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꼬맹이 마녀와 티티노양, 그리고 여기 등장한 모든 캐릭터에게 이 내용을 바칩니다. [꼬마마녀 이야기] 일요일의 아이 티티노 by. azderica *** 그다지 먼 옛날은 아니다. 그저 봄의 여신이 눈을 한 번 깜빡일 쯤 아니면 여름의 여신이 하품 한 번 할 쯤 그렇게 신들에게는 가볍고도 짧은 시간 동안 조금은 특이한 생을 살다간 신탁의 마녀가 여기에 있다. 마녀로서는 최초로 아즈데리카(일요일)에 태어난 아이이자, 마녀이자 마왕인 자. 그리하여 두 개의 영혼을 지녔으며, 두 개의 모습을 지닌 자. 그럼에도 제 힘을 과시하지 않고 떠도는 바람처럼 들판에 피어난 풀꽃처럼 발길 닫는 모든 곳을 둥지 삼아 즐겁게 살다간 자. 윤회의 수레바퀴를 함께 이어온 친구들을 무엇보다도 아끼던 자. 스스로가 '마녀'임을 자랑스러워했던 자. 이제 이곳에 그런 그녀의 작고도 큰 얘기가 펼쳐진다. 바로, 이곳에--- *** 1. 중대 발표 2. 수행시작 -1- 티티노가 모르는 이야기, 하나 -2- 티티노가 모르는 이야기, 둘 -3- 티티노가 모르는 이야기, 셋 3. 불완전(不完全)의 완전(完全) -1- 티티노가 모르는 이야기, 넷 -2- 티티노가 모르는 이야기, 다섯 4. 어디로 갈거나 -1- 티티노가 모르는 이야기, 여섯 -2- 티티노가 모르는 이야기, 일곱 -3- 티티노가 모르는 이야기, 여덟 5. 수행 재시작! 라이나폴스로... -1- 티티노가 모르는 이야기, 아홉 -2- 1. 중대 발표 그거 알아? 일요일의 아이는 신비한 힘이 있대. 일요일의 아이는... --아즈데리카(일요일)에 태어난 꼬마마녀.... 1 "나, 중대발표가 있어!!" 나는 참나무 안, 내 작은 보금자리에 친구들을 불러모았다. 일주일의 한 번, 작은 티타임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내가 아니지. 오늘 중대발표를 해 버리는 거야! 친구들은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글라인은 막 구워낸 버터쿠키를 정신없이 입에 우겨 넣다가 멈춘 상태였고 자칭 기법사(氣法司)인 사인은 이미 글라인의 손에서 무참하게 바스러져 가는 쿠키를 빼앗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정지한 상태였다. 그 불쌍한 쿠키의 파편조각이나마 먹으려는 카스왈르는 손가락으로 가루를 모으다가 나를 쳐다보았고 이미 파편조각을 먹는 것에 만족하고 있던 보노는 입가에 가루를 잔뜩 묻힌 채,--그녀는 다람쥐였다--이제 배를 뿌듯하게 채워 만족스럽다는 듯 작은 몸을 카스왈르의 다리에 기대고 앉아 여유 있게 나를 보고 있었다. 특히 호후스--그녀의 이름은 Ghost, 즉 유령이라는 의미인데 왜 그런 이름인고 하면 정말 말 그대로 유령이기 때문이다--는 희끄무레하고도 투명한 몸을 하고선 과자를 우걱우걱 먹고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호후스가 과자를 먹으면 과자가 그 몸을 통과하는 것이 그대로 보인다. 그리고 그 과자는 그대로 밑으로 떨어지고 그걸 주워 먹는 것은 롱긴이었다. 쩝쩝...... 잘도 먹는군. 나는 다시 한번 강조하며 말했다. "나는 결심했어. 나.... " 내 아늑한 참나무 보금자리. 보노가 그 조그만 손을 조물조물 놀려서 정성껏 만들어 준 예쁜 꽃 분홍 레이스 커튼, 제법 손재주가 있고 기운 센 글라인이 만들어 준 통나무 식탁, 기법사 사인이 만들어 준 푹신한 밀집 침대, 호후스가 선물한 작고 예쁜 향초, 그리고 그것을 올려놓는--롱긴이 열 손가락에 모두 붕대를 감아가며 만든 작은 탁자, 카스왈르가 가져온 예쁜 제라늄 화분이 있는. 나는 이곳에서 발표를 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지금 그것을 실천하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들 경청할 자세가 되어 있는지를 살펴야 했기에 잠시 말을 끊고 둘러보았더니, 모두들 아직까지 모든 행동을 정지한 그대로였다. 나는 '과연, 평소 교육을 얼마나 잘 시켰는지에 따라 이럴 때 효과가 드러난단 말야.'하며 속으로 흐뭇해했다. 그래서 만면에 미소를 띄운 채, 나는 드디어 오늘의 중대 사안을 발표했다. "나, '대 마왕' '아즈데리카'가 될 거야!!" "......" "...." "..................." 모두들 잠깐, 아주 잠깐 정지상태를 지속하더니 글라인은 기법사 사인에게 빼앗긴 반쪽 짜리 쿠키를 되찾기 위해 짧은 손을 휘둘렀고, 보노는 그대로 카스왈르의 다리에 기대 잠이 들어 버렸고, 카스왈르는 재빠르게 가루를 갈무리했다. 호후스는.... 여전히 과자를 흘리고 있었고 롱긴은 또 그 쿠키를 잽싸게 바닥에 떨어지기 전 받아서 입으로 가져갔다. "뭐야, 모두들....!!" 내가 소리를 지르려 할 때 갑자기 내 아늑한 보금자리를 진동시키는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 콰당----!! 탁자 위에 푸른 리본을 달고 앙증맞게 놓여 있던 소국 다발이 들썩이고 보노가 만들어 준 레이스 커튼이, 문이 열리는 기세에 들이친 작은 돌개바람에 '펄럭∼'하고 휘날렸다. 그리고 카스왈르가 준 제라늄 화분이 잎사귀를 출렁거리며 놀라는 소리를 냈다.(내게는 제라늄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녀 역시 나의 친한 친구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나 조금 늦을 거라고 얘기 했었잖아∼!! 근데 먼저 시작하다니.... 앗, 벌써 다 먹었잖아?" 요란하게 뛰어든 것은 몽몽이었다. 동네 촌장 할아버지의 손자, 천방지축 장난꾸러기. 하지만, 악의가 없고 뒤끝이 없어 모두들 몽몽을 좋아했다. 그러나 역시 지금 내 말을 끊어서 방해한 것은 용서 못해! "변, 개굴이∼!" - 펑∼ "개굴∼, 개굴∼" 몽몽은 원래 몸이라면 세 걸음이었으면 왔을 식탁까지의 공간을 수십 번 팔짝거려서는 간신히 도착했다. 몽몽이 변한 것을 본 친구들의 표정은 확 달라졌다. 흥, 한번씩 본때를 보여야 한다니까. "음... 진지하게 생각해 봤는데.... '대마왕'하구 '일요일(아즈데리카)'하구는 좀 안 어울리지 않냐?" 글라인이 짧은 팔을 끌어 턱에다 손을 괴며 말을 꺼내자--그는 드워프이다. 현재는...-- 사인도 뒤질 새라 입을 열었다. "그래 '아즈데리카'는 약해. 좀 더 카리스마 있는 강한 걸로 하는 게 어때?" "음... 일요일의 대마왕? 한가로운 마왕이란 뜻인가? 그런 대로...." "아냐, 난 사인의 말에 찬성이야. 에.... 거센소리가 들어가는 것이 더 힘있게 들려. 그런 이름 뭐 없을까?" "음.... 무서운 이름이 좋아. '하데스'나 '사투루누스'나.... 위엄과 권위가 넘치지?" 보노, 카스왈르, 롱긴의 순서로 거의 쉴 틈 없이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별로 신통한 의견은 없었다. "무엇보다... 넌 마녀잖아. 왠 대마왕?" 글라인은 자신이 정곡을 찔렀다는 듯 기고만장한 표정을 하고 나를 보았다. 그러나 그건 그만의 착각일 뿐이다. '대 마녀 왕' 뭐 그런 식으로 풀어 볼 수도 있지 않은가? 어쨌건 지금 말장난하려는 것이 아니지. "아무튼, 나는 하고야 말 꺼야. 대 마왕을." 보노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어째서 마왕이 되고 싶은 거야, 티티노? 넌 마녀로서도 자질이 훌륭한데." "그건...." 그렇게 묻는다면.... 실은 딱히 할 말이 없다. 그저 마왕이 되고 싶을 뿐. 낼 모래로 이제 겨우 10살이 되는 나에게 그런 것까지 묻는다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 나는 너처럼 폴리모프도 마구 할 수 있는 527살 먹은 엘프가 아니라구.(일반적으로 엘프들의 평균 연령은 700∼900세라고 한다. 오오, 세상에나∼!) 그런데 마왕은 어떻게 되는 거지? 그걸 생각하게 되자 나는 스스로가 대책 없는 말을 꺼내놓은 것이란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모르는 것을 가지고 혼자 끙끙거리는 성격이 아니다. "생각 해 봤는데.... 마왕은 어떻게 하면 될 수 있지?" 다들 입을 벌리고 한참 있는데 먼저 정신을 차린 롱긴이 헛기침을 하며 말을 꺼냈다. 롱긴은 뭘 하는지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그러나 제법 똑똑한 친구다. 그는 세상사에도 꽤나 박학다식하고 마력이나 마법에 대한 지식도 상당한 편이다. 허나 또렷한 무언가를 실현해 보인 적이 없어서 그의 실력이 실제 어느 만큼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실은 어디까지나 지식만 지니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음... 마왕은, 우선 마력을 빵빵하게 키워야겠지. 그런 다음, 아니 마력을 키워가면서 악행을 저지른다거나......" "꼭 악행을 저질러야 해?" "엥? 그... 대개는 그렇잖아? 마왕이 악행을 저질러서 용사가 파티를 구성해서 무찌르러 떠나고..." 롱긴을 대신해서 카스왈르가 놀라면서 대꾸했다. 그러자 그에 대한 의견들이 분분했으나 역시 쓸만한 의견들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버터쿠키 외에도 호두 머핀을 잔뜩 구워 놓았지만 그걸 내 주고픈 생각이 사라져 버렸다. 몽몽 개구리는 어느 샌가 내 무릎위로 올라 와 지느러미가 달린 쬐끄맣고 초록빛으로 윤이 나는 팔을 흔들며 온 몸으로 무언가를 표현하고 있었다. 걱정 마, 몽몽. 24시간 후에는 풀리는 마법이니까. 그 사이에 뱀한테 먹히지 않기만을 기도해 줄께. 촌장님은 중요한 일이니 꼭 오라고 하셨단다. 어제 오후에야 마법이 풀린 몽몽은 그 동안 집에도 못 들어가고 보노의 집--내 보금자리인 참나무 가지 위에 있는 조그만 구멍--에다 사발 하나 갖다 물을 채워 놓고 거기에서 헤엄치며 있었단다. 그리고 저녁때나 집에 들어가서 엄마한테 호되게 야단을 맞고, 오늘 아침 퉁퉁 부은 얼굴로 내게 촌장님의 얘기를 전하러 왔다. 맞은 것은 엉덩이인데 왜 얼굴이 퉁퉁 부었담? 나는 약초를 발라주려고 엉덩이를 보이라고 했다. 그런데... "왁, 넌... 너 나를 뭘로 보는 거야? 이래봬도 일곱 살이나 먹은 사나이라구!" "그래, 나는 내일이면 열 살이 되는, 너 보다 한참 누나야. 어서 벗어!" "너.... 넌 정말 미워. 흑∼" 나는, 내가 모르는 사이 뭔가 실수를 했나보다. 몽몽이는 그 크고 순진한 눈에 왕방울 만한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아니면 새삼 엉덩이가 또 아팠던 걸까? 그러기에 약초 발라준다고 할 때 바르지. 그럼 금새 나아서 안 아플 텐데. 이래봬도 약초로 연고 만드는 솜씨 하난 끝내준다구. 그러나, 난 한번 사양하면 더 권하지 않는 사람이란 말이야. 흥! "그럼 말아. 나 조금 있다 갈게. 먼저 가 있어." ".... 나 먼저 가? 나 혼자?" 묘한 재촉과 응석이 실린 몽의 말투에 나는 짠--한 눈을 하고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 혼자 가기 싫으면 거기 연못가에서 개구리 친구라도 잡아서 함께 가렴." "너... 넌.... 넌 싸나이 마음을 너무 몰라∼!! 으앙∼!!!" 몽이는 이번엔 주먹만한 눈물방울을 흩날리며 뒤돌아 쏜살 같이 뛰어갔다. 도대체 이번엔 뭐가 불만인 걸까? 요즘 몽이의 눈물을 보는 일이 잦다. 아무래도 심신이 허약해졌나 보다. 도룡뇽 뒷다리에 여러 가지 약초를 넣고 만든 보약을 한 첩 달여 먹여야 할 듯 하다. 나는 창고로 돌아와 촌장님 집에 가져 갈 새로 만든 연고며 약초들을 가방에 주섬주섬 챙겨 넣었다. 뒷방 가득히 쌓아 놓은 말린 약초들을 주섬주섬 챙겨 넣어도 그 크기가 전혀 부풀지 않는 작은 가죽 배낭은 엄마 아빠가 나에게 남기신 물건들 중하나이다. 나의 엄마는 마녀이고 아빠는.... 아빠는 정확히 뭘 하셨는지 모른다. 그저 내 눈에 비쳤던 아빠는 맨날 할 일 없이 폼잡고 앉아 빈둥대면서 나에게 재롱(?)이나 피우던 것이 다였다. 그런 것을 일명 '하얀 손'이라 한다고 카스왈르가 말 해 주었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글라인이 '그럼 너희 아빤 사자네?'하길래 그게 무슨 의미냐고 묻자 '백수의 왕, 라이언 킹은 사자 왕, 킹 라이언은 왕 사∼자. 킥킥킥....' 라고 대답하다가 나한테 한 대 얻어 터졌다. 그리고 글라인은 턱에 붕대를 감고 일주일동안 누워 있어야 했다. 뼈가 아물려면 그래야 한다나? 내가 그때 마법 아이템을 실험하기 위해 '강철 장갑(강철같은 효과가 난다고 강철이지 재료가 강철인 것은 아니다)'을 끼고 있었던 것이 그의 불행이라면 불행일까... 아무튼 문병 가면서 특제 고구마 케익을 구워다줬으니 사과는 충분히 했던 거지? 그때만 해도 글라인은 사람이었다. 기초 마법만 배운 상태에서 우쭐거리는, 약간 통통하고 성격이 음험한데가 좀 있긴 해도 귀여운 녀석이었다. 그때는 키도 컸다. 열 세 살인데도 170제나(cm). 먹는 게 다 키로만 갔나보다. 그러나 그는 난쟁이(드워프라고도 한다. 엘프와 더불어 대표적 이종족인데 이들은 키가 평균 100∼110제나 정도로 작은 편이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수염이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로 변하고부터 본격적으로 음험해진 것 같다. 녀석이 난쟁이, 즉 드워프로 변한 것에는 다 사연이 있다. 아직 초급 클래스인 주제에 나면서부터 마력을 지닌 내 앞에서 마법을 시전 해 보겠다고 우쭐대길래 한번 해보라고 했다. 맞장 뜨는 것을 사양할 내가 아니다. 글라인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변하겠다고 '변화(變化)의 마법'을 시전 하는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이봐, 이봐. 항상 말하는 거지만 인간들은 너무나 주문이 복잡하다구. 나처럼 간단하게 해야지. '변(變), 개구리! 아니면 변(變), 해달...' 난 인간이 아니냐구? 그야 외양은 인간이지만, 어쨌든 마녀의 딸이니까 완전한 인간은 아니지. 뭐, 솔직히 말하면 아빠도 제대로 된 인간인지 의심스럽긴 하지만. 글라인은 시골 마을의 삼류 마법사 양성소에서 오늘 막 배운 뜨끈뜨끈한 마법을 들고 와서 저렇게 설치고 있다. ....솔직히 말하겠다. 삼류는 아니고... 음... 그래, 진짜 솔직해져버리자. 실은 도시의 이름 있는 마법사들도 와서 한 수 배우고 간다는 마법사 로이카르스(마법사 이름치곤 화려하지 않은가?) 아저씨의 마법사 양성학원. 글라인은 그곳에서 마법을 배우는 중이다. 그런 대단한 아저씨가 왜 이런 시골에 와서 제자를 키우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는 이 숲이 아주 마음에 들었나 보다. 그는 가끔 우리 집에도 와서 나와 마법이나 마력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가곤 한다. 물론 나는 주로 듣는 쪽이고 그는 주로 먹는 쪽이다. 나는 그 아저씨의 몇 마디 얘길 듣기 위해 아주 비싼 수업료인 내 특제 쿠키--초코칩 쿠키를 다섯 개씩이나 상위에 올려놓는다. 그러면 그는 차와 함께 세 개는 먹고 두 개는 꼭 손수건에 싸서 들고 간다. 아껴 뒀다가 집에 가서 먹으려는 거다. 내 쿠키 만드는 솜씨는 이 근래에서 소문이 자자하기 때문에 이렇듯 쿠키를 달라고 오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나는 내 마음에 든 사람이 아니면 쿠키를 주지 않는다. 그러니까.... 나는 그 아저씨가 마음에 들었다는 얘기다. 흠흠. 얘기가 곁길로 샜다. 그래서...... 글라인은 평소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검은 똥개인 '케르베로스'로 변하기 위한 주문을 장장 10여분에 걸쳐 땀을 뻘뻘 흘려가며 외우기 시작했다. 좀 더 안전하게 마법진을 그려 놓고 할 일이지. 네 마법진 솜씨는 알고 있지만 난 맞장 뜨겠다고 하는 녀석은 2시간이고 3시간이고 기다려 줄 용의가 있어. 글라인이 마법진을 그리는 실력은 이미 정평이 나 있었다. 줄이 삐뚤삐뚤해서 지웠다가 다시 그리고, 또 지웠다간 엉뚱한 것까지 지워 다시 그리고 하는 악순환이 지속되었던 것이다. 그나마 그와 치열한 경쟁을 하는 라이벌 자칭 '기법사' 사인은 마법진 하나는 정확히 그렸다. 그러나 그림 그리는 사이에 뒤에서 갈기면 끝이지, 뭐. 암튼 주문을 다 외운 글라인은 드디어 마지막 한마디를 외쳤다. "변해라. 케르베로스!!" - 펑---!!! "......." 그리고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은 짧은 팔과 몽탕한 다리를 지닌, 그리고 얼굴에는 주름이 잡히고 머리색과 같은 갈색 콧수염과 동색의 턱수염이 난 드워프였다. 실은 처음에는 로브가 줄어든 것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로브 속에서 바둥대던 무엇(?)이--아마도 글라인이 변한 무엇(!)이겠지만-- 로브를 벗어제치자 그 다음에 나타난 것이 앞서 설명한 모습 그대로의 드.워.프. 였다. 나는 혹시나 케르베로스로 변한 글라인이 딴 데로 공간이동을 했는가 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어떤 낌새도 보이지 않았다. 케르베로스는 원래 괴수도감에 나온 케르베로스를 묘사해 보자면 짧고 윤기 나는 검은 털에 몸은 아주 늘씬한 개의 형상이며 키는 2젠(m)이 넘고 눈은 한밤에도 형형하게 번뜩이며 입에서는 지옥의 유황불을 내 뿜는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내는 소리는 지옥의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듯 두렵고도 소름끼치는 소리라 하지, 아마? 그러니, 글라인이 변했을 케르베로스 역시 덩치가 아주 커야 하는데--아니, 덩치가 작았다 하더라도 주변의 숲에 숨어 있다면 그 움직임을 나무들이 내게 알려 주었을 것이다. 이 주변의 나무들은 모두 나와 친구들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내게 아낌없이 알려주곤 했다. 때때로 위험에 처한 산새들의 소식을 바람에 실어 전하기도 해서 나는 그들을 구한 적도 있었다. 아마도 정령이 깨어 있는 숲이라 그런 것도 가능하겠지만. 그래서 다시 눈앞의 드워프를 주시하자 그는 어깨를 으쓱대며 기고만장해 있었다. 그의 하는 양은.... 아마도 글라인인 듯 했다. 아마 자신의 마법 성과에 으스대려고 하는 듯....? 그는 큰 소리로 웃기까지 했다. "크롸롸롸롸롸 크악∼∼∼!!!!(아하하하, 성공∼!)" 목소리만은 케르베로스인 듯.... 그는 시선이 낮아진 것이 네 발 달린(?) 짐승이 되었기 때문이라 여기는 듯 했다. 그렇더라도 진짜 케르베로스는 네 원래 눈 높이 보다 높은 곳에서 시선을 맞춰야 할걸? 괴수 도감에 나온 키 높이가 사실이라면 말야. 나는 인심쓰는 셈치고 주머니에서 손거울을 꺼내 불쌍한 글라인에게 내 주었다. 그는 처음엔 거울을 받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크아아 크롸롸롹∼ 카우우욱 키이이∼ 취이...." 아마도 네 발이 달렸기 때문에 손으로 그걸 잡을 수는 없다는 뜻인 걸까? 그러나 나는, 지금 생각해 보면 잔인한 행동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몽탕해진 그의 손을 잡아 그 위에 거울을 턱 올려 주었다. 그제야 자신의 몸을 내려다 본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직 이해가 안 가나 보다. 나는 주문을 외워 거울을 좀 크게 해 주었다. "변, 크게." 그래서 그의 손에서 커진 거울은... 너무 크게 했나? 그의 키만큼 커져서 전신을 다 비출 수가 있었다. 나는 그 거울이 쓰러지지 않게 잡아 줘야만 했다. 그리고, 들려오는 그의 괴성! 내가 거울을 어깨로 받치고는 두 손으로 귀를 막았는데도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듯한 그의 음성은 참으로 처절하고도 끈덕지고, 또한 커다란 파동이었다. "크아아아악∼!! 쿠롸롸롹∼ 크르르∼ 크릭크릭∼ 키에에∼" 무슨 의미였을까? 머리털과 수염을 쥐어뜯다가 아파서 다시 놓으며 좌절하는 모습...... 그 모습에서 대충 유추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어찌 된 일인지 아주 이성적이고 냉정하게 말을 꺼냈다. 초보 마법사 주제에 나와 맞장 뜨려한 글라인을 조금 골려주고 싶었던 걸까? "글라인, 너 드워프였니?" "크롸롸∼!!(아냐∼!!)" "몰랐는데.... 너 그럼 인간으로 폴리모프 한 거였니?" "크롸롸롸롸라아아앙∼!!(아니라니까아아아안∼!!)" "근데 드워프는 말을 할 줄 알텐데... 그럼 넌 혹시 오크?" 오크란, 드워프족보다 조금 더 작은 족속들로서 다부진 체격에 일반성인 남자의 서너 배는 되는 힘을 지녔다고 알려져 있다. 그들의 얼굴은 돼지의 그것에 가깝고 무엇보다 냄새가 지독하다고 한다. 그들은 놀랍게도 의사소통이 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종족이라기보다는 몬스터 쪽으로 취급되어 버리는 경향이 있는데, 왜 그런 식으로 분류하는 지는 잘 모르겠다. 나라고 언제나 모든 것을 다 아는 건 아니다. 이 정도의 설명만 하는 것도 어디냔 말야! 난 정말 친절한 것 같아. "쿠워어어엉∼(아니야∼)" 그래서, 내 눈앞에 선 드워프씨의 대답이 참 한참 만에야 나왔다. 어쨌거나 드디어는 눈물을 흘리며 얘기하는 드워프씨. 때문에 나는 또 사무적인 말투로 얘기했다. "오크가 눈물 흘린다는 얘기는 못 들어 봤어. 그럼 너 글씨로 써 봐." 나는 주머니에서 연필과 메모지를 꺼내 글라인(?)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빼앗듯이 받아들더니 뭔가를 열심히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에게 종이를 건넸다. 하지만 나는 그 종이를 금새 되돌려 주었다. "이렇게 휘갈겨 쓰면 알아 볼 수가 없잖아. 다시 써." "크으으∼(흐윽∼)" 이젠 콧물까지 흘리면서 우는 글라인을 보며 나는 조금, 아주 쪼금 불쌍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그가 내민 쪽지에는 비교적 단정한 글--글라인으로선 필사의 노력을 기울인 것이리라... 마법진 솜씨를 보면 글 솜씨도 대강 짐작이 가지 않는가?--쓰여 있었다. - 어떻게 된 거야? 나 왜 드워프가 되었지? 내 주문 다 들었니? 제대로 들었으면 나의 영민한 머리에 기록이 남았을 텐데... 나는 안타깝게도 딴 생각을 하느라 다 듣지 못했다. "아니." "크뤼뤼뤼...." 아주 불쌍하게 기운 없이 축 처진 어깨를 보고 나는 내가 그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우선, 당장은 말을 못해서 답답하겠구나." "크롸롸롸∼!!" 그는 당연하다는 듯,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번에 흐르는 눈물은 기쁨의 눈물인 듯 했다. 그래서 나는 최근에 익힌, 말을 할 수 있게 하는 의사소통의 마법을 시전 했다. 아주 최근에 익힌 것이라 미처 주문을 짧게 줄이진 못했다. "너, 주인의 명령을 받드는 자여. 바람에 힘을 실어 그 음성을 실어 나르는 자여. 이제 너의 새로운 주인인 마녀 티티노가 너에게 명령을 하노니 그의 음성을, 그의 목소리를, 그의 언어를 그에게 불어넣어라. 실시∼!" 마지막 시동어가 이상하다고? 난 간단명료한 것을 좋아할 뿐이야. 그리고 명령을 받드는 힘도 그런 것을 좋아한다구. 이제 몇 번 더 연습해 보구 저 주문도 짧게 만들어야지. 음... 어떻게 줄이면 되나? "음성 불어넣기. 실시∼!"...? 이것도 긴가? 내가 주문에 대해 생각해보는 아주 짧은 시간동안 드워프씨는 멍하니 서 있었다. 뭔가 변한 것이 아직 실감나지 않나 보다. "목소리를 내 봐." "크.... 으으..." 이상하다 마법이 안 들은 것인가? 내가 다시 시전하려 하는 순간 그는 꽉 막혀있던 무엇이 터져 나오는 듯 무섭게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쿠워어어... 어째서 내가, 내가 이렇게 된 거얍? 내가 왜? 그 잘생기고 미끈하던 내가 왜? 뺨에 살이 좀 통통하긴 했어도 그게 오히려 매력이었던 내가 왜 이렇게 주름진 얼굴이 되어야 하는 거야? 내 탱탱한 어린 피부를 돌리도∼ 내 키 돌리도∼으으 이렇게 몽탕해지다니∼오우우우우웅∼" 말하는 투를 들어보니 글라인이 확실했다. 그래서 나는 친절하게 이번엔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그 모습도 그다지 나쁘진 않아. 귀여운 걸? 그리고, 원래 드워프들은 나이가 어려도 주름이 좀 있어. 글.라.인. 그리고 수염도..." "아아악---!!" 내가 한 말이 확인 사살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동정해서 한 말이었는데. 그는 다시 머리와 수염을 쥐어뜯다가 아파서 놓는 것을 반복하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통곡했다. "크어어어∼" 우습게도...... 그러나 차마 소리내어 웃지는 못했지만, 그의 울음소리나 비명소리는 '케르베로스'의 목소리를 지닌 때 그대로였다. 아니, 원래 그런 소리를 냈었던가? 그러다 나는 내가 여전히 대형거울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그것도 글라인이 눈만 들면 바로 보이게끔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거울을 줄였다. "변, 원래대로." 작아진 거울은 다시 내 손안에 쏙 들어오는 손거울로 변했다. 그 거울을 주머니에 넣으며 글라인의 대성통곡을 듣고 있는데 갑자기 숲 한편이 술렁거리더니 오솔길 사이에서 롱긴과 카스왈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무슨 괴물의 소리야? 티티노, 별 일 없어?" "으.... 저기 마을 어귀까지 다 들려. 애들이 무섭대. 그래서...." 그래서 알아보러 온 거라고? 그럼 알아보도록 해. 나는 말없이 턱짓으로, 주저앉아서 더 작아 보이는 글라인을 가리켰다. 그러자 롱긴과 카스왈르는 다가오던 걸음을 멈추고는 긴장했다. 그가 오크로 보이는 것일지도... 하지만 이 근처에는 오크가 살지 않는다. 이 근처는 정령의 힘이 실제로 미치는 숲이니까 오크들은 무서워서 근접도 않는다구. 뭐, 그래도 간 큰 오크도 있을 수 있으니 긴장을 하는 것은 아주 바람직한 행동이야. "그... 그건 뭐야, 티티노?" "소리를 들어봐선 괴물 같은데... 근데 누구 목소리랑 비슷한 듯도 하구..." 그야 당연하지. 그대들이 10여 년을 들어온 친구의 목소리라네. 훗...... 그런데 대성통곡을 하면서도 그들의 얘기를 들었는지 어깨를 흠칫 하던 글라인은 더욱 더 큰 소리로 울어 제끼고 있었다. 이번엔 허리를 펴고 고개를 번쩍 치켜들어 하늘을 보며. "크헝헝헝헝.... 허엉∼" "나... 난쟁이다....!" "허걱, 드워프 할아버지가 여긴 어떻게?" "나... 난 전에 도시에 가서 딱 한번 봤는데...." "난 많이 봤지만... 드워프 나이는 도통 모르겠어." 난 널 더 모르겠어, 롱긴. 대체 이 마을에서 살기 이전엔 어디를 어떻게 돌아다녔기에 모르는 것도 없고 못 본 것도 없는 거지? 드워프를 많이 봤다고? 언제, 어디서? 무의식중에 이렇듯 한번씩 흘리는 말들을 조합해 보면 롱긴은 겉보기 보담 나이가 꽤 있을 듯 했다. 이름 그대로 롱긴(long+길다)인가? 그럼 여기 드워프로 변한 글라인과는 정반대인가? 나이는 열 셋이지만 할아버지처럼 보이는 글라인. 겉모습은 열 네 댓 살의 소년이지만 그 실제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롱긴. 훗, 웃기는 콤비다. 그런데.... 물.론. 그들의 대화를 들은 글라인은 이제는 광분하며 부르짖고 있었다. "쿠롸롸롹∼ 하라버지래∼ 난쟁이래∼ 크워어어어엉∼" "......" "마... 말을 하는군...." "그.... 그럼.... 드워프도 지성이 있는 족속이라구....." "쿠화하하하학.... 지성이 있는 족속이래.... 드...워....프....으흐흐흐흐....." ".....!?" "....!" 두 사람은 그제서야 뭔가 눈치를 챈 듯 했다. 그 울부짖음... 그전보다 정도가 심해지긴 했지만, 그리고 어디선가 듣던 말투... 목소리는 좀 더 낮고 거칠어졌으나 저 발작하는 동작하며.... '미니mini 글라인'인 듯..... 아니, '올드old 글라인'이라고 해야 하나....?? "세상에, 글라인.... 글라인이 맞니?" "아니, 어쩌다가 이렇게.... 야, 너 글라인 맞아?" "글라인 맞냐구... 크워어어어엉∼" "......" 롱긴은 상황파악이 되자 글라인에게로 성큼성큼 다가 왔다. 카스왈르는 아직 불확실한 것이 싫었던지 제자리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그래, 저것이 정상적인 인간의 반응이란다, 롱긴. 아니, 카스왈르 쟨 엘프와의 혼혈이지? 수목의 엘프와... 그래서 그녀의 머리는 싱싱한 풀잎과도 같은 초록색이다. 그 머리칼로 숲 속에 숨어버리면 찾기가 아주 힘들었다. 그러나 나는 다 찾을 수 있다. 왜냐고? 앞에 읽어보면 안다. 난 리바이벌 안 해. 롱긴은 침착하게 글라인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그의 옆에 주저앉아서 그를 내려다보면서. 그것이 그를 더 절망하게 하는 것에는 상관없이. 그건 그의 배려가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지금은 상황을 살피는 것이 우선이니 그렇게 한 것뿐이다. 그러나 글라인은 자신보다 키가 5제나(cm)나 작던 롱긴이 자신을 내려다본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음, 이제는 자포자기 했나보다. 별 반응이 없다. 한동안 그의 상태를 들여다보던 롱긴은 눈살을 찌푸리며... 롱긴 웃으면 봐 줄만한 얼굴인데... 아니 솔직히 말할게. 무척 잘생긴 얼굴인데, 찌푸리니까 꼴뚜기 같애 보여. 그렇게 찌푸리지 마..... 하고 속으로 생각하는 나에게 말을 했다. "글라인이 무슨 마법을 쓴 거야?" "으응... 케르베로스로 변하는..." "주문은 들었어?" "아니, 처음에 '온 세상의 힘을 관장하시는 하르모이아이시여 어쩌구'하는 것 하구 마지막에 '변해라. 케르베로스!!' 하는 시동어만..." "흠... 이거 복잡한 주문에 이중으로 걸렸는걸? 풀기 힘들게 되었어. 처음 주문은 알 수도 없는 상태고.... 어떻게 이중으로 걸었을까?" 나는 '이중'이란 말에 갑자기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럼 내가 한 의사소통의 마법이 두 번째 족쇄가 되어 글라인을 묶고 있단 말야? 아직 경험한 바는 없지만 마법책에서 '이중 마법의 부작용'이란 것을 본 적은 있다. 이중마법이란.... 말 그대로 이중으로 겹쳤다는 소리다. 이건 첫 힘과 두 번째 힘을 시전한 사람보다 월등히 강한 힘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면 영원히 풀 길 없는 부작용이자 평생을 지고 가야 하는 고통인 것이다. 새... 생각해 보니까 굉장한 거잖아? 허억--!! "글라인, 실은 뭐가 되고팠던거야?" "케르베로스... 쿠워워....." 넌 변하지 않아도 목소리는 케로잖아... 라고 속으로 얘기하는 듯 롱긴은 아주 잠깐 미소를 머금었다가 풀고는--물론 글라인이 안 보는 사이에--, 다시 걱정스런 목소리로 얘기했다. "그건 아주 어려운 건데... 너 다른 사소한 것에 먼저 적용을 시켜 봤어야지.... 잘못 된 주문을 스스로에게 걸어버렸으니... 게다가 두 번째의 주문은... " 그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 나를 보았다. 나는 가슴이 아주 뜨끔한 것을 아닌 척 하며 눈을 깜빡였다. 에구구.... 이건 이제부터 거짓말을 하겠소 하는 신호인데.... 언제나 이 버릇이 고쳐질거나... 나 이 버릇 고치기 전에는 아마 평생 거짓말하기 힘들 것 같다. 그는 짐작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해 줘, 티티노. 처음 변했을 때 글라인의 상태가 어땠어?" 그건 솔직히 말 할 수 있다구. 그래서 나는 주저 없이 대꾸했다. "음... 목소리는 완벽한 케로였는데, 겉모습은 완벽한 드워프였다고나... 아하하..." 나는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글라인이 성공한 줄 알고 잘난 척을 했더라는 말...... 까지는 차마 못했다. 글라인의 애처로운 어깨...... 그의 갈색 머리털이며 수염이 꺼칠해 보였다. "어떻게 그 두 주문을 뒤섞을 수가 있나.... 참 신기하다. 근데.... 그 어려운 주문을 외고 난 다음에.... 넌 뭘 했니, 티티노?" 으.... 나? 하하... 내가 뭘 했더라? 친절하게 거울도 보여줬고, 같이 고민도 해줬고, 글씨 못쓴다고 타박도 했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중'족쇄를 걸어버린 거다..... 그러나 롱긴은 말 안 해도 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내 저었다. "이건 너도 알겠지만.... 그래, 너로선 말을 못해 답답해하는 글라인이 안돼 보여서 그런 거겠지만 말야... 이중으로 걸린 족쇄가 어떻다는 거... 잘 알지? 너 네가 건 마법 완전 무효로 만들 수 있겠어?" 에휴, 그게 가능하다면 이렇게 뜨끔하지도 않는다구. 그 마법은 이제 막 익힌 거란 말야. 무효화까지는...... 그래, 무효화를 하는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당장, 1시간 이내에 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그 시간이 지나면 무효화하기 불가능하다는 소리다. 그러나 한번 물어는 봐야지. 혹시 이 방법이 듣지 않을까...? "저기... 다시 말을 못하게 하면 어떨까?" "하하... 이번엔 삼중 족쇄를 채우자고?" "......" "크워어어...." "저기, 이중 삼중 족쇄라는 게 뭐야?" 이제야 그 괴성의 드워프가 글라인이라는 확신이 섰는지 롱긴의 옆에 다가와 선 카스왈르가 슬며시 참견을 했다. "넌, 아직 몰라도 돼. 엘프와는 상관없어." 왜 상관이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냥 그렇게 말해버렸다. "그래, 카스... 잠시만... 티티노," 그가 나의 이름을 부른다. 두근두근.... 아아... 심장이 벌떡거린다. 롱신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무서워서..... "말을 못하게 하는 마법은.... 하아, 말을 못하게 하는 것과 원상태로 되돌리는 것은 아주 다른 거야. 조심스럽게 해야 해. 잘못하면 더 이상한.... 아니다 말자. 정말 더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어쩌겠니...." 방법이 없다는 소리를 참 길게도 하는구나, 롱긴. 너의 언변에 감탄하겠당. 어쨌든 큰 일이 벌어진 것만은 틀림없었다. 이젠 어쩔 수가 없다. 나의 처음 원대한 목표였던 모든 마법을 초월한 마법의 마스터인 '마도대왕'이 되는 수밖에.... 여기까지 생각하니 내가 왜 대마왕이 되려 했던 건지, 그 동기들 중의 하나가 기억났다. 그랬어. 글라인에게 걸린 이중 족쇄를 풀어주기 위해서였다. 이중족쇄란 아주 황당한 경우에 발생하는 것으로 보통은 마법을 두 번 세 번 건다고 해서 언제나 생기는 경우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이건 확률의 문제로.... 한마디로 글라인의 운이 나빴다고 할 수밖에. 그러나 글라인은 그 짧아진 팔 다리에 상관없이, 아니 오히려 그 때문에 더욱 땅에 가까워진 탓에 땅이나 상에 놓인 음식들을 더 빨리 집어먹을 수가 있었다. 야구로 치면 스트라이크 존이 좁아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엊그제 티타임때에도 사인보다 더 많은 과자를 집어먹지 않았던가. 글라인은 난쟁이가 된 스트레스를 먹는 것에 모조리 푸는 듯 했다. 글라인... 너 계속 그 페이스로 나간다면.... 내가 장차 1, 2년 내로는 어렵겠지만 3, 4, 5, 6, 7, 8, 9, 10...년 이내로 대 마법사, 혹은 대 마왕이 된 다음에 네 족쇄를 풀었을 때 너는 굴러다닐지도 몰러. 그 때 나는 글라인에게 다짐했다. "내가 언젠가... 널 본모습으로 돌려줄게. 걱정마, 글라인...." "크워어어......." "너 이제 말 할 줄 알잖아. 그 소리 좀 고만 내." "큐워어어어엉∼" "자꾸 그러면 다시 말 못하게 해서 삼중 족쇄 걸어버린닷∼!!" "....." 가만 생각해 보니까 그때의 기억이 새삼 선명하게 새록새록 떠오른다. 후후.... 어쨌든 그것도 동기라면 동기겠구낭. 대마왕이 되려 했던.... 그럼 다른 동기는 뭐였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짐을 싸긴 했지만 한 두 번 한 솜씨가 아니기에 내 손은 정확한 양을 잡아내어 약초를 배낭으로 우겨 넣고 있었다. 잘 말린 허브는 향도 좋았다. 난 내 방에만 박혀 있어도 언제나 상쾌하고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었다. 그러나.... 이젠 그것도 다 필요 없게 되었다. 내일은 내 10번째의 생일. 따사로운 이 봄에 맞는... 내 열 번째의 귀빠진 날. 흠.... 마녀는 10살이 되면 여행을 떠나야 한다. 그것이 마녀들의 규율이고 법이었다. 어디에서 어떻게 하고 자랐건 간에 10세의 생일을 맞는 날 저녁, 그 동안 열심히 운전을 연습해 온 마법의 빗자루를 타고 달이 휘영청 뜬 하늘 위를 나는 것이다. 그것도 보름달이라면 더욱 좋겠지. 보름달은 희망과 풍요와 따사로운 미래를 상징한다. 마녀들에게는.... 우리의 불투명한 마법 수행 길을 비추어 주는 등불인 것이다. 태양보다는 희미하지만 어둠 속에서는 충분히 밝은 빛. 그 빛이면 충분하다. 모든 길, 저 끝의 결말까지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건 살아있는 생명의 몫이 아니다. 미래를 거울 보듯 아는 것은. 다만 현재의 상황에 최선을 다하며 지금보다 조금 더 기운을 내는 것, 그것이 중요했다. 나는 그렇게 지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마녀들은 다른 인간과는 다르다. 혼자서, 그러나 함께 커나가야 한다. 아니, 그렇다면 인간들과 같은 걸까? 아구구... 촌장님 집에 빨리 가야지... 평소보다 많은 양의 약초를 집어넣느라 시간을 좀 지체했다. 나는 이제는 비어버린, 그래서 저기 꼭대기 조그만 창문이 확실히 보이는 창고를 스윽-- 둘러보았다. 내가 그 동안 약초를 보관하고 관리해 온 곳. 넌 참 훌륭한 창고였어. 이제 또 다른 마녀의 창고로 쓰이게 될지는 모르지만, 암튼 고마웠어. 당장은 필요하지 않지만 내일 지니고 떠나야 할 짐들은 침대 옆에 다 꾸려져 있었다. 몽이 오기 전까지 나는 새벽같이 일어나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다. 뭐, 평소에도 풀잎에 맺힌 이슬을 모은다던가 한참 자느라 정신없는 지렁이나 지네를 기절시켜 채집한다던가, 개구리랑 대화를 나눈다든지--하느라 새벽같이 일어나긴 하지만. 창고를 나와 방으로 들어온 나는 이미 싸 둔 짐 외에 손에 들어야 할 것과 등에 매야 할 것을 챙겼다. "다녀올게...." 나는 집을 나설 때면 항상 참나무 집에게 인사를 한다. 그럼 그 목소리를 듣고 보노가 쪼르르 따라 나선다. 그리고 나의 집은... 낮고 은은한 목소리로 나에게 '잘 다녀와'라고 울림을 보낸다. 이것도 오늘이 마지막. 내일은 진짜 이별이다.... "보노..." "왜?" 어깨 위에 걸터앉아 가을에 저장해 둔 땅콩을 까먹는 보노는 실은 엘프가 변신한 것이다. 그녀처럼 원래 자신의 종족과는 다른 종족으로 변신하는 것을 '폴리모프'라고 하지? 그녀는 지성이 있는 생명체 중에 가장 똑똑하고 현명하다는 엘프임에도 다람쥐가 되고부터는 치매끼가 있는 듯 보인다. 진짜 다람쥐처럼, 자기가 파묻은 밤이며 도토리를 찾지 못할 때가 종종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내가 먹여 살리니까 지금껏 별 걱정 없이 살아왔다. 내가 떠나면 어떡하지... 보노는 아무 생각 없이 순진한 눈으로 나를 쳐다 보고있다. ".... 아냐." "싱거워, 불렀으면 말을 해야지." "헤헤... 그냥 부르고파서..." "쳇, 쿠키나 줘." "여기..." 내 쿠키를 거침없이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건 친구들 중에서도 보노가 유일하다. 다른 친구들은 그래도 눈치껏 요청하지만 보노는 당당히 받아먹는다. 한 집에 사는 식구라서 그런가? 어쨌든 그녀는 내게 가장 친한 친구였다. 그리고... 맞아. 그녀는 엘프였지. 아주 가끔 내 앞에서만 본 모습을 하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엘프라는 것을 종종 까먹고는 한다. 그저 놀릴 때만 생각난다. '엘프가 밤 어디 묻었는지도 몰라? 것도 기억 못 해? 아하하....' ....하는 식의... 저쪽에 희끄무레한 것이 보인다. 아마도... "앗, 티티노. 어디 가는 길이야?" 어떤 형상이 나무에서 고개를 쏙 내미는 것(그것도 그대로 통과해서 내미는 것)을 본다는 것은--!! 언제 보아도 엽기다. 그녀는 그것이 재밌나 부다. 내가 놀라는 것이. 난 마년데, 저런 하찮은 일에 놀라다니. 그러나 벌건 대낮에 반투명 희끄무레한 물체(?)가 갑자기 벽 같은 데서 슥- 나타나 보라. 밤에 보는 것 보다 더 황당하다. 거기다, 호후스는 희안한 유령이었다. 낮에도 아무 상관없이 돌아다닌다. 정령의 숲에 살아서 그런 것인가, 원래 그런 것인가. "호후스... 놀래 키지 좀 마......" "하하... 놀래 키면 쿠키 놓고 도망갈까봐 그랬지." "그런 일은 절.대.로. 없어." "우후후... 그래도 나 쿠키 줄 거지?" 그녀가 유령임에도 쿠키를 열심히 먹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동정심이 많은 그녀는 쿠키의 향만 즐기고 밑으로 떨어뜨린 것을 주변의 여러 생물들이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착한 호후스. 그러나 롱신은 그녀가 그저 쿠키의 향기를 좋아하기 때문일 뿐이라고 한다. 냉정하게 보는 것인지 삐딱하게 보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여기, 아껴 먹어." "고마워" 그녀는 쿠키를 싼 손수건을 조심스레 받아 들더니 저만치로 가 버린다. 그녀의 등뒤에 대고 난 큰 소리로 외쳤다. "호후스... 오늘밤에 우리 집에 꼭 와야해∼!!" "알았어......" 멀어져 가면서 대답하는 호후스. 그녀는 어떤 것에도 애착이나 미련을 두지 않는다. 그건 그녀만의 철학이었다. 아마 내가 떠나면 나를 잊겠지. 왠지 울적해진다. 그만두자. "앗, 티티노" "왜, 보노?" "저기... 로이카르스...." "엥? 그 아저씨가 왜?" "저기에 있다구..." "......?!" 보노는 작고 앙증맞은 손으로 제 얼굴보다 더 큰 쿠키를 들고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나무 사이로 로이카르스 아저씨와 글라인, 기법사 사인, 세 사람이 서 있었다. 세 사람은 뭔가 심각한 표정으로 열띤 토론을 하는 듯 했다. 그래서 나는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세 사람도 나중에 저녁에 초대했으니. 다만, 로이카르스 아저씨만큼은 따로 만나고 싶었는데... 말없이 씨익 웃는 그 웃음이 너무나 귀여운 중년. 내 타입이란 말야. 후후후..... 로이카르스 아저씨는 글라인이 드워프가 되고 난 다음에 그를 보더니 난처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었다. 그리고 롱긴이 하는 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아냐, 롱신.(난 이 순간 롱긴의 본명을 처음 알았다. 그는 롱신이었던 거다. 그런데도 버릇은 어쩔 수 없는지 지금까지도 가끔씩 '롱긴'이라고 불러대곤 한다) 이중의 족쇄가 걸리기 전이었더라 해도... 케르베로스와 드워프의 혼합이라니... 그런 건 듣도보도 못했다. 이 녀석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엄청난 주문을 만들어 버린 거야. 깨닫지 못해서 문제지. 하하... 글라인, 그래서 난 네가 천재인지 둔재인지 항상 헷갈린다.' 로이카르스 아저씨의 호탕한 웃음이 끝나기도 전에 글라인은 표정이 환해졌다. 언제나 조금만 칭찬을 해도 기고만장한 그였기에. '그럼 제가 전혀 새로운 주문을 만들어 낸 것이군요? 에헴.... 난 과연 천재야. 어때 사인? 너의 기법 따위론 상대도 못하겠지?' 그러나 1젠(m)이 채 넘을까 말까인 그 키에 짧은 손을 허리에 걸치고 웃는 모습은 가관이었다. 변하기 전의 모습이라면 봐 줄만 했겠지만. '하하하.... 그러나 글라인, 네 주문이 불완전했던 것은 사실이다. 오히려 티티노의 주문 덕에 넌 안정을 되찾은 거지. 그래서 이중의 족쇄에 걸려 버렸고. 그대로 있었다면 네 몸은 분리되었을지도 몰라. 분리되려는 주문과 그것을 막아주는 주문이 네 몸에 동시에 존재하므로... 때때로 상쇄가 되어 제로 상태가 되기도 하지만 이 경우엔 이중의 족쇄가 성립된 거란다. 이젠 티티노의 말처럼 < 대 마도왕 > 같은 것이 오기 전에는 풀기 힘든 주문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어떠냐? 최초의 드워프 대마법사.... 멋지지 않니?' 드워프....라는 부분에서는 움찔하던 글라인도 '최초의'와 '대마법사' 부분에서는 득의 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댔다. 그리고 그건 아까보다 더 가관이었다. 그리고 그는 한가지를 간과하고 있었다. 그는 바로 이 몸, 마녀 티티노의 덕분에 분리되지 않았던 거다. 분리... 그건 뭘 의미할까. 설마 손, 발, 목, 다리 등이 다 따로따로 분리된다는 뜻인가? 어쨌든 그래서 글라인의 당면 목표는 '최초의 드워프 대마법사'였다. 그의 부모님들은 여기에 계셨다면 당연히 경악을 하셨겠지만, 벌써 3살 때부터 그 싹수(?)가 보인 말썽꾸러기 아들 하나 없는 셈치고 지나가던 로이카르스 아저씨가 달라니까 주어버렸던 때문에 그는 연고가 따로 없었다. 그리고 그는 로이카르스 아저씨를 아버지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그건 기법사 사인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경우엔 스스로 집을 버리고 떠나 왔지만. 보노는 내 어깨 위에서 쿠키를 아작아작 먹고 있었다. 그녀의 이빨은 참 귀여웠다. 쏙 나온 하얀 대문니(齒)... 그건 그녀의(다람쥐일 때의) 매력포인트다. 나는 오솔길을 지나 마을 입구에 들어섰다. 마을 대로에는 사람들이 바쁘게 지나다니고 있었다. 요즘 들어 마을에 느긋한 모습이 사라진 듯 했다. 낯선 사람들도 많이 보이고, 도시에서 무언가 큰 일이 벌어질 거라는 소문이 온 마을에 돌았다. 도대체 무슨 일인 걸까? 일전에 봤던 도시는 참 예쁜 집들이 많은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 도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다는 걸까. 지나치는 사람들과 반갑게 인사를 하면서 나는 마을 중앙에 있는 촌장님의 집 현관 앞으로 걸어갔다. 계단을 오르는데 누군가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카스왈르였다. 그녀는 나에게 반갑게 손을 흔들며 뛰어왔다. "안녕, 티티노? 오늘 저녁때 가면 되지?" "그래, 올 때 배는 비우고 와. 오늘은 넉넉하게 준비할 테니까." "와아... 특제 쿠키와 케익...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돌아. 에... 나 지금은 스승님 있는 곳에 가야 하니까... 잠시 심부름 온 거거든. 있다 봐∼!!" 마을 입구로 뛰어가는 그녀의 찰랑대는 초록 머리는 언제나 이슬을 머금은 듯 싱그러웠고, 체취에선 풀향기가 났다. 그녀는 아마 로이카르스 아저씨에게 초목과 생명에 대한 마법을 배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기분은 좋아진다. 언제나의 생각이지만 그건 정말 좋은 자질인 듯 했다. 나는 현관에 있는 줄을 잡아 당겼다. 밖에서는 소리가 들리지 않지만 안에서는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있으리라. 곧 문이 열리고 몽이의 엄마인 히사냐가 나타나 나를 반겼다. "어서 오너라, 티티노. 기다리고 있었어. 촌장님은 안에 계신단다." 그녀는 나를 한번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 현관 안에 들어선 내 외투를 받아 옷걸이에 잘 걸어두고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나는 언제나 오는 익숙한 곳이기에 안내 없이 촌장님의 방으로 갔다. 그 방은 촌장님의 서재 겸 마을의 대소사를 들고 오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주는 곳이었다. 잠은 딴 곳에서 주무시지만 하루 대부분은 그곳에서 생활하신다. 촌장 할아버지는 나에게 삼촌 같은 존재였다. 나는 이 마을에 맡겨지면서 처음 2년간은 촌장님의 보살핌 아래 이 집에서 보냈다. 그는 나를 친조카처럼, 친손주처럼 아껴주고 사랑해 주었다. 그래서 마녀의 집으로 참나무둥치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후에도 나는 이곳에 종종 놀러 오곤 했다. 몽몽이는 내가 이곳에 머물던 중에 태어났다. 촌장님 큰딸의 첫 아들로 온 식구의 귀염을 받은 몽이. 나는 큰언니를 돕기 위해 몽이의 기저귀 차는 것을 거들었었다. 가끔 기저귀를 가는 중에 쉬를 해 대면 정말 대책이 안 서곤 했는데(아주 가끔... 기저귀를 가는 중에 응가를 하기도 했다) 지금은 저렇게 컸다고 '싸나이 운운'하는 것이다. 훗, 가소로운 몽. "촌장 할아버지, 저 왔어요." "오.... 티티노냐? 어서 오너라." 할아버지는 돋보기를 아래로 내리면서 보고있던 책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품으로 뛰어드는 나를 답싹 안아 주었다. 할아버지는 예전보다 몸이 많이 축나 있었다. 몸을 아끼셔야 한다고 항상 당부 드렸지만 웃기만 하실 뿐 자신의 건강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환을 만들고 말린 약초를 가져와 집에 놓고 가곤 했다. 그러면 환은 몰라도 약초들은 언제나 마을 사람들에게 나뉘어 졌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마음씀씀이를 알고 있는 까닭에 나는 별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내가 캐야 하는 약초의 양은 더 많아졌지만. "우리 꼬마 마녀가 이제 내일이면 열 살이구나." 할아버지는 여러 가지 감회가 교차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9년. 9년의 세월이었다. 그 시간동안 나는 이곳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 그리고 그 바탕엔 할아버지의 배려가 있었다. 마녀들은 보통 인간과는 다른 데가 있다. 이미 어머니의 뱃속에서 잉태되는 순간부터 그 영혼은 주변의 모든 것을 보고, 듣고, 느끼며, 사유한다. 그래서 마녀들의 태교는 보통 인간들의 수준과는 아주 달랐다. 나의 아빠는 항상 엄마 곁에서 내게 이런저런 얘기들을 해 주곤 했다. 그건 엄마도 마찬가지였고 그들은 여러 곳을 여행하고 돌아다니면서 내게 많은 것을 경험시켰다. 뱃속에서 배운 모든 것들은 태어나게 되면서 산지식이 되어간다. 경험을 통해 지식을 실제로 익히는 것. 난 부모님과 함께 지낸 1년과 이 마을에서 살아 온 9년 동안 그 과정을 거쳤다. 마녀는 1년 동안은 그 부모와 함께 살며 기본적인 것들을 익힌다. 초기 1년 동안 마녀들의 성장은 다른 인간들에 비해 월등히 빠르다. 만 한 살이 된 어린 마녀는 3∼4살 정도의 인간 아이들과 비슷하다. 그 지능이나 지식 정도에 있어서는 더욱 큰 차이가 났지만. 그 후에 어린 마녀는 인간들의 마을에 맡겨진다. 그 마을에서 공부하며 자랄 수 있도록. 그리고 그 마을은 어머니 마녀의 주문으로 어린 마녀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죽게 될 때까지 마을이 번창하기를 기원한다. 즉, 나를 알고 있는 몽이나, 카스왈르나, 동네 꼬마들 등등이 죽을 때까지 그 기원은 지속적인 생명력을 갖는다는 의미다. 그러나.... 카스왈르는 반만 인간이니까 제외해야 되는 것일까? 그건 잘 모르겠군. 그런데, 앞서도 말했듯 한 살 짜리 마녀는 3∼4살 짜리 인간 아이와 비슷한 체격조건을 지니지만 이후의 성장속도는 비슷하다. 그러나 지능이나 사유에 있어서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의 차이를 보인다. 당연히 지금 나의 정신 수준은 20세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지식 수준은 말할 것도 없고. 이건 내가 잘난 척 하는 것이 아니라 마녀들은 다 그렇단 얘기다. 마녀들은 확실히 오래 산다. 그 대신 자주 태어나는 편이 아니다. 한 마녀가 임종을 맞을 때 즈음해서 하나 태어나는 정도랄까? 가끔 평범한 인간 중에서도 마녀가 태어나기는 한다.(그런 경우 정식 성인 마녀로서 인정받은 이들이 참석하는 마녀회의에서 그녀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하고 실천한다) 보노는 집안에 있기 싫다고 창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러나 실은 할아버지의 시선을 피해서 도망간 것이었다. 그녀는 이상하게도 할아버지의 시선을 싫어했다. 그 눈에 주시 당하면 본질을 간파 당할 것 같아서 싫다는 것이다. 내게는 할아버지의 눈이 따스해 보이기만 하는데. 그녀가 엘프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나와 호후스 뿐이다. 다른 사람들에겐 마녀와 함께 살아서 말을 할 수 있게 된 신기한 다람쥐일 뿐이었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시선은 그것을 아는 듯 보여서 싫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엔 그녀의 과민반응이었지만. "그래서.... 내일은 떠나는 거로구나. 서운해서 어쩌지?" "할아버지.... 나는 꼭 돌아 올 거예요. 그때까지 건강하게 있어야 해요." "그래그래...." "정말이에요. 17세의 생일이 지나 성인이 되면, 그때 꼭 돌아 올 테니 절대로 병나거나 노망나면 안돼요." "헐헐....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뎃끼, 노망이라니...." 할아버지는 그래도 정말 화난 것은 아니었다. 말로는 야단을 치지만 눈은 웃고 있었다. 그는 내가 마을을 떠나는 것과 왜 떠나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물론 수행을 위해 떠나는 것이긴 하지만, 실은 아주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그건.... 아아... 말하기 싫어. 나는 그걸 내 친구들에게 알리고 싶지가 않다. 내가 마녀인 것은 언제나 자랑스러운 일이었지만 그것만은.... 후.... 그래서 나는 내일 밤 아무도 모르게 떠나려 계획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여행이 끝나는 날. 아마도 내가 '대 마도왕'같은 것이 되어 있을 때, 이 마을에 돌아 올 것이다. 그러면 그때는 글라인을 본 모습으로 돌려줄 수도 있겠지. 물론 그가 원한다면 말이다. 혹시 '최초의 드워프 대 마법사'라는 타이틀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놓치고 싶지 않아 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니... 후후.... 나는 정말로 '대마왕'이 되고 싶다. 장난이 아니라 진지하게. 그 정확한 이유가 아직 하나밖에 안 떠오르긴 했지만 그건 내 진심이다. 친구들은 비웃었지만. 그리고 일요일의 아이니만큼 '아즈데리카'라는 닉을 쓸 것이다. 일요일의 아이는 신비한 힘이 있다고 한다. 일반인도 그러한데 마녀는 오죽하겠는가? 원래 일요일에 태어나는 마녀는 거의 없다. 아니, 한번도 없었다. 마녀 역사상. 그러나 나는 일요일에 태어났고, 그건 아마 아빠가 별난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닐까하고 생각해 본다. 그러나 아무리 유추해 봐도 나는 내 아빠가 뭘 하던 사람인지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뭔가 특이한 사람이었다는 느낌만 남아 있을 뿐.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는 나를 무척 사랑했다는 점이다. 그러니 그는 내가 잉태되었을 때부터 엄마와 내 곁에서 항상 떨어지지 않았고, 나에게 언제나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여 주었던 것이다. 나도 아빠를 사랑한다. 9년 동안 얼굴한번 못 봤지만. 하지만 그것이 마녀의 양육법이다.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티티노, 그것 잘 가지고 있느냐?" "그거...... 요?" 난 대부분의 상황에 대해 뻔뻔할 수도 있는 편이었지만 이것에 대해서만큼은 쑥스러움을 참을 수가 없다. 내일부터 다가올 나의 사춘기이자 성장기, 수행기에 대해 생각만으로도 창피해지는 느낌이었다. 그건.... 말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 너무나 쑥스럽다는 것만 밝힐 수 있을 뿐. 그런데 지금 촌장 할아버지는 그때 먹어야 할 약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 약은 내 바램대로 아주 정확히 조절해서 내가 만든 것이다. 어떤 성인이 될 것인지를 염두에 둔, 정확한 배합을 한 약이었다. 우선은 그 정도만 밝혀둔다. "잘 가지고 있죠. 당연히..." "한번 보여줄 수 있겠니?" "...??? 할아버지가 그걸 왜 보구 싶어요?" "그야 내일, 아니 어쩌면 오늘 이후 '너의 모습'을 두 번 다시 못 볼 테니까 왠지 아쉬워서 말이다. 도대체 어떤 약인지 구경이나 하고싶어서...." 아하하.... 망설여지는군요. 그래도 할아버지의 부탁이니 만큼 한번쯤이야 상관없겠죠. "그럼... 한번만요?" "그래, 한번만......" 나는 목에 걸고 있던 가죽끈을 벗어냈다. 가죽끈의 끝에는 작은 주머니가 묶여 있었는데 그것을 힘들게 풀어내자 검은 환약이 모습을 드러냈다. 할아버지는 약 앞에 얼굴을 갖다 대고 한참 들여다보더니 다시 묶으라고 했다. 내가 천을 다시 싸고 끈에 동여매자 할아버지는 자신이 걸어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선선히 그에게 주었다. 할아버지는 가죽끈을 들고 잠시 있다가 천천히 내 머리 위로 팔을 뻗었다. 그리고 목에 잘 걸어주시면서 나를 다시 한번 꼭 안아 주었다. 내가 촌장님의 집에서 나오자 어디선가 보노가 나타났다. 보노는 다시 내 어깨에 올라타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기분이 좋은가보다. 나는 이 마을에 맡겨지던 날부터 스스로의 몸을 보호 할 수 있는 힘과 지식을 지니고 있었으니, 촌장 할아버지가 나를 보호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 마음만은 충분하고도 넘칠 만큼 위해 주었다. 그래서 지금 나는 축복의 주문을 외운다. 조금은 불안한 느낌인 촌장님의 미래를 위해. - 할아버지.... 당신의 앞날에 평안한 잠과 꿈이 깃들기를.... 생을 얼마 남기지 않은 촌로에게 주는 최대의 배려. 나는 이 주문을 마음속으로 외웠다. 이제 오늘 보고나면 마지막. 내일은 어떻게 보낼 지 모르니까....... 보노의 콧노래가 귀에 흥겹게 들려 왔다. 조금 우울해 졌던 기분이 다시 좋아졌다. 화덕을 쓰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인가? 나는 흥겨운 콧노래를 부르며 과자와 케익을 구웠다. 벽난로에는 양철로 된 삿갓지붕을 씌워 원통을 통해 연기를 밖으로 뿜어내도록 해 놓았다. 부글부글 끓고 있는 스프 냄새가 숲을 진동시키고 있을 것이다. 아마 글라인들은 배가 많이 고프겠지. 수련을 열심히 했다면... 달빛 가득! 행복 가득! 그대들에게 행운이 와르르 쏟아지기를. 밤하늘을 날아가는 마녀의 빗자루 그대들의 꿈속으로, 그대들의 사랑 안으로, 궤적을 남기며 도는 별빛 빛나는 밤. 달빛아래 여행하는 이여 하늘을 보라. 문득. 그곳에는 달을 가로지르며 창공을 나는 귀여운 꼬마마녀가 있나니 햇살 가득! 행복 가득! 행운이 우루루 쏟아지기를.... 내가 지은 노래. 단순한 곡조로 흥얼거리기 좋게 만들었다. 이 노래를 부르고 있으면 왠지 기분이 좋다. 보노는 숲을 산책하고 온다했다. 지금쯤 올 때가 되었는데..... 친구들과의 '마지막' 식사시간이다. 오늘은 푸짐하고 넉넉하게 차려야지. 아까 싸 놓은 짐들은 모두 창고에 보관중이다. 짐이 놓인 자리 조금 빼고는 썰렁한 창고를 본다는 건 역시 기분 쳐지는 일이다. 향긋한 허브와 나물, 치킨과 양파를 섞은 특제 샐러드도 두 양푼 가득 만들었다. 고기는 촌장님댁 큰언니가 몽몽 편에 보내주신다고 했다. 이제 준비는 거의 다 끝난 것 같다. 앞치마를 벗고 잠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 방 어디에도 친구들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아마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나의 친구들... 나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폈다. 그러고 보니 어제오늘 이런저런 준비를 하느라 잠을 별로 못 잤다. 친구들이 오려면 시간이 아직 남았고.... 잠이나 한 숨 자야겠다. 오면 누군가 나를 깨울 테니까... 나는 안심하고 잠들었다. 벽난로에 줄여 놓은 불이 타닥타닥 하는 소리가 조금씩 멀어져갔다. ............ 너무 조용했다. 나는 눈을 떴다. 사위가 아뜩한 어둠에 잠긴 듯한 고요. 무한의 침묵 속에 빠져버린 듯한 느낌. 이건 뭘까? 본능적인 공포를 자극하는 절대 어둠 같은 이것은.... 그리고 다시 눈이 보이자 한편으론 안심이 되었지만 한편으론 이상했다. 주변의 침묵은 여전했다. 정말, 이상한 느낌. 침대에서 일어나는데 '풀썩∼'하며 먼지가 올라왔다. "......?" 아침에 방을 깨끗이 치우고 시트도 갈고 나갔는데 왜 이런 묵은 먼지가....? 마치 십 년 정도는 방치해 둔 폐허에 쌓인 먼지처럼 퀴퀴한 냄새. 그러나 방안을 둘러 본 나의 눈은 너무나 놀라서 한동안 눈을 깜빡일 수가 없을 정도였다. 방안은 온통.... 엉망이었다. 뭐라 표현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을 정도이다. 커텐이며 탁자며 모든 것이 부서지고 깨지고 찢어지고 뒤집어지고.... 내가 정성껏 끓였던 스프는 난로 바닥에 쏟아져 말라붙은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오래된 흔적 위에는 역시 먼지가 가득 쌓여 있어서, 뒤집어진 스프 냄비에 검게 말라붙은 흔적이 아니었다면 잘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식탁 위... 아니 이미 산산조각이 나 버린 두꺼운 통나무 식탁은 과자를 놓아두었던, 지금은 바닥에 우그러져 있는 철판 위에서 마치 과자인양 그렇게 놓여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도대체 무슨 일이.... 주위를 둘러보다가 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밖은.... "아.... 아아.... 어떻게 이럴 수가...." 한동안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긴 걸까.... 모두... 모두 어떻게 된 거야. 숲은 그 원래 모습을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시커멓게 타 들어가 있었다. 굵은 그루터기를 지닌 나무들도 모두 타다 남아서 바삭바삭 부서져 내리고 있었고 여린 풀잎이나 작은 나무들은 흔적도 없이 재만 남아 있었다. 마을 쪽을 돌아보았다. 그쪽의 숲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마을로 정신없이 뛰어 갔다. 보통의 불로는 이렇게나 큰 숲이, 그것도 정령의 가호를 받는 숲이 이렇게 탈수는 없다. 그렇다고 발연유(시동어 하나로 불꽃을 발동하여 무엇이든 태워버리는 마법유)를 뿌린 것은 아닌 듯 했다. 이건... 이건 마법에 의한 불이었다. 마을로 정신없이 뛰어가던 나는 언제나 있던 마을 입구, 그저 나무로 대강 형태만 만들어 놓은 문틀이 있던 곳에 거대한 철제 대문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정신을 수습할 틈도 없이 나는 뒷머리에 충격을 받아 무릎이 힘없이 꺾여 내리는 것을 느꼈다. --...노... --누구? --....티노... --....누구예요?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 그리고 밝은 빛. 나는 눈을 번쩍 뜨고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그리고 내가 멍하니 노려보던 것이 내 방 천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무렵 주위에 있던 실루엣이 현실로 다가왔다. 초점이 흐려졌던 눈이 맞춰지면서 나는 순식간에 현실로 빨려들어 왔다. "어떻게 된 거야?" "티티노, 걱정했잖아? 아무리 불러도 대답도 안 하고..." "들어와 보니까 얼굴이 창백해서... 손도 차고..." "흑... 티티노.... " 너무나 순수한 호후스는... 자신의 몸체만큼이나 투명한 눈물을 방울방울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친구들도 걱정스런 눈길로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특히 무뚝뚝하기로 소문난 기법사 사인조차 눈시울이 붉어져 있는 것을 본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온 몸에 식은땀이 흘러 조금 열린 창에서 들어온 바람이 조금 춥게 느껴졌다. 이제 3월도 중반이 넘어가는데.... 이젠 따스해진 날씨일텐데... 내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친구들은 모두 나를 말렸다. 그러나 조금 이상한 꿈을 꾸었다고 해서, 그래서 좀 놀랐다 해서 마지막 날을 이렇게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몸이 조금 불편한 것을 가지고 파티를 접고, 그렇게 떠나야 한다면 나는 정말 슬플 것이다. 7년이란 세월동안 다시 보기 힘들 친구들을. 이 이상한 꿈이 내게 알리는 바는 나 혼자서도 얼마든 해결 할 수 있을 것이다. 새벽에 당장 숲의 중앙 공터로 달려가서...... 암튼, 지금은 친구들부터 설득해야지! "나 괜찮아. 그냥 가위 눌렸었나봐. 오늘은 아침부터 무리를 해서 그런지..." "그... 그래 니가 음식 준비한 거 보면 알겠어. 무리했는지." "그래도 니 생일은 내일인데... " "원래 이브eve 날이 더 중요한 거야. 자정이 지나면 바로 생일이잖아." 내가 하는 말에 다들 수긍은 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여전히 불안한 눈초리... "됐어. 뭘 그래, 가위 좀 눌린 거 가지고... 나 말짱해. 아악∼!" 하면서 나는 팔을 마구 휘두르다가 손목을 삐었다. 그러자 롱긴이, 아니 롱신이 혀를 차면서 말했다. "그래, 그 힘찬 비명 소리 들으니 괜찮은 거 같다. 다들 자리에 앉자. 사인, 너는 스승님 모셔 오고, 몽아 너는 저장고에 넣어 놨던 고기나 꺼내줄래?" 에 또... 의외로 통솔력이 있는 롱긴, 아니지....... 롱신의 지시에 따라 친구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스왈르는 벽 옆에 선 항아리에서 내가 씻을 물을 떠 주었고 보노는 그 작은 몸으로 길고 무거울 수건을 낑낑대며 들고 있었다. 그리고 호후스는 세수를 하는 내 주위를 정신없이 우왕좌왕 하고 있었다. "고스..., 그렇게 왔다갔다하지 마. 나 이제 괜찮다니까." "그래도... 걱정된다구..." "이제 괜찮아. 이번엔 손목이 삐긴 했지만.... 내 특제 파스를 붙이면 금새 나으니까 상관 없다구." 사인이 로이카르스 아저씨와 함께 도착해서 모두 모이게 되자 파티는 시작되었다. 나, 꼬마마녀 티티노의 10번째 생일 이브를 축하하면서 먹고, 마시고, 떠들고, 장난하고... 모두.... 너희들 모두를 사랑해, 친구들아. 부디 나 잊지마. - 호후스... 내가 가고 나면 몽이 엄마가 쿠키 구워줄 꺼야. 그렇게 약속했으니 안심해. - 카스왈르. 네 싱그런 머리를 보면 언제나 상쾌했는데... 이슬 젖은 풀잎을 볼 때마다 네가 떠오르겠지. 안녕. - 몽아... 정말 씩씩한 싸나이로 자라나야 한다. 엄마 말 잘 듣고... - 기법사 사인. 무뚝뚝하지만 실은 정이 많은 녀석... 후후... 맨날 글라인과 싸우느라 힘들지? 그래도 너니까 버티지... 장한 기법사, 화이팅∼! - 그리고 글라인. 널 위해서라도 나 꼭 다시 돌아 올 테니까 너무 걱정 마. 네 족쇄 내가 꼭 풀어줄게. 물론, 항상 하는 말이지만 니가 원한다면.... - 롱신.... 끝까지 수수께끼로 남는 친구. 넌 언제나 곁에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하던, 실제로 제일 의지되는 친구였어. 그 동안 고마웠어. 그간 롱긴이라 불러서 미안... - 보노보노.... 보노이카 그란델리아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엘프 친구. 다른 친구들과는 또 다른 의미의 친구. 항상 곁에 있어주었던.... 사랑해. 보노.... 나 떠나면 울겠지. 그래도 넌 원래 엘프니까... 나 걱정 안 할게..... - 로이카르스 아저씨.... 아저씨는 아마 알지도 모르겠군요. 촌장 할아버지랑 친하시니까... 아마 아저씨께는 의논을 하는 것 같던데, 모른 체 해 주셔서 고마워요. 내 이상형의 아저씨... 나 기다려달라면 기다릴거예요? 지금까지도 혼자였는데 7년 정도 더 못 기다려 줘요? 후후... 농담예요. 너희들에게도 기원하나니.... 달빛 가득! 행복 가득! 행운이 우루루 쏟아지기를.... 2. 수행 시작 마녀의 성장 의식은 훌륭한 마녀, 온전한 마녀가 되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필수 조건이다. 모든 예비마녀는 이 날을 위해 9년여의 시간 동안 자신이 수련해온 마력과 비약술(秘藥術)을 총동원해 앞으로 자신이 평생토록 지니게 될 새로운 모습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낙오한 자는 쭈그렁 노파의 모습을 한 반쪽 마녀가 되어 비참하고도 짧은 생을 살아가야만 한다. 그러므로, 어린 마녀들이여, 다음의 주의 사항을 보고, 또 명심해서 그대들의 목표를 반드시 이루도록! < 마녀의 변태론 > 중, 어린 마녀들을 위한 주석 1 "카악∼, 퇘--!!" "뭐 이런 게 다 있어?" "저런 꼬맹이 하나를 어쩌지 못하다니, 니들 그러고 덩치가 아깝지도 않냐?" "그러는 넌 뭐냐?" 흥, 나야말로 뭐 이런 것들이 다 있어?....다. 어딜 가나 숲마다 저런 건달패가 있다는 것은, 아니 산적인가? 요즘 세상이 흉흉해 졌다더니 피부로 느껴지는 현실이었다. 벌써 세 번째 고른 숲이었으나 여기에도 지저분한 패거리들은 존재했다. "좋아, 다시 한 번.... 저런 꼬맹이를 어쩌지 못한다는 건 우리 아즈라엘단의 수치닷--!" "오옷... 좋았어. 이제는 오기닷. 너, 꼬마 거기 꼼짝 말고 서 있어∼!!" 나는 2젠(m) 가량만 몸을 솟구쳐 뛰어 올랐다. 이 정도야 약간의 도약력만 있으면 된다. 마법을 쓸 필요도 없다. 아슬아슬 내 밑으로 스쳐지나간 땅딸하지만 덩치가 있는 곰단지 녀석이 내 뒤의 진창에 코를 박았다. 그런데, 뭐라고....? 니들 방금 뭐라 그랬니? "아이코야..... 에퇘퇘.... " "허...허걱...." "으아...." "켁--" 나는 순식간에 내 앞, 5젠 전방에 서 있던 두 명을 랄트의 칼집 채로 정수리를 쳐서 쓰러뜨리고 가운데의 비쩍 마른 녀석의 코앞으로 다가갔다. 양쪽에 쓰러졌던 녀석들이 일어나려 해서 나는 약간의 수면가루를 뿌려 주었다. 한 십분만 자렴. 그리고 다시 마른 녀석을 응시했다. 녀석의 얼굴은 새파래져 있었다. "마.... 마녀...." "그래, 난 마녀야. 니들은 오늘 상대를 잘못 고른 거라구. 난 이제 막 수행 길에 나서서 힘이 펄펄 넘치는 마녀란 말야." "허...헉..." 뒤쪽 진창길에 박혀 있던 녀석도 얼어버렸나 보다. 마녀라는 소리를 듣고. 마녀는 친구들에겐 더없이 다정한 존재이나 자신에게 위해를 가한 사람에게는 용서가 없는 존재라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때론 마녀를 배척하는 사람들도, 배척하는 마을도 존재한다. 원한을 갖기 이전에 아예 담을 쌓겠다는 뜻일 테지만. 그래서 여러 가지를 대비하기 위해 나는 밤에 빗자루를 타고 나를 때가 아니면 마녀 정복(正服)을 입지 않았다. 때문에 녀석들이 날 만만한 꼬마쯤으로 보고 덤빌 수 있었으리라. 지금은 한낮, 숲 가운데를 지나던 중이었다. 내가 보름달이 뜨는 날부터 사흘간을 안전하게 기거할 장소를 찾기 위해서. "그냥 지나가려 했는데.... 니들이 하는 말 중에 걸리는 부분이 있어서 말야. 묻는 대로 대답하면 고이 보내줄게. 알았어?" - 끄덕끄덕끄덕끄덕--- 목 부러지겠다. 아까 까지만 해도 꼬마 운운하며 뒤에서 젤 큰소리 치던 녀석이 이젠 하얗게 질린 얼굴로 유령을 본 듯 나를 보고 있었다. - 후후... 호후스... 내가 너 같이 보이나 봐... 나는 친구를 떠올리게 해준 녀석에게 감사의 미소를 지었지만 왠지 의도와는 다른 효과를 거두는 것 같다. 녀석은 이제 무언가 뜨끈한 김이 오르는 액체(?)를 줄줄 흘리며 바지를 적시고 있었다. "간단하게 묻지. 니들 두목 이름이 뭐니?" 산적단들은 보통, 지명이름을 붙이거나 두목 이름을 붙이거나 둘 중의 하나다. 이 근처에 아즈라엘이라는 지명은 없으니, 그건 얘네들 두목의 이름이겠지. 그러나 확인은 해 봐야 하는 법. 비쩍 마른 녀석이 얼어서 말을 못하는 듯 보였다. 그래서 나는 랄트를 칼집에서 약간 꺼내 보였다. 아주 조금만. 새파랗게 날이 잘 선 랄트의 몸체가 반짝하고 빛을 냈다. "얘가 심심한가 봐. 나는 실은 마녀 검사(이건 순 뻥으로 난 그저 몸이 날래고 힘이 좀 셀 뿐이다)거든..." "두....두....두목은.... 두....두...." "천천히... 더듬지 말고, 침착하게 말해 봐." "두..... 두목 이름.... " "그래, 더 천천히. 분명하게 말해." "아... 아즈라엘....입니다...." 정말? 정말 아즈라엘?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아즈라엘을 떠올렸다. 그는 이런 녀석들과 어울릴 리가 없는데 어찌된 일일까. 깔끔한 성격, 절대 미를 추구하는 반(半)묘인족. 하긴 어떤 덜떨어진 마법사의 고양이 이름도 아즈라엘이라 하던데 이건 어쩌면 흔한 이름일지도 모른다. 그 마법사는 몸체가 파랗고 하얀 모자와 바지를 입는 작은 요정들을 금으로 만드는 외에는 아무 것에도 신경을 쓰지 않는 상황인지라 마법사 연합에서는 내 놓은 존재라고 들었다. 그가 따돌림을 당하는 이유는 '이 종족을 존중한다는 불문율을 깨고 요정을 금으로 만들려 하는 행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년동안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니 마법사들의 의식구조는 과연 평범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가 실제로는 신의 심부름을 하는 천사의 이름을 자신의 고양이에게 붙인 것은 자신의 실험에 행운이 깃들 기를 바라는 의도였을 지는 모르나 그로 인해 이름의 격이 격하된 것에는 애도를 표할 일이다. "너희 두목 어떻게 생겼는데?" "그... 그건..." "뭐냐? 두목 생김새도 몰라?" "저... 저 같은 말단은 잘 모릅니다. 두목 목소리만...." "......?" 뭔가 대규모의 산적단인가? 묘한 녀석들이잖아? 두목의 얼굴을 모르는 졸개라니... 뭔가 체계가 복잡한--다단계에 점조직을 갖춘 괴상하고도 엄청난 규모의 산적단인가? 그렇다면 꽤나 알려졌을 텐데 유명한 산적단 중에 그런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없다. 하긴, 내가 알면 얼마나 알겠어? 본격적으로 마을을 떠나 여행 해 본 건 지금이 처음인데 말야. 나는 눈앞의 녀석을 다시 한번 째려보다가 몸을 휙 돌렸다. 그리고 녀석이 자리에 풀썩 주저앉는 소리를 뒤로 한 채 숲 사이, 길이 없는 쪽으로 들어서서는 휘파람을 불었다. 오늘은 마을을 나선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생일날 저녁, 나는 내 참나무 보금자리에서 달이 뜨기를 기다렸다. 아마 글라인과 기법사 사인, 카스왈르는 로이카르스 아저씨에게 붙잡혀 있을 테구, 몽이와 롱긴, 호후스와 보노는 몽이 엄마의 과자 솜씨를 맛보려고 촌장님 댁에 가 있을 것이다. 달이 떠오를 때까지, 그 달이 중천에 떠서 깊은 밤이 될 때까지, 내가 이 마을을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달이 떠오르자 문을 나섰다. 나는 마녀 정복을 입고 있었다. 까만 색 긴 팔 원피스. 상체는 꼭 맞고 치마는 발목까지 오는 A라인... 목의 커다란 깃은 하얀색. 그리고 끝이 뾰족하구 커다란 챙이 달린 모자, 등에는 가죽끈으로 양어깨에 걸어 고정시킨 랄트(마력검)와 배낭을 맸다. 언제나처럼, 집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돌아섰을 때,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겉으로는 아무 변한 것이 없는데... 이제 내일부터 못 볼 익숙한 풍경들. 천천히 입을 열어 나는 마지막 인사를 했다. 아니, 마지막은 아니야. 꼭 돌아 올 거니까... 그러니까 인사도 평소와 같은, "다녀올게...." 나무도 여전히 '잘 다녀와'라고... 깊은 울림을 보낸다. 내 마음속으로. 그는 알고 있다. 내가 멀리 떠난다는 것을. 하지만 돌아온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니 슬프지 않아. "......?" 이미 어둑해진 때문에 잘 알아 볼 수는 없었지만 무언가 쪼그만 생물이 나뭇가지를 타고 쪼르르 내려오는 실루엣을 볼 수 있었다. 저건? "티티노, 이제야 나선 거야? 한참 기다렸잖아." "......" 내 어깨위로 스스럼없이 쪼르르 올라오는 그 생물은, 꼬리는 몸만큼 커서 그 털이 탐스러운, 고동색 줄무늬를 등에 지닌...... - 아...하...하..... 어떻게 된 거지? 몽이랑 갔을 줄 알았는데.... "뭐 생각하는 거야? 오늘은 달이 짧다구.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가야 하는데 그렇게 정신 놓고 있으면 어떡해? 빗자루나 세워!" "......" "아니, 뭐 하는 거야? 내가, 이 작은 몸으로 빗자루 조정을 해야겠어? 마녀는 내가 아니라 너라구, 티티노." "아.... 하하... 저기, 저기 말야 보노보노..... 너 왜 집에 있었니?" "무슨 소리야? 내가 집에 있지 않으면 어디에 있어야 하는데?" "아... 아까 몽이랑 같이 가지 않았어? 쿠키 먹으러..." "난 촌장님 댁 가기 싫어서 자는 척 했어. 몽이 엄마도 그냥 포기하고 가던 걸?" "......" 아마도 이건..... 보노를 진짜 다람쥐로 알고 있기 때문에 생긴 불상사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몽이 엄마도 보노를 굳이 데려 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보노의 말이 좀 이상하다. "저기, 보노.... 내가 이 밤중에 어디 가는지 알고 있는 거야?" 뭔가 이상한 질문이었지만 뜻만 통하면 된다. 난 지금 정신이 혼란한 상태이다. 그런 것까지 따지지 말기를. 그리고 보노는 당연한 듯 내 말을 받았다. "무슨 소리하는 거야? 527살 먹은 늙은이 취급할 때는 언제고? 내가 마녀 수행에 대해서도 모르리라고 생각했어?" "......" 그녀가 엘프인 것을 종종 잊고 있기는 했지만 그게 이런 곳에도 적용될 줄은 정말 몰랐다. 후--, 그래 넌 엘프였었지. 언제나 잊고 있었지만. "보노...... 그럼 내가 왜 혼자 가야 하는지도 알고 있겠지?" 스스로가 듣기에도 애처로운 내 목소리. "아니, 난 마녀가 수행여행 떠나면서 혼자 간다는 소린 듣지 못했어." "......보노보노, 그게 무슨 소리야. 마녀들은 혼자 떠나는 거라구. 네 말대로 빗자루를 타고.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은 슬프지만 그것이 바로 수행의 시작이란 말야." "흠.... 넌 뭔가 착각하고 있는 듯 한데. 마녀들은 혼자가 아니야. 그 옆에는 항상 친구이자 애완 동물이 있기 마련이라구. 대개는 그게 고양이이지만, 넌 고양이가 없으니 다람쥐로 하는 거야. 그게 바로 나지." ".....보노...." "난 기꺼이 너의 친구이자 애완 동물이 될 의향이 있어. 넌 어때?" "보노보노야∼ 사랑해∼!!" 기어코는 눈물을 흘리게 하는 내 작고 사랑스런 친구 보노. 그래, 너와 함께라면 나도 즐거울 꺼야. 정말, 정말 고마워, 보노보노..... "켁.... 숨막혀, 티티노. 난 작고 연약한 다람쥐라구. 날 죽일 작정이야? 켁켁켁.... 으... 좀 놔줘...." 하지만 나는 보노보노를 더 힘차게 껴안았고 한동안 그대로 있다가 보노가 숨을 못 쉰 탓에 거의 초죽음이 되어 늘어질 무렵에야 그녀를 놔주고는 허리춤에 걸린 빈 가죽 주머니를 열었다. 그 안으로 보노가 쪼르르 들어가자, 적당히 숨구멍만 열어놓고는 다시 주머니를 허리춤에 단단하게 동여맸다. 마법의 빗자루는 옅은 달빛을 모아 환해지며 하늘로 둥실 떠올랐다. 그리고 허공을 가르며 공중으로 치솟았다. 순식간에 땅이 멀어지는 느낌. 그건 빗자루를 타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쾌감이다. 보노는 주머니의 숨구멍으로 고개를 디밀어 바깥 풍경을 내다보았다. 처음이라면 아찔할 만도 했으련만 애써 태연한 척 하는 것이 귀여웠다. 나는 그녀가 멀미를 하지 않도록 빗자루의 중심을 잘 잡았다. 그리고 이제 어느 정도 고도에서 높이를 잡은 빗자루는 속도를 내며 내가 목표한 방향으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밤하늘, 시간을 지체한 탓에 어느새 하늘 가운데 높이 솟아 오른 엷은 달이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티티노∼" 내 휘파람 소리를 듣고 보노가 나뭇가지를 타며 달려 왔다. 쪼르르∼ 가지를 타고 온 그녀는 폴짝 뛰어서 내 어깨에 내려앉았다. 익숙한 솜씨로. "티티노.. 저쪽에 좀 괜찮은 공터가 있었어." "그래? 그럼 가 보자." "저쪽, 자작나무가 있는 쪽이야." 보노와 나뉘어서 의식을 치를 장소를 찾던 중 나는 산적들을 만났었다. 지금은 '상황 끝'이었지만. 나는 보노가 가리키는 방향대로 숲을 헤치며 가볍게 뛰어갔다. 보노가 찾은 곳이 정말 조용하고 인적이 드문, 안전한 곳이라면 좋겠지만 거기도 별로라면.... 다시 다른 숲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시간이 얼마 없다. 만일의 경우 정히 장소가 없을 때를 생각해야 했기에 다른 곳도 마찬가지 상황이라면 어쩌면 결계를 두고 사흘간의 의식을 치러야 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상당히 힘든 일이다. 결계를 두는 것도 힘든 일이었지만 그걸 유지시킬만한 지속적인 힘을 의식을 치르는 사흘동안 내야 한다는 것은. 그렇게 된다면 나는 '부실한' 의식의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런 것은 싫다, 정말로. 보름달이 뜨는 것은 내일 모레. 생일이 지나고 처음 맞는 보름달, 그리고 이후 이틀 밤 동안--즉 다 합해서 사흘동안 수행을 시작한 마녀는 안정적인 장소에서 달빛을 쐬어야 한다. 달빛을 충분히 받을수록 완전한 마력이 갖추어 지고 완벽한 변화를 이룰 수 있기에 그 준비를 위한 시간과 공은 충분히 들여야 했다. 사흘동안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을 안전하고 청명한 숲을 찾아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사흘간의 의식을 치를 준비를 해 놓고 낮에는 자고 밤에는 달빛을 쐬어야 한다. 수행을 시작하며 하는 의식이란...... 아아... 난 이 대목에서 왜 보통인간처럼 자랄 수는 없는가를 생각하며 한탄한다. 이런 갑작스런 변태는 정말 별로다. 내가 마녀라는 것 중에 마음에 안 드는 유일한 것이다. 정말 얘기하기 싫은, 그러나 마녀이기에 겪어야 하는 의식. 사흘간의 의식이 지나고 나흘째 되는 날. 마녀는 그간 들인 공으로 완전한 성인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태어나면서부터 지니고 있었던, 그리고 그 동안 갈고 닦아온 마력과 10세가 되고 첫 보름달의 빛, 그리고 공들여 만든 환약. 이 세 가지가 합쳐져서 마녀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의 모습을 얻게 된다. 원.하.는.대.로.... 모습을 갖출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이가 듣기에는 가히 환상적인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별로다. 그것만은 인간과 같았으면 좋겠다. 정말. 때때로 아름다움을 절실하게 추구하는 마녀가 있는데 그들은 백에 백, 마녀로서의 삶에 실패하기 마련이다. 마력을 동원하는 정도와 환약의 성분 조절을 통해 자신에게 적절한 만큼을 추구해야 하는데 욕심이 많은 마녀들은 자신의 모든 마력과 약성분을 동원해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녀로 변하고자 한다. 그러나.... 마력을 거의 다 소진한 탓에 인간들의 노리개 감이 되거나 들짐승의 밥이 되는 마녀도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것은 할머니 마녀들이 어린 마녀들에게 충고를 하기 위해 지어낸 얘기가 아닐까 싶다. 이런 어리석은 마녀가 있다니, 믿을 수가 없다. 물론 세월이 지나면 마력이 회복되기는 하겠지만 그 전이 문제인 것이다. 생에 제일 약한 순간 치명적 상처를 입게 된다면, 그래서 그 일이 죽음을 불러온다면...... 그런 어리석음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꼭 내가 원하는 만큼만 변할 것이다. 내 목표는 깜찍하고 사랑스런 마녀. 지나친 글래머도 싫고, 눈부시게 아름다워서 모든 이들이 기절할만한 모습도 싫다. 매력은 안에서 가꾸어지는 것. 겉모습만이 다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난 내 현재의 모습에서 많이 변하는 것을 그다지 원치 않는다. 나의 친구들이 못 알아볼 정도라면 곤란하다. 지금처럼 윤기 나는 붉은 머리를 지닌 채, 동그란 얼굴만 계란형으로, 키는 한 165∼170제나 정도? 다른 것은.... 현재처럼 적당히 마른 몸에 검붉고 짙은 속눈썹이면 된다. 더 이상 매력적이어선 곤란하다. 난 지금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이건 자화자찬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실에 근거한다. 흠흠...... 그 정도의 변화라면 기본적 마력과 적당한 달빛, 그리고 내가 만든 환약이면 충분하다. 의식이 끝나도 내 마력은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난 마력을 쓸 데 없는 곳에 쓸 생각은 없다. 내, 보다 원대한 목표는 따로 있으니까. 지나친 것도 모자람도 없이... 원하는 대로 의식을 치르기 위해 나는 꼼꼼하게 장소를 체크했다. 주변 나무의 위치며 공터의 크기, 달빛이 비치는 정도... 그리고 나온 결론은 여기도 좀 부적합하다는 것이었다. "미안해, 보노.... 니가 애써 찾아 주었는데..." "아냐, 그만큼 중요한 일이니까 당연한 일이지. 그럼 다음 숲으로 갈까?" "그래.... 다음에 점찍어 둔 숲으로 가 보자. 하지만 거기에도 적당한 장소가 없다면... 세 번째로 봤던 곳에서 약간의 진(陣)을 치고 의식을 치러야 할 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진을 친다면 네가 힘들잖아..." "그래서 진을 친다고.... 결계가 아닌... 결계라면 지속적으로 마력을 쏟아야 하겠지만 진을 치는 것은 좀 다르잖아. 물리적인 차원이니까." "후... 그래, 어쩔 수 없다면 그래야겠지. 하지만.... 다음 숲에서 네가 원하는 장소를 찾았으면 좋겠어." "고마워. 자, 이제 떠나자." --- 티티노가 모르는 이야기, 하나 "다 되었나?" "네, 촌장님. 이제 그 다람쥐만 잡아오면...." "응? 다람쥐? 아아... 그 보노보노라는... " "네, 아까 몽몽이와 함께 오질 않아서.... 어쩔깝쇼?" ".... 놔 두게." "네? 하지만 그, 마녀의 친구들은 모두 호랑나비풀을...." "괜찮아. 그건 다람쥐일 뿐이지. 사람이 아니니까... 수행 마녀라도 애완 동물 정도는 지참해도 되. 아니, 오히려 필수라 할 수 있지." "아, 그렇군요." 어두운 지하실에서, 촌장과 그의 수하 한 사람은 뭔가를 비밀스레 숙덕거리고 있었다. 달빛이 천장에 붙어있는 손바닥만한 창에서 비쳐들고 있었으나 아스름한 실루엣만 보일 뿐, 무엇이 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었다. 그저 사람 비슷해 보이는 다섯 개의 뭉치가 둥글둥글 바닥에 굴려져 있을 뿐. 그리고 뭔가 수상해 보이는 납으로 된 작은 상자 하나가 촌장의 손에 들려 있었다. "이것도... 쟤들 옆에 잘 놔둬. 내일 아침에 함께 풀어 주면 되." "네.... 이런 납 상자에... 유령을 가둘 수 있다니... 몰랐는뎁쇼?" "류젠님이 특별히 만드신 것이니까.... 어쨌든, 내일 아침까지는 모두 여기서 자도록 해야 한다네. 명심하게. 어차피 약에 취해 깨지도 못 할 테지만..." "저... 저도 여기 있어야 합니까, 촌장어른?" "자네는 입구에서 지키고 있으란 말일세.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건가? 자네가 여기 있으면 자네도 약에 취할 것 아닌가. 사람 참...." "아, 그렇군요. 이제 나갈깝쇼?" "확인은 다 했으니... 그러세. 조금만 더 있으면 나도 취할 것 같군." 그들은 다시 한번 컴컴한 방을 둘러보고는 문을 닫고 나갔다. '철컹--'하고 꽤나 큰 소리가 났으나 지하 방에 굴려 놓은 다섯 뭉치는 꼼짝도 않았다. "로이카르스. 자네는 뭐 하나?" "아, 촌장. 애들은 다 던져 놓고 왔나?" "던져 놓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푹신한 밀짚 깔아서 고이 눕혀 놓고 왔는데." "그거나 그거나." "냉숭냉숭한건 여전하구만. 류젠님께 연락은 했는가?" "아아......" 자신의 서재로 들어선 촌장은 서재에 앉아 있던 존경받는 마법사 선생인 로이카르스에게 마구 하대를 했다.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였지만. 로이카르스는 책상 위에서 붉은 천을 들추어냈다. 그러자 푸른 쿠션 위에 놓인 맑고 투명한 수정이 그 둥그런 모습을 드러냈다. "자네가 직접 하는 게 낫지 않나? 왕년의 위대한 마법사, 현재의 촌장선생." "난 이제 마력 없어. 장난하지 말고 빨리 주문이나 외워." "쳇, 놀리는 보람없기는 예나 지금이나... 그렇게 고지식하니 몇 십 년이나 이런 곳에 눌러 살았지." "자넨 안 그랬고?" "나야 10년밖에 안 됐잖아." "관두게. 자신이 불리한 건 발빼는 놈. 약삭빠르기는 여전해." "흠... 그 약삭빠른 놈을 자네의 사랑스러운 티티노 아가씨께서 동경하신다네. 이를 어쩌지?" "시끄러, 로이카르스. 누가 들으면 진짠 줄 알겠군. 수정길이나 열엇∼!!" "흠... 진짠데... 알았다구. 그렇게 째려보면 무섭단 말야. 중얼중얼중얼중얼.... 빛을 열어 그 주인에게로∼!" 겉보기엔 기껏해야 30대로 보이는 로이카르스와 잘 봐주어도 70은 되어 보이는 촌장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황당한 면이 있었다. 그러나 그 내용으로 봐서는 둘은 친구사이 같았다. 그것도 오래 전부터 잘 아는. "흥, 그 화려 찬란한 주문은 여전해. 겉멋만 들어서는..." "뭐, 내 취향이지만...... 앗!" 그들이 들여다보고 있는 성인 주먹보다 큰 수정구슬 안에 어떤 붉은 상이 어른거렸다. 그 붉은 실루엣이 타는 듯한 붉은 머리칼을 하고 몸에 착 달라붙는 반짝이는 붉은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확연하게 드러나자 두 사람은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인사말은 사뭇 달랐다. "당신의 충실한 종, 다마신. 이제 할 일을 마치고 영원의 마녀 류젠님께 인사드립니다." "계약의 종, 로이카르스입니다. 별일 없으시죠? 여전히 아름다우시군요." 촌장, 다마신은 유들유들한 인사말을 던지는 로이카르스를 한번 째려보고는 수정구 안의 여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로이카르스는 어깨만 으쓱 할 뿐이었다. 수정구 속의 여인은 그 화사함이 불꽃같았다.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어리자 보통 사람들은 그 심장을 원래 상태대로 유지 할 수 없을 듯한 무시무시한 아름다움이 넘쳐 났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 미소에 면역이 된 듯 겉으로는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로이카르스는 미소를 마주 짓기도 했다. "다마신, 내 충실한 종이여. 내 딸 티티노는 이제 떠났는가?" "아닙니다. 이제 떠나실 겁니다. 지금, 아가씨의 친구들은 모두 호랑나비풀에 취해 잠이 들어 있습니다." "흠... 그래? 그 유령은 잘 잡았나? 힘들 것 같다고 하더니?" "아닙니다. 약에 취해 어질 거리는 것을 납상자에 빨아들여 봉인했습니다. 오히려 가장 쉽더군요." "호홋... 그앤, 여전히 순진탱이란 말야. 한 번 당했으면서도 또 당하다니.... 호호호홋∼ 그럼 반항이 제일 심했던 것은...... 그 롱긴이라는?" "롱긴이 아니라... 롱신입니다. 그는... 오히려 경계를 전혀 못하고 있더군요. 이전의 그를 봐서는 믿을 수가 없는 일이지만..." "오호호홋, 호후스의 곁에 있으면 순진병이 도진다니까. 그것도 전염병의 일종인가?" "......병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흠....... 반항이 제일 심했던 것은 기법사 사인으로, 뭔가 이상한 것을 눈치챘는지 차를 안 마시고 나가려고 하더군요. 그래서 억지로......" "오옷, 꽤나 똘똘한 놈인걸? 후후.... 어쨌든 수고했어, 다마신." 수정 구슬 속에 비치는 여인 류젠. 영원의 마녀, 혹은 피빛 마녀로 통하는.... 마녀 세계에서뿐만 아니라 인간세계에도 그 이름이 꽤나 알려져 있는 강력한 마력의 소유자. 일찍이 그녀는 티티노가 어리석다고 했던 그 '절대미'를 추구하는 마녀의 대열에 끼어 있었다. 그녀는 온 마력과 최대한의 달빛, 그리고 환상의 환약을 준비해서--원래도 귀여운 데가 있었지만 전혀 만족하지 못하고-- 지금처럼 눈뜨고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의 초 절정 미녀가 된 것이었다. 어쩌면 티티노가 '초 절정 미녀'... 따위를 싫어하는 것은 자신의 미모를 믿고 안하무인인 엄마의 영향이 컸을지도 모른다. 티티노의 걱정대로 의식이 끝난 후 무방비 상태였던 그녀는 위험한 일을 당할 뻔했으나 그때 그녀를 본 한 남자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 남자가 바로 티티노의 아버지였다. 덕분인지 때문인지 류젠의 사고방식은 '미녀가 세상을 지배한다', '예쁘면 뭐든지 할 수 있어'라는 것으로 확고히 박혀 버렸다. 이후 류젠은 7년간의 수행동안 언제나 그와 함께였고 성인이 되는 17세의 생일에 이르러 두 사람은 결혼을 했다. 그리고 둘 사이에 티티노가 태어났던 것이다. "그럼 이제 슬슬 녀석들을 풀어놔야겠군." "류... 류젠님.... 친구들을 잡아놓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류젠의 말에 다마신의 그 주름진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안 돼. 그 애는 7년이 아니라 3년 내에 마력을 완성시켜야 해. 그걸 위해서는 온갖 고난과 고초를 겪어가며 빠른 성장을 할 필요가 있는 거야. 왜? 내 교육 방법에 대해 불만 있어?" "..... 아닙니다....." "로이카르스, 다마신은 상당히 불만이 많다는 듯한 표정인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지?" "뭐... 호랑이는 자신의 새끼를 절벽에 떨어뜨려 살아남는 놈만 기른다는 말도 있습니다만...." "흠... 호랑이가? 맘에 드는군. 이젠 호랑이를 애완용으로 길러봐야겠는데? 좋은 걸 가르쳐 줘서 고맙군." "별말씀을.... " "로이카르스.....으..." 다마신은 로이카르스를 향해 이를 갈았다. 안 그래도 이웃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는 소문에다, 세상인심도 예전 같지가 않아져서 티티노의 수행길이 걱정스러웠는데 협조는커녕 고난을 거드는 발언을 하다니.... 그는 그나마 보노보노라도 그녀의 곁에 붙어 있게 될 것을 생각하고 조금은 숨을 돌리는 참이었다. 500살이 넘은 엘프이니 그 지혜나 힘에 있어서도 티티노에게 충분한 도움을 줄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정체가 드러나자 않게 하기 위해 그 동안 신중을 기해왔었다. 덕분에 아무도.... 티티노를 제외하면, 그녀의 원래 정체를 모르는 듯 했다. 의사소통의 마법에 걸린 다람쥐로 생각할 뿐. "다마신, 네가 무얼 걱정하는 지는 알고 있다. 그러나 티티노는 제 아버지를 구해야 해. 그건 알고 있겠지?" "....잘 압니다. 류젠님...." "기한은 앞으로 3년이야. 3년 이내에 안 된다면.... 그 나쁜 놈-!! 내 그놈의 심장을 갈아 마실 거얏∼!!!" "류.... 류젠님... 제발 진정하시길...." "내기에 진걸 가지고 그런 말도 안 되는 복수를 하다닛∼!! 치사하고 야리꾸리한 놈! 내가 그래서 저를 택하지 않은 거얏∼!! 그놈 음침한 건 첨부터 알아봤어. 흥--!! 북쪽 대마왕이라고 으스대기는. 생긴 건 꼭 빠다 바른 치즈같이 흐물텅하니 생겨가지고는....." "......" "......" 북쪽 대마왕... 그에 대한 얘기가 나오기 시작하면 류젠의 입은 다물어 질 줄을 몰랐다. 왜 안 그렇겠는가? 그녀가 목숨처럼 사랑하는 남편을 봉인시킨 장본인인데. 그것도 좀 치사한 방법으로. 류젠의 말로는 그녀가 자신의 청혼을 거절한데 대한 복수를 하는 것이라 한다. 그리고 그 말은 사실인 듯 했다. 실제로 호색하는 북쪽 대마왕이 류젠에게 딱지 맞은 이후 자신의 성에서 두문불출하고 있었으니. 어쨌든 봉인된 남편을 구할 수 있는 조건은 봉인 한 순간부터 10년 이내에 그 딸이 완전한 마력을 갖추어야만 풀 수 있는 것이었다. 티티노가 자신도 모르게 대마왕급의 힘을 갖추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마도 엄마인 류젠이 지속적으로 보낸 암시주문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기한은 이제 꼭 3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다른 마녀들이 7년에 걸려 끝내는 수행을 티티노는 3년 안에 끝내야 한다는 뜻이었다. "흥, 그 아비에 그 딸이라고 하나뿐이라는 딸은 웃기는 취미를 가지고 있더군. 그 괴상한 이름을 가진 애가 이즈음 이상한 짓을 벌이고 있다지?" "'아즈라엘단'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떠돌이 산적들을 규합해 대규모의 미소년 미소녀 수집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덕분에 미소년 미소녀의 씨가 마를 지경이라던데.... 그 아비가 악행을 자제(?)하고 있는 요즘 그녀가 대신 악명을 떨치고 있다지요." 로이카르스가 그녀에게 자신이 아는 바를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류젠은 두 눈을 반짝이며 흥미를 나타냈다. "호오.... 미소년...의 수집이라고...? 그 수집한 소년들은 어쩐다고 하던가?" "흥미가 있으십니까? 연락을 취해서 알아봐 드릴까요?" "아.... 아니, 아니얏, 내가 왜 원수의 딸과 연락을 햇?" 그녀가--드물게도 얼굴을 약간 붉히며-- 말을 돌리기는 했지만, 로이카르스는 며칠 지나지 않아 그녀 스스로 자신에게 연락을 할 것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아마도 손이 딸려서 시동(侍童)을 더 구한다는 그럴싸한 내용으로.... 2 - 이곳은... 나무의 배치만 좀 더 그럴싸했다면 좋았을걸.... 나는 빗자루를 타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숲 가운데 공터에 내려섰다. 어깨에 올라타고 있던 보노가 얼른 땅으로 내려 왔다. 이젠 제법 비행에 익숙해졌는지 주머니에서 나와 있는 때가 많았다. 물론 허리에 줄 하나는 묶어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두고. 공터에 내려 와 주변을 좀 더 살핀 후 나는 결정했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 조건을 거의 갖추었다. 부족한 것은 진법의 배치로 약간의 보충만 하면 된다. 나는 만약을 위해 진을 치기로 했다. 보노에게도 설명했듯 진을 치는 것은 나무와 바위의 배치, 부적 등을 통한 물리적인 배치로도 가능하다. 물론 부적에 마력은 좀 부어 넣어야 하지만 지속적 소모는 아니니까. 나는 배낭에서 천막을 칠 재료들을 꺼냈다. 사흘 간, 아니 오늘부터 치면 닷새동안 내가 머물 곳이다. 그것도 아주 중요한 의식을 위한 장소. 튼튼하게 잘 만들어야지. 나는 보노에게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즉, 폴리모프를 해제하라는 의미이다. "흥, 혼자 왔으면 혼자 했을 거면서...." "지금은 혼자 온 게 아니잖아. 나 좀 거들어 줘. 천막 치는 건 힘들단 말야." "알았어, 중요한 거니까 어쩔 수 없지 뭐." 그래서 보노는.... 몸에서 은은한 빛을 내며 주변에 상쾌한 바람을 일으켰다. 빛은 순식간에 부풀어오르더니 더욱 눈부신 광선을 쏘아대다가 금새 사라졌다. 그리고 빛이 머물던 자리에 전과 다른 존재감으로 선, 맑고 투명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엘프 보노이카 그란델리아가 있었다. 확실히 그 이름은 이 모습일 때만 부를 생각이 든다. 쪼끄맣고 밤이나 도토리를 갉아먹는 다람쥐에게 '보노이카 그란델리아'라는 거창한 이름은 어불성설 아닌감? 후후.... "예뻐, 보노이카.... 그 물빛 머리는 빛에 따라 다른 색으로 보이는 걸. 반짝반짝... 무지개 색 같기도 하고... 정말 예뻐. 확실히 물의 엘프다워." "뭐니, 새삼스레....? 천막 기둥이나 세우자구." "알았어. 후후...." 섬세하고 연약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보노이카는 힘이 셌다. 하긴, 투명한 느낌이어서 그렇지 키는 정말 큰걸? 한 185제나 정도 되려나? 하지만 난 그렇게 큰 건 싫어. 적당 사이즈가 좋아. 우리는 한시간 정도 끙끙대서 천막을 완성했다. 태풍이 불어도 끄덕 없을 만큼 튼튼하게 말이다. 땀을 뻘뻘 흘린 탓에 시원한 냇가 생각이 절로 났다. "저기, 아까 봐둔 냇물에서 씻고 오지 않을래?" "그래, 나두 그 생각했어. 하지만... 난 다람쥐로 다시 변할래. 눈에 띄고 싶지 않아." "맘대로..." "그런데 말야... 이 천막 지금은 은신의 술을 써야 되겠어. 아직 진을 완성하지 않았으니까." "응, 그래서 지금 막 하려고...." "안 돼. 티티노. 넌 이제부터 마력을 아껴야 해. 내가 대신 해 줄게." "에... 왜?" "몰라서 물어? 넌 이제 의식을 위해 힘을 아껴야 되잖아. 그러니까 그 전까지 뭔가 힘이 필요하면 내가 해줄게." 으음... 언제나 나를 감동시키는 보노.... 정말 고마워. 사양치 않을게. 네 말처럼 난 지금 힘을 아껴야 할 테니까..... 그래서 보노가 은신의 술을 사용해 천막을 잘 감추어 두자 우리는 안심하고 냇가로 걸어갔다. 물론 보노는 다시 다람쥐로 변해서 내 어깨 위에 앉았다. 냇가에 막 도착했을 때였다. 보노와 내가 막 냇물에 들어가기 위해 옷을 벗었을 때, 아니지... 보노는 옷을 벗을 필요가 없으니까 나만 외투를 벗었을 때, 등뒤에서 어떤 이의 털털한 목소리가 들렸다. 왠지 귀에 익은...... 저 녀석들은 머리를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것은 아닐까? 분명하다. 저건 장식용이다. 등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은 불과 세시간도 전에 저쪽 숲에서 마주쳤던 녀석들의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입은 옷을 알아보지도 못 했다는 말이지... 쯧쯧... "후후... 이봐 귀여운 아가씨.... 옷을 벗는 중이었나? 내가 도와줄까?" "푸헐헐... 나도 도와주고 싶다네...." "이 아저씨야말로 덩치는 이래도 부드러운 손길을 지녔거든. 켈켈켈..." "..... 저기.... 아까 본 애 같지 않아?" 아, 정정하겠다. 한 녀석 정도는 머리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머리 틀만 갖춘 세 녀석에 의해 그 의견은 묵살되었다. "푸헐헐... 네놈 아까 그 여자 애한테 심하게 당하더니 이젠 오락가락 하는구나? 쬐끄만 기집애가 무섭다고 오줌까지 쌌으니 오죽할꼬......"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우린 마법 아이템으로 여기에 온 거라구. 덕분에 순식간에 이동. 그 쬐끄만 여자애가 어떻게 여기까지 단숨에 올 수 있단 말이야? 후후후...." "켈켈켈.... 별 씨나락 까먹는 소릴 다 듣는 군. 걔가 아까 우리 겁먹으라고 뻥친걸 믿냐? 그 쪼끄만 게 마녀라고?" 녀석들에게 이름을 지어줘야겠다. 듣다 보니 웃음소리가 다들 특이하다. 켈켈이, 후후, 푸헐이.... 그리고 나머지는 머리. 보노에겐 아까 빗자루를 타고 오면서 얘기를 해 주었었다. 그래서 내가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자 그녀가 '아까 걔들이야?'하는 듯한 표정으로 지금 나를 올려다본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성한 의식을 앞둔 마당에 될 수 있으면 고이 보내주려 했지만 앞뒤도 못 가리는 놈들을 벌써 두 번째 마주치게 되었다. 저런 놈들은 쓰레기일 뿐. 이젠 제대로 손을 봐 줘야겠지.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 '머리'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는 것이 우선 보였다. 그는 동료의 뒤에 서서도 난 제일 먼저 알아 본 것이었다. 나머지 녀석들은 각자의 특유한 웃음소리를 내다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한 놈씩 웃음을 멈추어갔다. 그리고 이상하게 침착해 보이는 눈앞의 소녀를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까는 방심했다 당했다고 생각해서인지 알아본 것 같은데도 별로 움찔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대신 그들은 손에 들고 있는 울퉁불퉁한 몽둥이와 이상하게 생긴 짧은 금속 막대기 등을 앞으로 내어 밀며 내게로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떤 녀석은 촘촘하게 엮은 그물을 들고 있었다. 내가 새냐? "켈켈.... 어찌된 일인지... 아까 걔랑 비슷한 애가 여기에도 있군." "잘 됐지 뭐, 허탕칠 뻔했는데, 비슷한 애라면 복수의 의미로... 후후후...." "푸헐.... 귀여운데, 꼬마 아가씨?" .......다시 정정한다. 이 녀석들의 지능은 상상을 초월하는군. 거기에 모자라면 똑똑한 쪽의 의견을 듣는 맛이라도 있어야지. 아즈라엘이라는 녀석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저런 녀석들을 부하라고 두었으니 골치 깨나 아프겠군. 그러나... 내가 막 주문을 외우려는 찰나였다. 어떤 빛 같은 것이 은빛 선을 그으며 허공을 가로지르더니 녀석들의 몽둥이와 그물을 산산조각 내 놓았고, 녀석들은 어느 샌가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음... 솔직히 나는 이런 식의 묘사는 잘 못하겠다. 검술에 관한 한 문외한이라...... 그저 직선 및 곡선으로 휘둘러지는 빛만 보였을 뿐이다. 정말로. 그나마 그게 마법이 아니라 '검술'이었나보다, 하고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앞에 한 남자가 품새 좋게 서서 칼집에 검을 막 집어넣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산적 패거리들은 순식간에 당한 일에 대해 얼빵한 표정으로 한참 있더니 자신들의 숫자만 믿고 그에게 덤비려 했다. 그러나 그에게서 뭔가 이상한 것을 본 듯 주춤 서버리더니 갑자기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어마 뜨거라 하고 제각각 아무방향으로나 도망쳐버렸다. 아무려나, 일을 대강 마무리했다고 생각한 듯한 검사는 산적들이 도망가는 것은 놔두고 적갈색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내 쪽을 돌아보았다. 얼굴 가득 파리가 미끄러질 듯 느끼한 미소를 지으며. 우웃...... 후에 보노보노가 말하기를 이때 내가 멀미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금새 그 미소를 거두었고 그래서 나는 다행히 구토까지는 안 할 수 있게 되었다. "하핫... 요즘 미소녀를 노리는 패거리들이 있다고 해서 난 또....." 난 또.... 그 뒷말은 뭐냐? 난 이 치가 더 기분 나빴다. 그 의미심장한 말속에는 나를 기분 나쁘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미소녀'가 아니라 이거지? "특히 어린 소녀를 노리는 기묘한 취향의 작자들이 많다더니 이런 어린애에게까지 마수를 뻗치나. 하하... 꼬마 아가씨, 어디 다친 데는 없나?" "......" "응? 나를 보고 할 말을 잊었나 보군. 하긴, 나도 내가 너무 잘 생겨서 고민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까지는...." 거의 대꾸할 가치를 못 느낄 만한 인간이다. 나는 산적들에게 퍼붓지 못한 저주를 이 치에게 내릴까 하다가 관뒀다. 정말, 의식 때문에 참는다. 쓸데없는 마력 소모는 하지 말자. 이제 며칠 남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마에 드러나는 핏줄을 고이 누르며 자리에 앉아 신발을 벗었다. 남자는 내 행동이 무척 의아하고 이해가 안 갔는지, 제자리에 그대로 서서 내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있거나 없거나 상관없이 벗은 신발은 바위 위에 올려놓고 바지도 무릎 위로 걷고 소매도 둥둥 걷어붙이고는 냇물로 철벅철벅 걸어 들어갔다. 저 치만 아니었어도 훌훌 벗어 던지고 첨벙거리며 보노랑 놀았을 텐데, 지금은 세수하고 손발을 씻는 것만으로 족해야 했다. 보노는 물가에서 찰방거리며 마음껏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보노야, 부럽당. 내가 고개를 숙이고 얼굴이며 목을 씻는 것을 벙찐 표정으로 바라보던 남자는 이제는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 왔다. 그리고 내가 목에 걸고 있던 수건으로 얼굴을 닦는 것을 가늘게 뜬눈으로 유심히 바라보았다. 흥, 그렇게 보면 어쩔 건데? 기묘한 취향 어쩌고 하더니 당신이야말로 그거 아냐? 그 뺨이 점점 상기되는 건? "....너는.... 하--, 그래 내가 누군지 모를 터이니.... 그렇다 해도 이건 지나치게 무례하구나. 자신을 구해준 이에게 인사 치레도 할 줄 모르다니. 그건 기본적인 예의가 아닌가." "......" - 구해주다니, 누가 누굴? 나는 묶고 있지 않아서 세수 할 때 젖어버린 머리칼을 수건으로 말리면서 그를 빤히 마주 보았다. 물 속에서 뭍에 올라 있는 큰 키의 사내를 처다 보는 것은 좀 힘든 일이었지만. 아아...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듯도 했다. 내가 주문을 걸기 전에 녀석들을 해결했으니 그 보답으로 뭔가를 바라는 거로군. 그래, 어쨌거나 당신으로 인해 물러간 거였으니까. 그래도 그 산적들이 그냥 도망간 것을 보면 이 치에게 뭔가 대단한 것이 보였던 거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냇가로 천천히 올라 왔다. 젖은 발을 다 닦고는... 천천히... 신발을 신었다. 그 동안에도 그는 상기된 얼굴로 옆에 서 있었다. 그럼 저 상기된 얼굴은 응분의 인사를 받지 못한데 대한 수치감으로 인한 것인가, 아하. 그래서 나는 주머니를 뒤적뒤적해서 뭔가를 찾았다. 그리고 마땅한 게 없어서 근처에 있던 예쁜 조약돌을 집어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변(變), 장미." ".....!?" 내가 알기로, 실제로 여자들보다 남자들이 더 꽃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건 촌장 할아버지도 그랬고, 로이카르스 아저씨도 그랬다. 뭐, 그건 성인 남자에 한해서다. 어린 녀석들은 쑥스러워 집어던지는 쪽이지만. 이 남자는, 아까처럼 느끼한 미소를 지을 수 있다는 건 충분히 '어른'이란 의미이다. "고마웠어요. 여기, 보답이라기엔 뭐하지만..." 그래도 나보다는 나이가 많은 듯 보였으니 존대어를 써 줘야겠지. 장미와 내 얼굴을 번갈아 들여다보던 남자는 갑자기 큰소리로 웃어대기 시작했다. 것도 허리를 꺾어가며. "파하하하하하하핫∼!! 우후후후후후∼!! 아하하하..... 아... 알았어, 알겠어요, 꼬마 마법사님.... 푸후후후후...." 저 웃음은 뭐고 갑자기 존대어는 또 뭐냐? 나는 이 변덕이 심한 사내에게 어떻게 적응해야 할 지 몰라 당황했다. 이랬다, 저랬다..... "하하하... 그래, 마법사님은 내가 나타나서 흥이 깨진 것에 화가 나셨던 거군요? 하하하.... 오히려 제가 사과를 구해야 하는 거였는데 이거 죄송하게 되었군요." "......" 마지막엔 윙크까지.... 정말 토할 것 같다. 난 이런 미끈덩한 얼굴은 정말 싫어. "하지만 이 장미는 기꺼이 받지요. 귀여운 꼬마 마법사님. 뭐 의미를 모르고 주는 것이겠지만..." "......?" 그는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장미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그 장미에 키스까지 했다. 보... 보노.... 나 진짜로 토할 것 같아. 그리구 소름이.... 나 닭으로 변하는 주문 외우지도 않았는데---!! "하하... 지금까지 많은 꽃들을 보아 왔지만, 돌로 만든 장미는 처음 보는군요. 그런데, 마법사님. 혹시 마법수행 중이신지?" "......" 나는 수건으로 보노를 싸 들고 물기를 닦아주었다. 저 느끼한 남자를 더 이상 상대 안 하기로 했다. 지금껏 얘기를 받아 준 것만 해도 웃기는 일이다. 나는 바쁘다구. 저녁도 먹어야해. 저녁.... 밥 생각을 하니 뱃속에서 쪼르륵-- 하고 벌레 소리가 난다. 음, 좀 부끄럽군. 남자가 또 웃는다. 쯧...... "하하, 이거 실례를...... 제가 잡아놓은 물고기와 고기가 좀 있는데 같이 드시겠습니까? 저 혼자 먹기에는 많아서요." 맘 흔들린다. 먹을 것에 관해서는. 그러나 저런 느끼한 미소를 반찬 삼아 식사하고픈 생각은 없다. 하지만 내 옆에서 제일 든든한 아군이 되어야 할 친구가 바로 배신을 때리고야 말았으니. "쿠키도 있어요?" "....아.... 아하... 물론 있지요. 마법사의 다람쥐여. 그것도 아주 바삭바삭한 아몬드 쿠키로 말입니다." 그는 아주 약간 눈썹을 치올렸을 뿐,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다람쥐' 보노에게 대꾸했다. 아무래도 하는 양으로 봐서는 마법사를 존경한다는 라이나폴스의 사람인 듯 하다. 그곳은 마법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에든 호의적이고 마법사라면 아무리 어려도 존경받는 나라였다. 그러나 여기는 라이나폴스에서 꽤나 멀리 떨어진 곳인데. 아마 이 사람도 수행중일지도. 그리고, 어제부터 쿠키 금단 증세를 보이는 보노는--어제 아침에 반 조각 먹은 것이 마지막이었다.--내 것도 아껴가며 절 줬건만 언제 봤다고 그 느끼한 남자의 앞으로 쪼르르 달려가는 모습이라니. "뭐해? 티티노... 너도 어차피 배고프잖아. 빨리 가자." 꼬랑지까지 살랑거릴 건 또 뭐얍... 흐윽∼ 보노... 넘 미워... 모닥불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오르고 있었다.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넘어갔고 주위에는 고기 익는 냄새가 가득했다. 우리는 우선 그가 끓여서 내려놓았던 스프를 먹고 있었다. 맛은 대충 그랬지만 배고프니까 먹어 줄만했다. 보노는.... 옆에서 아몬드 쿠키를 열심히 갉아먹고 부른 배를 만족스레 부여잡고는 늘어져 있었다. 그녀가 엘프일 때는 고귀한 엘프 여왕의 동생으로써 그 고상함과 우아함이 하늘을 찔렀다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다람쥐로써 살아 온 9년 동안 그런 것은 그런 것은 저기 시궁창에 던져 버린 것 같다. 그러나 아무리, 518년 간 배어온 생활 습관을 겨우 9년의 시간 때문에 던져버릴 수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내 생각엔.... 그녀는 순수하게 엘프로서 있을 때에도 뭔가 특이한 편이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다람쥐로 폴리모프 할 생각을 했지. 여상한 엘프였다면 꿈도 못 꿀 일이다. 그녀가 엘프로 변하는 것을 못 보았다면 나 역시 그녀의 정체를 꿈에도 알 수 없었으리라. 고기가 다 익었는지 꼬챙이로 찔러 보는 남자는.... 스스로를 떠돌이 검사라고 소개했다. 이름은 페이.... 그러나 그 이름은 아무래도 애칭인 듯 했다. 그는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았는데 나로선 그걸 굳이 캐물을 작정은 아니다. 살다보면 말못할 사정도 있는 것이고, 잠시 스쳐 가는 인연끼리는 그 정도만 알면 충분한 것이다. 뭐 아까 하는 말이나 검술 실력으로 봐서는 보통사람은 아닌 듯 했지만. "다 익은 것 같군요." "......." 그는 막 쓰는 용도로 보이는 단검을 꺼내 능숙한 솜씨로 고기를 잘라냈다. 그리고 잘라낸 고기를 내 앞에 놓인 나무 접시에 올려놨다. 막 자른 고기에선 김이 올랐다. 나는 젓가락을 들고 고기를 집어들었다. 그가 내어놓은 포크는 나에겐 오히려 불편했다. 그래서 나는 배낭에서 내 전용 젓가락과 수저를 꺼내 놓았었다. "마법사님은 말이 없는 편이군요. 아니면 내가 낯설어서인가요?" "......" 아무리 나라고 해도 입에 고기를 잔뜩 넣은 상태에서는 말하기가 곤란하다구. 나는 천천히, 내 페이스에 맞추어 고기를 씹고는 꿀떡 삼켰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낯설어서라는 쪽이 맞겠죠." "하하...." 그는 소탈하게 웃을 때는 아주 좋은 표정이었다. 그 표정은 마음에 든다. 하지만 그.... 이상하게 버터 바른 듯한 미소를 지을 때는 정말.... 으... 또 올라온다. 그는 극존칭은 쓰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어린 탓도 있지만 그 역시 보통 신분은 아니라는 의미이리라. 그런데 아까... 나이 얘기도 했던가? "내 나이가 궁금한가요?" - 끄덕끄덕-- 독심술을 할 줄 아나? 아님 내 표정에 그렇게 써 있었나? 그는 한번 싱긋이 웃더니 좀 우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이에 콤플렉스가 있나? "하하... 이번 하몬느 절기면 18살이 되죠. 녹음의 여신이자 정열의 여신 하몬느가 축복을 내리는 시기에.... " 하몬느... 정열의 상징이며 젊은 연인들의 수호자, 스스로가 많은 연인을 거느리고 있다는 여신. 짙푸른 녹음에서 태어나 바다로 들어간 이상한 여신. 그녀는 그 뜨거운 열정으로 모든 젊은 연인들을 수호한다. 그 절기에 태어난 아이는 그래서 힘차고 뜨거운 사랑을 경험한다고 한다. 바람둥이가 많이 태어나는 절기이기도 하고. 그러나 지금 페이의 표정은 별로 열정적이어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아까의 느끼한 미소를 지을 때가 하몬느의 아이다워 보였다. "그리고 결정의 날이 오는 시기이기도 하고......" "......에?" "하핫, 아닙니다. 아, 그런데 마법사님은 어디로 가시는 길인지?" "난......" "말하기 곤란한가요?" "......그렇군요. 뭐 조만간 고 르티카로 가려고는 생각하고는 있지만, 요즘 어지럽다고 해서." "아아... 고 르티카와 가우니시아 사이의 전쟁설 때문이군요." "라이나폴스에서는 고 르티카 쪽에 힘을 줄 거라는 얘기가 있던데." 그가 잠시 침묵했다. 나는 그냥 해 본 말이었는데. 마을에서 들리는 소문이 그랬으므로.... 뭐, 떠보려는 의도가 없었노라 부인하지는 않겠다. "...... 아셨군요. 제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짐작으로요....." 그리고 둘 사이엔 또 침묵의 가루가 내려앉았다. 아니, 수면의 가루인가보다. 저녁을 먹으니 잠이 온다. 아직 고기 더 먹어야 하는데.... 천막 치느라 무리를 했나. 하긴 요새 계속 강행군이었으니. 보노도 내 무릎에 기대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빨리 천막으로 가야겠당. 고기가 문제가 아니야. 내가 일어서려 하자 페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이 밤중에 어딜 가시려고?" "가야죠. 더 폐를 끼칠 수는 없죠." "마땅히 잘 데라도 있습니까? 제일 가까운 마을도 숲을 한참 벗어나야 있는데." "......" 이 대목에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갈 데가 있다고 한다면 어디냐고 꼬치꼬치 물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없다고 한다면.... "사람들끼리 뭉쳐 있는 것이 좋습니다. 내가 남자라서 꺼리는 거라면... 마법사님이 무슨 걱정이겠습니까? 나는 마법사님 말대로 라이나폴스 사람. 존경해야할 대상에게 서툰 짓은 할 수 없죠." - ....그리고 로리콤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거지, 당신? 하지만 그는 뒷말은 잇지 않았다. 아마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인 듯 하다. 하긴, 나도 아직 '장소'에 진을 다 설치한 것은 아니었고 아무리 달빛을 받으면 힘이 나는 마녀라 해도 이 정도의 빛 아래서 완벽한 진을 빠른 시간 내에 완성할 자신은 없다. 혹시나 있을 들짐승들의 습격에 대비하려면 이 사람 말처럼 모여 있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는 내가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담요를 깔고 있었다. 그것도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이쪽에 하나 저쪽에 하나.... 담요를 항상 2인분으로 가지고 다니는 건가? 담요를 반으로 접어 바닥에 펼쳐 놓던 페이는 내 쪽을 바라보며 아까의 느끼한 미소로 인한 인상 따위는 한방에 날려버리는 소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한 사람에게서 저렇게 다른 표정이 나올 수가 있을까. 새삼 그런 감탄을 하게 되다니. "하하... 수행을 위해 짐을 무겁게 하고 다니는 겁니다. 그래서 뭐든 두 몫으로 가지고 다니지요. 그렇게 이상하게 볼 건 없습니다. 고기나 더 들어요. 넉넉하니까..." "....." 의외로 배려가 세심한 데가 있는 사람이군. 그래서 나는 벌써 잠이 푹 들어버린 보노를 그가 깔아 놓은 담요 위에 살짝 올려 주었다. 보노는 잠시 움찔하더니 금새 고른 숨을 내 쉬며 잠들었다. 보노가 진짜 다람쥐였다면, 다람쥐는 보통 8∼10년을 사니까 사람으로 치면 환갑진갑이 다 지난 나이이다. 그러나 그는 엘프. 그것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다른 마녀들처럼 고양이를 키우지 않은 것은 그들은 너무나 일찍 죽는 때문이었다. 내가 채 성인이 되기도 전에 죽으면 어쩌나.... 나보다 일찍 죽는 사람들, 친구들 일만 생각해도 슬픈데.... 그렇다. 나보다 일찍, 아니, 내가 성인이 채 되기도 전에 죽을 나의 지인이 벌써 하나 생겼다. 나를 무척 사랑해준, 내가 많이 사랑한 사람. 어쩌면 엄마는.... 엄마는 그래서 '인간'에게 별 애착을 보이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저 사용인으로 부릴 뿐. 나도 그러고 싶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나는 이미 인간들을 사랑한다. 내가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이 나를 사랑한다. 그래서 이미 늦은 것이다. 그러나 내 친구 보노.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 너는 엘프니까.... 천년이 넘어도 사는 엘프니까 나보다 먼저 죽으면 안 돼. 내 어린 날의 강아지처럼, 그렇게 먼저 죽으면 안 돼.... 친구들... 다른 친구들은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아마 내 흉을 보고 있을지도, 아니 벌써 잊은 건 아니겠지? 밤하늘, 가득한 별무리가 서쪽으로, 서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 티티노가 모르는 이야기, 둘 로이카르스는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정령이 깨어 머무는 숲. 이곳은 그래서 깨끗했고 괴물이나 도적 따위가 함부로 근접을 못하는 곳이 또한 이곳이었다. 로이카르스가 서 있는 주변은 사람의 두 배는 되는 높이의 거대한 돌들이 위용을 갖추고 경계석 마냥 둘러서서 진을 치고 있었다. 중심의 가장 덩치가 큰돌을 둘러싸고 정확히 동서남북 방향에 하나씩, 그리고 그보다 조금 작은 기둥이 사이사이 배치되어 있었고 주변에 둘러선 나무들의 분위기도 엄정했다. 그러나 그 엄정한 분위기는 가운데에 서 있는 제일 큰 경계석이 파괴 된 때문에 많이 흐려진 상태였다. 로이카르스는 가슴 앞에서 양손을 모아 역삼각형 모양을 만들고는 주문을 외웠다. "...... 시바이나의 빛이여, 그녀의 명을 받들어 내게서 그 힘을 발현하라. 파(破)--!" - 콰콰콰쾅--!! 중심의 경계석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산산이 부서졌고, 옅게나마 주변에 남아 떠돌던 신령한 기운은 그와 함께 공기 중으로 흩어져갔다. 그러나 그 소리는 일정한 공간 내에서만 울리고 있었는데, 로이카르스가 주변에 소리 차단의 장막을 두르고 있었던 탓이었다. 중심 경계석의 완전한 파괴. 이로써 보호의 결계는 완전히 열렸다. 흑의 하르모이아로부터 숲을 보호하는 결계의 보호석. 그러나 그의 작은 주인, 그녀의 결정이 그러했다면, 자신은 기꺼이 거들 것이다. 로이카르스는 소리를 막기 위해 주위에 둘러놓은 방음의 장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입가엔 자조적인 미소를 띄우며 작은 꼬마마녀의 힘의 흔적이 남아 있었던 곳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니들 뭐 허냐?" "으응? 숲 탐사....." "흥, 한가하게 지금 숲이나 뒤지고 있을 때냐? 티티노가 없어졌는데.... 아니, 숲이라도 뒤져봐야겠군. 어디 숨은 건 아닐까? 그래, 장난하는 걸지도.... 으아∼ 니들은 걱정도 안 되냐 이 놈들아∼앗" 글라인의 말에 모두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그리고 그를 귀신 보듯 하고 있었다. 심지어 진짜 유령인 호후스조차.... "......" "저기... 글라인.... 어제부터 너 이상한 소리만 자꾸 하는데...." "뭐이? 니들 또 나 정신병자 취급하려는 거지?" "......" 다들 말은 없었으나 눈빛만은 긍정의 뜻을 보이고 있었다. 때문에 광분하는 글라인. "크아아악∼!! 이것들이, 이 머저리들앗∼!! 이것들도 친구라고.... 뭐 하는 것들이얏∼∼!! 동네 녀석들도 그렇고, 그 엉큼 마왕 같은 촌장도 그렇고, 심지어는 스승님이라는 작자도∼ 으드득∼빠드득∼!!" ".... 왜... 왠지 정도가 더 심해져 가는 것 같아. 롱신." ".... 할 말 없다, 사인. 쟤가 드워프가 된 것만 해도 황당하잖냐. 스승님이 실험하시던 무슨 약물을 잘못 먹었다는데...." "몽이도 들었어. 그 약, 반인반수 실험 중에 실패한 약이었다며?" 뭔가 초점이 어긋난 대화를 나누며 그들은 숲 속 오솔길 위에 서 있었다. 그때 들뜬 목소리의 카스왈르가 그들에게 활발하게 손을 내저으며 뛰어왔다. "야호∼!! 나 좋은 거 발견했다. 모두들 저리 가 보자." 글라인이 보기에 그녀가 온 방향은 티티노의 보금자리인 참나무가 있는 쪽이었다. 그는 그 생각을 미처 떠올리지 못한 자신의 아둔함을 한탄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가보면 알 수 있겠지. 이 의리도 없는 녀석들이 깨달을 수 있을 거야. 그래서 다들 우르르 몰려가는 뒤를, 그도 부리나케 쫓아갔다. 글라인의 생각대로, 공터에는 커다란 참나무가 있었다. 그리고 위쪽의, 보노보노가 머물던 집인 작은 구멍도 있었다. 분.명.히... 그러나 카스왈르가 모두를 앞에 세워놓고, "놀라지 마시라, 쨘∼" 하고 참나무의 대문처럼 보이는 것을 열었을 때, 그는 경악하고 말았다. 그저 입만 뻐끔뻐끔.... 카스왈르는 나무 안의 공간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그 아늑하고 좁은 공간에서 밖을 내다보았다. "지금 막 발견했어. 여기에 이런 것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 뭐니? 이것 봐, 몽이 하나 정도는 더 들어올 정도의 공간이야. 몽아, 이리 와 볼래?" "야∼ 나도 들어갈 수 있어?" "그럼... 두 사람 정도는 넉넉하겠어. 신기하지 않냐? 나무에 문 같은 게 달려 있고, 거기에 이런 공간도 있다는 게...." "오래 된 고목에는 때론 그런 공간이 생기기도 해. 이 참나무.... 보아하니 아주 오래 된 것 같은데, 뭐. 그런 공간 생길 만도 하다." 롱신은 카스왈르와 다른 친구들이 감탄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한 마디 했다. 그러나 그는 글라인이 붕어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뻐끔거리는 것을 보고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저건 또 뭐 하는 짓이람?' 어제부터 글라인은 좀 이상했다. 얼마 전, 약물복용(?)으로 인해 저런 괴상한 모습이 된 건 알겠는데, 티티노가 없어졌다고 난리 치는 건 또 뭐람? 티티노가 누구야? 우리마을에 그런 사람이 있었나? 글라인의 주장대로라면 마을엔 마녀가 하나 살았고, 그 마녀는 그들에게 둘도 없는 친구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생일 전날 밤 파티도 했었고.... 그렇다면, 그게 사실이라면 글라인.... 너 빼고는 우리들과 마을사람 모두가 그 사실에 대해 모르고 있는 것은 또 뭐냐구.... 라고 롱신이 말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거의 발작에 가까운 광란 증세를 보이며 '의리 없는 놈들, 나뿐 넘덜, 이렇게 고약한 일이 어딨냐고.... 티티노오오오오옹∼!! 커어억----!' 하고 외쳐대는 데는 당할 수가 없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그가 드워프의 모양새를 하고 있는 것도 티티노라는 마녀아이 때문이란다. 그러나 롱신이 보기에는 아무래도 자기 정체성 상실에 의한 충격이 커서 그 책임을 전가시키기 위한 초인간적 존재를 스스로 만들어 낸, 일종의 망상적 증상이 분명한 듯 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충격이 너무 크고, 괴로움도 크기에 잠시 저러는 것이겠거니... 하고 참는 수밖에. 오랜 친구에 대한 예의로서. 그러나 만약 저 증세가 일주일 이상 지속된다면 더 참지는 않으리라 생각하고는 있었다. '하아.... 저 녀석... 이제 이틀만 더 참아 보도록 하자. 제 정신으로 돌아 올 때까지. 그래도 정말 오랜 친구니까 참아주지 아니었으면.....?' 그는 생각하던 중 뭔가 허전한 느낌이 밀려오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건 뭘까? 꼭 뭔가 빠진 듯 하다. 아주 중요한 것이....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런데 말야...." 카스왈르는 친구들과 샌드위치를 먹어가며 말을 꺼냈다. 참나무 집에서 실컷 놀던 그들은 점심을 먹기 위해 가운데 공터에 자리를 펴고 앉았다. 글라인은 아까 뭔가에 충격을 받은 듯 하더니 그냥 마을로 돌아가 버렸다. 그래서 지금은 그녀와 호후스, 기법사 사인, 롱신, 몽몽. 이렇게 다섯이서 피크닉 바구니를 열고 맛있는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 참나무.... 왠지 낯익은 거 같지 않아?" "....응... 그러고 보니... 오늘 처음 보는 건데도 굉장히 익숙해." "나도 그런 생각이 든다. 니 얘기 듣고 보니...." 다들 카스왈르의 말에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러다가 호후스가 손뼉을 치며 입을 열었다. "맞아, 그러고 보니 보노보노가 안 보여. 어디 갔지?" "아, 맞다. 보노보노.... 그러고 보니 어제부터 안 보였어." "에.... 정말, 어디 갔지? 다람쥐 친구...." "응? 다람쥐 친구? 다람쥐였어? 아... 그렇지. 보노보노는 저기 참나무 위 구멍이 집이었어." "그... 그렇네. 보노보노 안에 있는 지 살펴볼까?" 뭔가 막혀 있던 것이 뚫린 듯, 여기저기에서 말이 튀어나왔다. 어찌 된 일일까? 그렇게 친한 친구를 잊고 있었다니... 우리가 정신이 없네... 어쩐지 참나무가 낯익었던 이유가 있었어..... 하는 여러 생각들이 교차하는 가운데 카스왈르가 수목 엘프의 혼혈답게 가벼운 몸놀림으로 나무 위에 뛰어올라갔다. 그러나 구멍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없어......" "없어? 어디 갔나?" "아, 산책 나갔을 지도 몰라. ....노랑.....?" "뭐라고, 호후스?" ".....으... 아니, 뭔가 기억이 안 나...." 호후스처럼 다들 뭔가 한 가닥 기억이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무엇인지 기억해내려 하다가 그들은 한낮의 태양 아래, 앉아 있던 자리에 스르륵 쓰러져 잠이 들고 말았다. 카스왈르는 나무 가지 위에서 잠이 들었다. 참나무 가지를 봄바람이 살랑살랑 흔들고 지나갔다. "어떻게 된 일인지.... 어쨌든 최소 일주일은 약효가 가야 하는데...." "그만큼 유대가 강한 것인지도 모르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류젠님이 직접 만드신 약은.... 그 약효의 정확함은 누구도 따를 자가 없는데.... 내가 직접 모아 보낸 호랑나비풀로 만드신 약이라고. 이런.... 거기다가, 글라인 녀석은 또 뭐야? 왜 기억이 그대로 남아 있는 거야?" 촌장, 다마신과 마법사 로이카르스는 티티노의 참나무 집 앞에 서서 쓰러져 있는 아이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이들은 지금 호랑나비풀로 만든 향에 취해 있었다. 호랑나비 풀과 여러 가지 허브를 섞게 되면 좋은 약재가 되지만, 그 풀에 개구리의 한숨과 동굴의 어둠 속에서 한번도 빠져 나오지 않은 박쥐의 피 두 방울, 지네의 독 약간을 넣고 고아, 잘 말려 가루를 내면 상대방이나 자신의 없애고자 하는 기억을 마음대로 없애거나 조작 할 수 있게 해 주는 약이 되는 것이다. 촌장은 류젠에게서 1주일 정도 망각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약을 직접 받아 왔었다. 그가 분명히 알기로 류젠은, 약을 독하게 만들었으면 만들었지 되다 만 약은 만들지를 않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이 녀석들은 이틀만에 벌써 기억을 떠올리려 하고 있었고 글라인의 경우.... 이 놈은 아예 기억이 지워지지도 않았던 것이다. 촌장, 다마신은 로이카르스를 흘끔 째려보았다. "글라인 녀석, 어떻게 된 일이야?" "낸들 아나? 단순히 이중 족쇄여서 마법 면역이 생긴 건지, 이중 족쇄를 건 장본인이 티티노여서 그런 건지.... 아니면 특수 체질이라거나."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은 정말 억울하다는 얼굴로 그를 돌아보는 로이카르스를 다마신은 한숨을 쉬며 쳐다보았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역시 걱정되는 바는 있었나 보군.... 하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하필 글라인일 건 또 뭐람. 이중족쇄가 걸린 것이 쓸모가 있었단 말인가? 그래도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나은가.... 하고 생각하면서 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자신이 여기서 더 따지게 된다면 그도 보노보노의 얘기를 꺼낼 것이다. 서로 불리한 입장이다. 여기서 그냥 마무리하는 것이 낫겠지. 어쨌든 류젠님에게 보일 형식적 '잡이'는 있어야 하니까, 그 동안 이 애들에게만큼은 지속적으로 약을 쓸 수밖에.... '미안하구나 모두들... 그러나 티티노님이 완전히 모습을 바꾸실 보름까지는 너희들을 붙잡아 둘 수밖에 없단다. 이해하렴. 그 뒤에 생기는 일이야.... 그야 너희들 하기 나름이겠지만. 부디 그분을 알아보길 바란다......' 근처 숲을 배회하고 있던 글라인은 다시 참나무가 있는 공터 쪽으로 걸어오다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는 덤불 속으로 얼른 숨었다. 살금살금 기어서 공터가 보이는 곳까지 다가간 그는 뜻밖의 것을 보았다. 촌장과 그의 스승이 무슨 이유에선지 잠들어 버린 친구들에게 이상한 약을 먹이며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친구들의 기억을 지워버린 것이 아마도 그 약일 것이라는 아주 당연한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 괴수(魁首)는 촌장과 스승인 것이다---!!! 글라인은 스승과 촌장이 다른 곳으로 갈 때까지 기척을 숨기고 그대로 납작 엎드려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스승이 잠시 이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씨익 웃음을 짓는 것을 보고는 심장이 멎는 줄로만 알았다. 다행히, 그냥 다른 일로 웃은 것인 듯 로이카르스는 다시 발길을 돌려 촌장 쪽으로 다가갔고, 일을 다 마친 두 사람은 마을 쪽으로 걸어갔다. 글라인은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잠시 그대로 있다가 일어서서는 공터에서 자고 있는 친구들에게 다가갔다. 3 이제... 오늘밤에 뜨는 달부터이다. 의식의 시작은 경건해야 한다. 무엇보다 지금껏 쌓아 온 것이 드러나는 순간을 위해서... 나는 진을 완성한 직후 냇가에서 정성을 들여 씻었다. 진은 결계만큼 완전하진 않겠지만 효과는 있다. 혹시 지나치는 불청객들을 위해 적당히 길을 헤매다 바깥쪽으로 뱉어 놓는 역할을 해 주니까. 여느 때 같으면 함께 물장구를 쳤을 보노도 오늘은 얌전을 떨어 주었다. 그녀는 폴리모프도 해제하고 조용히 냇가를 지켜주고 있었다. 혹시나 일전의 불상사 같은 일이 또 일어날 것을 염려해서. 페이라는 사람은 아보카도아 가도를 따라 좀 더 북쪽으로 향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무조건 반대 방향이라고 하고는 그를 먼저 보내고 분명히 갔음을 확인 한 후에야 내가 찾아 놓은 '장소'로 돌아 올 수 있었다. 그때까지도 보노보노의 은닉의 술은 유지되고 있었다. 후후... 엘프 졸개(?)라.... 괜찮은데? 그러나 그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하고 다만, 고맙다고 꼭 껴안고는 그녀에게 뽀뽀를 해 주었다. 보노는 숨이 막혀 괴로워했지만 나는 털이 목에 걸릴 뻔해서 괴로워해야 했다. 흠, 다람쥐의 꼬리털은 너무 길단 말야. "보노이카, 이제 가자." "그래, 그런데... 가다 보면 또 먼지가 묻겠는걸?" "에, 그런가?" 보노이카는 내 손을 잡고 주문을 외웠다. 그리고 밝은 빛이 눈앞을 스쳤다 싶은 순간 우리는 벌써 '장소'에 와 있었다. "와∼ 재밌다. 내가 쓰는 방법이랑은 많이 다른 것 같아. 보노이카 이건 뭐라는 거야?" "너도 마력이 좀 더 높아지면 할 수 있는 거야. 후후...." 그렇게만 얘기하고 보노이카는 다시 보노 다람쥐로 돌아갔다. 흥, 너무해. 그래, 내가 아직 마력이 별로다...라는 얘기를 하는 거지? 그야 당연하잖아. 어떻게 527살 먹은 엘프하고 의식도 치르지 않은 마녀하고 비교를 하겠냐고? 이 대목에서 항상 이럴 때만 찾는 527살 타령이 또 나온다. 그러나 들어도 콧방귀도 안 뀔 얘기, 하나마나 내 입만 아프다. 천막은 공터 가운데 있는 보리수나무 두 그루 사이에 자리를 잘 잡고 있었다. 어떤 성인도 보리수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던데.... 나도 그럼? 하지만 그 보리수나무와 이 보리수나무는 이름과 모양이 비슷할 뿐 자생지역은 전혀 다르다구. 성인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보리수는 인도보리수로 아열대 지방에 자라는 뽕나무 무리의 무화과 종류에 포함되는데 높이 30젠, 지름이 2젠 정도나 되는 참으로 거대한 상록수이다. 성인이 도를 깨친 인도보리수는 이곳에서는 추워서 자랄 수 없으므로 그 종교의 신자들은 대용 나무가 필요해서 추운 지방에서도 잘 자라는 피나무를 보리수란 이름을 붙여 널리 심기 시작했다는 거다. 피나무 무리들은 단단하고 새까만 열매가 흔하게 달려서 염주로 쓸 수 있고 잎이 하트모양으로 인도보리수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즉, 이 나무는 보리수를 가장한 피나무이다. 보리수나무 아래 자리한 천막 안에서 나는 마녀 정복을 갈아입었다. 빗자루를 들고 공터로 나와 나는 달이 뜨기를 기다렸다. 조용히 눈을 감고 서서... 제 2 성장의 시간.... 마녀들의 빠른 성장은 한 살이 되기까지 한번, 그리고 지금 또 한번 급격히 바뀌는 성장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인간으로 치면 2차 성징, 사춘기쯤 되려나? 그러나 인간은 그 기간 동안 비교적 차근차근 지나며 성장하는 편이고 마녀들은 몸부터 먼저 자라는 것이다. 의식을 통해. 그리고 그 몸에 맞는 마력과 정신력을 7년의 시간동안 수행하며 키워 나가는 것이다. 후일, 7년의 시간이 지나 자신의 바램만큼, 혹은 바램보다 더 크고 높은 마력을 지니지 못한다면, 그리고 지나치게 과용한 외모(?)와 그 마력이 조화되지 않는다면 완전한 마녀가 될 수는 없다. 그들은 반쪽마녀나 실패한 마녀로서 그냥 인간과 비슷한 수명을 지닌 채 인간들의 마을 근처에서 적당한 저주나 해 주면서 근근히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진짜 '마녀'라 할 수 있는 '마녀'의 숫자는 그다지 많지는 않다. 아니, 어떤 인간들은 그 반쪽 마녀들이 마녀의 본신(本身)인 줄 알고 있다. 나의 엄마의 경우, 무슨 운이 좋았는지는 몰라도 온 힘을 다 해 초인간적 미모를 얻은 후에도 아무 탈없이 수행기간을 무사히 끝내게 되어 완전한 마력을 얻은 바 있다. 엄마에 대해서라면..... 뭐, 분명히 내 엄마가 맞고 나도 사랑하긴 하지만 그 사고방식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예쁘면 다 돼'라니. 아빤 어떻게 그런 엄마를 사랑하게 된 걸까. 조금 이해가 안 가는 대목이다... 달이 뜨자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두 팔을 힘껏 벌렸다. 반짝반짝 부드럽게 빛나는 달빛이 내 온몸으로 쏟아져 내려온다. 춤을 두는 빛의 무리들. 요정들의 댄스 같다. 빛 무리가 까르르 웃으며 돌아다닌다. 그리고 달이 중천에 솟아올랐을 때, 나는 빗자루를 타고 수직으로 허공에 치솟아 올랐다. 공중에 매달린 커다랗고 둥근 달. 그 안으로 뛰어들 듯이 빠른 속도로 계속 솟아오르다가 구름을 뚫고 나서야 나는 그 수직의 비행을 멈추었다. 구름 위에 둥둥 떠 있는 느낌은 정말 색다르다. 옅고 부드러운, 솜사탕 같은 구름. 그 위에서 뒹굴고 싶지만 저 수증기 덩어리에 발을 디딘 순간 나는 땅 밑으로 추락하고 말 것이란 걸 알고 있다. 뭐, 최초의 구름 타는 마녀가 되고 싶은 욕심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 모험을 지금 해 볼 생각은 없다. 공기가 옅기 때문에 오랜 시간 머물지는 못하고 나는 점차 고도를 낮추면서 달빛을 한껏 받았다. 그리고 달이 저물녘이 되어서야 나는 공터로 내려 왔다. 그리고 공터의 한 가운데 온몸을 쭈욱 펴고 누워 마지막 달빛을 받았다. 온통 달빛을 머금은 마녀 정복에 은은한 빛이 감돌았다. 달이 지고, 새벽의 여명이 밝아 오면은, 나는 천막 안으로 들어가서 잠을 청할 것이다. 가득 들이킨 달빛을 온 몸에 깊숙이 스미게 하며. 앞으로 남은 이틀도 무사히 달빛을 받아야 될 텐데.... 밤하늘이 흐리지 않아야 될 텐데... 그런 여러 생각들이 떠오른다. 그러나 나는 일요일의 아이, 아즈데리카 차일드 azderica's child.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행운과 신비가 쫓아다니는 아이, 나 꼬마마녀 티티노는 분명히 내가 생각한 바를 이룰 것이라고.... 분명히 이룰 것이라고... 친구들과 함께 수행 길을 나서지 않은 것은, 마녀들의 규율 때문이기도 했지만 나는 아마 쑥스러웠는지도 모른다. 갑자기 변화한 내 모습에 친구들이 어떻게 적응할 지도 미지수였고, 그들이 제대로 받아 들여준다 해도 내 스스로가 바뀐 외모에 적응하려면 한참 걸릴 듯 해서.... 나는 적응이 좀 느린 편이라 그런지도 모른다. 어떨 때는 놀랄 만큼 빠른 적응을 하지만 그것이 내 주변상황을 송두리째 바꿔 놓을 수도 있는 일이라면 무척 신중을 기하는 편이다. 그래서 나는 2차 성장만큼은 인간의 것이 부럽다. 정말로. - 보노야, 그러니까 나 자란 다음에 괴물 취급하면 안돼. 정말루... 내일, 그리고 다음날 밤도 오늘처럼 보내고 나면 마지막날 새벽, 잠들기 전에 그 동안 정성 들여 만들어 놓은 환약을 먹게 된다. 가죽끈으로 묶어 내 목에 걸어놓은 것 말이다. 그걸 먹고 잠이 들면 의식은 막바지다. 그리고 한 밤중에 잠을 깨면 나는 이제 진짜 수행 길에 나설 자격을 얻은 예비 마녀가 되는 것이다. 내 스스로에게, 행운이 우르르 쏟아지기를. 그리하여 수행을 끝내면 마침내 완전한 꿈을 이룬 마녀로서 완성되어 있기를...... 우선 제대로 된 마녀가 되어야 그걸 바탕으로 대마왕이 되든, 대 마도 왕이 되든 할 것이 아닌가? 내 궁극적 목표는... 제대로 된 이유가 아직도 생각나지 않는다. 아아... 모르겠다. 이제 달도 지고 천막으로 잠이나 자러 가야겠다.... 후아아아암∼!! 달빛 가득! 행복 가득! 그대들에게 행운이 와르르 쏟아지기를. 햇살 가득! 행복 가득! 행운이 우루루 쏟아지기를.... 이제 수행 길에 들어선 꼬마마녀에게도 달빛 별빛 반짝이는 상큼한 행운이 깃들기를. 부디, 행운이 깃들기를.... --- 티티노가 모르는 이야기, 그 셋 "헥.... 바보 같은 놈들... 나 혼자라도 나서야지.... 촌장하구 스승하구 무슨 계략을 꾸미는 건지.... 혼자라두 티티노를 찾아 나설꺼야∼!! 우워어∼ 정의의 글라인, 파워가 샘 솟는닷∼!!" 글라인은 짧은 팔로 당나귀에게 고삐를 씌우느라 고생하고 있었다. 말은 타기에 무리가 있으니 좀 작은 당나귀를 고른 것이었는데, 그래도 혼자 여행 차비를 꾸리기엔 무리가 있었다. 언젠가 마법수행을 떠날 때 가지고 가리라 하고 그간 모아 놓은 짐들을 바리바리 꾸려 당나귀 등에 싣고 나니 문제가 생겼다. 짐이 너무 무거워서 당나귀가 꼼짝을 못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에잇∼ 바보 같은 녀석. 말이었다면 거뜬히 실었을 텐데. 비리비리해가지고는... " 그러나 그 짐의 부피를 보면 말이라고 해도 무리가 생길 듯 보였다. 현재 당나귀가 쓰러지지 않는 것만도 기적이라 할 수 있었다. 글라인은 정말 어쩔 수 없이 짐을 줄이기로 했다. 마법 수련생 답지 않게 힘 하나는 천하장사인 글라인 드워프군은 당나귀의 등에 얹힌, 자신보다 더 큰 부피의 짐을 번쩍 들어 땅으로 내렸다. 다른 사람이 봤다면 아마 당나귀가 글라인을 타고 가는 것이 나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쳇, 어쩔 수 없지. 다시 정리해서... 기초 마법 입문... 이건 필요하구, 담요... 이건 꼭 필요한 거구, 세면도구.... 당연히 필요하구, 수저 젓가락 밥그릇 등 취사도구.... 이것도 필요" 하면서 챙겨놓는 취사도구라는 것이 새끼 돼지 한 마리 정도는 거뜬히 들어가 헤엄칠 만한 걸이 냄비와 주걱 만한 수저, 그리고 양푼 만한 밥그릇이었다. 거기에.... "....난 몸이 약해서(?) 식사를 잘 해야 하니까... 밀가루 한 푸(포)대 하구, 쌀 한 푸대.... " 아마도 제대로 짐을 꾸려 출발하려면 꽤나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할 듯한 글라인이었다. 해가 서편으로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이제 달이 뜨면 만 사흘간의 의식이 끝난다. 티티노는 잠들기 전 보노이카에게 당부해 두었다. 자신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놀라지 말아 달라고. 그리고 보노이카는 오랜 세월 많은 것을 보고 겪은 경험으로 무엇을 보더라도 놀라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했다. 저편에 노을이 질 무렵, 달은 벌써 동편하늘에 떠올라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자정까지 기다려야 한다. 자정이 되어야 의식이 완전히 끝나는 것이므로. 때문에 그때까지 보노이카는 보리수나무 옆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만 사흘동안 두 사람은 반대로 행동했다. 티티노가 자는 동안 보노이카는 깨어 있고, 보노이카가 자는 동안 티티노는 깨어 있고. 그러나 보노이카는 실은 거의 잠을 자지 않았다. 혹시나 진을 침입했다가 튕겨 나가지 않는 생물이 있을 것을 염려해서였다. 그녀는 하루 두 세 시간만 자고도 숲에서라면 별 불편 없이 하루를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다람쥐일 경우엔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그녀는 사흘간 내내 폴리모프를 해제하고 있었다. 이렇게 며칠간이나 엘프로서 지내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거의 9년만의. 그러나 다람쥐로서 지낼 때도 그녀는 별 불편을 느끼지는 않았었다. 어차피 엘프란 자연에 가까운 존재. 오히려 인간으로 지내는 것 보다 다람쥐가 더 본연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 9년 동안 그녀는 다람쥐이면서도 '인간적'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건 티티노와 친구들의 영향이 컸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이미 예전에 엘프의 숲을 떠날 때부터 바랬던 것이었으니. 소원을 이룬 지금 그녀는 후회하지 않는다. 다만.... 갑자기 그녀의 앞에 놓여 있던 물 잔의 물이 바람도 없는데 출렁거렸다. 보노이카가 긴장하는 순간 물 잔의 물은 순식간에 허공으로 치솟아 어떤 형태를 이루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과거 그녀가 익히 알던 모습이었다. < 보노이카 그란델리아.... 오랜만이야. > "......어쩐 일이지?" <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하는 인사치고는 너무 딱딱한걸? 서운해, 보노이카.... 그새 만난 새 친구들에게 정이 담뿍 들어서 옛친구 따위는... > "네가 여기 머물러서는 안 되기 때문이야. 오해는 마." < 아아... 의식중인가... 이제 거의 끝나 가는 것 아냐? > "아직 완전히 끝나지는 않았어. 네가 여기 있으면 그녀의 마력이 흔들리게 되. 이제 그만 돌아가 줘." < 훗... 그래, 정령의 힘이 마녀의 마력과 무슨 상관이지? 되지도 않는 핑계를 갖다 붙일 만큼 궁색한 거니? > 보노이카는 아름다운 미간을 찌푸리며 눈앞에서 이제는 완전한 하나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 한 인간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 모양새는 마치 물이 부풀어올라 형체를 이룬 듯 보였다. 형체는 인간의 모습에 가까웠으나 재질은 물처럼 투명했다. 마치 물로 만들어진 조각 같은 모습. 그리고 그 하체는 유령의 꼬리처럼 가늘어지며 물잔 속에서 스물거리고 있었다. < 물의 정령으로서.... 나는 언제든 네가 있는 곳에 갈 수도 있었어. 하지만 그러지 않았지. 그건 네가 원치 않았기 때문이야. > 물빛 아픔이라는 뜻의 이름을 지닌 물의 정령, 피오리언. 그, 혹은 그녀는 성별이 딱히 없었다. 그는 예전에는 보노이카와 무척 가까운 친구였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보노이카를 친구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 그런데 왜 지금에 와서 나타난 거지?" < 오랜만에 엘프로서의 네 모습이 보고 싶어서...라고 한다면...? > "쓸 데 없는 소리. 네가 새삼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는 거야?" < .....아직도 용서하지 않았구나.... 그래, 그럼 난 이만 갈게. 그러나 네가 부르면 난 언제나 네게 올 수 있어. 단 한 방울이라도 물이 존재한다면 그곳이 어디이든.... 보노이카..... > "그럴 일은 없을 거야." < 앞일은 모르는 거니까...... > 보노이카는 그를 외면했다. 아직은 그를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옛 기억은 그녀에게 아직도 고통이었다. 그의 이름 의미 그대로의, 물빛 아픔. 가슴 아린 기억들. 엘프처럼 감정의 기복이 거의 없는 생물치고는 평생에 한번 느낄까 말까한 강렬한 감정을 그녀는 맛보았다. 그리고 그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다. < 보노이카.... 그는 아직 너를 잊지 않았어. 그걸 알려주러 왔어. 언제든 돌아오기를..... > 그 말을 끝으로 물의 정령 피오리언은 다시 순수한 물의 모습으로 돌아가 잔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한순간의 일렁임 뒤에 물은 원래의 물로 돌아왔다. 그의 마지막 말이 보노이카의 가슴 깊숙이 숨어 있던 감정을 일깨웠다. 그 때문인지, 아니면 그 동안 인간으로서의 감정에 젖어든 때문인지 그녀의 눈에서는 쉬 눈물이 흘러 내렸다. 나무 둥치에 기댄 채 한동안 힘없이 앉아 있던 그녀는 달이 중천에 떠 오른 것을 보고 자정이 넘었음을 알았다. - 티티노가 깰 때가 되었는데.... 이제 의식은 완전히 끝났을 것이다. 그녀는 망설이다가 천막의 입구를 조금 열어 보았다. 그러나 천막 안은 컴컴할 뿐, 이 밤에 천막 안이 제대로 보일 리가 없었다. 그녀가 조그맣게 주문을 외우자 조그만 불의 도깨비가 그 빛을 환하게 밝히며 나타났다. '윌 오 위스프'라고도 불리는 불의 도깨비는 또 다른 말로는 불의 정령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 정령은 하급정령으로 마법 레벨이 어느 정도 되면 누구나 부를 수 있는 도깨비였다. 흔히 무덤 가에서 본다는 도깨비불은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치 앞도 안 보이던 천막 안에 빛이 떠오르자 보노이카는 눈을 깜빡였다. 두어 번 깜빡임으로 금새 빛에 익숙해진 그녀는 천막 중간에 드리웠던 베일 사이로 마치 꿀처럼 윤기 흐르는 아마 빛 실이 흘러나와 있는 것에 의아해했다. 조금 머뭇거리던 그녀가 허리를 숙이고 베일을 걷어내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 온 것은 창백하고도 섬세한 느낌의 발끝이었다. 발끝만으로도 이 세상 것이 아닌 듯, 부드럽게 녹아날 크림 같은 모습. 시선을 끌어올리자 엇갈려 모인 무릎 위로 마녀 정복 치마가 약간 흐트러진 채 덮여 있는 것이 보였다. 왠지 기이한 이질감에 시선을 더 올리는 것을 망설이던 보노이카는 자신이 시선을 두고 있는 몸이 뒤척이는 기척에 깜짝 놀랐다. 가슴이 답답한 듯 앞섶을 풀어헤치는 가느다란 손가락과 이내 풀어지지 않는 것에 고개를 흔들어 대는 것은 아무래도 잠결의 움직임인 듯 분명하지 않았다. 보노이카는 주변에 온통 펼쳐져 있는, 도깨비불의 따스한 빛을 받아 부시게 반짝거리는 금빛 실타래가 고개가 움직임에 따라 이리저리 따라가는 것을 보고서야 그것이 '머리카락'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쉬 풀어지지 않는 앞섶에 답답해하면서도 좀처럼 깨지 않을 정도로 잠에 취해 있는 저 아마빛 머리칼의 여인은 의식을 끝내고 힘이 빠져 피로에 젖어있을 티티노일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아연했다. 티티노에게 놀라지 않겠다고 그렇게 다짐을 했건만 그녀는 지금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을 정도였다. 엎드린 상체를 두 팔로 버틴 채 주춤거리던 그녀는 티티노가 다시금 뒤척이며 돌아눕는 것을 보고 반사적으로 티티노를 흔들었다. "티... 티티노..... 티티노오∼∼" "으응.... " "티... 티노... 일어나 봐.... 티티노..." "으음... 보노... 나 지금.... 무지 피곤해. 정말 무진장...." "그... 그래도...." "의식이 끝나면...... 피곤하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게... 이렇게 피곤한 건 줄 몰랐어..... 하아아암∼" "..... 그래....." "나 좀 더 잘게. 너도 옆에서 자... 이젠 의식 끝났으니까.... 음... 같이 자자...." "그... .그래...." "너도 잠 통 못 잤잖아. 여기 누워..... 하아아암...." 그렇게 말하고 뒤척이다 다시 잠드는 티티노. 머리칼이 얼굴을 뒤덮는 것이 귀찮았던 그녀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머리칼만 쓸어 내렸다. 그런 티티노를 바라보는 보노이카의 두 눈은 대책 없이 휘둥그레졌다. 세심한 장인이 깎은 듯 오똑 솟은 콧날은 도깨비불로 인해 만지면 고운 가루가 묻어날 듯 섬세한 뺨에 또렷한 음영을 드리웠고 그 아래로 도톰하게 솟은 핑크빛 입술은 사랑스러웠다. 시원하게 드러난 이마, 그린 듯한 아미, 길게 뻗은 속눈썹. 그 눈을 뜨면 또 어떤 놀라움이 드러날 것인가. '티티노가 생각한 이상형의 모습이..... 이런 거였단 말야? 그.... 내가 듣기론 이게 아니었는데.... 이건, 아름답기는 하지만.... 아니, 아름다운 정도가 아니라 이 정도면.... ' 마땅히 표현할 말을 찾을 수 없을 정도의 모습, 마치 여신 같은 자태. 보노이카는 그녀의 500평생 볼 수 없었던 경국지색을 앞에 놓고 입만 뻐끔거렸다. '하아---' 한참동안 숨을 죽인 채 티티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보노이카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 쉬었다. 여자인 자신이 보기에도 한숨이 나오는데 다른 이들이 본다면 어떨 것인가. 그녀는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티티노의 말대로라면 그녀는 평소 이런 스타일(?)을 싫어했다. 그리고 미모에 욕심을 부려 과용을 해서 생기는 부작용에 대해 이미 그 의견을 피력한 바 있지 않은가? 티티노와 여행을 시작하면서 그녀는 마녀의 의식에 대해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보노이카에게 누누이 말 해 왔었다. 그런데... '.....실제 바램은 이런 거였단 말야? 뭔가 잔뜩 속은 듯한 느낌인걸? 그나저나 이런 상태라면 마력은 거의 바닥났을 텐데.... 어떡해야 하나.... 혹시 나만 믿고 이런 건.....?' 그러나 보노이카는 고개를 흔들었다. 티티노는 이중성격을 쓸 애도 아니었고 더구나 남에게 의지만 하고 살아가는 것은 몸서리를 칠 정도로 싫어했다. 그럼 그새 이상형이 바뀌었다는 것인가? '어찌 되었건, 티티노... 너, 너무 과용했어. 이건... 이건 너무해....' 엘프의 마음조차 순식간에 녹일 듯한 미색이라니... 담요를 덮어 주는 손길마저 조심스러웠다. 티티노가 움찔 하며 고개를 돌리자 보노이카는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서 구석에 접어놓은 담요를 펼쳐서 머리 위로 푹 덮어쓰고는 도깨비불을 꺼 버렸다. "꺄아아아아------악--!!" 보노이카는 허공을 찢는 비명소리에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늦은 오전의 해가 중천을 향해 올라서려는 즈음, 공터 가에 무성하게 늘어진 나무 가지며 넝쿨들이 담요를 덮어쓰고 있던 보노이카에게 초록의 그늘을 드리우며 직각으로 내려꽂히는 빛을 막아주고 있었다. 평화로워 보이는 주변. 방금의 비명이 꿈결인 듯 멍했던 보노이카는 잠깐의 사이를 두고 새로이 이어지는 비명에 화들짝 놀랐다. 두 눈을 크게 뜨고 무슨 일인가 해서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비명이 천막 안에서 이어진다는 것을 알고는 무조건 뛰어들어갔다. 아직 진을 파하지도 않았는데 누군가 침입을 한 것인가, 아니면.... "으흐흐흐흐.... 보노이카....... 나... 나 어떡해... 나... 흐으으으으...." 보노이카가 천막 안에 들어서자마자 보게 된 것은 커다란 거울을 들고 있는 티.티.노.였다. 거울은 아마도 이전 글라인 때처럼 손거울을 크게 만들어 놓은 것일 테지만 보노이카의 눈을 휘둥그레하게 만든 건 그런 것이 아니었다. 거울을 들고 있는 그녀는, 천막 안에서 보노이카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를 내며 흐느끼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티.티.노.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의식을 끝내기 전, 허리까지 내려오는 붉은 곱슬머리와 검붉은 눈을 지닌, 그리고 동그란 얼굴이 깜찍하고 귀여운 꼬마마녀, 바로 그 티티노였다. "보노이카... 흐으으... 나 왜 이래? 변하질 않았어. 이게 뭐지? 나... 나 불완전한 마녀가 된 거야? 나 이제 어쩌지.....? 흐으으으으....." 보노이카는 할 말을 잃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정신상태를 의심해야 했다. 어젯밤 자신이 본 것은 무엇이었단 말인가. 도깨비불을 통해 환상을 본 것이었단 말인가? 그럼 담요까지 챙겨들고 나가서 잔 것은 뭐란 말인가? 아니면.... 그녀는 어젯밤 채 의식이 끝나기도 전에 나타났던 옛 친구를 떠 올렸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아마도 그 때문이 아닐까. 의식의 마지막 순간 정령이 나타났던 때문에.... 그래서 그로 인한 부작용으로 이렇게 자라지 않은 것이 아닐까? 보노이카는 티티노의 얼굴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자신으로 인해 그런 일이 생기다니.... 그녀의 안전을 위해 엘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그로 인해 방해가 되는 존재를 불러들인 꼴이 되다니.... 그러나 격한 흐느낌으로 인해 우두두 떨리는 티티노의 작은 어깨를 그냥 놓아 둘 수는 없었다. 보노이카는 조용히 티티노의 옆으로 다가가 그녀를 안아주었다. 마치 힘을 주어 만지면 부서질 것을 다루듯 가만히, 소중하게 그녀의 어깨를 보듬었다. 그리고 그녀의 붉은 곱슬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흐으으... 보노이카... 나 어쩌지? 난... 난 완전한 마녀가 되고 싶었는데... 난 내가 마녀인 것이 언제나 자랑스러웠는데... 이제 반쪽 마녀가 되고 말았어.... 나... 나 어떡해.... 나.... 흐으으으..... 나... 이제 추하게 늙어 가는 일만 남은 걸까? 나는.... 나는..... 으흐흐흐....." 티티노의 흐느낌과 탄식은 계속 이어졌으나 보노이카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그녀의 어깨만을 안아주었다. 3. 불완전(不完全)의 완전(完全) 내 이름은 티티노 아즈데리카에 태어난 아이이자, 새 생명을 관장하는 롱디즈(봄) 여신의 딸 나는 마녀...... < 아즈데리카의 마녀 > 중(中) 1 - 꺄아아아아악---------!!! 이건 도대체가 말도 안 된다. 내가 준비했던 것에 뭐 하나 부족한 것이 있었단 말인가?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평생, 이렇게 불완전한 마녀로서, 실패한 마녀로서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불완전한 반쪽 마녀라도 자라지 않았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어느 마녀 참고 서적에도 그런 말은 적혀있지 않았단 말이다. 그럼 난 뭐야? 어떻게 이렇게 하나도 변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이냐. 그러나 변한 건 있었다. 바로 이 넘칠 듯한 마력!! 그럼 나는 몸은 성장 않고 마력만 성장했다는 말인가? 이게 도대체가 말이 되는 소리냐고오∼! 나는 그런 안배를 한 적이 없다. 어디선가 무슨 변수가 끼어 들지 않고서는 이런 일은 생길 수가 없다. 절.대.로.--!! 아웃∼ 성질낫∼!!! 그러나 지금껏 갈고 닦아온 내 인격과 덕망과 체면과 라면과 스프가 있으니 그래도 꾹 참자.... 참아..... 그런데 라면이 뭐더라.... - 콰콰콰쾅---------!!! - 우르르르르릉-----, 쿠르르릉---!! "......." "......" 하핫, 이런 실수를.... 나는 그저 손을 한 번 뻗쳤을 뿐인데. 저쪽에 돌산이 무너지는군. 뭐, 어쩔 수 없지. 이런 데라도 풀지 않으면 정말 미칠 것만 같은걸.... 지금까지 걸어가면서 이런 식으로 부서진 바위며, 나무며, 파헤쳐진 땅이 좀 길게 이어지는 것 같다. 그러나 내 잘못이 아냐. 그럼, 지나치게 넘쳐서 조절이 곤란해진 마력의 탓이지. 여느 때였다면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으로 생각될 일인걸? 주문조차 필요 없는 힘이라니... 그런데, 아까부터 거슬리는 것이 있었다. 보노이카는 다람쥐로 변하지도 않고 엘프인 채로, 어두운 표정을 짓고는 계속 내 뒤만 졸졸 따라 오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큰 죄를 지은 죄인인양 고개를 푹 숙이면서. 내가 아무리 옆에 오라고 해도 말을 안 듣는다. 안 그래도 속상한 데 대체 너까지 왜 그러는 거니, 보노이카? 내가 변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지는 거니? 너도 그렇게 느끼는 거야? 아니면 내가 너에게까지 마력을 함부로 휘두를 것 같아서니? - 화르륵---!! 화라라라라라-----_?!!! '......' 이건 또.... 음... 이번엔 불이 나가네. 이번엔 어떻게 한 거지? 스스로 저질러 놓고도 어떻게 한 건지 짐작조차 안 가는군. 이런 식으로 스스로 조절할 수 없는 마력이라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거얏. 흐으으..... 막 불이 옮겨 붙은 나무는 훨훨 잘도 타고 있었다. 비라도 오면 좋으련만, 오늘은 '햇님이 쨍쨍, 대머리도 반짝'....할만한 날씨였다. 금새 옆 나무며 덤불이며 옮겨 붙는 불은.... 아아, 이대로라면 금새 숲이 홀라당 다 타겠어.... 미치겠군. 나, 물은 못 부르는 건가? 내가 혹시 물도 나오는가 해서 다시 손을 올리려 하자 그때까지 뒤쪽에 서 있던 보노이카가 내 손을 얼른 잡아채며 고개를 짤짤 흔든다. 그래, 급했구나. 보노이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옆에도 오지 않으려 하더니... 그녀는 뭔가 고민을 하다가 그 불이 옮겨 붙는 속도를 보고는 고민을 접어버린 듯 보였다. 나는 그녀가 갑자기 허리에 차고 있던 가죽물통을 꺼내 들고는 입구를 여는 것을 보고 기가 막혀서 입을 딱 벌렸다. 설마 저 물로 저 큰 불을 끄겠다는 건 아니겠지, 보노이카? 그러나 그 말이 밖으로 튀어나올 새도 없이 보노이카는 뭐라고 주문을 외웠다. 앗, 뜨거. 불티가 여기까지 튀어 오는군. 쯧.... 보노이카가 외우는 주문은.... 앞부분은 못 알아듣겠다. 그러나 뒤에 시동어처럼 외치는 부분은 확실하게 들렸다. "..... 의 아픔이여, 너를 소환한다. 피오리언---!!" 그리고 가죽물통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무언가가 솟구쳐 올랐다. 그건 뭔가 물 같기도 하고 젤리 같기도 한 풍선? 암튼 뭔가가 튀어나오더니 곧 그것은 사람의 형상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것은 '말'도 했다. 오옷.... 예쁜걸? 성별이 애매해 보여서 그렇지. 푸르게도, 초록으로도 보이는 유리 같이 투명한 몸체. < 보노이카... 빨리도 부르는군. 것 봐, 내가 앞일은 모르는 거라고 그랬지? > "시끄러,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잔소리 말고 저 불이나 꺼. 상급정령인 네 힘이라면 충분하고도 남겠지." < 훗, 뭐니? 그 엘프답지 않은 말투.... 아, 알았어. 네가 날 필요로 한다니 기꺼이 들어주지. 아무 대가 없이도 말야... 후후후.... > 에.... 또 그리고.... 둘은 아주 잘 아는 사이인가보다. 대화하는 내용으로 봐선 보통의 사이는 아닌 듯 했다. 저건 아마도 물의 상급정령인 듯 한데.... 아, 보노이카는 물의 엘프였지. 그러면 물의 정령과 면식이 있는 것은 당연하겠군. 불을 다 끄고.... 그 불에, 미처 피하지 못한 토끼가 노릇노릇 잘 익어 있는 것을 발견한 나는 속까지 완전히 익히기 위해 근처에서 잘 마른 가지를 주워 왔다. 엘프인 보노이카는 과일 몇 개로도 충분하겠지만 나는 다르다구. '고기'도 먹어야 하는 잡식 동물이란 말씀. 그리고 배를 갈라 향초를 가득 채워 꼬맨 토끼 고기를, 일전에 페이라는 남자가 했던 대로 꼬챙이에 잘 꿰어서 불에 올려놓았다. 와∼ 바베큐다 바베큐! 점심은 이걸로 충분하겠다. 남는 건 잘 싸서 들고 가면 저녁까지도 해결 할 수 있겠지. 그리고 어느 정도 식사 준비가 끝나고 한숨 돌리고 불가에 모여 앉게 되자 비로소 보노이카와 그녀의 옆에 찰싹 붙어있는 괴상한 정령을 자세히 살펴 볼 수 있게 되었다. 보노이카는 여전히 어두운 기색이었고 그 정령은...... 물 잔에다 손을 담그고 앉아 있는 꼴이라니, 왠지 얼간이 같다. 저 정령도 생긴 거완 다르게 하는 짓이 좀 그렇네? 그리고, 보노이카와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는 것을 은근히 과시하는 듯한 표정. 흠, 의외로 웃기는 정령인지도...... "그래서...." 아, 보노이카가 할 얘기가 있다고 했지? 나는 점심준비를 위해 조금 있다가 하자고 그랬고. 무슨 비극이 있었건, 뭐가 어찌 되었건 밥을 먹어야 생각도 하고 슬퍼할 것이 아닌가? "그래, 이제 얘기해 봐. 식사 준비도 거의 끝나가니." "티티노...." "왜?" "....저기.... 저기 말이야......" 뭘 저렇게나 망설이는 걸까? < 보노이카, 그렇게 머뭇거릴게 뭐가 있어? 내가 보기엔 별 문제도 없구만... > "무슨 문제?" "티티노....." < ... 너... > 정령은 무척 놀라는 눈치였다. 뭐가 놀라운데? < 너 내 말 알아듣는 거야? > "왜, 비밀 얘기라도 하는 거니? 내가 알아들으면 좀 안돼?" < 보노이카... 쟨 뭐야? > "그러니까 말했잖아. 네가 만만하게 볼 상대가 절대 아니라고. 그냥 조용히 하고 있어." 그러나 그 정령은 보노이카의 말에 수긍할 수가 없는 눈치였다. 뭔가 아주 억울한 듯한 표정을 짓는. < 아무리 마녀라고 해도 아직 정식 마녀는 아니잖아? 게다가 상급정령의 언어를 알아듣는 다는 건...!! > "피오리언, 그만하랬지?" < 아하, 알겠어. 그랬지, 그랬어... 이 아이는 아즈데리카(일요일)의 마녀였지? 후후후후..... 아즈데리카의 마녀라... 아즈데리카에 태어난 마녀.... 호호호홋∼!! > 왠지 변태 같은 웃음소리다. 그래, 나는 아즈데리카에 태어난 마녀닷. 그래서 니가 뭐 보태준 거라도 있어? 왜 시비야 시비는? 나는 그러나 조용히, 아무 말 없이 그녀를 향해 손가락만 뻗쳤다. 그러자 손가락 끝에서 빛 막대기 같은 것이 나와서 쏜살같이 날아갔다. 정확히 정령이 있는 곳을 향해서. 흠... 이것도 자꾸 쓰니까 요령이 생기는군. 아마 내 마음상태에 따라서 나오는 것이 달라지는 것 같은데? 그럼 아까 불이 난 것은 불의 성질을 지닌 화를 냈기 때문인가? 뭔가 말이 안 되는 듯 하면서 말 되는군. < 꺄아악---, 너....!! > "잘도 피하네. 흠... 물의 정령이라 그런지 구멍을 만들어서 통과시키나? 하핫, 재밌는데? 한번 더 해볼까나?" "둘 다 그만햇---!!" 보노이카는 좀처럼 내지 않는 화를 내며 나와 정령을 함께 야단치고 있었다. 하지만 보노이카, 나 쟤랑 노는 게 재밌어지기 시작했는걸? 뭐 다칠 염려 없는 장난감이라고나.... 알았져. 그 표정 정말 무서비.... "그래서...." "......미안..." "하아....." "정말 미안해, 티티노. 나는....." 나는 손을 흔들어 보노이카의 말을 끊었다. 그러자 그녀의 옆에 앉아 있던 정령이 흠칫하고 긴장을 했다. 아마 내가 손을 흔들기만 하면 뭔가 튀어나가는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지? 어쩐지 상급정령치고는 가볍고 품위가 없어 보이는... 아니, 원래 정령이란 것이 그런 존재인지도 모르지만. 하아, 어쨌든.... 보노이카는 자신과 상관도 없는 일을 가지고 고민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내내 내게 미안한 표정이었던 걸까? 괜히 어두운 표정을 짓고... 훗, 보노이카. 내 생각엔 그건 아닌 것 같아. 약간 짐작 가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그러나 그건 아냐. 무엇보다 '그 여자'가 마력만 키우도록 유도할 리는 없잖아? 그럼, 정말 어떻게 된 일인 걸까.... 이것도 내가 아즈데리카의 아이인 것과 뭔가 관련이 있는 것일까? "보노이카.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거기 얼빵한 정령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야. 실제로 천막 안에 들어와서 휘젓고 다녔다면 뭔가 일이 벌어졌을 지도 모르지만, 그의 말대로 정령의 힘과 마녀의 힘은 확실히 다르니까..." < 뭐이? 얼빵? > "그래, 얼빵... 얼빵 정령씨." < 저 쪼끄만게.... > "쪼끄만 거한테 한 대 맞아 볼래? 이번엔 화염방사기 버전으로 가 줄까?" < 으..... > "흥, 성별도 없는 주제에." < 뭐얏? 나는 고차원의 존재라서 성별이 없는 거얏. 너희처럼 하등한 존잰줄 알앗? > "어이, 보노이카... 쟤가 너한테 하등존재라는데? 어떻게 생각해?" < 아... 아냐, 너한테 그런 거 아냐, 보노이카. 나는....> "하아-----" 보노이카의 커다란 한숨소리가 주위를 조용하게 만들었다. 뭔진 몰라도 정령은 그녀의 눈치를 상당히 보는 듯 했다. 보노이카는 정령에게 조용한 목소리로 충고했다. "피오리언, 너 이제 그만 가는 게 좋지 않겠니? 상급 정령이 자리를 오래 비우는 것은 안 좋다고 알고 있는데?" < 흐윽... 보노이카, 왜 나한테만 그래? 쟤가 먼저 시비를 걸었단 말야...,> "피오리언....." < 아... 알았어. 나, 갈게. 하지만 또 불러줘야 해. > "필요하면." < 꼭 필요하게 될 거야. 그럼 꼭 불러 줘. > 그, 혹은 그녀가 사라지고 나자 나는 심심해졌다. 오히려 그로 인해 상황의 심각성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는데.... 하아.... 또 밀려드는 여러 가지 생각들. 나는 과연 실패한 마녀인가? 그럼 아예 자라지 않은 것은 또 뭐란 말인가? 게다가 갑자기 엄청나져버린 이 조절하기도 힘든 마력.... 별로 달갑지 않은 일이다. 스스로가 조절할 수 있는 범위에서 조금 넘치도록, 그것이 지금까지의 내 방식이었다. 그래야 발전할 수 있는 거니까. 하지만 이건... 거의 포기상태에 이르도록 만드는 거잖아. 넘치는 것은 모자라는 것만 못하다고 누가 그러더군. 넘치는 것....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 봐도 대책이 안 선다. 결국 나는 '그곳'으로 가야만 하는 건가? 내게 충분한 마력이 갖추어지기 전에는, 내가 완전한 성인이 되기 전에는 가고싶지 않았던 또 한 장소. 내가 태어나고 1년간을 지냈던 곳, 엄마의 집. 거기에 가야 뭔가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정말 어쩔 수 없지만 언제나 자아도취에 취해 사는 엄마의 얼굴을 보러 가야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빠도 보고 싶다. 그 이유라면... 나는 자리를 털고 훌쩍 일어섰다. 보노이카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그녀의 의아한 시선에 나는 미소로 답해 주었다. "까짓 거....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쩌겠어? 원인을 알아야 대책을 세울 테니 움직여야지. 이렇게 궁상떨고 있는다고 의식을 물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디로.... 티티노 어디로 가려는 거야?" "엄마네. 자칭 초 절정 미녀이자 영원의 마녀,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피빛 마녀라고 하는 성질 고약한 여자한테. 거기에나 가야 뭔가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아. 방향을 잡자구." 빗자루를 타고 나르다가.... 나 아마 뱃속에 거지가 있나봐. 그러나 비행 중에 뭘 먹기도 그렇구, 보노 다람쥐(비행을 위해 다시 다람쥐로 폴리모프했다)와 나는 다시 땅으로 내려갔다. 어느덧 해가 서편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한 시간? 한 30분 정도면 해가 지려나.... 아아... 저녁을 먹고 좀 쉬었다가 달빛을 받으며 비행하는 것이 낫겠다. 달은 마녀에겐 치유제 역할도 한다. 달빛을 받으면... 후후... 기분이 좋다. 점심때 잘 싸 놓은 고기와 마른 빵을 꺼냈다. 이제 빵도 다 떨어져 간다. 그냥 간단히 먹고 출발하기 위해 불은 지피지 않았다. 어차피 어딘가 들러야 할 것 같다. 식량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엄마 집에 가면 빵이나 좀 얻을 꺼나. 보노는 열매 조금과 마른 빵 조금을 갉아먹었다. 내가 걱정 말라고 했는데도 여전히 기분이 꿀꿀한 듯 했다. 보노, 니 탓이 아니라니깐. 어느새 노을이 짙게 깔리고 있었다. 저녁을 먹어 배부르니까 졸린다. 조금 눈을 붙이고 갈까? 졸음비행은 추락을 부른다. 정말 위험하다. 그러니까 잠깐 눈 좀 붙이자. 나는 앉은자리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제대로 담요 깔고 자다가는 쉬 일어서 지지가 않을 듯 해서였다. 보노도 피곤한지 내 옆에서 존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무슨 소리가 들려 눈을 반짝 떴다. 사위는 이미 깊이 어두워져 있었다. 저편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 온다. 이것도 왠지 낯익은 웃음소리들..... "켈켈... 여기에..... 오오... 저 머리결....." "오늘도 허탕인가 했더니 이게 왠 떡이냐...!! 우후후후...." "푸헐헐... 요정인가... 옷, 눈이 부시군... " "두목이 좋아하시겠는걸? 저런 머리 좋아하신다는데..... 특별 수당을 받을지도 몰라." 이 산적들, 이젠 정답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어쩜 학습능력이 그렇게도 없을까. 거기다 저 설명들은 또 뭐야? 여기 나 말고 다른 사람 또 있어? 왠 요정? 옆에서 졸던 보노 다람쥐도 그 소리를 들었나 보다. 눈을 반짝 뜨고 나를 올려다본다. 그런데. 보노, 표정이 왜 그래? 에.... 뒤에서 뭔가 다가오는 느낌은 드는데 나 몸이 왜 이렇게 둔해졌지? 고개를 채 돌리기도 전에 눈앞에 별이 반짝였다. 이럴 수가... 내가 손 한번 못쓰고 당하다니... 그 날래고 잽싸기로 세상에 둘째가라면 서운할 마녀 티티노가.... 이렇게.... 으음... 눈앞이 캄캄하다. 엘프로 변한 보노의 목소리가 저 멀리에서 들려 온다. 보노야.... 나... 잔당..... --- 티티노가 모르는 이야기, 넷 "헉.... 어허... 저, 저런 이쁜이가 또 어디서 나타난 거지? 후후..." "알 게 뭐냐? 며칠동안 허탕치더니 오늘 횡재 한 거지. 푸헐∼ 우리가 이 여자를 잡고 있을 테니까 니들 둘이 저 여잘 잡어." "저... 저 여잔... 저건 엘프얏--! 저 뾰족한 귀...." "허어... 엘프? 켈켈... 정말 운이 트였군. 이런 절세 미인에다 고가에 팔리는 엘프라니.... 잡자∼!!" 보노이카는 그 와중에도 티티노의 설명과 자신이 한번 경험했던 것에 의해 그 산적들을 모두 구별 할 수가 있었다. 약간 마른 체격의 '후후', 우락부락하게 생긴 '푸헐이', 살집 두툼한 '켈켈이', 그리고 자신의 정체를 알아보는 척 하는, 게 중 똘똘한 듯한 '머리'. - 티티노, 이름 참 잘도 지었구나..... 아니지, 이럴 때가! "그녀를 내려놓지 못해? 이 더러운 산적 놈들∼!!" 아아... 말투도 어쩜 그렇게 인간다울(?) 수가... 그녀에겐 9년의 세월이 실은 900년처럼 느껴진 건지도 모른다. 산적들은 전혀, 엘프의 입에서 나올 듯 하지 않은 말투에 하던 짓을 잠시 멈추었다. 그러나 다시 팔을 걷어붙이고 이전에 티티노가 보았다는 이상하게 생긴 짧은 금속 막대기를 앞으로 쑥 내밀었다. 그리고 그녀는 거기에 뭔가 전기 같은 것이 치지직-- 소리를 내며 어리는 것을 보았다. - 저건 뇌전 마법의 아이템인가? 그들이 보노이카에게 덤벼들었으나 그녀의 행동이 먼저였다. 그녀는 뒤쪽으로 몸을 가볍게 둥실 띄우며 물러서면서 앞으로 나선 두 남자에게 물의 화살을 쏘았다. 짧은 주문을 외치며 팔을 뻗자 가늘게 휘돌아 뭉친 물의 화살 서너 개가 보노이카의 손바닥에서 튀어나와 서슴없이 뾰족한 끝을 두 남자에게로 향했다. 두 남자 중 하나는 손목에 정통으로 화살을 맞고 들고 있던 금속 막대기를 땅에 떨어뜨렸고, 다른 남자는 화살을 피하느라 휘청거리다가 그대로 땅바닥에 굴러버렸다. 순간, 뒤쪽에 있던 '머리'가 그들에게 외쳤다. "마법을 쓰는 엘프닷! 도망치자--_?!!" "으허헉..." "흐걱..." "저 예쁜이는 무서우니까 놔두고 이 예쁜이만 잡아가잣...!!! 이 정도면 하나로도 충분햇--!!" 어떻게 손 쓸 사이도 없이 산적들과 티티노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리자 보노이카는 그들이 사라진 공간에 망연한 시선을 보냈다. 티티노.... 어떻게 된 거야. 어젯밤 내가 본 것이 그럼 환상이 아니었던 거야? 그럼 낮의 모습은 또 뭐고.... 그리고 저 녀석들은.... 확실히 '아즈라엘단'이라고 했지? "아... 아즈라엘님!! 헉헉..." "뭐얏? 아즈라엘님이 혼자 계시는 시간을 방해하면 어떻게 되는 줄 몰라서 그랫?" "진짜로 혼자 있는 것도 아닌데 뭘, 그나저나... 그게 문제가 아니얏. 빨리 아즈라엘님을....!!" "글세 무슨 일인데 그래?" "너, 자꾸 막지맛! 만약에 이 사실을 즉시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지면 너나 나나 죽은 목숨이얏∼!!" "......뭔데...." - 콰당----!! - 쿠앙----!!! 치렁치렁하게 길고 화려한 옷을 입은 한 남자가 커다란 문 앞에 서서 방을 지키고 있던 자를 밀치고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안에서 무언가 커다란 것이 날아와 문짝에 부딪혔다. 그러나 경험이 많은 듯 화려한 옷을 입은 남자는 잽싸게 문 안쪽으로 들어와 있었다. 그래서 그 커다란... 실은 묵직한 목재 의자에 맞은 것은 착실히 문을 지키고 있던 제복을 입은 남자였다. "아이고...." "저리 가서 치료나 받게. 아즈라엘님, 방해해서 죄송하지만...." 다시 날아오는 촛대를 솜씨 좋게 피하며 그는 말을 이어갔다. "중요한 일이 생겼습니다. 꼭---!! 보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감히 내 사색을 방해할 때는 그만한 대응책이 있는 거겠지, 케이?" 사색이라 하기엔... 그가 누워 있던 침대 위에는 반라의 소년 두 명이 고양이처럼 뒹굴 거리며 케이를 향해 미소짓고 있었다. 재밌는 구경거리가 생겨서 즐겁다는 듯. 아마 사색이라기 보다는 '대화'라는 편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당연히... 그만한 각오도 없이 아즈라엘님의 사색을 방해했겠습니까?" "흐응.... 좋아. 그렇다면 얘기나 들어보지. 무슨 일이야?" 아즈라엘... 그, 혹은 그녀는 오른쪽에 누운 미소년이 입에 물려주는 담배를 받아 물고 반대편에 누워 있던 소년이 내어 미는 불에 그 담배 끝을 갖다 대며 느긋하게 일어나 앉았다. 화려한 옷을 입은 남자 케이는 자신들을 향해 고양이 같은 미소를 짓는 소년들을 무시하는 미소를 마주 지으며 아즈라엘의 귀가 솔깃할 말을 전했다. "아마, 눈이 무척 즐거우실 일이 생겼습니다만. 그다지 급하지 않으시다면 다음에 말씀 드리죠." "눈이 즐거울 일?" "네, 아아---주 즐거우실 겁니다. 저로서도 생전 처음인지라...." "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훗, 내 고양이들아. 내게 옷을 입혀주련?" 소년들은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마지못해 아즈라엘에게 비단 가운을 걸쳐 주었다. 아즈라엘은 그들의 머리를 간질이며 미소지었다. "조금 후에 다시 귀여워해 주마. 그렇게 뚱한 표정 지을 것 없어. 내 귀여운 고양이들.... 후훗..." 그, 혹은 그녀는 아름다운 소년들의 앵두빛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부드럽게 갖다 댔다. 그리고 소년들이 그의 몸에 찰싹 달라붙어 오는 것을 떼어내고는 케이를 향해 돌아섰다. "....................." 아즈라엘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세 번째 침실에 올라와 있었다. 벽지며 카핏이며 커튼 등, 온통 온화하고 상쾌한 푸른빛으로 가득한 이곳은 중심에 커다란 천개가 드리워진 우아한 침대가 놓여 있었는데 아즈라엘은 지금 그 침대 중심에 놓인 것을 바라보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히 케이가 아니더라도, 아니 자신조차 이런 것은 처음 본다. 이건? "언제나 멍청한 짓만 저지르고 다니는 녀석들이라 거의 내놓은 셈치고 있었는데... 하하, 이런 대박을 터트리기도 하는군요. 아마도 그간의 실수를 상쇄하고도 남을 듯 싶습니다." - 상쇄하고도 남는다고? 이건 그 정도가 아니얏. "녀석들에게 평생 놀고 먹을만한 금화를 던져주도록." "....에.... 하핫, 알겠습니다. 달리 명하실 것이라도?" 시선은 여전히 침대 중심에 머물러 둔 채로 아즈라엘은 손만 까딱였다. "없어. 물러가." "아... 네. 알겠습니다." 케이가 조용히 물러나고서도 아즈라엘은 너무도 연약한 모습으로 침대에 누워있는 '그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렇게 애틋한 모습을 하고 누워있는 미소녀를 그냥 두고 본다는 것은 아즈라엘의 사전에는 처음 기록될 일이었지만 그는 지금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손이 그녀의 얼굴에 가 닿았다. 그의 마른 목에는 침이 꿀꺽 넘어가고 있었다. '하아..... 이건 너무.... 거의 말도 나오지 않을 지경이군. 어떻게 이런 아름다움이 존재한단 말인가. 세상은 참 오래 살고 볼일이야....' 겉모습으로 봐서는 그다지 오래 산 듯 해 보이진 않았지만 그건 관용구를 쓴 것이라고 접어두고, 그는 손끝에 닿는 피부의 감촉에 놀라고 말았다. 마치 어린아이의 피부와도 같은, 실크처럼, 비로드처럼 윤기 있고 부드러운 피부. 그리고 그는 그보다 더 부드러운 실버 블론드를 스르륵 만져 내려갔다. 미소녀의 머리를 뒤로 쓸어 내리던 그는 그녀의 목뒤에 붉은 줄이 그어진 것을 보았다. '이건.....?' 어딘가에 찍히거나 졸려서 약한 피부에 피멍이 든 자욱이었다. 아마 조금 더 있으면 그 붉은 자국은 푸르게 변할 것이다. 그러나 그 자국 마저 아름다워 보이는 투명하고 희디흰 피부.... "케이--, 케이이이----_?" 그가 큰 소리로 외치자 문 밖에 대기하고 있었던 듯 케이는 금새 들어왔다. "무슨 일이신지, 아즈라엘님?" "그놈들 어디 있어?" "그.... 놈들이라니요?" "이 아이를 데려온 놈들 말얏∼!!" "그야.... 지금 홀에 앉아 최고의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만." "다 죽엿---!!" "네? 네, 알겠습니다." 그의 변덕을 익히 잘 알고 있는 케이는 별 토를 달지 않고 순순히 응대했다. 또 뭔가 변덕이 난 것인가 보다 생각했을 뿐. 대답을 하고 물러서려 할 때 아즈라엘은 다시 그를 불러 세웠다. "아니, 아니야. 그건 너무 가벼워. 후후... 지금 만찬 중이시라고?" "네... 그렇습니다만...?" "후훗... 그렇다면 그게 마지막 만찬이 되겠군. 최대한 정중히 대접하고 식사가 끝나면 '그 곳'으로 데려가. 내가 친히 손봐주도록 하지." "넷? 아즈라엘님께서 친히?" "그래.... 이런 보석에 흠집을 내다니.... 내가 그런 것들을 그냥 둘 수 있을 것 같애?" 그나마도 그들이 아니었다면 '보석'을 구경하지도 못했을 거면서-라는 말은, 슬기로운 케이로서는 머리에선 떠올려도 입 밖으로는 꺼내지 않았다. 케이와 아즈라엘에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즈음 저택의 현관에는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정확히 소란이라기 보다는 놀라움이었다. 아즈라엘단의 부하 하나가 그들이 있는 방으로 달려왔다. "케이님∼! 아즈라엘님∼∼!!" 케이는 무슨 일인가 해서 복도로 나가 보았다. 저런 식으로 뛰어오면서 윗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부른다는 것은 죽을 각오를 하고 해야 하는 일이다. 그만큼 급한 일인지도... "무슨 일인가?" "하아하아... 저기, 저.... 중요한 손님이..." "무슨 손님인데?" "그... 그 예전의... 마법사가 왔습니다. 그... 피빛의 마녀와 계약을 했다는...." "뭐야? 로이카르스가? 직접 왔단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 콰당---!! 아즈라엘은 안에서 얘기를 듣다가 문을 차고 나왔다. "로이카르스? 그가 왜?" 그는 심기가 불편했다. 피 빛 마녀 류젠의 마법사라니. 그녀와 자신의 아버지 사이의 일을 알기 때문에 새삼스레 왜 자신을 찾아 온 건지 이해가 안 됐다. 둘 사이의 일은 어디까지나 둘 사이의 문제다. 따로 독립해서 살고 있는 자신에게 찾아 올 일은 없을 텐데. 그것도 7년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 그는 아버지를 싫어했기에 류젠이 그의 청혼을 거절하고 순정(?)을 짓밟은 것에 대해서 속으로는 고소해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황당한 내기에서 그를 철저히 짓밟았던 것도.... 그 내기는 아마 그녀와 계약한 마법사인 로이카르스의 머리에서 나온 것일 터였다. 류젠은 그 정도의 머리를 가지고 있지는 않으니까. 그러니 로이카르스는 가볍게 볼 수 없는 남자였다. 그가 왜 왔을까. 혹여 무슨 꼬투리 잡힐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 "무슨 일로 왔다더냐?" "아.... 저기... 저희가 벌이고 있는 사업에 대해 상의할 것이 있다고...." "뭐?" "그... 미소년 미소녀의....." 머뭇거리던 부하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끝을 얼버무렸으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감을 잡은 아즈라엘의 얼굴엔 기묘한 표정이 어렸다. "아하.... 류젠의 심부름을 온 모양이군. 그래, 그녀도 미소년을 밝히나보군. 후훗.... 남편은 그렇게 되었는데 말야.... 핫핫핫핫---!!!" 아즈라엘은 호탕하게 웃어 제끼면서 케이를 돌아보았다. "케이. 여기 문단속 잘하고, 깨어나면 최상의 접대를 해 드리도록." "알겠습니다. 아즈라엘님." "가자." 자신이 직접 나서야할 중요한 손님이었다. 그는 우선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자신의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하하... 그래서 이렇게 몸소 오셨습니까?" 시간이 조금 걸리기는 했지만 가운하나만 걸치고 있던 상태에서 까다로운 상대를 맞이할 수는 없는 일. 아즈라엘은 나름대로 복장을 갖춘 상태로--그래봐야 바지와 블라우스만을 더 입었을 뿐이지만--대하기 껄끄러운 손님을 맞이했다. 손님의 배경인 그가 모시는 '주인'이라는 것도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이 작자, 로이카르스 자체만으로도 여간내기가 아닌 자였기에 비록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을지언정 아즈라엘은 긴장하고 있었다. "몸소라니오. 전 그저 주인의 심부름꾼일 뿐입니다. 말씀 낮추시지요. 북마왕의 아들이여." "흠... 제게 그 호칭은 적절치 못합니다만...." "아, 원래는 따님이셨으니까... 죄송합니다. 최근에 바꾸셨다는 얘기만 들었는지라.... 하하....." 아즈라엘은 얘기를 못 알아들은 척 하면서 은근히 자신의 속을 긁는 이 남자를 어떻게 요리해야 속이 시원해질까를 고민했다. "흠... 어쨌든 제 용무는 이미 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제 정보에 의하면 최근 최상품(最上品)을 들여오셨다고 해서 특별히 부탁드리기 위해 이 밤에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 온 것입니다." "아, 네...." 아즈라엘은 갈수록 자신이 몰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 남자와 얘기하면 항상 이런 식이다. 권모술수에 능한 자. 그러기에 류젠은 그를 마법사로서 보다 이런 일에 쓰는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의 정보 수집력은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패거리가 있는 것도 아닌데 어디서든, 어떻게든 다른 이보다 한 발 먼저 정보를 잡아내는 능력. 그 능력이 여기에서도 여지없이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아즈라엘은 진작 부하들의 입 단속을 명하지 못한 스스로를 한탄하고 있었다. 분명히 그는 부하들이나 시녀들이 재잘거리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저렇게 자신만만하게 나오는 것이지. 그는 방금 보고 나온 그 미소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침만 꿀꺽 삼켰다. 이미 들통나버린 이상 그, 아니 그의 뒤에 있는 영원의 마녀를 거슬릴 순 없다. '성질 더럽기로 치면 우리 집 영감도 두 손 두발 다 드는 여자니까 괜히 잘못 보여서 책잡힐 필요는 없지. 아깝지만.... 후우....' 그러나 그의 넘겨 집기와는 달리 로이카르스는 다만 포커 페이스를 잘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식으로 얘길 해야 최상품이 나올 테니까. 어차피 류젠의 이름을 거스를만한 짓은 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최상급을 원한다. 당연히 적당한 으름장이나 엄포, 허풍을 동원해볼 필요가 있었고 그것은 지금 적중한 듯 했다. 그건 현재 아즈라엘이 뭔가 아까운 것을 놓친 듯 한숨을 쉬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만족스럽게, 그러나 아주 약간의 미소를--어디까지나 포커 페이스로-- 지으며 잘 부탁한다고 얘기했다. "그럼 준비를 부탁드립니다." "아, 언제까지 말입니까?" "하하... 당연히 지.금. 이지요." "......" "아시다시피 제 주인의 성미가 조금.... 바라시는 바가 금새 충족이 안 되면 좀 그렇지요... 그리고 지금 당장 원하십니다. 제가 수렴해 갈 수 있도록." "그러시다면.... 당연히 편의를 봐 드려야죠." "죄송합니다. 이렇게 서두르게 해서." "아닙니다. 그럼 대가는...." "아, 중요한 얘기를 빠뜨리고 있었군요. 이것을....." 그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그녀의 이름에 걸맞게 피 빛으로 빛나는 커다란 루비였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어린 아이 주먹만한 크기의 붉은 결정은 티 하나 없이 섬세하게 컷팅 되어 찬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 이건......?" "그만큼의 최상품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확실히 보내주실 것을 믿고 있으신 것이고요." "......네, 물론이지요." 아즈라엘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런 파격적인 대가라면, 만약 그 기대에 어긋났을 때에 돌아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결국, 빼돌릴까하고 생각해 보던 것은 취소할 수밖에 없다. 아즈라엘은 마지막으로 그녀를 다시 보기 위해 방에 올라와 있었다. 그녀는 아직도 잠들어 있다. 마치 잠자는 숲속의 미녀인양. 그녀를 보면서 그에게 느는 것은 한숨뿐이었다. '저 미색은 거의 공포스러울 정도로군..... 아직 목소리도 못 들어 봤는데... 그러나.... 어쩔 수 없으니, 그곳에 보내야겠지.... 이 정도 물건이면 어차피 처치곤란이니까. 차라리 잘 됐는지도.....' "아즈라엘님?" 케이는 문가에서 들어오기 전 기척을 냈다. 갑작스레 들어가서 심기를 건드린다면 지금 아즈라엘이 어떻게 폭발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기에. 다 잡은 토끼를 눈뜨고 뺏기게 생긴 주인의 마음을 그는 잘 헤아리고 있었다. "아아.... 그래, 미련을 남겨서 뭐하나. 이미 결정된 것을.... 조심해서 데려가도록....." 아즈라엘이 방에서 나가자 케이와 함께 부하 두 명이 방으로 들어왔다. 케이는 부하들에게 조심해서 옮길 것을 명했다. 그들 중 입빠른 한 명이 케이에게 질문을 했다. "그러나... 미'소년'으로 원했는데..." "....." 그가 대답을 않는데도 그 부하는 계속 얘기를 이어갔다. 나름대로 근거도 뚜렷하게 대면서. "영원의 마녀는 소년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 소녀를 보냈다가 무슨 불벼락이 떨어질지는...." "이 정도 미색을 보면 소년이든 소녀든 가릴 것 같아? 미소년도 두엇 골라서... 책잡히지 않을 정도의 품질로 고르란 말야. 알았어?" 그렇게 얘기하고 나서, 케이는 이 입싸고 오지랖 넓은 녀석을 임무가 끝나자마자 어떻게 매장할 것인가를 궁리했다. 더 아쉬워하다가는 눈을 못 뗄 것 같기에 밖으로 나온 아즈라엘은 입맛만 다시며 창을 내다보고 있었다. 밖은 이미 어두워졌지만 그의 눈은 어둠 속의 사물도 온전히 분간할 수 있었다. 현관 마당에는 커다란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고 그 위에 6인승 마차가 서 있었다. 아마 그 마차에 태워서 통째로 전이를 할 양인 듯 했다. 로이카르스 정도의 실력이라면 그런 것쯤은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아마 마법진이 없어도 가능하겠지만, 그는 보낼 아이들을 단장시키는 동안 남는 시간을 그림공부(?)에 활용할 것이라고 의견을 밝힌바 있었다. 자신이 저택 안에서 왔다 갔다 한다면 일 처리가 불편할까 봐서란다. 고양이 쥐 생각하시기는.... '쯧... 곤란한 일만 아니었으면 내가 곁에 두고 예뻐해 줬을 텐데. 그런데.... 이상하단 말야. 낯이 익은 것이... 아니, 분위긴가? 그러나 저런 미색을 잊어버릴 리도 없고.... ' 보내기로 해놓고 왠지 찝찝한 기분이 드는 아즈라엘이었다. 2 꿈을... 이상한 꿈을 꾸었다. 나는 어딘 가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어디일까, 처음 와 본 장소... 이상한 사람들이.... 아아... 저건 그 산적들... 후후... 이제는 퍽이나 친숙해진 얼굴들. 아, 내가 산적들과 안면 트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것도 이젠 정겹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만약 또 다시 만나게 된다면 반가워서 한 대씩 쥐어박고 싶을지도.. 후후... 그런데... 다음 순간 나는 방에 누워 있었다. 넓고 커다란 방. 푸른색을 기조로 벽지며 커텐이며 모든 것이 푸르른... 물의 나라인가? 그러나 추워 보이는 파란색은 아니었다. 아늑함을 주는 푸르름.... 약간 열어 놓은 환기창 틈에서 들어온 바람이 얇은 레이스 커튼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팔랑거리며 공중을 차고 오르는 프릴. 누군가 내 쪽으로 다가온다. 두 사람... 한 사람은 왠지 낯이 익다. 누구지? 저쪽에 서 있는 사람은 치렁치렁하고 화려한 무늬의 옷을 입고 있다. 그리고 내 가까이 까지 다가온 사람은, 한숨을 쉬더니 뭐라고 얘기하는 듯 입술을 달싹거린다.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나가고서도 그는 나를 그저 내려다보고만 있다. 뭐랄까.... 멍한 눈이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지? 길고 검은 생머리를 아무 장식 없이 늘어뜨리고.... 짙은 어두움이 담긴 검은 눈동자에 이채가 어린다. 그래, 나는 저 눈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그 눈은.... 아마도 내가 아는 그 눈은 나의 첫 친구였던 아즈라엘. 그녀는 내가 잊을 수 없는 친구. 그 깔끔을 떠는 성격은 좀 그랬지만 어리던 나에게도 동등한 대우를 해 주었던, 첫 친구의 눈. 아무 생각이 없을 때는 내가 그녀의 반려이기를 바란 적도 있다. 하얀 얼굴에 붉은 입술이 그 검은 머리칼과 너무도 잘 어울렸기에 나는 그녀에게 한 눈에 반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여자였고, 나 역시 여자였다. 여자끼리는 '부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내 꿈은 아쉽게도 접혀버렸다. 그러나 그 일이 아니었더라도 나는 그녀를 멀리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엄마로 인해 '아름다운 족속'들에 대한 이상한 인상이 꾹꾹 박히게 되면서 아즈라엘도 그 '아름다운 족속'들 중의 하나로 인식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예쁘면 해결된다는 사고방식을 지닌, 자신의 아름다움을 위해 무엇이든 하고, 그를 위해서라면 어떤 가치나 진리도 무시해버리는 그 '족속'들..... 정말 내가 지나치게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반발심만 가득해 진 건 모두 다 엄마의 탓이다. 그래서 내가 마녀의 양육법에 의해 마을로 가게 되었을 때, 아빠와 헤어지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그보다는 엄마에게서 떨어질 수 있다는 해방감이 더 컸다. 그 어린 나이에도...... 그래, 한 살 짜리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런 해방감을 느껴야 했다. 내 엄마지만, 그녀는 정말 철이 없는 마녀였다. 세상은 참 이상하게도 그녀가 완전한 마녀가 될 수 있도록 돌아갔고, 덕분에 그녀는 언제나 모든 것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살았다. 아마 지금도 그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엄마가 정말 마음에 안 든다. 그는, 아즈라엘을 닮은 그는, 내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 꿈일까? 그 손의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미세한 떨림조차도. 그리고 그의 얼굴이 천천히 내려오다가 멈칫한다. 내 머리를 쓰다듬던 그의 손도 멈추었다. 그는 잠시 경직되어 있다가 벌떡 일어서며 누군가를 불렀다. 잠시 의식이 멀어지고.... 나는 또 다른 곳에 있었다. 이번엔 또 어디일까? 이상한 꿈. 내가 아는 얼굴들만 나오네? 이젠 단순히 낯익은 것이 아니라 잘 아는 얼굴. 아저씨...... 로이카르스 아저씨를 내가 많이 보고싶어 했던 걸까? 이렇게 꿈에 나오다니. 아저씨는 하나도 변한 것이 없네요. 하긴 며칠이나 지났다고, 아마 여드레 정도 지났나. 하아, 그래 내가 마을을 떠난 지가 이제 겨우 8일이라니, 무척 길게 느껴진 날들이었는데. 집 떠나면 고생이라더니 그 말이 맞아요. 그런데 아저씨...... 왜 그런 얼굴로 나를 보는 거예요? 아주, 아주 놀란 표정. 나 아저씨 그런 표정 처음 봤어요. 꿈이라 그런가봐. 그리고 아저씨는...... 아, 옆에 다른 사람들도 있어. 아주 예쁜 남자애들. 정말 예쁘다. 아직 소년 티를 못 벗은 앳된 얼굴들. 하지만 표정엔 생기가 없어. 늘어진 표정. 저런 건 싫은데. 왠지 내가 아는 고약한 마녀의 취향으로 생긴 얼굴들. 아, 여기에서 고약한 마녀란 당연히 '엄마'를 말하는 것이다. 에, 아저씨? 나...... 나를 담요로 싸는 거예요? 나 안 추운데. 담요로 싸고는 푹신한 의자에. 아, 이건 마차인가? 하지만 마차치고는 아주 크고 호화롭군요. 나를 떨어지지 않도록 안쪽으로 잘 눕혀놓고는 아저씨는 한숨을 쉬는군요. 왜 그래요? 나.... 아저씨의 입 모양은 알아 볼 수가 있네요. 지금 내 이름을 부르고 있어요. 아마도...... '티티노.... 네가 이런 모습이 되다니.....' 내가 어떤 모습인데요? 어째서 그런 말을 해요? 왜 그런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나를 보나요? 왜 한숨만 푹푹 쉬고 있어요? 나...... 그러고 보니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것이지? 분명히 꿈을 꾸고 있어.....? 이거 모두 다..... 꿈? 눈을 떴더니..... 천장에서 환한 불빛이, 나를 비추고 있었다. 한동안 정신이 없던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긴 어디? 난 누구? 후∼ 그래, 난 마녀 티티노...... 이상한 꿈을 꾸고 나니 정신이 다 없네. 그런데 여긴 어딜까? 산적들에게 납치된 것 같은데. 아마 아즈라엘단이란 녀석들의 소굴일까? 하지만 산적 소굴치고는 너무 화려하고 멋있는 방. 화려한 붉은 색으로 치장 된...... 에...... 분명히 저 붉은 비단 휘장과 붉은 카핏, 그리고 화려한 보석들이 세공 되어 있는 여러 장식품들은....... 설마, 설마 아니겠지.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도 있는 거야. 아하하, 정말 설마, 엄연히 아빠도 계신데 그런 짓을 할 수는 없는 거야. 티티노, 진정해. 네가 착각하고 있는 걸 꺼야. 영원의 마녀 류젠이 미소년 미소녀 헌터들의 두목이라니 그건 말도 안...... 그러나 난 이 대목에서 정말 자신이 없다. 그녀가 예쁜 것을 얼마나 밝히는 지 잘 알기에. 그러나 완전한 마녀로서 그렇게까지 타락할 수는...... 아, 아니구나. 타락할 수가 얼마든지 있구낭. 흐으-- 여기까지 생각하게 된 나는 으드득 이를 갈았다. 만약에 사실이라면, 그녀가 정말 그 헌터집단의 두목이라면, 아빠가 뭐라시건 간에 난 그녀를 용서치 않을꺼얏∼!! 엄마도 아냐∼!! 어떻게 딸까지 잡아오다니. 물론 그녀의 띨띨한 부하들이 멋모르고 한 짓이겠지만 얼마나 영계를 밝혔기에 이렇게 어려 보이는 나까지 잡아오느냔 말얏∼!!! 어째 부하들이 띨띨하다 싶더니, 그 두목에 그 부하였군. 흥, 엄마 밑에 그런 놈들 밖에 더 모이겠어? 띨띨한 두목에게 딱 어울리는 부하들이얏∼!! 일전에 했던 말 취소∼!! 다음에 그 네 놈을 보게 되면 자근자근 짓밟아 주리라.... 등등의 두서없는 생각을 하다가 나는 왠지 등골이 시려지는 것을 느꼈다. 이상하다. 내 머리색은 분명 붉은 색. 약간 갈색으로 보이는 붉은 색이다. 그런데 내 어깨로 늘어져 내려오는 이 금실은 뭐지? 그리고 그 금실은 어찌나 긴지 마치 이불처럼 내려와서 내 다리를 덮고 있다. 이건 뭐야? 그리고 아까의 꿈이 떠올랐다. 금방까지도 나는 꿈과 현실을 뒤섞어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꿈이 아니라면? 그러면 로이카르스 아저씨는 또 왜 보인 거지? 그리고 아저씨가 하던 말. '티티노.... 네가 이런 모습이 되다니.....' - ...... 나는 침대에서 뛰어 내려 거울을 찾았다. 내가 기억하는 대로라면, 여기가 정말 영원의 마녀, 내 엄마의 방이 맞다면, 거울은 분명 저쪽 휘장 뒤에 있을 것이다. 나는 성큼성큼 걸어서 휘장을 휙 걷어버렸다. 생각해 보면.... 내가 그렇게 성큼성큼 걸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일 것이다. 내 키는 135제나... '성큼성큼'이란 단어가 나설 자리가 없다. 그러나 지금 거울에 비친 왠 야시꾸리한 여자의 키는 최소 170제나는 되어 보였다. 아니... 175? 180? 그리고 발까지 내려오는 백금 빛 머리카락.... 저런 걸 아마 실버블론드라고 하던가.... 나는 다른 사람을 보는 듯 멍하니 거울을 바라보았다. 아마... 그 마녀가 새로운 거울을 들여놨나 보다. 정령이 비치는 거울을... 거울의 정령일지도 몰라. 왜 그런 거울도 있지 않은가?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 그러면 '네, 마녀님이 젤 예뻐요. 후후후'하면서 마녀의 비위를 맞춘다는 그 거울 말이다. 그런데 거울의 정령이 이런 정도라면 마녀는 얼마나 더 예뻐야 한단 말이야? 그러나, 그 거울은 할머니 마녀 때부터 내려온 그 거울이 맞았다. 거울 위쪽 장식에 꽃과 새가 섬세하게 조형된, 청동의 전신거울. 내가 이 거울을 퍽으나 좋아했기에 할머니는 내게 물려주리라 약속하셨다. 그러나 내가 정식마녀가 될 때까지는 엄마가 맡아 놓겠다고 하면서 자신의 방에 가지고 왔던 것이다. 그것 때문에도 엄마가 얼마나 얄미웠던가. 흑... '.....?' 그럼.... 그럼 여기 거울에 비친 여자는 누구지? 갸름한 턱선. 그건 마음에 드는 군. 그리고 자수정처럼 신비한 보랏빛을 품은 눈도. 오똑한 콧날. 이건 그럭저럭. 그리고 도톰하게 부푼 핑크빛 입술. 아아, 여기까지는 그래도 봐 줄만 해. 그러나 저 전체적인 조화에서 약간의 백치미가 감도는 건, 그건 뭐냔 말얏. 맘에 안 들어. 머리색 때문일까. 머리색이 흐리니까 흐린 느낌이 드는 걸까? 남들이 봤으면 뽀시시하고 몽롱한, 환상적인 분위기라고 했을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백치'로 뿐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하아-- 나는 세상이 경천동지(驚天動地) 할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내 표정이며, 손짓, 발짓을 그대로 따라하는 거울 속의 그녀가 바로 '나'라는 사실을. 흐윽, 글라인. 미안해 정말. 나, 이제야 네 심정을 알겠어. 네가 얼마나 끔찍했을지. 그리고 그 앞에서 거울까지 들이대며 잘난척하던 내가 얼마나, 거의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을 것이란 사실을, 그 처절함을 이제야 알겠어. 흐으으으-- 나는 너무나 허탈해서 놀라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다. 세상에 이런 비극이 또 어디 있겠는가. 내가, 내가 이런 모습이 되다니. 그럼 의식은 실패한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러나 내가 바란 것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내가 조제했던 환약은......? 거기까지 돌이켜 보니 뭔가 짚이는 것이 있었다. 즉, 내 생에 있어 최대의 비극이 된 출발점이 어디였는지 나는 짐작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믿기 싫은 일이었지만, 내가 사랑한 촌장 할아버지. 그가 배신자였던 것이다. 흐으으, 이럴 수가!!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어. 아까의 로이카르스 아저씨도 그럼, 그도 역시 류젠의 꼬봉(?)이었단 말인가. 그도 역시......? 어허허헉-- 하늘이 꺼지고 땅이 갈라진다 해도 이보다 더하랴 싶다. 사람은 앞과 뒤, 위와 아래를 의심하게 된다면 더 이상 살수가 없노라고 어떤 종교의 잠언집에 나와있다. 나는 지금 미래가 불확실해 졌고, 과거의 지인들을 의심하게 되었으며, 나를 지켜주고 있어야 할 하늘은 이미 무너졌고, 내 다리를 든든히 받치고 있어야 할 땅이 출렁거림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 것도 믿을 것이 없다. 정말로. 그때, 주변의 공기가 바뀌었다. 나른하게 늘어져 있던 실내의 공기 중으로 새로운 바람이 들어 왔다. 즉, 문이 열렸다는 소리다. 그리고 너무도 오랜만에 듣는, 그러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로이, 그녀가 그렇게나 특별한가? 굳이 내 침소에 옮겨 놓은 것을 보면?" ".......아주, 아주 특별한 분이십니다." "호오-- 그대의 입에서 '분'이라는 말이 나오다니, 어디......?" 그녀는 고개를 돌려 방 안 쪽을 보았다. 그리고 양손을 앞으로 뻗치며 정말 멍청하게 서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어느 쪽이건 잠시 입을 벌리고 굳어 있었다. 그녀는 내 모습을 보고 놀라서 굳었던 것이었고 나는, "하아, 이런 한숨 나올 일이. 로이, 그대는 정말 요즘의 내 취향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군. 오호호호호호.... 남자가 아닌 것이 조금 아쉽긴 하지만." "좀 더 자세히 살펴보시지요." ......그래, 이 멍청한 엄마야. 한갓(?) 마법사도 알아보는데 엄마인 네가 날 몰라 봤--? 그리고 뭐, 이상형? 그럼 그렇지. 그 환약은 당신이 만든 것이었던 거야. 당신의 이상적 미모를 구현한 엄청난 환약이었겠지. 그리고 촌장은 그걸 내 원래의 환약과 바꾸었을 테고. 으으으...... 그러나, 그러나 내가 여기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손만 올리고 있는 이유는..... '허억--' 슬프고도 당연하게도, 이 엄청난 미모를 위해 내 마력을 다 써버린 탓에 아무런 힘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산적들에게 대응이 늦을 수밖에 없었던 아까의 상황을 지금에야 이해하게 되었다. 내 몸은 이미 날래고 잽싸던 본래의 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는 비극이 연출 된 것이다. 나는 다만, 이제 손을 내리고 다만, 이를 악무는 것으로 사소한 반항을 하고 있었다. 그 멍청한 엄마가 얼마 만에 나를 알아볼지를 속으로 헤아리면서. 그리고 또 한가지 커다란 의문을 가슴에 품었으나 그것은 차후에 풀어도 될 문제, 지금은 이 눈앞의 맹한 여자가 문제였다. "자세히 살펴보라니, 뭘 더? 로이, 설마 그대의 앞에서 그녀를 속속들이 살피라는 것은 아니겠지? 그건 차후에 그녀와 나, 우리 둘이서만 은밀히......" "류젠님!" "......로이카르스. 그대가 지금 나에게 큰 소리를 쳤단 말인가?" "다.시. 한. 번. 잘. 살.펴. 보.시.란. 말.씀.입.니.다!" "......??" 그 맹한 여자는 성미대로 무조건 화를 내려다 말고 로이카르스 아저씨 아니, 로이카르스--이젠 막 나가기로 했다. 어차피 맹한 엄마의 꼬봉이나 하고 있을 뿐인 남자에게 내가 왜 다정하게 '아저씨∼'라고 해야한단 말인가?--의 말이 심상치 않은 것을 느끼고 나를 다시 한번 천천히 살펴보았다. 그 눈길은 정말이지, 흐으,..... 저것이 엄마가 딸을 보는 눈길이란 말인가. 끈적끈적...... "확실히 내가 티티노에게 줄 환약을 만들기 시작한 시기에 들었던 '라이나폴스'의 전설에 나오는 미녀와 꼭 닮았어. 그래서 나는 환약을 만드는 내내 그 이미지를 떠올렸지. 후후후, 그 애, 지금쯤 약을 먹고 의식을 끝냈겠지? 그리고 자신의 화사한 변신에 넋이 나갔을 테고. 오호호호호호∼" "류젠님....." 로이카르스는 거의 울상이었다. 나로서는 그의 난처한 표정은 처음 보았다. '난처한 척'하는 것은 본 적이 있으나 진심으로 난처해하는 것을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훗, 그래. 당신도 뭐 이렇게 멍청한 엄마가 다 있을까 싶은 거지? 그 맹한 엄마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내가 묻지도 않은 말을--아직 내가 누구인지 파악조차 못 하고 있지만--술술 내 뱉고 있었다. 때문에 나는 짐작하고 있던 바를 분명히 확인하게 되었다. 저런 여자는 다시없을 거야. 자신의 딸의 환약에 멋대로 손을 대고, 그 딸의 모습을 제 마음대로 바꾸려 하다니. 이건 딸의 기본적 인격을 무시하는 행위이다. 마녀의 의식은 그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신성한 것이다. 그 마녀가 어떠한 것을 원하고 얼마만큼의 마력을 써서 변하는가는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고 의무이다. 그 권한을 침범하는 것은 그것이 누구일지라도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이다. 그건 곧 마녀 제 일의 법을 위반하는 행위이고, 마녀 전체 회의에서 추방령을 받을만한 큰 사건인 것이다. 아빠를 생각해서 참으라고? 아니,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다. 아마 저 여자는 아빠도 모르게 일을 진행한 것이 분명하다. 아빠도 사실을 알게 된다면 심정적으로는 어떻더라도 그녀의 편을 들어 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딸의 가장 중요한 것을 좌우하려 한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고 나는 지금 심각한 부작용을 겪고 있다. 다시 해가 밝아 온다면 명확해지겠지만, 내 생각에 나는 지금 심각한 부작용을 겪고 있다. 지금의 나는 '분리' 되어 있는 것이다. 마치 글라인처럼. 분리된 한 면은 엄마의 바램에 따라 이런 모습이 되어 있는 것이고, 다른 한 면은 나의 바램대로 엄청난 마력을 지닌 원래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내가 자라지 않았던 것은...... 실은 이런 배경이 있었던 거다. 내 모든 불행의 시작. 저 '엄마'라는 이름의 마녀로 인해.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스스로 모든 것을 추리해 놓고도 아직 헤매고 있었다. 내가 누구인지를. 창 밖으로 여명의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아아... 밤이 가고 이제 찬란한 태양이 떠오르는 시간이다. 그리고 아마도 내 예상대로라면.... ".....!!!" "......" "......................" 나는 그녀의 두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동그래졌을 때, 양손을 다 동원해서 앞으로 번쩍 치켜들었다. 아아... 자그만 손. 내 손이 맞다. 익숙한 나의 손. 그리고 그 손에서는 태양만큼이나 환한 빛이 막 내뿜어지고 있었다. "이제 당분간은 움막에서 지내시면 되겠군요. 어.머.니." "티티노님...." "로이카르스, 당분간 내 이름 부르지 말아요. 나 또 손을 휘젓고 싶어지니까." 우리는 대저택의 정원이었던 곳에 나와서 멋있게 가루가 되어버린 유적(?)을 감상하고 있었다. 로이카르스는 안타까운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러나 이젠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이다. 그는 나의 추억의 사람이 아니다. 더 이상은. "티티노---옷!! 너, 엄마의 아름다운 저택을 이렇게 만들어 놓다니∼!!" "몸만 말짱하면 그 텃세와 으름짱으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으면서 뭘 그리 바락거려요? 어.머.니? 아아.... 아마도 그 미모로 뭐든 우려낼 수 있겠지요. 당신의 그 자랑스러운 아름다움으로 말예요." "흥, 넌 내가 괜히 영원의 마녀라 불리는 줄 아니? 이 정도쯤이야 회복 마법을 쓰면 간단하게 복구할 수 있어." "하, 그래요? 그럼 지금 당장 하시죠. 조금 있으면 마녀 평의회에서 어.머.니께 볼일이 있을 터이니..." 그녀의 두 눈이 더 할 수 없이 크게 떠진다. 아마 그것도 생각 못하고 일을 저질렀을 것이야. 안 봐도 그림이다. "뭐? 마녀 평의회?" "그럼요. '무엇이든, 어떻게든 할 수 있으나 마녀의 규정을 어겼을 때만큼은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는다. 마녀의 규칙에 따라....' 마녀의 법 제 1조 1항. 그것까지 무시할만한 능력이 있다면 뭐...." "티티노------------------------옷!!" 나는 그녀를 외면했다. 회복 마법을 쓰건 말건 아무 상관없다. 어린 날의 추억이 부숴진 것은 안타깝지만.... 그런데, 나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방금 전의 대 소동으로 저택의 모든 사람들이 다 밖으로 튀어 나왔는데 오직 한사람, 내가 꼭 보아야 할 한 사람이 보이질 않았다. 혹시 이 여자가 자신의 희희낙락(喜喜樂樂)을 위해 어디 멀리로 보낸 것 아냐? 설마, 설마 그런 거라면 더욱 용서할 수 없엇----!! 하아... 이젠 별 생각이 다 드는 군. 그건 정말 '설마'일 것이다. 그 맹함과 천성적 바람 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빠를 정말로 사랑했으니까. 그건 어쩔 수 없지만 나도 인정하는 바다. 그러나 지금 아빠가 안 보이는 이유는 뭘까? 내가 온 것을 이제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알게 되었을 터인데. 로이카르스는 옆에서 뭔가 말하고 싶은 눈치였다. 나는 더 이상 그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내가 좋아했던 사람이니까 그런 것일까. 정말 결연히 잘라버리려 했는데. 내가 그를 돌아보자 그는 안심한 듯 작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티티노님... 노여우시겠지만, 제 말씀을 들어주시겠습니까. 아마도 류젠님은 제대로 말씀하실 정신이 없으실 터이니.... 저쪽 별채는 말짱하니까 그리로 자리를 옮기시지요." "..... 알았어요." 아무리.... 그가 엄마의 부하인 것을 알게 되었다해도 그의 존대어는 어색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 화가 완전히 풀리지 않았단 말야. 아직까지는.... "그, 그럼...... 그 아즈라엘이 저 아즈라엘이 맞단 말예요?" "네, 무슨 문제라도?" "아하하...... 아, 아니.... 그냥, 하던 얘기나 계속...." 나는 손을 내밀려다가 멈추고--아직은 조절이 완전하지 않기에 손을 함부로 놀렸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그가 얘기를 계속 진행할 것을 재촉했다. 그러나, 이건 정말 말도 안 돼. 아니, 뭐 그럴 수도 있는 건가? 여자였다 남자였다 하다니, 아무리 마왕의 딸이라지만. 그리고 그녀, 아니 그가 정말 그런 지저분한 도적 떼를 부하로 거느리고 있단 말야? 난 마음속으로 그 네 명의 산적에게 다시 사면권을 보냈다. 그저 차원 낮은 욕심에 매여 우직하게 행동했을 뿐인 녀석들인걸. 아즈라엘이 나쁜 거지. 하하-- 생각해보니까 언젠가였다면 그녀가 남자가 된 것에 기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별 상관없다. 그는 이제 내 관심 밖의 인물이니까. 그러나 머릿속에 방금 떠 오른 생각은 내 빰을 달아오르도록 만들었다. 그, 그럼 그때 아즈라엘은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 했던 거얍? 이제 갓 10살이 넘은 어린 소녀에게! 물론 겉모습은 장성한 처으녀였지만. 로이카르스는 혼자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지는 나를 안타깝게 쳐다보고 있었다. 아저씨, 하, 버릇이 되어서 아저씨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는군. 어쨌든 로이카르스. 지금은 엄마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니까 그런 표정 하지 말아요. 엄마한테는 두 손 두발 다 들었으니까. 평의회를 부르는 문제는...... 차후에 생각하도록 하죠, 뭐. "중요한 얘기는 지금부터입니다만." "......?" "그 북마왕이 예전에 류젠님께 청혼을 했었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죠?" - 끄덕끄덕-- "그분이 티티노님의 아버님과 결혼하신 이후에도 계속 연락을 해 오신 것도, 아마 기억하시리라......" 그래, 그랬다. 연락을 한 것만이 아니라 무슨 핑계를 대서든 이곳, 엄마의 저택으로 찾아오곤 했다. 그 핑계중의 하나가 자식들끼리 친하게 지내도록 하자는 것이었고, 그래서 나는 아즈라엘을 만났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내가 마을로 가기 전, 두 달 남짓 이곳에 머무르기도 했었다. 아즈라엘이 나와 잘 통했던 점은, 그녀는 자신의 아빠를 싫어했고, 나는 나의 엄마를 싫어했다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서 나이 차이나 수준(?)차이에도 불구하고 둘은 친한 친구로서 지냈었다. 그 결과 기뻐한 것은 그 핑계로 저택을 또 드나들 수 있었던 북마왕이였지만. 하지만 내가 이곳을 떠난 뒤는 어떻게 되었을까? 핑계도 없어지고. "......그래서 티티노님이 마을로 가신 후는 잠시 출입이 뜸했었지만, 어쨌건 무슨 핑계든 대고 찾아오는 북마왕이 귀찮았던 류젠님은 '내기'를 생각하신 것이었지요." "내기......?" 여기서부터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든다. 정말 아주 불길한 느낌. 그 '내기'가 뭔데? "그건...... 북마왕이 류젠님에게 빠져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그분께는 아주 가혹한 것이었습니다만......" 그러면서 싱긋 미소를 짓는 것은 또 뭐야? 별로 '가혹하'다고 생각지 않는 다는 의미이겠지. 아니면 그래, 엄마가 무슨 머리가 있어서 계략을 짰겠어? 아마 그건 로이카르스가 넌지시 알려주었던 것이겠지. 에 잠깐, 잠깐만. 그럼 다마신 촌장과 로이카르스는 언제부터 엄마의 부하였던 거야? "로이카르스, 말을 끊어서 미안하지만, 당신과 촌장은 대체 언제부터 엄마의 수하로 있었던 거죠?" "아, 그야, 티티노님이 태어나시기 훨씬 전부터이죠. 그리고 정확히 말하자면 저는 수하가 아니라 계약관계에 불과합니다만." "계약?" "네, 계약이죠. 계약한 시기동안만, 그리고 계약한 일에 관해서만 관계하는 것이지요. 애초 계약이 끝난 후 재계약 시에 티티노님의 주변에 있으라는 명을 받았기에 전 티티노님이 태어나자마자 마을에 가서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지요. 다마신은 이미 오래 전부터 예비 되어 있었고." "설마, 엄마가?" "네, 그렇습니다." 나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그래도 그녀는 '엄마'이긴 했나보다. 그냥 마녀에게 호의적인 마을을 골라 계약한 것이 아니라 미리부터 태어날 아이를 위한 마을로서 준비시키고 있었다니. 왠지 저택을 망가뜨린 것이 뜨끔해지는 순간이었다. 로이카르스는 내 마음을 아는 듯 싱긋이, 내가 좋아하는 예의 미소를 지었다. 흥--, 뭐 그래도 그 정도 보복도 안 해서야 되겠어? 내 인격 자체가 흔들린 순간이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되는 것이 있고 안 되는 것이 있는 거란 말야--하며 애써 변명해봤지만 찝찝함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 확실히, 난 마녀로선 너무나 착해. 마음도 약하고. 그래서 탈이란 말야. 이 정도 찜찜한 것도 마음에 걸리다니. 뭐 어차피 엄마를 마녀 평의회에 넘기겠다는 것은 진심이 아니었다. 모처럼 잡은 엄마의 약점을 그런 식으로 한번에 해소한다는 것은 별로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두고두고 그 약점을 써먹어야 더 통쾌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지금은 내색하지 말자. 결정적일 때 써먹을수록 좋은 거니까. 아마 저 눈치 빠른 마법사는 내 맘속을 꿰뚫어 보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띄우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로이카르스, 엄마한테 이르면 그땐 정말 끝이예요. 지금은...... 흠흠...... "그, 그래서. 그 내기란 게 뭐예요? ........아저씨?" "후후- 그 명칭이 돌아온 걸 보니 절 용서하신 겁니까?" "뭐, 용서고 말고 할 것도 없군요. 엄마의 요청으로 마을에 가 있었던 거라면." "감사합니다. 마음이 무거웠는데, 티티노님." "그 존칭, 어떻게 할 수 없어요? 존대어는 그렇다 치고." "그건 나중에 어떻게 해 보죠." ".....으." 그는 말끝에 예의 귀여운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 보면 이 사람, 마법사치고는 잘 웃는 편인 것 같다. 내가 보기엔 거의 항상 웃는 얼굴이었으니. 다른 마법사들도 그런가, 아니면 이 사람만 그런 건가? "그 내기는 정말 별 것 아닌 것이었습니다만, 북마왕은 졌고 그래서 두 번 다시 류젠님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약속을 지킬 수밖에 없게 된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7년 전이었습니다." "그...... 7년 전. 그런데 그 내기가 뭔데요?" "하하-- 그냥 단순한 것이었다고만 보시면 됩니다. 아시다시피 류젠님이나 북마왕이나....... 그는 실은 똑똑한 자이지만 류젠님 앞에서는 아무 생각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이후의 일인만큼. 티티노님, 아버님의 일입니다." "에, 아빠가 왜요?" 뭐야, 아빠가 뭘 어쨌길래? 북마왕이 엄마에게 자꾸 추근댄다고 북마왕하고 한판 벌이기라도 했단 말야? 아빠는 어쩌자고... 아무리 얼뻥해 보였다고 해도 그거야 엄마 앞에서나 그런 거였지 실제로는 '대마왕'이라는 칭호를 지닌 자라고. 아빠 주제(?)에 거기 나설 처지가 되어? 내가 내 마음대로 상상의 가지를 쭉쭉 뻗쳐가고 있을 즈음, 로이카르스는 그 가지를 전지(剪枝)하는 가위로 싹둑싹둑 잘라 버렸다. "티티노님. 단도직입적으로 말씀 드리자면, 그 분은 봉인 되셨습니다." ".....??" "내기에 진 이후 폭주해 버린 북마왕을 막으려다가 그의 마수에 걸려서 말입니다. 북마왕은 그나마 결정적인 순간에 류젠님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긴 했는지 아버님을 봉인 해 버리더군요. 그리고 저주의 말을 남기고 떠났지요." "헉, 그...... 그런?" "이렇게 말입니다. 이 봉인은 나도 못 푸는 것이니... 단 한사람만이 풀 수가 있도다. 그러나 그도 자격을 지녀야 풀 수 있음이니, 지금으로부터 10년 안에 그 자가 완전한 마력을 갖추고 이 앞에 나타나 여기에 꽂힌 검을 뽑아 들 때 봉인이 풀릴 것이니라. 그 자는 피빛 마녀와 여기, 봉인 된 남쪽의 대 마왕 헤인의 피를 이어 받은 자, 롱디즈 여신의 딸이자 아즈데리카의 아이, 그들의 딸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그의 북쪽 본거지로 사라져버렸지요. 그리고 지금도 북쪽의 백화성(白花城)에서 두문불출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 너무나 황당하고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온다. 도대체 뭐부터 물어봐야 하는 걸까? 10년이라는 것이.... 그 기한이 앞으로 3년뿐이 안 남은 것이 맞느냐는 것에 대해서 물어봐야 하는 걸까, 아님 완전한 마력이라는 것은 얼마만큼의 마력을 말하는 것인가에 대해? 그것도 아니면 과연 남쪽의 대 마왕이란 누구인가 하는 것? 그것도 아니라면..... 으악---!!! 머리 터지겠다-아---_?!!! 흐아∼ 잠시 미친 척하고 괴성을 지르고 나자 속은 좀 시원해 졌지만 머리 속은 여전히 복잡했다. 공황상태에 접어든 내 머리는 비교적 단순한 색깔로 물들었다. 우선은 새하얗게. 아무 생각도 못하고 머리만 붙들고 앉아 있던 나는 마음을 진정시킨 후 이것저것 생각을 떠 올려 보았다. 자연스레 찌푸려지는 얼굴. 이것저것 두서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이 뒤섞여 곧 내 머리 속은 새까맣게 변했다. 그렇게 복잡해지면 머리를 털어 생각을 비우고...... 나는 한동안 그렇게 모노톤을 애용했다. 하하, 정말 몰랐었다. 엄마가 의식을 끝낸 후 무방비 상태였을 때, 갓 마왕이 되어 아직 마력에 대한 제어도 형편없고 별로 마왕으로서의 자각도 없는 아빠가 수행을 위해 길을 가던 중에 엄마를 구해 주었다는 거지? 그러니 힘과 연륜이 부족했던 아빠는 자신보다 나이와 경험치가 몇 배나 많은 북마왕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걸까? 그런데 왜? 나한테 얘기 해 줄 때는 그 '마왕'이라는 부분은 쏙 빼고 얘기한 거얏!? 덕분에 친구들에게 온갖 소리를 다 들어야 했다고. 흰 손의 마법사라느니, 사자라느니, 밀림의 왕이라는 둥. 그러나, 내가 '우리 아빠는 실은 남쪽 대마왕이야' 했으면 더 놀랐겠지. 표정들 볼만하겠군. 그러나 그건, 내가 어차피 인간 세상에 나가서 살고 수행해야 했으니 그냥 말 안 했던 거란다. 굉장한 배려다, 엄마로서는. 아마 아빠가 제안 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에 따랐다는 것만으로도, 그 얘기를 너무나 하고팠을 텐데 참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훈장을 줘서 마땅한 일이다, 엄마에게는! 좌우간, 내가 대 마왕이 되려 한 것은 그런 이유가 있었던 걸까? 핏줄의 끌림 때문에? 그러나 전통적으로 마녀의 딸은 마녀가 되고, 마왕의 아들은 마왕이 된다. 그 반대의 경우는--내가 알기론 없다. 마왕의 딸은 성년기가 지난 후 지니게 되는, 그 넘치는 마력을 가지고 고민할 것이다. 아즈라엘처럼. 그러나 마왕만큼은 아니고, 마왕이 되지도 못한다. 그래서 그는 남자가 된 것일까? 그렇게도 마왕이 되고 싶었던 걸까, 아버지를 그렇게 싫어하면서? 아아, 어쩌면 마왕에게 딸이 드문 것은 그 때문에 더 그런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성별을 바꾸어서 그냥 마왕이 되어 버리면 되니까. 마녀의 아들은, 그냥 평범하게 태어난다. 어찌 된 일인지 알 수 없지만 좌우간 그냥 평범한 인간으로서 살다가 평범하게 돌아가신다. 뭐, 정말 평범한 인간보다야 좀 비범하겠지만. 그럼 이제 내 처지를 살펴보자. 나는 '마녀의 딸'이므로 당연히 '마녀'가 되는 것이 순리이다. 그러나 마왕의 딸이기도 하다. 그로 인해 '넘치는 마력'을 나이가 들면서 소유하게 된다. 그럼, 내 마력은 곱빼기네? 하고 좋아할 처지가 아니다, 지금은. 어릴 때부터 다른 마녀들에 비해 마력이 높았던 것은 그걸로 설명이 된다. 그리고 지금 의식이 끝난 후 넘쳐나는 힘도. 손을 휘두르기만 되지 않는가? 아직 조절이 서툴러서 그렇지. 그러나 이 대목에서 나는 의식이 불완전하게, 아니 이상하게 이루어 졌던 것을 다시 떠올려야 한다. 그건 엄마의 계략으로 인해--뻔하다. 여전히 '예쁘면 다 돼'가 모토일 엄마는 딸 또한 예뻐야 뭐든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저따위 환약을 만들어 바꿔치기 한 것이 분명하다.-- 내가 내 바램과는 전혀 다르게 의식을 치러야 했던 것을 말한다. 나는 아빠의 문제도 문제지만 이것이 더 급했다.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내 완전한 마력운운도 할 것이 아닌가? 아니면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나? 내가 레이디 호크냐? 낮에는 이런 모습, 밤에는 저런 모습을 해야 하게? 레이디 호크라는 것은 대륙 서쪽 끝 어떤 나라 내려오는 전설이다. 한 아름다운 레이디와 그녀의 연인과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시기한 사악한 마법사가 내린 저주로 인해 밤이면 연인이 늑대가 되고 낮이면 그녀가 매가 되는 슬프고 애달픈 경험을 했었던 레이디의 전설이다. 다행히도 그녀는 일식을 계기로 사악한 마법사를 물리칠 수 있었기에 저주에서 풀렸다고 한다. 어쨌건, 계속 이런 상태로 나간다면 '완전한 마력'따위는 물 건너가는 것이고, 당연히 아빠의 봉인도 풀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의 원흉은.... 엄마다. 하지만 그 원흉은 별로 괴롭지 않은 듯 한데 왜 내가 이렇게 괴로워야 하는 거야? 하늘은 사람을 키우기 위해 그가 감당할 만큼의 시련을 준다고 하지. 그러나 이건 너무해요. 자신의 엄마가 존재만으로도 '시련' 그 자체인 처지라니...... "로이카르스...." "네, 티티노님." "그럼 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예요?" "......" "이렇게 두 가지의 모습으로 평생을 지내야 하는 건가요, 아니면 무슨 방법이 있는 걸까요?" "아마도...... 티티노님, 델비나스에 조언을 구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그저 마법사일 뿐입니다. 마녀들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구해야 하는 곳은 아무래도." "그럼, 그 할머니들한테 내가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요? 왜 그렇게 갈라졌냐고 하면, 제 바램과 환약 성분이 딴판이어서 그렇다고... 그렇게 대답해야 하나요? 그럼 그게 왜 달랐느냐 그러면, 환약을 엄마가 바꿔치기 해서 그런 것 같은데요--하고 말해야 하나요? 그럼 다음엔 엄마가 소환되어서 벌을 받아 반쪽 마녀가 되거나 남편과 함께 사이좋게 봉인 당하거나 그렇게 되는 일만 남아있겠죠. 그럼 나는 여전히 분리 된 채로 앉은자리에서 '고아마녀'가 되어야 하는 거구요. 안 그래요?" 로이카르스는 모든 걸 다 짐작하고 있겠지만 내 말을 끝까지 들어주었다. 그래, 나도 이렇게 떠들기라도 해야 속이 시원해지겠어서 떠들어대는 것뿐이다. 뭘 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어떻게 해야 내 앞길이 창창하게 뚫리는 걸까? 내 행운은 다 어디로 가 버린 걸까? 나, 아즈데리카의 아이 꼬마마녀 티티노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 티티노가 모르는 이야기, 다섯 보노이카는 이번에도 어쩔 수 없이 물빛 아픔 피오리언을 불렀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마자 좋아라 하고는 얼른 튀어 나왔다. 이번에는 작은 샘물에서. < 나날이 발전하는군. 처음엔 물잔이었다가 그 다음엔 수통, 이번엔 샘물. 다음엔 어디서 부를 거지, 보노이카? > "장난 할 시간 없어. 너는 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갈 수 있지?" < 그야 당연하지. 어디를 가야 하는데? > "아즈라엘단. 그런 이름의 도적패가 있는 곳을 알아봐 줘. 되도록 빨리." < 흠-- 아즈라엘? 어디서 들어 본 듯도 한데....? > "어디서 들어 봤어?" < 응, 아마도 마왕의 딸이라고. > "마왕의 딸? 마왕의 딸이 할 짓이 없어서 도적단이나 만들었단 말야? 그것도 인신매매를 전문으로 하는?" < 마왕의 딸이라면 심심해서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지. 그 넘치는 마력을 어디에 써야 할 지 모를 테니까. 한마디로 권태에 빠지기 쉬운 존재라는 말이야. > "흥, 그래. 너나 그 사람처럼 말이지?" < 보노이카, 그런...... > "내 부탁 들어 줄 거야, 말 거야?" 피오리언은 한숨을 내 쉬었다. 그러나 그녀 스스로 '그'에 대한 말을 꺼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어쩌면 나아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질투 나는 일이지만 그 티티노라는 마녀와 그녀의 새 친구들 덕분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래서 그녀가 조금씩 변화해 가는 거라면 그 이상한 꼬마마녀에게 고마워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아이는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아. 나를, 감히 상급 정령인 나를 장난감 다루듯 하다니. 내가 보노이카의 앞만 아니었어도 본 때를 보여 줬을 텐데.' "피오리언? 내 말 안 들려?" 피오리언은 보노이카의 앙칼진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그녀가 이런 목소리를 낼 수도 있다는 것 또한 처음 알게 되었다. 좋게 생각하자. 이런 식의 변화라면 오히려 희망이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에게도, 자신에게도. < 알았어. '아즈라엘단'이라고 했지? 내가 금방 가서 하급정령들에게 알아볼게. 그럼 조금 후에 봐. > 피오리언은 금새 나타났던 샘물 속으로 스미듯 사라졌다. "여기가 바로 그들의 소굴이란 말야?" < 쉿-- 소리가 커. 보노이카.. 너도 정령어로 말하는 게 좋겠어. > < 그래, 그러도록 하지. > 둘은 정원수의 그늘에 숨어 저택을 지켜보았다. 저택 마당에는 지금은 흐려진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조금 전 그 마법진을 통해 이동한 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 마당에는 아직 어수선한 분위기가 깔려 있었다. 마법진이 흐려진 후 뒤처리를 하는 듯 사내 몇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저택은 3층 높이로 무척 우아하고 깔끔한 양식이었다. 불이 켜진 복도에 사람의 그림자가 어렸다. 길고 검은머리의, 멀리에서 보기에도 말끔하고 하얀 얼굴이 잘 드러나 보였다. < 저거, 저택의 주인일까? > < 글쎄, 지금 이 시간까지 다들 안 자고 뭐 하는 거야? > < 도둑 소굴에 잠자는 시간이 따로 있겠어? > < 하지만 이건 단순한 도둑의 소굴이 아닌 것 같은데? 이 저택의 규모나...... > "잘 보았소. 보통의 소굴은 아니지. 이 아즈라엘님의 본가이니까." < .....!! > < ....!!! > "하하... 소용없을 거요. 이곳은 나의 보금자리. 날 위한 결계와 함정이 얼마든지 설치되어 있으니.... 그 동그란 구슬 속에 두 사람이 함께 있기에는 불편할 테지만 잠시 참고 있는 것이 좋겠소. 내가 당신들을 자세히 관찰 할 수 있을 때까지. 정령언어라니 이 얼마 만에 들어보는 말인가...." 어느새 한밤중에 격식을 그런 대로 갖춘 정장을 차려입은, 키가 크고 선이 가는 남자가 그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들... 보노이카와 피오리언은 순식간에 자신들을 가둔 둥그런 투명 구슬 같은 것에 갇혀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눈앞의 남자는.... 아마도 금방 2층 창가에 서 있던 남자 같아 보였다. "하하하-- 난 밤에도 눈이 잘 보이는 편이라 그대들의 움직임이 아주 잘 보였거든? 안 그래도 무언가 아쉽던 참인데, 이렇게도 우아하고 아름다운 엘프와 사랑스런 물의 정령이 제 발로 찾아오시다니, 이렇게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 아하하하-- 내 그대들을 환영하는 의미에서 오늘밤을 함께 보내도록 하지. 기대하시기를." < 너, 너는 뭐얏? 이 거지같은 자식∼!! > "저런, 물의 정령님은 입이 험하시군. 그대의 이름을 알고 싶은데? 그 투명한 모습만큼이나 아름다울 이름을......" < 너 따위가 내 이름을 알아서 뭐해? 물론 내가 아름답기는 하지만...... > "야! 입 닥쳐. 저건 너를 유인하는 거라는 거 몰라?" < 에-- > "정령이 스스로 이름을 말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잊고 있는 거냐? 종속되어 버린다구. 사람들과 오래 접촉을 안 하더니 다 까먹었냐, 이 바보!!" < .....그.... 그렇군. 보.... 아니... 으.... > 피오리언은 보노이카 덕분에 위기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지만 눈앞의 남자가 싫지는 않았다. 저 하얗고 창백한 얼굴에 섹시해 보이는 붉은 입술. 그리고 어둠 속 흐린 불빛 아래서도 푸른 윤기가 흐르는 검고 긴 생머리. 다른 때였다면 스스로 이름을 말해주며 주종의 서약을 했을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다른 때라면. 그러나 지금은 보노이카가 옆에 있었다. "하하-- 이건 또, 입이 건 엘프라니. 보아하니 하급 엘프는 아닌 듯 한데, 인간 생활에 많이 젖으셨나보군? 대단한 입심이오. 그럼 그대의 이름은? 엘프는 이름과는 상관없잖소?" "이름을 알고 싶으면 그쪽부터 먼저 밝히는 게 예의 아냐?" "핫하-- 그도 그렇지만, 아까 얘기 했잖소? 아즈라엘이라고. 이 집은 내 본가이고, 그대들이 찾아온 '도적소굴'이기도 하지. 뭘 찾아 왔는지는 모르지만. 하하하하--" "당신이...... 아즈라엘?" < 그럼 북마왕의 딸이 아니었나? 다른 아즈라엘인가? > "흐음, 감감무소식이군. 벌써 몇 년이나 지난 일을. 하긴 물의 정령들은 세상사에 별 관심이 없으니까. 정보 교류도 잘 안 하고. 뭐, 그건 상관없소. 어쨌든 그대들을 환영하오. 이름 모를 물의 정령님과 아마도...... 물의 엘프일 분이여." 보노이카를 보고 한 눈에 물의 엘프임을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은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뜻했다. 정령언어를 알아듣는 다는 것도. 어떤 사람이란 말인가, 그는? 이런 대단한 사람이 어째서 인신매매나 하고 있단 말인가? "대체 저게 뭐야?" "하핫, 나 참 세상 살다가 별 일을 다 보누나. 헐∼" "후후후-- 정말 짧다. 히히히∼" 간신히 짐을 꾸려 출발한 새벽녘에야 출발한 글라인이 한 마을을 통과할 때의 일이었다. 출발한지 사흘. 그 동안 그는 숲길만을 택해서 왔다. 마을 근처의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을 알아볼까 봐서 였다. 그러나 마침내 그가 식료품이 떨어져 구하기 위해 한 마을로 들어섰을 때, 그 마을 역시 '드워프'를 보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인지라 지나치면서 온 동네의 화젯거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대부분은 노골적으로 쳐다보거나 비웃지는 않았지만, 1젠이 조금 넘을까 싶은 키를 한 드워프가 나귀를 타고, 짐을 바리바리 싣고 가는 풍경은 가히 앞으로도 2∼30년... 아니, 드워프가 땅에서 떨어지기를 싫어한다는 것은 온 세상이 다 아는 바이니까... 100년쯤 지나게 되더라도 두고두고 회자될만한 '사건'이었다. 글라인은 그러나 주위의 시선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었다. 게다가 그는 지금은 좀 익숙해졌으나 아직까지는 어색한, 나귀의 등에 타고 가는 것에 많은 신경을 할애하고 있었다. 때문에 주변의 시선 따위를 신경 쓸 여유는 더 없었던 것이다. 그는 마을을 나서고서야 방향을 잡았다. 항상 몸이 먼저 움직이고서야 생각이 따라가는 탓에 무작정 출발부터 하고 본 탓이었다. 새벽길을 나오면서 그는 나귀등에서 고민했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할거나... 티티노는 어디로 간 거지? 그러고 보니 마을은 왜 떠난 거야? 스스로 떠난 거야, 납치 된 거야? 이 녀석.... 나 족쇄 풀어준다고 큰 소리 빵빵치더니.... 오기만 해 봐랏∼!! 아녀, 아녀, 티티노...... 친구야, 돌아와.... 흑... 친구들 중에서 그녀를 가장 걱정하고 좋아했다고는 할 수 없으나 의외로 마음 여리고 정이 많은 글라인은 이런저런 생각 끝에 티티노를 다시 볼 수 없을까봐 눈물을 흘렸다. 아마도 글라인은 사라진 것이 티티노가 아닌 다른 누구였다고 해도 이런 반응을 나타냈을 것이다. 스스로는 인정하지 않을 지 몰라도. 그리고 그는 아무래도 자신의 마음이 가는 곳으로 나귀의 발길을 몰아갔다. '라이나폴스'. 대단한 마도왕국인 것은 아니지만, 그곳은 모든 마법사가 신성시되는 곳이었다. 마법에 관한 것이라면 어떠한 것도 존경받는 나라. 그곳에 가면, 그곳에 가면 티티노가 있을 듯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실은 자신의 처지에 대한 무의식적 어떤 것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곳에 가면 드워프라고 해서 놀림 받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희귀한 드워프 마법사라서 오히려 떠받들어 질지도 모른다는 잠재의식 속의 생각들이 그의 방향을 잡아 주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는 '명예'를 좋아했으니까. 그 '라이나폴스'로 가기 위해선 대륙 서쪽 변경에 있는 자신의 마을에서 한참동안 남동쪽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것을, 그는 지도를 보고 길을 잡아갔다. 그리고 지금은 그 길로 들어선 후 처음으로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 들어선 참이었다. "와∼ 엄마, 나도 나귀 탈래∼!!!" "너 인석, 거기서 뭐 하는 거야?" 주변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던 글라인도 자신의 앞길을 막아서며 노골적으로 손가락질을 하는 어떤 꼬마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는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주위의 다른 시선들은 그저 스치며 지나갔던 반면, 천진한 어린아이에게 이 풍경은 또 다른 느낌을 주었던 것 같다. "뭘... 저 애도 탔잖아. 근데 엄마. 저 애는 왜 수염이 있어? 할아버지처럼...." "타시.... 무슨 말을 하는 거니? 그런 실례되는 말이 어딨어? 저건 드워프족이란 말야. 키는 작아도 할아버지라구. 내가 어른들께는 어쩌라고 가르쳤지? 어서 사과 드려..... 죄송합니다. 어르신. 제가 아이를 잘 못 가르쳐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녀는 드물게 예의 바른 여자였지만 오히려 아이의 말보다 자신의 말이 그에게 커다란 못이 되어 박히고 있다는 것을 알 도리가 없었다. 현재 글라인은 그야말로 엄청난 크기의 대못이 자신의 가슴을 후벼파는 아픔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마을에서야 이제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사실이었기에--그의 성미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함부로 놀리지 못했었다.-- 이즈음 별 각성 없이 지내고 있었는데, 새삼 이 꼬마 엄마의 반응은 그의 속을 홀라당 타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사정을 모르고 한 일인데 어쩌리.... 눈물을 삼키며 지나치는 수밖에. 그러나 지나쳐 가는 그의 뒤로 날아드는 카랑카랑한 꼬마의 목소리는 대못에다가 확인 사살까지 하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의 글라인은 정말 장하게도 그냥 지나쳐갈 남의 마을에서 차마 본성을 드러내기는 어려운 까닭에 꾹꾹 눌러 참고 힘든 고난의 가시밭길을 벗어났다. "그럼, 내 키랑 비슷한데도 저건 할아버지란 말야?" "타시, '저건'이 뭐야! '저 분'이라고 해야지." "헤헤헤... 그래도 웃기잖아. 꼬마 할아버지라니... " "타시야, 너 말버릇 안 고칠래? 엄마가 노인을 공경하라고 했어, 안 했어? !" "그래도 재밌자나요. 나귀에 짧은 다리 덜렁거리면서 가는 할아버지 드워프.... 에헤헤 친구들한테 굉장한 거 봤다고 자랑해야지∼!!" "타시, 너 자꾸 그러면 맴매 해 준다∼ 엄마 따라해 봐. 노.인.공.경!!!" 그리고... 지금도 꼬마보다 그의 엄마의 한마디 한마디가 더욱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글라인의 몸 여기저기에 꽂히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고난은 이제 겨우 시작이 아닐까나..... "모두 모였어?" "응." "그래, 그러면 확인하고.... " 어젯밤, 그 동안 이상증세를 보이던 글라인이... 길길이 날뛰다가 나중에는 뭔가에 홀린 듯 멍한 표정이더니, 오늘은 오전 내내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별 걱정 않던 친구들은 저녁이 다 되도록, 식사 때 얼굴한번 보이지 않는 글라인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다른 건 몰라도 '식사'를 거른다는 것은 그의 사전에 절대 없는 일이었기에. 그리고 지금 왠지 정답게 느껴지는 숲 공터의 참나무 앞에서 모두 모여 앉았다. 카스왈르, 롱신, 호후스, 기법사 사인, 그리고 몽몽.... 그들은 친구들 중 둘이나 없어진 것에 대해 함께 얘기해 보기 위해 모인 것이다. 낮에는 어찌 된 일인지 이것저것 생기는 일도 많고 심부름도 많아서 전혀 짬을 내지 못한 까닭에 글라인이 안 보이는 것도 나중에야 깨달았던 것이다. 오늘따라 카스왈르와 사인, 롱신에게 빠듯한 수련을 강요하는 스승이나, 몽이의 날쌘 몸을 전혀 놀려 두지 않고 심부름에 써먹는 촌장이나 좀 이상하긴 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마을의 큰 어른들의 명을 어길 수도 없는 일. 그들은 주어진 것을 간신히 마치고 달이 뜰 무렵에나 몰래몰래 밖에 나와 모인 것이었다. 그다지 춥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저기, 좀 이상한 게 있어. 글라인은 그 드워프 건 땜에 그렇다 치고, 보노보노는 대체 어딜 간 거야?" "그래, 보노보노가 며칠째 안 보여. 그리구 난 그것도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어." "나,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나두 어제 이곳에 오고서야 기억이 나더라니까." "나는 뭔가를 흘리고 다녀야 하는 데, 그게 뭐였더라? 그게 없어서 서운해." "그래......" 호후스가 그 반투명한 미간을 찌푸리며 슬픈 표정을 짓는다. 뒤따라 카스왈르도 뚱한 표정이다. 사인, 몽몽, 롱신도 다들 마찬가지였다. 보노보노가 말없이 사라지다니. 그녀는 그냥 야생의 다람쥐는 아니었잖은가? 무엇보다 9년 동안 함께 지낸 친구였다. 그리고 글라인.... 그는 또 어떻게 된 걸까? 그가 말하는 마녀에 대해 친구들 중 누구도 기억해 내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 역시. 글라인이 주장하는 바는 정말일까? 아니면 드워프가 된 충격으로 뭔가 핑계거리를 찾다가 환상에 사로잡혀 어딘 가로 떠나버린 걸까. "살펴보니까 마굿간에 있던 나귀 한 마리하구, 글라인이 그 동안 언젠가 마법수행 떠날 때 쓸 거라고 모아 뒀던 여러 가지 물건들이 없었어. 정말 어딘 가로 떠난 것 같아." "글라인, 대체 어디로 간 거야. 말도 없이. 그리구 보노보노두......" 롱신과 카스왈르가 한마디씩 했다. 모두들 왠지 기분이 울적했다. 글라인이 사라졌는데도 마을 사람들은 전혀 신경을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아예 모르고 있었다는 편이 맞다. 그리고 기법사 사인이 아까 스승에게 글라인의 얘기를 꺼냈더니, '수련하기 귀찮아서 어디 늘어져 자는 것 아니냐? 아니면 요즘 마음이 불편해서 땡땡이 치는 것이거나. 아무려나 누가 잡아가길 하겠니? 뭐가 걱정이냐?' 하고 말았다는 거. 스승다운 반응이긴 했지만 사인의 잘 발달된 직감은 그가 뭔가 숨기는 것이 있노라고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말이 거의 없는 사인은--글라인과 대전(?)을 벌일 때는 제외하고-- 더 이상 묻지 않았었다. 스승과 얘길 나눠봐야 더 캐낼 것이 없으리라는 생각도 들었기에. "우리, 정말 뭔가 빠뜨리고 있는 거 아냐?" "그럴지도 몰라....." "요즘 정말 이상해. 맹∼해진 듯도 하구....."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가 개운치 않아." "나도......" 시무룩하니 앉아 있던 그들은 호후스가 화들짝 놀라는 모습에 같이 놀라버렸다. "생각났어. 난 쿠키를 먹어야 해. 그것도 특제 쿠키!!" "호후스, 니가 뭘 먹는다는 얘기야. 넌 먹으면 몸에서 그대로 통과하잖아." "아냐아냐, 난, 난 언제나 쿠키를 들고 다녔단 말야. 그 쿠키는......" "쿠키......? 그러고 보니 나도 쿠키를 많이 먹었던 것 같아. 부드러운 고구마 쉬폰 케익도." "에, 나도 무슨 생각이 떠오르는 것 같아. 그게....?" "이거야, 참. 우리 모두 어떻게 된 거 아냐?" "후∼ 정말 이상하다, 이상해∼!!" 얘기를 나누는 그들의 사이로 어떤 향기가 코를 간지럽히며 날아다녔다. 그리고 그 향기에 취한 티티노의 친구들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풀밭 위에 하나 둘씩 늘어져 버렸다. "에구, 이거야 원. 한꺼번에 모여 있으니 처리하기 쉬워서 좋다만." 촌장 다마신의 컬컬한 음성이 어둠에 잠겨 있는 숲의 고요를 갈랐다. 그러나 주변 나무에서 잠들어 있던 새들이나 풀잎 위를 뛰닫던 벌레들은 별 신경도 쓰지 않고 제 할 일만 계속 했다. 즉, 자거나 울거나 풀 잎사귀를 갉아먹거나 했다는 소리이다. "이거, 순 엉터리 약 아냐? 효력이 거의 24시간뿐이 안돼." 남자 음성 치곤 맑고 높은 편인 로이카르스의 낭랑한 음성이 촌장의 컬컬한 음성에 뒤이어졌다. "앞으로 3∼4일만 더 쓰면 되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아아-- 이 위대한 대 마법사 로이카르스님께서 꼬맹이들 뒤치닥거리나 하고 있어야 하다니." 투덜거리면서도 로이카르스는 작게 주문을 외워 달빛이며 별빛이 휘황한데도 겹겹이 드리워진 나무 그늘에 가리워 어둠이 짙게 덧씌워진 공간에 도깨비불을 불러들였다. 짙은 어둠 속에선 작은 도깨비불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주위를 식별할 수 있었다. 로이카르스는 누가 어디에 쓰러져 있는 가를 주욱 훑어보았다. "위대한 좋아하시네. 녀석들 옮기는 거나 도와. 그 잘난 능력 가지고." "점점 더 하급의 일을 하게 되는군. 다음 번 재계약 때는 생각 좀 해 봐야 될 것 같아." "흥, 니놈이? 군말 없이 재계약 할 놈이 무슨." "글세, 그건 두고 봐야 아는 일이지." "잔말 말구 롱신하고 카스왈르하고...... 암튼 니 제자들은 다 니가 챙겨. 호후스와 몽몽은 내가 맡을 테니." 촌장은 호후스를 위한(?) 납상자를 열면서 로이카르스에게 면박을 주었다. 로이카르스는 더 이상 말 않고 빙긋 웃으면서 그의 말에 따랐다. 그리고 그는 롱신의 몸을 뒤집으면서 새벽녘에 글라인이 마을 어귀 굵은 나무 둥치에 꽂아 놓고 간 쪽지를 그의 주머니에 슬며시 찔러 넣었다. 4. 어디로 갈거나 햇살이 비치는 오후에는 티타임을 갖는 거야 아름다운 뜰, 하얀 철제 의자에 앉아 친구들을 부르지 이렇게 한가로운 오후에는.... < 아즈데리카의 마녀 > 中 1 한가로운 오후.... 로이카르스와 나는 티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더라면 아마 쿠키를 구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그럴 정신이 어딨담. 엄마는, 내 어머니 영원의 마녀는 회복 마법을 쓴 이후 너무나 피곤해서 자신의 방에 뻗어 있었다. 말이 쉽지, 콩가루가 난 것들을 일일이 회복시키기란 엄청난 마력이 소모되는 것이다. 그녀는 당분간, 아마도 이틀정도는 저렇게 축 쳐져 있어야 되지 않을까. 나는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다가 결국 지쳐버렸다. 그래서 로이카르스는 모처럼만의 티타임을 제안했고, 나는 그러자고 해 버렸다. 시녀들이 알아서 차를 날라 온다. 쿠키며, 케익도. 편하긴 편하다. 친구들과 참나무집에서 티타임을 가질 땐 분주했는데. 지금 그 집은 아마도 썰렁해져 있을 것이다. 마녀의 집은, 그가 지내기 편한 곳이라면 크기를 안 가린다. 어떤 크기이건 마녀의 존재로 인해 그 안에 들어갈 때는 원하는 크기만큼으로 늘어나는 것이다. 아니, 실은 그가 작아지는 것이겠지만. 그러므로 마녀의 집은 외관만으로는 얼만큼의 크기인지 알아 볼 수가 없다. 같은 크기라도 취향에 따라 작고 아늑하게 꾸미는 마녀가 있는가 하면 적당한 넓이로 여유 있게 지내는 마녀도 있다. 나는 어느 쪽이냐 하면 전자와 후자를 적절히 섞었다고나 할까. 아, 떠난다는 걸 알리기 싫어서 참나무 집에 대한 얘기를 안 해 줬었는데 지금쯤 다들 서운해할지도 모른다. 마녀가 떠난 마녀의 집은 원래의 크기로 느껴지게 된다. 지금은 아마 두 사람이 들어가면 빠듯한 공간정도일 것이다. 뭐 호후스까지 들어간다면 셋, 덩치가 작은 보노까지 들어간다면.....!!! "으앗∼!" "풋--, 무...... 무슨 일이십니까, 티티노님?" 내 호들갑에 놀란 로이카르스는 그 뜨거운 차에 혀가 데였을 텐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발음으로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어떠냐 하면...... "보노보노.... 보노보노를 두고 왔어. 찾으러 가야해!" 제대로 표현하자면 '두고'온 것이 아니었지만--난 납치되었던 거니까--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었다. 아마 그녀는 내가 있을만한 곳을 찾아다니고 있겠지. 그럼 그녀는 어딜 제일먼저 찾고 있을까. 내가 납치된 지 아직 만 하루도 안 되었다. 그러나. 나는 벌떡 일어선 채로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로이카르스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내 행동을 지켜보고 있다. 그러나 로이카르스, 잘못하면 큰 일이 날지도 모른다고요. 흐으-- "로이, 아즈라엘의 집 알죠?" "그야...... 보노가 그의 집에 갔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당연하죠. 그녀도 머리가 있고 지원군이 있는데." "에, 머리? 지원군? 다람쥐가?" "암튼 그런 게 있어요. 로이는....."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그녀가 엘프인 것을 모르고 있는 걸까? 하도 알면서도 모르는 척, 모르면서도 아는 척 하는 스타일인지라 나도 헷갈린다. "그녀.... 정체를 몰랐나요?" "아아.... 폴리모프 다람쥐.... 그녀는 엘프계에선 유명하죠. 인간들은 잘 몰라도." "에에....??" "물의 엘프 여왕의 동생이잖습니까? 유명할 수 밖에요." "......." 그러나 속뜻은 그게 아닌 것 같은데. 하도 중의법을 잘 쓰는 사람이라 지금도, 언제나도 헷갈린다. 그러나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을 해야 한다. "로이카르스, 나 아즈라엘 집에 좀 데려다 줘요. 지금 당장--!! 보노가 위험해." "......뭐 대충 짐작은 갑니다만. 알겠습니다. 여기에서 시전하도록 하지요." 그는 내 손을 잡더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언제나 느끼는 바이지만, 그는 짧게 외울 능력이 있으면서도 일부러 길고 화려찬란한 주문을 외운다. 저것도 어쩔 수 없는 버릇인 듯 싶다. -- 티티노가 모르는 이야기, 여섯 "아즈라엘니∼임∼!! 케이니∼임∼!!" "이번엔 또 무슨 일이야?" "글쎄요.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1층 서재에서 밀린 일과를 처리하던 케이와 아즈라엘은 오늘 종일--새벽부터-- 별 소동이 다 있었던 것을 생각하고는 오늘하루는 정말 이상하게 특별한 날인가보다 하고 말았다. 여느 때였으면 복도에서 저렇게 주인의 이름을 함부로 외치며 쿵쾅거리는 녀석들은 거의 죽음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여러모로 특이한 일이 많이 일어나는 날. 현재 선심 쓰듯 부하의 무례를 눈감아주는 아즈라엘의 입가엔 미소가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의 잠깐동안의 실수로 물의 엘프가 정령을 도망시키긴 했지만 아직 그 아름다운 엘프는 남아 있었다. 뭔가 드나드는 것이 많은 하루인 듯 싶었다. 그 아름다운 엘프는 답지 않게 악을 쓰다가 이상한 말을 했다. 친구를 찾아 왔다나? 자신의 친구를 부하들이 잡아갔다고. 그럼 그 실버블론드의 미소녀가 저 엘프의 친구였단 말인가? 핫, 끼리끼리 모인다더니, 미인의 친구는 미인이었나 보다. 대개는 안 그렇던데. 그는 꿩대신 닭이라도 얻은 것이 기분 좋았다. 아마도 오늘 밤 미약을 풀어놓는다면 그녀도 어쩔 수 없으리라. 그는 어제의 못 다 한 한을(?) 그녀의 친구인 엘프를 통해 오늘에야 풀리라 다짐하면서 낮 동안에는 밀린 일과를 처리하는 중이었다. 보던 양피지를 말아 놓고 그는 잠시 쉬었다 하리라 생각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간편한 로브는 그의 호리호리한 몸이 움직일 때마다 휘감기면서 그의 몸을 감쌌다. 그는 헐렁한 옷을 좋아했다. 꽉 끼는 옷은 질색이었다. 여자에서 남자로 바꾼 후 그 점이 두 번째로 좋게 생각되는 점이었다. 여성으로 있을 때엔 이런저런 코르셋이니 뭐니 착용해야 할 것이 많았다. 그는 화려한 드레스는 좋아했으나, 보는 것을 즐길 뿐 입는 것은 질색이었다. 그의 변태(?) 아버지는 딸에게 여러 가지 옷을 바꿔 입혀 보는 것을 좋아했다. 성년이 되기 전, 마력이 거의 없던 상태에서는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도 그는 더욱, 남자로 변하고자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성인이 되어 그러한 능력을 지니게 되자마자 그는 성을 바꾸었다. 아, 남자로 변한 뒤 첫 번째로 좋은 점은 뭐냐고.....? 그건... 아즈라엘이 막 쭉쭉 뻗었던 팔 다리를 접으려 할 때였다. - 퍽---!! "......@##$%$^^&$^*%????" "야, 너 내 친구 어쨌어?!" "......." "보노보노 내 놓으란 말야. 이 변태 마왕의 변태 딸아-------!!" "........................" 너무나 황당함에 목이 메인 아즈라엘은 자신에게 날아 온 것이 무엇이었는지 부터 확인했다. 그건 그가 아끼는, 거실에 있던 쿠션이었다. 커다란 쿠션, 방석 만한 크기의. 그리고 눈앞에는 아까 전에, 부연 설명을 하자면 새벽녘에 보았던 로이카르스와 난처한 얼굴의 케이가 서 있었다. 또 그 옆에는...... 또 다른 쿠션을 잡고 씩씩대는 붉은 곱슬머리의 귀엽고 앳된 소녀가 서 있었다. 으흠.... 특별히 어린 소녀 취미는 아니지만 꽤나 귀여운걸? 아... 아니지 지금 저 여자 애는 그런 생각을.... 헉, 쿠션을 들어올리고 있다. 또 집어던지려는 거닷!! 그는 잽싸게 한쪽으로 피했으나 쿠션이 연달아 날아 올 줄은 몰랐기에 두 번째의 것은 직방으로 얼굴에 충돌하도록 둘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두 번이나 쿠션을 맞춘 건방진 소녀에게 슬슬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넌, 뭐냐? 이런 건방진...." "흥, 역시 알아보지도 못하는군. 내가 새벽에 알아 봤어! 이 변태얏∼!!" "....뭐.... 뭐라는 거냐--!!" "내가 누군지 진짜 모르겠어? 이 천치 아즈라엘아--!!" "......!?" 어쩐지 낯익은 분위기다. 저 두 다리를 벌려 꼿꼿하게 세우고 허리는 곧게 편 채 두 손을 허리에 올려놓은 자세. 눈에 익은 붉은 곱슬머리. 그리고 저 당돌한 말투.... "....티.... 티티....노.....???" "티티티노가 아니라, 티티노--!!" "....에....????????" "에가 아냐, 에가... 너, 내 친구 잡고 있지? 시침떼지 말고. 물의 엘프인줄 척 보면 알았을 거 아냐. 걘 내 친구니까 얼른 내 놔." "......." 그리고.... 그는 자신이 남자가 되고 싶어했던 첫 번째 이유였던 티티노의 아직 덜 자란 모습을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 글자가 나올 수 있다면 이렇게 찍혔으리라. '아직.... 발육부진의 미숙아....' 2 "너 아직 의식 지나지 않았냐?" 자리에 앉자 그가 내 뱉은 첫마디였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훗, 관두자. 그의 멍하던 눈빛이 아직 내 뇌리에 남아 있다. 등골이 오싹하다. "아직 의식 할 때 안 되었어." "그런데 마을을 벗어났어?" "그건 내 사정이얏!!" "흐음-- 글쎄? 내 뛰어난 머리의 기억력에 근거하면, 네 생일은 벌써 지난 것 같은데? 그리고 첫 보름도 지났고......" "......" 아즈라엘이 저렇게 머리가 좋았던가? 아, 그래 무척 좋았던 것도 같다. 아무려나... 그렇다고 9년 전에 본 꼬맹이의 생일까지 기억하고 있단 말인가. 뭔가 석연치가 않다. 그는 이미 성년기를 넘어선 것 같다. "너야말로 왜 ..... 그렇게 됐는데?" "하하하... 말 돌리지 마. 티티노." 너야말로닷--! 우리는 로이카르스와 '케이'라는 사람이 저쪽에 따로 앉아 있는 것과 상관없이 서재 가운데 있는 안락의자에 마주 앉아서 '대화'라는 것을 나누고 있었다. 그의 말로는 내 친구인 물의 엘프는 지금 피곤한지 잠들어 있다는 거다. 그래서 그녀가 깰 때까지 기다리지 않겠느냐고 하며 간식이라도 들고 갈 것을 권유했다. 그래서 지금은 티타임이다. 암튼, 내가 보기엔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싫어한다면서 모든 것이 그와 꼭 닮아 있었다. 저 창백한 하얀 얼굴만 빼고. 반발하다가 돌아간 곳이 결국 그런 자리였니, 아즈라엘? 너는 지금 할렘을 만들기라도 하려는 거야, 뭐야? 그거 결국은 네 아버지 따라 하는 거 아냐? 뭐, 마왕의 딸, 아니 아들씩이나 되는 넘이 뭘 하건 그의 마음대로이긴 하다. 어차피 인간의 가치관으로 잴 수는 없는 존재들이니까. 하지만 그것이 나와 직접적인 이해 관계로 얽혀 있을 때는 용납이 안 되는 거다. 나..... 에 이어 이번엔 보노이카를 잡아 두었단 말이지. 내가 그를 열심히 째려보자 그는 길고 검은 눈썹을 치켜올린다. 왜 그러느냔 거겠지. 하지만, 뭘 뭐라고 할 수가 있을까. '너, 아까 나한테 뭐 하려고 그랬어?'라고...... 어떻게 물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실토하는 셈이 되는데. 나는 그냥 눈을 내리깔고 한숨만 폭폭 내 쉬었다. "히유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 땅 꺼지겠다. 내 저택이 튼튼하게 지어지긴 했지만, 니 한숨을 감당하기엔 좀 부족한 듯 한데?" "아즈라엘?" "응?" "......암것도 아냐." "......?" "근데 보노이카는 언제나 깨어나는 거야?" 그는 좀 불만스런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왜? 왜 그렇게 보는데? "흠... 뭐, 사정이 있는 듯 하니까.... 그런데 앞으로 어쩔 작정이야?" "뭐?" "네 아버지 일... 앞으로 어쩔 거냐구. 너 앞으로 삼 년 안에 마력 완성하는 것이 가능해?" "에.... 그건..." 어째서 대화가 맘대로 안 풀리는 거냐. 주거니받거니 하는 말들이 다 각자 따로 비빔밥이다. 각자 딴 궁리들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에엣, 나도 몰라!!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보노가 있는 방이 어디얏? 이봐, 케이! 안내해 줘!!" "......아즈라엘님?" 케이라는 사람이 주인의 허락을 구하려 아즈라엘을 쳐다보자 그는 내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예상했던 듯 히죽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케이와 로이카르스 쪽을 향해 서있던 내 손을 잡았다. 어린 날 그랬던 것처럼. 그러자 계속 내 쪽을 지켜보고 있던 로이카르스의 얼굴이 순간 경직된다. ....? 왜지, 로이카르스? "이리 와, 내가 직접 안내하지. 네 친구는 말야...." "...에...." 아즈라엘은 나를 거침없이 끌고 문 쪽을 향했다.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그의 힘주어 잡은 손을 빠져나가기란 쉽지 않았다. 무식하게 힘만 세가지구. "아즈, 나 손 아프단 말얏, 그리구 그렇게 성큼성큼 걸어가면 어떡해!? 난 보폭이 좁단 말야∼!!" "하하-- 미안. 미처 생각을 못 했군. 그러나 네가 빨리 보고싶어 하는 것 같기에 말야. 네 마법사님도 긴장하고 계신 듯 하고." "로이가? 로이가 왜?" 나는 아즈라엘의 말을 듣고 로이카르스를 돌아보았다. 그는 눈을 내리깔며 내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내가 아즈라엘을 다시 한번 돌아봤다가 그를 다시 본 순간, 나는 방안에 뇌전의 기운이 감도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건 아즈와 로이 사이에 생성되고 있는 기운이었다. 헉, 이게 뭐야? 방 분위기가 이상해. "아즈, 이봐, 아즈라엘! 우리 빨리 보노한테 가자구." 그러나 그는 아무 대꾸도 없이 잔인해 보이는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무섭다. 저런 미소를 짓는 아즈라엘은 처음 본다. 역시 대마왕의 딸, 아니 아들이라서 그런 걸까? 그러나 그런 것에 기죽어 있는 것은 티티노가 아니지. "아즈, 가르쳐줄 생각이 없다면 나 혼자 갈게. 아니, 이봐요. 케이씨. 안내해요." 이번엔 그도 이 수상한 기류에 휘말리는 것이 싫었던지 얼른 문 쪽으로 나섰다. 그러나 아즈라엘이 손을 들어 제지하자 제자리에서 굳어버렸다. 그는 아마도 주인의 말에 절대 복종하는 타입인가 보다. "케이, 자네는 마법사님을 접대하고 있어야지. 티티노는 나.와. 함.께. 간다." 함께 간다는 것을 무진장 강조하더니, 아즈라엘은 내 손을 휙 잡아당기며 다시 거침없이 걸어갔다. 그러나 이번은 보폭을 줄이면서. 아마, 나름대로 배려해 주는 거로군. 그래서 나도 종종걸음으로 그를 따라 갔..... 아니 끌려갔다. 복도에 나와서도 한참을 걸은 다음에야 그는 속도를 줄였다. 그리고 조금 여유를 되찾은 듯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내 옆에서 걸었다. "티티노는 아직도 예쁜 게 싫어?" "응? 예쁜 게 싫다니?" "아, 네가 그랬잖아. 예쁘기만 한 것은 싫다고....." "아..... 그거야 지금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무조건 예쁜 것이 싫다는 의미는 아니야."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군." "뭐가?" "후후, 글쎄, 뭘까....." 그는 뭐가 그리 기분 좋은지 연신 싱글거린다. "아즈?" "네가 나를 그렇게 부르는 것도 오랜만이다. 듣기 좋은데?" "......너 오늘따라 느끼하게 왜 그래? 난 '예쁘면 다 돼'주의도 싫지만 버터 바른 듯한 느끼함도 싫어. 그렇게 징그럽게 웃지마. 안 그래도 남자로 된 것이 적응 안 되는데." "적응 안 된다는 것치고는 상당히 당당한걸?" "흥, 그야 내가 티티노니까 그렇지." "그래. 여전한 티티노다. 여전히.... 하하하하하하" 그가 호탕하게 웃었다. 으-- 확실히 남자가 되고 나더니 목소리도 굵어지고, 손도 선이 가늘어 보이지만 확실히 힘이 있다. 그 때문에 내 손은 그에게 잡힌 그대로다. 아마 그가 손을 놓으면 손자국이 빨갛게 나 있을 것만 같다. 벌써부터 욱신거리는 것을 보니. 마침내 길고 긴 복도를 꼬불꼬불 지나고 오르락내리락 하다가 도착한 곳은 복도의 끝에 있는 문이 두 짝으로 된 방 앞이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딱--'소리를 내고는 문을 슬쩍 밀었다. 아마도 자신만이 열 수 있도록 주문을 걸어 놓았던 것 같다. 아즈라엘의 뒤를 따라 들어간 방은 부드러운 청록색이 온화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안쪽 벽 가운데에 붙어있는 반원형 침대는 크고 안락해 보였다. 아마 다섯 사람이 누워서 뒹굴어도 될 것 같다. 그리고 그 위에 보노가 잠들어 있었다. 우리는 침대 쪽으로 조용히 다가갔다. "뭘 먹였길래 아직도 잠을 자는 거야?" "먹이다니. 그저 피곤하니까 내리 자는 거겠지." "......" "뭘 그렇게 쳐다 봐? 내 말이 의심스러?" "당연하지. 엉큼 대마왕의 응큼 아들 말이 얼마나 신빙성 있을 것 같애?" "하하, 네가 하는 말이니까 그냥 놔둔다만...." "뭐?" "다른 사람이었으면 그 즉시 머리가 몸통에 붙어있지 않았을 거다." 그렇게 말하며 나를 직시하는 그의 눈동자는 아까 잔인한 미소를 머금을 때만큼이나 차가웠다. 그러나 냉기는 금새 사라지고 그 눈가에 미소가 어렸다. 변덕이 죽 끓듯 한 건 언제부터 생긴 버릇일까. 전엔 이렇지 않았었는데.... 그도 못 본 세월동안 많이 변한 걸까? 하긴 성(性)이 바뀌었는데 이보다 더 크고 확실한 변화가 또 어디 있겠어? "티... 티티노......?" "......!?" 보노의 목소리에 놀라 나는 침대 가운데 쪽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아직 덜 깬 듯 힘겹게 눈을 뜨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얼른 그 넓은 침대위로 기어올라갔다. 내가 침대 밑에 서서 얘기하기엔 침대가 너무 크고 넓었던 탓이다. "보노이카... 고생했지? 내가 왔어....." "티티노..... 너야말로.... 어떻게 된 거야?" "으응.... 난 괜찮아. 너 정말 괜찮니? 어디 아픈데 없구? 저 응큼한 놈이 너한테 나쁜 짓 한 건 아냐?" "티티노.... 네가 일찍 온 덕에 아직 아무 짓도 못했어." "모이?" 나는 그의 말이 귀에 찔리는 순간 눈을 희번득∼ 뜨며 돌아보았다. 그는 예의 그 징그런 미소를 띄고는 팔짱을 끼고 침대 앞에 서 있었다. 윽, 닭살이얏∼!! 그런데 그는 한 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내 가슴이 뜨끔할만한 얘기를 꺼내 놓았다. "그런데, 티티노. 너 혹시 발끝까지 오는 실버블론드를 지닌 아름다운 아가씨를 알고 있니? 보노이카양의 친구라던데, 그녀를 찾아 여길 왔다더군. 보노이카양의 친구라면 네 친구이기도 하지 않나 해서......" "......." 머리하난 비상한 녀석이다. 그런 유추가 금새 가능하다니. 그러나 난 그에 대해 할 말 없다. 으으, 곤란해 정말. 흑-- 정말 내 행운은 다 어디로 가버린 걸까. 왜 요즘은 이다지도 난처한 일만 생긴다는 말인가. 흐윽-- "그 물 정령은 어디 갔어?" 아즈라엘은 여전히... --침대의 천개 기둥에 한쪽 팔을 기대고 다른 한 손은 허리 위에 걸친 채 삐딱하게 서서는 우리 쪽을 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나를. 그러나 나는 그의 질문을 무시해버렸다. 맘대로 생각하라지. "아아.... 마침 화병에 물이 있길래.... 그리로 들여보냈어." "뭐얏? 의리도 없이 혼자 가버렸단 말얏? 내 앞에서는 네 둘도 없는 친구인양 우쭐대더니 그게 뭐 하는 짓이야?" "티티노... 그러지 마. 정령은......" "아아, 그래 자리를 오래 비우면 안 되는 거라고. 알고 있어. 안다구. 하지만 니가 이렇게 위험한 상황인데 어떻게 혼자만 사라질 수가 있는 거얏∼!! 다음에 보면 손 좀 봐 줘야겠어." "하하, 티티노.... 그래봬도 그는 상급정령이라구. 진심으로 한다면 아직 덜 자란 마녀가 상대하기엔 벅차.... 으음...." "왜, 머리 아파?" "으응.... 조금." 나는 다시 아즈라엘을 다그치려다가 관 뒀다. 우격다짐이 통할 상대가 아니다. 그는...... 글쎄, 9년이란 세월이 흐르면서 변한 것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그를 자세히 알았던 것은 겨우 두 달 남짓한 기간동안일 뿐이었다. 그 외에는 잠깐씩 봤던 것 뿐. 그러니 그의 원래 모습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아는 것은 그 두 달간의 아즈라엘. 실은 내가 지금 그에게 깝죽댈 수 있는 것도 옛정을 생각한 그의 배려 때문일 것이다. 뭐라 해도 그는 대 마왕의 후계자가 될, 정식으로 성인이 된 아들이었다. 제대로 한다면 나 따위는 상대도 안 되겠지, 아마. 엄마라면.... 그녀라면 아즈보다 몇 수는 위겠지만. 나는 아직, 아직이다. 별안간 엄청난 마력을 가지게 되었다 해도, 그건 지금까지의 내 힘에 비해 엄청나다는 것이지 절대적 관점에서 '엄청난'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나는 정식마녀도 아니잖은가? 그리고 아직까지 제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무턱대고 파괴하고 갈기는 힘만 있을 뿐 고급스런 기교는 없는 것이다. 일례로, 무조건 엄마의 집을 부수는 것은 단순 무식한 마력으로 어디든 내지르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지만, 엄마는 그것을 복구할 수 있는 '회복마법'도 할 수가 있었던 거다. 그렇게, 마력의 세기도 문제지만, 그걸 얼마나 세련되게 이용해서 다양한 곳에 응용할 수 있느냐가 레벨을 결정하는 중요 요소인 것이다. 나는 그런 점에 있어 한참 뒤떨어져 있었고 이것은 정상적이었으면 7년 동안의 수행기간 중에 실질적으로 익혀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어려운 기교를, 마력도 더 키워가면서 해야하는 수행을 3년 내에 해야 한다는...... 하아, 생각할수록 괴롭다. "티티노. 그녀에게 쉴 시간을 더 주어야 하지 않을까? 아직 피곤해 하는 것 같군." "......보노이카." "나, 괜찮아. 일어날 수 있어. 나.... " "보노이카, 무리하지마. 저 사람, 음... 알고 보니 내 옛 친구거든. 너나 나에게 더 이상 못된 짓은 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안심하고 더 누워있어. 그래도 돼. 너 제대로 기운 차린 다음에 움직이자구." "하지만...." 그녀의 흐려진 청 회색 눈이 떨리고 있었다. 약 기운이 덜 빠져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 눈은 나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보노이카도 내 밤의 모습을 본 것이겠지. 그래서 걱정하는 것이겠지. 그래, 해가 지려면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마 늦어도 8시 이전에 이 저택에서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보노이카는 지금 너무 창백해 보인다. 아즈, 엘프에게는 적은 양의 약도 조심스럽게 써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고는 할 수 없을 거야. 조용히 시키기 위해서였다 하더라도. 아아-- 아마 그녀가 고급 엘프라는 것을 짐작했기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마법을 쓰는 고위 엘프라는 것을. 그러나, 이해는 하면서도 감정은 받아들일 수가 없는 탓에, 당연히 내 친구의 일이니만큼. 나는 뚱한 표정으로 아즈라엘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내 심장도 뚫을 만큼 강하게 나를 직시하는 그의 어두운 눈을 마주쳤다. ....... 정말로...... 정말로 심장이 내려앉을 것만 같다. 그는 나를 왜 저런 눈으로 보는 걸까? 아까, 그러니까 새벽녘에 보았던 그 이채를 띤 멍한 눈과는 또 다른, 그러나 비슷한 느낌을 주는 시선. 나는 왠지 모르게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을 피하기가 힘들었다. 심장소리가, 옆에 있는 보노이카에게도 들릴 것만 같다. 난.... 난 이런 건.... - 똑, 똑.... "아즈라엘님, 만찬이 준비되었습니다만....." '이런 건 싫어-----!!'하고 외치려는 순간 들려온 소리. 그, 케이라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아즈라엘은 여전히 나를 보고 있었지만 아까처럼 강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케이라는 사람의 목소리로 인해 조금 전의 분위기는 많이 흐려져 있었다. "쯧---" 아즈라엘은 혀를 차며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는 문에 대고 외쳤다. "잠시 후에 내려가겠다. .....손님은 미리 모셔 놓도록." "아즈라엘." "응?" "내가 왜 이 옷을 입어야 하는데?" "예쁘니까." ".....그러니까, 저녁 먹는데 왜 예쁜 옷을 입어야 하는 건데?" "만찬이니까." "......그.... 만찬에는 이런 옷.... 레이스 달리고 주름이 정신없이 잡힌 하늘하늘한 옷을 꼭 입어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는 거야?" "응." "...... 그거 어느 나라 법인데?" "당연히 아즈라엘님의 법이지." "그럼 나랑 상관없는 법이겠네?" "아니, 상관이 무척 많은 법이지. 어쩔래? 빨리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갈래, 아니면 계속 나와 실갱이질을 하고 있을래? 선택은 네가 하는 거야. 마침 나는 시간적 여유가 많으니까 얼마나 늦든 상관없지만." 그는 비웃는 듯 그 입가에 파리도 미끄러질 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 입술은 마치, 하얀 눈 위에 붉은 장미 꽃잎이 떨어진 것 같다. 남자가 그렇게 이쁜 건 범죄야, 아즈라엘. 뭇 여자들에게 열등감을 키우는 아주 질 나쁜 범죄. 물론, 나처럼 깜찍하고 예쁜 소녀와는 상관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러나저러나, 아까 간식시간에 나왔던 과자나 케익만으로도 충분히 배가 차는데 얼마나 지났다고 또 저녁인가? 그것도 만찬이라니. 그의 집에 와서 먹을 것으로 고문을 당하고 갈 줄은 정말 몰랐다. 나도 먹는 것이라면 정말 좋아하지만, 때때로 걸신들린 듯이 먹어치우기도 하지만. 나는 주위에 널린 천조각(?)들을 보며 한숨을 내 쉬었다. 그러나 이런 옷을 입고하는 식사라면 그것이 제대로 피와 살이 될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나는 어떤 타협점이 없을까 싶어 다시 아즈라엘을 바라보았다. 처량한 눈으로. 그러나 그것이 내 실수였다. 이젠 그와 시선을 마주하는 것이 부담스럽기까지 하다. 도대체 왜 저런 오묘한 눈으로 나를 보는 건데? 난 지금 그가 좋아하는 미소년이나 미소녀의 모습이 아니란 말야. "하하-- 보면 볼수록 옛날 생각이 나." "......옛날이라고?" "너와 처음 만났을 때 말야. 그리고...... 너희 집에 머물 때의 일도." "그래...... 그땐 너도 여자였지." "하하-- 그리고 그 때 네가 한 말은 기억나지 않는 거지?" "......에?" "뭐, 아이들의 기억이야 다 그런 거지만. 어쨌든 옷 빨리 입어. 그게 마음에 안 들면 이쪽의 것들도 있으니까. 나 잠시 나갔다 올 동안 다 입어야해." 자, 잠깐, 잠깐만 아즈라엘!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려 할 때, 어디선지 떼거지로 나타난 하녀들이 우 몰려들었다. 아즈라엘의 취향과는 100만제나 정도의 간격이 있을 듯 덩치가 보통의 성인 남자 못지 않게 크고 우락부락하게 생긴 그 여자들은 내 가는 팔다리를 옴짝달싹 못하게 붙들고는 다짜고짜 옷을 벗기기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속옷 한 장만 남긴 채 순식간에 빈 몸이 되어버렸고, 그래서 막 문을 닫고 나가는 아즈라엘을 차마 부를 수가 없었다. 대체 왜 이렇게 덩치 좋고 힘 좋은 하녀들이 옷을 갈아 입히는 거래? 그런데 그게 무슨 소리지? 내 총명하고 똘똘한 머리가 기억 못하는 것이 다 있다니. 아즈, 말 좀 해봐. 내가 그때 무슨 얘길 했었는데? 난, 난 아무 것도 기억나는 것이 없단 말야. 내가 도대체 무슨 얘길 했다는 거얏-----!!! 그러나 나는 곧 제대로 정신을 차려야 했다. 이 여인네들이 나에게 프릴과 주름, 레이스가 가장 많고 치렁치렁한 옷을 입히려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최대한 인상을 쓰며 그중 제일 단정하고 깔끔해 보이는 옷을 집어들어 하녀들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그들은 아무 말 없이 그 옷을 받아들고는 내 허리에 이상한, 천으로 된 부목(?) 같은 것을 대더니 허리를 사정없이 조이기 시작했다. 조금 후 내 허리는 개미처럼 잘록해졌고.... (여기서 더 잘록해질 허리가 어딨단 말얏--!!) 엉덩이에는 뭔가 무겁고 둥그런 쇠테 같은 것을 출렁이게 해 놨다. 아마도 이 테 위에서 치마가 동그랗게 붕 떠 보이는 것이리라. 흐윽.... 이런 상태로는 먹을 것이 어디로 들어가는 건데? 이 부풀어 오른 치마 밑으로? 걷는 것도 힘들겠당. 나는 말없이 속으로만 눈물을 삼켜야 했다. -- 티티노가 모르는 이야기, 일곱 아마도 그건 티티노가 의식을 마친 순간이었을 것이다. 롱신은 눈을 번쩍 뜨면서 이곳이 어떤 현실인지를 되짚어 보아야 했다. 그리고 그는 그가 이 삶 속에 놓여 있던 이유를, 자신의 목적인 어떤 이름을 떠올렸다. 이즈음 로이카르스 스승은 잠시잠깐씩 자리를 비우면서 자신들에게는 고된 수련을 시키고 있었다. 여기서 자신들이란 롱신과 카스왈르, 기법사 사인을 가리킨다. 글라인이 없어진지도 며칠 되었건만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저 건성으로 '큰일이네.'라고 할뿐이었다. 어디 가서든 그 변죽으로 잘 지내고 있으리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인 듯 했다. 한편으로 그의 친구라는 '자신'들은 어떤 처지였느냐 하면, 아침이면 사라진 친구들에 대해 까맣게 잊고서 스승이 시킨 수련이며 촌장과 마을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불러대는 통에 허덕이며 아무 생각 없이 지내다가 문득 친구들의 기억을 떠올리고는 밤에는 참나무 밑에 모여 앉아 고민을 하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고민은 전혀 진전이 보이질 않았다. 아침이면 또 다시 백지 상태가 되어버리므로. 다만, 며칠 전 롱신의 바지에 무슨 쪽지가 들어 있어서 살펴보니, 글라인의 서체가 분명한 지렁이 기어가는 듯한 글자가 몇 개 적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글라인이 나무의 울퉁불퉁한 결에 대고 급히 휘갈겨 쓴 것인 듯 거의 알아 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책상에 제대로 펴고 써도 알아보기 힘든 글을 그렇듯 휘갈겨 썼다면, 것도 울퉁불퉁한 곳에 대고... 판독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기법사 사인은 그래도 글라인의 글씨 해독(?)을 자주 해 본 지라 단 한마디만은 대충 유추해 낼 수 있었지만 '라XO폴스O 간X' 이것만으로는 무슨 뜻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중간의 동그라미와 가위표는 전혀 알아 볼 수 없는 글자를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그 외의 글자는.... 아마 지렁이가 춤을 춘 것 같았다. "나, 이제 기억이 나. 온전하게!" "무슨 기억?" "뭐가 말야?" 롱신은 여전히 마을 사람들의 불림에 쫓아다니느라 바쁜 친구들, 카스왈르, 몽몽, 사인, 호후스들을 억지로 끌고 와 참나무 아래에 모아 놓고 있었다. 당연히 친구들은 의아한 눈을 하고 그를 응시했고. "그리고, 왜 아침마다 기억이 혼미했는지 알겠어. 제길, 그 마녀!" "......?" "무슨 마녀?" "엥......?" 다들 롱신의 두서없는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한동안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내뱉고 있었다. "아무리 이번 생에서 그녀의 엄마라지만, 이건 지나치잖아. 우리를 따돌리려 하다니. 그게 딸에게 어떤 일인 줄도 모르면서 짧은 시각으로 보는 우매함이라니......" 평소 뭔가를 많이 알고 어려운 말을 쓰는 그이긴 했으나 지금의 말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호후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롱신이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며 그녀를 직시했던 것이다. "너, 호후스 너 말야--!! 다른 녀석들은 그렇다 치고, 넌 유령이잖아. 유령의 상태로 그녀와의 인연을 이어왔으니, 아무리 좋은 게 좋은 거라면서 세상을 살아간다지만 호후스, 아니 샨! 너는 알고 있어야 하는 거 아냐?" "....로... 롱신... 무서워. 눈 그렇게 뜨지 마....." "좌우지간.... 지금의 널 보면 살아생전에 그 잔인하기로 이름난 '샨 에트라'란 걸 누가 믿겠어...." "에....?" "샨..... 에트라.....?" "그.... 그게 누군데?" "있어, 그런 게." 채 20년도 살지 못한 친구들이 200년 전에 그 명성을 떨친 고 르티카의 유명한 여장군의 이름을 알리는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병사들에게는 더 없는 상관이었으나 적병에게는 그 잔인함이 끝을 알 수 없다고 하는 공포의 존재였다고 한다. 호후스는 두리뭉수리 저편에 밀어 놓았던 기억을 롱신의 투덜거림으로 인해 반추해 볼 기회를 가질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이미 꿈같은 일이다. 이젠 아무 상관도 없는 일. 그래서 그녀는 특유의 무심함으로 이렇게 대꾸했다. "그래서?" "하아-- 그래, 넌 그때부터 영원의 마녀를 알고 있었잖아. 그 전(前) 생이 기억 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고 치고 그녀가 어떤 여자인지...... 아이구, 이제 와서 따져봐야 소용도 없군. 넌 정말 두 번이나 순진하게 당하다니." 호후스는 롱신의 말 때문에 그녀답지 않게 고민에 빠졌다. 가만 생각해 보니까 뭔가 떠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영원의 마녀가 아직 그 이름을 얻기 전. 그렇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고 르티카의 영지 확장을 위한 전투 중의 일이었다. 그때 그녀는 아직 수행을 떠나기 전의 어린 소녀였고 자신은 그녀가 지내는 마을을 지나쳐 가는 중이었다. 마을 근처 평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그녀는 정말 어이없이 실수로 쏜 화살에 치명상을 입었고 그 상처를 고쳐 준 것이 영원의 마녀였다. 그리고 그 마녀는 그녀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감지하고 그녀가 죽고 나면 자신의 주위에서 수호령으로 있어 줄 것을 요구했다. 용맹한 장수였던 자의 영이라면 수호령으로 쓰기엔 아주 좋은 조건이었기에. 그러나 어린 그녀의 나름대로의 계략이 샨에게는 귀여워 보였기에 그녀의 청을 승낙하고 말았다. 어차피 살아생전에 행해 질 계약이 아니었기에 할 테면 해 봐라라는 식이었는지도 모른다. 몇 년 뒤 그녀는 죽음을 맞이했고, 그 혼은 정말 어이없게도 영원의 마녀에게 종속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녀는 마녀에게 당장 필요 없을 때는 호랑나비풀에 취해 납상자에 봉인되는 몸이 되었다. 살아생전의 화려한 위용을 생각한다면 참으로 어이없는 꼴이었다. 그러나 마녀의 변덕 덕분에 그녀는 다시 자유를 찾게 되었고 거기엔 단 한가지 조건이 붙어 있었으니. 마녀는 앞으로 태어날 자신의 딸의 곁에서 그녀가 수행을 시작하기 전까지 수호령으로서 붙어 있을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호후스는 이곳 숲에 자리를 잡고 머무르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호후스는 은근히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럼 지금 아침마다 혼미한 것은! "류젠의 호랑나비풀 때문이란 말얏?" 참 드물게도 화를 내는 호후스를 보며 몽몽과 카스왈르와 사인은 평소 전혀 느끼지 못한 전율을 느꼈다. 호후스의 모습은 어느새 한 제국의 장수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복색을 갖춘, 엄정하고 위용 넘치는 전사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꼬마유령 마냥 뭉싱뭉실 귀엽던 평소의 모습은 간 데 없이. 촘촘히 얽힌 조끼형 사슬 갑옷(아마도 움직임의 편리를 위해 그냥 철판으로 하지 않고 사슬로 만든 듯 보인다)은 아마도 미스릴로 만든 듯 보였고 어깨며 팔꿈치, 무릎에 장식된 것도 미스릴로 보였다. 숄더 플레이트Shoulder plate는 그 두께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엘보 캡Elvow cap이나 신 가드Shinguard도 무게며 두께가 장난이 아닐 듯 했다. 거기에 어깨 장식 아래로 펄럭이는 커다란 망토는 진한 자줏빛으로 그 색이나 천은 평민들은 함부로 사용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자주빛을 만들어 내는 염료값은 엄청나게 비싸다) 게다가 등에 매어 놓은 거대한 검은 저것을 과연 인간이 휘두를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크고 웅장했고 한쪽 팔에는 역시 미스릴로 만들어진 듯한 투구가 들려 있었다. "헉.....!!!" "흐걱....." "......." 호후스의 본래 모습을 처음 보는 친구들의 반응이었다. "답지 않게 순진하기는. 하긴, 전장에서만 돌아다녔으니 그럴지도 모르지." "롱신, 너 마녀와 함께 이 꼬챙이에 사이좋게 꿰어져 죽고 싶으냣?" 200제나가 넘어 보이는 길이의 창을 휘두르는 호후스를 보고도, 뭐라 해도 롱신은 그런 일을 겪을만한 존재는 아닌지라 태연한 얼굴이었다. 오히려 다른 세 사람은 그 권위와 위엄에 짓눌려 떨고 있었는데, 그나마 침착한 것은 사인이었으니. "호랑나비 풀이 뭐야? 얘기를 다 이해하진 못하겠지만, 그 풀 때문에 우리가 뭔가 착각을 하고 있었다고 여겨지는데?" "그래, 바로 맞았어. 아마도 그녀의 하수인일 촌장님과 스승님 덕분에 우리는 아주 중요한 것을 까맣게 잊고 있던 거야." 그러자 쫄아있던 카스왈르와 몽몽도 무슨 일인지 궁금해져서 호기심으로 가득 찬 눈을 반짝였다. "자, 이제 기억해 봐. 내가 해독시켜 줄 테니." "......?" "......???" "....????" 롱신이 무언가 주문을 외우자 그들의 주위를 상쾌한 바람이 스치며 지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잊고 있던 것을 기억해 냈다. 그들의 친구, 저 참나무 집의 주인, 꼬마마녀 티티노를. 3 무엇이 어찌 되었건, 나는 이제 다시 길을 떠나야 한다. 물론 낮과 밤이 다른 내 몸이 불안하기는 하지만, 제대로 된 수행을 하지 않고서는 무엇도 바랄 수 없을 것이다. 내 몸이 온전해지는 것도, 아빠의 봉인이 풀리는 것도. 나는 보노이카와 함께 아빠의 봉인이 있는, 엄마의 저택에서 가장 큰 홀이 있는 별채에 와 있었다. 홀의 한가운데엔 예의 그 칼이 꽂혀 있었다. 북마왕이 남기고 떠났다는 그 칼은, 7년이 지난 지금도 막 날이 벼려진 듯 새파란 날카로움을 뿜어내고 있었다. 검신에 새겨진 문자로 봐서는 아마도 마법검인 듯 싶다. 아빠가 마녀 양육법에 따라 마을로 떠나던 날 나에게 주었던 검은 그리 길지 않은 랄트였다. 그 검은 '마력검'으로 검술 실력보다는, 지닌 자의 마력에 따라 힘이 좌우되는 검이다. 즉, 나의 경우는 이 검을 '검'으로써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마법도구'로써 내 힘을 실어 보내는 거다. 하지만, 이 검. 북마왕이 꽂아두고 간 검은 마법검이었다. 이 검은 검 자체에 마력이 담겨 있다. 검신에 새겨진 주문을 통해, 어느 정도의 검술 실력이 있는 자는 그 검에 담긴 마력을 자유로 사용할 수가 있다. 마법을 모르더라도. 그 검의 이름은.... 북마왕의 검이니 아마도 그 이름은 '아이스 스톰 ice storm'혹은 '빙화검(氷花劍)'이라 불리는 검일 것이다. 북쪽의 차가운 얼음 바람을 자유롭게 휘몰아치게 할 수 있다는, 대단한 위력의 검. 그는 그 검을 여기에 꽂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보노이카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은 안타까움? 뭐 그런 것을 담고 있었다. 확실히 그녀는 무척 인간에 가까워진 엘프였다. 그저 보통의 엘프였다면 이런 눈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빠가 봉인되어 있으면 힘을 길러서 봉인을 풀면 될 것 아니냐는... 지극히 사무적인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엘프들을 너무 무시하는 게 아니냐고? 그런지도 모르지만 예를 들면 그렇다는 말이니까.... 뭐, 엘프란 그만큼 애틋한 감정 같은 것이 철철 넘치는 존재는 아니라는 말이다. 나는 오히려 보노이카를 안아주어야 했다. 지금의 나는 그녀보다 키가 한참 작으니까 그녀의 허리를 안아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고마워, 보노이카. 내 마음을 알아주는 거구나. 그래, 나도 9년만에 만난 아빠가 이런 곳에 묻혀 있다는 것이 슬퍼. 하지만 죽은 것은 아니니까 희망이 남아 있는 거니까, 괜찮아. 내가 수행을 열심히 해서 마력을 제대로 키운다면 봉인을 풀 수 있을 거야. 분명히." "......티티노." "넌, 넌 나를 믿지, 보노이카?" "그래, 티티노. 너는 분명히 해 낼 수 있을 거야. 분명히...." "고마워, 날 믿어줘서." 아마 앞으로 힘든 곳만을 여행지로 정하면 되지 않을까. 이것이 현재의 내 생각이었다. 마침, 그런 말은 좀 어울리지 않지만 어쨌든 전운이 감도는 곳도 있고, 그런 곳을 돌아다니면서 경험을 쌓는다면 마력이나 기교가 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내 상태에 대해서 좀 더 제대로 파악을 하는 것은, 지금은 어쩔 수 없을 것 같다. 마녀 평의회에 의논하러 찾아가면 할머니들은 처음에는 반가워하시겠지만 찾아간 이유를 듣는 순간 엄마는 소환될 것이다. 엄마의 힘이 다른 완전한 마녀들에 비해서도 대단한 것은 사실이지만 마녀 할머니들의 위력은 그 누구도 무시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언제나 각자 따로 노는 것으로 유명한 동서남북의 마왕들이 힘을 다 합친다고 해도 마녀 평의회의 장로 할머니들에게는 대들 수가 없는 것이다. 제대로 따져 본다면 그 힘이 거의 비슷하거나 혹은 마녀 쪽이 우위에 있을 것이다. 숫자로 치더라도 마녀 쪽이 두 배는 넘으니까. 그리고 단합도 잘 되고. 그들은 그 대단한 힘을 세상에다가는 풀어놓지 않는다. 그래서 따로 그들만의 장소에서 살고 있다. 그곳은 마녀들이 아니면 아무도 들어 갈 수가 없다. 마녀로서 최상의 힘을 지니게 된다면, 그리고 나이가 든다면 언젠가는 나도 그곳에 가서 살아야 할 지 모르지만 지금으로선 그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 의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흐윽... 내 행운은 언제 돌아오는가. 요즘 이런 생각만 하게 된다. 정신차리자, 티티노. 언제나 노력 뒤에 행운이 오는 법이라고, 나는 항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노력부터 하자고.... "준비는 다 됐니?" 만 하루를 쉬고 나자 살만해진 듯한 엄마는 내게 인사를 차리러 나왔다. 그래, 그래도 엄마였지. 나를 낳아주었고, 딸을 위한 마을도 장만해 놓은, 의외로 자식사랑이 지극한 사람. 하지만 도가 지나친 건 문제가 있다구. 그래서 현재 내가 곤란을 겪고 있잖아? "대충." "흥, 여전한 말버릇이구나. 넌 그게 그렇게도 불만이니? 세상은 아름다운자가 지배하는 거야. 그 아름다움으로 인해 마력도 배로 증가하는 것이고. 지금의 네 모습으로는 그럭저럭 귀엽기는 하다마는 뭘 할 수 있겠니?" 많은 것을요. 아주 많은 것을 할 수 있지요. 그 아름다움만으로 어떤 마력도 쓸 수 없고 몸도 둔해진 상태보다는 훨씬 많은 일들을요. 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어차피 귀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뭐 엄마의 가치관은 그렇게나 확고한 것이었다. 아마도 파파할머니가 되었을 때나 생각이 좀 바뀌려나. 아아, 혹시나 하고 말해두는데, 완전한 마녀는 그 순간부터 겉모습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할머니'라고 한다고 해서 주름이 자글자글 잡힌 그런 쭈그렁 노파를 연상한다면 곤란하다. 실제로 평의회의 장로 할머니들도 그 아름다움은 눈부실 정도다. 다만 엄마나 밤의 내 모습 같은 대책 안 서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매력을 지닌 아름다움. 나는 그런 모습을 동경한다. 자신의 노력과 마음가짐으로 인해 가꾸어 가는 겉모습을. 이제는 날 샌 거지만. 후우. 나는 하루라도 빨리 떠나려 했지만 보노이카의 상태도 이직 좋지 않았고 밤길을 떠나는 것이 이제 위험해진 상태에서 출발은 내일 아침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해가 뜨면 당장. 어디로 갈까 하고 궁리하던 나는 우선 라이나폴스 쪽으로 방향을 잡기로 했다. 전운이 감도는 고 르티카와 가우니시아가 그 위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라이나폴스와 고 르티카와 가우니시아 삼국은 국경을 맞대고 붙어 있는, 대륙 북반구에 위치하고 있는 곳이다. 고 르티카와 가우니시아는 평야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탓에 양국간에 다툼이 잦았다. 거기에 가우니시아는 기사도를 숭앙하고 마법사를 배척하는 쪽이었고 고 르티카는 유명한 마도왕국이었다. 그 밑으로 가우니시아와는 산맥 끝자락을 두고 붙어 있는 라이나폴스는 비교적 왕래가 쉬운 고 르티카의 영향으로 마법사를 존경하는 나라로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본의 아니게 어쩌다보니 순식간에 대륙 남쪽(엄마의 집이 대륙 남쪽이니까, 그리고 이제 아빠가 남쪽 대마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 엄마의 집이 남쪽이었던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었다.)으로 내려와 버린 나는 북쪽으로 방향을 잡으면서 애초 목적지인 고 르티카를 가기 위해 라이나폴스를 지나쳐야 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전에 만난 페이라는 사람이 그곳 출신이었지? 왠지 그의 소탈한 웃음이 기억에 남아있다. 인연이 닿는다면 또 만날 수도 있겠지. "보노이카......" "응?"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 이 모습에 적응이 안돼." "나도 조금...... 그래." 보노아카와 나는 서로 멋적은 미소를 허공에 띄웠다. 나는 지금 전신거울 앞에 서 있었다. 이제 내가 내 모습을 제대로 살펴 본 것은 겨우 세 번째이다. 그러나 볼 때마다 머리끝이 쭈뼛쭈뼛하다. 어색하고 적응이 안 된다. 발끝까지 닿는 실버블론드. 왠지 맹한 얼굴. 그 자수정 빛 눈만은 좀 친숙해 보였지만 그래도 나는 검붉은 동공에 붉은 홍채를 지닌 내 원래의 눈이 더 좋다. "이 모습으로.... 천천히 변해 가는 걸까? 낮의 내 모습까지? 마력과 기교가 는다면, 어느 모습이 내 진짜 모습이 되는 걸까?" "......티티노. 글쎄, 나도 뭐라고 할 수 없는 일이구나. 나로서도 정말 생전 듣도보도 못한 일인지라. 아까 너의 어머니도 그러셨잖니." "하아---!!" 아까 오후에 만났을 때, 엄마는 자신 있게 단언했다. 지금은 나의 바램과 엄마의 바램이 충돌을 일으켜 분리되어 있지만 차츰 마력이 커질수록,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밤의 모습으로 있는 시간이 더 길어지게 될 것이고 그 시간에 쓸 수 있는 마법도 늘어날 것이라고. 그러나 정확한 건 알 수 없는 거 아냐? 맹한 모습이 늘어나는 만큼 마법을 더 못쓰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건데? 게다가 이상한 점이 한 가지 더 있다. "보노이카." "응?" "너 지금 내 목소리 들리니?" "에? 그럼 들리니까 알아듣고......?" "정말, 들려?" "그...... 그러고 보니, 네가 입술은 움직이지만 소리는 실제로 들리는 것이 아니구나. 머리 속에 울려오고 있어. 에엑!?" "후우--" "티, 티티노, 그럼 너 이 모습으로 있을 때엔 다른 사람들과는......" 그렇다. 나는 이 모습으로는 마법 엘프인 보노이카 이외의 다른 사람들과는 '대화'조차 나눌 수 없는 것 같다. 나는 보노이카를 통해 로이카르스를 불렀고, 그 예측이 '사실'임을 확인했다. 그는 내가 하는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고, 나는 계속 절망스러워져 갔다. 흐윽-- --- 티티노가 모르는 이야기, 여덟 "세째의 지금 위치는?" "글세, 그것이, 예정된 곳으로 가고 있지 않다고 합니다." "뭐얏--!!" 불꺼진 촛대가 넓은 서재의 허공을 긴 포물선을 그리면서 날아갔다. 두툼한 카핏 위에 부복하고 있던 남자는 그걸 미처 보지 못했기에 날아오는 촛대에 뒤통수를 정통으로 맞고는 기절해버렸다. 그의 옆쪽에 무심하게 서 있던 긴 튜닉을 입은 호리호리한 사내는 두어 번 손뼉을 쳐서 밖에 있던 시종들을 부르더니 기절한 사내를 처리할 것을 명했다. 방 가운데에 화려한 장식을 가득 단, 덩치를 잔뜩 부풀려 보이는 옷을 입은 다리가 짧은 사내는 분을 참지 못해 씩씩대면서 서재 안을 오가는 왕복운동(?)을 하고 있었다. "루쉬폰님, 고정하시지요. 라이나폴스 왕국 제일의 호남아, 둘째 왕자의 이미지에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십니다." "하지만--!! 으흠, 알겠네. 자네의 말이니까 내 진정하도록 하지. 후우∼" 그러나 쉬 진정되지 않는 것을 애써 누르는 라이나폴스 왕국의 둘째 왕자 루쉬폰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썩 잘생긴 편은 아니었지만 평소 호방한 행동과 언변으로 왕국의 귀족들과 백성들에게 인기를 누리는 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어머니가 어릴 때부터 붙여준 마법사 리 날파른의 조언 덕분이었지 실제 그의 모습은 급한 성미를 주체못하는, 그리고 모든 것을 쫀쫀히 따져보지 않고는 못 견디는 소심가 그 자체였다. 때문에 그는 리 없이는 어떠한 일도 혼자서 벌이지 못했고 대개는 모든 것을 그에게 전적으로 일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욕심은 창창해서 큰형의 자리를 어떻게든 치고 올라가려는 야심만은 가슴 가득 부풀어 있는 루쉬폰이었다. "어차피 검술 수행을 위해 떠난 상태라 꼭 예정대로 움직인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루쉬폰님께서 준비하신 계획은 다른 기회에라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니 너무 근심하지 마십시오." "으음, 그래. 역시 나에겐 리 자네밖에 없다네. 자네 외의 것들은 죄다 똥멍청이에 둔해빠진 것들이얏! 에잇--!!" "루쉬폰님, 언동을......" "아, 알겠네. 내가 실수를 했군. 하핫, 너무 흥분을 한 것 같아. 흠, 점잖게, 의연하게, 의젓하게." 그러나 루쉬폰은 또 다시 떠오르는 여러 생각들로 다시 달아오르고 있었다. "흥--, 한갓 마녀의 아들인 주제에, 마술이나 부리고 살 일이지 무슨 검술이 그렇게 뛰어난지. 그 녀석, 사람들 앞에서는 아무 욕심이 없는 척 빈들거리고 있지만 그 녀석 내 자리를 차고 올라올 생각이야. 시커먼 속이 내게는 다 보인단 말이다! 생각 없는 바람둥이인척 하면서 사람들을 교란시키고 있지만, 흥, 내 눈은 속일 수 없지. 때때로 반항적인 그 눈빛을 보면...... 흐흐-- 그 녀석, 철저히 짓밟아 주고 싶다구." 그는 현 왕비의 아들인 셋째동생을 무척 못마땅해하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네 살이나 차이나는 동생에게 늘 비교를 당해 온 탓에 그는 한이 골수에 사무쳐 있었다. 겉으로는 맘씨 좋은 형인 양 포장하고 있었지만 그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은 자신의 처소에서 하는 행동을 보면 잘 알 수 있었다. 비록 리의 철저한 단속으로 그 행동들이 외부에 소문으로 나도는 바는 없었으나 그는 밖에서 조금만 속상한 일이 있으면 자신 처소의 하인들에게 치도곤을 주곤 했다. 현재 왕세자인 큰형은 몸도 약하고 성품이 온화한 탓에 자신이 조금만 밀고 올라가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았으나 셋째는 그 총명함과 검술 실력으로 왕국사람들에게 널리 사랑 받는 편이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철이 들면서부터 그는 끼를 발동하더니 그 평판을 형편없이 떨어뜨릴 만큼의 명성을 새로이 날리기 시작했다. 바람둥이로서의. 때문에 약한 왕세자의 뒤를 든든히 보좌할 이인자로서 추앙 받던 그의 이미지는 현재 형편없이 퇴색해 있었다. 상대적으로 둘째 왕자의 위신은 그만큼 상승하게 되었고. 그러나 셋째 왕자 본연의 성품을 믿는 대신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으니 둘째는 그것이 불안한 것이었다. 또한 백성들에게는 아직까지도 자신보다는 셋째의 인지도가 높은 것도 불안 요인이었다. 라이나폴스는 마법사들이 존경을 받는 나라이긴 했으나 고 르티카처럼 그들이 권력의 중심에 나서지는 못했다. 다만 권력자들을 보좌하는 자로서의 존재라고나 할까. 마왕이나 마녀가 혈통으로 그 마력을 이어가는 것과는 달리, 마법은 그 혈통에 관계없이 자질로서 익힐 수 있는 것이기에 라이나폴스에는 수많은 마법학교가 있었다. 그러나 마법학교라고 해서 마법만을 가르치는 것은 아니고 일반인들에게 지식수업도 함께 하고 있었다. 마법사들은 자질과 함께 총명한 두뇌도 갖추고 있었기에 그러한 것이 가능했고, 그래서 라이나폴스의 마법사들은 온 국민의 스승으로서 더욱 존경받는 셈이었다. 권력자들의 보좌관으로서의 마법사의 존재는 라이나폴스에서는 권력을 유지하는 레벨로서 인식되기도 했다. 즉, 능력 있는 마법사를 '소유'함으로서 주인의 능력도 그만큼 상승되어 보인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왕국의 왕자들도 각자 개인 마법사를 소유하는 것이 당연했다. 현재 왕국 제일의 마법사라 여겨지는 자는 국왕의 보좌를 하고 있는 마법사 그르니에였고 다음이 루쉬폰의 마법사인 리 날파른이었다. 이렇게 따져 본다면 루쉬폰은 마법사에 있어서도 형보다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다음으로 셋째를 견재하기 위해 그의 곁에 어떠한 마법사도 붙지 않도록 비밀리에 로비를 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도 리의 도움이 큰 힘을 작용했다. 왕국 두 번째인 마법사의 충고를 거의 모든 마법사들이 기꺼이 따랐던 것이다. 덕분에 셋째는 소위 약간이라도 행세하는 자들은 누구나 성인이 되기 전에 소유하는 마법사를 아직까지 구하지 못했고 현재 수행 겸, 마법사를 모시기 위한 여행을 떠나야 했다. 왕국 내에서 구하지 못했기에 외부에서 직접 구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옆 나라인 마도왕국 고 르티카에서는 마법사를 함부로 유출하는 법이 없었기에--잠깐의 교환 스승이라면 몰라도 곁에 일생 붙어 지내야 하는 개인 마법사로 누군가를 초빙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일국의 왕자라 할지라도. 또한 어찌된 일인지 마녀에 대한 일반의 선입견과는 달리 라이나폴스의 세 번째 왕비는 권력에는 초연한 태도를 보였다. 때문에 자신의 아들이 마법사를 들이는 것에 대해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셋째 왕자를 아끼는 몇몇 사람들이나 그를 사랑하는 국왕만이 조금 참견을 하는 정도랄까. 다가오는 하몬느의 절기에 성년이 되는 왕자를 위해 국왕은 외부 마법사를 초빙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단, 이번 여행 중 그가 마법사를 구해 온다면 얘기는 달라지지만, 그래도 만약을 위해 국왕은 각지의 유명한 마법사들을 하몬느의 절기에 모셔 올 수 있도록 공문을 띄운 상태였다. 그러나 변변한 마법사들은 둘째 왕자의 계략(실은 리의 계략이겠지만)에 의해 초청은 승낙해도 보좌로서의 승낙은 실제로는 이미 물 건너 간 것이었다. 국왕은 그 사실을 알 도리가 없었지만. "흠, 녀석에게 확실한 첩자를 심어 둘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생각해 봐, 리. 그에게 가장 가까운 존재가 될 보좌 마법사가 우리의 편이라면...... 으흐흐흐흐, 녀석은 내 손안에 있는 것이지. 그런데," - 쾅----!! 탁자의 소리는 요란했으나 실제로 아픈 것은 탁자가 아니라 루쉬폰의 손인 듯 했다. 그는 빨개진 주먹을 부르르 떨며 이를 악물고 신음을 참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네 놈이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단 말이지, 페리언....." "모두 준비 됐어?" "그래, 롱신." "그럼 출발하자. 가는 길마다 탐문을 해야 할 테니까. 그래도 라이나폴스까지는 되도록 직선으로 가자구." 롱신 등은 참나무 아래에서 점호를 마치고 각자 말을 타고 오솔길을 지나갔다. 몽이는 아직 너무 어린 탓에 마을에 남아 혹시나 어디서라도 들려올지 모르는 지금은 없는 친구들의 소식을 받아 놓기로 했다. 그래서 지금 출발하는 것은 세 명이었다. 롱신과 카스왈르, 그리고 기법사 사인. 호후스의 경우 그녀는 사이즈를 얼마든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카스왈르의 곁에 붙어 다니기로 했다. 그녀는 낮에는 카스왈르의 허리에 찬 가죽주머니 안에 그 몸을 숨기고 있기로 했는데, 실제 그녀는 낮에도 말짱하게 돌아다니는 괴상한 유령이었으나 일반적으로 사람이 사는 곳에서 희끄무레한 것이 둥둥 떠다니는 일행은 환영받기 힘들 것이라는 지극히 타당한 이유 때문에 몸을 숨긴 것이다. 또한 평소에 숲을 휘휘 돌아다니며 산책하는 외에는 별 하는 일이 없던 그녀 스스로도 주머니 속에 박혀 있는 편을 선호했던 탓도 있다. 어제 오후에 모든 것을 기억해 내고 나서 그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글라인의 편지를 다시 해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고민을 해 본 결과, '라이나폴스로 간다' 라는 글인 것으로 판독해 냈다. 다른 문장을 알아볼 수 없는 것은 여전했으나 목적지라도 알아 낸 것이 수확이라면 수확이었다. 도대체 글라인이 뭘 근거로 라이나폴스로 향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 중 유일하게 호랑나비풀에 취하지 않았던 존재였으므로, 어쩌면 티티노가 걸어 놓은 두 번째의 족쇄가 그를 이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여러 추측으로 인해 이들 역시 글라인의 뒤를 따르기로 했다. 우선 목적지를 확실히 한 그들은 촌장에게 찾아가 갖은 협박을 다 하여 말을 세 필 얻어내고는--그러나 의외로 순순히 협박에 넘어가 주는 촌장 다마신의 모습이 수상쩍기는 했지만-- 이렇게 새벽녘까지 모든 여행 준비를 마치고 티티노의 집 앞에 섰던 것이다. 그리고 출발한 지 얼마 안돼, 이들은 그의 자취를 찾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귀에 짐을 얼마나 실었던지 약간 진득한 길에는 깊이 패인 나귀발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들은 글라인이 나귀를 타는 모습을 상상하며 키득거리다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무거운 짐을 진 나귀를 타고 그다지 멀리 가지는 못했을 테니 아마도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을에 들어선다면 나귀를 탄 드워프라는 존재는 정말 희귀할 터이니 찾기는 더 쉬워질 터. 그들은 우선 눈앞의 목표를 향해 말을 재촉해 돌진하고 있었다. 출발하는구나. 이 엄마도 안 보고 가다니. 참 딸내미 열심히 키워봐야 소용도 없고...... 영원의 마녀 류젠은 날이 밝아 오기가 무섭게 채비를 해 길을 떠나는 딸의 모습을, 이제는 완전히 복구 해 놓은 저택의 2층 창가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직 회복 마법을 쓴 피곤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안색은 창백해 보였고, 그 한 켠에는 딸에 대한 서운함이 얼굴 가득 서려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딸과 다정한 포옹한번 못 해 보다니. 이것이 다 그 북마왕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또 다시 이가 갈리는 류젠이었다. 그러나 어제 로이카르스가 슬쩍 흘린 보고에 의하면 무언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듯 해서 참고 있는 그녀였다. 북마왕의 딸, 아니 이젠 아들이 된 아즈라엘. 그가 티티노에게 마음이 있는 듯 하다니. 그 집안은 마녀에게 반하는 가풍이 있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그것도 대를 이어 별 반응도 없는 상대에게 빠져버린다는 것은...... 왠지 얼빠진 부자의 코메디를 보는 듯 해서 생각만으로도 통쾌해 지고 상쾌해지는 기분이었다.--그녀는 티티노가 당연히 아즈라엘을 안 좋아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오호호호호호홋---, 그럼 당연하지, 티티노. 네가 누구의 딸인데. 그래, 그렇게 콧대 높게 나가야지. 그래야 엄마처럼 사랑스런 남자를 얻게 되는 거란다. 그 눈부신 아름다움으로. 오호호호홋--" 그녀는 한참을 웃다가 티티노의 모습이 창가에서 보이지 않게 되자 왠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내 사랑스런 딸. 널 위해 내가 준비한 게 있지. 너의 수행을 위해 엄마의 사랑이 듬뿍 담긴 앞날을 준비했단다. 후후-- 그래, 네가 이제야 제대로 수행 길을 떠나는구나. 네 앞길에 저주를. 이 엄마가 빌어줄 것은 그것뿐이로구나. 행복한 여행이 되길......" 그녀는 휘파람을 불어 열어 놓은 창을 통해 무언가를 불렀다. 그리고 박쥐처럼 생긴, 그러나 해의 유무에 상관없이 날아다니는 듯한 새가 그녀의 앞에 오자 이렇게 말했다. "가서 전하라. 그나쉬, 그 돼지 머리를 한 오크에게. 사냥감이 떴다고 말이야." 즉, 그것은 '오크부대 출동'을 지시하는 전언이었다. 그리고 박쥐 비슷하게 생긴 새가 새벽의 햇살을 가르며 하늘로 날아오르자 그녀는 마음껏 웃어 재꼈다. "오호호홋---------!!" 티티노--그녀의 엄마는 정말 마.녀.였다. "하, 참.... 이거 뭐 일부러 흔적을 남기고 다닐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너무...." 대륙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아보카도아 가도를 따라 내려 온지 벌써 사흘째, 그러나 어디에도 티티노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애당초 북쪽으로 사람을 만나러 가려던 예정을 취소하고 남쪽으로 향했던 페리언은 황당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수행이라면 제법 다녀봤다고 자부하는 그였다. 당연히 보통사람이라면 여러 가지로 남겼을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그녀가 마법을 써서 이동했다거나, '그러나 수행중이라고 했는데 굳이 마법을 통해 전이하지는 않았을 터.' 혹은 납치되었다거나...... 그러나 여간한 실력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면 마법사를 함부로 납치 할 수는, 아, 아니구나. 아직 어린 만큼 실력이 미숙하고 실전 경험이 없다면 그럴 수도 있을 듯 했다. 그런 것이라면 그냥 포기하고 떠나도 되련만 그는 자신이 왜 굳이 그녀를 고집하고 싶어지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는 뛰어난 마법사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적당한 모양새만 갖춘 마법사라면 누구라도 좋았다. 그러나 둘째형의 끄나풀일지도 모르는 자는 질색이다. 아버님과 여러 사람들의 눈에 적당해 보이는, 그리고 둘째형의 관심을 끌지 않은 대강의 실력을 갖춘 마법사라면 누구라도 좋다고 생각했던 그였다. 때문에 아직 미숙해 보이는 티티노가 물망에 오른 것은 무리랄 것이 없었으나 예정까지 취소하고 꼬박 사흘을 내려오면서 그 흔적조차 찾을 길 없는 것에 그녀가 어떻게 되지 않았나 싶은 그는, 이제 무진장 걱정을 하는 중이었다. "하앗, 대체 어찌 된 일일까." 잠시 길가 나무그루터기에 앉아 한숨을 돌리던 그는 수풀 저쪽에서 심상찮은 기운을 느끼고는 바짝 엎드렸다. 사람의 어깨만큼 자란 풀들은 그의 모습을 잘 숨겨주었다. 그는 키 큰 풀들 사이로 조심스럽게 저편을 살펴보았다. 저편의 수풀들이 처음에는 조심스레 움직이더니 잠시 후 별 거리낄 것이 없는 듯 떼거지로 움직이는 무리들에 의해 마구 짓밟혔다. 무리들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취취-- 대장이 모이라고 했단 말이냐?" "쉭쉭 취-- 건수가 생겼다는디? 머릿수가 더 필요하댔구먼. 곧 일이 생길 거라나 뭐라나. 어쨌든, 쉭쉭-- 이렇게 밤에 움직여야지, 그을림 안경이라도 끼면 모를까 낮에는 무리여." "취익---취--- 네가 그런 것 낀다고 대낮에 돌아다닐 수나 있냐? 오거 마빡에 도끼 박는 소리하고 있네." "쉭쉬익-- 뭐야? 니가 시방 날 무시해버려? 글구, 내가 돌았냐? 그 덩치 큰 오거 마빡에 도끼는 왜 박냐? 간덩이 부은 너라면 모를까." "취익--췩--- 말이 그렇단 소리제. 도대체 농담도 이해 못하는 머리로 어떻게 대장 밑에 있는지 모르겠다니께." "니들 거기, 조용히 안 할꺼냐? 취이익--- 췩--- 행군이나 빨리 해. 안 그래도 짧은 다리로 시일이 족히 걸릴 텐데. 얏, 고레이! 너도 빨리 걸어! 굼벵이가 기어도 그보단 낫겠다. 췻 취익--" 분명히 말투로 보아 오크라고 여겨지는 패거리가 다섯이나 이 초저녁부터 어딘가로 정신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사람들의 눈에 덜 띄려고 아직은 해가 남은 까닭에 수풀사이를 헤쳐 가는 듯 했다. 그러나 저런 식으로 떠들면서 간다면 오히려 금새 눈에 띌텐데 싶어 페리언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러다 그의 귀에 익은 이름이 들려 오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취익-- 그런데, 그 뭐냐. 라이 어쩌고 하는 나라에서 온 놈이 뭐라고 했다고라?" "쉭 쉭-- 루쉬픈지 누시펀인지 하는 왕자놈의 심복이라잖냐. 오죽 부탁 할 데가 없으면 우리한테까지 부탁을 하겄냐? 대체 그런 여자를 어디서 찾으라는 거이야? 쉬익, 쉭---" "히익, 취익-- 아쉬우면 고양이 손이라도 벌리라고 하더구먼." 조금은 유식해 보이는 오크가 참견을 했으나 '벌리는' 것이 아니라 '빌리는' 것이다. 페리언은 웃음을 꾹 참고 조심스레 그들의 뒤를 쫓으며 그들의 얘기를 마저 엿들었다. "시끄럿, 지금 급한 건 마녀의 일이얏. 그 마녀가 화난다면, 크으으으-- 우린 모두 통구이가 될 거야. 아무리 빨리 걸어도 이틀이상 걸리는 길이다. 잔말 말고 로푸스로 빨리 가자구. 취이이익---" 그들 중에서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의 일갈이 있은 후 오크들은 투덜거리면서 더 이상 큰소리로 떠들지 않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 오크들이 속도를 높이자 페리언은 더 이상 뒤쫓지 않았다. 그는 금방 그들이 말한 것 중에 두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한가지는 '루쉬픈지 누시펀'인지 하는 왕자에 관한 것이었고, 다른 한가지는 그들이 향하고 있는 곳의 지명이었다. '루쉬폰이 오크의 손을 빌릴 정도로 찾고 있는 여자란 아마도 그 전설의 여인이겠군. 뭐라 해도 명분을 찾고 있을 테니. 아아, 아무래도 좋은데 정치에 관심 없는 나만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그리고,' 그는 그녀의 어머니가 가끔 말씀하시던 로푸스 근처에 사는 마녀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영원의 마녀라고 불리운다는 여인. 그녀가 사는 대저택에 그의 어머니는 가끔 다녀오곤 했다. 일전에는 그녀가 라이나폴스의 왕가 별장에 다녀간 적도 있을 정도로 두 사람은 친한 친구였다. 하지만 그녀가 왜 오크들을 부른단 말인가? 그 아름답고 신비로운 여인이. 그는 마녀에 대한 이미지가 다른 이들과는 많이 달랐다. 자신의 어머니는 '온유의 마녀'라고 불리울 정도로 온화하고 인자했다. 그리고 그 성품으로 인해 백성들에게 인기만점의 국모였다. 그러한 마녀를 곁에서 보아 온 탓에 그는 마녀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 버렸던 것이다. 자신의 여동생이 조금(?) 괴팍하고 별난 것은 그 성격 탓이려니 생각하고 있었고. 페리언은 어머니인 로제나엔의 영향으로 정치나 왕위에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야심 많은 둘째형은 그를 가만 두지 않았다. 사람 좋은 미소로 위장한 것이 다 들여다보이는 그 시커먼 속을 짐작할 때마다 페리언으로서도 치밀어 오르는 것이 많았다. 어린 시절부터 온갖 것에 트집을 잡던 그는 아마도 혼자서 자신을 라이벌로 여기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페리언은 생각해 보았다. '하아-- 내가 그래서 아무 마법사나 구하려고 하는데 아버진 굳이......' 온 나라에 소문내서 마법사를 초빙해 오는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직접 선택한 마법사를 데려가는 수밖에 없다. 그러면 조금 납득하실 지도 모르지. 다시 영원의 마녀 문제로 돌아가서, 그녀가 오크들을 필요로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건 좀 이상했다. 굳이 무언가를 복잡하게 생각 할 것 없이 그의 여정은 이제 로푸스로 정해지고 있었다. 어차피 아보카도아 도로를 따라 죽 남하하는 길이니만큼 그의 원래 목적에 벗어나는 것도 아니었고. 그는 다음 마을에 들러 말을 한 필 구할 것을 생각하며 발길을 재촉했다. 5. 수행 재시작! 라이나폴스로... 초원의 나라 라이나폴스여 그대들의 여신을, 그대들은 아는가. 따스한 자수정 빛 눈을 지니고 아마 빛 머리 길게 늘어뜨린 사랑스런 여신을 < 라이나폴스의 역사서 > 中 제 1권 : 서시 봄의 여신 롱디즈에게는 두 딸이 있었다지 봄의 햇살처럼 빛나는 미소를 가진 동생은 그녀의 붉은 머리는 정말 사랑스러웠는데..... -- 라이나폴스의 민담 中 1 흐음.... 새벽의 공기는 상쾌했다. 엄마는 목이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산다. 그건 정말 인정하는 바다. 그 눈이 높은 것은. 보노이카는 지금 다람쥐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낮 동안에는 그러는 편이 나을 듯 했다. 아마 내가 아무 힘이 없을 밤 동안에 나를 보호해 주기 위해서. 흑, 티티노 신세가 왜 이렇게 되었누. 달빛을 받으며 빗자루를 타는 즐거움은 이제 물 건너 간 것인가. 혹시나 해서 어젯밤 시도를 안 해본 것이 아니다. 저택의 마당에 나와 빗자루에 달빛을 한껏 머금게 하고는--그래야 나는 감이 더 좋다. 그래서 마녀들은 빗자루를 타는 것에 있어서 낮보다는 밤을 선호하는 편이다--빗자루 위에 올라 탄 순간, 아니, 올라탄 순간까지는 괜찮았다. 그러나 빗자루가 공중으로 붕 떠오르는 순간, 그 둔한 몸은 뒤로 발라당 나뒹굴고 말았다. 옆에서 보조하고 있던 로이카르스가 부유마법을 시전해 준 덕에 바닥에 호되게 부딪히는 것은 면했지만. 암튼, 야밤의 빗자루 산책은 이제 날 샌 거다. 빗자루를 못 타는 마녀라니, 이렇게 한심한 일은 없을 것이다. 반쪽 마녀들도 달밤에는 꼭 빗자루를 타고 이동한다. 나는 현재 그들보다 못한 신세다. 흐윽-- 나는 당분간 마녀 정복을 입는 것을 포기하고 배낭 저 깊은 구석에 고이 접어 쑤셔 넣었다. 뭐든지, 얼마든지 들어가는, 엄마가 내게 준 것들 중 유일하게 쓸만한 배낭에 말이다. 배낭은, 납치 될 당시 아즈라엘이 보관했던 것을 되찾아 온 것이다. 배낭까지 보았으니 그 희끄무레한 여자는 나요. 하고 선언한 거나 다름없는 꼴이 되었지만 이상하게도 아즈라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티티노...... 글쎄다. 네 취향이 그런 줄은 몰랐어. 나는, 본모습이...... 아냐.' 그리고 묵묵부답. 에, 그 정도면 아무 말도 않은 것이 아닌가? 왠지는 몰라도 그가 아는 것은 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문제는 앞으로가 문제다. 밤낮의 모습이 다른 것을 누구에게 납득시킨단 말인가? 난 대체 어떤 식으로 수행의 길을 가야 하는 것일까? 누가 밤이라고 봐 주는 법도 없을 테고 아니, 오히려 밤이야말로 은밀한 활동에 좋은 시간이 아닌가? 일전에 그 네 명의 패거리에게 잡혔던 것도 '밤'이었던 거다. 낮이 아니라. '에휴------' 느느니 한숨뿐이로다. 그러나 지금 내가 걷는 길은 정말 봄의 정취를 물씬 풍기는 아름다운 길이었다. 잠시잠깐이라도 그런 침침한 생각은 미뤄놓자.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고, 전에도 말하지 않았는가. 곳곳에 분홍, 노랑, 하얀 꽃들이 무리 지어 피어 있었고 저편에 죽 심어진 벚꽃나무는 이제 막 그 꽃잎을 와짝 떨어뜨리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달밤에 그 아래 앉아 있으면 정말 그림이 될텐데. 아, 밤에 나는 다른 모습이지. 아마, 그림 되는 건 맞겠군. 그러나 나는 내 모습으로 '그림'이 되고프다. 아직도 밤의 모습은 내게 낯설기만 하다. 그건 내 모습이 아닌 듯 느껴진다. 아마도 아직 적응이 안 돼 어색해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낯을 익히려고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볼수록 그런 생각은 더욱 강해져 갔다. 분리되는 느낌. 그리고 그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 바래온 것처럼, 아주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다. 나는 그런 내 자신이 무서웠다. 부르르∼ 하고, 나는 고개를 가로 저어 잡생각을 털어 내 버렸다. 이건 잡생각일 뿐이야 정말. 지금 막 아보카도아 가도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들어섰다. 이제 이 길만 따라가면 라이나폴스까지 된다. 고대의 어떤 슬기로운 이들이 만든 길인지는 몰라도 대륙의 남북과 동서를 횡단하는 두 길은 많은 이들에게 애용되고 있었다. 남북을 횡단하는 것은 아보카도아 가도라 불렀고 동서를 횡단하는 길은 림보아 가도라고 불렀다. 이 가도들은 마차 두 대가 마주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큰길이었다. 물론 때때로 산 사이를 지나는 길 같은 곳에서는 잠시 좁아지기는 하지만 어쨌든 일정한 넓이와 고르기를 유지하는 수준 높은 도로이다. 언덕은 되도록 깎아서 낮게 만들고 강이나 시내마다 아치형의 튼튼한 돌다리를 만들고 해서 될 수 있는 한 직선으로 이어진 길이다. 이 길에 대한 보수에 관한 한 모든 국가를 초월한 한 집단이 맡고 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전쟁이나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길은 유지되고 보수되어 왔고, 이 길을 따라 많은 도시들이 발달해 있었다. 이런걸 사회 간접자본이라 한다지? 고대인과 현대인의 수준은 비교해 보면 오히려 지금이 더 떨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럼 발전이며 발달이란 것은 대체 무엇일까. 기술은 발전해도 정신이 따라가지 못한다면 그 문명은 오히려 퇴보하는 것은 아닐까.... 현재 이만큼이나 유지하고 있는 것만도 대단하다고 해야하나. 사람들은 고대의 찬란했던 어느 시절이나 전설의 시대를 찬양하지만, 그 시절은 황금의 시대였고 은의 시대를 지나 청동의 시대도 지나서 지금은 철의 시대라서 사람들이 점점 메마르고 강퍅해 진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발전과 퇴보는 동전의 양면일 뿐이란 말인가? 발전인줄 알았던 것이 순식간에 뒤집어 보면 다른 의미의 퇴보라는...... 아아... 머리 아프다. 나는 지금 내 일만도 벅차다. 평범한 인간들의 일에 신경 쓰지 말자. 잘 닦인 길 하나 보고는 괜히 거창해질 필요는 없다. "보노보노." "응?" "이제 잠 다 잤어?" "응, 아하하하하함∼!! 확실히, 다람쥐일 때는 잠이 많이 와. 으아아아함∼" "하품한번 늘어지게 하는구나. 후후. 저기 보이는 저 대로 보이지?" "음...... 아보카도아 가도구나. 이제 저기만 따라 가면 되겠네?" "그래, 너 유식한 엘프다. 난 또 설명해주려고 했더니. 후후, 오히려 내가 너한테 물어가야 하겠구나." "흠- 글쎄. 내가 여행을 해 본 건 100년 전이 가장 최근이라서 그새 많이 변했을지도 몰라. 인간 세상에는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도 있잖아? 그리고 인간들은 뭐든 깎고 다듬어서 편의대로 고치길 좋아하는 동물이니까." 느낌 탓일까? 인간에 대한 빈정거림이 묻어 나오는 말투. 그냥 무심히 말했을 뿐인데 내가 넘겨짚기 하는 것인지? 그러나 자연에 가까운 존재로서는 당연한 감정일지도 모른다. 인간들 중에 자연과 조화롭게 어울릴 줄 아는 것은 저 동방의 해뜨는 나라 쥬신국 뿐이니. 그곳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연과 맞서 싸우는 것을 인간의 지상최대의 목표로 삼고 있는 듯 하다. 확실히. 뭐 문명과의 교류를 끊고 지내는 사람들도 가끔은 있다지만. 그걸 히피라고 하던가? "저쪽 길로 조금만 돌아가면 되겠어. 에, 어쨌든 해지기 전에 마을로 갈 수 있을까? 그게 안 되면 노숙을 해야 하는데, 좀......" "되도록 빨리 가 보구, 가도까지 도착해서 본다면. 음, 그땐 내가 폴리모프 해제해서 널 싸들고 다니는 수밖에." "싸, 싸들고....?" "그럼 어쩔 거야? 너 그 모습 그대로 마을에 들어 설 자신 있어? 그, 위험한 모습으로?" "아니." "그리고, 그 모습일 ,때 노숙은 더더욱 안 돼. 시간이 좀 걸려도 마을마다 묵어 가는 수밖에 없어. 밤이 되면 망토를 푹 뒤집어쓰고 다니면 되고." - 끄덕--- 맞는 말이다. 다른 대비책이 없으니 여정이 좀 늦어져도 확실한 방법을 쓸 수밖에 없다. 그, 밤의 모습으로는 걸리적거리기만 할뿐이다. 속도를 내는 것도,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대처하는 것도. "이...... 이건 뭐얏?" 사방이 시커먼 흙으로 둘러싸인 상황. 만져보니 눅눅하게 물기가 묻어나는 지하 깊은 곳의 흙들이 온 시야를 가리고 있다. 예전에 아마도 우물이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저러나 태평하게 가도 위를 걷고 있던 내가 왜 갑자기 우물일지도 모르는 곳에 처박혀서 두리번거리고 있어야 하는 거냐고옷--!! "낸들 알겠어?" 속은 어떨지 몰라도 겉으로는 참 태평한 자세로 어깨를 으쓱대는 보노보노였다. "으으-- 어째서, 가도 근처에 함정 같은 것이 있냐고? 거기다 이건......" "흠, 항마의 돌이군. 누군지 제법 머리 썼는데?" "으으-- 보노, 이건 말야. 자연상태의 것이 아니라고. 이런 강한 힘을 발휘하려면 엄청난 마력을 쏟아 부은 거란 말야." 물론, 보노이카도 보면 알긴 하겠지만. 덕분에 그녀는 폴리모프 해제도 못 하고 있었고 나 역시 옴짝달싹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밑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엄청난 깊이의 함정에서. "도대체 누가 이런 함정을...... 마법사라도 잡으려는 거야? 마법사를 위한 함정? 휘유우--" 나는 자세부터 바로 잡아야 했다. 그냥 떨어져 처박힌 탓에 여기저기 상채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떨어진 바닥은 그저 부드러운 흙이었기에 큰 상처는 없었다. 생각해 보건데 2차 요인, 즉 짐승을 잡기 위해 준비하는 함정이라면 흔히 그렇듯이 죽창이나 물웅덩이 같은 것이 준비 되어 있지 않은 것을 보면 사냥용의 함정은 아닌 듯 했다. 정말 마법사 사냥용인 것인가? 그런 것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지만. 함정의 깊이는 죽 올려다보니까 한 10젠은 되어 보였다. 아니, 밑에서 보니까 더 높아 보이는 지도 모른다. 그럼 한 5∼7젠? 그리고 내 머리정도의 높이에 항마의 돌이 주위를 빙 둘러가면서 촘촘히 박혀 있었다. 대체 누가 힘과 돈을 들여가며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거야? 그 순간 내 머리 속에는 그런 짓을 할만한 사람이 하나 떠올랐다. - 도리도리도리도리--- 설마.... 설마 이번엔 아닐 꺼야, 그렇지? 나는 뜨악한 표정으로 보노이카를 돌아다보았다. 그녀는 뭔가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조그만 손으로 입 주위를 받치고는 심각하게 고뇌하는 다람쥐라. 이 황당한 상황에서도 웃음이 난다. "보노이카...... 이 근처 지명이 어떻게 되지?" "음, 로푸스 아냐? 로푸스 대로가 아보카도아 가도와 연결되는 길목으로 생각했는데. 뭐 그새 변하지 않았다면." "로푸스면 아직 세력권 안에 있는거로군. 후우∼" 참으로 안타깝게도, 그래, 로푸스는 엄마의 세력이 짱짱하게 미치는 곳이다. 영원의 마녀가 이 근처에 자리잡은 후에는 근처의 영주나 공왕이라는 사람들도 이곳에 대한 소유권 주장을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덤으로 주변의 괜찮은 중소도시인 로푸스 지역까지도. 그래서 로푸스는 엄마 덕분에 중립도시 비스무리한 상업도시로 성장하고 있었다. 때문에 엄마에 대해 협조적이겠지만. 그럼 이걸 이곳 사람들이 팠단 말야?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저 위에서 들리는 소리들이 뭔가 심상찮다. 조그맣게 들려오는 쉭쉭--, 취취-- 하는 소리들. "보노이카, 너의 깊은 식견으로 볼 때, 저 위에서 들리는 소리가 뭐라고 생각되니?" "아아, 그 돼지머리의 하급 지성체 말이지?" "너도 나와 생각이 같은 거로구나." "으응......" "그리고 다른 생각들도." 보노이카는 왠지 짠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보노이카, 나는 동정 받고 싶은 생각 없어. 그저 내 몫의 주어진 시련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야지, 뭐. 그래도 이건 의식조작보다는 양호한 편이 아닐까나. 그 단순하신 마녀께서는 아마도 내 수행 길에 고난을 팍팍 뿌려주어야 진도도 팍팍 나가리라 생각하신 거겠지. 아아, 사려도 깊으셔라.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나는 저도 모르게 흙벽에 박혀 있는 항마의 돌을 주먹으로 내갈겼다. - 퍽---!! - 빠직----!! "......!!" - 욱신욱신---!! 손은 아려왔으나 이상하게도 돌은 쉽게 부서져 내렸다. 하하, 소 뒷발에 쥐 잡은 격인가. 우연히도 이런 수가 생기는 구나. 아마도 무리한 힘을 주입한 탓에 돌이 그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조직이 헐거워졌던 것일지도 모른다. 마력봉인을 확실히 하기 위해 머리 썼다만 그 때문에 완력을 이기지 못하는 것인가. 나는 배낭에서 강철장갑 아이템을 꺼내서 손에 끼운 다음(어차피 마법은 듣지 않겠지만 손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돌을 하나씩 격파해 갔다. 한 세 개쯤 부쉈을 때 보노이카가 나를 말렸다. "보노이카, 왜? 이 돌을 다 부숴야지 나갈 수가 있지...." "이걸로." 그녀는 무거워서 들지는 못하고 깨어져 나간 돌 조각 중 제법 큰 조각을 잡고 내게 밀어주려 하고 있었다. 그래, 네가 나보단 확실히 지혜나 경험 면에 있어서 뛰어나. 손으로 하면 아플 테니까 돌로 하라는 거지? 나는 항마의 돌을 항마의 돌로 깨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호기심과 더불어 그 돌을 집어들고는 흙벽에 박힌 돌에 힘껏 들이박았다. - 쨍---!! - 퍼억---!! 흠, 약간의 불꽃이 튀는 것을 제외하고는 별 다른 이상 현상은 없다. 그리고 부딪힌 돌과 박혀 있던 돌은 함께 조각나서 흩어져버렸다. "그래도 직접 주먹으로 하는 것 보단 나으니까, 되도록 큰 조각을 찾아서 또 깨야겠어." "티티노, 이왕이면 빨리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해가 지려면 얼마 남지 않았어. 내가 폴리모프 해서 너를 싸고 갈 시간이라도 벌어야 하잖아?" "알았어. 그럼......" '싸고 간다'는 표현은 맘에 안 들었지만, 그래도 거의 상황에 근접한 표현일 것이다. 간밤의 실험결과 100젠 달리기는 55초에 끊고, 제자리 높이 뛰기는 20제나, 그리고 근력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고, 지구력? 그런 게 어딨어? 단지 아기처럼 손을 움켜쥐는 힘과 차는 힘(다리로) 하나만은 굉장했으나 그거야 다른 것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지 보통 인간에 비하면 비슷한 정도라고나 할까. 몸만 성인이었지 모든 것이 '아기'의 조건에 가까웠다. 그저 비실비실 걷는 것이 다였다. 그것도 30분을 걸으니 힘겨웠다. 이래서야 싸들고 가는 것뿐이, 달리 수가 없다. - 퍽-- 퍽--- 퍽--- 퍼억----!! - 팍-- 파직--- 파각--- 빠지직--- !!! 깨는 소리는 일정한데 깨지는 소리는 참 다양하게 들려 온다. 나중에 시간 되면 항마의 돌을 크기별로 쭉 늘어놓고 연주회나 해 봐야겠다. 소리가 제법 맑고 높은 것이 듣기 괜찮을 듯도 하다. 돌을 다 깨고 나서 우리는 새로운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오래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보노이카는 우선 폴리모프부터 해제했다. "해가 지려면 정확히 얼마나 남은 거야?" "우리, 네가 변하고 난 다음에 나가는 것이 나을까? 시간이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다면 이곳을 빨리 벗어나서 가도까지 잽싸게 도망가버리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지만. 위에서 들리는 소리로 봐선 저항이 만만찮을 것 같은데." "그렇다고 여기서 날이 새기를 기다릴 수도 없잖아. 무엇보다 오크들은 밤에 활동하니까, 우리를 꺼내는 것도 밤일 거야. 무언가 수를 써서 잠들게 할지도 모르지. 네가 마법엘프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을 테니까." 정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지상에서 무언가를 들이붓는 듯한 느낌이 있어서 위를 올려다보았더니 희끄무레한 연기가 슬금슬금 내려앉고 있었다. 저건!! "보노이카, 숨을 멈추고 도약할 수 있겠어?" "힘들지만 해 보자구." "알았어. 같이 해 봐." 뭐, 고민할 시간을 안 주는군. 선택의 여지가 없이 우리는 무조건 도약을 했다. 그러나 숨을 완전히 참기는 힘들었다. 도약 후 땅에 내려앉으면서 잠시 숨을 들이킨 한순간으로 인해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지러운 중에도 내 시야에는 진풍경이 들어왔다. 글라인(물론 드워프 상태의 글라인 말이다) 보다도 조금 작은 것 같은, 덩치 좋은 꼬마(?)들이 지저분하고 거무튀튀한 옷을 입고는 괴상한 가면을 쓰고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가면은, 눈 부분은 왕방울 만하게 뚫려 있는데 투명한 재질로 막혀 있어 밖을 볼 수 있는 것이었고 입과 코가 있을 곳에는 마치 심통 난 아이가 입을 삐죽 내민 것 같은 돌기가 나와있었다. 그리고 그 오른쪽 밑으로 긴 원통 같은 것이 튀어나와 있었는데 그 끝은 작은 구멍이 송송 뚫려 있었다. 아마도 그곳에서 공기가 걸러지는 것이 아닐까나? '저걸 하나 뺏을까'하고 생각하는 사이 숨을 또 한번 들이키다가 쓰러지는 줄 알았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보노가 있는 곳을 확인했다. 보노도 숨을 참기가 힘든 듯 했다. 우리는 눈짓으로 방향을 정해 몸을 재빠르게 움직였다. "꺄----악----" 방금 내 입에서 나온...... 으음, 이 목소리는 내 목소리가 아녀. 그렇다면? 울창해서 어두운 숲을 채 벗어나지 못했는데 일은 터져 버렸다. 그나마 강철마법아이템의 장갑을 끼고 있었기에 저 오크의 가면을 벗기는 수확을--얼굴을 갈기니까 벗겨진 것이지만--얻어 잽싸게, 아니 흐느적거리며 가면을 뒤집어썼다. 흐윽. 연기가 엷어지긴 했지만 저건 정말 조심해야 하는 것. 아마도 엄마가 직접 만들었을 '호랑나비표'(?) 수면제이리라. 음, 아니 상표는 '류젠표'라고 하는 것이 더 적당한가? 바로 옆,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보노이카도 어떤 오크의 가면을 빼앗아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러나, 으음-- 이건 또 새로운 문제다. 오크냄새가 심각하군. 잠깐동안 연기에 취해 잠이 드느냐, 오크의 냄새로 질식하느냐 하는 고민을 했더랬지만 곧 보노이카가 내 허리를 잡아채는 바람에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이동을 할 수 있었다. "빨리 망토를 뒤집어 써!" "에...... 보노이카. 저기 말야." "뭐? 시간 없어. 우리는 투시하고 주문을 욀 여유를 가져야 한다구. 내가 이 근처 좌표를 알았던 건 100년도 전의 일이라......" "그러니까 말야. 저 오크들 멍청히 서 있는데?" "에......?" 나를 끼고도 수풀사이를 잘도 헤치고 가던 보노이카는 날 듯이 달리던 것을 주춤하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이미 많이 지나쳐 온 탓에 조금 전 내가 본, 오크의 멍한 모습을 그녀는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느끼기에도 정말로 오크들이 따라 오는 기색을 발견할 수 없는 듯 했다. 무엇보다 수풀이나 나무의 움직임이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발길을 멈추지 않는 보노이카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이 근처는 벗어나고 보는 것이 정답이야. 가도를 따라 가다보면 마을이 나올 테니까, 아니 그전에 주문을 욀 시간이라도 번다면 그걸로 충분해. 전이를 하건, 은닉의 술을 쓰건. 왜 쫓아오지 않는지는 모르겠지만." 역시 살아온 세월이 다른 만큼 지혜의 깊이도 다르다. 이럴 때에만 그녀의 연륜이 느껴진다. 보통 때는, 아마도 20세도 안 되어 보이는 외모 때문이겠지. 혹은 다람쥐 모습일 때의 이미지가 너무도 강해서라거나. 그런데, 이렇게 안겨서 다니는 것도 색다른 맛인데? 보노이카가 허리를 단단히 받쳐주긴 했지만 나로서도 매달려 있기 위해 필사적이었고, 그걸 위해 어제 측정해 본 기초체력을 무시(?)하는 무리를 저질렀다. 그러나 저 돼지를 닮은 냄새나는 하급 지성체에게 잡히지 않기 위한 것인지라 무진장 노력했다. 마침내 우리는 숲이 끝나기 전 어느 구석에 자리를 잡았고 보노이카는 두 사람이 앉아 있는 공간에 은닉의 술을 펼쳤다. 전이를 하기에는 아무래도 밤이기도 해서 좌표의 정확함을 확신할 수 없는 탓이었다. 무슨 좌표를 그렇게 따지느냐고? 하긴, 뭐 대충 감으로 전이를 해도 되기는 한다. 하지만 그것은 투시를 할만한 시간적 여유와 전이 실력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엔 정해진 좌표로 이동하는 것이 가장 쉽다. 정해진 좌표는 전이를 하는 마법사들끼리 '이곳은 전이를 하는 구역'이라는 표시를 확실히 해둔, 마법진이나 표식이 있는 곳이라 전이가 비교적 쉬운 까닭이다. 이건 옮겨갈 곳 근처에 전이를 할 때 걸리적거리는 것이 없다는 보장이 되어 있다는 소리이다. 좌표가 정해져 있지 않은 곳에 전이를 할 때는 그 근처에 방해물이 없는지를 먼저 이동할 곳을 투시를 해서 꼼꼼히 살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전이 시에 나무사이에 낀다거나 하는 등등의 엽기적인 상황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대로 투시를 한다는 것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힘도 들고. 그래서 우리는 지금 안전하게 은닉의 술 쪽을 택했다. 뭐, 엄마정도의 실력이라면 어디든 거침없이 이동하겠지만. 아아, 나도 빨리 마력을 키워야 할텐데. "아이고, 나 하룻밤동안 써야 할 체력을 다 쓴 거 아닌지 몰라." "매달려 오느라 고생했어, 티티노. 그것도 무척 힘든 일이거든." "빈정대는 거 아니지?" "아니야, 그런 거. 지금 네 힘은 아마도 아주 어린아이 수준인 거 아닐까? 갓난아기들은 몸이 성장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어서 다른 건 아무 것도 못하고 잠만 잔다잖아?" "그럼, 나 지금 그런 상태인가?" "그저 내 생각이야. 보기에, 내가 처음 본 날은 잠만 잤는데 두 번째 날은 그래도 좀 깨어 있었구, 물론 그 뒤에도 잠만 잤지만 말야, 점차 깨어있는 시간이 늘어나는 것 같아. 그리고 체력도 조금씩 나아지는 것도 같고." "생각해 보니 것도 그렇네. 뭐, 다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건가? 하지만 마녀의 의식 후 그런 일이 있다는 것은 들어 본 적이 없는걸? 마력이 줄어드는 일은 있을지 몰라도 갓난아기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저 내 생각일 뿐이니까. 아, 쉿--!" 드디어 무언가에 꾸무럭대던 오크 떼가 저편 길로 우루루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지나가는 것으로 대충 숫자를 헤아려 보니...... 으음, 많이도 긁어모았군. 내가 아는 상식으로는 오크들은 많아야 넷, 다섯 이상은 몰려다니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 중에 우두머리가 있어 명령 비슷한 것을 내리기는 하지만 뭐 단합이 잘 되는 존재는 아니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지금 저기 몰려가는 오크는 적게 잡아도 서른 이상이다. 그리고 너무나도 확실해 보이는 우두머리 같은 녀석이 일사불란하게 명령까지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다지 똘똘한 명령은 아닌 듯 했지만 그게 어딘가? "췻췻--- 대장. 그나쉬 대장. 사라져버렸습니다. 엘프 쪽이 대단한 녀석 일거라고 하더니 마법을 했나봅니다. 췻췻--" "취익--- 췩-- 고급엘프라더니.... 마법을 잘 쓰는 모양이지? 그러나, 마녀의 딸은 어떻게 된 거야? 그 여자는 어디로 사라지고 그.... 이상한 여자가 있었냐고? 취익---" "취잇--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췻췻--- 그게 함정에서 뭔가가 두 개 튀어나오더니 금새 재빠르게 움직여서... 취잇-- 나중에야 보니까 그 이상한 여자가 한쪽 구석에 주저앉아서는 고레이에게 한방 먹이고 있었습니다. 췻--- 그리고는 다들 그 여자를 보고 놀라서 머뭇거리느라...." "취익-- 그걸 꼭 잡아야 한다. 큰돈이 될 수 있는 여자다. 어떻게든 뒤져--!! 췩취익-- 혹시 모르니까 이 근처를 샅샅이 뒤져랏--!!" 하필 우리 앞에 와서 떠들어대는 통에 정보를 얻을 수 있어 좋았지만 불안한 건 사실이었다. 이쪽에서 보면 훤히 다 보이니까. 그 대장이라는 녀석이 희번득한 눈을 부리부리 뜨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우리를 알아보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조마조마 했다. 이건 무엇보다 경험부족에서 기인하는 문제일 것이다. 보노이카는 침착하게 앉아 있었으니까. 그리고 녀석들은 우리가 있는 곳은 다 살펴봤다고 생각했는지 다른 쪽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큰돈이 되는 여자'라니? 무엇보다 내가 이 모습이 된 건 아직 사흘. 그래, 사흘밖에 되지 않았다구. 이번이 겨우 네 번째 변신이란 말야. 그새 무슨 일을 저지르고 다녔다고 '큰돈이 되는 여자'가 되어 있는 거야? 나 현상범이었나? 안 그러면 나와 꼭 닮은 여자가 어딘 가에서 무슨 짓인가를 하고 다니기라도 했다는 거야? 아즈라엘단 쪽이야, 아즈라엘은 이미 눈치를 채고 있으니 현상금을 걸어 찾는다던가 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고 무엇보다 스스로 엄마에게 넘긴 상태이니 그건 말이 안 된다. 으음, 그러고 보니 아즈라엘, 날 팔아 넘긴 거잖아? 이제야 깨닫고 보니 화나는데? 친구를 팔아 넘기다니. 비록 그땐 알아 볼 수도 없는 상태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렇지. 흥, 다음 번에 만날 땐 쿠션 정도로 끝나지 않을 줄 알앗---!!(이 순간 아즈라엘은 따뜻한 방안에서 여전히 미소년들과 뒹굴다가 왠지 한기를 느꼈다고 한다) "휘유우우우우우우---- 이제야 한숨 돌렸네." 드디어, 우리는 30분이면 도착했을 아보카도아 가도에 그 몇 배에 달하는 시간이 걸려서 도착했다. 그리고 길에 들어서서는 한숨을 돌렸다. 이젠 안전한 건가? "그래, 한숨 돌렸다." "하아-- 저기 말야, 우리 뭐라도 좀 먹으면서 가지 않을래? 배가 고파. 우리 저녁도 못 먹었잖아." "티티노, 우리가 가도까지 무사히 오기는 했지만 그 오크들이 여기까지 찾아올지도 몰라. 뭐, 아예 엉뚱한 곳으로 갔다고 생각해 주면 고맙긴 하지만, 그래도 요행만 바라고 있을 수는 없잖아?" "그건 그래. 하지만......" "조금만 더 가면 마을이 하나 나올 거야. 내 기억으로는 아마 깨끗한 여관도 있었던 것 같아. 그곳까지 가야 안전한 거니까 조금만 참자." "알았져. 흐윽--" 해가 지긴 했지만 자정이 되려면 아직은 꽤 시간이 남았을 것이다. 우리가 함정에 빠진 것이 아마도 저녁 먹기 직전이니까 5∼6시경? 그리고 꽤 긴 시간으로 느껴진 소동이 지났으나 실질적으로는 얼마 시간이 얼마 안 지났을 것이다. 우리는 바지런히 걸었다. 보노이카는 약간 빠른 걸음이었지만 나는 무진장 노력하며 걸어야 했다. 체력이 딸린다. 후-- 이 모습으로 변해도 내가 원체 헐렁한 바지를 입었기에 지금은 길이가 딱 맞는 바지가 되어 별 상관없었고, 선이 가는 탓에 다른 사이즈들은 상관이 없었다. 다만 윗도리가 쫄쫄이 티이긴 해도 가슴부분이 조이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그래도, 짧은 망토를 배낭 속에 여분으로 넣어둔 긴 망토로 바꾸어 걸치고 나니 겉으로 드러나는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느낌으로 한시간 정도 지났을까? 음...... 별의 위치를 보니 더 된 듯 하다. 어스름한 달빛아래 저편에 뭔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저기, 저기가 마을 입구야. 로푸스에선 북쪽으로 가는 길에 있는 첫 마을이지.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되." "으응." 기운이 거의 바닥나고 있었지만 그래도 마을 윤곽을 보니 어디선가 힘이 불끈 솟았다. 정말 얼마 안 남았구나. 빨리 걸어야지. 마을 초입에 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맹하니 앞만 보고 걷던 나는 한참 만에야 옆에 있던 보노이카가 없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놀라 뒤를 돌아보았더니!? 저편에 왠 남정네를 바닥에 때려눕힌 보노이카가 난처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주저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내 둔해진 감각을 한탄하면서 보노이카에게 다가갔다. "누군데?" 아마도 기척을 눈치챈 보노이카가 오크인줄 알고 사정 볼 것 없이 때려눕힌 거겠지만. 훗, 불쌍한 남자로군. 아까 보노이카의 팔꿈치에 맞은 오크 한 놈은 거의 거품을 물고 쓰러지던데, 응? 보노이카의 난처한 표정이 잘못 때려서 미안하다는 정도를 넘어선 것이기에 이상했던 나는 그 쓰러진 남자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자 보노이카는 잘 살펴보라고 도깨비불까지 불러 주었다. 적갈색의 목뒤를 살짝 덮는 머리카락... 갈색 가죽 조끼. 뭐 그리고 기타 등등은 평범한 복장이었기에 딱히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그 얼굴은...... 조각처럼 솟은 콧날, 단정하게 다물어진 입술, 지금은 굳게 닫혀진 아마도 갈색 눈동자를 지녔을 눈. "페이......?" --- 티티노가 모르는 이야기, 아홉 왠지 잠이 오지 않는 밤이었다. 이제 이 마을에서 조금만 더 가면 대륙 남부의 첫머리인 로푸스의 초입이다. 페리언은 말까지 구해 탔으니 더 빨리 도착할 수도 있었으련만 그래도 아쉬움이 남아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티티노의 흔적을 찾느라 시간이 걸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어떠한 흔적도 찾을 수는 없었다. 자신이 헛수고를 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에 한숨을 쉬는 것도 여러 번. 그러나 내친김에 로푸스까지만이라도 가 보자고, 아직 하몬느의 절기까지는 여유가 있으니까. 하고 생각했던 페리언. 하늘에는 반달이 떠 있었다. 산책을 위해 간편한 옷차림을 하고 숙소를 나선 페리언은 하늘부터 쳐다보고 발걸음을 옮겼다. 롱디즈 여신의 절기, 두 번째 달의 하순.(즉, 4월 하순) 주변에는 꽃향기가 물씬했다.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주변에는 만개한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봄이라 꽃만 피어있는 나무들의 가로수는 그에게 특이한 느낌을 가지게 했다. 특히, 검은 가지에 달린 크고 탐스런 목련꽃은 세련되고 우아한 여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그는 소박한 들꽃에 더 매력을 느꼈다. 아마도 라이나폴스 궁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지 않겠지만. 지금껏 봄을 특별히 흠뻑 느낀 적이 없었건만 다가올 성년식을 생각해서인지 올해 봄의 향기는 유달리 그의 마음을 어지럽게 했다. '남자도 봄을 타던가.... 작년까지만 해도 식곤증으로 졸기만 했던 것 같은데... 하하....' 이 소규모의 마을은 번화한 도시와는 달리 해가 지면 바깥출입을 하는 사람의 수는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가족들끼리 식탁에 모여 앉아 군것질을 하거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도란도란 지내는 것이 마을의 일상 풍경이었다. 가끔 불켜진 창 틈 사이로 장난꾸러기 아이를 꾸짖는 여인의 높은 음성이 새어나오기도 했지만 그 음성에도 따스함이 묻어 있었다. 페리언은 그 소리를 듣고 자신이 어린 시절 장난을 칠 때마다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으시던 자상한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숙소를 나와 그렇게 천천히 걷다보니 그는 어느새 마을 입구를 나서고 있었다. 내친김에 가도의 가로수라도 구경하자 싶어 어슬렁거리며 걸어가던 그는 달빛아래 조심스레, 그러나 사뿐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거의 느끼기 힘든 기척을 알아챘다. 그리고 그 옆에는 발을 드는 것도 힘든 듯한 터덜거림으로 걸음을 옮기는 느낌도 함께였다. 아마도 한쪽은 많이 지쳐있는 여행자이리라 생각하다가 한밤중에 멀거니 나와 꽃구경(?)중인 자신의 꼴이 우습게 느껴져 그는 옆의 나무사이로 몸을 숨겼다. 두 사람. 멀리에서도 둘 다 가냘픈 체격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한쪽은 그 걸음걸이로 봐서는 보통의 사람이 아닌 듯 했다. 마치 중력의 간섭을 받지 않는 듯한 나는 듯한 걸음걸이. 그쪽은 아마도 숲 속에서 더 잘 이동한다는 엘프인 듯 보였다. 엘프가 숲을 걷는 것이라는 속담도 있잖은가? (식은 죽 먹기라는 의미) 다른 한쪽은 정말 많이 지친 듯 보였다. 간신히 엘프로 보이는 일행과 보조를 맞추고 있기는 했지만 저러다간 얼마 안 가 쓰러질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그쪽도 엘프로 보이는 동행과 잠시 뭔가를 두런거리더니 갑자기 힘이 솟는 듯 씩씩한(?), 그러나 그럼에도 가늘가늘해 보이는 몸짓과 걸음걸이로 속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페리언은 왠지 웃음이 나왔다. 가까이 다가오는 모습을 찬찬히 보니 키는 커도 여리고 성숙한 여성인 듯 했는데 하는 짓은 개구진 듯 보이는 것이 절로 웃음 짓게 했는지도 모른다. 일행은 마침내 그가 숨어 있는 나무 앞을 지나 마을 초입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마도 마을에 묵어가려는 것이, 마을의 여관은 하나뿐이니 자신과 같은 숙소를 쓰게 될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한 페리언은 그들 앞에 나설까말까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그 씩씩한 걸음걸이의 여성을 보았다. 여전히 하늘하늘한 몸짓에 비해 묘한 언밸런스를 던지는 씩씩한 걸음걸이. 그녀는 열심히 걷는 것에만 정신이 팔린 듯 길 안쪽으로 뻗어 나간 가로수 가지들에 옷깃이 휩쓸리는 것에는 상관 않고 무턱대고 걷고 있었다. 순간, 낮게 늘어진 나뭇가지가 중 하나가 그녀의 후드 위에 걸쳐졌다. 휙--하고 발걸음 한번 옮김에 따라 가지에 걸린 후드는 그대로 휩쓸리더니 소리 없이 뒤쪽으로 흘러내렸다. 그 순간까지도 페리언은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은 그녀의 머리 위로 부서져 내린 달빛이 참 아름답게 반짝인다는 것을 깨달은 직후였다. 온화한 달빛을 그래도 머금은 듯 부드럽게 빛을 흘리며 흩날리는 실버블론드...... '에에......엑?!' 페리언은 자신이 아마 달빛 때문에 착각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몸은 무의식적으로 길 위로 한 걸음을 내 딛고 있었다. 그의 나라, 라이나폴스의 전설에 나오는 달빛아래 아마 빛 머리의 여인. 페리언은 자신이 그것을 보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꿈에도 그러한 기대를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의 머리 속에는 어린 날부터 들어온 라이나폴스의 전설이 그 어느 때보다 생생히 떠올랐다. 그가 기억하는 구절은 대강 '이 여인을 처음으로 보는 왕가의 자손은 그가 누구이건 가장 위대한 제왕이 되리라.' 이런 부분뿐이었지만. 그렇게 길 위로 한 발을 내 딛고 멍하니 서 있는 사이 갑자기 그의 눈앞에 별이 반짝거렸다. 페리언은 마음속으로, '그러면 그렇지. 이렇게 별이 반짝거리는 것을 보니 분명히 환상일거야.' 라고 생각하며 길바닥에 털퍼덕-- 쓰러져 버렸다. "뭐라고---!!? 그게 정말인가?" "우연히 그곳에 함께 있었던 고렘이 직접 하는 보고이니 틀림없습니다. 조금 후면 영상을 전송해 올텐데 그 때 보신다면 확실히 아시게 될 것입니다." "이런..... 그럼 지금은?" "함께 있던 엘프와 함께 사라져버린 듯 합니다. 그 엘프가 마법을 쓰는 고급 엘프라고 하는 걸 보니 전이를 한 것으로 추측한다는 전언이었습니다." "하핫.... 이럴 수가. 전설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단지 그 비슷한 여자 하나를 찾아 명분으로 세워 놓으려했을 뿐인데...." "이것도 다 왕자님의 홍복이십니다. 모든 상황이 루쉬폰님을 위해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만." "으핫핫핫핫핫핫핫----" 루쉬폰은 하늘을 나를 듯한 기분으로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그 짧은 다리를 쉴 새 없이 움직여 창가로 다가갔다. 다리는 얇고 짧았으나 상체는 듬직한(?) 까닭에 루쉬폰의 걸음은 무척이나 뒤뚱거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걸음걸이에 대해 트집을 잡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특히, 그의 처소에서는. 뒷짐을 지고 가슴을 편--실은 배를 내민 루쉬폰은 하늘에 뜬 반달을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생각할수록 기분 좋은 일이 아닌가. 전설의 여인을 자신이 차지하게 된다면 자신이 왕통을 이을 명분은 서는 것이다. 그렇다면 셋째 따위는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었고 왕세자인 첫째마저도 자연스럽게 제칠 수 있을 것이다. 그들, 라이나폴스인이라면 세 살배기 아이들마저 다 아는 전설의 여인은 역사서의 서시에 '여신'으로까지 표현되는 바였으며 게다가 그녀를 얻은 자는 진정한 제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까지 있는 바였다. 그런데 전설에 따르면 롱디즈 여신의 딸이라고도 하는 그녀의 화신일지도 모르는 그 묘사와 꼭 닮은 여인을 발견했다하니 어찌 아니 기쁠손가. "하하하하하하핫핫핫핫핫..... 그저 나오느니 웃음뿐이군. 음... 그런데." 루쉬폰은 조건에 맞아떨어지는 여인을 발견했다는 것에만 도취해서 깜빡 빠뜨린,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실을 떠올렸다. "......그녀를 이제 어디서 찾아야 하나?" 그의 자연스럽게 시선이 향한 곳은 날파른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마법사 날파른은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문제없다는 듯 대꾸했다. "크게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미 셋째왕자의 일로 사방에 풀어놓은 하수인들이 있으니만큼 그들에게 지령을 내려 비밀리에 찾게 하면 됩니다. 그러한 미인이 지금까지 알려진 바 없었다는 것은--연유는 알 수 없으나 그들이 모습을 감추고 비밀리에 돌아다닌다는 의미도 될 테니 다른 이들이 알아채기 전에 빨리 움직인다면 가능할 것이라고 봅니다. 요는 빠른 시일 내에 찾아야 하는 것이 선결 과제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동료인 마법을 쓰는 고급 엘프라는 것이 흔하지 않으니 만큼 엘프와 함께 움직이는 여인을 찾으면 곧 소식이 있을 것입니다." 신임하는 마법사 리의 기나긴 설명을 죽 듣고 나서 한참동안 끙끙대다가 간신히 이해한 루쉬폰은 마침내 그 커다란 입을 귀밑까지 좍 벌리면서 만족하게 미소지었다. "역시, 나의 마법사 리 날파른일세. 자네의 뛰어난 두뇌를 누가 따르겠는가. 나의 오른팔, 나의 충신이여...." "루쉬폰님께서 전하로 불리실 날이 멀지 않았음입니다. 제가 어찌 미력하나마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참으로 길고 쓰잘데 없는 인사 치레가 오가고 나자 루쉬폰의 머리 속은 그 미인의 모습을 상상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도대체 어떤 여인이란 말인가? 어떤 여인이기에 지금껏 꽤나 많은 미인을 보아 왔을 자신의 왼팔인 고렘이 입에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할 정도로, 그리고 아무런 묘사도 못할 정도로 버벅 거리면서 보고를 했단 말인가? 다행히 고렘이 마법을 조금 쓸 줄 아는 까닭에 힘과 시간은 들어도 이미지를 구체화시켜 수정구를 통해 보내 온다고 하니 조만간 그 모습을 볼 수는 있을 터였다. 셋째를 경계하고 이미지와 품위를 드높이기 위해 루쉬폰은 여성들에게 예의바르고 점잖은 사내로 위장하고 있었지만, 실은 그 눈이 너무 높아 여간한 여성으로는 마음이 차지 않는 까닭에 그의 여성편력에 대한 소문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현재 그가 몰래 만나고 있는 애인은 그 아름다움이 왕국에 이름이 높았으나 집안이 기울어 부잣집 늙은이에게 시집가야 했던 애절한 사연(?)을 지닌 농염하고 성숙한 여성이었다. 그러나 루쉬폰은 그녀의 아름다움이 자신의 눈을 흡족하게 해 주어 즐겁기는 했으나 품위상, 위신상의 문제로 그녀도 곧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때마침 전설의 여인도 찾았다고하니. 그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책상 위에 가져다 놓은 리날파른의 수정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고렘의 첫 보고가 있고 나서 거의 한시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루쉬폰과 리가 수정 앞에 조용히 앉았을 때 수정은 환한 빛을 서서히 일어가다가 그 가운데에 어떤 영상을 비추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완성된 3차원 입체영상은, "..........." "......으음...." 그들은 한동안 침만 꿀꺽꿀꺽 삼키면서 영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정말 말로 다 표현하거나 형용할 수 없는 모습. 그녀의 아름다움은 그들의 모든 식견과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자수정빛 눈동자와 아마빛 머리, 아니 달빛을 머금은 실버블론드라니. "세상에, 어떻게 이런...... 정말로 롱디즈 여신의 딸의 화신이 아닐까? 어찌 이런 아름다움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이건 정말 인간의 것이 아니야." "어쩌면 왕자님의 말씀대로 여신의 딸이 고급엘프와 함께 세상구경을 나온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그렇다면 더욱, 왕자님을 위한 명분이 서는 일이 아닙니까? 이미 다른 차원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버린 여신. 그의 딸이 인세(人世)로 현현(顯現)했다는 것은......" "리." "넷, 루쉬폰님." 루쉬폰은 그 멍한 눈에 초점을 맞추며 날파른을 불렀다. 그러자 그는, 즉각 머리를 숙이며 대답하는, 자신보다 키가 큰 마법사의 등을 두들기며 대 만족의 미소를 얼굴 가득 지었다. "어쩌면 그렇게 내 맘에 쏙쏙 드는 소리만 하는가? 자네는 아마도 위대한 독심술가나 예언가로서의 자질도 있는 모양일세. 허허헛----."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운운하면서 서로의 칭찬 치레를 쏟아내는 그들의 위로, 창이 열려지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제 빛의 한 자락을 루쉬폰의 방안으로 들여보내야 했던 달빛은 그대로 희게 얼어붙은 채 아무 말 없이 흘러 다닐 뿐이었다. 글라인의 뒤를 쫓는 것은 정말로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눈에 띄지 않을 라야 않을 수 없는 존재. 원래의 모습이었다면 좀 특이한 소년정도의 대접을 받았겠지만 현재는 그런 상황이 아니었기에. 드. 워. 프. 글. 라. 인...... 드워프들은 원래가 땅 밑을 파고들기를 좋아하는 종족이다. 땅을 사랑하고 땅에서 나는 모든 금속을 사랑해 마지않는, 땅의 종족. 그래서 금속을 제련하는 기술이 뛰어난 자들.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의 축복을 받은 종족. 일설에 따르면 땅의 엘프가 진화하다보니 드워프라는 개별 종족을 만들어 낸 것이라고도 한다. 물론 일반적인 설은 아니다. 우선 외모에서 나는 차이부터 그 사실을 믿을 수 없도록 하고 있으니까. 어찌 되었건 땅에 붙어 있는 것을, 혹은 땅 속에서 지내는 것을 그들 절대절명의 존재 이유로 생각하는 드워프들이 땅에서 멀어지는 수단으로 여행을 다니는 일은 절.대. 있을 수가 없었다. 그건 드워프들의 자존심이자 숙명이라고 봐도 틀리지 않는다. 그러나 글라인은 어찌되었건 드워프의 모습을 하고 있음에도 나귀를 타고 돌아다니는 것이니...... 정말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는 배꼽을 잡고 웃지 않을 수가 없는, 놀라운 구경거리인 것을 글라인이 미처 예측을 못 한 것이 탈이라면 탈일까. 티티노가 엄마의 집에서 보노이카와 다시 수행 떠날 준비를 하고있을 즈음 롱신 일행은 글라인의 뒤를 거의 쫓아온 상황이었다. 그건 확실히 나귀보다 말이 빠른 탓도 있겠지만 글라인이 요령이 없어서인지 많이 밍기적거린 탓도 있었다. 롱신 등은 점심을 먹기 위해 마을에 들렀다가 여기에서도 그 '특이한 드워프'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이 묻지 않아도 지나온 마을 어디에서나 그 '특이한 드워프'의 이야기는 그 모습을 보게 된 것만으로도 화제거리였다. 카스왈르는 이제 포기했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고, 롱신은 반쯤은 한 쪽 귀로 흘리며 필요한 얘기만 듣고 있었다. 기법사 사인은 식탁 위에 놓인 스프 그릇과 입 사이에서 숟가락을 오가게 하는 왕복운동을 하며 묵묵히 먹기만 했고, 호후스는 그녀는 그냥 카스왈르의 허리춤에 있는 가죽 주머니 안에서 잠들어 있었다. 그러나 꿈속에서도 식당 안에서 들리는 '드워프의 활약'에 대한 이야기는 들려 왔다. "그래서 말이야, 세상에 이 드워프가 말 위에서 잽싸게 손을 뻗치더니만 뭔가를 휙--- 집어던지는데.... 하핫, 난 드워프가 그렇게 재빠른 줄 몰랐어." "몸이 작으니까 동작이 잰 게지." "그런가? 어쨌든 그래서, 그 소매치기 녀석의 뒤통수로 커다란 돌멩이가 '따악--'하고 가서 부딪히는데, 그 녀석 눈에 별이 스무 개쯤은 번쩍였을 거야. 혹이 이따만 하게 났던걸?" 하고 식당의 한가운데에 서서 목청 키워가며 얘기를 늘어놓는 사내는 커다란 주먹을 불끈 쥐고 올려 보이며 혹의 크기를 강조했다. 그리고는 다른 주먹마저 갖다 붙이며, "아니, 이따만하던가?" "옛끼, 이 사람아. 자네 주먹 두 개 합친 게 소매치기 머리보다 더 크겠구만." "퍼헐헐∼, 그래. 그 주먹 보다 작은 머리에 주먹보다 큰 혹이라... 녀석, 머리가 하나 더 생겼겠군? 드워프는 뭐든지 잘 만든다더니 머리도 새로 만들어 버린 건가?" "쿠하하핫, 그래, 그래." "이봐, 아직 내 얘기는 안 끝났다구. 그 드워프가 대단한 건 그 다음 일이 문제야." "계속해 봐. 나는 어제부터 귀가 마르고 닳도록 들었지만 여기엔 또 못들은 분들이 반이나 계시니까. 파하핫---" 사내가 한마디를 하면 참견은 그 몇 배로 돌아오곤 해서 사내의 말은 그 흐름이 간간이 끊겼다. 그럼에도 사내는 끈기 있게 얘기를 이어나갔으니, 그는 바로 은근과 끈기의 집합체였던 것이다. 참견쟁이들의 얘기를 종합해 보면 엊그제 드워프의 일이 있었던 이후로 그는 이 펍에서만-- 새로운 손님이 하나라도 들어오면 그 '나귀를 타고 다니는 특이한 드워프의 활약'이라는 긴 제목의 활극을 고장난 녹음기 마냥 반복해서 틀어대곤 했다한다. 반 대머리에 긴 앞치마를 두른 펍의 주인이 그에게 맥주를 한잔 안겨 주었다. "이틀 연짱으로 사설 늘어놓는다고 고생한다. 인심쓰는 거니까 이걸로 목이나 축여." "어어, 고마워. 퍼비. 그럼 한 잔 마시고.... 꿀꺽꿀꺽∼" 어쨌거나 롱신 등은 이제 점심을 다 먹었으나 글라인의 활약상이라는 것이 궁금해서 자리에 가만 앉아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아직은 자리에 여유가 있었던 만큼 식탁 위의 접시를 치우는, 주인집 딸로 보이는 종업원 소녀의 손길도 그리 거칠진 않았다. 아니, 그녀의 손길은 오히려 조심스러웠다. 그들이 펍에 들어올 때부터 바로 쪼르르 달려와 사근사근하게 주문도 받고 많은 신경을 써 주는 것은 뭔가 이유가 있어 보였다. 점심을 한참 먹는 중에 롱신은 무심코 이렇게 말했었다. '이 펍, 종업원 참 친절한데? 다음에 또 들릴 기회가 있으면 들러도 좋겠어. 내부도 깨끗한 편이고.' 그러나 카스왈르가 냉정하게 따져 보기엔 지금껏 들렀던 펍이나 이 펍이나 별 차이가 없어 보였고 그 '종업원 소녀'가 사근사근하게 구는 것은 롱신에게만이었다. 사인 앞에 스프 접시를 올려놓을 때는 그냥 덤덤하게 놓았었고 자신 앞에 놓을 때는 심지어 옷 앞섶에 스프가 한 방울 튀기도 했었다. 롱신은 그 동안 마을에서도 또래의 평범한 소녀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만큼 사춘기에 접어든 소녀의 미묘한 마음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했다. 그의 주변에 있는 여자라고는 개구지지만 애어른인 티티노라던가, 다람쥐인 보노보노(그녀도 일단은 여자이니까), 그리고 유령인 호후스, 마지막으로 반 엘프인 카스왈르뿐이었다. 그나마 '여자'로서 인식해 온 것도 아니었으니. 그러나 카스왈르는 다시 볼 것도 아닌 그 소녀의 행동에 대해 이것저것 따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에 롱신에게도 굳이, '롱신, 저 여자애가 친절하게 구는 것은 너한테 뿐이구, 그건 걔가 너에게 마음이 있어서 그런 거야.' 라고 설명해 줄 생각은 없었다. 솔직히 롱신이 그런 쪽에 무감해서 그렇지 마을에서도 그를 짝사랑하는 소녀들은 많이 있었다. 말하는 걸 들어보면 가끔 나이 수십 먹은 늙은이처럼 얘기할 때도 있지만 어쨌거나 겉모습은 16살 정도의 잘 생긴 소년인 것이다. 까만 머리는 차분하고 단정했고 짙은 남빛의 눈은 선량했다. 마을 자치대에게 배운 검술과 체술로 다진 체격은 단단했고,(그는 다른 마법사들처럼 마법만 익히려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마법 실전에 있어서 신통한 진도를 나가고 있진 못했지만 이론만은 빠삭했다) 키는 170제나가 안 되었지만 아직 성장기가 아닌가.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롱신은 마을 소녀들의 무수한 하트를 잘도 피해 다니며...... 실은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뭐, 아직 사랑을 몰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현재의 그는 친구들에게만큼은 더 없는 의지가 되는 존재였다. 그리고 아직은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그래서 말야...." 아, 그리고 옆에서는 그 끈질긴 사내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 소매치기와 한패인 놈이 드워프라고 우습게 보고, 또 자기 덩치만 믿고 나귀를 탄 그에게 덤벼들었는데, 그 순간 화르륵∼!!" "화르륵∼?" "그래, 뭐라고... 에 하이어벌이라고 하던가? 그렇게 외치면서 손을 좍 뻗으니까 불덩이가 이따만한 것이 화르륵∼하고 튀어나오는 거야!! 마법을 쓰는 드워프라니, 들어본 적 있나, 있어? 없지?" 그러자 펍 안이 순식간에 왁자지껄해졌다. - 드워프가 마법을 쓸 수 있는가? - 그만한 재능이 있는가? - 재능이 있다 해도 드워프가 금속이 아닌 것에 그 열정을 쏟아 붓는 경우도 있다는 말인가? - 마법을 쓰는 드워프란 것은 듣다듣다 첨 듣는다, 뻥 아니냐.... - 나도 분명히 봤는데 뻥은 아니었다. 등등의...... "....." "......." "............................" ". . . . ." 롱신 일행은 글라인의 활약이란 것의 정체를 알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뭐, 울 것까지야 없겠지만. "……화이어 볼이겠지…." "으음… 화염계 1클래스로 히트했군." "드디어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는 것인가. 최초의 드워프 마법사로서....?" "흠… 난 어쨌거나 쿠키가 먹고 싶다… 흐음…." 티티노표 쿠키의 금단 증상에 시달리고 있는 호후스는 글라인의 활약이란 것에 대해 별 신통찮은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다른 친구들은 다들 한마디씩 중얼거렸다. 그 뒤로 남은 얘기는 글라인의 덕에 소매치기도 잡고 금 주머니도 되찾은 상인은 그를 집에 모셔가 극진히 대접하고 잘 재워서 오늘 아침에 느즈막히 보냈다는 것이다. 이 얘기를 들은 롱신은 아마도 글라인이 소매치기를 잡았던 것은 그 돈을 잃은 사람이 누구인지 분명히 확인 한 뒤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때리는 것을 느꼈다. 그것도 아주 강렬하게. 카스왈르가 그를 쳐다보았다. 기법사 사인도. "니들 생각도 그러냐?" "…너도?" "으음....." 모두의 생각은 일치하고 있었다. 호후스만 빼고. "쿠키 먹고 시퍼… 쿠키… 티티노오~~~" "크롸롸롸롸롹~~~~~ 니들이 감히 나한테 덤빈단 말이냣!? 이놈, 이놈, 이놈들~!!" - 콱? 콱? 콰직--- 콱---!!! "으윽--" "아이고∼" "자…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 어억∼!!" 기나긴 숲이 거의 끝나 가는, 림보아 가도를 얼마 남겨두지 않는 소나무 숲 사이 공터에서 들리는 타작소리는 숲을 가득 울리고 있었다. "한 놈은 달아나 버렸으니 그 놈 몫만큼 니들이 나누어 맞아야 쓰겄다. 각오햇∼! 흐흐흐흐…." 마치 오크나 괴수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낮고 음흉한 웃음소리에 이어 타작 소리와 비명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롱신." "나도 봤어." "흠….? 뭐가 저리 급한 거지?" "으아악∼ 쿠∼우∼키이∼!" "호후스, 참어. 다음 마을에 가면 어떻게든 구해볼게. 지금은 좀 참어. 방금 그 마을에는 아몬드 쿠키가 없다는 걸 어쩌란 거야?" "아냐, 난 티티노표 쿠키가 먹고싶단 말야… 흐으으으…. 열 받고 날도 저물어 가는데 현현해버릴까부다." 롱신을 뺀 두 사람은'현현'이란 말에 잔뜩 긴장했다. 솔직히 호후스의 여장군 버전은 별로 보고싶지가 않았다. 무시무시했으니까. 그러나 롱신은 엉뚱한 소리를 했다. "그러고 싶다면, 그렇게 해. 마침 숲이 햇빛도 적당히 가려주 무엇보다 저기 얼빠진 녀석이 수상쩍어 보이니까, 걜 괴롭혀 보던지. 뭐, 저 녀석은 굳이 네가 본 모습을 보이지 않더라도 놀라 자빠질 것 같은데?" "그럼 그래 볼까?" 하면서 목소리만 들리던 호후스가 카스왈르의 주머니에서 빠져 나왔다. 그리고 그녀가 향한 곳은 전방 10젠 앞의 나무덤불 근처였다. 그곳에선 왠 비리비리하고 왜소한 사내 하나가 계속 뒤를 돌아보며, 풀린 다리로 휘청거리면서도 필사적으로 뛰고 있었다. 그러나 무언가에 잔뜩 겁을 먹었는지 다리가 맘대로 움직이지 않는 듯 했다. 그는 길이 아닌 길로 들어서서는 계속 넘어지고 자빠지고 하면서 온 전신에 상채기를 내고 있었다. "분명히 뭔가 수상한 녀석이야." "흐음…." 롱신 등이 감상을 하고 있는 동안 순식간에 사내의 옆으로 다가간 호후스는 조용히 그를 불렀다. "이 봐." "히야아악---!! 누, 누구요?" 아직 호후스를 발견하지 못한 사내는 무턱대고 놀란 다음에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겁을 집어먹고 있는데 그의 눈앞에 뭔가 희뿌연 것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반투명한 젤리 같은, 어찌 보면 연기 같기도 한, 그러나 눈 코 입이 달린 부유체. "………………." - 쿠당---!! "에엣…. 이봐, 너--!! 그냥 기절해 버리면 어떡해? 이봐아∼ 날 좀 재밌게 해달란 말이얏∼!! 아님 쿠키를 내 놓던지…. 야, 이넘아아아---_?!!" 카스왈르는 그 광경을 보며 생각했다. 곧 이 숲에 설화하나가 생기지 않을까나… 아마도'쿠키하나만 주면 안 잡아 먹쥐∼!'하는 유령의 이야기. 옛날 옛적에, 혹은 Once Upon a Time…. 어찌 되었건 그들 일행은 그 사내가 무엇인가에 겁을 먹고 도망치고 있었다는 것만은 짐작할 수 있었으므로 사내가 온 방향으로 향했다. 그가 워낙 길 아닌 길을 헤치며 온 까닭에 모두는 말에서 내려 수풀을 헤치며 걸었다. 그렇게 10분 여를 걷다 보니 어디서 많이 들었던 익숙한 웃음소리가 그들의 귓가를 울려 왔다. "크가가가가가, 푸하하하하핫, 니들이 감히 나를 무시해? 이 위대한 최초의 드워프 마법사 글라인님을? 이놈, 한 대 더 맞아라 이놈들∼!!" - 퍽---- 퍼벅----- 글라인의 맷집 좋은 주먹질과 발길질에 이미 뻗은 세 명의 덩치들은 기절한 채로 또다시 쏟아지는 뭇매를 맞고 있었다. 그리고 그 덩치들 위에 한 쪽 발을 걸치고 하늘을 향해 포효하는 글라인의 모습은 정말이지…. "크롸롸롸롸롸롸롹-----, 쿠오오오오오오오------" "구제불능이라니까." "스트레스를 저기서 다 풀고 있군." "저 아저씨들…. 불쌍하다." "글라인, 혼자서만 신났어. 나도 스트레스 해소 하고시프…. 내 쿠키이∼!!" 마을을 떠난 지 글라인은 8일, 롱신들은 5일째 되는 날. 드디어 만나게 된 글라인과 롱신, 카스왈르, 호후스, 사인이었다. 글라인은 하늘을 보며 괴성을 질러대느라 아직 몰랐지만. 2 "그, 그래서요?" "그러니 부탁 드립니다. 당신이 저의 개인 마법사가 되어 주실 것을. 원래는 정식으로 예를 갖추고 말씀드려야 하겠지만. 왕궁에 가서 정식으로 예를 드리겠습니다." "......" 눈앞의 이 남자가 하는 말을 다 믿을 수가 있겠는가? 난 옆에 있던 보노이카, 아니 보노다람쥐를 돌아보았다. 그녀 역시 당황스런 표정이긴 매한가지였다. 페이, 아니, '페리언 엘디안 라이너스'라고 완전한 이름을 밝힌 이 남자는 지금 마을에 하나뿐인 여관에 잡은 숙소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내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라이너스. 분명히 라이나폴스 왕가의 이름이다. 이 사람은 지금 라이나폴스의 국왕 엘다린 3세의 셋째 아들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자신의 개인마법사로 초빙하고자 한다고?! "저기 페이, 아니, 페리언님. 저는 당신의 말이 좀...... 그러니까 왕자인데다가 18세가 다 되어 가는데 아직 개인 마법사가 없단 말예요? 그것도 라이나폴스의 왕자가?"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며 왠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 사정은, 당신이 제 개인마법사가 되 주심을 허락하신다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승낙의 여부를." 으윽... 저 극존칭은 또 뭐냔 말이다. 적응 안되게.... "저기... 페이, 아니 페리언님.... 이런 것은 좀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아아.... 물론, 그렇습니다. 제가 실수를 했군요. 그럼..... 아, 마법사님께서도 라이나폴스로 가신다고 했으니 동행하면서 그 여부를 알려주신다면 되겠군요." 페이, 아니 페리언은--이름 적응부터 해야겠군. 그는 너무나 잘 되었다는 듯이 동행의 여부를 마음대로 정하면서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하고 있었다. 이 황당한 상황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었다. 보노이카와 나는 어젯밤 그를 때려눕힌 것이 미안스러워서 그를 정성껏(?) 돌보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정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지난 밤, 도깨비 불 아래에 페이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나나 보노이카나 황당한 심정이었다. 어쩌자고 북쪽으로 간다고 했던 이 남자를 대륙 남부 초입인 로푸스 근처의 마을에서 보게 되었단 말인가? 뭐, 그야 특별한 예정 없는 수행중이라면 행선지가 바뀌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기에 그건 그러려니했다. 좌우지간 기가 막히게 뻗어버린 그를 어깨에 들쳐 매고--물론 보노이카가-- 여관 간판을 단 곳을 찾았더니 마을에는 그 여관 하나뿐인 듯 주인이 그를 알아보았다. "아니, 이 손님은 어쩌다가 이렇게? 저희 집에 묵으신 손님이신데." "아아, 저기...... 발을 헛딛으셨나봐요. 그런데 길가의 돌에 머리를 부딛혔는지 정신을 못 차리셔서 이렇게......" 보노이카는 엘프로서는 정말 대단한 거짓말을, 그러나 인간으로서는 어설픈 거짓말을 얼굴이 벌개지며 늘어놓았다. 그러나 주인은 그녀의 상기된 볼이 장정하나를 부축해 오느라고 힘들어서 그런 것인 줄로 이해하고는 그의 방과 우리가 머물 곳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보노이카를 거들며 주인은 그의 방까지 그를 함께 부축해 왔다. 내 생각엔 보노이카 혼자 드는 것이 수월할 듯 했지만 뭐 그런 것을 굳이 밝힐 필요는 없으니까. 시골인심이 좋다는데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주인은 이것저것 세심하게 신경 써 주고 밑으로 내려갔다. 우리는 그에게 미안한 마음에 깨어날 때까지는 옆에 있어주어야 할 것으로 결론 내리고 여관 주인에게는 여기서 만나기로 한 사람이었다고 얘기를 해 놓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무리 정신을 잃었다지만 여자 둘이 낯선 남정네의 방에 있는 것을 납득시킬 수 없을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 말에 여관 주인은 돌 볼 사람이 생겨 안심한 듯한 눈치였다. 뭐,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선의의 거짓말쯤이야. 그리고 교대로 졸아가며 페이의 머리맡을 지키던 우리는 동이 터 올 무렵 정신을 차린 그에게 자초지종을 대략 늘어놓았다. 이번에는 다시 내 모습을 되찾았기에 내가 직접 설명했다. 나보다 더 거짓말이 서툰 보노이카는 묵묵히 앉아서 맞장구만 치고 있었고. 반 이상은 사실을 얘기했으니 나 역시 거짓말을 잘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별로 찔리지는 않았다. "아아, 미안하게 됐어요. 어찌된 일인지 오크들이 떼거지로 몰려 있는 곳에서 도망쳐 오다보니. 뒤에서 나는 기척이 오크의 것인 줄만 알았거든요. 그래서 순간적으로 당신을 때려눕히게 되었지만. 하하......" "오크 떼요?" 아아, 오크 떼...... 그렇지 오크는 아무리 무리를 지어봐야 서넛이다. 그가 내 말을 믿어줄까? 이건 사실인데. 그러나 그는 뭔가 잠시 생각해 보더니 왠지 그 말을 수긍해주었다. 그리고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저기, 페이....? 머리 계속 아파요? 나한테 좋은 허브가 있는데 향기라도 맡아 볼래요? 머리 아픈 덴 그만인데...." "마법사님...." "에.....?" "여기서야 마법사님을 만나게 되다니.... 그럼 남쪽으로 오셨던 게 맞군요. 흔적을 찾을 수가 없어서 걱정하고 있었는데." 뭐시라? 그럼 당신을 여기에서 만나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니었단 말이어라? 그러니까.... 날 쫓아 온 것이라고라?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당황하고 있는 내 앞에 그는 갑자기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더 당황할 사이도 없이 뭔가 알아듣기 힘든 소리를 늘어놓는 것이 아닌가? "본인, 라이나폴스 왕국의 위대한 국왕 엘다린 3세의 삼남 페리언 엘디안 라이너스는 제 앞의 훌륭한 마법사 티티노님께 제 개인 마법사로서의 승낙을 구하는 바입니다." ......훌륭한.... 뭐, '귀엽고 깜찍한' 같은 수식어라면 몰라도 '훌륭한' 어쩌고 하는 것은 아직 수행 첫걸음 단계인 내게 너무 과한 말이 아닌가? 물론 웬만한 인간 마법사보다야 월등한 수준인 것은 사실이겠지만. 근데, 이거 무슨 뜻이야? 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맹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서 그를 쳐다보자 그는 다시 제대로 된 설명을 했다. 제대로 된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좀 더 알아듣기 쉽게 풀어서 설명한 것만은 맞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자신은 실은 라이나폴스의 세 번째 왕자이고, 이름은 '페리언 엘디안 라이너스'이고 지금 자신의 개인 마법사가 되어줄 자를 찾아 수행 겸 여행중이라는 것이다. 그 장황한 설명 뒤에 앞의 상황이 벌어진 거지, 음. 내 방에 돌아와 아침식사를 할 때까지 여러 가지를 생각하며 보노이카와 상의해 보던 우리는, 그 개인마법사라는 것이 정확히 어떠한 것이고 그의 상황이 어떠하기에 외부의 마법사를 성년식이 다 되어서야 구하려는 것인지에 대해 대강이라도 알게 된 후에 결정을 하리라 결론 지었다. 왕자의 개인마법사라면 어쩌면 수행에 도움이 될 만한 여러 일들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라이나폴스까지 가려면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아 있으니까 어차피 같은 방향으로 향할 것, 찬찬히 가면서 생각해 보자는 것도 있었다. 나의 변신(?)문제는...... 어차피 수행을 하다보면 여러 사람들과 마주치게 될 것이다. 지금부터 미리 그에 대한 대처를 이것저것 해 가며 다니는 것도 좋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페리언이 어떤 사람인지 여부에 따라 솔직하게 밝힐 수도 있는 문제이고. 앞날은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기대를 할 수 있는 것. 나는 내 운을 믿기로 했다. 비록 요즘은 하강기이긴 해도.... 우리는 새벽의 맑은 공기를 한껏 마시고 있었다. 가도의 근처 숲길은 지금 나무들이 색색의 화사한 꽃을 가지마다 가득 피우고는 뽐을 내고 있었다. 꽃 잔치가 벌어졌나 부다. 아이 조아∼ 어쨌든 저기 옹달샘에 물먹으러 나온 건지 잠이 덜 깨서 정신없는 토끼도 보이고, 산들바람에 앉은뱅이 꽃들도 살랑거리고. 해는 아직 안 떴지만 모든 것이 환하게 보이는 시간이다. 그런데, "이봐요, 페리언, 페리언? 어쩌지, 너무 독했나본데?"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도무지 눈을 뜰 생각을 않는 페리언 왕자님이었다. "아무리.... 그 정도의 검술을 익힌 사람이 이렇게 정신력이 약하단 말야?" "이봐, 보노이카. 정신력이란 것과는 크게 상관없어. 수면가루는 마법이라기 보다는 의학에 가까운 거야. 정상적 인간에게는 틀림없이 듣는 화학작용이라구." "그래도, 체질이든 정신력이든 그런 것에 좌우되는 것은 사실이잖아?" "그야......" 뭐, 서두를 것은 없으니 늦게 일어난다 해도 상관은 없다. 그래도 그렇지. 약이 너무 잘 받는 체질인 거 아냐? 나는 아침을 준비하기 위해 냇가에서 물을 떠 왔다. 오랜만에 외식(?)을 하는 것이라 새로운 기분이다. 따져보면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지만. 마을을 떠난 지도 이제 겨우 보름하고 조금 더 지나지 않았던가. 어젯밤에 피워 놓은 모닥불의 불씨를 훅훅-- 불어 살리고 긴 나무 작대기를 셋 모아 고정시켜 놓은 걸이에 냄비의 손잡이를 걸어 놓았다. 물이 끓기를 기다리며 작은 나무 도마에 야채를 듬성듬성 썰었다. 그리고 냄비에 넣고 국자로 휘휘 젓다보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웃...... 이거 반쪽 마녀가 저주의 주문을 외우며 두꺼비 눈알과 박쥐 손톱, 도룡뇽 발톱, 몽달귀신의 머리카락 등등을 넣은 스프를 끓이는 듯한 느낌. 나는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내 인생이 저주로 가득한 삶이 되는 것은 절.대.로 싫다. 혹시 잘못되어 반쪽 마녀가 된다 하더라도 나는 저주로서 생을 마감하기는 싫다. 그럼 의사나 되어볼까? 약초에 관한 지식하나는 빵빵하니까 해부나 수술 쪽만 더 배워서 미녀의사로서의 명성을 날리는 거야. 햐얀 뼈를 자르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시뻘건 내장을 꺼내며, 젤리처럼 말캉거리는 따끈한 뇌수를 꺼내들고는 씨익-- 한번 웃어주고, 열어 놓았던 배를 바늘로 꼬매고. 우호호호호... 우, 웃을 때가 아냐. 스프를 끓이는 동안 어제 마을에서 산 빵이며 잼 등을 꺼내 놓았다. 그리고 다시 페리언이 누워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꼼짝도 않고 누워 있는 것이 시체 같아. 아니, 번데기일지도 몰라. 담요에 칭칭 둘러 싸여 있으니. 저대로 꿈틀거린다면......' 이전에 한번 같이 잤던(?) 경험으로 봐서는 그는 날이 밝는 신호인 여명이 떠오기도 전에 일찌감치 일어나는 습관이 있는 듯 했다. 그러나 오늘은 칭칭 두른 담요 안에서 아주 가끔 꿈틀대면서 엎드려서는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 감히 일국의 왕자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정말 애벌레 내지는 도롱이벌레 같다. 그가 저렇게 세상 모르고 잠들게 된 것은, 내가 아직 고백(?)할 준비가 되지 않은 탓이다. 어제 하루, 가도를 함께 걸어오면서 여러 가지 얘기도 나누고 그의 태도도 잘 살펴보았다. 그걸로 그 사람을 충분히 알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처음의 느물거리던 인상에 비하면 상당히 진지하고 순진해 보이는 면면이었다. 그러나 난 아직 내가 마녀라는 것도 얘기하지 못하고 있었고, 때문에 나를 철썩 같이 마법사라고 믿고 있는 그로서는 초빙을 위해서라도 내게 진지, 정중한 태도로 나올 수밖에 없었겠지. 실은 마녀란 라이나폴스의 왕이라하더라도 개인 마법사를 요청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닌 것이다. 반쪽의 마녀라면 그 마력이 형편없이 떨어지므로 그저 여러 주문과 계약에 의한 약간의 축복이나 지독한 저주(반쪽 마녀로서 살다보면 한이 많아지는지 저주의 강도는 축복의 그것보다 심하다고 알려져 있다)같은 것이나 할 수 있을 정도이기에 불가능 할 것이고, 온전한 마녀라면? 생각해 보라. 단적인 예가 바로 저 밑, 로푸스에 있지 않은가? 마왕에 필적할만한 힘을 가진 존재가 뭐가 아쉬워서 남의 밑에서 시중이나 들고 있겠는가? 그 자신이 시중 받기에도 모자란 상황인데. 변덕이라도 난다면 모를까. 그러나 나는 지금 좀 특수한 상황이니, 조건부라면 그의 요청을 들어 줄만도 하다. 제대로 된 정식 마법사를 들일 때까지만, 아니, 이건 무한정일수도 있으니 한 6개월에서 1년 정도 계약직으로. 그럼 연봉은 얼마를 받아야 하려나. 모 시장의 연봉은 3억로핀이라던데. 그러고 보면 라이나폴스의 현 왕비가 마녀라는 소리는 들은 것도 같다. 그럼 혹시 저 남자 마녀의 아들? 에엑... 그런데 마녀의 수면가루에 대한 면역이 전혀 없단 말얏? 말도 안돼. 그럼 저 남자는 전 왕비의 아들인가 부다. 그런데 어제들은 얘기로는 배다른 형이 둘이나 있다고 하던데. 흐음, 엘다린 3세, 왕비만 몇 명이나 바꾼 거야? 어찌되었건 그와 함께 여행을 계속 하려면, 그리고 그의 개인 마법사가 잠시라도 되고자 한다면 나는 내 비밀을 알려야 할 것이다. 항시 붙어 지내야 할 사람에게 무언가를 숨긴다는 것은 나에게 무척 힘든 일이다. 그것도 금새 들통날지도 모르는 것을. 어젯밤처럼 마녀의 수면가루에만 의존할 수도 없는 일이고. "간단하게 말하죠. 나는 마녀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개인 마법사로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면 일단 6개월간 계약을 하도록 하죠." 라고 해야할까. 해가 중천에 완전히 떠오른 다음에야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며 부시시 일어난 페리언은 한동안 눈을 감고 인상을 쓰고 있다가 자신이 이렇게 늦게 일어난 것이, 세상모르고 잤던 것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스프 먹을래요? 일부러 야채로만 넣었어요. 고기는 엊저녁에 많이 먹었으니까." "아아, 마법사님이 손수 아침을? 미안합니다. 이런 일이 없었는데......" 나는 늦게 일어난 것에 대한 사과를 받을 마음은 없었기에,--그건 내 탓이었으므로--아무 말 없이 수저와 스프 그릇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빵도. "나, 냇가에 좀 갔다 올께요. 음식 냄새가 베인 것 같아서 말예요. 천천히 들고 있어요." 그리고는 어깨에 올라 탄 보노 다람쥐와 함께, 그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숲 속을 향해 뛰듯이 걸어갔다. "보노이카.... 나는 실은....." 그동안 내가 스스로에 대한 감정을 추스릴 시간이 없었던 것 같다. 갑작스런 변화에 적응하기도 전에 여러 가지 일들이 생겼으니. 지금도 나는 이런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닌지도 모른다. 하지만 감상에 젖을만한 밤 시간은 이미 나의 것이 아닌 것이다. 타인이 되는 느낌. 내 자신이 어디에 있는 지 모르겠는 상태. 그건 정말 이상한 느낌이다. "티티노.... 너 실은 많이 슬펐던 거로구나?" 보노이카는 엘프의 모습으로 화하면서 나를 따스하게 감싸 안아주었다. 내 눈에선 굵은 눈물 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보노이카의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부드럽게 내 뺨을 쓸어 내린다. 하얗고 가냘파 보이는 손. 그 손을 보니 어젯밤의 내 모습이 떠오른다. 변한 것이 내가 원하는 대로의 모습이었다면 이렇지는 않았겠지. 다른 이의 껍질을 둘러 쓴 느낌. 그러한 기이함이 존재하리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도플갱어를 본 느낌과는 어떻게 다른 걸까? 아마 다르지만 비슷하지 않을까? 스스로의 정체성이 붕괴되는 듯한 느낌은. '또 다른 나'로 인해 내 정체성이 사라지는 것과 타인 속에 들어가 자신의 존재감을 상실하는 것.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나는 지금 밤의 내 모습에서 그러한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나와는 전혀 다른 존재라는 것을, 날이 갈수록 또렷하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얇은 속옷 하나만을 입고 물 속으로 들어갔다. 천천히... 무언가 의식을 치르는 듯 아주 천천히. 달은 이미 허공에 걸려 있었으나 해는 아직 서편 언덕의 끄트머리에서 하늘에 붉은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흐름이 그다지 세지 않은 물은 가슴께에 와 찰랑거리다가 졸졸 흘러 내려갔다. 나는 두 팔을 조금 벌리고 물의 흐름 속에서 반사된 내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해가 마지막 빛 조각을 공중에 던지며 가라앉자 내 몸은.... 손과 발은 조금 길어지고, 늘씬한 모양새가 되었다. 머리칼은 마법처럼 쑥쑥 늘어나더니 달빛아래 물을 한껏 머금어 반짝반짝 빛나며 시내의 흐름에 합류하고 있었다. 가끔 스쳐 가는 작은 돌풍이 물에 닿지 않은 앞 머리칼을 공중에서 물결치게 했다. 그래서 드러나는 가냘픈 어깨, 드러난 쇄골. 가느다랗게 올라가는 부드러운 목선, 내가 보기에도 한숨 나오는 여린 귓 볼, 솜털이 보송보송한 뺨. 도깨비불에 반사되어 창백한 빛을 띄는 자수정 빛 눈은 왠지 낯익었으나 그로 인해 오히려 내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강하게 주었다. 그리고 어느새 냇물은 내 허리 아래에서 흐르고 있었다. 그렇게, 보노이카의 배려로 주변에 은닉의 술을 걸어두었기에 나는 어떠한 방해 없이 도깨비불과 달빛아래 변화하는 내 모습을 지켜볼 수가 있었다. 그날은 내가 변화하는 몸이 된 지 닷새 째 밤이었고, 이제 내 몸 안의 무언가가 완전히 각성했음을 알 수 있었다. 머릿속에서 무엇인가가, 내게 당연하다는 듯 그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아니, '당연하다'는 의도가 아니라 '마침내 이루어졌다'라는 의도라고 해야 정확한 것일까. 나는 흘러온 지난 시간동안 간절히 바래왔으면서도, 막상 이루어졌음에 순수하게 기뻐하는 나 자신의 감정을 마치 다른 사람의 것을 보듯 그렇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 순수한 기쁨을 느끼는 것은 '나'이면서도 '내'가 아니었다. 그리고 내게 앞으로 너의 모든 것을 공유하게 되리라 선포하는 것은 아예 '나'와는 상관없는 타인이었다. 그 '타인'은 언젠가 낮의 시간조차 원할 것이란 것을, '현재의 나'는 느끼고 있었다. 순수한 '과거의 나'는 깨닫지 못했지만, 그랬기에 그러한 일을 허락한 것이었겠지만, 그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비극일 뿐. 나는 그런 것은 싫다. 때문에 나는 그 '타인'에게 순순히 낮 시간을 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미 과거의 '순수한 나'가 아닌 것이다...... 그래. 나는 어젯밤에 그렇게 내 변화하는 모습을 보며 무엇인가를 각성했다. 그러나 현재 내 기억은 조각조각 단편적으로만 떠오르고 있었다. 아니, 안개가 낀 듯 흐릿했다. 그럼에도 밤의 내 모습에 대한 불안감은 마음 속 가득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나를 못내 섧게 하는 것이다. 내 마음속에선 계속 모순된 감정이 교차했다. '다행'이라는 온화한 느낌과 무언가를 '거부'하려는 거센 의지가 맞서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서 그것을 지켜보는 존재가 있는 듯한 느낌이, 나를 섬뜩하게 한다. 그 존재는 내 마음속의 두 흐름을 비웃고 있었다. 마치 자중지란이 일어나 자멸하는 이웃나라를 지켜보는 적국의 국왕처럼. "티티노?" "아.... 응?"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해? 난.... 난 네가 그런 표정 짓는 거 처음 봤어. 마치 딴 세상으로 가버릴 것처럼...." "응? 내가 그랬어?" 나는 남아있는 눈물자국을 손으로 부비며 고개를 들어 보노이카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내가 무슨 생각을 했던가를 돌이켜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표정을 지었길래 보노이카가 저런 말을 하는 거지? ....... .................... .........................................??????? 으윽... 이럴 수가, 방금 전에 생각한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니. 나 벌써 치매 끼가 있는 건가? "티티노.... 너무 걱정하지 마. 언젠가는 밤의 너도 마력을 제대로 쓸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럼 완전한 마력을 얻는 것도 기대할 수 있겠지. 결국 네 아빠의 봉인도 풀 수 있을 것이고, 네 모습도 어떻게든 정리가 될 거야. 그러니 희망을 잃지 마." "으..... 으응......" 보노이카는 내게 희망을 주는 말을 해 주기 위해 무진장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뭔가 혼란이 왔다. 내가 지금 그걸 슬퍼하고 있었단 말인가? 에.... 또....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어쨌거나 저쨌거나, 나는 냇가에 온 김에 울어서 얼룩진 얼굴을 깨끗이 씻고 야영하던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고 했다. 그런데 이런 황당할 데가 있나. "보노이카.... 너 달밤에 체조한 적 있니?" "아니, 없어. 너는?" "나도...... 아니, 최근에 한번 했구나. 체력 측정한다고." "그래, 그것도 체조라면 체조다. 근데 쟤들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저 녀석들은 지금 인간으로 치면 '달밤에 체조하는 짓'을 하고 있는 거라고. 대낮에 겁도 없이 돌아다니는 오크라니." "아마, 저기 눈에 쓰고 있는 시커먼 것 하구, 입고 있는 검고 번쩍이는 거지발싸개 같이 생긴 특별한 넝마 때문에 저런 간뗑이가 부은 짓을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야∼ 보노이카, 너 엘프 맞니?" "묻지 마. 나도 요즘 그게 헷갈리고 있는 중이니까." 하면서 보노이카는 마을에서 산 단검을 꺼내들었다. 폴리모프시에 어디에 감추고 있었던 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암튼. 그리고 나는 양손을 털고 손목을 돌리면서 준비운동을 했다. 어디, 마음껏 죽죽 뻗어 볼까나? 뭐가 나오던 간에 오크들에게 맞추는 것이니 별로 양심에 거리낄 것도 없겠고, 특히 며칠 전 나를 함정에 빠뜨렸던 그놈들이라면 더더욱. 혹시나 불이 나서 걷잡을 수 없어지더라도 그 괴상한 물의 정령이 있으니까 안심하자. 어쩌면 이번에 시내에서 부른다면 많이 발전한 것에 좋아라하며 튀어나올 것이란 생각도 든다. 나는 입가에 사악한 미소를 띄우며 오른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손바닥을 저 만치에 서 있는 10여 마리의 오크 떼들에게 보이며. 그러나 오크들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를 테니 자신들의 손에 쥐고 있는 마법의 아이템만 믿고 히죽거리고 있다. 아무리 대단한 아이템이 있더라도 마법에 익숙하지 않는 이상 그저 조금 도움되는 싸움도구일 뿐. 마치 검술도 모르는 꼬마가 이름난 명검을 들고 있는 것과 비슷한 이치가 아닐까? "니들, 나 찾아오느라고 고생했다. 잠도 제대로 못 잤을 텐데.... 하긴, 내가 그 동안 늑장을 부리고 있었으니 금새 따라잡은 거겠지만. 근데, 피빛 마녀 류젠님은 뭐라 하시디?" 기세 등등하던 오크들은 이 말에 제자리에서 움찔거리고 있었다. '피빛 마녀 류젠'이란 이름에 반응하는 것일 테지. 아아.... 엄마. 고난을 주시려거든 좀 그럴듯한 걸로 보내요. 이런 머리도 없는 오크 떼나 보내지 말고. 뭐, 그야말로 엄마 수준에 맞는 거긴 하지만. 그리고 내가 막 적당한 조절과 조준을 통해 제일 앞에 선 놈한테 주먹만한 광구를 날리고 있을 무렵, - 슈우우욱---- 퍼억--!! "꾸웨에에에에엑-----!!" "티티노------!!" "에?" "응?"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보노이카를 돌아보긴 했지만, 그 목소리는 굵직했으니 그녀의 것이 아니란 것쯤은 머리 속에 입력되고 있었다. 근데, 으음. 오크는 생긴 것만 돼지 눌린 머리 비슷한 줄 알았더니 비명 소리도 돼지랑 비슷하군. 글라인하고 나란히 붙여 놓으면 어느 쪽이 더 미남일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잠시, "마법사님, 무사합니까?" 하며 뒤쪽 풀숲 사이에서 튀어나오는 페리언. 이미 그의 셔츠에는 피 같은 것이 조금 묻어 있었다. 그럼 저쪽에서도 오크들이 한바탕 했다는 소리인가? 이놈의 오크들 대체 몇 명이나 온 거야? 오크들은 상당히 술렁이고 있었다. 내가 아무런 주문 없이 슬쩍 쏘아 보낸 광구에 당해 쓰러진 동료도 그렇거니와 자기네 한패가 덮쳐서 잡아야 했을 남자가 여기 말짱히 살아 온 것에 놀라고 있는 듯 했다. "췻--- 저건... 저건 무슨 마법이야? 주문도 없이..." "쉭쉭--- 이렇게 강하다고는 말하지 않았잖아?" "취이잇---- 우연일지도 몰라." "퀴에엑-- 저 놈은 또 뭐야? 저 놈을 잡으러 보낸 녀석들은 다 뭐 하길래.....?" 흐음- 오크치곤 머리 깨나 썼군. 그러니까, 페리언과 내가 분리된 상태에서 공격을 시도했다는 소리인데. 이러나 저러나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놈들이 까불고 있어. 확, 그냥!! "페리언. 그쪽에도 오크들이 갔었나요?" "당신, 설마...... 다람쥐였던 보노......?" "아, 아하하하...... 이런, 들켰군요. 서로들 인사는 나중에 하세요. 지금은 이 오크들이나 요리하고 보자구요. 숫자가 꽤나 많은데." 오크들은 동료 하나가 당했음에도 그 많은 숫자들이 흥분하거나 흩어지지 않고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조금씩 우리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가만 보니까 그들을 지도하는 강한 우두머리가 있는 듯 했다. 이건 아까 예상처럼 우습게 볼 상대가 아닌 듯 했다. 수풀 사이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던 오크들이 그 모습을 다 드러내자...... 이럴 수가, 오크 50여 마리라니. 그것도 무언가에 의해 잘 통제되는 집단으로서! 엄마, 아까 비웃어서 죄송하군요. 아무리 우리 셋이 보통사람은 아니라지만 50여명(마리?)의 오크 군단을 감당키엔 벅차지 않을까? 갑자기 오크 무리의 가운데가 좍 갈라지더니 죽 서있던 오크들보다 머리 반 정도는 더 큰 오크가 걸어 나왔다. 그는 아마도 엊그제 보노이카와 내가 보았던 그 대장오크인 듯 했다. 그는 얼굴을 묘하게 일그러뜨리며--아마 미소를 지은 것인 듯-- 입을 열었다. "취잇-- 너, 거기 붉은 머리 여자. 제법 하는 것 같은데... 췻-" - 쉭-- - 척-- 나는 그가 던진 것을 얼결에 받아들었다. 오크는 힘이 좋다더니 그는 그 거리에서도 내 앞에 정확히 도착하도록 한 것 같다. "엣, 이건......?" "취이잇--- 네가 함정에 빠졌을 때 흘리고 간 물건이다. 나로선 그 용도를 알 수 없으니 기꺼이 돌려주도록 하지. 취익--" 핫, 신사적인 오크라니. 정말 살다살다 별 경우를 다 겪는다. 그가 던져준 것은 아마도 장갑을 꺼내기 위해 배낭을 뒤지다가 흘렸을 철제 머리핀이었다. "그럼 이것도 받아 봐랏--" 내가 그렇게 뭔가를 질질 흘리고 다니는 줄은 정말 몰랐지만... 어쨌든 나는 이번에도 그가 던진 것을 반사적으로 받아들었다. 그러나 이번에 받아 든 것은 처음 보는 낯선 물건이었다. 밤톨만한 크기에 모양은 동글동글한 구슬 같은 것이. "이건 내 게 아닌데?" 참으로 순진하게도, 나는 그것을 들어 보이며 오크 대장에게 휘둘러 보였다. 그 순간 페리언이 내 손을 잡아챘으나 작은 충격에도 약한 듯 구슬은 벌써 갈라지면서 무언가 연기 같은 것을 내뿜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오크 대장의 미소를 다시 보았다. - 이봐, 대장. 다시 봐도 그 미소는 정이 가지 않는군. 음...... 보통 마녀의 수면가루와는 달리 아무리 맡아도 면역이 생기지 않는 류젠표 호랑나비 풀로 만든 연기가 내 폐 안 가득 들어찬 순간, 나는 의식이 가물거리는 것을 느꼈다. 으윽, 옆에 서 있던 보노이카 역시 휘청거린다. 페리언 역시. 그는 내 손을 잡아채느라 바로 옆에 있었으니 타격이 더 클 것으로 보이는데, 그래도 현재 비교적 잘 버티는 듯 하지만 내 수면가루에도 금새 뻗은 사람인지라 금방 다운...... 되리.... 라.... 음, 음냐...... "으응...... 아우 머리야." "정신이 들어요?" 나는 누군가 내 뺨을 가볍게 두드리는 것을 느끼고 눈을 떴다. 흐린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옅은 갈색 눈동자.....!? "으으-- 응?!" - 벌떡∼!! "아얏∼" "......!" 나는 다짜고짜 일어나다가 페리언의 턱에 이마를 부딪혔다. 난 맘껏 엄살을 부렸지만 그는 차마 신음소리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아픈 건지, 체면 때문에 그러는지 아무소리도 내지 않고 그저 고개만 돌렸다. 흠, 인내심이 굉장하군요, 페리언. 내 이마가 단단한 편이라 꽤나 아플 텐데. 약간은 짱구머리거든요? "여긴......?" 주위를 둘러보았더니 내가 누워있던 곳은 무언가 이상한 장소였다. 커다란 돌 벽이 늘어선 축축한 실내. 돌 벽에는 초록빛 이끼가 끼어 있었고 어디선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도 나고 있었다. 다만 내가 누워 있는 곳은 바닥보다 조금 높은 돌로 만들어진 단이 사람 하나가 누울만한 넓이로 네모반듯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내 몸 위에는 페리언이 덮어 준 것 같은 담요가 걸쳐져 있었고. "페리언, 여긴 어디죠?" 내가 그를 굳이 왕자님이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그의 말에 대해 의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 이유로는 내가 어떤 인간의 왕에게도 속하지 않는 존재, 마녀이기 때문이다. 뭐, 만의 하나 반쪽 마녀가 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지금은 아직 모르는 거니까. 그리고 그는 그것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으니 더 자연스럽게 이름을 부르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가만, 그러고 보니 평소에는 꼬박꼬박 나를 '마법사님'이라고 불렀지만 아까 다급하니까 그냥 이름으로 불러버리데? 그렇다는 것은 속으로는 계속 그냥 이름을 불렀다는 얘긴데. 그러니까 급할 때 이름이 튀어나오지, 아니면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마법사님'이라고 해야 하는 거 아냐? 역시 날 진심으로 '훌륭한' 마법사라고 생각해서 초빙하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걸까? 그걸 알아야 내 대답도 정해지지. 뭐, 나도 이름 맘대로 부르는 것은 마찬가지이니까 이름 부르는 것에 대해선 봐 주지. 난 마음이 넓은 편이란 말씀. 암튼, 이곳은 조금 눅눅한 느낌은 있었지만 지하라거나 지저분하다는 느낌은 없는 곳이었다. 내가 누워 있는 뒤쪽 벽에는 횃불이 걸려 있었지만 그 불빛으로는 넓은 실내를 감당하지 못하는 듯 보였고 그 때문에 생기는 초록빛 그늘은 오히려 신비로운 느낌을 감돌게 했다. 설마 오크의 소굴이 신비롭게 보일 리는 없겠지? "다행히 우린 오크에게 잡힌 것이 아닙니다. 여긴, 제 어머님이 가끔 휴식을 취하러 오시는 곳이지요. 우리가 이곳에 오게 된 것은......" 그는 자신의 손에 남은 검은 재를 펼쳐 보였다. 그것은 아마도, "두루말이 서(書).......?" 나는 주저 없이 짐작 가는 바를 외쳤다. 여기서 잠깐, '두루말이 서'란 무엇을 말하는가? 그저 뜻 그대로 해석하면 안쪽으로 글씨 몇 자 적혀있는, 둘둘 말린 종이를 말한다. 그러나 그 속내는 뛰어난 마법사, 혹은 시간이 남아돌아 심심한 마녀나 마왕이 만들었을 법한 초 간편 마법 실행서인 것이다! 둘둘 말린 종이에는 종이 하나 당 한가지의 마법 주문이 적혀 있는데 만든 자가 얼마만큼의 마력을 부어 넣어 만들었는가에 따라 두루말이의 위력이 결정된다. 이것을 사용하는 방법은 촛농을 녹여 만든 이의 인장을 박아 넣은 봉인을 부러뜨리면서 시동어만 외쳐주면 된다. 단, 한번 쓰고 나면 끝이다. 일단 사용된 두루말이는 시커멓게 타서 재가 되어버리니까. 그러나 어쨌건 간에 실로 얼마나 간편한 방법인가--!! 두루말이 서는 시동어만 알면 되었지 마법 따위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것은 무진장 비싼 물건이고--제대로 된 두루말이를 만들려면 당연히 대단한 마력을 지니고 있어야 하고 그만한 마력을 지닌 인간 마법사라면 그거 만들 시간에 다른 마법 연구를 하고 있을 것이 뻔하다. 마녀나 마왕이라면 하릴없이 자신들만의 괴상한 취미에 몰두할 정신은 있어도 타인을 위해 유용할 두루말이 따위를 만들고 있을 여유는 없겠지--때문에 이 물건은 그만큼 값이 비쌌고 구하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내 대답에 대한 페리언의 반응이라니. "아시는군요. 역시......" 그럼? 알지, 몰라욧? 이거 나를 정말 '마법사님'으로 생각하는 거 맞아? 이렇게 무시되고 있는 상황이라면 어째서 나를 개인 마법사로 초빙하려는 거얏? 나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저로서는 처음 사용해 보는 것이라서.... 급한 김에 써먹긴 했지만 한 번 쓰고 나니 이렇게 재가되어 버리는군요. 이것 하나뿐이었는데. 덕분에 우리는 보노이카양과 떨어져서 엉뚱한 곳에 와버렸답니다." "......? 에, 보노이카가.....?" 그러고 보니, 보노이카가 없다. 나는 그가 있기에 보노도 함께인 줄만 알았는데. 그럼 보노이카만 오크들에게 끌려갔다는 거야?! "그때, 오크가 던진 구슬이 갈라진 후, 거기에서 나온 가스를 맡지 않기 위해 숨을 참으면서, 허리춤에 항상 간직하고 있던 이 스크롤을 펼쳐들고 주문을 외웠죠. 그런데 너무 다급해서 보노이카양은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고...... 그리고 그 스크롤에는 이곳에 오는 주문밖에는 없었지요." "그럼 보노이카는 지금 오크들에게 잡혀갔을 거라는 말이군요. 그리고 당신, 당신이 라이나폴스 현 왕비의 아들이란 말예요?" "그렇습니다만. 뭐 잘못된 것이라도?" "아, 아니예요. 그럼, 그럼 당신 어머니는......" "네, 세간에 알려져 있듯, 마녀이십니다. 온유의 마녀 로제나엔. 이곳은 어머니의 원래 거처이시고요. 지금은 왕성 이나폴에 계십니다만." "저기, 그럼 여기는 어느 지방인데요?" "대륙 남서쪽입니다. 아프가닌 고원 근처지요. 여기에서 우리가 있던 곳까지 가려면 말을 타도 한참이군요. 그나마 하나 있던 말도 지금은 오크들 손에 넘어가 버렸을 테고." ......거리도 거리지만 전이를 하기에 무엇보다 좌표가 불안하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있었던 곳이 처음가본 숲이었던 만큼. 그가 나를 과소 평가한 만큼 나도 그를 과소평가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뜻밖의 상황에서는 무척 기민한 행동을 보여주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덕분에 살았지만 보노이카가 마음에 걸린다. 그 오크들이 보노를 어떻게 하려는 걸까? 원래 목적은 나였으니 그녀를 함부로 다루지는 않겠지만. 아냐, 오크를 어떻게 믿어? 그 흉칙한 놈들이 '엘프 고기를 먹으면 장수한다더라' 해가면서 보노가 기절했을 때 요리라도 한다면...... 윽, 흉칙한 것을 상상해버렸다. 그런데!? "저기, 페리언. 지금 시간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아, 마법사님이 의식을 잃은 지 대략 네 시간쯤 지난 것 같으니....." "네...... 네 시간요?" "네, 아마도 곧 해질녘이 될 듯 합니다만. 지금 보노이카양을 찾으러 가는 것은 무리겠지요?" 헉, 이 아자씨야∼ 그것도 큰 문제지만. 으으-- 큰일났다. 아까 오크를 만났던 것이 한낮이었고 그로부터 서 너 시간이 지났으니 이제 해가 지려면. 에, 아직 두어 시간 정도의 여유는 있는 셈인가? "좌표가 확실한 곳이..... 아아, 그래요. 나는 아직 원거리를 투시해서 전이 할만큼의 실력은 안 되요." 페리언은 누가 뭐랬어? 하는 눈으로 날 쳐다본다. 말한 내가 괜히 무안하다. 하지만, 그가 말한 대로 지금 보노이카를 찾으러 가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밤은 오크들의 본격적 활동시간이고, 무엇보다 내 몸이 변하는 것이 문제가 될 테니까. 마력도 없어지는 몸으로, 그것도 오크들에게 큰돈이 걸린(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인물이 그 소굴에 쳐들어간다는 것은...... 으으, 생각해 보니까 소굴이 어딘지도 모르잖아? 여하튼 우린 지금 황당한 처지이다. 그 오크 떼의 본거지를 찾는 것이 첫 번째 문제이고, 머리 좋은 대장이 있는 오크 떼, 아니 오크군단을 어떻게 헤치고 보노이카를 찾아 나오느냐가 두 번째 문제. 으음...... 어머니, 머리 쓰셨군요. 둘 다 만만한 것이 아니네. 그런 똑똑한 오크 우두머리를 어디서 찾아 내셨던 걸까나. 어쩌면 육성한 것일지도 모르지. 둘 다 한참 고민에 빠져 있을 무렵 나는 실내 안쪽의, 베일이 드리워진 곳에서 이상한 빛이 솟아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은은하고 온화한 빛. 그 빛은 사람을 이끌고 따르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부드러운 명령, 따스한 요청 같은.... 나는 그 빛의 근원체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돌벽을 따라 다가갔다. 벽 가운데 아치형으로 뚫린 입구에 쳐진 베일을 걷었을 때 그곳에는 성숙하고 아름다운 한 여인이 서 있었다. 마치 백합처럼 고아한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이. 아니.... 그냥 백합 같은 아름다움이라기엔 너무나 부족했다. 흐트러짐 하나 없이 옆으로 길게 땋아 내려 금제 구슬장식의 리본을 감은 옅은 갈색의 머리결은 마치 창폿물로 감은 듯 건강한 윤기가 흘렀고 세사(細絲)마냥 가늘고 길었다. 혜안을 간직한 듯 보이는 그녀의 깊은 눈매는 투명한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길고 부드러운 속눈썹으로 둘러싸 마치 수풀 속의 신비한 샘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초생달을 그대로 따 놓은 듯한 눈썹의 곡선에 이어 아래로 곧게 뻗은 오똑한 코와 상냥한 미소를 띠고 있는 고운 입매는 어느 누구의 애간장이라도 녹일만한...... 으음, 내가 왜 이런 밝힘증 치한 같은 멘트나 날리고 있쥐? 여하튼, 그녀는 처음에 내가 착각한 것처럼 아치형의 입구 안의 작은 방에 진짜로 서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벽에 걸린 족자 안의 여인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내 느낌으로 그건 보통의 족자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족자 안의 섬세한 여인의 초상은 금방이라도 족자 밖으로 걸어 나올 듯 고개를 약간 모로 꼬며 이편을 바라보며,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을 듯한 걸음걸이로 한쪽 발은 가볍게 앞으로 내 딛고 있었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에게 신기(神氣)가 들렸다거나 그림의 주인공이 신기가 있다거나. 분명, 둘 중의 하나다. 그리고 나는 그 전자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후자의 가능성이 거의 100%에 가까울 것이라는 확신을 했다. 이 족자는 분명, 자신의 영역에 침입하는 자가 이로운 존재인지 해로운 존재인지 판단하는 능력이 있는 인공지능 정도는 지닌 물건일 것이다. 혹은 이 초상의 여인이 남겨 놓은 분신이거나. 내기를 해도 좋다. 분명 내가 이길 것이다. 흠...... 저 봐, 저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내가 나타난 직후 이채를 띠며 이쪽을 돌아보잖아? 난 이 정도 일엔 안 놀란다구. 단순히 마녀라서가 아니라 호후스의 여러 가지 엽기적인 등장으로 단련된 담력이 있는지라. 흠흠. 그녀는 자신의 작은, 그러나 확실한 움직임에 내가 놀라지 않는 것을 보고는 원래 그림에서 향하던 방향과 반대로 고개를 꼬더니 그 자그만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올렸다. 자상함과 온유함을 드러내는 그 눈가의 웃음. 그녀는 로제나엔인 것이다. 그러나, < 내 보금자리에 인기척이 나서 한번 보러 왔더니, 귀여운 꼬마마녀가 오셨구나. 지금 수행을 하는 중인 마녀라면 내 짐작 가는 바가 있긴 하지만. 후후... 그러나 우리간의 예의이니 네가 정식으로 인사를 하겠느냐? > "절제된 강인함의 마녀 로제나엔이시여... 아직 당신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어린 수행마녀 티티노가 그 영광을 뵙습니다." 내가 알기로 그녀는 절.대. '온유의 마녀'는 아니었다. 지금에 와서 그런 이름을 새삼 붙이게 된 연유는 짐작이 가지만 그녀는 그 겉모습과는 대조적인 마녀인 것으로 알고 있다. 외유 내강형의 대표적인 예이려나. 저 아름다움을 보더라도 그녀의 마력이 장난이 아니란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녀는 엄마처럼 요행으로 수퍼 초특급 울트라급의 미모를 갖추게된 철없는 온전 마녀가 아닌 것이다. 나는 비록 정복 차림은 아니었지만 현재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를 갖추었다. 두 손은 교차해서 가슴에 모으고 무릎을 굽히며 허리를 깊이 숙이는, 초짜 수행마녀가 완전한 마녀에게 첫 배견(拜見) 시에 갖추어야 하는 인사를 올렸다. 그녀는 나에게 어마어마한 대 선배인 것이다. 아마 내가 알기로는 엄마인 영원의 마녀 류젠 보다 50살은 더 많은 것으로 기억한다. 엄마도,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수행하던 시절이라고 하던가. < 현재 나도 바쁜 일이 있어 직접 움직이지는 못한다만....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게되었는지 말해보렴. 첫 수행을 떠난 우리 동족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정말 기쁘겠구나. > "로제나엔님...." 그러나 나는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작게 한숨을 쉬며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손은 여전히 가슴에 모은 채. 당장 보노이카의 일이 급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는 아마도 모든 것을 짐작하게 되었을 것이다. 수행을 떠난 지 이십여 일이 다 되어 가는데도 아직 어린 내 모습을 보고. 마녀들은,--당연히 온전한 마녀를 말하는 것이다-- 그 후손이 자주 나지 않는 탓에 어떤 마녀의 딸이 언제 나고, 어느 마을에서 지내는지, 언제 수행을 떠나는 시기인지 등등을 대개는 시시콜콜이 알고 있다. 뭔가 다른 일로 정신이 없지 않은 이상은 대개 그런 것들을 알고 챙기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처럼 그 어린 마녀의 수행 길에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면 한가지쯤 도움을 주는 것이 묵계이다. 그러한 도움은 어린 마녀의 수행에 있어 큰 보탬이 되는 까닭에 어린 마녀라면 누구라도 바라는 것이다. 물론 도움을 바라고 일부러 만나러 가는 것은 예외로 치지만. 엄마의 경우, 도움을 청하러 찾아가는 어린 마녀가 있다면...... 골탕이나 먹이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자기는 로제나엔을 일부러 만나러 간 주제에. 물론, 우연을 가장한 만남이긴 했지만 온전한 마녀가 수행마녀의 잔머리 굴림에 진짜로 속아넘어갔겠는가? 그저 '어린것이 귀여우니 한번 봐준 것'이었겠지. 그러나 지금 내 경우는 마주치는 것이 더 부담스럽다.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조금 더 지나면 아마 내가 이르지 않더라도 평의회에서조차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챌 것이다. 아마도...... 곧 그렇게 될 것 같다. 로제나엔, 그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며 나를 보고 있는 것일까. 그저 상냥해 보이기만 하는 그녀의 내면에는 강철과도 같은 의지와 그 의지를 관철할 만큼의 강인한 힘이 숨어 있는 것이겠지? 아음, 나도 저런 멋진 마녀가 되고 싶었는데. < 왜 말이 없느냐? 별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게냐? 하기는. 지금으로선 오히려 내가 너에게 부탁을 해야 할 상황이겠지만. 후후후...... > "......?" 이런저런 생각으로 정신없던 내 머리 속이 그녀의 한마디로 인해 더 혼란스러워졌다. 아마 지금 내 눈은 무척 똥그랗게 되었을 것이다. "로제나엔님이 저한테...... 부탁.....?" < 후후-- 무엘 그리 놀라는 게냐? 무리한 부탁이라도 할까봐서? > "아, 아니...... 부족한 저에게 무슨......??" < 저기, 저 베일을 걷고 조금 전 네가 있던 곳을 보렴. > 로제나엔, 그녀가 가리키는 대로 나는 돌아서서 베일을 걷었다. 그리고 내가 누워 있던 낮은 단 쪽을 보았다. 그곳에는 얼굴을 이편으로 돌리고 단 위에 엎드려 작게 코를 골고 있는 페리언이 있었다. 언제 잠든 거지? 아아, 그럼......? 나는 로제나엔을 한번 돌아보고 다시 페리언 쪽을 보았다. 확실히, 많이 닮았다. 얼굴의 윤곽이며 머리칼과 눈동자의 색깔들이. 페리언 쪽이 좀 짙은 편이긴 해도 두 사람이 모자간이라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보통 인간의 관점에서 본다면 남매간이라 하는 것이 더 맞는 것일지도. 흐음... 라이나폴스의 국왕이 얼마나 젊어 보이는지(?) 몰라도 자기 부인과 나란히 서 있으면 어린 여자를 아내로 맞은 주책바가지 중년 내지는 늙은이로 보이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드는 것은. 음음...... 실제 나이로 따져본다면 정 반대이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 그러니, 뭐. 인간은 시각에 의존하는 바가 많으니 눈에 보이는 대로 느낄 수밖에 없지만 실상을 알고 보면 황당한 감이 있군. 그런데... 로제나엔님, 저한테 부탁하실거라뇨? 아니, 설마 당신의 아들인 저 페리언을 저한테 돌봐주라고(?) 하시는 거예요, 지금? 내 놀람으로 벌어진 입과 아까보다 더욱 똥그래진 두 눈을 보고도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빙긋 웃기만 한다. 그... 그렇다는 거지요... 정말....? < 기이하지만... 자신의 개인 마법사로 제 어미와 같은 마녀를 선택한 것은 정말 기이한 일이지만 말이다. 나는 그것이 또 그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거든? 나는 그 아이의 선택을 기꺼이 존중할 생각이란다. 마녀의 아들이라는 것이 어떠한 존재인지 너도 이미 들은 바 있겠지만, 저 아이는 지금 특히나 묘한 상황에 놓여 있구나. 네가, 저 아이에게 잠시나마 힘이 되어 준다면 나는 정말 고맙겠구나. > "하... 하지만 로제나엔님. 저는 아직 허락하지 않았다구요." '게다가 저 남자는 속사정은 하나도 얘기하지 않고 절 은근히 무시하고 있단 말예요. 기분 나쁘게.' 그러나 이 말은 속에서만 메아리칠 뿐 겉으로 나오진 않았다. 현재 아무리 온유의 어쩌고로 행세하신다지만 저 은근히 배어 나오는 위엄과, 감추고 있지만 막연하게나마 느껴져 오는 마력의 크기는 아직 꼬마마녀인 나를 움츠러들게 만든다. 그런 대 선배 앞에서 그 아들을 흉볼 수는 없지 않은가? < 후후... 네가 어찌 생각하건 간에 이미 너희들은 한 배를 탄 것 같구나. 네 사정이 어떠한지는 모르겠다만 아들을 부탁하는 의미에서 나는 너의 부탁을 무엇이든 들어줄 수 있으련만. 게다가, 이번 하몬느의 절기에 저 아이의 성년식이 지나고 나면 네 수행 길에 묻어 다니면서 꽤나 도움을 줄 수 있을 것도 같고. 네 힘에 비하면 별 것 아니겠지만. 후후-- 그래도 재주가 많은 아이란다. 거두어 주지 않겠니? > 로제나엔은 상당히 겸손하게 말을 하고 있지만 정말 대강 봤던 검술 실력이나 순간적 상황판단 능력, 행동력 등을 보면 그 재주라는 것이 '상당한' 수준인 것은 부인하기 힘들다. 분명, 수행 길에 도움이 되겠지. 마녀의 아들. 그것은 상당히 애매한 것이다. 전에도 잠시 언급한 바가 있지만, 그때야 대강 넘어갔으니까 앞을 다시 보기 싫으신 분들을 위해 그때 내가 뭐라고 했었는지 대강 말해보겠다. 내가 마왕과 마녀의 자식들에 대해 설명한 바가 있었는데 마왕의 아들은 마왕이 되고 마녀의 딸은 마녀가 된다고. 그럼 마왕의 딸은 어떤고 하니, 성년이 지난 뒤 얻게 되는 넘치는 마력을 감당 못해 좀 이상한 길로 빠지곤 한다는. 그러나 마왕에게 딸은 정말 희귀하게 나오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아즈라엘은 참으로 희귀한 탄생을 하였건만 그 희귀성을 성년이 되면서 스스로 포기한 케이스라고나 할까. 음? 그럼 마왕에게 딸은 나와봤자잖아? 성별을 바꾸어버린다니. 반대의 경우도 가능할까? 아들이 딸로 변하는 거. 아아...... 이런 쓸 데 없는 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참. 그래서, 이제 '마녀의 아들'이라는 존재에 대한 고찰을 잠시 해 보도록 하자. '마녀의 아들, 그것을 알려주마.' 마녀의 아들들은, 마왕에게 딸이 나오는 것보다는 덜 귀한 경우이긴 하지만 분명 흔치 않은 경우이고 태어나긴 태어난다. 그러나 그처럼 애매한 존재가 없는 것이, 어머니의 마력을 타고 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보통인간들과 같으냐하면 그것도 아니다. 보통인간에 비해 조금, 혹은 노력에 따라 월등히 뛰어날 수도 있으나 마녀의 그것에 비한다면야.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마녀의 아들'이란 타이틀에 있다. 그 타이틀은 그를 평생토록 쫓아다니면서 '마녀의 아들이면서 마력도 없어?' '마녀의 아들이면 간단한 주문정도는 할 수 있지 않나?' '마녀의 아들이라면서 이 정도도 못 해?' 라던가, '이렇게 뜀박질을 잘 하다니.... 역시 넌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어. 절루 가.' '헉... 너 이렇게... 넌 우리와 달라. 그러니까 가버렷---!!' 하는 대충 두 가지 분류의 주변 반응에 시달리다가 스스로 초라해져서 함몰해 버리거나 초연함과 달관의 경지를 거쳐 수도승이라도 되어 버리는,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좀 비극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뭐, 극단적이고 유치한 설명이긴 하지만 대충 그렇다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왜 너희 엄마처럼 못하느냐'라며 무시하는 쪽과 '넌 우리보다 월등한 존재야. 우리완 달라'하면서 배척하는 경우. 둘 중의 하나이거나 둘 다의 대우를 받는 것이 '마녀의 아들'이란 존재인 것이다. 어찌 보면 불쌍한 존재이지. 그래서 어떤 경우, 마녀는 아들을 낳으면 요정을 시켜 평범한 집안의 아이와 바꿔오기도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평범한 집안의 아이는 시동으로 쓰던가 또 다른 집에 주어버리기도 하고 자신의 아들은 평범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낳은 어머니로서야 가슴 찢어지는 결정이겠지만 어찌 보면 이해가 갈 만도 한 행동인걸. 아마.... 저 페리언이라는 왕자도 그 비슷한 삶을 살아 온 것일까? 그 역시 마녀의 아들이란 이름을 짊어지고 살아야 했을 테니 아마 그랬겠지. 그런 생각을 하니 나로선 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의 처지에 동정이 간다. 이도 저도 아닌 삶이라니. 정체성을 찾기 힘든 삶이란 얼마나 고달픈 것일까. 아니, 어찌 보면 내 현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은 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지금은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이니까. "로제나엔님...." < 그래, 어린 수행마녀 티티노여. 네 생각의 결론은 어떤 것이니? > "저, 저는......" < 그래, 말해보렴. > "저 아직 제가 마녀라는 거 말하지 않았어요." < 그야 이제부터 얘기하면 될 것이고, 그것이 문제가 되느냐? 저 아이는 그런 건 상관 않을텐데? 음, 물론 개인 마법사로 마법사가 아닌 마녀를 들인다는 것에 다른 대신들과 국왕이 어찌 생각할지가 좀 걸리긴 하지만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을 것이니 너희는 두 사람 사이의 문제만 신경 쓰면 될 것이야. 두 사람 사이에서 서로 받아들이기 힘든 문제가 생긴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좋을 대로하면 되는 것이 아니겠니? > .....말의 뒷부분이 뭔가. 조금 삐딱하게 듣는다면 연애문제에 대한 상담대답처럼 들릴 말이군. 여하튼 그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마음을 먹었다. 아주 잠시만, 잠시동안만 그의 개인 마법사가 되어주겠다고. 내가 결심을 하고 고개를 들어 로제나엔의 눈을 응시했을 때 그녀는 이미 대답을 알고 있었다는 듯 나를 따스한 눈빛으로 감싸주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 안에서 나는 보호받고 사랑 받는 순결한 작은 영혼처럼 순수해져 가는 마음을 느꼈다. 혹시 그녀는 마녀가 아니라 천사인 것은 아닐까? 하지만, 저것도 알고 보면 고도의 기교를 요하는 마법의 일종인 것이다. 쓰는 사람에 따라 이렇게도 저렇게도 효과를 나타낼 수 있는 고급 마법. 그녀는 그녀의 의지와 생각에 따라 저것을 좋은 의도로 사용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자가 저런 거대한 마력으로 사람들을 미혹한다면 아마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사이비 교주쯤 되어버리지 않을까. < 후후, 역시 아즈데리카의 아이. 그래, 너는 그렇구나. 내 미혹의 마법조차 금새 알아채다니. > "......?" < 알고 빠지는 것과 모르고 빠지는 것은 커다란 차이가 있음이니라. 너는 전자 쪽이니 어딜 가더라도 훌륭한 마녀의 구실을 할 수 있겠구나. 너에게 축복의 마법을 주지 않더라도 너는 앞에 놓인 험난한 고비를 잘 견딜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주는 축복의 멘트이니라. 후후후...... > "로제나엔님, 지금 분위기에 농담을 하시는 건 왠지 안 어울려요." '별로 재밌지도 않구요....' 나는 좀 가라앉은 목소리로 감히 말대답을 했다. 그녀는 이제 그 미혹의 마법을 거둔 채 빙긋 미소만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난 셈이 확실한 편이라구요. 이모저모 적당히 따져보고 셈본 계산이 나와서 페리언의 개인 마법사가 되겠노라 결심은 했지만--물론 약간의 동정도 섞여 있다-- 다른 문제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에 대해 확실한 보완책을 그녀, 로제나엔에게서 받아내고자 한다. 거절하시진 않으시겠죠? < 그럼 어떤 말을 해야 어울리겠느냐? > "예를 들어 그 부탁에 대한 대가를 어떻게 주실 생각이라던가, 그런 것 말이에요." < 흐음. 그래, 너는 무엇을 원하느냐? 아직 조절이 서툴지만 상당한 마력도 지니고 있는 듯하고, 마력 조절 능력이나 힘을 키우는 것은 수행을 통해 할 수 있을 터이고. 무얼 바라지? > "아이템이요. 로제나엔님은 고성능의 훌륭한 아이템을 많이 만드셨다고 들었어요. 그러니까....." < 흐음. 아이템이라. 어떤 종류로? > "그러니까 말이죠. 제가 원하는 모습으로 보이게 하는 반지라던가 목걸이라던가 하는 그런 거요." < 호오, 그러고 보니...... 흐음? 네 모습은 분명 아이의 모습 그대로구나. > 으이그, 이제서야 눈치챈 척 하지 마시라구요. 다 보여요. "그대로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요." < ......그대로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고? 무슨 의미일까. 흐음. > "여하튼, 그런 것이 있으신가요?" 로제나엔은 대답을 회피하면서 두 눈이며 입가에 장난기를 가득 담고 있었다. 그녀의 분위기와 나이에 비하면 그러한 표정은 어울리지 않을 법도 한데 의외로 잘 어울려 보이는 것은 또 뭘까. 온유의 마녀로 지내시면서 실은 답답했던 것은 아닐까나? 나의 이러한 이해 과정은 차치(且置)하고서라도 이제 조금 있으면 밤이 온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것도 한시간은 족히 된 듯 하다. 중요한 결심은 이미 했으니 결론은 빠를수록 좋다. 시간을 끌어야 할 이유가 없단 말예욧, 로제나엔님∼! 눈동자를 이리 치키고 저리 치키며, 고개도 갸웃거리면서 계속 뜸을 들이던 그녀는 마침내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옆으로 까딱거렸다. < 음. 내가 예전에...... 한 100년 되었나? 여행하면서 가지고 놀던 것이 있는데. 지금은 어디 있더라? >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을 보아하니 그녀도 젊은 시절에는 꽤나 장난스러웠을 듯 하다. 지금도 그러한 표정이 어색하지 않은 것을 보면. 아아, 그러고 보니 그녀에게도 딸이 있다고 들었다. 그녀도 저런 로제나엔을 닮았을까? 그렇다면 장난기도 많겠지. 페리언처럼 갈색머리에 갈색 눈을 지녔을까나. 나이는 나와 비슷한 또래라고 들었다. 나보다 조금 어리다고. 그럼 그녀도 곧 수행을 떠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녀는 어디에서 지내는 것일까? 신분이 공주라면 따로이 마을에 내 보내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텐데. 마녀의 규율이 더 중요하긴 해도 인간들에게는 또 그렇지 않을 터이니. 음, 나 별 걱정을 다 하는군. 나는 내 일이 더 급해. 족자 안의 로제나엔은 움직임을 멈추고 있었다. 무언가를 찾기 위해 잠깐 자리를 비운 듯 했으니까. 그렇게 기다린 지 5분 정도가 지났을까. 기다리기가 지루해진 나는 방 입구에 드리워진 베일을 걷고 밖을 내다보았다. 컴컴한 실내에서 유일한 빛인, 벽에 걸린 횃불 아래 페리언이 엎드려 잠든 모습이 보였다. 공기의 떨림에 따라 흔들리는 불빛에 따라 그에게 드리워지는 그림자도 일렁이고 있었다. 횃불의 빛이 물든 그의 머리색은 지금 완전한 붉은 색으로 보였다. 이쪽으로 향한 얼굴은 그늘이 져서 반절은 보이지 않았지만 꼼짝도 않고 엎드려 있는 것을 보면 잠에 깊이 빠져 있는 듯 보였다. 얼굴을 받치느라 앞쪽으로 뻗은 팔 부분의 옷자락은 팽팽해져서 어깨에서 팔뚝까지의 윤곽을 그대로 드러내 보였다. 그 윤곽은 전체적으로 약간 마른 몸에서 보기엔 의외로 단단하고 적당한 두께로 이뤄진 근육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잘 빠진 맹수의 다리근육 같다고나 할까. 감은 한 쪽 눈이 잠깐 움찔거렸다고 느끼는 순간, 그는 몸을 뒤척이다가 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몰래 훔쳐보다가 들킨 느낌이랄까? 가슴이 뜨악했다. 이상하군. 내가 왜 그런걸 느껴야해? 저 사람 방에 몰래 들어가서 자는 모습을 훔쳐본 것도 아니고, 그저 보이는 걸 봤을 뿐인데. 일전에 보노이카와 함께 작은 여관의 숙소에서 그가 자는 모습을 지켜 볼 때는 이런 느낌은 아니었다. 오히려 뒤통수에 크게 난 혹이 우스워서 미안한 마음은 제쳐두고 배꼽을 잡고 웃지 않았던가? 아아, 지금도, 머리카락에 숨겨져서 그렇지 그 자국이 아직은 남아 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웃음이 나오려고 한다. 그렇지? "하.하.하....." 음...... 내가 봐도 어색한 웃음이군. 흠흠. 나는 다시 베일 안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돌아본 족자에는 아직 로제나엔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족자의 눈에 맑은 기운이 스며들었다. 그녀가 돌아 왔나보다. < 흐음...... 오래 안 쓰고 놔두었더니 찾기가 번거로워서..... 으음? 그런데, 우리 꼬마 마녀님, 왜 얼굴이 빨갛지? 그 새 쥐잡기라도 한 거니? 내가 한동안 뜸했던 집에 쥐나 바퀴벌레라도 세든 걸까? > "......" 내 얼굴이 빨개졌다고? 흠, 뭐 거울이 없으니 알 순 없지만, 그러고 보니 좀 화끈거리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건 로제나엔의 기묘한 시선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저 이상한 시선은 뭐냔 말야? 뭔가를 떠보는 듯한 야릇한 눈빛. 아무리 '온유의' 어쩌고로 위장한다해도 마녀로서의 본성은 어디 갈 수 없다는 것인가? 말하고 보니 누워서 침 뱉기다. 나도 마녀니까. 그럼 그냥 그.녀.의. 본.성.!! "일어나요." 어깨를 잡아 흔들면서 깨웠는데 페리언은 아직 꿈쩍도 않는다. "이젠 일어나라니까욧∼!! 빨리 움직여야지 보노이카를 찾으러 가죠∼!!" 그는 마치 시체처럼 축 쳐져서 잠이 들어 있었다. 여간해서는 깨지 않을 듯 했다. 로제나엔은 무슨 술을 썼기에 이렇게 푹 재워놨을까? 하긴, 내 수면가루에도 정상보다 더 깊이, 더 오래 잠이 들던 사람인데 뭐. 나는 페리언의 어깨를 마구 잡아 흔들다가 이 정도로는 어림없을 듯 해서 대책을 강구했다. 그리고 그를 내려다보는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고개를 옆으로 해 자느라고 하늘로 뻗쳐 오른 옆머리에 반쯤 가려져 있는 귀였다. 아무 망설임 없이 내 손은 귀를 향해 뻗쳐졌다. 순간, 페리언의 눈이 어깨가 움찔 하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내가 손을 뒤로 빼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는 다시 낮게 코를 골며 하던 일을 계속 했다. 즉, 계속 잤다는 얘기다. 나는 착각이었나 싶었으나 이번엔 조심스럽게 그의 귀로 손을 갖다 댔다. 그러자 그의 어깨가 다시금 경직되는 듯 싶더니 그냥 축 쳐지면서 내려앉았다. 다른 곳보다 귀가 예민한 것일까? 여기서 '귀'라는 것은 '청각'을 의미하지 않는다. 귀 근방의 감각이 예민한 듯 하다는 말이다. 암튼 나는 그의 귀를 살며시 잡고 잠시 기다렸다. 그러나 이번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서슴없이 그 귀를 잡아당겼.... 아니, 당기려 했다. 그러나 내 몸은 갑자기 허공을 한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차갑고 시커먼 돌 바닥이 눈앞으로 다가왔고 다리는 공중에서 버둥대고 있었다. 내 길다란 머리는.... 흑, 저 돌 바닥에 묻은 먼지 다 쓸어내겠군. 내 머리는 빗자루가 아니란 말얏. 이런 결 고운 빗자루 봤어? 아직 나는 낮의 내 몸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내'가, 날래고 잽싸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꼬마마녀 티티노가 아무런 낌새도 채지 못한 사이에 순식간에 허공에 공중제비를 돌게 되다니. 페리언, 역시 보통은 넘는 사람이었어. 나는 내 허리를 잡고 있는 페리언의 팔을 축으로 삼아 상체를 뒤로 꺾었다가 반탄력을 이용해 힘차게 반원을 그렸다. 음... 좀 굵은 철봉을 하는 느낌. 뭐, 이런 건 마을에 살 때 나무 위에서 많이 해 보던 거니까.... 그리고 내 회전에 의해 꺾이는 팔을 뒤로 빼내는 페리언의 어깨를 잡아 허공에서 추락하는 것을 모면했다. 그는 어깨 너머로 보이는 내 붉은 눈을 보고 무척 놀라는 듯 했다. "티... 티티... 아니, 마법사님...." "... 그냥 티티노라고 해요. 내가 더 부담스럽구만. 마음에도 없는 '마법사님'이란 명칭말예요." 그는 무척 당황한 듯한 표정으로 팔을 내밀어 내가 그의 어깨에서 내려오는 것을 도왔다. 그의 큰 키에 비할 때, 어느 누가 지금 우리들의 모습을 봤다면 고목나무 가지에 매미가 달렸다고 하지 않았을까? "누군줄 안 거예요?" "네?" 그는 내가 땅에 내려서자마자 한 질문에 연신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별것도 아닌 일에 계속 놀라는 걸 보면.... 처음의 느물거리던 인상에 비해 의외로 순진한 데가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좀 전에 공중제비 돌리던 걸 보면 상당히 익숙한 솜씨던걸요? 체격과 반사동작 등을 염두에 둔 듯이 슬쩍 들어올리면서 적당히 돌려댔잖아요. 뭔가 다른 경우를 염두에 둔 거라면 그렇게 부드럽게 돌려대지는 않았을 테니까. 아마 자객이라 생각했다면 나는 지금쯤 어디 한군데 부러져 있었을 지도 모르니까." "아, 그건.... 하하...." 그는 무척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한 손으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이 사람 의외의 면을 많이 보여준다. 이렇게 귀엽게 쑥스러워하다니. 그는 입술을 달싹이면서 말을 할 듯 말 듯 하다가 또 피식 웃어버렸다. "뭘 그렇게 쑥스러워해요? 말하기 곤란한 거예요?" "아, 아니, 동생이.... 동생이 장난을 많이 하는 편이라서요. 마법사님과 체격이 비슷해서 무의식중에 동생인줄 알고 그만...." "네, 함께 산단 말예요? 가족들과 함께?" "에엣....??" 이번엔 우리 둘 다 서로의 대답에 대해 무진장하게 당황했다. 그가 당황해 하는 것이 뭔진 알겠지만.... "마녀의 딸은..... 마녀의 딸을 양육하는 것은 1년이 지나면 가족들과 따로 살아야 하는데.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마, 마법사님, 그게 무슨.... 마녀의 양육법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건가요?" "당연하죠. 내가 마년데." 좀 어이없는 방식으로 고백을 하긴 했지만, 어차피 그도 알아야 할 것이니 빠른 것이 낫지 않을까? 그의 표정은 무슨 말을 들은 것인가 싶은 표정. 눈썹을 치켜 뜨며 입술은 약간 일그러뜨린 채 시간이라도 멈춘 듯 고정되어 있던 얼굴은 천천히 고개를 젓다가 끄덕이며 좀 다르게 바뀌었다. 얼굴로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그랬군'이라는 말을 하면 저런 표정일까. "그럼......" "아앗,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내가 왜 쓸 데 없는 질문이나 하구.... 이봐요, 페리언. 우리 둘 다 궁금한 건 나중에 얘기하기로 하고 지금은 우선 움직이자구요. 보노이카가... 보노이카부터 구하고 봐야 할 테니까." 나는 그를 깨웠던 이유를 이제야 떠올린 것이다. 나도 이젠 갈 때가 됐나, 허어∼ 깨우다가 공중제비 한바퀴를 돌고 나니 생각하던 것을 바닥에 죄 우루루 쏟아 버렸던가 부다. 나는 페리언을 재촉했고 그도 그 일이 먼저라는 것을 인정하는 듯 금새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궁금한 점은 나중에, 시간 있을 때 천천히 얘기하자구요. 흠... 그러고 보면 말도 잘 통하고.... 수행 동료로서는 괜찮은, 아니 인심썼다. 믿음직한 동료인걸? "어쩔 수 없이 저쪽 구석에 있는 진을 이용해야겠어요. 당신 어머님이 남겨 놓으신 좌표 책도 있으니.... 아, 당신이 잠든 사이에 이것저것 뒤져봤거든요." "아, 그런데 제가 왜 잠이 든 거죠? 분명히, 당신이 일어나기 전까진 분명 말짱한 정신이었는데." "실은 많이 피곤했나보죠. 당신이 갑자기 쓰러져서 자기에 난 여기에 뭔가 쓸만한 것이 없나 뒤져봤고.... 온전한 마녀가 우연히 만난 수행마녀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불문율이니까 뭐 걱정은 안 해요. 쓴 물건 제자리에 돌려놓겠습니다 하는 쪽지 정도는 남겨뒀으니." "마법사님... 아니.... 아무튼, 그럼 저 베일로 가려진 방에 들어갔더란 말입니까? 그곳은...." "왜요? 뭐 이상한 거라도?" "그곳은... 어머님 이외의 자가 들어갈 수 없는 술이 걸린 곳인데.... 저조차도 어머님과 함께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아니, 어떤 마법사라할지라도...." "그러니까.... 난 마.녀.라고 했잖아요. 동족에게는.... 그녀가 나쁜 마음을 품은 것이 아니라면 관대해지는 법이죠." 나는 한 쪽 눈을 찡긋하며 내가 '마녀'라는 것을 강조했다. 뭐, 진짜로 그의 어머님을 만났다는 것까지 시시콜콜히 말 할 필요는 없지 않겠어? 그녀와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어떤 요청을 받았고, 어떤 보답을 받았는지 등등은 말이다. 이제 선택은 당신의 몫이라구요. 마녀를 개인 마법사로 맞을지 않을지는. 근데, 왜 얼굴은 돌리시나? 그는 자신의 등뒤에 무언가를 느끼기라도 한 듯 갑자기 고개를 휙 돌렸다. "....? 거기 뭐 있어요?" "아... 아닙니다. 그저.... " "진짜 쥐라도 있나?" "아, 쥐.... 그래요, 쥐가 지나가는 듯 해서... 착각이었나 봐요. 하하..." 참 어색한 웃음을 흘리면서 그는 여전히 몸은 이편으로 두고 고개만 뒤로 돌린 채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저게 뭐 하는 짓이람? 저 사람은 좋게 잡아놓은 이미지, 희안한 행동으로 흐려놓는다니까. 스스로가 말야. 뭐, 어쨌거나 나는 마법진이 있는 쪽으로 가기 위해 그에게 부탁했다. 횃불을 꺼내달라고. 그는 내 얘기를 듣자마자 벽 쪽으로 후다닥 뛰어가서는 횃불을 꺼내들었다. 횃불을 어깨 높이로 들고 내게 다가오는 그의 얼굴은 불빛을 받아 붉고 노란빛으로 일렁였다. 불빛의 흔들림에 따라 어쩐지 특이하게 어른거리는 명암이 그 얼굴을 붉은 도깨비 같아 보이게 한다. 나는 그 얼굴이 우스워 키득거리면서 마법진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별전 : 티티노는 몰라도 상관없는 이야기, 그러나 여러분들은 아시면 참고가 될 이야기 우쒸∼!! 요즘 일진이 왜 이런지 모르겠다. 이제는 별 놈에게 다 걸리는군. 왠 어린애까지 날 무시하고 불러세우냐. 나는 헐레벌떡 뛰던 발걸음을 쉬기도 할 겸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물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변을 꼼꼼히 살피는 것도 잊지 않고. 음, 여기서 '일진'이란 저기 옆 동네 꼬맹이들이 만들었다는 그 '일진회(一進會)'의 '일진'이 아니라 '그 날의 운세'라는 의미의 '일진(日辰)'을 말한다. 착각들 마시기를. 다들 위의 얘기에서도 짐작하시겠지만 나는 머리가 꽤나 좋다고 자부한다. 그러니 저런 설명도 가능한 것 아닌가? 에헴, 이렇듯 총명하고 잘나신 이 몸의 이름은 노무쉬이다. 그러나 저 미련 곰탱이에 힘만 믿고 우쭐대는 녀석들 때문에 된통 고생한 것이 어디 한 두 번이던가. 내가 요즘 일진이 안 좋은 것도 다 저 녀석들과 한 조가 되고 부터이다. 그 전까지는 이렇게까지 운이 나쁜 적은 없었다. 아아.... 어머니께서 올 신년 운수보고 오셨을 때 올해 삼재(三災)가 꼈다고 하시더니 정말인가 부다. 부적하랄 때 할껄. 그래도 그럭저럭 적당히 예쁜 애들 골라서 한 둘 끌고 가서 쿠사리 먹을 때는 양호한 것이었다. 중간 두령에게 잔소리만 좀 얻어먹으면 되는 거니까. 아, 내가 하는 일이 뭐냐고? 에헴, 잘 들어 두도록. 나는 '미소년, 미소녀의 싹쓸이'가 지상최대의 목표인 자랑스런 아즈라엘단의 단원이다. 이건 일반의 그 저질스런 인신매매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럼, 그렇구 말구. 애들을 본거지에 확실히 인수하기 전까지는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조항이 있긴 해도, 벌이 짭짤하고 마법아이템 공짜로 얻어 쓸 수 있고 잘만 보이면 한 두 번 재미도 볼 수 있으니 아주 좋은 직장이 아닌가? 그래서 처음엔 같은 조원이 된 곰탱이들에 대해 별 불평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제길, 어디 미소년 미소녀가 길에 널린 줄 아나부지? 아님 냇가에 깔린 자갈이라두 되는 줄 아나? 맨날 천하절색의 이쁜 년 놈만 골라서 올 수 있어? 뭐 나는 눈이 발에 박혀서 그저 그런 애들만 잡아오는 줄 아나? 그 잔소리꾼 중간 두령.... 그러나 그 자가 문제가 아니다. 한 달에 한 번 '총 평가의 날' 보게되는 케이라는 부두령은 크지도 않은 목소리임에도 어찌나 압박을 주는 분위기인지 참 그 앞에서는 숨도 제대로 못 쉬겠더구만. 그러니 아직 얼굴도 못 봤지만 그 케이라는 놈이 입의 혀같이 섬긴다는 최고 두령인 아즈라엘님은 대체 어떤 사람이겠어? 아주 무시무시하고 험상궂고 위엄과 권위가 엄청난.... 으으, 상상만으로도 오금이 저려오네. 우리 두령은 또한 마법도 굉장히 잘 쓴다고 한다. 왠만한 마법사 몇쯤은 손가락 하나로도 튕겨 낸다는구만. 그래서 나는 정말 내가 아즈라엘단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어깨가 절로 으쓱해지는 거지. 가끔 우리 숙소가 아닌, 본가 저택 근처를 어슬렁거리다 보면 먼발치에서 길고 검은머리에 하얗고 창백한 얼굴을 지니고 그 입술은 하얀 종이 위에 선지피 한 방울 떨어뜨린 듯 섹시해 보이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 없는 미인이 화려한 옷을 입고 산책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아마 두목의 애첩일지도. 그 근처에서 어슬렁대는 것을 윗사람들에게 들키면 치도곤을 당할 일이지만 난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그 미인을 보기 위해 가끔 저택 주변을 서성거린다. 물론 위험 지역 근처는 갈 수가 없다. 섣불리 돌아다녔다가는 침입자로 오인 받아 방어마법 아이템을 발동시킬 수가 있으니. 그래서 아주 멀리에서만 바라보지만 난 시력이 좋으니까, 뭐. 그런데..... 다시. 나, 이 잘나신 XX가 요즘 일진이 안 좋은 이유를 설명하려다 말았군. 으흠, 보시라!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하다 곁길로 샜는지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지 않고도 정확히 기억해내지 않는가? 이런 것을 봐도 내 머리는 정말 보통이 아니다. 그러나 내 이 빛나는 두뇌가 환상의 곰탱이 조원을 만나면서 퇴색하고 있었으니.... 그건 내 두뇌의 문제가 아니라 이 곰탱이들의 무지함에 근거한다. 그 녀석들은 사람도 알아볼 줄 모르고 제 덩치들만 믿고 아무에게나 덤비다가 큰 코 다치기 일쑤이다. 나처럼 척 하면 착하고 알아보아야 할 것을. 쯧쯧쯧.... 그것도 그 이상한 여자아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내게 직접적 피해가 오지 않았다. 그 전까지는 나는 그 무식한 녀석들이 깝죽대다가 시비가 일어나면 그냥 모르는 사람인 척, 상관없는 사람인 척하고 다른 구경꾼들 사이에 섞여 있거나 혼자 빠져나가거나 했었기에. 치사하다고 하지 마시기를. 별 동지애도 없는 녀석들 때문에 나까지 골탕 먹을 일은 없지 않은가? 녀석들은 그 주제에 나보고 용기도 없고 뭐만 차고 있는 계집이라고 놀리지만--혹은 서서 볼일 보는 희안한 계집이라고도 한다. 끄응, 참자....-- 내가 보기에 녀석들의 것은 만용에 불과하다. 뭐 제 좋은 대로 생각하면 되는 거니까. 각자 생긴 대로 사는 거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내 일진이 지독하게 꼬이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붉은 곱슬머리를 한 여자아이를 만나고서부터이다. 그 꼬마아이는,--나는 그 여자 애를 처음 보는 순간부터 수상한 기운을 느꼈었다. 정말이다. 그리고 그런 감은 언제나 틀림없이 적중했다. 나는 예언자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그 붉은 머리와 그 검붉은 눈은 처음부터 수상한 분위기를 연출해 냈다. 앙증맞고 귀엽게 생긴 탓에 곰탱이들이 찍긴 했어도 나는 별로 하고픈 마음이 없었다. 그리고 그 전에 급히 먹은 음식 땜에 체한 상태여서 더 안 좋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으.... 말하기 싫은 화제를 꺼내려니 괜히 엉뚱한 소리만 나오는군. 좌우지간, 숲길을 혼자 지나가는 조그만 여자 애라고 계획도 없이 다짜고짜 덤벼든 것까지는 좋았다. 물론 나는 뒤편에 서 있었다. 나까지 그 놈들과 같은 격으로 놀 수는 없지 않은가? 그 우왁스런 놈들이 연약한 미소년 미소녀들에게 함부로 할 것을 염려해 나는 주로 참견하는 역할이었다. 상처가 나면 상품가치가 떨어지니 내가 하는 역할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놈들이 상품이 될 아이들의 팔을 지나치게 힘주어 잡는다던가하면 나는 이렇게 한마디하는 것이다. '살살해라, 좀. 중간 두령님 말씀 못 들었어? 우리가 데려간 상품들 가치가 반으로 줄면 우리 몫도 그만큼 줄어든다구.' 뭐 이런 정도로 얘기하면 녀석들도 몫이 줄어드는 것은 싫으니까 알아서 살살하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그 곰탱이들을 조정하는 '두뇌' 역을 하는 것이란 말씀. 흠흠... --그러나 너무 살살하다가 정말 이쁘게 생긴 소년하나를 놓친 쓰라린 기억 때문에 지금에 와선 그 말도 좀 덜 먹히게 되긴 했다. 그런데, 정말 눈앞에 뜻밖의 광경이 펼쳐졌다. 세 놈이 사방에서 둘러싸고 순식간에 덤볐는데--그 정도의 머리는 있었군 싶어 잠깐 속으로 칭찬해주었다-- 결과는 의외. 여자아이는 튀는 고무공 마냥 가볍게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뛰어 오르며 들고 있던 빗자루 같은 것으로 녀석들 중 한 녀석의 머리를 쿡 쥐어박았다. 그러자 다른 두 녀석들보다 좀 위에 있던 녀석의 머리가 밑의 두 녀석의 것과 부딪히면서 부싯돌 긋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 따닥--, 퍼벅--, 퍽--!! "으아이고∼" "으그그그∼∼" "으갸갸갸∼" 그리고 그 여자아이는 조금 떨어진 땅위로 사뿐히 착지했다. 정말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동작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예사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몸이 저렇게 날래고 재빠를 수 있다니. 아마 모르긴 해도 녀석들의 머리 위에는 별들이며 새들이 꽤나 많이 지저귀며 떠다녔을 것이다. 돌끼리 부딪힌 충격이 컸던지 세 놈은 한동안 바닥에 주저앉아 일어날 줄을 모르고 있었다. 각자의 머리를 손으로 싸쥐고서. "니들은 뭐니? 지저분하게 생긴 놈들. 에, 내 코트에 흙이 묻었잖아. 쯧---" 여자아이는 아주 여유만만하게 늘씬한 코트 뒷자락에 눈꼽만큼 묻은 흙을 털어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에 열 받은 세 놈들은 막 정신을 차리고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카악∼, 퇘--!!" "뭐 이런 게 다 있어?" "저런 꼬맹이 하나를 어쩌지 못하다니, 니들 그러고 덩치가 아깝지도 않냐?" "그러는 넌 뭐냐?" 세 놈이 덩치 값을 못 하는 것이 안쓰러워(?) 한마디 던졌더니 한 놈이 나를 흘겨보았다. 흠, 좋은 말은 원래 쓰게 느껴지는 법이다. 여자아이는 놈들을 가소롭다는 듯이 쳐다본다. 그 때 이미 알아봤어야 했는데. "좋아, 다시 한 번.... 저런 꼬맹이를 어쩌지 못한다는 건 우리 아즈라엘단의 수치닷--!" "오옷... 좋았어. 이제는 오기닷. 너, 꼬마 거기 꼼짝 말고 서 있어∼!!" 그런 말을 듣고 가만 서 있을 꼬마였다면, 이미 처음 일을 당하지도 않았겠지. 당연하게도 여자아이는 또 다시 도약을 했다. 그러면서 제일 먼저 뎀빈 탓에 자신의 밑으로 스쳐 지나가는 체격이 제법 다부진 넘의 머리를 발로 힘껏 밀어댔다. 그리고 바로 뒤이어 쫓아 들어가는 두 녀석을 등에 매고 있던 좀 짧고 화려한 칼로(다행히 칼집 째로) 순식간에 정수리를 쳐서 때려눕혔다. 그건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렇게 잽싼 몸놀림은 보다보다 처음 본다. 여자아이에게 처음 덤빈 녀석은 길가의 진창에 호되게 코를 박았다. 그리고 녀석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뒤이어 덤벼들던 두 녀석이 얼얼한 머리를 들고 일어서려 하자 그 애는 주머니에서 뭔가 작은 쌈지 같은 것을 꺼내더니 녀석들에게 반짝이는 가루를 조금씩 뿌려댔다. 그것이 무엇인지 눈치채버린 나는 그 순간 얼어버렸다. '마녀의 수면가루.....' 저 아이는 저렇게 조그맣지만.... 마녀였던 거다. 허억..... "마.... 마녀...." 나는 무의식중에 그 말을 입에 담았던 것 같다. 머릿속으로만 생각한 것인 줄 알았는데. "그래, 난 마녀야. 니들은 오늘 상대를 잘못 고른 거라구. 난 이제 막 수행 길에 나서서 힘이 펄펄 넘치는 마녀란 말야." "허...헉..." 진창길에 코를 박고 있다가 이제야 일어난 녀석도 숨을 삼킨다. 녀석도 '마녀'의 무서움에 대해 뭔가를 아나보다. 녀석은 로푸스 출신이라고 하던데 그곳의 마녀가 그렇게 괴팍하다지? 나는 어디 출신이냐 하면... 어릴 적부터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살았기에 일정한 고향은 없다. 다만 어릴 적 제일 오래 살았던 곳이 가우니시아이다. 그곳은 성기사를 숭앙하는 곳으로 마녀에 대한 무서운 전설이 가득한 곳이다. 마녀와 마법사, 그리고 마왕. 가우니시아에서는 그들의 존재는 곧 악마 그 자체이다. 성스러운 힘을 위협하고 성자를 홀리는 존재들. 그것이 바로 마력을 지니고 마법을 쓰는 자들이라고, 그들은 악마의 하수인이라고, 어릴 적 열심히 세뇌 받은 탓에 나는 이렇게 작은 마녀를 보고도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꼈다. 그리고 실제로 변방 한 귀퉁이 초라한 움막집에 사는 추하게 늙은 노파 마녀에 대한 기억은 어린 날의 공포로서 내 기억 속에 자리잡고 있다. 지금은 마법이란 것이 그렇게 악마적인 것은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때 보았던 한 동네 살던 노파가 주름이 자글자글 잡힌 얼굴에 히번뜩허니 눈을 뜨고 묘지에 가서 시체를 파헤치며 무시무시한 저주를 퍼붓는 것을 동네 꼬마들과 목격한 이후, 나는 '마녀'에 관한 한 지금까지도 오금이 저려올 정도의 공포를 느끼곤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여자아이... 아니 작은 마녀는 내게로 천천히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섣불리 도망치면 저주를 입을 것이 두려워--솔직히 발이 떨어지지 않아서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그냥 지나가려 했는데.... 니들이 하는 말 중에 걸리는 부분이 있어서 말야. 묻는 대로 대답하면 고이 보내줄게. 알았어?" - 끄덕끄덕끄덕끄덕--- 평소라면 낭랑하고 맑은 목소리라고 생각했을 법도 한데, 지금은 그것마저도 음산한 기운을 띄는 것처럼 들린다. 나는 최대한 협조하겠다는 의미로 목이 부러져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마녀가..... 으으.... 무서버.... 마녀가 미소를 지을 때는 엄청난 일이 벌어질지도 몰러.... 흐윽..... 그녀의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는 전율스러운 공포 그 자체였다. 마녀의 미소라니..... 그래서 나는 그만 실례를 하고 말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 마녀는 그걸 문제삼지는 않았다. 그리고는 엉뚱한 질문을 했다. "간단하게 묻지. 니들 두목 이름이 뭐니?" 내가 금새 대답을 못하는 것을 본 마녀는 칼의 손잡이를 들썩거리며 파랗게 날이 선 검신을 내게 잠깐 보여주었다. 흐걱... "얘가 심심한가 봐. 나는 실은 마녀 검사거든..." "두....두....두목은.... 두....두...." "천천히... 더듬지 말고, 침착하게 말해 봐." "두..... 두목 이름.... " "그래, 더 천천히. 분명하게 말해." "아... 아즈라엘....입니다...." 마녀 검사라니..... 그래서 저렇게 몸이 빠르고 날랬던 것인가? 흐윽... 저주를 퍼붓는 마녀만으로도 감당하기 벅찬데 거기에 검사까지.... 난 이제 죽었다. "너희 두목 어떻게 생겼는데?" "그...... 그건......" "뭐냐? 두목 생김새도 몰라?" "저...... 저 같은 말단은 잘 모릅니다. 두목 목소리만...." 아예 다 모른다고 하면 저주를 퍼 부을까봐 목소리만은 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목소리가 어떻냐고 물으면 어떡하지? 지어서 말하다가 들킨다면? 으아아아∼ 그러나 뭔가 궁리하는 듯 하던 작은 마녀는 나를 한번 째려보더니... 흑... 혹시 저주의 눈길인가? 그냥 휙 돌아서서 수풀 사이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긴장이 풀린 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이제와서 하는 말인데, 틀림없이 그 작은 마녀는 째려보면서 나에게 저주를 퍼부은 것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일이 안 풀릴 수가 있단 말인가. 나에게는 이제 컴컴한 앞날만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 후론 정말 되는 일이 없었다. 가는 곳마다 그렇고 그렇게 생긴 연놈들뿐이고 건수는 오르지 않고 중간 두령의 다그침은 심해지고. 거기다 꼬마아이한테 당한 것에 열 받은 세 놈들은 일은 할 생각도 않고 길길이 날뛰기만 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처음 일로 끝났다면 좀 덜했을지도 모르지만 마법아이템을 통해 다른 숲으로 전이한 다음에 또 생긴 일 때문에 우리 모두는 의욕까지 상실해버렸던 것이다. 다른 숲으로 전이했을 때, 우리는 그저 좀 쉬었다 가려는 생각이었다. "카악----- 퇘. 재수가 없으려니, 그런 꼬마계집한테 당하기나 하구." "거, 뭐냐? 왜 그때 잠이 온 거지?" "말했잖아? 마녀의 수면가루라고. 그 앤 쬐끄매도 마녀였다구." "놀구 있네. 무슨 마녀가 그렇게 콩알만하냐? 그 수면가루도 어디서 사거나 구한 거겠지. 그게 무슨 마녀야? 넌 진짜 마녀라는 것이 어떤지 몰라서 그러는데.... 으으... 그 괴기스럽고 전율할 정도의 미색이란. 마녀인줄 알면서도 다가가게 만드는 미모. 그리고 엄청난 마력. 마녀란 그런 거라구. 괜히 겁먹어서 오줌이나 지린 자식이 변명꺼리 없으니까 한다는 소리하고는..... 그런 땅꼬마가 마녀라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그땐 우리가 방심해서 당했을 뿐이라구!!" "그래, 그 꼬마가 그렇게 날래리라고 예상을 못 했기 때문에 당한 거지 절대 우리 힘이 모자라서 당한 건 아니야." 이런 바보 같은 놈들. 저 녀석은 마녀에 대해 제법 안다는 놈이 저런 엉뚱한 소리를 한담? 마녀가 미색이 어쩌구 어째? 그리구 엄청난 마력? 오크 시 암송하는 소리하구 자빠졌다. 자고로 마녀란 커다란 가마솥에다가 여러 가지 끔찍한 것들을 집어넣고 중얼중얼거리면서 저주나 퍼붓는 쭈그렁 노파들이란 말씀. 그것이 가우니시아에 널리 알려진 마녀에 관한 상식이다. 뭐 가끔 예쁜 마녀도 있다고는 하지만 그거야 사람들을 홀리려고 환술을 쓰는 것이겠지. 예쁜 마녀라니, 당치도 않은 말이닷∼!! 하긴... 녀석 말대로 콩알만한 마녀라는 건 좀 그렇긴 하지만.... 뭐 마녀도 어린 시절쯤은 있겠지. 걔도 아까 그러지 않았어? 수행을 떠났다나 뭐라나.... 흠... 저주라는 것도 수행을 거쳐야 위력이 대단해지는 건가 보군. 그렇게 티격태격하다가 냇가에 가서 세수나 하고 밥이나 먹자 해서 물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갔는데, 거기에서도 우린 그냥 돌아갔어야 했다. 그러나 미련 곰탱이 친인척들인 동료라는 놈들은 같은 실수를 또 하고 만 것이다. 내가 보기엔 분명 아까 그 마녀가 맞는데도 불구하고 시냇가에서 막 코트를 벗은 붉은 머리여자아이를 잡겠다고 설친 것이다. 으윽.... "후후... 이봐 귀여운 아가씨.... 옷을 벗는 중이었나? 내가 도와줄까?" "푸헐헐... 나도 도와주고 싶다네...." "이 아저씨야말로 덩치는 이래도 부드러운 손길을 지녔거든. 켈켈켈..." "..... 저기.... 아까 본 애 같지 않아?" 나는 이렇게 분명히 한 번 더 말렸으나.... "푸헐헐... 네놈 아까 그 여자 애한테 심하게 당하더니 이젠 오락가락 하는구나? 쬐끄만 기집애가 무섭다고 오줌까지 쌌으니 오죽할꼬......"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우린 마법 아이템으로 여기에 온 거라구. 덕분에 순식간에 이동. 그 쬐끄만 여자애가 어떻게 여기까지 단숨에 올 수 있단 말이야? 후후후...." "켈켈켈.... 별 씨나락 까먹는 소릴 다 듣는 군. 걔가 아까 우리 겁먹으라고 뻥친걸 믿냐? 그 쪼끄만 게 마녀라고?" 이따우 말이나 하믄서 그 마녀의 화를 자극하는 것이 아닌가? 마녀가 천천히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나는 아까 보았던 그 검붉은 색의 눈에서 빛이 번뜩이는 것을 보고야 말았다. 헉-- 난 정말 저주에 걸려버린 것 같다. 난 나도 모르는 새에 나는 뒷걸음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녀석들은 뇌전마법으로 충격을 주는 아이템과 그물 등을 들고 마녀에게로 서서히 다가서고 있었다. 니들... 이제 죽었다. 나는 몰러...... "켈켈.... 어찌된 일인지... 아까 걔랑 비슷한 애가 여기에도 있군." "잘 됐지 뭐, 허탕칠 뻔했는데, 비슷한 애라면 복수의 의미로... 후후후...." "푸헐.... 귀여운데, 꼬마 아가씨?" 그런데,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른다. 평생 쫓아다니는 마녀의 저주보다는 상처 몇 개 남는 것이 나을 테니까. 그 순간 하얀빛이 허공을 가르며 마녀를 향해 다가서는 세 명을 순식간에 쓰러뜨렸다. 놈들에게서 피가 철철 흘러 넘치지 않는 것을 봐서는 그 검사는 적당히 칼등 같은 것으로 놈들을 쓰러뜨렸나 보다. 그러나 그물이나 옷 등은 갈기갈기 흩어져 넝마가 되어 너덜거렸다. 난, 나는 그 순간 보았다. 검사가 칼을 휘두르는 순간은 너무 빨라 보지 못했고 그가 칼을 다 휘두르고 멈춘 순간을 말이다. 우연히 시선이 머무른 칼의 손잡이 끝 부분에는... 내 시력이 좋다는 것은 이미 밝힌 바 있었지? 거기에는 내가 가우니시아에 살 때 몇 번 보았던 라이나폴스 왕가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왕가를 상징하는 푸른색의 보석(사파이어)과 함께. 얼빠진 동료 놈들도, 처음엔 갑자기 나타나서 판을 깬 검사에게 무턱대고 뎀비려하더니 그 상징을 봤나보다. 부리나케 내 쪽으로 도망쳐 온다. 나는 이미 등을 돌리고 뛰고 있었고. 우리들은 정신없이 뛰어서 도망갔다. 아마 그 검사가 따라오려 마음만 먹었다면 금새 붙잡혔겠지만 그는 마녀만을 지키는 것이 목적이었나 보다. 으으.... 우린 정말 큰 걸 건드린 거야. 마녀에다 마녀를 지키는 왕가의 근위기사쯤 되는 녀석이라니...... 그러고 보니 라이나폴스의 왕비는 마녀라고 한다. 어쩌면 저 작은 마녀는 그 딸일지도 모른다. 붉은 망토의 마녀로 유명한 바로 그.... 으아아아----!!! 그럼 우리가 마녀공주를 건드릴 뻔한 거잖아? 정말 잡히면 죽음이다. 다리에 모터가 달린 것처럼 빨리 도망가 버리잣----!! ..........히유우우우.... 그게 시작이었다. 내 운이 지지리도 나빠지기 시작한 것은. 거기에서부터 내 인생은 꼬여버렸다. 그 뒤로 엄청난 건수를 건졌다 했는데 오히려 그것 때문에 아즈라엘단에서 쫒겨 나고, 마법 아이템도 다 빼앗기고. 아마 목숨을 건진 것만도 다행일지도 모르지. 그 선녀 같은 여자의 목에 상처를 냈으니 두령이 노발대발했다지. 그러게 이놈들아... 내가 살살 하라고 했잖아. 무식한 것들. 그때도 내가 아니었으면 마법엘프에게 당하고 있었을 거다. "켈켈... 여기에..... 오오... 저 머리결....." "오늘도 허탕인가 했더니 이게 왠 떡이냐...!! 우후후후...." "푸헐헐... 요정인가... 옷, 눈이 부시군... " "두목이 좋아하시겠는걸? 저런 머리 좋아하신다는 데..... 특별 수당을 받을지도 몰라." 하고 깝죽대다가 하마트면 그 실버블론드의 여자조차 놓칠 뻔한 놈들. 나는 녀석들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재빠르게 그 여자의 뒤쪽으로 가서 여자에게 마법아이템으로 뇌전 충격을 주었다. 여자는 아무 반항 없이 가볍게 쓰러져버렸다. 그런데 또 황당한 일이 생겼으니, "헉.... 어허... 저, 저런 이쁜이가 또 어디서 나타난 거지? 후후..." "알 게 뭐냐? 며칠동안 허탕치더니 오늘 횡재 한 거지. 푸헐∼ 우리가 이 여자를 잡고 있을 테니까 니들 둘이 저 여잘 잡어." 예쁘다고 무조건 횡잰 줄 아냐?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보건대 저 엘프도 뭔가 한가닥 하는 엘프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가 경고를 했건만, "저... 저 여잔... 저건 엘프얏--! 저 뾰족한 귀...." "허어... 엘프? 켈켈... 정말 운이 트였군. 이런 절세 미인에다 고가에 팔리는 엘프라니.... 잡자∼!!" 이 머저리들은 머리 속에 '엘프는 비싼 상품'이란 공식밖에 없다. 그거야 아무 힘없는 하급 엘프들의 경우 얘기지. 아니나다를까 내 불길한 예상대로 그 엘프에게는 뭔가 있었다. "그녀를 내려놓지 못해? 이 더러운 산적 놈들∼!!" ......말투를 보더라도 말이다. 어느 보통의 엘프가 저런 말투를 쓴단 말인가. 그리고 잠시 후 녀석들이 덤비는 것을 피해 뒤로 사뿐히 치솟던 그 엘프는 뭐라고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 같은 것을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 엘프의 손바닥에서 괴상하게 생긴 조그맣고 푸른 화살들이 이편으로 마구 날아들었다. 허걱--! "마법을 쓰는 엘프닷! 도망치자--_?!!" "으허헉..." "흐걱..." "저 예쁜이는 무서우니까 놔두고 이 예쁜이만 잡아가잣...!!! 이 정도면 하나로도 충분햇--!!" 그래도 의리는 있었기에 나는 혼자만 도망가지 않고 놈들을 불렀다. 아니, 실은 그 머저리들 중의 하나가 전이 마법의 아이템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지만. 여하튼 우리는 무사히 그 기적처럼 아름다운 여자를 얻어서 본거지로 전이했다. 그것은 다 내 덕이지. 그럼. 그런데 한 넘이 그 여자를 무식하게 어깨에 들쳐 매는 바람에 그때 목에 상처가 생겼나 부다. 그래서 우리는 잠깐 사이에 천국과 지옥을 왔다갔다했다. 처음엔 평생 먹고 살 만큼의 금화와 화려한 만찬을 상으로 받고 입이 찢어져라 좋아했었다. 분명, 그것은 천국이었다. 우리 옆에는 꽤나 반반한 계집들도 하나씩 앉아서 식사 시중을 들었다. 으아아∼ 그러나 이것이 '마지막 만찬'이 될 뻔했다니. 식사 후 우리는 정중히 어느 방으로 모셔졌다. 이상하게 지하로 내려가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나와 조원들은 구름 위를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뭐, 생각할수록 끔찍하니까 간단히 줄이면, 우리는 그 지하의 퀘퀘한 냄새가 나는 피가 낭자하고 음산한 방에서 여러 기구들을 거치며 거의 죽었다 살아났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부 두령 케이의 말이 더 끔찍했다. '지금, 두령께서 바쁘셔서 다행인 줄 알아라. 그 분이 애초 예정대로 너희들을 손수 봐주려 하셨다면 이 정도로 끝나진 않았겠지.' 그 말은.... 초죽음이 되어 의식의 끈만 간신히 잡고 있는 나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공포로 다가왔다. 그리고 정신을 읽었다 깨어난 순간 나는 동료들과 함께 어딘가의 벌판에 버려져 있는 것을 알았다. 그간 수족처럼 지니고 다녔던 마법의 아이템들과 아즈라엘단임을 상징하는 표식도 다 사라지고 나는 또 다시 떨거지 산적, 혹은 길거리 건달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한 처지가 되고 보니 웬수 같이만 느껴지던 조원 놈들이 왠지 다정한 형제처럼 느껴졌고, 그건 그들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우린 다 같이 모여 앉아 펑펑 울면서 서로의 처지를 위로하며 함께 아파했다. ....여기서 '아파했다'는 것은 마음이 아팠다는 의미가 아니라 고문을 당해 여기저기 결리고 쑤시고 하는 몸이 아팠다는 의미이다. 그렇게 떨거지 도적단쯤으로 하락해버린 우리들은 숲 속에서 지나가는 연약해 보이는 행인들의 돈푼이나 우려내면서 하루하루를 영위했다. 그리고 림보아 가도가 시작되는 근처, 소나무 숲 사이에서 자리를 잡아갈 무렵 우리는 희안한 광경을 보았다. 지금 와서 생각하건대.... 내 인생에 있어 조금이라도 희안한 것을 보았을 때는 무조건 피하고 보는 것이 상책일 것 같다. 지금까지 겪은 일들도 다 그렇지 않던가. 그러나 이건 정말 대단한, 굉장히 우스운 것이었다. 거의 배꼽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세상에 나귀를 타고 그 짧은 다리를 털레거리면서 여행하는 드워프라니... 내 생전 들어본 적도, 상상해본 적도 없다. 그리고 그건 동료들도 마찬가지였기에 우리는 사정없이 웃어버렸다. 나귀 위에 짐을 바리바리 싣고 오솔길을 지나가는 드워프를 보며. 우리는 그 드워프를 잡기로 했다. 그가 가진 짐만 해도 뭔가 있어 보였지만,--드워프의 짐이라니. 귀한 금속이나 보물들이 들었을 것이었기에--그 드워프 자체도 굉장한 돈벌이가 될 듯 했기 때문이다. 붙잡아다가 나귀를 타는 것 외에도 나귀 위에 물구나무서기라던가 옆으로 누워 달리기라던가하는 여러 가지 재주를 가르친다면 금새 떼돈을 벌 듯 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비웃음 소리를 이미 듣고 무언가 준비를 충분히 해 놓았을 드워프를 둘러싸고 녀석을 잡을 의사를 밝혔다. "야, 나귀 탄 대장! 어이, 재주 좀 더 부려봐∼!! 켈켈켈..." "후후... 너 실은 드워프의 탈을 쓴 인간 아니냐?" "이봐 할아범∼! 말 좀 해 봐. 드워프도 말을 할 줄 안대며?" "우리한테 그 짐들 순순히 넘기지 그래? 네 재주 있는 몸뚱이도 말야. 푸헐헐∼" 보통의 드워프라 할지라도, 머리가 있고 기본적인 맷집이 있지. 그 힘든 땅파기며 대장장이 일을 하는데 어찌 맷집이 없겠는가? 돌이켜보면 우리의 처사는 '드워프'라는 자체를 완전 무시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나귀 타는 드워프의 꼴이 워낙 우스웠기 때문에 우리는, 아니 이 똑똑한 나조차도 그런 것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우리는 모두 황당함에 기가 막혀 입을 벌리고 널부러져 하늘만 쳐다보는 신세가 되었다. 어느 누가 상상이나 해 봤겠는가? 나귀 타는 드워프에, 마법까지 쓰는 드워프라니! 그 드워프가 쓴 주문이 뭔지도 모르겠다. 손을 내 밀며 뭐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는 것밖에는. 그리고 그 드워프는 몽땅한 몸에 어울리지 않는 날랜 동작으로 나귀에서 풀쩍 뛰어내리더니 거품을 물고 뒤로 발라당 넘어져버린 우리들에게로 에벤하임 밑바닥에나 둥지를 틀고 있을 괴수만큼이나 요상한 웃음소리를 흩날리며 서서히 다가왔다. 그건.... 그건 정말 공포 그 자체였다. "크롸롸롸롹∼, 니들 나한테 뭐라 그랬어? 응? 나귀 탄 대장? 말을 할 줄 아냐고? 할아범이 어째? 니들이 감히 나, 위대한 최초의 드워프 마법사 글라인님을 무시하는 발언을 그렇게 서슴없이 했겠다? 키르르르륵∼" - 콱-- 콰직--- 콰지직--- 콱콱---!! 그리고.... 우리 중 제일 살집이 큰 동료에게 엄청난 소리를 내는 공포의 타작이 이어졌다. 어쩌다보니 그 드워프에게서 제일 멀리 떨어져 있던 나는 간신히 몸을 추스려 일어나 정신없이 타작중인 드워프의 눈을 피해 수풀 사이로 몸을 숨기고 온 몸의 힘을 다 짜내 지금 이렇게 도망중인 것이다. 내 길고 긴 신세 한탄은 여기에서 끝났으면 좋겠다. 아즈라엘단이던 때에 있던 마법 아이템들이 정말 하나만이라도 있었으면 하고 간절하게 바라게 된다. 하지만 지금 누군가 나를 불러 세웠다. 어린 목소리. 정말 이젠 별놈에게 다 걸리려나.... 그래도 그 괴물 드워프의 공포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지라 지금은 어린 목소리마저도 놀랍기만 했다. "히야아악---!! 누, 누구요?" 나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목소리가 들려온 듯한 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정말 수풀 속에 뭔가 숨어있기라도 한 것인가? 내가 시선을 아래로 향하려는데 눈앞에 뭔가 희뿌연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점점 더 확연히 보이는 그것은 반투명한 젤리 같은, 어찌 보면 연기 같기도 한, 그러나 눈 코 입이 달린 부유체..... "………………." - 쿠당---!! "에엣…. 이봐, 너--!! 그냥 기절해 버리면 어떡해? 이봐아∼ 날 좀 재밌게 해달란 말이얏∼!! 아님 쿠키를 내 놓던지…. 야, 이놈아아아---_?!!" 유령이 쿠키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하는 소리를 어렴풋이 들으면서 나는 의식 저 편으로 여행을 떠났다. 다시 눈 뜬 세상은 제발 내게 편한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아니, 이젠 착하게 살게여. 어무이... 지 좀 살려주이소......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