밀해 있고, 외성에는 수만 명의 마교인들이 상주해 있는 마교성의 한가운데서 무슨 수로 도망을 간단 말인가. 애초부터 계획이 성공하게 되면 자결을 하기 위해서 어금니에 부착해둔 독단이 있었다. “후우후우.” 자결을 하기 위해 깊게 심호흡을 들이켰다가 내뱉은 그가 독단을 깨물려는 순간, 누군가가 빠르게 그의 목을 움켜잡았다. “켁!” 그는 바로 천여운이었다. 이미 자신이 맡기로 한 최면에 걸린 자들을 전부 해결한 천여운은 단숨에 호위무사를 가장한 최면술사를 찾아냈다. '어떻게 단번에 나를?' 최면술사의 두 눈이 커졌다. 다른 호위 무사가 잡혔기 때문에 의심 받으리라고는 여겼지만 너무 빨랐다. 당혹스러운 것도 잠시였다. '큭! 이놈이 나를 어지간히 우습게 여기는 구나!' 그렇지 않아도 그로 인해 세 번의 계책이 전부 수포로 돌아간 것이 분했던 최면술사였다. 최면술사가 천여운의 가슴을 향해 공력을 끌어올려 쾌속하게 일권을 내질렀다. -팍! 꽉! "헛?" 일권은 미처 천여운의 가슴에 닿기도 전에 그의 손에 막혔다. 최면술사는 최대 공력을 끌어올려 이를 뿌리치려 했지만 내공의 수위에서 격차가 너무 컸다. '고, 고작 약관 밖에 안 되는 녀석이 무슨 공력이!' 당황해하는 최면술사에게 천여운이 냉랭하게 말을 하며, 잡은 주먹을 비틀어서 꺾어버렸다. "본교의 한복판에서 허튼 수작을 부리고도 무사히 넘어갈 줄 알았나?" -뿌드득! "끄어어억!"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끄으으...자, 잠깐...지금 무슨 짓을.." -콰드드드득! "끄아아아아아아아악!!!" 목이 붙잡혀서 몸이 고정되어 있던 최면술사의 꺾여진 팔을 천여운이 괴력으로 잡아당기자, 그의 오른팔목이 살과 근육이 찢겨나가는 소리와 함께 뜯겨지고 말았다. 그 고통은 말로 이룰 수 없었다. "히익!" "파, 팔을!" 생팔이 뜯겨지는 모습에 근방에 있던 정파 무림맹 사람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손속에 사정이 없고 잔인한 것이 마교는 과연 마교라는 생각이 들었다. 뜯겨져 나간 부위를 왼손으로 붙들고 고통스러워하는 최면술사에게 천여운이 무덤덤한 눈빛으로 물었다. "네놈들, 정체가 무엇이냐?" “끄으으으! 정체? 헉! 헉! 네, 네놈....뜻대....로 될 것 같으냐! 이익!” 이놈에게서 벗어날 방법따윈 없었다. 어차피 자결을 하려 했던 최면술사는 독단을 깨물려고 했다. 그러나 미처 깨물기도 전에 그의 입이 심후한 공력에 의해서 강제로 벌려졌다. “흐허어어어!” “네놈 같은 족속들은 안 되면 자살부터 하려 드는군.” 천여운이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독단이 부착된 어금니가 무형의 기운에 의해서 뽑혀져 나왔다. -우드득! 뽁! “흐허헉!” 허공에 떠있는 어금니와 독단을 바라보며 최면술사의 눈동자가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마교에 교주 외에도 이런 괴물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천여운의 이어지는 마지막 말은 기절한 사제와 마찬가지로 최면술사를 경악하게 만들고 만다. “그분이라는 놈도 처리해야 하니까 이따가 보자.” < 41장 숨겨진 목적(1) > 끝 < 41장 숨겨진 목적(2) -수정-> 마도관의 동북쪽에 자리하고 있는 비급 서재 건물. 평소라면 야밤에도 사방을 밝히는 횃불들과 철두철미하게 경비를 서고 있는 무사들로 인해 삼엄한 경계를 느끼는 곳이다. 그런 비급 서재 건물 주변이 고요하기 짝이 없다. 그 이유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시신들에 있었다. 수십 명이 넘는 경비 무사들이 죽어 있었는데 특이한 것은 입구 앞 쪽에 몰려 있었고, 싸운 흔적보다는 일검에 목이 찔려 사망한 듯 했다. 그나마 싸운 흔적이 있는 자들은 비급 서재 내부를 지키는 절정의 고수들이었는데, 그들의 몸은 강기에 당했는지 시신들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다. “아직인가.” “곧 올 걸세.” 비급 서재의 지하층에 두 명의 중년인이 서있었다. 그들은 비급 서재의 오층 내부를 지키고 있는 초절정의 고수들이었다. 바깥의 소란스러움을 듣고 비급 서재 바깥으로 나온 그들은 주검이 된 경비 무사들을 발견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숨겨진 지하보고 쪽으로 내려왔더니 이곳을 지키는 고수들 역시 시신이 되어 있었다. “철문을 강제로 부수고 들어가다니....대체 어떤 놈이 이런 대담하다 못해서 미친 짓을.” 콧수염의 중년인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하 보고의 기관 진식으로 만들어진 철문이 부서져 있었고, 강제로 진입하려 하면서 기관이 발동해서 청옥석 벽이 내려와 입구를 막았다. 아마도 침입자는 이 안에 갇혀 있을 것이다. “이 정도 두께의 청옥석 벽이라면 어지간한 고수라고 해도 쉽게 부수지 못할 걸세.” “그래도 뭔가 불안하군. 어서 관주께서 오셔야 하는데.....” 그들과 같이 오층을 지키는 다른 한 고수가 마도관의 본관으로 갔다. 급히 갔으니 지금쯤 관주가 도착할 때가 되었다. 초조해하며 기다리던 차였다. -쾅! 입구를 막고 있는 청옥석의 반대편에서 뭔가 충격을 가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놈이 나오려고 하나 보군.” 그들의 눈빛에 긴장감이 서렸다. 지하보고의 기관 진식이 발동해 내려온 청옥석 벽의 두께는 비급 서재 내부에 있는 비석과는 세 배 가까이나 될 만큼 두껍다. 그래서 어지간한 강기로도 쉽게 뚫기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 이 불안감은 대체 무엇일까? -쾅! 다시 한 번 벽의 반대쪽에서 큰 울림과 함께 진동이 바닥까지 울렸다. 아무래도 지하 보고 안에 있는 자가 청옥석의 단단함을 인지했는지 본격적으로 힘을 가하는 듯 했다. “그래도 확실히 청옥석이 단단하기는...” 중년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한 번 큰 충격음이 울려 퍼졌다. -콰앙! 방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소리와 진동이 일어났다. 두 초절정의 고수들의 눈이 커졌다.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청옥석 벽에 균열이 가있던 것이었다. “세, 세상에!” “안 되겠네! 청옥석 벽이 견디질....” -콰아아앙! 그 순간 엄청난 굉음과 함께 두꺼운 청옥석 벽이 박살이 나면서 파편들이 튀어나가며 그들을 뒤덮었다. 한편 오층 비급 서재를 지키는 고수에게 보고를 받은 좌호법 이화명과 이십 명의 무공 교두들이 비급 서재 건물의 근방까지 도착해 있었다. “이 소리는?” 그들이 있는 곳까지 들려오는 굉음 소리에 좌호법 이화명이 놀라서 더욱 빠르게 경공을 박차하여 한달음에 비급 서재 건물의 입구 앞까지 도달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보고는 받았지만 입구 쪽에 죽어있는 시신들을 보며 이화명의 인상이 굳어졌다. 입구 쪽에서 뿌연 먼지가 올라오고 있었다. 굳이 그 안까지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뿌연 먼지 틈으로 인영이 걸어 나오고 있었는데, 이윽고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한 명이 아니었다. 반백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 뱀과 같은 인상에 실눈의 중년인과 삽심 대 초반으로 보이는 날렵해 보이는 사내였다. “아니? 그대들은?” 그들을 알아본 이화명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니라면 그들은 정파 무림맹의 행렬에서 황금빛 천에 둘러싸여 있던 가마 주변을 지키던 호위 무사들이었다. ‘무림맹 귀빈의 호위무사? 아니야. 저 자는....’ 이화명의 시선은 실눈의 중년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중년인이 내뿜고 있는 기운은 절대 호위 무사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실눈의 중년인이 이화명을 바라보며 피식하고 웃더니 옆에 서있는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쭉정이들만 봐서 실망스러웠는데, 이제야 그럴 듯한 자가 등장했구나.” “스승님. 저자가 끝이 아닙니다.” “알고 있다.” -우르르르! 마침 뒤늦게 쫓아온 이십 명의 무공 교두들이 나타났다. 무공 교두들 역시도 수많은 경비 무사들의 시신과 저들을 발견하고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침입자?” 오백 년의 마도관 역사상 최악의 사태가 일어난 것이었다.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외부 침입자에 비급 서재를 지키는 경비 무사들이 전부 살해당하는 최악의 사건이었다. 무공 교두들을 데리고 온 오 층 비급 서재를 지키는 초절정의 고수가 분노에 찬 얼굴로 침입자 들에게 소리쳤다. “지하 보고에서 나오다니! 그들을 어떻게 한 거냐?” 자신을 제외한 두 사람이 지하 보고 앞을 지키기로 했다. 그런데 저들이 태연하게 나왔다는 것은, “글쎄, 저 밑에 있는 시신들을 잘 뒤져보면 나올 걸.” “감히!” 비아냥거리는 실눈의 중년인의 말투에 화를 참지 못한 초절정의 고수가 검을 뽑아서 그들을 향해 달려드려 하는 것은 이화명이 손을 내밀어 제지했다. “과, 관주!” “잠시만 기다리게.” 이화명이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네놈들이 누구인지 모르겠으나 지하보고가 목적이었나?” 삼십 대 사내의 등에 두르고 있는 두툼한 보자기가 수상했다. 지하보고에서 나온 게 틀림없다면 분명 그 안에 있는 검마 공의 유산들을 챙긴 게 틀림없어 보였다. 실눈의 중년인이 태연스럽게 말했다. “뭐, 보다시피.” -챙! 좌호법 이화명이 붉은 검신의 염화검을 뽑아서 무공 교두들에게 명을 내렸다. “저들을 막아라. 절대로 빠져나가게 해선 안 된다. 죽여도 좋다.” “충!” 생포가 중요하지 않았다. 검마 공의 유산을 외부로 빼돌리려 한다면 그것을 무조건 막아야 했다. 이화명의 명령이 떨어지자, 오층 비급 서재지기와 무공 교두들이 병장기를 뽑아서 일제히 침입자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실눈의 중년인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옆의 사내에게 말했다. “금방 처리하고 따라갈 터이니, 먼저 가도록 해라. 퇴로는 알고 있겠지.” “알겠습니다.” 실눈의 중년인이 앞으로 나서더니, 달려드는 무공 교두들을 향해 입을 오므리며 뭔가 바람을 부는 시늉을 하자 괴상한 소리가 그들의 귓가를 울렸다. -삐이이이이! 그것은 돌고래의 초음파와도 같았다. 고막을 울리는 소리에 침입자들을 향해 달려들던 무공 교두들이 귀를 막고 고통스러워했다. 소리에 실려있는 내공 때문에 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끄아악!" "끄윽! 귀,귀가!" 고통스러워하던 무공 교두들이 내공을 끌어올려 소리에 대항했다. 그러나 사자후와 달리 이 소리는 단순히 고막에 통증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극심한 어지러움증까지 유발했다. "으으윽!" "어엇! 땅이 위로 올라온다." -쿵! 쿵! 고막에 손상이 갔던 무공 교두들이 어지러움으로 균형을 잡지 못하다가 쓰러졌다. 물론 모든 자들이 이것에 걸린 것은 아니었다. 절정의 극에 이른 무공 교두 오신과 초절정의 고수인 오층 비급 서재지기는 내공이 두터웠기에 호신기운으로 버텨냈다. "이놈 사술에 능한 놈이로구나!" “호오. 내공이 제법 두터운가 보군. 하나.” -팟! 실눈의 중년인의 신형이 번개처럼 튕겨져 나와 단숨에 무공 교두 오신의 목을 비틀어버렸다. -뿌득! "컥!" "어떤 식으로든 결과는 죽음뿐이다." "빌어먹을!" 오신이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죽어버리자, 바로 옆에 있던 오층 비급 서재지기가 놀라서는 다급하게 검강을 형성하여 실눈의 중년인의 목을 찔렀다. -탁! "아닛? 거, 검강을 잡아내다니?" 그러나 실눈의 중년인은 검지와 중지 두 손가락에만 강기를 일으켜서 찔러오는 검을 잡아버렸다. 내공 운용에 있어서 상상을 초월하는 고수인 것이었다. 손가락 사이에 있는 검을 빼내려고 했지만 공력에서 격차가 심했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크윽! 그렇다면!" -탁! 비급 서재지기가 검병에서 손을 떼고서, 검결지에 검기를 일으켜서 반전을 꾀하려고 했으나, -콰득! "크헉!" 단숨에 심장을 강타하는 실눈의 중년인의 권강에 상체가 꿰뚫려서 즉사하고 말았다. 중년인의 손에 묻은 피를 바닥에 털면서 말했다. “지하에 있던 녀석들과 별 다를 바가 없군. 이제 방해꾼들은 별로 없으니 어서 가랏.” “명을 받듭니다.” 그 말과 함께 삼십 대의 사내가 경공을 펼쳐서 빠져나가려 했다. 이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좌호법 이화명이 아니었다. “누구 마음대로 빠져나간다는 것이냐!” 이화명이 적염검법의 절초를 펼쳐서 탈출을 시도하는 삼십 대 사내를 제압하려는 순간, 그의 앞을 실눈의 중년인이 가로막았다. “당연히 본좌의 뜻대로다.” -채채채채챙! 타타타타탓! 금속음과 함께 절초를 펼치던 이화명의 신형이 다섯 보 가량 뒤로 밀려났다. 특별한 병장기가 없어서 적수공권이라 생각했는데, 그의 두 손에 현철로 만들어진 권갑이 끼워져 있었다. ‘무슨 공력이?’ 이화명의 눈빛에 당혹감이 서렸다. 심상치 않은 자라고 여겼는데, 검병을 쥐고 있는 손이 떨릴 정도로 공력이 심후했다. 방금 전에 펼쳤던 적염검법의 절초에는 십성 공력이 실려 있었다. 이는 이화명보다 고수라는 의미였다. ‘이 자는 정말 위험하다.’ 도망치는 삼십 대의 침입자를 붙잡아야 했지만 한시라도 눈을 떼는 순간 저자의 살초가 그를 단숨에 덮쳐올게 틀림없었다. “제법이구나. 역시 운이 좋군. 정파 놈들과 비교하면 마교 녀석들은 어느 정도 실력일지 궁금하던 차였는데.” “.....대체 정체가 무엇이냐?” “그런 것보다 네놈의 실력이나 더 보자꾸나!” -팟! 실눈의 중년인의 신형이 번개처럼 뻗어와 이화명을 향해 패도적인 권초를 날렸다. 일권에 실려있는 엄청난 기세에 이화명이 뒤로 보법을 펼치며 적염검법의 방어초식인 검염망세(劍炎網勢)를 펼쳤다. -채채채채챙! 붉은 검신이 만들어내는 촘촘한 검망에 실눈의 중년인의 권초가 강타했다. 금속성과 함께 두 고수의 초식이 격렬하게 부딪쳤다. -화르륵! “호오?” 열양의 내공을 지닌 적염검법의 검초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화기(火氣)에도 불구하고, 실눈의 중년인의 기세는 멈추지 않았다. -채채채챙! 타타타탁! “큭!” 권격의 위력이 어찌나 강한지 점차 이화명의 신형이 밀려났다. 내공, 초식. 모든 면에서 그를 압도했다. ‘이, 이 자는 너무 강하다.’ 방어만으로는 안 된다고 판단한 이화명은 검망을 이루던 것을 풀고서 실눈의 중년인을 향해 적염검법의 비기를 펼쳤다. ‘승부를 걸어야 한다.’ 염화멸검(炎火滅劍). 이화명의 보검인 염화검의 검신이 강렬한 열기로 완전히 붉은 빛으로 물들더니, 폭발적인 역량의 검초가 쾌속하게 펼쳐졌다. -촤촤촤촤촤?! “그래! 이 정도는 해줘야지.” 비기답게 엄청난 기세로 펼쳐지는 검초에도 불구하고 실눈의 중년인의 오히려 즐겁다는 듯이 눈웃음을 짓더니, 두 손에 푸른빛 권강을 일으켰다. -우우웅! 그와 동시에 실눈의 중년인이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위력의 권초를 펼치며 이화명의 염화멸검을 향해 정면으로 부딪쳤다. -채채채채채챙! 붉은 빛 검결과 푸른빛 권강이 부딪치며 파공음으로 주변이 울렸다. 초식과 초식의 대결은 격렬했다. 그러나 승부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처음에는 호각으로 부딪치던 이화명의 검식들이 점차 허둥지둥 중년인의 권초를 막아내기 급급해져갔다. ‘이 권초는?’ 이화명의 눈빛이 흔들렸다. 실눈의 중년인이 펼치는 권초는 도저히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 파고들었기 때문에 막아내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리고 결국에는 틈이 벌어지고 말았다. -퍼퍼퍽! “크헉!” 실눈의 중년인의 권이 속사포처럼 이화명의 가슴과 복부, 어깨를 강타했다. 이화명의 입에서 선혈이 튀어나오며 그의 몸이 포탄처럼 뒤로 튕겨져 나가 바닥을 뒹굴고 말았다. “크으으윽.” 심한 내상을 입은 이화명이 염화검을 지팡이 삼아서 겨우 몸을 반쯤 일으켜 세웠다. 그런 이화명을 향해 실눈의 중년인이 웃으며 다가왔다. 마지막 마무리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화명이 자신을 향해서 걸어오는 중년인을 바라보며 힘겹게 입을 뗐다. “네.....네놈.....극도육무문이구나.” -탁! 그 말에 실눈의 중년인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몇 초식을 겨루지 않았는데 설마 자신의 정체를 눈치 챌 줄은 몰랐다. “어떻게 안 거지?” “......권초를 펼쳤지만 분명....쿨럭! 도초에 가까웠다.” 통상의 무공과는 다르게 육신에 무리를 줄 수밖에 없는 권식들. 그것은 극도신의 도법과 닮아 있었다. 이화명은 그 권초를 막아내면서 대호법이 말해주었던 극도육무문의 고수들을 떠올렸다. “재미있군. 숨긴다고 최대한 숨겼는데 말이야. 뭐, 어차피 죽을 녀석이니까 알려주지. 그래. 본좌는 극도육무문의 도권문주 사현이다.” 그 목소리에 진득한 살기가 베여있었다. ‘역시인가.’ 짐작이 맞았다. 이자가 극도육무문의 고수가 틀림없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알려야만 했다. 그러나 극심한 내상은 그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도권문주 사현이 비틀거리며 어떻게든 몸을 일으켜 세우려는 이화명의 앞까지 다가왔다. “그럼 잘 가라.” ‘크윽! 제발! 움직여라!’ -우웅! 사현이 강기가 서린 주먹으로 이화명의 머리통을 내려찍으려는 바로 순간이었다. -슉! “헛?” -파악! 엄청난 속도로 자신에게 날아오는 뭔가를 감지한 사현이 재빨리 그것을 강기를 두른 손으로 그것을 잡아냈다. 강기를 두르고 있었는데도 손바닥에 공력의 여파로 묵직함이 느껴졌다. 그래도 막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이딴 철구 같은 것으로 본좌를 해할 수 있을....엇?” 사현이 자신에게 이것을 던진 자에게 화를 내려다, 두 눈이 커져서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잡아낸 것은 철구 따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의 잘린 머리통이었다. 그의 강기에 반쯤 머리통이 으깨졌지만 몰라볼 수가 없었다. “이, 이게 대체?” 머리통의 주인은 다름 아닌 아까 전에 먼저 도주시켰던 삼십 대의 사내였다. 사내의 귓가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놈이 그분이냐?” -뿌득! 당혹감도 잠시였고 분노에 차오른 도권문주 사현이 이를 갈면서 자신에게 수급을 던진 자를 노려보았다. 긴 머리카락에 새하얀 얼굴의 청년이었다. 청년의 손에는 그들이 비급 서재의 지하 보고에서 탈취했던 보자기가 들려있었다. 좌호법 이화명이 두 눈이 커져서 청년을 향해 외쳤다. “소, 소교주님!” 그는 바로 천여운이었다. < 41장 숨겨진 목적(2) -수정-> 끝 < 41장 숨겨진 목적(3) > “소교주?” 소교주라는 말에 도권문주 사현의 눈빛에 이채가 띠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마교에 아직 소교주가 없다고 들었는데, 그 사이에 후계를 지정해놓은 것인가.’ 그의 정체로 놀란 것도 잠시였다. 도권문주 사현은 그의 등장만으로 자신이 세웠던 계획이 엉망이 되었다는 사실을 빠르게 인지했다. 정말로 저 자가 소교주라면 지금쯤 내성의 연회장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은 정파 무림맹과 마교를 상쟁하게 만드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의미였다. 원래는 두 세력이 싸우면서 성내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빠져나가려 했는데, 전면 수정해야 할 판국이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천여운이 어떻게 자신의 위치를 알아냈는지 였다. ‘자결을 했으면 했지. 녀석들이 계획을 절대로 불 리가 없는데.....’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이 확실했다. 전방을 쳐다보는 사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마도관의 동북쪽에 자리한 비급서재 건물은 고지대에 자리하고 있어서 전방을 바라보면, 마도 관의 대연무장부터 바깥쪽이 보였는데, 그곳에 불빛들이 번져가고 있었다. ‘칫, 몰려들고 있다.’ 기감에서부터 느껴졌다. 수많은 마교의 교인들이 마도관을 에워싸고 있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은 정해졌다. 당장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가기 전에 전리품으로 네놈 정도는 죽이고 가야겠구나.” -탁! 손에 쥐고 있던 삼십 대 사내의 수급을 바닥에 버린 사현이 비틀거리는 좌호법 이화명의 머리통을 다시 내려치려 했다. 하지만 이를 천여운이 그냥 내버려둘 리가 없었다. 그가 몰려드는 마교인들을 감지하느라 잠깐 시선이 팔린 사이에 천여운의 신형이 어느새 그의 바로 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챙! 천여운이 휘두른 일검에 이화명을 머리를 박살내려던 사현의 주먹이 뒤로 튕겨나갔다. ‘이놈 봐라?’ 사현의 두 눈이 커졌다. 손에 강기를 실은 것을 떠나서 단번에 죽일 작정으로 공력을 실었는데 그걸 튕겨냈다. 적어도 자신이 죽이려 했던 이자보다 공력이 훨씬 강하다는 말이었다. ‘재미있군. 그냥 소교주가 아니란 말이지?’ “흥!” 사현이 튕겨나가는 팔의 반동을 이용해 몸을 회전해서 천여운에게 권초를 날렸다. 이화접목(移花接木)의 수였다. 타인의 내공을 이용해 자신의 공력을 더 하는 수법이었다. 단 일 권에 불과했지만 그 권력은 엄청났다. ‘이런!’ 일검을 펼칠 때 처음부터 십성 공력으로 공격했던 천여운은 그가 오히려 자신의 공격을 이용해, 빠르게 반격을 가하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재빨리 검을 들어 올려서 일권을 막아냈다. -챙! 반동까지 이용한 사현의 권은 그 위력이 일반적인 수준을 상회했다. 검을 타고 들어오는 공력의 여파에 천여운의 오장육부가 들끓었다. 하지만 여기서 밀려난다면 움직이지 못하는 이화명을 이 자가 죽일 게 틀림없었다. -으득! 천여운이 이를 악물고 공력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치에 달한 극한의 괴력마저 끌어냈다. ‘엇?’ -부웅! 당연히 천여운이 내상을 입고 밀려날 거라 생각했는데, 도리어 엄청난 괴력이 일어나며 사현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치며 신형이 뒤로 날아가 버렸다. -주르륵! 이를 악물고 있는 천여운의 입가로 핏물이 흘러내렸다. 화경의 경지에 이른 후로는 타인이 공력에 의한 내상을 입어본 적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나노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체내로 침투한 에너지로 인한 내부 장기 손상을 자가수복합니다.] 몸 안의 나노머신들이 활성화되며 내상이 치료되면서 들끓는 속이 가라앉았다. -탁! 괴력으로 튕겨냈지만 역시 전혀 부상을 입지 않았는지 깃털처럼 가볍게 땅으로 내려오는 사현이었다. 천여운의 괴력에 놀라기는 했지만 입가에 흐르는 핏물을 보면서 사현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역시 내상을 입지 않을 리가 없지.’ 천여운의 공력에 자신의 공력마저 실은 이화접목의 수였다. 자신을 지키려다가 부상을 입은 듯 한 천여운을 바라보는 좌호법 이화명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조금만 더 빨리 운기가 활성화되었다면 그 공격을 피해냈을 것이다. 비틀거리던 이화명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하아....하아...소교주님. 제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괜찮습니까? 좌호법.” “몸을 움직일 정도는 됩니다.” 극심한 내상으로 일시적으로 내공을 운용하지 못했지만 이제 가능했다. 다만 빨리 이곳을 벗어나서 운기조식을 통해 내상을 도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천여운이 이화명에게 들고 있던 보자기를 넘겼다. “이것을 가지고 교주와 다른 장로님들을 불러주세요. 마도관의 입구 쪽에 있을 겁니다.” 혹시의 상황에 대비해야 했다. 전음을 도청했을 당시, 검마의 잔재라는 말에 비급서재의 지하보고를 짐작한 천여운은 교주와 장로들에게 마도관을 포위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 이곳으로 먼저 향했었다. 마교에 적이 침투한 상황이기에 아마도 교주와 수뇌부들은 마교 전체의 성내를 봉쇄하고 마도 관을 포위하고 있을 것이다. 사현이 그런 천여운의 말에 비웃었다. “웃기는 녀석들이군. 본좌가 네놈들을 보내줄 것 같으냐?” “이 자는 저한테 맡기고 어서 가세요.” “큭, 알겠습니다!” 천여운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이화명에게 내려가라 명했다. 내상이 심했기에 도움이 될 수 없기에 이화명은 곧장 마도관의 입구 쪽을 향해 경공을 펼쳤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극도신의 후예일 수도 있는 극도육무문의 고수 중에 한 사람이라면 천여운 혼자서 벅찬 상태일 수도 있었다. “누가 보내준다고 했느냐!” 사현의 신형이 바닥을 박차며 단숨에 이화명을 따라잡으려 했다. 하지만 천여운이 그를 가로막았다. “흥!” 사현이 방향을 틀어서 경공을 펼쳐 허공으로 신형이 솟구치더니, 이화명을 향해서 탄권강(彈拳?)을 쏘려고 했다. -스슥! ‘이놈 경공이?’ 그러나 어느새 천여운의 신형이 잔상처럼 일렁이며 허공에 있는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경신법인 풍신공을 익인 이후로 경공이 일취월장한 천여운이었다. “네놈의 상대는 나다.” -촤촤촤촤촤?! 천여운이 허공에 체류한 상태로 사현을 향해 검초를 펼쳤다. “이놈! 끝까지 방해구나.” -채채채채챙! 사현이 현철 권갑으로 권초의 방어식을 펼쳐서 쾌속하게 쇄도해오는 검초를 막아냈다. 허공에서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까지도 그들은 초식을 바꿔가면서 손을 멈추지 않고 격렬하게 부딪쳤다. -채채채챙! 발을 내딛을 곳이 없었기에 고절한 초식을 펼치지 않았지만 서로 호각이었다. ‘이놈 내상이 심하지 않았던가?’ 내상을 입었다고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내공을 운용하는데 막힘이 없자 사현은 적당히 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탁! 바닥에 닿는 순간 사현이 진각을 크게 밟으며 본격적으로 천여운에게 제대로 된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사현의 권이 기이한 방향으로 꺾이며 연달아 천여운의 요혈을 노려왔다. 이에 천여운이 놀란 눈으로 보법을 펼쳐서 그것을 피해냈다. “이건?” 방금 전에 사현이 펼쳤던 권식의 자세는 통상의 무공과는 달랐다. 그런 식으로 몸을 뒤틀면 근육에 무리가 갈 수 있는데, 사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옆으로 꺾었던 허리를 자연스럽게 폈다. “쥐새끼처럼 눈치가 제법 빠르구나.” 만약 천여운이 뒤로 보법을 펼치지 않았다면 일격을 허용했을 것이다. 천여운이 이죽거리는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극도신과 무슨 관계지?” 방금 전에 사현이 펼쳤던 권식만으로 극도신의 도법과 흡사하다는 것을 눈치 챈 천여운이었다. 아직까지 좌호법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 않았기에 극도육무문이 아니라 극도신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천여운의 질문에 그동안 여유만만 해 하던 사현의 표정이 변했다. “하! 그 자의 말과는 다르군. 아무도 모를 거라고 하더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기가 막히다는 듯이 혼자서 역정을 내는 사현의 모습에 천여운은 더욱 이 자의 정체가 궁금해 졌다. 어쩌면 대전 회의 때 거론되었다는 극도육무문의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을 안다면 역시 마교야 말로 본문의 숙적이군!” 계속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던 사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천여운을 노려보며 외쳤다. “잘됐군! 그렇지 않아도 네놈을 인질로 삼아서 빠져나가려 했는데. 이참에 본좌와 함께 가줘야 겠다.” “인질?” 인질이라는 말에 천여운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권문주 사현은 마도관이 마교의 무사들에게 둘러싸인 시점부터 그를 인질로 붙잡으려고 생각했었다. 마교의 소교주를 인질로 붙잡는 것 외에는 탈출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미 마도관의 연무장 쪽으로 수많은 횃불들이 진을 치면서 올라오며 범위를 좁히고 있었다. “노닥거릴 시간이 없다!” 그 말과 함께 사현의 신형이 빠르게 천여운에게 쇄도해왔다. 사현의 권에서 강한 공력이 응집되며 폭발적인 역량이 담긴 권초가 펼쳐졌다. 그 권초는 지금까지와는 궤를 달리했다. ‘극도신의 도법 제 이 초식?’ 도법이 아닌 권법으로 펼쳤지만 천여운은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원래의 도법이 아님에도 초식은 완벽하게 권법화되었고 그 위력도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이었다. ‘엄청나다.’ 자신을 짓이겨버릴 기세로 쇄도해오는 절세권초에 천여운이 표정이 진지해졌다. 이 정도 절세초식을 막아내려면 적어도 이십사마검 이상의 무공만이 대항할 수 있었다. 천여운이 이십사마검의 기수식을 취했다. 그리고 그의 손에서 이십사마검의 제 사초식인 천향검명(天向劍命)이 펼쳐졌다. -채채채채채채챙! 두 사람의 손에서 펼쳐지는 절세초식들이 부딪쳤다. 관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너무 빨라서 어지러울 지경으로 한 식마다 허를 찌르는 권초와 검초가 부딪치며 파공음이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채채채채챙! ‘이런....’ 초식을 부딪치면서 천여운의 안색이 어두워져갔다. 사현의 패도적인 권식에 그의 검초가 맞물리며 제 위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극도신의 도법을 잘 알고 있기에 검초를 펼치면서 그 허점을 노리려고 했는데, 오히려 사현 역시도 변초를 쓰면서 이십사마검의 허점을 노렸다. -퍽! “크윽!” 천여운의 가슴에 일권이 강타했다. 변초를 쓰기 시작하면서 움직임에 제약이 없고 기이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극도신류의 권법이 빛을 발했다. ‘칫!’ 천여운이 검초를 펼치던 것을 멈추고, 검망을 만들어내며 방어했지만 한번 밀려버린 탓에 범람하는 사현의 권초를 막을 수가 없었다. “검망 따위로 어찌할 수 있을 것 같으냐! 크하하하핫!” -채채채채채채챙! -끼리리리릭! 검강으로 펼치는 검망이었는데, 사현의 패도적인 권강의 위력에 천여운의 신형이 점차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극도신류의 권법의 위력 자체가 폭발적인 역량을 지닌 것도 있었지만 애초부터 사현의 내공은 천여운보다도 한 수 위였다. -쩌저저저저적! 어떻게든 버티려고 했으나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는 엄청난 권초의 위력을 버텨내지 못한 천여운의 현철검의 검신에 균열이 일어났다. “제법이긴 하지만 내공도, 초식도 모든 면에서 본좌가 한 수 위다! 흐아아압!” -쾅! 차차차창! 극성의 내공의 실린 일권이 흔들리는 검망의 한가운데를 강타하자, 천여운의 검이 그것을 버티지 못하고 부서져서 그 파편들이 튀어서 몸에 박혔다. -파파파파파팍! “젠장!” 호신강기를 펼쳤지만 몸에 반쯤 박혀버린 검의 파편에 신형이 흔들렸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사현의 주먹이 천여운의 복부에 꽂혔다. -퍼어어억! 몸을 관통할 것 같은 권경에 천여운의 입에서 피가 솟구치며 뒤로 밀려나갔다. 열 보 가량을 끌리듯이 뒤로 밀려나가던 천여운의 신형은 발바닥을 통해 몸 안을 헤집는 권경을 배출해서야 멈출 수 있었다. -쩌저저저저적! 천여운의 발바닥을 중심으로 석면 바닥이 일장 가량 균열이 갈라졌다. 가히 경이로울 정도의 위력이라 할 수 있었다. 멈춰 서서 움직이지 못하는 천여운을 바라보며 사현이 제법이라는 듯이 말했다. “반쯤 죽일 작정으로 권을 먹인 것인데, 그걸 해소시키다니. 과연 마교의 소교주라 할 만 하구나.” “후우.” 천여운이 깊은 숨을 내뱉자 그의 전신에 김이 피어올랐다. 남은 권경의 여파를 몸 밖으로 배출시키는 것이었다. “검마의 검법으로 본좌를 어찌할 수 있을 것 같았느냐.” ‘이십사마검의 검초를 알고 있는 건가?’ 천여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십사마검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허점을 노려왔을 때 뭔가 이상하다고 여겼는데, 이 자는 검 법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물론 그것을 무조건 이상하게만 볼 일은 아니었다. 검마가 극도신의 도초를 분석하려 들었듯이 그 후예들이라면 자신의 조사인 극도신의 호적수라 할 수 있는 검마의 초식을 분석했을 수도 있다. ‘이십사마검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건가.’ 사현이 득의양양한 얼굴로 천여운에게 말했다. “후후후, 검마의 검법을 파훼시켰으니 이제 확실히 결론이 났구나. 마교의 검법으로는 본문의 극도무(極刀武)를 이길 수 없다. 이제 괜한 반항은 그만두고 따라와라.” 사현이 천천히 그를 향해 걸어왔다. 권경을 해소했다고 해도 어차피 전신에 박힌 검의 파편부터 시작해 심한 내상으로 반항할 수 없으리라 여겼다. 그때 권경을 해소하고 있던 천여운의 몸에서 김이 올라오던 것이 멈춰지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어서 그를 노려보았다. ‘이 녀석....아직 눈빛이?’ 놀랍게도 천여운의 눈빛은 죽지 않았다. 오히려 방금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전의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본교의 검법이 극도무에서 밀린다고?” “다 죽어가는 녀석이 허세를 부리기......아니?” 멈추지 않고 천여운에게 걸어가던 사현이 발걸음을 멈췄다. 그는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투툭! 투투툭! 천여운의 전신에 박혀 있는 부서진 검날의 파편들이 체내에서 밀어내는 것처럼 떨어져 나오는것이 아닌가. -츄르르르륵! 더욱 놀라운 것은 얼굴에 박혀있던 작은 파편들이 떨어지면서 그의 상처부위들이 빠른 속도로 재생해나가고 있었다. “이럴 수가? 모, 몸이?” 마치 인간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놀라는 것도 잠시였고 사현은 본능적으로 천여운이 굉장히 위험한 존재라고 판단했다. 인질을 잡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 이놈!.....위험하다. 이건 마치 괴물이 아닌가.’ 생각을 바꿨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괴물이라면 부상을 입혀서 인질로 삼는 것은 불가능했다. 오히려 회복하기 전에 죽여야 했다. -우우웅! 사현이 전신의 내공을 활성화시키며 두 주먹에 권강을 일으켰다. 긴장감으로 표정이 굳어진 사현이 바닥을 박차고 번개처럼 신형을 날려서 극도무에서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최대의 권초를 펼쳤다. “죽어라! 이 괴물 같은 놈아!” 바로 그 순간이었다. -차차차차차착! 천여운의 팔목에 두르고 있던 흑빛 보호대의 조각이 분리되어서 하나로 뭉쳐지더니, 흑검의 형태를 갖추는 것이 아닌가. ‘이게 대체?’ 놀랄 틈도 없이 천여운이 흑검의 검병을 잡자, 은은한 묵빛 검신에서 선명한 검은빛 검강이 치솟았다. “검은 검강?” 흉흉한 마성이 폭발하며 흑검을 잡은 천여운의 신형이 한줄기의 검은 빛이 되어 사현의 펼치는 패도적인 권초로 뻗어왔다. 어두운 빛의 입자를 흩날리며 뻗어오는 검은 빛줄기가 스물네 개의 검식으로 분산되었다, 일순간 하나의 점으로 일원화되었다. -파차차차창! “무, 무슨 이런 위력이!” 엄청난 위력의 절초를 펼치던 사현의 권초가 무력하게 튕겨져 나가더니, 이내 양손이 대자로 벌려지며 천여운의 흑색 일검이 잔상을 일으키며 그의 몸을 관통했다. "커헉!" -탁! 어느새 천여운의 신형은 그를 지나쳐서 열 보 뒤의 위치에 서있었다. 사현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서 천여운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검법이 세상에......크헉!” 말을 마치기도 전에 사현의 입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더니, 이내 바닥에 쓰러졌다. 쓰러진 그의 가슴 정중앙은 구멍이 뚫려서 횡 하니 비어있었다. 천여운이 죽어있는 사현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게 본교 최고의 검법이다." < 41장 숨겨진 목적(3) > 끝 < 42장 빚은 꼭 갚겠습니다. (1) > 내상이 심해서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좌호법 이화명은 그것을 꾸역꾸역 견디며 경공을 펼쳤다. 사현과 직접 겨뤄봤기에 그 자가 얼마나 강한지는 몸소 깨달은 그였다. 서두르지 않는다면 소교주인 천여운의 목숨도 위험할 것이다. -타타탁! 빠르게 대연무장 방향으로 내려가던 이화명은 대연무장을 가득 메우며 점차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는 교인들에까지 도달했다. “헉...헉...헉! 좌호법 이화명이.....교주님을 배알합니다!” 이화명이 포위망의 선두에서 있는 교주 천유종에게 힘겹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부상을 입은 이화명의 모습에 수뇌부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본교에서 십 위권에 드는 고수인 이화명이 부상을 입을 정도라면 대체 어떤 적이 교에 침투했다는 말인가. 교주가 입을 열었다. “적은 어디에 있지?” “헉....헉....지금 비급 서재.....건물 앞에서 소교주와 그, 극도육....무문의 적이 교전 중....입니다. 서, 서두르셔야....” -털썩! “좌호법!” 사태의 다급함을 전하던 이화명이 결국 극심한 고통에 쓰러지고 말았다. 대호법 마라겸이 쓰러진 이화명의 상태를 살피더니, 호법가의 무사들을 불러서 빨리 의무실로 옮기게 했다. “극도육무문!” 이화명을 통해 침입자들이 극도육무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교주가 싸늘해진 인상으로 먼저 경공을 펼쳐서 비급서재 건물 쪽으로 가려했다. 그때 대호법 마라겸이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만류했다. “잠시만 멈춰주십시오. 교주님.” “무슨 짓이지? 대호법.” 불쾌하다는 듯이 묻는 교주의 말에 마라겸이 조용히 전음을 보냈다. [교주님. 옥체를 보존하십시오. 아직 그 자와의 대결에서 내상이 완치되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먼저 가겠습니다.] “......알겠다.” 잠시 멈칫하던 교주 천유종이 수긍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장로들은 마교의 네 방위 성문으로 나누어져서 퇴로를 봉쇄하고 있었고, 마도관으로 온 장로는 사 장로 자금경과 십 장로 연무화뿐이었다. 마라겸이 두 장로들과 함께 서둘러서 비급 서재 건물 쪽으로 경공을 펼쳤다. 그들을 보낸 후에 계속해서 포위망을 좁히려던 교주가 이화명이 쓰러지면서 떨어뜨린 보자기를 발견했다. “잠깐! 그것을 가져오라.” “충!” 호법가의 무사가 보자기를 가져와 교주에게 바쳤다. 교주가 보자기를 풀어보게 했는데 그 안에는 약품 냄새가 지독한 잘려진 팔과 인피로 보이는 가죽들이 나왔다. “이건 대체?” 지하 보고의 비밀을 모르고 있는 교주는 보자기에서 나온 도흔들이 새겨진 팔과 인피에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은 보자기 안에는 검마의 비급서들은 들어있지 않았다. 한편 명왕이라는 별호 이외에도 풍신이라는 별칭을 가진 마라겸 답게 엄청난 경공 실력으로 장로들보다 앞서 비급 서재 건물 쪽에 도달했다. ‘이럴.....수가?’ 마라겸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극도육무문의 적이라는 말에 고전하고 있을 천여운을 생각했는데, 그는 놀라운 광경을 보고야 말았다. 천여운이 검은 빛줄기가 되어서 적의 엄청난 권초를 파훼하고는 가슴을 관통하는 모습이었다. ‘세상에 이런 검초가 존재했단 말인가? 공방일체가 완벽하다.’ 도저히 흠을 잡을 수 없는 완벽한 검 초식이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천여운의 손에 들려있는 영롱한 빛이 흘러나오는 흑검이었다. 어둡고 거리가 멀었지만 한 눈에 보기에도 절세보검이었다. ‘흑검? 현철이라 어두운 빛깔을 띠는 것이 아니라 검신 전체가 완전한 흑검이었다. 가면 틈새로 보이는 마라겸의 두 눈동자가 떨렸다. ‘흑검....흑검? 설마.....저 검은.....’ -차차차차차착! 천여운의 손에 들려있던 흑검이 분해가 되더니 팔목에 보호대로 변했다. 검을 회수한 천여운이 대호법 마라겸의 기척을 감지하고서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호법?’ 천여운이 아차 하는 마음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포위망이 완전히 좁혀지기 전에 해결하려고 천마검공의 제 오 초식을 썼는데, 이것을 쓰는 모습도 모자라 천마검까지 노출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수하들에게조차 보이지 않은 비밀이 드러난 셈이었기에 난감했다. 때마침 두 장로들도 마라겸이 있는 쪽으로 도달했다. “대호법! 어찌 되었....아니?” 사 장로 자금경이 비급 서재 건물 앞에 도권문주 사현의 시신 앞에 서있는 천여운을 발견했다. 한참 공방이 이뤄지고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미 결판이 나있었다. ‘세상에......극도육무문의 고수를 단신으로 처리했단 말인가?’ 자금경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절강성 탈환 작전에서 극도육무문의 고수와 직접 겨뤄봤었기에 그들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는 그였다. ‘정녕 천여운 저 놈은 괴물이란 말인가.’ 일 장로 무진원을 쓰러뜨렸을 때부터 괴물이라고는 생각했지만 그 무위가 이미 장로들을 상회하고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놀라하고 있는 그와 달리 십 장로 연무화는 얼른 천여운에게로 다가가 그의 안위를 물었다. “소교주님. 다치신 데는 없으십니까?” “......괜찮습니다.” 부상은 이미 나노가 치료해줬기 때문에 멀쩡했다. 다만 천마검이 대호법 마라겸에게 노출된 것이 마음에 걸렸다. 호법가는 검마의 유지를 받들고 있다고 좌호법에게 들었지만 대호법은 교주의 충직한 오른팔이라고 들었다. “소교주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그러나 우려와는 달리 대호법 마라겸은 천여운의 안위만을 묻고, 천마검에 대한 것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무슨 속셈이지?’ 의아했지만 덕분에 교주와 포위망을 펼치고 있던 호법가의 무사들이 도착했을 때, 그 점은 거론되지 않고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죽은 사현의 몸에 남겨진 상처를 바라보는 교주의 눈빛은 심상치가 않았다. 단순히 꿰뚫린 것처럼 보이겠지만 교주의 눈에는 정확히 검흔으로 보였다. '......정말 이 아이의 작품인가?' 그런 것이라면 천여운은 일 장로 무진원을 상대로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천여운을 바라보는 교주의 눈빛은 갈수록 경계심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한참을 검흔을 바라보던 교주가 다음으로 관심을 보인 곳은 바로 비급 서재의 지하보고였다. "이곳을 노렸다는 것이냐?" '아아.....' 대호법 마라겸이 잠시 망설였다. 어떻게 적들을 막아내기는 했지만 다른 문제가 발생해버렸다. 그 동안 호법가에서 감춰 왔던 마도관의 비밀인 지하 보고의 존재가 교주에게 알려진 것이었다. "노린 것이 맞느냐고 물었다." "......그렇습니다." 마라겸의 대답에 교주가 굳어진 얼굴로 친히 지하보고에 내려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내부에는 아무 것도 없었고, 뭔가 종이 같은 것을 태운 그을음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검마의 유산이라 할 수 있는 비급 서재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태워져서 재가 되어 있었다. ‘마도관에 이런 곳이 숨겨져 있었다라.....’ 교주로 집권하면서 자신조차 몰랐던 비밀을 적이 알고 있었다. 그것이 교주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교주가 자신의 옆에서 대기하고 있는 대호법 마라겸을 매섭게 눈동자만 돌려서 바라보았다. '본좌를 가벼이 여겼구나.' 역대 마도관주들을 맡고 있는 세 호법들을 비롯해 비급 서재를 지키는 자들 모두가 교주인 자신에게 진실을 숨겼다는 것은 가볍게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교주에게서 풍겨지는 심상치 않은 변화에 가면의 틈으로 보이는 마라겸의 눈빛이 무거워졌다. ‘이건?’ 한편 천여운은 적들이 탈취하려 했던 보자기 안에 들어있는 물건들을 보며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검마의 잔재라는 말에 그들이 자신들과 대적할 수 있는 검마의 무공을 노렸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극도육무문에서 보낸 자들이 노린 것은 오백 년 전에 극도신이 남긴 흔적들이었다. '검마 공의 비급서를 노린 게 아니었다니.....' 생각해보면 그와 겨뤘던 도권문주 사현이라는 자는 이미 검마의 검법을 알고 있었다. 극도신의 후예라 할 수 있는 그들은 어째서 비급서도 아닌 이 도흔이 새겨진 팔과 인피를 가져가려고 했을까? 그것이 의문이었다. * * * 사건이 벌어진 이날 밤은 마교 성내 전체가 어수선했다. 호법가의 무사들은 숨어있는 적이 없는지 마도관을 수색하고, 죽은 비급 서재의 경비 무사들의 시신을 수습했다. 교내에 침투해있을 지도 모를 적을 찾기 위해 날밤을 새어가며 장로들을 필두로 모든 전력이 수 색작업을 가졌지만 네 명 이외에는 어떠한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것은 당연했다. 마교는 모든 교인들에게 신분 직위패를 지급해서 그 기록을 남겨두었고, 성내로의 진입하는 것 역시도 철저히 통제하기 때문에 보통 경로로는 숨어들기 힘들었다. 단일 세력의 강점이라 할 수 있었다. 한편 연회장은 다른 곳보다도 살벌할 정도로 수백 명의 무사들이 철통 경비를 서면서 한 무리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들은 정파 무림맹의 귀빈들이었다. “후우, 언제까지 이곳에 억류되어 있을지 난감하구려.” 칠웅주 모용강이 정좌한 상태로 불만을 내뱉었다. 정파 무림맹의 손님들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연회장에 억류되어서 하룻밤을 보내야만 했다. “동맹을 위해서는 결백을 밝혀야 하니. 모용 웅주. 조금만 참으시게.” 답답하기는 육웅주 풍청운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틈바구니에 적이 숨어서 침투했기에 아무리 불만스러워도 이런 마교의 결정에 항의를 할 수가 없었다. 만약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무림맹 역시도 같은 처분을 내렸을 것이다. 초조해하는 두 사람에게 제갈소희가 당부했다. “저희가 알고 있는 사실을 전부 말했으니까. 마교 측에서도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내릴 겁니다. 일단은 두 분 웅주님들께서는 조금만 더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알겠네. 제갈 군사.” "크흠. 알겠소." 이번 일에 연루된 범인 네 명은 전부 제갈소희의 호위 무사들이었다. 최면 암시에서 완전히 벗어난 그녀는 모든 것을 떠올렸다. ‘설마 나를 이런 식으로 이용할 줄이야.’ 동맹을 위해서 무림맹의 대표로 파견된 그녀는 은밀히 호위 무사들을 이끌고 남하하는 중이었다. 안휘성 탈환에 실패하고 강서성에서 체류 중인 두 웅주와 합류하기도 전에 제갈소희는 정체모를 자들에게 습격을 당하고 만다. 그런데 습격을 당하고 나서까지는 기억이 났는데,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어느새 정파 무림맹의 행렬에 합류하고 있었다. 더욱 기이한 것은 최면이 풀릴 때까지도 적이 분장한 네 명의 호위 무사들을 원래 자신의 호위무사로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야기는 했지만....' 이것만으로 모든 오해를 풀 수는 없었다. 다른 것보다도 암시에 걸려서 소교주를 공격한 것 자체가 치명적으로 작용해, 쉽게 억류가 풀리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영민한 그녀로서도 기다리는 것 외에는 별 도리가 없었다. 다만 이 사건만큼이나 염려되는 한 가지가 있었다. ‘웅주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이라 정보를 차단하고 은밀히 이동했는데, 나를 노렸다는 것은.....’ 어쩌면 무림맹의 십칠웅주 중에 적의 간자가 포함되어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러지 않고는 그녀의 은밀한 이동경로를 파악해서 이런 대담한 계획을 세울 방법이 없었다. ‘어서 빨리 결백을 증명하고서, 동맹을 무사히 결성하고 돌아가야 하는데.....’ 진척이 되지 않았다. 초조해진 그녀의 시선이 연회장의 좌측 편에 모여있는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그들은 어젯밤 최면에 걸려서 마교인들을 닥치는 대로 공격했던 화산파의 제자들과 모용세가의 무사들이었다. 마찬가지로 최면에 걸린 마교 측의 종주들은 다른 곳에 격리되어 있었다. “흐음.” 그런 무사들을 진맥하며 여러 도구를 사용해서 조사하는 이들이 있었다. 밤새 교인들이 마교 성내 전체를 샅샅이 수색을 할 동안에 마의 백종우 역시도 내성 의원들을 데리고 와서 최면에 걸린 자들을 살피고 있었다. ‘전혀 문제가 없다.’ 밤새 진맥을 하면서 백종우와 제자들은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다. 환술에 걸렸다고 해서 신체적 변화가 있을 거라 여겼지만 맥이 약간 느리게 뛰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증상도 없었다. “마의 어른.” 백종우에게로 연회장의 음식물을 조사하던 의원 한 명이 다가왔다. “어찌 되었느냐?” “연회장의 모든 주류나 음식물에도 특별한 약물이나 독이 들어있지는 않습니다.” “역시로구나.” 백종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면에 걸렸던 자들의 몸에도 특별한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으니 음식물에 뭔가 문제가 있을 리가 만무했다. 내성으로 들이는 음식들은 철저한 검식을 마치고 올라오는 것들이었다. ‘소교주의 판단이 틀렸다.’ 의원인 그가 이렇게 조사를 온 것은 천여운 때문이었다. 천여운은 교주에게 아뢰어 최면 암시를 촉발한 약물 같은 것이 있을 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처음 연회장에서 최면 암시가 걸린 것을 발견한 천여운의 말이었기에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고 여겼기에 교주는 마의를 불러서 조사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밤새 조사한 결과는 허탕이었다. “후우.....”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었다. 그때 연회장에 있던 무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연회장으로 들어오는 이에게 인사했다. “소교주님을 배알합니다!” 천여운이 연회장에 나타난 것이었다. 마침 잘되었다는 생각에 백종우가 수척한 얼굴로 그에게로 다가왔다. “소교주님을 뵙습니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백 의원님. 진척은 있으십니까?” 천여운의 질문에 백종우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말씀하신대로 환술에 걸렸다는 자들과 연회장의 음식물을 살폈지만 아무래도 말씀하신 약물에 의한 것은 아닌 듯합니다.” “음식물에 아무 것도 없었다고요?” “그렇습니다.” 마의 백종우의 말에 천여운이 인상을 찡그렸다. 뭔가 암시를 촉발한 독이나 약물이 있을 거라는 예상이 틀렸다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박수 한 번에 암시를 걸었을까?’ 그러기에는 이상했다. 최면 암시가 그런 식으로 쉽게 걸리는 것이었다면 연회장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전부 걸렸어야 맞았다. “제가 한 번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지요.” 말은 그렇게 답변했지만 백종우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밤새 이 많은 의원들이 살펴보았다는 데도 약물일 거라 생각하는 것을 보면 고집이 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시간 낭비다.’ 백종우는 의원들에게 일러서 철수 준비를 하게 하였다. 어차피 정말 환술에 의한 것이라면 약물과는 관련이 멀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천여운은 연회장의 한복판에 서서 원형 식탁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음식물에는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했다. 눈에 띠게 독을 하독 한다면 이 많은 고수들 중에 한 사람도 눈치 채지 못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참을 생각에 잠겨있던 천여운이 원형 식탁 위에 있는 술병과 술잔을 바라보았다. 어젯밤 최면술사가 암시를 걸 때 술잔으로 술병을 부딪쳤었다. -탁! 천여운이 술잔을 들어 보았다. ‘대체 이걸로 무슨 수로 암시를.....잠깐!’ 문득 술잔을 바라보던 천여운이 뭔가를 깨달았는지 술잔과 젓가락을 살폈다. ‘음식을 먹으려면 술잔이나 젓가락에 입을 대야 하잖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천여운이 나노에게 명했다. ‘나노 혹시 술잔이나 젓가락에 독이나 약물 같은 것이 묻어있는지 확인해줄 수 있어?’ [알겠습니다. 성분 분석을 위해 사용자의 손가락으로 물건들을 짚어주십시오.] 나노의 말에 천여운이 연회장에 있는 술잔들과 젓가락에 하나씩 손가락을 짚기 시작했다. 천여운의 알 수 없는 행동에 마의 백종우를 비롯한 의원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뭘 하는 거지?’ ‘술잔이랑 젓가락들은 뭐 하러?’ 도저히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 연회장에 있는 원형 탁자 위에 있는 그것들을 일일이 손가락으로 짚더니, 일부 술잔들을 거꾸로 뒤집어 놓았다. 그렇게 모든 탁자를 전부 돌아다닌 천여운이 연회장의 한쪽 편에 서있는 최면에 걸렸던 무림맹의 사람들에게 다가와서는 말했다. “어젯밤. 연회장에 앉았던 자리들은 기억하십니까?” “그, 그렇습니다만.” “그렇다면 어제 있었던 자리로 찾아가서 앉아주시기 바랍니다.” 왜 그러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결백을 증명해야 했으니,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어젯밤 연회장에 자신들이 착석했던 자리를 찾아갔다. ‘대체 뭘 하시려는 건지.....엇?’ ‘아닛?’ 인상을 찌푸리며 지켜보고 있던 마의 백종의를 비롯한 의원들의 두 눈이 커졌다. 놀랍게도 최면에 걸렸던 무림맹의 사람들이 앉은 자리의 술잔들이 전부 뒤집혀 있던 것이다. “이게 무슨?” “어떻게 저들이 앉았던 위치를?” 놀라하는 마의 백종우와 의원들에게 천여운이 탁자 위에 엎어져 있던 술잔 중 하나를 들고 와서 내밀었다. “술잔의 마시는 부위를 혀끝으로 살짝 맛을 보아주십시오.” “흠.......” 잠시 망설이던 백종우가 조심스럽게 술잔을 받아서 혀끝을 갖다 대었다. 그 순간 백종우가 떨리는 눈으로 술잔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 이건.....설마 양귀비?” 양귀비(楊貴妃) 이것을 즙액으로 건조시키게 되면 약물로 사용할 수 있다. 의원들이 외과 수술을 할 경우에 마취보조제로 쓰이는 것으로 중추신경을 마비시키기에 최면 작용을 일으킨다. ‘이 자가 노부가 알고 있던 그 소교주가 맞단 말인가?’ 얼마나 놀랐는지 백종우는 벙 찐 얼굴로 천여운을 얼굴을 바라보았다. < 42장 빚은 꼭 갚겠습니다. (1) > 끝 < 42장 빚은 꼭 갚겠습니다. (2) > 마교의 교주전. 성내에서 가장 화려하면서 웅장한 이 건물에 교주의 거처가 있다. 교주전 내에 있는 연공실에서 한 중년인이 온몸에 땀이 젖어서 걸어 나왔다. 그는 마교의 교주인 천유종이었다. 연공실의 입구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그가 양팔을 벌리자, 익숙한 듯이 상의를 탈의시켜서 뜨겁게 적신 수건으로 몸을 닦아냈다. -슥슥! "후후." 지쳤다는 듯이 무거운 숨을 내뱉는 교주는 자신의 우측 가슴부터 비스듬하게 내려오는 상처부위를 바라보았다. 어느 정도 몸 안에 있는 도경을 밖으로 배출 했는데도 여전히 후유증이 남아있었다. 적어도 열흘 정도는 계속 운기조식을 통해 원기를 회복해야만 도경에 의해 손상된 오장육부를 완치시킬 수 있을 것이다. 몸을 다 닦아낸 시종들이 새로운 옷을 갈아 입혀주자 교주는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곧장 어딘가로 향했다. 그곳은 교주전의 지하실이었는데, 여섯 개의 닫혀 있는 철문 중에 하나를 열고 들어가자 차가운 냉기가 내부에서 흘러나왔다. 교주가 등불을 밝히자 그 안에는 마도관 비급 서재 건물의 지하보고에서처럼 한옥석으로 벽면과 바닥이 이루어져 있었다. 그 안에 한옥석 탁자가 있었는데, 그 위에는 지하보고에 있어야 할 도흔으로 가득한 잘린 팔과 인피들이 올려 있었다. -슥! 교주 천유종이 도흔으로 가득한 팔을 만지며 눈을 감았다. 팔에 남겨진 도흔을 심상으로 그리게 되자 패도적인 도의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도흔만으로 도초를 떠올리는 것은 힘들지만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 자의 도에서 느껴졌던 도의(刀意)와 흡사하다.’ 이를 떠올리자 가슴의 상처부위가 욱신거렸다. 절강성에서 극도육무문의 세 명의 고수 중에 조법을 쓰는 자를 없애려고 할 때 갑자기 난입 한 자가 있었다. 그자는 앞서 세 명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자였다. 중원 오대고수의 일인이자 현경 초입의 고수인 교주 천유종이 불과 십 초식을 견디지 못할 만큼 상상을 초월하는 무위를 지녔었다. 초식의 한계를 벗어난 그 자는 특별한 식(式)이 없이도 천마검법을 파훼한 것도 모자라 그에게 부상을 입혔다. ‘.......그대는 아니군.’ 그 자가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었다. “큭!” -쩌저저저적! 교주가 손을 짚고 있던 한옥석 탁자에 균열이 일어났다. 그 자가 한 말을 떠올리자 그도 모르게 분노로 공력을 일으키고 말았다. 무슨 의미로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이 자신을 너무도 치욕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던 차였다. -쿵쿵! 누군가 철문을 두드렸다. “누구냐?” “마라겸입니다. 교주님.” “알겠다. 집무실로 올라가겠다.” “충!” 교주는 감정을 드러냈던 것을 가라앉히고서, 한옥석 방을 나가 위층에 있는 교주 집무실로 들어갔다. 집무실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대호법 마라겸이 뒤를 따라들어왔다. 화려한 석좌에 앉은 교주가 손을 들어서 보고하라 명했다. 마라겸이 지금까지 마교의 성내를 수색했던 과정과 교주가 명령을 내렸던 것들을 하나씩 차례대로 보고했다. 한참 보고를 듣고 있던 교주가 물었다. “그것은 어떻게 했지?” 그것이라고 지칭했지만 마라겸은 그것을 알아들었는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연회장에서 은밀히 회수한 옥병들은 십만대산 우절봉의 계곡에 폐기시켰습니다.” “아무도 찾을 수 없겠지?” “옥병을 물로 씻어내서 전부 깨서 계곡물에 던졌기 때문에 그럴 일은 없습니다.” “잘했다.” 연회장의 옥병들은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지금 연회장에 있는 음식물과 술병들은 조사를 위해 그대로 위치해 있었다. 그런데 대호법 마라겸은 그 중에 술이 담겨 있던 옥병을 빼돌려서 폐기시켰다고 말했다. 그것은 불과 어젯밤의 일이다. 최면에 걸려서 서로를 공격해대는 것이 마무리되고 천여운이 마도관에 적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말과 함께 먼저 그곳으로 향했을 때였다. 교주는 연회장에 있는 정파 무림맹의 사람들을 제압하게 하고, 장로들에게 성내를 봉쇄하라고 명했다. 그때 대호법 마라겸이 조용히 교주에게 옥병 하나를 가지고와 보고했다. ‘교주님. 술이 담긴 옥병에 뭔가 약물이 타있는 것 같습니다.’ ‘약물?’ 교주는 그것을 호법가의 무사들 중에 한 사람에게 복용하게 해보았다. 그랬더니 이것을 한 잔 마신 무사가 정신이 몽롱한 상태가 되어서 눈이 풀리는 것이 아닌가. 교주와 대호법은 이것이 저들이 암시에 걸리게 만들었던 원인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옥병들을 회수해서 마의에게 분석하게 하겠습니다.’ 대호법의 말에 교주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아니. 그럴 필요가 없어 보이는구나. 지금 빨리 옥병들을 회수해서 누구도 찾을 수 없게 폐기시켜라.’ “넷?” 교주의 말에 대호법이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반문했다. 이에 교주는 그 짧은 새에 자신이 생각했던 수를 대호법에게 말해주었다. ‘잘된 것일 수도 있다. 동맹 자리를 본교가 더 유리하도록 우위에 점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아......’ 교주의 한 수에 대호법이 신음성을 흘렸다. 설마 이런 상황에서 이것을 이용하리라고는 그 역시도 예상하지 못했다. 교주는 이 사건을 이용해 동맹을 결성하면서도 무림맹을 억누를 수 있는 명분을 얻어내려는 것이었다. ‘저들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 필요야 없지.’ 무림맹의 사람들만 암시에 걸렸다면 모를까 마교의 일부 종주들도 이에 걸렸다. 옥병에 약물이 타져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무림맹은 마교 측에서도 제대로 검수를 하지 않은 것으로 빌미 삼아 실책을 나누려고 들 것이다. 설사 최면술사가 연회장에서 약물을 탔다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옥병이 없다면 온전히 정파 무림맹에서 적을 이곳으로 끌어들여서 사달을 일으킨 것으로 저들을 억누를 수 있다. ‘명대로 하겠습니다.’ 이것이 옥병들이 바꿔진 전말이었다. 아무리 그것을 조사한다고 해도 지금 연회장에 있는 옥병들은 멀쩡한 술이 담겨 있었기에 무림맹 측의 결백을 풀어낼 수 없다. “마의와 의원들은 계속 조사하고 있는가?” “그렇습니다.” “이쯤하면 의원들을 물려도 되겠군.” 이것은 의도적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무림맹 측을 연회장에 억류시켜서, 그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공정하게 조사를 했다는 사실을 일부러 연출하기 위함이었다. 상대 쪽에는 무림맹의 두 머리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군사 제갈소희가 있었다. 소교주 천여운이 아뢴 것을 허락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 정도까지 조사에 성의를 다했다는 것을 보인다면 반론을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의원들을 물리게 하고 정파 무림맹의 사람들을 금옥으로 옮기도록...응?” 마라겸에게 다음 명령을 내리려던 교주가 집무실 쪽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에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집무실의 입구 쪽에서 호위 무사들이 고했다. “교주님. 마의가 알현하기를 청합니다.” “흠?” 철수시키라고 명을 내리려했는데, 본인이 먼저 온 것을 보면 더 이상 연회장에서 어떠한 증거도 나오지 않는다고 보고하기 위함인 듯 했다. ‘잘됐군.’ 교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오라 하였다. 집무실에 들어온 마의 백종우가 가지고 온 흰 천으로 가려진 쟁반을 옆에 내려놓고,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인사 올렸다. “마의 백종우가 삼가 교주님을 배알합니다.” “어서 오라. 그래 조사는 잘 되지 않은 것이냐?” 교주 천유종의 물음에 마의 백종우가 살짝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닙니다. 교주님! 원인을 알아냈습니다!” “뭣?” 백종우의 말에 교주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대체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단 말인가. 대호법 마라겸을 통해서 약물이 담긴 옥병들을 전부 폐기하게 하였는데, 원인을 알아냈다 고 하니 속내를 감추지 못했다. 백종우가 옆에 놓여있던 쟁반에 천을 벗겼다. 쟁반 위에는 술잔들이 놓여 있었는데, 그것을 본 교주의 눈빛이 흔들렸다. ‘잔?’ 이것을 본 교주는 아차 하는 마음이 들었다. 어젯밤에는 경황이 없어서 무림맹의 사람들을 강제로 억류하는 사이에 옥병들만을 교체하게 했는데 설마 술잔을 들고 올 줄은 몰랐다. 다행히 술잔에는 어떠한 것도 담겨져 있지 않았다. ‘아무 것도 담겨 있지 않다면 문제가 될 게 없지만....’ 그의 그런 불안함은 맞아들었다. 백종우가 술잔을 가리키며 교주에게 말했다. “술잔에 양귀비를 비롯한 다량의 환각을 일으키는 약재를 조합한 잔재들이 묻어있는 것을 발견 했습니다.” ‘이런.....’ 교주는 당혹감에 말문을 잃고 말았다. 술잔까지 처리하라고 하지 않은 것은 실책이기는 했지만, 술이 담긴 옥병에 문제가 없음을 발견했다면 이를 간과할 법도 했는데 찾아낸 것이었다. ‘마의에게도 언질을 했어야 했건만.’ 후회가 되었다. 차라리 그에게 미리 말해두어서 증거를 발견해도 모른 척하라고 했어야 했다고 생각되었다. 정파 무림맹의 사람들이 전부 지켜보는 앞에서 이뤄지는 조사였기에 자연스럽게 행해지도록 일부러 언질하지 않은 것이 사달을 일으켰다. 약물로 인해 벌어진 일에 교주의 심기가 불편했다고 판단한 마의 백종우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말했다. “그래도 소교주께서 영민하여 이것을 발견했습니다.” “....뭐라? 소교주가 이것을 발견해?” 소교주가 발견했다는 말에 교주의 인상을 찡그렸다. 마의가 이것을 보고한 것만으로도 정파 무림맹을 상대로 우위를 점하려던 한 수가 무너져서 어처구니가 없었던 교주였다. ‘이 녀석이.....’ 잠시 말이 없던 교주가 물었다. “.....그것이 정말 환술에 걸린 원인이 맞는가?” “그렇습니다. 이것을 복용하게 된다면 환각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환술에 능한 자가 암시를 건다면 충분히 확률이 높습니다. 내공이 약한 자라면 더더욱 그렇겠지요. 다만 한 가지 의문스러운 점은 술잔에 묻어있는 양으로는 모자랍니다.” 마의 백종우의 말이 계속되면 될수록 교주의 표정은 굳어져만 갔다. “더 많은 양을 복용해야 하는데 옥병 안에 들은 술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소교주께서 이것이 바꿔진 것일 수도 있다고 직접 내성에 있는 옥병의 재고 확인을...” “대호법!” “충!” 교주가 백종우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그것을 끊었다. 어젯밤에 일어난 사태의 원인을 알아냈는데도 불구하고 반응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챈 백종우가 입을 다물었다. “침입자들이 어떻게 환술을 걸었는지 그 원인을 알아냈으니, 정파 무림맹의 손님들의 억류를 풀어주도록 하라. 그리고 소교주도.....더는 조사를 멈추게 하도록 하라.” “명을 받듭니다.” 대호법이 먼저 집무실을 나가자 마의 백종우는 그제야 깨달았다. 교주는 처음부터 약물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심기가 불편할 때면 눈매가 가늘어지는 것은 교주 특유의 감정 표현이었다. "허어.....교주께서 은폐한 것이었구나.’ 사실 천여운이 옥병의 재고를 파악한다고 했을 때, 백종우는 교주를 배알해서 내성 음식물의 검수를 맡는 자들 중에 간자가 있을 지도 모른다고 보고하려 했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는 듯 했다. 한편 내성의 주방에서 숙수를 만나서 옥병의 재고를 파악하고 있던 천여운은 대호법 마라겸이 나타나면서 그것을 멈춰야만 했다. 간자가 있을 지도 모르기에 조사를 진행해야 한다고 말하는 천여운에게 마라겸은 교주가 세웠던 계획을 알려주었다. ‘그 상황에서 이것을 계획했단 말인가.’ 교주가 마도관에 있을 때부터 자신을 미끼로 이용할 만큼 계략에 능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점에선 참으로 대단하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교주의 이 한 수가 완벽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대호법께서는 처음부터 이 계획을 알고 계셨습니까?” 천여운의 물음에 마라겸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도 교주가 계획한 이 한 수가 무림맹과의 동맹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좋은 명분을 제공해주기에 동의하는 부분이었다. “옥병을 처리한 것도 대호법이겠군요.” “그렇습니다.” “술잔은 둘째로 놓더라도 저라면 옥병을 전부 폐기하지 않았을 겁니다.” “.....고견이 있으십니까?” “그것을 분석해서 대응할 수 있다면 적들이 똑같은 방법을 취하더라도 당하지 않을 테니까요.” “아!” 대호법 마라겸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 후까지 생각했단 말인가.’ 천여운의 말대로 그들이 썼던 약물을 분석했다면 차후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방비 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교주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을 그저 아쉽게만 생각했던 마라겸이었지만 천여운이 술잔에 남은 약물의 잔재를 발견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괜한 훈수를 뒀군요. 먼저 나가겠습니다.” -탁! 옥병을 내려놓고 내성 주방을 나가는 천여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마라겸의 눈빛은 묘했다. *** “아아!” 초조하게 기다리던 정파 무림맹의 사람들이 다행스러워했다. 결백이 증명되지 않으면 어떡해하나 노심초사하던 그들은 암시에 걸렸던 비밀이 밝혀지면서 연회장에 억류되던 것을 풀려날 수 있었다. “허허, 다행일세. 오해가 풀려서 말이네.” 육웅주 풍청운의 말에 칠웅주 모용강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불만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흥! 다행이긴 하지만 어차피 동맹을 파기할 수 없는 상황이니, 저들도 본맹과 싸운다는 자충수를 둘 수 없기에 그런 걸 수도 있소.” "그 말도 일리가 있구만." 극도육무문이라는 최악의 적을 앞에 두고 두 세력이 상쟁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마교에서 자충수를 두진 않을 거라 여긴 무용강이었다. 하지만 군사인 제갈소희의 생각은 달랐다. ‘아니야. 이번 일을 빌미로 마교는 본맹과의 동맹에서 우위를 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한 발 물러난다는 것은.....’ 천여운의 도움이 컸다. 그가 암시의 비밀을 밝혀내주지 않았다면 무림맹은 난처한 상황에 빠졌을 것이다. ‘소교주.... 천여운.’ 어젯밤에도 자신이 암시에 걸려서 우발적인 행동을 벌인 것부터 시작해 하마터면 동맹의 연회장이 피로 물들 뻔한 것을 천여운이 막아 냈다. 그렇게 되었다면 극도육무문에서 의도한 대로 모든 것이 이뤄졌을 것이다. ‘그는 대의를 택했다. 마교에도 이런 큰 인물이 있었다니!’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제갈소희는 천여운의 행동에 내심 큰 감격을 받았다. 그러는 한편으로 그가 영리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맹에 우위를 점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본 맹에 빚을 지게 만들다니. 어쩌면 그야말로 마교의 요주의 인물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그런 생각은 착각에서 비롯되었지만 천여운은 본의 아니게 무림맹의 제 이 군사인 제갈소희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 빚은 꼭 갚도록 하지요. 천여운 소교주.’ < 42장 빚은 꼭 갚겠습니다. (2) > 끝 < 43장 전력을 늘려라 (1) > 연회장의 사건이 터진 후, 사흘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마정(魔正) 동맹은 정상적으로 체결되었고 성내의 교인들에게도 공표되었다. 극도육무문이라는 새롭게 등장한 적을 상대하기 위해서라는 당위성을 부여했지만, 긴 세월 동안 정파 무림맹과 대립을 해오던 교인들의 분위기는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본래라면 닷새는 더 머무르기로 예정이 되어있던 정파 무림맹의 사신단은 마교 내의 그런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이틀이 지난 이른 아침에 출성했다. 물론 실질적인 이유는 달랐다. ‘본 맹에 극도육무문의 간자가 있을 지도 모릅니다.’ 군사인 제갈소희의 제기한 의견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두 웅주들은 쉽게 믿지 못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정파 무림맹을 지탱하는 십칠웅주들 중에 간자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말에 동의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납치된 것부터 시작해 여러 미심쩍은 부분을 조곤조곤 설명했고, 결국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지한 사신단은 빠른 철수를 결정한다. ‘이건 본맹의 맹주님께서 드리는 초대장입니다.’ 사신단의 대표인 제갈소희는 견고한 동맹을 위해 마교 측에도 신년에 있을 무림대회에 참석해달라는 무림맹주의 초대장을 전달하고 떠났다. 그렇게 무림맹의 사신단이 떠난 후 마교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미시(未時) 초 비환귀종의 객당. 그곳에는 십 장로 연무화, 그리고 십일 장로 환의, 고왕흘, 문규, 허봉, 사마착, 백기 등이 모여서 회의를 하고 있었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천여운이 소교주로 등극하면서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다소 심각했다. 허봉이 연신 불만스럽다는 듯이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아니. 대외전에서 다른 것들은 전부 공표하고 주군께서 소교주로 등극한 것은 어째서 밝히지 않은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네요.” 허봉의 말에 다들 인상을 쓴 채 침묵으로 일관했다. 연회장의 사건으로 미루어졌던 대외전의 공표가 오늘 정오에 있었다. 그때 교주 천유종이 직접 나와서 모든 교인들이 모여 있는 앞에서 여러 가지 공표를 했는데, 유일하게 천여운의 소교주 등극에 대한 이야기만 생략했다. 물론 교내에 있는 모든 종주들이 알고 있는 사항이기에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었지만 이것을 공표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저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네? 저만 그런 건가요? 다들 아무렇지 않으신 겁니까?” 가만히 있던 고왕흘이 입을 열었다. “사실.....허봉의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주군. 뭔가 이상합니다.” 천마신교의 일인자인 교주가 직접 공표한 것이었기에 다들 조심스러웠지만, 계속된 허봉의 불만에 하나 둘씩 속내를 밝혔다. “대외전의 공표는 교내로 대전 회의에서 결정된 주요 안건들을 발표하는 자리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교주 임명 사실만을 빼놓았다는 건....” 사마착은 차마 마지막 말을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 뒷내용을 다른 이가 말해주었다. “교주님의 심중에 변화가 생겼느냐는 말이 아닌가요?” “아....환 장로님.” 십일 장로 환의였다. 마도관 시절부터 수하가 된 고왕흘, 허봉 등은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좋지 않을 천여운을 생각해서 그 말을 뱉지 못했는데 환의는 아니었다. 여성스러운 말투와 달리 그는 화법에 있어서 직설적이었다. “저희 장로들도 여러분들의 생각과 차이가 없답니다. 안 그런가요?” 환의의 물음에 인피면구를 벗고서 장원에 대타를 세워두고 온 연무화가 동의하는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여운을 지지하는 세 장로들 역시도 불과 반 시진 전의 공표가 의아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소교주 쟁탈전, 입회자까지 절차를 밟아서 오른 자리인데, 그것을 교주님의 심중만으로 뒤집을 수 있는 겁니까?” 백기가 궁금해졌는지 환의에게 물었다. 이에 환의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대답했다. “글쎄요. 지금까지는 그런 일이 있었다고 듣지는 못했군요. 하지만......교주님의 권한이라면 여섯 종파가 반발을 하지 않는다면 뒤집지 못할 것도 없지요.” 그런 사례가 없다는 말에 얼굴이 밝아지던 수하들의 안색이 뒤에 이어지는 말에 일제히 어두워졌다. 환의가 말하는 바를 알아들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행해진 소교주를 뽑는 방식은 여섯 종파의 소교주 후보자들끼리만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중간에 교주라고 해도 결정된 사항을 바꾸기 어려웠다. 하지만 천여운은 여섯 종파의 출신이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큰 반발이 없다면 소교주 임명을 철회할 수도 있다는 말이군요.” 그때 묵묵히 듣고 있던 천여운이 입을 열었다. 모두가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는데, 천여운에게서는 특별한 감정 변화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남의 일처럼 무덤덤하게 듣고 있었다. 환의가 그런 천여운을 빤히 바라보다가, 평소보다 진지해진 얼굴로 말했다. “조금 후에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지금 하는 편이 좋겠군요.” “.....무엇이죠?” “소교주님께서 현마종의 종주인 무진원의 처리하신 후에 그가 가진 남은 현마종의 전력들을 회유하기 위해서 계속 접촉을 시도했습니다.” 그것은 천여운도 알고 있는 사항이었다. 환의는 남은 현마종의 전력을 없애면 마교의 전력 감소 면을 들어서 회유를 권했다. 천여운도 그것에 동의해서 이 일은 환의에게 일임했었다. “그런데 어젯밤부로 현마종의 장원이 텅 비어 있었습니다.” “비어....있었다고요?” 하룻밤 새에 현마종의 장원이 비어있다는 말에 천여운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뭔가 문제가 있었다면 교내가 소란스러워졌을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천여운이 물었다. “남은 네 종파에서 움직인 겁니까?” 천여운 측에서 흡수하고 싶어 할 만큼 남은 네 종파 역시도 주인을 잃은 현마종의 전력을 탐내기는 마찬가지였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그럼?” “교주전에서 움직였습니다.” “교주전이라면....” 마교의 내성에는 두 개의 무력 집단이 존재한다. 하나가 호법가의 무사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교주전에 소속된 무사들이었다. 호법가의 무사들은 세 호법들이 이끌고 있는 무력집단인 반면에 교주전 소속의 무사들은 철저한 호위 무사이면서 교주 직속의 무사들이었다. “현마종의 남은 전력의 절반은 검마종으로, 그리고 그 절반은 도마종에 배속되었습니다.” 이 말에 천여운을 비롯한 수하들이 인상이 굳어졌다. 환의의 말대로라면 교주가 직접 손을 써서 검마종과 도마종에 힘을 실어줬다는 말이 아닌가. 교주전에서 직접 나섰다면 현마종의 수장을 처리한 천여운에게 남은 세력을 복속시키는 것이 맞았으나 전혀 예상 밖의 행보를 보인 것이었다. “이건.....명백하게 소교주님을 견제하는 것이 아닙니까?” 사마착이 평소보다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까지는 여섯 종파만을 적으로 생각했던 천여운의 수하들에게는 이런 교주의 의중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교주님께서 그러시다니....” 문규가 입술을 질끈 깨물고 천여운을 살펴보았다. 자신들도 황당하면서도 기분이 나쁜데, 그 아들인 천여운은 얼마나 심기가 불편할지 걱정되었다. 하지만 천여운의 사고는 이들과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견제.....아니야. 이건 단순히 견제가 아니라 균형을 맞추고 있는 거다.” “네?” 천여운이 지금까지 바라본 교주는 철저하게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자였다. 처음부터 견제만을 위한 목적이었다면 애초부터 소교주가 되지 못하도록 막았을 테지만, 대전 회의에서 직접 소교주로 임명했다. 그러면서 천여운 쪽에 힘이 실리면서 기세가 넘어가는 듯 했다. “두 종파의 힘을 강화시켜주면서 나를 견제하게 함으로써 균형을 맞추고 있다. 대외전에서 소교주 등극을 공표하지 않은 것 역시.....” 네 종파에게 여전히 기회가 있다고 공표한 셈이었다. 천여운이 소교주의 자리에서 실각될 수 있다고 네 종파에 희망을 주면서 그들이 천여운에 대한 한풀 꺾인 전의를 살려주었다. “나와 네 종파가 서로 부딪치기를 부추기는 것이다.” 힘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균등해야 전의를 가질 수 있는 법이었다. 아무리 네 종파라고 해도 갈수록 확률이 없는 싸움을 하려고 들진 않을 것이다. “어, 어떻게 교주님께서 그런.....” 허봉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결국 교주는 천여운을 소교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패로 여긴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교주님의 본질을 잘 파악했군요.’ 십일 장로 환의나 십 장로 연무화는 이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현 교주인 천유종은 참으로 무정한 인물이었다. 그에게는 혈족, 혈육이라는 정이 존재하지 않았고 모든 것이 교권을 강화하고 지키기 위한 패에 불과했다. ‘교주님이 아군이 아니라니.....’ ‘이걸 대체 어찌 해야 한단 말인가.’ 교주의 심중을 짐작하게 되자 분위기가 더욱 무거워졌다. 그렇게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지던 차에 천여운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한 사람씩 눈을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여기 모여 있는 모든 분들에게 여쭙고 싶습니다.” “?” “만약.....어떤 일이 있어도 나를 믿고 따라줄 수 있겠습니까?” “!!!” 천여운의 마지막 말에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천여운은 지금 이들에게 교주와 부딪치더라도 자신을 따라줄 수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었다. 여기에 모여 있는 모든 사람들은 소교주가 될 천여운에게 충성을 맹세한 이들이었지만, 그것이 현 마교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교주를 배척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지금의 본교는 많은 것이 잘못되었습니다. 나는 다시 본교를 예전의 천마 조사님께서 개파 하셨던 시절로 돌리고 싶습니다. 그것이 설사 본교의 현 하늘과 부딪치는 일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한 번 숨을 고른 천여운이 그들에게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믿고 따라주십시오.” -탁! 천여운이 그들에게 포권을 취했다. 한 점의 흔들림이 없는 천여운의 곧은 눈빛에 모두가 말문을 잃고 말았다. ‘주군께서 결의 하셨구나!’ ‘교주님과 부딪치는 것도 불사하시겠다는 것인가.’ 한참 동안 적막이 흐르던 객당에 누군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천여운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그는 바로 허봉이었다. -탁! “무슨 섭섭한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저는 주군이 어떠한 길을 걷는다고 해도 무조건 따를 것입니다.” 이미 어떠한 일이 있어도 천여운을 따르기로 결심했던 허봉이었다. 허봉의 그런 행동은 계기가 되었다. 곧바로 고왕흘이 자리에 일어나서 포권을 취하며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역시 허봉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내가 어찌 한 입으로 두 말을 하겠습니까? 그것이 설사 수 라의 길이 되던, 가시밭길이 되어 온몸에 피가 흐를지언정 주군을 따르겠습니다.” 뜨거움이 솟구치게 하는 고왕흘의 결의가 담긴 말에 남은 사람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두 장로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천여운에게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여 다시 한 번 충성을 맹세했다. “저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주군을 따를 것을 맹세합니다.” -꾹! 천여운의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어쩌면 네 종파뿐만이 아니라 교주와 부딪칠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누구 한 명은 이탈할 지도 모른다고 여겼던 천여운이었지만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따라준다고 하니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렇게 이번 대외전의 공표는 천여운과 수하들을 더욱 굳건하게 만드는 자리가 될 수 있었다. 뜨거워졌던 분위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고 천여운은 지금까지 여섯 종파를 상대하기 위해 계획했던 모든 것들을 전면 철회했다. “교주님이 네 종파에 힘을 실어주었으니, 그에 맞게 움직여야겠습니다.” “고견이 있으십니까? 후후후.” 환의의 질문에 천여운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균형을 맞추려고 했으니, 저는 그것을 깨야겠습니다.” * * * 마교 성내의 서북쪽에 자리하고 있는 마룡장종의 장원. 지금은 네 종파가 되어버린 여섯 종파에 버금간다는 명성에 걸맞게 웅장하면서 큰 규모의 장원이었다. 조용했던 장원의 내당 정원을 가로질러 누군가 급하게 종주의 집무실 앞으로 뛰어왔다. 급하게 뛰어와서 거친 호흡을 내뱉는 사내가 집무실 문 앞에서 고했다. “헉헉! 조, 종주님! 경비 무사인 부송입니다!” “무슨 일이느냐?” “소, 소교주님께서 종주님을 뵙기를 청하십니다.” “뭣?” 집무실에 앉아서 서적을 읽고 있던 팔 장로 문연이 놀란 얼굴로 문을 열고 나왔다. < 43장 전력을 늘려라 (1) > 끝 < 43장 전력을 늘려라 (2) > 마룡장종의 외당과 내당의 경계지점에 자리한 객당. 객당은 부랴부랴 손님을 맞이할 준비로 시종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소교주가 방문한 것이기에, 허투루 준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객당을 꾸미고 다과를 준비하는 동안 동행한 문규가 넓은 마룡장종의 정원을 소개하면서 둘러보고 있는 중이었다. 나이가 지긋한 마룡장종의 종주인 문연의 유일한 취미 생활은 정원을 가꾸는 것이었다. 문연은 조경(造景)에 조예가 깊어서 정원은 장식물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조경에 조자도 모르는 제가 봐도 엄청 멋지네요.” 허봉이 정원을 둘러보며 연신 우와우와 하면서 탄성을 흘렸다. 그만큼 마룡장종의 정원은 마교의 내성에 있는 정원을 제외하면 가장 잘 가꾸고 아름다웠다. “헤헤 그렇죠?” 문규가 정원을 둘러보면서 감탄하는 일행들을 보면서 뿌듯해했다. 마룡장종으로 오게 된 일행들은 호위를 맡고 있는 십 장로 연무화와 허봉, 백기였다. 물론 문규는 마룡장종의 종주인 문연의 손녀이기 당연히 동행했다. 그렇다면 다른 이들은 어디에 있을까? 같은 시각 그들은 나누어져서 움직이고 있었다. 전력을 늘려야 한다는 천여운에 의견에 동의한 십일 장로 환의는 구 장로 사마의와 함께 육 장로이자 몽환검종의 종주 몽오를 만나러 갔다. ‘괜찮겠습니까?’ ‘사마 장로가 육 장로와 마도관의 동문이면서 막역지우라 들었습니다. 소교주님 혼자서 모든 일을 하실 수는 없으니, 육 장로는 저희들이 설득해 보겠습니다. 후후후.’ 남은 고왕흘과 사마착은 환의에게 받은 각 종파의 세력표를 기준으로 네 종파의 산하에 속해있지 않은 중립 종파들을 찾아다니면서 영입하기로 하였다. 그들 중에서 가장 말발이 좋은 고왕흘이 이를 맡았는데, 원래는 허봉을 데려가려 했지만 이번에는 절대로 양보하지 못한다며 천여운에게로 합류했다. ‘백기도 데려가십시오. 주군.’ ‘둘만으로 되겠나?’ ‘괜찮습니다. 하하하핫.’ ‘......잘난 척은.’ ‘크흠! 주군을 잘 보.필.해.서 다녀오게나. 백기.’ 서로를 동료이면서 호적수로 여기다 보니, 백기와는 늘 티격태격하는 고왕흘이기에 결국은 사마착과 함께 움직이기로 하였다. 그렇게 문규의 안내를 받으며 정원을 돌아다니던 차였다. 팔 장로 문연이 직접 그들을 데리러왔다. 황궁의 대학사를 보는 것처럼 백발에 고풍스러운 품격이 있어 보이는 노인이 바로 문연이었다. 풍채는 젊은 백기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만큼 건장했다. “팔 장로 문연이 소교주님을 뵙겠습니다.” 두 손을 모아서 고개를 숙이는 문연에게 천여운도 포권을 취하며 인사했다. “팔 장로님을 뵙습니다.” 그들은 초면은 아니었다. 대전 회의 때도 봤었고, 내성 연회장에서도 얼굴을 마주한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꽤 큰 사건이 벌어져서 문연에게 단단히 각인이 된 천여운이었다. ‘아직도 인피면구를 쓰고 있다니?’ 인사를 하고 난 문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문규에게로 향했다. 마도관을 나왔다고 하여서 이제 인피면구를 벗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했었는데, 동료들이 아직 모른다고 부끄러워했던 그녀였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인피면구로 얼굴을 가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흠흠.’ 문규도 그런 문연의 눈빛을 눈치 챘는지 괜히 시선을 회피했다. 문연이 내심 혀를 차면서 천여운에게 말했다. “제가 직접 소교주님을 객당으로 모시겠습니다.” “시종을 보내셔도 괜찮은데, 문 장로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존귀한 분이 오셨는데 그럴 수야 있겠습니까? 허허허, 가시지요.” 문연이 천여운의 옆에 서서 객당으로 길 안내를 하였다. 그렇게 넓은 정원을 벗어나 객당으로 향하고 있는데, 마룡장종의 대문을 지키는 경비무사 부송이 황급히 달려왔다. 아무래도 다른 손님이 찾아온 듯 했다. “조, 종주님.” “무슨 일이느냐?” 문연의 물음에 경비 무사 부송이 답했다. “지금 대문 밖에 삼 장로님과 사 장로님, 그리고 천무금 공자님이 지금 당장 뵙기를 청합니다.” “뭐라?” 뜻밖의 손님에 문연이 인상을 찡그렸다. 하필 소교주인 천여운이 있는 시점에 네 종파인 그들이 찾아온 이유가 무엇일까? 먼저 찾아온 것은 천여운이기는 했지만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소교주가 아니라고 해도 천무금 역시도 마교의 공자이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로군.’ 마도관에서도 폐관 수련에 들어간 이후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녀석이었다. 오 단계 시험을 치르다가 탈락했다고 들었다. ‘공교롭군. 이 시점에 찾아오다니.’ 왠지 느낌상으로 그들의 목적도 자신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손님의 입장이기에 가타부타 나설 일은 아니었다. “허어. 이것 참....” 현 소교주와 네 종파와의 관계를 잘 알고 있기에 어찌해야 할지 망설이는 문연에게 천여운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장로님께서 편하신 대로 하시지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천여운이 먼저 양해해준 덕분에 한결 편해진 문연이 손님들을 객당의 다른 건물로 모시라고 했다. 그리고 다시 객당으로 천여운 일행을 안내했다. 객당 앞에는 정원과 작은 연못 있었는데, 그 앞에 누각(樓閣)이 멋들어지게 자리 잡고 있었다. 누각 밑에 원형 탁자에 다과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멋지군요. 문 장로님이 조경의 조예가 깊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닌 것 같습니다.” 말수가 적은 천여운이었지만 칭찬에 인색한 것은 아니었다. 칭찬을 듣고서 기분이 나쁠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기분이 한결 좋아진 문연이 웃으면서 말했다. “허허허, 이것 참. 매일 소일거리로 하던 것을 칭찬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다과를 준비했으니, 드시면서 담소를 나누시지요.”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천여운과 일행은 문연을 따라서 누각 위로 올라갔다. 누각 아래에 있는 원형 탁자 위로 전병부터 시작해 여러 간식들이 있었다. ‘오옷! 이번에는 무난하구나.’ 허봉의 입 꼬리가 헤벌쭉 올라갔다. 지금까지 장로들의 장원에 들릴 때마다 매번 일이 터졌었기에 왠지 모르게 불안해했던 허봉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문규도 있고 느낌이 좋았다. ‘그러고 보니까 지난 번에 사무종에 들렸을 때는 사마 장로님께서 그 여식과 주군을 붙여주려고 했다고 들었는데, 이번에도 또 그러진 않겠지?’ 허봉이 듣기로는 마룡장종의 종주에게도 손녀가 있다고 알고 있었다. 문규가 자신에게 이란성 쌍둥이 동생이 있다고 했으니 아마도 여동생이라 짐작되었다. 문연이 박수를 치자 여시종들이 찻잔에 뜨거운 찻물을 따랐다. -조르르륵! “그럼 담소를 나눠볼...” 문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객당의 소문(小門)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이, 이러시면 곤란하옵니다. 지금 다른 손님이...” “허어, 급한 일이라지 않았느냐.” 시종들이 소문 안으로 들어오려는 한 사내들을 만류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기어코 객당 쪽으로 들어왔다. “응?” 문연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은 다름 아닌 삼 장로 부철용과 사 장로 자금경, 도마종의 후보자였던 천무금이었다. 시종이 옆 건물로 안내를 하고 있었는데, 방향을 틀어서 억지로 밀고 들어온 그들의 눈빛에는 안도감이 서렸다. ‘아직 늦지 않았구나.’ 그들은 내심 이야기가 많이 진행되었을까 걱정했던 차였다. 하지만 분위기를 보아하니 천여운 일행도 이제 갓 자리에 앉은 걸로 보였다. ‘공교롭기 짝이 없구나.’ 사실 이들은 천여운과 마찬가지로 마룡장종을 산하의 세력으로 회유하기 위해서 방문했다. 그런데 자금경의 생각대로 공교롭게도 그 날이 겹친 것이었다. 예법에 어긋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혹시나 마룡장종의 종주마저 천여운에게 넘어갈 것을 우려하여 억지로 밀고 들어온 셈이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소교주님.” 천여운이 차가운 눈빛으로 삼 장로의 일행들을 한 번 스윽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문연이 거듭 양해를 구한 후에 장로들에게 다가갔다. 문연이 그들에게 가볍게 포권을 취하며 먼저 인사부터 했다. “두 분 장로님과 천 공자님께 인사드립니다.” 이에 세 사람도 인사를 하려하는데, 문연이 곧장 불쾌하다는 목소리로 본론을 꺼냈다. “세 분께는 먼저 손님이 계셔서 잠시 기다리시기를 청했는데, 이 어찌 무례한 행동을 하십니까?” 그런 문연에게 삼 장로 부철용이 능청스럽게 답했다. “소교주님께서 계시다기에 본교의 장로 된 자로 인사를 드리지 않을 수가 없어서 실례를 저지 르게 되었소.” “소교주님을 말이오?” 뜻밖에 소교주인 천여운을 언급하자 문연의 말문이 막혔다. 마교에 있어서 후계자인 소교주는 교주 다음인 이 인자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 그에게 인사를 올리기 위해서 객당으로 들어왔다고 말을 하니 더 이상 무례를 꼬집기도 모호해졌다. “소교주께 인사를 드려도 되겠소?” “......그리 하시지요.” 문연이 마지못해 허락하자 두 장로와 천무금이 누각으로 다가왔다. “두 장로께서 소교주님께 계시다고 하셔서 인사를 드리러 왔다고 합니다.” ‘인사라.....’ 뻔한 수작에 천여운이 냉담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두 장로가 기다렸다는 듯이 천여운을 향해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삼 장로 부철용이 소교주님을 뵙습니다.” “사 장로 자금경이 소교주님을 뵙습니다.” 마지막은 천무금의 차례였는데, 잔뜩 인상이 구겨진 것으로 보아 차마 고개를 숙여서 인사를 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한 듯 했다. 불과 몇 년 만에 상하 관계가 완전히 뒤바뀐 셈이었다. ‘젠장. 내가 이딴 천한 놈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다니.’ 하지만 장로들마저 자존심을 죽이고 인사를 했는데 혼자 예법에 어긋날 수는 없었다. 설사 그를 싫어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잠시 망설이던 천무금이 고개를 숙이며 얼굴이 상기되어서는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소.....교...주님을 뵙...습니다.” 천여운은 그런 천무금을 무시하고서 두 장로를 향해 가볍게 포권을 취했다. ‘젠장.’ 무시를 당한 천무금은 불쾌했지만 입술을 질끈 깨무는 것으로 참았다. 서로가 적대관계였지만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나누는 상황이 우스웠지만 이것은 또 하나의 전쟁이었다. 인사를 마친 삼 장로 부철용이 먼저 입을 열었다. “소교주님께서도 문 장로에게 볼 일이 있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그러시군요. 저희도 문 장로님께 들을 답변이 있어서 왔습니다.” ‘답변?’ 천여운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답변이라고 한다면 그 전에 뭔가 대화가 진척되었었다는 말이 아닌가. 적당히 돌려보내려고 했는데 이런 식으로 말을 하니 무슨 말이 오갔었는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정작 팔 장로 문연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허어,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러자 사 장로 자금경이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것 참. 난감하구려. 얼마 전에 문 장로께 매파를 보냈었는데 벌써 잊으셨소?” ‘응?’ 매파라는 말에 문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조부인 문연을 바라보았다. 대체 이건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자금경의 말을 들은 문연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아니. 그것은 분명히...” “그때 문 장로께서 분명 숙고하겠다고 하지 않았소?” 그 말에 문연은 내심 기가 찼다. 여섯 종파 중의 하나인 복마종에서 온 매파에게 무작정 거절한다고 말하는 것은 경우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숙고하겠다는 표현을 한 것인데 이를 이렇게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 기회를 잡았다 싶었는지 삼 장로 부철용이 말을 이어갔다. “그 말씀 때문에 천무금 공자께서 직접 문 장로의 여식을 보러 온 것이오.” 천무금이 두 손을 모으며 문연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허어!” 처음부터 두 장로들은 이런 식으로 몰아붙이려고 작정한 듯 했다. 문연은 교주의 자식인 천무금이 있는 앞에서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단박에 거절하기도 애매했다. ‘이를 어찌 한단 말인가.’ 분명 천여운이 마룡장종을 찾은 것은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위함이 틀림없다. 그런데 여기서 혼례에 관해서 긍정적으로 고려해보겠다는 식으로 답변하게 된다면 양 측을 상대로 줄타기를 하는 셈이 되어버린다. ‘후후후, 팔 장로 여기서 줄 선택을 잘해야 할 것이오.’ 삼 장로 부철용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감돌았다. 무게가 다를 것이다. 단순히 충성 맹세를 통해 수하로 거두려고 하는 천여운보다도 혈연관계를 통해서 굳건한 관계를 제시하는 쪽이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던 천여운이 입을 열었다. “문 장로님.” “네, 소교주님.” “혼례라는 것은 당사자의 의견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까?” 그 말에 난처해하던 문연이 그의 의도를 알아챘는지 밝아진 얼굴로 동의했다. “허허허, 그렇지요. 저는 그 아이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선택권을 돌림으로써 상황을 벗어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쉽게 포기할 그들이 아니었다. 사 장로 자금경이 말했다. “호오, 더 잘 되었군요. 그럼 문 장로의 손녀 분을 불러서 천 공자님을 만나게 한다면 호불호를 알 수 있겠지요.” 문연의 말에 오히려 그들은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의사가 중요하다고 말했지만, 마교에서 교주의 자제를 앞에 두고서 단번에 거절할 규수가 누가 있단 말인가. ‘자충수를 두는 구려. 팔 장로, 소교주. 후후후.’ 유리하게 되었다며 좋아하는 장로들의 앞으로 누군가가 나섰다. 그는 천여운의 곁에 앉아있던 처진 눈매에 선한 인상을 가진 문규였다. “문....규?” '이 녀석은 왜 나서는 거지?' 문규가 나서자 그를 알아본 천무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마도관에 있던 시절부터 마룡장종의 세력을 산하로 거두기 위해 그를 몇 번 설득하려 들었던 천무금이었다. “문규, 네가 왜....엇?” -쭈우우욱! 그때 문규가 자신의 턱 밑 이음새를 붙잡더니 그것을 잡아 당겼다. 길게 쭈욱 늘어나는 피부에 모두가 화들짝 놀라했다. “사, 살이?” “서, 설마? 이건 인피면구?” 문규가 인피면구를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던 천여운의 수하들이나, 두 장로들, 천무금이 동시에 탄성과 함께 두 눈이 커져서 어안이 벙벙해졌다. “허어.....” "어찌 이런!" 도화지처럼 새하얀 얼굴에 반짝이는 눈망울. 앵두 같은 분홍빛 입술. 반달 모양의 눈매를 가진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근 사 년 동안 인피면구에 가려져 있던 약관의 나이가 된 문규는 너무도 어여쁜 여인으로 성장해 있었다. 문규가 놀라하는 두 장로들과 천무금을 향해 포권을 취하며 인사했다. “장로님들과 공자님께 인사드립니다. 문연 장로님의 손녀인 문규라고 합니다.” < 43장 전력을 늘려라 (2) > 끝 < 43장 전력을 늘려라 (3) > 단순히 인피면구를 벗은 것에 불과한 행동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일으킨 파장은 객당 누각의 모든 사람들을 놀랍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평소에 천여운과 마찬가지로 무뚝뚝한 백기조차도 두 눈이 동그랗게 커져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허봉은 입이 벌어져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이거 진짜야?’ 물론 이것은 현실이었다. 짧은 찰나에 허봉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과거들이 스쳐지나갔다. 숙소에서 옷을 홀라당 벗고 뛰어다녔던 것부터 시작해서 많은 과거를 떠올리자, 허봉의 안색은 창백하다 못해서 질려버렸다. ‘끄허어어어어!’ 허봉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서 고개를 숙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문규의 정체에 복마종의 후보자인 천무금 역시도 당혹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여자였다고?’ 그 멍청해 보이던 얼굴에 이런 절세미녀가 숨겨져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했겠는가. 문규의 얼굴을 보는 순간 아름다움에 탄성이 나올 정도였다. 그런데 문제는 몰랐다는 것보다도 다른데 있었다. ‘이런 젠장....’ 마도관에서 소교주 쟁탈전을 위해 천무금 그 역시도 상위 종파의 인재들을 영입하려고 여러 수 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었다. 천무금은 도마종의 천유찬처럼 극단적으로 공격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천성이 오만했기에 문규를 협박하면서까지 산하로 거두려고 했었다. ‘계속 산하로 들어오지 않겠다고 버티는데 약속하도록 하지. 훗날 본 공자가 소교주가 된다면 마룡장종이라는 이름을 마교에서 지워버리겠다. 만약 그것이 두렵지 않다면 계속해서 중립이니 뭐니 지껄여라.’ 라고 했는데, 지금 그 협박했던 상대에게 공개적으로 구혼을 한 셈이었다. 아무리 오만한 그라고 해도 차마 문규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인피면구라....’ 삼 장로 부철용은 그녀의 정체와 아름다운 얼굴에 놀랐다. 이 정도 외모라면 중원 삼대 미녀의 호칭을 갈아치워도 될 만큼의 절세미녀였다. 천무금과 맺어주기 위한 자리가 아니었다면 첩으로 거두고 싶을 만큼 욕망을 일으키는 아름다움이었다. ‘아쉽군. 정말 아쉬워.’ 하지만 그는 눈앞의 욕망에 이성을 잃을 만큼 어리석은 자가 아니었다. 장로의 위치에 있는 만큼 실리를 더욱 따졌다. ‘어차피 인피면구로 가렸었다고 한들 문 장로의 손녀인 것은 변함없지 않은가.’ 천무금의 속사정을 모르는 부철용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이렇게 아름다우신 손녀 분이 인피면구를 하고 있을 줄은 몰랐구려. 나라도 이런 손녀를 두었다면 걱정되어서 그럴 것 같소. 하하하하핫.” 호탕하게 웃으면서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이어나갔다. 이를 보조하기라도 하듯 사 장로 자금경도 문규의 아름다움을 칭찬하며 말했다. “우리 천 공자는 복도 많구려. 이런 미녀와 연을 맺게 되었으니.” “배, 백부!” 외백부인 자금경의 그 말에 천무금이 난처함을 금치 못했다. 그의 심경을 모르는 사 장로 자금경이 문규에게 웃으면서 물었다. “어차피 매파를 보냈던 것을 이 자리에서 같이 들었을 터이니, 문 소저가 답변을 해주면 될 듯 하네. 천 공자의 구혼을 받아들이겠는가.” 그러자 문규가 빙그레 웃으며 천무금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침 천무금 공자님을 뵈니까 생각이 나네요. 마도관에 있을 때 제게 해주셨던 말씀이 있었거든요.” “오오, 이미 안면도 있었다니 더욱 잘 되었구려.” 뭔가 느낌이 좋다고 생각했는지 자금경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러나 이어지는 문규의 말에 한순간에 깨지고 말았다. “천무금 공자님께서 소교주가 되신다면 저희 마룡장종을 마교에서 지워버리겠다고 하셨는데. 다행히 소교주가 되지는 않으셨네요? 휴.” “뭣?” 웃고 있던 사 장로 자금경의 인상이 굳어졌다. ‘아아....’ 천무금이 안색이 어두워지며 시선이 밑으로 향해졌다. 그 당시에 아무렇지 않게 했던 말이 비수가 되어 돌아올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문규의 말을 들은 팔 장로 문연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본 종을 지워버리시겠다?” “그, 그게 아니라....” 아무리 마교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여섯 종파 중 하나인 복마종을 등에 업고 있다고는 하나 선을 지나친 협박이었다. 복마종이라고 해도 마룡장종을 상대하려면 상당한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전음으로 다그치는 자금경의 말에 천무금이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입이 열 개라도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어차피 벌어진 일이었기에 수습해야 한다고 생각한 자금경이 얼른 문연을 달래려 했다. “문 장로. 아무래도 공자님께서 어린 치기에 말실수를 한 것 같은데....” “실수라는 말로 변명이 될 것 같소?” 팔 장로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어지간한 일로는 평정심을 잃지 않는 그였지만 사랑하는 자신의 손녀에게 마룡장종을 두고 협박을 했다니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문 장로. 이러다 출수라도 하시겠소?” “본 종을 지우시겠다는 데 못 할 것도 없지요.” “허어.” 처음에는 오해를 풀려고 했던 사 장로 자금경도 점차 표정이 굳어져갔다. 그 역시도 여섯 종파의 일원인 만큼 직위 상으로 밑에 있는 팔 장로가 기세를 내뿜는 것에 빈정이 상한 듯 했다. -고오오오오! 화경의 고수인 두 사람이 기세를 내뿜자 누각 안이 어느새 진기로 가득 차졌다. 고요했던 누각 주위 연못에 파문이 일어났다. 무림인들답게 감정싸움이 격해지면 결국 무력으로 표출되기 마련이었다. 이를 지켜만 볼 수 없었던 삼 장로 부철용이 한숨을 내쉬며 끼어들었다. “후우, 그만! 두 분은 기세를 거두시오.” “삼 장로라면 이 같은 말을 듣고도 그냥 참을 수 있겠소?” 인상을 잔뜩 쓰고 있는 팔 장로 문연을 바라보던 부철용이 말했다. “팔 장로의 심경도 이해가 하지 못할 부분도 아니오. 하나, 천 공자님께서 생도 시절에 철없이 내뱉은 말에 무슨 힘이 있겠소. 그리고 본교에서 마룡장종을 쉽게 건드릴 종파가 있다고 생각하시오?” “크흠.” 마룡장종을 띄어주면서 달래는 부철용의 말에 기세를 올리던 팔 장로 문연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천무금은 불쾌할 수도 있겠지만 그를 깎아내리는 것만이 팔 장로 문연의 기분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후우, 언젠가 쓸모 있을 것 같아서 이건 쓰지 않으려 했는데....’ 삼 장로 부철용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주홍색 옥패였다. 옥패의 한 가운데에는 의(醫)라고 새겨져 있었다. “본 장로가 듣기로는 팔 장로께서는 몇 년 전부터 계속 용한 의원을 찾고 있다고 들었소.” “그건.....” 최대한 종파 내부의 일을 숨겼지만 의원을 구하는 것을 숨길 수는 없었다. 문규의 쌍둥이 동생인 문유는 선천적인 천치(天癡)로 태어났다. 문연은 이를 고칠 의원을 찾기 위해 마교의 성내만이 아니라 중원 각 지부를 통해서도 신의에 대한 출처를 수소문한 적이 있었다. “이 패는 신의를 만날 수 있는 옥패요.” “아!” 삼 장로 부철용의 말에 팔 장로 문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토록 소재를 찾아다니던 신의를 만날 수 있는 옥패라고 하니 마음이 동할 수밖에 없었다. ‘현마종의 장원에서 이것을 발견한 것이 신의 한수로군.’ 사실 이 옥패의 주인은 원래 무 부인이었다. 그녀와 현마종의 종주인 무진원이 죽고 나서, 교주의 인가가 떨어지면서 검마종과 도마종에서 현마종에 남겨진 모든 것을 수습했었다. ‘마음이 동할 것이오. 문 장로.’ 신의를 만날 수 있는 옥패가 귀한 보물이기는 했지만, 이로 인해 마룡장종을 얻고 팔 장로를 끌어들일 수 있다면 충분한 값어치를 했다고 볼 수 있었다. “팔 장로의 손녀 분과 천무금 공자님께서 맺어지게 된다면 본 장로가 이것을 예물로 드리리다.” “그, 그 옥패를 예물로 말이오?” “본 장로는 절대로 허언을 하지 않소.” “아니 어째서 삼 장로가 이 귀한 것을 예물로 준 단 말이오?” 팔 장로 문연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네 종파의 입장에서는 향후를 위해서 마룡장종을 영입하고 싶어하는 것을 알고 있지만, 엄밀히 말한다면 천무금은 복마종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도마종에서 귀한 보물까지 내놓으면서 지원하는 것이 이상했다. ‘중요한 게 있지.’ 삼 장로 부철용이 천무금을 가리키면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까는 말씀드리지 못했는데, 천무금 공자는 우리 네 종파의 장로들이 공동 전인으로 삼기로 했소이다.” “공동....전인?” 그 말에 천여운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들었기 때문이었다. ‘네 종파가 힘을 합치겠다는 건가?’ 천여운의 그 짐작은 정확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네 종파에서는 힘을 합칠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천여운이 소교주의 자리를 차지한 것부터 시작해 본교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는 무진원과 극도육무문의 고수를 죽인 것에서 그들은 큰 위기의식을 느꼈다. ‘이대로는 안 되오!’ 그때 교주가 명분을 주었다. 소교주가 언제든지 바뀔 수도 있다는 희망을 말이다. 네 종파에서 천무금을 공동 전인으로 삼았다는 말은 마도관에서 유일하게 멀쩡하게 나온 그를 소교주로 추대하려한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천여운이 바로 앞에 있으니 이것을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충분히 의사를 내비친 그들이었다. ‘잔머리를 굴렸군. 그냥 당하지는 않겠다는 건가.’ 천여운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쉽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네 종파가 힘을 합친다면 지금까지보다 더욱 힘든 싸움으로 이어질 것이다. ‘문 장로가 흔들릴 수도 있겠구나.’ 천여운이 우려의 눈빛으로 문연을 바라보았다. 그 예상은 정확했다. ‘네 종파에서 천무금 공자를 지지하는 것인가?’ 팔 장로 문연의 속내가 복잡해졌다. 지금 그들은 자신들의 패를 전부 보인 셈이었다. ‘노부에게 선택하라고 종용하는 것이구나. 허어.....’ 문연은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한 쪽은 자신의 손녀인 문규가 충성을 맹세한 소교주였고, 다른 한 쪽은 손자인 문유를 치료할 수 있고 앞으로의 판도를 바꾸려고 하는 네 종파였다. 저울질을 하면 할수록 점점 추가 다른 쪽으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아아.....규야.’ 한참을 고민에 빠져 있던 문연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문규를 바라보았다. 다른 것보다도 문유를 고칠 수 있다는 점에서 너무도 흔들렸다. 이에 득의양양해하는 삼 장로 부철용의 귓가로 사 장로 자금경의 흥분한 목소리의 전음이 들려왔다. [삼 장로. 훌륭하오!] [후후후, 무릇 정치란 이런 것이오. 상대가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알고서 그것을 내어줘야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얻는 법이오.] [과연!......본 장로가 한 수 배웠소이다.] 천여운은 지금 당장의 대가없는 충성을 바라겠지만 자신들은 팔 장로 문연이 원하는 바를 가져다주었다. 그런 점에서 이 승패는 결정이 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이겼소이다. 하하하하핫.’ 망설이는 팔 장로 문연에게 삼 장로 부철용이 쇄기를 꽂듯이 말했다. “문 장로. 손녀 분과 천무금 공자님의 혼인을 허락하시겠소? “노부는......” 한참을 말이 없던 문연이 무언가를 말하려던 때였다. 가만히 그들의 대화를 지켜만 보던 문규가 갑자기 천여운의 팔짱을 끼더니 두 볼이 새빨개져서는 소리쳤다. -꽉! “응?” “저...저는 이미 소, 소교주님의 사람이라고요!” “!?” 누각 아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일제히 굳어졌다. 그것은 천여운 또한 마찬가지였다. 분명 자신의 수하이기 때문에 맞는 말이기는 했지만 오해의 소지가 다분했다. 무게의 추가 천무금에게로 쏠리던 팔 장로 문연 역시도 어안이 벙벙해져서 천여운을 바라보았다. “소, 소교주님?” < 43장 전력을 늘려라 (3) > 끝 < 43장 전력을 늘려라 (4) > 폭탄선언이나 다름없는 문규의 말에 누각 아래로 정적이 흘렀다. 천여운의 수하들인 허봉이나 백기 또한 얼마나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그를 쳐다보았다. 아무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표정이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주, 주군 대체 언제 그런?’ ‘참......빠르시군요.’ 무덤덤했던 천여운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얘기해버리면 누구라도 오해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죄, 죄송해요. 이 방법 외에는 생각나는 게 없었어요.] 전음성에 천여운이 문규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글썽이는 눈망울로 팔짱을 끼고서 천여운을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이 마치 떨고 있는 사슴처럼 보여서 당혹스러워 하던 천여운이 얼굴을 붉히면서 혀를 내둘렀다. ‘일부러 그런 것이었구나.’ 문규는 조부인 문연이 흔들리려 하는 이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서 그런 폭탄선언을 한 것이었다. 사실 그녀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까딱하다가는 천무금과 혼인을 하게 생겼는데 이것저것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 문규의 이런 우발적인 행동은 모두를 놀라게 한 것뿐만이 아니라, 또 다른 효과를 가져왔다. -뿌득! 천무금이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서 이빨을 갈았다. 예전의 실수가 있어서 입을 닫고 있었지만 내심 문규의 본 모습에 한 눈에 반했던 천무금이었다. 삼 장로 부철용 덕분에 절세미녀인 그녀와 혼인할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을 품고 있었던 그는 내심 화를 주체하지 못했다. 이것을 발견한 천여운의 눈빛에 이채가 띠었다. 그러더니 자신의 팔짱을 끼고 있는 문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혹시나 천여운이 난처해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그녀는 머리를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길에 두 볼이 더욱 빨갛게 물들어갔다. ‘이, 이 빌어먹을 놈이 또 내 것을 빼앗다니!’ 그 모습에 더욱 질투심이 차오른 천무금이 이빨을 가는 것도 모자라 살기 어린 눈으로 천여운을 노려보았다. 천무금은 어머니인 자 부인의 죽음을 천여운의 탓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그에 대한 분노가 컸다. 그러나 장로들이 신신당부한 것도 있었고, 무위에서 상대가 되지 않으니 훗날을 기약하기 위해서 참아왔지만 천여운과 문규가 몸을 섞었을 거라고 상상해버리자 일순간 분노를 자제하기 힘들었다. 천무금의 몸에서 짙은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 순간 천여운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웃어?’ 바로 그때였다. -챙! 천무금의 목으로 날카로운 검 끝이 위협을 가했다. “헛!” 당황한 천무금이 놀란 눈빛으로 자신의 목을 겨냥하고 있는 자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바로 십 장로 연무화였다. 천여운의 옆에서 호위 무사처럼 지키고 있던 그녀가 천무금의 살기를 감지하고서 검을 뽑은 것이었다. “감히 일개 호위 무사에 불과한 계집이 누구의 목에 검을 들이대는 것이냐!” 사 장로 자금경이 노기가 서린 목소리로 연무화에게 외쳤다. 그들은 환골탈태를 하여 젊어진 그녀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일개 호위 무사라....’ 호위무사로 연기하고 있는 연무화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소교주님께 살기를 비쳤다.” 이 자리에서 천무금의 살기를 감지하지 못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교주의 후계자라 할 수 있는 천여운에게 살기를 비친다는 것은 일종의 반역이나 마찬가지였다. ‘크윽! 당했다. 그렇게 자제하라 했건만.’ 사 장로 자금경이 난처함을 금치 못했다. 예전부터 누이인 자 부인의 죽음으로 천무금의 모든 분노가 천여운에게로 쏠려있다는 사실은 그 역시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룡장종의 장원의 대문에서 천여운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그에게 절대로 경거망동(輕擧妄動)을 하지 말라고 당부했었다. 아직은 천여운의 신분이 소교주였기 때문에 두 장로들 역시도 최대한 공손하게 행동하여 이 같은 빌미를 제공하지 않으려 했는데, 천무금이 실수를 저지른 것이었다. ‘마, 막아야 한다.’ 다소 우스운 이유일지는 모르겠지만 천무금은 유일하게 사지가 멀쩡한 소교주 후보자였다. 그래서 네 종파에서 그를 공동 전인으로 삼기로 한 것이었다. 천여운이 그 동안 여섯 종파를 상대로 보여 왔던 행보를 생각한다면 절대로 봐줄 리가 없었다. “소교...” 하지만 모든 일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당장 검을 치워라.” “소교주님을 위협했다. 꼼짝하지 마라.” “이 빌어먹을 호위 계집이 누구에게 명령질이야!” 그렇지 않아도 분노한 천무금은 자신의 목을 겨냥한 연무화의 검을 쳐내려고 했다. 완숙한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천무금은 장로들이나 천여운을 직접 상대할 자신은 없었지만 그 외의 다른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창! 천무금이 팔성 공력을 끌어올려서 검신을 주먹으로 쳐냈다. “엇?” 천무금의 두 눈이 커졌다. 놀랍게도 그의 주먹에 닿은 검은 수천 근이 되는 거대한 암석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호위무사라 하여 우습게 보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네, 네년은 도대체?” -푹! “끄아악! 이, 이 년이 정말 미쳤구나!” 천무금이 자신의 목을 살짝 파고드는 검 끝에 혼비백산이 되어 소리쳤다. 이 여자는 정말로 자신을 죽일 작정으로 보였다. ‘안 된다. 소교주는 이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을 거다.’ 삼 장로 부철용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전에서 교주가 보는 앞에서도 자신에게 위협을 가했다는 이유만으로 일 장로 무진원을 고기 조각으로 만든 천여운이었다. -털썩! 삼 장로 부철용이 한 쪽 무릎을 꿇고 포권을 취하며 외쳤다. “소교주님. 노여워하실 줄은 알겠지만, 그래도 같은 어버이를 두신 형제인만큼 천 공자의 치기 어린 실수를 부디 용서해주시옵소서.” 그런 행동에 눈치가 빠른 사 장로 자금경 역시도 같은 자세를 취하며 외쳤다. “소교주님. 부디 노여움을 거둬주십시오!” 어떻게든 천무금을 살려야 했다.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상위직에 속하는 장로 두 명이 무릎까지 꿇고서 부탁했다. 이 정도라면 자존심을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천여운의 입에서 나온 말은 냉담하기 그지없었다. “죽여라.” “충!” 연무화가 대답과 함께 천무금의 목에 살짝 찔려져 있던 검에 힘을 가하려했다. “안돼에에엣!” -챙! 그 순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삼 장로 부철용가 번개처럼 도를 뽑아서 연무화의 검을 쳐냈다. -팍! “끄윽! 내 목!” -타타탁! 덕분에 검 끝에 목의 살이 살짝 찢겨나간 천무금이 한 손으로 상처부위를 감싸며 보법을 펼쳐서 거리를 벌렸다. 연무화가 이를 놓치지 않기 위해 검초를 날리려는 순간 부철용이 이를 가로막았다. “멈춰랏!” "흥!" -채채채채채챙! 순식간에 두 화경의 고수의 검과 도가 격렬하게 부딪쳤다. 연무화가 보통 고수가 아닐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전력을 다해서 도초를 펼친 삼 장로 부철용의 두 눈이 커졌다. ‘무, 무슨 호위 무사의 공력이 이리 강하단 말인가.’ 검과 도가 부딪칠 때마다 오히려 도병을 쥐고 있는 자신의 손이 떨려왔다. 당연히 연배에서 우위라 여겼기 때문에 공력으로 밀어붙이려던 삼 장로의 생각은 틀리고 말았다. -채채채채챙! -팟! 짧은 찰나에 세 초식 가량을 부딪쳤던 두 사람의 신형이 서로 떨어져나갔다. 엄밀히 말한다면 삼 장로가 뒤로 물러난 것이었다.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대체 이 여자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일개 호위 무사라고?’ 절대로 아니었다. 세 초식을 부딪친 결과 삼 장로 부철용은 확신할 수 있었다. 천여운의 호위 무사라고 자처하고 있는 이 여인은 적어도 완숙한 화경의 경지이거나 그 이상의 무위를 지녔다. 그런데 그가 연무화가 겨루는 사이에 더욱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소, 소교주! 멈추시오!” 사 장로 자금경의 외침에 그의 시선이 돌아갔다. “아닛?” 어느새 천여운이 백룡도를 뽑아서 도망치던 천무금의 목을 겨냥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백룡도에서 흘러나오는 강렬한 살기와 날카로운 예기에 천무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사색이 되어 멈춰있었다. “헉....헉....” 천여운이 조금만 손을 움직여도 목이 베인다. ‘이, 이놈! 저....정말로 나를 죽일 셈인가?’ 마도관에서와는 분위기가 너무 달랐다. 생도 때 부딪쳤을 때는 목숨에 위협을 가하지 않았던 천여운이 무정하게 노려보자, 천무금은 처음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심으로 물들었다. “내 명령이 말 같이 들리지 않나 보군.” 더 이상의 존대가 없어진 천여운의 차가운 목소리에 두 장로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소교주를 위협했다는 명분을 가진 천여운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이를 어찌 한단 말인가.’ 두 장로들은 자신들의 선택을 후회했다. 천여운이 먼저 마룡장종을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과감하게 포기했어야 한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때 천여운이 도를 크게 휘둘러서 천무금의 목을 베려했다. 그 순간 삼 장로 부철용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소, 소교주! 제발 멈추시오!!!” -착! 빠른 속도로 천무금의 목을 베려고 했던 백룡도가 중간에 멈춰 섰다. 몇 번 씩이나 죽음을 왔다갔다 하는 천무금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어댔다. 삼 장로 부철용이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말했다. “......마룡장종과의 혼인을 포기하겠습니다. 그리고 소교주님께서 원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들어드리겠습니다.”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천무금을 살리는데 주력하려는 것이었다. 유일하게 멀쩡한 천무금 마저 죽게 된다면 제대로 내세울 소교주 후보자들이 없게 되어버린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천여운의 입 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신의를 만날 수 있다는 그 옥패를 넘겨라.” ‘큭! 역시인가.’ 천여운의 요구를 듣는 순간 삼 장로 부철용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요구 사항을 말해보라고 한 것이었는데 역시 천여운의 목적은 옥패였다. 그러나 별 수 없었다. 옥패를 주고서라도 천무금을 살릴 수 있다면 당장에는 밑지는 장사가 아니었다. "여기 있습니다. 부디 자비를 베푸시옵소서." 삼 장로 부철용이 품속에서 의라고 적혀 있는 주홍 옥패를 꺼내서 천여운에게 공손히 갖다 바치며 고개를 숙였다. 천여운이 그것을 받아들면서 말했다. “무릇 정치란 상대가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알고서 그것을 내어줘야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얻는 법이지.” '!?' 그 말을 듣는 순간 삼 장로 부철용의 두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파르르 떨려왔다. 방금 그 말은 자신이 사 장로에게 전음으로 했던 말이 아니었던가. 놀라서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서 천여운을 바라보는 순간, 그가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 옥패만으로는 밑지는 장사인데.” “뭣?” -?! 어떻게 만류할 틈도 없었다. 순식간에 천여운의 백룡도가 번쩍이며 천무금의 오른쪽 어깨를 스쳐지나갔다. -툭! 천무금의 오른팔이 정원의 바닥으로 떨어졌다. “끄아아아아아악!” < 43장 전력을 늘려라 (4) > 끝 < 43장 전력을 늘려라 (5) > -푸슈슉! “끄어어억! 내 팔! 내 오른팔이!” 겨우 살았다고 안도했던 천무금은 피가 뿜어져 나오는 잘려나간 팔의 단면 부위를 붙잡고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당했다!’ 신의를 만날 수 있는 옥패를 바쳐가면서 그를 구하려 했던 삼 장로 부철용은 얼굴이 일그러져서 말문을 잃고 말았다. 적어도 원하는 바를 얻었으니 천무금을 놓아주리라 여겼는데 오산이었다. 천여운의 행보는 과감함 그 자체였다. ‘크윽!.....일부러 자른 것이구나. 천무금 공자가 네 종파의 공동 전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짧은 순간에 이런 판단을 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이로써 천무금은 살아남았다고 해도 공동 전인으로서의 효용 가치는 없어진 셈이었다. 부철용은 진심으로 천여운이 무섭게 느껴졌다. ‘별 수 없단 말인가.’ 따지고 싶어도 명분이 없었다. 살기를 내비친 것만으로도 즉각 처분이 가능했는데, 목숨을 부지하게 해주었으니 말이다. 천여운이 그들을 바라보며 냉소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불만이라도 있나?” 그 질문이 무엇을 노리는 것인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타타탁! 사 장로 자금경이 출혈이 심한 천무금의 혈도를 짚으면서 겨우겨우 올라오는 살기를 짓누르며 말했다. “.....아닙니다. 소교주님의 선처에.....감사드립니다.” 삼 장로 부철용과 달리 자금경에게 있어서는 조카의 팔을 자른 것이었는데 이를 참아내는 것을 본다면 대단한 인내심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간다면 천여운과 목숨을 걸고 사투를 벌어야 할 판국이었다. 그만큼 장로들은 어리석지 않았다. “천 공자의 상세가 좋지 않아 저희는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속내는 달랐다. ‘.....아직 끝나지 않았소. 소교주!’ 두 장로들은 분함 마음을 꾹꾹 눌러두고 천여운과 팔 장로 문연에게 인사를 한 후에 고통스러워하는 천무금을 데리고 마룡장종의 장원에서 나갔다. 그들이 떠나간 후에 천여운은 팔 장로 문연에게 마룡장종에서 피를 보게 한 것을 사죄하며 빼앗은 주홍 옥패를 선물로 주었다. “이것이 문 장로께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오오!” 신의를 만날 수 있는 옥패를 받아든 팔 장로 문연은 감격을 금치 못했다. 그만큼 손자인 문유를 살리고 싶은 마음이 컸던 그였다. -털썩! 문연이 한쪽 무릎을 꿇고 포권을 취하며 외쳤다. “아아아! 소교주님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아직 신의를 만난 것도 아닌데 이러지 마십시오.” “저희 마룡장종에는 은인과 같은 분이신데 어찌 노부가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일어나십시오.” 천여운이 빙그레 웃으며 문연의 팔을 잡고 일어나기를 청했다. 방금 전까지는 냉정하게 천무금의 팔을 잘랐던 사람이라고는 믿기 힘들만큼 부드러운 호의가 느껴졌다. ‘이 어찌 큰 인물이란 말인가.’ 이런 세심한 행동에서 더욱 감격을 받은 문연이 눈시울이 붉어졌다. 애초부터 천여운이 이곳 마룡장종을 방문한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던 문연이었다. ‘네가 나보다 더 나은 눈을 가졌구나.’ 문연이 따뜻한 눈빛으로 문규를 바라보았다. 한순간 손자를 치료할 수 있다는 유혹을 이기지 못한 것이 문규에게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런 훌륭한 남편감을 찾은 문규의 안목을 칭찬해주고 싶었다. 유일한 그의 걱정거리를 해결해줬으니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내어주는 것이 맞다고 여겨졌다. -탁! 결심한 팔 장로 문연이 다시 한 번 두 손을 모으며 외쳤다. “마룡장종의 종주이자 팔 장로 문연이 이 자리에서 맹세합니다. 노부의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미력하나 저희 마룡장종은 소교주님을 돕겠습니다. 부디 충성을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할아버지....” 그런 문연의 외침에 문규의 얼굴이 환해졌다. 자신의 조부가 천여운의 힘이 되어주기를 바랐던 그녀는 기뻐했다. -탁! 천여운도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제가 더욱 부탁드리고 싶었던 부분입니다.” 애초부터 마룡장종을 방문한 것이 팔 장로 문연의 충성이 목적이었던 천여운은 이를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천여운은 마교의 열두 장로들 중 네 명의 충성을 받게 되었다. 목적을 달성한 천여운과 일행들은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누각으로 돌아와 다과를 먹으면서 제대로 된 담소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후루룩! 많이 식었지만 마룡장종에서 직접 재배한 차 맛은 일품이었다. 차를 마시고 있는 천여운에게 문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흠흠, 소교주님. 그런데 제 손녀와는 언제 혼례식을 치르실 생각이십니까?” -풋! “흐헥!” 차를 입에 머금고 그 맛을 즐기고 있던 천여운의 입에서 찻물이 뿜어져 나왔다. 이번에 봉변을 당한 것은 맞은편에 앉아있던 허봉이었다. “하, 할아버지!” 문규가 얼굴이 새빨개져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사건이 벌어지느라 잊고 있었는데, 그녀가 임기응변으로 했던 말을 그대로 믿고 있는 팔 장로 문연이었다. 난처해하는 그들의 모습을 풋풋하다고 생각한 문연이 흡족해하며 말했다. “허허허, 빠르긴 하지만 이미 흠흠, 초야를 치렀다고 하시니, 되도록 빨리 기일을 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오옷! 호, 혼례를 치르시는 겁니까? 축하드립니다. 주군!” 얼굴에 묻은 찻물을 소매로 닦아내며 허봉이 눈치 없이 축하했다. 그 통에 백기도 얼떨결에 축하한다고 말했다. 묘하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천여운과 문규는 서로를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어찌 설명한담.’ 참으로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두 사람은 이 오해를 풀기까지 꽤 긴 시간을 소요해야만 했다. 후에 진실을 알게 된 팔 장로 문연은 내심 아쉬운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하지만 실망은 하지 않았다. ‘소교주님이나 규아의 반응을 보면 서로 호감이 있는 건 틀림없다. 허허허.’ 그의 오랜 연륜이 말해주고 있었다. 구 장로 사마의와 달리 급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닌 문연은 천천히 이들을 지켜보기로 하였다. 혼례에 대한 이야기로 인해 어색해진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문연은 시종들에게 일러서 손자인 문유를 불러오도록 하였다. “손자 분은 어찌?” “소교주님께 도움을 받았는데 어찌 노부가 감출 수 있겠습니까?” 문연은 시종들이 문유를 데리러간 사이에 신의가 필요한 사연을 이야기 해주었다. 난산으로 분만시간이 길어지면서 문규의 쌍둥이 동생인 문유가 선천적인 천치로 태어난 사정이었다. 이것은 예전에 문규가 인피면구에 대한 것을 들켰을 때 말해주었지만 천여운은 일부러 내색하지 않고 들었다. “손주 녀석을 치료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지만 어찌해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소교주께서 희망을 주신 겁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문연이 이야기를 마칠 무렵 마침 시종들이 문유를 데리고 왔다. 문유의 모습에 허봉이나 백기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아!’ 그 모습이 문규가 인피면구를 쓰고 있을 때와 거의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좀 더 성장한 얼굴에 입을 반쯤 벌리고 있었고, 두 눈의 초점이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라....버지....헤에.” 누각으로 온 문유가 반쯤 벌린 입에서 침을 흘리며 말했다. 그래도 누가 누구인지는 알아보는 듯 했다. “유야. 잘 지내고 있었어?” “누....나아아!” 문유가 뒤뚱뒤뚱 걸어와 문규에게 강아지처럼 머리를 가져왔다. 문규는 익숙한 것처럼 안타까운 표정으로 문유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유야. 누나에게 그만 응석부리고 여기 소교주님께 인사 드리거라. 네게 큰 도움을 주셨단다.” 문연의 말에 그녀의 품에 파묻혀 있던 문유가 고개를 들어 천여운을 바라보았다. 초점이 맞지는 않았지만 문유의 한쪽 눈은 천여운을 응시했다. “헤에에.....안....냐....세...요.” 침을 흘리면서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이 모습을 보고나니 팔 장로 문연이 아까 전에 삼 장로 부철용이 옥패를 가지고 제안을 했을 때 흔들릴 수밖에 없다고 여겨졌다. ‘신의를 희망으로 생각할 만도 하구나.’ 한참을 안타깝게 문유를 바라보던 천여운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노에게 물었다. ‘나노. 혹시 문유를 치료할 방법이 없을까?’ [증상을 확인해야 가능합니다.] ‘난산으로 분만이 늦어져서 저렇게 되었다고 하는데, 알 것 같아?’ [데이터를 검색해보겠습니다.] 나노의 데이터 중에서는 광활한 의료 지식 분야도 있다. 빠르게 데이터를 검색하여 사례 분석을 한 나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환자의 증세와 비슷한 데이터 사례를 24,201,023가 검색되었습니다.] ‘그렇게나 많이?’ 그것은 당연했다. 나노가 만들어진 시기를 기준으로 수백 년 간 축적된 전 세계 의료 기록들이었으니 많을 수밖에 없었다. [정확한 확인을 위해서 사용자의 두 손바닥을 펴서 환자의 머리에 접촉해주십시오.] -스스스! 명령을 내린 것은 아니었지만 천여운의 동공이 흔들리며 증강현실이 개안되었다. 흰 빛의 입자로 선이 그려지며 생겨난 증강현실 속의 문유의 양 머리에 손바닥 모양의 노란 빛이 생겨나며 갖다대라는 표시가 생겨났다. 천여운이 팔 장로 문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문 장로님. 혹시 제가 손자 분을 상세를 살펴보아도 되겠습니까?” 뜬금없는 말에 문연이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자세한 상세가 궁금해서 그러는가 보다 싶었다. “그렇게 하시지요.” “알겠습니다.” 문연의 허락이 떨어지자 천여운이 나노가 표시해놓은 대로 두 손바닥을 문유의 머리에 올려놓았다. “아으어어어....모...하...세...요?” 머리가 붙잡힌 문유가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머리를 갸웃거렸다. [지정한 대상의 뇌를 자기공명영상(magnetic resonance imaging)법으로 스캔하겠습니다.] 그때 천여운의 손바닥에서 희미한 붉은 빛이 선을 그리며 손가락 끝에서 손바닥까지 내려왔다. “엇?” 기이한 현상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것은 일반적인 스캔이 아니라 나노 머신들이 손바닥을 통해 자기장을 발생시켜, 고주파를 생성시켜서 신체부위에 있는 수소원자핵을 공명시켜 각 조직에서 나오는 신호를 측정하여 재구성하는 방법이었다. -츠츠츠츠! 증강현실에 자기공명영상(MRI)로 스캔한 영상이 출력되었다. 그것은 문유의 머릿속에 있는 뇌와 혈관들의 모습이었는데, 그것이 영상으로 출력되어 보이고 있었다. ‘아!’ 알면 알수록 끝없는 나노의 능력에 천여운은 놀라워했다. 영상이 진행되자 흰빛과 붉은 빛의 선이 그려지며 그것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삐삐삐삐삐삐삐! [붉은 점으로 표시된 곳으로 혈액 순환이 원활하지 않습니다. 의료 사례 분석에 의하면 분만 시간이 길어지면서 산소의 유입에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일부 뇌의 기능이 작동하지 않으면서 뇌세포가 파괴되면서 장애를 가져왔습니다.] ‘고칠 수 있겠어?’ [단기간에는 힘들지만 일정 기간 동안, 혈액 순환이 되지 않는 지점으로 전자기파를 주입하여 자극을 통해 혈액 순환을 원활하게 하여 새로운 뇌세포가 생기도록 한다면 장애가 치료될 수 있습니다.] ‘아아아!’ 그 말은 치료가 가능하다는 소리였다. [전자기파 치료를 실시하겠습니까?] ‘그래!' [붉은 색으로 표시된 곳으로 손가락을 짚어주십시오.] 나노의 목소리와 함께 문유의 머리에서 혈액 순환이 원활하지 않은 지점이 붉은 색 빛으로 표시가 되었다. 천여운이 그곳으로 손가락들을 짚었다. “소교주님?” 도통 알 수 없는 천여운의 행동에 팔 장로 문연이 불안하게 쳐다보았다. 여러 의원들이 와서 진맥을 했지만 머리를 직접 만지거나 하는 행위를 한 적은 없었다. 천여운이 문유를 바라보면서 경고의 말을 했다. “조금 아플 수도 있어.” “으어어어?” 그 말을 알아들을 리가 만무했다. 바로 그 순간 천여운의 손가락에서 빛이 번쩍이며 전자기파가 형성되며 문유의 머리로 주입되었다. -파치치치치칙! “끄갸갸갸갸갸갸갸갸갸!” 문유가 괴상한 소리를 내뱉으며 머리에 경련을 일으켰다. 이윽고 문유의 눈과 코, 입에서 끈적거리는 검은 핏물이 흘러내렸다. “헉!” 누각 아래 있던 모든 사람들이 놀라서 눈이 커졌다. “소, 소교주! 대체 무슨 짓입니까?” 가만히 지켜보던 팔 장로 문연이 놀라서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다. 더 내버려뒀다가는 신의를 만나서 치료를 받기도 전에 손주가 죽을 것만 같았다. “끄갸아아아아!” "소교주!!!" 만류하는 외침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자 문연이 억지로 천여운을 떼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연무화가 앞을 가로막으면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비키시오!” “소교주님을 믿으세요.” “지, 지금 애가 죽게 생겼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앗! 유야!” -털썩! 그때 천여운이 손가락을 떼자 얼굴에 경련을 일으키던 문유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검은 핏물이 흘러나오던 문유의 콧구멍과 입에서 회색빛 김이 흘러나왔다. “에잇! 비키시오!” -탁! 연무화를 밀쳐낸 팔 장로 문연이 탁자 앞에 주저앉은 문유를 부축했다. 원래부터도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문유는 혼이 나간 사람처럼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유야! 유아야!” 문연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의 양팔을 붙잡고 흔들었다. 그런데도 문유는 여전히 멍해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충성 여부와 상관없이 손주가 완전히 바보가 되었다는 생각에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문연이 얼굴이 상기되어서 천여운을 노려보았다. “소교주! 이게 대체 무...” -탁! "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유가 양팔을 붙들고 있는 문연의 손을 잡았다. “아....파...요. 머....리가....아....파요.” “무, 문유야. 괜찮느냐?” 문유가 정신을 차린 것 같아 놀란 문연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의 얼굴을 바라본 팔 장로 문연이 경악한 나머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이게.....어찌?” 큰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근 이십 년 동안이나 따로 놀던 문유의 두 눈동자의 초점이 보통 사람들처럼 돌아온 것이 아닌가. “이럴 수가.....” 문규 또한 놀란 나머지 입을 두 손으로 가리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것은 호전의 징조였다. < 43장 전력을 늘려라 (5) > 끝 < 44장 무명(無名) (1) > 여전히 입을 벌리고 침을 흘린 채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문유다. 허봉이나 백기는 큰 차이를 발견하지 못하더라도 오랫동안 함께 한 가족들은 달랐다. 그 미묘한 차이는 팔 장로 문연을 울컥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머....리....가...아파...요...으으으.” “유아야!” 머리를 붙잡고 고통을 호소하는 문유를 와락 끌어안고 문연은 눈물을 보였다. 팔 장로 문연은 사고로 자식을 잃은 후에 남은 혈족이라 할 수 있는 문유와 문규에 대한 정이 깊었다. “흑.....” 문규 역시도 붉어진 눈망울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주군의 능력은 대체 어디까지란 말인가?’ 문연의 격한 반응에 허봉은 놀랍다는 표정으로 천여운을 바라보았다. 물론 그것은 백기 또한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미독에 중독되었던 것을 알아챌 만큼 의술이나 약술에 일가견이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나 따위는 범접할 수 없는 신인(神人)이로구나.’ 매번 놀라게 하는 그에게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어쩌면 천여운이야 말로 신(神)과 소통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여겨졌다. 그렇게 마룡장종의 객당 누각은 천여운이 보인 신기로 인하여 한동안 놀라움과 감동의 여파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천여운과 일행이 마룡장종의 장원에서 나온 것은 한 시진이 지나서였다. 들어갈 때는 네 명이었던 일행이 나올 때는 다섯 명으로 늘어있었다. 추가된 한 명은 문규의 쌍둥이 동생인 문유였다. 장원을 나오는 천여운의 손에는 신의를 만날 수 있는 주홍색 옥패가 들려 있었다. ‘소교주님께서 치료가 가능하시다면 저희에게는 이 패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소교주께서 가지고 계시다 더욱 유용한 곳에 쓰시기 바랍니다.’ 팔 장로 문연은 한동안 비환귀종의 객당에 문유를 맡기기로 하였다. 십일 장로인 환의와는 교분이 두터웠고 한동안 문유가 정기적인 치료를 받아야 장애가 호전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손주들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문유를 데리고 천여운과 일행들은 비환귀종으로 돌아왔다. 그 시각이 유시(酉時) 중엽이었다. 늦겨울답게 해가 저물고 벌써 날이 어두워져있었다. 객당으로 돌아오자 먼저 돌아온 십일 장로 환의가 누군가와 기다리고 있었다. “응?” 완고한 중년의 귀부인이었는데, 환골탈태하기 전의 연무화였다. 그녀는 비환귀종에서 훈련을 받아 연무화를 대신 연기하고 있는 인피면구를 쓴 암종의 요원이었다. 환의 역시도 객당으로 들어오는 천여운 일행을 발견했는지 마루에서 내려오더니, 누군가를 발견하고서 입술을 실룩였다. 인피면구를 벗고 있는 문규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우리 조카가 드디어 면구를 벗었군요. 역시 면구로 가리기는 참 아까운 얼굴이네요. 이렇게 어여쁜데 말이에요. 후후후.] ‘윽! 환 숙부!’ 놀리는 환의의 전음성에 문규가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 사 년 가까이 남자로 지내서 그런지 다른 사람들이 여자임을 의식하게 하면 괜히 쑥스럽고 기분이 묘해졌다. 그런 문규의 반응이 재미있는지 환의가 빙그레 웃으며 천여운에게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소교주님. 가신 일은 잘되셨는지요.” 환의의 물음에 천여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했다. 마룡장종의 경우는 문규라는 접점이 있다 보니, 당연히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여겼던 환의는 크게 놀라워하진 않았다. “경하 드립니다. 마룡장종이라면 소교주님께 정말 큰 힘이 될 겁니다. 후후후.” “운이 좋았습니다. 문규가 있었으니까요. 환 장로님께서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지요?” 환의와 구 장로 사마의가 육 장로의 몽오를 영입하기 위해 몽환검종의 장원으로 갔던 것을 물었다. 그 질문에 환의가 한쪽 무릎을 꿇고 천여운에게 사죄했다. “사죄드리겠습니다. 저와 사마 장로가 몽환검종으로 갔으나, 몽 장로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만나지 못했다고요?” “네에. 저희가 도착했을 무렵에 이미 손님이 있었습니다.” 손님이 있었다는 말에 천여운이 인상을 찡그리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혹시.....검마종이나 음마종이었습니까?” “아! 그걸 어찌 아셨는지요?” 천여운의 질문에 환의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의 예상대로 몽환검종의 장원을 먼저 찾은 손님은 검마종과 음마종의 두 종주들이었다. 간발의 차로 그들에게 선수를 빼앗긴 환의와 사마의는 기다렸다가 보기를 청했지만 오늘은 힘들것 같다는 전갈에 돌아와야만 했다. ‘역시인가.’ 천여운이 중립에 있는 장로들을 아군으로 영입하려는 것처럼 네 종파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저들은 어떻게든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세력을 늘려나가는 것이었다. 다만 몽 장로를 보기도 전에 문전박대를 당했다면 그는 네 종파 쪽에 넘어갔을 확률이 높아졌다. “별로 좋은 소식은 아니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저들이 빨랐던 거죠. 그런데 이분은 어째서?” “아아!” 천여운이 그들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연무화의 인피면구를 쓰고 있는 암종의 요원을 물었다. 환의가 그 물음에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우리 요원이 이곳에 온 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연 장로.” “음?” 환의의 부름에 천여운의 옆을 지키고 있던 연무화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 역시도 마연검종의 장원에서 자신을 연기하고 있어야 할 요원이 이곳에 온 것을 궁금했던 차였다. “소교주님과 연 장로님께 인사드립니다. 이십사 호라고 합니다.” -착! 스스로를 이십사 호라고 밝힌 인피면구의 요원이 먼저 인사를 했다. 천여운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주자, 인피면구의 요원 이십사 호가 비환귀종의 장원으로 찾아온 이유를 말해주었다. “연 장로님. 마연검종의 장원에 침입자가 있었습니다.” “침입자?.....설마 또 검마종에서?” “아닙니다.” 연무화의 예상과 달리 침입자는 검마종이 아니었다. 이십사 호는 불과 한 시진 전쯤에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연무화에게 평소 행동반경을 들어서 숙지하고 있는 이십사 호는 본당 건물의 서재에서 서적을 읽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서재에서 서적을 읽고 있을 때 웬 전음이 들려왔습니다.” [연무화.] 전음성에 놀란 이십사 호가 서재 밖으로 나왔지만 근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이십사 호는 주변을 살펴보려고 했는데 다시 예의 전음이 들려왔다. [평소처럼 행동해라. 괜히 나를 찾으려 의식하지 말고.] ‘아!’ 전음성에 이십사 호는 그제야 이 정체 모를 자의 무공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두려움을 느낀 이십사 호는 훈련받은 대로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서재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다시 전음이 들려왔다. [사정이 바뀌었다. 기일을 열흘 당기도록 하겠다. 그럼.] 그것이 끝이었다. 앞뒤 전후가 없이 기일을 바꾸겠다는 말을 끝으로 더 이상의 전음은 들려오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재에서 일각 가량을 기다렸던 이십사 호는 들리지 않는 전음성에 밖으로 나와 전음을 보낸 자의 흔적을 찾았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제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연 장로님께 이 사실을 전해드리러 온 겁니다.” 그녀의 이야기가 끝나자 천여운이 진지해진 눈빛으로 연무화를 바라보았다. 연무화 역시도 그런 천여운의 시선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십사 호가 말해준 전음을 보낸 자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챈 듯 했다. “무.....명.” 그녀는 그 자를 무명(無名)이라고 확신했다. 삼 년 전, 연무화 자신을 포함한 세 장로들에게 이십사마검의 일 초식을 익힌 후에 십만대산의 오현봉에서 만나기로 약조한 그 정체모를 고수였다. “아!” 그의 정체만 의식했던 연무화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것은 전음의 내용 중에 기일을 열흘 당기겠다는 말 때문이었다. 천여운에게 무명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을 때가 바로 닷새전의 일이었다. 그때 그녀는 보름 후에 무명과 만난다고 하였다. “.....오늘이군요.” 열흘을 당긴 시점은 바로 오늘이었다. 연무화가 이해가 가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몇 차례 무명을 만나면서 한 번도 기일을 변경했던 적은 없었는데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째서 기간을 당겼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녀의 의문에 천여운이 입 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뭔가 사정이 생겼다는 거겠죠. 잘됐군요.” 그렇지 않아도 이십사마검과 천마검공을 전부 알고 있는 무명을 만나기를 학수고대해오던 천여운이었다. 그것이 이렇게 당겨질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 * * 그날 밤 자시(子時) 무렵. 마교 성에서 서남쪽으로 백 리(里) 떨어진 오현봉. 십만대산의 수많은 산봉우리들 중에서도 세 손가락에 꼽히는 드높은 산이다. 오현봉의 산꼭대기 위로 날렵하게 경공을 펼치며 오르는 자가 있었다. 거친 산자락을 쉽게 오르는 자는 불과 이각 여의 시간 만에 산의 꼭대기에 이르렀다. -탁! 산 정상을 밟자 밤하늘 달빛에 비춰지는 십만대산의 산봉우리들이 펼쳐졌다. 어두웠지만 그 은은하게 보이는 산봉우리들이 광활하기 그지없었다. “후우.” 차가운 산 공기에 입김이 자욱하게 올라왔다. 쉬지 않고 산을 오른 자는 중년의 귀부인인 연무화였다. 그녀는 계속해서 환골탈태한 사실을 숨기기 위해 이십사 호에게서 받은 인피면구를 착용하고 예전의 모습으로 이곳에 왔다. “연 장로. 오셨소?” 그때 그녀의 귀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현봉의 정상에는 그녀보다도 먼저 도착한 이가 있었다. 부리부리한 눈매에 짧은 턱수염을 기른 검마종의 종주이자 이 장로 경본기였다. 한 바위 위에 앉아서 정좌를 하고서 기다리고 있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연무화에게로 다가왔다. “이번에도 셋이 모일 줄 알았는데, 둘만 오게 되었구려.” “흥!” 경본기의 말에 연무화가 콧방귀를 뀌었다. 마연검종에서 오백여 년 동안이나 현마종과 검마종을 싫어하는 것을 알기에 경본기는 냉담한 그녀의 반응에 아무렇지 않아했다. “그래도 오현봉에 오른 걸 보니, 검초에 성과를 거두었나 보구려.” “그분을 배신한 파렴치한 일족과는 말을 섞지 않는다.” “하! 여전하시군.” 경본기가 혀를 차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매번 이곳에서 만날 때마다 그녀는 일 장로 무진원과 자신과는 절대로 말을 섞으려 하지 않았다. 늘 경멸하는 눈빛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네년이 그런다고 해도 별 수 없다. 이번에 검마 공의 모든 진전을 잇게 되는 것은 우리 검마종이 될 것이다.’ 비록 파문당하기는 했지만 검마의 진전을 잇고 싶어 하는 검마종이었다. 마교에서 서열 이, 삼 위를 다투던 최강의 무인인 무진원이 없는 이상 승리는 자신의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자신은 지난번의 무명과의 만남에서 한 가지 알게 된 것이 있었다. ‘짐작이 맞다면 그는 분명......아! 거의 시간이 되었군.’ 달이 밤하늘의 중천에 떠있는 것을 보니 자시가 되었다. 항상 시간에 맞춰서 나타나는 자였으니 지금 쯤 산봉우리 위로 도착할 때가 되었다. 바로 그때였다. -탁! 산봉우리 위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자가 가벼운 신형으로 그들이 있는 앞으로 다가왔다. 검은 복면에 흑색 장포를 걸치고 있는 사내는 틀림없는 무명이었다. “제 시간에 맞췄군.” 목소리 또한 그때의 그 목소리였다. 무명의 반응을 보면 두 사람 밖에 있지 않은데도 전혀 이상해하지 않았다. 마교를 자유롭게 드나드는 자였으니 당연히 일 장로 무진원의 죽음을 아는 것도 당연했다. ‘정말 이 자는 누구지?’ 연무화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완숙한 화경의 경지일 때도 그랬지만 극(極)에 올랐는데도 여전히 무명의 무공을 짐작하기 힘들었다. 이렇게 기운을 완전히 갈무리하려면 오직 화경의 극 이상의 무위를 지녀야 가능하다. “기일을 변경했는데도 시간을 맞춘 것에 경의를 표하지. 그럼 바로 본론에 들어가도록 할까. 두 사람 중에 누가...” -털썩! “.....무슨 짓이지?” 무명이 자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쪽 무릎을 꿇는 검마 종주 경본기의 태도에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물었다. 연무화 역시도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자가 왜 무릎을?’ 그때 경본기가 두 손을 모아서 예를 갖춘 목소리로 말했다. “검마종의 종주이자 본교의 이 장로인 경본기가 태상교주님께 인사 올립니다.” “뭐?” 경본기의 말에 연무화가 두 눈이 커져서 무명을 바라보았다. 무명이 본교와 관련된 자일 거라고는 짐작했지만 태상 교주이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그녀였다. ‘그때 그 검법.....분명 틀림없다.’ 이 장로 경본기는 삼 년 전에 무명이 보여주었던 그 전율적인 검초를 떠올렸다. 그 검초를 보는 순간 경본기와 무진원은 동시에 놀랐었다. 그들은 수차례 현 교주인 천유종과 전장을 함께 했기에 천마검법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무명이 펼친 이 검초는 천마검법과 매우 흡사했다. 처음에는 교주가 자신들을 상대로 시험하는 것인가 고민했지만 여섯 종파를 약화시키려는 그가 그럴 리가 없었다. 그날 장원으로 돌아온 경본기는 고민에 빠져 있다가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교주 이외에 천마검법을 알고 있는 자가 대체 누가 있단 말인가. 아! 설마?’ 태상교주 천인지였다. 이십여 년 전에 행방불명된 태상교주 천인지가 아니고는 천마검법을 익힐 수 있는 자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사라져서 생사를 알 수 없는 그만이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 본교를 이렇게 쉽게 드나들면서 본 종의 비밀을 알 만한 사람은 태상교주님 밖에 없다.’ 무명이 태상교주라고 확신한 경본기는 예를 갖췄다. 만의 하나라도 틀릴 확률은 없겠지만 그가 태상교주라면 예를 갖춰서 잘 보일 필요가 있었다. 괜히 심기를 건드려서 나쁠 게 없었다. 그런 이 장로 경본기를 말없이 내려다보던 무명이 입을 열었다. “경본기. 뭔가 착....” -흠칫! 말을 하던 무명이 잠시 그것을 멈추더니, 눈매를 가늘게 뜨고서 연무화와 경본기를 차례로 쳐다보며 물었다. “누구지?” 그 목소리가 다소 위압적으로 바뀌어 있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누구 약조를 어긴 것이냐?” “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았습니다.” “헛소리.” 무명이 검결지로 하얀 빛 검기를 만들어내서 뒤편으로 날렸다. -촤아아악! 무명이 발산한 검기가 어딘가를 향해 쇄도했다. “대체 무슨....엇?” 검기에 놀란 경본기가 포권을 취하던 것을 풀고서 고개를 들었다. 그때 그들이 있는 반대편, 즉 무명의 뒤쪽에 반쯤 갈라진 수풀 속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경본기의 두 눈이 커졌다. 그가 어째서 이곳에 나타난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소.....교주!!!” 그는 바로 천여운이었다. < 44장 무명(無名) (1) > 끝 < 44장 무명(無名) (2) > 자시가 되기 반 시진 전. 오현봉의 산봉우리에 가장 먼저 도착한 자가 있었다. 그는 바로 천여운이었다. 무명과의 만남이 열흘이 당겨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천여운은 연무화와 상의를 해서 먼저 오현봉의 정상에서 숨어있기로 하였다. '저도 함께 하겠습니다.' 처음에는 십일 장로 환의가 위험하니 같이 동행하겠다고 하였지만, 무명의 무공이 세 장로들보다도 강하다고 알고 있던 천여운이 이를 거절했다. 그가 정말로 엄청난 무위를 지녔다면 매복을 눈치 채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먼저 오현봉의 정상에 도착한 천여운은 몸을 숨기기 좋은 곳을 찾았다. 산봉우리에 유일하게 수풀이 우거진 곳이 있어서 이곳에서 대기하면서 무명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이 장로.' 처음 나타난 사람은 이 장로 경본기였다. 그 역시도 화경의 경지에 오른 고수였지만 천여운의 기척을 감지하기에는 무위에서 한 단락 차이가 났기에 불가능했다. 경본기는 한참이 지나도 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얼마 있지 않아 연무화가 산 정상으로 올라왔고, 이윽고 천여운이 기다리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복면에 흑색 장포를 걸친 무명이었다. '아!' 수풀에 숨어있던 천여운이 속으로 탄성을 흘렸다. 어느 정도 강할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기를 완전히 갈무리한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적어도 자신과 동급의 무인이거나 그 이상일지도 몰랐다. 정말 그 정체가 궁금해졌다. '일단은 더 지켜보자.' 천여운은 일단 무명이 두 장로들을 시험하기 위해서 천마검공의 일 초식을 펼칠 터이니, 그것을 보고서 판단하기로 했다. 그렇게 더 숨어서 지켜보려던 했는데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응?' 무명이 갑자기 몸을 돌려서 천여운이 있는 방향으로 검기를 날린 것이었다. 기를 완전히 갈무리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기척을 감지해냈다. -촤아아아아악! '나를 발견하다니? 별 수 없구나!' 정확하게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검기에 천여운이 보법을 펼쳐서 그것을 피해냈다. 덕분에 빗겨나간 검기가 수풀의 반을 갈랐다. 검기를 피해냈지만 이미 위치를 들킨 이상 남은 선택지는 하나였다. "소, 소교주!!!" 천여운이 모습을 드러내자 이 장로 경본기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체 그가 어떻게 이곳에 나타났단 말인가? '서, 설마?' 교내에서 오직 세 사람만의 비밀이었는데 천여운이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은 범인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경본기가 고개를 획하고 돌려서 연무화를 노려보며 말했다. "연 장로! 당신의 짓이구려!" 이미 대전 회의에서 천여운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만 천하에 공개한 연무화였다. 그녀가 아니고는 천여운이 오현봉에 나타난 것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흥! 그래 본 녀다." "소교주를 이곳에 데려오다니 대체 제 정신이오?" 이 장로 경본기는 진심으로 화가 났는지 기세를 내뿜으며 말했다. 검마의 마지막 심득이 담긴 검법인 이십사마검을 전수 받는 이 날만을 손꼽아서 기다렸는데 그것에 초를 친 셈이었다. "기세를 보아하니 출수할 작정인가 보지." -챙! 연무화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집에서 보검을 뽑았다. 처음부터 이 자리에서 진정한 검종을 가리려고 했었기에 기다렸던 바였다. "크윽! 정말 막무가내구려." 경본기 역시 당장에라도 그녀의 목을 베고 싶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털썩! 경본기가 두 무릎까지 바닥에 꿇고서 무명에게 말했다. "태상교주님! 이것은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말씀하신 약조를 지켰습니다. 그러니 부디 검종의 진전을 잇도록..." 그런 그의 간절함에도 불구하고 무명이 냉정하게 말을 잘랐다. "늦었다. 한 사람이라도 약조를 어긴 순간부터 끝이다. 그대들과 이십사마검은 인연이 없는 듯하군." "어, 어찌 그런!" -탓! 그렇게 기다려왔던 이십사마검을 익힐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스러워하는 경본기를 뒤로 한 채 무명이 빠르게 경공을 펼쳐서 이곳을 벗어나려 했다. "태, 태상교주!" 이 장로 경본기가 급히 무명을 쫒아가려하는 것을 연무화가 가로막았다. "누구 마음대로 보내준다고 했지?" "이.....년이 정녕!" 본래는 호전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억눌렀던 경본기의 난폭함이 일순간에 터져 나왔다. -챙! 경본기가 검을 뽑아서 자신을 가로막는 연무화를 향해 검초를 날렸다. 얼마나 분노했는지 초식에 살의가 잔뜩 베여있었다. "흥!" -채채채채채채챙! 연무화가 유연하게 진신마검의 검초를 펼치며 이를 막아냈다. 무공으로는 자신이 한 수 위라고 생각했던 경본기의 눈빛이 흔들렸다. '뭐지? 이 년이 원래부터 이렇게 강했던가?' 일 장로 무진원이나 대호법 마라겸을 제외한다면 교내에서 자신을 꺾을 자는 없다고 자부했던 그였다. 그런데 그녀가 검을 부딪칠 때마다 전해져오는 공력의 여파에 당혹스러웠다. 긴장하고 제대로 전의를 가다듬지 않으면 오히려 자신이 패배 할 수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빌어먹을!' -타타타타탁! 한편 빠르게 경공을 펼치며 오현봉의 정상을 벗어난 무명은 벌써 산중턱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의 경공은 흡사 바람을 타고 내려가는 것처럼 너무도 빨랐다. 보통 무림인들이 몇 번을 디뎌야 할 보폭보다 두 배 이상은 넓게 뛰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안타깝군.' 산을 타고 내려가면서 무명은 내심 이십사마검을 전수하지 못 한 것을 아쉬워했다. 일부러 기일까지 당겨가면서 그들을 만난 것도 무리해서라도 무공을 전수하기 위해서였는데, 이제는 힘들게 되었다. '어차피 다른 이십사마검의 전수자가 나왔으니 상관없겠지.' 과거의 검종과 연이 있는 자들이 익히길 바랐지만 이제는 별 수 없었다. 약조를 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적당히 따돌리다가 돌아가야겠군.' 자신이 경공을 펼쳐서 산봉우리를 벗어나려하자 천여운이 따라오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충분히 따돌릴 자신은 있었다. 무명이 용천혈에 내공을 더욱 끌어을려서 경공을 박차려고 했다. 바로 그때였다. "으아아아아앗!" '엇?' 귓가로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놀란 무명이 위를 쳐다보았다. 바로 그 순간 허공에서 천여운이 떨어지면서 자신을 향해 백룡도를 내려찍고 있었다. '아닛?' 당황한 것도 잠시였고 무명이 흑색장포에 가려져있던 검집에서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검을 뽑아서 백룡도를 막아냈다. -채애애애앵! 푸우욱! 도신과 검신이 부딪치는 순간 묵직한 무게감과 함께 무명의 발이 땅을 파고들었다. 마치 천근추(千斤錘)를 펼친 것만 같은 위력이었다. '이런!' 절반의 공력만으로 대응하려 했던 무명이 안 되겠다 싶어서 구 성 공력까지 끌어올렸다. 그러자 발목까지 파고들었던 묵직한 위력이 상쇄되면서 천여운의 백룡도를 쳐낼 수 있었다. 챙! 콰직! "크윽!" 무명의 검에 튕겨나간 천여운이 거목에 부딪쳤다. 두 사람이 부딪쳤던 남은 공력의 여파가 거목에 집중되면서 그것이 부러져나갔다. -쿵! "하아....하아...." 거목에 박혀 있는 천여운의 입에서 거친 호흡이 튀어나왔다. 원래도 새하얀 얼굴이 더욱 질려 있는 것으로 보아 뭔가 무리를 한 모양이었다. '다시는 이 짓거리는 하지 말아야지.' 천여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파열된 근육과 금이 간 뼈를 빠르게 자가수복합니다.] 나노의 목소리와 함께 몸 전체를 울리는 통증들이 서서히 완화 되어 갔다. -푹! 푹! 그때 무명이 발목까지 파고들었던 다리를 땅바닥에서 빼내며 어이가 없다는 투로 말했다. "설마 그 위에서 뛰어내린 것이냐?" 무명의 질문에 천여운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말이 정답이었기 때문이었다. 천여운은 무명을 따라잡기 위해서 경공을 펼쳤지만, 어느새 그 격차가 벌어지면서 도저히 그를 따라잡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나노에게 야간투시경 모드를 활성화하고 증강현실을 개안하여 무명이 내려가는 경로를 추적 및 계산하게 하여 그 위치로 과감하게 뛰어내린 것이었다. '정말 죽을 뻔했다.' 떨어지면서 처음으로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무리하게 모험을 건 덕분에 단번에 무명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구나. 그 높은 고지에서 내가 내려가는 경로를 짐작하여 뛰어내렸다는 말인가?' 무명은 진심으로 어이가 없다는 눈빛으로 천여운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무공을 익혔다고 해도 그 정도 높이라면 어지간한 배짱이 있지 않고는 뛰어내릴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까딱 잘못했다간 낙하하는 힘에 죽을 수도 있었다. '정말 괴물 같은 녀석이군. 하지만 어차피 결과는 다를 바 없다. 자신은 다시 경공을 펼쳐서 내려가면 될 일이라고 여겼는데. -부들부들! '이런.....' 무명의 발목부터 허벅지까지 떨려왔다. 떨어지면서 도를 내려치는 힘을 막아냈는데 그 여파를 완전히 이겨내지 못했다. 섬세할 정도로 전신에 공력을 운용하여 뼈가 부러지거나 하는 것은 막을 수 있었지만 근육이 일부 파열된 듯 했다. "후우!" 반면 천여운은 나노의 자가수복 기능으로 몸이 회복되었다. 박혀있던 거목에서 몸을 일으켜 세운 천여운이 무명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제 당신의 정체가 뭔지 알아볼 시간이군." "고작 그 이유 때문에 목숨을 걸다니......대단한 배짱이군." 무명이 혀를 내두르며 천여운에게 검 끝을 겨냥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 경공을 원활하게 펼칠 수 없다면 무명에게도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천여운을 빠르게 제압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이 높이에서 떨어져서 거목이 부러질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면 쓰러뜨리는데 그리 오랜 시간을 소요하지 않으리라. "길고 짧은 것을 꼭 대봐야 아는 것이 아니니까 말이야." 그 말과 함께 무명의 신형이 튕겨져 나오며 천여운을 향해 쇄도 해왔다. -촤촤촤촤촤촤! '이건?' 무명의 손에서 펼쳐지는 검초는 다름 아닌 검마의 이십사마검이었다. 연무화가 초식을 기억해서 복원했던 것과는 다른 완전한 형태의 이십사마검의 검초였다. 스물네 개의 검식들이 맞물리면서 격류처럼 천여운을 밀어붙였다. 그 위력은 천여운의 손에서 펼쳐지는 것 이상이었다. '후우!' 천여운이 숨을 내쉬며 백룡도의 도병을 다르게 잡았다. 무명의 손에서 펼쳐지는 이십사마검의 검초는 접무도법으로 막아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전력으로 간다!' 천여운이 극도신의 도법의 이 초식을 펼쳤다. 무명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극도신의 도법!' 그는 도법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일순간에 이십사마검의 검초와 극도신의 도초가 격렬하게 부딪쳤다. -채채채채채채챙! 두 절세초식이 부딪치면서 어두운 오현봉의 산봉우리 중턱이 금속성으로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검과 도가 부딪칠 때마다 천여운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울컥울컥! 무명의 공력은 그보다도 훨씬 더 심후했다. 도신을 타고 흐르는 공력의 여파가 오장육부를 자극해서 핏물이 식도를 타고 올라올 정도였다. [체내로 파고드는 에너지에 장기 기관에 손상이 갔습니다. 빠르게 자가수복합니다.] 나노가 보조하지 않았다면 공력으로 승부가 났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공력에서 밀린다고 해서 초식 승부까지 밀리는 것은 아니었다. 이십사마검의 검초는 극도신의 도초보다 한 수 아래였다. '분명 나보다 공력이 낮은데.' -채채채채챙! 무명은 강한 공력을 바탕으로 이십사마검을 펼쳐서 극도신의 도초를 파훼하려 했지만, 천여운이 이를 버텨내고 초식을 펼치자 비정상적인 각도로 꺾어 들어오는 도식에 방법을 바꿔야만 했다. '과연 극도신의 도법이로구나. 그렇다면!' -타타탁! 무명이 보법을 펼쳐서 기이한 각도로 파고드는 도식들을 피해냈다. 그가 물러나자 기세를 이어나가야 한다고 판단한 천여운이 극도신의 도초의 제 삼초를 연달아 펼쳤다. -촤촤촤촤촥! 패도적인 도결이 부드럽게 이어지며 무명을 노렸다. 그 순간 무명이 빠르게 신형을 더욱 벌리더니, 잡고 있던 검에서 손을 놓았다. 천여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 -채채채채챙! 놀랍게도 거리를 벌린 상태에서 무명이 검결지로 움직임을 그리자, 검이 허공에서 스스로 움직이며 검초를 펼쳤다. '이기어검!' 그것은 이기어검(以氣御劍)이었다. 진기로써 검을 부리는 것이었는데, 적어도 현경의 초입에 이른 고수만이 가능한 기술이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기어검으로 펼치는 검법에 있었다. '천마검공?' 그것은 천마검공의 제 이 초식이었다. 검초의 운기요결이 정확하지 않아서 그 위력이 다소 반감되었으나 분명 천마검공이었다. -채채채채채챙! 초식의 위력이 반감되었다고는 하나 이기어검으로 검초의 움직임이 더욱 자유로워서인지, 원래의 천마검공 못지않은 절세초식이 펼쳐졌다. '이런 식으로 천마검공을 펼칠 줄이야.' 아무리 도식이 비정상적인 각도로 꺾인다고 하나 스스로 검을 잡고 검초를 펼치는 것이 아니기에 무명은 기어코 극도신의 도초를 파훼하는데 성공했다. -챙! 챙! 천여운이 쥐고 있던 백룡도가 뒤로 튕겨나가는 순간 무명의 신형이 파고들면서 다시 검을 잡고 그의 어깨를 찔렀다. -푹! "크윽!" 어깨를 찔린 천여운의 신형이 뒤로 여덟 보가 넘게 밀려났다. 천여운이 피가 흐르는 어깨를 붙잡고 무명을 노려보았다. '정말 강하다. 본교에 이런 전율적인 고수가 숨어있었다니.....이 자는 정말 태상교주님인가.' 이 정도 무위라고 한다면 태상 교주가 아니고는 설명이 힘들었다. "하아......하아...." 무명의 호흡이 다소 거칠어졌다. 얼굴은 복면으로 가리고 있었지만 드러난 손등에 핏줄이 서있는 것을 보면 꽤 무리한 듯 했다. 내공의 소모가 큰 이기어검을 비롯해 운기요결이 완벽하지 않은 천마검공을 동시에 시전했으니 당연히 신체에 부하가 걸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현경의 고수는 내공을 회복하는 것에 있어서 그 이전의 경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경이로운 운기 능력을 지녔다. "후우!후우!" 복면의 입 쪽에서 하얀 김이 흘러나오자, 점차 거친 호흡이 안정되어 갔다. 무명이 천여운에게 검 끝을 겨냥하면서 말했다. "충분히 실력 차를 격감했겠지. 너는 내 상대가 되지 못한다. 더 이상 나를 따라오지 마라." "아직.....끝나지 않았다." 그런 무명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천여운의 눈빛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여전히 포기하지 않으려는 모습에 무명이 혀를 내둘렀다. '정말 독종이로구나.' 이미 무공의 경지로도 한 단락 이상 차이가 나는 것을 확인했을 텐데도 포기하지 않는 것을 보면 지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 수 없군. 확실하게 쓰러뜨리는 수밖에.' -솨아아아아! 지금까지와 다르게 무명의 몸에서 강렬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것은 일종의 경고였다. 방금 전에는 어깨로 끝났지만 이번에는 확실하게 목숨을 노릴 거라는 의지를 보이는 것이었다. 받아랏! -슉! 무명의 손에서 검이 살아있는 것처럼 날아서 천여운에게로 쇄도해왔다. '그 전의를 꺾어주마. 이 초식은 절대로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무명은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최강의 초식으로 천여운을 쓰러뜨리려 했다. 그것은 바로 천마검공의 제 사 초식이었다. -촤촤촤촤촤촤촥! 무명이 검결지를 휘젓자 허공을 날으는 이기어검이 화려한 검결을 그리며 천마검공의 제 사 초식의 궤적을 그렸다. 그 위력은 단숨에 천여운을 고기조각으로 만들 기세였다. 천여운이 깊은 호흡을 내뱉더니 이내 신형이 바닥에서 튕겨져 나오며, 그의 백룡도에서 극도신의 도초가 펼쳐졌다. 패도적인 기세의 도결이 허공에 화려한 궤적을 그리는 천마검공의 검초로 쇄도했다. -채채채채채채챙! 귀가 찢어질 듯 한 금속성과 함께 두 절세초식이 격렬하게 부딪쳤다. 본래라면 기이한 각도로 상대의 허점을 노리는 극도신의 도초가 이기어검을 막아내는데 그 전력을 쏟고 있었다. -팟! 팟! 천마검공의 제 사 초식의 검식들의 위력은 가히 명불허전이었다. 완전하지 않은 초식임에도 불구하고 이기어검이라는 날개를 달고서 천여운의 몸에 상처를 입혔다. '끝이다!' 이미 도식의 절반 이상이 파훼되어서 초식에 허점이 여실히 드러났다. 무명이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는 그 순간이었다. '아닛?' -차차차차차차착! 천여운의 양 팔목의 보호대로 있던 검은 철들이 분리되면서 하나의 흑검으로 변했다. 여전히 도초를 펼치는 가운데 천여운이 그 흑검을 왼손으로 잡았다. 바로 그 순간 무명의 두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서, 설마?' '흐아아아압! 기합성과 함께 이기어검에 밀리고 있던 천여운의 보폭이 앞으로 내딛는 순간, 폭발적인 역량과 함께 왼손에 들려있는 흑검에서 절세검초가 펼쳐졌다. 그것은 진정한 천마검공의 제 사 초식이었다. -채채채채채채채챙! 오른손에서 펼쳐지는 극도신의 도초와 왼손으로 펼쳐지는 천마 검공의 검초가 맞물리면서 백색과 검은색 입자가 화려한 궤적을 그리며 흩날렸다. -채채채채채채챙! '마, 막아낼 수가 없다!'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차차차창! 너무도 강렬한 두 초식의 위력에 일순간에 검초가 파훼되고, 이기어검을 펼치고 있던 무명의 보검이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크헉!" -부웅! 그 반동의 여파로 무명이 피를 뿜으며 뒤로 날아가 버렸다. -쾅! 거목이 없었다면 바닥에 쓰러졌을 지도 모른다. 무명이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고통을 참아가면서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착! 어느새 천여운의 백룡도와 천마검이 교차해서 그의 목을 겨냥하고 있었다. < 44장 무명(無名) (2) > 끝 < 44장 무명(無名) (3) >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는 날카로운 백룡도와 천마검을 보면서 무명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애초부터 무위의 격차는 확연했다. 화경의 극과 현경 초입이 한 단락 차이라고 하나 그 간극은 엄청나다. 내공의 양, 공력의 차이, 공력을 운용하는 범용성부터 시작해서 천여운이 승리할 수 있을 확률은 굉장히 낮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전부 엎어버릴 만큼 폭발적인 역량을 보여주었다. 더욱 무서운 것은 천여운 한 명이 익힌 무공들은 중원 무림을 통틀어도 수위에 꼽히는 절학들이라는 점이었다. 그런 절세무공들을 일 장로 무진원의 비기를 이용해 우도좌검을 펼쳤으니 그 위력이 상상을 초월하는 것도 당연했다. ‘진정 괴물이로구나.’ 상대를 전부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몰랐던 것 같았다. 무명이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는 천여운을 바라보며 물었다. “......죽일 것이냐?” “아직은 아니다.” 목적을 달성한 후에는 죽일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그런 천여운의 말에 입을 다물고 있던 무명이 흑검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 검......혹시 천마검인가?” 무명의 질문에 천여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분명 본교와 관련된 사람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천마검을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적어도 수뇌부급에 해당하는 인물일 확률이 높았다. -탁! ?! 천여운이 천마검의 날카로운 검끝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복면을 베었다. 복면의 천이 갈라지며 가려져 있던 무명의 얼굴이 드러났다. “앗?”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천여운이 인상을 찡그렸다. 태상교주이거나 수뇌부들 중에 숨겨진 누구일지도 모른다는 예상과 다르게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다. 무명은 삼십 대 중반으로 이국적이면서 훤칠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두 눈동자의 색이 달랐다. 오른쪽 동공이 파란색이었다. 어찌 보면 중원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다른 것이 궁금했다. “당신 대체 누구지?” 천여운의 질문에 무명의 눈빛에 이채가 띠었다. 이국적인 외모보다는 오직 정체에만 관심을 가지는 태도 때문이었다. ‘참으로 특이하구나. 보통의 중원인과는 다른 외모에는 전혀 의문스러워하지 않다니.’ 잠시 말이 없던 무명이 입을 열었다. “소교주님. 더 이상 싸우거나 도망치지 않을 터이니, 목에 겨눈 것을 풀어주십시오.” “이, 이 목소리는?” 놀랍게도 무명은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까지는 변조를 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천여운이 익히 알고 있는 자의 것이었다. “대호법!” 바로 대호법 마라겸의 목소리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던 무명의 정체에 천여운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태상교주가 아니었다니....’ 천여운이 잠시 고민하다가 그의 목에 겨누고 있던 백룡도와 흑검을 거두어 들였다. -차차차차차착! 흉흉한 마성의 내공을 갈무리하자 흑검이 다시 검은 철조각들로 분리되면서 천여운의 팔목의 보호대로 돌아갔다. 벌써 두 번씩이나 대호법 마라겸을 상대로 천마검을 보인 셈이었다. 천여운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그가 어떻게 이십사마검과 천마검공을 익히고 있는 가에서부터 심지어 천마검을 알고 있는 것까지 모든 게 의문스러웠다. “후우, 대호법. 어찌 된 것인지 모두 설명해주기 바랍니다.” 진지한 천여운의 물음에 마라겸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 전에 소교주님께 먼저 드릴 말씀이....” -콰아아아앙! 마라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거대한 굉음이 산 전체로 울려 퍼졌다. 그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두 사람이 산봉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찌릿찌릿! 그들의 감각을 자극할 만큼 사악하면서도 강렬한 기운이 산 위 쪽에서 퍼져 나오고 있었다. 천여운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곳은 십 장로 연무화와 이 장로 경본기가 겨루고 있는 산 정상인 듯 했다. 그런 천여운에게 마라겸이 말했다. “소교주님. 일단 산 정상에 오르시죠. 저도 함께 하겠습니다.” 아직 마라겸과의 일이 해결되지 않았기에 걱정했던 천여운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곧장 경공을 펼쳐서 산 위로 올랐다. 그 뒤를 따라서 마라겸도 경공을 펼쳤다. 하지만 내상 때문에 원래의 속도만큼은 낼 수가 없었다. 한편 오현봉의 산봉우리 정상은 아까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산봉우리의 바닥은 군데군데 균열로 갈라져 있었고, 바닥에 수많은 구덩이들이 파여져서 아수라장과 같았다. -탁! “하아...하아...”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신형을 빠르게 움직이는 여인이 있었으니, 십 장로 연무화였다. 아까 전만 하더라도 깔끔했던 의복이 반쯤 넝마가 되어 있었다. 곳곳은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는데, 출혈이 컸는지 연무화의 안색은 하얗게 질려서 지친 상태였다. -팟! 콰아앙! 그녀의 움직임이 조금만 늦었어도 바닥에 패인 구멍처럼 되었을 것이다. 먼지가 피어오르는 구멍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고오오오오! 마교에서 제일 거구라 할 수 있는 고왕흘보다도 머리 하나는 더 큰 존재였는데, 전신의 근육이 비대할 정도로 커져서 혈관들이 울룩불룩 튀어나와 피부가 검붉게 보였다. 먼지 사이로 보이는 붉은 안광은 보는 이로 하여금 소름이 돋을 만큼 사악한 마성을 풍기고 있었다. 괴물 같은 사내가 짐승 같은 울음소리를 내며 입을 열었다. “크르르르르르, 쥐새끼처럼 빠르구나. 네년이 언제까지 피할 수 있을까.” “하아....하아....경본기....이놈!” 놀랍게도 이 괴물 같은 사내는 바로 이 장로 경본기였다. 원래의 모습은 떠올리지 못할 만큼 거구의 괴인 되어버린 경본기는 진득한 살기를 흘리며 그녀를 향해 다시 몸을 날렸다. -슉! “큭!” 거구와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그 몸놀림은 매우 빨랐다. 화경의 극에 이른 그녀가 전력으로 경공을 펼치는 속도를 따라잡을 정도로 민첩했다. 다만 근육이 비대해지면서 정교함이 떨어져서 겨우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크아아아아!” -퍽! “꺄아아아악!” 경본기의 거대한 주먹에 맞은 그녀가 비명과 함께 튕겨나가 버렸다. 그 힘이 어찌나 강했던지 호신강기를 펼쳐서 막았는데도 왼쪽 팔목의 뼈가 부러진 듯 했다. ‘저...적응 하고 있어.’ 경본기는 스스로의 육신에 적응하고 있었다. 몇 차례는 겨우 피했는데 결국에는 이렇게 공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그녀가 부러진 왼쪽 팔을 늘어뜨리고 검을 지팡이 삼아서 일어나며 경본기를 노려보았다. “크르르르르르. 꼴좋구나.” “하아....하아....역혈마공을 펼치고도 네놈이 무사할 것 같으냐!” 괴물처럼 변해버린 경본기의 변화는 바로 역혈마공(易血魔功)에서 비롯되었다. 연무화의 대결에서 패배한 경본기의 선택은 바로 역혈마공이었다. ‘빌어먹을 역혈마공!’ 전에도 검마종의 암검이종 중 하나인 대무검종에서 역혈마공과 연루되었을 때 끝까지 부인했던 경본기는 역혈마공을 익히고 있었다. 완숙한 화경의 경지인 경본기가 역혈마공을 펼치니, 폭증한 그 위력은 인간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나버렸다. “크하하하하하하! 그런 반쪽짜리와 같은 줄 아느냐?” “반쪽?” “나의 역혈대라신공(易血代拏神功)은 그딴 미완성 마공 따위 비교하지 마라.” 원래의 역혈마공은 쓰면 쓸수록 사용자의 기혈이 망가지고, 이지를 잃어가기 때문에 후에는 아군조차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고 보면 한참 전에 이지를 상실해야 할 그가 생각보다 멀쩡했다. “말도 안 돼!” “크크크크큭! 어리석은 년. 본 종에서 완성시킨 역혈대라신공은 기존의 부작용을 거의 대부분 없애는데 성공했다.” 득의양양해하는 경본기의 모습에 연무화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정말로 역혈마공의 부작용을 없애는데 성공했다면 현 마교에서 가장 위험한 곳은 검마종이라 할 수 있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녀가 고개를 흔들며 경본기의 말을 부정했다. 그의 말대로 정말로 부작용을 없앴다면 검마종에서 굳이 역혈마공을 숨길 이유가 없었다. 뭔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여전히 밝히지 않는 것이었다. “네년과의 잡담도 이제 끝이다. 이제 죽여주마! 크르르르르!” -탓! 경본기가 짐승과 같은 울음소리를 내며 그녀를 향해 죽음의 마수를 뻗어왔다. 어찌나 빨랐던지 어느새 그녀의 바로 세 보 앞까지 도달했다. “크아아아아! 죽어랏!” “허튼 소리!” 연무화의 검에서 푸른빛 검강이 치솟았다. 아까 전에 당한 일격 때문에 더 이상 경공을 펼칠 여력이 없기에 남은 내공을 끌어 모아 최후의 공세를 가하기 위해서였다. “너나 죽어!” 연무화가 있는 힘을 다해서 그의 가슴에 검강을 찔러 넣었다. 바로 코앞까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목숨을 각오하고 찌른 그녀의 일검이 경본기의 비대해진 가슴을 찔렀다. 그러나, -차차창! 놀랍게도 검강을 실은 연무화의 보검은 마치 바위에 부딪친 달걀처럼 부서지고 말았다. 경본기의 붉게 팽창한 근육은 갑주처럼 단단했는데 검강조차 관통하지 않았다. “이, 이럴 수가.....” “크르르르르르! 반항은 끝났느냐!” 경본기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괴물 같은 놈의 거구가 바로 앞까지 다가오자 연무화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아아아.....” -털썩! 더 이상 반항할 힘이 없는 그녀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것을 즐기기라도 하듯 경본기가 천천히 거대한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비열하게 웃었다. “크크크큭. 고통스럽게 죽어라.” 그 말을 끝으로 경본기의 주먹이 연무화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죽음에 대한 공포로 그녀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까아아앙! ‘아?’ 당연히 고통과 함께 죽을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그녀의 귀로 뭔가 금속성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아....하아....” 거친 호흡성이 바로 옆에서 들렸다. 그녀가 눈을 뜨고 옆을 바라보니 놀랍게도 누군가 경본기의 거구의 주먹을 새하얀 도로 막아냈다. 연무화가 두 눈이 커져서 외쳤다. “소교주님!” 그는 바로 천여운이었다. 얼굴이 땀으로 젖어있는 그의 모습을 보면 얼마나 다급하게 산봉우리를 올랐는지 알 수 있었다. ‘다행히 늦지 않았군.’ 조금만 늦었어도 연무화가 놈의 주먹질에 짓이겨졌을 것이다. 위기의 순간에 구해진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반면 경본기는 갑자기 나타나서는 자신의 공격을 막아낸 천여운을 어이없어 했다. “또 나를 방해하다니! 크르르르!” 그 말에 천여운이 차갑게 식은 눈빛으로 말했다. “방해? 헛소리도 진지하게 하는군.” “크르르르르르. 오만하구나. 지금의 나를 네놈 따위가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솨아아아아아! 경본기의 몸에서 강렬한 살기와 함께 사악한 기운이 치솟았다. 그 기세가 심상치가 않았다. ‘위험하다.’ “물러나세요.” -팍! “아앗! 소, 소교주님!” 천여운이 연무화의 몸에 공력을 실어서 뒤로 밀어냈다. 공격하려는 목적이 아니었기에 그녀의 몸이 뒤로 멀찌감치 날아가 안착했다. 바로 그 순간 경본기의 흉악한 손에서 거대한 강기가 치솟으며 천여운을 난도질하려 들었다. -촤촤촤촤?! ‘세상에!’ 이에 천여운이 몸을 빠르게 회전하며 백룡도에 도강을 만들어냈다. -채채채채챙! 경본기의 강기가 실린 공격과 도강이 부딪치자 찢어질 것 같은 파공음이 사방을 울렸다. 접무도법의 회원접경을 펼쳐서 강기의 공격을 막아냈는데도 불구하고, 엄청난 공력에 천여운의 몸이 뒤로 튕겨져 나가버렸다. -파앙! ‘무, 무슨 공력이!’ 폭증한 경본기의 공력은 무시무시한 위력을 지녔다. 천여운이 생성한 도강을 단숨에 일그러뜨리고 날려버릴 정도였다. -치이이이익! 겨우 균형을 잡고서 땅을 밟았는데도 천여운의 신형이 뒤로 열 보 가량 밀려났다. 천여운의 뺨으로 식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고수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괴물과 마주하는 느낌이었다. ‘역혈마공인가?’ 경본기의 비정상적으로 커지고 혈관들이 팽창한 모습은 분명 역혈마공이 틀림없었다. 삼 년 전에도 역혈마공을 썼던 죄수와 겨룬 적이 있었지만 이 장로 경본기와 비교한다면 아이 수준에 불과했다. 긴장한 천여운의 모습에 경본기는 득의양양해져서 양손에 강기를 만들어내며 다가왔다. “크르르르르르, 마침 잘됐구나. 이참에 네놈을 죽여서 후환을 없애주마.” -팟! 경본기가 거구에 어울리지 않는 엄청난 속도로 천여운에게 쇄도해왔다. 손으로 만들어낸 거대한 강기로 그가 펼치는 무공은 진신마검의 검초였다. ‘이런!’ -타타탁! “크하하하하핫! 도망갈 수 없다! 크르르!” 천여운이 보법을 펼쳐서 이를 피해내려 했지만 강기가 워낙 거대해서 그 범위를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피할 수 없다면 부딪치는 수밖에 없었다. 천여운이 도병을 쥐고 있는 파지법을 바꾸어서 극도신의 도법을 펼쳤다. -채채채채채챙! 패도적이면서 기이한 방향으로 쇄도하는 극도신의 도법의 신묘함에도 불구하고 경본기는 성난 황소처럼 앞으로 밀어붙였다. 천여운의 도강이 자신의 몸을 가르려고 하는데도 멈추지 않았다. -채채채채챙! ‘몸이?’ 도강이 실린 백룡도의 도가 수차례 경본기의 몸을 베었으나, 같은 무구에 부딪친 것처럼 금속성만 일어나며 오히려 튕겨나갔다. 경본기의 팽창한 육신은 금강불괴(金剛不壞) 그 자체였다. “크르르르! 소용없다! 죽어랏!” -쾅! “크헉!” 경본기가 휘두르는 거대한 강기를 천여운이 재빨리 막아냈지만 그의 신형이 튕겨져 나가고 말았다. -콰콰콰콰콰쾅! 그 엄청난 여파에 천여운의 몸이 물수제비를 치듯이 바닥을 수차례 부딪치고서야 멈췄다. 그가 마지막으로 부딪쳤던 땅바닥은 함몰되다시피 되어 구덩이로 박혀버린 듯 했다. 먼지로 뿌옇게 가려진 곳에서 더 이상 천여운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소, 소교주님!!!” 이를 지켜보던 연무화가 절규하듯이 소리쳤다. 마침 산 정상에 도달해서 이 광경을 보게 된 대호법 마라겸 역시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그렇지 않아도 자신과 겨루느라 내공의 소모가 컸던 천여운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 실력이라면 누구에게도 패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산봉우리의 정상에 이런 괴물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이 장로가 역혈마공을 펼치다니?’ 마라겸 역시도 무림의 경험이 풍부했지만 화경의 고수가 역혈마공을 펼친 것은 처음 보았다. 그 모습이 인간이라고 보기에는 괴물 쪽에 가까웠다. “네놈도 별 수 없구나! 크카카카카카카칵!”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는지 경본기는 광오하게 웃으며 기뻐했다. 손에서 느껴진 감촉만 보았을 때 확실히 치명상을 입혔다. 불사신이 아니고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방금 전까지는 말이다. -차차차차차차착! 뿌연 먼지 속에서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광기가 넘치는 짐승처럼 웃어대던 경본기가 그것을 멈추고서 점차 가라앉는 먼지를 바라보았다. -오싹! 이상했다. 가라앉는 먼지 속에서 소름이 끼칠 정도로 흉흉한 마성이 느껴졌다. 역혈대라신공을 펼치면서 전신의 감각이 짐승처럼 올라서인지 그것이 너무 선명해서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다 죽어가는 놈이 뿜을 만한 기운이 아니었다. ‘.....대체 이게 뭐지?’ 바로 그 순간이었다. -팟! 먼지가 완전히 가라앉히기도 전에 그곳에서 천여운이 튕겨져 나왔다. 번개처럼 날아오는 천여운의 손에는 백룡도가 사라져 있었고, 흑검이 들려 있었다. “크르륵! 아직 살아있었구나! 크아아아아아아!” 경본기가 짐승처럼 포효하며 양손에 거대한 강기를 일으켰다. 그것에 맞추듯이 쇄도해오는 천여운의 흑검에서 검은 빛이 일렁이며 검강이 치솟았다. ‘검은 검강?’ 흑검이 잔상을 일으키며 스물네 갈래로 갈라지더니 하나로 일원화되었다. 경본기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천여운에게 폭증한 모든 공력을 끌어올려서 태풍과 같은 기세로 거대한 강기를 휘둘렀다. 하지만, -채채채채채채챙! ‘아, 아닛?’ 천여운을 난도질해서 찢어버릴 기세였던 거대한 강기가 도리어 튕겨져 나가며 일순간에 파훼되었다. 놀랄 틈도 없이 검은 입자를 흩날리는 어두운 빛줄기가 경본기의 가슴을 강타했다. -콰콰콰콰콱! “끄아아아아아악!” -솨아아악! 탁! 고통의 비명을 지르는 경본기의 몸을 관통해서 천여운의 신형이 열 보 뒤에서 멈춰 섰다. -털썩! “끄윽....끄윽......” 경본기가 바닥으로 무릎을 꿇으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자신의 횡하게 뚫려버린 가슴을 내려다 보았다. 강기로도 절대로 파괴할 수 없었던 역혈대라신공의 육신이 어처구니 없이 뚫렸다. “어떻게......어떻게.....이런 일이....” -쿵! 바닥에 쓰러진 경본기는 숨을 거뒀는지 더 이상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하아....하아....” 죽은 경본기를 바라보며 천여운이 거친 숨을 내뱉었다. 대호법 마라겸과의 대결에서 많은 내공을 소진한 천여운은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최강의 비기를 펼쳐야만 했다. “후우.....” 더 이상 싸울 기운도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탁! “응?” 언제 다가왔는지 대호법 마라겸이 천여운의 앞에 두 무릎을 꿇더니 허리를 숙여 이마를 땅에 박으며 외쳤다. “대 천마신교의 대호법 마라겸이 당대 천마님을 배알 하나이다!” < 44장 무명(無名) (3) > 끝 < 44장 무명(無名) (4) > 알 수 없는 그의 말에 천여운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어째서 대호법 마라겸이 자신을 천마라고 지칭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천마는 본교의 개파 조사님이 아닌가. “대호법.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당대 천마님에 대한 예를 갖추고 있습니다.” 진지한 그의 말에 천여운이 인상을 찡그렸다. 부상을 입은 몸을 이끌고 그들의 곁으로 다가온 십 장로 연무화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대호법을 바라보았다. “이 자가 무명입니까? 소교주님.” “.....대호법입니다.” “네? 이 자가 대호법이라고요?” 늘 냉담한 표정으로 일관하는 연무화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첫 번째로 놀란 것은 무명의 정체가 대호법이라는 점이었고, 두 번째는 그 동안 가면에 가려져 한 번도 보지 못한 대호법의 얼굴 때문이었다. 완전한 중원인으로 보기에는 대호법은 생김새는 이국적인 느낌이 강했다. ‘이때까지 세 장로들을 불렀던 게 대호법이었다니…하!’ 엎드려서 고개만 살짝 들어서 천여운을 바라보고 있던 마라겸이 그녀에게 말했다. “연 장로, 당대 천마께 예를 갖추시오.” “네?.....당대 천마?” 당대 천마라는 말에 연무화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의 눈이 자연스럽게 천여운이 쥐고 있는 흑검으로 향했다.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의 밝은 달빛에 비춰진 흑검의 검신에 천마검(天魔劍)이라고 음각이 새겨져 있었다. “서, 설마.....” “조사님의 제단에 참석했으니 연 장로도 아시겠지요.” ‘천마검!’ -팍! 대호법의 무게감 있는 목소리에 연무화가 바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녀마저 머리를 조아리자 천여운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하아, 대체 왜들 이러는 겁니까?” “소교주님께서 진정한 천마이시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천마라뇨?” 그 반문에 대답한 것은 대호법이 아닌 연무화였다. “내성의 북쪽에는 역대 교주님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과 개파 조사님의 위패와 유언을 남겨놓은 계단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전에 들어본 기억이 있었다. 천마신교에서는 역대 교주들을 위해 일 년에 단 하루 성대한 제례 의식을 치른다. 그 날은 개파 조사인 천마가 우화등선한 날이었다. 제례 의식이 치러질 때 성내 전체로 장엄한 배화(拜火) 의식이 이루어지는데 반나절 가까이 교인들은 엎드려서 추모를 한다. 이때 제례 의식을 주관하는 것은 교주를 비롯한 호법, 장로들이었는데, 이들만이 유일하게 일 년 중에 단 한번 천마의 제단에 들어가게 된다. “제단에는 천마 조사께서 우화등선 전에 남기신 비문(碑文)이 있습니다.” 연무화는 제례 의식을 치를 때마다 그 비문을 보았었다. 비문의 글씨는 천마가 직접 새긴 것이라 하였기에 유심히 보아서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 비문에는 진정한 천마검을 얻는 자가 본좌의 칭호를 물려받게 되리라고 새겨져 있었습니다.” 칭호. 그것은 바로 천마(天魔)라는 이름이었다. 연무화는 제단의 비석에 새겨진 그것을 보면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지금 교주가 지니고 있는 천마검은 진정한 검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비문에는 천마령이 새겨져 있습니다.” 천마령(天魔令). 그것은 개파조사인 천마가 남긴 칙령의 문양이었다. 마교의 모든 것은 교주의 명령과 장로 회의를 통해서 결정되지만 가장 기본적인 법도는 천마령에 의거한다. 천마령은 천마신교의 교인이라면 누구도 거부, 거역할 수 없는 칙령이었다. 설사 당대 교주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현 교주께서는 단 한 번도 천마라는 칭호를 물려받지 않으셨습니다.” 마교에 있어서 천마 조사는 신(神)과 같은 존재였다. 아무리 본교의 하늘이라 할 수 있는 교주라고 할지라도, 천마령이 발동한 비문을 어길 수가 없었다. 그것은 기득권을 잡은 여섯 종파의 종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체계가 흐트러지는 순간 중원에서 단일 집합체로 최고의 성세를 갖춘 천마 신교의 기강이 무너지기 때문이었다. “지금 교주님이 지니시고 있는 천마검은 모조입니다. 모든 장로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죠.” ‘아.....’ 천여운이 자신이 쥐고 있는 흑검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흑검에 천마검이라고 새겨져 있었는지 의문스러웠는데, 그 비밀이 풀렸다. 천여운이 가진 흑검이야말로 진정한 천마검이었다. “하지만 천마검의 진위를 아는 것이 교주님뿐이라면 아무리 천마령이라고 해도 속일 수도 있었을 텐데 이상하군요 장로들도 이를 묵인하는 것도 그렇고요.” 그가 보았던 교주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다. 비록 천마령이 절대적이라고 하나, 교주로서 모조 천마검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위엄이 손상되는 일이었다. 매년마다 치러지는 제단의 제례 의식으로 이 사실을 알면서도 묵인하는 것 역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소교주님의 말씀대로 교주님께서 이를 숨기지 않는 것은 저도 의문이지만 장로들이 이를 묵인하는 것은 저희 선조 때부터 구전으로 들은 게 있습니다.” “그게 뭐지요?” 그것은 오백 년 전에 극도신의 사건 때 진정한 천마검을 강탈당했다는 풍문이 있었다. 마교에 있어서는 수치스러운 역사였기 때문에 그때부터 교주를 비롯한 장로 들이 이 사실을 묵인하고 숨겨왔다는 것이었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기에 천여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대호법 마라겸이 고개를 저으며 끼어들었다. “연무화 장로의 말도 일부 맞지만 정정해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 “교주께서는 천마검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 것은 천마령의 수호자 때문입니다.” “천마령의 수호자?” 연무화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장로들보다는 교내 사정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지만 처음 들어보는 직책이었다. 이에 마라경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 “천마령의 수호자는 천마 조사 시절부터 천마령을 수호하면서 역대 교주들을 보필했습니다. 수호자의 임무는 보필하는 교주님이 천마령을 어기지 않도록 중심을 잡게 하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천마령의 수호자를 만든 것은 개파 조사인 천마라고 하였다. 천마에게 직접 무공을 전수받은 역대 천마령의 수호자들은 교주 못지않은 무공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숨겨진 강자가 본교에 있었다니....” 연무화가 처음 알게 된 진실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천마 조사님의 명을 받들어온 천마령의 수호자들은 늘 교주님의 그림자로서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다른 교인들은 알지 못합니다.” 다른 교인들이 모르는 것을 대호법 마라겸은 알고 있었다. “잠깐......그 말은?” 천여운의 물음에 마라겸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렇습니다. 제가 천마령의 수호자입니다. 역대 대호법들의 숨겨진 직책입니다.” “아!” 마라겸이 품속에서 손바닥 만한 푸른 옥패를 꺼내들었다. 그 앞면에는 [대호법(大護法)]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반대로 돌리니 놀랍게도, 천마령(天魔令)이 새겨져 있었다. “처, 천마령!” 천마의 명령이자 인장이라 할 수 있는 천마령이 대호법의 신분패 뒤에 숨겨져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천마령의 새겨진 부분은 일 자로 그어져있었다. 인장이 다시 활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인 듯 했다. “이 패는 천마 조사님께서 직접 만드신 것입니다.” “아아아!” 이것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수호자를 의식해서 천마령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이때 천여운은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교주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천마 조사 때부터 내려온 직책이라 할지라도 거추장스럽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대호법이 천마령의 수호자라면 교주님이 위험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는 교주님께 해를 가할 수 없습니다.” “......그걸 교주님이 믿을까요?” 현 교주의 성격상 이를 쉽게 믿을 리가 없었다. 그런 천여운의 의문을 마라겸이 풀어주었다. “천마 조사께서는 저희 수호자들에게 제약을 걸어두었습니다. 그것은 특별한 금제가 걸린 고독입니다.” 고독(蠱毒). 그것은 체내의 기생하는 독을 가진 벌레였다 대호법 일족은 선대로부터 이 고독을 대물림 받아왔다. 천마가 직접 만들어낸 이 고독은 대호법의 심장과 단전에 파고들어 있는데, 그가 직접 교주의 목숨에 해를 가하게 되면 발동한다고 한다. “교주님께서 영고(令蠱)를 복용하셨기 패문에 그분께 위해를 가한다면 저는 죽게 됩니다.” “아......” 고를 이용한 영고의 재조법은 오직 대호법 일족만이 알고 있었는데, 이들은 새롭게 교주로 등극하는 자에게 영고를 바치고 충성을 맹세했다. 이 비밀을 아는 것 역시도 오직 교주와 대호법뿐이었다. 하지만 대호법이 교주에게 해를 가할 수 없다고 해도 천마령을 보이며 이를 문제 삼을 수 있기 때문에 함부로 어길 수가 없는 것이었다. 참으로 묘한 관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비밀이 있을 줄이야.....” 다소 씁쓸하게 말하는 천여운을 바라보며 마라겸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 “천마 조사님께서는 본교에 마(魔)를 봉해두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격을 갖춘 자가 천마검을 얻게 되리라고 예언하셨지요.” 그것이 바로 봉마동의 전설이었다. 몇 백 년에 달하는 동안 수많은 역대 소교주 후보자들이 시험을 치렀으나 누구 하나 천마검을 찾아낸 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천마의 마지막 심득이라 할 수 있는 천마검공을 터득한 자도 없었다. “천마 조사님의 유지를 받들기에 저희 수호자 일족은 계속해서 기다렸습니다.” 그러기를 수백 년의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긴 세월이 지나도 당대 천마는 나타나지 않았고 점점 수호자 일족 역시도 이것을 포기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이제 달라졌습니다.” “달라졌다는 건?” “소교주님께서 진정한 당대 천마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저희 천마령의 수호자는 오직 당대 천마님만을 주군으로 모십니다.” “아!” 진중한 대호법 마라겸의 목소리에 연무화는 전율로 몸이 떨려왔다. 그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었기 때문이었다. 대호법 마라겸은 현 교주인 천유종이 아닌 당대 천마인 천여운을 진정한 천마 신교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제게 천마기(天魔氣)를 내려주십시오.” “천마기?” “천마님께서 천마검에서 얻으신 기운이 있지 않으십니까?” “.....혹시 이것을 말하는 겁니까?” 천여운이 천마검에 흉흉한 마성의 기운을 주입하자 짙은 어둠을 머금은 검은빛 검강이 치솟았다. -우우웅! “아아아! 역시!” 바로 앞에서 이것을 보게 되자 마라겸의 눈빛이 감격으로 물들었다. 이 장로 경본기를 쓰러뜨릴 때 검은 검강을 보면서 확신했었는데 역시 천마기가 틀림없었다.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당대 천마님을 모실 수 있게 부디 천마기를 하사하여주십시오.” “그게 무슨 말이죠?” “제 몸에 있는 고독은 천마 조사님의 천마기를 주입하여서 만들어졌습니다.” 마라겸의 말에 의하면 영고는 당시에 천마기를 얻은 천마 조사의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임시로 만들어진 최소한의 금제라고 한다. “천마 조사님께서 이르기를 제 고독은 천마기를 가진 숙주를 주인으로 인식 한다고 하셨습니다. 부디 저를 거둬주십시오.” 고독의 제어권을 천여운이 가지기를 바라는 대호법 마라겸이었다. 스스로 충성의 의지를 보이는 모습에 천여운의 마음이 움직였다. 천여운이 말없이 그의 머리에 있는 백회혈(百會穴)로 흉흉한 마성의 기운을 끌어내 일부를 주입했다. -우우웅! 마성의 기운이 백회혈을 타고 들어오자, 마라겸이 운기를 통해 전신의 경맥으로 이것을 순환시켰다. “큭!” 마라겸의 체내에 파고들어 있던 고독이 천마기와 접촉했다. 심장과 단전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잠시 느껴졌지만 그것을 길지 않았다. 이윽고 기운을 완전히 받아들였는지 마라겸의 눈빛에서 강렬한 안광과 함께 흉흉한 마성이 일렁였다. -탁! 마라겸이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신을 거둬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천마령의 수호자이자 대호법 마라겸이 당대 천마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천여운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현 마교에 있어서 최고의 무인이자 교주를 모시는 대호법 마라겸이 충성을 맹세했다. 이로써 천여운은 호법가의 모든 힘을 얻게 된 것이었다 < 44장 무명(無名) (4) > 끝 < 45장 함정 속으로 걸어가다 (1) > “충성 맹세도 좋으시겠지만 대호법께서는 아직 해명할 일이 남으셨습니다.” 대호법 마라겸의 충성 맹세로 가슴이 뛰던 분위기를 뒤로 한 채, 십 장로 연무화가 그에게 말했다. 그것은 천여운 역시도 동의하는 바였다. 천마검에 대한 비밀이 풀렸다고는 하나, 마라겸이 무명으로 분장하고서 세 종파에 검마의 무공을 전수하려던 것부터 천마검공을 알고 있는 것까지 무엇 하나 풀리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당연히 말씀드리는 것이 순리겠지요.” 어차피 충성을 맹세한 만큼 속이려는 마음은 애초부터 없었던 마라겸이었다. 마라겸이 과거를 회상하듯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십오 년 전, 태상교주께서는 갑작스럽게 교주 직에서 물러나셨습니다.” 한참 마교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이었기에 그의 그런 결정을 모두가 의아해했다. 태상교주는 당시에 중원 오대 고수로 한참 명성을 날리고 있었고, 부상을 입었거나 약해진 것이 아니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때가 태상교주께서 강소성 정벌을 친정하시던 시점이셨지요.” 몇 차례 강소성 정벌을 시도했던 태상교주는 갑작스럽게 정권에서 물러났다. 그렇게 정권에서 물러난 태상교주는 긴 폐관에 들어갔다. 폐관에 들어갔던 태상교주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근 오 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복귀한 태상교주는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해져 있었다. “태상교주께서 언제 행방불명 되셨는지 연무화 장로는 아시죠?” “......중추절이 아닙니까?” 단풍이 지고 오곡이 풍성해지던 중추절(中秋 ?). 태상교주 천인지가 사라졌다. 아무런 일언반구의 말도 없이 행방불명된 태상교주를 찾기 위해 많은 교인들이 동원되었지만 끝끝내 그는 발견되지 않았다. “전날 밤.....저는 태상교주님을 뵈었었습니다.” “네에? 대호법이 태상교주님을 뵈었다고요? 그런데 어째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은 거죠?” 그녀가 알기로는 대호법은 태상교주 천인지를 비롯해 현 교주 천유종까지 이대에 걸쳐서 모신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분명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고 밝혔던 그였다. “함구하라는 명령도 있었지만, 제게도 어디로 가시는지에 대한 것은 밝히지 않으셨습니다.” 중추절의 전날 밤. 태상교주 천인지가 마라겸의 숙소를 은밀히 찾아왔다고 한다. “태상교주께서는 제게 반드시 비밀을 지키기를 당부하시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태상교주께서 십년 내로 자신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검마 공의 유지에 얽매이지 말고 검종과 연이 있는 자들에게 검마 공의 무공을 전수하라 지시하셨습니다.” “아!......그, 그게 태상교주님의 명이였다고요?” 칠십여 년 전 천여운 이전에 마지막으로 마도관의 육 단계 시험을 통과한 태상교주 천인지는 비급 서재의 지하 보고를 들어갔었다. 그렇기 때문에 검마 공에 대한 비밀 역시도 알고 있었다. ‘그랬구나. 호법가는 검마 공의 유지를 받을어서 마도관을 관리했으니....’ 비급 서재의 지하 보고에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무명, 즉 마라겸이 진신마검과 이십사마검을 익히고 있는 비밀이 풀렸다. 그런데 천마검공은 여전히 의문이었다. “천마검공은 어떻게 된 겁니까?” “.....그건 태상교주님께서 전수해주셨습니다.” “네?” 오직 천마의 후계만이 익힐 수 있는 무공을 전수했다는 것은 꽤나 파장이 큰일이었다. 물론 구결뿐인 무공이었기에 안다고 해서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태상교주의 그런 결정은 파격적이라 할 수 있었다. “태상교주님께서는 오 년 동안 폐관을 하시면서 천마검공의 운기요결을 만들기 위해 시간을 소요하셨다고 했습니다.” 마교의 역사상 손에 꼽는 기재라 불린 태상교주 천인지는 폐관에 들어가서 그림의 떡이라 불리는 천마검공의 초식의 운기요결을 만들려고 했으나 끝내 실패했다. 그렇다고 소정의 성과를 거두기는 했다. “태상교주님께서는 기존의 초식을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불완전하게나마 펼칠 수 있는 운기요결을 만드셨습니다.” 태상교주는 자신이 연구하던 것을 마라겸에게 전수해주었고, 그것을 받들어서 천마검공을 완성시키라고 명했다.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천여운이 물었다. “차라리 교주님에게 천마검공을 직접 전수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요?” “......사실 그 점은 소신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 태상교주님께서는 그 당시에도 현 교주님을 탐탁해하지 않았습니다.” “네?” 이 점에 관해서는 연무화 역시도 알고 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건 저도 들었습니다. 당시에 태상교주께서 갑자기 교주의 자리를 물려준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불렸으니까요.” 태상교주 천인지는 원래 현마종을 외가로 두고 있었다. 그래서 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가 뒤를 잇기를 바랐지만 그것은 그저 바람으로 끝나고 말았다. 마도관의 기간이 끝나고 나서, 검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였던 천유종이 다른 후보자들을 대부분 죽여 버렸기 때문이었다. 당시에 살아남은 이는 단 두명의 후보자뿐이었다고 한다. “살려둔 한 명이 형제 분이셨는데, 교주님께서는 그 분의 오른팔도 베었지요.” 그 당시에 검마종은 유일하게 두 명의 소교주 후보자가 있었다. 천유종의 배다른 동생인 천유중이었는데, 그는 차마 형제를 죽이지는 않았지만 소교주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그 오른팔마저 베었다고 했다. 그로 인해 천유종의 평가는 냉정하고 살성이 짙다는 이야기뿐이었다. “모두가 태상교주님께서 복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유애님을 소교주로 삼으실 거라 여겼는데, 갑자기 교주직을 천유종님께 물려주셔서 꽤 논란이 되었었습니다.” 아무래도 그 안에는 더 깊은 사정이 있어보였지만 대호법이나 연무화가 그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어떤 이유에서든 태상교주는 교주가 아닌 대호법에게 천마검공을 맡겼다. 처음에 마라겸은 이것을 거부했지만 태상교주의 단호한 명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태상교주님께서는 십 년 내로 자신이 돌아오지 못한다면 마교에 큰 위험이 닥칠 수도 있다고 경고하셨습니다.” 마라겸이 몇 번이나 태상교주에게 무슨 사정인지 여쭸지만 그는 어떠한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다음날 중추절에 태상교주는 마교에서 사라졌다. 태상교주의 명을 받든 마라겸은 결국 이 사실을 지금까지 함구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천여운은 대호법 마라겸이 지금의 교주보다는 태상교주를 더욱 마음으로 모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는 태상교주님의 명령대로 십 년 동안 그분을 기다렸습니다.” 부디 그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태상교주 천인지는 끝내 마교로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마라겸은 그 명을 받들어 이 년 동안 검마의 무공을 익힌 후에 검종에서 갈라져 나온 세 종파의 종주들을 불러서 이것을 전수하려했다. “아아.....그래서 우리를 오현봉에 불렀군요.” “그렇습니다. 그 뒤의 일들은 연무화 장로께서 더 잘 알겠지요.” 그 말에 그녀가 괜히 눈썹을 치켜 올렸다. 세 종파 간의 감정의 골은 오백 년에 걸쳐서 최악에 이르러 있었기에 마라겸은 세 명 모두에게 무공을 전수할 수가 없었다. “그분을 배신한 후렴무치한 자들에게 검종을 잇게 할 수 없으니까요.” 마라겸은 그 같은 감정의 골을 노렸다. 몇 차례나 마도관의 관주를 담당했던 만큼 다른 이를 가르치는데 능했던 마라겸은 그들에게 조건을 제시해서 오히려 진신마검을 더욱 발전시키게 만들었다. 그러는 한편으로 또 다른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천마검공의 운기요결을 만들기 위해 틈틈이 시 간을 투자했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팔 년에 걸쳐서 천마검공의 초식을 복원해보려고 했으나, 운기요결은커녕 이기어검으로 응용하는 정도가 한계였습니다.” 천마검공은 무림 역사상 최강이라 불렸던 무인 천마 조사가 말년에 모든 심득을 모아서 만든 지고의 검법이었다. 사실 그 정도만으로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대호법이 모든 이야기를 마치자 천여운은 지금까지의 의문을 풀 수 있었다. “이 모든 게 태상교주님의 안배셨군요. 그렇다면 그분께서는 극도육무문의 존재를 알고 있던것이 아닐까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천여운의 말에 마라겸 역시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극도육무문이 등장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마라겸 역시도 앞으로 닥칠 위험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엄청난 무위를 직접 확인하고 나니 확신할 수 있었다. 어쩌면 태상교주의 행방불명은 극도육무문과 관련이 있을 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아!” 그때 연무화가 한 가지 더 궁금한 것을 물었다. “대호법. 그런데 원래 만나기로 했던 기일을 당긴 이유가 뭐죠?” 그 질문에 마라겸이 심각해진 표정으로 연무화가 아닌 천여운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것은......” * * * 동일한 시각. 마교의 내성 교주전. 평소 때 이 시각의 교주전은 외곽 경비를 위한 횃불 이외에는 건물 내의 등불은 꺼져있지만, 지금 교주 집무실은 여전히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집무실 내에는 교주 천유종이 굳어진 얼굴로 누군가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왼쪽 눈에 검은 안대를 쓰고 있는 중년인이었다. “서쪽 성 밖으로 나간 대호법의 종적을 놓쳤습니다. 아직까지 근방을 추적하고 있지만 지금 호위전의 인력만으로는 힘듭니다.” 마교 성의 서쪽에 펼쳐진 산봉우리만 수백 개가 넘는다. 고작 백여 명의 인원만으로 산 전체를 뒤지기에는 인력이 부족했다. “두 사람의 행방은?” “비환귀종을 감시하는 자로부터 방금 전에 전갈을 받았지만 아직까지 소교주는 복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연검종의 연무화 장로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놀랍게도 검은 안대의 중년인은 천여운과 십 장로 연무화를 감시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아직까지 장원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에 교주의 심기는 더욱 불편해지고 있었다. 그때 그런 교주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또 이렇게 되었군요.” 집무실의 한 쪽 편의 벽에 기대서있는 중년인이었는데, 특이한 것은 오른팔 소매가 휑하니 비어있다는 점이었다. 외팔의 중년인이 천천히 교주가 앉아있는 책상 앞까지 다가왔다. 그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제가 말씀드렸지요. 더는 쓸 수 있는 패가 아니라고요. 패는 패 이상으로 다루지 않는 것이 교주님의 신조가 아니셨습니까?”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냐?” “더 분란이 커지기 전에 정리하시지요.” 외팔의 중년인의 말에 교주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 눈빛에는 불쾌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장담컨대 경본기 녀석은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겁니다. 그놈의 행보를 계속 지켜보셨으면 교주님도 짐작하실 텐데요.” “.........” “경본기는 지금 버릴 패가 아니었습니다. 시기를 놓치면 안 됩니다. 놈은 독입니다. 더 이상 패로 가치가 없습니다.” 외팔의 중년인의 진중한 권유에 교주가 고민에 빠진 듯이 등을 기대고 앉아 있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정리할 때가 되었군.” 그 말에 외팔의 중년인이 반색하며 말했다. “현명하신 선택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일단 수족(手足)부터 떼낸다.” 당장에 처리하기에는 그 덩치가 크게 불어져 있었다. 썩은 부위를 제거하자고 통째로 버릴 수는 없기에 그 뭉쳐진 힘을 분산시킬 필요가 있었다. “패현.” “충!” 교주의 부름에 검은 안대의 중년인이 답했다. “교주령을 발동한다. 지금 당장 좌호법 이화명과 우호법 섭맹을 체포하여 하옥시켜라.” “충!” < 45장 함정 속으로 걸어가다 (1) > 끝 < 45장 함정 속으로 걸어가다 (2) > 천여운이 다시 마교의 성으로 복귀한 것은 이튿날 사시(巳時) 중엽이었다. 운기조식으로 내공을 빠르게 회복했지만 대호법 마라겸이나 십 장로 연무화의 경우 내상까지 입어서 그들이 회복하는 동안 호법을 서게 되면서 늦게 되었다. ‘저는 다른 성문으로 통과하도록 하겠습니다.’ 마라겸은 자신과 함께 성으로 복귀하게 된다면 괜한 의심을 살 수 있다고 우려하여 중간에 이탈했다. 그렇게 천여운은 인피면구를 벗은 연무화와 서쪽 성문을 통과했다. 지금까지 두어 번 정도 밤에만 성문을 통과했었는데, 왠지 모르게 전보다 경계가 삼엄한 느낌이었다. ‘뭔가 이상하다.’ 특유의 감이라는 것이 있었다. 성문을 지키는 무인들이 천여운의 패를 보면서 화들짝 놀라서 인사를 하는데, 사뭇 어제와는 달랐다. ‘나노.....전음 도청 모드.’ 천여운의 명령에 나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알겠습니다. 진동이 다른 음파의 주파수를 탐지합니다. 사용자의 청각으로 다른 주파수의 소리가 들리도록 조정했습니다.] -삐이! 고주파의 소음과 함께 천여운의 귓가로 들리지 않던 소리들이 잡히기 시작했다. [....께서 복귀하셨다. 당장 교주전에 전갈을 넣어라.] [충!] 성문을 지나서 성내로 들어온 천여운의 인상이 굳어졌다. 그 모습에 연무화가 의아했는지 조용히 물었다. “왜 그러시는지?” “......아무래도 문제가 생긴 것 같군요. 서둘러 돌아가야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언제부터 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움직임을 교주전에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가 말한 ‘전조’가 시작된 듯 했다. 천여운과 연무화가 서둘러서 성내 서남쪽에 있는 비환귀종의 장원으로 향했다. 한편 같은 시각 내성 교주전. 교주전 건물에 누군가가 호위전의 무사들에게 연행되어 오고 있었다. 그는 바로 대호법 마라겸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을 줄이야.’ 마라겸의 속내는 복잡하기만 했다. 내성으로 들어서자마자 숙소에서 호위전의 무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물었더니 이 장로 경본기가 실종된 것에 연루되었다며, 교주령에 의거하여 연행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역혈대라신공으로 폭주한 이 장로 경본기는 천여운의 손에 죽었다. 그 시신은 어젯밤 오현봉에서 떨어진 다른 산속에 누구도 찾지 못하게 묻어두고 온 참이었다. ‘교주께서 나를 범인으로 알고 계시는 건가.’ 그런 것이라면 그나마 다행일 수도 있었다. 아직까지 천여운이 진정한 천마라는 사실의 공표되지 않은 시점에서 이것을 빌미 삼아서 교주가 여론을 몰아간다면 앞으로의 행보에 많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 장로가 역혈신공을 써서 폭주한 것이 다행이구나.’ 만약 교주가 자신을 범인으로 의심하여 몰아간다면 이것을 방패삼아 빠져나갈 수는 있었다. 이윽고 교주 집무실 앞에 도달했다. “교주님. 대호법을 연행해왔습니다.” “들여보내라.” “충!” 집무실의 문이 열리자 집무책상 앞에는 교주 천유종이, 그리고 그 반대편의 벽면에는 외팔의 중년인이 벽에 기대고 서있었다. 교주가 마라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한밤중에 출타는 잘했는가. 대호법.” 어차피 알고 있는 것이라면 굳이 속일 이유는 없었다. 마라겸이 바닥에 한 쪽 무릎을 꿇고서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심려를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거두절미하고 말하지. 어젯밤에 이 장로 경본기가 성 밖을 빠져나가서 아직까지 행방불명되었다. “그것은....” “아직 본좌의 말이 끝나지 않았다.” 단호한 교주의 목소리에 마라겸이 고개를 숙였다. 뭔가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간다는 느낌에 사로잡혔지만 지금 당장에 교주의 심기를 거슬릴 수는 없었다. “그런데 어젯밤 소교주와 연무화 장로가 성내에서 사라졌다고 하더군.” ‘이런.....’ 가면 속의 대호법의 눈빛이 흔들렸다. 자신을 살펴보기 시작했다는 것은 눈치 채고 있었지만, 소교주인 천여운 역시도 감시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호법전이 아닌 호위전의 무사들을 풀은 듯 했다. “그동안 소교주의 행보를 생각했을 때, 본좌는 이 장로의 신변에 뭔가 문제가 생겼다고 밖에 판단이 되지 않는군. 안 그런가?” 마라겸의 눈빛이 흔들렸다. 교주의 목적은 자신이 아니라 바로 소교주였던 것이다. “교주님.....” “소교주가 만약에 이 장로를 성 밖으로 유인하여 살해한 것이라면 명백히 개인적인 원한으로 선을 지나친 것이지 않겠나.” ‘이걸.....노린 것이었나.’ 마라겸이 가면 속에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교주는 성 밖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정확하게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교주는 천여운이 이 장로 경본기를 살해한 것으로 몰아서 그를 압박하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안 된다. 당대 천마님께 흠집을 만들 수는 없다.’ 교주에게 빌미를 제공해서는 안 된다. 작은 빌미만으로도 명분과 여론을 조작하는 것은 교주에게는 너무 손쉬운 일이었다. -팍! 마라겸이 바닥에 납작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교주님. 그것은 소교주님의 개인적인 감정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면 무엇이란 거지?” 교주의 물음에 마라겸은 이 장로 경본기에 대한 죽음을 설명했다. 물론 천여운이 오해를 살 수 있는 부분을 최대한 지우고서 경본기가 역혈마공을 익힌 것에 초점을 두어서 말했다. “....역혈마공으로 신체가 비대해져서 혼자 옮기기 힘들었기에 교주님께 보고를 드려서 교내로 옮겨오려고 했습니다.” 임기응변으로 말한 것치고 이음새가 자연스러웠다. 어째서 이 장로 경본기가 성 밖으로 나갔는지를 모르는 교주로서는 이 해명에 흠을 잡기 어려울 것이다. 마라겸의 해명을 전부 들은 교주가 생각에 잠긴 듯이 가만히 있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좋다. 그렇다면 호위전의 사람들을 붙여줄 터이니, 이 장로의 시신을 가져오도록 하라.” “충!” ‘됐다!’ 마라겸이 속으로 안도했다. 시신을 가져온다면 더욱 해명하기가 편해지리라.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호법전의 사람들이 아닌 호위전의 무사들을 데리고 가라는 것이었다. 최근 마도관의 지하 보고가 드러난 이후로 의심이 짙어져서라 여겨졌다. 대호법 마라겸이 집무실을 나가고 나서 반대편의 벽면에 기대고 서있던 외팔의 중년인이 다가 와서 말했다. “이로써 확실해졌군요. 마라겸 역시 놈을 지지하는 게 틀림없습니다.” 그 말에 동의하는지 교주 역시도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에 들어서 그런 낌새가 보이기는 했지만 마라겸의 해명을 듣고 나서 확신했다. “이런 식이라면 마라겸이 계획한대로 행하진 않을 것 같군요.” “아니. 녀석은 할 수밖에 없다.” 교주의 단호한 말에 외팔의 중년인이 의아했다. 그러자 교주가 품속에서 자물쇠를 꺼내서 집무실 책상 밑의 금고를 열었다. 그 안에서 온기를 머금은 작은 석함을 꺼냈다. 석함을 열자 놀랍게도 그 안에는 핏물이 고여 있었는데, 작은 혈충(血蟲) 같은 것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영고(令蠱)다.” “그게 영고였습니까?” 교주가 석함 안에 있던 영고를 짚어들더니, 이내 입안에 넣고 삼켰다. 혐오스러운지 외팔의 중년인이 인상을 찡그렸다. 이십오 년 전에 대호법이 충성맹세를 할 때 넘겼던 것이지만 그는 이것을 먹지 않았다. 오히려 마의에게 보내서 영고를 분석하게 했다. 그리고 최근에 그 성과를 거두었다. “녀석은 본좌의 명령을 들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을 하는 교주의 눈빛에 미묘한 붉은 안광이 띠었다. 한편 비환귀종의 객당에서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천여운과 십 장로 연무화, 십일 장로 환의, 허봉이었다. 그런데 평소라면 보일 다른 수하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했고, 백기는 복마종 산하의 북섬단의 부단주, 고왕흘은 검마종 산하의 기갑마단의 부단주로 배치되었습니다. 교주령이 떨어져서 거부권한이 없었습니다.” 환의의 보고를 듣는 내내 천여운의 인상은 굳어져만 가고 있었다. 이른 아침에 교주전에서 명령에 내려와 백기, 고왕흘, 사마착, 문규를 차출해갔다. 단주의 직위를 가진 자들에게 직책을 부여한다는 명목 하에서였다. “전부......네 종파의 산하로 배치되었군요.” 문제는 그들이 전부 네 종파의 산하에 있는 단으로 뿔뿔이 나뉘게 되었는 점이었다. 이것은 어떤 식으로 보아도 천여운 일파를 억지로 분산시켜놓는 걸로 밖에 판단이 되지 않았다. “휴, 주군. 그래도 저는 무사히 벗어났습니다.” 허봉이 다행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특이하게도 허봉은 유일하게 아무런 교주령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열외 같은데.’ 환의는 목구멍까지 그 말이 올라왔다가 생각으로만 남겨두었다. 중소 종파 중에서도 하위권에 속하는 허봉을 교주전에서는 큰 전력으로 판단하지 않은 듯 했다. 환의가 계속 보고를 이어갔다. “두 호법과 단주들뿐만이 아닙니다. 사마의 장로는 호남성 지부의 시찰단으로, 그리고 팔 장로인 문연 공은 극도육무문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강서성 북동부 지부에 방어선을 구축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구 장로 사마의는 이미 진시 초에 북쪽으로 출발한 상태였고, 팔 장로 문연은 물자와 준비가 끝마치는 대로 오늘 내로 출발 예정이었다. 너무도 빠르게 이뤄지는 조치들에 기가 찰 노릇이었다. “내게도 명령이 떨어졌겠군.” 연무화의 말에 환의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몇 차례 마연검종에 교주전의 무사들이 찾는 걸보면 그런 것 같습니다. 뭐,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기 계시지만요.” 환의의 말대로였다. 천여운과 같이 복귀를 하면서 그녀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 인피면구를 벗고 들어왔다. 공교롭게도 그런 행동 덕분에 교주전에서는 아직까지 연무화가 교내로 복귀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큭! 교주님이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이건 완전히 주군을 고립시키는 것이잖습니까?” 허봉이 분개했는지 얼굴이 빨개져서 소리쳤다. 교주전에서 내려온 교주령으로 인해 천여운은 수족을 전부 떼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좌호법과 우호법이 교내 금옥에 갇히면서 호법가의 힘부터 시작해 최상위 종파라 할 수 있는 두 장로들까지 교외로 보내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환 장로님은 저처럼 열외가 되셨네요.” 허봉의 말에 환의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흐음. 의미가 조금 다른 것 같군요.” ‘교주님은 저를 풀어둘 수 없거든요. 후후후.’ 유일하게 환의를 남겨둔 것은 그가 암종의 수장이기 때문이었다. 중원 전체로 보내는 간자들을 통솔하고 지휘를 맡는 그를 외부로 떼어놓을 명분이 없기에 가까이 둔 것뿐이었다. “아무튼 주군! 두 분 장로님마저도 교주전에서 어떤 조치가 이뤄지기 전에 뭔가 수를 강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호오.’ 평소와 다르게 날카로운 허봉의 지적에 환의 역시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장기적인 것도 아니고 이렇게 빠른 속도로 천여운의 힘을 분산시킨다는 것은 굉장히 심상치가 않았다. ‘그게.....소교주님을 직접적으로 노리는 것이 아니어야 하는데.’ 그 점이 우려가 되었다. 교주가 천여운을 이용하고 도구로써 다루려한다는 사실은 네 종파에 힘을 실어주는 것으로 명백했다. 그런데 이렇게 천여운의 힘을 급감시킨다는 것은 매우 위험했다. 아무리 무위가 뛰어난 천여운이라고 해도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구나. 왜 이렇게 담담하시지?’ 갑작스럽게 닥친 일에 당황스러워하거나 감정적으로 분출될 거라 여겼는데, 오히려 천여운은 심기가 불편해하면서도 담담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마치 이런 일이 닥칠 거라고 예상이라도 한 듯이 말이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소교주님. 저와 연무화 장로는 명령이 떨어진다면 어떤 식으로든 이행.....아!” 말을 하던 중간에 환의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천여운이나 연무화 역시도 같은 방향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에 허봉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말했다. “무,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요?” “늦었군요.” 환의가 어두워진 안색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화경의 고수인 그들은 기감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비환귀종의 장원 바깥에 수백 명에 이르는 무인들이 포위망을 이뤄서 둘러싸고 있었다. < 45장 함정 속으로 걸어가다 (2) > 끝 < 45장 함정 속으로 걸어가다 (3) > “종주님! 종주님!” 비환귀종의 객당으로 경비 무사들 중의 한 사람이 부리나케 뛰어왔다. 객당의 대청 위에 있던 환의가 자리에 일어나서 물었다. “무슨 일인가요?” “지, 지금 장원 바깥에 부주검단의 단주라는 분과 교주전의 사자께서 오셨습니다.” “부주....검단이요?” 놀라하는 환의의 반응에 천여운이 물었다. “왜 그러는 겁니까?” “......검마종 산하의 암검이종 중 하나인 부주검종에서 운용하는 단입니다.” 암검이종(暗劍二宗). 그들은 검마종의 숨겨진 힘이었다. 삼 년 전에는 이종이라 하여 대무검종도 있었지만, 마도관의 죄수들이 역혈마공을 익힌 사건에 연루되어 종파가 통째로 해체되면서 지금은 암검종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검마종 산하의 세력이라는 것이었다. “난처한 상황이 되었군요.” 환의 역시도 이들이 이렇게 빠르게 움직일 거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무슨 목적인지는 모르겠지만 부주검단의 전력이 비환귀종을 둘러싸고 있다는 것은 그리 좋은 목적이 아닌 것은 틀림없었다. “하아......” “주군?” 천여운이 한숨을 내쉬며 대청 아래로 내려가 하늘을 쳐다보았다. 최근에 들어서 각오는 다지고 있었지만 너무 빨랐다. 여섯 종파가 아닌 그와 부딪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화부인을 부려둔 것에 대한 원망만 있을 뿐이었다. ‘......운명이라는 건가.’ 다급한 상황 속에서 심고에 빠진 듯한 천여운의 태도에 모두가 입을 다물고 지켜보았다. 마음이 조급한 것은 오직 경비 무사뿐이었다. 한참 동안 하늘을 바라보며 탄식해하던 천여운이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결의에 찬 눈빛으로 환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전에 부탁해두었던 그것. 준비하셨습니까?” “아!” 그 물음에 환의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한편 비환귀종의 장원 바깥은 자그마치 삼백여 명에 이르는 부주검단의 무사들이 진을 치듯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장원의 대문 쪽에는 갈색 갑주를 입은 콧수염의 중년인과 교주전의 복장을 갖추고 안대를 쓰고 있는 중년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갑주를 입은 중년인은 부주검단의 단주인 주겸이라는 자였다. “패현 공. 곧 나올 것 같소.” 주겸의 말에 안대를 쓰고 있는 중년인, 패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비 무사가 들어간 지 꽤 되었는데도 지체되고 있어서 비환귀종 내의 전력을 끌어 모으는 것인가 의심해보았지만 특별한 움직임은 없었다. -끼이이이익! 비환귀종의 대문이 열리며 그 안에서 네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여운과 허봉, 그리고 십 장로 연무화, 십일 장로 환의였다. 연무화는 여전히 인피면구를 쓰지 않고 천여운의 호위무사인 것처럼 곁을 지켰다. “소교주님을 배알합니다.” 부주검단주 주겸과 교주전에서 나온 패현이 동시에 천여운에게 포권을 취하면서 인사했다. 천여운도 마지못해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인사를 건네고 있었지만 그 사이에선 묘한 냉기가 흘렀다. 그때 십일 장로 환의가 먼저 입을 뗐다. “어째서 이 많은 무사 분들이 저희 비환귀종의 장원을 둘러싸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그 말에 답한 것은 교주전 소속인 패현이었다. “그리 느끼셨다면 송구스럽습니다. 환 장로. 부주검단은 비환귀종을 위협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장원을 둘러싼 것부터가 위협이었다.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는 환의를 뒤로 한 채, 패현이 천여운을 바라보며 말했다. “소교주님께서는 교주령을 받으시지요.” 마교인에게 있어서 교주령은 절대적인 명령이었다. 잠시 말이 없던 천여운이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으면서 외쳤다. “소교주 천여운이 삼가 교주령을 받듭니다.” 이에 패현이 입술을 이죽거리고는 교주령이 적힌 둘둘 말려있던 명령서를 펴서 읽었다. “소교주에게 명을 내린다. 절강성 쪽에서 극도육무문의 전력이 복건성 북부로 남하하고 있다는 긴급 전보가 있었다. 소교주에게 일개 단을 맡길 터이니, 출진하여 복건성 북부 지부들을 규합하여 이를 막도록 하라.” ‘아!’ 뜻밖의 교주령에 천여운의 눈빛이 흔들렸다. 뭔가 계책이 들어올 거라고는 짐작했지만 이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바였다. 천여운이 고개를 들어서 비환귀종의 장원을 둘러싼 부주검단의 무사들을 쳐다보았다. 하나 같이 전쟁에 나가는 것처럼 갑주를 입고 무장을 하고 있었다. ‘설마?’ 교주령이 적힌 명령서를 다시 갈무리한 패현이 말했다. “한시가 급한 사항입니다. 소교주께서는 교주령이 떨어지셨으니, 부주검단을 데리고 당장 출진하시지요.” 그 말에 환의와 연무화가 놀란 눈으로 천여운을 쳐다보았다. 이것은 그들로서도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연무화가 다급한 목소리로 천여운에게 전음을 보냈다. [이, 이건 함정입니다!] 출진 명령은 보기 좋은 명분에 불과했다. 한 마디로 교내에서 천여운을 처단하는 것이 아니라 교외에서 처리하겠다는 소리였다. 천여운의 수족을 전부 떼지 않았으면 모르겠지만 검마종 산하의 전력을 붙인다는 것은 속이 보이는 수작이었다. 더군다나 당장 출진하라는 것은 어떠한 방비를 할 틈도 주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크윽! 당했다.’ 여기서 항명을 한다면 분명 이들은 그것을 빌미로 공격할 것이다. 말 그대로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천여운을 막다른 절벽으로 몰아가는 상황에 화가 난 허봉이 이빨을 갈면서 말했다. -뿌득! “그, 그럼! 저도 함께 하겠습니다!” “......소교주께서 혼자 출진하라고 명하셨다. 교주령이 내려오는데 어딜 끼어드는 것이냐.” 패현의 다그침에 허봉이 화가 났지만 입을 닫아야만 했다. 교주령은 그만큼 절대적이었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망연자실하게 서있는 환의와 연무화에게 바닥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있는 천여운에게서 전음이 들려왔다. 이에 두 사람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받아들여야만 했다. ‘함정인 줄 알면서 걸어가야 하다니.....’ 연무화는 진심으로 교주전의 이런 계략에 분노했다. 아무리 자신의 권력과 아성을 위협한다고 해도 자식인 천여운을 죽음 속으로 몰아넣는 것은 냉정함을 넘어서 피도 눈물도 없다고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그런 그들에게 교주전의 심복인 패현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출진하시지요.” * * * 대호법 마라겸이 교내로 복귀한 것은 두 시진하고도 반이 지나서였다. 오현봉의 근방의 다른 산봉우리에 묻어두었던 이 장로 경본기의 시신을 가지고 내성으로 복귀했다. 확실히 역혈마공으로 비대해져서 무거워진 시신은 내공을 쓰지 않는다면 장정 여섯 명 정도는 달라붙어야 겨우 옮길 수 있었다. 그런데 두 시진 사이에 내성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내성을 돌아다니는 일부 무사들과 시종들에게서 이질감이 느껴졌다. 알 수 없는 불안함에 사로잡혔지만 마라겸은 내색하지 않고 호위 무사들과 함께 시신을 가지고 교주전으로 이동했다. 호위전의 무사들에게 일러서 교주전의 근방 건물에 있는 영안실로 시신을 옮기게 했다. “교주님께 보여드려야 하니, 시신을 먼저 깨끗이 하도록 하겠습니다.” 땅에 묻혔었기는 하나, 그리 더러운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굳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기에 마라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위전의 무사들이 이 장로 경본기의 시신을 끙끙거리며 어딘가로 옮겼다. 그런데 그 방향은, “잠깐 거긴 소각로 쪽...” “대호법.” 호위전의 무사들을 부르려는 마라겸의 앞을 안대를 쓴 중년인이 가로막았다. 그는 호위전의 무사들의 수장인 패현이었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마라겸이 패현을 지나쳐서 다시 호위전의 무사들을 부르려고 하자, 그가 보법을 펼치며 앞을 가로막았다. 가면의 틈 사이로 보이는 마라겸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이게.....무슨 짓이오?” “교주님의 명령이니 더 이상 시신에는 관여하지 마시오.” “교주님의 명령?” 마라겸은 어이가 없어졌다. 괜한 분란이 없도록 하기 위해 역혈마공이 발현된 시신을 가져왔더니, 지금 그것을 소각로에 태우려한다는 말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것을 막아야 했다. 조급한 마음이 들려하는 마라겸에게 패현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지금 그쪽에 신경 쓰실 여력이 없습니다. 교주님께서 대호법이 당도하면 당장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지금 대전으로 가시면 됩니다.” “대전?” 뜻밖의 말에 마라겸이 의아해했다. 내성의 대전은 교내 모든 종주들이 모이는 회의 때가 아니고는 개방되지 않는다. 최근에 대전 회의가 발의되었었기 때문에 당분간은 열릴 일이 없었다. “대체 그게 무슨?” “지금 대전 회의가 시작 된지 일 각 정도 되었으니 서두르셔야 할 겁니다.” “.......회의 안건이 무엇이오?” “후후후, 소교주님의 폐위에 대한 회의입니다.” “뭐요?” 전혀 예측하지 못한 안건에 대호법 마라겸은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반문했다. 교주가 어떤 식으로든 움직일 거라고 여겼지만 이렇게 빠르게 진행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큭, 당했구나.’ 이렇게 된다면 빨리 서둘러야 했다. 소교주가 폐위되는 것이 더 진행되기 전에 막아야 했다. 아니 어쩌면 위기를 기회 삼아서 모든 종주들이 모인 앞에서 소교주가 당대 천마임을 밝히고 반전을 꾀해야겠다고 여겼다. 안타깝게도 마라겸은 시신을 운구해오느라 천여운이 복건성으로 출진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먼저 실례하겠소.” -탓! 그 말과 함께 마라겸이 빠르게 경공을 펼쳐서 대전 방향으로 향했다. 그런 마라겸의 뒷모습을 보면서 패현이 혀를 찼다. “쯧쯧, 역시 소교주의 사람이 틀림없군.”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당혹감을 비추면서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미 대세를 거스르기에는 늦었다. 지금 마라겸의 역할은 확실하게 천여운이 폐위가 되도록 사지로 몰아넣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에게도 부여된 역할이 있었다. “어이! 그쪽으로 들어가지 마라!” “어멋!” 패현이 소각로 방향 쪽으로 들어갈 뻔 한 여시종을 향해 소리쳤다. 이 장로 경본기의 시신이 완전히 소각될 때까지 누구도 다가오지 못하도록 통제해야 했다. 한편 거대한 기둥들이 지탱하고 있는 대전 건물 안에는 수많은 인파들이 모여 있었다. 현재 교내에 있는 모든 종주들과 장로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종주들은 참석해 있는 상태였지만, 석좌 다음에 놓여 있는 장로석들은 상당수가 비어져 있었다. 장로들 중에 참석한 이들은 삼 장로 부철용과 사 장로 자금경, 오 장로 항소유, 육 장로 몽오, 마지막으로 십일 장로 환의뿐이었다. -타타탁! 대전 회의실에 도착한 대호법 마라겸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교주가 이미 착석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대전 입구를 지키는 무사가 그의 입장을 알리지 않았다. 하지만 대전은 굉장히 정숙한 상태였기에 모두가 마라겸의 입장을 금방 알아차렸다. ‘뭐지?’ 가면 속에 가려진 마라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회의가 한참 진행되고 있으리라 여겼는데, 모두가 침묵을 금치 못하고 있는 것이 이상했다. 마라겸이 눈을 돌리며 천여운을 찾으려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대전 회의에 있어야 할 천여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더군다나 장로들 중에서 천여운 일파라고는 오직 십일 장로 환의 밖에 없었다. ‘이런......’ 그제야 마라겸은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소교주의 폐위를 논의하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당사자인 소교주와 그 일파를 제하고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었다. 장로들이 있는 단 쪽으로 그가 걸어가자 석좌에 앉아있는 교주가 입을 열었다. “마침 잘됐군. 그 사건을 지켜본 대호법이 복귀했으니.” ‘그 사건?’ 영문을 몰라 하는 마라겸에게 교주가 입을 열었다. “대호법은 가운데로 오라.” “.....명을 받듭니다.” 마라겸이 천천히 걸어와 장로석이 마주보는 한 가운데에서 멈춰 섰다. 항상 교주의 옆자리를 지켰었기에 이 가운데에 서는 것은 처음이었다. 마라겸이 바닥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아서 고개를 숙였다. “대호법에게 묻겠다. 아까 전에 본좌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고하면 된다.” “알겠습니다.” “소교주 천여운이 이 장로 경본기를 기습해서 살해한 것을 눈앞에서 본 것이 맞는가?” ‘기습?’ 교주의 질문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마라겸의 눈빛이 흔들렸다. 분명 교주에게 이 장로 경본기가 역혈마공을 익혀서 폭주했다는 것을 알렸는데, 이런 식으로 질문을 하는 의도가 무엇일까? “교주님. 분명...” “묻는 말에만 답해라. 소교주 천여운이 이 장로 경본기를 기습해서 죽인 것이 맞는가?” 강경한 교주의 목소리에 마라겸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의도적으로 원하는 답변만 들으려고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할 순 없다.’ 교주의 의도대로 된다면 소교주의 폐위에 힘이 실려 버리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때 마라겸의 귀로 교주의 전음이 들려왔다. [본좌가 영고에 내공을 주입하게 되면 고독이 폭주하게 될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대호법 마라겸의 몸이 떨려왔다. 교주 천유종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그의 노림수는 바로 이것이었다. 영고의 지배를 받는 고독이 몸속에 있는 이상 마라겸은 절대로 자신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으리라. ‘녀석을 지지하는 자들이 이 자리에 없다는 것을 보았으니 너도 알겠지.’ 이미 천여운의 소교주 폐위를 막기에는 가망성이 없었다. 아무리 지지한다고 한들 목숨까지 걸어가면서 충성을 지킬 수는 없을 것이다. 교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대호법. 소교주 천여운이 이 장로 경본기를 기습해서 죽인 것이 맞는가?” ‘자 답해라.’ 대답은 결정되어 있었다. 그의 역할은 이 자리에서 천여운이 확실하게 폐위되도록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드디어 마라겸이 몸을 떨던 것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소교주께서는 이 장로를 기습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마라겸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말에 교주 천유종의 눈에 노기가 서렸다. 기어코 자신의 명령을 거역한 것이었다. “그리고 소교주께서는...” ‘.....어쩔 수가 없군.’ 더 이상 입을 열어서 역혈마공이 거론되는 것을 막아야 했다. 교주가 몸속에 있는 영고에 내공을 주입했다. 원래는 대호법 마라겸이 자신에게 해를 가해야만 발동되는 것이었지만, 마의가 그것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서 영고가 소멸되면 고독들이 폭주하도록 해놓았다. 그러나, “이 장로 경본기를 멋대로 살해한 것이 아니라....” ‘이, 이게 무슨? 어째서 듣지 않는 거지?’ 영고에 내공을 주입했는데 대호법 마라겸이 고통스러워하기는커녕, 멀쩡하게 말을 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 장로가 역혈...” ‘안 돼!’ 여기서 그가 진실을 말한다면 자신이 소교주를 폐위하기 위해 거짓 공론화를 한 것이 모든 종 주들의 앞에서 드러나고 만다. 당황한 교주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단번에 신형을 날려서 마라겸의 입을 막기위해 검결지를 날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팍! 누군가 그의 앞을 가로막고서 검결지를 막아냈다. 그는 바로 십일 장로 환의였다. ‘아닛? 이놈이?’ 덕분에 대호법 마라겸은 큰 소리로 대전의 모두가 들을 수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역혈마공을 익혀서 폭주한 것을 소교주께서 제압하셨습니다.” -웅성웅성! 결국 진실이 알려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갑작스럽게 교주가 대호법을 공격한 것부터 시작해, 그것을 십일 장로 환의가 제지하자 모든 종주들의 관심은 그들에게로 향했다. 교주가 분노한 눈빛으로 환의를 노려보며 말했다. “환 장로! 네놈이 감히 본좌를 거스르는 것이냐.” "환 장로가 아닙니다." "뭣?" 그러자 십일 장로 환의가 입 꼬리를 올리더니, 자신의 턱 부분의 이음새를 잡고서 들어올렸다. 피부가 길게 늘어났다. -쭈우우우욱! "이, 이게?' 놀랍게도 교주의 검결지를 막은 자는 환의가 아니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환의의 인피면구를 쓰고 있던 숨겨진 인물이었다. 그는 바로, “소교주? 네, 네가 어찌 여기에?” 복건성으로 향하다가 지금쯤 처리되었어야 할 천여운이었다. 경악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교주에게 천여운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교주직을 계승하러 왔습니다.” < 45장 함정 속으로 걸어가다 (3) > 끝 < 46장 진정한 계승자 (1) > 마교 성에서 동쪽으로 백오십 리 가량 떨어진 곳. 무장을 한 삼백여 명의 부주검단의 단원들이 말을 타고 진군하고 있었다. 늦은 출정으로 하늘이 반쯤 어두워지고 해가 지평선 너머로 지고 있어, 슬슬 터를 잡고 야영 준비를 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수풀이 우거진 산 고개였는데, 정상에서 내려다보니 이곳에서 조금만 더 이동하면 야영을 할 수 있을 만한 터가 보였다. 하지만 그들이 찾는 곳은 야영지가 아니었다. 부주검단의 단주 주겸에게 부관이 신호를 보냈다. [이곳이면 될 것 같습니다.] 부관의 전음에 주겸이 어두워진 하늘과 주변을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적도 드물고 여기서 해결하면 될 것 같았다. 선두에서 이동하고 있는 천여운의 옆에서 말을 몰고 있던 주겸이 검을 뽑았다. -챙!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부주검단의 단원들이 전부 검을 뽑았다. 그 소리에 천여운이 말을 몰다가 고개를 돌렸다. “이게 무슨 짓이죠?” 천여운의 질문에 주겸이 비릿하게 웃더니 검을 겨냥하며 외쳤다. “무슨 의미겠소. 이곳이 소교주의 무덤이 된다는 것이지요.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이시오.” “죽어랏!”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부주검단의 부관이 일기토를 벌이는 장수처럼 말을 몰아서 검강을 형성하여 천여운의 목을 베려고 했다. “후후후, 언제 숨겨둔 이를 드러내나 기다렸는데 역시군요.” ‘후후후?’ 웃음소리가 뭔가 교태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우웅! 바로 그 순간 천여운이 번개처럼 도를 뽑아서 검강을 막아내더니, 단숨에 부관의 목을 베었다. -?! 부관이 초절정 초입의 고수라고는 하나 화경의 고수의 상대가 될 리가 만무했다. 고작 일도에 허무한 죽음을 맞이한 부관의 시체를 보면서 부주검단의 단주가 싸늘해진 얼굴로 말했다. “기어코 반항하시겠다 이것이오? 소교주!” “저는 소교주님이 아니라서요.” “그게 무슨?”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천여운이 목의 이음새 부분을 붙잡고 얼굴을 뒤덮고 있던 인피면구를 벗어버렸다. 인피면구 속에 드러난 얼굴은 하얀 분칠을 한 십일 장로 환의였다. “아닛!” 환의가 목 부분의 이음새를 꾹꾹 눌렀다. 인피면구는 한 겹이 아니라 두 겹으로 쓰고 있는 그였다. “하마터면 인피면구 두 개를 전부 다 벗어버릴 뻔했네요. 후후후.” “화, 환 장로!” 소교주라고 여겼던 인물이 십일 장로 환의이자 부주검단의 단주 주겸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비환귀종의 입구에서 다른 짓을 하지 못하게 곧바로 출진을 했었다. 그런데 대체 언제 소교주가 환의로 바뀌었단 말인가. “서, 설마.....처음부터 환 장로가 소교주인 척을 했단 말이오?” “정답입니다. 후후후.” 그렇다는 말은 비환귀종의 입구에 있던 환 장로가 천여운이라는 말이 아닌가. 소교주를 함정에 빠뜨렸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속은 것은 자신들과 교주라는 말이었다. 당혹감에 빠진 것도 잠시였고 주겸이 분노에 차서 외쳤다. “환 장로! 그대가 감히 교주령을 어기다니!” “어기다니요? 교주령에서는 분명 출진을 명했지? 죽으라는 명령은 있지 않았는걸요.” 비꼬는 환의의 말에 주겸이 이를 갈면서 단원들에게 소리쳤다. -으드득! “당장 이 반역자를 잡아서 본교로 복귀한다.” “충!” “글쎄요. 인원이 많기는 하지만 제가 도망가자고 마음먹는다면 여러분들이 잡을 수 있을까요?” 대부분의 인원이 일류고수였고, 절정의 고수들은 오십여 명이었다. 비록 단주인 주겸이 완숙한 초절정의 고수이기는 했지만 화경의 고수인 환의가 마음먹고 경공을 펼친다면 언제든지 따돌릴 자신이 있었다. 자신만만해 하는 환의를 바라보며 주겸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화경의 고수를 상대하는데 그 정도 대비도 안했을까.” “크르르르!”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부주검단의 단원들의 입에서 짐승 같은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나 같이 붉은 안광을 띠는 모습에 환의가 침을 꿀꺽 삼켰다. “으음.....이건 예상 못했는데요.” 암검이종의 하나인 부주검단. 그들 역시도 역혈마공을 익힌 무력 집단이었다. 아무래도 도망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닐 지도 모른다고 여겨진 환의의 눈빛에 긴장감이 서렸다. 한편 마교 내성 내 대전. 대전 역시도 갑작스러운 천여운의 등장에 이를 지켜보던 종주들이 하나 같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소교주 천여운은 교주령을 듣고 복건성으로 출진했다고 들었는데, 설마 십일 장로 환의로 변장해서 나타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소교주님이라고?’ ‘허어! 어찌 이런 일이?’ ‘이상하다. 아까 전만 하더라도 분명 환 장로의 목소리였는데.’ 환의와 한 번이라도 대화를 나눠본 자들은 목소리에 전혀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만도 했다. [원래 사용자의 목소리로 변환합니다.] “흠흠! 아아아아아!” 나노의 목소리 변조로 완벽하게 환의의 목소리로 바꾼 천여운이었다. 심지어 환의를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자주 접했던 교주조차도 대전 회의 전의 인사에서 구분할 수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사술을 익혔구나.’ 원래의 목소리로 돌아오는 천여운을 바라보며 교주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그의 등장에 경악했던 것도 잠시였고 원래의 냉정함을 되찾았다. ‘환 장로가 인피면구를 만들어준 것인가?’ 그렇다는 것은 지금 복건성으로 출진한 자가 환 장로일 확률이 높았다. 천여운을 지지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교주인 자신의 명령을 거역해가면서까지 도울 줄은 몰랐다. ‘감히!’ 전부터 그 과감함과 당돌함은 익히 알았지만 이제 그 선을 지나쳤다. 대전 회의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분명 모든 종주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과 승부를 보겠다는것이 틀림없었다. ‘대호법을 믿고 이러는 것이냐.’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대호법이 고독의 통제를 벗어나게 만들었다. 게다가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으니 누명에서 벗어났고 반전을 꾀했다고 여길 것이다. ‘해명 이전에 실수를 저질렀구나.’ 모습을 드러낸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여전히 유리한 것은 자신이지 소교주가 아니었다. 마교의 내성은 오직 자신의 통제 하에서만 움직이는 절대적인 영역이었다. “무엄하구나. 소교주. 교주령을 어기고 감히 대전에 정체를 숨기고 나타나다니. 반역을 저지르려는 것이냐.” 힘이 들어간 교주의 위엄 있는 목소리에 대전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교주의 말대로 천여운의 이러한 행동은 반역을 저지른다는 일종의 빌미를 제공한 셈이었다. 이에 천여운이 차갑게 식은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그 전에 먼저 여쭙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뭐라?” “어째서 제게 이 장로를 기습해서 죽였다는 누명을 씌워서 소교주직에서 폐위시키려고 하시는 겁니까?” 날카롭게 꼬집는 천여운의 질문에 모두가 집중했다. 사실 방금 전에 대호법이 밝힌 진실 덕분에 분위기는 완전히 반전되어 교주의 입장이 난감해진 터였다. “누명이라.....” 그런데 교주는 방금 전과 달리 여유로워 보였다. 교주 천유종이 천여운의 뒤편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있는 대호법을 향해 명을 내렸다. “대호법. 소교주 천여운이 교주령을 어겼다. 당장 제압하라.”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런 교주의 명령에 대호법이 따를 리가 없었다. 물론 애초부터 교주도 그가 완전히 천여운의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했기에 예상한 부분이었다. 교주가 대전 내에 있는 장로들과 수뇌부들을 향해 외쳤다. “보아라. 대호법 마라겸은 본좌가 아닌 소교주를 따르고 있다. 그가 한 증언을 믿을 수 있겠느냐?” 그 말에 일순간 대전에 침묵이 찾아왔다. 교주의 노림수는 바로 이것이었다. 방금 전까지 내심 교주에게 의구심이 피어오르던 종주들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대호법의 명령 거부로 교주의 말에 더욱 힘이 실렸기 때문이었다. ‘이런....’ 마라겸이 놀란 눈으로 교주를 바라보았다. 쉽게 당할 인물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자신의 충성이 소교주에게 옮겨간 것을 이용할 줄은 몰랐다. “소교주를 보호하기 위한 대호법의 충성은 잘 알았도다. 하나, 잘못을 저질렀다면 응당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 -딱 교주가 손가락을 튕기자 대전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호위전의 무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상시 교주의 주변을 지키는 호위전 최고의 고수들이었다. “소교주와 대호법을 체포하라.” “충!” 호위전의 고수들이 그들을 향해 다가오려는 순간이었다. 대전의 입구 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안됩니다! 당장 멈추십시오.” “비켜라!” -우당탕! “윽! 뭐, 뭐야? 네놈들은 시종이 아니잖아.” “어서 가십시오! 장로님.” 입구를 지키는 무사들이 누군가를 제지하고 있었는데, 그 자가 막무가내로 대전 입구의 문을 열어젖혔다. -쾅! 소란스러움에 뒤쪽으로 시선이 가있던 대전 내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대전의 거대한 문이 열리며 등장한 사람은 다름 아닌 십 장로 연무화였다. 대전 회의에 참석하지 않을 거라고 알고 있던 그녀가 뒤늦게 나타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저 복장은?’ 그녀는 내성의 여시종들이 입고 있는 검은 상의에 흰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것도 의아했지만 연무화가 한손으로 끌고 온 것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것은 전신의 일부가 그을린 거구의 시신이었다. “회의 중에 늦게 참석해서 죄송합니다. 중요한 증거물이 있어서 늦었습니다.” -둥둥! 연무화가 내공을 끌어올려 허공섭물로 시신을 대전의 가운데로 옮기게 했다. 대전의 정중앙으로 날아오는 거구의 시신을 보는 모든 종주들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번졌다. "아닛?" 전신의 혈관이 울룩불룩하게 올라온 시신. 그 시신은 불에 그을린 흔적들이 있었지만 얼굴을 못 알아볼 건 아니었다. 그는 다름 아닌 검마종의 종주인 이 장로 경본기였다. “여, 역혈마공?” “역혈마공이 틀림없네!” 원래의 경본기의 신장보다도 두 배 이상 커졌고, 괴물처럼 비대해진 덩치와 혈관의 팽창해서 터질 듯한 근육은 분명 역혈마공에 의한 부작용이 틀림없었다. “대호법의 말이 사실이란 말이잖아.” “이 장로가 역혈마공을 익히다니?” 대전 내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패현은 대체 무얼 하고?’ 교주 천유종의 표정이 굳어졌다. 시신을 불태우게 하고 누구도 소각로에 들이지 말라고 했는데, 지금 시신을 보면 연무화가 강제로 그것을 가져온 듯 했다. -채채채챙! “이놈들. 대체 정체가 무엇이냐!” “당장 비키지 못할까!” 소란스러운 대전의 입구 바깥쪽에서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시종과 내성 경비 무사의 옷을 입은 자들이 대전 바깥에서 호위전의 무사들이 내부로 들어오려는 것을 막고 있었다. “우아아아악! 무, 무슨 계집이!” -쾅! “끄아아악!” 덩치가 건장한 성인 남자보다 머리 하나만큼은 더 큰 여시종이 호위전의 무사의 발목을 낚아채서 도끼를 휘두르듯이 다른 자들을 쳐냈다. 여자라고 믿기에는 가히 괴력의 소유자였다. ‘저놈들은 대체?’ 분명히 천여운이 가진 모든 힘을 전부 분산시켰다. 그런데 대체 내성의 시종으로 변장해서 들어온 저놈들의 정체가 무엇이란 말인가? 천여운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교주가 알지 못하는 천여운의 세력. 그들은 바로 마도관에 남아있던 그의 수하들이었다. ‘허봉. 제 시간에 맞췄구나.’ 마도관주인 좌호법 이화명이 체포되면서 마도관은 모든 것이 일시중지된 상태였다. 그 안에 있는 무공 교두들은 조사를 받는다고 내성에 억류된 상태였지만 마도관의 숙소에 남아 있는 천여운의 수하들은 아니었다. “아무도 여길 지나들 수 없다.” 입구에서 듬직하게 신위를 떨치고 있는 여시종은 바로 파부종의 호상화였다. 호상화의 앞에 누군가 다급히 뛰어와서 소리쳤다. “비, 비켜라! 이 계집!” “저를 뚫고 지나가야 할 겁니다.” 그는 호위전의 수장인 패현이었다. 얼굴에 피멍이 들어있고 몰골이 엉망인 걸로 보아, 소각로에서 시신을 지키려다가 연무화에게 된통 당한 듯 했다. “이런 빌어먹을 계집이!” 그렇지 않아도 웬 젊은 여시종에게 수치스러울 만큼 당했던 패현이 노기가 솟구쳐서 그녀를 향해 검초를 펼쳤다. -채채채채챙! 그러나 호상화는 당황해하지 않고 호위전의 무사에게서 빼앗은 검으로 침착하게 검초를 막아냈다. ‘젠장! 대체 내성에 이런 괴물 같은 계집들이 언제 들어왔단 말인가.’ 조급해하며 어떻게든 그녀를 뚫고 들어가려 했으나, 부상을 입은 그가 쉽게 꺾기에는 호상화의 무위가 절대로 약하지 않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뭔가 문제가 생겼다.’ 사태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인지한 종주들이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에는 천여운이 누명을 풀기 위해서 이런 계책을 꾸몄다고 여겼던 그들이었지만 호위전의 무사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고 있는 자들을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후우.” 교주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미 이 장로 경본기의 시신을 가져온 시점에서 계책이 엉망이 되었다. 교주가 노기가 서린 눈으로 낮게 깔린 어조로 위협적으로 말했다. “소교주. 네가 정녕 본좌와 끝장을 보겠다는 것이냐.” 그런 교주를 바라보며 천여운이 담담하게 답했다. “말씀드렸을 텐데요. 저는 누명만을 벗기 위해서 온 게 아닙니다. 지금 저는 교주직을 계승하러 온 겁니다.” “감히!” -파파파팟! 교주의 검결지가 빠르게 움직이며 천여운의 상체 요혈들을 노렸다. 그러나 이미 손에서 모이는 강대한 기운을 감지하고 있던 천여운은 보법을 펼쳐서 거리를 벌리며 이를 피해냈다. 교주가 자신에게서 거리를 벌린 천여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대전의 모든 장로, 종주들에게 교주령으로 명령한다. 당장 이 반역자들을 제압해라.” 더 이상의 빌미니, 명분이니 하는 머리싸움은 소용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절대적인 권위로 천여운을 밀어붙일 수밖에 없었다. 거부할 수 없는 교주령이 떨어지자 머뭇거리던 종주들의 일부가 천여운과 마라겸, 연무화를 향해 달려들려 했다. 호위전의 무사들도 기다렸다는 듯이 공격하려는 순간이었다. -파팍! “크헉!” 신형을 날리던 호위전 무사들의 일부가 일격을 당해 뒤로 튕겨나갔다. 호위전의 무사들이 어이가 없다는 눈빛으로 자신들을 가로막은 자들을 쳐다보았다. “어, 어째서 당신들이.....” * * * 십만대산의 마교의 성에서 동쪽으로 백십 리 정도 떨어진 곳. 어두운 밤 중이었지만 격렬한 추격전이 이뤄지고 있었다. “크르르르르!” “서랏!” 짐승처럼 울부짖는 붉은 안광에 근육이 부풀어 오른 부주검단의 무사들이 미칠 듯이 누군가를 잡기 위해서 추격을 하고 있었다. 그들보다 스무 보 가량을 앞서서 경공을 펼치고 있는 이가 있었으니 십일 장로 환의였다. “헉....헉....” 환의의 옷에 보이는 핏물들을 보면 격렬한 전투를 치른 듯 했다. 비록 그의 무위를 능가하는 자들은 없었지만 삼백 여명이 역혈마공을 쓰고서 덤벼대는 통에 결국은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 포위망을 겨우 뚫고 도망갔지만 부상이 가볍지 않았다. “하아....하아....” 오감이 짐승처럼 보통 사람들보다도 몇 배 이상 발달한 부주검단주 주겸의 귓가로 지쳐있는 호흡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저 자를 잡을 순간이 멀지 않았다. “크크크큭, 도망쳐봐야 소용없소.” 지금 이 산만 벗어나면 곧 평야 지대가 펼쳐진다. 그곳이라면 검기를 쏘아대거나 창을 던져서 위협을 가하기 좋았다. -파파파파팟! 길게 이어지는 수풀을 뚫고 지나가는 순간, 한참을 도망치던 환의가 그것을 멈추고 자리에 멈춰서 있었다. 그의 눈빛에 절망감이 서렸다. -다그닥! 다그닥! 환의가 바라보는 눈앞에 수백 명에 이르는 또 다른 마교의 깃발을 들고 있는 단이 말을 타고 진군해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멈춘 이유는 그들이 종파 깃발에 도마종과 음마종이라 새겨져 있었다. 환의가 탄식을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소교주님......저는 여기까지인가 보군요. 뭐, 그래도 나름 보람된 죽음 같아서 만족스럽군요. 후후후.’ “크르르르르! 끝이다. 환 장로. 크크큭.” 부주검단의 단주 주겸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파파팟! 산 고개를 너머 뒤늦게 수풀을 빠져나온 붉은 안광을 내뿜는 부주검단의 무인들이 몰이사냥을 마친 들짐승들처럼 환의를 향해 다가왔다. -꽉! 환의가 자신의 보도를 도병을 꽉 쥐었다. 이왕 이 자리에서 적들의 손에 죽게 된다면 선택은 하나였다. 모든 본신진기마저 불태워서 최대한 많은 적들을 죽이는 편이 천여운에게 도움될 것이다. 그렇게 내공을 십성으로 끌어올리는데, “대 천마신교의 환도단과 비궁음단의 무인들이여. 당대 천마님의 천마령이다. 사악한 역혈마공을 익힌 저 사도의 무리들을 섬멸해라.” ‘아?’ 환의의 두 눈이 커졌다. 선두에 서있는 회색 갑주의 환도단의 단주가 보도를 들고 외쳤다. “진격!” “와아아아아아아!!!” -채채채채챙! 그의 외침에 끝남과 동시에 사백 명에 이르는 무인들이 일제히 병장기를 뽑아서 역혈마공을 펼치고 있는 부주검단의 무인들을 향해 진격해왔다. “이, 이게 대체 무슨?” 도마종과 음마종의 깃발을 보고서 교주와 네 종파에서 보낸 후발대라고 여겼던 부주검단의 단주 주겸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진격해오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같은 시각. 마교 내성의 대전. 교주 천유종이 잔뜩 일그러진 인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어떤 이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장로들이었다. 삼 장로 부철용과 사 장로 자금경, 오 장로 항소유, 육 장로 몽오가 동시에 천여운을 향해 달려드는 호위전의 무사들을 공격해서 막아낸 것이었다. “이, 이놈들이!!!” 교주의 입에서 결국 거친 소리가 튀어나왔다. < 46장 진정한 계승자 (1) > 끝 < 46장 진정한 계승자 (2) > 지금으로부터 두 시진 전. 마교의 동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도마종의 장원. 장원의 본당 건물 주변에는 수많은 도마종의 무사들이 긴장된 눈으로 에워싸고 있었고, 언제라도 신호만 떨어지면 공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도마종의 집무실에는 두 사람이 독대를 하고 있었다. 한 명은 도마종의 종주이자 삼 장로 부철용이었고, 그와 마주보고 있는 자는 바로 천여운이었다. 두 사람 간에는 침묵과 냉기가 어우러져 방안을 무겁게 짓눌렀다. 천여운의 손에는 벗겨진 인피면구가 들려 있었는데, 이것을 끝까지 벗지 않았다면 십일 장로 환의라고 계속 착각했을 지도 몰랐다. ‘방어 체계를 잘 갖추고 있군.’ 여섯 종파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성세를 자랑하는 도마종다웠다. 삼 장로 부철용이 전음으로 신호를 보내는 순간 얼마 되지 않아 도마종 내에 있는 전력의 반이 이곳을 포위했다. ‘과연 어떻게 나올까?’ 천여운으로서도 이것은 모험이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도마종을 상대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반전을 일으키기도 전에 모든 게 허사가 되어버릴 것이다. ‘도마종. 본교의 광동성 동북 지부를 산하에 두고 있다. 그만 움직여도.....’ 현재 진군 중인 부주검단에 있는 환의를 도울 수 있다. 본교에서 외부로 전력을 빼낸다면 모든 것이 틀어질 수 있기에 각 지부에 산하 세력을 두고 있는 네 종파의 협조가 필요했다. 문제는 그들과 천여운의 관계는 최악이라는 것이었다. “흐으음.” 삼 장로 부철용은 고민에 빠진 모습이었다. 처음에 그는 환의의 모습으로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일고의 망설임도 없이 천여운과의 만남을 거부하거나 이곳에 묶어두고서 밀고했을 것이다. ‘소교주의 말이 정말 사실일까?’ 그가 이렇게 고민하는 이유가 있었다. 천여운이 했던 말은 그를 비롯한 다른 장로들 역시도 최근에 들어서 강하게 느끼는 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절강성 탈환을 위한 출진 이후로 분명 확실해지고 있었다. ‘은원 관계를 떠나서 이번 소교주의 말은 분명 일리가 있다. 이대로 간다면 결국 그 화살은 우리들에게도 올 것이 뻔하다.’ 본교에 있어서 가장 큰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소교주마저 내쳤다. 이것은 그뿐만이 아니라 음마종, 복마종에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지금 상황만 보았을 때는 언제든지 네 종파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교주가 어떻게 나올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고민하는 부철용에게 천여운이 말했다. 교주가 대전 회의를 소집한 시간까지 두 시진 가량 남았다. 한참을 숙고하던 부철용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소교주님. 이대로 교주전에 발고한다면 조용히 끝낼 수 있는 일인 것도 아시지요?” “부 장로님께서 그리 선택한다면 그렇겠지요.” 담담한 천여운의 목소리에 부철용이 인상을 찡그렸다. 몇 차례 만나게 되면서 그가 어떤 인물인지는 잘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알면 알수록 이 배짱부터 시작해 대담함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교주님. 왜 우리가 본교의 근간이라 불리면서도 천(天)가에 머리를 숙이는 것인지 아십니까?” “.......” “본교는 마신(魔神)과 불을 숭상하지요. 이와 소통하는 존재가 바로 교주의 역할이면서 천가의 혈맥이 선택받았기 때문입니다.” 천마신교의 십만 교도들은 긴 세월 동안 신과 소통하는 교주를 하늘로 모셨다. 그것은 아무리 세력이 강해지고 기득권을 가졌다고 해도 여섯 종파가 가질 수 없는 역사이면서 천마신교의 근본적인 정신이었다. 이 체계가 무너지는 순간 모든 질서가 붕괴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그들은 절대로 선을 넘기지 않았다. “지금 소교주님께서 하고자 하는 일은 하늘을 무너뜨리자고 하는 말과 다름없습니다. 명분과 대의가 없는 싸움은 결국 발을 디딜 기반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설사 천여운이 천가의 혈통이라고 해도 말이다. 천마신교는 단일 단체 이전에 교단(敎團)이었다. 그들이 이 혁명에 성공한다고 해도 중원 전체로 퍼져 있는 십만 교도들을 따르게 할 만한 명분 자체를 잃는 셈이었다. “쉽게 말해 제가 뒷감당을 할 만한 구심점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군요.” “......직설적으로 말씀드린다면 그렇습니다. 저희와의 다소 좋지 않은 관계를 잠시 접어둔다고 해도 소교주님의 말씀을 무작정 따르기에는 저희가 지어야 할 감당이...” -차차차차차착!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천여운의 팔목에 부착되어 있던 검은 보호대가 분해되면서 하나의 형태로 바뀌어가는 것이었다. “이, 이건.....” 하나로 합쳐진 영롱한 빛을 내는 흑검을 보는 순간 놀란 삼 장로 부철용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종주! 무슨 일이십니까?] 부철용의 목소리에 안에서 무언가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한 총관이 전음을 보냈다. 신호를 보내는 순간 당장에라도 들어갈 기세로 말이다. 하지만 돌아오는 전음은 절대로 안으로 누구도 들이지 말라는 명이었다. 그렇게 다시 두 시진 후, 천여운을 수호하는 형태로 둘러싼 장로들을 보면서 교주 천유종은 분노를 금치 못했다. 설마 이들이 천여운을 보호하기 위해 호위전의 무사들을 공격할 거라고는 교주를 비롯한 종주들도 예상하지 못했다. ‘대,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장로 분들이 소교주님을 보호하다니?’ ‘이걸 어찌 해야 할지....’ 교주의 명령으로 어쩔 수 없이 천여운과 마라겸, 연무화를 공격하려 했던 종주들은 일제히 멈출 수밖에 없었다. 사태가 이상하게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실핏줄이 터졌는지 다소 붉어진 눈으로 교주가 장로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감히 본좌의 교주령을 어기는 것이냐?” -고오오오오! 분노하는 교주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진기의 기세는 엄청났다. 숨이 턱턱 막힐 만큼 강렬하면서 무거운 진기에 대전 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갔다. “크윽!” “무, 무슨 기운이....” 종주들의 반 이상이 초절정의 고수들이었지만 현경의 고수가 뿜어대는 기운을 버틸 수 있는 자들은 이 자리에서 오직 장로들뿐이었다. ‘아직 부상이 완전히 낫지 않았다고 들었는데도 이 정도라니.....’ 차원이 다른 기세에 장로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중원 오대 고수라 불리는 교주의 무위는 절대로 그들이 만만하게 볼 수 있는 단순한 칭호가 아니었다. ‘정말 소교주가 해낼 수 있을까?’ 음마종의 종주이자 오 장로 항소유의 이마는 식은땀으로 젖어들고 있었다. 분명 천여운을 돕기로 결정했지만 교주의 이 엄청난 기운을 직접 대면하니 두려워졌다. 교주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네놈들이 정녕 반역을 저지르는 것이냐?” 살기가 진득하게 묻어나는 목소리는 어떻게 대답하냐에 따라서 당장에라도 살수를 펼칠 기세였다. 장로들이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자 교주의 표정이 아수라처럼 무섭게 변해갔다.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의지를 관철하는 것에 분노했다. “기어코 네놈들이 반역을....” “반역이 아닙니다.” 그때 천여운이 그의 말을 자르고 끼어들었다. 교주가 어이가 없어하며 노기에 차서 입을 열려는 순간, -차차차차차차착! “엇?” 천여운의 팔목의 검은 보호대가 분해되면서 흑철들이 모여들며 하나의 형태를 이루었다. 검신 전체가 완전히 검은 빛을 띠는 영롱한 절세보검이었다. 처음 보는 신비하면서 놀라운 광경에 교주를 비롯한 대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흑검으로 향했다. [天魔劍] 검신에 새겨진 선명한 음각을 모두가 보았다. 천마검. 검신에는 천마검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이 음각에 새겨진 필체가 어디서 많이 본 필체였다. 그것은 마교 내성의 대외전의 비석에 새겨져 있는 천마 조사가 남긴 필체와 거의 동일했다. “천마검?” “이, 이게 대체 무슨?” “어째서 소교주님의 검신에?” 영문을 모르는 종주들이 놀란 눈으로 흑검을 바라보았다. 검의 생김새는 교주가 가지고 있는 천마검과 흡사했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검에서 흘러나오는 영롱한 자태에서부터 완전히 흑색 빛을 띠는 것이 달랐다. ‘이, 이 녀석이 어떻게?’ 교주의 눈빛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일대 조사인 천마가 남긴 유언들을 교주로 즉위했을 때부터 들어온 천유종이 흑검을 몰라볼 리가 없었다. 그의 허리춤에 차고 있는 화려한 검집에 천마검이 들어있다. 그러나 그것은 진품이 아닌 모조였다. 왜냐하면 수백 년 동안 역대 교주들 중에서 누구도 천마 조사가 남겼다는 진정한 마(魔)를 발견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검에서 흉흉한 마성(魔性)이 느껴진다.’ 부정할 수 없는 진품이었다. 교주가 분노도 잊고서 당혹감에 빠졌다. ‘이놈들이 이것 때문에?’ 장로들이 천여운을 비호하는 이유가 밝혀졌다. 여기서 천여운이 쥐고 있는 검이 천마검이라고 인정해 버리면, 그를 자신의 입으로 당대 천마라고 인정하는 셈이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다. 절대로 아니야.” 교주가 고개를 흔들면서 진실을 부정했다. 그때 교주의 귓가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정하면 끝입니다. 검이 가짜라는 것을 증명하지 않으면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교주의 놀란 눈으로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언제 대전에 들어온 것인지 외팔의 중년인이 장로석 뒤쪽에 있는 거대한 기둥의 가려진 그림자 속에 숨어서 교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중! 네가 언제?’ 그는 바로 그의 동생인 천유중이었다. 대전에 들어오지 말라고 명했는데 어느새 들어와 있었다. [저한테 신경 쓰실 틈이 없을 텐데요. 잘 대처하지 않으면 교주님의 자리가 위태로울 수 있습니다. 검을 부러뜨리십시오.] 천유중의 조언에 당황해하던 교주의 흔들림이 멈췄다. 그의 말이 맞았다. 여기서 저 검이 진품이라고 인정하는 순간 그의 권위가 무너진다. 교주가 천여운을 바라보면서 손을 내밀었다. “검.....검을 보고 싶다.” '아닛?' 그 말에 장로들이 흠칫하며 놀라서는 안 된다고 고개를 저었다. 모든 종주들이 보는 앞에서 흑검을 보이기는 했지만 교주의 손에 넘어가면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확인해 보시지요.” 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천여운은 선뜻 검을 두 손바닥에 올려서 내밀었다. 교주가 손을 뻗어 내공을 일으켜서 흑검을 끌어당겼다. 그런데 삼 성 이상의 공력을 썼는데도 불구하고 천여운의 손에 올려 있는 검이 요지부동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본좌를 농락하는 것이냐?” 불쾌해하는 교주의 말에 천여운이 입 꼬리를 올리며 검을 허공섭물로 띄어서 교주의 앞까지 보냈다. 교주가 자신의 앞으로 날아온 천마검의 검병을 왼손으로 잡았다. 단숨에 검신에 내공을 주입해서 약하게 만든 뒤에 오른손에 검강을 일으켜서 부러뜨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치이이이익! “끄으으윽! 이, 이게 무슨!” 검을 쥐는 순간 손바닥이 타들어갈 고통에 사로잡혔다. 놀란 교주가 검병에서 손을 뗐더니 그의 손바닥에 정말로 화상 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 요물 같은 검이 감히!” 교주가 분노해서 공중에 떠있는 검에 강기가 서린 오른손을 휘두르려 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크와아아아아아!] “헉!” 언제 나타난 것인지 거대한 흑룡이 입을 쩌억 벌리며 포효했다. 어찌나 놀랐는지 교주가 보법을 펼치며 최대한 거리를 벌리며 흑룡에게서 벗어났다. 그런데 다섯 보 정도 뒤로 물러났을 때 교주의 두 눈이 커졌다. ‘이럴 수가?’ 분명 눈앞에 보였던 거대한 흑룡이 환상처럼 사라졌다. 흑룡이 있던 자리에는 영롱한 흑색 검신의 자태를 뽐내는 천마검이 둥둥 떠있을 뿐이었다. 천여운이 빙그레 웃으며 손을 뻗자 천마검이 빨려 들어왔다. -꽉! 교주가 손에 쥐었을 때는 거부했던 천마검은 천여운의 손에서는 잠잠하기만 했다. “처, 천마검이다.” “천마검이 틀림없어!” 종주들 중에 몇 명이 소리쳤다. 그들은 교내에서 가장 오래된 종파의 종주들이었는데, 어렸을 적부터 천마검의 전설에 대해서 들어왔던 자들이었다. 흑룡의 뼈와 피로 만들어진 천마검은 주인을 정하는 기물(奇物)이라 들었다. “천마검이 소교주님을 주인으로 인정했다!” “!!!” 그때 상위 종파인 마권종의 종주 고왕현이 소리쳤다. 이를 기점으로 종주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웅성웅성! 스스로 주인을 정하는 천마검의 소유자는 당대 천마의 칭호를 계승하면서 진정한 천마신교의 주인을 의미했다. ‘이런.....’ 교주가 당혹스러운지 입술을 깨물었다. 검을 부러뜨리려고 했는데 오히려 진짜 천마검이라고 알게 만든 셈이었다. ‘때가 되었다!’ 그때 한쪽 무릎을 꿇고 있던 대호법 마라겸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마라겸이 품속에서 손바닥만한 푸른 옥패를 꺼내고는 그것을 두 손으로 공손히 잡고서 종주들에게 보이면서 소리쳤다. “대 천마신교의 교인들은 천마령을 받들라!” “처, 천마령?” 천마령이라는 말에 종주들이 놀라서 옥패를 바라보았다. 대호법이 두 손으로 쥐고 있는 옥패에는 선명하게 천마령(天魔令)이라 새겨져 있었다. 천마신교의 모든 교법에 새겨져 있으니 천마령의 문양을 모르는 이들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쿵! 쿵! 쿵! 종주들이 일제히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천마신교를 세운 개파 조사의 절대적인 권위를 나타내는 천마령의 앞에선 누구도 일어설 수 없었다. 장로들 역시도 바닥에 엎드리고 고개를 조아렸다. “대....대호법 이놈!” 모두의 앞에서 천마령의 존재를 밝히는 대호법의 태도에 교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마라겸은 이를 개의치 않고 소리쳤다. “천마령의 수호자 마라겸이 천마 조사님의 천마령을 전한다.” “천마신교! 천천세! 천천세!” 대전 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외쳤다. 마라겸이 이어서 외쳤다. “본좌가 남겨놓은 시험을 통과하여 천마검을 얻은 소교주 천여운에게 본좌의 칭호인 천마를 물려주노라.” -팍! 천여운이 한 쪽 무릎을 꿇고서 천마령을 향해 포권을 취하며 외쳤다. “대 천마신교의 혈손인 천여운이 위대한 개파 조사님의 천마령을 받듭니다.” 그 외침이 끝나자 대전 내의 사람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수백 년 동안 한 번도 칭호를 물려받지 못했던 당대 천마가 이 자리에서 탄생한 것이었다. 그것은 천마신교에 있어서 전율적인 사건이었다. “와아아아아!!!” “당대 천마님이시다!” “천마신교! 천천세! 천천세!” 환호성을 지르며 천마신교의 구호를 외치는 종주들을 바라보는 교주 천유종의 얼굴은 지금까지와 다르게 비참하게 일그러져갔다. ‘크으으윽! 어찌! 어찌!’ 그리고 그 비참함은 곧 분노로 이어졌다. 얼굴이 시뻘겋게 상기되어서는 교주가 기둥의 뒤편에 서있는 외팔의 천유중을 노려보았다. 그의 참견 덕분에 더욱 비참하게 내몰리고 말았다. 기둥에 여유롭게 기대고 서있는 천유종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죽거렸다. [한낱 장기패들에게 지셨군요. 또 다시 형님은 지키지 못했습니다. 킥.] “감히! 감히! 네놈이 본좌를 모독하는 것이냐!” 대전을 울리는 쩌렁쩌렁한 교주의 외침에 일순간에 정적이 찾아왔다. 모두가 고개를 들어 올려서 교주를 바라보았는데, 그가 분노한 얼굴로 대전의 기둥 쪽을 바라보면서 씩씩 대고 있었다. “아아......” 천여운을 비롯한 장로들의 눈빛이 떨려왔다. 교주가 노려보는 기둥 뒤에는 어떠한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 46장 진정한 계승자 (2) > 끝 < 46장 진정한 계승자 (3) > 교주는 마치 실제의 누군가를 향해서 분노를 토해내고 있었다. 그러나 기둥 뒤의 그림자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기감을 개방해도 은신한 흔적조차 느껴지지 않았기에 대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눈빛에 당혹감이 서렸다. ‘이게 대체?’ ‘교, 교주님께서 어째서?’ 그만큼 교주가 보이는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실제로 보게 된 교주의 이런 모습에 천여운이 인상을 찡그리며 어젯밤 오현봉의 정상에서의 대화를 떠올렸다. 연무화가 대호법 마라겸에게 물었었다. ‘대호법. 그런데 원래 만나기로 했던 기일을 당긴 이유가 뭐죠?’ ‘그것은......교주님께서 최근에 들어서 저를 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호법을 멀리한다고요?’ 연무화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극도육무문의 간자 사건 때 마도관의 지하 보고가 드러난 이후로 교주가 그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온통 의심으로 가득했다. 심지어 집무실을 벗어나 다른 임무를 맡길 때 감시의 눈길이 생겨났다. 그 때문에 마라겸은 더 이상은 단독 행동이 힘들 거라고 판단하여서 원래의 기일을 당긴 것이었다. ‘차마 말씀드리기 그렇지만 교주님께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니요. 변화라고 해야 옳을 것 같군요.’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신변상에 문제가 생겼단 겁니까?’ 두루뭉술한 대호법의 말에 연무화가 의아해했다. ‘신변이라면 신변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세 호법들 중에서 상시 교주의 곁을 지키는 마라겸이었다. 그렇기에 그 만큼이나 교주의 신변이나 심경 변화를 빠르게 읽는 사람도 드물었다. 이야기를 하는 내내 마라겸은 이 사태를 굉장히 심각해하고 있었다. ‘당대 천마님께 보셨던 교주님의 현재는 원래의 모습과는 다소 거리가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교주님께서 분명 냉철하신 부분이 있지만 그렇다고 본교에 대한 정이 없으신 분이 아닙니다.' '글쎄요.' 이 말은 천여운이 동의하기 힘들었다. 교주가 현재 펼치는 정책이나 자신을 견제하는 모습을 보면 내부적으로 싸움을 격화시키고 있었다. 외부에 거대한 적이 나타났다면 교주로서 교내를 아울러서 대항해야 하는데, 오히려 자신의 권좌를 지키는데 급급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렇게 말씀드리니 와 닿기 힘드실 거라 생각합니다.’ ‘뭔가 특별한 변화가 있는 겁니까?’ 그런 천여운의 물음에 마라겸이 무거워진 눈빛으로 답했다. ‘교주님께서 최근에 들어서 계속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십니다.’ ‘누군가라면?’ ‘.......천유중 공입니다.’ 천유중은 마도관 시절에 같은 검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였으며 쟁탈전에서 오른팔이 잘렸다고 했던 천유종의 배다른 동생이었다. 대호법에 대한 신뢰가 떨어졌다면 아무래도 혈육을 믿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천유중 공과 대화를 나누시다뇨? 그게 무슨 궤변입니까?’ 연무화가 화들짝 놀라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천여운으로서는 의아해 할 수밖에 없었다. ‘왜 궤변이라는 거죠?’ ‘.....소교주님. 검마종의 천유중 공자는 십오 년 전에 사파 연맹과의 전쟁에서 패왕 항연에게 전사했습니다.’ ‘네?’ 패왕 항연. 지금도 사파 연맹의 일인자로 군림하는 최강자였다. 삼십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 중원 무림의 오대고수 중 하나로 그 자리를 한 번도 누구에게 내어주지 않은 절대고수 중에 한 사람이었다. ‘십오 년 전이면 귀주에 사원 평야 전투를 말하는 것인가?’ 십오 년 전의 전쟁은 꽤나 유명한 사건이었다. 마교에서 최대한 정보를 감추었지만 결국 오대 고수 중의 하나인 태상 교주 천인지의 행방불명이 알려지면서 이를 기회삼아 사파 연맹에서 마교의 영역을 침범했다. 이때까지 이름을 한 번도 알리지 않았던 교주가 이 전쟁에서 새로운 오대 고수로 거듭나게 되었었다. ‘잠깐. 그럼 교주가 죽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겁니까?’ ‘......죽은 사람이 아니라 아무래도 환상인 것 같습니다.’ ‘환상?’ 마라겸이 이것을 발견한 것은 절강성 탈환전 때 이후의 일이었다. 그 당시에 그 역시도 내상을 입어서 치료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교주가 달라졌음을 알아차렸다. ‘교주께서는 아무도 없는 벽면이나 어두운 곳을 바라보면서 계속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처음에는 그리 길지 않아서 의구심만 품었지만.....’ 근래에 들어서 그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길어졌다. 마치 죽은 천유중이 곁에서 계속 머무는 것처럼 뭔가 대화를 나눴다. 이것을 수차례 발견한 마라겸은 서서히 교주의 정신에 문제가 생기고 있는 ‘전조’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 교주님의 정신을 갉아먹고 있습니다.’ ‘그게 대체 무엇이죠?’ ‘그것은......’ 마라겸이 짐작하는 원인에 천여운과 연무화가 놀란 눈으로 동시에 뭔가를 쳐다보았다. 그것은 가슴이 휑하니 뚫려서 죽어있는 이 장로 경본기의 시신이었다. 천여운의 회상이 끊어진 것은 삼 장로 부철용 때문이었다.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분노하는 교주를 넋 놓고 바라보던 부철용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교....교주님. 지금 누구와 대화를 나누시는 겁니까?” “뭐라?” 그의 질문에 대전의 기둥 쪽을 바라보며 분노를 토해내던 교주 천유종이 이를 멈추고서 고개를 돌렸다. 대전은 침묵으로 물들어 있었다. 장로들을 비롯해 모든 종주들이 심각해하는 눈빛으로 교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그런 시선에 교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말했다. “왜 그런 눈으로 본좌를 바라보는 것이냐?” “......소신들은 교주님께서 누구와 대화를 나누시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난감하다는 듯이 말하는 부철용의 태도에 교주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대전 기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삼 장로가 지금 본좌를 능멸하는 것이냐. 그대의 눈에는 천유중 단주가 보이지 않는단 말이냐?” “!?” 부철용뿐만이 아니라 대전 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더욱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교주의 동생인 천유중은 지난 사파 연맹과의 대전쟁에서 전사했고 그 시신을 화장까지 했는데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웅성웅성! [키키킥, 이것 참 재미있게 되었군요.] “뭐라!” 교주의 눈에는 기둥에 기대고 서있는 천유중이 뚜렷이 보였다. 외팔의 천유중은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이 낄낄대면서 웃고 있었다. 그것이 교주의 분노를 더욱 촉발시켰다. “더 이상 선을 넘게 된다면 용서는 없다. 당장 물러가라! 네놈은 대전에 있을 자격이 없다.” 교주의 외침에 삼 장로 부철용의 표정을 굳혔다. 천여운의 말을 반신반의하고 있었지만 이로써 확실해졌다. ‘교주에게 이상이 생긴 것이 틀림없다.’ 이것은 절대로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천마신교라는 십만 교인들을 이끄는 교주가 판단력을 잃게 된다면 이 거대한 배가 표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탁! 대호법 마라겸이 교주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교주님. 이곳에는 지금 아무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천유중 공은 이미 예전에 전사하여명을 달리했습니다.” “뭣?” 마라겸은 마지막으로 교주가 정신 차리기를 바라고서 진실을 밝혔다. 그가 스스로 잘못된 것을 받아들이고서 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마의 공에게 진료를 받으시길...” -?! 마라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날카로운 예기가 그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오른쪽 목에 상흔이 생겨나며 피가 흘러내렸다. 조금만 늦게 고개를 움직이지 않았다면 단번에 목이 잘려나갈 뻔했다. “진료? 하! 이제 알겠구나. 지금 대전에 모인 네놈들은 본좌를 미친 것으로 몰아서 반역을 꾸미기 위함이로다.” “아......” 마라겸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분노한 교주는 더욱 사리 분별이 힘들어지고 있었다. 점점 악화되고 있다고 하는 것이 옳았다. -챙! 교주가 허리춤에 있는 화려한 검집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그 검은 현철로 만들어져서 어두운 빛을 띠고 있는 모조 천마검이었다. “본좌가 다시 교의 질서를 바로 잡겠다!” “교주...” -탁! 천여운이 말없이 마라겸의 어깨를 잡고서 고개를 흔들었다. 이에 마라겸이 고개를 들어서 교주를 바라보았는데 아까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그 눈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역시 내 짐작이 맞았단 말인가.’ 교주의 훤한 이마에 불룩불룩 올라오는 혈관들은 그 증후가 확실했다. ‘역....혈...마...공.’ 역혈마공의 폐해가 틀림없었다. 역혈마공은 쓰면 쓸수록 그 부작용이 극명해진다. 전신의 혈도를 역혈시키면서 공력을 폭증하지만 내공의 흐름이 역류하면서 뇌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때 알아봤어야 했건만.’ 절강성 탈환 당시에 극도육무문의 수장으로 짐작되는 절대고수가 나타났다. 전율적인 무력을 가진 그 자가 노린 것은 바로 교주였다. 장소를 수차례 바꿀 정도로 격렬한 전투를 펼치던 교주가 부상을 입고 한 산봉우리에서 내려왔었는데, 그때 상태가 그리 좋지 않은 것이 그저 내상이길 바랐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교주는 위기의 순간에 역혈마공을 펼친 것 같았다. 그나마 지금까지 이지를 완전히 잃지 않은 것은 지고의 경지인 현경에 올랐기 때문에 버틴 듯 했다. “네놈이다. 고작 패에 불과한 네놈으로 인해서 본교에 이런 분란이 일어났다. 이제 본좌의 손으로 명줄을 거둬주마.” -사아아아! 교주가 지독한 살기를 내뿜으며 천여운에게 검을 겨냥하며 다가왔다. 그것은 자식이 아닌 적을 대하는 자세였다. 이에 천여운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이지를 상실했다고 해도 끝까지 패라고 부른다는 것은 그게 당신의 의지란 것이겠지.’ 지금에 와서 씁쓸하지 않았다. 자신이 부모라고 여기는 사람은 낳아준 화 부인과 길러진 장 호위뿐이었다. -착! 천여운 역시도 교주를 향해 검 끝을 겨눴다. “모두 물러나세요.” “충!” 결의가 담긴 눈빛으로 전의를 불태우자, 그를 둘러싸고 호위하던 장로들이 종주들이 모여 있는 곳까지 발걸음을 물리며 거리를 벌렸다. 그들의 대결은 단순히 부자간의 싸움이 아니었다. 마교의 진정한 주인을 가리는 대결이었다. ‘명분과 모든 것을 갖췄다. 하나.....과연 당대 천마가 교주를 감당할 수 있을까?’ 장로들이 냉철한 눈으로 천여운을 바라보았다. 비록 반쯤 미친 대다가 부상이 완치되지 않았다고는 하나 상대는 중원 오대 고수의 일인이자 현경의 고수였다. 일 장로 무진원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괴물이었다. -팟! 교주의 신형이 잔상처럼 흩어지더니 어느새 천여운의 앞에 도달했다. 모조 천마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강이 단숨에 천여운의 목을 베려고 했다. “흡!” -챙! 어느새 천여운이 천마검을 들어 올려서 일검을 막아냈다. 교주가 자신의 검을 막아낸 천여운을 바라보면서 비웃음을 흘렸다. “본좌의 검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파르르르르르! 교주가 내공을 순환시키며 십성 공력으로 끌어올리자 부딪쳐 있는 두 사람의 검이 떨리며 천여운의 신형이 옆으로 밀려나갔다. -끼리리리리! 현경 초입의 고수인 교주와 내공에서 확실히 차이가 났다. ‘역시 불리한 싸움이다.’ ‘교주는 절대로 이름뿐인 자가 아니다.’ 이것을 지켜보는 장로들과 모든 종주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서로 비슷한 역량의 고수끼리의 싸움이라면 전술과 전략, 그리고 전의가 향방을 가르겠지만 두 사람은 한 단락의 차이가 있었다. “헛수고 하지 말거라.” 절세보검인 천마검이 아니었다면 벌써 옛적에 검 째로 베어버렸을 것이다. 검을 타고 느껴지는 강대한 공력에 천여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자리가 다르다.’ 그것은 천여운 또한 직감하는 바였다. 본교를 이끄는 모든 중역들이 모여 있는 이 자리에서 당대 천마로서의 무위를 확실히 각인시켜 야만 확실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전력을 다한다!’ 이제 더 이상 천마기를 숨길 필요가 없었다. 천여운이 단전 속에 잠들어 있는 흉흉한 마성을 일깨웠다. 이 기운을 단순히 강기에 집중하는 데로만 사용했지만 전신으로 순환시켜서 몸에 두르게 된다면, -고오오오오! 천여운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흘러나왔다. 흉악한 마수, 흑룡이 포효를 하는 것처럼 흉흉한 마성의 기운이 대전을 가득 메워갔다. “허어.....” “이럴 수가!” 지난 번 대전 회의에서 보인 것과는 차원이 다른 기운에 장로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천여운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흉흉한 기운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강렬했고 그들을 소름 돋게 만들었다. -우우웅! 천마검을 두르고 있던 푸른빛의 검강이 어느새 검게 물들었다. 처음 보는 강기의 형태에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거, 검은 검강?” “천마 조사님의 검강이다!” 이를 알아보는 자들이 나왔다. 마신의 현신이라 불리는 천마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검은 빛이 일렁였다고 했다. 그것은 그저 전설 따위가 아니었다. -끼리리리리릭! 압도적인 교주 천유종의 공력에 밀려나던 천여운의 몸이 멈춰졌다. 공력이 폭증했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오히려 공력에서 느껴지는 흉흉한 마성의 기운이 천여운의 검강을 더욱 세밀하면서 강하게 만들어주고 있는 듯 했다. ‘이 힘은 대체?’ 다소 거칠어져 있는 교주 역시도 놀란 눈치였다. 공력의 우위마저도 극복해내는 기이한 힘이라면 이렇게 힘겨루기는 의미가 없었다. ‘가볍게 여길 수 없구나.’ -챙! 교주가 검에 반탄력을 일으켜서 천마검을 튕기고는 검초를 펼쳤다. 검마가 복원한 천마검법의 초식이었다. 날카로운 열여덟 개의 검식들이 교묘하게 천여운의 양 어깨와 가슴, 복부의 요혈들로 파고들었다. ‘빠르다.’ 현경의 고수인 교주의 손에서 펼쳐지는 천마검법의 위력은 엄청났다. 단숨에 천여운의 요혈들을 꿰뚫을 기세였다. -촤촤촤촤촤?! 그러나 천여운의 손에서 펼쳐지는 검법은 더욱 상위검법인 천마검공이었다. 천마기가 발동한 상태에서 펼쳐지는 천마검공의 위력은 기존에 단순하게 검초를 펼치는 것을 훨씬 상회했다. -채채채채채챙! 스물네 개의 검식들이 검은 빛 입자를 흩날리며 교주의 검초를 막아냈다. 검초는 화려한 검결과 달리 흉악하면서 저돌적인 기세로 단숨에 천마검법의 일 초식을 파훼해버렸다. -차차차창! 보통의 검수들이라면 검초에서 밀린다면 당황했을 것이다. 하지만 교주는 달랐다. “흥!” -채채채채챙! 미쳤다고는 믿기 힘들 만큼 교주는 즉흥적으로 검식들을 막아냈다. 하지만 그 위력이 강했기에 검초를 막아내기는 했지만 검력의 흐름에 밀려서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촤르르르르! 다섯 보 정도 밀려난 교주가 더욱 붉게 물든 눈동자를 번뜩이며 중얼거렸다. “천마검공?” 교주전에 있는 검보로 수차례 보았던 천마검공이 틀림없었다. 천마조사가 남긴 마지막 심득이라 하여서 수차례 익혀보려고 했지만 운기요결을 해결할 수 없어서 익히지 못한 검법이었다. ‘스물네 개의 검식이 만들어낸 검력이 이 정도 위력을 가지다니.’ 과연 천하제일이라 불렸던 천마가 만든 검법다웠다. 교주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방금 전까지는 분노에만 사로잡혀 있다면 완전히 전투에 몰입한 듯 했다. ‘검초로는 본좌보다 우위에 있구나.’ 절세검초를 펼쳐서 전투에 우위를 점하려 한다면 자신 역시도 좀 더 고차원적으로 대결을 이끌어가는 것이 답이었다. 자신 역시도 강해지기 위해서 수많은 고심을 다했다. “검을 내놓아라.” 교주가 대전의 기둥 쪽에서 물러나서 대결을 지켜보는 호위전의 무사들을 향해서 손을 뻗었다. 그러자 강한 진기가 일어나며 그들의 검집의 검들이 요동을 치며 움직이더니, -챙! 챙! 챙! 챙! “어엇!” “거, 검이?” 이내 그들의 검이 검집에서 뽑혀져 나와서 교주의 주위 허공을 둥실둥실 둘러쌌다. 교주를 둘러싼 일곱 자루의 검들은 장관이라 할 수 있었다. “헛!” “이, 이기어검!” 대결을 지켜보는 종주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현경의 고수만이 펼칠 수 있는 고차원적인 기술이었다. 장로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교주가 정신도 온전치 않고 내상을 아직 치료 중인 것으로 알고 있어서 무리하지 않을 거라 여겼는데, 이 정도까지 고차원적인 기술을 보인다는 것은 천여운을 확실하게 처리하려는 결의가 보였다. 그런데 모두가 놀라워하는 와중에 천여운이 입 꼬리를 올렸다.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셨군요.” “뭣?” 그 순간 천여운이 입구가 열려 있는 대전 바깥 쪽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허봉!!!” 그 외침에 대전 바깥에서 호위전의 무사들이 들어오려는 것을 막고 있는 자들 중에 한 사람이 몸을 돌리더니 자신의 등에 차고 있던 도집을 풀더니 외쳤다. “주구우우우운! 받으십시오!” 그는 바로 허봉이었다. 허봉이 내공을 실어서 있는 힘을 다해서 도집을 대전 안쪽으로 던졌다. -휙! 날아오는 도집을 향해서 천여운이 왼손을 뻗었다. -우우웅! 챙! 도집에서 공명음이 일어나며 도가 뽑혀져 나오며 새하얀 도신의 백룡도가 천여운의 손으로 빨려 들어왔다. 오른손에 흑색 천마검, 왼손에 백색 백룡도. -챙! 천여운이 두 절세병기들을 한 차례 부딪치고는 독특한 기수식을 취했다. “하!” 교주가 그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네놈이 무슨 일 장로라도 되는 줄 아느냐. 어리석구나.” 교주가 검결지를 만들어내고는 천여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허공에 떠있던 일곱 자루의 검들이 동시에 번개 같은 속도로 천여운에게 쇄도했다. “흥!” -촤촤촤촤촤?! 교주가 검결지를 휘젓자 일곱 자루의 검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전 방위에서 일곱 명의 고수가 합격을 펼치는 것처럼 천마검법의 검초가 일어났다. 하나라도 막지 못한다면 단숨에 날아드는 이기어검에 꼬챙이가 될 것이다. ‘소교주!’ 교주의 엄청난 이기어검에 모두가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우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하아아압!” -촤촤촤촤촤촤?! 기합을 내뱉은 천여운이 양손이 동시에 움직이더니 검은 빛 검결과 도결이 일어나며 오른손에서 천마검공의 검초, 왼손에서 극도신의 도초가 펼쳐졌다. “이럴 수가?” “이, 이건 설마 우검좌도!” 엄청난 광경에 장로들이 놀라서 소리쳤다. 천여운의 손에서 펼쳐지는 것은 틀림없는 일 장로 무진원의 절초인 우검좌도였다. 교주의 두 눈이 커졌다. '이놈이 정말로?' 엄청난 위력의 검초와 도초가 틈없이 맞물리며 동시에 전 방위로 공격해오는 일곱 자루의 이기 어검이 펼치는 검초를 파훼시켜 버렸다. -차차차차차창! 검은빛 강기를 두르고 있는 양대병기를 이겨내지 못한 검들이 부서져나갔다. -울컥울컥! ‘큭!’ 검이 부서질 때마다 진기가 연결되어서 검결지를 타고 들어오는 고통에 교주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 46장 진정한 계승자 (3) > 끝 < 47장 원흉 (1) > 이기어검(以氣馭劍). 진기로써 검을 부리는 기술이다. 직접 검을 들고서 움직이는 것보다 자유롭게 날아다니기에 초식이 훨씬 다채롭게 발휘된다. 팔이나 관절의 움직임에 한계가 있는 인간의 몸으로 구사하기 힘든 방향으로 검을 다룸으로써 검초의 위력이 극대화되는 장점을 가진 고차원의 기술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기어검에도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기어검은 현경의 경지에 오르면서 광활해진 정신력을 바탕으로 극도의 집중력을 통해서 진기로 연결된 검을 부리는 기술이다. 시전자의 집중력이 끊기거나 정신이 온전치 않으면 그만큼 다루기 힘든 기술이라는 의미였다. -채채채채채채챙! 교주가 정신이 온전할 때만 하더라도 최대 열 자루의 검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었지만 지금은 일곱 자루조차 무리해서 겨우 초식을 발휘한 상태였다. ‘이 녀석. 이기어검을 경험한 적이 있는 건가?’ 어지간한 고수들은 이기어검의 위용에 당황해서 허점이 생기기 마련이었지만 천여운은 전혀 당황해하지 않고 우검좌도라는 또 다른 고차원적인 기술로 대응했다. ‘대호법에게 고마워해야 겠군.’ 그를 통해서 이기어검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꽤 난감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더욱 다행스러운 점은 교주가 펼치는 이기어검은 마라겸이 한 자루로 펼칠 때보다도 검 에 실린 기운이 약했다. ‘이대로 남은 네 자루도 부수고 앞으로 나아간다!’ -차창! “큭!” 또 다시 검초를 펼치던 한 자루의 검이 부서졌다. 검이 부서질 때마다 진기가 연결된 교주는 고통을 느꼈다. 벌써 네 자루의 검이 부러졌다. -탁! 일곱 자루 중에 네 자루가 부서지면서 약해지자 기세가 오른 천여운이 우검좌도로 검초와 도초의 제 이 초식을 연달아 펼치면서 앞으로 전진 했다. -채채채채채챙! ‘이놈이!’ -휘리릭! 교주가 검결지를 휘저으며 남은 세 자루를 조종해, 전진해오는 천여운의 정면과 양옆으로 공격하여서 막으려고 했다. -욱씬! 검이 부서지면서 검결지를 타고 들어오는 고통보다도 어느새 인가 보다 심한 두통이 교주를 괴롭히고 있었다. -불끈불끈! 교주의 이마 부위로 혈관이 팽창해서 터질 듯이 부풀어 있었다. 역혈마공을 펼치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붉게 물든 두 눈은 그리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머리가 깨질 것 같다.’ 고통이 지속되자 교주는 이기어검을 온전히 펼칠 수가 없었다. 집중력이 끊기자 연결된 진기를 해지되면서 겨우 버티고 있던 세 자루의 검이 실이 끊어진 것 마냥 바닥으로 떨어졌다. -쨍그랑! ‘흔들리고 있다. 기회는 지금이다!’ 앞을 가로막는 것이 없어지자 천여운의 신형이 번개처럼 교주에게로 쇄도했다. 교주가 고통스러운지 한쪽 머리를 붙잡은 상태로 바닥을 향해서 십성 공력으로 진각을 밟았다. -쾅! 파파파팍! 바닥에 균열이 일어나더니 부서진 파편들이 솟구치며 천여운의 앞을 가로막았다. 파편들에 공력이 실려 있어서 암기와도 같았다. -채채채채챙! 천여운이 오른손의 천마검으로 검막을 만들어내며 파편들을 막아냈다. 교주가 잔뜩 인상을 쓰면서 보법을 펼치며 거리를 더욱 벌렸다. “오오오!” 이것을 지켜보는 장로들과 모든 종주들의 얼굴이 흥분으로 물들었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역혈마공의 부작용이 더욱 촉발하여 교주가 약해지고 있었다. 천여운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면 그를 수월하게 제압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모든 이가 천여운의 승리를 바라는 것만은 아니었다. 종주들의 틈에서 어두워진 안색으로 두 사람의 대결을 심각하게 응시하는 자가 있었다. ‘이대로라면 교주가 죽는다.’ 여기서 교주가 죽게 되면 마교는 천여운이라는 막강한 절대자에 의해서 다시 원래의 자리를 되찾게 될 것이다. 천마령과 천마검에 대해서 예측하지 못한 것이 패착이었다. 아직 모든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는데 교주가 이 자리에서 무력하게 죽게 둘 수는 없었다. ‘아직 네놈이 해야 할 일이 남아있어.’ 자식인 천여운마저도 적으로 여길 만큼 역혈마공의 부작용으로 혼란스러워 할 때, 그의 손으로 남은 세 사람을 죽이게 해야 한다. “크으으으!” 교주가 깨질 것 같은 머리를 왼손으로 붙들고 모조 천마검으로 탄검강을 발산하며 천여운이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 “다가오지 마랏!” -?! ?! ?! 그런 검강을 날리는 것으로는 약간의 시간을 지연시킬 뿐이었다. 천여운은 흑색 강기를 발산하는 양대 신병으로 그것을 가볍게 베어내어 없애버렸다. 어느 샌가부터 교주의 두 눈에 천여운은 흉악한 마수처럼 보였다. “하아....하아....” 식은땀마저 흘러내리는 교주의 귓가로 그때 전음성이 들려왔다. [이대로 역모를 꾸미는 자의 손에 죽을 겁니까? 당신의 어머니와 사랑하는 아내를 죽게 만든 여섯 종파를 그냥 내버려둘 겁니까?] 익숙한 목소리에 두통으로 인상을 쓰던 교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는 사이에 천여운이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몸에서 풍겨져 나오는 흉흉한 마성은 거대한 흑룡이 입을 벌리고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끄으으으으.” [역혈대라신공을 쓰십시오. 역혈대라신공으로 눈앞의 적을 물리치시고, 남은 세 종파의 수장들의 목을 베어 신교를 바로잡으십시오!] ‘역혈대라신공?.....역혈대라신공?’ -쨍그랑! 교주가 모조 천마검마저 바닥에 떨어뜨렸다. 역혈대라신공을 쓰라는 전음성에 교주가 혼란스러운지 두 손으로 머리를 붙잡고 비틀거렸다. ‘역혈대라신......’ 짧은 찰나의 순간, 교주의 머릿속에 수많은 과거가 스쳐지나갔다. . . . 천유종 그는 검마종의 전대 종주인 경본강이 받아들인 양녀의 태생이었다. 원래 경본강에는 친딸이 있었지만 태상 교주인 천인지와 수차례 관계를 가져도 자식을 갖지 못했다. 결국 전대 검마종주는 소교주 후보자를 배출하기 위해 양녀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참으로 공교롭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양녀인 경하은이 아이를 가지고 나서 얼마 있지 않아 친딸인 경유은 역시도 임신을 한 것이었다. ‘둘 다 본좌의 자식인데 누구 한 명만 기회를 줄 수 있겠느냐.’ 태상교주 천인지는 그렇게 태어난 천유종, 천유중 두 아들을 소교주 후보자로 인정했다. 하지만 그가 인정했다고 해도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본처를 자처하는 경유은은 아들을 낳은 후로부터 양녀로 들어온 경하은을 경멸하듯이 무시했고 그것은 다른 여섯 종파의 부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정신적인 고통으로 다가왔을까? 경하은은 천유종이 젖을 떼기도 전에 시름시름 앓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누가 네 녀석의 큰 어머니라는 것이냐. 경 부인이라고 불러라.’ “......네. 부인.‘ 천유종 역시도 자라나면서 차별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무에 있어서 뛰어난 재능을 지녔지만 엄밀히 말해서 검마종의 완전한 태생이 아니었기에 견제를 받았다. ‘네가 할 일은 유중이가 교주가 되도록 돕는 것이다. 명심해라.’ ‘알겠습니다.’ 경본강은 마도관에 들어가기 전까지 귀에 박히도록 강조했다. 어렸을 적부터 자신의 삶은 목적이 그런 것으로만 알고 자라왔기에 당연스럽게 여겼다. ‘형님. 또 어머님께 한 소리 들었습니까? 휴.....제가 만약 소교주가 된다면 절대로 형님이 무시 받지 못하도록 만들겠습니다.’ ‘......말이라도 고맙다.’ ‘말이라뇨. 제가 얼마나 형님을 아끼는지 아시죠?’ 그나마 유일하게 삶의 낙은 어렸을 적부터 친하게 지내왔고 자신을 친형처럼 여겨주는 천유중이었다. 그러나 마도관 입관 후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처음 마도관에 입관했을 때만 하더라도 특별한 문제가 없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다른 다섯 종파의 후보자들이 천유종을 경멸하기 시작했다. ‘네놈 따위가 우리와 같은 수준으로 놀려고 드느냐?’ ‘후처의 자식으로 운 좋게 여섯 종파에서 태어났으면 네 주군이나 잘 모셔라.’ 어째서 자신이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지 점차 힘들어져갔다. 그래도 동생인 천유중이 소교주가 된다면 이 모든 것이 나아질 거라는 일념 하에 그를 도우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천유종은 자루 안의 송곳과도 같았다. 그의 무에 대한 재능은 여섯 종파의 소교주 후보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났기에 불과 삼 년도 되지 않아서 마도관의 오 단계 시험을 통과했다. ‘유중아.’ ‘제 이름을 부르지 마십쇼.’ 어느 순간부터 천유중의 태도가 차가워졌다. 다른 소교주 후보자들을 견제하는 것처럼 그를 멀리했다. 천유종은 바보가 아니었다. 자신의 뛰어난 재능이 그를 시기 멀게 하였다는 것을 눈치 챘기에 그날부터 훈련하던 것을 멈 추고 존재를 드러내지 않도록 했다. 다른 종파의 소교주 후보자들이 오 단계 시험을 통과하고 쟁탈전을 위한 지지자들을 모을 때도 아무도 받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유독 끈질기게 천유종의 산하로 들어오고 싶다고 의사를 밝힌 이가 있었다. ‘부주검종의 소종주인 여불위라고 합니다. 부디 저를 받아주십시오. 공자께서 소교주가 되도록 만들어드리겠습니다.’ 검마종 산하의 종파인 것을 알기에 그에게 천유중의 밑으로 들어가라 수차례 권했지만 마다하고 여불위는 그를 쫓아다녔다. 그렇게 마도관의 사 년이 끝나갈 무렵 여불위가 그를 찾았다. ‘공자님. 마도관이 끝나고 먼저 다른 후보자들을 치셔야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다른 공자님들께서 모두 단합하여 공자님을 먼저 제거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천유중 공자 님도 마찬가지이시고요.’ '뭣?‘ 천유종은 여불위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근래에 들어서 자신을 멀리했다고 해도 친형제나 다름없는 천유중이 그랬을 리가 만무했다. 여불위는 증거를 보여주겠다며 그들의 회담 장소를 알려주겠다고 하였다. 마도관의 숙소 뒤편에 자리한 산 중턱. 어두운 밤 중에 여섯 명의 소교주 후보자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자, 이제 마음에 준비들은 했나?” 현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무진의 말에 한두 명씩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대부분의 참가의 의사를 밝혔고 유일하게 답하지 않은 사람이 복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유애와 그의 동생인 천유중이었다. ‘됐어. 그런 치졸한 방법으로는 하고 싶지 않아.’ 마교인답지 않게 다소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인 천유애는 이를 거절했다. 그녀는 애초부터 소교주의 자리에 큰 관심이 없는 자였기에 다들 납득할 수 있었다. ‘유중. 네 녀석은 어떻게 할 거지?’ ‘설마 같은 종파라고 정이 생겨서 그새 마음이 바뀐 건 아니겠지?’ 다른 소교주 후보자들의 보채는 태도에 천유중의 입에서는 뜻밖의 말이 나왔다. ‘무슨 개소리야. 그딴 씨받이 계집의 자식 놈을 내가 인정할 것 같아. 나도 참가하겠다.’ 그렇게 복마종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가 천유종을 합공해서 죽이기로 협의했다. 그들이 산중턱을 내려가고 나서 나무 위에서 기척을 죽이고서 이것을 지켜보고 있던 천유종은 충격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어째서......어째서 네가......’ 그만큼은 자신을 형제라고 불러주고 인정했다고 여겼다. 그런데 천유중의 입에서 나온 말은 차마 거론하기 힘들 만큼 더럽기 짝이 없었다. 처음 느껴본 실망감과 분노는 말로 이룰 수가 없었다. 그때 자신의 옆에서 같이 기척을 죽이고서 이 같은 광경을 지켜보았던 여불위가 말했다. ‘이제 아셨겠죠. 저들을 먼저 치셔야 공자님이 사실 수 있습니다.’ ‘......어째서 너는 내게 이것을 알려준 것이지?’ 차라리 모르고서 죽는 편이 나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 천유종에게 여불위가 평소와 다르게 다소 상기된 얼굴로 그 이유를 꺼냈다. ‘저는 공자님과 같은 피가 섞여 있으니까요.’ ‘뭐? 같은 피?’ ‘공자님의 어머님이신 경하은 부인께서는 원래 저희 큰 고모님이셨습니다.’ 경하은의 본명은 여하은. 그녀는 부주검종의 출신이었던 것이었다. 뜻밖에 밝혀진 비밀에 천유종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검마종의 장원에서 지냈을 때는 누구도 그에게 어머니의 원래 생가를 밝히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에서야 그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고모님께서는 검마종의 종주이신 경본강 장로님의 명령에 강제로 양녀로 입양되셨지요.’ 원래는 대무검종의 종주인 하일현과 혼인하기로 되어 있었던 그녀는 산하의 종파라는 이유만으로 힘없이 명령에 따라야만 했다. ‘고모님께서는 소교주 후보자를 낳아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검마종에 입양되어서 모진 세월을 보내시다 돌아가셨습니다.’ 여불위는 이 같은 사실을 부친인 여불경에게 귀가 딱지에 얹을 만큼 들어왔다. 그 만큼 부주검종에 있어서 이 사건은 뼈에 사무칠 만큼 원한에 가까웠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여불위를 통해서 어머니의 죽음과 모진 세월을 듣게 된 천유종은 지금까지 그들에게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세월들이 증오스럽게 느껴졌다. ‘그들을 먼저 치십쇼. 그래야 공자님께서 살아남을 수 있고 고모님의 한을 풀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 혼자서 그들을 무슨 수로 상대한단 말이냐.’ 여불위의 말대로 살아남으려면 그들을 죽여야만 했다. 문제는 그가 일 년 동안이나 무공을 수련하는 것을 멈추면서 실력이 정체되었다는 것이었다. 그 사이에 다른 종파의 소교주 후보자들 역시도 오 단계 시험을 통과하면서 적어도 완숙한 초절정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혼자서 이 다섯 명을 상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더군다나 그를 도울 만한 세력도 없었고 여섯 종파의 위세 때문에 움직일 리도 만무했다.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방법?’ ‘공자님께서 그들을 압도적으로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죠.’ ‘......짧은 시간 내에 그런 방법이 대체 어디 있단 말이느냐?’ ‘역혈대라신공!’ < 47장 원흉 (1) > 끝 < 47장 원흉 (2) > ‘뭐?’ ‘역혈마공을 개량한 겁니다.’ ‘잠깐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역혈마공은 본교에서 태상교주께서 금지시키신 무공이잖아!’ 역혈마공은 그 부작용이 심해서 나중에는 아군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이지를 상실하고 끝에는 주화입마를 입은 것처럼 되어서 금지된 마공이었다. 여불위가 권하는 것은 바로 그 역혈마공이었다. ‘다릅니다. 원래의 역혈마공은 그럴지 모르겠지만 본 종에서는 이것의 부작용을 없애기 위해 연구했고 개량시켰지요. 당연히 성과도 있었습니다.’ ‘그걸 어떻게?’ ‘......검마종주님의 명령 때문입니다.’ ‘검마종주의 명령?’ 여불위는 검마종의 산하에 있는 암검이종인 대무검종과 부주검종은 그들의 숨겨진 힘과 동시에 역혈마공을 연구하거나 더러운 일을 도맡아왔다고 했다. 그는 아직까지 역혈마공의 개량형인 역혈대라신공은 검마종주조차 알지 못한다고 밝혔다. ‘이것은 역혈마공과 다르게 크게 이지를 상실한다거나 그러지 않습니다. 한두 번 위기 상황에 쓰신다고 해도 큰 부작용이나 해가 있지 않을 겁니다.’ ‘........’ ‘친척이나 다름없는데 제가 공자님을 속이겠습니까?’ 그때 여불위는 미묘하게 뒤틀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진실을 알고 나서 분노에 사로잡힌 천유종은 이를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마도관의 사 년이 끝나고 남아있던 모든 생도들이 일시에 졸업하여 나온 그날 밤. 마교를 떠들썩하게 만든 그 사건이 벌어졌다. 그 날은 폭우처럼 쏟아지는 우기의 밤이었다. -쏴아아아아! 고여 있는 빗물은 피로 인해 붉게 물들어 있었고, 사방에는 수많은 시신들이 사분오열로 찢겨져서 비참한 꼴로 널려 있었다. '크르르르르.....' 붉은 안광이 짙게 물든 천유종의 앞에 누군가 무릎을 꿇고 빌고 있다. -참방! 참방! 고인 빗물로 머리를 세차게 박으면서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는 것은 바로 천유중이었다. 천유중은 절대로 비밀을 발설하지 않겠다며 애걸복걸을 하면서 목숨을 구걸했다. ‘제발! 제발 살려주십시오! 형님. 혀, 형제이잖습니까? 제발! 제발!’ 형제를 들먹이는 그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천유종의 머릿속에 그가 씨받이 계집의 자식이라고 말했던 것이 계속 맴돌았다. ‘죽이십시오. 공자님.’ 역혈대라신공으로 짐승 같은 살의에 사로잡힌 천유종에게 여불위가 외쳤다. 그런데 그를 죽이기 위해 검을 내리칠려고 할 때마다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서 그것을 할 수가 없었다. 진실을 알게 되었지만 십 몇 년 동안에 쌓아온 정이 그것을 붙잡은 것이다. 결국 천유종은 끝내 배다른 동생인 천유중을 죽이지 못했다. 팔 한쪽만을 잘라버렸다. ‘네놈은 이제부터 내가 짖으라면 개처럼 짖고, 네 분수에 맞게 더럽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끄으으으....알겠습니다. 살려주셔서 가, 감사합니다.’ ‘안 됩니다. 공자님께 후환이 될 겁니다. 죽여야 합니다!’ 목숨을 건지게 된 천유중을 끝까지 죽이라고 여불위는 강요했다. 그러나 천유종이 이것을 거절하자 여불위가 검을 뽑아서 그의 목을 베려했고, 결국 천유종은 여불위를 쓰러뜨려야만 했다. 다음날 천유종은 네 종파의 소교주 후보자들은 전부 죽였고, 검마종의 소교주 후보자인 천유중의 팔을 잘렸다는 것이 회부되어 금옥에 갇히게 되었다. ‘왜 그놈을 죽이지 않은 것이야? 왜! 왜!’ 금옥에 갇혀 있는 닷새 동안 천유종은 지독한 환상과 고통에 휩싸였다. 부작용이 없을 거라는 역혈대라신공은 이지를 상실하지 않았지만 그 후유증이 강했다. 한 번도 얼굴을 본 적도 없는 어머니가 매일 밤 나타나서 그를 다그쳤다. ‘아니야! 아니라고!’ 그렇게 닷새가 지나고 나서 쉬지 않고 운기조식을 하면서 심신을 가라앉힌 결과 후유증은 가라앉을 수 있었다. 금옥에 갇힌 지 열흘 째가 되는 날에 천유종은 풀려났다. 네 종파에 그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교주인 천인지에게 압력을 넣었지만 검마종주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약속을 지키길 바란다.’ 그것은 천유종과 검마종주의 비밀스러운 협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유종은 검마종에서 암검이종을 통해서 역혈마공을 연구하고 있던 것을 밝히겠다고 협박하였고, 이를 중단하고 자신을 구제해준다면 함구하기로 약속했다. ‘공자님.’ 그가 석옥되고 나서 여불위가 찾아왔지만 천유종은 더 이상 그에게 가까이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너는 내게 역혈대라신공이 부작용이 없다고 하였다.’ 이것을 빌미 삼아 천유종은 그를 멀리했다. 가까이 하기에 여불위라는 자는 너무도 위험하다고 여겨졌다. 여불위는 그때 천유종에게 말했다. ‘술과 여자는 처음부터 하지 않았으면 몰라도 한 번 가까이 하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지요. 크크큭.’ 그를 죽여야 할까 고민했지만 어머니의 혈육이라는 것과 어찌 되었든 자신을 구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에 참아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고 나서 어느 날 교주 천인지가 자신을 찾아왔다. 천인지는 그를 데리고 천마 조사의 제단으로 이끌었다. ‘네게 교주의 자리를 물려주겠다.’ ‘네?’ 천인지는 뜻밖에도 그에게 교주의 자리를 물려주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네 종파의 소교주 후보자들을 죽은 이후부터 일 년씩이나 소교주를 정하는 것을 미뤄왔기에 큰 기대를 버렸던 천유종이었다. 당연히 복마종의 후보자인 천유애가 교주가 되리라 여겼는데 예상과 달라졌다. ‘......유약한 그 아이는 앞으로 다가올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어째서 자신을 선택했냐는 물음에 교주 천인지는 그렇게 답변했다. 위기라는 말이 의아했지만 천인지는 더 이상 그것에 대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보다도 천인지는 천마 조사가 남긴 교주로서의 사명과 많은 것들을 일러주면서 간곡히 부탁했다. ‘교주의 위라는 것은 단순히 권력이 아니다. 그것은 무게이면서 사명이다. 네 어깨 위에 십만 교도들의 명운이 달려있는 것이다. 네 속에 분노를 가라앉히고 오직 교의 앞길만을 생각해라.’ '......명심하겠습니다.' 교주 천인지의 당부에 천유종은 천마 조사의 제단 앞에서 약조했다. 오직 천마신교만을 위해 생을 바치기로 말이다. 그렇게 천유종은 교주의 위를 물려받았고 태상교주가 된 천인지와의 약조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분노를 죽였다. 그러나 한 번 쌓여 있던 분노가 그렇게 쉽게 가라앉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통대로 여섯 종파에서 한 명씩 추천받아 아내를 맞이했지만 그들에게 정을 가질 수가 없었다. ‘......강해져야 한다.’ 천유종의 교주로서의 삶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교의 정무가 끝난 후에 그는 모든 시간을 무공 연마에 투자했다. 갑작스럽게 교주 위를 물려받은 그는 다른 장로들에 비해서 무공이 약했기에 대호법 마라겸의 보호를 받아야하는 처지였다. 강해지기 위해 천유종은 치열할 정도로 무공 연마를 했다. 그때 그에게 유일한 낙이 생겼다. ‘히잉. 어쩜 매일 같이 옷을 이렇게 만드세요? 교주님.’ 훈련을 마치고 나올 때면 넝마가 된 옷을 보면서 울상을 짓는 여시종이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귀엽다고만 여기고 한두 마디씩 걸던 말들이 어느새는 반나절 가까이 대화를 나누기까지 길어졌다. ‘와! 교주님. 오늘은 옷이 깨끗하네요.’ ‘화연, 네가 하도 투덜거리니 본좌가 상의를 벗고 훈련을 해서 그런 거다.’ ‘네에. 네에. 감사합니다.’ ‘허어. 무엄하다.’ ‘......지금 화내시는 거에요?’ ‘그....그게......크흠.’ 여시종 화연과의 장난스러운 대화는 천유종이 일생 동안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던 따뜻함 그 자체였다. 늘 한 결 같이 자신을 향해 웃어주는 그녀에게 천유종은 점차 빠져들었다. 화연의 말 한 마디에 설레고 손짓 한 번에 웃을 수 있었기에 그녀는 천유종에게 햇살이었다. 몇 개월이 지나고 천유종은 자신의 아이를 가진 그녀에게 정중히 청혼하였다. 본교의 법도에서 어긋난다며 화연이 눈물을 흘리며 성 밖으로 떠나겠다고 했지만 천유종은 그럴 수가 없다고 하였다. ‘본좌가.....본좌가 너와 아이를 지키겠다.’ 그의 유일한 햇살이면서 희망을 절대로 잃을 수 없었다. 천유종은 대전 회의를 열어서 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밝히고 혼례를 강행했다. 그 반발은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했다. 중간에 폐관에 들어갔던 태상 교주가 잠시 나와서 중재를 해야 할 정도였다. 천유종은 중재 끝에 그녀와 혼인할 수 있었지만 교주전이 아닌 외부에 그녀의 거처를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매일 같이 화연의 거처를 찾는 천유종의 발걸음은 늘 가벼웠다. 천유종은 이 행복이 한결 같기를 바랐다. 그러나 여섯 종파의 부인들에게 소홀했던 그가 한 여인과 아이에게 관심을 가지니 당연히 시기와 질투가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누가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어느 날부터 화연의 거처에는 짓궂은 일들이 일어났다. 그것은 갈수록 심해졌으면 심해졌지 절대로 약해지거나 하지 않았다. 교주는 호위 무사를 배치하고 여러 방면으로 그녀가 해를 입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그러던 어느 날. 폐관에 들어갔다고 나온 태상교주 천인지가 갑작스럽게 행방불명되었다. 천유종은 그를 찾기 위해 사람을 풀었지만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파연맹의 패왕 항연이 대규모의 전력을 이끌고 침공해왔다. 본교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오대고수인 태상교주가 사라진 정보가 외부에 새어나가지 않도록 최대한 차단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사파연맹에서는 그것을 알아챘다. 전쟁은 근 여섯 달 가까이나 지속되었다. 그런데 전쟁을 치르는 어느 순간부터 화연이 병에 걸려서 낫질 않았다. ‘교주님. 제 걱정은 하지 말고 다녀오세요. 이깟 병은 금방 이겨낼게요.’ 화연이 걱정되었지만 교주는 어쩔 수 없이 출진해야만 했다. 귀주로 패왕 항연이 직접 친정을 나왔는데, 그로 인해서 장로 두 명이 죽었고 배다른 동생인 천유중마저 전사했다. 교주인 그가 직접 나가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마저 온 것이었다. ‘금방.....금방 다녀올게.’ ‘네에.’ 아픈 와중에도 화연은 천유종에게 밝게 웃어주었다. 그것이 그가 마지막으로 본 아내의 미소였다. 대규모의 전력을 이끌고 출진한 교주 천유종은 귀주의 사원 평야에서 패왕 항연이 이끄는 사파연맹의 대군과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그때 천유종은 일대일로 패왕 항연과 겨루게 되었는데, ‘크하하하하하핫! 고작 네놈 따위가 교주라니 정말 실망스럽구나. 천인지 공에 비하면 애송이에 불과하구나.’ 화경의 극에 이른 그에 비해서 패왕 항연은 현경 초입의 고수였다.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그라고 해도 무위에서 밀렸기에 도저히 상대할 방도가 없었다. ‘안 돼. 본좌가 지면 본교는....화연은.....’ 결국 천유종은 근 칠 년 동안이나 스스로 금지해온 역혈대라신공을 펼쳤다. 갑작스럽게 폭증한 공력에 야수처럼 돌변해, 미칠 듯이 덤비는 천유종의 변화에 당혹스러워 한 항연은 결국 그를 죽이지 못하고 후퇴해야만 했다. ‘이, 이놈이 정녕 미쳤구나!’ 자신의 목숨마저 불태우는 전의에 두려움을 느낀 탓이었다. 오대 고수인 항연이 후퇴하면서 천유종은 태상교주에 이어서 그 칭호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적들을 물리쳤지만 천유종은 기뻐할 수 없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교내로 복귀한 그는 아내인 화연의 사망 소식을 듣고 격분할 수밖에 없었다. 마의 백종우는 그녀가 미독에 의한 사망이라고 하였고 천유종은 교내를 샅샅이 뒤져서라도 범인을 색출하게 했다. 그러나 끝내 범인을 찾지 못하고 그녀의 죽음은 미궁으로 빠지게 되었다. 더욱 그를 처절하게 만든 것은, -쾅! 쾅! 쾅! ‘끄아아아아아아!’ 천유종은 스스로를 교주전 폐관 연공실에 가둬두고 역혈대라신공의 후유증과 싸워야 했다. 아내인 화연이 장례를 치르는데도 환영과 두통에 사로잡힌 그는 폐관 연공실을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청옥석으로 만들어진 폐관 연공실 벽에 주먹이 부서지고 피가 흘러내릴 만큼 격분하고 오열하면서도 자신이 환영에 사로잡혀 아이를 해칠까봐 두려웠다. ‘끄흐흐흐흑.’ 그렇게 밤낮으로 격분하고 오열하기를 한 달이 되던 날. 격통에 시달리던 두통이 사라졌다. 한 달이나 매일 같이 나타나 그의 앞에서 말을 거는 천유중의 환영도 보이지 않았다. 전보다 훨씬 길어진 후유증이었다. 폐관 연공실에서 나온 천유종은 예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원래부터도 무표정했던 얼굴에는 차가운 냉기만이 흘렀고 모든 것에 냉소적이게 바뀌었다. ‘.....누구인가.’ 천유종은 여섯 종파 중에서 범인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남겨진 천여운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대로 그를 방치한다면 분명 여섯 종파의 그 간악한 계집들이 또 다시 수작을 부릴 지도 몰랐다. ‘그 아이에게 무공을 익히지 못하게 했다고?’ ‘그렇습니다.’ 대호법의 보고에 천유종은 기가 차서 할 말을 잃었다. 이젠 하다하다 못해서 아무런 해가 되지 못하는 그 아이에게 무공조차 익히지 못하게 막는 것을 보면서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더욱 슬픈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 아이를 살리려고 그렇게까지 한 것이냐. 화연.’ 자신이 전장터에 나가서 지키지 못하는 사이에 죽어가면서도 천여운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약조까지 한 것이었다.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마음 같아서는 여섯 종파의 부인들을 전부 불러서 죽여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필시 여섯 종파와 사생결단으로 싸워야만 할 것이다. 그것은 본교가 자멸로 들어가는 지름길이었다. -으득! 천유종은 입술을 깨물고 독하게 마음먹었다. 이렇게 된 이상 철저하게 본교를 변화시켜서 더 이상 여섯 종파가 교의 근간이 되지 못하게 바꿔나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당장에 많은 것을 변화시키려들면 마교는 약해질 게 틀림없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천여운을 생각하면 천유종은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지금이라도 어린 천여운을 걷어서 보호 속에서 크도록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한다면 여섯 종파와 갈등만 더욱 심화되고, 아내를 죽인 범인을 색출하기도 힘들 것이다. ‘이 아비를 원망해라.’ 천유종은 어린 천여운을 미끼로 삼아서 범인을 찾고, 천여운이 어미인 화연과 같은 전철을 받지 않도록 여섯 종파의 힘을 약화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천여운을 찾아간다면 마음이 약해질 까봐 그것도 삼갔다. ‘본좌는 냉정하다. 본좌는 본교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 내 아들 역시도 그저 패에 불과하다.’ 구슬프게 교주전의 집무실에서 그는 그 말만을 되뇌었다. 그렇게 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교주는 보이지 않게 천여운을 보호하면서도 여섯 종파에는 무관심한 척 일관되게 행동해왔다. 마도관의 입관식 날. 교주는 긴장되는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근 십 년 만에 화연과 자신의 아들을 만나는 그 날이 찾아왔다. 마음이 약해질 까봐 절대로 보지 않으려고 했지만 입관식 날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최대한 시선을 마주하지 않으려 했지만, ‘아아아......’ 한 눈에 그를 알아보았다. 화연과 많이 닮은 모습에 콧등이 시큰해졌다. 결국 천유종은 단상 위에서 짧게 입관식 인사를 끝내고 내려갔다. 더 있으면 감정이 복받칠 것만 같았다. ‘우호법이 녀석에게 관심 있어 한다고?’ ‘네. 그렇습니다.’ ‘......좌호법에게 일러서 어느 정도 배려하게 해라.’ ‘어찌?’ ‘본좌의 아들이란 놈이 고작 마도관의 일 단계, 이 단계 시험에서 떨어지는 꼴을 보라는 것이냐.’ ‘알겠습니다. 충!’ 대호법을 보내서 의무실에 있는 경비 무사들을 물리게 했다. 그 동안은 여섯 종파에서 눈치챌까봐 무공을 직접 전수하는 것을 꺼렸지만 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도관에 입관했으니 이런 배려를 하더라도 눈치를 볼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두 달 정도가 지났을 때 드디어 검마종에서 미끼를 물었다. 분명히 역혈마공에 대한 연구를 하지 말라고 약조를 했는데 그것을 어기고 대무검종에서 흔적을 노출시켰다. ‘우호법. 대무검종을 전부 체포하라. 반항할 시에 전부 죽여도 좋다.’ 내심 부주검종에서 그러길 바랐지만 그곳은 여전히 잠잠했다. 그의 명령을 받은 우호법 섭맹이 표정이 썩 좋지 않다. 제자로 받은 천여운을 미끼로 이용했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그들의 힘을 약화시키지 않는다면 전면전을 해야 했다. ‘본좌에게 그 아이도 패에 불과하다. 패에 불과하다.’ 이렇게 스스로의 마음을 붙잡지 않으면 약해질 것이다. 다시 삼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절강성이 정체모를 문파에 의해서 탈환되면서 사태가 심각해지자, 천유종은 정파 무림맹과 협정을 통해서 그들을 치기로 하였다. 근 십오 년 만에 큰 전쟁으로 치닫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두르기로 했다. ‘그 아이가 출관하기 전에 해결해야 한다.’ 만약 전쟁이 길어져서 또 다시 그곳에 신경을 써야 한다면 예전과 같은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르기에 두려웠다. 그렇게 절강성에 천유종은 극도육무문의 고수들과 맞부딪쳤다. 그들은 지금까지 보았던 어떠한 적들보다도 강했고 위험한 자들이었다. ‘어떻게든 처리해야 겠다.’ 원래는 장로들의 선에서 해결하게 하려 했던 그가 대호법과 나서서 세 명을 죽이려고 했다. 그때 그 자가 나타났다. 천유종은 그 자의 엄청난 무위에 전율을 느꼈다. 그가 아직은 현경의 경지에 오르지 못했던 애송이로 돌아간 느낌이 들 정도로 너무 강했다. 불과 십여 초식 만에 수세에 내몰린 천유종에게 그 자가 말했다. ‘.....그대는 아니군.’ 그와 함께 그 자가 마무리를 짓기 위해 일격을 가하려고 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그의 머릿속에 화연과 천여운이 스치고 지나갔다. ‘안 돼. 안 돼! 본좌가.....본좌가 여기서 죽으면 그 아이는 혼자 남게 된다.’ 자신이 죽게 되면 분명 천여운은 마도관을 나와서 혼자 여섯 종파의 적들과 힘겹게 고군분투하게 될 것이다. 비록 그 아이에게 정을 주지 않고 미끼로 삼았지만, 자신이 살아있어야 여섯 종파에서도 선을 넘는 행동을 하지 못한다. ‘교주님. 확실하게 경고를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특정 무공을 쓰신 후에 한 달 동안 환영을 보셨다고 했는데, 앞으로는 그 무공을 삼가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다시 쓰시게 된다면 후유증이 지금과 같이 끝날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마의에게 진맥을 받았을 때 신신당부했지만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여기서 죽을 수 없어.’ 결국 천유종은 다시 한 번 역혈대라신공을 펼쳤다. 그 다음부터 아무 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앞에는 대호법 마라겸이 걱정스러운 투로 부르고 있었다. ‘교주님? 교주님?’ 그런데 그가 자신을 불렀을 때 이상하게 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아무 느낌이 없었다. 어떻게 적을 물리쳤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멍한 느낌에 사로잡혀 있는데 그의 옆에서 대호법 마라겸과 함께 누군가 자신을 부축했다. ‘유중?’ 그는 천유중이었다. 죽었다고 생각한 그가 나타나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또 무리하셨군요. 이런 식으로 하다가 본교의 균형을 맞출 수 있겠습니까?] ‘균형?’ [쯧쯧, 형님, 아니 교주님이 돌아가시면 누가 본교를 바로 세운단 말입니까?] 천유중의 말에 멍하게 혼이 빠져있던 천유종이 흐릿해진 눈으로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면서 중얼거렸다. ‘그래.......본교의 균형을 바로 잡아야 해. 본교의 균형을......’ . . . “크르르르! 그래. 네놈은 고작 패에 불과하다. 본좌가!.....본좌가 본교의 균형을 바로 잡아야해!!!” 두 손으로 머리를 붙잡고 괴로워하던 천유종이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고개를 들었다. 아까 전과 다르게 완전히 붉어진 두 눈을 보면 역혈대라신공을 펼치려고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대전에 있는 사람들이 교주의 붉어진 두 눈에 당혹스러워했다. “헉!” “서, 설마 지금 역혈마공을?” 아무리 상태가 좋지 않아서 수세에 몰렸다고는 하지만 교주가 역혈마공을 펼칠 거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면서 입 꼬리가 올라가는 중년인이 있었다. ‘크크큭, 됐다. 날뛰고 날뛰어서 소교주도, 여섯 종파의 종주들도 전부 없애버리고 네 할 일을 마쳐라.’ 애써 전음을 보내서 자극한 보람이 있었다. 이제 교주는 폭주해서 대전 내에 있는 자들을 닥치는 대로 공격할 것이다. 역혈대라신공을 펼치자 교주의 상의가 찢겨져나가며 상반신의 근육이 핏줄이 곤두서서 부풀어 오르려고 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천여운의 신형이 번개처럼 뻗어나가서 단숨에 교주의 머리를 붙잡고 가슴에 손을 얹었다. -꽉! “크르르르, 이게 무슨 짓이냐?” “죄송한데 이걸 너무 많이 겪어서요. 많이 아플 겁니다.” “뭣?” ‘나노!’ [알겠습니다.] -파치치치치치칙! 머리를 붙잡고 있는 천여운의 왼손에서 새하얀 전기가 번쩍이면서 전격이 흘러나와 교주의 백회혈(百會穴)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옥당혈(玉堂穴)을 짚고 있는 오른손에서 웅후한 내공이 파고들면서 역류하려는 교주의 내기를 붙들었다. “끄가가가가가가각!!!” 파고드는 엄청난 전격에 교주 천유종이 전신에 경련을 일으켰다. 온몸을 떨면서 괴이한 비명을 질러대던 천유종이 한참을 부르르 떨다가 머리카락이 전부 타들어가고 얼굴이 시꺼멓게 타서는 바닥에 쓰러졌다. -쿵! 이 광경에 모든 사람들이 어안이 벙벙해져서 넋을 놓고 쳐다보았다. ‘비, 빌어먹을 이게 무슨?’ 이것을 지켜본 중년인이 당혹감에 사로잡혔다. 설마 교주가 역혈대라신공을 미처 펼치기도 전에 천여운의 손에 이런 식으로 제압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방금 전에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저 이상한 기운은 무엇이란 말인가. 바로 그때였다. -스륵! “헉!” 언제 경공을 펼친 것인지 천여운이 잔상처럼 중년인의 앞에 나타났다. “이, 이형환위?” 이형환위(移形換位). 극도로 빠른 신법으로 잔상이 남는 현상을 말한다. 중년인이 놀라서 어떻게 해볼 틈도 없이 천여운이 그의 목을 움켜잡고서 들어올렸다. -콱! “케엑!” 움켜잡은 손을 풀려고 해보았지만 괴력에 가까운 힘에 어찌해볼 수가 없었다. 천여운이 바둥거리는 중년인을 살기 어린 눈빛으로 노려보면서 말했다. “네놈.....대체 누구냐?” < 47장 원흉 (2) > 끝 < 47장 원흉 (3) > 대호법 마라겸은 천여운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을 말해주었다. 그는 교주 천유종이 일부러 드러낸 적은 없었지만, 지금까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천여운을 수차례나 지켜주었다고 했다. 그러나 천여운은 그 말만으로 모든 것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교주는 어머니인 화 부인이 죽었을 때조차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냉혈한이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교주를 찾았다.’ 그 모습을 떠올리면 교주에 대한 원망이 여전히 가시지 않는다. 더군다나 여러 차례 자신을 이용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를 그저 패로 여겼던 자가 사실은 보호했던 거라고?’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과연 대호법의 말대로 정말 교주가 역혈마공으로 인해서 이지를 상실하고 정신이 피폐해져서 그런 것이라면 그것을 바로 잡을 필요가 있었다. '정말로 그런 것이라면 그 입으로 직접 듣겠다.' 마라겸과 연무화가 운기조식으로 내상을 치료하는 사이에 천여운은 호법을 서준다고 한 뒤에 죽은 이 장로 경본기의 시신으로 다가갔다. ‘나노. 시신을 분석할 수 있지?’ [지정한 대상의 신체를 자기공명영상(magnetic resonance imaging)법으로 스캔하겠습니다. 머리부터 발목까지 손바닥으로 천천히 훑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는 역혈마공을 쓴 자들의 시신을 회수해가면서 분석해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을 분석한다면 뭔가 방법이 나올지도 모른다. 적어도 역혈마공으로 인해 미쳐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면 대호법이 말한 멀쩡했던 교주를 만나게 되리라. “켁켁....” 정체를 알 수 없는 중년인이 숨이 막혔는지 바둥거리며 고통스러워했다. 그는 이 상황을 믿기 힘들었다. 역혈대라신공은 한 번 발동되면 내기가 역류하기 시작해서, 시전자가 죽거나 혹은 폭주해서 그 힘을 다해야만 멈출 수가 있다. 그런데 그것이 발동되는 도중에 강제로 막으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대, 대체 이놈은 뭐란 말인가?’ 당혹스러워하는 중년인에게 천여운이 한 번 더 물었다. “네놈은 누구냐고 물었다.”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대체?” -꽈악! “케케켁!” 천여운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가자 중년인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대전에 있는 동안 최대한 조용히 있었는데 자신을 붙잡고서 정체를 물으니, 순간 전음이 아니라 실수로 입을 열었던 건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때 그의 정체를 밝힌 것은 옆에 있던 다른 중소종파의 종주였다. “처, 천마시여. 그는 부주검종의 종주인 여불위입니다.” “부주검종?” 부주검종이라는 말에 천여운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환의를 통해서 그들이 검마종 산하에 숨겨진 암검이종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교주에게 전음을 보내서 역혈대라신공을 펼치라는 말을 했다. 그 전음을 듣자마자 교주가 더욱 혼란스러워하더니 그것을 펼쳤다. 천여운은 대전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이 안의 모든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서 전음 도청 모드를 상시 유지하고 있었다. 이에 여불위가 걸려든 것이었다. “켁켁, 처, 천마시여. 대체 왜 이러시는 건지?” 여불위는 최대한 발뺌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아무 것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는데 이래봐야 천여운만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웅성웅성! 실제로도 종주들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여불위의 얕은 수작에 천여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전음을 보냈다. [역혈대라신공으로 눈앞의 적을 물리치고, 남은 세 종파의 수장들의 목을 베어 신교를 바로잡아라. 네놈이 교주에게 한 말일텐데.] “!?” 전음을 듣는 순간 여불위의 두 눈이 커졌다. 그것은 자신이 아까 전에 교주에게 전음을 보냈던 내용이었다. 천여운은 폭주하려고 하는 교주 천유종과 겨루느라 정신이 없었을 텐데, 대체 어떻게 자신의 전음을 듣는단 말인가? ‘그, 그럴 리가 없다. 세상에 전음을 듣는 자가 어디에 있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떠한 높은 경지에 오른 자도 전음을 도청할 수는 없다. 그런 그의 생각이라도 읽었는지 천여운이 다시 전음을 보냈다. [왜? 네놈의 전음을 들어서 놀랐나? 나더러 역모를 꾸몄다고 지껄이더니 이제는 모르는 척 발뺌하는 것이냐?] ‘헉!’ 그 전음을 듣는 순간 여불위의 동공이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반신반의 했었다. 그러나 확실했다. ‘마, 말도 안 돼! 이놈은 정말로 전음을 도청할 수 있다.’ 이것은 굉장히 위험한 능력이었다. 전음이라는 수단은 직접적인 소리를 내뿜지 않고 특정인에게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유용한 수 단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읽을 수 있다면 전음 하나만 잘못 보내도 계획이 노출된다는 의미였다. ‘아, 안 된다. 이렇게 되면 전음을 보내라고 해선 안 돼.’ 여불위는 빠르게 상황 판단을 마쳤다. 전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면 다른 동료에게 알려서 이것을 방비해야 했다. “켁...켁! 저, 전음을...” "누구 마음대로 지껄이라고 했지." -콱! “끄윽!” 천여운이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어 여불위가 말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비, 빌어먹을!’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였다. 어차피 계획이 물거품으로 돌아간 이상 자신이 모든 것을 뒤집어쓰더라도 그들을 성 밖으로 내보내야만 했다. 여불위가 내기를 역류시키려는 찰나였다. [큭! 계획은 실패했다. 어쩔 수 없다. 여 단주. 소교주와 동귀어진해라. 그 사이에 그곳을 정리하고 철수하겠다.] 여불위의 눈빛에 당혹감이 서렸다. 신공을 펼쳐서 천여운의 손에서 벗어난 뒤에 전음을 쓰지 말라고 외치려고 했는데, 그것을 하기도 전에 미처 저질러버렸다. ‘비, 빌어먹을 설마?’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천여운의 시선이 단번에 누군가에게로 향했다. 그는 대전의 입구 쪽에서 호상화와 전투를 벌이고 있는 호위전의 수장인 패현이었다. ‘아뿔싸!’ 조급해진 여불위가 빠르게 특정 경맥으로 내기를 역류시켰다. 그의 상체와 팔뚝이 부풀어 오르며 근육이 팽창하기 시작했다. 목에도 핏줄이 곤두서서 반탄력이 일어났다. -팡! 그의 목을 쥐고 있던 천여운의 손이 뒤로 튕겨나갔다. 천여운이 다른 동료인 패현을 잡기 전에 그를 붙잡고 동귀어진을 시도해야 했다. 하지만, -팍! “헛?” “멍청하군. 통하지 않는다는 걸 봤을 텐데.” 천여운이 그의 머리를 붙잡고 가슴에 손을 얹고는 교주에게 했던 것처럼 전기를 발산하고 역류하는 기를 잡아두려고 했다. -파치칙! “크윽!” 천여운의 손에서 하얀 빛의 전격이 튀자, 여불위가 오른팔로 머리를 붙잡던 손을 밀쳐내고서 왼손 주먹으로 가슴에 일격을 날렸다. ‘움직였어?’ 천여운이 빠르게 몸을 젖혀서 이를 피해나자 여불위가 뒤로 보법을 펼쳤다. 거리를 벌리기 위해서였다. -타타탁! 보법을 펼치는 와중에 여불위의 상반신 옷이 찢어지며 근육이 부풀어 올랐다. 가슴에 핏줄이 불끈불끈 올라오는 모습이 징그럽기마저 했다. 그런데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분명 역혈마공을 펼치는 것 같은데 그의 눈동자는 붉게 물들지 않았다. ‘다르다. 백회혈과 옥당혈을 제압했는데 움직이다니.’ 내기가 역류하는 경로가 다른 듯 했다. 그 증거로 여불위는 역혈마공을 펼치면서 나오는 특유의 짐승 같은 울음소리조차 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다소 거친 느낌은 원래의 것과 동일했다. 천여운의 그런 짐작은 정확했다. ‘부작용이 있는 그런 역혈마공 따위와 같은 줄 아느냐. 흐흐흐. 이것은 진정한 역혈대라신공이다.’ 교주 천유종이나 이 장로 경본기가 익힌 것과 다르게 제대로 완성된 역혈대라신공이었다. 거의 대부분의 부작용을 없애고 신체를 강화시키고 공력을 폭증시킨 것이다. 단지 단점이 있다면 시간제한이 극명하다는 점이었다. 반각도 정도 밖에 지속되지 않고 한 번 쓰게 되면 탈진하지만 천여운과 동귀어진 하여 그를 보내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여, 역혈마공!” “천마님의 짐작이 맞았어.” “당장 제압해랏!” 근처에 있던 종주들이 더 이상 수수방관하지 않고 나섰다. 교주가 아닌 자가 역혈마공을 쓴 것이라면 당장 제압하는 것이 수순이었다. 대전이라 병장기를 들고 들어올 수 없었지만 그들 역시도 절정에서 초절정 이상의 실력을 지닌 고수들이었다. -팟! 다섯 명의 종주들이 무공을 펼치며 달려들자, 여불위가 빠른 몸놀림으로 그들의 공격을 피해낸 뒤에 오히려 반격까지 가했다. -파파파팍! “크헉!” “무, 무슨 공력이 이렇게?” 여불위의 권각에 맞은 종주 두 명이 뒤로 튕겨나갔다. 방어를 했지만 그것을 무시할 만큼 엄청난 공력에 대응할 수가 없었다. “받아랏!” 상위 종파의 환검종의 종주 묵연이 검강을 일으켜서 여불위의 뒤를 노렸다. 그의 검강이 단숨에 여불위의 날개 뼈 쪽을 찔렀지만, -치치칙! “큭! 비, 비켜랏!” -파팍! “아닛! 모, 몸이?” 검강을 찔러 넣었는데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밖에 들어가지 않고 강한 반탄력이 일어나며 도리어 묵연의 팔이 튕겨나갔다. 화경의 경지에 오른 이 장로 경본기 만큼은 아니었지만 육신이 굉장히 단단했다. “합!” -팟! 다른 두 명이 당황스러워하는 틈을 놓치지 않고 여불위가 빠르게 경공을 펼쳐서 천여운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네놈만 죽이면 된다!’ 다른 자들까지 상대할 여유는 없었다. 전음을 듣는 저 말도 안 되는 능력을 가진 천여운만 죽여도 원래의 목적에는 실패했어도 그 이상의 성과를 달성한 셈이었다. -우우웅! 천여운을 향해 쇄도하는 여불위의 손에서 푸른빛 검강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그 크기가 통상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이 장로 경본기가 역혈대라신공을 펼치면서 폭증한 공력으로 형성한 강기의 크기에 버금갈 정도였다. “처, 천마님!” 종주들이 놀라서 외쳤다. 그를 제지할 틈도 없이 이미 천여운에게로 거대해진 검강으로 검초를 날렸다. 패도적인 위력으로 펼쳐지는 검초는 천여운을 단숨에 압사시켜 고기 조각으로 만들 기세였다. “죽어랏!” -촤악! 툭! "엇?" 날카롭게 베이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무언가 떨어졌다. 그것은 혈관이 잔뜩 서서 징그럽게 근육이 부푼 여불위의 팔이었다. “끄아아아악!” 방금 전까지 맨손이었던 천여운의 손에 어느새 검은빛 검강의 서려 있는 천마검이 들려있었다. 여불위는 잘린 단면을 붙잡고서 고통스러워했다. 역혈대라신공을 펼쳤기에 신체가 검강을 견뎌낼 만큼 단단해졌는데, 그것을 단숨에 베어버린 것이었다. “끄으윽, 어, 어째서 내 팔이?” 고통도 고통이었지만 당혹스러웠다. 더 상위 경지에 오른 고수들이 역혈대라신공을 펼쳐도 소용이 없는데, 완성이 되었다고 한들 천여운을 상대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비틀거리는 여불위에게 천여운이 무덤덤하게 물었다. “네놈에게 역혈마공을 거두라고 해도 당연히 거부하겠지?” “뭣?” -?! “끄아아아아악!” 뭐라고 반문하기도 전에 여불위의 다른 한 팔이 잘려나갔다. 전투 능력을 완전히 상실시키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어차피 머리와 몸통만 있으면 되잖아.” “끄으윽, 대, 대체 무엇을 하려...” -?! “끄아아아아악!” -쿵! 날카로운 예기가 허벅지를 스치고 지나가며 여불위가 뒤로 넘어졌다. 아에 도망갈 수 없도록 다리까지 잘라버린 것이었다. 냉기가 흐를 만큼 차가운 눈빛으로 내려다보는 천여운에게서는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끄으으으으....이, 이 미친 놈이.....헉...헉!” 교주 천유종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냉혹했다. 적을 대함에 있어서 일말의 자비가 없었다. 여불위는 자신의 실력으로는 역혈대라신공을 펼친다고 해도 절대로 천여운을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을 뼛속까지 각인하게 되었다. ‘헉...헉.....이놈은 정말 괴물인 건가. 크윽! 여기까진가. 그래도 패 단주가 철수할 시간을 벌었으니 자결을...’ -쿠당탕! “크흑!” 팔 다리가 전부 잘려서 고통스럽게 누워있는 여불위의 옆으로 누군가 강압적인 힘에 엎어졌다. 힘없이 고개를 겨우 돌린 여불위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아, 아닛?’ 그는 바로 호위전의 수장인 패현이었다. 혈도가 점해졌는지 패현은 무력하게 몸을 옴짝달싹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읍읍읍!” “명령하신 대로 그를 잡아왔습니다.” 도주를 시도했던 그를 잡아온 자는 바로 십 장로 연무화였다. 대전 바닥에 엎어져 있는 패현은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어서 연무화를 증오스럽게 노려보았다. “끄으으으으! 이, 이노오옴!" 전음을 보낸 자가 누군지 알아냈는데 후속조치를 하지 않았을 리가 만무했다. 여불위의 시간 끌기는 결국 헛수고로 끝난 셈이었다. 모든 것이 무산되어 분노하는 여불위를 뒤로 한 채, 천여운이 대전에 있는 모든 장로, 종주들을 바라보며 명을 내렸다. “당대 천마로서 명한다. 부주검종과 호위전의 무사들을 전부 제압해라. 반항하면 전부 죽여도 좋다.” 위엄이 넘치는 목소리에 대전 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외쳤다. “충!!!” < 47장 원흉 (3) > 끝 < 47장 원흉 (4) > 당대 천마로서 명령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 종주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벅차오르는 느낌에 사로잡혀 충을 외쳤다. 천여운이 보여주는 위엄은 교인들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반전의 전율로 상기된 종주들이 일사분란하게 대전 밖으로 신형을 날리며 호위전의 무사들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마교에서 이백 위권 내에 드는 고수들이 투입되니 그 속도는 당연히 빠를 수밖에 없었다. 호위전의 무사들이 밖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전 내에도 호위전에서 가장 뛰어난 고수 열두 명이 있었다. 그들은 교주 직속 호위무사들이었다. -우웅! 삼 장로 부철용의 오른손에 서슬파란 도강을 서려서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쓸데없는 반항은 하지 않기를 바란다." -쿵! 쿵! 부철용의 경고에 열 명의 무사들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서 손을 깍지를 끼고 머리 위로 올려놓았다. 반항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었다. 그들은 오직 교주의 명령으로만 움직이지만, 천유종이 역혈마공을 펼친 모습에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서 항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진짜 호위전의 무사는 아니었다. 대전 내에 있는 호위전 무사들 중의 두 사람의 눈빛이 묘했다. '어떡해야 하지?' '빌어먹을.' 설마 단주들이 이렇게 허무하게 제압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교주의 정신 상태가 악화 되면서 직속 호위 무사로 발탁될 수 있었는데 아무 것도 해보지 못하고 끝나게 생겼다. "네놈들도 관련이 있구나." 그들의 그런 망설임 덕분에 삼 장로 부철용은 적임을 알 수 있었다. 부철용의 신형이 번개처럼 그들에게로 쇄도했다. '별 수 없다. 그렇다면....' [내가 막겠다. 자네는 빨리 교주를!] -챙! 길쭉한 턱의 호위전의 무사가 검강을 형성해서 부철용을 가로막았다. 화경의 고수인 그를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잠깐이라도 막는 사이에 교주를 죽이라고 했다. [알겠다.] -팟! 남은 호위전의 무사가 바닥을 박차며 석좌 앞에 쓰러져 있는 교주를 향해 달려들었다. 대호법 마라겸이 그의 안위를 살피고 있었지만 그 공격을 이겨내고 어떤 식으로든 무방비 상태인 교주의 목을 베거나 심장을 찌른다. "흐아아아압!" 그러나, -휘휘휘휙! 교주를 보살피던 대호법 마라겸이 가볍게 검결지를 휘젓자, 대전 바닥에 떨어져 있던 세 자루의 검이 일제히 허공으로 떠오르며 달려드는 호위전의 무사에게로 쇄도했다. '이, 이기어검.' 당황한 호위전의 무사가 검초를 펼치며 날아오는 검들을 막으려고 했다. -채채챙! 한 자루의 검은 어떻게 막았으나 다른 두 자루는 놓치고 말았다. -파팍! “크헉!" 두 자루의 검이 호위전의 무사의 양 어깨를 관통했다. 검에 꿰뚫린 그의 몸이 이기어검에 실린 웅후한 공력을 이기지 못하고 허공으로 떠올라서 대전 기둥까지 날아가 박혀버렸다. '비, 빌어먹을....끄으으윽!' 양어깨에 박힌 검을 뽑고 싶어도 상처부위를 파고드는 검기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명왕 마라겸의 호위를 우습게 본 자의 말로였다. -촤촥! 투툭! "끄아아아악!" 삼 장로 부철용을 막겠다며 덤볐던 길죽한 턱의 호위무사가 비명을 질렀다. 적어도 삼 초식 정도는 버텨볼 거라 마음먹었지만 고작 한 초식도 버티지 못하고 양팔이 잘려나가고 말았다. "반항하지 말라고 했는데. 쯧." "끄으으윽!" 천여운의 무위가 괴물처럼 강해서 근래에 빛을 발하지 못했지만 이들은 마교에서도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고수들이었다. 한편 바깥의 상황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호위전의 무사들의 숫자는 삼백여 명이었는데 그들 모두가 간자들은 아니었다. 종주들이 일제히 나와서 제압하려들자 그들의 반응은 제각각 달랐다. "조, 종주들이 어째서 우리를?" "뭔가 잘못 된 건가?" 호위전의 수장인 패현의 명령을 따라서 대전 내로 진입하려 했던 그들이었다. 처음에는 인피면구를 쓰고 있던 시종들로 인해서 정말로 반역이 일어난 거라 여겼지만 아무래도 그게 아닌 듯 했다. "당대 천마께서 반항하면 죽여도 좋다고 했소. 간자들에게 손속에 사정을 두지 마시오!" "알겠소." 마권종의 종주 고왕현의 외침에 종주들의 손에는 거침이 없었다. 실제로 호위 무사들 중에서 간자인지 격렬하게 버티다가 죽어나가는 자들 역시 발생했다. 이러다 보니, "하, 항복하겠습니다." "저, 저는 간자가 아닙니다!" 덕분에 호위전의 무사들 중에서도 자발적으로 항복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항복하는 호위전의 무사들이 속출하면서 간자들의 구분이 점점 쉬워지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양팔과 다리가 잘려서 몸통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여불위가 분함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의 대에 와서 계획을 발동하라는 명이 떨어지면서 치밀하게 계획했는데 모든 것이 단 한사람으로 인해 수포로 돌아갔다. 단일 방파인 마교로 파고들어 실세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검마종의 신임을 얻기까지 조부까지 삼대가 많은 시간을 소요해야 했다. '그분의 명을 받든 사자가 오게 된다면 본 종이 준비한 백 년 대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알겠느냐? 불위야.' 선대 종주인 여불금의 말대로 정말로 그분의 사자가 나타났다. 숨겨왔던 그들의 진정한 실체마저 무림에 드러내면서 말이다. 대계의 때가 왔다고 생각하여 기뻐하며 그것을 실천하려 했는데, 삼대에 걸쳐서 준비한 것이 무산된 셈이었다. -삐이이이익! 분노하고 있는 여불위의 귀로 대전 바깥에서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을 들은 여불위의 눈빛이 지금까지의 분노를 잊고서 회심으로 물들었다. 이를 바라본 천여운이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뭐지?" "크크큭, 완전한 네놈의 승리라고 생각하겠지?"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냐?" 아무래도 방금 전에 들려온 찢어질 듯한 피리 소리와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지만 단 하나라도 천여운의 뒤통수를 칠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여불위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 "비록 네놈과 남은 수뇌부들을 처리하지 못했지만 호법들은 저승으로 데려가도록 하마." "뭐라고?" 천여운이 인상이 굳어지며 반문했다. "금옥에 있는 좌우호법을 지키는 자들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크크큭, 방금 전의 신호로 놈들의 수급이 차가운 금옥 바닥을 뒹굴고 있을 것이다!" 방금 전의 피리 신호는 바로 그것이었다. 만약에 있을 사태에 대비하여 단번에 좌호법과 우호법을 죽이라는 신호였다. 금옥에는 그들이 심어놓은 호위전의 무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두 호법이 네놈의 수하라지? 어서 가서 놈들의 잘린 머리통을 보면서 비참해 하거라! 크크크큭.' 그런데 천여운의 반응이 이상했다. 조급해 하기는커녕 오히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뭐지?' 의아해하는 여불위에게 천여운이 입 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고작 그거였나?" "뭐?" 마교에 있어서 큰 전력이자 천여운에게 최고의 조력자라 할 수 있는 좌우호법이 죽었을 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태도가 너무 여유로웠다. 같은 시각, 마교의 내성 남동쪽에 자리하고 있는 금옥. 금옥의 지하층에 한 철창으로 만들어진 옥실에 두 사람의 중년인이 의자에 단단히 밧줄로 묶여 있었다. 그들은 바로 좌호법 이화명과 우호법 섭맹이었다. 철창에 안에 사이좋게 구속되어 있는 그들은 답답하기 그지 없었다. 교주령이 떨어져서 거부할 수 없기에 잡혀오기는 했지만, 기문(氣門)을 장침으로 찔러서 금제까지 당해서 불안한 상황이었다. -저벅! 저벅! 철창의 앞에서 뭔가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호위전의 무사들이 검병을 붙잡고서 왔다갔다 거리는 게 거슬렸다. 좌호법 이화명이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마도관의 관주로 재직해 있는 자신을 노릴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정녕 교주께서 잘못 되셨단 말인가.' 그저 여섯 종파만을 생각했는데, 교주가 이런 명령을 내렸다는 것을 믿기 힘들었다. 바깥의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 지도 답답했다. 자신들을 격리시켰다는 것은 다른 천여운의 조력자인 장로들도 그렇게 되었을 확률이 높았다. '소교주께서 위험하실 지도 모른다.' 그런 우려는 좌호법 이화명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한쪽 눈을 잃은 대다가 내상까지 입어서 요양을 하던 차에 잡혀왔기에 뭔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후우....후우....' 섭맹은 두 시진이 넘게 진땀을 빼가면서 진기를 끌어 모았다. 기문을 막고 있는 침을 빼기 위해서였다. '한 번 더!' 섭맹이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서 기문 쪽으로 기운을 집중했다. 하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요지부동하는 장침 때문에 지친 섭맹이 자신도 모르게 거친 숨을 내쉬었다. "끄윽! 헉! 헉!" "뭐냐? 지금 뭘 하는 거지?" -쿵! 쿵! 이를 발견한 호위전의 무사들 중 한 사람이 철창을 치면서 물었다. 섭맹이 금제를 풀려한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눈치 채고 있던 이화명이 당혹스러운 나머지 큰 소리로 말했다. "호법이라는 놈이 고작 묶여 있는 것도 못 참는 거냐?" "뭐야? 헉...헉...이 빨간 머리 놈이 이런데서 까지도 분위기 파악하지 못하고 시비를 거는 게야?" "힘들면 그냥 잠이라도 자라." "이놈이!" 이화명의 의도를 파악한 섭맹이 빠르게 받아쳤다. 서로 으르렁 대는 태도에 이상하게 여기던 호위전의 무사가 한숨을 푹 내쉬면서 다시 몸을 돌렸다. 금옥에 갇힌 순간부터 끊임없이 티격태격 두 호법의 모습을 계속 지켜보았기 때문이었다. "휴." 이화명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티를 내는군.' 금제를 풀려고 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섭맹이 실수를 하는통에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대단하다고 여겨졌다. 자신 역시도 몇 차례 기문을 뚫으려고 하다 포기했는데, 의외로 섭맹은 끝까지 금제를 풀려고 아등바등하고 있었다. '나도 다시 한 번 도전해봐야 겠군.'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였다. -삐이이이익! 금옥 바깥쪽에서 작게 피리 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그러자 호위전의 무사들의 기다렸다는 듯이 피식 웃고는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챙! "뭐, 뭐냐? 이놈들 설마?" 살기를 풀풀 풍기는 그들의 모습에 섭맹이 당황해하며 외쳤다. 아무리 보아도 사형 집행인처럼 보였다. 검을 뽑은 그들이 자물쇠로 잠귀어진 철장의 문을 열려고 했다. -꽉꽉! 사태가 잘못 돌아간다는 사실을 인지한 이화명 역시도 구속하고 있는 밧줄만이라도 풀어보려고 힘을 주었지만 소용없었다. 내공이 금제되어 있는 상태라서 공력을 끌어올릴 수가 없었다. "큭!" 이화명은 내심 후회가 되었다. 교주령이든 뭐든 섭맹처럼 금제를 풀어서 방비를 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물쇠가 따지면서 철창의 문이 열리려는 찰나였다. -쾅! "누, 누구냣!" 지하실의 문이 굉음과 함께 부서지면서 거구의 사내가 들이 닥쳐서 호위전의 무사들을 향해서 달려들었다. 거구와는 어울리지 않게 쾌속한 몸놀림으로 파고든 사내가 푸른빛 강기가 서린 일권을 내뻗었다. -퍽! "크헉!" -쾅! 일권에 실려 있는 엄청난 위력에 방심했던 호위전의 무사가 비명을 지르며 날아가 지하실 벽에 처박히고 말았다. 긴 턱수염을 기른 거구의 사내를 알아본 이화명이 어안이 벙벙해져서 중얼거렸다. "고왕흘?" 근육질의 거구의 사내는 바로 고왕흘이었다. 놀랄 틈도 없이 호위전의 다른 무사들이 고왕흘을 공격하려는 순간에 지하실 문으로 누군가 튀어나와서 화려한 각법을 펼치며 무사들을 공격했다. -파파파팟! 그는 백기였다. 백기는 폭풍과도 같은 기세의 각법을 펼치며 무사들을 밀어 붙였다. 발차기가 너무 쾌속해서 오히려 공간이 협소한 금옥 내에서 검을 휘두르는 그들로서는 방어를 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이, 이놈들이 대체 언제?" "아까부터 대기하고 있었소! 하압!" -퍼퍼퍼퍽! "크윽!" 맹수처럼 밀어붙이는 고왕흘의 권초에 호위전의 무사들이 파죽지세로 밀려나갔다. 젊은 외모와 달리 완숙한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그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날뛰면서 호위 무사들을 제압해갔다. "휴우우우!" 두 사람이 정확한 시점에 나타난 덕분에 목숨을 건진 두 호법이 자신들도 모르게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세 종파의 장로들이 나를 도왔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나?" "뭣?" 여불위의 눈동자가 떨려왔다. 교주는 천여운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네 종파 산하의 전투단으로 그의 수하들을 배치시켰다. 당연히 그들을 배제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네 종파가 아군이 되었다는 것은 그 수하들의 동선에 실질적으로 제한이 없다는 말이었다. "내가 두 호법을 그냥 내버려뒀을 것 같나?" "이, 이놈 지금 허장성세를 부리는 것이냐?" "글쎄." 자신만만해 하는 천여운의 태도에 불안함을 느낀 여불위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만약 천여운의 말대로 그가 금옥에 마저 수하들을 보냈다면 정말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실패하는 것이었다. "그보다 네놈한테 신경 쓰는 게 좋을걸." "크윽! 이노오오옴!" '이대로는 안 된다.' 분노하던 여불위가 결심했다. 자신의 몸통만 남겨서 살려둔 것은 배후에 숨겨진 원흉을 찾기 위해서일 것이다. 아직 역혈대라신공이 풀리지 않았으니, 역류하는 기를 더욱 폭주시켜서 자결하기로 말이다. "흐읍!" 여불위가 역류하던 기를 더욱 활성화시켰다. 그러자 그의 상체가 더욱 부풀어 오르며 혈관들이 터질 것처럼 팽창했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자 천여운이 몸을 숙여서 그의 상태를 살폈다. "크크크큭, 소용없다. 완성된 역혈대라신공은 혈도의 위치가 전부 바뀌기 때문에 막을 수 없다!" 그것 때문에 아까 전에 여불위가 역혈대라신공을 펼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죽는 것이 두려웠지만 살아남아서 고문을 당할 바에는 이렇게 자결하는 편이 나았다. -고오오오! 거의 두 배 가까이 부풀어 오른 여불위의 상체가 찢어질 것 만 같았다. 튀어나온 혈관들로 뒤덮인 징그러운 얼굴로 여불위가 속이 울컥거리는 것을 참고서 회심의 목소리로 말했다. "우욱! 우욱! 지금의 위기를 넘겼다고 좋아하지 마라. 마교 뿐만이 아니라 본문의 힘이 닿지 않는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욱!" 그런데 천여운은 그의 말에 집중하지 않고 있었다. -탁! "읍!" 그의 얼굴에 천여운의 손바닥이 스치고 지나갔는데 뭔가 미세한 빛이 보였다. 천여운이 빠르게 그의 몸을 손바닥으로 훑고 내려가는데 대체 무얼 하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우욱! 네놈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우욱! 소용없다고..." -탁! 천여운이 그의 머리의 오른쪽 귀 밑으로 손바닥을 갖다 댔다. 그리고 그의 왼쪽 가슴으로 손을 얹었다. 알 수 없는 불길함에 사로잡힌 여불위가 뭔가를 말을 하려 했지만, "대체 뭘 하려...." -파치치치치치치칙! "끄가가가가가가가가각!" 귀 밑을 파고드는 전기에 여불위가 전신에 경련을 일으키며 괴성을 질러댔다. 온몸을 찌릿찌릿 파고드는 전격에 몸이 뒤틀리는 것만 같았다. 어찌나 고통스러웠는지 괴성을 지르던 여불위가 결국은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짝! -짝! -짝! "흐헉!" 뺨에서 느껴지는 화끈거리는 통증에 깨어난 여불위가 당혹감에 젖어 어쩔 줄 몰라 했다. "내, 내가 어째서?" 그는 죽지 않았다. 역혈대라신공을 폭주시켜서 전신의 혈관이 터져서 죽었어야 할 그의 몸은 어느새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마치 폭주하던 교주 천유종이 제압되었을 때처럼 말이다. 그런 여불위의 뺨을 때려서 깨운 천여운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소용이 있네? 그래. 아까 본문이 어쨌다고?" '......비, 빌어먹을.' 괴물 같은 천여운의 능력에 여불위는 질려버리고 말았다. < 47장 원흉 (4) > 끝 < 48장 교주 취임식 (1) > 사 장로 자금경과 육 장로 몽오는 교내에 있는 산하 세력들을 이끌고 동쪽에 있는 부주검단의 장원으로 서둘렀다. 호위전의 무사들 중에는 간자로 의심되는 자가 많이 심어져 있지 않았다. 그 만큼 호위전의 무사들을 뽑는 기준이 까다로웠기 때문이었다. “서둘러라!” “충!” 사장로 자금경과 육 장로 몽오가 서두르는 이유가 있었다. 아까 전에 호위전의 무사들 중에 간자로 보이는 자들이 피리를 불었는데, 그것이 어떤 신호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혹여 탈출을 시도할 지도 모르기에 빨리 제압해야 했다. 외성의 문을 전부 봉쇄했고 비상 체제로 돌입했기 때문에 쉽게 도망갈 수는 없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저, 저길 보십쇼!” 그들이 향하는 동쪽 편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연기의 틈 사이로 타오르는 불꽃마저 보였다. 경공을 박차서 도착한 자금경과 몽오는 적을 상대하는 일보다 활활 타오르고 있는 부주검종의 장원의 불을 잡는 일부터 시작해야만 했다. “불을 꺼라!” “불이 번지지 못하게 해랏!” -화르르륵! “큭! 한 발 늦었구나.” 뜨거운 열기로 장원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장원 전체에 기름을 들이 붙고 미리 준비했는지 불길이 모든 것을 삼키고 있었다. 할 수 있는 것은 불이 다른 곳으로 번지지 않게 막는 것뿐이었다. 육 장로 몽오와 그 산하의 세 개 단에서 불길을 제압하는 동안에 남은 전력들은 성내를 수색하여 부주검종과 관련된 자들을 찾게 했다. * * * 그렇게 사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다. 부주검종을 불태운 화마를 제압했지만 그 안에 살아있는 자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시신들은 거의 타서 흔적만 남아 있었고, 그나마 불길이 덜했던 쪽에서 발견된 자들도 자결을 해있었다. 그들은 언제라도 잔재를 없애려고 한 것처럼 철저하게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것은 부주검종만이 아니었다. 당연히 그들을 통제하던 상위 종파인 검마종에 조사가 들어갔는데, 그 내부에 부주검종과 관련되었던 자들은 전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유일하게 부주검종에서 살아남은 자는 여불위 뿐이었는데, 그는 팔다리가 잘린 것에 대한 응급치료를 받은 후에 감금되어서 조사에 들어갔다. 검마종의 혈족들은 조사를 위해 전부 체포되어서 금옥으로 실려 갔고, 그들의 산하에 있던 전투단과 대는 전부 해체되어 직무 보류 상태에 들어갔다. “호위전의 무사들 중에 총 열네 명이 부주검종 출신으로 밝혀졌습니다.” “역시인가.” 삼백여 명으로 이루어진 호위전의 무사들 중에서 간자는 이번에 새롭게 수장의 직위를 맡은 패현을 포함해 총 열네 명이었다. “서류 기록을 보니, 원래는 다섯 명에 불과했는데, 이번에 아홉 명이 추가된 것입니다.” 그리고 세 부관 중 한 명에 불과했던 그였지만 교주가 절강성 탈환전에서 복귀한 후로 수장 직을 맡았다. 어제부터 좌호법 이화명이 직접 패현과 여불위의 심문을 맡았지만 이렇다 할 만 한 결과는 나오지 않고 있었다.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자들은 바로 천여운과 대호법 마라겸이었다. 그들이 있는 곳은 교주의 집무실이었다. 사흘 전의 사건이 있은 후로 천여운은 내성으로 입성하여 세 호법과 산하 장로들의 도움을 받아서 내정을 주관하고 있었다. 소교주의 직위와 천마의 칭호를 가진 그였기에 누구도 이에 관해서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었다. -똑똑! “천마시여. 십일 장로가 존안을 뵙기를 청합니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십일 장로 환의가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비단에 나비 문양이 그려진 화려한 옷은 여전했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인피면구가 달라져 있었다. 원래는 미색의 남자였다면 지금은 다소 평범한 남자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색조 화장을 해서 중성적인 느낌은 그대로다. “천마님의 존안을 뵙습니다.” “벌써 복귀하셨습니까?” “후후후, 천마께서 본교를 위해서 이리 고생하시는데 어찌 제가 쉴 수 있겠습니까.” 십일 장로 환의는 복건성 출정이라는 함정에 천여운을 대신해서 갔었다. 그때 제 시간에 구원병력이 오지 않았다면 낭패를 볼 뻔 했다. 두 개의 단에서 지원이 나오면서 환의는 그들과 함께 역혈마공을 펼치는 부주검단의 무사들과 싸웠다. 숫자로는 그들을 앞섰지만 역혈마공을 펼치지는 무사들의 폭증한 공력 때문에 아군에도 많은 희생을 치렀다. “보고 드릴게 있어서 찾아뵙습니다.” “.....추적에 관련된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환의는 사흘 전 두 시진에 걸쳐서 격렬한 전투 끝에 그들을 물리쳤다. 부주검단의 무사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몇 명의 숫자가 모자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부주검단의 단주 주겸과 세 명 정도의 인원이 부족한 것을 알게 된 환의는 추적단을 파견하고 암종의 연락망을 통해 복건성과 강서성 쪽을 수색하도록 했다. “복건성의 북부 지부에서 전갈이 왔습니다.” “발견한 겁니까?” “네. 그들의 흔적을 복건성의 북부에 있는 우문촌에서 발견 하였는데.....송구스럽습니다.” “놓쳤군요?” “북부 무안 지부로 지원 요청을 하고서 대원 두 명이 추적을 했는데, 그들이 행방불명되었습니다.” -팍!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십일 장로 환의를 천여운이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집무실의 벽면에 걸려있는 중원 전도로 다가갔다. 복건성의 북부에 있는 우문촌이라면 거의 절강성으로 들어서기 전의 경계면이었다. “절강성으로 넘어갔군요.” “그렇게 추측하고 있습니다.” 복건성 북부 무안 지부에서 온 전력들이 주변을 수색했지만 어떠한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암종의 대원들이 남긴 마지막 흔적은 절강성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경계면 너머까지 진입했지만 절강성은 극도육무문의 영역이 되면서 더 이상의 추적을 할 수 없었기에 돌아와야만 했다. “역시 그들과 관련이 있을 확률이 높겠군요.” 천여운은 이번 사태의 배후에 극도육무문이 있다고 추측했다. 그것에는 나름의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아직까지 살아서 포로가 된 자들이 입을 꾹 닫고 있었지만, 유일하게 풀리지 않았던 비밀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역시 내 예상이 맞는 건가. 그때 술병도 그렇고.' 정파 무림맹과의 연회에서 술병에 양귀비가 들은 약물이 담겨 있었다. 그 당시에 연회장의 정원에 있던 간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고작 한 명의 간자가 그 많은 술병에 약물을 한 번도 들키지 않고 넣었던 것에 천여운은 의구심을 가졌었다. 그때 호위전에서 음식의 검수를 담당했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간자들이 있다면 충분히 대량의 약물을 숨기기 충분했다. 이것을 연결해서 생각한다면 부주검종은 극도육무문과 관련이 있을 확률이 높았다. ‘후우.’ 대호법에서 조사를 해서 알게 된 것은 부주검종이 약 육십여 년 전에 외부에서 영입된 종파라고 하였다. 원래는 부주검문이라 하여 절강성에서 활동하던 문파였지만 태상교주인 천인지의 전성기 시절, 북부 정벌에서 패배하고 개종하여 본교에 입교했다고 들었다. ‘이해할 수가 없다. 그 오랜 세월 동안 기다려왔다는 것인가?’ 그때부터도 만약 극도육무문과 관련이 있었다면 정말 오랜 세월을 투자하면서 교내에 침투해있었다는 말이었다. 극도육무문이 무림에 등장한 것은 고작 한 달 밖에 되지 않았다. 도저히 연결 짓기에는 기간의 간극이 너무 컸다. 다만 마음이 걸리는 것이 있다면 여불위가 자결을 시도하기 전에 했던 말이었다. [우욱! 지금의 위기를 넘겼다고 좋아하지 마라. 마교 뿐만이 아니라 본문의 힘이 닿지 않는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욱!] 마치 그는 중원 전역에 자신들의 힘이 뻗어있는 것처럼 말했다. 그런데 그 본문이 부주검종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놈의 입을 열게 한다면 알 수 있겠지만.....’ 그것이 쉽지 않았다. 첫날에 천여운이 고문지기를 대동해서 심문하여 인두로 지지는 등, 갖은 고문을 가해보았지만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절대로 입을 열지 않았다. ‘뭔가 놈의 입을 열게 할 방법이.....아!’ 문득 천여운에게 전혀 염두하지 않았던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특별히 시도를 해볼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가능성이 없지 않아보였다. -탁! 천여운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자 대호법 마라겸과 십일 장로 환의가 의아해했다. 마라겸이 물었다. “천마시여. 왜 그러시는 지?” “마의를 봐야할 것 같습니다.” “네? 하지만 곧 있으면 대전 회의가.....” 신시(申時) 중엽에 대전 회의가 개최되기로 하였다. 반각 전부터 대전 건물로 각 파의 종주들이 모이는 와중이었다. “잠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결국 그들은 천여운을 따라서 내성의 의전(醫垈)으로 향했다. 의전에는 평소보다 많은 호법전의 무사들이 철통같은 경비를 서고 있었다. 그곳에 본교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가 머물고 있기 때문이었다. -착! “천마님을 배알합니다!” 천여운이 등장하자 의전을 지키던 모든 호법전의 무사들이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그가 아니었다면 호법전이 하마터면 해체될 뻔했기에 그들은 천여운을 마음 속 깊이 받들고 있었다. 의전 안으로 들어서자 밖에서의 외침 소리를 들은 마의 백종우와 내성 의원들이 나왔다. “천마님을 배알합니다.” 예를 표하는 의원들에게 천여운도 가볍게 포권을 취했다. 의원들의 캥한 얼굴을 보면 밤을 새었는지 모두가 피로해보였다. 천여운이 마의 백종우에게 말했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마의 공.” “아닙니다. 교주님의 주치의로서 당연한 사명입니다. 그보다 아무 진척이 없는 죄를 꾸짖어 주십시오.” “아......” 천여운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마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기 때문이었다. 사흘 전부터 교주 천유종이 이곳에 입원하여 마의의 치료를 받고 있었지만 큰 성과가 없었다. 대전에서 나노의 힘으로 폭주하던 불완전한 역혈대라신공을 제어했었다. 덕분에 역류하던 내기가 뇌에 미치던 암시를 풀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원하는 방향으로 풀렸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희망에 불과했다. 잠시 깨어났던 교주는 환영에 사로잡혀서 그저 안 된다는 말만을 들먹이다가 이내 쓰러지고 말았다. 그때 혼수상태에 빠졌는데 아직까지도 깨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이 문제지?’ 나노로 전신과 머리를 MRI(자기공명영상)로 스캔했지만 특이사항을 발견하지 못했다. 내상이나 경맥의 손상은 당연한 것이었기에 치료를 하게 했지만 어째서 여전히 환영을 보는 것인지, 그리고 왜 혼수상태에서 깨지 못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저장된 데이터의 의료 기록에 사례가 없는 사항이기에 정확한 원인을 진단 내릴 수 없습니다.] 나노는 확실한 분석을 위해서는 나노 머신을 직접 몸에 주입하는 방법뿐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프로그램에 금제가 되어있어서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 천여운이 침상에 누워있는 교주 천유종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볼 때면 답답했다. 그에게서 진실과 그 속에 숨겨진 속내를 알고 싶었는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마지막으로 천유종이 보았던 환영은 뜻밖에도 배다른 동생인 천유중이 아니었다. ‘화연.....화연.....기다려준다고 했잖아. 끄흐흐흑.’ 교주는 오열을 하면서 슬퍼하다가 갑자기 뭔가에 당하는 사람처럼 안 된다는 말만 연신 내뱉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전혀 보지 못했다. 천여운과 마라겸이 몇 번씩이나 그를 불렀지만 소용없었다. “송구스럽습니다. 소신의 의술이 부족하여 교주님께 벌어진 일을 정확히 파악하기 힘듭니다. 신을 꾸짖어 주십시오.” 마의가 부끄럽다는 듯이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사실 마의의 의술 실력은 황실 어의에 맞먹을 정도로 훌륭하다. 그런 그가 원인조차 알아내지 못한다는 것은 교주의 상태가 일반적인 것을 넘어서 심상치 않음을 의미했다. “......아닙니다.” 마의나 내성의 의원들이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그들의 초췌한 모습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지금으로서는 의원들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문득 천여운은 자신의 품속에 있는 주홍색 옥패를 떠올렸다. 신의를 만날 수 있다는 옥패였다. 어쩌면 그들의 손에서 교주를 회생시킬 수 없다면 신의를 만나야할 지도 몰랐다. 아직은 사흘 밖에 되지 않았으니 조금만 더 지켜보기로 했다. “천마님. 이제 곧 대전 회의가 시작될 시간입니다.” “아!” 대호법 마라겸의 말을 듣고서야 천여운은 원래 이곳에 왔던 목적을 떠올렸다. 천여운이 서둘러 마의에게 물었다. “마의 공. 혹시 전에 정파 무림맹과의 연회장에서 발견되었던 약물 분석이 끝났습니까?” “양귀비가 들어있던 그것을 말씀하십니까?” “맞습니다. 혹시 그 약물을 그대로 제조하실 수 있습니까?” “가능은 합니다만. 어찌?” 의아해하는 마의 백종우를 바라보며 천여운의 눈빛이 반짝였다. * * * 거대한 기둥들이 지탱하고 있는 대전 건물 안에 장로들과 각 파의 종주들이 모여 있었다. 호위전의 음모로 파견 나갔던 장로들도 복귀했기에 장로 석은 지난 번 대전 회의 때보다 비어있지 않았다. 삼 장로 부철용과 사 장로 자금경, 오 장로 항소유, 육 장로 몽오, 팔 장로 문연, 구 장로 사마의, 십 장로 연무화, 십일 장로 환의까지 착석했다. 석좌 뒤편에서 외침 소리가 대전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당대 천마님께서 납시옵니다.” 대전의 뒤쪽 길에서 검은 무복에 금빛 수가 놓아진 예복을 입은 천여운이 등장하자 모든 교인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었다. “천마신교! 천천세!” 천세를 외친 후에 삼 장로가 대표로 외쳤다. “천마신교의 미천한 교인이 삼가 당대 천마님을 배알 하나이다!” 그러자 대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복창했다. “당대 천마님을 배알 하나이다!!!” 아직 약관에 못 미치는 청년이었지만 천여운이 가진 무게감은 대전에 있는 모든 교인들이 느낄 만큼 굉장했다. 천마라는 칭호가 가지는 위명은 그만큼 교인들에게 있어서 상징성이 컸다. 양옆에 좌우호법과 대호법을 대동한 천여운이 걸어 들어와 석좌 쪽으로 향했다. 석좌의 옆에는 교주석에 못지않은 화려한 자리가 있었다. 천마라는 칭호를 가진 천여운을 위해서 장로 회의에서 임시로 새로운 자리를 만든 것이었다. “흠.” 오늘 아침까지도 대전에서 보지 못했던 새로운 좌석에 천여운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아무래도 교주의 자리가 아닌 이곳에 앉으라는 의미 같았다. 누가 갖다 놓은 것인지는 뻔해보였다. ‘그새를 참지 못한 건가.’ 천여운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세 종파의 장로들에게 향했다. 그들은 천여운을 천마로 인정하고서 이번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손을 잡았다. 하지만 위기가 물러났으니 확실하게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었다. ‘아직 교주께서 위를 물려주지 않았으니 석좌에는 앉을 수 없다.’ 교주의 자리에 앉고 싶다면 전대 교주들이 그랬던 것처럼 본교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세 종파와 협의를 이뤄야 할 것이다. 천여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피식 웃었다. 이와 함께 자연스럽게 새롭게 놓인 좌석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건들고는 지나쳐서 석좌에 앉았다. ‘엇?’ 삼 장로 부철용, 사 장로 자금경, 오 장로 항소유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분명 장로 회의에서 있었던 사항을 대호법 마라겸에게 보고를 했는데 천여운이 교주의 자리에 앉으니 어이가 없었다. “흠흠, 천마시여. 그 옆 자리가....” -파스스스스! ‘아, 아닛?’ 그때 부철용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옆에 있던 좌석이 부서져 내렸다. 방금 전에 좌석에 손을 댈 때 공력을 주입했기 때문이었다. 애써 준비해온 자리를 부수고는 석좌에 앉아버리자 세 장로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탁! 천여운이 자리에 앉아서 손을 가볍게 들어 올리자 바로 옆에 서있던 대호법 마라겸이 외쳤다. “착석하시오.” “천마신교! 천천세!” 다시 한 번 천세를 외친 모든 대전 내 종주들이 자리에 착석했다. ‘큭.’ ‘막무가내로구나.’ 석좌에 앉은 것 때문에 불만이 가득 찼지만 세 종파의 장로들도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 이번 대전 회의는 임시 대책 회의로서 사흘 전의 사건으로 두 번씩이나 간자를 허용한 본교의 방어선을 견고하게 구축하고, 비어있는 수뇌부들의 공석들을 채우기 위한 자리였다. 어젯밤에 있었던 장로 회의에서 모두가 동의했기에 임시 내정 책임자인 천마 천여운의 동의 하에 모두가 소집되었다. “그럼 대전 회의를 실시하겠소.” 대호법 마라겸의 외침에 현재 선임 장로인 부철용이 자리에 일어나서 장로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들을 발표하려고 했다. 그것은 현재 장로직의 개정 건이었다. “먼저 첫 번째 안건....” 그때 대호법 마라겸이 그의 말을 끊었다. “잠깐 삼 장로께서는 착석하길 바라오.” “네?” “안건 회의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당대 천마님의 교주 취임식에 관련된 사항을 먼저 논의하도록 하겠소.” “뭐, 뭣? 교주 취임식?” 장로회의 때까지만 하더라도 나오지 않던 사항에 삼 장로 부철용과 두 장로들의 얼굴이 일제히 일그러졌다. < 48장 교주 취임식 (1) > 끝 < 48장 교주 취임식 (2) > 보통 대전 회의에서 있을 주요 안건이나 공표할 내용은 장로 회의에서 결정된다. 어젯밤에 있었던 장로 회의에서 많은 안건들이 논의되었지만 천여운의 교주 취임식에 관련된 내용이 거론된 적은 없었다. 천여운 일파에 속하는 장로들이 그 점에 대해서 한 번도 논의하지 않아서 내심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던 세 종파의 장로들은 당혹스러웠다. “대, 대호법. 이의가 있습니다.” 보다 못한 오 장로 항소유가 이의를 제기했다. 그녀가 자리에 일어나서 대호법 마라겸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건 사전에 전혀 논의되지 않은 사항입니다.” “그, 그렇습니다. 장로 회의에서 올린 안건에 없는 사항이 어째서 임의로 이루어지는지 알 수 없군요.” 그녀를 돕기 위해 사 장로 자금경 역시도 힘을 보탰다. 여기서 그냥 내버려두면 자연스럽게 천여운의 교주 취임식이 정해질 판국이었다. 아직까지 천여운과 협의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럴 순 없었다. “천마님의 교주 위를 물려받는 건은 현 교주님이 깨어나서 논의해도 충분히 늦지 않은 사항이니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두 장로들의 지원을 입은 삼 장로 부철용이 말했다. 하지만 부철용이 바라보는 대상은 각 장로들과 참석한 종주들이었다. 그들의 호응을 이끌어내기 위해서였다. ‘참으로 우습게 되었구나.’ 사실 이 말을 하면서도 삼 장로 부철용은 내심 세 종파의 위세가 낮아졌음을 격감했다. 예전 같으면 여섯 종파가 다른 장로들의 동의나 호응을 구하진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아무런 세력을 모으지 않고 오직 태상교주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밀어붙여서 교주가 된 천유종과 달리 천여운은 차곡차곡 세력을 모아왔다. ‘반면 우리는....’ 여섯 종파에서 세 종파가 없어졌다. 독마종은 완전히 멸종하여 사라졌고, 검마종과 현마종은 해체 되어서 그 전력이 나뉘어졌다. 이제는 확실하게 천여운 일파가 세력 면에서 앞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세 분만 이의를 제기한다는 것이오?” 대호법 마라겸의 물음에 세 장로들이 육 장로 몽오를 쳐다보았다. 그까지 지원을 해줘야 최소 장로 석에서 절반의 이의 제기를 얻어낼 수 있다. 그러나, ‘아닛? 이....이 작자가.....’ 육 장로 몽오는 두 눈을 감고서 그들의 시선을 회피해 버렸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그들과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던 몽오였다. 그런데 지금 태도는 전혀 아니었다. 누가 보더라도 그들을 등지려고 하는 의지가 확고해 보였다. -씨익! 그 모습을 보면서 흡족하게 웃고 있는 이가 있었으니, 구 장로 사마의였다. 어젯밤 장로 회의가 끝나고 교분이 두터운 몽오와 따로 시간을 가졌던 사마의는 설득 끝에 몽오를 천여운의 산하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몽오 역시도 천여운이 당대 천마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 이미 마음을 어느 정도 정해놓은 상태라 그리 어렵지 않았다. ‘빌어먹을!’ 삼 장로 부철용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난감하게 되었다. 표결권이 큰 장로들의 숫자에서 밀리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렇게 된다면 이의 제기가 무색해질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종주들을 믿을 수밖에 없나.’ 두 회전의 대전 회의에서 종주들의 지지도는 여섯 종파 측에서 육 할이 넘게 확보하고 있었다. 그것만 유지된다면 적어도 이의 제기가 통과되게 된다. “종주들 측에서도 이의 제기에 찬성하는 분이 있으시오?” “저희도 세 장로님들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대호법 마라겸의 물음에 도마종 산하의 오룡도종의 조상이 대표로 말하자, 다른 종주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이의제기에 동의했다. 그러나, ‘이런.....’ 세 장로들의 인상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종주들 중에서 자리에 일어난 자는 고작해야 서른다섯 명에 불과했다. 그들은 세 종파의 산하에 속해있는 종파의 종주들이었다. ‘세 종파의 위세를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냐.’ 검마종이 해체되고 그 숫자가 확연히 줄었다. 원래는 산하에 속하지 않더라도 여섯 종파의 위세에 따르는 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더 이상 힘을 보태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대 천마라는 절대적인 존재가 탄생했기 때문이었다. 사흘 전 대전에서 벌어진 대결로 천여운의 위용을 확인한 종주들의 지지도는 그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크윽, 표결로 밀어 붙일 수가 없게 되었구나.’ 팔 할 이상이 천여운을 지지하는 이상 교주 취임식은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때 천여운 산하의 장로들은 승기를 확신했다. 내부로 침투한 간자들을 처단하기 전만 하더라도 세 종파는 동맹의 관계였다. 하지만 그들을 처리한 시점부터는 여전히 내부에서 골머리를 썩게 만들 적대 관계임은 변함이 없었다. 대호법 마라겸이 입을 열었다. “이의 제기는 표결권에 오 할을 넘지 못했으니 다시 당대 천마님의 교주 취임식에 관련된 회의를 진행하도록 하겠소.” ‘됐다!’ 팔 장로 문연과 구 장로 사마의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지난 번 대전 회의로 양대 세력 간에 지지도에 있어서 반전이 일어날 거라고 예측은 했지만 이제 확실해졌다. 바로 그때였다. 삼 장로 부철용이 굳은 인상으로 대전 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는 천여운을 향해서 한 쪽 무릎을 꿇고 포권을 취하면서 말했다. “저는 당대 천마님의 전통성과 천마령을 인정하고 따릅니다. 하나 본교에도 적법한 절차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번 간자 사태로 분명 교주님께서 적의 농간에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그 분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정식 절차대로 위를 물려받는 것이 옳은 줄 사료되옵니다.” -팍! “저희도 삼 장로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기세를 이어서 사 장로 자금경과 오 장로 항소유 역시도 나와서 한 쪽 무릎을 꿇고 부철용의 의견에 동의한다고 의사를 밝혔다. 이들의 행동은 표결권과는 무관하게 내정 책임자인 천여운에게 주청을 하는 것이었다. ‘현 교주님을 물고 늘어지는 건가.’ 천여운의 옆에서 회의를 지켜보는 좌호법 이화명이 인상을 찡그렸다. 저들은 이의 제기나 표결권에 있어서 뜻대로 되지 않으니, 교주를 빌미 삼아 절차를 따라야 한다고 우기는 것이었다. 이화명의 생각은 정확했다. ‘이렇게 된 이상 다시 전력을 확보하기까지 최대한 시간을 지체시켜야 한다.’ 외부의 적이 강성하고 전통성을 갖춘 천여운을 구심점으로 모든 세력이 하나로 일원화 되기 전에 기득권을 지켜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오백 년 동안 유지해왔던 여섯 종파 체제는 완전히 무너져 내릴 것이다. ‘쉽게 당하지 않겠다는 건가.’ 팔 장로 문연의 눈빛이 무거워졌다. 이렇게 내부 싸움으로 계속 지연 되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문연이 조심스럽게 천여운을 바라보았다. ‘역시 심기가 불편하시구나.’ 세 장로를 바라보는 천여운의 표정은 차갑기만 했다. 천여운이 여섯 종파를 증오하는 것을 모르는 자들은 산하에 아무도 없다. 하지만 강한 적이 외부에 도사리는 와중에 교내 세력이 약화되는 것을 우려한 장로들이 그들을 장기적으로 품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서둘러 교주의 위에 올라서 남은 세 종파를 아우르려고 했건만.’ 구 장로 사마의 역시도 같은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저들이 강하게 나오는 것을 억누를 필요가 있었다. “마의 공은 교주님의 치료에 진척이 없다고 보고했소. 세 분 장로님들의 뜻도 알겠지만 극도육무문이 언제 본교의 영역으로 침공해올지 모를 상황에 언제까지 수장의 자리를 비워둘 수 없는 노릇이 아니오.” “그렇다면 더더욱 제 의견은 같소. 마의 공이 안 된다면 신의라도 초빙해서 교주님을 회복시킨 후에 절차를 따르는 것이 옳소.” “허어.....” 사마의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절대로 물러나지 않을 거라는 강경함을 보이는 태도에 대전의 분위기가 점차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당대 천마님의 말씀이 맞단 말인가.’ 저들은 절대로 기득권을 포기할 생각 따윈 일체 없었다. 어떻게든 남은 세 종파가 기존의 체계를 유지해서 교내에서 가장 큰 성세를 누리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무릎을 꿇고 있던 세 장로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삼 장로 부철용이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아직까지 본교의 하늘은 교주님이십니다. 다른 사항은 몰라도 양위에 관련된 것은 절차를 무시하고서 진행된다면 대전 회의가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대전 회의는 교주님께서 쾌차 하실 때까지 참석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삼 장로 부철용이 몸을 돌리자 두 장로들도 따랐다. 그러자 그들의 산하에 있는 종주들 역시도 머뭇거리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웅성웅성! 분위기가 묘하게 돌아갔다. 대전의 출구 쪽으로 걸어가는 부철용의 입 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이것은 일종에 도박이었다. 만약 여기서 자신들을 제지시킨다면 그들은 더욱 강경하게 교주를 명분 삼아서 천여운이 폭정을 행하려 한다고 우길 참이었다. ‘외부에 적이 없다면 우리를 버리더라도 큰 타격이 없겠지만 지금 전력에서 이 할이 깎여나가는 무리수를 둘 수 있을까?’ 부철용은 자신의 지략이 통할 거라고 확신했다. 천여운이 아무리 자신들을 증오한다고 할지라도 더 이상의 전력 감소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싸움은 피할 것이다. ‘아무리 책략이라고 해도 무례하군.’ 대호법 마라겸이 손을 들어 호법전의 무사들에게 대전을 빠져나가려고 하는 그들을 막게 하려고 했다. [그냥 가게 내버려두십시오.] [......충!] 천여운의 심중을 알 수 없었지만 명령에 따라야 했다. 결국 대전 회의 중에 장로 세 명과 종주 서른다섯 명이 나가는 사태가 발생하고야 말았다. 사실 내정 책임자나 혹은 천마의 권위로 억지로 그들을 붙잡을 수 있었지만 천여운은 그리 하지 않았다. 모두가 의아해 하는 가운데 천여운이 마라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차라리 잘됐군요. 확실하게 아군과 적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으니.” 적이라고 지칭하는 말에 마라겸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대로 내분이 지속된다면 결국 본교의 힘은 다시 약화될 수밖에 없으리라. 채찍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기에 교주인 천유종도 그랬고, 전대 교주인 천인지 역시도 그들이 원하는 바를 어느 정도 수용해줄 수밖에 없었다. ‘천마님께서는 대체 어찌 하시려고 그러시는 가.’ 우려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 * * 대전 회의가 끝나고 그날 저녁 술시(戌時) 초. 내성 연회장에 있는 누각에 등불로 밝혀져 있었고, 전각 아래의 탁자 위로 푸짐한 음식들과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그곳에는 세 명의 중년의 남녀가 있었는데, 그들은 다름 아닌 삼 장로 부철용과 사 장로 자금경, 오 장로 항소유였다. 불과 몇 시진 전만 하더라도 대전을 나섰던 그들이 어째서 다시 내성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불과 반 시진 전의 초대 때문이었다. 도마종의 장원에 모여서 앞으로의 일을 회의하고 있던 그들에게 호법전의 사자가 찾아와 천여운의 전갈을 알렸다. 짧은 문구였지만 그들이 원하는 그 내용이 적혀 있었다. [협의를 하겠다.] 천여운은 술시 초까지 내성 연회장의 누각에서 저녁 식사를 하면서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호법전의 사자가 일러주었다. “과연 부 장로의 책략이 통했습니다.” 오 장로 항소유가 들뜬 얼굴로 상기되어 그를 칭찬했다. 처음에는 혹시나 천여운이 계략을 펼쳐서 자신들을 함정에 빠뜨리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던 그녀였다. 하지만 삼 장로 부철용이 그것은 아니라고 단언했었다. ‘그렇게 된다면 본교의 전력이 많이 깎이게 될 것이오. 아무리 당대 천마가 여섯 종파와 적대적이라고 해도 그런 무리수는 두지 않을 것이오. 하나, 확실하게 해둘 필요는 있지 않겠소.’ 그들은 호법전의 사자에게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알렸다. 그리고 그 요구사항은 대부분 허가되었다. 내성의 별실이 아닌 탁 트여 있는 외부에서 식사 자리를 갖는 것부터, 오직 시종들을 제외한 경비 무사들, 호법전의 고수들을 물리는 것까지 말이다. “후후후. 더 이상 걱정할 것은 없소. 딱 하나를 제외한다면 말이오.” 그것은 술과 음식이었다. 애초에 자신들을 산하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협의였기에 천여운이 음식을 가지고 수작을 부리진 않았을 것 같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시종들은 무공을 익히지 않았으니 확인해볼 수가 없군.’ 설사 산공독이라고 해도 체내에 들어온 것을 역류시킬 수 있었지만, 세상에는 수많은 독이 있으니 모를 일이었다. 그들이 먼저 도착해서 주위에 함정이나 매복이 없는지 확인이 끝난 사이에 천여운이 연회장의 누각으로 도착했다. 유일하게 대동한 사람이라고는 대호법 마라겸뿐이었다. 모든 무사들을 물렸기 때문에 유일한 호위인 그만큼은 세 장로들 역시도 오지 말라고 요구할 수는 없었다. “천마님을 배알합니다.” 그들이 일어나서 천여운에게 인사를 올렸다. 대전 회의에서 보았을 때와는 사뭇 다르게 밝은 표정들이었다.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렇게 가볍게 인사를 나눈 후에 누각 아래 술상에 앉은 천여운에게 삼 장로 부철용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이렇게 당대 천마께서 우호적인 자리를 마련해주셔서 저희 세 장로도 감읍할 따름입니다.” 인사치례에 불과한 말이다. 이것은 돌려 말해서 ‘네놈이라고 해도 별 수 없지 않느냐.’와 같았다. 옆에서 호위를 하고 있는 마라겸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그들을 싸늘하게 쳐다보았다. “흠흠, 일단 음식이 식을 수 있으니 식사를 하면서 협의를 하시는 게 어떠신지요?” 사 장로 자금경의 말에 천여운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삼 장로 부철용이 탁자 위에 올려 있는 술병을 들어서 천여운의 잔에 따르면서 말했다. “당대 천마님께 한 잔 올리겠나이다.” 그 말을 하는 삼 장로 부철용의 눈매가 날카로웠다. 부철용이 먼저 술을 따른 것은 천여운이 이것을 마시게 해서 혹시나 수작을 부리지 않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탁! 천여운이 부철용이 따른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 48장 교주 취임식 (2) > 끝 < 48장 교주 취임식 (3) > 천여운이 아무렇지 않게 술을 마시는 모습을 확인하자 세 장로들은 음식에 특별한 장난을 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천천히 이 작은 연회를 즐기면서 원하는 바를 협의하면 된다. 처음 시작은 공석이 된 일 장로에서 삼 장로까지의 자리다. 선임 장로의 자리들을 교내 병권과 내정의 절반을 움직일 수 있는 자리이기에 반드시 확보해야 했다. ‘그리고 해산된 검마종 산하의 전력이나 교주전에서 회수해 간 사업장들을 받게 된다면 원래의 성세를 되찾게 된다.’ 세 종파가 없어진 것은 전력 감소가 있었지만 잘되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섯이서 나누던 기득권을 셋이서 나눈다면 그동안보다 더욱 큰 고기를 가질 수 있게 되니 말이다. 더군다나 근 백 년 동안 현마종, 검마종에서 독식하다시피 해왔던 교주의 자리도 자신들의 외손자들이 가질 수 있게 되리라. -홀짝! 기분이 좋아진 세 장로들이 안심하고서 술을 따라 마셨다. 의심이 많은 부철용이 내공을 끌어 올려서 확인해 보았지만 전혀 문제가 없었다. 몇 차례 술이 들어가자 시종들이 고급 음식들을 하나 둘씩 내오기 시작했다. 꽤 신경 쓴 연회 자리라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후후후, 우리의 전력이 신경 쓰이긴 했나 보구나. 이 정도로 신경 쓰는 것을 보면 말이야.’ 만족스러웠는지 삼 장로 부철용의 얼굴에 미소가 띠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연회가 시작되자 내성 숙수가 직접 황소를 끌고 와서 부위를 해체하여 숯불에 굽는 등 갖가지 요리를 해왔다. “하하하핫, 진즉에 이런 자리가 마련되었다면 참으로 좋을 뻔 했습니다.” 맛있는 음식과 술을 들어가니 분위기는 한결 들떠 올랐다. 어느 정도 주거니 받거니 좋은 분위기가 형성되었다고 생각한 삼 장로 부철용이 본격적으로 협의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다. “천마님이시여. 그럼 슬슬 협의에 관한...” “그 전에 별미를 하나 드시겠습니까?” “별미.....요?” 식사와 반주를 곁들이는 동안 말이 없던 천여운이 처음 꺼낸 말이었다. 세 장로들이 의아해 하자 천여운이 숙수가 해체하고 있는 황소를 가리켰다. “얼마 전에 먹은 음식인데, 북경 쪽에서는 별미로 유명하다더군요.” “북경 쪽에서요?” “이왕 우호적인 관계를 갖기로 하였으니, 제가 여러분께 직접 대접하도록 하지요.” “천마님께서 직접요?” “네.” 그 말과 함께 천여운이 반쯤 해체되어 있는 황소가 놓여있는 곳으로 갔다. 내성 숙수에게 뭔가를 이르자 그가 알겠다면서 양념장 같은 것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천여운이 손에 식칼을 들고 황소의 가슴 부위를 해체했다. ‘흠?’ 가슴 부위를 해체한 천여운은 황소의 체내에서 심장 부위를 꺼내들었다. 도살 된지 얼마 되지 않은 황소의 심장은 미세하게 뛰고 있었고,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다. ‘설마 생으로?’ 천여운이 그것을 들고 와서 접시에 얹어서 네 등분으로 나누었다. 항소유는 평소에 생식을 하지 않았기에 미간을 찡그렸다. 내성 숙수가 방금 만든 양념장을 들고 와서 말했다. “소금만 살짝 간해서 드셔도 맛있지만 제가 만든 양념장에 찍어 드신다면 훨씬 별미로 느껴지실 겁니다.” “오, 이건 오랜만에 보는 요리구려.” 사 장로 자금경은 예전에 먹어본 적이 있는 듯 했다. 평소부터 진귀한 음식들을 찾아서 먹는 것을 좋아 하는 자금경이 먼저 그것을 집어서 양념장에 찍어서 입에 넣었다. 천여운 역시도 익숙한 것처럼 잘라진 소의 생 심장을 젓가락으로 집어서 양념장이 아닌 소금에 살짝 찍어서 먹었다. ‘소금이라....’ 이것을 유심히 지켜본 삼 장로 부철용이 젓가락으로 그것을 집어서 천여운과 마찬가지로 소금에 찍어서 입에 넣었다. 핏기가 가득해서 비릴 줄만 알았는데 생각보다 담백한 맛이 입가를 맴돌았다. -우걱우걱! ‘과연 별미로군.’ 직접 소의 심장을 해체해 와서 살짝 의심을 했었지만 아닌 듯 했다. 생식에 거부감이 있는 항소유였지만 차마 당대 천마인 천여운이 직접 대접하는 것을 거부하기는 그랬는지 젓가락에 기를 불어넣어 조금만 잘라내서 입에 넣었다. ‘으으, 본 녀의 취향은 아니구나.’ 미세한 피 비린내가 썩 달갑지는 않았다. 그래도 성의는 보였으니 이 정도면 되었다고 여겼다. -탁! 천여운이 혼자 잔에 술을 따라서 단숨에 들이키고는 입을 열었다. “별미도 맛을 보았으니, 그럼 그 협의라는 것을 이야기 하도록 하시지요.” “후후후, 알겠습니다.” 고대하던 순간이었다. 천여운이 얼마큼 수용할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많은 것을 얻어내야 했다. 그들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삼 장로 부철용이 머릿속으로 정리해온 요구사항들을 하나씩 꺼내려고 했다. 그런데, “먼저 제 요구사항부터 여러분께 말씀드리겠습니다.” “넷?” 뜬금없는 천여운의 말에 부철용이 요구사항을 꺼내려다 입을 닫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협의라는 것은 서로가 원하는 것을 맞춰 나가는 게 아닙니까?” 담담하게 답변하는 천여운을 바라보며 세 장로들은 이것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다. 그들은 원래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밝히고 그것을 조율해나가려 했다. 그런데 천여운 또한 요구사항이 있다고 하니 전혀 예측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흠.....’ 난감했다. 세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전음을 보내서 의견을 나누고 싶었지만 전에 마룡장종에서 한 가지 미심쩍은 부분이 생겨서 쉽게 할 수가 없었다. 천여운이 전음을 엿들을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삼 장로 부철용이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먼저 말씀하시지요.” 어차피 아니다 싶은 부분은 과감하게 거절하면 될 테니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천여운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요구사항을 꺼냈다. “첫 번째. 기존의 관행처럼 이어져 오던 여섯 종파 체제를 없애겠습니다.” “네?” 그 말에 세 명의 장로들이 동시에 반문했다. 그들이 예상한 것은 천여운 산하로 들어와서 그를 지지해달라는 것 정도로 생각했는데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치고 들어왔다. 어이가 없어서 순간 할 말을 잃었던 부철용이 따지고 들려했다. “천마님. 지금 무슨...” “아직 제 요구사항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묵직한 천여운의 경고음에 부철용이 노기가 서린 눈으로 노려보다가 이내 답했다. “후우.....일단은 알겠습니다.” “두 번째. 기존의 장로직을 개편해서 본교의 전통대로 강자존에 의거하여 가장 뛰어난 무위를 지닌 순으로 장로직의 서열을 매기겠습니다.” “하!” 오 장로 항소유가 기가 찬 나머지 눈매가 매섭게 올라갔다. 만약 천여운의 말대로 진행된다면 한 팔을 잃은 그녀는 까딱하다가 가장 최하위 서열로 밀려날 확률이 높았다. “세 번째. 본교의 모든 종파는 한 개의 단(團) 이외에는 어떠한 무력 집단을 소요할 수 없으며, 그 외에 보유하고 있던 무력 집단은 전부 본교에서 운용하는 단과 대로 개편하도록 하겠습니다.” 두 번째 요구 조건까지도 가당치 않다며 거절할 생각으로 참고 들었다. 물론 천마의 권위를 생각해서 그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세 번째 요구를 듣는 순간 세 장로들은 일제히 분노를 참지 못했다. “네 번...” 천여운이 네 번째 요구사항을 말하기도 전에 삼 장로 부철용이 탁상을 내리쳤다. -쾅! 그와 동시에 대호법 마라겸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서 그의 목에 겨냥했다. 목에 날카로운 예기가 느껴짐에도 불구하고 부철용은 노기가 서린 것을 거두지 않고 천여운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지금 천마님께서는 무엇을 하자는 겁니까?” “......우호적인 협의를 위해서 요구 사항을 말하는 겁니다만.” “이게 우호적인 겁니까? 지금 저희와 척을 지자고 하시는 것과 별 차이가 없게 들립니다.” 네 번째 요구사항을 듣진 못했지만 세 번째까지만 수용해도 그들은 모든 힘을 잃게 된다. 심지어 기존에 가졌던 기득권을 잃고서 모든 교인들과 경쟁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런 분노하는 부철용을 바라보며 천여운이 담담하게 말했다. “여러분과 척을 지지 않기 위해서 이런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하! 이게 말씀입니까? 천마께서 말씀하신 조건은 저희 귀에는 저희 세 종파와 끝내 척을 지겠다는 말로 밖에 들리지 않는 걸요.” 오 장로 항소유가 앙칼진 목소리로 말했다. 대호법 마라겸이 검을 겨냥한 채 위협하고 있었지만 두렵지 않았다. 지금 내성 바깥에는 교내에 있는 삼대 종파의 모든 전력이 정원 쪽 방향에서 주둔한 채 대기하고 있었다. 만약 자신들에게 일이 생긴다면 무조건 내성 벽을 넘어서 진입하라고 명을 내렸다. 그것은 천여운에게 이번 협의 전에 자신들이 내걸었던 조건이었다. 천여운이 이 모든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협의를 하겠다고 했기에 모든 것이 완만하게 진행된다고 흡족해했던 그들이었다. ‘후우.’ 삼 장로 부철용이 솟구쳤던 분노를 어느 정도 가라앉히고서 냉정한 목소리로 천여운에게 말했다. “천마님이시여. 저희가 가진 힘은 본교의 이 할에 해당합니다. 그것을 전부 잃고도 앞으로 극도 육무문을 비롯해 정파 무림맹과 사파 연맹을 견제하실 수 있으리라 여기시는 겁니까?” 목소리만 이성을 되찾았지 그 내용은 실상 협박에 가까웠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게 만들고 요구 조건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교내 전력에서 이탈하겠다고 위협을 가하는 것이었다. ‘네놈은 실수를 저지른 거다. 어리석게도 우리의 심기를 건들다니.’ 이렇게 된 이상 이 기회를 통해서 확실하게 천여운을 압박해야 겠다고 여겼다. 모두가 비슷한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자 천여운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휴, 역시 네놈들을 상대로 좋게 이야기하는 건 힘들군.” “뭣?” 갑자기 달라진 천여운의 말투에 그들의 인상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방금 전까지 존대하던 말투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눈빛에서 싸늘한 냉기가 풍겨졌다. 천여운이 그들을 바라보면서 명령했다. “꿇어라.” 대뜸 꿇으라는 말에 세 장로들이 어이가 없어서 반문하려는 순간, -찌릿! “끄으으으윽!” "꺄아아아악!“ “끄헉!” 세 장로들이 일제히 심장을 갉아먹는 듯 한 강렬한 고통에 온몸을 뒤틀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무언가가 자신들의 심장에 직접적으로 공격해오는 것 같았다. 당황한 그들이 내공을 일으키려 했지만, -욱씬욱씬! “흐헉!” "꺄아아아악!" "끄어어억. 다, 단전에도 통증이!" 단전에서도 심장에서 느껴졌던 찢어질 것만 같은 고통이 느껴지면서 내공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내공을 움직이면 통증이 유발했다. 이것은 마치 자신들을 체내를 갉아먹는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내상을 입었을 때보다도 고통스러웠다. ‘끄으으윽 대,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부, 분명히 확인했는데?’ 그들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음식이나 술에 독 같은 것이 없는 것을 확인했고, 심지어 어지간해서는 천여운이 먼저 손을 대는 것만 먹었는데 이 현상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꿇어라.” 천여운이 다시 한 번 그들에게 명했다. 고통을 이겨내고 자존심을 지키려고 해도 심장과 단전을 파고드는 강렬한 고통은 그들을 너무도 무력하게 만들었다. -쿵! 쿵! 쿵! 세 장로들이 고통스러워하면서 겨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고통은 사라졌다. 삼 장로 부철용이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서 거친 숨을 내뱉으며 소리쳤다. “대, 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그 질문에 천여운이 입 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네놈들 같이 머릿속에 썩은 것으로 가득한 놈들에게 어울리는 짓이지.” “그......게 대체?” “고독이다.” “!?” 고독(蠱毒)이라는 말에 세 장로들의 눈동자가 동시에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예전에 들어본 적이 있었다. 독충인 고독은 체내에 잠복해 있다가 숙주를 위협하는 위험한 독이라고 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화경의 고수였기에 체내에 영향을 주는 독물이 잠입하면 금방 알아채고서 역류시킬 수 있다. “마, 말도 안 돼. 고독이 무슨 수로?” 당황해하는 그들을 바라보며 가면 속 마라겸이 이틀 전을 떠올렸다. ‘고독을 체내에서 제거해주신다는 말씀입니까?’ ‘대호법께는 굳이 고독이 있어야 할 필요성이 없어 보입니다.’ 천여운은 대호법 마라겸의 몸속에 있는 고독을 체외로 배출시키게 했다. 대호법의 일가가 대대로 대물림 받아왔던 고독은 오직 숙주가 죽거나, 천마기를 가진 명령권자에 의해 체외로 빼낼 수 있다. 영고는 본 적이 있었지만 한 번도 체내에 있던 고독을 본 적이 없었던 마라겸은 그것이 빠져나오면서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이게 대체?’ 그것은 단순히 몇 개가 아닌 수백 마리의 실벌레와 같았다. 그런데 여기서 천여운은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호법이 고독이라 불렀던 이 체내에 기생하는 벌레들은 일반 적으로 알려진 독(毒)을 가진 고독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이 벌레들을 먹게 된다면 단순히 단백질 덩어리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활용해도 되겠군.’ 천여운은 이것을 살아있는 황소에게 복용시켰고, 그것들은 자연스럽게 본능이 이끄는 대로 소의 심장에 안착했다. 그 심장을 사이좋게 세 장로들은 먹은 것이었다. ‘설마 그것을 이들에게 사용하실 줄이야.’ 마라겸은 이런 천여운의 놀라운 지략에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세 장로들은 자신들의 고통이 고독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통증이 사라졌기 때문에 내공을 끌어올려서 이것을 제거하려고 해도, “끄아아아아악!” 심장을 갉아먹는 엄청난 고통에 비명을 지르면서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거의 죽으려고 하는 사 장로 자금경을 바라보면서 남은 두 장로들은 쉽게 고독을 제거할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확실하게 말해주지. 그 고독은 천마 조사님께서 직접 만드신 것이다. 오직 천마기에 의해서만 통제 된다. 없애려고 허튼 수작을 부려도 소용없다.” “처, 천마 조사님께서?” “네놈들이 내 통제에 따르지 않거나 위협을 가할 경우에 발동되도록 되어 있다.” “그, 그럴 수가?” 천여운의 말에 그들은 어찌 할 바를 몰라 했다. 그 말은 결국 자신의 명령에 거역한다면 언제든지 고통스럽게 죽게 된다고 위협을 하는 것이었다. ‘다, 당했다!’ 확실하게 대처했다고 여겼는데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다. 이렇게 된다면 자신들은 고독에 의해 죽지 않기 위해서라도 천여운의 통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망연자실해 하는 그들에게 천여운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군. 네 번째 요구 조건을 깜빡했어.” “네 번째?” “내 산하로 받아주는 대가로 적당한 공물이 받고 싶은데 말이야.” “공물이라니 대체 무슨?” 알 수 없는 불길함에 사로잡힌 세 장로들에게 천여운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세 종파에 있는 교주 부인들의 오른팔 한 짝 씩을 받고 싶은데 말이야. 우.호.적.인 관계를 위해서 말이지. 되도록 그대들의 손으로 직접 해줬으면 좋겠군.” “!?” 말도 안 되는 천여운의 요구 조건에 그들의 안색이 지독할 만큼 창백하게 물들었다. < 48장 교주 취임식 (3) > 끝 < 48장 교주 취임식 (4) > 천여운은 교주 집무실의 탁자 위에 올려 있는 약품이 처리된 두 짝의 오른팔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깨까지 정확하게 잘려진 팔들은 가녀린 여성의 팔이었다. 하나는 어젯밤 도마종에서 보낸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그저께 음마종에서 보냈다. ‘자 부인께서는 이미 돌아가셨는지라 양해 부탁드립니다.’ 복마종의 자 부인은 이미 죽었는지라 운이 좋게도 사 장로 자금경은 손에 혈족의 피를 묻히지 않을 수가 있었다. 천여운은 두 짝의 팔을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제 놈들 목숨이 더 고귀하단 말이군.’ 그래도 내심 본교를 움직여 왔던 장로로서의 자존심과 혈족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으로 말도 안 되는 자신의 요구를 거절하고 자긍심을 보여줄 거라 여겼는데 예상 밖이었다. 오백 년이라는 세월 동안 권력욕에 물든 위정자들의 끝을 보여주었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인가.’ 경멸스러우면서 한편으로 씁쓸하기마저 했다. 본교가 이런 작자들에 의해서 휘둘렸다는 사실이 말이다. ‘운이 좋군. 목숨을 더 부지할 수 있게 되어서.’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세 종파 역시도 처리하고 싶은 것이 본심이었다. 하지만 지금 외부의 적들이 강성해지는 상황 속에서 내부의 썩은 부위를 단숨에 도려내는 것은 다소 위험부담이 컸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닷새 전, 천여운은 지휘를 막론하고 모든 수하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하여 의견을 청했다. 그 동안 본교를 휘둘러왔던 여섯 종파에 대한 건이었다. 세 종파가 해체되었고 남은 세 종파를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의견이 궁금했다. 처음에는 복수를 단행하고자 했던 천여운이었지만 교내에 두 차례에 걸쳐서 간자가 침투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나니, 교내 전력의 약화를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의견은 거의 삼 대 칠로 나뉘었다. ‘훗날의 후환을 남겨둘 바에는 본교의 개혁을 위해서라도 확실하게 숙청해야 합니다.’ ‘썩은 부위를 내버려둬서 더욱 곪게 만들 바에는 잘라내야 합니다.’ 세 종파를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은 후환을 남겨둬서는 안 된다는 이유를 바탕으로 의견을 보였다. 의외로 이런 의견들은 삼 할에 불과했다. 그 동안 여섯 종파의 폐해를 지켜봐왔고 그들이 마교의 발전을 갉아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살려둬야 한다고 주장한 쪽이 칠 할이었다. ‘만약 외부에 적이 없다면 확실히 처단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때가 아닙니다.’ ‘아직까지 세 종파와 유착되어 있는 산하의 종파들이 많습니다. 그들 모두를 숙청하려면 아군의 피해도 감당해야 합니다.’ ‘저도 의견이 같습니다. 그리고 화경의 고수 셋이 차지하는 비중은 큽니다. 벌써 본교에 네 명이나 되는 화경의 고수를 잃은 상태에서 이 셋마저 숙청한다면 앞으로 다가올 적들을 감당키가 힘듭니다.’ 반대하는 쪽은 아군의 전력 감소를 우려했다. 양 측에서 주장하는 바는 극명하게 장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세 종파를 남겨두게 된다면 계속 해서 내부에 골머리를 썩게 만들 적을 살려두는 셈이었고, 그들을 없앤다면 마교의 전력 감소로 외부의 적들에게 취약해진다. 이때 천여운은 많은 고심을 했다. 전력을 감소시키지 않고 남은 세 종파을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을 말이다. 그렇게 떠올린 것이 바로 고독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고독으로 그들을 통제한 후에 본교를 개혁하여 세 종파의 전력을 분산시키는 방법이었다. 이렇게 된다면 이 할의 세력을 본교가 운용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나아가서 세 장로들을 외부의 적들과의 싸움에 선봉으로 세워서 활용할 수 있게 되는 장점이 생긴다. 수하들 역시도 이 같은 천여운의 중도적인 책략에 대부분 동의했다. ‘선대 교주들도 이런 고민을 했을까?’ 막상 힘을 가지게 되었지만 확실하게 정리할 수 없는 현실이 씁쓸했다. 이상을 이루려고 한다면 결국 현실과 부딪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나름의 타협점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전력 감소가 두려워서 내부의 적을 죽이지 못한다면 답은 하나다. 그들을 처리해도 될 만큼 본교의 전력을 키운다.’ 이것이 천여운이 얻은 최상의 답이었다. 당분간은 세 종파의 장로들을 이용해서 외부의 적을 견제하면서, 그들이 더 이상 필요 없을 만큼 내부의 힘을 키운 뒤에, ‘놈들을 없앤다.’ 그 기간을 길게 두지 않을 것이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본교에 새로운 고수들을 양성하는 일이었다. 무에 있어서 뛰어난 재능을 지닌 육검이나 삼십 위 권 내에 있는 단주 급에서 새로운 화경의 고수를 탄생시키는 것이 관건이었다. 천여운이 그렇게 향후 계획을 짜고 있을 때, 누군가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똑똑! “천마님이시여. 예복으로 준비 하셔야 합니다.” 대호법 마라겸이었다. “아아.....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천여운이 집무실의 책상 의자에서 일어났다. * * * 정오 무렵의 차가운 겨울 하늘. 태양이 중천에 떠있는 새파란 하늘에는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큰 행사를 치르기에는 더 없이 좋은 날이었다. -웅성웅성! 마교의 내성 대외전에는 수많은 교인들이 모여들어 발을 디딜 틈이 없을 만큼 북적거렸다. 성내에 있는 대부분의 교인들이 집밀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며칠 전의 공표로 인해 모여든 교인들의 얼굴에는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화르륵! 정오의 대낮이었지만 사방에 불을 밝혀놓았다. 그것은 마신과 불을 숭상하는 천마신교의 전통에 의해서였다. 단상 위에는 거대한 성화대가 놓여 있었는데 그곳에는 아직까지 불을 붙여놓지 않았다. “조금 더 앞으로 물러나시오.” “허어, 여기서 어떻게 뒤로 가란 말이오!” 호법전의 무사들이 앞으로 밀고 들어오는 교인들의 거리를 벌리게 했다.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새로운 본교의 하늘을 보기 위한 교인들의 마음은 이해했지만 위험할 수도 있으니 거리는 유지해야 했다. -둥! 둥! 둥! 내성 벽의 위에서 북을 치는 소리가 퍼져왔다. 첫 번째 북소리는 행사가 시작된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였다. “오오오! 이제 시작하려나 보오.” “드디어 취임식인가.” 내성에서 대외전으로 이어지는 곳에는 붉은 비단을 펼쳐 길을 만들어 놓았고, 그 양 옆으로는 본교의 수뇌부들과 종주, 단주들이 나란히 서있었다. 모두가 화려한 예복을 갖춰 입고 경건한 자세로 기다리고 있었다. “주군께서 교주의 자리에 오르시게 되다니.” 고왕흘이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말하자, 백기나 다른 천여운의 수하들 역시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 순간을 만끽했다. 마도관에 있을 때만 하더라도 과연 쟁탈전을 이겨내고 소교주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까 걱정을 했는데 이렇게 교주의 위까지 오르는 날이 왔다. “그나저나 허봉이 안타깝게 되었군요.” 사마착이 이 자리에 없는 허봉을 생각하면 안타까웠는지 말했다. 내성에서 대외전의 단상까지는 오직 단주 급 이상의 고위직들만이 자리했기에 대주급 이하로 는 일반 교인들과 마찬가지로 밑에서 취임식을 지켜봐야 했다. “뭐, 규칙이 그러한 걸 어쩌겠나.” 백기가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혼자 대주들의 푸른 예복을 입고서 이곳에 서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본교의 예복은 직위에 따라서 그 색이 결정되는데, 장로 급들은 보라색 예복을 입었고 단주 급들은 붉은 예복을 갖춰 입는다. “허봉이 주군의 취임식을 가까이서 보고 싶어 했는데 아쉽긴 하겠네.” 제 일 수하라고 불리는 만큼 허봉의 충성도는 수하들 중에 최고였다. 취임식이 정해지고 나서 신나했던 그였지만 단주 급 밑으로는 일반 교인들과 같이 행사를 지켜 봐야 한다고 해서 어깨가 축 쳐졌었다. “헤에, 그런데 저기 뒷모습이 익숙하지 않나요?” 붉은 예복을 갖춰 입어서 평소보다 훨씬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문규가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곳은 대외전의 단상이었다. 대외전의 단상 위에 성화대 옆에 어딘지 익숙한 느낌의 뒷모습이 보였다. “흐음.” 모두가 유심히 지켜보는 가운데 그 익숙한 뒷모습의 사내가 고개를 획하고 돌려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고왕흘과 백기, 사마의 등의 눈이 일제히 커졌다. “허, 허봉?” 그는 다름 아닌 허봉이었다. 멀리서 허봉이 성화대의 불을 붙이는 기름을 적신 횃불을 잡고서 신이 난다는 듯이 그들을 향해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취임하는 교주에게 횃불을 넘겨주는 역할을 부여 받은 모양이었다. 헤벌쭉 웃고 있는 모습에 모두가 방금 전까지 그를 안쓰러워했던 것을 허탈해 했다. “......쓸데없는 걱정을 했군.” “흠흠, 그러게 말일세.” 백기의 담담한 말에 고왕흘은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 내성 벽 위에서 다시 한 번 북소리가 들리며 동시에 뿔피리 소리가 성내 전체로 울려 퍼졌다. -둥! 둥! 둥! -뿌우우우우우우! 내성의 대문이 열리며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독특한 문양의 가면을 쓴 그는 대호법 마라겸이었다. 예복을 갖춰 입은 마라겸이 무언가를 공손히 받치고서 들고 나오는데, 붉은 비단 길의 양옆에 나란히 서있던 장로, 종주, 단주들이 일제히 엎드려서 외쳤다. “천마신교! 천세! 천세! 천천세!” 그들이 외치자 대외전에 모여있는 모든 교인들이 일제히 복창했다. “천마신교!!! 천세!!! 천세!!! 천천세!!!” 몇 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동시에 외치자 마교의 성내 전체가 뒤흔들다 못해 하늘까지 쩌렁쩌렁 울리는 느낌이었다. 대호법 마라겸이 공손히 받쳐서 들고 있는 것은 천마령(天魔令)이었다. 마라겸의 뒤로 여시종 두 명이 면류관이 올려 있는 받침대를 들고서 따라서 걸었다. 보조하듯이 북소리가 울렸다. -둥! 둥! 둥! 원래는 선대 교주가 앞서서 단상 위로 오르나 교주는 아직 의식불명이었다. 그 역할을 천마령의 수호자인 대호법 마라겸이 대신하는 것이었다. 천마령을 앞세움으로써 천마 조사의 의지가 깃들어 있음을 만 교인들에게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탁! 단상 위에 오른 대호법 마라겸이 천마령을 높이 들고 외쳤다. “대 천마신교의 교인들은 천마령을 받들라!” “천마신교!!! 천세!!! 천세!!! 천천세!!!” 교인들의 그런 거대한 외침에 단상 위에 서있는 허봉이 다 떨릴 지경이었다. 주군인 천여운의 취임식인데 오히려 자신이 더 긴장되었다. “지금부터 대 천마신교의 교주 취임식을 거행하겠다.” “와아아아아아아!!!” 환호성을 지르는 교인들의 외침 소리가 마교 전체를 뒤덮었다. -뿌우우우우! 뿔피리 소리가 길게 울려 퍼지는 소리와 함께 내성의 입구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긴 머리카락에 새하얀 얼굴. 금빛용이 수 놓여 있는 검은 정복을 입은 청년은 바로 천여운이었다. 천여운이 내성의 입구에서 대외전의 단상까지 이어진 붉은 비단길을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고작 약관에 불과해 보이는 외모와 다르게 천여운에게서 느껴지는 패왕과도 같은 존재감에 이를 지켜보는 교인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클클클, 이놈아. 교주님께서 이 몸의 제자이니라.] 천여운의 우측에서 허름한 옷 대신 예복을 갖추고 있는 우호법 섭맹이 흐뭇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이에 좌측에 서있는 좌호법 이화명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놈의 제자 타령은 언제까지 우려먹을 참이냐.] 천여운의 취임식이 결정된 이후로 종종 이화명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섭맹이었다. 뭐 그래도 부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유일하게 천여운을 가르친 스승이라고 한다면 섭맹뿐이었으니 말이다. -팍! 내성의 입구 쪽에 서있던 삼 장로 부철용을 시작으로 장로들이 순차적으로 천여운에게 무릎을 꿇고 포권을 취한 후에 그 뒤를 따랐다. 대외전의 단상 쪽으로 이동하기 위해서였다. 장로들을 지나서 종주, 그리고 단주들을 지나칠 무렵 천여운의 눈에 고왕흘, 문규, 사마착, 백기, 호상화, 채택겸 등이 보였다. 마도관을 나간 후로 얼마 있지 않아서 단주가 된 호상화와 채택이었다. [진심으로 경하드리옵니다. 주군, 아니 교주님.] [경하드립니다. 교주님!] [헤에, 이제는 공자님이라고 정말 부르지 못하겠네요. 경하드립니다. 교주님.] 하나 둘 씩 전음을 보내는 그들의 눈빛은 감격으로 물들어 있었다. 장난스럽게 말하는 것과 달리 문규는 콧등까지 빨개져서 눈시울을 붉혔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천여운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들에게 감사함을 느끼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보였다. -둥! 둥! 둥! 단주들까지 합류해서 행렬이 진행되자 그 광경은 가히 장관이었다. 한 일국의 왕이 보위에 오르는 것만 같은 경건함마저 느껴졌다. 붉은 비단 길을 걸어서 성화대가 있는 단상이 보이자 천여운의 머릿속에 많은 일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머니.....’ 소교주 후보 최하위에 속했던 그가 이제는 교주의 위에 오른다. 이 순간만큼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어머니인 화 부인이었다. 누구보다도 어머니인 화 부인에게 이 모습을 보이고 싶었지만 그녀는 머나먼 곳에 있다. ‘......제가 본교를 바꾸겠습니다. 다시는 그런 폐해와 비극이 없도록.’ 수백, 수천 번도 다짐했던 결심이었다. 붉은 비단 길을 걸어서 단상 앞까지 도착하자 장로들과 종주, 단주들이 멈춰 서서 두 갈래로 나뉘어져서는 오와 열을 맞춰서 단상 앞 쪽에 자리했다. -탁! 탁! 탁! 천여운이 계단 위를 한 걸음씩 밟고 올라섰다. 그리고 단상 위에 오르자 대외전을 가득 메우고 있는 수만 명의 교인들이 보였다. 지난번에는 단상 아래에서 지켜봤기 때문에 몰랐는데, 이 위에서 바라보는 광경은 말로 설명하기 힘들었다. “오오오오오!!!” “당대 천마님이시다!” “천마님께서 단상 위에 오르셨다!” “와아아아아아아아!!!” 천여운이 단상 위에 올라서 그 자태를 보이자, 교인들이 열광을 하듯이 환호성을 질렀다. 최근에 있었던 모든 일들이 밝혀지고 당대 천마가 되었음이 공표되고 나서부터 모든 교인들은 그의 존안을 뵙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었다. ‘드디어 진정한 신교의 주인이 탄생하는구나. 역대 천마령의 수호자들이시여. 그 순간이 왔나이다.’ 대호법 마라겸 역시도 감격을 금치 못했다. 가면 속에 감춰진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천여운의 앞으로 대호법 마라겸이 다가와 천마령을 보이며 소리쳤다. “새롭게 이십사 대 교주가 될 천여운은 천마령을 받들라.” -탁! “대 천마신교의 혈손 천여운이 천마령을 받듭니다.” 천여운이 한 쪽 무릎을 단상 바닥에 꿇고서 천마령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대호법 마라겸이 횃불을 들고 있는 허봉에게 명했다. “횃불을 드려라.” “충!” 허봉이 크게 외치며 천여운의 앞으로 횃불을 가져왔다. 횃불의 손잡이를 잡고 있는 허봉의 손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취임식의 가장 중요한 행사인 성화 의식을 앞두자 긴장되는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허봉.’ 천여운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그의 첫 번째 수하이자 어려움을 함께 해주었던 동료였다. 천여운이 횃불을 받아들면서 그의 어깨에 공력을 불어넣어서 긴장이 가라앉게 해주었다. 허봉이 떨리는 목소리로 울먹거리면서 말했다. “교, 교주님. 경하드리옵니다. 이 순간을 잊지 못할 겁니다.” “......나도 그렇다.” 횃불을 받아든 천여운이 천천히 성화대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성화대에 불을 붙였다. -화르르르르륵! 근 이십 년 만에 불타오르는 성화대에서 푸른 불꽃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일대 교주인 천마 조사의 시절부터 내려온 성화대에는 불을 붙이면 특이하게도 붉은 불꽃이 아닌 푸른빛 불꽃이 피어올랐다. -탁! 천여운이 양팔을 가슴에 모으고서 바닥에 두 무릎을 꿇고 암송했다. 그것은 천마신교의 경문이었다. “이 한 몸 성화 불에 불사르니 생과 사에 미련 없네. 선을 위해 악을 제거하고 광명을 밝히니, 기쁨과 슬픔은 모두 한낱 먼지로 남으리.” 천여운이 경문을 암송하기 시작하자 수뇌부들을 막론하고 대외전에 모여 있는 모든 교인들도 따라서 두 팔을 가슴에 교차하듯이 모으며 경문을 복창했다. “이 한 몸 성화 불에 불사르니 생과 사에 미련 없네!!! 선을 위해 악을 제거하고 광명을 밝히니, 기쁨과 슬픔은 모두 한낱 먼지로 남으리!!!” 그것은 천마신교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배화교, 그리고 성화대를 보내온 페르시아교에서부터 내려온 경문이었다. 고요하면서 엄숙한 경문 암송에 천마신교 전체가 성스러워졌다. “근심 많은 중생 가련하도다.” “근심 많은 중생 가련하도다!!!” 마신과 불을 숭상하는 천마신교이지만 그 경문은 뭇 세상 사람들의 근심을 걱정하는 경건함이 깃들어 있었다. 엄숙했던 경문 암송이 끝나자 대호법 마라겸이 외쳤다. “천마령에 의거하여 당대 천마이자 소교주인 천여운에게 교주의 위를 물려주노라. 제 이십사 대 교주인 천여운은 면류관을 받으라.” 드디어 위를 물려받는 순간이 왔다. 면류관을 쓰게 되면 천여운은 대 천마신교의 교주로 등극하는 것이었다. 천여운이 한 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두 눈을 감고서, 면류관을 받아들일 자세를 취했다. 그런데 면류관을 씌우는 시간이 생각보다 지체되었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단상 위로 누군가 걸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무공을 익히지 않은 것처럼 평범한 기척이었다. 그 자가 눈을 감고 있는 천여운의 앞으로 걸어오더니 이내 뭔가를 머리에 씌어주었다. 그것은 바로 면류관이었다. 천여운이 눈을 뜨고서 앞을 바라보자, “공자, 아니.....교주님. 경하드리옵니다.” 장 호위가 눈물을 흘리면서 감격스럽게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얼마 전에 백종명과 대장장이 구선웅에게 부탁하여 임플란트 시술을 받은 장 호위는 이빨을 환하게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화 부인께서도 웃고 계실 겁니다.” -주르륵! 예상치 못한 장 호위의 이런 등장은 처음으로 천여운의 심금을 울렸다. 그의 뺨 위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이것은 천여운의 수하들이 취임식을 준비하는 대호법 마라겸에게 청해서 준비한 선물이었다. 그리고 그 선물은 성공했다. 활짝 웃으면서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천여운의 수하들이 뿌듯함을 감추지 못했다. 외롭기만 했던 그의 짧은 인생에 처음으로 기쁨을 느꼈다. 면류관을 쓴 천여운이 상기된 얼굴로 단상 위로 걸어가 손을 뻗었다. -차차차차차차차착! 그러자 그의 양팔에 보호대의 흑철들이 분리되어 하나의 검의 형태를 이루었다. 영롱한 자태를 자랑하는 흑검은 바로 천마검이었다. “오오오오오!!!” 이를 지켜보고 있는 수많은 교인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허공에 떠있는 천마검의 검병을 잡은 천여운이 그것을 하늘 높이 치켜 올렸다. 그 순간 모든 교인들이 천지가 떠나가라 함성을 질렀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천마신교!!! 천세!!! 천세!!! 천천세!!!” 그렇게 천마신교의 제 이십사대 교주이자, 제 이대 천마가 탄생했다. 훗날 중원 무림의 사기를 적은 백로사가(白老史家)에서는 이 날을 일컬어 천마신교에 마신(魔神)이 그 몸을 일으킨 날이라고 불렀다. < 48장 교주 취임식 (4) > 끝 < 49장 무림 출도 (1) > 싸늘한 바람이 앙상한 나뭇가지를 시리게 만들던 겨울이 갔다. 녹내가 나는 푸른 새싹이 돋아나며 수백 개의 산봉우리로 가득한 십만대산에도 봄 향이 물씬 올라왔다. 마교의 새 교주의 즉위식이 있고 석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에 마교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젊고 패기가 넘치는 당대 교주인 천여운은 확고한 지지를 바탕으로 마교를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기존 수뇌부 층에서도 일부 반발이 있기는 했지만 각 종파에서는 하나의 단을 제외한 모든 전력을 마교 자체에 귀속시키는 정책이 통과되었다. 세 종파의 종주들이나 성세가 높은 최상위, 상위 종파들의 입장에서는 달가운 정책은 아니었지만 모두의 힘이 균등해진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었다. ‘모든 것은 강자존, 즉 실력 우선 주위로 돌리겠다.’ 라고 공언한 천여운은 각 종파의 대표인 종주들의 직급에 따라서 보유할 수 있는 단(團)과 대(隊)를 달리하게 했다. 그것은 중소 종파에도 기회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면서도 기존의 상위 종파도 따라잡히지 않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가져오게 만들었다. ‘장로들도 예외가 아니다.’ 이러한 실력 우선 주위는 종파에만 그치지 않았다. 장로들 역시도 직위 개편이 이루어졌는데, 교주 즉위식이 있고 두 달 뒤에 새로운 장로를 발탁하는 큰 대회가 열렸다. 이것은 신임 장로 발탁만이 아닌 기존의 장로들의 직위까지 새롭게 결정되는 대회였다. ‘최소 참가 기준 초절정의 극이다.’ 원래 장로 직은 화경의 경지가 최소 기준이었지만 첫 대회에서 새로운 화경의 고수가 등장하진 않을 거라 여겼기에 기준을 완화시켜서 참가자를 늘리도록 했다. 그것은 본교 내부만이 아닌 지부에도 하달되었다. 그렇게 치르게 된 대회에는 의외의 결과가 나오게 되었다. 기준치에 부합해서 대회에 참가를 신청한 인원은 마흔다섯 명. 그 중에서 병법과 병략을 다루는 예선을 통과한 자는 서른두 명이었다. 여기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생겨났다. 그 동안 등장하지 않은 숨은 고수들이 대회에 출사표를 낸 것이었다. ‘한 종파에서 두 명이나요?’ 첫 번째는 같은 종파 내에서 두 명의 화경의 고수를 보유하고 있는 일이었다. 그것은 세 종파도 아닌 몽환검종이었다. 원래 육 장로를 맡고 있던 몽환검종의 종주인 몽오 외에도 그 장남인 몽무가 화경의 고수였던 것이다. 의외로 이 사실은 몽오도 알지 못했다. 몽무는 지난 마도관 기수에서 가장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던 자로 졸업 후에 가장 빈번하게 전쟁이 일어나는 귀주성의 서부 전선에 오 년 간 출정했었다. 그곳에서 수많은 생사를 넘나드는 실전 경험을 겪으면서 깨달음을 얻은 듯 했다. 두 번째는 놀랍게도 마교 지부에 또 다른 고수가 숨어있었다. ‘양단화? 여자인가요?’ ‘아닙니다. 호남성의 동북 지부장입니다. 원래는 이곳 본 성 출신이지만 전장을 좋아해서 지원하여 십년 째 그곳에 있는 자입니다.’ 그 역시도 화경의 고수였다. 그것도 신청서에 의하면 완숙한 화경의 경지에 올라있었다. ‘그런데 어째서죠?’ ‘극도육무문에 흥미가 생겼다고 하더군요.’ 사유는 최근 들어서 정파 무림맹과의 동맹으로 잠잠해진 전선에 흥미를 잃었다고 한다. 권력에는 관심이 없는 타고난 전사인 듯 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내사검종(內史劒宗)의 서등이라는 자였다. 그는 자의로 참가 의사를 밝힌 자가 아니었고, 대호법 마라겸이 추천한 자로 특이하게도 해남도에 귀양이 보내진 죄수였다. ‘십오 년씩이나 귀양을 보냈다고요?’ ‘아마 대부분의 장로들도 알고 있는 자입니다.’ 원래 내사검종은 본교의 사기를 기록하는 직위가 부여되었던 종파라고 한다. 그런데 계속해서 사기 기록에 간섭하는 현마종에 불만을 품고서 한 밤 중에 종파의 전력을 이끌고 기습을 했다고 한다. ‘그거 참 마음에 드는군요.’ ‘하지만 기습은 실패했습니다.’ 그때 내사검종에 심어져 있던 현마종의 간자가 이 사실을 고했고, 전력 소모를 원하지 않았던 현마종주인 무진원이 교주전에 신고를 했다고 했다. ‘당시에 내사검종의 종주인 서등은 화경 초입의 고수였는데, 차기 장로직이 보장되어 있다고 알려진 자였죠.’ 사기 기록을 담당한 만큼 본교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서등은 호법전의 무사들에게 반항하지 않고 곧바로 항복했다. 여섯 종파에서는 서등을 참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지금은 태상 교주로 밀려난 천유종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를 해남도로 귀양을 보냈다고 한다. ‘태상 교주님께서는 그를 훗날 여섯 종파를 상대하는 검으로 쓰기 위해서 일부러 무공을 폐하지 않고 귀양을 보냈습니다.’ 그런 마라겸의 설명에 만족스러워한 천여운은 서등의 귀양해지를 교주령으로 허가했다. 여섯 종파 중 하나와 대립했다는 것만으로 마음에 든 그였다. 교주의 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서등은 호법전에서 온 사자의 전갈을 받고 마교의 본성으로 십오 년 만에 입성했다. 시대는 천여운이 억지로 잡아당기지 않아도 새로운 고수들을 차곡차곡 탄생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장강 후랑 최전랑(長江 後浪 催前浪). 장강의 뒷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내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마교에 있어서 오백 년 만에 강자존에 의거한 장로직을 건 대회가 치러졌고 모든 직위는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다. 현마종과 검마종이 사라지면서 자신의 적수가 없을 거라고 단언했던 도마종의 종주 부철용은 이회 전에 탈락하여 상위권에 진입하지 못하고 말았다. ‘호오?’ 천여운이나 대호법 마라겸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가 일어났다. 일 장로의 자리는 내사검종의 서등이 차지했다. 십오 년간 귀양살이를 하면서 절치부심으로 무공을 갈고 닦은 그는 화경의 극에 이르러 있었고, 검마의 이십사마검을 익힌 연무화마저 깨뜨렸다. 드디어 마교에 철저하게 무위와 실력을 겸비한 장로 직이 결정되었다. 일 장로 내사검종의 서등. 이 장로 마연검종의 연무화. 삼 장로 마룡장종의 문연. 사 장로 북양무종의 양단화. 오 장로 도마종의 부철용. 육 장로 몽환검종의 몽무. 칠 장로 비환귀종의 환의. 팔 장로 몽환검종의 몽오. 구 장로 사무종의 사마의. 십 장로 복마종의 자금경. 십일 장로 음마종의 항소유. 십이 장로 구문종의 구처용. 유일하게 십이 장로 구문종의 구처용은 화경에 이르지 못한 고수였지만 대회에서 열두 번째로 우수한 성적을 거둬서 장로 직에 오르게 되었다. 근 오백 년 만에 일어난 큰 변화라고 할 수 있었다. 여기서 천여운은 대전 회의를 통해 파격적인 방안을 제시한다. 그것은 장로 직을 오 년에 한 번씩 대회를 통해서 개편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방법대로 한다면 기존에 장로 직에 올랐던 자들도 계속해서 자신을 갈고 닦아야만 했고, 다른 종파들도 언제든지 수뇌부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열리게 된다. ‘호위전을 육검단으로 나누겠다.’ 천여운은 내성 호위전의 규모를 키웠다. 호위전에 여섯 개의 단을 두어 그의 수하들인 육검이 경쟁하는 체계를 만들었다. 육검단의 무사들은 대부분 천여운이 마도관에서 거둬들였던 수하들로 채워졌지만 단 하나 다른 것이 있다면 호위전의 수장은 육검이 아닌 마도관의 선임 무공 교두였던 호진창이 맡게 되었다. 예전부터 스승으로 여겼고 연륜이 있는 호진창이 호위전의 수장이 되는 것은 육검들 모두가 찬성하는 바였다. 대부분이 개편되었지만 유일하게 그대로 유지되는 것은 호법전이었다. 일대 교주인 천마 조사 시절부터 전통에 어긋남이 없이 이어져 온 호법전의 방식은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천여운은 이를 그대로 두었다. 그리고 석 달 사이에 극도육무문과의 한 차례 접전이 있었다. 복건성과 절강성의 경계 지점에 극도육무문의 병력이 모여들고 있다는 전갈이 날아오게 되어 일 장로인 서등이 대장이 되어 부장으로 오 장로 부철용과 십 장로 자금경, 십일 장로 항소유를 이끌고 출정했다. 그러나 큰 전장으로 이어질 거라는 예상과 달리 경계 지점에서의 작은 전투 이외에는 큰 마찰은 없었다. 암종에서 보낸 간자에 의하면 극도육무문은 정벌한 강소성과 절강성의 내부를 견고히 다지는 과정을 가지고 있어서 당분간 외부로 눈을 돌리진 못할 것 같다고 하였다. 그래도 혹시의 상황을 대비하여 네 장로들은 당분간 복건성의 북부에 주둔하면서 상황을 살피기로 했다. ‘이번만큼은 극도육무문이 도움이 되는군요.’ 천여운에게 있어서 좋은 명분 거리를 주었다. 여섯 종파를 극도로 싫어하는 일 장로 서등의 감시 하에서 세 장로들을 한동안 외부로 출정시켰으니 본교 내부에 있는 그들의 전력을 분산시키기가 한결 편해졌다. 그들이 출정을 나갔다고 다시 복귀하라는 명이 떨어질 때쯤이면 그 일이 마무리가 되어있을 것이다. 그리고 불과 한달 전, 정파 무림맹의 사자가 맹주의 서찰을 전달했다. 그 내용은 신임 교주로 즉위한 것에 대한 축하 인사와 원래 신년 초에 무림 대회에 참석하기를 부탁했던 것을 당분간 미루겠다고 것이었다. 정보망에 의하면 정파 무림맹 내부에서 현재 여러 사건들이 발발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림맹에서는 최대한 정보를 차단하려고 하지만 아무래도 그들 내부에도 극도육무문의 간자가 침투한 듯 했다. ‘제법 고생하겠군요.’ 천여운의 평은 간단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단일 방파인 마교와 다르게 수많은 문파, 방파가 결속한 무림맹은 더더욱 간자를 색출해내기 어려운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아마 정파 무림맹의 맹주를 비롯한 수뇌부들이 진땀을 빼고 있을 것이다. 이런 대내외적인 큰 변화 이외에도 작은 일들이 있었다. 천여운은 마의 백종우에게 부탁하여 정파 무림맹과의 동맹 연회식 때 극도육무문의 간자들이 썼던 약물을 만들게 하였다. 그것을 이용해서 여불위와 패현의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양귀비의 경우 겨울이 아닌 초여름에 피어나는 꽃이었고, 마교에서는 취급하지 않는 약재여서 그것을 공수해오기까지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운이 좋군.’ 조금 더 그들의 입을 열기까지 지체될 것 같았다. 그 사이에 천여운은 한 달 전에 중원으로 특별 파견대를 보냈다. 마의와 수많은 의원들이 붙어서 치료를 하고 다방면으로 연구했지만 여전히 태상 교주는 의식불명 상태였다. 결국 천여운은 마지막 수단인 신의(神醫)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신의를 만날 수 있는 옥패의 사용지였다. 처음에는 옥패만 달랑 가지고 있어서 이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조차 몰랐는데, 호법전과 비환귀종이 조사 끝에 이것의 원래 주인인 현마종의 무 부인임을 알아냈다. 그래서 현마종에 속해 있던 자들을 수소문한 끝에 옥패를 가지고 가야 하는 곳을 알아냈는데 그곳은 다름 아닌 정파의 영역이었다. ‘난감하군요.’ ‘호북성에 있는 폐검곡이라니.....’ 호북성은 무당파와 제갈세가의 영역이었다. 나아가 북쪽으로 더욱 올라간다면 정파 무림맹의 본단이 하남성의 남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가볍게 생각한다면 정파 무림맹과 동맹을 맺었으니, 전혀 어려울 게 없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신의는 무림에서도 신출귀몰한 자였다. 죽은 자를 빼놓고는 고치지 못하는 병이 없다고 불리는데, 황실부터 시작해 정파 무림맹, 사파 연맹까지 그의 소재를 알아내려고 갖은 노력을 기하고 있다. ‘정파 무림맹에 요청하기에는 위험합니다.’ 오히려 신의를 만날 수 있는 옥패를 노릴 확률이 높았다. 태상 교주가 의식불명인 것은 기밀로 유출시키지 않고 있지만 신의를 찾는다는 시점에서 무림맹에서는 필시 의심하고 들게 뻔했다. ‘소수 정예로 사람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소수 정예요?’ 대호법 마라겸의 제안은 이러했다.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고수를 파견하는 것이었다. 물론 실력이 없는 자를 파견했다가는 신의를 보호하는데 문제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에 소수이 지만 확실한 고수를 차출했다. 그들은 바로 이 장로 연무화와 육검의 두 사람인 호상화와 백기였다. 연무화의 경우는 평소 장로로 활동할 때는 나이 든 인피면구를 착용하고 있어서 젊은 외모에 대해서 알고 있는 자들이 극히 드물었다. 여기서 정파 영역에 종종 간자로 파견되었던 암종의 요원을 한 명 붙였다. ‘이들이라면 충분히 해낼 겁니다.’ 다소 위험부담감이 컸지만 마라겸의 말대로 이 정도 전력이라면 충분히 신의를 데리고 올 수 있을 것이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오늘. 내성의 교주전에 있는 연무장에는 비무가 벌어지고 있었다. 비무의 양상은 독특하게 이뤄지고 있었는데, 네 사람이 합격을 펼치면서 한 사람과 대결을 펼치고 있었다. -파파파파팍! 거구의 사내가 쾌속한 권초를 펼치고 있었는데, 그는 바로 고왕흘이었다. 고왕흘 이외에도 익숙하게 합격을 펼치고 있는 자들은 바로 사마착, 문규, 채택겸이었다. 그들은 각자의 절기를 펼치면서 단 한 사람을 실전을 방불케 할 만큼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러나, -타타타탁! ‘너무 빨라!’ 그들이 상대하는 자는 잔상을 흩날리며 움직이는데, 최근에 들어서 초절정의 극에 이른 고왕흘이나 문규의 눈에도 보이지 않을 만큼 빨랐다. ‘정말 내공을 반도 사용하지 않으시는 게 맞나?’ 그런 것 치고는 잔상조차 쫓아가기도 힘들었다. 네 명이 방심하지 않고 서로를 등지고 상대하지 않는다면 언제라도 균형이 무너질 만큼 계속해서 틈을 파고들었다. ‘더 빨라지셨다.’ 연무장의 바깥에서 대결을 지켜보는 대호법 마라겸이 작게 탄성을 흘렸다. 그는 유일하게 저 잔상의 움직임이 파악되는 절대고수였다. 잔상을 일으키며 움직이고 있는 자는 바로 천여운이었다. ‘대체 저 독특한 보법은 무엇이지?’ 천여운이 펼치는 보법은 기존의 것과 다르게 땅을 튕기듯이 박차면서 움직였다. 처음 연습할 때 지켜볼 때는 단순해 보였는데, 거기에 내공이 실리고 풍신공까지 더해지니 무서울 만큼 움직임을 예측하기 힘들었다. ‘후우, 기회를 포착한다.’ 육안으로는 파악하기 힘들기에 고왕흘은 때를 기다렸다. 분명 어떤 식으로든 공격이 들어올 테니 말이다. 그리고 그 때가 찾아왔다. -팟! 잔상을 일으키며 권초를 피해내던 천여운의 몸이 그의 가슴까지 파고들었다. ‘지금이닷!’ 고왕흘이 그 순간에 맞춰서 십성 공력에 실린 일권을 천여운에게 날렸다. 이 정도 속도로 파고들었다면 절대로 멈추지 못하고 그의 일권에 맞으리라고 여겼다. 그러나, -우드드득! “헛?” 천여운이 기이한 방향으로 허리를 비틀며 일권을 피해낸 후에 고왕흘의 갈비뼈 쪽으로 주먹을 꽂았다. -퍽! “크흑!” 놀란 고왕흘이 급하게 이를 막아냈지만 그의 거구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타격을 할 때 내공을 싣지 않았는데 순수한 완력과 타격의 힘만으로 그의 몸을 띠운 것이었다. -파팍! 그 상태에서 천여운이 돌려차기로 그를 걷어찼다. 고왕흘의 몸이 날아가면서 측면을 노리려고 했던 사마착이 그와 부딪치고서 뒤로 한바탕 굴러 떨어졌다. “우왓!” -쿠당탕! 남은 문규와 채택겸이 떨어져 나간 두 사람을 보면서 기겁을 했다. 어떻게 된 것이 본 실력 발휘를 하지 않는다는 사람이 하루하루가 갈수록 경이로울 만큼 강해져가고 있었다. ‘대체 공자님이 펼치시는 이 무공은 뭐지?’ 천여운은 기존의 무공과는 다른 체술에 가까운 것을 익히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은 복합적인 무공의 초식과 다르게 가벼운 식들만으로 이루어진 것에 비해서 효과 적으로 상대의 요혈만을 노려 와서 상대하기가 까다로웠다. -탓! 빠르게 움직이던 천여운이 자리에서 멈춰 섰다. 문규나 채택겸만으로는 자신을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이들과는 이쯤 해둘까? 나노 어때?’ [권투와 풍신공, 태권도를 이용한 복합 무공이 75% 정도 완성되었습니다.] ‘아직 멀었나?’ 천여운은 근래에 들어서 나노의 시스템에 내장되어 있는 먼 미래의 체술들을 익혔다. 이 체술들은 중원의 무술들보다 훨씬 체계적으로 정립되어 있으나, 내공을 사용하고 복합적인 초식이 없기에 천여운은 나노와 함께 이것들을 무공화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슬슬 힘 조절은 잘 되어가는군.’ -꽉! 천여운이 자신의 두 주먹을 쥐어 보았다. 그의 힘은 원래부터도 인간의 한계치에 가까울 정도였지만 최근에는 그것을 넘어섰다. 나노를 통해 역혈마공, 역혈대라신공을 분석하면서 근육과 섬유질을 더욱 세밀하게 발전시켰다. 처음에는 늘어난 괴력을 조절하지 못했었는데, 이제는 어느 정도 가능해졌다. ‘기본 능력을 최상으로 끌어올린다.’ 교주로 등극하기까지 강적들과 겨루면서 부족한 점을 많이 깨달았다. 그것을 보충하기 위한 천여운의 노력은 점점 결실을 맺어가고 있었다. ‘많이 강해졌지만 아직 현경의 경지는 요원하구나.’ 밤마다 명상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있지만 심득에 대한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다. 그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무림을 통틀어서 현경의 경지에 오른 자는 비공식적인 자들을 통틀어도 열 손가락에 꼽을 것이다. 수십 만 명이 넘는 무림인들 중에서 극소수라는 것은 그만큼의 고행을 요한다는 의미였다. ‘조급해서 해결될 깨달음은 아니겠지. 후우.’ 천여운이 넘어져 있는 고왕흘과 사마의를 일으켜 세우며 오늘 훈련을 마치자고 말을 하려는데, 대호법 마라겸이 급히 누군가와 함께 비무장으로 내려왔다. 그들이 천여운에게 두 손을 모아 고개 숙여 인사했다. “교주님의 존안을 뵙습니다.” “환 장로.” 그는 칠 장로 환의였다. 늘 여유가 넘치는 환의의 안색이 다소 어두워져 있었다. 그가 저런 표정을 지을 때는 보통 안 좋은 소식을 전할 때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교주님. 호북성에 있는 암종의 대원으로부터 전갈이 왔습니다.” “호북성이요?” 호북성이라는 말에 천여운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곳은 이 장로 연무화와 백기, 호상화가 신의를 데리러 파견된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한달 쯤 되었기에 슬슬 소식이 들려올 거라 생각했다. 불안한 예상은 언제나 들어맞는 것일까? "......대체 무슨 일이죠?" “교주님. 신의를 찾으러 갔던 특별 파견대가 폐검곡에서 행방불명되었습니다.” < 49장 무림 출도 (1) > 끝 < 49장 무림 출도 (2) > 불과 열흘 전, 이른 새벽의 깊은 숲속, 새하얀 안개가 뒤덮여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계곡이 있는 이곳은 자주 안개가 끼는 지역이기도 했다. 허리춤에 검집을 차고 있는 네 명의 무림인들이 객잔 바깥에서 여장을 꾸리며 계곡 쪽으로 떠날 준비를 마쳤다. 그들은 바로 마교에서 보낸 특별 파견대였다. 환골탈태를 한 이 장로 연무화를 비롯한 육검단의 단주 호상화, 백기, 그리고 중년의 암종 출신 대원 한 명이었다. “저쪽 숲을 통과하면 계곡의 상류가 나올 걸세.” 객잔 앞에 서있는 곰방대를 물고 있는 노인이 동쪽 편의 숲을 가리켰다. 친절한 노인의 말에 백기가 포권을 취하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할 게 있나. 죽으러 가는 길을 가르쳐줬는데. 쯧쯧. 안개가 끼는 날에 저 계곡으로 가는 건 자살행위라고 그리 일러줬건만......” 노인은 안쓰럽다는 듯이 혀를 차며 객잔으로 들어 가버렸다. “.......” 백기는 자신이 한순간 감사를 표한 것이 후회되었다. 노인의 말대로 동쪽으로 이동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안개 사이로 우거진 숲이 보였다. 숲을 통과해 지나가면 절곡의 상류 방향으로 들어갈 수 있다. 숲으로 들어가는 입구 쪽에는 오래된 나무 푯말이 꽂혀 있었다. [廢劍谷] 폐검곡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삭은 판목에 적힌 출입금지 글씨는 검붉은 색을 띠고 있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괜히 소름이 돋게 만들었다. 폐검곡은 예전부터 험하고 사고가 많아서 산꾼들 조차도 출입이 드물다고 한다. 특히 안개가 끼는 날에는 더더욱 그렇다. 그들이 지나가는 숲은 워낙 우거져서 거의 수풀을 헤치다시피 해야 했다. -??! 암종의 대원이 앞장서서 검으로 수풀을 베어내며 걸어가는데, 안개도 뿌옇고 시야가 제대로 보이지 않아서 제대로 가는 건지 확신이 가지 않았다. “저도 폐검곡은 처음인지라 으스스하군요.” 암종 대원의 말에 세 사람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유독 말수가 없는 세 명인지라 마교를 떠나온 후로부터 암종의 대원은 한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이 무거운 사람들이라서 특별 파견대라 지칭하신건가.’ 연무화, 백기, 호상화 세 사람은 처음 만난 사람처럼 대화를 유독하지 않았다. 정말 필요한 상황을 제외하곤 말이다. 덕분에 암종의 대원도 본의 아니게 이곳으로 오는 보름 동안에 목이 잠길 만큼 말수가 적어졌다. -웅웅웅! ‘공명음이 느껴진다.’ 우거진 안개 숲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연무화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날카로운 검(劍)의 예기와도 같았다. ‘따라가볼까?’ 어차피 폐검곡 안에서의 길은 암종의 대원도 모른다고 했으니 이 공명음을 따라가 보면 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본 녀가 앞 장 서겠다.” “.....그렇게 하시죠.” 호상화가 그 말과 함께 그녀의 뒤를 따르자 일행들도 자연스럽게 선두를 바꾸었다. 그녀는 뭔가에 이끌린 사람처럼 짙은 안개 숲은 파헤치고 어딘가로 향했다. 한참을 지났을 때 우거진 숲이 끝나고 뭔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선두에 서있던 연무화가 놀란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아!” 뒤 따라오던 세 명도 연무화가 발견한 그것을 보고나서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감탄하는 듯한 눈빛으로 그것을 살펴보는데, 연무화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허리춤의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챙! 바로 그 순간 검은 인영 하나가 쾌속한 속도로 그들을 덮쳤다. * * * 그로부터 스무날 정도가 지났다. 호남성의 최북단 쪽에는 호북성을 가르고 있는 황하(黃河)가 자리하고 있다. 모르는 사람이 처음 이 황하를 보게 되면 그 광활한 자태에 놀라게 된다. 칭해성의 산맥에서 발원하여 감숙성을 따라 산서성, 섬서성, 하남성을 거쳐 산동성의 발해만(渤海滿)까지 이어진다. -다그닥! 다그닥! “워워워!” 황하가 보이는 언덕 위에 말을 타고 달리던 이들이 멈춰 섰다. 말 위에서 길게 굽이굽이 이어지는 광활한 황하를 바라보는 그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와! 진짜 크다.” “이, 이게 황하인가요?” 두 사람은 다름 아닌 문규와 허봉이었다. 처음 보는 황하에 그들은 시선이 빼앗겨서 눈을 떼지 못했다. “휴.....” 그런 그들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푹 내쉬는 한 사람이 있었다. 머리를 뒤로 넘기고 있는 짙은 눈썹에 훤칠한 외모의 중년인이었는데, 그는 이번에 새롭게 부임한 사 장로 양단화였다. 양단화의 옆에 나란히 말을 타고 있는 긴 머리카락의 청년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천여운이었다. 이들 네 명이 어떻게 이곳 황하까지 오게 된 것일까? 그것은 행방불명된 특별 파견대를 찾기 위해서 천여운이 직접 출도한 것이었다. 원래는 다른 이들을 파견하려고 했던 천여운이었지만, 태어나서 한 번도 마교 밖을 벗어난 적이 없기에 이번 기회에 직접 나오게 되었다. ‘안 됩니다!’ ‘교주님께서 직접 가시다니요?’ 물론 교주인 그가 직접 행방불명된 자들을 찾는다고 하니 반대가 심했다. 대호법 마라겸은 물론이고 칠 장로 환의까지도 위험하다고 했다. 하지만 한 번 정도는 자유롭게 중원을 둘러보고 싶었던 천여운이었기에 이번만큼은 강하게 의지를 피력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따라가도록 하겠습니다.’ 당연히 교주를 호위하는 위치였기에 대호법 마라겸이 따라간다고 했다. 하지만 천여운이 이를 거절했다. 이번에 무림으로 출타하는 것은 비공식적이기 때문에 대역을 세워두고 갈 참이었다. 자신이 빠지는 것도 모자라서 대호법까지 대역으로 세워둔다면 이상한 낌새를 알아챌 수도 있기에 마라겸에게 남으라 하였다. ‘후우, 절대로 혼자는 안 됩니다. 그럼 이렇게 하시지요.’ 환의는 이번 길이 천여운에게 있어서 초행이기 때문에 정파 무림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이를 데려가기를 권했다. 물론 호위를 할 만큼 뛰어난 실력을 지닌 자로 말이다. 마음 같아서는 그가 보좌를 하고 싶지만 암종을 통솔해야 하는 입장인 그는 본교를 벗어나 장시간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차출된 것이 바로 사 장로 양단화였다. 그는 호남성 동북쪽에서 지부장으로 지냈기에 중원 각지에 대한 지리가 밝았다. 더군다나 완숙한 화경의 경지에 오른 고수였기에 천여운을 보좌하기에도 충분했다. ‘저, 저도 가겠습니다. 교주님.’ 거기에 호위전의 부관을 맡고 있는 허봉이 동행하겠다고 했다. 한시도 천여운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그였다. 짐꾼을 자처하면서까지 따라가겠다고 강한 의지를 보인 덕분에 천여운은 이렇게 세 명이서 조용히 다녀오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언제부터 기다린 거지?’ 새벽에 성 북문을 나서는데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네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육검 중에 남은 고왕흘, 문규, 사마착, 채택겸이었다. 교주를 보호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그들이었기에 마찬가지로 동행하겠다고 여장을 꾸려서 준비했던 것이었다. ‘저희도 교주님을 호위하겠습니다.’ ‘너무 많아. 너희들까지 자리를 비우면 확실하게 티가 난다.’ 충성심에서 비롯된 것이었기에 나무라기도 힘들었다. 결국 천여운은 이들 중에서 한 사람만을 데리고 가기로 했다. 그렇게 결정된 것이 바로 문규였다. 실력 면에서는 고왕흘이 앞섰으나 워낙 거구에 눈에 띠는 그였기에 곧바로 배제되었다. ‘교, 교주님!’ ‘안 돼.’ 처음으로 자신의 애지중지해오던 근육들이 원망스러운 고왕흘이었다. 호상화가 행방불명되었다는 소식에 꼭 같이 출도하고 싶었던 그였다. ‘다음 번에는 육검 전부 함께 할 테니 이번에는 남아라.’ ‘알겠습니다. 부디 무운을 빕니다.’ 천여운은 그들에게 자신이 다녀오는 동안 열심히 수련을 해서 무위를 높이라고 명했다. 그렇게 무림으로 출도하게 된 네 사람은 근 열흘 동안 마교의 지부에 들려서, 말을 바꿔가면서 꼬박 달려온 참이었다. 여기서 천여운과 문규 두 사람은 인피면구를 착용하고 있었다. 천여운은 전에 정파 무림맹과의 동맹을 위한 연회장에서 얼굴을 보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숨길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문규의 경우 워낙 경국지색이었기 때문에 마도관 시절부터 차고 있던 문유의 얼굴을 본 따서 만든 인피면구를 차고 나왔다. ‘후우.’ 양단화는 들떠있는 허봉과 문규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더니, 천여운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주군. 이제 황하를 건너게 되면 정파의 영역입니다. 위험할 수도 있으니 긴장하셔야 합니다.” 마교의 성을 나선 후부터는 수하들은 교주라는 칭호를 삼갔다. 괜히 교주님이라고 내뱉었다가 위치가 노출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양단화가 하는 말은 엄밀히 얘기해서 천여운이 아니라 마교 성을 출타한 이후로 여전히 들떠 있는 두 사람에게 하는 말이었다. ‘아무리 봐도 특이하단 말이야.’ 사 장로 양단화가 처음 허봉을 본 후에 놀란 것은 그가 호위전 수장인 호진창을 보좌하는 부관이라는 사실이었다. 어찌 본다면 호위전에서 육검단주보다도 높은 서열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에게서 느껴지는 무위는 절정의 극에 불과했다. '절정의 극이 약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호위전의 부관들이 적어도 초절정의 고수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실력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는 천여운의 인사 조치라고는 믿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곳으로 이동하면서 한시도 쉬지 않고 천여운을 극진히 모시는 모습에서 충성심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긴 교주님을 처음 뵈었을 때도 그랬지.’ 신임 장로를 선출하는 대회가 끝나고 내성 대전에서 사 장로로 취임할 때 처음 천여운을 보았다. 그때 양단화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고작 약관도 되지 않은 천여운이 기존에 정권을 휘두르던 여섯 종파의 절반을 해체시키고, 본교에 들이닥친 위기를 두 차례나 구했다는 쉽게 와 닿지 않았다.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무위만큼은 완숙한 화경의 경지인 자신보다 상위 고수라는 점이었다. ‘본교의 역사상 두 번째 천마님.’ 영웅은 어렸을 적부터 행보에 있어서 남다르다고 들었다. 그는 자신이 행운아라 생각했다. 이번 기회에 천여운을 곁에서 모시게 되었으니, 그 진가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될 지도 몰랐다. “밑으로 내려가면 나루터가 있습니다.” 양단화가 강에 있는 나루터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들은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횡단하는 것이었기에 나루터를 찾았다. 인파가 몰려 있는 나루터에는 수많은 나룻배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주군. 저 배는 태어나서 처음 타봅니다.” “헤에. 저두요.” ‘아아아.....’ 그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에 괴로운 것은 양단화뿐이었다. 이곳을 건너기만 하면 곧 적들의 영역이었다. 말을 몰아서 언덕을 내려간 천여운과 일행들은 나룻배를 구하기 위해서 기다렸다. 말 네 필까지 같이 건너려면 적어도 나룻배 두 대는 구해야 했다. “주군.” 허봉이 언덕 위에 있을 때와 다르게 진지한 눈빛으로 천여운을 불렀다. 천여운이 의아하게 쳐다보자 허봉이 말했다. “강을 건널 때 조심하셔야 합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래도 정파의 영역에 도착하니 경계심을 갖고 호위자 본연의 모습을 갖추는 허봉의 모습에 양단화도 한시름 마음을 놓았다. “제가 중원기행록에서 읽었는데 황하에는 수로십팔채라는 무공을 익힌 도적 떼들이 활동한다고 했습니다. 무위로는 주군이 앞서겠지만 강에서 수적들은....” “......허 부관, 아니 허봉.” “네?” “수로십팔채의 도선(盜船)은 강을 타고 내려가는 상단 배를 노린다네. 이렇게 강을 횡단해서 건너는 작은 나룻배들이 아니고.” 잘못된 상식을 꾸짖는 양단화의 말에 허봉의 얼굴이 빨개졌다. “......아.” 책으로 배운 중원 상식의 한계였다. 그렇게 반 시진 가량을 대기했다가 차례가 온 그들은 나룻배를 탈 수 있었다. 내심 혹시나 책에서 본 대로 수로채의 도적들이 나타나지 않을까 허봉이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강이 탁하다.’ 떠다니는 나룻배 위에서 천여운이 바라본 강은 흙색 빛깔이었다. 황하는 중류 부근이 가장 탁한데 황토 고원의 황토를 머금고 있어서다. ‘이래서 황하라고 하는 건가?’ 황하의 주변에서 물을 수급하는 지방의 사람들은 물에 섞인 흙과 그 흙 맛을 제거하기 위해 차(茶)를 끓여 마시는 풍습을 지니고 있다. -탁! 드디어 강을 횡단하여 호북 땅을 밟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교가 아닌 정파 무림의 영역에 들어온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본교의 지부가 없기 때문에 역관에서 말을 교체해서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경험이 많은 양단화 덕분에 그들의 이동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긴장했던 것과 다르게 그들은 대부분의 큰 마을을 피해서 이동했기 때문에 정파 무림인들과 만날 일은 거의 없었다. 닷새 동안 쉬지 않고 이동한 끝에 그들은 드디어 호북성의 북서쪽에 있는 폐검곡의 인근까지 도달했다. “비가 내릴 것 같군요.” -쿠르르르릉! 오후 무렵부터 하늘이 흐릿했는데 먹구름이 꼈다. 천둥소리도 한 번씩 들리는 것으로 보아서 곧 비가 내릴 것 같았다. 그때 그들의 눈에 등불이 밝혀진 객잔이 보였다. “주군. 오늘은 저곳에서 쉬고 내일 아침에 일찍 이동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객잔에서 죽우의라도 빌릴 수 있는지 물어봐야 겠군요.” 양단화의 말에 천여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들이 눈앞에 보이는 험난해 보이는 산봉우리들 사이에 폐검곡이 있다고 들었다. 어두운 밤에 비까지 내리면 숲속 이동이 힘들 수도 있으니, 객잔에서 쉬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요 이틀 동안은 노숙을 했기에 피곤하기도 했다. [당원 객잔(棠原 客棧)] 객잔의 이름이었다. 마을에 있는 객잔이 아니었기에 규모가 그리 크진 않았다. 그래도 있을 만한 것은 다 있었다. “오! 마구간이 있네요. 저는 말들을 묶어놓고 들어가겠습니다. 먼저 들어가십시오. 주군.” “부탁할게.” 허봉이 마구간으로 말들을 끌고 가는 동안 남은 일행들은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객잔으로 들어간 천여운과 일행들의 발걸음이 일순간 멈칫했다. ‘이런.....’ 사 장로 양단화의 눈빛에 난처함이 서렸다. 그 동안 최대한 정파 무림인들을 피해서 이동했는데, 객잔 내에는 한 무리의 흰 도복을 입은 도사들이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무당파(武當派)의 도인들이었다. < 49장 무림 출도 (2) > 끝 < 50장 객잔의 밤 (1) > -쿠르르쾅쾅! 천둥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이윽고 장대비가 쏟아졌다. -쏴아아아아! 조금만 늦었더라면 비를 고스란히 맞을 뻔했다. 왁자지껄 떠들면서 식사를 하고 있던 모든 객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열리는 객잔의 입구로 향했다. 물론 무당파의 도인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난감하군.’ 사 장로 양단화는 하필 폐검곡의 근방에 있는 객잔에서 무당파의 도인들과 마주치자 당혹스러웠다. 그들은 정파 무림맹 내에서도 확고한 위치를 가진 자들이었다. 게다가 정파 무림에서도 가장 큰 규모라 불리는 구파일방에서도 세 손가락에 꼽히는 성세를 자랑하는 무당파였다. ‘승냥이들을 피해서 왔더니 범이 기다리고 있는 꼴이군.’ 물론 대 천마신교의 장로이자 그 동안 전장만을 찾아다녔던 그가 이들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지금 그들 일행에는 교주 천여운이 있었다. 장기패로 치면 왕이 직접 움직인 것과 마찬가지였는데, 정파 무림맹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동맹과 상관없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 알 수가 없었다. 양단화가 천여운에게 은밀히 전음을 보냈다. [교주님. 이곳에 정파 무인들이 꽤 많습니다.] 가장 성가신 자들이 무당파라는 것이었지 객잔 내에 있는 자들의 태반이 무림인들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이 뛰어나봐야 고작 일류고수에 불과했다. 허봉 혼자서도 짧은 시간 내에 전부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이다. [다른 자들은 그저 쭉정이들 같으나, 저기 저자들은 정파 무림맹에서도 요직을 맡고 있는 무당파의 도인들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이 질문의 답은 두 가지였다. 비를 무릅쓰고서 객잔에서 머무르는 것을 포기하느냐. 혹은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마찰을 피해서 객잔에 조용히 머무르는가 였다. -쏴아아아아! 천여운이 객잔 바깥을 쳐다보니 쏟아지는 비가 금방 그칠 것 같진 않았다. 거의 폭우 수준에 가까웠는데, 이런 날씨에 계곡을 수색하는 것은 그리 현명한 선택은 아닌 듯 했다. [난처하지만 조용히 있는 편이 좋겠군요.] 어차피 인피면구로 변장을 했기 때문에 저들이 알아볼 위험은 없었다. 더군다나 기감으로 느끼기에 무당파의 도인들 중에서 가장 강한 자라고 해봐야 절정의 극에 불과했다. 이곳이 정파의 영역 한복판이 아니었다면 굳이 두려워할 자들은 아니었지만 괜한 분란은 피하는 편이 나았다. -팍! “후아! 비가 갑자기 내려서...엇?” 뒤늦게 들어온 허봉이 비에 젖어서 들어왔다. 아무 생각 없이 들어온 허봉도 객잔 내에 있는 무당파의 도인들을 보고서 인상이 굳어졌다. [내색하지 마라.] "흡!" 하지만 양단화가 미리 전음을 보냈기에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에 앉았다. 처음으로 적지에서 보게 된 정파 무림인은 무림 초출인 허봉이나 문규를 긴장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반면 천여운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담담했다. ‘교주께서도 초출이라고 들었는데, 배짱이 남다르구나.’ 사 장로 양단화가 내심 감탄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들은 무당파의 도인들과 최대한 떨어진 것이 아닌 바로 옆 좌석에 앉았다. 이런 대담한 행동 때문에 처음에는 경계심이 서린 눈으로 쳐다보았던 무당파의 도인들도 어느새 식사를 하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후우.” 자욱한 담배 연기를 내뿜는 한 노인이 있었다. 객잔 주방 앞에서 의자에 앉아서 곰방대를 물고 있는 노인이 천천히 일어나서는 그들이 있는 좌석으로 다가왔다. “식사만 하는 것이오?” 보통 객잔에는 점소이 한두 명이 있지만 노인이 그 역할을 대신하는 듯 했다. 곰방대 노인의 물음에 양단화가 말했다. “빈 방이 있습니까?” “하긴 이 궂은 날씨에 식사만 하긴 그렇지요? 그런데 이를 어찌하나.” “방이 없습니까?” “허허허, 이렇게 손님들이 많은 것을 보면 모르겠소?” 객잔 내에 좌석은 총 여덟 탁자가 있다. 그 중에 다섯 탁자에 손님들이 앉아 있었고, 그 숫자가 스물다섯 명이었다. 방이 있는 이 층을 올려다보니, 객잔에 머무를 수 있는 방은 탁자 수와 같은 여덟 개였다. “비는 방이 하나도 없습니까?” “이 인실이 하나 비는데 비좁더라도 괜찮겠소?” 작은 객잔의 규모를 생각한다면 이 인실이라 말한 방이 작은 모양이었다. 양단화가 난감하다는 듯이 턱을 쓰다듬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명색이 교주님이신데 네 명이서 잠을 청하게 할 순 없었다. 그때 누군가 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원시천존. 원시천존. 방이 모자란 가 봅니다.” 천여운이 고개를 돌려보니, 무당파의 한 도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갈한 도사 복에 삼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콧수염이 멋들어진 자였다. 양단화의 눈빛에 경계심이 서렸다. 일부러 그들과의 접점을 피하려고 했는데 이런 식으로 대화를 섞어야 하는 상황이 올 줄은 몰랐다. 다행히 도사의 말에 대답한 것은 곰방대의 노인이었다. “허허허, 무 도장께서 방이라도 양보하실 생각이신가 보오?” “객들께서 곤란해 하는데 도를 수양하는 사람들이 그깟 방이 무슨 대수라고 양보하지 못하겠습니까?” 그들의 대화를 보면 꽤 안면이 있는 듯 했다. 노인이 곰방대를 한번 주욱 빨아들이고는 연기를 내뱉으며 말했다. “여기 무당파의 무진자 도장께서 방 하나를 양보해 주신다고 하는 구려. 어떻게 하겠소?” 노인의 말에 잠시 머뭇거리던 양단화가 자리에서 일어나 무진자라 불린 무당파의 도인에게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무 도장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원시천존. 원시천존. 아닙니다. 사해가 동도라 하지 않습니까? 세 분도 보아하니 무공을 익히 신 영웅 분들인 것 같은데, 형제들을 위해서 이 정도 양보를 해드려야지요.” ‘아.....’ 무진자 도장는 아무래도 그들을 같은 정파의 무림인으로 오해한 듯 했다. 허리춤에 각자의 병장기를 차고 있으니 당연히 무인임을 눈치 못 채는 것도 이상했다. 기운을 갈무리하고 있었지만 조심해야겠다고 여겼다. 그때 무진자가 은밀하게 전음을 보내왔다. [보아하니 모시는 공자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오? 걱정 마시고 방을 쓰십시오.] 그 전음과 함께 무진자가 눈 한 쪽을 찡긋거리며 허봉을 쳐다보았다. 양단화는 순간 콧방귀가 나올 뻔 했지만 겨우 참았다. 이때 천여운 역시도 혼자 피식하고 웃었다. ‘그런 거였나.’ 무진자라 불리는 무당파의 도사는 이들 중에 가장 항렬이 높은 자였다. 그는 절정의 극에 달하는 무인이었는데, 천여운의 일행 중에서 유일하게 무공 수위가 드러나는 허봉을 보고서 그가 일행의 대표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겉보기만 봐서는 다들 약관에 청년들이었는데, 누가 그들이 화경에 초절정의 고수들이라고 짐작하겠는가. “응?” 아무 것도 모르는 허봉은 어리둥절해 했다. 무진자 도장이 웃으면서 그렇게 자리로 돌아가고 나서, 허봉은 괜히 기분이 나빠진 얼굴로 천여운에게 전음을 보냈다. [주군. 저 말코 도사 놈이 이상합니다. 저를 보면서 한쪽 눈만 깜빡거리는데 꼭 환 장로님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혹시 변태일까요?] ‘..........’ 오한이 난다는 듯이 몸서리를 치는 허봉을 보면서 천여운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간단히 고기 국수와 요깃거리를 주문한 그들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서 평범한 대화를 하면서 중요한 내용은 전음으로 했다. 신의를 만날 수 있는 주홍 옥패를 특별 파견대에 맡겼기 때문에 폐검곡 전체를 수색하듯이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 “내일은 비가 그치길 바라야 겠군요.” -탁! 한참 대화를 나누던 차에 노인이 주방에서 나온 음식을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래도 음식을 가져올 때 만큼은 곰방대를 의자에 얹어두고 왔다. “아마 이른 아침이면 비가 그칠 것이오.” 그들의 대화를 일부 들은 모양이었다. 이에 허봉이 말했다. “이렇게 비가 많이 내리는데 그럴까요?” “허허허, 노부가 이곳에 정착한지만 삼십 여 년이라네. 우기도 아니고 이 정도는 잠시 내리는 소나기라네.” “오오! 그럼 잘됐군요.” 확신하는 노인의 말에 허봉이 잘됐다는 듯이 천여운에게 말했다. 그러자 노인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물었다. “흐음, 혹시 객들은 폐검곡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이오?” 노인의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객잔 내가 일시에 조용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왁자지껄 시끄러웠던 곳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말이다. 대부분 손님들이 아닌 척 하고 있지만 노인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상하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천여운과 일행들도 경계심이 높아져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에 있는 자들 중에서 무당파를 제외하고 두 집단이 무공을 익힌 자들이었는데, 그들 모두가 하던 대화를 동시에 멈췄다는 것 자체가 수상했다. 이를 개의치 않는지 노인이 하던 말을 계속 이었다. “괜한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폐검곡에는 들어가지 마시오.” “네?” 허봉이 반문하자 노인이 빈 쟁반을 챙기고서 의자에 걸쳐놓은 곰방대를 주어 들었다. 그리고는 깊게 그것을 빨아들이고는 연기를 내뱉으며 말했다. “후우, 요 근래 계곡에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이 없소. 괜한 불나방이 되는 짓은 하지 않았으면하는 구려.” “......노인장,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양단화가 다소 진지해진 눈빛으로 물었다. 이곳에 출발하기 전에 암종의 수장인 칠 장로 환의에게 여러 정보를 들었다. 그러나 특별 파견대 이외에도 폐검곡 내에서 다른 자들이 행방불명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없었다. “요 얼마 전부터 댁들 같은 무인들이 왔었는데, 계곡에 들어가는 것은 보았지만 살아서 나오는 걸 본 적이 없소. 후우.” 노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자욱한 담배 연기가 객잔을 메웠다. -콰르르르릉! 천둥 번개마저 내리치자 분위기가 묘하게 스산해졌다. 무서운 이야기라도 듣는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조용하게 집중하고 있었다. “계곡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그런 것은 노부 같이 일개 장사치가 어찌 알겠소. 아무튼 노부는 분명이 경고 했소. 그리고 비가 그친다면 분명 안개가 낄 것인데, 괜히 계곡에 들어갔다가 비명횡사하지 말고 돌아가도록 하시오.” 단호한 노인의 말에 천여운을 비롯한 일행들의 인상이 굳어졌다. 뭔가를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주변에서 경청하고 있는 저들이 마음에 걸렸다. 사 장로 양단화가 천여운에게 전음을 보냈다. [주위에 듣는 귀가 많으니, 제가 나중에 따로 노인장에게 자세한 내막을 물어보겠습니다. 교주님께서는 식사를 하신 후에 쉬십시오.] [알겠습니다.] 양단화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 천여운과 일행들은 식사를 시작했다. 곰방대의 노인이 다시 의자에 앉아서 조용히 담배를 피는데 집중하자, 조용했던 객잔이 다시 떠들썩하게 바뀌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무 사형. 역시 그분께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객주가 무언가 알고 있지 않을까요?] [원시천존. 원시천존. 사제, 괜한 섣부른 추측은 삼가게.] [죄송합니다.] 객잔 내부가 전음들로 가득해지고 있었다. 나노를 통해서 미리 전음의 주파수를 열어놓은 천여운의 귓가로 사방의 전음들이 들려와 여러 정보들을 알려주었다. 일류 고수들로 이루어진 집단 중에 하나는 정파 무림의 한 방파의 무인들인 듯한데, 그들 역시도 폐검곡에서 무언가를 찾는 것 같았다. [역시 폐검곡에서 뭔가 일이 터진 게 틀림없습니다.] [단정 짓기에는 이르다. 부방주께서 쉽게 당하실 리가 없다.] [하나....] [허어! 어찌 되었든 수색은 예정대로 행한다.] [알겠습니다.] 이 한 집단의 경우는 천여운 일행과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행방불명되어서 찾아온 자들인 듯 했다. 하지만 또 다른 집단의 목적은 달랐다. [이상하군요. 그 물건이 없어서 그런 걸까요?] [그럴 리가. 예전에도 왔었지만 그것을 가져오지 않았다고 누군가가 죽거나 하진 않았는데.] [......그렇다면 혹시 신의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럴 리가 없다. 신의를 지키는 게 누구인지 몰라서 하는 소리이냐?] [하긴. 그렇겠군요.] [사람이 너무 많다. 비가 새벽에라도 그친다면 빨리 출발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또 다른 무인들의 집단의 목적은 신의였다. 그들이 말한 물건은 아무래도 주홍 옥패인 것 같았다. ‘폐검곡에 신의가 있는 게 확실하다. 그런데 어째서 연무화와 파견대들이 행방불명 된 거지?’ 그것을 알 수가 없었다. 화경의 극에 이른 연무화가 행방불명되었다.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려면 적어도 그 이상이 무위를 지니거나, 압도적인 전력으로 습격을 해야만 가능한데 대체 이 계곡에서 무슨 일이 있던 것일까? 한참을 식사를 하면서 알게 된 것은 무당파를 포함한 세 집단은 천여운 일행과 마찬가지로 폐검곡에서 누군가를 찾는다는 것이었다. -콰르르릉! -쏴아아아아! 곰방대의 노인의 예상과 다르게 밤이 깊어질수록 빗줄기는 더욱 굵어졌다.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서면서도 내일을 위해서 여독을 풀어야 하기에 천여운과 일행들은 객실 방으로 들어가 쉬기로 했다. 계단을 올라가서 방 앞에서 양단화가 말했다. “주군께서 이곳에서 쉬시고 저희들은...” 그때 허봉이 그의 말을 잘랐다. “잠깐만요.” “뭔가?” “이 인실이 비좁다고 했는데, 세 명이서 한 방을 쓰는 것은 아닌 듯 합니다.” 허봉의 말에 양단화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무라려 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주군께서 당연히 혼자 쓰셔...” “이렇게 좁은 방에 여....흠흠....자인...문규와 셋이 쓰는 것보다 주군과 같은 방을 쓰면서 호위라도 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에엑?” 헛기침을 하는 허봉의 말에 문규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양단화 역시도 문규가 여자인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교주님을 혼자서 쉬게 하는 편이 옳다고 여겼었다. ‘흐음.....하긴 누군가 교주님을 모시는 편이 나을 려나.’ 틀린 말은 아니라 생각했는지 양단화가 납득해했다. 다만 이 시끄러운 허봉과 같은 방에서 자는 것이 그리 달갑지는 않았다. “알겠네. 문 단주, 아니 문규가 주군을 모시도록 하게.” “자자! 저희는 방으로 가지요. 얼른요. 히히히.” 허봉이 양단화의 등을 떠밀 듯이 재촉했다. 그러면서 고개를 돌려서 천여운을 바라보면서 무당파의 도인인 무진자가 했던 것처럼 눈 한쪽을 깜빡이는 것이 아닌가. ‘교주님! 이 제 일의 충신인 허봉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좋은 밤 보내십시오. 히히히.’ 능글 맞는 허봉의 표정에 천여운의 미간이 굳어졌다. < 50장 객잔의 밤 (1) > 끝 < 50장 객잔의 밤 (2)-(19금) > 처음에는 어색해 하던 천여운과 문규가 머뭇거리다 이내 방에 들어왔다. 예전에 마도관의 생도 시절에 같은 숙소를 쓴 적이 있지만 지금은 사뭇 느낌이 달랐다. 그때는 좀 더 어렸고 호감이 없던 때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많은 생도들이 같이 한 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천여운과 단 둘이 있는 상황이었다. ‘으으으.’ 문규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속으로 본교의 경문이라도 외우고 싶은 심경이었다. 그런데 방안으로 들어와서 그들을 한 번 더 당혹스럽게 만든 것이 있었다. “엇?” “침상이.....하나네요?” 이 인실로 알았던 방은 생각보다 넓었는데 침상이 하나였다. 무당파의 도인인 무진자가 양보해준 방인 듯 했다. “아, 아무래도 실수한 것 같은데요. 교, 교주님. 제가 가서 방을 바꿔달라고 다시 말하고 올게요.” “문....” 천여운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문규가 방을 후다닥 나가버렸다. 방문을 닫고서 나온 문규는 심장이 쿵쿵 뛰어서 진정되지 않는 가슴을 가라앉혔다. 예전에 몰랐는데 좋아하는 사람과 한 공간에 둘이 있는 것이 이렇게 심장에 좋지 않은 일인 줄은 몰랐다. ‘떨려.’ 문규는 부르르 떨리는 손을 보면서 어루만졌다. 어찌 되었든 침상이 하나 뿐인 방에서 자는 것은 아무래도 아니었다. 그녀가 ㅁ자 형태로 되어있는 이층의 반대편으로 향했다. 숙소 방이 떨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다각! 다각! 마침 무당파의 도사들도 대화를 나누던 것을 마치고 쉬려고 하는지 이 층 계단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계단의 앞 쪽에 마주친 무진자 도장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일행의 공자께서 참으로 독특한 취향을 지녔나 보구려. 혼자 쉬라고 했는데 둘이 같이...” “네?” “흠흠, 아니올시다. 원시천존. 원시천존.” 무진자 도장은 괜히 원시천존을 읊으면서 민망하다는 듯이 방으로 들어갔다. 뭔가 대단히 큰 오해를 한 것 같았는데, 다행스러운 점은 이런 방면에서 순진무구한 문규는 영문을 몰라서 갸우뚱거리기만 했다. 양단화와 허봉이 머무는 방 앞에 도착한 그녀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허봉. 허봉.” 차마 사 장로인 양단화를 부르기는 그랬다. 조심스럽게 허봉을 부르는 그녀는 안에서 아무런 답이 없자 조급해졌다. “치이.” 양단화는 모르겠지만 분명 안에서 허봉의 인기척이 느껴지는데 일부러 모르는 척을 하는 건지 이상했다. 괜히 심술이 난 문규가 문을 세게 두드렸다. “허봉!” 그때 방 안쪽에서 누군가가 뛰어나와서 문을 살짝 열었다. 안에 등잔의 불을 껐는지 어두웠다. 허봉이 고개만을 빼꼼 내밀고서 말했다. “흠흠, 무슨 일인가요?” “방이 바뀐 것 같아요.” “방이요?” “주군께서 들어가신 방에 침상이 하나 밖에 없어요?” 그 말을 듣는 허봉이 묘한 눈빛이 되었다. 두 방 모두가 침상이 두 개인 이 인실로 생각했는데, 하나라는 말에 더욱 잘 되었다고 여긴 허봉이었다. “허봉.....지금 되게 이상하게 웃고 있는 거 알아요?” 굉장히 음흉한 표정에 가까웠다. 그런 그녀의 날카로운 지적에 허봉이 얼른 얼굴 표정을 바꾸어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이거 어찌 하나요.” “왜요?” “이 방도 침상이 하나뿐이에요.” “거짓말!” “아니에요. 진짠데.....그래서 저는 바닥에서 자야 하거든요. 그런데 지금 양단화 공이 주무시고 계신데 깨울까요?” 너스레를 떠는 허봉의 말에 문규가 울상이 되었다. 등잔을 키고서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그래도 명색이 장로인데 깨우라고 말하기도 모호했다. 결국 그녀는 투덜거리면서 돌아가야만 했다. 반대편으로 발을 동동 굴리면서 돌아가는 그녀를 보면서 허봉이 므흣하게 웃었다. ‘나중에 저한테 감사하실 겁니다.’ 그런 허봉의 뒤편에서 사 장로 양단화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 한 번만 눈 감아 주는 걸세. 허 부관.” “넵! 히히히.” 그렇게 다시 천여운이 있는 방 앞까지 온 그녀는 어찌 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방금 전까지 괜찮았는데 다시 심장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가슴이 너무 뛰어서 방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때 방문이 열렸다. “방을 바꿔 준다고 했나?” 문 밖의 인기척을 느낀 천여운이었다. 그의 물음에 문규가 얼굴이 새빨개져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 아니요. 저쪽 방도 침상이 하나라고 하네요.” “......그래?” 허봉이 바로 앞에서 그렇게 말했다면 믿지 않겠지만, 문규가 직접 그리 말을 하니 어쩔 수가 없다고 생각한 천여운은 방문을 열어서 들어오라고 했다. 방으로 들어온 그녀는 다시 어찌 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그때 천여운이 말했다. “문규, 네가 침상에서 자라. 오늘 밤은 정좌해서 심상 수련을 할 테니.” “네?” 문규가 반문했다. 그러자 천여운이 살짝 얼굴을 붉히면서 한 번 더 침상에서 자라고 권했다. 처음에는 긴장 되서 몰랐는데 천여운 역시도 쑥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게 되니, 그녀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혹시 교주님도?’ 아무래도 떨리는 것이 자신만이 아닌 듯 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떨리던 것이 가라앉고 천여운이 귀엽게 느껴졌다. ‘헤에.’ 늘 담담한 모습만 보이고 냉철하게 행동하는 그였는데, 본인도 모르게 얼굴이 상기된 것을 보니까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그녀였다. 그 동안 반신반의 했는데 천여운도 자신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어서 자라.” “그래도 교주님이....” “나는 괜찮다.” “정말요?” “.....그래.” “후회하셔도 전 몰라요.” 긴장이 풀려서 장난스럽게 묻는 문규의 물음에 천여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규가 피식하고 웃고는 겉에 걸치고 있는 옷을 벗어서 탁자에 걸쳐 놓았다. ‘헛.’ 순간 놀란 천여운이 고개를 돌렸다. 분명 자신과 함께 있으니 옷을 전부 벗진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상의를 벗는 시늉만 했는데 괜히 민망해졌다. 쑥스러워하며 기다리던 찰나에 문규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응?’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돌린 천여운의 표정이 굳어졌다. 언제 벗은 것일까. 인피면구를 벗은 문규가 자신의 한 보 앞에 서있었던 것이다. 은은한 등잔불에 비치는 문규의 아름다운 얼굴은 방금 전보다도 천여운의 심장을 더욱 크게 뛰게 만들었다. -두근두근!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문규. 탐스러운 복사 꽃잎을 머금은 듯한 입술은 고혹적이기 마저 했다. 천여운이 당혹스러운지 말을 더듬었다. “이, 인피면구는 왜 벗은 것이냐?” 그 모습마저도 사랑스럽게 느껴졌는지 그녀가 반달 웃음을 지었다. 처음 달빛 아래에서 보았을 때처럼 문규는 싱그러우면서도 맑은 미소를 가지고 있었다. 멍한 눈으로 바라보는 천여운에게 그녀가 말했다. “교주님.....절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조심스럽게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문규. 그런 그녀의 떨림을 느꼈는지 멍해져 있던 천여운의 눈이 어느새 문규와 마주했다. 문규가 조심스럽게 작은 입술을 움직이며 말했다. “혹시 제가 싫으신 건가요?” 그녀의 눈동자는 오직 천여운 하나만을 담고 있었다. 문규의 물음에 한참을 말이 없던 천여운이 천천히 손을 올려서 그녀의 하얀 뺨 위에 손을 얹었다. 이에 문규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아.....” 작고 가녀린 새처럼 떨고 있는 모습에 천여운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다.” “아!” 처음 보았을 때부터 쭉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던 그였다. 하지만 어머니인 화 부인의 임종 후로 정을 받지 못하고 자라온 그는 정에 관련된 모든 것이 어색했다. 뺨을 만지면서 쑥스러워 하는 모습에 그녀가 피식 웃었다. '바보.' 그때 그녀가 까치발을 들어서 천여운의 입술에 작고 앵두 같은 입술을 가져왔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자 천여운의 눈이 커졌다. 부드러우면서 향긋한 문규의 살향이 그의 코를 자극했다. ‘문규.....’ 애정은 배우지 않아도 몸에 각인된 것처럼 입술을 맞대고 있던 천여운의 혀가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들어가, 부드럽게 그녀의 혀를 휘어 감았다. “으음!”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자극적인 행동에 그녀의 얼굴이 상기되다 못해 화끈거렸다. 그런데도 혀를 부드럽게 감는 느낌에 사로잡혀 뗄 수가 없었다. 그때 천여운의 머릿속에 나노의 목소리가 울렸다. [사용자의 심장 박동수가 급격하게 오르고 있습니다. 호르몬 수치가 상승...] ‘나노. 음 소거.’ [음 소거 모드를 발동합니다.] 한참을 타액과 타액을 교환하며 입을 맞추던 천여운과 문규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입술을 맞추고 있는 동안 숨을 쉬지 못했는지 문규가 벅찬 호흡을 내뱉었다. “하아....하아....” 두 볼이 붉게 상기되어서 거친 호흡을 내뱉는 그녀의 모습에 천여운의 심장이 더욱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강한 자극에 천여운과 문규의 눈빛이 몽롱해졌다. 두 사람은 배우지 않았는데도 자연스럽게 다시 한 번 입을 맞추면서 서로의 뺨과 몸을 매만졌다. 어느새 두 사람은 침상에 앉아서 누구 할 것 없이 서로를 갈구하기 시작했다. “하아.....교주님.....” “문규.” 한참을 입술을 맞추며 몸을 매만지던 천여운의 손길이 문규의 옷을 조금씩 풀어헤치며, 붕대로 감고 있는 그녀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타인에 의해 닿은 적이 없었던 가슴에 천여운의 뜨거운 손길이 닿자 그녀의 몸이 움찔하며 떨렸다. “하아.....” 그마저도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감았던 붕대가 벗겨지면서 그녀의 아름답고 탐스러운 가슴이 드러났다. 숨겨져 있던 봉긋한 가슴에 천여운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 "부, 부끄러워요." 얼굴이 새빨개져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에 더욱 자극받은 천여운이 문규의 몸에 더욱 밀착했다. 맨 살결이 닿자 문규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학!” 놀라하던 그녀가 떨리는 눈빛으로 천여운을 껴안았다. 얼굴이 녹아내릴 만큼 화끈거리는 것 이상으로 흥분된 감정에 사로잡힌 문규도 자연스럽게 천여운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스르륵! 근육이 발달된 천여운의 가슴에 맞닿은 그녀의 귀에 고동이 울려 퍼졌다. 천여운의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전해졌다. 그것을 느끼자 그가 얼마나 자신으로 인해 흥분했음을 알게 된 문규의 전신을 짜릿하게 만들었다. “아!” 천여운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실 한 올 없이 나신이 된 그녀는 봉긋한 가슴에 부드럽게 내려오는 곡선이 아름다운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떨리는 하얀 살결을 보면서 천여운의 남성이 단단해졌다. ‘어멋!’ 무심결에 이것을 보게 된 문규가 소스라치게 놀라서 자신의 두 눈을 손으로 가렸다. 부끄러워하는 모습에 더욱 자극받은 천여운이 그녀의 허리를 한 팔로 감싸 안으며, 조심스럽게 그녀에게로 밀착했다. “하악!” 서로의 그곳이 살짝 닿자 그녀의 입에서 교태스러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신이 입에서 이런 목소리가 나올 줄은 몰랐는지 손을 가리고 있던 두 눈이 커져서 천여운을 바라보았다. “교, 교주님....너, 너무 떨려요.” 몸을 파르르 떨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천여운이 다른 한 손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겨주면서 달래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따뜻하게 전해져오는 그의 목소리에 진정이 된 그녀가 얼굴을 감싸고 있던 손을 떼어서 그의 등을 감싸 안았다. 천여운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양쪽 무릎을 잡고 두 다리를 활짝 벌렸다. -두근두근!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문규의 다리를 벌리고 있는 야한 모습에 천여운의 심장이 크게 고동쳤다. 그의 본능이 꽃잎으로 남성이 다가가기를 권하고 있었다. '여긴가.' 본능적으로 들어가야 할 곳을 알게 된 천여운이 남성을 비볐다. 자신의 꽃잎을 자극하는 천여운의 뜨거운 남성에 문규의 입에서 애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아....하아....교주님....뭔가 이상해요. 아아앙." 처음 느껴보는 야릇한 감각이었다. 그 순간 천여운의 단단한 남성이 문규의 젖어있는 꽃잎을 찔렀다. “윽!” 문규가 인상을 찡그렸다. 한 번도 남성의 그것이 닿지 않은 꽃잎은 쉽게 문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단단한 천여운의 그것이 몇 차례 자극하기 시작하자, 그녀가 애달픈 표정을 하더니 이내 그것을 받아들였다. “하아악!” 그녀가 거친 교성음을 내뱉으며 등허리를 활처럼 튕겨졌다. 그리고는 몸을 파르르 떨더니, 떨어지지 않으려고 천여운의 등허리로 두 다리를 교차하여 고정시켰다. 천여운 또한 그녀의 안에서 더욱 흥분되었는지 호흡이 거칠어졌다. “헉...헉....문규....” “교주님.....교주님.....” 천여운의 허리가 뒤로 빠졌다가 다시 한 번 문규의 안으로 움직이자, 그녀의 입에서 교태스러운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흐으으응!” 아파하면서도 흥분하는 문규의 모습에 천여운은 완전히 이성을 풀어헤치고 만다. 천여운이 조심스럽게 움직이던 허리를 조금씩 속도를 높이자 문규의 입에서 신음성이 더욱 커져갔다. "아흑! 조금만 천천히...." "헉.....헉..." -탁! 탁! 탁! "아으윽! 교....교주님." 애원하는 목소리 조차도 자극적이면서도 야하게 들려왔다. 한 마리의 야수가 된 천여운은 문규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새하얀 허벅지를 움켜잡고는 점차 격렬하게 허리를 흔들었다. -팍! "하악!" 강하게 밀고 들어오는 남성에 그녀의 입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인상을 찡그리며 아픔이 더욱 강했던 문규의 얼굴 표정이 점차 야릇하게 바뀌어갔다. '모, 몸이 달아 올라서 정신이 혼미해질 것 같아.' 쾌감이 그녀의 몸과 마음까지 사로잡자 입에서 나오는 교성이 강해졌다. "하악.....하악....하악!" 점차 그들의 방안이 뜨거운 열기와 쾌감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 * * 한편 반 시진 정도가 지났을 무렵, 사 장로 양단화가 숙소의 방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나왔다. -드르렁! 드르렁! 방안에서 허봉은 코를 골면서 잠이 들어 있었다. 이 층에서 난간을 붙잡고 밑을 내려다보니 대부분의 손님들이 호실로 들어갔는지 조용했고 바깥의 빗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지금까지 방안에서 사람들이 들어가기만을 기다렸던 그였다. -슉! 양단화가 가볍게 신형을 날려서 일 층으로 내려왔다. 바닥에 닿는 그의 두 발은 깃털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만큼 화경의 무위는 범인을 넘어선다. ‘자고 있을 려나.’ 지금은 자시 중엽이었기 때문에 숙수나, 곰방대의 노인도 자고 있을 수도 있었다. 더군다나 이렇게 비가 많이 내리는 늦은 밤에 손님이 있을 리도 없으니 말이다. 아까 전에 보았을 때 주방 옆에 그들이 묶는 숙소가 있는 듯 했다. 양단화가 기척을 죽이고서 노인만 깨우기 위해서 숙소의 방문을 조용히 열고서 등잔불을 가져갔다. 그런데, ‘엇?’ 숙소 안에는 주방장으로 보이는 털보 중년인 외에는 침상 하나가 비어있었다. 이불이 들쳐 있는 것을 보면 분명 누군가 있었던 것은 틀림없었다. ‘대체 어디로 간 거지?’ 양단화가 기감을 넓혀서 인근 반경까지 인기척을 느끼려고 집중했다. 장대비로 인해 자연 현상이 기감을 방해했지만 가까운 곳에서 사람의 인기척이 감지되었다. ‘마구간?’ 그곳은 바로 마구간이었다. 양단화가 조심스럽게 객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콰르르쾅쾅! -쏴아아아아! 아직까지 천둥 번개가 치면서 비가 폭우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양단화가 최대한 비를 맞지 않기 위해서 빠르게 경공을 펼쳐서 객잔의 마구간으로 향했다. 한달음에 마구간의 근처로 도착한 양단화가 신형을 틀어서 몸을 숨겼다. 곰방대의 노인만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듯 했다. 노인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한 주홍색 옥패를 손에 들고 있는 중년인이었다. ‘저건?’ 이곳에 오기 전에 들었었다. 신의를 만나기 위해서는 의(醫)라고 새겨진 주홍색 옥패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저게 그것인가?’ 특별 파견대가 들고 갔다는 것과 흡사해보였다. 먼저 온 손님이 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볼까 하던 찰나였다. -푹! ‘헛?’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노인의 손가락으로 검결지를 만들더니, 쾌속하게 중년인의 미간을 뚫어버렸다. -털썩! 방심하고 있던 중년인이 눈을 부릅 뜨고서 죽음을 맞이했다. ‘이럴 수가.....’ 무공을 전혀 익히지 않은 자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엄청난 고수였던 것이다. 놀라하고 있는데, 노인이 뭔가를 중얼거렸다. 그 입술 모양은, “쥐새끼 한 마리가 있군.” < 50장 객잔의 밤 (2)-(19금) > 끝 < 50장 객잔의 밤 (2), (3) > 이번 화는 50장 객잔의 밤(2) 전체 이용가와 객잔의 밤(3)화가 합쳐졌습니다. 19금이 걸려있는 전 화를 읽으신 독자 분들께서는 내용의 중반부부터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 처음에는 어색해 하던 천여운과 문규가 머뭇거리다 이내 방에 들어왔다. 예전에 마도관의 생도 시절에 같은 숙소를 쓴 적이 있지만 지금은 사뭇 느낌이 달랐다. 그때는 좀 더 어렸고 호감이 없던 때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많은 생도들이 같이 한 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천여운과 단 둘이 있는 상황이었다. ‘으으으.’ 문규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속으로 본교의 경문이라도 외우고 싶은 심경이었다. 그런데 방안으로 들어와서 그들을 한 번 더 당혹스럽게 만든 것이 있었다. “엇?” “침상이.....하나네요?” 이 인실로 알았던 방은 생각보다 넓었는데 침상이 하나였다. 무당파의 도인인 무진자가 양보해준 방인 듯 했다. “아, 아무래도 실수한 것 같은데요. 교, 교주님. 제가 가서 방을 바꿔달라고 다시 말하고 올게요.” “문....” 천여운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문규가 방을 후다닥 나가버렸다. 방문을 닫고서 나온 문규는 심장이 쿵쿵 뛰어서 진정되지 않는 가슴을 가라앉혔다. 예전에 몰랐는데 좋아하는 사람과 한 공간에 둘이 있는 것이 이렇게 심장에 좋지 않은 일인 줄은 몰랐다. ‘떨려.’ 문규는 부르르 떨리는 손을 보면서 어루만졌다. 어찌 되었든 침상이 하나 뿐인 방에서 자는 것은 아무래도 아니었다. 그녀가 ㅁ자 형태로 되어있는 이층의 반대편으로 향했다. 숙소 방이 떨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다각! 다각! 마침 무당파의 도사들도 대화를 나누던 것을 마치고 쉬려고 하는지 이 층 계단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계단의 앞 쪽에 마주친 무진자 도장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일행의 공자께서 참으로 독특한 취향을 지녔나 보구려. 혼자 쉬라고 했는데 둘이 같이...” “네?” “흠흠, 아니올시다. 원시천존. 원시천존.” 무진자 도장은 괜히 원시천존을 읊으면서 민망하다는 듯이 방으로 들어갔다. 뭔가 대단히 큰 오해를 한 것 같았는데, 다행스러운 점은 이런 방면에서 순진무구한 문규는 영문을 몰라서 갸우뚱거리기만 했다. 양단화와 허봉이 머무는 방 앞에 도착한 그녀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허봉. 허봉.” 차마 사 장로인 양단화를 부르기는 그랬다. 조심스럽게 허봉을 부르는 그녀는 안에서 아무런 답이 없자 조급해졌다. “치이.” 양단화는 모르겠지만 분명 안에서 허봉의 인기척이 느껴지는데 일부러 모르는 척을 하는 건지 이상했다. 괜히 심술이 난 문규가 문을 세게 두드렸다. “허봉!” 그때 방 안쪽에서 누군가가 뛰어나와서 문을 살짝 열었다. 안에 등잔의 불을 껐는지 어두웠다. 허봉이 고개만을 빼꼼 내밀고서 말했다. “흠흠, 무슨 일인가요?” “방이 바뀐 것 같아요.” “방이요?” “주군께서 들어가신 방에 침상이 하나 밖에 없어요?” 그 말을 듣는 허봉이 묘한 눈빛이 되었다. 두 방 모두가 침상이 두 개인 이 인실로 생각했는데, 하나라는 말에 더욱 잘 되었다고 여긴 허봉이었다. “허봉.....지금 되게 이상하게 웃고 있는 거 알아요?” 굉장히 음흉한 표정에 가까웠다. 그런 그녀의 날카로운 지적에 허봉이 얼른 얼굴 표정을 바꾸어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이거 어찌 하나요.” “왜요?” “이 방도 침상이 하나뿐이에요.” “거짓말!” “아니에요. 진짠데.....그래서 저는 바닥에서 자야 하거든요. 그런데 지금 양단화 공이 주무시고 계신데 깨울까요?” 너스레를 떠는 허봉의 말에 문규가 울상이 되었다. 등잔을 키고서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그래도 명색이 장로인데 깨우라고 말하기도 모호했다. 결국 그녀는 투덜거리면서 돌아가야만 했다. 반대편으로 발을 동동 굴리면서 돌아가는 그녀를 보면서 허봉이 므흣하게 웃었다. ‘나중에 저한테 감사하실 겁니다.’ 그런 허봉의 뒤편에서 사 장로 양단화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 한 번만 눈 감아 주는 걸세. 허 부관.” “넵! 히히히.” 그렇게 다시 천여운이 있는 방 앞까지 온 그녀는 어찌 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방금 전까지 괜찮았는데 다시 심장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가슴이 너무 뛰어서 방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때 방문이 열렸다. “방을 바꿔 준다고 했나?” 문 밖의 인기척을 느낀 천여운이었다. 그의 물음에 문규가 얼굴이 새빨개져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 아니요. 저쪽 방도 침상이 하나라고 하네요.” “......그래?” 허봉이 바로 앞에서 그렇게 말했다면 믿지 않겠지만, 문규가 직접 그리 말을 하니 어쩔 수가 없다고 생각한 천여운은 방문을 열어서 들어오라고 했다. 방으로 들어온 그녀는 다시 어찌 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그때 천여운이 말했다. “문규, 네가 침상에서 자라. 오늘 밤은 정좌해서 심상 수련을 할 테니.” “네?” 문규가 반문했다. 그러자 천여운이 살짝 얼굴을 붉히면서 한 번 더 침상에서 자라고 권했다. 처음에는 긴장 되서 몰랐는데 천여운 역시도 쑥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게 되니, 그녀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혹시 교주님도?’ 아무래도 떨리는 것이 자신만이 아닌 듯 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떨리던 것이 가라앉고 천여운이 귀엽게 느껴졌다. ‘헤에.’ 늘 담담한 모습만 보이고 냉철하게 행동하는 그였는데, 본인도 모르게 얼굴이 상기된 것을 보니까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그녀였다. 그 동안 반신반의 했는데 천여운도 자신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어서 자라.” “그래도 교주님이....” “나는 괜찮다.” “정말요?” “.....그래.” “후회하셔도 전 몰라요.” 긴장이 풀려서 장난스럽게 묻는 문규의 물음에 천여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규가 피식하고 웃고는 겉에 걸치고 있는 옷을 벗어서 탁자에 걸쳐 놓았다. ‘헛.’ 순간 놀란 천여운이 고개를 돌렸다. 분명 자신과 함께 있으니 옷을 전부 벗진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상의를 벗는 시늉만 했는데 괜히 민망해졌다. 쑥스러워하며 기다리던 찰나에 문규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응?’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돌린 천여운의 표정이 굳어졌다. 언제 벗은 것일까. 인피면구를 벗은 문규가 자신의 한 보 앞에 서있었던 것이다. 은은한 등잔불에 비치는 문규의 아름다운 얼굴은 방금 전보다도 천여운의 심장을 더욱 크게 뛰게 만들었다. -두근두근!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문규. 탐스러운 복사 꽃잎을 머금은 듯한 입술은 고혹적이기 마저 했다. 천여운이 당혹스러운지 말을 더듬었다. “이, 인피면구는 왜 벗은 것이냐?” 그 모습마저도 사랑스럽게 느껴졌는지 그녀가 반달 웃음을 지었다. 처음 달빛 아래에서 보았을 때처럼 문규는 싱그러우면서도 맑은 미소를 가지고 있었다. 멍한 눈으로 바라보는 천여운에게 그녀가 말했다. “교주님.....절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조심스럽게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문규. 그런 그녀의 떨림을 느꼈는지 멍해져 있던 천여운의 눈이 어느새 문규와 마주했다. 문규가 조심스럽게 작은 입술을 움직이며 말했다. “혹시 제가 싫으신 건가요?” 그녀의 눈동자는 오직 천여운 하나만을 담고 있었다. 문규의 물음에 한참을 말이 없던 천여운이 천천히 손을 올려서 그녀의 하얀 뺨 위에 손을 얹었다. 이에 문규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아.....” 작고 가녀린 새처럼 떨고 있는 모습에 천여운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다.” “아!” 처음 보았을 때부터 쭉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던 그였다. 하지만 어머니인 화 부인의 임종 후로 정을 받지 못하고 자라온 그는 정에 관련된 모든 것이 어색했다. 뺨을 만지면서 쑥스러워 하는 모습에 그녀가 피식 웃었다. '바보.' 그때 그녀가 까치발을 들어서 천여운의 입술에 작고 앵두 같은 입술을 가져왔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자 천여운의 눈이 커졌다. 부드러우면서 향긋한 문규의 살향이 그의 코를 자극했다. ‘문규.....’ 그때 천여운의 머릿속에 나노의 목소리가 울렸다. [사용자의 심장 박동수가 급격하게 오르고 있습니다. 호르몬 수치가 상승...] ‘나노. 음 소거.’ [음 소거 모드를 발동합니다.] 한참 동안 입을 맞추던 천여운과 문규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입술을 맞추고 있는 동안 숨을 참고 있었던 문규가 벅찬 호흡을 내뱉었다. “하아....하아....” 두 볼이 붉게 상기되어서 수줍어하는 그녀의 모습에 천여운의 심장이 더욱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처음 겪어보는 입맞춤에 강한 자극을 받은 천여운과 문규의 눈빛이 몽롱해졌다. 두 사람은 배우지 않았는데도 자연스럽게 다시 한 번 입을 맞추면서 서로의 뺨과 몸을 매만졌다. 어느새 두 사람은 침상에 앉아서 누구 할 것 없이 서로를 갈구하기 시작했다. * * * 한편 반 시진 정도가 지났을 무렵, 사 장로 양단화가 숙소의 방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나왔다. -드르렁! 드르렁! 방안에서 허봉은 코를 골면서 잠이 들어 있었다. 이 층에서 난간을 붙잡고 밑을 내려다보니 대부분의 손님들이 호실로 들어갔는지 조용했고 바깥의 빗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지금까지 방안에서 사람들이 들어가기만을 기다렸던 그였다. -슉! 양단화가 가볍게 신형을 날려서 일 층으로 내려왔다. 바닥에 닿는 그의 두 발은 깃털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만큼 화경의 무위는 범인을 넘어선다. ‘자고 있을 려나.’ 지금은 자시 중엽이었기 때문에 숙수나, 곰방대의 노인도 자고 있을 수도 있었다. 더군다나 이렇게 비가 많이 내리는 늦은 밤에 손님이 있을 리도 없으니 말이다. 아까 전에 보았을 때 주방 옆에 그들이 묶는 숙소가 있는 듯 했다. 양단화가 기척을 죽이고서 노인만 깨우기 위해서 숙소의 방문을 조용히 열고서 등잔불을 가져갔다. 그런데, ‘엇?’ 숙소 안에는 주방장으로 보이는 털보 중년인 외에는 침상 하나가 비어있었다. 이불이 들쳐 있는 것을 보면 분명 누군가 있었던 것은 틀림없었다. ‘대체 어디로 간 거지?’ 양단화가 기감을 넓혀서 인근 반경까지 인기척을 느끼려고 집중했다. 장대비로 인해 자연 현상이 기감을 방해했지만 가까운 곳에서 사람의 인기척이 감지되었다. ‘마구간?’ 그곳은 바로 마구간이었다. 양단화가 조심스럽게 객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콰르르쾅쾅! -쏴아아아아! 아직까지 천둥 번개가 치면서 비가 폭우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양단화가 최대한 비를 맞지 않기 위해서 빠르게 경공을 펼쳐서 객잔의 마구간으로 향했다. 한달음에 마구간의 근처로 도착한 양단화가 신형을 틀어서 몸을 숨겼다. 곰방대의 노인만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듯 했다. 노인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한 주홍색 옥패를 손에 들고 있는 중년인이었다. ‘저건?’ 이곳에 오기 전에 들었었다. 신의를 만나기 위해서는 의(醫)라고 새겨진 주홍색 옥패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저게 그것인가?’ 특별 파견대가 들고 갔다는 것과 흡사해보였다. 먼저 온 손님이 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볼까 하던 찰나였다. -푹! ‘헛?’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노인의 손가락으로 검결지를 만들더니, 쾌속하게 중년인의 미간을 뚫어버렸다. -털썩! 방심하고 있던 중년인이 눈을 부릅 뜨고서 죽음을 맞이했다. ‘이럴 수가.....’ 무공을 전혀 익히지 않은 자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엄청난 고수였던 것이다. 놀라하고 있는데, 노인이 뭔가를 중얼거렸다. 그 입술 모양은, “쥐새끼 한 마리가 있군.” * * * 노인이 허리를 숙여서 죽은 중년인이 떨어뜨린 주홍색 옥패를 주어 들었다. 그것을 품속에 갈무리한 노인이 굽었던 허리를 곧게 폈다. -우드드득! 허리를 구부정하게 다니던 것이 거짓이었는지 시원하다는 표정으로 몸을 풀었다. “이걸 하나 얻자고 시간 낭비가 심했군.” 노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에게서 풍겨져 오는 기운부터 분위기까지 모든 게 달라졌다고 느낀 사 장로 양단화는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노인의 신형이 잔상처럼 흩어졌다. 이형환위의 수법이었다. “큭!” 사 장로 양단화가 재빨리 보도를 뽑아서 앞으로 휘둘렀다. 그러자 사라졌던 노인이 잔상처럼 나타나서는 상체를 뒤로 젖히며 보도를 피했다. -쏴아아아아!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 양단화가 긴장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런 그를 바라보면서 노인이 입 꼬리를 올렸다. “제법 눈치가 빠르구나. 허허허.” 눈앞에 있던 빗방울이 튀어 오르지 않았다면 노인이 자신의 근처로 다가온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적어도 노인은 그보다 한 단락 이상의 고수가 틀림없었다. “노인장....당신의 진짜 정체가 뭐지?” “정체? 허허허. 보다시피 객잔의 주인이 아닌가.” “허튼소리!” 고작 객잔의 주인이 이런 엄청난 고수일 리가 만무했다. 세찬 장대비에 노인의 얼굴 피부가 들썩거렸다. ‘설마 인피면구인가?’ 교묘하게 만들어진 인피면구라도 이렇게 장대비를 연달아 맞으니 흐트러질 수밖에 없었다. 의아한 표정을 짓는 그를 향해 노인이 검결지를 뻗었다. 양단화가 도를 휘둘러서 찔러오는 검결지를 막았다. -차아아앙! ‘엄청난 공력이다!’ 검결지에 실려 있는 공력에 도신이 떨려왔다. 덕분에 이를 막아낸 양단화의 신형이 뒤로 다섯 보 가량 밀려났다. -타타타타탁!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노인이 검결지로 검초를 펼쳤다. 그의 검초에 실려 있는 검기가 여러 갈래 뻗어오면서 양단화의 주요 요혈들을 노렸다. 양단화가 빠르게 몸을 회전하면서 도망(刀網)을 만들어내 검기를 튕겨냈다. -채채채채챙! 도기를 튕겨내자 어느새 바로 앞까지 도달한 노인이 회전이 끝날 무렵의 양단화의 움직임에 맞춰서 미간에 검결지를 찔러왔다. “헛?” 놀란 양단화가 고개를 뒤로 젖히는 순간, 노인이 발차기로 그의 다리를 걷어찼다. -퍽! 쿠당탕! “크헉!” 균형이 무너진 양단화가 흙탕물에 몸을 뒹굴었다. 쪽팔림이고 할 것 없이 양단화는 나려타곤(懶驢打滾)의 수법으로 몸을 뒹굴면서 노인의 다음 공격을 피해냈다. -촤아아아악! 고여 있는 흙탕물를 가르며 날카로운 예기가 스쳐 지나갔다. 조금만 늦었어도 몸이 두 동강이 날 뻔했다. 손을 바닥에 짚어서 몸을 용수철처럼 튀어서 일으켜 세운 양단화가 도기를 발산하여 객잔을 향해 날렸다. -쾅! 도기가 객잔 벽을 뚫고 들어갔다. 그것을 보면서 노인이 혀를 끌끌 차면서 말했다. “고놈. 머리를 굴리는 구나.” “하아....하아....” 양단화가 도기를 날린 것은 객잔 내에 있는 사람들을 깨우기 위해서였다. 이왕이면 교주인 천여운이 이를 알아차리기를 바랐다. 노인이 비릿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안에 있는 쭉정이들이 나온다고 해서 네놈에게 구명줄이 될 성 싶으냐? 허허허. 괜한 쓸데없는 짓으로 희생만 늘릴 뿐이다.” “쭉정이? 하아....과연 그럴까?” “허장성세를 부리기는!” -스슥!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노인의 신형이 흩어지며 둘로 나뉘더니 양단화의 양옆으로 동시에 노려왔다. 움직임이 너무 빨라서 둘로 보이는 것이었다. ‘어디지?’ 여기서 하나의 공격이 분명 진초였는데, 어느 것도 허점이 보이지 않았다. 고민하던 양단화가 공력을 끌어올려 보도에 도강을 일으켜서 크게 휘두르며 동시에 둘로 나뉜 노인을 베려했다. -스슥! 가장 먼저 베인 노인의 잔상은 환영에 불과했다. 진초는 왼쪽에서 검결지를 찔러왔다. ‘더 빠르게!’ 양단화가 도를 더욱 빠르게 휘둘렀지만 검결지를 막기에는 미처 늦었다. -푹! 검결지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빛의 검강이 간발의 차로 양단화의 도강에 부딪치며 원래 노렸던 가슴을 꿰뚫지 못하고 왼쪽 어깨를 관통했다. “크헉!” 어깨를 파고드는 고통에 양단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신형이 흔들리며 비틀거리는 양단화를 바라보며 노인이 마무리를 지으려고 했다. “저승으로 보내주마.” 노인이 검결지로 양단화의 머리를 찌르려는 순간이었다. -흠칫! 빗속을 꿰뚫고 날아오는 날카로운 예기를 감지한 노인이 빠르게 신형을 뒤로 물렸다. 그 순간 그의 앞으로 푸른빛 도강이 스치고 지나갔다. -콰콰콰쾅! 바닥에 꽂힌 도강에 고여 있던 빗물과 파편이 위로 튀어 올랐다. 노인이 가볍게 검결지를 휘젓자 그를 향해서 튀어 오르던 파편이 검막에 막혀서 튕겨나갔다. -탁! 그 사이에 어느새 양단화의 앞으로 누군가 나타났다. 그를 알아본 양단화가 어깨의 부상으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화색이 밝아졌다. “주, 주군!” 그를 위기에서 구한 자는 바로 천여운이었다. 급하게 나왔는지 상의를 반쯤 걸치다시피 한 그의 얼굴은 다소 상기되어 있었다. ‘저 자의 정체가 뭐지?’ 막 나온 참이라 경황이 없었지만 무공을 펼치는 것으로 보아 노인이 단순한 객주가 아님은 눈치 챘다. 기습적으로 날린 도강도 여유롭게 피해낼 정도의 고수였다. “크흠.” 노인이 방금 전과 달리 인상이 굳어졌다. ‘그저 젊은 애송이인줄 알았는데, 실력을 숨기고 있었나?’ 화경의 극에 올라서 모든 기운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천여운이다. 그래서인지 객잔에 있을 때만 하더라도 양단화 이외에는 위협될 만한 고수가 없을 거라고 단정 지었던 노인이었다. ‘이놈을 부르기 위함이었군.’ 그제야 양단화가 객잔에 도기를 날렸던 것을 납득할 수 있었다. 천여운이 그에게 백룡도로 겨냥하며 물었다. “당신 정체가 뭐지?” “........” 그 물음에 노인은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당장 그와 겨뤄야 할지 아니면 피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객잔 입구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칫! 목숨을 건졌구나.” -팟! 좋은 명분거리가 생겼다. 양단화를 향해 그 말을 남기고서 노인이 어딘가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어딜!” -촤아아아악! 천여운이 도망가는 그를 향해서 탄도강(彈刀?)을 날렸지만 노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것을 피한 뒤에 사라져버렸다. 그곳은 노인이 가지 말라고 당부했던 계곡이 있는 산 쪽이었다. 그를 따라가서 잡아야 하나 고민했던 천여운이었지만 이내 그것을 포기했다. 무위가 짐작이 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그와 동급이거나 그 이상의 실력자일지 몰랐다. 그리고, “양단화 공. 괜찮습니까?” “저, 저는 괜찮습니다. 주군.” 그렇게 말하면서도 안색이 창백했다. 어깨가 검강에 관통 당했으니 그 고통을 말로 이룰 수 없을 것이다. -타타탁! 천여운이 어깨 부위에 지혈점을 눌러서 출혈이 멎게 도왔다. 그 사이에 객잔 밖으로 무당파의 도인들을 비롯한 두 무림인 집단들이 주섬주섬 나왔다. 객잔 일층을 관통한 도기로 한껏 긴장한 눈빛들이 역력했다. -팟! 무당파의 무진자 도장이 경공을 펼쳐서 그들에게로 다가와 물었다. “원시천존. 원시천존. 무슨 일입니까?” 이를 어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해하는 차에 양단화가 임기응변으로 말했다. “큭, 무 도장. 습격을 당했습니다.” “습격이라뇨?” 피로 물들어 있는 왼쪽 어깨를 본다면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는 양단화가 마구간 쪽으로 고개를 돌려서 눈빛으로 가리켰다. “말을 살피러 가는데, 객잔주인 노인장이 한 남자를 살해했습니다.” “살해?” 그 말을 엿들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놀란 얼굴로 마구간으로 달려갔다. 마구간에는 미간이 꿰뚫려서 죽어있는 중년인이 있었다. “자, 장주님!” 그들의 일행이었던 세 사람이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객잔주에게서 정보를 얻겠다며 나갔던 자가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는데,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슬픔과 격노에 빠져있던 와중에 그들 중 한 사람이 중년인의 품을 뒤졌다. 그런데 품속에 있어야 할 주홍색 옥패가 보이지 않았다. -팟! “없어! 없어!” 당황한 그들이 이곳저곳을 살피더니 이내 양단화가 있는 곳으로 부리나케 달려왔다. 그리고는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 정말 이곳의 객잔주가 장주님을 살해한 것이 틀림없소?” “쿨럭....쿨럭.....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소. 여러분들이 나오려고 하자 계곡 쪽으로 급히 도망갔소.” “큭! 당장 채비를 해라!” “알겠습니다!” 장주가 살해되고 중요한 물건을 탈취 당했다는 격분에 그들은 노인의 정체나 그 실력보다도 당장 잡아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쏴아아아아! 비가 폭우처럼 쏟아지는 밤이었는데, 그들은 마구간에서 말을 몰고 와서 살해당한 문주를 챙겨서 다급히 객잔을 떠났다. 무당파의 도인들 몇몇이 폭우로 위험하다고 만류했지만 소용없었다. 무진자 도장은 아직도 믿을 수가 없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도경을 외웠다. “원시천존. 원시천존. 어찌 이런 일이....허어.” 몇 년 동안이나 알고 지내왔던 노인이 고수였고, 손님을 살해했다는 것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 역시도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노인에게 정보를 물으려고 했는데 한 편으로는 운이 좋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출혈이 심한 듯하니,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도우님.” 천여운이 부상당한 양단화를 부축해서 객잔으로 들어가자, 무당파의 도인들 중에 한 사람이 그에게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형. 보셨습니까?” “.....보았네.” “인피면구입니다.” 그들은 천여운의 얼굴을 덮고 있는 인피면구를 알아챘다. 장대비가 쏟아지면서 인피면구가 약간 흐트러진 것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혹시 저들이 노인장과 죽은 사내를 해한 범인이 아닐까요?” “그건 아닌 듯 하네.” “네?” “그것은 무 사형의 말이 맞네. 그들은 둘 다 도(刀)를 사용하는 자들이었네. 그런데 죽은 사내는 검상을 입었었네.” “아!” 천여운과 양단화가 들고 있는 도를 유심히 살폈던 무진자와 한 도인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범인이 아니라고 해도 인피면구를 쓰고 있던 점이 마음에 걸렸다. 더군다나 이곳 폐검곡은 비밀이 많은 장소였다. -콰르르르릉! 천둥 번개와 폭우가 쏟아지는 밤하늘을 쳐다보면서 무진자가 중얼거렸다. “폐검곡에 또 다시 심상치 않은 바람이 일렁이는구나.” * * * 다음 날 이른 새벽, 그렇게 그칠 것 같지 않던 폭우가 어느새 잠잠해졌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는 걸 보면 더 이상 비가 내릴 것 같진 않았다. 떠나려는 이들에게는 희소식이었다. 동이 트기 전에 천여운 일행은 일찍 여장을 꾸렸다. 객잔에 들어가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무당파 도인들이 대화를 나누는 것을 엿들은 천여운은 의심받고 있다는 생각에 일찍 떠나려고 했다. 그런데, ‘먼저 떠나다니?’ 그가 막 일어났을 무렵, 새벽 인시에 비가 수그러들자 기다렸다는 듯이 무당파의 도인들이 서 둘러 먼저 객잔을 빠져나갔다.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나가는 것을 보아서 아무도 모르게 나가려는 듯 했다. ‘역시 어젯밤의 그 일 때문인가?’ 한 밤 중의 사건이 터진 후에 천여운과 무당파의 도인들은 자고 있는 숙수를 깨웠다. 숙수에게 노인의 정체를 캐묻기 위해서였다. ‘저, 저는 정말 몰랐습니다요. 정말입니다.’ 노인과 달리 숙수는 정말로 무공을 익히지 않은 평범한 자였다. 여기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 노인은 한 달 전에 닷새 정도 사라졌다가 태연히 돌아왔다고 했다. ‘뭐, 뭔가 평소랑 다르다고는 생각했지만.....’ 원래부터도 괴팍한 성격의 객잔주였기에 그러려니 하고 여겼다고 했다. 그런 숙수의 말에서 천여운은 그 자가 한 달 전에 객잔에 몰래 잠입한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닷새라는 기간은 죽은 노인의 얼굴 가죽으로 인피면구를 만들 시간이었으리라. 무림인이었다면 한 번쯤은 의심해 볼만도 했는데, 평범한 객잔 숙수로서는 의심해볼 여지는 없었다. 그런데 숙수의 증언으로 한 달 전에 사람이 뒤바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무당파의 도인들의 표정이 뭔가 심각해졌다. [사형! 그 분과 연락이 끊긴 시점과 동일합니다.] [.....허어, 서둘러야겠구나.] 전음을 도청했을 때 뭔가 숨겨진 사정이 있다고 여겼는데, 역시 이렇게 일찍 출발한 것으로 보아서 그 분과 연락이 끊겼다고 한 말과 관련이 있는 듯 했다. ‘그들도 폐검곡으로 향했다면 뭔가 알게 되겠지.’ 왠지 모르게 그런 느낌이 들었다. 마구간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차에 사 장로 양단화와 허봉이 객잔 밖으로 조용히 나왔다. 객잔 주방에서 식량과 물을 챙겨서 나온 그들이었다. 아직까지 안색이 창백한 양단화의 모습에 천여운이 걱정스러운지 물었다. “괜찮습니까?” “심려를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주군. 그래도 한 사람의 몫을 하는 데는 지장이 없습니다.” “몸을 자중하세요.” “충!” 밤새 운기조식을 하여 내상을 어느 정도 치료했지만 관통된 어깨의 상처가 금방 아물 리가 없었다. 그래도 왼쪽 어깨였기를 망정이었지 오른쪽이었다면 큰일 날 뻔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코를 골면서 숙면을 취한 허봉은 이른 새벽에 양단화가 깨워서야, 밤새 있었던 사건을 알게 되었다. "제, 제가 말들을 끌고 나오겠습니다." "그러게. 허 부관." 미안한 마음에 고개가 축 쳐져 있던 허봉이 어쩌다가 문규와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눈이 마주친 문규가 양볼이 새빨개져서는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고개를 획하고 돌려버렸다. 이에 허봉의 입 꼬리가 음흉하게 올라갔다. ‘했네. 했어.’ < 50장 객잔의 밤 (2), (3) > 끝 < 51장 폐검곡, 검들의 무덤 (1) > 안개로 앞이 보이지 않는 숲속. 비는 그쳤지만 축축한 바닥에 젖어있는 수풀로 인해 습기가 가득하다. 우거진 숲은 사람의 출입이 드물어서인지 앞을 헤치고 나가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 ?! “제대로 가는 건지도 모르겠는 데요.” 허봉이 선두에서 수풀을 검으로 베면서 투덜거렸다. 폐검곡이라 적혀 오래된 나무 푯말을 지나친 이후로 그들은 정처 없이 숲을 헤매고 있었다. 수풀이 너무 우거진 탓에 말을 타고 이동할 수 없어서 인근에 묶어두고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건초 더미에서 바늘 찾기 격이구나.’ 폐검곡이라는 이 안개로 가려진 거대한 산속에서 행방불명된 특별 파견대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듯 했다. 계속해서 기감을 열어두고서 인기척을 감지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아무런 진척이 없다. [지도 생성이 5퍼센트 가량 진척 중입니다.] 천여운의 머릿속으로 나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금 천여운의 시야는 증강현실이 개안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의 시야로 작은 영상이 그려지고 있는데, 그것은 나노가 지금까지 이동한 경로들을 정리해서 지도를 만들고 있었다. “아니. 왼쪽으로 이동해라.” “넵. 주군.” 허봉이 천여운의 명령에 방향을 틀었다. 나노가 지도를 생성하고 있는 덕분에 적어도 같은 길을 반복할 우려는 없었다. 이 같은 나노의 능력을 알게 된다면 모두가 탐을 내리라. 다만 이런 식으로 수색을 해서는 어느 세월에 행방불명된 자들을 찾고 신의가 있는 곳을 알아낼지가 문제였다. 한 시진 가량을 숲을 헤매고 있던 차였다. ‘아까부터 공명음이 느껴진다.’ 일정 지역에서 작은 공명음 같은 것이 윙윙 거리며 귓가에 맴돌았다. 천여운과 마찬가지로 사 장로 양단화 역시 그것을 느꼈는지 같은 방향을 바라보면서 인상을 찡그렸다. “느끼셨습니까?” 양단화의 물음에 천여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규와 허봉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이 느낄 수 없다는 것은 기감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이 공명음을 감지하기에는 무공의 경지가 모자란 탓이었다. “뭔가 있는 것 같군요. 그쪽으로 가도록 하죠.” “충!” 양단화가 답하자 허봉이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어, 어디로요?” 그들이 하는 대화를 도통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양단화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허 부관. 지금 보는 방향에서 북서쪽으로 틀게.” “네, 넵!” -?! ?! ?! 양단화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설명하면 허봉이 풀숲을 베어서 뚫고 갔다. 그 뒤를 따라서 일행들은 이동에 좀 더 속도를 가했다. 공명음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이동하자 갈수록 공명음이 강해졌다. -웅웅웅! ‘마치.....날카로운 예기와도 같다.’ 그 방향에서 날카로운 예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신병들에게서나 느껴질 법한 그런 날카로운 기운을 풍겼다. 조금만 더 이동하면 그 진원지에 다가갈 것 같았다. 바로 그때, ‘이게 무슨 냄새지?’ 습한 수풀이라 더욱 코끝을 자극하는 혈향이 어디선가 맡아졌다. 일행들도 이것을 맡았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주군. 피 냄새가 납니다.” 바로 근방인 듯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들은 혈향이 불어오는 방향을 향해서 빠르게 경공을 펼쳐서 갔다. 그들이 있던 곳에서 동쪽으로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나무를 비롯해 수풀 이곳저곳에 검흔들로 가득한 장소가 드러났다. “윽!” 그곳에 도착한 문규가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수풀의 이곳저곳이 피로 난자되어 있었고, 가장 끔찍한 것은 반 토막으로 잘려진 시체였다. 장기 기관이 이리저리 튀어나와 있는 것이 비위가 약하면 견디기 힘든 장면이었다. 그런데 시체는 단 한 구가 아니었다. 두 구의 시신이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었는데, 이곳에 남아있는 대부분의 검흔들은 그들이 살기 위해 발악한 흔적인 듯 했다. “아! 이들은?” 죽어있는 시신들의 얼굴을 본 천여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놀랍게도 그들은 어젯밤에 장주가 살해당했다면서, 흉수인 노인을 추적하러 계곡으로 들어갔던 자들이었다. ‘그 자와 마주친 건가?’ 그렇지 않고는 이렇게 시신으로 발견될 이유가 없었다. 이들의 무위는 강해봐야 일류고수에 불과했다. 노인을 상대로 덤벼봐야 자살 행위 밖에 되지 않았으나, 그들 일행이 애써 그것까지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 “어, 어제 그들인 것 같은 데요. 주군.” 허봉도 알아보았는지 죽은 시신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툭툭! 시신을 몇 차례 손끝으로 건드린 허봉이 말했다. “주군. 죽은 지 그리 오래된 것 같지 않습니다.” 어젯밤에 그들이 노인을 추적했던 시각에는 한참 폭우가 쏟아졌다. 만약 시신이 계속 비를 맞았다면 퉁퉁 불어있거나 할 텐데, 피가 흘러내린 자국이 바닥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면 분명했다. ‘나노, 분석해줘.’ 천여운이 시신의 피와 피부에 손가락을 대고 나노에게 명했다. 그러자 손가락에서 찌릿하며 미세한 흰빛이 세어 나오며 시신에 대한 분석이 들어갔다. 이윽고 나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혈액의 응고 상태와 근육의 경직을 살펴본 결과 사망한지 한 시진 가량 지난 걸로 추측됩니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정도 시간이라면 이들을 죽인 흉수가 한참 먼 곳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여기서 천여운은 또 한 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그런데.....한 사람은 어디 간 거지?’ 이들 일행은 분명 총 세 명이었던 걸로 기억했다. 죽은 문주까지 합하면 네 명이다. 천여운이 의아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주위 어디에도 또 다른 한 명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도망에 성공했을 리가 없다.’ 고작 세 명뿐이라 도망쳐봐야 노인의 손바닥 안 일텐데, 어째서인지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기고 있을 때 양단화가 손을 들어서 신호를 보냈다. “주군!” 천여운이 그곳으로 가보자, 눅눅하여 질척거리는 진흙 바닥에 발자국들이 보였다. 그것은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의 것이었다. 아직 마르지 않은 빗물로 인해 바닥에 발자국이 남은 것은 천운이었다. ‘흔적을 지우진 못했구나.’ 단순한 흙바닥이나 모래였다면 조금만 노력해도 흔적을 지우기 쉽겠지만, 질척이는 진흙바닥의 흔적을 지우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두 명의 발자국이 향하는 방향은, “......공명음이 느껴지는 곳입니다.” -웅웅웅! 날카로운 예기가 흘러나오는 그곳으로 발자국은 이동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잘하면 공명음이 흘러나오는 장소에서 흉수로 짐작되는 노인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어째서 노인이 단 한 명을 살려뒀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일단 따라가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천여운과 일행은 자연스럽게 남겨진 발자국을 따라서 이동했다. 허봉이 검으로 풀숲을 베지 않아도 이미 앞서 만들어진 길이 있었기에 이동하기에는 그리 불편함은 없었다. 그렇게 반 각 정도를 걸어가자 이윽고 수풀이 끝나는 지점이 보였다. “오오!” 허봉의 얼굴이 환해졌다. 계속 습한 풀숲에만 있던 것이 갑갑했던 차였다. 뿌연 안개가 없었다면 멀리서도 뭔가 보였겠지만 수풀을 완전히 빠져나가야 무엇이 있는지 확인될 것 같았다. ‘바닥에 진흙이 없다?’ 빠져나오는 지점에 가까워지자 바닥이 돌로 바뀌었다. 그래서 진흙에 남겨져 있던 발자국도 사라졌다. -사악! 숲을 벗어나자 사방이 확 트인 곳이 드러났다. 여전히 안개가 사방을 뿌옇게 만들었지만, 눈앞에 장엄하리만큼 버티고 있는 이 광활한 암석 장벽이 보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와아아! 산? 아니 바위산인가?” 문규가 고개를 아래에서부터 위로 올려보았다. 그들의 앞에 있는 암석 장벽은 높고 거대한 산봉우리였는데, 흙이 아닌 암석으로 된 바위산이라고 해야 옳았다. 산면이 경사가 수직에 거의 발 디딜 곳이 없을 만큼 험준했다. 경공을 펼치는 무림인이라고 해도 이곳만큼은 등산 장비를 갖추지 않는다면 오르기 힘들 거라 여겨졌다. “이런 곳이 숨겨져 있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좀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 그들이 앞으로 다가갔다. 가장 앞서 걷고 있던 허봉이 한달음에 달려갔다가, 갑자기 멈춰서면서 소스라치게 놀라했다. “히익!” 암석 장벽만을 보고 달리다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몰랐는데 암석 벽은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절벽이 존재하고 있었다. “주, 주군 절벽입니다. 가까이 가시면 안 됩니다.” 허봉이 사색이 된 얼굴로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절벽과 거대한 암석 장벽 사이에 거리가 상당히 먼데다가, 더욱 놀라운 것은 절벽 낭떠러지의 밑이 보이지 않을 만큼 굉장히 깊었다. -휘이이잉! 깊은 절벽에서 나오는 곡풍이 스산하게 들려왔다. “왁! 저, 정말 깊은데요. 공자님.” 문규도 조심스럽게 밑을 내려다보았다가 아찔했는지 고개를 들어올렸다. 안개가 뿌연 것과 별개로 밑이 완전히 검게 보일 만큼 깊었다. 이곳에 떨어졌다가는 평범한 사람이든 무공을 익힌 고수이든 단번에 즉사할 만큼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웅웅웅! 예의 공명음이 들려왔다. 선명하게 느껴지는 날카로운 예기와 공명음에 천여운이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천여운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 “이, 이럴 수가.....” 사 장로 양단화 역시도 무의식적으로 그곳을 보았다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수풀을 막 빠져나왔을 때는 안개로 보지 못했는데, 조금 더 가까워지자 암석 장벽에 있는 그것을 볼 수 있었다. 검(劍). 놀랍게도 암석 장벽에는 너무도 거대하게 검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대체 무얼 보시길래....헉!” “이, 이건.....” 두 사람이 놀라하자 궁금해 하던 허봉과 문규 역시도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말문을 잃고 말았다. ‘전율적이다!’ 검이라는 글자를 보고서 떠오른 것은 그 한 마디였다. 가까이에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암석 장벽에 새겨진 검이라는 글자는 누가 조각칼로 새긴 것이 아니었다. ‘검? 아니 검기로 새긴 것이다.’ 이 글자는 기(氣)로써 새겨진 것 같았다. 언제 새겨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검이라는 글자에서 흘러나오는 검의(劍意)와 날카로운 예기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강렬한 충격을 가져왔다. 마치 청옥석 벽에 새겨진 천마의 검흔을 보았을 때와 거의 동등한 수준이었다. ‘대체 누가 이것을 새긴 거지?’ 글자에서 풍겨지는 검의에서는 세상을 거침없이 내려다볼 만큼 오만함과 절대자의 품격이 느껴졌다. 마치 이 한 글자로 스스로 검에 있어서 천하제일이라 칭하는 듯 했다. 검을 갈고 닦는 자의 마음을 일순간에 굴복시킬 정도였다. “으으으.” 비교적 검에 대한 깨달음이 낮은 허봉조차도 식은땀을 흘리면서 검이라는 글자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 쉬지 않고 한 번에 새겼다. 대체 어떻게 한 거지?’ 기로써 새긴 것은 알 수 있었지만 한 획도 쉬지 않고 새긴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이렇게 한참 떨어진 절벽을 가로질러서 말이다. 그런데 그 방법도 그랬지만 이 검이라는 글자가 굉장히 거대하게 새겨져서 몰라볼 뻔했는데, 이 필체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았다. ‘이 필체는 마치....’ “공자님. 저걸 보세요.” 문규의 외침에 천여운이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보았다. 검이라고 적혀 있는 거대한 글씨 밑으로 암석 장벽에 수많은 무언가가 꽂혀 있었다. 고슴도치처럼 박혀 있는 그것은 다름 아닌 검이었다. “검?” 수많은 검들이 그 글씨 밑에 박혀 있었는데, 어렴풋이 세어보아도 백 개는 넘어보였다. 여러 종류의 검들이 박혀 있었는데 그 중에는 평범한 장검부터 시작해 보검들도 있었다. 꽤 오랜 세월 동안 방치되어 있었는지 대부분이 심하게 녹이 슬어 있었다. ‘이 많은 검들이 어째서? 설마....검을 버린 것인가?’ 자신의 몸이나 매한가지인 독문병기를 버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검을 포기했다는 말과도 같았다. 그만큼 저 검이라는 글자에 굴복한 자들이 많았단 말인가. 한참 그것을 바라보던 천여운이 문득 깨달았다. ‘잠깐! 절벽 골짜기에 검을 버려두고 갔다는 건......설마 여기가?’ < 51장 폐검곡, 검들의 무덤 (1) > 끝 < 51장 폐검곡, 검들의 무덤 (2) > “폐검곡! 공자님. 이곳이 폐검곡인가 봐요!” 문규의 말에 동의하는지 천여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이야 말로 진정한 폐검곡(廢劍谷)이었다. 수많은 검들이 이곳에 버려지고 폐기되었기에 이곳을 폐검곡이라 부르는 것이었다. ‘여긴 검의 무덤이나 마찬가지로구나.’ -웅웅웅! 벽에 박혀 있는 검들에서 미세한 떨림이 일어나자, 예의 공명음이 느껴졌다. “아아아!” 공명음이 느껴지는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냈다. 그것은 벽에 새겨진 검이라는 글자에서 흘러나오는 예기가 암석 장벽에 박혀 있는 검들에 영향을 주면서 생겨난 파동이었다. ‘벽에 새겨진 검흔에서 흘러나온 검기에 영향을 받다니....하!’ 검을 익히는 자로서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언뜻 보아도 암석 장벽에 새겨진 글씨는 오래 전에 남긴 것이었다. 그런데도 검흔에서 흘러나오는 예기가 아직도 남아있다는 것은 화경의 극에 이른 천여운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화경의 극으로도 범접할 수 없는 경지란 말인가.' 검수인 천여운이 한참 그곳을 뚫어지게 쳐다볼 무렵에 충격에서 빠져나온 양단화가 뭔가를 발견했는지 급히 전음을 보내 왔다. [주군! 주군!] ‘!?’ [근방에 인기척이 느껴집니다.] ‘인기척?’ 검이라고 새겨진 글씨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던 천여운이 이내 기감을 집중하자, 가까운 곳에서 정말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기척이 느껴지는 곳은 암석 장벽 쪽에 가까웠다. ‘어째서 장벽 쪽에서 느껴지는 거지?’ [허 부관!] “헉! 네..네네네!” [조용히 하게!] 양단화가 멍하게 검(劍) 자를 바라보고 있는 허봉을 일깨웠다. 여전히 그 충격에서 벗어나기 힘든지 허봉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정신이 없어 보였다. [정신 차리고 조용히 따라오게.] [네넵!] 양단화를 필두로 천여운과 일행이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서 움직였다. 검(劍) 자가 새겨진 부근에서 조금만 더 우측 편으로 이동하자, 암석 장벽 쪽에 또 다른 놀라운것이 발견되었다. ‘아! 이건?’ 벽 쪽에 스무 개 정도 되는 동굴이 보였다. 폐검 장벽의 옆쪽에 이런 곳이 숨겨져 있을 줄은 몰랐다. 동굴들을 보게 되자 천여운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설마 이곳에 신의가 있는 건가?’ 처음 이 산에 들어왔을 때는 사람의 흔적은커녕 어떠한 것도 발견할 수 없어서 내심 초조한 마음이 들었던 그였다. 하지만 장벽에 숨겨진 동굴들을 발견하고 나니, 어쩌면 신의가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겨졌다. [동굴이 엄청 많아요.] 문규의 전음에 천여운이 더욱 기감을 높였다. 동굴이 이렇게 많다는 것은 이 중에 대다수는 가짜일 확률이 높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인기척이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점이었다. [저기다!] 천여운이 동굴 중에 한 곳을 손으로 가리켰다. 사 장로 양단화 역시도 그곳에서 기척을 느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멀다.’ 암석 장벽에 있는 동굴로 들어가려면 이 절벽 낭떠러지를 한 번에 뛰어넘어야만 가능했다. 거리는 족히 10장(丈)은 되어보였다. 어지간한 경공 실력으로는 절대로 뛰어넘을 수 없는 거리였다. 한 번에 도약을 해야 하는데 절정의 극에 이른 허봉이 넘기에는 너무 멀었다. ‘문규도 가능할까?’ 문규가 완숙한 초절정의 경지라고는 하나 천여운의 눈에는 불안하게 여겨졌다. 한 번이라도 실수하게 된다면 그대로 깊은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만다. -꿀꺽! 허봉이 낭떠러지를 한 번 쳐다보고는 긴장된 눈빛으로 침을 삼켰다. 천여운이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양단화 공. 허봉을 안아서 저곳까지 뛰어넘을 수 있겠습니까?” 그 질문에 잠시 고민하더니 양단화가 가능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경의 경지인 그는 심후한 공력을 지녔기에 크게 도약하지 않아도 충분히 10장 거리를 뛰어넘는데 큰 무리가 없었다. “문규, 가능하겠어?” 천여운의 질문에 장벽까지의 거리를 눈대중으로 어느 정도 확인한 문규가 그렇다고 말을 하려 하는데, “힘들면 내가 안고 뛸게.” 그 말에 입 밖으로 나오려던 말이 쏙 들어가서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천여운이 안고 뛴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헤에. 안아준대.’ 좋아하는 그녀를 보면서 허봉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게 결정하자 먼저 천여운이 문규를 안아들었다. ‘꺄아!’ 문규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는 두 볼이 빨개질 정도로 좋아했다. 보호받는 느낌이란 이런 것일까. “좋아. 간다. 꽉 잡아.” “네에. 헤헤헤.” 문규가 천여운을 꼭 껴안자, 곧바로 절벽을 향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타타타타타탁! 용천혈에 공력을 모아서 지면을 박차자, 그의 몸이 낭떠러지의 허공을 가로지르며 단숨에 십 장 거리를 뛰어넘어서 동굴 안으로 안착했다. 이것을 본 허봉이 웃으면서 양단화에게 다가갔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 말을 들은 양단화가 인상을 굳히더니, 이내 양팔을 등 뒤로 뻗고 몸을 약간 숙이고는 업히라는 시늉을 했다. “안아 주시는 게 아닌가요?” “남자를 안는 취미는 없네. 업히게.” “......넵.” 단호한 거절에 허봉이 엉거주춤 양단화의 등에 업혔다. 빨리 업히지 않으면 그대로 버려두고 갈 기세였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타타타타타탁! “흐헉!” 허봉을 업자마자 양단화는 꽉 붙잡으라는 말도 없이 빠르게 도약을 해서 단숨에 절벽 낭떠러지를 뛰어넘었다. 동굴에 발을 안착한 양단화가 엉덩이를 받치고 있던 손을 뗐다. 교주인 천여운의 명령이라 따르기는 했지만 찝찝하다는 듯이 하의에 손을 슥슥 닦았다. ‘헉....헉 간 떨어질 뻔 했네.’ 민망한 것보다도 놀란 게 더 컸다. 그러거나 말거나 동굴에 들어선 양단화가 코를 킁킁 거렸다. ‘이게 무슨 냄새지?’ 뭔가 퀴퀴한 냄새가 동굴 안에서 맡아졌다. 그것은 꼭 불에 그을린 냄새와도 같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양단화가 천여운에게 그것을 전하려고 했는데, 그가 몸을 숙이고서 바닥에 있는 뭔가를 손가락으로 만지고 있었다. ‘이게 뭐지?’ 천여운이 손가락에 묻은 검은 가루를 보았다. 코를 가까이 하고서 냄새를 맡아보니 동굴 전체에서 흘러나오는 냄새와 같았다. ‘나노. 이게 뭔지 알겠어?’ 천여운의 질문에 나노가 검은 가루에 대한 분석에 들어갔다. 손가락 끝에서 흰빛이 살짝 일렁이더니 이윽고 나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성분 분석이 완료되었습니다. 초석 75%, 유황 10%, 분탄 15% 비율로 이루어진 화약입니다.] ‘화약? 그 폭발하는 가루?’ [그렇습니다.] 천여운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화약 가루를 쳐다보았다. 어째서 이곳에 화약 가루가 떨어져 있고 동굴 전체에 이 냄새가 진동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들자 천여운이 어두운 동굴 안을 쳐다보았다. 저 안에서 분명 인기척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동굴 깊숙이에서 흔들리는 희미한 불빛도 보였다. ‘대체 뭘 하려는 거지?’ 물론 화약이라는 것의 목적이 분명했지만 아직 사람이 있다면 이것을 폭발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어떻게 할까요? 교주님.] [잠시만 기다리세요.] [충!]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천여운이 먼저 확인해야겠다고 판단했다. 괜히 섣불리 들어갔다가 낭패를 겪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나노. 야간 투시경 모드.’ [사용자의 눈에 야간투시경(夜間透視鏡) 모드를 개안합니다.] 나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지며 천여운의 동공이 흔들리더니, 이내 어두웠던 그의 시야에 빛이 증폭되면서 어두웠던 동굴 안쪽이 선명하게 보였다. 거리가 살짝 떨어져 있어서 조금 들어가야 보일 듯 했다. [대기하세요.] 천여운이 열 걸음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자 조금씩 멀리 있는 인영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노, 확대해줘.’ [알겠습니다. 시각 정보를 줌 인(zoom in) 하겠습니다.] 나노의 목소리와 함께 멀리서 보이는 희미한 인영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완전히 형태를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확대되자 천여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엇?’ 확대된 시야에 잡힌 것은 동굴의 막혀있는 끝이었다. 그곳에 한 사내가 바닥에 앉아서 머리를 격하게 흔들고 있었는데, 그것이 불빛이 흔들리던 원인이었다. ‘저 자는?’ 그는 다름 아닌 수풀에서 죽어있던 자들의 일행이었다. 사내는 팔부터 다리까지 온통 밧줄 같은 것에 묶여 있었는데,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머리를 격하게 흔들면서 사색이 되어 있었다. ‘횃불?’ 사내가 입에 물고 있는 것은 작은 횃불이었다. 작은 나뭇가지로 만든 횃불의 끝을 물고 있는 그는 어떻게든 불을 끄려고 애를 쓰고 있었지만 그것은 이미 거의 입술 근처까지 도달했다. 타들어갈 것 같은 열기에도 사내는 물고 있는 횃불을 놓지 않고 기를 쓰고 흔들었다. ‘서, 설마?’ 천여운이 사내의 근처를 살펴보니 동굴 입구 쪽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양의 화약 가루가 쌓여 있었다. 당황한 천여운이 야간 투시경 모드를 해지하고 소리쳤다. “당장 이곳을 벗어나야...” 바로 그 순간이었다. -콰콰콰콰쾅! 동굴 안쪽에서 귀가 찢어질 것만 같은 폭발음과 함께 엄청난 불빛이 전광석화와 같이 뿜어져 나왔다. -삐이이이이! 그 폭발음은 너무도 강했기에 귀가 멍멍해지면서 천여운의 뒷말조차 들리지 않았다. 뒷말이 들리지 않았어도 사태가 잘못되었음을 파악한 양단화, 문규, 허봉 등이 놀라서 몸을 돌렸지만 폭발의 여파는 너무도 빨랐다. 용이 불꽃을 토해내는 것처럼 동굴 입구까지 순식간에 폭염이 도달했다. 엄청난 열기의 폭염이 일순간에 그들을 뒤덮었다. -콰콰콰콰콰쾅! 동굴까지 무너지는 일촉즉발의 상황 속에서 천여운의 머릿속에는 오직 탈출보다도 문규와 다른 이들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천여운이 단숨에 십성 공력으로 끌어올려 세 사람을 향해 두 손을 뻗었다. 그러자 동굴 바깥을 향해 몸을 돌리던 그들의 몸이 강한 진기에 밀려나가며 포탄처럼 튕겨나갔다. -팡! “아악!” “꺄아아아악!” -부웅! 폭발이 뒤덮는 절묘한 순간에 동굴 바깥으로 몸이 빠져나온 세 사람은 엄청난 진기에 의해 절벽 반대편에 있는 곳까지 날아가 버렸다. ‘아, 안 돼! 공자님?’ 날아가는 짧은 찰나의 순간에 문규가 충혈된 눈으로 다급히 고개를 돌렸는데, -화르르르르륵! “끄아아아악!” 터져 나오는 폭발을 그대로 맞고서 온몸에 불이 붙은 천여운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동굴 바깥으로 튕겨져 나와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안 돼에에에에에에에!!!” 문규가 절규하며 소리를 질렀지만 이미 천여운의 몸은 엄청난 속도로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천여운이 마지막 혼신의 힘으로 쏘아 보낸 진기의 여파가 다되면서 반대편 절벽에 안착한 문규와 일행들이 놀라서 몸을 틀어서 절벽 낭떠러지로 달려갔다. “주, 주구우우우우운!!!” “아아아아아아악!!!” 끝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 속으로 천여운으로 보이는 불꽃이 희미하게 사라졌다. 문규와 허봉이 미친 듯이 절규하면서 충동적으로 낭떠러지로 뛰어들려고 하자, 당황한 사 장로 양단화가 그들을 붙잡고 만류했다. 지금 여기서 뛰어내리면 같이 죽으려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놔요! 당장 놓으라고요!” 눈물 범벅이가 돼서 충혈된 눈으로 소리를 지르는 문규의 뺨을 양단화가 때렸다. -찰싹! “정신 차리게! 자네를 살리려고 한 교주님의 희생을 헛되게 할 참인가!” 오히려 그 다그침을 듣자 문규의 마음은 찢어질 것만 같았다. 겨우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지 고작 하루 채도 지나지 않았는데, 생겨난 비극은 그녀의 마음을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털썩! "엉엉엉!"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가 구슬프게 꺼이꺼이 목 놓아 울었다. 계속해서 낭떠러지로 소리를 지르던 허봉도 눈시울이 빨개져서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설마 그 짧은 순간에 이런 일이 발생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크윽!’ 주먹을 꽉 쥔 양단화의 주먹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충동적으로 뛰어드는 두 사람을 말리긴 했지만 양단화 역시 같은 마음이었다. 교주를 지켜야 할 자신이 오히려 도움을 받아서 목숨을 구원한 셈이었으니, 그 비통한 마음은 말로 이룰 수가 없었다. 슬픔의 여운이 미처 가라앉기도 전이었다. -탁! 수풀 사이로 느껴지는 인기척에 양단화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 누군가 즐겁다는 듯이 유유히 걸어 나오고 있었는데, 그는 바로 객잔의 곰방대 노인이었다. “네, 네놈은?” “허허허, 이거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군. 놈들을 끌어낼 미끼에 엉뚱한 녀석들이 걸려들었으니 말이야.” 암석 장벽의 동굴 안에 화약은 바로 노인의 짓이었다. 노인은 정말로 생각지도 못한 성과를 거뒀다는 듯이 기쁜 내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놈이 같이 있었으면 꽤나 껄끄러울 뻔했는데, 알아서 낭떠러지로 떨어져주니 참으로 고마운 일이군.” “당신!” 구슬프게 울고 있던 문규가 충혈 된 눈으로 노인을 노려보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천여운의 죽음을 즐거워하는 모습에서 강한 분노를 느꼈다. “호오? 사내 녀석이 계집처럼 울부짖더니 제법 강단이 있구나. 하나!” -고오오오오! 노인에게서 순식간에 엄청난 기운이 폭사되어 나왔다. “그 강단도 그리 오래 가진 못할 것이야.” 노인의 살기 가득한 경고에 양단화의 눈빛이 긴장감으로 물들었다. 어젯밤에 상대했을 때도 확연한 무위의 차이를 보여줬던 괴물 같은 자였다. “곧 바빠질 예정이라 금방 끝내주겠네. 허허허.” 그 말과 함께 노인이 손가락으로 검결지를 만들더니, 비릿하게 웃으며 그들을 향해 신형을 뻗어왔다. * * * 반 시진 정도가 지났을 무렵, 폐검곡에서 오십 리 정도 떨어진 어떤 숲속. 그곳에 어떤 누군가가 힘겹게 몸을 비틀거리면서 걸어가고 있었다. “하아...하아...” 지쳤는지 거친 호흡을 내뱉고 있는 그는 아까 전, 천여운의 남은 일행들을 공격했던 객잔주 노인이었다. 노인은 심한 내상을 입었는지 안색이 굉장히 창백했다. ‘후우, 운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어긋났구나.’ 한참을 걸어가던 노인이 숲속에서 가장 길게 뻗은 거목에 등을 기댔다. 노인이 자신이 지나온 곳을 향해 기감을 열어서 살펴보았으나 더 이상의 추적은 없는 듯 했다. ‘그 계집 같은 놈이 동귀어진의 기세로 덤벼들지만 않았어도 빠르게 정리하고 그 놈도 처리할 수 있었을 텐데.’ 아직도 그 녀석의 눈빛이 잊을 수가 없었다. 충혈 된 눈으로 마치 지아비를 잃고 한이 서린 여인처럼 죽일 듯이 달려드는데, 무위에서 압도적인 그조차도 순간 전의에서 밀렸었다. 그런 와중에 그렇게 기다렸던 그 놈이 미끼를 물고서 나오는 바람에 도리어 합공을 당해서 심한 내상을 입고 말았다. ‘크크큭, 상관없다. 어차피 어느 동굴에서 기어 나왔는지 이제 알게 되었으니 말이야.’ 애초에 목적은 그것이었다. 동굴마다 들락날락 거리면서 살폈지만 어떠한 입구도 발견하지 못했다. 궁여지책으로 동굴 중의 하나를 폭발시켜보았는데, 역시나 아니나 다를까 미끼를 물었다. ‘그 분의 흔적을 찾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내상만 치료한 후에...흠?’ -슉! 슉! 슉! 목적을 이룬 것에 즐거워하던 찰나에 주변에서 수많은 기척들이 나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은 아무렇지 않게 서있었다. 수많은 기척들 중 하나가 노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무릎을 꿇고 외쳤다. “제 이 단주 이충이 도검문주를 뵙습니다!” 도검문주라 불린 노인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 51장 폐검곡, 검들의 무덤 (2) > 끝 < 52장 폐검곡의 비밀 (1) > -화르르르르륵! 등 뒤에서 폭염이 터져 나오는 것을 직격으로 맞은 천여운의 몸에 불이 붙었다. 폭발로 일어난 열기는 천여운의 등 뒤의 살갗이 녹아내릴 만큼 엄청난 고온이었다. 온몸에 불이 붙은 천여운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아아아악!” 고통을 이겨내고 도약해보려고 했지만 폭발의 힘을 견디지 못했다. 동굴 속에서 튕겨나간 천여운은 온몸에 불이 붙은 채로 그대로 낭떠러지로 떨어져야만 했다. 찰나의 순간에 문규의 절규하는 얼굴이 보였다. ‘아아아.....’ 화마가 온몸을 불태우는 와중에 천여운의 머릿속에는 온통 그녀의 슬퍼하는 얼굴이 그려지면서 마음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슈우우우우우!!! 엄청난 속도로 떨어지면서 몸에 붙었던 불들이 서서히 꺼져갔다. [폭발로 인한 화상을 자가 복구합니다.] 떨어지는 와중에도 나노 머신이 전신의 화상을 복구시켰다. -츠츠츠츠츠! 녹아내려서 근육까지 손상되었던 부분이 꿈틀거리며 빠르게 재생했다. 덕분에 고통은 역시도 빠르게 완화되었지만, 문제는 자신이 엄청난 깊이의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깊다니?’ [떨어지는 가속도가 붙고 있습니다. 위험! 위험!] 나노의 목소리가 울리며 계속 경고했다. 시야의 증강현실이 유지된 상태라 눈앞에 붉은 빛 입자로 만들어진 숫자의 단위가 올라가며 가속의 위험을 경고했다. 한 번 높은 산에서 뛰어내린 적은 있었지만 그것도 이보다는 낮았다. 짙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무서운 속도로 떨어지자 천여운의 마음속에 나노의 신체 자가 수복 능력보다도 죽음에 대한 공포심이 커져갔다. ‘이대로 죽는 건가?’ 누구라도 이런 상황에 겪으면 죽음에 직면하게 된다. 고통, 어둠, 끝, 그리고 영원한 무(無). 그것이 감정에 자리하는 순간 인간은 절망의 나락 속으로 빠져든다. -두근! 두근! [사용자의 심장 박동이 빠르게 상승합니다.] 나노의 목소리가 끝없이 울려 퍼지며 위험을 알렸지만 아무 것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이런 속도라면 아무리 호신강기를 펼친다고 해도 단 한순간에 온몸이 박살나서 재생을 하기도 전에 죽을 지도 몰랐다.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건가?’ 서서히 그 현실을 받아들이려는 찰나의 순간이었다. -슈우우우! 휘이이이이잉! 떨어지는 도중에 엄청난 바람이 회오리를 일으키듯이 일어나며 천여운의 몸이 휩쓸리듯이 옆으로 튕겨나갔다. “헉!” 수직으로 떨어지던 몸이 강풍에 옆으로 비틀렸으니 놀랄 만도 했다. 천여운의 몸이 암석 장벽에 부딪쳤다. -쾅!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바람이 몰아치는 힘이 워낙 강하다보니 몸이 반대편 절벽이 있던 벽면 쪽으로 날아가서 부딪쳤다. -쾅! “크윽!” 몸이 부딪치면서 고통 덕분에 천여운이 정신을 차렸다. 일순간 죽음이라는 공포에 굴복할 뻔 했던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했다. ‘이렇게 죽을 수 없어!’ 죽는 것보다도 더욱 두려운 게 있다. 아직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들은 모두 마치지 못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마음을 준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공포로 물들어있던 머릿속이 일순간에 맑아졌다. -쾅! 강풍에 이리저리 부딪치는 천여운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공포심에 붙잡혀 있을 때 보이지 않았는데 그것이 눈에 띠었다. ‘검?’ 놀랍게도 암석 장벽에는 검(劍) 자가 새겨져 있던 벽면 만큼은 아니었지만 꽤 많은 검들이 꽂혀 있었다. “아!” 그때 천여운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천여운이 등허리에 손을 짚었다. ‘있다!’ 다행히 허리춤에 매고 있던 백룡도의 도집이 무사했다. 도집의 끈을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운이 좋게도 고열을 버텨내고서, 허리춤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챙! 천여운이 도집에서 백룡도를 뽑아들었다. 백룡도의 도병을 꽉 쥐고서 천여운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차피 죽을 위기라면 모험을 건다.’ 여전히 거센 바람이 몰아치면서 그의 몸이 이리저리 휩쓸리면서 떨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벽면 방향 쪽으로 휩쓸리는 순간, “하압!” -쾅! 천여운이 있는 힘을 다해서 벽면을 향해 백룡도를 내리 꽂았다. -콰지지지지지! 떨어지는 속도 덕분인지 백룡도의 날카로움 덕분인지, 절벽의 벽에 꽂힌 채로 미끄러지듯 벽면을 베고서 내려가졌다. -우드득! “끄으으윽!” 오른쪽 어깨뼈와 갈비뼈에 금이 가거나 부러진 듯 했다. 아무리 근육을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게 발전시켰다고 해도 뼈마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관성이 붙은 속도를 억지로 이겨내려고 했으니 그 대가를 치룬 것이었다. -콰지지지지지지! “멈춰! 제발!” 그렇게 오 장 가까이를 베고 내려가던 차에 속도가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밑으로 쭉 베고 내려가던 백령도가 이내 멈춰 섰다. “머, 멈췄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멈춰 섰다. 추락해서 까딱하다가 죽을 뻔했는데 겨우 위기를 넘겼다. 밑으로 고개를 내려다보니, 그 끝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욱씬! [어깨뼈가 탈골되고 금이 갔습니다. 오른쪽 삼 번 갈비뼈가 부러졌습니다. 손상된 부위를 자가 수복합니다.] 나노 머신이 금이 가고 부러진 뼈를 수복하기 시작하자 통증이 완화되었다. 밑을 내려다본 천여운은 이 정도 높이라면 충분히 뛰어내리더라도 경공으로 버틸 수 있다고 판단했다. -폭! 통증이 가라앉자 백룡도의 도를 뽑아서 사뿐히 내려왔다. 땅을 밟은 천여운이 어둠뿐인 바닥에 주저 않고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천여운은 이번 일로 인해 무공이 모든 면에서 만능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상황에 따라서는 그 역시도 언제든지 죽음의 위기에 직면할 수 있었다. -탁! 어느 정도 숨을 돌리고 난 천여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숨을 건졌으니 어떻게든 이 절벽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나노. 야간 투시경 모드.’ [사용자의 눈에 야간투시경(夜間透視鏡) 모드를 개안합니다.] 나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지며 천여운의 동공이 흔들리더니, 이내 어두웠던 그의 시야에 빛이 증폭되면서 캄캄했던 주변이 선명하게 보였다. ‘아......’ 시야가 밝아지면서 천여운의 두 눈이 커졌다. 아무 것도 없을 것만 같은 절벽 아래에는 수많은 검들이 박혀 있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풍파를 맞았는지 녹이 슬어서 대다수가 더 이상 쓸 수 없는 고철이라고 봐야 했다. ‘버려진 검들이 없는 곳이 없구나.’ 그런데 검만 버려진 것이 아니었다. 바닥에는 수많은 해골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이곳 절벽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죽은 자들인 듯 했다. 오래된 것은 손상되어서 사람의 뼈로 짐작되는 정도인 것도 있었지만, 죽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것은 해골의 형태가 비교적 멀쩡하고 옷도 걸치고 있었다. ‘하마터면 나도 이렇게 될 뻔 했구나. 그런데 이 자들은 어째서 이런 낭떠러지에서 죽어있는 걸까?’ 의문이 들었지만 알 방법이 없었다. 천여운이 올라갈 방법을 찾기 위해 가파른 절벽으로 다가갔다. 매끄럽고 경사가 수직에 가까운 암석 장벽보다는 거친 벽면을 가진 절벽 방향 쪽이 낫다고 판단해서였다. 그러나, ‘하아.....여기도 매한가지구나.’ 절벽 쪽이 좀 더 거칠기는 했으나 오히려 경사가 역으로 가파르게 되어있었다. 위쪽으로 갈수록 올라갈 수 없는 구조였다. ‘이래서 이곳에 대한 정보가 없었던 것이었나?’ 생각해보면 밧줄을 이용해서 내려오려고 해도 위에서 떨어지면서 경험한 그 회오리치는 바람에 균형을 잡는 것조차 무리인 듯 했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위를 둘러보기로 했다. 천천히 암석 장벽을 기준으로 해서 주위를 돌면서 살피던 천여운이 어떤 지점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엇?” 천여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닐까 착각마저 들었다. 그곳의 암석 장벽에는 수많은 검흔과 도흔이 남아 있었다. "어째서 이런 곳에 싸운 흔적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야 화약이 터지면서 폭발에 떠밀려서 의지와 상관없이 내려왔다지만, 이들은 어떻게 이곳에서 싸운 걸까? 유심히 그 흔적들 살피던 천여운의 두 눈이 커졌다. 암석 장벽에 새겨진 검흔, 도흔은 천여운에게 낯익은 것들이었다. “처....천마검공?" 선명하게 남아있는 검흔은 천마검공의 검흔들과 굉장히 닮아있었다. 몇 개의 검식을 제외하고 동일한 걸 보면, 마치 천마검공이 이전에 만들어진 검법 같았다. “아! 설마?” 천여운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올려서 위를 쳐다보았다. 절벽 낭떠러지로 떨어지기 전에 보았던 검(劍) 자가 어디서 많이 낯익은 필체라고 여겼는데, 그것은 바로 천마 조사의 필체였다. -차차차차차차착! 팔목 보호대에 천마기를 불어넣어서 흑검의 형태로 바꾸었다. 그리고 흑검에 새겨져 있는 글자들을 보았다. [天魔劍] 천마검에서 검이라 적혀 있는 필체가 확실하게 거대하게 새겨진 검과 동일했다. 그렇다는 것은 이곳에서 천마 조사가 누군가와 겨뤘던 것이 틀림없었다. 이것까지야 그럴 수 있다고 여겨졌다. 교주전에 있는 사기(史記)를 보면 일대 교주인 천마 조사 시절에는 사천성, 호북성, 안휘성 까지도 정벌한 적이 있었다고 나와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정작 천여운을 놀라게 만든 것은 다른데 있었다. ‘이 도흔은 대체 뭐란 말인가?’ 이것은 아무리 살펴보아도 극도신의 도법이 틀림없었다. 천여운은 이 기이한 흔적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오백 년 전에 나타난 극도신에게도 선조가 있었단 말인가?’ 그 외에는 특별히 추론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천여운이 극도신의 도법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 처음 보는 초식이다.’ 극도신의 도흔으로 보이는 것들 중에는 처음 보는 두 초식이 있었다. 그것은 천여운이 익힌 극도신의 도법의 네 초식보다도 훨씬 전율적인 위력을 지녔다. 아무래도 후반부 초식인 듯 했다. ‘.....고작 네 초식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구나.’ 도법을 보면서 놀라움을 가물 수가 없었다. 이 정도라면 천마검공의 마지막 초식을 제외하고는 거의 동등한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하! 기연인건가.’ 운이 없게 떨어졌다고 여겼는데 전화위복이나 다름없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절벽 밑에 두 절대고수의 대결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천여운은 흔적만으로도 나노를 통해 구현할 수 있으니 말이다. '나노, 스캔해줘.' 천여운은 나노에게 벽면에 새겨진 검흔, 그리고 도흔들을 추출하게 했다. [알겠습니다.] 나노가 스캔을 하고서 분석에 들어가는 동안 천여운은 검흔과 도흔의 흔적들을 따라서 걷고 있었는데, “응?” 걷던 도중에 뜻밖에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것은 기존의 것과는 전혀 다른 검흔이었다. 뭔가 복잡하게 검흔들이 얽혀서 새겨진 것들이었는데, 그 밑에는 단 두자가 적혀 있었다. 不可能 불가능. 할 수 없다고 적어놓은 듯 했다. 필체를 보면 천마 조사가 새겨놓은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이것을 잘 살펴보니 옆의 장벽에 있던 싸운 흔적들과 다르게 마치 검마 공이 청옥석 비석에 새겨놓은 것처럼 수차례 반복해서 검흔을 남긴 것 같았다. ‘왜 불가라고 적은 거지?’ 이상하다고 여긴 천여운이 나노에게 검흔들을 추출하게 했다. 나노가 검흔들을 전부 추출하자 천여운이 명했다. ‘나노 여기에 있는 검흔들을 입체 영상으로 구현해줘.’ [알겠습니다. 스캔한 검흔을 3D(Three D imensions, 3차원) 입체 영상으로 구현합니다.] -솨아아아! 그러자 복잡하게 새겨져 있던 검흔들이 천여운의 시야로 개안된 증강현실을 통해 허공에 흰 빛의 입자들이 선을 그리며 세밀한 입체영상으로 구현 해냈다. 검식들을 분류해서 초식들로 변환된 것을 보는 순간, “이.....럴 수가.....” 천여운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극도신의 도법처럼 근육의 파열이나 인간이 움직일 수 있는 한계선상을 넘어선 검식이 가미된 검법이었다. 천여운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설마 합치려고 한 건가?’ 그랬다. 불가능하다고 적어놓은 이 검흔들은 천마 조사가 자신의 검법에 극도신의 도법을 보고서 깨달은 심득을 합쳐서 만든 검법이었던 것이다. < 52장 폐검곡의 비밀 (1) > 끝 < 52장 폐검곡의 비밀 (2) > 어두운 밤. 사방이 둥그런 암석 장벽으로 둘러싸인 곳이 있다. 오직 하늘만이 트여 있어서 이보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지 않고는 발견할 수 없는 비밀의 장소였다. 놀랍게도 이곳에 상당한 규모의 장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장원에 있는 건물 앞에는 수많은 탕기가 놓여 있었고, 약재 창고 안에는 수많은 약초들이 벽면의 약함을 가득 매우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의원이라고 생각되는 곳이었다. 이곳은 바로 폐검곡의 암석 장벽 안에 숨겨진 신의(神醫)의 은신처였다. 한 장원 건물 안에는 여러 개의 침상이 놓여 있었는데, 그곳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한 중년의 사내가 있었다. 멋들어지게 올린 머리가 힘없이 헝클어져 있는 이 사내는 바로 사 장로 양단화였다. 그런 양단화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고통을 호소하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윽!” “무슨 사내가 이런 것도 못 참는가.” -팍! 움찔 거리는 그의 머리를 붙잡는 한 노파가 있었다. 육십 대는 훨씬 넘겨 보이는 노파는 특이하게도 연령대에 비해서 굉장히 건장한 몸을 하고 있었다. 우람한 팔뚝 근육이 마치 고왕흘을 보는 듯 했다. -툭! 툭! “하아....” 양단화가 이렇게 통증을 호소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의 부상 부위 때문이었다. 오른쪽 이마에서부터 눈 밑까지 검기에 베이면서 시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괴물 같은 무위를 지닌 그 객잔주 노인과 겨루면서 얻은 부상이었다. 한 쪽 눈을 잃었지만 그래도 목숨을 건진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 단주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치료도 받지 못했겠지.’ 과연 교주가 뽑은 육검 중의 한 사람다웠다. 평소에는 순진무구해 보였는데 분노해서 전의를 불태우는 모습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보통 고수들은 흥분하게 되면 이성을 잃고서 날뛰는데 그치는 반면, 문규는 놀라울 만큼 자신의 공격을 보조하면서 노인의 허점을 노렸다. 그 덕분에 ‘그 자’가 나타날 때까지 겨우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대단한 재능이다. 어쩌면 십 년에서 이십 년 내로 본교에 연무화 장로에 버금가는 여자 고수가 등장할 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던 것은 전적으로 문규의 공이 컸다. 그렇기에 양단화는 그녀의 뛰어난 재능을 높이 샀다. -따끔! “윽!”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얼굴을 꿰매는 것은 아프다. 거의 다 꿰매갈 무렵에 건너편 침상에서 울음이 터져 나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엉엉엉! 히끅...공자님.” “흑!.....어찌 그럴 일이....” 건너편 침상에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서 울고 있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문규였다. 오열을 하듯이 울고 있는 그녀를 덩치가 커다란 여인이 끌어안고서 같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는데, 그녀는 육검의 일인인 호상화였다. 놀랍게도 행방불명되었다고 알려진 그녀는 이곳 신의의 은신처에 있었다. 물론 살아있는 것은 호상화만이 아니었다. “끄으으으윽! 주군!” “........” 문규의 옆 침상에는 초췌한 얼굴의 허봉이 상반신에 붕대를 칭칭 감고서 누워 있었다. 누워서 흐느끼는 허봉의 옆에는 백기가 앉아 있었는데, 큰 충격 받았는지 멍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이럴 수가.....” 같은 말만을 되뇌였다. 그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천여운이 폭발에 휘말려 낭떠러지에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서로 안면이 있는 일행이라 하더니 참으로 다르구먼.” 얼굴을 꿰매고 있는 노파가 오열소리에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가 말했다. 노파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당연했다. 말수가 유달리 없는 백기나 호상화와 달리 감정 표현을 잘 표출하는 허봉과 문규였으니,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상반되어 보일 수밖에 없다. “자네들의 주군이라는 자가 인덕이 있었나 보군. 모두가 눈물을 흘릴 정도면 말이야.” "......." 노파의 말에 사 장로 양단화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 역시도 죽은 교주를 떠올리면 가슴이 먹먹하긴 매한가지였다. 목숨으로 죄를 청하고 싶지만 지금으로서는 임무를 다해야만 했다. -탁! 능숙하게 꿰매는 것을 마친 노파가 그의 꿰맨 부위에 약초를 발랐다. 치료를 받고 있던 양단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신의 공.” 놀랍게도 양단화는 노파를 신의라고 불렀다. 건장한 체구에 근육질의 노파는 다름 아닌 이곳 숨겨진 장원의 주인인 신의 감로수였다. 노파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내가 자네더러 그리 부르라고 하던가?” “.....감 파파.” 노파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스스로 신의라 불리길 원하지 않았다. 평범한 할머니라 불리는 걸로 만족했다. 이 노파는 참으로 특이한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우락부락할 만큼 발달한 근육 때문에 무공을 익혔나 싶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그가 의아해 하자 신의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자고로 의원이라면 긴 수술을 위해 체력을 단련해야지.’ 옳은 말이긴 했다. 다만 그녀가 말한 체력이라는 것이 상당히 과해 보였지만 말이다. 감 파파라고 부르라는 신의 감로수에게 양단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혹시 진료 의뢰를...” -꽉! “으윽!” 신의 감로수가 약을 바르다 말고 양단화의 상처 부위를 꾹 눌렀다. 근육만큼이나 힘이 보통이 아니다. 덕분에 양단화는 통증으로 하던 말을 중간에 멈춰야만 했다. “하아.....” 이상하게 신의 감로수는 처음 보았을 때부터 부탁을 하려고 할 때마다 말을 자르고서 꺼내지도 못하게 했다. 그녀가 의무실의 입구 쪽으로 흘깃 눈동자를 움직였다. 그곳에서 두 명의 무사들이 유심히 신의 감로수를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감시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저들의 눈치를 보는 것인가?’ 사 장로 양단화 역시도 그녀의 태도가 이상하게 느껴졌는지 더 이상의 권유를 멈췄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만 하더라도 도움을 받았다는 생각에 감사하기만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곳 장원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슥슥! 약초를 바른 후에 상처부위에 붕대를 감아준 신의 감로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당부했다. “상처 부위는 이레 정도는 꾸준히 치료를 받아야 하니, 안정을 취하도록 하게. 그럼.” 그 말과 함께 그녀는 볼일을 마쳤다는 듯이 의무실 밖으로 나갔다. 의무실 입구 쪽에서 대기하던 무사 두 명도 그녀를 호위하듯이 뒤를 따랐다. 신의 감로수가 나가자 양단화의 귓가에 전음이 들려왔다. [양 장로도 슬슬 눈치 챘겠지?] 양단화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좌측편의 침상에 걸터앉아 있는 짙은 눈썹에 미녀가 팔짱을 끼고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바로 일 장로 연무화였다. 특별 파견대의 두 사람이 이곳에 있던 것처럼 그녀 역시도 무사했다. 처음으로 인피면구 속에 감춰진 연무화의 젊어진 모습을 보게 된 양단화는 아직도 익숙하지 않은지 어색한 눈빛으로 전음에 답했다. [......감시를 당하는 것 같소.] 신의 감로수에게 붙어있던 무사들이 떠났지만 여전히 주위에 몇몇 기척이 느껴졌다. 그 기척들은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의무실 안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연 장로. 대체 어찌된 영문이오?] 부상을 입은 것 때문에 신의에게 상처를 치료받느라 정작 대화를 나누지 못했던 그들이었다. 양단화의 물음에 연무화가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이곳에 도착한 우린 저들과 대치했었다.] 폐검곡에 도착한 연무화의 일행을 누군가 공격해왔다. 정확히 말하면 누군가들이었다. 그들은 이곳 숨겨진 장원에서 나온 무사들이었는데, 연무화와 일행을 습격한 후에 정체를 물었었다. 물론 정파의 영역이었기에 연무화가 그것을 밝힐 리가 없었다. 그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의(醫) 자가 적힌 주홍색 옥패를 보이면서 신의를 만나러 온 사람들이 라고만 했다. 그러자 그들을 습격했던 자들이 경계심을 한층 풀고서 관심을 보였다. [그때 그 객잔주와 세 명의 고수가 나타났다.] 갑작스러운 노인의 등장에 새로운 싸움이 벌어지고 말았다. 노인도 그랬지만 다른 세 명도 초절정의 고수였는데, 그들 덕분에 순식간에 암종의 대원이 살해되었고 숨겨진 장원에서 나온 무사 두 명도 죽임을 당했다. 그렇게 연무화가 객잔주 노인과 싸우고 있을 무렵에 ‘그 자’가 나타났다. [.....무당패검 현운자.] 무겁게 가라앉은 그녀의 전음에 양단화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역시 그자가 맞구려.] 양단화가 그 이름을 모를 리가 없었다. 중원 무림에서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오대 고수. 그 오대 고수의 밑으로 차세대 절대자가 될지도 모른다고 알려진 아홉 무인들이 있다. 무림인들은 그들을 통틀어 구패(九?)라고 불렀다. 구패 중에서 무당패검 현운자는 무당파의 장로이자 정파 무림에서 명성을 떨치는 고수였다. [그의 도움으로 노인을 쫓은 뒤에 우리는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다. 하지만.....보다시피 아직도 신의를 설득하지 못하고 있다.] 사 장로 양단화가 했던 것처럼 그들도 진료 의뢰를 했지만 소용없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주홍 옥패가 있다고 해도 치료를 하기 힘들다는 말만을 번복할 뿐이었다. 그녀는 그 이유가 이곳을 지키고 있는 무당패검 현운자에게 있다고 추측했다. '대체 무엇 때문일까?' 신의의 태도를 보면 분명 숨겨진 무언가가 있었다. 당장에 문제는 무당패검이었다. [그 자가 아직 우리의 정체를 모르는 것이 다행이구려.] 하필 이곳에 무당패검 현운자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면 현운자 외에 다른 무사들은 무당파의 도인 같지는 않았다. 연무화가 무거운 숨을 내쉬며 전음을 보냈다. [그게 얼마나 갈까?] '........' 현운자 정도 되는 자가 그들 일행을 의심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들 일행에 무림에서 수위에 꼽히는 화경의 고수가 두 명이나 있는데, 당연히 출신이나 어디에 속하는지 알아내려 할 것이다. [어쩌면 알면서도 우리를 이용하려 드는 것일 수도 있겠지.] 연무화가 숨어있는 기척들이 있는 곳을 바라보면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한편 장원의 다른 건물. 그곳에서 흰 수염에 강인한 인상을 가진 도복의 노인이 누군가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어젯밤 당원 객잔에 있던 무당파의 도인들이었다. 도인들 중에 가장 항렬이 높은 무진자가 말했다. “그래서 연락이 끊겼군요. 현 사숙.” “그렇다. 그들이 이곳 폐검곡을 둘러싸고 있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느니라.” 흰 수염의 무당파 도인은 바로 무당패검 현운자였다. 현운자는 한 달 동안이나 무당파와 연락이 끊겼던 이유를 그들에게 설명해주었다. 물론 그 이유는 객잔주로 변장한 노인과 관련이 있었다. 언젠가부터 나타난 그들이 폐검곡의 숨겨진 장원을 찾기 위해서 수색을 하는 바람에 제대로 된 연락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현 사숙. 차라리 무당이나 제갈세가로 장소를 옮기는 것이 어떨까요? 거의 대법이 완성되었다면 굳이 신의의 거처를 고집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녀를 너무 자극해서 나쁠 것은 없다. 푸른 하늘(蒼天)을 위해서라지만 정도는 지켜야 한다.” “죄송합니다.” “괜찮느니라. 그리고 네 말대로 신의가 대법을 거의 완성했다. 저들이 이곳의 위치를 파악한 이상 장소를 옮기는 것이 옳다.”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르기에는 이미 노출된 게 많았다. 입구에 청옥석 벽과 기문진식이 설치되어 있지만 뚫리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무진자가 한 가지 더 의아한 것이 있는지 물었다. “헌데 현 사숙. 저들을 어찌 도와준 겁니까? 아무리 봐도 저들은 사파 연맹이나 마교의 주구들이 틀림없습니다.” 그가 말하는 저들은 천여운 일행을 뜻했다. 무당패검 현운자에게서 그들 일행 중에 화경의 고수가 두 명이나 있다는 말에 경악을 했던 무진자였다. 화경의 경지는 무림에서도 수위에 꼽히는 고수들이었다. “무 사형의 말이 맞습니다. 사숙.” 그렇지 않아도 천여운이 인피면구를 하고 있는 것 때문에 그 일행을 의심하고 있던 무당파의 도인들이었다. 물론 드넓은 중원 무림에 숨겨진 고수들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서로 같은 일행에 두 명이나 되는 화경의 고수가 있다면 분명 그들은 무림 삼대 세력 중에서 한 곳에 속해 있을 확률이 높았다. 정파의 인사들은 그들이 잘 알고 있으니, 당연히 사파 연맹이나 마교 외에는 답이 없었다. “더군다나 저들도 신의를 노리는 자들이잖습니까?” “......이이제이다.”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를 이용하여 다른 오랑캐를 제압한다는 말이다. “아아! 설마 저들을 이용해서?” “그래. 저들을 방패로 삼아서 그들을 막고서, 우리는 신의를 데리고 무당산으로 귀환한다. 알겠느냐?” “원시천존. 원시천존. 참으로 혜안이십니다.” 현운자의 진정한 의중을 알게 된 무진자가 그의 혜안에 탄복했다. 밖에서 이곳을 노리는 자들만큼이나 천여운 일행을 위험하게 생각하고 있던 무진자로서는 그의 계획이 달가울 수밖에 없었다. 설사 그것이 현재 동맹을 맺고 있는 마교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 * * 같은 시각 절벽의 낭떠러지. 그곳에서 경쾌하게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촤촤촤촤촤촤촤?! 온통 어둠뿐인 공간 속에서 한 청년이 쉬지 않고 검초를 펼치고 있었다. 검초를 펼치고 있는 이 청년은 바로 천여운이었다. 그는 벌써 한 시진이 넘게 검초를 펼치고 있었는데, 이것은 기존에 천여운이 익히고 있던 것들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촤촤촤촤?! 파팍! 끊임없이 이어지던 검초가 중간에 끊기면서 천여운의 신형이 흔들렸다. 제대로 검식이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아....하아....” 천여운은 지쳤는지 바닥에 주저앉아서 휴식을 취했다.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쉬운 일이 아니구나.’ 두 절세무공의 깨달음을 하나로 모은다는 것을 절대로 쉽게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검을 휘두르며 시도하고 있던 것은 천마검공에 극도신의 무공의 장점을 합치는 일이었다. 천여운은 두 시진 전을 떠올렸다. 처음 천마 조사가 남긴 흔적들을 보고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지?’ 자신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발상의 전환에 놀라웠다. 그저 완성된 무공을 숙달하는데 그친 자신과 달리 천마 조사는 새롭게 보게 된 무공에서 깨달음을 얻어서 시도를 하려고 했다. 그것이 불발에 그쳤지만 말이다. ‘육체의 한계.’ 아무리 무공과 검에 있어서 최고의 영역에 이른 천마라고 해도 유일하게 극복할 수 없는 문제였다. 무공을 위한 최고의 신체를 가진다고 해도 인간이 발달시킬 수 있는 근육과 근섬유질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극도신의 도법은 인간의 한계 영역까지 발달시켜야만 완전히 펼칠 수 있다. 이를 검법에 담으려고 했던 천마는 몇 번의 가벼운 시도 끝에 결론을 내렸다. ‘불가능.’ 하지만 천여운을 달랐다. 천마검공, 극도신의 무공, 역혈마공을 분석하면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설 만큼 근육과 근섬유질 이 발달한 그였다. 천여운은 천마가 시험 삼아서 만든 초식을 무리 없이 펼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완성된 천마검공이 아니었기에 천마가 만들었던 것을 표본 삼아, 천여운이 직접 합쳐야만 했다. ‘.....어렵다.’ 다만 이론적으로는 가능했지만 그걸 실질적으로 합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기존에 있는 천마검공의 초식 자체가 완벽하게 검식의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거의 새로운 초식을 창안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시 해보자.’ 적당히 휴식을 취한 천여운이 일어나서 다시 검초를 펼쳤다. -촤촤촤촤촤촤?! 나노를 통해서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분석하고 있다. 하지만 그 스스로도 직접 한계에 부딪치면서 깨달음을 얻고 싶다. 천여운은 쉬지 않고 새로운 검식을 다양한 방법으로 합치기 위해 노력했다. “하아....하아....” '지친다.' 그러기를 또 한 시진이 지나고 이제는 완전히 탈진했다. 연속해서 천마검공을 두 시진 가까이 펼치니 내공이 완전히 비어버렸다. 어째서 한계를 뛰어넘은 새로운 검식을 합칠 수 없을까? 수많은 방법으로 도전해도 계속 실패했다. ‘기존의 검식에 한계를 넘어선 검식이 합쳐지지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조화를 이뤄야 하는데.....’ 새로운 검식들이 조화를 이뤄야만 검공이 완성된다. 대 자로 뻗어서 조화를 어떻게 이뤄야 할지 고민을 거듭하던 천여운의 머릿속에 문득 뭔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 기존의 검식을 전부 활용하려 하지 말자. 조화롭지 않다면 빼는 것이 옳다. 굳이 스스로 제한을 둔다면 조화를 이루는데 자유롭지.....자유롭지.....’ 기존의 검식. 그리고 새로운 검식의 조화를 생각하던 천여운에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의식하지 않았을 때 찾아오곤 한다. ‘조화를 이루기 위해선 자유로움 필요하다. 그것은 스스로를 가둬두는 것이 아니라 여는 것에서 이루어진다.’ 화경(化境). 그것은 기존에 가진 것을 일원화 하는 과정에서 깨달음이 온다. 화경을 이룬 고수가 스스로의 내기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것은 그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그보다 높은 경지는 다르다. 화경을 넘어서는 경지는 기를 다루는데 있어서 스스로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워진다. 내외(內外)가 조화를 이루면서 기를 자유롭게 순환할 수 있을 때, 그 깨달음을 일컬어 무인들은 현경(玄境)의 경지라 부른다. -고오오오오! 천여운의 몸에서 강렬한 빛이 흘러나오며 그의 주변이 요동쳤다. 고요하던 대자연의 기운들이 내공이 비어버린 천여운의 몸으로 빨려 들어왔다. 대자연의 기운이 내부의 경맥들을 순환하면서, 어느덧 좌선하고 있는 천여운에게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 52장 폐검곡의 비밀 (2) > 끝 < 52장 폐검곡의 비밀 (3) > 중원 무림에 알려진 신의는 황궁 대학사와 같은 풍모를 지닌 고상한 노인의 모습이다. 그러나 실상의 그녀는 완전히 달랐다. 작은 체구와 달리 우람한 근육을 자랑하는 노파. 그녀가 바로 신의 감로수였다. “흥. 바쁜 사람을 또 무슨 일로 부른 것이오?” 신의 감로수를 장원의 한 거처로 부른 사람은 바로 무당패검 현운자였다. 다소 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를 바라보던 현운자가 강인한 인상에 어울리지 않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원시천존. 원시천존. 빈도는 감 파파께 전해드릴 말씀이 있어서 부른 것이외다.” 보통 그가 이런 말을 했을 때는 불편한 요구사항을 말할 때였다. 내심 불안함을 느낀 신의 감로수가 물었다. “전할 말? 그게 무슨 소리요?” “아무래도 이른 새벽이나 아침 무렵까지 필요한 것을 정리해서 떠나야 할 것 같소.” “떠나다니? 설마 폐검곡을 말이오?” “그렇소.” 폐검곡의 은신처를 떠나자는 말에 신의 감로수의 인상이 무섭게 굳어졌다. 이곳은 그녀가 선조대대로 머물던 보금자리였다. 그 보금자리를 버리자는 말이 곱게 들릴 리가 만무했다. “분명 그때 약조한 것과 다르지 않소? 그대들의 조건을 들어주는 대가로 이곳에서 연구를 하기로 했잖소. 그리고 대법이 완성되면 그대들이...” “감 파파의 장원에서 물러나기로 했지요. 하나 상황이 바뀌었소.” “무엇이 말이오? 설마 밖에 있는 그 자들을 말하는 것이오? 그런 자들이 여태껏 한 둘이 아니었는데 새삼스럽게 그런단 말이오.” 신의라는 명성 때문에 이곳 폐검곡을 찾아오는 이들은 줄곧 있었다. 물론 그들은 과거 선대에서부터 자신이 왕진을 나갔을 때 인연이 닿았던 자들이거나 주홍색 옥패를 얻은 이들이었다. “그와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는 것쯤은 감 파파도 아시지 않소?” 부드럽게 말을 하던 현운자의 목소리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설득조로 이야기하는 것을 포기한 모양이었다. “저들은 지금까지와 달리 위험하오. 아직 대법을 완성하지 못했는데 감 파파가 납치당한다면 창천 계획이 무산되고 말 것이오.” 현운자가 천천히 걸어와 그녀의 앞에 서서 눈을 마주치면서 말했다. “소중한 것을 잃고서 무림의 안녕을 위해 도와주기로 약조하지 않았소? 부디 우리가 그대를 악(惡)으로부터 지키게 해주시오.” ‘크으으......’ 낮게 깔린 현운자의 위압감이 실린 목소리에 신의 감로수의 눈빛이 분한 듯이 떨렸다. 어쩌다가 자신의 처지가 이렇게 된 것일까 망연자실하기만 했다. 좋은 의도로 시작한 일이 어느새 방향이 틀어졌다. 감로수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이를 동의로 받아들인 현운자가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묘시 전까지 준비를 마치도록 하시오.” 그 말을 마지막으로 현운자는 그녀를 돌려보냈다. 필요한 것들을 정리할 수 있도록 말이다. 신의 감로수가 돌아가자 얼마 있지 않아 검은 무복의 사내가 급히 들어왔다. “상황은?”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폐검곡의 숲 주변에 수상한 움직임들이 감지되었습니다. 그 숫자가 늘어나는 걸 보아선 빠르면 아침이 될 것 같습니다.” 폐검곡 암석 장벽의 근방 숲을 정찰 나갔다가 온 결과였다. “서둘러야겠군.” “계획대로 저자들을 미끼로 쓰실 겁니까?” 검은 무복의 사내가 말하는 저자들은 천여운의 일행들을 뜻했다. 그들을 방패막이로 삼아서 이곳 폐검곡을 벗어나 무당파로 복귀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현운자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렇느니라. 저들은 충분히 미끼의 역할에 충실할 것이다. 우리는 신의가 준비되는 대로 출발하도록 한다.” “알겠습니다.” 현운자와 검은 무복의 사내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신의 감로수는 자신의 거처이자 약당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연구실로 쓰는 약당은 수많은 의료 도구와 서적들로 가득했다. 그 중에는 특이한 것들도 꽤 많았는데 한 쪽 벽면에는 약품 처리가 되어서 보존되어 있는 해골이 박제되어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이곳에 들어오면 소스라치게 놀랄 만한 광경이었다. 그런데 이 해골은 특이하게도 죽었을 당시에 몸이 두 동강이 났었는지 척추 부근이 깨끗하게 잘려나가 있었다. -팍! 쨍그랑! “크으윽!” 의약당으로 들어온 그녀가 분한 마음에 약재 그릇 하나를 집어 던졌다. 선조 대대로 보금자리인 이곳을 버려야 하는 것이 너무도 비통했다. 하지만 저들의 말대로 이곳을 떠나지 않는다면 분명 외부의 적들이 침투해 와서 자신을 노릴것이 틀림없었다. ‘앞뒤가 온통 가시밭길이로구나.’ 밖에서 노리는 자들과 현운자의 무리들이 무슨 차이가 있을까. 감로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약당의 문 앞에 서있는 감시자 두 명의 그림자를 보았다. 어차피 자신이 거부한다면 저들은 강제로라도 끌고 나갈 것이다. ‘별 수 없구나.’ 거부할 수 없기에 현운자의 말대로 최대한 필요한 것들을 챙겨야만 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다가 약당의 좌측 벽면에 있는 책꽂이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약초강목이라는 서적을 꺼내들었다. -탁! 그것을 펴자 놀랍게도 약초강목의 서적 안에는 또 다른 작은 책자가 들어있었다. 그런데 이 책자는 특이하게도 보통 서적들과는 재질이 달라보였다. -촤르르륵! 감로수가 그것을 펴들자 그 안에는 기존의 한어와는 다른 글들이 써져 있었다. [瞄准那个人是我的错误] 분명 한어였는데 미묘하게 한자들이 간체화 되어있다. 그래서 제대로 해석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앞에 서술되어 있는 글들과 달리 뒷장에는 인체를 상세하게 그려놓은 도형도가 있다. 이것은 기존의 의서에 알려진 것보다도 혈자리, 뼈, 근육까지도 상세하게 그려져 있기에 의원에게 있어서는 보물과도 같았다. ‘이걸 가져가야 대법을 완성할 수 있겠지.’ 이 책은 선조 대대로 물려받은 보물이었다. 서적을 품속에 갈무리한 그녀가 필요한 기구들을 챙기는 사이에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신의께서 바쁘셔서 안 된다고 하지 않았소.” “에이, 지금 이렇게 아픈데 간단한 진료조차 보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정말 야박하신 분들이네.” “허참.” 누군가가 신의의 약당으로 들어오려는 것을 감시자들이 제지하고 있었다. 금방 쫓아낼 것 같았는데 의외로 계속 버티고 있자, 이를 의아하게 여긴 감로수가 문을 열고 나왔다. ‘응? 이 청년들은?’ 그녀를 만나기를 고집하는 자들은 바로 허봉과 호상화였다. 허봉은 자신보다 덩치가 큰 호상화를 부축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가슴이 아프다며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감 파파께서는 하던 일을 마저 하시죠.” 감시하는 무사의 말에 허봉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와! 정말 너무 하시네요. 환자가 아프다는데 그걸 버려두라고 권하는 겁니까?” “허어! 허봉의 항의에 그들이 난처해했다. 그녀는 지금 철수할 준비를 해야 하는데, 이것을 방해하지 못하게 한다고 환자를 들여보내지 않는 것도 입장을 바꿔서 생각한다면 의심스러울 것 같았다. “흠.” 신의 감로수가 가까이 다가와 호상화의 손목을 잡고서 맥을 재보았다. 그러더니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인상을 찡그렸다. ‘맥이....’ 그녀의 반응을 살피던 감시 무사가 물었다. “심각합니까?” 이에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감로수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좀 더 상태를 살펴봐야 할 것 같네. 금방이면 되네.” “......후우,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판단된 감시 무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가라고 했다. 허봉이 눈을 반짝이면서 호상화를 데리고 약당 내의 침상에 눕혔다. 그리고는 약당 안으로 따라 들어온 감시 무사들에게 말했다. “우린 나가죠.” 뜬금없는 말에 감시 무사들이 인상을 굳히면서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우리는 감 파파를 지켜야 하는 사람들이라....” “와.....그럼 아직 시집도 가지 않은 소저의 중요한 그곳을 보겠다는 겁니까? 이분들 정말 파렴치하시네.” “뭐, 뭐요?” 허봉의 말에 두 감시 무사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허봉이 혀를 차면서 호상화의 봉긋하게 나온 가슴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 높였다. “꼭 보셔야 직성이 풀리겠습니까?” “헛?” 졸지에 가슴을 보고 싶어 하는 호색한으로 몰아가는 허봉의 말에 두 사람은 어이가 없어서 말을 더듬으면서 해명하려 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우리는....” 그러자 그런 허봉을 도와주기라도 하듯 신의 감로수가 말했다. “환자의 상의를 벗겨야 할 것 같으니, 남자들은 나가있게나. 설마 이걸 지켜볼 참인가?” “크윽......알겠습니다. 빨리 살펴보시고 말씀해주십시오.” 신의를 절대로 다른 이들과 따로 두지 말라는 명이 있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허봉이 워낙 바람을 잡는 통에 괜히 가슴을 의식하게 되어버렸다. 결국 그들은 신의 감로수에게 환자의 가슴만 살펴보고 나서, 곧장 말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한 후에 허봉과 함께 약당 밖으로 나갔다. -쾅! 약당의 문이 닫히는 틈 사이로 허봉의 눈빛이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 * * 이른 새벽 무렵. 인시 중엽을 넘어가자 사방으로 대자연의 기운이 더욱 충만해졌다. 그 기운들을 순환시킬 때마다 주위와 동화되는 듯 한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낭떠러지의 바닥에는 밤사이에 없었던 거대한 구덩이가 있었다. 그 구덩이의 한 가운데 천여운이 서있다. 천여운의 눈빛은 전과는 다른 현기로 가득했다. 호흡을 천천히 들이마셨다가 내쉬던 그가 쥐고 있던 자신의 오른손 주먹을 보았다. ‘내공에 있어서 거의 한계가 없어졌다.’ 운기를 할 때마다 대자연의 기를 순환시키면 내공이 빠른 속도로 차오른다. 그 속도는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굉장히 빨랐다. 이 정도라면 큰 내공의 소모를 요하는 절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내공의 제한이 거의 없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공력도 거의 두 배에서 세 배 가까이 끌어올릴 수 있다.’ 사용할 수 있는 공력의 범용치가 내부의 기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던 화경의 경지일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늘었다. 지금 천여운의 서있는 넓은 반경의 거대한 구멍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천여운이 기쁨과 감격에 젖어 탄성을 흘렸다. "아아아!" ‘정말 행운이다. 현경의 경지에 오르다니!’ 그랬다. 천여운은 의도치 않은 깨달음으로 벽을 깰 수 있었다. 천마검공에 한계를 넘어선 검식의 조화를 이루려던 것이 벽을 돌파해서 더 높은 경지인 현경을 이루게 되었다. 그야말로 행운을 넘어서 천운이라 할 만 했다. 천여운이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은 어둠 뿐이었던 밤 하늘이 어느새 희미하게 남색 빛을 띠고 있었다. 그것은 아침이 오기 전의 새벽 하늘 색과 같았다. ‘이런......’ 마음 같아서는 기세를 몰아서 새로운 검법을 완성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많이 이곳에서 시간을 많이 지체했다. 낭떠러지를 빠져나올 방법을 찾는다는 게 천마조사와 검흔을 발견한 덕분에 절벽 위에 있을 수 하들을 망각하고 말았다. ‘초식은 조화를 이루지 못했어도.....다른 성과는 있었으니까.’ 그 성과는 현경의 경지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좀 더 다른 의미에서의 성과였다. ‘일단은 빠져나가자.’ 현실로 돌아오자 서서히 많은 것이 걱정되었다. 몸에 불이 붙어서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으니 수하들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특히 문규를 생각하니 마음이 절절해졌다. 자신이 죽은 줄 알고 슬퍼하고 있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올라가야 하지?’ 여전히 이 수직으로 뻗어있는 암석 장벽을 오를 방법이 막막하기만 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천여운이 바닥과 장벽에 꽂혀 있는 검들을 쳐다보다가 문득 뭔가를 깨달았다. ‘잠깐만.....길을 꼭 찾으라는 법이 있나. 만들면 되잖아.’ 같은 시각. 폐검곡의 암석 장벽 내에 있는 장원. 무당패검 현운자가 있는 거처로 검은 무복의 사내가 들어왔다. “어찌 되었느냐?” “신의도 떠날 준비가 끝난 것 같습니다.” “잘 되었군. 그들은 아직 자고 있겠지?” “감시자들을 붙여두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한 번 더 살펴보겠습니다.” 침상이 있는 의무실 건물에만 다섯 명의 감시자들이 있었다. 무슨 문제가 생겼다면 진즉에 알았을 것이다. 설사 그들 중에 기감이 뛰어난 자가 눈치 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확인 후에 감시자들과 함께 신의를 데리고 비밀통로로 오라. 본 도는 본 파의 제자들을 데리고 가겠다.” “알겠습니다.” 그들이 알아차렸을 무렵에 자신들은 숨겨진 비밀 통로로 빠져나간 후일 것이다. 이곳의 입구를 봉하고 있던 청옥석 벽과 기관진식을 해제하고 나갈 것이기에 밖에 있던 자들이 빠르게 침투해 들어올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완벽한 이이제이가 성사된다. 마지막 임무를 부여받은 검은 무복의 사내가 유유히 의무실로 향했다. ‘응?’ 의무실 건물 앞까지 도착한 그가 인상을 찡그렸다. 뭔가 이상했다. 분명 지붕 위에 두 명의 감시자들이 있을 텐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잠깐 한 명이 비운 것이라면 뒷간을 생각하겠지만 그게 아닌 듯 했다. ‘설마?’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심스럽게 의무실 문을 열고서 그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두운 의무실 안에 희미하게 침상에 누워 있는 다섯 그림자가 보였다. 작은 숨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아직 곯아떨어진 모양이었다. 하긴 부상을 입은 자들인데 피로한 것도 당연했다. ‘문제가 없구나. 그럼 지붕 위에 있는 녀석들은 대체 어디에....잠깐!’ 검은 무복의 사내가 놀란 눈으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생각해보니 의무실 안에는 여섯 명이 있어야 했는데 한 명이 부족했다. ‘누가 자리를 비운 거지?’ 사내가 기척을 죽이고서 살금살금 확인하기 위해서 다가갔다. 그리고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어두운 그림자의 얼굴을 살펴보는 순간, “이런.....젠장!” 누워있는 그림자는 바로 지붕 위에 있어야 할 감시자 중에 한 사람이었다. 그의 상태를 보니 기절시키는 훈혈(暈穴)이 점해져 있었다. 놀란 검은 무복의 사내가 침대에 누워 있는 자들을 전부 살펴봤는데, 당혹스럽게도 그들은 전부 의무실을 감시하던 자들이었다. “빌어먹을!” 검은 무복의 사내가 인상이 일그러져 다급하게 의무실을 뛰쳐나갔다. < 52장 폐검곡의 비밀 (3) > 끝 < 53장 강림(1) > -휘이이이이잉! “헛!” 거센 강풍에 경공을 펼치던 천여운의 몸이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었다. 어떻게든 중심을 잡아보려고 했으나 녹이 슨 검신은 천여운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부서지고 말았다. -챙캉! “으아아아아악!” -슈우우우우우욱! 덕분에 발 디딜 곳이 없어진 천여운의 몸이 다시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애써 이곳까지 올라왔는데 일순간에 무너지게 생겼다. ‘안 돼!’ 천여운은 재빨리 백룡도를 뽑아서 암석 장벽에 꽂았다. -팍! 콰르르르르! 다행히 떨어지고 얼마 안 되었기에 관성이 크게 붙지 않아, 백룡도가 장벽을 크게 베지 않고도 멈출 수 있었다. 반 장(丈) 정도였지만 심장을 덜컥거리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천여운이 거친 숨을 내쉬면서 위를 쳐다보았다. “하아....하아...” ‘젠장, 바람을 염두 하지 못했다.’ 그가 문득 떠올렸던 좋은 방법은 벽면에 꽂혀 있는 검들을 이기어검으로 꽂아서 발 디딜 곳을 직접 만드는 것이었다. 길을 직접 만든다면 무리 없이 올라갈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러나 낭떠러지에서 중간 지점에서 몰아치는 엄청난 강풍은 균형을 잡기 힘들게 만들었다. 그것은 바다의 파도 속에서 버티려고 안간 힘을 쓰는 것과 비슷했다. ‘이 구간은 경공으로 무리다.’ 현경을 떠나서 경공의 고수인 마라겸이라고 해도 이런 엄청난 강풍에다가 발 디딜 곳이 없는 곳에서는 오르기가 힘들 것이다. 고민하던 천여운은 번거롭지만 무식한 방법을 쓰기로 했다. -차차차차차차착! 천여운의 팔 보호대의 흑철이 불리되면서 흑검의 형태로 바뀌었다. 오른손에는 백룡도, 왼손에는 천마검을 쥔 천여운은 왼손을 위로 뻗어 벽면을 향해 검을 박았다. -푹! 괴력과 내공이 더해져서 암석 벽면이 쉽게 뚫렸다. 물론 절세병기들이기에 더욱 쉬웠다. 천여운이 그 상태에서 오른손에 있던 백룡도를 암석 벽에서 뽑아서, 왼손에 박고 있던 천마검보다 더 높은 곳에 도를 박았다. -푹! ‘다소 시간은 걸리겠지만 이 구간은 어쩔 수가 없다.’ 회오리 수준의 몰아치는 바람 때문에 모양새는 빠져도 이것이 안전했다. 대신 경공을 펼치는 것보다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서두르자.’ 천여운은 장벽 위로 검을 꽂아 넣으며 속도를 박찼다. 한편 의무실 건물을 빠져나온 검은 무복의 사내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신의 감로수가 있는 장원의 약당 건물로 향했다. ‘탕약에 넣은 수면제가 통하지 않은 건가.’ 그들의 탕약에 일부러 수면 성분이 있는 약재를 넣었다. 어차피 일종의 약이었기 때문에 알아차리기 힘들 거라고 여겼는데, 아무도 잠들지 않고 사라졌다는 것은 노림수가 뻔했다. “한 명씩. 따라와라.” “충!” 가는 길목에 배치되어 있던 무사들이 따라붙었다. 여섯 명이나 되는 고수들을 그 혼자서 잡기 힘들었다. 신의 감로수가 있어야 할 약당으로 달리는 그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쾅! 검은 무복의 사내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약당 문을 부쉈다. 어차피 이곳을 버리고 갈 것이기에 장원이 부서지든 말든 상관없었다. “아니?” 약당 안에는 신의가 없었다. 오히려 바닥에 두 명의 감시자들이 쓰러져 있었다. 무사들이 약당 안으로 들어가 쓰러져 있는 감시자들의 상태를 살폈다. “주, 죽었습니다.” 감시자들은 목이 베여서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죽은 듯 했다. 불과 반각까지만 해도 멀쩡히 약당의 문 입구를 지키고 있던 감시자들이었다. “빌어먹을!” 뭔가 꼬여도 한참 꼬였다. 의무실에 있던 여섯 명보다도 신의가 사라진 것은 모든 일이 틀어짐을 의미했다. 당황한 검은 무복의 사내는 밖으로 뛰쳐나가서 소리쳤다. “신의가 사라졌다! 신의를 찾아라!” “헉? 신의가?” 그의 외침을 들은 장원 내에 있는 모든 무사들이 다급히 수색에 들어갔다. 그러는 사이에 검은 무복의 사내는 서둘러서 이 사실을 보고하기 위해서 비밀 통로 쪽에서 대기하고 있을 무당패검 운현자에게로 향했다. -슉! 경공을 펼쳐서 한달음에 비밀 통로 앞으로 달려온 사내는 그 앞에 서있는 도복을 입은 무당파의 도인들을 발견했다. “끄으응!” “안 열려!” 비밀 통로는 그 옆에 설치되어 있는 기관 제어 장치의 봉을 움직이면 열 수 있는데, 그것이 부러져 있었고 몇몇 도인들이 통로를 열기 위해 안간 힘을 쓰고 있었다. 두께가 두꺼운 청옥석 벽이 쉽게 열릴 리가 만무했다. 무당파의 도인들 사이에 서있는 무당패검 운현자에게 검은 무복의 사내가 부리나케 달려가 보고 했다. “신의가 사라졌다니 무슨 소리인가?” 장원 내에 외치는 소리를 듣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노기가 서린 운현자의 물음에 검은 무복의 사내가 다급히 상황을 보고했다. “운현자 어른! 지금 의무실에 있는 여섯 명과 신의가 사라졌습니다. 장원 내를 수색하라고 했는데...” -쾅!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운현자가 거칠게 진각을 밟았다. 바닥에 난 균열은 그가 얼마나 분노했는지를 잘 알려주고 있었다. 운현자가 손으로 비밀 통로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수색? 이미 그 자들이 비밀 통로의 입구를 부수고 도망쳤는데, 그런 소리가 나온단 말인가!” “비, 비밀 통로를요?" ‘아뿔싸! 당했구나.’ 그제야 검은 무복의 사내는 당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이미 한 발 늦은 상황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비밀 통로를 알아낸 것도 모자라, 그 제어장치를 부수고 도망쳤다는 것은 조력자가 있다는 소리였다. 그 조력자는 당연히 신의일 확률이 높았다. ‘우릴 배신했단 말인가!’ 당혹감에 젖어있는 검은 무복 사내를 뒤로 한 채, 운현자가 허리춤에서 자신의 독문보검인 청현검(靑賢劍)을 뽑아들었다. -우웅! 검에 검강을 실은 운현자가 무당파의 도인들에게 말했다. “비켜라!” 기관 제어 장치가 부서졌으니 강제로 열고 나가는 수밖에 없다. 무당파의 도인들이 비밀 통로 앞에서 물러서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쾅! 숨겨진 장원의 입구 쪽에서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어젯밤에 들었던 그 폭발음과 비슷했다. 적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아마도 얼마 있지 않으면 그들이 들이닥칠 것이다. 라고 서두르려고 했는데, “적들이다!!! 적들이 들어온다!!!” “적이 침투했다!!!” 입구 쪽에 있는 무사들의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운현자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화약을 쓴다고 해도 단 한 번의 폭발만으로 적이 침입이 가능할 순 없었다. 몇 개의 기관 진식을 통과하고 입구를 막고 있는 청옥석 벽도 제거해야만 들어올 수 있는데,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서, 설마.....’ 운현자의 눈빛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지금 상황은 마치 자신들이 의무실에 있는 그 자들을 상대로 하려고 했던 이이제이 계책과 동일했다. 오히려 그들이 이곳에 갇히고 외부의 적이 침투했다.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것이었다. ‘감.....로.....수! 이 늙은 계집이 감히!’ * * * 암석 장벽 내부에서 운현자가 분개하고 있을 무렵, 비밀 통로로 이어진 동굴 안에는 일곱 인영들이 밖을 빠져나오기 위해 서두르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천여운의 수하들이었다. 동굴 내부로 울리는 시끄러운 웅성거리는 소리들에 허봉이 히죽거리며 웃었다. “히히히, 그놈들이 장원에 들이닥쳤나 본데요.” “잘됐군.” 이 모든 계획을 세운 것은 바로 사 장로 양단화였다. 물론 이것을 알아내기 위해서 수준급의 연기를 해준 허봉과 호상화 두 사람의 공이 컸다. 덕분에 신의 감로수를 빼낼 수가 있었다. ‘끄응!’ 내색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백기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부상을 입은 허봉이 업기에는 그랬기에 그가 자처해서 신의 감로수를 업었는데, 워낙 근육량이 많은 그녀인지라 생각보다 무거웠다. “사내 녀석이 힘이 없구만.” 업혀서 훈수를 두는 감로수의 말에 백기가 오기가 생겨서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저 힘으로만 업기에는 그녀의 몸무게가 지치게 만든다. “노닥거릴 시간이 없다. 서두르자.” “넵!” 이 장로 연무화가 일행들을 재촉했다. 적들이 많기에 장원 내에 있는 자들도 그리 오래 버티진 못할 것이다. 무당파의 도인들과 정파 무사들이 적들로부터 시선을 돌리고 있을 때 자신들은 빨리 폐검곡을 벗어나야만 했다. -타타타탁! 비밀 통로를 달린지 얼마 되지 않아 그 끝이 보였다. 그런데 출구가 뚫려 있을 줄 알았는데 막혀있다. “출구가?” “암석으로 막아둔 거네. 밀기만 하면 되네.” 신의 감로수의 말에 선두에 서있던 연무화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막혀 있는 통로의 끝을 밀었다. 그녀의 심후한 내공에 의해 막혀있는 암석이 밀려나가기 시작했다. -쿠르르르르르! “빛이다!” 암석이 밀려나자 그 틈으로 빛이 흘러들어왔다. 아직 날이 밝지는 않았기에 새벽의 남색 빛이었다. -쿠르르르르! 팍! 휘이이이이! 암석이 완전히 밀려나며 낭떠러지로 그것이 떨어졌다. 출구가 열리자 반대편 절벽이 보였다. 그런데 절벽 반대편에 보이는 수많은 인영들에 연무화와 일행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적어도 스무 명 이상은 되어 보였는데, 적들 모두가 장원 내부로 들어간 것은 아닌 듯 했다. ‘그래도 그 객잔주나 고수들은 없다.’ 그놈들이 있다면 성가셨을 테지만 이들 정도면 뚫을 수 있다. “본 녀가 앞 장 서서 뚫겠다. 다들 바짝 따라붙어라.” 연무화의 말에 모두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빠르게 내달려 도약하여 단숨에 십 장 거리의 낭떠러지를 뛰어넘었다. 절벽을 밟는 순간에 그녀가 검을 뽑아들었다. -챙! 검을 뽑은 그녀가 가까이에 있는 복면인들을 향해 검초를 펼쳤다. 미리 병장기를 들고 있던 복면인들이 막아내려 했지만, -촤촤촤촤?! “크헉!” 쾌검의 진수를 담은 진신마검의 삼 초식이었다. 고절하면서도 빠른 검식에 방어는커녕, 순식간에 두 사람의 복면인의 병장기가 부서지고 목과 심장이 꿰뚫려 죽음을 맞이했다. 연무화가 남은 자들을 처리하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삐이이이이이익! 복면인들 중에 한 사람이 목에 매고 있던 작은 피리를 불었다. ‘이런!’ 그것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알기에 연무화가 다급히 피리를 부는 자를 향해 탄검강을 날렸다. -촤아아아악! 푸른빛의 검강이 날아가 단숨에 피리를 분 복면인을 일도양단하려 했다. 그러나 이것을 다른 복면인들이 지켜볼 리가 없었다. 옆에 있던 복면인이 피리를 부는 자를 밀어낸 덕분에 탄검강이 빗겨나갔다. ‘젠장!’ -탓! 양단화가 허봉을 업고서 땅을 밟았다. 그녀가 당혹스러워 하는 차에 일행들이 하나 둘씩 절벽을 도약해서 건너왔다. 그들 역시도 절벽 반대편에서 울려 퍼지는 피리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서두른 것이다. 그러나, -슉! 슉! 슉! 슉! 피리 소리를 들은 암석 장벽을 둘러싸고 있던 모든 복면인들이 일제히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그 숫자는 그들이 상상했던 수를 훨씬 뛰어넘었다. 이렇게 많은 자들이 언제 폐검곡까지 침투해온 것인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족히 백 명은 넘는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온 것일까? 얼마 전만 하더라도 객잔주 노인 밖에 없다고 여겼는데 그게 아닌 듯 했다. 난처함을 금치 못하는 연무화에게 뭔가 날카로운 예기가 뻗어왔다. “헛?” 그녀가 재빨리 검을 들어서 이를 막아냈다. -챙! 끼리리리리리릭! 그것은 푸른빛 탄검강이었다. 검강을 막아낸 그녀의 신형이 뒤로 다섯 보 가까이 밀려났다. 십성 공력까지 끌어내서 막아냈지만 검강에 실린 기운이 엄청났기에 그것이 해소되기까지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이 느낌은?’ 그녀가 검강이 날아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바로 객잔주 노인이었다. 암석 장벽 내부에 있을 거라 여겼는데, 뜻밖에도 그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노인은 월척이라도 한 사람처럼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허허허, 역시 예상대로군.” “........” “이런 곳에 입구가 하나뿐이라고 여기지 않았거든.” 노인은 애초부터 통로가 하나일 거라고 단정짓지 않았다. 그렇기에 정보를 모으면서도 수하들이 모이기를 꾸준히 기다린 것이었다. 노인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들을 훑다가 신의 감로수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호오. 신의가 노파일 줄은 몰랐군.” 그녀가 신의임을 단번에 알아챘다. 나머지 사람들은 얼굴을 한 번씩 보았기에 구분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으득! 노인의 얼굴을 보자 침울한 얼굴로 말이 없던 문규가 이를 갈았다. 죽은 천여운의 원수라고 할 수 있는 자를 다시 보게 되니 분노가 솟구쳤다. 반면 연무화나 양단화는 이 상황이 난처하기만 했다. ‘큰일이구나.’ 무력을 측정할 수 없는 괴물인 노인만으로도 벅찼는데,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한 사람도 문제였다. 노인과 마찬가지로 복면을 쓰지 않은 사내에게서 풍겨져오는 기운은 범상치가 않았다. 적어도 화경 초입의 고수가 틀림없었다. “이 단주. 본좌가 저 두 사람을 상대할 터이니, 나머지를 정리하고 신의를 데려와라.” “충!” 노인이 가리킨 두 사람은 바로 연무화와 양단화였다. 두 번씩이나 그들을 처리하지 못하고 물러났던 것이 불만스러웠던 노인이었다. -챙! 노인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집에서 두꺼운 검을 뽑아들었다. 이들에게서 맡겨놓았던 검을 받은 그였다. “그럼 시작해보실까!” -팟! 노인의 신형이 잔상을 남기며 흩어지더니, 단숨에 연무화를 향해 거리를 좁혀왔다. “칫!” -촤촤촤촤?! 연무화가 보법을 펼쳐서 거리를 벌리며, 검초를 펼쳐 노인을 견제하면서 소리쳤다. “감 파파를 보호해!” 어떻게든 그녀를 탈출시켜서 십만대산으로 데려가야 했다. 신의 감로수를 업고 있는 주위로 허봉과 호상화, 문규 등이 삼각 대형으로 등을 지고 섰다. 적의 수가 너무 많았기에 퍼져서 싸우다간 신의를 빼앗길 수도 있었다. 네 사람의 눈빛이 강한 긴장감으로 물들었다. [양 장로! 내가 이 자를 맡고 있는 동안 저 복면을 쓰지 않은 자를 처리해라!] [알겠소!] -챙! 양단화도 그녀의 의견에 동의하는지, 이 단주라 불리는 자를 향해 도를 뽑아 신형을 날리려 했다. 그러나 어느새 연무화를 상대하던 노인이 방향을 틀어서 양단화를 막아섰다. “이런!” “어딜 가려고 하나. 자네 두 사람이 내 몫인데.” 노인이 막아선 틈에 기회를 엿보고 있던 이 단주라는 사내가 단숨에 신의 주변을 지키고 있는 세 사람을 향해서 땅을 박차고 쇄도해왔다. -팟! 이 단주가 목표로 한 자는 바로 문규였다. 문규가 잔뜩 긴장한 눈빛으로 두 손바닥에 장강(掌?)을 일으켜서, 그를 막으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슉! ‘아닛?’ 그녀를 향해 신형을 뻗어오던 이 단주가 놀라서 우측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챙! “검?” 그에게 날아온 것은 다름 아닌 녹슨 검이었다. 갑자기 날아오는 검의 예기를 감지하고서 막기는 했지만 그 공력이 너무 강했다. 이 단주의 신형이 녹슨 검에 실린 심후한 공력에 밀려 났다. -파파파파팍! 다섯 보 가까이 밀려난 이 단주가 십성 공력을 끌어올려서 녹슨 검을 쳐냈다. -챙강! 워낙 녹슨 검이었다 보니, 그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검신이 부서지고 말았다. 만약 멀쩡한 검이었다면 좀 더 밀려났을 지도 모른다. 이 단주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이기어검? 대체 누가?” 분명 자신을 노린 이 일격은 이기어검이 틀림없었다. 이 단주가 검이 날아온 방향으로 몸을 틀어서 쳐다보았다. 그곳은 바로 암석 장벽 쪽이었다. 그런데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뭐지? 대체....엇?’ 그때 그의 눈에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들들들들! “암석 장벽이 흔들린다!” 복면인 중 한 사람이 놀라서 소리쳤다. ‘암석 장벽? 그게 아니야.’ 흔들리는 것은 암석 장벽이 아니었다. 암석 장벽에 꽂혀있는 백 개가 넘는 수많은 검들이 들썩거리며 움직였다. 알 수 없는 기이한 현상에 복면인들을 비롯해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들썩 거리던 검들에 변화가 일어났다. -푹! 푹! 푹! 푹! 푹! 수많은 검들이 검집에서 나오듯이 장벽에서 뽑혀졌다. 그리고는 그 많은 검들이 허공에 둥둥 뜨더니, 이내 검 끝이 반대방향으로 회전을 하고는 복면 인들을 겨냥하기 시작했다. “헉!” “거, 검들이?” 모든 복면인들의 눈빛에 당혹감이 서렸다. ‘이게 대체 무슨?’ 양단화를 상대하던 노인조차도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검들을 바라보았다. 백여 개가 넘는 검들이 허공에 떠있는 모습은 장관 그 자체였다. -고오오오오! 그때 절벽 낭떠러지 밑에서 무언가가 떠오르고 있었다. ‘이, 이건?’ 펄럭거리는 검은 장포를 걸치고 있는 긴 머리카락의 청년이었는데, 머리부터 모습을 드러낸 그는 놀랍게도 흑검을 타고서 허공을 오르고 있었다. 그 모습이 흡사 마계에서 현신하는 마신(魔神)과도 같았다. “아....아아아!” 이 광경에 문규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깜빡거리다가, 이내 눈시울이 붉어져서 큰 소리로 청년에게 외쳤다. “공자님!!!” < 53장 강림(1) > 끝 < 53장 강림(2) > 한참을 천마검과 백룡도를 번갈아 꽂으며 절벽 위를 올라오던 천여운은 드디어 거센 바람이 몰아치던 구간을 지날 수 있었다. 바람이 잠잠해질 무렵 그의 기감에 수많은 기척이 감지되었다. 화경의 경지일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먼 곳까지 느낄 수 있었다. ‘많아.’ 천여운의 눈빛이 떨려왔다. 자신이 낭떠러지에 떨어져 있는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위에서 느껴지는 수많은 기척들은 전부 무공을 익힌 무인들이었다. ‘연무화?’ 익숙한 기운도 느껴졌다. 행방불명되었던 연무화와 백기, 호상화의 기척이었다. '살아있었구나!' 이들을 감지한 천여운은 서둘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감지하고 있는 수많은 기척들은 하나 같이 살기를 머금고 있었다. 서두르지 않으면 무슨 사태가 벌어질지도 몰랐다. ‘이제 벽에 검과 도를 꽂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다시 검들로 디딤 길을 만들려던 천여운의 눈에 저 멀리서 절벽을 가로질러서 뛰어넘고 있는 검은 점들이 보였다. 검은 점에서 너무도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문규!’ 그녀는 문규였다. 문규에 이어서 다른 이들도 절벽을 뛰어넘고 있었다. 그들이 건너가는 절벽 쪽으로 수많은 무인들의 기척들이 몰려들고 있었는데, 그 중에 굉장히 위험한 자들도 껴있었다. 분명 그때 객잔에서 잠시 손을 섞었던 그 노인인 듯 했다. 현경의 경지에 오르기 전만 하더라도 느껴지지 않은 그가 감지되었다. ‘서둘러야 한다.’ 하지만 이래서는 속도를 내기 힘들었다. 장벽에 박혀 있는 검들을 뽑아서 길을 내려고 했던 천여운이 방법을 바꾸었다. 일종의 발상의 전환이었다. ‘잠깐만 검을 조정할 수 있다면 차라리 타고 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 발상의 전환이 바로 어검비행술(馭劍飛行術)이었다. 천여운은 모르겠지만 현경의 고수들 중에서 검을 타고 날아다니는 자가 있다는 설은 종종 무림의 전설과도 같이 들려왔다. 그것을 천여운은 자의로 떠올린 것이었다. -휙! 천여운이 천마검을 손에 놓고서 진기를 불어넣었다. 그러자 천마검이 살아있는 것처럼 자유롭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여운은 조심스럽게 검신에 두 발을 올려놓았다. -탁! 뭔가 허공을 짚고 서있는 듯한 미묘한 느낌에 사로잡혔지만 이것을 느긋하게 감상할 틈 따윈 없었다. 용천혈에 내공을 모아서 검에 발을 흡착시켰다. 그리고 검결지를 움직이자 천마검이 기다렸다는 듯이 세차게 허공을 날아올랐다. 근 백오십 여명에 가까운 엄청난 인원에 달하는 적들을 감지한 천여운이 선택한 비장의 수법은 바로 이기어검이었다. -둥둥둥! 허공에 떠있는 수많은 검들이 그의 주위에서 대장군의 명령을 기다리는 대군처럼 대기하고 있다. 언제든지 천여운이 손만 뻗으면 당장에라도 쇄도해올 기세였다. 이 때문에 잔뜩 긴장한 복면인들은 경직되어서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공자님!!!” 문규가 토끼 눈이 되어서 눈물을 글썽이면서 외쳤다. 그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주, 주구우우우운! 살아겠셨군요!” “흑!” 호상화나 허봉 역시도 죽은 줄만 알았던 천여운의 등장에 가슴이 벅차서 눈물을 흘렸다. 더욱 전율적인 것은 천여운의 주위에 떠오른 수많은 검들이었다. 이것은 이기어검의 수법이 틀림없었다. ‘교, 교주님께서 현경의 경지에 오르신 건가’ 연무화는 믿을 수가 없었는지 눈을 크게 뜨고서 천여운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자신과 동등한 경지였던 그였다. 그런데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죽었다고 알려진 고작 하룻밤 사이에 확연하게 달라져서 나타났다. ‘교주님께서는 정녕 마신의 선택을 받으신 분이란 말인가?’ 그것으로 모든 걸 표현하기도 힘들었다. 흑색 장포를 펄럭이면서 수많은 검들 사이에 떠있는 모습만으로도 선택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신의 현신 그 자체로 보였다. ‘이놈. 분명이 죽은 것을 보았는데....’ 노인은 분명 숲속 안에서 그가 폭발에 휘말려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설사 자신이라고 한들 몸에 불이 붙어서, 이런 까마득한 높이의 낭떠러지에 떨어진다면 살아남을 가능성은 전무 하다. ‘그저께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아닌가.’ 그때는 분명히 화경의 극에 이른 걸로 판단했다. 그런데 이기어검을 펼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현경의 경지가 틀림없었다. 더군다나 이 많은 검들을 떠오르게 했다는 것은, ‘초입이 아니다. 이놈은 확실하게 현경의 경지에 올랐다.’ 어이가 없는 것을 떠나서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죽음만이 도사리고 있는 절벽 낭떠러지 아래에 엄청난 기연이 숨겨져 있기라도 한 것일까? 노인이 시선을 돌려서 백기에게 업혀있는 신의를 쳐다보았다. ‘아니야. 분명 신의 저 노파가 그것을 가지고 있을 텐데.’ 순간 그 분의 물건이 혹시 낭떠러지 아래에 있었던 것을 아닐까 추측했지만, 아무래도 그건 아닌 듯 했다. 노인이 천여운을 향해 소리쳤다. “용케 죽지도 않고 살았군. 허허허, 지고의 경지에 올라선 것을 축하하네.” 무림인들에게 있어서 지고의 경지. 그것은 현경을 의미한다. 수백만 명에 이르는 중원의 무인들 가운데 열 손가락에 꼽히는 자들만이 오른 절대적인 경지였다. 약관에 불과한 천여운에게 부러움과 시기의 눈빛을 보낼 만도 했지만 복면인들의 눈빛은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둥둥! 그들을 겨냥하고 있는 저 수많은 검들이 주는 위압감은 엄청났다. 이 수많은 검들의 한 가운데서 어검비행술을 펼치고 있는 천여운의 모습은 괴물 혹은 마신과도 같았다. 사기가 현격히 떨어진 복면인들을 의식한 노인이 이어서 소리쳤다. “허장성세는 그만 부리고 이리로 와서 손을 섞지 않겠나? 그 검들을 전부 제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본좌가 모를 것 같나?” 이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노인 역시도 현경 초입의 고수였다. 충분히 이기어검을 다룰 수 있지만 그는 그것이 진정한 고수를 상대로는 효용성이 크게 떨어짐을 알았다. 이기어검 자체는 검식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아무리 높은 경지에 올라 사고의 폭이 넓어져도 검을 다룰 수 있는 숫자에는 한계가 있었다. ‘기공만 줄곧 파고있는 그놈조차도 열두 자루가 한계라고 선을 그었다. 암. 저것은 허장성세다.’ 그 열두 자루조차도 세밀하게 다루는 것은 무리다. 이기어검으로 세밀하게 다룰 수 있는 숫자는 기껏해야 세 자루에서 다섯 자루가 한계다. ‘멍청한 녀석이구나. 같은 현경의 고수 앞에서 속임수를 부리려고 하다니.’ 노인은 허공에 떠있는 검들이 허세라고 확신했다. 이것은 수적으로 불리하기에 복면인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는 천여운의 계책이리라. 그때 천여운이 노인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허장성세로 보이나?” “그럼 그게 허장성세가 아니라면 대체 뭐....” 천여운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검결지를 뻗어서 복면인들을 향해 가리켰다. 그러자 허공에 떠있는 백여 개의 검신이 떨리며 움직이려고 했다. ‘아니야. 절대로 불가능하다.’ 노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불길한 느낌이 들었지만 부정했다. 그리고 검병을 굳게 잡고 천여운 있는 허공으로 신형을 날리려 했다. 찰나의 순간, 천여운이 나노에게 명했다. ‘나노. 보조해줘.’ 이에 나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사용자의 명령에 의거하여 128개의 검에 판넬(Funnel) 원격 조정 시스템을 가동합니다. 타겟(Target) 락 온(lock on)] -삐삐삐삐삐삐삐삐삐! 이미 증강현실이 개안되어 있는 천여운의 시야에 붉은 입자들이 십자 형태로 빠르게 생성되면서 복면인들을 조준 겨냥했다. 그것은 땅을 박차고 자신을 향해 쇄도해오는 노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천여운이 방아쇠를 잡아당기듯 검결지를 살짝 위로 올렸다. [판넬(Funnel). 가동.] 나노의 목소리가 끝남과 동시에 백이십팔 개의 검이 일제히 움직였다. -촤촤촤촤촤촤촤촤촤! 그 위용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장관을 그려냈다. 수많은 검들은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며 복면인들 향해 하나씩 쇄도했다. “마, 말도 안 돼!” “이 많은 검들이?” 놀란 복면인들이 병장기를 휘두르며 막으려고 했지만, 검이 움직이는 속도는 천여운이 직접 검을 다루는 속도와 거의 동일했다. -푹! “끄악!” -푹! “컥!” 순식간에 수십 명의 복면인들의 몸이 무력하게 이기어검에 꿰뚫렸다. 사방에서 피가 튀어 오르고 죽음의 비명 소리가 퍼져나가는 것이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채채채챙! “막아랏! 막아야 한다!” “뭐? 이, 이걸 무슨 수로?” 복면인들이 소리를 치면서 검초를 펼쳤지만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하나 하나가 고절한 검초를 펼치는 이기어검들을 무슨 수로 막겠는가. 점차 폐검곡의 절벽 앞이 짙은 혈향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이 광경에 노인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설마 정말로 백 개가 넘는 검으로 이기어검을 펼치는 것을 보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대체 어떤 뇌 구조를 지녔기에 이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물론 통상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노인이 나노의 존재를 알 리가 없었다. 천여운의 대뇌에 자리 잡고 있는 메인 시스템을 담당하는 나노는 원격으로 수억이 넘는 나노머신을 조정할 수 있다. 일반적인 인간의 뇌가 감당하지 못하는 궁극의 연산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나노의 연산능력 보조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네놈도 예외가 아니다.” 천여운이 노인을 향해 검결지를 뻗었다. -슈우우욱! “헛?” 노인이 자신을 향해 쇄도해오는 네 자루의 검들에 신형을 날리던 것을 멈추고 재빨리 검초를 펼쳐서 그것들을 막아냈다. -채채채챙! 고절한 검초를 펼치는 이기어검이기는 하나, 녹이 슨 검들이었기에 노인의 심후한 공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전부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큭, 본좌를 우습게 여겼구나. 아닛?” 그런데 허공에 떠있던 천여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애초부터 녹이 슬고 다 부러져 가는 검으로 현경 초입의 고수인 노인을 죽일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천여운 역시도 알고 있었다. -푹! 푹! 푹! “크헉!” “끄아아악!” 검들이 허공을 날아다니며 사방에 피를 뿌리며 끝없이 움직였다. 퍼져 나오는 비명은 죽음의 장송곡이었다. -타아아앗! 타아아앗! 타아아앗! 땅을 딛고 뛰어가는 소리가 천천히 울려 퍼졌다. 마치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것만 같은 느낌이다. 사방에서 피어오르는 핏물들과 아비규환으로 쓰러지는 복면인들의 틈 사이를 가로질러 천여운의 신형이 어딘가로 내달리고 있었다. '더 빨리!' 그곳에는 이 단주라 불린 사내가 문규를 향해 검초를 펼치고 있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자 재빨리 신의를 탈취하려는 것이었다. 문규가 두 손에 강기를 일으켜서 뻗어 올리고 있었지만 한 박자 늦었다. -스! 스! 스! 공간을 가로질러서 그의 검이 빠른 속도로 문규의 미간을 향해 찔러들고 있었다. 바로 그 찰나의 순간 천여운의 손에 들려있는 천마검이 횡으로 그어지며 그의 검을 위로 쳐냈다. -챙! 검을 든 손이 위로 튕겨나간 이 단주의 눈이 커졌다. ‘어, 언제 여기까지?’ 그의 눈에는 천여운이 잔상처럼 나타난 걸로 보였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오른손에 쥐고 있는 천마검으로 검을 튕겨낸 것에 이어서 천여운의 왼손에 들려 있는 백룡도가 쾌속하게 이 단주의 목에 닿고 있었다. -슥! 피부에 차가운 도신이 닿아서야 이 단주는 그 사실을 깨달았다. ‘헉?’ 동공이 파르르 떨리며 당혹스러워 하던 그 짧은 찰나에 그의 목을 백룡도가 스치고 지나갔다. -?! 천천히 흘러가던 시공간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것이 현경의 고수가 보는 속도의 세상이었다. “앗?” 기습적으로 미간을 찔러오는 쾌검에 놀라서 막으려던 문규가 뜻밖의 상황에 그것을 멈췄다. 어느새 자신을 찔러오던 검이 빗나가서 위로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선?” -서걱! 이 단주의 목에 붉은 선이 생겨나더니, 이내 갈라져서는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이 단주의 눈동자는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 -푸슉! 이 단주의 잘려진 목의 단면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천여운이 피를 뿜고 있는 이 단주의 시신을 발로 차서 넘어뜨려, 문규에게 피가 튀지 않도록 했다. -주륵! “공자님!” 위기에서 자신을 구해준 천여운의 등장에 문규의 붉은 뺨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반면 다른 한 사람의 기분은 최악으로 치닿고 있었다. “이노오오오오옴!” 일순간 천여운의 족적을 놓쳤다가, 뒤늦게 그를 발견한 노인의 입에서 분노의 일갈이 터져 나왔다. < 53장 강림(2) > 끝 < 53장 강림 (3) > 화경 초입과 현경의 경지에서 오는 무위의 간극.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 복면인들의 이 단주는 허무하게 목숨을 잃고 말았다. 물론 무위의 간극과 별개로 천여운의 검에서 이어지는 도가 허를 찌른 것도 있었다. "흑! 공자님!" -슥! 뺨 위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소매로 닦아주며 천여운이 부드럽게 문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걱정시켜서 미안하다." "힝! 정말 돌아가신 줄 알았다고요." 걱정을 했다 뿐이겠는가. 밤새 오열을 해서 목이 다 쉬었다. 그때 천여운이 몸을 비틀거렸다. '두통이....' 머리가 멍해지면서 강한 통증이 뇌 전체를 파고들었다. "공자님?" 문규가 그를 부축했다가 이마에 심하게 올라온 핏줄들을 보며 놀라했다. 천여운의 이마에 핏줄들이 부풀어 올라서 터질 것만 같았다. [체내에 있는 에너지 소모율 75% 초과했습니다. 대뇌의 과부하로 인해 판넬 원격 조정 시스템을 중단합니다.] 나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끊임없이 단전에서 빠져나가던 내공의 소모가 멈춰졌다. 욱신거리던 두통도 가라앉았다. 나노가 판넬 시스템을 중단하자 허공을 가로지르며 수많은 궤적을 그리던 검들이 힘을 잃고서 바닥에 떨어졌다. -챙그랑! 챙그랑! "아? 거, 검들이 멈췄다." 어차피 녹이 슨 검이어서 복면인들을 공격하는 와중에 반 이상이 손상이 갔지만, 진기의 연결이 끊긴 검들은 바닥에 떨어지자 대다수가 부서지고 말았다. '역시 너무 많았군.' 천여운이 여전히 멍한 머리를 부여잡고 신형을 바로잡았다. 아무리 나노가 연산 능력을 보조했지만 그것을 조정하는 기본 주체가 천여운 본인이다 보니, 뇌에 무리가 가고 내공의 소모가 심할 수밖에 없었다. '반에 반각도 못 버티는군.' 검 백이십팔 개를 이기어검으로 다룰 수 있는 시각은 반의 반각(3분)이 한계였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괴물이라 불릴만한 능력이었다. 혈향과 시신들로 가득한 폐검곡의 절벽 위에 서있는 복면인들이라고 해봐야 고작 열여덟 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들의 실력이 다른 자들보다 뛰어난 것도 있었지만, 운이 좋게도 손상이 심한 검으로 인해 부상을 피할 수 있었다. '괴, 괴물!' '저 자는 정녕 마신이란 말인가?' 비록 공격이 멈췄다고는 하지만 복면인들은 전의를 상실해 있었다. 불과 반의 반각 만에 백오십 여 명에 팔 할이 죽었으니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두려움과 경외심이 동시에 느껴질 정도였다. '남은 놈들을 처리해야 한다.' "후우!" 천여운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대자연의 기운을 통해 소진된 내공을 회복하려는 순간이었다. -팟! "이노오오오옴!" 어느새 그의 두 보 앞으로 노인의 신형이 뻗어와 있었다. 수하들을 잃어서 분노에 차오른 노인이었지만, 천여운이 무리했다는 사실을 발견하자 그 기회를 놓칠 새라 공격해왔다. "물러나!" -팍! "아앗!" 천여운이 자신의 옆에 서있던 문규를 밀쳐내고서, 천마검을 휘둘러 찔러오는 노인의 검을 재빨리 막아냈다. -채에에에에에엥! 두 현경의 고수가 검을 부딪치자 강한 파장이 생겨나며 두 사람의 주위로 거센 바람이 일어나 주변에 있던 자들을 밀려나게 만들었다. '검을 부딪친 것만으로?' 신의 감로수를 업고 있는 백기가 놀라서 보법을 펼치며 그들에게서 떨어졌다. 백기를 보호하고 있는 세 사람 역시도 보조를 맞춰서 물러섰다. 기습적으로 천여운에게 일검을 먹이려 했던 노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내공을 전부 소진한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듯 했다. 십성 공력이 실린 일검을 막아냈는데 오히려 검병을 쥐고 있는 자신의 손이 더욱 떨렸다. 내공의 여부와 상관없이 무위에서 한 단락 차이 때문이었다. '나노가 내공이 완전히 소진되기 전에 끊어줘서 다행이군.' 반면 천여운은 다행스러워했다. 내공을 부족했다면 노인의 기습적인 일검에 부상을 당할 뻔 했다. 천여운이 왼손의 백룡도를 휘둘러 이 단주를 죽였을 때처럼 노인의 목을 노렸다. 그러나, -파치치칙! 반대 손으로 검결지를 만든 노인이 검강을 형성해 이를 막아냈다. 천여운처럼 우검좌도를 펼칠 수 있는 것은 아니나 양손에 강기를 일으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당장 신의를 빼앗아라!" 서로 대치한 와중에 노인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살아남은 복면인들에게 소리쳤다. 한참 망연자실해 하던 복면인들이 이내 정신을 차렸다. "추, 충!" 자신들의 문주가 저 괴물 같은 놈을 상대할 때 얼른 신의를 빼앗아야 했다. 가까이에 있던 복면인들이 일제히 호상화, 허봉, 문규를 향해 병장기를 휘두르며 쇄도했다. 하지만 그들이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촥! "크악!" 어느새 복면인의 앞을 가로막은 사 장로 양단화가 일도에 그의 목을 베어버렸다. "어리석은 놈들. 우리는 안중에도 없구나." 그것은 양단화 뿐만이 아니었다. 이 장로 연무화 역시도 노인의 외침을 듣는 순간, 곧장 신형을 날려서 신의를 노리려는 복면인들을 공격했다. -채채챙! '너무 강해.' 검초를 펼칠 필요도 없이 연무화는 기본 검식만으로 그들을 빠르게 쓰러뜨려 나갔다. 복면인들 역시도 고수들이기는 했지만 화경의 고수의 상대가 될 리가 만무했다. 곁눈질로 이를 확인한 노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크으! 이 괴물 같은 놈이 껴서 모든 게 망쳤구나. 대체 이놈과 저들의 정체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들의 정보망에도 없었던 존재들이었다. 무위를 본다면 분명 오대고수에 비견되는 실력을 지닌 천여운이다. 특히 오대고수와 구패에 관한 정보는 확실하게 모았는데, 그들 중에서 고작 약관에 불과한 고수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놈이 지쳤다고 해도 수적으로 밀린다.' 상황이 완전히 반전되어버렸다. 그 혼자서 이들을 감당하기에는 전력으로 밀렸다. '별 수 없다. 최고의 살초로 이놈에게 부상을 입힌 후에 도망간다.' 고민하던 노인이 결정을 내렸다. 상당한 시간과 공을 들인 계획이 무산되고 수하들을 대다수 잃어서 화가 나긴 했지만 여기서 물러나지 않는다면 목숨이 위험했다. '아쉽구나. 이놈이 내공을 소진했을 때 없애야 하건만.' 단 한 초식 내로 과연 죽일 수 있을지는 확신이 가지 않았지만 별 수 없었다. -채애앵! '검에 힘을?' 천여운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검을 맞부딪치고 있던 노인이 검끝을 아래 방향으로 흘려서 이화접목의 수법으로 힘의 방향을 땅바닥 쪽으로 돌렸다. -쾅! 천여운이 쥐고 있던 천마검과 노인의 검이 동시에 땅바닥에 내리꽂히자 절벽 바닥에 균열이 일어났다. -쩌저저적! 그 순간 노인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거리를 벌렸다. 그것은 최고의 살초를 펼치기 위한 거리였다. "받아랏!" 노인의 검 끝에서 강한 공력과 함께 살기가 응집되며 폭발적인 역량의 검초가 펼쳐졌다. 살기를 잔뜩 머금은 검초가 패도적인 기세로 수 갈래로 갈라졌다. 그런데 이 검초가 매우 낯이 익었다. '이건?' -촤촤촤촤촥! 검초의 검식들이 뻗어오는 경로는 일반적인 초식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찌르기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도초에 가까웠다. '극도신류?' 그것은 극도신의 도법과 매우 흡사했다. 이 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해 했던 천여운은 본능적으로 그가 극도육무문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채채채채챙! 천여운이 천마검공의 이 초식을 펼쳐서 이것에 대항했다. 일반적인 경로와는 다르게 꺾어 들어오는 검법이었지만 이미 그것을 알고 있는 천여운이었기에 변초를 써서 막아냈다. -채챙! '엇?' 왼쪽 겨드랑이 쪽을 위로 베려고 했던 노인의 두 눈이 커졌다. 이 각도에서는 절대로 예측하지 못할 검식이었는데, 그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던 것처럼 막아내자 뭔가 이상했다. -채챙! 천여운이 그의 검을 쳐내며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놈 극도육무문이구나." 노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정파의 영역에 잠입했기에 최대한 극도신류에 가까운 초식을 자제했는데, 딱 한 번을 쓰고서 탄로가 났다. '이놈? 본문의 무공을 알고 있는 건가.' 그런 노인의 반응에 천여운은 그가 극도육무문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이 정도 무위를 지닌 자라면 분명 수뇌부급이 틀림없었다. '께름칙하다. 여기서 벗어나야 해.' -채채챙! 정체가 탄로 난 시점에서 더욱 초조함을 느낀 노인이 검강을 일으켜서 눈을 난잡하게 만드는 검초를 펼쳤다. 그리고서 거리를 다시 벌리려고 했다. 그러나 천여운이 독특한 보법을 펼치며 바로 앞에서 쇄도해 오는 검강의 초식을 작은 움직임만으로 피해냈다. '이 보법?' 방금 전에 천여운이 펼치는 경신법은 풍신공이었다. 노인은 이것을 보자 몇 달 전에 절강성에서 상대했던 독특한 문양이 그려진 가면을 쓴 사내를 떠올렸다. '이놈 설마 그놈인가?' 한 번 겨뤘던 상대가 쓰는 무공 정도는 알아볼 수 있다. 분명 이 보법은 그 가면의 사내가 쓰던 것과 동일했다. 다른 마교의 장로들과 다르게 절묘한 신법으로 극도신류의 절초를 피해낸 후에 자신에게 일격을 가했던 그 자가 틀림없었다. "네놈 그때 그 가면을 쓴 마교인이구나!" '가면?' 노인의 외침에 천여운의 눈빛이 반짝였다. 이 자가 말한 사람은 분명 대호법 마라겸이었다. '대호법이 절강성에서 겨뤘다고 한 그 검으로 극도신류의 무공을 썼다는 그 자다.' 마라겸에게 절강성 탈환전에 있었던 일을 상세히 들었던 천여운이다. 그렇다면 이 자를 확실하게 잡아야 했다. '이놈이 그 마교인이라면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없애는 편이 좋다.' 도망치려고 했던 노인이 일순간 계획을 변경했다. 그들의 목적 중에는 마교의 전력을 최대한 약화시키는 것도 있었다. 마교의 수뇌부라면 이 자리에서 없애는 편이 본문이 대계를 위해서도 좋다. -팟! 거리를 벌리려던 노인이 땅을 박차고 다시 신형을 좁혀왔다. 노인은 지금까지 남겨두었던 여력을 전부 끌어올려 극도신류의 절초인 회룡승천(回龍昇天)을 펼쳤다. "흥! 이번에는 못 벗어날 것이다!" '이 초식은?' 노인이 펼치는 극도신류의 초식은 천여운이 비룡(飛龍)이라 명칭했던 극도신류의 육 초식이었다. 그 위력은 전 일 장로 무진원의 육신을 갈가리 찢을 만큼 강렬하다. 검초를 펼치는 노인의 몸이 지면 아래에서부터 위로 회전하자, 검결이 회오리를 치듯이 위로 이어지며 검강이 천여운을 감싸려 했다. '네놈이 용케 살아남았던 그 초식이다.' 지난번에는 이 초식을 완전히 익히지 못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때의 분함을 잊지 않기 위해 검초에 맞게 확실하게 보완 하여 초식을 완성했다. -들썩들썩! 천여운의 몸이 극도신류 회룡승천이 만들어낸 강대한 검력에 떠오르려고 했다. 이미 그 시점에서 초식의 팔 할이 먹고 들어간 셈이었다. '끝이다!' 그런데 천여운의 표정이 묘했다. "이걸 당사자인 네놈들에게 시험해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뭐?" -차차차차차착! 천여운이 오른손에 들고 있던 천마검이 분해되어 팔목 보호대로 변했다. 허공으로 두 발이 살짝 떠오른 상태에서 천여운이 오른손에 쥐고 있던 백룡도를 두 손으로 쥐고서 지면을 향해 내리찍었다. -쾅! -스스스스스슥! 그 순간 천여운의 신형이 잔상을 일으키듯 여덟 갈래로 갈라지며, 그의 몸을 둘러싼 회룡승천의 도강을 향해 일시에 여덟 잔상이 여덟 도식을 펼쳤다. 그걸 보는 순간 노인의 입에서 당혹성이 터져 나왔다. "서, 설마 이건?" -파치치칙! "헛?" 여덟 잔상이 펼치는 도식이 용이 승천하는 것처럼 회오리를 치면서 좁혀오는 도강을 일시에 파훼시키며 도강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콰콰콰콰콰쾅! 응집해있던 역량을 일순간에 폭발시키는 패도적인 도초식. 그것은 절벽 아래에서 천여운이 새롭게 얻게 된 극도신류의 칠 초식이었다. '이럴 수가! 어, 어찌 이런 일이?' 놀란 노인이 다급히 검강을 일으켜서 극도신류의 방어 초식을 펼쳤다. 그러나 그 위력은 너무도 파괴적이었다. -채애애앵! "끄으으으윽!" -쩌저저적! 방어 초식을 펼치는 노인의 검신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금이 간 검신을 꿰뚫고 푸른빛의 도결이 그의 상반신을 갈랐다. -촤아아악! "컥!"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와 함께 사방으로 퍼져나간 도초의 위력에 땅바닥에 모래 파편이 일어나 일시적으로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쓸 만한데?' 천여운이 바닥에 내리꽂힌 백룡도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마지막 팔 초식과 다르게 칠 초식은 기존의 도식들을 이용한 초식이었기에 짧은 시간 내에 분석하여 익히게 된 새로운 절기였다. 그 위력은 전반부 초식들보다도 훨씬 뛰어났다. -고오오오오! 이윽고 뿌옇게 일어난 먼지가 가라앉았다. 천여운의 주위로 여덟 갈래로 갈라진 도흔의 흔적은 포탄이라도 터진 것만 같았다. -챙그랑! 땅바닥으로 부러진 검신이 떨어졌다. 그것은 노인이 들고 있던 긴 장검이었다. "쿨럭." 겨우 버티고 있던 노인의 입에서 선혈이 터져 나왔다. 그의 상반신 쪽이 비스듬하게 피로 젖어가고 있었는데, 도식을 막아내지 못하고 베인 듯 했다. 부상보다도 노인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네, 네놈이 어떻게 그 분의 도법을.....푸웃!" -털썩! 그 말을 끝으로 노인이 입에서 한 번 더 피를 뿜으며 고꾸라졌다. < 53장 강림(3) > 끝 < 54장 나라고 못할 것 같으냐? (1) > 상반신 비스듬하게 베인 노인은 죽지 않았다. 천여운의 주변으로 뻗어 나온 여덟 갈래의 도는 중에서 유일하게 끊긴 부분. 그곳이 노인이 쓰러져 있는 방향이 있었다. 극도신류의 도법 칠 초식을 펼쳤을 때 그를 죽이지 않기 위해 도중에 힘을 조절했다. 그는 절강성 탈환전에 나타났던 극도육무문의 수뇌부였기 때문에 마교에 침투했던 간자들 보다도 정보를 더욱 많이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촤촤?! “크악!” 비명 소리와 함께 마지막 복면인이 바닥에 쓰러졌다. 복면인들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한들 이 장로 연무화와 사장로 양단화에 비하면 범 앞에 하룻강아지에 불과했다. 그들은 천여운과 마찬가지로 각자 한 명씩 목숨을 거두지 않고 살려뒀다. ‘대단하다.’ 백기의 등에 업혀 있는 신의 감로수가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이들을 통해서 도망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런 결과가 벌어질 줄은 몰랐다. ‘저 청년은 정말 괴물이구나.’ 아직도 방금 전에 있었던 그 광경을 잊을 수가 없다. 폐검곡 절벽을 날아다니는 수많은 검들이 만드는 궤적의 향연. 끊임없이 퍼져 나오는 복면인들의 비명 소리는 이것을 지켜보는 신의 감로수를 질리게 만들었다. ‘무림맹주 이외에도 이런 괴물이 있었다니....게다가 젊다.’ -팍! 상황이 정리가 되자 천여운의 사 장로 양단화가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머리를 바닥에 조아리며 사죄했다. “주군! 신을 벌하여 주십시오.” 그 동안 낭떠러지에 떨어진 천여운을 떠올릴 때마다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던 양단화였다. ‘응? 혹시 그 죽었다고 했던 주군이 이 친구인가?’ 그의 말을 듣고서야 감로수는 그들이 슬퍼하던 주군이라는 자가 천여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쿵! 바닥에 이마를 찧는 그를 보면서 천여운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어찌 누구의 탓이 있겠는가. 천여운이 괜찮다며 일어나라고 했다. “그런데 백기. 등에 업고 있는...응?” 갑자기 천여운이 어딘가를 바라보면서 인상을 굳혔다. 이에 의아해진 양단화가 고개를 들었다. “주군?” 천여운이 북쪽 숲을 쳐다보더니, 이내 발밑으로 손을 뻗어서 뭔가를 들어 올리는 시늉을 했다. -휘리릭! 탁! 그러자 바닥에 떨어져 있던 복면인의 검 한 자루가 천여운의 손으로 빨려들어왔다. 한편 폐검곡의 북쪽 방향에서 이 리(里) 정도 떨어진 곳. 두 명의 피로 얼룩진 무당파의 도복을 입은 자들이 힘겹게 수풀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흰 수염에 강인한 인상의 도인은 무당패검 현운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무당파의 무 자 항렬의 평제자였다. -팟! 경공을 펼치고 있는 두 사람의 표정은 필사적이었다. 어떻게든 폐검곡을 벗어나 북쪽의 무당의 영역으로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서둘러야 한다.’ 어째서 그들은 이렇게 도망치다시피 경공을 펼치는 것일까? 천여운의 수하들이 비밀 통로의 기관 제어장치를 망가뜨린 덕분에 장원으로 침투한 적들과 싸워야 했다. 장원 내에 싸운 적들을 전부 없앴지만 그들 역시도 살아남은 자라고는 현운자와 단 한 명의 도인뿐이었다. 겨우 살아서 장벽 밖을 빠져나온 현운자는 믿기지 않는 광경을 보고 말았다. 수많은 이기어검이 만들어내는 살육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도, 도망가야 한다. 저 괴물은 어찌할 수가 없다.’ 아무리 자신이 구패 중의 한 사람이라고는 하나 저런 괴물을 상대할 능력은 없었다. 다행히 저 괴물은 복면인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무당으로 돌아가서 전력을 이끌고 와야 한다. 맹의 호북 연합 지부에 지원요청을 해야 할지도.’ 저들이 신의를 데리고 가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다행히 그들이 있는 폐검곡에서 무당산까지는 쉬지 않고 경공을 펼치면 이틀 내로는 도착한다. 서두른다면 호북 지역에 천라지망(天羅蜘網)을 펼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헉...헉....헉...” 다만 옆에서 경공을 펼치고 있는 다른 도인이 마음에 걸렸다. 그 역시도 부상을 입었지만, 이 도인은 내상이 심한지 경공을 펼치는 내내 호흡이 거칠고 혈색이 나빴다. “조금만 버텨라.” “헉...헉...네. 사숙.” 조금만 더 거리를 벌린 후에 쉬는 편이 나았다. 적어도 오 리 정도의 거리는 벌리지 않고는 위험하다고 판단되었다. ‘그래도 그 많은 자들을 처리해야하니 어느 정도 시간은 벌 수 있겠지.’ 당연히 그러리라고 생각했다. 바로 그때였다. -슈우우우욱! 멀리서 수풀을 가로질러 뭔가 날아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가까이 와서야 날카로운 예기를 감지한 재빨리 몸을 숙이면서 외쳤다. “숙여!” “넷?” 무 자 항렬의 평제자가 미처 몸을 숙이기도 전이었다. -푹! “크헉!” 그의 등으로 검 하나가 날아와 등에 꽂혔다. “사, 사숙....” 가슴이 꿰뚫린 무자 항렬의 평제자는 그를 한 번 부르고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현운자는 전신에 소름이 돋아서 할 말을 잃었다. 설마 그 짧은 새에 복면인들을 전부 처리했단 말인가. ‘말도 안 돼. 이 거리를 감지했단 말인가.’ 화경의 극에 이른 그 역시도 십성 공력으로 창이나 검을 던지면 일 리(400m)가 넘게 던질 수 있지만 수풀을 가로질러서 이렇게 던진다는 건 그야말로 괴물이었다. 자신보다 공력이 적어도 두 배를 넘어선다는 의미였다. ‘현경의 고수는 정녕 괴물이란 말인가.’ 이 정도 경지라면 사파나 마교에서도 수뇌부급이 틀림없었다. 서둘러서 아군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원시천존. 원시천존. 미안하구나.’ 시신을 수습할 틈이 없었다. 현운자가 죽은 무자 항렬의 평제자의 품속에 책자를 꺼내들었다. 그 책자는 다름 아닌 신의 감로수가 가지고 있던 그 보물이라 부르던 것이었다. 검이 가슴을 관통하면서 책자에도 구멍이 났지만 이를 챙기는 현운자였다. -팟! 지금까지는 평제자와 보조를 맞추느라 속력을 내지 못했던 현운자는 전신의 공력을 끌어올려서 경공을 펼쳤다. 이윽고 얼마 있지 않아 그들이 있던 곳에 누군가 도착했다. 이 장로 연무화였다. 투검을 한 후로 내공을 전부 소진한 천여운의 명령을 듣고서, 도망치고 있는 자를 잡기 위해 이곳까지 온 그녀는 바닥에 쓰러진 도인의 시신을 발견했다. ‘아!’ 시신에 꽂혀 있는 검은 천여운이 투검 했던 그것이었다. 수풀이 워낙 우거져서 맞출 수 있으려나 했는데, 정확하게 저격했다. ‘한 명은 피했구나. 역시.....그 자인가.’ 숲속의 질퍽한 땅바닥에는 두 명의 발자국이 있었다. 그것을 따라서 추적해온 그녀였다. 그녀는 일단 도망간 남은 한 사람의 발자국을 쫓아가보기로 했다. 혹시 도망간 자가 짐작하고 있는 그 자라면 놓쳤다가는 본교로 귀환할 때 위험할 지도 몰랐다. -팟! 연무화가 발자국이 있는 방향으로 경공을 펼쳤다. * * * 폐검곡의 암석 장벽 안에 숨겨진 장원. 장원에 있는 의약당 건물 안에서 신의 감로수가 이곳저곳을 허둥지둥 뒤지고 있었다. 그녀는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렸는지 안색이 좋지 않았다. “대, 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분명히 그 책자를 품속에 갈무리해뒀었다. 그런데 모든 준비를 마치고 탈출하는 과정에서 책자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대대로 물려받은 소중한 보물이었기에 꼭 찾아야만 했다. 신의 감로수가 그 물건을 찾느라 혈안이 되어서 정신이 없는 와중에 천여운의 수하들은 장벽 바깥의 시신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질질질! “윽. 무겁네요.” “바닥에 자국들은 꼭 지워라. 허봉.” “당연하죠.” 허봉과 백기가 죽은 복면인들의 시신을 한 곳으로 모으고 있었다. 워낙 시신이 많아서 전부 쌓아놓고 불 태우기 힘들어서 스무 구씩 모아서 태웠다. ‘외부에 있는 것만 말씀입니까?’ 천여운은 내부의 시신들은 그대로 방치해두라고 했다. 그런 천여운의 의견에 사 장로 양단화가 찬성했다. 어차피 밖에 시신들은 그들과 대립하던 자들이라 흔적을 지워야만 했지만, 장원에 있는 시신들은 무당파와 복면인들의 싸움이기에 그대로 두는 편이 좋았다. ‘없다.’ 장원 내부를 살피던 사 장로 양단화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격렬한 싸움으로 엉망이 된 장원 내에는 수많은 시신들로 가득했다. 그 중에 양단화가 찾던 자는 무당패검 현운자의 시신이었다. ‘역시 교주님께서 감지했던 그 기척은 그 자인가?’ 가장 놓치면 안 될 자가 빠져나갔다. 그 자가 천여운의 신위를 조금이라도 보았다면 분명 무당파의 아군을 끌고 올 것이 뻔했다. ‘연 장로가 놓치지 않기를 바라야겠군.’ 이 장로 연무화는 마교에서도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강자였다. 아무리 중원에서 수위 급에 속하는 강자인 구패(九?)라고 해도 그녀가 밀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신의 공.” 한참 책자를 찾느라 여념이 없는 신의 감로수를 누군가 불렀다. 그는 바로 천여운이었다. 다른 이들이 자신을 신의라고 부르면 곧장 감 파파라고 부르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그녀였지만 차마 천여운에게는 그리하지 못했다. “무, 무슨 일입니까? 은공.” 그 덕분에 목숨을 구함 받았기에 은공이라 칭했다. “바쁘신 건 알지만 혹시 약재 몇 가지를 부탁드려도 됩니까?” “약재요?” 천여운의 요구에 그녀가 의아해했다. 이에 천여운이 탁자 위에 있는 종이 하나를 꺼내들어 붓으로 필요한 약재를 적어주었다. 명색이 중원 최고의 의원인 신의의 거처인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묻는 것이었다. 천여운이 넘겨준 약재 이름을 보던 감로수가 눈을 크게 뜨고서 중얼거렸다. “말린 양귀비?” “있습니까?” “그리 많지는 않지만 마취용으로 있기는 합니다.” 양귀비가 있다는 말에 천여운의 입 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숨겨진 장원에 있는 한 건물의 숙소 방 안. 문규와 호상화는 살아남은 복면인 두 명과 노인을 방마다 한 명씩 격리시켜놓았다. 두 여자가 의자에 묶여있는 자를 보면서 무언가를 하고 있다. “거기 귀 밑에 얇은 피가 보이죠?” “아! 여기?” “네! 맞아요.” 문규가 설명해주는 것을 듣고서 호상화가 노인의 목과 귀 사이에 얇은 피를 찾아냈다. 생각보다 정교하게 이음새를 가리고 있어서 몰라볼 뻔했다. 하지만 해본 사람이 잘 안다고 인피면구를 쓰고 사 년 가까이를 지내온 문규 덕분에 이것을 쉽게 구분할 수 있었다. -찌이이익! 객잔주로 변장한 노인의 피부가 길게 늘어났다. 호상화가 그것을 잡아당기자 이윽고 노인의 인피면구 속에 감춰진 얼굴이 드러났다. “어라?” 인피면구를 벗긴 두 여자들이 묘한 표정이 되었다. 말투가 영락없는 노인이라 꽤 나이를 먹었을 거라 여겼는데, 생각보다 젊었다. 화경의 고수부터는 환골탈태를 하기 때문에 외모만으로 나이를 짐작하기는 어려웠지만 이 자는 삼십대 중후반으로 보였다. “더 늙었을 줄 알았는데.” “그러게....” -꿈틀! “앗? 그때 기절해 있던 사내가 움직였다. 깨어나는데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더 빨리 깨어났다. 문규가 누군가를 데려오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으으음.’ 정신을 잃고 있던 사내가 힘겹게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그는 자신의 몸 전체를 구속하고 있는 밧줄을 발견했다. ‘잡힌 건가?’ 그 일격에 당했을 때 상반신이 베여서 꼼짝없이 죽으리라고 여겼는데 아니었다. 고개를 내려서 바라보니 상반신에 옷을 벗겨서 붕대를 감아놓았다. ‘일부러 살려놓은 건가?’ 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을 살려뒀다는 것은 뻔한 수작이었다.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멍청한 놈들이로군. 본좌가 입을 열거라고 생각한 것이냐?’ 아무리 패배했다고 한들 함부로 입을 놀려서 극도육무문의 비밀을 발설할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어차피 잡혔으니 자결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러나, -욱씬! 단전의 내공들을 폭주시켜서 전신의 경맥에 손상을 입혀서 자살하려던 사내가 강한 통증에 그것을 멈춰야만 했다. 기문에 침이 꽂혀 있어서 내공을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기문을 막아놓았구나.’ 확실하게 대비를 해놓았다. 입에 재갈을 물려놔서 혀를 깨물어서 자살하기도 힘들었다. 죽을 수도 없게 해놓자 사내는 이를 어찌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그때 방문이 열렸다. -끼이이익! 방문으로 들어오는 긴 머리카락의 청년의 모습에 사내의 두 눈이 커졌다. 그는 바로 천여운이었다. 사로잡혀서 자결해야 한다고만 생각했던 그였지만 막상 천여운을 보게 되자 다시 기절하기 전 이 떠올랐다. 대체 그가 어떻게 그 분의 무공을 익히는지 궁금했다. “읍읍!” 다만 재갈이 물려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호상화는 나가있어.” “하지만?” “괜찮아.” “알겠습니다.” 마지못해 호상화가 방문을 나가자, 천여운이 사내의 두 보 앞으로 다가가 의자 하나를 갖다놓고서 앉았다. 그리고는 거칠게 물려있던 재갈을 밑으로 내렸다. -팍! “하아.....” 물린 재갈이 벗겨지자 사내가 답답함이 가셨는지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한 번 호흡을 가다듬은 사내가 천여운을 거친 눈빛으로 노려보면서 물었다. “......어이! 마교의 주구 놈이 어떻게 그 분의 도법을 알고 있는 것이냐?” 다른 건 필요 없었다. 그 무공을 어떻게 알고 있고 익히고 있는 이유가 궁금했다. 대답하길 종용하는 눈빛을 보내는 사내를 바라보던 천여운이 피식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딱 두 가지를 정정해주지.” “뭐?” “첫 번째, 나는 마교의 주구가 아니다.” 그 말에 사내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허튼 소리. 본좌가 절강성에서 보았던 네놈을 모를 것...” -꽉! “우읍!” 천여운이 사내의 입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했다. “확실하게 말해주지. 나는 마교의 주구가 아니라 천마신교의 하늘이자 주인이다.” ‘천마신교의 하늘? 주인?.....서, 설마?’ 순간 무슨 말인지 몰랐던 사내의 눈동자가 떨렸다. 천마신교의 하늘이란 교주를 의미하는 말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네, 네놈이....마교의 교주라고?”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말은 마교의 교주가 직접 정파의 영역까지 왕림했다는 말이 아닌가. -탁! “엇?” 당혹스러워 하는 사내의 복부로 천여운의 손바닥이 닿았다. 뭘 하려는가 싶어서 두려운 눈빛으로 쳐다보는 사내에게 천여운이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 번째, 네놈에게는 질문할 수 있는 권한 따위는 없다.” “자, 잠깐...” -치치치칙! 그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천여운의 손에서 흘러나온 심후한 공력이 단전을 파고들었다. “끄아아아아아악!” < 54장 나라고 못할 것 같으냐? (1) > 끝 < 54장 나라고 못할 것 같으냐? (2) > 단전을 파고드는 심후한 공력은 사내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다주었다. 구슬과도 같은 형태를 갖추고 있던 사내의 단전에 실금 같은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쩌저저적! 무림인에게 있어서 가장 큰 고통은 단전이 파괴되는 고통이라 했다. 육신의 고통도 상상 이상이었지만, 무인이 평생을 이룬 성취를 일순간에 잃는 그 고통은 정신을 피폐하게 할 만큼 크나큰 상실감을 안겨준다. “끄아아아아아아악! 이노오오옴! 차, 차라리 나를 죽여라.” 비명을 지르던 사내의 입에서 죽이라는 말마저 나왔다. 하지만 천여운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그의 단전을 파괴시켜버렸다. -콰지직! “끄어어어어억!” 뭔가 속에서 일그러지는 소리가 나며 사내가 비명을 지르다가 이내 혼절해버렸다. 물론 그 혼절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짝! 뺨에서 느껴지는 화끈한 통증에 사내가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얼굴이 땀으로 젖어서 하얗게 질려버린 얼굴. 단전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고통. “헉....헉...헉...” ‘내, 내가 내공이 없다니.....내공이....’ 이미 적에게 잡힌 마당에 죽음을 각오했지만, 내공을 상실하자 그 심정은 말로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런데 천여운이 갑자기 그의 눈 앞에 대고 두 손바닥을 마주쳤다. -짝! 알 수 없는 그의 행동에 의아해하던 사내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놈 설마?’ 내공을 상실했지만 손바닥을 부딪칠 때 미묘하게 다른 소리가 났다. 그것은 분명 내공을 실은 것이 틀림없었다. “하? 지금 네놈 혹시 암시를 걸려고 한 것이냐?” 암시. 그것은 최면의 전조다. 극도육무문의 수뇌부라 할 수 있는 사내가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극도육무문의 문주들 중에서 환술에 능한 자가 있었다. 마교에 스스로 간자를 자처해서 들어갔다가 소식이 끊겼기에 극도육무문에서는 그가 죽었다고 판단했다. ‘마교에 밑천을 털린 것이냐?’ 그렇게 자신만만해 하더니 결과가 한심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환술은 자신에게 아무 소용이 없다. “잘 아는군.” 천여운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박수 한 번을 쳤을 뿐인데 바로 알아차릴 줄은 몰랐다. 이에 사내가 비웃음을 흘렸다. “하아....하아....멍청한 놈이로구나. 본문의 술법을 따라하다니? 그게 가능할 거라 생각하나?” 비록 단전이 파괴되어서 내공을 상실했지만,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서 암시를 견디는 훈련부터 양귀비 약물을 견디는 내성까지 생기도록 대비했다. 자신들의 술법에 당할 만큼 허술하지 않았다. “하아....크큭.....크하하하하핫.” “?” “괴물 같은 무위 때문에 걱정했는데 괜한 기우 였구나. 머리가 생각만큼 돌아가지 않는구나. 네놈이 정말 마교 교주라고? 헛소..” -꽉! “우읍!” “시끄럽군.” 또 다시 천여운이 그의 입을 움켜잡았다. 기분이 나빴지만 밧줄이 몸이 묶여있어서 반항할 수가 없었다. 천여운이 사내의 입을 잡고 강제로 벌리게 하더니, 바닥에 있던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그것은 약탕기였다. “본문에서 그 정도 대비를 하지 않.....흐어어....뭐, 뭐얏? 이, 이게 무슨....” -휘청휘청!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온몸이 나른해지면서 뭔가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 속도가 너무 빨라서 세상이 요지경으로 바뀌는 것 같았다. 흐물흐물 녹을 것만 같은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힌 사내가 겨우겨우 정신을 붙잡고 물었다. “네.....흐으으....네놈....대체 약에 무슨 짓을?” “네놈이야말로 멍청하군. 내가 설마 네놈들이 쓰는 그 약물을 그대로 쓸 것 같았냐?” “뭣?” 천여운이 사내에게 먹인 약물은 나노가 미래의 약물 지식이 복합되었다. 나노는 그것을 자백제라고 불렀다. [총 서른다섯 가지 자백제 중에서 서른 가지는 국제법에 의거하여 금지 되었습니다. 의료용으로 겸용해서 쓰이는 약물 중에 리탈린(ritalin)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리탈린은 정신흥분제, 중추신경을 자극하는 약물이다. 의료용으로 보편적으로 쓰이지만 군(軍)에서는 자백제로 쓰기도 한다. 나노는 기존의 약물에 이것을 더해 비율을 맞춰서 더욱 효과를 높게 만들었다. 왠만한 약재가 다있는 신의의 의약당 덕분이기도 했다. “네놈들 것보다 훨씬 강하게 만들었다.” “마...말도 안 돼? 그 약물을 강화시켰다고?.....흐으으...어떻게?” 내성을 길러서 약물이 소용 없으리라고 여겼는데,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잘 먹혔다. 갈수록 몸이 나른해지고 뭔가 계속 말을 하고 싶은 욕구가 치솟았다. -꽉! 입술을 깨물며 겨우 잠에 깨려는 것처럼 고개를 흔드는 그에게 천여운이 입 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네놈들도 한 것을 나라고 못할 것 같으냐?” “비, 빌어먹을!” -짝! “아, 안 돼!” -짝! 천여운의 손에서 특정 주파수를 내는 내공이 담긴 박수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지자, 이내 그의 동공이 멍해졌다. 완전히 암시에 빠져든 것이었다. 내심 반신반의 했었는데 정말로 최면이 먹혀 들자 천여운은 내심 신기해했다. 단전이 폐해지면서 무공을 잃어서 더욱 잘 걸렸다. ‘그럼 하나씩 물어볼까?’ 나노가 알려준 최면법을 기준으로 행해보기로 했다. 천여운이 그의 눈앞에 박수를 한 번 치고서 암시의 기준을 정했다. “내가 손가락을 튕길 때마다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한다.” -딱! “.....알겠다.” 이제 조건이 걸렸으니 질문만 하면 된다. 천여운은 멍하게 있는 사내에게 먼저 정체를 물었다. “이름이 뭐지?” -딱! “본좌는 극도육무문의 여섯 문주 중의 한 명인 검도문주 이백이다.” 천여운의 눈이 반짝였다. 확실하게 통했다. 스스로의 정체를 뚜렷하게 이야기를 했으니 말이다. 무엇부터 물어야 할지 고민하던 천여운이 우선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묻기로 했다. “신의를 왜 데려가려 한 거지?” -딱! “그가 그분이 남기신 물건을 가지고 있다.” 그분이라는 지칭에 천여운이 인상을 찡그렸다. 최면에 걸린 상태에서도 존칭을 칭하는 것을 보면 머릿속에 강하게 각인된 자인 듯 했다. “그 물건이 뭐지?” -딱! “극무지체(極武至體)를 만들 수 있는 인체도다.” “극무지체? 그게 뭐지?” -딱! “그것은 본문 최고의 무공인 극도신무(極刀神武)를 완벽하게 익힐 수 있는 신체이다.” ‘극도신무?’ 왠지 모르게 그가 말한 무공 명이 극도신의 도법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천여운이 물었다. “내가 네놈에게 펼쳤던 그 도법이 극도신무인가?” -딱! “그렇다.” 도법을 익힌 지 근 몇 달 만에 그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이 극무지체를 만들 수 있는 인체도를 얻으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어째서 그 인체도가 필요한 거지?” -딱! “극도신무는 보통 방법으로는 익힐 수 없는 무공이다. 대법을 통해 인간이 단련할 수 없는 신체부위를 한계치까지 끌어올리기 위해서다.” “아!” 이 이야기를 듣자 천여운이 납득이 가는지 탄성을 흘렸다. 생각해보면 극도신무는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익히기 힘든 무공이었다. 천여운 본인은 나노의 도움으로 근육과 근섬유질을 인간의 한계치까지 변환 시킬 수 있었지만, 이 무공은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익힐 수 없는 도법이었다. ‘잠깐.....그런데 이들이 어째서 그게 필요한 거지?’ 극도신의 후예라는 자들이 선조의 무공을 완벽하게 익힐 방법을 모르기라도 한 단 말인가. 어째서 이 대법을 구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게다가, ‘어떻게 신의가 그 인체도를 가지고 있는 거지?’ 궁금했다. 그래서 그것을 물었지만, “그것은 알 수가 없다.” “응?” 의외로 극도육무문에서는 신의 감로수가 그 물건을 얻은 경로는 모르고 있었다. 하긴 그것마저 알고 있었다면 진즉에 탈환하려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질문을 바꾸었다. “그럼 어떻게 안 거지?” -딱! “정파 무림맹의 숨겨진 비밀 조직 창천회의 간자를 통해 알았다.” “창천회?” 무림으로 출도하기 전에 정파 무림맹의 조직 정보에 대해서 꽤 숙지했는데 처음 들어본다. 창천회는 대체 무슨 조직일까? 의아해하는데 이백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창천회의 계획 중에 신의의 대법을 이용해 인간의 한계치를 넘어선 무인 양성이 있다는 것을 입수하면서, 그것이 극무지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정보를 입수한 극도육무문에서는 이를 탈환하기위해 그를 파견한 것이다. 무당파에서 신의를 감시, 보호하고 있다는 정보까지 얻어낸 그들은 숨겨진 신의의 은신처를 찾아내기 위해 한 달이 걸렸다. 폐검곡이 워낙 정파의 영역 한 가운데 였기 때문에 전력을 분산시켜서 한곳에 다시 모이느라 시간을 소요한 것도 있었다. ‘그래도 의문점은 풀렸구나.’ 이 정도면 극도육무문이 신의를 노린 의문점을 풀 수 있었다. 이제 가장 중요한 그들의 비밀을 알아낼 차례였다. 그 동안 밝혀지지 않은 극도육무문의 숨겨진 전력, 비밀들을 알아낸다면 더이상 그들이 만들어내는 흐름에 휘둘리지 않고 반격을 가할 수 있으리라. * * * 한편 폐검곡의 암석 장벽 안으로 허봉과 백기가 복귀하면서 단 한 명만 도착하지 않았다. 도망간 무당패검 현운자를 추적하고 있는 이 장로 연무화였다. 절벽에 있던 복면인들의 시신들을 전부 태우느라 옷과 얼굴이 그을린 자국으로 가득한 허봉과 백기였다. “이것도 일이네요. 휴.” 허봉이 지친다는 듯이 말했다. 백기 역시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숨을 돌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들에게 사 장로 양단화가 말했다. “고생했네. 언제 출발할지 알 수 없으니, 허 부관과 백 단주는 잠시 눈이라도 붙이고들 있게나.” 정파 영역의 한 가운데였기 때문에 도망간 현운자가 아니더라도 언제 정파인들이 나타날지 몰랐다. 그래서 양단화는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쉬기를 권했다. 그때 의약당 건물에 있던 신의 감로수가 난처한 얼굴로 나타났다. “감 파파?” “이, 이보게들.” “무슨 일입니까? 아직 그 물건을 못 찾은 겁니까?” 감로수가 중요한 서적을 잃어버려서 찾아야 한다는 말을 들은 그들이었다. “의약당에는 아무 것도 없네. 혹시 밖에 특이한 종이로 만든 서적이 떨어져있다거나 본 적이 없나?” 감로수의 물음에 세 사람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 물건은 무당패검 현운자가 들고 있으니 말이다. “아아아!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선조 대대로 물려받은 보물을 이런 식으로 잃어버리니,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던 차에 장벽 안으로 들어오는 입구 쪽에서 뭔가 소리가 들려왔다. -바스락! ‘앗!’ 놀란 사 장로 양단화와 백기, 허봉이 경계심이 올라서 기수식을 취하며 언제라도 출수할 준비를 했다. 조용히 전음을 보내서 신의 감로수에게 말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긴장하고서 기다리는 차에 동굴 통로 쪽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사람은 바로, “연 장로!” 통로에서 나타난 사람은 바로 이 장로 연무화였다. 도망간 무당패검 현운자를 추적하러 갔던 그녀가 드디어 복귀한 것이다. 뒤늦게 복귀한 그녀는 등에 무언가를 찢은 옷가지로 동여매고 있었는데, 팔 다리가 잘려서 머리만 있는 몸통이었다. “아!” 그 자는 바로 무당패검 현운자였다. 상대가 구패 중의 한 사람이라 걱정한 것과 달리 연무화는 그를 잡아오는데 성공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피로 얼룩진 연무화의 옷이나 창백한 얼굴을 보면 그를 잡느라 꽤나 고생한 모양이었다. 동급의 고수였으니 쉽게 제압할 수 없었으리라. ‘이, 이 자들은 정말 잔인하구나.’ 그 동안 자신을 압박해온 현운자이지만 몸통만 남은 몰골을 보자 신의 감로수의 눈빛이 떨려왔다. 의원이라서 괜찮았지 보통 사람들이라면 눈을 뜨도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감로수는 이들이 절대로 정파인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반면, ‘훌륭하다!’ 동맹을 떠나서 정파의 큰 전력 중 하나인 구패 중 한 사람인 현운자를 제압한 것은 마교의 입장에서는 큰 성과였기에 사 장로 양단화가 그녀를 축하해주려 했다. “연 장로! 정말...” -펑!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장원의 어딘가에서 폭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저, 저곳은?” 그곳은 바로 천여운이 극도육무문의 수뇌부 중의 한 사람인 도검문주 이백을 심문하는 건물 쪽이었다. “주, 주군!” -팟! 놀란 천여운의 수하들이 일제히 그곳으로 신형을 날렸다. < 54장 나라고 못할 것 같으냐? (2) > 끝 < 54장 나라고 못할 것 같으냐? (3) > -키엑키엑! 어두운 석실에 시끄럽게 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귀뚜라미 소리보다도 더 시끄럽고 듣기 께름칙한 소리를 내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때 석실 안으로 누군가 등불을 들고 들어왔다. 얼굴이 비치지 않는 한 정체불명의 사내가 천천히 걸어 들어와서는 아까부터 시끄럽게 울고 있는 무언가를 찾았다. 석면에 진열장이 있었고, 그 위로 수많은 목함이 놓여 있었다. 그 중에 검(劍)이라 적힌 붉은 목함이었다. 사내가 검이라 적힌 목함을 꺼내들자, 그 안에서 더욱 크게 키엑키엑 소리가 들려왔다. -달칵! 목함을 열자 그 안에 주먹만 한 고(蠱)가 있었다. 더듬이와 입만 있는 붉은 고가 괴상한 소리를 지르면서 파르르 떨어댔다. 사내가 아무렇지 않게 고를 집어 들었다. “물건을 회수하라고 보냈더니 쓸데없는 것을 나불거리고 있군. 쯧.” 혀를 차던 사내가 고를 쥐고 있던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키에에에에! 자신을 짓누르는 강한 압력에 고가 크게 소리를 지르더니 이내, -푸직! 터져서 그대로 죽고 말았다. 고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하얀 체액을 만지면서 사내가 비릿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그놈에게서 뭔가를 알아낼 생각이라면 크나큰 오산이다.” 같은 시각, 호북성의 폐검곡 내에 있는 장원 건물. 한 숙소 방에서 천여운이 최면을 통한 심문을 하고 있었다. 스스로를 극도육무문의 도검문주라고 밝힌 이백은 지금까지 원하는 것을 잘 설명해주고 있었다. 이제 중요한 질문이었다. 그들의 주둔하고 있는 진정한 본진과 전력. 그리고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는지를 알아내야 했다. 극도신이 무림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지 약 오백 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극도육무문이었다. 이제야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충분한 힘을 길렀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대비할 수 있다. “네놈들이 그분이라 칭하는 자는 극도신이냐?” -딱! “......으으으....” 천여운의 질문에 이때까지 줄곧 대답을 잘해오던 이백이 몸을 떨었다. 풀린 동공이 흔들리며 강한 거부감을 보이고 있다. ‘완강하군.’ 천여운이 한 번 더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그렇다.” 계속해서 버티던 이백이 힘겹게 입술을 들썩거리며 말했다. 역시 예상대로 극도육무문은 극도신의 후예가 맞았다. “그럼 네놈들의 전력은 문파명에서 처럼 여섯 문파로 나뉘는 것이냐?” -딱! -움찔움찔! 근본적인 정보를 캐묻기 시작하자 거부감은 더욱 커졌다. 동공이 떨리는 것을 넘어서서 이백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며 붉게 상기되기 시작했다. ‘상태가 점점 나빠지고 있다.’ 단전이 파괴 되어서 아무런 내공이 없는데도 자백제와 최면을 버티고 있었다. 그것이 강한 정신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기에는 점차 이상했다. ‘엇?’ 갑자기 흐릿했던 이백의 동공이 또렷해졌다. 그러더니 그의 이마에 핏줄이 곤두서면서 머리가 부풀기 시작했다. 괴이한 변화가 일어나자 이백이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천여운을 향해서 이죽거리는 눈빛을 보내왔다. ‘....보, 본좌에게서 아무 것도 알아낼 수 없을 거라 했지?’ 최악의 상황이 발생되면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수뇌부들에게 더욱 철저하게 금제를 걸어놓았다. 발설해서는 안 될 정보를 입에 담는 순간, 머릿속에 심어져 있는 고의 수컷이 연결된 암컷에게 신호를 보낸다. 암수가 연결된 고는 한쪽이 죽게 되면 다른 한쪽도 터져서 죽는다. “끄으으으으윽!” 머릿속에서 이질감이 느껴지면서 뭔가가 빠르게 부풀어 오르는 게 느껴진다. 바로 그때 천여운이 그의 머리로 손바닥을 갖다 댔다. ‘끄으윽? 뭐, 뭐야?’ 천여운의 손바닥에서 미세한 빛이 흘러나왔다. 그것이 끝나자 천여운의 동공이 빠르게 떨리면서 증강현실이 개안되었다. 흰 빛의 입자가 네모로 된 영상 정보를 만들어냈다. [지정한 대상의 뇌를 자기공명영상(magnetic resonance imaging)법으로 스캔한 결과 뇌에 부착된 벌레가 부풀어 오르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나노가 증강현실을 통해 보여주는 영상에 흰색 뇌의 형태로 보이는 뿌연 것에 작고 붉은 무언가가 부풀어 오르는 게 보였다. “흠.” 천여운이 인상을 찡그렸다. 아직 제대로 된 정보를 얻지 못했는데 금제가 가해져 있다. 난처해하는 그의 모습에 위안을 얻은 도검문주 이백이 입 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끄으으....하아..하아...크큭, 네놈은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별 수 없군.” “크크큭, 네놈이 현경의 고수라 한 들...” 그 순간 이백의 머리를 잡고 있는 천여운의 손에서 강한 빛과 함께 전격이 일어났다. -파치치치치치치칙! “끄가가가가가가가가가!” 갑작스럽게 머릿속을 울리는 전격에 이백이 전신에 경련을 일으켰다. 그의 눈과 두 귀, 콧구멍, 입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칠공토혈(七公吐血)이란 이런 의미일까. -팍! 천여운이 그의 오른쪽 눈 쪽에 손을 갖다 댔다. ‘나노. 뇌에 손상이 가지 않게 보조해줘.’ [알겠습니다.] 천여운의 진기가 그의 머릿속을 파고들면서 무언가를 끌어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노의 전격으로 인해서 잠시 자폭하려던 움직임이 멈춰진 고(蠱)였다. [벌레를 포착했습니다.] ‘빼낸다.’ [에너지에 대한 원격 조정권을 부여받습니다.] 진기로 고를 감싸자 나노가 그것을 직접 움직여서 최대한 뇌에 손상이 가지 않는 쪽으로 빼내기 시작했다. -쿠득쿠득! “끄가가가가가가가!” 전격으로 계속 경련을 일으키던 이백의 오른쪽 눈이 들썩거렸다. 그 순간 천여운이 잡아당기는 시늉을 하자 이백의 눈알이 튀어나오면서, 그 뒤로 두 손가락을 모은 크기만큼 부풀어 오른 벌레가 안구에서 뽑혀져 나왔다. -콰득! "끄아아아아악!" “합!” 천여운이 그것을 천장 위로 진기를 유도했다. 그러자 튀어나온 고가 방안의 천장을 뚫고서 건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전격에서 벗어난 고는 순식간에 부풀어 올라서 터져버렸다. -펑! 건물의 지붕 위로 터진 고의 하얀 체액들이 떨어져 엉겨 붙었다. “끄헉....끄헉...” -움찔움찔! 전격은 물론이거니와 눈알을 뽑혀져 나오는 고통을 겪은 이백은 당장에라도 죽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그의 한 쪽뿐인 눈알은 공포와 두려움에 차서 천여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이....이놈은 정녕 괴물이란 말인가?’ 금제를 이런 식으로 풀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머릿속의 고를 뽑는다는 발상 자체가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뇌의 손상을 최대한 줄였지만 연명 시간이 길지 않습니다.] 나노의 목소리에 천여운은 서둘러야겠다고 생각했다. 미세한 전자파로 정지해가는 뇌세포를 자극해 억지로 활성화시켰지만 곧 숨을 거둬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많이 아프겠지만 조금 서두를게.” “끄으으윽....뭣?” -딱! 천여운이 다시 한 번 그의 귓가에 대고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고통스러워하던 이백의 동공이 수축되면서 다시 흐리멍덩하게 바뀌었다. -펑! “앗?” 천장을 뚫고 터지는 무언가를 발견한 호상화와 문규가 지붕 위로 올라갔다. 그 위에는 새하얀 체액 같은 것들이 지붕에 엉겨 붙어 있었다. “이, 이게 대체?” “교주님!” 방안에서 무언가 일이 터졌다고 생각한 문규가 다급히 밑으로 내려가, 문을 열고서 방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힉!” 안으로 들어온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천여운의 의자에 묶여 있는 도검문주 이백의 머리를 잡고서 뭔가를 듣고 있었는데, 오른쪽 눈알이 대롱대롱 달려있는 모습이 끔찍했다. “끄흑....끄흑.....절강성.....하, 항주.......화......황산에......본거....끄르륵.” 힘겹게 입을 열던 이백이 이내 고개를 바닥으로 떨궜다. 결국 숨을 거둔 것이었다. “하아.....” 천여운이 한숨을 내쉬며 그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최대한 많은 정보를 빼내려고 했는데 결국 두어 가지 밖에 알아내지 못했다. 물론 그것도 굉장히 컸다. -타타탁! “교주님!” 그때 방 안으로 다른 수하들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폭음 소리에 놀라서 한달음에 달려온 그들이었다. 사 장로 양단화가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괘, 괜찮으십니까?” 터지는 소리가 생각보다 커서 혹시나 큰일이 터졌나 싶어서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천여운은 무사해보였다. 천여운이 어리둥절해하는 수하들에게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놈들의 본거지를 알아냈다.” “!?” 그곳은 바로 절강성 항주에 있는 황산이었다.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기 전에 도검문주 이백은 극도육무문의 본거지를 밝히고 말았다. 그런 천여운의 말에 수하들이 두 눈을 반짝였다. * * * 이각 정도가 지난 또 다른 방 안. 그곳에 팔 다리가 잘려나간 무당파의 장로, 무당패검 현운자가 의자에 묶여져서 넘어지지 않게 고정되어 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는 그는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를 쓰러뜨린 연무화가 지혈을 하고서 서둘러 왔지만 출혈이 너무 컸다. ‘허어.....팔 다리를 전부 잘랐으니 당연한 게 아니오?’ 신의 감로수가 혀를 내둘렀다. 그녀가 진맥을 했지만 워낙 피를 많이 흘려서, 오래 버텨봐야 반 시진이 한계라고 결론을 내렸다. 수혈을 하는 방법을 권했지만 어차피 그들은 서둘러서 이곳을 떠나야 할 입장이었기에 현운자의 생명을 연장시킬 생각따윈 없었다. 필요한 정보만 빼낸 후에 시신을 처리하고 떠날 작정이었다. “은공께 부탁이 있습니다.” -털썩! 감로수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서 천여운에게 빌었다. 약학과 의학에 있어서 중원 최고라 불리는 그녀는 천여운이 만든 탕약의 재료만으로 어떤 용도에서 만들었는지 짐작해낼 수 있었다. “현운자 도장에게 그 약을 쓸 거라면 이 늙은이도 질문을 할 수 있게 해주시오.” 감로수는 정파의 창천회(蒼天會)라 불리는 단체의 부탁을 받고 근 일 년 동안 폐검곡의 은신처에서 육신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대법에 대한 연구를 했다고 말했다. 그것을 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창천회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강한 무인들을 양성한다고 했습니다. 노부(老婦)는 원래 무림의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으나....” 그녀의 하나뿐인 손녀가 일 년 전에 사파 연맹의 무림인에게 납치당했다고 했다. 유일한 혈육이자 후계자가 납치당하자, 그녀는 복수에 불타는 마음에 그들의 의뢰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사파 연맹에게서 노부의 손녀를 받기 위해서 전쟁에 이겨야만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지금의 힘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했지요.” 처음에는 복수심에 사로잡혔던 그녀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상하다고 여겼다. 그녀가 알게 된 이 창천회라는 조직은 구대문파의 몇 곳도 속해 있을 만큼 큰 힘을 가지고 있었는데, 납치된 손녀의 생사 여부조차도 제대로 알아내지 못했다. “현운자 도장.....저 자는 분명 뭔가를 알고 있습니다.” 신의 감로수는 그가 뭔가 진실을 숨기고 있다고 확신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의원인 그녀로서는 그것을 강제적으로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그저 그들의 요구 조건을 들어주는 것만이 손녀를 살릴 길이라고만 여겼다. “만약 은공께서 도와주신다면 그대들이 사파이든 마교이든 상관없이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들어드리겠습니다.” 그녀의 제안에 천여운이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신의는 의원답게 정도적인 성향을 가진 인물이었기에 어떻게 설득해서 태상 교주의 진료를 보게 할지 고민했던 차에 그들로서는 잘 된 일이었다. “먼저 질문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천여운은 선뜻 그녀에게 먼저 기회를 주었다. 단전을 파괴시키고 약물을 복용한 현운자는 먼저 암시를 걸었던 도검문주 이백과 마찬가지로 몽롱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내 손녀.....감미양이 어디에 있는지 정말 모르오?” -딱! 천여운이 내공이 담긴 손가락을 튕기자 현운자가 힘겹게 입을 뗐다. “원시천존.....원시천존.....감 파파의 손녀는 수로십팔채 중 하나인 용호채에 있소.” “뭐, 뭣?” 단번에 그 위치를 말하자 감로수의 눈빛에 노기가 서렸다. 지금까지 수십 차례 시간이 날 때마다 조심스럽게 행방을 찾았냐고 물어도 한결 같이 노력 중이라는 말뿐이었던 현운자였다. -으득! 감로수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분노에 차오른 그녀가 겨우 화를 억누르고 물었다. “왜....왜 알고 있으면서 이야기해주지 않은 것이오?” -딱! “.....감 파파, 그대의 대법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알리지 말라는 천주의 명이 있었소. 그리고 용호채와는 계속 연통을 넣고 있기에 대법만 완성된다면 손녀 분을 데려올 수 있소.” “요....용호채와 연통을 넣고 있다고?” 현운자의 입에서 나오는 충격적인 진실에 감로수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방안에는 천여운의 수하들 모두가 있었는데 그들 역시도 어이가 없었는지 혀를 찼다. 허봉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중얼거렸다. “하! 소위 명문 정파라 불리는 것들이 하는 짓이 사파만도 못하네요. 못된 말코 도사 같으니라고!” -퍽! “욱!” “조용히 하고 있어.” 옆에 있던 호상화가 그의 명치를 팔꿈치로 때려서 조용히 시켰다. 그렇지 않아도 신의 감로수가 큰 충격을 받았는데 그런 식으로 얘기하면 더 자극될 것이 아닌가. 그러나 호봉의 입을 다물게 하는 것과 별개로 감로수는 이미 이성을 상실했다. “이노오오오옴! 감히 노부의 손녀를!” -꽉! 감로수가 화를 이기지 못하고 매서운 얼굴이 되어 현운자의 목을 졸랐다. “컥컥!” < 54장 나라고 못할 것 같으냐? (3) > 끝 < 55장 용호채 (1) > 그것은 방안에 있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분노를 이기지 못한 신의 감로수의 목조름을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다. 아무리 이성을 잃었다고 해도 의원인만큼 적정선에서 멈출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목을 조르면서 누르는 곳은 혈자리 중에서도 요혈이었다. -꽈아아악! “네놈이 그러고도 도인이라고? 죽어! 죽어어어어!” “켁켁!” ‘이런.....이러다 죽겠어.’ 얼굴색이 보랏빛으로 물드는 무당패검 현운자의 모습에 더이상은 안 되겠다고 생각한 천여운이 그녀를 만류했다. 아직 천여운은 그에게서 어떠한 정보를 묻지 못했다. “신의 공! 멈추시오!” “이이이익!” 감로수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지 현운자의 목을 더욱 세게 졸랐다. 보통 성인 남성의 두 배 가까이나 두꺼운 근육을 가진 그녀의 힘은 내공을 잃고 상태가 위독한 현운자가 견디기에는 너무도 치명적이었다. 몽롱하던 눈동자가 뒤집히려 했다. '별 수 없구나.' 천여운이 손을 내뻗자, 두 손으로 현운자의 목을 조르고 있던 신의 감로수의 몸이 강한 진기로 인해 뒤로 튕겨나갔다. "헛?" -팡! 튕겨 나간 그녀의 몸을 사 장로 양단화가 받아냈다. 감로수는 여전히 분노가 삭히지 않는지 길길이 날뛰는데 무섭기 마저 했다. "이거 놔라!" "진정하시오. 감 파파!" 일 년 씩이나 자신을 속인 것도 모자라 손녀를 사파 중에서도 악랄하기로 유명한 수로십팔채에 방치해뒀다고 하니 용서할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호상화. 신의 공을 잠시 다른 곳으로 모셔라.” “충!” 양단화에게서 감로수를 인계받은 호상화가 그녀를 밖으로 데려갔다. 천여운은 어떻게든 죽어가는 현운자를 더 연명시키기 위해 손을 썼다. 그러나 큰 출혈로 인해 피가 부족했던 그는 원활한 호흡을 하지 못하면서 결국 목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파치치치칙! 뇌와 심장을 전격으로 자극해도 소용없었다. 이런 일이 벌어질지 알았더라면 먼저 물어볼 걸 후회가 되는 천여운이었다. 다른 것보다 정파 무림맹의 숨겨진 조직이라 불리는 창천회가 어떤 조직인지 궁금했는데 아쉬웠다. ‘신의 공이 그들과 협조 했다고 하니 어느 정도는 알지 않을까?’ 이미 죽은 자에게 무슨 이야기를 듣겠는가. ‘의원이 도인의 목을 조른다라.....’ 천여운은 방금 전을 떠올리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찌 보면 그는 이번이 첫 무림 출도이자 중원행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일을 겪고 나니, 명문 정파이든 혹은 그것이 도를 수행하는 도인이든, 사람을 살리는 의원이든 결국 마교와 큰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사람은 같은 건가.’ 그저 이념의 차이일 뿐 일까? 좀 더 근본적인 차이가 있을 거라는 기대감은 무뎌지고 있었다. “교주님.” 그때 이 장로 연무화가 천여운에게 다가왔다. 그녀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는데 타다 남은 종이 조각들이었다. 남은 조각들도 검게 그을려서 거의 알아볼 수도 없었다. “이건?”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말씀드리지 못했는데, 현운자가 제게 따라잡히기 전에 이것을 삼매진 화로 태우고 있었습니다.” 삼매진화(三昧眞火) 그것은 내공으로 불을 일으키는 수법이다. 연무화가 꺼내들은 타다 남은 조각들을 보자마자 사 장로 양단화가 다가와 말했다. “혹시 그게 신의가 찾던 그 물건이 아닙니까?” 신의 감로수가 뭔가를 찾고 있는 것은 알고 있던 그들이다. 다만 독특한 재질로 만들어진 서적이라고만 들어서 정확한 것을 몰랐다. “특이하군요?” 타다 남은 종이 조각이었지만 뭔가 기존의 한지보다도 훨씬 두껍고 매끄러운 재질이었다. ‘매끈하다. 대체 이게 뭐지?’ 천여운이 그것을 받아들자 머릿속에 나노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삐삐삐! [프로그램에 락(lock)이 걸려있습니다. 종이 재질 및 연도 분석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예전에 나노 머신의 일부를 다른 이에게 보낼 수 있는지 물었을 때와 비슷한 경고음이었다. 나노가 정보에 관해서 잠금장치가 되어있다고 한 것은 오랜만의 일이었다. ‘이상하다. 응?’ 겉표지의 뒷장에 반쯤 타들어가서 검게 그을린 종이가 있었다. [瞄准那个人是我的错误.....] 유일하게 글씨가 세 줄 정도 남아 있었는데, 그것은 기존에 그가 알고 있던 한자가 아니었다. 뭔가 간체화 된 글씨 같았다. ‘나노....이것도 알려줄 수 없어?’ [간체(簡體)입니다.] ‘간체?’ [기존의 번체(繁體)를 쓰기 쉽게 바꾼 한자체입니다.] ‘어떻게 만들어진 거야?’ [프로그램에 락이 걸려서 알려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럼 이 세 줄은 해석할 수 있어?’ [가능합니다. 간체를 번역하겠습니다. 그를 노렸던 것은 실수다. 과연 마교의 시조라 할 만 했다. 괜한 욕심에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 차라리 원래의 계획대로 마...까지입니다.] 뒷부분은 그을림 자국으로 소실되었다. ‘!?’ 나노의 해석을 들은 천여운의 표정이 묘해졌다. 대체 이게 무슨 의미일까? 신의 공이 가지고 있는 물건은 극무지체를 만들 수 있는 인체도라고 들었다. 그런데 꼭 내용이 일지를 보는 듯 했다. ‘마교의 시조? 설마 천마 조사님을 말하는 건가?’ 천마신교를 세운 개파 조사가 다른 사람일리가 만무했다. 이 글을 적은 자는 천마 조사를 노렸는데 성공하지 못한 것 같았다. 생각에 잠겨 있던 천여운이 절벽 아래에 떨어졌을 때의 극도신무의 도흔을 떠올렸다. ‘아! 설마 이 글을 남긴 자는 극도육무문의 조사인건가?’ 그렇게 추측하자 어느 정도 아귀가 들어맞았다. 극무지체의 인체도를 만든 자가 극도육무문의 조사이고 그 자료를 어떤 경로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신의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만 끊겨진 뒤에는 대체 무슨 말을 적으려고 한 것일까? ‘......조사님이 아니라 본교를 노렸어야 한다고 말하려던 것일까?’ 아쉬웠다. 뒷부분이 타지 않았다면 좀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이 정도로는 큰 정보가 되지 못했다. 뒷장에 남은 한 장은 완전히 검게 그을려져 있어서, 타기 전에 종이였다는 것 정도만 알아볼 수 있었다. ‘쓸모없군. 남의 손에 들어갈 바에 파기한다는 건가?’ 무당패검 현운자의 이러한 행동은 창천회에 있어서 당연한 선택이었다. 이것을 태우지 않았다면 마교의 손에 그것이 떨어졌을 것이다. -탁! 천여운이 살펴본 타다 남은 종이 조각을 연무화에게 말했다. “신의 공에게 돌려주십시오. 그리고 남은 두 명을 심문하고 떠날 테니 준비하세요.” “충!” 천여운의 명에 모두가 외쳤다. 반 시진 정도가 지나고 천여운은 두 방에 격리시켜 놓은 복면인들을 심문했다. 그런데 그들은 수뇌부였던 도검문주 이백과 달리 큰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강소성에 있는 충산에서 훈련 받은 것 이외에는 직속 상관들만을 숙지하고 있었고 극도육무문의 어떠한 것도 몰랐다. ‘.....금제가 없는 것도 이 때문인가.’ 복면인들은 특별한 금제가 걸려있지 않았다. 굳이 가지고 있는 정보가 없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쉽지만 지금까지 얻은 정보들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남은 한 사람의 복면인의 심문을 끝내고, 시신들을 처리한 천여운과 일행들은 떠날 준비를 마쳤다. 목적대로 사라졌던 특별 파견대도 찾았고 신의 역시도 진료를 봐주기로 했으니, 마교로 복귀하는 일만 남았다. 막 장원을 떠나려던 차에 신의가 천여운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은공!” ‘아.....’ 두 번째 꿇는 무릎이라 내심 짐작 가는 부분이 없지 않았다. 그녀의 손녀가 수로십팔채에 일 년 동안이나 잡혀있었다고 하니 신경 쓰이는 게 당연했다. “염치 불구하고 은공께 부탁드리고 싶은게 있습니다.” 감로수의 주름 진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늙은 노파인 그녀가 울면서 감정을 드러내자 서글픈 느낌마저 들었다. “이 노부의 손녀가 황하의 거친 수적 떼들의 손에 있습니다. 벌써 일 년이 지났다고 하는데흑....어찌 할미된 자로 이를 방관할 수 있겠습니까?” ‘역시구나.’ 감로수의 말이 계속 될수록 일행들의 표정에 난처함이 피어올랐다. 벌써 정파의 영역에서 상당 시일을 소요했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서 사파의 영역에까지 들어가게 된다면 그만큼 그들이 노출될 확률이 더욱 높아진다. 그런 그들의 표정을 의식했는지 감로수가 최후의 방법을 썼다. -팍! 감로수가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만약 노부의 손녀를 구해주신다면 은공을 평생 견마지로로 모시겠습니다.” “!!!” 그 말에 모두가 놀란 표정이 되었다. 감로수가 하는 말은 절대로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신의 감로수가 부탁을 들어주는 대가로 충성을 건 것이었다. 못 고치는 병이 없다고 알려진 중원 최고의 의원인 신의의 가치는 무림뿐만이 아닌 황궁에서도 노릴 만큼 크다. 그런 신의가 스스로를 걸었다는 것은 그만큼 손녀의 가치가 크다는 의미였다. '제발.....' 간절함이 담겨있는 그녀의 등이 떨려왔다. [교주님! 좋은 기회입니다!] 사 장로 양단화가 상기된 얼굴로 전음을 보냈다. 다소 위험부담이 따르지만 그녀의 제안을 재고해보라고 권하기 위해서였다. 천여운이 손을 들어 올리며 진정하라는 표시를 했다. 그가 그렇게 닥달하지 않아도 같은 의견이었다. -부웅! ‘아?’ 엎드려 있는 감로수의 몸이 거대한 진기로 인해 저절로 일으켜세워졌다.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신의 감로수에게 천여운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약속 꼭 지키기 바랍니다.” "아아아! 은공!" 이에 그녀의 눈에서 더욱 많은 눈물이 쏟아졌다. 거절하면 어찌하나 걱정했는데 도움을 준다고 하니 감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손녀를 구하기 위해 사파의 악명 높은 수로십팔채 중 한 곳을 상대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나 다름없기에 미안하기도 했다. “허 부관의 뜻대로 되었네. 그려.” “네?” 그 말에 허봉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했다. 그러자 양단화가 피식하고 웃으며 답했다. “수로십팔채 중 한 곳으로 가게 되었으니 말일세.” “헉!”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그렇게 수로십팔채를 조심해야 한다고 했던 허봉의 말대로 천여운과 수하들은 직접 그들을 찾아가게 생겼다. 한참을 감격에 겨워서 눈물을 흘리던 신의 감로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은공의 존성대명조차 여쭙지 못했습니다. 늦었지만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이들의 주군이라는 사실 외에는 아무 것도 몰랐다. 천여운이 그런 감로수를 향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천여운입니다.” “천여운?”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 같았다. 천가의 성은 중원 무림에서도 거의 드물었다. ‘특이하네. 그런데 왠지 이름이 낯익은.....천여운....천여운.....서, 설마? 헉!!!’ 처음에는 아무렇지 않게 그 이름을 대뇌이던 신의 감로수의 두 눈동자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마, 마교의 신임 교주?’ 최근에 마교의 정권이 바뀐 것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정파 연맹에서도 천여운의 교주 취임을 축하하는 사자를 보냈으니 말이다. 창천회의 무사들이 잡담을 떠드는 소리를 통해서 그 이야기를 들었던 신의 감로수였다. ‘이럴 수가....’ 분명 정파의 출신은 아니라고 짐작 했었다. 아마도 마교에 있는 고위 종파의 사람이거나 혹은 사파 연맹의 신임 수뇌부 정도로 여겼는데, 충격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파 무림맹의 어느 누구도 지금 자신들의 영역 한복판에 마교 교주가 왕림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십만대산에 정파 무림맹주가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노, 노부가 지금 마교 교주의 밑으로 들어가겠다고 말한 건가?’ 세수(歲數)가 고희(古稀)에 이른 신의 감로수의 인생 후반기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왔다. * * * -다그닥! 다그닥! 폐검곡을 벗어난 천여운의 일행은 말을 타고 남하하고 있었다. 말을 잃어버렸으면 어쩌나 했는데 그들이 숲에 숨겨두었던 곳에 그대로 있었다. 게다가 중간에 숲 중간에서 버려진 말들도 발견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폐검곡을 찾아서 들어갔던 자들이 끌고온 말인 듯 했다. 어차피 그들은 극도육무문에 의해 목숨을 잃었기에 천여운의 수하들은 그들의 말을 쏠쏠히 챙겼다. 말을 몰고가면서 천여운이 나란히 달리고 있는 사 장로 양단화에게 물었다. “양단화 공. 용호채라는 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습니까?” 숲을 벗어났기에 다시 호칭을 숨겼다. 그가 마교에서 중원 각 주요 세력들의 정보가 담긴 서류를 보았을 때, 근거지가 불분명한 단체가 몇 곳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수로십팔채였다. 그들의 근거지인 수로채가 밀집된 곳은 알려져 있으나, 어느 곳이 용호채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저도 그건 알지 못합니다.” “흐음.” 난감했다. 그렇다고 열여덟 개나 되는 수로채를 일일이 뒤져볼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이 데리고 있는 포로를 탈환 하려는 것이니 말이다. 우려감을 보이는 천여운을 보면서 사 장로 양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걱정마십시오. 주군. 저는 알지 못해도 그들의 수로채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자들을 알고 있습니다.” 자신감을 보이는 양단화의 말투에 천여운이 의아해했다. 과연 누가 수로십팔채의 사정을 잘 알고 있다는 것 일까? < 55장 용호채 (1) > 끝 < 55장 용호채 (2) > 폐검곡에서 팔 리(里) 정도 떨어진 한 숲속. 그곳에 죽립으로 얼굴을 가린 사내들이 경공을 펼치면서 달리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옷을 입어서 칙칙한 느낌이었지만 특이하게도 허리에 차고 있는 혁대는 푸른색이었다. 한참을 달리던 중에 선두에 서있던 자가 어느 지점에서 멈춰 섰다. “인주(人主)!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그가 멈춰 서자 뒤따르던 서른 명에 이르는 자들이 모두가 멈춰 섰고, 그의 근방에 있던 한 죽립인이 선두에 있던 자에게 물었다. “미약하지만 피 냄새가 나는 구나.” “피 냄새요?” 그들의 코에는 아무 것도 맡아지지 않았다. 인주라 불린 사내가 어딘가로 방향을 틀어서 그들을 인도했다. 조금 더 우거진 숲 안으로 들어가자, 가려져 있던 이면이 드러났다. “이건?” 그들이 바라보는 숲 안은 한 바탕 벌어진 큰 싸움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검흔들을 지웠지만 도저히 숨길 수 없을 만큼 그 흔적이 컸다. 베어진 나무 수만 수십 그루가 넘었다. ‘.....적어도 화경의 경지에 이른 고수들이 싸운 게 틀림없다.’ 경의 경지에 이른 자들의 기의 잔재는 꽤 오랫동안 흔적으로 남는다. 땅에서 피어오르는 기운들이 말해주고 있었다. “저곳을 파보아라.” “넵!” 수풀 앞 쪽에 흙들이 다른 곳에 비해서 어색하게 덮여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곳을 파게 하자 붉게 물들은 흙더미 속에 잘려진 팔과 다리가 나왔다. “헛? 이, 이건.....도복?” 팔과 다리를 감싸고 있는 옷만 보아도 도복인지 알 수 있었다. 그 외에 다른 것은 발견되지 않은 걸로 보아서 시신이 손상 되었던지 혹은 가져갔을 확률이 높았다. 이 근처에서 이런 격렬한 대결을 펼칠만한 도인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구패의 일인이자 무당파의 장로. 무당패검 현운자. ‘문제가 생겼군.’ 인주라 불리는 죽립인은 뭔가 일이 터졌다고 확신했다. 서둘러서 폐검곡으로 가야겠다고 마음먹는 찰나에 한 죽립인이 그를 불렀다. “인주! 이곳에 표식이 있습니다.” “각인?” 죽립인이 부른 곳으로 가자 한 거목이 있었는데, 성인 남성 두 명이 목마를 태운 높이의 위치에 날카로운 것으로 자게 새겨진 흔적이 있었다. [二人] 특이한 것은 이(二) 자의 위쪽 획을 더 길게 그어놓았다. 이 흔적은 그들의 비밀 표식이었다. 역으로 윗 획이 긴 이(二)와 인(人)을 더하게 되면 천(天)이 된다. 푸른 혁대를 매고 있는 죽립인들은 정도 무림맹의 숨겨진 조직인 창천회의 존재들이었다. -파팟! 죽립인 중 한 사람이 거목의 위로 올라갔다. 나무 귀퉁이에 무언가가 숨겨져 있었다. 그것은 이 시대에는 볼 수 없는 매끄러운 특이한 재질로 만들어진 서책이었다. “이것이 있습니다.” “이건?” 서책의 전반부 내용이 담긴 부분이 찢겨나가 있었는데, 후반부만 있는 듯 했다. 첫 장부터 인체도가 그려져 있었다. 무당패검 현운자가 숨겨둔 물건은 바로 신의 가문이 대대로 물려 받은 보서였다. * * * 무림은 삼대 세력의 구도로 몇 백 년 간 지속되어 왔다. 정파 무림맹, 사파 연맹, 그리고 천마신교. 이 거대한 세 구도 속에서 중원 무림의 영역이 나뉘게 되었다. 북정서사남마(北正西邪南魔). 서쪽은 예전부터 사파가 기승을 부리던 곳이었고, 사파 연맹이 들어선 후로는 그것이 굳건해졌다. 이 삼대 세력은 한결 같이 대립해왔고 그 경계 지역은 끊임없이 피를 부르는 전장터였다. 그러나 이 전장터들 가운데 유일하게 조용한 곳이 있었다. 그곳은 바로 묵경시(默京市)이다. 유일하게 삼대 세력이 동시에 맞닿아 있는 접점 지역이었다. 사천성, 호북성, 호남성의 정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는 이 도시는 분쟁이 없는 중립 지역에 가까웠다. 물론 평화를 위한 것은 아니다. 단지 팽팽한 균형으로 인해 움직이지 않을 뿐이었다. 어느 양 쪽이 움직여서 싸우게 되면 다른 한 쪽이 일거양득이 가능하기에 암묵적으로 묵경시는 중립지역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저, 저기 저 사람들은 왠지 사파 사람들 같은데요? 흉터가 우와!” 허봉의 말에 백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당연히 삼대 세력의 경계 지점이니 사파 출신의 무림인들이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허봉이 가리킨 자들은 흉악한 인상을 지닌 자들이었다. 백기도 눈가에 흉터가 있었지만 그들에 비한다면 그리 심하다고 할 수 없었다. “좀 조용히 해. 이목을 끄는 것도 아니고.” “네에에.....” 결국 한 마디 듣고서 침울해하는 허봉이다. 처음으로 큰 도시에 와서 들뜬 것은 이해하지만 허봉은 어떤 면에서는 지나치게 말이 많았다. 문규와 함께 있다면 두 사람의 수다에 백기는 질릴 지경이었다. 그나마 다행은 문규가 이 자리에 없다는 것이었다. “주군. 이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그들의 길 안내를 하고 있는 사람은 사 장로 양단화였다. 이곳 묵경시에는 네 명이서 왔다. 천여운과 허봉, 백기, 양단화였다. 수로십팔채로 향하게 된다면 정파의 영역보다도 더 거칠고 위험할 수도 있다고 판단한 천여운이 신의 감로수를 데리고 여자들은 호남성 서북부에 있는 마교 지부로 가게 했다. ‘뒷골목?’ 사 장로 양단화가 안내해서 들어가는 곳은 묵경시에서도 뒷골목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어두운 느낌마저 풍기고 있었다. “이보시오. 오늘 좋은 화주가 들어왔다오. 와서 한 잔들 하고 가시구려.” “거기. 나으리들. 오늘 좋은 밤 보내고 싶지 않아요?” 호객 행위를 하는데 대부분이 술을 팔거나 몸을 파는 기생들이었다. 그들이 걸어가고 있는 거리는 술집에서부터 홍등가, 기방 등이 밀집된 지역이었다. ‘이런 곳에 정보를 알만한 자들이 있다고?’ 양단화의 말을 듣고서 오기는 했지만 분위기가 저속하다. 이곳 거리를 활보하는 자들의 대다수가 도적떼들이나 사기꾼 같은 느낌마저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보, 보셨나요? 저기 저 여자들 가슴을 거의 다 드러내고...” “허봉.....제발!” “쳇....성인군자 납셨네요.” 호들갑을 떠는 허봉을 백기가 만류시켰다. 덕분에 몇 마디 이상을 제대로 떠들어본 적이 없는 허봉이었다. ‘아아, 문규랑 고왕흘이 그립다.’ 그들은 전부 받아줬는데 말이다. 반면 백기가 있는 덕분에 한결 편해진 사 장로 양단화였다. 한참을 골목을 들어가던 양단화가 네 층이나 되는 화려한 외관을 가진 건물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곳입니다. 주군.” [午上樓] 오상루. 술집과 기방을 겸해서 하는 곳인 듯 했다. 다른 가게들과 마찬가지로 호객 행위를 하는 자들이 야한 옷을 입은 기녀들인 것을 보면 말이다. 저곳에 과연 정보원들이 있을까 반신반의했지만 들어가기로 했다. 입구로 들어서자 가슴이 파인 붉은 비단 옷을 입은 기녀들이 와서는 그들의 팔짱을 끼려고 했다. “어머, 나으리들. 한 번 풀러 오셨어요?” “이 소협. 팔뚝 봐. 너무 마음에 드는데.” -뭉클! ‘헛!’ 한 기녀의 풍만한 가슴이 팔뚝에 닿자 백기가 놀라서 얼굴을 붉혔다. 그 모습을 보면서 허봉이 키득거리며 좋아했다. ‘아닌 척하면서 완전 숙맥이네.’ “여기 머리가 짧은 이 젊은 나으리는 내 거!” -찰싹! “흐허어어!” 그러면서도 허봉 역시도 기녀들이 달라붙자 온 몸이 경직되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작정하고 유혹하려 드는데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때 양단화가 기녀들에게 말했다. “잔 세 개가 놓인 자리를 원하오.” “아.....” 그의 말을 듣자 기녀들이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짓더니, 그들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방금 전까지 유혹하려 들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기녀들의 안내한 곳은 건물의 삼층이었다. 술과 음식을 파는 일 층과 기녀들이 있는 이 층과 다르게 꽤 무거운 분위기의 장소였다. 그들이 위에 올라오자 자리에 앉아있는 손님들이 고개를 돌려서 힐끗거리며 그들을 쳐다보았다. ‘전부 무림인.’ 하나 같이 병장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 무림인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가진 병장기들은 단순히 검과 도만이 아니라 철구부터 시작해 독특한 병기들이 많았다. “이곳에 앉으시죠.” 삼층에 있던 점소이가 다가와 그들을 비어있는 자리로 안내했다. 탁자 위에는 차가 담긴 주전자와 색깔이 다른 세 개의 잔이 놓여 있었다. “주문을 하시고 불러주십시오.” 점소이가 물러나자 양단화가 조용히 전음을 보냈다. [교주님. 이곳은 묵경시에서 정보를 파는 암문(暗門)입니다. 하오문과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아.....’ 중원에는 수많은 방파들이 있는데 그들 중에서 정보를 사고파는 단체도 있다. 정파에서는 개방이 있고 사파에는 하오문이 있다. 그런데 이곳 암문은 오직 묵경시에서만 활동하는 정보 단체이다. 하오문이나 개방이 다른 세력의 손님을 받지 않는 반면에 이곳 암문은 중립지에 있다 보니 손님을 가리지 않았다. [여기 있는 잔 세 개는 정보의 등급을 나타내는데, 붉은 잔은 하(下), 푸른 잔은 중(中), 하얀 잔은 상(上)으로 등급입니다.] [.....우리가 알려는 정보는 등급이 어느 정도입니까?] [아마도 중(中)급 정도로 생각됩니다.] 수로십팔채 중에 하나의 위치를 알아보는 것이기 때문에 하 등급은 아니었다. 주요 요인의 위치를 알려달라는 식으로 정보가 세밀해질수록 등급이 높아지는 것으로 양단화는 알고 있었다. [대가는 무엇입니까?] [보통은 전표나 금전으로 지불했었습니다. 그런데 간혹 정보를 요구할 때가 있더군요.] 양단화가 직접 왔을 때는 그랬던 적이 없었지만 이들은 정보를 파는 것뿐만이 아니라 수집도 하기에 가끔씩은 상응하는 정보를 요구해오기도 했다. 양단화가 푸른 잔에 차를 따랐다. 그러자 점소이가 와서는 이를 확인하고는 양단화와 전음을 나누었다. 어떤 정보를 의뢰하는지 듣기 위해서였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점소이가 기다려달라는 말과 함께 위 층으로 올라갔다. 얼마 있지 않아 점소이가 다시 나타나서는 그들에게 말했다. “손님들. 위층으로 자리를 옮겨드리려고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위층?” 양단화가 인상을 찡그렸다. 전에 왔을 때와는 절차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보통 정보 의뢰 등급을 확인한 후에 어떤 정보가 필요한지를 묻는다. 그리고 나서 정보료를 요구한 후에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면 음식을 가져올 때 정리해서 몰래 넘긴다. “루주께서 직접 대접하고 싶으시다는 군요.” "루주가?"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천여운이 괜찮다는 표시를 보내자 양단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점소이가 위층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한 번도 오상루의 사 층에는 올라가본 적이 없는 양단화였다. [제가 알기로는 위층은 상급 정보를 요청하는 손님만 받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뭔가 이상합니다.] [일단은 정보가 필요한 것이니 만나보도록 하죠.] 어차피 천여운이 기감에는 그리 위험한 자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굳이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위층에 올라가자 삼 층과 달리 여러 개의 방이 있었는데, 점소이가 그 중 하나의 방에 그들을 안내했다. 방안으로 들어가자 화려하게 꾸며진 별실이 나왔다. 그곳에 오른쪽 눈에 검은 안대를 끼고 있는 한 중년인이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뒤에는 호위무사로 보이는 두 명의 건장한 사내가 서있었다. 안대의 중년인이 일어나서 인사를 했다. “반갑소. 오상루의 루주인 만오라고 하오. 귀한 손님들이라 위층으로 모시라고 했소.” “루주를 직접 뵐 줄은 몰랐소. 반갑소이다.” 처음 보는 루주의 모습에 양단화가 포권을 취하며 인사했다. 오상루의 루주 만오가 그들에게 자리에 앉기를 권했다. 자리에 앉자 양단화가 의례적인 절차를 끊고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어째서 우리를 이곳으로 부른 것이오? 분명 중급 정보를 의뢰했는데 말이오.” 그 질문에 만오가 눈에 이채가 띠더니 곧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그 의뢰는 상급에 속하오. 아니 조금 더 애매하다고 해야 할까.” “.....그게 무슨 소리요?” 의아해하는 양단화를 보면서 만오가 피식 웃고는 뭔가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어떠한 표식이 그려진 단검이었다. 단검에는 칼자국으로 十八이라고 그려져 있었다. “정보 단체인 우리들을 후원하는 곳은 꽤 많지요. 그 중 한군데서 준 증표인데, 혹시 손님께서는 본문을 후원하는 곳이 어딘지 아시겠소?” 십팔이라는 한자를 계속 쳐다보던 허봉이 중얼거렸다. “십팔?......설마 수로십팔채?” “후후후, 젊은 소협이 눈치가 빠르구려.” 오상루의 루주 만오의 말에 양단화의 인상이 굳어졌다. 설마 이들을 후원하는 단체 중에 수로십팔채가 들어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만오가 여유롭게 두 손을 벌려가면서 말했다. “뭐, 그렇다고 정보 단체인 우리들이 그것을 팔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니, 실망할 필요는 없소.” “?” “여러분들이 용호채의 위치를 알려고 하는 목적에 불순함이 없다는 것을 약조하시고, 정보에 제 값을 치른다면 알려드릴 요량이라오.” 말인 즉, 용호채에 위협이 되는 일이 아니라면 알려주겠다는 말이었다. -슉! 슉! 어느새 인가 별실 주변의 오 층으로 많은 기척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적어도 삼십여 명이 넘는 자들이었다. 주변에 충분한 인력이 모이자 만오가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허리에 뒷짐을 지면서 말했다. “마교의 북부지부장 양단화 공. 얼마 전에 십만대산으로 복귀 하셨다고 들었소.” “!?” 놀랍게도 그는 양단화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몇 차례나 의뢰를 하러 직접 왔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마교 내부의 사정은 모르는지 장로가 된 것은 몰랐다. 오상루의 루주 만오가 천여운을 손바닥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양단화 공 같이 마교에서 꽤 직위도 있으신 분이 꼬박꼬박 존대를 해가면서 모시는 공자님이 과연 누구인지 본 루주는 궁금하오.” “뭐야?” 그 말에 반응한 것은 오히려 허봉이나 백기였다. 그러자 만오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허어? 정보가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소? 그 대가를 말씀드리는 것뿐이오.” 만오의 그런 말에 양단화가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그가 요구하는 것은 정말로 천여운의 신분이나 정체를 알고 싶다는 것이 아니었다. 당연히 알려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서 이런 질문을 한 것이다. ‘정보를 포기할 수밖에 없을 거다. 후후후.’ 득의양양해하는 만오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던 천여운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이곳을 후원해준다면 확실히 알겠군.” “뭐요?” -파팟! “흐엇!” 바로 그 순간 천여운이 손을 내밀어 가볍게 끌어당기는 시늉을 하자, 별실에 심후한 진기가 일어나며 만오의 옆에 서있던 호위 무사들 중에 한 사람의 몸이 부웅하고 떠올라 날아왔다. “허, 허공섭물?” -콱! “컥!” 천여운이 자신의 앞으로 날아온 호위무사의 목을 단숨에 움켜쥐었다. 허공섭물에 놀란 것도 잠시였고, 갑작스럽게 벌어진 사태에 만오가 안절부절 하지 못하고 소리쳤다. “이, 이게 무슨 짓이오?” “수하 놈과는 할 말이 없다.” “뭣?” 그렇게 말한 천여운이 목을 움켜잡는 손에 더욱 힘을 주면서 말했다. -꽈악! "끄으윽!" “루주 놈이 호위인 척 하고 있으면 쓰나.” 의미심장한 그의 말에 호위 무사의 두 눈이 커졌다. < 55장 용호채 (2) > 끝 < 55장 용호채 (3) > 오상루의 총관 만오는 당혹스러웠다. 그는 구실을 만들어서 의뢰자들을 돌려보내라는 루주의 명령을 이행 중이었다. 마교의 고위직에 있는 양단화가 모실 정도라면 본성이 있는 십만대산의 요직의 인물이라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그의 정체를 요구하면 어떤 식으로든 정보 교환에 응하지 않으리라 여겼다. -꽉! “컥!” 겉보기만 봐서는 그저 약관의 공자라고 여겼는데 단단히 착각하고 말았다. 허공섭물을 펼칠 정도의 고수라면 엄청난 실력자를 의미했다. ‘비, 빌어먹을.....이놈 인피면구를 쓴 마교의 수뇌부가 틀림없다.’ 화경의 고수라면 자신들이 어찌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괜히 다른 별실에서 접대하는 자들의 비위를 맞추느라 도리어 된통 깨지게 생겼다. “루주가 호위인 척 하면 쓰나.” ‘마, 말도 안돼? 대체 어떻게?’ 의미심장한 천여운의 말에 호위 무사로 분한 진정한 오상루의 루주는 놀란 나머지 말문을 잃고 말았다. 암문의 수장이자 루주의 자리에 오른 후로 외부의 누구에게도 정체를 밝힌 적이 없었다. 그런데 천여운이 단번에 그의 정체를 알아냈다. ‘그가 루주라고?’ 천여운의 수하들 역시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지 놀라워했다. 무공 수위가 높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총관인 만오나 진정한 루주의 무위가 그리 높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소리였다. ‘안 된다.’ 어떻게든 잡아떼야 한다고 생각한 만오가 여유롭게 뒷짐을 지던 것을 풀고서 외쳤다. “무, 무슨 짓이오. 그는 내 호위 무사이건만.” “호위 무사? 웃기는군.” -고오오오오! 별실의 사방에서 요동치는 살기들은 바깥에 대기한 기척들이 내뿜고 있는 것이었다. 일개 호위무사가 제압 당했다고 보일 반응이 아니었다. [루주!] 만오가 어찌할 바를 몰라서 루주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러나 목을 움켜쥐고 있는 마당에 답변을 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괴, 괴물이다.’ 절정 초입의 고수인 루주였지만 천여운의 손아귀 속에서는 하찮은 벌레에 불과했다. 조금만 손에 힘을 준다면 언제든지 목이 부러져서 죽을 것이다. ‘우리의 선을 벗어났다. 사죄를 하고 돌려보내야 한다.’ 루주는 짧은 순간에 수많은 고민을 했다. 처음부터 마교의 지부장 급의 고수라고 하여 함부로 할 수 없기에 적당한 명분으로 보내려고 했는데, 이러다가 정말 사달이 벌어질 것 같았다. 절대로 그들과 마주치게 해서는 안 된다. “켁....켁...제, 제발...” 루주가 천여운에게 놓아달라고 부탁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 말이 바깥에서 대기하는 자들에게는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제발....살려달라고?’ 구원요청으로 판단한 오상루의 무사들이 일제히 별실 벽을 부수고 난입했다. -쾅! 벽을 뚫고 들어오는 무사들의 모습에 총관 만오가 놀라서 소리 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안....” -촤아악! 벽을 부수고 난입한 무사들이 미리 뽑아둔 병장기를 천여운의 일행들에게 휘둘렀다. 그들의 도검이 단숨에 양단화, 허봉, 백기 등을 일도양단하려 들었다. 그러나, -챙! 사 장로 양단화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상태로 가볍게 손가락을 움직여서 그들의 도검을 막아냈다. 마교의 사람들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십성 공력으로 공격 했던 무사가 당혹스러워했다. 손가락에 막힌 검날이 부러졌기 때문이었다. ‘소, 손가락으로 검을?’ 고작 이류 고수인 그가 완숙한 화경의 경지의 고수를 벨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너무 커다란 격차로 양단화는 굳이 일어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다. 난입한 무사들 중에 가장 뛰어난 수준의 고수가 일류에 불과했기에 일행 중에서 가장 무공이 낮은 허봉조차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파파파팟! “크헉!” “으악! -쿠당탕! 허봉이 검조차 뽑지 않고 가벼운 권각술로 덤벼드는 그들을 날려보냈다. 쾌속한 그의 권각에 맞은 오상루의 무사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나가떨어졌다. “오!” 허봉이 자신의 손에 나가떨어진 무사들을 보면서 뿌듯해했다. 사실 허봉의 무위는 무림에서도 중상위권에 속하는 축이었지만 주변에 워낙 강자들이 넘치는 바람에 그 진가를 발휘할 틈이 없었을 뿐이었다. 게다가 최근에 폐검곡을 다녀온 이후로, -챙! -우웅! “허, 헉! 거....검강?” 허봉이 뽑은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에 공격해 오던 무사들이 일제히 멈췄다. 초절정의 경지부터만이 가능한 검강을 선보였기 때문이었다. ‘고, 고수다!’ 제일 어리버리해 보여서 그를 노렸는데 놀랍게도 초절정의 고수였다. 허봉은 얼마 전에 초절정 초입에 올랐다. 그것은 폐검곡의 암석 장벽에 있던 천마 조사가 남긴 검흔으로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중소 종파의 생도에 불과했던 그가 단주 급의 실력이 되었으니 장족의 발전을 한 것이다. “계속 할 건가요? 히히. 참고로 일행 중에서 제가 제일 약합니다.” 자신감이 넘치는 허봉의 목소리에 결국 그들은 항복의 의사를 밝혔다. 모두가 무기를 바닥에 내려놓자 천여운이 피식하고 웃으며 움켜 잡던 손아귀의 힘을 거두었다. “쿨럭쿨럭!” 한참 기침을 하던 루주가 다소 공손해진 태도로 말했다. “쿨럭....손님들께 신분을 속여서 죄송합니다. 오상루의 루주인 두현이라고 합니다.” “총관인 만오라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만오 역시도 바닥에 무릎까지 꿇고서 사죄했다. 일개 정보를 팔고 사는 문파인 그들이 어찌할 수 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괜히 심기를 건드리는 것보다 비굴하지만 이 편이 나았다. 분위기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자 천여운이 물었다. “수로십팔채에서 후원한다고 했나?” “.....그렇습니다.” “그들의 산하에 속한다고 봐도 무방하겠군.” “그, 그건 아닙니다. 상하 관계라기 보다는 서로의 이문을 위한 협약 관계로 보시면 됩니다. 후원이라는 것이...” -쾅! “크헉!”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기가 그의 머리를 잡고 탁자에 내리찍었다. 옴짝달싹 하지 못하는 오상루의 루주 두현의 귓가에 백기의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군을 상대로 말 장난을 할 생각 따윈 버려라.” “아, 알겠습니다!” 정보 단체라서 그런지 말로 혼선을 주려는 것을 백기가 사전에 차단했다. 게다가 그들이 원하는 정보는 암문이 그들의 산하이든 협약 관계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거두절미하고 묻겠다. 수로십팔채 중에서 용호채의 위치가 어디에 있지?” 천여운이 궁금한 것은 오직 그것 뿐이었다. 그런데 그 질문을 하자 루주 두현의 반응이 이상했다. 뭔가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했다. ‘뭔가 있군.’ 그 예상은 들어맞았다. 천여운의 귓가로 루주 두현에게로 향하는 총관 만오의 전음이 들려왔다. [루주. 차라리 지금 별실에 있는 그자들을 내보내겠습니다. 이러다간 정말 사달이라도...] [아니다. 그자들이 가라고 한다고 고분고분하게 갈 사람들이느냐. 이 자들도 무섭기는 하지만 적어도 말은 통하지 않겠느냐.] ‘별실?’ 이곳에 들어왔을 때부터 전음을 도청하고 있던 천여운이었다. 그들의 전음 대화를 들어보면 별실에 그들이 두려워하는 누군가가 있는 듯 했다. 잠시 총관과 전음을 나눈 루주 두현이 천여운에게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협. 부디 이번 한 번만 물러나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뜬금없이 물러나 달라고 부탁하자 천여운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이곳에 황하삼귀가 있습니다.” “황하삼귀?” “대, 대협 조금만 조용히.....” 그의 사정이 어찌되었든 천여운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호남성 북부 지부장으로 활동했던 양단화는 그 이름을 잘 알고 있었다. 황하삼귀(黃河三鬼). 그들은 수로십팔채 중에 북풍채의 간부들로 악명 높은 자들이었다. 무공이 뛰어나서 악명을 떨친 것이 아니라 습격한 배를 강탈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내들은 전부 죽이고 여인들은 납치할 만큼 악질적인 자들이었다. 관에서도 현상금을 걸고 있는 자들인데 태연자약하게 도시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알고 있는 자들입니까?” “네. 갈씨 삼 형제는 유명합니다.” 천여운의 질문에 양단화가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알려주었다. 가장 중요한 정보는 그들의 악명보다 가장 껄끄러운 점이었다. “수로십팔채의 총두목인 황하패주 갈모잠의 조카들입니다.” 황하패주(黃河?主) 갈모잠. 그는 중원 구패의 일인이자 사파 연맹의 여덟 간부 중 서열 사 위에 해당하는 절대고수다. 갈모잠에 대해서는 천여운 또한 들은 적이 있었다. 그가 있기 때문에 황하에 수적 떼들이 무리를 이루어 판을 쳐도 관에서 암묵적으로 묵인해주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물론 실상은 수로십팔채에서 관에 정기적으로 갖다 바치는 뇌물이 천문학적이기 때문이다. “뒷배가 좋은 녀석들이군요.” “그렇습니다.” 사파의 거두인 황하패주 갈모잠은 잔인한 성정을 가진 자였지만 자신의 형제나 가족들은 끔찍이 여겨서, 예전에 누군가 황하삼귀가 타고 있는 북풍채를 공격했던 자들을 찾아내 구족까지 멸한 적이 있다. 그 이후로 북풍채와 황하삼귀는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대협.] 말을 하던 루주 두현이 갑자기 전음을 보냈다. [저희를 후원하는 곳이 북풍채입니다. 이들에게 황하를 타는 표국이나 상단 배들에 대한 정보를 주는 대가로 보호받고 있습니다.] 결국 루주 두현이 자신들의 사정을 설명했다. 그가 바닥에 기절해 있는 무사들과 병장기를 내려놓고 바라보는 자들을 눈빛으로 가리키며 전음을 보냈다. [크흠.....제 수하들 중에 황하삼귀가 심어 놓은 간자가 있습니다.] 그 말에 천여운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루주가 전음을 보내가면서 눈치를 보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말실수를 했다가 간자들이 고할 지도 몰랐다. [대협께서는 이번 한 번만 정보를 얻으시면 끝날 일이지만, 저희는 식솔들의 생계와 암문의 명운이 달려있습니다. 부디 선처 부탁드립니다.] 황하삼귀는 수틀리면 아군이고 할 것 없이 칼부터 들이내미는 작자들이었다. 보통 그들이 이곳에 오면 나흘 가량을 방탕하게 먹고 놀면서 머무는데, 오늘이 고작 첫날에 불과했다. 그런 와중에 용호채에 일이 터지게 되면 당연히 정보를 팔아넘긴 그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팍! 루주 두현이 바닥에 이마를 박으며 정중히 말했다. “정말 죄송한 말씀이지만 정보를 팔 수가 없습니다.” [대협, 제발 부탁드립니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모험이나 마찬가지였다.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천여운을 비롯한 양단화는 마교에서 높은 자들이다. 마교 역시도 무섭고 껄끄러웠지만 적어도 대화라는 것이 통했는데, 이들 황하삼귀는 태생부터가 강도, 살인, 납치를 일삼는 도적들이라 하는 짓이 행패에 가깝다. ‘아무리 마교의 높은 자들이라고 해도 황하삼귀가 연루되어 있으니 어느 정도 이해는 해주겠지.’ 라고 루주 두현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 사실을 몰랐다. 천여운의 행보나 생각은 타인과는 남다르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군. 그런 사정이 있을 줄은 몰랐군. 그렇다면 그 황하삼귀란 녀석들은 아래층에 있나?” “아!” 기감을 열어서 황하삼귀가 어디에 있는지 짐작하고 있었지만 천여운은 그들의 위치를 물었다. 천여운이 자신들의 사정을 이해했다고 여긴 그가 밝아진 얼굴로 답했다. “양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하삼귀는 이 층의 별실에 있습니다.” 그러자 천여운이 고개를 돌려 수하들을 향해 명했다. “들었지? 허봉, 백기. 이 층으로 내려가서 황하삼귀를 잡아와라.” “!?” 천여운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명령에 별실에 있던 암문 사람들의 두 눈이 커졌다. 이와 달리 허봉과 백기는 명령이 떨어지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외치며 별실 바깥으로 신형을 날렸다. “충!” “대, 대협! 대체 이게? 방금 전에 분명히 양해해주신다고...” “내가? 그런 말을 한 기억은 없는데.” 퉁명스러운 천여운의 말에 루주 두현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천여운의 말대로 양해를 해주겠다는 식으로 직접 말을 한 적은 없었다. 어이가 없어진 두현이 다급히 말했다.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하시는 겁니까?” “이런 짓.” -우득! 그 순간 천여운의 손을 뻗어서 뭔가를 돌리는 시늉을 하자, 부서진 별실의 벽 쪽에 서있던 무사 중 한 사람이 갑자기 목이 꺾여서 바닥으로 쓰러졌다. < 55장 용호채 (3) > 끝 < 55장 용호채 (4) > -우드득! “끄억!” -털썩! 갑자기 서있던 무사가 목이 꺾여서 쓰러지자, 별실이 혼란에 빠져들었다. “이찬! 이찬!” 옆에 있던 다른 턱수염의 무사가 쓰러진 자를 살피다가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 “주, 죽었어.” "히익! 고, 고작 손짓으로?" 그 말에 별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순간 공포심으로 질려갔다. 허공섭물을 썼을 때부터 굉장한 고수라고는 생각했지만 단순히 손짓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을 정도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저, 전율적인 고수다.’ 눈앞에 서있는 저 청년은 차원이 다른 고수였다. 그것을 인식하자 별실에 있는 자들은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워졌다. 어떠한 정보도 없는데다가 오늘 처음 보았을 텐데 대체 무슨 수로 간자를 알아낸 것일까? 영문을 알 수 없어 하는 루주 두현의 귓가에 천여운의 전음이 들려왔다. [더 이상 간자가 있나?] [어, 없습니다.] 루주가 북풍채의 간자 세 사람을 찾기까지 걸린 시간이 한 달. 천여운이 찾은 시각은 촌각에 불과했다. 거기다 모자라서 찾은 간자들을 일말에 망설임도 없이 전부 죽여 버렸다. ‘대체 이 자는 누구란 말인가?’ 이쯤 되니 그의 정체가 정말 궁금해졌다. -쿵쿵! 그때 계단 쪽에서 뭔가 소리가 들려왔다. 별실로 오는 통로 쪽을 무사들이 바라보자, 천여운의 수하들인 백기와 허봉이 알몸으로 벌거벗은 삼십대 중반의 사내 세 명을 질질 끌고 오고 있었다. ‘저, 정말로 끌고 왔어.’ ‘이런.....’ 그들은 바로 황하삼귀였다. 방금 전까지 기녀들과 방탕하게 노느라 옷을 전부 벗고 있던 그들이다. 알몸으로 얻어터져서 전신이 멍투성이가 된 그들은 점혈을 당했는지, 눈만 부릅뜨고서 별실에 도착했다. “명을 이행했습니다!” ‘이, 이를 어째!’ 정말로 황하삼귀를 끌고 오는 사태를 보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루주 두현의 인상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저들을 저 꼴로 끌고 왔으니 더 이상 사태를 수습하기가 힘들다. 점혈이 눌려져서 꼼짝할 수 없지만 분노로 인해 전신이 붉게 달아오른 황하사귀였다. [대,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저희 암문의 명운이 달려있다고...] 혹시나 황하삼귀가 듣기라도 할까 전음을 보내는 루주 두현이었다. 물론 천여운은 그냥 대답했다. “암문의 명운이 나와 무슨 상관이라는 거지?” “네?” 천여운은 암문이 어찌 되든 관심이 없었다. 어떠한 사유가 있든지 천여운은 자신과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그들의 사정을 일일이 고려하지 않는다. “대, 대협?” “그건 그대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않나?” ‘빌어먹을!’ 그제야 그는 자신이 잘못된 판단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자는 황하삼귀보다도 더 말이 통하지 않는 자였다. 그들은 뱃속에 기름칠을 해주고 주머니 속을 채워주기라도 하면 얌전하기라도 했는데, 이런 유형의 인간은 절대로 타인의 뜻대로 움직이는 자가 아니었다. ‘위험해. 본문이 쌓아온 모든 게 무너질 수 있어.’ -타타탁! 천여운이 황하삼귀의 가장 좌측에 있는 자에게로 다가가 그의 점해진 혈도를 풀어주었다. 아혈(啞穴)이 점해져서 말을 할 수 없었던 황하삼귀의 셋째 갈연이 기다렸다는 듯이 악에 차서 소리쳤다. “너 이 개새끼야. 내가 누군지 알고 있는 거냐? 이거 안 풀어? 이런 씨발 놈들이....” “이게!” -퍽! “크헉!” 갈연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허봉이 발끈해서 그의 뒷통수를 후려갈겼다. “이런 미친놈이 감히 누구더러 욕을 하는 거냐? 죽고 싶어?” 다른 것은 몰라도 주군인 천여운을 모욕하면 용서할 수 없는 허봉이었다. 머리를 맞은 갈연이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바닥을 응시했다. 목을 움직일 수 있었다면 당장에 고개를 돌려서 허봉을 노려보았을 것이다. “이런 씨발!.....” 욕이 끊이질 않았다. 사파 중에서도 강도, 납치, 강간 등 가장 더러운 짓을 주업으로 하는 자들이라 그런지 입이 험했다. 그런 그들에게 천여운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놈들이 누구인지는 관심 없다. 딱 하나만 묻겠다. 대답하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 “뭐?” 목을 베겠다는 말에 황하삼귀 세 사람의 동공이 흔들렸다. 여태까지 배짱이 많은 자들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자신들의 목숨을 가지고 위협하는 자는 처음 이었다. 그들의 백부인 황하패주 갈모잠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조급해진 갈연이 루주 두현을 쳐다보면서 소리쳤다. “비, 빌어먹을! 어이 두 루주! 지금 뭐하는 거야? 이 새끼들이 이따위로 지껄이는데 그냥 내버려둘 생각...” “베어.” -?! 천여운의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날카로운 예기가 갈연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언제 뽑았는지 양단화의 오른손에 그의 보도가 들려 있었는데, 도신에 붉은 핏방울이 묻어있었다. “새, 생각....생....” -스르륵! 툭! 황하삼귀의 셋제 갈연의 목이 갈라지며 바닥에 떨어졌다. 잘려진 목의 단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분수가 알몸으로 무릎을 꿇고 있는 두 황하이귀의 몸을 적셨다. ‘셋째야!!!’ ‘모, 목을 베다니!’ 죽은 형제의 뜨거운 피가 몸에 젖자 그들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분노의 감정보다도 두려움이 앞섰다. “......쓸데없는 소리를 해도 죽는다.” 천여운은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그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끼이이익! 그들의 뒤에 서있는 사 장로 양단화가 일부러 겁을 주려는 것처럼 도를 바닥에 끌었다. 마치 사형을 집행하는 망나니가 뒤에 서있는 것처럼 말이다. 도를 끄는 소리가 귓가에 울리자 두 명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 이 새끼....지....진짜야.’ ‘주, 죽을 수도 있다!’ 형제 중에 한 사람이 죽자 그제야 현실을 직시하게 된 황하이귀다. 자신들의 백부를 들먹인다고 해도 눈 하나 깜빡일 사람들이 아님을 깨달았다. ‘아아아......’ ‘우....우리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오상루의 루주와 총관 두 사람은 바닥을 뒹구는 황하삼귀의 셋째 갈연의 목을 보면서 더 이상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가 없었다. 이미 모든 일이 되돌릴 수 없는 지경까지 왔다. -타타탁! 천여운이 이번에는 둘째가 아닌 첫째 갈모의 점혈을 풀어주고 물었다. “용호채가 어디에 있지? 위치를 말해라.” “요, 용호채?” 자신들의 근거지인 북풍채도 아닌 용호채를 묻자 갈모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이들의 살벌한 태도만 봐서는 꼭 용호채를 습격할 기세였다. 용호채의 위치를 불었다가 무슨 사태가 벌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어떻게 하지?’ 자신들이 수적이긴 했지만 수로십팔채의 중요한 규율 중에 하나가 동료를 배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거짓말로 위치를 속였다가 괜히 목숨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찰나의 순간 수많은 고민을 한 갈모의 선택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 이곳에서 동쪽으로 황하를 따라서 이십 리 정도 가면 두문산이란 곳이 있는데, 그 앞의 강이 갈라지는 어귀에 용호채가 있소.” 갈모의 입에서 용호채의 위치가 나왔다. 같은 수로채의 사람들도 중요했지만 그보다 소중한 것이 자신의 목숨이었다. 천여운이 고개를 돌려서 루주 두현을 바라보자 진실이 맞는지 굳은 인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암문을 다그칠 필요는 없었군.’ 원래는 황하삼귀를 전부 죽인 후에 루주인 두현에게 용호채의 위치를 들으려 했는데, 그 전에 답이 나왔다. 갈모가 천여운을 바라보며 애원하는 소리로 말했다. “이, 이제 살려주시오. 알고 싶어하는 것을 알려줬잖소.” “뭔가 착각하고 있군.” “?” “내가 언제 네놈을 살려준다고 했지?” “뭐, 뭣?” 갈모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형제들을 팔았지만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줄 알았던 그였다. 그러나, “전부 죽여라.” “이! 이! 개새...” -?! 데굴데굴! 천여운이 눈짓을 보내자 사 장로 양단화가 망설임 없이 그의 목을 베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는지라 황하삼귀의 첫째인 갈모는 억울하다는 눈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애초에 약조한 것은 없었다. 후환을 남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천여운이다. 어차피 살려둔다면 이들은 곧바로 수로십팔채의 정점인 황하패주 갈모잠을 찾아가 고할게 뻔했다. 당연한 순리였다. “네놈이 마지막이군.” 양단화가 가볍게 도를 휘둘렀다. “읍읍읍!” -?! 데굴데굴! 황하삼귀의 둘째인 갈택은 끝내 말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죽고 말았다. 형제들이 차례로 죽는 것을 보면서 극도의 공포심을 느꼈는지 죽기 전의 그의 방광에서 오줌이 흘러나왔다. ‘이, 이게 마교!!!’ ‘피도 눈물도 없구나.’ 별실에 있는 사람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떤 면에서는 사파보다도 더욱 잔인하다고 알고 있었지만 정말 오금이 지릴 정도였다. 루주 두현이 두려움이 찬 눈빛으로 천여운을 바라보았다. 원하는 정보도 얻었고 저들을 죽였으니 자신들의 차례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가자.” “충!” 천여운의 말이 떨어지자 수하들이 볼일이 끝났다는 듯이 그 뒤를 따랐다. '아! 어째서?' 천여운이 자신들을 그대로 두고 나가는 것이 아닌가. 별실을 나가려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던 루주 두현이 문득 어떤 용기가 생겼는지 소리쳤다. “어, 어째서 우리를 살려두는 것이오?” 그게 궁금했다. 황하삼귀를 죽일 정도로 후환을 확실하게 제거하는 자가 자신들을 살려두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들의 입을 막아둬야 안심이 될 텐데 말이다. 이에 천여운이 잠시 멈춰 서서 대답했다. “그대 입으로 황하삼귀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지 않았나? 한 배를 탔으니 당연히 도운 거다.” “뭐, 뭐요? 그런 억지가 대체!” "어쨌든 필요한 정보를 얻었으니 값을 치룬 거다. 그럼." 의도하지 않은 대답을 마치 도움을 준 것처럼 말하자 루주 두현이 황당해했다. 간자가 살아있었다면 하마터면 오해를 살 뻔 했다. 그러나 간자들은 죽었다. '.....그저 변덕인 것 같구나.' "하아......" 다행히 천여운이 황하삼귀를 통해서 원하는 정보를 알게 된 것을 빚으로 쳐서 살려준 것 같았다. 이에 안심이 되었는지 루주 두현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런 두현에게 천여운이 피식 웃으면서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런데 말이야. 그대가 모르는 것 같아서 알려주는데, 간자가 한 명 더 있다. 그 정도는 그대가 처리할 수 있겠지?” 그 말을 들은 루주 두현의 두 눈이 터질 것처럼 커졌다. ‘비, 빌어 먹을! 간자가 한 사람 더 있다고?’ 천여운이 죽인 세 사람이 전부인줄 알았는데, 또 다른 한 사람이 존재했다면 이것은 최악의 사태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간자를 단번에 찾아낸 천여운의 말을 그는 절대로 가볍게 흘려 넘길 수가 없었다. 그 간자를 찾지 못한다면 황하패주 갈모잠의 손에 잔인하게 죽을 지도 몰랐다. 반드시 그 자를 찾아야 했다. “아무도 별실을 나가지 마라!” “네?” 루주 두현이 별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명령했다. 그러는 사이에 천여운과 수하들은 바깥으로 나왔다. 오상루를 벗어나 뒷골목을 걸으면서 허봉이 내심 궁금했었는지 물었다. “주군께서는 어떻게 간자를 찾으신 겁니까?” 그 질문에 천여운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거짓말이다.” “네?” “간자는 없다.” “없다면....헉!” 천여운이 던진 마지막 말은 진실이 아니었다. 오상루에는 더 이상 간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천여운의 그 거짓말은 있지도 않은 간자를 만들어내 별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의심을 심어주었다. “훌륭한 연환계로군요.” 천여운이 의도를 파악한 사 장로 양단화가 감탄했다. 연환계(連環計). 계책을 써 적이 내부적으로 서로를 견제하여 속박하도록 만든다. 루주 두현과 암문의 사람들은 있지도 않은 간자를 찾느라 한동안 서로를 믿지 못하고 전전긍긍해야만 할 것이다. "서두른다. 오늘 내로 용호채에서 신의의 여식을 빼낸다." "충!" < 55장 용호채 (4) > 끝 < 56장 선상 위의 재앙 (1) > 천여운과 일행들은 묵경시를 벗어나 동쪽으로 황하를 따라서 백 리(里)를 이동했다. 말을 타고 이동했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태양이 지평선으로 반쯤 가라앉아서 하늘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누런 황하가 붉은 빛을 머금고 은은하게 반짝거렸다. -다그닥! 다그닥! "와아!" "아름답군요." 강을 따라 말을 몰고 있었는데, 그 해질녘의 모습은 금이라도 울리는 느낌마저 들었다. 태어나서 마교의 성에서만 자라온 천여운과 허봉, 백기 등은 그 광경을 눈만이 아닌 가슴에도 담아두었다. 한참을 달려온 그들은 드디어 두문산 근경에 이르렀다. 죽은 황하삼귀의 둘째인 갈택이 말했던 것처럼 큰 강이 좌측으로 갈라져서 작은 하로(河路)를 만들었다. "정말 강이 갈라지는군요." 그들은 강이 갈라지는 방향을 따라서 말을 몰았다. 그곳을 따라가자 작은 강이 두문산 쪽으로 뻗어가고 있었다. 어느 지점부터는 두문산이 이동 경로를 막고 있어서 말을 두고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강이 이어지는 곳을 산을 타고서 넘자, 산으로 가려진 곳에 수십 채의 투박한 오두막 집들이 보였다. 그들이 찾던 용호채였다. "와! 저런데 숨어있으니 안 보일 만도 하네요." 허봉이 혀를 내둘렀다. 강이 갈라지는 어귀에 가려져 있어서 천해의 요새라고 할 수 있었다. 산을 등지고 강을 앞에 끼고 있어서 언제든지 배로 이동할 수 있으니, 수적들에게 있어서는 최적의 보금자리이기도 했다. "망루들이 꽤 보입니다." 사 장로 양단화가 손으로 몇 군데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망루가 있었고 그 위에 감시를 서고 있는 수적들이 보였다. 중요한 거점지에 망루들이 있어서 어느 방향에서 접근하든 용호채 쪽으로 다가가면 단번에 포착할 수 있게 해놓았다. '단순한 도적들은 아니구나.' 사파에서도 악명이 자자한 수로십팔채 중의 한곳이다. 당연히 경계에 구멍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저기 배가 꽤 크군요." 산 위에서 천여운이 수로채의 선착장에 정박해 있는 배 두 척을 가리켰다. 황하를 따라서 말을 타고 오면서 여러 배들이 떠있는 것을 보았는데 웬만한 것들보다 훨씬 컸다. "흠....뭔가 이상합니다." 그런데 양단화는 커다란 배를 보면서 이상하게 여겼다. 천여운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 이유를 말해주었다. "제가 알기로 수로채의 배들이 작은 편은 아니지만 저렇게 크진 않습니다. 수적들이다보니 좀 더 날렵한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황하의 인근인 호남성 북부 지부장을 맡았던 그답게 여러 차례 수로채의 약탈선, 전투선들을 보았다. 그런데 그런 배들치고는 상당히 컸다. 꼭 대량의 짐들을 옮기기 위한 배처럼 보였다. "양단화님 저길 보세요." 허봉이 가리키는 곳에 많은 사람들이 짐을 옮기는 것이 보였다. 스무 명 정도 되는 장정들이 수레에 많은 짐들을 담아서 끌고 가는데, 그곳은 선착장 방향이었다. 짐을 나르는 행렬이 긴 것을 보면 수로채에 있는 것들을 전부 옮기는 것 같았다. "저긴 오두막을 해체하는 것 같습니다만." 백기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서너 명의 장정들이 오두막에 달라붙어 그것을 해체하고 있었다. 막 도착했을 때는 몰랐는데 집의 삼분지의 일 가량이 해체 되어 있었다. 그것을 유심히 지켜보던 양단화가 천여운에게 말했다. "주군. 아무래도 용호채에서 근거지를 옮기려는 것 같습니다." "근거지를요?" 양단화는 정황상 저들이 수로채를 옮긴다고 판단했다. 원래부터 수적들은 몇 달에 한 번 꼴로 근거지를 옮겨서 관이나 적들의 눈을 피한다고 알고 있었다. 다만 하필 그들이 이곳에 도착한 시점에 옮기는 것이 공교로웠다. 그렇다고 해도 이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행일 수도 있습니다. 저들이 근거지를 이동하려는 때를 이용한다면 굳이 큰 마찰을 피하고서 신의의 손녀를 탈환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들이 평소와 같다면 오히려 탈환 과정에 마찰이 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근거지 이동을 위해서 바쁜 틈을 노린다면 더욱 쉽게 빼낼 수도 있다고 판단한 양단화였다. "그 전에 저들의 상황부터 알아야겠군요." "그렇습니다." 천여운의 말대로 정보가 필요했다. 저들이 정말로 근거지를 옮기는지부터 신의의 손녀가 구류 된 곳. 그곳을 알지 못한다면 헤매게 될 것이다. "백기." "네." 천여운이 그들이 있는 위치에서 제일 가까운 망루를 가리켰다. 망루 위에 두 명의 감시자들이 있었다. "저들을 조용히 잡아올 수 있겠어?" "해보겠습니다." 각법을 익힌 만큼 경공 실력이 육검들 중에 가장 뛰어난 백기였다. 게다가 망루에 감시자들이 있다고 해도 일류고수에 불과했기에 백기가 특별히 실수만 저지르지 않는다면 납치하는데 무리는 없어보였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팟! 천여운의 명을 받은 백기가 기척을 죽이고서 경공을 펼쳤다. 빠르게 산을 타고 내려가는 그의 모습이 어느새 망루 쪽까지 도달했다. 산 위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그들은 잘 보였다. '잘하고 있군.' -타타탓! 백기는 단숨에 망루 위로 올라가 감시자들 중 한 사람의 목을 비틀었다. -우득!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이 당황해서 소리를 지르려 하자, 그의 아혈을 점한 뒤에 뒷목을 쳐서 기절시켜 버렸다. "후우."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들키지 않고 해야 한다는 생각에 괜히 긴장되었다. 백기가 그를 들쳐 메고서 빠르게 망루를 내려갔다. 그런데 여기서 백기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뭐야? 네놈!" 공교롭게도 그가 망루에서 내려오자 교대 근무자들이 나타난 것이었다. 백기가 놀라서 그들을 향해 신형을 날리려는 순간, -파팍! "크헉!" -우드득! 털썩! 두 교대 근무자들의 뒤에서 나타난 허봉과 양단화가 그들을 제압했다. 산 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그들은 망루 쪽으로 다가오는 교대 근무자들을 발견하고서 얼른 내려온 것이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괜히 일이 커질 뻔했다. "심장 떨어질 뻔 했죠? 히히." "아, 아니다." 허봉의 놀림에 백기가 강하게 부정했다. "조용히 하고 시신들부터 옮기게." "네넵." 양단화의 말에 허봉과 백기가 죽은 교대 근무자들의 시신을 망루에서 떨어진 우거진 수풀에 숨겨놓았다. 그 사이에 양단화는 기절해 있는 감시자를 들쳐 매고서 산 위로 올라갔다. 천여운의 앞에 감시자를 내려놓은 양단화가 말했다. "운이 좋았습니다. 교대 근무자들까지 처리했으니 잠시간은 눈치 채지 못할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닐 것이다. 오랫동안 있어야 할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면 눈치 챌 테니 말이다. 서둘러야 했다. 양단화가 기절해 있는 감시자를 깨웠다. "헙?" 깨어난 감시자는 자신이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했는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그의 아혈을 풀기 전에 양단화가 단단히 경고했다. -챙! "소리를 지르면 죽일 것이다. 알겠다면 고개를 끄덕여라." 목에 닿아 있는 차가운 도날에 감시자가 고개를 미친 듯이 흔들었다. 죽기는 싫은 모양이었다. 아혈을 풀어준 양단화가 그에게 은밀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용호채의 근거지를 옮기는 것이냐?" "그, 그렇습니다." 예상대로였다. 신의의 손녀의 소재를 묻기 전에 양단화가 한 가지를 더 물었다. "왜 오늘 옮기는 거지?" "저, 저희 채의 근거지가 노출되었다고 해서 옮기는 겁니다." "근거지가 노출 돼?" 그 말에 천여운이 인상을 찡그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아니야. 곧장 이곳으로 오지 않았나.' 황하삼귀를 처리하고 나서 곧바로 묵경시를 떠나, 이곳 용호채로 온 그들이었다. 이 짧은 시간 내에 정보가 흘러나간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 했다. 양단화가 그를 다그쳐서 어디에 노출되었는지를 물었지만 감시자에 불과한 그는 그것까지는 모른다고 말했다. "저, 정말 모릅니다!" 목에 칼을 들이대도 말하지 않는 것을 보면 정말 모르는 듯 했다. 양단화가 가장 중요한 것을 물었다. "신의의 손녀는 어디에 구류되어 있지?" "네? 신의의 손녀?" -팍! 피부를 파고드는 도날에 감시자가 기겁을 했다. "히이이익!" "수작부리지마라." "저, 정말 처음 들어봅니다. 신의의 손녀는커녕 지금 저희 채에 구류된 자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구류된 자들이 없다고?" 이상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신의의 손녀다. 자백제에 당한 무당패검 현운자가 했던 말이었다. 용호채에 연통을 넣어서 언제든지 받을 수 있도록 손을 썼다고 했는데, 그것이 거짓일 리가 없었다. '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천여운이 물었다. "감미양이라는 여자를 모르나? 근육질에 얼굴의 코에 점이 있고..." 신의 감로수는 손녀가 자신과 완전히 쏙 빼다 닮았다고 했다. 특히 대대로 의술을 익혀온 그녀의 가문은 남녀 할 것 없이 근육을 발달해서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했었다. "근육질의 여자? 아! 부, 부채주님의 전리품, 아니 여자 분을 말씀하시는 건지?" 외모와 이름을 말하자 감시자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천여운의 예상대로 용호채에서는 그녀의 정체를 모르는 듯 했다. 알고 있다면 신의를 끌어낼 수 있는 중요한 인질이니, 현운자가 일부러 숨겼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데 있었다. "부채주의 여자?" 감시자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소식에 일행들의 인상이 굳어졌다. 아무래도 일 년 사이에 뭔가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감 파파가 알면 난리 나겠는데요." "......그렇겠군." 아무리 무당패검 현운자와의 뒷거래로 납치했다고 하나, 일 년씩이나 수적인 용호채에서 여자인 감미양을 그냥 내버려뒀을 리가 만무했다. 허봉의 말대로 신의 감로수가 이것을 알게 되면 대성통곡을 하리라. "그렇다면 그녀는 어디에 있지?" 어쨌거나 생사를 확인했으니 위치를 알아야 했다. 양단화의 질문에 감시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 지금 그녀는 배에 있습니다." "저 배를 말하는 거냐?" 한참 짐을 옮기느라 정신이 없는 선착장 앞의 배를 가리켰다. 그러자 감시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강 어귀를 벗어나 다시 황하로 빠지는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호걸(豪傑) 분들은 전부 강 위의 배에 있습니다." "뭐?" 의아해진 천여운이 경공을 펼쳐서 높은 나무 위로 올라가보았다. 황하로 빠지기 전의 부근에 다섯 척의 날렵한 전투선들이 쇠사슬로 연결해놓고 닻을 내리고 강 한가운데에 정박해있었다. "이런....." < 56장 선상 위의 재앙 (1) > 끝 < 56장 선상 위의 재앙 (2) > 해가 완전히 저물고 날이 어두웠다. 근 해시(亥時) 중엽이 넘겨서 용호채의 짐들을 옮겨놓은 배 한 척이 천천히 황하로 이어지는 하류 쪽으로 내려와 전투선들이 연결된 곳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필요한 등불 이외에는 어떠한 것을 밝히지 않고도 어두운 강 위에서도 능숙하게 배를 이동시켜 갖다 붙였다. "천천히 붙여라!" -끼익! 끼익! 쿵! "됐다! 묶어라!" 짐을 실은 커다란 배가 다섯 척이 연결된 전투선 옆에 붙여 지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수적들이 쇠사슬을 가지고 연결해 고정하기 시작했다. 배가 완전히 연결되자 여섯 적이 한 덩어리가 되어서 안정적이게 강 위에 고정되었다. 물 위에 떠있는 하나의 요새처럼 말이다. "고생들 했다. 내일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남은 배 한 척에도 짐을 옮겨야하니 이제 눈들 붙여라." "와아아아!!!" "이놈들아! 닥치지 못할까. 채주님께서 주무신다." "헙!" 쉴 수 있다는 말에 환호하던 수적들이 채주가 잔다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선임 수적들의 호령 아래 오늘 해야 할 일들을 끝낸 그들은 쉬기 위해 배 안에 있는 숙소로 들어갔다. -탁! 탁! 배를 연결하기 위해 켜두었던 등불들이 전부 꺼졌다. 선상 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가고 고요한 정적이 찾아왔다. 배의 갑판으로 물이 철썩이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짐을 실어놓은 배 안에는 잠을 잘 수 있는 공간이 없기 때문에 이곳을 지키는 불침번 몇 명 이외에는 아무도 없다. -들썩들썩! 배 안에 있는 커다란 목함의 뚜껑이 움직였다. 뚜껑이 살짝 열리면서 어두운 그곳에서 네 개의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눈동자들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사방을 살폈다. 그리고 짐을 실은 이 공간에는 불침번을 서고 있는 자들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목함에서 나왔다. [그럭저럭 성공했군요.] [시간이 없네.] 어둠 속에 그들은 바로 사 장로 양단화와 백기였다. 그들은 강 위에 있는 배로 잠입하기 위해서 목함 안에서 근 두 시진 가량을 숨어있어야만 했다. [한 시진 내로 신의의 손녀를 찾아서 빼내야 하네.] 서둘러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망루의 감시자에게 물어서 얻은 정보에 의하면 또 다른 교대 근무자가 축시 초에 온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수로채에 남아있는 자들이 사라진 감시자들로 인해 그들의 침입을 눈치 채고 경계망이 가동될 것이다. [교주님께서는 자시 초까지 오신다고 했지요?] 천여운과 허봉은 나룻배를 구해서 자시 초까지 하류로 내려온다고 했다. 이곳은 황하로 연결되기 전의 하류라서 물살이 세서 작은 나룻배가 강 한복판에 정박하기 어렵다. 그래서 천여운과 허봉은 시간을 정해두고 그때에 맞춰서 상류에서 나룻배를 몰고 오기로 하였다. 그때에 맞춰서 두 사람은 신의의 손녀를 탈환해서 나룻배로 뛰어내려야 했다. 시간이 매우 촉박하다고 볼 수 있었다. [서두르세.] [알겠습니다.] 원래는 천여운이 직접 그녀를 찾겠다고 했지만 양단화가 한사코 만류했다. 부디 어려운 일은 자신들에게 맡기라고 간청했다. 또 다시 천여운이 폭발에 휩쓸려서 낭떠러지에 떨어졌던 그런 사태가 벌어지길 원하지 않았다. [불침번을 서는 자들이 꽤 많군요.] 배 위로 상당한 인기척들이 느껴졌다. 하지만 완숙한 화경,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그들은 고작 불침번을 서는 자들에게 기척이 감지 당할 그런 실력자들이 아니었다. -슉! 짐이 실려 있는 배 안에서 빠져나온 그들이 몸을 숨겼다. 배 위에 있는 불침번들의 숫자는 총 여섯 명이었다. 선박 양 옆에 두 사람, 배의 머리와 후미 부분에 각각 두 사람씩 경계 근무를 서고 있었다. '차라리 전부 죽이거나 혈도를 점하는 게 나을 지도.' 하지만 괜히 그런 짓을 했다가 배 위로 누군가 올라오면 곧장 들키고 만다. 양단화와 백기가 기척을 죽이고서 경공을 펼쳐서 연결되어 있는 다른 배로 신형을 날렸다. -슈슉! 쇠사슬로 배를 전부 연결해놓아서 흔들림이 거의 없었다. 확실히 수적들답게 이런 경험은 다채로운 듯 했다. [세 번째 배라고 했나?] 감시자는 세 번째 배인 걸로 알고 있다고 했다. 혹시나 헷갈릴 경우에는 배 위에 두 개의 칼날이 교차하는 깃발이 걸려있으니 그걸 보면 된다고 일러주었다. [저기 깃발이 있군요.] 세 번째 배라고 했는데 네 번째 배에 그 깃발이 있었다. 하마터면 괜한 곳에 들어갈 뻔했다. 두 사람은 서둘러서 불침번들의 눈을 피해서 조심스럽게 네 번째 배로 몸을 옮겼다. '배의 후미 쪽의 배 밑으로 내려가면 수하들이 있는 숙소가 있고, 배의 머리 쪽으로 내려가면 부채주님의 방이 있습니다.' 라고 감시자가 설명했었다. 배의 머리 쪽에 경계 근무를 서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저 두 사람만큼 어쩔 수 없이 기절시켜야 할 듯 했다. [신호를 보내겠네. 내가 우측을 맡겠네.] [알겠습니다. 좌측을 맡겠습니다.] 양단화가 손바닥으로 기다리라는 표시를 했다가, 경계 근무를 서는 자들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공격하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팟! 두 사람이 동시에 신형을 날려서 배의 갑판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던 경계 근무자들의 혈도를 점했다. -타타타탁! 쓰러지려하는 자들을 붙잡아서 바닥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긴장의 연속이었다. [제가 지키고 있겠습니다.] [알겠네.] 백기가 이곳을 지키는 사이에 양단화가 조용히 배 머리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코를 골면서 자고 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드르렁! 드르렁! 어두운 방안의 침상 위에 남녀가 같이 누워있었다. 콧수염을 기른 중년인은 하의만 입고서 곤히 잠들어 있었고, 옆에 우람한 근육을 가진 여인이 보기와는 다르게 새근거리면서 자고 있었다. '정말 많이 닮았군.' 어두워서 얼굴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몸 하나는 빼닮았다. 거대한 도끼를 들고 다니는 호상화보다도 상체 근육은 더 커보였다. -타타타탁! 사 장로 양단화가 자고 있는 사내의 훈혈을 점했다. 혹시나 그가 중간에 깨는 미연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서 옆에 있는 신의의 손녀인 감미양을 조심스럽게 흔들어서 깨웠다. "으으응?" -팍! "흡!" 양단화가 잠에서 깨는 그녀의 입을 막고서 전음을 보냈다. [조용히 하시오. 감미양 소저.] 감미양이 놀라서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있는 양단화를 쳐다보았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옆에 누워서 자고 있는 부채주가 아님은 확실했다. [소저의 조모이신 감 파파가 보낸 사람이오.] 그 전음에 그녀의 눈이 커졌다. 감 파파라는 칭호는 평소에 신의 감로수가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호칭이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나서 놀랐지만 이내 진정을 되찾았다. [감 파파가 소저를 탈출시켜달라고 부탁해서 온 것이니, 조용히 우리들과 나갈 수 있겠소?] 양단화의 전음에 감미양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빨리 상황 설명이 되었다. 괜히 그녀가 의심이라도 했다면 귀찮았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감미양이 옆에 누워있는 부재주로 짐작되는 자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이에 양단화가 안심시켰다. [옆에 남자는 걱정하지 마시오. 혈도를 점해서 기절한 것 뿐이오.] 그 말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침상에서 일어났다. 양단화가 선두에 서서 그녀를 이끌었다. 바깥으로 나가자 대기하고 있던 백기가 그녀를 보고서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 '많이 닮았군.' 백기도 우람한 그녀의 근육에 같은 생각을 했다. 이제 남은 일은 천여운이 오는 경로로 이동을 해서 탈출하는 것만 남았다. [이쪽으로!] 여섯 척의 배가 연결된 우측에서 온다고 했으니, 다시 짐을 실어놓은 커다란 배로 이동해야 했다. 감미양이 무공을 익히지 않았기에 백기가 그녀를 업었다. ‘젠장.....이것마저도 같구나.' 묵직한 무게에 백기는 얼마 전에 신의 감로수를 업었던 것을 떠올렸다. 보통 여인들과는 확연히 다른 신의 일가였다. 양단화가 앞장서서 경계 근무를 서고 있는 자들의 시선이나 이동 경로를 파악해서 백기를 이끌었다. -슉슉! 한 번 이동했던 터라 더욱 쉽게 시선을 피할 수 있었다. 다섯 번째 배로 단숨에 넘어간 그들이 서둘러서 짐이 실려 있는 커다란 배로 넘어가려던 찰나였다. -삐이이이이이익!!! 물이 철썩이는 소리만 들리던 고요한 선상 위에 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선두에 서서 쇠사슬이 연결된 곳을 넘으려던 양단화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려서 뒤를 쳐다보았다. '아무 기척도 못 느꼈는데 대체 이게....앗?' 양단화가 순간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백기를 바라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백기에게 업혀 있는 감미양이었다. 방금 전에 선상 위를 울린 피리를 분 범인은 다름 아닌 그녀였던 것이다. [이게 무슨…] -푹! 백기가 놀란 나머지 그녀를 다그치려는 순간, 그의 옆구리로 날카로운 무언가가 파고들려 했다. '큭!' 살갗을 파고드는 날카로움에 백기가 업고 있던 손을 떼고서 그녀를 떨어뜨렸다. 조금만 늦었어도 옆구리에 단검이 박힐 뻔했다. '이 여자가 어째서?' 감미양은 단검을 들고서 떨리는 눈으로 백기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적습이다! 적습이다!' 경계 근무를 서고 있는 자들이 그들을 발견한 것이다. 그들이 소리를 치자 갑자기 배가 들썩거리면서 뛰어올라오는 소리와 함께 배 안쪽에서 수많은 수적들이 위로 올라왔다. -화르륵! 화르륵! 쉬고 있다가 올라온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빨랐다. 어두웠던 선상 위가 수많은 등불로 밝아지며 수를 헤아리기 힘든 수적들이 어느새 그들을 에워쌌다. 사 장로 양단화의 인상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함정이구나.' 설마 이런 사태가 벌어지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물살이 거센 배 위에서 수많은 적들에게 둘러쌓이는 최악의 상황을 말이다. '이를 어찌해야 하지?' 영문을 알기도 힘들었다. 어째서 신의의 손녀가 자신들의 뒤통수를 치고 이들을 도왔는지부터 이들이 어떻게 미리 알고서 이런 함정을 팠는지도 말이다. 그때 수적들의 틈 사이로 어떤 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촉나라의 무장 중의 하나인 장비를 보는 듯한 사자 수염을 기른 거친 중년인과 죽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푸른 혁대를 차고 있는 사내였다. "크하하하하! 과연 인주(人主)의 예상대로 되었구려. 정말 부채주의 부인을 데려가려고 할 줄은 예상도 못했는걸." 걸걸하게 웃으며 말하는 중년인은 이곳 용호채의 채주인 복호선이었다. 옆에 서있는 인주라 불린 중년인이 살짝 드러난 하관에 입 꼬리를 올리면서 답했다. "혹시나 했는데 운이 좋았소." "인주 공의 지략은 본 재주가 따라갈 수가 없구려. 크하하하핫." 그들의 태도를 보면 마치 양단화와 백기를 이미 잡은 사람처럼 대하고 있었다. 함정에 빠진 것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으니 어쩔 수 없지만 양단화는 그보다도 신의의 손녀를 부르는 호칭이 마음에 걸렸다. ‘부채주의 부인이라니?' 부채주의 여자라고 했던 게 그런 의미일 줄은 몰랐다. 당혹스러워하는 그들을 바라보며 인주라 불리는 죽립인이 입을 열었다. "이곳을 탈출하는 것은 무리다. 물살이 거센 이곳에서 도망 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겠지? 항복해라." '......아아아.' 양단화가 허탈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것은 철저하게 그들을 고립시키기 위한 함정이었다. 배를 왜 하필 황하로 연결되는 하류 지점에 정박시켰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지 않았던 스스로가 어리석게 느껴졌다. 사실 이것은 눈치 채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수전을 겪어 본 적이 없는데다가 예상하지 못한 변수들을 어찌 가늠할 수 있겠는가. "항복해라. 그대가 아무리 무당패검을 죽인 자라고 해도 본 인주를 비롯해 이 많은 호걸들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다." 인주가 이렇게 자신감을 보이는 이유는 극명했다. 그 역시도 화경의 극에 이른 고수였기 때문이었다. 이곳이 선상 위가 아니라고 해도 두 사람을 놓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후우." 허탈하게 한숨을 내쉬는 양단화의 모습에 그가 포기했다고 생각한 인주가 피식하고 웃고는 수적들에게 명했다. "저들을 구속해라." "흐흐흐!" 수적들이 히죽거리면서 다가오자 양단화가 허리춤에서 도를 뽑았다. -챙! 백기 역시도 적들을 상대하기 위한 각법의 기수식을 취했다. 이상하게도 절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눈빛에 전혀 두려움이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인주가 혀를 차면서 말했다. "쯧, 그대들이 어찌해볼 방법이 없다고 했을 텐데." "누가 우리뿐이라고 했나." "허튼 소리. 이 강 한가운데에 누가 올 수....?" -흠칫! 인주가 뭔가를 감지했는지 놀란 눈으로 배 갑판의 끝 쪽으로 달려가 밑을 쳐다 보았다. -슈우우욱! "아닛?" 바로 그 순간 그의 앞으로 무언가 빠르게 치고 올라오면서, 놀란 그가 보법을 펼치며 뒤로 물러났다. -쿠당탕! "으허헉!" 그의 앞으로 떨어진 자는 바로 허봉이었다. 그러나 인주를 비롯한 수적들을 놀라게 만든 것은 다른데 있었다. 선상 위로 흑색 검을 타고 있는 긴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청년이 공중에 떠있었다. "어, 어검비행?" 인주가 경악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 56장 선상 위의 재앙 (2) > 끝 < 56장 선상 위의 재앙 (3) > 불과 반 시진 전, 작은 강의 상류까지 올라간 천여운과 허봉은 작은 마을을 발견했다. 강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생계를 이어가는 작은 어촌이었는데, 그곳에서 값을 치르고 나룻배를 구할 수 있었다. 그들을 만나기로 한 시각에 맞춰서 그들은 나룻배를 띄웠다. 하류로 내려가는 강의 물살은 생각보다 빨랐다. “주, 주군! 노를 젓지 않아도 꽤 빠른데요.” 처음에는 괜찮은 것 같다고 하던 허봉이 어느새 긴장한 얼굴이 되었다. 나룻배의 후미에서 방향타를 잡은 천여운 역시도 강의 유속이 점차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잘못해서 배에 부딪치거나 실수하면 그들을 못 태울 수도 있겠다.’ 묵직한 방향타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한참을 내려오던 그들의 눈에 강 한가운데에 희미한 불빛들이 보였다. 그런데 희미하던 불빛들이 이내 갑자기 번져나가듯이 선상이 온통 환해지는 것이 아닌가. “엇? 주군! 갑자기 배 위가 밝아졌습니다.” “.....문제가 생긴 것 같군.” 천여운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들의 계획에는 큰 허점이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노출되었는지는 몰라도 수적들이 경계 태세에 들어간 것 만큼은 확실해 보였다. -철썩! 철썩! “주, 주군 어떡하죠? 물살이 더 빨라지는데.” 그들이 타고 있는 나룻배는 황하로 이어지는 하류의 유속에 굉장히 빠르게 나아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강 한가운데에 정박된 용호채의 하나 된 배를 지나칠 것 같았다. “조용히 탈환하기는 글렀군.” “네?” “별 수 없다. 배 위로 오르자.” 그 말과 함께 천여운이 팔목의 소매를 걷었다. 그러자 팔목 보호대의 형태로 둘러져 있던 검은 철들이 분해가 되어 하나의 검의 형태를 이루었다. -차차차차차착! 매번 볼 때마다 신기했는지 허봉의 눈이 동그래졌다. 천여운이 흑검으로 변한 천마검에 진기를 불어넣자, 검이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며 둥둥 뜨기 시작했다. 천마검이 익숙하게 날 밟고 올라서라고 하듯이 발목의 높이로 내려왔다. -착! 천여운이 흑검에 발을 올려서 흡착시킨 후에 말했다. “이리와라. 허봉.” “넷?” “날아오를 거니까. 안겨라.” 문규였다면 좋아서 곧장 안겼겠지만 허봉은 살짝 민망한 표정이 되었다. 이에 천여운이 피식 웃더니, 그를 낚아채서는 단숨에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팍! 부웅! “우와아아앗! 주, 주군!” 방심했던 허봉은 천여운의 팔에 낚여서 공중으로 떠오르자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어두운 강 위를 날아오른 천여운은 단숨에 배 위쪽으로 올라왔다. -쾅! 그들이 타고 있던 나룻배는 빠른 유속에 용호채의 전투선에 부딪쳐 부서지고 말았다. 그러더니 이내 강물 아래로 가라앉았다. 강의 유속이 너무 빨라서 이 지점에서는 나룻배로 버티기 힘든 곳이었다. -쿠당탕! 내려놓는다는 천여운의 말을 미처 듣지 못한 허봉이 선상 바닥을 뒹굴었다. 쪽팔린 나머지 얼른 일어난 그는 엄청나게 많은 수적들의 숫자에 내심 기겁을 했다. ‘이, 이거 너무 많잖아!’ 나룻배에서 보았을 때도 많은 것 같다고 여겼지만 굉장한 수였다. 반면 수적들 역시도 넋을 놓고서 허공에 떠있는 천여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웅성웅성! 어검비행(馭劍飛行). 무림에서도 전설로만 들려오는 검술과 경공의 최상승의 경지이다. 현경 급의 고수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기술이었기에 죽립에 가려진 인주라 불리는 사내가 당혹스러워하는 것도 당연했다. ‘저, 저 자가 아니다.’ 인주는 천여운의 등장에 구패의 일인인 무당패검 현운자를 죽인 범인이 사 장로 양단화가 아님을 확신했다. 물론 진짜 범인은 천여운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천여운의 시선이 빠르게 주위를 훑고 지나갔다. 짧은 시간 안에 이들의 전력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두 명.’ 배 위에서 눈에 들어오는 고수는 단연코 죽립을 쓰고 있는 인주와 사자 수염을 기르고 있는 용호채의 채주 복호선이었다. 인주는 화경의 극에 이른 자였고, 복호선은 초절정의 극에 이른 고수였다. 그 외에 거슬리는 것은 저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어림잡아서 삼백이 넘는다.’ 전력을 단번에 파악한 천여운의 귀로 사 장로 양단화의 전음이 들려왔다. [교주님. 함정이었습니다!] 양단화는 그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을 간략히 설명했다. 구출하는 과정에서 감미양이 피리를 불러서 수적들에게 신호를 보낸 것부터 저 죽립인이 수적들과 공조하여 파놓은 함정까지 말이다. 이에 천여운의 시선이 단검을 들고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 신의의 손녀, 감미양에게로 향했다. -흠칫!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천여운의 차가운 눈빛에 그녀가 움찔했다. 함정이야 저 인주라 불린 자가 변수가 되었다지만, 납치되었다고 알려진 감미양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는 그였다. 그때 인주라 불리는 사내가 허공에 떠있는 천여운에게 소리쳤다. “고인께서는 극도육무문의 고수이시오?” 이 말에 천여운이 오른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저자는 갑자기 등장한 천여운을 극도육무문의 고수로 오해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짧은 질문 하나에 천여운은 두 가지 사실을 추측할 수 있었다. ‘폐검곡의 흔적들을 보고서 온 게 틀림없구나.’ 사 장로 양단화가 그에게 간략하게 설명할 때, 저 죽립인은 그들이 신의의 손녀를 노리고 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다가 그에게 극도육무문의 고수냐고 묻는다는 것은 그들이 폐검곡에 일부러 남겨놓은 극도육무문의 복면인들의 흔적을 보고서 이곳에 왔을 확률이 높았다. ‘푸른 혁대?......아!’ 천여운은 이를 통해 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네놈 창천회로군.” 천여운의 의미심장한 말에 죽립에 가려진 인주의 두 눈동자가 떨렸다. 극도육무문으로 추측되는 자가 숨겨진 비밀 조직인 창천회를 알고 있다는 것에서 놀란 듯 했다. [이, 인주! 어떻게 할 것이오? 저, 저자는 아무리 봐도 엄청난 고수인 것 같은데!] 용호채의 채주인 복호선이 다급히 그에게 전음을 보냈다. 공중에서 어검비행을 펼치고 있는 천여운의 모습에 어찌해야 할지 난감해진 그였다. 인주 역시도 난감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본 회의 존재를 알고 있는데다가 신의를 데리고 있다.’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도저히 놓쳐서는 안 될 자들인 것이다. 하지만 먼저 움직인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네놈들이 납치한 자는 우리가 데려가겠다.” “뭣?” -휘릭! 공중에 떠있는 상태에서 천여운이 손으로 뭔가를 잡아당기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부웅! “꺄아아아악!” 단검을 들고서 수적들의 곁에 있던 감미양의 몸이 떠오름과 동시에 양단화와 백기 등이 있는 곳으로 날아왔다. “아, 안돼에엣!” 가까이에 있던 수적 몇 명이 붙잡으려 했지만 놓치고 말았다. “허, 허공섭물!” 무공을 익힌 용호채의 사람들이 그것을 몰라볼 리가 없었다. 허공섭물까지 보고나자 어검비행술을 펼치고 있는 천여운이 자신들이 감당하기 힘든 괴물이라는 것이 깊숙이 와 닿고 있었다. ‘아뿔싸! 신의의 손녀를 빼앗기다니!’ 설마 이런 식으로 감미양을 빼앗길 줄은 몰랐던 인주였다. 백기는 자신의 근처로 날아온 감미양의 손목을 발로 차서 단검을 떨어뜨리게 했다. -타타타탁! 그리고서 그녀의 혈도를 점해서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혈도의 점해진 그녀가 뭔가를 말하고 싶어했지만 아혈과 마혈이 동시에 점해져서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읍읍!” “이번에는 얌전히 있으십시다. 감 소저.” 어차피 혈도에 점해져서 얌전히 있을 수밖에 없다. -탁! 그러는 사이에 천여운이 공중에 떠있던 천마검에서 선상으로 내려왔다. -차차차착! 내려오면서 천마검이 분해가 되어 그의 팔목의 보호대의 형태로 바뀌었다. 검신이 눕혀있어서 그랬지만 흑검에 보기 좋게 천마검이라 적혀 있기 때문에 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였다. “백기 그녀를 지켜라.” “충!” 천여운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허리춤에 있던 백룡도를 뽑아서 선상 바닥을 향해 그었다. -촤아아아악! 새하얀 백룡도의 날에서 흘러나온 도기에 의해 선상 바닥에 일 자로 선이 생겨났다. 이를 수적들이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천여운이 경고했다. “이 선을 넘는 자는 가장 먼저 죽여주마.” 살기가 물씬 풍기는 목소리에 수적들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천여운의 존재감은 이 많은 숫자의 수적들을 억누를 만큼 위압적이었다. 실제로 선을 넘기면 정말로 죽을 것만 같은 기세였다. ‘큭! 어디서 이런 괴물이 튀어나와서!’ 강한 압박감에 용호채의 채주 복호선의 표정마저도 잔뜩 굳어졌다. 확연한 무위의 차는 그 역시도 다른 수적들과 마찬가지로 겁을 먹게 만들었다. 그때 인주가 은밀히 그에게 전음을 보냈다. [채주....혹시 아기는 선실에 있소?] [아아! 그 아기를 이용하려는 것이오? 그런데 문제가 있소. 인주가 데려오라고는 했지만 부채주가 간곡히 부탁하여 아기는 본 채주의 거처에 숨겨두었소.] 복호선의 대답에 인주가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역시도 정파 출신이었기 때문에 함정을 파면서도 아기를 내세워서 협박하자니 신경이 쓰이 기는 했었다. [칫. 이럴 줄 알았다면 부채주고 뭐고 아기를 데려올 걸 그랬소.] [아니오. 어차피 저들은 모르니 상관없소.] [아하! 허패구려!] [일단은 있어보시오.] 인주가 앞으로 나서며 강경한 목소리로 천여운을 향해 소리쳤다. “고인이여. 그대가 지고의 경지에 오른 강자임은 알고 있지만 이 고립된 선상 위에서 그 여인을 무사히 데려갈 수 있겠소?” 천여운이 아닌 그녀를 노리겠다고 협박하는 것이었다. 인주는 어째서 천여운의 일행이 감미양을 데려가려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중원 최고의 명의인 신의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녀의 약점인 감미양을 이용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그 옹고집을 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신의의 손녀를 무사히 데려갈 수 있게 내버려 둘 것 같으냐.’ 절대로 보낼 수 없다. 신의는 창천회의 계획 중 하나인 극무지체의 대법을 알고 있는 자였다. 그녀가 저들을 돕기라도 한다면 문제가 커진다. ‘손녀를 구출하지 못한다면 그녀를 애틋하게 아끼는 신의가 굳이 저들을 도와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겠지.’ 인주는 누구보다도 신의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의 성향은 알지 못했다. 천여운이 그런 그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전혀 흔들리지 않고 말했다. “쓸데없는 걱정이군. 그렇게 자신 있다면 덤벼라.” -착! 천여운이 백룡도의 도 끝을 인주에게 겨냥하며 외쳤다. 단순히 도 끝을 향했을 뿐인데 강렬한 전의와 함께 날카로운 예기가 사방을 감돌았다. 절대로 허언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큭! 실력만큼이나 오만한 자로구나. 별 수 없군.’ 결국 인주가 비장의 수를 꺼내들었다. 인주가 용호채의 채주 복호선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자 그가 입을 열었다. “크흠! 그녀의 남편과 아기가 우리의 손에 있는데 과연 그대들을 도울 것 같나?” “아기?” 그 말에 놀란 양단화와 백기가 놀란 눈으로 감미양을 쳐다보았다. 혈도가 점해져서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두 눈시울이 붉어져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아기 때문이었나.’ 어쩐지 뭔가 그녀의 태도가 이상하다고 여겼다. 그게 강제가 되었든 자발적이든 용호채 부채주의 아기를 낳은 그녀는 또 다른 볼모가 되어버린 자식을 위해서 함정을 도운 것이었다. 용호채의 채주 복호선이 위협적인 목소리로 감미양이 들으라는 듯이 소리쳤다. “본 채주의 명령이 떨어지면 선실 안에 있는 아기는 죽은 목숨이다! 만약 그대들이 본 채의 부하들을 손끝이라도 건드리거나, 감 부인이 선상 밖으로 나가게 된다면 아기의 목숨은 없다. 알겠나?” -부들부들! 이에 감미양이 온몸을 떨었다.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리며 그녀의 심적 고통을 말해주었다. “이, 이 비겁한 놈들! 이제는 하다하다 못해서 아기를 인질로 잡는 것이냐!” 허봉이 어이가 없는지 눈을 부라리면서 인주에게 소리쳤다. 사파 놈들이 원래부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아기로 협박을 할 줄은 몰랐다. ‘기분은 더럽지만 어쩔 수 없다.’ 그들 역시도 신의를 움직일 수 있는 패를 쉽게 넘겨줄 순 없었다. 더러운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만 했다. 양단화를 비롯해 백기, 허봉 등이 어찌해야 하나 눈치를 보자, 인주는 자신들의 협박이 먹혔다고 확신했다. ‘됐다!’ “감 부인을 넘기시오. 그렇다면 그대들을 곱게 보내주겠소.” 인주가 조심스럽게 제의를 했다. 허패에 불과한데다가 거기서 더 나아가 신의를 내놓으라고 한다면 적의 반발을 살 것이 뻔하기에 적당한 선에서 협의를 보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천여운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에도, “싫다면?” 인주와 용호채의 채주 복호선의 인상이 굳어졌다. 설마 아기를 죽이겠다고 협박하는데도 거절의 의사를 비칠 줄은 몰랐다. “읍읍읍!” 감미양 역시도 어찌나 놀랐는지 울던 것을 멈추고, 눈이 왕방울 만해져서 천여운을 노려보았다. 인주가 다급히 천여운에게 전음을 보냈다. [하! 그대의 잘못된 선택이 신의의 증손자를 죽일 수도 있는데 허장성세가 보통이 아니구려. 그렇게 된다면 신의가 그대들의 손에 있다고 한들 도울 것 같소?] 그 전음에 천여운이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말했다. “죽여라.” “뭐, 뭣?” 인주의 눈빛에 당혹감이 서렸다. “지, 지금 그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소?” “모를 리가 있나.” 그 순간 천여운이 쥐고 있던 백룡도를 수적들이 밀집된 것으로 던졌다. -슈우우욱! -푸푸푸푸푸푹! “크아악!” “크헉!” 순식간에 천여운의 손에서 벗어난 백룡도가 여섯 명이나 되는 수적들을 몸을 관통했다. 무방비로 있던 수적들은 반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몸이 꿰뚫려서, 비명과 함께 선상 바닥에 쓰러졌다. -탁! 천여운이 끌어당기는 시늉을 하자, 그들의 몸을 꿰뚫은 백룡도가 다시 오른손으로 빨려 들어왔다. 그것은 이기어도(以氣馭刀)였다. 일순간에 수하 여섯 명이 죽음을 맞이하자 노기가 치솟은 채주 복호선이 소리쳤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정녕 아기가 죽는 꼴을 보겠다는 것이냐!” 그 말에 천여운이 무표정하게 답했다. “수하들의 손끝 하나만 대면 죽인다고 하지 않았나? 명색이 여기 수적들의 수장인 것 같은데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나?” “크으으윽! 네, 네놈이 기어코 벌주를 택하는 것이구나.” 채주 복호선은 여기서 약하게 나가면 허패라는 것을 들킴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강하게 분위기를 이어가려 했다. 복호선이 손을 높이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본 채주의 손이 밑으로 떨어지면 아기를 죽여라!” “아, 알겠습니다!” 그의 장단에 맞춰서 근처에 있던 수적들이 소리쳤다. “마지막 경고다. 감 부인을 넘기지 않...” 복호선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이었다. 천여운의 신형이 흐릿해지면서 잔상이 남긴 상태로 어느새 그의 앞을 파고들었다. “이, 이런!” 놀란 복호선이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천여운의 백룡도가 더 빨랐다. 백룡도가 번개처럼 위로 솟구쳤다. -촤악! 툭! 이에 하늘 높이 들고 있던 채주 복호선의 왼팔이 잘리며 선상 바닥으로 떨어졌다. 갑자기 팔이 잘려나간 복호선이 피가 나는 단면을 부여잡고 뒤로 넘어졌다. -쿠당! “끄아아아악! 내 팔! 내 팔이 잘렸어!” 용호채의 수적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초절정의 고수인 두목이라고 해도 현경의 고수인 천여운의 앞에서는 그저 애송이에 불과했다. “채, 채주!!!” 당혹스러워하는 수적들을 바라보면서 천여운이 이죽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가만히 있지? 네놈들 채주의 손이 밑으로 떨어졌다. 명령대로 해야지. 어서?” “그, 그건....” “큭!” 선실에 있지도 않은 아기를 죽일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수적들이 어쩌지도 못하고 머뭇거리자, 천여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고통스러워하는 채주 복호선의 가슴을 괴력으로 짓밟으며 말했다. -콱! “끄아아악!” “있지도 않은 허패로 날 속일 수 있을 것 같았나?” 복호선은 하얗게 질려버린 얼굴로 그제야 인지할 수 있었다. 절대로 건들면 안 되는 존재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사실을 말이다. < 56장 선상 위의 재앙 (3) > 끝 < 56장 선상 위의 재앙 (4) > “역시 주군이셔!” 허봉이 신이 나서 외쳤다. 예전부터 어떠한 적에게도 휘둘리지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꽤 난감하다고 여겼었다. 하다 못해서 아기를 내세워 협박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반면 사 장로 양단화는 내심 무섭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허패라는 확신이 있으셨던 것일까? 가끔 교주께서는 꼭 타인의 생각이나 전음을 듣는다는 착각마저 생기게 한다.’ 천여운과 대면한 적들을 하나 같이 당황스러워 한다. 그가 그들의 계획을 관찰이라도 한 것처럼 알아채니 말이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그런 일이 있을 리는 만무하기에 대단한 배짱과 상황 판단 능력으로 볼 수 밖에 없었다. ‘그 여섯 종파를 무너뜨린 저력을 알 것만 같다.’ 오직 천여운이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판단되었다. 양단화가 힐끗 돌아서 백기의 옆에 주저앉아 있는 신의의 손녀 감미양을 바라보았다. “읍읍읍.....” 허패라는 말을 듣고서 안도하고는 다리에 힘이 풀려버린 그녀였다. 양단화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저 여자가 문제군. 쯧.' 어찌 되었거나 이곳에 아기가 없다는 것은 다시 용호채로 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자신의 아기를 지키기 위해 구출하는 자의 뒤통수를 쳤던 그녀다. 이해하지 못할 부분은 아니었지만 그 아기를 구출하지 않는다면 똑같은 일이 반복될 지도 몰랐다. 그런 양단화의 귓가로 천여운의 전음이 들려왔다. [양 장로.] [네. 교주님!] 인주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복호선을 밟고 있는 천여운의 말투에서 허패가 드러났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떻게 알아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선상에 아기가 없다는 사실을 적이 알고 있다. ‘기감으로 알아차린 것일까?’ 어찌 되었거나 인주는 눈앞의 저 괴물이 무력 이상으로 상대하기 껄끄럽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어쩔 수 없구나.’ 인주는 천여운의 신경이 온통 복호선에게로 향했을 때를 노려야 한다고 여겼다. 여기서 우물쭈물 했다가는 현경의 고수와 난전을 벌여야 한다. [효명!] [네. 주군!] 인주가 수적들의 뒤편에 가려져 있는 창천회의 무사 중 한 사람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들은 굳이 모습을 드러낼 필요가 없기에 뒤에서 대기 중이었었다. [시간을 끌고 있을 터이니, 헤엄을 쳐서라도 뭍으로 올라가서 아기를 데려와라. 혹시나 문제가 생겨서 난전이 벌어진다면 그냥 죽여도 좋다.] [아....기를 말씀입니까?] [신의가 저놈들의 뜻대로 움직이게 된다면 창천 계획에 지장이 생긴다!] [.....알겠습니다!] 여차하면 아기를 죽이라는 말에 망설여졌지만 이내 효명은 알겠다고 답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배의 후미 쪽으로 향했다. 물살이 세서 헤엄치더라도 한참 밀려나겠지만 뭍으로 올라가기만 한다면 용호채까지는 경공으로 금방 갈 수 있다. ‘허패가 진패가 되어서도 강하게 나올 수 있나 보자꾸나.’ 천여운의 발에 밟혀있는 용호채의 채주인 복호선에게 미안하기는 했지만 구해줄 수 없을 것 같다.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하니 말이다. 헤엄쳐서 건너는 시간부터 용호채에서 이곳까지 오는 거리를 친다면 적어도 이각 정도의 시각은 필요했다. “끄으으으으윽! 제, 제발!” 채주 복호선은 정말로 죽을 것만 같았다. 공력을 끌어내서 밀쳐보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공력도 그렇고 이 말도 안 되는 괴력 때문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급해진 복호선은 죽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 사로잡혀서 결국 항복의사를 밝혔다. “그, 그냥 보내줄 터이니, 아니....아기도 줄 터이니 제발 살려주시오!” 수하들이 지켜보는 앞이지만 자존심을 챙길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 천여운이 어느새 부터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뭔가 생각에 잠긴 사람처럼 말이다. “이, 이보시오?” “아아! 미안하군. 잠시 뭘 듣느라 말이야.” “본 채주가 항복한다고 하지 않았소. 제, 제발 살려주시오.” 이에 천여운이 담담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글쎄. 네놈이 항복한다고 해도 다른 한 녀석의 생각은 그렇지 않아 보이는데.” “그, 그게 무슨 소리요? 한 녀석이라면 설마?” “네놈과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것이지.” "자, 잠까아아안!" -우드드득! 채주 복호선의 가슴을 밟고 있던 천여운의 발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복호선의 가슴이 움푹 들어가면서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더니, 그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오며 비명을 질렀다. “끄릅! 끄아아아아아악!” 하지만 그 비명은 오래가지 않았다. 천여운의 발에 가슴이 완전히 함몰되면서 복호선의 숨이 끊겼기 때문이었다. “채, 채주!” “이, 이놈이 감히!” 자신들의 채주가 비참하게 죽자 이를 지켜보던 수적들 중에 분노를 이기지 못한 일부가 천여운을 향해 병장기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 “헉? 이게 무슨?” “사, 사라졌어!” 그런데 그들이 휘두른 병장기가 천여운을 통과해 지나가버렸다. 그들이 공격한 대상은 잔상에 불과했다. 어느새 천여운의 신형은 다시 양단화가 서있는 배의 머리 부근에 도달해 있었다. ‘어째서?’ 인주가 의아해했다. 채주가 자신의 입으로 항복하고서 아기를 준다고까지 했다. 충분히 솔깃할 만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천여운은 아무런 고민도 없이 그를 죽여 버렸다. ‘큭, 시간을 더 끌어야 하는데.’ 자신의 수하들이 강물로 뛰어 내린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아마 지금쯤 물살에 밀려나가면서 뭍으로 올라가려고 부단히 애쓰고 있을 것이다. 어떻게 시간을 끌어야 할지 고민하던 차에 천여운이 인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놈. 잔꾀가 많은 놈이군.” “잔꾀?” 그 말과 함께 천여운이 손으로 검결지를 만들어, 이기어도에 죽은 수적들의 시신이 있는 곳을 향해 휘젓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둥둥! 시신들의 곁에 있던 여섯 자루의 도검들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도, 도검들이?” “무, 물러섯!” 수적들 역시도 당황해서 떠오른 도검들에 우왕좌왕 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떠오른 도검들이 노린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천여운이 배의 머리 쪽으로 다가가서 강물이 있는 방향을 힐끔 쳐다보더니, 인주를 향해 큰 목소리로 말했다. “열심히 헤엄치고 있군.” 그 말을 듣는 인주의 두 눈동자가 흔들렸다. 배 갑판 쪽으로 다가가는 게 불안했는데 헤엄치고 있는 수하들의 존재를 들켰다. ‘어, 어떻게 알아차린 거지?’ 분명 죽은 용호채의 채주를 상대하는 사이에 조용히 지시를 내렸다. 아무리 기감이 넓다고 해도 삼백 명이 넘는 무인들이 포진해있는 곳에서 이것저것 신경 쓰는것은 힘들었다. “강물에서 헤엄치고 있으면 못 잡을 거라 생각했나? 그럭저럭 닿을 것 같네.” “그게 무슨?” 그때 인주의 두 눈이 커졌다. ‘서, 설마?’ 천여운이 검결지를 움직이면서 강물이 있는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둥둥 떠있던 여섯 자루의 도검이 일제히 빠른 속도로 강물 쪽을 향해 날아갔다. -슈슈슈슈슈슉! “안 돼에에에에!” 인주가 놀라서 경공을 펼쳐서 뛰어오른 후에 넓은 도신의 도를 뽑았다. 그의 도에서 푸른빛 도강이 치솟았다. 인주가 다급히 강물로 날아가는 도검을 향해 탄도강을 날렸다. -촤아아아악! 어떻게든 막으려는 발악이었지만 이미 먼저 날아간 도검을 기가 응집한 강기라고 해도 따라잡을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공력을 끌어올려서 물살을 헤치며 헤엄치고 있던 창천회의 무사들에게 봉변이 일어났다. -푸푸푸푸푹! “끄악!” “컥!” 갑작스럽게 날아온 도검에 헤엄치던 그들의 몸이 꿰뚫렸다. 물속에서 무방비로 있던 그들은 어이없이 도검에 죽음을 맞이하여 수장되고 말았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전부 도검에 맞은 것은 아니었다. “비, 빌어먹을!” “잠수해!” -푸웃! 선두에서 헤엄을 치다가 비명소리를 들은 효명과 한 사람이 물속으로 잠수했다. 단번에 헤엄치던 다섯 사람을 죽인 도검이 힘을 잃고서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투투툭! 풍덩! 거리가 점점 멀어져서 진기가 끊겼기 때문이었다. ‘아아아!’ 그것을 본 인주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무리 현경의 경지에 오른 괴물이라고 해도 저렇게 먼 거리까지 이기어검의 수법을 유지하는것은 무리였다. 두 사람만 살아남은게 그랬지만 이제 충분했다. -탁! 인주가 선상 바닥으로 내려오자 쾌재하며 소리쳤다. “아무리 그대라고 해도 저들을 막을 수 없소! 저들이 어디로 향했는지는 그대도 알 거라 생각하오. 허패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겠소?” 다시 유리한 고지에 섰다고 생각한 인주의 목소리가 득의양양해졌다. 아기를 가지고 위협하는 것이 부끄럽다는 생각 따윈 사라진지 오래였다. 이에 천여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는, “양단화.” “충!” 양단화가 들고 있던 보도를 손에서 놓자 그것이 공중에서 멈췄다.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양단화가 보도의 위로 뛰어올랐다. -탁! 그의 발이 도에 안착하자마자 천여운이 손을 좌측을 향해 길게 뻗자, 양단화를 태운 보도가 배를 벗어나 허공을 가로질렀다. “아, 아닛?” 물살이 거센 허공을 가로지른 양단화가 거의 뭍에 도착했다. 그쯤 되어서 도에 실려있던 천여운의 진기가 끊겼지만 이 정도 거리는 단숨에 뛰어넘을 수 있었다. -팟! 양단화가 힘이 약해지는 도를 박차고 경공을 펼쳐서 뭍으로 도약했다. -탁! ‘성공했다!’ 양단화 역시도 처음 도전해보는 일이었기에 내심 불안했는데, 성공하자 얼굴이 환해졌다. 이것을 보면서 인주가 놀라다 못해서 어이가 없어했다. 아직 두 명의 수하들이 강물에서 올라온 것을 보지도 못했는데, 천여운의 수하는 너무도 쉽게 뭍에 도착했다. “이, 이런 미친!” 결국 그의 입에서 거친 소리가 튀어나왔다. ‘이기어도를 이런 운송 수단으로 이용하다니?’ 생각지도 못한 발상의 전환이었다. 사실 이 방법으로 아까 전 수하들을 배 위로 올려 보낼 수도 있었지만, 너무 눈에 띠는데다가 들킬 수도 있기에 조용히 잠입하는 것을 택했던 그들이었다. 천여운이 당혹스러워하는 인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를 어찌하나? 그 아기도 내 손에 들어오게 생겼네.” 이죽거린다고 생각한 인주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소리쳤다. “빌어먹을! 아기가 있는 위치나 알고 하는 소리요?” “채주의 거처가 아닌가?” “뭣?”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천여운의 말에 죽립에 가려진 인주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정확하게 아기가 있는 위치를 알고 있었다. ‘마.....말도 안 돼!’ 처음에는 그저 아무렇지 않게 여겼는데 뭔가 이상했다. ‘채, 채주가 내게 전음으로 했던 말을 저자가 대체 어떻게 안단 말인가?’ 전음을 엿듣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능력은 사람으로 하여금 경외감만을 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경계심 혹은 두려움마저 준다. ‘아기나 신의가 문제가 아니다.’ 인주는 이제야 진짜로 위험한 것이 무엇인지 인지했다. 저 약관에 불과해 보이는 괴물은 무위만 위험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능력마저 가지고 있다. 정말 그것이 전음을 읽어내는 능력이라면 최악이라 할 수 있었다. ‘저놈을 여기서 수장시키든 도망치든지 무슨 수를 내야 해.’ < 56장 선상 위의 재앙 (4) > 끝 < 57장 죽은 자는 말이 없다.(1) > 빠른 찰나에 인주가 전력을 분석했다. 화경의 고수 한 명이 아기를 탈환하기 위해 선상에서 이탈했다. 그것이 불행 중의 다행이었다. ‘저 자가 현경의 고수이긴 하지만.’ 화경의 극에 이른 자신과 삼백 명이 넘는 수적들이 힘을 뭉친다면 저 자를 어찌 상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수에는 장사가 없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저 자를 묶어주기만 해도 충분하다.’ 죽이는 것까지도 바라지 않았다. 여차하면 저자가 이 많은 수적들을 상대하는 사이에 도망쳐서라도 이 괴물의 존재를 알려야 했다. 빠르게 계산을 끝낸 인주가 실행에 옮겼다. 인주는 배의 수장을 맡는 부채주들 중 한 사람에게 전음을 보냈다. [변 부채주! 무엇하는 것이오?] [그, 그게....] [계속 넋 놓고 있을 참이오? 그대들의 채주가 죽었소!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고작 셋에 불과하오. 삼백 명이 넘는 호걸들을 두고 무슨 짓이오?] [넋을 놓는게 아니라....] 변 부채주 뿐만이 아니라 많은 수적들이 이기어검을 비롯한 천여운의 놀라운 무위에 두려움을 느껴서 위축되어 있었다. 겁을 먹은 변 부채주에 태도에 인주가 강하게 말했다. [그대의 채주와 본 회에서 맺은 맹약을 어길 참이오!] [매, 맹약이야 알지만 저 괴물을 무슨 수로 죽인단 말이오?] 변 부채주의 전음에 인주가 신경질이 났다. 이들을 움직여서라도 막으려고 했는데 이렇게 겁을 먹을 줄은 몰랐다. 아무리 호전적이고 막무가내인 사파의 수적들이라고 해도 압도적인 무력 앞에 공포를 모르는것이 아니었다. [고작 한 명이오! 수로십팔채의 호걸이라는 분들이 겁을 먹어서 그냥 가만히 당할 작...]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날카로운 예기가 느껴졌다. 자신의 목을 노리는 차가운 감각에 인주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꺾었다. -슉! 푸른빛의 탄도강이 그의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인주의 두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금만 늦었어도 자신의 목을 노리는 도강에 저 세상으로 갈 뻔했다. -촤촤촤촤촤?! “크악!” “컥!” 그러나 그가 피하는 바람에 뒤에 있던 수적들이 도강을 직격으로 맞고 말았다. 덕분에 열 명이 넘는 수적들의 목과 가슴이 갈라졌다. 피 분수가 뿜어져 나오며 선상을 적셨다. -슉! “헛?” 어느새 인주 앞으로 천여운의 신형이 도달했다. 인주가 젖혔던 상태로 몸을 왼쪽으로 빙글 돌면서 넓은 도신을 가진 보도로 몸을 감쌌다. 그것을 천여운이 내리쳤다. -깡! 쾅! “크헉!” 도신으로 막았지만 심후한 공력에 인주의 몸이 선상 바닥을 곤두박질쳤다. 나무로 만든 선상바닥에 패이면서 그의 몸의 일부가 박혔다. ‘무, 무슨 공력이?’ 분명 무위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각오는 했는데, 공력의 거의 두 배에 이르니 막는 것조차도 버거웠다. 용케 도병에서 손을 놓지 않았지만 손가락이 떨려왔다. “네놈이 잔머리를 굴릴 틈을 줄 것 같으냐.” 그 말에 인주의 두 눈동자가 흔들렸다. ‘여, 역시 이놈은 전음을 엿듣는 것이 가능하다.’ 인주가 이번에 전음을 보낸 것은 수적들을 움직이려고 한 것도 있었지만 천여운의 능력을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전음을 듣는다면 어떤 식으로든 제지하리라 여겼다. ‘도망쳐야 해.’ 인주가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 백룡도를 밀어내는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등 쪽으로 공력을 모아서 천여운의 꼼짝 못하게 억누르는 힘을 이용했다. -콰지직! 일부만 박혀있던 인주의 몸이 선상 바닥을 뚫고서 밑으로 떨어졌다. 인주는 이 상태에서 싸움을 포기하고 선단의 밑을 뚫고서 도망칠 계획이었다. ‘수적들 사이에 신의의 손녀와 수하들을 두고서 나를 쫓진 못하겠지.’ 선상 바닥을 뚫고서 선실로 떨어지는 그는 그대로 몸을 비틀어서 도강을 만들어내 선실 바닥을 뚫으려고 했다. 그러나, -우우웅! “아닛?” 바닥으로 떨어지던 그의 몸이 허공에서 멈춰 섰다. 천여운이 허공섭물로 떨어지는 그의 몸을 붙잡은 것이었다. ‘큭,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허공섭물로 나를 붙잡아 두려고 하다니?’ 허공섭물로 상대를 제지하는 것은 화경 미만의 고수들에게나 통하는 수법이었다. 스스로의 기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화경의 고수는 상대의 진기를 차단해낼 수 있다. “하압!” -팡! 인주가 전신에 반탄기를 일으켜서 몸을 억류하는 진기의 힘을 풀어냈다. 바로 그 순간 인주의 눈에 당혹감이 서렸다. 아주 잠깐 허공섭물로 멈춰서는 사이에 천여운이 선실 바닥으로 내려와 있는 것이 아닌가. “어, 언제? 빌어먹을!” 인주가 낙하하는 상태로 다급히 도초를 펼쳤다. 화경의 고수답게 고절한 도초였다. 그의 도강이 실린 도초가 선실 바닥에 내려와 있는 천여운을 덮쳤다. “네놈의 실수다. 고지를 버리고 저지를 점하다니!” 놀라기는 했지만 위치적으로는 자신이 우위였다. 그런데 그의 패도적인 도초에도 천여운의 눈빛은 담담하기만 했다. “실수? 과연 그럴까?” 그 말과 함께 천여운의 백룡도에서 뻗어나온 날카로운 도강이 회오리를 치듯이 인주에게로 솟구쳤다. 극도신무의 절초 중의 하나인 회룡승천(回龍昇天)이다. -채채채채챙! “어엇?” ‘이, 이럴 수가? 밑으로 내려찍는 힘이 더 강할 터인데?’ -채챙! 일순간에 인주가 펼치던 도초가 위로 솟구치는 회룡승천의 도초에 파훼되고 말았다. 패도적인 도세의 위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초식을 파훼한 도강이 여전히 회오리를 치면서 인주의 몸을 찢어버릴 기세로 휘감고 말았다. ‘도, 도강이 몸을?’ 선상 위에 있는 수적들이 선실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숨을 죽이고, 바닥에 구멍이 난 곳을 바라보았다. 병장기 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격하게 싸우고 있는 것 같았는데, 일순간 고요해졌다. “끝난 건가?” 바로 그 순간 선상 바닥을 뚫고서 인주의 몸이 떠올랐다. -콰앙! “헉!” 그 뒤를 따라 천여운의 신형이 승천하는 용처럼 백룡도를 휘두르며 솟구쳤다. -촤촤촤촤촤?! “컥컥컥컥!” 인주의 몸을 두르고 있는 회오리 형태의 도강이 좁혀지며 그의 몸을 난자했다. 몸을 완전히 가른 것이 아니었지만 피부의 겉면이 찢겨나가서 눈을 뜨고 지켜보기 힘들 정도로 잔인했다. 당하고 있는 인주는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직 죽게 둘 순 없지.’ 천여운이 도초를 펼치던 손의 움직임을 바꾸어 변초를 썼다. -촤촤?! 회오리를 치며 그의 몸을 완전히 찢어버리려고 하던 도강의 기세가 약해지더니, 이내 그의 양 팔꿈치가 싹둑 잘려나갔다. “끄아아아아악!” -쿵! 양 팔꿈치까지 잘려나간 인주가 선상 바닥으로 떨어졌다. 피부가 갈가리 찢겨나가고 팔꿈치가 잘린 고통 때문에 인주는 비명만 질러댔다. 그런 그에게로 천여운이 다가왔다. “죽립이 부서졌는데도 얼굴을 못 알아보겠군. 뭐 상관없다.” 천여운의 그의 단전에 손을 얹었다. 고통스러워하던 인주가 화들짝 놀라서는 소리쳤다. “끄으으윽! 자, 잠깐! 지금 무얼 하려고?” “이런 짓.” -우직! “끄아아아아악!” 심후한 내력으로 인주의 단전을 일순간에 파괴시켜 버렸다. 양 팔꿈치에 이어서 단전까지 파괴당한 인주는 극한의 고통으로 두 눈이 뒤집혀서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타타타탁! 그런 인주의 몸에 천여운이 혈도를 눌러서 지혈시켰다. 그리고는 그의 몸을 허공섭물로 띄어서는 허봉과 백기가 서있는 곳으로 날려 보내며 소리쳤다. “허봉. 죽지 않게 해 놔라.” “넵!” 인주까지 해결한 천여운이 냉정한 눈빛으로 수적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네놈들 차례다.” 애초에 상대가 약하든 강하든 후환을 두지 않는 천여운이었다. 단 한 사람에 불과했으나 그 위압감은 좌중을 휘어잡고도 남을 만큼 강렬했다. “히이익!” 채주마저 꼼짝 못하는 화경의 고수 인주가 무력하게 당한 것까지 보고나자 용호채 수적들의 통제심이 박살나고 말았다. “괴, 괴물!” 공포심으로 질려버린 그들이 혼비백산 흩어지며 소리쳤다. 용호채의 간부급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도, 도망쳐!” “물로 뛰어들어라!” 이미 그들의 머릿속에는 수적으로 훨씬 우위라는 것도 사라졌다. 유속이 심해서 헤엄치기 힘들다는 것도 상관없었다. 자신들이 어떤 식으로 대항한다고 해도 저 괴물을 감당할 수 없다고 머릿속에 박혀버렸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전부 흩어져서 도망치는 편이 한 사람이라도 살아남을 방법이었다. 그러나, “누가 도망치게 둔다고 했지.” 천여운이 두 손을 들어 올리는 시늉을 하자, 수적들이 도망치기 위해 떨어뜨린 병장기들이 허공으로 일제히 떠올랐다. 그 숫자가 육십 여개 정도였다. 천여운이 나노에게 명했다. ‘나노. 판넬 시스템.’ 이에 나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사용자의 명령에 의거하여 63개의 병장기에 판넬(Funnel) 원격 조정 시스템을 가동합니다. 타겟(Target) 락 온(lock on)] -삐삐삐삐삐삐삐삐삐! 천여운의 시야로 증강현실이 개안되며 붉은 입자들이 십자 형태로 빠르게 생성되면서 선상에서 도망치고 강물에 뛰어드려는 수적들을 조준 겨냥했다. -슈슈슈슈슈! 허공으로 떠오른 병장기들이 배의 바깥쪽으로 포위하듯이 둘러쌌다. 강물에 뛰어내리려던 수적들이 허공에 떠있는 병장기들에 놀라서 일제히 멈춰 섰다. 자신들을 향한 병장기들의 날 끝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 이게 대체?” “이....이건 너무 많잖아!” 수적들은 경악한 나머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들 역시도 무림인으로 수많은 경험이 있었지만 한 번도 이런 사기적인 능력은 들어본 적도 본 적도 없었다. 천여운이 방아쇠를 잡아당기듯 두 손가락을 모은 검결지를 잡아당겼다. [판넬(Funnel). 가동.] 나노의 목소리가 끝남과 동시에 육십세 개의 검이 일제히 움직였다. -촤촤촤촤촤촤촤촤촤! 그 위용은 강 한 복판에 있는 선상 위에 엄청난 장관을 만들어냈다. 수많은 검들은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며 수적들을 죽이기 위해 하나씩 쇄도했다. “마, 말도 안 돼!” “도망쳐!” 선상에 난리가 났다. 어떻게든 도망치려는 이들부터 시작해 날아오는 도검들을 막으려는 이들까지 전장을 방불케 했다. 그러나 그 전장은 말 그대로 학살에 가까웠다. 날아다니는 병장기들이 배 바깥으로 뛰어내리지 못하게 만드는 바람에 선상은 점차 피로 물들어갔다. -푹! “끄악!” -푹! “컥!” 순식간에 수십 명의 수적들의 몸이 이기어검, 이기어도에 꿰뚫렸다. 녹이 슬고 부서져가는 검으로도 극도육무문의 일류 고수들로 이루어진 복면인들을 학살했던 기술이었다. 멀쩡한 검에다가 그 숫자를 줄이니 살상율이 더욱 올라갔다. “이, 이 악마 같은!” 수많은 수적들이 무참히 죽어감에도 천여운의 눈빛에는 한 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마치 당연한 일을 하는 것처럼 그들의 죽음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러다 전부 죽겠어! 버, 벗어나야 하는데.” 배들이 쇠사슬에 연결되어 합쳐져 있는 바람에 이기어검이라는 쇠창살에 갇혀서 도망도 못가고 죽어가고 있다. 그때 한 간부 급의 수적이 뭔가를 떠올렸다. “그, 그래! 배에 연결된 쇠사슬을 끊어라!” 이기어검이라고 해도 거리가 멀어질수록 진기가 끊기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유속이 빠르기에 배를 분단시켜서 벗어나는 방법을 떠올렸다. ‘어차피 전부 살아남는 건 무리다. 배를 전부 끊어서 살 놈들이라도 살아야 한다!’ 벌써 그 많은 인원의 삼 할 가까이나 죽었다. 전부 죽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어서!” “빨리 끊어!” 천여운이 있는 배에서 다른 배 쪽으로 도망간 수적들이 배마다 연결된 쇠사슬을 내리치며 끊어내려고 했다. -챙! 챙! 그때 수적들을 학살하던 병장기들의 일부가 날아와 쇠사슬을 끊었다. “엇?” “어, 어째서?” 자신들을 살려줄 리가 만무했는데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슉! 슉! 쾅! 쾅! 수적들을 학살하고 있던 병장기의 일부가 갑자기 방향을 틀면서 선단의 바닥을 파고들었다. 선단 바닥에 구멍이 뚫리기 시작하자 배가 기우뚱거렸다. -들썩! 배 안으로 물이 차오른 것이었다. “헉! 배, 배를?” “이런 제기랄! 배를 노린 거였어!” 천여운은 자신이 타고 있는 배를 제외하고 모든 것을 강물 아래로 가라앉힐 요량이었다. 그러나 그 가라앉는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물에 뛰어내릴 수 없기에 배의 연결을 끊어서 도망치려고 했던 수적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유일하게 도망칠 수 있는 활로마저 끊겨버렸다. “다, 닻이라도 올려!” “알겠습니다!” 배가 가라앉더라도 닻을 올려서 강물의 유속에 밀리기를 바랐다. 그러나 물이 차오르기 시작한 배가 닻을 올린다고 해서 쉽게 떠밀릴 리가 만무했다. “아, 안됩니다! 배가 움직...컥!” -푹! 어떻게든 배를 움직여 보려 했던 수적의 가슴을 검 한 자루가 꿰뚫었다. “대고오오옥!!!” -털썩! 그 모습에 배를 분단시키려고 지휘했던 간부급 수적의 두 눈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떨리는 눈으로 천여운을 바라보았다. “저....저 괴물은 진정 지옥의 악마란 말인가.” 정말 배 위에 있는 모든 것을 죽일 작정으로 보였다. 천여운이 양손을 휘저을 때마다 터져 나오는 비명들은 죽음의 만가 그 자체였다. -슉! 푹! 푹! 푹! “끄악!” “컥!” 검에 꿰뚫려서 죽어가는 수적들은 깨달았다. 자신들의 배에 최악의 재앙이 닥쳐왔다는 것을 말이다. < 57장 죽은 자는 말이 없다.(1) > 끝 < 57장 죽은 자는 말이 없다.(2) > “읍읍!” 혈도가 점해진 신의의 손녀 감미양이 신음성을 냈다. 수많은 수적들이 죽어나가는 광경을 바라보는 감미양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었다. 훈혈이 점해졌어도 그녀의 흐르는 눈물을 막지는 못했다. -주르륵! 그것을 보고 있던 백기가 조용히 그녀의 몸을 뒤로 돌렸다. 아무리 수적들이라고는 하나 잔인하게 죽어가는 모습에 그녀가 고통스러워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눈빛은 끔찍해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왠지 모르게 슬퍼보였다. 뭔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느낌이다. “이제 곧 끝나니 조금만 참으시오. 곧 아기도 데려올 것이오.” 백기가 달래듯이 말했다. 그런데 그녀는 오히려 눈을 부릅뜨고서 노려보았다. “읍읍!” 마치 혈도를 풀어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아기가 인질로 잡혀있다고는 하나, 한번 뒤통수를 쳤던 여인이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을 리가 없다고 여긴 백기는 그 눈빛을 무시했다. 허봉이 슬쩍 쳐다보고는 전음을 보냈다. [이런 말은 안하려고 했는데, 구해주는데 되게 노려보네요. 그죠?] ‘........’ 입술이 튀어나온 허봉의 표정에 백기는 입을 다물었다. 한편 용호채로 아기를 구하기 위해 향했던 사 장로 양단화는 감시 망루에 있던 수적들을 전부 제거하고 오두막이 반쯤 해체된 수로채에 진입했다. 확실히 사전에 준비된 함정이 맞았는지 수로채에 인기척이 거의 없었다. ‘남은 자들은 여인들과 아이들뿐인가.’ 전투가 가능한 수적들은 전부 선단에 있는 듯 했다. 기껏해야 망루에 있는 감시자들과 수로채를 돌아다니며 경계를 서는 열 명 남짓 되는 수적들이 전부였다. -우득! “컥!” 기척도 없이 다가온 양단화의 손에 수적 한 사람의 목이 옆으로 돌아갔다. 조용히 양단화는 죽은 수적의 시신을 구석으로 숨겼다. ‘총 아홉 명.’ 양단화는 조용히 불침번을 서는 수적들을 하나씩 전부 죽여 나갔다. 사실 그들의 정체를 모르기에 굳이 수로채에 있는 자들을 죽일 필요는 없었지만 후환을 남겨봐야 좋을 게 없었다. ‘오두막에 있는 여인들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 어차피 수로채 안에만 있던 이들이 정체를 알기도 어려울 것이다. 선단에서도 그 죽립을 쓰고 있는 자도 천여운 일행을 극도육무문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저곳인가?’ 양단화는 금방 채주의 오두막을 찾을 수 있었다. 가장 화려한 오두막이기에 눈에 띨 수밖에 없었다. 오두막 위에 오려진 호피 가죽만 보더라도 나의 위엄을 보라고 말하는 듯 했다. ‘안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둘.’ 새근거리는 소리와 방안을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발걸음 소리였다. 양단화가 오두막의 입구를 조심스럽게 열어서 안으로 들어갔다. 오두막 안에서 아기를 끌어안고서 흔들고 있던 중년의 여인이 놀라서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꺄아...” -타타탁! 양단화가 그녀의 훈혈을 집어서 기절시켰다. 넘어지면서 떨어뜨리려고 하는 포대에 감싸고 있는 아기를 받았다. -탁! 받아낸 아기가 울려고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잠이 들도록 혈을 눌렀다. 아직 어린 아기에게 아혈을 점하면 호흡 곤란으로 죽을 수도 있기에 이게 최선이었다. -슥! 양단화가 자신에 발목에 걸쳐져, 넘어질 때 소리가 나는 것을 방지했던 중년의 여인을 씁쓸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보모에 불과한 여인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일순간이나마 자신의 얼굴을 보았으니 말이다. -우드득! 양단화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목을 꺾어버렸다. 죽어서 싸늘하게 식어가는 여인을 남겨둔 채, 그는 아이를 안고서 오두막을 벗어났다. 수로채를 벗어난 양단화는 경공을 펼쳐서 선단이 떠있던 곳으로 강변으로 왔다. “아!” 양단화의 입에서 놀라움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떠나기 전만 하더라도 일촉즉발의 싸움이 벌어지기 전이었는데, 쇠사슬로 연결되어있던 다섯 대의 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짐을 싣고 있던 큰 배마저도 선의 머리만 빼놓고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이 짧은 시간 안에 몰살시키시다니?’ 천여운의 괴물 같은 무위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현경의 경지는 중원 무림의 정점이라 불리는 오대 고수에 견줄 만한 무위이니 말이다. 다만 그 속도가 굉장히 빨랐다. ‘그때 그 수법을 쓰신 건가?’ 아직도 머릿속에서 그 광경이 잊혀지지 않았다. 백 자루가 넘는 이기어검이 허공에 수를 놓으며 일으킨 살육의 현장. 그것은 그가 보았던 어떠한 강자들도 할 수 없었던 기술이었다. 아군인 그조차도 공포심으로 물들게 만들 정도였다. [양 장로님. 이쪽입니다!] 그의 귓가로 허봉의 전음이 들려왔다. 기척이 느껴지는 방향을 쳐다보자 산으로 올라가는 중턱에 손을 흔드는 허봉이 보였다. 산 중턱까지 올라가 보니 수풀이 우거진 곳에 일행이 있었다. “내리신 명을 이행했습니다.” “수고했어요.” 아기를 보이자 천여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칭찬했다. 양단화가 문득 옆을 쳐다보니, 한쪽 편에서 백기가 전신의 피부에 피고름이 말라붙어 있는 처참한 몰골의 사내를 줄로 나무에 고정시키고 있었다. 양 팔꿈치가 잘려있는 모습만 보아도, ‘교주님의 작품이구나.’ 바로 알아챘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천여운의 손에 닿는 자들은 팔 한 짝은 기본으로 날아가는 듯 했다. 생각해보면 소교주 후보자들의 절반 이상이 팔이 잘렸다고 들었다. 이를 떠올리니 괜히 오른팔에 닭살이 돋았다. ‘응?’ 그런데 한쪽 편에 있는 신의의 손녀 감미양의 상태가 이상했다. 혈도가 점해져서 움직이지 못하는 그녀가 연신 눈물을 흘리면서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허 부관. 왜 저러는 건가?” “모르겠네요. 일단 상태가 이상해서 점혈을 풀지 않았는데 계속 저러고 있습니다. 심지어 저희를 원수처럼 노려보던데요.” “원수?” 양단화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까지 아기가 붙잡혀 있어서 불안해하고 있다고 여겼다. 양단화가 안고 있는 아기를 데려가서 그녀의 앞에 보였다. “아기는 무사히 구해왔소.” 몸을 떨고 있던 감미양이 아이를 보자 방금 전과 다르게 눈동자에 안도의 빛이 서렸다. 어미의 마음이라는 것일까? 그 모습을 지켜본 천여운이 그녀의 점혈을 풀어주라고 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불안정했지만 아기가 있으니, 차차 괜찮아 질 거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타타타탁! 막상 양단화가 점혈을 풀어주자, “아아아악!!!” 감미양이 고막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러댔다. 그 시끄러운 소리에 한참을 기절해 있던 인주마저도 깰 정도였다. 정신 차린 인주는 실눈으로 주변 상황을 보고서야 자신이 죽지 않고 잡혀 왔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이를 어찌 해야 하나.’ 당혹스러운 것도 잠시였고 인주는 일단 눈을 감고서 기절한 척했다. 어차피 줄로 묶여 있어서 도망칠 수도 없으니 말이다. -콱! “읍읍!” 당황한 양단화가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다시 혈도를 점할까 하다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기에 물어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오?” 양단화의 물음에 입이 틀어 막힌 그녀가 씩씩거리며 뭔가를 말하고 싶어했다. “소리를 지른다면 다시 혈도를 점하겠소.” 이에 그녀가 눈동자를 위 아래로 움직였다. 양단화가 막고 있던 입에 손을 떼자 감미양이 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아....하아....당신들이 내 부군을 수장시켰는데 용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요?” “부군?” 뜬금없는 부군이라는 말에 양단화를 비롯한 백기, 허봉 등이 인상을 찡그렸다. 대체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양단화가 설마 하는 마음에 물었다. “혹시 그 부채주라는 자를 말하는 것이오?” “그래요. 당신들은 그분이 제 부군인 것을 들었으면서도 죽게 내버려뒀어요!” 놀랍게도 감미양은 용호채의 부채주란 자를 정말 부군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백기가 그때 그녀의 눈물을 떠올리며 기가 찼다. ‘정말로 슬퍼서 흘린 눈물이란 말인가?’ 당시에는 잔혹한 광경을 이기지 못해서 두려워서인 줄만 알았다. 배가 가라앉자 경기를 일으킨 것도 선실에 혈도가 점해진 채 기절해 있는 부채주가 살아있는 채로 수장되었기 때문이었다. 한 번 말문이 트인 그녀는 심지어 천여운을 노려보면 말했다. “그리고 어떻게 호걸 분들을....그 분들을 그렇게 잔인하게 죽인 것이죠? 힘을 가졌다고 해서 그 많은 사람을 학살하다니. 당신은 정말 악마에요!” “악마라.....” 이성을 잃을 만큼 화를 내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천여운의 그런 괴물 같은 무위나 학살에 기가 질려서 겁을 먹을 만도 했지만 그녀는 거침이 없었다. ‘이, 이 여자가 정말 미쳤나?’ 순간 허봉의 표정이 벙 찌고 말았다. 천여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태도에 그마저도 의문이 갈 정도였다. 자백제에 의해 무당패검 현운자가 그 입으로 직접 신의의 소녀가 납치당한 것이라고 말했었다. ‘납치를 당했다는 여자가 어째서 수적들을 두둔하는 거지?’ 그런 그의 머릿속에 나노의 목소리가 울렸다. [스톡홀름 증후군 (Stockholm症候群)으로 판단됩니다.] ‘스톡홀름 증후군?’ [공포심으로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가해자에게 연민이나 정신적으로 동조하는 증세입니다. 그것이 과할 경우 사랑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 그딴 증상도 있나.’ 나노의 설명을 들어도 전혀 납득이 가지 않았다. 한편 나무에 묶인 채로 기절한 척하면서 이 상황을 몰래 엿듣고 있는 인주가 내심 즐거워했다. 그는 사실 이 같은 일을 여러 차례 보고 받았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다. ‘신의의 손녀가 용호채의 부채주와 맺어진 후로 그들과 긴밀한 관계가 되었다고 하더니 사실이구나. 후후후.’ 그렇기에 그녀가 인주가 만든 함정을 도운 것이기도 했다. 그녀는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만 협조한 것이 아니었다. 감미양에게 있어서 남편과 아이가 머물고 있는 용호채는 가족이자 동료나 다름없었다. 일 년이라는 기간이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희생이 많았지만 그나마 다행일 지도 모른다. 저들이 신의의 손녀의 반감을 샀으니, 뜻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인주의 예상대로 되는 것일까? 감미양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천여운과 수하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할머니의 부탁을 받고 왔다고요? 그럼 당신들의 목적도 뻔하겠군요. 날 데려가는 대가로 할머니께 부탁해서 누군가를 살리는 게 목적이겠죠.” 감미양은 생각 외로 똑똑했다. 정확한 것은 아니었지만 맥락이 비슷하기는 했다. 단순히 원하는 태상교주를 살리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영원히 천여운에게 충성하는 대가가 걸려 있지만 말이다. “진정하시오. 우리는 정말 그대의 조모님의 부탁을 받고 온 것이오. 납치를 당했다고 들었는데 다가, 채주란 자가 아기로 협박을 했는데 우리가 어찌 세세한 사정까지 안단 말이오?” 결국 양단화가 오해를 풀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한 자가 말 한마디에 마음이 바뀔 리가 없었다. 감미양이 악에 받쳐서 소리쳤다. “흥! 우습군요. 설사 그렇다고 해도 타인의 소중한 사람들을 해하고 그런 것을 원하다니!” “허어.....의도한 것이 아니오. 그리고 몰랐다고 하지 않았소.” “모르면 모든 게 해결 되나요? 여기서 확실하게 말씀드리죠. 절대로 당신들은 원하는 걸 얻을 수 없을 거에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벙 쪄 있던 허봉이 눈매가 날카로워져서 물었다. 감미양은 한이 맺힌 목소리로 저주하듯이 모두에게 말했다. “할머니께 저는 가지 않을 겁니다. 만약에 강제로 끌고 가려 한다면 할머니께 당신들이 원하는것을 이루지 못하게 말씀드릴 거에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요! 당신들도 소중한 것을 잃어봐야 그 고통을 알 거에요!” 자신의 모든 것을 동원해서라도 방해하겠다고 공포를 놓는 그녀였다. 기껏 물에 빠진 것을 구해놨더니 짐 보따리를 내놓으라는 격이었다.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크큭, 재미있구나. 기껏 신의의 손녀를 얻었더니 반감이란 반감은 전부 샀구나. 꼴좋다. 네놈들은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기절한 척 하고 있는 인주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구해야 하는 인질이 짐 덩어리가 되었으니 고생길이 훤해 보였다. 데려는 가야 하는데, 데려가도 도움은커녕 방해만 되는 자가 되어버린 셈이었다. 말 그대로 계륵(鷄肋)인 셈이었다. ‘본주를 이런 몰골로 만든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구나.’ 그렇게 좋아하고 있는데, 허봉의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참으로 안타깝네요. 당신은 우리를 정파 나부랭이들처럼 생각했나 보군요. 뭐 그게 아니더라도 저희 교주님을 몰라도 한참 모르네요.” “교주님?” 허봉의 말에 악에 받쳐 있던 그녀의 두 눈이 둥그레졌다. 그것은 눈을 감고 있는 인주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중원 무림에서 교주라는 칭호를 쓰는 자는 오직 단 한 사람뿐이었다. ‘교주라니? 서, 설마......’ 놀라거나 말거나 천여운이 그녀를 차갑게 식은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위압적으로 말했다. “소중한 사람을 잃는 고통을 그대만 알 거라고 생각하나?” “그, 그건!” “그대가 납치한 대상들에게 사랑에 빠지든 그들을 소중하게 여기든 내 알바가 아니다.” 냉정한 그의 말에 감미양은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뭔가 그녀가 생각했던 반응과는 완전히 달랐다. 원하는 것이 있는 자들이기에 자신의 원한과 분노를 달래기 위해 애를 쓰거나 곤욕스러워 하리라고 여겼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를 방해한다고 말했나?” “다, 당연한 게 아닌가요. 부군을 수장시킨 당신들을 내가 도울....” 뒷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 모두가 무정하면서도 한없이 차가웠기 때문이었다. 천여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그대가 어떤 식으로 지껄여도 우리는 데려갈 것이다.” 강제로 데려간다는 의사에 그녀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흥! 절 데려간다 해도 소용없어요. 할머니께 절대로 당신들을 돕지 못하게...” “과연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뭐, 뭐라고요?”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지." "!?" 순간 감미양은 자신의 귀가 잘못 되었는지 착각했다. 그 말에 깜짝 놀라기는 기절한 척 하고 있는 인주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생각하나요? 양 장로.” “난전 속에서 인질이 죽는 일은 다반사입니다. 시신만 수습하더라도 감지덕지죠. 신의도 슬퍼하겠지만 어쩔 수 있겠습니까.” 사 장로 양단화의 대답에 그녀의 인상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들의 말투는 보통 정파인들이나 혹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사고와는 완전히 달랐다. “자, 잠깐만요. 서, 설마 저를 죽일 생각인건가요? 다....당신! 제 정신인가요? 저를 구하러 오셨잖아요.” "효용성이 있기 때문에 구한 거다." "효, 효용성?" "그대는 신의의 손녀라는 것 외에는 아무 쓸모가 없거든. 그런데 스스로 그 가치를 버렸지." "그, 그런!" 사람은 때로 목숨을 위협받으면 생각이 달라지곤 한다. 분노에 사로잡혀서 앞뒤를 가리지 못했던 이성이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다. 천여운이 속삭이듯이 그녀에게 말했다. “다행이군. 그대의 아이가 잠이 들어있어서 말이야.” 살기 어린 목소리에 감미양이 안색이 하얗게 질려서 외쳤다. “이, 이 악마 같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천여운이 손을 옆으로 휘저었다. 그러자 그녀의 목이 심후한 공력에 의해 강제로 옆으로 돌아갔다. -우드득! “컥!”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감미양은 목뼈가 꺾여서 그대로 죽고 말았다. 분노에 사로잡혔다고 하지만 상대를 가리지 못한 호기로 목숨을 잃은 것이었다. ‘헉!’ 이 소리를 들은 인주는 순간 호흡이 멎을 것만 같았다. ‘이, 이놈들 정녕 미친 자들이 아닌가. 정말로 죽이다니?’ 설마 신의를 움직일 수 있는 중요한 패인 그 손녀를 망설임도 없이 죽여 버릴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것도 잠들어 있다고는 하지만 아기가 있는 앞에서 말이다. 이 상황에 어이가 없어하는데 그의 귓가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터벅터벅! 그리고는, -콱! “켁!” 발걸음의 주인이 그의 목을 움켜잡았다. 화들짝 놀라서 눈을 떠보니 목을 잡은 천여운이 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강한 불쾌함으로 가득했다. “눈을 감고 있으면 모를 줄 알았나?” '!!!' 인주의 두 눈동자가 흔들렸다. 기절했을 때와 호흡이 달라졌는데 천여운이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런 인주를 바라보며 천여운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이제 네 차례다.” -오싹! 인주는 살면서 처음으로 심장이 덜컥거리는 감정을 경험했다. < 57장 죽은 자는 말이 없다.(2) > 끝 < 58장 오대고수의 전인 (1) > 횃불 몇 개만이 밝히고 있는 어두운 밤. 황산의 숲에 둘러싸여 가려진 용호채로 누군가 나타났다. 걸음 소리가 작고 일정한 발걸음을 가진 그는 무림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기척을 감지하기 어려운 것치고는 이 낯선 방문자는 눈에 띨 수밖에 없었다. 등에 교차로 차고 있는 상당한 크기의 두 개의 대검(大劍). 그리고 한 쪽 어깨에 걸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산중왕이라 불리는 범이었다. 죽어서 늘어진 범을 가지고 용호채 내로 들어온 것이었다. -화르르륵! 용호채 내로 들어선 그의 얼굴이 일렁이는 횃불에 드러났다. 헝클어진 머리에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털옷을 입었는데, 많이 봐줘도 이십대 중반에 불과한 청년이었다. “응?” 용호채로 들어온 청년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이상하네. 이 시간 때쯤이면 수적 녀석들도 전부 들어와서 쉬었던 것 같은데.’ 청년이 느끼기에는 용호채에 있는 기척이라고는 오십여 명에 불과했는데, 전부 여인과 어린아이들 정도인 것 같았다. ‘뭐,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지.’ 어차피 이들이 어디를 나가든 관심이 없었다. 자신의 볼 일은 ‘그녀’에게 있으니까 말이다. 청년은 익숙하게 용호채의 어딘가로 향했다. 그곳은 용호채에서도 채주인 복호선의 오두막보다는 작았지만 다른 일반 수적들의 것보다는 훨씬 큰 규모를 가진 곳이었다. 울타리가 쳐져 있는 오두막으로 다가가던 청년이 멈춰 섰다. 미묘한 느낌을 받은 그는 바로 울타리 안쪽의 항아리들을 모아놓은 곳으로 가보았다. “어?” 그곳에 수적으로 보이는 사내가 몸이 접혀서 죽어있었다. 숙여서 이 자를 살펴보니, 정확한 사인은 목이 부러져서 죽은 듯 했다. ‘시신을 몰래 숨기기 위해 허리를 접은 건가?’ 죽어있는 수적의 시체를 발견한 청년은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쿵! 울타리 안에 죽은 범의 사체를 내려놓은 그가 오두막을 두드렸다. 솔직히 말하면 ‘그녀’와 그 남편이란 놈이 있어야 할 방안에 아무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유모가 있어야 할 오두막의 방안에도 말이다. ‘약을 받아야 하는데. 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가 오두막의 한 방에 들어가 보았다. 그곳은 약재실처럼 꾸며져 있었는데 혹시나 그곳에 만들어놓은 물건이 있나 싶어 확인했다. 그러나 약재들은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조합된 환약 같은 것이 없었다. “칫. 이 정도로 자주 왔으면 여분 정도는 만들어놨겠다.” 혀를 차면서 청년이 약재실을 나와 어딘가로 향했다. 그곳은 근방에 있는 오두막 중 하나였다. 오두막 중 한 곳에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에 말을 묻기 위해서였다. -쿵쿵! 두드리는 소리에 오두막 방안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중년의 여인 한 명이 잠에 깨서 초췌한 얼굴로 나왔다. “아니. 누가 이 밤중에 두드리는....아?” 청년을 본 중년의 여인이 화들짝 놀라했다. 그를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놀란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대, 대협께서 어찌 제 오두막에 오신 겁니까? 감 부인을 찾아온 게 아닙....아!” 중년의 여인은 지금 용호채에 그녀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긴 그렇지 않고 이 청년이 근방의 거처에 살고 있는 자신을 찾아올 리가 없었다. “어디에 있어?” “가, 감 부인을 말씀하시는 거죠?” “그래.” 중년의 여인은 그녀가 지금 강 위에 있는 합쳐진 선단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 위치를 알려주자 청년은 고맙다는 말 한마디와 함께 사라졌다. 청년이 사라지자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중년의 여인이 문지방에 털썩 주저앉아서 중얼거렸다. “어휴. 간 떨어질 뻔 했네. 이래서 채를 얼른 옮겨야 해.” 청년이 나타날 때마다 두렵다. 혹시나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서 그 괴물 같은 자가 모습을 드러낼까봐 말이다. 한편 같은 시각. 용호채의 전투선과 수적들이 수장당한 곳의 앞에 자리하고 있는 산중턱. 그곳에서는 누군가의 심문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큰 나무에 묶여 있는 전신의 피부가 찢겨져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는 사내가 있다. 그는 수적들에게 인주라 불리는 자였다. 인주라 불리는 자는 두 눈동자의 동공이 풀려서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상이....창천회....의 조직 구조요.” “흠.” 그 앞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 자들은 천여운과 그 수하들이었다. 사 장로 양단화가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정파에서도 이런 급진주의자들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이에 허봉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완전 미친놈들인데요. 정파의 세상이야 뭐 그렇다 치고 사파와 본교와 관련된 자들은 구족까지 깡그리 죽이겠다는 발상 자체가 웃기네요.” 창천회(蒼天會). 푸른 하늘을 만들기 위해 뭉쳤다는 정파의 비밀 조직이다. 그들은 정파 내에서도 대문파나 큰 힘을 가진 자들이 뭉쳐서 만든 조직이라고 한다. 정도를 지향하는 정파 내에서도 가장 급진주의자들로 뭉쳐졌다. 자백제와 최면에 걸린 인주는 창천회의 목적과 조직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말해주었다. “거의 망상 수준인데요.” 허봉이 이렇게 열을 내는 것은 그들의 목적에 있었다. 앞서 그가 말한 대로 창천회의 목적은 그들의 정의에 벗어나는 자들을 전부 몰살시켜 정도의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은 정파에서 지향하는 이념과는 거리가 멀었다. “굳이 정파라는 이름을 내세울 자격이 없군.” 백기도 혀를 차면서 말했다. 그 과정에 있어서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사파의 이념에 가까웠다. ‘회주와 다섯 간부라....’ 그들은 조직의 정점이라 불리는 회주와 다섯 간부,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창천회에 가입한 정도의 무인들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다섯 간부는 천주(天主), 지주(地主), 인주(人主), 음주(陰主), 양주(陽主)이다. 천지인과 음양에서 따온 듯 했다. ‘정파 사람들의 발상답군.’ 천여운이 다시 질문을 이어갔다. “다섯 간부들은 서열 순인가?” -딱!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인주가 움찔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니오. 회....주를 제외하면...전부....동등....한 관계이요.” 대답을 하는 인주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다. 말을 계속 지체하면서 하는 것은 자백제의 투여량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단전이 폐해졌다고 해도 화경의 극에 이른 자라서 그런지 정신력이 굉장히 강하군.’ 완전한 화경을 이룬 인주는 자백제가 처음에는 통하지 않았다. 정신이 몽롱해진 상태에서도 완강히 거부했었다. 그래서 자백제를 기준치보다도 더욱 먹이게 되었는데 그 다음부터는 거의 환각 상태에 가까울 만큼 혼미해져 있었다. ‘서둘러야 겠다.’ 거의 눈이 반쯤 감겨 있어서 필요한 정보를 빨리 빼내야 할 것 같았다. “간부들의 정체를 밝혀라.” -딱! 가장 중요한 정보였다. 그들의 정체를 안다면 훗날 대응하기도 쉽다. 정체를 밝히라는 말에 인주의 몸이 움찔하며 떨리더니, 말을 하기 싫은 사람처럼 거부감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딱! 천여운이 다시 한 번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인주가 떨리는 상태에서 겨우 입을 열었다. “천....주에.....남궁.....세....세가의 남궁경.” ‘남궁경!’ 남궁경이라는 말에 양단화가 놀란 눈이 되었다. 남궁세가는 정도 무림의 오대세가 중의 수장 격에 속하는 곳이다. 남궁경은 남궁세가의 가주로 천명검객이라 불리는 자로 구패 중에서도 상위권에 속하는 강자로 정파에서 차기 오대고수에 가까운 자였다. “지.....주에 무당...무당파의 현운자.” “아.....” 무당파의 현운자가 관련이 있을 거라는 생각했지만 역시나 간부 중의 한 사람이었다. 구대문파 중에서도 소림, 화산과 더불어 최고의 성세를 누리는 무당파였다. 상당히 껄끄러운 문파가 끼어있는 셈이었다. “음주...에.....사천당가의.....당필순,” “.....왠지 이건 짐작했던 부분이군요.” 오대세가 중 하나인 사천당가는 정파 중에서도 가장 호전적인 자들 중 하나이다. 정도에 속하면서도 유일하게 독(毒)과 암기에 능하다. 사천당가의 부가주인 당필순은 과거 정사 간의 전쟁에서 딸을 잃었기 때문에 사파를 극도로 증오하는 자였다. 구패에는 포함되진 않았지만 독인으로 위험한 인물이었다. “양주.....양주는.....끄으으윽.....” 이어서 양주의 정체를 말하려던 인주가 갑자기 고통스러운 신음성을 흘렸다. 이마의 핏줄이 곤두선 것을 보면 굉장한 두통을 겪고 있는 듯 했다. [자백제가 과도하게 투여되어서 뇌에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나노의 말에 천여운이 인상을 찡그렸다. 물론 그 말도 맞았지만 이 인주라는 자가 자의적으로 버티는 것도 있었다. 무위에 걸맞은 정신력을 지녔다고 할 만 했다. “끄으으으으으!” 인주의 눈동자가 뒤집히면서 흰자위 밖에 보이지 않았다.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는 인주가 중얼거렸다. “보, 본주는 하북.....하북...팽가의....팽무......월.....” 인주의 진정한 정체가 드러났다. 도신이 넓은 장도를 독문무기로 쓰는 인주는 하북팽가의 부가주인 팽무월이었다. 무림구패의 일인이자 도월패주(刀月?主)라 불리는 자였다. “끄르르르르....” [호흡이 약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천여운이 그의 몸에 내력을 불어넣어 기운을 북돋게 하려 했다. 그러나 단전이 파괴된 인주, 아니 팽무월의 몸은 깨진 항아리와 마찬가지였다. 물을 부어도 끊임없이 새는 항아리였다. ‘양주는 그렇다쳐도 회주에 대해서 들어야 하는데!’ 작은 경련과 함께 죽어가는 인주의 몸을 붙잡고 천여운이 흔들었다. “이봐! 회주의 정체가 뭐지?” -딱! 팽무월의 귀에다 대고 손가락을 튕겼다. 하지만 거의 그는 죽기 일보 직전의 상태였다. “끄르르.....” 천여운이 한손으로 몸을 흔들면서 내력을 불어넣으면서 귓가에 계속 손가락을 튕겼다. -딱! 딱! 딱! 그러자 팽무월이 숨이 넘어가기 전에 힘겹게 입을 뗐다. “회.....주....의....정체...는.....천주......만이.....” 끝내 말을 마치지는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부상이 심한데 약물이 너무 많이 투여되면서 결국 버티질 못했다. -탁! 그의 가슴에 손을 얹어서 심장이 뛰는 것을 확인한 양단화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죽었습니다.” 그래도 충분한 정보는 얻었다. “......마지막에 그 말은 남궁경이라는 자가 창천회의 회주를 알고 있다는 거겠죠?” “그런 것 같습니다. 좋은 정보기는 한데, 그 정체를 알아내기는 어렵겠군요.” 양단화의 말에 천여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교주직에 취임하고나서 무림의 정세에 대해서 많은 정보를 숙지한 천여운이다. 남궁경은 창천회의 간부 이전에 정파무림맹의 십칠웅주 중에 제 삼웅주라는 직위를 가진 자였다. 사 웅주에서 십칠 웅주까지는 거의 동급 지위이다. 그런데 삼웅주 이상부터는 무림맹 내에서도 실권을 지녔는데, 남궁경은 두 군단 중 하나인 마벌단(魔伐團)의 단장이었다. 마벌단은 말 그대로 마를 공격한다는 의미로 그는 마교 정벌단의 총사령관이었다. 근 삼만 명에 이르는 무림의 중소문파의 전력을 움직일 수 있는 사내다. “까다롭군요. 어찌 되었든 정보로서는 충분한 가치가 있는....” 양단화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천여운이 어딘가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은 강이 있는 방향이었다. 천여운보다는 늦었지만 사 장로 양단화 역시도 뭔가를 감지했는지 강변 쪽으로 시선이 이동했다. [교주님. 상당한 실력자가 나타났습니다. 창천회인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양단화가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대며 허봉이나 백기 등에게 조용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들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입을 다물고 기척을 죽였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상대가 천여운이나 양단화의 기척은 알아채지 못했지만 허봉이나 백기를 감지하고 말았다. “온다!” 양단화의 경고에 두 사람이 경계심이 가득 찬 표정으로 기수식을 취했다. 이윽고 숲을 가로질러서 뭔가 가까워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사사삭! 슉! 우거진 수풀들로 가려진 중턱에 그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교차한 대검을 등에 차고 있고 덥수룩한 머리카락의 청년이었다. “엇? 여섯 명?” 청년의 표정이 묘해졌다. 강변 쪽에서 느꼈을 때는 두 사람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죽은 자들까지 포함해서 네 사람이나 더 있었다. '앗!' 청년의 시선이 바닥에 가지런히 누워있는 신의의 손녀, 감미양에게로 향했다. 숨소리도, 그리고 몸에 미동조차 없고 새하얗게 변해가는 피부. 분명 죽은 것이 틀림없었다. “빌어먹을!” 청년이 눈빛에 노기가 서려서 천여운과 수하들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네놈들이 저 여자를 죽인 것이냐?” -팟! 그 말과 함께 청년이 지면을 박차며 떠올라 등에 차고 있던 대검 하나를 뽑아서, 감미양의 시신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던 백기에게 달려들었다. ‘크다!’ 대검의 크기가 보통 검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넓은 검신에 길이도 오 척에 이를 정도였다. 청년이 패도적인 기세로 허공에서 검을 내리쳤다. 그때 사 장로 양단화가 재빨리 신형을 날리며 앞을 가로막았다. -우웅! 양단화의 펴고 있는 손바닥에서 푸른빛 도강이 서렸다. 도강을 형성한 양단화가 견고한 망을 만들어내 위에서 대검을 내려치는 청년의 일격에 맞섰다. -파치치치칙! 도강에 부딪친 대검에서 마찬가지로 푸른빛 검강이 서렸다. 무기를 쥐고 있었지만 내력에서 양단화가 앞섰기에 청년의 신형이 뒤로 날아갔다. 가볍게 빙글 돌면서 몸을 바로 세운 청년이 눈살을 찌푸렸다. “젠장. 그나마 약한 녀석들부터 처리하려 했더니.” “약해?” 백기가 불쾌했는지 인상이 무섭게 굳어졌다. 무인으로서 무시당하는 말을 들은 셈이니 당연했다. [백 단주. 방심할 자가 아니네. 자네보다 한 수 위의 고수네.] [네? 한 수 위라고요?] 양단화가 전음을 통해서 백기에게 일러주었다. 백기가 단번에 당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위험함에 양단화가 나선 것이었다. 청년이 짜증난다는 듯이 투덜거리며 뒤에 차고 있던 대검 하나를 더 뽑았다. -챙! “젠장, 이거 완전 손해인데.” 자신의 신장에서 어깨까지의 길이나 되는 두 대검을 가볍게 쥐고 있는 모습이 심상치가 않았다. 무림에서도 양손으로 검을 다루는 자들은 드물었다. 특히 높은 경지를 추구하는 자들은 하나의 병장기에 집중했으니 말이다. 이에 양단화가 이상했는지 머릿속을 굴렸다.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무림에 두 개의 대검을 쓰는 자에 대해....어디서 들었더라.’ “두 개의 대검....양검?....쌍검? 앗! 알겠다! 무쌍검!” “이런......” 양단화의 외침에 두 대검을 쥐고 있는 청년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 58장 오대고수의 전인 (1) > 끝 < 58장 오대고수의 전인 (2) > 오대고수. 무림인들은 중원 무림에서 가장 강한 무인들을 손꼽아서 그렇게 불렀다. 언제부터 다섯 명으로 꼽았는지는 모르나, 어느새 전통처럼 다섯 명의 절대자들이 무림의 최강의 자리에서 군림했다. 북정(北正), 남마(南魔), 동투(東鬪), 서패(西霸), 중쌍(中雙). 지금의 오대고수를 부르는 약칭이다. 북정도(北正刀) 이목. 남마주(南魔主) 천유종. 동투신(東鬪神) 악의. 서패왕(西霸王) 항연. 무쌍검(武雙劍) 왕전. 북정도 이목은 정파 무림맹의 맹주이자 정도문(正道門)의 문주이다. 구대문파에 속하지 않지만 대대로 정파 최고의 고수들을 배출해온 정도문 출신이었다. 남마주라는 칭호는 원래 전대 태상교주였던 천인지의 칭호였으나, 천유종이 귀주성에 벌어진 사원 평야 전투에서 사파 연맹을 패퇴시키면서 계승하게 되었다. 서패왕 항연은 사파 연맹의 맹주로 치열한 사파인들간의 사투 끝에 그 자리를 차지한 무자이다. 무공 능력도 뛰어나지만 간교한 인물로 평가받는 자였다. 위의 세 사람은 현 무림을 삼분하고 있는 삼대 세력의 수장들이다. 그러나 나머지 두 사람은 삼대 세력에 전혀 포함되지 않는 오직 무(武)로써 오대고수의 자리를 차지한 자들이었다. 동투신에 관해서는 워낙 소문이 무성해서 알려진 바가 적다. 오대고수들 중에서 유일하게 병장기 없이 맨몸으로 최고의 고수의 자리를 차지했기에 투신이라는 칭호를 가졌다는 것 이외에는 말이다. 그러나 무쌍검 왕전은 다르다. 그의 명성은 무림 전체를 뒤흔들 만큼 모르는 이가 없었다. 어찌 본다면 명성이라기보다는 악명에 가까울 지도 몰랐다. ‘지금의 수로십팔채를 만든 자가 아닌가?’ 사 장로 양단화의 외침에 천여운이 이것을 떠올렸다. 수로십팔채를 만들었다는 것은 그들을 일으켜 세웠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본래 황하에는 수적들이 들끓던 시기가 있었다. 당시에는 수로삼십채라 하여 근 만 명에 달하는 수적들이 황하를 지배하여 관군과 무림인들의 속을 썩이게 하던 시기가 있었다. ‘홀로 삼천 명이 넘는 수적들을 몰살시킨 장본인.’ 그가 바로 무쌍검 왕전이었다. 왕전은 원래 중원십패(지금의 구패)의 일인으로 불렸던 무인이었다. 모종의 사건으로 아내를 잃고 그 분노로 삼천 명이 넘는 수적들을 몰살시켜서, 수로채의 힘을 절반으로 낮춰버렸다. 이 사건이 있은 직후에 사파 연맹의 분노를 사고, 수많은 이들을 죽였다는 이유로 정파 무림맹에서 배척받은 왕전은 몇 차례의 큰 싸움 이후에 모습을 감추었다. ‘이거 곤란한데.....’ 청년이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두 대검을 잡고 있는 것만으로 무쌍검을 떠올릴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아버지의 말씀이 맞구나.’ 그의 부친이 늘 당부했던 말이었다. 생사의 위기가 있지 않고는 어지간해서는 두 대검을 쓰지 말라고 경고했었다. 아버지가 무림에서 모습을 감춘 지 꽤 오래되었다고 들었는데, 이를 알아챘다는 것은 저 외눈의 중년인이 무림의 경험이 많다는 것이리라. ‘이를 어쩌지.’ 방금 전에 손을 섞어본 결과 외눈의 중년인은 자신보다 윗줄의 고수였다. 바닥에 누워있는 감미양의 시신만 본다면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인 듯 했다. ‘에라 모르겠다. 도망치자.’ 그렇게 결심한 청년이 몸을 돌리려고 했다. 그때 그에게 누군가 쾌속한 몸놀림으로 달려들어 발차기를 날렸다. -파파파파팍! 수십 개의 잔영을 만들어내는 발차기에 청년이 대검의 넓은 검신을 이용해 수월하게 공격을 막아냈다. “어라? 네 녀석은?” 발차기를 막아내는 청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를 공격한 자는 자신이 약하다고 평가했던 얼굴에 흉터가 있는 청년이었다. 동년배로 보이지만 느껴지는 기운이 한 수 아래였다. “누구 마음대로 공격했다가 도망치려고 하는 것이더냐!” 잔영이 넘치는 발차기를 날리던 백기가 몸을 회전하면서 자세를 낮추더니 하단부 쪽을 공략했다. 대검이 크기 때문에 공간이 비는 쪽을 노린 것이다. -파팍! 그러나 청년은 예측이라도 한 것처럼 다른 한 손에 들고 있던 대검을 바닥에 내리찍었다. 대검에 하단부가 막혀버렸다. -쿵! -두우우웅! 발바닥에 실려 있는 상당한 공력에 대검이 진동했다. 검병을 쥐고 있는 손이 찌릿하게 떨려왔다. 마찬가지로 대검에 막힌 백기의 신형이 뒤로 튕겨나가서 세보 뒤로 밀려났다. -타타탁! 단순히 느껴지는 기운만으로는 상대가 무조건 약하리라고 판단했던 청년의 표정이 흥미롭다는 듯이 바뀌었다. “......제법인데.” 청년의 입에서 나온 칭찬에 백기는 여전히 표정이 굳어있다. 연달아 행했던 공격이 막혔기 때문이었다. 반면 백기의 그런 모습에 이를 지켜보고 있는 천여운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내가 알던 그 모습이구나.’ 지금 백기의 모습은 마도관에서 보았던 전의와 투기가 넘치던 시절과 같았다. 최근에 들어서 극도육무문을 비롯해 창천회 등, 무림에서도 최상위권에 속하는 고수들과 대적하면서 실력발휘를 하지 못했던 그였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구나. 백 단주에게 맡겨보는 것도 좋겠군.’ 사 장로 양단화 역시도 백기의 높은 전의에 그렇게 평가했다. 두 개의 대검을 사용하는 청년의 무위는 초절정의 극에 달해있었다. 완숙한 초절정인 백기보다도 한수 위였다. 그러나 무인 간의 대결이 무조건 무위의 경지로만 승패가 결정되는 것도 아니었다. 때로는 높은 전의와 뛰어난 전술이 이것을 극복하게 만들 수도 있다. ‘대검은 크지만 다루는데 있어서 익숙한지 보통의 검처럼 휘두른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빈틈을 만드는 수밖에 없다.’ 온통 청년에 대한 공략으로 머리가 복잡한 백기였다. ‘하아. 이것 참.’ 그와 달리 청년의 표정에는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 처음 만나보는 동년배의 실력자와 더 겨뤄보고 싶은 마음이 강했지만, 자신이 감지하지 못했던 두 사람의 존재가 마음에 걸렸다. 더군다나 한 사람은 무쌍검마저 알아보았다. 청년이 백기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어이. 발좀 쓰는 놈.” “뭐?” “절대로 네가 무서워서 가는 게 아니다. 내가 정말 바빠서 그런 거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청년이 공력을 끌어올려서 두 대검에 검강을 일으켰다. 희미하게 일렁이는 푸른빛 검강이 실린 두 대검을 청년이 높이 들어올렸다. ‘설마?’ 백기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급히 그를 막아보려 했으나 늦었다. 청년이 두 개의 대검을 동시에 바닥에 내리쳤다. -콰아아앙! 강기가 실린 대검이 바닥에 닿는 순간, 큰 굉음과 함께 바닥에 있던 흙모래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사방이 먼지로 뒤덮이는 순간 청년이 몸을 돌려 신형을 날렸다. 도망치기 위한 수법인 것이다. ‘돌아가서 아버지께 말씀드려야 해. 무쌍검을 알아보는 이가....엇?’ 그때 청년이 놀라서 두 눈이 커졌다. 언제 움직였는지 자신이 몸을 날리는 방향에 긴 머리카락의 청년이 서있었던 것이었다. 바로 천여운이었다. “보내주지 않는다고 들었을 텐데.” “젠장!” 청년이 재빨리 두 개의 대검을 교차하며 독특한 기수식을 취했다. 솔직히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자의 무위가 짐작이 가지 않았기에 제대로 된 초식을 펼치는 것 외에는 답이 없었다. ‘무쌍검결 제 삼초 무정교파(無情交波).’ 교차되어 있던 대검의 파괴력을 극대화하는 검초였다. 그때 초식이 미처 발휘되기도 전에 천여운의 신형이 앞을 파고들었다. -착! 천여운의 교차하고 있던 대검에 손을 갖다 댔다. “그걸로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청년이 응축되어 있던 검력을 폭사시키며 검신에 손을 갖다 대고 있는 천여운을 밀어내면서 단숨에 무정교파로 갈라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뭐, 뭐야? 움직이지가?” 청년이 아무리 공력을 끌어올려도 교차된 팔을 펼 수가 없었다. 대검을 누르고 있는 공력이 압도적으로 강했기 때문이었다. 공력에서 밀리기에 다소 내상을 감수하고라도 힘으로 펴보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이, 이 녀석 마치 아버지와 같아.’ 거대한 암벽에 달걀을 던지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깨지라고 실컷 던져도 벽이 노른자와 흰자만 뒤섞여서 더러워진 기분. 지금이 딱 그랬다. 그때 천여운이 다른 한손으로 엄지손가락에 중지손가락을 고정시키더니, 무방비 상태인 청년의 이마에 갖다 댔다. 꼭 그 손가락의 모습이, “딱밤?” “잘 아네.” -빡! “끄악!” -빙그르르르! 쿠당탕! 심후한 공력이 실려 있는 딱밤을 맞은 청년이 대검을 놓고서, 허공에 몸이 세 바퀴나 회전을 해서는 넘어지고 말았다.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으나, “으어어어어......” 뇌가 흔들리는 고통에 어지러워하던 청년이 이내 바닥으로 쓰러졌다. -쿵! 천여운이 그런 그의 단전에 손을 얹어서 파괴시키려고 했다. 그때 사 장로 양단화가 급히 그를 만류했다. “교주님! 잠시만 멈춰주십시오.” 천여운이 손바닥에 공력을 모으던 것을 멈추자 양단화가 말했다. “이 청년은 창천회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창천회가 아니라고요?” “들으셨을 테지만 무쌍검은 사파나 정파 쪽에 배척받아서 모습을 감춘 자입니다.” 그 말에 천여운이 한 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물론 천여운 역시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어찌 본다면 무쌍검의 그 악명을 만들어낸 수적 몰살 사건은 지금 창천회의 이념과 비슷했다. 하지만 정파에도 속한 인물이 아니었으니 양단화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이 자의 정체나 목적을 알아봐야 겠군요.” 만약 창천회나 사파 쪽에 관련되어 있다면 살려둘 필요가 없었다. 더군다나 창천회의 인주, 팽무월과 신의의 손녀가 죽어 있는 모습을 보았으니 말이다. -타타타탁! 천여운이 심후한 공력으로 그의 혈도를 점했다. 현경의 내공이 담겨있으니 아무리 초절정의 극에 이르렀어도 사흘간은 자력으로 풀 수 없을 것이다. “이번에는 제가 하겠습니다. 교주님.” 천여운이 하게 되면 위압적인 것이 강하기에 양단화가 맡기로 했다. 얼마 있지 않아 상태가 호전된 청년이 정신을 차렸다. “어...엇?” -꽈악! 그는 자신의 몸을 감고 있는 밧줄을 보면서 당혹스러워했다. 피가 진득한 밧줄은 아까 전에 보았던 죽은 시체가 매고 있던 그것인 듯 했다. 어쩌다가 자신이 잡혔는지 감을 잡지 못하던 청년이 이마에서 느껴지는 통증으로 아까 전을 떠올릴 수 있었다. “내, 내가 고작 딱밤 따위에 기절했다고?” 그랬다. 제대로 겨뤄보지도 못하고 딱밤에 나가 떨어졌다. 이를 떠올린 청년은 얼마나 쪽팔렸는지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래도 자신의 아버지가 그 나이 또래에서는 상대될 자가 없다고 말해서 자신감 하나로 살아왔는데 이건 아니었다. ‘그 동년배에게 한 방에 나가떨어졌습니다. 아버지.’ 자괴감에 빠져있는 청년의 귓가로 양단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 차렸는가?” “헉!” 놀란 청년이 공력을 끌어올리려고 했으나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심지어 단전의 감각조차 마비된 것만 같았다. “이, 이게 무슨?” “자네의 혈도를 점해놓았네.” “아......이런....” 잠시 기절한 사이에 철저하게 붙잡혀 버린 듯 했다. 청년은 자신이 확실하게 제압되어서 적들에게 붙잡혔다는 것을 인지하자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강단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를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설마 죽이시려는 건 아니죠? 이런 말까지는 안하려고 했는데..... 살려주세요.” “.....자네 꽤 그런 말을 당당하게 하는군.” 빠른 태도 변화에 양단화가 속으로 기가 차했다. 덤빌 때만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공격하던 자라고 믿기 힘들었다. 이 청년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 목적을 알아야 했다. “자네를 죽일 수도 있었지만, 혹시나 괜한 생사람을 잡을 수도 있기에 영문을 물어보고 판단하려고 살려두었네.” “아?” 청년은 자신의 대답여하에 따라서 생사가 결정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마디로 말을 잘해야만 살 수 있는 확률이 올라간다. 잠시 고민하던 청년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뭐든 물어보시지요. 제가 아는 선에서는 전부 답해드리겠습니다.” “.......” 양단화가 속으로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 청년은 어떤 조직에 속해있는 인물은 아닌 듯 했다. 이 정도 무위에 있는 자가 어떤 조직에 속해있으면 정보를 발설하지 않기 위해 자결을 하려한 다거나 완강하게 반항하는데, 오히려 뭐든 물어보라고 한다. “일단 자네 이름부터 물어봐도 되겠나. 계속 자네라고 부르기도 힘들군.” 그 물음에 잠시 머뭇거리던 청년이 입을 열었다. “분왕입니다.” “분왕?” 스스로를 분왕이라고 말한 청년을 보면서 양단화가 인상을 찡그렸다. 자신이 짐작하고 있는 오대고수 중 한 사람인 무쌍검의 전인이라면 왕(王)이라는 성을 써야만 했다. ‘제자인가?’ 그럴 확률도 없지 않았다. 꼭 전인이라는 것이 아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그런데 이름만 밝힌 것을 보면 정체를 숨기려고 하는 것은 확실한 듯 했다. 양단화가 이어서 물었다. “왜 우리를 공격한 겐가?” 물론 누구를 보고나서 공격했는지는 당시에 분왕의 시선만으로 알 수 있었다. 그는 감미양의 시신을 보고서 무엇 때문이지 화가 나서 공격해왔다. 분왕이 여전히 바닥에 눕혀 있는 감미양의 시신을 쳐다보고는 다소 무거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저 여인을 죽였기에 공격했습니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양단화가 뒤를 보면서 손짓을 하자 허봉이 다가왔다. 허봉의 품안에는 보자기에서 잠을 자고 있는 아기가 있었다. 이를 보게 된 분왕이 떨리는 눈으로 중얼거렸다. “이 아기는.....” “역시 자네도 알고 있었군. 저기 죽은 감미양의 아들일세.” 당연히 분왕도 그것은 잘 알고 있었다. 몇 번이나 부채주의 오두막을 방문했기에 아기의 얼굴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양단화가 안타깝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원래 감미양과 아기를 전부 구하고 싶었지만 이 자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네.” 양단화가 가리킨 것은 바로 옆에 놓여 있는 인주의 시신이었다. 끔찍한 시신의 모습에 분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구하러 왔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우리는 감미양의 조모님의 부탁을 받고 그 손녀와 증손을 구출하러 왔다는 말이네. 그런데 함정에 빠져서 그녀를 구하지 못했지.” ‘우와.....진짜.....’ 양단화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허봉이 속으로 신기해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안그랬는데 상당히 연기를 잘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구하러 온 것은 확실하지만 감미양은 천여운의 손에 죽었다. ‘양 장로님 정말 대단한데.’ 이에 분왕도 완전히 속았는지 눈동자가 흔들렸다. 자신이 오해를 했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정말 이 여자의 조모께서 보낸 것이 틀림없습니까?” “분왕 자네를 붙잡고 있는 것은 우리들인데, 굳이 허언을 할 이유가 있겠는가.” 하나뿐인 눈으로 인자하게 웃는 양단화의 모습에 분왕이 허탈해했다. 괜한 오해 때문에 이들을 공격해서 자신이 붙잡혔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완전히 넘어왔다는 생각이 들자 양단화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분왕이 정말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괜히 좋은 목적에서 오신 분들인데 제가 오인했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네. 하하하. 그런데 자네는 무슨 연유로 감미양을 찾으려고 한 겐가?” 양단화의 질문에 분왕이 씁쓸한 표정으로 답했다. “약이 필요했습니다.” “약?” 양단화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와 어떠한 친분 관계가 있을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오히려 의원으로서 찾은 모양이었다. 생각해보니 신의의 손녀라면 웬만한 의원들보다도 의술이 뛰어날 것 같긴 했다. 반면 옆에 있던 허봉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중얼거렸다. “에휴, 약쟁이었군요.” "!?" 방금 전까지 씁쓸해하던 분왕이 황당하다는 눈으로 허봉을 쳐다보았다. < 58장 오대고수의 전인 (2) > 끝 < 59장 구음절맥 (1) > 한때 중원에 양귀비로 만든 마약(魔藥)이 퍼져나가 민생을 어지럽힌 적이 있었다. 그때 황명으로 이것의 양산을 금지시켰지만 여전히 환락가를 비롯해 재물이 많은 자들에게 암중으로 유통되고 있다. 이 암중으로 돌아다니는 마약을 구하는 자들 혹은 약에 중독되어서 폐인이 된 자들을 약쟁이라고 하는데, 그리 좋은 표현이 아니었다. 당연히 분왕이 황당해 하는 것도 당연했다, 분왕의 반응에 사 장로 양단화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서 허봉에게 멀찌감치 떨어져 있으라고 했다. “약을 구하려는 목적은 무엇인가?” “그건......누이가 아픕니다.” 잠시 망설이던 분왕이 대략적인 이유를 말해주었다. “누이?” “누이가 오랜 지병이 있습니다. 다른 의원들은 어찌 못했는데, 죽은 저 여자 의원이 준 약을 먹으면 호전되었었습니다.” 분왕의 말대로라면 확실히 감미양 또한 신의의 혈통이 맞는 모양이었다. 의원으로서의 재능이 이렇게 뛰어났다면 어쩌면 천여운의 손에 죽지 않았다면 차세대 신의가 되었을 지도 몰랐다. “그런가? 하긴 그런 사정이 있었다면 분왕 자네가 열을 낼 만도 하군.” 이해하는 것처럼 말하면서도 양단화의 눈빛에는 여전히 의심으로 가득했다. 그것은 당연했다. 모든 것을 말한다고 했지만 분왕은 대략적인 사정에서 그치고 있었다. ‘생각 외로 자세한 사정은 숨기는군.’ 물론 어떠한 고문도 없이 부드럽게 이야기를 했으니, 긴장감이 한층 풀려서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이때 조용히 심문을 지켜보던 천여운이 가까이 다가왔다. ‘웃!’ 고절한 초식도 아니고 고작 손가락을 튕기는 딱밤 한 방을 맞고 기절했던 분왕은 이상하게 위축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같은 연배도 아니고 어찌 본다면 더 어린 것 같은데 위압감이 보통이 아니었다. 정말 자신의 아버지를 눈앞에 두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 녀석, 혹시 환골탈태를 해서 젊어 보이는 거 아냐?’ 생각해보면 화경의 극에 이른 자는 환골탈태를 해서 더욱 젊어진다고 들었다. 그의 아버지는 중원 무림을 통틀어 자신의 연배에 초절정의 극에 이른 자는 거의 없을 거라고 단언했었다. ‘그래. 환골탈태를 한 고수가 틀림없어.’ 그렇게 자기 위안을 통해 한결 마음이 편해지는 분왕이었다. 분왕의 앞으로 다가온 천여운이 특유의 차가운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뭔가 착각하고 있군.” “네?” “지금 우리가 친목 대화를 나누는 것 같나? 살아서 풀려나고 싶으면 똑바로 답해라. 한 번만 더 두루뭉술하게 답변하면 단전을 파괴해서 산짐승의 먹이로 던져주마,” “엑? 그건 너무 한 거 아니야.......요?” 같은 연배로 보여서 반말이 나올 뻔했지만 얼른 바꿔서 말했다. 너무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그를 뒤로 한 채, 천여운은 다시 떨어져서 양단화의 심문을 바라보았다. 천여운의 이런 협박은 나름의 효과를 거두었다. ‘젠장. 이놈은 피도 눈물도 없구나.’ 농담이라고는 한 치도 섞여 있지 않은 천여운의 차가운 태도에 위기감을 느낀 분왕이 결국 숨겼던 비밀의 일부를 밝혔다. 안 그랬다간 여기서 꼼짝없이 죽을 것 같았다. “......사실 여동생의 지병이 많이 심각합니다.” “대체 무슨 병이기에 그러는가?” “다른 사람들은 그냥 절맥증이라고 하던데, 저 여자 의원은 구음절맥이라고 했습니다.” “구음절맥?” 그 말에 사 장로 양단화가 두 눈이 커졌다. 상당히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이 병을 잘 모르는 천여운은 의아한 표정이 되어서 나노에게 물어보았다. ‘나노 구음절맥이 뭔지 알아?’ [데이터에 사례가 없는 병명입니다.] 나노도 모르는 병이었다. 그것은 당연했다. 단순한 절맥증조차도 미래에서는 발견되지 않은 병이었다. 절맥증은 음기가 강해서 혈맥이 막혀버리는 병이었는데, 이것은 보통 무림의 여아들이 걸리는 병으로 평생을 시름시름 앓고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분왕의 입에서 거론된 구음절맥은 이것과 비슷하면서도 확연히 다르다. [양 장로 무슨 병인지 알고 있습니까?] 천여운의 전음에 양단화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설명해주었다. 구음절맥(九陰]絶脈). 이것은 무림에서도 전설로 불리는 불치병이었다. 구음절맥에 걸린 자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끝없는 음기를 지니게 된다고 한다. 이런 음기 또한 일종의 진기였기에 병에 걸린 자는 거의 한계가 없는 무한한 음기의 내공을 지녔다고 알려졌다. 얼핏 좋은 것 같지만 인간의 몸은 음과 양이 균형을 이루게 되어 있다. 그것의 균형이 깨진다는 것은 결국 수명에 영향을 끼친다. 구음절맥에 걸린 자는 갈수록 강해지는 음기의 부작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스무 해를 넘기지 못해 단명한다고 한다. [특이한 병이로군요.] [저도 그 병이 실제한다고는 처음 들었습니다.] 사 장로 양단화 역시도 이것이 그저 무림에 전해져 오는 전설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신의의 손녀가 병명을 그리 진단했다면 허투루 들을 수 없었다. 누이의 병명을 밝히지 않으려고 했던 분왕은 약간은 침울해진 표정이 되었다. ‘요 근래 발작이 심해져서 약을 전부 다 썼는데 이제 어쩌지?’ 분왕이 용호채를 찾은 것도 누이의 발작을 막기 위한 약을 받기 위해서였다. 엄밀히 말하면 더 강한 약이 필요했다. 전에 감미양이 제조해주었던 약을 먹으면 적어도 나흘 정도는 잠잠했는데, 이제는 고작 하루도 아니고 반나절을 버티지 못했다. ‘그 약을 제조할 수 있는 저 여자가 죽었으니 이제 어떻게.....아!” 그때 분왕의 머릿속에 아까전에 양단화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분명 양단화는 감미양의 조모의 부탁을 받고 구출하러 왔다고 했었다. 분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혹시 저 여자 의원을 구출해달라고 부탁했다는 그 조모라는 분도 의원입니까?” 그 질문에 양단화의 표정이 묘해졌다. 조모, 즉 신의 감로수의 정체를 밝혀야 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중원 오대고수 중 한 사람인 무쌍검 왕전의 전인으로 짐작되는 자가 뛰어난 의원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교주님! 들으셨습니까?] [.....잘하면 빚을 만들 수 있겠군요.] [역시!] 공교롭게도 천여운 또한 양단화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분왕의 누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무쌍검 왕전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도움을 준다면 마교로 영입까지는 아니더라도 훗날에 왕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만약에 왕전의 전인이 아니더라도 이런 젊은 나이에 초절정의 극에 이른 후기지수에게 빚을 만들어둔다면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리라. 천여운이 고개를 끄덕이자 양단화가 빙그레 웃으며 분왕에게 말했다. “그렇네. 오히려 그분이 더 뛰어난 의원이시지. 감미양 또한 그분에게 의술을 배웠으니 말일세.” “아! 저, 정말입니까?” 더 뛰어난 의원이라는 말에 분왕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렇지 않아도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망연자실하던 차에 뜻밖의 희소식인 것이다. 동아줄이라도 잡았다는 생각에 화색이 밝아진 분왕이 들떠서 말했다. “호, 혹시 괜찮으시다면 그분께 제 여동생의 진료를...” -오싹! -콰아아아앙! 분왕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산중턱에 있는 모든 이들의 기감을 자극하는 오싹한 기운이 느껴짐과 동시에 거대한 굉음 소리가 산 전체를 울렸다. 천여운과 수하들의 시선이 동시에 북서쪽을 향했다. “이, 이런!” 나무에 묶여있는 분왕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점혈로 내공을 쓸 수 없게 제한되었지만 이 특유의 오싹한 기운은 익숙했다. 누이가 폭주했을 때와 같았다. ‘말도 안 돼. 고작 두 시진 채도 안 되었을 텐데.’ 마지막 남은 환약을 그녀에게 먹인지 얼마 되지 않았다. 적어도 반나절은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두 시진도 되지 않아서 폭주로 짐작되는 기운이 느껴지 자 당혹스러웠다. ‘가깝다.’ 천여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주, 주군. 대체 이 기운은?“ 사 장로 양단화의 눈동자가 떨려왔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북서쪽의 다른 산에서 퍼져오는 기운이었다. 아무리 가깝다고는 하나 이렇게 선명하게 느껴지는 차가운 한기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때 분왕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제, 제 누이입니다!” “누이?” “누이의 음기가 폭주한 겁니다.” “이 차가운 기운이 자네의 누이라고?” 양단화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구음절맥을 지닌 자가 끝없는 음기를 지녔다는 말을 들었지만 상상 이상이었다. 이 정도 거리에서 그 기운이 감지될 정도이니 말이다. “사정은 알고 있지만 얼른 이 밧줄을 풀어주십시오. 당장 혈도제압술로 누이를 진정시키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사, 사람이 이 정도 음기를 쏟아내면 그렇겠네. 그려.“ ‘으음.....’ 양단화의 말에 분왕은 차마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위험하다는 말은 단순히 누이의 목숨만이 위험하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폭주한 분왕의 누이가 어떤 일을 벌일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타타타탁! 그때 천여운이 묶여있는 분왕의 혈도를 짚었다. 점혈이 풀리자 잠잠하던 단전이 활성화되며 전신의 경맥들로 진기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파팍! 내공이 돌아오자 분왕이 자력으로 묶여있던 밧줄을 끊어냈다. 천여운이 그에게 말했다. “앞장 서라.” “알겠습니다.” 이에 분왕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먼저 경공을 펼쳐서 한기가 퍼져오는 곳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그 뒤를 천여운과 백기가 따랐다. 감미양의 아기가 있기 때문에 사 장로 양단화와 허봉은 남게 했다. 그들이 있던 황산의 산중턱에서 북서쪽으로 용호채를 지나 오 리(里) 정도 떨어진 곳에 작은 산봉우리들이 밀집한 곳. 그곳에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지금은 한 겨울이 지난 지 한참 오래되어 늦은 봄이다. 그런데 어느 지점을 기점으로 사방이 하얀 서리들로 수풀 전체가 하얗게 물들었다. 풍성한 나뭇잎들조차 전부 얼어버렸고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져 가루처럼 부서졌다. 앙상해진 나뭇가지조차 차갑게 얼어붙어 떨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 같은 현상이 점차 그 반경이 넓어지고 있었다. -쩌저저저적! 마치 차가운 겨울이 직접 움직이는 것처럼 수풀의 서쪽 방향이 빠르게 한기와 함께 하얀 서리로 뒤덮여갔다. 그것은 살아있는 것처럼 점차 서쪽으로 이동했다. 한기가 일어나고 있는 중심부로 누군가 경공을 펼치며 들어가고 있었다. “하아...” 백기는 숨을 쉴 때마다 입에서 나오는 입김에 놀라워했다. 한겨울도 아닌데 이상현상이라 그 자체였다. 그들이 경공을 펼쳐서 한기의 중심부로 들어갈수록 그 차가움은 뼈가 시릴 정도로 더욱 강해져갔다. 내공으로 체온을 유지하지 않았다면 동사(凍死)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드디어 이 엄청난 한기가 뿜어져 나오는 중심부로 도착했다. “아아!“ 천여운의 입에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한기의 중심부에는 긴 은발에 천여운보다도 더 새하얀 피부를 가진 절세미녀가 있었다. 그 독특한 아름다움은 신비롭기 마저 했다. 은발의 미녀는 동공이 풀린 상태로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말도 안 되는 진기다.’ 얼마나 진기가 강했으면 은발의 미녀의 주변 공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심지어 얼어붙은 파편들이 떠서 주위에 둥둥 떠서 따라왔다. 그녀의 밟고 있는 바닥은 하얗게 얼어붙어 있었는데, 움직일 때마다 새하얀 길이 만들어졌다. “여구우우우운!” 분왕이 큰 소리로 중심부에 있는 은발의 미녀를 불렀다. 누이의 이름이 여군인 듯 했다. 그런데 여군이라 불린 은발의 미녀는 전혀 그것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멍한 눈으로 앞으로 직진했다. “역시 폭주했네요. 혈도제압술로 체내 진기의 흐름을 막아야겠습니다.” “잠깐...” -슉! 뭔가 그녀의 상태가 위험하다고 여긴 천여운이 만류하려 했지만 이미 분왕이 그녀의 곁으로 신형을 날렸다. 예전에도 몇 차례 누이의 음기가 폭주하는 것을 막았던 분왕이었다. 다만 이번에는 그 몇 차례 벌어졌던 폭주와 규모적으로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한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너, 너무 차갑다.’ 십성 내공을 운용하여 전신을 보호하고 있는데도 살이 떨릴 만큼 차가웠다. 긴장을 풀어서 호신 기운을 풀었다가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여군! 정신차려. 오라버니다.“ 바로 옆까지 다가온 분왕이 그녀를 불렀다. 그러나 여군은 들은 채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갔다. ‘칫!’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한 분왕이 그녀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얼음 파편들을 가로질러 혈도제압술을 펼치려고 했다. ‘미안하다. 일단 제압할게.‘ -촤악! 얼음 파편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살갗이 베여나가는 느낌이다. 그것을 통과한 분왕이 그녀의 혈도를 제압하기 위해 손을 가져가는 순간, -휙! “헉?” 지금까지 들은 채도 하지 않고 앞으로만 이동하던 백발의 미녀 여군이 갑자기 고개를 획하고 돌리며 분왕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멍하기만 했던 그녀의 두 눈동자가 완전히 흰색으로 변해 있었다. 자신의 친 누이임에도 불구하고 섬뜩해질 지경이었다. “여, 여군!” -꽉! 여군이 혈도제압술을 펼치려던 분왕의 팔목을 가녀린 손으로 움켜잡았다. 그 순간 분왕의 팔목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음기가 파고들며, 그의 팔목이 새하얗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쩌저저적! “으아아악! 여, 여군! 이게 무슨 짓이야! 그만 둬!“ 내공을 운기해도 소용이 없었다. 당황한 분왕이 그녀에게 하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들은 채도 하지 않았다. ‘비, 빌어먹을! 어쩔 수 없다.’ 이러다 몸이 얼어붙어 죽을 수 있다고 판단한 분왕이 결국은 누이인 그녀를 밀쳐내기 위해 공력을 실어 발로 걷어찼다. 차마 누이에게 대검을 쓸 수는 없었다. -팍! 쩌저적! 그러나 그의 그런 판단은 잘못되었다. 발차기는 여군의 몸에 닿지 못했다. 미처 닿기도 전에 하얀 서리들이 새하얀 얼음 막을 쳐서는 발차기를 막아냈다. “대체 이게 무슨?” -팍! 어이가 없어하는 분왕을 향해 여군이 손을 뻗어서 그의 반대쪽 어깨를 붙잡았다. 그러자 차가운 한기가 어깨를 파고들어왔다. 분왕의 두 눈이 커졌다. “여, 여군!” -쩌저저저적! “으아아아악!” 몸이 얼어붙는 차가운 고통에 분왕이 비명을 질렀다. 무한에 가까운 음기가 폭주한 여군은 오라버니인 분왕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분왕은 몸이 얼어붙어 누이의 손에 죽으리라. 바로 그 순간이었다. -쾅! 그녀의 주변을 두르고 있는 서리 파편들을 꿰뚫고 허공에서 누군가 강림했다. 새하얀 눈동자를 가진 여군의 시선이 그 자에게로 향했다. “이쯤에서 그만 하지.” 그 자는 바로 천여운이었다. 갑작스럽게 개입한 천여운의 존재가 거슬린 것인지 그녀가 분왕의 오른 팔목을 잡고 있던 손을 떼서, 그를 향해 휘둘렀다. -휙! 팍! 천여운이 쾌속하게 뻗어온 그녀의 손을 잡아냈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가 분왕에게 한 것처럼 한기를 일으켜서 천여운을 위협하려 했다. “위, 위험합니다!” 분왕이 놀라서 소리쳤다. 그러나, -우우웅! “!?” 한기를 일으켜 천여운의 손을 얼어붙게 하려던 여군의 새하얀 눈동자가 떨리며 이채가 띠었다. 분왕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심후한 공력에 한기가 쉽게 침투하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의 손목이 뜨거웠다. “그만하라고 했을 텐데.” 그 말과 함께 천여운의 좌수가 쾌속하게 그녀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 59장 구음절맥 (1) > 끝 < 59장 구음절맥 (2) > 가슴을 파고드는 좌수는 여군의 혈도 제압술을 펼치기 위함이었다. 천여운의 손이 그녀의 가슴에 닿으려는 순간이었다. -쩌저적! 그녀의 가슴 쪽에 하얀 서리들이 응집해서는 얼음으로 된 막을 만들어냈다. 천여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기이한 능력이구나.’ 잠시 멈칫했던 천여운이 손가락에 공력을 발산하여 얼음 막을 단숨에 꿰뚫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 짧은 틈에 여군이 붙잡고 있던 분왕을 놓고서 천여운을 향해 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이번에는 직접적으로 그를 얼리려는 게 아니었다. -휘이이잉! “이건?” 여군이 손을 휘두르는 순간에 얼어붙을 만큼 차가운 한기의 바람이 회오리처럼 일어나며, 그녀의 곁에 있던 분왕과 천여운이 동시에 뒤로 밀려났다. “으아악!” 두 팔이 반쯤 얼어붙었던 분왕은 균형을 잡지 못하고 뒤로 튕겨나가고 말았다. 그의 몸이 부웅 떠올라 날아가는 것을 백기가 잡아냈다. -팍! “큭!” 분왕을 잡기는 했지만 그의 몸에 실려 있는 강대한 진기의 여파로 백기 또한 한참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진기다.’ 주변의 공기를 일렁이게 할 만큼 강한 것을 알았지만 경악스러울 정도였다. 거의 스무 보 가까이 바닥을 질질 끌고서야 겨우 멈출 수 있었다. “고, 고마워.” 분왕이 부끄럽다는 표정으로 인사했다. 백기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전의 말투를 생각했을 때 건방지다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라 자신의 감정에 꽤나 솔직한 유형인것 같았다. -파스슥! “끄윽!” 분왕이 얼어붙은 자신의 팔목을 바라보았다. 내공으로 최대한 보호했으나 피부 쪽이 완전히 얼어붙었다. 고통스러워하는 분왕의 모습에 백기가 말없이 그의 얼어붙은 부위에 내공을 불어넣어서 체온이 올라가도록 도왔다. “너 정말 괜찮은 녀석이구나.” 낯간지러운 말투로 고마워하는 분왕에게 백기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답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운기해서 한기나 몰아내라.” “그, 그래. 그런데 이러고 있을 틈이 없어. 누이를 막지 못하면 더 안 좋은 사태가 벌어질지도 몰라.” 전에도 한 번 폭주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자신의 아버지가 함께 있었기에 음기가 완전히 개방되기 전에 혈도제압술로 어떻게 막아냈다. 그런데 하필이면 아버지가 자리를 비웠을 때 일이 터졌다. ‘약으로 양기를 보충하는 것은 임시처방에 불과해요.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는다면 누이 분은 음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폭주할 겁니다.’ 죽은 감미양이 했던 경고였다. 당시에 그녀는 자신의 의술 실력으로는 완치시키는게 무리라고 했다. 오직 신의만이 치료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기에 그를 찾기 위해서 아버지가 근 일 년 동안이나 백방으로 중원 곳곳을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다. 그 정체를 숨겨야 했기에 혼자서 신의를 찾아내는 것이 쉬울 리가 없었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크윽.” 완전히 폭주한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끝없는 음기는 아버지가 아니고는 감당할 수 있는 자가 없을 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의 눈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이, 이럴 수가?” 방금 전의 음기의 폭풍에 날아가리라 여겼던 천여운이 고작 다섯 보 정도만 밀려난 상태에서 새하얀 도를 뽑아서 차가운 한기를 막아내고 있었다. ‘강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예상보다 훨씬 괴물이었다.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계속 머릿속에서 아버지와 비교하고 있었다. 백기가 담담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저 분이 막을 수 없다면 안 좋은 사태가 벌어지겠지. 그럴 일은 없다고 보지만.” 천여운을 알게 된 이후로 그의 패배를 쉽게 상상할 수 없었다. 아무리 구음절맥이라고 할지라도 천여운이 죽이지 못할 적은 없다고 믿고 있는 백기였다. ‘내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인가.’ 그런 강한 믿음에 분왕이 입을 다물고 운기에 집중했다. 단번에 날려버릴 요량이었는데 천여운이 한기를 잘 막아내자 여군의 하얀 눈동자가 차츰 투명하게 바뀌어가고 있었다. -고오오오! 그러자 그녀의 주변의 공기가 더욱 일렁이며 사방으로 하얀 서리들이 일어났다. 자신의 주위만 두르고 있던 것이 그 반경이 굉장히 넓어졌다. 이에 천여운의 눈빛이 더욱 무거워져갔다. ‘내공이 정말로 무한정인건가.’ 이 정도의 진기를 발산하면서도 더욱 강대해지는 것이 믿기 힘들 지경이었다. 무인이 내공을 갈고 닦아서 기운을 발산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여군이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팟! 사방으로 떠오른 하얀 서리들이 응집하더니 살아있는 것처럼 수백 개의 얼음파편이 되었다. “이런.....” 웬만해서는 놀라지 않는 천여운조차 인상이 굳어졌다. 그저 음기가 폭주했다고만 치부하기에는 말도 안 되는 능력을 선보이고 있었다. “이.....게 대체?” 멀리서 이를 지켜보는 백기와 분왕 또한 입이 벌어졌다. 이게 정녕 사람의 손에서 펼쳐지는 능력이 맞는 건지 이해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얼음 파편에 천여운이 둘러싸여 있다. ‘이걸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분왕 자신이 저 한 가운데에 있다고 가정했을 때, 어떤 식으로든 공격을 막는 게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었다. 그때 여군이 손을 움켜쥐는 시늉을 했다. 그 순간 수백 개의 얼음 파편이 일제히 천여운을 향해서 쇄도했다. -슈슈슈슈슈슉! “위, 위험합니다!” 분왕의 운기를 돕던 백기가 놀라서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앞뒤 할 것 없이 사방에서 날아오는 얼음파편들은 빈틈조차 주지 않고 천여운을 단숨에 얼음꼬챙이로 만들 기세였다. 찰나의 순간 천여운의 선택은 지극히 단순했다. ‘나노. 증강현실 개안. 얼음파편 경로분석.’ [사용자의 두 눈에 증강현실을 개안합니다.] 나노의 목소리와 함께 천여운의 동공이 떨리면서 증강현실이 개안되었다. [얼음 파편의 공격 경로를 분석해서 표시합니다.] -삐삐삐삐삐삐삐삐! 하얀 빛의 입자가 선을 그리더니 이내 사방에서 쇄도해오는 얼음 파편의 이동 경로가 붉은 선으로 그려졌다. ‘보인다.’ 공격 경로가 파악되자, 육안으로 미처 판별이 되지 않는 활로가 보였다. -탓! 천여운이 발이 지면을 박차고 앞으로 번개처럼 뻗어나갔다. 현경의 경지에 오르면서 경공이 훨씬 빨라진 천여운의 시야로 얼음 파편들이 천천히 그를 향해 쇄도해왔다. -채채채채채챙! 천여운이 백룡도를 휘두르며 얼음파편을 부쉈다. 애초에 가만히 서서 전 방위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천여운은 앞으로 치고나가면서 앞과 양 옆으로 날아오는 공격만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그 선택은 옳았다. -채채채챙! 백룡도의 도결에 닿은 얼음 파편들이 쉽게 부서졌다. 천여운의 신형은 빠르게 파편들을 부수고 앞으로 나아갔다. “대, 대단하다!” 분왕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설마 저것을 정면돌파 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대단한 배짱이라 할 수 있었다. -채채채채채챙! 부서지는 얼음 파편들을 가로지르며 천여운은 예상이 들어맞음을 다행스러워했다. ‘얼음 파편에 진기가 실린 것은 아니다.’ 겉으로만 본다면 꼭 이기어검처럼 보였으나 아니었다. 무한한 음기의 내공으로 수많은 얼음파편을 만들어내 단순히 물건을 날리는 수준에 불과한 공격을 행하고 있었다. 여기에 진기마저 실려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말이다. -고오오오! 천여운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느꼈는지 그녀의 투명한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대로라면 금방 닿을 것만 같았다. 여군이 다른 한손을 앞으로 뻗으며 위로 들어 올리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바닥에서 새하얀 김이 흘러나오더니 이내 서리들이 빠르게 응집하며 거대한 얼음장벽이 위로 솟구쳤다. -쿠쿠쿠쿠쿠쿠! “세상에! 저런 것도 가능한가?” 은발을 휘날리며 보이는 그녀의 능력들은 정말 기이했다. 얼음 장벽을 만들어내는 모습이 보이는 그대로 얼음의 마녀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수법은 그녀에게 악수였다. 자신의 시야마저도 가려지면서 천여운의 경로를 향해 무한정으로 쇄도하던 얼음파편들이 멈춰지고 말았다. ‘기회다.’ 천여운이 눈앞에 가로막고 있는 얼음장벽을 향해 백룡도를 약간 비스듬하게 일(一)자로 휘둘렀다. 백룡도에서 생성된 푸른빛 도강이 그것을 갈랐다. -촤아아아악! -쿠르르르르! 갈라진 얼음장벽이 옆으로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천여운이 무너져 내리는 얼음 장벽 사이를 통과해 여군의 앞을 파고들었다. “!?” -솨아아아아아! “늦었어!” 당황한 여군이 전신에서 강한 한기를 발산하며 막아내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천여운의 손이 더욱 빨랐다. -타타타탁! 천여운의 좌수가 그녀의 가슴을 비롯한 단전 쪽에 있는 혈도를 눌렀다. 심후한 공력이 담긴 손길에 경맥 사이에 흐르던 진기가 막히면서 여군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한기가 줄어들었다. ‘무슨 음기가 이렇게 강하지?’ 보통 혈도를 짚을 때 화경의 고수라도 오성의 공력 이상을 쓴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근 칠성에 가까운 공력으로 타혈을 했는데도 음기가 완전히 끊이지 않고 전신에서 흘러나왔다. -움찔움찔! 더군다나 마혈(痲穴)도 같이 짚었는데도 몸이 움직였다. 천여운이 다시 구성의 공력으로 기절하도록 훈혈을 타혈했다. -스르륵! 그제야 여군의 하얀 눈꺼풀이 무겁게 덮이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이를 보면서 천여운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휴우.....” 겨우 사태를 진정시킨 것이었다. 이것을 지켜보던 백기와 분왕이 얼른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분왕이 다소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저, 정말로 제 누이를 제압하실 줄이야. 정말 대단합니다!” 거의 반신반의 했었다.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고는 폭주가 계속 이어질 거라 예상했던 그였다. 문제는 그 폭주의 끝에 여군이 목숨이 다할 지도 몰라서 걱정을 했었는데, 모든 기운을 소진하기 전에 막아서 다행이었다. '이 녀석도 상태가 좋지 않군.' 분왕의 오른팔의 움직임이 어색했다. 백기가 내공을 불어넣어서 도왔지만, 얼었던 피부가 보랏빛으로 변색되어 치료가 시급해보였다. 하지만 그보다 심각한 것은 여군이었다. -불룩불룩! 혈도제압술로 음기의 흐름을 통제했더니 혈관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여전히 체내의 음기가 폭주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천여운이 심각한 목소리로 백기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서둘러서 지부로 가야겠다.” 이대로 내버려뒀다가는 혈도를 제압해놓은 것이 풀려서 다시 폭주가 이어질 우려가 있었다. 동의하는지 백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여운이 쓰러져 있는 여군의 몸을 어깨에 걸쳤다. 백기에게 맡기기에는 여전히 음기가 흘러나와서 상당히 위험했다. “저기 제 누이를 어쩌시려고?” “감미양의 조모에게 데려가려고 한다.” “아! 하지만 그 여자의 조모가 뛰어난 의원이라고 해도 지금 제 누이의 상태를 호전시킬 수 있을지.....” 분왕이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이제는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죽은 감미양의 말했던 대로 약은 임시조치에 불과해보였다. 그런 분왕에게 천여운이 담담하게 말했다. “뭐, 신의도 고칠 수 없다면 정말 어찌할 수 없다는 거겠지. 서둘러야 하니 따라오기나 해라.” “넷? 시, 신의?” -팟! 그 말과 함께 천여운이 나머지 일행들이 있는 황산 쪽으로 먼저 경공을 펼쳤다. 신의라는 말에 당황해하는 분왕에게 백기가 말했다. “......감미양의 조모가 신의다.” “뭐라고?” 이에 분왕의 두 눈이 커졌다. 그렇게 아버지와 자신이 찾아 헤매던 신의가 감미양의 조모란 말인가. 놀라는 한편으로 어이가 없었다. 몇 차례나 그녀에게 약을 받아갈 동안 한 번도 그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진작 알려줬으면 좋았잖아!’ 감미양이 이 사실을 알려주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원래는 분왕의 아버지가 수적들인 용호채를 없애려고 하는 것을 감미양이 여군에게 약을 제조해주는 대가로 살아남았기 때문이었다. “그만 놀라하고 따라오기나 해라.” 백기의 말을 듣고서야 분왕은 정신을 차리고 일단 그들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죽어가는 누이를 살려야 하니 말이다. * * * 황산에 있는 일행들과 합류한 천여운은 서둘러 나루터를 찾았다. 황하만 건너서 서둘러 남하하면 반나절 내로 호남 최북부에 있는 마교의 지부로 갈 수 있다. 그곳에 신의 감로수와 문규, 호상화 등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두운 새벽이었기 때문에 배를 구할 수 있으려나 걱정했는데, 밤늦게도 운영하는 나루터를 발견할 수 있었다. 강을 건너서 쉬지 않고 경공을 펼친 그들은 마교의 지부에 도착했다. “미천한 신도가 신교의 교주님을 뵙습니다! 천세! 천세! 천천세!” “천세!! 천세!! 천천세!!” 이른 아침이었지만 천여운의 방문에 호남 최북부 지부장 대원이 의복도 제대로 갖춰입지 못하고 버선발로 대문 밖으로 뛰쳐나왔다. 수장인 교주가 친히 왕림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 일행 앞으로 백 명이 넘는 교도들이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마, 마교의 교주라고?’ 덕분에 분왕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마교의 영역인 호남성으로 건너간 것도 모자라서, 그 지부에 들어가려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었다. 설마 십만대산의 주인일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역시 환골탈태를 한 게 틀림없어.’ 더욱 그를 오해를 하게 만들었다. 여군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기에 천여운이 서둘러 신의가 머무는 거처를 물었다. “지금 제 일 객당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쪽으로 가시지요.” 지부장 대원이 앞장서서 지부 내 객당으로 안내했다. 천여운이 뒤쫓아서 걸어오고 있는 사 장로 양단화와 백기에게 말했다. “양 장로와 백기는 잠시 다른 객당에서 아기와 시신을 가지고 대기하고 있으세요.” “아! 알겠습니다.” “충!” 당장에 음기가 폭주하는 여군을 치료해야 하는데, 신의 감로수에게 용호채에 있었던 자초지종을 설명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었다. 일단은 급한 불부터 꺼야 하기 때문에 천여운은 그들을 대기하게 했다. “아 저기 계시는군요.” 지부장 대원이 손바닥으로 객당의 대청 쪽을 가리켰다. 마침 제 일 객당에서 신의 감로수가 문규, 호상화와 함께 대청 위에 상을 펴놓고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신의의 안위가 중요하기에 항시 붙어서 그녀를 지키고 있는 문규와 호상화였다. “아! 교주님!” 뜻밖에 이른 아침에 천여운이 나타나자, 문규가 식사를 하다 말고 벌떡 일어나서는 환한 얼굴로 뛰어내려왔다. "앗?" 그런데 그의 어깨에 걸치고 있는 은발의 미녀, 여군을 발견하고는 인상이 딱딱하게 굳어져서 물었다. “......이, 이 여자는 뭐죠?” < 59장 구음절맥 (2) > 끝 작가의 말 (문규): 내 남자가 낯선 여인을 데리고 왔다.(시무룩) < 59장 구음절맥 (3) > 사람에게는 고유의 향이라는 것이 있다. 살에서 맡아지는 향이든 옷에 베인 향이든 말이다. 그것을 본인이 인지하지 못하더라도 타인은 느낄 수 있다. 마찬가지로 기(氣)에도 고유의 느낌이 담겨져 있어서 내공을 단련한 내가고수라면 이를 감지하는 게 가능하다. 더욱 높은 경지에 오를수록 기감의 반경은 넓어지고 감폭은 세밀해진다. 현경의 경지에 오른 고수들은 대자연의 기운과 감응하기에 기의 잔향을 느낄 수 있는데, 황산으로 이어졌던 음기가 황하를 건넜다. -타타타탁! 여느 고수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속도로 경공을 펼치는 자가 있다. 곱슬거리는 긴 머리카락에 짧은 턱수염의 중년인이다. 얼굴에 가득한 주름은 세월의 풍파로 가득하다. 뒷짐을 지고서 경공을 펼치는데도 중년인은 신형에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앞으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서남쪽.’ 차가운 음기의 잔향이 그곳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쉬지 않고 경공을 펼쳤는데 아직까지 자신의 소중한 자식들을 납치한 흉수들을 따라잡지 못했다. ‘누가 되었든 절대로 용서치 않을 것이다. 나의 자식들을 노린 대가를 치르리라.’ 중년인의 눈빛은 냉정했지만 속내는 끓어오르고 있었다. 출타를 마치고 돌아온 왕전은 부서진 거처와 사방이 얼어붙은 흔적들을 발견하고서 추적하는 중이었다. 흔적들을 통해서 폭주한 딸이 엄청난 고수에게 제압되었음을 알아차린 그의 마음은 초조함으로 가득했다. ‘.....저곳은?’ 한참동안 경공을 펼치며 남하하던 왕전의 두 눈에 상당한 규모의 장원이 띠었다. 장원의 현판에 크게 붙어있는 것은, [天魔神敎 支部] 그곳은 바로 천마신교의 호남성 북부 지부였다. 공교롭게도 음기의 잔향은 마교의 지부로 이어지고 있었다. 중년인의 얼굴이 야차처럼 무섭게 일그러졌다. ‘저놈들이 흉수였단 말인가!’ 예상치 못한 자들이 흉수였으나 상관없었다. 그가 세상에서 두려워할 자들은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차가운 한기의 잔향을 따라 중년인의 신형이 번개처럼 마교의 지부를 향해 뻗어갔다. 한편 마교의 호남 북부 지부의 제 일 객당 대청 위에서 신의 감로수가 은발의 절세미녀 여군을 진맥하고 하고 있었다. “흐음.” 워낙 급한 사안이라고 해서 밥을 먹다말고 감로수는 진맥에 집중했다. 혈관이 부풀어 오르고 전신에서 싸늘한 한기가 흘러나오는 여군의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히잉.’ 옆에서 지켜보는 문규의 얼굴이 뾰로통하다. 방금 전에 천여운에게 여자가 누구인지 물었으나, 그는 위험하다는 말과 함께 신의를 불러서 서 둘러 진맥을 보게 했다. 덕분에 괜히 혼자서 수많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다. 그냥 환자라고만 치부하기에 지금까지 그녀가 보았던 여자들을 통틀어 최고라 할 만큼 너무도 아름다웠다. ‘왜 교주님께서 저 여자를 데려 온 거지?’ 천여운을 좋아하는 그녀로서는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문규의 의문증을 풀어준 것은 허봉이었다.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 문규의 모습에 은발의 미녀 여군을 의식하고 있음을 눈치 챈 허봉이 그간의 사정을 알려주었다. [....에 치료를 해주시고 빚을 만들려고 데려오신 거에요.] [아! 그랬던 건가요? 휴, 역시 제가 알고 있는 교주님께서는 그럴 분이 아니죠. 헤에.] 오해가 풀린 덕분에 한결 표정이 밝아졌다. 하긴 그녀가 지금껏 보았던 천여운은 여자의 미색에 흔들리거나 하는 사내가 아니었다. 괜히 질투를 한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아!] 그런데 뒤에 이어지는 허봉의 말에 밝아졌던 문규의 표정을 다시 뒤바뀌게 만들었다. [문규. 확실한 건 아닌데요. 제가 예전에 어떤 서책에서 본 것 같은데, 구음절맥은 반대 성향인 강한 양기를 가진 사람과 음양의 조화를 이루면 낫는다고 하던데.] [음양의 조화?] [그거 있잖아요. 남녀의 교합. 서책에서는 남자의 뜨거운 그것만이...] ‘!?’ [뭐라구욧!] 문규의 얼굴이 빨개지다 못해 터질 것처럼 상기되어 허봉에게 그만하라고 전음을 보냈다. 어디서 보았는지 늘 이상한 정보가 머릿속에 한가득한 그였다. -씨익! 웃고 있는 걸 보니 분명 일부러 장난친 게 틀림없었다. 방금 전까지 고마워했던 마음은 취소였다. ‘너무해! 놀리는 것도 아니고.’ “하아.” 신의 감로수의 입에서 입김이 흘러나왔다. 신기하게도 여군의 주위 공기만 싸늘한 겨울 같았다. 그런 차가운 한기를 견뎌내고 여군의 진맥을 마친 감로수가 심각한 얼굴로 병명을 내뱉었다. “구음절맥!” 손녀가 알아낸 것을 신의가 알지 못할 리가 없었다. “.....살면서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건만.” 그녀가 이런 증상을 가진 자를 본 것은 처음이 아닌 듯 했다. 이에 곁에 있던 분왕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제 누이의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겁니까?” “누가 처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임시조치로 양기를 북돋게 하는 약을 제조해준 것 같은데, 그 덕분에 목숨을 연명한 것 같군. 사실 이 병에 걸리면 스무 해를 넘기기 힘드네.” ‘당신 손녀요.’ 그 처방을 해준 사람은 신의 감로수의 손녀, 감미양이었다. 이 말을 하려다가 입을 꾹 닫았다. 지부로 오면서 사전에 천여운이 치료를 받고 싶다면 되도록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라고 경고를 했기 때문이었다. “방금 전에 이 병을 다시 볼일이 없을 거라고 얘기했는데, 치료한 적이 있는 겁니까?” 천여운의 질문에 감로수가 망설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 그건 무슨 의미입니까?” 당연히 중원제일의 의원인 신의라면 누이를 치료할 수 있을 거라 철썩 같이 믿었던 분왕이었다. 그런데 감로수가 애매한 태도를 보이니, 언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감로수가 잔뜩 굳어있는 분왕을 쳐다보면서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보게. 소협, 노부의 말을 우선 끝까지 듣게나.” “?” “처음 구음절맥을 진맥했던 것은 삼십여 년 전이네. 그 당시에도 근본적으로 어떻게 치료를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었네.” “치료방법을 안다고요?” “그것도 모를 거라 생각했나. 다만 이 병 자체가 일반 사람들이 걸리는 것이 아니라 내공을 연마하는 무림인의 혈통들에게 내려오기 때문에 치료하기 힘든 걸세.” 삼십여 년 전, 신의 감로수는 구음절맥에 걸린 여인을 만났다. 머리가 희다 못해서 은발이 되어버릴 만큼 음기가 폭주한 이 여인을 치료할 방법을 그녀는 연구 끝에 알아냈다. 그러나 이 방법은 단순히 의술만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음기로 막혀버린 경맥을 그에 버금가는 양기의 내공으로 뚫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끝없이 치솟는 음기를 감당할 수 있는 양기를 가진 자를 찾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인 줄 아나?” “그래서 못 찾은 겁니까?” “.....찾긴 찾았네.” 당시에도 신의로 명성을 날리던 그녀는 자신의 인맥을 동원하여, 당대 오대고수 중에서 역근경을 극성으로 연마하여 최고의 내가고수라 불리는 소림방장 구휼 대사에게 부탁했다. 정도 무림인들에게 존경받는 구휼 대사는 중생의 안위를 생각하는 승려답게 선뜻 그 부탁을 받아들였다. “그, 그런데 어째서 실패한 겁니까?” “분명 구휼 대사는 폭주하는 음기를 감당할 만큼의 극양의 내공을 지녔네. 다만 구음절맥을 겪고 있는 그 여인의 경맥이 버티질 못했지.” 구휼 대사가 양기가 가득한 진기를 불어넣어 막혀있는 아홉 경맥을 뚫었으나, 문제는 다른 곳에서 생겨버렸다. 신의 감로수의 말대로 경맥을 틀어막고 있을 정도로 강한 음기를 뚫기 위해 그에 상응하는 양기가 외부에서 들어오면서, 그녀의 경맥이나 몸이 기운들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그녀는 전신의 경맥이 터져서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네. 사실 그분의 탓이 아니었는데 괜한 자책감에 방장직에서 물러났네.” “엇? 그러고 보니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아요.” 문규는 어린 시절 조부인 문연에게 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삼십여 년 전 오대고수 중에 한 사람인 구휼 대사가 갑자기 방장직을 내려놓고 무림에서 물러나기로 천명한 사건은 정도 무림뿐만이 아니라, 마교나 사파 연맹에도 꽤 뜨거운 쟁점이 되었었다. “노부의 긴 의원 인생에 처음으로 사람을 살리지 못했네.” 아무리 신의라고 할지라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가 무공을 익혀서 내가기공에 대해서 해박했다면 그런 문제를 발견했겠지만, 의원으로서 처음 보는 사례였기 때문에 결국 목숨을 구명하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그럼 결국 그 방법이 틀렸다는 건데 무슨 해결방법을 안다는 겁니까?” 분왕의 말에 감로수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한 번 실패한 것을 연구하지 않는다면 그게 의원이라 할 수 있나. 노부는 그때 치료 방법에 문제점을 알게 되었지.” 구휼 대사는 신의에게 양강의 내공을 불어넣어 경맥을 뚫으려고 하니, 음기가 더욱 강하게 치솟아 반탄력이 생겨나면서 더욱 공력을 높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 덕분에 구음절맥에 걸린 여인이 두 강대한 기운을 견디지 못한 것이다. “그럼 무슨 수로 고칠 수 있습니까? 양기를 불어 넣는게 불가능하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둘 다 단점이 있네.” “무슨 단점입니까?” “하나는 당장에 힘들터이니 불가능에 가깝고, 다른 하나는 이 죽어가는 아가씨나 오라비 분이 그다지 원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지.” 자신과 누이가 원하지 않는 방법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분왕이 불안해진 눈빛으로 물었다. “제가 원하지 않는다는 그 방법은 대체 뭡니까?” “참으로 공교로운 것이 막힌 아홉 절맥 중에 음기가 폭주하는 시작점이 자궁 쪽에 있네.” “자, 자궁?” 그 말에 분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갔다. 바보가 아닌 이상 신의 감로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지, 지금 그 말씀은?” “그렇네. 음양의 조화를 통해 경맥에 자극을 줄여서 자연스럽게 양기를 받아들이는 방법이네.” 감로수의 그 말에 허봉이 놀란 눈으로 중얼거렸다. “엇? 그 말씀은 정말로 남자의 뜨거운 유, 육...” “허봉!!!” “흡!” 문규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서 소리치자, 아차 싶었는지 허봉이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의 머릿속이 일순간 복잡해졌다. 허봉이 놀린다고 장난으로 했던 말이 정말 현실로 이루어질 판이었다. ‘으으으! 허봉!’ 문규는 울상이 되어서 속으로 절규하면서 허봉을 흘겨보았다. 그의 말이 씨가 되어버렸다. “음양의 조화를 감당하려면 역시 양기가 강해야 하는데....” 이 말을 하는 신의 감로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천여운을 향하고 있었다. 구음절맥으로 음기가 폭주한 여군을 제압할 정도의 내가고수는 이곳에서 천여운 뿐이었으니 이런 반응은 당연했다. ‘흐음.’ 생각지도 못한 치료 방법에 천여운 또한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물었다. “그것 말고 불가능하다고 하는 방법은 뭡니까?” “그건....” -흠칫! 감로수가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천여운이 대청에서 벌떡 일어났다. 천여운이 떨리는 눈동자로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그 방향은 이곳 지부의 장원 대문이 있는 쪽이었다. ‘전율적이다.’ 지금껏 느껴본 적이 없는 전율적인 기운이 그곳에서 풍겨져 나오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것은 오직 천여운만이 느낄 정도로 절대고수라는 것을 의미했다. 여군이 음기가 폭주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위기감을 느꼈다. “교주님? 왜 그러세요?” 문규가 같이 일어나서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천여운이 모두를 바라보며 경고했다. “모두 이곳에서 움직이지 말고 있어요.” -탓! 천여운이 전율적인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 * * 지부 장원으로 들어오는 대문 앞으로 입구를 지키는 문지기들이 바닥에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다. 정파의 영역과 경계지점이라 할 수 있는 호남성 북부에 자리한 지부에는 문지기들조차 일류 이상의 고수들로 배치되어 있는데, 그들이 너무도 무력하게 당했다. -착! 장원의 현관을 통과하면 외당 건물의 앞으로 큰 마당이 있다. 마당에 마흔 명이 넘는 외당 무사들이 장원 내부로 진입하려는 한 곱슬머리에 턱수염의 중년인을 둘러싸고 있었다. 지부의 외당주 지현이 검으로 그를 겨냥하면서 외쳤다. “고인께서는 당장 물러나시오. 이곳이 어딘지 알고 이리 행패를 부리는 것이오!” 지현의 이마는 식은땀으로 가득했다. 특별한 기운을 발산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중년인에게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위압감이 마당에 있는 무사들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대체 이 자의 정체가 무엇이란 말인가?’ 정파 무림맹과 동맹을 맺은 후로 한 동안 잠잠했던 전선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괴물 같은 자가 난입하니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나야말로 경고하지. 이렇게 되기 싫다면 당장 그대들이 납치한 나의 자식들을 데려와라.” 곱슬머리의 중년인의 앞에 네 명의 외당무사들이 쓰러져 있다. 대문을 통과한 그를 제지하기 위해 달려들었다가 고작 가볍게 손을 휘젓는 것만으로 저리 되었다. 외당주 지현이 어이가 없다는 투로 소리쳤다. “아니. 고인의 자식을 대체 이곳에서 찾는단 말이오! 고인은 대체 누구시기에 이런 억지를 부리는 것이오?” 그 외침에 곱슬머리 중년인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눈빛이 불쾌함으로 가득했다. 차가운 한기의 잔향이 장원의 안쪽에서 선명하게 느껴졌다. “끝까지 발뺌할 참이냐. 그렇다면 내 손으로 직접 찾는 수밖에.” -탁! 중년인이 앞으로 한 발자국 떼었다. 이에 외당주 지현이 외당무사들을 향해 공격 신호를 보냈다. “쳐라!”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외당의 무사들이 일제히 검을 휘두르며 곱슬머리의 중년인을 향해 달려들려고 했다. 바로 그 순간 중년인이 오른손에 검결지를 만들어 가볍게 휘저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파파파파팟! “헉!” “거, 검이?” 그들이 들고 있던 검이 손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손에서 벗어난 검은 허공에 뜬 상태로 검 끝이 역으로 돌아가며 그 주인들을 겨냥했다. “서, 설마 이기어검?” 외당 무사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분명 엄청난 고수라는 것은 짐작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기어검이라는 고절한 수법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현경의 고수임을 의미했다. ‘어, 어떻게 이런 절세고수가 본교의 지부에?’ 외당주 지현 역시도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는 겨우 내공으로 검이 손에서 벗어나려는 것을 막았지만, 다른 외당 무사들은 전부 자신의 검과 대치하고 있었다. ‘검을 정교하게 다루는 것은 불가능해도 이 정도는 할 수 있지.’ 현경의 고수라고 해도 열두 자루 이상의 이기어검을 정교하게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초식을 펼치는 게 아니라 단순하게 움직이거나 찌르는 정도라면 이 정도의 숫자를 감당할 수 있다. 일종의 위협용이었다. “마지막 경고다. 나를 가로막는 자들은 전부 죽을 것이다. 비켜라.” 곱슬머리의 중년인이 한 번 더 경고했다. 이 많은 자들을 죽이게 되면 확실하게 마교의 척을 지는 것을 알기에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절세고수라고 해도 정파를 마주하고 있는 전장터를 종횡한 지부의 무사들이 그런 제안에 넘어갈 리가 만무했다. 더군다나 외당을 지나게 되면 객당 쪽에 자신들이 모시는 하늘이 있다. “허튼소리! 아무리 고인이 절세고수라고 해도 우리들을 정말 우습게 보는 구려! 대 천마신교의 교인들이 위협을 가한다고 해서 무릎을 꿇을 것 같소!” 외당주 지현의 절개 있는 외침에 곱슬머리의 중년인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분노를 억누르고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었건만 기회를 던졌으니 말이다. “참으로 어리석군.” 중년인이 검결지를 들어 올리자 그들을 겨냥하고 있던 검신에 힘이 들어갔다. “그대들의 선택이다. 잘가라.” 중년인이 가볍게 검결지를 휘저었다. -슈욱! 그러자 허공에 떠있던 검이 겨냥하고 있던 외당 무사들을 찌르려들었다. “힉!” 당황해서 눈을 감는 자들부터 각양각색으로 외당 무사들이 검을 피하려고 했는데,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둥둥! 그들을 찌르려던 검이 고작 손가락 한 마디 정도만 움직이더니 멈춘 것이다. 외당 무사들의 표정이 의아해졌다. "검이 멈췄어!" “뭐, 뭐지?” 한순간 곱슬머리의 중년인의 마음이 변했는가 싶었다. 그런데 그게 아닌 듯 했다. 곱슬머리의 중년인이 마치 제지를 당한 것처럼 휘두르던 검결지를 멈춘 채로 손가락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곱슬머리의 중년인의 동공이 빠르게 흔들렸다. ‘이게 대체 무슨?’ 그로서도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진기로 연결된 이기어검이 그의 통제를 벗어나버렸다. 더욱 진기를 끌어올려서 검들을 움직여보려고 했으나 소용없었다. ‘내가 검들에 연결해놓은 진기를 누군가 침식했다.’ 그것 외에는 이 현상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저벅저벅! 바로 그때 중년인의 눈으로 내당의 전각 쪽에서 누군가 외당의 마당 쪽으로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긴 머리카락에 새하얀 피부를 가진 차가운 분위기의 청년이었다. 그는 바로 천여운이었다. '설마 저 젊은이가?' 중년인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천여운의 머릿속에 나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용자의 에너지를 침투시켜 판넬 침식에 성공했습니다.] ‘반격한다. 나노.’ [사용자의 명령에 의거하여 침식한 40자루의 검에 판넬 원격 시스템을 가동합니다. 타겟(Target) 락 온(lock on)] -삐삐삐삐삐삐삐삐! 천여운의 동공이 빠르게 흔들리며 흰빛의 입자가 선을 그리며 이기어검의 제어권이 그에게로 들어왔다. 붉은 십자 모양의 입자가 생성되며 단 한 사람에게로 조준되었다. 천여운이 손을 내밀어 잡아당겼다가 밀어내는 시늉을 하자, 허공에서 멈춰있던 사십 자루의 검들이 다시 역으로 일제히 회전했다. -휘리리리릭! “하! 이런.....” 곱슬머리의 중년인이 기가 차했다. 생애 처음으로 이기어검의 제어권을 도중에 빼앗겨버렸다. < 59장 구음절맥 (3) > 끝 < 59장 일거양득(一擧兩得) (1) > 허공에 떠서 역으로 그를 겨냥하는 사십 자루의 검들. 검끝에서 느껴지는 예리한 기운은 언제라도 그를 꿰뚫을 기세였다. ‘참으로 특이하구나. 이 많은 검에 간섭하려면 그 만큼 세밀하게 진기를 다뤄야 한다는 것인데.’ 당혹스러웠던 것도 잠시였고 곱슬머리의 중년인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기어검이라고는 하나 자신은 실상 방대한 내공으로 허공섭물을 펼친 것에 불과하나, 저 젊은이는 분명 이 많은 수의 검에 진기를 부여한 것이 틀림없었다. ‘고작 약관에 불과해보이는데.’ 느껴지는 기운은 자신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다. 이 정도 능력이라면 중원 오대고수에 버금가는 무위를 지녔다고 봐도 무방했다. 분명 내당 전각 쪽에서 걸어온 것을 보면 마교의 사람이 틀림없을 텐데 과연 누구란 말인가? 그때 곱슬머리카락의 중년인의 머릿속에 최근에 들었던 정보가 기억났다. 신의를 찾기 위해서 하오문에 정보를 의뢰했다가 들은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마교에 젊은 교주가 부임했다고 들었는데, 설마?’ 그의 예상은 정확했다. 중년인을 견제하느라 정신이 쏠려있던 외당주 지현과 외당 무사들이 뒤늦게 천여운을 발견하고는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미천한 교도가 대 천마신교의 하늘이신 교주님을 배알하나이다!” “교주님을 배알하나이다!!!” ‘!?’ 쩌렁쩌렁한 외침에 중년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설마 했는데 정말로 마교의 신임교주일 줄은 몰랐다. 십만대산에 있어야할 마교의 교주가 정파의 영역과 가장 경계지점이라 할 수 있는 호남성 최북단에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하겠는가. ‘잠깐 그렇다면 내 딸 아이를 제압한 자가 저 자란 말인가?’ 여기서 느껴지는 기운들 중에서 그만한 능력자는 천여운 밖에 없었다. 화경의 고수로 짐작되는 한 명의 기운도 느껴졌지만 그자의 능력으로는 폭주하는 구음절맥을 완전히 제압하기에는 무리였다. -착! 천여운의 앞으로 다가온 외당주 지현이 한쪽 무릎을 꿇고 포권을 취하며 보고했다. “호남 북부 지부의 외당주 지현이 보고 드립니다.” “말해라.” “저기 있는 고인이 막무가내로 본교의 지부로 쳐들어와서 경비 무사들과 외당 무사들을 해한 뒤에 자식을 내놓으라고 위협을 가하고 있었습니다.” “자식을 내놓으라고?” 보고를 들은 천여운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전율적인 기운을 느끼고서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는데 아무래도 그 자인 듯 했다. 구음절맥의 여인인 여군의 아버지. 그리고 두 대검을 쓰는 분왕을 통해 짐작하는 그 이름. “무쌍검 왕전!” 천여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그 이름에 외당주 지현을 비롯한 무릎을 꿇고 있는 외당 무사들의 두 눈이 커졌다. 그 이름을 듣고서 놀라지 않을 무림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중원 오대고수 중의 한 사람이자 하룻밤 사이에 삼천 명의 수적을 몰살시킨 악명을 가진 절대고수가 아닌가. -웅성웅성! “무쌍검이라니?” “지금 우리가 오대고수와 대적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 파장은 굉장했다. 아무리 절개 높고 용맹한 마교의 무사들이라고 해도 무림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고수를 보게 되었으니 관심이 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정작 당사자인 곱슬머리의 중년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에 천여운이 그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무쌍검 왕전 공이 맞으시오?” 직접적인 물음에 곱슬머리의 중년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부정이라기보다 긍정에 가까웠다. 중년인의 머릿속은 지금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고 있는 중이었다. ‘내 정체를 안다는 것은 역시 아이들을 데려간 자가 마교의 교주라는 말인가.’ 상당히 곤란한 일이었다. 수적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거대 세력을 수장이 아닌가. 그런 자가 무엇 때문에 자식들을 데려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자를 상대하려면 상당한 진기를 소모할 것이 뻔했다. ‘그렇게 된다면 화경의 고수나 이곳에 있는 고수들이 개입하겠지.’ 어떤 식으로든 불리한 상황이었다. 어느 정도 판단이 선 곱슬머리의 중년인이 위압적으로 뿜어대고 있던 기운을 갈무리했다. 그러자 외당 마당을 짓누르던 공기가 한층 가벼워졌다. -탁! 곱슬머리의 중년인이 천여운을 향해 가볍게 포권을 취하며 인사했다. “천마신교의 신임 교주를 뵙게 되어 영광이오. 본인은 왕전이라고 하오.” “오오오!” 외당 무사들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천여운의 짐작이 맞았다. 곱슬머리 중년인의 정체는 바로 중원 오대고수의 일인인 무쌍검 왕전이었다. 위압적인 기세를 거뒀다는 것은 말로써 상황을 풀어나가겠다는 의사를 표현한 것이리라. -스륵! 천여운이 손을 잡아당기자 허공에 떠있는 검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댕그랑! 댕그랑! “아! 내 검!” 외당의 무사들이 자신들의 검을 얼른 주워들었다. 천여운이 무릎 꿇고 있는 외당주 지현에게 말했다. “쓰러져 있는 외당 무사들을 데려가서 치료해라.” “네?” 지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마당 바닥에 쓰러져 있는 네 명의 외당 무사들이 죽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실상 그들은 가벼운 내상만 입고서 기절한 상태였다. “손에 사정을 둬서 고맙습니다.” 천여운이 가볍게 포권을 취하며 고마움을 표했다. 사실 왕전은 외당 무사들 뿐만이 아니라 대문에 쓰러져 있는 경비 무사들까지 누구도 목숨을 거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마교의 지부 내에 자식들의 기감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들이 목숨을 잃었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겠지만 아직까지 무사한데 살생을 해서 마교마저 적으로 삼기는 그로서도 벅찼다. 단지 무력 시위를 한 것은 자신의 무위를 보임으로써 자식들을 함부로 건들지 말라는 경고이자, 구음절맥인 여군을 제압한 자를 끌어내기 위해서였다. ‘그게 마교의 교주일 줄이야.’ 이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을 뿐이었다. 어찌 되었든 자식들을 데려간 자가 모습을 드러냈으니 본론을 꺼내야만 했다. “천마신교의 수장인 교주를 뵙게 되었으니, 더욱 예를 갖추고 싶으나 그러지 못함을 양해해주길 바라오. 내 자식들의 기운이 이곳에서 느껴지오. 어째서 그들을 데려갔는지 그 연유를 듣고 싶소만.” 최대한 예를 갖춰서 말을 하고 있었지만 힘이 들어간 목소리에는 불쾌함으로 가득했다. 아내를 잃고 나서 그의 삶은 목적은 오직 자식들뿐이었다. ‘좋은 기회다.’ 그 질문에 천여운은 오히려 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빚은 만들어두고 싶었던 당사자가 나타났으니 오히려 모양새가 그럴 듯 해졌다. 왕전이 애타게 찾는 인물이 신의라고 들었으니 말이다. “미처 왕전 공이 오해하게 만든 것은 사과드리겠습니다. 따님의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았기에 서둘러 이곳으로 데려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아.....” 그 말에 왕전이 인상이 어두워졌다. 용호채에 있는 여자 의원인 감미양에게 임시로 약을 처방받았지만 갈수록 음기의 폭주가 잦아지는 것이 걱정스러웠던 그였다. 아직까지 신의를 찾지도 못했는데 이런 사달이 날 줄은 몰랐다. “교주께서 좋은 의도로 그러셨다니, 본인 역시도 조급한 마음에 실수를 한 것 같소이다. 하지만 내 아이를 돌볼 의원이 황산 쪽에..” -오싹! 미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딘가에서 한기가 일어났다. 사방의 공기가 일순간에 차가워지면서 외당 건물에 서리가 생겨날 정도였다. 갑작스러운 한기에 천여운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객당 쪽으로 돌렸다. ‘설마 혈도제압술이 풀렸단 말인가?’ 불과 한 시진 전에 한 번도 혈도에 공력을 심어놨었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한기가 몰아친다는 것은 혈도제압술이 풀렸다는 의미였다. 왕전이 심각해진 얼굴로 외쳤다. “교주!” “따라오십시오!” -탓! 천여운이 다급히 객당 쪽을 향해 경공을 펼치자, 그 뒤를 왕전이 따랐다. 서둘러 객당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자 외당 마당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한 한기가 폭풍처럼 몰아치고 있었다. -쩌저저적! 바닥과 건물 벽이 하얗게 얼어붙었다. 다른 별개의 장소로 온 것처럼 허공에는 차가운 서리들이 둥둥 떠있었다. 객당 앞의 마당에는 허봉이 한쪽 입가에 피를 흘리면서 신의 감로수를 보호하고 있었고, 두 사람이 긴 은발을 흩날리고 있는 여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요.” “교주님이나 양 장로님이 오셔야 할 것 같아.” 그들은 문규와 호상화였다. 천여운이 자리를 비운 후로 갑자기 깨어난 여군으로 이 사태가 벌어졌다. 전신에서 소름끼칠 만큼 싸늘한 한기를 내뿜는 여군은 아무리 초절정의 고수들인 그녀들이라 해도 감당키 어려웠다. “하아.” 문규의 입에서 뿌연 김이 흘러나왔다. 마치 겨울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공으로 몸을 보호하는데도 한기로 인해 떨릴 만큼 추웠다. “온다!” 호상화가 다급하게 외쳤다. -팍! 은발을 흩날리는 여군이 객당 마루바닥에 가볍게 진각을 밟자, 이를 중심으로 바닥에서 새하얀 얼음 가시가 튀어나와 그녀들에게 쇄도했다. -촤촤촤촤?! “이런!” “뛰어요!” 바닥 전체에서 얼음 가시가 튀어나오자 그녀들이 동시에 뛰어올랐다. 순식간에 객당 마루바닥이 얼음 가시밭이 되고 말았다. “에잇!” 문규가 뛰어오른 상태에서 장력을 날렸는데, 그것이 여군의 몸에 미처 닿기도 전에 하얀 김으로 변해 사라져버렸다. ‘말도 안 돼!’ 놀라할 틈도 없이 여군이 두 손을 교차했다가 활짝 펴자, 새하얀 서리 돌풍이 일어나서 허공에 체류 중이던 그녀들을 강타했다. -휘이이이잉! 파팍! “꺄악!” “으윽!” 두 사람이 다급히 호신강기로 몸을 보호했지만 이것은 거대한 진기 덩어리나 마찬가지라 그들의 몸이 뒤로 튕겨져 나갔다. -털썩! 데굴데굴! 두 여인은 바닥을 뒹굴다가 낙법을 치면서 겨우 자세를 잡았다. 그런데 어느새 그들의 주위 허공에 수많은 날카로운 얼음조각들이 둥둥 떠서, 그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이, 이건 대체?” “상화. 제 눈이 잘못된 게 아니죠?” 일반적인 그들이 알고 있는 무림인의 규격이 아니었다. 마치 전설 속에 나오는 설녀(雪女)나 백발 마녀의 화신이라도 되는 것만 같았다. 은발을 흩날리면서 그녀들을 노려보고 있는 여군의 눈동자가 점점 투명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우우웅! 호상화가 들고 있는 거대한 도끼에 푸른빛 강기가 일렁였다. 문규 역시도 두 손바닥에 장강을 형성하여 언제든지 초식을 발휘하기 위한 기수식을 취했다. 두 여인들의 눈빛이 긴장감으로 물들었다. 그때 여군이 그들을 향해 뻗은 손바닥을 움켜쥐는 시늉을 했다. -스스스스스! 그러자 허공에 떠있던 수많은 날카로운 얼음 조각들이 만천화우의 암기처럼 일제히 그녀들을 향해 쇄도하려 했다. -슈슈슈슈슈슈!!!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녀들을 향해 빠르게 날아오던 얼음조각들이 중간에 멈춰 섰다. 각자의 절기를 펼쳐서 얼음조각의 공격을 막아내려 했던 그녀들이 영문을 몰라 하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군.” “앗! 교주님!” “교주님!”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천여운이었다. 때마침 객당에 도착한 천여운은 얼음 조각의 공격들을 막아낸 것이었다. 그런데 도착한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탁! “아?" 그녀들의 앞으로 곱슬머리의 중년인이 나타나 얼음조각들을 향해 양손으로 만든 검결지를 휘저었다. -촤촤촤촤?! 그러자 놀랍게도 허공에 날카로운 예기들이 선을 그리더니, 이내 얼음조각들이 산산조각이 나다못해 가루로 부서지고 말았다. 이런 엄청난 능력을 보여준 자는 바로 무쌍검 왕전이었다. ‘대단하다. 이런 쾌검이라면 아까 전의 이기어검도 충분히 막았겠구나.’ 천여운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과연 중원 오대고수라 불릴 만한 검술 실력이었다. “여군아.” 왕전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엄청난 한기로 인해 폭주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상태가 최악인 듯 했다. ‘서둘러야 겠구나.’ 왕전이 객당 마루 위에 서있는 은발의 미녀, 여군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엄청난 위압감을 내뿜는 왕전의 등장에 위기감을 느꼈는지, 여군이 허공에 있는 서리들을 응집시켜 두꺼운 얼음 장벽을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천여운에게도 통하지 않은 것이 왕전과 같은 절대고수에게 그런 것이 통할 리가 없었다. -쿠르르르! 촤악! 얼음 장벽이 미처 만들어지기도 전에 그것이 갈라지며 왕전의 신형이 여군에게 도달했다. 어느새 객당 마루바닥에 치솟아 있던 얼음 가시들도 가루처럼 변해 있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무위였다. -타타타탁! 여군에게 도달한 왕전의 손이 그녀의 혈도를 눌렀다. 그런데 약을 먹기 전이라면 오성 공력만으로도 먹혔던 혈도제압술이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강한 음기가 반탄력을 일으켰다. ‘더욱 심각해졌구나.’ 안 되겠다고 생각한 왕전이 단번에 팔성 공력으로 혈도제압술을 펼쳤다. -타타타타탁! 심후한 공력이 주요 혈도를 파고들자 여군의 몸이 움찔거리더니, 이내 사방을 겨울로 만들어놓았던 한기가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여군의 주위로는 한기가 강했다. -덜덜덜! 특이하게도 혈도제압술에 당한 여군은 자신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음기에 추위를 느끼는지 몸을 떨었다. 왕전의 눈빛에 당혹감이 서렸다. 아무리 상태가 심각해도 이 정도까지인 적은 없었다. ‘허어,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용호채까지는 반나절은 걸릴 터인데.’ 얼른 용호채에 있는 감미양에게 데려가야 할 것 같은데, 이대로 가다간 여군이 음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동사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그때 그들 부녀의 곁으로 근육질의 노파와 천여운이 다가왔다. 노파는 바로 신의 감로수였다. ‘아?’ 왠지 낯익은 모습에 왕전이 인상을 찡그리는데, 감로수가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고 있는 여군의 맥을 짚었다. “의원입니까?” 왕전의 말에 천여운이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을 진맥을 하던 신의 감로수가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아아, 결국 음기가 체내에 완전히 퍼진 듯 합니다. 이대로 가면 반나절도 못넘길 겁니다. 교주님. 이제 선택권이 없습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어르신. 제 딸이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딸이 죽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사로잡힌 왕전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신의 감로수가 안타깝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음양 교합 이외에는 답이 없습니다.” “엥!?” 뜬금없이 튀어나온 음양교합이라는 말에 왕전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 59장 일거양득(一擧兩得) (1) > 끝 < 60장 일거양득(一擧兩得) (2) > 왕전의 얼굴은 황당함과 분노가 뒤섞여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음양 교합이라는 말에 화가 폭발하여서 일순간 신의 감미양을 죽일 뻔 했다. 하지만 그녀의 정체를 듣고 나자 차마 어찌할 수가 없었다. 중원 최고의 의원이라 불리는 신의가 구음절맥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음양 교합뿐이라고 하는데 부정하기도 어려웠다. ‘소림방장이셨던 구휼 대사가 실패하신 일이라니....’ 더군다나 전 오대 고수 중 일인이었던 구휼 대사가 무림에서 은퇴한 사정마저 듣고 나니 더욱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결국 당장에 죽어가는 딸을 구하려면 음양 교합을 통해 음기가 폭주하는 시작점인 자궁에서부터 막힌 경맥을 뚫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서책에서나 보던 일이 내 여식에게 벌어지다니....’ 이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다면 허봉이 크게 동의했을 지도 모른다. 천하에서 인정하는 오대 고수의 일인이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에 무쌍검 왕전은 탄식했다. 이런 왕전과 마찬가지로 난감하기는 천여운 역시도 같았다. “음양 교합이라니.....음양 교합.....” 문규가 혼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게 같은 말을 대뇌였다.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연모하는 이가 다른 여인과 몸을 섞어야 한다고 하면 좋아할 여인이 어디 있겠는가. “히잉!” 그녀가 고개를 파묻으며 울상을 지었다. “후우.” 천여운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침울해져 있는 문규를 바라보는 천여운은 오죽 답답하겠는가. 다른 이들이었다면 그 분위기가 신비로우면서 천하의 절색인 여군을 안을 수 있다고 한다면 좋아서 난리였겠지만 천여운은 달랐다. ‘다른 여인이라니....’ 천여운은 평생 단 한 여인만 보기로 결심했다. 여섯 종파에 대한 폐해를 겪고 나서, 처와 자식들이 많은 것은 결국 분란의 씨앗만 남긴다는 것을 여실히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교주님.’ 마도관 시절부터 지켜보았던 수하들은 그 심정을 이해했다. 천여운은 한 번 정한 것은 끝까지 관철할 만큼 확고한 사내였다. 그런 그가 스스로 결정했던 것을 꺾는다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저 구음절맥의 여인을 살리는 게 옳다.’ 문규와 친한 호상화마저도 그렇게 생각했다. 감정적인 부분을 떼어놓고 본다면 중원 오대고수인 무쌍검 왕전에게 빚을 만들 수 있다. 오히려 빚을 넘어서 그를 장인이자 아군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회였다. “시간이 없네.” 모두가 고민에 빠져있을 무렵, 신의 감로수가 서두르기를 권했다. “하아....하아....” 여군의 벅찬 호흡에서 하얀 김이 흘러나왔다. 그녀가 침을 꽂아서 흐트러진 내기의 흐름을 통제하고 있었지만 이걸로는 여군의 목숨을 연명시키기보다 오한을 완화시켜줄 뿐이었다. “아버지.” 분왕이 그를 안쓰럽게 불렀다. 예상대로 그의 정체는 무쌍검 왕전의 장남이었다. 그리고 그의 실제 본명은 왕분이었다. “분아.” “아버지.....저도 불편하긴 하지만, 일단 여군이를 살리는게 우선이 아닐까요?” “그리 생각하는 것이냐.” “.......죽으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왕분의 말에 왕전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딸을 살리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생판 처음 보는 자에게 몸을 맡기게 한다는 것은 아버지로서 용납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딸의 몸을 허락한다면 그것을 하룻밤의 인연으로 그치게 할 수 없다. 한 번 몸을 섞었으면 당연히 딸의 앞날을 위해서라도 책임져야 할 일이었다. ‘내 소중한 딸을 저 자에게 맡긴다고?’ 신분이야 훌륭하다. 무림 삼대 세력 중에 하나인 마교의 교주가 아닌가. 더군다나 무림인으로서 그 무위조차도 훗날의 오대 고수를 맡아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고절했다. 다만 왕전 역시도 눈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크흠.’ 내색하진 않고 있지만 천여운의 모습을 보니, 저기서 고개를 푹 숙이고서 침울해하고 있는 여인의 눈치를 상당히 보고 있었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뛰어난 무위와 아름다움, 그리고 기품이 느껴졌다. 마교에서도 아마 꽤 지체 높은 가문의 여식이리라. 아무래도 그녀는 차기 교주의 부인이 될 사람인 듯 했다. ‘나 왕전의 딸이 정실도 아니고 마교 교주의 첩이 되라고?’ 무림에 적이 많고 자식들을 위해서 몸을 숨겼지만, 중원 오대 고수라는 것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는 그였다. 그런 자부심을 가진 사내가 여식을 타인의 첩으로 보내고 싶겠는가. 왕전이 다시 한 번 천여운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아내가 될 사람의 눈치를 보는 걸 보면 여색이 있는 자는 아니다.’ 역대 마교의 교주들은 부인을 많이 두었다고 들었는데, 천여운의 태도를 보면 그들과는 좀 다른 것 같았다. 그나마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다. “하아....하아....” 깊은 고심에 빠져있는 왕전의 귓가로 앓고 있는 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 이상은 지체할 시간이 없다고 판단한 왕전은 결국 자신의 복잡해진 머릿속을 간결하게 만들었다. ‘어리석구나. 왕전아. 왕전아. 우선 딸을 살려도 모자랄 판국에.’ 딸이 죽게 생겼는데 이것저것 고려할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대청 위에 있던 왕전이 다급하게 천여운의 앞으로 다가와 포권을 취했다. -탁! “천 교주. 나 왕전은 살면서 누구에게도 아쉬운 소리를 한 적이 없는 사람이오. 하나, 오늘만큼은 스스로의 맹약을 깨야할 것 같소.” -털썩! 그 말과 함께 왕전이 바닥에 두 무릎을 꿇었다. 뜻밖의 행동에 객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놀라워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중원 오대고수인 무쌍검 왕전이 무릎을 꿇은 것이었다. “왕전 공!” 천여운이 난처한 기색으로 그를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그가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왕전이 무릎을 꿇은 상태로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디 본인의 딸을 살려주시오. 오대 고수로서가 아닌 한 사람의 아비로서 이렇게 간절히 빌겠소.” -쿵! 왕전이 이번에는 바닥에 자신의 이마를 박았다. 자존심을 완전히 내려놓고 머리까지 숙여가며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하아.....” 이에 천여운은 참으로 난감했다. 어찌 본다면 지금의 상황은 진퇴양난이나 마찬가지였다. 무림의 명숙이라 할 수 있는 왕전이 이렇게까지 부탁을 하는데 거절한다면 그에게 빚은커녕 척을 지게 될 것이다. ‘그것은 두렵지 않다.’ 어차피 수많은 역경을 이겨내고서 마교주의 자리를 쟁취한 그였다. 설사 오대 고수라 할지라도 적이 되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더군다나 정파인도 아닌 마교인인 그는 누군가를 살려야 한다는 도덕심 따위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 내 의지를 관철하는 게 맞다.’ 오직 문규 한 사람만을 바라보기로 결심하지 않았는가. 오대고수를 얻을 기회를 잃는 것아 아쉽지만 더 훗날을 바라보는게 맞았다. 그가 여기서 다른 여인을 받게 된다면 여섯 종파와 같은 폐해가 또 일어날지도 모른다. 쟁탈전이라는 미명 아래 배다른 형제끼리의 권력을 위한 학살극. ‘문규 이외에 다른 여인이 아이를 가진다면 또 다시 비극이 일어나겠지.’ 천여운 자신은 복수를 위해서 그러했지만 자신의 자식들이 그러기는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천여운의 머릿속에 나노의 목소리가 울렸다. [사용자가 피임(避妊)을 원하신다면 자체 정관 차단 모드를 실행할 수 있습니다.] ‘뭐?’ 피임이라는 것은 임신을 피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정관 모드라는 것은 대체 무슨 소리인가? [정관 모드는 체내의 나노머신들이 사용자가 성 행위 시에 정자가 이동하는 통로인 정관을 일시적으로 막습니다. 정관 수술보다 더욱 효과적으로 피임을 할 수 있습니다.] ‘!?’ 천여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말은 원하는 대상자에게만 임신을 시킬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혹시나 여군이 임신하는 것을 우려하는 천여운을 안심시키기 위해 나노가 정보를 제공한 것이었다. ‘........’ 나노의 말에 천여운이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나노의 말대로라면 정관 모드를 발동한다면 문규 이외에 어떠한 여자가 아이를 가지는 것을 피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스스로 납득할 만한 이유를 나노가 단번에 없앤 것이었다. ‘젠장......’ 바로 그때 천여운의 귓가로 문규의 전음이 들려왔다. [교주님!] ‘응?’ 이에 문규를 바라보자 어느새 그녀가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서 뭔가 결의에 찬 눈빛으로 천여운을 쳐다보고 있었다. [히잉, 저 정말 속상하고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아요.] 문규의 그 말에 천여운이 차마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사실 객잔에서 천여운은 문규와 뜨거운 사랑을 나누면서, 그녀의 귓가에 대고 맹세를 했었다. 오직 그녀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부인으로 받겠다고 말이다. [문규......] [그런데 아무리 속상해도 공은 공이고 사는 사가 아니겠어요!] [?] [저는 교주님과 이어질 여인이기 이전에 대 천마신교의 교인이면서 교주님의 충실한 수하에요. 당연히 교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거절할 이유는 없다고 봐요.] 눈빛은 결의에 차있는데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뭔가 그런 모습이 미안한 한편으로 이상하게 귀엽게 느껴지는 천여운이었다. [히잉.......왕전 공의 부탁을 들어주세요!] 그녀의 결의는 바로 이것이었다. 고개를 푹 숙여가면서 고민을 한 문규는 이것이 마교에 있어서나 천여운에게 이득이 되었으면 되었지 절대로 손해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했다. 다만 자신만의 남자가 아니게 되는 것이 속상하고 슬플 뿐이었다. [문규.....원하지 않는데 그렇게 무리하지 않아도 돼.] [당연히 원하지 않죠! 교주님이라면 제가 다른 잘생긴 남자들! 응! 막 만나고 그러면 좋겠어요?] [.......] 그렇게 역지사지(易地思之)로 말하니 할 말은 없다. 사실 마교에서 천여운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문규뿐이었다. 그녀만이 천여운에게 안식처이면서 편안하게 해준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웃어요? 아주 좋으신 가봐요. 구음절맥을 핑계로 예쁜 여자랑 막....히잉! 몰라요!] 결국 문규의 두 뺨으로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속이 상하긴 많이 상한 듯 했다. 천여운이 그런 문규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으며 전음을 보냈다. [뭐가 예쁘다는 거야. 내게는 문규 네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워.] 그런 천여운의 말에 눈물을 흘리던 문규가 그를 흘겨보며 전음을 보냈다. [흥흥! 교주님은 순애보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까 아니네요.] [응?] [......피! 거짓말. 그렇게 낯간지러우면서......괜히 부끄럽게 만드는 말을 쉽게 하실 수 있어요.] 문규가 부끄럽다는 듯이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너무도 사랑스러운 모습에 당장에 뛰어가서 안아주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보는 이목도 많았고, 머리를 숙인 왕전에게 예의가 아니었다. [내게는 늘 네가 우선이야.] [흥흥! 어디 지켜볼게요. 그리고.....이번에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이해하지만, 왕 소저 이외에는 안 돼요. 정말로!] [......그래.] 문규의 허락이 떨어지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후대의 문제도 나노로 인해 해결되었기 때문에 아무 걱정이 없다는 의미였다. 천여운이 머리를 바닥에 박고 있는 왕전에게 허리를 숙여서 그를 일으켜 세우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왕전 공이 딸을 살리려는 마음을 어찌 외면하겠습니까?” “천 교주!” 천여운이 부탁을 받아들이자 왕전의 얼굴이 환해졌다. 지금 여기서 유일하게 딸을 살릴 수 있는 것은 천여운뿐이었다. 물론 그 자신도 음기를 감당할 수 있으나 천륜을 어기고 짐승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부탁하겠소. 부디....부디 내 여식을 살려주시오.” “알겠습니다.” 천여운의 손을 붙잡는 왕전의 눈빛은 정말로 간절했다. 아내를 떠나보내고 오직 그의 삶의 원동력은 자식들뿐이었다. 결정을 기다리던 신의 감로수가 잘됐다며 말했다. “흠흠, 잘 이야기가 마무리되었으니 다행입니다. 교주님. 서두르시죠. 더 지체했다가 음양 교합으로도 힘들 수도 있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흠흠!” 천여운의 물음에 신의 감로수가 헛기침을 하면서 넌지시 객당에 있는 다른 이들을 쳐다보았다. 이에 왕전을 비롯한 천여운의 수하들이 살짝 민망해하며 객당 바깥으로 나갔다. 그들이 물러나자 감로수가 앞으로 천여운이 해야 할 음양 교합의 치료방법을 설명해주었다. 치료라는 명분을 떼고 듣는다면 천여운조차 낯 뜨거운 단어들이 오갔다. 모든 것을 전해준 신의 감로수가 마지막으로 신신당부를 하면서 객당 밖으로 물러났다. “교합을 시도하는 도중에 강하게 거부할 겁니다. 그리 된다면 교주님께 격한 싸움이 될 겁니다. 절대로 중도에 멈춰서는 안 됩니다. 아시겠죠?” “.......” 뭐라고 대답하기 참 애매했다. 고개를 끄덕인 천여운이 한기를 내뿜고 있는 여군을 안고서 객당 방안으로 들어갔다. 방에 있는 침구에 그녀를 조심스레 내려놓고 나서 천여운이 숨을 크게 내쉬었다. “후우.”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도 그 역시도 떨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일단 혈도부터 풀라고 했지.’ 음양교합을 할 때 혈도에 막고 있는 공력을 해소시켜야 한다고 했다. 이걸 풀고 나면 여군이 다시 눈을 뜨게 된다. 정말로 격한 싸움이 될지도 모른다. ‘혹시 모르니, 미리 옷부터 벗겨야 겠구나.’ 여군이 도중에 격렬하게 반항한다면 음양교합을 하는 것이 힘들어질 수도 있다. 다소 떨리는 눈빛으로 천여운이 침구에 누워있는 여군의 겉옷에 손을 뻗었다. < 60장 일거양득(一擧兩得) (2) > 끝 작가의 말 다음화는 19금화입니다. 19금화가 불편하신 독자님께서는 한 편을 건너뛰시고 보시면 됩니다. < 60장 일거양득(一擧兩得) (3)-19금 > 천여운은 사랑하는 문규와 뜨거운 밤을 보내면서 처음으로 여자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 한 번에 불과했다. 아무리 담담하면서 냉철한 그라고 해도 만난 지 고작 반나절 밖에 되지 않은 여인의 옷을 벗기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스르륵! 천여운이 여군이 입고 있는 겉옷을 조심스럽게 벗겼다. 푸른 겉옷이 벗겨지면서 그녀의 속옷이 드러났는데, 겉옷보다 얇아서 새하얀 살결이 보였다. 그 모습에 괜히 얼굴이 후끈 뜨거워졌다. 낯 뜨겁기는 했지만 어찌되었든 음양교합을 시도하려면 나신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번에는 천여운의 손이 그녀가 입고 있는 속옷으로 천천히 향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번뜩! ‘엇?’ 얌전히 눈을 감고 있던 여군이 갑자기 두 눈이 떠졌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혈도제압술을 펼친지 고작해야 이각 정도 밖에 되지 않았는데, 자의로써 정신을 차린 것이었다. -투둑! 투둑! 투둑! 바로 곁에 있으니 확실하게 들렸다. 정신을 차린 것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체내를 잠식한 무한한 음기가 혈도를 막고 있는 왕전의 심후한 공력을 배출해냈다. ‘음기가 최고치에 달했다더니 혈도제압술도 통하지 않는구나.’ 옷을 전부 벗기기도 전에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천여운이 재빨리 그녀의 치마를 잡아당기려 했는데, 강한 한기가 뿜어져 나오며 그의 신형이 위로 솟구쳤다. “헛?” -쾅! 위로 솟구친 천여운의 몸이 방안 천장에 부딪쳤다. 순간 반탄강기로 몸을 보호하지 않았다면 내상을 입을 뻔했다. ‘팔 성 공력으로는 더 이상 막기 힘들다.’ 음기가 최고치에 달했다는 것은 진기 역시도 그만큼 올랐다는 것을 의미했다.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로 인해 침구가 들썩였다. -쩌저저저적! 객실 방안에 서리들이 생겨나더니, 이내 사방을 차갑게 얼리기 시작했다. 혈도제압술을 풀자마자 최고치로 음기가 치솟고 있었다. 침구에 누워있는 그녀가 손을 내밀자 허공에 날카로운 얼음조각들이 생겨나더니, 천장에 박혀있는 천여운에게 날아갔다. -슈슈슈슈슈슉! 천여운이 재빨리 날아오는 얼음조각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방안이 일순간 음기 이외에도 천여운의 십성 공력으로 끌어올린 진기로 가득해졌다. -슈슈슈! 둥둥! 그러자 천여운에게 쇄도하던 얼음조각들이 아슬아슬하게 멈춰 섰다. 천여운이 손을 옆으로 휘젓자 얼음조각들이 부서지면서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파스스스! ‘이러다간 계속 싸움만 길어지겠어.’ 얼음 조각들을 파괴한 천여운의 신형이 부서진 천장에서 튕겨 나왔다. 그리고는 잔상을 일으키며 여군이 누워있는 침구로 내려왔다. -고오오오오! 천여운이 자신의 바로 위를 덮쳐오자, 그녀의 눈동자가 투명해지면서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객실 공간이었는데 은발이 흩날리며 날카롭게 섰다. 그 모습이 하얀 고양이가 앙칼지게 성질을 부리는 것만 같았다. -솨아아아아! 여군의 몸에서 한기가 회오리처럼 일어나며 날카롭게 서리들이 일어나, 천여운의 몸을 난자하면서 밀쳐내려고 했다. ‘큭!’ 천여운이 십성 공력으로 반탄강기를 일으켜서 그것을 막아냈다. 아무리 음기가 최고조에 올랐다고 하나 현경의 경지인 천여운의 몸에 상처를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파스스스슥! 오히려 서리들이 천여운의 반탄강기에 맞고 부서졌다. 이런 공격들이 통하지 않자 여군이 방법을 바꿨다. -휙! 여군의 우수가 재빠르게 움직이며 천여운의 목을 움켜잡으려 했다. “어딜!” -팍! 그것을 천여운이 더욱 빠르게 낚아채서 침구 쪽에 못 움직이도록 고정시켰다. 그녀가 몸을 비틀면서 반대 손을 들어 올리려고 했으나, 이미 천여운이 먼저 손목을 붙잡고 침구로 짓눌렀다. 덕분에 여군은 양팔을 들어올린 상태로 무방비가 되었다. -찌이익! 그 틈을 노려서 천여운이 재빨리 그녀의 치맛자락을 거칠게 찢어버렸다. 덕분에 그녀의 새하얀 허벅지와 긴 다리가 드러났다. 꽃잎만 가리고 있는 속옷은 자극적이었다. -콱! “큭!” 잠시 치마를 찢어버리고 다시 손목을 잡으려고 했는데,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여군의 날카로운 손톱이 천여운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마치 단숨에 심장을 옥죄이려는 것처럼 말이다. -쿠욱! 그러나 천여운의 단단한 가슴 근육은 그녀의 손톱을 파고들지 못하게 만들었다. 손톱에 한기를 응집시켜서 파고들려 해도 소용없었다. “으으으으!” 처음으로 그녀의 입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마치 분하다는 듯이 말이다. 이와 동시에 그녀의 눈동자가 완전히 투명해지면서 그녀의 손톱으로 모든 것을 얼려버릴 것만 같은 한기가 일어나 천여운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쩌저저저적! 천여운의 단단한 가슴 피부 부분이 하얀 서리가 일어났다. 피부가 얼어붙은 것이었다. [체온을 끌어올려서 피부가 얼어붙는 것을 막겠습니다.] -우우우우웅! 나노의 목소리와 함께 천여운의 체내에 있는 수억의 나노머신들이 분주히 움직이면서 온몸의 체온이 높게 상승했다. -치이이이이이! 냉기에 맞서서 체온이 상승하자 몸에서 김이 뿜어져 나오며 방안이 뿌옇게 변해갔다. 천여운이 완전하게 투명해진 그녀의 두 눈을 보면서 생각했다. ‘신의의 말대로 음기가 한계치에 올랐다. 더 지체되면 그녀의 경맥이 완전히 얼어붙어서 죽게 된다.’ 스스로의 목숨을 위협하면서 최악으로 강해진 것이다. 더 이상 자신의 몸을 보호하면서 그녀를 공략하기에는 촉박해졌다. 천여운이 여유로운 한손으로 자신의 하의를 찢었다. -촤악! 그러자 천여운의 굵은 허벅지와 함께 아직은 힘이 들어가지 않은 남성이 드러났다. 대단한 것은 힘이 들어가지 않았는데 여느 물건들과는 비교하기 힘들 만큼 건실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래서 제대로 들어갈 수 있을까?’ 워낙 격렬하게 대치중인지라 흥분하는 것이 힘들었다. -고오오오오! 천여운의 등 뒤의 허공에서 서리들이 모여서 날카로운 얼음조각들이 생겨났다. 여군이 투명한 눈동자를 밑으로 내리깔자 그것들이 일제히 천여운의 등으로 쇄도해서 꽂혔다. -파파파파파팍! 그것을 천여운은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았다. 그저 방탄강기를 유지해서 등 깊숙이 파고들지만 않게 했다. 대응이라고는 나노머신이 활성화 되어서 자가 수복을 통해서 얼음조각을 밀어내게 할 뿐이었다. -콱! 천여운은 그녀의 공격을 무시하고 오른쪽 허벅지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스스로에 대한 보호의식이 남아있는지 그녀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허벅지를 오므리려고 했다. 그러나 천여운의 괴력은 청옥석을 단순히 완력으로 부술 정도다. -팍! 그녀의 오른쪽 허벅지가 강제로 벌려졌다. 그 순간 천여운이 여군의 은밀한 꽃잎을 가리고 있는 속옷을 거칠게 뜯어냈다. -찌이익! 속옷이 찢어져서 은밀한 부위가 드러나자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음기가 폭주하여서 모든 것을 얼려버리고 파괴하려는 본능 속에서 여자로서의 의식이 일부 눈을 뜬 것이었다. -슥! 천여운이 허리를 밀면서 천천히 그녀의 꽃잎에 남성을 비볐다. ‘윽! 차갑다.’ 얼음 같이 차가운 꽃잎에 순간 남성을 뗄 뻔했다. 일부러 남성을 자극하여서 흥분시키려고 했는데 오히려 얼음장 같은 차가움만 느끼고 말았다. “이익!” 그녀가 거칠게 몸을 비틀면서 천여운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반항이 심하자 천여운이 허벅지를 잡고 있던 손을 떼서, 이번에는 그녀의 속옷 상의를 찢어버렸다. -출렁! 유일하게 몸을 가리고 있던 속옷 상의가 찢어지자 그녀의 봉긋한 두 젖가슴이 출렁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 피부에 늘씬한 몸매에 어울리지 않게 풍만한 가슴을 지녔다. “아아아!” 천여운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아름다운 나신에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해하던 천여운의 남성에 불끈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꾸욱! “학!” 남성이 커지면서 비비기만 했을 때와 다르게 꽃잎을 살짝 찌르자, 여군이 당혹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침구 위로 도망가려했다. -꽉! 하지만 한쪽 팔목이 천여운에게 잡혀 있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천여운이 공력을 운기하여 체온을 뜨겁게 상승시킨 오른손 손가락으로 그녀의 은밀한 꽃잎을 건드렸다. “아앗!” 차가웠던 꽃잎에 따스한 손가락이 닿자 그녀의 입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한 번도 닿지 않았던 은밀한 곳에 타인의 손길이 닿자, 몸을 최대한 비틀면서 벗어나려고 했다. -꽉! 천여운은 반항하는 그녀를 꽉 붙잡고서 은밀한 부위를 공략했다. 차가웠던 꽃잎이 녹아서 젖게 만들지 않고는 음양 교합을 시도할 수가 없다. -슥슥! 처음에는 가볍게 간질이며 비비던 천여운의 손가락이 점차 빨라지며, 이내 그녀의 은밀한 꽃잎 안으로 쑤욱하고 진입을 시도했다. “흐윽!” 몸을 비틀어대던 그녀가 일순간 부르르 떨었다. 자신의 안으로 들어오는 천여운의 뜨거운 손가락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더!’ 천여운이 조금씩 그녀의 애간장을 태우듯이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이자, 몸을 이리저리 뒤틀던 그녀의 움직임이 조금씩 느려져만 갔다. ‘아! 젖고 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천천히 공략을 시도했던 천여운의 손가락에 물기가 느껴졌다. 그녀의 꽃잎이 젖어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천여운의 손가락의 움직임이 더해갈수록 더욱 끈적해져만 갔다. ‘됐다. 지금이다.’ 천여운은 드디어 때가 왔다고 판단했다. 그녀의 은밀한 꽃잎을 공략하던 손가락을 빼냈다. “이익!” 손가락이 자신의 안에서 빠져나오자 일순간 움직임이 둔해졌던 여군이 다소 상기된 얼굴로 가슴에 손톱을 박고 있던 한 손으로 천여운을 밀쳐내려고 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쑤욱! 그녀가 방심한 찰나에 천여운의 굵게 흥분한 남성이 젖어있는 꽃잎을 파고들었다. “하아악!” 여군의 허리가 활처럼 휘어지며 투명한 두 눈이 커졌다. 손가락이 들어왔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은 뜨겁고 굵은 육봉은 그녀의 모든 의식을 일순간 마비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아....하아....” 천여운이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며 그녀의 꽃잎 안으로 남성을 완전히 밀어 넣었다. 그러자 그녀의 입에서 가냘픈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하으으으윽.” -꿈틀! 그녀의 골반과 허리가 떨려왔다. 남성이 들어온 순간 통증과 함께 미묘한 감각에 사로잡혀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것은 천여운 또한 마찬가지였다. 문규와의 경험이 있다고 하나, 여군의 안으로 남성이 들어가자 차가우면서도 알수 없는 쾌감에 순간 정신이 아찔해져왔다. ‘이게 음기인가?’ 일반적인 남녀의 관계를 맺었을 때와는 확연하게 다른 느낌이었다. 여기서 허리를 빼면서 움직이게 된다면 성교로 이어지겠지만, 천여운이 우선적으로 해야할 일이 있었다. “후우!” 천여운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남성으로 내공을 모았다.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일이었지만 현경의 경지인 그는 진기를 다루는데 있어서 숨을 쉬는 것처럼 쉬웠기에 그리 어렵진 않았다. “하악!” 천여운의 남성에 진기가 모이자 입에서 신음성이 터져나왔다. 음기와는 상반되는 양기를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방금 전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그녀의 허리부터 시작해 전신이 떨렸다. ‘천천히.....’ 천여운이 남성을 움직이면서 천천히 자신의 진기를 그녀의 몸 안으로 주입하기 시작했다. “하아....하아.....” -스스스스스! 남성에서 흘러나온 진기가 그녀의 자궁에 있는 첫 번째 음기가 폭주하는 지점에 닿았다. 천여운은 말을 모는 것처럼 기감을 집중해서 첫 번째 절맥에 진입했다. 그러자 그녀의 몸 안에 있던 체내를 잠식했던 음기가 거칠게 움직이면서 폭주하는 지점으로 몰려들면서 양기의 진입을 막으려고 했다. ‘이 음기를 이기려고 들지 말고 받아들이라 했다.’ 신의 감로수는 음기를 무작정 이기려고 들거나 몰아내려고 하면, 오히려 그것이 더욱 폭주하여 경맥을 손상시킨다고 하였다. ‘음기를 내 몸으로 순환시켜서 밖으로 배출시킨다.’ 그것이 신의가 내세운 이론이었다. 물론 이 같은 이론을 만드는데 큰 도움을 준 것은 내가 고수인 전 소림방장 구휼 대사였다. 구휼 대사는 그녀에게 현경의 고수라면 대자연의 기운을 체내로 순환시킬 수 있기 때문에 음기를 직접 받아들여서 내보내는 편이 나았다고 이야기했었다. ‘해보자.’ 천여운이 신의 감로수에게 들었던 대로 이 방법을 시도했다. 양기를 보내는 와중에 집중하여 몰려든 음기를 자신의 체내로 유도했다. -스스스스! 처음에는 위기감을 느꼈던 음기가 천여운이라는 통로를 만나자, 진입하려드는 양기와 맞부딪치는 것을 피하고 그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됐다.’ 천여운의 몸으로 구음절맥의 폭주하는 음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거대한 음기에 천여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런 엄청난 양의 음기를 지녔었나.’ 놀라울 정도였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절대로 견딜 수 없는 수준이었다. 천여운이 계획했던 대로 남성을 통해서 밀려들어오는 음기를 단전에 순환시켜서 체외로 배출하려고 했다. -고오오오오! “헉?” 그 순간 천여운이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구음절맥으로 생성된 무한하면서 선천적인 음기가 단전으로 들어오자, 그곳에서 또아리를 틀고 있던 다른 기운이 눈을 뜬 것이었다. ‘처, 천마기가?’ 천여운의 단전에 잠들어 있던 흉폭한 기운이 깨어나고 말았다. 깨어난 천마기가 그의 통제를 벗어났다. 마치 먹잇감이라도 만난 것처럼 체내로 흘러들어오는 음기를 흡수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 이게 무슨.....’ 아무리 천여운이 천마기를 잠재우려고 해봐도 소용없었다. 천마기는 한없이 차가운 기운을 계속 머금고 덩치를 불려나갔다. ‘큭! 이렇게 되면 체내에 있는 양기를 내보내서 균형을 맞출 수밖에 없다.’ 아무리 대자연의 기운을 순환시킬 수 있다고 하지만 현재의 천여운이 감당할 수 있는 용량을 벗어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양기를 더욱 내보내서 그릇을 비워야만 했다. -푹! “학!” 천여운이 여군의 꽃잎에 더욱 몸을 밀착하고 양기를 보내자, 그녀의 첫 번째 음기가 폭주하던 지점을 지나서 양기가 경맥을 타고 들어갔다. -스르르륵!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두 번째 지점으로 진압해서 막혀있던 절맥을 뚫고서 음기를 받아들이자, 그녀의 투명했던 눈동자가 점차 색을 되찾아갔다. “하아....하아....” 그것이 세 번째, 그리고 네 번째 지점을 통과했을 때는 두 눈동자의 색이 완전히 검게 변해서 보통 사람처럼 돌아왔다. 그리고 새하얗던 피부에 점점 온기가 돌면서 홍조가 피어났다. ‘아! 효과가 있다.’ 통제에서 벗어난 천마기로 인해 난감해하던 천여운이 놀라워했다. 이대로만 간다면 그녀의 폭주하는 음기를 가라앉히고 구음절맥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여기서 또다시 변수가 일어났다. “힉.....히익....” 폭주하던 음기가 어느 정도 빠져나가자, 거기에 사로잡혀있던 그녀의 자아가 돌아온 것이었다. 정신을 차린 여군은 너무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감미양이 제조해준 환약을 먹고 잠이 들었던 것이었는데, 정신이 들고 보니 자신이 외간 남성에게 안겨있다. ‘내, 내가 어째서?’ -쑥! 그때 천여운이 허리를 뒤로 뺐다가 다시 그녀의 꽃잎으로 남성을 밀어 넣었다. “하윽!” 통증과 함께 느껴지는 묘한 쾌감에 그녀가 신음성을 흘리며 허리를 들어올렸다.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그녀는 순간 멍해졌다. 자신이 어째서 이러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흐윽!” 여군은 너무 부끄러운 나머지 자신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너무 무서우면서도 당혹스러운 감정에 사로잡혀서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무, 무서워.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지? 왕분? 아버지?’ -쑥! 그때 천여운의 남성에서 흘러나온 양기가 또 다른 막혀있던 절맥을 통과했다. 그러자 그녀의 머릿속이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흐릿했던 기억들이 조금씩 영상처럼 흘러들어왔다. ‘아!’ 신기한 현상이었다. 그녀가 음기에 사로잡혀 폭주했을 때의 기억들이 되살아난 것이었다. 심지어 마지막으로 혈도제압술을 풀어가고 있을 때, 신의와 천여운이 나눴던 이야기들마저도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음양 교합?’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이 남자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이 과정은 자신의 구음절맥을 치료하기 위한 음양 교합인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이 돌아왔다고 해도 낯선 남자와의 성교가 두렵고 부끄럽지 않을 리가 없었다. “흐윽!”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소저?” 천여운은 그녀의 눈물을 보고서 정신을 차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두 손으로 부끄럽다는 듯이 얼굴을 가릴 때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성이 돌아온 것이 틀림없었다. 뭔가 상대가 정신을 되찾으니 천여운도 민망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치료를 중도에 멈출 수 없는 노릇이었다. 천여운이 침착하게 말했다. “왕 소저. 많이 당혹스럽고 부끄러운 것은 알겠지만 지금 이렇게 치료하지 않으면 그대는 죽을 지도 모르오.” 눈물을 흘리면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던 그녀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흑....아, 알고 있어요. 하, 하지만.....흐윽.” 그녀도 두렵기는 했지만 상대가 악의가 없음은 기억을 되찾으면서 알고 있었다. 다만 이 일련의 과정들이 너무 갑작스럽기에 무서울 뿐이었다. 천여운이 떨고 있는 그녀를 다독이고 싶었지만 밀려들어오는 음기를 통제하기 위해서 양기를 보내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소, 소저.....지금은 어찌할 수가 없소.” “자, 잠깐만요. 조금만 시간을....” -쑤욱! 여군이 놀라서 잠시만 멈춰달라고 하려 했지만 이미 천여운의 남성이 그녀의 꽃잎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하악!” 여군의 입에서 강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아까와는 다르게 생기가 넘치는 목소리에 천여운은 묘한 흥분을 느꼈다. “하으윽, 제....제발 살살......” -쑤욱! 그녀의 그런 애원은 오히려 천여운을 더욱 자극하고 말았다. 처음에는 워낙 강한 음기로 조심스럽게 움직이던 허리가 점점 빨라지면서 천여운의 남성이 꽃잎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속도가 붙어갔다. -탁! 탁! 탁! “제발 천천히.....하악!......하악!.....하악!” 속도가 점점 빨라지자 처음에는 그저 무섭고 천천히 하기를 종용하던 여군의 표정이 바뀌어갔다. 얼굴에 붉게 상기되면서 고통의 신음성에서 점차 교성으로 바뀌어갔다. ‘이, 이상해. 몸이 뜨겁고 그곳이.....’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스스로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점차 천여운의 남성이 반복되면서 꽃잎에 들어왔다가 나갈 때마다 쾌감을 느껴가고 있었다. 그 흥분으로 인해 어느새 그녀는 천여운의 움직임에 맞춰서 허리를 움직였다. "하악! 하악!" “소저?” 그런 변화에 천여운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교성을 내뱉고 있던 그녀가 부끄러웠는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소리쳤다. “아, 아무 말 하지 말아요! 하아아악!” -팍! 그녀의 두 다리가 천여운의 허벅지를 감싸 안았다. 적극적으로 그의 남성을 받아들이기 위함이었다. '이, 이젠 모르겠어.'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이 쾌락에 집중하고 싶었다. 구음절맥을 치료하기 위해 시작된 음양 교합이 어느새 뜨거운 열락과 쾌감을 동반하면서 두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거친 신음소리가 객당 바깥까지 울려 퍼졌다. < 60장 일거양득(一擧兩得) (3)-19금 > 끝 < 61장 극(極) (1) > 천마기(天魔氣). 그것은 천마검에 있었던 흉폭한 검은 기운을 명칭화한 것이다. 단순한 기운이라고 치부하기에 천마기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천여운의 단전에 잠들어있었다. 천마기는 보통의 기운들과 다르게 파괴적이면서도 흉폭하다. 그렇기에 다루기 힘든 부분이 있어서 천여운 역시도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면 천마기를 개방하지 않는다. ‘크으윽!’ 기를 폭증시키는 능력이 전부라고 여겼던 이 천마기는 놀랍게도 포식자였다. 그것이 반대 성향에 가까운 음기라고 할지라도 전부 먹어치우려고 들었다. 천여운은 이 천마기가 먹어치운 음기를 제어하기 위해서 원래 가지고 있던 양기를 배출시켰는데, 음기가 끝없이 들어오면서 오히려 균형이 어긋나버렸다. -털썩! 막혀있던 모든 절맥이 뚫린 왕여군이 쓰러졌다. ‘됐다. 큭!’ 이제는 그 자신을 얼어붙게 만들려고 하는 음기를 제어해야 했다. 천여운은 양기를 북돋게 하기 위하여 천마검공을 운기했다. -고오오오오! 음기를 배출하는 편이 오히려 더 빠르지만 천마기가 그것을 먹어치우면서 체외로 배출시킬 수가 없었다. 천마기가 성향이 다른 음기를 천여운에게 맞게 변화시키고 있지만 그것을 기다렸다가는 기의 불균형으로 주화입마를 입을 판국이었다. “쿨럭!" 운기를 하던 천여운의 기침에 피가 묻어났다. 천여운은 몸 안에 버티고 있는 음기만큼의 기운을 생성해냈다. 그런데 문제는 절대로 공존할 수 없는 두 기운이 체내에 있는 것도 모자라서, 천여운이 감당할 수 있는 범용치마저 넘어섰다. 내상을 입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스스스스! [오장육부의 손상을 자가수복하고 있습니다.] 넘치는 기로 인해 입는 내상을 나노머신들이 수복시키지 않았다면 진즉에 쓰러졌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회복된다고 해도 근본적인 해결이 필요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천여운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균형을 맞추는 것만으로 턱도 없다.....기운들을 완전히 조화시켜야 해.’ 음기를 버릴 수가 없다면 선택권은 오직 하나였다. 어떠한 무림인들도 시도하지 않은 극양과 극음의 기운의 조화. ‘어느 한 쪽을 비울 수 없다면 공존시켜야 한다. 상반된 기운이 부딪치지 않고 공존하게 된다면.....’ 조화에 대한 고민에 사로잡혀 있던 천여운은 이윽고 무아의 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그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아아아!” 그렇게 공존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구음절맥의 음기와 천마기가 체내에서 부딪치지 않고 태극을 이루듯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오른손의 천마검에 흑색 강기와 왼손 백룡도의 새하얀 강기가 그것을 증명했다. 주위에 있는 모든 이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쳐다보고 있었다. “처, 천 교주! 정신을 차린 겐가?” 그때 그의 앞에 다섯 보 정도 떨어진 곳에 대치하고 있던 무쌍검 왕전이 물었다. 그를 바라보는 천여운의 눈빛에 이채가 띠었다. 조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기운이 폭주하는 것을 발산할 때 누군가가 그것을 받아주었는데, 왕전이 틀림없었다. ‘감사할 일이구나.’ 본능적으로 기의 방출을 도울 자를 찾았던 천여운이다. 오대 고수인 그가 없었다면 주위에 더욱 여파가 커졌을 지도 모른다. 천여운이 그에게 고마움을 표하려 했다. “왕전 공. 고맙....크윽!” 그때 천여운에게 또 다른 변화가 일어났다. 그가 발산하고 있는 한기를 풍기고 있는 새하얀 도강이 검게 물들어갔다. 심지어 검은 검강에서는 차가운 한기가 발산되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왕전이 다시 한 번 놀라워했다. 방금 전까지 천여운은 공존할 수 없는 상반된 기운을 동시에 배출했었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했는데 지금 일어나는 현상은 그 상반된 기운이 공존이 아닌 완전한 조화를 이루려고 하고 있었다. “와, 왕 대협! 교주님께서 왜 저러시는 거죠?” 알 수 없는 현상에 문규가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서 유일하게 천여운에게 일어나는 현상을 이해할 수 있는 자는 왕전뿐이었다. 왕전이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상반된 기운을 완전히 조화시키고 있네.” 파괴적인 성격의 천마기가 한기를 내뿜고 있었다.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지는 도강과 검강에 오대 고수인 왕전조차 전율을 느낄 정도였다. 저 위력이 과연 어느 정도일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발산되는 기운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저게 인간이 가질 만한 내공이란 말인가?’ 얼핏 느껴지는 기운이 아까 전에 대치했을 때보다 훨씬 강해졌다. 어쩌면 순수한 내공만으로는 천여운이 자신을 능가할 지도 몰랐다. ‘나조차 밟지 못한 영역으로 가고 있다.’ 천여운에게 벌어지는 현상은 그것이었다. -댕그랑! 바로 그때 천여운이 자신이 들고 있던 백룡도와 천마검을 떨어뜨리고서 좌선을 취했다. 갑자기 마당에 주저앉은 그의 몸에서 검은 아지랑이와 서리가 일어났다. 엄밀히 말한다면 검은 서리들이 주위를 두르고 있었다. “아아아!” 모두가 그것을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천여운이 새로운 경지로 올라서고 있는 중요한 기점에 있다는 것을 말이다. -우르르르! 객당 쪽에서 들려오는 굉음들과 거대한 기운에 지부에 있는 교인들이 몰려들었다. 허봉과 호상화가 객당 전각 쪽으로 가서 그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교주님께서 대공을 이루고 계십니다. 사람들을 물리세요.” “그, 그게 정말이오?” “중요한 대공에 방해가 되어선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소름 끼칠 만큼 강대한 기운에 놀라서 부리나케 달려온 지부장 대원이 객당으로 데려온 지부 무사들을 전부 물리게 했다. 가부좌를 틀고서 대공을 이루는 것에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호법을 설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제 일 객당에 있는 모든 이들이 물러났다. 모두가 물러난 후에 왕전은 신의 감로수를 보채어 쓰러져 있는 왕여군의 상태를 살피게 했다. "왕 대협. 성공이오! 체내에 폭주하던 음기가 가라앉았소." "그,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소. 일단은 경과를 지켜봐야 겠지만, 일단은 따님을 노부가 약당으로 데려가 상태를 더 확인해보겠소." "아아!" 간단한 진맥으로 딸의 무사함을 확인하자 왕전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눈시울이 붉어진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렇게 긴 세월 동안이나 딸을 치료하기 위해 고생한 것을 모두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이곳에 있는 약당으로 데려갈 터이니, 같이 가시겠소?" ".....아! 저는 잠시 할 일이 있습니다. 신의 공. 제 딸을 부탁드립니다. 분아 네가 도와주거라." "네? 그럼 아버지께서는?" "애비는.....천 교주에게 조금이라도 빚을 갚아야 겠구나." "아아! 알겠습니다." 왕전은 아들인 왕분에게 신의 감로수를 도와서 왕여군을 약당으로 옮기게 했다. 딸의 상세가 괜찮아진 것을 확인하고 나니, 고마운 마음에 호법을 자처한 것이다. 객당에 남아있는 자라고는 무쌍검 왕전, 호상화, 허봉, 문규뿐이었다. -쩌저저저적! 마당 바닥이 검은 빛 서리로 얼어붙었다. ‘소름끼칠 정도로 무섭고 차가운 기운이다.’ 천여운을 중심으로 제 일 객당 전체가 흉폭하면서도 차가운 진기로 가득해졌다. 호법을 서고 있는 이들조차 견디기 힘들 정도로 말이다. 여기서 유일하게 영향을 받지 않는 자는 왕전뿐이었다. “앗!” -휘리리리릭! 그때 천여운의 몸에서 검은 아지랑이와 서리들이 회오리를 치더니 이내 밖으로 발산되던 기운들이 일제히 그에게로 빨려 들어갔다. 공존하던 모든 기운들이 조화를 이루는데 성공한 것이다. -파스스스슥! ‘교주님의 몸이?’ ‘갈라지고 있어!’ 호법을 서면서 이를 지켜보던 수하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메마른 사막이 갈라지듯 천여운의 전신의 피부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현상을 모르는 자가 있겠는가. ‘환골탈태!’ 환골탈태(換骨奪胎). 더욱 높은 경지에 오르면서 육신의 그에 맞게 변하는 현상이다. 화경의 극에 이르면서 한 번의 환골탈태를 겪었던 천여운이었다. 그런 그에게 두 번째 환골탈태가 찾아왔다. -우득! 우득! 골격에 변화부터 시작해 피부가 들썩거리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한 번도 환골탈태를 보지 못했던 허봉, 호상화, 문규 등은 놀라움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 변화는 그들에게 진귀한 경험이었다. 한참 동안이나 갈라진 피부 속에서 변화가 일던 천여운의 움직임이 멈췄다. ‘끝난 건가?’ 문규가 조마조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과연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파슥! 파슥! ‘아!’ 그때 천여운의 몸에 갈라져 있던 피부 조각들이 타오르는 재처럼 허공으로 산화했다. 과거의 허물들이 산화하면서 천여운의 환골탈태한 새로운 모습이 드러났다. 새하얀 피부에 윤기가 있는 탄력 있는 근육.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육신이 있다면 이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 만큼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감탄을 일으키게 했다. ‘어머!’ -화끈! 천여운의 나신을 보았던 문규조차 괜히 얼굴이 더 상기될 정도로 아름답게 느껴졌다. 호상화는 애초에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허어!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왕전이 진심으로 놀라워했다. 방금 전까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기운을 발산하던 천여운이다. 그런데 이제는 완숙한 현경의 고수인 그조차도 기운을 감지하지 못할 만큼 완벽하게 갈무리하고 있었다. 오히려 평범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반박귀진!’ 반박귀진(反樸歸眞). 그것은 도가에서 모든 것이 본래의 상태로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무림인들에게 있어서 반박귀진은 무공에 있어서 안과 밖의 기운을 전부 거두는 경지를 뜻한다. 천여운의 눈빛에는 강렬한 안광은 없었지만 혜안이 가득했다. 그런 그에게 왕전이 다소 흥이 올라간 목소리로 말했다. “천 교주! 축하하네! 내 평생 목표로 한 경지에 올라가는 것을 이리 볼 줄이야.” 무쌍검 왕전이 목표로 한 경지. 그것은 완전한 현경의 경지를 말한다. 즉, 천여운은 극음과 극양의 조화를 이루는 도중에 내외의 조화마저 깨닫게 되면서 현경의 극에 오르게 된 것이다. -팍! 천여운의 수하들이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대공을 이루신 것을 감축 드리옵니다!” 그들의 축하 인사에 천여운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음양 교합을 통해서 치료하려고 했던 것이 그에게 엄청난 기연을 가져왔다. 대단한 행운이라 할 수 있었다. “천 교주.” “말씀하시지요. 왕전 공.” “새로운 경지를 밟았으니 그것을 시험하고픈 마음이 없소? 교주만 괜찮다면 내가 그것을 돕고 싶소만.” 왕전의 눈빛에는 호승심이 가득했다. 지금까지는 딸을 살리고 싶어하는 아버지였다면 이제는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전의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현경의 극에 이른 천여운과 겨루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했다. 무림에서 몸을 감춘 후로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지 못한 그에게 천여운은 그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출구였다. ‘아아!’ 무릎을 꿇고 있는 수하들의 몸에 떨림이 왔다. 어찌 보면 이것은 오대 고수 중의 한 사람인 왕전이 비무를 청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환골탈태 전에도 잠깐 손을 섞기는 했지만 그것과는 의미가 완전히 달랐다. ‘오대 고수와 교주님의 대결!’ ‘보, 보고 싶다.’ 무인으로서 이 엄청난 대결을 보고 싶지 않을 이가 있겠는가. 호승심이 가득한 왕전을 잠시 바라보던 천여운이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저도 청하고 싶은 부분이군요.” 마찬가지로 천여운 역시도 새로운 경지에 오르면서 깨달은 것을 시험해 보고픈 마음이 가득했다. 왕전이 고맙다는 듯이 가볍게 포권을 취했다. “그럼 장소를 옮기겠...”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왕 대협!” 그때 무릎을 꿇고 있던 허봉이 다급히 끼어들었다. 왕전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자 허봉이 진지하게 말했다. “일단 교주님께 의복부터 드리겠습니다. 흠흠.” 그 말에 무릎을 꿇고 있는 문규와 호상화가 괜히 쑥스러운지 얼굴을 붉혔다. 그랬다. 천여운은 지금 실 한 올도 걸치지 않은 나신이었다. < 61장 극(極) (1) > 끝 < 61장 극(極) (2) > 마교의 호남성 북부 지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곡문 평야.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인적이 드물기에 이곳은 대결을 펼치기에 적합한 곳이다. 극비리에 펼치는 대결이었기에 지부의 외당 무사들이 혹시나 반경 오 리까지 누구도 오지 못하게 지키고 있었다. 무림인들이라면 누구나가 궁금해 할만한 엄청난 대결이 이곳 곡문 평야에 이뤄진다. 중원에서 최고 고수라 불리는 오대고수의 일인인 무쌍검 왕전과 현 마교에서 최고 고수라 할 수 있는 이대 천마 천여운의 비무였다. 가벼운 비무라면 목검 같은 걸로 하겠지만 그들에게는 의미가 없다. 강호 무림의 최정상 급에 속하는 그들은 병장기를 들지 않아도 육신 자체가 흉기나 마찬가지였다. -쾅쾅! 곡문 평야에 엄청난 굉음들이 사방으로 계속해서 퍼져나가고 있다. 대결이 펼쳐지는 진원지에서 한참은 떨어져서 이것을 지켜보는 이들의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이, 이게 정녕 무인들의 대결인가?” 호남성 북부 지부의 지부장 대원이 입에서 연신 탄성이 흘러나왔다. 곡문 평야는 두 절대고수들의 대결로 인해 거의 초토화가 되듯이 변해가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여기서 이 두 고수들 간의 대결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자는 실질적으로 없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흐아아압!” -촤촤촤촤?! 성인 남성의 신장만한 두 대검을 가벼운 막대기를 휘두르듯이 다루는 왕전의 검초는 정말 대단했다. 두 대검의 간격은 당연히 보통의 검들보다도 훨씬 넓었다. 그 덕분에 대결에 있어서 간격이 좁혀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챙! ‘또 막혔다.’ 확실히 대단한 것은 완숙한 현경의 경지에 오른 고수답게 왕전은 천여운이 펼치는 대다수의 초식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막아냈다. ‘저 커다란 대검들이 성가시구나.’ 워낙 커다란 대검에 검강을 싣다보니 의외로 틈이 생겨나질 않았다. 조금이라도 둔한 모습을 보인다면 파고들 텐데, 왕전은 무림 최고수답게 패도적인 검식뿐만이 아니라 부드러운 유검이나 변초에도 능했다. -채채채챙! 이런 곤란함은 왕전 역시도 겪고 있었다. 최대한 천여운과의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쉼 없이 두 대검으로 검결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거리를 주면 안 된다. 천 교주의 저 검초는 너무 위험해.’ 탐색전을 위해서 세 초식 정도 천마검공의 검초와 부딪쳤던 그였다. 오른팔 어깨 부근의 옷이 붉게 물든 것이 그 결과였다. 두 초식은 어떻게 막아냈는데 갑자기 워낙 변초를 쓴 세 번째 초식에 오른팔 어깨 쪽의 요혈이 살짝 찔렸다. 근접해서 정면에서 검초를 대결하기에는 위험했다. ‘점점 힘들어지는 구나.’ 오른손에 쥐고 있는 대검이 무겁게 느껴졌다. 거의 근성으로 버티고 있지만 대결이 지속된다면 그가 불리해질 것이다. 어차피 공력에서 그가 밀리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휙! 천여운이 빈틈을 찾기 위해서 허공으로 떠올라 검은 강기가 실려 있는 천마검을 패도적으로 내리쳤다. “엄청난 기세로군. 훌륭하네.” -채앵!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왕전이 두 대검을 교차해서 여유롭게 이를 막아냈다. 그런데 위에서 내리찍는 순간 천여운이 허공을 향해 발을 박차자, 뒤로 풍압이 일어나며 이내 그의 신형이 잔상을 일으키며 사라졌다. ‘엇? 허공을 밟아?’ 경신술 풍신공의 최고 경지였다. 허공을 박차고 신형을 바꾼다는 것은 말 그대로 허공답보(許空踏步)였다. 일순간 종적을 놓친 왕전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지금 내게 빈틈은....’ 바로 뒤였다. 왕전이 있는 힘을 다해 허리를 뒤틀며 오른손의 대검을 방패처럼 뒤로 휘둘렀다. 수많은 전투 경험은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사라졌던 천여운의 신형이 잔상과 함께 나타나 그에게 번개처럼 천마검을 찔러왔다. -챙! -촤르르르르! “큭!” 천마검과 부딪친 그의 신형이 뒤로 다섯 보 가량이 밀려나갔다. 십성 공력으로 일격을 막아냈는데 이를 버티지 못했다. 할 말이 없을 정도의 위력이었다. “후우....” 왕전이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내뱉자 입에서 김이 흘러나왔다. 몸 안을 파고든 한기를 배출시킨 것이었다. 내공으로 몸을 보호했는데, 천여운의 천마검에서 발산되고 있는 검은 검강의 한기가 침투해온다. ‘참으로 어이가 없구나.’ 제일 위험한 흉폭한 기운을 배척하면 한기가 파고든다. 한 번에 두 기운을 다룬다는 것이 이리 성가실 줄은 몰랐다. ‘인정할 수밖에 없군.’ 근 오십 초 가량 겨뤄본 결과 확실하게 천여운이 자신보다 한 수위였다. 물론 숨겨진 절초들이나 확실하게 상대를 죽이고자 하는 살초들을 쓰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만 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천 교주 역시도 전력을 다하진 않는다.’ 그의 예상대로 천여운 역시도 완전히 전력을 다하진 않았다. 확실하게 상대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좌검우도를 비롯해 천마검공, 극도신무의 최후의 비기는 펼치지 않았으니 말이다. 결국 두 사람은 비무에 걸 맞는 대결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저러다 두 분 중 한 사람은 크게 다치는 거 아니에요?” “와, 완전 살이 떨리는데요.” 걱정스러워하는 문규부터 허봉이 호들갑을 떨었다. 정작 당사자들과 달리 이 대결을 지켜보는 이들에게는 지금 이 정도로도 서로 죽일 듯이 싸우는 걸로 보였다. 왕전이 여전히 두 대검에 있는 검강을 풀지 않고서 천여운에게 말했다. “뛰어난 고수는 검을 부딪치는 것만으로 상대의 전력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하오. 서로 간의 초식 대결은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소. 천 교주.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되겠소?” “말씀하시죠.” “천 교주가 현경의 끝에 이르면서 얻은 깨달음을 보여줄 수 있겠소?” 이미 충분히 서로의 실력은 파악했다. 왕전이 궁금한 것은 천여운이 현경의 끝에 이르면서 어느 정도의 능력을 지닌 것인지 그 최고 수준을 보고 싶었다. 그것이 설사 자신이 부상을 입는다고 해도 말이다. 무인으로서 역대 무림에서 손에 꼽는 경지에 오른 무인의 전력을 딱 한 번만 견식하고픈 마음이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무엇이 말인가?”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만.” “후후후, 걱정 마시게. 아무리 자네에 비해서 한 수 떨어지긴 하지만 괜히 오대고수라 불리는 것이 아닐세.” 천여운의 우려에 왕전이 괜찮다는 듯이 말했다. 아직까지 최고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비기조차 펼치지 않았다. 여차하면 비기로 그것을 막으면 된다. “.......알겠습니다. 그러시다면.” 사실 천여운 역시도 한 번은 확인해보고 싶었다. 현경의 극에 이르면서 깨달았던 그것을. -차차차차차차착! 천여운이 들고 있던 천마검을 다시 보호대의 형태를 바꾸었다. 이에 왕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검을 거둔다는 것은 뭔가 기공에 가까운 깨달음을 보여주겠다는 의미로 보였다. 천여운이 두 손가락을 모으고서 검결지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왕전을 향해서 겨냥했다.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그의 생각이라도 읽은 것처럼 천여운이 입을 열었다. “제가 깨달은 것은 총 두 가지입니다.” -오싹! 바로 그때였다. 지금까지 천여운에게서 발산되었던 기운들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만큼 강렬한 진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 진기는 싸늘한 한기로 가득했는데, 천여운의 반경 일 리 정도에 검은 서리들이 일어났다. -쩌저저적!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검은 서리들이 뭉치면서 하나의 검은색 얼음검의 형태를 갖추는 것이었다. 구음절맥에 걸린 왕여군이 보여준 그 능력이었다. “허어!” 음기를 흡수했다고는 했지만 이런 것까지 가능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왕전이었다. 절로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허공에 생성된 얼음검들의 숫자는 거의 백 자루에 가까웠다. -둥둥! 촤촤촤?! 그 많은 숫자의 얼음검들이 일제히 날아와 왕전을 포위했다. 엄청난 숫자의 얼음검들의 위용에 왕전은 대검을 쥐고 있는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과연 기대 이상의 능력이었다. “......대단하구려. 천 교주.” 이런 능력이라면 거의 일인 군단이라고 봐도 무방한 능력이었다. 왕전이 긴장된 눈빛으로 자신을 겨누고 있는 얼음검들의 방향을 확인했다. 그런데 얼음검들이 허공에서 갑자기 부서졌다. -파스스슥! 검은 얼음 조각 파편들이 허공에 흩어지며 얼음검들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것을 막기 위해 최고의 초식을 준비하던 왕전으로서는 허탈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천 교주......지금 나를 우습게 보는 것이오?” “아닙니다.” “아니라면 왜 공격을 멈춘 것이오?” “제가 깨달은 두 번째에 비하면 최고가 아니니까요.” “그게 무슨 소리...” 바로 그 순간이었다. 천여운의 주변으로 푸른 빛이 일렁였다. 그의 주변에서 생겨나는 푸른 빛들이 하나로 뭉쳐지면서 얼음검처럼 검의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 왕전의 두 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실망스러웠던 마음은 사라지고 경악스러웠다. ‘.....말도 안 돼!’ 검의 형태를 띠고 있는 푸른 빛은 분명 검강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그냥 검강이 아니었다. 검에 형성된 것도 아니고 허공에 자연적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은 이기유형(以氣有形)을 뜻한다. 현경의 경지에 오른 자는 허공에서 검을 다루는 술법인 이기어검(以氣馭劍)을 다룰 수 있다.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완숙한 현경의 경지에 이르면 그 이기어검에 강기를 실어서 이기어검강(以氣馭劍?)을 펼칠 수 있다. '이, 이게 정말 가능한 건가?' 그런데 천여운이 펼치는 것은 매개체가 전혀 없이 허공에 강기를 형성시킨 것이었다. 그 숫자가 총 열두 개였다. 천여운이 놀라서 말문을 잃은 왕전에게 입을 열었다. “이게 제 깨달음입니다.” 여러 고절한 기의 깨달음이 복합적으로 펼쳐진 이것이야 말로 지금 천여운이 펼칠 수 있는 최고의 기술이었다. ‘반 각도 유지하기 힘들지만 충분하다.’ “그럼 갑니다!” 그 말과 함께 천여운이 검결지를 들어서 왕전을 향해 뻗었다. 그 순간 허공에 떠있던 열두 개의 검은 검강들이 일제히 왕전을 향해 번개처럼 쇄도했다. -슈슈슈슈슈슉! “헛?” 허공 가로질러서 날아오는 검은 검강들에 왕전이 화들짝 놀라서 대검을 휘둘렀다. -촤촤촤?! 두 자루의 대검으로 거리를 벌리면서 이를 막아내려 했는데 이것들은 각자가 천여운이 검초를 펼치는 것처럼 전 방향으로 나누어져 공격해왔다. -채채채채챙! 왕전이 팔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쾌속한 속도로 초식을 펼쳤지만 버거웠다. 마치 사방에 열두 명의 절세고수들이 합공을 하는 것처럼 쉬지 않고 밀어붙였는데, 말 그대로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촤악! “크윽!” 다섯 자루의 검강이 펼치는 초식을 막던 왕전의 등허리를 베었다. 왕전이 몸을 비틀면서 대검으로 그것을 쳐냈다. -파치칙! 슈슉! ‘이런!’ 한 자루가 튕겨나가는 빈 곳을 다른 검강이 날아와 그대로 메꾸었다. 덕분에 왕전은 쉴틈 없이 이것을 막느라 한시도 긴장을 풀 수 없게 되어버렸다. “세상에.....” “지금 우리가 뭘 보고 있는 거야?” 대결을 지켜보던 이들도 놀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기어검이라는 것은 고절한 기술이지만 진기의 소모량이 크고 그 강도가 아랫급 고수들이나 상대할 정도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것이 유형화된 강기가 되자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휙휙! 멀리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천여운이 두 손을 휘젓고 있다. 왕전은 끝없이 이어지는 검강들을 막느라 점차 신형이 이리저리 튕겨나가며 그 움직임이 점차 더뎌가고 있었다. “무, 무쌍검 왕 대협이 밀리고 있어요!” 흥분한 허봉이 숨이 넘어갈 듯이 소리쳤다. 다른 사람도 아닌 오대고수의 일인이 막는데 급급해하고 있다. 믿기지 않는 광경이 일어난 것이다. ‘빌어먹을!’ 그 당사자는 정말 환장할 지경이었다. 검강들이 펼치는 끝없는 초식의 향연 속에 왕전은 순간 오대 고수의 체통도 잊고서 입 밖으로 거친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내공에 끝이 없단 말인가?’ 조금만 빈틈을 보였다가는 죽을 수도 있었다. 아직 반의 반각도 되지 않았지만 이를 막고 있는 왕전은 죽을 맛이었다. 언제 천여운의 내공이 다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이것을 막아내는 것은 일종의 심리적 부담감이 굉장히 컸다. ‘아, 안되겠다!’ 정신없이 스무 초식 가량을 막아내던 왕전이 다급히 소리쳤다. “처, 천 교주! 천 교주!” 그의 외침이 들리자 끊임없이 초식을 펼치던 검강들이 허공에서 일제히 멈췄다. -쿵! 공격이 멈춰지자 왕전이 쥐고 있던 두 개의 대검을 떨어뜨렸다. 그의 얼굴이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다. “하아....하아....하아....” 왕전은 굉장히 지친 상태였다. 천여운이 그런 그를 담담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물었다. “계속 하시겠습니까?” '하!' 그 질문에 왕전이 다소 어이가 없다는 듯이 천여운을 쳐다보다,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허탈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하아...하아....내가 졌소. 천 교주.” 항복 선언을 하는 왕전의 목소리에 천여운의 눈이 반짝였다. 무림에서 최고로 군림하고 있는 오대 고수 중 일인인 무쌍검 왕전이 천여운에게 패배를 인정한 것이다. < 61장 극(極) (2) > 끝 < 62장 마교 귀환 (1) > 강소성 금릉의 서남쪽의 삼산(三山). 이곳은 양자강 근처에 있는 산으로 동서로 강에 의하여 잘렸는데, 세 봉우리가 남북으로 접하고 있기에 삼산이라고 부른다. 삼산의 근경에 자리 잡고 있는 큰 궁궐 같은 산장이 있다. 이 정도 규모의 산장이라면 현판을 크게 붙일 만도 했지만 이곳에는 아무런 이름이 없었다. 궁궐 같은 산장 담벼락은 미로처럼 얽혀 있고, 그 내부에는 자그마치 스물여섯 채의 크고 작은 건물들이 이어져 있다. 이름 없는 산장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본당 건물. 그곳의 한 집무실에서 가느다란 눈매에 긴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 있는 한 중년인이 누군가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그런데 보고를 듣는 내내 시종일관 중년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한참을 듣던 도중에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결론은 이백의 고가 터졌다는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그것을 회수하러 가지 않았나?” 그것이라고 지칭했지만 보고하는 사내는 곧장 알아들었다. 그 분께서 남기신 물건을 의미하는 것이다. “맞습니다.” 담담하게 답하는 사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중년인이 앉아있던 집무실 책상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쾅! 강한 공력이 실려 있었는지 일순간에 책상이 박살나고 말았다. 지금까지 그저 표정만으로 불쾌함만을 내보이던 사내가 직접적으로 그 감정을 표출하자, 그제야 보고하는 사내가 움찔하며 당혹스러워했다. “그렇다면 녀석의 시신이라도 찾아와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닌가!” “소, 송구스럽습니다.” 중년인은 ‘이백’이라 불린 자의 죽음에 화를 내고 있었다. 당연히 그럴 만도 했다. 중년인은 이백의 단 하나뿐인 친형제인 이욱이었다. “저희도 곧장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간자들을 보내서 수색했지만 도검문주의 시신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도검문도들의 시신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내의 보고에 이욱의 오른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하! 도검문의 한 개 단이 전부 사라졌다고?” 자그마치 백 오십 명에 달하는 일류 고수들로 이루어져 있다. 화경의 경지에 이른 단주를 비롯해 이들의 수장인 도검문주 이백만 있어도 어지간한 중소문파 세 곳 정도는 하루 사이에 멸문시킬 전력이었다. “전부는 아닙니다. 정확히 백다섯 구의 시신이 사라졌고, 나머지 오십구는 창천회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창천회? 그놈들이 그랬다고?” 이욱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분명 이백이 명을 받고서 폐검곡으로 향하기 전에 창천회에 심어진 간자들을 통해서 그곳에 주둔해있는 전력을 파악했다. 듣기로는 분명 다섯 간부 중 한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그 외에는 고작 사십 여명 정도만 지키고 있다고 들었다. “그럴 리가 없다. 고작 그 정도 전력으로 녀석과 한 개 단을 없앴다고?” “알아본 결과 창천회에서 다른 전력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문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누군가 개입한 것 같습니다.” “크으으으! 감히 어떤 놈이 개입했단 말이더냐!” 철저하게 중원 각 세력들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있는 그들이었다. 사파 연맹을 비롯해 마교, 정파 무림맹, 심지어 창천회까지도 그 전력의 유동이 없는 것을 확인 후에 진행된 계획이었다. “그분이 남긴 그것을 얻지 못했다면 결국 내 아우는 이도저도 못하고 개죽음을 당한 것이 아니더냐!” 이백의 죽음보다도 명예가 더럽혀진 것이 화가 났다. 누가 개입한 것인지는 몰라도 찾아서 찢어 죽이고 싶은 심경이었다. 그때 보고를 전하던 사내가 등 뒤에 매고 있던 원통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바치면서 말했다. “.....상심이 크신 줄 알겠지만 진정해주십시오. ‘도주(刀主)’께서 전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건?” 붉은 비단에 금빛 용 무늬가 수놓아진 화려한 두루마리였다. 심지어 두루마리를 묶고 있는 끈마저도 금빛 줄로 만들어져 있었다. “기다리셨던 그 전서입니다.” “아아!” 이욱이 두루마리를 봉하고 있는 금빛 줄을 풀어서 그것을 펴보았다. 그곳에는 문장가가 적은 듯한 수려한 필체로 적힌 글이 적혀 있었는데, 맨 왼쪽 밑에는 위엄이 담겨 있는 붉은 인장이 찍혀 있었다. “드디어 대계의 세 번째가 시작되는 것인가.” 동생의 죽음으로 분노로 가득했던 그의 눈빛이 떨려왔다. 고대하던 대계의 세 번째가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그 한가운데 같이 있어야 할 동생이 없다는 것이 참담할 뿐이었다. 두루마리에 적혀있는 글귀를 마저 읽어 내려가던 이욱이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통허현? 그곳의 바로 밑이 아닌가. 그곳에서 하는 게 아니었던가?” “늘 그곳에서 했던 적은 없다고 합니다.” “.....하긴 그런 위험을 감수할 리가 없지. 뭐, 상관없다. 장소가 어찌되었든 대계의 목적은 다 하나니까.” 이욱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렇지 않아도 손에 피를 보지 않으면 이 분노를 해소시킬 수 없다고 느낀 판국이었다. * * * 호남성의 북쪽 마교 지부. 그곳의 제 이 객당에서 한 노파가 아기를 끌어안고 오열을 하고 있었다. 근육이 잘 발달한 노파는 바로 신의 감로수였다. 그녀는 어찌나 슬펐는지 꺽꺽 거리면서 얼굴이 빨개져서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응애! 응애!” 덕분에 아기가 같이 울어대는 통에 제 이 객당이 시끄럽기 그지없었다. 그들의 앞에서 난처한 표정으로 서있는 안대를 쓰고 있는 훤칠한 중년인이 있었으니, 그는 사 장로 양단화였다. 벌써 이 각이 넘게 울음을 그치지 않고 있었다. 같이 울어대던 아기는 울다가 지쳐서 쉬다가, 우는 것을 반복했다. ‘상심이 컸나보군.’ 신의 감로수가 이렇게 오열을 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것은 바로 앞에 눕혀 있는 손녀 감미양의 시신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구출하고 싶어 했던 손녀가 죽어서 시신으로 돌아왔는데 슬프지 않을 리가 없었다. ‘후우.’ 자신이 처리하겠다고 나선 일이었지만 정말 피곤한 일이었다. 아마도 이렇게 통곡을 하는 게 며칠은 갈지 몰랐다. 한참을 울어대던 신의 감로수는 아기를 안은 채, 싸늘한 시신이 된 감미양의 뺨을 어루만지면서 중얼거렸다. “꺽꺽! 이놈들....이놈들 감히 내 손녀를 죽이다니! 용서치 않겠다! 흐흐흑.” 감로수는 그녀를 죽인 범인을 창천회로 알고 있다. 어찌 본다면 미안한 일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아는 편이 훨씬 나았다. 만약 감미양을 살려서 데려왔다면 어떤 식으로든 방해를 하고 들려 했을 테니 말이다. ‘증손주가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군.’ 증손주의 존재가 절묘한 한 수였다. 손녀를 잃은 슬픔이 크겠지만 감로수는 절대로 목숨을 헛되이 던지진 않을 것이다. 복수를 해야 하고 유일한 혈육을 위해서라도 악착 같이 살아남으리라. “이놈들! 이놈들!” 절규를 하는 신의 감로수를 차갑게 바라보며 양단화는 생각했다. ‘본교를 위해서라도 그 분노를 이어가시오. 감 파파.’ 같은 시각 지부의 본당 좌측에 있는 약당. 그곳에 환자들이 머물 수 있는 침구들이 놓여있는 방이 있다. 방에 있는 한 침구에 은발의 여인이 상반신을 일으켜서 등을 기대고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무쌍검 왕전과 그의 딸인 왕여군이었다. 늘 하얗기만 했던 뺨에 혈색이 돌아온 모습을 보면서 왕전의 얼굴에는 연신 흐뭇함으로 가득했다. 머리카락은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지만 충분했다. 이렇게 건강해진 모습을 보기 위해서 그 동안 얼마나 고초를 겪었는가. ‘가연. 우리 아이가 이렇게 이뻤다오.’ 홍조가 돌아온 왕여군은 생기가 돌면서 더욱 아름다웠다. 새하얗기만 할 때도 절세미인이었는데 지금은 못 남성들을 한 눈에 반하게 할 만큼 꽃과도 같았다. 자신의 딸이라서가 아니라, 아마 전 무림을 통틀어서 세 손가락에 꼽는 미녀일 것이다. “흠흠.” 왕전이 아까부터 연신 헛기침을 해댔다. ‘아이가 건강해져서 좋기는 한데, 참으로 난감하구나.’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대화를 잘 나누던 부녀가 서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야 하는데 차마 입을 열기가 어려웠다. 구음절맥을 치료하기 위해 왕여군은 자의가 아닌 어쩔 수 없이 천여운과 음양교합을 했다. 물론 이 사실에 대해서는 그녀 역시도 인지하고 있었다. 음양교합 중도에 깨어나기도 했고 음기에 사로잡혀 있을 당시에 기억들이 돌아왔다고 했으니 말이다. 비록 치료를 위해서라고 하나, 외간 남녀가 서로 몸을 섞었으니 이유야 어찌되었든 혼사를 거론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천 교주 정도면 절대로 나쁜 조건이 아니다.’ 처음에는 딸을 살리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라는 미명 아래 음양교합을 부탁했다. 그런데 알면 알수록 이상하게 천여운이 마음에 들었다. 어찌 본다면 사위라는 조건을 두고 본다면 그만큼이나 뛰어난 신랑감이 없었다. ‘흐음.’ 왕전은 무(武)에 대한 자부심은 높지만, 딸을 위해서 긴 세월을 은거할 만큼 물욕이나 명예욕, 권력욕 등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막상 진지하게 딸의 혼사를 고민해보니 천여운 만한 사람도 없었다. ‘무위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호승심에서 겨뤄본 결과 천여운은 정말 괴물이었다. 고작 약관에 불과한 자가 오대 고수 중 한 사람인 자신을 비무로 꺾었다. 물론 자신이 비기나 살초를 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버렸다. ‘동쪽에 그 괴물도 있지만. 훗날을 보면 천 교주는 차기 천하제일이 될 지도 모른다.’ 여태껏 무림에서 천하제일이라고 들은 자는 몇 되지 않는다. 그런데 천여운은 그리 될지도 몰랐다. 아직 앞날이 창창하니 말이다. 더군다나 무림의 삼대 세력 중의 하나인 마교의 수장인 만큼 사파 연맹과 척을 지고 있는 자신과 달리 딸을 더욱 잘 지켜줄 수 있을 것이다. ‘그래. 네가 다소 원망할 수 있겠지만 그가 인연일 수도 있다.’ 딸이 거부할 수도 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평생 혼자 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마음을 다 잡은 왕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흠흠, 여군...” “아버지.” “응?” 그런데 공교롭게도 왕여군 역시도 할 말이 있어보였다. 방금 전까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것도 그 때문인 듯 했다. 잠시 망설이던 왕여군이 말했다. “처, 천 교주님에게 패했다고 들었어요. 사실인가요?” 그 말에 왕전의 인상이 굳어졌다. 무자로서의 자긍심과 아버지로서의 자존심 때문에 일부로 말하지 않은 그였다. “그걸 누구에게 들었느냐?” “.....그게 허봉이라는 분에게 들었습니다.” “하!”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녀석이!' 허봉이라는 자에게 들었다는 말에 왕전이 눈꼬리가 무섭게 치켜 올라갔다. 설마 그걸 딸에게 얘기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사실 심부름으로 신의 감로수를 데리러 왔던 허봉이 주절주절 몇 가지를 이야기한 것이었다. 그래도 차마 허봉이 그에게 부인, 부인하면서 불렀던 것은 말하지 않았다. 그것까지 이야기하기에는 괜히 부끄러웠다. ‘정말 사실이었구나!’ 왕전의 반응에 그녀는 내심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의외로 말수가 없다뿐이지 감정표현에 솔직한 자신의 아버지였다.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정말로 패배한 것이리라. 주책 맞게 자신의 패배를 나불거린 허봉에게 화가 난 왕전이지만 겨우 흥분을 가라앉히고 원래 자신이 꺼내던 말을 하려 했다. “여군아. 그건....” “아버지. 저 결심했어요. 허락해주신다면 천 교주님을 따라가고 싶어요.” “뭐, 뭣?” 미처 본론을 꺼내기도 전에 딸의 입에서 먼저 천여운을 따라가겠다는 말이 나오자 왕전은 순간 말문이 막혀서 어안이 벙벙해졌다. < 62장 마교 귀환 (1) > 끝 < 62장 마교 귀환 (2) > 어안이 벙벙해진 왕전은 일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허참.’ 사람의 마음이란 게 참으로 간사했다. 막상 원하는 방향으로 쉽게 흘러가니 기분이 착잡했다. 그가 알고 있던 딸은 설사 몸을 섞었다고 해도 쉽게 마음을 열 만한 성격이 아니었다. 어미인 가연 없이 키우기는 했지만 그렇게 가볍게 키우진 않았다. “......혹시 이 애비가 천 교주에게 패했다고 그러는 것이느냐?” 만약 그 이유라면 굉장히 섭섭할 것이다. 왕여군 역시도 무림을 살아가는 자로 강한 무인을 동경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천여운 같이 약관에 훤칠한 외모에 차기 천하제일 고수의 자질을 가졌다면 젊은 소저로서 한눈에 반할 수도 있긴 하다. 그런데 뒤에 이어지는 말은 뜻밖이었다. “아니에요. 제가 설마 그런 이유로 천 교주님을 따라간다고 할까요.” “그럼?” “허봉이란 분과 분이 오라버니에게 들었어요. 그분 역시도 정인이 계신데 그것을 감수하고 구해주셨다고요.” “크흠.” 생각보다 깨어나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왕여군이었다. 음양교합으로 몸을 섞었으니 혼사를 추진하는 것보다도 정인인 문규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더 껄끄러웠는데 이미 알고 있었다. “정인이 있는데 다른 여인을 살리기 위해서 그러기가 쉬운 일인가요.” 그 말을 하면서 왕여군이 얼굴을 붉혔다. 이에 괜히 신경질이 난 왕전이 인상을 굳히며 말했다. “그런 것은 신경 쓰지 말거라. 남자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지조가 있지 않단다. 애비가 얘기 하지 않았느냐.” 물론 문규의 눈치를 보던 천여운이 그런 유형으로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괜한 심통에서 하는 말이었다. “아버지도 남자잖아요?” “애비와 다른 남자들이 같느냐.” 마음이 느껴지는 아버지의 말에 왕여군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아버지는 다르죠. 그런데 뭔가 오해하신 것 같아요.” “음?” “저는 천 교주님과 한 번.....초야를 치렀으니, 혼례를 하겠다는 말이 아니에요.” “뭣?” 왕여군에서 나오는 전혀 뜻밖의 말에 왕전의 인상이 굳어졌다. 혼사를 치를 것도 아닌데 대체 무슨 이유에서 천여운을 따라가겠다는 말인가. 그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그녀가 말했다. “천 교주님이 어쩌면 영원히 눈을 감을 지도 모를 저를 살려주셨잖아요. 그 은혜가 하해(河海)와 같은데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나요.” “여군아. 너 설마....” 뭔가 이상했다. 그녀의 말투를 들으면 혼사가 아니라 은혜를 갚기 위해서 그의 수하로 들어가고 싶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 예상은 완전히 들어맞았다. “맞아요. 마교에 입교해서 목숨을 살려주신 보답을 하고 싶어요. 아버지께서 보은은 확실히 갚아야 한다고 말씀해주셨잖아요.” 전혀 그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자 왕전이 당혹스러운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여군아.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 줄 알고 있느냐?......후우,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거두절미하고 말하마. 너를 치료하기 위해서라고 하나 천 교주와 초야를 치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혼례가 아니라 마교에 입교하겠다니?” “아버지. 저도 무림을 살아가는 여인이에요. 한 번 몸을 섞었다고 무작정 혼례를 치르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그분에게는 정인이 있잖아요.” “그게 무슨 소리야! 정인이 있다고 해서 혼례를 치르지 못할 것이 어디 있단 말이느냐. 너는 이 왕전의 딸이야. 네가 뭐가 부족해서!” 물론 적이 많고 은거한 몸이기는 했지만 오대고수라는 명성과 위엄은 여전하다. 그가 의탁하기로 마음먹는다면 누가 두 팔을 벌리지 않을까? “혹시 원래의 정인이 있어서 첩이 되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이라면 이 애비가 어떻게 천 교주와 상의를 해볼 터이니..” “아이 정말! 그게 아니라니까요!” 왕전의 말을 듣던 그녀가 결국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한 번도 태어나서 자신에게 반항을 한 적이 없던 딸이 소리를 지르니 왕전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입을 벌렸다. “아버지! 한 번 몸을 섞었다고 혼례를 치르면 세상 여자들이 남아나겠어요? 전부 원하는 여자들에게 득달같이 달려들 텐데요.” “.......” 위풍당당하다. 그리고 너무 똑 부러지게 말을 하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저 그 정도로 가벼운 여자 아니거든요. 그리고 혼사도 몇 번은 만나봐야 어떤 사람인지 알거 아니에욧!” “그, 그건 맞는 말이구나.” 왕전이 얼떨결에 답하자 그녀가 기세를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아버지도 분이도 같이 가요!” “뭣?” “약속하셨잖아요. 평생 어머니를 대신해서 저와 분이를 보호해주신다고요.” 결국 그녀의 말은 다 같이 마교로 가자는 의미였다. ‘아.....’ 처음에는 뜻밖의 말들이 이어지면서 당혹스러웠던 왕전의 표정이 차츰 변했다. 그저 딸이 이상한 고집을 피운다고만 치부했던 그였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이 아이가 설마.....’ 반항하는 것 같이 소리를 지른 왕여군이었지만 그 눈빛에는 간절함이 보였다. 걱정스러운 듯이 그를 바라보는 모습. 그제야 왕전은 딸인 왕여군의 진의를 알 수 있었다. ‘언제까지 저희들을 보호하느라 아버지께서 은거만 하시고 사파 연맹과 정파 무림맹을 피해 다닐 수 없잖아요. 차라리 마교로 가요.’ 왕전은 자식들을 걱정해서 그 뛰어난 무위를 지니고도 은거를 했다. 딸이 납치를 당하면서 정체가 드러난 것이었지만 지금껏 한 번도 스스로를 내세운 적이 없었다. 중원 무림을 군림하는 오대 고수의 무자라는 자가 말이다. 그것이 그녀의 마음을 너무 아프게 했다. 아버지 정도라면 어딜 가든지 명성을 떨치고 충분히 누릴 수도 있는데, 아픈 자신과 왕분을 보호하기 위해 늘 스스로를 희생했다. ‘이렇게 되면 아버지도 자존심을 굽히시고, 같이 따라가겠지.’ 그녀는 왕전이 애지중지 키운 만큼 배려심이 깊게 자랐다. 어떻게든 아버지인 왕전의 자존심을 무너뜨리지 않고 마땅한 명분을 준 것이다. 정파 출신이었기에 마교에 대해서 워낙 안 좋은 인상이 있었지만, 이번 일을 겪으면서 그들 역시도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 아이의 씀씀이가 참으로 깊구나. 가연, 우리 아이가 이렇게 잘 자랐소.’ 왕여군의 진의를 알게 된 왕전의 마음이 완전히 누그러졌다. 생각해보면 음양 교합을 했다고 해서 딸의 앞날을 위해서 자존심을 내던지고, 무조건 혼례를 추진하는 것도 우습기도 했다. 차라리 딸의 진의대로 은혜도 갚으면서 서로가 필요한 것을 요구하는게 나았다. “흠흠, 네 뜻이 정녕 그렇다면 어쩔 수가 없구나. 그래도 천 교주에게 아무 마음이 없다고 하니 그러도록 하거라.” 헛기침을 하면서도 왕전의 얼굴이 밝다. 딸이 초야를 치른 남자가 아닌 아버지를 신경 쓰는 것에서 기분이 좋아진 왕전이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왕여군의 말에 왕전의 표정은 다시 굳어지고 말았다. “모, 모를 일이죠. 좀 더 보다보면 좋아 질지도.” 그 말과 함께 부끄럽다는 듯이 왕여군이 얼굴을 붉히며 획하고 고개를 돌렸다. “!?” 이에 왕전은 기가 차다는 듯이 혀를 내둘렀다. 딸이지만 도저히 여자의 마음은 알 도리가 없었다. 한편 지부에서 가장 귀빈들을 모시는 제 삼 객당의 화려한 호실에 천여운이 이 장로인 연무화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는 근 하루가 넘게 자리를 비웠다고 반 시진 전에 복귀한 참이었다. 천여운은 용호채로 가기 전에 신의 감로수에게 사전에 환자가 누구인지는 숨긴 채, 증상을 알려주었다. 나노의 능력으로 체내 전체를 스캔했기 때문에 조금이라고 이상이 있는 부분은 전부 알렸는데, 그녀는 이 증상이 심혼맥(心魂脈)에 손상일 지도 모른다고 했다. ‘천마신교에는 이런 약재가 있습니까?’ 마침 다행인 것은 양귀비의 소재를 알아보기 위해서 마교 내에 있는 모든 약재들에 대한 정보를 나노의 데이터에 저장시켜놓은 천여운이었다. 연무화는 신의 감로수의 부탁을 받고 근경에서 마교에 없는 약재들을 구하러 다녀왔다. 탁자에 올려놓은 약재들이 그것이었다. “감 파파가 일러준 약재들은 전부 구해왔습니다. 제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런 일들이 있을 줄이야. 송구스럽습니다.” “아닙니다. 어차피 결과적으로 잘 된 일이니까요.” 사실 연무화가 있었다고 한들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어차피 음양 교합부터 시작해 오대 고수인 무쌍검 왕전과의 대결은 예정에도 없었던 일이었으니 말이다. -탁! 연무화가 무릎을 꿇고서 포권을 취했다. “그래도 경하드립니다. 교주님. 명실 공히 오대 고수의 반열에 드신 겁니다!” 그녀의 말대로 천여운은 무쌍검과의 비무에서 이기게 되면서 오대 고수의 반열에 오른 것이었다. 태상교주인 천유종과 다르게 역혈마공을 쓴 것도 아니었기에 의미가 남달랐다. 천여운을 모시는 수하로서 감개무량했다. ‘약재도 구했으니 이제 본교로 복귀인가.’ 생각보다 외유가 길어졌다. 이제 남은 것은 신의 감로수의 일만 원만하게 해결하면 마교로 복귀하는 일만이 남았다. 그때 객실의 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똑똑! “교주님. 지부장 대원입니다.” “들어오라.” 천여운의 허락에 객실 문이 열리며 지부장 대원을 비롯한 검은 무복을 입고 있는 평범한 인상의 청년이 같이 들어왔다. 청년이 한 쪽 무릎을 꿇으며 천여운에게 인사를 올렸다. “대 천마신교의 교주님을 배알하나이다.” “누구지?” 천여운의 물음에 검은 무복의 청년이 말했다. “교주님. 암종의 종주인 환 장로가 보내서 급히 왔습니다.” "환 장로!" 청년은 비환귀종이 아닌 암종의 요원이었다. 그를 급하게 보냈다는 것은 뭔가 중요한 전달이 있다는 의미였다. 암종은 보고서를 제출할 때를 제외하고는 기본적으로 서찰 전달 방식을 쓰지 않고 구두로 전달하기에 전음을 보내왔다. 청년의 전음을 들은 천여운이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서둘러 돌아가야 겠구나.” 본교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손님이 십만대산으로 향하고 있다는 정보였다. * * * 천여운은 그 날 오후에 당장 본교로 복귀할 수 있도록 준비를 했다. 출도 시에는 말을 타고 북상했었지만 돌아가는 길에는 마차가 필요하여 지부장에게 부탁해놓았다. 그것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원래는 신의 감로수의 손녀 감미양의 장례를 치르고 가려고 했지만, 예상하지 못한 손님으로 인해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천여운은 마교에서 성대한 장례를 약속하고서야, 신의 감로수를 진정시키고 데려갈 수 있었다. “거기 조심해서 올리시오!” “읏차!” -쿵! 마교의 외당 무사들이 조심스럽게 마차에 시신이 담긴 관을 실었다. 관 옆에는 신의 감로수가 아기를 안고서 꼭 붙어 있었다. 대부분의 준비를 마쳤으니 이제 출발하기만 하면 된다. 천여운은 연무화, 양단화 두 장로들을 데리고 왕전 일가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 의사를 묻기 위해 약당으로 향했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해결하려 했는데.’ 음양 교합으로 인해 왕전이 어렴풋이 혼사에 대해 거론했었다. 문규가 유일하게 허락한 단 한 사람의 여인이었기에 천천히 왕전과 이를 대화 나누면서 향후 거취를 어떻게 할지 물으려 했다. 그런데 일정이 앞당겨져서 난감하던 차에 예상외의 일이 벌어졌다. '세상에 이런 일이!' 이 장로 연무화와 사 장 양단화가 입까지 쩌억 벌어져서는 놀라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무쌍검 왕전을 비롯한 그의 자식들인 왕분, 왕여군이 무릎을 꿇고서 마교에 입교를 청한 것이다. “왕전 공.....” “부디 천 교주께서는 거절하지 마시길 바라오. 소중한 여식을 구해준 은혜를 어찌 쉽게 갚을 수 있겠소. 부디 입교를 허락하여 그것을 갚게 해주시오.” -탁! 무릎을 꿇고서 포권을 취하는데도 오대 고수의 위엄 때문인지 무게감이 가득했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오오오!’ 이 모습에 특히 사 장로 양단화는 기쁨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천여운에게 아뢰어 왕여군과의 혼사를 추진하려고 했던 그였다. 마교에 오대고수 중 한 사람을 초빙할 수 있다면 현재의 판도가 달라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자발적으로 그 일가가 마교에 입교를 한다고 했다. 마교에 있어서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이건 예상 밖이구나.’ 천여운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비무를 하고나서 조심스럽게 왕여군과의 혼례에 대해서 거론했던 왕전이 불과 한 시진 만에 태도를 바꾸었다. 굳이 혼례를 통해서 초빙되는 것보다는 모양새가 좋지만 의외였다. ‘혹시 그녀의 의견인가?’ 천여운이 왕여군을 쳐다보았다. -휙! 눈이 마주쳤는데,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그녀가 급히 시선을 회피했다. 음양 교합이라고는 하나 서로의 몸을 뜨겁게 탐했으니 부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알 수가 없구나.’ 저런 태도를 본다면 절대로 호감이 없진 않은 것 같다. 그때 천여운의 귓가로 왕전의 전음이 들려왔다. [흠흠, 천 교주. 혼사에 관련된 이야기는 차후에 하도록 합시다. 너무 서두르는 것보다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가는 편이 좋지 않겠소?] ‘.......’ 그 전음을 듣고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이 결정에는 왕여군의 입김이 들어간 것이 틀림없었다. 혼사의 추진이 아닌 입교라는 방향은 정말 예상 외다.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르다.’ 절세미인이기는 하지만 여색을 밝히지 않기에 아무렇지 않게 여겼는데, 문규처럼 여느 여인들과는 뭔가 달랐다. 천여운은 처음으로 문규 외의 다른 여인에게 호기심을 느꼈다.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왕전에게 천여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전음을 보냈다. [알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왕전은 만족스러워했다. 천여운이 그들 왕전 일가에게 가볍게 포권을 취하면서 말했다. “천하의 무쌍검 왕전 공께서 본교에 입교한다고 하는데, 어찌 환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서 오십시오.” 대우가 담긴 환영에 왕전이 밝아진 얼굴로 화답했다. “고맙소! 천 교주, 아니. 소신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주님.” 입교를 허락하자 위계질서에 맞게 곧바로 존대를 하는 왕전이었다. 이에 수하들이 들뜬 얼굴로 축하했다. -팍! “교주님! 경하드리옵니다!” “무쌍검 왕 대협을 얻으신 것을 경하드립니다!”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두 장로들은 전율과 기쁨에 차올랐다. 천여운이 중원 오대고수라는 천하의 인재를 얻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 정보가 중원으로 퍼져나간다면 다른 두 세력들인 정파 무림맹과 사파 연맹이 경악할 만한 사건이었다. * * * 한편 호남성의 중부 쪽으로 십만대산을 향해 남하하는 화려한 행렬이 있었다. 길게 이어지는 행렬의 중심부에는 황금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마차가 있었고, 그 주위를 수많은 군관들이 철통같이 지켰다. 그들은 무림인이 아니라 관(官)의 병력이 틀림없었다. 높게 들고 있는 붉은 깃발에는 황가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 62장 마교 귀환 (2) > 끝 < 63장 황명(皇命) (1) > 수백 개의 산봉우리로 이루어진 십만대산. 그곳을 굉장한 속도로 가로질러 가는 자가 있었다. 산을 빽빽하게 메우고 있는 거목들의 나무 끝을 가볍게 밟고서 지나가는 신기마저 보였다. 얼핏 보아서는 바람이 스쳐지나간다는 느낌밖에 들지 않는다. 이런 엄청난 경공 실력을 보이고 있는 자는 다름 아닌 마교의 교주 천여운이었다. -슉슉! 그가 한 보씩 무언가를 밟고 지나갈 때마다 주위 배경이 달라졌다. 현경의 극에 오른 후로 그의 경공은 풍신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 대호법 마라겸조차 넘보기 힘들 만큼 쾌속하면서 고절해졌다. 이렇게 혼자서 쉬지 않고 달린지가 거의 이틀이 되어간다. ‘늦지 않아야 하는데.’ 혹여 제 시간에 맞추지 못할까봐 우려가 되었다. 이틀 전에 다시 한 번 암종에서 온 급보에 의하면 예기치 못한 손님들이 이틀 후면 마교의 성에 도달한다고 알렸다. 시신을 실은 마차 덕분에 아무리 속력을 내도 사흘은 걸릴 거리였다. 결국 천여운은 일행들보다도 두고서 따로 움직여야 했다. ‘교주님. 저희가 따라가겠습니다.’ 두 장로가 호위를 하겠다고 했으나 신의 감로수를 데리고 천천히 오라고 하였다. 어차피 그들이 동행한다면 속도를 늦춰야 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마교 내외부로 공식적으로 천여운은 폐관 수련에 들어간 상태였다. 그런데 이 손님들은 그가 폐관에 들어간 것과 무관하게 반드시 성 밖에까지 마중을 나가야만하는 존재들이었다. ‘더 서두르자!’ -팟! 천여운이 경공에 더욱 박찼다. 거의 마교의 성에서 이십 리 정도 떨어진 지점. -쿠쿠쿠쿠! 말발굽 소리가 대지를 울리고 있다. 한참 경공을 펼치며 성으로 향하던 천여운의 기감에 수많은 인기척들이 감지되었다. 그곳을 바라보니 굉장히 길게 군관들의 철통같은 호위 진으로 이루어진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호오?’ 잠시 경공을 멈추고 높은 나무 위에서 기척을 죽인 채 지켜보았다. 행렬의 중심부에는 황금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마차가 있었고, 가장 선두에는 붉은 깃발에는 황가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정말 황궁에서 나온 게 틀림없구나.’ 수많은 관인들, 그리고 관병, 무관들이 지키고 호위하고 있다. 자그마치 삼천여 명에 이르는 대규모의 행렬이었다. 여기서 천여운을 의아하게 만든 것이 있었다. ‘관과 무림은 별개라고 들었다. 그런데 저 무관들은 무공을 익히고 있다.’ 마차의 주위를 철통같이 지키는 주홍빛 갑주를 입은 무관들이 있었는데, 삼백여 명 정도로 전부 무공을 익힌 자들이었다. 적어도 일류에서 절정 초입까지 고루 섞여 있었다. 아무리 기척을 갈무리한다고 해도 천여운의 앞에서는 발가벗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저 자는?’ 그리고 그들의 앞에서 선두로 말을 몰고 있는 화려한 주홍 갑주의 중년인 역시도 무공을 익힌 자였는데, 수하들과는 그 수준의 격차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왜냐하면 저 자는 화경의 경지에 이른 무인이었기 때문이었다. ‘흠.....화경의 경지에 이른 무관이라.’ 무림에서도 보기 드문 경지의 고수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 의아했다. 그 바로 옆에는 금빛 혁대를 매고 있는 부관으로 보이는 훤칠한 청년이 보좌를 하고 있다. 중년인에 비해서 무공이 떨어지지만 초절정 초입에 이른 고수였다. 이들 두 사람은 확실히 다른 자들에 비해서 확 튀었다. ‘나노. 확대해봐.’ [사용자의 시야의 초점을 줌 인(zoom in)하겠습니다.] 나노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리며 천여운의 동공이 흔들리더니, 시야의 초점이 확대되었다. 시야를 확대하자 주홍빛 갑주의 중년인을 비롯한 그 부관이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중년인은 무위도 뛰어났지만 얼굴을 보니 전장의 대장군의 풍모가 느껴졌다. 아무래도 꽤 높은 관직에 있는 무관이 틀림없었다. ‘이상하군.’ 그런데 이상하게 옆에 있는 저 부관이 신경 쓰였다. 훤칠한 외모에 사내다운 기상이 엿보이는 자였는데, 왠지 모를 독특한 기풍이 느껴졌다. 단순한 무관 출신이라기보다는 고관대작의 자제처럼 보이는 자였다. 무공만 뛰어나지 않았다면 그리 여겼을 것이다. ‘저런 자들에게 호위를 받고 있는 저 가마 속에 있는 자는 누굴까?’ 화려한 가마 안에는 단 한 명의 기척이 느껴졌다. 이 자는 무공을 전혀 익히지 않은 자였다. ‘곧 알게 되겠지.’ 대충 행렬에 있는 자들을 눈에 넣은 천여운은 다시 경공을 펼쳐서 서둘러 남하했다. 저들보다 먼저 도착해서 의복을 갖춰 입고 준비를 마쳐야 하니 말이다. 한편 북성의 입구 쪽에는 수많은 교인들이 나와서 황궁에서 나온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바닥에는 고급 비단으로 길을 만들고 여러 가지로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성벽의 위에는 나비 문양이 그려진 붉은 비단 옷을 입은 사내가 북쪽 언저리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다. “아직이신가.” 그는 바로 칠 장로 환의였다. 여전히 얼굴에 하얀 분칠을 하고서 여인처럼 꾸민 그는 초조한 눈빛으로 북쪽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성벽 아래쪽에서 누군가가 위로 올라왔다. 독특한 문양의 가면을 쓰고 있는 그는 바로 대호법 마라겸이었다. “교주님은 아직이오?” 마라겸의 질문에 환의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큰일이네요. 곧 황궁 행렬단이 당도할 터인데요.” 이미 행렬단이 이십 리 안으로 들어왔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곧 당도하기에 그들을 맞이해야만 했다. 만약 교주가 그 안에 도착하지 않는다면 황궁 행렬단부터 시작해 교인들조차 교내에 그가 자리를 비우고 있음을 알게 된다. 꽤 난처한 상황이 일어난다는 의미였다. “흠, 큰일이구려.” 환의의 말에 동의하는지 마라겸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북쪽을 응시했다. 그때 북쪽 숲을 바라보던 마라겸의 두 눈에 이채가 띠었다. 뭔가 멀리서 빠르게 다가오는 점 같은 것이 보였다. ‘빠르다.’ 그 속도가 굉장히 빨라서 얼핏 보았다면 그저 바람에 흩날리는 수풀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옆에 있는 환의는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자신도 계속 앞을 보지 않았다면 놓쳤을 수도 있었다. 점점 커져가는 점은 숲속의 나무 꼭대기의 나뭇가지만 밟고서 성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설마?’ 아직까지 멀어서 누군지 알 수 없으나, 기감을 열어도 어떠한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보다도 훨씬 높은 경지에 오른 고수라는 의미였다. 현경의 경지인 그보다 높은 수준의 고수라면 당금 무림에서 오대고수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슉! 슉! 이곳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저 자는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는지 좌우로 빠르게 이동해서 잔상만 보이고 있었다. ‘일부러 들키지 않으려고 하는 것인가?’ 저렇게 이동하면 성벽 위에 있는 무사들의 무위로는 발견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숲이 끝나는 부군부터 성벽까지는 일 리가 넘는 거리의 평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곧 모습이 보이리라. “환 장로 아무래도 방비를 해야 할 것 같소.”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방비라뇨?” “저길 보시오.” 마라겸이 잔상을 일으키며 다가오는 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점으로 보이던 자가 어느새 사람의 인영을 갖춰서 보였다. “무엇을 보라는 거죠?” “저기 잔상 같은 것이 안 보이시오?” 환의가 안력에 집중해서 마라겸이 가리킨 곳을 살펴보자 이윽고 무언가가 보였다. 워낙 빨라서 화경의 고수인 그조차 집중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이건 대체?” “당장 경계망을 가동해야 할 것 같소.” “하아. 하필 이 시점에....” 저 정도라면 상상을 초월하는 고수가 틀림없었다. -슉! 슉! 조금만 더 가까워지면 그 얼굴이 보일 참이었다. 환의가 성벽 위에 있는 무사들에게 일러서 경계망을 울리도록 하려던 찰나에 마라겸의 두 눈에 그 자의 얼굴이 보였다. “환 장로! 멈추시오!” 마라겸의 다급한 제지에 환의가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순간 당혹스러워하던 마라겸이 전음을 보냈다. [교주님이시오!] [네? 교, 교주님이요?] 멀리서 빠르게 다가오는 저 엄청난 경공을 펼치는 자는 바로 천여운이었다. 하마터면 경계망을 울려서 일을 크게 만들 뻔했다. 천여운이 저렇게 잔상을 일으키면서 오는 이유는 분명 자신이 성 밖에 나갔다는 것을 감추고 들어오기 위함이었다. ‘차라리 다른 문 쪽으로 오시는 편이 나을 듯한데.’ 교주라는 말에 환의가 난처함을 감추지 못했다. 숲길이 끝나면 당연히 평야로 내려와야 하는데, 그렇게 된다면 어떤 식으로든 모습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엇?’ -팡! 높은 나무들로 이루어진 수풀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였다. 빠르게 경공을 펼치며 다가오던 천여운이 나무 위에서 더욱 높은 허공으로 뛰어오른 것이다. ‘교, 교주님!’ ‘대체 뭘 하시려고?’ 성벽 위보다도 훨씬 높은 고지로 오르는 모습에 마라겸과 환의가 당혹스러워했다. 아직까지 성벽 위에 있는 무사들은 환영 준비를 하는 것을 쳐다보느라 저 높은 곳까지 신형이 치솟은 천여운을 보지 못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팡! 팡! 팡! 천여운이 성벽을 훨씬 뛰어넘는 위치까지 허공을 밟고 위로 오르는 것이 아닌가. 이것을 유일하게 바라보고 있던 마라겸과 환의는 순간 경악한 나머지 자신들도 모르게 소리칠 뻔했다. ‘맙소사!’ ‘허, 허공답보!’ 그것은 바로 허공답보(許空踏步)였다. 기를 압축하여 공기를 발판 삼아 움직이는 고도의 경신법이었다. 경공의 최고 경지라 불리는 이 수법은 어검비행과 더불어 전설로 불리는데 무림인들조차도 꿈으로만 그리는 경공술이었다. ‘교, 교주님께서 더욱 높은 경지에 올랐단 말인가.’ 이것은 풍신이라 불리는 마라겸조차 할 수 없는 능력이었다. 아주 잠깐 정도 신형의 방향을 바꿀 때 정도만 가능한 것을 천여운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보이고 있었다. 허공의 높은 곳까지 밟고 올라간 천여운의 다음 행동은 더욱 놀라웠다. ‘서, 설마?’ -챙! 천여운은 백룡도를 뽑아서 날린 후에 그것을 타고서 어도비행술을 펼쳤다. 거의 성벽의 두 배가 넘는 높이까지 올라가서 어도비행술을 펼치니 누가 이를 발견할 수 있겠는가. 어도비행술의 속도는 굉장히 빨랐다. 단숨에 허공을 가로질러서 날아오는 모습에 두 사람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슝! 천여운은 어느새 성벽 위를 지나서 본성 안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고개를 들어서 천여운이 날아가는 방향을 따라서 시선을 이동하던 환의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전음을 보냈다. [으음, 대호법......대체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내가 묻고 싶소.] 고작 보지 못한 한 달 새에 천여운은 더욱 괴물이 되어 돌아왔다. 중원 최고라 불리는 오대고수 급에 버금가는 무위를 지녀서 말이다. * * * 당황스러워했던 대호법 마라겸과 칠 장로 환의는 천여운이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간 방향으로 경공을 펼쳐서 쫓아갔다. 그들이 쫓아오는 것을 보았던 것인지 천여운이 내성 근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대호법 마라겸이 교주님을 삼가 배알하나이다!” "칠 장로 환의가 교주님을 삼가 배알하나이다!" "두 분 별고 없으셨습니까?" "본교에 있었던 저희가 어찌 별고가 있겠습니까? 교주님. 송구스럽습니다만. 우선 서두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아....." 오랜만에 얼굴을 보게 된 해후도 잠시였고, 그들은 얼른 천여운이 의복을 갖추는 것을 돕기 위해 내성으로 데려갔다. 내성의 대전에는 교내에 남아있는 장로들이 이미 의복을 갖추고서 대기 중이었다. 교주와 더불어 황궁에서 온 손님들을 맞이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의복을 갖춰 입은 천여운이 대전에 들어서자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한 쪽 무릎을 꿇고서 두 손을 모아 예를 표했다. -탁! “신교의 미천한 신도들이 교주님을 배알하나이다.” “교주님을 배알하나이다!!!” 현재 가장 직위가 높은 삼 장로 문연이 대표로 인사를 올렸다. 문연의 인사를 받은 천여운의 표정이 묘해졌다. ‘흠.....’ 무림에 출도하면서 그의 손녀인 문규와 초야를 치른 천여운이었다. 혼례를 치르기도 전에 맺어진 것이었기에 그 조부인 문연과 눈이 마주치자,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황궁 손님의 일만 마무리되면 문 장로와 이야기를 나눠야 겠구나.’ 우선은 그의 생각대로 황궁 행렬단이 먼저였다. 천여운은 대기하고 있던 여섯 명의 장로들과 육검의 삼인을 이끌고서 환영 준비를 마친 북문으로 향했다. 북문에는 각 종파의 종주들이 미리 나와서 오 열을 갖추고 있었다. 천여운을 중심으로 하여 장로들이 그 앞으로 나와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쿠르르르! 수백 필의 말발굽 소리에 땅에 진동이 강해졌다. 이윽고 얼마 있지 않아 숲길 쪽에서 황궁 행렬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러한 입성이 애초부터 익숙해서인지 황궁 행렬단의 선두에 있던 병사들이 갈라지며 중앙에 있던 화려한 마차가 앞으로 이동해왔다. 마차를 호위하고 있는 군관들의 선두에 서있는 주홍빛 화려한 갑주를 입은 중년의 무관이 말에서 내려 익숙하게 앞으로 걸어나왔다. ‘아!’ 대호법 마라겸을 비롯한 장로들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천여운처럼 마교의 수뇌부들 역시도 화려한 갑주의 중년의 무관이 화경의 경지에 이른 고수라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중년의 무관이 북문 앞에 서있는 천여운과 마교인들을 오만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외쳤다. “대명제국의 신민들이여. 본 무관은 대명제국의 남진무사 연남군이다!” -웅성웅성! 남진무사라는 말에 모든 수뇌부들이 놀란 얼굴이 되었다. 황궁의 직위 체계를 잘 알지 못하는 천여운의 귓가로 칠 장로 환의의 전음이 들려왔다. [교, 교주님. 저 자는 금의위입니다!] 금의위(錦衣衛). 그들은 대명제국의 특무기관으로 동창, 서장, 대내행창과 더불어 황제의 신임을 받고 있는 황실 친위대였다. 이 금의위의 직위체계는 그들의 수장인 지휘사가 있고, 그 바로 밑에 남, 북 진무사를 거느리고 있는데 황실에서 고위 관료에 속하는 무관인 것이다. 천여운은 모르겠지만 남, 북 진무사의 무위나 명성은 무림에서도 알아줄 만큼 대단했다. '대체 가마 속에 누가 있기에 이런 고위 무관이 호위한 거지?' 그 궁금함에 답이라도 하려는 듯 마차가 들썩거렸다. 안에 있는 자가 마차에서 내리려는 모양이었다. -끼이이이익! '이 자가 황실의....응?' 화려한 마차의 문이 열리며 그 안에 있는 자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후덕하게 살이 올라서 찢어진 눈매를 가진 염소수염의 관료였다. 황실의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기대와는 전혀 어긋난 모습에 천여운이 내심 이상하게 여겼다. "에헴." 염소수염의 관료가 마차 안에서 뭔가를 정성스럽게 금빛 쟁반에 올려서 뒤뚱거리며 내려왔다. '뭐지?' 쟁반 위에는 붉은 비단에 금빛 용 무늬가 수놓아진 화려한 두루마리가 올려져있었다. 모두가 그저 의아해하게 쳐다보자, 남진무사 연남군이 인상을 굳히며 외쳤다. “무엄하다! 황명을 앞에 두고, 누가 감히 고개를 든단 말인가. 당장 무릎을 꿇어라." “!?” 황실 행렬단이 마차에 실어서 정성껏 모시고 온 것은 다름 아닌 황제의 명이 담긴 두루마리였다. < 63장 황명(皇命) (1) > 끝 < 63장 황명(皇命) (2) > 황명을 실은 황가의 행렬이 도착하기 사흘 전, 가마에서 누군가를 부르는 목소리가 바깥으로 들려왔다. “남진무사. 밖에 있느냐.” “전하! 신 남진무사 연남군 곁에 있사옵니다.” 가마를 지키는 금의위들의 선두에 서있던 남진무사 연남군이 말의 속도를 늦추어 가마 곁으로 붙었다. 그가 옆으로 붙자 가마에서 불평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남진무사. 참으로 우습지 않소? 대명제국의 성왕인 본 왕이 직접 행차한다는 것이.” 가마 안에 있는 황명이 담긴 두루마리와 있는 자는 다름 아닌 대명제국 황제의 둘째 아들인 성왕 주태겸이었다. 주태겸은 지금 십만대산으로 향하는 것이 상당히 불만스러웠다. 처음에는 황제의 명도 있었고 자신의 입지가 걸려있는 일이기에 오기로 내려왔지만 못마땅한것이 그의 심경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명하신 것이오니, 부디 노여움을 거두어 주십시오.” 남진무사 연남군이 그를 달래듯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실 이 같은 말을 남하하는 동안 벌써 수차례나 반복적으로 해왔던 그였다. 가마 안에 있는 성왕 주태겸은 그런 말에도 더는 그 말로도 달래지지 않는지 불만이 삭지 않았다. ‘이런 전통을 태조께서 맺으셨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군.’ 차마 이 말은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대명제국을 세운 태조를 모욕하는 말은 설사 왕이라고 해도 용납되지 않는다. 무림(武林)과 관(官)의 상호불가침(相互不可侵) 조약. 그것은 대명제국의 태조와 무림의 삼대 세력의 수장들이 맺은 조약이었다. 보통 사람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무위를 지닌 무림인들은 국가적인 측면으로 보았을 때 굉장히 위험한 존재들이었다. 한 때는 무림과의 전면전을 치른 황조들도 있었지만, 대명제국의 태조는 이 같은 일이 국력의 낭비라고 판단하고 그들과 모종의 조약을 맺었다. ‘듣기로는 태조께서 대명제국을 세울 때 그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들었다.’ 그것이 상호불가침 조약의 시초라고 들었다. 그런데 이 같은 일이 벌써 백팔십여 년 전의 일이다. “남진무사.” “예. 전하.” “이 땅은 누구의 것인가?” “대명제국의 폐하의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대명제국의 폐하의 땅에 살아가는 자들은 무엇인가?” “황제 폐하와 대명제국의 신민들이옵니다.” -쾅! 안에서 주먹질이라도 했는지 가마가 흔들거렸다. “그런데 어찌해서 이 무림인이라는 무뢰배들은 대명제국을 능멸하는 것이냐.” “어찌 그런?” “폐하께서 황명을 내리면 당장에라도 황도로 달려와 머리를 조아려야 할 것들이 오히려 반대로 되어서 본 왕이 특사로 내려간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성왕 주태겸은 이것이 불만이었다. 황제의 명을 받아서 그들에게 특사로 황명을 전달하러 가는 것이 가당치도 않다고 여겼다. 더군다나 지금 향하고 있는 이 마교라는 단체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들은 우두머리인 교주라는 자가 감히 하늘을 칭하고 있다고 들었다. 대명제국의 황제 폐하조차도 천자(天子)라 하여 하늘의 아들을 칭하고 있는데 정말 광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위 정파라고 하는 것들과 이리 다르단 말이냐.” 정파인들은 여느 관료들이나 백성들과 다를 바 없이 황실의 위엄에 우호적이면서 스스로를 바짝 낮추어 대했다. 성왕 주태겸은 황실에서 여러 차례 정파의 고수들을 보았다. 여러 연회 자리에서 초빙 받아서 연무를 보인 적도 있었고, 도가의 고수들은 황실 사람들에게 도가토납법 등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무공에 관심이 많았던 성왕 또한 화산파의 도사에게 황실 무공 이외에 도가 무공을 사사 받았다. “신이 알기로는 사파와 마교는 지향하는 바가 다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남진무사인 연남군은 무관이지만 정파 무림인 중에 몇 지인이 있었다. 그래서 무림의 삼대 세력 간에 대한 알력을 일부 들었었다. 대명제국보다도 오랜 세월 동안 다퉈올 만큼 서로 생각하고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고 들었다. “지향? 우습구나. 그런 것은 저들끼리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닌가. 무림에서 오직 정파만이 대명제국의 신민이란 말인가.” “.....그렇사옵니다.” 그 말은 연남군 역시도 동의하는 바였다. 황실의 관료들 역시도 여러 당파를 이루고 있으나 근본적으로 황상의 신하들이었다. 그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였다. 무림 안에서 어떻게 나뉘든 간에 그것은 그들만의 문제였다. 대명제국의 입장에서는 모두가 같은 신민인 것이다. ‘황상께서는 명하셨다고 하지만 그건 모양새가 좋지 않다. 적어도 교주가 직접 오도록 해야 본왕의 입지와 위신이 서지 않겠는가.’ 정파 무림맹과 달리 마교나 사파 연맹은 그 수장들이 직접 행차한 적이 없었다. 늘 수뇌부들을 대리로 보내서 불가침 조약을 이어나갔다. 감히 불손하게 말이다. ‘흥.’ 첫째인 영왕 주태윤에게 우선권이 없었다면 그 역시도 위치적으로 가깝고 늘 머리를 조아리는 정파 무림맹에 특사로 갔을 것이다. 그나마 황실 손님에 대한 대우만큼은 확실하게 해준다고 하는 마교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사파 연맹은 그의 숙부인 진왕조차도 가지 말라고 혀를 내둘렀다. “이대로 가만히 둘 수가 없구나. 네 생각은 어떻느냐? 육영.” 주태겸의 질문에 가마 왼쪽 편에서 그림자에 가려져 말을 몰고 있는 사내가 답했다. “소신이 듣기로 이번에 마교라는 곳의 교주가 바뀌었다고 들었습니다.” “흠, 본왕도 그리 들었다.” 성왕 주태겸은 황명을 받고 남하하기 전에 황실에 초빙되어 도가토납법을 가르치는 화산파의 도인들에게 현 마교에 대해서 물었었다. 그들도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마교의 교주가 약관에 불과한 자로 바뀌었다고 들었다. “소신의 정보원에 의하면 원래 교주의 신변에 문제가 생겨서 현 교주가 그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고 들었습니다.” “호오. 그래?” 생각지도 못하게 자세한 사정을 알고 있자 주태겸이 흥미를 보였다. 그림자에 가려진 사내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듣기로는 대부분의 마교의 인재들을 갈아치우고 현 교주는 무능력한 자라고 하던데, 이것을 기회로 삼는 것이 어떠한지?” “기회?” “전하께서 무뢰배들을 바로잡아 폐하의 신임을 얻어서 입지를 다지심이 좋을 거라 사료되옵니다.” 그림자에 가려진 육영이라는 자의 말에 남진무사 연남군이 인상을 찡그렸다. 어떤 식으로 황명을 전달하는 특사가 진행되든지 그것은 전적으로 성왕 주태겸에게 달려있지만 이런 간언이 옳을지 판단이 가지 않았다. “흥미롭구나. 계속 말해 보거라.” 그러나 성왕 주태겸은 이에 크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육영의 간언을 모두 듣고 난 성왕 주태겸은 안타깝게도 그의 의견을 전적으로 수용키로 하였다. ‘저 육영이라는 자는 대체.......후우. 그들이 어찌 나올지는 모르겠구나.’ 우려가 되었지만 황실 친위대인 금의위는 오직 명령만 들을 뿐이었다. 그것이 문관과 무관의 차이였다. * * * 남진무사 연남군이 북문의 성 앞에 있는 마교인들을 향해 외쳤다. “무엄하도다! 당장 모두 무릎을 꿇고 황명을 받들지 못할까!” 위엄이 넘치는 호통. 공력마저 실려 있었기에 근방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보통 백성들은 황명이라고 한다면 당장에 겁을 내면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다. 그런데 달랐다. 뭔가 공기가 싸늘하게 바뀌었다. 방금 전까지 황가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에서 환대해주는 느낌을 받았다면 무릎을 꿇으라는 말이 나옴과 동시에 마교인들의 표정이 일제히 굳어졌다. ‘허어....’ 남진무사 연남군조차 순간 할 말을 잃을 정도였다. 마교인들이 쉽게 무릎을 꿇지는 않을 거라고 여겼지만 이렇게 냉담한 반응이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무리 무림인이라도 이건 아니구나.’ 우려되는 명령을 이행했지만 막상 마교인들의 냉담하면서 떨떠름해하는 모습을 보자, 황실을 보필하는 친위대인 금의위의 남진무사로서 연남군은 노기가 올랐다. 그가 인상을 잔뜩 쓰고서 다시 호통을 치려는데, 그의 귓가로 전음이 들려왔다. [되었다. 그대가 나서서는 안 되겠구나.] 성왕 주태겸의 전음이었다. 그 말이 끝나자 가마 밖으로 나온 후덕한 관료처럼 보이는 자가 인상을 굳히며, 옆에 있는 금의위를 불러서 황명이 담긴 두루마리 쟁반을 맡겼다. 그러더니 앞으로 몇 보 걸어 나와 천여운을 비롯한 마교인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여서 소리쳤다. “본왕은 대명제국 황제 폐하의 명을 받고 내려온 성왕 주태겸이라고 한다.” 그는 다름 아닌 성왕 주태겸이었다. 방금 전까지 냉담하게 바라보던 마교인들의 반응이 바뀌었다. -웅성웅성! “성왕이라니?” “황제의 아들이란 말인가?” 왕의 칭호를 가지는 자들은 오직 황제의 형제들과 그 자식들뿐이다. 금의위가 호위하기에 상당한 권력을 가진 자가 납셨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게 왕일 줄이야. 의아해하는 천여운의 귓가로 환의의 전음이 들려왔다. [교주님. 성왕이라고 한다면 현 황제의 둘째 아들인 주태겸입니다.] 무림만큼은 아니었지만 암종인 현 황실 인사들의 이름 정도는 기억해뒀다. 과거에도 상호불가침 조약 때문에 몇 차례 재상 급이나 왕들이 방문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그 태도가 과거와는 전혀 상반된다는 것이다. 오만하게 내려다보는 표정하면서 호통을 치는 것이 마치 보통의 백성들을 대하는 듯 했다. 성왕 주태겸이 웅성거리는 그들을 향해 찢어진 눈썹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참으로 무엄한 자들이로다. 감히 황상의 명이 담긴 두루마리를 보고도 멀뚱히 서있는 것도 모자라 본왕이 직접 납셨는데도 이리 고개를 들고 있단 말인가!” 성왕 주태겸의 태도를 보면 기어코 마교인들이 무릎을 꿇는 것을 보고 싶어하는 듯 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면서 마교인들을 어찌해야 할지 난감했다. 오히려 그보다도 교주의 심기가 불편해지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응? 저놈인가?’ 성왕 주태겸의 눈에 마교인들의 한가운데서 화려한 의복을 갖춰입은 천여운을 발견했다. 모두가 한결 같이 그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이번에 등극했다는 그 신임 교주가 틀림없었다. ‘아무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서 몰랐는데 교주가 틀림없구나.’ 완벽하게 기가 갈무리 되어서 어떠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 천여운이다. 무인이라기 보다는 평범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렇기에 금의위들을 비롯해 성왕 주태겸은 처음에 그가 마교의 교주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정말 애송이였구나.’ 그래도 마교의 교주라 하여서 상당한 고수일거라 여겼는데 아니었다. 이것에 더욱 자신감이라도 얻었는지 성왕 주태겸이 손가락으로 천여운을 가리켰다. “그대가 마교의 교주이느냐?” 당연하다는 듯한 하대에 옆에 서있던 좌호법 이화명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물론 모든 마교인들이 하나 같이 같은 반응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성왕 주태겸은 더욱 화를 돋우기라도 하는 것처럼 천여운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고 했거늘. 교주가 모범이 되지 않으니 그러하구나. 당장 이리 와서 무릎을 꿇고 황제 폐하의 명을 받으라.” 결국 그 마지막 말은 마교인들의 공분을 사고 말았다. '감히!' '본교의 하늘을 능욕하다니!' -고오오오오! 그들의 몸에서 일제히 강렬한 기운이 발산되면서 가만히 서있던 말들이 놀라서 앞 말발굽을 들어 올리며 몸을 돌리려했다. -히이이잉! “헉! 마, 말들이 갑자기!” “워워!” 이것은 평범한 병사들은 물론이거니와 무공을 익힌 금의위들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마교인들이 분노하여 진기를 뿜어대고 있는 것을 말이다. 가장 먼저 위협을 느낀 남진무사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들며 소리쳤다. -챙! “감히 지금 황제 폐하의 명을 가져오신 성왕 전하께 기운을 드러냈단 말인가! 마교에서는 지금 역모를 행하려는 것이냐!” 역모(逆謀). 그것은 현 황조에 반기를 드는 것을 말한다. 황제와 그 핏줄을 위협하는 것은 역모의 행위로 간주되게 된다. 무릎을 꿇으라는 명령도 모자라서 이제는 역모까지 거론하자 마교인들은 하나 같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후후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성왕 주태겸이 속으로 흡족해했다. 매번 황실에서 상호불가침 조약 때문에 대우를 해주는 것에 익숙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강경하게 나온다면 제깟 것들이 어찌하겠는가. 아무리 무림인이라고 해도 황실의 수백만 대군과 맞서 싸우기라도 할 텐가. ‘대명제국의 신민이라면 그에 걸맞게 행동 하거라.’ 어차피 마교인들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존심을 택하고 황실을 적으로 만드느냐? 혹은 그동안의 자존심을 버리고 수치스러워하느냐를 두고 고민하리라. 그렇게 여겼다. 그러나, -탁! 갑자기 천여운의 곁에 있던 반백의 건장한 노인이 앞으로 나와, 그에게 한쪽 무릎을 꿇고 포권을 취하고서 말했다. “교주님. 소신이 잠시 나서도 괜찮겠습니까?” 그가 아뢰자 천여운이 손을 가볍게 들어서 허했다. 반백의 노인은 다름 아닌 마교의 제 삼 장로인 문연이었다. 문연이 앞으로 걸어 나와 가볍게 성왕 주태겸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이에 곁에 있던 금의위가 소리쳤다. “감히 주상 전하께 건방지게 포권을 취하는...” -오싹! “흐억!” 그 순간 금의위는 숨이 턱 막힐 것 같은 진기에 억눌려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문연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진기가 그를 억눌러서 고통스럽기마저 했다. 그런 금의위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문연이 입을 열었다. “대명제국의 성왕 전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에 성왕 주태겸이 불쾌하다는 듯이 말했다. “감히 본왕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그런 그의 말을 자르고서 문연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성왕 전하.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저희 천마신교의 교인들을 교의 하늘이신 교주님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강경한 문연의 말에 마교인들이 동의하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그의 말에 황실 행렬단의 병사들이나 금의위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대명제국의 신하들로서 한 번도 겪어 본적이 없는 태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희 천마신교는 정식으로 대명제국과 상호불가침 조약을 맺은 동등하면서 서로 무관한 관계입니다.” 문연의 말에 성왕 주태겸의 인상이 굳어졌다. 설마 이 상황에서 상호불가침 조약을 거론할 줄은 몰랐다. “대명제국의 태조께서 건국하실 때, 본교의 도움을 받으셨고 관과 무림이 불가침조약을 맺기로 하였는데 어찌하여 저희에게 무릎을 꿇기를 권하십니까?” 본질을 정확하게 짚는 문연이었다. 문연은 전대 태상교주부터 모셔왔던 오랜 종가답게 과거의 조약들을 상세히 알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무림은 황실이나 관과는 완전 별개의 존재였다. 정파 무림인들 중에는 관직으로 나가는 자들도 있어서 우호적인 관계로 황실을 대우할지 모르나 마교는 아니었다. 오직 불과 마신, 그리고 이를 이어주는 교주만을 모실 뿐이다. ‘후우.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 이를 들은 남진무사 연남군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상호불가침 조약을 맺은 마교 측에서 성왕에게 무릎을 꿇을 리도 없었고, 역모로 협박을 한다고 해도 쉽게 따를 리가 없었다. ‘더는 저들을 불쾌하게 하기보다 이쯤에서 멈추는 게 좋을 련만.’ 육영의 간언한대로 해봐야 마교인들의 심기만 건들 뿐이었다. 아무리 마교인들이 불만스러운 성왕 주태겸이라도 이쯤에서 멈추리라 여겼다. 그런데 그 예상은 벗어났다. “감히! 하찮은 신민 주제에 대명제국의 본왕에게 훈계를 하는 것이더냐! 금의위는 들어라! 당장 이 무례한 자를 본왕의 앞에 무릎을 꿇려라!” 뜻밖의 성왕의 명령에 남진무사 연남군을 비롯한 옆에 서있던 훤칠한 부관마저 당혹스러운 눈빛이 되었다. “잠...” “명을 받듭니다!” -챙!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금의위들 중에 세 사람이 검을 뽑아서 삼 장로 문연을 향해 달려들었다. “허허. 악수를 두시는 구려.” 그러나 화경의 고수인 문연이 고작 일류 고수에 불과한 금의위들에게 제압될 리가 만무했다. -채채채챙! 문연은 가볍게 맨손으로 강기를 일으켜 그들이 휘두르는 검을 부숴버렸다. “헉! 거, 검이?” -팍! “크윽!” 그때 종주들 중에 일부가 나서, 세 사람의 금의위들을 단숨에 제압하고 말았다. 문연을 제압해서 무릎을 꿇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금의위들이 제압되는 사태가 벌어져 버렸다. “성왕 전하를 보호하랏!” “반역이닷!” -타타타타타탁! 금의위들이 일제히 병장기를 빼들고서 일사불란하게 마차 주위로 들고 있던 철방패를 바닥에 내리꽂으며 경계 진을 만들어냈다. 갑자기 사태가 악화된 것에 당혹스러워하는 남진무사 연남군과 다르게 오히려 이런 사태를 바라기라도 했다는 듯이 성왕 주태겸의 입 꼬리가 올라가고 있었다. ‘흐흐흐, 제 놈들이 이런 판을 만들어주었구나.’ 그런 그의 귓가로 누군가의 전음이 들려왔다. [육영!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게야!] 놀랍게도 스스로를 성왕이라 밝혔던 이 후덕한 자의 정체는 육영이었다. 육영은 자신에게 전음을 보낸 자를 바라보며 공손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의 뜻을 받들어서 건방진 마교의 무리들을 바로잡기 위함입니다.] [이런 식으로 하라고 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 당혹스러워하는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남진무사 연남군의 옆에 서있는 부관이었다. 그가 진정한 성왕 주태겸이었다. '적당히 황실의 위엄만 보이면 된다고 하더니....육영 이 자가!' 마교인들을 자극할 수도 있기에 금의위로 변장하고 육영을 대리로 앞세웠는데, 마지막에 와서 그가 하지도 않은 말을 꺼내서 사태를 악화시켜 버렸다. 연남군의 표정을 보면 이런 명령을 내린 것이 그라고 생각하는지 난처해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보, 본왕이 아니다!] 성왕 주태겸이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지만 이미 늦었다. 이미 금의위들을 비롯해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서 전투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육영은 이 사태를 흡족해했다. ‘이것으로 마교는 황실과 척을 지겠구나. 크크큭. 굳이 제 삼계를 벌일 필요도 없이 이 육영의 손에 모든 것이 이루어...’ 바로 그때였다. 흡족해하는 육영의 앞으로 갑자기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는 바로 천여운이었다. ‘어, 어떻게 금의위들을 뚫고서?’ 놀랄 틈이 없었다. “큭!” -팟!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니었지만 비추공을 팔성까지 익혀, 무위가 완숙한 절정에 이른 육영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앞에 나타난 천여운을 향해 일수를 날렸다. 그러나, -?! “끄아아아악!” 육영이 지른 일수가 순식간에 잘려나가고 말았다. 손목 채로 잘려나간 고통으로 육영이 비명을 지르면서 당혹스러운 마음에 아무렇게나 지껄였다. “보, 본 왕을 치려하다니 진정 역모...” “헛소리 지껄이지 마라.” “네, 네놈이?” -?!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천여운이 맨손으로 도기를 일으켜 그의 반대쪽 왼팔을 어깨채로 그대로 베어버렸다. “끄아아아아아악!” 오른손과 왼팔이 잘려나간 육영이 육중한 몸으로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잘린 단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가 분수처럼 바닥을 적셨다. -탁! 바닥을 뒹구르는 육영의 육중한 몸을 천여운이 너무도 가볍게 한 손으로 들어올렸다. 금의위들조차 그 괴력에 놀라서 두 눈이 커졌다. “지, 지금 뭘 하려고?” “이런 짓.” -휙! “으아아아아악!” 천여운이 들어 올린 육영을 물건을 던지듯이 마교인들이 있는 곳을 향해 던져버렸다. -쿠당탕! “끄헉!” 금의위 이백 명이 만들어낸 경계진에서 일순간에 마교 고수들이 있는 한복판에 떨어지고 만 육영은 고통도 잊고서 당혹스러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가, 감히!” “이 자를 잡아랏!” 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이를 막지 못한 금의위들이 당장에 천여운을 향해 검을 휘두르려고 했으나 소용없었다. -슉! 천여운의 신형이 잔상을 일으키듯이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황실의 무공을 익힌 금의위들이 이 수법을 모를 리가 없었다. “사, 사라졌어! 설마 이건?” “이형환위!” 그들이 사라진 천여운을 찾으려고 했는데, 어느새 그는 금의위들이 원진으로 철통처럼 둘러싸고 있는 성왕 주태겸과 남진무사의 앞으로 나타났다. 누구 하나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을 만큼 너무 빨라서 귀신을 보는 듯 했다. “어, 어떻게 원진을 뚫고서?” “막아랏!” 금의위들이 놀라서 천여운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슉! 슉! 슉! 천여운의 주변으로 잔상을 일으키며 세 사람이 나타나, 금의위들을 가로막았다. 그들은 대호법 마라겸을 비롯한 좌호법 이화명, 우호법 섭맹이었다. 금의위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무공의 경지에 오른 세 호법들에게 경계 진을 뚫는 것은 물을 마시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촤악! 좌호법 이화명이 바닥에 타오를 듯한 붉은 검신의 보검으로 선을 그으며 경고했다. “이 선을 넘으면 한쪽 팔 정도는 각오해라.” “클클, 이하동문이다.” -촤악! 마찬가지로 섭맹이 바닥에 광무도의 도기로 선을 만들며 말했다. 두 화경의 고수가 내뿜는 강렬한 살기에 용맹한 금의위들이라고 해도 두려움을 느꼈는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어느새 곳곳에 나타난 마교의 종주들이 병장기를 뽑고서 투기를 풀풀 풍기면서, 진 밖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 이게 무림인, 아니 마교란 말인가?’ 부관의 갑주를 걸치고 있는 성왕 주태겸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 또한 무공을 익혔는데다가 일류 고수들로 이루어진 경계진이라면 누구도 뚫지 못할 거라 여겼다. 그런데 이들은 너무도 쉽게 이 방어망을 통과했다. 심지어 무공을 전혀 익힌 것 같지 않은 천여운은 상상을 초월하는 괴물이었다. 주위에 정적이 감돌자 천여운이 성왕 주태겸을 향해 가볍게 포권을 취하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성왕 전하를 뵙습니다. 부관의 갑주가 잘 어울리시는군요.” ‘!?’ 천여운의 입에서 나온 그 말에 성왕 주태겸의 두 눈동자가 흔들렸다. 놀랍게도 천여운은 숨겨진 그의 진정한 정체를 알고 있었다. ‘이, 이럴 수가! 본 왕을 알아차리다니?' < 63장 황명(皇命) (2) > 끝 < 63장 황명(皇命) (3) > 성왕 주태겸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대리를 앞세워 정체를 숨겼는데, 이 젊고 괴물 같은 마교 교주는 자신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데도 장단에 맞춰줬다는 이야기인가? 그가 놀라서 아무 말도 못할 무렵, 남진무사 연남군이 다소 긴장한 얼굴로 성왕을 보호하면서 항의조로 말했다. "아무리 관과 무림이 불가침조약이라고 하나 감히 황실의 관료를 해하고 전하를 위협해도 될 것 같소?" 아까보다는 말투는 다소 조심스러워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마교인들의 심기가 거슬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우호법 섭맹이 가당치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클클, 남진무사 나으리. 당초에 시작은 우리가 아니라 그대들 쪽에서 하지 않았소?" "그, 그건...." 섭맹의 말대로 애초에 도발을 한 것은 성왕의 대리였다. 마교에서는 성 밖에 수뇌부들이 직접 나와서 환영 준비까지 하며 황실에 대한 최대한의 예우를 해주었다. 그런데 그들에게 강압적으로 무릎을 꿇기를 종용했다. '저 자의 말이 맞지만 이들의 무력에 굴복한다면 불가침 조약을 떠나서 황실의 권위가 무너진다.' 남진무사가 곁눈질로 금의위들과 병사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마교의 고수들 때문에 연신 긴장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건 아니다.' 이곳이 아무리 무림이면서 마교라고 해도 황실은 엄연히 황실이었다. 중원을 다스리는 대명제국 황제의 핏줄인 성왕의 권위는 손상되어서는 안 된다. 금의위로서 그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흠흠, 그것은 전하께서 한 것이 아니라 저 육영이라는 관료가 멋대로 저지른 것이오. 그리고 설사 그것이 그대들의 심기를 불편했다고 해서 대명제국의 관리를 함부로 해할 수 있는 명분이 될 것 같소?" 남진무사 연남군의 말에 천여운이 도리어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그의 뒤에 있는 성왕 주태겸에게 물었다. “성왕 전하께 묻지요. 저희 신교에서는 본 교주를 사칭하게 된다면 즉각 처분이 가능한데, 황실에서는 왕을 사칭하는 자를 어찌 처분하는지 궁금하군요." '!?' 성왕 주태겸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남진무사 연남군이 한 말을 천여운이 보기 좋게 쳐냈기 때문이었다. 굳이 마교가 아니더라도 황실에서도 황제와 그 일가인 황족을 사칭하는 자들은 사족을 멸할 만큼 엄벌을 내렸다. "이것만 말씀드리지요. 불가침 조약이 없었다면 저자의 명 줄은 없었을 겁니다." 교주의 위에 오른 천여운은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지 않는다. 그것이 대명제국의 황제라고 하여도 말이다. '이 자는 그저 무위만 뛰어난 것이 아니구나.' 처음에는 그저 괴물 같은 무위에 놀랍고 당혹스럽기만 했는데, 명분을 제시하여 오히려 남진무사의 말문을 막히게 만든 것을 보니 영리하기마저 했다. 상대가 명분마저 취하자 남진무사 연남군은 결국 원초적인 이유로 돌아갔다. "큭, 좋소. 어찌 되었든 그대들의 이런 행동은 황실에 무례를 범하는 것이오. 당장 성왕 전하의 곁에서 물러나시오!" 그 말과 함께 연남군이 천여운에게 검 끝을 겨냥했다. 바로 그 순간 누군가가 엄청나게 쾌속한 몸놀림으로 순식간에 연남군의 앞으로 파고들더니, 그의 검을 쳐냈다. -챙! "크윽!" 바짝 긴장해서 팔성 이상의 공력을 운기한 연남군이었지만 상대는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심후한 공력을 지니고 있었다. '무슨 공력이 이리 강하단 말인가?' 내심 중원에 오대고수가 아니라면 어떠한 고수라도 상대할 수 있을 거라 자신했던 남진무사였다. 실제로 화산파의 장로와 겨뤄서 무승부를 이루기도 했었다. '이 가면의 남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천여운을 향해 검을 겨냥하자마자 그를 공격해온 자는 다름 아닌 대호법 마라겸이었다. 연남군은 오른팔이 위로 튕겨나가자 왼쪽 발을 들어 올려서 마라겸의 왼쪽 목을 향해 차올렸다. -슉! 그러나 마라겸은 가볍게 고개를 뒤로 움직이는 것만으로 피해냈다. 오히려 그의 발차기에 검결지로 허벅지 요결을 찔렀다. -푸슉! 푸슉! "크헉!" 마라겸의 검결지에 찔린 남진무사 연남군의 허벅지에 검기가 관통했다. 연남군이 고통의 신음을 내뱉으며 다리를 접으며 균형을 잡으려고 했지만 마라겸이 그의 몸을 지탱하고 있던 오른발을 발로 걷어찼다. -팍! 쿠당탕! 덕분에 연남군이 꼴사납게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바닥에 넘어지면서 연남군이 들고 있던 검을 떨어뜨렸는데, -슉! 마라겸이 손을 뻗자 바닥에 떨어지려 하던 연남군의 검이 허공으로 떠올라, 그의 손으로 빨려 들어왔다. 허공섭물의 수법이었다. -착! "헛?" 마라겸이 빼앗은 검 끝으로 연남군의 목을 겨냥하며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교주님께 함부로 검을 겨냥하지 마라." "큭!" 연남군은 자신의 목에 느껴지는 차갑고 날카로운 검 끝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화경의 경지에 오른 후로 차있던 자신감이 일순간에 부서졌다. 이 가면의 남자는 자신이 발끝도 쫒아갈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무위를 지닌 고수였다. '남진무사를 제압하다니?' 금의위에서도 북진무사와 더불어 최고의 무장이었다. 자신을 보호해줄 유일할 활로인 남진무사가 제압당하자 성왕 주태겸은 난처했다. 주위의 원진을 만들고 있는 금의위들은 천여운의 양옆에 서있는 호법들의 기세에 전의가 죽어서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이러다가 이들은 본 왕마저도 위협하겠구나.' 여기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의 세치 혀뿐이라는 것이다. 어차피 무위로는 마교인들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성왕 주태겸이 입을 열었다. "무엄하다! 이렇게 본 왕의 호위인 남진무사를 제압하고 금의위들을 위협하다니, 정녕 대명제국의 수백만 대군이 두렵지 않은가 보구나." 주태겸의 선택은 지극히 간단했다. 황실에서 유복하게 자라온 그에게 불가침 조약이라고 해서 황가의 존재가 아닌 누군가에게 굴복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꽤 용기가 있으시군요." 천여운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이 정도 보여줬으면 어느 정도 자존심을 굽힐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주태겸은 아무리 무공이 뛰어난 무인이라고 해도 빗발치는 수백만의 화살을 감당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의 말처럼 실제로 정면으로 그리 대치한다면 절대고수라고 해도 감당키 어려울 것이다. "본왕에게 조금이라도 해를 가한다면 마교는 사라지는 것이다!" 주태겸이 더욱 강하게 나왔다. 자신이 가진 큰 패를 활용해야만 적들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마교라고 해도 황실의 수백만 대군이 두렵지 않을 수는 없으리라. 그렇게 여겼다. 그런데 이상했다. '뭐지? 어째서 저런 눈빛을 하는 거지?' 수백만 대군을 거론했음에도 불구하고 천여운이나 마교인들의 표정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오히려 천여운은 실망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젓고 있었다. "용기가 과하면 만용이라고 하지요. 나름 처음 뵙게 되는 관(官)의 분이라 신경을 썼었는데 실망스럽군요." "뭣?" "수백만 대군이라....." 그 말과 함께 천여운이 가볍게 왼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그들을 원으로 둘러싸고 있던 금의위들에게 이변이 일어났다. -우우웅! "어엇? 이, 이게 대체 무슨?" "거, 검이 제멋대로?" 병장기를 꼭 쥐고서 긴장하고 있던 그들이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이 쥐고 있던 병장기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들의 손에서 빠져나가려고 했다. "이이익!" 금의위들이 공력을 끌어올려서 버티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일류고수들에 불과한 그들이 감당하기에는 바위 앞에 계란도 아니고 티끌이나 마찬가지였다. -휘리릭! 촤촤촤촤촤촥! "허억!" 이백 명에 이르는 그들의 손에서 검이 빠져나왔다. 심지어 그 검들이 일제히 회전을 하더니, 원래의 주인들인 금의위들을 겨냥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히익!" "마, 말도 안 돼!" 넘어진 상태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남진무사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자신의 눈이 잘못 되었는지 착각마저 들었다. '이, 이기어검? 이게 이기어검이라고? 정녕 마교 교주는 인간이 아니란 말인가!' 무공을 익혔으니 상위 경지에 오른 자가 행할 수 있는 수법을 모를 리가 없다. 현경의 경지에 오른 오대고수들은 손에서 검을 놓고 자유롭게 다룰 수 있다고 들었었다. 그런데 이건 상상을 초월했다. '이럴 수가.....' 놀란 것은 금의위들이나 황실 사람들뿐만이 아니었다. 허공답보를 펼치는 천여운을 보면서 그가 현경의 경지에 올랐을 거라 짐작했던 대호법 마라겸을 비롯한 마교의 수뇌부들 조차 놀라했다. '못 본 그 짧은 새에 어찌 이렇게.....' 대전에서 천여운의 무위를 보았었던 그들이다. 저 수많은 검들을 기로써 부리는 천여운을 보니 전율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오오오! 천마이시여!" "진정 현세에 천마님께서 강림하셨도다!" 천여운의 괴물 같은 무위는 천마의 강림을 떠올리게 했다. 마교의 역사상 두 번째 천마라 할 만한 절대적인 무위를 보이고 있었다. -저벅! 금의위들이 자신들의 검에 위협받고 있는 와중에 천여운이 이를 그대로 유지한 상태로 천천히 성왕 주태겸을 향해 걸어왔다. "히익!" -타탁! 쿵! 천여운의 경악스러운 능력에 두려움을 느낀 주태겸이 놀라서 뒷걸음을 치다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황실의 권위도 체통도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두렵고 공포스러울 뿐이었다. 천여운이 가볍게 오른손을 들어 올리는 시늉을 하자, 넘어졌던 주태겸의 헤아리기 힘든 엄청난 공력에 의해서 일으켜졌다. -우우우우웅! "헉! 모, 몸이?" 무공을 익힌 주태겸은 본능적으로 몸에 힘을 뺐다. 괜히 공력을 운기하여 이 힘에 반항을 하면 내상을 입는다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몸이 일으켜 세워지자 천여운의 그의 두보 앞까지 걸어와서 말했다. "상호 불가침 조약이 어떻게 생긴 것 같습니까?" "그, 그건?" "저희 천마신교에서 황실의 수백만 대군이 두려워서 생긴 것 같습니까?" 이 질문에 주태겸은 답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그렇다고 생각했다. 황실의 사람들은 무림과 관이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은 것이 그저 국력을 낭비하지 않고, 대명제국을 세웠을 당시에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라 여겼다. "그 반대입니다." "반대?" "황상께서 저희가 두렵기 때문에 불가침 조약을 맺은 겁니다." "가, 감히! 대명제국의 태조께서 무림인들이 두려....흐헉!" 두렵기는 하지만 태조를 모욕했다는 생각에 반박하려 했던 주태겸이 말을 마칠 수가 없었다. 그의 몸이 허공으로 더욱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공중으로 삼 장(丈) 가까이 떠오르자 심장이 덜컥 떨어지는 줄 알았다. "대군은 황상의 명령에 의해서 움직이겠죠. 그런데 그 황상이 없어진다면 어떻겠습니까?" "!?" 주태겸의 두 눈이 커졌다. 지금 이 마교 교주는 황상을 죽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불경하다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계속해서 몸이 천천히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한밤중에 저와 같은 고수들이 몰래 황궁으로 들어온다면 알 수 있겠습니까?" 의미심장한 천여운의 말에 그의 두 눈이 흔들렸다. 생각해보면 천여운이나 저 마교의 고수들은 너무도 쉽게 금의위들의 원진을 뚫고 들어왔다. "황상, 태자 전하, 성왕 전하와 같은 황족 분들이 없는 하늘 아래 대명제국의 백만대군은 누구의 명을 들을까요?" -오싹! 주태겸은 살면서 처음으로 공포 그 이상을 느꼈다. 이 자의 가라앉은 차가운 목소리나 담담한 눈빛을 보면 절대로 허언이 아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그리 행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었다. '이, 이 자는 진심이다.' 그것이 너무도 무서웠다. "이제 불가침 조약이 왜 생겼는지 아시겠습니까?" 두려움에 온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 성왕 주태겸을 바라보며 천여운이 방금 전까지 흘리던 위협적인 기운을 거둬들이고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이에 성왕 주태겸이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슈우우우! 허공으로 떠올라 있던 주태겸의 몸이 천천히 땅으로 내려왔다. 땅을 밟은 주태겸이 다리가 후들거리는지 몸을 비틀거리며 겨우 균형을 잡았다. "헉....헉..." 거칠어진 호흡. 그리고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그의 얼굴이 얼마나 두려움을 느꼈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뭐....꼭 그 이유만은 아니지만.' 사실 정말로 그 이유만이라면 황실은 이미 전복되어도 한참 전에 망했을 것이다. 황실의 안에 숨겨진 힘이 있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숨겨진 힘이 황제를 지키고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암살을 하려면 정말로 천여운과 같은 절대자가 아니고는 애초에 시도도 불가능하다 들었다. 하지만 굳이 성왕 주태겸이나 금의위들이 모르는 것을 거론 할 필요는 없었다. -타타타탁! 챙그랑! 챙그랑! "아!" "거, 검이?" 천여운이 왼손을 내리자 금의위들을 위협하던 이기어검이 해지되었다. 이백 자루에 병장기들이 일제히 바닥에 우수수 떨어졌다. 이 날 이곳에 있던 금의위와 병사들은 처음으로 절대고수가 어떤 존재인지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럼 전하께서 손수 가져오신 황명이 무엇인지 읽어봐야겠군요." 천여운이 마차 앞에 떨어진 쟁반을 향해 손을 뻗자, 두루마리가 빠르게 날아와 천여운의 손으로 빨려 들어왔다. 너무 많은 것을 보았기에 금의위들조차 이런 것은 놀랍지도 않았다. 천여운이 두루마리에 둘러진 금줄을 풀고서 이것을 펼치려고 하는 찰나였다. "끄아아아악!" 그때 어디선가 비명이 들려왔다. 천여운이 그곳을 바라보자 북문 앞의 종주들이 있는 곳에 육영이라는 관료가 눈과 코, 입에서 피를 흘리면서 고통스러워 하고 있었다. 주변에 있는 종주들 또한 영문을 몰라 당혹스러워했다. '이게 대체?' 천여운이 두루마리를 쥐고서 육영이 있는 곳으로 다급히 신형을 날렸다. < 63장 황명(皇命) (3) > 끝 < 63장 황명(皇命) (4) > 육중한 살집에 찢어진 눈매의 관료가 고통스러워하면서 두려워 하는 눈빛으로 주위에 있는 마교 고수들을 바라보았다. "끄으으윽!" 이 자는 성왕 주태겸을 연기한 황실의 관료인 육영이다. 그를 이곳에 던졌다는 것은 필시 제압해놓고 있으라는 교주님의 의도이리라. "이, 이놈들. 나는 황실의 관료다! 다가오지마라." "황실 관료? 하! 웃기는군." "으으으." 육영이 발로 땅바닥을 밀어내며 뒤로 움직여보았지만 사방이 마교인들이었다. 분위기가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고오오오! 사방에서 살기가 요동을 쳤다. 건방진 입으로 교주를 비롯한 마교인들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종용을 했으니 당연히 그 화를 감당해내야만 했다. '빌어먹을 이러다가 정말 죽겠구나.' 불과 반의 반각 전 만 하더라도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되었다고 여겼다. 괜한 욕심에 기존의 계획된 것 이상으로 획책했던 것이 오산이었다. "종주들은 잠깐 멈추시오." 그때 살기를 물씬 풍기는 마교인들 중 한 사람이 냉정한 눈빛으로 걸어 나왔다. 환검종의 종주인 묵연이었다. "당장에라도 찢어죽이고 싶지만 일단은 살려두마." 묵연은 겉에 두르고 있던 장포를 찢어 천으로 잘린 팔을 지혈시킨 후에 내공을 쓰지 못하게 혈도제압술을 펼쳤다. -타타타탁! 원래라면 자살을 해야 하건만 심지가 약한 육영은 혈도제압술을 당하면서도 차마 혀를 깨물거나 내공을 폭주시키지 못했다. 죽어서 저승에 가는 것보다 개똥밭이라도 이승이 나았다. 그런데 여기서 예상 외의 일이 벌어졌다. '엇?' 혈도제압술로 내공이 제압되어 천여운의 놀라운 신위를 바라보던 육영은 점차 온몸이 차갑게 식어가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춥다는 생각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아 오장육부를 난자하는 것만 같은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아아악!" 놀란 종주들이 그를 살폈는데, 귓구멍을 제외한 얼굴의 모든 구멍에서 검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치이이익! 핏방울이 바닥에 떨어지자 매캐한 연기가 흘러나왔다. "도, 독?" "물러서시오!" 독에 중독되었다고 판단되자 종주들이 일제히 그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마교의 고수들이 물러나는 모습에서 육영은 자신이 독에 중독되었음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독이라니? 육영 저 자가 어째서? 설마 마교에서?' 이것을 본 남진무사 연남군이 순간 마교를 의심했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마교주는 언제든지 금의위들과 황실 특사로 온 병사들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손수 보여주었다. 굳이 독을 써가면서 죽일 리가 없었다. '헉...헉.....내, 내가 언제 독에?' 대업의 제 삼 계를 위해 성왕에게 보내지기 직전에 고를 심기는 했지만 쓸데없는 정보를 발설하려 할 때 발동하는 거라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내공이 금제되자마자 몸속에 독이 발동했다. '끄으으으, 고는 전신의 혈관을 터뜨려서 죽이는데.' 확실히 고는 아니었다. 다른 독에 중독된 것이 틀림없었다. -털썩! 부들부들! 오장육부를 비롯한 전신에 독이 완전히 퍼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점점 의식이 사라져가는 와중에 육영의 머릿속에 누군가가 스쳐지나갔다. '도혈문주?' 생각해보니 황실에서 출발하기 이틀 전에 도혈문주(刀血門主)를 만났다. 상위 여섯 문주들 중에서 도염문주와 더불어 가장 위험하다고 불리는 최악의 사내였다. 내심 그가 두려웠지만 식사도 대접해주고 전표도 넉넉히 챙겨줘서 기분 좋은 만남이었다고 여겼었다. '식사? 설마 그때?' "끄웨에에엑!" 속에서 크게 피를 게워낸 육영이 바닥에서 몸을 꿈틀 거렸다. 이제는 그의 몸에서 독기마저 증기처럼 뭉실거리며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때 천여운이 급히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위, 위험합니다! 교주님!" "그 자의 몸에서 독기가 흘러나옵니다!" 주변에 거리를 벌리고 있던 종주들이 만류했지만 천여운의 손이 이미 육영에게 뻗고 있었다. -치이이익! "아!" 육영의 몸에서 여전히 독기가 흘러나왔지만 현경의 극에 오르면서 만독불침의 경지에마저 오른 천여운에게 통할 리가 만무했다. 뿌옇게 흘러나오던 독기는 그에게 닿는 순간 정화되듯이 사라져버렸다. '독이 통하지 않는다!' '아아! 교주님께서 정녕 무의 끝을 보셨구나.' 이를 지켜보는 종주들이 내심 탄성을 흘리며 대단해했다. 그런 그들의 반응을 개의치 않고 천여운은 육영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등에 손을 대고 감각에 집중했다. -쿵!.......쿵!.......쿵! 심장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점점 느려지고 있는 것이 숨이 끊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칫." 그를 죽게 내버려둘 순 없었다. 전음 도청을 통해서 그가 성왕 주태겸의 명령을 어기고, 황실과 본교를 부딪치게 만들려 했다. 그것을 들은 천여운은 육영이 다른 어떤 세력의 간첩이라 여겼었다. -파파팍! 천여운의 그의 주요 혈자리로 공력을 흘려보내 독을 몰아내 보려 했다. "끄윽!" 그러나 이미 전신으로 퍼져나간 독으로 인해 밑 빠진 독에 불과했다. 공력을 불어넣어도 회생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대체 왜 이러는 것이지?" 천여운의 물음에 영문을 몰라서 당혹스러워 하던 환검종의 종주 묵연이 말했다. "지, 지혈을 한 후에 내공을 운기할 수 없도록 혈도제압술을 펼쳤습니다." "혈도제압술?" 천여운의 인상이 굳어졌다. 그렇다면 내공이 체내로 순환하지 않는 순간 독이 퍼져나갔다는 말이었다. 철두철미하게 정보가 누설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과하구나.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어차피 살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운기 경로나 체내를 살펴서 그가 어디서 보내진 존재인지 알아내야 했다. 천여운이 그의 명문혈로 내공을 불어 넣어 운기 경로를 살폈다. '이건 비추공?' 비추공(肥抽功). 그것은 정파의 소림사에서 기원한 무공이다. 단순히 살을 찌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빠르게 내공을 쌓을 수 있는 기공의 일종이었다. 워낙 잘 알려진 무공이었지만 외형이 보기 좋지 않고, 몸이 둔해지는 등 단점이 많아서 일반적으로 잘 익히지 않는 무공이었다. '정파의 첩자란 말인가?' 무공의 기원만 보면 정파의 사람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어째서 황실과 마교를 부딪치게 만든단 말인가. '이상하다. 설마....'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천여운이 나노에게 명했다. '나노, MRI 스캔.' [알겠습니다. 지정한 대상의 몸에 자기공명영상(magnetic resonance imaging)법으로 스캔하겠습니다.] 나노의 목소리와 함께 천여운의 손바닥에서 희미한 붉은 빛이 선을 그리며 손가락 끝에서 손바닥까지 내려왔다. -츠츠츠츠! 천여운의 동공이 흔들리며 증강현실이 개안되었다. 개안된 증강현실에 자기공명영상(MRI)로 스캔한 영상이 출력되었다. '우선 머리부터.' 천여운이 이제는 거의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는 육영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만졌다. 그 순간 천여운의 시야의 스캔된 영상에 무언가가 잡혔다. '이건?' 영상 속에는 머릿속에 작은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그 움직임이 차츰차츰 느려지는 것을 보면 숙주와 마찬가지로 죽어가는 듯 했다. '고다. 고가 틀림없어.' 이것은 극도육무문의 도검문주 이백이란 자가 가지고 있던 고와 비슷한 형태였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고가 죽어가는 것뿐이었다. -스륵! 육영의 고개가 옆으로 힘없이 돌아갔다. 독이 전신을 잠식하면서 힘겹게 버티던 육영이 결국 숨을 거둔 것이다. 이때 놀라운 현상이 벌어졌다. 육영이 숨을 거두는 순간에 머릿속에 있는 고로 보이는 흰색 형태의 무언가가 작게 터지면서 액체처럼 변해서 뇌로 스며 들었다. -주르륵! 육영의 귀가 코에서 검은 피와는 다른 누런 끈적거리는 액체가 흘러내렸다. 죽어서 터진 고가 흘러나온 것이다. 같은 시각. 절강성 항주에 있는 황산에 숨겨진 어두운 석실. -키엑키엑! 석실에 시끄럽게 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등불 하나만 비추고 있는 석실 안의 탁자위에 올려진 붉은 목함 안에 주먹만한 붉은 고(蠱)가 기괴한 소리를 내면서 울고 있었다. 이를 그림자에 얼굴이 가려진 정체불명의 사내가 바라보고 있었다. -푸직! 한참을 울면서 파르르 떨던 고가 갑자기 터지더니 녹아내렸다. 사내가 죽은 고가 들어있던 붉은 함의 뚜껑을 닫으며 중얼거렸다. "역시 이번에도 마교인가." 붉은 함의 뚜껑 위에는 제 삼계 마교 첩(諜)이라 적혀 있었다. 이번에는 굳이 사내가 직접 고를 없앨 필요도 없었다. 간자의 몸에 조금이라도 이상 징후가 보이면 독이 퍼져나가 죽도록 조치를 취해놨으니 말이다. "본문에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 것 같으나. 네놈들이 어떤 짓을 한들 아무 것도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최근 들어서 두 번째 대계가 허무하게 깨져버렸다. 그것이 제대로 이어졌다면 마교는 그들의 수중에 쉽게 들어 왔을 지도 모른다. 오히려 오랜 시간 공들여서 대기하고 있던 간자들마저 잃었다. 이번에는 고의 흔적마저도 남기지 않도록 신경을 썼으니 마교에서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배후를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체모를 사내가 전혀 염두 못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나노였다. MRI 스캔을 통해서 고가 터지기도 전에 체내에 있다는 것을 알아낸 천여운이었다. 이를 통해 천여운은 육영의 정체를 눈치 챘다. '극도육무문!' 황실과 그들을 부딪치게 만들려고 했던 이 자의 정체는 극도육무문의 간자였다. '이번에도 극도육무문이라....' 황실에마저도 손길이 닿아있을 만큼 그들의 영향력이 대체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문득 이들이 연관되어 있는 황명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천여운이 두루마리를 펴보았다. -사르르륵! "헉!" "황명이다! 엎드려라!" -우르르르! 말려있는 두루마리를 열리자 금의위들이 일제히 바닥에 엎드려서 머리를 조아렸다. 눈치를 보고 있던 이천 명에 이르는 병사들도 얼른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황제의 명이 담긴 두루마리를 열었기 때문에 예를 갖준 것이다. 정작 황명을 받은 당사자인 천여운을 비롯한 마교인들은 당당하게 서있었다. '큭. 무례한 자들 같으니라고!' 허벅지를 다쳐서 절뚝거리며 엎드린 남진무사 연남군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천여운이 확실하게 그들의 기를 죽였기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흠." 한참을 두루마리를 읽어 내려가던 천여운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그것에는 특사로 온 성왕 주태겸의 태도와는 다르게 하나의 동등한 국가를 대하는 듯 한 정중한 체로 적혀 있었다. 실질적으로 황명이라기보다는 친서에 가까웠다. [.....책봉될 태자와 새로운 불가침 조약을 맺는 자리에 귀교의 영웅분들과 여러 귀빈들을 초청하려고 하오.] 두루마리에는 천여운을 초청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초청날은 다음 달 초닷새인 단오제(端午節) 날이었다. 그런데 이 내용을 살펴보면 초대되는 것은 마교 뿐만이 아닌 듯 했다. -슉! "헉?" 겨우 진정을 하고 있던 성왕 주태겸이 갑자기 나타난 천여운 때문에 놀라 했다. 귀신처럼 흐릿하게 나타나는 통에 심장이 덜컥 했다. "왜, 왜 그러시오?" 천여운이 두루마리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전하께서는 이 안에 담겨있는 내용을 알고 계십니까?" "자세히는 아니더라도 대충은 알고 있소." 황명이 담긴 두루마리는 황족이라고 해도 몰래 살펴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사로 왔기에 그것을 전달할 때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황제가 언급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새로운 불가침 조약을 위한 초청 내용이 담겨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천여운이 두루마리를 성왕에게 넘기며 물었다. "혹시 이 초청장이 누구에게 간 것인지 알 수 있습니까?" 그 질문에 성왕 주태겸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답변했다. 찰나에 고민했지만 어차피 후에 알게 될 일이라 굳이 숨길 필요는 없었다. "각 세력의 수장들에게 전달되었소." "삼대 세력?" 주태겸의 대답에 천여운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단오제 날에 초청장에 응한 삼대 세력의 수장들과 수뇌부들이 한 곳으로 모인다는 말이 아닌가. '그들을 한 자리에 모은다?' 뭔가 의미심장한 이야기였다. 이념이 다른 삼대 세력이 한 자리에 모인 경우는 무림사를 통틀어 다섯 손가락에 꼽을 만큼 적었다. 그렇게 모였을 때도 실질적으로 두 번을 제외하곤 대전쟁을 벌였을 때뿐이었다. '설마 극도육무문에서 삼대 세력들끼리 전쟁을 벌이게 만들려는 것인가.' 만약 그들이 획책한 것이라면 그것이 확률이 높았다. 그런데 이어지는 주태겸의 말에서 전혀 예상 밖의 내용이 튀어나왔다. "아니오. 혹시 교주께서 말한 삼대 세력이 귀교와 정파 무림맹, 사파 연맹을 말한 것이라면 한 곳이 더 있소." "한 곳?" "극도육무문이라는 신진 세력이오." 놀랍게도 초대되는 대상들 중에 극도육무문이 끼어있었다. < 63장 황명(皇命) (4) > 끝 < 64장 저를 도와주셔야겠습니다 (1) > 각 세력의 본단의 위치가 다르기에 황실의 특사가 도착한 시각은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그 시기가 보름을 넘기지는 않았다. 가장 빨리 도착한 곳은 위치적으로 제일 가까운 정파 무림맹의 본단이 있는 하남성의 낙양현이었다. 낙양현에 사신으로 간 자는 황제의 장자인 영왕 주태윤이었다. 차기 태자로 낙점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자로 그의 방문에 정파 무림맹의 본단은 벌써 사흘 째 잔치가 이어지고 있었다. 악공이 연주를 하면 아름다운 여인들이 나와서 무용을 추면서 영왕을 기쁘게 했다. 가장 상석에 영왕이 앉아 있었고 그 바로 옆 좌석에서 무림맹주 연부경이 직접 그를 보필하고 있었다. "전하, 신의 잔을 받으시지요." "하하하핫! 맹주께서 이리 대접해주시니 참으로 좋소이다." 무림을 삼분하는 단체의 수장이 직접 보필할 만큼 극진한 대접을 받으니, 영왕은 한참 기분이 들떠서 흡족한 상태였다. 각 지방의 만찬들로 가득한 탁자의 양 옆으로는 무림맹의 수뇌부들이자 각 파의 수장들인 십칠웅주들이 앉아 있었다. 물론 모든 웅주들이 참석한 것은 아니었다. 십칠웅주들 중의 한 사람이자 소림사의 현 방장인 무각 대사는 불문의 승려였기에 잔치에는 처음부터 참여하지 않았다. 잔치가 벌어지는 무림맹의 대전 건물 바깥에서 아름다운 외모의 한 여인과 화산파의 도복을 입은 인자한 인상의 도인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직 간자들을 확실하게 솎아내지 못했는데, 이렇게 나흘 째 잔치라니 괜찮을지 모르겠소. 제갈 군사." "풍 웅주님의 말씀도 일리가 있지만, 차기 황제 폐하가 되실 영왕께 잘 보여서 맹에 나쁠 건 없습니다. 물론 현 시국에서는 그렇지만요."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들은 무림맹의 제 이 군사인 제갈소희와 육웅주 풍청운이었다. 이들은 마교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로 무림맹에 수뇌부들 중에 숨어있는 간자를 찾기 위해서 몇 달째 애를 먹고 있었다. 단일 세력인 마교와 달리 수많은 문파, 방파들이 합쳐진 무림맹에서 모든 간자를 잡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군사라는 호칭을 지닌 그녀답게 여러 함정을 파서 많은 간자들을 붙잡았다. 간자들은 놀랍게도 무림맹의 주축인 구대문파의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간자들은 남아있었다. '이들은 대체 언제부터 무림에 침투했기에 이렇게 많은 간자를 심었단 말인가.' 이 점이 이해하기 힘들었다. 신생 문파라고 하기에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쩌면 극도육무문은 더욱 오래전부터 존재했을지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제갈 군사. 그런데 노부는 미심쩍소." "무엇이 말입니까?" "아무래도 이번 불가침 조약식에 극도육무문이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이 계속 드오." 풍청운의 말에 제갈소희가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것은 굳이 그들이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무림맹의 수뇌부들 역시도 짐작하는 부분이었다. 항상 삼대 세력이 대표로 행했던 관과 무림의 불가침 조약식에 신생 세력인 극도육무문이 껴있는데 의심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의도가 다분해 보이는 함정에 마교와 사파연맹이 걸려들겠소?" 정파 무림맹과 달리 두 세력은 늘 대리인만을 보내서 조약식을 진행하게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 사의 세력이 개입해서 수작을 부리는 것이 다분한데 더욱 참석할 리가 만무했다. "아니요. 아마도 걸려들 겁니다. 사파 연맹은 모르겠지만 현 마교라면 말이죠." "그게 무슨 소리요?" "전에 소교주, 아니 현 마교주를 기억하시죠?" "아아, 참으로 대단한 자였소." 처음에는 마교의 잠용이나 후기지수 정도로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그때 양측의 누구도 몰랐던 극도육무문의 함정을 눈치 채고 그들이 보낸 간자를 처리한 것이 천여운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고작 얼마 되지 않아 마교의 정권을 잡았다고 들었으니 대단하면서도 무서운 자였다. "저라면 저들이 파놓은 함정을 역으로 이용할 겁니다. 제가 떠올린 것을 현 마교주 천여운이 생각하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제갈 군사는 마교주가 직접 올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제가 보았던 그라면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을 테니까요." 제갈소희는 천여운이라는 자의 무위보다도 비상한 머리를 더 높게 쳤다. 이번에 어떤 함정이 도사릴지는 모르나 처음으로 극도육무문이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만약에 그들의 수장이 나타나는 자리라면 절호의 기회였다. 천여운이라면 분명히 이런 상황을 이용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나타날 거라 확신했다. 바로 그때였다. "그것참 듣던 중에 반가운 소리구려. 제갈 매." "아!" 제갈소희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중저음에 힘이 들어간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그녀의 뒤에 나타난 삼십대 초반에 백의에 훤칠한 외모를 지닌 사내가 서있었다. "연 가가!" 그는 다름 아닌 제갈소희의 약혼자이자 무림맹주의 장남인 연부소였다. 무림맹의 수뇌부들 중에 일곱웅주가 심혈을 다해서 키운 차기 정파의 미래라 불리는 남자였다. '허어....또 무공이 발전했군.' 연부소의 등장에 풍청운이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연부소가 가까이로 다가오는 동안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 했던 그였다. 못 본 사이에 화경의 고수인 그의 기감을 속일 정도라면 대체 어느 정도까지 발전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찌 보면 하늘은 참으로 공평하구나.' 연부소를 볼 때마다 과연 훗날에 누가 그의 상대가 되겠는가 생각했었다. 그런데 마교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그 생각이 바뀌었다. 하늘은 늘 호적수라는 존재를 내려준다고 말이다. "반갑다니 무슨 말씀인가요? 가가." "사신으로 갔던 제갈 매나 풍 웅주님과 모용 웅주님이 그렇게 칭찬하신 그 자를 볼 수 있는 기회이잖소." 연부소의 말에 제갈소희가 의아하게 보았다. 처음 천여운에 대해서 그녀가 거론했을 때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연부소였다. 그런데 지금 말을 들어보면 내심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그가 보고 싶으신가 보군요." "다음 세대를 같이 걸어가야 할 자이니 말이오."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는 그였지만 그 눈빛이 꽤 진지했다. 그것이 신경 쓰였지만 제갈 매는 훗날의 호적수에 대한 호승심이라 여겼다. "가가께서 급하게 마음먹지 않으셔도 단오제에 그를 볼 수 있을 겁니다." "후후, 기대하겠소." *** 성왕 주태겸의 황궁 특사가 마교를 방문한지 이레라는 시간이 흘렀다. 황궁 특사는 그 이레 동안 마교의 내성에서 지냈다. 천여운의 신위와 적대감을 가진 마교인들로 인해 잔뜩 겁을 먹은 성왕 주태겸은 황상에 대한 답서나 조약식에 대한 참석 여부를 빨리 묻고 철수하려 했다. 하지만 천여운이 생각할 시간도 필요하고 여독을 풀게 해주겠다고 권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마교에 입성했다. 두려운 이레가 될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마교에서 성왕 주태경에게 융숭한 대접을 해주었다. '대체 무슨 장단에 맞추라는 건지?' 처음에는 확 바뀐 듯한 태도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연일 이어지는 훌륭한 접대에 성왕은 첫날의 긴장감을 풀고서 지낼 수 있었다. 황궁 못지않은 융숭한 접대에 어쩌면 마교주가 이번 초청에 응할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감마저 들었다. '안 그래도 영왕 형님보다 입지가 좁았는데, 이번 일로 상황이 바뀔 수도 있겠구나.' 황실에서 처음 특사의 명을 받았을 때, 황제를 비롯해 귀족 관료들도 마교주의 참석에 대해서는 특별히 큰 기대를 가지지 않았다. 매번 정파 무림맹의 맹주만 참석하고 남은 두 세력은 대리인을 보냈기에 실상은 체면치레만 겨우 하는 조약식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마교주가 참석하게 된다면 황제의 권위가 살게 된다. '폐하께서는 외교도 일종의 능력이라고 했지.' 어쩌면 황상에게 인정받고 태자로서 입지를 세울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이번 단오제에 황자들 중에서 태자를 책봉한다고 했기에 둘째 황자이기도 한 성왕 주태겸으로서는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해야만 했다. 그때 누군가 객실 문을 두드렸다. -똑똑! "성왕 전하. 남진무사 연남군이옵니다." "들어오라." 늦은 밤, 성왕 주태겸의 객실로 남진무사 연남군이 들어왔다. 연남군이 들어와서 다시 한 번 예를 갖추자, 주태겸이 기분이 좋은지 호들갑스럽게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전음으로 말했다. [남진무사. 이번에 잘하면 신교의 교주가 조약식에 참석할 것 같지 않나?] "아....." 그의 질문에 잠시 주위를 의식하던 연남군이 진기를 끌어올렸다. 이에 성왕 주태겸이 의아해 하자 연남군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송구합니다. 객실에 진기로 막을 쳤습니다. 이제 편히 말씀 하셔도 됩니다. 전하." "과연! 남진무사 그대는 본왕의 의중을 잘 읽는구나." 연남군 덕분에 전음을 쓸 필요가 없어지자 성왕 주태겸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이 전혀 모르는 것이 있었다. 객당의 천장 위에 남진무사가 감지할 수 없는 고절한 무위의 누군가가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한편 마교의 내성의 의전(醫展). 그곳에는 마의 백종우를 비롯한 몇몇 선택받은 의원들이 누군가의 치료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침상 위에 창백한 얼굴로 누워있는 민둥머리의 중년인은 태상교주인 천유종이었다. 그런 천유종의 머리에 긴 침으로 침을 놓고 있는 노파가 있었으니, 바로 신의 감로수였다. '벌써 한 시진 가까이 쉬지 않고 침을 놓고 있다. 정말 대단하구나.' 백종우는 그녀의 솜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신의 감로수는 태상교주의 손상된 혼원맥을 치료하기 위해서 약물 치료와 침술을 겸하고 있었는데, 의원들로 하여금 놀라게 만들었다. '과연 중원 최고의 의원이라 할 만 하다.' 평생을 의술을 연마했기에 나름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녀의 의술은 기존의 기술을 몇 단계나 압도할 정도였다. 상체의 근육은 그저 관상용이 아닌 것이 한 시진이 지나도 흐트러짐이 없다. '허허허, 외공을 게을리 할게 아니구나.' 의원의 길을 걸은 후로 내공을 연마하기는 했지만 무공을 익히기를 소홀히 했던 백종우는 외공의 연마성을 느꼈다. 땀을 흘려가며 일 각 정도 더 침을 놓던 그녀가 손을 뗐다. "마의 공이라고 하셨소." "그렇소이다. 신의 공." "크흠." "아아, 감 파파." 교주인 천여운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명칭을 확고히 하는 감로수였다. 감로수가 그에게 금색 침통을 넘겨주며 말했다. "한 시진 후에 침을 빼야하는데 부탁해도 되겠소. 노부는 만신이 결려서 쉬어야 할 것 같소." "그리 하시지요. 나머지는 제가 맡겠습니다." 어차피 교주 일가의 주치의를 맡고 있는 마의가 해야할 일이었다. 신의 덕분에 좋은 공부가 되었기에 만족스러웠다. 태상교주가 있는 호화로운 침구실에서 나오자 밖에는 좌우 호법을 대동한 천여운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혼원맥에 손상이 꽤 오래되긴 했지만 위험한 고비는 넘겼습니다. 차후 경과를 지켜봐야겠지만 보름 내로 깨어나실 겁니다." "아!" 과연 신의다웠다. 나노의 MRI스캔과 의료 정보만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을 해 냈다. 사실 이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무공으로 인해 일어난 내상은 미래의 의학으로 알 수 없는 부분이 많았기에 나노가 가진 의료기록이 만사형통이 될 수는 없었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이랄 것이야 있겠습니까? 의원으로 본분을 다할 뿐이지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땀에 절어서 지쳐있는 모습에 천여운은 들어가서 쉬라고 권했다. 감로수가 숙소로 돌아간 후에 누군가가 급히 그를 찾았다. 칠 장로 환의였다. 천여운에게 가볍게 예를 갖춘 후에 환의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후후후, 교주님. 찾았습니다." 그 말에 천여운의 눈빛이 묘하게 반짝였다. 다음날이 되어 정오 무렵, 황궁 특사들이 떠날 준비를 전부 마쳤다. 북문에 오 열을 맞춰서 서있는 이천 명의 병사들과 이백 명의 금의위들은 출발 신호가 떨어지면 곧장 진군할 것이다. 북문의 바닥에는 붉은 비단길이 놓여 있었고, 마교의 수뇌부들과 종주들이 나와서 환송회를 하듯이 배웅을 나왔다. 교주인 천여운까지 나와서 성왕 주태겸의 앞에 서있었다. 물론 배웅만이 목적은 아니었다. -탁! 성왕 주태겸이 포권을 취하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덕분에 여독을 풀고 좋은 대접을 받았소. 돌아가서 황제 폐하께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고 보고 드리리다." "편하게 쉬었다니 다행이군요." 첫 만남이 일부 틀어지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성왕이었다 여기서 천여운이 확답이 담긴 답서마저 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천여운의 옆에 여시종이 천마신교의 교주의 인장이 찍혀 있는 두루마리를 쟁반에 받쳐서 들고 있었다. "천 교주께서는 숙고하셨소이까?" 주태겸이 기대감이 가득차서 천여운에게 물었다. 그가 이번 조약식에 참석만 해준다면 입지를 세울 좋은 명분을 가지게 된다. 역대 특사들 중에 누구도 마교주를 초청한 자가 없었으니 말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분위기는 매우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죄송한 말씀이지만 조약식에는 대리를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뭐, 뭐요?" 뜻밖의 결정에 주태겸의 얼굴이 일순간에 일그러졌다. 기대감이 컸던 만큼 그것이 부서지자 차마 실망감을 숨길 수가 없었다. '아.....잘 안 되었구나.'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남진무사 연남군을 비롯한 금의위들도 내심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극진한 대접을 받았기에 마교주의 심기가 누그러졌다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결국 성왕 주태겸과 황실 특사단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떠나야만 했다. 교주인 천여운을 비롯해 마교의 수뇌부들이 그가 마차에 탈 때까지 끝까지 배웅해줬으나 실망감에 가득 찬 그는 더 이상 그들을 보고 싶지 않았다. "전하 출발할까요?" 마차 밖에서 들리는 남진무사 연남군의 물음에 성왕 주태겸이 퉁명스럽게 답했다. "그리하라." "출발하라!" "충!!!" 남진무사의 호령이 떨어지자, 금의위들이 오 열을 맞춰서 마차 주변에 말을 몰았고, 이천 명의 병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성왕 주태겸은 짜증스러운 눈빛으로 천여운이 준 답서가 적힌 두루마리를 보았다. 황족의 체통도 잊은 채 주태겸이 두루마리를 발로 걷어차며 중얼거렸다. -팍! "빌어먹을 놈. 본 왕에게 괜한 기대감만 실어줘서는 이게 무슨 낭패란 말인가. 큭." 짜증이라도 풀고 싶었지만 이곳에 따라온 금의위들은 그가 망신을 당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그리 하기도 민망했다. 그저 작은 소리로 욕을 하는 것이 화풀이의 다였다. "망할 놈. 제깟 놈이 마교 교주면 다 인가. 황제 폐하가 초청을 했으면 당장에라도 굽신거리면서 와야 할 것이..." 바로 그때였다. -사뿐! "허억!" 한참을 마교 교주의 욕을 하던 성왕 주태겸이 화들짝 놀라서 그것을 멈춰야만 했다. 출발하고 나서도 한참 동안 아무 기척도 느끼지 못했던 그였다. 그런데 갑자기 마차의 천장에서 누군가 깃털과도 같은 몸놀림으로 내려왔다. "처, 천 교…흡!" 입을 열어서 그를 부르려고 했지만 심후한 진기로 인해 입이 다물어졌다. 주태겸은 믿을 수 없는지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 자를 보았다. 그는 바로 마교의 교주 천여운이었다. '방금 전까지 배웅하고 있던 자가 어떻게 마차에?'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것도 그의 욕을 하고 있을 때 나타난 통에 심장이 떨어질 것처럼 날뛰었다. -쿵! 쿵! 쿵! 쿵! 입만 열 수 있다면 살려달라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성왕 주태겸에게 천여운이 악마처럼 입 꼬리를 올리며 전음을 보냈다. [그 동안 제가 참으로 미우셨나 봅니다. 성왕 전하.] '히익!' 주태겸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미친 듯이 고개를 양옆으로 흔들었다. < 64장 저를 도와주셔야겠습니다 (1) > 끝 < 64장 도와주셔야겠습니다 (2) >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방금 전에 마교의 성 북문에서 배웅하던 천여운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 모습만 봐서는 한참은 마차 안에서 숨어있던 것처럼 나타났다. 자신이 들어가는 그 순간에 들어갔다고 하기에는 믿기지가 않았다. “읍읍.” [무공을 익히셨으니 전음은 하실 수 있겠죠?] 천여운의 말에 성왕 주태겸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강제로 입을 닫혀서 그런지 턱이 아팠다. -우우웅! 신기하게도 강제로 입을 닫게 만들던 진기가 사라지면서 편해졌다. “하아....하아....” 코로 숨을 쉬어도 되었는데, 얼마나 공포심을 느꼈는지 하얗게 질려서는 입으로 연신 거침 숨을 토해냈다. ‘젠장, 여기서 소리를 질러도 소용없겠지?’ 이미 천여운의 엄청난 무위는 두 눈으로 확인했다. 마음만 먹으면 혼자서도 황실 특사단을 전멸시킬 수 있는 괴물이었다. 결국 그의 비위를 맞추는 수밖에 없었다. ‘본 왕이 어쩌다가 이런 수난을.....’ 마교로 출발하기 전만 해도 이런 일을 겪으리라고 누가 상상했겠는가. 황제를 제외하고는 황족으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성왕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대, 대체 언제 마차에 탄 거요?]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천여운은 두루뭉술하게 답변했다. 이에 성왕 주태겸은 본의 아니게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자의 무공은 정말 하늘에 닿았구나. 그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도 누구 하나 눈치채지 못하게 마차에 탔단 말인가.’ 주태겸은 자신이 마차의 문을 여는 순간 천여운이 탔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은 아니었다. 천여운이 마차를 탄 것은 금의위들이 떠날 채비를 하던 시점이었다. [그, 그런데 천 교주께서 어찌 해서 본 왕의 마차에 탄 것이오?] 비위를 거슬리기는 싫지만 도통 이유를 짐작하기 힘들었다. 조약식에 참석하는 것도 거절한데다가 이 마차는 황도인 개봉으로 향하는데, 어째서 여기에 탔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천여운이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당연히 전하와 함께 황궁으로 가기 위함입니다.] [화, 황궁?] 천여운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목적에 주태겸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천하 무림을 세 등분 하는 거대 단체의 수장이 갑자기 황궁으로 가겠다는데 의아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했다. 사실 그보다도 천여운 자체가 무서운 주태겸이었다. ‘서, 설마 본 왕이 했던 말을 듣고서 그러는 것은 아니겠지?’ 불안함이 지속되다 보면 사리 판단이 흩어지기 마련이었다. 하필이면 당사자가 보고 있는 앞에서 욕을 하고 있었으니 충분히 화가 날 만도 했다. 주태겸이 황족의 체통도 잊은 채, 조심스럽게 달래듯이 말했다. [호, 혹시 천 교주. 본 왕이 방금 전에 혼자서 했던 말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면 노여워하지 마시오. 본 왕은 교주께서 조약식에 참석하지 못해서 그저 속이 상해서 그런 것이라오.] [다행이군요. 혹여 저를 싫어하는 줄 알고 상당히 불쾌할 뻔했습니다.] ‘헉!’ 담담하게 하는 말치고는 그를 두렵게 만들었다. 말투만 들어보면 적의를 느꼈으면 어찌 할 뻔했다고 하는 듯 했다. 이에 주태겸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전하의 마차에 함부로 타서 놀라게 만든 점은 송구스럽습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값은 충분히 치른 걸로 하겠습니다.] [아, 알겠소!] 사실 무례를 저지른 것은 마차에 난입한 천여운 쪽이다. 하지만 욕을 하던 것을 들켜서 혹여 그가 불쾌함으로 어찌 나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주태겸은 좋아라 이를 받아들였다. “휴우.” 어찌 보면 굉장히 순진하다고 할 수 있었다. 계속 마차에서 이러고 있을 수 없으니 천여운이 본론을 꺼냈다.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성왕 전하께서 저를 도와주셔야겠습니다.] 도와달라는 청유형이 아니었다. 칼만 들지 않았다 뿐이지 시키는 데로 하라는 소리였다. 주태겸은 순간 어이가 없었지만 천여운이 두려웠기에 인상을 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자가 무섭기는 하지만 황족의 말은 천금과도 같다고 했다.’ 황제 폐하와 그를 가르치던 대제학이 늘 하던 말이다. 나라의 법보다도 우선시 되는 것이 황제와 황족의 말이기에 늘 신중히 하라고 당부했었다. [대, 대체 무엇을 도와달란 말이오?] 눈치를 보면서도 할 말은 하는 모습에 천여운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자신을 마냥 두려워할 줄 알았는데 생각 외로 중요한 부분에서는 강단이 있었다. ‘황족은 황족이란 건가.’ 그렇다면 적당히 구슬릴 필요가 있었다. 어차피 황궁으로 가게 되면 그의 도움이 절실했다. [설명이 필요하겠군요. 이레 전에 전하를 대신하던 그 관료를 기억하시겠죠?] [.........] 기억하다 뿐이겠는가. 그 일이 있은 후부터 천여운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마교 측에서는 그때 육영이 처음부터 독에 중독되어 있었다고 해명했었다. 그것은 남진무사 연남군도 동의했기 때문에 주태겸도 납득했지만 어째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전하께서는 이번 조약식에 극도육무문이 참석한다고 하셨죠?] [....그렇소.] [그 죽은 관료는 극도육무문의 간자입니다.] [뭐, 뭐요?] 천여운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정보에 주태겸이 인상을 찡그렸다. 독에 중독된 것이 이상하기는 했지만 느닷없이 황실의 하급 관료인 육영이 간자라고 하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선 본교에서 있었던 일부터 말씀드려야 겠군요.] 천여운은 의아해하는 주태겸에게 간단히 극도육무문이 현 무림에 등장한 배경과 함께 마교에 있었던 여러 사건들을 간략히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극도육무문에서 정보 차단을 위해 심는 고의 존재를 알려주었다. [이럴 수가......정보의 유출을 막기 위해 사람의 몸에 그런 것을 심는단 말이오?] 고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된 주태겸이 놀라워했다. 어찌 보면 효율적인 방법이기는 했지만 극단적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참으로 독한 단체로구나.’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간략한 사정을 알려준 천여운이 본론을 꺼냈다. [제가 도와달라고 말씀드린 건 어찌 본다면 성왕 전하께도 도움이 되실 겁니다.] [본 왕에게 말이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전하의 특사단 내부에 육영이라는 자 이외에도 극도육무문의 간자가 있습니다.] “헉! 그...” [쉿!] 순간 놀라서 육성으로 말할 뻔한 주태겸이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자신이 이끄는 특사단에 그런 위험한 자들이 간자로 껴있다고 말을 하는데 놀라지 않는 것이 더 이상했다. ‘일부로 거짓을 말하는 게 아닐까?’ 라고 생각도 했지만 태조도 두려워하는 단체의 수장이 이런 일로 거짓을 말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진실이라면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처, 천 교주의 말이 사실이라면 당장 그들을 잡아야 겠소!] 그런 위험한 자들의 손에 농락당하는 것은 육영을 마지막으로 사양하고 싶었다. 주태겸의 전음에 천여운이 고개를 저었다. [왜 그러는 것이오?] [그렇게 된다면 황궁에 숨어있는 그들의 배후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천여운의 진정한 목적이었다. 과감하게 성왕 주태겸의 마차에 탄 것은 황궁에 있는 그들을 찾기 위해서였다. 극도육무문은 마교뿐만 아니라 각 무림의 세력에 간자들을 두어서 계략을 획책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황실마저 연루되어 버린다면 상당히 복잡해진다. 그들이 이면의 세계인 무림 이외에도 영향력을 가져버리면 상대하기가 더욱 껄끄러워지기에 천여운은 사전에 이들을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하.....이 자는 발본색원을 하려는구나.’ 천여운의 전음에 주태겸은 내심 그가 무섭게 느껴졌다. 주태겸은 당장에 보이는 적을 제거하는 것에 안주했지만 천여운은 배후마저 뿌리째 뽑으려고하고 있다. 적으로 삼는다면 정말 위험한 자는 천여운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이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과연 맞을까?’ 황궁에 정식으로 초빙하는 것도 아니고 몰래 들이는 것은 황족인 그로서도 꽤 난감한 일이었다. 혹여나 잘못되어 들키게 된다면 황제의 진노를 살 수도 있다. 더군다나 이 자는 무림 삼대 세력 중에서 가장 위험한 마교의 수장이 아닌가. 자신의 손으로 안방에 괴물을 풀어놓는 것일 지도 몰랐다. 망설이는 성왕 주태겸의 모습에 천여운이 준비해놓은 비장의 수를 꺼내들었다. [입지를 다져서 태자가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 천여운의 전음에 주태겸의 눈빛이 떨렸다. ‘이 자가 어찌?’ 남진무사인 연남군에게만 속내를 밝혔던 내용을 알고 있었다. 그때 분명히 연남군이 진기로 막을 쳐서 누구도 듣지 못한다고 했는데, 이를 꺼내니 당혹스러웠다. 그런 그에게 쇄기를 박듯이 천여운이 말했다. [황궁에 숨어서 암략을 꾸미는 자들을 잡게 된다면 전하께 넘겨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그게 참 말이오?] [어차피 저는 그들을 제거하는 것이 목적이지. 황상에게 공을 세우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만.] 천여운의 제안에 주태겸의 마음이 갈대처럼 흔들렸다. 굉장히 솔깃했다. 그의 말대로 만약 황궁에 숨어든 극도육무문의 간자들과 그 배후를 찾아내게 된다면 황상에게 인정받을 만한 대단한 공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본 왕은 영왕 형님을 제치고서 태자의 자리에 가까워질지도 모른다.’ 단오제까지 한 달이 남았다. 그 안에 황제의 마음에 들만한 공이 필요했다. 고민을 하던 성왕 주태겸이 조심스럽게 천여운을 바라보며 물었다. [만약 본 왕이 천 교주의 제안을 거절하면 어찌 할 것 이오?] [그것은 성왕 전하의 상상에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흠칫! 천여운의 말에 주태겸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제안을 따르지 않더라도 결국 본인의 뜻대로 하겠다는 말이나 다를 바 없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주태겸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칫, 어쩔 수 없구나. 그래. 본 왕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이 자를 이용하는 것이라 생각하자. 본 왕이 손해 보는 것은 없다. 암.’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주태겸이었다. 주태겸이 제안을 받아들이자 천여운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황궁으로 향하는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엇?’ 주태겸의 얼굴이 빠른 속도로 일그러졌다. 천여운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당연히 수반해야할 고통을 미처 염두 하지 못했다. 황궁으로 향하는 동안 그와 단둘이 이 마차 안에서 보내야 했다. ‘.......망했구나.’ * * * 대명제국의 황도 개봉( ?封) 개봉은 하남성 북동부에 위치한 인구 오십만이 밀집한 중원 최대 도시이다. 황하의 남쪽 대평원에 위치하며 네 개의 주요 운하가 교차되는 지역으로 상업이 발달하여 중원의 중심부라 할 만 했다. 마교 성의 근 열 배에 달하는 거대한 외성으로 들어가면 황도의 중심부로 가는 데만 마차로 두 시진이 걸릴 정도로 도시가 광활하다. 황도의 중심부에는 중원에서 가장 화려한 용정궁(龍亭宮)이 있다. 금빛 기와들로 이루어진 황가의 위엄이 가득하다. 근 보름에 걸쳐서 이동한 황실 특사단의 행렬이 용정궁의 남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착! 황궁의 입구를 지키는 근위병들이 창을 높게 들어 성왕 주태겸의 마차가 입궁하는 것을 환영했다. 드넓은 황궁 안으로 들어간 마차는 어느 곳에서 멈춰야 했다. 마차가 이동할 수 있는 경로가 끝났기 때문이었다. -탁! 마차의 문이 열리며 성왕 주태겸이 내려왔다. 보름 사이에 얼굴이 많이 수척해진 주태겸이었다. ‘드디어....드디어 왔구나.’ 황궁에 도착하기만을 얼마나 간절히 바랐는지 모른다. 하북성으로 들어서기 전까지 천여운과 근 이레 동안을 함께 숙식을 함께 했던 그였다. ‘으으,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다.’ 천여운은 그와 이동하는 내내 마차에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런 과묵함은 그를 괴롭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나마 하북성으로 들어와서 천여운이 미리 준비해둔 금의위의 인피면구를 쓰고서 나갔기 때문에 숨통이 트일 수 있었다. ‘참으로 신기하구나.’ 주태겸은 남진무사 연남군의 왼쪽 뒤에 서있는 중년의 금의위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가 바로 마교의 교주 천여운이었다. 대체 언제 준비한 것인지 금의위 이한과 똑닮은 인피면구를 쓰고 있었다. ‘그는 황궁에서 볼일이 끝날 동안 본교의 호남성 북부 지부에 잠시 맡아두겠습니다.’ 진짜 금의위 이한은 호남성 마교의 지부에 있다. 고작 이레만에 철두철미하게 황궁 입성을 준비한 천여운이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다니 하....’ 이들의 수장인 연남군조차도 천여운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당연했다. 나노의 능력으로 목소리마저 금의위 이한의 것을 복제했기 때문에 특별히 모난 행동을 하지 않고서야 알아차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전하를 모실 열 명만 남고, 나머지는 복귀해서 기다려라.” 남진무사 연남군이 호위의 임무가 끝난 금의위들에게 궁정내 관할 소(所)로 복귀하게 했다. ‘다행이구나.’ 연남군의 곁에 붙어있었던 천여운은 자연스레 열 명에 포함될 수 있었다. 다소 위험하긴 했지만 일부러 붙어있는 보람이 있었다. 황명을 이수하고 복귀한 성왕 주태겸은 황제가 기거하고 있는 건안궁으로 가서 보고를 올려야 했기에 최소한의 금의위들만이 호위한다. ‘굳이 본 왕이 신경쓰지 않아도 잘 따라 붙는구나.’ 주태겸이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호명을 할까 했는데 알아서 호위로 잘 붙었다. 나머지 금의위들이 철수하자 성왕 주태겸은 익숙하게 건안궁으로 향했다. ‘과연 황궁이라 할 만 하구나.’ 건안궁으로 향하면서 천여운은 금빛 기와에 화려함이 가득한 궁전에 놀라워했다. 마교의 내성도 화려하긴 했지만 확실히 황궁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드넓은 궁의 곳곳에 조경을 잘 꾸며놓았고 정원에는 작은 호수들이 있고 구경할 것들이 정말 많았다. ‘저곳인가.’ 한참을 이동하던 천여운의 눈에 거대한 궁으로 들어가는 전각이 보였다. 그런데 전각의 앞에 환관으로 보이는 푸른 관복을 입은 자들이 서른 명 정도가 서있었고, 그들의 한가운데 다른 환관들보다 더 화려한 장신구를 하고 있는 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꼭 환 장로를 보는 것 같군.' 얼굴에 분칠까지 해서는 환관답게 여성스러움도 깃들어 있었다. “하아....동창.” 그들을 발견한 남진무사 연남군이 한숨을 쉬었다. 환관들의 무리는 바로 황실에서 금의위와 더불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하는 동창(東廠)이었다. 건안궁으로 향하면 늘 상 마주쳐야 하는 자들이라 껄끄러웠다. 그런 동창의 환관들을 바라보는 천여운의 눈빛이 묘했다. ‘환관들이 전부 무공을 익히다니?’ 놀랍게도 이 동창이라 불리는 환관들은 전부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 심지어 그들의 수장으로 보이는 화려한 장신구를 하고 있는 자는 화경의 고수였다. < 64장 도와주셔야겠습니다 (2) > 끝 < 65장 동창(東廠) (1) > 흔히 관과 무림은 별개이기에 관인들 중에 무공을 익힌 이가 없을 거라 생각하는 이들도 더러 있다. 하지만 황실 역시도 여러 황조를 겪고 무수한 세월을 통해 무공을 단련한 집단을 양성했다. 대명제국에도 무공을 익힌 네 집단이 있었는데, 동창, 서창, 대내행창과 황제의 친위대인 금의위가 있다. 관명에 따르면 동창과 서창, 대내행창 등은 창위라 하여 환관들의 조직이다. 이들은 일반 관료들과 달리 오로지 황제의 명으로만 움직이며 독자적인 사법권을 지니고 있어서 신분고하에 상관없이 체포, 구금을 비롯해 심지어 즉결처형권까지 지니고 있을 만큼 막강한 권한을 부여받았다. 원래 금의위는 친위대의 역할이 강했지만 창위의 업무가 많아지고 커지면서 동창의 산하 조직으로 편입되고 말았다. 덕분에 원래는 동창의 제독과 동등한 관계였던 금의위의 수장인 지휘사가 권력으로 휘둘리는 상황이 발생하면서 금의위들은 환관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적대감이라....' 남진무사 연남군의 바로 곁에 있는 천여운은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굳이 숨기지 않을 만큼 연남군은 싫은 내색을 보였다. 이를 전혀 개의치 않는지 동창 환관들의 수장으로 보이는 화려한 장신구의 환관이 입을 가리며 베시시 웃으며 다가왔다. "성왕 전하께 인사드리옵니다. 호호호." 여자처럼 입을 가리고 웃는 모습이 썩 보기 좋진 않았다. 환의와는 다르게 간사함이 느껴졌다. 성왕 주태겸 역시도 이 환관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지 굳은 얼굴로 인사를 받아주었다. "오 첩형 오랜만이구나." 화려한 장신구의 환관의 이름은 오태성. 동창의 삼 인자로 동창제독인 임 공공을 보좌하는 두 첩형 중 한 사람이다. '독특하다.' 뛰어난 무공을 지녔기에 극도육무문의 간자로 의심되는 인물이라 천여운은 오 첩형을 유심이 살폈다. 그러나 오 첩형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음기는 극도육무문의 무공과는 관련이 먼 듯 했다. '이런 식이라면 찾는데 더 시간이 걸리겠구나.' 천여운은 금의위들을 제외하면 황궁에 무공을 익힌 이가 별로 없을 거라 여겼다. 그런데 이곳 건안궁에서만 느껴지는 기운들을 감지하면 거의 몇 백 명에 이르는 자들이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 직접 대면하지 않고는 기감만으로 찾는 것은 무리였다. "십만대산까지 다녀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전하." "폐하의 명인데 무슨 고생인가." "호호호, 미개한 마인들을 만나시고 오셨는데도 이리 담대 하시니 참으로 멋지십니다." '헉?' 오 첩형의 말에 주태겸이 흠칫 놀라서 곁눈질로 천여운을 바라보았다. 아무렇지 않은지 표정변화가 없었다. 다만 그 눈빛은 불쾌하다는 듯이 오 첩형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흠흠! 폐하께서는 계신가?" "아아, 그렇지 않아도 폐하께서 전하가 오셨다는 보고를 듣고서 이렇게 소신을 보냈사옵니다." 다행히 주태겸이 눈치껏 화제를 돌려서 오 첩형이 이를 보진 못했다. 오 첩형이 고개를 천천히 숙이며 손바닥으로 전각의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부터는 소신들이 전하를 궁으로 모시겠습니다. 호호호." 그 말에 남진무사 연남군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성왕 전하는 저희 금의위들이 모실 겁니다." 그런 연남군의 말에 오 첩형이 지금껏 주태겸에게 보였던 방글거리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는 싸늘한 눈초리로 말했다. "건안궁에는 폐하의 명이 없으면 종 4품 밑으로는 입궁할 수 없습니다만." 일반 금의위들의 지휘사와 지휘동지, 첨사, 그리고 진부사를 제외하고는 정5품 밑의 품계이다. 결국 남진무사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입궁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이 환관 놈이....' 남진무사가 불쾌함을 감추지 못했다. 성왕 주태겸의 수족이라 할 수 있는 남진무사와 산하 금의위들이다. 이런 식으로 그들의 입궁을 막는 것은 결국 권위를 과시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폐하까지 들먹이며 말했으니 받아들여야 했다. "너희들은 소로 복귀해라." 연남군이 뒤에 서있는 금의위들에게 명했다. 황궁 안도 살피려 했던 천여운은 계획이 틀어지자 내심 이 동창이라 불리는 환관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진무사도 복귀하셔도 되는데요. 호호호." -뿌득! 비아냥거리는 오 첩형의 말에 연남군이 이빨을 갈았다. 그때 이를 주시하고 있던 주태겸이 다소 낮아진 어조로 오 첩형에게 말했다. "남진무사에게 본 왕을 지키라고 명하신 것이 폐하이신데 태도가 과하구나." "아아! 송구스럽습니다." 황족인 성왕의 앞에서 알력 다툼을 한 것이 지나쳤다는 사실을 인지한 오 첩형이 빠르게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그러나 그 표정은 여전히 능글맞게 웃고 있었다. '빌어먹을 환관 놈이 영왕 형님의 입지가 확고하다고 이러는 것인가.' 일 년 전부터 태자의 자리가 거론된 이후로 궁에서는 파벌이 나뉘었다. 그 중에 동창은 황제의 장자인 영왕 주태윤을 지지하는 파벌이었는데, 최근에 들어서 황제의 마음이 영왕에게 기울자 다른 황자들을 대하는 태도가 불손해져갔다. '고작 환관 따위에게 권력을 실어주니 황실이 이 꼴이구나.' 참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성질대로 한다면 동창을 뒤엎고 싶지만 황제의 직속의 단체인 동창이나 서창은 황족이라고 해도 건드려봐야 벌집을 쑤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천 교주?] 주태겸이 조심스럽게 그에게 전음을 보냈다. [저는 개의치 마십시오. 술시 무렵에 전하가 계신 성양궁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마차로 오면서 황궁 내부에 대한 설명을 들은 천여운이었다. 주태겸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석양이 지는 것을 보면 곧 해가 완전히 저물 것 같았다. '뭐, 이 괴물이라면 자기가 알아서 잘 찾아오겠지.' 이에 주태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동창의 환관들을 대동하고서 건안궁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들어가자 금의위들 중에 연남군 다음으로 직위가 높은 백 천호(千戶)가 자연스럽게 선두에 서서 소로 이끌었다. 개봉 내에는 금의위들이 주둔하는 다섯 개의 소가 있다. 이들은 전부 내성이라 할 수 있는 용정궁의 소에 속하는 금의위들이었다. 건안궁에서 거리가 멀어지고 주위에 인적이 보이지 않자 금의위들이 불평을 터뜨렸다. "망할 환관 놈들!" "오 첩형 그 자는 언제 봐도 짜증납니다." "정말 무례하지 않습니까?" 그를 처음 보는 천여운도 불쾌했는데 이들은 더욱 그러할 만 했다. 불만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닌 것 같았다. 이렇게 뒷담화라도 하면서 풀지 않으면 분이 가시지 않는지 소로 복귀하는 내내 금의위들은 동창을 험담했다. 그런데 돌아가는 내내 천여운이 유심히 살피는 자가 있었다. '윤 백호.' 유일하게 동창의 뒷담에 끼지 않고 천여운처럼 과묵하게 있는이였다. 천여운이 황궁으로 들어가는 것에 쉽게 미련을 버린 것은 이 윤 백호라는 금의위 때문이었다. [금의위들 중에 두 사람이 간자로 파악됩니다.] 칠 장로 환의는 황궁 특사단 중에 다섯 명의 간자로 의심되는 자가 있다 했다. 그들은 이레 동안 마교의 내성을 돌아다니면서 수상한 행동을 보였다. 일부러 경계망을 느슨하게 하여 그들이 주요한 거점 이외의 곳은 돌아다닐 수 있도록 함정을 파놨기에 간자로 의심되는 자들을 좁힐 수 있었다. '무공은 그리 높지 않다.' 윤 백호란 금의위는 느껴지는 무위는 일류 고수에 불과했다. 내성 객당을 벗어나 돌아다닌 두 명의 금의위들 중 한 사람이니 분명 뭔가 숨겨진 것이 있으리라. 소에 도착하자 백 천호가 아홉 명의 금의위들에게 말했다. "그 동안 성왕 전하를 호위하느라 고생이 많았다. 남진무사께서 나흘 동안은 당직 경계 근무를 빼주신다고 하니, 여독을 풀도록 해라." "충!!!" 뜻밖의 좋은 소식에 금의위들이 신나서 좋아했다. 그들은 특별한 임무가 없을 때는 용정궁의 경계 근무를 선다. 그런데 나흘 동안 빼준다고 했으니 휴가나 마찬가지였다. '잘됐군.' 금의위로 변장했기 때문에 그들의 근무 일정을 피할 방법을 생각해두던 천여운은 잘 됐다고 여겼다. 천천히 윤 백호를 살펴보면 그가 누구와 접촉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뜻밖의 상황이 발생했다. 주둔지인 소의 숙소로 다른 금의위들이 전부 들어가자 윤 백호가 그에게 다가온 것이다. 그리고는 꽤 친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한. 우리는 갈 곳이 있지 않나?" '응?' 천여운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변장한 금의위 이한이란 인물이 윤 백호와 친분이 있는 듯 했다. 설마 여기서 이런 변수가 발생할 줄은 몰랐다. '......일단 맞장구를 쳐야 겠지.' 당황해서 모르는 척한다면 상황이 꼬일 것이다. 그가 지금 변장한 인물은 금의위 이한으로 직급은 시백호였다. 윤 백호보다는 한 직급 낮았다. "그.... 렇습니다." 천여운의 대답에 윤 백호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나 잘못 대답한 것인가 당혹스러웠는데 그건 아닌 듯 했다. "아직 소에 있으니 군율에 맞게 답해라." '아!' 그 말에 천여운은 자신이 무엇을 실수했는지를 눈치 챘다. "충!" 그제야 윤 백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천여운에게 자신을 따라오라는 말과 함께 앞장서서 어딘가로 향했다. 금의위 중앙소에서 나온 윤 백호는 천여운을 데리고 익숙하게 용정궁의 어딘가로 이동했는데, 이리저리 복잡하게 돌아서 갔다. '다른 이들의 이목 때문인가.' 경계 근무를 서는 자들의 눈에 일부러 띠는 것 같기도 했다. 확실히 이들의 눈도장을 찍으면서 이동한다면 혹시나 윗선에서 자리를 비운 것에 대해서 소재를 묻게 된다면 증명하기는 쉬울 것이다. 점점 더 간자로서 확신을 가지게 만들었다. 한참을 황궁 내를 빙빙 둘러서 이동하던 끝에 그들은 황궁 내에서도 상당히 거대한 건물에 도착했다. '창고?' 이곳은 황궁의 식량을 보관하는 창고 건물이었다. 창고 건물에 도착하기 전에 윤 백호는 황궁의 옷감을 세탁하는 빨래터의 건조대에 걸려있는 장포를 챙겨서 금의위 복과 얼굴을 가리게 했다. -슉! 얼굴을 가리고 나서부터는 윤 백호는 경계 근무자들을 피해서 이동했다. 그들의 위치를 전부 파악하고 있기에 쉽게 들키지 않고 창고 건물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열 개의 큰 창고 중에 네 번째 건물이었다. '쌀 창고인가?' 건물에 들어서자 짚 냄새와 함께 수십만에 가까운 탑처럼 쌓여있는 쌀가마니가 보였다. 수백 평에 이르는 창고 안에 쌓인 쌀가마니는 황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일 년을 족히 먹을 수 있는 양을 보관하고 있었다. 천여운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어두운 창고의 깊숙이 들어가자 수많은 인기척들이 느껴졌다. 전부 무공을 익힌 자들이었다. '역시인가.' 황궁 내에서 이렇게 은밀하게 활동하는 자들이라면 필시 극도육무문일 확률이 높았다. 생각보다 빠르게 그들의 흔적을 발견한 것 같다. 윤 백호를 따라서 창고의 가장 안쪽으로 들어가자 그곳에 이십 여명에 이르는 검은 장포로 모습을 가리고 있는 인영들이 서있었다. '저 자가 우두머리인가?' 가장 안쪽의 쌀가마니 위에 앉아있는 한 인영이 보였다. 옆에 장포인들이 호위하는 형태로 서있는 것을 보면 확실했다. -저벅저벅! 윤 백호와 천여운이 그들의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왔을 무렵이었다. 지금까지 과묵하게 이동해오던 윤 백호가 입을 열었다. "진짜 이한은 어떻게 한 거지?" 뜻밖의 질문에 천여운이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그러자 윤 백호가 재빨리 앞으로 튀어나가서 장포인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에게 소리쳤다. "나으리! 저 자는 간자입니다!" 그의 외침에 천여운의 뒤편에 있던 열 명의 장포인들이 빠르게 창고 밖으로 나가는 퇴로를 가로막았다. '이런.....'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오산인 듯 했다. 일단은 시치미를 떼보기로 했다. 천여운이 장포인들의 우두머리의 앞에 서있는 윤 백호에게 물었다. "윤 백호님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역시 네놈은 이한이 아니다. 이한은 나와 죽마고우여서 둘만 있는 자리에서 절대로 경어를 쓰지 않는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부분에서 들키고 말았다. 천여운이 이한이 아니라고 확신한 윤백호가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창고까지 그렇게 둘러서 오는데도 아무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고? 대체 네놈의 정체가 무엇이냐?" 부재에 대한 증명을 위해서 둘러서 이동했다고 여겼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천여운이 허탈했는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 얼굴과 목소리를 완벽하게 복제했다고 해도 친분이 있는 자를 속이는 것은 힘들었다. 이 방법은 윤 백호라는 자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허점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쌀가마니에 앉아있던 장포인들의 우두머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확실히 간자가 맞느냐?" 뭔가 간드러지는 목소리였다. 우두머리의 질문에 윤 백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러자 이들의 우두머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하안 치아를 드러내며 말했다. "어리석은 놈이로구나. 제 발로 범의 아가리로 뛰어들다니." '범의 아가리?' 천여운이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혀를 쯧쯧 거리던 우두머리가 천여운을 포위하고 있는 장포인들에게 명을 내렸다. "당장 저 자를 제압해서 본 대당두의 앞에 무릎 꿇려라." "예이." -팟! 뒤쪽에 있던 장포인 세 명이 동시에 천여운에게 달려들었다. 기를 갈무리하고 있어서 평범해 보이는 천여운을 우습게 본 그들은 적수공권으로 공격해왔는데 이것이 통할 리가 만무했다. 천여운이 뒤로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강한 기압이 일어나며 세 명의 몸이 동시에 뒤로 튕겨나갔다. -팡! "끄헉!" '으아아악!' 어떤 움직임이 있던 것도 아니었는데 세 명이 동시에 뒤로 날아가 뒹굴었다. 바닥을 뒹군 그들은 심한 내상이라도 입었는지 움찔거리며 일어나질 못했다. 이에 윤 백호를 비롯한 장포인들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헉?" "이, 이게 대체 무슨?" 평범한 간자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우두머리인 자가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천여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보, 보통 놈이 아니구나! 전부 쳐라!" "예, 예이!"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머뭇거리던 장포인들이 허리춤의 혁대에서 뭔가를 빼냈다. -챙! 곡선으로 튀어나온 얇은 검신의 그것은 연검이었다. 보통은 여자들이나 암살자들이 많이 쓰는 검이었는데, 몸에 소지하거나 숨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연검을 빼들은 장포인들이 천여운을 향해 동시에 합공을 해 왔다. 그들이 신형을 날리려는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천여운이 여전히 가만히 서있는 상태로 장포인들을 향해 천천히 손바닥을 살짝 들어 올렸다가 내리는 시늉을 했다. 그 순간 그를 향해 신형을 날리던 장포인들이 일제히 땅바닥에 처박혔다. -쾅! 쾅! 쾅! 쾅! "끄악!" "모, 몸이....." "끄어억!" 바닥에 강제로 처박힌 그들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무형의 공력이 일어나 그들을 짓누르는데 압사당해 죽을 것만 같았다. 창고의 돌바닥에 일어난 균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대,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이놈은 그냥 고수가 아니야.' 단순한 손짓만으로 장포인들을 전부 제압할 만큼 괴물이었다. 장포인들의 우두머리는 경악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을 치고 말았다. 하지만 그리 멀리 갈 수가 없었다. "와라" 천여운이 가볍게 왼손을 내밀어서 끌어당기는 시늉을 하자, 뒷걸음을 치던 우두머리의 몸이 심후한 공력에 의해서 강제로 떠오르고 말았다. -부웅! "으어어어억!" 몸이 떠오른 우두머리가 공력을 끌어올렸지만 소용없었다. 그가 반항하기에는 공력의 격차는 천지 차이였다. -콱! 순식간에 강대한 공력에 의해 날아온 우두머리는 천여운에게 목을 붙잡히고 말았다. 그의 목을 움켜쥔 천여운이 낮게 깔린 위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범의 아가리가 어쨌다고?" < 65장 동창(東廠) (1) > 끝 < 65장 동창(東廠) (2) > "켁켁!" 장포인들의 우두머리는 무공에 있어서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고수였다. 공력에 있어서만큼은 나름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목을 움켜잡힌 이후로 무력해진 것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이, 이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보통 간자라고 한다면 그리 뛰어난 무공을 지니지 않는다. 실제로 여전히 그가 천여운에게서 느끼는 기운은 평범한 범인과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오른손에 집중된 공력은 상상을 불허했다. -슥! 천여운이 고개를 살짝 위로 들어 올리자,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장포가 벗겨졌다. 장포 속에 드러난 모습에 천여운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환관?" 벗겨진 장포 안의 인물은 다름 아닌 환관이었다. 푸른 관복에 환관들이 쓰는 관모하며 하얗게 분칠한 얼굴을 보니, 동창의 환관이 틀림없었다. '음기?' 목을 움켜잡으면서 느껴지는 것은 음기에 가까웠다. 극도육무문이라고 하기에는 내공 심법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 '이상하다.' 이를 의아하게 여긴 천여운의 시선이 자연스레 윤 백호에게로 향했다. 압도적인 무위에 기가 질려버린 윤 백호도 그 자리에 서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천여운이 그런 윤 백호에게 물었다. "극도육무문의 간자가 아니었나?" 그 물음에 윤 백호가 떨려하는 와중에도 영문을 몰라 했다. "그, 극도육무문? 그게 무슨 소리이신지?" 상대가 이곳에 있는 자들을 단숨에 없애버릴 수 있는 절대 고수라는 것을 인지한 그의 태도는 아까 전과 다르게 공손해졌다. '설마 헛다리를 짚은 건가?' 천여운이 누르는 시늉을 하고 있던 오른손을 내렸다. 그러자 바닥에 압사당하기 일보 직전까지 그들을 억누르던 엄청난 공력이 사라졌다. 하지만 이미 내상을 심하게 입은 그들은 전부 기절한 상태였다. '동창의 고수들이 이 자에게 있어서는 애송이와 다를 바가 없구나.' 확연한 무위의 차이였다. 천여운이 이번에는 윤 백호를 향해 손을 뻗어서 끌어당기는 시늉을 했다. 반항할 의욕도 없이 그는 무력하게 끌려왔다. -부우웅! 쿵! "크윽!" 바닥에 강제로 무릎이 꿇린 윤 백호에게 천여운이 물었다. "금의위가 어째서 동창의 환관들과 접촉한 거지?" "그, 그건...."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윤 백호는 쉽사리 답변을 하지 못했다. 아무리 상대가 압도적인 무력을 가진 자라고 해도 여기서 입을 열게 되면 동창을 배신하는 것이었다.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웃기는 녀석이군. 간자로서 의리를 지키겠다는 것이냐?" "......" 그런 윤 백호를 향해 천여운이 아무렇지 않게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무릎을 꿇고 있던 윤 백호의 오른팔목이 뒤로 꺾이면서 팔꿈치로 뼈가 튀어나왔다. -우드득! 뿌직! "끄아아읍! 읍!" 멀쩡한 뼈가 부러져서 튀어나왔으니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하지만 윤 백호는 비명을 지를 수가 없었다. 무형의 기운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기 때문이었다. '이, 이 자는 정말 손에 사정을 두지 않는구나.' 천여운의 손에 목이 잡혀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환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더 무서운 것은 이런 잔인한 행동을 하면서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 냉정함이 놀라웠다. "끄으으으으....." 비명을 지를 수도 없으니 윤 백호는 군관이라는 것도 잊고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그것을 전혀 개의치 않는지 천여운이 물었다. "한 번 더 대답을 하지 않으면 반대 팔도 똑같이 만들어주지." 사람이란 참으로 특이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의를 지키고 안 되면 죽자고 생각했는데 한 번 극한의 고통을 겪고나니 쉽게 그것이 무너져 내렸다. 입을 막고 있던 무형의 기운이 사라지자 윤 백호가 다급히 말했다. "저, 저는 동창 출신의 간자입니다." "동창? 그럼 환관이었단 말이냐?" "환관은 아니고 동창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사실을 불었음에도 불구하고 천여운의 눈빛은 실망으로 물들었다. 극도육무문의 간자라고 생각했는데 예상과 달리 동창 출신의 간자였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전혀 쓸모없는 인간이었다. '그냥 죽일까?' 잠시 고민하던 천여운이 그에게 한 가지를 더 물어보았다. "어째서 황궁 특사단에 끼어있던 거지? 성왕을 감시한 것이냐?" 그런 천여운의 물음에 목을 잡혀 있는 환관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주태겸 전하의 사람이 아닌가?' 처음에는 금의위에서 보낸 간자이거나 성왕 주태겸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를 아무렇지 않게 부르는 것을 보면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성왕 전하께서 황명을 달성하는지와 혹시나 마교의 교주와 밀약을 맺게 된다면 그것을 알아내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나와 밀약을 맺는지 알아보라 했다고?' 아무래도 이 자의 말에는 거짓이 없어 보였다. 극도육무문의 간자가 아니라 황궁의 태자 책봉에 관여하려는 동창의 간자가 확실한 듯 했다. 이 황자인 성왕 주태겸이 공을 세우는 것을 견제하기 위함 일 것이다. 모든 사실을 고한 윤 백호가 바닥에 엎드려서 머리를 조아리며 빌었다. “제,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살려만 주신다면 성왕 전하께 폐가 가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동창을 배신한 셈이지만 어찌하겠는가.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 말이다. '기어코 제 목숨만을 구걸하다니. 크윽. 간자를 잘못 키웠구나.' 간자로서 들킨다면 자진하라고 훈련을 시켰는데 이렇게 빨리 굴복할 줄은 몰랐다. 물론 천여운이 그만큼 위압적이고 두렵기도 했다. 그런데 천여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윤 백호가 전혀 기대한 것이 아니었다. "누가 살려준다고 했지?" "네? 그, 그게 무슨..." -뿌득! 미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윤 백호의 목이 꺾였다. "케켁, 히익!" 이에 목이 붙잡혀 있던 환관의 우두머리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사실을 고하면 살려줄 그런 분위기로 보였는데 전혀 아니었다. '지, 진짜로 죽여버리다니? 큰일이다. 이, 이자는 뭐라고 해도 본 대당두를 반드시 죽이겠구나.' 물론 그 짐작은 정확했다. 천여운은 후환을 남기는 인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없애는 편이 낫겠지만 이들을 전부 죽인다면 황실의 경계가 심해지겠지.' 아무리 수만 명의 관료, 환관, 궁인들이 있는 황궁이라도 한 둘도 아니고 스무 명이 넘는 이들이 없어진다면 문제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황궁에 숨어있는 극도육무문의 간자들이 몸을 사리면서 찾기 힘들어질 것이다. 이들이 자신의 모습을 금의위 이찬으로 알고 있지만, 어차피 인피면구를 쓰고 있어서 이것을 벗기만 하면 굳이 정체를 들킬 일도 없었다. 그의 속내를 모르는 환관의 우두머리는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잔머리를 굴렸다. "켁켁....자, 잠시만....제 말을...켁...들어주십시오. 나으리." 굳이 들을 가치가 없었다. 천여운이 이를 무시하고 손에 힘을 주어 환관을 기절시키려는데, 그가 다급하게 말했다. "사, 살려주신다면 저. 저희 동창의 식객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켁.....이, 임 공공께서는 인재를 아끼십니다." '동창의 식객?' 식객(食客) 그것은 또는 문객(門客)이라 부른다. 전국시대부터 널리 퍼져 있던 풍습으로 귀족이 재능 있는 사람을 자신의 손님, 즉 객(客)으로서 우대하고 먹여 살리는 대신에 주인(主)이 되는 귀족을 돕는 것이다. 환관 따위가 식객을 운운하는 것이 우스웠지만 천여운의 머릿속에는 전혀 다른 것이 떠올랐다. '조금 떠볼까?' 자신을 식객으로 초빙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는 것은 그 외에도 무림인을 초빙했을 확률도 없지 않았다. 천여운이 그의 목을 움켜쥐던 손에 힘을 약간 느슨하게 하고서 말했다. "우습구나. 동창이 나를 식객으로 모시고 싶다고?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으냐?" 일말의 여지를 남기는 천여운의 말에 불안해하던 환관이 쾌재를 불렀다. 그에게도 이것은 모험이나 마찬가지였다. '본 당두의 예상이 맞았구나. 이 자가 간자의 임무를 실패했으니 뭔가를 제안하면 흔들릴 수도 있다고 여겼는데 과연!' 기가 살은 환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저는 동창의 대당두입니다. 공공께 인재를 천거할 권한이 충분이 있습니다." 꽤 높은 직위일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훨씬 높았다. 천여운이 듣기로 동창은 제독과 그 밑으로 두 첩형, 그리고 대당두, 당두 순으로 품계가 내려간다고 들었는데, 실질적으로 동창의 사 인자라는 말이었다. "대당두라....." 천여운이 짐짓 망설이는 내색을 보이자 대당두가 말했다. "공께 실례가 안 된다면 여쭙고 싶습니다." "무엇을 말이냐?" "혹 서창의 의뢰를 받으신 건 아닌지." '서창?' 그의 말을 들은 천여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단순한 물음에 불과했지만 천여운은 이 말로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이 동창이라는 집단이 알력을 다투는 것이 단순히 금의위뿐만이 아니라 같은 환관들로 이루어진 집단인 서창도 포함된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이 자의 말대로라고 한다면 칠 장로 환의가 발견한 간자들 중에 극도육무문이 아니라 서창의 간자도 있을지도 몰랐다. '쉬운 일이 아니구나.' 황실 내의 권력 암투마저 끼어들면서 일이 어려워졌다. 이렇게 된다면 다섯 중에 허패들이 많아져서 허탕이 될 확률도 높아졌다. '이들의 흙탕물에 뛰어들 생각은 없지만.....' 확인해볼 필요성은 있었다. 식객이라고 하는 자들이 마음에 걸렸다. 그들 중에 극도육무문의 간자가 있다면 황궁의 실세라 할 수 있는 동창과 결탁할 확률이 지극히 높았다. ".....알려줄 수 없다." 천여운이 그의 물음에 일부러 뜸을 들이고서 답변했다. 덕분에 대당두는 그가 서창의 의뢰를 받았다고 확신해버렸다. '역시 서창 놈들이 확실하구나. 이런 엄청난 고수를 구하다니.....이 작자들이 태자 간택식을 앞에 두고 있다고 자금을 아끼지 않는구나. 하지만 본 대당두가 이 자를 설득한다면.' 그들의 계획이 실패할 뿐더러 동창의 힘이 더욱 강해질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공공께 인정을 받아서 차후에 첩형으로 승진 할 지도 몰랐다. 대당두가 조심스럽게 그에게 말했다. "나으리. 이것만큼은 약조드릴 수 있습니다. 무엇을 대가로 받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저희는 서창에서 제안한 것보다도 배를 약조드립니다." "나를 돈따위에 넘어가는 자로 보는 것이냐?" 너무 쉽게 넘어가면 의심을 받을 수도 있기에 천여운이 일부러 그의 제안을 튕겼다. 그것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대당두는 안달이 나서 어쩔 줄 몰라했다. '정말 조심스러운 자로구나. 으으, 그렇다면...' 천여운이 생각보다 잘 넘어오지 않자 대당두가 마지막 패를 꺼냈다. "고, 공처럼 뛰어난 인재라면 공공께서 영왕 전하께 천거하실 수도 있습니다." '영왕?' 영왕 주태윤. 황제의 첫째 황자이자 현재 태자의 자리에 가장 가까운 남자이다. 수많은 관료들이 그를 지원하고 있고, 황궁의 세 실세 중에 동창이 그의 수족처럼 움직이고 있다. 아까 전 금의위들이 뒷담화를 할 때 동창이 차기 태자인 그를 뒤에 업고 있다는 말을 했던 것이 기억났다. '이거 생각보다 귀찮게 되었는데.' 가장 최악으로 성가신 상황은 극도육무문이 영왕과 연관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무림뿐만이 아니라 황실에도 영향을 끼치는 것이 목적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결국 천여운은 일단 이들이 장단에 맞춰주기로 결정했다. ".....정말 영왕 전하께 천거해줄 수 있나?" '됐다!' 어색한 말투였지만 그의 긍정적인 반응을 기다리고 있던 대당두는 기쁜 나머지 이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다, 당연한 게 아니겠습니까? 나으리와 같은 대협이라면 영왕 전하께서도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공공께 보고하러 갈 참이니 당장에라도...." -탁! "흐헛!" -털썩! 천여운이 잡고 있던 그의 목에서 손을 떼었다. 살았다는 기쁨에 긴장이 풀려버린 대당두가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방금 전만 해도 그를 압박하던 진기가 거짓말처럼 없어진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런 그에게 천여운이 가볍게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그럼 대당두. 부탁하겠소." *** 한편 황궁의 건안궁의 좌측에는 궁녀들이 머무는 거처인 백화전이 있었다. 백화전에 출입할 수 있는 자들은 오직 황제와 궁녀들뿐으로 금남의 구역이라 할 수 있다. 궁녀들만이 머무는 이 백화전의 장원의 서쪽 편에는 대나무 숲이 있었는데, 그곳으로 한 장포를 둘러쓴 자가 은밀히 들어가고 있었다. 해가 져서 어두웠는데도 등불도 없이 그는 익숙하게 대나무 숲길을 잘도 찾아 들어갔다. 그런데 이 장포인은 이동하는 내내 누군가 자신을 따라붙은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슉! 슉! 길게 뻗은 대나무 위에서 기척을 죽이고서 그를 쫒는 자가 있었다. 장포인과 마찬가지로 겉에 백색 천 같은 것을 두르고 얼굴을 가리고 있는 자였는데, 살짝 보이는 안쪽에 금의위의 갑주가 보였다. '대체 어디까지 가는 거지?' 이 금의위 갑주를 입은 사내는 다름 아닌 마교 암종의 대주였다. 황궁 특사단에 껴서 황궁에 잠입한 것은 오직 천여운만이 아니었다. 다섯 명이나 되는 간자들을 추적하기 위해서 그의 수하들 역시도 잠입해서 이렇게 쫒고 있는 중이었다. 적어도 완숙한 초절정 이상의 대주급 고수들로만 이루어진 정예들이었다. 한참동안 대나무 숲을 달려가던 장포인이 어딘가에서 멈춰섰다. '아.' -탁! 암종의 대주 역시도 두 손으로 대나무를 잡고서 매달린 채로 멈췄다. 그가 호흡을 죽이고서 장포인을 응시했다. 간자와 암살 훈련을 받은 그는 일반적인 고수들보다도 은신을 하는데 탁월했다. '응?' 장포인이 멈춰서서 기다린지 반 각 정도가 지났을 무렵에 대나무 숲으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두웠지만 대나무 숲의 틈틈이 비춰지는 달빛에 희미하게 뭔가가 보였다. 그런데 저 복장은 어디서 많이 보았던 것이다. '궁녀?' 뜻밖에도 대나무 숲으로 나타난 자는 나이가 지긋한 궁녀였다. 붉은 색 비단 겉옷을 입은 걸로 보아 궁녀들 중에서도 품계가 높은 상궁인 듯 했다. 호흡을 최대한 죽이고서 그들의 대화를 집중하려던 찰나였다. -슉! '앗!' 놀랍게도 멀리서 장포인의 앞에 서있던 상궁의 모습이 사라졌다. 뭔가 이상하다고 판단한 그가 위치를 옮겨서 살펴보려고 하는데 뒤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엄한 황궁에 쥐새끼들이 많이 끼어왔구나." '마....말도 안 돼.' 완숙한 초절정의 고수인 그가 안력을 집중해서 쳐다보았는데, 바로 앞에서 놓친 거도 모자라서 뒤를 빼앗기고 말았다. 그의 본능이 이 자리에서 당장 벗어나야 한다고 크게 경고하고 있었다. 암종의 대주는 주저 없이 대나무를 발로 박차고서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상궁에게서 도망치려고 했다. 그러나, -퍽! "컥!" 경공을 펼치기도 전에 그의 뒷목을 타격하는 힘에 의해 그 대로 기절해버렸다. 정신을 잃은 암종의 대주는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풀썩! 바닥에 쓰러진 암종의 대주를 바라보며 상궁이 중얼거렸다. "쥐새끼들을 사냥할 시간이로구나." 그녀의 말이 끝나는 순간, 대나무 숲의 깊숙한 안쪽에서 수 많은 인영들의 안광이 번뜩였다. < 65장 동창(東廠) (2) > 끝 < 66장 황궁의 숨겨진 힘 (1) > 어두운 밤, 구름에 반쯤 가려진 보름달이 하얗고 영롱하다. 아직 초저녁에 불과하기에 황궁 전체에 등불이 밝아졌다. 용정궁에는 수많은 건물들이 있었는데, 황후들의 궁전부터 시작해 황자, 관료들의 근무처 여러 역할에 맞게 적재적소의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용정궁의 동쪽 성 내곽 쪽에는 동창의 환관들이 기거하는 당이 있고,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동창의 식객들이 머무는 객당이 자리했다. 그런 동쪽 내곽 쪽으로 향하는 열 명 가량의 인원이 있었다. 아홉 명은 동창 환관의 복장을 하고 있었고, 한 사람은 금의위의 갑주를 입고 있는 군관이었는데 바로 천여운이다. -움찔! 주변에서 이 열로 걷고 있는 환관들이 이동하는 내내 천여운의 눈치를 보았다. 대당두의 말에 의하면 이야기가 잘 되었다고 했는데, 그 말도 안 되는 능력을 생각하면 여전히 두려웠다. '저, 정말 이 자를 데려가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나머지 열 명의 환관들이 천여운이 죽인 윤 백호의 시신을 처리하느라 늦고 있다. 그걸 생각하면 솔직히 이 자를 믿기 힘들었다. 그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누군가는 신나게 떠들고 있다. "이렇게 대협과 같은 고수가 저희 동창에 한 손 보태주신다고 하니, 공공께서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요호호호." 다른 환관들과 달리 대당두는 한 건 했다는 생각에 들떠 있었다. 무위가 짐작가지 않는 절대고수를 초빙했으니 공공께서 크게 치하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끄럽군.' 이렇게 말이 많은 자는 허봉 이래로 처음 보는 것 같다. 애써 한 귀로 흘리고 있지만 간드러지는 이 웃음소리를 참기 힘들었다. 점차 짜증이 심해지던 찰나에 동창 환관들이 머무는 숙소이자 근무처인 동당의 건물이 보였다. "저깁니다." 대당두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 커다란 건물들이 있는 장원이 보였다. 황궁 내에서도 무소불위의 권력의 중심에 있다고 하는 동창답게 규모가 굉장했다. '족히 이삼천 명은 수용할 수 있겠구나.' 대명제국의 황궁이 환관들로 넘쳐난다는 말이 그냥 생긴 것이 아닌 듯 했다. 대당두를 따라서 동당의 입구로 갔다. 입구에서 대당두가 그곳을 지키고 있는 경비 병사들에게 물었다. "공공께서는 퇴궁해서 돌아오셨느냐?"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흐음, 늦으시는구나." 평소라면 저녁이 되기 전에는 퇴궁해서 복귀하는데, 이 시간까지 오지 않았다는 것은 아무래도 업무가 길어지는 듯 했다. '성왕 전하가 복귀한 것 때문에 그런가?' 그렇지 않아도 성왕 주태겸이 특사단의 명을 마치고 돌아왔다고 들었다. "그럼 오 첩형께서도 아직 오지 않았겠구나." "그렇습니다." 예상대로였다. 동창의 제독인 임 공공의 오른팔이라 할 수 있는 오 첩형은 늘 곁에서 그를 보필한다. 그도 없다는 것은 여전히 퇴궁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아아....' 대당두가 옆에 서있는 천여운의 눈치를 보았다. 당장에 임 공공에게 천거해주겠다며 설득해서 데려왔는데 그가 자리에 없으니 말이다. '이를 어찌하지. 공공이 계시지 않는다면 동당으로 들일 수 가 없는데.' 적어도 이 인자인 첩형의 허가가 있어야 안으로 들일 수 있다. '어떡하지? 아.....' 천여운은 무덤덤하게 있었지만 괜히 불안했다. 고민하던 대당두가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에이. 그렇다면 금 첩형께 데려가서 먼저 알려드리는 게 좋겠다. 어차피 이런 고수를 공공께서 마다할 리도 없을 테니.' 금 첩형은 임 공공의 왼팔이면서 동당과 객당 등 내부적인 일을 책임지는 자였다. 주간에는 동당에 있지만 저녁부터는 늘 객당에 있었다. 어차피 그를 초빙하게 되면 객당에서 머물게 될 터이니, 금 첩형에게 먼저 아뢰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저.....나으리. 아직 공공께서 퇴궁하지 않아서 그런데 혹시 괜찮으시다면 먼저 객당에 있는 첩형부터 뵙는게 어떨까요?" 조심스러운 대당두의 물음에 천여운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부터 객당에 있는 식객들을 살펴보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에 대당두가 다행스러워하면서 천여운에게 따라오라고 했다. "이쪽으로 가시지요."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객당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객당 방향으로 향하던 천여운이 갑자기 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나으리?" 대당두가 의아해하며 물었지만 천여운의 눈빛은 왠지 모르게 심각했다. '뭐지? 이 이질적인 기운은.....'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이질적인 기운들이 그의 기감을 어지럽혔다. *** 동쪽 외곽에 있는 동당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북쪽 장원. 이곳의 현판에는 동당객당(東黨客黨)이라 적혀있다. 객당 내의 본당 건물 앞의 마당에 삼십여 명의 사람들이 양 쪽으로 대치하고 서서 누군가를 바라보고 서있었다. 본당의 대청 위의 상석에는 오른쪽 뺨에 길게 그어진 검상 이 있는 애꾸눈의 환관 복장의 중년인이 앉아있었다. 여느 환관들과 다르게 분칠도 하지 않은 자였는데, 풍기는 기세가 심상치가 않았다. "....가장 뛰어난 자들로 선별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앞에서 또 다른 환관이 보고를 하고 있었다. 내용을 들어보면 뭔가 계획을 짰는데 이에 동원될 고수들을 말하는 듯 했다. 마당에서 대치하고 있는 이들이 바로 그 고수들이었다. 황궁 하급 무관의 관복을 입고 있었지만 제각각 풍기는 분위기가 적어도 절정의 고수들 이상으로 이루어진 자들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유독 눈을 굴리면서 눈치를 보는 한 사람이 있었다. 흉터투성이에 험상궂은 얼굴의 사내였다. 겉모습만 보면 안하무인일 것 같은 외모와 다르게 식은땀마저 흘리면서 긴장된 기색이 역력한 이 자는 다름 아닌 허봉이었다. '으으, 이거 어쩌지?' 천여운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따라붙는 허봉이다. 암종의 대주들과 마찬가지로 간자들 중의 한 사람의 추적을 맡은 허봉은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객당으로 단번에 진입할 수 있었다. '멍청이. 괜한 짓을 해가지고.' 넉살이 좋은 허봉은 전문가들인 암종의 대주들과 다르게 황궁으로 오는 도중에 대담하게도 자신이 맡기로 한 자와 직접적으로 접촉을 했다. [혹시 출세에 관심이 있소?] 이레 동안 그 간자는 허봉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를 동창에 초빙했다. 뭔가 일이 잘 풀린다고 생각한 허봉은 신이 나서 동창의 객당에 입성했는데, [무공도 뛰어나고 인상이, 흠흠 아니 기골이 듬직한 게 마음에 드는구나. 오늘 유시 중엽에 본당 앞으로 나오거라.] 공교롭게도 어떤 정보를 캐서 탈출하기도 전에 그들에게 차출되고 말았다. 뭔가 이 사실을 천여운에게 알려야 할 것 같은데 분위기 상 도저히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자신과 함께 차출된 자들의 무공도 보통이 아니었지만 저기 대청 위에 앉아있는 금 첩형이라고 하는 환관 같지도 않는 자는 무위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여기만 벗어나면 어떻게든 탈출하자.' 저들의 계획만 들으면 후에 뒷감당이 힘들 것 같았다. 허봉은 기회를 엿보기로 결심했다. 한편 대청 위에서 여전히 인상을 잔뜩 쓰고 있는 금 첩형이라 불리는 환관은 뭔가를 회상하면서 곱씹고 있었다. -스윽! 그는 자신의 오른쪽 뺨에 난 자상을 계속 매만졌는데 이것은 오래된 상처가 아니었다. 아주 최근, 그것도 불과 한 시진 전에 생긴 것이었다. '빌어먹을 아직까지 위치가 확실하지도 않은데 갑자기 계획을 서두르라니.' 원래 그의 계획은 확실하게 그곳을 알아낸 후에 행하는 것이었다. 제 일 황자인 영왕 주태윤과의 관계도 돈독해졌고 잘 진행 되던 차였다. 그런데 갑자기 태자 책봉식이 단오제로 정해졌다면서 계획을 앞당기라는 말에 반론을 제기하다가 상처를 입고 말았다. [수호전의 위치도 확실하지 않고 전임자도 그들에게 방심했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혹 폐검곡에서의 일 때문에 너무 서두르다간…] -촥! [큭!] [도조문주 금예. 이제 네놈은 본좌의 소관이다. 본좌는 토를 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문에서 내려온 명령에 복종해라.] [……알겠습니다.] 결국 명령에 굴복해야만 했다. '여섯 문주들 중에서 제일 미친놈이라고 하더니 딱 그 짝이구나.' 명령은 그렇다 쳐도 설마 황궁에서 활동하고 있는 자신의 얼굴을 건드릴 줄은 몰랐다. 그것이 그를 굉장히 불쾌하게 만들었다. 어차피 오늘 밤 임무를 마치고 나면 더 이상 황궁에 있을 일은 없었지만 그 동안 투자한 시간이 헛되게 느껴졌다. ".....이상입니다. 금 첩형." 보고를 마친 환관이 조용히 그의 눈치를 보았다. 하명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금 첩형은 분노를 삭이고 있는지 계속해서 인상을 쓰고서 딴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라고 빨리해야 여길 벗어나는데 왜 저리 멍을 때리는 거야?' 마음이 조급해진 허봉이 살짝 기침 소리를 냈다. "흠흠!" 그런데 그가 기침 소리를 내는 순간에 금 첩형을 바라보고 있던 삼십여 명의 무관들의 표정이 사색이 되고 말았다. '엥? 왜, 왜 그러는 거지?' 알 수 없는 반응에 허봉이 의아해했다. 하지만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멍하게 인상을 쓰고 있던 금 첩형이 정신을 차리더니, 주위를 둘러보면서 낮게 깔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누구인가? 지금 누가 기침소리를 내었어?" 워낙 정색하면서 하는 말에 삼십여 명의 무사들이 안절부절 시선을 돌렸다. 이에 허봉은 뭔가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젠장!' 뭔가 일이 잘 풀린다고 생각했다. 일단은 여기서 자신이 했다고 말하면 일이 복잡해질 것 같았기에 시치미를 뗐다. 그러자 금 첩형이 더욱 언성을 높이며 소리쳤다. "누가 기침소리를 내었는가 말이야!" 허봉은 어이가 없어졌다. 고작 기침 소리에 이리 정색하면서 화를 낼 줄은 몰랐다. '아니. 이거 완전 미친 놈 아니야.' 그래도 끝까지 모른 척을 하려고 했는데 난감하게도 삼십여 명이나 되는 무관들이 조용히 허봉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헉! 이, 이 의리도 없는 작자들 같으니.' 덕분에 금 첩형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에게로 향했다. 허봉이 식은땀을 흘렸다. 기침 한 번에 모든 일이 틀어지게 생겼다. 잠시 고민하던 허봉이 고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첩형." 허봉이 사죄를 하자 금 첩형의 옆에 있던 환관이 눈치를 보다 수습하려 했다. 그렇지 않아도 출타를 했다가 돌아와서 심기가불편한 것을 알고 있었다. 평소에도 화가 나면 수하들에게 손부터 나가는 자였다. ".....첩형 나으리. 무충이라는 자온데, 오늘 처음 식객으로 초빙되어서 아직 아무 것도 잘 모릅니다. 부디 너그..." 환관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금 첩형이 그것을 자르고 말했다. "신참? 허어, 참으로 딱하구나. 본 첩형이 지금 고심 중에 있거늘 어찌 기침을 할 수 있느냐. 이 미련한 것아." '젠장.' 허봉은 일단 무조건 사죄하는 시늉을 했다. 허리를 더욱 숙이며 외쳤다. "송구하옵니다. 첩형.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사실 이 정도로 빌었으면 대충 넘어갈 만도 했지만 금 첩형의 심기는 최악으로 불쾌한 상황이었다. 마침 그 화를 풀고 싶던 차에 잘되었다고 여겼다. "본 첩형이 가만히 보니 네놈 머릿속에는 군율이라는 것이 없구나. 무관이라는 자가 참으로 한심한지고. 이 동창이라는 곳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마." 뭔가 말하는 것이 불길했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벌어지고 말았다. -팟! '헛?' 금 첩형의 신형이 대청에서 튕겨져 나오며 단숨에 허봉을 향해 날아와 그의 머리통을 깨부술 기세로 일격을 날리려 했다. 워낙 쾌속한 일수였지만 처음부터 긴장하고 있던 허봉은 재빨리 몸을 뒤로 날려서 그것을 피해냈다. "이놈이 감히 피해?" 가볍게 날린 일격을 피해내자 더욱 분노한 금 첩형이 제대로 된 초식을 펼쳤다. 그가 두 손으로 조법의 형태를 갖추더니 단숨에 허봉에게로 파고들었다. 어찌나 쾌속한지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허봉의 육안으로는 그의 움직임이 파악되지 않을 정도였다. '제, 젠장!' 그의 가슴으로 파고드는 날카로운 손톱에 얼굴이 사색이 되려는 찰나였다. -파파파팍! "아닛?" 갑자기 누군가 허봉의 앞으로 끼어들어 그의 조법을 막아냈다. 고절한 초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는 너무도 쉽게 조법을 막아냄과 동시에 바로 반격까지 가했다. -촤촤촤촤촤! 심후한 공력이 실려 있는 검결지가 화려한 궤적을 그리며 금 첩형의 가슴 요혈들을 찔렀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랐지만 금 첩형 또한 굉장한 고수였다. 당황해하지 않고서 독특한 보법을 펼치며 검초의 궤적을 피 하면서 기회를 엿보려했다. '엄청난 검초다.' 스물네 검식으로 이루어진 화려한 검결에 금 첩형은 숨을 돌릴 틈새 없이 움직이면서 초식을 피해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이마를 찔러오는 검식을 피한 그는, -휙! 몸이 기이한 각도로 꺾이며 그 자의 심장을 향해 일조를 날렸다. '이런 공격은 처음 봤을거닷!' 허리를 뒤로 직각으로 꺾었다가 바로 튕겨지듯 공격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금 첩형은 이것을 선 보였다. 이 일격에 지켜보는 모두가 놀라하는데, 이 자는 오히려 가소롭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웃어?' 그의 손톱이 심장을 파고드는데 말이다. -콱! '이, 이걸 잡아?' 놀랍게도 금 첩형의 조법이 심장을 파고들기도 전에 예측이라도 한 것처럼 이 자가 그의 팔목을 낚아채버렸다. 그리고는 그것을 꺾으려고 하는지 왼손을 들어 올려서 밑으로 내리쳤다. "젠장!" 금 첩형이 십성 공력으로 끌어올려 오른팔에 반탄강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 자가 내리치는 공력은 그의 상상을 훨씬 초월했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공력이! 허억.' -우드드득! 뿌지직! "끄아아아아아악!" 팔이 꺾여버린 정도가 아니라 내리치는 순간에 팔목 째로 뜯겨나가 버렸다. 뼈가 부서지고 팔이 뜯겨지는 엄청난 고통에 금 첩형이 비명을 질렀다. "끄어어억!" 너무도 고통스러웠지만 금 첩형은 그것을 참아내고 빠르게 보법을 펼쳐서 뒤로 열 보 이상 물러났다. 금 첩형이 피가 흘러내리는 팔목을 붙들고 정체불명의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 금의위?" 그 자는 금의위의 갑주를 입고 있었다. 하마터면 죽을 뻔 했던 허봉이 놀라서 그 자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두 눈이 왕방울만하게 커졌다. 사전에 인피면구들을 미리 보지 않았더라면 모를 뻔했다. '교주님!' 그는 바로 천여운이었다. < 66장 황궁의 숨겨진 힘 (1) > 끝 < 66장 황궁의 숨겨진 힘 (2) > 현경의 극에 오른 천여운의 기감 반경은 거의 십 리에 이를 정도였다. 물론 거리가 멀어질수록 상대의 기를 정확하게 읽는 것은 힘들지만 가까울수록 특유의 기운으로 누구인지조차 구분할 수 있게 된다. 동당객당에서 허봉의 기운을 감지한 천여운은 급히 그를 구하기 위해 같이 이동하던 대당두와 환관들을 버려두고 왔다. 덕분에 목숨을 구제받은 허봉이 환해진 얼굴로 전음을 보냈다. [교주님!] [잘했다. 허봉.] 천여운이 그런 그를 바라보며 칭찬했다. 그를 구하기 위해서 금 첩형과 겨루게 되었는데, 그 덕분에 그가 극도육무문의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느 환관들과 달리 양기가 넘치는 내공에 극도신무를 익히고 있었다. 조법으로 변형되었다고는 하나 특유의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초식의 움직임만큼은 절대로 속일 수가 없다. [네? 잘했다뇨?] 그들이 수상하다는 것만 인지하고 있던 허봉이 의아해했다. [네가 극도육무문의 간자를 발견했잖느냐.] [헉? 제가요? 그, 그럼 저 환관 놈이 극도육무문?] 전혀 몰랐었던 허봉이 놀라서 금 첩형을 힐끔 쳐다보았다. 팔이 뜯겨져 나간 덕분에 흐트러진 내기를 가다듬느라 몸에서 하안 김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때 천여운이 그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전음을 보냈다. [허봉. 내 신호가 떨어지면 도망치거나 숨을 준비를 해라.] [네?] 영문을 알 수 없는 천여운의 말에 허봉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천여운이 한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이가 한 명 더 있었으니, 금 첩형이었다. "끄으으으." 뜯겨져나간 팔목의 부분을 지혈하고 있는 금 첩형의 안색이 좋지 않다. 그는 본능적으로 천여운과 손을 섞으면서 그가 절대로 금의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파악했다. '금의위 중에 저런 전율적인 고수가 존재할 리가 없다.' 금의위들 중에서 무위로는 최고라 불리는 북진무사조차도 그보다 한수 떨어진다. 그렇다는 것은 적어도 화경의 극에 이르거나 그보다 훨씬 상위 고수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뭔가를 추측하기는 힘들었다. '황궁의 인물은 아니다. 대체 누구....엇?' -오싹! 그때 금 첩형의 표정이 굳어졌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이질적인 기운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주 불길한 기운이었다. 금 첩형이 다급히 주위의 하급 무관 옷을 입고 있는 식객들을 향해 소리쳤다. "뭔가 온다! 당장 병장기를 빼들고 경계하라!" "네? 그게 무슨?" "말대꾸하지 말고 어서!" 처음에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절대고수인 천여운을 경계하려한 그들이었다. 그러나 금 첩형의 다급한 반응에 뭔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식객들은 재빨리 각자의 독문병기를 빼들었다. -챙! 챙! 그들 역시도 절정 이상으로만 차출된 고수들이었지만 천여운이나 금 첩형에 비하면 기감이 약했다. 하지만 그들이 그 이질적인 기운을 감지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슉! 슉! 슉! 귀를 자극하는 뭔가를 딛는 소리. 그리고 무인이라고 하기에는 소름 돋는 이질적인 기운. “와, 왔다." "모두 조용히 해!" 금 첩형의 외침에 일순간 주변에 정적이 감돌았다. -휘이이잉! 싸늘한 기운이 감돌면서 바람이 일어나며 담장 벽에 걸려있 는 횃불들이 일제히 꺼졌다. 횃불 빛이 사라지고 주변이 일순간에 어둠으로 물들었다. 어두워진 주변의 담장 벽 위를 비롯한 건물의 천장들에 펄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인기척들이 하나 둘씩 나타났다. '불길한 기운들이다.' 금 첩형이 경계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인기척들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어둠 속에서 수많은 안광들이 그들을 포위한 채 지켜보고 있었다. 달빛에 비추는 그들의 눈빛은 독특하게도 노란 빛을 띠었다. '뭐, 뭐지?' '황궁 내에 이런 자들이 있었나?' 불길한 기운들을 가진 인영들에게 둘러싸인 삼십여 명의 무관들은 긴장했는지 병장기를 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에 대한 불안함은 공통적인 심리일 것이다. -스륵! 그때 마당의 한 복판으로 검은 인영 하나가 나타났다. 구름 속에 가려져 있던 보름달이 살짝 모습을 드러내며 검은 인영의 얼굴을 반쯤 비췄다. 곧게 올린 희끗한 머리에 다소곳하게 두 손을 모으고 있는 붉은 비단 옷을 걸치고 있는 궁녀였다. "영 상궁?" 금 첩형이 놀란 눈으로 입을 뗐다. 동당의 업무를 주로 맡아서 했지만 큰 행사 때는 건안궁에 입궐하였기에 그 정체를 모를 리가 만무했다. 궁녀의 정체는 황궁 궁녀들의 서열 2위라 할 수 있는 부제 조상궁 영월이었다. 황실 내전 창고의 출납을 담당하는 책임자였다. '설마?'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위를 살펴본 그는 내심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담장 위에 마치 짐승처럼 두 손과 발을 모은 채 대기하고 있는 노란 안광의 주인들은 전부 궁녀들이었다. -웅성웅성! 식객인 무관들 역시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궁녀들에게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기운은 근본적으로 불길하면서 그들을 긴장케 만들었다. 절대로 평범한 궁녀도 아니었고 무인이라고 하기도 애매했다. '......설마 이들이 수호전의 사람들이란 말인가?' 황궁의 숨겨진 힘, 황궁 수호전(皇宮 守護殿) 황궁에 침투해온 이래로 수호전을 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했다. 금 첩형은 수호전의 고수들은 무림인들조차도 범접할 수 없는 무위를 지녔다는 풍문에 의거해서 금의위를 비롯해 서창 등 무력집단을 주시했다. 그러나 설마 나인이라 할 수 있는 궁녀들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만약 이들이 정말로 수호전의 사람들이라면 여기서 부딪치는 것은 막아야 한다. 더군다나....' 오른팔을 잃었기에 공력이 절감한 상태였다. 더군다나 정체불명의 금의위도 처리하지 못했는데,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는 부제조상궁 영월을 상대하는 것은 더더욱 무리였다. -꽈악! 금 첩형이 자신의 상처부위를 꽉 쥐고서 말했다. "영 상궁께서 어인 일로 이곳 동당의 객당까지 납시었소?" 일반적인 환관들의 직위 체계라면 부태감 격에 속하는 금예는 동급 직위라 할 수 있겠지만 동창의 품계는 높은 관료직과 동등한 종 3품에 해당한다. 부제조상궁 영월이 담담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황궁에 쥐새끼들이 들어왔는데, 그들 중에 가장 위험한 자가 이리로 향하여 쫓아왔더니 재미있는 광경을 보게 됩니다." "재미있는 광경이라니요?" "예전부터 새겨보고 있었는데 역시 동당의 객당은 복마전이구려." 복마전 (伏魔殿). 마귀가 숨어있는 전각을 말한다. 나쁜 일이나 음모가 끊임없이 행해지고 있는 악의 근거지라는 뜻이다. 몰아붙인다는 생각에 금 첩형이 인상을 쓰며 대꾸했다. "복마전?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것이오? 이곳은 동창의 영역이오. 아무리 부제조상궁이라고 해도 함부로 난입해도 되는 곳이 아니오!" 황궁의 규정상 황명이 아니라면 각 당의 출입은 그 책임자의 권한에 달려있었다. 금 첩형은 황궁 법도를 핑계 삼아 그들을 내보내려는 것이었다. 물론 그 역시도 이것이 통할지는 미지수였다. "본 상궁은 나인들의 수장으로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그럼?" "그대가 그리 찾아 해매던 황궁 수호전의 삼태상의 일인으로 찾아온 것이오." "수호전!" 놀랍게도 부제조상궁 영월은 스스로의 정체를 과감하게 밝혔다. 황궁 수호전이 정체를 드러내는 의미는 단 하나였다. 황궁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황궁에 위협을 가하는 자를 처단 할 때였다. ".....그대가 수호전의 삼태상일 줄은 몰랐구려. 영 상궁." "모두가 늘 그리 말하지요." 영월의 오른손에 기운이 응집하고 있었다. 이를 감지한 금 첩형이 다급히 자신의 팔을 들어 보이며 그녀에게 말했다. "영 상궁! 본 동창을 복마전이라고 모는 것은 과한 처사인 것 같소. 보시오. 본 첩형의 뜯겨나간 팔을 보면 모르겠소. 우리도 당했소이다." 팔이 뜯겨나가지 않았더라면 해명거리가 없을 뻔했다. 덕분에 잘됐다고 여겼는데 부제조상궁 영월은 전혀 개의치 않는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부상을 당한 것이 어떻다는 거죠? 아까도 얘기했듯이 그대가 황궁에 입궐하는 순간부터 계속 예의주시 했었다고 말했을 텐데요. 금 첩형." "큭! 영 상궁! 지금 본 첩형을 핍박할 것이 아니라 저들....엇?" -휘잉! 금 첩형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금의위를 가리키려 했는데 보이지 않았다. 횃불이 꺼지면서 잠시 어둠이 들이닥치기 전만 하더라도 분명 마당의 한 가운데에 있던 금의위가 없었다. 더군다나 기침을 했던 그 신입 식객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 이놈들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려 하던 금 첩형이 당혹스러워했다. 그러든가 말든가 부제조상궁, 아니 황궁수호전의 삼태상의 일인인 영월이 주위를 포위하고 있는 노란 안광을 내뿜는 궁녀들에게 명했다. "수호전의 법도에 따라 전부 제압해라. 반항할 경우에 죽여도 좋다." "충!!!" -슉! 슉! 슉!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궁녀들이 일제히 마당 내부로 신형을 날렸다. 긴장하고서 상황이 어찌될지 경계만을 하고 있던 식객들이 전의를 일으키며 병장기를 휘둘렀다. "맞서 싸워라!" "황궁 수호전이라고 해도 계집들이다!" 궁녀들에게서 풍겨지는 불길한 기운이 마음에 걸렸지만 어차피 그들과 부딪칠 것을 예정에 두고 있던 무관들이었다. 아직 싸워보지도 않고 전의를 상실할 만큼 약한 이들도 아니었다. "하압!" 한 무관이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궁녀를 향해 도초를 펼쳤다. 도기가 실린 도초가 절묘한 도결을 그리며 다섯 방향으로 갈라져 궁녀를 베려했다. -촤촤촤촤촥! 인정사정없이 베어오는 도초에 놀랍게도 궁녀는 적수공권으로 쇄도해왔다. 두 손에 기(氣)를 두른 것도 아니었는데, 도기가 실려있는 도결을 향해 궁녀가 맨손으로 독특한 장법을 펼쳤다. '이 계집이 정녕 미쳤구나.' 대담함에 손에 힘이 빠질 뻔했지만 지금 궁녀들은 적이었다. 무관은 독한 마음으로 도초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깡! 깡! 깡! 놀랍게도 그녀의 두 팔목을 단숨에 베려했던 도가 철구에 부딪친 것마냥 쇳소리와 함께 뒤로 튕겨나갔다. 오히려 도를 쥐고 있는 손바닥이 얼얼해질 지경이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영문을 알 수 없어하는데 궁녀의 안광을 번뜩이며 손바닥이 그의 가슴을 때렸다. -퍽! "끄아악!" 가슴에 일격을 당하는 순간 화기(火氣)가 무관의 몸을 관통 했다. 오장육부가 타들어가는 고통과 함께 무관의 벌린 입에서 새까만 연기가 흘러나왔다. 괴이한 현상이라 할 수 있었다. "이, 이 계집들 뭔가 이상해!" 이런 현상을 겪는 것은 다른 무관들도 마찬가지였다. 궁녀들은 무관들보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전사처럼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깡! 깡! “거, 검이 안 통해?" 그런데 그녀들의 치맛자락을 흩날리는 것과 달리 그녀들은 마치 갑주를 걸친 것처럼 기가 실린 공격에도 끄떡도 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통하는 공격은 강기(罡氣)를 응집한 것만이 통했다. -촥! 무관들 중에는 초절정의 고수들도 몇 명이 있었는데, 주위에 도검이나 기를 통한 공격이 통하지 않는 것을 보고서 단번에 강기를 일으켰다. '베인다!' 다행스럽게 강기를 일으킨 공격은 먹혔다. 몸이 단단하기는 했지만 금강불괴 수준은 아닌 듯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공격이 먹힌 것이 아니었다. "이, 이런 미친!" 팔이 잘려나갔는데도 궁녀는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는지, 특유의 노란 안광을 섬뜩하게 번뜩이며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 계집들은 괴물이라도 된단 말인가?' -타타타탁! 놀란 나머지 초절정 고수인 그마저도 보법을 펼치며 거리를 벌렸다. 함부로 대응하기에는 너무 위험했다. "후우...후우..." -고오오오오! 갈수록 짙어져가는 노란 안광에 몸에서 열기마저 느껴지는 궁녀들이 심장을 옥죄이는 공포처럼 그들을 향해 무섭게 다가왔다. 불사신이라도 되는 것 같은 이들의 기세에 식객들의 얼굴이 서서히 질려갔다. 반면 이를 보게 된 금 첩형의 눈빛은 기묘하게 반짝였다. '찾았다! 이것이야!' < 66장 황궁의 숨겨진 힘 (2) > 끝 < 66장 황궁의 숨겨진 힘 (3) > -촥촥! "젠장!" 강기로 팔이 잘려나갔는데도 미친 듯이 달려드는 궁녀에게 초절정의 고수가 검강을 일으킨 검으로 검초를 펼쳤다. 그의 검강이 불사신처럼 고통도 호소하지 않고 달려드는 궁녀의 몸을 난자했다. 하지만 궁녀라고 해서 자신의 몸을 벨 수 있는 강기에 무턱 대고 달려들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팟! 쾅! '피했어?' 궁녀는 몸을 틀어서 강기를 피해낸 후에 빠른 몸놀림으로 그의 주변을 빙빙 돌면서 허점을 찾으려했다. '무슨 움직임이!' 궁녀의 움직임은 일반적인 보법과는 너무 달랐다. 마치 날렵한 살쾡이처럼 이리저리 튀어나가면서 검초를 피해냈다. 상대하기 껄끄러웠다. '다리나 목을 베어야 해.' 팔을 베어서도 저런 움직임을 보인다면 다리를 멈추게 하거나 목을 베는 수밖에 없었다. 고통을 어떻게 견디는지는 몰라도 정말로 불사신일 리는 없다. -촤촤촤촥! -팟! 팟! 팟! 궁녀는 그의 검초에 적응했는지 점차 익숙하게 피해냈다. 초절정의 고수는 이것을 이용하기로 했다. 계속 반복적으로 검초를 펼치다가 변초를 쓴다면, 이에 적응한 궁녀의 방심을 끌어낼 수 있으리라. '이때다!' 궁녀가 그의 검초가 닿기도 전에 자세만 보고 왼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바로 그 순간에 초절정의 고수가 검세를 꺾으며 궁녀의 목을 향해 검을 베어 들어갔다. 궁녀가 놀라서 피하고 싶었지만 관성의 힘에 의해 멈출 수가 없었다. "아!" -촤악! 초절정의 고수가 그녀의 목을 베어내는데 성공했다. 목이 베이자 불사신처럼 계속해서 움직일 것 같던 궁녀의 몸이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으로 쓰러졌다. "됐다! 불사신은 무슨..." -퍽! 퍽! "크헉!" 궁녀를 죽였다는 생각에 환희에 차던 초절정의 고수가 엄청난 통증에 비명을 질렀다. 고통은 잠시였고 당혹감에 뒤를 쳐다보니 궁녀 두 명이 그의 등과 옆구리에 일격을 먹였다. 내부로 파고드는 뜨거운 화기에 피가 들끓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물론 그것은 단순한 기분이 아니었다. -치이이이익! "끄으으윽!" 초절정 고수가 기겁을 하면서 내공으로 몸을 보호했지만 이미 늦었다. 오장육부로 파고든 화기가 그의 장기를 태우려들었다. 초절정의 고수가 있는 힘을 끌어내서 검강을 일으켜서 궁녀 한 명의 목을 베어냈다. -촥! 동료의 목이 베이자 등에 일 장을 먹인 궁녀가 그의 머리를 붙잡았다. -콱! "놔, 놔라....으, 으아아악!" 머리를 파고드는 화기에 초절정의 고수의 얼굴이 붉게 달아 올랐다. 무리해서 계속 강기를 일으키면서 기운을 소진한 초절정의 고수는 더 이상 반항할 수가 없었다. -팍! 팍! 그의 눈알이 뜨거운 화기에 검게 그을리며 터져버렸다. 궁녀들이 가지고 있는 이 화기는 단순한 양기라고 하기에는 이질적인 힘이었다. 말 그대로 순수한 화(火)의 기운이었다. -치치치치칙! "끄아아아악!" 사방에서 불에 지지는 듯한 매캐한 냄새와 함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숫적으로 열세인 데다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이 괴물 같은 궁녀들의 알 수 없는 힘에 무관들이 하나 둘씩 죽어갔다. 물론 모두가 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흥!" 한쪽 팔이 뜯겨나가 공력이 절감한 금 첩형이었지만 그는 화경의 극에 이른 고수였다. 궁녀들이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그의 눈에는 평범한 움직임에 불과했다. -휙! 휙! 휙! 궁녀 한 명이 그에게 달려들자 상반신만 살짝 움직여서 공격을 가볍게 피해냈다. 화가 났는지 궁녀가 인상을 쓰고서 변초를 쓰려했지만, -탁! “한 팔이 없다고 본 첩형을 우습게 여겼구나. 하압!" -콰직! 궁녀의 팔을 낚아챈 그가 날카로운 조법으로 그녀의 팔을 잡고서 뜯어내버렸다. 어깨까지 통째로 뽑아버린 금 첩형이 그녀의 복부를 발로 걷어찼다. -퍽! 쿠당탕! 엄청난 공력에 궁녀의 몸이 뒤로 열 보가 넘는 거리를 날아가 바닥을 뒹굴었다. 아무리 고통에 강한 궁녀라고 하나 파고든 공력을 쉽사리 내보낼 수 없는지, 바닥에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켜 세우지 못했다. -찌이이이익! 금 첩형이 뜯어낸 궁녀의 팔목에 옷을 이빨로 찢어냈다. 맨살이 드러난 궁녀의 팔을 본 금 첩형의 눈이 환희에 차올랐다. "크크큭, 드디어! 드디어! 찾았구나!" 궁녀의 팔의 피부에는 놀랍게도 붉은 비늘 같은 것이 촘촘하게 올라와 있었다. 병장기와 검기를 막아낸 것은 바로 이 비늘이었다. 이것을 발견한 첩형은 환희에 차서 궁녀들과 싸우고 있는 식객들을 향해 소리쳤다. "역혈대라신공의 해금을 허한다." "충!"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싸우고 있던 무관들 중에 네 사람이 동시에 외쳤다. 이를 개의치 않고 궁녀들이 그들을 제압하기 위해 달려들었는데, 네 사람의 몸에 돌연 변화가 일어났다. -쿠득! 쿠득! 그들의 상체 근육이 기괴할 정도로 빠르게 부풀기 시작했다. 눈동자가 붉게 물들며 얼굴에 핏줄들이 울룩불룩 튀어 나와 흉측하게 변해갔다. "크르르르르!" 그 입에서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 모습에 근방에서 싸우던 몇 남지 않은 무관들조차 놀라 했다. 성인 남자의 신장보다 두 배 가까이 커진 네 명은 인간의 형상을 벗어난 괴물에 가까웠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이런 괴물들이 어떻게 식객들 틈에?" 아무 것도 모르는 그들로서는 마치 괴물들의 틈바구니 속에 낀 느낌이었다.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는 무관들과 달리 궁녀들은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다시 역혈대라신공을 펼친 무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콱! 역혈대라신공을 펼친 무인이 달려드는 궁녀의 발목을 낚아 챘다. 마치 그 모습이 거인이 소인을 잡은 것만 같았다. 그렇게 발목을 잡아낸 무인은 아등바등거리는 궁녀의 반대 쪽 다리를 잡고 찢어버렸다. -촤아아아악! 궁녀는 너무도 쉽게 몸이 반으로 찢겨지고 말았다. 궁녀를 너무도 잔인하게 죽여 버린 후에 포효하는 모습이 괴물 그 자체였다. "크와아아아아!" "히익!" 몇 안 남은 무관들은 도저히 이 공포를 이겨낼 수가 없었다. 그들은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 담장 쪽으로 경공을 펼쳤지만 그들을 궁녀들이 가로막았다. "비, 빌어먹을! 이 괴물들이!" -촥! 깡! "젠장!" 무관들이 어떻게든 그녀들을 물리치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병장기가 통하지 않았다. 적어도 강기를 다룰 줄 알아야 상처를 입힐 수가 있는데, 그나마 강기를 다를 줄 아는 초절정의 고수 세 명은 죽고 나머지 네 명은 저런 괴물이 되어버렸다. "크와아아아아!" 포효하면서 괴물 같은 능력을 보이는 역혈대라신공의 무인들을 삼태상의 일인인 영월이 인상을 찡그리면서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에게 금 첩형이 득의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본 첩형에게 비장의 수가 없을 줄 알았소? 흐흐흐." ".....역시 네놈들은 복마전이 틀림없구나." "그놈의 복마전 소리는 그만두고 항복한다면 궁녀들과 그대의 목숨을 보전하게 해줄 수 있소." 금 첩형의 목적은 이들을 죽이는 것이 아니었다. 황궁의 숨겨진 힘이라 불리는 수호전의 위치와 그들이 가진 이 이질적인 힘의 근원을 원했다. 탐욕스러운 눈빛을 보이는 금 첩형에게 영월이 혀를 차면서 말했다. "고작 저런 인간의 탈을 벗은 짐승 따위로 수호전을 넘보려고 하다니. 쯧쯧." "뭐라?" -딱! 영월이 손가락을 튕기자, 그녀의 뒤에서 면사포를 쓴 두 명 의 궁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붉은 문양이 그려진 푸른 비단 겉옷을 입고 있었다. "감찰상궁?" 복장을 보아하니 부제조상궁을 보좌하는 감찰 상궁들이 틀 림 없었다. 면사포의 틈으로 보이는 노란 안광을 보니 다른 궁녀들과 마찬가지로 이질적인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그녀들의 손에 들려있는 긴 연검이었다. "궁녀들을 도와서 저 인간의 탈을 벗어난 짐승들을 죽여라." -이 태상의 명을 받듭니다." -팟! 명이 떨어짐과 동시에 그녀들의 신형이 바닥을 박차며 단숨에 역혈대라신공을 펼치는 무인들을 향해 쇄도했다. "크르르르르!" 역혈대라신공을 펼치는 무인들이 빠르게 조법을 펼치며 그녀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감찰상궁은 다른 궁녀들보다도 훨씬 빠른 몸놀림으로 바닥을 이리저리 튕기듯이 신형을 옮기며 그것을 피해냈다. -슉! 슉! 슉! "크르르르, 이 쥐새끼 같은 년이!" 화가 난 역혈대라신공의 무인이 날카로운 손톱에 조강(爪罡)을 일으켜서 좀더 고차원적인 조법을 펼쳤다. -휙! 그러나 감찰상궁은 이들의 공격을 피해낸 후에 연검으로 팔을 내리쳤다. "크크크크! 소용없다!" 역혈대라신공을 펼치면 몸이 강도가 단단해진다. 화경의 고수 이상이 펼치게 되면 금강불괴에 가깝지만 그들 역시도 초절정의 고수였기 때문에 검기 정도는 통하지 않는다. 그러나, -촤악! "크아아악!" 절대로 벨 수 없을 것 같던 두꺼운 팔을 연검이 파고들었다. 완전히 뼈까지 베어내는 데는 실패했지만 감찰상궁의 연검을 확실하게 통했다. -치이이이이! 역혈대라신공을 펼친 무인이 놀라서 그녀의 검을 보니, 불에 달군 것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더군다나 희미하게 푸른빛을 일렁이는 것을 보면 강기도 일 으킨 듯 했다. 다른 궁녀들과 달리 이들은 무공마저 제대로 익힌 자들이었다. "크아아아아아!" 위험하다고 판단한 역혈대라신공의 무인이 그녀를 제압하 기 위해 달려들려 했으나, 미처 간과한 것이 있었다. 상대는 감찰상궁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틈이 생겨나자 주위에 있던 궁녀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일격을 날렸다. -퍼퍼퍼퍼퍽! 아무리 단단한 육신이라고 해도 수많은 화기를 머금은 일장들이 중첩되자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크아아아아아!" 적을 위압하는 포효가 어느새 고통의 비명에 가까워졌다. '크윽! 수호전의 힘을 얕봤구나.' 역혈대라신공으로 상황이 반전되었다고 여겼던 금 첩형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궁녀들도 많이 죽었지만 네 명의 역혈대라신공을 펼치는 무인들만으로 제압하기에는 숫적으로 열세였다. 전임자의 실패도 있었기 때문에 수호전의 눈을 속이기 위해 소수만 내부로 잠입한 것이 오판이었다. '별 수 없구나. 우두머리인 영 상궁을 제압하는 수밖에.' 스스로 황궁 수호전의 우두머리인 삼태상 중 한 사람이라 밝힌 영월이었다. 그렇다면 그녀를 제압한다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으리라. '공력이 절감했으니 최고의 초식으로 단숨에 제압한다.' 마음의 결정을 내린 금 첩형이 왼손에 십성 공력을 끌어올렸다. 아주 잠깐 영월의 시선이 궁녀들과 역혈대라신공의 무인들이 싸우는 곳으로 향하는 순간, 그의 신형이 그녀에게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파팍! 콱! "크헉!" 시선이 돌아갔다고 생각한 그녀가 금 첩형의 기습 공격을 막은 것도 모자라, 목을 움켜쥐었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멀쩡했던 영월의 두 눈이 노란 안광을 띠고 있었다. "손버릇이 나쁘구나. 금 첩형." "캑....켁! 흐아아압!" 금 첩형은 다급히 조강을 일으켜서, 목을 움켜쥔 그녀의 손을 쳐내려고 했지만 청옥석이라도 내려치는 것처럼 꿈쩍도 안 했다. -까아아앙! "허억!" 궁녀들 때문에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엄청났다. 설마 강기마저 견뎌낼 정도의 강도를 지녔을 줄은 몰랐다. 영월의 두 눈에 짙은 살기가 일렁였다. "어리석은 자여. 역시 그대와 같은 복마전의 놈들은 굳이 살려서 데려갈 필요가 없겠구나. 그냥 죽거라." -꽈아아악! "끄어어억!" 금 첩형을 부러뜨리려고 하는지 그녀의 손아귀에 엄청난 힘이 들어갔다. 당장에라도 목이 비틀릴 것 같은 공포심에 사로잡힌 금 첩형의 선택은 간단했다. -불끈! 불끈! "응? 이건...." 붙잡고 있던 금 첩형의 목이 통나무처럼 굵어졌다. 그것도 모자라서 상체가 부풀어 오르며 얼굴에 징그러울 만큼 핏줄이 튀어나왔다. 역혈대라신공을 펼친 것이다. "어리석은!" 영월이 그가 완전히 역혈대라신공을 펼치기 전에 죽이기 위해 왼손을 들어올려 심장 쪽을 겨냥했다. 그녀의 왼손이 붉게 물들며 화기가 응집되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흠칫! '응?' 흉흉한 기운이 느껴졌다. 영월이 놀란 나머지 뒤로 신형을 날렸다. -쾅! 그와 동시에 역혈대라신공을 펼치는 금 첩형의 뒤로 공중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위에서 떨어진 그 자는 금 첩형의 머리를 움켜잡았다. -꽉! "누, 누구?" 갑자기 머리를 잡히는 바람에 당황한 금 첩형이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그의 머리로 엄청난 전격이 파고들었다. -파치치치치치치칙! "끄가가가가가가가각!" 온 몸에서 하얀 빛이 불똥처럼 튀어 오르는 것이 가관도 아니었다. 파고든 전격은 기혈을 역행하며 역혈대라신공을 펼치는 공력을 분산시키며 부풀던 그의 몸이 가라앉으며 두 눈의 색도 원래대로 돌아갔다. -부르르르! 전격은 가라앉았지만 그 여파는 남았기에 금 첩형의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머리털은 전부 타서 대머리가 되어버린 그였다. "이...이런.....미친......" 역혈대라신공을 펼치기도 전에 강제로 저지당한 것이다. 그가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돌렸더니 아까 전에 사라졌던 금의위가 서있었다. 바로 천여운이었다. "이놈 도망간 게 아니었어? 서....설마...." "이....이 비, 빌어먹을 새끼가....." -털썩! 금 첩형은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기절하고 말았다. 갑자기 나타난 천여운 덕분에 그를 죽이려던 것을 저지당한 수호전의 이 태상 영월이 불쾌하다는 듯이 말했다. "하아....어디로 갔나 했더니 숨어있었구나." 그녀는 천여운의 무력을 측정할 수 없으나 흉흉한 마성의 기운만은 뚜렷히 느껴졌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그를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천여운이 그런 그녀에게 당당하게 말했다. "이 자는 나의 것이오." "흥! 뭐가 어쩌고 저째? 본 태상에게서 도망간 줄 알았더니. 갑자기 나타나서 한다는 소리가....잠깐! 설마?" 순간 이 태상 영월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처음에는 그저 도망갔다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어, 어부지리를 노려?" 그랬다. 천여운은 이들이 서로 싸워서 전력이 소모하기를 기다린 것이었다. 그녀는 금 첩형이 어째서 욕을 하면서 쓰러졌는지 그제야 깨닫고 말았다. < 66장 황궁의 숨겨진 힘 (3) > 끝 < 66장 황궁의 숨겨진 힘 (4) > 이질적인 기운의 등장. 그 짧은 찰나에 천여운의 상황 판단 능력은 빛을 발했다. 만약에 그 자리에 천여운이 있었다면 극도육무문을 비롯한 궁녀들은 가장 위험한 인물인 천여운을 먼저 처단하기 위해 잠시 힘을 합쳤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잠시 몸을 숨김으로써 양측의 전력을 깎아내리는 어부지리를 취할 수 있었다. '황실의 숨겨진 힘이라......' 사실 이렇게 어부지리를 취했지만 천여운 또한 그들의 정체에 놀라워했다. 교주전에는 황실의 숨겨진 힘은 가늠하기 힘들기에 불가침 조약을 깨뜨리지 말라는 선대 교주들의 유지가 있었다. 확실히 그들의 힘은 일반적인 무공과는 궤를 달리했다. '독특한 힘이다. 마치....' "감히 황궁 수호전인 본 태상을 상대로 영악한 잔꾀를 펼치다니!" 자신과 수호전 소속의 궁녀들이 이용당했다는 생각에 노기가 치솟은 이 태상 영월이다. 이곳에 있는 무인들을 제압하기 위해 벌써 열 명 가까이나 죽었다.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도 죽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저 자에게 느껴지는 흉흉한 기운.' 그것이 그녀의 몸 안에 내재된 기운으로 하여금 경계심이 높게 만들었다. 더군다나 방금 전에 이상한 뇌전(雷電)과 같은 힘을 일으켜서 금 첩형을 단번에 제압할 정도의 실력자라면 정말 위험했다. -스스스! 검게 돌아왔던 영월의 눈동자가 노란 안광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에 붉은 아지랑이 같은 것이 피어올랐는데 뜨거운 화기였다. '일단은 대화로 교섭해볼까.' 모양새가 완전한 어부지리가 되었지만 사실 수호전에서 극도육무문의 간자를 죽이려고 하지 않았다면 최대한 모습을 숨기려 했던 천여운이었다. 후에 조용히 금 첩형을 빼내면 되기 때문이었다. "멈추시오. 그대와 싸우려고 하는 것이 아니오." "뭐? 싸우려고 하는게 아니다?" "그가 필요하기에 황궁에 왔을 뿐이지. 황궁과 적대하려는 것이 아니오." 화경의 극에 이르는 실력자라면 분명 극도육무문에서도 간부급에 해당하는 자이다. 그를 통해서 그들이 조약식 때 무엇을 꾸미는 지를 알아내려면 그를 살려서 데려가야만 했다. 천여운은 그녀에게 적의가 없음을 밝혔다. 그러나 오히려 역효과가 일어났다. "저 자가 필요해서 와? 무엄하구나. 황궁을 제 집의 안방처럼 생각하는 자로다." 천여운이 적대할 의사가 없다고 해도 황궁 수호전의 입장에서는 천여운은 침입자였다. 대명제국의 중심부까지 들어와서 제멋대로 누군가를 데려 가겠다고 하는데, 좋게 들릴 리가 만무했다. "실력도 그만큼 따라주는지 보자꾸나!" -팟! 영월의 신형이 앞으로 뻗어오며 천여운에게 일수를 뻗었다. 어찌나 빨랐는지 찰나의 순간에 앞으로 도달하여 목을 꿰뚫 으려고 했다. 그러나, -팍! 천여운은 가볍게 손을 들어 올리면서 그녀의 단순한 일격을 위로 쳐냈다. 첫 수는 당연히 막힐 거라고 예측을 했는지 그녀의 좌수가 우수를 쳐낸 천여운의 팔을 내리치려 했다. '화기?' 그녀의 좌수는 붉게 물들어 화기가 일렁였다. 화기가 실린 공격에 의해 무관들을 비롯해 역혈대라신공을 썼던 자들이 어찌 당하는지를 보았던 천여운은 신중을 기했다. '그렇다면....' -슉! 천여운의 좌수가 더욱 빠르게 움직여 그녀의 미간에 검결지를 찔러왔다. 당장 물러나지 않으면 팔을 앗아간다고 해도 이마가 꿰뚫려서 죽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영월은 천여운의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푹! 팍! 두 사람의 일격이 동시에 서로에게 적중했다. 찰나의 순간에 천여운의 두 눈에 이채가 띠었다. 심후한 공력이 실려 있는 천여운의 검결지에 미간이 찔린 영월의 몸이 뒤로 튕겨나갔다. -팟! 열 보 가량 뒤로 밀려나간 영월의 미간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죽이지 않기 위해 공력을 절제하기는 했지만 미간은 요혈이기에 치명적일 수도 있는데 그것을 버텨냈다. 심지어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건가?' 이마에서 콧등과 입술로 타고내리는 피를 그녀가 소매로 닦아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의 이마의 상처 부위가 눈에 띠게 빠르게 회복되어 갔다. 피는 금방 그쳤고 패인 손자국 표시도 서서히 돌아왔다. '엄청난 재생력이다!' 사실 이 부분은 천여운이 놀랄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체내에 나노 머신이 있는 것도 아닌데, 저런 회복력을 지닌 것이 놀라웠다. 이렇게 놀란 것은 천여운만이 아니었다. '팔을 베어 내려고 했는데?' 부르르르! 붉게 물든 그녀의 좌수가 떨려왔다. 일부러 이마의 상처를 감수하고서 공격을 감행했는데 베지 못했다. 두 번째 환골탈태와 나노에 의해서 역혈대라신공을 펼쳤을 때의 강도 수준으로 극으로 발달한 천여운의 육체는 쉽게 뚫을 수 없다. -스스스스! 천여운이 그녀의 일격이 닿았던 팔을 바라보았다. 화기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그의 팔에 침투하려고 부단히 애를 쓰고 있었다. '여자의 몸으로 이런 화기를 다루는 것이 기이하구나.' 음기가 강한 여자들은 양기의 무공을 익히기 힘들다. 그런데 이 정도 화기를 일으키려면 극양의 내공을 지녀야 하는데, 후천적으로 생겨난 기운이라기보다는 선천진기에 가까웠다. "후우" 천여운이 내재되어있는 구음절맥의 음기를 끌어냈다. 그러자 그의 팔에 침투하려던 화기가 이내 힘을 잃고서 증기처럼 사라졌다. 이 광경에 영월의 두 눈이 커졌다. '전력은 아니었다고 하나, 본 태상의 화기를 저리 쉽게 해소 시키다니? 이 자의 정체는 정녕 무엇이란 말인가?' 위험한 인물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예상보다 훨씬 강한 듯 했다. 그녀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그를 제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오호라. 가진 바 무위를 믿고서 황궁에 침입한 것이로구나. 그렇다면 제대로 상대해주마." -고오오오! 이 태상 영월이 체내에 잠재된 기운을 본격적으로 끌어올렸다. 옅게 피어오르던 붉은 아지랑이가 서서히 짙어지며 그녀의 몸에서 열기가 강해졌다. 천여운이 난처하다는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말했다. "거듭 말하지만 황궁과 척을 지을 생각은 없소. 이 자만 데려가게 해준다면 조용히 물러나겠소."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물러나는 편이 나았다. 아까 전에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려보면 황궁의 숨겨진 힘은 이들만이 아닌 듯 했다. 아무 것도 밝히지 않으려 했지만 간단한 자초지종을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이 자는 극도육무문의 간자로 무림을 상대로 음모를 꾸미고 있는 자요. 황궁으로 친다면 복마전과 같소. 나는 이것을 막기 위해 온 것이오." "극도육무문?" 극도육무문이라는 말에 그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황궁 수호전은 황궁을 수호하기 위해 외부의 정보 역시도 수집했는데, 극도육무문이 무림에 새롭게 등장한 신생 세력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을 막으려 한다고?" "그렇소. 무림과 관은 불가침의 관계요. 그런데 극도육무문에서 황궁을 이용해서 음모를 꾸미고 있소. 그렇기에 그들의 배후를 알아내서 막으려고 하오." 꽤 많은 정보를 밝혔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알려줘야 오해를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의도대로 모든 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보내줄 수가 없구나. 태조와 황상들께서 은혜를 베풀어 무림을 인정해주었더니, 황궁 내에서 알력을 다투려고 하다니 말이야!" '.....말이 통하지 않는군.' 황궁의 수호전인 영월이 무림인들과 사고관이 같을 리가 없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무엄한 무뢰배들이 황궁을 우습게 여겼기에 이런 일들을 벌인다고 밖에 판단이 가지 않았다. "역시 무림도 황상의 통제가 필요하구나." 더군다나 그녀는 황궁 수호전 내에서도 무림에 배타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적의가 느껴지는 말투에 천여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냥 쓰러뜨리고 가는 수밖에 없겠구나.' 더 이상의 설득은 포기했다. 차라리 황궁 수호전의 궁녀들을 전부 제압하는 편이 빠를 듯했다. "별 수 없군. 분명 경고했소." 그 말과 함께 천여운이 천천히 앞으로 나서자, 영월이 손가락을 튕기며 표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딱! "무림에서 어떤 명성을 지녔다고 한들 잊어라. 이곳은 황궁이다. 본 태상과 수호전의 전사들이 있는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은 버려라." -슉! 슉! 슉! 그녀의 손가락을 튕기는 신호를 들은 궁녀들이 모여들었다. 적들과 싸우느라 숫자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아직까지 오십 여 명이 넘는 궁녀들이 건재했다. 어느새 역혈대라신공을 펼친 무인들을 제압한 감찰상궁 두 사람도 끈적거리는 피로 물든 연검을 들고서 걸어왔다. 초절정의 고수들이 펼친 역혈대라신공의 고수들을 없앴다는 것은 화경에 버금가는 무위를 지녔음을 의미했다. -화르르륵! 영월의 양팔 소매에 불길이 붙으며 타올랐다. 옷소매가 타서 재가 되어 사라지자, 그녀의 붉은 비늘로 뒤 덮인 양팔이 드러났다. 붉은 아지랑이는 정제된 기(氣)처럼 양팔에 둘러졌다. "아까와는 다를 거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오장육부를 전부 태워주마. 오만하고 건방진 무림인이여. 혼자 아등바등 견뎌 보거라." 숫적인 우위를 점했다는 것에서 영월과 궁녀들은 자신감에 차있었다. 한 수 부딪쳐본 결과 천여운과 자신이 거의 비등한 무력을 지녔다고 판단한 그녀는 이 정도 전력이라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런데 이상했다. 혼자 고립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천여운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혼자라....."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이에 천여운이 영월을 향해 입 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누가 혼자라고 했지?" "뭐?" 바로 그때였다. 객당의 본당의 동쪽 담장과 지붕 위에서 동시에 검은 인영 세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나타난 이들로 영월의 표정이 굳어졌다. '혼자가 아니었나?' 지붕 위를 바라보니 한 사람은 하급 무관의 복장에 얼굴이 흉터로 가득한 자였고, 또 다른 자를 보려는 순간, -슉! 순식간에 신형이 사라졌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찾아보려 했는데 육안으로 판별이 가지 않았다. 눈을 굴리면서 발달한 귀에 집중했는데 그 소리가 어느새 궁녀들로 둘러싸인 천여운 쪽에서 들리고 있었다. '이럴 수가? 본 태상이 종적을 놓치다니?' 아무도 없었던 천여운의 옆에 누군가 자연스레 서있었다. 기이한 가면을 쓰고 있는 정체불명의 남자는 바로 대호법 마라겸이었다. "부르셨습니까?" 오직 천여운의 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마라겸이었다. 충직하게 말하는 것과 다르게 그의 몸에서 발산되는 위압적인 기운이 사방을 둘러싼 궁녀들에게 뿜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한없이 죽음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무림에서 명왕이라 불리는 마라겸의 진면목이었다. "숨겨둔 패가 있었구나!" "누가 그분께 함부로 입을 놀리는 것이냐." 그때 그림자로 드리워진 동쪽 담장 위에 있던 자가 그곳에서 내려와 궁녀들이 있는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타오를 것 같은 붉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가면을 쓴 남자였다. '붉은 머리카락?' 자신들을 향해서 멈추지 않고 다가오자, 감찰상궁 중 한 사람이 나서며 연검으로 그를 겨냥하며 말했다. "멈춰라.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침입한 것이냐? 당장 멈추지 않으면..." 그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붉은 머리카락의 가면인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올 때마다 느껴지는 압박감에 위협을 느낀 그녀가 더 이상의 경고는 없이 곧바로 화기를 실은 연검으로 초식을 펼쳤다. -휘리리리릭! 촤촤촤촥! 뜨거운 열기를 머금은 붉은 연검이 채찍처럼 휘어지며 가면인에게로 쇄도했다. "화기라....." 가면 틈새로 보이는 가면인의 눈꼬리가 웃고 있었다. 뜨거운 화기를 담은 연검이 그를 베어내려는 순간 가면인이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챙! 붉은 문양으로 뒤덮인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검에서 사방을 불태울 것 같은 강렬한 열기가 일어나더니, 이내 감찰상궁의 연검과 부딪쳤다. -채애앵! 화르르륵! 열기로 가득한 두 사람의 검이 부딪쳤는데 결과는 놀랍게도, -쩌저저적! "거, 검이?" 감찰상궁의 눈에 당혹감이 일었다. 놀랍게도 화기를 실은 연검에 균열이 가기 시작하더니 가면인의 패도적인 검세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은 부서져버렸다. -챙그랑! '내 화기가 밀렸어?' 당혹스러워하는 그녀에게 가면인이 위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화기를 쓴다고 해서 방심하고 있지 않나? 계집 너는 단지 화기(火氣), 난 그 화기마저 살라버리는 적염(赤炎)의 검이다." "저, 적염?" "나와 네년의 능력은 완전히 상하관계에 있지!" -화르르륵! 우우웅! 그 말과 함께 가면인의 검에 붉은 빛 검강이 일렁이며 그녀의 심장을 찔러왔다. -푹! 놀란 그녀가 다급히 몸을 틀었지만 쾌속한 가면인의 검이 어깨를 관통했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그녀였지만 압도적인 무력에 두려움을 느꼈는지, 부상을 입자마자 보법을 펼치며 최대한 뒤로 거리를 벌렸다. "이럴 수가? 하 감찰상궁의 검을 더 강한 화기로 베다니?" 다른 감찰상궁이 부상을 입은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그 앞을 가로막았다. 감찰상궁의 능력은 일반적인 궁녀들보다는 상위이나 강한 재생력은 갖추지 못했는지, 오른팔이 축 쳐졌다. "부, 붉은 머리카락에 적염의 검?......설마.....당신은 염왕 이화명?" 부상을 입은 감찰상궁의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림을 활동하지는 않으나 수호전의 간부 격에 속하는 그녀들은 무림의 주요 인사들 정도는 꾀고 있었다. "뭣?" 감찰상궁의 말에 이 태상 영월이 놀란 눈으로 천여운과 가면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염왕이라고? 그는 마교의 좌호법인데?...잠깐....그렇다면 저 가면의 남자는 설마 명왕 마라겸이란 말인가?' 무림에서도 명왕이라는 별호로 유명한 대호법 마라겸이다. 그의 손에 죽은 정사의 고수들만 수백 명에 이르고 마교의 삼대 고수라 불리는 자였다. 염왕과 명왕은 마교의 호법들이었다. 지금까지 천여운의 정체를 짐작하지 못하고 있던 이 태상 영월이 떨리는 눈으로 입을 열었다. "서, 설마 그대는.....마....교주?" < 66장 황궁의 숨겨진 힘 (4) > 끝 < 67장 영물의 피 (1) > 관과 무림은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서로가 상관을 하지 않기로 했지만 거대 무력 단체를 그저 방관만 할 리가 없었다. 황궁에서는 언제든지 위협이 될 수 있는 무림을 유심히 살폈다. 태조시절부터 외 내부의 위협으로부터 황궁을 지켜온 숨겨진 힘인 황궁 수호전에서 가장 위험하게 생각하는 곳이 바로 마교였다. '단일 세력으로 최고의 성세를 구가하는 곳.' 삼대 세력 중에서 유일하게 단일 방파로 이루어진 곳은 마교뿐이다. 다른 두 세력은 수많은 단체들이 모인 군집체였기에 언제든지 권력의 향방이 바필 수도 있으나 마교는 유일하게 일인 권력 체계를 지녔다. 황실에서 황위를 물려받는 것처럼 말이다. '종교나 무림 단체로 포장하고 있으나 실상은 하나의 군주나 다름없다.' 마교에 적을 두고 있는 신도는 십만 명에 이른다고 알려져 있다. 강함의 고하를 떠나서 그 십만 명의 무인들이 마교 교주의 명이라면 지옥불이라도 뛰어든다고 들었다. 그런 자가 역심이라도 품으면 대명제국에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 "그, 그대는 마교주가 아닙니까?" 이 태상 영월이 떨리는 목소리로 천여운을 향해 물었다. 그 물음에 천여운은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귀를 의심하게 하는 말을 꺼냈다. "....더욱 그냥 넘어갈 수 없게 되어버렸군." 천여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좌호법 이화명이 무림도 아니고 황궁에서조차 위명이 알려져 있을 줄은 몰랐다. 붉은 머리카락만으로 그 정체를 추측했으니 말이다. [흠흠, 송구스럽습니다.] 이화명이 천여운에게 죄송스러움에 전음을 보냈다. 사실 이것은 이화명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마교에서 출발하기 전에 마의에게 부탁하여 검은 머리카락으로 염색을 했던 그였다. 하지만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특유의 독문심법에 의해서 발현된 붉은 머리카락은 그가 내공을 사용할 때마다 조금씩 원래 대로 돌아왔다. '두건이라도 쓸걸 그랬구나.' 특별한 일이 없다면 계속 은신해 있을 참이었고, 황궁에서 굳이 머리카락 하나로 자신을 알아볼 자가 있겠나 싶어서 얼굴만 가렸는데 단번에 들켜버렸다. 이 태상 영월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부, 부정하지 않았다.' 긍정을 표한 것도 아니었지만 저런 식으로 답했다는 것은 분명 마교 교주가 틀림없었다. 마교 최고수인 두 호법의 호위를 받는 사람이 세상에 또 누가 있단 말인가. '마교의 교주가 황궁으로 침입하다니 참으로 난감하구나.' 그저 무림에서 떨친 명성만을 믿고서 겁을 상실한 자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정말 마교의 교주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황제와 동등한 관계로서 불가침 조약을 맺은 삼대 세력의 수장 중의 일인이 아닌가. '이를 어찌해야 하지?' 황궁의 법도나 수호전의 임무대로 한다면 황궁에 무단으로 침입한 자는 지위를 막론하고 무조건 제압하거나 반항 시에는 즉각 사살하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상대가 마교의 교주이기에 저 자를 잘못 건드렸다가 무슨 사태가 벌어질지 짐작조차 하기 힘들었다. -슥! 두 감찰상궁들조차 어찌해야 하나는 식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하필 마교 교주라니....큭!' 차라리 혼자 침입한 것이라면 살인멸구(殺人滅口)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저 두 절세고수들이 나타나면서 부딪쳐도 어찌 될지 모를 상황이 되어버렸다. 결국 자신의 선에서 해결하기 힘든 일이라고 판단한 그녀가 고민하던 끝에 절묘한 묘수를 생각해냈다. '아! 그렇지! 이렇게 된 이상 이들을 잘 구슬려서 수호전으 로 데려가 처리해야 겠구나.' 수호전에는 일 태상을 비롯해 더 많은 고수들이 있다. 자신보다 더 강한 집행권과 결정권을 가진 일 태상을 끌어 들이는 편이 나았다. 영월이 다소 공손해진 목소리로 천여운에게 말했다. "귀인께서 정말 천마신교의 교주님이시라면 어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당연히 몰래 잠입한 것이니 말할 이유는 없었다. 천여운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것에서 심기가 불편하다고 생각한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선 귀인의 신분을 몰랐기에 무례를 범한 것을 용서하십시오." 이 태상 영월이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 황궁으로 치자면 황제와도 같은 천여운이었기에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한 것이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영월이 본론을 꺼냈다. "송구스러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불가침 조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귀인께서 먼저 이리 예고 없이 황궁에 납시었으니, 임무를 등지고 그냥 눈을 감게 되면 소첩의 입장이 난처하게 되옵니다." 공손하게 말을 하고 있었지만 먼저 잘못한 것은 천여운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녀가 계속해서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하나, 어찌 귀인께 함부로 대하겠습니까? 저희 수호전의 일 태상께 아뢰어 원만하게 처리되도록 하겠습니다. 불편하시겠지만 잠시 소첩이 모시겠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두 손을 모으며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영악하게 잔머리를 굴린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한다면 무례하지 않고 공손하게 교섭을 요청했다는 명분도 얻게 되면서, 무리하게 싸움을 하지 않고서 천여운을 데려갈 수 있게 된다. 괜한 희생을 줄일 수도 있고 수호전의 다른 태상들에게 자존심을 살릴 수도 있다. '후후, 별 수 없을 거다. 아무리 무림인이라고 해도 예로써 대하는데 무뢰배처럼 고집을 부리진 않겠지. 게다가 정체가 드러났으니 명색이 마교의 교주라는 자가 황제폐하께서 계신 황궁에서 더는 소란피우기도 힘들 거다.' 갑자기 떠올렸지만 참으로 묘수였다. 영월이 조심스럽게 천여운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피식! 그때 천여운이 가벼운 웃음을 보였다. 긍정적인 반응이라 생각한 영월은 자신의 묘수가 통했다고 여겼다. '됐다!' 이제 마교 교주와 그 수하들을 수호전에 데려가서 일 태상이나 황상께 보고하여 처분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사실 그녀는 이것을 계기로 황실과 무림의 불가침 조약이 깨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잘하면 일 태상의 보고를 들은 폐하께서 진노하시여 무림을 토벌한다고 하실 지도 모르겠구나. 후후후.' 생각만 해도 즐거워졌다. 고작 무인에 불과한 자들이 황실과 동등한 입장에 선다는 것이 아니꼽던 그녀였다. 어떻게 보면 대명제국에 붙어서 살고 있는 신민들 주제에 말이다. "옳은 선택을 하셨습니다. 이제 소첩을 따라...." -촥!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뭔가를 가르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그리고 그 소리가 끝나자 천여운과 영월의 사이에 서있던 다섯 명의 궁녀들의 뒷목에 붉은 선이 생겨났다. "아?" 그것을 발견한 순간 다섯 궁녀들의 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탁! 데굴데굴! 푸슉! 잘린 궁녀들의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비늘로 인해 도검이 통하지 않는 육신이 너무도 쉽게 베여졌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로 경악스러워하는 그녀의 눈동자에 천여운이 푸른빛 도강이 서린 손날을 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도강?' 여느 강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선명했다. "이!...이!....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설마 궁녀들을 죽여버릴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찌나 어이가 없었는지 말까지 더듬는 영월에게 천여운이 입을 열었다. "참으로 우습군. 듣기 좋은 말로 포장했지만 결론은 나를 어딘가로 압송하겠다는 소리가 아닌가." "어, 언제 제가 압송한다고 했습니까? 윗선에 고할 동안 잠시 모시겠다고..." "헛소리 집어치워라." 천여운의 몸에서 강한 위압감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마치 황제에게서 느껴질 법한 패왕의 기세와도 같았다. 이에 영월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늙은 계집이 여우처럼 잔머리를 굴리는 구나. 나는 분명 경고했다. 충분히 그대에게도 득이 되는 일이었는데 그 선택권을 저버린 것은 그대다." 이것은 실상 마교만의 득은 아니었다. 황궁에 숨어있는 간자들을 처리하는 것이기에 대명제국에도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간자 한 사람만 넘겨준 후에 모든 공을 수호전에서 차지했으면 서로가 이익을 누렸을 수도 있는데 그녀는 끝까지 무림인에 대한 적대감으로 일을 처리하려 했다. 그것도 모자라 눈에 뻔히 보이는 수작마저 부렸다. "저, 정말 이러고도 후환이 두렵지 않습니까? 황제 폐하께서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불가침 조약이 깨질 수도 있습니다." 고심했던 수가 통하지 않자 결국 그녀는 황제까지 들먹였다. 이에 천여운이 입 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대들은 이곳에서 전부 동창의 식객들과 싸워서 죽은 것일 텐데, 무슨 후환을 두려워하라는 것이지?" "다, 당신!" 영월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잔머리를 꾀하다가 오히려 자신이 벼랑 끝에 내달린 꼴이 되어버렸다. '보, 본 태상이 오판했구나.' 세상에는 수를 써서 통할 상대가 있고 절대로 쓰지 말아야 할 상대가 있다. 어리석게도 그녀는 수를 쓰지 말아야 할 상대에게 수작을 부렸다. "대호법, 좌호법. 한 사람도 남기지 말고 전부 죽여라." "충!" 천여운의 살기 어린 명령의 떨어지자, 두 호법이 동시에 외치며 발걸음을 내딛었다. 두 절세고수가 저승사자라도 되는 것처럼 움직이자 영월이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궁녀들에게 명했다. "다, 당장 저들을 막아라!" 간부들과 달리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무표정한 궁녀들이다. 그들은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그것을 이행하기 위해 대호법 마라겸과 좌호법 이화명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달려드는 자들은 아까 전 식객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자들이다. 마교뿐만이 아니라 무림에서도 수위에 속하는 고수였다. -팟! 궁녀들이 붉게 물든 두 손으로 사방으로 에워싸며 이화명에게 달려들었지만 그들의 화기는 그의 털끝 하나에도 닿을 수가 없었다. "내게 화기는 통하지 않는다!" -촥! 촥! 상성이 좋지 않았다. 오히려 이화명의 붉게 물든 적염의 검 앞에 파죽지세로 베여나갔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궁녀들이기에 몸이 베여도 무시하고서 달려들 법도 했지만 전혀 그러질 못했다. -촥! 촥! 쿠당탕! 검에 베인 궁녀들은 바닥에 쓰러져서 일어나질 못했다. 이화명의 검에 베인 궁녀들은 체내에 파고드는 화경의 공력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체내에 선천진기가 공력의 여파를 몰아낼 만큼의 능력이 되지 못했다. -슉! 촥! 슉! 촥! 명왕이라는 별호 이외에도 풍신이라 불리는 대호법 마라겸은 바람과 같은 경공 속도로 궁녀들의 목을 베어내고 있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짐승 같은 탄력적인 몸놀림을 보여주던 궁녀들조차 아차하는 순간에 목이 날아가 버렸다. '어디? 대체 어디...' -촥! 데굴데굴! 아무리 고통을 느끼지 않는 그녀들이라고 해도 보이지 않는 상대는 두려울 수밖에 없었는지 우왕좌왕 무너져갔다. "보, 보이지도 않아." 이 광경에 감찰상궁 두 사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벌써 절반 가까이 되는 궁녀들이 죽었다. 초절정의 고수들조차 두세 사람이 합공하면 상대할 수 있는 궁녀들이었지만 저들의 앞에선 아이나 다름없었다. "정신 차려라!" 혼란에 빠진 감찰상궁들을 이 태상 영월이 다그쳤다. 그리고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서 천여운을 눈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본 태상과 저 자를 합공한다." "마, 마교주를요?" "겁먹지 마라. 어떻게든 저 자만 제압하면 저들도 막을 수 있다." 정체를 알고 나서 부담이 되기는 했지만 그녀가 알기로 지금의 마교주 천여운은 취임한지 얼마 안 된 젊은 자로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 두 고수에 비하면 무위가 떨어질 거라 확신했다. '아까 전에 손을 섞었을 때 거의 호각이었다. 감찰상궁들과 합공을 하면 제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교주만 사로잡으면 아무리 저자들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합공으로 틈을 만들어내라!" "추, 충!" 그녀의 명에 잠시 머뭇거리던 두 감찰상궁이 동시에 천여운을 향해 달려들었다. -슉! 평소에 합공을 맞췄었는지 어깨에 부상을 당한 감찰상궁이 천여운의 하단 쪽을 향해 붉은 화기를 머금은 각법을 펼쳤고, 멀쩡한 감찰상궁이 연검으로 검초를 펼치며 그의 상단 쪽으로 노렸다. -팟! '저들의 공격을 막는 순간을 노린다.' 두 감찰상궁의 천여운의 시야를 가리자 영월이 땅을 박차며 한 호흡 만에 천여운의 뒤쪽으로 신형을 옮겼다. 궁녀들이나 감찰상궁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빨랐다. -촤촤촤촥! 이때 상단을 노리는 감찰상궁의 연검이 휘어지며 채찍처럼 검초가 천여운의 요혈을 찔러왔다. 그런데 바로 코앞까지 화기가 실린 검초가 다가왔는데도 천여운은 미동조차 없었다. '뭐지?' 그녀가 의아해하던 찰나에 천여운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이며 검초를 펼치던 감찰상궁의 손목을 낚아챘다. -콱! '마, 말도 안 돼. 검초를 펼치는 도중인데?' 검초를 파훼한 것도 아니고 시전도중에 막아버린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검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과 손목에는 화기가 담겨 있었는데, 그것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오싹! '차, 차가워!' 오히려 강한 한기가 파고들며 그녀의 화기를 억눌렀다. 기이한 현상에 놀라서 손목을 빼내려고 했는데, 더욱 당혹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꾸욱! "아악! 자, 잠깐! 지금 뭘 하려고...." 천여운이 잡고 있던 팔목에 힘을 주더니, 그녀의 몸을 인형처럼 들어 올려 하단부로 각법을 펼치던 감찰상궁에게로 패대기를 치듯이 내려치고 말았다. -부우웅! "꺄아아아아악!" -퍽! 쾅! "아악!" 멀쩡한 감찰상궁의 몸에 깔려버린 부상당한 감찰상궁은 바닥에 그대로 처박히고 말았다. 어찌나 괴력에 가까운 힘이었는지 돌바닥에 갈라져서 움푹 패었다. 통하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너무도 무력하게 제압당했다. -화르르륵! 바로 그때였다. 두 사람이 빈틈을 만들기를 기다렸던 이 태상 영월이었다. 체내의 선천진기와 화기를 최대한으로 끌어낸 그녀의 양팔은 불꽃으로 뒤덮여 있었다. "받아랏!" -팟! 그녀의 패도적인 양장(兩掌)이 모든 것을 태울 것 같은 기세로 천여운의 뒤를 급습했다. 오직 이 순간만을 노렸다. 그러나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탁! 당연히 보통이라면 뒤에서 공격해온다면 뒤를 돌아서 막으리라고 여기겠지만 천여운의 신형을 오히려 앞으로 날렸다. '이, 이런!' 덕분에 그녀의 양장은 천여운의 등에 닿지 못하고 말았다. 그런데 앞으로 신형을 날렸던 천여운이 바닥에 발을 튕기며 다시 반대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아닛? -차차차차차차착!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온 천여운의 팔목에 있던 보호대가 흑검의 형태를 갖췄다. 흑검을 손에 쥔 천여운이 단숨에 그녀의 옆으로 비스듬하게 파고들어서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는 양팔을 향해 내리치려 했다. '내 팔을 노려?’ 평소라면 피부를 두르고 있는 갑주와 같은 비늘을 믿겠지만 저 흑검에서 느껴지는 예기가 범상치가 않았다. '피, 피해야 해!' 놀란 그녀가 초식을 강제로 멈추려 했다. 전력으로 끌어낸 선천진기를 도중에 회수하는 것이었기에 내상을 입겠지만 팔이 잘리는 것만은 피해야 했다. -울컥! 속에서 피가 솟구치는 것을 참고서 그녀가 양팔을 잡아당겼다. "내가 경고했지." 귓가를 파고드는 차가운 목소리에 영월의 두 눈이 흔들렸다. 그녀의 양팔이 완전히 끌어당기기도 전에 차가운 금속이 손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촥! 툭! 영월이 두 눈이 커져서 바닥으로 떨어진 익숙한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목대에 핏줄이 서서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아아악!" < 67장 영물의 피 (1) > 끝 < 67장 영물의 피 (2) > 궁녀들과 마찬가지로 이 태상 영월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눈앞에서 자신의 두 손이 잘려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놀라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흑검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예기에 우려했지만 너무도 쉽게 베였다. '본 태상의 비늘은 강기도 견뎌낼 수 있거늘.' 궁녀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선천진기를 지닌 그녀였지만 천여운의 검을 견뎌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꿈틀꿈틀! 그녀의 잘린 팔의 단면이 핏줄들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상처를 입은 것에 대한 재생 능력이 발휘되는 것 같은데, 잘린 팔을 복원시키는 능력은 없었는지 피만 멎어가고 있었다. 팔이 잘렸다는 충격도 잠시였고 이 태상 영월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착! 주름진 그녀 목으로 천마검의 날카로운 검 끝이 닿아있었다. 언제든지 그녀의 목을 찔러서 죽일 기세였다. '크윽! 이 괴물 같은 놈!' 처음 손을 섞었을 때는 무력에 있어서 호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에 불과했다. 애초부터 그는 원래 무력에 일각도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죽는 건가?' 흑검의 끝에서 느껴지는 살기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이렇든 저렇든 천여운이 자신들을 죽여서 입을 막으려는 것이 확실해지자, 더 이상 잘 보이려는 마음도 사라졌는지 이 태상 영월이 표독스럽게 말했다. "흥! 이러고도 황궁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 성 싶으냐?" 더 이상의 공손함도 존대도 없었다. 처음 대면했을 때와 전혀 다를 것이 없는 태도였다. 사람은 절대로 본성이 변하지 않는다. "못 빠져나갈 것 같나?" "하! 황궁을 우습게 여기는군. 이 정도로 소란을 피웠는데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리라고 착각하진 않겠지." 고요한 한밤 중에 이렇게 격렬하게 싸움을 벌였다. 그것도 수호전의 궁녀들이 동창의 식객들을 상대할 때부터 말이다. 근처에만 하더라도 야간 경비를 서는 금의위를 비롯해 동창의 근거지인 동당이 있는데,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더 이상하다. "곧 그들이 들이닥치면 네놈은 황궁의 역적이 되는 것이다! 살인멸구? 호호호홋 꿈도 꾸지 마라." 천여운의 무력이 강하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가 황궁 내에 있는 모든 전력을 상대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황궁이 더욱 소란스러워진다면 수호전의 다른 태상들도 나오겠지. 그들은 본 태상보다도 더 강하다! 네놈들은 절대로 살아서 마교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야!" 표독스럽게 눈을 부라리며 말하는 영월의 태도는 가증스럽기마저 했다. 그런데 천여운의 반응은 이상할 정도로 무덤덤했다. 못해도 당혹스러워한다거나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할 법도 한데 아무 걱정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뭐지?' 의아하게 여기는데 그때 목에 닿아있던 천여운의 검 끝이 우즉 뺨으로 향했다. -탁! "지금 무얼..." -촤악! "흐아아가각."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천여운의 검이 그녀의 뺨을 꿰뚫고 일(一)자로 입을 통과해 반대쪽 뺨까지 베어버리고 말았다. 졸지에 입이 찢어진 이 태상 영월이 턱이 벌어져서 소리쳤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그런 그녀의 말에 천여운이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혀도 베려고 했는데 용케 안 베였군." "뭐, 뭣?" 아무렇지 않게 하는 말에 영월은 등골이 오싹해져 왔다. 검이 뺨을 파고들자마자 혀를 안쪽으로 말아 넣었는데 안 그랬다면 잘렸을 것이다. -스스스스! 그녀의 베인 뺨의 핏줄들이 엉겨 붙으며 재생하기 시작했다. 인간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재생력이라 할 수 있었다. 신체부위가 완전히 잘리는 것이 아니라면 가벼운 상처는 빠르게 자가수복이 가능해보였다. '으으으! 어째서! 어째서 아직까지 오지 않는 거지?' 상처는 낫고는 있었지만 최악의 굴욕을 맛보고 있다는 생각에 영월의 마음은 조급해졌다. 지금쯤이면 황군이 몰려와도 모자랄 판국에 주변이 너무 조용했다.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천여운이 혀를 차면서 말했다. "멍청하군." "뭣?" "설마 내가 그 정도도 생각하지 않은 것 같나?" "그게 무슨?" 의아해하는 그녀에게 천여운이 주변을 가볍게 훑으며 말했다. "이곳 주변은 진기로 막이 쳐져서 어떠한 소리도 새어나가지 않는다." "지, 진기로 막을 쳤다고? 그,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이 넓은 곳을 무슨 수로 막을 친단 말이야!" 그녀가 경악해서 소리쳤다. 완숙한 화경의 고수에 버금가는 선천진기를 보유하고 있는 이 태상 영월이었다. 그녀 역시도 심후한 진기를 이용해서 특정 공간에 막을 쳐서 소리를 차단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유지하는데 상당한 기운을 소진하기에 좁은 공간이나 방 하나 정도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가능해! 이놈은 내공이 무한하기라도 하단 말인가?' 이 넓은 동창 객당의 본당 마당을 통째로 진기로 막을 치려면 못해도 그녀 자신보다도 열 배에 달하는 진기를 지녀야 가능했다. "자신이 안된다고 남이 안 된다는 고정관념이 있나보군." "마....말도 안 돼." 처음에는 믿을 수가 없어서 부정했던 그녀는 이윽고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여전히 주변은 고요했고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말은 이 주변이 외부와 소리가 완전히 차단되었다는 의미였다. "몸은 재생하는데 목을 베어도 과연 재생할까?" -오싹! 천여운이 정말로 목을 베려는지 검을 들어올렸다. 영월의 얼굴이 순식간에 사색이 되었다. '아, 안 돼! 이렇게 되면 본 태상은 개죽음을 당하는 것이 아닌가.' 진실이 왜곡되어서 죽는 것만큼 개죽음도 없었다. 그것만큼 막아야 했다. 영월이 다급히 소리쳤다. "소, 소첩을 죽이면 당신의 부하들도 죽을 겁니다!" “헛소리 지껄이지 마라." 죽기 일보 직전에 그녀가 무슨 수로 호법들을 건든단 말인가. 허튼 수작을 부린다는 생각에 천여운이 이를 무시하고서 그녀의 목을 베려했다. 그러자 그녀가 잘린 두 손을 휘저으며 간절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수, 수호전의 금옥에 인피면구를 쓴 세 명의 간자들을 잡아 두었습니다. 그들을 모른다고 하시진 않겠죠?" -파앙! 단번에 그녀의 목을 베려고 했던 천여운의 검이 허공에서 멈췄다. 인피면구를 쓴 세 사람이라고 한다면 암종의 대주들이었다. '잡힌 것이었나?' 황궁에 잠입한 암종의 대주 및 허봉과는 오늘 밤 자시(子時) 초에 성왕 주태겸의 궁전에서 접선하기로 했기 때문에 그들이 잡힌 것을 몰랐던 천여운이다. 그가 공격을 멈추자 영월의 눈이 반짝였다. '통했다. 역시 이 자의 수하들이 맞구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막 내뱉은 것이었는데 통했다. 죽음을 코앞에 두고서 겨우 목숨을 부지한 그녀의 얼굴은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들을 수호전의 금옥에 붙잡아 두었다고?" "그,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감정을 전혀 읽기 힘들 정도로 무표정하기만 했던 천여운이 인상을 찡그리자, 그녀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그의 약점을 발견한 것이다. '냉혹한 괴물인 줄 알았는데 그것은 아니구나.' 하긴 한 단체의 수장이라는 자가 수하들을 쉽게 버릴 리가 만무했다. 마교인들이 적에게는 냉혹하지만 같은 교인들에 대한 의는 끈끈하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이 태상 영월은 이것을 이용하자고 생각했다. '그들을 풀어준다는 것을 빌미로 수호전 근방으로만 데려갈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반전을 일으킬 수 있다. 수호전의 앞에서 적이라고 소리만 질러도 난리가 날 것이다. 황궁의 진정한 숨겨진 힘이라 할 수 있는 일 태상에게 데려 가기만 하면 설사 마교의 교주라고 해도 물리칠 수 있으리라. 그녀가 조심스럽게 천여운에게 제안했다. "소, 소첩을 살려주신다면 귀인의 수하들이 풀려날 수 있도록..." -촥! "어?" 영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방금 전에 자신이 본 것이 현실인지조차 구분할 수가 없었다. 미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천여운이 검을 휘둘렀다. 목이 서늘했다. "지, 지금....무엇을?" "늙은 계집이 입만 열면 수작질이군. 그냥 죽어라." "!?" -스르륵! 툭! 천여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의 시야가 빙글빙글 회전을 하면서 밑으로 떨어졌다.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서야 그녀는 자신의 목이 베였음을 인지할 수 있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재생력의 부작용인가. 목이 베여졌는데도 그녀는 곧바로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다. '어.... 어째....서?'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콰직! 천여운이 바닥을 구르고 있는 영월의 머리통을 그대로 밟아 으깨버리고 말았다. 끝까지 수작을 부리려던 자의 비참한 말로였다. -슉! 슉! 슉! 불쾌한 기색을 보이는 천여운의 앞으로 대호법 마라겸과 좌 호법 이화명, 그리고 지붕 위에서 망을 보고 있던 허봉이 내려 왔다. 마라겸과 이화명이 두 손을 모아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명을 이행했습니다!" 모든 궁녀들을 전부 사살한 그들이었다. 여자들이라 마음이 약해질 법도 했지만 그들의 손에는 일말의 인정도 없었다. 최대한 마교의 검초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시신들의 자상만으로는 무공의 연원조차 알기 힘들게 처리해놓았다. 천여운이 천마검공의 검초를 사용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럼 이 자를 데리고 철수할지?" 좌호법 이화명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검게 그을려서 대머리가 되어있는 금 첩형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에 천여운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그러려고 했는데, 암종의 대주들이 붙잡혔군요." "그들이 말입니까?" 전혀 예상 밖의 일에 두 호법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간자나 암살에 특화된 그들이 잡힐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대호법 마라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교주님. 어찌하실 요량이신지?" 이곳의 일이야 살인멸구로 처리하기는 했지만 금옥에 갇힌 자들을 잡으려면 그들의 경계망을 뚫어야 한다는 소리였다. 더군다나 그들은 황궁의 숨겨진 힘이라 할 수 있는 수호전의 위치를 알지 못한다. 극도육무문조차 오랜 시간동안 공을 들였는데도 알아내지 못한 곳이다. "교주님. 현실적으로 그들을 구출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안타깝지만....그들을 포기하는 편이 어떤지?" 좌호법 이화명이 냉정하지만 이성적인 선택지를 제안했다. 어차피 암종의 대주들은 적에게 붙잡혔을 때에 대비한 훈련을 받은 자들이었다. 탈출이 여의치 않으면 자결을 하도록 말이다. -질끈! '아아...정말 버리는 수밖에 없는 건가.' 같이 출발한 동료를 버리라는 권유에 허봉이 기분이 씁쓸했는지 입술을 깨물었지만, 확실히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그때 천여운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 손으로 차출해서 데려온 자들을 쉽게 버리면 교주로서 자격이 없겠지요. 그리고 이런 자들에게 잡혀서 그들이 자결하게 둘 순 없습니다." 천여운이 바닥에 으깨져 있는 영월의 머리통을 바라보았다. 이번에 황궁에 잠입하면서 위선과 수작을 부리는 자들은 세상 어디에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아.....그럼 어찌 하실지?" 위험부담 때문에 암종의 대주들에 대한 구출을 반대했던 좌호법 이화명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에 대답한 것은 천여운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아직 숨이 붙어있습니다." 어느새 마라겸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어떤 자들에게 다가가 있었는데, 그녀들은 바로 감찰상궁이었다. 다른 궁녀들은 전부 죽었지만 아직까지 살아있는 그녀들이었다. "......대호법. 그들이 쉽게 불겠습니까?" 궁녀들을 학살하다시피 한 그들에게 퍽이나 쉽게 황궁 수호전의 위치를 불겠는가. 이것은 천여운 역시 동의하는 바였다. 밖으로 데려가서 약물이 들어간 자백제를 통해서 시도한다면 가능성이 있겠지만 지금 당장에는 그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을 놓친다면 태상과 궁녀들을 잃은 수호전에서 경계를 강화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에 마라겸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당연히 적들에게는 불지 않겠지." "네?" 그렇게 말한 마라겸이 고개를 돌려서 천여운에게 말했다. "교주님 이렇게 하심은 어떠신지?" *** 얼마나 시간이 흐른 것일까? 마교의 교주에게 손목이 잡혀서 하 감찰상궁과 부딪쳐서 기절했던 윤 감찰상궁이다. '내가 기절을 했다고?' 그것을 복용하고서 이 힘을 가진 후에 처음 겪는 일이었다.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저주받은 몸이 되었는데, 얼마나 강하기에 이런 일이 가능한지 신기할 정도였다. '어떻게 된 거지?' 겨우 정신을 차린 그녀가 일어나려했다. 그러나 그녀는 쓰러진 몸을 일으켜 세울 수가 없었다. -쿵! "아?"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의 최대 단점은 이런 것일까? 그녀는 일어나려고 시도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신의 상태를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불행하게도 그녀의 발목이 잘려있었다. "내.... 발이...." 두 발이 발목 채로 잘렸음을 인지한 윤 감찰상궁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갔다. 악몽을 꾸는 느낌이었다. 자신이 기절한 사이에 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주위를 둘러봤더니 코를 자극하는 피 냄새와 함께 수많은 궁녀들의 시신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아.... 아아아아...."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을 바라보았더니 익숙한 옷을 입은 시신도 보였다. 잔인하게도 양손이 잘리고 목이 베여서 죽었다. "이, 이….태상!" 자신이 기절해 있는 사이에 수장인 이 태상을 비롯한 모든 궁녀들이 살해당한 것이다. 그 자들은 정말 괴물이었다. '얼마나 된 거지?' 아직까지 어두운 밤이었고 주위에 누구도 없는 것을 보면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때 사람의 인기척과 목소리가 들려왔다. "앗! 살아있는 궁녀가 있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금의위로 보이는 무관 두 명이 달려 왔다. 이 근처에서 야간 경계 근무를 서고 있는 자들인 듯 했다. "아! 세상에!" 금의위 중에 한 사람이 발목이 잘린 그녀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얼굴이 새하얀 금의위가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감찰상궁이 아니오? 괜찮으시오?" 이들의 등장에 윤 감찰상궁의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물었다. "저, 저는 괜찮습니다. 금의위 무관들께서는 언제 오신 건지?" 그것이 궁금했다. 이런 엄청난 사건이 발발했는데 아직까지 황궁의 어떤 사람들도 발견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웬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서 동창 객당으로 들어왔더니 이리 처참한 일이 벌어져 있었소. 지금 한 사람이 금의위 중앙소에 보고하러 갔으니 곧 사람들이 올거요." "아!" '얼마 안 되었어!'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 금의위의 말이 맞다면 사건이 벌어진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게 확실했다. 그렇다면 당장에 수호전의 윗선에 보고해서 마교 교주 일행이 황궁 밖으로 도주하지 못하도록 막아야만 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녀의 잘린 발이었다. "죄, 죄송하지만 금의위 무관께서는 혹시 저를 도와주실 수 있을지?" "당연한 게 아니오. 당장 지금 황궁 의당으로..."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일입니다. 지금 황궁에 매우 위험한 역도들이 침입했습니다. 당장 알려야 합니다." 그녀의 다급한 말에 금의위 중 한 사람이 괜찮다는 듯이 달랬다. "허어! 그게 사실이오? 큰일이구려. 그래도 곧 금의위들이 올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아닙니다. 그들만으로는 안 됩니다. 송구스럽습니다만. 저, 저를 업어주십시오. 제 다리가 이러하여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지금 상궁께선 의원이 더 급한데 무슨 안내를?" "제발 부탁드립니다! 지금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요!" "허어....아, 알겠소." 막무가내로 보채는 윤 감찰상궁의 말에 금의위 중 한 사람이 결국 그녀를 업었다. 등에 업힌 그녀가 손가락으로 황궁의 북서쪽 방향을 가리키며 그곳으로 서둘러서 가자고 하였다. 그런 그녀의 뒤를 따르는 새하얀 얼굴의 금의위의 입 꼬리 가 올라갔다. < 67장 영물의 피 (2) > 끝 < 67장 영물의 피 (3) > "무관님. 혹시 더 빨리 달리실 수 있으신가요?" "몸도 성치 않은데 괜찮겠소?" "소첩은 심려치 마십시오." "알겠소. 꽉 잡으시오!" -팟! 불안한 목소리로 서두르기를 종용하는 윤 감찰상궁의 말에 금의위가 경공을 펼쳤다. 방금 전까지 뛸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속도로 앞으로 치고 나갔다. '아.... 빠르다!' 등에 업혀있는 그녀의 두 눈에 이채가 띠었다. 금의위가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 자의 경공은 일류고수를 훨씬 상회하는 듯 했다. 의아할 법도 했지만 그보다 급한 사안 때문에 그러려니 했다. "저쪽입니다." 윤 감찰상궁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으로 금의위는 앞으로 뻗어나갔다. 용정궁 자체도 워낙 넓기 때문에 경공을 펼치는데도 금방 도착하지 않았다. 얼마 가지 않아 곧 궁의 북서쪽에 이르렀다. '아....' 그곳에는 굉장히 거대한 릉(陵)이 있었다. 황제가 머물고 있는 건안궁보다도 훨씬 커다란 이 릉은 태조의 황릉이었다. 릉의 앞에 있는 화려한 사당에는 태조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어째서 황릉에?' 윤 감찰상궁을 업고 있는 금의위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윗선에 보고를 해야 한다고 데려온 것이 태조의 황릉이었으니 이해할 수 없는 것도 당연했다. 물론 이곳 황릉은 진짜로 태조의 시신을 보관한 곳은 아니다. 대명제국을 세운 최초의 황제를 기리기 위함이다. "이곳에는 어째서?" 금의위의 물음에 윤 감찰상궁이 그의 등에 찰싹 달라붙었다. "헉?" 갑주 때문에 크게 상관은 없었지만 여인이 가까이 달라붙으니 괜히 얼굴이 빨개지는 금의위였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윤 감찰상궁이 그의 목을 두 손으로 움켜잡았기 때문이었다. "켁! 이, 이게 무슨 짓이오?" "본 상궁은 폐하께 직접 교지를 받은 수호전의 종3품 관료입니다. 지금부터 귀관들께서 보는 것은 모두 잊어야 할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황명에 의거하여 참수토록 하겠습니다." 고압적이면서 위협을 가하는 목소리에 금의위가 당혹스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명에 응하지 않으면 목을 부러뜨릴 기세였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귀 관도요." ".....알겠소." 뒤에 있던 금의위의 대답까지 들은 윤 감찰상궁이 사당을 가리키며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세요." "사, 사당으로 말이오?" "네." 그녀의 말대로 사당으로 들어가자 등을 전부 꺼두어서 어두웠다. 낮에는 종일 향을 피웠었는지 그 특유의 냄새가 진동했다. 뒤에 있던 금의위가 사당 내벽에 걸려있던 등불을 찾아서 불을 밝히자 그 내부가 환해졌다. "오...." 윤 감찰상궁을 업고 있는 금의위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보통 사당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금붙이들이 가득하고 화려하게 꾸며놓았다. 사당에 안쪽 벽에는 태조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고, 그 앞의 제단에는 위패와 타다 남은 향이 꽂혀있는 향꽂이가 있었다. "태조 폐하의 용안을 뵈었는데 어찌 가만히 있으십니까?" "아!....어, 그게...." 금의위들이 가만히 그것을 쳐다보기만 하자 윤 감찰상궁이 다그쳤다. 그녀를 업고 있는 금의위가 흠칫하며 당혹스러워하자, 그 뒤에 있는 금의위가 얼른 대답했다. "감찰상궁. 당연히 태조께 절을 드려야 하지만 향도 밝히지 않았고, 역도들의 침입으로 굉장히 급하다고 하지 않으셨소?" “아아....." 그 말이 옳다고 여긴 윤 감찰상궁이 제단의 우측을 가리키며 가자고 했다. 제단의 우측으로 가자 금빛용으로 수를 놓은 붉은 천이 있었다. 업혀 있는 윤 그녀가 손을 뻗어 그것을 들어 올리자 제단의 뒤쪽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왔다. '아! 사당의 뒤쪽에 이런 길이 숨겨져 있었구나.' 누가 태조의 황릉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으리라 상상하겠는가. 우측으로 길로 들어가자 제단의 벽에 가려진 뒤쪽으로 들어 갈 수 있었다. 초상화 벽의 뒤쪽에는 두 사람이 서있을 수 있는 폭의 공간이 나왔는데, 뭔가 길이 나올 것 같았는데 푸른 빛 벽에 막혀 있었다. '청옥석?' 그 벽은 단단한 청옥석으로 만들어졌다. 등불을 들어서 비추자 벽에 웬 동물의 그림 같은 것이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 동물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몸은 사슴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고, 꼬리는 소와 비슷했고 발굽과 갈기는 말과 같았다. 가장 특이한 것은 머리는 또 다른 영수인 용과 같은 생김새를 하고 있는데, 뾰족한 뿔이 머리에 달려 있었다. '이건 기린?' 괴이한 그림은 상상의 영수인 기린(騏麟)이었다. 몸에서 불을 뿜고 있어서 불의 화신이라하여 화기린이라고 도 부른다. 고대 전설에 나오는 영수로 시경(詩經)과 준추(春秋)에도 거론되는 성스러운 존재이다. 봉황과 마찬가지로 기린이 출현하면 성왕이 나타날 길조라고 여겼다고 한다. '태조의 제단 뒤에 이런 그림을 그려놓다니 특이하구나.' 대단한 것은 이 기린의 그림을 새겨넣은 자도 심후한 공력의 소유자인지, 손가락으로 청옥석 벽에 이것을 그렸다. 기이하게 여기고 있는 찰나에 윤 감찰상궁이 말했다. "놀랄 시간이 없습니다. 그림이 그려진 벽 쪽으로 좀 더 가까이 가주세요." "이렇게 말이오?" 금의위가 몸을 옆으로 돌려서 벽면에 가까이 하자, 업혀 있던 그녀가 손을 뻗어서 기린 그림의 두 눈을 꾸욱 눌렀다. 그러자 그림에 그려진 두 눈이 안쪽으로 들어갔다. '엇? 눈이?' -쿠르르르릉! 그와 동시에 벽 면에서 기관이 움직이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청옥석벽이 성문처럼 반으로 갈라져서 입구를 만들어냈다. 이곳이 바로 숨겨진 황궁 수호전의 입구였다. "쭉 따라 들어가세요." 제단이 사당 가장 안쪽 벽의 끝에 붙어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수호전은 결국 황릉 내부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었다. -솨아아아! 청옥석 벽에 가려져있을 때는 몰랐는데 이것이 열리자 그 내부에서 감찰상궁에게서 풍겨지는 것보다도 강렬하면서 이질적인 기운이 흘러나왔다. '서둘러야 해.' 수호전의 내부 통로로 들어서자 윤 감찰상궁의 눈빛이 무거워졌다. 그런 그녀의 뒤쪽에서 조용히 따라오던 새하얀 얼굴의 금의위가 말을 걸었다. "황릉 안에 이런 곳이 있을 줄은 몰랐구려." “......일개 금의위인 귀 관이 가질 의문이 아닙니다. 조용히 따라오기나 하세요." 냉철하게 답변을 하면서도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사실 이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황궁 수호전의 내부로 황제나 삼태상의 허락을 받지 않은 자들이 침입하게 되면 이유를 막론하고 참수한다. 아마도 이 긴 통로를 지나는 순간 그들은 숨을 거둘 것이다. 그래서 더욱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지 뒤쪽에 있는 금의위가 또 말을 걸었다. "이렇게 넓은 곳이라면 사람을 가둬두는 금옥 같은 것도 있겠구려. 대중 어디쯤에 있는지 알 수 있겠소?"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 전혀 뜬금없는 말에 윤 감찰상궁이 이상하다 싶어서 고개를 돌리려고 했는데, 통로가 끝나며 횃불이 밝혀진 중간 공동에 도착했다. 그런데 공동에 도착한 순간 벌어진 광경에 그녀가 말문을 잃고 말았다. 코끝을 찌르는 피 냄새. "이, 이게 대체....." 중간 공동은 세 갈래의 길을 잇는 곳이었다. 평소라면 이곳을 지키는 수호전의 경계병들이 창을 들고서 서있어야 했다. 그런데 그들이 전부 차가운 돌바닥에 주검이 되어 쓰러져 있었다. "어, 어째서 이들이?" 너무 놀라서 어쩔 줄 몰라하는 그녀의 귓가로 금의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건 예상 밖이군. 먼저 방문한 자들이 있다니 말이야." "!?" 그녀의 두 눈이 커졌다. 분명 방금 전만 하더라도 탁한 목소리였던 금의위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그런데 이 목소리는 그녀가 기절하기 전에 들었던 그 마교 교주 천여운의 목소리와 같았다. '아,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애써 부정해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자의 목소리였다.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별 수 없군. 수호전의 금옥은 어디에 있지?" '그....그 자다!'' 자신을 패대기쳤던 그 남자가 틀림없었다. 궁녀들을 학살하고 도주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렇다는 것은 이들은 금의위로 변장하고서 자신을 속였다는 말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으득! 이 태상과 동료들을 죽인 것도 모자라, 자신을 속여서 황궁 수호전 안으로 침입했다는 생각에 그녀는 솟구치는 분노를 진정할 수가 없었다. 짧은 찰나에 그녀는 자신을 업고 있는 자를 붙잡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당하고 만다. "에잇!" 그녀가 손을 뻗어 금의위의 목을 움켜쥐려는 순간, -우득! "컥!" 그녀의 목이 돌아가면서 부러지고 말았다. 목이 돌아가면서 천여운과 마주하게 된 윤 감찰상궁이 두 눈을 부릅뜬 채 금의위 무관의 등에 축 늘어져 버렸다. "허봉. 내려놔도 좋다." “헉? 버, 벌써 죽이셨습니까?" -털썩! 죽은 그녀를 업고 있던 금의위가 화들짝 놀라서 그녀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이 금의위 무관의 정체는 바로 허봉이었다. 대호법 마라겸이 떠올린 계획 덕분에 쉽게 황궁 수호전의 안으로 침투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에게 변수가 생겨버렸다. 황궁 수호전에 먼저 침입한 자들이 있는 것이다. "이게 어찌 된 일일까요?" 허봉이 죽어 있는 황궁 수호전의 경계병들의 시신을 바라보며 물었다. 피가 응고되지 않은 것을 보면 죽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데 있었다. '이 도흔은 본교의 묵영도법의 삼 초식이다. 그리고 이건 십지절검의 이 초식?' 시신에 남겨진 무공들은 하나 같이 마교의 무공들이었다. 마도관의 비급 서적을 육 할 가까이 스캔하여 걸어 다니는 무공 비급 서재인 천여운이 이를 몰라볼 리가 없었다. 고절한 무공은 없었지만 이 정도 흔적이라면 누가 봐도 마교인들에게 당했다고 추측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천여운이 인상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허봉 아무래도 암종의 대주들의 구출만으로 끝낼 문제가 아닌 것 같다." *** 한편 황릉 내 수호전의 가장 중심부의 한 넓은 공동. 그곳에 오십여 명의 용역, 숙수, 그리고 나인들의 복장을 한 이들이 병장기를 들고서 긴장된 눈빛으로 공동의 입구 쪽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들의 한 가운데에 황궁 주방장의 최고 지휘자라 할 수 있는 대숙수의 관복을 입고 있는 중년의 사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도병을 매만졌다. -타타타타탁! 그때 공동의 입구 쪽에서 한 나인이 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그가 급히 대숙수에게 한쪽 무릎을 꿇고서 보고했다. "크, 큰일입니다! 삼 태상! 제 오(五) 공동이 뚫렸습니다. 곧 이곳으로 놈들이 들이닥칠 것 같습니다." 대숙수의 정체는 황궁 수호전의 삼 태상이었다. 수호전의 전사들은 일반 관료들과 달리 황궁에서 항시 상주하는 잡무를 담당하는 자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 삼 태상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탄식을 했다. 수호전의 창립 이래로 한 번도 뚫린 적이 없는 곳이 적들의 침입을 허용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그들이 대부분의 경계선을 지나서 가장 중추라 할 수 있는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역시 목적은 그것인가?' 수호전 중심부로 온다는 것은 목적이 극명했다. 그것은 수호전의 태상, 전사들이 태조의 명을 받고서 대대로 지켜온 보물이었다. 적들의 손에 넘어가서는 안 될 위험한 것이었다. '계획된 일인가?' 하필 수호전의 전력이 삼 할 가까이나 빠진 상태에서 적습이 일어난 것이 수상하다. 이 태상과 그것의 희석된 잔재를 복용한 궁녀들이 있었다면 적습을 막는데 더욱 도움이 되었을 텐데 어쩔 수가 없었다. '반드시 막아야 한다.' 이 태상이 오십여 명의 수호전의 전사들에게 소리쳤다. "절대로 적들을 제 칠 공동까지 보내선 안 된다. 목숨으로 사수하라. 무슨 수를 쓰더라도..." -흠칫! 사기를 돋게 만들려던 이 태상의 입이 다물어졌다. 공동의 통로 쪽에서 불길하면서 숨이 턱 막힐 만큼 짙은 살기를 내뿜는 존재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벌써 도착하다니!' 이윽고 입구로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을 죽인다면 저렇게 갈색 장포가 붉게 물들 수 있을까? 가장 선두에 서있는 칼날이 곤두 서있는 것 같은 인상을 지닌 젊은 여인을 제외한 세 명의 사내들의 복장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여인이 입술을 실룩거리면서 중얼거렸다. "고작 무덤 안에 숨어있는 벌레들이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구나." 황궁의 숨겨진 힘이라 할 수있는 수호전의 전사들을 앞에 두고 태평스러웠다. 오히려 귀찮다는 듯한 태도가 역력했다. 이에 곁에 있던 턱수염의 사내가 혀를 날름거리며 말했다. "도혈문주. 어차피 적당히 흔적을 남겨야 하니, 이곳은 저희들에게 맡기시고 먼저 가서 그것을 취하십시오." 두 명의 사내들이 나서자 도혈문주라 불린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게 수호전의 전사들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러서 지나려고 했다. 이에 어이가 없어진 전사들이 분노를 토해냈다. "감히 이 역도의 무리들이 이곳이 어느 안전이라고 함부로 지나가려 하는 것이냐!" "죽어랏!" -팟! 숙수의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이 세 명은 초절정의 고수들이었다. 그들이 들고 있던 식도에 도강을 생성하고서 도혈문주라 불린 여인을 향해 동시에 달려들어 도초를 펼쳤다. 그러나 그들의 신형이 닿기도 전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착! 언제 뽑은 것일까? 여인이 허리춤에 차고 있는 도집에 도를 집어넣었다. -촤촤촤촤촤촤촤! 그 순간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던 세 명의 숙수들의 몸이 난자되듯이 갈라지더니, 수십 조각의 고기조각이 되어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투투투투툭!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이 잔인한 광경에 공동에 있는 모든 수호전의 전사들이 경악한 나머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마, 말도 안 되는 쾌도.....' 심지어 이들의 수장인 이 태상조차 그녀의 도를 보지 못했다. 이것이 도법이라면 전율 그 자체였다. "버러지 같은 것들." 여인은 막아볼 테면 막아보라는 식으로 이 태상을 향해 이죽이며 다시 앞으로 발걸음을 뗐다. < 67장 영물의 피 (3) > 끝 < 68장 아군이 아니오(1) > 거대한 황릉 내에 숨겨진 황궁 수호전의 근거지. 이곳은 총 일곱 개의 지하 공동으로 이어져 있다. 지하 가장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고 알려진 마지막 일곱 번째 공동은 수뇌부라 할 수 있는 이 태상과 삼 태상조차도 두어 번 정도까지밖에 가본 적이 없었다. 대명제국이 세워질 무렵부터 존재해왔던 그 보물이 있는 곳이다. ‘덥다.....아니 뜨거워지고 있어.’ 도혈문주라 불리는 여인을 보좌하고 있는 중년의 사내의 얼굴이 땀으로 가득하다. 내공으로 몸을 보호했는데도 그 열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열기는 마치 다가오려는 자를 배척하는 것만 같은 공격적인 양상마저 띠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이딴 열기가 말이냐?”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 번 쳐다보았지만 무의미했다. 그녀는 전혀 열기에 영향을 받지 않는 듯 땀 한 방울 조차 흘리지 않고 있었다. 내공이 그와는 격이 다름을 몸소 보여주었다. ‘......본문을 이끄는 상위 육문주답구나.’ 괜한 우려는 접어두고서 내공을 끌어올려 자신을 보호하는데 더 신경 썼다. 얼마 가지 않아 통로의 끝이 보였다. “다 온 것 같습니다.” 하고 통과를 한 순간 그들의 눈앞에 새하얀 장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가 끝인가라고 생각하기에는 뭔가 이상했다. 왜냐하면 새하얀 장벽에는 또 다른 입구가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가까이로 다가가자 장벽의 입구로 들어가는 쪽의 벽면에 글이 새겨져 있었다. [함부로 보물을 탐하는 자. 이곳에 갇혀 죽으리. 억지로 이곳을 벗어나려는 자. 이곳에 깔려 죽으리.] 불길한 경고들이었다. 도혈문주라 불리는 여인이 그것을 읽고는 벽면을 만져보았다. 멀리서 볼 때는 그저 새하얗게 보였는데 가까이에서 보면 이것이 격세석 벽돌들을 쌓아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설마?’ 그녀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입구로 들어서자, “하!” 절로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벽들이 전부 벽돌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전부 끊어짐이 없이 연결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일부러 벽돌들 부수고서 지나가려 한다면 모든 구조가 무너지도록 설계가 된 곳 같았다. [쿨럭....쿨럭.....침입자들이여. 네놈들이 발버둥 친다고 해도 마지막 층으로는 절대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스스로 삼 태상이라고 했던 자가 했던 경고다. 매 지하 공동을 지키는 작자들이 누누이 그런 말을 했기에 한 귀로 흘렸는데, 확실히 그 물건을 지키는 마지막 관문다웠다. “쓸데없는 짓으로 시간을 끄는군.”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아무 망설임 없이 장벽의 입구로 들어갔다. 이를 중년의 사내가 뒤따랐다. 그런데 그들이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바닥에 묘한 진동과 함께 기관 진식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편 이곳으로부터 한참 위층인 네 번째 지하공동. 네 번째 지하 공동의 바닥에는 격렬했던 전투의 흔적과 수많은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어림잡아도 오십여 명은 되어보였다. 그런 공동 안에 유일하게 숨을 쉬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피로 얼룩진 장포를 걸치고 있는 자였는데, 그는 한참 전부터 죽은 시신들을 상대로 무언가를하고 있었다. -촤촤촤?! 특이하게도 시신들에 하나하나 새로운 상처를 입혔다. 대부분의 죽은 시신들은 단 일수에 죽었는데 그 위로 다른 검초들을 새겨놓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에이. 귀찮아.” 이렇게 일일이 이런 작업을 하는 것이 귀찮은지 연신 투덜거렸다. 이곳 수호전의 근거지로 잠입하기 위해서 소수 정예로만 왔기에 수하들이 해야 할 일을 문주인 그가 할 수밖에 없었다. -촤촤촤?! 죽이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는데, 이렇게 검상을 조작하는 과정이 오래 걸렸다. 앞선 공동들보다 이곳을 사수하는 자들이 많았기에 그 혼자 남아서 이런 수고로움을 겪어야만 했다. ‘그래도 거의 끝나가는군.’ 이제 여섯 구 정도만 하고서 그들을 뒤따라가면 된다. 어쩌면 그 괴물 같은 도혈문주라면 지금쯤 보물이 있는 곳에 도달했을 지도 모른다. ‘서둘러야겠다.’ 그 역시도 그 보물이 궁금했다. 그렇게 다음 시신을 향해 다가가려는데, 공동으로 들어오는 통로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설마 벌써 지원군을 보낸 건가?’ 그러기에는 너무 빨랐다.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더니, 통로의 입구 쪽에서 한 젊은 금의위의 갑주를 입은 무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금의위?” 지원군인줄 알았는데 고작 한 사람이다. 젊은 금의위 무관의 정체는 바로 허봉이었다. 그가 시신들을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와.....여긴 더 많잖아! 진짜 너무 하...엇!” 수많은 시신들에 놀라하던 허봉이 시신들 사이에 서있는 사내를 발견했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면서 소리쳤다. “찾았다! 와! 지하를 네 층이나 내려와서야 이제 겨우 따라잡았네.” 금의위로 변장한 허봉의 외침에 장포를 입은 사내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의 말만 들으면 수호전의 지원군처럼 느껴졌는데 그러기에는 고작 한 사람뿐이었다. 더군다나 저 무관에게서 느껴지는 무위는 초절정에 불과했다. 전체 무림을 기준으로 강한 축에 속하기는 했지만, 완숙한 화경의 경지에 오른 그에 비한다면 애송이나 다름없었다. ‘하! 애송이 주제에 감히 본좌에게 손가락질을 하다니.’ 건방지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혼자냐?” “어, 아직 미혼이야.” 어이없는 동문서답에 순간 벙쪘다. “.......지금 본좌와 말장난을 하는 것이냐?” “말장난? 질문에 대답한 것뿐인데.” “이놈이 감히!” -팟! 자신의 물음에 계속 장난질을 친다는 생각에 화가 난 사내가 단번에 이 건방진 금의위를 죽이기 위해 신형을 날렸다. 단숨에 다섯 보 앞까지 신형을 좁힌 그가 검초를 펼치며 외쳤다. “뭘 믿고 함부로 지껄이는 것이냐! 당장에 그 건방진 입을 당장 찢어주마!” 그의 절묘한 검초가 공언한대로 허봉을 입을 베기 위해 안면 쪽으로 쇄도해왔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오싹! ‘이, 이건....’ 검초를 펼치던 그의 기감을 자극하는 뭔가가 느껴졌다. 등골이 오싹하게 곤두 설 만큼 날카로운 예기였다. 그것을 감지한 사내가 놀라서 검초를 포기하고서 신형을 비틀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슉! 푸푸푸푹! “컥컥컥!” 순식간에 허봉의 뒤에서 나타난 검은 인영이 펼치는 날카로운 검초가 그의 가슴의 요혈을 찔렀다. 너무 빨라서 피하거나 막을 틈도 없었다. -털썩! 주요 요혈들을 당한 사내는 그 자리에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허봉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당연히 이 분을 믿고 서지. 히히.” 그는 바로 천여운이었다. 어둠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는데, 통로의 뒤 쪽에 서있었던 그였다. 다만 기를 완전히 갈무리하고 있었기에 전혀 감지할 수 없었다. “쿨럭....쿨럭!” 아직 목숨이 끊어지지 않은 사내가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천여운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새하얀 얼굴에 차갑고 냉혹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보, 본좌가 고작 이 젊은 금의위에게 한 초식 만에 제압당했다고?’ 도저히 믿기 힘들었다. 더군다나 이 금의위는 고작 약관에 불과해보였다. 한참을 어이없어 하던 그가 고개를 저으며 현실을 부정했다. 이런 괴물 같은 무위를 지닌 자가 절대로 금의위일 리가 만무했다. “쿨럭...쿨럭....네....네놈은...대체....누구냐?”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천여운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본교의 무공으로 이딴 수작을 부리면 모를 줄 알았더냐?” “본교?.......헉!?” 그 말을 곧장 알아듣지 못했던 사내의 눈동자가 일순간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본교라는 말을 쓰는 자들은 오직 단 한 곳뿐이었다. 바로 천마신교였다. ‘마교!!! 어, 어떻게 이놈들이 이곳에?’ 하필 몰래 음모를 꾸미고 있는데 그 당사자들이 앞에 나타난 셈이었다. -?! “끄아아아악!” 놀라하고 있는데 그의 오른팔이 잘려나갔다. 예고도 없이 팔을 자른 통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잘린 팔을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하고 있는데, 천여운이 담담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많이 바빠서 그런데.....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않을 때마다 팔다리를 차례대로 하나씩 자르마.” “끄으으.....” 뭘 자른다는 말을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말을 했다. 잘린 팔의 고통 때문에 신음성만을 흘리고 있는데, 그 순간 천여운의 검결지에 맺힌 검기가 그의 왼쪽 허벅지를 갈랐다. -촤악! “끄아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는 그에게 천여운이 말했다. “답변을 안 하네.” ‘이....이런 미친!’ 인정사정없는 신체 토막에 사내의 얼굴이 점차 새하얗게 질려갔다. * * * 마지막 지하 공동으로 가기 전의 최후의 방어선인 제 육 공동. 그곳에서는 한참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미 지하로 그 괴물 같은 여인을 보내버리고 말았기에 이제는 살아남기 위한 싸움으로 변질 되고 말았다. 제 칠 공동으로 내려가는 입구 쪽 바닥에 망연자실하게 기대서 앉아있는 대숙수의 복장을 하고 있는 양팔이 없는 중년인이 있었다. 그는 바로 황궁 수호전의 세 기둥 중의 일인인 삼 태상이었다. -으득! 양팔이 없는 삼 태상이 분노로 이를 갈고 있었다. 어쩌다가 그는 이런 꼴이 된 것일까? 그것은 수호전의 전사들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러서 마지막 공동으로 향하려던 도혈문주라 불린 여인을 막으려다 벌어진 참사였다. 불과 한 초식 만에 이런 결과가 벌어지고 말았다. ‘어찌 황궁 수호전에 이런 시련이 닥쳤단 말인가!’ 화경의 극에 이른 도법의 고수인 그였지만 그 여인을 도저히 어쩔 수가 없었다. 무위가 상상을 불허하는 괴물 그 자체였다. 우두머리인 삼 태상이 고작 한 초식 만에 양팔을 잃고서 무력해졌는데, 다른 이들이 그녀를 막을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촤촤촤?! “끄아아악!” 공동 내부가 베는 소리와 비명 소리들로 난무했다. 그 도혈문주라는 여인도 괴물이었지만 이곳에 남은 두 명의 피에 젖은 장포인들도 엄청난 고수들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삼 태상과 버금갈 정도의 무위를 지녔다. “크헉!” 수호전의 전사 중에 궁녀의 목이 날아갔다. 이들은 여자라고 해서 손에 사정을 두거나 하지 않고 과감하게 살초를 펼쳤다. 그 모습을 망연자실하게 지켜보는 것이 너무도 괴로웠다. ‘네놈은 가장 마지막에 죽어라.’ 도혈문주라는 자의 명령대로 두 고수들은 삼 태상을 건드리지 않고 다른 자들부터 먼저 죽이고 있었다. 이제 살아있는 자라고는 그를 포함해 고작 여덟 명에 불과했다. “크으윽....이놈들!” -주르륵! 수호전의 전사들이 잔인하게 죽어가는 모습에 그의 눈에서 눈물마저 흘러내렸다. 차라리 싸우다가 먼저 죽었다면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얼마 남지 않았군. 지독한 것들.” “그러게 말일세.” -?! “크헉!” 압도적인 무위를 지닌 그들이었지만 황궁 수호전 전사들의 저항도 격렬했다. 그들 대다수가 못해도 절정의 무위를 지닌 자들이었기 때문에 두 장포인들 역시도 부상을 완전히 입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 물론 경미한 수준에 그쳤지만 말이다. “으으으.” 이제 다섯 명이 남았다. 오십 여명 중에서 고작 다섯만 남게 되자, 그들은 전의를 상실했는지 두려움에 떨었다. 결과가 정해진 싸움에 몸을 내던진다는 것이 그랬다. -챙! 장포인들 중 창술을 쓰는 한 자가 다른 이에게 손을 들어 보이며 앞으로 나섰다. 남은 자들은 전부 자신이 처리하겠다는 수신호였다. 이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뜻대로 하시게.” 양보하겠다며 보내주자 그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창을 살아남은 수호전의 전사들에게 겨냥했다. -투툭! 투툭! ‘뭐야?’ 그때 그의 머리 위로 뭔가 작은 부스러기 같은 것이 떨어졌다. 공동 천장의 붙어있는 돌의 잔재가 떨어진 것이다 싶어서 신경 쓰지 않는데, 다른 한 사람의 장포인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도창문주! 피하게!” -쩌저저저적! 바로 그 순간 천장에 균열이 일어나며 그곳이 무너져 내렸다. 돌 부스러기와는 비교도 안 되는 커다란 암석 파편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헉!” 당황한 도창문주라 불린 사내가 얼마나 급했는지 앞으로 몸을 날렸다. -콰콰콰콰쾅! 천장을 지탱하던 암석 파편들이 바닥에 떨어져 박혔다. 덕분에 먼지가 일어나서 시야가 가려졌다. ‘다, 다행이다.’ 바닥을 구르긴 했지만 커다란 암석 파편을 피한 그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른 장포인의 외침을 듣지 못하고, 조금만 늦었어도 어이없는 부상을 당할 뻔했다. 그런데 파편이 떨어진 먼지 속에서 인영이 보였다. ‘뭐지?’ 분명 사람의 인영이 맞는 것 같은데 기감 상으로는 어떠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평범한 사람처럼 말이다. -휘리릭! 그때 그 인영이 허공을 향해 가볍게 손을 휘젓자, 주변을 뒤덮었던 먼지가 신기하게도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그렇게 되면서 먼지 속 인영의 모습도 드러났다. “엇?” 금의위의 갑주를 입고 있는 긴 머리카락에 새하얀 얼굴의 청년이었다. 그런데 청년의 왼손에는 익숙한 얼굴의 무언가가 들려있었다. “아, 아닛?” 도창문주라 불린 자와 다른 장포인의 두 눈들이 커졌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공동의 위층에서 시신들에 검흔을 남기는 작업을 하고 있던 도절문주의 수급이었다. < 68장 아군이 아니오(1) > 끝 < 68장 아군이 아니오(2) > 시신들에게 검흔을 입히는 작업을 마치고 슬슬 지금쯤 이곳으로 내려왔어야 할 도절문주였다. 그런데 전혀 뜻밖의 이변이 일어나고 말았다. 듣도 보도 못한 금의위로 보이는 자의 손에 머리가 잘려서 나타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두 사람 모두가 하도 놀란 나머지 잠시 말문을 잃었는데, 긴 머리카락의 금의위가 입 꼬리를 올리며 중얼거렸다. “이 길이 더 빠르군.” 긴 머리카락에 새하얀 얼굴의 금의위는 바로 천여운이었다. 그는 어떻게 하다가 부서진 천장에서 이곳으로 나타나게 된 것일까? 그것은 과감한 시도에 있었다. ‘네놈 말고도 네 명이나 더 있다고?’ ‘쿨럭...쿨럭....그, 그렇다.’ 천여운에게 붙잡힌 도절문주는 양팔과 양다리가 전부 잘려서야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일부러 일부 정보를 발설했다. 더 이상 고통을 겪지 않고 머릿속에 박혀있는 고(蠱)로 죽기 위함이었다. -불끈! 불끈! 고가 폭주하면서 전신의 핏줄과 몸이 부풀어 오르며 자폭하려고 했기에 결국 천여운은 그의 목을 잘라야만 했다. 천여운이 그에게서 들은 정보는 그들의 총 인원수. 그리고 그들이 이곳에 잠입한 목적 중 하나가 황릉에 숨겨진 영수(靈獸), 기린의 피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존재했구나.’ 궁녀들에게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기운. 그리고 피부에 나있는 붉은 비늘들로 인해 미심쩍게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실재하고 있었다. ‘아아....그렇다면 서둘러야 겠구나.’ 혹여 그들의 손에 진귀한 영수의 피가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될지 몰랐다. 괜한 후환을 만들지 말고 그것이 넘어가지 않게 막아야 했다. 그런데 지하로 연결된 공동들은 생각보다 통로가 길고 이동을 많이 해야 했는데, 천여운은 여기서 과감하게 발상을 전환했다. ‘뚫자.’ 청옥석 벽조차도 순수한 힘만으로 뚫을 수 있는 천여운이었다. 공력과 조합한다면 충분히 해 볼만 했다. 그리고 그 결과 이렇게 제 육 공동의 천장을 뚫고서 내려올 수 있었다. ‘그, 금의위?’ 이렇게 천장을 뚫는다는 기발한 발상으로 나타난 천여운에게 놀란 것은 장포인들만이 아니었다. 황궁 수호전의 전사들 역시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겉모습만 본다면 금의위의 갑주를 입었기에 무관으로 착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아아!’ ‘호, 혹시 지원군인가?’ 워낙 범상치 않은 등장에 수호전에 위기를 알고서 황제 폐하께서 보낸 지원군일지도 모른다고 오해하고 말았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경이 그들의 의구심을 낮추게 만들었다. “폐, 폐하께서 지원군을 보내셨다!” “와아아아아!” 한 사람이 외치자, 남은 수호전의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 광경에 칠 공동의 입구 쪽에 기대서 절망스러워하던 삼 태상의 얼굴도 붉게 상기 되었다. 하늘에서 동아줄이라도 떨어진 기분이었다. “오오! 황상이시여!” 황제 폐하의 은덕에 감사했다. 그런 그들의 외침 소리에 도창문주와 장포인의 두 눈이 희번득 천여운의 얼굴로 향했다. 순간 놀라서 잠시 말문을 잃었지만 결론적으로 이 자의 손에 동료가 죽었다. ‘고작 금의위라고?’ 무림인도 아니고 무공을 익혔다고는 하나 황궁의 군관 따위에게 도절문주가 당했다는 생각에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감정적이게 된 도창문주가 그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앗! 성급하다!’ 신중하게 대응하자고 전음을 보내려고 했던 장포인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단단한 암석 천장을 뚫고 내려온 것도 그랬지만 기감으로도 무위가 파악되지 않기에 위험하다고 판단한 그였다. “죽어랏!” -우우웅! 도창문주의 창에 푸른빛 창강(槍罡)이 일어났다. 일반적인 병장기들과 달리 긴 창으로 펼치는 초식은 절묘하기 짝이 없었다. 창대가 휘어지면서 날카로운 창날이 수십 개의 잔영을 만들어내며 천여운을 뒤덮었다. -촤촤촤촤촤?! 잔영 하나 하나가 치명적인 요혈들만 노리고 있었다. 빼곡하게 시야를 메우는 창강의 엄청난 위력에 수호전의 전사들이 외쳤다. “피, 피하십시오! 무관님!” 저런 엄청난 절초를 정면에서 대응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삼 태상조차도 내심 몸이 멀쩡할 때도 저 초식을 막을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의 위력이었다. 모두가 피하기를 바랐으나, ‘앗! 정면으로?.’ 천여운은 전혀 개의치 않는지 오히려 창강의 잔영 속으로 걸어갔다. “멍청한 놈! 스스로 자멸하는 구나!” 도창문주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비록 감정적으로 대응하기는 했으나, 그는 전투에 있어서만큼은 절대로 방심하지 않는다. 이 절초는 그가 극도신무를 바탕으로 창안한 창술을 집대성한 것이다. 그때 천여운이 등허리에 차고 있던 도집에 잠들어 있던 도병에 손을 잡았다. -착! ‘엇?’ 도창문주의 두 눈이 흔들렸다. 도를 뽑는 것 같이 분명 허리춤에 도병에 손을 가져갔는데, 어느새 도집에 반쯤 나온 새하얀 도신의 도를 꽂고 있었다. ‘서, 설마?’ 바로 그 순간이었다. -채채채채채채채챙! 천여운을 향해서 쇄도하던 창강의 초식이 갑자기 허공에서 생겨난 날카로운 예기에 휘감기며 잔영들이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친 것처럼 말이다. ‘앗 이 초식은?’ 이 광경에 삼 태상 역시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지금 이것은 그 도혈문주라 불리던 괴물 같은 여인이 보여주었던 극쾌의 도초와 매우 흡사했다. -주르르륵! “크으윽!” 도창문주의 창대를 잡은 두 손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손바닥이 찢겨진 것이다. 허공을 맴도는 도초의 여파가 워낙 강해서 창대를 통해서 전달되었는데, 이화접목의 수법으로 바닥에 흘려보내도 감당이 되지 않았다. ‘공력을 감당할 수가 없어.’ 십성 공력까지 끌어냈는데도 밀리는 상황이 일어났다. -타타타타탁! 공력의 여파를 이기지 못한 도창문주의 신형이 뒤로 열 보 가량 밀려났다. 혼자서 폭풍 속을 지나치기라도 한 듯 머리카락이 산발이 되어서 정신이 없어보였다. 그런 와중에 믿기 힘들다는 눈빛으로 소리쳤다. “네, 네놈.....대체 정체가 무엇이냐? 어떻게 그 초식을?” 그가 이렇게 소리를 지르는 것도 당연했다. 왜냐하면 천여운이 펼친 초식은 극도신무의 제 오 초식인 극쾌살도(極快殺刀)였다. 유일하게 발도술을 통해서 펼치는 도초인데, 극성에 이르면 도를 뽑는 것조차 보지 못할 만큼 쾌도의 경지에 이른다. ‘어찌 이런 일이....’ 그런데 문제는 이 극쾌살도의 초식을 익힌 자는 상위 육문주 밖에 없다는 것이다. 육신의 한계를 넘어선 도식에 속도를 가미한 이 초식은 다른 극도육무문의 문주들은 다른 무기를 사용해도 익힐 수가 없는 초식이었다. “어떻게 금의위 따위가 극도신무의 초식...앗!” -쩌저적! 그때 그의 창날에 금이 가면서 부서져버렸다. 놀랄 틈도 없이 천여운의 신형이 어느새 그의 가까이로 파고들었다. “말이 많군.” “큭!” 도창문주가 보법을 펼치며 창대를 휘두르며 뒤로 거리를 벌리려 했다. 바로 그 순간 천여운의 신형이 훨씬 빨라지며 잔상을 일으키며 수 갈래로 갈라지더니, 이내 하나가 되어 그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초, 초식이 하나로?’ 일원화 되는 검식들에 놀란 도창문주가 창대에 강기를 일으켜서 회전을 하며 방어를 했으나, -푹! 스스스스! “컥!” 어느새 천여운의 신형이 도창문주의 뒤에 자리 잡고 있었다. 검결지를 쥐고 있는 천여운의 손가락에서 흉흉한 기운을 머금은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도창문주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자신의 가슴을 쳐다보았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검초가?” 그의 가슴은 언제 검초에 직격 당했는지 휑하고 구멍이 뚫려있었다. 그런 그에게 천여운이 아무렇지 않게 중얼거렸다. “미안하지만 내가 바빠서 길게 상대해줄 시간이 없다.” 그의 가슴을 관통한 이 절세초식은 바로 천마검공의 마지막 절초였다. 찰나의 순간에 검결지에 천마기를 둘러서 사용했지만 그 위력은 화경의 극에 이른 고수조차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강렬했다. “.....말도 안 돼. 보, 본좌가 이렇게 허무하게.....” -털썩! 어이가 없다는 듯이 중얼거리던 도창문주가 숨이 끊어졌는지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가 쓰러짐과 동시에 수호전의 전사들이 크게 환호성을 질렀다. “와아아아아아!!!” “적을 죽였다!” 오십여 명이나 되는 전사들이 동시 합공을 해도 고작 얕은 상처를 내는 것이 전부였는데, 고작 두 초식 만에 한 명을 죽였으니 정말 대단하게 여겨졌다. ‘저, 전율적이다! 금의위 중에 저런 실력자가 있었단 말인가?’ 처음에는 황제 폐하의 지원군이라고만 여겨서 감격스러워 하던 삼 태상이 어느새 의문을 품었다. 금의위들 중에서도 최강이라 불리는 북진무사도 이 정도 무위를 지니지 않았다. 설사 황제를 보호하는 수신호위라고 해도 저 창을 든 고수를 제압하려면 적어도 수십 초식은 겨뤄야 가능할 듯한데 너무 압도적이었다. 그 무위가 마치 무림에서 최고라 불리는 오대 고수급은 되어보였다. ‘이, 이럴 수가! 도창문주가 고작 두 초식 만에 죽다니?’ 장포인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분을 모시는 상위 육문주에 비하면 떨어진다고 하나, 무림을 기준으로 봤을 때는 한 문파의 수장 급에 속하는 실력자였다. ‘저런 무위에 금의위라고?’ 황궁 수호전의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 그들과는 연관이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정말 금의위일 수도 있지만, 동창의 첩형으로 침투되어있던 도조문주가 금의위 중에서는 그들을 대적할 만 한 자가 없다고 했다. ‘아냐. 절대로 금의위 따위가 아니다. 저 자의 정체가 대체 뭐지?’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극도신무의 제 오 초식인 극쾌살도만 쓰지 않았더라도 이렇게 당혹스럽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때 천여운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곳에선 네놈이 마지막인가?” 얼음장 같이 차가운 눈빛이 날카로운 검처럼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젠장!’ -오싹! 단지 그와 시선을 마주쳤을 뿐인데, 장포인은 극도의 공포심을 느꼈다. 이 괴물 같은 자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화경의 극에 오른 고수라는 체면도 필요 없었다. 자신이 상대할 수 없는 자에게 대적해봐야 결과는 도창문주와 같은 죽음으로 돌아올 것이다. ‘도, 도혈문주에게 데려가야 해.’ 괴물을 상대하려면 괴물이 제 격이었다. 이 자는 자신의 선에서 절대로 해결할 수 없는 적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장포인은 도주를 결심했다. ‘틈을 만들어야 해!’ -우웅! 장포인이 검강을 일으켜서 천여운이 있는 곳을 향해 탄검강을 날렸다. 정확히 말하면 천여운이 아닌 그의 주위를 노린 것이다. -콰콰콰쾅! 탄검강이 적중한 공동 바닥이 부서지면서 파편과 먼지가 위로 솟구쳤다. 잠시라도 그의 시야를 가리기 위함이었다. ‘됐다!’ 장포인이 재빨리 마지막 공동으로 향하는 통로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그것은 옳은 선택이었다. 천여운과 정면으로 대결을 했다면 더욱 빨리 죽음을 맞이했을 테니 말이다. -오싹! 뭔가 싸늘하다. 그것을 무시하고서 경공을 박차한 장포인의 신형이 어느새 통로의 입구 쪽으로 도달했다. 그러나 한참을 내달리던 그는 바로 입구 앞에서 멈춰야만 했다. -끼익! “이, 이게 대체 뭐야?” 장포인은 당혹스러운 눈빛이 되었다. 경공을 펼치면서 뭔가 모를 스산한 한기 같은 기운을 느끼기는 했는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둥둥! 입구의 허공으로 수십 개의 얼음검들이 둥둥 떠서는 그를 겨냥하고 있었다. 그 엄청난 위용에 할 말을 잃을 지경이었다. “얼음검? 서, 설마 이게 이기어검이라고?” 이기어검을 본 적이 없다면 모를까. 이렇게 많은 수의 얼음검들을 다루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조차 의문이었다. ‘대체 이게 뭐야? 이, 이자는 정녕 괴물이란 말인가?’ 얼음검들은 언제라도 그를 꿰뚫은 기세로 날카로운 예기를 발하고 있었다. “도망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비, 빌어먹을!’ 그런 그의 귓가로 천여운의 목소리가 울렸다. 애석하게도 그의 탄검강은 아주 잠깐도 시간을 끌지 못했다. 심장이 덜컥 거리는 공포감에 이성을 잃은 장포인은 얼음검들을 향해 검강을 일으켜서 신형을 날렸다. ‘차라리 뚫는다!’ 저놈과 직접 상대를 하느니 이 난관을 뚫는 것이 나았다. 장포인은 입구를 막고 있는 얼음검들을 향해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최고의 절초를 펼쳤다. -촤촤촤촤?! 극도신무를 바탕으로 한 검초 중에서 가장 공수가 완벽한 초식이었다. 그의 신형이 뻗어오자, 수십 개의 얼음검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향해 화살비처럼 날아갔다. -슈슈슈슈슈슈슈슈슉! ‘방심하지 않으면 된다!’ 장포인이 최대한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촘촘하게 검초를 펼치며 얼음검들과 부딪쳤다. -채채채채채챙! 파스슥! ‘그러면 그렇지 얼음은 얼음이구나.’ 날카로우면서 단단한 얼음검이었지만 강기에 비하면 당연히 강도가 약했다. 그의 검강에 부딪칠 때마다 얼음검들이 부서지거나 아지랑이가 올라오며 산화했다. 장포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벗어날 수 있겠어!’ 벌써 얼음검들의 절반이 부서졌다. 그러나 그가 모르는 한 가지 사실이 있었다. 보통의 고수들이라면 이기어검을 펼칠 때 극도의 정신력을 발휘하느라,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 하지만 천여운은 나노가 이기어검에 대한 판넬 제어권을 갖고 있기에 그것이 가능했다. “뒤가 비었군.” “아닛?” 바로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놀란 장포인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 “컥!” 그의 목으로 새하얀 도날이 스치고 지나갔다. 막아볼 틈도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얼음검들을 뚫고서 지나갈 수 있다고 화색에 차있던 그의 두 눈이 일순간에 절망으로 뒤바뀌었다. “.....어, 어떻게?” 움직일 수 있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게 남겨진 생은 찰나에 불과했다. -툭! 푸슉! 장포인의 목이 갈라지며 그의 머리가 허무하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데굴데굴! “오오오!” 입구 쪽에 기대고 있던 삼 태상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바닥을 구르는 장포인의 수급을 보면서 그는 진심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자는 가히 무신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닌 자였다. ‘놀랍구나! 세상에 이런 절대고수가 존재했단 말인가.’ 정체가 무엇인지는 당장에 중요하지 않았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런 전율적인 고수가 자신들의 아군이라는 것이었다. ‘그래! 이 자라면 그 괴물 같은 여인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벌써 그 여인이 마지막 공동으로 내려간 지 일 각 정도가 지났으니, 서두른다면 보물을 탈취하는 것을 저지할 수 있으리라. “무관님! 지금 당장 밑으로 내려가서 적들을 막으소서. 보물이 탈취 당하기 전에 서둘러야 합니다!” 삼 태상이 다급한 목소리로 천여운에게 소리쳤다. 그런데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 천여운이 도집에 도를 집어넣지도 않은 채, 그의 앞으로 묘한 살기를 풍기면서 다가왔다. 뭔가 꺼림칙한 기분에 삼 태상이 의아해하며 그를 불렀다. “무, 무관님?” 그런 삼 태상을 향해 천여운이 안타깝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를 어쩌나?" "그, 그게 무슨?" ".....나도 그대의 아군이 아니오.” “넷? 그게 무슨...”” -?! 놀란 그가 뭐라고 답변하기 전에 천여운의 도가 그의 목을 베었다. 잘린 삼 태상의 머리는 대체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하는 눈빛으로 차가운 바닥을 뒹굴었다. "이, 이게 대체?" "무....무관님! 어찌 이러신 겁니까?" 황제 폐하께서 보내신 아군이라고 철썩 같이 믿으며 환호성을 지르던 공동이 일순간에 차가운 적막으로 휩싸였다. 그들의 세 수장 중 한 사람으 목을 베었으니 당혹스러운 것도 당연했다. 천여운이 그들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무관이라.....아직도 내가 금의위로 보이나보군.” “!?” 금의위가 아니라면 대체 누구란 말인가? 천여운이 날카로운 도 끝을 들어올려, 그들에게 겨냥하며 무게감이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십만대산의 주인이다.” “십만대산? 서, 설마 마....마교?” 십만대산의 주인. 그것은 마교의 교주를 부르는 또 다른 호칭이다. 천여운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진실에 그들의 눈빛이 일제히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대들을 죽이려고 하는 적이지.” “!!!” -슉!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천여운의 신형이 순식간에 그들을 향해 뻗어왔다. < 68장 아군이 아니오(2) > 끝 < 69장 기린의 화신 (1) > 황릉의 제 사 공동은 세 갈래의 길로 나누어져 있다. 곧바로 밑으로 향한 천여운과 달리 허봉은 다른 공동으로 와있었다. 세 갈래에서 우측으로 향하면 나오는 곳이 황궁 수호전의 금옥이다. 그곳에서 그는 얼굴이 피멍으로 가득한 사내 한 사람과 속옷만 입고 있는 시신 두 구를 옮기고 있었다. “젠장.” 허봉의 입에서 거친 소리가 튀어나왔다. 속옷으로 중요 부위만 가리고 있는 시신들은 고문으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손톱과 발톱은 전부 벗겨져 있었고 인두로 몸을 지진 흔적부터 갖은 고생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황궁은 무슨 개뿔!” 허봉은 시신들을 보면서 상기된 얼굴로 계속 욕설을 내뱉었다. 그들은 암종의 대주들이었다. 금옥에 잡혀 들어온 순간부터 모진 고문을 당하다 목숨을 잃은 그들이었다. “허 부관님. 그만 불을 붙여주시지요.” 시신들의 주변에 태울만한 것을 모아온 상처투성이의 사내가 말했다. 그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암종의 대주였다. 가장 마지막에 고문을 받게 되면서 운 좋게 적습으로 인해 살아남게 되었다. 횃불을 들고 있는 허봉이 잠시 망설였다. “본교로 데려가지도 못하고.....” 흔적을 없애기 위해서 태워야 하는 것이 그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그 모습에 암종의 대주가 그에게 횃불을 넘겨달라고 했다. “후우, 제가 하겠습니다.” 피멍으로 엉망인 얼굴이었지만 부은 눈에는 결의가 가득하다. 허봉이 그에게 횃불을 넘기자 아무 망설임 없이 그는 시신들의 주변에 있는 천조각과 부러뜨린 나뭇가지에 불을 붙였다. -화르르륵! 등불에 있던 기름을 부어놓아서 순식간에 불이 붙었다. 치솟는 불꽃을 보면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암종의 대주가 조용히 말했다. “어차피 간자로 살아가기에 본교를 위해서 희생을 각오했습니다. 임무 중에 순직한 형제들에게 슬퍼하는 기색은 보이지 마십시오.” “누, 누가 슬퍼한다고 그럽니까? 그냥.....” 뒷말은 차마 잇지 못했다. 암종의 대주들은 첩보와 간자, 그리고 암살을 위주로 활동하기 때문에 가족이나 주변의 친지도 없다. 그들은 오직 마교를 위해서 살아가는 그림자들이었다. 스스로 걸어가고자 하는 길에 후회하지 않는다. 그래도 마지막 임무를 천마신교의 하늘이라 할 수 있는 교주와 함께 했고, 그들의 시신을 직접 구했기에 떠나가는 길이 헛되지 않다고 여겼다. ‘교주님께서 화가 나신 모습은 오랜만이다.’ 교주에 등극한 후로 크게 분노하는 모습을 보기 힘들었던 천여운이다. 그런데 고문을 당한 암종 대주들의 시신을 발견하고는 급격하게 눈빛이 식어가는 것을 본 후에 오래간 만이라고 생각했다. ‘혼자 가셨는데 괜찮을까 모르겠네.’ 불에 타는 시신들을 보면서 허봉은 걱정했다. 그와 살아남은 암종의 대주에게 시신들에 대한 처리와 한 가지 일을 맡겨놓고 먼저 지하로 향한 천여운이었다. 허봉은 그를 천하무적이라고 믿었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법이었다. ‘서둘러서 마무리하고 교주님이 계신 곳으로...’ -쾅! 드르르르르! 바로 그때였다. 지하 공동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커다란 진동이 일어났다. 무너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공동이 떨리는 것이 육안으로 판별이 가능할 정도였다. ‘이건 대체?’ 진동만이 아니었다. 지하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솟구쳤다. 허봉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암종의 대주에게 말했다. “자, 잠시 교주님께 다녀올 테니, 이곳을 부탁합니다.” “알겠습니다! 서두르십시오!” 허봉의 신형이 빠르게 금옥이 있는 공동 바깥으로 튀어나갔다. * * * 숨겨진 보물이 있는 마지막 제 칠 공동. 그곳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기관진식이 설치된 미로를 통과해야만 한다. 강제로 격세석 벽을 부수게 되면 천장이 무너지도록 설계가 되어 있어서 선택권이라고는 없었다. 여러 위험한 함정이 도사리고 있지만 그것은 압도적인 무력을 가진 도혈문주의 앞에선 단순히 시간 끌기에 불과했다. “유치하군.” -파스슥! 바닥에서 튀어나온 창날은 반탄강기에 막혀서 부서지고, 벽에서 튀어나온 화살들도 그들의 움직임에 비해서 너무 느렸다. 굳이 도혈문주가 나설 필요도 없이 그를 보좌하는 사내가 웬만한 기관진식들은 파훼시키면서 이동한 결과 드디어 미로의 끝에 도달했다. ‘출구다!’ 들어올 때처럼 격세석 장벽이 하나 가로막고 있었고, 그 밑으로 출구가 있었다. 그런데 출구에서 환한 빛이 횃불의 불빛처럼 일렁였다. 그들이 출구를 통과하자 그들의 눈앞에 여섯 번째 공동의 반 정도 되는 크기의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그녀를 보좌하는 사내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화르르르르르! 출구로 나오자마자 뜨거운 열기가 그들을 마중했는데, 공동의 끝에 이곳의 삼분지의 일을 차지하는 큰 못이 자리하고 있었다. 정말 신기한 것은 그 못의 정 한가운데에 작은 섬처럼 암석이 튀어나와 있었는데, 그곳에 거대한 불꽃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부글부글! 그 불꽃으로 인해 못이 뜨거운 온천수처럼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덕분에 공동은 뜨거우면서 희뿌연 수증기로 매우 공기가 습했다. ‘참으로 신비로운 곳이구나.’ 깊은 지하이다 보니 마치 용암의 대지로 들어선 기분마저 들게 만들었다. 못 한 가운데 타오르는 불꽃의 기이함에 시선을 빼앗겼던 그들의 귓가에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감히 이곳에 더러운 발을 내딛은 것이냐?” “엇?” 목소리는 들리고 있었는데, 그 존재가 어디에 있는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못 한 가운데의 거대한 불꽃에서 풍기는 이질적인 기운이 이곳 공동을 잠식하고 있어서 기감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사내와 달리 도혈문주의 시선은 거대한 불꽃으로 향하고 있었다. “네년이 마지막 파수꾼이냐?” ‘네년?’ 그녀의 말에 사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워낙 걸걸한 목소리여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던 그였다. 그때 공동으로 다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건방진 계집이로구나. 하긴 황궁의 보물을 노릴 만큼 간이 부었으니 말이야.” 목소리가 방금 전보다 날카로워져 있다. 빈 정이 상한 듯 한 목소리에 도혈문주가 전혀 기가 죽지 않고 불꽃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언제까지 거기서 숨어서 지껄일 참이냐. 모습을 드러내라. 설마 겁을 먹은 것은 아니겠지. 아아! 혹시 모습이 추해서 숨은 게냐?” 일부러 상대를 도발하고 있는 그녀였다. 여인들끼리의 기 싸움이란 이런 것일까? ‘이런 식의 도발이 통할까?.....엇?’ 두 사람의 대화에 사내가 의문을 가지는데, 거대한 불꽃이 있는 뒤편에서 검은 인영이 움직이는것이 보였다. 설마 했는데 정말로 도혈문주의 도발에 넘어간 모양이었다. -화르르르르! 모든 것을 태울 것만 같은 화마 속에 대체 어떻게 들어간 것일까? 바로 그때 거대한 불꽃 속에서 보이던 검은 인영이 천천히 그것을 가로질러 앞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아닛?” 놀랍게도 검은 인영의 몸 전체가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불꽃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그것을 가로지르더니, 못을 평지를 걷듯이 걸어서 앞으로 걸어 나왔다. -화르르륵! 온몸이 불꽃으로 휘감고 있는 모습이 불의 화신 그 자체였다. 이곳 황릉을 지키는 수호전의 전사들 가운데 화기를 다루는 자들을 더러 보기는 했지만 그것과는 비교가 불가했다. ‘불에 타는 것이 아니라 전신이 불꽃 그 자체다.’ 인간이라고는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사내의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곳으로 내려오면서 어떠한 황궁 수호전의 전사들을 보아도 경계심이 들지 않았으나, 저 불꽃으로 휩싸인 자는 달랐다. ‘정녕 인간의 기운이 맞는 건가?’ 몸에서 풍겨져 나오는 기운이 광폭하면서 공격적이었다. 긴장하는 그와는 달리 옆에 서있는 도혈문주의 눈빛에는 전의가 감돌았다. 지금까지는 전혀 흥미를 가지지 못했으나, 이제야 관심이 갈 만한 대상을 찾았다는 그런 표정마저 짓고 있었다. “후후후, 단순히 이곳을 지키는 자로만 생각했는데, 그것을 취했구나. 맞지?” 그녀의 질문에 불꽃을 휘감는 자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신을 휘감고 있는 불꽃이 서서히 수그러들면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스스스슥! 불꽃이 뒤덮고 있어서 전신이 검게 그을렸을 것만 같았는데, 얼굴부터 온몸이 붉은 비늘로 뒤덮여 있는 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헛?’ 온몸이 비늘로 덮여 있었지만 그녀는 실 한 올도 걸치지 않은 나신이었다. 봉긋한 가슴하며 잘록하게 들어간 허리에 완벽한 몸매의 소유자였다. 비늘의 여인이 오른손을 어딘가로 뻗자 공동의 구석 한편에 있던 천 같은 것이 날아와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스스스슥! 그렇게 가슴부터 허벅지까지 천으로 가려지자 놀랍게도 전신을 뒤덮고 있던 붉은 비늘들이 피부 속으로 스며들 듯이 사라졌다. 타오를 것 같은 적발이 허리까지 내려오는 고혹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얼굴만 봐서는 고작 약관에 불과해보였다. ‘자, 자극적이구나.’ 천으로 몸을 가린 것과 다름없어서 몸매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덕분에 사내가 괜히 민망한지 눈을 돌렸다. 이를 전혀 개의치 않는지 적발의 여인이 도혈문주를 얼굴부터 위 아래로 한 번 훑어보고는 가소롭다는 듯이 노려보면서 입을 열었다. “얼마나 특별하나 했더니 별 것 없구나.” 추하다는 말을 계속 의식했던 모양이었다. 객관적으로 평가한다면 적발의 여인은 중원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절세미인이었다. 이번에는 반대로 자신의 얼굴을 감평당했다는 생각에 도혈문주가 기분이 나빠졌는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하. 고작 무덤 지기 주제에 건방지구나.” “고작 무덤지기? 본 녀는 대명제국의 태조와의 약조에 의거해 오랜 세월 동안 이곳 황릉의 보물을 지키고 있다. 고작 너 같은 도적 따위가 함부로 입을 놀릴 대상이 아니다.” ‘태조?’ 태조와의 약조라는 말에 사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뭔가 범상치 않다고는 여겼지만 저 여인의 말만 들으면 근 이백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왔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런 그녀의 말에 불쾌해 하던 도혈문주의 눈빛이 반짝였다. “기린의 피에 영생의 효능도 있었나?” “영생!” 무공에 극에 이른 무인도 수명에는 한계가 있다. 세월 앞에서는 누구도 장사가 없다는 말이 괜히 생겨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근 이백 년을 살아왔다는 자가 여전히 약관의 모습이라는 것은 영생에 가까운 능력을 지녔다는 것이었다. “눈이 탐욕으로 가득하구나. 어리석은 자들이여.” 그들의 눈에서 비치는 탐욕의 빛을 발견한 적발의 여인의 목소리에서 살기가 일어났다. 보물을 노리고 들어온 자들이라면 죽여야 한다. “일 태상 란영. 태조의 명에 따라 보물을 노리는 도적들을 참하겠다.” -화르르륵! 스스로를 일 태상 란영이라 밝힌 그녀의 양팔에 불꽃이 일어났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이 눈앞에 있는 모든 적을 태워버릴 기세였다. ‘엄청나다!’ 단순히 드러나는 기운만으로도 어지간한 고수들은 견디지 못할 만큼 강렬했다. 놀라하는 사내에게 도혈문주가 말했다. “뒤로 물러서라. 본좌가 상대 하겠다.” “아, 알겠습,,,” -스륵!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들의 앞으로 흐릿한 잔상 같은 것이 일렁였다. “엇?” 신기루처럼 공기가 일렁이며 나타난 자는 다름 아닌 일 태상 란영이었다. 어찌나 빨랐는지 사내는 그녀가 다가온 것조차 몰랐다. “뭐가 뒤로 물러나라는 것이냐. 둘 다 사이좋게 보내주마.” -화르르륵! 그녀의 양손에서 일어난 불꽃이 화마처럼 그들을 동시에 뒤덮었다. 단순히 열양의 기운이나 화기를 넘어선 불꽃에 사내가 당혹스러워 하며 검을 뽑아 검강으로 검막을 만들어냈다. -촤촤촤촤촤?! 검강으로 만들어낸 검막이 촘촘한 그물망의 형태를 만들어냈다. 사내는 다급하게 방어를 취했으나 당연히 이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화르르르르르륵! “이, 이게 무슨?” 불꽃이 일순간에 검막을 뒤덮더니, 강한 열기가 침투하며 검병을 잡은 손이 뜨거워졌다. 내공으로 보호하고 있지만 그 열기가 너무 뜨거워 탈 것만 같았다. -치이이익! “크윽!” 사내가 검막을 회수하고서 신형을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불꽃이 그물의 틈새로 스며들면서 화마가 그를 덮쳤다. -화르르륵! “비, 빌어먹을!” 사내가 잡고 있던 검을 놓고서 신형을 뒤로 날렸지만 불꽃이 이미 몸을 휘감았다. 순식간에 그의 몸에 붙은 불꽃이 그를 태우려들었다. “으아아아악!” 팔을 시작으로 상반신에 불꽃이 붙자 사내가 화들짝 놀라서 뇌려타곤을 펼치며 바닥을 뒹굴었다. 반면 동시에 공격을 당한 도혈문주는 달랐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고 했던가. 불꽃이 뒤덮으려고 하자, 도혈문주가 발도술을 펼치며 도리어 일 태상 란영의 목을 베려고 들었다. -촤악! ‘빠르다!’ 몸을 가볍게 젖혀서 피하려고 했던 란영이 공격하던 것을 멈추고 신형을 뒤로 날려서 도혈문주의 발도술을 피해야만 했다. ‘그 거리에서 피해?’ 도혈문주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확실히 자신의 간격에 있어서 단숨에 죽일 작정이었는데 피해냈다. 도를 정확하게 보았다는 소리였다. “네년. 보통이 아니구나.” 도혈문주가 열 보 정도 거리를 물린 일 태상 란영에게 제법이라는 듯이 말했다. 그러자 일 태상 란영 역시도 마찬가지라는 듯이 답했다. “호오! 본 녀의 일 수를 막아내다니? 근 이십 년 만이로구나.” 그녀 역시도 일수에 그들을 불태워서 죽일 작정이었는데, 도리어 자신이 피하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참으로 오랜만이군. 이런 상대는.’ 황궁의 진정한 숨겨진 힘이라 불리는 그녀였다. 긴 세월을 살아온 만큼 누구도 그녀의 일수를 쉽게 파하지 못했는데 정말 오랜만이었다. 흥미가 돌았는지 일 태상 란영의 눈빛에 전의가 감돌았다. ‘황궁 수호전이라 실망할 뻔했는데 재미있겠구나.’ -고오오오! 서로에게 호승심을 느낀 두 절세고수들이 서로를 대치하고서 기운을 끌어올렸다. 그들이 그러고 있던 차에 도혈문주를 보좌하는 사내는 몸에 붙은 불꽃을 겨우 끄고서, 화기를 배출시키고 있었다. -치이이이익! 가부좌를 취하고 있는 그의 몸에서 뜨거운 수증기가 흘러나왔다. 도혈문주의 도를 피하느라 물러나기를 망정이었지 공격이 더 이어졌다면 꼼짝없이 당할 뻔했다. ‘저, 정말 괴물 같은 여인이다.’ 도혈문주 같은 여인이 세상에 또 있을까 했는데, 황릉에 이렇게 숨어 있었다. 괴물의 상대는 괴물이 제 격이었다. 자신이 끼어들어봐야 방해만 될 것이 뻔하기에 도혈문주가 그녀를 상대하는 동안에 보물을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후우......화기를 마저 배출시키고 나는 못이 있는 쪽으로 가서...응?’ -쿠르르르르! 공동의 천장 쪽에서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화기를 배출시키는데 집중하고 있던 그가 뭔가 싶어서 고개를 들어 올리는 순간이었다. -콰콰콰쾅! 천장이 갈라지며 지반을 받치고 있던 암석이 그를 뒤덮었다. 말 그대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으, 으아아아악!” -퍼퍼퍼퍽! 운기조식을 하고 있지 않았다면 재빨리 피했겠지만 지독히도 운이 없었다. 그대로 무너지는 암석에 깔려버린 그였다. 서로가 대치하고서 허실을 탐색하고 있던 두 여인이 갑작스럽게 무너진 천장으로 시선이 돌아갔다. “도상문주!” 방금 전 비명소리는 분명 자신을 보좌하던 도상문주가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가 가부좌를 틀고 있던 곳에는 무너진 천장의 암석 파편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 파편들 위로 누군가가 서있었다. "이놈은?" “금의위?” 두 사람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천장에서 내려온 자는 새하얀 얼굴에 금의위의 복장을 하고 있는 청년이었다. 그는 바로 천여운이었다. 앞서 다른 두 공동을 지나쳤을 때와 마찬가지로 단숨에 지하 바닥을 뚫고서 마지막 공동까지 내려온 그였다. 천여운이 대치하고 있는 두 여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다행히 늦지 않았군.” < 69장 기린의 화신 (1) > 끝 < 69장 기린의 화신 (2) > ‘멍청한 놈!’ 살다 살다 무인이 싸우다 죽은 것도 아니고 무너지는 천장에 깔려버렸다. 뭐라고 언급하기조차 싫었다. 천장을 뚫고서 나타나는 바람에 놀랐던 것도 잠시, 도혈문주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보통이 아니다.’ 그녀의 예민한 기감으로도 평범해 보이지 않는 자였다. 완벽하게 기운을 갈무리하고 있어서 그렇지 화경을 넘어서는 고수가 틀림없었다. ‘쉽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건가?’ 눈앞에 대치하고 있는 일 태상 란영이라는 자만 제거하면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금의위의 복장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 황궁 측의 고수였다. ‘바로 위에서 나타났다는 것은.....’ 위의 지하 공동에서 시신들에 마교의 무공 흔적을 남기는 작업을 하고 있던 자들을 전부 제압했을 확률이 높았다. 도혈문주가 일 태상 란영과 더불어 천여운을 번갈아가면서 쳐다보았다. 무(武)에 있어서 자신은 있었지만 합공을 당한다면 자신이 불리해지리라. ‘그렇다면....’ 한편 갑작스럽게 천장을 뚫고 내려온 천여운으로 인해 당혹스러운 것은 도혈문주만이 아니었다. 일 태상 란영 역시도 범상치 않은 그의 등장에 경계심이 일어났다. 금의위의 복장을 하고 있는데, 그들 중에서 저 정도 위압감을 가진 고수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수신호위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황제를 옆에서 지키는 수신호위보다도 강하다고 확신했다. 더군다나 기운을 갈무리하고 있지만 자신이 가진 기운과는 다른 흉흉하면서도 위험한 기운이 풍겨지고 있었다. ‘정상적인 통로도 아니고 천장을 뚫고 나타났다. 이년의 아군이구나.’ 란영이 도혈문주를 노려보았다. 호승심을 자극시키는 고수였기에 오랜만에 승부를 해볼만 하다고 여겼는데, 역시나 보물을 탈취하려는 자들이 정정당당하게 부딪칠 리가 없었다. 아무리 자신이라고 해도 이 두 사람이 동시에 덤벼든다면 꽤 난처할 것 같았다. ‘동시에 합공당하면 위험하다. 그렇다면....’ 참으로 공교로웠다. 천여운의 등장으로 두 절세고수인 여인들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 경계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천여운과 서로를 번갈아가면서 쳐다보던 두 여인이 서로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신형을 날렸다. -팟! 두 절세고수들이 동시에 노린 자는 바로 천여운이었다. 합공을 막기 위해서 그들이 선택한 것은 새롭게 나타난 그부터 제압한 후에 남은 적을 처리하자는 것이었다. -화르르륵! -촤악! ‘합공을?’ 천여운 역시도 이런 전개는 예상하지 못했다. 마치 서로의 싸움에 방해당한 맹수가 새로운 적을 배제하는 양상이었다. ‘이런....’ 왼쪽에는 화기린이 달려들기라도 하듯 뜨거운 불꽃을 내뿜는 장법이 작렬해왔고, 오른쪽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쾌도의 도초가 쇄도해왔다. ‘응?’ ‘엇?’ 동시에 천여운을 향해 초식을 날리는 서로를 발견한 두 여인의 눈빛에 이채가 띠었다. 저 금의위가 상대편의 아군이라고 생각했는데 대체 이건 무슨 일일까? 하지만 이미 초식을 날렸기에 무를 수도 없었다. “시작부터 좋지 않군.” 천여운의 눈빛이 무거워졌다. 보법으로 피하기에는 두 사람의 초식이 너무도 빨랐다. -챙! 천여운이 오른손을 뻗자 등 뒤의 도집에 있던 백룡도가 저절로 뽑혀지며 그의 손으로 빨려들어왔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차차차차차착! 왼손을 뻗자 양팔의 손목을 보호하고 있던 흑철들이 분해되면서 흑검을 형태로 이루어지면서 천여운의 손으로 빨려 들어왔다. ‘팔의 보호대가 검으로?’ ‘저 도는 대체 뭐지?’ 우도좌검의 형태를 취한 천여운의 모습에 그녀들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로 이루어졌다. -치이이이이이! 뜨거운 열기로 가득한 공간에 차가운 한기가 일어나며 백룡도에서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기이한 현상에도 불구하고 왼쪽을 파고든 일 태상 란영의 불꽃을 휘감은 장초가 천여운을 태워버릴 기세로 덮쳤다. -촤촤촤촤?! 그 순간 한기를 머금은 천여운의 백룡도가 기이한 각도로 움직이며 란영의 장초와 부딪쳤다. -채채채채챙! ‘이건 한기?’ 란영의 두 눈동자가 흔들렸다. 한기를 머금은 도초가 그녀의 초식을 막는 것도 모자라서 허점을 파고들려 했다. 놀란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극도신무의 절초로 단숨에 천여운을 네 토막으로 갈라버리려고 했는데, 흑검이 절묘하게 움직이며 도혈문주의 도초를 막아냈다. -채채채채챙! ‘본좌의 도초를 막아내?’ 당혹스러운 것도 당연했다. 영문을 모르겠지만 어떻게 합공을 하게 되었는데, 그들 한 사람의 공격도 어지간한 고수들은 막기조차 힘든데 오히려 동시에 막아냈다. 그것도 모자라 양손으로 전혀 다른 초식을 펼치면서 말이다. ‘양손으로 도초와 검초를 다룬다고?’ 오랜 세월 동안 무공을 익혀왔지만 완전히 다른 초식을 양손으로 펼치는 것은 처음 겪는 일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초식들이 전부 절세초식이었다. ‘이놈....위험하다.’ ‘전력을 아낄 수준이 아니야.’ 기습적으로 노린 것이기는 하나 완전히 전력을 다한 두 여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천여운이 자신들의 초식을 막아내자, 그녀들은 그가 굉장히 위험하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여기서....’ ‘배제해야 해.’ -촤르르륵! 양팔에만 불꽃이 휘감아 있던 일 태상 란영의 전신에 붉은 비늘이 일어났다. 그러더니 붉은 비늘에 돋아난 곳이 전부 불꽃으로 바뀌어 이윽고 그녀는 불꽃의 화신이 되었다. -화르르르륵! 방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열기가 치솟았다. 한기를 내뿜고 있던 백룡도가 붉게 달아오를 만큼 뜨거웠다. -치이이익! 백룡도의 검병을 타고 손바닥에 열기가 침투할 정도였다. 검게 그을리는 것이 화상을 입어갔다. “한기를 다루는 자여. 이것도 막을 수 있을까? 십이겁화(十二劫火)!” -고오오오오! “이건?” 열두 개의 불꽃의 구가 그녀의 주위에서 생겨나더니, 천여운에게 동시에 내리꽂히며 폭발하듯이 연달아 일어났다. 단순히 양손에서 불꽃을 뿜어대던 장법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위력이었다. -쾅! 쾅! 쾅! 쾅! ‘이때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도혈문주 역시도 극도신무의 절초를 펼쳤다. 쾌도를 주로 익혀온 그녀가 극도로 발전시킨 극도신무의 제 오 초식인 극쾌살도(極快殺刀)였다. -착! 그녀가 허리춤의 도집에 도를 집어넣자 허공에서 날카로운 예기가 일어났다. 전력을 다한 그녀의 극쾌살도는 황궁 수호전의 전사들에게 펼쳤던 수준을 훨씬 뛰어넘었다. 화염구에 뒤덮여 폭발을 일으키는 곳에서 갑자기 스물네 식의 도강이 생겨났다. “죽어라.” -촤촤촤촤촤?!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폭발하고 있는 불꽃으로 도강이 일제히 꽂혔다. 불꽃을 가르며 파고드는 도강의 세례는 그 내부를 난자하듯이 갈랐다. -콰콰콰콰쾅! 쩌저저적! 폭발과 도강이 동시에 한곳에 집중되자, 그 여파로 바닥에 균열이 일어나더니 그곳에 불꽃의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엄청난 위력이다.’ ‘이 정도일 줄이야. 거리를 벌려야겠어!’ -팟! 이에 두 여인이 동시에 신형을 뒤로 날리며 초식의 여파에서 몸을 피했다. 두 절세초식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의도해서 초식을 펼친 것은 아니었는데 완벽할 만큼 두 절대고수의 합공이 이루어진 셈이었다. -슈우우우우! 합쳐진 두 초식이 끝나자 그곳은 거의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폭발로 검게 그을려서 거대한 구덩이가 파여 있었고, 곳곳이 거대한 도흔들로 난자되어 엉망이었다. 그 중심부는 매캐한 연기만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이런 엄청난 위력이라면 시신조차 남기 힘들어 보였다. ‘가루가 되었겠군.’ 처참한 흔적에 혈도문주가 혀를 찼다. 그리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일 태상 란영을 쳐다보았다. ‘이년은 무슨 수작이지?’ 분명 이 금의위는 황궁의 고수가 틀림없었다. 그런데 오히려 자신과 더불어 이 자에게 합공을 가했다. 덕분에 쉽게 처리할 수 있었지만 도통 무슨 의도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일 태상 란영이 그녀에게 물었다. “방금 그 남자, 네년이 데려온 게 아니었나?” ‘!?’ 일 태상 란영은 그녀와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이에 도혈문주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물었다. “무슨 헛소리지? 네년이 데려온 거 아냐?” “뭣?” 그 반문에 두 여인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서로의 아군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이 금의위의 정체가 무엇이란 말인가? ‘하!.....죽기 전에 물어봤었어야 하나.’ 일 태상 란영은 뭔가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시신조차 남지 않은 죽은 자에게 아무 것도 물어볼 수 없었다. 반면 도혈문주는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잘 됐다. 어차피 꺼림칙한 놈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해결해두었으니 이제 이 타오르는 계집만 처리하면 되겠구나.’ 의도한 합공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쉽게 처리한 게 다행이었다. 밤은 길지 않았다. 어서 이 여자를 죽이고서 기린의 피를 탈취해서 황궁을 벗어나야 했다. -슥! 도혈문주가 그녀에게 도를 겨냥하며 말했다. “운이 좋은 줄 알아라. 이제 네년만 처리하면 되겠구나.” 짙은 살기를 내뿜는 그녀의 모습에 일 태상 란영이 혀를 차면서 답했다. “우습구나. 그 말을 그대로 돌려주지. 방금 전에 그 자와 합공을 해야 본 녀를 겨우 상대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화르르르륵! 그녀의 주위로 몸에서 불꽃이 더욱 활활 타올랐다. 일 태상 란영이 양 손을 들어 올리자, 주변으로 불꽃의 구들이 떠올랐다. 방금 전 금의위에게 썼던 그 기술과 흡사했다. “후후, 그딴 기술이 본좌에게 통할 것 같으냐.” “글쎄, 통할지 안 통할지는 보면...” -오싹!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두 사람의 감각을 동시에 자극하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두 여인이 동시에 그곳을 바라보았다. -휙! 그곳은 다름 아닌 아까 전에 동시에 합공하여 초토화된 장소였다. 폭발의 여파로 아직까지 뿌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그들을 오싹하게 만드는 기운이 풍겨졌다. “이게 대체 무슨?” “그럴 리가....” 이상했다. 그 엄청난 초식의 여파 속에서 살아남을 리가 만무했다. 이것은 중원 최강이라 불리는 오대 고수라 할지라도 막을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도의 위력이었었다. 그러나, -쩌저저저적! “엇?” 초토화되어 큰 구덩이가 패인 곳을 중심으로 바닥이 한기가 올라왔다. 공동 전체가 못 한 가운데의 불꽃으로 뜨거운 열기로 가득한데, 놀랍게도 바닥이 차가운 서리가 생겨나 얼어붙고 있었다. 그런데 이 서리는 검은 빛을 띠었다. “바닥이 검게 얼어붙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그들의 시선이 흩어져가는 연기로 향했다. 이윽고 연기가 가시면서 그 속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이럴 수가?” “죽.....지 않았어?” 놀랍게도 연기 속에는 두 절세초식을 직격으로 합공당한 천여운이 가루가 되기는커녕 멀쩡히 서있었다. 물론 완전히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입고 있는 금의위 갑주가 그을려 있었고, 얼굴과 갑주가 손상된 부근이 화상 자국과 도흔으로 보이는 상처들로 가득했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앗! 상처가?” -츠츠츠츠! 화상 자국부터 베인 상처들이 눈에 보일 만큼 빠르게 회복되어 갔다. 처음부터 없었던 상처처럼 순식간에 그것들이 사라졌다. ‘뭐지? 이 자는.....’ 말도 안 되는 재생 속도에 일 태상 란영의 표정이 굳어졌다. 기린의 피를 복용하고 그것을 완전히 흡수한 자신의 재생력보다도 훨씬 빨라보였다. 놀라하는 그들을 바라보며 천여운이 입을 열었다. “황궁 수호전과 극도육무문의 두 사람이 동시에 합공할 줄은 몰랐군. 후우......뭐, 상관없다. 지금부터는 나 역시 합공을 할 거니까.” “뭐? 합공?” 합공이라는 말에 그들이 주위로 기감을 집중했다. 그러나 주변에 어떠한 타인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의미일까? ‘나노.’ 천여운이 머릿속에 있는 나노를 불렀다. ‘전력으로 간다.’ [알겠습니다. 사용자의 시야로 증강현실을 개안합니다.] -파르르르! 천여운의 두 동공이 흔들리면서 흰 빛의 입자가 선을 그리며 증강현실이 개안되었다. 증강현실이 개안되자 천여운이 그들을 향해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허공에서 푸른 빛이 응집하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서, 설마?” 도혈문주의 눈동자가 떨려왔다. 그녀의 불길한 예상은 현실로 이루어졌다. 허공에서 응집한 푸른빛은 검의 형태를 이루었는데 그것은 바로, “이, 이기어검강!” 그것은 바로 이기어검강이었다. ‘검이라는 매개체가 없이 허공에 강기를 응집시키다니?’ 완숙한 현경의 경지에 이른 자는 검이라는 매개체에 강기를 실어서 이기어검강을 펼칠 수 있다.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이기유형의 경지에 이르면 매개체가 없이 허공에 검강을 만들어낼 수 있는데, 그 경지를 무림인들은 현경의 극이라고 부른다. “혀, 현경의 극이라고?” 완숙한 현경의 경지인 도혈문주가 경악하는 것은 당연했다. 무림에서 자신을 상대할 수 있는 자는 오직 오대고수들뿐이라고 여겼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우우우웅! 응집하는 푸른빛의 강기들은 단 하나가 아니었다. 천여운의 주위로 열두 개의 푸른빛 강기가 응집하여서 이기어검강이 만들어졌다. “마, 말도 안 돼.” 하나도 아니고 열두 개의 이기어검강에 그녀는 경악했다. 범상치 않다고 여겼지만 이건 괴물 그 자체였다. 전신이 불꽃으로 뒤덮여 있는 일 태상 란영조차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놈 대체 정체가 뭐야?’ < 69장 기린의 화신 (2) > 끝 < 69장 기린의 화신 (3) > 열두 개의 유형화된 이기어검강의 위용. 그것은 황궁의 숨겨진 힘 그 자체라 불리는 일 태상 란영과 극도육무문의 상위 육문주 중의 일인인 도혈문주를 경악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현경의 극!’ 이기유형의 경지에 이른 고수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란영조차도 단 한 번밖에 보지 못했다. 물론 그것조차 이 정도 수준은 아니었다. 놀라하는 그들을 향해 천여운이 담담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부디 실망시키지 마라." -고오오오! 천여운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열두 개의 이기어검강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며 여섯 개씩 나뉘면서 두 여인을 겨냥했다. ‘자칫 방심했다가 위험하겠구나.’ 이백 년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왔지만 이런 것은 처음 본다. 저 검강 하나하나에 실려 있는 강렬한 기운은 단순히 보이기 용이 아니었다. 천여운이 속으로 외쳤다. ‘판넬!’ [열두 개의 이기어검강에 판넬 원격 조정 기능을 활성화합니다.] -삐삐삐삐삐삐! 나노의 대답과 함께 증강현실에 열두 개의 붉은빛이 십자 형태의 과녁을 그리며 두 여인을 겨냥했다. ‘놀라서 될 문제가 아니다.’ 경악해하던 두 여인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현경의 극에 이른 천여운이 보이는 신기에 경악하기는 했지만, 여기서 망연자실하게 방관한다면 허무하게 당할 것이 뻔했다. 젊어 보이는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들 역시도 백전의 노장이었다. ‘냉정하게 생각하자.’ 도혈문주가 눈매를 가늘게 뜨고서 자신을 겨냥하는 여섯 개의 이기어검강을 노려보았다. 비록 놀라기는 했지만 저것을 완숙히 다루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완숙한 현경의 경지에 이른 그녀도 이기어검강을 다룰 수 있지만 정밀하게 다룰 수 있는 숫자는 고작 세 개가 한계였다. ‘기공의 일인자인 도공문주도 이기어검을 일곱 개 이상 다루지 못한다. 저놈이 아무리 괴물이라고 해도 열두 개를 정밀하게 다룰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더군다나 강기를 유형화하는 것만으로 공력소모가 굉장할 것이다. 그렇다는 말은 승부는 시간에 달렸다는 의미였다. 자신과 저 불꽃을 내뿜는 여자가 적어도 반 각 이상만 버텨도 승패는 자신들에게 유리해지리라. ‘초식이 아니라 단순한 식은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막을 수 있다.’ 일 태상 란영 역시도 비슷한 결론을 내렸다. 괴물 같은 능력이기는 했지만 열두 개나 되는 이기어검강으로 초식을 정교하게 다룰 리가 없다고 여겼다. ‘적이긴 하지만 저 년이 오래 버텨주길 바라야 하는 건가.’ 란영이 도혈문주를 흘깃 쳐다보았다. 관건은 시간을 얼마큼 끄느냐에 따라서 저 괴물 놈을 쓰러뜨릴 수 있느냐가 달렸다. ‘좋아!’ -화르르륵! 일 태상 란영의 주위에 떠있는 불꽃의 구들을 방향을 천여운이 있는 곳으로 돌렸다. 어차피 열두 개의 이기어검강 중에 자신이 상대할 숫자는 여섯 개다. 충분히 해볼만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척! 천여운이 그들을 향해 손을 뻗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열두 개의 이기어검강이 허공에 푸른빛의 궤적을 그리면서 그들을 향해 쇄도했다. -슈슈슈슈슈슉! 그것은 일종의 장관이나 다름없었다. ‘온다!’ 경계하면서 기다리던 일 태상 란영이 쇄도해오는 여섯 개의 이기어검강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허공에 떠있던 불꽃의 구들이 이기어검강을 향해 포탄처럼 날아갔다. -슈슈슈슉! 이기어검강을 부딪쳐 폭발을 일으켜 상쇄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녀의 의도대로 앞으로 뻗어나간 불꽃의 구들은 두 개씩 하나의 이기어검강을 향해 날아가 부딪치려 했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아닛?’ -촤촤촤촤?! -콰콰콰쾅! 놀랍게도 날아오던 이기어검강들이 불꽃의 구를 갈라버린 것이다. 그것도 이기어검강이 하나하나가 따로 조정하는 것처럼 상황에 맞게 불꽃의 구들을 가볍게 베고서 다시 쇄도해왔다. ‘설마 정말로 이걸 전부 다룬다고?’ 란영의 두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만약 정말로 그런 것이라면 여섯 명이나 되는 괴물을 상대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칫!” 순식간에 자신을 찌르려드는 이기어검강들에 란영이 바닥을 향해 주먹을 내리찍었다. -쾅! 쩌저저저적! 그러자 바닥에 균열이 일어나며 붉은 용암과도 같은 열기가 흘러나오더니, 이내 그녀의 주변으로 거대한 불기둥이 치솟았다. -화르르르륵! 촤촤촤?! 불꽃의 기둥이 치솟는 덕분에 그녀를 찌르려던 이기어검강이 막히고 말았다. 불기둥은 철벽이 되어서 이기어검강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했다. ‘어차피 이기어검강이라한들 그 역시 강기가 아닌가. 본 녀의 불기둥은 강기도 뚫을 수 없을 만큼 견고하다!’ 굳이 하나씩 상대할 필요가 없었다. 이백 년 동안 갈고 닦은 그녀의 선천진기는 다른 두 태상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촤촤촤촤?! 우우우웅! 이기어검강들이 불기둥을 찔러서 꿰뚫어보려 했지만 막혀서 고착되었다. 란영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역시 자신이 예상한대로 이기어검강들은 단순한 찌르기나 베는 것 외에는 응용이 불가능한 듯 했다. ‘그러면 그렇지. 무슨 수로 초식....엇?’ -슉! 불기둥을 뚫지 못한 이기어검강들이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는, [여섯 개의 이기어검강에 천마검공 세 초식, 이십사마검의 세 초식을 가동합니다.] 불기둥을 둘러싼 이기어검강들이 일제히 초식을 펼치기 시작했다. 심지어 전부 다른 초식들이었다. 그것은 마교 최강의 검법이라 할 수 있는 천마검공과 검마의 이십사마검의 검초였다. “서, 설마?” 란영의 입에서 육성으로 경악하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검강의 위력을 최대한으로 발현하게 만드는 것은 검식이 조합된 초식에서 비롯된다. -촤촤촤촤촤?! 순식간에 여섯 명의 절대고수들이 합공하는 것처럼 불기둥을 향해 마교의 양대 검초가 강타했다. 견고할 것 같은 불기둥에 여섯 초식들이 부딪치자 상황이 달라졌다. 불기둥에 절세검초들이 난자하더니, 이내 두 개의 이기어검강이 불길을 뚫고서 그 내부에 있던 일 태상 란영에게로 파고들었다. ‘괴물 같은 놈! 하지만 쉽게 당할 성 싶으냐!’ -화르르륵! 란영이 다급히 양손으로 불꽃으로 장결을 일으키며 검초에 대응했다. 단순히 불꽃만이 그녀의 전부는 아니었다. 불꽃을 머금은 그녀의 장법 역시도 고절했는데,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꽃과는 다르게 부드러움을 머금고 있었다. 그녀가 단순히 손을 휘젓는 것만으로 불꽃이 만개하는 꽃처럼 수를 놓았다. -차차차차창! 그녀의 장법과 이기어검강이 펼치는 화려한 검결이 부딪치며 불꽃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그런데 검초를 막아내던 란영의 눈빛에 이채가 띠었다. ‘이....검초는?’ 한편 일 태상 란영과 마찬가지로 날아오는 여섯 개의 이기어검강의 공격에 봉착한 도혈문주는 특기인 쾌도술로 자신의 간격으로 검강이 진입하지 못하게 막으려 했다. -채채채채채챙!! 쾌도의 고수답게 그녀의 간격으로 들어오려던 이기어검강이 허공에서 날카로운 예기들에 부딪치며 불꽃이 튀면서 진입하지 못했다. “네놈의 내공이 다 하는 동안 본좌의 간격으로 절대로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그녀가 자신감에 차서 소리쳤다. 도를 휘두르는 오른손과 팔이 육안으로 잔상처럼 보일 만큼 빨랐다. 그러나 이기어검강이 단순히 찌르기 공격만을 한다면 이것이 장기적으로 통했을 지도 모른다. “아닛?” 단순히 찔러오던 이기어검강이 갑자기 검결을 그리기 시작했다. 도혈문주의 두 눈이 커졌다. -촤촤촤촤촤?! “서, 설마 초식을?” 놀랄 틈도 없이 여섯 개의 이기어검강이 허공에서 검수도 없이 검초를 펼쳤다. 여섯 명의 검의 고수가 합공을 하는 것처럼 여섯 개의 다른 검초가 펼쳐지자 그녀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 이건 아니잖아.’ 황당해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여섯 검초 하나하나가 현경의 극에 오른 고수인 천여운이 펼치는 것과 진배없었다. 일대일로도 벅찬 상대가 여섯이라면 결과는 지극히 뻔했다. -채채채채채채챙! “으윽!” 극성의 공력, 그리고 극쾌로 물샐 틈이 없이 도초를 펼쳤지만 그녀의 신형이 밀려나기 시작했다. 벌써 열 보가 넘는 거리를 바닥에 지탱하고 있던 두 발이 끌려갔다. -촤아아아아! 간격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았는데도 여섯 검초 하나하나의 위력이 강해서 막아낼 수가 없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이 검초 하나하나가 무적이라 단언했던 극도신무의 도초에 버금갔다. 오히려 초식의 완성도에서는 더욱 뛰어났다. ‘뭐지? 이 검법.....낯이 익다.’ 죽을힘을 다해 쾌도를 펼치며 여섯 검초를 막아내는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처음에는 이기어검강으로 초식을 펼칠 수 있다는 것에 당혹스럽기만 했는데, 그녀는 이 검초를 본 적이 있었다. ‘이건 그 늙은이가 펼치던 검법?’ 틀림없었다. 몇 년 동안이나 극도육무문이 전면으로 무림 활거를 하려던 것을 막던 그 늙은이들 중에 한 사람이 펼치던 검초와 흡사했다. 더군다나 불안정하던 그 늙은이의 검초와 달리 완전무결하다. 그 늙은이는 스스로를 마교의 태상교주라고 밝혔었다. 도혈문주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마교다! 이놈은 마교의 놈이구나!’ 드디어 그녀는 정체불명의 금의위의 정체를 알아냈다. 그녀가 알기로 당금 무림에서 이 검법을 펼칠 수 있는 자는 오직 단 한 사람뿐이었다. ‘긴 머리카락에 새하얀 얼굴.....’ 오랫동안 마교에 간자로 있던 암검이종이 잔존인들이 알려준 것과 흡사했다. 그 자의 이름은 분명, ‘천여운!’ 현 마교의 교주 천여운이 틀림없었다. 몇 번이나 자신들의 계획을 수포로 돌아가게 한 장본인이었다. -으득! 도혈문주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의 진정한 정체를 알게 되자 더욱 당혹스러웠다. 분명 자신들이 계획한대로라고 한다면 마교의 교주는 자신들이 황궁을 통해 획책한 계획에 의구심을 가지느라 마교에 있어야만 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단오제에 맞춰서 준비를 해야 하는 자가 대체 어떻게 황궁에 나타난단 말인가? -채채채채챙!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이 자가 정말로 마교주 천여운이라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계획이 틀어졌음을 ‘그 분’께 알리거나 이 자리에서 처단을 해야 하는데, 지금으로서는 전자도 후자도 하기 힘들었다. ‘빌어먹을 어떻게 해보고 싶어도.’ 이러다간 자신이 먼저 죽을 판국이었다. 반각만 버티면 된다고 여겼는데, 그 시간이 이렇게 길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그때였다. -치이이이익! “으윽!” 뒤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에 그녀가 곁눈질로 뒤를 힐끔 쳐다보았다. 어느새 그녀의 신형이 거대한 불꽃이 치솟아 뜨거운 열기로 가득한 못 근처까지 밀려있었다. ‘언제 여기까지?’ 끝없이 공격해오는 여섯 이기어검강의 초식에 이 정도까지 밀린 것이었다. 바닥에 끌려있는 발자국은 근 이십 보가 넘는 거리였다. -화르르르륵! 차차차차창! 뒤로 한참을 밀려난 덕분에 앞쪽에서 겨루고 있는 일 태상 란영의 모습이 보였다. 근방이 불꽃과 검강의 검흔으로 초토화가 될 만큼 격렬했다. 그러나 눈에 띨 만큼 란영은 곤욕스러워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놈의 내공이 다하기도 전에 우리가 먼저 쓰러지겠어.’ 검초에 집중하면서 그녀는 어찌해야 하나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까? -치이이이이! “아흑!” 모든 공력을 이기어검강을 막는데 집중하느라 등에서 느껴지는 열기조차 막기 힘들었다. ‘빌어먹을! 보물은커녕 이러다간....엇?’ 그때 그녀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한 가지가 있었다. 자신의 바로 뒤에 있는 못에 기린의 피가 있다. ‘......어차피 이 상황에선 답이 없다. 도박을 걸 수밖에 없는 것인가.’ 짧은 시간 안에 기린의 피가 어떤 효과를 가져올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충분히 도박을 해볼 만했다. 적어도 영물의 피라면 공력을 폭증시킬 수 있으리라. “하압!” 쾌도를 펼치던 도혈문주가 재빨리 쥐고 있던 보도를 두 손으로 쥐고서 지면을 향해 내리찍었다. 이 도초는 최근에 공을 세우면서 ‘그 분’께 전수받은 것이었다. -쾅! 그 순간 그녀의 신형이 잔상처럼 여덟 갈래로 갈라지며, 쾌도가 멈춰지면서 그녀를 향해 쇄도해오는 이기어검강들을 향해 여덟 잔상이 여덟 도식을 펼쳤다. 극도신무 제 칠초식 팔선도경(八僊刀競)이다. -촤촤촤촤촤?! 여덟 갈래로 뻗어나간 잔상이 일순간에 폭발적인 역량의 패도적인 도세를 만들어내며 이기어검강을 밀어냈다. ‘이때닷!’ 유형화된 검강마저 주춤거릴 만큼의 위력에 드디어 빈틈이 생겨났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그녀가 타오르는 불꽃이 있는 못을 향해 신형을 날리려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촤악! “꺄아아아아악!” 몸을 돌리려고 하는 찰나에 그녀의 오른팔에 차가운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분명 이기어검강을 밀어냈는데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툭! “아아아악! 파, 팔이!” 방금 전의 그 차가움의 정체는 바로 팔이 잘려나간 것이었다. 도를 쥐고 있던 그녀의 팔이 뜨거운 열기로 가득한 바닥에 떨어져서 꿈틀거렸다. “어, 어째서?” 고통보다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올리는데, 놀랍게도 그녀의 눈앞에 천여운이 서있었다. “허튼 짓을 하게 내버려둘 줄 알았나?” “네, 네놈이 어떻게?” 도혈문주는 경악하다 못해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열두 개의 유형화된 이기어검강을 다루려면 극도의 집중력을 요해야 해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해야 할 터였다. 그런데 대체 이게 무슨 어이없는 일인가. -슈슈슈슈슈슉! “아닛?” 놀라하는데, 어느 틈에 천여운의 주변으로 그녀가 잠시 막아냈던 여섯 개의 이기어검강이 날아와 포위망을 펼치듯이 둘러쌌다. 그야말로 절망스러운 상황이 연출되고 말았다. '말도 안 돼! 이 많은 이기어검강을 다루면서 움직일 수 있다고?' 그것이 이기어검강이 아니라 이기어검이면 이백 자루 이상도 가능하다. 물론 모든 연산을 나노가 보조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네, 네놈은 정녕 괴물이란 말이냐?”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의 한계를 벗어났다. 분문에서도 몇 차례 사건 이후로 유심히 살피고 있었는데 이건 그 정도로 모자랐다. 대업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제거해야만 할 대상이었다. -으득! 그녀가 고통을 참기위해 이를 악 물었다. 고통이나 두려움보다 여기서 그저 망연자실하게 당하는 것이 더욱 수치스러웠다. 오른팔을 자른 천여운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본좌의 팔을 잘랐다고 우습게 여기는 것이냐!’ 오른팔이 잘리기는 했지만 그녀 정도 되는 고수라면 왼손으로도 도초를 펼치는 것이 가능했다. 더군다나 바로 이렇게 코앞 정도의 간격이라면 말이다. 그녀는 살기를 죽이고서 조심스럽게 왼손으로 공력을 보내려고 했는데, -?! 툭! “꺄아아아아아악!” 미처 공력을 운기하기도 전에 그녀의 남아있던 왼팔이 잘려나갔다. 그녀가 고막이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남아있던 한 팔마저 잘려나가면서 고통으로 정신이 혼미해져가는 그녀에게 천여운이 무정하게 말했다. “허튼 수작 부리지 말라고 경고했을 텐데. 계집.” “끄으으으으.....하아...하아...” 방심할 거라 여겼는데 그것은 오산이었다. 수차례 강적들과 대결을 하면서 경험을 쌓은 천여운은 적이 숨을 거둘 때까지 절대로 방심하지 않는다. 그것이 적들에게 있어서는 피도 눈물도 없다고 여겨지게 만들었다. “내 팔을....내 팔을! 끄으으윽!” 양팔이 잘려나갔으니 더 이상의 재기는 불가능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것이 그녀를 비참하면서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으득! 육체적인 고통은 오래가지 않았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그녀가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하아...하아.....지고의 경지라 불리는 현경의 극에 이른 자가 고작 오른팔이 잘려나간 여인한테도 겁을 먹은 것이냐? 참으로 우습구나.” 이에 천여운이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인이 아니라 필요할 때는 언제든 여자임을 내세우는 계집이었나?” “뭐얏? 네놈이! 감히! 아아아아악! 죽어어어엇!”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그녀가 양팔이 잘린 것을 잊고서 미친개처럼 이빨로 천여운의 목을 물어뜯으려고 했다. 그러나, “너나 죽어라.” -촤촤촤촤촤?! “커커커커컥!”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여섯 개의 이기어검강이 일제히 도혈문주의 몸을 찔렀다. 고슴도치처럼 이기어검강에 관통당한 그녀가 비틀거리다, 증오스럽다는 눈빛으로 천여운을 노려보다 이내 뒤로 넘어갔다. < 69장 기린의 화신 (3) > 끝 < 70장 허봉이여 불꽃이 되어라 (1) > -첨벙! 이기어검강에 꿰뚫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도혈문주는 거대한 불꽃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는 못에 넘어지면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뽀글뽀글! '특이하구나. 못이 끓다니?' 그녀 덕분에 거대한 불꽃과 못을 발견한 천여운이다. 신기한 것은 이렇게 불꽃이 타오르는데도 못이 끓기만 하고 마르지 않은 것이 이상했다. 구음절맥의 한기를 지닌 천여운은 이 정도 열기에 큰 영향을 받지 않지만 뜨거운 열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기에 물러섰다. [사용자의 잔존 에너지가 38퍼센트 남았습니다.] 천여운의 머릿속에 나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 오랜 시간을 소요하지 않았지만 유형화된 이기어검강의 내공 소모는 현경의 극에 이르렀다고 해도 부담스러웠다. '이제 남은 것은 저 온몸이 불에 타고 있는 여인인가.' -화르르르륵! 전신에서 한기를 내뿜는 여인도 만났지만 불로 타오르는 것은 참으로 기이했다. 일 태상 란영은 나노가 조정하는 이기어검강을 상대하느라 정신없이 장법을 펼치고 있었는데, 도혈문주보다는 잘 버티고 있었다. -촤촤촤촥! 이기어검강이 펼치는 검초가 사방을 가득 메웠다. 그런데 그녀는 이 초식들을 완벽하게 막아내지는 못했다. 단 하나의 초식만으로도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천마검공과 이십사마검의 검초를 여섯 개나 감당하니 그것은 당연했다. -촥! "윽!" 푸른빛 검강이 만들어내는 검의 궤적이 란영의 갈비뼈 쪽을 베고 지나갔다. 그로 인해 신형이 잠시 흔들리자 이를 놓칠 새라 다른 검강의 검식이 그녀의 왼쪽 허벅지 쪽을 베었다. -촥! "하압!" 그런데 그녀는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는지, 이를 무시하고서 장결을 일으켜 다른 검강들이 펼치는 검초를 막아냈다. '아.…상처가?' 천여운이 이를 유심히 살펴보니 그녀의 다친 부위가 재생하고 있었다. 나노머신의 회복속도 만큼은 아니었지만 빠른 속도로 베인 부위가 아물어갔다. 불꽃은 그저 몸에 두른 것처럼 육신의 재생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직 버틴 건가?' 고통을 느끼지 않고 빠른 재생력이 그녀를 지금까지 버티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물론 그것뿐만이 아니라 일 태상 란영의 장법은 무림에서도 수위에 꼽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고절했다. '하지만 이제 끝내야겠군.' 도혈문주를 죽였기 때문에 더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우우웅! 천여운의 주위로 푸른빛이 응집하며 여섯 개의 이기어검강이 생겨났다. 오대고수인 무쌍검 왕전마저도 열두 개를 상대하면서 고전하다가 항복 선언을 했는데, 과연 그녀는 이를 견딜 수 있을까? -슥! 천여운이 손을 들어 올리며 란영에게 투입하려는 순간이었다. "끄으으윽!" 익숙한 목소리의 신음성에 천여운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그 소리는 반대쪽 끝인 공동의 입구 쪽에서 흘러나왔었다. '허봉?' 그곳을 바라보자 허봉이 누군가에게 붙잡혀 있었는데, 그 자는 피로 물든 장포에 부상을 당했는지 몰골이 엉망인 사내였다. 한쪽 팔은 짓뭉개졌는지 밑으로 축 쳐져 있는 사내는 충혈 된 눈으로 허봉의 뒤에서 단검을 목에 겨냥하고서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하아....하아...빌어먹을...." '제, 젠장! 이게 대체 무슨 날벼락이야?' 갑자기 기습적으로 뒤를 잡힌 허봉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지하에서 들려오는 폭발음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달음에 밑으로 달려온 그였다. 물론 천여운이 뚫어놓은 지름길로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복병이 생겨났는데, 이곳 마지막 공동으로 뛰어내린 순간 바닥에 쌓여있던 돌무더기에서 이 자가 튀어나와 그를 붙잡은 것이었다. "저, 저기..." "닥쳐! 죽기 싫으면 꼼짝하지 마라!" 허봉이 공력을 끌어올려서 이 자에게서 벗어나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그였지만 상대는 화경의 고수였다. 시도도 하기 전에 그의 왼쪽 어깨를 찌른 뒤에 살기어린 경고를 했다. -푹! "끄으으윽!" "꼼짝하지 말라고 했지! 한 번만 더 움직이면 네놈의 목을 베겠다." 차가운 단검은 언제든지 그의 목을 벨 기세였다. 결국 허봉은 반항을 할 수가 없었다. '이, 이 자는 대체 누구지?' 짓뭉개진 팔의 고통 때문에 거친 호흡을 내뱉는 그는 도혈문주를 보좌하는 극도육무문의 고수인 도상문주였다. 모두가 죽었다고 생각했던 그는 무너진 잔재 속에서 겨우 살아남았다. 몸 전체에 부상을 입고 운기 도중에 충격을 당해 내상을 입었지만, 수위에서 한참 차이가 나는 허봉은 어떻게 제압할 수 있었다. '도혈문주가 죽다니....' 한 팔로 허봉을 억지로 붙잡고 있는 그는 이 사태를 어찌 해야 할지 고민했다. 밑에 깔려서 겨우 들끓는 내기를 진정시켜서 탈출하긴 했는데, 멀리서 도혈문주가 두 팔이 잘려서 죽는 것을 목격하고 말았다. '말도 안 돼. 저 괴물 같은 여자를 저리 쉽게 죽이다니?' 괴물을 능가하는 괴물이었다. 짧은 순간에 그는 수많은 고민을 해야만 했다. 계속 돌무더기 속에 숨어서 죽은 척 하고서 저들이 사라지길 기다려야 하는지 말이다. '저 괴물 놈이 언제까지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다.' 두 사람을 처리하고 나면 분명 회복한 자신을 감지할 게 뻔했다. 그러던 차에 돌무더기 위로 누군가가 '주군!' 하면서 뛰어내렸고, 그는 이것을 활로의 기회로 삼아보기로 했다. "하아.....네놈은 저 자와 무슨 관계지?" ".....아까 닥치라고..." "지금 나와 말장난을 하는..." -슉!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동의 반대편에 있던 천여운의 신형이 어느새 그들의 앞으로 나타났다. 어찌나 빨랐는지 화경의 고수인 그조차 나타나서야 알아차릴 정도였다. '이, 이놈은 정말 괴물이다.' 도혈문주조차 상대하지 못했는데, 자신이 어찌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주, 주군!" 난데없이 적에게 잡혀버린 허봉이 어찌할 바를 모를 표정으로 천여운을 불렀다. 본의 아니게 짐이 되어버린 셈이었다. -고오오오오!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았다.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바로 앞에서 수많은 검들이 겨냥하고 있는 것처럼 심장을 옥죄여왔다. 그 압박감은 화경의 고수라고 해도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최대한 냉정함을 유지하려 했던 도상문주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킬 정도였으니 말이다. '진정하자. 이렇게 본좌를 압박한다는 것은 분명 일행이 틀림없다.' 두렵기는 했지만 이걸로 확실해졌다. 주군이라고 했을 때 혹시나 했는데 자신에게 잡혀 있는 이 자는 분명 이 괴물과 관련되어 있다. 그때 천여운이 차갑게 식은 눈빛으로 도상문주를 노려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를 풀어줘라." "아아아....교주님!" 진심으로 분노한 천여운의 모습에 허봉이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그를 모시게 된지 어언 오 년이 다되어가는데, 이 모습에서 얼마나 자신을 수하로서 아끼는지 알 수 있었다. "허튼 소리! 가까이 다가오지 마라! 그 자리에서 조금만 움직인다면 이 자를 죽여 버리겠다." 도상문주가 긴장된 표정으로 강하게 말했다. 경고대로 이 자를 풀어주게 되면 그 다음에 벌어질 일은 안 봐도 뻔했다. -고오오오! '크윽. 움직이지 말라고 했더니...' 천여운의 몸에서 풍겨지는 살기가 점점 더 짙어져갔다. 그를 더욱 자극한 것이다. 어차피 패는 던졌기에 더 이상 물러날 곳은 없었다. "제, 제안하겠다. 부하 놈을 살리고 싶다면 저곳에서 기린의 피를 가져와라. 그리고 나를 놓아주겠다고 약조한다면 무사히 풀어주겠다." 그의 고개를 까딱이면서 거대한 불꽃이 타오르는 못을 가리켰다. 이런 식의 협박이 통할지 안 통할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이 자를 아낀다면 넘어올 것이다.' 저 분노하는 태도를 본다면 분명 아끼는 수하가 틀림없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자신의 조건을 수락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런데 그가 모르는 한 가지가 있었다. 보통 정파인이나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희생을 감수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천여운은 마도를 지향하는 마교인이었다. "......나도 한 가지 제안을 하지." "제, 제안?" "지금 허봉을 놓아준다면 최대한 고통스럽지 않게 죽여주마. 그런데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나는 네놈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를 후회할 정도로 고통스럽게 죽일 것이다." '!?' 천여운의 입에서 나온 말에 도상문주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당연히 고민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도리어 협박을 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그였다. 더군다나 협박의 선택지는 어떤 식으로든 죽음이었다. '이, 이놈은 대체 뭐야?' 이렇게 된다면 이 자를 데리고 협박해도 소용이 없다는 소리였다. 상대가 더욱 강하게 나오는 바람에 도상문주는 어찌해야 할지 난감해했다. 그런데 여기서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사용자의 잔존 에너지가 15퍼센트 남았습니다. 더 이상 이기어검강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 -슈우우웅! 나노의 목소리와 함께 판넬 원격 시스템으로 가동되던 이기어검강이 중지되었다. 도상문주의 협박으로 시간이 소모된 탓이었다. '이런!' 천여운의 눈빛이 흔들렸다. 열두 개의 이기어검강을 유지하는데 소모되는 내공은 상상을 초월한다. 나노는 이 이상의 내공을 소모하게 되면, 천여운이 스스로를 보호하면서 남은 적들을 상대하는데 차질을 빚을 거라 판단하고 이를 강제로 중지시켰다. -화르르륵! 그로 인해 여섯 개의 이기어검강들이 펼치는 절세검초를 상대하던 일 태상 란영이 그것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이것에서 풀려난 란영은 망설임도 없이 곧장 그들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전신에 불꽃을 내뿜으며 달려오는 모습이 위협적이었다. '위, 위험해!' 정면을 보고 있었기에 이를 가장 먼저 발견한 허봉은 본능적으로 천여운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짧은 찰나에 허봉이 결의에 찬 눈빛으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여기서 짐이 되어선 안 된다고 결심한 그는 목숨을 던질 각오로 손에 강기를 일으켜, 뒤에 있는 도상문주를 공격하려 했다. -우웅! "이, 이놈이!" 이것을 도상문주가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허봉의 손에 강기가 일어나려 하자, 위협을 느낀 그가 무의식적으로 허봉의 목을 단검으로 베어버렸다. -촥! "컥!" 단검에 목이 베인 허봉이 앞으로 쓰러지려했다. 핏방울이 허공을 흩날리며 그것은 너무도 천천히 이루어졌다. '주군.....뒤에.....' 앞으로 쓰러져가면서 허봉은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죽어가는 그는 필사적으로 그것을 알리려 했다. "허보오오오오옹!!!" -팟! 극도로 분노한 천여운의 신형이 순식간에 앞으로 뻗어나갔다. 열 보 거리를 단숨에 좁혀왔다. '빠, 빨라!' 도상문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차피 벌어진 일이었기에 어떻게든 버텨보자는 심경에 도상문주가 다급히 방어하려고 했지만 그것이 통할 리가 만무했다. -촥! "끄아아아악!" 천여운의 흑검이 번개처럼 움직이자 순식간에 단검을 들고 있던 그의 팔이 잘려나갔다. 잘려나간 팔이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천여운이 흑검을 바닥에 꽂고서, 그의 머리통을 움켜잡았다. -꽈악! "허억?" 머리통을 잡은 그의 손아귀에 들어간 힘이 너무 강했다. 청옥석마저도 순수한 힘만으로 부숴버릴 만큼 괴력을 소유한 천여운이다. "끄어어억, 지, 지금 뭘 하려고?" "후회할 거라고 했지!" "제, 제발 그냥 죽여...." -우드드득! "끄아아아아아아악!" 천여운의 손가락 마디마디가 그의 머리의 두개골을 뚫고서 파고들었다. 팔이 잘렸을 때도 너무 고통스러웠지만 이것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지독했다. 영혼이 빠져나갈 것만 같은 그런 고통이었다. -타타타탁! '빌어먹을!' 놈에게 더욱 고통을 주고 싶었지만 뒤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화기(火氣)를 감지했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두개골에 손가락을 파고든 상태로 천여운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탁! '서, 설마?' 부서진 두개골에서 피가 흘러나와 얼굴을 전부 적신 도상문주의 두 눈이 커졌다. 천여운이 무엇을 하려는지 본능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아, 안돼에에에!" -뿌지지지직! 쑤우우욱 "끄아아..." 비명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어깨를 잡고 있던 천여운이 그대로 도상문주의 머리를 몸에서 뽑아버렸다. 뽑혀진 그의 머리를 따라 척추 뼈까지 길게 끌려나왔다. 길게 고통을 느끼진 못했지만 사전에 경고한대로 최고로 고통스럽고 잔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그였다. -팍! 뽑은 머리통을 바닥에 내팽개친 천여운이 바닥으로 손을 뻗었다. -슈욱! 착! 바닥에 꽂혀 있던 흑검이 그의 손으로 빨려 들어왔다. 검을 잡은 천여운은 그대로 바닥을 박차고서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일 태상 란영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그런데, -털썩! '!?' 당연히 그를 공격할 거라 여겼던 일 태상 란영이 갑자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무슨 수작인가 싶어 의아해하는데, 그녀가 바닥에 머리까지 조아리며 공동이 떠나가라 외쳤다. "아아아! 어찌 이제서야 찾아주신단 말입니까? 미천한 교인이 대 천마신교의 하늘이신 교주님을 배알하나이다!" < 70장 허봉이여 불꽃이 되어라 (1) > 끝 < 70장 허봉이여 불꽃이 되어라 (2) > -화르르르륵! 여전히 불꽃에 휩싸여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일 태상 란영. 그런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천여운은 전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황릉의 보물을 지키는 황궁 수호전의 고수라고 생각한 자가 갑자기 스스로를 마교의 교인이라고 밝혔다. ".....대체 무슨 수작이지?" 천여운의 말에 그녀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올리더니 말했다. "그 전에 먼저 급한 일이 있지 않으십니까?" 불꽃에 휩싸여 있는 그녀의 눈동자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허봉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그 말에 천여운이 눈살을 찌푸렸다. 적의가 느껴지지 않지만 그녀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 짐작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 하지?' 확실한 방법은 그녀를 제압해두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허봉의 상태를 살펴보는 것이 더 급선무이긴 했다. "허튼 수작을 부리면 각오해라." "부디 의심을 거두어주십시오." 천여운의 경고에 그녀가 몸에 두르고 있는 불꽃을 거두었다. 그러면서 붉은 비늘로 뒤덮인 그녀의 나신이 드러났다. 옷을 걸치고 있지 않았기에 일 태상 란영은 붉은 비늘은 체내로 넣지 않았다. -팟! 그녀가 전신에서 발산하던 이질적인 기운마저 거둬들이자, 천여운은 다급히 쓰러져 있는 허봉에게로 이동했다. "허봉!" 앞으로 고꾸라져 있는 그를 뒤집자, 허봉이 깊게 베인 자신의 목을 붙잡고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죽어가고 있었다. 입에서는 핏물이 흘러나왔고 그는 몸을 벌벌 떨었다. 죽음을 앞둔 사람처럼 동공이 풀리고 몸이 차가워져가자 냉정한 천여운조차 눈시울이 붉어졌다. "안 된다. 허봉." "후...... 후....구 운...." 목이 베여서 말을 할 수 없는데도 멍한 눈으로 허봉은 천여운을 불렀다. 천여운이 피가 흐르는 그의 목을 잡고서 소리쳤다. "말하지 마라." "하... 아.....하.....아....." 입만 벙긋거리는데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나.....의.....주.....군....' 죽음이 두려워서 벌벌 떨면서도 그를 부르는 모습에 천여운은 가슴이 쓰라렸다. 그의 첫 번째 수하이자 어려움을 동고동락했던 동료였다. 그를 이렇게 허무하게 죽게 할 수 없었다. "허락할 수 없다. 네가 죽게 내버려둘 것 같으냐!" -타타타탁! 피가 흐르지 않게 지혈 점을 누른 뒤에 손에 공력을 모아 삼매진화를 일으켰다. 뜨거운 불꽃으로 베인 상처부위를 지져서 아물게 하기 위해서였다. "참아라!" -치이이이이익! '끄으으으!‘ 목을 지지자 허봉이 고통의 신음을 흘리며 몸을 파르르 떨었다. 출혈이 심해지기 전에 상처 부위를 지지기는 했지만 목을 베인 것은 치명적이었다. 천여운이 속으로 물었다. '나노. 상태를...' 스캔하게 하려고 했는데, 누군가 옆으로 다가왔다. 일 태상 란영이었다. 이에 천여운이 강렬한 기운을 발산하며 노기서린 목소리로 그녀에게 경고했다. "다가오지 마라." 한 걸음만 더 다가오면 당장에 베어버릴 기세였다. 날카로운 반응에 한 걸음 물러나며 그녀가 다급히 한 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갑자기 소신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데리고 온 교인이 목숨에 경각에 달했으니, 부디 소신에게 맡겨 주실 수 없으시겠습니까?" 진중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에 천여운은 고민했다. 당장에 나노가 상태를 확인한다고 해도 타인을 치료할 수 없기에 위급한 상황을 타개할 수는 없었다. 천여운이 눈썹을 치켜 올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어떻게 한다는 거지?" "교주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내 도움?" "일단은 서둘러야 하니, 다시 설명 드리겠습니다." 란영이 가까이로 다가와 죽어가고 있는 허봉을 안아들었다. 멀쩡한 상태였다면 여자가 건드는 것만으로 쑥스러워할 그였지만 지금은 거의 미동이 없어지고 있었다. 호흡이 미약해지는 것을 보아 서두르지 않으면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팟! 허봉을 안아들은 그녀가 거대한 불꽃이 타오르는 못으로 향했다. 공동의 삼분지의 일에 해당하는 들끓고 있는 못으로 다가가자 뜨거운 열기가 후끈거렸다. 죽어가는 허봉은 그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탁! 못에서 여덟 보 정도 떨어진 거리에 그를 내려놓은 란영이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그리고는 못으로 뛰어가, 아무 망설임도 없이 뜨겁게 끓고 있는 물을 두 손으로 떴다. 불꽃이나 뜨거움에 내성이 있는지 그녀는 전혀 뜨거워하지 않았다. 물을 손으로 받은 그녀가 허봉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의아해진 천여운이 물었다. "그게 뭐지?" "희석된 기린의 피입니다." "기린의 피? 이게 기린의 피라고?" 단순히 끓고 있는 못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 큰 못 전체가 피라면 대체 영수인 기린은 얼마나 큰 것일까? '투명한데?' 보통 피라고 한다면 진하고 붉은 색을 띨 텐데, 그녀의 손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는 뜨거운 물은 투명하기만 했다. "기린의 피는 화기가 너무 강해서 만질 수도 없습니다. 대명 제국의 태조께서 이것을 식히기 위해 북해에서 만년한설을 공수하여 부었는데도 겨우 이 정도가 되었지요." 이 못이 만년한설(萬年寒雪)로 희석된 기린의 피라고 한다면 저 거대한 불꽃은 대체 무엇일까? 의문이 들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허봉이었다. "이걸로 어떻게 하려는 거지?" "교주님께서 아까 전에 극음에 가까운 한기를 다루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혹시 기린의 피에 한기를 불어 넣으실 수 있는지요." 그녀가 도와달라고 한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뜨거운 기린의 희석된 피에 한기를 불어넣어 식혀달라는 소리였다. "기린의 피는 희석된 것이라고 해도 손상된 육신을 재생하는데 큰 효능이 있습니다. 다만 화기가 너무 강해 희석된 것이라도 남자는 버티기 힘듭니다." 기린의 피의 부작용이었다. 애초부터 양기가 강한 남자가 이것을 복용하게 된다면 화기를 버티지 못하고 내기가 상해 오히려 오장육부가 타들어가서 죽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고 보니 궁녀들만 붉은 비늘에 화기를 지니고 있었다.' 이를 떠올린 천여운이 화가 나서 말했다. "그럼 위험하다는 소리가 아닌가?" "많이 복용하면 그렇기는 하지만 이런 소량에 한기를 불어 넣는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녀의 말을 들어보면 한 번도 시도해본 적은 없는 듯 했다. 강한 불신이 들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기에 결국 그녀가 말한 대로 물에 한기를 불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구음절멕에 걸린 왕여군의 극음의 기운을 흡수한 천여운은 이를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손에 한기를 일으키자 하얀 서리가 생겨났다. 그렇게 일으킨 한기를 그녀의 손에서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희석된 기린의 피에 주입하자, 조금씩 그것이 식어갔다. '아! 식는구나.' 란영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내심 실패하면 어쩌나 걱정 했었는데, 정말로 끓고 있는 피가 식었다. 거품이 올라오던 것이 이제는 미지근하게 바뀌었다. "마시게 하겠습니다." 천여운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식은 기린의 피를 자신의 입에 머금었다. 그리고는 입을 맞춰서 허봉의 입안으로 피를 밀어 넣었다. 정신을 잃고 있었기에 입안에 흘려보내는 것만으로는 마시지 못했기에 입으로 직접 전달한 것이었다. 만약 그가 정신이 들었다면 어땠을까? 붉은 비늘이 얼굴과 전신을 뒤덮은 여자와 첫 입맞춤을 한 기분이 말이다. -꿀꺽꿀꺽! 점차 미동이 없어져가는 허봉의 식도를 타고 기린의 피가 들어갔다. 남은 것은 란영이 말한 대로 기린의 피가 제대로 된 재생 효과를 있기를 바라야만 했다. 그런데 그 효과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 천여운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새하얗게 질려가면서 숨이 얕아지던 허봉의 얼굴색이 점차 상기되어갔다. 체온이 오르는 것이었다. "하아....하아....하아...." 심지어 호흡 소리도 점차 강해져갔다. 목을 살펴보니 놀랍게도 불로 지져서 화상자국이 쭈글쭈글 해진 피부가 조금씩 변해갔다. 예상한 것보다도 대단히 빠른 효능이라 할 수 있었다. '희석된 피가 이 정도라면 진짜 피는 어느 정도란 말인가.' 천여운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붉은 비늘로 전신이 뒤덮인 일 태상 란영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제대로 된 기린의 피를 복용해서 저리 된 것일까 궁금해졌다. 그때 란영이 천여운에게 말했다. "교주님. 잠시 그의 곁에서 물러나주십시오." "이제부터 이 자의 체내에 화기가 강해질 터이니, 그것이 폭주하지 않도록 제가 조절하겠습니다." 수호전 소속의 궁녀들을 통해서 희석된 기린의 피를 복용한 자들이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 천여운이 한기를 주입해 그 기운을 더 낮췄다고는 하나 도움이 필요했다. 허봉이 호전되는 것으로 눈으로 확인하면서 불신의 마음이 가라앉은 천여운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부탁한다고 하였다. -탁! 빠르게 회복되어가는 허봉을 가부좌로 앉힌 그녀가 등 뒤로 두 손을 갖다 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천여운의 머릿속에 문득 뭔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기린의 피가 손상된 육신을 재생시킨다고?' 고개를 돌린 천여운이 팔팔 끓고 있는 못을 바라보았다. 그가 보고 있는 곳은 아까 전에 양팔이 잘리고 온몸이 고슴도치처럼 이기어검강에 꿰뚫린 도혈문주의 시신이 가라앉은 곳이었다. '괜한 우려인가.' 천여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무리 재생의 효과가 강한 기린의 피라고 할지라도 그런 죽기 일보 직전의 상태마저 호전시킬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지만 그 정도까지는 힘들어보였다. * * * 뜨겁게 끓고 있는 못의 밑바닥. 그곳에 양팔이 잘려서 가라앉은 도혈문주의 시신이 있었다. 이 정도 뜨거움이라면 맨살이 완전히 익어버리기 십상일 텐데, 도혈문주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서 울룩불룩 물집이 올라온 것 이외에는 시신이 온전했다. -부글부글! 그런데 영원히 움직이지 않을 것만 같던 시신에 변화가 생겨났다. 이기어검강에 관통되었던 상처 부위들이 빠른 속도로 아물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상처 부위들에 붉은 비늘이 돋아났다. 츠츠츠츠츠! 변화는 매우 빨랐다. 이윽고 회복되어가던 도혈문주의 눈이 번쩍 뜨였다. 짙은 안광을 내뿜는 그녀는 자신의 몸 상태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본좌가 죽지 않았다니?' 분명 마교 교주 천여운에게 당해서 회생할 수 없는 치명상을 입고 못에 가라앉았다. 그런데 자신은 살아있었다. '여긴?' 신기한 것은 분명 자신이 있는 이곳은 뜨거운 물속인 것 같은데, 호흡을 하지 않고 있어도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숨을 쉬는 것보다도 편했고 전혀 뜨거움을 느끼지 못했다. '아아아! 찾았구나. 이것이 기린의 피구나!' 도혈문주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빠져있는 이 못이 기린의 피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어이없게 죽게 되었다고 절망했는데 그것이 전화위복이 된 것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단전을 살핀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내공이 늘었다.' 폭증 수준은 아니었지만 원래의 내공보다도 훨씬 상승했다. 더군다나 이곳을 지키고 있던 그 일 태상이라는 여자처럼 화기마저 머금고 있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왼팔이?' 잘려나간 양팔 중에 왼팔이 재생해있는 것이 아닌가. 팔 전체가 붉은 비늘이 돋아나 있었는데, 이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굉장한 행운이 따랐다. 못에 빠진 그녀는 운이 좋게도 잘려나간 왼팔이 있는 곳으로 가라앉았고,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재생능력이 그것을 끌어 당겨 회복시킨 것이었다. '만약 오른팔도 붙이려고 한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구나!' 확률적으로 충분히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내공도 급격히 상승했고 왼팔이 회복된 그녀는 기대감에 부풀어서 수면으로 올라갔다. 얼마큼 이 안에 있었는지는 몰라도 상처가 전부 회복되었을 정도이니, 꽤 오랜 시간이 흘렀으리라 여겼다. '천여운! 네놈은 본좌를 죽였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본좌는 살아남았다. 흥! 다음에 마주치게 된다면 이 치욕을 반드시 갚아주겠다!' -푸웃! 그렇게 수면 위로 올라온 그녀를 반기는 것이 있었다. -둥둥둥! '앗?' 도혈문주의 두 눈이 커졌다. 그녀의 떨리는 눈동자로 허공에 떠있는 열두 개의 푸른빛 이기어검강이 자신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 비치고 있었다. '이. 이게 대체.' 당혹스러워하는 그녀의 귓가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나 했는데 살아있었네." "!?" 당연히 그 목소리를 잊을 리가 없었다. 바로 천여운이었다. 그녀가 얼굴이 급격하게 일그러지면서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려 하는데, "이번에는 확실하게 죽어라." 사형선고가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열두 개의 이기어검강이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찔러 들어왔다. -슈슈슈슈슈슈슈슉! < 70장 허봉이여 불꽃이 되어라 (2) > 끝 < 70장 허봉이여 불꽃이 되어라 (3) > 어이가 없었다. 기사회생(起死回生)했다고 기뻐했던 것이 무색해졌다. '처, 천여운! 이익!' 여섯 개의 이기어검강에도 고전을 면치 못했던 도혈문주였다. 무방비 상태에서 바로 코앞에서 열두 개의 이기어검강이 무차별적으로 찔러 들어오자, 어떻게 손을 써볼 틈도 없었다. -푸푸푸푸푹! "아아아악!" 전신의 요혈이 이기어검강에 꿰뚫려버리고 말았다. 여섯 개도 아닌 열두 개가 관통했으니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표정이 묘해졌다. '고통이 느껴지지 않아?' 분명 전신이 이기어검강에 관통 당했는데, 신기하게도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강기가 응집되어 있기에 몸을 움직일수록 살점이 분해 되어서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모, 못 안으로 들어가야 해!' 도혈문주는 본능적으로 살려면 못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판단했다. 발버둥을 치면서 뒷걸음을 치려고 하는데, 그것을 천여운이 그냥 내버려둘 리가 만무했다. "그냥 죽으라고 했을 텐데." 천여운이 왼손을 내밀어 끌어당기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고슴도치처럼 이기어검강이 꽂혀있는 그녀의 몸이 부웅하고 못 바깥으로 끌려나왔다. '무, 무슨 내공이?' 허공섭물에 대항해보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기린의 피로 내공이 상승했다고 하나, 현경의 극에 이른 천여운의 내공 수위는 그녀보다 훨씬 두터웠다. -팍! 강제로 끌려온 도혈문주는 천여운의 앞에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극도육무문을 움직이는 여섯 상위문주 중 일인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무릎을 꿇은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 흉흉한 기운은 대체 뭐지?' 못에 빠지기 전만 하더라도 그저 무위의 차만 직감했다. 그런데 천여운에게서 뭔가 흉폭하면서도 죽음을 직감하게 만드는 기운이 느껴졌다. 심지어 검은 아지랑이 같은 것마저 보였다. 도혈문주의 피와 살이 된 기린의 피가 강하게 경고하고 있었다. [절대로 상대할 수 없다. 상위 포식자다. 도망쳐라.] '빌어먹을! 본좌가 그걸 모를 것 같아.' 도망치고 싶어도 전신을 관통한 이기어검강들에 몸을 짓누르는 내공 때문에 움직일 수도 없었다. 기린의 피를 복용한 한 것이 말짱 도루묵이었다. 여기서 그녀는 자신이 복용한 것이 그저 희석된 기린의 피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천.....여......운!!!" 할 수 있는 것은 표독스럽게 천여운을 노려보며 악을 쓰는 것뿐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천여운은 냉정하게 말했다. "목도 붙여보시지." 그 말에 도혈문주의 두 눈이 급속하게 커졌다. "이, 이 개새..." -촥! 욕설을 전부 내뱉기도 전에 도혈문주의 목에 날카로운 뭔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무언가는 바로 흑철로 만들어진 천마검이었다.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그녀의 목에 붉은 선이 진해지며, 이윽고 비스듬히 내려앉은 머리통이 바닥을 데굴데굴 뒹굴었다. "흥!" 천여운이 왼손을 휘젓자, 그녀의 몸에 꽂혀있던 이기어검강이 움직이며 전신을 난도질했다. 그것이 멈춘 것은 도혈문주의 전신이 고기 조각이 되어서였다. 목을 잘랐기 때문에 더 이상 살아날 일은 없었지만 후환은 절대로 남기지 않는 천여운이다. "뭐가 개새...라는 거냐." -콰직! 마지막 마무리는 그녀의 머리통을 밟아서 으깨는 것으로 끝났다. 황궁의 보물을 탈취하고 마교를 위기로 몰아가려 했던 모든 계획이 허무하게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 * * 같은 시각. 절강성 항주에 있는 황산에 거대한 야차상(夜叉像)이 세워진 공동 안. 야차상 앞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가 등지고서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그 뒤에서 얼굴을 붕대로 가린 정체불명의 사내가 뚜껑이 열려 있는 붉은 목함 하나를 들고 있었다. -키엑키엑! 사내가 들고 있는 붉은 목함 안에는 주먹 만한 붉은 고(蠱)가 기괴한 소리를 내면서 울고 있었다. 이를 붕대의 사내가 긴장된 눈으로 살펴보고 있었다. -푸직! 그러던 차에 한참을 울면서 파르르 떨던 고가 갑자기 터지더니 녹아내렸다. 사내가 죽은 고가 들어있던 붉은 함의 뚜껑을 닫으며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실패했습니다." 붉은 함의 뚜껑 위에는 도혈(刀血)이라 적혀 있었다. 그것은 황궁으로 갔던 여섯 상위문주 중 한 사람인 도혈문주의 몸에 심어진 고와 연결된 것이었다. 붕대의 사내는 야차상 앞에 가부좌를 틀고 있는 그림자 속의 사내의 눈치를 보았다. 그의 심기가 불편해졌으리라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던 중에 야차상 앞에 앉아 있는 사내가 바닥으로 가볍게 손을 짚었다. 그 순간, -팡! "크헉!!" 붉은 함을 들고 있던 붕대의 사내의 몸이 뒤로 튕겨져 나갔다. 열 보 거리가 넘게 나가떨어진 사내는 내상을 입었는지,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파팍! 피를 토해낸 붕대의 사내가 다급히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변명하는 것을 싫어하는 '그 분'의 성정을 알기에 아무 말 없이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야차상 앞의 사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도염, 도광, 두 문주를 불러라." 중저음에 낮게 깔린 목소리였다. 엎드리고 있는 붕대의 사내의 두 눈이 커졌다. 그들은 극도육무문을 움직이는 상위육문의 문주들이었다. "네? 그 두 문주를 말입니까?" "계획을 변경한다. 그들을 통호현으로 보내서 도공문주를 지원하게 해라." 붕대의 사내가 속으로 놀라했다. 하나의 대계에 상위육문주가 두 명 이상이 투입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극도육무문의 절반이나 되는 전력이 투입되는 셈이었다. '허어.....통허현이 피로 물들겠구나.' 확실하게 대계를 성사시키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도주(刀主)의 명을 받듭니다!" * * * 황릉의 가장 지하 공동. 도상문주에게 목이 베여서 목숨이 경각에 달해있던 허봉의 상처가 완전히 아물었다. 하얗게 질려있던 얼굴은 혈색을 찾았고 호흡도 제대로 돌아왔다. 그런 그의 등에 손을 대고서 운기를 돕고 있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일 태상 란영이었다. '으음.' 눈을 감고 있는 그녀의 표정이 묘하다. 희석된 기린의 피를 복용한 자는 강한 화기가 폭주할 확률이 높다. 음기가 강한 여성조차도 강한 화기의 부작용으로 통각을 잃고, 간혹 심할 경우는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다. 여성이 이럴 정도라면 양기가 강한 남자는 매우 위험하다. 근 이백 년 동안 수십 번이나 황실에서 지원해온 남성들이 피를 복용했는데,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전부 목숨을 잃었다. '한기가 주입되어서 그런 것인가?' 다행히 천여운이 극음의 기운을 불어 넣어 더욱 화기가 중화 된 기린의 피였다. 그래서인지 허봉의 몸에서 예상과는 달리 화기가 폭주하지 않았다. 그렇게 추측을 했었다. '아.....이상하다. 어째서 이런 것이지?' 아무리 더욱 중화된 화기라고 해도 변화가 있어야 했다. 기린의 피를 복용한 자는 한 사람도 남김없이 육신에 변화가 생겨났다. 붉은 비늘이 그 증거였다. '육신이 화기를 생성하게 재구성되어야 하는데 어째서 변화를 겪지 않은 것이지?' 이상하다고 생각한 그녀는 호기심에 허봉의 운기를 돕는 것을 넘어서 근원이라 할 수 있는 단전에 접촉을 시도해보았다. 화기가 내공에 융화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앗? 이게 뭐지?' 그녀는 허봉의 단전에 웅크리고 있는 하나의 기운을 발견했다. 그것은 내공이 아닌 하나의 흉폭한 영수의 기운이었는데, 천여운에게서 느꼈던 그것과 흡사했다. '이 검은 기운은 대체 뭐지? 아!' 란영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운. 이 기운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놀랍게도 기린의 피가 가진 화기를 흡수하고 있었다. 마치 상위 포식자처럼 희석된 기린의 피가 가진 화기를 억누르는 듯 했다. '이 교인은 혹시 다른 영수의 피를 먹은 적이 있나?' 그녀의 짐작대로 허봉은 예전에 천여운이 봉마동에 있던 검은 액체를 먹은 적이 있었다. 마교가 창립되던 시절부터 있었던 그 액체는 검은 이무기의 피였다. 용이 되기 직전의 영수의 피는 소량에 불과했지만 허봉의 단전에 둥지를 트고서 잠들어 있었다. '알 수가 없구나. 일단 손을 떼야겠다.' 화기를 흡수할 수 있게 도움을 주려했는데 의미가 없어보였다. 어차피 폭주를 막아주는 기운이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소, 손을 뗄 수가 없어.' 허봉의 단전에 자신의 화기가 담긴 선천진기를 연결했던 그녀였다. 그런데 이것이 흡착이라도 된 듯이 기운이 연결되어서 끊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이익!" 불길함을 느낀 란영이 기운을 더욱 끌어올려서 단번에 그것을 끊어 내려했다. 하지만 끊어내려고 할수록 허봉의 단전에 깨어난 흉흉한 기운은 한참을 굶어온 것처럼 물고 늘어졌다. '이런! 화기가 빠져나가고 있어.' 란영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처음에는 흡착된 정도였는데 기운을 끌어올리자, 급속도로 화기가 빠져 나갔다.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현상에 그녀는 어떻게든 허봉을 떼어내려고 애를 쓰다가 결국 전신에 불꽃마저 일으켰다. -화르르륵! 허봉의 단전에 있는 기운이 위협을 느끼도록 말이다. 그런데 위협을 느끼기는커녕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부, 불꽃이!" -화르르르륵! 온몸에 휘감고 있는 불꽃이 옮겨 붙듯이 허봉의 등 뒤로 불꽃이 이어졌다. 당황한 그녀는 결국 거친 방법을 써야만 했다. "에잇!" -퍼억! 란영이 두 발을 뻗어, 허봉을 등을 지지대 삼아서 그를 밀쳐 내버렸다. 어떻게 흡착되었던 두 손이 떨어져나갔다. 그런데 거의 그녀가 지니고 있던 화기의 절반 가까이를 흡수해버린 허봉이었다. -화르르르륵! "이, 이를 어쩌지?" 몸에 전부 붙기 전에 손을 뗀다고 했는데, 이미 전신이 불꽃에 휘감겼다. 놀라운 것은 붉은 비늘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허봉의 몸은 불꽃에 타지 않고 오히려 공명하고 있었다. 불꽃은 허봉이 입고 있는 옷만을 태워서 그를 알몸으로 만들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예상한 것과는 다른 현상에 덜컥 두려움이 생겼다. 아무래도 천여운의 도움을 받아서 극음의 기운으로 화기가 폭주하지 못하게 미리 제압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허봉이 화기를 감당하지 못할 거라 여겼다. 란영이 다급히 고개를 돌려서 천여운을 부르려고 했는데, "엇? 교주님?" 못 앞쪽에 있던 천여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주위를 살피던 그녀의 두 눈이 커졌다. '!?' 못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는 거대한 불꽃 속에 검은 인영이 들어가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교, 교주님!!!"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 인영이 천여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 어찌!' 저 거대한 불꽃은 이백 년 가까이 꺼지지 않은 기린의 피의 결정체였다. 다가오는 모든 것을 불태워 재로 만들어 버린다. "안 돼에에에에!" 경악한 그녀가 다급히 거대한 불꽃으로 신형을 날렸다. < 70장 허봉이여 불꽃이 되어라 (3) > < 71장 삼위일체 (1) > -웅웅웅! 어디선가 묘한 공명음이 들려온다. 도혈문주를 완전히 없애고 난 천여운의 시선은 어느 한 곳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못 한가운데에 있는 거대한 불꽃이었다. ‘만년한설로 희석시켰다고 했나?’ 불의 기운을 타고난 기린은 불꽃에서 태어났다고 할 만큼 화기(火氣)가 넘친다. 그렇기에 죽어서도 그 사체에서 피어난 열기는 근 이백 년이 다되어가도록 유지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못의 한가운데에 있는 불꽃은 유독 화기가 강했다. ‘어째서지?’ 천여운의 몸 안에 자리하고 있는 천마기가 강하게 요동쳤다. 이 공명음을 감지하고 나서부터 진정이 되지 않는지, 서서히 그의 몸에서 검은 아지랑이가 짙어져만 갔다. ‘천마기가 통제가 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딱 한 번 겪어보았다. 그것은 구음절맥의 극음의 한기를 받아들일 때였다. 그저 순환을 시키려고 했을 뿐인데 탐욕스러운 천마기는 이것을 먹어치웠고 천여운은 극음의 한기를 가지게 되었다. ‘네놈 설마 저 안의 기운을 탐내는 것이냐?’ 요동치는 천마기의 의지를 알아챈 천여운이 혀를 내둘렀다. 극음의 기운을 먹어치운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또 다른 힘을 탐내다니 말이다. 그런데 저 불꽃은 구음절맥과는 비교하기 힘든 힘의 결정체였다. ‘너무 욕심내는 것이 아니냐. 천마기.’ 과식은 체할 수도 있는 법이었다. 현경의 극에 이르면서 진기를 담아둘 수 있는 용량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그것에도 한계가 있다. 더군다나 천마기와 마찬가지로 저 화기는 극양의 기운이었다. -우우웅! 망설이는 천여운과 달리 체내의 천마기는 더욱 유형화되어 갔다. 천여운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흑기가 짙어져가자, 공명음을 내던 거대한 불꽃이 맞수를 상대하듯이 더욱 덩치를 불려갔다. -화르르륵! “앗! 불꽃이?” 그렇지 않아도 거대한 불꽃이 더욱 커지자 공동의 천장까지 닿았다. 불꽃은 마치 천마기를 의식하는지 배척하는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다가오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말이다. -찌릿! 덕분에 천마기가 호응하면서 이제는 전신의 감각이 곤두섰다. 어지간히 거대한 불꽃 안에 있는 무언가를 탐내고 있는 듯 했다. ‘고집이 세구나. 후우.’ 호응하는 두 기운에 결국 두 손을 들고만 천여운은 거대한 불꽃 속에 있는 이 이질적인 기운의 근원을 향해 다가가기로 마음먹었다. 현경의 극에 이르면서 환골탈태를 하여 그의 몸은 금강불괴, 만독불침, 수화불침에 이르렀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경우였고 이 불꽃은 영기를 가졌다. ‘극음의 기운으로 몸을 보호하자.’ -쩌저저적! 흑기만 흘리던 천여운의 전신에 강렬한 한기가 일어났다. 그 차가움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한 공동이 그를 중심으로 서리가 일어날 정도였다. “좋아. 한 번 해보자.” 온몸을 한기로 두른 천여운이 천천히 못 위로 걸어갔다. 끓고 있는 물 안으로 들어가려는 것처럼 보였는데, 천여운의 발이 수면 위에 닿자 파문이 일어나며 신기하게도 물밑으로 가라앉지 않았다. -파파파파팡! 이것은 바로 등평도수(登萍渡水)였다. 경신법으로 허공답보의 경지에 이른 천여운이 물 위를 밟지 못할 리가 없었다. -화르르륵! 천여운이 못 위를 등평도수로 걸어오자 거대한 불꽃이 활활 타면서 다가오기를 거부했다. 그럴수록 그의 안에 있는 천마기는 요동을 치며 더욱 탐욕을 드러냈다. ‘숨을 쉬기 힘들다. 후우읍.’ 열기가 강해지자 공기마저 희박해지는 느낌이었다. 이에 천여운은 크게 숨을 들이 마쉬고는 거대한 불꽃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화르르륵! 치이이이이! 그 뜨거움이 짐작되지 않는 불꽃과 극음의 한기를 발산하는 천여운의 신형이 부딪치는 순간 엄청난 수증기가 일어나며 사방이 뿌옇게 바뀌었다. ‘윽!’ 한기로 몸을 보호하고 있는데도 엄청난 화기가 몸을 덮쳤다. 한계에 이른 육신과 한기, 그리고 천마기로 몸을 보호하지 않았다면 일순간에 타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강렬한 불꽃이었다. -화아아아아아아! ‘버텨보겠다는 것이냐. 소용없다.’ -탁! 불꽃 안에 있는 근원이 그의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굉장한 열기를 발산했다. 하지만 아무리 열기를 발산한다고 해도 천여운은 한 발자국씩 내딛으며 거대한 불꽃의 중심으로 기어코 들어가고 말았다. -솨아아아아아아! 불꽃의 안으로 들어오자 그 중심부에서 눈부신 빛이 흘러나왔다. 강한 열기로 생겨난 빛이었는데 눈을 뜨고 쳐다보기 힘들 만큼 강렬했다. ‘나노.’ [광시야(光視野)모드를 발동합니다.] 나노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리며 동공이 수축되었다. 이윽고 눈부심에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던 천여운의 시야가 어두워지며 빠르게 빛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보인다.’ 눈부심에 적응한 천여운의 눈에 빨갛게 달아오른 구슬 같은 것이 보였다. 주먹만 한 이 구슬은 엄청난 열기와 함께 거대한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는데, 순도 높은 선천진 기였다. ‘이게 대체 뭐지?’ 천여운이 의아하게 바라보는 구슬의 정체는 바로 진원이었다. 영수인 기린의 모든 영력을 담고 있는 진원이었는데, 이백 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거대한 불꽃으로 스스로를 보호하면서 그 영기를 보존하고 있었다. -우우우웅! 진원이 강하게 공명음을 냈다. 마치 다가오기를 거부한다는 듯이 말이다. 천여운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흉폭하면서 탐욕스러운 천마기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기운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천마기야 거침없이 받아들이겠지만 천여운은 걱정스러웠다. 극음의 한기와 천마기의 기운 이외에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게 되면 삼종의 진기를 가지게 되는데 어찌 될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어차피 주사위는 던져졌다.’ 잠시 망설이던 천여운이 진원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어차피 이것이 극도육무문에서 노리는 것이라면 차라리 자신이 취하는 편이 나았다. -탁! 치이이이익! “크윽!” 천여운이 엄청난 열기로 손바닥이 타들어갔다. 놀랍게도 수화불침인 그의 육신이 화상을 입고 있는 것이었다. 불꽃에서 나온 열기는 극음의 한기로 견딜 수 있었는데 직접적으로 진원에 손을 대니, 그 뜨거움이 상상을 초월했다. [3000도 이상의 고온이 사용자의 에너지 실드를 파괴하고 침투했습니다. 화상을 입은 부위를 빠르게 자가수복합니다.] 엄청난 고온이었다. 영물의 진원인데도 불구하고 누구도 취하지 못한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천여운은 극음의 한기와 나노의 수복 능력이 뒷받침했다. -고오오오오! 천여운이 진원을 손바닥으로 움켜쥐자 기다렸다는 듯이 천마기가 뜨거운 영기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체내로 뜨거운 화기가 들어오자 천여운은 극한의 고통을 느꼈다. 천마기는 이것을 탐욕스럽게 흡수했는데, 그 속도가 굉장히 빨랐다. -치이이이익! “끄으으으윽!” 천여운의 몸에서 끊임없이 수증기가 흘러나왔는데, 한기로 체내를 보호하면서 벌어지는 현상이었다. 이 영기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오장육부가 순식간에 화기에 타버릴 것이다. ‘비, 빌어먹을 예상대로다.’ 화기가 몸으로 들어오자 예상대로 삼종의 기운이 부딪치기 시작했다. 극음의 한기와 천마기는 균형을 이루고 있었는데, 화기마저 들어오면서 삼종의 진기가 자리싸움을 하게 되었다. -불룩불룩! 천여운의 전신의 핏줄이 불룩불룩 올라왔다. 그 기운을 감당하려다보니 당연히 그의 몸에 과부하가 일어났다. 이를 악물고 버텨보지만 영수라 할 수 있는 기린의 진원이 가진 영기는 당연히 천여운의 단전이 감당할 수 있는 허용치를 가볍게 넘어섰다. -쿵! “끄으으으윽!”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른 기운에 천여운이 고통을 참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삼종진기를 감당한다는 것 자체가 무림에서도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안 된다. 기운을 내보내고 손을 떼야 돼.’ 이대로 가다간 단전과 육신이 터져서 죽을 지도 모른다. 화기를 견디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결심한 천여운이 탐욕스럽게 영기를 흡수하는 천마기를 강제로 잠재우고 진원에서 손을 떼려고 했다. 그런데 여기서 천여운이 예측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고오오오오! ‘아니? 천마기가 위로 솟구친다.’ 배꼽 아래의 하단전에 자리 잡고 있던 천마기가 가슴의 정중앙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곳은 인간의 원기라 할 수 있는 선천진기가 있는 중단전이었다. ‘이럴 수가!’ 끝까지 하단전에서 다른 두 기운과 자리싸움을 할 거라고 여겼던 천마기가 중단전으로 올라가 자, 자연스럽게 그 빈 공백을 기린의 영기가 차올랐다. 그러면서 극음의 한기와 기린의 화기가 하단전에서 균형을 이루기 시작했다. ‘아아아! 잘하면 삼종진기의 균형을 이룰 수도 있겠구나.’ 한결 체내의 과부하가 사라지자 천여운이 눈을 감고서 이에 집중했다. * * *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단 말인가?’ 이 광경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가 있었다. 그녀는 바로 일 태상 란영이었다. 기린의 진원이 자리하고 있는 거대한 불꽃으로 들어간 천여운을 빼내려고 했던 그녀는 알 수 없는 진기에 막혀서 오히려 튕겨나가고 말았다. 강제로 이것을 뚫을까 했지만 그녀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앗! 불이 수그러들고 있어!’ 근 이백 년이나 이곳 지하 공동에서 기린의 진원과 피를 지켜온 그녀였다. 그 오랜 세월 동안 한 번도 꺼진 적이 없는 거대한 불꽃이 점차 수그러들고 있었다. 란영의 두 눈이 커졌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그녀가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역대 황상들의 명을 받고서 거대한 불꽃 안에서 진원을 빼내보려고 했었다. 그러나 전신에 불꽃을 두를 수 있는 그녀조차도 진원이 내뿜는 엄청난 열기로 인해 아예 건드릴 수도 없었다. ‘교주님께서 진원의 힘을 흡수하고 계신 건가?’ 그러지 않고서 진원을 보호하는 불꽃이 수그러들 리가 없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극음의 한기를 지녀서 불꽃을 뚫고서 진원에 접근할 수 있다고 해도 전혀 상반된 기운을 흡수하고 있었다. ‘이러다 큰일이 나는 게 아닐까?’ 근 이백 년이나 기다려왔던 만남이었다. 당연히 교주님도 무인이기에 진원을 탐낼 수도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한 사람이 극한의 한기와 화기를 동시에 지닐 수는 없었다. ‘양쪽에서 참으로 난처하구나.’ 란영은 고개를 돌려서 온몸이 불꽃에 휩싸인 허봉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화기가 폭주할 지도 모른다고 여겼는데, 예상 외로 허봉은 화기를 점차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지킬 수밖에 없나.’ 이런 경우는 란영 역시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녀로서는 변화의 과정인 두 사람을 지켜보면서 호법을 취하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할 수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것일까? 드디어 변화가 생겨났다. 그 시작은 바로 허봉이었다. -화르르르륵! 그의 몸을 태울 것처럼 오랫동안 휩싸여 있던 불꽃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러더니 그의 몸으로 흡수되듯이 사라졌다. 그때 허봉의 피부에 균열이 일어나더니 이내 껍질이 갈라지며, 이것들이 허공으로 재처럼 산화했다. “아! 환골탈태!” 일 태상 란영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기린의 피도 모자라서 자신의 화기를 절반이나 가져갔기에 뭔가 변화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환골탈태를 했다. 육신이 완전히 재구성한 허봉은 신장이 훨씬 발달해서 보기 좋아졌다. 허봉이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이, 이게 꿈이야. 생시야.” 그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스스로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온몸에 불꽃에 휩싸였을 때부터 이미 정신을 차리고서 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운기와 명상에 들어갔던 그였다. 허봉은 깨어나면서 자신이 엄청난 기연을 이루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무인으로서 감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때 누군가 그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축하하네.” “으헉!” 전신이 붉은 비늘로 덮인 란영의 모습에 허봉이 화들짝 놀라했다. 이에 란영이 불쾌해했는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흥! 목숨을 구해주고 환골탈태를 하게 해준 은인에게 하는 첫 말이 참으로 경박하군. 그래.” “아! 그럼 당신이 아까 전 그 불꽃....” 허봉은 죽어가면서 거의 정신이 혼미했지만 불꽃에 뒤덮인 란영이 무릎을 꿇고서 천여운에게 교주님이라고 외치는 소리는 들었다. 란영이 그의 몸을 위에서 아래로 슬쩍 훑어보고는 입 꼬리를 올리면서 말했다. “환골탈태가 골고루 되진 않았나 보군.” “!!!” 그 말을 듣고서야 허봉은 자신이 알몸이라는 사실을 인지했다. “헉!” 얼굴이 시뻘개진 허봉이 다급히 뭔가 가릴 만한 것을 찾았는데, 입구 쪽 방향에 핏빛 장포를 입은 시신이 보였다. 급한 나머지 그 방향으로 손을 뻗었는데, 진기가 일어나며 장포가 끌어당겨지며 허공을 날아서 그 손으로 빨려 들어왔다. -탁! 허봉이 자신이 하고도 믿기지 않는지 장포를 눈이 휘둥그레져서 쳐다보았다. 화경의 고수부터 가능하다는 허공섭물의 신기를 발휘한 것이었다. “오오오! 내, 내가 허공섭물을!” “별걸 다 놀라하는군.” 처음에는 살짝 기분 나빠했던 란영이었지만 뭔가 순진한 허봉의 모습에 피식하고 웃었다. 교주를 위해서 목숨을 내던질 만큼 충심이 깊은 자였다. 그런데 예상외의 모습이었다. “아! 자네 혹시 몸에 불꽃을 일으킬 수 있나?” 문득 그녀는 그것이 궁금해졌다. 몸을 보호하는 붉은 비늘이 없이도 불꽃에 타지 않고서 화기를 흡수한 그였다. 어쩌면 그가 온전하게 화기를 얻었을 수도 있다고 예상했다. “불꽃이요?” “그래. 불꽃을 발현할 수 있을 거네. 아까 전에 온몸에 불이 휘감겼을 때의 감각을...앗!” -화르르륵! 말을 끝맺기도 전에 허봉의 몸에 순식간에 불꽃이 일어났다. 그녀가 전신에 불꽃을 휘어 감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되, 되네요?” 불꽃을 일으키는데 한 번에 해냈다. 피부를 보호하는 붉은 비늘도 없이 불꽃을 다루는 모습에 란영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놀랍구나! 이 자는 진정으로 기린의 피를 온전히 흡수했다. 궁녀들이나 본녀조차도 불완전한 형태로 발현되었건만.’ 진심으로 축하할 만한 일이었다. 교주님을 보필하는 자가 기린의 힘이라 할 수 있는 화기를 얻었으니 말이다. 허봉도 많이 놀랐는지 눈이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귀엽군.’ 약간은 순진해 보이는 그 모습에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뭐, 많이 놀랐겠지만 화기를 지니게 되어서....” “그....그게 아니라 저, 저기에...” 허봉이 그녀의 뒤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오싹! 바로 그 순간 엄청난 거대한 기운이 폭사되어 나오며 놀란 란영이 뒤로 고개를 돌렸다. 뒤를 바라보니 못의 한가운데에 천여운이 허공에 떠있었다. -둥둥! 더욱 놀라운 것은 천여운의 주위로 검은 불꽃이 회오리를 치듯이 상승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검은 불꽃의 용이 승천하는 것처럼 보였다. -고오오오오! “대, 대체 이게 무슨?” 그냥 불꽃도 아니고 검게 물든 불꽃에 란영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진원을 흡수하면서 뭔가 변화가 있을 거라고 여겼지만 이건 장관 그 자체였다. 허봉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교, 교주님께 흑염룡이 강림하셨어.” < 71장 삼위일체 (1) > 끝 < 71장 삼위일체 (2) > 근 반시진에 걸쳐서 천여운에게 일어나 변화는 경이로웠다. 허공에 떠있는 그의 전신을 둘러싸고 있는 검은 불꽃의 회오리를 치며 상승했다. 기린의 피를 흡수하여 화기를 다룰 수 있게 된 일 태상 란영조차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앗! 불꽃이 없어졌다!'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진원을 보호하고 있던 거대한 불꽃이 완전히 사라졌다. 뜨거운 기린의 진원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부서진 재만 남아 있었다. '아! 정말 진원의 화기를 전부 흡수하셨단 말인가!' 란영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태껏 황궁 수호전의 누구 하나 성공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데 누가 목숨을 걸고서 진원의 기운을 탐낼 수 있겠는가. 게다가 기린의 피만으로도 위험하긴 하나 공력을 증강시킬 수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검은 불꽃은 뭐지?’ 진원을 흡수한 것도 그랬지만 천여운의 주위를 두르고 있는 불꽃이 신기했다. 어두운 저 불꽃에서 흉흉하면서 죽음의 기운이 풍겨져왔다. 천여운에게서 느껴지던 그 특유의 느낌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자에게서도 느껴졌었는데.’ 란영이 놀라서 입을 벌리고 있는 허봉을 힐끔 쳐다보았다. 천여운 만큼은 아니었지만 허봉의 단전에도 이와 비슷한 기운이 잠들어 있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천마기는 갓 용이 되어 승천하는 이무기의 진원과 피를 흡수한 그 정수였다. 오래된 피였지만 그것을 조금이라도 흡수한 허봉도 비슷한 진기의 잔향이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이종의 진기를 흡수하신 건가!’ 란영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백 년 가까이 이곳 황릉에만 지킨 그녀는 수많은 황궁의 무인들과 황궁을 찾았던 무림인들을 만났지만 한 육신에 이종의 진기를 지닌 자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천여운은 지금 그것을 해내려고 했다. ‘역시 대 천마신교의 교주님다우신....엇?’ 이것만으로 대단하다고 여기려는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천여운의 전신이 검은 불꽃만이 아니라 주변에 차가운 검은 서리들이 일어났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이종의 진기라고 생각한 것은 그녀의 착각이었다. 극음의 한기마저 포함해서 삼종의 진기였다. ‘말도 안 돼! 서, 설마 세 기운의 균형을 이루셨단 말인가?’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경악할 만한 사건이라 할 수 있었다. 한 사람의 몸에 완전 극을 달리는 기운들이 동시에 세 개나 존재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게 실제로 일어났다. ‘백룡도!’ 눈을 뜬 천여운이 손을 뻗자, 도집에서 곤히 있던 백룡도가 뽑혀져 나와 왼손으로 빨려들어왔다. ‘천마검!’ -차차차차차착! 천여운이 오른손을 뻗자 보호대의 형태로 있던 흑철들이 분해되어서 흑검의 형태를 갖추더니 손으로 빨려 들어왔다. 양대 절세병기들을 손에 쥔 천여운이 기운을 집중하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쩌저저적! 화르르륵! 그의 왼손에 있던 백룡도에서 검은 서리가 맺히며 극도의 한기가 일어났으며, 오른손의 천마검에서 검은 화염이 일어나 검을 휘감았다. 삼종진기를 동시에 발현한 것이다. “세상에!” “우와!” 이를 지켜보고 있는 란영과 허봉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두 절세병기에서 풍겨지는 기운은 상상을 초월했다. 지금 이루어낸 힘으로 만약 초식을 펼친다면 얼마나 전율적인 위력의 초식이 이뤄질까?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아아! 그런 것인가.’ 두 사람이 놀라워할 만한 능력을 선보이는 천여운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삼종의 진기의 균형을 이뤄내어 한 몸에 가두어 삼위일체(三位一體)를 이룬 그는 천마기가 중단전을 개척하면서 새로운 경지에 눈을 뜨고 있었다. ‘내공을 유형화한 것이 기(氣)이다. 그리고 그 기를 응집한 것이 강기(罡氣)이다.’ 이것이 기로써 이룰 수 있는 능력이다. 여기서 무형의 기운인 진기를 연결하여 펼칠 수 있는 것이 이기어검이고, 현경의 극에 이르러 펼칠 수 있던 것이 이기유형의 경지로 강기를 형성하여 다룰 수 있었다. ‘이게 끝이라고 여겼었다.’ 흔히 무림인들에게 알려진 경지는 현경의 끝을 극(極)이라 하였다. 분명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하단전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내공의 한계치까지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단전을 열게 되면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마치 본능적으로 각인되어 있던 것처럼 천여운은 스스로 무엇을 새롭게 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무형의 기운.’ 그가 가지고 있는 삼종 기운들은 속성을 지닌 무형의 기운이다. 타고난 선천적인 진기라 할 수 있었다. 이것들은 유형화 될 수 없는 기운이기에 무언가가 매체가 되어 발현되거나, 혹은 순수하게 그 속성의 기운만을 다룰 수가 있다. -번쩍! 감고 있던 천여운의 눈이 번쩍 뜨였다. 모든 기를 갈무리 할 수 있기에 평범했던 천여운의 안광이 강렬히 빛났다. -팍! 천여운이 흑화, 흑한의 기운을 발현하고 있던 백룡도와 천마검을 손에서 놓았다. 허공에 떠있던 그의 손에서 벗어난 양대병기들이 못의 한가운데에 솟구쳐 있던 바닥으로 떨어져 박혔다. -쿠쿠쿠쿠! 두 절세병기들에 담겨있던 기운이 땅바닥에 흘러들어가며 균열이 일어났다. 백룡도가 떨어진 부위의 땅은 검은 서리로 얼어붙었고, 천마검이 떨어졌던 부위에는 흑염이 솟구쳤다. 그저 바닥에 꽂았을 뿐인데 그 여파는 못처럼 고여있는 기린의 피에도 영향을 미쳤다. "앗! 못이!" 허봉이 가리킨 부근에 기이한 변화가 생겨났다. -치이이이익! 부글부글! 백룡도에서 흘러나온 흑한의 기운에 닿은 왼쪽은 수증기가 일어나며 끓고 있던 기린의 피가 식어갔고, 반대편에 흑염이 흘러들어간 곳은 더욱 끓어올랐다. '대단하다! 이게 기린의 진원을 흡수한 힘인가!' 만년한설로도 고작 일부 식히는 것이 한계였는데, 병기에 남아있는 기운이 이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대단했다. 그런데 천여운은 갑자기 병장기를 왜 손에서 넣은 것인가? ‘대체 무얼 하시려는 건지?’ '아직 삼종진기를 가다듬지 못하신 건가?' 천여운의 알 수 없는 행동에 두 사람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여기서 란영을 경악하게 만드는 일이 벌어졌다. 천여운이 손으로 뭔가를 쥐는 시늉을 했다. '응?' '어째서 빈손으로?' 아무 것도 없는데 검병이나 도병을 쥐는 파지법을 취한 것이다. 이상하게 여기고 있는데 천여운이 쥐고 있는 오른손에서 검은 불꽃이 일어나더니 이내 선명한 검의 형태를 갖추어 갔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천여운의 왼손에서 검은 서리가 일어나며 마찬가지로 선명한 도의 형태로 바뀌었다. “서, 설마.....” 란영의 두 눈이 흔들렸다. 지금 천여운이 펼치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한 탓이었다. “지금 교주님께서 뭘 하시는 거죠?” 물론 아무 것도 짐작하지 못하는 자도 있었다. 의아해 하는 허봉의 물음에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형.....검!” “무형검? 무형....검......헉! 무, 무형검이라고요?”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말을 되새기던 허봉도 놀라서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공을 연마하는 무림인들에게도 여러 전설들이 있다. 정도 무공의 발산지인 소림의 시초인 보리 달마 조사가 갈대 잎 하나를 타고서 강을 건넜다는 것부터 시작해 수많은 전설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무형검이었다. 무공의 끝이라 불리는 현경의 극. 그런데 무림의 기인이사들은 이 경지가 무공의 끝이 아니라고 했다. 그 중 한 사람의 들려오는 일화다. 화산파의 초인이자 전설이라 불렸던 독고구패는 말년에 들어서 검을 들고 다니지 않았다고 한다. 화산파의 동문이 궁금하여 독고구패에게 물었더니 그가 이렇게 답했다고 했다. [이기유형을 넘어선 무형의 검을 다룰 수 있게 되면서, 더 이상의 검은 내게 있어 무의미하네.] 아무리 화산에 있어서 전설적인 검객이 하는 말이었지만 허풍이라 여긴 화산의 제자는 세상에 그런 것이 어디 있냐고 불신의 태도를 보였다. 이에 독고구패가 아무렇지 않게 무형의 기운인 진기를 유형화하여 검을 만들어내는 신기를 보였다. 그것을 본 동문은 경악하여 머리 숙여 그를 불신한 것을 사죄했다고 한다. 이 일화가 퍼져나가면서 무림의 전설이 되었는데, 이때부터 무림인들은 현경을 넘어선 경지가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 무형의 진기를 검화하는 것을 두고 무형검(無形劍)이라 불렀다. '정말 무형검이라니? 그저 상상 속의 경지로만 여겼건만.....당시의 교주님도 현 교주님 만큼은 아니셨는데.' 일 태상 란영이 모셨던 그 시절의 교주도 당대 최고의 고수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런 엄청난 무인임에도 불구하고 기린의 진원을 흡수하기 전의 천여운보다도 한 수 아래였다. 그런데 그보다도 훨씬 강해지려 하니, 가히 탈 인간 급이라 할 만 했다. “교, 교주님께서 지금 무형검을 펼치시는 거라고요? 그, 그렇다면 생사경의 경지에 올랐다는 말입니까?” 얼마나 놀랐는지 허봉이 침을 튀겨가며 호들갑을 떨었다. 생사경(生死境). 무림에서도 최고라 불리는 현경을 넘어선 전설의 경지이다. 그 많은 무림인들 중에서도 현경의 극에 오른 자는 한 세대의 정점들 중에서도 한두 명 나올까 말까할 만큼 극악의 경지였는데, 이를 넘어서는 자가 쉽게 나올 리가 없었다. 그래서 무림인들은 살아서는 이루지 못하고 죽어서나 이룰 수 있는 경지라고 하여, 무형검을 다루는 이 경지를 두고 생사경이라 불렀다. “저게 정말 무형검이라면......생사경이 틀림없네.” 그녀는 넋을 잃은 표정으로 허봉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때 천여운이 놀라서 그를 우러러보고 있는 두 사람에게 외쳤다. “둘 다 옆으로 물러나라.” “네, 네넵!” “며, 명을 받듭니다!” 아무래도 무형검으로 짐작되는 저 힘을 시험하려는 모양이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양쪽으로 공동의 벽 끝으로 신형을 날리자, 천여운은 기다렸다는 듯이 허공에서 흑염의 무형검을 반대쪽 공동을 향해 뻗었다. -촤아아아악! “헉!” -펄럭펄럭! 공동 옆 벽끝에 있는데 돌풍이 일어나며, 걸치고 있던 허봉의 장포가 휘날렸다. 엄청난 풍압과 함께 천여운이 검을 뻗은 방향으로 검은 화염이 날카로운 검격을 일으키며 공동을 관통하여 뻗어나갔다. -화르르르륵! “세......상에.....” 공동의 거의 절반이 넘는 십오 장(丈) 거리에 검흔이 바닥을 갈랐다. 그런데 이 갈라진 검흔에서 흑염이 올라오며 불길을 만들어냈다. 검은 불꽃은 흉흉한 기운을 풍기고 있어서 다가가면 모든 것을 태워 재로 만들 기세였다. “한 번 더.” 이게 끝이 아니었다. 천여운이 다시 한 번 그 방향을 향해 이번에는 왼손에 들고 있던 흑한의 무형도를 휘둘렀다. -촤아아아악! 쩌적! 쩌저저적! 그러자 날카로운 도격이 검은 불꽃을 가르며 바닥에 도흔을 만들어냈다. 꺼지지 않고서 계속 바닥을 녹이고 들어갈 것 같던 흑염을 갈랐고, 도흔의 파편들을 중심으로 검은 얼음이 날카롭게 올라왔다. 공동의 반을 거의 초토화시킬 만큼 엄청난 위력의 검격과 도격이었다. 더군다나 특별한 초식을 펼친 것도 아니라 그저 그 무형검 자체의 힘을 발산한 것뿐이었는에 이 정도였다. “무, 무형검이 맞아!” 일 태상 란영은 너무 놀라서 입을 벌리고서 중얼거렸다. 오랫동안 살아오면서도 그저 전설로만 들어왔던 경지를 직접 눈으로 보게 되니, 전율에 사로 잡혔다. “이런 느낌인가.” 천여운이 새롭게 깨달은 힘에 감을 잡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진기의 소모가 극악이라 할 만큼 엄청나기에 두 개의 무형검, 도를 만드는 것이 한계였지만 이 상태로 이기어검술도 펼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정도로 끝낼까.’ 충분히 그 위력을 확인했고 허봉이 무사한 것도 보았으니, 이기어무형검은 나중에 시험해 봐도 될 것 같았다. 날이 밝기 전에 황릉을 벗어나야 하니 말이다. -둥! 둥! 둥! 천여운이 허공답보를 펼치면서 천천히 못 한가운데의 허공에서 그 바깥 쪽 바닥으로 내려왔다. 그가 지면을 밟은 순간 일 태상 란영과 허봉이 동시에 그의 앞으로 한달음에 달려와 한 쪽 무릎을 꿇고서 환희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교주님! 대공을 이루신 것을 경하드리옵니다!” “지고의 경지를 넘어서 생사경의 경지에 이른 것을 감축 드립니다!” 서로 다른 말을 했지만 의미는 상통했다. 현 천마신교의 교주이자 이대 천마인 천여운이 무림에서도 전설의 경지라 할 수 있는 생사경에 이른 것이다. < 71장 삼위일체 (2) > 끝 ⓒ 한중월야 < 71장 삼위일체 (2) > 근 반시진에 걸쳐서 천여운에게 일어난 변화는 경이로웠다. 허공에 떠있는 그의 전신을 검은 불꽃이 회오리를 치며 휘감았다. 기린의 피를 흡수하여 화기를 다룰 수 있게 된 일 태상 란영 조차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앗! 그러고 보니 불꽃이 없어졌다!'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진원을 보호하고 있던 거대한 불꽃이 완전히 사라졌다. 뜨거운 기린의 진원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부서진 재만 남아 있었다. '아! 정말 진원의 화기를 전부 흡수하셨단 말인가!' 란영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태껏 황궁 수호전의 누구 하나 성공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데 누가 목숨을 걸고서 기린의 진원의 기운을 탐낼 수 있겠는가. 게다가 기린의 피만으로도 위험하긴 하나 공력을 증강시킬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검은 불꽃은 대체 뭐지?' 진원을 흡수한 것도 그랬지만 천여운의 주위를 두르고 있는 검은 불꽃이 신기했다. 어두운 저 불꽃에서 흉흉하면서 죽음의 기운이 풍겨져왔다. 천여운에게서 느껴지던 그 특유의 느낌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자에게서도 느껴졌었는데.' 란영이 놀라서 입을 벌리고 있는 허봉을 힐끔 쳐다보았다. 천여운 만큼은 아니었지만 허봉의 단전에도 이와 비슷한 기운이 잠들어 있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천마기는 갓 용이 되어 승천하는 이무기의 진원과 피를 흡수한 그 정수였다. 오래된 피였지만 그것을 조금이라도 흡수한 허봉도 비슷한 진기의 잔향이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이종의 진기를 흡수하신 건가!' 란영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백 년 가까이 이곳 황릉만 지킨 그녀는 수많은 황궁의 무인들과 황궁을 찾았던 무림인들을 만났지만 한 육신에 이종의 진기를 지닌 자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천여운은 지금 그것을 해내려고 했다. '역시 대 천마신교의 교주님다우신....엇?' 이것만으로 대단하다고 여기려는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천여운의 전신이 검은 불꽃만이 아니라 주변에 차가운 검은 서리들이 일어났다. "한기!" 이종의 진기라고 생각한 것은 그녀의 착각이었다. 검은 불꽃에 놀라서 염두하지 못했는데, 극음의 한기마저 포함해 삼종의 진기였다. '두, 두 개가 아니다! 설마 세 기운의 균형을 이루셨단 말인가?'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경악할 만한 사건이라 할 수 있었다. 한 사람의 몸에 완전 극을 달리는 기운들이 동시에 세 개나 존재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게 실제로 일어났다. '백룡도!' 눈을 뜬 천여운이 손을 뻗자, 도집에서 곤히 있던 백룡도가 뽑혀져 나와 왼손으로 빨려 들어왔다. '천마검!‘ -차차차차차착! 천여운이 오른손을 뻗자 보호대의 형태로 있던 흑철들이 분해되어서 흑검의 형태를 갖추더니 손으로 빨려 들어왔다. 양대 절세병기들을 손에 쥔 천여운이 기운을 집중하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쩌저저적! 화르르륵! 그의 왼손에 있던 백룡도에서 검은 서리가 맺히며 극도의 한기가 일어났으며, 오른손의 천마검에서 검은 화염이 일어나 검을 휘감았다. 삼종진기를 동시에 발현한 것이다. "세상에!" "우와!" 이를 지켜보고 있는 란영과 허봉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두 절세병기에서 풍겨지는 기운은 상상을 초월했다. 지금 이루어낸 힘으로 만약 초식을 펼친다면 얼마나 전율적인 위력의 초식이 이뤄질까?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아아! 그런 것인가.' 두 사람이 놀라워할 만한 능력을 선보이는 천여운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삼종의 진기의 균형을 이뤄내어 한 몸에 가두어 삼위일체(三位一體)를 이룬 그는 천마기가 중단전을 개척하면서 새로운 경지에 눈을 뜨고 있었다. '내공을 유형화한 것이 기(氣)이다. 그리고 그 기를 응집한 것이 강기(罡氣)이다.' 이것이 기로써 이룰 수 있는 능력이다. 여기서 무형의 기운인 진기를 연결하여 펼칠 수 있는 것이 이기어검이고, 현경의 극에 이르러 펼칠 수 있던 것이 이기유형의 경지로 강기를 형성하여 다룰 수 있었다. '이게 끝이라고 여겼었다.' 흔히 무림인들에게 알려진 경지는 현경의 끝을 극(極)이라 하였다. 분명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하단전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내공의 한계치까지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단전을 열게 되면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마치 본능적으로 각인되어 있던 것처럼 천여운은 스스로 무엇을 새롭게 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무형의 기운.' 그가 가지고 있는 삼종 기운들은 속성을 지닌 무형의 기운이다. 타고난 선천적인 진기라 할 수 있었다. 이것들은 유형화 될 수 없는 기운이기에 무언가가 매체가 되어 발현되거나, 혹은 순수하게 그 속성의 기운만을 다룰 수가 있다. -번쩍! 감고 있던 천여운의 눈이 번쩍 뜨였다. 모든 기를 갈무리 할 수 있기에 평범했던 천여운의 안광이 강렬히 빛났다. -팍! 천여운이 흑화, 흑한의 기운을 발현하고 있던 백룡도와 천마검을 손에서 놓았다. 허공에 떠있던 그의 손에서 벗어난 양대병기들이 못의 한가운데에 솟구쳐 있는 바닥에 떨어져 박혔다. -쿠쿠쿠쿠! 두 절세병기들에 담겨있던 기운이 땅바닥에 흘러들어가며 균열이 일어났다. 백룡도가 떨어진 부위의 땅은 검은 서리로 얼어붙었고, 천마검이 떨어졌던 부위에는 흑염이 솟구쳤다. 그저 바닥에 꽂았을 뿐인데 그 여파는 못처럼 고여있는 기린의 피에도 영향을 미쳤다. "앗! 못이!" 허봉이 가리킨 부근에 기이한 변화가 생겨났다. -치이이이익! 부글부글! 백룡도에서 흘러나온 흑한의 기운에 닿은 왼쪽은 수증기가 일어나며 끓고 있던 기린의 피가 식어갔고, 반대편에 흑염이 흘러들어간 곳은 더욱 끓어올랐다. '대단하다! 이게 기린의 진원을 흡수한 힘인가!' 만년한설로도 고작 일부 식히는 것이 한계였는데, 병기에 남아있는 기운이 이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대단했다. 그런데 천여운은 갑자기 병장기를 왜 손에서 넣은 것인가? '대체 무얼 하시려는 건지?' '아직 삼종진기를 가다듬지 못하신 건가?' 천여운의 알 수 없는 행동에 두 사람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여기서 란영을 경악하게 만드는 일이 벌어졌다. 천여운이 손으로 뭔가를 쥐는 시늉을 했다. '응?' '어째서 빈손으로?' 아무 것도 없는데 검병이나 도병을 쥐는 파지법을 취한 것이다. 이상하게 여기고 있는데 천여운이 쥐고 있는 오른손에서 검은 불꽃이 일어나더니 이내 선명한 검의 형태를 갖추어 갔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천여운의 왼손에서 검은 서리가 일어나며 마찬가지로 선명한 도의 형태로 바뀌었다. "서, 설마....." 란영의 두 눈이 흔들렸다. 지금 천여운이 펼치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한 탓이었다. "지금 교주님께서 뭘 하시는 거죠?" 물론 아무 것도 짐작하지 못하는 자도 있었다. 의아해 하는 허봉의 물음에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형.....검!" "무형검? 무형....검......헉! 무, 무형검이라고요?"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말을 되새기던 허봉도 놀라서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공을 연마하는 무림인들에게도 여러 전설들이 있다. 정도 무공의 발산지인 소림의 시초인 보리 달마 조사가 갈대 잎 하나를 타고서 강을 건넜다는 것부터 시작해 수많은 전설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무형검이었다. 무공의 끝이라 불리는 현경의 극. 그런데 무림의 기인이사들은 이 경지가 무공의 끝이 아니라고 했다. 그 중 한 사람의 들려오는 일화다. 화산파의 초인이자 무패의 검객이라 불렸던 독고구패는 말년에 들어서 검을 들고 다니지 않았다고 한다. 화산파의 동문이 궁금하여 독고구패에게 물었더니 그가 이렇게 답했다고 했다. [이기유형을 넘어선 무형의 검을 다를 수 있게 되면서, 더 이상의 검은 내게 있어 무의미하네.] 아무리 화산에 있어서 전설적인 검객이 하는 말이었지만 허풍이라 여긴 화산의 제자는 세상에 그런 것이 어디 있냐고 불신의 태도를 보였다. 이에 독고구패가 아무렇지 않게 무형의 기운인 진기를 유형화하여 검을 만들어내는 신기를 보였다. 그것을 본 동문은 경악하여 머리 숙여 그를 불신한 것을 사죄했다고 한다. 이 일화가 퍼져나가면서 무림의 전설이 되었는데, 이때부터 무림인들은 현경을 넘어선 경지가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 무형의 진기를 검화하는 것을 두고 무형검(無形劍)이라 불렀다. '정말 무형검이라니? 그저 상상 속의 경지로만 여겼건만..... 당시의 교주님도 현 교주님 만큼은 아니셨는데.' 일 태상 란영이 모셨던 그 시절의 교주도 당대 최고의 고수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런 엄청난 무인임에도 불구하고 기린의 진원을 흡수하기 전의 천여운보다도 한 수 아래였다. 그런데 그보다도 훨씬 강해지려 하니, 가히 탈 인간 급이라 할 만 했다. "교, 교주님께서 지금 무형검을 펼치시는 거라고요? 그, 그렇다면 생사경의 경지에 올랐다는 말입니까?" 얼마나 놀랐는지 허봉이 침을 튀겨가며 호들갑을 떨었다. 생사경(生死境). 무림에서도 최고라 불리는 현경을 넘어선 전설의 경지이다. 그 많은 무림인들 중에서도 현경의 극에 오른 자는 한 세대의 정점들 중에서도 한두 명 나올까 말까할 만큼 극악의 경지였는데, 이를 넘어서는 자가 쉽게 나올 리가 없었다. 그래서 무림인들은 살아서는 이루지 못하고 죽어서나 이룰 수 있는 경지라고 하여, 무형검을 다루는 이 경지를 두고 생사경이라 불렀다. "저게 정말 무형검이라면......생사경이 틀림없네." 그녀는 넋을 잃은 표정으로 허봉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때 천여운이 놀라서 그를 우러러보고 있는 두 사람에게 외쳤다. "둘 다 옆으로 물러나라." "네, 네넵!" "며, 명을 받듭니다!" 아무래도 무형검으로 짐작되는 저 힘을 시험하려는 모양이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양쪽으로 공동의 벽 끝으로 신형을 날리자, 천여운은 기다렸다는 듯이 허공에서 흑염의 무형검을 반대 쪽 공동을 향해 뻗었다. -촤아아아악! "헉!" -펄럭펄럭! 공동 옆 벽끝에 있는데 돌풍이 일어나며, 걸치고 있던 허봉의 장포가 휘날렸다. 엄청난 풍압과 함께 천여운이 검을 뻗은 방향으로 검은 화염이 날카로운 검격을 일으키며 공동을 관통하여 뻗어나갔다. -화르르르륵! "세......상에....." 공동의 거의 절반이 넘는 십오 장(丈) 거리에 검흔이 바닥을 갈랐다. 그런데 이 갈라진 검흔에서 흑염이 올라오며 불길을 만들어 냈다. 검은 불꽃은 흉흉한 기운을 풍기고 있어서 다가가면 모든 것을 태워 재로 만들 기세였다. "한 번 더." 이게 끝이 아니었다. 천여운이 다시 한 번 그 방향을 향해 이번에는 왼손에 들고 있던 흑한의 무형도를 휘둘렀다. -촤아아아악! 쩌적! 쩌저저적! 그러자 날카로운 도격이 검은 불꽃을 가르며 바닥에 도흔을 만들어냈다. 꺼지지 않고서 계속 바닥을 녹이고 들어갈 것 같던 흑염을 갈랐고, 도흔의 파편들을 중심으로 검은 얼음이 날카롭게 올라왔다. 공동의 반을 거의 초토화시킬 만큼 엄청난 위력의 검격과 도격이었다. 더군다나 특별한 초식을 펼친 것도 아니라 그저 그 무형검 자체의 힘을 발산한 것뿐이었는데 이 정도였다. "무, 무형검이 맞아!" 일 태상 란영은 너무 놀라서 입을 벌리고서 중얼거렸다. 오랫동안 살아오면서도 그저 전설로만 들어왔던 경지를 직접 눈으로 보게 되니, 전율에 사로잡혔다. "이런 느낌인가." 천여운이 새롭게 깨달은 힘에 감을 잡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진기의 소모가 극악이라 할 만큼 엄청나기에 두 개의 무형검, 도를 만드는 것이 한계였지만 이 상태로 이기어검술도 펼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정도로 끝낼까.' 충분히 그 위력을 확인했고 허봉이 무사한 것도 보았으니, 이기어무형검은 나중에 시험해 봐도 될 것 같았다. 날이 밝기 전에 황릉을 벗어나야 하니 말이다. -둥! 둥! 둥! 천여운이 허공답보를 펼치며, 계단을 밟듯이 천천히 못 한 가운의 허공에서 그 바깥 쪽 바닥으로 내려왔다. -타탁! 발이 지면에 닿는 순간 일 태상 란영과 허봉이 동시에 그의 앞으로 한달음에 달려와 한 쪽 무릎을 꿇고서, 감격과 환희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교주님! 대공을 이루신 것을 경하드리옵니다!" "지고의 경지를 넘어서 생사경의 경지에 이른 것을 감축 드립니다!" 서로 다른 말을 했지만 의미는 상통했다. 현 천마신교의 교주이자 이대 천마인 천여운이 무림에서도 전설의 경지라 할 수 있는 생사경에 이른 것이다. < 71장 삼위일체 (2) > 끝 < 72장 수작은 수작으로 (1) > 지금으로부터 이백십여 년 전, 연황국(沇皇國)의 마지막 황제가 붕어하면서 중원은 열 개의 소국으로 찢어진다. 중원의 각 주요 요충지를 차지했던 성주와 벼슬아치들이 하나 둘씩 칭왕(稱王) 하면서, 자연스럽게 연황국은 멸국(滅國)의 길에 들어선다. 십국의 시대가 이어지는 근 십 년 동안 중원은 혼란의 시기를 맞이한다. 칭왕을 한 군주들의 탐욕은 자신들의 영역에서 끝이 날 리가 만무했다. "그 십 년 동안 중원은 피가 끊이지 않았고 황폐화 되었습니다. 양지의 중원이 그리 되었는데 당연히 무림 역시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죠." 아무리 관과 무림이 서로를 등한시 한다고 해도 중원을 살아가니, 당연히 전쟁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끝없는 전쟁은 국토의 황폐화를 가져왔고 병량미 싸움으로 식량난마저 일어났다. 밭을 일굴 일꾼들은 전부 군인으로 차출되거나, 도적 떼가 되어버렸으니 점차 중원은 암흑기로 빠져들었다. "그때 한 영웅이 일어났습니다." 십국 가운데 가장 열국에 속하던 순나라. 그 순나라의 당대 왕이었던 주원순이 병사한 후에 그 아들인 주원명(朱元明)이 등극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통허현의 현령 직을 대대로 물려받아온 주원순과 달리 주원명은 무장으로 북의 야만인들과 전쟁을 치러온 무패의 대장군이었다. 연황국이 멸국하면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모든 것에 흥미를 잃고 중원을 떠돌면서 영웅호걸들을 사귀는데 두 눈을 돌렸다. "주원명이라면 태조의 이름이군." 천여운의 말에 일 태상 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명제국을 건국한 태조였다. "주원명은 대장군 시절에 북의 야만인들로부터 연황국을 지켰기 때문에 영웅으로 받들어진 자였죠. 심지어 무림인들조차 그를 존경했습니다." 멸국의 길을 걷는 연황국에 있어서 유일한 영웅이었다. 당대 마교주인 천인경이 직접 교분을 쌓기 위해 십만대산에 초청할 만큼 그는 관과 무림 모두에게 인정받았다. 그는 중심이 강했기 때문에 나라가 멸망하자 관직을 내려놓았다. 그러나 십 년이라는 세월 동안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약해진 중원에 북으로는 야만족과 서역의 세력들이 쳐들어와 피가 끊이질 않자 결국 일어나게 된다. "태조께서는 영웅이고 경험이 많은 대장군이긴 했지만 당시에 순나라의 전력만으로는 십국을 통일하고 외세를 물리치기에는 역부족이었죠." 아무리 병법에 능한 대장군 출신인 그라고 해도 열국을 통일하려면 국력을 길러야 했는데, 그러려면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백성들이 겪는 고통이 크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는 십 년 동안 교분을 쌓은 중원 각지의 영웅들과 무림인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천명(天命)이 이 부족한 주 아무개와 여러 영웅분들께 고난에 젖은 백성들의 피눈물을 닦으라고 하였소. 탐욕스러운 군주들과 도적떼들로부터 그들을 구명할 수 있도록 영웅분들께서 부디 본인의 손을 거들어주시기 바라오.] 영웅과 대의명분. 그것을 다 갖춘 주원명은 시운(時運)을 타고났다. 그의 산하에 집결한 중원의 영웅들은 빠르게 열국을 멸망시키고 외세를 몰아냈다. 장장 십 년이라는 세월 만에 중원은 다시 통일하게 된다. "통일한 순나라는 위대한 태조의 이름을 따서 국명을 대명 제국이라 칭했습니다." 나라가 안정되면서 건국 공로를 인정받은 영웅들은 벼슬과 땅을 받게 되었다. 이때 태조의 건국을 도운 것은 영웅들뿐만이 아니라 무림인들도 있었는데, 정도 무림맹과 마교였다. "부탁을 받고서 도왔지만 나라가 안정을 되찾으니, 태조나 관료들에게 있어서 저희들은 부담스러운 존재들이었죠." 뛰어난 고수 한 사람이 수십 명의 병사를 혼자 상대할 수 있다. 그런 무림인들의 존재는 당연히 위협적이었다. 수당 황국 시절에도 관에 있어서 무림은 골칫거리였는데, 중원 통일을 위해 그들의 도움마저 받았으니 대가를 치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태조께서는 관과 무림이 상호불가침 계약을 맺는 조건으로 본교와 무림맹이 원하는 것을 제공해주기로 하셨습니다." 당시 무림맹의 맹주 무당검선 지현 장문인은 대명제국의 국교를 도교로 정해주길 청했다. 불가침 관계는 맺더라도 황실과의 연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본교에서도 천마신교를 국교로 삼아달라고 요청하려 했는데, 그들이 황궁 대전에서 먼저 그것을 청했고 태조께서 승낙해 버린 것이었죠." 사실 이 사건은 꽤나 유명했다. 마교와 무림맹이 건국에 미친 공로는 거의 같았다. 종교의 색채를 가진 마교 측에서도 같은 조건을 요청할 수 있다는 것쯤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는데, 덜컥 정파 측의 요청을 승낙해버렸다. '일부러 그랬다는 이야기도 많았지.' 당시에도 마교는 정도를 지향하는 무림맹에 비해서 위험한 느낌이 강했기에 관료들의 입김이 작용한 걸로 짐작하고 있었다. "이에 심기가 불편해진 당시 교주님께서 과감한 요청을 하셨습니다." 중원에는 하나의 전설이 있었다. 한 제국이 탄생하기 전에 영수가 나타난다는 전설이었다. 놀랍게도 태조가 중원을 통일하기 전에 개봉에 영수인 불기린이 나타나, 고을 다섯 개를 불태우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때 마교 교주인 천인경이 호법과 장로, 종주 등 수백 명의 고수들을 데리고 삼일밤낮을 합공하여 불기린을 제압하는데 성공했다. 불기린이 죽고서 그 사체에서 꺼지지 않은 불꽃이 피어올랐는데, 이를 태조는 건국의 길조라고 여겼다. 그래서 기린이 죽은 곳에 거대한 릉을 만들게 하고, 개봉을 수도로 삼을 것을 천명했다. [그렇다면 기린의 진원과 피를 주십시오.] 천인경은 모두가 있는 황궁 대전에서 기린의 진원과 피를 요청했다. 건국의 길조라 여겼던 기린의 진원과 피를 달라고 하자, 관료들을 비롯해 무림맹의 인사들은 난리가 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반대했겠지" "교주님의 말씀대로입니다." 정파 무림맹에서는 당연히 마교의 전력 상승을 막아야만 했고, 황궁에서는 건국의 길조이자 황궁의 보물이 된 기린의 진원과 피를 넘길 수 없었다. 결사반대하는 분위기가 진행되었지만 교주 천인경은 끝까지 그것을 고집했다. [본좌와 본교의 사람들이 목숨을 던져가면서 잡은 것이오. 기린의 사체를 달라는 것도 아니고 진원과 피를 달라고 하는데, 그대들이 뭐라고 반대하는 것인가!] 그 일침에 관료들과 무림맹의 인사들은 모든 결정권을 태조에게 미뤄야만 했다. 심기가 불편한 마교 교주를 달래야 했기에 고심하던 태조는 결국 그 요청을 승낙하고 말았다. "대신 전제 조건이 붙었죠." 기린의 진원과 피를 가져갈 수 있다면 이라는 전제조건이었다. "우와 진짜 치사하네요!" 이를 듣고 있던 허봉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툴툴거렸다. 교주를 비롯한 마교의 고수들이 수백 명이 동원되어서야 겨우 제압한 불기린이었다. 문제는 불기린의 몸에서 나온 진원이나 피는 그 화기가 너무 강하고 불꽃에 타고 있어서, 복용은 커녕 건드릴 수도 없었다. "교주님께서 여러 방법으로 이를 옮겨보려고 했으나, 불타는 기린의 진원이나 피를 식힐 방법이 없었죠."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당대 교주 천인경은 제안했다. 기린의 피는 마교에 소유권이 있기에 이것을 가져갈 수 있을 때까지 마교의 고수들이 지키게 하겠다고 했다. 혹여 정파 무림맹의 손에 넘어가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린의 진원을 당장에 들고 가게 하는 것은 막았지만, 그 제안만큼은 어쩔 수가 없기에 태조는 한 가지 조건을 붙여서 승낙 하셨죠." 태조는 고수들이 기린의 릉에 머무는 동안은 그들이 황궁을 지키고 역대 황제들에게도 충성 맹세를 해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그렇게 릉에 머물게 된 고수들이 소신을 포함해 총 열두 명입니다." 란영이 지하 공동의 한편에 있는 석실에서 열두 패를 들고 왔다. 그것들은 전부 마교에서 사용하는 신분과 직위를 알려주는 패였다. "앗?" 패들을 살펴보던 허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것들 중에 마룡장종의 외당주라고 적힌 패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룡장종 외당주 문란영?" 허봉의 말에 천여운의 눈에도 이채가 띠었다. 장법의 초식이 많이 바뀌어서 헷갈리기는 했는데,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든다고 여겼더니 바로 마룡장종의 장법이었던 것이다. "......마룡장종이었나?" 마룡장종이라면 삼 장로 문연와 육검의 일인인 문규의 종파였다. "헉! 그럼 무, 문규의 증조 아니 고고조 할머니쯤은 되시겠네요?" "문규?" 놀라서 호들갑을 떠는 허봉의 말에 란영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본교를 떠나서 백구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황릉에서만 지내왔기에 이제는 종파에서의 기억이 흐릿하기마저 했다. '문 장로와 문규가 많이 놀라겠군.' 허봉의 말대로 한참 조상이 생존해 있는 셈이니 말이다. 인연이라는 것은 참으로 기이하게 다가올 때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패만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들 모두?" "성화의 재로 돌아갔습니다." 마교에서는 순직하거나 죽은 자들이 성화의 재가 된다고 한다. 그렇게 성화의 재로 돌아간 자들은 세월이 흘러서 다시 태어난다고 믿는 것이 마교의 교리였다. "당시 교주님의 명으로 이곳을 지키면서 소신들은 기린의 진원과 피를 가지고 갈 방법이나 복용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황궁에서도 기린의 피에 관심을 가졌기에 힘을 합쳐서 연구를 진척했으나 특별한 소득을 얻지 못했다. 피를 섣불리 복용했다가, 전부 화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동료들은 여자인 소신에게는 화기가 위험할 수 있다고, 시험 삼아 소량의 기린의 피를 복용하는 것조차 만류했죠." 그 결과 팔십의 노파가 되었을 때 살아남은 자는 란영뿐이었다. 이야기를 하는 내내 떨리는 목소리인 그녀가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동료들 모두가 성화의 재로 돌아가고.....하아, 지독히도 외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내공이 깊어져서 화경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나이가 있어 오래 살 수는 없다고 여긴 그녀는 역발상을 하게 되었다. 남성이 양기로 인하여 화기를 감당하지 못한다면 어차피 살 날이 많지 않은 자신의 몸에 시험해보자고 말이다. "태조를 비롯한 대명제국의 역대 황제 폐하들께서도 진원과 기린의 피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귀한 만년한설까지 동원하여 기린의 피에 타오르던 불꽃은 꺼뜨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마지막 도박을 하는 심경으로 희석된 기린의 피를 복용했고, 처음으로 화기를 흡수하는데 성공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녀는 환골탈태를 하여 젊음을 되찾았다. "소신의 몸을 통해서 성공했기에 소신은 진원과 기린의 피를 활용할 방법을 찾기 위해서 연구했습니다." "황궁에서도 관심을 보였겠군." "그렇습니다. 하지만 관심대로 되지는 않았죠." 한 명의 성공으로 시도된 기린 피의 복용은 전부 실패로 돌아갔다. 희석된 기린의 피에 담긴 화기조차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황궁에서도 여자 고수들로 시험했을 텐데?"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소신이 거짓을 고했습니다." "거짓?" 란영은 희석된 피를 여자 무인들은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이것으로 황궁에서 공력이 증가한 무인들을 양산하는 것을 막기 위해 황제에게 거짓말을 했다. "희석된 기린의 피를 복용하려면 내공이 없는 상태여야만 가능하다고 말입니다." "호오!" 유일하게 기린의 피를 복용한 사람이 한 말이니 황제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도 수많은 남자 고수들을 희생시켰기 때문에 또 다른 고수들을 희생시키기에는 더 이상의 큰 기대감은 사라진 당대 황제였다. "무공을 익힌 고수는 별로 없지만 황궁에는 수천 명의 궁녀들이 있죠." 그렇게 생겨난 것이 현재 궁녀들로 이루어진 수호단의 전사들이었다. 내공을 익히지 않았기에 궁녀들 중에서 화기를 받아들인 자는 극소수에 불과했지만 이들만으로도 굉장한 전력이 만들어졌다. -털썩! 란영이 두 무릎을 꿇고서 글썽거리는 눈으로 말했다. "소신은 이 숨이 다하기 전에 십만대산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기린의 진원과 피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라곤 저 뿐이었습니다." 홀로 살아남은 란영은 이 사실을 마교에 알리고 싶었다. 불완전한 복용법이라도 마교의 전력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혼자뿐인 그녀가 이 방법을 알리러 십만대산으로 가는 것을 황제가 막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었고, 자리를 비운 사이에 혹여 기린의 피에 대한 거짓이 탄로 나서 황궁의 힘이 커지는 것을 경계해야만 했다. "그래도 이렇게 마신이 도우사 본교의 하늘이신 교주님을 뵙게 되었으니, 성화의 재가 되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주르륵!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 천여운은 내심 마음이 짠해졌다. 홀로 그 오랜 세월을 전전긍긍하면서 당시 교주의 명을 받들고 있었던 란영이었다. 이 정도 무력을 가지게 되었다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황궁을 탈출해서 여생을 보내도 되었을 텐데, 대단한 교에 대한 충심을 지녔다. "조, 존경스럽습니다! 선배님!" 허봉조차 그런 그녀를 경외심이 넘치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진정한 교인이로구나!' 크게 감격한 천여운이 중대한 결심을 했다. 처음에는 경계심으로 대했으나, 이런 충심을 가진 자를 황릉에서 썩게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차차차차차착! "앗!" 천여운의 팔목 보호대로 변했던 흑철이 모아지면서 흑검이 되었다. 멀리서는 미처 보지 못했었는데, 흑검의 검신 아래쪽에 선명하게 천마검(天魔劍)이라는 음각이 새겨져 있었다. '흑검에 어째서 저 문구가?......잠깐! 서, 설마 이건 진정한 천마검!' 란영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처음에는 그녀가 알고 있던 천마검과는 달라서 알아보지 못 했었다. 그런데 흑검이라고 한다면 천마령에 적혀 있는 전설 속의 진정한 천마검이 틀림없었다. '이럴 수가! 본교에 진정한 천마님이 탄생했단 말인가!' 모조품이 아닌 진정한 천마검을 지녔다는 것은 천마 조사에 이어서 두 번째 천마의 칭호를 가진 교주임을 의미했다. 어찌나 놀랐는지 눈동자가 감격으로 떨려왔다. 그런 그녀에게 천여운이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 천마신교의 제 이십사대 교주이자, 제 이대 천마인 천여운이 오랜 세월 동안이나 명을 충실히 이행해온 본교의 영웅에게 그 공로를 치하하노라." "흐흑!" 진중한 천여운의 목소리에 그녀가 더욱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노고를 인정받는 것까지도 원하지 않았다. 그저 마지막으로 십만대산으로 돌아가거나 교주님을 뵙기를 간절히 바랐는데, 천여운의 말에 서러움이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공로에 대한 대가로 본 교주는 마룡장종의 문란영에게 대장로의 직위를 내리노라." "대, 대장로!!!" 현 마교에는 존재하지 않는 직위이다. 그녀의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서 천여운이 새롭게 만들어낸 직위였다. 근 이백 년이라는 세월 동안 마교를 위해 헌신했고, 그녀의 무위는 대호법 마라겸과도 버금갔기에 대장로라는 직위를 만들었다. "어, 어찌 신과 같은 자에게 그런 직위를..." 란영이 어쩔 줄 몰라했다. 평생을 본교에 헌신했지만 그녀가 꿈도 꾸지 못했던 직위였다. 천여운이 괜찮다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대에게 어울리는 직위다. 겸양치 말라." "아아아! 교주님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사드리옵니다. 천세! 천세! 천천세!" -쿵! 쿵! 쿵! 란영이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감격의 인사를 올렸다. 평범한 종파의 외당주로 시작하여 황릉에서 오랜 세월을 빛을 보지 못하고 고생해온 보상을 이렇게 받게 되었다. < 72장 수작은 수작으로 (1) > 끝 < 72장 수작은 수작으로 (2) > 황궁 수호전의 일 태상 란영. 그녀의 진정한 정체는 마교의 마룡장종의 외당주인 문란영이었다. 이제 그녀는 천여운의 명으로 대장로 문란영으로 거듭났다. '오대고수인 무쌍검에 이어서 황궁의 실질적인 일인자마저 영입하는 셈이잖아!' 허봉이 얼마나 들떴는지 상기된 얼굴이 되었다. 여섯 종파와의 내부 전쟁이 종결된 후로 급속하게 전보다도 전력이 상승해가고 있는 마교였다. 물론 란영의 경우는 영입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아....." -슥! 란영이 붉어진 눈시울에 맺힌 눈물을 손등으로 훔쳤다. 어느 정도 감격의 여운이 가시는 듯하자 천여운이 말했다. "지금 당장 그대를 본교로 데려가고 싶지만 아직 남은 일들이 있다. 그것만 해결하고 데려갈 터이니, 잠시 동안 대장로가 이곳을 더 지켜줄 수 있겠나?"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명을 내려주십시오! 반드시 이행 하겠나이다." 란영이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말했다. 백구십여 년 동안을 이곳 황릉 지하 공동에서 보내왔다. 당대 교주의 명령으로 잠시 더 기다린다고 해서 크게 상심 할 것도 없었다. "좋다. 그렇다면 대장로가 해줄 일이 있다." "소신이 말입니까?" 천여운은 대장로 란영에게 생각해둔 바를 알려주었다. 그 말을 전부 들은 그녀는 한동안 잃었던 흥미를 되찾은 사람처럼 얼굴에 화색이 돌아서 답했다. "충! 명을 받듭니다." "좋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황릉을 나가봐야 할 것 같다." 벌써 축시(丑時) 말이었다. 날이 밝기 전에 황릉을 빠져나가서 서둘러 처리할 일이 있었다. 그런 천여운을 란영이 다급히 불러 세웠다.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교주님!" "음?" ".......흠흠, 석실에 여분의 옷이 있는데, 두 분 모두 그것이라도 입고 나가시지요." "!?" 그랬다. 이야기를 하느라 미처 잊고 있었는데, 천여운의 옷은 기린의 진원이 내뿜는 불꽃에 전부 타서 알몸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경공이 빠르다고 해도 나신으로 황궁을 돌아다니는 것은 민망스러운 일이었다. * * * 아침이 밝아오고 황궁의 한쪽 편이 발칵 뒤집혔다. 동창의 식객들이 머무는 동당객당에서 동창의 금 첩형과 식객들, 그리고 황궁 수호전의 전사들인 궁녀들의 시신들이 발견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른 아침인 진시(辰時) 초가 되어서 발견된 것 때문에 더욱 난리가 났다. 황궁은 두 시진 단위로 경계 근무를 서는 자들이 교대를 하는데, 그 전의 교대 근무자들까지 살해당했기 때문에 이제야 발견되었다. "끔찍하구나." 금의위 천호(千户) 이암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경계 근무를 서는 금의위의 긴급 호출을 받고서 출두했는데, 피 냄새가 진동을 했고 현장에 있는 시신들은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싸움이 일어났는데 주위의 누구하나 알지 못했다는 것인가.' 이상했다. 경계 근무를 서는 자들이 살해당했다고 해도 가까운 곳이라면 전투를 벌이는 소리 때문에 알아차렸을 만도 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도 아무도 듣지 못했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었다. '설마 진기로 소리를 차단.....후우, 아니다. 바보 같은 생각이다.' 황궁 최고의 고수 중 한 사람인 북진무사가 온다고 해도 이 넓은 마당 전체의 소리를 진기로 차단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단은 시신들을 수습해서 조사를 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여봐라. 각 시신들을 분류..." -쾅! 그가 명령을 전부 내리기도 전에 본당 전각의 문이 거세게 열리며 불청객들이 나타났다. 하얗게 분을 칠한 푸른 관복을 입은 관료들이 본당 마당으로 우르르 몰려왔다. '동창?' 천호 이암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들은 바로 동창의 환관들이었다. 그들의 한가운데에 옥으로 된 목걸이를 걸고 있는 자는 동창의 당두였다. 당두가 그에게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후후후, 이 시각부터 이곳에서 벌어진 사건은 저희 동창에서 수사를 진행합니다." 그 말에 천호 이암이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황궁 내에서 벌어진 살해 사건은 저희 금의위가..." "이곳이 지금 어디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동당객당. 동창에서 운영하는 그들의 영역이었다. 물론 관리를 하는 것은 그들의 책임이었지만 황궁 내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한 수사권을 가진 것은 금의위였다. 동창이 하는 일은 첩보 기관이면서 관리의 부정이나 모반을 정탐하는 임무를 맡는다. "당두. 지금 영역 문제로 다툴 상황이 아닙니다. 수십 명이 넘는 궁녀들과 무관들이 살해 당한 사건입니다." 이들과 길게 엮어봐야 좋을 것이 없기에 천호 이암이 선을 그었다. 그러자 동창의 당두가 붉게 칠한 입술을 실룩거리며 말했다. "후후후, 뭔가 착각하고 있군요. 우리 금의위 천호님." "이 사건은 금의위들도 연루되어 있는 범죄입니다." "뭐, 뭐요?"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천호 이암이 불쾌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자신도 이제 막 보고를 받고 출동했는데, 금의위가 연루되었다니 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이 환관 놈이 대체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지?' 이를 전혀 개의치 않는지 동창의 당두가 환관들에게 명했다. "황궁에 역도의 무리들을 끌어들인 금의위들을 전부 포박하세요." 그 명령이 떨어지자 환관들이 미리 준비한 포승줄을 들고서 금의위들에게 다가왔다. 말도 안되는 명에 어이가 없어진 천호 이암이 소리쳤다. "역도라니! 지금 대체 이게 무슨 짓이오!" 역도(逆盜)의 무리. 그것은 역적과 도적을 붙인 말이다. 이제 막 사건이 발견된 장소에서 금의위들을 역도로 무리들과 연관되어 있다고 몰아붙인 것은 지극히 모함에 가까웠다. "대체 누가 우리 금의위들에게 말도 안 되는 모함을 한단 말이오?" "지엄하신 영왕 전하와 제독이신 임 공공의 명에 일개 금의위인 천호가 입을 함부로 놀리시는 군요." "여, 영왕 전하?" 당두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이암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영왕 주태윤. 대명제국의 태자에 가장 가까운 황제의 적자이다. 거기서 모자라 동창의 수장이자 장관인 독창제독의 명이라니 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 같은 시각 성양궁(星洋宮). 성왕 주태겸이 기거하는 황궁이다. 그곳에 동창의 환관들이 이백여 명이 몰려와 궁 전체를 둘러싸고 포위했다. 아무도 도망칠 수 없도록 철두철미하게 막아놓은 성양궁으로 들어가는 전각 입구에 화려한 백색 군갑을 갖춘 훤칠한 청년이 서있었다. 그 뒤로 푸른 관료복에 화려한 장신구로 치장한 늙은 환관과 황궁 종 사품 무관들의 관료복을 입은 중년인이 수행 보좌하고 있었다. " 확실하게 준비는 되었겠지?" "호호호, 그렇습니다. 영왕 전하." 백색 군갑의 청년은 바로 영왕 주태윤이었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여자들처럼 간드러지게 웃으며 답한 자는 동창의 일인자인 동창제독 임청화이다. 임 공공이라 불리는 그는 북진무사 영조, 그리고 수신호위와 더불어 황궁 삼대 고수 중 일인으로 환관들의 전설적인 무공 비급서인 규화보전(葵花寶典)을 극성으로 익혀 화경의 극에 이른 절세고수였다. "아마 지금쯤 오 첩형이 답신을 가져왔던 정도 무림맹의 그 도사들과 함께 황릉 내부 수색에 들어갔을 겁니다. 호호호." 그 말에 영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있는 중년의 무관에게 물었다. "차질 없이 준비되었기 바란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전하. 이미 묘시 초에 준비가 되었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중년의 무관이 자신의 뒤쪽에 서있는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장포인을 힐끔 쳐다보며 답했다. 이에 영왕 주태윤이 흡족해했다. "좋아. 이번 일로 태자의 지위가 확실해진다면 본 왕이 적극적으로 극도육무문을 지원하도록 하겠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고개를 숙여 감사를 올리는 중년의 무관. 놀랍게도 그의 정체는 다름 아닌 극도육무문의 인물이었다. 영왕의 궁전인 영장궁(英裝宮)에서 주태윤과 함께 있었기에 유일하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자였다. "시작하라." "네이." 영왕 주태윤의 명에 동창제독 임 공공이 내공을 실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성왕 전하께서는 궁밖으로 나와 추포를 받으시오!" 간드러지는 목소리인데도 내공이 얼마나 심후했는지, 궁 전체를 포위하고 있는 동창의 환관들이 전부 들을 수 있을 만큼 크게 들렸다. 임 공공이 두 차례 반복해서 이를 외친지 얼마 되지 않아, 전각의 문이 열리며 성왕 주태겸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남진무사 연남군과 금의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태겸이 형님 전하를 뵈옵니다." 주태겸이 고개 숙여 영왕 주태윤에게 인사를 올렸다. 여기서는 그가 가장 높은 신분을 지녔기에 그게 순리였다. 하지만 인사를 끝낸 후에는 곧장 불쾌하다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대체 어인 일입니까? 형님 전하." "오랜만이구나." 형님 전하라 부르는 그와 달리 주태윤은 성왕 주태겸을 아우라 부르지 않았다. 엄밀히 이야기하면 배다른 형제인 그를 아우로 인정하지 않았다. "오랜만인 것도 좋은데, 동창의 제독인 임 공공부터 시작해 환관들이 어째서 제 궁을 포위하고 있는 것이지요?" 마치 대역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그런 주태겸의 질문에 답을 한 것은 임 공공이었다. "성왕 전하. 지금 궁내에 큰 변이 일어났습니다. 역도의 무리들이 침입하여 궁녀들 수십 명과 동창의 식객들을 살해하였습니다." "뭐?" 임 공공의 말에 주태겸의 두 눈이 커졌다. 그의 당혹스러워하는 태도에 임 공공이 기세를 이어나갔다.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전하. 이 역도의 무리들이 황릉에 침입해서 태조 폐하의 보물을 훔쳤다는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제보?" 제보라는 말에 주태겸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주태겸이 고개를 돌려 임 공공에게 물었다. "하! 임 공공. 대체 어떤 제보를 받았는데 이렇게 궁을 포위 한 거요?" 단순히 제보라고 했는데, 마치 자신을 범인으로 몰아가는 분위기에 불쾌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임 공공이 특유의 간드러진 웃음소리를 내며 답했다. "호호호, 너무 노여워하지 마시옵소서. 전하."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전하께서 사자로 다녀오신 마교의 역도들이 복귀하는 행렬에 숨어서 황궁에 잠입하여 이런 일을 벌인 것 같습니다. 간밤에 이를 발견한 저희 동창의 당두들이 이를 저지하려다 실패하고 이를 제보했습니다." 그런 임 공공의 말에 주태겸의 뒤에 서있던 금의위 중 한 사람이 움찔거리더니, 어이가 없다는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다행히 임 공공의 시선은 여전히 주태겸에게 향해 있었다. 주태겸이 여전히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그걸 본 왕이 믿으라고 하는 말인가? 말인 즉 본 왕이 그들을 데려오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그 말에 임 공공이 입 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야 모를 일이지요. 전하. 지엄하신 황제 폐하께서 이번 일의 진상을 밝히고 범인을 추포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조사를 하면 명명백백히 드러날 일입니다. 호호호." "추포? 하! 지금 본 왕을 추포하겠다는..." "허어!" 화가 나서 언성이 올라가려하는 주태겸의 말을 자르고서 영왕 주태윤이 고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건방진 녀석. 감히 황실을 어지럽히고도 아주 당당하구나. 역도의 무리들과 연루되었다면 얌전히 추포를 받아도 모자랄 판국에 말이다." 더 이상의 황자 간의 상호존중은 사라졌다. '후처의 자식 주제에.' 영왕 주태윤은 그를 동등한 위치로 여기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서 우러러봐야 하는 위치야 말로 주태겸에게 어울리는 자리라 생각했다. 후처의 자식 주제에 자신과 태자의 자리를 놓고 겨룬다는 것 자체가 수치였다.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밟아주마.' 모든 것이 확실하게 준비되었다. 이번 일을 계기로 그를 지지하는 금의위들부터 한 번에 몰아낼 작정이었다. 황자인 주태겸마저 완전히 연루시키는 것은 힘들겠지만, 지지 세력을 제거하고 황제의 신뢰를 잃게 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더 이상 추태를 보이지 말고 얌전히 추포를 받아라. 죄상이 있는지 없는지는 곧 밝혀질 일이다."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는 주태윤에게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주태겸이 싸늘해진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증좌도 없이 이리 하는 것은 모함입니다." "하하하하핫, 증좌가 없다고 생각하느냐?" 이미 사전에 증좌 조작은 끝났다. 황릉 지하 공동에 죽어있는 수호전 전사들의 모든 시신에 마교의 무공들로 흔적이 가득할 것이다. "증좌 따위야 조사를 핑계로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본 왕이 고작 너를 추포하고자 증좌를 조작할 것 같으냐? 지금 동창의 관료들뿐만이 아니라, 황궁 감식반 의원들과 정도 무림맹의 사신들이 확인하고 있다." 모든 것이 공정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밝혔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도 황자인 그가 쉽게 납득하고 추포를 받아들일 리가 만무했다. 옥새가 찍혀있는 추포장이 없으면 강제로 추포할 순 없다. "제 눈으로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습니다." "허어! 네 녀석이 정녕!" "전하." 노기가 오르려는 영왕을 동창제독 임 공공이 만류하는 목소리로 불렀다. "무슨 일인가? 공공" "호호호, 성왕 전하께서 쉽게 납득하지 못하시니, 차라리 직접 증좌를 보여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어차피 성왕 주태겸이 한 번에 납득하지 않을 것을 예측했던 그들이다. 금의위들과 함께 직접 데려가서 마교인들이 이를 저질렀다는 것을 보여주면 추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처음부터 이것을 계획했던 영왕 주태윤이 능청스럽게 말했다. "굳이 강제로 추포하면 될 일을 무엇하러 증좌를 보인단 말인가?" 이 말을 하면서 주태윤은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주태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충분히 그를 자극했으니 지기 싫어하는 녀석의 성정대로라면 분명 더욱 강하게 나오리라. 그리고 그 예측은 들어맞았다. "흥! 좋습니다. 증좌를 직접 본다면 추포를 받아들이겠습니다!" 원하는 대답이 나오자 영왕의 뒤에 서있던 극도육무문의 무인의 눈빛이 반짝였다. 성왕을 추포해서 황제의 신뢰를 완전히 잃게 하면 자신들이 지원하는 영왕을 무사히 태자로 만들 수 있고, 계획대로 모든 죄를 마교에 뒤집을 수 있다. '흐흐흐, 계획대로 되는구나.' * * * 황궁의 북서쪽에 있는 거대한 태조 황릉. 제단에 숨겨진 통로로 영왕 주태윤과 성왕 주태겸이 나란히 앞서서 증좌를 확인하기 위해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 뒤로 동창제독 임 공공을 비롯한 동창의 환관들, 그리고 남진무사와 금의위 네 명이 뒤따라서 들어갔다. '네놈과의 악연도 이제 끝이구나. 후후.' 영왕 주태윤은 걸어가는 내내 흡족함을 감추지 못했다.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태자 후보로 거론되는 그가 이번에 황궁 보물이 사라진 역도의 무리들과 연루되어서 추포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관료들이 태자 책봉에 반대할 것이다. -웅성웅성! 통로의 끝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수많은 횃불들로 밝힌 첫 번째 지하 공동에는 수많은 시신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 시신들을 황궁 감식반의 의원들과 무림맹의 사신단으로 온 공동파의 도사들이 일일이 살펴보고 있었다. "성왕 전하를 배알하옵니다!" "영왕 전하를 배알하옵니다!" 두 왕이 나타나자 그들이 작업하던 것을 멈추고서 인사를 올렸다. 영왕 주태윤이 손을 들어 올리며 득의양양한 얼굴을 하고서, 성왕 주태겸과 함께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후후후, 모든 것이 순조롭구나.' 극도육무문의 중년인이 나열된 시신들을 바라보며 흡족해 했다. 황궁 수호전의 전사들이 전부 마교인에게 몰살당했다고 한다면 필시 황제가 분노하게 될 것이다. '도혈문주와 각 문주들이 꽤 고생했겠군.' 지하 공동이 여러 층이라 들었는데, 이곳만 하더라도 시신이 거의 오십 구가 넘었다. 다섯 명이서 이 시신들에 일일이 마교의 검흔을 남기려면 꽤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정파 무림맹의 고수들이 증언한다면 더욱 신빙성이 있겠지. 크큭. 마교 놈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당하겠지.' 근 몇 년에 걸쳐서 철두철미하게 계획했다. 이번 일로 차기 황제의 지지와 영물의 피도 얻고, 마교를 압박할 수 있으니 일거삼득(一舉三得)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즐거워하고 있는데, 갑자기 영왕 주태윤의 당혹스러워 하는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그, 그게 대체 무슨 소리느냐!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뭔가 심상치 않은 그의 반응에 극도육무문의 중년인이 인상을 찡그렸다. 주태윤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체 무슨 문제가 생겼기에 저렇게 외치는 것일까? 곧 그 연유가 드러났다. "시신에 남겨진 흔적이 극도육무문의 무공이라니? 그게 무슨 헛소리야!" "뭣?" 뜬금없는 소리에 중년인의 두 눈이 커졌다. 갑자기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 72장 수작은 수작으로 (2) > 끝 < 72장 수작은 수작으로 (3) > 정도 무림맹의 사신으로 오게 된 공동파의 장문인 청수 진인. 그는 무림맹의 십칠웅주(十七雄主) 중에 십이웅주의 좌를 가진 인사이다. 구대 문파의 도가 계열 중에서도 화산파의 장문인인 풍천운과 더불어 강직하고 올곧은 성격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래서 황궁에서 도교의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늘 초청되는 인물이었다. '정도 무림맹의 수뇌부이면서 청수 진인 같은 공명정대하기로 유명한 도사가 시신의 상흔을 증빙한다면 누구도 이견을 내지 않을 겁니다.' 라는 극도육무문의 무인이라는 자의 말을 믿고서, 영왕 주태윤은 청수 진인과 공동파의 도사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황실과의 연을 중시 여기는 무림맹의 인사인 청수 진인은 흔쾌히 이를 받아들였다. 상흔을 살피는 것이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정말 마교에서 그런 역도의 짓을 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들이 알고 있는 마교는 호전적인 부분도 있었지만 사파와는 달리 도적질을 할 그런 위인들은 아니었다. "시신들의 상흔이 남겨진 위치 별로 나누어서 내려놓아라." "네이~." 황릉의 지하공동으로 그들을 데리고 온 자는 동창의 환관 오 첩형이다. 황궁 감식반의 의원들과 공동파의 도사들만으로 시신을 수습하기는 힘들기에 동창의 백여 명의 환관들이 인력으로 투입 되었다. -탁! 환관들이 계속 시신들을 찾아서 옮겨 왔는데, 이제 고작 첫 번째 공동인데도 벌써 오십 구가 넘어가고 있었다. '이 자는 숙수로군.' 시신들의 복장을 보면서 오 첩형은 내심 놀라워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처음 황릉의 숨겨진 공동에 들어왔다. 황궁 수호전에 대해서는 풍문으로 듣기는 했지만, 궁녀들을 비롯해 궁정 주방의 숙수, 정원사부터 이런 자들이 수호전의 전사들일 줄은 몰랐다. '뭐, 상관없다. 이들의 희생으로 성왕 전하를 실각시키고 영왕 전하께서 황제의 보위를 물려받는다면 거룩한 희생이지. 후후후.' 그렇게 된다면 동창의 지위는 더욱 확고부동해질 것이다. 근래에 들어서 서창의 규모가 커지면서, 권력이 양분될 것을 우려하고 있던 동창이었다. "흐음." 어디선가 신음성이 들려왔다. 오 첩형이 바라보니, 시신들의 상흔을 살피고 있는 공동파의 도사들의 표정이 묘했다. 심지어 장문인인 청수 진인도 인상이 굳어져 있었다. '왜 그러는 것이지.' 의아해진 오 첩형이 뭔가 싶어서 직접 시신을 살펴보았다. 수많은 상흔들로 가득한 시신. 마교의 무공을 모르는 그로서는 그러려니 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 문제도 없어 보이는데. 다른 시신들도 뭐......엇?' 옆에 놓여있는 시신을 보던 오 첩형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이 흔들렸다. 시신들의 상처는 매우 얇고 채찍같이 휘어지는 검 자국으로 가득했다. 연검에 의한 상처였다. '서, 설마....' 놀란 오 첩형이 시신들을 살폈는데, 다섯 구 중에 하나 꼴로 이러했다. 문제는 단순히 연검이라는 무기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 안 돼. 당장 감식을 중지해야 해.' 오 첩형이 다급히 공동파의 장문인인 청수 진인에게 가려고 했는데, 통로의 입구 쪽에 있던 동창의 환관들이 인사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성왕 전하를 배알하옵니다!" "영왕 전하를 배알하옵니다!" '헉!' 오 첩협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지금쯤 영왕 주태윤이 성왕을 데려올 거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빨랐다. 다가가서 만류하고 싶었는데, 영왕은 공동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곧장 성왕 주태겸과 함께 청수 진인에게로 다가갔다. '이런!' 영왕 주태윤의 성정은 잘 알고 있었지만 역시나 급했다. 일개 첩형에 불과한 자신이 갑자기 황자들의 행보를 가로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자, 그는 우선 제독 임 공공에게 전음을 보냈다. [공공!] [후후후, 잘 진행하고 있구나.] [크, 큰일입니다.] [뭐가 큰일이라는 것이야?] 오 첩형의 다급한 목소리에 뭔가 이상하다고 여긴 임 공공이 물었다. 이에 오 첩형이 자신이 발견한 것을 말해주려고 하는데, 갑자기 영왕 주태윤의 당혹스러운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그, 그게 대체 무슨 소리느냐!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느, 늦었다.' 이미 청수 진인이 영왕에게 사실을 고하고 말았다. 이윽고 주태윤의 입에서 충격적인 외침이 터져 나왔다. "시신에 남겨진 흔적이 극도육무문의 무공이라니? 그게 무슨 헛소리야?" 그 말에 오 첩형이 눈동자가 더욱 커졌다. 자신이 이야기하려고 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동창제독 임 공공이 하얗게 분칠한 얼굴이 붉어질 만큼 노기가 올라서 옆에 있는 극도육무문의 중년인을 노려보았다. 중년인 또한 이런 상황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는지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이보시오. 도곤문주! 이게 무슨 이야기죠?] 임 공공이 전음으로 그를 다그쳤다. 분명히 이 극도육무문에서 왔다는 도곤문주는 모든 준비를 확실히 마쳤다고 했다. 그렇다면 공동파의 장문인인 청수 진인의 입에서 상흔들이 마교의 무공이라고 말을 해야 정상이었다. [극도육무문의 무공이면 그대들 문파가 아닌가요?] [그, 그렇습니다만. 이럴 리가 없습니다!] 도곤문주라 불린 중년인 역시도 영문을 알 리가 만무했다. 분명히 도혈문주가 묘시 초에 직접 찾아와 모든 준비가 끝났다고 말했다. 상위 육문주 중 한 사람인 그녀가 이런 실수를 했을 리가 없었다. '도혈문주?' 도곤문주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뒤쪽에 환관들 곁에 서있는 면사포의 장포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미 임 공공의 눈빛은 싸늘하게 돌변했다. '......별 수 없군.' 황궁에서 삼십 여년이 넘게 오랜 정치 생활을 해온 임 공공이다. 그는 더 이상 도곤문주의 해명을 재촉하지 않았다. 이미 청수 진인의 입에서 시신들의 상흔이 극도육무문이라고 나왔다면 여기서 빨리 그를 내쳐야 한다고 판단했다. 임 공공이 서둘러 오 첩형에게 전음을 보냈다. [당장 극도육무문의 이 자를 추포해라.] 성왕 주태겸이나 금의위들이 이 자의 정체를 알 리가 없었지만, 변수가 발생한 이상 괜한 후환거리를 두어선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임 공공이었다. 그런데 오 첩형이 명을 이행하지 않았다. [고, 공공!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시신들에는...]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공동파의 장문인 청수 진인의 목소리가 공동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뚜렷하게 들려왔다. "그뿐이 아닙니다. 전하. 시신들에는 파상연검술에 의한 상흔들도 남아있습니다. 원시천존. 원시천존." '!?' 붉게 달아오르던 임 공공의 표정이 굳어졌다. 파상연검술(波狀軟劍術). 임청화의 스승이자 전임 동창제독인 유 공공이 규화보전에 나오는 파상검법을 바탕으로 환관들을 위해서 만든 검술이었다. 동창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면서 연검을 주무기로 사용하는 그들을 상징하는 검술이기도 했다. '이,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팟! 당황한 임 공공이 경공으로 영왕 주태윤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억울하다는 목소리로 고했다. "즈어어어언하아아아! 그럴 리가 없사옵니다아아아!" 시신에 파상연검술이 남겨져 있다고 한다면 황궁 수호전의 전사들을 죽인 자로 동창의 환관들이 연루된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공동파의 장문인 청수 진인이 안타깝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허어, 스무 구의 시신을 살폈지만 확실히 파상연검술이 틀림없습니다. 공공." "청수 진인! 그럴 리가 없습니다. 어찌..." "공공.....직접 보시지요. 노도도 문제가 없도록 살펴보려고 했지만 상흔들은 그때 연무식 때, 동창의 당두들이 보여주었던 검술입니다." '연무식!!!' 얼마 전 새해를 맞이하여 황궁의 도교 행사가 끝난 후에 구대문파의 도교 인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동창과 서창, 금의위의 무인들이 연무식에서 검술 시연을 보인 적이 있었다. 청수 진인 정도 되는 명성이 자자한 검객이 보았던 검술을 쉽게 잊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는 군요. 전하." "뭐라!" 옆에서 들려오는 이죽거리는 목소리에 영왕 주태윤이 고개를 돌렸다. 주태윤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 떨리는 주태윤의 눈동자에 입 꼬리가 귓가에 걸릴 만큼 올라간 성왕 주태겸의 얼굴이 보였다. '이, 이놈이!' 분명 함정을 판 것은 자신이었다. 그런데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란 말인가? 어째서 마교의 무공이 상흔으로 남아있어야 할 시신들에 극도육무문과 동창 환관들의 무공 흔적이 남아있는 것일까? 확실한 것은 단 하나였다. 지금 청수 진인의 증언으로 모든 정황이 성왕 주태겸이 아닌 자신이 위태롭게 되어버렸다. 불과 촌각 전만 하더라도 득의양양했던 그였다. 꼴도 보기 싫은 성왕을 실각시킬 수 있다고 믿은 함정이 일 순간에 자신의 목을 노리는 검날이 되어서 날아왔다. "으, 음모다! 이건 음모야!" 영왕 주태윤이 어찌나 당황했는지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지금으로서는 음모라고 우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주태윤을 바라보며 반대로 득의양양해진 성왕 주태겸이 허리를 당당하게 펴고서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겠군요. 형님 전하." "폐, 폐하?" 주태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만약 이 사실을 당금 황제가 알게 된다면 지금까지 쌓아왔던 신뢰가 일순간에 무너진다. 동창에서 그를 지원하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황궁에 아무도 없었다. '아, 안 돼.' 이제 얼마 후면 단오제였다. 누가 태자로 책봉되는지 결정한다고 알려진 날이다. 동창에서 황궁 수호전 전사들의 살해 및 보물 탈취 사건이 연루되면 자신은 태자는커녕 도리어 실각되고 말 것이다. "네, 네놈의 짓이다! 후처의 자식 주제에 감히 태자의 자리를 노린다고 이런 음모를 꾸몄구나!" 이성을 잃은 주태윤이 삿대질을 하면서 외쳤다. 물론 궁지에 몰린 그에게는 당연한 발악이었다. 음모라고 우겨서라도 이 상황을 타개하지 않으면 최악으로 치닫게 되니 말이다. "네놈이 시신을 조작한 게 틀림없다!" 바로 그때였다. "그 부분은 소신이 설명 드리고 싶습니다." 걸걸하게 들렸지만 분명 여자의 목소리였다. 공동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절로 그곳으로 향했다. 목소리가 들려온 제 이 공동으로 들어가는 지하 통로 쪽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 황실 문양이 그려진 붉은 갑주를 입은 여인이었다. 타오를 것 같은 적발이 허리까지 내려오는 고혹적이면서 신비로운 모습은 환관들조차 탄성이 흘러나올 정도였다. -팟! 입구 쪽에서 나타난 그녀가 순식간에 두 왕들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찌나 빨랐는지 임 공공이 내심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고수다.' 모습만 신비로운 것이 아니라 무위조차 짐작이 가지 않는 여인이었다. 평소라면 그런 아름다움에 넋이라도 나가겠지만 위기에 몰린 영왕 주태윤은 오히려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네, 네년은 누구길래 감히 본 왕의 앞에 나선 것이냐!" 그 말에 그녀가 갑주에 걸치고 있던 황궁 신분패를 두 손으로 공손히 보이며 대답했다. "전하. 소신은 이곳 황릉을 지키는 황궁 수호전의 책임자인 일 태상 란영이라고 하옵니다." "뭐, 뭐라!" 밝혀진 그녀의 정체에 주태윤이 당혹스러워했다. 전부 죽었다고 알려진 황궁 수호전의 전사들 중에 생존자가 나타난 것이니 말이다. "그, 그럴 리가 없다!" -탁! 믿기 힘들어 신분패를 빼앗아 살폈는데, 황제의 옥새가 새겨진 이 패에는 황궁 수호전의 일 태상이라는 직위를 증빙하고 있었다. 정말로 황궁 수호전의 책임자가 틀림없었다. "어찌 이런...." 너무 놀라서 말문이 막혔는데, 동창제독 임 공공이 다급히 전음을 보내왔다. [전하! 차라리 잘 되었습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주태윤이 의아한 눈빛으로 임 공공을 바라보았다. 임 공공은 무너지는 하늘 속에 솟아날 구멍을 찾은 사람처럼 눈을 반짝이며 전음을 보냈다. [이 여인이 정말로 살아남은 유일한 황궁 수호전의 고수라면 이 죄상을 전부 극도육무문에 떠넘길 수 있습니다!] '아!' 임 공공의 전음에 주태윤의 두 눈에 활기가 돌았다. 생각해보니 그녀가 등장했다고 걱정할 일이 아닌 것이 황릉을 습격한 진범들은 극도육무문의 고수들이었다. 이 사실만 말해주어도 적어도 동창과 자신은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 '과연! 역시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활로가 보이자 침착해진 영왕 주태윤이 짐짓 근엄한 목소리로 란영에게 물었다. "흠흠, 무엇을 설명한다고 하는 것인지, 수호전의 일 태상께 서 말해줄 수 있겠소?" -쿵! 그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가 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외쳤다. "전하! 태조께서 지키라고 명하셨던 황궁 보물을 저 동창의 환관들과 역도의 무리들에게 빼앗기고 말았나이다. 소신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 그녀의 그런 외침에 주태윤과 임 공공이 동시에 벙 쪄버리고 말았다. 이것 대체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 살아남은 유일한 황궁 수호전의 책임자라 하여서 활로라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숨이 끊어져가는 환자의 목에 제대로 비수를 꽂은 셈이었다. "호오. 동창의 환관들이 황궁의 보물을 노렸다고 했는가!" 성왕 주태겸이 입 꼬리가 올라가서 모두가 들으라는 듯이 크게 말했다. -웅성웅성! 이에 공동파의 도인들을 비롯해 황궁 감식반의 의원들이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았다. 의심스러워 하는 싸늘한 눈초리들이다. 그녀로 인해 확실하게 동창의 환관들은 역도의 무리들과 연루된 셈이니 말이다. '이, 이러다 정말 동창이 역도로 몰리겠구나.' 이런 최악의 분위기를 읽은 동창제독 임 공공의 눈이 빠르게 좌중을 훑었다. 시신의 흔적을 비롯해 유일하게 살아남은 수호전의 인물이 저리 증언한다면 동창은 꼼짝없이 황제의 분노를 사고 만다. 그런 그에게 누군가의 전음 소리가 들려왔다. [임 공공! 별 수 없습니다. 차라리 이곳에 있는 자들을 전부 제거하여 입을 막아야만 합니다!] 그 자는 바로 극도육무문의 도곤문주였다. 이미 상황이 글렀다는 것을 인식한 도곤문주는 살인멸구만이 답이라 여겼다. 다행인 것은 이곳이 황릉의 지하공동이라는 점이었다. '공동파의 장문인과 남진무사, 그리고 저 일 태상이라는 여자만 제외하면 전부 금방 제압할 수 있다.' 세 명의 고수가 있기는 하지만 전력은 훨씬 앞섰다. 현경의 고수인 도혈문주를 비롯해 자신과 동창제독 임 공공, 그리고 오 첩형이라는 자가 화경의 고수였다. 더군다나 동창의 환관들만 백여 명이 넘으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이들만 죽이면 증거야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습니다!] 도곤문주의 전음에 임 공공의 두 눈이 흔들렸다. 어차피 정황은 이미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확실히 그의 제안대로 이곳에 있는 자들만 전부 제거한다면,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릴 수 있었다. '큭! 방도가 없구나.' 붉게 물들인 입술을 질끈 깨문 임 공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이들을 내보낸다면 자신이 쌓아온 그 동안의 모든 것이 무너진다. 마음에 결정을 내린 임 공공이 동창의 환관들을 향해 외쳤다. "영왕 전하께서 음모에 빠지셨다! 이 역도의 무리들을 전부 제거해서 전하를 보호하랏!" "!!!" 졸지에 역도의 무리들과 연루된 걸로 몰려서 눈치를 보고 있던 동창의 환관들은 그의 명령을 듣자마자, 그 진의를 단번에 알아들었다. "저들을 죽여라!" "네이!" -챙! 임 공공의 명령에 환관들이 일제히 혁대에 있던 연검을 빼냈다. 저들이 태세를 바꾸자 공동파의 장문인 청수 진인을 비롯한 공동파의 도인들 역시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이 자들이 살인멸구를 할 셈이로구나!' 내심 이곳이 인적이 드문 황릉 지하 공동이라 우려했던 그였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상흔에 대한 진실이 알려지자마자 태세를 전환했다. "원시천존. 원시천존. 공동의 제자들은 역도의 무리들에게서 성왕 전하를 보호하랏!" "충!" 정황상 그들은 자신들이 보호해야 할 대상을 파악했다. 여기서 성왕 주태겸이 죽게 되면 공동파도 살인멸구 당하고 역도의 무리로 내몰리게 된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도곤문주가 면사포를 한 장포인에게 전음을 보냈다. [도혈문주! 문주가 저 일 태상이라는 자를 상대해 주신다면 남진무사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일 태상이라 불린 자의 무공이 범상치 않아 보인다. 자신보다는 한 수 위의 고수인 듯 했다. 하지만 현경의 고수인 도혈문주라면 필시 그녀를 제압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런데 여기서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촥! 단번에 금의위 남진무사를 노리려고 했던 그의 오른팔 어깨에 날카로운 무언가가 스쳐지나갔다. '!?' 무슨 일인가 싶어 바닥을 쳐다보았는데, 허리춤에서 곤봉을 꺼내들던 그의 오른팔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운기하던 팔이 잘려나갔으니 그 고통은 말로 이를 수가 없었다. "끄아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던 도곤문주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의 뒤에 면사포의 장포인이 처음 보는 새하얀 도를 들고서, 싸늘한 기세로 서있었다. "끄으으윽! 도, 도혈문주! 어, 어째서 내 팔을?" 그런 도곤문주에게 면사포의 장포인이 속삭이듯이 말했다. "아직도 내가 도혈문주라고 생각하나?" 놀랍게도 도혈문주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면사포 속에서 들리는 낮게 깔린 남자의 목소리에 도곤문주의 두 눈이 터질 듯이 커졌다. < 72장 수작은 수작으로 (3) > 끝 < 72장 수작은 수작으로 (4) > 불과 한 시진 전, 묘시(卯時) 초. 아직까지 해가 뜨지 않아 하늘은 어두웠다. 영왕 주태윤의 궁전인 영장궁 내의 객당 마당 앞에서 초조한 표정으로 서있는 중년인이 있었다. 그는 극도육무문의 도곤문주 추성이었다. '.....너무 늦다.' 무림에 정식으로 극도육무문의 모습을 드러낸 이래로 세 번째로 가장 많은 고수들이 투입되는 대계였다. 이 한 번으로 가져올 득(得)은 기존의 실패를 만회하고도 남는다. 그런데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인시 중엽쯤에는 완료되어야 하는데, 어째서인지 예정된 시간보다도 늦어지고 있다. '설마 실패인가.' 준비 기간만 몇 년이 걸린 만큼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황궁 내의 요직인 동창에 사람을 심는 것부터 황제의 장자인 영왕과 교분을 쌓는 것까지 어느 하나 신중을 기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황궁 수호전의 고수가 그리 대단하단 말인가?' 이번 계획의 가장 큰 핵심은 황궁 수호전의 고수들을 제거하는 것에 있다. 이를 위해서 극도육무문의 여섯 최고 고수 중의 일인인 도혈문주마저 투입되지 않았는가. 그녀의 패배는 이 계획의 실패로 이어진다. 어두웠던 하늘이 어느새 남색 빛으로 물들며 해가 뜰 조짐이 보인다. -슉! "기다리고 있었나?" "앗!"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도곤문주 추성이 화들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고 장포를 입고 있는 자였다. "얼굴을?" "그런 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을 텐데." 특유의 오만함이 깃든 여자의 목소리. 신경질적으로 대응하는 것만으로 의심할 여지가 없는 도혈문주였다. 무사히 복귀한 도혈문주는 불꽃에 손상된 그녀의 보도 혈사의 도집을 보여주었다. '아, 황궁의 수호전의 고수와 겨루느라 부상을 입은 게로구나.' 기린의 영물이 화기를 머금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자존심이 강한 도혈문주가 상처를 입었다는 이를 보여줄 리가 만무했다. 그렇게 도곤문주 추성은 별다른 의심 없이 그녀와 동행하고서 영왕 주태윤을 배알하러 갔다. 모습을 숨길지언정 목소리만큼은 어떤 누가 속일 수 있을까? 라고 당연히 생각했다. -촤악! "끄아아아아악!" 황릉의 지하공동으로 내려와, 오른팔이 잘리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말이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갑자기 이 자가 미치기라도 했나?' -웅성웅성! 느닷없이 벌어진 일에 주변에 있던 동창 환관들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도곤문주의 동료라고 했던 면사포의 장포인이 갑자기 기습적으로 그의 팔을 벨 거라고 누가 예측이나 했겠는가. 그러나 그들의 놀라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촥! "끄악!" "이, 이놈들이!" 환관들과 같이 영왕과 성왕을 기다리고 있던 남진무사 연남군과 금의위 네 명이 병장기를 뽑고서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이 역도들을 물리치고 성왕 전하와 감식반 의원들을 보호하랏!" "충!" 살인멸구를 위한 동창제독 임 공공의 명령은 결국 혼전을 야기했다. 순식간에 지하공동이 전장터가 되었다. 덕분에 근방에 있던 환관들은 팔이 잘린 도곤문주를 신경 쓸 겨를이 없어졌다. "내가 도혈문주라고 생각하나?" "!?" 팔이 잘린 고통도 잊은 채, 도곤문주 추성이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면사포의 장포인을 바라보았다. 아까 전에 전음을 교환했을 때만 하더라도 분명 도혈문주의 목소리였다. 그런데 이게 대체 무슨 귀신이 곡할 노릇이란 말인가. '갑자기 남자의 목소리라니?' 이치에 전혀 맞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가끔 독특한 비술로 타인의 목소리를 따라하는 간자들도 있지만 그건 동성일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도곤문주 추성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네, 네놈은 대체 누구냐?"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목소리는 둘째 치고 도혈문주로 변장을 하고서 자신에게 접근했다는 것은 완벽하다고 믿었던 이 계획을 눈치 챘다는 의미였다. 그런 그의 질문에 면사포의 장포인은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몰라도 된다." 그 말과 함께 장포인의 새하얀 도가 움직였다. '헛?' 한 팔이 잘린 덕분에 계속 도에 집중하고 있었던 도곤문주 추성이 재빨리 허공섭물로 곤봉을 손으로 빨아들였다. 다행히 운기를 마치고 있던 그는 단숨에 팔 성 공력을 끌어 올렸다. -채애앵! 단숨에 목을 베려고 드는 도를 막아냈다. 그런데 도를 막아낸 곤봉에 강한 울림이 생겨나며 그의 신형이 옆으로 바닥을 질질 끌면서 옆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끼이이이이익! '무, 무슨 공력이?' 지금 이 자의 일도는 초식이 아니었다. 그저 가볍게 휘두른 것뿐이었는데, 그의 공력을 압도하고 있었다. 얼굴을 면사포로 가리고 있어서 표정을 알 수는 없었지만 전혀 힘을 들이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이놈......강하다.' 한 번 부딪친 것만으로 실력 차를 격감했다. 그의 팔을 벤 것은 단순히 기습에 의한 운이 좋은 일격이 아니었다. -쩌저저적! '이, 이럴 수가? 한철로 만든 곤봉이?' 금이 가고 있었다. 두 발을 지지대 삼아서 뭉툭한 곤봉으로 막아내고 있는데, 이 얇은 도신에 부서지려했다. 공력으로 겨루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이 자의 힘을 이용해야 해.' 지금 상황에서는 이화접목의 수법으로 상대의 공력을 이용해서 극도신무로 반전시켜야 한다. 도곤문주 추성이 공력을 줄이고서 일부러 면사포의 사내의 힘에 순응했다. -채애애애앵! 그러자 곤봉을 잡고 있던 그의 몸이 옆으로 부웅하고 떠올랐다. 도가 휘둘러지는 힘에 몸을 맡긴 그는 옆 돌기를 하며 몸을 회전시켰다. -휘이익! 덕분에 면사포 사내의 도가 빗겨나가고 말았다. -촥! '이때다.' 추성이 회전하는 도중에 곧바로 극도신무의 초식으로 이어 나가려 했다. 이화접목의 이치를 이용했기에 면사포의 사내는 자신의 힘을 이기지 못해, 변초를 사용하지 못할 것이다. 라고 여겼다. -휙! '뭣?' 몸을 회전하고 있는 추성의 두 눈이 커졌다. 면사포 사내의 새하얀 도신이 빗겨나간 방향에서 갑자기 멈추더니, 역방향으로 다시 도날이 회전하면서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마, 말도 안 돼!' 갑자기 억지로 멈추게 되면 육신에 과부하가 일어나 팔의 근육이 상한다. 이런 것이 가능한 무공은 오직 자신들의 극도신무뿐이었다. "빌어먹을!" 회전하고 있던 그가 다급히 역으로 쇄도해오는 도를 곤봉으로 막았다. -채애애애애앵! "크헉!" 몸이 거꾸로 회전하던 도곤문주 추성이 도를 막아내는 순간, 금이 가던 곤봉이 완전히 부서지면서 그의 신형이 호숫가에 날리는 물수제비처럼 바닥을 수차례 튕기며 날아가 버렸다. -쿵! 쿵! 쿵! 쿵! 쾅! 지하 공동의 벽 끝에 몸이 박혀서야 겨우 멈출 수 있었다. 발이 지면에 떨어진 순간을 노렸기 때문에 이화접목은커녕 그 위력을 고스란히 맛보고 말았다. '끄웨에에엑!" 바닥에 무릎을 꿇은 도곤문주 추성이 피를 토해냈다. 내상이 너무 심했다. 고작 일격을 막았을 뿐인데 파고드는 공력에 오장육부가 뒤틀릴 것만 같았다. '이, 이놈은 정말 괴물이다.' 화경의 고수인 자신을 마치 한참 격이 떨어지는 하수처럼 고작 일도 만에 날려버렸다. 팔이 잘려서 공력이 반감했지만 이건 너무 심했다. 도곤문주 추성은 짧은 찰나에 수많은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완성된 역혈대라신공이 정말 쓸 만할까.' 최근에 완성된 역혈대라신공의 운기법을 받기는 했지만 사용해본 적이 없다. 이것을 사용하고 나면 반 시진 동안은 내공을 운용할 수 없다는 부작용 때문에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는 쓸 일이 없다고 판단했던 그였다. 그 어지간한 일이 생겼다. '저 괴물을 죽이지 않으면 대계가 모두 수포로 돌아간다.' 어차피 내상도 심했고 팔이 잘려서 살아나갈 확률도 적었다. 그렇다면 이자와 동귀어진이라도 해야 한다. 적어도 괴물 같은 저 놈만 죽인다면 동창의 환관들이 성왕 주태겸과 남은 자들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쿠드드드득! 역혈대라신공을 운용하자 단번에 신체에 변화가 생겨났다. 얼굴에 핏줄이 징그럽게 일어났다. 상반신 근육이 크게 부풀기 시작하면서, 부상을 입은 고통이 신기하게도 사라져갔다. '내공이 늘어난다!'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었는데, 놀랍게도 단전의 내공이 거의 폭증하다시피 늘어가고 있었다. 이렇게나 폭증한 공력으로 극도신무를 펼치면 엄청난 위력이 발휘될 것이다. "크크크크큭! 이 정도 힘이라면 아무리 네놈이 괴물이라도, 동귀어.." -꽉! "엇?"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온 면사포의 사내가 그의 머리를 움켜 잡았다. 그리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통하지 않는 기술을 어지간히 남발하는군." "뭣?" 그 순간 면사포의 사내의 손에서 화려한 빛이 일어났다. 화려한 빛은 방대한 전격(電激)이었다. -파치치치치치치치치칙! "끄가가가가가가가각!" 백회혈로 파고드는 전격에 그가 강한 경련을 일으키며 비명을 질러댔다.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류의 고통이었다. 백회혈을 시작으로 전신으로 밀려들어온 전격은 놀랍게도 역류하던 기운을 강제로 해지시켜버렸다. 덕분에 급속하게 이뤄지던 신체의 변화가 다시 원상복구 되었다. -치치칙! 전신을 강타하던 전격이 사라지자, 겨우 정신을 붙들고 있던 도곤문주 추성이 어이가 없다는 눈빛으로 물었다. "무, 무슨 이 런 말도 안 되는....." -털썩! 말을 전부 마치지 못하고 바닥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쓰러진 도곤문주를 바라보면서 천여운이 담담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뭐, 네놈의 잘못은 아니다. 그저 상대가 나빴을 뿐이지." 그 말 그대로였다. 운이 없게도 세상에서 유일하게 역혈대라신공이 통하지 않는 상대를 만난 것뿐이었다. 한편 백 명이 넘는 환관들이 공격해오면서 난전이 벌어졌다. 공동파의 장문인 청수 진인을 비롯한 네 명의 공동파 제자들이 이를 막으려고 했지만, 수적으로 너무 밀렸다. -채채채챙! "큭!" 게다가 그냥 환관들도 문제였지만 당두들의 실력이 남달랐다. 이들은 절정의 무위를 지닌 고수들이어서 검초 하나하나가 예리할 정도로 요혈을 노려왔다. 덕분에 공동파의 제자들조차 쩔쩔 맬 수밖에 없었다. '허어, 영왕 전하를 미리 잡았어야 했나.' 청수 진인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성왕 주태겸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에 환관들의 공격을 막는 것을 우선시 했는데, 영왕 주태윤을 인질로 잡았으면 이들을 견제하기 수월했을 지도 모른다. '하긴 임 공공이 있으니 그것도 어려웠을 지도.' 그들을 죽이라고 명한 동창제독 임 공공은 곧바로 영왕 주태윤을 먼저 빼냈다. 규화보전이라는 희대의 무공을 익힌 그는 독특한 경공으로 단숨에 주태윤을 낚아챈 후에 성왕 주태겸의 목숨을 노렸다. 물론 그것은 실패로 돌아갔다. '보통 고수가 아니다. 이 계집은...' 주태겸에게 번개처럼 바늘 암기를 날렸는데, 그 앞에 무릎 꿇고 있던 일 태상 란영이라는 여인이 불꽃으로 방패 같은 것을 만들어서 막아버렸다. 화기를 다루는 것이 심상치가 않았다. "대, 대체 어찌 할 작정이오? 공공! 전부 죽이라니?" 임 공공 덕분에 겨우 목숨을 부지한 주태윤이 얼굴이 빨개져서 소리쳤다. 완벽할 거라던 계획이 꼬이는 것도 모자라서, 임 공공이 살인멸구까지 하려고 들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전하. 저를 믿어주십시오. 책임지고 전부 해결하겠습니다." 그 말에 영왕 주태윤이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지금 믿고 자시고의 문제가 아니지 않소! 이미 벌어진 일이 아니오. 저들을 죽이지 못한다면 본 왕과 공공은 모든 것이 끝나오!" 같은 황족의 목숨을 대놓고 노리는 것은 최악의 우책이었다. 실패하게 된다면 그 여파는 걷잡을 수가 없게 된다. "소신을 믿어주십시오. 전하. 저 임 공공이옵니다." "공공....." 임 공공이 웃어 보이며 그를 달랬다. 자신이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영왕이 더욱 불안해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것이 통했는지 영왕 주태윤이 겨우 이성을 되찾았는지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주태겸과 저들을 반드시 죽여야 하오. 누구도 살아남아선 안 되오!" "후후후,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하." 겨우 그를 안심시킨 임 공공이 속으로 안도했다. 혹여 자신의 우발적인 결정에 노발대발해서 따르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임 공공이 전황을 살폈다. -챙챙챙! 한참 격렬하게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공동파의 도인들과 일 태상 란영이라는 여인이 성왕 주태겸을 노리는 환관들을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압!" -채채채챙! 동창의 이 인자인 오 첩형은 금의위의 고수인 남진무사 연남군을 상대하고 있었다. 원래 입구 쪽에서 동창의 환관들과 대기하고 있던 연남군이었는데, 성왕 주태겸이 위기에 처하자 그를 구하기 위해 달려온 듯했다. '잘 막았구나. 오 첩형.' 오 첩형이 막지 않았다면 주태겸을 보호하는 진이 두터워졌을 것이다. 모든 호위가 그에게 집중되었다면 또 다른 눈과 귀를 가진 황궁 감식반 의원들을 먼저 처리하는 편이 나을 듯 했다. '그들을 먼저 처리하고 성왕을 노려야 겠구나.' 황궁 감식반의 의원들은 의외로 금의위 네 명이 보호하고 있었다. 금의위들은 증언을 해줄 의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환관들의 공격을 빈틈없이 차단하고 있었다. '뭐지? 금의위들이 저리 무공이 뛰어났나?' 그런데 금의위들 치고는 고작 네 명이서 너무 잘 버텼다. 워낙 환관들의 숫자가 많아서 공격이 끊임없이 들어와서 그렇지 일대일로 겨뤘다면 금방 승부가 날 만큼 무위가 뛰어났다. '저놈들을 먼저 처리해야 겠다.' -팟! 금의위들과 황궁 감식반 의원들을 먼저 처리해야겠다고 마음먹은 동창제독 임 공공이 신형을 날리기 위해 발이 바닥에서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고오오오! 쿵! "흐헛!" 잠시 떨어졌던 발바닥이 다시 땅으로 떨어졌다. 그것도 모자라 그의 전신을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진기가 강제로 억눌렀다. "뭐, 뭐얏?" 화경의 극에 올라서 누구보다 심후한 내공을 지닌 임 공공이다. 그런 그조차 이 거대한 진기의 압력에 쉽게 발걸음을 떼는 것조차 힘들었다. '이게 진기라고?' 단순한 진기라기보다는 무형의 기운이 억누르는 것과 다름 없었다. "누, 누가 이런 말도 안 되는..."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쿵! 쿵! 쿵! 쿵! 쿵! 여기저기서 둔탁한 소리들이 들려왔다. "크흐!!" "이, 이게 대체..." "모, 몸이 움직이지가!" 공동에 있던 백여 명이 넘는 환관들이 일제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하나 둘도 아니고 이 많은 인원이 진기로 인해 무릎을 꿇리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내공이 그나마 강한 당두들이 버텨보려고 했으나, "꿇어라." -쿵! 쿵! 쿵! "끄억!" 더욱 강한 진기가 압박을 가하면서 강제로 무릎이 꿇려졌다. 덕분에 내공이 약한 자들은 바닥에 엎어져서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쩌저저저적! "끄으으으윽!" "사, 살려줘." 바닥을 억누르는 진기는 거대한 중력과도 같았다. 누르는 힘이 어찌나 강했는지 그들을 지탱하는 바닥에 조금씩 패일 정도였다. '전하!' 당황한 임 공공이 고개를 돌려 영왕 주태윤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주태윤 역시 돌바닥에 코까지 박고서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끄웨에에에엑! 고오오옹.....고오오옹!!!" "저, 전하아아아아!" 내공이 없는 그가 견디기에는 너무도 고통스러운 압박이었다. 이러다간 영왕의 얼굴이 납작하게 찌그러질 판국이었다. '다, 당장 저지해야 해!' 다급해진 임 공공이 이 말도 안 되는 진기를 내뿜고 있는 존재를 찾았다. 멀리 있지도 않았다. 그 존재는 공동의 한 가운데에 서있었다. '저, 저 자는?' 진기로 인한 풍압으로 긴 머리카락을 흩날리고 있는 새하얀 얼굴의 사내. 그는 바로 천여운이었다. < 72장 수작은 수작으로 (4) > 끝 < 73장 황제의 수신호위 (1) > 동창의 환관으로 시작하여 그 정점인 동창제독에 오른 임청화. 그의 스승인 유 공공이 유일하게 당부한 것이 있다. 훌륭한 환관으로서 갖춰야 할 가장 큰 덕목은 무엇이든 세심하게 관찰하는데 있다고 누차 가르쳤었다. 실제로도 그는 그런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세심한 관찰력으로 권력의 중심부까지 올라섰다. 현 황제도 그렇고 영왕 주태윤이 그를 아끼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저 자는 대체 누구지?’ 지하 공동에 들어왔을 때,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의 얼굴은 숙지해두었다. 그런데 전혀 보지 못했던 인물이 서있었다. 고작 약관에 불과해 보였지만 긴 머리카락에 새하얀 얼굴의 저 청년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은 좌중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이게 정녕 인간의 힘이란 말인가?’ “끄으으으윽!” “모, 몸을!” 동창의 환관들이 안간 힘을 써도 진기에 억눌려서 바닥에서 무릎을 펼 수가 없었다. 얼마나 심후한 내공을 지니면 이런 일이 가능할까? 더욱 놀라운 것은 강제로 무릎이 꿇린 자들은 영왕 주태윤과 환관들뿐이었다. 다른 이들은 멀쩡히 서있었다. “허어.....어찌 이런 일이?” 환관들을 상대하고 있던 공동파의 장문인 청수 진인 역시도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자신과 더불어 공동파의 도인들은 진기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진기를 숨 쉬는 것처럼 통제할 수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장문인인 청수진인조차 놀라는데 제자들이라고 다를 것이 있겠는가. 진기에 억눌리지 않는다고 해도 이런 전율적인 기운이 느껴지지 않을 리가 없었다. ‘말도 안 돼.’ ‘괴....괴물이다.’ 공동파의 제자들은 하나 같이 식은땀을 흘렸다. 놀라하던 그들은 이내 장문인인 청수 진인에게 어찌해야 좋을지 난감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청수 진인이 아무 말이 없자, 대제자 영운이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장문인?” “......일단 가만히 지켜 보거라. 저 자는......오대고수급의 고수다.” “오, 오대고수!” 청수 진인의 입에서 나온 말에 공동파 제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전율적인 고수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장문인의 입에서 오대고수가 거론될 줄은 몰랐다. 오대고수는 중원 무림에서 가장 강하다는 다섯 절대자들이다. ‘저렇게 젊은 사내가 무림맹주님과 같은 오대고수 급의 무인이라고?’ 무림맹주 북정도 이목. 정도 무림을 상징하는 최고의 고수다. 얼핏 보아도 자신들과 동년배이거나 훨씬 어려 보였는데 믿기지가 않는 현실이었다. -웅성웅성! ‘저 괴물이 아군이길 망정이지.’ 그런 공동파 무인들의 반응에 성왕 주태겸은 내심 자신의 선택을 뿌듯하게 여겼다. 이 많은 동창의 환관들이 덤볐을 때는 큰일났구나 싶었는데, 설마 이 많은 자들을 일순간에 무릎 꿇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풋!’ 멀리서 환관들 사이에서 같이 바닥에 엎어져 있는 영왕 주태윤이 보였다. 주태윤은 황자의 위엄을 잃고서 코까지 박고서, 낑낑 거리면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끄웨에에에엑!” 속내를 숨길 수 없었는지 주태겸의 입이 헤벌쭉 벌려졌다. ‘그래! 그게 내가 겪었던 기분이다!’ 마교에 사신으로 갔다가 망신당했던 것을 함께 공유하는 느낌이었다. 속이 뻥 뚫릴 만큼 시원했다. 반면 주태윤의 이런 모습에 임 공공의 안색은 창백해졌다. ‘이런 괴물이 어떻게 황궁에 들어온 거지?’ 무형의 기운인 진기로 백 명이 넘는 환관들을 강제로 짓누를 정도로 내공의 한계를 알 수 없는 자였다. 살인멸구가 문제가 아니라 역으로 살인멸구를 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 되었다. 이런 변수가 발생하자 임 공공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큭! 어쩔 수가 없구나.’ 지금 상황에서는 영왕 주태윤의 안위가 우선이었다. 동창의 환관들을 전부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전하를 탈출시켜야 한다.’ 임 공공이 동창에서 또 다른 화경의 고수인 오 첩형을 바라보았다. 다른 환관들과 달리 내공이 깊은 오 첩형도 그럭저럭 진기의 압박을 견뎌내고 있었지만 천여운의 위압감에 두려워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오 첩형!] [고, 공공! 저, 저 자자는 완전히 괴물입니다.] [정신 차려라. 괴물이건 아니건 당장 전하를 보호해야 한다.] [그.....그렇기는 하지만....] 오 첩형이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상황에서 대체 무슨 수로 영왕 주태윤을 보호한단 말인가. 그들 중에서 움직일 수 있는 자라고 해봐야 자신과 임 공공뿐이었다. [놈을 공격해서 막아라. 오 첩형이 공격하면 놈의 진기의 압박이 풀릴 것이다.] 아무리 괴물이라 해도 적을 상대하면서 진기로 백여 명이 넘는 환관들을 계속 압박할 수 없으리라 여겼다. 그럼 제어에서 풀린 환관들로 인해 다시 난전이 벌어질 것이다. 물론 저런 괴물에게는 시간 벌기에 불과하다. [그 동안 본 제독이 전하를 모시고 탈출하겠다.] [제, 제가 말입니까?] 당혹감에 빠진 오 첩형의 두 눈이 흔들렸다. 지금 임 공공의 말은 결국 자신더러 희생을 하라는 소리와 다름없었다. [공공!] [어허! 전하를 위한 희생을 두려워하는 겐가! 전하를 탈출시키고 나서 무사히 이 위기를 넘기게 된다면 자네를 동창의 부제독으로 임명하겠다.] 평소라면 솔깃한 제안이었다. 부제독으로 임명한다는 것은 차기 제독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저 괴물을 상대로 무사히 위기를 넘긴다는 발상 자체가 어이가 없었다. ‘제, 젠장!’ 두려웠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면 언제든지 자신도 희생시킬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그것이 이렇게 빨리 다가온 것이 화가 날 뿐이었다. [.....알겠습니다.] [본 제독의 공격에 맞춰서 놈을 노려라!] -팟! 그 전음이 끝남과 동시에 임 공공이 신형이 일 장 높이로 치솟았다. 허공에 떠오른 임 공공이 소매로 손을 집어넣더니, 이내 손에 한 무더기의 바늘 암기가 드러났다. ‘이 비장의 수를 지금 쓰게 될 줄이야.’ 이것은 그가 당가의 만천화우(滿天花雨)에 영감을 받아 만든 무공이었다. 파상만침경(波狀萬針勁). 바늘 하나하나에 물결처럼 퍼져나가는 규화보전의 파상 발경(發勁)을 싣는 비기였다. 내공 소모가 큰 기술이었지만 그 위력은 한 번에 수십 명의 고수들을 몰살시킬 수 있을 만큼 전율적이다. ‘규화보전의 정수를 담은 암기술이다!’ 아무리 괴물이라도 이것을 막기는 쉽지 않으리라 여겼다. 왜냐하면 규화보전의 파상술은 기(氣)를 뒤흔들어 그것을 투과하는 고도의 수법이었다. “받아랏!” -파파파파파팟! 임 공공의 파상만침경의 바늘 암기가 천여운이 있는 곳으로 퍼져나갔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는 오른손에 쥔 것은 천여운, 그리고 왼손에 쥔 바늘 암기는 성왕 주태겸이 있는 방향으로도 날렸다. -파파파파파팟! ‘쉽게 막을 수 없을 거다.’ 백 명이 넘는 고수를 억누를 정도로 진기를 사용하고 있다. 파상만침경을 막으려면 그것을 풀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설사 그것을 풀지 않고서 무리해서 막는다고 해도 곧장 오 첩형의 살초가 그를 덮친다. ‘본 제독이 생각해도 완벽하다.’ 이 정도 공격이라면 저 괴물에게서 충분히 영왕 주태윤을 데리고 도망칠 시간은 확보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었다. 비기를 펼치자마자 영왕에게로 신형을 날리려던 그의 발걸음이 두 보도 나아가지 못했다. -파파파파파파팍! “!?” 임 공공의 두 눈이 커졌다. 그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백 개가 넘는 파상발경이 실린 바늘암기가 허공에서 쏟아지는데, 천여운이 그것들을 향해 가볍게 손을 뻗었다. “이런 미친!” 어찌나 놀랐는지 순간 욕이 나올 뻔했다. 바늘이 허공에 보이지 않는 벽에 막히기라도 한 듯이 도중에 멈춰선 것이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환관들에 대한 진기의 압박을 풀지도 않고서, 그의 비기를 너무도 쉽게 막아냈다. 내공은 둘째 치고 정신이 몇 개라도 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나노가 있는 천여운은 가능하다. [바늘들에 사용자의 에너지를 침투시켜 판넬 침식에 성공했습니다.] 머릿속을 울리는 나노의 목소리에 천여운이 피식 웃었다. “웃기지도 않는 공격이군.” “이, 이놈이!” 당황한 임 공공이 남은 바늘들을 모조리 꺼내서 다시 한번 날리려고 하는데, 천여운이 그에 손을 뻗으며 속으로 나노에게 명했다. ‘나노, 놈에게 도로 돌려줘라.’ [사용자의 명령에 의거하여 바늘들에 판넬 원격 시스템을 가동합니다. 타겟(Target) 락 온(lock on)] -삐삐삐삐삐삐삐삐! 천여운의 동공이 빠르게 흔들리며 붉은 십자 모양의 입자가 생성되며 임 공공에게로 조준되었다. -휘리리릭! 허공에 멈춰 있던 바늘들이 일제히 역으로 회전했다. “이, 이게 대체?” “네놈의 것이다. 가져가라.” -파파파파파파팟! 천여운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역으로 그를 겨냥한 바늘들이 일제히 임 공공에게 쇄도해갔다. “이, 이런!” 비기를 누군가에게 써본 적은 있지만 당한 적은 없는 그였다. 백 개가 넘는 바늘들이 그가 날렸을 때보다도 훨씬 쾌속한 속도로 날아오자. 천여운이 했던 것처럼 허공을 향해 파상발경을 일으켜 파동을 만들어냈다. -팡! 그의 양장을 뻗자 허공에 물결처럼 강기의 파동이 원을 그렸다. ‘노, 놈도 했는데 본 제독이라고 못할....’ -푸푸푸푸푸푸푹! “끄아아아아아악!” 안타깝게도 천여운이 했던 방법은 따라하는 것은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사방으로 넓게 펼쳐진 그의 파상만경침과 달리 천여운이 도로 날려버린 바늘들은 한 지점으로 모여서 파동의 중심부를 강타했다. 덕분에 짧은 시간도 버텨내지 못하고 단숨에 중심부를 바늘들이 관통해버렸다. -털썩! “끄으으으윽, 이....이런 괴물 같은 놈.” 바닥에 무릎을 꿇은 임 공공의 상반신은 선인장처럼 바늘들로 수를 놓았다. 그래도 발경에 의해 힘은 줄어들었는지, 바늘이 몸을 완전히 관통하지 않고서 반쯤 박히기만 했다. 고통스러워하는 임 공공이 노기가 서린 눈으로 오 첩형을 찾았다. ‘오, 오 첩형 이놈은 대체 뭘 하는...응?’ 계획대로라면 오 첩형도 놈의 뒤를 쳤어야 했다. 그런데 그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는데, 오 첩형이 왠 금의위에게 막혀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쩔쩔 매고 있었다. ‘비, 빌어먹을 이놈은 대체 뭐지?’ 임 공공의 당부대로 절초를 펼쳐서 남진무사를 뿌리친 그였다. 그는 재빨리 경공을 펼쳐서 천여운의 뒤를 치려했는데, 금의위 중의 한 사람이 갑자기 그를 막아섰다. 고작 금의위에 불과하다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화르르르륵! 금의위는 일 태상 란영이라는 여인처럼 불꽃을 다뤘다. 검에 불꽃을 실어서 검초를 펼쳤는데, 방심했다가 어깨를 관통 당했다. -치이이익! “크윽....” 불꽃으로 인해 상처가 지져져서 출혈은 없었지만 화기가 체내로 침투했다. 내공을 운기해서 이것을 몰아내고 싶은데 이놈이 미친 듯이 공격해 와서 틈이 없었다. “감히 주군의 뒤통수를 치려고! 흥! 불꽃의 검을 다루는 금의위는 바로 허봉이었다. 새로운 변수에 막혀버린 오 첩형은 발이 묶여서 임 공공의 계획을 도울 수가 없었다. ‘저놈은 또 뭐란 말인가?’ 임 공공은 이제는 황당하기마저 했다. 별다른 힘을 들이지 않고 해결할 거라 여겼던 성왕 주태겸 측에서 계속 정체불명의 고수들이 하나 둘씩 등장하니 미칠 지경이었다. ‘그럼 다른 파상만침경도?’ 당연히 그것은 애초에 일 태상 란영에 의해 막혔다. 수많은 바늘들이 허공에서 주태겸을 덮쳐오자, 곁에 있던 그녀가 불꽃의 기둥을 만들어내서 바늘들을 전부 재로 만들어버렸다. ‘어, 어째서 이런 놈들이 나타났단 말인가....’ “크아아악!” -쾅!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자 임 공공이 괴성을 지르며 바닥을 내리쳤다. 뭘 어떻게 해보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다. 새로운 태자를 옹립하고 계속해서 권력을 이어나가려 했던 그의 야망이 한순간에 무너져내렸다. '이럴 수가.....임 공공이 저렇게 쉽게 지다니?' '황궁 삼대 고수 중 일인이 이렇게 무력하게....' 무릎을 꿇고서 지켜보고 있던 동창의 환관들도 결과에 망연자실해했다. 황궁 삼대 고수이자 동창의 일인자로 군림해온 동창제독 임청화가 이렇게 무력하게 패배할 거라고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저벅저벅! 허탈해하는 그의 앞으로 어느새 천여운이 다가왔다. 그런 그를 핏대까지 선 눈으로 올려다보며 임 공공이 악에 바친 목소리로 말했다. “네놈....네놈 대체 정체가 무엇이냐! 무엇기에 본 제독의 앞을 가로막느냔 말이닷!” 절대로 황궁 수호전의 고수일 리가 없었다. 그만 없었어도 오늘 성왕을 실각시킬 수 있었는데 너무 억울했다. 그런 그를 천여운이 싸늘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네놈이 되도 안 되는 누명을 씌우려 했던 곳의 주인이다.” “뭐? 누명을 씌워?” 순간 무슨 말인가 싶어서 어안이 벙벙해 하던 임 공공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방금 전까지는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말도 안 되는 무위로 인해서 번개처럼 머릿속을 스쳐지나간 단어. “서, 설마 마.....교주?” 눈앞에 있는 괴물 같은 사내. 그는 십만대산의 주인이자 천마신교의 교주인 천여운이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잘 알고 있군. 그럼 네놈의 운명도 잘 알겠지?" 살기 어린 천여운의 의미심장한 말에 그가 화들짝 놀라서 소리쳤다. "자, 잠깐! 본 제독은 대....대명제국의 관료다. 아, 아무리 그대가 마교의.." -?!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차가운 도날이 번개처럼 목을 스쳐지나갔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막을 틈도 없었다. "관료인데, 뭐 어쩌라고." "!?" -툭! 데굴데굴! 뭐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의 머리는 이미 자신의 몸뚱이와 작별을 고했다. < 73장 황제의 수신호위 (1) > 끝 < 73장 황제의 수신호위 (2) > “임 공공!!!” “헉! 제, 제독의 목을 베다니?” 공동의 여기저기서 동창 환관들의 탄식과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그래도 황궁에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고 할 만큼 권력의 정점에 서있는 동창제독의 목을 아무 망설임도 없이 벨 거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크윽!” 그러나 누구 하나 쉽게 분함을 드러내진 못했다. 분함을 표현하기에는 무력하게 무릎을 꿇고 있는 현실이 그들을 비참하게 만들 뿐이었다. ‘저, 정말로 목을 베었어!’ 성왕 주태겸조차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교에서 직접 그를 겪었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응징을 하리라고는 여겼지만, 설마 단호하게 목을 벨 줄은 몰랐다. ‘관과 무림의 불가침 조약을 의식할 줄 알았는데.’ 그래도 이곳은 대명제국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황궁이었다. 아무리 거침없는 천여운이라고 해도 이 많은 관료들 앞에서 쉽게 목숨을 빼앗지는 않을 거라 여겼는데, 아직까지 그를 전부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다. ‘확실히 정파 무림맹과는 다르구나.’ 주태겸이 자신의 가까이에 있는 공동파의 도사들을 힐끔 쳐다보았다. 도사들은 죽일 각오로 덤벼드는 환관들을 상대하면서도 목숨을 빼앗지 않기 위해 대부분의 적들의 혈도를 제압하는 선에서 끝냈다. “허어.....원시천존. 원시천존. 어찌 이런 일이.....” 공동파의 장문인 청수 진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동창제독인 임청화가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 아니라 죽기 전에 그가 했던 말 때문이었다. ‘노도가 대체 무슨 말을 들은 건가.’ 화경의 고수인 그의 청력은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면 공동 내에서 들려오는 어지간한 목소리는 전부 들을 수 있다. 임 공공은 목이 베이기 전에 저 괴물 같은 청년을 마교주라고 불렀다. ‘마교의 교주라고?’ 처음에는 그저 황궁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자로 추측했다. 그런데 정파의 영역이면서 황궁의 한복판에 뜬금없이 마교 교주가 왕림했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 자가 천여운 교주.’ 마교로 사신을 갔던 제 이 군사인 제갈소희를 통해 처음 알려졌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소교주에 불과했던 자가 얼마 지나지 않아 마교주로 등극했다고 무림맹에 정식으로 사자를 보내왔다. 이때 무림맹에서는 오대고수의 일인인 천유종이 물러나고, 고작 약관에 불과한 소교주가 취임한 것을 달갑게 여겼었다. ‘애송이라고? 허허허.’ 회의에서 나왔던 말들은 전부 기억 속에서 지워야 할 듯 했다. 직접 보고 나니 이건 괴물이었다. 자라나는 이무기가 아니라 이미 대성한 용이나 다름없었다. [영운아.] 갑자기 대제자 영운의 귓가로 전음이 들려왔다. [장문인?] [저 자의 인상착의를 유심히 살펴두었다가, 본 파로 돌아가거든 초상화를 그리도록 해라.] [네?] 알 수 없는 청수 진인의 말에 대제자 영운이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이에 청수 진인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말했다. [저 자는 마교주 천여운이다.] [마교주라고....네엡? 마, 마교주란 말입니까?] 마교주라는 말에 영운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젊어 보이는 모습에 이런 무위를 지녔기에 환골탈태를 한 고인이라 여겼는데, 정말로 약관의 나이였던 것이다. 물론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마, 마교주가 이런 곳에 있어도 되는 겁니까?] 비록 공동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 동맹을 맺었다고는 하나, 수백 년간 대립해왔던 적대세력인 마교의 수장이다. 그런 자가 무림맹에 일언반구의 언질도 없이 정파의 영역을 침범한 셈이었다. [무림맹에서 난리가 날 겁니다.] 동맹이 아니었다면 큰 파장을 일으킬 사건이었다. 전음으로 말을 하면서도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그에게 청수 진인이 경고했다. [일단은 내색하지 말 거라. 지금 당장에 마교주의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건 없어 보이는 구나. 원시천존. 원시천존.] [알겠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하면서도 대제자 영운은 내심 실망을 금치 못했다. 정파를 움직이는 열일곱 웅주들 중의 한 사람이자 공동영검 청수 진인이 마교주의 무위에 억눌려서 눈치를 보는 느낌이었다. 이곳 개봉 역시도 정파의 영역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저벅저벅! 그들이 그러는 사이에 천여운이 어느새 영왕 주태윤이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동창의 환관들 중에 누구도 그것을 저지하지 못했다. ‘저, 전하의 곁으로 보내선 안 되는데...’ ‘으으으, 몸이 움직이지가 않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그들의 다리가 쉽사리 펴지지가 않았다. 사실 동창제독 임청화가 목을 자르고 나서, 천여운은 환관들을 억압하던 무형의 기운을 풀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것이 풀렸는데도 불구하고 누구도 일어서질 못한다는 것이다. -뚝! 뚝! 뚝! 천여운이 걸어오는 방향에 핏방울들이 떨어져 있었다. 그의 오른손에 들려있는 동창제독 임청하의 잘린 목에서 떨어진 핏방울이었다. 이미 그 모습만으로 강한 위압감과 공포심에 사로잡힌 환관들은 더 이상 반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헉....헉....헉....” 코뼈가 부러지면서 코피를 줄줄 흘리고 있는 영왕 주태윤. 황자이자 왕으로서의 위엄이 손상이 간 그는 분노보다도 부끄러움에 젖어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툭! 데굴데굴! 그런 그의 앞으로 무언가 굴러왔다. ‘이건?’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을 바라본 주태윤이 화들짝 놀라서 뒤로 엉덩방아를 찍었다. “히익! 이, 임 공공!” 그의 앞으로 굴러온 것은 다름 아닌 임 공공의 수급이었다. 전장을 가본 적이 없는 그였기에 사람의 잘려진 머리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이 익히 잘 알고 있는 이의 머리였기에 그 충격은 훨씬 컸다. “우웨에에에엑!” 속에서 올라오는 것을 참지 못하고 게워내 버렸다. 한참을 토하던 주태윤이 어이가 없다는 눈빛으로 천여운을 올려다보았다. 평탄대로만을 걸어왔던 그의 생에 있어서 처음 겪는 장벽이었다. ‘으으으....이 괴물 놈은 대체 무엇이기에 본 왕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냐. 계획대로만 되었어도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는데.’ 태자의 자리도, 꼴도 보기 싫은 성왕도 실각시킬 수 있었다. 가끔 분노라는 것은 두려움을 잃게 만드는데 효과적이기도 했다. “전부....전부 네놈 때문이로다. 무뢰배에 불과한 무림인 주제에 감히 본 왕의 앞길을....” -부웅! “허억! 모, 몸이!” 분노를 내뱉기도 전에 그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런 주태윤의 두 보 앞까지 다가온 천여운이 냉정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입이 참으로 가볍군요.” “뭐라! 가, 감히!” “극도육무문과 손을 잡고서 본교에 수작을 부리려고 해놓고 잘도 그런 소리가 나오는 군요. 영왕 전하.” “본교?” 천여운의 입에서 나온 본교라는 말에 영문을 몰라 하던 주태윤의 두 눈이 커졌다. 처음에는 그저 성왕 주태겸에게 의뢰를 받은 무림인 정도로 생각했던 그였다. 그런데 무림에서 스스로의 문파를 교(敎)라 칭하는 자는 오직 한군데뿐이었다. “마.....교?” “잘도 아는군.” “어, 어떻게 마교인이 화....황궁에?” 천여운이 마교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주태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사전에 극도육무문의 도곤문주라는 자와 동창제독 임청화와 계획을 상의할 때, 마교는 황하 이남 지역에 있기에 죄를 뒤집어 씌운다고 해도 큰 문제가 없을 거라 장담했다. ‘뭐가 문제가 없다는 건가?’ 계획을 성사시키기도 전에 마교인이 나타났다. 주태윤이 몸을 아등바등 움직이며 풀려나려고 했지만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런 그에게 천여운이 담담하게 말했다. “잘 아시니 다행이군요. 이제 그 대가를 치러야 할 시간입니다.” 그 말과 함께 천여운이 오른손을 들어 올리자, 불길함에 사로잡힌 주태윤이 순식간에 창백해진 얼굴로 소리쳤다. “지,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냐? 본 왕은 대명제국의 황자이다. 어찌 신민 따위가 감히 황족에게...” -우드득! 주태윤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천여운이 오른손을 살짝 움직이자, 그의 손목이 반대 방향으로 꺾여버리고 말았다. “끄아아아아아악!” 팔꿈치의 뼈가 살가죽을 뚫고 튀어나왔다. 무인도 버티기 힘든 고통을 황자인 주태윤이 버틸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천여운이 혀를 차면서 말했다. “황족인데 뭘 어쩌라는 건지. 후우.” 황족이 두려웠다면 애초에 이런 짓도 벌이지 않았다. 비명을 지르는 그 모습에 근처에 있던 동창 환관들의 눈이 돌아갔다. “가, 감히! 무림인 따위가 전하의 옥체를 상하게 하다니!” “당장 전하를 내려놓아랏!” 아무리 겁을 먹었다고 하나 자신들이 모시는 황족이었다. 분노한 환관 세 명이 동시에 연검을 휘두르며 천여운에게 파상검술의 검초를 펼쳤다. -촤촤촤촤?! 채찍처럼 휘어감는 검초들이 세 방향에서 천여운을 노렸으나, “헉!” “이, 이게 대체 무슨?” 검초를 펼치던 그들의 몸이 그대로 도중에 멈춰지고 말았다. 인형이라도 된 것처럼 몸이 굳어진 그들은 당혹감에 젖어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천여운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목숨을 헛되이 여기는군.” “뭣?” -휙! 천여운이 뒤쪽으로 왼손을 들어 가볍게 돌리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몸이 굳어져 있던 세 명의 환관들의 목이 그대로 옆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우드드득! “컥!” 목뼈가 꺾인 그들은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숨을 거뒀다. 일말의 자비심도 없는 천여운의 손속에 근방에 있던 환관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주....죽였어!’ 저 압도적인 절대자는 황실의 관료이든 황자이든 전혀 개의치 않았다. 말 그대로 폭군이나 다름없었다. 팔이 꺾인 고통에 어느 정도 가셨는지 비명을 질러대던 주태윤이 핏대가 선 눈으로 악을 질렀다. “끄으으으윽! 이 하찮은 것이 감히 황족의 팔을 꺾다니! 헉....헉! 네놈으로 인해 마교인들이 중원에서 사라지더라도 후회...” -우드드득! “끄아아아아아악!” 분노를 토해내던 주태윤의 왼팔이 꺾여버리고 말았다. 오른팔과 마찬가지로 팔꿈치를 뚫고 튀어나온 뼈로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주태윤은 황족의 위엄도 버리고 닭똥 같은 눈물마저 흘렸다. ‘이, 이놈은 진짜다.’ 그제야 주태윤은 목숨의 위기를 직감할 수 있었다. 이 자는 기분이 틀어지면 얼마든지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파 무림맹의 맹주를 비롯한 정파 무림인들은 황궁의 관료들이나 백성들처럼 그에게 바짝 머리를 조아렸는데, 이 자는 절대 아니었다. ‘이, 이게 마교인!’ 완전히 정파인들과는 성향이 달랐다.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팔을 꺾어버리니 무서웠다. 그런 주태윤을 향해 천여운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이 다시 한 번 손을 들어올렸다. “히익!” 두 팔을 꺾어버린 것도 모자라서 다른 부위마저 꺾는다는 공포감에 사로잡힌 주태윤이 사색이 되어서 소리쳤다. “안 돼에에에! 보, 본 왕이 실언을 했소! 어찌 일개 황자가 태조 폐하의 맹약을 깰 수 있겠소. 부...부디 용서해주시오!” 오만한 그의 입에서 용서해달라는 말이 나왔다. 비굴하고 자시고를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눈물을 흘리면서 용서해달라는 말을 반복해서 소리치는 그에게 천여운이 아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계속 헛소리를 지껄였다면 팔 한 짝 정도는 잘라버리고 싶었는데, 참 아쉽군요.” “파, 팔을?” -오싹! 팔을 잘라버리려 했다는 말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흠.’ 놀라하는 그를 뒤로 한 채, 천여운이 어딘가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뭐, 분풀이는 어느 정도 끝났으니, 약조대로 전하의 처분은 성왕 전하께 넘겨야 겠군요.” “약조? 어어엇!” 허공에 떠있던 그의 몸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천여운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주태윤의 몸을 허공에 떠서는 따라서 이동했다. 몸이 고정된 상태로 주태윤은 그대로 성왕 주태겸의 앞으로 옮겨졌다. -털썩! “크윽!” 강제로 몸을 고정하던 힘이 사라지면서 바닥에 떨어졌다. "원하는 대로 하시지요." 천여운의 그 말에 성왕 주태겸의 입 꼬리가 귀에 걸렸다. “팔은 괜찮으십니까? 형님 전하.” 들려오는 목소리는 전혀 걱정하는 말투가 아니다. 오히려 이죽거림에 가까웠다. ‘주태겸! 이노오오옴!’ 바닥에 주저앉은 영왕 주태윤은 자신의 앞에서 득의양양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는 성왕 주태겸의 모습에 강한 치욕을 느꼈다. ‘어쩌다가 본 왕이 이런 처지가 되었단 말인가.’ 상황이 이렇게 되고 나니, 자신의 선택이 후회가 되었다. 주태겸을 실각시키고 금의위마저 없앨 수 있다는 생각에 욕심을 부린 것이 결과적으로 이런 패착을 가져왔다. 주태겸이 분해하는 그를 향해 말했다. “형님 전하의 패배를 인정하시겠습니까? 공들여 세우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서 참으로 안타깝겠군요.” -으득! 그의 말에 이빨까지 갈던 영왕 주태윤이 겨우 입을 열었다. “......동창제독인 임 공공이 죽고 본 왕도 이 꼴이 되었다. 아무리 증인이 있다고 해도 황제 폐하께서 후궁의 소생인 네놈을 단번에 신뢰할 것 같으냐?” 비록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가 실패했다고 해도 성왕 주태겸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정처가 아닌 궁녀 즉, 후궁의 소생이었다. 설사 자신이 실각한다고 해도 삼황자인 주태성에게 더욱 힘이 쏠릴 것이다. “청수 진인!” “.....예. 전하.” 갑작스러운 주태윤의 부름에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청수 진인이 찝찝한 목소리로 답했다. 주태윤이 그런 애원하는 어조로 말했다. “본 왕이 귀 맹의 맹주와 돈독한 사이임을 그대도 알지 않소. 이번 일에 부디 관여하지 않기를 바라오.” “.......허어.” 상황이 이렇게 되었음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주태윤이었다. 이에 청수 진인조차 순간 할 말을 잃을 정도였다. 무림맹에 사신으로 왔을 때도 영왕 주태윤에게서 야망을 느끼기는 했지만, 권력욕이 예상보다 훨씬 강한 인물이었다. “감식반의 의원들도 이 일을 눈 감아 준다면....” “네가 태자가 될 일은 없을 것이다.” “뭣? 누가 감히 본 왕.....엇?” 갑자기 끼어든 누군가의 목소리에 화를 내려하던 주태윤의 두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심하게 흔들렸다. 천여운에게 공포심을 느꼈을 때보다도 더욱 질려버린 그였다. -팍! “이 황자 주태겸이 대명제국의 위대하신 황제 폐하를 배알하옵니다!” “황제 폐하를 배알하옵니다!!!” 성왕 주태겸의 외침을 시작으로 지하 공동에 있는 모든 관료들이 입구 쪽에 서있는 황금빛 곤룡포를 입은 위엄 넘치는 중년인을 향해 무릎을 꿇으며 인사를 올렸다. 충격에 빠진 주태윤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 어찌 폐하께서 황릉에.....” 지하 공동에 나타난 자는 바로 대명제국의 당금 황제인 주태원이었다. < 73장 황제의 수신호위 (2) > 끝 < 73장 황제의 수신호위 (3) > 기우가 헌앙하고 용의 기품과 위엄이 서린 얼굴. 천하를 포용하는 권위란 이런 것이라고 알려주는 듯한 중년인은 당금 황제인 주태원이었다. ‘어, 어째서 폐하가 이곳에? 아! 저들도 오다니?’ 영왕 주태윤이 황제의 뒤에 서있는 자들에 인상이 더욱 일그러졌다. 백미의 붉은 관복에 화려한 장신구를 하고 있는 노환관은 동창과 더불어 황궁 관료들의 감사를 맡고 있는 서창의 제독인 육청은과 두 첩형이었다. 그리고 서창 제독의 우측 편에 서있는 남색 관복을 입은 환관들은 대내행창의 제독인 서태식과 그를 보좌하는 두 첩형이었다. 황궁에서 동창과 더불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두 환관 조직들의 수장이 전부 나타났다. 더군다나, ‘도지휘사!’ 황제의 우측 편에 서있는 정2품 관복을 입은 풍채가 좋은 중년인은 금의위의 일인자인 도지 휘사 백자기였다. 백자기의 옆에서 무자 특유의 패기를 발산하는 자는 금의위 최강의 무인이라 불리는 북진무사 영조다. 황궁 내에서 무공을 익힌 모든 집단의 수장들이 전부 모인 셈이었다. ‘황제도 껴있었군. 귀찮게 되었어.’ 황제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천여운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다. 애초에 기감을 통해서 황릉으로 진입하는 자들의 기운을 감지했기에 특별히 놀랄만한 일은 아니었다. 단지 신경 쓰이는 것은 두 가지 뿐이었다. “폐, 폐하!” -타타타타탁! 털썩! 한참을 놀라하던 영왕 주태윤이 다급히 황제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무릎을 꿇었다. 두 팔의 부러져서 팔꿈치가 튀어나오고, 코피를 흘리고 있는 주태윤의 몰골만 본다면 온갖 수 난을 겪은 행색이었다. “폐하, 살려주시옵소서. 성왕의 음모로 동창 제독인 임청화가 목숨을 잃고, 소자 역시도 이리 되었습니다.” “하!” 태도 일변하는 그의 말에 성왕 주태겸이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황제의 앞에서 저런 태도를 보일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역시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평소라면 일황자인 그의 말을 경청했을 황제의 눈빛이 싸늘하기만 했다. “폐, 폐하!” 그런 차가움이 주태윤을 당혹스럽게 했다. 죽은 아선 황후의 유일한 소생이자 장자인 만큼 한 번도 그를 대함에 있어서 따뜻함을 잃지 않았던 황제였다. 그랬던 황제의 눈빛에는 실망감과 불신이 가득했다. “아닙니다. 그, 그게 아닙니다! 폐하! 아니. 아바마마! 이 모든 것이 성왕 저 후궁..” “그 입 다물지 못할까!” 황제의 분노가 섞인 일갈에 주태윤의 떼를 쓰는 아이 같던 주태윤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영왕 주태윤에게 황제가 입술을 뗐다. “짐에게 눈과 귀가 없는 줄 아는 구나. 네가 어찌하는지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었건만 끝내 선을 지나치는 구나.” “그, 그게 무슨...” “허어! 동창제독과 네가 뭔가 일을 꾸미고 있음을 짐이 모를 줄 알았더냐.” ‘!!!’ 비수처럼 다가오는 황제의 일침에 주태윤은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동창 제독을 비롯한 많은 관료들의 지지를 얻었지만 여전히 황궁의 모든 권력은 황제에게 집중되어 있다. 그만큼 이 황궁에서 황제의 눈과 귀가 닿지 않는 곳은 없다는 의미였다. “오, 오해이십니다. 저와 임 공공은 성왕이 마교인들과 손을 잡고서 태조 폐하의 보물을 훔치려는 음모를 발견한 겁니다.” 필사적으로 자신의 무고를 주장하는 주태윤의 말에 황제의 실망은 깊어져갔다. 황제가 뒤에 서있던 대내행창의 제독인 서태식을 불렀다. “서 제독.” “예. 폐하.” “그들을 불러라.” 황제의 명령에 대내행창의 제독 서태식이 공동에 있는 관료들을 바라보며 외쳤다. “폐하의 명으로 감찰 임무를 종료한다.” “감찰 업무?” 뜬금없는 감찰 임무라는 말에 주태윤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동창의 환관들 중에 두 명의 당두와 세 명의 환관들이 벌떡 일어나서는 황제가 있는 입구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뭐야? 이놈들이 어째서?’ 황제의 열다섯 보 앞까지 다가온 환관들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선두에 서있는 당두 중 한 사람이 외쳤다. “대내행창의 당두 심형이 감찰 임무를 종료하고 폐하의 용안을 뵈옵니다.” “용안을 뵈옵니다.” 주태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놀랍게도 이 다섯 명의 환관들의 진정한 정체는 대내행창의 환관들이었던 것이다. ‘어째서 이들이 동창에 있단 말인가?’ 어찌나 놀랐던지 주태윤은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감사와 첩보 업무를 주로 하는 동창이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허봉과 겨루고 있다가 엎드려 있는 동창의 오 첩형 역시 당혹스럽긴 매한가지였다. ‘빌어먹을! 그렇게 솎아낸다고 솎아냈는데 아직도 간자 놈들이 있었다니.’ 무소불위의 환관 조직이 동창뿐만이 아니라 굳이 서창이나 대내행창까지 존재하는 이유. 그것은 수많은 관료들을 감찰하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세 환관 조직이 서로의 독주를 견제하면서, 권력이라는 술독에 중독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로 인해 이 세 조직은 틈만 나면 서로에게 간자를 심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솎아내는데 아직도 다섯 명이나 되는 대내행창의 간자들이 내부로 파고들어 있었던 것이다. 사실 철저하게 외부와 단절된 곳이 아니고는 대규모의 인원 내의 간자를 파악한다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보고하라.” “명을 받듭니다.” 대내행창 제독 서태식의 명령에 감찰 임무를 마친 대내행창의 당두가 영왕 주태윤과 동창 제독이 하달했던 내용들을 상세히 아뢰었다. “소신이 동창에서 감찰 임무를 한 것은 반 년 전부터입니다. 그렇게 살펴보던 석달 전부터 성왕 전하가 동창의 본부인 동당으로 자주 출입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뇌부로 있던 것이 아니라 완전히 자세한 사항을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황릉의 시신을 조작하려한 것부터 극도육무문과 손을 잡았다는 내용만으로도 주태윤을 궁지로 몰기에는 충분했다. 대내행창의 간자들의 입이 열릴수록 영왕 주태윤은 사색이 되어갔다. 모든 보고가 끝났을 때 황제는 매몰차게 말했다. “고작 태자의 자리에 오르려고 황릉을 습격해서 수호전의 전사들을 몰살시키고 이런 짓을 벌인 것이더냐.” “폐, 폐하....” “실망스럽도다. 모든 것이 짐의 부덕함에 일어난 잘못이다. 다른 황자들과 마찬가지로 엄하게 키웠어야 했건만.” 그를 탓하기 보다는 스스로의 훈육을 탓하는 황제였다. 이미 절망의 나락에 빠진 주태윤은 눈이 반쯤 돌아가서 그의 말도 들리지 않았다. 황제의 완고한 성품을 알기에 정황이 드러난 이상 더 변명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도지휘사. 저들을 당장 체포해서 구금하도록 하라.” 황제의 명령에 도지휘사의 얼굴에 흡족함이 묻어났다. 금의위가 동창의 산하로 편입되었을 때 치욕을 느꼈었는데, 모든 상황이 반전되어 그들을 체포하게 되었다. 세상일은 참으로 모를 일이었다. “지엄하신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북진무사.” “충!” “폐하의 명을 이행하라.” 금의위의 수장인 도지휘사가 북진무사 영조를 부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입술을 오므려서 피리 소리 같은 것을 냈다. -삐이이이익! 그 소리가 끝남과 동시에 공동을 나가는 통로 쪽에서 갑주를 입은 금의위들이 줄을 지어 몰려들어왔다. 계속해서 밀려들어오는데 그 숫자를 짐작하기도 힘들었다. ‘아! 이렇게 많은 자들이?’ 성왕 주태겸의 두 눈에 이채가 띠었다. 병에서 쏟아지는 물처럼 밀려들어오던 금의위들의 줄이 끝나며, 군관들답게 공동 안에서 오열을 맞춰 섰다. 그 숫자가 자그마치 이백 명에 이르렀다. 대기하고 있는 금의위들에게 북진무사가 외쳤다. “역도의 무리들인 동창의 환관들을 전부 체포하라!” “충!!!” 이 날만을 기다려왔던 금의위들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무관이면서도 환관들에게 무시를 당했던 것을 되갚아줄 기회였으니 말이다. “꼼짝 마라!” “.....” 수장인 임 공공도 죽고 황제가 나타난 마당에 이미 모든 것이 끝났음을 인지한 동창의 환관들은 무력하게 포승줄에 묶여서 끌려 나가야만 했다. 황제는 그것에서 그치지 않고 노기가 서린 목소리로 영왕 주태윤을 가리키며 명했다. “녀석도 끌고 가서 영장궁에 가둬두어라.” “헉!” 황제의 명령에 금의위들이 주저앉아 있는 영왕 주태윤에게 냉큼 다가갔다. “무례를 용서하소서. 전하.” “이놈들!” 그래도 황족이라 포승줄로 묶을 수는 없었기에 금의위 두 사람이 팔을 붙들고서 일으켜 세웠다. 끌려 나가는 주태윤이 마지막 발악을 하듯이 외쳐댔다. “아바마마! 이러실 수 없습니다! 주태겸 저놈도 무림인들을 끌어들여 동창제독도 죽이고 소자를 이 꼴로 만들었는데, 어째서 소자에게만 이렇게 이러신단 말입니까!” 서럽다는 듯이 울면서 말했지만 황제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실망이 극에 이르렀는데 무슨 말이 들리겠는가. “아바마마! 아바마마!” 동녘이 환해지는 아침에만 하더라도 원하는 모든 것을 얻게 될 거라 기뻐했던 영왕 주태윤의 야망은 일장춘몽(一場春夢)이 되어 거품처럼 사라졌다. 황제를 부르짖으며 끌려 나가는 모습은 처절하기마저 했다. ‘폐하께서 직접 나서시니, 영왕의 음모도 일사천리로 정리가 되었구나.’ 아끼던 장자의 잘못에도 냉혹한 황제였다. 영왕의 목소리가 더 이상 지하공동에서 들리지 않게 되자, 황제는 자연스럽게 입구 쪽에서 공동 한가운데로 걸음을 옮겼다. “아들 녀석의 일은 해결하였으니, 남은 일을 처리해야 겠군.” “아!” 황제의 뒤를 따라서 두 제독과 첩형들, 그리고 지휘사, 북진무사가 따라왔는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뒤로 서창, 대내행창의 환관들이 두 줄로 밀려들어오면서 지하공동의 외곽을 둥글게 에워쌌다. ‘이들을 전부 데려오셨단 말인가?’ 주태겸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일이 마무리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도합 삼백여 명이나 되는 금의위, 서창, 대내행창의 관료들이 들어서자, 공동의 절반이 가득 차버렸다. 여전히 위엄이 가득한 황제와 달리 도지휘사를 비롯한 두 제독들의 표정은 나찰처럼 무섭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무엄하다! 감히 대명제국의 황제 폐하께서 납시었는데, 어찌 무릎을 펴고서 서있는 것이더냐!” 도지휘사가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황제가 황릉의 지하 공동에 왕림하면서 성왕 주태겸을 비롯한 모든 관료들이 무릎을 꿇었다. 그런데 무엄하게도 무릎을 꿇지 않은 자들이 있었다. 네 명의 금의위와 흑색 장포를 걸치고 있는 긴 머리카락의 사내, 천여운이었다. 아까 전까지는 황제가 영왕과 동창의 환관들의 처분을 내리는 일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군율이 엉망이구나. 남진무사의 소속인 듯 한데, 폐하를 앞에 두고서 어찌 저런 불경을 저지 른단 말인가!’ 도지휘사 백자기의 눈에는 천여운을 제외한 네 명이 금의위의 갑주를 입고 있어서 산하의 수 하들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금의위이든 아니든, 누구라도 황제 폐하의 앞에선 무릎을 꿇어야 한다. “당장 무릎을 꿇지 못할...” -척! “폐, 폐하!” 그런 백자기을 제지한 것은 황제였다. 황제가 손을 들어 올려서 그만 하라는 신호를 보내자, 도지휘사가 뭔가를 말하고 싶어하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황제의 명에 불복하는 것은 그 권위를 배반하는 일이었다. “겸아. 이들이 네가 끌어들인 무림인들이더냐?” 아직 무릎을 꿇고 있는 성왕 주태겸이 놀라워했다. 아직까지 이들이 누구인지 아뢰지 않았는데, 황제는 가지고 있는 정보와 특유의 통찰력으로 자신과 이들의 관계를 유추해냈다. 물론 무릎을 꿇지 않은 시점에서 대충은 예측하고 있었다. "끄, 끌어들인 것이 아니오라, 소신을 도와준 이들이옵니다." 주태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황제도 두려웠지만 그에 못지 않게 괴물 같은 마교주 천여운이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그런 모습에 황제가 한 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생각했다. ‘무림맹의 인사들이 이리 뻣뻣할 리가 없지. 그렇다면 역시 그들인가?’ 모든 것을 보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황제는 이 검은 장포를 입고 있는 젊은 사내가 자신의 장자인 영왕 주태윤을 두 팔을 잔인하게 부러뜨리는 것을 보았다. 공과 사를 구분하기 위해 방관했지만 기분이 상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황제가 이번에는 천여운과 금의위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대들은 마교인들인가?” 성왕 주태겸과 접촉한 무림인이라고 해봐야 사신으로 갔던 마교뿐이었다. 연이 없는 사파인들이 그를 도왔을 리가 만무했다. 이에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천여운이 두 손을 모아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조용히 일이 해결되면 돌아가려고 했는데, 역시 인연이라는 것은 모르는 법이군요. 이렇게 폐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천마신교의 당대 교주인 천여운이라고 합니다.” “교주?” 교주라는 말에 황제의 두 눈이 커졌다. 팔을 부러뜨리는 장면부터 보아서 그 정체를 듣지 못했는데, 설마 마교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교주일 줄은 몰랐다. -으득! 그런 황제와 달리 지휘사와 제독들의 화는 정점에 달했다. 관과 무림이 불가침 조약이 맺어 있기는 했지만, 늘 호의적이고 머리를 숙여왔던 정파인들만 접했던 그들의 눈에는 천여운의 행동은 반역이나 다름없었다. -쾅! 쩌저저저적! 초절정의 고수인 서창의 제독 육청은이 분노로 진각을 밟았다. 진각을 밟은 곳이 갈라지며 균열이 일어나자, 충분히 신위를 선보였다고 생각한 육청은이 노기가 서린 목소리로 호통쳤다. “무엄하다! 감히 황제 폐하께 포권이라니? 네놈이 오체분시를 당해야 정신을...” -척! “앗!” 그런 그의 목에 어느새 날카로운 검 끝이 들어왔다. ‘어, 언제 검을?’ 검을 뽑는 것조차 보지 못했다. 아까 전만 하더라도 평범한 금의위로 보였던 자가 독특한 문양의 가면을 쓰고서 그의 목에 검을 겨냥하고 있었는데, 그 살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노환관이야말로 본교의 하늘이신 교주님께 무례를 범하지 말라. 관과 무림은 동등한 관계로 불가침 조약을 맺었지. 그대들의 산하로 들어간 것이 아니다.” “......그 가면에 쾌속한 검술. 그대가 마라겸이로군.” 독특한 문양의 가면을 쓴 자는 바로 대호법 마라겸이었다. 마라겸의 이름을 맞춘 자는 바로 북진무사 영조였다. 황궁 최고의 검객이라 불리는 북진무사 영조는 무림들과 교분이 있었고, 평소에 황제의 명으로 무림의 동향을 살폈기에 그 정체를 단번에 알아챘다. “그 명성은 익히 들어왔다. 전장에서 명왕이라고 불린다지. 한데,” -챙! 영조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집에서 보검을 뽑아 마라겸을 겨냥했다. 그리고 불쾌하다는 듯이 싸늘한 눈빛으로 말했다. “대명제국의 황제 폐하 앞에서 검을 뽑아, 그 관료인 제독의 목숨을 위협하고도 살아 돌아갈 수 있을 성 싶으냐!” -쿵! 쿵! 쿵! 쿵!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금의위들이 방패를 바닥에 계속해서 내리쳤다. 적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위협을 가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기를 저하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마교인들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 -?! “헛!” “검기?” 방패를 내리찍는 금의위들의 앞의 바닥에 날카로운 검기가 선을 그렸다. 덕분에 방패를 내리찍던 행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후우....” -팍! 그런 그들의 앞으로 금의위 중 한 사람이 머리에 쓰고 있던 두건을 거칠게 벗어던지며 걸어왔다. 두건 속에 드러난 찰랑이는 붉은 머리카락의 사내는 바로 좌호법 이화명이었다. -화르르륵! 이화명의 붉은 검신에 뜨거운 화염이 일렁였다. “확실하게 경고하지. 방패가 아니라 검을 뽑는 자는 가장 먼저 죽여주마.” 좌중을 압도하는 살기어린 경고. 이에 금의위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염.....왕!” 영조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붉은 머리카락에 타오르는 검을 보는 순간에 당연히 그 정체를 알아차렸다. ‘마교 교주도 모자라 명왕과 염왕이라니? 이런 거물들이 황궁에 침입하다니. 허어.’ 마교주에 대해선 모르겠지만 정파 무림맹의 웅주들이 저 두 거물들의 이름만 들어도 혀를 찰 정도로 무림에서 명성이 높은 자들이었다. 그렇게 놀라하는 차였다. -탁! 엎드려서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자 중에 한 사람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적발에 매혹적인 여인이었다.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는 두 제독과 지휘사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오오! 일 태상!” 마교인들의 위협에 경계심이 생기던 차에 잘 됐다고 여겼다. 황궁의 수호전의 최강의 고수인 일 태상 란영이 나선다면 아무리 마교인들이라고 한들 두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곳이 황릉이라 다행이구나! 저 여자는 이백 년을 살아온 괴물이다. 아무리 명성 높은 무림인이라고 할지라도 일 태상의 앞에선 그저 애송이에 불과하다. 후후후.’ -화르르르륵!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의 전신에 불꽃이 휘감기며, 불기린의 화신이 되었다. 그 위용에 대내행창의 제독인 서태식의 입 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마교인들이여 고작 검에 불을 일으키는 정도로 호들갑을 떨었는데, 이것이 황궁의 진정한 힘이...” -화르르르륵! “아닛?” 의기양양해 하던 제독 서태식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당연히 마교인들을 위협할 줄 알았던 란영의 손에서 나온 불꽃이 원을 그리며, 그들을 에워싸고 있던 삼백여 명의 금의위, 환관들의 앞을 방벽처럼 가로막았다. 우군으로부터 그들을 격리시킨 꼴이었다. “이, 일 태상! 이게 무슨 짓이오!” 당황해하는 대내행창의 제독 서태식을 무시하고서, 불꽃의 원 밖에 있는 삼백인을 향해 란영이 외쳤다. “교주님을 위협하는 자는 그 누구가 될 지라도, 천마신교의 대장로인 나 문란영이 불살라 버리겠다!” “!?” 아군이라 굳게 믿었던 란영의 입에서 튀어나온 뜻밖의 말에 두 제독과 지휘사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 73장 황제의 수신호위 (3) > 끝 < 73장 황제의 수신호위 (4) > 황릉을 보호하는 숨겨진 힘인 황궁 수호전 전사. 그들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황궁 내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하다. 황궁에 항시 상주하면서 황제를 보필하는 삼창(三廠)의 제독들과 금의위를 통솔하는 지휘사, 그리고 대명제국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황제뿐이었다. ‘란영.’ 오직 황릉의 보물을 지키기 위해 존재했던 기린의 화신. 그녀의 불꽃이 도리어 그들을 향해 창을 겨누었다. ‘이십여 년 만에 보았거늘.’ 근엄함을 유지하고 있던 황제의 미간에 그늘이 졌다. 황위를 물려받으면서 처음 그녀를 보았다. 젊고 혈기가 넘치는 황제였던 그는 중원에서는 볼 수 없는 적발의 머리카락에 요염함을 풍기는 매력에 빠져들었었다. ‘아름다움이 여전하구나.’ 여전히 변하지 않은 모습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상황으로부터 그녀가 대명제국이 세워질 때부터 이곳 황릉의 보물을 지켜왔음을 알고 나서 부터는 발길을 끊었었다. “지금 그대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있는 것이오? 일 태상!” 지휘사 백자기가 어찌나 황당했는지 상기된 얼굴로 호통을 쳤다. 황릉의 보물과 황상을 보호해야 할 수호전 전사의 수장이라는 자가 갑자기 뒤통수를 친 셈이었으니 용납할 수가 없었다. “금의위 도지휘사. 그대를 애송이 동지 시절부터 보았는데, 이제는 본 녀에게 호통을 칠 만큼 배짱이 많이 두터워졌구나.” 동지(同知). 애송이라 불렀지만 금의위의 도지휘사를 보필하는 정3품의 고위직이다. 북진무사 출신으로 두루 현장 경험을 쌓은 백자기는 서른넷이라는 젊은 나이에 동지에 올라, 차기 도지휘사로 내정되었다. “크흠!” 란영의 일침에 백자기가 당황해서 헛기침을 해댔다. 그 역시도 지휘사로 부임하면서 처음 그녀를 만났고, 괜한 호기를 부렸다가 망신을 당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계집이 황궁 수호전의 일인자라니 참으로 재미있구나.] -화르르륵! [으아아악! 관복에 불이!] 멋도 모르고 조롱을 했다가 새롭게 맞춘 도지휘사 관복이 한줌의 재가 되고 말았다. 잊고 있었는데 최악의 기억이 떠올려 버렸다. “언제적 이야기를 지금 하는 것이오! 일 태상! 폐하를 모셔야 할 자가 마교인들을 보호하려 하다니, 반역이외다!” -챙! 도지휘사에 오른 후로 출정식 때 외에는 뽑지 않았던 보검을 뽑았다. 녹색의 영롱한 검병에 검날이 보는 것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해질 만큼 날카로움이 극대화된 명검이었다. 검신에 새겨진 음각을 본 좌호법 이화명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순균!” 순균(純鈞). 초나라의 명장인 구치자(歐治子)가 만든 명검이었다. 한철로 주조한 것은 아니었지만 구치자가 만든 보검들은 소나 말의 머리도 한 번에 베어서 떨어뜨릴 수 있을 만큼 날카롭다고 전해진다. -우웅! 순균에 푸른빛 검강이 발현되었다. “상황(上皇) 폐하께서 주신 검으로 네년을 벌하겠다.” 한참 현역이었던 북진무사 시절에 전 황제를 모시고 북방의 야만족을 토벌하면서 공을 쌓은 백자기는 황실에서 보관하고 있던 십대 명검 중에 하나를 받았다. ‘호오! 저 검을 실물로 보다니.’ 사욕이 없는 이화명조차 관심을 보일 만큼, 무인이라면 탐이 나는 보검이었다. 반면 정작 보검을 뽑은 백자기의 시선은 란영의 두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일 태상. 상황 폐하를 잊지 않았으리라 믿소.’ 무(武)에 관심이 많았던 전 황제 주금서. 그는 종종 황궁의 무인들을 데려가서 란영과 겨루게끔 했었다. 그때 늘 들고 갔던 검이 이 순균이었다. ‘저들의 어떤 꾐이나 수작에 넘어갔는지는 모르겠으나, 일 태상 다시 상황 폐하의 은혜를 떠올리고 돌아오시오!’ 백자기의 진정한 목적은 그것이었다. 보검 순균을 보이면서 상황에 대한 추억과 충성심을 떠올리게 하는 것. 근 이백 년을 황릉에서 보낼 정도로 충성심이 높은 자라면 충분히 저들의 수작에서 넘어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압!” -팟! 백자기의 신형이 앞으로 튀어나가며, 천여운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란영에게로 뻗어나갔다. 지금은 현역에서 물러났으나 전 황궁 삼대 고수 중의 한 사람이 그였다. 날카로운 보검 순균에서 발한 화려한 검초가 수많은 잔영을 그리며 동시에 란영을 뒤덮었다. -촤촤촤촤촤촤! 찌르기로 요혈을 노리는 잔영들은 허초였다. 진정한 초식의 진수는 그녀의 정중선을 단숨에 베어내기 위해 수직으로 내려치고 있었다. 초식이 코앞까지 다가왔는데 그녀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 초식은?’ 낯이 익은 초식에 이채가 띠었다. 하지만 이대로 직격당하면 허초라고 해도 당하고 만다. -화르르륵! 그녀가 오른손을 들어 올리자 화염의 벽이 앞으로 치솟았다. 아무리 정교한 허초라고 해도 화기로 만들어진 방어선에 막혀버리자 일시에 사라졌다. ‘이런 식으로 막다니? 하지만!’ 이런 속임수는 통하지 않을 거라고 예측했다. 지휘사 백자기의 보검 순균이 화염의 벽을 가르며 그녀의 머리부터 정중선을 내리쳤다. 그러나, -창! 검강에 뒤덮인 보검 순균이 막혀버렸다. 장법의 고수답게 찰나의 순간에 백자기의 진초를 강기가 실린 두 손으로 박수를 치듯이 잡아버린 것이다. ‘손으로 이걸 잡다니? 역시 괴물이구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도전한 것이지만 역시였다. 전에도 수차례 상황의 명으로 겨뤘었지만 한 번도 다섯 초식을 넘겨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단번에 제압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노림수는 다른데 있었다. -부들부들! 공력에서 밀렸기에 검병을 잡은 손을 떨면서 백자기가 입을 열었다. “일 태상! 이 초식이 기억나지 않소? 상황 폐하께서 만드신 검초를 그대가 이렇게 보완해주지 않았소.” 그랬다. 지휘사 백자기가 펼친 이 검초는 상황 주금서 만든 초식이었다. 이를 보여줌으로써 옛 추억과 황실에 대한 충성심을 다시 떠올리게 하려는 절묘한 노림수였다. “떠올리시오. 그 순간을.” 백자기가 간절한 눈빛으로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자 란영의 심후한 공력에 의해 붙잡혀 있던 검신의 떨림이 멈췄다. “아!” 자신의 노림수가 통했다는 생각에 백자기의 눈빛에 화색이 돌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댕강! ‘댕강?.......엇!?’ 환해졌던 백자기의 얼굴이 한순간에 일그러졌다. 상황 폐하께 받아서 반평생을 애지중지 여기던 전설의 보검 순균의 검신이 두 동강이 나버린 것이었다. '내....내 거어어어어엄!!!' 바닥으로 떨어지는 검 조각을 따라 내려가는 백자기의 두 눈은 절망으로 가득했다. 그런 그의 귓가에 란영의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떠올리라는 것이냐? 지휘사 그대의 추억을 미화시켜서 본 녀에게 강요하지 마라.” “네 이년이...” -화르륵! 파앙! “크헉!” 백자기가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란영의 불꽃을 휘감은 일장이 가슴을 때렸다. 화기와 함께 가슴을 파고드는 심후한 공력에 그의 몸이 뒤로 튕겨나갔다. -부웅! “도지휘사!” 정면으로 튕겨나가는 그를 북진무사 영조가 잡아냈다. -팍! ‘이런!’ -타타타타타탁! 그러나 도중에 잡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몸에 실려 있는 공력이 워낙 강하다보니 바닥을 질질 끌면서 밀려나야만 했다. 황궁 최고의 검객이라 할지라도 현경의 고수인 그녀의 내공에 미치진 못했다. “흥! 하여간 지나간 과거에 집착하는 것은 어느 남정네들이든 다를 바가 없구나.” 란영에게 이곳 황릉에 대한 기억은 절대로 추억이 아니었다. 동료들을 잃은 지독한 외로움과 당대 교주의 명을 지켜야 한다는 충정으로 버텨온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을 떠올리라고 강요해봐야 오히려 심기를 건드는 꼴이었다. “크으으윽!” -치이이이익! 가부좌를 틀고 있는 백자기의 입에서 하얀 김이 흘러나왔다. 늘 소중하게 여기던 보검 순결이 부서져서 화를 내고 싶어도, 오장육부로 파고든 화기를 몰아내는데 집중해야만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대했건만 도지휘사를 망설임 없이 부상 입히자, 대내행창의 제독 서태식이 손가락으로 삿대질을 하면서 소리쳤다. “일 태상! 정녕 그대가 황제 폐하를 배신하겠다는 것인가!” “배신? 지금 누구더러 배신이라고 하는 것이오. 제독.” “지금 그대의 행동이 대명제국에 대한 배신이나 역모가 아니라면 대체 무엇으로 표현한다는 것이오!” 그런 서태식의 말에 란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일침을 가했다. “본 녀는 태어났을 때부터 신교를 위해서 살아왔다. 그 옛날 당대 교주님의 명을 받고서, 이곳 황릉에서 신교의 보물을 지켰는데 무엇이 배신이라는 것이지?” 배신이라는 말은 문란영 그녀를 모독하는 표현이었다. 오직 마교에 대한 충정으로 살아온 그녀였다. 하지만 숨겨진 그녀의 존재는 알아도 이백 년 전의 맹약을 지금의 관료인 서태식이 알 리가 없었다. “마교의 보물? 아니. 그런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멈추어라.” 그때 누군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폐하?” 그의 말을 가로막은 자는 다름 아닌 황제였다. 마교 교주임을 알고 나서 잠시 방관하던 그가 나서자, 대내행창의 제독 서태식은 가만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당당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란영과 눈이 마주친 황제는 과거를 떠올렸다. 당시 황위를 물려주면서 상황이 말했었다. [황상은 들으시게. 황릉의 보물인 기린의 진원과 피는 엄밀히 말하면 황실의 것이 아니네.] [황실의 것이 아니라뇨?] 지금까지 몰랐던 진실에 그 역시도 당혹스러웠었다. 상황 주금서는 선대 황제들로부터 들어왔던 계약의 내용을 알려주었다. [수호전의 일 태상 란영은 태조 폐하와 건국 시초에 계약을 맺고서 이곳을 지키고 있는 마교의 무인일세.] 원래는 시간이 흐르면서 황릉을 지키는 무인들이 전부 사라질 거라 생각했던 태조였다. 마교인들이 전부 죽게 된다면 세월의 흐름 속에 자연스럽게 잊혀 질 거라 여겼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마지막 남은 마교의 무인인 문란영이 기린의 피를 복용하고서 그 끝을 알 수 없는 수명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짐작은 했건만.’ 그것이 당대 황제인 자신의 대에서 벌어질 줄은 몰랐다. 하긴 황릉에 있는 기린의 진원과 피가 탈취되었다면 더 이상의 계약은 무의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당대의 마교 교주가 이곳에 직접 나타났으니 말이다. “......일 태상의 말이 전부 맞도다. 그녀는 마교의 사람이 틀림없다.” “!!!” 황제는 순순히 사실을 인정했다. 그런 황제의 말에 불꽃의 원안에 있던 관료들이 전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지금까지 누구도 알지 못한 비밀이 드러났다. 대명제국의 보물이라 여겼던 기린의 피와 진원이 전부 마교의 것이었고, 황궁의 숨겨진 힘이라 불려왔던 자가 마교의 무인이라는 것은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어, 어찌 이런 일이.....” “황릉의 보물이 마교의 것이라니.....” 그런 관료들의 당혹감과 달리 천여운은 황제를 달리 보게 되었다. 대명제국의 전력이 집중되어 있는 황궁의 한가운데에 있는 자신이었다. 얼마든지 황제가 강하게 나오거나, 진실을 왜곡할 수도 있었는데 전혀 이를 개의치 않고 인정했다. ‘황제의 도량이 생각보다 넓구나.’ 과연 이 광활한 중원을 다스리는 황제다운 도량이었다. 내심 황제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 궁금했던 천여운으로서는 이 점은 만족스러웠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공이 마교주라고 했소?” 황제의 입에서 나온 것은 공대에 가까운 말투였다. 이에 관료들이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파 무림맹의 맹주에게조차 거의 하대하다시피 했던 황제가 정말로 동등한 관계의 수장을 대하듯이 공대를 해주었다. “그렇습니다. 폐하.” 천여운도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변했다. 그러나 대화의 처음이 부드럽게 오갔다고 해서 모든 것이 원활하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짐이 거두절미하고 이야기 하겠네. 짐의 둘째 아들인 성왕을 도와준 것은 고맙게 생각하네. 하나, 이곳은 황궁일세.” 점차 황제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는 것이 짐의 허락 없이 함부로 황궁에 침입하고 난리를 부릴 수 있는 권한이 아닐세!” 어느 것 하나 틀린 말은 없었다. 천여운과 마교인들은 무단으로 황궁을 침입한 것이었다. 황제가 나무라거나 그 책임을 묻는다고 해도 딱히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단 극도육무문의 문제만 얽혀있지 않다면 말이다. “심기가 불편하셨다면 송구스럽습니다. 폐하. 하지만 여기서 일부 오해를 풀고 넘어갔으면....” 바로 그때였다. -솨아아아아아! 천여운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사방으로 날카로운 예기가 일어나며, 공동 한가운데와 삼백 명의 금의위, 환관들을 격리시켜놓고 있던 불꽃이 일제히 꺼졌다. -슉! 그와 동시에 황제의 앞에 대내행창의 환관 한 사람이 무릎을 꿇었다. 곱상하게 생긴 청년이었는데, 얼핏 보면 여자처럼 보이기도 할 만큼 예쁘장한 외모를 지닌 환관이었다. ‘빠르다.’ 좌호법 이화명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가 움직이는 것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은 젊은 환관이 고개를 바닥에 조아리며 말했다. “폐하께 사죄드리옵니다. 명하신대로 계속 지켜보려고 했으나, 더는 위험하다고 판단이 되어서 이리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 모습에 지금껏 당당하기만 했던 란영의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수.....신호위!” 란영의 불꽃을 잠재우고 나타난 젊은 환관. 그의 정체는 바로 황제를 보호하는 마지막 보루(堡壘)라 불리는 수신호위였다. 단지 숨어있다가 나선 것뿐이었는데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렇지 않아도 부르려고 했노라." "명을 내려주십시오." 이에 황제가 근엄한 얼굴로 천여운을 바라보면서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교주, 귀 공이 황궁을 멋대로 침입했다는 것은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짐과 황궁의 힘을 가벼이 여겼다는 것이겠지. 지금부터 본 황궁의 진정한 힘을 보여줄까 하네." < 73장 황제의 수신호위 (4) > 끝 < 73장 황제의 수신호위 (5) > 수신호위(守神護衛).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수호전과 다르게 황궁에 널리 퍼진 존재이다. 황제를 보호하는 유일한 보루라 불리는 수신호위를 모르는 자는 간자라고 불릴 정도였다. 수신호위라는 존재에 대해 들려오는 풍문은 정말 많았다. 과거 무관들의 난이 일어났을 때, 건안궁으로 침입한 무관 삼백여 명으로부터 황제를 지키고 그들의 목을 전부 베었다는 것부터 가히 전설에 가까운 일화들이 넘쳐났다. ‘저 자가 수신호위라고?’ 대내행창의 제독인 서태식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냐하면 수신호위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귀가 닳도록 들었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갑자기 대내행창의 환관 한 사람이 툭 튀어나와서는, 수신호위라고 하는데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알고 있는 자인가?] 서태식이 옆에 있는 상 첩형에게 전음으로 물어보았다. 환관들을 직접 뽑고 관리하는 상 첩형조차도 처음 보는 얼굴이기에 고개를 저었다. [서 공공. 아까 전에 소집할 때만 하더라도 저런 자는 없었습니다.] [허어!] 대내행창의 환관이 아니었다. 중간에 변장을 하여 몰래 합류했다는 의미였다. ‘참으로 기이한 날이다. 평생 황궁에 있으면서도 보기 힘든 두 사람이 동시에 한 자리에 나타나다니.’ 황릉의 지하공동을 지키는 수호전의 일인자 란영. 그리고 누구에게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그림자처럼 황제를 지키는 수신호위. 관료들에게 있어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자리였다. ‘역시 이 자도 살아있었구나.’ 수신호위라고 부른 예쁘장한 얼굴의 환관을 바라보는 란영의 눈빛이 묘했다. 그를 보는 순간 단번에 누구인지 알아본 그녀였다. 그런데 정작 나타나기 전만 하더라도 그 존재를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예전에는 기척을 감지할 수 있었는데....’ 게다가 얼핏 단순한 불처럼 보였겠지만 그녀의 화기(火氣)가 실린 불꽃은 쉽게 꺼지지 않는다. 이를 쉽게 꺼뜨린 것만으로도 무공이 전보다 훨씬 발전했다는 의미였다. ‘저 자는 너무 위험해.’ 제독이나 지휘사, 북진무사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자였다. 뒷짐을 지고서 수신호위라 불린 환관을 바라보는 황제의 눈빛은 강한 신뢰감으로 가득했다. “황궁의 진정한 힘이라.....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지?” 황제의 자신감이 가득한 말에 천여운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런 표현은 힘으로 자신들을 억누르겠다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말이었다. 황제가 무릎을 꿇고 있는 환관에게 말했다. “일어 나거라.” “명을 받듭니다.” 환관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황제가 그를 가리키며 소개했다. “이 자는 짐의 수신호위인 임규화라고 한다.” 그런 황제의 소개에 환관이 베시시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천여운에게 인사했다. “마교주께 인사드립니다.” 가냘픈 목소리하며 웃는 모습이 얼핏 보면 여자처럼 보였다. 남장한 여자로 보인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이름도 여성스럽군.’ 규화(葵花)는 해바라기를 뜻했다. 여성이 아니고는 화라는 한자를 잘 쓰지 않는데 특이했다. ‘임규화?’ 담담하게 수신호위 임규화를 바라보는 천여운과 달리 대호법 마라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처음 보는 자였는데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이름이었다. 갑자기 떠올리려고 하니 기억은 나지 않는데, 분명 들어본 적이 있었다. 황제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짐이 무림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지만, 무림인들은 시비(是非)를 가릴 때 무위를 겨뤄서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고 하더군. 약육강식이라고 했던가.” 약육강식(弱肉强食). 무림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다. 약한 자는 먹히고 강한 자는 먹는다는 말처럼 무림은 강자가 진리이면서 옳음이었다. 이 말을 꺼내는 것은 지극히 황제의 의도가 보였다. “이유를 막론하고 마교주 귀 공은 황궁에 멋대로 침입하고 짐의 신하들을 해하고, 황족이자 짐의 자식인 영왕의 두 팔을 부러뜨렸지.” 역대 어떠한 무림인도 해본 적이 없는 위업을 달성했다. 이것만 들어본다면 황제의 입장에서 노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적으로 대함은 천여운이 불가침 조약을 맺은 무림 삼대 세력 중 하나인 마교의 수장이었기 때문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불가침 조약을 귀 공이 먼저 깨었다고 할 수 있네. 이를 그냥 눈감는다면 천하를 다스리는 짐에게 치욕이지.” “폐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치욕을 논하는 황제의 말에 관료들이 이구동성으로 만류하며 부끄러워했다. 무림의 고수만 아니었다면 이 건방진 무뢰배들을 당장에 참하여 저잣거리에 효수하고픈 마음이 굴뚝같았다. -척! 황제가 손을 들어서 난리가 난 관료들의 입을 다물게 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짐이 말했듯이 귀 공과 그대들을 그냥 보내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 그래서 짐이 제안하는 바이다. 단언컨대 짐의 수신호위는 황궁 최고의 고수라 할 수 있네.” 황제의 단언에 북진무사 영조의 얼굴이 부끄러움에 빨개졌다. 대명제국의 모든 신민들에게 황궁 최고의 검객이자 무인이라 불리는 그였지만 이곳에서는 그 칭호가 무색했다. “비록 귀 공이 짐과 대명제국에 무례를 범했다고 하지만, 짐은 여전히 태조 폐하의 유지를 어길 생각은 없네.” 사전에 적의는 없다고 긋는 황제의 말에 천여운이 속으로 실소했다. 천여운과 마교의 잘못을 계속 짚으면서 명분을 확실히 다졌다. 처음에는 황제가 분노했기 때문에 이를 해지(解之)하기 위해 비장의 무기를 드러내는가 했는데 아무래도 그게 목적이 아닌 듯 했다. “짐이 양보하여 무림의 법도를 존중하도록 하겠네. 짐의 수신호위를 상대하여 꺾을 수 있다면 이번 일은 없던 걸로 하지.” 지금까지 벌어진 일들은 무마하겠다는 제안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밑밥을 깔아두었으니, 수신호위를 꺾지 못했을 때에 대가가 절대로 가볍지 않을 것이다. 천여운이 물었다. “수신호위를 꺾지 못한다면?” “불가침 조약을 수정토록 하겠다.” “?” 불가침 조약을 수정하겠다는 말에 천여운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황제의 노림수는 바로 이것이었다. 특정 대가를 원하리라고 여겼는데, 예상과 다르게 상당히 까다로운 부분을 건드렸다. “정파 무림맹에서는 불가침 조약과 상관없이 대명제국과 짐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있지. 그렇지 않은가?” ‘허어.’ 황제가 바닥에 엎드려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다름 아닌 공동파의 장문인 청수 진인과 그 제자들이었다. 갑자기 황제가 데려온 관료들과 마교의 수뇌부들이 대결을 펼치는 대치 상황이 발생하면서 이도저도 못하고 관망하고 있던 그들이었다. ‘난감하구나.’ 상황이 정리되기를 기다렸던 청수 진인은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황제의 이런 질문은 굉장히 민감한 사항이었다. ‘하필 마교의 교주가 있는 곳에서 이런 일이....’ 마교인들이 없었다면 친 대명제국의 노선을 걷는 무림맹이었기에 적당히 황제의 비위를 맞췄을 것이다. 그런데 같은 삼대 세력 중 하나인 마교의 교주가 보는 앞에서 대명제국에 충성을 했다고 말해버리면, 정파 무림은 관에 무릎을 꿇었다고 공식화되어 버린다. “그게 아닌가?” “폐하.....그, 그것은.....” 대답할 수 없는 상황에 청수 진인이 진땀을 흘렸다. 괜히 말실수를 했다가 무림맹의 수뇌부들인 전 웅주들의 질타를 받고서 탈맹 상황까지 발생할 수도 있었다. 계속 망설이자 황제의 표정이 굳어져가는 것이 뻔히 보였다. 난처해하던 바로 그때였다. “그래서 수신호위를 꺾지 못한다면 저희 천마신교가 불가침 조약이 아니라, 대명제국의 신하가 되길 원하시는 겁니까?” ‘앗!’ 절묘한 순간에 천여운이 끼어들었다.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져있던 청수 진인에게 있어서는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덕분에 황제의 굳어가던 시선이 어느새 천여운에게로 돌아갔다. ‘어째서?’ 청수 진인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천여운을 흘깃 쳐다보았다. 가만히 있었다면 정파 무림맹이 난처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는 좋은 기회를 저버렸다. ‘설마 본 맹과의 동맹 때문에?’ 청수 진인의 두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무리 동맹을 맺었다고는 하지만 무림맹과 마교는 언젠가 다시 적대 관계로 돌아갈 것이다. 그런데 황제의 앞에서 무림맹을 도와준 셈이었다. ‘허어.....원시천존. 원시천존.’ 청수 진인은 내심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마교에 있어서 아무런 득도 없는 상황에 도움을 줬다는 것은 진심으로 동맹 관계에 대한 예우를 해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현 마교의 교주인가. 그저 무위만 강하다고 여겼건만 영웅으로서의 도량과 포용심을 갖췄구나. 훌륭하다.’ 처음에는 그를 무조건 위험하다고만 여겼던 청수 진인이었다. 방금 전의 일로 천여운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호의적으로 바뀌었다. 사실 이것은 약간의 오해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무림맹을 황궁의 산하로 집어넣으려 하다니, 무서울 정도로 수완가로군.’ 천여운이 중간에 끼어든 것은 무림맹을 도운 것이 아니었다. 청수 진인의 난처해하는 표정만으로 그들이 황실에 그저 호의적인 태도만 취한다는 사실은 금방 파악했다. 그런데 여기서 무림맹의 수뇌부인 그가 황실에 충성 맹세를 했다고 말해버리면, 그들은 고작 말 한 마디에 황실 산하로 들어가져 버린다. 무림맹에서는 공동파의 장문인을 질타할지 모르겠으나, 대명제국의 황제를 상대로 그런 공언을 취소할 수 없으리라. 그렇게 되면 황제는 무림맹을 시작으로 전 무림을 관의 산하로 넣으려들 것이 뻔했다. “흐음.” 황제의 눈빛에는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천여운이 중간에 끼어들지 않았다면 자연스럽게 정파 무림맹의 수뇌부 입에서 대명제국에 대한 충성을 유도할 수도 있었는데 실패해버렸다. ‘아직은 정치나 외교적인 역량은 없을 줄 알았는데 제법이군.’ 정파 무림맹의 사신은 현재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자였다. 그런 자에게서 자연스럽게 원하는 것을 얻을 수도 있었는데 아쉽게 되었다. 그래도 아직까지 기회는 끝나지 않았다. “그렇네. 귀 교는 건국 당시에 공을 세웠기에 태조 폐하께서는 호의로써 불가침 조약을 맺어 그대들의 자유를 인정했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로 착각하는 법이지. 관과 무림의 불가침 조약을 믿고서 황궁을 어지럽혔으니 그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나.” 길게 타당한 사유를 내세워 말했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수신호위에게 패한다면 마교가 대명제국에 충성을 맹세하라는 뜻이었다. 그저 도량이 넓고 위엄 있는 황제로만 보이겠지만 그 역시도 이 광활한 중원을 다스리는 군주인 만큼 지략을 갖춘 수완가였다. 한 번 잡은 명분을 허투루 사용할 위인이 아니었다. ‘이런!’ 대호법 마라겸이나 좌호법 이화명의 눈빛에 당혹감이 서렸다. 황제에게 노림수가 있다고는 파악했지만 설마 이런 상황을 이용해서 무림과 관의 불가침 관계를 역전시키려들 줄은 몰랐다. 그때 대호법 마라겸의 귓가로 대장로 란영의 전음이 들려왔다. [대호법이라고 했죠? 당장 이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막아야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황제 폐하는 지금 이 내기에 이길 자신이 있기 때문에 이런 제안을 하는 거에요.] [이길 자신이 있다니?] [본 녀는 황릉에 있었기에 잘은 모르지만 한때 무림인들에게 임규화를 모르는 이가 없다고 들었어요. 그는....] [임규화!] 대호법 마라겸의 두 눈이 커졌다. 아까 전부터 많이 들어본 이름이라 여겼는데, 란영의 전음에 떠올리고 말았다. ‘파상검제 임규화!’ 파상검제(波狀劍帝) 임규화. 그는 한때 중원 오대고수의 일인이자 검의 황제로 불렸던 자다. 무림에 혜성처럼 등장하여 독특한 검술 하나로 명성을 떨친 절대고수였다. 어떠한 세력에 속해있지도 않았는데 당시 오대고수 중 두 명을 꺾으면서 극도신 이래로 천하제일 고수가 탄생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주었던 고수다. ‘그 자는 고작 일 년 정도 무림에서 활동하다가 사라졌다고 들었는데.’ 그때가 벌써 구십여 년이나 지난 먼 과거였다. 마라겸도 선대로부터 어릴 적에 들었던 이야기였기 때문에 단번에 떠올리지 못한 것이었다. 아무리 경지가 높다고 해도 적어도 백이십 세를 훌쩍 넘긴 자일텐데, 환골탈태를 했다고 해도 노인이어야 하는데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럴 리가....] [그는 본 녀와 같이 기린의 피를 복용하고서 오랜 세월을 살아남은 자에요!] [기린의 피!] 그랬다. 파상검제 임규화. 그는 본시 환관 출신으로 황궁에서 한참 기린의 피를 통한 실험이 진행될 당시에 그것을 복용하고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남자였다. 이 성공으로 황궁에서는 수십 명의 환관들을 대상으로 기린의 피를 복용케 했으나, 모두가 화기에 오장육부가 타서 죽게 되면서 유일한 남성복용 사례가 되었다. ‘마교의 교주여. 그대는 짐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명분이 충분했다. 그것을 이용해 이미 거절할 수 없도록 모든 상황을 만들어놓았다. 여기서 거절한다면 마교 교주를 비롯한 그의 수하들이 수신호위를 꺾을 수 없다고 인정하는 셈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굳이 그들의 무위를 눈치 보지 않고, 이곳 황릉에 있는 전력만으로 마교인들을 제압할 수 있다는 것도 증명하게 된다. ‘짐의 수신호위는 기린의 피를 복용하기도 전에도 황궁 최고의 고수라 불렸던 동창의 초대 제독이다. 이미 무림에서도 그 능력을 증명했지.’ 황제는 이 내기에 이길 자신이 있었다. 어떤 상황이 오든 그는 절대로 잃는 것이 없다. 그때 천여운이 호법들과 대장로 란영을 제치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마음에 결정을 내린 듯 했다. “그래. 짐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화르르르륵! 황제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천여운의 오른손에서 검은 불꽃이 일어나더니, 선명한 검의 형태를 갖추었다. ‘검은 불꽃의 검?’ 그것은 천마기와 화기를 머금은 무형검이다. 처음 보는 기이한 광경에 황제가 의아해하는데, 그의 앞에 당당하게 서있던 수신호위 임규화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 폐하! 잠깐 대결을 유보해주십시오. 저 자는....” 바로 그때였다. -슉! 천여운의 신형이 흩어지며 눈 깜빡할 사이에 임규화의 앞에 나타났다. “헉!” 당황한 임규화가 허리춤에서 황금빛 연검을 뽑아들려고 했는데, 그의 오른팔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흑염의 검이 스치고 지나갔다. -치이이이이익! “끄아아아아아악!” 반쯤 뽑은 연검을 들고 있던 임규화의 오른팔이 허공을 핑그르 돌며 바닥에 떨어졌다. -탁! 바닥에 떨어진 그의 팔의 단면은 잘 타서 검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끄으으윽!” 고통은 둘째 치고 지독한 살기가 그를 위협하고 있었다. ‘서, 설마 이 자가 나를 죽이려고?’ 황제와 모든 관료들이 보는 앞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목숨에 위협을 느낀 임규환이 당황한 나머지 왼손의 검지로 검강을 일으켜 천여운의 심장을 찔렀다. 그러나, -촤악! “컥!” 육안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쾌속한 흑염의 검이 그의 목을 갈랐다. 베인 고통과 타는 고통을 동시에 느낀다는 것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 그 자체였다. 핏대가 선 두 눈을 부릅뜨고서 임규화가 필사적으로 중얼거렸다. “새.....새....생...사....” -툭! 하지만 갈라진 그의 목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말을 마치지 못했다. “이, 이게 대체?” 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당혹스러워하는 황제의 앞으로 천여운이 머리통을 잃은 임규화의 시신을 옆으로 밀치면서 다가왔다. -팍! 그리고는 냉소적인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폐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줄 착각하기 마련이죠.” < 73장 황제의 수신호위 (5) > 끝 < 74장 놈을 건드리지 마라 (1) > 무공이라는 것은 참으로 오묘하다. 삼류에서 일류 사이의 간극은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더욱 위의 경지로 올라갈수록 그 간극은 전과는 천차만별로 올라간다. 무림인들이 높은 경지로 올라갈수록 외공보다는 내공이나 고차원적인 깨달음에 매달리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단적인 예로 현경 초입부터 시작해 극까지 단계별로 올라갈수록 내공의 보유량이나 초식에 실을 수 있는 공력의 차이가 확연하게 벌어진다. 물론 초식에 있어서는 얼마큼 이해도가 높은가 혹은 상황에 맞게 활용하는 능력은 무공의 경지와 상관없이 이루어질지 모르겠으나, 같은 경지가 아니고는 이 간극을 메꾸기란 쉽지 않다. 파상검제 임규화. 그의 추정 무공의 경지는 현경의 극(極)이다. 현 오대고수들과 비교해도 상위 세 손가락에 드는 실력자임이 틀림없다. 더군다나 오랜 세월을 살아온 만큼 무(武)에 대한 경험은 현 무림에서 수위에 꼽힐 만한 절대자라 할 수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쉽게 제압하다니.....’ 심각하게 우려하던 대호법 마라겸과 대장로 문란영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교주인 천여운을 미처 만류하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들은 임규화가 처음 모습을 드러내서 그 기운을 드러내는 순간 설사 천여운이라고 할지라도 위험할 수도 있겠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결과는 불과 세 초식 이내로 목이 베이고 말았다. ‘허어! 이럴 수가.’ 이를 지켜보고 있던 청수 진인과 공동파의 제자들 역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늘 위에 더 높은 하늘이 있다고 했던가. 수신호위라고 했던 임규화를 보았을 때, 무림맹주인 북정도 이목을 처음 대면했을 때가 떠올릴 만큼 떨림을 받았다. 그런데 그런 그를 삼류 고수를 상대하는 것 마냥 팔과 목을 베어냈다. ‘빈도의 두 눈이 잘못 되었을 리가 없다. 방금 그 검은 불꽃으로 만든 검은 무형검이 틀림없다!’ 무형검(無形劍). 형태가 없는 무형의 기운인 진기를 유형화한 검이다. 화산파의 초인이자 전설이라 불리는 독고구패가 선보였던 전설적인 이 검은 오직 생사경의 경지에 올라야만 가능한 수법이었다. ‘그 검은 절대로 검강 같은 게 아니다.’ 기를 응집하는 강기 또한 그 위력이 뛰어나나 무형검과 비견할 수 없었다. 파상의 원리와 이화접목이 극대화된 파상검막조차 단번에 꿰뚫을 정도로 그 위력이 경이롭기 마저 했다. “.....생사경!” 작게 중얼거리는 한 마디였지만 그 파장은 엄청났다. 공동 안에 있는 자들 중에서 무공을 익힌 고수들이었다. 무공을 연마하는 잇아 전설 속의 경지라 불리는 생사경을 들어보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말도 안 돼!” “새, 생사경이라니?” “그게 정말로 존재하는 경지였나?” 북진무사를 비롯해 두 제독과 지휘사, 첩형들까지 누구 할 것 없이 경악한 나머지 혼란스러워했다. 수신호위가 어이없게 죽은 것 이상으로 충격적인 소리였다. 정파를 이끌어가는 십칠웅주의 일인으로서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되었지만, ‘허어, 저 자는 맹주님이신 이목 대협도 한 수 접어야 할지도 모른다. 마교에 역대급 괴물이 탄생했구나. 원시천존. 원시천존.’ 도저히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문득 청수 진인은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당금의 마교주라면 동쪽의 그 괴물과 비견할 수 있지 않을까?’ 어떠한 누구도 건드릴 수 없다고 불리는 동쪽의 괴물. 워낙 무림을 활보하지 않아서 정보가 적지만 오대고수 중에서 유일하게 별호에 신(神)이라는 광오한 글자가 들어갔다. 그것도 싸움의 신이라 불리는 투신(鬪神)이라는 칭호를 가졌다. 그가 본격적으로 무림을 활보했다면 오직 두 주먹만으로 천하제일인이라는 칭호를 얻었을 거라 불리는 자였다. ‘괴물 대 괴물이라....’ 그런 청수 진인의 귓가로 쩌렁쩌렁한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네, 네 이놈! 당장 폐하의 앞에서 물러나지 못할까!” 북진무사 영조가 떨리는 손으로 검을 겨우 잡고서 천여운을 향해 겨냥하고 있었다. 수신호위를 죽이고서 황제의 바로 두 보 앞까지 다가간 그를 막아야만 했다. 그런데 너무 전율적일 만큼 압도적인 무위를 눈앞에서 보고나니, 아무리 충심이 높은 그라고 해도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일검에 죽을 거야.’ 나서는 순간 죽는다는 확신이 발을 무겁게 만들었다. 이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발을 떼려고 안간 힘을 쓰는 북진무사 영조의 목에 어느새 서슬파란 검날이 들어왔다. 독특한 문양의 가면을 쓴 대호법 마라겸이었다. “며, 명왕!” “약속하지. 여기서 한 발자국만 더 뗀다면 수신호위라는 자와 같이 수급이 바닥을 구르게 될 것이다.” “큭!” 영조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가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은 천여운이 아니더라도 이 지하 공동 내에서 대호법 마라겸을 비롯한 마교의 대장로라고 밝힌 란영을 막을 자가 없다는 것이다. 영조가 입을 다물면서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집중되었다. ‘수신호위가 이렇게 무력하게 당하다니?’ 차가운 지하 공동의 바닥을 구르고 있는 수신호위 임규화의 머리. 죽어가면서도 믿기지 않는지 두 눈을 감지 못하고 있었다. [저 자를 상대할 수 있겠나?] [겨뤄봐야 알겠지만 절대로 소신이 패배할 일은 없을 것 같사옵니다.] 황궁을 찾아왔던 오대고수의 일인이자 무림맹주 북정도 이목을 보았던 수신호위 임규화가 했던 말이었다. 당대 오대고수를 보고도 자신감을 잃지 않은 그가 고작 세 초식도 버티지 못하고 차가운 주검이 되어버렸다. ‘지, 짐이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명분을 이용해서 이를 얻으려 하다가, 선대로 물려받은 유산이라 할 수 있는 수신호위를 잃은 것이다. 절대로 흔들릴 것 같지 않던 황제의 부동심에 금이 갔다. 근엄했던 눈빛에는 당혹감이 서려서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을 걷고 말았다. -탁! 천여운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제가 두려우십니까?” 만인의 이목이 집중된 지하공동이 일순간에 침묵으로 뒤덮였다. ‘아차!’ 황제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광활한 중원을 다스리는 대명제국의 황제가 뒤로 물러났다. 이것은 만천하를 포용해야 할 그가 상대를 두려워하고 있음을 인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안 된다. 짐은 대명제국의 황제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당황한 황제가 천여운을 매섭게 노려보며 호통을 쳤다. “무엄하다! 당장 짐에게서 물러나지 못할까?” 이에 천여운이 다시 한 번 실소를 금치 못했다. 주도권을 빼앗겼는데도 황제라는 자리가 그것을 쉽게 인정하지 못하게 하는 듯 했다. 천여운이 웃음기가 완전히 빠진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뭔가 착각하시는 것 같군요.” “착각? 지금 짐을 능멸하려는 것이더냐?” “능멸이라는 것은 폐하께서 저보다 우위에 서있을 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 말과 함께 천여운이 앞으로 한발자국 더 다가오며 손을 들어올렸다. -부웅! “!?” 그러자 황제의 몸이 심후한 진기에 휩싸이며 천천히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처음 겪어보는 굴욕에 황제의 인상이 딱딱하게 굳어져갔다. “가, 감히! 이 무뢰배가 폐하를!” 황실에 대한 충성심이 깊은 대내행창의 제독 서태식이 이를 참지 못하고 일갈을 지르며, 황제를 구하기 위해서 신형을 날렸다. -팟! 초입이기는 하나 화경의 고수답게 신법이 매우 빨랐다. 단숨에 천여운의 뒤를 점해서 그의 등을 검으로 찌르려고 했지만, 다른 천여운의 수하들이 이를 내버려둘 리가 만무했다. -화르르르륵! “아, 아닛!” 뒤를 노리려던 찰나에 그 앞으로 뜨거운 불기둥이 치솟아 벽을 만들어냈다. 이에 당황한 서태식이 화기가 느껴지는 진원지로 고개를 돌렸는데, 역시나 란영이 손을 뻗어서 화기를 발출했다. “누구 마음대로 그분의 뒤를 노리는 것이지? 서 제독! 죽고 싶지 않다면 허튼 짓을 삼가라!” “일 태상 그대가 기어코!” 마음 같아서는 검강으로 단번에 불을 갈라서 통과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그 틈에 란영이 그의 뒤를 노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신하로서 황제가 능욕 당하는 것을 지켜볼 순 없었다. 설사 자신의 목숨을 던지더라도 군주를 보호하는 것이 신하의 덕목이었다. ‘살을 내어주고 뼈를 취한다!’ 대내행창의 제독 서태식이 육참골단(肉斬骨斷)의 결의로 란영이 만들어낸 불기둥을 뚫으려고 했다. “어딜!” 그러나 이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란영이 아니었다. 서태식이 잠시 망설이는 사이에 어느새 거리를 좁혀온 란영의 불꽃으로 타오르는 장법이 유려하게 허공에 수를 놓으며 그를 노렸다. -우웅! 서태식은 스스로에 대한 방어를 포기하고서 검강을 일으켜 불기둥으로 돌진했다. ‘이를 악물고 버티고 불기둥과 함께 마교주의 등을 벤다.’ 어차피 목적은 그것이었다. 불기둥이 가로막고 있어서 방심하고 있을 천여운을 베고서 황제를 구해낸다. 그 각오로 검강이 실린 검으로 독문검법인 절연검법에서 가장 패도적인 절초를 펼치며 불기 둥을 내리쳤으나, -화르르르륵! “엇? 거, 검초를?” 검강에 단번에 갈라질 거라 여겼던 불기둥이 용울음을 치듯이 회오리를 치며 상승하더니, 그의 검초를 쉽게 튕겨내 버렸다. 죽은 수신호위인 임교화가 쉽게 불꽃을 꺼뜨렸다고 가벼이 여겼겠지만, 발현되는 화기는 그녀의 역량에서 비롯된다. 현경의 고수인 그녀의 진기를 그가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분명 경고했다. 서 제독!” “비, 빌어먹을!” -파파파파파팍! 각오하고 있던 란영의 유려한 장법이 서태식의 등 전체의 요혈들에 강타했다. 반탄강기를 일으켜서 막아내려고 했지만 애초부터 공력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타격을 고스란히 받고 말았다. “끄아아아악!” -우드드득! 갈비뼈를 비롯해 등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살을 내어주고 뼈를 취하려고 했는데, 결국 뼈도 내어준 셈이 되어버렸다. 심한 부상으로 쓰러지는 제독 서태식을 란영이 뒷목을 잡고서, 천여운이 있는 곳에서 멀찌감치 던져버렸다. -쿠당탕! 바닥을 뒹굴며 피 기침을 하는 서태식이 환관들과 금의위의 무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쿨럭쿨럭! 뭣들 하는 거냐! 당장 폐하를 보호하지 못할까!" “하, 하지만...” 황궁의 전설이라 불리는 수신호위 임규화조차 상대가 되지 못했다. “에잇! 어차피 마교의 놈들은 고작 다섯이다! 대명제국의 폐하께서 치욕을 당하게 내버려두는 불충을 저지를 셈이냐!” “추, 충!!!” -챙! 신하로서의 불충을 꼬집는 서태식의 일침에 그들이 병장기를 뽑아들었다. 갈수록 혼란스럽게 돌아가는 상황에 어찌해야 할지 곤란했던 그들이었지만 대내행창의 제독인 서태식의 말이 옳다고 여겨졌다. ‘그, 그래! 아무리 뛰어난 고수라도 저 자는 혼자다.’ ‘우리가 숫적으로 훨씬 우위야. 인간인 이상 지치지 않을 리가 없어.’ 무공이 낮다고 해도 그들의 숫자만 해도 삼백 명이 넘었다. 쉴틈 없이 협공을 가한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보였다. “쿨럭! 쿨럭! 마, 마교주부터 노려라!” “충!” -팟! 보채는 서태식의 명령에 북진무사 산하의 금의위 다섯이 동시에 황제를 진기로 강제로 띄우고 있는 천여운에게로 검초를 펼치며 달려들었다. “폐하를 당장 놓아랏!” “이 역적 놈!” -촤촤촤촤촤?! 검초를 펼치는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자신을 구출하기 위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한 삼백 명의 환관들과 금의위를 발견한 황제가 인상을 쓰면서 말했다. “지금이라도 짐을 내려놓는다면...” 그런 황제의 권고를 천여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잘랐다. “쓸데없는 기대심은 버리십시오.” “뭐?” 그런 황제의 두 눈에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천여운이 왼손을 들어 올려 손바닥을 폈는데, 그를 향해 검초를 펼치며 신형을 날리던 다섯 명의 금의위 무관들이 보이지 않는 벽에 막힌 것처럼 박고 말았다. -쾅! “으억!” “내, 내 코!” “이, 이게 대체 무슨?” 정말 세게 부딪친 자들은 코뼈가 부러져서 코피마저 흘렸다. 보이지 않는 진기의 벽에 부딪쳐서 당혹스러워하는 그들을 향해 천여운이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그러자, -팡! “크헉!” “으아아악!” 강렬한 진기의 풍압이 일어나며 무관들의 몸이 뒤로 튕겨져 나가고 말았다. “저, 저들을 받아줘랏!” “충! 어어엇!” -팍! 쿠당탕! 뒤에서 이어서 후속타를 날리려고 대기하고 있던 금의위 무관들이 날아오는 그들을 받아냈는데, 거대한 진기의 여파로 뒤로 네다섯 명이 우르르 넘어지고 말았다. “으악!” “끄웨에엑!” 날아오는 무관들을 직접 받아낸 자들은 심지어 피를 한움큼 토해냈다. 심후한 진기로 인해 내상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이익! 전부 공격해랏! 고작 한 명이다! 고작!” 금의위 천호장의 짜증스러운 외침에 백여 명의 금의위 무관들이 일제히 달려들려고 하는데, 천여운이 손바닥을 위로 들어 올렸다가 아래로 내렸다. -오싹! “헉? 이, 이건?” 그러자 온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전율적인 진기가 일어나며 금의위들을 비롯한 이백여 명의 서창, 대내행창의 환관들을 짓눌렀다. “이, 이게 진기라고?” “말도 안 돼!” 당황해하면서도 그들이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했으나, 동창의 환관들조차 속수무책으로 당했는데 그들이라고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쿵! 쿵! 쿵! 쿵! 안간 힘을 쓰던 삼백 명의 관료들이 차례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강제로 무릎이 꿇린 그들의 얼굴을 하얗게 질려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안 돼. 이, 이건 괴물 그 자체야.’ ‘폐, 폐하아아아!’ 아무리 절대고수라고 해도 수로 밀어붙인다면 그래도 지치게라도 만들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여겼는데 이건 아니었다.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그들은 황제 폐하를 볼 면목조차 없었다. “어찌 한낱 인간이 이런 일을....” 황제는 한 사람도 남김없이 강제로 무릎이 꿇려진 환관들과 금의위들을 보면서 질려버리고 말았다. 근엄함과 냉정함을 유지하고 싶어도 도저히 불가능했다. 잔뜩 인상이 굳어진 황제를 향해 천여운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제 좀 조용해졌군요. 그럼 다시 이야기를 해볼까요?” 여유로운 천여운과 달리 황제는 쉽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런 황제를 향해 천여운이 계속 말을 이었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줄 착각한다는 말이 어느 쪽의 입장인지 이해가 되셨는지요?” 천여운의 말에 황제는 인정하기 싫지만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의 괴물이라면 언제든지 마음먹는다면 황실에 침입해서 황제인 자신을 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점이 정말 오금이 저릴 만큼 무서운 현실이었다. “뭐, 성왕 전하에게도 말했지만 태조께서 불가침 조약을 맺은 것은 저희가 대명제국에 공을 세워서가 아닙니다. 그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죠.” “크흠!” 굴욕적이었지만 차마 반론할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치욕을 당하기에는 황제로서의 권위와 자긍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화가 치밀어 올라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황제가 입을 열었다. “백번 양보해서 귀 공의 말이 맞다고 친다. 그런데 이렇게 짐을 위협하고도 뒷감당을 할 자신은 있는가? 아무리 그대가 절대고수라 해도 모든 귀교의 사람들이 그런 것이 아닐 텐데 말이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폐하께서는 만용을 부리는군요.” 천여운의 말에 황제가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호탕하게 웃어댔다. “하하하하하핫!” 그리고는 천여운을 날카로운 눈매로 노려보며 호통을 쳤다. “짐을 우습게 여기는구나! 아무리 막무가내인 귀 공이라고 해도 이 광활한 대명제국을 다스리는 황제인 짐을 죽이게 되면 일어날 여파들을 잘 알텐데 말이다.” 황제가 보이는 자신감. 그것은 대명제국이라는 거대한 중원을 통치하는 자의 부재로 일어날 여파 때문이었다. 당장에 그가 죽게 된다면 관료들끼리 서로가 지지하는 황자를 내세워 정권을 휘두르기 위해 분명 내전이 일어날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정국이 혼란스러워진다면 한동안 눈치를 보고 있던 북쪽의 야만족을 비롯한 서역의 전투 부족들이 그 틈을 노려서 중원을 침략해올 것이다. “그대는 절대로 짐의 목숨을 담보로 위협을 가할 수...” -촤악! “허억!” 바로 그 순간 언제 도를 뽑은 것인지, 새하얀 백룡도의 날카로운 도날이 황제의 목을 살짝 베었다. 갑작스러운 돌발행동에 당황한 황제가 놀라서 소리쳤다. “지,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더냐?” “폐하께서는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서 과신이 지나친 듯 하군요.” “뭣?” “이가 빠지면 새로운 이가 나서 씹는 역할을 대신 하듯이 세상의 이치가 그러하지요. 결국 누군가가 그 역할을 하기 마련이죠.” “지, 지금 귀 공이 하는 말은....” 목소리까지 떨리는 황제와 눈을 마주하고 있던 천여운이 고개를 돌려서 성왕 주태겸을 슬며 시 쳐다보고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주 훌륭한 대타가 있군요. 게다가 제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장기말로요.” “!!!” 붉으락 했던 황제의 얼굴이 일순간에 하얗게 질려버렸다. < 74장 놈을 건드리지 마라 (1) > 끝 < 74장 놈을 건드리지 마라 (2) >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천여운의 행보를 망연자실하게 지켜보고 있던 성왕 주태겸 또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방금 전에 천여운이 한 말은 전혀 사전에 논의가 되지 않았던 부분이다. 갑자기 정말로 역모(逆謀)를 꾸미는 악당처럼 말을 하고 있는데, 전신에 오한이 일어날 만큼 무서워졌다. “지, 짐을 죽일 작정이냐?” 하얗게 질려 있는 황제의 눈동자가 떨려왔다. 눈앞에 있는 마교의 교주가 기존에 자신이 알았던 무림인들과 달리 어떠한 것에도 구애받지 않음은 느꼈지만 이건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황제가 바라보는 천여운의 두 눈동자에는 어떠한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제가 폐하를 죽이지 못할 것 같습니까?” -꾸욱! 그 말과 함께 목의 살갗에 갖다 대고 있던 백룡도의 도신이 더욱 살을 파고들었다. 확실하게 죽일 수 있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헛!” ‘이, 이 자는 정말 진심이다.’ 태어나서 한 번도 보위에 오른 직후에 작은 상처조차 나지 않았던 황제였다. 목에 도날이 파고드니 죽음에 대한 중압감은 말로 이룰 수가 없었다. “이 역도의 무리가 감히 황제 폐하께 무슨 짓이냐!” -슉! 황제의 목숨마저 위협하는 천여운의 행동에 대노한 북진무사 영조가 눈이 뒤집혀서 그를 향해 신형을 날리려했다. -스륵! 불과 한 발자국 내딛고서 튀어나가려는 그의 앞에 대호법 마라겸이 가로막았다. 영조가 신법으로 그를 제치려고 했지만 상대는 명왕이라는 별호 이외에 풍신이라 불리는 사내였다. 옆으로 몸을 뒤틀자, 바로 그 앞으로 나타나 가로막았다. ‘무슨 신법이 이렇게?’ 빠르다고 생각하려는데 그의 목덜미에 싸늘한 것이 느껴졌다. 어느새 마라겸이 그의 뒤로 신형을 파고들어 목을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있던 것이다. 찰나의 순간에 영조의 머릿속에 마라겸이 했던 경고가 스치고 지나갔다. [약속하지. 여기서 한 발자국만 더 뗀다면 수신호위라는 자와 같이 수급이 바닥을 구르게 될 것이다.] 영조의 두 눈이 커졌다. 정말 공언한 대로 고작 한 발자국 밖에 떼지 않았는데 목을 베려들었다. “아, 안돼에에엣!” 당황해서 몸을 돌려 막으려했지만 마라겸의 검은 너무도 빨랐다. 목에 차가운 검날이 닿자,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공포심에 사로잡힌 그의 얼굴은 짧은 순간에도 불구하고 식은땀으로 젖어들었다. -팍! “컥!” 목덜미를 내리치는 힘에 영조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정신을 잃고 말았다. 목을 벤다고 경고를 했지만 차마 그를 죽이진 못하고 마라겸은 검면으로 내리쳐서 기절시켜 버렸다. ‘교주님처럼은 힘들구나.’ 아무리 사전에 목숨을 경고했다고 해도 상대는 황실 고위 무관이었다. 교주인 천여운이 정말로 황실을 전복하겠다는 최후의 의지를 보이지 않고는 무작정 죽이기는 힘들었다. 결론은 이 공동 내에 있는 자들의 목숨은 천여운의 결정에 의해 달려있었다. ‘허어, 큰일이로다. 대체 이를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제자들에게 부끄러웠지만 공동파의 장문인 청수 진인조차 어찌해야 할지 난처한 표정으로 천여운과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정파 무림맹의 수뇌부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를 막아야 했다. 여기서 황제가 죽게 된다면 당금 무림과 관의 관계는 한 치 앞을 모르게 된다. 그런데 더욱 당혹스러운 것은 천여운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성왕 전하를 보위에 오르게 하겠다고? 그렇다면 성왕 전하께서는 마교와 손을 잡았단 말인가. 원시천존. 원시천존.’ 정파 무림맹은 황실과 연을 이어나가기 위해 늘 황제와 차대 보위를 물려받을 황태자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무림맹은 장자인 영왕 주태윤이 태자의 자리를 물려받을 거라고 확신했기에 여러 방면에서 그를 지원하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 극도육무문과 손을 잡고서 살인멸구를 하려든 것 때문에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할 판국이었는데, 그것을 넘어서 마교주의 뜻대로 움직이는 황자를 보위에 오르게 한다면 최악의 사태가 벌어진다. ‘그것은 안 된다. 그리 된다면 지금까지 본 맹이 지켜온 정도 무림의 균형이 무너진다.’ 정파 측에서 늘 경계했던 일이었다. 이런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막아야 하는데, 문제는 그 자신의 힘만으로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원시천존. 원시천존. 빈도가 이리 무력하게 느껴질 줄이야.’ 현경의 고수 한 사람을 상대하기 위해서 적어도 화경의 고수 다섯에서 열 명이 필요하다. 그런데 상대는 생사경의 고수다. 무림맹의 전력의 중추인 열일곱 명의 웅주들이 합공을 해도 백 초식을 견딜 수 있을까 말까한 절대고수를 무슨 수로 저지한단 말인가. ‘일인 군단 그 자체로다.’ 양지의 세계와 무림의 극명하게 다른 점이다. 단 한 명의 절대적인 고수가 미치는 영향력은 전황 전체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된다. 현 마교주 천여운이 그런 존재였다. “폐하!!!” “끄으으윽!” “당장 그 분을 놓아라!” 신하들이 충성심으로 부르짖는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진기에 강제로 억눌린 그들로서 황제를 구할 수 있는 어떠한 방법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무력하게 소리를 지르는 것이 다였다. ‘이것이 진정한 절대고수인가?’ 황제는 그제야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황궁의 한복판이고 수많은 무관, 관료들의 한가운데에 있다고 해서 절대로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절대고수인 천여운은 그 모든 것을 무시하고도 황제인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역량을 지녔다. ‘무섭다. 태조께서 불가침 조약을 절대로 깨선 안 된다는 유훈을 남기실 만하다.’ 태조는 후대의 황제들에게 절대로 무림인들과 척을 짓지 말라고 경고했다. 이것을 새겨듣기는 했지만 황제는 그것이 무림이라는 단체로 여겼지 절대고수 한 사람의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를 간과한 자신의 판단이 우책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막말로 천여운 정도 되는 절대고수가 마음만 먹는다면 밤중에 조용히 황제를 암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잠깐! 설마 이 자의 목적은.....’ 문득 황제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 역량을 지닌 사내라면 권력을 탐했다면, 방금 전에 생각한 것처럼 밤에 암살을 하든 더 조용히 자신을 처리하고서 성왕을 보위에 올리는 방법을 쓸 수도 있었다. ‘설사 태겸이를 보위에 올리기 위해 짐을 여기서 죽인다면 다른 황자들을 지원하는 관료들을 억누르기 위해 더 많은 피를 흘려야만 원하는 것을 얻게 된다.’ 눈앞의 이 사내가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수신호위를 죽일 때 손속에 일말의 자비조차 없던 자가 굳이 황궁의 관료들을 죽이 지도 않고 진기로 억누르고, 자신을 공중에 띄워서 위협을 가한다는 것은, ‘압도적인 역량을 보여주기 위함이구나.’ 무슨 수를 써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괴물임을 보여주었다. 황제와 관료들의 머릿속에 확실하게 그것이 각인되었으니 성공적이라 할 수 있었다. ‘마교주 이 자는 짐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 그렇다면....’ 이를 확신한 황제가 입을 열려고 하는데 창백한 인상의 누군가 난입하여 천여운의 앞을 가로 막았다. 그는 다름 아닌 성왕 주태겸이었다. 갑자기 나선 주태겸이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천여운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이게 무슨 짓이죠? 전하.” “처, 천 교주! 부디 여기서 멈춰주시오!” 뜻밖에도 주태겸은 황제를 위협하고 있는 천여운을 만류했다. 황제 역시도 이 같은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지 인상을 찡그렸다. ‘이 아이와 마교주는 한 패가 아니었던가?’ 천여운이 협박을 한 것 때문에 당연히 그와 주태겸이 무조건 한 배를 탔다고 여겼던 황제였다. 성왕 주태겸은 황자들 중에서 유일하게 후궁의 소생이었다. 두 번째로 태어나서 이 황자이기는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삼 황자보다도 서열 순위는 밀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천여운의 지원을 받아야 황제가 될 확률이 높아지는 입장이었다. “천 교주의 심기가 불편함을 알고 있소. 하나 분명 천 교주께서 했던 본 왕과의 약조는 극도육무문이라는 역도의 무리들의 음모를 막는 것이지 않았소.” “극도육무문?” 성왕 주태겸의 입에서 극도육무문이 거론되자 황제가 더욱 의아해했다. 그 문파명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단편적으로 그들이 영왕 주태윤을 지원하는 것과 다른 삼대 세력과 더불어 불가침 조약에 참석하고 싶어 하는 신생 세력 정도로 알고 있던 황제였다. “약조는 분명 지켰습니다만.” “그렇다고 해도 폐하를 건드리는 것은 아니지 않소!” 얼굴이 창백해져서 두려워하면서도 주태겸은 의외로 강하게 나왔다. 정말로 불의에 맞서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이 황제나 다른 관료들로 하여금 혼란을 가져왔다. 물러서지 않는 성왕 주태겸을 향해 천여운이 차갑게 식은 눈빛으로 말했다. “건국 시절에도 그랬지요. 본교에서는 순수하게 대명 황조에 도움을 주었지만 늘 결과는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천여운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수신호위를 눈빛으로 가리켰다. 압도적인 힘이 없었다면 수신호위에게 패해서 마교는 황실에 도움을 주고도 강제로 충성 맹세를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 그것은.....” “폐하의 말씀대로 호의가 계속되면 그것이 권리인 줄 알죠. 본교에서는 이제 그것을 그만두려고 합니다. 굳이 대명제국과 황실, 그리고 폐하께 호의를 베풀 이유를 못 느끼겠군요.” 천여운의 몸에서 치솟는 살기에 황제의 얼굴이 굳어져갔다. 살기만 보아선 당장에 베어버릴 기세였다. 이에 주태겸이 다급히 외쳤다. “머, 멈추시오! 폐하께서는 모든 진실을 알지 못해서 그런 것이오!” “죄송하지만 지금 저는 진실을 굳이 설명할 기분이 아니군요. 당장 비키지 않는다면 강제로 치워버릴 겁니다.” “비킬 수 없소! 폐하를 죽이겠다면 본 왕도 같이 베시오.” 부들부들 떨면서 양 팔을 벌려서 막아선 주태겸을 향해 천여운이 혀를 차면서 말했다. “고집이 세군요.” 그 말과 함께 천여운이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우드드득! “끄아아아아악!” 그러자 양팔을 벌리고 막고 서있던 주태겸의 다리가 기이하게 꺾이면서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다리가 부러져서 비명을 지르는 주태겸의 모습에 당황한 황제가 외쳤다. “이게 무슨 짓이오! 귀 공은 짐을 죽이고 이 아이를 보위에 올릴 거라 하지 않았소!” 아무리 후공의 소생이라도 자식은 자식이었다. 바로 앞에서 자식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부모가 누가 있겠는가. 그런 황제를 향해 천여운이 전혀 개의치 않고서 말했다. “살아만 있으면 상관없습니다만.” “이...이 자가....” 황제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기존의 통념을 완전히 무시하고서 행동하는 천여운을 전혀 예측할 수가 없었다. 그가 알고 있던 정파 무림인들과는 너무도 달랐다. ‘이, 이게 마교인건가.’ -꽉! 그때 바닥에 쓰러져서 비명을 질러대던 성왕 주태겸이 핏대가 선 얼굴로 그의 발목을 잡고 늘어져서 외쳤다. “제발! 제발 천 교주 노여움을 거두고 폐하를 살려주시오!” 애원하는 목소리에도 천여운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서 말했다. “두 다리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셨군요. 그렇다면 그 두 팔도 앗아가도록 하죠.” 천여운이 손을 들려고 하자 황제가 다급히 외쳤다. “처, 천 교주! 멈추시게!” “제게 명령하지 마십시오.” -뿌드드드! "끄어어어어!" 천여운이 이를 무시하고서 손을 돌리는 시늉을 하자, 성왕 주태겸의 두 팔이 강제로 돌아가려고 했다. 눈시울이 붉어진 황제가 통곡에 찬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짐이! 짐이! 졌소!” 황제의 입에서 나온 충격적인 패배 선언에 엎드려 있는 환관, 금의위들, 그리고 두 제독과 지휘사, 첩형들 누구라도 할 것 없이 굳어져버렸다. 절대로 나와서는 안 될 말이 대명제국 황제의 입에서 튀어온 것이다. “어찌 이런 일이.....” “폐....폐하아아아아....” 나라를 잃은 표정으로 넋을 놓고 있는 관료들의 반응을 뒤로 한 채 황제가 목이 매여서 다 쉰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짐이 졌네. 천 교주가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줄 터이니, 부디....부디 천 교주께서 짐과 성왕 아니, 짐의 자식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시게.” 황제의 완전한 항복 선언. 이것이 중원에 퍼져나간다면 그 파장은 말로 이룰 수가 없을 것이다. “그 말씀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그렇네.” 무슨 일이 있어도 과감하게 황제의 목을 벨 것만 같았던 천여운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드디어 원하는 대답을 얻어낸 것이었다. 그런 천여운의 표정에 황제가 괴로웠는지 두 눈을 감았다. ‘역시.....원하는 것이 있었구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던진 말이었는데, 결국 상대가 의도하는 대로 움직인 셈이었다. -털썩! “크윽.” 황제의 몸을 강제로 떠오르게 했던 진기가 풀렸다. 바닥에 주저앉은 황제는 얼마나 떨리는지 다리가 풀려서 일어나질 못했다. 그런 황제를 천여운이 밑으로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요구 조건은 이틀의 폐하의 건안궁에서 듣도록 하지요. 정식 절차를 위해서 옥새를 준비하도록 하십시오.” “오, 옥새!” 천여운의 입에서 나온 옥새라는 말에 황제의 표정이 굳어졌다. 옥새까지 찍어서 정식으로 공문을 만들어버리면 태조 폐하가 했던 것처럼 조약을 맺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대명제국과 황제에게 있어서 최대의 치욕이었다. 이에 분노를 느낀 황제가 떨리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는데, 천여운이 빙그레 웃으면서 경고했다. “이틀의 말미를 드린 것은 여기에 있는 성왕 전하와 황궁 관료, 그리고 공동파의 도사들께 진실을 들으시라고 여유를 드린 겁니다. 그리고....” 천여운이 손을 강하게 허공으로 휘저었다. 그러자 진기에 억눌려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던 삼백여 명의 금의위와 환관들이 누군가 강제로 머리를 내려친 것처럼 바닥에 세차게 이마를 박았다. -쾅! 쾅! 쾅! “크헉!” “컥!” 이마에 피를 흘리는 그들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죽은 것은 아니었지만 강한 뇌진탕으로 기절한 것이다. “혹시나 쓸데없는 짓을 한다면 이번에는 정말로 폐하의 목을 취하겠습니다. 현명한 판단을 하시리라 믿습니다.” “크.....큭......알겠소.” 명백한 협박에 황제가 고개를 숙이며 비통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천여운은 처음부터 이들을 쓰러뜨리거나 죽이고자 마음먹었다면 곧장 죽일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더 이상 눈을 마주하지 못하는 황제를 뒤로 한 채, 천여운이 수하들을 향해 말했다. “돌아간다.” “충!” 큰 소리의 복명과 함께 마교인들이 먼저 공동 밖으로 나가는 천여운의 뒤를 따랐다. 오랜 세월을 황릉의 보물을 지켜왔던 일 태상, 아니 이제는 대장로 란영이 시원섭섭한 얼굴로 공동을 훑어보고는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지고 일 각 뒤까지 넋을 놓고 있던 두 제독과 지휘사가 무릎을 꿇고서 황제에게 비통한 목소리로 외쳤다. “폐하아아아! 신들이 무력하여 불충을 저질렀사옵니다. 부디 이 치욕을 갚을 기회를 주십시오!” “치욕을 갚을 기회를 주십시오!” 그런 그들을 향해 멍하게 있던 황제가 서서히 눈이 뒤집혀서는 노기가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 자가 떠난 지 한참 후에나 그런 소리가 나오는가?” 황제의 날카로운 일침에 두 제독과 지휘사가 부끄러움에 붉게 상기되어 어쩔 줄 몰라 했다. 변명할 여지가 없이 그들은 천여운과 마교인들의 기척이 사라질 때까지 차마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에 공동파의 장문인 청수 진인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지만 되려 호통만 듣고 말았다. “폐하....혹시 괜찮으시다면 저희 무림맹에....” “진인께서는 부디 그 입을 다물길 바라네.” “.....원시천존. 원시천존.” 그런 그들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황제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말했다. “짐을 더 수치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다면 더 이상 이 일을 거론하지 마라. 그리고 절대로 마교주.......후우, 놈을 건드리지 마라.” “.....명을 받듭니다!” 힘없이 대답하는 제독들을 뒤로 하고서 황제가 바로 앞에 쓰러져 있는 성왕 주태겸을 살폈다. 두 다리가 부러진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기절한 듯 했다. 그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황제가 그의 등을 가볍게 쓰다듬어 주고서 우두커니 서있는 첩형들에게 명했다. "여봐라. 짐의 아들을 어서 어의에게 데려가도록 하라." "네...네이!" -씨익! 그런데 기절해 있다고 생각한 주태겸의 입 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가 있었다. < 74장 놈을 건드리지 마라 (2) > 끝 < 75장 오대고수라는 칭호 (1) > 황궁 의무실에서 치료를 받고난 성왕 주태겸은 자신의 궁전인 성양궁으로 옮겨졌다. 성양궁의 침소로 돌아온 주태겸은 히죽거리며 좋아했다. 한 번도 어의에게 진료를 받아본 적이 없었는데 그런 호사를 누리게 되니 기분이 남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침소로 금의위 남진무사 연남군이 방문했다. 들어오자마자 연남군은 내내 걱정했었는지 곧장 물었다. “전하. 다리는 괜찮으시옵니까?” “괜찮을 리가 있느냐? 평생 처음 겪어보는 아픔이었다.” 주태겸이 부목을 대고서 붕대를 감고 있는 자신의 두 다리를 쳐다보았다. 다리가 부러졌을 때만 하더라도 천여운이 원망스러웠다. [약간 아플 겁니다.] 그의 전음을 듣고 ‘아. 그래도 연기를 하는 것이니 적당히 하겠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두 다리를 부러뜨릴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망할.....’ 덕분에 어의로부터 완치는 한 달이 걸리고, 보름 동안은 제대로 걷지 못할 거라는 진단을 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었다. 어느 부위든 그렇겠지만 다리는 잘못 부러지면 평생 절름발이나 걷지 못하는 수가 있었다. 그런데 어의가 그의 상처부위를 보고서 천운이라고 말했다. [어떻게 다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연골이나 인대에는 손상이 가지 않아서 잘 요양만 한다면 뼈가 전보다 더 튼튼하게 아물 겁니다. 뼈를 다시 부러뜨려서 맞추려고 했는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서 다행입니다. 전하.] ‘나 참 이걸 감사해야 할 일인가......’ 어의의 그 말을 듣고서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그때 천여운의 기세만 보아서는 사전에 전음을 보낸 것과 달리 과하다고 여겼는데, 최대한 신경써준 것이었다. 덕분에 이런 희생을 통해 얻은 것은 굉장히 컸다. 어의에게 치료를 받는 내내 황제가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살펴보았다. ‘그게 최고의 호사지.’ 황제는 장자인 연왕 주태윤에게는 부드러웠지만 다른 자식들에게는 유독 냉혹하게 대했다. 그러나 이번 일로 황제의 신뢰를 사게 되었으니 절대로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다. ‘처음 아들이라고 불렀다.’ 기분이 묘했었다. 후궁의 소생인 그를 한 번도 아들이라고 부른 적이 없는 황제였다. “아무튼 단오제까지는 꼼짝없이 궁에서 요양을 하게 생겼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혹여 전하께서 걷지 못할까봐 많이 걱정했었습니다. 게다가......천 교주, 그 자가 어찌 튈지 몰라서 조마조마했습니다.” 처음 계획했던 것과 다르게 황제가 등장하는 변수가 발생하면서, 모든 상황이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기에 내내 걱정했던 남진무사였다. 특히 두 기수 선배인 북진무사 영조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사전에 미리 알려주고 싶어도 그는 도지휘사를 상시 호위하는데다가, 지금의 계획도 이른 새벽 아침에 천여운에게 통보를 받는 바람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애초에 적당히 부러뜨렸으면 얼마나 좋아. 그냥 천 교주는 다 좋은데....아니 다 좋은 것도 아니군. 아무튼 적당히 라는게....응? 남진무사 왜 그런 표정을?” 한 번 불만이 터지자 연신 투덜대는 성왕 주태겸을 남진무사 연남군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어디 불편한가?” “......저, 전하.....옆에.....” “옆에? 대체 뭘.....헉!!!” 별 생각 없이 침상의 좌측으로 고개를 돌린 성왕 주태겸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굳어버렸다. 언제 들어온 것인지 천여운이 바로 옆에 서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무공이 절대로 낮은 것이 아니었지만 천여운의 기척을 감지하기에는 격의 차이가 심했다. “처, 천 교주? “나름 신경써드린 것을 그리 생각하실 줄 몰랐군요.” 무덤덤한 목소리였지만 그것이 오히려 성왕을 더욱 궁지로 내몰았다. ‘이익! 아무리 그래도 황자의 침소인데 인기척이라도 내면서 나타나야 할 거 아냐!‘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뿐이지 돌아버릴 것 같았다. 식은땀을 흘리며 주태겸이 얼른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하...하하하핫, 천 교주. 그런 뜻이 아니라. 아! 그래. 조금만 더 힘을 빼면 완벽했을 것 같다는 그런 뜻이었소.“ 변명 같지 않은 변명을 내뱉었다. 가끔 천여운을 대면할 때면 황제의 눈치를 보는 관료들의 입장이 이해가 갔다. 누구나가 당혹스러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의도하지 않은 말들을 막 내뱉어 수습하려든 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네~네~. 그러시겠죠.” “험험, 천 교주, 본 왕을 믿지...” “제가 말씀드린 대로 황제 폐하께는 아뢰었습니까?”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는 천여운의 말에 주태겸이 찝찝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천여운은 황제를 위협하는 내내 계획을 수정해서 새롭게 고해야 할 사실들을 바꿔주었다. 그런 그를 보면서 성왕은 괴물이라고 생각했다. ‘무공은 그렇다 치더라도 머릿속에 여러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동시에 여러 일들을 어떻게 하는 거지?’ 금의위, 환관들을 진기로 억누르면서 황제를 구속하며 대화를 나눴다. 그 와중에 전음까지 보냈으니, 한 번에 여러 가지 일들을 동시에 진행하는 것이 신기했다. 물론 천여운의 머릿속에 있는 나노가 보조를 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연히 천 교주가 일러준 대로 했소.” 의무실에서 그를 돌보던 황제는 분노해서 건안궁으로 돌아갔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극도육무문이라는 문파로 인해서 이 모든 일이 벌어진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일부는 천여운이 증거를 조작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극도육무문은 영왕 주태윤을 꼭두각시 황제로 삼아 대명제국을 지배하려는 역당(逆黨)이 되었다. “폐하께는 천 교주가 극도육무문으로부터 황궁을 구하려고 했다고 아뢰었소. 아마 폐하께서도 당장에는 풀리지 않으셔도 천 교주를 이해하실 것이오.” “뭐, 굳이 저를 이해하진 않으셔도 됩니다.” 애초에 목적은 극도육무문의 음모를 파하고 그들에게 죄상을 넘기는 것이었다. 굳이 황제가 자신을 긍정적으로 보든 아니든 그런 것은 개의치 않았다. 천여운의 눈치를 보던 주태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천 교주, 괜찮다면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소?” “......말씀하십시오.” “그....폐하께 이틀 뒤에 무엇을 요구하려고 하는 것인지 궁금해서 그런데 혹시 말해줄 수 있소?” 사실 천여운이 원하는 것을 대부분 얻어낸 것으로 안다. 굳이 요구하지 않아도 극도육무문은 대명제국에 있어서 역당으로 몰릴 것이다. 어차피 관과 무림의 불가침 조약 때문에 조세(租稅)도 거두지 않는데, 딱히 무엇을 요구한 단 말인가. “뭐, 요구라기보다는 제안입니다.” “제안?” 영문을 알 수 없는 천여운의 말에 주태겸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요구를 들어준다고 했는데 제안을 한다는 것은 황제가 거절할 수도 있는 선택권을 주겠다는 의미였다. 천여운이 그 제안의 내용을 말해주자 주태겸의 표정이 더욱 아리송해졌다. “......천 교주. 요구도 아닌데 폐하께서 그 제안을 받아들일 것 같소?” 아무리 모든 원흉이 극도육무문인 것을 알게 된 황제라고 해도 황릉의 지하공동에서 있었던 치욕을 쉽게 잊을 리가 없었다. ‘수신호위마저 죽였는데....’ 과연 제안을 들어줄 지가 의문이었다. 자신이라면 거절할 수 있다면 무조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천여운의 반응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자신만만한 눈빛으로 확신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절대로 거절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나고, 천여운은 예정대로 황제가 기거하는 건안궁의 대전을 방문했다. 옥새를 찍어가면서 공문서를 만들어 조약을 맺는 것 자체가 수치라고 여긴 황제는 다른 관료들을 부른다거나 함정을 파는 허튼 수작을 부리진 못했다. 천여운은 성왕 주태겸에게 말했던 것처럼 요구가 아닌 제안이라며 그것을 말했다. “.....입니다. 폐하께서 거절하신다면 앞서 말씀드린 데로 불가침 조약만 정상적으로 진행해주시면 됩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제안에 황제가 묘한 표정이 되었다. ‘.....이것을 요구도 아니고 거절해도 되는 제안이라고?’ 황제는 거의 일 각 가까이 침묵을 하면서 고민을 한 끝에 제안에 대답을 했다. 숙고 끝의 대답에 천여운의 입 꼬리가 흡족하게 올라갔다. * * * 황릉 사건이 있고 열흘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하남성에 있는 정도 무림맹의 본단 건물에서는 웅주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최근에 무림맹 역시도 내부 간자 사건을 겪고, 극도육무문의 위협 때문에 각 웅주들이 각자문파와 방파의 제자들을 이끌고 전선으로 나가 있어서 의석은 고작 절반 밖에 채우지 못했다. 이 회의를 소집 요청을 한 사람을 다름 아닌 공동파의 장문인이자 무림맹의 십칠웅주(十七雄主) 중에 십이웅주의 좌를 차지하고 있는 청수 진인이었다. “아니 청 진인. 그것이 정말 참 말이오?” 가장 말석의 좌에 앉아 있는 희끗한 짧은 턱수염의 중년인이 심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는 웅주들 중에 말석인 십칠웅주이자 오대세가 중 하나인 하북팽가의 가주를 맡고 있는 팽구유였다. 청수 진인이 무림맹의 사신으로 황실에 갔었던 일들을 보고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 내용 중에 거론된 뜻밖의 인물로 인해 웅주들은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마교주라니? 그가 어떻게 황궁에 나타난단 말이오?” 마교에 있어야 할 마교주가 황궁에 나타났다고 하니 어이가 없었다. 비록 동맹을 맺었다고는 하지만 개봉은 엄밀히 정파의 영역이었는데, 아무런 통보도 없이 멋대로 저지른 셈이었다. “자세히는 빈도도 알 수 없으나, 성왕 전하가 끌어들인 것 같소이다. 원시천존.” “아직 젊어서 그런지 선을 모르는구려.” “아미타불, 그것보다 극도육무문이 어떻게 영왕 전하를 이용해서 황궁에 침투한 건지가 더 심각한 문제가 아닌지.” 긴 탁상에서 네 번째 자리에 앉아 있던 승려복의 중년의 여인이 끼어들었다. 그녀는 사웅주이자 비구니들로만 이루어진 불가의 문파인 항산파의 문주인 정선 사태였다. 여인이었지만 무림에서 검후(劍后)라 불리는 검의 고수였다. “사태의 말에도 일리가 있소. 청 진인의 보고대라로면 극도육무문이 관에도 손을 뻗고 있다는 말이 아니오.” 정선 사태의 말에 두 번째 자리에 앉아 있던 백미의 노스님이 동의했다. 노스님은 이웅주이자 맹주와 더불어 정도 무림맹의 상징적인 존재라 할 수 있는 소림사의 방장인 각연 대사였다. 희대의 내가기공인 역근경과 구양진경을 극성으로 익힌 그는 무림에서도 열 손가락에 꼽히는 내가 고수이다. “아미타불, 만약 그들이 관을 움직일 수 있게 된다면 무림이 혼란에 빠질 수 있소.” “......본맹의 위치도 흔들리게 되겠죠.” 무림에서 유일하게 관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정파 무림맹뿐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 극도육무문이 영왕을 움직여 대명제국의 황실을 조종하게 된다면 그들을 당연히 밀려날 게 뻔했다. 절대로 좌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걸 생각한다면 젊은 마교주에게 고마워해야 할 일이 아니오. 천여운 교주가 그것을 막았다고 하니, 최악의 사태는 면한 것이 아니오?” 각연 대사의 말에 대답한 사람은 긴 수염에 풍채가 좋은 검은 도사복을 입은 노인이었다. “풍 장문인.” 노 도인은 화산파의 장문인이자 육웅주인 풍청운이었다. 제 이군사인 제갈소희와 더불어 십만대산 마교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천여운에게 호의 적인 인물이었다. “풍 장문인은 애송이 마교주와 안면이 있다고 늘 그에게 호의적이구려.” 십칠웅주 팽구유가 비꼬듯이 말했다. 그는 사파를 비롯해 마교인이라면 학을 떼는 인물이었다. 극도육무문이 나타나면서 마교와의 임시 동맹이 추진될 당시에도 절대로 안된다며 끝까지 결사반대 했었다. 물론 웅주회의는 다수결 체제였기에 각하되었다. “원시천존. 원시천존. 팽 가주께서는 늘 호전적이기만 하시구려. 무인으로서 본분을 지키시려는 모습이 존경스럽소.” “아니 뭐요!” 그런 팽구유의 비꼬는 말을 유려하게 받아치는 풍청운이었다. 아직까지 모든 보고를 마치지 않았는데, 각 웅주들이 서로가 중요시 여기는 부분들로 갑론을박이 벌어지자, 이를 지켜보던 청수 진인이 결국 참지 못하고 탁자를 내리쳤다. -쾅! “허어! 아직 빈도의 말이 끝나지 않았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청수 진인의 태도에 모두가 의아해했다. 보고의 대부분은 끝났다고 생각하여 자신들의 의견을 나누고 있던 웅주들이었다. 그러나 청수 진인은 정작 중요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극도육무문의 고수를 처리하고 동창 제독과 영왕 주태윤을 해결하고 나서 벌어졌던 일들을 말이다. “아무래도 진인께서 아직 본론을 말하지 않은 듯 하군요. 여러 웅주분들께서는 잠시만 발언을 멈추시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때 회의 탁자의 가장 상석에 앉아 있는 사내가 웅성거리는 웅주들을 진정시켰다. 특이하게도 왼쪽 눈을 감고 있는 고상한 분위기의 중년인이었다, 겉보기에는 무인이 아니라 황궁의 문관과도 같은 느낌을 주는 이 자는 바로 무림맹의 맹주이자 오대고수의 일인인 북정도 이목이었다. “흠흠, 맹주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청 진인께선 마저 말씀해주시지요.” 좌중이 조용해지자 청수 진인은 그 다음에 있었던 일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극도육무문이 연관되어서 영왕 주태윤과 일을 꾸몄을 때도 놀라했던 웅주들의 표정이 서 서히 심각해져갔다. “그게 정말이오? 허어.....황제의 수신호위가 파상검제 임규화라니.” 파상검제 임규화. 한 때 구십여 년 전, 중원의 오대고수의 일인이자 검의 황제라 불렸던 자였다. 무림맹의 웅주들이 그 이름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 절대고수가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것도 모자라 황실의 숨겨진 힘이라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놀라운 것은, “뭐, 뭐요? 지금 뭐라고 했소?” “마교주가 수신호위를 이겼소. 그것도 고작 한 초식하고도 두 식만으로 말이오.” 제대로 된 초식은 단 한 번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초식도 아니라 절묘한 검식이었다. 청수 진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 충격적이었는지 웅주들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알기로 마교주 천여운은 이제 고작 약관에 불과했고, 교주로 취임한지 몇 달도 되지 않은 애송이에 불과했다. 마교의 내전을 해결할 만큼 무공이 뛰어나다고는 들었지만, 높아봐야 후기지수들 중에서 상위권에 속하는 정도로 여겼었다. “아무리 나이가 들었다고 해도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것은 현경의 고수가 아니오?” “허어, 그렇소. 적어도 맹주님이나 구패의 그 세 분들과 비슷한 실력자이라 터인데, 마교주에게 당했다는 것은....” “원시천존. 원시천존. 빈도도 예전에 마교에서 천 교주를 본 적이 있지만 오대 고수를 이길만한 실력자는 아니었소. 청수 진인께서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것이 아니오.” 웅주들은 청수진인의 말을 쉽게 믿지 못했다, 당대의 오대고수 중 한 사람인 무쌍검 왕전을 이겼을 때조차 정보를 차단했기 때문에 천여운의 진정한 무위를 알고 있는 자는 바로 앞에서 지켜본 청수 진인뿐이었다. ‘대체 무엇을 보았기에 저렇게 떨고 있지?’ 다른 웅주들과 달리 맹주만이 떨고 있는 청수 진인의 손등을 발견했다. 마교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내내 청수 진인은 이상할 정도로 두 손을 떨고 있었다. “잘못 안다라.....빈도가 지금껏 수많은 마교의 무인들을 보았지만 그 자는 다르오.” “다르다?” “마교주 그 자는 인간의 범주를 벗어났소, 아니 어쩌면 신이라 불러야 할 지 모르겠소. 그래 그 자는 마신이오.” “아미타불. 마신이라뇨? 청수 진인께서 아무래도 여러 일을 겪으면서 혼란스러운 듯한데, 잠시 차라도 마시면서....” 항산파의 정선 사태가 그에게 흥분을 가라앉히라고 권하려고 하는데, 청수 진인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큰 소리로 말했다. “대체 웅주들께서는 빈도의 말을 어찌 이렇게 가볍게 듣는 것이오! 마교주는 빈도가 보는 앞에서 무형검을 썼소. 그것으로 황제의 수신호위의 목을 베고서, 삼백 명이 넘는 무공을 익힌 고수들을 진기로 제압하는 신위마저...” 천여운이 오대고수 급의 고수인 파상검제 임규화를 죽였다는 것보다 믿기 힘들었다. 아니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사실이었다. 무림맹의 맹주이자 정도 무림을 상징하는 최고 고수인 북정도 이목조차 현경의 고수인데, 갓 무림에 등장한 신임 교주가 생사경의 고수라는 것은 무림 전체의 판도에 영향을 줄 만큼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그렇게 난리가 나있는데, 갑자기 무림맹 본단 회의실의 문을 누군가 다급히 두드렸다. -쿵! 쿵! 쿵! 회의 중에는 큰 별고가 없이는 방해하지 말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급한 소식인 듯 했다. 무림맹의 외총관 감운서였다. “매, 맹주님! 지, 지금 개봉에 있는 무림맹의 지부장에게서 급보가 날아왔습니다. 헉헉.” “급보?” 의아해하는 무림맹주 이목과 각 웅주들을 바라보며 감운서가 호흡을 가다듬고 말했다. “전날 정오에 대명제국의 황궁에서 국교를 바꾼다고 공표했습니다.” “아니. 갑자기 그게 무슨 뜬금없는 소린가?” 대명제국의 국교(國敎)는 현재 도교(道敎)이다. 그리고 황실의 도교의 행사를 주관하는 것은 무림맹에 속해있는 도가 계열의 문파들이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행해왔다. 그런데 황실에서 일언반구의 언질도 없이 국교를 바꾼다고 하는 것은 무림맹의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운 소식이었다. “원시천존. 원시천존. 국교를 바꾼다니 대체 무엇으로 말인가?” 화산파의 장문인 풍청운이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이에 외총관 감운서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힘들게 입을 열었다. “하아.....이걸 어찌 말씀드려야 할 지.....” “뜸들이지 말고 말하게!“ 다그치는 십칠웅주 팽구유의 말에 감운서가 결국 그것을 말했다. “황궁에서....대명제국의 국교를 천마신교로 바꾼다고 공표하였습니다.” “!!!” -쾅! 전혀 예상하지 못한 외총관 감운서의 충격적인 급보에 모든 웅주들이 서로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두 눈이 커져서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 75장 오대고수라는 칭호 (1) > 끝 < 75장 오대고수라는 칭호 (2) > 황도(皇都) 개봉. 그 개봉의 가장 중심부에 자리한 용정궁 근 십만 명에 이르는 황궁 관료들을 수용하기 위한 이 궁전에서도 가장 화려하면서 웅장한 곳을 꼽으라면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건안궁을 말할 것이다. 황금빛 기와에 건물을 받치고 있는 기둥까지 전부 황금으로 도배된 건안궁은 황제가 기거하는 곳이다. 건안궁의 대전에 대내행창의 제독 서태식과 서창의 제독 육청은이 무릎을 꿇고서 머리까지 바닥에 박아가며 주청을 올리고 있었다. “폐하! 신들을 파직하셔도 좋습니다. 부디 국교 건에 관해서 명을 거두어주시기 바랍니다. 이건 아니옵니다.” “폐하! 서 제독이 말씀드린 것처럼 국교의 건은 부디 철회해주시옵소서! 다른 훌륭한 종교가 이렇게 많을 지언데 천마신교라뇨.” 일반 관료들 중에서는 황제의 결정에 반대를 하는 이들이 없었다. 하지만 이들은 천마신교의 교주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 교주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눈앞에서 지켜본 당사자들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그들은 황제의 결정을 듣고 나서 도통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황제가 힘든 일을 겪게 되면서, 혹 정신적으로 이상이 생겼다는 추측마저 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알아서 무릎을 꿇는 자들도 있는데 어찌 이런 결정을 내리셨나.’ 정도 무림맹이나 정파인들은 황실에 대한 태도가 확연히 다르다. 그들은 다른 백성들이나 관료들과 마찬가지로 황제를 하늘로 받들 줄 알았고, 관에 호의적이기에 한결 대하기가 편했다. 그런데 지난 사건으로 무림의 모든 세력이 정파와 같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았다. “폐하! 천마신교의 교인들은 대명제국에 따를 위인들이 아니옵니다. 특히 마교주 천여운은 불손하게도 폐하를......” -쾅! 서창의 제독 육청은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황제가 옥좌의 한 귀퉁이를 내리쳤다. 심기가 불편해진 용안에 육청은은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순간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황릉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을 더이상 거론하지도 입 밖으로 내뱉지 말라고 했는데, 주청을 하면서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실수하고 말았다. “폐하. 신이 불경을 저질렀나이다.” -쿵! 쿵! 육청은이 대전 바닥에 세차게 이마를 찧으며 사죄했다. 몇 번을 박고서 이마에서 피가 흘려 내려서야 황제는 손을 들어 그만하라고 표시했다. “자...자비로우신 폐하의 은덕에 감사드립니다.” -주르륵! 이마에서 흐르는 피가 얼굴을 뒤덮은 서창 제독 육청은이 이를 감사히 여겼다. 최악의 말실수를 했기에 피를 보는 것을 감수한 보람이 있었다. “흐음.” 황제가 무릎을 꿇고 있는 두 제독을 굳은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이들의 심경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 또한 처음에는 당연히 마교주 천여운이 했던 제안을 단번에 거절하려 했었는데, 중도에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짐이 묻겠다. 경들은 적(敵)의 적(敵)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적의 적이라 하심은....” 지금까지 그들의 주청에 대해 불편한 심기만 보이던 황제였다, 그런 황제가 처음으로 어심을 보이는 질문을 던지자 두 제독들은 고민에 휩싸였다. 신중하게 답변을 해야 했으나, 워낙 옛날부터 답이 정해진 질문이었다. “.....적의 적은 아군이나 다름없습니다.” 조심스러운 대내행창 제독 서태식의 말에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천 교주가 짐에게 했던 말이다.” “아!” 건안궁에 찾아와 요구 조건에 대한 공문서를 만들 당시에 천여운이 국교에 관한 제안과 함께 했던 말이었다. 물론 약간의 차이는 있었다. 황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었지만 천여운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물론 확실한 전제와 함께 말이다. [극도육무문은 본교에 있어서 반드시 없애야할 적입니다. 이것을 미리 전제로 말씀드렸으니, 한 가지 질문 드리겠습니다. 폐하라면 적의 적을 어찌 하실 겁니까?] 천여운이 한 말의 의미를 모를 리가 없었다. 황제는 성왕 주태겸을 비롯해 감식반 의원들, 그리고 정파 무림맹의 청수진인 등 여러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증언들을 통해 극도육무문이 황실에도 위험한 존재임을 각인하게 되었다. ‘만약 천 교주 그 자가 놈들을 막지 못했다면 태윤이 그 아이가 태자가 되어서 극도육무문의 꼭두각시가 되었을 것이다.’ 최악의 상황을 맞을 뻔했던 것이다. 그리 되었다면 황릉의 보물 탈취 및 수호전 전사들의 살해를 마교 측에서 했다고 오인하여서 그들과 부딪쳤다면 그 뒷일은 상상도 하기 싫어졌다. “하나 폐하, 적의 적이라는 논지로 아뢴다면 정파 무림맹 역시도 극도육무문의 적입니다. 게다가 폐하의 대명제국에 호의적이기마저 합니다.” 대내행창의 제독 서태식이 어떻게든 황제를 설득하기위해 반박했다. 그러나 그것은 도리어 파고들 틈만 주고 말았다. “그래서 정도 무림맹에서 극도육무문을 막았나? 심지어 사신으로 왔던 청수 진인은 짐이 마교주 그 자에게 치욕을 당하고 있을 때도 무력하게 지켜보기만 했지.” “그, 그것은.....” 황제는 아직도 그것을 잊지 못했다. 공동파의 장문인인 청수 진인은 무림에서도 명성이 높은 무인이라 들었다. 그런데 정작 마교주가 있는 앞에서는 말 한마디 꺼내지 않고 조용히 수수방관했다. ‘그런 자가 무림의 고수라고? 하!’ 그나마 관료들은 무위가 부족해도 황제를 구하기 위해 목숨마저 던지려 했는데, 정파 무림맹의 수뇌부이자 황실 국교를 운영하는 도사란 사람은 마교주의 무력에 굴복하고 말았다. “짐은 고민했다. 극도육무문 그 역도의 무리들은 황궁 수호전의 전사들마저 막지 못한 무서운 적이다. 그런 자들이 짐과 대명제국을 노리는데, 정작 연을 맺고 있는 정도 무림맹의 도인들이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굳이 국교를 맡길 이유가 없다.” ‘이런....’ 두 제독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들은 오랜 세월 황제를 보필하면서 그의 성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우리가 간과했구나.’ 제독들은 황제가 치욕을 당했기에 더욱 정도 무림맹을 가까이 할 거라 여겼다. 훗날에 복수를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있었다. 그 치욕을 당하는 상황 속에서 정도 무림맹의 수뇌부라는 작자는 완전히 방관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폐하는 정치에 있어서 감정을 배제하고 철저히 이(利)를 추구한다.’ 황제는 효용성이 떨어지는 자는 과감히 버리고, 신분을 불문하고 쓸 만한 자는 새롭게 인사 등용을 단행할 만큼 정치색이 파격적이었다. 이것이 아귀가 들어맞았던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지만 어찌 그런 무뢰배들을....’ 황족과 관료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을 기용하는 것은 일종의 위험한 도박이었다. 두 제독의 입장에서는 그 점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황제는 짧은 일 각 동안 수많은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황제는 원래 이번 일을 계기로 무림인에게 학을 떼게 되어서, 정파든 마교든 어느 곳을 막론하고 불가침 조약대로 완전히 손을 떼려고 했다. ‘짐이 손을 뗀다고 해도 황궁에 간자를 보낼 만큼 간이 부은 놈들이 쉽게 포기할까? 아니다. 분명 또 다시 손을 쓸 게 틀림없다.’ 자라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했던가. 황제의 마음이 딱 그랬다. 단순히 감정적인 부분만으로 일을 처결하기에 앞날이 우려된 것이다. 그래서 모든 감정을 배제하고서 계산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생각하면 그 자는 무서울 정도로 강하다.’ 눈앞에서 그 괴물 같은 능력을 보았다. 손짓 한 번에 수많은 무공을 익힌 고수들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심지어 이백 년을 살아왔고 기린의 피를 먹은 수신호위마저 검을 몇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 싸늘한 주검으로 만들었다. ‘게다가 그 극도육무문이라는 세력과 동창에서 계획한 것을 파악해서 전부 수포로 돌릴 만큼 지략마저 뛰어나다.’ 이렇게만 계산한다면 반드시 손에 넣고 싶은 인재였다. 최악의 적이 반대로 생각하면 최강의 아군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 적의 적을 곁에 둔다는 것은 일종에 적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함이다.’ 마교주 천여운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천마신교가 국교가 된다면 극도육무문에서도 경각심을 가져서 쉽게 황궁을 넘보지 못할 것이다. 여러모로 득이 되는 사항이었다. “짐이 천마신교를 국교로 두어서 극도육무문을 견제하기 위함이다. 이것보다 나은 상책을 들고 오지 않는다면 짐의 결정이 철회될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결국 강경한 황제의 결정에 두 제독은 물러나야만 했다. 하지만 황제는 단 한 가지 여지를 남겼다. ‘더 나은 상책!’ * * * 하남성에 있는 정도 무림맹의 본단 건물. 웅주들이 모여 있는 회의장은 연 사흘 동안 난리가 나있는 상태였다. 국교를 통해서 황실과의 연을 이어나가고 있는 정도 무림맹에 있어서, 이번 황제의 공표는 가히 충격적인 결정이었다. 마교와 동맹을 맺고서 극도육무문에 집중을 하고 있던 그들의 입장에서는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셈이었다. 게다가 현 마교주 천여운의 무위에 대한 논란도 끊이지 않았다. 무림의 역사상 고작 약관에 불과한 자가 생사경에 올랐다는 말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지금까지 독고구패가 말했던 무형검의 신위를 보여주었던 극소수의 절대자들 또한 무림에서 적어도 수십 년을 활동한 노고수들이었다. 아무리 공동파의 장문인인 청수 진인이 보았다고 증언을 해도 쉽게 믿기지가 않는 것은 당연했다. 현경의 경지에 올랐다고 해도 상식을 넘어서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던 차에 무림맹에 손님이 찾아온다. 남색 관료 복장에 수염이 없는 중년의 환관이었는데, 그는 황궁 대내행창의 두 첩형 중의 한 사람인 미주라는 자였다. 미주는 대내행창의 제독의 명을 받고 무림맹을 방문했다. 그에게서 제독 서태식의 의중을 듣게 된 무림맹의 웅주들은 각양각색이 반응을 보였다. 미 첩형의 전갈을 마치자, 항상파의 장문인 정선 사태가 물었다. “아미타불, 첩형 나으리. 그게 정말입니까?” 그 물음에 미 첩형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정확한 심중을 헤아리기는 어려우나, 제독께서 말씀하시기를 더 나은 상책이 있다면 폐하께서도 어느 정도 고려해보실 것 같다고 하오.” “허어.....” 그 말에 모든 웅주들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사실 일부 웅주들의 눈빛은 청수 진인에게로 향하고 있었는데, 꽤나 원망의 눈초리에 가까웠다. 미 첩형은 유일하게 청수 진인이 무림맹에 전달하지 않은 한 가지를 말해주었다. 그것은 황제가 곤욕스러운 상황에 처했는데도 청수 진인이 마교주가 두려워 가만히 방관했던 사실이었다. ‘폐하께서 본 맹에 실망한 것도 당연하구나.’ ‘쯧, 본 맹의 위신을 떨어뜨리다니 공동파도 이제 한 물 갔군.’ 이런 눈초리가 청수 진인을 막다른 길로 내몰았다. 원망과 불신이 담긴 그들의 눈빛에 청수 진인은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시천존. 원시천존. 빈도가 천 교주의 능력을 그리 말했는데, 이런 반응을 보인다면 어찌할 수가 없구나.’ 그는 더 이상 무림맹에서 일하기가 힘들다는 판단이 들었다. 청수 진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웅주들에게 두 손을 모아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빈도가 무력하여 이런 사태가 벌어졌으니, 책임지고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하겠소이다.” 보통 이런 상황이 일어난다면 누구 한 명이라도 반대하거나 말리는 분위기가 조성될 만도 했지만 아무도 그러하지 않았다. 그 만큼 웅주들은 이번 사태의 원인을 청수 진인의 책임이 크다고 여긴 탓이었다. “흥! 참으로 속편하시구려. 사고를 쳐놓고 자리에 물러나시려 한다니.” 정파인의 특성상 모두가 크게 탓하지는 못하는 와중에 호전적인 하북팽가의 가주 팽구유가 큰 소리로 청수 진인을 나무랐다. 자신의 책임도 있고 여론이 좋지 않은 탓에 그냥 물러나려고 했던 청수 진인의 눈빛에 노기가 서렸다. “허어? 지금 화가 나셨소이까? 진인께서는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으실 텐데.” 팽구유의 비꼬는 말에 가만히 주먹을 쥐고 있던 청수 진인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빈도가 무력하여서 이런 사태가 벌어진 데는 인정하는 바이나, 팽 가주께서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텐데 말씀이 참으로 과하시구려.” “하! 본인이 그곳에 있어도 마찬가지라? 진인께서 요 근래 허언이 지나치시구려. 본인이었다면 그런 실수는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오.” “누구나가 말을 내뱉는 것은 쉽게 할 수 있소이다.” “뭐요?”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오리까? 팽 가주께서 그리 자신만만하게 말씀하시는데, 그 자리에 있다고 하여도 빈도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데, 이 팔을 걸지요.” 강하게 나오는 청수 진인의 일침에 팽구유 역시도 노기가 올랐는지, 얼굴에 핏대가 서서 탁자를 내리치며 소리쳤다. -쾅! "지금 그 말에 책임질 수 있소이까?" "장부일언중천금이라고 했소. 팽 가주께서도 팔을 거실 수 있겠소?" "흥! 무엇이 어렵겠소!" 이에 팽구유가 자리에서 일어나 무림맹주에게 호탕하게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탁! "맹주! 이번 일을 수습하는데, 황궁으로 본인을 보내주시오. 입궐하여 황제 폐하를 설득하고 국교를 다시 바로 잡도록 하겠소이다." 그렇지 않아도 누가 이 일을 수습하기 위해 황궁에 입궐할지 난감해하던 차였다. 다른 웅주들도 잘 되었다고 여겼는지, 못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참에 본 가주의 능력을 보여주지. 고작 그딴 마교의 무뢰배 따위에게 겁을 먹다니. 생사경? 하! 정파의 수치 같으니라고.' 하북팽가의 가주 팽구유는 다른 웅주들과 다르게 가장 늦게 무림맹에 입성한 자였다. 부친의 자리를 그대로 물려받은 그는 유달리 공을 세운 것이 없었다. 이 참에 자신의 무위를 황실과 다른 웅주들에게 증명해보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여겼다. "십칠웅주께서 말이오?" "그렇소!" 맹주 이목이 이를 허가하려던 차에 누군가가 자리에서 일어나 마찬가지로 그에게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맹주님. 저도 십칠웅주님과 함께 황궁으로 보내주십시오." 뒤이어 지원한 사내는 다름 아닌 무림맹주의 장남인 연부소였다. < 75장 오대고수라는 칭호 (2) > 끝 < 75장 오대고수라는 칭호 (3) > 연부소(蓮負訴). 그는 무림맹주의 장남이다. 무림맹주의 성이 이가(梨家)임을 생각하면 다른 성을 쓰고 있다. 그것은 그가 맹주의 친아들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혼인을 하지 않은 무림맹주 북정도 이목은 슬하의 세 자식을 두었는데, 전부 고아를 거둬들였다. 연부소, 강소아, 모유주. 이 세 남매는 고아 출신이었지만 모두가 탐낼만한 무재들이었기에 북정도 이목이 슬하에 거둘만 하다고 칭찬이 자자했다. 어째서 세 자식들에게 그의 성을 쓰지 않게 하는지는 모르나, 그들이 훗날 이목의 뒤를 이어 정도 무림맹을 이끌어갈 후기지수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 중 장남인 연부소는 일곱 웅주가 공동전인으로 삼을 만큼, 무림맹에서 심혈을 기울여 키운 차세대 무림맹의 얼굴이 될 자였다. “맹주님. 저도 십칠웅주님과 함께 황궁으로 보내주십시오.” 한 쪽만 뜨고 있는 맹주 이목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최근에 들어서 웅주 회의에 참석하게 했지만 특별히 자신의 의사를 밝힌 적이 없었던 그가 처음으로 공식적인 청을 올렸다. ‘흠.....마교주 천여운 때문인가?’ 친부가 아니라고 해도 어릴 때부터 키워왔는데, 자식인 연부소의 생각을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다른 일에는 큰 관심이 보이지 않는 그였지만 유독 마교주 천여운의 이야기에는 관심을 보이는 연부소였다. ‘호적수인가.’ 이목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중원 무림의 무인들은 오대고수들 중에서 자신과 더불어 남마주 천유종을 늘 비교하곤 했다. 북정(北正)에 남마(南魔)가 맞선다는 말까지 생길 정도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무림에 출도하여 각자가 무림맹과 마교의 정점에 서서 명성을 날렸기에 호적수로 여기는 것도 당연했다. '역시 내 아들이로군.' 그런 그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제 이군사인 제갈소희가 마교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부터 천여운의 행보를 늘 주시하고 있는 연부소였다. 맹주를 바라보고 있는 연부소의 눈빛에는 호승심이 가득했다. ‘위험하긴 해도 좋은 경험이 될지도. 뛰어난 호적수는 한계를 넘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지.’ 어차피 무림맹과 마교는 현재 동맹 관계이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물론 이번 일로 극도육무문과 별개로 크게 알력 다툼을 해야겠지만 말이다. 맹주 이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다. “뜻대로 하거라.” “감사합니다!” -팍! 연부소가 화색이 밝아져서 포권을 취했다. “호오! 연 공자도 본 가주와 함께 가게 되다니. 영광이로군.” 뜻밖의 지원에 팽구유가 흥미를 보였다. 그가 무림맹에 입성하여 웅주가 되기 전부터 연부소가 후기지수를 넘어선 괴물이라는 소문은 익히 들어왔다. 약관의 나이에 무림에 출도한지 불과 석 달 채도 되지 않아, 팽가의 부가주인 팽무월과 마찬가 지로 무림구패(武林九?)의 일인이 되었다. 보통 연부소의 연배라면 후기지수로 명성을 날려도 대단하다는 말을 듣는데, 오대고수의 바로 밑 서열에 해당하는 무림 구패의 일인이 되었으니 대단하다 할만 했다. ‘이제 고작 서른이라 들었는데, 무위를 짐작할 수 없구나.’ 그 역시도 화경의 고수였지만 연부소의 무공 수위를 알 수 없었다. 소문으로는 화경의 극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어쩌면 지고의 경지에 올랐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부족한 실력이지만 십칠웅주님을 돕고 싶습니다.” “하하하하핫, 겸양도 지나치면 밉다고 하다니. 자네가 딱 그렇군. 본 맹의 비장의 무기인 자네마저 같이 동행한다면 본 가주로서는 청 진인의 팔을 얻을 확률이 더 올라가겠네. 그려.” 그러면서 오른팔을 들어서 자르는 시늉을 하는 얄미운 행동마저 했다. 청수 진인을 편들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이를 지켜보는 웅주들마저 속으로 혀를 내두를 만큼 팽구유의 행동은 지나쳤다. ‘부가주와 가주의 위치가 바뀌었군. 쯧쯧.’ 오히려 팽가의 부가주인 도월패주 팽무월이 정실의 자식이었다면 이 자리에 웅주로 있었을 지도 모른다. 물론 팽구유가 무위나 지략이 부족함은 아니었다. 단지 정파인치고는 성정이 호전적이고 지나칠 만큼 상대를 몰아치는 경향이 높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극하는 팽구유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청수 진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사흘 동안 그 자의 무서움은 수차례 경고했다. ‘그것을 무시한 것은 그대일세. 팽 가주. 원시천존. 원시천존.’ 비록 무림맹과 마교가 동맹을 맺었다고는 하나, 그가 보았던 천여운은 손속에 자비가 없다는 자였다. 팽구유가 살아서 돌아온다면 과연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가 궁금했다. * * * 무림맹의 본단은 황도인 개봉과 그리 멀지 않다. 같은 하남성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을 타고 쉬지 않고 이동한다면 사흘이면 도착했고, 경공을 펼친다면 이틀이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다. 대내행창의 미 첩형과 무림맹의 사신단이 도착한 시각은 딱 사흘 째 되는 정오였다. 오십여 명이나 되는 무림인들이 용정궁의 남문 앞에서 통행증이 발부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 오십여 명의 절반은 하북팽가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절반은 회색 승려복에 비교적 짧고 얇은 검집을 등에 매고 있는 비구니들이었다. 비구니들의 선두에 서있는 중년의 비구니는 다름 아닌 항산파의 장문인인 정선 사태였다. “부디 사태께서 나설 일은 없었으면 좋겠소이다.” 정선 사태의 옆에 있는 팽가의 가주인 팽구유가 투덜거렸다. 원래 그는 무림맹주의 장남인 연부소와 팽가의 무사들만을 대동해서 이동하려 했지만 중간에 맹주의 명으로 정선 사태도 합류했다. 그 이유는, “아미타불. 국교가 불도로 바뀌는 것이 어찌 나쁜 일이겠소. 대명제국에 자비로우신 부처님의 은덕이 알려질 수 있는 기회지요. 팽 가주.”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서였다. 황제가 공식적으로 국교를 바꾼다고 발표를 했는데, 그것을 다시 철회하는 것은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불도(佛道)를 권장하려는 것이었다. 청수 진인 사태로 도교에 대해 불신이 생겼다면 불도를 권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판단한 맹주는 항산파의 정선 사태에게 부탁했다. “각연 대사께서 오셨다면 더 나았겠지만 빈승이 어찌 해봐야지요. 아미타불.” 그녀의 말대로 각연 대사는 중원에서도 가장 큰 불도의 중심지인 소림사의 방장이었기에 그 명성과 입김이 강하다. 하지만 각연 대사는 현재 따로 맡고 있는 일이 있기에 무림맹에서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다. “그건 일단 폐하를 알현하고 이야기 하십시다. 아직 황궁 내에 있는 사원을 철수시키지 않았다고 하니 설득하는데 그리 어려움이 없을 지도 모르오.” 이곳으로 오는 내내 대내행창의 미 첩형이 여러 정보를 주었다. 그중 다행스럽게도 황제가 국교를 바꾸는 것을 공표했지만 아직까지 도교 사원을 철수시키진 않은 것 같다고 한다. 미 첩형의 말대로 아직까지 여지는 주고 있는 듯 했다. “아미타불. 그런데 생각보다 길어지는 군요.” 그들이 남문 입구에서 대기한지 벌써 반 시진이 훨씬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었다. 미 첩형이 먼저 입궁하여 통행증을 발부받는다고 했는데, 이 각이면 된다고 했는데, 생각보다 지체되고 있었다. “연 공자는 마교주가 없다고 해서 어떡하나? 기대가 컸던 것 같은데.” 팽구유가 혼자서 조용히 서있는 백의의 연부소에게 말했다. 황도로 오면서 미 첩형은 마교주는 마교로 돌아간 것 같다고 알려주면서 실망을 금치 못한 그였다. ‘아직 그 자와 연(緣)이 없는 것인가.’ 내심 후세대를 이끌어갈 호적수를 만나고픈 욕구가 강했던 연부소였다. 게다가 약혼녀인 제갈소희가 그렇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기에 과연 어떤 인물인가 직접 대면하고 싶었는데 실망스러웠다. ‘그 자의 무공 흔적을 견식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나.’ 연부소는 아쉬운 마음에 미 첩형에게 혹시 천여운이 죽인 수신호위의 시신을 화장했는지 물어봤는데, 아직까지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시신의 검흔을 확인하면 그가 정말로 무형검을 썼는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다.’ 사실 그 역시도 다른 웅주들과 마찬가지로 무형검은 아닐 거라 추측했다. 제갈소희에게 들었던 때만 하더라도 화경의 고수라고 들었다. 아무리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다고 해도 불과 몇 달 만에 전설적인 무인들이나 올랐다는 경지를 밟는다는 것은 상식을 벗어난 일이었다. ‘확실한 것은 청수 진인조차 그자의 무공 수위를 파악하기 힘들만큼 발전했다는 것이다. 재미있군. 하늘이 나와 정파의 독주를 원하지 않는 것인가.’ 처음 무림에 출도하면서 여러 고수들과 자웅을 겨뤘던 그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자신의 연배 중에서 누구도 그에 비할 자가 없었다. 심지어 지금에 이르러서는 웅주들 중에서도 자신의 도를 받아낼 자는 몇 되지 않았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흔히 세상이 말하는 천재임을 인지하게 되었다. ‘그가 진정한 호적수라면 나와 어떤 식으로든 부딪칠 것이다. 아무리 나를 피한다고 해도 말이다.’ 그때까지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혈기를 가라앉혀야 할 듯 했다. 그러던 차에 누군가 용정궁의 남문에서 나와, 정파 무림맹의 사신단이 있는 곳으로 다급히 달려왔다. 대내행창의 미 첩형이었다. “통행증이 발부된 것입니까? 아미타불.” 정선사태의 물음에 미 첩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토, 통행증은 당연히 발부되었소. 그보다 큰일났소. 지금 당장 서둘러서 폐하를 알현해야 하오.” “당장요?” 전에도 황궁에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황제를 알현하기까지 길게는 이틀에서 사흘이 걸린 적이 있었다. 그런데 통행증이 발부되자마자 알현한다니 이건 굉장히 빨랐다. “이른 아침에 마교의 사제들이 궁에 입궐하면서 도교 사원의 해체가 앞 당겨졌소!” “네?” 마교의 사제들이 입궐했다는 말에 팽구유와 정선 사태가 놀람을 금치 못했다. 아직까지 사원이나 법당이 남아있다는 말에 안심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된다면 정말 서두르지 않으면 남아있는 도사들이 전부 쫓겨날지도 몰랐다. “아미타불. 큰일이구려. 아무래도 안 되겠소. 팽 가주님과 연 공자께서는 서둘러 폐하를 알현하시오. 급한 대로 빈승이 항산파의 제자들을 이끌고 그들이 법당을 해체하는 것을 저지하겠소.” 설득이 실패하면 나서기로 했던 항산파의 정선 사태였다. 그녀가 법당이 해체되는 것을 막겠다고 하자 팽구유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했다. 이때 연부소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혹시 마교주도 다시 입궐했습니까?” “그것은 잘 모르겠소. 그보다 어서 서두르지 않으면 더 이상 되돌릴 수 없을 지도 모르오.” 이에 연부소가 내심 아쉬웠는지 입맛을 다셨다. 마교주 정도 되는 자가 다시 입궐했다면 미 첩형이 모를 리가 없었다. 정선 사태를 따라가서 도울까 했지만 그것은 단념하고 팽 가주를 따라서 황제 폐하를 알현하기로 결정했다. * * * 용정궁의 동남쪽에 도교의 사원이 자리하고 있다. 태조 시절에 건축된 이 도교의 사원은 여느 중원 도관들과 같이 여러 법당 건물과, 본당인 삼청관(三淸觀)으로 이루어져 있다. 삼청이라 함은 삼원(三元)의 화생(化生)인 삼보군(三寶君)이 관할하는 영역으로, 옥청(玉淸)·상청(上淸)·태청(太淸)을 지칭한다. 그런 황궁 도교의 사원에 한바탕 난리가 났다. -우당탕! “크윽! 당장 멈춰라!” “이놈들! 이곳이 어디라고 감히!” 사원에 상주하는 도사들이 버티고 앉아서 항전했지만 소용없었다. 한 시진 전부터 들이닥친 마교의 교인들이 법당 내에 있는 법구들을 비롯해 서적들을 전부 빼내고 있었다. “이 사악한 마교인들아! 이곳은 성스러운 도교의 법당이다! 썩 물러...” -퍽! “크헉!” “누가 사악한 마교인이라는 것이냐. 황제 폐하의 어명으로 이곳을 해체하고 천마신교의 사원을 세우라고 했는데 버티는 것이 더 행패가 아니더냐.” 마교의 복장을 하고 있는 교인이 도사를 발로 걷어찼다. 법당의 앞을 가로막고서 해체하는 것을 결사 항전하는데, 어명이라고 해도 도통 말을 듣지 않았다. “네놈들이 황제 폐하의 눈과 귀를 막은 것을 모를 성 싶으냐! 이 사악한 것들!” 강제로 끌려 나가면서도 마교인들을 욕하는 도사들이었다. 처음에는 어명을 전하고 자체적으로 철수하라고 권했으나, 자신들은 무림맹에서 아무런 전갈을 받지 못했다면서 버티고 앉았다. 황명이라고 해도 곧 바뀔 거라는 식으로 말이다. “더는 못 참겠다!” -화르르륵! 그때 삼청관의 앞마당에 서있던 한 청년이 손에 불꽃을 일으켰다. 기이한 광경에 쫓아내도 계속해서 들어와 난리를 피우던 도사들의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는 이 청년은 마교주 천여운의 오른팔인 허봉이었다. “지금부터 계속 버티고 있는 자들은 이렇게 만들겠다!” -화르르륵! 허봉이 마당에 있는 작은 나무에 불꽃을 던지자 그것에 불이 붙었다. 나무는 순식간에 까맣게 타들어가 재가 되어버렸다. “히익!” 일부러 위협을 가하기 위해 기린의 화기(火氣)를 보인 것이었다. 그것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 끝까지 버티고 항전을 하려 하던 도사들이라고 해도 이런 것은 처음 보았는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쳇. 무공만 익힌 자들이었어도 그냥 패대기를 치는데.’ 사원에 있는 도사들은 말 그대로 정말 도사들이었다. 무공을 익힌 자들이 아니었기에 적당히 겁만 주어서 쫓아내라고 했는데, 생각보다 근성있게 버텨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계속 방해하는 자들은 전부 혈도를 제압해놓아라.” “충!” 허봉의 강경한 명에 그렇지 않아도 곤두 서있던 마교의 무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도사들을 제압하려고 했다. 바로 그러던 차에 사원 안으로 비구니들이 들이닥쳤다. “와아아아아!!!” “엥? 비구니?” -챙! 챙! 챙! 갑자기 나타난 비구니들은 검을 뽑고서 응전태세를 취하며, 마교의 무사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들은 바로 항산파의 제자들이었다. 느닷없이 나타난 비구니들이 도관의 도사들을 보호하려고 하자, 마교의 무사들도 의아한 표정으로 어찌해야 할지 몰라 허봉을 바라보았다. “아미타불!” 그런 비구니들의 틈 사이로 붉은 가사를 입은 근엄해 보이는 중년의 비구니가 걸어 나왔다. 그녀는 항산파의 장문인인 정선 사태였다. ‘다행히 늦지 않았구나.’ 급하게 대내행창의 환관의 안내를 받아 도관으로 달려온 그녀였다. 혹여 사원이 완전히 해체되고 도사들이 쫓겨났을까 걱정했는데, 아직은 진행 중인 듯 했다. '아!' 정선 사태가 굳은 얼굴로 마교 무사들의 뒤에 우두커니 서있는 허봉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가 이들의 우두머리임을 알아차렸다. 손발이 찌릿할 만큼 강렬한 기운을 발산하는 것으로 보아, 화경의 경지에 오른 고수가 틀림없었다. ‘고작 약관에 불과해 보이는 자가 화경의 경지라니? 혹시 저 자가 마교의 교주인가?’ 청수 진인은 마교주가 생사경의 고수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선 사태 역시도 다른 웅주들과 마찬가지로 실제로 그럴 리는 없다고 판단했다. 고작 스무 해 밖에 살지 않은 자가 지고의 경지인 현경을 넘어서 생사경에 이르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저런 기운을 풍기는 자라면 청수 진인이 오해할 만도 하구나.’ 저 두건을 쓴 자에게서 이질적인 기운이 풍겨졌다. 그것은 기린의 화기였는데, 일반적인 선천진기와 다르기에 무공을 익힌 자들이라면 경계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아미타불.” 그녀가 합장을 하면서 허봉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입술을 뗐다. “빈승은 항산파의 장문인인 정선 사태라고 하오. 동맹을 맺은 귀교와 이런 상황에 대면하게 된것이 안타깝지만 교인들을 데리고 도관에서 물러나기를 바라오.” 그녀의 권고에 허봉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항산파의 장문인이시면 무림맹의 분이실 텐데, 갑자기 들이닥쳐서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무리 동맹 관계라고 하지만 지켜야할 선이라는 것이 있소. 어찌 귀교에서 정파의 영역까지 넘어와서 이리 간교한 계책을 부린단 말이오.” 황제가 국교를 천마신교로 바꾼다고 한 것을 꼬집은 것이었다. 그런 그녀의 말에 허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흐으음, 언제부터 황궁이 정파의 영역이었습니까?” “크흠! 아미타불!”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는 허봉의 태도에 시치미를 뗀다고 생각한 정선 사태의 눈매가 싸늘해졌다. 주위를 살펴보니 그 외에는 특별히 고수가 감지되지 않았다. 악명 높은 호법들이 주위에 있으면 곤란했을 뻔 했는데, 마교주 혼자라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차라리 여기서 마교주를 제압하는 편이 좋겠구나.’ 그를 제압한다면 국교 건에 관해서 황제를 설득하기 쉬울 듯 했다. 이질적인 기운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불도의 정기가 담긴 항산파의 무공이라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으리라. “아미타불. 분명 빈승은 좋게 권고했소. 벌주를 청한 것은 마교주 그대이오니, 부디 후회하지 마시길.” -채앵! 그 말과 함께 그녀가 항산파의 보검인 수현검(修賢劍)을 반쯤 뽑는데, 바로 뒤에서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을 후회하지 말라는 거지?” “!?” 방금 전까지도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갑자기 뒤를 빼앗긴 것에 놀란 정선 사태가 보법을 펼쳐서 다급히 거리를 벌리려는데, 그녀의 뒷목을 정체모를 자가 움켜잡았다. -콱! “아악!” 반탄강기를 일으켜서 사내의 손을 쳐내려고 했지만, 전율적인 공력이 파고들면서 온몸이 무력화되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공력이....’ 압도적인 공력에 당혹스러워하는데, 멀리서 마교주라고 생각했던 자를 비롯한 모든 마교의 무사들이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며 소리쳤다. -파팍! “천세! 천세! 천천세! 미천한 교인이 교주님을 배알하나이다.” “뭣?" 뒷목이 잡혀 있던 정선 사태가 두 눈이 커져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 75장 오대고수라는 칭호 (3) > 끝 < 75장 오대고수라는 칭호 (4) > 항산파의 장문인 정선사태. 그녀는 장문인이기 되기 전까지 무림을 활보하면서 여고수로 명성을 드높였다. 검을 다루는데 비상하는 제비와 같다하여 젊은 시절에는 비연검(飛燕劍)이라 불렸었고, 검수로서 절정을 이루는 삼십대 중반의 나이에는 사파에서 악명이 높은 고악검수 능조의 목을 베면서 검후(劍后)라 불리게 되었다. 지금은 무림맹의 사웅주로서 명성이 두터웠지만 현역 당시에는 유일하게 여자 검객으로 무림구패에 이름을 올릴 만큼 뛰어난 고수였다. “정선 사태!” “사태에에에에에!!!” 비구니들이 놀라서 소리쳤다. 항산파의 비구니들을 비롯해 정파의 여자 무림인들이 목표로 삼는 검후 정선 사태가 어이없게도 뒷목이 잡혀서 아등바등 꼼짝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 저자가 마교주라고?” 새하얀 얼굴이 긴 머리카락을 뒤로 묶고 있는 흑의의 공자였다. 아무리 많이 봐줘도 약관에 불과해 보이는 청년이 한 팔은 뒷짐을 진 채로 고작 오른손만으로 정선 사태의 뒷목을 움켜쥐고 있는 모습이 오만해보이기 마저 했다. ‘어째서 스승님께서 꼼짝하지 못하시는 거지?’ 비구니들 중에서 아랫입술이 두터운 젊은 비구니가 있다. 그녀는 정선 사태의 대제자이자 항산파의 후기지수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오선이었다. [사저! 이러다 스승님께서 당하겠어요!] 그런 그녀의 귓가로 전음을 보내는 여인은 둘째 제자인 오혜였다. [아! 사매의 말이 맞아.] 오혜의 전음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린 그녀가 수신호로 항산파의 검법의 합격술인 검연목지 (劍連睦持)를 펼치라 하였다. -팟! 항산파가 자랑하는 두 후기지수가 동시에 신형을 날렸다. 두 비구니가 서로 수차례 신형을 교차하면서 시선을 어지럽히더니, 동시에 천여운의 좌측과 우측으로 검초를 전개해왔다. “당장 스승님을 놓아랏!” “이 사악한 마교의 우두머리!” 두 사람의 검이 절묘하게 스승인 정선 사태를 피해서 천여운의 우측 어깨와 좌측 갈비뼈 쪽을 찔러오는데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콱! “아악!” 우측 어깨를 노리던 오혜의 팔목을 누가 낚아챈 것이다. 놀란 그녀가 자신의 팔목을 잡은 자를 쳐다보았는데, 엄청난 거구에 턱수염을 기른 근육질의 청년이 서있었다. “여 스님이 감히 누구를 노리는 것이오.” 쥐고 있는 손이 어찌나 컸는지 그녀의 가냘픈 팔목이 나무 막대기라도 되는 것 같았다. -챙강! 동시에 좌측을 노렸던 오선의 검이 닿기도 전에 누군가에게 막혔다. 어찌나 빠른지 흐릿하게 나타난 독특한 문양의 가면을 쓴 장포인이 검초를 펼치는 맨손으로 잡아서 그것을 부러뜨려버렸다. ‘어, 엄청난 고수다.’ 놀란 그녀가 빠르게 보법을 펼치며 거리를 벌렸다. 오혜 사매가 성공했나 바라보았는데, 보통 사람들의 두 배나 되는 신장의 근육질의 사내에게 팔목이 잡혀서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왕흘!” 허봉이 거구의 사내를 보며 반갑게 소리쳤다. 오랜만에 만나는 거구의 사내는 다름 아닌 육검의 서열 일위인 마권종의 고왕흘이었다. 마교 내전이 끝난 후로 한 번도 십만대산을 벗어나지 못한 그가 드디어 무림을 출도하여 황궁에 오게 된 것이다. “여어! 허봉. 오랜만일세. 혼자 교주님을 따라다니는 특혜를 누리느라...아!” 고왕흘 역시 반갑게 손을 흔들다, 허봉을 바라보는 눈빛에 이채가 띠었다. 교주인 천여운이야 원래부터 괴물 같았기에 그랬지만 못 보던 사이에 허봉의 무공이 경이로 울 만큼 발전했다. ‘이거.....실화인가.’ 거구의 신장 때문에 한 번도 무림 출도에 따라나서지 못한 고왕흘은 몇 달간 수련에만 매달렸다. 주군인 천여운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피나는 훈련 끝에 육검들 중에 유일하게 화경 초입의 경지에 오른 고왕흘이었다. 장로 급의 실력이 되었다고 기뻐한 게 엊그제였는데, 그 허봉이 자신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이번에 나름 성과를 얻어서 기뻐했는데, 허봉을 상대로 긴장해야할 판국인데.’ 무공 실력이 낮아서 육검단의 부관에 머물러 있던 허봉이었다. 풍기는 기운만큼이나 무위마저 확실하다면 다음 육검 서열 전에서 일검을 차지할 수도 있을것 같았다. ‘대체 이 자들은....’ 오선은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내뿜고 있는 두 고수들에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스승을 구하려고 했는데 도리어 사매마저 붙잡혀 버렸다. 팔목이 붙잡혀서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오혜의 모습이 애처롭기마저 했다. ‘다른 고수들이 나타났구나.’ 오선의 반응만으로 이를 눈치 챈 정선 사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도관을 해체시킬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아무런 대비도 강구하지 않고서 이곳으로 온 것이 실책이었다.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제압되다니....아미타불!’ 어이없이 당했다는 것에 수치심을 느낀 정선 사태가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어쩌면 자신도 타격을 입을지는 모르겠지만, 뒷목을 움켜잡고 있는 마교주의 손에서 벗어나려면 이 방법뿐이었다. “다, 당장 빈승의 몸에서 손을 떼시오! 그렇지 않다면!” “그렇지 않다면?” “후회할 것이오! 하압!”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정선 사태가 기합을 지르며 두 손에 십성의 내공을 끌어올리더니, 이내 자신의 가슴에 양장을 때렸다. -팡! 불문인 항산파의 내공을 수십 년 동안 익혀서 웅주들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에 꼽힐 만큼 심후한 공력을 지니고 있는 그녀였다. ‘방법은 오직 하나 격산타우뿐이다.’ 격산타우(隔山打牛). 산을 때려 그 너머에 있는 소를 친다는 뜻이다. 이것은 발경의 일종으로 중간에 끼어있는 물체를 매개체 삼아 충격을 전달하는 수준 높은 내가중수법이었다. 천여운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그녀는 검후라는 칭호를 가진 무인답게 스스로의 몸에 격산타우의 수법을 펼치는 도박을 걸었다. -찌릿! 그녀의 가슴과 목을 타고서 공력의 유동이 느껴졌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모험이었지만 우려와 다르게 성공했다. -파파파팍!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몸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고 발경이 뒷목을 잡고 있는 천여운의 손으로 전달되었다. ‘성공이다! 이제 벗어...앗!’ 아무리 심후한 내공을 지녔다고 해도 발경이 체내로 파고들면 내상을 막기 위해서라도 당연히 손을 뗄 거라고 여긴 그녀였다. 그러나, -쩌저저저저적! 정선 사태의 뒷목을 잡고 있는 천여운의 발밑의 석판에 균열이 일어났다. 이를 발견한 그녀의 두 눈이 커졌다. “마, 말도 안 돼.” 석판이 갈라진 것은 그녀가 격산타우의 수법으로 보낸 발경의 여파였다. 놀랍게도 천여운은 손으로 파고든 공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체내의 경맥을 통과시켜서 발밑의 용문혈(湧泉穴)로 배출시켜버렸다. 그녀의 수준 높은 내가중수법을 더욱 고도의 수법으로 받아버린 것이다. “어, 어떻게 이것을?” 회심의 일격이 너무도 쉽게 수포로 돌아갔다. 기척도 없이 뒤를 잡혔을 때부터 자신보다 훨씬 강자란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 격이 완전히 달랐다. [그 자는 괴물, 아니 마신 그 자체요.] 그런 그녀의 머릿속에 공동파의 장문인 청수 진인이 했던 경고가 떠올랐다. 그때는 헛소리로 취급했었는데, 이건 정말 괴물이었다. [생사경의 고수란 말이오!] 등골부터 소름이 돋았다. 어쩌면 정말로 생사경의 고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게 아니더라도 이런 압도적인 무위를 지녔다는 것은 오대고수 급에 속하는 고수일지도 몰랐다. ‘아, 안 돼! 이 자는 이목 맹주가 아니고는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야.’ 당황해하는 그녀에게 천여운이 말했다. “여스님께서 후회라는 말을 남발하는군요.” 그 목소리에서 심기가 뒤틀려 있음을 느낀 정선 사태가 당황해서 소리쳤다. “마, 마교주여. 빈승은 귀교와 동맹을 맺은 무림맹의 웅주 정선 사태입니다! 서로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이 손을 떼고 일단은 대화를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무력으로 대항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그녀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무림맹과 마교가 정식으로 동맹을 맺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한 가지 모르는 것이 있었다. “대화를 원했으면 검을 뽑지 말았어야죠.” “!?” 천여운은 상대가 누구이든 간에 받은 것은 몇 배로 갚는 위인이라는 것이다. “아, 아니. 그것은....” 허봉을 향해 먼저 검을 뽑으려고 했던 정선 사태였다. 정선 사태의 입장에서는 도관을 해체 하는 것을 막는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분명 먼저 출수하려한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오싹! ‘이 자가 정녕?’ 바로 뒤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예기를 감지한 정선 사태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아등바등 몸부림을 치며 소리쳤다. “자, 잠깐! 빈승에게 해를 가한다면 동맹이...” “뭐든지 참으라고 맺은 동맹이 아닙니다만. 그리고 후회할 짓은 처음부터 하지 말았어야죠. 사태.” -촤악! 그 말이 끝남과 정선 사태의 왼쪽 어깨에 날카로운 예기가 스쳐지나갔다. 베이는 그 순간에는 아무런 고통이 없다. 단지 베이고 나서 붙어있어야 할 것이 잘려나간 후의 고통이 말로 이룰 수 없을 뿐이었다. -툭!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왼팔을 바라보며 그녀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아아아악!” -팍! 그런 정선 사태를 천여운이 바닥에 내팽개쳤다. 처음 겪어보는 고통에 눈물까지 흘리며 비명을 지르는 그녀에게 천여운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동맹의 예우 차원에서 왼팔로 끝내도록 하죠.” 전혀 고마운 얘기가 아니었지만 검수의 오른팔을 앗아가는 것보단 나았다. 천여운의 입장에서는 정말로 많이 봐준 셈이었다. 검후라 불리는 자신들의 장문인이 검 한번 휘두르지 못하고 어이없게 팔이 잘려나가자, 항산파의 비구니들은 경악한 나머지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천여운이 마교의 무사들에게 명했다. “전부 제압해라. 반항하면 베어도 좋다.” “충!!!” * * * 같은 시각 황제가 기거하는 건안궁의 대전. -쿵! 쿵! 쿵! “크윽!” “무릎을 펼 수가 없어!” 대전 내에 있던 대내행창의 열두 명의 환관들이 갑자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내공을 익힌 일류고수인 그들이었지만 자신들을 짓누르는 심후한 진기에 대항하지 못하고, 강제로 꿇는 굴욕을 당해야만 했다. 이 광경에 용좌에 앉아 있는 황제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호오.” 황제의 용좌에서 오십 보 떨어진 대전의 한가운데에 두 명의 사내가 있었는데, 한 사람은 무림맹의 십칠웅주이면서 하북팽가의 가주 팽구유였다. 그리고 이 강대한 진기를 내뿜으며 환관들을 무릎 꿇린 사내는 무림맹주의 장남이자 무림구패의 일인인 연부소였다. ‘놀랍다. 혹시나 했는데 정말이구나.’ 팽구유가 옆에 서있는 연부소를 보면서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기운을 완전히 갈무리 할 수 있는 반박귀진(返樸歸眞)의 경지에 올랐기에 혹시 하는 추측을 했었는데 예상이 들어맞았다. ‘고작 서른에 불과한 녀석이 지고의 경지를 밟다니!’ 지고의 경지. 그것은 무림에서도 극소수의 무인만이 오른 현경의 경지를 말한다. 무림맹주인 이목을 비롯한 일곱 웅주들이 공동 전인으로 삼아, 심혈을 기울여 가르친 것은 알고 있었지만 경악스러운 성장이었다. ‘대단하다. 내 대에서 정파에 천하제일고수가 탄생할 수도 있겠구나.’ 당금 무림의 최고수라 불리는 오대고수들 중에서도 삼십대에 현경의 경지에 오른 고수는 동쪽의 괴물 정도라 들었다. 어쩌면 그 괴물과 자웅을 겨룰 영웅이 자신과 한 세대를 나란히 걷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팽구유는 내심 뿌듯함을 느꼈다. “보셨습니까! 폐하! 이것이 훗날의 중원 오대고수의 칭호를 얻을 연부소 공자의 무위입니다.” 팽구유가 연부소를 칭찬하며 치켜세워주었다. 자신의 입으로 잘난 채를 하게 만들어줄 수는 없으니 말이다. 물론 황제가 직접 두 눈으로 연부소의 놀라운 능력을 확인했으니, 신뢰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어떻게든 본 맹이 마교보다도 극도육무문으로부터 황실을 보호할 수 있음을 확실히 각인시켜야 하오.] 그것이 맹주인 이목이 내린 지령이었다. 연부소는 그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했다. 황제의 입에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이제 관건은 황제를 설득해서 국교를 다시 도교로 바꾸도록 유도해야 한다. 그런데 탄성을 흘렸던 황제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러자 미리 대기라도 하고 있었던 것처럼 대전의 곳곳에 있던 환관들이 일제히 몰려들었다. -우르르르! 그 숫자가 자그마치 이백여 명에 가까웠다. 건안궁의 대전이 워낙 넓어서 그들만으로 채워지진 않았지만, 대체 무슨 연유에서 환관들을 불렀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황제가 입을 열었다. “연부소라고 했나.” “예. 폐하.” “다시 한 번 해보아라.” “?” 황제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명에 연부소와 팽구유의 두 눈에 이채가 띠었다. 갑자기 그들을 대전 한가운데로 왜 불렀는지 몰랐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이 많은 숫자의 환관들의 무릎을 꿇리라는 의미였다. 아무래도 앞서 보여준 능력만으로 만족하지 못해서 무위를 확인해보려는 모양이었다. '이들을 쓰러뜨려야 하나.' 진기로 무릎 꿇리기에는 그 숫자가 너무 많았다. 건안궁에 들어오기 전에 자신의 독문병기인 첨원도를 맡겨두었는데, 아무래도 맨손으로 환관들을 제압해야 할 듯 했다. 그때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삼백 명.” “네?” “마교주가 손짓 한 번으로 무릎 꿇린 자의 숫자다.” 황제의 입에서 나온 말도 안 되는 숫자에 연부소의 두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 75장 오대고수라는 칭호 (4) > 끝 < 76장 격(格) (1) -수정- > ‘삼백 명?’ 연부소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눈앞에 있는 이백 명에 이르는 대내행창의 환관들. 무공을 익힌 그들은 삼류에서 일류까지 고루 섞여 있었다. 물론 간간히 환관들 중에서 당두라고 불리는 절정의 무공 실력을 지닌 고수들도 끼어있기는 하지만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이들은 전부 제압하는 것은 팽 가주님 혼자서도 가능한 일이다.’ 화경의 고수인 십칠웅주 팽구유라면 그리 오랜 시간을 소요하지 않고 환관들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하물며 현경 초입의 경지에 이른 그 역시도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무형의 기운인 진기로 이 많은 자들을 손짓 한 번으로 무릎 꿇린다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전력을 다 한다면 백 명 정도는 가능할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그리 오랜 시간 무릎 꿇리는 것은 힘들다. 상대가 완전히 반항하지 않는다면 모를까 무공의 경지와는 별개로 각자가 호신을 위해 진기에 대항하는데, 그 숫자가 늘어날수록 그만큼 많은 진기를 소진하게 된다. 아마 지금의 자신이라면 백 명을 묶어두는 것도 길어봐야 일 각에서 이 각이 한계일 것이다. ‘불가능한 일이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황제의 말대로는 절대로 불가능했다. 손짓 한 번에 삼백여 명을 무릎 꿇렸다는 것은 다소 과장된 표현임이 틀림없었다. 옥좌에 앉아서 그를 바라보는 황제의 기대감으로 가득한 눈빛이 보였다. ‘아아, 폐하께서 나를 시험하는 것이구나.’ 연부소는 황제의 진정한 의도가 그것이라 여겼다. 마교주를 확실하게 제압할 수 있을 만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선보이라는 의미가 틀림없었다.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연부소의 머릿속에는 천여운이 생사경의 경지라는 것은 일제히 배제된 채 계산이 되고 있었다. [손짓 한 번이라니 황제 폐하께서 너무 과장을 하시는군.] 그런 연부소의 귓가로 팽구유의 전음이 들려왔다. 그 역시도 동의하기에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폐하께서 확실한 무언가를 보여주길 원하시는 것 같은데, 가능하겠나?] 팽구유 역시도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자신보다 훨씬 무위가 높은 연부소가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맹주인 이목이 당부한 이 지령을 달성하거나 황제를 만족시키려면 그만큼 압도적인 위용을 보여줘야 하는데, 죽이지 않고서 그러기란 쉽지가 않다. 그때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왜 할 수 없는가?” 미묘한 실망의 눈빛이 멀리서도 뚜렷이 보였다. 이에 연부소는 묘한 호승심에 사로잡혔다. ‘참으로 공교롭다. 내가 의도한 것도 아닌데 대명제국의 황제 폐하 앞에서 그 자와 비견되는 자리를 가지다니. 하늘이 내려준 호적수란 말인가.’ 마교주 천여운과 자신은 호적수라는 연이 틀림없다고 여겨졌다. 훗날 자신이 정도 무림맹의 맹주가 되어 정파를 이끌어나간다면 자신과 무림을 두고서 자웅을 겨뤄야 하는 영웅일 테니 말이다. ‘그 자에게 질 순 없지.’ -팍! 연부소가 두 손을 모아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폐하. 하나, 이미 누군가 보여줬다고 한 것을 다시 보여드리는 것은 무자로서 자존심이 있기에 다른 것을 보여드리겠나이다.” “다른 것?” 의아해하는 황제를 바라보던 연부소가 환관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가까이에 있던 환관들 중 세 명의 혁대에 숨겨져 있던 연검이 뽑혀져 나왔다. -챙! “헉! 어, 어떻게 연검이 있는지?” “내 검!” 세 환관들은 자신들의 연검이 저절로 뽑혀져 나오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연부소 정도 되는 절대고수가 아무리 숨겨놓았다고 해도 병장기의 날카로운 예기를 감지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둥둥! “호오.” 황제의 두 눈에 흥미가 깃들었다. 허공에 떠오른 연검 세 개는 살아있는 것처럼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환관들 중에서 절정의 경지에 오른 세 명의 당두들은 이것이 무엇인지 알기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기어검!” 이기어검(以氣御劍). 현경의 고수가 검을 말 부리 듯이 진기로써 부리는 수법을 말한다. 당두들의 말에 다른 환관들도 웅성거리며 놀라하는 분위기이자, 황제가 옥좌 바깥의 열보 바깥에 있는 대내행창의 제독 서태식을 바라보았다. 무슨 뜻인지 곧바로 알아들은 서태식이 황제에게 살짝 전음을 보냈다. [폐하. 저 기술은 무림에서도 오대고수 급에 버금가야만 가능한 고도의 기술입니다.] 무림에서 공식적으로 현경의 경지라 알려진 자들은 오직 오대고수뿐이었다. 물론 수많은 무림인들 중에 실력을 숨긴 고수가 없겠냐 만은 고작 나이 삼십에 불과한 자가 이기어검을 펼친다는 것은 놀라운 신위라 할 수 있었다. “오대고수?” 황제도 무림에 있어서 오대고수의 위명을 잘 안다. 그를 지키다가 어이없이 죽음을 당한 수신호위 역시 구십여 년 전의 오대고수였다. 정파에서도 정도 무림맹주 단 한 사람만이 오대고수라고 들었는데, 그 장남이 그에 버금가는 무위를 지녔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마교주도 오대고수인가?” 황제가 조용한 목소리로 살짝 물어보았다. 이에 서태식이 고개를 살짝 저으며 다시 전음을 보냈다. [아닙니다. 제가 알기로는 마교의 전임 교주가 오대고수 중 한 사람이라 들었습니다.] “그래?” ‘오대고수들은 중원에서도 천하제일을 다투는 고수라고 하였는데, 전대 오대고수였던 임규화를 고작 몇 수만에 죽인 마교주는 얼마나 강하단 말인가.’ 지금 생각해도 모골이 오싹해질 만큼 두려웠다. 그런데 그런 괴물 같은 마교주 천여운의 위명을 아직까지 무림인들이 모른다는 것이 더 의아한 일이었다. ‘낭중지추라고 하였다. 마교주는 그 자는 어떻게든 그 모습을 드러나게 되겠지.’ 무림인들 간의 서열 매기기나 실질적인 무위를 정확하게 알고 판단하지 못하는 황제이지만 그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천여운의 이름 석자가 언젠가 천하제일을 다투는 위명을 얻게되리라고 말이다. 그래서인지 상대적으로 연부소라는 자의 무위가 크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지가 않았다. ‘훗날의 오대고수가 될 자라고?’ 오대고수인 정파 무림맹주가 직접 와서 무위를 증명해도 모자랄 판국이었는데, 내심 실소가 나왔다. 그런 황제의 속내를 모르는 연부소는 어떤 신위를 보여야만 황제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정했다. 자신이 펼칠 수 있는 가장 고절하면서 화려한 초식을 선보이기로 말이다. -촤아아악! 세 보 앞으로 걸어 나온 연부소가 발끝으로 대전 바닥에 딱 어깨 너비만큼의 서있을 공간의 원을 그렸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환관들도 의아했는지 어리둥절해했다. 원으로 된 선을 그린 연부소가 황제에게 말했다. “폐하. 그렇다면 소신은 이 원안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관료들을 제압하는 것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 정도는 마교주도 했느...” -휘이이이익! 황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부소가 두 손을 휘젓자, 허공에 떠있던 세 자루의 연검이 유유히 물속을 헤엄치는 물고기마냥 출렁이며 움직였다. 연부소가 환관들에게 선심을 쓰듯이 말했다. “저를 이 원의 바깥으로 밀어낸다면 제 패배로 인정하겠습니다.” “?” 오만하기 그지없는 자신감이었다. 바로 그 순간 연부소가 손을 움직이자, 천천히 헤엄치던 세 개의 연검의 갑자기 가속화되더니 허공에 수많은 궤적을 그리며 환관들 사이를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슉! 귓가를 울리는 연검이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는 가히 위협적이었다. 허공을 무차별적으로 날아다니는 연검이 언제 자신을 찌를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사로잡히기에 충분했다. “마, 막아랏!” -챙! 이기어검을 막기 위해 이백여 명의 환관들이 연검을 뽑아들었다. 팽구유는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일찌감치 멀리 거리를 벌린 상태였다. ‘연검이지만 어떻게든 될 것 같다.’ 원래라면 곧장 초식을 펼치려 했던 연부소였지만 도초를 연검으로 펼치기 위해 약간의 적응의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리 긴 시간을 요하진 않았다. “원 안에서 밀어내랏!” “와아아아아아!” 당두들의 외침에 대내행창의 환관들이 일제히 연부소를 향해 달려들었다. 분명 자신의 입으로 원안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벗어나면 패배라고 공언했다. ‘강제로 밀어내자!’ 아무리 무림에서 명성을 떨치는 고수라고 하나, 이백여 명이나 되는 적이 동시에 달려드는데 무슨 수로 막겠는가. 그렇게 여기고 있었는데 그것은 현경의 고수를 너무 쉽게 여긴 공략법이었다. “도화경천(刀華競天).” 연부소가 작게 중얼거리며 두 손을 원으로 만들며 하늘 위로 들어올렸다. 그 순간 환관들의 틈 사이의 공간을 가로지르며 날아다니던 세 개의 연검이 번개처럼 맞물리며 수많은 도식의 궤적을 만들어냈다. -촤촤촤촤촤촤?! 연검이 만들어낸 날카로운 예기가 회오리를 일으키며, 환관들의 틈 사이를 스쳐지나가더니 이내 강렬한 기류가 일어나며 그들의 몸이 떠올랐다. -휘이이이잉! “어어어엇!” “이, 이 바람은 대체!” 그것은 거의 돌풍 수준에 가까웠다. 연부소가 있는 한가운데가 태풍의 눈이 되어, 그를 향해 덮쳐오던 그 많은 환관들이 뒤로 전부 튕겨나가며 우르르 넘어지고 말았다. -쿠당탕! “오오!” 이를 지켜보던 황제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마교주가 흡사 마신을 보는 것처럼 위압적인 능력을 보여줬다면 연부소는 정파의 영웅답게 화려하고 멋진 초식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엇?” “오, 옷이?” 더욱 놀라운 것은 환관들의 관복 상의가 전부 찢겨져 나갔다. 단순히 화려하고 위력이 있는 것을 넘어서 정교할 정도로 검을 다뤘다는 의미였다. 팽가의 가주 팽구유가 혀를 내둘렀다. ‘뭔가 보여주리라고는 생각했지만 정말 괴물이구나.’ 설마 이 정도 고차원적인 초식을 보여줄 줄은 몰랐다. 무림에서 이십여 년 간이나 활동한 자신조차 입이 벌어질 정도인데, 이것만큼은 황제라고 해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성공이구나.’ 연부소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이 초식은 아버지인 북정도 이목이 이기어도의 특성에 맞게 만든 초식이었다. 이목은 여타의 고수들과 발상이 다른 자였다. 그는 허공을 자유롭게 날릴 수 있는 이기어도에 맞는 초식을 새롭게 만들었는데, 연부소가 보인 것이 바로 그 초식이었다. ‘어떻습니까? 폐.....!?’ 황제의 놀라는 모습을 상상하고 그에게로 고개를 돌린 연부소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까 전에 약간의 탄성이 흘러나오기에 성공했다고 여겼는데, 황제는 놀란 얼굴이라기 보다는 생각보다 심드렁한 표정에 가까웠다. “놀랍기는 한데, 그게 다인가?” “네?” 황제는 그가 보여준 것을 전혀 만족스러워 하지 않았다. 사실 그보다도 훨씬 높은 경지의 고수인 수신호위 임규화도 가능한 기예였기에 특별히 놀라움은 없었다. ‘어째서?’ 당연히 황제의 마음을 빼앗았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팽구유 역시도 당혹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대체 마교주 천여운이 어떤 신위를 보였기에 황제의 마음을 한 점 움직일 수 없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더는 없는가?” “폐, 폐하?” 더 이상 흥미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황제의 말투에 팽구유가 어떻게 이 상황을 수 습해야 할지 난처해했다. “폐, 폐하! 방금 연 공자가 보여준 기예는 무림에서도 오대고수 급의 고수가 아니고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황제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짐이 오대고수에 대해서 모를 거라 생각하나?” “그, 그것이 아니오라....” “지금은 없으나 짐의 수신호위가 전전대 오대고수였지. 자네들도 익히 알고 있다지. 파상검제의 위명을?” 당연히 모를 리가 없었다. 구십여 년 전에 누구도 견줄 수 없던 검의 황제라고 불렸던 자인데 모르는게 더 이상했다. “연부소라고 했나?” “......네. 폐하.” “그대가 뛰어난 것은 충분히 알았다. 그렇다면 자네의 아비를 세 초식 이내로 이길 수 있나?” “네?” 연부소의 두 눈이 흔들렸다. 아무리 그의 실력이 월등히 상승했다고는 하나 북정도 이목은 정파 무림과 도법에 있어서 정점에 서있는 자였다. 그런 자를 무슨 수로 세 초식 이내로 이긴단 말인가. 연부소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망설이자 황제가 가볍게 손을 저으며 말했다. “되었다. 짐의 결정에는 변함이 없도다. 이만 물러나라.” “폐, 폐하!” 설득하는데 애를 먹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런 식으로 축객령을 당할 줄은 예상도 못했다. 이때 그들은 몰랐다. 연부소가 신위를 떨친다는 것이 오히려 황제의 마음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큰일이다. 이대로 물러나면 정말 천마신교가 국교가 되어버린다.’ 정도 무림맹에 있어서 가장 큰 치욕을 맞게 되는 것이었다.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한 팽구유가 다급히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황제에게 외쳤다. “폐하! 저번 일로 실망이 크신 줄은 알겠지만 저희 정도 무림맹을 믿고...” “폐하! 폐하아아아아!” 연부소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바깥에서 고성이 들려왔다. 뭔가 울부짖는 소리에 가까웠기 때문에 대전까지 뚜렷이 들렸는데, 황제도 들었는지 인상을 찡그리더니 대내행창 제독 서태식에게 물었다. “무슨 소란이느냐?” “알아보게 하겠습니다.” 서태식이 환관들을 향해 눈짓을 보내자, 몇몇 환관들이 급히 대전 바깥으로 나갔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환관들이 한 도사 한 명을 데리고 들어왔다. 얼굴이 파랗게 떠있고 얼마나 헐레벌떡 뛰어왔는지 옷이 땀에 젖어 있었다. -털썩! “대, 대명제국의 폐하를 배알하나이다.” “짐이 몇 번이나 궁 앞에서 소란을 피우지 말라고 했을 터인데,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더냐?” 황제의 물음으로 보아 도사들이 찾아온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닌 듯 했다. 도교를 국교에서 폐지한다고 한 이후부터 수차례 몰려와 항소문을 올리고 명을 거둬주길 청원하고 있는 도사들이었다. “폐하아아아아!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태조 폐하 시절부터 도교를 숭상하던 대명제국이 아니오리까. 어찌 저 사악한 마교의 무리들이 도교의 사원을 해체하고 법구들을 부수도록 허락하신단 말입니까?” 절규하는 도사의 말에 팽구유의 인상이 굳어졌다. 항산파의 정선 사태가 급히 가본다고 하여서 어느 정도 지체시켰을 거라 생각했는데, 뭔가 문제가 생긴 듯 했다. 그때 연부소가 다급히 도사를 붙들고 물었다. “잠깐 멈추시오. 도사님. 혹시 마교주도 황궁의 도교 사원에 나타났소?” “그, 그걸 어찌 아셨습니까?” 놀라하는 도사의 대답에 연부소의 두 눈이 커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본 것이었는데, 그렇게나 대면하고 싶어했던 마교주가 이곳 황궁에 나타난 것이었다. ‘잠깐! 마교주가 여기에 왔다면 더 간단한 방법이 있지 않은가.’ 어떻게 황제를 설득해야 고민하던 차에 연부소의 머릿속에 좋은 묘수가 떠올랐다. ‘황제 폐하는 마교주를 두려워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는 설득할 수 없으니, 직접 그보다 우위에 있음을 증명하는 편이 훨씬 나을지도 모른다.’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연부소는 국교를 재고해달라고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팽구유에게 자신의 계획을 전음으로 보냈다. 이를 들은 팽구유가 잠시 고민에 빠졌다가 이내 동의했다. 어차피 직접 설득이 힘든 상황에 이곳 건안궁 대전에서 계속 버티고 있는 것은 시간 낭비였다. 그들은 짐짓 포기라도 한 것처럼 황제에게 인사를 올렸다. “폐하! 저희는 이만 물러나보도록 하겠습니다.” 순순히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밝힌 두 사람을 바라보며 황제가 속으로 혀를 찼다. 누가 보아도 이들의 노림수가 뻔했다. 마교주가 황궁 도교 사원에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서 저리 눈을 반짝이는데, 눈치를 못채는 게 더 이상했다. ‘참으로 어리석도다. 변인지 장인지 직접 맛을 봐야 아는 자들이로군.’ 그렇게 사지로 가고 싶다는데 별 수 있겠는가. 호기로움이 지나치면 수명이 짧아진다는 말이 새삼 이해가 갔다. * * * -타타타타탁! 황궁의 도관 건물이 있는 동남쪽으로 급히 경공을 펼치는 이들이 있다. 선두에 서서 안내하고 있는 자는 대내행창의 미 첩형이었고, 그 뒤로 팽구유와 연부소, 그리고 팽가의 무사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짐은 분명 그대들을 배려했도다.] [넷?] 건안궁의 대전을 퇴청할 때 황제가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찝찝한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그들이 노릴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이것뿐이었다. ‘마교주를 제압한다면 황제 폐하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 황제는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왠지 마교주를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연부소의 놀라운 신위를 확인하고도 말이다. “첩형 나으리. 혹시 공도 마교주를 본적이 있소?” 팽구유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앞서 경공을 펼치고 있는 미 첩형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답했다. “있다뿐이겠소. 솔직히 말씀드리면 본 첩형은 그대들이 그날의 마교주를 직접 대면하지 않고는 그 기분을 통감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오.” 그 말을 하면서 그때를 떠올렸는지 몸서리를 치는 미 첩형이었다. 황제의 초청으로 여러 정파 무림인들도 보았고, 환관들끼리 겨루기도 해보았지만 다 부질없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압도적으로 강했다. “그 자는 사람이 아니오. 괴물, 아니 마신이라 불러야 마땅할 것이오.” “마신?” 연부소가 미간을 찡그렸다. 청수 진인이 무림맹에서 했던 말을 그대로 내뱉고 있는 미 첩형이었다. 대체 얼마나 강했기에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흥분되는 구나. 드디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와 대적할 수 있는 호적수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자신의 애도(愛刀)인 첨원도의 도병을 잡은 오른손이 떨려왔다. 마교주가 없다고 했을 때만 해도 실망을 금치 못했는데, 도사의 입에서 황궁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피가 끓어오를 만큼 전의가 불타올랐다. “저곳이오!” 미 첩형이 멀리서 봐도 도관의 사원으로 보이는 건물을 가리켰다. 검후인 항산파의 정선 사태가 먼저 향했기에 지금쯤 한참 싸움이 벌어졌을 수도 있다고 여겼는데 생각보다 조용했다. “엇!” 그런데 사원의 열려있는 대문 틈 사이로 무력하게 꿇려 있는 비구니들이 보였다. 그들은 다름 아닌 항산파의 여제자들이었다. “어찌 이런 일이!” 팽구유의 인상이 야차처럼 일그러졌다. 혹시나 했는데, 먼저 도관의 해체를 막으러 갔던 항산파의 제자들이 제압된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검후 정선 사태는 어떻게 된 것일까? ‘아니다.’ 순간 노기가 치솟았던 팽구였지만 이내 이성을 되찾았다. 차라리 잘되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너무 일이 잘 풀려 버리면 모든 공이 연부소와 정선 사태에게로 집중될까 우려했었는데, 어느 정도 자신에게도 기회가 온 듯 했다. ‘마교주는 연 공자에게 맡기고 마교의 수뇌부를 노려야 겠다.’ 그 정도만 하더라도 위신도 세울 수 있고 후에 맹으로 복귀하면 청수 진인의 한쪽 팔도 받을 수 있으리라. -챙! 팽구유가 가주만이 물려받는 벽문도(霹刎刀)를 뽑으며 외쳤다. “팽가의 무사들아. 도를 뽑아라! 본 맹의 형제자매들을 구할 시간이 왔도다.” “와아아아아아아!” -챙! 챙! 챙! 가주인 팽구유의 호탕한 외침에 사기가 오른 스물다섯 명의 팽가의 정예 무사들이 함성을 질렀다. 팽가 내에서도 절정의 경지에 오른 고수들만 차출해서 왔다. 부관으로 따라온 외당주는 초절정의 고수였기 때문에 충분히 어떤 적에게도 쉽게 밀리지 않는 전력이라 자부한다. “연 공자. 본 가주가 먼저 선공을 가하겠네.” “좋을 대로 하십시오!” 자신 못지않게 전의를 보이는 팽구유 목소리에 연부소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웅! 팽구유의 도에서 푸른빛의 도강이 일어났다. 여기서 마교인들을 제압하고서 황제 폐하의 신뢰를 회복해야 하기에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기로 마음먹은 그였다. “본 가주를 따르라!” -팟! 쾅! 팽구유의 신형이 한줄기의 빛이 되어 사원의 대문을 뚫고 지나갔다. 뒤따라 들어가기 위해 연부소가 대문으로 경공을 펼치려 하는데, 등골이 오싹할 만큼 날카로운 예기가 느껴졌다. ‘뭐지? 이 예기는?’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귀가 찢어질 듯한 비명 소리가 사원 안에서 터져 나왔다. “끄아아아아악!” 놀란 연부소와 팽가의 무사들이 대문을 통과해 사원의 마당으로 들어갔는데, 호기롭게 선공을 취하려 들어갔던 팽구유가 누군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아닛!?” 그런데 팽구유의 상태가 이상했다. 무릎을 꿇고 있는 팽구유의 오른팔이 비어있었고, 잘려진 단면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가, 가주!!!” 팽가의 무사들이 경악해서 소리쳤다. 그들이 노해서 달려가려는 것을 연부소가 다급히 만류했다. “멈추시오!” 그와 동시에 연부소가 떨리는 눈빛으로 팽구유의 앞에 서있는 자를 쳐다보았다. 긴 머리카락에 새하얀 얼굴의 청년이 서있었는데, 놀랍게도 그의 손에 잘린 팽구유의 오른팔이 들려있었다. 청년이 긴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그들에게 말했다. “후우, 다짜고짜 덤비다니......오늘따라 팔이 잘리고 싶은 자들이 많군.” < 76장 격(格) (1) -수정- > 끝 < 76장 격(格) (2) > 하북팽가. 그들은 정파에서도 도(刀)로는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명가(名家)이다. 배다른 동생인 도월패주 팽무월과 더불어 정파에서 다섯 손가락에 드는 도객으로 명성을 떨친 하북팽가의 가주 팽구유. 그는 비록 무림맹 수뇌부의 말단인 십칠웅주였지만 부친과 다르게 야망이 있었다. 동생만큼 무(武)에 있어서 천부적인 재능은 없었지만 무림맹의 중추라 할 수 있는 삼웅주 이상의 자리를 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만큼 공로가 필요했다. ‘극도육무문은 너무 위험부담감이 크다.’ 극도육무문을 통해서 무위를 떨치기에는 그들은 정보도 적었고 너무 강했다. 그런 와중에 기회가 찾아왔다. 마교가 국교로 바뀌는 얼토당토않은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이것의 원인은 두 가지. 신임 마교주 천여운이라는 자와 올해 단오제 때에 불가침 조약 갱신 건에 관한 화답을 하러 황궁에 사신으로 갔던 청수 진인이었다. ‘청수 진인은 십이웅주다. 그가 자리에서 물러났으니 기존의 웅주들이 순차적으로 승진하겠지. 하지만 그것으로는 모자라다.’ 삼웅주를 목표로 하는 이상 더 빨리 위로 치고 올라가야 한다. 이것이 기회일지도 몰랐다. 청수 진인이 저지른 짓을 수습할 수만 있다면 그의 직위를 자신이 차지할 수 있을 지도 몰< 76장 격(格) (2) > 하북팽가. 그들은 정파에서도 도(刀)로는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명가(名家)이다. 배다른 동생인 도월패주 팽무월과 더불어 정파에서 다섯 손가락에 드는 도객으로 명성을 떨친 하북팽가의 가주 팽구유. 그는 비록 무림맹 수뇌부의 말단인 십칠웅주였지만 부친과 다르게 야망이 있었다. 동생만큼 무(武)에 있어서 천부적인 재능은 없었지만 무림맹의 중추라 할 수 있는 삼웅주 이상의 자리를 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만큼 공로가 필요했다. ‘극도육무문은 너무 위험부담감이 크다.’ 극도육무문을 통해서 무위를 떨치기에는 그들은 정보도 적었고 너무 강했다. 그런 와중에 기회가 찾아왔다. 마교가 국교로 바뀌는 얼토당토않은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이것의 원인은 두 가지. 신임 마교주 천여운이라는 자와 올해 단오제 때에 불가침 조약 갱신 건에 관한 화답을 하러 황궁에 사신으로 갔던 청수 진인이었다. ‘청수 진인은 십이웅주다. 그가 자리에서 물러났으니 기존의 웅주들이 순차적으로 승진하겠지. 하지만 그것으로는 모자라다.’ 삼웅주를 목표로 하는 이상 더 빨리 위로 치고 올라가야 한다. 이것이 기회일지도 몰랐다. 청수 진인이 저지른 짓을 수습할 수만 있다면 그의 직위를 자신이 차지할 수 있을 지도 몰랐다. 그런데 여기서 그가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청수 진인은 책임지고 물러나기 전까지 마교의 교주가 괴물이라고 수차례 말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고작 약관에 불과한 자가 생사경이라고? 풋! 차라리 그날 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핑계를 대던가.’ 팽구유 역시도 그 말을 한 귀로 흘려들었다. 불과 몇 달 전만 하더라도 화경의 고수라고 떠들썩했던 자가 그 수많은 단계를 넘어서 생사경의 경지가 되었다는 것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청수 진인, 미 첩형, 그리고 황제까지 마교주를 두려워했다. 아마도 추정 무위는 완숙한 화경의 경지이거나 혹은 최악의 경우에 화경의 극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자신보다는 분명 높은 실력자이기에 상대하기는 껄끄럽다. -쾅! 황궁 도교 사원의 문을 도강으로 단숨에 뚫고 들어간 팽구유는 찰나의 순간에 자신이 상대할 만한 적수를 빠르게 포착했다. 계단 위 법당 앞에 거구에 근육질의 사내와 푸른 두건을 쓴 청년이 서있었다. 그들을 보는 순간 팽구유는 단번에 화경의 고수임을 알아차렸다. ‘저놈이구나! 저놈이 마교주가 틀림없다.’ 저 거구의 턱수염 사내는 겉보기만 봐서는 자신과 거의 동년배로 보였다. 그런데 푸른 두건을 쓴 청년은 약관의 나이였다. 게다가 미묘하게 풍기는 이질적인 기운이 심상치가 않았다. ‘그렇다면 본 가주의 상대는 저 근육질의 사내로군.’ 곧바로 상대할 수도 있었지만 그 전에 사기 진작을 위해서 적당한 희생물이 필요했다. 단순한 무사가 아니라 마교 내에서도 단주 급 이상의 적이 있을 것이다. ‘저놈!’ 그런 와중에 팽구유의 눈에 법당 마당에 서있는 한 청년이 보였다. 다른 마교의 무사들과 다르게 고급스러운 흑의를 입고서 뒷짐을 쥐고 있는 자였는데, 풍기는 기운만으로는 평범했다. ‘제사장이나 군사일 수도 있겠구나!’ 딱 그가 찾던 희생물이었다. 무공은 약하지만 중요한 수뇌부일 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팽구유의 신형은 단숨에 그 청년에게로 쇄도했다. “흥! 감히 본맹의 형제자매들을 노리다니! 마교의 주구여!” 도강을 일으킨 벽문도로 단숨에 청년의 목을 베어내려 했다. 여기서 이 자의 목을 베는 순간에 연부소를 비롯한 팽가의 무사들이 사원 안으로 들이닥칠 것이다. “엇?” 그 순간 완벽했던 팽구유의 계획이 어이없게 틀어졌다. -?! 벽문도로 분명 청년의 목을 베었는데, 잔상처럼 흩어지는 것이 아닌가. 팽구유의 두 눈이 커졌다. “이, 이형환위?” 그 역시도 이형환위를 펼칠 수 있기는 하지만, 바로 코앞 거리에서 신형이 흩어져 보일 만큼 이렇게 빠른 신법은 본 적이 없었다. ‘어디로?’ -팍! 재빨리 그자를 찾으려는데, 그의 오른손목을 누군가 붙잡았다. 이형환위로 사라진 청년이 어느새 자신의 우측으로 이동해있던 것이다. “빌어먹을!” 팽구유가 이를 뿌리치고서 벽문도를 휘두르려는 순간 오싹할만한 예기가 느껴졌다. ‘피, 피해야 해!’ -탁! 불길함에 사로잡힌 팽구유가 전력으로 휘두르려던 벽문도를 손에서 놓고서 신법을 펼쳐서 거리를 벌리려고 했다. 그러나 붙잡힌 손목에 걸려서 몸이 부웅 떠버렸다. ‘헉! 무, 무슨 공력이?’ 놀랄 틈도 없었다. 공중으로 몸이 떠있는 상태에서 청년의 손이 그의 오른쪽 어깨를 내리치고 있었다. 팽구유의 두 눈에 청년의 손에 서려있는 푸른빛이 보였다. “도, 도강!” -?! “끄아아아아아악!” 날카로운 도강이 살과 뼈를 베어내자 팽구유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팔이 잘려본 적이 없으니 그 고통은 말로 형용할 수가 없었다. 너무 아파서 눈물까지 찔끔 올라오는데, 잘린 팔을 들고 있는 청년이 차갑게 식은 목소리로 어깨를 짓누르며 말했다. “꿇어라.” -꾸욱! 쾅! “크헉!” 팔이 잘려서 내공의 소실이 있는 것과 별개로 전율적인 공력이었다. 어깨를 짓누르는 순간에 절대로 버틸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파고드는 내공이 전신을 무력화했다. ‘크윽! 마, 말도 안 되는 괴물이다. 어떻게 이런 놈이 황궁에......서, 설마!’ 팽구유의 두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무릎이 꿇리기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귓등으로 흘려보냈던 청수 진인의 그 말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 자는 괴물, 아니 마신 그 자체요.] 팽구유가 떨리는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서 눈앞의 청년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얼굴에 날카롭고 강인해 보이는 눈매.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었지만 아무리 많이 봐줘도 약관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화경의 고수인 자신이 삼류 고수마냥 어이없게 제압되었다. [생사경의 고수란 말이오!] "그, 그게 사실이라고?” 팽구유는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했는지 직감할 수 있었다. 하고많은 자들 중에서 들어서자마자 본보기로 노렸던 자가 바로 마교주 천여운이었던 것이다. ‘내,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거지?’ 하얗게 질려버린 팽구유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바로 그때 사원의 대문으로 무림맹주의 장남 연부소와 팽가의 무사들이 들이닥쳤다. 천여운이 긴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그들에게 말했다. “후우, 다짜고짜 덤비다니......오늘따라 팔이 잘리고 싶은 자들이 많군.” 그런 천여운을 바라보는 연부소의 눈빛이 떨려왔다. 정도 무림맹의 십칠웅주 중 일인인 하북팽가의 가주 팽구유가 들어가자마자 저 꼴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닛!” 우측 편을 바라보니 항산파의 비구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고, 그 앞에 검후 정선 사태도 함께 였는데 놀랍게도 팽구유와 마찬가지로 팔이 잘려있었다. “정선 사태!” 팽가의 외당주 팽여속이 놀라서 소리쳤다. 전대 무림구패이자 검후 정선 사태의 그런 몰골은 모두에게 충격을 주었다. 혈도가 제압되어서 꼼짝하지 못하는 그녀가 핏대가 선 눈으로 힘겹게 그들을 향해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했다. ‘안 돼! 이 자는 절대로 상대해선 안 될 자요!’ 아혈을 점해둬서 입과 혀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팽가의 가주나 자신과 같은 꼴이 되고 싶지 않다면 도망가라고 하고 싶은데, 아무래도 그건 힘들어 보였다. 어느새 입구 쪽을 마교의 무사들이 막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독특한 문양의 가면을 쓴 자가 있었다. '명왕!' 정파 무림인들에게는 악명이 드높은 별호다. 마교에서도 세 손가락에 꼽는 고수로 알고 있었다. 살기를 풀풀 풍기는 모습이 들어오는 것은 자유지만 나가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고 말하는것 같았다. ‘연 공자.’ 정선 사태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무림맹주의 장남인 연부소를 바라보았다. 유일한 희망이 그였지만 너무 상황이 좋지 않았다. '설마 마교주와 싸우려는 건가?' 다른 팽가의 무사들과 달리 연부소의 두 눈은 오직 천여운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것도 뚜렷하게 전의마저 풍기면서 말이다. ‘저 자다. 틀림없다.’ 연부소는 첫눈에 그가 마교주 천여운임을 확신했다. 현경 초입의 경지인 자신이 기감으로 파악되지 않는 유일한 단 한사람. 약관의 어린 나이와는 별개로 오직 타인의 위에 군림하는 패자만이 지닐 수 있는 위엄. 마교의 교주가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었다. -부들부들! 연부소의 온몸이 떨려왔다. 그렇게 만나고 싶어 했던 호적수라 여겼던 마교주 천여운을 보자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기대 이하였다면 실망할 뻔했는데 대단했다. ‘이 나조차 짐작할 수 없는 강함을 지니다니. 과연 나의 호적수다.’ 운명이 드디어 그와 자신을 한 자리에 묶어두었다. 중원 무림이라는 거대한 패권을 다투게 될 호적수를 이렇게 만나게 되니 감개가 무량했다. 목숨을 걸만큼 긴장하게 만드는 강자가 호적수라는 것은 너무도 기쁜 일이었다. -꽉! 도병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당장에라도 도를 뽑아서 겨루고 싶지만 연부소는 그렇게 어리석은 자가 아니었다. 연부소가 두 손을 모아 포권을 취하며 소리쳤다. “마교주를 뵙게 되어 영광이오. 본인은 무림맹주의 장남이자 백원단의 단주인 연부소라고 하오!” 백원단(白元團). 정도 무림맹에서 자랑하는 네 개의 무력집단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백원단이었는데, 절정의 고수들로만 이루어진 이백 명의 정예들로 정마 전쟁이 벌어질 때면 수많은 마교인들을 죽여 전공을 세운 최강의 무력집단이었다. “연부소!” 고왕흘이 꽤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백원단의 단주라는 것도 놀라웠지만 연부소라 함은 정파뿐만이 아니라 전 무림에서 주목하는 차세대 오대고수라 불리는 자였다. ‘정도 무림맹에서 급하긴 했구나. 저런 거물급 인사를 보내다니.’ 이백 년이나 지켜온 국교의 자리를 빼앗겼다. 뭔가 무림맹에서 어떠한 조치를 취할 거라고 여긴 천여운은 황궁에서의 일을 마무리하고도 십만대산 마교로 곧장 복귀하지 않았는데, 과연 옳은 판단이었다. '무림맹주 북정도의 아들이라...' 천여운도 소교주 시절에 장로들이 비교하듯이 한 말 때문에 연부소의 이름은 기억하고 있었다. 정파에서 천재 혹은 괴물이라 불리는 자라고 들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팍! 천여운이 들고 있던 팽구유의 잘린 팔을 바닥에 던지고서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가 몇 발자국 걸어 나왔을 뿐이었는데, 불길한 위압감에 사로잡힌 팽가의 무사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뒷걸음을 쳤다. '무슨 기세가!' 마교 교주임을 알게 돼서가 아니라, 사원에 들어왔을 때부터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천여운이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연부소에게 말했다. “잘됐군. 그럼 그대가 지금 무림맹의 대표라는 것이군.” “으음, 그건......일단 그렇다고 해도 무방하겠구려.” 연부소가 웅주들을 힐끔 쳐다보았다. 정선 사태를 비롯해 팽구유까지 두 웅주들이 직위상 위였지만 나설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심각한 부상을 입고서 적들의 손에 잡힌 셈이니 말이다. “멋대로 공격한 것에 대해서 각오는 했겠지.” ‘아!’ 살기등등한 천여운의 목소리에 팔이 잘려서 두려움에 떨고 있던 팽구유가 정신을 차렸다. 무림맹에 공적을 세우고 황제를 설득하기 위해 마교주를 제압하려 했던 그들이다. 하지만 그것은 마교주 천여운이 연부소보다 약하다는 것을 전제삼은 것이었는데, 직접 겨뤄보니 아니었다. ‘여, 연 공자의 상대가 아니야.’ 아무리 연부소가 정파에서도 괴물이라 불리는 차세대 영웅이라고 해도 격이 달랐다. 마교주는 오대고수가 아니고는 엄두도 내기 힘든 고수였다. [연 공자! 안 되오. 국교를 되돌리는 것은 포기해야 할 것 같소!] 연부소가 마교주에 대한 전의가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팽구유였다. 다급히 전음을 보내서 그를 만류했다. 이에 연부소가 그를 쳐다보면서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연 공자! 그 자와 겨루는 것은 어리석은 짓....] 팽구유가 전음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연부소가 천여운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팍! 그리고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마교주여. 우선 본 맹을 대표해서 귀교를 공격한 것에 대해 사과드리겠소.” 팽구유가 놀란 눈으로 연부소를 쳐다보았다. 호승심에 그와 겨루자고 말을 할까 걱정했던 것과 달리 의외로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뜻밖의 행동에 천여운 역시도 눈에 이채가 띠었다. ‘한 발자국 물러서는 것인가.’ 전의에 불타서 노려보던 것과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연부소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본맹의 입장에서는 귀교에서 대명제국의 국교의 자리를 강탈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폐하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여러 가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릴 수가 없었소.” 진심을 말하는 연부소의 태도는 전형적인 정기 넘치는 정파인이 모습이었다. 어차피 마교 측에서도 알고 있을 사실이었기에 굳이 속일 이유도 없었다. 흉흉한 기세를 풍기던 천여운이 조용히 자신의 말에 집중하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한 연부소가 본론을 꺼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일은 귀교 측에도 어느 정도 원인제공을 했다고 생각하오.” “원인제공?” 천여운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러나 연부소는 이를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본맹과 귀교는 공동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 동맹을 맺지 않았소. 이 일로 동맹이 깨지는 것은 마교주께서도 원하지 않을 거라고 보오.” ‘아!’ 이어지는 연부소의 말에 팽구유와 정선 사태가 내심 탄성을 흘렸다. 수치를 무릅쓰고 고개를 숙임으로서 이 상황을 타개하려는 것인가 추측했는데, 의외의 묘수를 쓴 것이다. 그저 무공만 뛰어나다고 생각했는데 영악한 수였다. “본 맹에서도 한 발자국 물러나서 국교 건은 포기하겠소. 그러니 부디 동맹의 예우로써 두 웅주님들과 항산파의 제자들을 무사히 풀어주길 바라오.” ‘괜찮은 한 수였소. 연 공자.’ 항산파의 정선 사태가 속으로 그를 칭찬했다. 어차피 마교주와 마교인들을 제압해야만 황제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의 무력으로는 마교주를 상대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차라리 기존의 전력을 보존하는데 주력하는 편이 나았다. ‘국교 건도 깨끗히 포기한다고 했으니, 마교주로서도 거절할 수 없는 제의다.’ 극도육무문이라는 공동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서라도 마교주도 동맹을 깨는 것만큼은 피할 것이다 “부탁드리겠소.” 연부소가 화룡정점으로 한 번 더 공손하게 포권을 취하며 고개 숙여 부탁했다. 정도 무림맹주의 아들이자 차기 정파의 정점이 될 그가 이렇게까지 나왔는데 마교주로서도 어쩔 수 없으리라. 그렇게 여겼는데, “뭔가 착각하고 있군.” “!?” 당연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여겼는데, 천여운의 반응이 예상과는 달랐다. 천여운이 천천히 한 걸음씩 연부소가 있는 곳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국교를 정하는 것은 네놈들이 양보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황제 폐하의 결정에 달려있는 일이다. 그걸 뒤집을 수 없으니, 네놈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덤빈 것이 아닌가?” “그, 그건....” 정곡을 찌르는 말에 연부소가 순간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리고 동맹이 깨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치고 꽤나 대담한 짓거리를 해놓고 말장난으로 피해나갈 생각을 하다니 실망스럽군.” -챙! 불과 열보 앞까지 거리를 다가온 천여운이 새하얀 도신의 백룡도를 뽑았다. "마교주여. 정말 동맹이 깨질 수도..." "헛소리는 집어치우고, 대가로 팔 하나 정도는 받아가겠다." "팔?" -고오오오! 흉흉한 살기가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당장에라도 출수할 기세에 연부소의 인상이 굳어졌다. ‘어쩔 도리가 없구나.’ 웅주들의 목숨이 걸려 있는 일이기에 교섭이라는 방법을 택했었는데 보기 좋게 실패해버렸다. 아무래도 마교주는 무위만 강한 것이 아닌 듯 했다. 결국은 그가 원래 바라던 대로 겨룰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 같았다. 연부소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두 웅주들을 번갈아가면서 쳐다보았다. ‘두 웅주님께는 죄송스럽군요. 마교주가 본인보다 강하기에 희생을 줄이고자 피해보려고 했는데, 역시 그와 나는 겨룰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 같소.‘ 이것을 보면 호적수라는 운명은 어쩔 수 없다고 여겨졌다. 연부소가 천천히 허리춤에 있던 자신의 애도인 첨원도를 뽑았다. -챙! 그리고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천여운을 향해 도 끝을 겨냥하면서 말했다. “귀공도 아마 본인을 의식했을 거라고 생각하오. 호적수라는 것이 그런 존재이니 말이오. 마교주 귀공도 마교에서 그랬겠지만 본인 역시도 정파에서 천재라 불린...” -?! “!?”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차가운 예기가 오른팔을 스쳐지나갔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연부소는 뒤늦게야 자신의 신체 상태를 알 수 있었다. -툭! 챙그랑! 첨원도를 쥐고 있던 오른팔이 돌바닥으로 떨어졌다. “끄아아아악!“ 팔이 잘려나간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는 연부소의 귀에 천여운의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재라서 뭐가 어쨌다는 거냐.” “끄으윽!” -팟! 잘려나간 단면 부위가 너무 아팠지만 그것을 참고서 연부소가 거리를 벌렸다. 당연히 무위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에 어느 정도 밀릴 거라고는 예측했지만 설마 불과 일도에 팔을 잃을 줄은 몰랐다. ‘안 보였어. 말도 안 될 정도의 쾌도다.’ 분명 정면에서 베어 들어왔는데, 뒤늦게 반응하고 말았다. 알면서도 당한다는 말이 이런 뜻인가. 그때 천여운이 바닥에 떨어진 그의 오른팔을 밟고 서서는 물었다. "대가는 받았다. 계속 할 테냐?" 그 말에 늘 침착하고 크게 감정 변화가 없던 연부소조차 화가 들끓었다. "지금 본인을 모욕하는 것인가!" -타타탁! 연부소가 잘린 팔 부위의 혈도를 점해서 지혈시켰다. ‘가까이서 겨루는 것을 피해야 해.’ 신법을 펼쳐서 일정 거리가 벌리자, 연부소가 입술을 질끈 깨물고서 왼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챙! 챙! 챙! 그러자 바닥에 떨어져 있던 첨원도를 비롯해 등에 매고 있던 도집에서 대기하고 있던 양대 보도인 고원도와 삭원도가 동시에 뽑혀져 나왔다. 황제의 앞에서 보인 이기어도술을 선보이려는 것이었다. “하아....하아....방금 전에는 방심했지만 이젠 다를 것이오!” 연부소가 왼손을 휘젓자, 세 보도가 허공에서 빠르게 교차하며 시야를 어지럽히더니, 이내 천여운을 향해 합격을 펼치듯이 절묘하게 쇄도했다. -슉! 슉! 슉! 북정도 이목에게 전수 받은 초식화된 이기어도술은 그가 펼칠 수 있는 최고의 기술이라 자부한다. 마교주라고 해도 이것을 막으려면 꽤나 애를 먹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슥! 천여운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세 자루의 보도로 가볍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천여운의 바로 앞에서 이기어도가 멈춰버렸다. “어, 어째서?” 당황한 연부소가 진기를 더욱 끌어올려 이기어도를 펼치려 했지만 이미 세 자루의 보도는 그의 제어권을 벗어나버리고 말았다. 말 그대로 제어권을 침식당한 것이었다. 자신의 아버지인 북정도 이목조차도 이런 것은 불가능했다. “자, 잠깐 마교주여. 이건 불공평한...” “그럼 팔이 잘렸을 때 그만뒀어야지.” -휘리릭! 천여운이 가볍게 손을 움직이자, 세 자루의 보도가 거꾸로 회전하더니 원래의 주인을 향해 번개처럼 날아가 그의 몸에 꽂혔다. -파파팍! “컥컥컥!” 양쪽 허벅지와 반대쪽 어깨에 도가 꽂혀서 대롱거렸다. 입에서 선혈이 솟구쳤다. “쿨럭!” 연부소는 자신의 몸에 꽂혀 있는 세 자루의 보도를 보면서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강함은 불공평 그 자체였다. ‘끄으으으....너무 압도적이지 않은가? 정말 생사경의 고수란 말인가.’ 천여운의 무위를 현경 혹은 완숙한 현경의 경지라고 추측했던 연부소였다. 약관의 나이에 생사경의 경지에 오른 자가 있다는 말은 평생 듣도 보지도 못했다. '진짜 괴물이다.' 이렇게 어이없이 당하고 나서야, 연부소 역시도 다른 웅주들처럼 현실을 직시할 수가 있었다. ‘......이 자는 나와 격이 다르다.’ 절대로 자신의 호적수가 아니었다. 피를 토해내며 허탈해하는 그의 앞으로 천여운이 다가왔다. 마무리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쿨럭쿨럭.....패자가....무슨 말을 하겠소. 죽이시오. 하지만 그대는 이것으로 무림맹 역시도 적으로....” “무슨 헛소리냐.” “!?” “내가 네놈을 왜 죽이지?” “그게 무슨?” 천여운이 의아해 하는 그를 냉소적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언제든지 써먹을 수 있는 이렇게 좋은 인질인데 말이야.” ‘이.....이 자는 정말......’ 끝내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 76장 격(格) (2) > 끝 < 77장 파기(破棄) (1) > 눈앞에서 정파의 차세대 영웅이자 무림맹주의 장자 연부소가 압도적인 무위로 제압당하자, 나머지 팽가의 무사들은 큰 반항 없이 항복하게 되었다. 물론 그 배경에는 쓸데없는 희생을 피하고자 한 팽구유의 전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덤벼봐야 중상이나 죽음만 당할 거다.’ 야망에 눈이 멀어 공을 세우려고 했던 그였지만 상대의 무위를 파악한 시점부터 지극히 현실을 깨닫게 되었다. ‘저 괴물이 저 꼴이 되다니.....’ 현경 초입의 고수를 이렇게 아이 다루듯이 쓰러뜨릴 줄은 몰랐다. 마치 그 무위 차가 초절정의 고수와 삼류 고수가 겨룬 것이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두 사람이 보였던 고절한 기예들만 아니었다면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무위가 올라갈수록 그 간극의 차이가 심해지는 것인가.’ 무서웠다. 이제 겨우 약관인데 말도 안 되는 성장을 보였다. 초절정의 고수가 화경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도 길게는 수 년에서 길게는 수십 년의 시간이 소요되기도 한다. ‘불과 몇 달 만에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청수 진인이 그렇게 경고를 했어도 무림맹의 누구도 믿지 못할 만큼 상식을 넘어선 성장이었다. ‘아......!!!’ 문득 팽구유는 황궁으로 떠나기 전에 청수 진인과 내기를 했던 것이 떠올랐다. 서로의 한 팔을 걸고서 약조했는데, 운이 좋아서 풀려나게 된다면 남은 한 팔마저 빼앗길 위기였다. 방금 전만 하더라도 정도 무림맹 측에서 협상이 잘되길 바랐던 마음이 미묘하게 되어버렸다. 한편 남은 팽가의 무사들까지 전부 항복하게 되면서, 법당의 앞마당은 백여 명에 가까운 포로 들로 가득 차고 말았다. 결사 항전을 하던 도사 사십여 명과 항산파, 팽가의 무사 오십여 명은 자신들의 처분이 두려워 하염없이 땅바닥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가리키며 법당 안의 대청 위에서 허봉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교주님. 저들을 한 사람도 죽이지는 않았지만 무림맹주의 아들과 두 웅주들이 부상을 입었는데, 괜찮을 런지요?” 연부소가 했던 경고가 내심 마음에 걸렸던 허봉이었다. 정도 무림맹의 입장에서는 국교도 빼앗긴 것도 모자라, 그들의 수뇌부까지 팔이 잘리는 치욕을 당한 셈이었으니, 여차하면 동맹을 파기할 지도 몰랐다. 이에 대답한 것은 옆에 있던 고왕흘이었다. “하하핫, 걱정말게. 허봉. 아마 당장에 그럴 일은 없을 걸세.” “당장이라면?” “어차피 동맹을 맺은 이유가 더 극도육무문이라는 적을 상대하기 위함인데, 동맹이 파기되면 삼파 전도 아니고 사파 전으로 돌아가는데 어찌 쉽게 동맹을 파기하겠는가. 그저 희생없이 무사히 이곳을 벗어나기 위한 연부소의 술책일 뿐일세.” 고왕흘의 말에 천여운 역시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동맹을 맺은 이유가 단순히 평화를 위해 맞은 것이 아니었기에 정도 무림맹에서는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고는 동맹을 파하진 못할 것이다. “에휴, 괜한 걱정을 했네요.” “허봉 자네의 기우도 당연하네. 하지만 서쪽에는 사파, 동쪽에는 극도육무문, 남쪽에는 본교를 두고서 그런 멍청한 짓은 하지 못할 걸세.” 그 말대로 동맹이 파해질 경우 정도무림맹의 경우 지리적으로 동서남으로 적에게 둘러싸이는 형태가 되어버려서 막다른 궁지에 몰리게 된다. 정도 무림맹 측에서 그것만은 절대적으로 피하려고 할 것이다. “이번에 무림맹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꽤나 놀라겠군요. 히히힛.” 아직까지 정도 무림맹은 아무런 결과도 알지 못한다. 그저 황궁으로 파견한 이들이 성공적으로 황제를 설득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교주님. 저들을 어찌 하실 건지?” 고왕흘이 혈도가 점해지고 포승줄에 단단히 묶여있는 포로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언제까지 이 많은 자들을 여기에 두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연부소와 웅주들만 남겨두고 돌려보내야지.” 동맹이 아니라면 명분이 충분했기에 굳이 죽여도 상관없지만, 더 이상 정도 무림맹과 알력을 키우는 것은 그리 바람직한 방향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제가 정도 무림맹 측으로 사신으로 가서 저들을 인계하고 교주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오겠습니다!” 고왕흘이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도 무림맹의 본진에 포로를 인계하러 가는 것이었기에 저들의 분노를 사서 위험할 수도 있었지만, 고왕흘은 그런 것을 전혀 개의치 않는 담대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아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천여운이 괜찮다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포로로 묶여있는 정파인들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저들 손에 서신을 쥐어줘서 보내도 충분하니까.” 연부소와 두 웅주를 데리고 있기에 저들이 함부로 하지는 못하겠지만, 괜한 무리는 할 필요가 없었다. 만약에 상황이 발생하여 무림맹 측에서 강하게 나와, 고왕흘을 인질로 잡고서 교환을 요청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쩝, 알겠습니다.” 못내 아쉬웠는지 고왕흘이 입맛을 다셨다. 다른 육검들에 비해서 이번이 첫 출도였기에 좀 더 경험을 해보고 싶은 그였다. 그런 그와 달리 허봉이 히죽 웃으면서 말했다. “이번 일로 무림 전체에서 교주님의 위엄을 알게 되겠군요. 옷! 어쩌면 교주님께서도 별호가 생기는 게 아닙니까?” 지금까지는 살려둔 적이 없었기에 이름이 알려질 기회가 극히 없던 천여운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로 인해 무림에서도 명성이 두터운 세 고수를 제압했으니, 별호라는 것이 생길지도 몰랐다. 무림에서 활동하는 무인이라면 명성에 걸맞는 별호가 생기기를 바란다. “기대되는데요. 히히힛.” * * * 그렇게 사흘 뒤, 정도 무림맹으로 잡혔던 포로들이 송환되었다. 팽가 가주인 팽구유뿐만이 아니라 항산파의 검후인 정선 사태와 맹주의 아들인 연부소가 갔었기에 어느 정도 일이 잘 풀리지 않을까 짐작했었던 무림맹에 있어서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정파 무림맹의 본단 대전. 맹주인 이목을 비롯한 세 명의 웅주들이 항산파와 제자인 오선과 오혜, 그리고 팽가의 외당주인 팽여속 등에게 그간의 황궁에서 있었던 일을 보고 받았다. “허어. 어찌 이런 일이.....아미타불.” 이웅주이자 소림사 방장 각연 대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연신 경을 외웠다. 이런 사태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설마 그 세 사람이 인질로 붙잡혀 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오선 스님 그게 정말이오?” 육웅주이자 화산파의 장문인 풍청운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지 이를 되물었다. 청수 진인의 경고 때문에 마교주 천여운의 무공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고는 생각했지만 이건 정말 충격적이었다. “정말입니다. 그 연 공자조차 전혀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오선은 재차 그때 있었던 대결을 그대로 이야기해주었다. 듣는 내내 웅주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대결의 내용을 들으면 들을수록 대결이라기보다는 일방적으로 당한 것에 가까웠다. ‘이기어도를 펼치던 것을 역으로 빼앗았다고?’ ‘아니. 그게 가능한 일인가?’ 현경의 고수만이 펼칠 수 있다고 알려진 고절한 기예가 이기어도술이었다. 그것만으로도 현 무림의 정상이라 할 수 있는 오대고수가 아니고는 언감생심 넘볼 수 없는 수 준이었는데, 이를 무력화했다는 것은 그 경지가 훨씬 위라는 것을 의미했다. “하......진인의 말이 정말 사실이었단 말인가.” 부끄러운 이야기였지만 당시에 누구도 청수 진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무공을 익히는 자들이라면 누구나가 알 것이다. 화경의 경지에조차 평생을 연마해도 오르지 못하는 이들이 무림에 수두룩하다. 게다가 지고의 경지라 불리는 현경에 오른 이들은 전 무림인을 통틀어서 열 손가락 안에 들 만큼 현저히 적다. 생사경이 죽었다가 깨어나도 오르지 못할 경지라고 불리는데는 달리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진정한 신인(神人)이란 말인가.’ 하늘에서 선택을 받았다고 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한참을 놀라하던 풍청운이 문득 의아한 표정으로 팽여속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등에 매고 있던 그것은 무엇인가?” “아!” 그 질문에 팽여속의 표정이 급속히 어두워졌다. 앞서 황궁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것보다도 더 어려워하는 눈치였다. “.....무엇인가? 한 번 열어보게.” 그때 심각해하는 다른 웅주들과 달리 유달리 표정 변화가 없던 한 중년의 사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아! 삼웅주.’ 고급스러운 파란 비단 정복을 입은 짙은 눈썹의 사내였는데, 그는 남궁세가의 가주이자 무림구패의 일인으로 명성을 날리는 천명검객 남궁경이었다. ‘이분도 있었구나.’ 팽여속이 의아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남궁경은 무림맹의 전력의 삼 할을 움직일 수 있는 삼웅주의 자리에 있는 자로 극도육무문과 맞닿은 전장을 책임지는 동부 사령관이다. 한 동안은 웅주 회의에 참석하지 못할 거로 알았는데,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삼 웅주의 말씀대로 하게.” 풍청운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했다. 이에 잠시 망설이던 팽여속이 힘겹게 말했다. “실은 마교주가 이, 이 목함을 맹주님께 꼭 전하라고 하였습니다.” “본 맹주에게 말인가?” “그, 그렇습니다.” 의아해하던 맹주 이목이 그것을 가까이로 들고 오게 했다. 팽여속이 등에 매고 있던 목함의 끈을 풀어서 이목이 앉아 있는 석좌의 다섯 보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목함의 뚜껑을 열자 이를 지켜보고 있던 웅주들의 표정이 일제히 굳어졌다. 목함 안에는 놀랍게도 약품 처리가 된 잘린 팔 세 개가 나란히 들어있었다. “어, 어찌 이런!” 방금 전까지 황궁에서 있었던 일들을 들은 웅주들이 이 팔이 누구의 것들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회색 승복으로 보이는 팔소매는 정선 사태였고, 근육이 잘 발달한 팔은 팽구유, 마지막으로 백의 소매는 연부소의 것이 분명했다. -쾅! 석좌에서 들려오는 굉음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지금까지 근엄함을 잃지 않고 있던 무림맹주 이목의 하나만 뜨고 있는 눈에 불꽃같은 노기가 서렸다. ‘맹주께서 진노하셨구나.’ 아들의 팔만 무림맹으로 돌아온 셈이었으니 화가 나는 것도 당연했다. -휘리리릭! “앗!” 목함 안에 있던 백의의 잘린 팔이 허공으로 떠올라 이목의 손으로 빨려 들어왔다. 이목의 떨리는 눈으로 아들의 잘린 팔을 쳐다보았다. ‘마.....교.....주.’ 고요한 호수와도 같은 그의 마음에 격랑이 일어났다. 전대 마교주인 남마주 천유종조차도 그를 이렇게 화나게 만들지 않았다. ‘광오하구나.’ 이렇게 잘린 팔만 보낸다는 것은 그를 비롯해 무림맹 전체를 도발하고 조롱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분노하고 있던 그의 눈에 무언가가 띠었다. ‘이건?’ 잘린 팔은 주먹을 꾹 쥐고 있었는데, 그 안에 무언가가 들어있었다. 그냥 펴보려고 했는데 무슨 짓을 했는지 너무 꽉 쥐어져서 도통 펴지지 않았다. ‘흐음.’ 천유종이 쥐고 있는 손목의 힘줄에 심후한 내공을 주입하자, 경직된 손가락이 펴지며 그것이 드러났다. 그것은 아주 단단하게 접혀져 있는데 글씨가 갖은 것이 적혀 있었다. ‘설마 이건.....서찰?’ 이상했다. 어째서 서찰 같은 것을 이런 식으로 주먹에 쥐게 해서 보이지 않게 했을까? 뭔가 숨겨진 무언가가 있다고 판단한 이목을 다른 웅주들이 보이지 않게 잘린 팔에 가려서 조심스럽게 펴보았다. 서찰에 적힌 내용을 읽어 내려가는 이목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어 갔다. '!?' 이를 모르는 웅주들은 그들 나름대로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육웅주 풍청운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웅주인 각연 대사에게 말했다. “대사께서는 이게 무슨 의미로 보십니까?” “......빈승은 이것이 아무래도 경고로 보이오. 전대 교주인 남마주 역시도 위험한 자라 여겼는데, 당대 마교주는 정말......”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이것은 일종의 경고이자 도발이었다. 천마신교가 국교가 된 것에 대해서 더 이상 관여하면 용서치 않겠다는 것과 불만이면 언제든지 상대해주겠다는 말하는 것 같았다. “명분도 상황도 그리 좋지 않구려. 아미타불.” 마교 측에서 먼저 공격을 해서 이런 일을 벌어졌으면 모를까, 이번 사태의 원인이 연부소를 비롯한 입궐한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기에 항의를 할 명분이 없었다. 더군다나 이번 일로 동맹을 파기해봐야 손해를 보는 쪽은 무림맹 측이었다. ‘까다롭다. 더는 극도육무문만이 문제가 아닌 것 같구나.’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당대 마교주 천여운이 이끄는 마교는 정도 무림맹에게 있어서 극도육무문 이상으로 위험하다고 느끼게 만들었다. “참으로 진퇴양난입니다.” 풍청운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답답함을 감추지 못했다. -탁! 그때 서찰을 품속에 갈무리한 이목이 잘린 연부소의 팔을 내려놓고, 웅주들을 향해 말했다. “여러 웅주들께 안건을 올리겠소.” “안건이라 함은?” 의아해하는 웅주들에게 맹주 이목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교와의 동맹 파기를 제청하는 바이오.” < 77장 파기(破棄) (1) > 끝 < 77장 파기(破棄) (2) > 갑작스럽게 제청된 무림맹주 이목의 동맹 파기. 그것은 정도 무림맹의 본단을 혼란으로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들인 연부소의 팔이 잘려서 왔으니, 분노를 하는 것도 당연했지만 극단적인 제청이라 할 수 있었다. “아미타불! 맹주. 너무 섣부른 제청인 것 같소.” 어지간한 경우에는 이목의 결정을 반대하지 않는 이웅주 각연 대사였지만 이번 일만큼은 옳지 못한 판단이라 여겼다. 당장에 마교와 척을 지게 되면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다. “원시천존. 원시천존. 맹주. 그것은 빈도 역시도 대사님과 같은 의견이오. 이번 사건은 마교주가 과하게 도발한 것도 있지만 동맹 파기까지는 무리한 제청이오.” 육웅주인 풍청운도 이를 반대했다. 만약 마교주가 원래 그들이 판단했던 종사로서 아직은 모자란 애송이었다면 모르겠지만, 이번 국교 사건으로 무력을 갖춘 괴물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이런 상황에서 극도육무문 이상의 적을 만드는 것은 위험한 판단이었다. “부디 제청을 거둬주길 바라오.” 정파 무림에서도 인망과 명성이 두터운 두 웅주의 의견은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이었다. 게다가 무림맹 내에서도 온건주의자에 속하는 그들로서는 과도하게 전쟁의 범위가 커지는것을 만류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 그렇게 생각하오?” 맹주 이목의 물음에 자연스레 모두의 시선이 삼웅주 남궁경에게로 향했다. 여기서 그마저 반대를 해줘야 제청 자체를 막을 수 있었다. 다만, ‘남궁 가주는 정파가 아닌 세력에 극단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자다.’ 두 웅주들이 우려하는 점이었다. 극도육무문의 무림에 드러났을 때도 팽가의 가주인 팽구유, 당가의 가주 당필호와 더불어 앞장서서 동맹을 결사반대했던 인물이었다. 게다가 그는 연부소를 가르쳤던 스승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삼웅주 남궁경이 상당히 고민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찌해야 좋을까?’ 남궁경의 고민은 당연했다. 정도 무림맹 내에서도 소수만이 알고 있는 그의 정체. 그것은 창천회(蒼天會)의 다섯 간부 중의 한 사람인 천주이다. 사마(邪魔)의 무리들을 전부 멸해서, 창천의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동맹 파기는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었다. ‘아무리 연 공자의 팔이 잘렸다고는 하나 평소 맹주의 성품을 생각하면 극단적이다.’ 물론 무위로서도 정파에서 정점에 서있는 자가 이목이다. 하지만 구파일방 오대세가의 출신이 아닌 그가 무림맹의 맹주가 될 수 있었던 것에는 대협이라는 칭호를 받을 만큼 정기가 넘치고 중도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맹주의 결정치고는 굉장히 극단적이었다. ‘흠.....’ 남궁경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넘어가지 않기에는 이것은 어떤 의미로 좋은 기회였다. ‘이번 단오제에 사파나 마교의 수뇌부부터 극도육무문까지 전부 모인다. 지주가 남겨놓은 그 책으로 시술의 양산이 겨우 성공했다고는 하지만 맹에서 같이 지원해준다면 이번 기회에 그들 수뇌부를 한 번에 제거할 수 있다.’ 이제 단오제까지 열흘의 기간이 남았다. 그때 통허현에 삼대 세력의 수뇌부들과 신생 문파인 극도육무문까지 모여서 관과 무림의 불가침 조약을 갱신하게 된다. 그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기회는 극히 드물다. 전체 전력이 오진 않더라도 각 파의 주요 수뇌부들만 제거해도 향후 중원 무림의 전황을 뒤흔들 만큼 크나큰 계기가 될 것이다. 남궁경이 고개를 들어 석좌에 앉아 있는 맹주 이목을 바라보았다. 이목의 하나뿐인 눈빛에는 강한 결의가 서려있었다. ‘진심인가.’ 십칠웅주인 팽구유 같은 자가 이런 안건을 냈다면 당연히 노림수가 있다고 판단했겠지만, 그러기에는 맹주의 성품 자체가 올곧다. 의심이 많은 남궁경은 의견을 내기 전에 마지막으로 맹주 이목의 진정한 의중을 떠보기로 결정했다. “맹주께서 이렇게 큰 결심을 하신 이유에 대해서 들어볼 수 있겠소이까?” 그 질문에 맹주 이목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입을 열었다. “처음 본 맹주가 마교와의 동맹을 추진한 것은 위험한 악을 전초제근(剪草除根)하기 위함이었소. 하지만 그 생각이 틀렸소이다.” “틀렸다함은?” “악을 제거하고자 또 다른 악과 타협한다면, 예부터 정의를 숭상하는 정도 무림맹의 고결한 의지에 반한다는 것을 깨달았소! 지금이라도 본 맹주는 이를 바로 잡고서 정파의 중심인 본 맹이 중심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소이다.” 정기가 넘치는 목소리에 남궁경의 눈빛에 이채가 띠었다. 처음에는 갑작스러운 파기 제청에 의심을 했었지만 괜한 우려라 판단되었다. 그렇다면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었다. ‘두 군사와 다른 웅주들이 없는 지금이 기회다. 맹주의 결정이 바뀌기 전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한참을 고민하던 끝에 남궁경이 입을 열었다. “맹주의 결의를 잘 들었소. 정의를 생각하는 그 고결함이 이 남궁 모의 마음을 움직였소이다. 본인 역시도 전부터 동맹을 반대해온 사람으로서 맹주의 제청에 찬성하는 바이오.” “허어.” 이웅주 각연 대사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역시 예상과 같은 결과가 일어났다. [풍 장문인. 이러다 정말 큰일날 수도 있겠소. 아미타불.] [일단은 막아야 겠소이다.] 상황이 좋지 않다고 판단한 육웅주 풍청운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맹주! 본 맹의 모든 결정은 회의로 결정되기에 과반수 이상의 웅주들이 참석해야만 진행이 가능하지 않소. 정히 제청을 하시겠다면 그들의 절반을 소환시켜야 하지 않겠소?” 풍청운의 목적은 시간을 벌려는 것이었다. 지금 맹주 이목은 분노로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않고 있었다. 올곧은 성품의 그라면 하루만 설득해도 극단적인 제청을 철회할 확률이 높았다. 그러나, “그럴 필요 없소이다. 각 웅주들은 맡은 소임으로 공사다망하지 않소. 맹주께서 이번에 큰 결의를 하셨으니, 맹주령을 발동하는 것이 어떻겠소이까?” “아니! 남궁 가주!” 남궁경의 의견에 각연 대사와 풍청운이 놀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맹주령(盟主令). 그것은 무림맹주가 지닌 최대 권한이었다. 풍청운의 말대로 수많은 문파가 가입하여 만들어진 무림맹이기에 모든 안건은 회의를 통해서 결정되지만 예외적인 경우가 있다. 바로 맹주령을 통한 결정이었다. 무림맹주는 임기 동안 총 세 번의 맹주령을 발동할 수 있다. 이것은 정파 무림을 대표하는 자에게 위임된 최대 권한으로 맹주령을 발동할 시에는 누구든 이견을 제의하지 않고 따라야만 했다. “남궁 가주! 이 중차대한 일에 어찌 맹주령을 발동하라는 것이오!” 도사로서 평소에 화를 잘 내지 않는 풍청운조차 목소리가 높아졌다. 맹주령을 발동하면 누구도 거부권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워낙 강제적인 성격이 강한 권한이라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고는 역대 무림맹주들도 이것을 쓰는데 신중을 기했다. 현 맹주인 이목 역시도 임기 동안에 한 번도 쓰지 않았다. “맹주 이것은 신중히 선택...” “좋소이다. 삼 웅주의 의견을 받아들여 이번 파기 제청은 회의가 없이 맹주령을 통해 결정토록 하겠습니다.” “매, 맹주!” “어찌 그런 결정을.....원시천존. 원시천존.” 확고하게 결정을 내리는 맹주 이목의 말에 두 웅주들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반면에 남궁경은 기쁨을 숨길 수 없었는지 입 꼬리가 올라갔다. ‘거짓이 아니었다. 확실하다!’ 혹시나 했던 우려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드디어 창천회의 오랜 계획을 발동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생겨났다. ‘회주께서도 크게 기뻐하시겠구나!’ * * * 늦은 밤. 무림맹 본단 맹주 이목의 집무실. 집무실 책상에 있는 백자 등잔의 촛불 하나가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맹주 이목이 촛불 아래에서 잔뜩 구겨진 서찰 하나를 펴서 읽어 내려갔다. [본좌는 마교주. 천여운이라고 하오. 먼저 황궁에서 맹주의 아드님과 귀 맹의 웅주들에게 해를 입힌 것을 먼저 사과하겠소.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귀 맹의 웅주들이 믿지 않을 거라 생각하여, 과하게 맹주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소. 맹주께는 약조하리다. 이번 일이 마무리된다면 아드님과 두 웅주 분들을 무사히 송환시키겠소. 그리고 국교 건 역시도 황제 폐하께 아뢰어 도교로 양보되도록 할 터이니, 이번에 본좌를 믿고서 맹주와 한 가지 일을 도모하고자 하오. 이번 황궁에서의 일로 대계가 실패하여 극도육무문의 수뇌부들이 단오제 때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도 있소. 듣기로는 본교와 마찬가지로 귀 맹 역시도 간자 문제로 골머리를 썩고 있다고 들었소. 그래서 본좌가 좋은 방책을 떠올리게 되었소이다. 이를 위해서 맹주께서.....] 구깃구깃 구겨진 서찰에 적힌 내용이었다. 간자를 보낸 적들을 속이기 위해 아군도 속이라는 말과 함께 동맹을 잠시 파기하자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분노하기는 했지만 극단적으로는 갈 생각이 없던 이목이었다. 그러나 서찰의 내용을 되새기면서 마교주가 한 제의가 일리가 있다고 여겼다. '....이번 결정은 본 맹주에게 있어 도박이나 다름 없다.' -화르르르륵! 심란한 마음에 집무실로 돌아와 다시 한 번 서찰을 읽은 이목은 이를 촛불에 태웠다. 불이 붙은 서찰이 바스라지면서 재가 되어 허공으로 사라져갔다. 이를 바라보는 이목의 눈빛이 묘하게 반짝였다. * * * 무림맹의 본단 건물에서 서남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산인 연자봉의 깊은 계곡. 수풀들로 가려진 어두운 계곡의 깊숙이에는 하나의 동굴이 있었다. 산짐승이 살 것 같은 동굴 안은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동굴의 입구 앞으로 한 정체불명의 검은 장포의 죽립인이 나타났다. 죽립인이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동굴 입구의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서 작게 입을 열었다. “도공문의 제 삼대 대주 복정이 문주의 명을 이행했나이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동굴 안에서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있는 듯 없는 듯이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은 이 인영은 독특하게도 눈까지 전부 가려진 검은 복면을 쓰고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 터인데 전혀 불편함이 없어 보였다. “어떻게 되었지?” 복면에 가려진 입술 부분이 들썩이며 움직였다. 결과를 묻는 복면인의 질문에 죽립인이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성공했습니다.” “동맹을 파기한다고 선언하였나?” “그렇습니다!” 그 말을 하면서 죽립인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죽립을 벗었다. 그러자 뜻밖에도 죽립에 드러난 얼굴은 팽가의 외당주인 팽여속이었다. “역시 문주께서 만드신 인피면구는 완벽했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으니, 팽가의 사람들조차 의심을 하지 않았습니다.” 팽여속이 자신의 볼을 쭉 잡아당겼는데, 고무처럼 늘어났다. 이에 복면인이 그를 다그쳤다. “그만. 죽은 시신으로 만든 것이다. 그리 잡아당기면 찢어진다.” “헉! 소, 송구합니다.” 놀란 팽여속이 잡아당기던 볼 살을 놓았다. 눈치를 보는 그에게 복면인이 물었다. “창천회 놈들도 움직였나?” “문주께서 예견하신 대로 그 자가 알아서 돕더군요. 이번 기회를 잘 살린다면 회주라는 자의 정체도 근 시일 내로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복면인이 흡족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삼 대주. 너는 대계에 시작되는 그 날까지 무림맹에서 저들이 계획대로 움직이는지 살펴라.” “명을 받듭니다!” -슉! 복면인의 명령이 떨어지자, 팽여속이 다시 죽립을 쓰고서 경공을 펼쳐서 돌아갔다. 그런 그가 돌아가는 방향을 쳐다보면서 복면인이 중얼거렸다. “마교주 천여운! 그동안 모습을 숨기고서 본문의 대계를 줄곧 방해했겠다. 이번에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다!" < 77장 파기(破棄) (2) > 끝 < 78장 불가침 조약식 (1) > 이틀이 지나고 전 무림으로 정도 무림맹의 공표가 퍼져나갔다. 근 일 년도 되지 않은 정마(正魔) 동맹의 파기. 그리 오랫동안은 동맹이 유지되지 않을 거라는 것은 전 무림인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 순간이 너무도 빠르게 찾아왔다. 최근에 사파 내부의 전쟁으로 외부에 눈길을 돌리지 않던 사파 연맹조차도 이에 관심을 가질 지경이었다. 사천성 북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사파 연맹의 본단. 본단의 연맹주의 침소. 그곳에 온몸에 흉터투성이인 거구의 사내가 왜소한 늙은 의원에게 침을 맞으면서 왼쪽 눈에 안대를 쓴 중년인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이상 현 중원 무림의 현황 보고를 마치겠습니다.” “클클, 이것 참 재미있게 돌아가는구나.” 침을 맞고 있는 거구의 사내가 흥미롭다는 듯이 말을 하면서도 입맛을 다셨다. 좋은 기회를 포착하고도 내버려둬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단오제 때만 노려도 큰 수확을 거둘 만도 한데......그 빌어먹을 ‘놈’ 덕분에 참으로 좋은 기회를 놓치는구나.” 오랫동안 삼대 세력 간의 균등한 성세가 이어지던 무림에 처음으로 균형이 깨졌다. 극도육무문이 하나의 계기가 된 것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내부의 적으로 인해 사파 연맹은 이 기회를 엿볼 틈이 없었다. “주군께서 내상만 회복하셔도 언제든 해결할 수 있는 자이옵니다.” 안대의 중년인의 말에 거구의 사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협공이라고 하나 그 놈과 손을 섞어본 결과 훗날을 장담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주군.” “그리 이상한 것이 아니다. 자연스러운 수순일 수도 있다. 장강 후랑 추전랑이라고 하지 않았더냐. 오랜 세월 해먹었으니 이런 순간이 찾아온 것이지.” 장강후랑추전랑(長江後浪推前浪) 일대신인환구인(一代新人換舊人). 장강의 뒷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내듯, 한 시대의 새사람이 옛사람을 대신한다는 말이다. 자존심이 강한 사내였지만 언제까지 정점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늘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주군!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주군은 대사파 연맹의 맹주이시자 서쪽의 패왕이 아니십니까!” 그를 모신지 오래 되었지만, 여태껏 본 적이 없는 약한 모습에 안대의 중년인이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거구의 사내의 정체는 다름 아닌 오대고수의 일인이자 서쪽의 패왕이라 불리는 항연이었다. 근 삼십여 년 동안이나 사파 연맹을 아우른 그가 이렇게 내상을 입고서 치료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누가 짐작이나 하겠는가. 철저하게 정보를 통제 하지 않았다면 사파 전체에 큰 지각변동이 있을만한 대사건이었다. “주군 하나를 바라보는 무인들이 수만 명입니다. 이런 부상 따위는 털어내시고 그 놈을 없애시면 됩니다! 부디 수하들 앞에서 약한 말씀은 삼가주십시오.” “클클, 고얀 놈. 수적이나 하던 녀석을 데려왔더니, 잔소리가 심하구나. 갈모잠.” 안대의 중년인. 그의 정체는 바로 황하 수로십팔채의 총두목인 황하패주(黃河?主) 갈모잠이었다. 그는 중원 구패의 일인이자 사파 연맹의 여덟 간부 중 서열 사 위에 해당하는 절대고수이다. 전에 묵경시에서 천여운의 손에 죽은 황하삼귀의 백부이기도 했다. “너무하십니다. 주군. 제가 연맹 자금의 삼 할을 책임지는데, 섭섭하군요.” “클클클.” 기분이 한결 나아졌는지 농을 던지는 항연의 말을 그가 장난스럽게 받아쳤다. 그만큼 서로를 신뢰하는 사이이기도 했다. 패왕 항연이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입을 열었다. “네 녀석의 말을 듣고 보니, 아직까지 무림에 본 패왕이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성을 느끼는 구나.” “주군. 그 말씀은?” “통허현에서 있을 불가침 조약을 말하는 거다.” 갈모잠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패왕 자신의 부상도 있었고, 현재는 비교적 잠잠한 상태이지만 여전히 내전을 치르는 와중이었기에 큰 힘을 동원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주군. 그 일보다는 부상 치료에 전념하시는 편이...” “아니다. 만약에 이번 단오제를 그냥 넘긴다면 중원 무림의 사람들도 그렇고 ‘그 놈’도 본좌의 부상을 눈치 채겠지.” “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미처 염두 하지 못한 갈모잠이었다. 확실히 항연이 말한 대로 ‘그 놈’ 역시도 이번 일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을 지도 몰랐다. 만약 패왕이 불가침 조약에 사람을 보내지 않고 세력 보존에 급급하다면 이를 빌미로 다시 한 번 노려올 확률이 높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태껏 조약을 갱신할 때마다 본좌가 직접 가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구나.” 마교에서도 한 번도 교주가 직접 참석한 적이 없기에 자존심을 지키려고 한 번도 조약식에 참석하지 않았던 그였다. 하지만 참석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럴 듯한 자를 보내지 않는다면 ‘그 놈’이 알아차릴 것이다. “갈모잠. 네가 참석토록 해라.” “네?” 항연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명령에 갈모잠이 당혹스러워했다. “주군! 지금 상황에서 제가 본단을 비우면...” “상관없다. 어차피 이곳은 대사선과 조패검이 지키고 있으니.” 현재 사파연맹의 본단은 황하패주 갈모잠을 비롯한 서열 이위인 대사선(大邪仙) 공윤과 오위인 조패검(趙敗劍) 금종사가 지키고 있었다. 세 간부들이 철통 같이 지키고 있지만 이 중 한 명이라도 빠진다면 부상 입은 패왕 항연의 안전에 문제가 생길 지도 몰랐다. 우려하는 갈모잠에게 항연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 녀석을 그냥 보내주는 것이 아니다.” “하면?” “조카 녀석들을 마교인들이 죽였다지.” 묵경시에서 정보를 파는 암문(暗門)의 수장인 두현을 족쳐서 알아낸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꼴에 정보 상인이라고 아무 것도 발설하려 하지 않았지만 오상루에 있던 기생들의 반수 이상을 죽이자 결국에 입을 열었다. “.....놈들에게는 빚이 좀 있지요.” 담담하게 말을 했지만 그 눈빛에 진득한 살기가 베여있었다. 혼인을 하지 않은 갈모잠은 가족, 친지들을 끔찍이 여겨 그들을 건드리는 자는 누구라도 용서치 않는다. 단지 이번 내전이 길어지면서 복수를 할 기회가 차일피일 미뤄졌던 것이다. “이번에 그 빚을 갚을 기회를 주마. 조약식이 끝나면 분명 혼선이 빚어진다. 그렇게 된다면 정도 무림맹의 녀석들이나 그 극도뭐시기인가 하는 놈들이 누구를 먼저 노릴지 알겠지?” 정도 무림맹의 공표로 인해 황궁 사건은 이미 무림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들리는 정보만 조합해도 두 세력이 먼저 노릴 대상자는 뻔했다. 서로 손을 잡진 않더라도 마교를 먼저 치려할 것이다. “천유종 그 놈의 자식 녀석이 요즘 활개를 치고 다니는데, 무림이란 곳이 그저 무위만으로 날뛸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줘라.” -욱씬! 항연이 전신에 가득한 상처들 중에 가슴 한 가운데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전 마교주 천유종에게 당한 상처가 쓰라렸다. 두 눈이 빨개져서 짐승처럼 변한 놈이 아무리 살초를 가해도 쓰러지지 않고서 미친 듯이 덤벼대는 통에 전의를 상실한 그는 후퇴를 해야만 했다. ‘그때의 치욕을 네놈의 자식의 목숨으로 갚아주마.’ -고오오오오! 부상을 입었음에도 강렬한 살기를 발산하는 항연의 모습에 아직은 그가 건재하다고 여긴 갈모잠이 내심 다행스러워했다. “알겠습니다. 반드시 주군의 명을 이행하고 돌아오겠나이다.” 항연의 명대로 조약식에 참석하려면 서둘러 떠나야 했다. 여드레 안에 통허현에 도착하려면 기간이 빠듯하다. 인사를 한 후에 나가려는 갈모잠에게 항연이 한 가지 궁금했는지 물었다. “그러고 보니, 정파 녀석들이 이번에 동맹 파기를 할 때, 현 마교주 그 놈을 뭐라고 불렀다고 했지?” “.....황제를 능욕하고 사신으로 갔던 무림맹 수뇌부들의 팔을 잘라 동맹의 신의를 어겼다고하여 역천마인라고 한다더군요.” “역천마인? 하여간 정도 무림맹 놈들의 작명하는 꼴이란.” 정파의 무인들을 제외하면 사마의 무인들에게 늘 최악의 별호를 갖다 붙이는 그들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마교의 교주인데 역천마인이라 한다면 격이 떨어져 보인다. “그런데 무림인들은 그리 부르지 않습니다. 아주 광오한 별호로 부르더군요.” “광오한 별호?” “대명제국의 하늘인 황제마저도 함부로 하지 못한다고 해서 마교주 그 놈을 역천마제(易天魔帝)라고 부릅니다.” “마제? 하!” 항연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오대고수의 일인인 자신조차도 왕(王)이라 불리는데, 첫 별호에 아주 광오했다. 하긴 관과 무림이 불가침 조약을 맺은 후로 황궁을 직접적으로 위협한 자가 없었는데, 그곳을 들쑤셔 놓았다면 그리 불릴 만도 했다. “놈이 다시는 그 별호를 쓰지 못하도록 만들어라.” “황하패주 갈모잠. 주군의 명을 받듭니다!” * * * 불가침 조약식이 있기까지 나흘 전. 정도 무림맹으로 황궁의 사신단이 도착했다. 무림맹의 대전 안에는 무림맹의 여덟 명의 웅주들과 단주 급 이상의 간부들이 모여, 무릎을 꿇고 바닥에 머리를 조아려 어명을 받고 있었다. 어명을 전달하는 자는 금의위 북진무사인 영조였다. 석좌에 서서 어명이 적힌 두루마리를 펴든 영조가 그 내용을 읊고 있었다. “....위치는 통허현의 진성(津城) 내에서 조약식이 진행될 것이다. 관과 무림이 불가침 조약을 맺는 평화적인 자리인 만큼 각파의 수장들을 제외한 호위 병력은 백 명을 넘겨선 안 될 것이며, 식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어명을 읽어 내려갈 동안 웅주들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번 조약식은 삼대 세력 모두가 아마도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조약식이 끝나는 순간 언제든 전쟁이 시작될 수 있다.’ 그렇기에 웅주들은 회의 끝에 정도 무림맹에서도 최고의 무력 집단이라 불리는 백원단과 정의단의 정예 무사들을 동원해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려 했다. 그런데 사전에 이것이 어명을 통해서 차단된 셈이었다. ‘한 개의 단밖에 투입이 안 되겠구나.’ 물론 그렇다고 해도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각파의 대표들은 숫자에 제한 없이 출입할 수 있기에 방비를 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가령 삼류 문파의 대표들까지 참석시킨다면 어느 정도 다른 세력들보다도 우위에 점할 지도 몰랐다. 수백 개의 문파, 방파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무림맹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누구의 머릿속에 나온 생각인지 알겠구나. 후후후.’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이웅주 남궁경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현재 마교주 천여운은 아직까지 개봉의 황궁에 상주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정마 동맹이 파기되면서, 마교주는 적지인 정파의 영역의 한가운데에 있는 셈이었다. 이미 개봉의 주위를 연부소의 백원단을 비롯한 다섯 개의 단이 포진하고 있다. 언제든지 마교주가 황궁 밖으로 나오면 그를 칠 준비가 되었다. ‘소용없다. 마교주여. 네놈이 황제 폐하를 움직여서 무슨 수를 쓴다고 해도 살아서 통허현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창천회에 소속된 중소문파들만 백여 곳이 넘었다. 게다가 혹시의 상황을 대비하여 통허현에 이미 그들의 간자들을 곳곳에 숨겨두었기 때문에 만일의 경우 동원할 고수들의 숫자는 충분했다. ‘그에 반해 마교의 병력들은 황하 이남에서 발이 묶였지.’ 동맹파기를 공표하기 전에 이미 호북 황하의 경계면에 무림맹의 일곱 개의 단과 여섯 곳의 호북지부 무사들, 그리고 점창파, 무당파의 제자들이 진을 치면서, 단오제에 맞춰서 북상하려 했던 마교의 병력을 저지하고 있었다. 마교 측에서 사태의 급박함을 느꼈다고 해도 방도가 없을 것이다. ‘참으로 공교로운 일이다.’ 마치 호응이라도 해주듯이 절강성 쪽에서는 극도육무문, 사천에서는 사파 연맹의 병력들이 일제히 경계 지역을 배회하면서 마교의 북상을 막았다. '그들 역시도 이것이 기회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겠지.' 이로써 마교주 천여운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현재 황궁에 상주하고 있는 오십여 명에 불과한 교인들에 불과했다. 물론 천여운 본인이 최강이라 할 수 있는 생사경의 경지에 오른 고수라는 큰 변수가 있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놈을 통해서 시술자의 힘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창천회의 지주인 무당파의 현운자가 죽기 전에 남긴 신의의 비서로 개량된 극무지체(極武至體)의 시술을 완성시켰다. 시간이 부족하여 많은 자들에게 시술을 행하진 않았지만, 팔할 이상이 성공적으로 마쳤기에 큰 효과를 낼 것이다. ‘역천마제? 하늘이 네놈의 무덤을 통허현이라고 하는구나. 후후후.’ 창천회의 천주 남궁경은 즐거움을 숨길 수가 없었다. 이번 단오제를 기점으로 무림의 정세는 완전히 뒤바뀌게 될 것이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초닷새가 되었다. 대망의 단오제 날이 다가온 것이다. 단오는 일명 수릿날, 천중절, 중오절, 단양이라고도 한다. 한 해에 양기가 가장 왕성한 날인 단오제 날은 초나라 회왕(懷王)때에 비롯되어, 중원 전체로 퍼져나갔다. 하남성의 통허현의 중심부에 자리한 진성(津城). 그곳은 대명제국의 태조 주원명이 일어난 최초의 도읍지이면서, 중원의 영웅들과 백성들을 구하기로 천지신명께 맹세를 한 곳이다. 그것을 기려서 통허현의 진성에서는 새로운 태자가 정해질 무렵, 관과 무림의 불가침 조약식이 행해졌다. 현에 불과한 성이었기에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족히 이만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었기에 충분히 조약식을 진행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정오에 진행될 조약식에 앞서 황궁의 관료들과 오백여 명의 금의위, 삼천 명의 병사들이 오 열을 갖추고 대기하고 있었다. -쿵! 쿵! 쿵! 성문을 지키고 있는 황궁의 금의위가 북을 두드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정도 무림맹의 맹주님과 각 파의 수장 분들께서 도착했습니다!” 가장 먼저 도착한 이들은 정도 무림맹 측이었다. 정파의 영역이었기에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탁! 가장 먼저 성문의 입구를 밟고 들어온 자는 무림맹주 이목이었다. 이목이 조약식을 위해 꾸민 성내를 살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드디어 시작인가.’ 오늘을 기점으로 새로운 지각 변동이 일어난다. -우르르르! 맹주 이목을 필두로 다섯 웅주들과 이백삼십네 명의 각 문파, 방파의 수장들, 그리고 마교주에게 포로로 잡혀서 단주가 공석인 백원단의 정예무사 백 명이 전의가 넘치는 눈으로 입성하였다. < 78장 불가침 조약식 (1) > 끝 < 78장 불가침 조약식 (2) > “이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가장 먼저 진성에 입성한 정도 무림맹의 웅주들과 각 파의 수장들은 금의위들의 안내를 받아 황궁 관료들의 맞은편 좌측으로 이동했다. 서문 쪽에 가까운 장소를 할당 받은 무림맹의 사람들은 진형을 갖췄다. 정파인들 특유의 질서정연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그들 중에 내재된 투기와 긴장감을 숨기지 못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백원단의 정예 무사들이었다. ‘정의단이 아니라 백원단으로 주장한 보람이 있구나.’ 이 모습에 삼웅주 남궁경이 흡족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무림맹 최고의 전력 중 하나인 백원단의 수장은 무림맹주의 장자인 연부소이다. 그런 연부소가 황궁에서 마교주 천여운의 손에 붙잡혔다는 것을 알게 된 백원단의 무사들은 분노로 고양된 듯 했다. 백원단의 부단주인 호양검 숭백도 단원들과 같은 마음인지 분위기가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마교주여. 네놈은 적을 만드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구나.’ 최소 무위가 절정의 이상의 실력자들만 이루어진 백원단이다. 창천회에서 준비한 전력도 최고라 자부하지만, 이런 백원단까지 함께 한다면 가히 하룻밤 사이에 대문파 두세 곳은 멸문시킬 수 있을만한 전력이었다. 더군다나, ‘금의위와 환관 삼백 명을 진기로 짓눌렀다지? 하지만 이번에도 그럴 수 있을까?’ 이곳에 참석한 각 파의 수장들은 하나 같이 절정 이상의 고수들이다. 현경의 고수인 무림맹주 이목과 자신을 비롯한 화경의 고수들인 다섯 웅주들과 무림 구패 중의 한 사람인 도월패주 팽무월이 있다. 게다가 중소문파의 문주들 중에서도 초절정의 고수들만 오십여 명이 넘었다. 생사경의 고수를 상대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마친 그들이었다. ‘사파 연맹과 극도육무문도 마찬가지겠지.’ 그들 역시도 마교주 천여운을 죽이기 위해 최고 전력을 갖춰서 올 것이다. 이 삼대 세력이 전초전에 일제히 공격한다면 아무리 생사경의 고수라고 할지라도 죽이지 못할 적도 아니라고 판단했다. ‘관건은 마교주와 마교인들을 처리하고 나서인가.’ 공통의 적인 마교를 처리하고 나면 분명 삼대 세력은 암묵적인 동맹을 끝내고 곧바로 그들끼리 교착하게 것이다. 이 자리에서 살아남는 세력이 향후 중원 무림의 패권을 가질 수 있다. ‘곧 그 순간이다.’ 하늘을 쳐다보니 해가 중천으로 향하며 정오에 가까워졌다. 그러던 차에 진성의 서문 쪽에서 다수의 인기척과 함께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둥! 둥! 둥! “사파 연맹의 간부님과 각 파의 수장님들께서 입성하십니다.” 두 번째로 도착한 자들은 사파 연맹이었다. 무림맹주 이목의 우측에 서있던 화산파의 장문인이자 육웅주 풍청운의 두 눈에 이채가 띠었다. ‘내전 중이라 들었는데 참석하다니?’ 무림맹에도 당연히 각 세력들에 보낸 간자들이 있다. 그들을 통해 사파 연맹이 내전으로 복잡한 상황이라고 알고 있던 무림맹의 웅주들이었다. 당연히 이번 불가침 조약에 누구도 파견하지 않거나, 아니면 전력 소모가 되지 않을 정도의 사람을 보낼 줄 알았다. ‘황하패주 갈모잠!’ '아니. 저 자가 오다니?' 서문을 통해서 당당하게 들어오는 검은 안대의 중년인. 그는 수로십팔채의 수장이자, 사파 연맹에서도 간부 서열 사위에 해당하는 거물이었다. 그 뒤를 따라 들어오는 열일곱 명의 거칠고 험상궂은 사내들은 수로십칠채의 채주들이 틀림없었다. ‘한 명이 비는군.’ 무림맹의 정보단의 단주직을 맡고 있는 무림맹의 십삼웅주 제갈용은 그들 중에 한 사람이 비었다는 것을 곧장 알아차렸다. 그 한 사람은 바로 용호채의 채주 복호선이었다. 천여운의 손에 용호채가 강물 속에 수장되면서 이제는 수로십칠채가 되어버린 수적들이었다. ‘이놈들 어디 있느냐?’ 갈모잠은 진성에 들어서자마자 마교주와 마교인들을 찾았다. 암문의 수장인 두현을 족쳐서 알아낸 사실 중 하나가 마교인들의 용호채의 위치를 찾는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로인해 하룻밤 사이에 사라진 용호채의 진범이 마교라고 확신하는 갈모잠이었다. 오늘 그는 끔찍이도 아끼는 조카들인 황하삼귀와 용호채에 대한 피의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할 작정이었다. ‘용서할 수 없다. 마교 놈들!’ 누가 진범인 줄은 몰라도 마교인들 중에 양단화라는 자가 있기를 바랐다. 암문의 수장인 두현에게 유일하게 들은 이름이었다. [마, 마교의 하남 북부지부장인 양단화라는 자와 새하얀 얼굴에 젊은 청년이었습니다. 아...아무래도 십만대산에서 온 것 같은데, 지부장인 양단화가 그리 공손히 대하는 것을 보면 마교 내에서도 직위가 높은 자인 것 같습니다!] 두현은 그 높은 직위의 청년의 명령에 양단화가 황하삼귀의 목을 베었다고 했다. 만약 그놈을 찾게 되면 반드시 배로 갚아줄 것이다. 놈의 소중한 자들을 전부 찾아내서 보는 앞에서 그 목을 벨 작정이었다. -둥! 둥! 둥! 갈모잠과 수로십칠채의 채주들, 그리고 갈모잠의 수로채인 갈룡채의 정예 수적 백 명이 금의위들의 안내를 받아 자신들이 배정된 위치에 진형을 갖추려는데 동문 쪽에서 북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인가?’ ‘드디어 도착했나?’ 정파 무림맹과 사파 연맹 양측의 시선이 동시에 동문 쪽으로 향했다. 삼대세력 중에서 남은 곳은 오직 단 하나 마교뿐이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도착한 세력은 다름 아닌 최근 무림을 뒤흔들고 있는 신생 세력인 극도육무문이었다. “극도육무문의 상위 세 문주님들과 각 파의 문주님들께서 입성하십니다!” 금의위의 외침에 무림맹주의 이목을 비롯한 웅주들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강소성을 빼앗기고 나서 처음으로 대면하게 되는 그들이었다. 그들의 손에 강소성의 모든 무림맹 지부들과 열다섯 문파, 방파들이 전부 멸문했다. ‘상위 세 문주라고?’ 정도 무림맹 측에서도 극도육무문의 지위 체계는 수많은 문파들 위에 그들을 통제하는 여섯 문파가 있을 거라 여겼는데, 그들 중의 절반이나 온 것이었다. 절반의 전력이 왔다는 것이 상징하는 바는 컸다. 그들 역시도 이 자리를 통해서 중원의 패권을 노린다는 의미였다. ‘들어온다.’ 처음으로 제대로 직면하게 되는 자리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동문을 통과하여 선두에 나란히 걸어 들어오는 세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좌측에는 붉은 도집을 차고 있는 짧은 백발의 노인이었고, 가운데에 걷고 있는 자는 긴 머리카락에 두 눈을 검은 천으로 가리고 있는 중년인이었다. 마지막 우측에 있는 자는 상의를 입지 않고 잘 발달된 근육을 드러내고 있는 턱수염의 중년인이었다. 특이한 것은 자신의 신장만한 거대한 도를 등에 차고 있었다. “범상치 않은 자들이오. 맹주.” “.........” 육웅주 풍청운의 말에 맹주 이목은 아무 답변도 하지 않았다. 이를 의아하게 생각한 풍청운이 고개를 돌려 이목을 바라보았는데, 그가 인상을 잔뜩 쓰고서 굉장히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맹주 어찌 그러시오?” “.......풍 장문인. 어쩌면 오늘 본 맹의 모두가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겠소.” “?” “저들 세 사람 모두 현경의 고수요. 게다가......한 사람, 한 사람이 전부 본 맹주와 겨룰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들이오.” “!?” 맹주 이목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말에 풍청운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기감으로 정확한 무위를 추정할 수가 없어서 당연히 자신보다는 뛰어날 줄은 알았지만 이건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요? 맹주. 그 말은 저들 세 사람이 전부 오대고수급의 무위를 지녔다는 것이오?” 그 질문에 이목의 시선이 검은 천으로 두 눈을 가린 자를 쳐다보았다. 양옆의 두 사람은 완숙한 현경의 경지에 오른 자들인 것 같은데, 저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사내는 확실하게 자신과 동격인 극(極)에 이르렀음이 틀림없었다. 오대고수들 각각이 서로 다른 무위를 지녔겠지만 자신을 기준으로 본다면 오대고수라고 칭해도 부족함이 없는 자였다. “이런......!” 남궁경의 입에서도 놀람이 탄성이 흘러나왔다. 사실 탄성이라기보다는 당혹감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상위 문주라 불린 세 사람의 뒤로 따라 들어오는 열두 명의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고수들이 있었는데, 충격적이게도 그들 전부가 화경의 고수들이었다. 게다가 그들 뒤에 백 명의 무인들은 전부 초절정 초입 이상의 무인들이었는데, 말 그대로 최정예들만 모아놓은 듯 했다. ‘마, 말도 안 되는 전력이다.’ 당연히 극도육무문 역시도 당연히 만반의 준비를 했으리라고는 짐작했다. 그러나 그 예상한 범위의 수준을 훨씬 넘어섰다. 남궁경이 짜놓은 계획에는 첫 목표로 공동의 적인 마교주 천여운을 제거하고 나서 극도육무문을 노리는 것이었는데, 계획을 수정해야 할지도 몰랐다. ‘마교주 그 놈과 저들이 먼저 부딪치게 해야 한다.’ 차라리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취하는 방법이 전력을 보존할 수 있는 길이었다. 마교주 천여운을 먼저 제거하고 저들과 붙었다가는 양패구상을 하거나, 도리어 정도 무림맹과 창천회가 패하는 사태가 발생할 지도 몰랐다. 그만큼 저들이 보유한 절대고수들의 숫자가 너무 압도적이었다. “놀라는 꼴들 하고는. 크크큭.” 상의를 입지 않은 근육질의 사내가 놀라하는 정도 무림맹의 수뇌부들의 얼굴을 보면서 즐겁다는 듯이 이죽거렸다. 그러자 좌측에 있던 백발의 노인이 혀를 차면서 냉정하게 말했다. “어차피 죽을 자들의 반응을 뭣 하러 신경 쓰는 것인가. 도광문주.” 자신의 신장만한 도를 매고 있는 사내는 극도육무문의 상위 세 문주들 중의 한 사람인 도광문주(刀狂門主) 자운강이었다. 상위 세 문주들 중에서 가장 패도적이면서 파괴적인 극도신무를 완성한 자였다. “뭘 그리 빡빡하게 구는 것이오. 도염문주. 나이도 지긋해서 그런가 이 주목받는 것에 대한 즐거움을 모르는군.” 붉은 도집을 매고 있는 백발의 노인은 상위 육문주 중의 일인인 도염문주(刀炎門主) 노도경이었다. 상위 육문주 중에서 ‘도주(刀主)’를 제일 오랫동안 보좌해왔다. 그들의 잡담을 개의치 않고 가운데에 있는 두 눈을 가린 자가 뒤에 있는 덥수룩한 수 염을 기른 자에게 말을 걸었다. “준비는 잘 마쳤겠지.” “넵. 도공문주. 만약에 경우 문주께서 신호를 보내신다면 이곳 진성에 있는 누구도 살아나갈 수 없을 겁니다.” 검은 천으로 두 눈을 가린 자의 정체는 상위 육문주 중의 한 사람인 도공문주(刀功門主) 이욱이었다. 폐검곡에서 천여운의 손에 죽은 도검문주 이백의 친형이기도 했다. 살벌한 분위기의 도공문주 이욱에게 도광문주 자운강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굳이 노격진천뢰를 쓸 일이 있겠소? 도공문주. 요는 생사경의 고수인 마교주만 제거하면 만사형통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오. 그분께서 만드신 합격술인 칠성극도진을 믿지 못하는 것이오?” 노격진천뢰(怒擊震天雷). 그것은 백 년 전의 폭약 전문가인 노격자가 만든 폭탄으로 일반적인 진천뢰의 위력의 통상 다섯 배에 해당하는 폭발이 일어나는 최악의 병기였다. 워낙 재료가 구하기 힘들고 제조 과정에 어려움을 겪는 물건이기에 극도육무문에서도 그리 많은 양을 보유하지 않았는데, 그것이 전부 이 진성의 지하에 깔려있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마교주를 비롯해 이곳에 있는 자들만 제거해도 본문의 최종 대계에 한발자국 다가갈 수 있다.” “......하여간 틈이 없구만. 알겠소이다.” 전에도 빈틈이 없을 만큼 철저했지만 동생을 잃고 나서 더욱 냉정해졌다. 어차피 이번 일의 책임자는 도공문주였고, 자신들은 그를 돕기 위해 도주의 명을 받고 온 것이었기에 그저 따를 뿐이었다. 도염문주 역시도 도공문주의 철두철미함을 높이 샀다. ‘이 남자가 대계를 맡은 이상 누구도 살아남지 못한다. 마교주 네놈이 그동안 본문의 대계를 방해했으니 그 대가를 이 자리에서 치르리라.’ 그렇게 정도 무림맹, 사파 연맹, 극도육무문까지 삼대 세력이 모였다. 이제 남은 것은 마교뿐이었다. 십만대산에서 북상하는 길이 막혔기에 마교주의 손발이 끊겼기에 쉽게 이 자리에 오기가 힘들 것이다. 해가 완전히 하늘의 한가운데에 선 정오가 되었다. 그런데 아직까지 마교주가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각 세력의 수뇌부들의 입장에서는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뭐지? 왜 이렇게 늦는 거지?’ ‘설마 자존심을 버리고 황궁에 계속 몸을 숨길 작정인가?’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하던 차였다. -둥! 둥! 둥! 그때 북문에서 북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성벽 위에 있던 금의위가 소리쳤다. “천마신교의 교주님께서 입성하십니다!” '왔다!!!' -웅성웅성! 금의위의 외침에 삼대 세력의 모든 이들이 시선이 일제히 북문으로 향했다. 그들이 가장 일목표로 삼은 자가 드디어 불가침 조약식의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다른 수뇌부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역시나 북상이 막혀서 다른 수뇌부들은 합류하지 못했다. [마교주가 성의 한가운데로 들어온다면 대계를 시작한다.] [충!] 도공문주 이욱의 전음에 그를 보좌하는 도함문주 이감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놀랍게도 그들이 노리는 순간은 정도 무림맹의 창천회나 사파연맹이 노리는 불가침 조약식이 끝나고 나서가 아니었다. 조약식을 위해 삼대 세력의 모든 주역들이 모인 순간이 대계의 시작이었다. 황궁의 관료들이 있건 없건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모두를 죽여서 입을 다물게 할 작정이었으니 말이다. -쿵! 쿵! 쿵! 북문에서 다소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는데, 북문의 입구를 지나쳐 마교의 무사들이 웬 큰 목함들을 네다섯 명씩 붙어서 힘겹게 성내로 들고 왔다. 특이한 것은 이들 전부가 흙바닥을 뒹굴기라도 했는지 흙먼지 투성이었다. ‘뭐야?’ ‘뭘 들고 오는 거지?’ 뒤늦게 온 것도 모자라서 목함 같은 것을 들고오니 다들 의문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극도육무문의 상위 세 문주들조차 대체 뭔가 싶어 집중하게 되었다. 목함들이 황궁 관료들과 금의위들이 있는 곳과 삼대 세력이 진형을 치고 있는 한가운데 쯤까지 왔을 때, 마교의 무사들이 멈춰 섰다. ‘뭐야? 무슨 덩치가 저렇게?’ 그런 무사들의 한가운데에 성인 남성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거구에 근육질의 사내가 있었다. 마교주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대체 저 자는 누구란 말인가? 그때 거구의 사내가 목함 하나를 발로 걷어찼다. -쾅! 와르르르르! 그러자 큰 목함이 넘어지면서 쇳조각들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흘러나왔다. 뭔가 사람의 주먹 두 개만한 둥근 형태에 쇳덩어리였는데, 원래는 심지 같은 것이 있었는지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웅성웅성! ‘뭐야? 저게?’ '철구인가?' 처음 보는 물건에 모두가 뭔가 싶어 의아해하는데, 표정이 방금 전과는 완전히 뒤바뀐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극도육무문의 문주들과 무사들이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그들은 목함에서 나온 정체불명의 철구들을 보고는 입까지 벌어져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말도 안 돼!” “저, 저들이 저걸 어떻게?” 목함에서 나온 물건의 정체는 다름 아닌 그들이 몇 달 전부터 파놓은 진성의 지하 동굴에 설치해놓은 노격진천뢰였다. ‘이게 대체 무슨?’ 도공문주조차 어이가 없어하는데, 거구의 사내가 단상 위에 황궁 관료들의 한가운데에 서있는 정 이품 관복을 입고 있는 중년의 관료에게 한쪽 무릎을 꿇고서 포권을 취하더니, 호탕한 목소리로 외쳤다. -팍! “늦어서 송구합니다. 워낙 숫자가 많아서 방금 전에 마지막 개수까지 폭약을 해체해서 회수했습니다. 교주님.” ‘뭣!?’ ‘교주님?’ 거구의 사내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말에 모두의 놀란 눈으로 일제히 단상 위에 있는 중년의 관료를 쳐다보았다. < 78장 불가침 조약식 (2) > 끝 < 79장 역천마제(逆天魔帝) (1) > 단상 위의 곰보 같은 얼굴의 중년의 관료. 정 이품 관복이라면 황궁에서도 높은 관직을 하고 있는 자이겠지만 무림인의 기준으로 봤을 때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자였다. 기감 상으로도 어떠한 내공을 익힌 흔적이 없기에 일반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저런 평범한 자에게 저 거구의 사내가 무릎을 꿇고서 교주님이라고 불렀을까? ‘게다가 저 모습은 들었던 것과는 다른데?’ 정도 무림맹에서는 마교주 천여운을 역천마인이라 부르면서 그 외모도 각 파에 알렸다. 그가 황궁에서 빠져나가는 순간 천라지망(天羅地網)을 펼치기 위해서다. 모두가 의아해하는 와중에 중년의 관료가 고개를 돌려 단상의 좌측 편에 서있던 남색 갑주를 입은 중년인과 붉은 관복의 환관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이번 행사에 참석한 금의위의 북진무사 영조와 서창의 첩형인 자형인이었다. 목함에서 쏟아진 철구들에 그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해 하고 있었다. 중년의 관료가 그런 그들에게 말했다. “확인이 되었습니까?” “어찌 이런 많은 양의 폭탄이 진성에 숨겨져 있었다니?” “황궁 병기고에 있는 진천뢰보다도 훨씬 크오! 어떻게 저런 폭탄이 이곳에?” 그들의 외침 소리에 단상 위로 시선을 집중하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놀라했다. 교주라는 말에 신경을 쓰느라 미처 몰랐는데, 폭약을 제거했다는 저 철구가 폭탄이라는 말이 아닌가. -웅성웅성! “대, 대체 무슨 소리야?” “저 많은 철구들이 전부 폭탄이라고?” 쓰러뜨린 목함 하나에만 거의 백 개 이상의 철구가 쏟아졌다. 그런데 다른 목함들까지 합하면 적어도 오백 개의 폭탄이라는 소리였다. 화약의 경우 관에서 취급하는 물건이기에 허가가 떨어지지 않는다면 조금도 소지조차 할 수 없는데, 그야말로 엄청난 양이었다. “이런 위험한 무기를 가진 자들과는 불가침 조약을 맺을 수 없소.” “당장 폐하께 아뢰어야 하오.” 북진무사 영조와 서창의 첩형 자형인은 노격진천뢰를 보면서 치를 떨었다. 저만한 양의 폭탄을 진성의 지하에 숨겨두었다는 것은 이곳에 있는 자들을 전부 폭발로 죽이려 했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어떻게 이런!’ 도공문주 이욱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어느새 그는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있던 검은 천마저 풀고서 노격 진천뢰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진성에 파놓은 지하 동굴의 입구에도 극도육무문의 무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을 찾아냈다는 것은 분명 그들을 처리했다는 말이었다. ‘아! 그게 문제가 아니야.' 폭탄을 들킨 것에만 놀라하던 도공문주 이욱이 문득 더 큰 문제를 떠올렸다. 노격진천뢰는 마교주 천여운을 놓칠 것에 대비한 최후의 수단이었는데, 그것을 사전에 들키지 말아야 할 자들에게 들켰다. ‘설마 저놈들이?’ 도공문주 이욱이 단상 위의 관료들을 노려보았다. 마교주가 오기를 기다린다고 미처 염두 하지 못했는데, 아직까지 이번 불가침 조약을 맺을 새로운 대명제국의 태자가 도착하지 않았다. 정오가 넘었는데도 아직까지 태자가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침 조약을 맺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폭탄을 찾는 것을 기다렸다는 말이 아닌가!’ 그의 예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단상 위의 관료가 바닥에 쏟아진 노격진천뢰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노격진천뢰 중의 두 철구가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관료의 손으로 빨려들어갔다. “허, 허공섭물!” “이럴 수가! 저 관료는 고, 고수다!” 너무도 평범하여 잘못들은 것인가 반문하던 무림인들이 충격을 금치 못했다. 관료가 선보인 허공섭물(虛空攝物)은 화경 이상의 고수들만 가능한 고절한 내공 수법이었다. 무림맹의 삼웅주이자 창천회의 천주인 남궁경 역시도 당혹스럽긴 매한가지였다. ‘정말 저 관료가 마교주란 말인가?’ 그런데 여전히 기감 상으로 어떠한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놀라하는 무림인들의 반응은 개의치 않는지, 허공섭물로 노격진천뢰의 철구 두 개를 빨아들인 관료가 그것을 북진무사 영조와 자 첩형에게 넘겼다. “어느 문파에서 이런 짓을 벌인 것인지는 사전에 말씀드렸지요? 그럼 이것을 가지고 황제 폐하와 태자 저하께 잘 전해드리기 바랍니다.” “알겠소이다!” “천 교주의 경고가 없었다면 하마터면 큰 사달이 날 뻔했소. 반드시 폐하께 전하겠소.” -팍! 두 관료가 동시에 감사의 포권을 취하며 철구를 받아들었다. 이것을 가지고 가서 자신들의 눈으로 확인한 것을 황제에게 그대로 고할 작정이었다. “서두르시오.” 천여운의 경고에 두 사람의 표정에 비장함이 서렸다. 그 경고의 의미를 알아들었기 때문이었다. 대담하다 못해서 이런 엄청난 양의 폭탄을 성의 지하에 숨겨둔 역도의 무리들이 쉽게 자신들을 보내줄 리가 만무했다. “뒤를 부탁하오!” -팟! 두 사람의 동시에 성내 광장에서 북문 쪽을 향해 내달렸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차출된 화경과 초절정의 고수들이었다. 당연히 경공 실력은 어지간한 무림인들보다도 훨씬 빨랐다. 그 광경에 도공문주가 다급히 외쳤다. “도광문주!” “칫! 처음부터 일이 꼬이다니!” 저들을 성밖으로 내보내서 황궁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극도육무문은 무림인뿐만이 아니라 대명제국 즉, 중원 전체를 적으로 삼게 된다. 원래의 대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는 것이다. -팟! 노격진천뢰가 드러난 순간부터 일이 꼬였음을 직감한 도광문주 자운강은 운기를 마친 상태였기에 엄청난 속도로 황궁 북문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이에 맞춰서 도공문주 이욱이 손을 들어서 다른 신호를 보냈다. “닫아라!” 그러자 뒤에 있던 열두 명의 일반 문주들 중의 한 명이 목에 차고 있던 뿔피리를 입에 대고 세게 불었다. -뿌우우우우우!!!! 진성 전체가 울릴 정도로 뿔피리 소리가 퍼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각 성문의 근처에 있던 무사들이 성벽을 고정하고 있던 도르래의 굵은 밧줄을 도로 베었다. -?! ?! ?! -타르르르르르르! 밧줄이 끊기자 도르래가 미친 듯이 돌아가며 열려있던 각 성문들이 일제히 닫히기 시작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설마 성문을 점거한 것인가?” 이 광경에 정도 무림맹과 사파 연맹의 무림인들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남문, 동문, 서문이 동시에 닫혀버렸다. 성 밖으로 빠져나가려면 경공을 펼쳐서 성벽을 뛰어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당연히 전부 닫힐 거라 여겼던 성벽 중에 북문이 유일하게 닫히지 않았다. ‘역시 활로를 뚫어뒀구나.’ 도공문주가 거칠게 인상을 찡그렸다. 지하 동굴에 있던 노격진천뢰까지 찾아냈으니, 북문에 심어둔 자들도 처리했을 지도 모른다고 짐작했는데 예상대로였다. 북문의 성문이 그대로 열려있자, 도광문주 자운강 역시도 짜증스러워 했다. “칫! 도움이 안 되는군.” -챙! 자운강이 재빨리 등 뒤에 차고 있는 자신의 신장만한 도를 뽑아서 그에 걸맞은 도강을 형성했다. -우웅! 육 척(尺)이나 되는 거대한 도강으로 단숨에 두 관료들과 거리를 좁혀서 통째로 베어버릴 작정이었다. “네놈들이 경공을 펼쳐봐야 본좌의 손바닥 안이지!” 어느새 자운강의 신형은 북문으로 도주하는 두 관료들과의 거리가 스무 보 이내로 좁혀 있었다. ‘그 거리에서 따라잡았다고?’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북진무사 영조의 인상이 굳어졌다. 황궁 최고의 검객이라 불리는 자신이 마치 사냥감이라도 된 것처럼 쉽게 따라잡히는 꼴이 어이가 없었다. “두 동강을 내주마!” 절대로 헛소리가 아니었다. 뒤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예기가 심상치가 않았다. 단숨에 열 보 거리까지 거리를 좁혀온 자운강이 회심의 눈빛으로 거대한 도를 휘두르려고 했다. ‘끝이다! 이놈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스슥! 그의 바로 앞으로 잔상 같은 것이 생겨났다. 흐릿했던 잔상은 어느새 짙어졌는데 독특한 가면을 쓴 정체불명의 장포인이었다. “빌어먹을 놈이 막지 마랏!” -?! 단번에 그를 베어내려고 했는데, 가면의 사내가 바람과도 같은 몸놀림으로 이를 피해내고서 도리어 자운강의 목을 검으로 찔러왔다. “헛?” 당황한 자운강이 허리를 뒤로 젖혔다. 보통의 무림인들이라면 이 자세에서 어떠한 행동을 하기도 힘들었지만, 극도육무문의 고수들은 극도신무를 익히기 위해 근골이 인간의 한계를 벗어났다. -팡! 허리를 뒤로 젖힌 상태에서 자운강이 몸을 뒤틀며, 크게 도를 휘둘러 가면을 쓴 사내의 검을 쳐냈다. -챙! 엄청난 공력을 실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면의 사내의 신형은 두 보 이상 밀려나지 않았다. 다시 젖혔던 허리를 곧게 편 자운강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네놈......명왕이로구나.” 명왕(命王) 마라겸. 마교에서 죽음을 관장하는 자라 불리는 그 고수가 틀림없었다. 도검문주 이백의 손에서 펼쳐진 극도신무의 절초를 공중에서 피할 정도로 경공의 대가라고 들었는데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나를 알고 있나?" ‘이자가 왔다는 것은 저놈이 정말 마교주로구나!’ 정보대로라면 황궁에 상주하고 있는 마교주 천여운의 곁에 있는 고수는 대호법 마라겸뿐이라 들었다. 그런 그가 자신을 가로막았다는 것은 저 관료가 틀림없이 마교주였다. “젠장!” 도광문주 자운강의 입에서 거친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 잠시 겨룬 사이에 이미 두 관료들의 신형이 북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저들을 따라잡아야 하는데, 방금 전에 한수 겨뤄본 결과 이 자를 제압하려면 적어도 수 십 초식은 겨뤄야만 가능했다. ‘명왕 저 놈도 있었구나!’ 도공문주 이욱 역시도 자운강이 가로막힌 것을 발견하고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대로 관료들을 놓칠 수가 없었다. 이욱이 두 손을 들어 올리자, 허공으로 세 개의 도가 떠올랐다. “보내줄 성 싶으냐!” 도공문주 이욱이 북문을 향해 손을 뻗자, 세 개의 도가 화살처럼 그곳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슉! 슉! 슉! 그러나 북문을 향해 뻗어가던 도는 절반도 날아가지 못해 멈추고 말았다. 마치 벽에 막힌 것처럼 도가 성내 공중에서 파르르 떨리며 고정되었다. “아닛?” 이욱의 입에서 당혹스러운 외침이 흘러나왔다. 도염문주 노도경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찌 그러는 것인가?” “이기어도의 통제권을 빼앗겼소.” “뭐라? 이기어도의 통제권을 빼앗기다니? 대체 누가?” 그의 물음에 도공문주 이욱의 눈빛이 날카롭게 단상 위의 누군가를 응시했다. 단상 위에 서있는 곰보 얼굴의 관료가 허공에 떠있는 세 개의 도를 향해 손을 뻗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진기로 연결된 이기어도의 통제권을 빼앗다니? 말도 안 되는 능력을 가졌구나.’ 더욱 진기를 끌어올려도 허공의 도는 떨리기만 할뿐 반응이 없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는 성내 무림인들 모두가 입을 쩌억 벌리고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웅성웅성! “이, 이게 대체 말이 되는 일인가?” “지금 이기어도를 막은 게 분명하지?” 이기어도만으로도 무림인들 모두가 경악해할 만한 고절한 수법이었는데, 그것을 저 곰보 얼굴의 관료가 손을 뻗는 것만으로 막아내고 있다. 자신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경지에 올랐음을 의미했다. ‘생사경!’ 성내에 있는 자들 중에 고수라 할 수 있는 정도 무림맹의 다섯 웅주들이나 사파 연맹의 갈모잠은 이를 실감할 수 있었다. 생사경의 고수가 아니고는 이 정도까지 진기를 숨쉬듯이 다룰 수가 없다. 그야말로 괴물이었다. 곰보 얼굴의 정 이품 관료가 뻗은 손을 휘젓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휘리릭! 허공에서 멈춰 있던 도가 반대로 회전을 하더니, 도공문주를 겨냥했다. “이런!” 도공문주 이욱의 두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미 침식당한 이기어도의 통제권은 이미 완전히 관료의 손에 넘어갔다. 관료가 그를 정확하게 쳐다보며 냉소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도로 가져가라.” 그리고 손을 내밀자, 반대로 겨냥하고 있던 세 자루의 도가 일제히 도공문주 이욱을 향해 빠르게 쇄도했다. 보통의 고수들이라면 놀라서 당황해할 만도 했지만 무림맹주 이목이 오대고수 급이라고 칭할 만큼 그들 역시도 고절한 무위를 지녔다. “흥!” -촤촤촤촤촤?! 도공문주 이욱과 옆에 있던 도염문주 노도경이 동시에 화려한 도초를 펼치며 이기어도를 손쉽게 막아냈다. 그것도 모자라 진기가 연결된 것을 끊게 하기 위해 이기어도를 그대로 부숴버렸다. -챙그랑! 단순한 이기어도는 현경의 고수에게는 무의미한 공격이었다. ‘빌어먹을! 대계가 전초부터 이렇게 헝클어지다니!’ 이런 공격보다도 대계가 엉망이 된 것에 더욱 화가 나는 도공문주 이욱이었다. 이미 북문을 통과한 두 관료들은 점이 돼서 보이지 않았다. 너무 멀어져서 따라잡기도 힘들었다. -으득! 도공문주 이욱이 이를 갈더니, 단상 위에 있는 정 이품 관료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마교주 천여운! 언제까지 인피면구를 쓰고 연기를 할 참이더냐! 당장 정체를 밝히지 못할까!” "인피면구?" -웅성웅성! 그의 외침에 성내 모든 시선이 정 이품 관료를 향했다. 소문으로 들었던 외모와는 전혀 달라서 아닐 수도 있다고 여겼는데, 인피면구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뭐, 나도 갑갑하던 참이니까." 이에 관료가 피식하고 웃고는 자신의 턱밑의 살을 잡더니 그것을 당겼다. 그러자 고무처럼 피부가 늘어나더니, 이내 곰보 같던 인피가 벗겨지며 그 속에 숨겨져 있던 진정한 얼굴이 드러났다. 그 정체에 집중하고 있던 무림인들의 두 눈이 커졌다. '아아아!' ‘역시!’ ‘그, 그 자다!’ 긴 머리카락에 새하얀 얼굴, 그리고 검처럼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저 청년은 그렇게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던 그 존재가 틀림없었다. 근래에 무림 전체를 뒤흔드는 그 위명. 역천마제(逆天魔帝) 마교주 천여운이었다. < 79장 역천마제(逆天魔帝) (1) > 끝 < 79장 역천마제(逆天魔帝) (2) > 정도 무림맹 측의 동맹 파기로 널리 퍼진 그 위명. 그것은 악명에 가까울 정도였다. 황제를 위협하여 국교를 바꾸게 하고, 정파 무림의 미래라고 할 수 있는 무림구패의 일인인 연부소와 무림맹의 두 웅주인 검후 정선 사태, 하북팽가의 가주 등의 팔을 자르고서 납치했다. 이제 처음 무림에 모습을 드러낸 신임 마교주가 벌인 일들이었다. 여태껏 그들이 알고 있던 역대 마교주라는 작자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행보를 보여주고 있었다. 마치 거침없는 패도(覇道)에 가까운 행보였다. "저 젊은이가 마교주?" "역천 마제?" "고작 약관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데....허어!" 처음 보게 되는 천여운의 얼굴에 정사를 막론하고 극도육무문의 문주들 조차도 놀라워하기는 매한가지였다 . 아무리 많이 줘도 약관 그 이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물론 실제로도 그렇고 말이다. '허어, 그리 오래되진 않았지만 여전하구려. 원시천존. 원시 천존.' 무림맹의 육웅주 화산파의 장문인 풍청운이 오랜만에 보는 천여운의 얼굴에 변함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 한 가지 변한 것이 있다면 풍기는 기운이 완전히 달라졌다. 술로 표현한다면 그 당시에는 독한 화주에 가까웠다면 지금은 완전히 무르익어서 그 독기가 사라지고 은은한 향을 풍기는 고급주와도 같았다. '그 짧은 기간에 이렇게 성장할 수 있단 말인가.' 직위가 사람을 만드는 것일까? 소교주 시절보다도 훨씬 단단하고 위엄 있는 모습은 누구도 가벼이 볼 수 없게 만들었다. 충분히 한 단체의 수장이자 군주의 그릇이 엿보였다. 정도 무림맹 측도 놀랐지만 처음 마교주를 접하면서 놀람을 금치 못하는 이가 또 한명이 있었다. 그는 바로 사파 연맹의 대표로 참석한 무림구패의 일인인 황하패주 갈모잠이었다. 인상이 딱딱하게 굳어져서 천여운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의 머릿속에는 암문의 수장인 두현이 했던 말이 다시 스쳐지나 갔다. [마, 마교의 하남 북부지부장인 양단화라는 자와 새하얀 얼굴에 젊은 청년이었습니다. 아...아무래도 십만대산에서 온 것 같은데, 지부장인 양단화가그리 공손히 대하는 것을 보면 마교 내 에서도 직위가 높은 자인 것 같습니다!] 그 당시에 양단화가 모신다는 자의 외양을 상세히 들었었다. 그런데 인피면구 속에 감춰져 있던 마교주 천여운의 진정한 모습을 보는 순간에 그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마교주....마교주였단 말인가?' 심증에 불과했지만 황하패주 갈모잠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틀림없었다. 조카들인 황하삼귀의 목을 베게 만들고, 물속에 수장되어 사라진 용호채의 진범. 사파 내부의 전쟁만 마무리된다면 반드시 찾아내, 그 피 값을 치르게 하리라고 벼르고 있던 자가 바로 마교주 천여운이었던 것이다. '이노오오오오옴!' 차마 입 밖으로 그 분노를 표출하지는 못했다. 방금 전에 보였던 말도 안 되는 신위를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승산이 있었다면 단번에 단상 위로 신형을 날려서 갈가리 찢어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크으으윽!' 분에 겨워하던 차에 갈모잠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 올랐다. [조카 녀석들을 마교인들이 죽였다지.] [.....놈들에게는 빚이 좀 있지요.] [이번에 그 빚을 갚을 기회를 주마. 조약식이 끝나면 분명 혼선이 빚어진다. 그렇게 된다면 정도 무림맹의 녀석들이나 그 극도뭐시기인가 하는 놈들이 누구를 먼저 노릴지 알겠지?] 참으로 공교로웠다. 서패왕 항연이 했던 말이 예견처럼 되어버렸다. 저 괴물을 죽이려면 이곳에 있는 자들이 전부 힘을 합쳐야 한다. 그래야만 가능성이 있었다. '보아하니, 나만의 생각은 아닌 것 같구나.' 자신이 이끌고 온 사파 연맹보다도 훨씬 엄청난 전력을 끌고 온 정도 무림맹과 극도육무문 측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무림맹의 삼웅주이자 창천회의 천주 남궁경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앞에도 범, 뒤에도 범인 형국이 아닌가: 처음에는 극도육무문의 엄청난 전력을 이용하려고 했다. 오대고수 급에 버금가는 세 명의 현경의 고수에 열두 명이나 되는 화경의 고수를 보유한 그들이 마교주 천여운과 양패구상을 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바닥에 쏟아져 있는 저 많은 양의 폭탄을 보고나니, 저들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너무 위험한 자들이었다. '이곳에 있는 모든 무림인을 죽일 작정이었나?' 저 정도 폭탄이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예전에 황궁에서 진천뢰라는 것을 시연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 폭발하는 위력이 어지간한 고수들도 막기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 저 폭탄의 크기는 진천뢰보다도 세 배는 커보였다. '도저히.....이용할 만한 자들이 아니다.' 사악한 사파인들도 이 정도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폭탄까지 동원할 정도면 일반적인 무림인들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한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이것만으로도 극도육무문은 창천회가 열해야 한다고 이념 으로 정한 악(惡)에 한없이 가까운 자들이었다. '둘 중 누구를 먼저 노려야 한단 말인가.' 마교주 천여운의 신위를 보고나서는 더욱 난감했다. 방금 전의 이기어도의 통제권을 빼앗는 것을 보면 생사경의 고수인 천여운을 일대일로 대적할 자는 성내에 누구도 없어보였다. 심지어 오대고수의 일인인 무림맹주 이목조차 상대가 될 것 같지 않았다. '맹주.....' 무림맹주 이목의 표정이 어두운 것을 보면 확실했다. 선택의 기로였다. 어느 쪽을 먼저 노려야 실리를 챙기고 손해를 적게 볼지 고민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차에 그의 귓속에 누군가의 전음이 들려왔다. [남궁 가주.] '누가 전음을?' 누가 자신을 부르는가 싶어서 기감을 집중하는데, 뜻밖에도 전혀 예상외의 인물이 전음을 보냈다. 그는 방금 전에 이기어도를 보였던 극도육무문의 상위 문주였다. 뜻밖의 인물이 전음을 보내서 의아해하는데, 다음으로 날아 오는 전음은 더욱 그를 놀라게 만들었다. [아니. 창천회의 천주라고 해야 하나.] '아닛?' 당혹스럽게도 그는 정도 무림맹에서도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한 번도 대면한 적도 없는 극도육무문의 수뇌부 입에서 그 정체가 거론되자 당혹스러웠다. '어떻게 이 자가 본 회를 알고 있는 거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창천회의 다른 간부인 음주(陰主) 당필순을 보았는데, 자신에게만 보낸 전음인 듯 했다. 그렇다는 것은 이곳 진성에 있는 창천회를 움직이는 대표가 자신이라는 것을 뚜렷하게 알고 있다는 소리였다. '무서운 정보력이다. 설마 본 회에 간자가 있는 것인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난감해하는 그의 귓가로 전음이 이어졌다. [거두절미하고 제안하겠다. 그대도 보았다시피 생사경의 고수는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괴물이다.] 그것은 동의하는 부분이다. 현경의 고수이자 오대고수의 일인인 무림맹주 이목조차도 일인군단이라 불린다. 그만큼 누구도 건드리기 힘든 절대고수인데, 그보다도 고차원적인 경지에 이르렀다면 대인전투 능력도 상상을 넘어설 것이다. 어차피 이 자도 적이었지만 들어볼 가치는 충분했다. 잠시 망설이던 천주 남궁경이 그에게 전음을 보냈다. [무슨 제안이오?] [여기서 모두가 싸우는 혼전이 벌어져봐야 손해를 보는 것 은 본문이나 창천회 둘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 [그쪽도 숨겨둔 패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남궁경이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저들이 극무지체 시술에 대한 것도 알고 있는 듯 했다. 이 정도 정보까지 들어갔다는 것은 분명 창천회 내부에 간자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회주에 대한 정보는 회내에서도 유일하게 천주인 자신만이 안다는 점이었다. [저 자를 쓰러뜨릴 동안만 잠시 동맹을 맺는 게 어떻겠나?] 도공문주 이욱의 전음에서 나온 제안에 남궁경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역시 제안은 예상대로 동맹이었다. 공동의 적을 먼저 제거하고 자웅을 겨루자는 소리였다. 그 편이 서로에게도 득이긴 했지만 대놓고 제안을 할 줄은 몰랐다. '그만큼 저들도 마교주를 두려워한다는 것인가?' 이런 것을 보면 마교주 저 자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작 약관에 불과하고 이제 막 마교주가 된 자가 무림을 혼란으로 빠뜨린 극도육무문의 수뇌부가 임시 동맹을 제안할 만큼 강한 경계심을 보이게 만들었다. 그들의 악으로 규명한 마교인이 아니라면 당금 무림에 새롭 게 등장한 영웅이라고 할 만 했다. '.....선택권은 없어 보이는구나.' 잠시 동안 고민하던 남궁경이 결정을 내렸다. 오대고수급의 고수들마저 두려워하는 적이라면 이 자리에서 확실히 죽이는 편이 훗날의 정파 무림을 위해서라도 나았다. 괜히 혼전이 벌어지는 틈을 타 저자가 양측에 피해만 주고서 도망간다면 더욱 답이 없는 상황이 되어버릴 것이다. 대답을 하려던 차에 놀라운 전음이 들려왔다. [방금 전, 사파 연맹의 황하패주와도 합의를 보았다. 결정했나?] '사파 연맹까지?' 무서울 정도로 행동력이 빠른 자들이었다. 어찌 본다면 부끄러운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이것은 정해진 수순일지도 몰랐다. 마교주 천여운은 여러모로 너무 많은 적을 만들었다. [좋소. 마교주를 해치울 동안 만이오.] [.....시간이 촉박하니 무림맹주는 그대가 서둘러 설득할 수 있겠지.] [알겠소.] 어차피 무림맹주 이목 역시도 자신의 결정에 동의할 것이다. 자식인 연부소의 잘린 팔이 무림맹으로 송환되었을 때 엄청난 분노를 보여주었다. 당연히 마교주 천여운을 먼저 죽이자는데 이견이 있을 리가 없었다. "들어라! 우리의 적은 정해져있다. 본 사파 연맹의 일원이면서 본 수로십팔채의 동지들이었던 용호채를 수장시킨 마교주 천여운이다!" 협공하기로 한 것에 전의가 올랐는지 황하패주 갈모잠이 먼저 수하들을 선동했다. 용호채의 진실을 모르고 있던 그들은 갈모잠의 외침에 분노를 참지 못했다. 황하에서는 공포라 불리는 수적들이었지만 동료들만큼은 가족처럼 끔찍이 여기는 자들이 바로 수로십팔채였다. "오늘 저놈의 피로써 동지들의 혼을 달랠 것이다! 본좌를 따르라!" -챙! 갈모잠이 독문병기인 수룡도(水龍刀)를 뽑자, 수로십칠채의 채주들과 무공이 뛰어난 정예 수적들이 병장기를 뽑고서 복창을 하며 함성을 질렀다. "피로써 동지들의 혼을 달래자!!! 와아아아아!!!!"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해서였다. 그들 역시도 마교주 천여운이 괴물이라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았다. 총 두목의 명이 떨어졌으니 이렇게라도 두려움을 떨치고 적을 상대하기 위함이었다. "극도신의 후예들이여! 본문의 대계를 위해서 반드시 마교주를 죽여야 한다!" 이에 호응이라도 하듯이 도공문주가 큰 소리로 자신의 뒤에 있는 열두 명의 문주들과 극도육무문의 문도들에게 외쳤다. 그러자 극도육무문의 문도들 역시도 사기 진작을 하려는지 함성을 질렀다. "와아아아아아아아!!!" 분위기가 제대로 고조되었다. 거의 마교주 천여운이 무림 공적 수준으로 몰리고 있었다. '이 기세를 이어야겠구나.' 남궁경이 서둘러 맹주 이목에게 동참하자는 전음을 보냈다. [맹주. 기회인 것 같소. 본 맹도 이참에 마교주 저 자를 먼저....앗?]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탓! 전음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무림맹주 이목이 천여운이 있는 단상 위로 경공을 펼쳐 올라섰다. [맹주! 설마 그와 겨루기라도 하려는...?] 설마 일대일로 겨루려는 것인가 싶었는데, 맹주 이목이 마교주 천여운과 가볍게 서로 목례를 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 자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지?' 의아해 하는 차에 단상 위로 오르는 또 다른 인물이 있었다. 육웅주 화산파의 장문인인 풍청운이었는데, 무림맹주와 사전에 이야기로 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의 옆에 섰다. "갑시다!" 옆에서 들리는 칠웅주 모용세가의 가주 모용강의 목소리에 남궁경의 눈이 커졌다. '!?' 모용강뿐만이 아니라, 다른 웅주들 모두 단상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앞서 올라간 풍청운을 비롯해 칠웅주 모용강, 십일웅주 개방의 방주 홍팔우, 십삼웅주 제갈세가주 제갈용이 맹주 이목의 곁에 섰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웅주들이 전부 단상에 올라간 셈이었다. "이게 대체?" 그런데 그들이 끝이 아니었다. 우르르르르! 웅주들의 뒤에 서있었던 백사십여 명의 각파의 수장들이 앞으로 걸어가더니, 단상 앞쪽으로 자리하고는 몸을 돌렸다. '이건?' 공교롭게도 남아있는 백여명의 각 파의 수장들은 창천회에 가입한 자들이었다, 대치한 형태가 마치 무림맹주 이목을 비롯한 저들이 마교주에게 붙은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아니 실제로 서로가 공조한 느낌이었다. 당황한 남궁경이 전음이 아니라 입으로 외쳤다. "맹주! 지금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것이오? 설마 극악무도한 마교주와 함께 할 작정이오?" 정도 무림맹과 마교는 동맹을 파기했다. 게다가 불과 반 시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번 불가침 조약식을 기회 삼아, 마교주를 직접 처단할 각오마저 보였던 맹주였다. 완전히 그를 믿고 있던 남궁경의 입장에서는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셈이었다. 그때 무림맹주 이목이 입을 열었다. "남궁 가주! 그대야말로 어찌 역도의 무리들과 함께 하려는 것인가!" "!?" 천주 남궁경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극도육무문을 가리키며 역도의 무리라고 칭하며 다그치니,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 창천회가 정도 무림맹의 뒤에서 암약하기는 했지만 본질이 정의를 추구하다보니, 이런 식으로 몰아붙이면 취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의견이 갈라진 것인가?' 정도 무림맹의 호응을 기다리던 도공문주 이욱은 무림맹주가 뜬금없이 단상 위로 올라가는 모습에 뭔가 일이 잘못되었음을 파악했다. 잠시 그들의 대화를 관망하던 이욱이 무림맹주를 향해 소리쳤다. "무림맹주! 설마 마교주의 편에 붙는 것이오? 본좌가 알기로는 정도 무림맹은 마교와의 동맹을 파기했다고 들었는데, 너무 파렴치한 것이 아니오?" 난처해하는 천주 남궁경을 돕기 위함이었다. 게다가 여기서 마교주 천여운에게 조력자가 붙는 것은 막아야 했다. 만에 하나라는 가능성 따위를 줄순 없었다. '.......극도육무문의 도움을 받게 되다니.' 천주 남궁경의 인상이 잔뜩 구겨졌다. 열악을 이념으로 삼는 창천회의 천주로서 수치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여기서 맹주 이목을 다시 되돌리지 않는다면 정파인들의 전력이 반으로 나뉘는 상황이 발생해 버린다. 그때 맹주 이목이 도공문주를 향해 가당치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귀 파는 본 맹을 참으로 우습게 보는 구려." "그게 무슨?" "간자를 심어서 서찰을 속인다고 본 맹주가 모를 것 같았소?" "!?" 맹주 이목에게서 나온 뜻밖의 말에 이번에는 도공문주의 두 눈이 흔들렸다. 놀랍게도 맹주 이목은 연부소의 잘린 팔의 주먹에 숨겨놓은 서찰이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무림맹주 이목과 정도 무림맹은 그가 의도한 계획대로 움직였다. 마교와의 동맹을 파기한 것도 모자라, 마교인들이 교주를 돕기 위해 북상하는 것마저도 막았기에 확실히 속였다고 판단한 그들이었다. 맹주 이목의 흔들림 없는 눈빛을 보면 확실하게 진실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런 의문을 풀어주기라도 하듯 그가 입을 열었다. "본 맹은 근 수백 년 동안이나 마교와 대립해왔소. 그 오랜 세월을 대립했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겠소?" "이제 막 무림에 발을 내민 신생문파인 귀 파에서는 본 맹 만큼이나 그들을 잘 알 수 없다는 소리요." "잘 알 수 없다고?" "본 맹주는 지금껏 마교주들과 서찰을 주고받으면서, 그들이 스스로를 마교주라고 칭한 것은 듣도 보도 한 적이 없소이다." 도공문주 이욱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서찰의 내용은 수차례 검토했지만 전혀 하자를 찾기 힘들 만큼 정황에 맞게 꾸며졌다. '마교주를 마교주라고 칭한 것이 대체 무슨 문제란 말인가.' 그런데 창천회의 천주 남궁경의 표정은 그러하지 않았다.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처, 천마신교!" "천마신교?"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천여운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마교라는 약칭은 무림인들이나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였다. 마교인들은 자신들을 칭할 때 천마신교 내지 신교라고 외부에 소개를 하는데, 그 교주인 천여운이 서찰에 마교주라 약칭할 리가 없었다. '이런....!' 그제야 도공문주 이욱 역시도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말았다. 서찰의 첫 도입부에 적었던 그 마교주라는 한 마디 덕분에 들키고만 것이었다. "고작 그런 것 따위에 들키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냥 넘어갈 법도 한 일이었는데, 그 미묘한 차이를 눈치 챈 무림맹주 이목의 통찰력이 더욱 황당했다. -챙! 그런 도공문주 이욱을 향해 맹주 이목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자신의 보도 천하평정도(天下平正刀)를 뽑아, 도 끝을 겨냥하며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작 그런 것조차 이해하지 못한 것이 그대들의 실수지." "큭!" 오랫동안 대립해오면 아군보다도 그 적을 이해할 수 있다고 했던가. 그것이 도공문주 이욱이 간과한 치명적인 실수였다. < 79장 역천마제(逆天魔帝) (2) > 끝 < 79장 역천마제(逆天魔帝) (3) > "본 맹주는 정의를 위해 대명제국을 위협하고, 동맹을 이간질하여 신의를 저버리게 하는 극도육무문을 용서할 수 없노라!" 장내를 쩌렁쩌렁 울리는 무림맹주 이목의 정기가 넘치는 외침에 기다렸다는 듯이 네 명의 웅주들과 단상 앞에 있던 각 파의 수장들이 각자의 병장기를 뽑으며 호응했다. -챙! 챙! 챙! "우리는 맹주를 따르겠소!" "역도의 무리들과 함께 할 수 없소이다!" "와아아아아아아!" -챙! 챙! 챙! 병장기를 뽑은 수장들이 결의가 담긴 눈빛으로 기수식을 취했다. 언제라도 출초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에 창천회에 가입한 각 파의 수장들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를 어찌한단 말이오?' '허어....아군끼리 싸워야 할 판국이 아닌가.' 불과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같은 방향을 나란히 바라보던 동료들이 어느새 반대편으로 넘어가서로 대치하게 되어버렸다.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큭!' 설마 같은 정파 내에서 파가 갈릴 줄은 몰랐던 남궁경이었다. 무림맹주 이목에게 까맣게 속아 넘어가버렸다. '본 주가 잘못 판단했다.' 그가 알고 있던 무림맹주는 가장 정파다운 인물이었기에 설마 이런 식으로 마교주와 공조하여 뒤통수를 칠 줄은 전혀 예상 하지 못했다. [천주. 이를 어찌할 겁니까?] 옆에 있는 음주 사천당문의 부가주 당필순이 난감한 표정으로 전음을 보냈다. [사기가 저하되고 있습니다.] -웅성웅성! 창천회 소속이기는 했지만 같은 정파인들과 대립하는 상황은 예정에도 없었기에 각 파의 수장들 역시도 혼란스러워보였다. 이 대치가 지속된다는 것은 서로에게 검을 꽂아야 하는 상황도 발생한다는 의미였다. '아아아!' 모든 결정권을 가진 남궁경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미 극도육무문과 임시 동맹을 맺고 마교주를 먼저 죽이기로 하였다. 여기서 동지들과는 싸울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입장 표명을 확실하게 해라. 남궁 가주.] 흔들리는 남궁경의 귓가로 도공문주 이욱의 전음이 들려왔다. '이 자가 일부러 독촉하는 구나.' 의도는 분명했다. 둘로 나뉘게 되어버린 정파인들끼리 서로 분란이 지속되게 만들려는 수작이었다. 이것을 듣게 되자 남궁경은 자신들의 방향을 확실하게 정할 수 있었다. -챙! 남궁경의 남궁세가의 가주 보검인 제왕검(帝王劍)을 뽑고서 외쳤다. "뜻을 달리한다고 어찌 정의를 추구하는 동지들과 싸울 수 있단 말인가! 우리의 목적은 오직 저 사악한 마교주 역천마제뿐이다!" "와아아아아아! 역천마제를 죽여서 정의를 수호하자!!!" 현명한 선택에 난감해하던 창천회 소속의 각 파의 수장들이 함성을 질렀다. 이렇게 공표를 했으니 뜻을 달리하는 맹주 측의 정파인들도 섣불리 자신들을 공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잘도 빠져나갔군.' 도공문주 이욱이 아쉬웠는지 입맛을 다셨다. 그의 독촉에 넘어가서 흔들렸다면 정파인들끼리 서로 대립하는 그림도 볼 수 있었는데, 그것은 포기해야 할 듯 했다. 남궁경의 외침에 맹주 이목 역시도 내심 다행스럽게 여겼다. '같은 정파인들끼리의 싸움은 피할 수 있게 되었구나. 그러나.....' 저들이 마교주 천여운과 대립하여 죽게 된다면 이를 탓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인지 씁쓸했다. 서찰의 허점으로 인해 극도육무문의 술책을 눈치 챈 이목은 은밀히 황궁에 있는 천여운과 공조하여 서로의 정보를 교환했다. '창천회라....' 그 덕분에 맹주 이목은 정도 무림맹 내부에 극도육무문의 간자만이 아니라 멸악을주장하는극단주의적인 성향을 지닌 창천회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비록 그들이 무림맹 내에서 암약했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목적이 사사로운 욕심이 아니라 악을 멸하여 창천의 세상을 세우려는 것을 알게 되자 차마 내부적으로 단정 짓기도 어려워졌다. '손속의 자비를 요청하고 싶지만....' 그 동안 들었던 마교주 천여운이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을 상대로 살수를 쓰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던 같았다. 자신들에게 있어서나 아군이었지 창천회는 마교주 천여운에게 있어서 철저한 적이었다. 창천회 측의 정파인들을 바라보던 맹주 이목이 현실로 돌아왔다. '후우, 천 교주. 그대와 상의한 대로 했지만 정말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겠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우려의 눈빛으로 천여운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비롯한 정파인들의 삼 할이 마교주에게 붙었지만 창천회뿐만이 아니라 연부소가 이끄는 백원단은 움직이지 않았기에 저쪽의 정파인들은 이백 명이 넘었다. [어찌 단주님을 포로로 잡은 마교주와 함께 한단 말입니까! 주군의 부친이신 맹주님이라도 이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승백.....] 맹주 이목은 다른 웅주들에게처럼 백원단의 부단주 호양검 승백에게 사전에 마교주와 공조했던 계획을 언질을 했으나,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만약 그런 상황이 온다면 백원단은 무조건 마교주와 싸울 거라는 결의마저 보였다. '여전히 그 차이가 크오. 천 교주.' 그런 맹주 이목의 판단은 정확했다. 정파 내에서도 세력이 나뉘기는 했지만 극도육무문의 입장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고 여겼다. 왜나하면 그들이 주시하는 것은 창천회의 비장의 수였기 때문이다. 같은 무위의 경지더라도 극도신무를 익힌 자신들이 중원 무림인들보다 훨씬 고강한 무위를 지녔다고 자부하는 그들이었다. "서찰을 눈치챘다고 득의양양해졌나 본데, 어차피 상관없다. 무림맹주여. 그대와 몇몇 수뇌부들이 마교주에게 붙었다고 전황에 달라지는 것은 없다."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아는 법이오!" 맹주 이목의 일침에 도공문주 이욱이 도발하기라도 하듯이 말했다. "길고 짧은 것이라. 과연 그게 쉬울까? 후후후, 그래도 무림맹주 그대에게 감사하도록 하지. 덕분에 마교의 군대가 북상하는 것을 막았..." -쾅! 그때 큰 굉음 소리가 북쪽에서 울려 퍼졌다. 성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 진원지로 향했다. "헉! 부, 북문이?" "안 돼에에에에!" 유일하게 열려있던 진성의 북문이 다른 문들과 마찬가지로 닫혀버린 것이었다. 그 앞에 있던 마교의 무사들이 도르래의 밧줄을 끊은 듯 했다. "아니. 대체 어쩔 작정으로?" "천 교주!" 육웅주 풍청운이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천여운을 쳐다보았다. 그들이 그나마 유일하게 희망을 가지고 있던 것은 퇴로인 북문을 등지고 싸운다는 점이었다. 언제든지 도주라도 시도해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걸 끊어놓다니?' '이, 이게 무슨 짓이야?' 무림맹의 사람들 모두가 황당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도공문주 이욱이 닫혀버린 북문을 보면서 속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전쟁이 시작되면 자신들이 먼저 취하려 했던 일계가 북문의 봉쇄였다. "하하하하핫! 손수 퇴로를 막아 주다니! 천 교주. 본 문의 수고로움을 이렇게 덜어주어서 참으로 고맙소이다." 어리석음을 비꼬는 말에 천여운이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굳이 고마워할 것 없다. 누구도 도망가지 못하도록 막은 것 뿐이니까." "뭐라? 지금 무슨 헛소리를….!?" -휙! 그때 이욱이 하던 말을 멈추고서, 놀란 눈으로 다급히 성벽 쪽을 바라보았다. 옆에 있던 도염문주 노도경 역시도 마찬가지로 당혹스러운 눈으로 성벽으로 쳐다보았다. '뭐지? 이 기운들은?' 어느새 성벽 쪽으로 꽤 많은 수의 고수들의 기운이 감지되었다. 바로 그때였다. -파파파파파팍! 성벽 바깥벽을 밟고서 경공을 펼치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그 숫자가 굉장히 많았다. 곧 성벽 위로 그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 이럴 수가?" "전부 마교인?" 놀랍게도 그들은 전부 마교의 무사들이었는데, 하나하나가 절정 이상의 고수들이었다. 포위하듯이 동쪽에서부터 서쪽, 남쪽, 북쪽 등 전 성벽 위를 둘러싸고 있는 마교의 무사들은 얼핏 보아도 거의 삼백여 명에 달하는 숫자였다. 그때 노격진천뢰가 들어있는 목함들의 앞에 서있던 거구의 사내가 기다렸다는 듯이 큰 소리로 호탕하게 외쳤다. "교주 직속대인 호위전에서 이렇게 늦어서야 되겠나!" "호, 호위전?" 호위전이라 하면 교주를 지키는 직속대였다. 그렇다는 것은 저 성벽에 있는 고수들은 호위전의 무사들이라는 소리였다. "너무해요. 교주님이랑 같이 있어놓고 그런 말이 나오나요!" -파파파팍! 투정부리는 목소리와 함께 성벽에서 다섯 명의 젊은 남녀가 성내로 뛰어 내렸다. 약관에 불과해 보이는 남녀들은 겉보기와 다르게 하나 같이 고절한 무공 실력을 지녔는데, 어느새 천여운이 있는 단상 앞으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서 외쳤다. "육검단의 이검단주 문규가 교주님을 배알합니다!" "육검단의 삼검단주 백기가 교주님을 배알합니다!" "육검단의 사검단주 사마착이 교주님을 배알합니다!" "육검단의 오검단주 호상화가 교주님을 배알합니다!" "육검단의 육검단주 재택경이 교주님을 배알합니다!" 그들은 바로 호위전 육검단의 단주들이었다. 근육질의 거구의 사내가 그들을 향해 씨익하고 웃더니, 곁으로 다가가 다시 한쪽 무릎을 꿇고서 포권을 취하며 외쳤다. "호위전 육검단의 일검단주 고왕흘이 다시 한 번 교주님께 인사드립니다!" 거구의 사내는 바로 고왕흘이었다. 천여운의 여섯 검들이 처음으로 무림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파팍! 여섯 육검단주들의 인사가 끝나자, 성벽 위에 있는 오백여 명의 고수들이 한 쪽 무릎을 꿇고서 포권을 취하며 성 내외가 떠나가라 큰 목소리로 외쳤다. "삼가 미천한 교인들이 대 천마신교의 교주님을 배알합니다!!!" "크윽!" "무, 무슨 소리가!" 고막이 전체가 울리는 느낌이었다. 창천회, 사파연맹, 극도육무문의 수뇌부들이 대지를 진동시키는 거대한 외침 소리에 어느새 표정들이 굳어졌다. 그것은 이 외침을 성벽 위에 있는 마교인들만이 외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천주 남궁경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성내 단상 주위에서 오열을 갖추고 있던 이백여 명의 금의위들과 삼천 명의 병사들이 전부 한 쪽 무릎을 꿇고서 마교주 천여운을 향해 포권을 취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스스로를 미천한 교인이라 칭했다. 그 뜻은, '말도 안 돼!.......저들 모두가 마교의 병사들이라고?’ 이들의 책임자인 북진무사와 서창의 첩형이 도망칠 때, 어째서 같이 가지 않았나 싶었는데, 놀랍게도 그들은 전부 마교의 교인들이었던 것이다. "!!!" 천여운과 사전에 동조했던 맹주 이목과 무림맹의 웅주들도 전혀 이 사실을 몰랐었기에 어안이 벙벙해져서 엄청난 수의 마교의 무사들을 쳐다보았다. '황궁 금의위와 병사들로 속이다니?' '하! 이래서 황하 이북으로 북상하는 것을 막아도 상관없다고 한 것인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발상이었다. 설마 이 많은 숫자의 마교인들이 전부 관인으로 변장하고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전력에서 훨씬 뒤떨어진다고 걱정했는데, 오히려 반전되어 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끝이 아니었다. '이 패도적인 검기는?' '전율적인 기운이다!' 다른 자들과 달리 도공문주 이욱과 도염문주 노도경의 시선은 여전히 동문 쪽의 성벽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 이유가 곧 드러났다. -팟! 이윽고 동문 성벽을 넘고서 거대한 두 자루의 대검을 등에 차고 있는 범상치 않은 중년의 사내가 허공을 계단 밟듯이 성안으로 천천히 내려왔다. '허, 허공답보!' 절대로 평범한 고수가 아니었다. 그때 사파 연맹의 십칠채주 중의 한 사람인 부운채의 채주 진오승이 화들짝 놀라서 소리쳤다. "무, 무쌍검!!!" "히익!" 그 외침에 다른 채주들 역시도 그를 알아보았는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여타의 무림인들 중에는 몰라보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황하를 누비는 수적들인 그들은 절대로 그 얼굴을 모를 수가 없었다. "무쌍검 왕전!" 그는 무림맹주 이목과 더불어 오대고수의 일인인 무쌍검 왕전이었다. 수로삼십채라 하여 만 명에 달하는 수적들로 황하를 지배하던 전성기 시절의 그들을 홀로 삼천 명을 몰살시켜 수로십팔채로 만든 장본인이었다. "네, 네 놈이......어떻게?" 황하패주 갈모잠 역시도 그의 등장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욱씬! 검은 안대로 가려진 왼쪽 눈 쪽이 강하게 욱신거리며 통증이 되살아났다. 무쌍검 왕전은 그의 왼눈을 앗아간 공포스러운 존재였다. 그런데 이번 불가침 조약과는 전혀 무관한 무쌍검 왕전이 이곳 통허현의 진성에 나타난 이유가 무엇일까? '저 자가 오대고수의 일인인 무쌍검이라고? 어째서 이곳에 나타난 거지?' 의아하기는 극도육무문의 상위 문주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고오오오오! 그때 무쌍검 왕전이 무시무시한 투기를 발산하면서, 성큼성큼 천여운이 있는 단상 앞으로 걸어왔다. 정도 무림맹의 웅주들과 각 파의 수장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렸다. 바로 그 순간 왕전이 한쪽 무릎을 꿇고서 천여운을 향해 공손히 포권을 취하며 외쳤다. "왕 모가 주군의 명을 받고 달려왔나이다." "!!!" 왕전의 입에서 나온 충격적인 말에 마교인들을 제외한 성내의 모든 무림인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이게 무슨 소리야?' 모두가 자신들의 귀를 의심해야만 했다. 놀랍게도 오랜 세월 동안 모습을 감추고 있었던 오대고수의 일인인 무쌍검 왕전이 마교주 천여운의 수하가 된 것이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남궁경은 어찌나 놀랐는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중원 오대고수 중 두 명이 마교주 천여운 측에 합류한 것이다. 천여운이 놀라하는 극도육무문과 창천회, 그리고 사파 연맹의 무림인들을 향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했지. 누구도 도망갈 수 없을 거라고." "!!!!" 북문마저 봉쇄한 진정한 이유였다. 그를 어리석다고 비웃었던 도공문주 이욱의 동공이 미친 듯이 떨려왔다. 노격진천뢰의 계책은 실패했지만, 그래도 마교주를 사지로 몰아넣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속아서 궁지에 몰린 것은 자신들이었다. "여기가 네놈들의 무덤이다." "마교주...... 이노오오옴!" 천여운이 입 꼬리를 올리며 특유의 냉소적인 목소리로 개전(開戰)의 신호탄을 울렸다. "대 천마신교의 이대 천마 천여운이 명한다. 한 사람도 남김 없이 전부 죽여라!" "충!!!" < 79장 역천마제(逆天魔帝) (3) > 끝 < 80장 천마재림 (1) > 마교주 천여운의 입에서 나온 명령은 이곳 진성에 있는 모든 무림인들을 전율케 만들었다. 역시 그의 목적은 이곳 진성에 있는 자들을 전부 몰살시키는 것이었다. 마교의 영역도 아닌 정파의 영역에서 적들을 한 곳에 몰아 넣는다는 발상 자체가 대담하다 못해서 무섭게 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이대 천마?' 반면 다행스럽게도 아군이라 할 수 있는 정도 무림맹의 네 웅주들과 무림맹주 이목의 표정이 묘해졌다. 모두를 죽이라는 명령도 놀랐지만 마교주 천여운이 스스로를 이대 천마라고 거론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천마(天魔). 중원 무림인치고 그 위명을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정파 무림에 전설적인 대종사 보리 달마 장삼봉, 독고구패(獨孤九覇)와 더불어 무림의 사대종사라 불렸다. 마교를 세운 시초이자 무림 역사상 최고이자 최강이라 불렸던 전설적인 인물이다. 보통 마(魔)를 추구하는 자들은 정파인들에 의해서 그 위명이 덮일 만도 했지만 워낙 무(武) 하나만으로도 중원 전체를 진동시켰던 자이기에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던 천하제일인자였다. 맹주 이목이나 무림맹의 웅주들은 천여운이 스스로를 천마라 칭한 이유는 자세히 모른다. 익히 알기로는 천마라는 인물은 마(魔)로써 패왕의 길을 걸었던 자였다. '허어.....스스로를 천마라 칭했음은 천 교주도 패도를 걷겠다는 것인가? 원시천존. 원시천존.' 그것이 정파를 이끄는 수장들의 귀에는 심상치 않게 들렸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당대 마교주 천여운을 보면 확실히 마교의 개파조사인 천마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와아아아아아아!!!" 성내가 떠나가라 함성을 지르며 진격해오는 마교의 무사들을 보면서 창천회를 비롯한 사파 연맹, 극도육무문의 무사들도 이내 병장기를 빼들었다. -챙! 챙! 챙! 각파의 최고 전력들로 구성된 이 전쟁은 더 이상 수뇌부들만 연결된 대표전이 아니었다. 이 전쟁은 향후 각 세력 간의 균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빌어먹을!" 그가 나타나기 전만 하더라도 복수뿐만이 아니라 마교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기대감에 차있던 황하패주 갈모잠은 어찌 해야 할지 고민되었다. 그만큼 무쌍검 왕전은 살아남은 수로십칠채의 수적들에게 악몽이나 다름없었다. -부웅! 부웅! 두 개의 거대한 대검을 가볍게 양손으로 휘두르는 모습을 보니, 그때의 일이 절로 떠올랐다. 그것은 말 그대로 학살이었다. 자신과 더불어 수로삼십채 시절 채주들과 부채주들이 반나절 동안 합공을 가해서 겨우 쫒아낼 수 있었다. 자신도 그때보다 한 단계 진일보 했지만 왕전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그것을 훨씬 상회했다. "참으로 마음에 드는 첫 임무로군." 누군가의 산하로 들어간 것이 생애 처음인 왕전. 내심 천여운의 소환에 어떤 싸움이 벌어질까 궁금했는데, 이렇게 홉족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파 연맹과 정도 무림맹의 감시 때문에 건드릴 수 없었던 남은 수로채의 수괴들을 전부 몰살 시킬 기회가 주어졌으니 말이다. "일단 머리부터 잡아보실까!" -탁! 왕전이 거대한 대검으로 투창을 하듯이 자세를 취하더니, 이내 심후한 공력을 실어 그것을 황하패주 갈모잠이 있는 곳을 향해 던지려했다. "제, 젠장! 역시 본좌부터 노리는 것이냐." 수하들의 앞에서 뒤로 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갈모잠이 독문병기인 수룡도에 내공을 일으켜 도강(刀罡)을 발산했다. -우웅! 긴장된 표정으로 대검이 날아오는 순간을 포착하려는데, 왕전의 앞을 누군가가 막아섰다. '?' 하얀 백발에 붉은 도집을 등에 매고 있는 뒷모습. 그는 극도육무문의 상위 세 문주 중의 한 사람인 도염문주 노도경이었다. 덕분에 대검을 투검하려던 왕전이 그것을 멈췄다. "하아......" 내심 잔뜩 긴장했던 갈모잠이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를 위기에서 구해준 노도경이 강렬한 기운을 발산하며 무쌍검 왕전에게 말했다. "약자와 싸우려는 겐가. 강자여." 약간 떨어져 있었지만 이 말을 들은 갈모잠의 인상이 구겨졌다. 졸지에 약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를 개의치 않는 도염문주 노도경은 뒤로 손짓을 하면서 전음을 보냈다. [그대들은 본 문과 둘로 나뉜 정도 무림맹 측과 합공하여 단상을 공격하게. 이자는 본좌가 맡을 터이니.] 선택권은 없었다. 갈모잠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십칠채주들과 백 명의 수적들을 이끌고, 성내 광장의 단상 쪽을 향해 진격했다. '주군이 말한 극도육무문의 수뇌부 중의 한 사람인가?' 왕전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문파의 수장도 아닌 수뇌부라는 자의 무공이 현경의 경지였다. 아직까지 직접 손을 겨루지는 않았지만 첫눈에 그 역량이 자신에게 버금갈 정도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노인장 같은 자가 무림에 있을 줄은 몰랐구려." "후후후, 본문은 단합을 중요시하는 곳이라 말일세. 당금 중원 오대고수 중 한 사람이라지. 그래 그 정도는 되어야 노부의 상대가 될 수 있지." 오만하게 말은 했지만 그 자격은 충분했다. 서로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눈으로는 허실을 찾고 있었는데, 이를 찾기 힘들었다. 하지만 적당한 도발은 필요한 법. "훌룡한 상대를 원한다면 주군과 겨루는 편이 좋지 않겠소?" 그 말에 도염문주 노도경의 인상이 굳어졌다. 뭐라고 반박을 하고 싶지만 저 괴물 같은 마교주와는 일대 일로 겨뤄서 승리할 자신이 없었다. "입심이 제법 세구만. 하나 마교주에게는 본문에서 따로 준비한 것이 있으니, 자네는 본좌와 승부를!" -챙!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엄청난 속도로 발도한 노도경의 새빨간 도가 왕전의 목을 베려들었다. 그러나 이미 만전 상태였던 왕전이 이를 막지 못할 리가 만무했다. 가볍게 대검을 옆으로 치켜들어 도를 막아냈다. -깡! '역시 기습이 통하지 않는군. 중원 오대고수다워.' -지이이이이잉! 왕전의 대검이 충격으로 떨려왔다. 그래도 신형이 밀려나거나 내상을 입거나 하진 않았다. '공력이 보통이 아니구나.' 두 사람의 내공 수위는 거의 백중지세였다. 그렇다는 것은 초식 대결로 승부의 판가름을 지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였다. "그럼 제대로 해봅시다. 노인장!" 왕전이 오른손에 있는 대검을 가볍게 휘두르며 도염문주 노도경에게 유연하게 검초를 펼쳤다. -촤촤촤촤촤촤! 거대한 대검을 나뭇가지 휘두르듯이 가볍게 유(柔)의 묘리를 담아, 검초를 펼치는 것이 과연 오대고수다운 검술 실력이었다. "좋아!" -타타타탁! 고절한 검술 실력에 흥이 올랐는지, 노도경이 극도신무의 독특한 보법을 펼치며 세 보 이상을 움직이지 않고 가까이에서 검 초를 피해냈다. 마치 위험을 즐기듯이 말이다. '완벽하게 내 검을 피할 자신이 있단 건가?' 그런 자신감이 없고는 할 수 있는 회피법이 아니었다. 하지만 도염문주 노도경의 선택은 옳았다. 거대한 대검을 다루는 무쌍검 왕전의 검초의 유일한 약점은 거리를 가까이 좁히면 초식의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꽤 위험한 대결이 되겠군.'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전의가 오른 왕전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한편 극도육무문과 창천회는 계획과는 다르게 몰려오는 마교의 무사들을 막느라, 거의 난전(亂戰)이 되어가고 있었다. 교주와 함께 한다는 것 때문인지 마교인들의 사기는 하늘에 치솟았다. "아아아아아아아!" -챙챙챙! 천여운 혼자라면 그를 노리면 되었는데, 워낙 마교인들의 숫자가 그들의 배가 되다 보니 이를 헤쳐 나가는 것도 힘들었다. '크윽! 아주 작정을 했구나. 마교주!' 창천회의 천주 남궁경이 속으로 분통을 터뜨렸다. 어떻게 정파 영역 한복판에 이 많은 수의 마교인들을 변장 시켜서 진입할 생각을 했단 말인가. 대담함을 넘어서 치가 떨릴 정도였다. '극도육무문 그 작자들은 뭘 하고 있단 말인가!' 물론 난전이 되었지만 적어도 천여운을 가장 먼저 노려야 했다. 수장의 목만 베어도 반전을 일으킬 수 있다. "비켜랏!" -촤촤촤촤촤촤! "끄악!" 남궁경이 제왕검으로 제왕검결의 검초를 펼치며 달려드는 마교의 무사들을 쓰러뜨렸다. 그러면서 극도육무문의 수뇌부들의 행방을 찾았다. 자신들 역시도 난전 속에 마교의 무사들을 헤치면서 앞으로 조금씩 전진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수많은 병장기들이 부딪치는 소리 가운데 유달리 수준 높은 검초들과 도초들이 접전을 벌이는 소리가 그의 귀를 사로잡았다. "아!" 그곳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정도 무림맹의 웅주들과 각 파의 수장들이 극도육무문과 부딪쳐서 일전을 벌이고 있었다. 애초부터 정도 무림맹의 목적은 극도육무문이었다. "맹주....." 무림맹주 이목은 지금 극도육무문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도공문주 이욱라는 자와 일대일로 자웅을 겨루고 있었다. 개전이 시작되자마자 이목은 처음부터 그를 자신의 적수로 염두했다. '대단하다!' 과연 정파를 대표하는 오대고수의 일인다웠다. 이목이 다루는 세 자루의 이기어도가 교묘할 정도로 초식의 합격술을 만들어내며, 도공문주 이욱을 격렬히 밀어붙이고 있었다. -채채채채채챙! '이기어도로 도초를 만들다니, 과연 오대고수답구나.' 기공술의 대가인 이욱 역시도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파죽지세와 같은 기세로 밀어붙이는 것이 빠르게 승부를 보려고 하는 맹주 이목의 의지가 엿보였다. '하지만 본좌를 상대로 그것은 오만이다!' -채채채채채챙! 도공문주 이욱이 그물 같은 도망(刀網)을 만들어내 이기어 도를 막아내는 한편으로 왼손에 진기를 일으키더니, 허공으로 들어올리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바닥에 균열이 일어나며, 갈라진 파편들에 공력이 실려, 그것들이 일제히 치솟으며 이목에게 쇄도했다. -슈슈슈슈슈슉! "피, 피해랏!" 그들의 근처에서 싸우던 정파 무림맹의 수장들과 극도육무문의 고수들이 놀라서 피해야 할 정도의 위력이었다. 기공술의 정점에 이른 자가 펼치는 이기어탄공술이었다. '헛! 파편 하나하나가 탄지신통을 펼친 것이나 다름없구나!' 놀란 맹주 이목이 왼손을 끌어당기자, 합격 초식을 펼치던 이기어도 중에 한 자루가 빠르게 날아와 도막을 만들어내며 파편들이 통과하지 못하도록 막아냈다. -슉! -파파파파파팍! "앗? 파편들이?" "으악!" 막아내서 튕겨나간 파편들은 근처에 있던 수장들과 극도육무문의 무사들의 몸을 파고들 만큼 말도 안 되는 위력을 보여주었다. "무, 물러나랏!" "저들의 가까이로 가면 안 돼!" 한참 전투를 벌이던 양 측이 동시에 그들에게 멀어졌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탄을 금치 못하게 하는 수준 높은 싸움이었다. '하! 저것이 오대고수 급의 싸움인가.' 그야 말로 탈인간 급의 대결이라 할 수 있었다. 저런 엄청난 대결을 하고 있는 극도육무문 측의 수장에게 마교주를 합공하자고 독촉하기에 애매하기는 했다. [천주!] 그때 천주 남궁경이 귓가에 음주 만독(萬毒) 당필순의 전음이 들려왔다. 얼마 떨어지지 앞쪽에 당필순이 있었는데, 언제 저까지 파고 들었는지 마교주 천여운이 있는 단상까지 거의 열다섯 보 거리까지 전진해있었다. [사파 연맹 측이 지금 마교주의 호위전 무사들을 막고 있습니다. 이틈에 마교주를 치겠습니다!] 결의가 담겨 있는 목소리였다. 만독 당필순의 말대로 마교의 육검들은 서쪽 방향에서 밀려 들어온 황하패주 갈모잠과 십칠채주들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잔머리를 굴릴 줄 알았는데 의외구나.' 사파인들의 특성상 불리해지면 수작을 부릴 줄 알았다. 물론 엄밀히 말한다면 도염문주 노도경의 도움을 받고서, 그나마 상대하기 무난한 방향으로 공격을 시도한 것뿐이었다. [당 부가주! 그대 혼자선 무리네! 시술을 발동하고 해도...] [생사경의 고수를 상대로 이것저것 따질게 어디 있습니까! 지금이 기회입니다. 본가의 비기로 마교주와 동귀어진을 하겠습니다!] [비기?] 비기라는 말에 남궁경의 두 눈동자가 흔들렸다. 통허현으로 오기 전부터 당필순이 누차 이야기했던 당가의 비기를 말하는 듯 했다. 마교의 독마종주인 괴독마장 백오와 더불어 독에 관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만독 당필순이 펼치는 동귀어진의 비기는 익히 들어왔다. '만독인술을 펼치려는 것이로구나!' 만독인술(萬毒人術). 독을 익히는 자의 최고 경지를 독인의 경지라 한다. 독인의 경지에 이른 자는 전신에 독기를 뿜어댈 수 있는데, 이것에도 시전자가 견딜 수 있는 한계점이라는 것이있다. [지금 품속에 무형지독이 있습니다.] [허어! 결국 그것을 챙겨왔단 말이오?] [......딱 한 병 남아있는 것입니다.] 무형지독(無形之毒)은 당가에서 만든 최고의 독으로 이것은 중원에서 만들어진 최고의 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형태도 없고 향도 맛도 느낄 수 없는 이 독은 한 번 중독된 즉시 아무리 초절정의 고수조차 일 각을 넘기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할 정도로 지독한 위력을 지녔다. '역시 전부 폐기한 것이 아니구나.' 위력을 둘째치고 무색무취에 악용될 가능성이 높아서 정도 무림맹 내에서도 절대로 쓰지 말기를 회의로 결정한 금지된 독이었다. 공식이 워낙 복잡해서 비법서로 전해지는데, 이것을 무형지독과 함께 전부 웅주들이 보는 앞에서 폐기하게 했는데 역시나 그 잔재가 남아있었다. [이런 날을 위해서 남겨놓은 마지막 병입니다. 목숨을 걸고 마교주를 죽이고 저승으로 가져갈 터이니, 천주께서는 부디 눈을 감아주십시오.] [......알겠소이다.] 비장한 각오가 담긴 목소리에 천주 남궁경이 결국 허락했다. 그의 말대로 생사경의 고수를 죽이기 위해서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만독인술에 무형지독이라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확실히 그 정도라면 대라신선이라도 죽일 수 있을 만큼 최후의 비기라 할만 했다. 그만큼 독이라는 것은 무림에서도 일종의 반칙이나 다름없었다. 대인살상 능력만큼은 오대고수급이라 불리면서도 괴독마장 백오나 만독 당필순이 무림에 무인으로서 크게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였다. '이번에 이 한 몸 불살라 마교주를 죽이고 창천의 하늘을 만드리라! 그렇게 된다면 당가의 위명이 중원을 울리겠지!' 단상까지 열 보 거리까지 진입한 당필순의 얼굴에 비장함이 넘쳤다. 마교의 무사들이 막고 있었지만 당필순 역시 기본적으로 화경의 경지에 이른 고수답게 막기 힘들었다. '단상까지 아홉 보.' "크악!" '단상까지 여덟 보.' "막아라! 교주님의 곁에 진입...끄악!" 당필순의 손에 파죽지세로 마교의 무사들이 쓰러졌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공력의 소모를 줄이고 적들을 처단해서 앞으로만 전진했다. 그 결과 단상까지 다섯 보가 남았다. 이 정도라면 충분히 마지막 비기를 쓸 수 있는 사정거리가 완성되었다. 이를 숨죽이고서 지켜보는 천주 남궁경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물들었다. -달칵! 꿀꺽꿀꺽! 당필순이 품속에 있던 무형지독의 옥병을 따서 그것을 단숨에 들이켰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절대로 하면 안 될 행동이지만 독인의 경지에 이른 그는 체내에서 독을 융합시킬 수 있다. '크윽! 지독하구나. 만독을 받아들였는데도 오장육부가 들끓는 것 같다.' 과연 당가의 모든 역사와 기술이 응집된 최강의 독이라 할 만 했다. 이 독까지 체내에 융합해서 당가 최후의 비기인 만독인술을 펼친다면 아무리 생사경의 고수라도 단번에 녹아내릴 것이다. "흐아아아아압!" -파아아아아아아! 무형지독을 기존의 독과 융합시킨 당필순이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 지독한 독기가 풍겨지며 온몸에 흐물흐물 거리는 보랏빛 갑주가 생겨나 전신을 둘러쌌다. -치이이이익! "끄아아악! 도, 독이닷!" "도, 독인!!!" 당필순에게 생겨난 갑작스러운 변화에 그를 막아서던 마교인들조차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자를 단상 위로 내보낼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 당필순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마교인들에게 검강들이 쇄도했다. -촤촤촤촤촥 당필순이 뒤를 흘깃 바라보니 천주 남궁경의 제왕검으로 탄검강을 날려서, 그를 가로막으려는 마교인들을 막아준 것이었다. [어서 가시오! 영웅이 되시게!] '천주.' 남궁경의 전음에 감격한 당필순이 속에서부터 전의가 울컥 치솟았는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단상 위의 마교주 천여운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꼭 성공하겠소!’ -파스스스스! 비기 만독인술을 펼치는 그의 보랏빛 갑주는 닿는 족족히 모든 것을 녹아내릴 만큼 엄청난 독기를 발산했다. 이를 강제로 막는다고 해도 반경 십 장(丈)까지 독기의 폭발이 일어난다. 당필순은 확신할 수 있었다. 마교주 천여운은 이 자리에서 자신과 함께 죽게 된다. 그리고 그는 정파 무림을 공헌한 영웅으로 평생 만인의 가슴속에 남게 될 것이다. "마교주여 정의를 위해서 본좌와 함께 저승으로 가...!?" 자고 소리를 치던 당필순의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불과 천여운까지 거리 두 보 앞에서 그의 신형이 공중에 멈춰서 있었다. -둥둥! "이, 이게 대체?" 천여운이 가볍게 손바닥으로 막는 시늉을 하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말로 이를 수 없을 만큼 굉장히 민망한 느낌이다. ᅳ'비, 빌어먹을!' 이런 상황은 생각하지 못했다. 설마 신형을 날리는 상대를 허공섭물로 공중에서 붙잡으리라고는 누가 예측하겠는가. 공력에서 너무 격차가 심했다. '괴물 같은 놈! 직접 터뜨리면 된다!' 당황해 하던 당필순이 안되겠다 싶어 자체적으로 폭발을 시도하려는데, "비기인가? 그런데 독은 이미 많이 겪어봐서 말이야. 저승에는 혼자 가라." "뭣?" -쩌저저저적! 바로 그 순간 그의 몸이 차가운 한기로 얼어붙기 시작했다. "자, 잠깐 이건 반칙이...." -쩌적! 뭐라고 말을 전부 끝내기도 전에 당필순의 몸은 거대한 얼음덩어리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완전히 얼어붙자 천여운이 허공에 떠있는 얼음덩어리를 손으로 밀어내는 시늉을 하자, 그것이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기 시작하더니 이내 진성 바깥으로 넘어가버렸다. -슈우우우욱! 쿵! 콰아아앙! 진성 바깥에서 뭔가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폭발음이 들려왔다. 어찌나 어이가 없었는지, 천주 남궁경이 할 말을 잃고서 진성 바깥에서 뭉실거리며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를 바라보았다. '미친!......이걸 이런 식으로....' < 80장 천마재림 (1) > 끝 < 80장 천마재림 (2) > 천주 남궁경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결의에 차서 동귀어진을 하려들었던 만독 당필순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계책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독인을 얼려서 날려 보낼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빙공도 다를 줄 알았나?' 세외 북해빙궁의 고수들이나 가능한 수준이었다. 열양기가 강한 무인이 불꽃을 다루는 것은 간간이 본적이 있었지만, 천여운이 짙은 음기 계통의 무공마저 익혔을 줄은 몰랐다. 당필순에게는 안타깝지만 전력 분석에서 실패한 대가였다. '.....정말 무서운 자다.' 남궁경은 진심으로 천여운이 두렵게 느껴졌다. 기습을 당한 와중에 독인이 자폭하는 것을 막으려고 얼린 것부터 시작해, 일부러 성 밖으로 던진 것까지 찰나의 순간에 엄청난 판단 능력이었다. '독이라도 퍼졌으면 개죽음은 아니었는데.' 만약 천여운이 스스로의 안위만 생각해서 그저 당필순을 밀어내기만 했다면, 난전(亂戰) 중이기에 뒤섞여 있는 마교인들까지도 폭발에 휘말려 독이 성내 사방으로 퍼져나갔을 지도 몰랐다. '경험이 도움이 되었군.'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괴독마장 백오와 겨뤘던 것이 떠올랐던 천여운이다. 마도관의 대연무장에서 독 기운이 퍼져나가는 것 덕분에 육 단계 시험에 참관했던 사람들이 뒤로 피하는 상황이 벌어졌었다. 성내에 독이 퍼졌다면 자신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싸움이 되어버린다. '이제 남은 창천회의 간부는 회주까지 합쳐서 세 명인가.' 지주 무당파의 현운자, 인주 도월패주 팽무월, 음주 만독 당필순까지 절반의 간부들이 죽어나간 창천회다. 천여운의 날카로운 눈빛이 정확하게 난전의 한복판에 있는 남궁경을 꿰뚫었다. '.......설마 지금 본 주를 쳐다보는 것인가?' 천여운과 정확하게 눈이 마주친 남궁경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창천회의 수뇌부 중의 한 사람을 처단하자마자 쳐다본 것이어서, 그로서는 왠지 심장이 덜컥하는 느낌이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설마 극도육무문처럼 본 주의 정체를 눈치 챈다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어째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인가. 바로 그때 남궁경의 뒤에서 뭔가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뭐지?' 놀란 남궁경이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 뒤에 황궁 관료의 복장을 하고 있는 푸른 두건을 쓴 청년이 있었다. 아무래도 마교주 천여운과 마찬가지로 변장했던 마교인들 중에 한 사람인 것 같았다. 푸른 두건의 청년이 히죽거리며 그에게 말했다. "여기 있었네! 히히, 교주님 덕분에 겨우 찾았네요. 명색이 정도 무림맹의 웅주라는 양반이 이런 난전 틈에 숨어 있나요?" -척! 남궁경이 긴장된 눈빛으로 제왕검으로 그를 겨냥했다. 겉보기에는 약관의 청년이었는데, 전신에서 풍기는 기운이 화경의 고수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대는 누구지?" 허봉의 말처럼 명색이 정도무림맹의 웅주인 남궁경이었다.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 "저요? 허봉입니다." "허봉?"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마교주가 데려온 인물들 중에 육검이라 불린 자들도 처음 보는 고수들이었는데, 이 자도 마교에서 새롭게 키운 후기지수 인 듯 했다. 물론 그런 것치고 무위가 너무 높지만 말이다. "대 천마신교의 교주님의 제 일 수하이자, 호위전의 부관입니다! 더 이상 떠들 필요가 있나요? 그럼 한 수 배우겠습니다!" -화르르륵! 그 말과 함께 허봉의 검에서 뜨거운 불꽃이 일렁였다. 남궁경이 느꼈던 묘하게 불길하면서 이질적인 기운이 바로 저 불꽃이 틀림없었다. 젊다고 만만하게 볼게 아닌 듯 했다. '방심하면 큰일 나겠구나.' 천주 남궁경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제왕검의 검병을 꾹 쥐었다. -파파팍! 한편 천여운이 있는 단상 위로 일곱 명의 인영이 나타났다. 독기를 발산하던 당필순을 피해서 떨어져 있던 극도육무문의 일곱 문주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묻어났다. "무림맹 녀석들이 한 건 제대로 하나 싶었는데. 아쉽게 되었구려." 단상에 올라온 그들 중 한 사람인 도간문주 계상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내심 천여운이 독에 당했으면 하는 기대감이 컸던 그였다. 독인으로 변한 만독 당필순이 내뿜는 독기는 화경의 고수들인 그들조차도 극도로 위험하다고 느껴질 만큼 강력했다. "아무래도 우리들의 손으로 마교주 생사를 다뤄야 할 운명인가 보구려. 개진(開陣)!" "개진!!!" -팍! 도간문주 계상이 기수식을 취하자, 나머지 여섯 명의 문주들도 복창하며 각자가 다른 기수식을 취했다. 칠성극도진(七星極刀陣). 극도육무문의 도주가 만들었다고 한 비장의 도진(刀陣)이었다. 절대고수를 상대하기 위해 만든 이 도진은 놀랍게도 굉장히 정교하게 협공을 이루는데, 한 사람 한 사람이 화경의 극에 이른 그들이 펼치는 도초의 위력을 몇 배나 강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천여운을 상대로 여섯 초식이나 교환하며 대등하게 겨뤘기 때문이었다. '생사경의 고수라 잔뜩 긴장했는데, 과연 그분께서 만드신 도진은 최고다. 아니 최강이라 부를 만하다?' 개전하면서 도공문주 이욱의 명령에 내심 부담감이 컸던 그들이다. 현경의 고수조차도 괴물 같은 무위를 지녔는데, 그것을 넘어서는 전설의 경지에 이른 고수를 합공한다고 해도 과연 상대 할 수 있을까 의문이었었다. "아무리 생사경의 고수라고 해서 완벽한 무적은 아니구려!" 이제는 생각만큼 두렵지 않다. 생사경의 고수인 천여운과 대등하게 초식을 겨뤘다는 것은 장기적인 싸움으로 보았을 때, 합공을 하는 그들이 더욱 유리하다는 증거였다. "말이 많군. 계속 떠들 거냐?" 천여운이 전혀 흔들림이 없는 눈빛으로 냉소적으로 물었다. 이에 도간문주 계상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사담이 길어졌구려. 지금까지 보여드린 것은 이 초식에 전 주에 불과했다는 것을 말씀드리오. 그대에게 칠성극도진의 마지막 최강의 진초를 보여드리리다! 칠 초 개진!" "칠 초 개진!" 도간문주 계상의 외침에 그를 비롯한 일곱 문주가 동시에 도식을 펼쳤다. 천여운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도식이 아니다.' 이번에는 동시에 펼치는 도 초식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촤촤촤촤촤촤! 지금까지는 도식들을 쪼개서 일곱 명이 교묘하게 하나의 초식을 만들었다면, 이번에는 일곱 초식이 동시에 맞물리면서 그 위력은 기존의 것을 훨씬 뛰어넘었다. '지금까지의 초식들도 겨우 막았다. 그분께서 만드신 이 최강의 초식이라면 마교주를 쓰러뜨릴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초식을 펼치는 그들의 눈빛에는 승기가 가득했다. 푸른빛 도강이 화려한 빛의 궤적을 그리며 틈을 주지 않고 천여운을 베려 들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오싹! 갑자기 천여운의 몸에서 흉흉하면서 마성의 기운이 폭사되었다. 진초를 펼치는 그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검강의 색이 변했어?' 천여운이 들고 있는 천마검의 푸른빛 강기에서 검은 색으로 바뀌었다. 검은빛의 검강은 흉흉한 마성을 내포하고 있었는데, 그 불길함이 말로 이를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천여운의 몸이 움직였다. -스르르륵! "앗!" 그의 신형이 순식간에 일곱 갈래의 잔상으로 갈라지더니, 이내 교묘하게 맞물리는 초식들의 아주 미세한 빈틈을 찔러 들어 왔다. -채채채채챙!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어떻게 동시에 이것을?" 진초를 펼치던 일곱 문주가 동시에 경악했다. 천여운이 지금 검은 검강으로 파고든 빈틈은 초식들이 연계를 하기 위한 유일한 공간이었는데, 이것을 동시에 노린 것이었다. '강제로 초식을 진행해야 해.' 틈이 벌려지게 되면 초식이 파훼될 수도 있다. 일곱 문주가 십성 공력으로 끌어올리며 강제적으로 초식을 이어나가려 했다. 그러나, -차차차차창! "무, 무슨 공력이!"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마지막 최후의 진초는 원래 칠성극도진을 펼칠 때보다도 두 배나 더욱 강한 위력을 발산하는 초식이었는데, 그 공력을 훨씬 뛰어넘었다. '손바닥이 찢어질 것 같아!' 하지만 그보다도 먼저 견디지 못한 것이 있었다. "헛!" -쩌저저적! 쨍그랑! 도초를 펼치던 그들의 오른팔이 뒤로 튕겨나가더니, 쥐고 있던 도들이 균열이 가서는 이내 부서져 버리고 말았다. "크헉!" "컥!" -우당탕! 도가 깨지자 당연히 그 여파를 고스란히 맞은 그들의 몸이 동시에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넓은 단상의 끝부분까지 밀려나가, 넘어진 그들이 누구 할 것 없이 선혈을 토해냈다. "끄으으윽, 마지막 초식이 이렇게 쉽게 깨지다니?" "쿨럭쿨럭.....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방금 전까지 비등하게 겨뤘었는데....." 게다가 마지막 초식은 절초답게 그 위력이 두 배에 달했다. 그것을 초식의 약점마저 찾은 것도 모자라서 너무도 쉽게 파훼시켜 버렸다. 천여운이 어이가 없어하는 그들에게 말했다. "뭔가 착각하고 있군" "착각?" "네놈들이 강해서 내가 이 도진을 상대했다고 생각하냐?" "뭣?" "내가 네놈들을 상대해준 것은 두 가지 이유다." "두 가지?" "뭐, 두 가지를 네놈들이 전부 알 필요는 없고." 천여운이 왼손을 들어서 가볍게 휘저었다. 그러자 사방에 차가운 한기가 일어나며,투명한 얼음으로 만들어진 도(刀)가 허공에 생겨났다. -쩌저저적! 놀라운 광경에 그들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건 대체?" "도?" 천여운이 다시 한 번 가볍게 왼손을 휘저었다. 당황한 그들이 다급히 몸을 일으켜 세우는데, 어느새 한 사람, 한 사람의 주위로 일곱 개의 얼음 도가 빙글빙글 허공을 둘러쌌다. -둥둥! "이, 이게 이기어도라고?"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얼음 도를 만든 것도 모자라, 마흔아홉 자루의 이기어도를 부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보다 자신들의 주위에 둘러싸고 있는 얼음 도가 일곱 자루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대, 대체 무얼 하려는 것이오?" 영문을 몰라하는 그들에게 천여운이 입 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덕분에 잘 배웠다." "잘 배워?.....자, 잠깐 설마!" 슈슈슈슈슈슉! 바로 그 순간 쓰러져 있는 그들을 향해 허공에 떠서 둘러쌌던 얼음 도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궤적을 그리는데 매우 익숙한 초식이었다. 그들의 두 눈이 터질 듯이 커졌다. "말......도 안 돼!!!" 그것은 놀랍게도 그들이 펼치던 칠성극도진이었다. 경악할 틈도 없이 쓰러져 있는 그들의 몸에 일곱 개의 얼음 도가 칠성극도진의 도초를 펼치며 난자했다. -촤촤촤촤촤촤촤촥! "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악! 어, 어떻게 이런 일이!" 단상 위로 일곱 문주들의 비명이 일제히 터져 나왔다. 무력하게 칠성극도진의 도초에 난자당한 그들의 몸이 오체 분시가 되듯이 갈라졌다. -쩌저저저적! 더욱 무서운 것은 얼음 도의 차가운 한기에 잘린 단면이 얼어붙어서, 죽는 순간까지 베이는 고통과 동사(凍死)의 통증이 동시에 느낀다는 것이다. [극도신무의 도식을 조합한 판넬 시스템을 종료합니다.] -파스스스슥! 머릿속에 나노의 목소리가 울리며 칠성극도진을 펼친 얼음 도들이 힘을 잃고서 부서졌다. 잘려 있는 머리통의 눈동자는 어찌나 경악했는지, 하나 같이 두 눈을 부릅뜬 채 죽음을 맞이했다. '이미 극도신무의 도식을 알고 있으니, 금방 배울 수 있군.' 천여운은 나노를 통해 그들의 칠성극도진을 그 자리에서 스캔했다. 판넬 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에 굳이 그 스스로 펼칠 필요도 없이 나노에게 진기를 넘기자, 칠성극도진을 그대로 구현해냈다. 도식을 몰랐다면 분석 시간이 걸렸겠지만 천여운은 이미 극도신무를 익히고 있었다. '진법을 분석해서 약점을 알린다면 본교의 무사들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겠지.' 이것이 천여운의 진정한 목적이었다. 칠성극도진을 처음 보게 된 천여운은 이것이 마교의 검마섬진 이상으로 까다로운 위력을 지녔다는 것을 깨닫고서 전 초식을 일부러 상대한 것이었다. 당한 그들의 입장에서는 처음 선보인 비장의 수법을 털린 셈이었다. "후우." 천여운이 단상 위에서 전황을 바라보았다. 육검을 비롯해 부관 허봉, 호위전의 무사들이 격렬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이번에 처음으로 십만대산을 나온 초출들이다. 호법들과 장로들이 그에게 조언했다. [교주님 혼자서 모든 일을 해결하실 수는 없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적이라면 모르겠지만 본 교의 무인들도 성장할 수 있도록 실전 경험을 쌓게 해야 합니다.] 죽은 일곱 극도육무문의 문주들이 듣지 못한 두 번째 이유. 그것은 이번에 초출인 호위전과 마교의 신입 무사들이 큰 전쟁을 통해 실전경험을 쌓게 하려함이었다. '그래. 따라오려면 충분히 강해져야지.' 천여운이 전장의 한복판에서 분전하고 있는 육검들을 바라 보며 입 꼬리를 올렸다. < 80장 천마재림 (2) > 끝 < 80장 천마재림 (3) > -채채채채챙! 격렬하게 겨루고 있는 두 사람의 신형이 세 차례 가량을 허공에서 부딪치더니, 이내 멀리 떨어졌다. 그들은 무림맹주 이목과 도공문주 이욱이었다. 수준 높은 공방을 펼치고 있는 그들의 무위는 무림의 정상급이라 할만 했다. 근접전은 도초를 펼치며 직접 겨루는가 하면, 조금만 거리가 떨어지면 쉴 새 없이 기공과 이기어도가 부딪치며 손에 땀을 쥐게 만들었다. "후우....후우...." 도공문주 이욱의 호흡이 거칠어져 있었다. 짧은 대결이었지만 몇 수 정도는 목숨이 직결될 만한 살초들이 오갔다. '오대고수라고 해도 본 좌의 상대가 되지 않을 거라 여겼는데 과연 명성에 걸맞은 실력을 지녔구나.' 이욱은 냉정하게 현 대결을 분석했다. 근접전에서는 기묘한 극도신무의 초식에 밀리는 맹주 이목이었지만 세 자루로 펼치는 이기어도법의 초식은 오히려 기공술로도 파훼하기 힘들 만큼 정교했다. '좀 더 근접전으로 유도해야 겠구나.' 이목의 도법도 대단하기는 했지만 극도신무보다는 한 수 아래였다. 오래 끌면 안 되는 싸움이었다. 무림맹주 이목을 빨리 처리해야, 마교주 천여운을 상대하고 있는 일곱 문주들과 합류하여 도울 수 있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아닛?' 도공문주 이욱의 표정이 굳어졌다. 잠시 거리를 벌린 틈에 마교주 천여운과 칠성극도진이 겨루는 것을 살폈는데, 물샐 틈 없이 합공을 펼치던 일곱 문주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설마?' 단상 위에는 수많은 얼음 고기조각만이 널려있었다. 그나마 형태를 알아볼 수 있는 수급이 있었는데, 문주들 중의 한 사람인 도영문주 우찬의 머리였다. '그 분께서 만든 칠성극도진을 격파했단 말인가?' 칠성극도진의 위력은 그가 직접 겨뤄봐서 잘 안다. 도식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워낙 틈새 없이 연계되는 진초의 향연에 그조차 수십 초식을 겨뤄도 파훼법을 찾기 힘들 만큼 대단한 도진이었다. '아뿔싸! 큰일이구나!' 칠성극도진이 파훼되었다는 것은 이곳 진성에서 그를 묶어 둘 자들이 더 이상 없다는 의미였다. 심각한 표정을 짓던 도공문주 이욱이 결정을 내렸다. '도저히 아껴둘 상황이 아니다.' 그들이 숨겨놓은 비장의 세 가지 책략 중 두 가지가 깨졌으니, 이제는 마지막 수를 풀어야만 했다. 창천회 측이나 사파 연맹의 전력이 아직까지 유지될 때 밀어붙여야 한다. "어딜 한 눈 파는 게요!" 이목의 외침과 함께 세 자루의 이기어도가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흥!" -파파팍! 도공문주 이욱이 재빨리 기공으로 막을 생성하여, 이기어도를 막아내고는 목소리에 심후한 공력을 실어 성내가 떠나가라 외쳤다. "제 이계를 실시하랏!" "충!!!" 그의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무림맹, 마교도들과 겨루고 있던 살아남은 칠십여 명의 극도육무문의 문도들의 두 눈이 붉게 물들며 전신의 근육이 부풀기 시작했다. -투투투툭! 상체가 찢어진 그들의 체구는 거의 고왕흘에 맞먹을 정도로 커졌다. 인간이 아닌 괴인으로 변한 그들의 모습은 당연히 전장의 한복판이더라도 확연히 눈에 띨 수밖에 없었다. "엇? 이, 이게 무슨?" "설마 역혈마공?" 갑작스러운 변화에 당황한 무림맹과 마교의 무사들이 일제히 극도육무문의 문도들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역혈마공? 아니야. 다르다.' 마교의 내전으로 직접 두 눈으로 역혈마공을 경험했던 호위 전의 무사들이었다. 기존의 역혈마공과 다른 것이 핏줄이 울룩불룩하게 튀어나오지 않았고 특유의 짐승 같은 울음소리를 내지 않았다. 이것은 완성된 역혈대라신공이었다. '저게 저들의 비장의 수인가?' 허봉과 대결을 펼치고 있던 창천회의 천주 남궁경 역시도 역혈대라신공을 펼치는 극도육무문의 고수들을 발견하고서, 분위기가 달라졌음을 감지했다. '참 공교롭구나.' 그들의 숨겨둔 패라는 것이 거의 비슷했다. 남궁경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극도육무문이 비장의 수를 공개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이 전황이 불리하다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자신들도 숨겨둔 패를 아껴둘 필요가 없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압!" '끈질긴 놈?' 엄밀히 말하면 허봉은 그보다 한 수 아래였다. 화경의 경지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초식의 운용 면에서 현저히 밀렸으나, 저 이질적인 불꽃이 싸움을 팽팽하게 유지시켜 주었다. -촤촤촤촤촤! 남궁경이 제왕검결의 절초를 펼치며 미친 듯이 덤벼드는 허봉을 견제했다. 전의만큼은 젊어서인지 절정이었다. -촥! "윽!" 검식의 일부를 막지 못한 허봉의 허벅지로 남궁경의 검이 스치고 지나갔다. 덕분에 움직임이 잠시 더뎌졌다. '이때다!' 남궁경이 자신의 목에 매고 있던 작은 피리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서 그것을 세게 불었다. -삐이이이이이이익! "아!" 피리 소리가 울려 퍼지자, 창천회에 가입한 정도 각 파의 수장들 중에 일부가 준비해놓은 침을 품속에서 꺼내들었다. 피리 소리는 시술을 발동하라는 신호였다. 침을 손에 쥔 그들이 호흡을 가다듬고는 자신들의 등과 목 사이에 있는 특정 혈도 부위를 강하게 찔러 넣었다. "푸른 하늘을 위하여!" -푹! "끄윽!" "이것들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싸우다 말고 스스로에게 침을 찌르는 행동은 당연히 기이했다. 이상한 짓을 한다고 여기면서도 마교의 무사들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들을 공격했다. -촥! 침을 맞느라 일순간 경직되었던 자들 중에 도검에 찔린 자들이 속출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도에 베이고 검에 찔린 자들이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는지, 아무렇지 않게 반격해오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움직임이 방금 전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민첩해졌을 뿐더러 완력이 거의 두 배로 늘어나서, 병기를 부딪칠 때마다 손이 울릴 정도였다. -챙! 챙! "뭐, 뭐야 갑자기 강해졌어" "이것들 대체 뭘 한 거지?" 침을 찌르고 나서는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다. 강해진 것보다도 더욱 무서운 것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촥! "파, 팔이 베였는데?" 한 쪽 팔이 잘려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공격해왔다. 이들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아, 감정이 사라진 것처럼 무표정해졌는데, 마치 인간이 아닌 존재와 싸우는 느낌마저 들게 했다. '극무지체?' 이 광경을 보고서 대호법 마라겸과 겨루고 있던 도광문주 자운강의 인상이 굳어졌다. 그들이 폐검곡에서 찾던 물건은 역시 창천회에서 가지고 있었다. "재밌는 짓거리를 했군." 그의 입 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극무지체의 시술법은 근골의 한계를 넘게 만들어, 인위적으로 완벽하게 극도신무를 펼칠 수 있는 육체로 만들어주는 비술이었다. 극도육무문에서도 완벽하게 극도신무를 익힌 자들은 상위 육문주와 도주뿐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책 중 하나인 비술이 적힌 '그 분'의 유물을 어처구니없이 창천회에 빼앗긴 것이다. '고통을 못 느끼게 한 건가?' 더군다나 시술법을 개량한 것 같은데, 인간이 아닌 완벽한 살인 병기들을 만들어냈다. 감정과 고통을 제거한 괴물을 창조한 것이다. '잘됐군. 이번 전쟁을 무사히 넘길 수만 있다면 비술을 빼앗을 수 있겠구나.' 유일하게 좋은 소식이었다. 자운강이 왼손으로 변해가는 성내 전황을 가리키며 말했다. "보이냐? 이때까지는 전초에 불과했다. 이제 제 이막이 시작 된 것이다. 지금부터는 전장이 아니라 살육이다. 크크큭." 가면 틈새로 보이는 마라겸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극도육무문이나 갈라진 정도 무림맹 측에서 뭔가 숨겨진 비장의 수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탈 인간 병기들일 줄은 몰랐다. 숫적으로 우위라고 하여 안심하고 싸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때 마라겸의 귓가로 익숙한 전음이 들려왔다. [대호법. 실전 경험을 쌓게 하는 건 여기서 끝내야 겠군요.] 그것은 천여운의 전음이었다. 전음을 들은 마라겸이 피식하고 웃고는 자운강에게 말했다. "그렇군. 그대들의 손으로 직접 살육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 군." "무슨 헛소리를 하는....응?" 의아해하던 자운강의 시선이 어느새 허공으로 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성내 허공을 향해 누군가가 계단을 밟듯이 올라가고 있었다. 누군가는 바로 마교주 천여운이었다. "앗!" 그것을 다른 이들이 발견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능공허도(凌空虛道)!" -웅성웅성! 경신술에 있어서 최고 경지라 할 수 있는 능공허도를 펼치고 있었다. 그것은 현경의 경지에 오른 고수라면 누구나가 가능한 경신법이었지만 여기서 한 단계를 더 넘어가게 된다면, "우와앗!" "허공에 떠있어!" 진성의 허공 한 복판에 도달한 천여운의 신형은 공중에 둥둥 떠있었다. 말 그대로 하늘을 날고 있는 것이었다. 내공으로 공기의 발판을 만들어서 걷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경지의 기술이었다. 불길한 느낌에 사로잡힌 도공문주 이욱이 무림맹주 이목과 싸우던 것을 멈추고서 그를 향해 일갈을 내질렀다. "마교주! 이노오오옴!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냐?" -파파파파파팍! 도공문주가 왼손을 휘저으며, 허공에 있는 천여운을 향해 바닥의 파편들을 암기처럼 이기어탄공을 펼쳐 날려 보냈다. 그러나 허공으로 날아오르던 파편들은 도중에 멈춰서 힘을 잃고 떨어졌다. 그저 손을 내밀었을 뿐인데 벽에 막힌 것처럼 말이다. 투투투투툭! '어째서 통하지 않는 거지?' 기공술로는 정점에 달했다고 자부했지만, 진기를 이용한 기술은 이상하리만큼 전혀 통하지가 않았다. 마치 진기로 연결된 것들이 침식당하는 느낌이었다. 천여운이 당혹스러워하는 도공문주를 비롯한 성내 무림인들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네놈들이 자초한 것이다." "자초해?" 성내를 울리는 천여운의 냉소적인 목소리에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뭘 하려고 성의 허공 한복판까지 날아오른단 말인가. -드르르르르르! "뭐, 뭐지?" "흔들린다." 바닥에서 강한 진동이 느껴졌다. 바로 그 순간 바닥에 떨어져 있던 주인을 잃은 병장기들이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엇?" 누구나 할 것 없이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허공으로 떠오르는 병장기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어어엇!" 사파 연맹을 비롯해 창천회, 백원단의 무인들 중에 내공이 낮은 자들의 병장기들이 요동을 치며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려 했다. "이이익!" "내, 내 거어어어엄!" 내공이 높은 자들은 이를 막아냈지만 어설픈 자들은 자신의 병장기를 빼앗기고 말았다. 그렇게 허공에 떠오른 병장기만 거의 이백 자루에 달했다. 성 위를 수놓고 있는 병장기들의 모습은 말 그대로 장관이나 다름없었다. "세상에!" "이걸....전부?" 허공섭물이라고 해도 대단한데, 이것이 전부 이기어검술이라면 경악할 일이었다. 모두가 경계심이 가득한 얼굴로 하늘을 쳐다보며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둥둥둥! '아니야. 불가능해. 아무리 생사경의 경지에 올라서 내공이 넘쳐나도 일개 개인이 열두 자루 이상의 도검으로 이기어검술을 펼칠 수는 없다.' 도공문주 이욱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런 식으로 병장기를 허공에 떠오르게 하는 것은 내공 낭비에 불과했다. 단순하게 병장기를 떨궈봐야 여기에 있는 고수들 중에 막지 못할 자가 누가 있단 말인가. "검을 떨구려는 것이다! 전부 방비해라!" 도공문주 이욱의 외침에 극도육무문의 무인들을 비롯해 사파 연맹과 창천회의 고수들도 병장기를 쥐고서 허공을 응시했다. 천여운이 그런 성내에 있는 무림인들을 내려다보며, 속으로 나노에게 명했다. '나노, 과녁 지정.' [멀티 록 온 시스템(multi lock on system)을 가동합니다.] 나노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리며, 흰 빛의 입자들이 선을 그리고 있는 천여운의 개방된 증강현실로 수많은 십자 형태의 붉은 과녁들이 형성되었다. -삐삐삐삐삐삐삐삐삐삐삐삐삐삐! 타깃이 전부 지정되자 천여운이 내공을 십성으로 끌어올렸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우우우우웅! 여기저기서 경악성이 터져나왔다. "마, 말도 안돼!" "이게 전부....이기어검강이라고?" 그냥 이기어도검술도 놀라울 판국인데 이 많은 숫자의 도검들이 성위 하늘에서 강기를 일으키자, 밝은 대낮에 반짝이는 별들이 수를 놓은 느낌이었다. "정녕......인간이란 말인가?" 무림맹주 이목을 비롯한 무림맹의 웅주들도 입을 쩌억 벌리고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천여운이 밑에서 올려다보고 있는 창천회, 극도육무문, 사파연맹의 무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유일하게 이 초식에 이름을 붙였지" "천공섬광(天空閃光)." "천공......섬광?.....잠깐....설마!" 도공문주 이욱이 사색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 천여운이 그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우우우우웅! 그 순간 하늘을 쳐다보는 모든 무림인들의 두 눈동자에 수 많은 푸른빛이 점처럼 가득 메워지며 점차 커졌다. 이것은 그냥 이기어검강이 아니었다. 이백 자루의 도검으로 펼치는 이 기술은 경악스럽게도 이기어탄검강(以氣馭彈劍罡)이었다. 진성의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던 탄검강들이 쏟아지는 빗줄기처럼 일자로 내려치며 순식간에 성내가 빛으로 뒤덮였다. -콰콰콰콰콰콰콰콰쾅! "이런 미친!" "피, 피해에에에엣!" "도망쳐랏!" 성내 여기저기서 도망치라는 외침이 터져 나왔지만, 이윽고 그것은 아비규환에 가까운 비명소리로 바뀌었다. "끄아아아아악!" "끄헉!"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는 말로도 부족했다. 그것은 천여운이 명명한 대로 천공섬광, 즉 하늘의 빛줄기나 다름없었다. 놀라운 것은 빛줄기들은 정확하게 적들을 향해서만 쇄도했다. -콰콰콰콰콰쾅! 사방에서 내리치는 탄검강에 찢겨나가는 적들을 바라보며 무림맹주 이목이 넋이 나가서 중얼거렸다. "무, 무림에......정말로 천마......천마가 재림했구나." < 80장 천마재림 (3) > 끝 < 80장 천마재림 (4) > -콰콰콰콰콰쾅! 성을 가득 메우는 푸른색 강기들. 하늘에서 빗발처럼 내려치는 이기어탄검강의 위력은 가히 재앙에 가까웠다. 정도 무림맹, 창천회, 사파 연맹, 극도육무문을 비롯해 심지어 천여운의 수하들인 마교인들조차도 전율과 경악을 금치 못 할 정도의 힘이었다. "끄아아아악!" "이, 이게 무슨 인간의 힘이란 말인가!" "살려줘어어어!" 상대적으로 가장 약한 사파의 수적들은 난리가 났다. 내려치는 강기의 빛줄기가 내려칠 때마다 반수가 날아가질 않나, 심지어는 몸 전체가 소멸되는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산개해랏! 산개해!" 수적들을 이끄는 황하패주 갈모잠을 비롯한 십칠채주들이 외쳤으나 소용없었다. 같은 강기라도 생사경의 고수가 발산하는 탄검강은 위력 자체가 달랐다. "초, 총두목! 도망쳐야 합니다! 저, 저놈은 괴..." -쾅! 갈모잠에게 도주를 권고하던 십칠채주들 중 한 명인 육호채의 채주 방원의 머리통이 강기의 덩어리를 맞고 사라졌다. -푸슉! 분수처럼 솟구치는 핏물에 갈모잠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이건 정말로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힘이었다. "헛?" -파치치직! "크헉!" 자신에게도 내리치는 이기어탄검강을 도강을 일으켜 다급히 쳐냈지만, 도병을 잡은 두 손이 부러질 것처럼 아팠다. '무, 무슨 강기의 위력이?' 통상의 것과는 비교도 하기 힘들었다. 초절정의 고수의 머리통을 한 방에 소멸시켜 버릴 위력이니, 그럴 만도 했다. 갈모잠은 진심으로 두려워졌다. 생사경의 고수라고 해도 삼대 세력의 고수들이 힘을 합친다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거라는 추측은 막연한 착각에 불과했다. '저 괴물은 혼자서도 이곳에 있는 자들을 전부 몰살시킬 수 있었어.' 다른 자들이라면 모를까. 마교주 천여운의 힘은 그것이 가능해보였다. 이 진성에서 벌어지는 재앙과도 같은 학살이 그 증거였다. 쉴 새 없이 퍼붓는 강기의 빛줄기에 화경 이상의 고수급을 제외하고는 속수무책으로 죽어 나가고 있었다. '우, 우리는 건드리지 말아야 할 괴물을 건드린 것인가.' -파치치직! "크흑! 이,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창천회의 천주 남궁경 역시 자신을 노리는 강기를 쳐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완숙한 화경에 이른 그조차 십성 공력의 검강을 펼쳐야 겨우 막아낼 수 있을 만큼 전율적인 위력이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슈슈슈슈숙! 콰콰콰과쾅! "산개해랏! 가까이 붙으면 당한다!" "미친! 강기가 쫒아오는데 무슨 수로 피한단 말이얏!" "끄아아아악!" 한 번에 이백여 강기가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정확하게 적들에게 쏟아져 내렸다. 마치 이백 명의 고수들이 한 사람씩 전담한 것 마냥 말이다. '말 그대로 이기어검술과 탄강기가 하나가 된 기술이다. 머릿속이 어떻게 된 것도 아니고 어떻게 이 많은 수를 통제한단 말인가?' 상식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그 상식을 뛰어넘게 만들어주는 것이 나노의 연산 능력이었다. 미래 기술의 집합체라 할 수 있는 나노의 연산능력을 바탕으로 한 멀티 록 온 시스템과 판넬 시스템의 결합은 이기어탄검강을 재앙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큭, 그나마 시술자들의 통각을 없앤 것이 다행이구나.' 통각을 제거하여 고통과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시술자들이었기에 어떠한 부상을 입어도 개의치 않고 움직일 수 있다. -쾅! 실제로 강기에 팔 다리가 잘려나갔는데도 움직이는 속도에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나노. 전부 머리를 노려라.' [알겠습니다. 타깃들의 세부 범위를 헤드샷(hedshot)으로 지정합니다.] 강기의 빛줄기들은 정확하게 그들의 머리를 노려왔다. 아무리 고통을 느끼지 않는 적들이라고 해도 머리가 날아가는데, 불사신(不死身)도 아니고 움직일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쾅! 쾅! 쾅! 머리를 잃은 시술자들의 몸이 비틀거리다 바닥에 쓰러져갔다. "머, 머리만 노리다니!" 천주 남궁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느새 절반 이상이 차가운 주검이 되어 있었다. 그러다보니 변화가 생겨났다. 공포나 두려움에 대한 감정을 통제한 시술자들이 주변의 동료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 나가자, 점차 우왕좌왕하며 통제가 되지 않았다. '이럴 수가.....시술자들이 두려워하는 것인가?' 애초에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인지능력이나 생각 자체를 제거한 것은 아니었다. 뻔히 개죽음을 당하는 것을 아는 데도 대항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당황해 하는 그의 앞으로 허봉이 걸어왔다. 득의양양한 얼굴을 보아서 교주 천여운의 전율적인 신위에 자부심을 느낀 모양이었다. "저희의 승부도 마무리 지어야죠!" -챙! "지, 지금 그럴 상황이!" -파치치치직! 남궁경이 자신에게 날아오는 강기를 쳐냈다. 빗줄기처럼 쏟아지는 이기어탄검강에 성내가 초토화되고 그 역시도 이것을 막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이를 개의치 않는지 허봉이 공격해왔다. 이런 상황에도 끈질기게 노리는 그에게 화가 난 남궁경이 제왕검결의 검초 중에서 가장 살초에 가까운 검정검연(劍定劍演)을 펼쳤다. -촤촤촤촤촤촥! 그때, -오싹! 초식을 펼치는 남궁경의 머리로 푸른빛 강기가 내리쳤다. 화들짝 놀란 남궁경이 변초를 써서 이를 막아냈는데,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허봉의 환영검술의 절초가 그를 덮쳐왔다. "이 비겁한!" -채채채채챙! 촤촥! 당연히 변초를 쓰면서 초식이 뒤엉켰으니, 공격을 제대로 막을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순식간에 환영검법에 남궁경의 왼팔 하나가 날아갔다. "끄아아아아아악!" 무림에 처음 등장하는 무명에다가 한 수 아래의 실력자인 허봉에게 어처구니없이 당한 남궁경은 강한 치욕감으로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한편 극도육무문의 수장인 도공문주 이욱은 천공섬광의 초식이 시전 된 이래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본 좌가 대체 무엇을 보고 있는 거지?' 어도술과 기공을 극으로 익힌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성 위에서 쏟아지는 이기어탄검강의 빛줄기들은 놀랍게도 한 치의 실수도 없이 정확하게 적들만을 노렸고 이제는 머리통 만을 노렸다. -쾅! 쾅! 쾅! "크아아아악!" "크헉!" 역혈대라신공을 펼친 고수들이라고 해도 머리가 소멸되면 움직일 수 없는 것은 창천회의 시술자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초절정의 고수들로 구성된 극도육무문의 문도들은 역혈대라신공으로 내공이 폭증하여, 일시적으로 화경에 버금가는 무위를 지니게 된다는 점이었다. -파치치직! "산개해서 막아랏!"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치는 강기들을 힘겹게 막아내며 살기 위해서 아등바등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다른 적들이 없었다면 피해가 최소화 되었을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이기어탄검강에 피해를 입지 않는 것을 인지한 정도 무림맹 측과 마교인들이 이 틈을 놓치지 않고 공격해왔다. "교주님을 도와서 적들을 제거하랏! "와아아아아아아!!!" 사기가 오른 그들로 인해 강기의 빛줄기가 내려치는 성내는 아까 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혼전으로 이어졌다. 진한 피비린내로 사방이 요동을 쳤다. '이대로 가면 전멸할 지도 모른다. 이미 대계는 실패했다. 더 이상의 희생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후퇴해야 하나.' 진성 대계의 책임자인 도공문주 이욱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지금이라도 진성을 벗어나면 적어도 최소한의 전력이라도 보존할 수 있다. 그러던 차였다. "끄으으윽! 대체 언제까지?" "무, 무슨 내공이 넘쳐나는 것도 아니고!" 아비규환 속에 들려오는 일부 비명소리에 문득 이욱의 눈매 가 날카로워졌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마교주의 인간을 벗어난 능력에 놀 라서 절대로 대항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그였지만 문득 이런 생 각이 들었다. '아무리 생사경의 고수라고 해도 인간인 이상 내공에 한계 가 있다.' 자신조차도 열두 자루로 이기어도강을 펼치려면 짧게는 일 각에서 길게는 이 각의 시간을 유지하는 것이 한계였다. 지금 천여운은 그 열 배에 가까운 숫자에 더욱 내공소모가 심한 이기어탄검강을 펼치고 있었다. -과과콰콰콰쾅! 한 성의 내부가 초토화될 정도로 말이다. 벌써 반 각이 지나고 있으니, 슬슬 한계점에 도달할 것이다. '조금만....조금만 더 버티면 저 인간을 벗어난 괴물의 목숨을 노릴 수 있는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 지금이 아니면 저자를 죽일 기회가 쉽게 생길까?' 유일한 반전의 기회. 그것이 퇴각을 하려던 마음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다른 문주들의 동의가 필요해.' 마침 무쌍검 왕전과 더불어 명왕 마라겸을 상대하느라, 매 순간이 절체절명인 도염문주와 도광문주가 어떻게 해야 할지 전음을 보내왔다. [도공문주 이대로 가다간 전부 전멸하오. 문책을 당하더라도 남은 전력을 수습해서 퇴각하는 것만이 살 길이오.] [.......저 괴물은 우리의 선을 벗어났소.] 어차피 대계는 완전히 실패했다고 판단한 그들이었다. [아직 방법이 하나 있소.] [방법?] 이에 도공문주 이욱이 의아한 반응을 보이는 다른 상위 문주 두 명에게 자신의 마지막 계획을 전음으로 전달했다. 희생을 전제로 하여 무모하기는 했지만 충분히 일리는 있었다. [이번에 실패하면 그 분의 분노가 문책으로 끝낼 것 같소?] [흐음.....] 확실히 이 정도 기술이라면 아무리 생사경의 고수라고 해도 내공이 바닥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신중한 도염문주 노도경은 탐탁치 않아했지만 호전적인 도광문주 자운강이 동의해주었다. '좋아?' 이에 일말의 전의가 샘솟은 도공문주 이욱이 외쳤다. "버텨라!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 "충!!!" 겨우겨우 버티고 있는 극도육무문의 살아남은 문도들의 사기를 북돋게 했다. 지휘자의 역할이란 그랬다. 절망 속에서도 사기를 유지시키는 것이다. -콰콰콰콰콰쾅! 그렇게 일 각이 다 되어갈 무렵, 살육에 가까울 만큼 초토화되고 있던 진성 내부에 변화가 생겨났다. 하늘 위에서 별처럼 반짝이며 강기를 내뿜던 병장기들이 그 힘을 잃은 것처럼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했다. -투투투투툭! 챙그랑! 챙그랑! 무기들이 떨어진다는 의미는 단 한 가지였다. '드디어!' 무한할 것 같던 마교주 천여운의 내공이 드디어 다한 것이다. 도공문주 이욱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성내에 살아남은 무림인들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허공에 떠 있던 마교주 천여운에게로 향했다. -슈우우욱! 허공에 떠있을 만한 내공도 남아있지 않는지 천여운의 신형이 밑으로 떨어졌다. 바로 그때였다. -팟! 팟! 팟! "앗!" 마교인들이 화들짝 놀라서 소리쳤다. 교주님!" "위, 위험합니다!" 허공에서 떨어지는 천여운을 향해 어느새 세 명의 인영이 쇄도한 것이었다. 그들은 바로 극도육무문의 세 상위 문주들이었다. 오직 천여운의 내공이 전부 소진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그들은 병장기가 떨어지는 순간에 상대하던 적수들을 버리고서 곧장 허공으로 날아오른 것이다. '허어! 이 순간을 노렸단 말인가?’ 불리한 상황에도 퇴각을 하지 않는 것을 의아하게 여겼던 맹주 이목이었다. 갑자기 절초를 펼치며 자신을 뿌리치길래, 전력을 다하려는 가 보다 싶었는데 그 목적은 뜻밖에도 마교주였다. '스스로 무적이라고 방심했겠지!' '이 순간을 기다렸다?' '마교주 그대는 반드시 이곳에서 죽어야 하오?' 상위 세 문주들은 각자가 펼칠 수 있는 최고의 절기를 펼쳤다. 내공이 다한 이 순간만이 천여운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기 때문이다. -촤촤촤촤촤촤촤! 전의가 절정에 달한 그들의 도에 패도적인 기세가 일어났다. '엇?' 그런데 셋 중에 유일하게 천여운의 정면을 노리던 도염문주 노도경의 눈동자에 비치는 의아한 모습. 당연히 당황해할 줄 알았던 천여운의 입 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웃어?' 뭔가 이상했다. 절체절명의 위기일 텐데 대체 왜 웃는 것일까? 불길함을 감지한 노도경이 다른 둘에게 조심하라고 경고를 하려고 하는데, 천여운이 세 사람을 향해 말했다. "내공이 다하는 순간에 합공하면 나를 죽일 수 있을 것 같냐?" '아니. 이 자가 그걸 어떻게?' 세 사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때 당황해 하는 그들의 앞에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등골이 오싹해질 만큼 흉흉한 기운이 천여운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솨아아아아아아! 바로 그 순간 천여운의 왼손에 한기가 뿜어져 나오는 흑빙도(黑水刀)와 오른손에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흑염검(黑炎劍)이 형성되었다. 경악한 세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무형검!!?" 대부분의 내공을 소진했다고 믿은 천여운의 손에서 펼쳐진 것은 생사경의 고수만이 펼칠 수 있다는 전설의 무형검(無形劍)이었다. '아뿔싸, 우리를 속였단 말인가?' < 80장 천마재림 (4) > 끝 < 80장 천마재림 (5) > 도공문주 이욱의 판단은 정확했다. 아무리 생사경의 고수라고 한들, 인간의 껍데기를 하고 있 는 이상, 지닐 수 있는 내공에는 한계가 있다. 당연히 생사경의 고수라고 해도 내공을 전부 소진하면 약해 지는 것도 당연했다. 계획대로 진행되었다면 확실히 승기를 거둘 수 있는 방법이었다. 단지 그가 몰랐던 두 가지 사실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말도 안 되는 내공이다. 그렇게 탄강기를 난사하고도 내공이 이만큼이나 남았단 말인가?' 도공문주 이욱이 막연하게 추측한 생사경에 오른 고수의 내공 보유양은 전 단계인 현경의 경지와 비교할 수준이 아니었다. 내공의 보유량이 그 궤를 달리하기 때문이다. 천여운이 이기어탄검강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정확하게 이 각 정도였다. 물론 이것뿐이었다면 충분히 기회를 노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내공이 다하는 순간을 노린다면 나를 죽일 수 있을 것 같냐?" '이, 이놈이! 내공이 소진된 척 속였단 말인가?' 그것을 듣는 순간 절호의 계획이라며 이것을 짰던 도공문주 이욱은 자신이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어이 없게도 천여운은 내공이 다한 것처럼 속여, 일부러 공격을 유도한 것이었다. ’아니! 이런 상황을 이용하다니?’ '대, 대체 어찌된 놈이란 말인가?’ 설마 이런 상황에서 그들의 노림수마저 계산해서 속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들보다 훨씬 더 먼 곳을 바라본 셈이었다. 그저 무위만 강한 자보다 두려운 것이 지략마저 갖춘 자였다. 어쩌면 최근에 들어 대계가 번번이 실패하는 원인이 어쩌면 단 한사람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놈은 너무 위험하다!'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에 그들의 머릿속에 동시에 스쳐 지나간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것을 인지했다고 한들, 이미 검은 불꽃과 검은 냉기를 발산하는 진기의 무형검이 세 문주들을 덮치고 있었다. -화르르륵 -쩌저저적! 하필이면 허공에서 절초를 펼치는 바람에 중도에 피할 방도가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전설의 무형검과 대적해야만 했다. '큭! 별 수 없구나. 그렇다고 해도!' 위력 면에서 차이는 보일 수밖에 없겠지만, 자신들에게는 중원 모든 무공을 능가한다고 자부하는 극도신무(極刀神武)가 있었다. 오대고수인 무림맹주 이목조차 초식 대결에서는 밀려서 근접전을 피하지 않았던가. "하압!" 천여운의 발밑 쪽을 노린 도광문주 자운강은 극도신무의 절초 중의 하나인 회룡승천(回龍昇天)을 펼쳤다. 정면을 노린 도염문주 노도경이 극도신무의 제 일초식인 도극지정(刀極知情)을 펼쳤고, 그 뒤를 노린 도공문주 이욱은 극도신무의 제 오초식인 극쾌살도(極快殺刀)를 펼쳤다. -촤촤촤촤촤촤촥! "어, 엄청난 도초다!" "저런 도초들이 존재했다니?" 이를 지켜보는 무림인들 모두가 놀라움을 금치 못할 만큼 대단한 초식들이었다. 도로써 천하제일이라는 칭호를 얻은 극도신의 도법이다. 극도육무문 내에서도 극도신무의 정수를 제대로 익힌 자들은 수장인 도주와 상위 육문주뿐이었다. 그들의 손에서 펼쳐지는 초식의 위력은 여느 문주들이 펼치는 초식들과는 그 위력을 비교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설마 양손으로 다른 초식을 펼치는 것인가?' 절초를 펼치는 세 문주들의 두 눈이 커졌다. 놀랍게도 천여운의 왼손에 있는 흑빙도와 오른손의 흑염검이 전혀 다른 초식을 펼치고 있었다. 게다가 왼손의 흑빙도가 펼치는 초식은 그들이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다. "!?" 천여운의 손에서 펼쳐지는 극도신무의 초식은 제 이 초식, 도극제형(刀極制形)이다. 평생을 익혀온 무공인데 못 알아볼 리가 만무했다. '말도 안 돼?' '어, 어떻게 이놈이 극도신무를?'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외인(外人)인 마교주 천여운이 극도신무를 펼치니 말이다. 그것도 그들 이상으로 초식의 정밀하다. 놀라하는 세 사람에게 천여운이 펼치는 우검좌도의 초식이 쇄도해왔다. "큭!" -차차차차차차차창! 네 명의 절대고수들이 펼치는 절세초식들이 격렬하게 부딪쳤다. 이 순간만큼은 진성 내의 모두가 숨을 죽이고서 그들의 대결을 지켜보았다. 생사경의 고수 대 세 명의 현경의 고수. 어디서 값을 치르고도 볼 수 없는 초인들의 대결이 그들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이었다. 과연 승부는 어떻게 될까? '이, 이게 대체!' 그런데 네 사람의 초식이 부딪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극도육무문의 세 상위 문주들의 안색이 질려가고 있었다. 초식을 펼치는데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흑빙도에 초식을 부딪친 도광문주 자운강이 펼치는 도초가 궤적을 그리는 그대로 얼어붙는 것이 아닌가. -쩌저저적! '무슨 한기가 이리?' 초식이 휘두르는 방향으로 얼어붙을 만큼 지독한 한기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도공문주 이욱과 도염문주 노도경은 천여운이 휘두르는 검초의 궤적을 따라오는 엄청난 열기의 흑염(黑炎)에 탈 것만 같았다. '이게 정녕 검초란 말인가?' 도염문주 노도경 역시도 열양의 진기를 이용해 도초에 불꽃을 만들어냈는데, 이 흑염에 비하면 장난 수준에 불과했다. -채채채채채채챙! 비록 천여운의 함정에 빠지긴 했지만 세 명이나 되는 현경의 고수가 합공했기에 어느 정도 동등한 승부가 이뤄질 것이라 예측했던 세 상위 문주들이었다. 그러나 부딪친 결과는 생사경의 고수와 현경의 고수가 가진 간극을 확실하게 각인시켜주었다. 그들이 신형이 허공에서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전에 승부에 변화가 생겨났다. "피하게!" 도공문주 이욱이 다급한 목소리로 도광문주 자운강에게 외쳤다. 지독한 한기로 인해 자운강의 신형이 둔해진 틈을 타 어느새 천여운의 흑빙도가 그를 일도양단하려 들었다. "헛!" 당황한 자운강이 재빨리 신형을 왼쪽으로 뒤틀었지만 이미 늦었다. 천여운의 흑빙도가 그의 오른쪽 어깨를 파고들었다. -푹! "쿨럭!" 자운강의 입에서 선혈이 터져 나왔다. 한기가 어깨를 파고들자 베인 부위가 잘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부서지는 느낌을 받았다. 머릿속으로는 어떻게든 벗어나야 한다고 여겼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쩌저저저적! "끄아아아아아아악!" 도광문주 자운강의 입에서 찢어질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깨를 파고든 흑빙도가 어느새 그의 상반신을 시원하게 반으로 갈라버린 것이다. 반으로 갈라진 그가 힘을 잃고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파스스스슥! 놀라운 것은 바닥에 떨어진 자운강의 몸은 그새 얼어붙어서 바닥에 떨어지면서 얼음조각처럼 깨져버렸다. '크윽! 이놈은 정녕 인간이 아니란 말인가.' 도공문주 이욱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세 명이서도 균형이 맞지 않던 것이 한 명이 죽음으로 이탈했으니, 당연히 견딜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아래쪽이 비었군" -뭣?" -푸욱! 치이이이익! "으헉!" 도염문주의 노도경의 왼쪽 허벅지로 흑염검이 꽂혔다. 검이 꽂힌 곳에 검은 불꽃이 파고들면서 그 부위가 매캐한 연기와 함께 타들어갔다. '화기를 몰아낼 수가 없어.' 내공을 끌어올려 허벅지로 집중했지만 화기를 몰아내기는 커녕, 타들어가는 고통을 완화시키는 것이 한계였다. '무리다. 이 괴물은 우리가 상대할 수 없어. 오직 도주만이 이놈을 죽일 수 있다.' 타들어가는 고통에 도염문주 노도경은 어떤 식으로든 이곳에서는 절대로 마교주 천여운을 죽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겨루다 죽는 것은 개죽음이었다. 적어도 남은 전력만이라도 살려서 본문으로 보내야만 했다. 어차피 한 쪽 다리를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자신은 이곳을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번에 실패를 겪었으니 다음번에는 이런 우를 범하지 않겠지.' 도염문주 노도경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도공문주 이욱을 바라보았다. 세수가 일흔을 넘긴 그가 살아봐야 얼마나 살겠는가. 본문의 대계를 위해서라도 젊은 자들을 살리고 죽을 수 있다면 절대로 헛된 죽음은 아니라고 여겼다. 노도경이 도공문주 이욱을 향해 입을 벙긋거렸다. 허벅지를 찔린 바람에 당황해서 그를 보고 있던 이욱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도망가게?' 그가 희생을 자처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이욱이 안 된다고 외치려고 하는데, 노도경이 결의에 가득 찬 눈빛으로 천여운을 향해 몸을 던졌다. 마침 그들의 신형이 성내 바닥으로 떨어진 순간이었다. -쾅! 도염문주 노도경이 쥐고 있던 붉은 보도를 두 손으로 쥐고서 지면을 향해 내리찍었다. 그 순간 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패도적인 도세가 여덟 갈래로 갈라지면서 천여운을 향해서 쇄도했다. -촤촤촤촤촤촤촤촤! 극도신무 제 칠초식 팔선도경(八傕刀競)이다. 여덟 갈래로 뻗어나간 잔상이 일순간에 폭발적인 역량의 패도적인 도세를 만들어내며 천여운을 뒤덮었다. 워낙 가까이에서 벌어졌지만 천여운은 이 초식의 유일한 허점을 알고 있었다. '도초의 중심부.' 그곳을 공격하면 단숨에 초식이 파훼된다. 단순한 약점이었지만 이 패도적인 여덟 도세의 한 가운데를 파고들 만큼의 대담한 배짱을 가진 이들이 없었다. -슉! 천여운이 단숨에 여덟 갈래로 뻗어나가는 팔선도경의 패도적인 도세의 중심부를 향해 과감하게 흑염검을 찔러왔다. '역시 극도신무를 알고 있구나.' 그런 천여운의 대담한 일검에 노도경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초식을 잘 알지 않고는 팔선도경의 유일한 약점을 알 수가 없는데 정확하게 그 부위를 노려왔다. -푹! "크헉!" 천여운의 검이 절묘하게 중심부에 있는 노도경의 심장을 꿰 뚫었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심장이 꿰뚫렸으니 당연히 절명해야 할 노도경이 갑자기 그를 더욱 끌어당겨서 끌어안았다. -불끈불끈! 어느새 역혈대라신공을 펼쳤는지 노도경의 상반신이 찢어지고 근육이 부풀어 올랐다. 선혈을 토해내면서도 노도경은 있는 힘을 다해 천여운을 압박했다. "역시 예상대로 움직여줬구나!" 극도신무를 알고 있으니, 당연히 그 약점인 중심부로 뛰어들 줄 알고 있었다." 팔선도경은 다름 아닌 도염문주 노도경의 함정이었다. 애초에 죽음을 각오한 그는 그가 자신을 향해 근접하게 만들도록 유도한 것이다. 모험 삼아 초식을 펼치는 도중에 역혈대라신공을 펼쳤기에 흑염검이 완전히 그의 심장을 관통하지 않았다. 노도경이 사자후를 터뜨리듯이 성내가 떠나가라 소리쳤다. "산개해서 도망쳐랏!!!" 짧은 외침. 그것은 이 대결을 지켜보고 있던 모든 이들이 알아듣기에 충분했다. 살아남아있던 사파연맹, 창천회, 극도육무문의 마흔 명 채도 되지 않는 고수들이 일제히 뒤도 돌아보아보지 않고 진성의 사방으로 산개했다. "잡아랏!" "절대로 놓쳐선 안 된다." 당연히 이 외침을 같이 들은 마교인들이나 정도 무림맹의 고수들이 그들이 도주하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둘 리가 없었다. 성벽으로 오르려는 것을 가로막고서 탈출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천공섬광의 초식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삼 대 세력 내에서도 손을 꼽는 실력자들인 만큼 그 반항이 보통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놈들 팔이 잘렸는데도?" ”고통을 정말 못 느끼는 건가?” 창천회의 극무지체 시술자들은 몸이 베이든 말든 무조건 성벽을 기어올랐다. 이미 전쟁에서 졌기 때문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고자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숫자가 적다보니 제압될 수밖에 없었다. "앗!" 대호법 마라겸, 무쌍검 왕전이 동시에 동쪽 성벽으로 도주를 시도하는 도공문주 이욱을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를 제지하려는 순간에 역혈대라신공을 펼친 화경의 경지인 극도육무문의 문주들과 살아남은 문도들이 앞을 가로막는 바람에 막히고 말았다. "도공문주께 손을 대게 할 것 같으냐!" "우리를 뚫고 지나가야 가능할 것이다!" 아무리 오대고수에 명왕 마라겸이라 해도 역혈대라신공을 펼쳐서 공력이 폭증한 화경의 고수들을 단번에 제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죽을 각오로 덤벼, 단 한 사람을 탈출시키려 하고 있었다. '이런 저 자는 놓치면 안 되는데?' 그 사이에 도공문주 이욱은 이미 성벽을 뛰어넘고 있었다. 동료와 수하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만들어준 기회를 쉽게 져 버릴 남자가 아니었다. -울룩불룩! 상체 근육이 고왕흘보다도 훨씬 비대해져서 천여운을 껴안고서 움직이지 못하도록 제지하고 있는 도염문주 노도경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부들부들! "으으으으!" 역혈대라신공을 펼쳐서 근육이 인간의 한계치에 이르게 된 그였다. 당연히 힘으로는 일반적인 무인들의 범주를 훨씬 벗어났다고 자부하는데, 그의 양팔이 근육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이, 이게 대체 무슨 힘이란 말인가.' 말이 되지 않았다. 현경의 경지에 오른 자신이 펼친 역혈대라신공의 괴력을 순수한 완력으로 이겨내고 있었다. 내공이야 생사경의 경지에 올랐기에 당연히 능가한다고 치지만 이건 아니었다. 일개 인간이 어떻게 이런 완력마저 지닐 수 있단 말인가. '어차피 최대한 끌었다.' 다른 사람은 탈출하지 못하더라도 상위 문주인 도공문주 한 사람만 도주에 성공한다면 이 희생은 제 값을 치른 것이었다. -부들부들! 양팔의 근육이 찢겨나가서 피가 흘러내렸다. 더 이상 힘으로 묶어둘 수 있는데 한계가 있었다. "마교주, 이 괴물 같은 자여! 노부와 함께 저승으로 가자꾸나!" -파르르르! 투둑! 투둑! 노도경의 몸이 떨리면 전신의 핏줄이 울룩불룩 올라왔다. 역혈대라신공의 대법 중에 스스로의 내공을 폭주시켜 상대와 자폭하는 비술이 있다. 내공이 깊을수록 그 위력은 배로 커지는데, 현경의 경지인 데다가 역혈대라신공으로 폭증한 공력으로 인해 그 폭발은 누구도 버티지 못할 거라 확신했다. "아무리 네놈 같은 괴물이라고 해도 이번 만큼은 절대로 살아남지..." "다른 녀석들도 다 그렇게 말하더군." "뭐?" 바로 그 순간이 었다. -파치치치치치치치치치칙! "끄가가가가가가가가가!" 천여운의 몸에서 엄청난 전격이 일어나며 도염문주 노도경을 감전시켰다. 몸이 전격으로 경직되는 순간 천여운의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가면서, 그렇게 버텨왔던 노도경의 양팔이 찢겨져나갔다. -찌이이이익! "끄아아아아아악!" 양팔이 떨어져 나간 노도경이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다. * * * 동료와 수하들의 희생으로 진성을 벗어난 도공문주 이욱은 벌써 동쪽으로 삼 리(里) 가까이 멀어져 있었다. 전력을 다해서 도망쳤기 때문에 벌써 이 정도 거리에 도달한 것이었다. 그의 시야에서도 성이 주먹에 가려질 만큼 작게 변해 있었다. '크윽!' 도망가는 이욱의 눈빛은 수치심으로 가득했지만,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지금까지 알아낸 정보를 도주에게 전달하고 새로운 대계를 짜야만 했다. -으득! 얼마나 분했는지 갈고 있는 이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이번 일로 확실해졌다. 그들이 반드시 제거해야 할 적이 말이다. 마교주 천여운을 죽이지 않는다면 모든 대계가 수포로 돌아 가게 될 것이다. '지금의 승리를 즐겨라. 마교주여. 네놈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가진 것이 많은 자는 약점이 많은 법이다.' 직접 겨루지 않더라도 그를 압박할 방법은 넘친다. 가령 그의 소중한 존재들을 전부 납치한다면, 아무리 냉정한 인간이라고 할지라도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고개조차 돌리지 못하고, 미친 듯이 도망가지만 그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본좌가 다시 돌아온다면 마교주 네놈과 마교는 무림에서 사라…' -푹! "크헉" 가슴에서 느껴지는 화끈한 고통에 도공문주 이욱이 흔들리는 눈으로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치이이이! 타는 소리와 함께 흘러나오는 매캐한 연기. 놀랍게도 흑색 불꽃의 검이 그의 가슴 한복판을 관통하고 있었다. "이, 이건....." 마교주 천여운이 펼치는 무형검인 흑염검이었다. 도공문주 이욱이 어이가 없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돌려서 진성을 바라보았다. 거의 손가락 마디만큼 작아져 있는 성이었다.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이 거리를.....?' 삼 리를 훌쩍 넘긴 거리였다. 날려 보낸 건 둘째 치고 이 엄청난 거리에서 정확하게 맞춘 것이었다. 그 말은 단순히 투창 식으로 무형검을 던진 것이 아니라 이기어술을 펼쳤다는 말인데, "이.....이기어무형검이라고? 하! 마교주.....네 놈은...정녕 인간이....쿨럭!" 안색이 하얗게 질린 도공문주 이욱이 피를 한 움큼 토해내더니, 이내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 80장 천마재림 (5) > 끝 < 81장 오대고수 등극 (1) > 진성에서 오 리(里) 정도 떨어진 비형산 정운봉의 꼭대기. 산봉우리의 정상에 몇 그루의 나무가 있다. 그 중 가장 높게 자란 소나무의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 발끝 하나로만 서서 버티는 기행을 보이는 자가 있었다. 검은 장포에 죽립을 쓰고 있는 정체불명의 사내였다. 그는 아슬아슬하게 나뭇가지 위에 서서, 반 시진 전부터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는데 한 번도 시선을 떼지 않고 집중하고 있었다. 그곳은 바로 진성이 있는 방향이다. '너무 떨어져서 잘 보이지 않을 텐데.' 그런 사내를 의아하게 눈빛으로 바라보는 자가 있었다. 죽립인이 있는 소나무 바로 밑에 서서 얼굴을 붕대로 감고있는 사내였다. 굳이 소나무에 올라가지 않더라도 정운봉의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광활한 세상이 펼쳐졌다, 다만 모든 것이 작게 보여서 사람이 티끌처럼 보였다. '정말 진성이 보이시는 건가?' 죽립인에 대한 믿음은 강했지만 아무리 안력을 집중해 봐도 잘 보이지 않는다. 오 리나 떨어졌는데 진성이 보이는 것이 이상했다. 그런데 한 번도 시선이 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정말로 관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언제까지 그것이 이어질까 하는 찰나였다. -쾅! '헛?' 커다란 소나무가 반으로 쪼개지며 죽립의 사내가 밑으로 내려왔다. 그냥 내려온 것도 아니고 소나무를 박살낸 것을 보면 심기가 굉장히 불편해보였다. '도, 도주" 놀랍게도 죽립인의 정체는 바로 극도육무문의 수장인 도주(刀主)였다. 그가 직접 통허현의 근경까지 와서 이 모든 전황을 살펴보고 있었던 것이다. 당황해하는 붕대의 사내에게 도주가 입을 열었다. "돌아간다." 철수의 의사를 밝히자 붕대의 사내의 눈빛에 의아함이 묻어났다. 대계가 원래 계획대로 진행되었다면 절대로 이런 반응을 보일 리가 없었다. "도주. 혹시 대계에 차질이라도 빚어진 것이라면 도살대나 도섬대를 투입하는 편이 어떨지?" "......이미 패한 곳이다. 누굴 보내도 되돌릴 수 없다." "패, 패하다뇨?" 붕대의 사내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햇다. 이번 대계는 극도육무문에서도 오랜 세월 동안 공을 들인 작전이었다. 황궁 태자 간택부터 시작해 중원 무림을 삼분하는 삼대 세력에 간자를 심는 것까지 전부 이 대계를 위한 밑작업이었다. "허어.....어찌 이런 일이...." 이를 실패했다면 당연히 도주의 분노가 말로 이를 수가 없을 것이다. 죽립인의 등이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두려움으로 망연자실해 하는 붕대의 사내에게 도주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관없다. 그에 상응할 만한 것을 얻었으니." 그 말에 붕대의 사내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당연히 분노를 토해낼 거라 여겼던 것과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오히려 목소리가 상당히 고양되어 있었다. 의아해하는 붕대의 사내에게 도주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드디어 놈을 찾았으니까." "놈이라면?" "마신!" 죽립 사이로 보이는 도주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 * * 신시(申時) 초, 병장기들이 부딪치고 비명들로 가득하던 진성의 소음이 한결 가라앉았다. 전쟁으로 초토화된 진성의 내부는 피비린내로 코끝이 진동했다. 성내 바닥에 널브러진 수많은 시신들로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곳에서 사망한 고수들의 숫자만 족히 육백 명에 이를 정도였고, 부상자는 약 천 명에 이를 정도로 십 년 만에 벌어진 정사마(正邪魇) 전체가 연루된 최고 규모의 전장이라 할 수 있었다. 전장의 승자는 마교와 정도 무림맹 연합 측이었다. 사파 연맹에서 참석한 수로채의 채주들과 수적들은 전부 사망하고 오직 단 한 명만 살아남았는데, 황하패주 갈모잠이 포로로 불잡혔다. "크윽! 죽여라! 죽이란 말이다." "원시천존. 원시천존. 어찌 이곳에서 그대를 죽일 수 있겠소이까. 그 동안 악행에 대하여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오." 수하들이 전부 죽었기에 자결을 시도하려 했지만 정도 무림맹에서도 황하를 누비며 수적질을 해온 이 거물을 오랫동안 노려왔기에 죽지 못하게 금제하여 생포했다. 사파연맹과 달리 극도육무문 측의 전장 결과는 다소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마교 측에서 손속에 정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지독한 놈들이군." "한 사람도 남김없이 금제를 한 건가." 고왕흘과 백기를 비롯한 육검들이 여러 구의 시신들을 보며 치를 떨었다. 그들이 바라보는 시신들은 하나 같이 머리가 터져서 죽은 자들이었는데, 그들은 극도육무문의 문도들이었다. 대부분의 극도육무문의 문도들이 전장에서 죽었지만, 마교인들은 그들 중에 문도 여덟 명과 문주 한 명을 생포하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혈도를 점해서 기절시킨 그들이 갑자기 동시에 머리가 터져서 죽어버렸다. 머릿속에 심어져있던 고(螂)가 발동한 것이다. '철저한 자들이구나.' 이 점은 경험이 많은 대호법 마라겸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지금까지 극도육무문의 행태를 본다면 누구를 막론하고 고를 심어두어서 정보가 탈취되는 것을 막았다. 어째서 이들은 이렇게까지 정보가 탈취되는 것을 두려워할까? '하지만 그대들도 이건 예상하지 못했겠지.' 마라겸의 가면 틈새로 보이는 두 눈이 누군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치치직! 아직까지 몸에서 미묘한 전격이 흐르는 민둥머리에 눈썹조차 타서 없어진 노인이 있었다. 노인의 몰골은 참으로 끔찍했다. 양팔이 전부 뜯겨져 나가 있었고, 인중과 입가에는 찐득거리는 검은 핏물이 흘러내렸는지 말라붙어 있었다. 그는 도염문주 노도경이었다. "이....이 괴물 같은 놈....."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넋을 놓고 있는 노도경은 연신 같은 말만을 중얼거렸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모두가 고가 발동해서 터져 죽으려고 할 때, 천여운이 그의 머릿속에 있는 고를 제거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말라있는 검은 피가 그 증거였다. '당대 교주님의 능력은 대체 어디까지일까?' 늘 느끼는 것이지만 천여운은 그가 모셔왔던 여느 태상교주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두 번째 천마인 그의 대에서 그동안 천마신교의 모든 비원들이 이뤄질 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고양되었다. 한편 마교와 무림맹 측에서는 마지막 한 가지 사안으로 마찰을 빚고 있었다. 그것은 살아남은 창천회의 간부인 천주 남궁경 때문이었다. 허봉에게서 팔이 잘린 남궁경은 죽을 각오를 하고서 도주를 시도했다. 그것을 공교롭게도 무림맹의 웅주들인 모용세가주 모용강과 개방 방주 홍팔우가 성벽을 뛰어 넘는 것을 잡아냈다. "본 맹에서 잡은 포로이외다. 동맹 간에도 서로 법도라는 것이 있는데, 어찌 본 맹 측의 포로를 넘기라고 강요하는 것이오?" 무림맹 측은 천주 남궁경을 넘기지 않으려고 했다. 그들로서도 당연한 일일수도 있었다. 남궁경은 무림맹 내에서도 숨겨진 세력인 창천회의 간부인 데다, 이번 전장에 극무지체라는 시술에 대한 비밀을 쥐고 있는 존재였다. '이 자를 넘기면 정파 내의 치부가드러나.' '게다가 마교에 넘기게 된다면 그 위험한 기술을 알아내서 악용할 확률이 높아진다. 그것만은 막아야 해.' '.......그런 기술은 정파를 위해서 쓰여야 한다.' 다른 창천회에 가입한 수장들은 전장에서 전부 죽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그를 이 자리에서 적이라고 규정하고서 죽이는 것이라면 반박할 여지가 없겠지만 그를 포로로 넘길 수 는 없었다. "그쪽에서 잡았다고요?" "그렇소이다."' 홍팔우가 얼굴에 철면피를 깔고 말했다. 그들에게 남궁경의 신변은 인수받으려고 하던 허봉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부상입고서 도망가는 자를 붙잡고서 한다는 소리가 우스웠다. "저기요. 남궁 가주님. 제 검에 팔이 베이고서 도망치지 않았나요?" 허봉이 웅주들의 뒤에 서서 밧줄에 묶여서 억류되어 있는 남궁경에게 물었다. 이에 남궁경이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서 잡아뗐다. "그런 일은 없소." "이야! 팔이 베인 곳이 타들어갔을 텐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요? 이것 참 염치가 없으시네요." 허봉이 서서히 짜증이 올랐는지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동맹만 아니라면 곧바로 출수하고 싶은 심정이었는지 손이 근질거렸다. "본 가주는 모용가주와 홍 방주와 자웅을 겨루다가 잡혔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대놓고 시치미를 떼는 것이 처음이었는지 남궁경의 태도가 어색했다. 하지만 남궁경 역시도 이런 식으로 우길 수밖에 없었다. '절대로 저들의 손에 갈 수는 없다.' 마교측에 신변이 넘어가게 된다면 죽는 것은 불 보듯이 뻔했고, 창천회에 대한 정보를 캐기 위해서 죽을 때까지 고문을 당할 것이다. "아직도 못 받은 것이냐?" "교주님." 그렇게 난처해하고 있을 때, 포로로 잡은 도염문주 노도경을 살피고 있던 천여운이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허봉을 상대할 때와 달리 마교주인 천여운이 직접 다가오자, 웅주들의 눈빛이 긴장감으로 물들었다. '마 마교주라고 해도 넘겨선 안 된다.' '위압감이 보통이 아니구나.' 그의 괴물 같은 신위를 두 눈으로 직접 보았기에 내심 두렵기는했지만, 남궁경을 이대로 넘기게 되면 그들이 감당해야할 손해가 너무 컸다. '맹주?' 개방 방주 홍팔우가 무림맹주 이목을 힐끔 쳐다보며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저쪽도 수장이 나섰으니, 이쪽도 수장이 나서서 대화를 나누는 편이 그림이 맞기도 했다. '흐음.' 망설이는 맹주 이목의 귀로 남궁경의 전음이 들려왔다. [맹주! 본 가주의 신변이 넘어가게 된다면, 극무지체의 시술법과 정파 내에 있는 창천회의 비밀까지 전부 저들의 손에 들어 가는데....그리 된다면 본맹뿐만이 아니라 정파가 위기에 처할수 도 있는데 정녕 괜찮단 말이오?] 웅주들이 이렇게까지 나서서 그를 보호하는 것은 이러한 남궁경의 필사적인 전음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와중에 그의 전음을 듣게 되자, 맹주 이목은 마음의 결정을 내려야 했다. '남궁 가주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창천회의 정보가 넘어가는 것보다도 육신에 통증을 느끼지 않던 시술자들에 대한 정보가 마교 측에 들어가는 것이 더욱 위험하게 느껴졌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전쟁으로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해진 마교를 확인했다. '여기서 더욱 힘이 실린다면 삼대 세력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질지도 모른다.' 고심하던 맹주 이목은 결국 그들을 돕기로 했다. 남궁경의 신변을 넘기지 않기로 말이다. -팍! 결정을 내린 맹주 이목이 웅주들의 앞으로 나서더니, 천여운을 향해 가볍게 포권을 취하며 정기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천 교주. 이번 일은 귀교에서 양해해줄 수 없겠소?" "양해?" "귀교의 부관이 남궁 가주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해도, 분명 마지막에는 본 맹의 웅주 두 분이 도주하는 그를 붙잡지 않았소. 이 점을 감안한다면 그의 신변은 본 맹에서 데려가야 한다는 것은 그대도 부정할 수 없지.." "후우.” 이목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천여운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이내 손을 내밀어 끌어당기는 시늉을 했다. -우우웅! "헉! 모, 몸이?' 그러자 웅주들의 뒤편에 숨어있던 남궁경의 신형이 허공으로 부웅하고 떠오르더니, 강제로 천여운이 있는 방향으로 날아 오려고 했다. 이를 맹주 이목이 억지로 옷을 붙잡아 땅으로 끄집어 내렸다. -팍! "아니. 이게 무슨 짓인가!" 갑작스러운 그의 돌발 행동에 화가 난 이목이 인상을 쓰고서 물었다. 그러자 천여운이 더욱 강한 진기로 그를 끌어당겼다. -우우웅! '무슨 내공이?' 전율스러울 정도의 내공이었다. 졸지에 무림 양대 세력의 수장인 무림맹주와 마교주의 내력 대결 사이에 끼인 꼴이 된 남궁경이 하얗게 질려서 소리쳤다. "매, 맹주! 절대로 놓으면 안 되오!” 그러나 이목이 그를 억지로 붙들려고 해도 내공에서 격차가 심했다.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결국 잡고 있던 옷이 찢겨져 나가며 남궁경의 몸이 이내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찌이이이익! "매, 맹주우우우우우!" "이런!" -휘이이익! 콱! "헉!" 그렇게 날아간 남궁경의 몸이 천여운의 손에 빨려 들어왔다. 천여운의 손아귀에 머리통이 붙잡힌 남궁경은 사색이 되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남궁 가주!” 천여운이 당황해 하는 무림맹주 이목과 무림맹의 웅주들을 쳐다보며 특유의 냉소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마지막에 붙잡은 자의 것이라고 했으니, 이제 이 자의 신변은 내 것인가?" < 81장 오대고수 등극 (1) > 끝 < 81장 오대고수 등극 (2) >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고 했던가. '이런.....' 맹주 이목을 비롯한 정도 무림맹의 웅주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천여운의 손에 붙잡혀 있는 남궁경을 보면서 그들 중에 누구도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자신들의 억지 논리를 영리하게 받아친 셈이었으니 말이다. "그럼 이 자는 내가 데려가겠다." -꽈악! 아무도 반박을 하지 못하자, 천여운은 머리통을 움켜잡고 있던 남궁경의 신변을 뒤에 있던 교인들에게 넘기려 했다. 사색이 된 남궁경이 맹주 이목을 바라보며 악을 쓰며 소리쳤다. "매, 맹주! 이렇게 보고만 있을 참이오! 본 가주가 넘어가면..." "시끄럽군." -타타타타탁! "흡! 읍읍읍!"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천여운이 혈도를 제압했다. 혈도가 제압되어 내공마저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전음조차 보낼 수 없는 남궁경은 미친 듯이 신음성만 토해냈다. 보다 못한 화산파의 장문인 풍청운이 나서서 말했다. "원시천존. 원시천존. 천 교주. 동맹의 예우가 있는데, 부디 남궁 가주를 본 맹에 넘겨줄 수 없겠소이까? 그 역시도 엄밀히 본 맹의 수뇌부요." 풍천운은 이곳에 있는 웅주들 중에 유일하게 천여운과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나름 교분이 있다고 생각한 그도 웬만하면 나서지 않으려고 했지만, 마교 측에 남궁경을 넘기는 것은 다소 위태롭다고 여겼다. 그런 풍청운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천여운은 남궁경을 그대로 넘겼다. 당황한 풍청운이 그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정녕 이럴 것이오?" 이에 천여운이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말했다. "풍 장문인. 그대라면 목숨을 노린 적을 놓아줄 수 있겠소?" "그, 그건....." 창천회에 소속된 정도 무림맹의 수장들과 창천회의 간부인 천주 남궁경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천여운과 마교인을 공격해왔다. 풍청운이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자, 천여운이 웅주들을 바라보며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동맹의 예우니 듣기 좋은 소리는 전부 빼고 말하지. 남궁 가주가 동료라고 보호하려 드는 것이냐? 아니면!" -우웅! 천여운이 손을 뻗자, 진성에 널브러진 시신들 중에 하나가 날아왔다. 머리가 잘려있는 시술자의 시신이었다. 통각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단전이 파괴되거나, 머리가 잘려야만 전투력을 상실하는 탈 인간적인 존재들이다. "이 기술이 본 교에 들어갈 까봐 두려운 것이냐?" "그, 그건...." "처음부터 남궁 가주를 보호하고 싶었다면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 그를 설득해서 동맹을 굳건히 했어야 하지 않나?" "........." 정곡을 찌르는 말에 웅주들은 어떠한 반박도 할 수가 없었다. 천여운의 말대로 내부를 좀먹고 있는 강경파라 할 수 있는 남궁경을 보호하려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극무지체의 시술법. 고통도 두려움도 느끼지 못하는 탈 인간으로 이루어진 병단을 만들 수 있는 이 시술법을 마교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물론 덤으로 그것을 정파에서 쓰일 수 있다면 이보다 금상 첨화는 없었다. 모두가 입을 다물고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할 때, 맹주 이목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천 교주. 솔직히 말하겠소. 진성 내에 있는 모든 영웅분들 께서 보았겠지만 그 기술은 너무 위험하오. 그대의 말대로 본 맹에서는 그 기술이 귀교에 들어가 악용되는 것을 염려하고 있소." 정도의 수장답게 맹주 이목은 서슴없이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솔직하게 밝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그런 악용될 문제가 있기에 마교 측에서 천주 남궁경을 데려가는 것은 그런 의도가 아니냐고 추궁하는 것이었다. '아!' 맹주 이목의 의도를 알아차린 제갈세가주 제갈용과 개방의 방주 홍팔우가 속으로 좋은 방법이라 여겼다. 확실히 이런 식으로 대놓고 말한다면 마교주가 데려갈 수 있는 명분을 없앨 수 있었다. 영악한 제갈용이 이를 돕기 위해 거들었다. "그렇소. 맹주님의 말대로 본 맹에서는 그런 악용을 우려하는 것이오. 천 교주가 정말로 그런 의도가 없다면 무림의 은원대로 오히려 남궁 가주를 처단해야 맞지. 포로로 데려가는 것은 본 맹으로서는 의심할 여지가 충분하지 않소?" '오오오!' 맹주의 추궁에 더해서 화룡점정을 찍는 제갈용의 말에 이를 지켜보던 웅주들과 각 파의 수장들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로써 마교주 천여운은 천주 남궁경을 데려갈 명분을 잃었다. 여기서 포로로 데려가겠다고 억지를 부린다면 그런 의도가 있다고 자백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마교주 이번만큼은 그대라도 양보해야 할 것이오.' '중원 무림의 영웅들이 모인 이 자리에서 스스로 악의를 가졌음을 밝힐 수 있을까?' 무엇을 택하든 무림맹에는 득이었다. 남궁경을 포기하면 그들이 이 극무지체의 시술법을 얻게 되는 것이고, 그를 억지로 데려가려 한다면 마교에서 위험한 기술을 악용하려 한다고 더욱 밀어붙일 수 있다. 고민이 될 거라 여겼다. 잠시 말이 없던 천여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역시 그대라고 해도 답이 없겠지.' 그 모습에 제갈용은 자신의 계획이 먹혔음을 확신하고 입술을 실룩였다. 그때 천여운이 그런 그에게 말했다. "그 말에 일리가 있군." 뜻밖에도 완전히 인정하는 말에 천여운의 주변에 있던 육검들조차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명분 때문에 남궁경을 포기하려는 모양이었다. '됐다?' 천여운이 한 발 물러서서 양보한다고 여긴 제갈용은 더는 무례하게 밀어붙이면 그의 심기가 불편해질 거라 여겨 부드럽게 말했다. "역시 천 교주께서는 천하의 영웅답소. 본 맹에서도 천 교주께서 그런 악의를 가지지 않았음을 알고 있소이다." 일부러 그를 치켜세워 주었다. 괜히 심기가 뒤틀려서 그가 무력을 들고 나오면 이 자리에서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서 무림맹의 수장들에게 일러서 남궁경을 인수받으라고 하려 했다. "자청 문주. 남궁 가주를 데려와 줄 수...." "잠깐." "......왜 그러는 것인지?" 갑자기 천여운이 그것을 제지하자 불안해진 제갈용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나 그 짧은 새에 마음이 바뀔 리는 없었지만 생사경의 고수라는 압도적인 무력이 괜히 떨리게 만들었다. "이건 확실히 해두지." "무엇을 말이오?" "창천회에 아직 한 명의 간부와 그들의 수장인 회주가 있다." "그것이야 그때 천 교주께서 본 맹에 정보를 보내주지 않았소이까?" 천여운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창천회의 간부들에 대한 정보를 보내주었다. 이를 바탕으로 정도 무림맹에서는 이번 조약식이 있기 전까지 창천회에 가입한 문파들을 추적하여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유독 그 두 사람만은 찾을 수가 없었다. 창천회의 흑막인 회주와 남은 단 한 사람의 간부 양주(陽主). 하지만 천주인 남궁경이 유일하게 회주를 알고 있다고 했으니, 이번 기회를 통해서 알아낼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들을 꼭 잡아라." '아!' 천여운의 그 말에 괜한 우려임을 깨달은 제갈용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래도 확실히 마교에서 탄생한 새로운 영웅답게 훌륭한 배포를 가진 듯 했다. 제갈용이 굳은 결의가 담긴 목소리로 답했다. "당연하오! 천 교주가 본 맹을 믿어줬으니 당연히 그리해야 하지 않겠소. 믿어주시오." "다행이군. 만약에 그들을 잡지 못하고 무림맹이 휘둘린다거나 본 교에 위협을 가하게 된다면 절대로 용서치 않겠다." "!?" 방금 전까지 훈훈한 분위기로 마무리 되려나 싶었던 제갈용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뭔가 부탁이라기보다는 위협, 혹은 협박에 가까운 말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이던 제갈용은 특별히 악의를 담고 한 말이 아니라고 판단했기에 답변했다. "크흠흠. 알겠소이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것이오." "좋다. 그럼 데려가라." 그 말에 제갈용이 찝찝한 얼굴로 오도문의 자청문주에게 부탁했다. "그를 데려와주시오. 자청 문주." "아, 알겠습니다. 십삼웅주." 그렇게 자청 문주가 눈치를 보면서 혈도가 점해진 남궁경을 데리러가려 하는데, -푹! "크흡?" -주르륵! 남궁경의 부롭뜬 두 눈에 진한 피가 흘러내려 시야를 붉게 가렸다. 놀랍게도 그의 넓은 이마가 검기로 꿰뚫리고 만 것이었다. -부들부들! 몸을 심하게 떨던 남궁경의 고개가 이윽고 밑으로 내려갔다. '!!!'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져서 죽은 남궁경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워낙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제갈용을 비롯한 무림맹의 웅주들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 이게 무슨 짓이오! 남궁 가주를 넘겨주기로 하지 않았소!" 제갈용이 얼굴이 빨같게 상기되어 소리쳤다. 방금 전까지 포로를 넘긴다고 협의까지 해놓고 죽이다니 이건 아니었다. 이에 천여운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살려서 준다고 애기한 기억은 없는데." "뭐, 뭐요?" 어찌나 당당하게 말하는지 제갈용이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역시!' 허봉과 육검들의 입 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주군인 천여운이 절대로 자신의 손에 들어온 것을 곱게 넘겨줄 리가 만무했다. 반면 맹주 이목은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강하게 항의했다. "천 교주. 지금 농을 할 상황이 아니지 않소. 지금 이것은 본 맹을 능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요." "능욕?" "그러지 않고서 넘겨주기로 한 남궁 가주를 어찌 죽일 수 있단 말이오!" 이목이 손가락으로 숨을 거둔 남궁경을 가리켰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 온갖 수를 강구하던 자의 죽음치고 허무했다. 천여운이 노기가 가득한 맹주 이목을 향해 말했다. "귀 맹의 제갈웅주가 말한 대로 했는데 어째서 항의를 하는 것이지?" "그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포로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무림의 은원대로 남궁 가주를 처단해야 맞다고 하지 않았나?" '뭣!?' 그 말과 함께 천여운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제갈용을 바라보았다. 제갈용은 그런 천여운의 말에 어이가 없어했다. 분명 그의 입으로 그런 말을 했지만 그것은 천여운을 명분적으로 압박하기 위해서 했던 소리였다. 그런데 그 말을 빌미삼아 남궁 가주를 죽였다는 말이 아닌가. "아, 아니. 천 교주. 아까 전에 했던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니지..." -고오오오오! "헛!" 갑작스럽게 발산되는 강렬한 살기에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정도 무림맹의 사람들이 일순간 경직되고 말았다. 칼날을 목에 대는 듯한 살기에 마치 사선에 서있는 느낌마저 받았다. 제갈용이 식은땀을 흘리며 입술을 뗐다. "명....왕!" 살기를 내뿜고 있는 자는 천여운의 왼쪽에 서있는 독특한 문양의 가면을 쓰고 있는 대호법 마라겸이었다. 명성에 걸맞을 만큼 죽음을 몰고 올 것만 같은 사내였다. 마라겸이 살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제갈 가주. 지금 그대의 눈앞에 있는 분이 누구라고 생각하 는 것이오?" "어찌 이런...." "설마 본교의 교주님을 상대로 허언이라도 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오? 그런 것이라면 본인이 용서치 않을 것이외다!" 마라겸에게서 느껴지는 살기는 언제라도 출수할 기세였다. 현경의 고수가 내뿜는 살기에 질려버린 제갈용은 어떠한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웅성웅성! '아! 언제?’ 어느새 주변에는 마교의 수많은 교인들이 모여들어 둘러싸고 있었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마치 자신들의 교주를 모욕한 것이나고 항의를 하는 듯한 눈빛이다. 천여운이 당혹스러워하는 무림맹의 웅주들에게 비웃음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그대들도 내부에 처리해야 할 적이었다면 시신으로 넘겨받아도 상관없지 않나? 그대들이 그렇게 우려하는 창천회의 시술이 무림맹 내부에서 악용될 일도 없고 말이야.” ’아닛? 차, 창천회의 시술을 노리는게 아니었단 말인가?’ 그 말에 웅주들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당연히 시술법은 필요없었다. 그들은 모르겠지만 이 개량된 시술법을 개발한 신의가 마교에 있으니 말이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마교에 창천회의 시술법을 빼앗기지 않았다고 쾌재를 불렀는데, 상황이 완전히 반전이 되어버렸다. '하! 어쩌다 이렇게.....' 제갈용은 그제야 자신이 꾀를 부리다가 당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처음부터 마교주 천여운은 시술법을 노린 것이 아니었다. '큭! 그들을 잡지 못하고 휘둘리거나 마교에 위협을 가하게 된다면 용서치 않겠다는 것이 이런 의미였나.’ 마교주 천여운의 진정한 목적은 창천회의 배후에 있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되려 잔머리를 굴린 덕분에 남궁경을 잃은 것도 모자라, 무림맹은 아무런 정보도 없이 창천회의 회주와 간부를 찾아야 하는 상황을 맞이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마교에서 그들을 간섭하거나, 침공할 좋은 명분까지 쥐어 준 셈이었다. '....당했다!’ -으득! 분을 이기지 못한 제갈용이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으으으! 마교주우우우!!!' 무력으로 어찌 할 수 없다고 잔머리를 굴린 것이 어리석은 실책이 되어버렸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결과였다. 덕분에 제갈용뿐만이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정파의 수장들은 뚜렷하게 각인할 수 있었다. '이것이.....당금의 마교주인가.' 그 행보에 거침이 없었다. 기존에 그들이 알고 있던 마교와는 완전히 달라졌음을 받아 들여야 했다. < 81장 오대고수 등극 (2) > 끝 < 81장 오대고수 등극 (3) > 기호지세(騎虎之勢)라고 했던가. 마교주 천여운을 비롯해 마교 측의 기세는 범람하는 파도와도 같아, 지금의 무림맹이 어찌 막을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섰다. '아아아. 어쩔 도리가 없구나.' 맹주 이목은 내심 깊은 탄식을 해야만 했다. 웅주들을 포함해 기껏 해봐야 백 명 남짓도 되지 않는 정도 무림맹 측과는 다르게 마교인들은 전쟁이 끝나고도 천 명을 훌쩍 넘긴 전력을 보존하고 있었다.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일인군단을 넘어서 재앙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마교주 천여운 혼자만 하더라도 감당할 수 없었다. 결론은 여기서 그들이 무슨 수를 쓰더라도 현 마교를 제재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아.....' 절로 한숨만 나왔다. 맹주 이목은 조약식을 위해 통허현의 진성에 첫 발을 내딛으며 생각했었다. 이 날을 계기로 무림의 정세가 바뀔 거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당분간은 천 교주의 시대로구나.' 이 자리는 천여운이라는 절대적인 존재를 각인시키는 자리가 되어버렸다. 이제는 전 무림인들이 그의 위용을 알게 될 것이다. 마교인들에게 둘러싸여서 모두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상황 속에 무림맹주 이목이 입을 열었다. "그만!" '맹주?'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자, 맹주 이목이 다시 말을 이었다. "천 교주. 본 맹 역시도 시술법을 악용할 생각은 단연코 없었소이다. 교주가 그런 우려에서 남궁 가주와의 은원을 해결했다고 했으니, 본 맹에서는 그대를 더 이상 책망하지 않겠소." '아아.....' '어찌 그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는 맹주의 말에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양보의 느낌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이것은 마교주라는 압도적인 힘에 오대고수의 일인이자 정파의 정점에 서있는 사내가 무릎을 꿇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여러 영웅분들께는 미안하외다.' 맹주 이목이 실망을 금치 못하는 각 파의 수장들을 바라보며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지금까지 보여준 마교주 천여운의 행로라면 이 이상 마찰을 빚게 되면 어떤 식으로 나올지 알 수 없었다. '맹주. 그대의 뜻을 잘 알았소이다. 원시천존. 원시천존.' 물론 모두가 실망하는 것은 아니었다. 화산의 장문인인 풍청운이나 개방의 방주인 홍팔우는 그의 판단이 옳다고 여겼다. 굴욕적이기는 했지만 지금은 와신상담(臥薪普膽)을 해야만 했다. '월왕 구천도 쓸개를 씹어가며 참았다고 했는데, 이까짓 자존심 싸움이 무엇이 문제겠소이까.' 그들의 위로의 눈빛을 보내며 무거운 맹주 이목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덜게 해주었다. 이목이 다시 천여운에게 포권을 하며 부탁했다. -팍! "천 교주. 남궁 가주의 건으로 심기가 불편해졌다면 본 맹주가 대표로 사과하는 바이오. 그러니 이제 교인들을 물러주시고 향후의 일을 논의하는 것이 어떻겠소." 두 손을 모으고서 자세를 유지하는 맹주 이목. 이를 담담하게 바라보던 천여운이 이내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주위를 포진하고 있던 마교인들이 신속히 진형을 풀고서 물러났다. -우르르르 "하아…." 이를 보면서 긴장으로 식은땀을 흘려대던 각 파의 수장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더 상황이 악화되었다면, 새로운 전장이 이어졌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순간이었다. '충분히 압박을 가했으니, 이 정도 선에서 멈추는 것이 맞겠지.' 사실 천여운도 더 이상 그들을 밀어붙일 계획은 없었다.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기는 했지만 극도육무문을 완전히 처리한 것도 아니었고, 사파 연맹 역시도 그 전력이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기에 당장에는 정도 무림맹과의 동맹을 깨뜨릴 필요는 없었다. 아직은 시기상조(時機尙早)였다. '조금만 더.....유지하자.' 천여운의 입 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 * * 대명제국의 수도 개봉 건안궁 대전. 옥좌에는 황제가 근엄하게 앉아 있었고, 그보다 조금 아래 단에는 이번 단오제를 기점으로 새로운 황태자의 위에 오른 성왕 주태경이 앉아있었다. 겉으로 크게 내색을 하지 않고 있었지만, 황릉 사건의 기폭제가 되어 끝내 태자의 자리를 차지한 그는 내심 하늘을 날아오를 듯 했다. 하지만 당장에 그 기쁨을 표현하기에는 대전이 분위기가 무거웠다. 이는 한 가지 사건에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었다. 단의 아래에 있는 대전 한 가운데에는 금의위의 북진무사 영조와 서창의 첩형 자형인이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성인 남성의 주먹 두 개만한 둥근 형태의 쇳덩어리가 있었는데, 작은 구멍에 심지가 달린 이것은 노격진천뢰였다. 불과 한 시진 전에 이것을 보게 된 황제를 비롯한 대전 내에 있는 관료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찌 군(軍)에서 다룰 화약 병기를 일개 무림의 집단에서 가지고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이 노격진천뢰는 기존의 것보다도 훨씬 성능이 강해 보였다. 불가침 조약과 별개로 폭약은 워낙 위험한 살상무기이기에 대명제국의 법으로 금지한 물건이었다. 이것을 소유했다는 것도 문제였는데, 그도 모자라 이것을 진성의 지하에 깔아두었다는 보고를 듣게 된 황제는 진노하고 말았다. [짐을 대신하여 태자와 관료들을 보낼 자리에 그런 대역무도한 음모를 꾸였단 말이느냐! 진정한 역도의 무리들이로다. 그저 지켜볼 수가 없구나! 여봐라!] 황제는 당장 극도육무문 세력들의 토벌을 명했다. 원래는 마교주 천여운이 해결하겠다고 미리 알렸지만 그냥 좌시하기에는 극도육무문은 선을 지나쳤다. 금의위 지휘사 백자기와 남진무사 연남군이 금의위의 절반인 이천 명과 병사 만 명을 이끌고 통허현의 진성으로 출진했다. 건국 이래 최초로 일부이기는 하나, 무림의 세력과의 전쟁을 천명한 것이다. 그런데, [뭐라? 벌써 회군을 한다?] 군이 출진한지 불과 몇 시진 만에 다시 회군하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지휘사 백자기가 서둘러 복귀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지금 황제는 이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던 차에 때마침 대전 밖에서 내궁 환관의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금의위 도지휘사 백자기가 대전으로 들기를 청하옵니다." "들라하라." 황제의 명이 떨어지고 건안궁의 대전으로 회색의 견고한 갑주를 걸친 도지휘사 백자기가 대전 안으로 서둘러 들어왔다. "신. 도지휘사 백자기. 황제 폐하를 알현하나이다!" 백자기가 인사를 올리자마자, 어떻게 된 연유인지 궁금했던 황제가 곧장 물었다. "지휘사는 어찌하여 출진한지 얼마 되지 않아 벌써 회군을 한 것인가?" 아직까지 금의위들과 병사들은 용정궁으로 당도하지 않았지만, 도지휘사가 서둘러 복귀한 것은 분명 진성 내의 상황을 직접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폐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대명제국의 황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진성 내에 역당의 무리들은 전멸했사옵니다." "역당의 무리들이 전멸했다?" 황제의 눈빛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사전에 마교주의 청을 받아, 금의위의 갑주와 병사들의 옷을 빌려주기는 했지만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전쟁이 마무리 되었을 줄은 몰랐다. "너무 빠르지 않은가?" 아무리 무림인들 간의 전쟁이라고 해도 굉장히 빨랐다. 보고를 하는 백자기 또한 같은 의견이었지만 분명 전쟁은 끝났다. "폐하의 명을 받들어, 서둘러 진성으로 출진하기위해 먼저 남진무사와 뛰어난 금의위들을 보내 정황을 살피게 했는데....." 그 다음에 이어지는 백자기의 보고에 대전 내에 있는 모든 관료들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해야만 했다. 당시에 북진무사와 자 첩형이 도주하기는 했지만, 진성에는 황궁의 관료들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부 금의위들이 정황을 살피고 있었는데, 그들을 통해서 남진무사는 진성에서 벌어졌던 놀라운 일들을 듣고서 지휘사에게 보고했다. 그것을 그대로 보고하는 지휘사 백자기조차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게 정녕 말이 되는 일인가?" 보고의 대부분은 마교주 천여운이 보여주었던 인간을 뛰어 넘은 신위들이었다. 들어보면 그 많은 대다수의 적들을 죽인 자는 천여운 단 한 사람이었다. 전쟁이 아니라 재앙이자 학살에 가까웠다. 게다가, "뭐라? 허공에 날아올라 성내에 벼락을 내리치게 했다?" 특히 천공섬광(天空閃光)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황제조차도 어안이 벙벙해져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성내를 가득 메우는 이기어탄검강의 위용은 그렇게 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허어, 어찌 인간의 몸으로 그런...." 대내행창의 제독 서태석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같은 말만 대뇌였다. 대전에 있는 두 제독과 첩형들은 전부 무공을 익힌 자들이었는데, 생사경의 고수가 이 정도까지 괴물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정말 인간이 아닌 자로구나. 천 교주와 손을 잡길 천만 다행이다.' 황태자가 된 성왕 주태경은 새삼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적으로 삼기에는 마교주 천여운은 너무도 괴물 같은 자였다. "그리하여 회군을 하게 되었사옵니다. 폐하!" 도지휘사 백자기가 진성에 있었던 전황에 대한 모든 보고를 마쳤을 때, 대전은 심각했던 아까 전과 달리 고요한 적막으로 휩싸였다. 그만큼 마교주 천여운에 대한 이야기는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폐하께서도 많이 놀라셨을 것이다.' 천하를 다스리는 자로서 인간을 뛰어 넘는 힘을 가진 괴물은 위협 그 자체였다. 어쩌면 전보다 더욱 두려움을 느낄지도 몰랐다. 모두가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고 있는데. 한참을 멍하게 있던 황제가 중얼거리듯이 입을 열었다. '....짐의....짐의 대에서 국교가 바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 누구도 이견을 달 수 없는 사실이었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단오제 날로부터 보름이 지났다. 입소문이라는 것은 참으로 빨랐다. 중원 무림 전체로 그 날에 있었던 일이 퍼져 나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동맹으로 승리에 동참하기는 했지만 마지막에 와서는 굴욕을 맛보았던 정도 무림맹이다. 그들은 이 굴욕을 숨기기 위해 통허현 진성에서 있었던 전쟁을 정도 무림맹과 마교가 동맹을 맺어 극도육무문과 사파연맹의 음모를 물리친 정도로 공표했지만, 그것이 숨겨질 리가 만무했다. 각 파의 수장들이 직접 눈으로 보았는데, 무엇을 어찌 숨긴단 말인가. 마교주 천여운의 괴물 같은 신위는 있는 그대로 무림 전체로 퍼져나갔고, 심지어 무림맹의 굴욕마저 가감 없이 전해졌다. 무림맹 측에서는 이를 강하게 부인했지만, 그러기에는 후에 생겨난 결과들이 부정할 수 없게 만들었다. 십만대산 마교의 성내 태상교주전. 내성에 있는 태상교주전의 침소에 짧은 머리카락의 중년인이 침상에 상체만 일으켜서, 탕약을 마시고 있었다. 그는 바로 전 교주인 천유종이었다. 심혼맥의 손상으로 몇 달 동안이나 혼수상태에 빠져있던 그가 드디어 깨어난 것이었다.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기에 많이 야윈 모습이었지만 눈빛에는 예전과 같은 역혈마공의 부작용이 사라지고 정기가 돌아와 있었다. -벌컥벌컥! "클클클, 천천히 드십시오. 태상교주님" 그 옆에는 안대를 하고 있는 허름한 옷차림의 중년인은 우호법 섭맹이었다. 태상교주 천유종이 눈을 뜬 것은 사흘 전이었다. 하지만 많이 약해진 상태였기에 이틀이 지나서야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우호법 섭맹은 어제부터 침소를 방문하여, 그 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태상교주 천유종에게 알려주었는데 정신이 돌아온 그는 많이 혼란스러워했다. 공교롭게도 천유종은 절강성에서 극도육무문의 수장과 겨룬 이후의 기억이 파편처럼 조각나서 거의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계속 이야기 하게. 우호법." 천유종이 소매로 입가에 묻은 탕약의 진액을 닦으며 말했다. 그러자 섭맹이 신이 난 듯이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제가 어디까지 말씀드렸지요?" "....여운이 아니, 현 교주가 개봉에 상주하고 있다는 것까지 말했네." 자신이 아닌 천여운을 교주라고 부르는 것이 입에 붙지 않는지, 천유종이 어색하게 말했다. 정신을 잃고 깨어나 보니, 너무도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깨어나자마자 모두가 자신을 태상교주라고 부르는 것부터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아아! 맞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지금 교주께서는 개봉에 본교의 지부 작업으로 한참 바쁘십 니다." "허어!" 천유종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다시 들어도 도무지 믿기지 않을 만큼 놀라운 소식이었다. 현재 하남성의 개봉 지역 전체가 공식적으로 마교의 영역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정도 무림맹에서 그것을 용납했단 말인가?" "용납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습니다." 대명제국에서 국교가 된 천마신교를 대대적으로 장려하면서, 황궁뿐만이 아니라 수도인 개봉에도 마교의 지부를 건설하라는 황명이 내려왔다. 정파의 영역 한 가운데였기에 당연히 정도 무림맹에서는 완강하게 거부할 법도 했지만 전혀 그러지 않았다. 개봉은 엄밀히 황도였기에 무림맹은 대명제국의 황명을 존중한다는 것과 동맹에 대한 예우를 내세워 이를 받아들였다고 공표했다. "실상은 그렇지가 않지요. 클클클." 창천회에 가입한 수장들이 전멸하면서 전력의 삼 할 가까이를 잃은데다 당장에 마교와 동맹을 파기하게 되면 극도육무문을 비롯하여 사방에 적으로 둘러싸이게 되기에 정도 무림맹으로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전부 교주께서 진성의 전투에서 놀라운 신위를 보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이번 전쟁으로 정도 무림맹은 천여운이 교주로 있는 현재의 마교와 전쟁을 벌여서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그러기에 굴욕을 감수하면서까지 개봉을 양보한 것이기도 했다. '그 아이가 생사경의 경지에 올랐다니.' 깨어난 천유종이 들었던 가장 놀란 소식이었다. 자신이 정신을 잃은 사이에 이 많은 일들이 벌어진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천유종이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대고수의 칭호는 본좌가 아니라 현 교주에게 넘겨야 할 것 같군." 그 말에 섭맹이 입술을 실룩거리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말했다. "흠흠, 태상교주님. 아뢰옵기 송구스럽지만 이미 현 교주께서는 이번 전쟁으로 오대고수라고 불리고 있으십니다." "아니? 그게 정말인가?" 중원 오대고수. 그것은 수많은 무림인들 중에서 정점에 선 다섯 명만이 가지는 칭호이다. 그 칭호를 고작 약관의 나이에 얻었다는 것은 무림사에 있어서 전무후무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현 교주의 스승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는 섭맹은 이 소식을 접한 뒤에 뿌듯함을 넘어서 연일 즐거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아아!' 천유종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유년기에 무공조차 익히지 못하고 힘겹게 자라왔던 화연과 자신의 아이가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나 그 위치에 섰다는 것이 감격스러웠다. 그런 그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섭맹의 시선에 짐짓 민망했는지, 천유종이 다른 것을 물었다. "크흠, 오대고수가 되었다면 그에 걸맞는 별호도 생겼겠군." 그 질문에 섭맹이 입 꼬리가 귀까지 걸려서 답했다. "본교에 있어서 가히 최고의 별호를 얻으셨습니다!" "최고의 별호?" "마신! 교주께서는 마신이라고 불리우십니다!" 새로운 오대고수로 등극하면서 얻게 된 천여운의 새로운 별호. 그것은 바로 마신(魔神)이었다. 그 전율스러운 무위는 가히 신과 같다고 하여 정사마를 막론하고 모든 무림인들이 그를 마신이라고 불렀다. ”마신!!!” 섭맹의 말에 천유종이 전율을 금치 못했다. 광오하면서 멋진 별호에 놀란 것이 아니라, 역대 교주들 중에 천마 조사 이래로 두 번째로 마신이라는 칭호를 가진 교주가 탄생했기 때문이었다. < 81장 오대고수 등극 (3)> 끝 < 82장 북쪽에서 온 손님 (1) > "헉...헉....헉....." 거친 호흡성에 뿌연 입김이 흘러나올 만큼 차가운 얼음 동굴. 불과 한 시진 전만 하더라도 투명하면서 아름다운 얼음이 사방을 수정(水晶)처럼 수놓던 동굴은 부서진 파편의 잔해들로 가득하다. -뚝뚝! 바닥에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에 바닥을 쳐다 보니, 붉은 핏자국이 얼음 바닥에 퍼져나갔다. 얼마나 급하게 도망쳤는지 몰랐는데, 두꺼운 털옷이 붉게 젖어 있었다. "하아.... 하아! 끄으으으윽?" 이를 인식하자 베였던 부위들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서 치료하지 않으면 추운 날씨로 상처부위가 괴사(壞死)할 지도 몰랐다. '서둘러서.....궁(宮)에 알려야만 해.' 겨우 몸을 일으켜 세워 절뚝거리며 걷는데,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쿠르르르르! 얼음 동굴 전체에 진동이 일어났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동굴이 흔들리자, 그렇지 않아도 부서진 얼음 파편들이 흩날리며 사방이 하얗게 수증기처럼 시야를 메웠다. "서, 설마?" 불길한 징조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겨우 목숨을 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두터운 빙벽마저 뚫으려 한단 말인가. 두려움을 느낀 그는 서둘러 이곳을 빠져나가려 했다. 바로 그 순간, -콰콰콰콰콰쾅! "크와아아아아아!" 견고하던 얼음 바닥이 부서지면서 검은 괴생물이 포효를 지르며 뚫고 나왔다. 뿌연 수증기로 희미하게 보였지만 노란 안광에 사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 이 빙벽을 뚫다니?' 놀라하던 그가 아차 싶어 입을 틀어막았다. 입을 틀어막고서 호흡을 들키지 않으려는 순간, 노란 안광을 내뿜던 괴생물이 뱀처럼 길게 휘어지며 그를 향해 흉악한 이를 드러내며 뻗어왔다. "크와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악!" -팍!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온몸을 미친 듯이 발버둥 치며 벌떡 일어났다. 몸을 덮고 있던 모포가 벗겨지며 수풀 틈으로 비치는 햇살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날이 밝은 것이다. "헉.....헉...." 얼마나 놀랐는지 얼굴이 식은땀으로 가득했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지하 얼음 동굴에서 괴생물이 그를 덮쳐왔는데, 그것은 꿈속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또..…또 인가.' 얼굴이 흉터로 가득한 청년이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손등으로 닦았다. -바스락! 옆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하얀 털옷을 입은 중년인이 불씨가 꺼져가는 모닥불에 마른 나뭇가지를 넣으며 되 살리고 있었다. 중년인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또 그때 일을 꾼 게냐?" "단 숙부." "어지간히 기억 속에 남은 듯하구나. 하긴 그 괴물로부터 살아남은 자는 너밖에 없으니 말이다. 후우....덥구나." 불씨를 지피던 중년인이 입고 있던 털옷을 벗었다. 얼마나 더웠는지 털옷 안에 있는 내의가 땀으로 젖어있었다. "오랜만에 오지만 이곳 중원은 정말 덥구나. 중원인들은 이런 더운 곳에서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군." 날씨는 그리 덥지도 춥지도 않다. 그러나 추운 북쪽에서 내려온 중년인에게 중원의 날씨는 덥게만 느껴졌다. 흉터의 청년 역시도 덥다고 느꼈기에 옛적에 털옷 대신 가벼운 소재의 장포를 걸치고 있었다. 그때의 악몽을 꾸고서 깨어난 청년은 겨우 공포에서 벗어났는지 떨림이 멈췄다. 그런 청년에게 중년인이 말했다. "사흘을 꼬박 자지 않고 내려왔는데, 좀 더 쉬거라." "아닙니다. 백부. 그 괴물이 언제 빙장석을 뚫고 나올지 모르는데, 쉴 틈이 어디 있겠습니까?" "고집하고는." 이곳 하남 북부까지 내려오기까지 보틈 동안 전부 합쳐 고작 네 시진밖에 수면을 취하지 못했다. 눈 밑이 퀭한 것이 그 증거였다. 운기조식으로 내기를 채우지 않았다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중년인이 말했다. "이제 곧 갈래 길이다. 나는 이대로 정도 무림맹의 본단으로 갈 것이다. 정말 너는 개봉으로 갈 참이더냐?" "......그렇습니다." "형님을 닮아서 고집이 보통이 아니구나. 그들이 정말 도울 것 같으냐. 중원 무림인들 중에서 협(俠)을 추구하는 이들은 정파인들 밖에 없다." "안하니 만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마(魇)를 추구하는 것들이 퍽이나 네 부탁을 들어줄까." 중년인이 그의 고집에 혀를 찼다. 그래도 한 번씩 왕래가 있던 정도 무림맹에 부탁을 하는 편이 나은데 어째서 저런 고집을 부리는지 모르겠다. '사마의 무리들이 얼마나 간악하던가.' 그런 자들이 타인의 위기에 도움을 줄 거라고 생각지 않았다. 불신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숙부의 시선에 흉터의 청년이 자신의 품속에 숨겨진 물건을 꾹 쥐었다. 죽을 뻔했던 그를 구해준 그 자가 준 물건이었다. 눈앞에 있는 숙부조차 믿을 수가 없어서 이 물건을 보이지 않았는데, 이것이 있다면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지도 몰랐다. [꼭 전해주게.] 그 자가 정말 이 물건의 주인이 맞다면 말이다. * * * 개봉의 마교 지부에서 가까운 풍청 객잔. 객잔 앞의 햇빛을 가리는 차양 밑의 탁자에 앉아, 가볍게 반주(飯酒)를 하면서 오리고기와 국수로 식사를 하는 이들이 있었다. 대로에는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객잔에는 손님들이 없다. 그것은 차양 아래서 식사를 하고 있는 이들 때문이었다. 붉은 색으로 마(魔)라 적힌 상의를 입고 있는 그들은 누가 보아도 마교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개봉에 마교의 지부가 들어선지, 거의 한 달 가까이 되었지만 아직까지 개봉 사람들은 마교인들에 대한 선입견 때문인지 그들을 두려워했다. 몇 백 년이 넘게 정파의 영역으로 있던 곳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에휴, 그냥 와서 식사하면 되지. 뭘 그렇게 피해 가는지 모르겠네요." -벌컥! 가볍게 술잔을 털어 넘기는 자색 두건의 청년은 호위전의 부관인 허봉이다. 툴툴거리는 그의 말처럼 사람들은 신기할 정도로 객잔 가까이로 오다가, 그들을 발견하고는 도망치듯이 객잔 주변을 빙 둘러서 가버렸다. -탁! '몰라서 묻는 게요.' 추가 주문한 음식을 탁자에 내려놓는 점소이가 속으로 혀를 찼다. 점심 때라서 손님이 넘쳐야 할 시간에 저들이 객잔 입구에 자리 잡은 덕분에 오늘 장사는 공친 셈이었다. '그게 그렇게 신경 쓰였다면 이 층에서 식사를 하던가?' 라고 말할 용기는 없기에 음식만 내려놓고 조용히 객잔으로 들어갔다. 추가로 나온 음식인 화과육의 고기 한 점을 입에 쑤셔 넣는 허봉에게 거구의 근육질의 청년인 고왕흘이 달래듯이 말했다. "어차피 시간이 걸릴 일이네. 그래도 처음보다는 낫지 않나" 처음 개봉에 지부가 들어서고 포교 활동을 할 때, 개봉 사람들은 무슨 귀신이나 괴물을 보는 것처럼 마교인들을 피해 다녔다. 그래도 한 달이 지나면서 그것은 생각보다 많이 완화되었다. "그렇긴 한데.....에잇 아무튼 아직 한참 먼 것 같아요."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하핫, 허봉 자네는 뭐든지 의욕이 과다해서 문제일세. 정파에서 수백 년에 걸쳐서 만든 인식을 한 달 새에 완전히 바꾸는 것이 어찌 가능하겠나." -탁탁! 허봉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사마착이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정파인들의 영향을 받은 개봉 사람들의 인식을 단 번에 바꾸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그렇기에 지부소속의 제사장들이 구휼미를 베푸는등 여러 방면으로 포교 활동에 힘을 쓰고 있었다. "게다가 교주님의 명성 덕분에 한 달 동안 새로 가입한 교인이 백 명이면 많이 선전하지 않았나. 너무 걱정하지 말게." "전부 무림인이잖아요." 새로 교에 가입한 자들은 평범한 백성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진성에서 있었던 천여운의 신위를 듣고서, 마교에 입교를 신청한 떠돌이 낭인들이었다. 오대고수가 된 마신 천여운의 명성은 방금 무림에서 하늘을 찌를 듯했다. 대명제국의 국교마저 바꾸고 정도 무림맹이 굴욕을 감수하고서 개봉을 넘긴 사건으로 향후 마교가 무림을 제패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번지면서,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무소속의 무림인들이 급격히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게 어딘가. 그만큼 최연소 오대고수가 되신 교주님의 산하에 들어오고 싶은 자들이 많다는 증거지." "전 사실 그게 좀 불만입니다." "응?" 천여운을 광신도처럼 따르는 허봉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말에 모두의 표정이 의아해졌다. 이에 허봉이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아니. 이쯤 되면 교주님은 오대고수가 아니라 천하제일인이라고 불려야 하는 거 아닌가요? 무림맹주도 상대가 되지 않고, 당금 무림에서 현경의 고수 세 명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는 분은 교주님 밖에 없잖아요." "그건 그렇군." 고왕흘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 신위를 보였는데도 오대고수에서 그친 것을 보면 정도 무림맹이나 사파 연맹에서 수작을 부렸다는 공작을 벌였다는 생각마저도 들었다. 그때 가만히 국수를 먹는데 집중하던 호상화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동쪽의 괴물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닐까." "동쪽의 괴물?" 의아해하는 허봉의 말에 옆에 있던 사마착이 손바닥을 치면서 말했다. "아!......투신을 말하는 게요?" 동투신(東鬪神) 악의. 중원 오대고수의 일인이다. 동쪽의 투신이라 불리는 그는 오대고수들 중에서 병장기조차 다루지 않고 오직 두 주먹 하나로 무림의 정점에 오른 사내였다. 천여운 역시도 별호에 신(神)이라는 광오한 글자가 붙게 되었지만, 그 이전부터 오대고수들 중에 유일하게 신이라는 글자가 붙었던 자이다. "에이, 그래봐야 소문만 무성한 자랑 만인의 앞에서 위용을 떨치신 교주님을 비교하는 게 말이 되나요." 허봉이 손을 휘저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하자, 방금 전까지 웃으면서 말하던 고왕흘이 콧김을 쉭쉭 뿜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허봉! 우리 상화가 한 말을 너무 아무렇지 않게 치부 하는 것 아닌가." "우리 상화? 와! 또 시작이네요." -촥! 그 말에 호상화가 먹고 있던 국수를 내뿜고서 얼굴이 빨개졌다. 덕분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사마착의 얼굴에 국수가 이리저리 휘감기고 말았다. '아......이거 전에도 경험했던 것 같은데.' 지성이면 감천이랄까. 계속해서 호감을 보이면서 노력한 끝에 얼마 전부터 사귀기 시작한 고왕흘과 호상화였다. 곰 두 마리가 나란히 붙어있는 것 마냥, 보통 사람들보다 거구인 두 사람은 천생연분이라 할 만큼 잘 어울렸다. 다만 그것이 누군가의 배알이 뒤틀리게 할 뿐이었다. "허참, 이거 연인이 없는 사람은 섭섭해서 살 수 있겠나요." "크흡!" "아까부터 얘기할까 말까하다가 참았는데, 두 분이 하도 붙어있어서 그런지 그 여리여리한 의자가 부러지려 하거든요. 그리고....." '.......또 시작이다.' -찌릿!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허봉의 투덜거림에 호상화가 옆에 앉아 있는 고왕흘을 흘겨보았다. 그렇게 남들 앞에서 우리 상화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는데, 또 그랬다가 허봉의 불평불만을 식사 내내 듣게 생겼다. 그렇게 어수선하던 찰나에 허봉이 갑자기 투덜거리던 것을 멈췄다. '응?' 왜 그러나 싶어서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을 쳐다보았는데, 장포를 둘러쓴 얼굴에 흉터가 가득한 한 청년이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무림인?' 첫 눈에 그들은 흉터의 청년이 무공을 익혔음을 알아차렸다. 절정 초입에 이른 무공 실력을 지닌 자였다. 느닷없이 그들을 향해서 다가오기에 경계심이 생기려고 하는데, 탁자의 앞까지 다가온 청년이 뜻밖의 행동을 했다. -털썩! 바닥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겨우.....겨우 마교의 분들을 만나 뵙게 되는군요." "엥?" 일면식도 없는 자가 무릎까지 꿇어가면서 하는 뜬금없는 소리에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고왕흘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 연유를 물었다. "누구시기에 갑자기 이렇게 무릎을 꿇는 것인지?" 그 물음에 청년이 간절한 목소리로 청했다. "귀교의 교주님을 뵙게 해주십시오!" "?" 느닷없이 교주님을 뵙게 해달라는 말에 고왕흘이 뭐라고 해야 할지 난감해했다. 허름한 행색을 보면 낭인인 듯한데, 아무래도 교에 가입을 원하는 자 같았다. 이에 허봉이 자리에 일어나서 말했다. "아, 혹시 본교에 가입하시려는 것 같은데, 요 맞은편 골목으로 들어가서 지부로 가서 문의하시면....." 그 말을 끊고서 흉터의 청년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죄송하지만그러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귀교의 교주님을 뵙고 도움을 요청하러 왔습니다." 허봉이 눈썹이 치켜 올라가서 흉터의 청년에게 다가와 말했다. "저기 이렇게 막무가내로 교주님을 뵙겠다고 하시면, 저희가 친절하게 '예' 하고 바로 안내해드릴 거라고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 그때 허봉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흉터의 청년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급히 꺼내들었다. "!?" 그것은 옥으로 만든 패였는데, 이를 보는 순간 허봉이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허봉 대체 왜 그러는 것인....엇!" 대체 무엇을 보았기에 그러는가 싶어서, 허봉의 옆으로 고개를 기웃거리던 고왕흘조차 입이 벌어져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옥패에는 일곱 글자의 글씨와 직인이 새겨져 있었다. [太上敎主 天仁知] 태상교주 천인지. 옥패는 다름 아닌 오래 전, 행방불명되었던 전 태상교주 천인지의 신분패였다. < 82장 북쪽에서 온 손님 (1) > 끝 < 82장 북쪽에서 온 손님 (2) > 개봉 마교 지부. 대명제국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은 개봉 마교 지부의 부지는 마도관에 버금갈 정도로 넓었다. 마교의 본단인 십만대산의 성을 제외하면 가장 큰 규모라고 할 수 있었다. 지부의 대연무장에 사백여 명이나 되는 호위전의 무사들이 훈련복을 입고서, 단상 위에 있는 누군가의 대결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육검단의 두 단주인 백기와 채택겸이었다. -파파파팍! 두 사람은 무기가 없이 적수공권으로 대결을 펼치고 있었는데, 기존의 박투술이나 혹은 장법, 권법, 각법 류의 무공과는 달랐다. 통상의 무공이 식(式)의 연계를 통해 초식(招式)을 이루는 것과 다르게 백기와 채택겸의 보여주는 동작들은 한 식 자체가 상대의 요혈을 노리는 일격의 기술들이었다. -파팍! 백기가 허공에서 연달아 회전을 하면서 발차기를 하는 것을 채택겸이 바닥을 통통 뛰는 독특한 보법으로 피해내더니, 그의 발차기를 두 손으로 잡아챘다. “앗!”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백기의 다리를 잡는 순간 뱀이 먹잇감을 조르듯이 자신의 양 다리를 꼬아서, 그가 조금이라도 반항하면 다리 관절이 꺾일 정도로 구속했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호위전의 무사들의 입에서 저마다 탄성이 흘러나왔다. “우와!” “백기 단주의 발차기를 저런 식으로 제압하다니?” 채택겸은 뛰어난 고수였지만 육검단에서 가장 아랫 서열이다. 그런데 서열 삼위인 백기의 발차기를 쾌속한 관절기로 제압하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칫.’ 그런 호위단 무사들의 반응에 빈정이 상했는지, 백기가 관절이 꺾인 상태에서 두 팔에 공력을 모아 등허리를 비틀며 두 다리를 벌리고서 풍차처럼 회전시켰다. “우엇!” -부우우웅! 팍! 덕분에 양다리를 꼬아서 밀착하고 있던 채택겸이 회전력을 이기지 못하고 튕겨나가고 말았다. 물론 여기서 이를 악물고 억지로 다리를 부러뜨릴 수 있었지만, 그 전에 백기가 다리에 강기(?氣)를 일으킨다면 서로 부상을 입고 말 것이다. “우왓! 그걸 빠져나왔어!” “바닥에서 어떻게 저런 초식을 쓸 수 있는 거지?” 얼핏보면 바닥을 뒹굴며 회전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어느 순간에 하나의 태풍처럼 기세가 돌변했다. 공력이 실린 두 다리의 회전에 날카로운 풍압은 다가가기조차 힘들어보였다. 통상의 무공과는 완전히 다른 독특한 초식이었다. ‘나노, 어때?’ [카포에라(Capoeira)의 윈드밀(wind mill)에 실린 에너지의 분배가 적절합니다. 더욱 강한 에너지를 응집한 강기(?氣)를 발산한다면 살상력이 두 배 이상 높아질 겁니다] 대결을 참관하고 있던 천여운의 물음에 나노가 답변했다. 지금 육검단주인 백기와 채택겸이 보이는 무공들은 나노가 미래의 무술들인 복싱, 태권도, 주짓수, 카포에라에 운기법과 초식의 투로를 대입하여 만든 무공들이었다. 기존 중원의 무공들은 초식을 파악하고 있으면 그에 대한 파훼법이 쉽게 이뤄질 수 있으나, 미래의 무술들을 대입한 이 무공들은 한 식, 한 식이 철저히 상대의 인체를 파괴시키기 위한 일격들로 이루어져서 위험한 살상 무공으로 탄생했다. ‘제대로 익힐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완벽하게 익혔군.’ 천여운의 눈빛에 흡족함이 묻어났다. 물론 개개인의 편차는 있었다. 채택겸은 주로 두 손을 이용하는 복싱이나 주짓수에 좀 더 특화가 되었고, 각법의 달인인 백기는 태권도와 카포에라 등에 더욱 치중했다. 각자에게 맞는 기술을 더욱 잘 소화시킨 것이었다. ‘이 정도 완성도라면 백병전에서 훌륭히 쓰일 수 있겠어.’ 교주로 취임하면서 시작된 현대 무술의 무공화 작업이 드디어 빛을 발할 만큼 완성도를 갖췄다. 시험 삼아 마도관의 전 선임교두였던 현 호위전의 수장 호진창과 이 두 사람에게 전수했는데, 몇 달 새에 훌륭하게 체득했다. -팍! 비무를 마친 백기와 채택겸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서로에게 공손히 포권을 취했다. 이 대결을 지켜본 호위전의 무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와아아아아아아!” 단상 석좌에 앉아있는 천여운의 옆에 서있던 호위전 수장 호진창이 앞으로 걸어와, 큰 목소리로 호위전의 무사들에게 외쳤다. “잘 보았나? 이것이 교주님께서 만드신 새롭게 본교의 기본 무공이 될 합종투술이다.” “와아아아아아아!!!” 합종투술(合綜鬪術). 천여운은 완성된 무공이 여러 미래 무술들의 정수를 모아서 만들었다고 하여 합종투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것을 처음 접하게 된 호진창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교주님께서 이런 무공을 만드셨다고요?] 고작 약관에 불과한 천여운이 기존의 무공들과는 전혀 다른 인체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깃든 무공을 창안했다는 것에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오오! 진정 대종사의 길에 드셨군요! 교주님의 존재가 본교의 홍복입니다!] [.........] 워낙 격하게 기뻐해서 마음이 불편할 정도였다. 엄밀히 말하면 천여운의 안에 있는 나노가 분석하여 만든 무공이었으니 말이다. “오늘부터 본 호위전주가 예전처럼 무공 교두가 되어 귀관들에게 합종투술을 전수할 것이다. 교주님께 누가 되지 않게 완벽히 익히도록 하라!” “충!!!” 대연무장 전체를 울리는 쩌렁쩌렁한 호위전 무사들의 사기 넘치는 외침에 천여운이 입 꼬리가 올라갔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지금 십만대산의 마교 내에는 신의 감로수를 비롯한 마의 백종우가 불기린의 피를 분석하여 안정된 영약으로 변환하는 과정에 들어갔다. 사전에 나노가 성분을 분석한 정보도 넘겼기에 그것은 빠르게 진행될 것이다. ‘머지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전력을 갖추는 그 날이 말이다. 한편 대연무장의 바깥쪽에서 이것을 지켜보는 두 명의 여인들이 있었다. 두 여인들은 중원을 통틀어 손에 꼽는 절세미녀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다. 웃는 눈매가 아름다운 푸른 무복을 입은 여인은 바로 문규였다. 그런데 늘 웃는 얼굴인 문규가 약간은 볼이 부풀어 올라서, 옆에 서있는 여인을 의식하고 있었다. 천여운처럼 새하얀 얼굴에 긴 은발의 청초함을 지닌 그녀는 왕여군이다. 왕여군의 시선은 단상 위의 석좌에 군왕처럼 위엄 있는 모습으로 앉아있는 교주 천여운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두 볼에 홍조가 오른 모습에 문규가 두 볼이 더욱 부풀어 올랐다. ‘히잉.’ 불만스러울 만도 했다. 닷새 전에 개봉의 마교 지부에 도착한 왕여군이다. 중요한 소식을 알리기 위해 좌호법 이화명과 함께 왔다는 그녀는 닷새 째 은근히 교주의 곁을 맴돌고 있었다. 자신의 입으로 왕여군까지는 허락한다고 했지만 왠지 모르게 신경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 이럴수록 대범해야지!’ 질투 같은 것은 자신과 어울리지 않았다. 문규가 그녀에게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었다. “흠흠! 왕 소저, 아직 몸도 안 좋다고 들었는데, 그만 구경하고 들어가서 쉬는 것이 어떤 가요?” 천여운 덕분에 구음절맥에서 벗어난 왕여군은 목숨을 구제 받았지만, 원래의 진기가 아닌 천여운의 양기가 채워지면서 내기가 불안정한 상태였다. 하루의 절반 가까이를 운기조식을 취해야 하는 입장이기에 이를 핑계로 하는 소리였다. 그런 문규의 말에 왕여군이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아니에요. 문 소저. 저는 괜찮아요. 이렇게 바람이라도 쐬면서 교주님을 뵈고 있으니까 좋네요. 혹시 피곤하신 것이면 제 걱정은 하지 말고 들어가세요.” ‘으아아아!’ 그녀의 대답에 문규의 두 볼이 다시 부풀어 올랐다. 왠지 도리어 한 방 먹은 느낌이다. ‘담대해져야 해. 담대....담대...담대...담대......에잇! 몰라!’ 도저히 담대해질 수가 없었다. 깨어난 태상교주 천유종의 소식을 전하러 왔다고 한 그녀는 이를 핑계로 계속 천여운에게 들러붙어서 친해지려고 애를 썼다. ‘좌호법이랑 같이 돌아가면 되지. 괜히 남아가지고. 쳇쳇.’ 태상교주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천여운은 이곳 지부에서의 일을 마무리하고서 본교로 복귀한다고 좌호법 이화명을 먼저 보냈다. 그런데 왕여군은 천여운과 함께 마교로 복귀하겠다고 남은 것이었다. ‘히잉.’ 불이 잔뜩 부풀어 오른 그녀를 슬며시 쳐다보며 왕여군이 속으로 미안해했다. ‘문 소저, 미안해요. 저도 교주님의 얼굴 보기가 너무 힘드니, 이렇게라도 해야 저분의 마음에 들지요.’ 마도관 시절부터 감정 교류가 있었던 문규와 다르게 구음절맥으로 연결된 왕여군은 그와의 접점이 많지 않다보니, 좀 더 알아갈 기회를 가지고 싶었다. 그런데 교주인 천여운이 마교에 있기는커녕 중원을 외유하며 들어오지 않다보니, 이런 식으로 밖에 기회가 나지 않았다. ‘교주님이랑 잘 되면 언니로 잘 모실게요. 그때까지만 흠흠.’ 서로가 미묘한 경쟁을 하던 차에 누군가 대연무장 외곽으로 다급히 들어왔다. -타타타타탁! “허봉?” 문규가 놀라서 그를 불렀다. 그런데 얼마나 급한 일이었는지, 허봉이 그녀의 부름에도 답하지 않고서 곧장 연무장의 단상에 있는 천여운에게로 경공을 펼쳐서 다가갔다. ‘무슨 일인데 저러지?’ 의아하던 차에 허봉이 뭔가를 아뢰자, 천여운이 놀란 눈으로 석좌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무슨 큰일이 벌어진 것 같았다. * * * 천여운은 허봉의 뒤를 따라서 외당 객당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객당에 그 손님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였다. 그의 손에는 허봉이 가지고 온 옥패가 쥐어져 있었는데, 그것에는 태상교주 천인지라 새겨져 있었다. 교주의 직인이 찍혀 있는 이 신분패는 가짜가 아니었다. 나노에게 시켜서 분석하게 했는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교주패와 동일한 성분의 옥으로 만든 물건이었다. ‘사라진 조부님의 신분패라니.’ 이십여 년 전 중추절에 행방불명되었던 천인지였다. 아무런 일언반구의 말도 없이 사라져서, 그를 찾기 위해 중원 전역에 있는 교인들이 동원되었지만 끝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그 신변을 알고 있는 자가 나타난 것이다. “교주님. 만에 하나의 경우도 대비하셔야 합니다. 옥패가 진짜이긴 하지만 의심스러운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옆에서 같이 이동하고 있는 대호법 마라겸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말했다. 마라겸은 유일하게 사라지기 전의 천인지를 보았다. 그런 그에게조차 자신이 어째서 마교를 떠나는지에 대해서 밝히지 않았다. 조심성이 많은 태상교주가 이렇게 누군가에게 자신의 신분패를 맡겨서 보냈다는 사실이 그 자를 쉽게 믿지 못하게 만들었다. “일단 보면 알게 되겠지요.” 어찌된 영문인지는 직접 보면 알게 될 것이다. 동쪽 편에 있는 객당의 호실로 들어가자, 고왕흘과 호상화가 얼굴이 흉터투성이인 청년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여 그를 구류한 듯 했다. “교주님을 뵙습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일어나 포권을 취하자, 흉터투성이의 청년의 두 눈에 이채가 띠었다. ‘이 사람이 마교주라고?’ 척 보기에도 자신보다도 훨씬 어렸다. 중원으로 내려오면서 엄청난 신위에 대한 소문을 접했을 때는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가진 무인의 자태를 생각했는데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눈매가 날카롭고 분위기가 오묘하기는 했지만 무공을 익힌 흔적도 보이지 않았기에 그저 명문세가의 공자처럼 보였다. ‘혹시 나를 떠보기 위해서 그런 것인가?’ 일순간 의심이 들었지만 그 옆에 서있는 가면의 사내에게서 느껴지는 짙은 죽음의 그림자가 심상치가 않았다. 겉보기만 봐도 엄청난 무(武)의 향기를 풍겼다. ‘아! 이 자가 명왕이로구나.’ 명왕 마라겸에 대한 명성은 예전부터 풍문으로 들어왔다. 마교의 대호법이라고 들었는데, 그가 붙어있다는 것은 마교주가 틀림없었다. 그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서 인사를 하려 하는데, 마교주 천여운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대가 이 물건을 가지고 온 자인가.” 천여운이 전 태상교주의 신분패를 보이며 물었다. “그, 그렇습니다.” 그때 옆에 있던 고왕흘이 그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한 일파의 수장을 뵈었는데, 계속 멀뚱히 앉아서 신분조차 밝히지 않을 생각이오.” 지부에 오는 내내, 교주를 직접 뵐 때까지는 아무 것도 밝힐 수가 없다고 고집을 부린 청년이었다. 강제로 입을 열게 만들까 하다가, 워낙 중요한 사안인 듯 하여 혈도를 제압해 내공을 금제한 뒤에 일단은 데려왔지만 그 점이 썩 마음에 들진 않았다. -탁! 그제야 흉터의 청년이 다급히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처, 천마신교의 교주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북해빙궁의 사신으로 온 단백현이라고 합니다.” “북해....빙궁?” 청년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정체에 객실 내 모든 사람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놀랍게도 그는 중원 무림인이 아니라, 세외 삼대 세력 중 하나인 차가운 북쪽 대지의 패권을 쥐고 있는 북해빙궁(北海氷宮)의 사람이었다. < 82장 북쪽에서 온 손님 (2) > 끝 < 82장 북쪽에서 온 손님 (3) > 세외(世外) 삼대 세력. 그들은 중원 바깥에 있는 이민족들이 이룬 무림(武林)이다. 물론 중원인들의 입장에서는 세상의 중심을 그들로 알고 있기에 세외 세력이라고 부르지만 그들만의 무림을 구축하고 패권을 다투는 형태는 중원 무림과 다를 바가 없었다. 세외를 대표하는 삼대 세력은 동, 서 ,북으로 이루어진다. 동쪽의 성산이라 불리는 장백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검술의 본향이라 불리는 장백파(長白派). 서장 티베트 고원에 불교가 전파되어 생겨난 황교가 뿌리가 되어 소림사와 더불어 내가 무공으로 명성을 떨치는 포달랍궁(包達拉宮). 그리고 마지막으로 북쪽 차가운 설원의 대지인 북해(바이칼 호)에 자리한 음한의 무공인 빙공(氷功)을 다루는 북해빙궁(北海氷宮)이 있다. 물론 이들 이외에도 남만야수궁, 소뢰음사, 백타산장. 남왜 등 여러 무력을 지닌 단체들이 있으나 현재 가장 큰 세력을 구가하는 곳이 위 삼대 세력이었다. ‘북해빙궁이라.....’ 한 때 삼십여 년 전, 세외 세력 중에 중원 무림의 패권을 노리고서 남하했던 무리가 있다. 그들이 바로 북해빙궁이다. 하지만 그들은 중원에 진출한지 불과 한 달 채도 되지 않아 북해로 철수했는데, 장기간 전쟁을 지속하기에 중원의 기후나 식문화 등이 너무 큰 차이를 보였기에 그들 스스로 포기하고 말았다. 이때 북해빙궁은 전쟁을 포기했을 때, 대립했던 정도 무림맹과 평화 협정을 맺은 걸로 유명하다. “북해빙궁의 사신이라고?” 천여운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행방불명된 전 태상교주 천인지의 소식을 가져온 자가 북해빙궁에서 왔다고 하니 의아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신? 흐음.’ 허봉이 약간은 불신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정도로 거대 세력의 사신이라면 어느 정도 위세를 갖춰서 왔을 텐데, 허름한 장포하며 흉터투성이의 얼굴은 그저 낭인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소협이 북해빙궁의 사신이라 한다면 응당 신분을 상징할 만한 무언가 있어야 하지 않겠소?” 처음부터 그를 의심스럽게 생각하던 대호법 마라겸이 물었다. 이에 모두가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를 사신으로 칭했다면 적어도 북해빙궁의 궁주의 서신이라던가 혹은 그들만이 지닌 신표(信標) 정도는 들고 있을 것이다. “아......” 마라겸의 물음에 북해빙궁의 사신이라 칭한 단백현의 눈빛에 당혹감이 서렸다. 생각해보니 정식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궁주 대리의 서신은 그의 숙부 단주성이 정도 무림맹에 들고 갔다. “그, 그 서신은 제가 아니라 숙부가...” “숙부?” “하아, 이걸 어찌 설명해야 할지....” 사실 정도 무림맹에 가는 서신은 정식으로 요청하는 공문이었지만, 마교를 찾아온 것은 북해빙궁이 아닌 오직 그만의 자의였다. 뭔가 이 사실을 당장에 얘기하면 분위기상 굉장히 불쾌해 할 것 같았다. ‘수상한데.’ 그가 망설이자 마라겸의 눈빛에 더욱 불신이 실렸다. 이에 어떻게 해야 하나 당황해하던 단백현이 문득 자신의 신분을 증명할 만한 것을 떠올렸는지 말했다. “아! 제가 북해빙궁의 사람이란 증거를 보여드리겠습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이 있었다. 단백현이 옆에 서있는 고왕흘에게 포권을 취하며 부탁했다. “내공의 금제를 잠시 풀어주시겠습니까?” “내공의 금제를?” 고왕흘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무공 수위를 봤을 때 그리 위험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아직 확인 절차를 마치지 않은 상태에서 이를 풀어줄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러나 천여운이 허락한다고 했기에 풀어줘야만 했다. -타타타탁! “하아!” 내공의 금제가 풀리자 그의 입에서 김이 흘러나왔다 막혔던 내기가 돌아가면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내공을 순환시킨 단백현이 탁자 위에 올려 진 찻잔을 가리켰다. “응?” “잘 보십시오.” 반쯤 채워져 있는 찻잔을 들고서 그가 단전에 잠재되어 있던 음한의 내공을 운용했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이윽고 변화가 일어났다. -슈우우우! 쩌저적! 그러자 그의 손에서 차가운 한기가 일어나더니, 옅은 수증기와 함께 이내 찻잔 안의 찻물이 얼어붙었다. 북해빙궁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빙공을 선보인 것이었다. ‘쉬운 방법이 있었는데, 당황해서 하마터면 괜한 의심만 받았구나. 휴우.’ 단백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중원의 무림인들은 불가능한 능력을 선보였으니, 이제 자신의 신분을 의심치 않을 거라고 여겼는데, ‘응?’ 그를 바라보는 눈빛이 여전히 미심쩍다. 심히 당황스러웠다. ‘왜, 왜 그러는 거지? 빙공을 보였는데 어째서?’ 누구 한 명 할 것 없이 여전히 불신의 눈빛으로 가득했다. 북해빙궁을 상징하는 빙백신장(氷白神掌)을 응용해서 보여주었는데, 이것으로도 증명이 안 된다는 것이 이상한 상황이었다.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어하는데 천여운이 탁자 위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솨아아아! ‘!?’ -쩌저저저저적! ‘뭐, 뭐야!!!’ 그 순간 강렬한 한기가 발산하며 방 전체가 서늘해지더니, 탁자에 하얀 서리가 생겨나며 이내 얼어붙어버렸다. 완전히 얼어붙은 탁자를 천여운이 가볍게 내려치자, 그 부분을 중심으로 균열이 일어나며 얼음조각처럼 부서져 내렸다. -파스스슥! 바닥에 떨어진 얼음 파편들을 보며 단백현이 황당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어, 어떻게 이런 극음의 내공을?” 말도 안 될 정도의 극음의 한기였다. 게다가 그가 선보인 빙백신공의 내공 운용보다도 훨씬 빨랐다. 차가운 북해에서 살기 때문에 사시사철 한기에 노출되어서, 체내에 음기를 지니고 있는 북해인들도 아닌 천여운이 이런 능력을 보이자 도리어 놀라버렸다. “이러면 나도 북해빙궁의 사람인가?” “.........” 이런 식으로 물으니 할 말이 없어진다. 잠시 말문이 막혔던 단백현이 말까지 더듬으며 입을 열었다. “대, 대체....어떻게 이런 음기를 지닌 겁니까?” “그게 중요한가? 북해빙궁의 사신임을 증빙할 만한 신표를 보이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라 생각되지 않는데.” 단백현이 난처해했다. 애초에 그는 의심을 받을 만한 상황이었다. 태상교주의 신분패를 들고 오기는 했지만, 마교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일종의 함정일 수도 있기 때문에 섣불리 믿기 힘든 것은 당연했다. “교주님. 굳이 이렇게 하는 것보다 더 쉽게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습니까?” 허봉의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최근에 천여운이 가장 많이 써먹는 암시와 자백제를 쓰면 확실하게 거짓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있다. 뭔가 불안함을 느낀 단백현이 다급히 말했다. “잠깐 기다려주십시오! 그건 아시겠죠? 본 궁의 무공인 빙백신공을 극성으로 익힌 자는 머리카락이 내공의 영향으로 은발이 됩니다.” “.....그대의 머리카락은 흑발로 보이는데.” 희미하게 회색빛을 띠지만 그래도 짙은 흑발이다. “저는 극성으로 익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팔층 신공 중에 오층의 경지에만 달해도 빙백신공을 십성 공력으로 다루게 되면 은발이 발현합니다.” 이 말에 천여운이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대호법 마라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객실 안에서도 무림에 대한 경험이 가장 많은 마라겸 역시도 이 부분은 잘 알지 못하는지 고개를 저었다. 북해빙궁은 삼십여 년 전에 단 한 차례의 남하했을 때를 제외하고 실질적으로 중원인들과의 교류도 적었고, 그들과 유일하게 대립했다가 교류를 한 이들도 정도 무림맹뿐이었다. 황하 이남에 자리한 마교였기 때문에 북해빙궁과 한 번도 부딪치거나 교류를 할 작은 건수조차 없었기에 빙백신공의 자세한 효능까지는 알 수 없었다. 정보를 주로 다루는 암종의 수장인 환의 장로라면 혹시 알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십만대산에 있었다. 그때 마라겸이 이를 알만한 한 사람을 떠올렸다. “왕전 공이라면 알지도 모르겠군요.” “아.....그럴 수도 있겠군.” 이에 천여운이 일리가 있다고 여겼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무쌍검 왕전이 수로삼십채의 수적 몰살 사건을 계기로 오대고수가 되기 전까지는 정파 무림인으로 활동했던 것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삼십여 년 전에는 왕전이 한참 후기지수로서 정도 무림맹의 단원으로 활동하던 시기였으니, 충분히 알 법도 했다. “허봉. 왕전 공을 불러와라.” “넵. 교주님.” 천여운의 명에 허봉이 부리나케 객실을 나섰다. ‘왕전......왕전....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왕전.....앗!’ 그들이 나누는 대화 속의 낯익은 이름에 누구인지 고민하던 단백현이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무쌍검 왕전!” 생각해보니, 개봉으로 향하는 와중에 들었던 것 같았다. 마교주 천여운에 대한 놀라운 신위 이외에도 중원 무림을 들썩이는 소문 중 하나가 오대고수인 무쌍검 왕전이 마교에 입교했다는 이야기였다.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세외 무림인 북해빙궁 역시도 한 때 중원 무림 진출을 꿈꾸었었기에 때문에 중원에서 명성을 떨치는 무림인들에 대한 이름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흐지부지한 이야기가 되었지만 말이다. '마교 한 곳에만 중원무림의 오대고수가 두 명이나 있다니. 당금 무림의 패권을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구나.' 오대고수의 신위는 귀가 따가울 만큼 들었다. 그러기에 경이로울 따름이었다. “그만 놀라고 이제 증명해라.” “아, 알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증명을 하기 위해서 빙백신공을 익힌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으로서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고오오오오! 방금 전에 빙백신장을 응용했을 때와 달리 제대로 빙백신공을 운용하자, 단백현의 몸에서 눈에 띠는 변화가 생겨났다. 서리가 일어나며 피부가 새하얗게 바뀌며 흑발이었던 머리카락이 모근부터 시작해 은발로 변해갔다. “오오!” 눈앞에서 일어나는 신기한 현상에 고왕흘과 호상화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흑발이었던 단백현의 머리카락이 완전히 은발이 되어서 여느 사람들과 다른 신비한 분위기마저 풍겼다. ‘신기하군.’ 어떠한 내공 운기법을 지녔는지는 몰라도 놀라운 현상이었다. 방금 전까지는 약간의 미심쩍은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왕전이 증빙만 해준다면 확실히 북해빙궁이라고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슈우우우! 단백현이 빙백신공의 운기를 중지하자, 이내 은발이 다시 빛을 잃고 흑발로 바뀌었다. 하나의 마술을 보는 듯 한 신기함이었다. “보셨습니까?” 아까와는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에 단백현은 내심 다행스럽게 여겼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은발만큼은 빙백신공을 익혀야만 가능한 일이기에 충분히 증명이 될 거라 확신했다. “교주님. 왕전 공을 모셔왔습니다.” 그때 마침 허봉이 다른 객실에 있던 왕전을 데려왔다. 오대고수이자 한때 정파인이었던 무쌍검 왕전이 증명만 해준다면 이제 마교주 천여운을 설득해서 도움을 청해야 하는 또 다른 난관이 남아있었다. ‘그래도 태상교주의 신분패가 있으니, 그 자의 말이 맞다면 도움을 줄 것이다.’ 객실 문이 열리며 가장 먼저 허봉이 들어왔고, 그 뒤로 누군가들이 따라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아.....왕전 대협이라!’ 어렸을 적부터 들어왔던 오대고수 중 한 사람인 왕전을 본다는 기대감에 부푼 단백현이 얼른 뒤로 몸을 돌려서 포권을 취하려는데, “북해빙궁의 단백현이 중원 오대고수이신 왕전 대협을....엇!?” 단백현의 두 동공이 지진이 난 듯이 흔들렸다. 왕전의 옆에 새하얀 얼굴에 은발의 미녀인 왕여군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이, 이건 대체?’ 순간 당황한 단백현이 어쩔 줄 몰라 했다. 방금 전에도 천여운이 극음의 내공을 선보였기 때문에 불신을 당했는데, 같은 일이 벌어질까 두려워 제 발이 저려서 해명했다. “뭐, 뭔가 잘못 되었습니다. 저 소저 분은 대체 어떻게? 빙백신공을 익히지 않고는 이런 일이....” 횡설수설하는데 이제는 울상마저 짓고 있었다. 태상교주 천인지의 신분패만 보인다면 만사형통으로 일이 진행될 거라 여겼던 단백현은 정말 억울할 지경이었다. * * * 비슷한 시각, 정도 무림맹의 본단. 무림맹의 웅주 회의실에 맹주 이목을 비롯한 네 명의 웅주들이 탁자에 올려놓은 장문의 서찰 내용을 훑어보면서 심각한 얼굴로 상의를 하고 있었다. 회의실의 바깥에 있는 응접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이가 있었는데, 북해빙궁 단백현의 숙부인 단주성이었다. 그는 궁주 대리가 보낸 서신을 전달하고 한시가 급함을 알렸다. 그래서 맹주 이목은 현재 무림맹의 본단에 있는 웅주들을 긴급 소집하여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한 시진 가까이 기다리고 있는데, 왠지 불안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곳 정도 무림맹으로 내려오기 전에 소문을 접했다. ‘하필 이럴 때 그런 사건이 터졌었다니. 아아.’ 통허현 진성에 있었던 전쟁 때문이었다. 그 사건으로 정도 무림맹의 전력에 많은 타격을 받았다고 들었다. 평화 협정을 맺고 나서 주기적으로 교류를 가졌지만 어쩌면 이번에는 도움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우려마저 생겼다. 회의실은 의견이 반으로 갈려서 격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개방의 방주 홍팔우가 서찰의 내용 중에 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건 너무 위험하오. 맹주. 머리가 네 개 달린 용귀라니?” “홍 방주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대체 얼마나 오랜 세월을 살아온 영물이기에 그런 괴물이 북해빙궁에 봉해져 있단 말입니까?” 의견을 분분하게 만든 서찰의 요청. 그것은 바로 이무기나 불기린과 더불어 신령스러운 영물이라 불리는 용귀(龍龜)를 퇴치하는데 도움을 달라는 간곡한 내용이었다. < 82장 북쪽에서 온 손님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