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수정판] 공녀(貢女) : Prologue #. Prologue [이 문제는 신속하게 처리하는 게 좋을 듯 합니다. 현자의 탑의 지원을 받아 이틀 내로 처리하도록 하는 게 어떻습니까?] [그게 좋겠습니다. 이틀 뒤 시행하는 겁니까?] [예. 그럼 이 문제는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마법구에서 흘러 나오는 빛은 허공에 여섯 사람의 모습을 그려 내고 있었다. 제국을 제외한 여섯 왕국 왕의 모습이, 마법구에서 나오는 빛이 사그라듬에 따라 허공으로 흩어져 갔다. "어째서 이런 일이 생기는지… 하아!" 황제는 근심 어린 표정으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라면 귀족들이 앉아 있었을 회의실의 의자는 한산했고, 그 빈 자리들을 보며 황제는 다시 얼굴을 찌푸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황태자 루블리츠가 그의 얼굴을 보며 의아한 듯 말했다. "아버님, 생각하고 말 것도 없는 문제가 아닙니까? 이 엘루시아 세계 전체가 걸린 문제입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루블리츠. 귀족들을 만만하게 보지 말거라. 바로 앞에 떨어진 이익 밖에 보지 않는 그 치들은, 분명 이번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루블리츠는 그 것도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다시 의견을 바꾸지는 않은 듯 했다. "그렇다 해도 고작 500명입니다. 저희 제국에 할당된 수는 겨우 100여명이고 말입니다. 아버님, 지금 귀족들에게 딸의 존재는 이미 정치상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나 재산을 늘리기 위한 도구로 전락한 지 오래 입니다. 이 귀족계에서 정이 두터운 관계는 찾아보기 힘든 일이 아닙니까? 그들도 살기 위해서 라면 칙령을 어기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루블리츠가 왜 그러는 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자, 황제는 여전히 주름잡힌 얼굴로 말했다. 루블리츠의 말처럼 쉽게 해결될 수 있을 만한 일이라면 그가 이렇게 걱정하고 고민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왕은 18세~25세 사이의 백작가문 이상의 영애를 원했다. 특별한 병이 있어서도 안 되고, 신분이 더 낮아서도 안 돼. 백작 이상의 작위를 가지고 있는 귀족들이 딸을 그냥 내어 줄 것 같으냐? 적어도 많은 금액을 요구할 것이 뻔할 뿐더러, 작위를 원하는 자들도 있을 게다. 그렇다고 작위가 낮거나 없는 가문에 백작 위를 내려 해결해서도 안 된다. 귀족들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야 없지 않느냐. 거기다, 그렇게 되면 이제까지 제국을 지탱하고 있던 법이 무너져 내린다." 지금 황제는, 좋고 완만한 성격으로 백성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신하를 아끼고 활용할 줄 아는 인물이었으며 정확한 판단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는 그의 아래에 있는 세 공작가문과 함께 제국 최대의 성황기(盛況期)를 이뤄 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더욱 고민스러웠다. 아무리 이런 상황이 닥쳤다고 하지만 자신의 딸을 '상납'해 오라는 명령을 어떻게 그들에게 내리라는 말인가. 얼마 전, 대륙에서 숨어 활동하던 흑마법사 길드에서 마왕의 전언을 가진 마족과 함께 그에게 '통보'했다. 그들의 조건에 맞는 백작가문 이상의 영애를 '바치라'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것은 조용히 왕들에게만 전해진 일이라 이렇게 아직 귀족들에게 알리지 않고 결정할 수 있었다. 이번 일이 그들의 귀에 들어갈 시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모르는 것이다. 주제도 모르고 마족들과 싸우자고 덤빌 수도 있었다. "휴우……." 황제가 다시 걱정스런 한숨을 내쉬었다. 루블리츠의 이마가 살짝 접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황제가 한숨을 내쉬며 옆에 드리워진 줄을 잡아 당겨 시종을 불렀다. 큰 문이 열리며 시종이 모습을 드러내자 황제는 시종에게 옥쇄를 찍은 서신을 던져 주며 말했다. "지금 곧 귀족들을 소집하라! 특히, 세 공작께서는 꼭 참석하라 이르라!" Subject [수정판] 공녀(貢女) : 제1화 [마계의 공녀로!] #. 제1화 [마계의 공녀(貢女)로!] * * * * * * * * * * * * * * * 믿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어머니의 양수 속에서 헤엄치던 때를 기억한다. 언제나 편안하게 귓가를 울리던 어머니의 규칙적인 심장 고동소리…. 세상에 그것보다 더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이 또 있을까? 내가 처음 태어나던 때를, 흐릿하게나마 기억한다. 이상하게 목이 답답하고 가슴이 아파 왔다. 뭔가 아주 답답한데 주위는 깜깜하기만 해서 불안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귀를 통해 낯선 감각이 느껴지고, 온몸은 '무언가'에 포근하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역시 익숙하지 않아 불편하고 불안했다. 조금 전까지 느끼고 있었던 온기를 찾아 마구 발버둥치고, 곧 내 몸에 닿는 무언가 '따뜻한' 것에 조금이지만 안심했다. 나중에 어머니에게 여쭤 보니 그 때 내가 울지 않아서 유모가 무척이나 당황했었다고 한다. 그 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나는 행복감에 젖곤 한다. 그 때가… 내 생애에서 두 번째로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아아,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내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은 '그 청천벽력같은 일'이 없었더라면, 지금쯤 나는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루피아 자서전' 中 발췌========================== 제국 시리어스에는, '제국의 기둥'이라 불리우는 세 가문이 있다. '엘 세느안트' 가(家), '칼르니르' 가(家), '에스베크' 가(家). 칼르니르 가문은 대대로 소드 마스터를 배출함으로써 '제국의 검'이라 불리며 칼르니르 가의 수장은 '대륙 제일의 검사'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리고 에스베크 가문은 황제의 옆에서 조언을 해 주고 황제의 자문관(諮問官) 역할을 해옴으로써 제국의 지낭(知囊)이라고 불리고 있다. 마법사들의 길드인 '현자의 탑'의 현자에 버금갈 정도의 현자(賢者)이자 마법사를 배출해 내는 에스베크 가문은 언제나 황제의 옆에서 그가 현명한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엘 세느안트 가문은 그런 두 가문의 권력과 다른 귀족들의 불만을 수렴하고 조절해 충돌이 일어나지 않도록 황제의 옆에서 정치를 이끄는, 말하자면 '절충제'같은 역할을 했다. 언제나 엘 세느안트 가문은 문무(文武) 양쪽으로 능했다. 필요하다면 군사를, 또 정치까지 넘나들어야 했던 엘 세느안트 공작들은 언제나 훌륭한 정치가였고, 기사였다. 위에서 길게 설명한 만큼, 엘 세느안트 가문은 긴 역사를 지닌 명문가 중의 명문가였다. 그의 영지에 있는 성보다는 규모가 작았지만 그만큼 화려하고 잘 꾸며져 있는 공작의 저택은, 과연 '명문가'라고 감탄할 만큼 아름다웠다. 원래대로라면 공작의 가족은 시즌이 아닌 이상 영지에 있어야 옳았다. 하지만 공작의 가족사랑은 제국에 널리 알려져 있을 만큼 유별났고 특별했기에 공작의 가족은 모두 수도의 저택에서 살았다. 그런 공작의 저택- 서재에서 믿을 수 없다는 듯한 경악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뭐라구요?" 루피아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불신의 눈동자로 그녀는 아버지를 쳐다봤다. 아버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주먹을 꽉 쥐고 계셨다. 그녀는 천천히, 그리고 침착하게 자신이 조금 전 들어야 했던 '믿을 수 없는' 말을 되새겼다. '마계의… 공녀(貢女)? 내가?' 공녀(貢女). 공물로 바쳐지는 여자… 그 뜻을 되새겨 본 그녀는, 정말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녀의 아버지를 응시했다. 아까처럼 그녀의 아버지는 비참한 표정으로 입술을 꽉 깨물고 계셨다. 부들부들 떨리는 아버지의 주먹을 본 그녀는 미친 듯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것이 뜨거웠다. 손끝이 차가워져 왔고, 조금씩 떨려 왔다. 그런 것을 들키지 않으려 손을 맞잡은 그녀는 조금 진정할 수 있었다. "미안… 하다." 마치, 쥐어짜는 듯한 작고 떨리는 음성. 언제나 자신감에 차 있고, 비록 남에게는 냉정하고 차갑다는 말을 들으시긴 하셨지만 가족이나 친구에게는 더없이 너그럽고 다정하신 아버지셨다. 그런데 저런, 떨리는 음성이라니. "뭐가 미안하다는 말씀이세요?" 그녀의 아버지는 잘못한 것이 없었다. 아무리 믿을 수 없는 말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말을 듣게 된 데에 아버지는 아무런 책임도 없으신 것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사과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루피아는 괜히 화가 났다. "아버지는 잘못하신 게 하나도 없으시잖아요? 엘루시아 세계 전체가 걸린 문제라고 하셨잖아요. 안 그럼 모두 죽는다고 하잖아요? 황제 폐하의 칙령이잖아요." 그녀의 시선이 탁자에 놓여진 금박 입혀진 '소환 명령서'에 가 닿았다. 황실의 문장이 선명하게 박혀 있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그 서신은, 방금 아버지의 품에서 나와 그녀에게 전달되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집에서 업무를 보시던 그녀의 아버지는 낮, 황제 폐하의 소집령에 황성으로 달려 가셨고, 방금 돌아오셔서 그녀에게 저 서신을 전달해 주셨다. 그녀의 시선이 조금 올라 와 아버지에게로 닿았다. "이만 들어갈게요. 내일, 황성으로 출발하면… 되는 거겠죠? 현자의 탑까지 동원되다니, 대단하네요." 후읍, 하고 숨을 들이 마셨다. 진정이 되질 않았다. 가슴은 미친 듯이 뛰었지만,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하기만 했다. 심지어는 미소까지 띄울 수 있었다. 두근거리는, 초조한 속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쓰던 루피아는 최대한 감정을 배제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목소리가 떨릴 것 같았다. 아버지는 그녀의 말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눈을 감고 계셨다. "방으로, 돌아갈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서재를 나섰다. 방문이 탁, 하고 닫히자 그녀는 갑자기 숨이 막혀 왔다. 입술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이를 꽉 앙다물고 빠르게 자신의 방으로 돌아 온 그녀는 문을 쾅 닫고 뒤로 기대 숨을 헉헉 몰아 쉬었다. 방 안에서 침대를 정리하던 시녀 베키가 깜짝 놀란 듯 동그랗게 떠진 눈동자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아가씨? 왜 그러세요?" 루피아는 고개를 절래 절래 저으며 미안한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최대한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노력하면서 루피아는 입을 열었다. 제발, 떨지 마. 하지만 손가락은 벌써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좀 나가 줘, 베키." "네? 아, 예." 베키는 얼굴 가득 의아함이 떠올랐으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방을 나섰다. 베키가 나가자 마자, 루피아는 비칠비칠 걸어 가 침대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리고, 아직까지 떨림이 남아있는 손을 꽉 맞잡았다. 서재에서 쥐고 나온 듯, 황제 폐하의 '소환 명령서'가 그녀의 손에서 살짝 구겨졌다. 손을 펴 명령서를 다시 한 번 훑은 루피아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아 버렸다. 『제국의 모든 백작 이상의 작위를 가진 가문에서는, 딸을 한 명씩……』 솔직히 말해서,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루피아의 이성은 이미 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어떻게 해야, 어떤 식으로 준비해야 할 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짐을 챙기고, 황성으로 가야 해. 그것도 내일.' 생각보다 훨씬 냉정하게 자신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가슴은 아직까지 진정되지 않아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그녀는 긴 속눈썹을 다시 내리고, 손으로 심장부근을 꾹 눌렀다. 손가락을 통해 두근거리며 빠르게 뛰는 심장이 느껴졌다. 감긴 눈으로는 어둠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마계…….' 머릿속을 떠도는 말, 마계, 공녀, 황제, 칙령, 아버지, 오빠들, 어머니, 이별(離別)… 후우, 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옷을 갈아입지 않았지만, 지금 그런 것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도망쳐 보면 어떨까, 생각해 보던 그녀는 피식 웃었다. 도망친다면, 분명 그녀는 어디론가로 돌아 다니며 마계로 가지는 않아도 될 것이다. 하지만 가족들은? 누구보다 황제께 충성하는 아버지는? 기사의 자리에서 열심히 생활하고 있는 오빠들은? 분명 그들은 그녀가 도망친 죗값을 대신 받아야 할 것이다. 또한, 한 명이라도 모자라면 마족이 어떠한 반응을 보일 지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무의식의 세계로 빠져 들었다. 잠에서 깨었을 때는, 이 혼란스러운 머리가 조금이라도 진정되어 있길 바라면서. * * * * * * * * * * * * * * * '제길, 제기랄, 빌어먹을, 망할, 썩을!!' 루피아는 속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알고 있는 모든 욕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명문가의 아가씨가 아는 욕이 많으면 얼마나 많겠는가? 언어적 한계를 느끼며 루피아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젯밤 느닷없이 그런 통보를 받은 것도 혼란스러워 죽겠는데, 오늘 아침에는 예고도 없이 '불청객'들마저 들이닥쳤다. 아침, 아니 새벽에 정신을 차린 루피아는 제일 처음 어머니에게로 달려갔다. 어젯밤 아버지께 이야기를 전해들은 것인지 어머니는 창백하게 굳은 안색으로 침대에 누워 계셨다. 기절하신 후 정신을 차리시지 못하는 어머니는 그녀가 방에 도착했을 때도 침대에 누워 계셨다. 작별인사라도 하려던 루피아는 아쉬웠지만 그냥 뒤돌아 방을 나섰다. '그래…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하자고. 재수가 없었다고.' 아침, 예고도 없이 갑작스레 들이닥친 '불청객'은, 황제의 명이라면 자빠져 죽어라고 해도 곧이 곧대로 들을 그 이름도 유명한 '로열 나이트'들이었다. 첫째 오빠 카에리드 엘 세느안트가 로열 기사단 소속이라 로열 나이트들에 대한 말을 많이 들어 온 루피아였지만, '소환 명령서'를 내밀며 '호위'해 주겠다고 하는 그들을 곱게 볼 수는 없었다. 말만 '호위'이지, 사실은 '감시'라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도망칠까 걱정이라도 되었던 것일까? 그리고 때맞춰 그녀의 세 오빠들도 아침에 만나 볼 수 있었다. 가지런하게 정열해 서 있는 거의 100여명은 되어 보이는 로열 나이트들 사이로, 그녀의 세 오빠들이 울어서 퉁퉁 붓고 빨개진 눈을 등장했다. 평소 차갑기로 유명했던 이데카른마저 그녀를 붙잡고 울었다. 오빠들 앞에서는 괜찮다고 웃어 보이느라, 얼굴 근육이 아플 정도였다. 루피아는 푹신한 의자에 몸을 맡기며 눈을 감고 생각했다. '마계에서 왜 여자들을 원한 걸까? 그들이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납치할 수 있는데. 설마, 우는 여자들을 보면서 희열을 느끼는 변태는 아닐 테지? …아니, 그럴 리가. 적어도 그렇다면 그렇게 세세하게 조건을 달고, 또 번거롭게 요구할 필요까지는 없었을 거야. 그럼 대체 뭐야?' 역시, 궁금한 건 바로 그 문제였다. 그들은 이렇게 여자를 요구할 필요가 없었다. 설마, 남녀 성비율이 안 맞으니 보충하겠다, 는 용도로 끌고 오라고 하는 걸까? 그럼 그 조건은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하지만 그 것도 아닐 것 같았다. 만약 남녀 성비율이 안 맞는다고 해도 그들은 언제든지 개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데다가, 인간과 마족의 결합으로는 반마족밖에 태어나지 않는다. 반마족을 혐오한다고 한다고 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건 아닌 것 같다. 그 문제를 파고 들어가면 갈 수록 마족이 여자 500명을, 그것도 귀족 18~25세 사이의 여자를 필요로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실제로, 역사를 살펴보면 '공녀'가 없던 것도 아니었다. 드래곤이나 미신을 믿거나 두려워 하는 시골 마을에 가 보면 마을 처녀를 괴물에게 바치거나 하는 등의 일이 아직도 일어나고 있고, 약소국이 강대국에게 여자를 바치는 경우도 간간이 있었다. 예전 주위 여러 왕국에서는 시리어스 제국에 공물로 처녀를 바치기도 했었다고 한다. '만에, 정말 만에 하나 돌아 온다고 하면…….' 그렇다고 해도, 사람들의 눈길이 고울 리는 없었다. 분명, 마족에게 더렵혀진 여자 어쩌구 하면서 배척하고 혐오하고, 괴롭힐 것이다. 그녀들 덕에 목숨을 구명한 주제에, 그녀들을 경멸 어린 눈길로 볼 것이 분명했다. 아니, 그것 뿐 아니라 혹시라도 그녀들이 살아 나온 것 때문에 마족이 분노할까 걱정되어 다시 마계로 보낼 가능성도 있었다. 사실, 돌아올 가능성도 희박한 상황이긴 하지만 말이다. "제길! 모르겠어! 내가 그놈들 속을 어떻게 알아? 나중에 물어 보면 되겠지!" 그녀는 주위를 100여명의 기사들이 지키고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린 듯 했다. 물론, 기사들도 웬만한 소음은 넘어가 줄 것일 테지만. 속이 답답해진 루피아는 짜증을 부리며 맞은편 의자를 쾅쾅 걷어 차 버렸다. 철로 만들어진 판에 구둣발 자국이 움푹 났다. '생각하면 할 수록, 정말 기분 더러워. 작별인사 할 시간도 안 줘? 그냥 들이닥쳐 데려가면 어쩌라고! 아… 아버지는 못 봤네. 이런, 평생 못 보는 건데… 휴-.'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녀는 잊고 있었다. 사실상 '감시'라고는 하지만 일단 그녀를 '호위'하기 위해 마차 주변을 둘러싸 지키고 있던 100여명이 달하는 로열 나이트들을 말이다. 갑작스러운 찢어질 듯한 비명(?)에 마차를 세우고 문을 벌컥 연 한 로열 나이트가 다급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레이디 엘 세느안트!" 비명(괴성)을 질렀던 '레이디' 엘 세느안트 루피아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묻는 로열 나이트를 향해 얼른 수줍게 웃으며 대답했다. "호, 호, 호! 바퀴벌레가 있네요. 호호호!" 가증스럽다. 가까스로 레이디의 품위(?)를 지켜 낸 루피아는 바퀴벌레를 찾아내려는 기사를 향해 살포시 웃어 준 다음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래도 명색이 명문 공작가의 레이디인데, '짜증나서 소리 질렀다, 왜!'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말도 안 되는 변명을 철석같이 믿으며 바퀴벌레가 왜 거기 있지? 라고 중얼거리는 기사를 향해, 루피아는 살포시 혀를 내밀어 보였다. '황성에서 내준 마차에 바퀴벌레 따위가 왜 있겠냐? 당연히 거짓말이지!' 어쨌거나 그렇게 도착한 황성은, 저택으로부터 대략 두 시간정도 걸리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엘 세느안트 공작의 직위가 직위이니만큼 그는 자주 황성에 들락날락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두 시간 동안의 고민이 무색하게 '마족 속을 내가 어찌 아리오'라는 간단한 결론을 내려 버린 루피아는 황성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레이디 엘 세느안트." 아마 로열 나이트가 된 지 얼마 안 된 듯, 젊어 보이는 기사 하나가 그녀에게 마차 문을 열어 주며 손을 내밀었다. 부모님과 오빠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머리 위에서부터 투명한 천을 써 얼굴을 가린 루피아는, 기사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물론, '레이디의 품위'를 지켜야 한다는 어머니 카멜라의 충고 역시 잘 숙지해 최대한 조심스럽고 최대한 우아하고, 또 최대한 천- 천히 내린 루피아는 처음 들어 와 본 황성을 쭉 둘러 보았다. '황성은 처음인데… 너무 안쪽으로 들어와서 그런가? 규모는 잘 모르겠고… 화려하군.' 마차에서 내린 그녀가 본 것은, 대여섯 개로 이뤄진 융단이 깔린 계단이었다. 마차에서 내리자 마자 융단에 발을 디딜 수 있도록 해 놓은 것 같았다. 계단을 올라가니, 양 옆으로는 새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복도가 있고, 정 중앙에는 화려하고 큰 문을 향해 융단이 깔린 길이 나 있었다. 높은 천장과 그 곳에 그려진 벽화, 벽에 양각 되어있는 아름다운 신화의 한 장면들. 처음 느낀 것은, 역시 '황성답게 화려하다'는 것이었다. 하얗게 깔린 대리석에는 햇살이 부서져 반짝였고, 쭉쭉 뻗은 복도는 시원스러워 보였다. 평소 어머니 카멜라에게서 지시받은 대로, 루피아는 자신이 내려 오도록 도와 준 기사에게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살짝 까닥여 보였다. 아까 그 로열 나이트를 앞세워 그의 뒤를 걸어가던 루피아는, 텅 빈 복도를 걸어가는 소리에 어쩐지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녀의 옆에는 아버지가 없었다. 아버지는, 결국 아침까지 나오지 않으셨다. 딸을 마계로 보내 버리는 데 차마 만나 볼 수가 없으신 모양인지, 어제 그대로 서재에 틀어박히셔서 나오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렇게 펑펑 울다니… 이데카른 오빠까지. 어젯밤에도 상당히… 운 것 같던데.' 평소 이데카른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그건 보고 기절한다 하더라도 놀라운 게 아닐 장면이었다. 아버지처럼 다른 사람 앞에서는 엄청나게 딱딱하고 차가웠으며, 말수도 없었다. 가족들 앞에서도 필요한 말만 할 뿐 특별히 감정을 드러내지도 않는 게 바로 이데카른이었다. 그녀 앞에서만 살짝 웃어 보이는 게 전부였으니 말이다. 자신을 지나치게 아끼던 오빠들과 부모님을 생각해 보던 루피아는 살짝 웃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긴 복도를 걸어가던 그녀는, 아주 조심스럽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기사의 목소리에 상큼-하게 돌아섰다. 생긋- 웃으며 돌아 선 그녀에게, 기사는 정말, 정말 무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길은 그 쪽이 아니라 이 쪽입니다만… 그 쪽은 복도입니다. 이 융단을 따라 걸어주시면 되는데… 이 쪽으로 와 주시겠습니까?" …그녀는 완전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 * * * * * * * * * * * * * * 넓은 홀에는, 세 가지 색의 로브를 입은 마법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커다란 마법진을 정성스레 그리고 있었다. 황실 소속의 흰색 로브를 입은 마법사와, 현자의 탑 소속의 갈색 로브의 마법사, 그리고 이제껏 숨어 활동했던 검은 로브의 흑마법사, 이 세 부류였다. 다른 때였다면 서로 헐뜯고 마법을 날리며 싸우고 있었을 세 부류는, 황태자 루블리츠의 지도 아래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마법진을 그리고 있었다. 99명의 여자들이 마법진의 정 중앙에서 공포 어린 눈빛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그런 그녀들을 루블리츠는 차갑게 쳐다보고 있었다. '엘루시아 세계 사람들이 모두 죽게 되는 것보다는 낫지.' 사소 취대(私消 取貸). 루블리츠는 평소 신조로 여기는 그 말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모자라는 나머지 한 명을 기다렸다. 엘 세느안트 가문의 공녀(公女)인 '루피아 엘 세느안트'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아무리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는 충신이라는 엘 세느안트 공작이지만, 루블리츠는 확인 차원에서 새벽같이 로열 나이트 100명을 보냈다. 그런데 아직까지 도착하지 않은 것이다. '그 공녀께선, 아직 단 한 번도 사교계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 궁금하군.' 그 때, 중앙 문이 열리며 엘 세느안트 가에 보냈던 로열 나이트 중 한 명이 들어왔다. 그는 루블리츠에게 다가가 절도있게 무릎을 꿇으면서 말했다. "엘 세느안트 공작가 영애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문가에서 공녀(公女) 엘 세느안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발 한 발 에스코트도 없이 당당하게 발걸음을 내딛은 그녀는, 한 두발짝인가 들어 와 주위를 둘러보기라도 하려는 듯 자리에서 멈춰 섰다. 하얀 천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그녀의 모습은, 아니 그 존재감은 이미 홀을 적막감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마계로 가는 것에 반항이라도 하듯이 순백색 새하얀 색의 드레스로 온몸을 감싸고, 흑단같은 머리카락은 앞으로 흐르듯 내려 놓았다. 장갑을 끼지 않은 팔의 피부는 눈처럼 새하얗기만 했고, 언뜻 보면 연약하게만 보였지만 그녀의 몸 전체를 돌고 흐르는 알 수 없는 존재감은 절대 그녀를 얕볼 수 없게 만들었다. 그녀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당당한 걸음걸이로 여자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다른 여자들처럼 울지도 않았으며, 가기 싫다고 난리를 부리지도 않았다. 울고 있던 영애들 사이에서 두 사람이 그녀에게 다가가 안겼다. 자신에게 안겨 무작정 울기만 하는 그녀 둘을, 레이디 엘 세느안트는 잘 달래서 마법진 안쪽으로 데리고 갔다. 알고 보니 그 두 명은, 그녀가 모습을 이 자리에서 드러내기 전에 유일하게 친분이 있었던 두 공작가문의 영애들이였다. '에리나 칼르니르'와 '세키라 에스베크'. 시리어스 제국의 세 공작들은, 젊었을 적 함께 대륙을 여행했던 절친한 사이였다. 대륙을 함께 여행하며 지금의 부인들을 만났고, '영웅'이라는 이름 또한 얻었다. 레이디 엘 세느안트가 비록 사교계에서 활동하지는 않았었다고는 하지만 친구 하나 없는 폐쇄적인 생활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소식은 간간이 저 두 사람에 의해 사교계에 전해졌고, 그 소식 하나에 사람들은 그녀에 대한 호기심을 키워 갔다. 그 둘이 그녀에게 안겨서 울음을 터뜨리자, 그것이 스위치가 된 듯 주위 모든 영애들이 그녀를 중심으로 매달려 울음을 더욱 크게 터뜨리고 말았다. 천 속 표정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레이디 엘 세느안트는 그녀들의 등을 토닥거려 주고 달래 주며 눈물을 닦아 주었다. '어째... 묘한 상황이군. 가장 어린 18살에게 안겨 울음을 터뜨린다?' 그 상황을 묘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루블리츠는, 마법진이 다 그려졌다는 마법사의 보고를 받았다. 원래대로라면 온갖 절차를 밟고 선언과 함께 인사를 하며 그녀들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난장판이 되어 버린 이 상황에서는 절차고 뭐고 필요없을 것 같았다. 그는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마법사들에게 간단한 손짓을 보냈다. "^%$@&@&**%$^%@^*$#@&#^*%#@&@%$^%#@^%~" 아마 룬어인 듯한 알아듣지 못할 말로, 마법사들이 3중으로 중얼거리기 시작하자, 홀 안을 가득 채운 금색 마법진이 화려하게 빛났다. 마법사들이 웅얼거리며 알 수 없는 손짓을 두어 번 하자, 드디어 주문이 완성된 모양인지 마법진에서 나는 빛과 바람이 더욱 거세졌다. 마법사들은 감았던 눈을 한꺼번에 뜨며 크게 소리쳤다. "마계로 통하는 문이여, 게이트 온!" 우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여자들의 모습이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사막의 모래가 날리듯, 점차 흐려져 가는 여자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루블리츠는 레이디 엘 세느안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도, 레이디 엘 세느안트는 우는 여자들을 달래 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 * * * * * * * * * * * * * * 중앙 문을 지나치자 나온 곳은, 넓은 홀이었다. 평소 같이 있으리라 생각도 하지 못했던 세 부류의 마법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루피아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세상에! 흑마법사라니... 그래, 흑마법사가 소식을 들고 왔다더니 정말인가 보네. 눈에 익은 룬어나 고대어 등등으로 그려진 복잡 미묘한 마법진을, 그녀는 한두 걸음 가까이 다가와 자세하게 관찰했다. 형식 등은 알 수 있었지만 저걸 그려보라고 하면 못할 것 같았다. '그래, 저걸로 마계로 간단 말이지.' 순간, 현실감이 몰려왔다. 이제 다시는, 이 땅을 밟을 수 없을 것이다! 쉽게 포기할 수 있을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머리는 이미 인정하고 있었다. 옛날부터 그랬다. 아무리 믿을 수 없는 일이어도, 가슴은 두근대며 뛰고 있어도 머리는 이미 그 현실을 받아들이고 대책을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이 마지막이야.' 입 안이 바싹 바싹 말라 왔다. 하지만 루피아는 절대로 약한 모습 따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당당하게 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주위를 훑어 보았다. 마법진의 정 중앙에는, 아마도 99명일 여자들이 모여 있었다. 여자들은 한데 모여 앉아 훌쩍대며 울고 있었다. 그녀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는 루피아가 보기에도 그다지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루피아는 지독한 기분이었다. 억지로 끌어 넣어도 반항했을 마법진 위에, 그녀는 스스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울 것만 같았다. "흑, 흐아아앙! 루피아아-!!" "루, 루피아~ 우리 이제 어떡해! 흑, 흡… 흐윽!!" 세키라와 에리나였다. 자신에게 안겨 들며 울기 시작하는 친구들을 토닥거려 주며, 루피아는 마법진 안쪽으로 들어갔다. 간단하게 짐을 챙겨 오긴 했지만 다들 짐에는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하긴, 마계로 넘어가면 어떤 꼴을 당하게 될 지 모르는 데 그런 데에 신경 쓸 겨를이 어디 있겠는가? "흑- 흐아앙, 아아앙- 으아아앙~!!" "지, 진정해, 세키라. 자, 자, 들어가자." 루피아는 어린애처럼 우는 에리나와 세키라의 등을 토닥이며 둥근 원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그녀의 하얀 드레스가 흠뻑 젖을 정도로 매달려 우는 둘의 등을 토닥거렸다. 아마 이 둘도 식구들 앞에서는 울지 못했을 것이다. 두 사람도, 그녀 못지 않게 자존심이 센 성격이었던 것이다. 아마 세키라라면 조용히 눈물 몇 방울 흘렸을지 몰라도, 에리나는 끝까지 도도한 표정으로 당당하게 집을 걸어 나왔을 것이다. '후우- 이러면 울 수도 없잖아. 하긴, 울 생각도 없지만.' 그녀가 달래 주는 모습을 보았는지, 주위 여자들도 슬금슬금 모여들어 울기 시작했다. 혼자 눈물을 닦아 가며 울던 여자들마저도 그녀에게로 달려들어 엉엉 울기 시작했다. "흑- 흑, 이제 우리 어떡해…." "틀림없이 죽게 될 거야… 왜 이런 일이……." '이, 이게 무슨 일이야! 내가 무슨 손수건(?)인가? 왜 나한테 매달려서 우는 거얏?!' 속으로 절규하는 루피아였지만, 그녀는 될 수 있는 한 그녀들의 등을 토닥이며 안아 주었다. 그녀들의 눈물에(눈물 뿐이었을까 의심스럽지만) 젖어버린 드레스 때문에 찝찝했지만 별 수 없었다. 설마 마계에 옷 정도야 없을까, 하고 중얼거린 루피아는, 최대한 얼굴에 쓴 천만은 사수하기로 했다. '제발 그만 좀 울어, 이것들아!' -하고 소리지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루피아는 꾹 눌러 참았다. 그녀의 성질이 튀어나와 버리면, 이 여자들은 더욱 엉엉 울어 버릴 것이 뻔했다. 게다가, 평소 친하던 세키라와 에레나가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우는 것을 보니 안쓰럽기도 했다. '그래, 울어라, 울어.' 루피아는 자신도 같은 상황이라는 것을 잊어버린 모양이다. 루피아는 자신에게 안겨 드는 여자들을 토닥이고 달랠 즈음, 점차 마법진에 주위의 마나(Mana)가 모이며 금빛으로 화려하게 빛났다. 룬어와 고대어, 마나와 마법진, 마법사들의 두 색깔 마력이 하나로 모여들며 마법진 바깥쪽을 검게 물들였다. '왜 나는 끝이 이 모양이야?!' 다른 거라면 몰라도, 우는 여자 달래 주며 '내 세계'를 떠나다니… 참 폼 없게도 떠난다, 고 생각하며 루피아는 에리나와 세키라를 꼭 안아 주었다. * * * * * * * * * * * * * * * "…갔겠지?" 카에리드가 제일 처음 침묵을 깼다. 그렇게, 꼴사납게 우는 모습으로 동생을 보낸 후, 그들은 망연자실하게 저택 앞 분수가에 주저앉아 있었다. 어젯밤, 아버지로부터 그 소식을 듣고서 얼마나 울었던가. 너무 울어 머리가 아플 정도였다. 술에 취해서, 새벽까지 울어 대던 그들은, 결국 이렇게 망연히 그들의 소중한 여동생을 보내고야 말았다. "다시, 볼 수 없겠지? 그렇겠지? 응? 형…." 물기 젖은 목소리로, 트로에가 물었다. 어렸을 때부터 소중하게 지켜 온 그들의 여동생, 예쁘게 웃는 보랏빛 눈동자가 떠오르자 목이 메어 왔다. 루피아는 그들에게 있어 특별한 의미를 가진 존재였다. 맨 처음 루피아가 세상에 태어나던 날, 다 함께 이 아이만은 지켜 주자고, 그렇게 맹세했건만, 그랬건만! "황제…? 대륙민을 위해…? 모두를- 위해서?" 황제의 명령이었다. 루피아를 보내지 않으면 대륙에 존재하는 인간이란 인간은 모두 죽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루피아만, 루피아만 데리고 도망쳐 볼까도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들에게 있어 루피아는 더할 수 없이 소중한 존재였지만, 부모님이 갖게 될 책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목숨이라는 게 너무 무거웠기 때문이다. 후회하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다. 지금에 와서는 너무 늦어 버렸다. 이미 떠나 버렸기 때문에. 카에리드와 이데카른, 트로에는 다시 눈에 눈물이 차 오르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아침의 해가, 시리도록 푸른 하늘로 떠오르고 있었다. * * * * * * * * * * * * * * * 툭! 책이 손에서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에드윈드 에스베크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자신의 아버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렇게. 에스베크 공작의 얼굴은 아래를 향해 있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그렇게 꽉 깨물고 있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버지?" 아니어야 했다! 거짓말이어야 했다. 에드윈드는 목으로 침을 삼키며 침착하게 다시 물었다. 제발, 잘못 들은 것이기를! 귀가 잘못된 것이기를! 그렇게 기도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진실을 들려 주었다. "네 누님은… 마계의 공물(貢物)로, 공녀(貢女)로 바쳐졌다." "그,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요! 잠깐- 아주 잠깐이었잖아요! 겨우 몇 달이었을 뿐인데, 그 사이에 누님께서 사라지셨다고? 믿을 수 없어! 아버지, 거짓말이라고 해 보십시오! 왜? 누님께서는 제국의 공녀(公女)이신데, 높은 신분이신데 그런…!!" 겨우 몇 달일 뿐이었다. 겨우 몇 달 연구소에 틀어박혀 연구하는 동안, 아버지는 그의 누님이 마계의 공물로 바쳐졌다 하신다. 믿을 수 있겠는가? 에드윈드의 물기 가득한 녹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무 대답 없이 고개를 떨구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거짓을 찾을 수는 없었다. 에드윈드는 천천히 주저 앉았다. "세키라 누님……." 눈물이 방울방울 세어 나왔다. 볼을 타고 흐르는 맑은 눈물방울이 아래로 떨어져 두꺼운 남빛 카펫을 적셨다. 에스베크 공작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그의 방을 나섰다. 그는 방을 나서며 주저앉은 아들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말했다. "마계에서 제시한 조건에 맞는 수가, 안타깝게도 공작가문의 아이들까지 다 합해야 겨우 맞더구나. …미안하다……." "……." 에드윈드의 머릿속에는, 연약하기만 한 세키라의 모습이 떠돌고 있었다. 4살 차이의 그의 누님은, 돌아가신 어머님 대신 그를 돌봐 주던, 마치 어머니 같던 존재였다. 아랫입술이 덜덜 떨려 왔다. 그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피가 흐르는지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구해내고 말 거야… 내가, 꼭! -구해낼 거야!" 제 목: [수정판] 공녀(貢女) : 제2화 [마족, 그들의 사정] #. 제2화 [마족, 그들의 사정] * * * * * * * * * * * * * * * 1000여명은 족히 수용할 수 있을 듯 넓은 공간, 서열 500위까지의 마족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무언가 불만스러운 듯한 얼굴로 그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공간의 정중앙을 차지하는 큰 마법진이었다. 보통 간단한 수인(手印)과 시동어만으로 마법을 실행하는 암흑마법(暗黑魔法)을 쓰는 마족들에게는 굉-장히 귀찮아 보이는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고대어와 룬어 등등으로 이루어진 그 마법진은, 그 어두운 공간에서 금빛을 조금씩 뿜어내고 있었다. 드디어, 마법진이 화려하게 빛나며 웅웅대는 마나를 풍기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기분 나쁜 음을 내며 금색으로 빛나던 마법진에서는, 희미한 잔상이 어려가는 것처럼 그림자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흐릿하던 그들의 모습이 점차 뚜렷해져 갔다. 미숙한 인간들이 보내는 탓에 조금, 아니 많이 느리게 형상을 갖춰가던 그들은, 잠시 후 마침내 완벽한 500명의 모습을 그려냈다. 나풀나풀한 비실용적일 것 같은 드레스를 두르고,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들이었다. 마족들의 얼굴에 짜증이 비췄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지만, 짜증이 나기는 매한가지였다. 인간들 중에서도 '귀족'이라는 부류를, 그들도 가장 싫어했다. 물론 계약으로 인해 중간계로 가는 경우 중 십중팔구가 흑마법사거나 권력을 가지고 싶어하는 귀족인간이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귀족'이라는 족속에 대해 더욱 잘 알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소위 '레이디'라 불리는 인간들도 짜증나기는 마찬가지였다. 콧대만 높고 사치스러우며, 할 줄 아는 것은 소리치고 떽떽거리는 것 밖에 없는 짜증나는 부류. 그런 생각을 하며 잔뜩 인상을 구기고 있던 그 때, 그들의 귀에 예상치 못한 '호통'소리가 들렸다. "제발 그만 좀 짜아아- 늬들 눈물샘은 도대체가, 왜 끝이 없는 거냐아-!!" * * * * * * * * * * * * * * * 루피아는, 점차 뚜렷해져 가는 주위 모습을 보며 식은땀으로 미끈해진 손을 꼭 쥐었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손이 차가워져 있었다. 그녀 역시 중간계의 인간이라, <악마>, 또는 <마족>이 주는 공포감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엘루시아 대륙인이라면 누구나 읽어야 하는 필독서 <성서聖書>에는 마치 세뇌라도 하려는 듯 적혀 있지 않은가? '악마는 지극히 사악하고 반드시 없어져야 할 존재, 사라져야 할 존재다.'-라고. '제, 제기랄, 손이 떨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주변의 모습이 점차 선명해 지면 선명해 질 수록 누구인지 모르지만 꽉 잡힌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서러운 지 울고 있는 여자들은 끝이 없었다. 그런데, 점차 짜증이 났다. 질질 짜는 여자들에게 점점 화가 났다. 물론, 그녀들이 잘못한 것은 없었다. 그녀들은 어디까지나 '곱게 자란' 온실 속의 화초였고,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엘루시아 세계를 구한다는 미명(美名) 아래, 희생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왜 끝이 없는 거냐고!!' 맨 처음 그녀에게 안겨 울던 에리나, 세키라도 사람들을 달래기 바빴다. 달래주지 않고 울게 놔둬도 괜찮겠지만 어느 새인가 상황이 이렇게 번져 버렸다. 아마 세키라와 에리나가 루피아에게 매달려 운 것이 발단이겠지만. 무작정 드레스를 붙잡고 울어대는 통에, 루피아는 드디어 폭발하고야 말았다. "제발 그만 좀 짜아아- 늬들 눈물샘은 도대체가, 왜 끝이 없는 거냐아-!!" 좀 '적당히'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진정할 만 하면 다시 질질짜고, 질질 짜다가 이제는 엉엉 울어대니, 대체가 끝이 안 보이는 것이다. '왜 날 붙잡고 우는 거야!! 친구인 세키라나 에리나는 알겠는데!' 가장 황당한 건, 자신을 붙잡고 우는 이름모를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울어도 울어도 끝이 없는 그녀들을 보자니 짜증이 치솟는 것이었다. 여자가 울고 있으면 맨 처음에는 동정심을 느끼지만 그것도 잠시다. 조금만 오래가도 짜증이 나는 것이다. 루피아가 딱 그 상태였다. "제발!! 제발 그만 좀 울라고!! 벌써 마계에 다 왔잖아! 봐! 안 보여? 저기 마족들 널렸네! 당장 안 그쳐어-!!" 그녀가 소리치자, 그제야 주위를 둘러 보기 시작했는지 공녀들 사이에서 울음이 뚝 멎었다. 대신 두려움에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루피아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 역시 주위를 둘러 보았다. 검게 내려앉은 어둠, 아직 웅웅대며 옅게 마력을 뿌리고 있는 마법진- 그리고, 어둠 속에서- 섬뜩하게 빛나는 수백 쌍의, 붉은 눈동자. 오싹! 두려움이 점차 피어 올랐다. 보기만 해도 섬뜩한 핏빛 눈동자 수백 쌍이 그녀들을 향해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점차 가운데로 향했다. 대략 서른 명 가량이 일렬로 가운데에 서 있었고, 그들을 따라 올라가 가장 마지막, 가장 높은 그 곳에는……. "다 끝난 건가?" 스륵- 검은 머리카락이 어깨를 타고 흘러 내렸다. 의자에서 우아하게 몸을 일으킨 그는, 얼어있는 그녀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태초의 어둠에서 빠져 나온 듯 검기만 한 긴 머리카락과, 그에 대비되는 새하얀 피부- 무엇보다, 섬뜩한 핏빛의 눈동자가, 그녀의 뇌리에 박히듯 선명하게 그려졌다. 아름다우면서도 결코 여성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중성적인 느낌이 더 강했다. 절대적 미(美)를 가진 존재. 그것이, 루피아와 <마왕>의 첫 만남이었다. 지금, 루피아는 '생애 최고의 난감한 상황 Best 1'에 당당히 기록될 수 있을 때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녀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녀 앞에서 그녀를 내려다 보는 남자에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녀와는 달리, 그는 전혀 난감할 게 없다는 표정이었다. "저기, 죄송한데요. 말을 못 알아 듣겠어요." "……뭐라고?" 루피아는 자신도 모르게, 작게 인상을 찌푸리는 남자의 얼굴을 보며 드레스 자락을 꽉 쥐었다. 그의 핏빛 눈을 마주보기 위해서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마치, 자신이 세상의 정점(頂點)에 서 있다는 듯이, 오만한 눈동자였다. 단순히 핏빛의 색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뿜어내는 분위기, 위압감, 힘- 그 모든 것 때문에 마주보기가 힘들었다.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 쉬었다. 저 눈동자는, 그녀를 굳어 버리게 만든다. '여유'가 필요했지만-, 바라는 건 무리였다. "못 알아듣겠어요. 그 쪽은 알아듣는 것 같지만, 이쪽은 전-혀 모르겠다구요. 난 시리어스 제국어 외에 대륙 공통어, 에크라, 네이코, 카즈니, 크니르, 게르노시크, 에웰로니의 언어를 모두 마스터하고 있지만, 그 쪽 말은 전혀 못 알아듣겠어요." 루피아는 평소보다 훨씬 말이 많고 이것 저것 쓸데없는 것까지 늘어놨다. 긴장을 풀기 위한 방법이었지만, 별달리 소용은 없는 듯했다. 마왕은 루피아를 보며 눈살을 찌푸리다가, 옆의 마족과 몇 마디 나눠 보더니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아마도 시종인 듯한 마족이었는데,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겠느냐고 물어본 듯 했다. 그 때, 양 옆으로 서 있던 서른 명의 마족들 중 초록색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이 그에게 뭐라고 말하자 그는 다시 루피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빌어먹을!' 그녀는 자신의 '위치'를 다시 한 번 되새겼다. 자신은, 자신은 '공녀'. 즉, 나라에서 도매금으로 팔아버린 여자였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손짓 한 번, 아니 말 한 마디로도 간단히 죽여 버릴 수 있는 무가치한 존재이기도 했다. 여기는, 이곳은 '중간계'가 아니었다. '마계'일 뿐. 그녀는 특별계층인 귀족이 아니라, 단순히 팔려온 여자였고, 약해빠진 인간일 뿐이다. 그 비참한 사실을, 그녀는 다시 한 번 떠올렸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마왕은, 바로 몸을 돌려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녀가 한참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을 때, 그녀는 자신의 팔을 누군가가 잡아 당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 새 다가 온 마족은, 아까 마왕의 곁에 있던 마족이었다. 아까부터 뭔가를 전달하려 노력하던 그는, 그녀의 팔을 잡아 끌며 한 쪽으로 나 있는 문을 가르켰다. 공녀들은 셋으로 나뉘어서 각기 다른 문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저리로 가자구요?" 마족은 알아듣지 못한 모양이었지만, 그녀가 말귀를 알아 들었다는 것은 안 듯 했다. 루피아는 그 마족의 팔에 이끌려, 다른 여자들과 함께 '어디론가' 끌려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공녀라도, 옷이나 먹을 거 정도는 주겠지?' 설마, 이 눈물(소금기) 젖은 드레스를 계속 입고 있어야 하지는 않겠지? 갑작스레 힘이 쭉 빠진 것 같은 루피아는 극심한 피곤을 느끼며 생각했다. 지금 그녀에게는, 목욕할 수 있는 따뜻한 물과 축축하지 않은 새 옷이 필요했다. 절실하게! * * * * * * * * * * * * * * * 공녀들은 하인들의 안내에 따라 미리 준비된 방으로 안내될 것이다. 공녀들이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완전히 사라지자, 지켜보던 마족 가운데 하나가 끔찍하다는 듯 신음을 흘렸다. 그 공포에 질린 새하얀 얼굴이라니! 마족들은 믿기 싫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정말, 저 여자들을…?" "마신(魔神)께서 내리신 명이다. 근 3만년 만에."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말하는 군주의 말에, 마족들은 절망했다. 저 질질 짜기만 하는 재수없는 것들을 어떻게… 미래에 대한 상상으로 정신이 아찔해진 그들은 잠시 휘청였다. 일렬로 정렬해 있던 서열 30위의 마족들 중 서열 2위의 '아로데 드 벨로시스'가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어쩔 수 없지 않나? 팔자려니- 해." 열받게도, 아로데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전혀 위로를 받지 못한 마족들은 저 웃는 낯에 마력탄을 날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지만 그가 서열 2위라는 점을 상기시키며 가까스로 참아냈다. "무슨 말을 하셨습니까?" 서열 3위 '로이드윈 드 스켈로테'가 아까부터 침묵을 지키고 있던 마왕에게 말했다. 그는 그 여자들이 웅성거리던 소리를 알아듣지 못했지만 마왕은 그 여자의 말을 알아듣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여자 쪽에서는 '모르겠다'는 표정인데, 마왕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말을 못 알아 듣더군. 나만 알아들을 수 있었던 듯 해. 시종에게 확인했지." "아마, 군주께서 마왕의 자리에 계시기 때문일 겁니다. 본래, 마족이 계약을 맺으면 그 상대로부터 언어에 대한 지식을 이전받아 사용하죠. 하지만 이번에는 저쪽에서 넘어 온 것이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어서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일 겁니다. 하지만 군주께선 다르죠. 마왕으로서의 특권, 정도 될까요." 로이드윈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제 공녀의 거주에 대한 것이 문제였다. 임시로 마왕성에 방을 마련해 두기는 했지만 이대로 놔둘 수는 없었다. 그들이 이 곳에 온 이유도 이유였거니와, 마왕이 머무르는 이 마왕성에 저런 인간들을 내버려 둘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 문제에 대해 결정될 때까지는, 일단 이 마왕성에 머물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저와 아로데, 유리아덴이 간단한 교육을 시키고 있는 게 좋겠군요." 로이드윈의 말에, 모두들 긍정하는 분위기였다. 하긴, '로이드윈에게 밉보여 좋을 것 없다'는, 마족들 사이에 파다하게 퍼진 소문을 들어서라도 마족들이 반항(?)할 리는 없었다. 실제로 로이드윈은 마계의 모든 정보를 담당하는 정보부였고, 그에게 잘못 보였다가는 무언가 잃어도 꼭 잃게 된다는 소문이 언제나 뒤따르고 있었다. '건드리면 다친다!'-였다. 어쨌거나 그들은, '이런' 명령을 내린 마신 클리오라를 마음 속으로(드러내 놓고 원망할 만큼 간 큰 녀석은 없다)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신이시여, 저희에게 어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그들의 머릿속에는, 대략 한달 전에 들이닥쳤던 교황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신탁이 내려졌습니다!> '신탁(神託)'이 내려졌다. 무려 3만 년 만에 내려진 신탁이며, 그들의 어버이 '마신 클리오라'의 명령이었다. 마계의 마신을 모시는 교황에게서 신탁을 전해들은 마왕은, 드물게 황당해 하고 있었다. 언제나 침착하고 차갑던 그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번져갔다. "…정말인가, 이 내용이?" 내용이 너무나, 너무나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신탁의 내용은 이러했다. 『'고위 마족'의 칭호를 받은 마왕을 포함한 마족들은-』 "…말도 안 돼. 교황, 정확한가?" 신탁을 받은 종이를 구기며 마왕이 중얼거리자, 교황이 침울한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마계에서는, 모든 마족을 다스리는 '마왕'과, 오직 마신을 떠받드는 '교황'이 존재했다. 교황도 마왕에게 속한 존재이나, 마족들에게서 적당한 존경을 받고 있었다. 교황 역시 당황한 표정이었으나 단호하게 말했다.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한 치 거짓도 없는 진실입니다, 군주시여. 마신 클리오라께서는 이미 중간계로 통하는 문을 10년 동안 열어두겠다고 하셨고, 그리 되었습니다." "어째서 이런 신탁을 내리셨단 말인가?" "저같은 한낱 마족에 불과한 자가, 위대하신 마신의 뜻을 어찌 헤아릴 수 있단 말입니까. 군주시여, 이 것은 '진실'이옵니다. 인간들에게 여자들을 요구하십시오. 백작 가문 이상의 18~25세 귀족영애들을, 정확히 500명을 말입니다." 마왕은 종이를 아주 구겨버렸다. 마왕의 손에 꾸깃해진 종이에는, 교황이 전해 준 신탁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인간계에서 백작가문 이상의 지위를 가진 18~25세 사이의 영애를-』 * * * * * * * * * * * * * * * 루피아는 시종의 뒤를 졸졸 따라 가면서,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 보았다. 이 곳은 '마계'고, 나는 '공녀'다. 그 사실을 계속 반복해서 떠올리면서, 이제 다 각자의 방으로 안내되고 텅 빈 복도를 둘러 봤다. 과연 '마왕성'답게 복도는 어두웠고, 처음 느낀대로, 추웠다. '이곳은 마계, 내가 전혀 모르는 곳이야. 그러니까, 집처럼 편하게 굴어서는 안 돼.' 마치 최면이라도 걸 듯, 자신의 행동을 제어하기 위한 일이었지만, 그녀는 '마왕성'의 모습에 더 흥미가 갔다. 스스로 최면을 거는 행동을 포기하고, 그녀는 앞서 걸어가는 시종의 눈치를 보며 이것저것 구경했다. 복도는, 일단 굉장히 넓었다. 이곳으로 워프되어 오기 전에 스치듯 보았던 황성의 복도가 새하얀 대리석으로 되어 있었다면, 이곳의 복도는 온통 검다는 차이 뿐이었다. 아니, 이 곳의 복도가 더 침침하고, 오래되었나? "…허억?" 그녀는 이것저것 주위를 둘러 보다가, 복도의 벽에 '예술적으로' 매달린 박제를 보고 깜짝 놀라야 했다. 그러니까, 그녀의 기억과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저건 분명…. '저, 저거 오크? 오크를 박제해서 걸어 놔? 그 것도 마왕성에서?' 돼지 머리에 3, 4m는 될 듯한 커다란 몸, 어둠 속에서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초록색 몸체, 허리에 아무렇게나 둘러진 동물의 가죽, 손 대신 벽에 걸려진 투박한 무기.. 그녀가 책에서 보았던 오크의 모습이 분명했다. 오크 박제상을 아주 자랑스럽다는 듯이 박제해서 걸어놓는 이 성은 대체 뭐야? 그녀의 놀란 표정을 보며 시종은 그녀를 잠시 돌아 보았다가 박제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정말 자랑스럽다'는 표정. 루피아는 거북스러운 느낌에 오크 박제를 피하려 옆으로 비켜났다. "박제가 참 잘 되었죠? 건조도 잘 되고, 보존마법도 잘 되었어요. 그런 실용성 있는 마법은 참 드문데… 저런 약한 종의 오크는 보기 드문 희귀종이라 이런 것들을 모으시는 고위마족 분들께서 탐내시는 물건들이죠. 그런데 왜 그 쪽으로 가시는 겁니까?" "예? 아, 저 구석에는 뭐가 있는 것 같은데 뭘까, 하는 불타 오르는 학문적 탐구심때문에요." 학문적 탐구심은 무슨? 그녀는 그저 오크를 피해 옆으로 비킨 것 뿐이었다. 하지만 시종은 언제 봐도 섬뜩한 핏빛 눈동자를 빛내며 말했다. "어? 눈이 좋으시네요. 저 구석에 있는 클라포(쥐 몬스터의 일종) 시체를 어떻게 보셨죠?" 그녀는 천천히 그녀가 서 있던 자리에서 비켜나 자신의 옆을 바라 보았다. 차가운 돌로 된 복도 위에는, 허옇게 눈이 뒤집힌 채 배를 까놓은 클라포의 시체가 자리하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혐오감을 주는 오크와, 방금 본 클라포 시체를 떠올려 본(다시 보기에는 부담스러웠다) 루피아는 오크에게로 시선을 고정시키고는 말했다. "차라리 네가 낫다." "예?" "하하하, 아무것도 아니에요. 빨리 방으로 가죠? 생각보다 대우가 좋네요." 루피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시종을 재촉했다. 시종은 의문스런 표정을 짓긴 했지만 곧 걸음을 재촉하며 혀를 차며 말했다. "시녀들에게 청소를 좀 더 열심히 하라고 해야 겠군요. 보통 땐 저런 게 나돌아다니지 않는데, 요즘 전체적 분위기가 좀 좋지 않다 보니 소홀해진 모양입니다." '젠장할, 더러운 거 알면 네가 좀 치워! 으으윽, 발에 닿았어!' 옆으로 피하려다 슬쩍 스친 그 감각(?)이 지워지지가 않는 루피아였다. 루피아는 다시 걸음을 옮기는 시종의 뒤를 졸졸 따라가며 물었다. 대체, 이 성은 얼마나 크길래 이렇게 걸었는 데도 방이 안 나와? "얼마나 더 가야하죠?" "아마 30분 쯤 더 가면 방이 나올 겁니다." 30분씩이나? '우리 집에서는 대충 15분 정도 걸어 다니면 길을 찾을 수 있었는데… 이렇게 방 찾아 가는데도 30분씩 걸리니까… 으엑, 상상이 안 돼.' 루피아는 길치+방향치였다. 저택에서도 종종(살던 집인데도) 길을 잃어 밥을 굶어야 했던 비극적인 사건들을 떠올리며 루피아는 혀를 내둘렀다. '여기서 길 잃으면 나는 그대로 굶어 죽겠는 걸. 지도를 구해서 다 외워 버릴까? 흠….' 시종의 뒤를 따라가며, 루피아는 '역시 마족이군'이라는 생각을 해야 했다. 척 보기에도 시종은, 일단 사람들의 '미의 기준'에 아주 적합한 외모를 가졌다. 하얀 피부라든가,(아까도 한 번 보기에, 그건 기본 사항인 것 같았다) 석류처럼 붉은 입술, 오뚝한 콧날, 그러면서도 확실하게- 뭐랄까, 개성? 각자만의 개성이 강하게 풍겼다. 머릿결도 부드러워 보였다. 시종인데도 이렇게 아름다운데, 다른 고위 마족은 오죽하랴. 루피아는 잠시간이지만 보았던 <마왕>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가늘게 떨었다. 지워지지 않는 이미지로, 확실하게 그녀의 머릿속에 파고든…… 루피아는 고개를 저어서 생각을 떨쳐 버렸다. "음… 혹시, 정말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요. 저희가 왜 여기에 와야 했는지, 이유를 아세요?" 그녀는 그게 제일 궁금했다. 솔직히 마계에 여자가 필요할 이유따위 없지 않은가. 그녀는 시종을 보며 계속 말했다. "마계에 성(性)비율로 문제가 생길 리 없고, 마족들이 인간 여자를 필요로 할 이유따위 없잖아요. 굳이 인간, 그것도 귀족 여자가 필요할 리 없다고 생각되는 데요. 공물로 바쳐진 저희 여자따위가, 왜 필요했죠? 그것도 조건까지 붙였었잖아요." 그녀의 질문에 그 이름모를 아름다운 시종(비록 마계에서는 '평범'의 축에 낀다고 해도)의 얼굴에 난감함이 떠올랐다. "그걸 제가 말해도 될지……." 루피아는 시종을 조금만 더 닦달(?)하면 의문이 풀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눈을 빛내며 재촉했다. 눈을 반짝이며 묻는 그녀에게, 시종은 못 이기는 척 넘어가 주며 작게 말했다. "사실… 이번 일은 마신(魔神) 클리오라께서 내리신 명이거든요." "…마신 클리오라?" 그녀는 의외의 단어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기서 마신 클리오라가 왜 나와? 그렇지만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 지금 대륙에서 시리어스 제국의 황제와 맞먹을 정도의 권력을 가진다는, 빛의 신 오르가프의 반대속성을 지닌 신으로, 그 신도들은 흑마법사와 함께 음지(陰地)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파괴와 어둠을 담당하는 신이라고 알고 있다. "3만 년 만에 클리오라께서 다시 저희에게 그 존재를 알리셨습니다. 요 몇대 째 간, 클리오라께서는 저희에게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셨거든요. 그런데 그게… 에- 저같은 미천한 마족따위가 어찌 지고하신 클리오라님의 뜻을 알겠느냐마는, 음… 저희 입장에서는 조금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명령이었죠." "…설마." "예. 마신 클리오라께서는, 인간들에게 귀족 여자 500명을 데리고 오라 명하셨던 겁니다." 그렇다면 설명이 되었다. '마신 클리오라'라는 존재의 명령은, 아무리 마왕이라 하더라도 쉽게 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러나, 그 이유가 궁금했다. 무작정 데리고 와서 밥 먹이고 재워주면서 키워라, 는 둥의 속셈(?)은 아닐 것 아닌가. "그럼 어째서요? 걔네들 데리고 뭐 하면서 놀아라, 뭐 이런 건 없었어요?" "-그게." 시종은 잠시 말을 끊었다. 그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한숨을 포옥~ 내쉬고나더니, 조금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루피아는 그 시종에 의해서 나오게 될 '의문의 답'에 귀를 기울였다. "신탁의 내용은 이렇다고 들었습니다. 『'고위 마족'의 칭호를 받은 '마왕을 포함한 마족'들은, 중간계에서 온 조건에 맞는 여자들을,』" '고위마족의 칭호를 받은 자? 그러니까... 대충 얼마쯤이지? 뭐 아는 게 있어야지. '조건에 맞는? 공녀의 조건을 말하는 건가?' "『아내로 맞아들여야 한다.』." 루피아는 시종의 마지막 말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내가 지금 대체 뭘 들은 거지? 황당+당황+경악이 뒤섞인 그녀의 표정은 얇은 천 한 장에 가려져 있었다. 시종은 그녀의 표정을 짐작할 수 있었는지 작게 고개를 내저으며 걸음을 다시 옮겼다. "서둘러 방에 가셔야 하니까, 빨리 따라 오세요." "아… 예." 루피아는 핑핑 도는 머릿속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면서 시종의 뒤를 따라갔다. 꼭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약간 비틀거리면서 벽을 짚었다. 근데, 왜 물컹-한 느낌이 드는 거지? "…저기, 실례지만.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시종은 심오한, 무척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교육이 잘 되어 있는 시종 같았다. 공녀에게도 이렇게 친절하고 예의바르다니. 루피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종의 얼굴에서, 그녀는 꼭 '새로운 발견이군'하는 듯한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트롤이 그렇게 좋으십니까? 포옹을 하실 만큼?" 루피아의 시선이 점차 손 쪽으로 옮겨갔다. 그러고보니, 벽 치고는 물컹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녀의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촉감이 더욱 선명해지는 것 같은 느낌. 녹색의 거친… 그리고 징그러운. 그녀는 손이 닿은 곳에서 조금 더 눈을 올렸다. 저, 우락부락한 얼굴이랑, 무식하게 크기만 한 녹색 몸. 트롤?! 사람이 정신이 없으면 무슨 짓인들 못 하겠는가? 루피아는 자신의 손에 잡힌 트롤의 녹색 팔을 보고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 하하하하, 나름대로 귀엽잖아요. 아, 하, 핫!" "이상하네? 인간이 트롤을 좋아했던가? 흐음, 새로운 발견이군. 트롤에게 귀엽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당연하지! 징그럽지, 이게 어디가 귀엽냐? 그렇다고 그걸 믿어? 젠장할!' 졸지에 <마족보다 더한> 취향이 되어버린 루피아였다. 그러나 루피아는 잊고 있었다. 방금, 그녀가 마왕 앞에서 어째서 '생애 최고의 난감한 상황 Best 1'을 겪어야 했었는지, 그리고 그 상황이 어째서 이 시종과는 이어지지 않았는지 말이다. '뭔가 까먹은 게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뭐지? 우으! 뭐더라? 뭔가 하나를 넘겨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뭔가 찝찝한데- …모르겠다!' 그녀는 더 생각하길 포기해 버렸다. 제 목: [수정판] 공녀(貢女) : 제3화 [색다른 신부수업](1) #. 제3화 [색다른 신부수업] * * * * * * * * * * * * * * * 본론을 꺼내기 전에, '신부수업'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정의부터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 보통 상식으로는, '신부수업'이란 여자가 시집가기 전에 배워야 할, 요리, 바느질, 청소 등등의 것을 배운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물론 중간계에서의, 그 것도 인간들에 한해서에 통용되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렇다. 나 역시, 잠깐이기는 하지만 소위 말하는 그 '신부수업'이라는 것을 해 보기는 했었다. 마계에 가기 전에, 나의 어머니인 '카멜라 엘 세느안트' 공작부인께서는 '네 성격같은 것에 관해서는, 집안에서는 터치하지 않을 생각이지만- 그래도 너는 이 제국의 셋 밖에 없는 <공녀>다. 그러니까 내숭이든 뭐든, 남의 눈에는 '트집 잡힐 것 없이' 보여야 해. 남의 눈 신경쓸 게 없다는 게 네 생각이겠지만, 그래도 잘 보여서 나쁠 것 없다. 그러니까! 이런 기본적인 것들은 우선 할 수는 있어야 해!'-라고 하셨다. 자유분방하게 날 키우신 어머니이시기는 하지만- 뭐, 저런 것들은 '잠깐이지만' 가르치긴 하셨었다. 다른 것이라면 다 자신있지만, 나는 위에서 언급한 요리, 바느질, 청소 등등의 '여성스러운' 것들과는 전혀 인연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마법에 관심을 보여 온 나는 마법을 연구하고 배우는 것에만 신경을 썼지- 저런 '쓰잘데기 없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뭐- 내 어릴 적 얘기는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하고- 다시 그 때 상황으로 돌아 가겠다. 당시, 세키라와 에리나는, 무척 겁을 먹고 있는 상태였는데다, 제대로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갖지 못했다. 그 때가 아로데 드 벨로시스나, 로이드윈 드 스켈로테를 처음 만났던 때였다. 아-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이가 부득부득 갈린다. 완전 그들은 우리를 가지고 놀았다! 왠일인지, 대우가 생각보다 훨씬 좋았지만-……. ==================루피아 자서전' 中 발췌========================== 집무실로 돌아 온 마왕은, 평소와 같이 뚜벅뚜벅 걸어 가 그의 책상 앞에 앉았다. 편안하게 몸을 뒤로 젖힌 그는, 이제 막 만나고 온 '인간'들을 떠올리며 살며시 미간에 주름을 그었다. 느닷없이 내려 진 '신탁'. 물론 마신 클리오라의 명령이었기에 그대로 행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탐탁하게 여겨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그대로 올려다 보는 보랏빛 눈동자를 떠올렸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그를 똑바로 쳐다 보는 보랏빛 눈동자는, 너무나 직선적이라 그의 머릿속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래봤자 하찮은 인간일 뿐.' 마왕 위(位)에 오른 지- 아직 20년이다. 그는 그의 나이 482세가 되던 해 마왕의 위를 이어 받았고, 지금은 그 자리에서 확실하게 자신의 위치를 굳히는 중이었다. 아니, 굳혔다. "군주님, 서열 제2위 아로데 드 벨리시스 마계공작께서 배알을 원하십니다." "들어 와." 시종이 공손하게 열어 주는 문 뒤에서, 아로데가 씩씩하게 걸어 들어왔다. 아로데는 약간 어두운 듯한 피부에, 결 좋은 초록색 짧은 머리카락이 목 뒤에서 살짝 묶어놓고 있었다. '마계공작' 답게 고급스런 망토를 걸치고 들어 와 상큼한 미소를 지은 그가 허리를 굽혀 보이며 인사했다. "마계와 어둠, 그를 다스리는 주인이시여, 그대에게 영원한 어둠의 안식이 따르기를." "본론만 말하도록." 언제나 마왕을 보면 해야 하는 당연한 인사치례지만, 마왕은 간단히 생략시키고 말을 재촉했다. 이제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그로서는 가는 시간이 아까웠다. "공녀들의 거주 문제에 대한 결론이 났습니다. 보고드리러 온 것이니, 그다지 시간은 걸리지 않을 겁니다." 그 것을 잘 아는 아로데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조금 전 그가 먼저 자리를 뜨고 나서 남은 자들이 의논해서 공녀들의 거주 문제를 해결지은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공녀들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들이 많은 터라(서류 중 태반이 그 문제였다), 작게 인상을 쓰며 말해 보라는 듯이 그에게 시선을 고정 시켰다. "그들을 마족에게 하나씩 나눠 주는 게 가장 나을 것 같습니다. 마왕성에 그대로 두는 것은 안 될 말이고 말입니다. 그러려면, 차라리 처음부터 하나씩 나눠 갖는 게 나을 것 같다고 결론이 나왔습니다." 공녀를 물건취급하는 어투였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마신 클리오라는 어떤 생각에서인지 그들을 아내로 맞이하라고 명령했다. 한 건물에 다 넣어 버리면 그 말을 지키기가 어렵게 된다. "그래서 그렇습니다. 차라리 한 마족에게 공녀 하나씩을 배정해 주어, 그 마족에게 책임지고 교육시키라 이르면 훨씬 더 효율적이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랬다. 분명, 최고위 500명이니만큼 그에 맡겨진 직책도 직책이고 그 만큼 각자 바쁘다. 공녀의 수도 500이다. 한 데 모아놓고 교육을 시키기엔 하나하나 신경쓸 수 없을만큼 많은 숫자인 것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한 명당 하나씩 배정을 시켜서 하나라도 확실하게 교육시키는 게 효율적이다. "그러나 수가 맞지 않다. 설마- 나까지 그것에 동참하라는 것은 아니겠지?" 이 수많은 업무를 보는데도 바빠 죽겠는데, 여기서 시간을 할애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아로데나 로이드윈, 유리아덴 등이 도와 준다면야 시간은 남겠지만, 마왕은 특별한 때가 아니면 그들에게 각자 배정된 일 외의 몫은 시키지 않았다. 아로데는 고개를 저었다. "설마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설사 거주는 이 마왕성에 하게 되더라도 교육은 저희 세 사람이 알아서 하죠." 그는 간단히 해결을 내버렸다. 마왕성에 머무는 것 정도야 허락할 수 있었다. 어차피 얼마 후면 '마황비(魔皇妃)'도 필요할 것이다. 한 명은 마왕성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 마왕성에 연회를 여는 것은 어떻습니까? 한 명의 마족에게 한 명의 공녀가 붙는다면, 저희 선택의 폭이 너무 좁아질 것입니다. 이런 명을 받은 것도 억울한데, 선택의 기회는 자유롭게 주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습니까?" 안 그래도 억울한데 그 정도도 허락해 주지 않으면 폭주할 지도. 아로데는 그렇게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요 100년 동안 마왕성에서는 한 번도 연회가 열리지 않았었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연회 좀 즐겨보자-는 생각도 조금 섞여 있기는 했다. "그럼, 그러도록 하지." "그럼- 마계와 어둠, 그를 다스리는 주인이시여, 그대에게 영원한 어둠의 안식이 따르기를." 아로데는 그에게 깊이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섰다. 방문을 나서자,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서열3위 '로이드윈 드 스켈로테'가 그에게 물었다. 허리를 넘길 정도로 긴 금발머리를 그대로 풀어 내리고, 날카로운 콧날 위에는 은테 안경 하나가 가볍게 올려져 있었다. 눈이 나빠서 쓴 것은 아니었지만, 은테 안경은 그의 이미지를 날카로워 보이면서도 이지적이게 만들었다. "어떻게 됐어?" 아로데는 빙긋 고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말했다. "당연하지 않나?" 로이드윈은 벽에서 기댔던 몸을 일으키며 가볍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는 아로데와 함께 복도를 걸어 나가며 물었다. "어떤 여자로 할 건지는 정했어?" "글쎄……?" "흐음, 누가 있긴 한가 보군? 아! 유리아덴이 오늘 밤에 만나자고 하던데. 갈 거지?" 아로데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서열4위 '유리아덴 드 샤벨'은, 그들 둘과 무척 친한 사이였다. 로이드윈과 아로데, 유리아덴은 선대 마왕 때부터 함께 다니며 마왕 다음의 자리인 서열 2, 3, 4위를 지키고 있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마계에서는 마왕 다음의 권력을 확실하게 잡고 있었다. 로이드윈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쿡 웃으며 말했다. "인간 여자에게 코를 꿰이게 된 서열 500위 안의 모든 마족들을 애도하는 뜻에서 술이나 한 잔. 어때?" 공녀들과 마찬가지로, 고위 마족들에게 공녀는 마생(魔生) 최고의 불행이었다. * * * * * * * * * * * * * * * 시종(아직 이름도 모름)에게 안내를 받아 들어간 방에서, 루피아는 무작정 옷장부터 먼저 찾았다.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는 이 '고급스러운 휴지'를 빨리 벗어버리고 싶었다. 생각해 보라! 소금기에 젖어 찝찝한 옷을 누가 입고 싶어한단 말인가? "…생각보다 더 엄청난 방인데?" 그녀의 엘 세느안트 가문이 보통 명문가가 아닌 만큼, 그녀의 저택이나 영지의 성은, 왠만한 왕국의 왕성과 비견될 정도의 규모를 자랑했다. "이 방, 정말 싱글 룸이 맞는거야? 오옷, 침대도 슈퍼 빅 사이즈다. 열 댓명이 몰려서 자도 안 좁겠는 걸." 방 중앙에서는 모닥불이 타닥거리며 타고 있었고, 그 때문인지 방은 전체적으로 훈훈했다. 바닥은 폭신한 카펫이 두껍게 깔려져 있어 따뜻한 느낌을 더했다. 귀하다는 흑옥(黑玉)으로 만들어진 침대나, 새하얀 실크 시트, 새하얀 커튼, 세심한 무늬가 새겨져 있는 가구들 화려하고 사치스런 방의 인테리어는, 루피아가 처음 생각했던 '굉장히 싸늘하고 형편없는 방'과는 천양지차였기에 그녀는 약간 당황해야 했다. '훗- 어쨌든 침대에서 떨어질 걱정은 없어서 좋은데.' 잠버릇이 그다지 좋지 않은(사실은 무진장 나쁜) 루피아는 커다란 침대를 환영했다. 집에서도 특별히 제작한 특별침대에서 자야 바닥으로 추락한 채 아침을 맞아야 하는 일을 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손가락으로 푹- 누르면 폭- 꺼져 들어가는 폭신함에, 루피아는 탄성을 흘리며 좋아했다. 방을 한 바퀴 쭉- 둘러보니, 색색깔의 구슬로 만들어진 발이 내려져 있는 곳이 보였다. 차르륵-하고 맑은 소리를 내는 발을 걷어보니 새하얗고 얇은 천 몇 겹이 나왔다. 루피아는 당연히 그 것들을 걷었다. "여긴 욕탕이네." 욕실 벽 두 군데에서는 푸른색 불꽃이 빛을 내며 실내를 밝히고 있었다. 역시나 검은색으로 꾸며진 인테리어에 루피아는 피식 웃었다. 목욕하고 싶은 생각은 굴뚝같았지만, 옷을 갈아입는 게 우선이었다. 그녀는 다음 방을 벌컥 열었다. "서재네? 여기서 공부하라는 소리인가? 그치만 마계어도 모르는데 책만 많으면 무엇하리." 그녀는 한 방 가득 차 있는 책들을 아까운 눈으로 보며 입맛(?)을 다시다가 문을 닫았다. 마법을 익히는 그녀로서는 저 책들을 읽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꼭 마계어를 익혀서 저 많은 책들과 조우하는 기쁨을 누려야겠다고 다짐한 그녀는 다음 문을 열었다. "아, 찾았다." 그녀는 드디어 찾아낸 드레스 룸에 들어갔다. 마력이 남아 도는지, 마법으로 만든 등(燈)이 사람이 들어온 것을 인식했는지 확 켜졌다. 그녀는 마법등을 손으로 건드려 보는 등 신기해 하다가, 곧 옷들로 고개를 돌렸다. 이 찝찝한 기분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역시 마계다. 누가 어둠의 자식들 아니랄까 봐 온통 검은 옷 뿐이냐? ...나쁜 건 아니지만." 조금 전 봤던 마족들은 모두 상당히 고급스럽고 다채로운(?)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았는데, 왠일인지 이 곳에 있는 옷은 모두 보라색, 남색, 검은색 계통의 옷들 뿐이었다. 하지만 그다지 불만은 없었다. 그녀는 지금 입고 있는 이런 옷만 아니면 사양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검은색이라면 그녀도 좋아하는 색이다. '그나저나. 하아- 트롤을 좋아하는 성격으로 오인받다니. 나는 정말… 어라? 나, 그 시종이랑 어떻게 얘기했지?' 마왕을 앞에 둔 채 당황스런 장면을 연출해야 했던 것과, 시종과 함께 이 방으로 오는 동안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루피아는 설마, 하는 생각을 지웠다. '내가, 마법을 쓴 건 아니겠지? 설마… 아하하! 아닐 거야. 내가 그 정신없는 와중에, 설마 랭귀지(Language:언어) 마법을 썼을 리가 없지 않겠어? 그럼, 아닐거야. 고럼고럼. 내가 그럴리가 없지. 아암-!!' 그녀는 계속 드는 불길한 생각을, 그것도 아주- 아주 가능성이 짙은 생각을 애써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려 했다. 만약 그 시종이 마왕에게 그 얘기를 한다면, 마왕은 그녀가 그를 놀리려 했다고 생각해서 화를 낼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마법은, 그녀의 생활 속에서 무척 익숙한 것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마법에 재능을 보였고 또 흥미를 가졌던 그녀는 특별한 시동어나 수식계산 없이도 랭귀지같은 1서클 마법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그럼, 그럼! 그럴 리가 없는 거라고. 자~ 어서 씻으러 가 볼까! 뭘 입지? 옷이 많아서 고민되네~ 너무 많아도 문제라니까!" 그녀는 가운과 수건, 손에 잡히는 실내복을 아무거나 대충 챙겨서 아까 봐 두었던 욕탕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럴 리가 없어! 내가 날 배신할 리가 없잖아~ 하, 하, 하!' 현실을 부정하지 말자. 잠시 후, 루피아는 쩍쩍 달라붙었던 짭짤한 액체로 버무러진 하얀 드레스- 아니, 회색 드레스를 보며 상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촉촉하게 젖은 긴 머리를 검은 수건으로 말리면서 가운을 입었다. 그녀의 모습은, 굉장히 아름다우며 고혹적이었다. 촉촉히 젖은 윤기나는 검은 머리카락은 허리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고, 눈보다 더 새하얗고 매끄러울 듯한 피부 위에는 아직 덜 닦은 투명한 물방울이 군데군데 동그랗게 이슬져 있었다. 단정하고 곧게 뻗은 눈썹 아래에 자리한, 살짝 내리깔은 눈썹은 그녀의 라벤더를 떠올리게 하는 자수정빛 눈동자에 그늘이 지게 할 정도로 길었다. 유려한 선을 자랑하며 뻗어있는 코는 오뚝했고, 그 아래 촉촉한 장미빛 입술은 키스하고 싶은 충동을 일게 만들었다. "아얏! 이놈의 머리, 확 잘라버려? 이익- 베키가 할 때는 잘만 내려가더니, 왜 내가 빗을 잡으면 늘 이런거야?!" 비록 성격은 이렇지만, 머리를 빗고있던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빗을 억지로 잡아당겼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돌아오는 것은 결국 두피의 고통 뿐이다. 새치도 아닌 쌩쌩한 머리카락을 대충 10개는 뽑아버린 그녀는 더욱 더 엉켜버린 머리카락을 들어 찡그린 인상으로 쳐다봤다. 정말, 희대의 신비라고나 할까. 유독 그녀에게만 반항(?)을 하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Å¤££¤ㆎ£¥ÅÅ¢¤££¤℃." 갑작스레 들려 온 말소리에, 루피아는 놀라며 뒤를 돌아 보았다. 그녀가 들어 온 문이 약간 열려 있었고, 아마도 시녀일 듯한 사람이 공손하게 두 손을 모은 채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꼭, 베키처럼. 그녀는 약간의 허탈감, 씁쓸함을 맛보며 물었다. "누구?" 그녀는 색바랜 금발머리와 붉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미소녀였다. 왠지 모르지만 홀에서 보았던 마족들보다는 눈동자색이 더- 뭐랄까, 탁해 보였다. 그녀는 자신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루피아를 보며 자신을 가리키더니 한 자 한 자 힘주어 또박 또박 말했다. "메를리나. 메, 를, 리, 나." 메를리나는 손짓으로 그녀를 가르켰다. 그녀는 왠지 얼떨떨한 기분으로 입을 열어 대답했다. "루피아… 엘 세느안트." 생긋, 하고 웃는 얼굴. 밝게 웃는, 사교성이 좋은 점이 꼭 베키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물론 베키는 평범한 갈색 머리카락에 피부도 저렇게 투명하지 않고, 오히려 어두운 색이었다. 코 언저리에는 약간이지만 주근깨도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닮게 느껴지는 건지. 한참이나 넋놓고 메를리나를 바라보던 그녀에게, 메를리나가 다가 와 빗을 잡았다. "ㆎ£¥Å¢¤££¥ÅÅ¢£¤℃¤℃.(머리를 빗을 때 이렇게 험하게 하시면 안 되죠. 살살 하셔야 아프지 않고 더 잘 빗어져요.)" 신기하게도 메를리나가 빗자 머리카락은 반항하지 않고(?) 빗에 잘 빗겨 내려갔다. 루피아는 그녀에게 머리칼을 맡긴 채 생각에 잠겼다. 분명히, 시종의 말은 똑똑하게 잘 알아들을 수 있었는데, 메를리나의 말은 알아듣지 못하겠다. '하아… 나도 모르게 랭귀지 마법을 써 버린 것 같네. …근데, 마왕에게는 왜 랭귀지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던 거지?' 아마도, 너무 긴장해서일 것이다. 너무너무 긴장했고, 또 두려웠기 때문에. 시종과 걸을 땐 그녀도 모르게 긴장이 풀려서 자연스레 마법이 써졌을 것이다-고 그녀는 결론을 내렸다. 아마 지금 메를리나와 대화가 되지 않는 건 그녀가 의식적으로 마법을 쓰지 않겠다 마음 먹었기 때문일 것이다. '잠깐. 그럼- 왜 마왕은 랭귀지 마법을 쓰지 않았던 거야? 귀찮았던 건가? 아냐, 고작해야 1클래스 마법일 뿐인데?' 그녀는 몰랐지만, 마왕은 랭귀지 마법을 몰랐다. 아니, 애초에 그런 실용성 마법은 마계에 존재하지 않았다. 마법을 실용성 쪽으로 연구한 것은 전적으로 인간들 뿐이었고, 드래곤들이 시초가 되었다지만 마법의 다양성에 대해서는 인간들을 따를 자가 없었다. 오죽하면 드래곤들조차 몇백 년에 한 번씩 인간세상에서 마법책을 약탈(?)해 가겠는가. 마족들이 계약으로 중간계에 드나든다고 해도, 그들에게 있어 실용성 마법은 익힐 가치가 없는- 그저 장난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걸 모르는 루피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메를리나가 빗질하는 머리카락이 잡아당겨져 신음을 흘렸고,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아픈, 생 머리카락 뽑기를 무려 다섯 번이나 해야 했다. '우씨! 몰라!!' 성질이 난 그녀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밤이 깊었고, 또 정신적으로 많이 힘든 하루였다. 하지만 정신은 또렷하기만 했다. 침대에 누워, 루피아는 메를리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뭘 물어볼 수도 없고... 무지 답답한 기분이었다. 대체 뭘 어떻게 해야할까. 내일부터는 마계어를 배워야 한다. 메를리나는 그녀가 침대 위로 올라가자 불을 꺼 주고, 상냥하게 인사까지 해 주고 갔다. 비록 알아듣지 못할 말이었지만. '휴우… 나, 마계로 왔구나.' 그러나 도저히 잠이 올 것 같지가 않았다. 잠시 동안 침대에 멀뚱히 누워있던 그녀는 자리에서 부시시 일어나 창문가로 갔다. '남색. 별도 없네. 달- 안 보여. 뜨긴 뜬 건가? 달은, 신의 소관이니 마계에도 뜨긴 뜰 텐데.' 어둠만이, 빛이 침투할 틈따위는 없다는 듯이 남빛으로 하늘을 꽉 메우고 있었다. 하늘을 바라보던 그녀는, 다시 창문을 닫고 서재로 들어갔다. 서재를 한 번 둘러볼 생각이었다. 아버지의 서재를 생각나게 할 정도로, 큰 방에는 책들이 가득 꽂혀져 있었다. 그녀는 그녀가 발을 들여놓자 마자 켜지는 마법등의 빛을 잠시 응시하다 안쪽으로 몸을 옮겼다. 종이, 펜, 책, 커다란 책상, 마법등, 소파. 이게 다였지만, 서재는 포근한 느낌을 줬다. 책 냄새나, 오래 된 서재만의 느낌. 그녀는 아무런 책이나 뽑아들었지만 글자를 모르니 책을 읽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다시 책을 꼽아 넣어야 했다. '제-기랄, 무지 답답하네.' 그녀는 소파 위에 드러누워 버렸다. 폭신한 소파가 등에 닿자, 그녀는 침대보다 더 편안함을 느꼈다. 집에서도 가끔 생각이 복잡해서 잠이 오지 않으면 아버지의 서재로 몰래 침투(?)해 들어 가 소파에서 잠자곤 했던 그녀다. 소파에 누워 눈을 감은 그녀는 씁쓸하게 웃었다. '아까… 베키랑 착각했어. 베키가 여기 있을 리가 없는데.' 그녀의 머리를 늘 빗어주던 것은 베키의 일이었다. 비록 시녀였지만, 그리고 그녀보다 5살은 많았지만 베키는 어렸을 때부터 늘 함께였던 친구였다. 에리나와 세키라, 그리고 베키. 여기로 오기 전 정신없는 아침에- 눈물이 글썽글썽한 채 자신을 보던 베키의 순진한 갈색 눈이 떠오르자, 그녀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늘 내 머리를 빗어주겠다고 고집 피우시던 어머니, 내 말이라면 껌뻑 죽으시는 아버지, 조금 무뚝뚝하기는 하지만 결국 내 말을 다 들어주는 이데카른 오빠, 항상 따뜻하게 웃으며 안아주는 카드리안 오빠, 눈물이 많고 마음이 약한 우리 트로에 오빠. 다들 잘 있을까? 킥, 아직 하루밖에 안 됐는데….' 가족들의 얼굴을 하나 하나 떠올랐다. 선명히, 너무나 선명히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그래서 더 가슴이 아팠다. 다시는 볼 수 없다. 다시는. 그 사랑하는 가족들의 얼굴을, 목소리를, 눈동자를, 손길을. 언젠가, 시간이 많이 흐르면- 얼굴이 기억나지 않아 슬플 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기억이 나서, 너무 많이 기억이 나서 아프고 슬펐다. "제길, 기분이 가라앉잖아." 생각을 계속하던 그녀는 신경질을 부리며 소파에 바로 앉았다. 계속 이렇게 있다가는, 울어버리고 말 것 같았다. 그녀는 서재 문을 닫고 침대 안으로 들어가 누웠다. '자야지. 오늘… 피곤했으니까.' 첫 날이라서 그런다고, 낯선 곳에 온 첫 날이니까 감상적이 된 거라고 생각하며 루피아는 눈을 감았다. 눈 앞에서 아른거리는 가족들의 얼굴을 애써 지워 버렸다. '하지만…… 자고 난 뒤에도, 가족들 얼굴은 볼 수 없겠지.' 제 목: [수정판] 공녀(貢女) : 제3화 [색다른 신부수업](2) [수정판] 공녀(貢女) : 제3화 [색다른 신부수업](2) * * * * * * * * * * * * * * * 너무 울어서인지 부어서 잘 떠지지 않는 눈을 에리나는 억지로 떴다. 그녀가 삶을 살면서, 그렇게 무작정 울어본 적이 언제인지, 잘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아니,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머리가 지끈하게 아파왔다. 머리를 가볍게 흔들어 정신을 차린 에리나는, 낮게 신음을 흘렸다. 그녀가 누워있는 방은, 훈훈한 온기가 감돌고 있었다. 호화롭게 꾸며져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어두운, 그런 분위기였다. 에리나는 이 곳이 어딘지, 자신이 왜 여기 와 있는 것인지를 상기시켰다. "아……." 왈칵, 다시 눈에서 눈물이 베어 나왔다. 믿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자신이 '공녀'로 팔려 버리다니, 마족들에게 한낱 '물건'으로써의 가치로밖에 여겨지지 않게 넘겨져 버렸다니. 어제 그렇게 울었건만 아직도 눈물이 남아있는 모양이다. 에리나는 재빨리 흐르는 눈물을 이불로 닦아냈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울었으니 그 정도면 충분하지 싶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신이 울었다는 것 자체를 받아 들이기 싫었다. 다른 여자들처럼 눈물이나 찍어내는 한심한 행동 따위는 하기 싫었다. "℃Å¢¥¤ÅÅ¢㏀." 그 때, 문이 스르륵 열리며 시녀가 나타나 무어라 말했다. 에리나는 자기가 일어나자마자 울었다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허리를 꼿꼿히 폈다. 비록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상대도 그녀가 알아들으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녀는 그녀에게 다가 오더니 옷가지를 내밀었다. 아마, 갈아 입으라는 뜻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는 이불을 잡아 당기고 손가락으로 방 안의 문 중에 한 곳을 가르켰다. '…저기에 들어 가라는 뜻인 것 같네.' 에리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녀가 가르킨 문 쪽으로 향했다. 아마도 욕실과 탈의실의 용도로 쓰여지는 곳 같았다. 우선 간단하게 얼굴을 씻고 에리나는 시녀가 건넨 옷으로 갈아 입었다. 시녀가 건네 주었던 옷을 다 입고, 에리나는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았다. '전에 입었던 드레스보다 훨씬 실용적이고… 편해.' 과연, '전투의 종족'이라는 건가? 왼쪽 어깨에서 보랏빛 보석이 박힌 장신구가 웃옷을 잡아 주었고, 허리는 천을 덧대어 줄로 묶어 고정시켰다. 허리끈은 보석의 장신구의 연장이어서 무척 화려했지만 부담스러운 느낌은 없었다. 전체적으로 남색빛깔의 그 옷의 아래쪽은 치마나 바지 두 가지가 있었는데 에리나는 잠시 고민하다 치마를 골랐다. 그녀 취향에는 솔직히 활동적인 바지가 맞긴 했지만 치마도 그다지 불편해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치마는, 종아리 정도의 길이로 폭이 넓어서 움직이기 좋았다. "ㆎ£¥ÅÅ¢¤££¤℃." 그녀가 밖으로 나오자, 시녀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뭐라고 하면서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는 따라 오라는 듯이 종종걸음으로 문을 열어 주었다. '…시작… 이구나.' 긴장감으로 주먹을 쥔 손바닥에서 땀이 베어 나왔다. 에리나는 긴장감으로 딱딱해진 몸짓으로 걸음을 한 걸음 뗐다. 빨리 오라는 듯 뒤돌아서 그녀를 쳐다보는 시녀에게 먼저 움직이라는 눈짓을 보내고, 에리나는 잠시 방문과 복도 사이에서 멈춰섰다. "£¥." 시녀의 재촉에, 멈춰섰던 에리나는 다시 걸음을 뗐다. 복도 저 앞에서, 탁한 시녀의 붉은색 눈만이 빛나는 것 같았다. 그 뒤를 따르며, 에리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무서워. 하지만, 그렇다고 움츠러드는 건… 이 에리나의, 내 자존심이 용납 안 해!' * * * * * * * * * * * * * * * 아로데는 로이드윈, 유리아덴과 함께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아침 나절부터 이 세 마족은 이제 잠시 뒤면 하게 될 '수업'에 대한 것을 의논(?)하기 위해 모인 것이다. "어떡할까? 일단 우리 셋이 정하면 나머지는 볼 것 없어." 서열 2, 3, 4위가 합쳤는데(?) 반항할 간 큰 녀석이 어디 있을까? 당연히 이 세 마족이 정하는 것이, 마왕이 크게 반대하지 않는 한 법이었다. "일단 오늘 우리가 '수업'을 한 다음, 우리 먼저 맘에 드는 걸로 하나씩 고르는 거야. 그 다음 추첨, 또는 제비뽑기를 하는 것이 어때? 종이에 숫자를 적어넣은 다음 5~500까지 뽑게 하는거야. 걸리는 대로 보내는 거지. 맘에 안 드는 여자가 걸리면 어때? 다 자기 운이지." "오~ 그거 좋은 생각이야. 그럼 수업은… 아! 유리아덴, 네 생체실험용 몬스터 좀 빌리자." 유리아덴은 그렇게 하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왕성 주위 숲에 서식하는 몬스터 몇 마리 때려 잡아서 쓸 수도 있겠지만, 그런 짓을 했다간 여자들은 모조리 다 죽어 버릴 게 뻔했다. 그런 것을 고려해서 로이드윈은 유리아덴에게 말한 것이다. 사실, 클리오라의 명령을 지키는 데 공녀가 죽어 버리면 곤란하니까. "검술은… 에이, 무슨 놈의. 기본도 안 되어 있구만. 마법은 로이드윈, 네가 맡아. 난 복잡한 건 질색이거든. 아~ 근데 유리아덴, 너 아직도 몬스터 가지고 장난치냐?" 유리아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유리아덴, 그의 고.상.한 취미 중 하나는 바로, '몬스터 생체 해부 및 연구'였던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종자의 몬스터를 다른 종자의 몬스터와 결합시키거나, 분해(?)해서 재조합, 재결합시킨다던가 하는 것들이다. "신경 꺼." "이제 좀 있으면 가야 겠네. 훗, 기대되지 않아, 로윈?" 아로데가 키득키득 웃으며 말하자 로이드윈의 입가에도 아름다운 미소가 피어났다. 여성형 마족이나 인간 여성이 보았다면 그야말로 홀딱 넘어가 버릴만큼 아름다운 미소였다. 로이드윈은 콧날 위에 걸쳐진 안경을 슬쩍 올려썼다. "…후훗." "후후후후후……." 그가 내는 작은 웃음소리를 들으며, 아로데는 결코 로이드윈에 못지않은 웃음을 피워냈다. 음흉하게 웃는 두 마족을 보다가 슬쩍 자리에서 일어난 유리아덴은 문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철부지들." 어쩌면 유리아덴은, '장난'이라고 해서 삐진 걸지도 모른다. * * * * * * * * * * * * * * * 에리나와 마찬가지로 루피아가 준비를 끝내고 가게 된 곳은, 어제 도착했던 곳과는 다르지만 비슷한 규모의 커다란 홀이었다. 왠만한 방으로는 500명이나 되는 여자들을 여유롭게 수용할 수가 없어 이 곳으로 모이게 한 것 같았다. 루피아는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우글우글한(?) 여자들의 모습에 잠시 혀를 찼다. '우와… 우글우글대네. 홀이 커서 그렇지, 저 펄럭이는 옷 하며. 마계에서 만든 옷이라 그런지 거추장스러운 프릴이나 레이스는 없지만 펄럭이긴 매한가지야.' 보라색, 검은색, 남색이 주를 이루는 드레스를 입은 여자들이 침울한 분위기로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있었다. 어제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다들 눈이 퉁퉁 부어 빨개진 상태였다. 루피아는 그 사이로 발을 들여 놓으며 어제 안 울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녀도 울었다면 그녀 얼굴도 저 모양 저 꼴이었을 것이 아닌가? 루피아는 사람들 속에서 에리나와 세키라의 모습을 찾았다. 사람이 많아서 찾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아주 찾기 쉬웠다. 루피아, 그녀가 어디서나 튀는 존재이듯(모든 여자들의 시선이 모인 만큼) 에리나와 세키라도 튀는 존재였던 것이다. "루피아." 그녀는 자신들에게 또 안겨드는 세키라를 안아줬다. 처음처럼 울지는 않지만 아직도 많이 불안한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루피아는 슬프지도, 불안하지도 않다는 얘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들보다 슬프면 슬펐지 결코 덜하지는 않으리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그저, 티를 내기가 싫었을 뿐이다. 루피아는 친구에게 생긋 웃어 주었다. "어젯밤에는 괜찮았어?" "무, 무서웠어. 시녀도 빨간 눈이었어. 너무너무 무서웠어… 흑!" 루피아가 묻자, 세키라는 울먹거리면서 말했다. 에리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가가 빨간 것을 보니 어젯밤에 실컷 운 모양이다. 울먹울먹하며 말하는 세키라를 위로해 준 루피아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자신에게만 매달리지 말고 다른 사람을 찾아보면 좋으련만. 그런 그녀의 귓가로, 훌쩍이는 작은 소리 외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던 주위를 기분좋게 울리는 미성이 들렸다. "℃Å££℉¢″£㎗¢㎕?¢." '뭐라는겨, 저 마족?' 목소리의 주인공은, 홀 중앙 단상에 올라 서 있는 마족들 중 하나였다. 루피아는 눈을 찌푸려가며 앞의 세 사람을 주목했다. 그리고, 분명 꽤나 지위가 높은 자들일 거라고 확신했다. '저 분위기나 여유는 아무데서나 오는 게 아니지.'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셋을 조금 더 자세히 관찰하려 애썼다. 그 중 초록색 머리카락은, 전에 한 번 스치듯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우선 한 사람은 신록을 머금은 듯한 초록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다. 피부는 검었다. 그 때문인지 그 마족은 무척- 뭐랄까, '야성적'인 느낌이 들었다. 절대 책상 위에 얌전히 앉아있는 학자형은 아니었다. 붉은색 두 눈에는 장난기가 가득 베어 있었지만, 아마도 전쟁터에서는 가장 확 돌아 버리는 타입일 거라고 루피아는 생각했다. 그리고 하나는 잘 넘겨 정리한 금빛 머리칼을 가지고 있는 백색 피부의 미남이었다. 입가에는 약간 비뚜름한 미소가 걸려 있었는데, 마치 비웃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했고- 상냥한 웃음같기도 했다. 초록색 머리와는 다른, 학자형 타입인 것 같았다. 앞에 나서서 싸우기 보다는, 뒤에서 조종하는 타입. 또 다른 나머지는- 약간 특이한 타입인 것 같았다. 굳이 타입을 나누자면, 싸이코틱, 이라고나 할까. 무심한 듯한 붉은색 눈동자나 그녀의 눈동자색보다 조금 더 짙은 보랏빛 머리카락이 아주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두 사람에 비하면 키가 좀 작았지만, 평균 신장치는 웃도는 키였다. 하지만, '…저 둘 사이에 있으니 왠지 꼬마같아 보여.' 사실 정신적 연령으로 보면 유리아덴이 그나마 저 두 사람보다는 훨씬 성숙하지만, 루피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픽 웃었다. 그녀는 단상 위에 오른 셋을 공포어린 눈빛으로 조심스레 쳐다보며 몸을 사리는 여자들을 둘러보고는 다시 코웃음쳤다. 에리나와 세키라는, 떨리는 두 손을 맞잡은 채 허리를 꼿꼿하게 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만일 조금이라도 죽일 생각이 있었다면 어제 진작 죽였을 걸. 그걸 보면 죽게 되는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떠는지.'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게 될까 두려운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비웃어 주리라. 자신들?지금, 세상에서 가장 비천하다 여겼던 노예와도 다름없는 신세인 것이다. 호화로운 방이 주어지고, 고운 옷감의 옷이 입혀지고, 시녀가 주어 졌다고 해서 그 사실을 망각하면 곤란했다. 그렇다고 해도 마족에게 감사할 생각따위는 물론 없지만 말이다. 세 사람은 무슨 회의를 하는 듯 했다. 무엇이든 가르치려 해도, 막상 말이 통하지 않으니 답답도 하겠지. 그런데… 아니, 저게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왜, 왜 갑자기 가위 바위 보야? 저것들 장난하나?' 기가 막히기 그지없는 노릇이었다. 단상 위에서, 여자들 뻔히 다 보는 앞에서 가위 바위 보라니. 마치 무슨 추첨같은 느낌이 들었다. 루피아는 '가위 바위 보'를 하고 있는, 조금 황당한 마족 셋을 주시했다. 아까 자세히 보았던 대로, 익숙하지 않은 이종족(異種族)이라는 느낌을 그다지 주지는 않는 세 마족. 그 점이 오히려 더 불편했다. "℃Å££℉℃Å£℉¢″£㎗㎕?¢¢″£㎗¢㎕?¢£." "£℉¢″£㎗¢㎕??" "℉! ¢″£㎗, ¢㎕?¢." 초록색 머리 마족- 아로데는 빙긋 웃으며 무엇인가를 말했다. 그러자 두 마족은 뭔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무슨 소리들을 하는 건지 답답한 루피아였지만, 어쩌랴? 그렇다고 마족 멱살을 잡고 '너 무슨 얘기 했어?'라고 물어볼 순 없는 노릇이 아닌가. 초록색 머리 마족은 단상의 중앙에 제대로 자리를 잡고 섰다. 그가 발을 한 번 구르자, 여자들의 몸이 순간적으로 움찔, 하며 조심스레 중앙단상으로 모였다. 물론, 그 중 루피아는 제외다(주인공은 언제나 예외가 아니던가. 일종의 특권이다). 루피아는 애초부터 그들을 보고 있었으므로 조심스럽게 응시 어쩌고 할 단계가 아닌 것이다. 루피아는 순간적으로 초록색 머리 마족의 눈에 스치는 얼음같은 싸늘함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 '역시~ 저 놈은 싸울 때 제일 빡 돌아버리는 녀석일 거야!' 그의 핏빛 눈동자에 스치는 잠깐의 냉기만으로도, 루피아는 피부에 소름이 돋는 느낌이었다. 연상적으로, 마왕의 눈동자가 다시금 떠오르는 루피아였다. 바로 그 때, 아주 명랑하고 발랄한(?) <고대어> 발음이 들려왔다. "안녕~~?" 비틀! 순간적으로 루피아의 몸이 기우뚱 기울어 졌다. '안녕'이라니? 게다가 저 친숙한 목소리와 말투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아까 그 싸늘한 표정을 지었던 마족이 맞는걸까? 초록색 머리칼 마족- 아로데는 생각보다 열렬한 반응(?)에 감동하며 계속 고대어로 말했다. "오옷, 역시 잘 알아듣네. 어디 보자… 제대로 먼저 반응한 건 저 넷이군." 아로데가 가르킨 사람은 루피아를 포함해 세키라, 에리나, 그리고 그녀와 그다지 떨어지지 않은 곳에 앉아있는 핑크색 머리카락의 귀여운 여자였다. 루피아가 그 여자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녀와 루피아는 순간적으로 눈이 마주쳤다. "내가 알기로, 고대어는 꽤 되는 가문의 여식이라면 알고는 있을 거야. 잘 말할 수 있는 것까지는 기대하지 않아도, 알아들을 수 있기는 할 걸?" 루피아는 속으로 신음을 흘렸다. 고대어라니… 생각지도 못한 방법이었다. 물론 그녀가 고대어를 완벽하게 마스터하고 있기는 하다. 마법의 필수적인 요소가 바로 룬어와 고대어, 마나였다. 마법서를 보자면, 거기에 써 있는 고대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효과가 다르게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 허다했다. 마법을 익히는 루피아 그녀로서는 고대어는 모국어인 시리어스어보다 자연스러워야 했다. 아로데는 피식 피식 어이없이 웃는 그녀, 루피아를 보며 눈을 빛냈다. 반짝, 하고 핏빛 그의 눈동자가 빛을 냈다고 생각하는 순간 루피아의 뇌리에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늘 그렇듯이, 그녀의 예상은(불길한 것만) 언제나 잘 맞아 떨어졌다. "로이드윈, 유리아덴! 나 결정했어." "…뭘?" 단상 위 남자는 장난스럽게 씨익- 웃었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고 느낀 순간, 그의 시선은 그녀의 옆으로 흘러서 세키라에게까지 닿았다. 세키라의 몸이 더욱 떨렸지만, 세키라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나, 이 둘로 할래." "어엉?" "꺄… 아악!" 어느 사인지, 그 마족이 벌써 그녀의 뒤에 와서 어깨에 손을 얹고 있었다! 마족의 손이 닿자 세키라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작게 비명을 질러버렸고 루피아는 약간 얼빠진 듯한 소리를 내었다. 루피아의 떨리는 시선이 손에서 타고 올라가 아로데의 얼굴을 향했다. 그 마족- 아로데의 얼굴에는, 그 특유의 미소(-일 것 같은) 장난스런 미소가 걸려 있었다. '시, 싫어어어어어!' * * * * * * * * * * * * * * *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에드윈드는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고 괴로워 해 봐도 나오는 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엎드려 누님을 허망하게 보낸 것에 대해 괴로워 하는 대신 해결책을 찾아보기로 했다. '아버지 연구실… 들어오는 데 조금(?) 장애물이 있기는 했지만, 뒤져보면 뭔가 하나라도 건져지는 게 있긴 하겠지.' 마법사의 연구실이니만큼 들어오는 데 걸리는 마법 트릭은 장난이 아니었다. 하지만 에드윈드는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손가락에 쥐어진 팔찌를 들어 올렸다. 이 팔찌를 얻어내기 위해 얼마나 큰 모험을 해야 했는가!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누님을 되찾으려는 에드윈드의 열망 앞에서는 태양 앞의 반딧불처럼 무색하기만 했다. '아버지도 그런 면으로 보면 참 허술하시다니까… 쿡, 아무리 아들이라도 그렇지, 그렇게 방심해 버리시다니. 제국의 세 공작 중 하나인 에스베크 공작이 '술'에 엄청 약하다는 걸 다른 사람들이 알면 포복절도할 걸. 포도주라면 몇 모금 정도는 괜찮겠지만… 중요한 건 내가 건네 드린 건 보통 포도주가 아니었다는 점이지.' 지위가 지위인 만큼, 아예 술을 손도 못 대는 건 아니었다. 단지 주량이 겨우 포도주 몇 잔을 넘길 정도라는 게 문제였다. 에드윈드는 '딸을 잃어 상심이 컸으셨을 텐데 너무 내 입장만 생각하고 이기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하며 아버지에게 술을 따라 드렸다. 아들의 기특한 태도에 감동을 받으신 에스베크 공작은 꺼멓게 탄 속을 달래려 하기라도 하듯 에드윈드가 따라준 술을 벌컥 들이마셨고…… 쓰러졌다. 쓰러진 아버지의 품을 뒤져 연구실을 통과할 수 있는 팔찌를 훔쳐낸 에드윈드는 지금 이렇게 어둠을 틈타 연구실에 침투한 것이다. '약에 관한 것에 흥미가 있었을 때 자세하게 연구하느라 약재상과 친해둔 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에프함'. 술의 도수를 높이는 약이지. 아무 곳에도 쓸모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줄 생각도 못했어. 뭐- 드래곤도 쓰러질 거라는 건 확인된 바 없지만 맛과 향에 아무 이상없이 도수를 높일 수 있다는 건 확실했어.' 그는 장난스럽게 손에서 놀리던 팔찌를 눈앞에 있는 구멍에 맞춰 넣었다. 딱 맞춰 쏘옥 들어간 팔찌는 구멍 속에서 달칵, 하는 소리를 내며 한 바퀴 빙 돌았다. 평소 마치 드래곤의 레어처럼 엄청난 철벽수비를 자랑하던 아버지의 연구실이, 아주 허무하게 열리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에드윈드도 예전에 이러한 방법을 생각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에게 이런 방법을 쓸 수는 없어서 생각만 해 두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아버지는 무슨 아버지? 내가 지금 그런 거 따지게 됐어? 누님 구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건 이 세상에 없어! 기다려요, 누님!' 마계에서 동생의 구원을 기다리는 세키라 누님을 떠올리며, 에드윈드는 열의에 불타 용감하게 아버지의 연구실에 발을 디뎠다. 제 목: [수정판] 공녀(貢女) : 제3화 [색다른 신부수업](3) [수정판] 공녀(貢女) : 제3화 [색다른 신부수업](3) * * * * * * * * * * * * * * * 오싹, 비록 옷 위로였지만 마족의 손이 어깨에 닿자 루피아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껴야 했다. 그녀가 그러니 세키라는 오죽할까. 아까 나지막하게 신음을 흘린 세키라는 질색한 표정으로 눈을 꼭 감고 있었다. 하지만 기겁하며 뿌리치지 않은 것만 해도 대단한 성과라고 할 수 있었다. 악마의 마수(?)에 붙잡힌 친구와 자신을 구하고자, 루피아가 똑 부러지는 고대어 발음으로 말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얘 얼굴도 안 보여요!" 그야말로, 겁먹은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는 자존심이 공포를 이긴 상황이었다. 그녀의 말에 아로데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반짝이는 장난기와 묘한 생기를 감춘 붉은색 눈이 세키라에게서 떨어지지 않은 채 웃음을 띠었다. "내가 왜 너희들같은 미물(微物)의 마음따위를 신경써 주어야 하지?" 붉은색 눈동자에는, 그녀들의 상상 속 '악마'의 역할에 충실한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경멸, 비웃음. 마치 벌레보다 못하다는 듯한 그 눈이란! 분해서, 루피아는 주먹을 꽉 앙다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런데, 환멸어린 눈으로 그녀들을 보던 아로데의 눈빛이 다시 묘한 빛을 발하는 게 아닌가? 그리고 그는 싱긋- 상큼한 미소를 둘에게 날려보내 주었다. '뭐, 뭐야?' 급작스러운 분위기 쇄신(?)에 놀란 루피아가 어이없다는 듯 그를 쳐다보자 아로데는 푸훗,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아까 그런 눈으로 자신들을 본 적이 없다는 듯. 그는 아주 재밌다는듯 가까이 다가 온 두 마족에게 말했다. "하하하! 성깔이 보통이 아닌 걸? 큭! 봤어?" 흥미를 담은 시선이 자신에게로 내리 꽂혔다. 루피아는 꾹꾹 죽여 두자고 결심했던 '자존심'이 고개를 쳐드는 것을 느꼈다. 지금 마구 상처입고 쿡쿡 찔려지고 있는데 어찌 꿈틀거리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보랏빛 머리의 마족이 그녀를 무심하게 관찰하더니 툭 내뱉었다. "과연, 좋은 혈통의 종자라 그런가." 혈통? 종자? 하! 기가 막히다. 마시장에 내놓아진 말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가격이 매겨지는 듯한 느낌에 루피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옆에서는 에리나와 세키라가 그런 그녀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한 편으로는 저 악마들의 치욕스런 말에 분노하는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키들대며 웃는 것도 마치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 어서 해야 할 일부터 하는 게 좋지 않겠어? 그래도 우리 '부인'이 되실 분들 아니야? 킥, 비록 아무 짝에도 쓸모 없겠지만." 마치, 사육이라도 하겠다는 어투였다. 루피아는 다시 이를 악물고 주먹을 꽉 쥐어야 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피가 나도 느낄 수 없었다. 아로데는 흥미로운 시선으로 루피아를 한 번 훑고 세키라를 주시했다. 세키라의 몸이 그의 시선에 움찔하자 그는 세키라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주고는 단상 위로 되돌아 갔다. 세키라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아직도, 그의 손이 닿았던 어깨에 감촉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어깨를 한 번 쓸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 루, 루피아! 너, 너 피!!" "뭐? 어… 얼레. 언제 난 거지?" 에리나가 루피아의 손바닥을 펴 보더니 깜짝 놀라 기겁했다. 깜짝 놀라 손바닥을 편 루피아는 손바닥에 선명하게 난 초승달 모양 손톱자국 네 개와 그 주위로 베어나온 피를 봐야 했다. 세키라는 얼른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피를 닦고 감싸매 주었다. "나, 이러려고… 저런 말이나 들으려고 고대어를 배운 게 아니었는데. 으흑!" 서러움에 세키라는 말을 잇지 못했다. 세상에, 짐승 취급이라니. 비록 그들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말이었다 하더라도 그 충격은 컸다. 루피아는 손수건을 맨 손을 꼭 붙잡고 눈물을 흘리는 세키라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루피아는 세 마족의 등에 대고 원망어린 눈초리를 마구마구 쏘아 보냈다. 바로 그 때, 아로데가 휘익- 돌아 보면서 말했다. "아잉~ 그렇게 열정적으로 쳐다보면 부끄럽잖아~" 순간, 여자들과 두 마족은 얼음이라도 된 듯 움직임을 멈춰 버렸다. 모두의 경직된 시선이 아로데에게 모이자, 아로데는 정말 부끄럽다는 듯 광대뼈 부근을 붉게 물들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몸을 비비 꼬았다. 그는 루피아에게 은근한 시선을 보내며 코맹맹이 소리로 말했다. "아이이잉~ 너무 그렇게 쳐다보면 나, 삐.칠.꼬.얌!" 아아! 정말 너무나 충격적이 아닐 수 없다. 로이드윈은 머리를 감싸쥐고 아로데의 어깨에 슬며시 손을 얹으며 무너진 표정을 지었고 유리아덴은 그 옆에서 얼굴을 굳힌 채 침묵으로 호소(?)하고 있었다. 이런 걸 보면, 아무래도 상습범(?)인 듯 하다. "제발… 그 것만은 하지 말아 줘." 그나마 다행인 점을 들라면, 아로데의 외모가 평균치를 훨씬 웃돌아 보기 역겹지는 않다는 점이랄까? 아로데는 로이드윈의 표정과 유리아덴의 얼굴을 보고는 씨익 웃었다. 마치 무슨 일을 저지른 후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한 미소였다. 공녀들에게 따라 오라고 말한 뒤 밖으로 나가는 세 사람을 충격받은 얼굴로 벙쪄 바라보며, 루피아는 작게 중얼거렸다. "의외로…… 귀여운 구석도 있잖아?" 취향을 의심해야 할 만한 발언이었다. "유리아덴, 준비는 다 끝났어?" 로이드윈이 물었다. 유리아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준비는 끝내놓은 상태였다. 어차피 실험 실패로 숲에 풀어 놓으면 하루도 채 되지 않아 다 죽어버릴 게 뻔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이번 기회에 써먹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로이드윈은 훗, 하고 웃고는 준비된 널찍한 공간에서 불안한 듯 웅성거리는 여자들을 내려다 보았다. 이제 곧 벌어지게 될 상황에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분명, 재미있을 거야. 여자들에게는 검이 하나씩 주어져 있었다. 무서워서 차마 검을 만지지 못하는 여자도 있었고, 무거워 하며 낑낑대는 여자도 있었다. 그에 반해, 검을 아주 익숙하게 만지는 여자도 극소수였지만 있긴 했다. "자- 유리아덴, 시작해." 평소처럼 유리아덴은 간단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허공에 간단한 수인을 맺었다. 보랏빛 마기가 그의 손가락부터 시작되어 흔적을 남겼다. 그리고, "꺄, 꺄아아아아악!!" "캬아아아! 저, 저게 뭐야아아!!" 자지러지는 여자의 비명이 울렸다. 손에 쥐여진 검을 살펴보던 루피아는 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들어 비명이 울린 곳으로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는... 그 곳에는!! '저, 저거 대체 정체가 뭐야!' 하나 하나 개성적(?)으로 솟아있는 뿔, 역겨운 올리브 빛깔의 꺼칠한 피부 위에 미끈거리는 투명한 노란 액체. 아아, 거기까지는 어찌어찌 봐 준다고 치자. 루피아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건, 그 복합괴물(?)의 상체, 그것도 머리 부분이 띠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루피아는 또 그 괴물들을 잘 뜯어 보았다. 아아, 한쪽 다리는 말의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돼지 거구나. 그런데 어떻게 길이 비율이 맞는 걸까? 아이러니네. 어느 사인가 루피아는 현실도피를 하고 있었다. "끔찍해… 우엑!!" 역겨운 냄새가 화악, 풍겨왔다. 대충 모두 합해 열 두마리가 조금 넘는 것 같다. 그녀들의 주위를 빙 둘러싸며 서 있는 그 괴물들은, 적어도 4m는 될 듯이 보였다. 곳곳에서 속에 든 것을 게워내는 소리가 들렸다(든 것도 없겠지만, 아마도). "흑, 흑… 무서워요. 흑흑!" 갑자기 얼결에 한 여자가 루피아에게 안겨 들었다. 동글동글한 눈매에 솜사탕같은 핑크빛 머리카락, 눈물로 젖은 핑크색 달콤한 눈동자를 한 아주 귀여운 여자였다. 아까 고대어 어쩌고 할 때 눈이 마주쳤던. 나이는 대충- 음, 한 16살 정도로 보였다. 아마 그보다는 많겠지만 그렇게 보일 정도로 어린 동안이었다. 루피아는 정말 얼떨결에 그 아이를 토닥여 주고 말았다. "이제부터 너희들이 죽여야 할 것들이다. 여기 있는 유리아덴의 생체실험 실패작들이지. 어차피 숲에 데려다 줘봤자 하루도 못 돼 죽을 거야. 아마- 머릿수로 밀고 나가면 쉽게 이길 수 있을 걸? 후후, 인간들이 상대해도 될 정도라니. 할 말 다 한 거지." "지, 지금 그걸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예요? 저것들을 죽이라니?" "왜,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여?" 씨-익 웃는 아로데의 얼굴이 빛났다. 루피아는 토닥여주던 여자를 밀어내고 그를 쏘아 보았다. 그녀의 옆에 서 있던 세키라의 얼굴에 긴장이 비춰졌다. '그래, 그래. 저런 싸이코한테 찍히다니, 긴장이 되기도 하겠지. 불쌍한 루피아, 세키라.' 에리나의 얼굴에는 그렇게 써져 있는 것만 같았다. 아로데는 그들에게 상큼-한 미소를 날리면서 무.척. 재미있다는 감정을 지우지 않은 채 말했다. "난 스파르타 식을 선호하지!" 아아, 진정한 '악마의 미소'였다. * * * * * * * * * * * * * * * "캬캬캬캬캬! 크캬캬캬캬캬- 쿠흐흐흐흐! 흐하하! 아, 아이고 배야!" 로이드윈과 아로데는 금방이라도 가출할 것 같은 배꼽을 붙잡으며 자지러지게 웃었다. 그 정도로, 방금까지 눈 앞에 펼쳐졌던 광경은 가관 중의 가관, 장관 중의 장관이었던 것이다. 이 모습을 다른 동료들에게 보여줄 수 없었다는 것이 심히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크… 크흐흐, 흐흐흐… 기대 이상이야, 정말! 크… 그 꽁지빠지게 도망다니는 모습이란. 므흐흐흣!" 죽을 가능성은 조금도 없었다. 아무리 머릿수가 많다지만 인간 여자에게 죽을 수 있을 만큼 약한 녀석들이었기 때문이다. 겨우 웃음을 멈춘 두 사람은 단상 위에서 계속해서 키들거렸다. 그들의 눈에는, 조금도 웃지 않는 유리아덴이 비정상으로 비춰졌다. 한편, 루피아는 눈에 훤히 보이는 데서 키들거리며 웃고 있는 세 마족을 향해 이를 부드득 갈았다. '아주 가지고 노시는 구만! 가지고 놀아!' 스파르타 식이고 뭐고, 유리아덴의 그 '생체실험 실패작'들은 결국 공녀들의 손 아래에서 장렬하게 그 최후를 맞이했다. 루피아와 에리나의 지휘(?) 아래, 공녀들은 결국 손에 들린 흉기를 한꺼번에 휘둘러 하나씩 그 괴물들을 '처리'해 나갔던 것이다. 그 정신없었던, 그리고 지옥같았던 시간 후 남은 건, 내일이면 몰려오게 될 근육통과 너무 많이 갈는 바람에 늙어서 이가 다 빠지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 뿐이었다. 단상 위에서 유유자적하게 구경이나 하던 세 마족은 그녀들이 숨을 다 진정시킬 무렵에야 느릿느릿 내려왔다. 그것도 루피아와 에리나, 세키라 셋 앞으로 말이다. 원망을 담아 노려보는 그녀 앞에서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을 한 로이드윈이 말했다. 안경 쓴 그의 얼굴을 한 대 후려쳐 주고만 싶은 루피아였다. "힘들어?" 알면서 왜 물어? 그렇게 말해주고 싶은 루피아였지만 그녀는 꾹- 꾹 눌러 속으로 삼켰다. 그리고는 생긋 웃는 표정을 지으며 말해 주었다. 비꼼이 가득한 목소리로. "아뇨. 괜찮습니다. 네~ 괜찮고 말고요. 누가 시키신 일이라고 감.히. 힘들어 하겠어요." 그러나, 루피아는 잠시 잊었었다. 그녀가 비꼬는 상대가 누구인지를 말이다. "누구긴 누구야, 위대하신 내가 시킨 일이지. 후후, 너무 황송해서 힘든 줄도 모르겠지?" 아아! 누구라도 좋으니 저 밉살스런 얼굴에 주먹 한 대만 꽂아 주었으면! 그녀는 진심으로 바랐다. 그녀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로이드윈을 쏘아보자, 로이드윈은 예의 그 미소를 지으며 생글거렸다. 그 모습에 도리어 힘이 빠져버린 루피아였다. "자! 이제 마법 차례인가?" '마법'이라는 단어에 루피아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에 묘한 생기가 돌며 팽그르르 빛났다. 아까까지 분해 죽겠다는 얼굴로 이를 바득바득 갈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루피아는 로이드윈을 열광적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마법도 가르쳐 줘요?" 그런 그녀의 모습에는, 정말 묘한 광기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맹목적으로 반짝이는 그녀의 눈빛에 로이드윈은 뭔지 모를 박력을 느꼈다. 루피아는 정말 만개한 꽃처럼 아주 활짝, 활짝 웃고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도 마법을 배울 수 있을 줄이야! 중간계 마법이랑은 많이 다르겠지? 마계의 마법은 파괴적이라고 하던데. 마계마법은 어떤 걸까? 궁금해! 궁금해~' 로이드윈은 빨리 가자고 여자들을 재촉하는 루피아를 보며 어디선가 본 것 같은 한 문구를 떠올렸다. 「마법사란? -수식과 주문에 목숨을 거는 공통적 습성이 있으며, 대부분 정신이 나간 것들이 대부분이다.」 정신 나간 것들…. 어쩌면, 루피아도 그 범주에 들지 모른다고 로이드윈은 생각했다. * * * * * * * * * * * * * * * 빠드득! 루피아는 섬뜩한 소리를 내며 이를 갈았다. 정말, 그딴 녀석들을 믿은 내가 바보지! 아니, 애초에 그딴 녀석들이 제대로 가르치리라 기대했던 것부터가 오판이었어! 아까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보라고! 생각보다 약했지만 괴물 몇 마리 대령해 놓고 알아서 해, 라고 던져버린 녀석들이 마법이라고 제대로 가르치겠어? 그래, 그럴 리가 없었던 거라구! 속으로 계속 중얼거려 봤지만 열받은 속은 풀리지가 않았다. "망할 것……!!" 뚝!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던 가벼운 깃털 펜의 펜대가 부러져 버렸다. 주위에는 공녀들이 지쳐 곯아떨어진 채 널브러져 있었다. 차마 몸을 펴지도 못하고 웅크려서 잠이 든 그녀들을 위해 루피아는 터져 나오려는 소리를 삼켰다. 조금 전 세 마족의 안내를 받아 이 곳으로 온 루피아는 기대에 찬 눈으로 세 마족을 바라봤다. 하지만 세 마족은 눈을 반짝이는 그녀에게 단 한 마디를 했을 뿐이었다. "자, 알아서 해!" 라고. 그 때 그 얼굴들이 떠오르자 루피아는 다시 이를 갈았다. 아드득! 으득! 어쨌든 세 마족이 그렇게 가 버리고 난 뒤 루피아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황성의 도서실도 이렇게 크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거대한 규모의 도서실이었다. 책 냄새가 물씬 풍겨나고, 들쑥날쑥하게 꼽혀 있는 책들이 그녀를 유혹했다. 루피아는 세 마족에게 이가 갈렸지만 이런 기회를 놓칠 순 없어 일단 책을 한 권 뽑아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생각지도 못한 문제에 봉착했다. '그, 글자를 몰라!!' 아아, 어떻게 이런 일이! 그랬다. 문자! 그녀는 마계의 문자를 몰랐던 것이다. 알 수 없는 도형과 그림들로만 나열되어 있는 책장을 분한 듯 마구 넘기며 루피아는 속으로 처절한 절규를 질렀다. 바로 그게, 겨우 10분 전 상황인 것이다. 그녀의 손에서 한 번 부러졌던 펜대가 또 한 번 뚝! 하고 허리가 부서지는 아픔을 겪었다. 꽤나 길었던 깃털펜은 이제 원래 길이의 4분의 1이 되어 있었다. 루피아의 손에 들려있는 책은, <하루만에 익히는 마계어! 당신은 더이상 문맹이 아닙니다!>라는 제목의 책이었다(필독 연령대 2, 3세). * * * * * * * * * * * * * * * "네- 이- 노오오오옴-----!!!" "히익!" 딸꾹! 에드윈드는 깜짝 놀라며 마구 뒤지고 있던 아버지의 연구 상자에서 고개를 들었다.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노기를 마구마구 뿌려대는 그의 아버지, 에스베크 공작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버지의 몸에서 살기가 물씬 풍겨 나왔다. "감히- 아들이란 녀석이 아비를 죽이려고 해? 그리고나서 한다는 짓이 고작 연구실을 뒤벼 놓는 것이냐? 오냐, 너 죽고 나 죽자. 세키라까지 보냈는데 못할 짓이 어디 있누? 아이스 에로우!" 공작의 손 위에서, 몇 개의 긴 얼음 화살이 생성되어 에드윈드를 겨눴다. 에드윈드의 안색이 창백해지며 에드윈드는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으아, 저거 맞으면 유언이고 뭐고 없겠다! "여, 여긴 아버지 연구실이에요! 그거 날리면 적어도 여기는 다 날아 간다구요! 진정해욧!!" "시끄럽다!" "으아아, 제기랄! 대체 어떻게 깨어난 거에요? 적어도 하루는 잠들었어야지! 그렇게 냉큼 정신차려 버리는 게 어딨어?!" "어딨긴, 녀석아! 여?다! 이이~ 아무리 그래도, 알콜성 독초인 '에프함' 가루를 술에 타다니, 미쳤느냐? 내가 해독제를 미리 먹어 두지 않았더라면 어떡할 뻔 했느냐!" 치밀하다! 에드윈드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격언을 떠올렸다. 그가 아버지에게 약탄 술을 먹여 쓰러지게 했던 것처럼, 아버지는 미리 아들의 행동을 읽고 에프함의 해독제를 먹어 두었던 것이다. 역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에드윈드는 아버지가 날리는 아이스 에로우를 잽싸게 피하며 소리쳤다. "제길! 가르쳐 달라고 말해도 모른다고 시침 뚝 떼셨잖아요! 누가 모를 줄 알아요? 아버지는 분명 알고 있어요! 우, 우아아악!!" "닥쳐랏! 존속살인을 일으키려고 하다니, 이 무서운 자식!" "그래도 아버지 아들이에욧!!" "난 너같은 자식 둔 적 없어! 에프함이 어떤 물질이라는 걸 몰랐던 게냐!" 물론, 어떤 성분이 들었는지 대충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첨가된 물질에 죽지는 않을 정도로 독성을 조절해 주는 성분이 있었기에 안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적당하게 조절된 그 양에 아버지의 해독제가 더해지니 에프함의 효력이 오래갈 수가 없던 것이다. 에드윈드는 조금 더 강한 성분을 써야 했다며 이를 갈았다. "그러지 말고 가르쳐 달란 말이에요! 분명 알고 계시잖아요!! 으이익~ 존속살인 좋아하시네! 어린 아들한테 마법 마구 날리는 건 어떻구요!!" "독살시도는 안 했다! 가랏!" 콰콰콰쾅! 연구실의 벽이 박살이 나며 찬바람이 들어왔다. 에드윈드의 안색이 단박에 창백해져 버렸다. 에드윈드는 재빨리 박살난 벽 쪽으로 몸을 날리며 아버지를 향해 소리쳤다. "난 절대 포기 안 해!" 집념의 소년, 에드윈드. 그의 나이 방년 16세였다. 제 목: [수정판] 공녀(貢女) : 제4화 [마왕](1) #. 제4화 [마왕] * * * * * * * * * * * * * * * "정말 읽을 수 있으시겠어요? 혹시 모르시는 게 있으면 물어 보세요." 루피아는 걱정스러운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메를리나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따사로운 오후, 그녀는 가벼운 다과와 함께 독서를 하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제 이를 갈며 세 마족을 저주했던 문제의 도서실에서 가져 온 책을 펴며 그녀가 공부를 하려고 하자 메를리나는 자신이 읽어 주겠다며 나섰고, 루피아가 거절하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렇게 묻는 것이다. "음, 걱정 마. 기본 글자는 어제 죽어라고 외웠으니까. 무슨 글이 그렇게 복잡하대? 기본 형태만 200자야, 200자." 그렇게 열심히 공부해 본 적도 생애 처음일 것이다! <하루만에 익히는 마계어! 당신은 더이상 문맹이 아닙니다!>(필독 연령대 2, 3세)를 열심히 들여다 본 결과, 책에 적힌 말처럼 그녀는 하루만에 마계어의 기본 형태 200자를 달달 외우게 되었다. 어제 잠들면서도 중얼중얼대며 손가락으로 형태를 그리는 등, 노력에 노력을 거듭한 결과였다. 지금 루피아의 머릿속에는 고대어와 룬어, 시리어스 어와 대륙 공통어, 각 국가의 언어 등 수많은 형태의 언어들이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신계와 마계의 언어가 합쳐지다 보니 그래요. 옛날에 천마전쟁이 일어났을 때 하도 오래 지속되다 보니 그렇게 섞여져 버렸다고 하더라구요. 초기 마계에는 특정한 언어란 게 없었구, 의지로만 의사를 전달했다고 해요." 루피아가 투덜거리자 메를리나가 친절히 대답해 주었다. 루피아는 바삭거리는 쿠키를 집어 입으로 가져가며 떠듬떠듬 기본 책을 읽어 내려갔다. 제목은 <자라나는 새싹을 위한 '열려라 문자 나라'>였다. 손가락으로 글자 하나 하나를 짚어 내려가며 책을 읽어 나가는 루피아를 보며 메를리나는 풋 웃었다. 큰 보라색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려가며 글자를 따라 읽는 루피아가 너무 귀여웠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루피아님이 마왕성에 남게 되셔서요." "……제발 그 얘긴 하지 마." 단번에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러워 졌다. 루피아는 으으, 하고 신음을 흘리며 테이블 위에 쓰러져 버렸다. 괴로워 하는 그녀의 표정을 본 메를리나는 다시 소리죽여 웃어야 했다. 그리곤 웃음을 참느라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요?" 부슥!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쿠키가 바스락거리며 루피아의 손 안에서 형태를 잃어 버렸다. 왠지 심상찮은 모습에 메를리나는 오전에 있었던 일을 상기했다. 그리고, 오전의 일을 끝낸 루피아가 억울해 하는, 그리고 무척 분해하는 얼굴로 돌아왔다는 것도 생각해 냈다. '그게 그렇게 분한 일인가?' 메를리나는 마족이었다. 자신의 능력에 따라 모든 것이 좌우되는 세계에서 태어나고 자란 뼈속까지 마족인 것이다. 그녀 역시 약한 것은 싫어 했고, 자신보다 약한 존재에게는 철저하게 자신의 권리를 이행했다. 루피아 역시 그녀보다 약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일단 이례적인 존재이기에 권리를 요구하지는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마족이기 이전에 여자였다. 귀여운 것이나 예쁜 것에는 약하다는 약점이 있는 것이다. 그 때 루피아는 광기 어린 얼굴로 절규했다. "어떻게! 어떻게 사람을 '제비뽑기'로 가지고 놀 수가 있느냔 말이야아!!"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늘 오전의 일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 * * * * * * * * * * * * * * "내가 데려갈 거라니까! 포기해!" "네가 무슨 권리로? 싫어!" 로이드윈과 아로데가 거대한 대전 안을 쩌렁쩌렁 울리며 다투었다. 주위에서는 공녀들의 무리와 마족들의 무리가 그 두 사람을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두 마족의 중앙에 어이없이 끼게 된 루피아는 정말 아주아주 쪽팔렸다. 얼굴이 화끈 달아 오르는 느낌이었다. "이 성깔 더러운 여자는 내가 데려갈 거야! 재미있을 것 같단 말이야!" "나도 마찬가지라고!" 게다가, 그녀를 데려 가겠다는 이유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마치 시장에서 흥정되는 물건이 된 듯한 느낌에 루피아는 정말 비참한 기분을 맛봤다. 곁에 서 있는 세키라와 에리나도 좋은 얼굴이 아니었다. 아니, 공녀들 전부가. 특별계층으로 어디서나 우대를 받았던 귀족 영애들이었으니 그 자존심이 오죽이나 셀까. 그런데 하루 아침에 물건보다 못한 취급을 받게 되었으니 그 기분이 얼마나 비참할까 루피아는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그녀 역시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한 기분을 느끼고 있지는 않았다. '흥정되는 물건이라… 아, 그다지 틀린 말도 아닌가?' 문득, 오빠들과 함께 시장을 구경하고 다니던 일이 떠올랐다. 그녀가 11세가 되던 날, 그녀는 드디어 탈출을 감행했었다. 물론 도중에 오빠들에게 발각되는 바람에 함께 나가야 했었지만, 그 날은 처음 구경하는 시장의 모습에 완전히 넋을 잃었었다. 그리고 제일 인상적으로 머릿속에 남은 기억은 '아줌마'라 불리는 최강의 막강부대의 엄청난 설전이었다. 아, 그 열렬하게 빛나던 눈동자와 피튀기듯 튀겨대는 타액들, 벌겋게 붉어진 얼굴! 단순한 억지도 아닌 어거지를 쓰며 한 푼이라도 더 깎기 위해 장사꾼들을 몰아치던 그 카리스마! '오빠들마저도 무서워 할 정도였으니 뭘 더 말할까? 훗.' 오빠들마저도 몇 번 본 모습이었지만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었다. 추억에 젖어있던 그녀를 기억 속에서 건져 낸 것은 한숨섞인 로이드윈의 목소리였다. "아무래도 이래서는 영 결론이 안 나겠어. 우리도 제비뽑기 하자." "뭐? 그러다 아예 엉뚱한 곳으로 가 버리면 어떡하고?" "우리만 따로 제비뽑기를 하자고. 마왕성에 남겨놓을 하나하고 우리가 데려갈 여자 셋. 이렇게." 로이드윈의 손가락이 루피아와 에리나, 세키라, 그리고 그녀들의 가장 가까이에 앉아 있던 분홍색 머리칼의 소녀를 가리켰다. 어쨌든 그렇게 그들의 말다툼이 정리되자, 대대적인 마족과 공녀들의 제비뽑기가 시작되었다. 공녀들과 마족들은 숫자가 적힌 종이를 하나씩 받았고, 같은 숫자를 가진 자들이 함께 생활하게 되는 것이다. 얼마 뒤, 마족의 옆에는 공녀가 하나씩 서게 되었다. 공녀들의 공통점이라면, 하나같이 눈이 빨갛고 훌쩍이고 있다는 것이다. 보호해 줄 것 하나없이 낯선 세상에 팔려져 버린 것이다. 게다가 상대는 '악마'들이다. 두려워 할 이유가 충분했다. '마족이니까' 우리를 죽일 거야. '마족이니까' 이제는 다 끝난 거야. '마족이니까' 언제 괴롭히며 때릴 지 몰라. '마족이니까'...... 루피아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키라는 애써 어깨를 펴고 있긴 했지만 가늘게 떨리는 손을 감출 수는 없었다. 세키라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다. 피부는 하얗다 못해 창백했고 상냥하고 따뜻한 갈색 눈은 유난히 크고 물기어려 보였다. 가는 팔다리나 어깨 위에서 굽실거리며 춤추는 갈색 머리카락은 더욱 유약한 분위기를 부각시켰다. 그에 비하면 에리나는 좀 나은 편이었다. 적어도 그녀의 높은 자존심이 그녀의 약한 모습을 용납하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낯선 사람에게는 좀 쌀쌀맞게 대해서 성격이 차갑다는 사람도 더러 있지만 한 번 친해지면 에리나는 세심하게 챙겨준다. 화려한 금발머리와 차갑게 올라간 냉정한 초록색 눈동자는 그녀의 높은 자존심을 알려준다. '하지만 둘 다 강하니까. 지금은 이러고 있지만 금세 기운을 차릴 거야.' 그녀는 그녀들과 함께 따로 격리되어 서 있는 핑크색 머리의 여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름은 아유니 드 포르티칼이라고 했고, 나이는… 21살이라고 한다! 세키라나 에리나보다 1살 많은 나이였다. 구름같은 핑크색 머리카락을 양옆으로 묶어 말았고, 예쁜 분홍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키가 작아서 더 어려 보이긴 했다. "거기 금발머리! 너부터 골라." 에리나의 몸이 움찔했다. 에리나는 떨리는 손을 꾹 쥐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래, 넌 대 칼르니르 공작가문의 영애야. 이딴 일에 겁먹지 마. 그냥 당당하게 걸어가서 종이조각 하나 집어오면 되는 거라구. 떨지 마, 에리나! 에리나는 앞에 놓인 네 개의 종이조각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종이에 적혀있는 숫자는…… '4'. 에리나의 눈길이 무심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보라색 머리카락의 마족에게 향했다. 그는 그녀에게 힐끗 눈길을 한 번 주었을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왠지 자존심이 상한 에리나였다. "어쩌면 가장 나은 건지도 몰라. 그나마 성질이 더럽지는 않잖아." 루피아가 시리어스 어로 위로의 말을 건넸다. 루피아는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라는 말을 떠올리며 먼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녀가 아까 에리나가 섰던 탁상 앞에 서자, 옆에서 아로데와 로이드윈이 소리쳤다. "자! 저거, '2'를 뽑는 거야! 저게 '2'야!" 저걸 뽑는다면 그녀가 미쳤다고 봐도 좋았다. "아니야, 저거야! '2'보다는 '3'이 더 나아!" 차라리 언덕 위 하얀 신전으로 가고 말아. 루피아는 묘한 경쟁의 눈길을 주고받는 두 마족의 얼굴에 주먹을 한 방 꽂아주고 싶었다. 그녀는 그들이 말한 '2'와 '3'을 제외한 나머지 하나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그녀는 몰랐다! 차라리 '2'나 '3'이 훨씬 나았으리란 것을. 그녀가 한 것은, 정말정말 최악의 선택이었다는 걸! 그녀는 그 사실도 모른 채 접힌 종이를 폈다. 그리고 보인 건…… 어? "꽈, 꽝?" 장내의 모든 사람들 눈이 놀람으로 크게 떠졌다. 갑자기 이게 무슨 드래곤 오크다리 핥는 소리? 로이드윈과 아로데의 눈이 제비뽑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책임졌던 유리아덴에게로 향했다. 시선을 느낀 것인지 방관자의 자세만을 취하고 있던 유리아덴이 입을 열어 말했다. "제비뽑기에는 늘 꽝이 있어야 하잖아?" "……너, 너!" 비록 어차피 남은 하나는 마왕성에 남게 되는 거였지만, 그래도 유리아덴에게 그런 것을 가르쳐 준 로이드윈은 속으로 절규했다. 차라리 자기 번호가 적힌 종이가 어떤 것인지 가르쳐 주지 말 것을 그랬다. 아로데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지만 곧 세키라 쪽으로 몸을 돌려 손목을 휙 잡아 당기며 말했다. "난 이쪽으로 할래. 이의없지?" "나야… 루피아만 아니면 누구든 상관없어." 로이드윈은 아쉬움의 한숨을 삼키며 아유니를 한 번 훑었다. "넌 이제부터 마왕성에 머물게 됐어. 지금까지 머물던 방에서 머물게 될 걸? 후훗, 가끔 놀러올 테니 기대하라고." '꽝'의 뜻을 이해한 루피아의 안색이 점차 파랗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내, 내가 왜 그걸 집어 들었지? 차라리 둘 중에 하나를 택할 것을! 그러고 보니 종이는 네 개였고, 있는 숫자 2, 3, 4였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물론 '1'일 것, 왜 그런 당연한 것을 이제야 안 거지? 최악이다!! * * * * * * * * * * * * * * * "오전에 공녀들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마왕성에 하나 남겠습니다만 그녀는 책만 던져주면 알아서 할 인간이니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물론 그러실 리 없겠지만요." 로이드윈이 허리를 살짝 숙여 보이며 익살스럽게 말했다. 마왕은 시종을 통해 결재된 서류를 로이드윈에게 넘겼다. 로이드윈은 서류를 빠르게 훑어보며 피식 웃었다. "여전히 일 처리가 빠르시군요." "그건 빨리 처리해야 하는 것 아닌가?" 로이드윈은 피식 웃었다. "네에, 그렇긴 하지요. 이대로 두실 겁니까? 계속 관찰만 하실 겁니까?" 마왕이 불쾌하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로이드윈은 냉큼 입을 다물었지만 호기심어린 시선을 던져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딜렌' 관한 문제는 그들에게 있어 무척 민감한 사안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에 관련된……. "지금도 이미 충분한 골칫거리다." 로이드윈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하지만 떠오른 그 즉시 그는 그 표정을 지워 버리고 얼른 화제를 돌릴 필요성을 느꼈다. 냉정하고 차가운 주인이 '딜렌'에 관해 어떠한 감정도 갖고 있지 않으리라 생각하고는 있지만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막 입을 떼려는 순간 마왕이 먼저 그에게 물었다. "천계는 어떤가?" 천계. 어둠의 반대속성인 빛을 타고난 종족 '천족'들의 터전. 로이드윈은 재빨리 대답했다. "아직 조용합니다. 30여년 전 알 수 없는 이유로 12대천사가 잠적한 이후 조용한 천계였지만 요즘들어 '천계이자 천계가 아닌 곳'에서의 움직임이 약간 수상합니다." "쿡! 그 여자인가?" "네. 하지만 그것도 요 1년 사이에는 잠잠합니다. 상당히 수상합니다. 잠적했던 12대천사가 움직이기 시작할 거라는 소문 역시 떠돌고 있습니다. 그다지 신경쓸 건 없다고 생각됩니다만, 그래도 보고드리는 게 좋을 거라는 생각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마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30여년 전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잠적했던 12대천사는 '세라핌의 공간' 속에서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12대천사의 대표격이 되는 미카엘조차도 다른 천족들에게 얼굴 한 번 내비치지 않았다면 말 다 한 셈이었다. 마왕은 지금 12대천사보다는 대천사들이 잠적한 동안 아무도 모르게 천계를 나눠놓은 여자의 움직임이 더 신경쓰였다. "…그래, 앞으로 공녀 건은 어떻게 할 작정이지?" "예정대로 4일 뒤 연회를 열고, 각자 맡게 된 공녀를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쓸만하게' 만들어 놓게 할 작정입니다. 애초에 개인이 가르치게 한다는 이유도 여기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일단 이 곳에 오게 되었으니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죠. 아마도 프리스트나 암흑계열 신성마법을 가르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클리오라께서도 당신께서 내리신 명령으로 이 곳에 오게 된 그녀들에게 조금 더 신경을 쓰실 테니 신성마법 계열이라면 능력이 크지 않겠습니까?"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기는 했다. 분명 클리오라는 공녀들을 저대로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마왕은 비소(秘所)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정신부터 차려야 하겠지." 로이드윈의 얼굴에 어색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 점이 마음에 걸리던 그였으니까 말이다. 그가 아는 여자 중 하나는 이미 적응한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마왕은 왠지 궁금증이 이는 것을 느꼈다. 성에 남은 공녀가, 혹시 그 여자일까? 상관없다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궁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오늘 확인해야 하는 마지막 서류에 사인을 한 그는 생각했다. '한 번쯤 가 봐야 겠군.' 그의 군주가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자, 로이드윈은 될 수 있는 한 작게 인사의 말을 읊조리고 방을 나왔다. 아까 군주에게 보고한 것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었다. 다만, 아직 말하지 않은 사실이 조금 더 있는 것 뿐이다. '에우로카엘… 그녀가 행방불명이다? 이건 대체 무얼 의미하는 건지. 아직 정확하지 않아 보고드리지는 않았지만. 잘 살펴봐야 하겠군.' 마안(磨眼) 로이드윈 드 스켈로테. 그의 또 다른 직위 이름이었다. * * * * * * * * * * * * * * * 세키라는 아로데의 팔에 더욱 매달렸다. 아찔한 느낌이 전신을 지배하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것이, 그녀는 지금 그의 팔 하나에 매달려 허공에 떠 있는 것이다. 아로데는 눈을 꼭 감은 세키라를 보며 알 수 없는 웃음을 짓더니 몸을 낮춰 그녀를 땅에 내려 주었다. "이봐, 언제까지 눈을 감고 있을 셈이야? 이제부터 살게 될 곳인데, 보지도 않을 거야?" 그의 말에 그녀는 슬그머니 눈을 뗐다. 발이 지면에 닿아 있었지만 아직 눈을 뜨지는 않은 상태였던 것이다. 그녀가 감고 있던 눈을 살짝 떠 주위를 살피자, 아로데는 그녀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 주었다. 세키라는 잔뜩 겁내고 있었던 것이 부끄러웠던지 헛기침을 하며 얼굴을 발갛게 물들였다. "자, 좋아도 싫어도 이제는 저 곳에서 살게 될 거야. 아!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내 업무상 보통은 마왕성에서 지내게 될 가능성이 많으니까 네 친구들은 자주 만날 수 있을 테니." 눈을 뜬 세키라는 눈에 들어 온 저택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로데의 저택의 모습은 중간계에서 그녀가 많이 보던 양식의 저택이었던 것이다. 비록 옛날 고풍적 느낌이 강한 양식의 저택이었지만 전체적 구조같은 것이 아주 비슷했다. 그녀가 알기로 눈앞 저택이 따른 양식은 대충 300년 전 쯤에 유행했던 것이었다. 세키라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자 아로데는 웃음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계약의 법에 매여 중간계에 나갔을 때 보고 따온 거다. 재미있어서 말이지. 인간들은 재밌는 걸 많이 만드니까. 쳇, 그 여자가 이걸 봤을 때 반응이 궁금했는데." 아로데의 끝말에 덧붙여진 투덜거림을 듣고 세키라는 작게 웃었다. 처음부터 느낀 거지만, 이 악마들은 그녀의 상식에 맞춰진 이미지같지가 않았다. 훨씬 장난기 있고, 훨씬 자유로웠으며, 훨씬… 악마적이었다. ''악마적'? 그럼 더 맞는 건가? 묘하게 아닌 듯 하지만 그거보다 더 맞는 표현은 없는 걸.' 세키라는 얼른 생각을 돌리며 그에게 질문했다. 악마에게 말을 걸고 질문을 하다니, 어제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태도이긴 했다. 하지만 이 악마는 세키라의 질문을 무시하거나 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계약의 법이요?" "고대부터 존재했던 마족들의 법이지. 유희의 수단이야, 계약은. 중간계에서 우리를 불러낼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지. 우리를 불러 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주면 우리는 그들의 소원을 이뤄주지." 세키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물을 바치고 악마를 불러 내 원하는 바를 이룬다는 얘기는 많이 들어본 바 있었으니 말이다. 아로데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희미한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아는지? 천계에도 계약의 법은 존재해.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은 우리보다 제물을 더 가리지. 예를 들어 인간의 생명력을 포함한 성력(聖力)같은 것을 받는다는 것밖에 차이가 없어. 그에 비해 우리에게는 피나, 심장 같은 걸 제물로 바치지. 그다지 필요하진 않지만 나름대로 재미있는 일이거든. 자신들의 바람을 이루기 위해 동족을 해한다는 게." 세키라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용드 그랬지만 장난기어린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던 아로데의 얼굴이 천계의 얘기가 나오자 비꼼이 가득한 차가운 얼굴로 바뀌었기 때문도 있었다. 세키라의 놀란 얼굴을 본 아로데는 다시 그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계약으로 인해 불려 나가는 걸 그다지 즐기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갈 때마다 재밌는 것을 몇 개씩 수집해 오곤 하지. 아마 창고에 가 보면 네가 볼 만한 것들이 있을 거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저택의 안으로 들어갔다. 세키라는 그를 따라 조심스레 안쪽으로 발을 들여 놓으며 주위를 살폈다. 마법적 힘을 가미한 듯 환하게 빛나는 샹들리에, 2층으로 연결된 계단이 중앙에 나 있었고 2층 복도에는 푸른색 초가 군데 군데를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아로데는 곧장 이층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그리고 문을 열어주며 그녀에게 말했다. "4일 뒤에 마왕성에 연회를 열게 돼. 그거 알아두고… 너야 내일이면 갈 수 있을 테지만." "연회요?" "내가 말 안 했던가? 일주일에 한 번씩 친목을 다질 겸 해서 연회를 열기로 했지." 세키라는 그런 말을 들은 기억은 없었다. 친목을 다질 겸, 이라. 누구와 누구의 친목? "그렇군요. 그럼… 루피아가 치장한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아직까지 루피아가 사교계에 데뷔하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리며 세키라는 살풋이 미소를 지었다. 루피아는 그녀의 바람과 그녀의 아버지, 오빠들의 강력한 방어로 사교계에 데뷔하지 않았다. 제국에 단 셋뿐인 공녀 중 하나가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 그녀에 대한 소문과 억측이 나돌기도 했었지만 세키라 자신과 에리나가 가끔 흘리는 정보와 엘 세느안트 가문의 남자들의 강경한 대응(소문을 흘린 장본인과의 결투 등)으로 금방 가라앉았다. 세키라의 미소한 얼굴을 보며 아로데가 말했다. "뭐야, 둘이 사겨?" "……." 아로데는 농담 식으로 툭 던진 것이지만 세키라가 침묵하자 오히려 놀랐다. 그, 그럼 두 사람이 레즈였단 말인가! '정말로? 안 될 건 없지만, 그렇지만…….' 뭔가를 곰곰히 생각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세키라는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더듬더듬 말했다. "저, 저는 루피아 좋아해요." 저 말을 대체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마계에서는 여성끼리 사귀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그런 쪽으로는 워낙 자유롭다 보니 게이나 레즈라는 단어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난하는 경우도 없는 것이다. 아로데는 뒤돌아 '라이벌인가?'하고 중얼거렸다. 세키라는 절망적(?)으로 보이는 아로데의 모습을 보고 당황했다. '어어? '친구'로서 '사귄다'는 게 아니었던가? 나는 루피아 좋아하는 거 맞는데… 왜 저러시지? 뭐, 뭔가 잘못된 걸까?' 세키라는 루피아에 대한 것을 생각하다 그녀가 마왕성에 혼자 남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문득 걱정이 되었다. 괜찮을까? 그녀는 먹구름을 불러다 옆에 뿌려놓고 충격에 빠져있는 아로데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저, 저… 서열 2위 님." 먹구름이 한층 더 짙어졌다. 아로데는 그녀를 돌아보며 벽을 짚고 물었다. "이름은 몰라?" 그의 어두운 모습에 잔뜩 겁을 먹은 세키라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제비뽑기할 때 '2'를 뽑으라고 하시던 것 밖에……." 세키라는 머리가 좋은 편이었지만, 아로데가 자기 소개를 했는지 안 했는지 특별히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그러고보니 특별히 이름을 가르쳐 주거나 한 적은 없는 것 같았다는 것을 떠올리자 아로데는 그녀에게 확실하게 '아로데 드 벨로시스'라고 가르쳐 주었다. 잔뜩 강조해서! "왜 불렀어?" 그의 이름을 속으로 뇌까리던 세키라는 얼른 그를 불렀던 이유를 상기시켰다. "음, 저... '마왕님'은 어떤 분이세요?" 왜 묻느냐는 듯한 그의 눈빛에 세키라는 작게 덧붙였다. "아, 에… 루, 루피아가 걱정되어서요…." 아로데는 세키라를 뚫어져라 쳐다 보다가 세키라의 눈이 꼭 감겨질 쯤에야 난간에 걸터앉아 입을 열었다. "글쎄… 한 마디로 말하자면, '마왕'이시지." 누가 그걸 모르냐는 듯이 세키라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지자, 아로데는 킥킥 웃으면서 다시 말했다. "차갑고, 냉정한 판단력, 빠른 일처리, 타인을 압도하는 시선과 분위기. 그리고 부하를 부리는 능력. 무엇보다, 역대 어떤 마왕보다 강한 주문과 마력까지 갖추셨지. 그 분이 처음 후계자로서 태어나셨을 때, 난 소름마저 돋을 정도였어." 세키라는 기억 속에 스쳤던 마왕의 이미지를 떠올리려 노력했다. 하지만 겁에 질려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던 그 때의 일을 떠올리는 건 불가능했다. 그녀는 마왕을 올려다 볼 용기조차 내지 못한 채 떨고 있었던 것이다. "가장 중요한 건… 아직 어리시다는 거지. 아무도 그 분을 어리게 보지 않을 테지만 아직은 502세밖에 되지 않으셨으니까." 인간의 개념으로는 결코 어린 나이가 아니었지만 세키라는 긍정했다. 아로데는 이쯤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고는 그녀가 방으로 들어가게 했다. 방을 살펴 볼 사이도 없이 침대로 걸어 가 앉은 세키라는 루피아가 걱정돼 죽을 지경이었다. 그 아이라면 절대 얌전히 있을 리가 없었다. 분명 자신이 한 일에는 확실히 책임을 지고, 누구보다 일처리가 확실하며 자신의 앞가림을 잘 하는 아이였지만, 그래도 아직 어리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올해 겨우 성년이 되지 않았던가! 비록 그 아이에게 가장 많이 기대는 것이 자신과 에리나였지만. '제발, 루피아! 괜히 돌아다니다 길잃지 말고 얌전히 있어야 해!' 세키라는 기도했다. 제 목: [수정판] 공녀(貢女) : 제4화 [마왕](2) #. 제4화 [마왕] * * * * * * * * * * * * * * * 루피아는 일단 이 마계에 대해 자세히 알려면, 괜한 책을 파고드는 것보다는 마족에게서 산 지식을 얻는 것을 택했다. 그 편이 훨씬 자세하고 사실적이며, 또 시간도 적게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멀리 있는 마족보다 가까이 있는 마족을 택했다. "흠흠! 잘 들으세요, 루피아 님. 먼저 마계의 역사부터 얘기해 드리죠." 그녀는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메를리나는 그녀의 그런 눈빛이 부담스러운지 딴 곳으로 눈길을 돌렸지만 결국 웃어 버리고 말았다. 허리에 손을 얹고 마치 선생님같은 폼을 잡은 뒤 메를리나는 얘기를 시작했다. "험! 마계가 창조된 계기는 마신 클리오라께서 당신을 믿고 따르던 생명들을 당신의 세계에 옮겨다 주셨던 때였어요. 대륙 '창조의 시기'에 대륙은 빛과 어둠, 그리고 혼돈이 뒤섞여 매우 혼란스러웠고, 빛이 신계로 나뉘어 옮겨지자 어둠도 함께 옮겨지기 시작한 거죠. 결국 중간계에는 혼돈밖에 남지 않았지만, 혼돈, 즉 카오스는 어둠의 신이시기도 한 클리오라와 빛의 신인 오르가프의 통제 아래 정리되어 갔다고 해요. 어쨌든, 마계의 시작은 '분열의 날'부터 시작되었답니다." 그 것은 루피아도 잘 아는 이야기였다. 모든 빛과 어둠이 갈려 서로 부딪치기 시작한 날은 '분열의 날'이었다고 한다. 중간계에 모든 것을 두었던 어둠과 빛의 신은 서로 반발하기 시작한 생명체들을 보다 못해 어둠과 빛으로 갈라 버렸다고 했다. 그 이야기는 대륙인 필독서 성서에 등장하는 이야기였다. "맨 처음, 클리오라께서 옮겨주신 세계는 온통 어둠이었습니다. 과연 어둠의 신인 그 분께서 창조하신 세계 역시 어둠 뿐이었던 거죠. 하지만 그 세계는 점차 바뀌어 갔습니다. 빛의 영역에 속하는 태양은 없지만 빛, 어둠과는 상관없었던 세 개의 달이 생겨났고, 클리오라를 따르는 생명체들 사이에서도 서열이 생겼습니다. 그게 이 마계 서열의 시초였구요." 메를리나는 목이 타는지 준비해 두었던 음료로 목을 축였다. 루피아는 그녀의 얘기에 더 귀를 기울였다. "맨 처음, 아무 것도 없었던 선조들은 무조건 본능에만 의지했습니다. 거칠고, 질서가 없었죠. 있었다면 단 하나, 강함에 의한 서열 뿐이었습니다. 그런 선조들을 이끌기 위해 클리오라께서 보내주신 존재가, 바로 '마왕'이십니다." 루피아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모습이 있었다. 암흑의 파편처럼 짙게 흘러내린 검은 머리칼, 그녀를 직시하던 붉은 눈동자- 누구든 압도해 버릴 것 같은 위압감. 날카로운, 그러나 넋을 잃고 쳐다보게 할 정도로 아름다움을 가진 남자. "초대 마왕께서는 강하고, 아름다우셨습니다. 순식간에 마계의 정상에 오르셔서 모든 것을 정리해 나가기 시작하셨죠. 모든 것을 정하고, 지배하셨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메를리나는 매우 경건한 태도였다. 그녀가 순간 너무나 진지해져서 루피아는 뭐라고 말을 꺼내지 못했다. 막역하게만 '악마'라고 생각했던 마족이었지만, 그들의 역사를 듣다보니 뭔가 묘한 기분이 된 루피아였다. "마왕께서는 단 하나의 혈족밖에 낳지 않으십니다. 비록… 아니, 아닙니다. 어쨌든 군주께서는 이 마계의 하나밖에 없는 지배자이시자, 신과 같으십니다." 그녀에게 황제는 절대적이지 않다. 만약 황제의 명령이라도, 그녀의 소중한 것에 해악을 끼친다면 절대로 항명할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황제의 명령이란 절대적이었다. 아무리 그녀를 사랑했더라도 어떤가. 이렇게 황제의 명령에 자신을 마계로 보내지 않았던... 생각을 이어가던 루피아는 놀라며 숨을 들이켰다. '내,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아니, 아니야. 엘루시아 세계 전체의 운명이 걸린 문제였잖아. 아버진 결코 황제의 명령 하나 때문에 날 이 곳에 보내 버리신 게 아니야. 아니잖아!' 그녀의 표정에 깜짝 놀란 메를리나를 보자 루피아는 계속 말하라는 듯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메를리나는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무엇보다 지금의 군주께서는 정말 환상이시죠! 가장 어린 나이에 마왕 위(位)에 오르신 데다, 가장 강하다는 평을 듣고 계시는 걸요! 얼마나 멋진 분이신데요~ 초대 마왕님과 비견될 정도라고 말해질 정도라니까요! 아아~" 메를리나는 황홀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 베키도 그녀의 오라비들의 얘기가 나올 때마다 저런 표정을 했다. 루피아는 또다시 자신이 메를리나와 베키의 닮은 점을 찾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쓰게 웃었다. 하지만 둘의 성격이 비슷한 것은 사실이었다. '시녀라는 것도 같고, 성격도 비슷하고… 후후, 둘이 소개시켜 주면 재미있을 것 같아.' 다시 중간계의 가족들이 생각나자, 루피아는 더이상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메를리나의 얘기를 듣고 있던 의자에서 벌떡 몸을 일으킨 루피아는 무작정 방문을 열며 말했다. "…나,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 * * * * * * * * * * * * * * * "여, 여기가 도대체 어디야!" 문득 정신을 차리고 나니 전혀 모르는 곳이었다. 무언가 홀린 듯 생각하면서 걸었던 듯 한데, 그 도중에 자신이 어디로 행보를 정했는지 루피아는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가 짐승이 아닌 이상 귀소본능이 있을 리도 없고 말이다. 루피아는 그 자리에 가만 서서 주위를 둘러 보았다. '전혀 몰라. 여기가 어디야? 으윽, 나는 대체… 어떻게 아무 생각 없이 이런 곳으로 올 수가 있는 거야!' 게다가 벽에 장식이랍시고 달아놓은 박제들은 더 기가 막혔다. 트롤, 오크, 오우거 외에도 알 수 없는 몬스터가 벽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표정마저 리얼하니, 이거야말로 박제의 진수였다. "에잇, 몰라! 어떻게 시간 보내고 있으면 사람이 찾으러 오겠지. 좋아! 마왕성 대탐험이닷!" 루피아는 낮게 중얼거리며 계속 앞으로 가 보기로 했다. 갈림길같은 건 나오지 않은 것 같은데 어째서 길을 잃어버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고보니, 마왕은 여기 왔을 때 딱 한 번밖에 못 봤지. 절대 잊혀지지는 않았지만… 킥, 하긴- 누구라도 그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절대 잊어버릴 수 없을 거야.' 고작해야 이제 3일째일 뿐이다. 그럴 뿐인데, 마치 10년이나 보낸 것처럼 느껴졌다. 너무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일과 변화가 일어나서 되새기려니 오랜 시간이 보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녀는 메를리나의 설명을 떠올렸다. 이 마계는 단일군주 체제인 것 같았다(하긴, 마왕이 둘이라면 그건 그거 나름대로 무서웠다). 종교적인 문제는 어떨지 모르지만 이 곳에서는 마왕, 그가 법이라는 말이었다. '마왕에게 보내 달라고 하면… 안 되겠지. 마신의 명령이면 마왕도 어쩔 수 없을 테니까.' 루피아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시간이 좀 지난 것 같은데, 왜 아무도 찾으러 안 오는 거지? 늘 이 정도 시간이 지나면 아버지나 오빠들이 병사들을 풀어서 굉장히 소란스러워 졌을……. '…아.' 그녀는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췄다.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실감'이라고 해야 할까? 중간계에서 가족들에게 받았던 또 하나의 '사랑'을 깨닫음과 동시에, 상실감도 느꼈다. 여기는 날 찾을 존재가 아무도 없어. 이곳은 내게 익숙한 곳이 아니야. 나는- 이 곳에는 한낱, 바쳐진 '제물'에 불과할 뿐야. '알고 있었다'라고 되뇌었지만, 머리로만 알고 있었을 뿐 그 말이 뜻하는 것을 제대로 느끼지는 못했다. 너무나 익숙했고,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오히려 느끼지 못했다. 이제 자신을 필요로 하는 존재따위는 아무도 없다. 자신을 찾던 여자들을 한심하게 여겼지만, 그렇게라도 다른 이에게 자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증명받고 싶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자신이 한심했다. 이렇게 어리석을 수 있을까. 왜, 자신이 다른 이들과 '다르다'고 여기고 있었을까. 그녀도, 고작해 봐야 마법 조금 쓰는 귀족가 아가씨일 뿐이지 않은가.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약했어.' 피식, 그녀는 씁쓸하게 웃었다. 뭐랄까, 귀족 가문 특유의 자존심이랄까. '나는 특별하다'는,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자존심의 단편이 이런 곳에서 발견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중간계에서라면 필요했을런지도 몰랐다. 그녀는 그녀 자신이 어찌 생각하든 귀족이고, 자신에 대한 자신감과 약간의 자존심이 없으면 제대로 생활하기 힘들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그 곳에 한해서의 이야기일 뿐이다. 남색의, 첫날 보았던 것과 똑같은 하늘이 그녀의 시야를 꽉 채웠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남색의 정 중앙을 차지하며 은은하게 빛나는 저… 달일까. 루피아는 탄성을 흘렸다. "와아! 달이다! 달이 세 개야!" 이 곳에 온 첫날은 달을 보지 못했던 그녀였다. 달은 신의 소관이니 마계에도 뜰 거라 생각했고 메를리나의 설명도 있었기에 알고는 있었지만 마계의 달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은색, 빨간색, 파란색 세 개네… 중간계에는 달이 두 갠데, 여기는… 붉은 달이 하나 더 있구나. 킥, 마족들 눈도 붉은 색이던데. 무슨 연관이 있는 건가?' 짙디짙은 남색 하늘에 별 하나없이 서로 엉켜 빛나는 세 개의 달은, 어쩐지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했다. 아아, 여기는 진짜 마계로구나. 그녀의 시선이, 점차 아래로 떨어졌다. "화, 화원이다!" 세상에! 이 마계에 저런 게 있을 줄이야 생각도 못한 루피아였다. 태양도 없는데 어떻게 꽃이 핀 거지? 그녀가 있는 높이에서는 장미처럼 보이는 꽃의 붉은색 정도밖에 구별되지 않았다. 내려가 보고는 싶었지만 그녀는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나, 방향치잖아. 이대로 내려가려면 평생 가도 못 가겠다. 어쩌지?' 고민은 잠시였다. 그녀는 바로 앞에 있는 창문을 벌컥 열어 젖히고 그 위에 발을 턱 걸쳤다. 4층 높이였기에 머리가 아찔하게 아파왔지만, 그녀는 침착하게 마법을 캐스팅하고 주문을 웅얼거렸다. 주문이 되었다 싶자, 그녀는 몸을 밖으로 밀며 시동어를 외쳤다. "플라이(Fly)!" 그녀의 몸이 둥실 떠올랐고, 옷이 조금(?) 펄럭이기는 했지만 그녀는 비교적 수월하게 지면에 발을 닿을 수 있었다. 뭐- 그녀가 긴 옷자락을 밟는 바람에 흙바닥에 구르게 되었었다는 아주 사소한 일은 말 그대로 사소할 뿐이니 넘어 가도록 하자. 어쨋거나 그녀는 발을 땅에 디디고 조금 전보다 훨씬 가까이에서 정원을 구경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더 아름답잖아……." '탄성이 절로 나올 만큼'이라는 수식어가 딱 어울리는 정원이었다. 정원의 주위는 높은 건물로 둘러 싸여져 있었지만 정원에서 위를 올려다 보면 짙은 남빛의 하늘과 달이 눈을 시리게 할 정도였다. 루피아는 갖가지 이름모를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것을 보며 감탄사를 흘리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흐음! 이 꽃으로 방이라도 좀 꾸며놓으면 어디 덧나나? 마계의 마왕성이라고 해서 이렇게 음침하고 낡을 필요는 없잖아. 적어도 이 꽃으로 꾸미기만 해도 분위기가 확 바뀌겠다!" 그건 개인적인 취향에 따르는 문제였지만, 그런 문제야 어떻든 그녀는 오랜만에 눈을 즐겁게 해 주는 풍경에 빙글빙글한 미소를 입가에 베어 물었다. 순백의 하양, 가을 하늘처럼 파란색도 있었고, 선명한 붉은색도 있었다. 현란한 색채가 눈을 어지럽혔다. "……!!" 이것저것 꽃을 살펴보던 그녀의 눈이, 순간 커졌다. 그리고 그녀의 아름다운 보랏빛 자수정 눈동자에는……. "……넌." * * * * * * * * * * * * * * * "베키! 이리 와 보겠니?" 시녀장의 말에 베키는 힘없이 돌아섰다. 뒤돌아 선 그녀의 눈에 우아하게 서 있는 엘 세느안트 저택의 시녀장의 얼굴이 보였다. 시녀장은 힘없는 표정을 한 채 베키를 걱정스럽다는 듯이 쳐다 보다가 입을 뗐다. "잠깐 에스베크 저택에 가서 이 물건 좀 전하고 오너라." "예." 베키는 순순하게 대답하고는 허리를 숙여 보였다. 시녀장은 걱정스럽다는 듯이 혀를 찼다. 3일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나 밝은 아이였는데, 아가씨께서 마계로 가시고 난 뒤부터는 말도 잘 하지 않고 침울한 아이가 되어 버렸다. "해가 다 져 가는 저녁이니까 페디론과 같이 가렴. 마차를 불러 두었단다. 에스베크 저택 연구실에 침입자가 들었다는 소문이 있던데, 휴우- 거기도 조용하지만은 않은 모양이야. 이 물건은 연구실을 수리하는 데에 필요한 재료로 쓰일 거라고 하는 구나. 칼르니르 저택도 아직까지는 조용하지만 이제 곧 바르에든 경께서 돌아 오시면 한바탕 소란스러워 질 거라고 하는 소릴 들었다." "…네." 베키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조용하게 필요한 대답만을 할 뿐이었다. 시녀장은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듯 말했다. "…휴- 베키, 네가 슬프고 힘든 건 잘 알아. 나도… 이 저택의 모든 사람들이 네가 아가씨를 사랑하듯 사랑했는데 네 마음을 왜 모르겠니. 하지만 그런다고 아가씨께서 돌아 오시는 건 아니잖니." 베키는 노예 출신의 시녀였다. 과거 어땠는지는 잘 모르지만 처음 이 곳에 왔을 때는 막 아가씨께서 태어나신 때였고, 그 때는 부엌 하녀로 온갖 궂은 일을 다 했었다. 시녀장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 때 어린 베키의 표정에 어린 절망과 체념을. 하지만 아가씨가 베키를 마음에 들어 하면서 전속 시녀가 되고, 점점 자라나는 아가씨를 보며 웃음을 찾아갔던 것이다. 단 3일 전만 해도 누구도 그녀의 과거를 알 수 없을만큼 밝고 명랑했었는데. "…다녀 오겠습니다." 시녀장의 말에 베키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숙여 보일 따름이었다. 코 언저리에 뿌려진 주근깨가 그녀의 앞머리에 다 가려질 만큼 고개를 푹 숙인 베키는 종종걸음으로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아마도 같이 가 줄 페디론을 부르러 가는 것인지 달려가는 베키의 뒷모습을 보며 시녀장은 다시 한 번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알아. 알고 있어! 아가씨께서 돌아오실 수 있는 가능성따위는 없다는 걸. 하지만, 그렇지만 난, 나는…!' 복도를 달려가며 베키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의 순박한 갈색 눈에는 어느 새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혀 있었다. 에스베크 저택으로 함께 갈 페디론이 일하는 저택의 마구간에 도착하자 베키는 벽을 잡고 숨을 몰아 쉬었다. 쉼호흡을 한 그녀는 마구간 안에 있는 페디론의 이름을 불렀다. "페디론! 시녀장께서 지금 에스베크 저택에 다녀 오라셔. 어서 준비하고 나와." "어? 거기는 뛰어 가도 2시간이잖아!" "마차를 탈 수 있으니까 걱정 마. 얼른 나와." 베키의 재촉에 어리둥절한 페디론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마구간에서 더러워진 옷에 손을 닦았다. 베키는 마차가 기다리고 있을 뒷문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에스베크 저택에 가서 물건을 전해주는 일이야. 뒷문에 마차가 기다리고 있다고 하셨으니까 빨리 가야 해. 나 혼자 가면 위험하다고 시녀장께서 같이 가라고 하셨어. 기다릴게." 어느 사이엔가 주위는 어둑어둑한 어둠에 먹혀들고 있었다. 베키는 남보랏빛으로 물든 하늘을 보며 마차를 향해 걸어 갔다. 잠시 뒤 그녀는 페디론과 함께 에스베크 저택에 도착했다. 기다리고 있었던 듯 꽤 낯이 익은 에스베크 저택의 집사가 그녀를 맞았다. 베키는 인사를 건넨 후 물건을 내밀었다. 하지만 집사는 고개를 저으며 그녀에게 물건을 돌려 주었다. "아뇨, 그 물건은 직접 전해 주십시오. 흠, 흐흠! 어딘지는 아시겠고… 그럼 저는 이만. 흠!" 이상하다. 저 집사는 저렇게 남에게 이런 일을 시킬 사람이 아닌데… 주인 손에 들어가는 물건은 우선 자신을 거쳐 철저한 검사 후에 들이게 하는 사람인데. 베키는 어리둥절했지만 헛기침을 하며 물러나는 집사를 붙잡지는 않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예전에 알아 두었던 방으로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여기이던가? 노크를…….' 베키는 노크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노크를 하려고 문가로 가져가던 손을 멈추었다. "가르쳐 달라니까! 아버지, 이런 게 어딨어요! 가르쳐 줘요!!" "시끄러 이 놈아! 감히 아버지를 독살하려 해? 에프함을 먹이다니… 그 지팡이 안 치워!" "에잇! 그까짓 거 먹는다고 죽을 노친네도 아니면서 뭘 그래요! 올해로 벌써 환갑이니 죽을 때도 됐잖우? 쳇, 나이 육십에 열여섯 아들네미라니, 참 복도 많수!" "네가 언제 내게 복(福)이더냐? 화(禍)다, 화! 너 때문에 내가 홧병에 죽지!" 그 때 시녀장이 했던 말이 번뜩 그녀의 뇌를 스쳐갔다. '에스베크 저택의 연구실에 침입자가 들어……'라고 했던가? 저 대화를 듣자하니 그 '침입자'가 다름아닌 에스베크 가문의 아들, '에드윈드 에스베크'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뭘 가르쳐 달라고 그러는 거지?' 설마 누님이 마계로 끌려 갔는데 주문이나 공식을 가르쳐 달라는 건 아닐테고 말이다. 게다가 그 정도라면 저 아들이 아비를 독살(?)시도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에잇- 누님을 되찾아 올 수 있는 방법, 알고 계시잖아요옷!!" "……!!" 베키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지금 '누님을 되찾아 올 수 있는 방법'이라고 했나? 그, 그럼 우리 아가씨도? 베키는 지금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본연의 임무를 상기해 내고는 문에 노크했다. 그녀는 손잡이를 열어 얼굴을 빼꼼히 내밀면서 말했다. "엘 세느안트 저택에서 왔습니다, 에스베크 공작각하. 실례인 건 알지만 이미 시간이 늦었기에 기다릴 수 없어 직접 찾게 되었습니다." "아, 아. 그 친구에게 재료를 부탁했지. 욘석아! 이게 다 너 때문이다! 네가 내 연구실을 부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 아니냐." "쳇!" 한쪽 소파에 앉아 몸을 파묻은 열여섯 살 소년의 입이 샐쭉하니 내밀어 졌다. 베키는 에드윈드 에스베크의 얼굴을 잘 기억해 두었다. 목 뒤까지 흘러 내린 화려한 백금발, 총명하게 반짝이는 짙은 녹색 눈동자. 수수한 아름다움을 지닌 세키라와는 정 반대의 화려한 아름다움을 지닌 소년이었지만 확실히 잘 생긴 소년이기는 했다. "수고했네, 아가씨. 늦은 밤 이 멀리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겠어. 너무 늦은 것 같으니, 오늘 밤은 여기서 지내고 가는 게 어떤가? 그 친구에게는 내가 연락을 보내겠네." 에스베크 공작의 친절한 제안에 베키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녀가 감사하다고 깊게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들 때, 에드윈드와 눈동자가 딱 마주쳤다. "……!" "…이봐요, 당신……!" "이봐요 당신은 무슨 이봐요 당신이야! 애꿎은 순진한 시녀 꼬실 생각말고 가서 자!" 에드윈드의 부름에 베키가 막 당황하자 에스베크 공작이 나서서 도와 주었다. 에드윈드의 얼굴이 불만스럽게 부으면서 투덜거렸다. "쳇, 아버지는 좀 빠지란 말이유! 정적 중요한 건 가르쳐 주지 않으면서!" "이 녀석이!" 베키는 조용히 방을 빠져 나왔다. 어느 새 집사가 기다리고 있었는지 그녀가 임시로 묵을 방으로 안내해 주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베키는 집사의 뒤를 따라가며 뒤를 힐끗 보았다. '분명… 뭔가 있어. 어쩌면… 어쩌면, 아가씨께서는 돌아오실 수 있을지도 몰라!' * * * * * * * * * * * * * * * 루피아는 그 자리에서 얼어 붙었다. 어떻게 하고 많은 마족들 중에 하필이면 저 마족이냔 말이야! 재수가 지지리도 없는 루피아는 그저 입을 딱- 벌리고 놀람을 표현하는 것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마, 마왕!' 단번에 저번에 멀리서나마 봤던 그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존재감이나 위압감, 비록 멀리서였지만 선명하게 보였던 완연한 선홍빛 눈동자는 절대로 잊혀지거나 착각될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작은 미풍에 잠시 흐트러졌다 돌아오는 검디검은 머리칼, 달빛에 비추어 더욱 하얗게 보이는 얼굴. 미미하지만 놀람을 담고 있는 선홍빛 눈동자까지, 지독하게 어울려서 소름이 돋았다. "…넌. 왜 네가 여기 있는 거지?" 기억하고 있다? 의아함을 담은 그의 눈길이 그녀에게 닿아 멎었다. 이 상황에서 내릴 결정은 단 한 가지! 후퇴뿐이닷! 도망가기 위해 걸음을 살짝 뒤로 옮긴 그녀는 흘깃 뒤를 보고 경악해야 했다. 기, 길이, 문이 없잖아! 아니, 그건 둘째치고라도 돌아가는 길따위 모르잖아, 난! "네가 왜 여기 있는 것이냐고 물었다. 대답 안 할 건가?" 루피아는 눈동자를 양 옆으로 굴렸다. 대체 뭐라고 대답한단 말인가? '바람쐬러 나왔다가 길 잃어서 신세 한탄+달구경하면서 돌아 다니고 있는데 화원이 예뻐서 뛰어 내렸다'? 굳이 말하자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말 그렇게 대답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이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자신의 말을 무시한다고 생각할 거고… 어쩐다? "에, 그게… 그게요. 사실은, 하핫! 아하하하." 웃음으로 떼우기. 그녀는 최대한 어색함을 지우고 자연- 스럽게(퍽이나!) 웃었다. 스마일~ "…정신적 문제가 있는 건가?" "……." 아아, 루피아. 너 정말 갈 데까지 가는 구나. 정신적 문제, 라니! 정신병자 취급이라니! 루피아는 웃는 얼굴을 대번 굳히고 고개를 숙이더니 투덜거리듯 중얼거렸다. "길을 잃었다는, 아주 사소한 거라구요… 그게 어떻게 정신적 문제로까지 번지는 거야!" "그래서 불만인가?" "당연… 히… 하하, 아니죠. 아니구 말구요." "……." 마왕은 말이 없었다. 다만 그녀를 뚫어져라 응시할 뿐. 뭐 그리 볼 게 있는지 한참동안을, 마왕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루피아는 시선을 피하는 건 왠지 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그의 눈을 똑바로 올려다 봐 주었다. 얼마간 그러던 마왕은, 부리부리하게 노려보는 그녀를 보며 피식 웃었다. "…바보로군. 마왕성 내에서는 담당시녀 이름을 부르면 그게 어디에서든 시녀는 네 부름에 응답하게 되어 있다." 그걸,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구! 마왕의 비웃음에 루피아는 얼굴이 확확 달아 오르는 느낌이었다. 느물대는 로이드윈의 면상보다, 아로데의 비웃는 듯한 얼굴보다 저 얼굴에 제일 먼저 주먹을 꽂아넣고 싶었다. '으으윽! 벗어나고 싶어어어~ 제길! 내가 길 잃은 게 내 탓이야? 내 탓이냐구! 다- 이 마왕성을 미로처럼 만든 설계사 탓이야! 왜 이 넓은, 길 잃기 딱 좋은 곳에 표지판같은 걸 안 만들어 놓느냐구! 우리집처럼 표지판을 장만해 놓음 얼마나 좋아? 돈이 쪼달리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남아도는 돈 갖고 뭘 하길래 그런 걸 하나 안 해 놔?' 그녀가 주먹을 꽉 쥐고 억울함(?)과 원통함(?)에 부들부들 떨 무렵, 마왕은 그녀를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관찰하고 있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그녀의 표정이 그의 입장에서는 신기하게 느껴진 모양이다. 루피아는 자신이 관찰대상이 되고 있음을 깨닫고 그제야 사색(?)을 멈췄다. 하지만 아무래도 늦은 모양이다. 마왕은 이미 그녀를 '이상하다'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이름은?" 평소 성격같았다면 '네가 이름을 안 말해 주는데 내가 왜 말해줘야 하냐?'고 말했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쩌랴, 이 곳은 안타깝게도 마계이고, 또한 눈 앞의 상대는 이 마계의 지도자인 '마왕'이었다. 한 마디로 권력이 안 따라 준다는 것이다. "루피아. '루피아 엘 세느안트'……." 마왕은 그녀의 이름을 듣고 입안으로 뇌까리는 듯 하더니 곧 뒤돌아 사라져(?) 버렸다. "엇? 어, 어디로 사라진 거야?! 혹시 텔레포트? 나, 난 아직 4클래스라 텔레포트같은 고위급 마법(6클래스 마법)은 못 쓴다구! 나보고 어떻게 방으로 돌아 가라는 거야?!" 그녀는 마왕이 홀연히 사라진 뒷자리를 바라보고 있다가 마왕이 한 말을 조심스레 상기했다. 그러니까, 이름만 부르면 시녀가 온다고 했었지. 그녀는 잠시 화원을 둘러 보다가 마왕의 말을 직접 실험해 보기로 했다. "메, 메를리나." "네엣~!!" 아아, 그녀의 그 동안의 고생이 무색하게도, 매정한 메를리나의 경쾌한(?) 대답은 곧바로, 그것도 바로 옆에서 들렸다. '허, 허탈해… 난 왜 이제까지 헤매고 있었던 거야! 힘 빠져어어!' 메를리나 왈, 그녀가 있던 이 화원은 마왕만의 장소라고 한다. 원래대로라면 그녀는 이 곳에 발을 들여놔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하지만 허탈감에 빠진 루피아의 귀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메를리나가 꼴이 이게 뭐냐고 잔소리하면서 목욕탕으로 끌고 간 것도, 머리 빗으면서 조는 바람에 멀쩡한 머리카락 두 가닥이 그냥 뽑혀버린 것도 그녀는 몰랐다(본인은 그렇게 주장한다). 하지만 다만 그녀가 오늘 알게 된 분명한 사실. '마왕은 성격이 더러워! 그 비웃음… 결코 초보자의 실력(?)이 아니야! 그건 숙달된 조교의 시범적인(?) 비웃음이었어! 그 마왕, 성격 진짜 안 좋아!' 마왕은 서류에 시달리던 눈을 쉬게하기 위해 그의 화원에서 바람을 쐬고 있었다. 그런데 쉬고 있던 그의 민감한 감각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의 시선이 위로 올라갔고, 그는 곧 그의 감각에 걸린 '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 '저건… 저번에 그 인간인가? 저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그는 흥미롭게 그녀를 응시했다. 창문에서 달을 바라보며 와아, 와아하고 탄성을 내지르던 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점차 내렸다. 아마도 화원을 발견한 모양인 듯 그녀는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는 뭔가 생각하는 모양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기에 좌우를 둘러 본 다음 나지막히 체념의 한숨까지 내쉬는 게 아닌가. '대체 뭘 생각하기에 저렇게 다양한 표정이 나오는 거지?' 다음 그녀의 행동은 더더욱 기가 막혔다. 좌우 양옆을 둘러본 후 다리를 창문가에 턱- 걸치는 것이다. 치마를 잘 추스른 후 뭔가를 중얼거리는 듯 하던 그녀는 갑자기 몸을 창밖으로 들이 밀었다. '마법인가?' 그녀의 몸이 허공에 둥실 떠오르더니 곧 땅에 발을 대었다. 안전하게 착지하는 듯 했지만 그녀는 긴 드레스 자락을 밟고 뒤로 넘어져 버렸다. 꽈당! 하는 큰 소리가 울렸지만 그녀는 곧 힘차게(?) 일어나며 옷 자락을 털고 다시 주위를 살폈다. 큰 눈을 또르르 굴려가며 살피는 것이, '누가 본 건 아니겠지?'라고 생각하는 게 다 보일 지경이었다. 그녀가 주위를 잘 살피긴 했지만 건물의 어두운 그림자에 숨겨진 그의 모습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아무도 보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린 모양인지, 그녀는 본격적으로 화원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한 동안 넋이 빠진 듯 멍한 표정이던 그녀는 다시 무슨 불만이 있는 것인지 투덜거렸다. "흐음! 이 꽃으로 방이라도 좀 꾸며놓으면 어디 덧나나? 마계의 마왕성이라고 해서 이렇게 음침하고 낡을 필요는 없잖아. 적어도 이 꽃으로 꾸미기만 해도 분위기가 확 바뀌겠다!" 그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곧 그녀가 그를 발견한 모양인지 눈을 크게 떴다. 아아, 저기서 눈이 더 커질 수도 있군. 그가 한 질문의 대답을 찾는 듯 그녀의 눈동자가 옆으로 굴렀다.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는 생각이 모두 드러나 보였다. '생각이 읽히는군, 읽혀.' 그는 잠시 나누던 대화(?)를 멈추고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를 뚫어져라 쳐다 보았다. 다른 이라면 두려워서라도 피했을 그의 시선을, 그녀는 잘못한 것 따위는 없다고 말하는 듯한 당당한 눈동자로 똑바로 올려다 보았다. 아니, 노려봤다. 그 모습에 마왕은 피식 웃었다. "…이름은?" "루피아. '루피아 엘 세느안트'……." <루피아 엘 세느안트>. 그는 입 안으로 그 이름을 되뇌어 보았다. 어쩐지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입가에 옅은 웃음을 그리며 중얼거렸다. "기억해 두지, 루피아 엘 세느안트." --------------------------------------------------------------------------- 우선,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드리겠습니다. 에휴..ㅡ0ㅜ 제가 잠시 미쳤었(?)나 봐요. 이랬다 저랬다... 일단 오늘 올린 이게 이제까지 수정한 거 전부입니다. 이제 말도 없이 막 지우고 그런 일 없을 거예요. 요즘 머리가 많이 복잡해요. 고등학교 진학문제(난 단순하지만;;)두 있고, 제가 이런 일 하는 게 처음이다 보니까 많이... 에, 잡생각이 많아지구 그래요. 수정한 거 아껴 뒀다가 간간히 올릴 생각이었지만 이대로 있다가는 또 이랬다 저랬다 하게 될 것 같아 그냥 올려 버립니다.-_-;; 저는 귀가 얇은 편이라-(게다가 소심하기까지.. 크흑!) 일단 변덕이 심하거든요. 제 성격을 제가 모를 정도이니... 에휴. 심하죠.(...;;) 수정판, 차라리 수정판으로 진도를 빨리 따라잡아 버리는 게 낫겠어요. 이거 수정하는 거- 책 내는 것 때문에 하는 거니까요. 그냥 낼 순 없잖아요...^^; ...불쾌하셨었다면 사과드리겠구요, 에... 다- 경험부족에 제 변덕스런 성격 탓이지요, 뭐...ㅠㅠ 그렇게 알아 주시구!! ...흑~ 이제 연재 문제로 돌아와서! 이번에 수정한 걸 전부 다 올려 버렸기 때문에 한 동안 다시 많-이 써야 합니다!ㅠㅠ 아아- 까마득하여라. 어쨌든 즐독...(하실 수 있으실라나...;;)하세요!! 제 목: [수정판] 공녀(貢女) : 제5화 [다 뜯어 고쳐라! 마왕성 개조계획 24시간!](1) #. 제5화 [다 뜯어 고쳐라! 마왕성 개조계획 24시간!] * * * * * * * * * * * * * * * 마왕성의 시녀들은 오랜만에 분주했다. 이제 곧 이 마왕성에도 '연회'라는 게 열린다는 것이다! 비록 그 이유는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어쨌든 이 오랜만의 분주함이 시녀들에게는 기분이 좋았다. 그 100년이라는 긴 기간동안 얼-마나 지루한 생활의 반복이었던가! 가벼운 감동마저 느끼는 그녀들이었다. "자, 모두 서둘러! 이제 내일이면 연회가 시작된다." 그랬다. 시간은 흘러- 흘러 벌써 루피아가 마계에 온 지 6일째가 되는 날에 이르렀던 것이다. 시녀장 아크로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감동의 물결(?)에서 허우적거리던 시녀들은 퍼뜩 깨어나 다시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왕성을 깨끗히 치우고, 식기도 준비해야 했다. 그리고 바쁘기 움직이는 이들 중에는 루피아의 전속시녀, 메를리나도 속해 있었다. 메를리나가 루피아의 전속시녀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할 일은 해야 했기 때문이다. '에… 오늘도 도서실에 처박혀 계시려나?' 이 곳에 처음 와서 간단한 글자 하나 읽지 못했던 루피아는 본격적으로 문자를 익혀야 하겠다면서 도서실에 처박혀 책과의 전쟁에 돌입했던 것이다. 마왕성에 머물기로 결정된 뒤 그녀는 지정된 자신의 방과 도서실만 들락날락거리며 생활했다. 식사조차도 메를리나가 챙겨줘야 겨우 입에 댈 수 있었던 것이다. '후- 벌써 일주일이나 흘렀구나. 시간 참 빨라.' 메를리나는 처음 문을 열고 방에 들어갔을 때를 상기했다. 시녀장의 사랑(?)과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메를리나는 공녀 중 하나의 전속시녀로 들어가게 되었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면서 성질만 더러울 인간 여자의 시중이나 들게 되었다고 투덜거렸었다. 뭐, 다행히 루피아는 오히려 그녀의 마음에 드는 편이었다. "메를리나! 바쁘게 일 해도 시간이 모자라는 판에 넋을 놓고 있다니!" 아크로의 날카로운 호통이 메를리나를 상념에서 꺼냈다. 메를리나는 잠시 멈췄던 손을 바쁘게 움직이면서 투덜거렸다. '하여튼! 마족이라도 저렇게 깐깐한 성격이 나오기도 힘들 거다. 누가 시녀장 아니랄까 봐. 정말 천직이라니까, 천직.' 메를리나는 그녀 역시 시녀라는 사실을 잊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루피아가 보기에는 시녀장 아크로나 메를리나나 깐깐하기는 매한가지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천계, 마계, 중간계 할 것 없이 모든 시녀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일종의 '직업병'이었다. 어쨌든, 루피아 생각을 하다가 혼나는 메를리나의 상황을 전-혀 모르는 루피아는 메를리나의 예상대로 오늘도 도서실에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콜록 콜록! 에, 에취이-!! 켁켁, 무슨 놈의 먼지가 이렇게 많아. 콜록콜록!" 책 더미에서 루피아는 몸을 일으켰다. 책에 쌓여있던 먼지가 폴폴 일어나면서 허공에서 춤췄고, 루피아는 진저리를 치며 기침을 해댔다. 벌써 3일이나 이렇게 도서실에 처박혀서 생활하고는 있지만 이놈의 먼지는 도대체 끝이 없었다. "으윽- 이 놈의 역사책! 뭐가 이렇게 바리바리 쌓여져 있는 거야. 문법은 왜 이렇게 복잡한 거냐구! 쳇, 어느 역사책에서나 말은 다 꼬아 놨다니까. 뭐, 중간계 역사책에 비하면 마계 것이 훨씬 더 솔직하고 적나라하긴 하지만… 에취! 대체 얼마나 책을 안 봤으면 이렇게 먼지가 많이 쌓인 거야?" 루피아는 책을 털고(?) 일어서며 머리카락에 묻은 먼지 덩어리를 떼어 냈다. 통통 튀어서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낸 그녀는 책 사이에 끼여 있던 그녀가 찾던 책을 짚어 촛불이 켜진 책상으로 돌아왔다. 푸른 빛을 내는 촛불 여러 개가 한 책상에 모여 빛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지독한 환경은 또 뭐냐구. 세상 사람들의 상식에 맞춰주기 위해 분위기를 조성하는 역할을 한다는 건 잘 알겠지만 이렇게… 으으, 음침할 필요까지는 없잖아! 저 유리창은 깨진 지가 언젠데 아직도 안 갈아 끼운 거야? 찬바람이 들어와서… 춥잖아." 그녀는 계속해서 투덜거렸다. 이 지독한 환경이 문제였다! 돈이 모자라는 것도 아닐 텐데, 대체 왜! 왜 이런 불편한 인테리어를 그냥 두는 것인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춥고, 건조하고, 먼지만 날아다니는 공기를 들이쉬고 내쉬며 책을 폈다. [어린이 추천동화! 마녀 헤드라의 계약]이라는 동화책이었다(권장 연령대 30세~40세). 역사책을 찾기는 했지만 그건 특별하게 독해공부(…)같은 걸 할 때나 읽는 거지, 단순하게 문자를 눈에 익히게 하려면 이렇게 쉬운 책이 제격이었던 것이다. <헤드라는 계약 상대와의 계약을 만료하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녀의 손이 인간의 가슴을 파고 들어가며 부드러운 피를 파냈다. 헤드라의 손이 인간의 심장을 세게 움켜쥐자 헤드라의 손을 통해서는 심장이 박동하는 움직임이…> 이건 동화가 아니었다! 중간계에서는 절대 출판되지 못할, 엽기 호러물이었던 것이다. 그나마 이 책이 가장 엽기성(?)이 덜한 것이라고 하면 할 말 다 한 것이다. 실제로, 책 후기에는 이렇게 나와 있었다. <본 책은 중간계에 번역, 배포되어 큰 인기를 끈 작품으로……> '공통점이라면, 마족은 무지하게 영명하고 강하고 지혜로우며… 하여튼 무지무지 잘났다고 묘사되어 있다는 거로군. 천족은 멍청하고 겉멋만 잔뜩 들었으며 위선적이라고 나와 있고. 인간이야, 뭐- 어리석고 약해 빠지고, 약속도 잘 안 지키고, 약아 빠지고, 중요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종이라고 나와 있네. 이거 참.' 루피아는 피식 실소를 흘렸다. 중간계에서 보고 자란 동화책에서는 마족이란 아주 사악하고 필멸(必滅)해야 할 아주아주 나쁜 존재라고 묘사되어 있었다. 마족은 마족 중심, 인간은 인간 중심으로 아이들을 가르키고 있었다. 루피아는 책장을 넘겼다. 일단 빨리 마계문자에 익숙해 져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무시를 안 당하지. 절대! 절대로 무시당하는 일 따위 겪지 않겠어!' * * * * * * * * * * * * * * * 마왕은 눈살을 찌푸렸다. '지켜 보겠다'고 생각한 밤 이래로 그 여자는 방과 도서실만을 들락 날락거리며 생활하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은 그 두 곳밖에 없다는 듯이 말이다. 게다가 만나는 마족이라고는 그녀 담당의 시녀 뿐이라고 한다. '그 두 곳에서밖에 생활할 수 없다고 알고 있는 건가?' 정작 루피아는 그런 것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있었지만, 마왕은 그 것밖에 이유가 없다고 여겼다. 그렇다면 생각을 고쳐 줘야 하리라. 그는 이제껏 보지 못했던 신선한(?) 반응을 보이는 루피아가 흥미로웠고, 그녀의 생활반경이 좁아 진다면 그 만큼 흥미로운 일이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마왕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구, 군주님. 뭔가 피, 필요하신 것이라도 이, 있으십니까?" "그 여자 어디 있지?" 이 시종이 얼마 전에 바뀌었다. 잔뜩 굳어서 말을 더듬던 시종은 '그 여자'라는 마왕의 호칭에 곧바로 한 사람을 떠올릴 수 있었다. "마, 마왕성에 머물고 계신 공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 몬스터를 좋아하는 취향의?" 그렇다. 얼마 전에 바뀐 마왕의 시종, 그는 6일 전 루피아를 방까지 안내했던 바로 그 시종이었던 것이다. 마왕은 시종의 말에서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몬스터를 좋아하는 취향? "그게 무슨 소리지?" "에, 예? 저, 저는 6일 전 첫날에 그 공녀를 방으로 안내했던……." 마왕은 로이드윈의 보고를 떠올렸다. 공녀들이 고대어를 사용하기로 했던 것은 분명 그녀들이 왔던 날 다음 날이었다. 그런데 이 시종의 말에 따르면 그는 이 곳에 온 첫날에 그 여자와 얘기를 나누었다는 소리가 되지 않는가? 하지만 그 바로 전에 그녀는 자신과 대화가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럼, 그 여자가 마계어를 안다는 소리인가? '그렇다는 것은…?' 하지만 인간이 마계언어를 알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지금도 고대어를 줄창 사용하고 있다는 보고를 듣자면 분명 마계언어는 모르는 게 분명했다. 마왕은 살짝 이맛살에 주름을 그었다. 그 표정에 시종의 가슴이 철렁 가라앉았다는 것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사실. "구, 군주님?" "그 여자, 어디 있나?" "네, 네? 아, 그 분이시라면 지금 도서실에서…." 마왕은 답답하게 말을 더듬는 시종을 제치고 복도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뒤돌아 시종에게 한 마디 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당장 담당 바꿔!" * * * * * * * * * * * * * * * "푸엣치이-! 켁! 켁켁! 어- 허억? 우아아악!" 콰당! 와르르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책꽂이에서 책이 무너져(?) 내렸다. 간발의 차이로 머리 위에 책 세례를 맞는 불행을 피한 루피아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짙은 먼지구름으로 인한 재채기를 하며 투덜거렸다. 만약 저기 깔렸다면… 으엑,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제길- 왜 정리가 하나도 되어 있지 않은 거야! 콜록, 켁켁! 이놈의 먼지, 그렇게 날렸으면 좀 줄어들 것도 같은데 왜 조금도 없어지질 않는 거야?" 어딘가에 먼지 제조기라도 있는 게 아닐까 의심까지 되는 상황이었다. 이 심한 먼지라니… 청소를 언제 한 건지 이제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루피아는 낮게 욕설을 내뱉으며 신경질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3일 전부터 반복해 왔던 일상적인 일(?)이었기에 이제는 새롭지도 않았다. '우리 집 창고도 이 정도는 아닐 거라고. 한 100년쯤은 묵은 거 같애. 쳇! 정리 좀 하고 살지.' "뭘 하는 거지?" "으히에엑!" 갑자기 들려 온 목소리에 루피아는 깜짝 놀라며 숨을 들이켰다. 생각해 보라! 이 음침한 배경, 어두컴컴한 주위. 갑자기 뒤에서 들려 온 낮고 차가운 목소리! 놀랄 만도 하지 않은가 말이다. 하지만 뒤를 돌아 본 루피아는 차라리 귀신이 낫겠다 싶었다. '저 남자는 또 무슨 일이래!' 살갗에 소름이 돋을 만큼 차갑고 위압감 서린, 하지만 낮고 풍성한 음성. 그런 목소리의 주인은 그녀가 아는 한 하나밖에 없었다. "그것까지 고해야 하나요? 보시다시피, 독서를 하기 위한 처절하고 힘겨운 투쟁 중입니다." 확실히, 그녀의 몰골(?)은 '힘겨운 투쟁 중'이라고 표현해도 절대 부족함이 없었다. 먼지가 꼬질꼬질하게 묻은 검은 머리카락, 구깃하게 구겨질 대로 구겨진 옷, 역시 먼지가 묻어 부분부분 까만 얼굴까지. 마왕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그런 것 같군." 비웃는 것 같은 어투가 신경쓰이기는 했지만 루피아는 굳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따위 것보다는 빨리 이 자리를 빠져 나가는 게 우선이었다. 대체 왜 마왕이 그녀를 찾아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차피 별다른 일은 없을 거였다. "그럼, 저는 이만." 말 하지 않는 틈에 재빨리! …사라지려고 했지만 마왕은 그녀가 생각하는 대로 일을 풀어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마왕의 물음에, 루피아는 제자리에 멈춰서야 했다. "첫 날, 어떻게 대화한 거지?" 싸악, 루피아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첫 날- 이제는 거의 잊어가던 일이었는데… 설마, 그 얘길 듣고 자신을 놀렸다고 생각하는 건가? 대체 그 시종과 대화했던 일이 어떻게 마왕 귀에까지 들어간 거야! "…말 못하나?" '이, 이젠 벙어리 취급까지… 크윽, 안 되겠어! 화내는 상대의 진을 빼놓는 방법! 내가 먼저 선수를 쳐 버리자!' 그녀는 과거 이 방법으로 꽤 여러 번 화(?)를 면했던 적이 있었다. 잔뜩 벼르고 있는 상대에게 먼저 나서서 사과하고 빌면 상대는 왠지 맥이 빠지게 되는 것이다. 자고로 이런 상황에서는 상대가 반항해야 화내는 재미가 있는 법이다. "죄송해요, 놀린 게 아니예요! 저-얼대 그런 의도는 없었다구요! 그냥, 그냥… 나도 모르게 마왕님 앞에 서니까 긴장이 돼서, 그래서 마법이 자연스레 발동이 안 걸렸던 거예요! 그런데 시종은 대하기가 편하니까, 긴장이 풀려서… 그래서… 에잇, 정말 의도한 게 아니라구요! 랭귀지 마법같은 1클래스 마법은 익숙하게 사용하니까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마왕은 알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기겁을 하며 말한 대사에는 그가 궁금해 했던 것들의 답이 다 있었던 것이다. '랭귀지 마법'이라는 건 대충 언어를 해석해 주는 기능을 하는 마법인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언뜻, 중간계에는 별 희한한 마법들이 다 만들어진다는 말을 들은 듯도 했다. 하지만 아직 하나…. "좋아. 그럼, 정말 몬스터 취향인가?" "……." 루피아는 할 말을 잃었다. 그 시종이 그것까지 말한 건가. 이 수다스런 자식같으니라구… 말할 게 있고 안할 게 있지, 뭐 좋다고 그런 것까지 시시콜콜 말한단 말인가? 이름도 모르는 시종을 향한 원망이 새록새록 솟아나는 루피아였다. "그… 럴 리가 없잖아요. 저는 어디까지나 정상적 취향이란 말이예요." "그렇군." 마왕은 루피아의 억울함 섞인 변명에 다시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상적 취향'이라는 게 정확하게 어떤 것을 뜻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범주에 '몬스터 취향'이라는 항목은 없는 게 확실했다. 다시 인사를 하고 도서실을 나서려 하는 루피아에게, 마왕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 성 내에서의 네 행동에 제한을 두지 않겠다. 적어도 이 성 안에서는 네 행동을 제어할 수 있는 자는 나로 한정될 것이다." "……?" 빨리 마왕에게서 벗어나려던 루피아는 마왕의 그 말에 멈칫했다. 의도를 알아보려 뒤를 돌아 보았지만 마왕은 그녀가 보던 책을 펴들고 눈살을 찌푸리고 서 있을 뿐이었다(한 마디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대체 저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냐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그녀가 마왕을 빤히 쳐다 보았지만 마왕은 그녀의 눈빛을 철저히 무시했다. 그런 것은 좀 자세하게 말해주면 어디가 덧나냐! 그녀는 자신이 질문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잊어먹은 모양이었다. "그… 말을 하러 오신 겁니까?" 이번에도 대답은커녕, 마왕은 그녀의 질문을 무시하고 도서실에서 뚜벅 뚜벅 걸어서 나가 버렸다. 한 동안 멍한 눈으로 루피아는 마왕이 간 방향을 쳐다보고 있었다. '가만! 이거… 가만 생각해 보니까 엄청난 행운이잖아? 행동에 제한을 두지 않을 거라고? 그거… 해석하기에 따라서 뭐든 해도 된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루피아는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뭐든지' 해도 된다-… 그렇다면. "훗… 후후후후! 그래, 뭐든지… 훗훗훗훗!" 마왕은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것은 전-혀 모른 채 복도를 걸을 때, 마왕성의 도서실 복도에서는 루피아의 의미심장한 웃음소리가 작게 퍼져 나갔다. * * * * * * * * * * * * * * * "일어나요! 이제 그만 돌아가 봐야 하지 않습니까?" 벌떡! 베키는 눈을 번쩍 뜨며 몸을 일으켰다.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그녀는 황당한 눈으로 눈앞의 인물을 쳐다 보았다. 대체 왜 이 사람이 그녀를 깨우고 있는 것인가! 그녀같은 시녀를 깨우러 오기에는 그의 신분이 너무 높았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듯, 에드윈드는 장난꾸러기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아, 우리 아버지가 시켜서요. 벌써 한낮이라고요. 그… 페라딘인가? 페디론인가 하는 시종은 먼저 돌아 간다고 하고 갔습니다. 자, 어서 일어 나세요." 베키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는 에드윈드를 응시했다. 다시 한 번 그를 향해 웃어보인 에드윈드는 그녀를 침대에서 끌어내고 생긋 웃어 주었다. 16살 특유의 소년의 미소였다. 베키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도련님께… 저기, 그러니까……." "아아, 그럴 필요 없어요. 사실, 아버지가 시킨 게 아니라 내가 지원한 거니까. 일부러 당신 깨우러 오는 사람하고 바꿔서 이제까지 옆에서 보고 있던 거거든요. 원래는 한 3시간 전인가 그 때 당신을 깨워서 보냈어야 했는데… 너무 잘 자서 깨우기가 미안해서." "예?" 지원했다고? 시킨 게 아니라고? 베키는 지금 에드윈드가 무슨 말을 하는지 통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동시에, 시간이 벌써 그렇게 흘렀다면 어제 들었던 얘기에 대한 실마리를 잡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흐응… 당신, 들었죠?" "네, 네에?" 베키를 보는 에드윈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에드윈드는 수상하다는 눈으로 베키를 쳐다보며 슬쩍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거짓말 할 생각 말아요. 다 알고 있으니까. 아버지는 모르는 것 같지만, 당신은 분명 방문 앞에서 우리 부자(父子) 얘기를 다 들었어요. 맞죠? 어제 눈이 마주쳤을 때 직감적으로 알았죠. 내 직감은 정말 무시못할 거라고 누님이 그랬거든." 베키는 긴장된 표정으로 에드윈드를 바라보았다. 적어도, 지금 그녀가 알고 있는 정보만으로도 엘 세느안트 저택에서 폐인이 다 되어있는 세 명의 공자(公子)들을 구할 수는 있었다. 여차하면 저 미소년의 얼굴에 상처를 내는 범죄(?)를 저지르고라도 기필코 이 소식을 도련님들에게 전하리라! 그녀는 결심을 다졌다. 그런 그녀에게 에드윈드의 음성이 들렸다. "나는 지금 아버지때문에 저택 밖으로 나가지 못하니까, 좀 도와 줘요." "에… 예에?!" "어? 어제 들은 것을 엘 세느안트 저택의 세 공자들에게 전해 주려던 것 아니었어요? 아, 엘 세느안트 공작각하께는 말이 못 들어가게 하세요. 어차피 아버지랑 한 패인 것같으니까. 그러니까, 제일 그런 것 엘 세느안트 공작각하께 말하지 않을 것 같은 공자를 골라서 정보를 흘려주는 거예요." "네… 에…?" 기가 막혔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그럴 것도 없었다. 어차피 이 어린 도련님 입장에서는 한 사람의 힘이라도 더 필요한 실정이고, 그가 알고 있는 소식을 엘 세느안트의 세 공자에게 알릴 정보원이 필요한 것이다. 애초에 말릴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이름이…?" "베키. 베키요." "그래. 베키 양이 엘 세느안트의 세 공자와 나를 이어주는 정보원같은 역할을 하는 거지. 난 이틀에 한 번씩 아버지의 특수한 물건 하나씩을 깰 테니까 엘 세느안트 저택에서 재료를 가지고 당신이 이 곳으로 오는 거야. 그 때 정보를 가지고 오고, 가는 거지. 어때?" "아…." 베키는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반응에, 에드윈드는 무척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에게 무언가를 턱- 안겨주며 에드윈드는 그녀를 문 쪽으로 밀었다. 그리고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베키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나는… 당신이 마음에 들거든요. 자주 와요~" --------------------------------------------------------------------------- 자아- 쓰는 족족 올립니다! 아주 막 나가기로...ㅠㅠ 되도록 빨리 진도 따라잡기 위해! 아자뤼!><; 제 목: [수정판] 공녀(貢女) : 제5화 [마왕성 개조계획 24시간!](2) #. 제5화 [다 뜯어 고쳐라! 마왕성 개조계획 24시간!] * * * * * * * * * * * * * * * "네에에엣?!" 메를리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못 들었어? 이 마왕성을 확 뜯어고쳐 버리겠다고 했어. 새로 꾸며야지!" 마왕성을 뜯어 고치겠다? 새로 꾸미겠다고?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메를리나의 입장에서는 그런 말을 하는 루피아는 확실히 '자살 행위'를 하겠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메를리나는 순진하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왜?'라고 묻는 듯한 루피아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입을 다물지 못하고 믿을 수 없다는 메시지를 담은 얼굴로 루피아의 앞에 서 있을 뿐. "왜 그런 표정이야? 부담스러워." 솔직히 저렇게 입을 크게 벌리고 속 내용물을 다 보여주면 부담스러울 만도 하다. 루피아는 아직도 굳어있는 메를리나를 향해 방글방글 웃으면서 말했다. "봐! 이 음침~ 하기 그지없는 주위를! 불을 피우지 않으면 추워서 얼어 죽겠고(도서실), 복도는 어두침침한 데다가 밝히고 있는 횃불은 파란 색이라 괴기스럽고! 유리창은 깨져 있는 데가 많고 클라포 시체가 배를 까뒤집은 채 널려 있어! 뿐인 줄 알아? 검은색도 예쁜 검은색이 아니라 칙칙한 검은색이란 말이야. 아무리 어둠을 대표하는 종족인 마족이라지만 이건 너무 심하다고 생각 안 해?" 그녀의 말에는 심히 동감하는 메를리나였다. 솔직히, 이 성에서 겨우 6일을 보낸 루피아가 더 잘 알겠는가, 벌써 100년이 넘는 세월동안 마왕성에서 일해 온 메를리나가 더 잘 알겠는가? 하지만 메를리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추스리고 말했다. "하, 하지만 그런 일은 군주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텐데요'라고 말하려 했던 메를리나의 말은 루피아의 말에 의해 잘려졌다. "훗- 괜찮아! 이건 마왕님께서 허락하신 일이거든~ 훗훗훗." '비록 직접적이 아니라 간접적이긴 했지만', 이라고 작게 덧붙인 루피아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렸다. 그녀의 자신만만한 말에 메를리나는 패닉에 빠져 버렸다. 전대 마왕은 거의 마왕성에 머물지 않고 마계 곳곳의 별장에서 머물거나 여행을 다녔고, 현 마왕은 즉위한 지 20년이 지났지만 한 번도 그런 말을 꺼낸 적이 없었다. 그 결과 마왕성의 시녀들이 아무리 원해도 마왕성을 뜯어 고치는 일은 대대로 계-속 계속 미뤄지고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마, 말도 안 돼." "말이 안 되긴 뭐가 안 돼? 안 되면 되게 하라! 몰라? 이건 마왕님께서 허가하신 거야. 시간이 없다구. 빨리빨리 움직이자. 성 안의 모든 사람들이 한꺼번에 움직이면 하루 안에 끝낼 수 있을지도 몰라." 비록 지금은 한낮이었지만, 마족의 기본적인 체력이나 능력 등을 생각해 보면 훨씬 빨리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루피아의 재촉에 아직 얼떨떨한 메를리나는 눈을 깜빡였다. "하, 하지만 뭐부터 해야 할 지……." "우선, 마왕성의 모든 시녀를 총집합 시켜 줘. 그리고 시녀장을 데리고 와!" 루피아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아까부터 흘리던 뭔가 의미심장한 미소였지만 메를리나는 신경쓰지 못했다. 어쩐지 가슴이 콩닥거리는(?) 분위기에 메를리나는 활기차게 대답했다. "네엣- 5분 내로 총집합 시키겠습니다!!"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니, 메를리나?" 시녀장은 평소 아꼈던 메를리나가 드디어 돌아버린 게 아닌가 했다. 메를리나라면 지금은 마왕성에 머무르는 공녀의 옆에서 시중을 들어주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아까 갑자기 두다다다 무서운 속도로 달려 와 그녀 앞에 서더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게 아닌가. "어서요! 5분 내로 시녀들을 집합시켜야 한다니까요? 당장 하던 일 멈추고 모이라고 하세요. 루피아님께서 서두르라고 하셨단 말이에요~" 아크로는 기가 막혔다. 한낱 하찮은 인간따위가 어떻게 마족에게 '명령'을 내린단 말인가? "무슨 소리니! 우리가 왜 그.딴. 인간 여자의 명을 따라야 한단 말이야? 아무리 최고위 마족분들의 부인으로 클리오라께서 정해 주셨다고는 하지만 한낱 인간따위에게!" 지금 그딴 게 문제인가. 다급해진 메를리나는 답답한 속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마황비(魔皇妃) 마마의 자리도 그 '하찮은 인간'의 것이잖아요! 하여튼, 루피아님께서 시키신 걸 하는건 손해보는 것이 없는 거라구요! 아니 이건 기회예요! 억만 분의 일이 될까말까한 엄청난 기회!!" 발을 동동 굴리며 급하게 말하는 메를리나를 보며 아크로는 조금이지만 호기심이 동하는 것을 느꼈다. 평소 그녀가 차기 시녀장으로 점찍어 두었던 메를리나는 활달하고 활기찬 아이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급하게 굴거나 발까지 동동 구르며 예의없이 행동하는 애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 일이 무엇인데?" "이 마왕성을 새로 꾸미시겠다고 하셨어요. 요즘 유행하는 디자인으로요!!" "……!!!" 메를리나의 말에 아크로의 눈이 놀람으로 물든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크로는 금방 표정을 수습하며 물었다. "마왕님의 허가도 없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다시 말하지만 아크로는 마왕성 내부의 모든 시녀들을 총괄하는 시녀장이었다. 시녀장으로써 이 음침하기 그지없는 마왕성을 가장 먼저 꾸미고 싶은 사람은 바로 아크로였던 것이다. 하지만 군주께 감히 말을 건넬 용기가 없어 차일피일 미루어만 왔다. 20년 전 전대 마왕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다. "당연히 허가를 받으셨으니 그러시는 거죠! 괜찮으니 어서 빨리요오~ 우아아앗, 이제 겨우 3분밖에 안 남았어어어~!!" 루피아는 대략 30분 정도를 여유있게 기다릴 생각이었지만, 5분 내로 오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던 메를리나는 진심이었다. 그런 그녀로서는 머뭇대는 아크로가 답답하고 가는 시간 1분, 1초가 아깝기만 했다. 메를리나의 힘찬(?) 대답에 시녀장 아크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크로는 옆에 있는 시녀 호출벨을 급하게 누르고 급하게 소리쳤다. "성 안의 모든 시녀, 시종들은 당장 집합하라! 2분 내로 도착하지 않으면 급료고 뭐고 다 없다! 당장 집하아아아아아아압-!!!" 그리고는 메를리나의 손목을 붙잡고 빠르게 걸어가며 아크로는 말했다. "서둘러! 내일까지 시간도 그리 많지 않으니!!" …이제는 메를리나가 아크로에게 끌려가는 형국이 되어 버렸다. 아크로에게 손목을 점령당한 채 메를리나는 다시 빠르게 흘러가는 상황에 어리둥절함을 맛봤다. 하지만 곧 정신차린 메를리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상관에게 대놓고 개길만큼 메를리나는 멍청하지 않았다). '뭐야! 다 내숭이었잖아!!' "아! 오셨군요, 시녀장 아크로." 루피아는 반가운 얼굴로 방금 끓여 한 모금 넘긴 차를 내려 놓았다. 메를리나가 올 때까지 적어도 30분은 걸릴 거라는 그녀의 예상을 깨고, 정확하게 4분 57초만에 문이 벌컥 열리고 두 사람이 등장했다. "안녕하십니까, 루피아 엘 세느안트 님." 그녀는 숨을 몰아쉬는 메를리나와는 달리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단정한 차림과 머리모양을 고수하고 있는 중년부인을 보며 과연 시녀장이다, 라고 중얼거렸다. 왜 어느 곳에나 시녀장의 이미지는 다 비슷비슷한 걸까? "제가 부른 용건은 들으셨지요?" "물론입니다. 그런데 그 말이 정말……?" 약간 미심쩍은 듯이 끝말을 흐리는 아크로의 말에 루피아는 생긋 웃으며 마지막 확인도장(?)을 찍어 주었다. "그럼요. 간접적으로나마 내 행동을 인정해 주셨으니까 너무 걱정 말아요." 루피아와 아크로는 잠시 침묵하며 서로를 빤히 쳐다보았다. 루피아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입가에 띄운 채 아크로의 갈적색 눈을 뚫어져라 쳐다 보았고, 아크로 역시 루피아의 보랏빛 눈을 직시했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애가 타고 속이 타는 건 메를리나 뿐이었다. "……." "……." 그 상태로 2분 간이 더 흘렀다. 아크로를 쳐다보던 루피아의 입가에 더 짙은 미소가 피어 올랐다. 동시에 아크로의 입가에도 만족스런 웃음이 흘렀다. "성 내부 분위기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먼저 푸근하고 아늑한 분위기로 바꿔야 하겠지요. 그러려면 손이 많이 갈 텐데, 시녀들은 모두 집합시켜 주셨나요?" "물론입니다." "그렇담, 마계에서 제일가는 인테리어 디자이너를 불러 오세요. 그리고 간편, 간단, 그리고 최대한 어두운 이미지에 신비로움을 가미한 디자인으로 바꿔 버려야 해요. 제일 중요한 건 짧은 시간 내에 완성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내부 연락망을 띄워야 겠군요. 1시간 내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대대적인 공사는 필요없고, 일단 성 안의 분위기만 확 바꿔 버리기로 하죠. 시간이 없어도 너무 없으니까요."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끝내죠." 아크로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띄워 보였다. 그녀로서는 굴러들어 온 기회를 걷어 찰 이유가 조금도 없었다. 그녀가 군주에게 허락을 구할 용기가 없어 미뤄오던 일이었던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하고 바라고 계획했던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마음에 드는 분이시군요." 루피아가 말하자, 아크로 역시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웃었다. "저 역시 난생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인간을 만난 것 같습니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생긋 웃었다. 알 수 없는 유대감의 공간이 형성된 것 같았다. 너무도 친숙한 분위기가 둘 사이에 흐르는 가운데, 그 사이에 끼지 못한 메를리나만이 홀로 따돌려지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대체 왜 이렇게 급속도로 친해진 거야?' 잠시 뒤, 아크로와 루피아는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크로는 시녀들의 총지휘를 맡았고, 루피아는 디자이너와 상의해 전체적 디자인을 맡았다. 시간이 없다. 내일이면 바로 연회였던 것이다. 루피아는 마계의복 특유의 펄럭거리는 천자락을 휘감아 허리에 고정시켰다. 긴 검은 머리카락을 위로 높이 올려묶고 소매를 걷어붙인 루피아는 준비된 상황을 점검했다. 하루. 24시간. 1440분. 86400초. 많다면 많고, 적다면 무-지 적은 시간이었다. 먼저 아크로는 마왕성 내부의 연락망을 이용해 마계에서 꽤나 이름이 나 있다고 하는 디자이너를 불렀다. 과연 '마왕성'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탓인지 디자이너는 재빨리 달려왔고, 그 덕분에 전체적인 테두리를 빠르게 잡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메를리나가 모아 온 '불만사항'들을 훑어 보았다. "…도서실이 너무 춥고 어두워요… 그래, 이건 뭐 나도 동감하는 사항이야. 복도가 어둡고 무서워요. 명계의 시퍼런 할짓없는 것들이 쫓아오는 것 같아요. 귀신을 말하는 건가? 복도에 걸려있는 몬스터 컬렉션도 어디 한 군데 치워 주세요. 구역질이 날 것 같아요. 깨진 유리창을 복구해 주세요. …뭐야, 유리창도 마음대로 갈아 끼우지 못하는 거야? 이런 건 알아서 해야 하는 거 아냐?" "음, 그게… 성의 내부는 고급스럽고 깨끗하게 꾸며져 있긴 하지만 외부까지는 신경쓸 필요가 없다고 해서 그렇게 내버려 둔 거였거든요. 게다가 마족들이 워낙 추위나 더위같은 걸 잘 안 타니까요. 군주께서 워낙… 그런 데 신경을 쓰지 않으시는 성격이세요."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마왕이, 건물의 외관같은 것에 신경을 쓰며 깐깐하게 구는 모습따위, 눈의 건강의 위해서라도 절대로 보고싶지 않았다. 루피아는 디자이너의 말대로 준비해 온 물건들을 만족스런 눈으로 훑어 보았다. 처음 이 마왕성에 왔을 때부터 불편하고 신경에 거슬렸던 이 마왕성 인테리어들을 뜯어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정말이지 속이 다 시원했다. 비록 도서실과 방만을 왔다 갔다 한 그녀였지만, 그 춥고 어두운 도서실에서 괴기스런 분위기만 조성하는 파란 촛불에 의지해 문자를 익혀가던 그 때 그 기억! 아아, 정말 떠올리기도 싫었다. * * * * * * * * * * * * * * * 에리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거울을 응시했다. 거울 속에는, 화려한 색채의 금발머리를 허리께까지 내려뜨린 채 살짝 올라간 짙은 녹색 눈동자를 가진 여자가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에리나는 신경질적으로 거울에서 시선을 뗐다. 여성스러운, 지극히 여성스러운 자신의 외모가 그녀는 못마땅했다. '어머니를 닮아 아주 예쁘구나.'라는 말. 그 말은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자주 들어 온 말이었다. 어른들은 칭찬으로 한 말이었을지 몰라도 에리나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정말 싫어하는 말이 되었다. 어머니를 닮아 금속성의 고운 금발머리가, 어머니를 닮아 짙고 깊은 녹색을 내는 눈동자도 싫었다. '차라리 남자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걸.' 칼르니르 가문은 제국의 대표적인 무가(武家)였다. 아들인 바르에든 칼르니르는 과연 칼르니르 가문의 핏줄답게 로열 나이트의 제1대대에 소속되어 있고, 사하르디나드 축제(시리어스 제국의 대표적인 축제로, 4월 내내 열린다)의 검투 대회에서 최연소로 우승해 실력을 입증한 바 있다. 하지만 에리나는, '여자'라는 이유로 검을 잡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다. '여자'로 태어났다는 걸, 에리나는 한 번도 좋아해 본 적이 없었다. 여자이기에 이렇게 마계로 끌려오게 되지 않았는가. 옷감을 몸에 둘둘 두르고, 무겁기만 한 보석을 달고, 인형처럼 앉아 춤이랍시고 몇 번 빙빙 돌게 하는, 소위 말하는 '여자의 일'이라는 것도 싫다. 에리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휴우- 정말, 4일 동안 방에서 아무 것도 안 하고 처박혀 있으려니 죽을 맛이로군.' 이 곳에서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복도로 한 걸음만 나가도 시녀가 못마땅한 눈으로 노려보기 일쑤고, 그 째림을 견디고 나가더라도 다른 시녀와 시종의 말없는 불평에 얼마 안 돼 방으로 다시 돌아와야 했다. 그 눈빛은, 한 마디로 '괜히 쓸데없이 돌아 다니다가 일 만들지 말고 방에 처박혀 있어'였다. 평소라면 그런 눈빛쯤 단번에 무시하고 마음대로 돌아다닐 그녀였지만 이 곳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에리나는 침대의 푹신한 쿠션에 몸을 묻었다. 폭신폭신한 이 감촉이 처음에는 좋았지만 이제는 지긋지긋했다. 죄수처럼 방 안에만 콕 처박혀서는, 아무 것도 못하고 세월아~ 네월아~ 하는 꼴이라니. 더 이상은 못 참겠다. '좋아! 어차피 일이라 봐야 죽는 것밖에 더 있겠어? 나갈 거야.' 게다가, 나가지 못하는 이유가 고작해야 시녀와 시종이 노려보는 것 때문이라니 정말 한심하지 않은가. 에리나는 굳은 결심과 함께 침대에서 몸을 발딱 일으켰다. 슬쩍 들은 바로는 그녀가 이 저택에 온 이후로 '유리아덴'이라는 마족은 단 한 번도 이 저택에 다시 온 적이 없다고 한다. 그 말은, 제1의 위험인물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에리나는 씩씩하게 문가로 걸어 가 손잡이를 돌렸다. 달칵! 부드럽게 문이 밀리며 복도의 모습이 드러났다. 에리나는 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좌우를 살핀 뒤 완전하게 복도 밖으로 나왔다. 왠지모를 개운함을 느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복도를 걸어갔다. 반대편에서 그런 그녀를 어이없이 바라보는 유리아덴이 있었음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 음- 이번 편은 그다지 바뀐 게 없어요-_-; 에리나 얘기만 조금.. 수정인가요? 에에, 졸려요...ㅠㅠ 제 목: [수정판] 공녀(貢女) : 제6화 [달 깊어가는 밤](1) #. 제6화 [달 깊어가는 밤] * * * * * * * * * * * * * * * 에스베크 저택에서 돌아 온 후로부터, 베키의 생활은 그야말로 실수의 연발이었다. 부엌일을 도우면서 접시 깨는 건 예사고,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굴러 떨어질 뻔 한 게 한 두번이 아니었다. 어딘가에 정신을 놓고 있다가 시녀장에게 한 소리 들은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어디 아픈 게 아니냐며 걱정해 주는 동료들의 말에 괜찮다고 손을 흔들며 웃어 보이다가 앞을 보지 못해서 벽에 부딪친 적도 있었다. 덕분에 현재 그녀의 몸은 온통 멍 투성이에 상처 투성이였다. 심지어는 발목까지 삐어 버린 베키는, 현재 일종의 패닉이라고 자신의 상태를 판단했다. "어휴- 정말이지 베키! 요즘 대체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야! 발을 삐다니. 정신 딴 데 팔아먹고 얘기하다가 벽에 머릴 박지 않나." "미안해." 베키의 동료, 샤리는 베키의 사과에 씨익 웃어 버렸다. 다친 건 베키인데 사과같은 걸 하다니, 가끔이었지만 샤리는 베키가 무작정 사과부터 하고 보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샤리는 이 빨래만 널고 쉬라고 말하고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위로해 주었다. 샤리가 뒷문을 통해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베키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빨리 도련님들께 정보를 전해 드려야 하는데…….' 그런데 지금은 그것마저도 여의치 않다. 사랑하는 여동생을 잃은 상실감에 술에 푹 절어 계시는 세 도련님께서는 방 문을 굳게 걸어 잠그시고는 사람들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으시기 때문이었다. 식사를 올려 보내 드려도 손도 대지 않은 채 밖으로 내보내지는 경우가 많았고, 그것때문에 엘 세느안트 저택에는 또 한 바탕 비상이 걸릴 태세였다. 비록, 그 중심이 공작부부가 아니라 시녀, 시종들 중심이라는 게 다르긴 하지만. 베키는 루피아 담당시녀였었고 그녀의 오빠들에게 담당시녀는 배정되지 않아 있기 때문에 당번을 바꾼다든가 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베키는 바람에 펄럭이는 하얀 빨래를 보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앞이 막막했다. 거기다, 지금 그녀의 머리를 어지럽게 하는 건…. '에휴우우우~ 안 그래도 심란한데, 왜 나한테 장난질이야. 그 어린 도련님한테는 어떻게 연락을 해야 한다지? 아직까지 잠잠한 거 보면 일을 저지른 건 아닌 것 같은데. 아니, 그 꼬마 도련님이 일을 내기 전에 얼른 세 도련님들께 정보를 전해 드려야 해.' 베키는 결연하게 다짐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침 이번에 널은 빨래를 끝으로 그녀에게 맡겨진 일은 모두 끝났다. 그 꼬마 도련님이 마지막에 한 말은 그녀의 마음을 약간, 아주 약간 두근거리게 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것을 굳이 부정하지는 않겠다. 누구라도 그 정도로 잘 생긴 사람한테 그런 말을 들었다면 조금쯤은 두근거리는 게 정상적일 테니까 말이다. 비록 그 상대가 그녀보다 7살이나 어리다 하더라도 말이다. 베키는 미간에 주름을 그으며 고심에 빠졌다. 꼬마 도련님의 짖궂은 말장난에 대해서는 나중에 생각할 문제였다. 머리 뒷구석으로 꾹 밀어 넣은 채 베키는 어떻게 하면 도련님 방에 아무도 모르게 들어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니, 그 전에. 어느 도련님께 소식을 전해 드린다? 그 꼬마 도련님께서는 분명- 각하께 제일 말하지 않을 것 같은 공자를 고르라 했는데.' 잠시 세 도련님의 얼굴을 떠올려 보면 베키는 피식 웃었다. 꼬마 도련님께서 말한 조건에 딱 맞는 공자는 애초에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카에리드 도련님은 너무 효성이 지극해서, 아가씨를 구출해 낼 방법을 찾을 실마리가 있다고 하면 당장 어머니나 아버지께 가서 고해 바칠 가능성이 짙었다(이건 어디까지나 엘 세느안트 공작이 그 방법을 모른다고 가정했을 때다). 트로에 도련님같이 마음이 약한 분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가족 앞에서도 짤막짤막하게만 말을 하던 이데카른 도련님이 가장 낫다고, 베키는 중얼거렸다. 언제나 루피아의 옆에서 시중을 들어주던 베키는 필연적으로 루피아 앞에서 무너지는(?) 세 공자를 보았고, 그로 인해 아주 잠시간 현실과 환상의 괴리에서 괴로워 해야 했지만 금방 극복했다(환상 속에서 꿈꾸었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지만 일단 멋있었기에). '좋아. 그럼 이데카른 도련님 방 근처로 한 번 가 볼까…….' 운인지, 이데카른의 방은 그녀가 서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볼 수 있는 건 이데카른의 방의 굳게 닫힌 창문과 발코니 뿐이었지만, 그걸로도 지금 베키는 충분했다. 베키는 주위를 한 바퀴 빙 돌아 보았다. 저 정도 높이라면… 아, 사다리를 이용하면 되겠구나. 미리 근처에 갖다 놔야 하겠다. 그 다음에는 발코니로 올라가서 창문을 두드리면 아마 이데카른 도련님께서 나오시겠지. 남들 눈에 안 띄게 밤에 가야 하겠다고 결정을 내린 베키는 다시 한 번 이데카른의 창문 발코니를 바라보며 눈에 확실하게 새겨 두었다. '좋아. 오늘밤이다. 그 꼬마 도련님께서 일을 저지르기 전에 얼른 알려 드려야지.' * * * * * * * * * * * * * * * "아유! 대체 어디로 사라지셨담? 어째서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거야?" 인비지빌리티(시전자의 모습을 사라지게 하는 마법. 2클래스)로 몸을 감춘 루피아는 수풀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잔뜩 몸을 웅크렸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메를리나가 드디어 그녀의 머리 바로 위에 멈춰서서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제발 빨리 가라! "루피아님! 루피아니이이임~ 다시는 안 그럴게요, 좀 나와요! 루피아니이이임~" 마왕성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이런 식으로 숨었다면 루피아는 금방 들켰을 것이다. 하지만 이 곳은 마왕성이고, 마계의 중심이었다. 마계의 모든 힘의 줄기의 뿌리가 바로 이 마왕성이었고, 그런만큼 여러 색깔의 마나가 뒤엉켜 있었다. 덕분에 루피아는 바로 머리 위에서 메를리나가 소리를 질러 대는데도 무사(?)할 수가 있는 것이다. '미쳤어? 내가 다시 너한테 잡혀주면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 성을 갈어!' 메를리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점차 멀어져가자, 루피아는 메를리나의 모습이 점이 되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 루피아가 이렇게 필사적으로 메를리나의 손길(?)에서 벗어나려 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루피아는 오늘 아침의 일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또한 메를리나의 집요함에도 몸을 떨었다. 어떻게 2시간동안 줄창 쫓아다닐 수가 있는 건지. '아무리 100년만의 연회라고 해도 그렇지, 이건 너무 심했어. 내가 인형이야? 어머니한테도 이렇게 당하지는 않았던 나라고.' 어제, 그렇게 우아하게 보였던 아크로마저도 신이 나서 홍조가 어린 얼굴이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한 루피아였다. 오늘은 장장 100년만의 침묵을 깨고 마왕성에서 연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그래서 오늘을 위해 어제 그렇게 몸살이 날 정도로 열심히 일했지 않은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루피아 자신에게 드레스며 악세서리를 가지고 와서 인형처럼 만지작거리게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 레이스며, 프릴이며, 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 보석(돌) 덩어리들이라니! 루피아는 영문을 모르고 그들의 마수(?)에 몸을 바쳐야 했다. 얼떨결에 입혀지고, 벗겨지고, 달려지고, 빼앗기고… 완전히 시녀들의 인형이 따로 없는 형국이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루피아는 탈출을 감행했고, 그 결과 이렇게 모든 시녀가 아크로의 지휘 아래 루피아의 포획 작전을 펼치게 된 것이다. 덕분에 루피아는 인비지빌리티도 마음대로 풀지 못한 채 구석에서 숨을 죽여야 했던 것이고 말이다. '이 상태로는 아무 것도 못할 것 같애. 대충 옷만 차려입고 나가며 되는 거 아냐? 쳇, 연회는 저녁에 열린다고 했으니 그 동안 어디 안전한 데 가서 숨어 있어야 하겠다.' 루피아는 수풀 속에서 몸을 일으켜 묻은 흙먼지를 탈탈 털었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무작정 도망쳤던 그녀가 이 곳이 어딘지 알 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방금 메를리나가 돌아간 방향으로는 절대 가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루피아였다. 루피아는 그녀가 서 있는 곳이 어딘지도 모른 채, 무작정 메를리나의 반대편으로 달렸다. '마왕성 안에서는 메를리나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된다고 했으니까, 돌아갈 시간이 된 것 같으면 메를리나를 불러야지. 약간… 후환이 두렵긴 하지만 시간이 없는데 아까처럼 그러기야 하겠어?' 어젯밤 메를리나에게 얻어서 본 마왕성의 대략적 지도를 떠올린 루피아는 조금 전 메를리나가 간 방향에 있는 건물이 그녀의 방이 있었던 '본관'의 오른쪽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반대편에는 이름은 없었지만 하여튼 건물이 하나 더 있다고 나와 있었다. 이름이 궁금했지만 그 때는 메를리나도 쉬러 가고 없었고, 그녀 자신도 피곤했기에 그리 신경쓰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건물 이름이나 용도가 어쨌든 루피아는 자신이 앞에 두고 있는 건물이 지도의 그 건물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꽤… 낡았네. 하긴 이 마왕성 치고 안 낡은 곳이 어디 있겠냐마는. 이건 좀 정도가 심해. 디자이너나 시녀장 아크로도 이 건물은 손댈 생각도 안한 모양이지? 하긴, 나도 엄두가 안 나겠다. 헐, 안 무너지면 다행이겠다." 죽은 덩쿨이 건물을 꽉 덮고 있었다. 건물벽에는 금이 쫙쫙 가 있었고, 덩쿨이 덮인 유리창은 다 깨져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거기다 배경이 먹구름이 짙게 깔린 어두운 하늘이라 그런지 더더욱 괴기스런 분위기가 흘렀다. 심령소설에서나 등장하는 '유령의 집'같은 분위기랄까? 아마 사용을 하지 않고 손질을 하지 않은지 적어도 10년은 흐른 모양이었다. 왠지 호기심이 솟은 루피아는 가장 가까운 창문가로 걸어갔다. 덩쿨은 깨진 창문을 통해 건물 안까지 들어가 있었다. 그녀는 익숙한 솜씨로 창문을 넘고 손을 탁탁 털었다. "훗! 부모님과 오빠들을 따돌리고 가정교사를 물먹이려면 적어도 이 정도는 되야지!" 루피아는 의기양양하게 핫핫 웃으면서 말했다. 저택에 가정교사를 불러 이것저것을 공부했던 루피아는, 가끔 놀고싶을 때는 오빠들과 부모님을 따돌리고 가정교사를 물먹이곤 했던 것이다. 수업시간에 횅하니 사라져서 온 집안 사람들이 혼비백산했는데, 결국 저녁에 나무 위에서 잠든 채 발견되었던 적도 있었다. 그때의 그 가정교사는 괜히 깐깐하고 콧대만 높고 제대로 가르쳐 주지도 않아서 아예 쫓아 내려고 마음을 먹은 경우였다. 아마 소개장이 잘못 쓰여진 모양으로, 루피아는 그 선생의 주머니에 개구리 넣기, 식사에 지네, 지렁이 잡아넣기는 물론이고, 잠자리에 바퀴벌레를 풀어 놓는 일 등등 아주 다양한 일을 시행했다. 그 결과, 그 선생은 입에 거품을 물고 몇 번이나 기절한 끝에 자진해서 짐을 싸들고 고향으로 내려갔다고 한다. 식구들도 은근히 공작 앞에서도 건방지게 구는 콧대높은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베키는 그녀가 간 대문 앞에서 소금마저 뿌렸다(사실, 계획에 그녀가 한몫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녀가 창문을 통해 들어온 방은, 먼지와 거미줄 투성이이었다. 아마도 침실이었던 듯 방 한쪽에는 커다란 침대가 이불과 천개가 찢긴 채 있고, 깨진 거울이 방 안을 비춰내고 있었다. 루피아는 예전에는 고급스러웠을 방의 풍경을 생각하며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기 위해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발을 옮길 때마다 바닥에서 삐그덕거리는게, 아마 바닥도 썩은 모양이었다. "여기… 대체 누가 쓴 방이었던 거지?" 대체 누가 썼던 방이었길래 이렇게 관리도 안 하고 내버려 두었던 것일까? 두리번거리던 루피아는 한쪽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찢어진 초상화를 발견했다. 칼로 찢긴 듯이 중앙에 칼자국이 나 있었다. 루피아는 초상화 쪽으로 다가갔다. "왜 초상화를 이렇게 찢어놨담? 불길하게… 산 사람이면 그것대로 불길하고, 죽은 사람이면 예의가 아니잖아."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루피아는 짧은 숨을 들이켰다. 초상화로 가져가던 손을 멈칫하고 그녀는 소리의 진원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왕은 문가에 기대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도 초상화를 찢는 건 좋지 않아요." 마왕이 그녀에게 걸어 다가와 옆에 섰다. 그도 그녀의 옆에서 팔짱을 끼고 중앙에 칼자국이 난 초상화를 바라 보았다. 루피아는 몸을 움찔했지만 초상화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컸기에 내빼지는(?) 못했다. 마왕은 아직도 초상화로부터 눈을 떼지 않았고, 루피아는 흘깃 시선을 흘렸다. 숨이 막힐 것 같은 아름다움과, 그의 존재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한 위압감, 존재감. 지금도 처음처럼 마왕이 두렵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루피아는 입을 꾹 다물고 버티고 서 있었다. "이 초상화는… 선대 마왕이 남긴 '또 하나의 예외'이지. 그는 법칙을 많이 깼으니까." '또 하나의 예외'? 법칙을 깨다? 루피아는 알 수 없는 마왕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마왕은 루피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든 말든 상관없다는 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이 건물 전체가 그가 남긴 '예외'의 흔적이라 볼 수 있겠지. 내가 즉위한 20년 전부터 이 곳은 전혀 쓰이지도, 돌봐지지도 않았다. 이런 곳에, 왜 네가 있는 것인가?"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마왕이 초상화에서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려 묻자, 루피아는 최대한 마왕의 시선을 흘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음,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해 몸을 숨겨야해서요…." 그 '피치 못할 사정'이 자신을 가지고 인형놀이를 하려는 광기 어린 시녀들의 마수를 피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라는 건 죽어도 말 못했다. 마왕은 뭔가 미심쩍다는 듯한 눈빛을 던졌지만 루피아는 끝까지 그의 시선을 열심히 피했다. 하지만 의외로 마왕의 시선은 그다지 집요하지 않았다. 금방 시선을 돌려버린 마왕은 따라 오라고 말하며 문을 열었다. '왜 따라 오라는 거지? 서, 설마 여기에 허락도 없이 들어 왔다고 고문을 하려는 건가?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으으음~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안 따라가겠다고 할 처지도 아니고, 궁금하기도 하니까 따라가고 보자. 죽기보다 더하겠어?' 루피아는 마왕의 뒤를 쪼르르 쫓아갔다. * * * * * * * * * * * * * * * "우아아- 체르비에에엘-!! 이거 놔앗~ 흐갸갹, 싫어어어-" 미카엘은 귀를 울리는 에리엘의 비명에 솟으려는 혈관을 꾹 눌렀다. 벌써 30년이나 아침마다 들어 온 비명이지만 익숙해지기에는 먼 것 같았다. 아니, 애초에 익숙해지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빨리 벗어나고 싶을 뿐. 아아, 어떻게 세인(世人)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는 12대천사라는 것들이 전부 이 모양일까? 사람들이 이들의 실체를 모르는 게 차라리 다행이다 싶은 미카엘이었다. "쿄-쿄코코코! 반항하지 말아라. 그럼 더 아플 뿐이야~" 체르비엘은 에리엘의 허리에 올라타서 십자꺽기를 하고 있었다. 에리엘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눈물을 뽑아내고, 그 옆에서는 요시피아나가 '히히히'하고 경망스러운 웃음을 터뜨리고 있다. 체스를 두거나 책을 보는 개인파와 잡담파, 경기 구경꾼(?)들고 구성된 이 소란스러운 집단은, 다름아닌 12대천사들이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30년 전 잠시간의 휴식을 청한 이 열두 세라핌들은, 그들의 힘으로 천계에서 차단된 또 하나의 공간을 만들어 그 이름을 <세라핌의 쉼터>라 명명하고 그 안에서 휴식을 가졌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직 그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다. "크하하, 체르비엘! 동생을 그렇게 괴롭히면 되냐?" 자칭 '체르비엘 라이벌'이라고 하는 시즈니엘이 배를 잡고 킥킥대며 물었다. 체르비엘은 시즈니엘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날리더니 순식간에 에리엘에게서 시즈니엘에게로 몸을 날렸다. 시즈니엘도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드는 체르비엘에게로 주먹을 들고 일어섰다. 막 두 천족의 주먹이 부딪치려는 순간, 그들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물러나야 했다. 미카엘이 관망하던 자세에서 벗어나 몸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뒤로 먹구름이 줄래줄래 뻗어나올 것 같은 그의 분위기를 잘 감지한 두 천사는 알아서 자중했다. '미카엘이 화나면 정말 큰일난다.' 12명의 대천사 중 가장 정상적이며 온화하고 친절한 미카엘이라고 하더라도, 단점은 한 가지 가지고 있었다. 얌전한 사람들이 으례 다 그렇듯이, 그도 한 번 뚜껑이 열려 버리면 아주 열려 버리는 것이다. 예전에 크게 데인 적이 있는 두 천족은 미카엘의 기분을 적당히 맞춰주며 사는 게 이미 습관화 되어 있었다. "…그만 여기서 나가는 게 어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잖아." 이마에 솟은 혈관을 꾹꾹 누르던 미카엘은 심각하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은 나던 소음마저 멈춰 버렸다. 12대천사들은 미카엘의 얼굴을 바라 보았고, 미카엘은 그런 동료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이 곳에 들어왔었던 이유는 이제 해결되었잖아. 그 후로 거의 20년이 흘렀다. 이제 그만 나갈 때도 되지 않았어? 천계의 중심인 우리가 무려 30년이나 자리를 비웠어. 천계에도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지 알 수 없다는 거야. …마계도 그렇고." 미카엘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인 열 사람과 그를 빤히 쳐다보는 한 사람을 보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웠다. 그들에게 특별하게 맡겨진 의무는 다하고 있다 하나, 그들이 천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많이 감소했을 것이다. 옛날처럼 그들의 이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게 되었을 거라는 건 미카엘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천계의- 천족의 치명적인 약점, 정(靜)적이라는 성격이 그들의 힘이 미치지 않았던 천계를 어떻게 변화시켰을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 미카엘 말이 맞아." 카마엘이 미카엘의 말에 동조하고 나섰다. 사실, 다른 이들도 그런 점을 알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너무 오랜만에 맛보는 휴식의 달콤함에, 진절머리가 날 만큼 답답한 천계의 상황에 울화통이 치밀어 계속 차일피일 미루어 오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들 침묵하며 입을 꾹 다물자, 미카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오르가프 님의 전언이 나에게 내려 왔다. …마계에 사건이 하나 터진 모양이야." 미카엘의 그 말에도 12대천사들은 시큰둥했다. 하긴, 이제까지 쭉 너무 조용했으니 사건이 하나 터질만도 했다. 하지만 미카엘의 다음 말은 그들을 당황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근데… 그 일에 중간계가 개입해 있다고 하더군. 마계에서, 중간계의 인간들에게 귀족 여자들을 '상납'하라고 했다나 봐." "뭐…?!" 그제야 심각해진 동료들의 얼굴을 보며 미카엘은 고개를 젓고는 말을 이었다. "그러게 내가 나가자고 계속 그랬잖아? 그 일이 있다고 한 때가… 대충 지금으로부터 일주일 전쯤이지. 그러니까, 이제 좀 나가자고…." 체르비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에리엘과 하즈아리, 시즈니엘, 요시피아나, 카마엘도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들 '철없는 천족'이 아닌 '12대천사'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게 모두의 진짜 모습이다. 아니, 본모습은 오히려 '철없는' 쪽이 맞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의 뒷면에는 '12대천사'로서의 얼굴이 숨어있는 것이다. 이미 제1차, 제2차 천마전쟁을 겪은 그들이었다. 그들이 그 두 차례의 전쟁에서 보여 주었던 위용과 힘은, 결코 쉬운 게 아니었다. 미카엘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내일 천계에 나가기로 합의를 보았다. 지금 당장 나가도 되지만, 남은 휴식시간을 즐기고 싶은 마음은 그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나른하게 쏟아지는 환한 빛, 신록이 가득 찬 싱그러운 초록 풀잎에서 전해오는 향기를 맡으며 미카엘은 기지개를 켰다. 비록 내일부터는 다시 30년 전의 끔찍한(혹은 더할) 천계로 들어가게 되지만 지금만은 즐기고픈 그였다. 그는, 곧 마주하게 될 천계의 상황은 꿈에도 모른 채, 마지막 달콤한 휴식을 즐기려는 편안함의 미소만이 지어져 있었다. * * * * * * * * * * * * * * * "에휴우우…." 점차 짙은 빛깔을 띠어가는 회색의 하늘을 보며 에리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어제의 일로 복잡했고, 그것은 지금 이렇게 에리나가 궁상맞게 하늘을 보며 한숨을 내쉬게 하는 동기가 되어 주었다. 어제 일을 떠올린 에리나는 신음을 흘리며 머리카락에 손을 찔러 넣었다. '왜 몰랐을까? 그 마족이 뒤에서 따라 왔었다는 걸 알았다면 그렇게 바보같은 짓은 하지 않았을 텐데에에~ 으으윽, 에휴우우~' 그녀는 어제, 4일만에 방을 나와 이 저택을 돌아 보았었다. 그것도 상쾌함에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면서 말이다. 복도를 돌아 다니며 이것 저것을 많이 구경하던 에리나는, 이상한 문을 발견하게 되었다. 다른 방들은 다 똑같은 무늬, 똑같은 색깔이었는데 그 방문만 유독 다른 색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아주 오묘한(?) 색으로, 어떻게 하면 저런 색이 나올까 궁금할 정도로 아주아주… 미묘한 색이었다. 에리나는 당연히 그 문을 벌컥 열어 보았고, 이어 드러난 방 안의 풍경에 기겁을 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저, 저건… 저건 검이잖아!" 검이었다. 아니, 그냥 검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검의 천국이었던 것이다. 온갖 검들이 종류별로 다양하게 분류되어 각각의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에리나의 초록색 눈동자가 생기로 반짝였다. 롱 소드(Long Sword), 바스타드 소드(Bastard Sword), 세이버(Saber), 메인고쉬(Main gauche), 카타르(Katar), 브로드 소드(Broad Sword), 팔치온(Falchion), 레이피어(Rapier), 그레이트 소드(Great Sword), 숏 소드(Short Sword), 노말 소드(Normal Sword), 그라디우스(Gladius), 그랜드 샴서(Grand Shamsheer), 시미터(Schimitar), 프람베르그(Flamberge), 파타(Pata), 마노플(Manople),클레이모어(Claymore), 터크(Turk) 등등 없는 게 없을 정도였다. 어렸을 적부터 오빠의 허리에 걸려있던 검을 보며 부러워 했던 것을 떠올리며 에리나는 눈을 반짝였다. "…그 마족의 수집품인가? 대단해… 굉장해! 엄청나. 아버지의 컬렉션보다도 더 엄청나." 하지만 그녀의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체력만 조금씩 단련해 왔을 뿐 다른 아가씨들과 다를 바가 없는 그녀였다. 검을 다루는 법은 가르침받지 못했던 것이다. 에리나는 그래도 구경은 해도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방으로 한 걸음 들어갔다. 방 밖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검들이 널려 있었다. 그 매력에 에리나는 그만 포-옥 빠져 버리고 말았다. "……." 검에 몸이나 숨결이 닿지 않게 조심하면서 구경하던 에리나는, 갑자기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깜짝 놀라면서 뒤를 돌아 보았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주저앉아 검을 구경하는 그녀에게로 다가오는 유리아덴의 모습을 보며 말 그대로 굳어 버렸다. '어, 어떻게 저 마족이 여길? 아니아니, 나 지금 무슨 꼴을 보이고 있는 거야? 으윽, 내가 아까 이 검들을 보면서 침을 질-질 흘리던 꼴을 다 들켜 버렸다는 소리잖아! 이런 젠장….' 에리나는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유리아덴은 그녀가 있든 없든 신경 안 쓴다는 분위기였다. 그녀가 보고 있던 검을 그대로 응시하던 유리아덴은 마침내 손을 뻗어 그녀가 뚫어져라 쳐다 보았던 세이버(Saber)를 집어 들었다. "……?" 유리아덴은 그 세이버를 그녀에게 던졌다. 얼떨결에 세이버를 낚아 챈 에리나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유리아덴을 쳐다 보았고, 유리아덴은 그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 "가지고 싶으면 가져." "…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유리아덴을 쳐다보자, 에리나는 얼떨떨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되물었다. 유리아덴은 에리나가 세이버를 쥔 손을 쳐다 보다가 그녀의 손을 잡아 올려 말했다. "…이 손으로, 하고 싶은 걸 해. 나는 막지 않는다." "……!!" 에리나의 눈이 놀람으로 떨렸다. 유리아덴을 그런 그녀의 눈을 똑바로 올려다 보다가, 그녀의 손을 놓아 주었다. 에리나는 유리아덴이 방을 나서고도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를 인식할 수 있었다. 하룻밤이 지난 후인 지금에서도 그 진의(眞意)를 파악할 수 없는 그의 말을. 에리나의 시선이 탁자 위에 흰색 천에 싸인 채 곱게 놓여있는 세이버를 향했다. 어제, 그녀가 뚫어져라 쳐다보던 바로 그 세이버였다. 흰색의 검집에는 비상하는 드래곤이 섬세한 선으로 표현되어 있었고, 그 안의 날은 날카로운 우윳빛이었다. 시린 푸른빛을 더한 세이버의 날카로움과 섬세한 매력에 에리나는 푹 빠져 버렸고, 비록 지금은 다루지 못하지만 언젠가라도 꼭 다루게 되고 싶다는 생각을 충돌질하게 만들었다. 에리나는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내가 버티고 있는 건 내 자존심 때문이야. 이게 아니었더라면 내가 한심하다 생각하는 다른 부류와 똑같이 나는 무너지고 말 거야. …이렇게 버티고는 있지만, 가족들을- 잃은 슬픔은 결코 가벼운 게 아니니까… 아직도 눈물이 나려 해. 하지만… 난…….'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 하지만 아직은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에리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중얼거리며 무릎을 감싸 안고 머리를 묻었다. 회색빛 하늘에, 점차 짙은 어둠이 방울지고 있었다. --------------------------------------------------------------- 네에- 드디어 본판과 다른 부분이 나왔습니다아아ㅠㅠ 에리나 얘기가 있죠? 담편에는 세키라 얘기가 나와요! 베키 얘기도 그렇고... 루피아도 마왕을 따라 갔으니 나오겠죠. 그리고, 연회 날의 키스신은 아무래도 사라질 것 같네요. 전개상 많이 어색한 장면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없애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흐윽, 네르가 드디어 미쳐 나가봐요. 진도를 따라잡기 위해, 열심-히 쓰겠습니다!ㅠ0ㅠ; 멜은 donghee425@hanmail.net으로 보내 주시구요, 리플 마니마니 달아 주시구요~ 수정판이라 아무래도 조회수가...ㅠㅠ 그치만 수정판이 '낫다'고 해주시니 네르는 너무너무 기뻐요~^-^ 즐독하세요~^^ 제 목: [수정판] 공녀(貢女) : 제6화 [달 깊어가는 밤](2) #. 제6화 [달 깊어가는 밤] * * * * * * * * * * * * * * * "크크큭, 아하하하! 그랬단 말이지? 킥킥킥, 이거 참… 하하!" 아로데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눈가에 눈물까지 달 정도로 배를 잡고 웃었다. 웃음을 진정시키고도 어깨를 들썩거릴 정도였다. 세키라는 그와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앉아 그의 몸부림(?)에 찻잔이 쓰러지지 않도록 잘 잡고 있어야 했다. "너무 웃으시네요." 세키라가 계속 웃다가 진정하고, 웃다가 킥킥거리기를 반복하는 아로데를 보다 못해 말하자, 아로데는 웃느라 차마 대답은 못하고 손만 휘휘 내저었다. 세키라는 왜 지금 자신이 이런 일을 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다가 결국 포기해 버렸다. 참 이상한 일이다. '악마하고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니. 며칠 전이었다면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야.' 이 저택에 온 지도 어느새 5일이 흘렀다. 오늘이 이 마계에 온 지 딱 일주일이 되는 날이었던 것이다. 그 동안, 세키라는 아로데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 동안 있었던 일을 회상하며 세키라는 따듯한 찻잔을 꼭 쥐었다. 그의 저택에 온 지 딱 하루가 되는 날, 아로데는 그녀에게 들러 '같이 놀자'고 말했다. 순간 세키라는 얼어붙었지만 그는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지 상관없다는 태도로 무작정 그녀를 끌고 함께 놀았다(?). 그가 노는 방식은 참 다양했다. 참고로, 그가 노는 데에 이용된 장난감은 주로 이 저택에서 일하고 있는 시녀와 시종들이었다. 세키라는 단지 그의 옆에 붙어 있었던 것 뿐이었지만 그의 장난감이 된 시녀와 시종들에게 동정심을 금할 수가 없었다. 또, 그의 다양한 장난에 걸려 망가지는 시녀, 시종들을 보자니 작게나마 웃음마저 나왔던 것이다. 하긴, 누구라도 불에 다 타버린 머리카락과 거멓게 그을린 얼굴의 미남, 미녀를, 그리고 그 몰골로 차마 화도 내지 못하고 이만 빠득빠득 갈고 있는 모습을 보자면 웃음이 안 나올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상한 시약(試藥)을 만들어서 바닥에 뿌리면 그것을 밟은 시녀와 시종들은 개구리로 변해 버리기도 하고, 원숭이 꼬리가 달리기도 했다.(다행히 1회용이라 그녀가 실수로 밟아 개구리로 변하는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다) 뿐인가? 머리가 길게 자라나게 하는 저주를 걸어 저택의 모든 시종, 시녀들이 치렁치렁한 긴 머리를 자르지도 못한 채 불편하게 일해야 했던 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머리카락을 서로 몰래 묶어놓는다든지, 별 희한한 모양으로 올려 묶는다든지 하는 장난을 또 치고는 했다. 그런데도 시녀, 시종들은 이만 아득아득 갈 뿐 덤비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녀와 함께 차를 마시며 잡담을 나누는 중이었다. '루피아와 오빠들 얘기가 그렇게 웃긴가?' 방금 세키라는 루피아의 가출 사건과 그 오빠들 얘기를 해주던 참이었다. 루피아가 11살되는 날 가출을 시도했고, 결국 시장바닥에서 오빠들과 함께 놀다 발견되었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그 얘기를 들은 아로데는 저렇게 정신도 못 차리고 웃고 있는 것이다. "킥… 후우, 후아… 겨우 멈췄네." 쉼호흡을 하고 나서야 겨우 웃음을 멈춘 아로데는, 자신을 보며 희미한 웃음을 띠고 있는 세키라를 올려다 보았다. 그가 그렇게 난리를 친 후에야 겨우 희미한 미소나마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올려다 본다는 것을 눈치채자마자 그 웃음마저 감춰 버렸다. 아로데는 낮게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이제 가봐야겠어. 저녁에 연회때문에 마왕성에 가봐야 하니까… 오랜만에 네 친구들을 만날 수 있을 거다." 그 말에 그녀의 얼굴에는 단번에 화색이 돌았다. 아로데는 그 모습을 보며 물었다. "…아직도, 내가 두렵나?" 그녀의 몸이 일순간 굳었다. 세키라는 살짝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푹 수그렸다. 요즘들어 그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가신 것은 사실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그려져 있는 '마족'이라는 기준이나 정의에 도저히 끼워맞출 수 없는 아로데의 행동에 그녀도 많이 혼란스러웠다. 세키라는 입을 꾹 다물고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는 그의 시선을 알 수 있었다. 왠지 모르게 불편함과 어색함을 느낀 세키라는 가슴 한 구석이 뭔가 석연찮음을 느꼈다. 손바닥이 긴장감으로 인해 젖어 들었다. 한참이나 뒤에, 아로데는 그녀에게 등을 돌려 걸어 나가며 말했다. "…인간은… 약해. 아무리 강해도, 결국 약해." 아무리 강해도 결국은 약하다? 알 수 없는 말. 세키라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으려 했지만, 이내 손을 거두고 말았다. 잡을 수 없다. 그리고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아는지, 아로데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잠시 멈칫했다. "……그래서, 잡을 수 없어." 그가 나간 뒤, 세키라는 꼭 맞잡고 있던 두 손을 놓았다. 그리고 그가 한 말을 곱씹어 보았다. 인간이 약하다? 그래, 그건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보기에 인간은 너무나 하찮고 약한 존재이리라. 그리고 '아무리 강해도'라고 했다. 무엇이? 그래서 잡을 수 없다고? 세키라는 미간을 접었다. '모르겠어.' 5일 동안 그와 함께 보냈던 시간들을 떠올리면서, 세키라는 눈을 감았다. 밤, 혼자 있는 시간에는 아직도 가족을 떠올리며 눈물 짓지만, 그와 함께 있는 동안에는 가족들을 생각할 시간조차 없었다. 그래서 괜찮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두려웠다. 자신을 바라보는 붉은색 눈을, 도저히 겁내지 않을 수 없었다. 세키라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고 싶지 않다. 뭔지 모를, 알 수 없는 묘한 석연찮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 감정을 꾹꾹 누르고 부정하면서, 세키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 * * * * * * * * * * * * * * 베키는 사다리를 발코니에 턱- 걸치고서야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아아, 정말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베키는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는 발목을 향한 원망을 퍼부으며 욱신거리는 발목을 문질렀다. 그녀의 부주의 덕에 삔 발목이 욱신거려 사다리를 옮기는 과정에서 수도 없이 멈추고 주춤거리고 넘어질 뻔 했던 것이다. 이데카른 도련님의 방의 발코니 앞에서, 베키는 자신을 돌아 보았다. 우선, 그녀의 복장부터. 온통 검은색 일색인 그녀의 옷은, 정말 그녀의 발목때문에 주춤거리는 태도만 아니었다면 어쌔신으로 오해하기 딱 좋은 복장이었다. 검은 목티, 검은 바지를 입은 것으로도 모자라 검은 마스크까지 어디서 구했는지 입가에 쓰고 검은 두건까지 두른 그녀는 영락없는 '양상군자' 아니면 '어쌔신'이었다. 거기에 사다리를 타고 발코니에 올라가려 하다니, 만약 들키기라도 한다면 영락없이 쫓겨나고 말 터였다. 하긴, 들킨 뻔 한 위기가 몇 번 오기는 했었다. '페디론, 미안! 이번 일은 정말 들키면 곤란해.' 베키는 사다리를 옮겨오는 도중에 만난 마구간 지기 페디론을 떠올리며 그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 그녀가 옮기고 있는 사다리로 옆구리를 얻어맞고, 그것도 모자라 나무 지팡이로 머리까지 정통으로 얻어 맞았으니, 과연 살아나 있을까 의문일 정도였다. 다행이 숨은 붙어 있다는 것을 확인한 베키는 친절하게도 그의 얼굴에 말똥을 고이 덮어 주었다. 말똥을 치우려다 기절한 것으로 보이기 위함이었으나, 그 일은 그나마 남아있던 페디론의 정신을 멀리멀리 보내 버리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어쨌든, 베키는 발코니에 걸쳐진 사다리를 한 발 한 벌 조심스럽게 타고 올라갔다. 발을 옮길 때마다 붕대로 압박해 놓은 발목이 욱씬거려 미칠 지경이었지만, 참고 또 참았다. 이 일에 걸린 중요성이 얼마나 큰데, 겨우 발목의 부상 따위로 포기할 수는 아니, 실패할 수는 없다. '으- 응차! 에구야, 겨우 올라왔네. 헥헥!' 베키는 발코니에 팔을 얹고 숨을 몰아 쉬었다. 머리가 아찔하다… 베키는 다시 한 번 힘을 내어 발코니에 발을 얹었다. 그리고 발코니 안쪽으로 몸을 떨어뜨린 그녀는, 그녀가 떨어질 때 난 소리는 생각하지도 않고 땅에 부딪쳐 욱신거리는 발목과 허리를 감싸고 신음을 흘려야 했다. 크- 이쪽 허리에는 멍이 들었었는데! 아구, 내 발목! 베키는 겨우겨우 몸을 일으켰다. 발코니로 연결된 이데카른 도련님의 잠긴 창문으로 다가간 베키는, 쉼호흡으로 호흡을 가다듬으며 창문을 두드렸다. "…주무시나?" 커튼으로 가려진 방 안의 정경을 보려던 베키는 깜짝 놀라야 했다. 이데카른의 싸늘한 푸른색 눈동자가 바로 앞에 있었던 것이다! 잠시 뒤, 베키는 이데카른의 방 안에 들어와 있었다. 바닥에 데굴데굴 굴러 다니는 술병, 잔뜩 망가진 가구나 도자기들, 그리고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이데카른의 모습을 보자니 그 동안 그가 얼마나 망가졌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게 했다. "루피아의 전속시녀가 여긴 왠일이지? 게다가 그런 차림으로 말야." 이데카른이 베키에게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이데카른에게 베키는 꽤나 낯이 익은 시녀였다. 이제껏 쭉 루피아의 옆에서 시중을 들어왔던 시녀이기도 했고, 루피아도 몇 번이나 '베키'의 이야기를 해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시녀가 정말 '수상하기 짝이 없는' 복장으로 그의 발코니를 통해 들어왔다. 이상하게 생각될 만한 일이었던 것이다. 갈색 머리카락에 주근깨가 앉아있는 피부, 특징적인 것이라면 순박하게 빛나는 갈색의 커다란 눈정도였다. 검은 마스크와 두건을 벗어버린 그녀는 잔뜩 긴장한 채 그를 보고 있었다. "루, 루피아 아가씨에 관련된 일이에요." "……!" 벌떡! 침착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던 이데카른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의자에 앉아 그녀를 여유롭게 바라보던 태도는 버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이데카른의 싸늘한 푸른눈에 불꽃이 튀었다. 베키는 깜짝 놀라야 했지만, 이데카른은 그딴 것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게 무슨…? 자, 자세하게 말해 봐!" "우, 우선 진정하세요! 그래야 말씀드리죠!" 베키의 어깨를 잡고 흔드는 이데카른에게 베키가 말하자, 이데카른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그녀의 어깨를 놓아 주었다. 베키는 안 그래도 멍이 든(온몸에 멍이 들었다?) 어깨를 주물거리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차가운 사람이 이렇게까지 흥분하다니. 확실히 그녀라도 그러겠지만 이 형제의 누이 사랑은 아무도 말릴 수 없다는 걸 그녀는 다시 한 번 절감했다. "제가 다른 도련님들이 아닌 둘째 도련님을 찾아온 이유는, 공작각하 내외께 아무 말을 하지 않을 것 같은 분이시기 때문이에요. 이 일은… 그러니까, 공작각하께 말씀드리지 않는 게 나을 것 같거든요." 베키의 말에 이데카른의 눈이 빛났다. 아마도 수상하다는 뜻이리라. 하지만 베키는 과감하게 무시했다. "제가 얼마 전, 에스베크 저택에 심부름을 다녀 온 일이 있습니다. 그 때, 저는 우연히 에스베크 공작 각하와 자제분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지요. 그 때, 에스베크 공자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님을 되찾아 올 수 있는 방법'이라구요. 이 정도면 아시겠죠?" 이데카른의 눈은 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져서 떨리고 있었다. 베키는 그 뒤 숨을 길게 들이마쉰 뒤 말을 이었다. "에스베크 가문의 공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저를 연락원으로 하여, 함께 연락을 주고 받자고요. 함께 에스베크 공작각하를 설득해 보자는 말씀인 것 같았어요. 이데카른 도련님, 나머지 두 도련님께 이 말을 전해 드리고, 절대 공작각하께는 말씀드리지 마세요.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공작각하께서도 그 방법을 알지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아." 비틀, 이데카른의 몸이 휘청거렸다. 손으로 눈가에 가져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술을 꾹 깨문 이데카른은, 베키가 걱정스럽게 그에게 손을 가져다 대자 그제야 눈가에서 손을 떼고 몸을 똑바로 세웠다. "…도련님?" 이데카른은 뭔가 감정이 벅찬 듯한 한숨을 길게 내쉰 다음, 눈가로 손을 가져가 비볐다. 베키는 자리에서 서둘러 일어나 이데카른에게 침대의 이불을 가져가 덮어 주었다. 이 차가운 철인이 완전하게 무너진 모습이었다. 베키는 그의 방을 돌아 다니며 우선 술병들을 치우고 창문을 열어 공기를 바꿨다. 그 뒤 이데카른을 살펴보니, 이데카른은 완전하게 잠이 들어 있었다. 베키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살며시 웃음을 지었다. '…이 모습은… 그냥 못본 걸로 해 드려야지.' 베키는, 그의 눈가에 묻어있던 물기는 눈감아 주기로 했다. * * * * * * * * * * * * * * * 마왕을 따라간 곳은, 같은 건물 안에서 유일하게 잘 치워진 방이었다. 낡긴 마찬가지였지만 그가 자주 사용한 듯 그나마 먼지나 거미줄은 없었다. 마왕은 익숙한 걸음걸이로 방 안을 가로질러 소파에 누웠다. 루피아가 뻘쭘하게 서 있자, 마왕은 그녀를 보며 앉으라는 듯이 턱짓을 했다. '뭐하라는 거야, 이 마왕이? 나더러 다리라도 주무르라는 말인가?' 그도 그럴것이, 그만 쫓아왔던 루피아로서는 무엇을 하라는 말도 없이 무작정 누워 버리는 마왕을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마왕은 그런 그녀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소파에 편안하게 누워 눈을 감을 뿐이었다. 루피아는 마왕이 턱짓한 대로(꼭 주인의 말에 따르는 강아지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마왕의 옆에 마련된 소파에 앉았다. 둘이 온 방은 아까 온 방에서 그다지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하지만 처음 본 느낌대로 훨씬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고 깨끗했다. 아이보리색 커튼이 창문을 가리고 있었고(분명 창밖에는 죽은 덩쿨이 덮고 있을 게 뻔했다), 방 안 곳곳에는 야명주 몇 개와 푸른색 촛불이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마왕이 누워있는 큰 소파와 루피아가 앉아있는 소파, 그리고 낮은 테이블이 있었으며, 찬장에는 술로 보이는 액체가 담겨진 병이 진열되어 있었다. 방 구경을 끝낸 루피아는 마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녀를 이 곳으로 데리고 온 마왕은, 지금 그녀에게는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소파에 편안하게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확실히- 굉장히 아름답다. 부드럽게 흘러 내리는 검은 흑발이 소파 위에 흩어져 있었고, 하얀 피부는 여인네의 그것보다 훨씬 하얗고 투명해 보였다. 그 붉은 눈동자에 그림자를 만들 만큼 긴 속눈썹, 쭉 뻗은 검은 눈썹, 뚜렷한 이목구비와 날카로운 콧날까지. 그녀의 오빠들도 결코 빠지지 않는 외모의 소유자라고 자부하는 루피아였지만 마왕과 비교하라고 한다면 마왕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루피아는 방 안에 흐르는 어색한 공기가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어색함을 이기지 못한 루피아는 결국 먼저 입을 열고야 말았다. "왜 절 여기 데리고 오셨어요?" 아아, 얘깃거리가 이렇게나 없었단 말인가? 루피아는 입을 연 것을 후회했지만 이미 뱉은 말을 주워담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궁금하기도 했다. 그것보다- 내가 이 마족에게 먼저 말을 걸다니. 마왕은 눈을 뜨지도 않고 말했다. "몸을 숨겨야 한다면서? 그 장소를 제공해 준 것 뿐이다." "엑? 그, 그것 때문이었어요?" 고작 그 말 때문에 따라 오라고 했었던 거야? "그렇다면, 내가 왜 따라 오라고 했었겠나." 그러고보니 그로서는 그녀를 데리고 올 필요가 전혀 없었다. 루피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마왕은 소파에서 편안하게 '쉬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 곳이 그의 쉼터인가? 모든 마족을 지배하는 마왕의 쉼터라기에는 너무 초라한 곳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 마왕은 이 곳에서 정말 편해 보이는 듯 했다. 루피아는 몸에 힘을 풀었다. 소파에서 몸을 뒤로 젖힌 그녀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왠지- 몸의 긴장이 풀리는 듯한 느낌이다. 이 곳에 온 이래, 그녀는 그녀도 모르게 몸에 너무 힘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유 중에 이 옆에서 쉬고 있는 마왕의 존재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나, 긴장을 푼 지금은 꼭 따듯한 물 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마왕은 오늘 하루 종일 이 곳에 이렇게 있었던 걸까? 왜 바뀐 마왕성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지? 내 마음대로 일을 벌여 놨으니 뭐라고 한 마디 할 법도 한데… 에이, 몰라. 벌써 벌여놓은 일인데 어쩌겠어. 내가 잘못을 한 것도 아니고….' 그녀는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 낡은 마왕성을 바꿔놓은 게 절대 잘못은 아니다. 분명 뭐라고 한 마디 하긴 하겠지만 그다지 걱정하지는 않는 루피아였다. 그것보다, 꼭 온수에 잠겨있는 것 같은 나른한 느낌에 그녀는 더 신경을 쓰고 싶었다. 아니, 쉬고 싶었다고 해야 할까? 이 마계에 온 이후로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기에 그녀는 이 기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오늘 연회니까… 이제 그만 가 봐야 하는데…….' 하지만 벌써 그녀는 무의식의 세계로 잠겨 들어가고 있었다. --------------------------------------------------------------- 우우.. 정말 '매일 연재'로군요^^ 꼬랑지도 점점 짧아지고.. 결국 잠이 든 루피아 양^^ 둘 얘기는 조금 바꿀 예정입니다. 세키라 양, 에리나 양 얘기도 자세하게 쓸 예정이고요. 멜은 donghee425@hanmail.net로 보내 주시구요, 리플 마니요^^ 그럼 즐독하세요! 제 목: [수정판] 공녀(貢女) : 제6화 [달 깊어가는 밤](3) #. 제6화 [달 깊어가는 밤] * * * * * * * * * * * * * * * 메를리나는 발을 동동 굴렸다. 대체 어디로 숨어서 안 나오시는 거야! 숨어서 그냥 잠드신 거 아니야? 어떡해! 이제 곧 연회 시간인데에-! 하지만 그녀의 속타는 마음과는 달리 시간은 재깍재깍 잘만 가고 있었고, 루피아는 영 나타나 주지 않았다. 메를리나는 사라진 루피아가 돌아온다 하더라도 이제 시작 시간까지 10분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루피아를 예쁘고 화려하게 꾸며 줄 자신은 없었다. 그녀는 마지막 보았던 루피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분명 좋은 차림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게다가 시녀들과 한판 쥐잡기 작전(?)을 같이 했으니 그 꼴이 상상이 가는 메를리나였다. '어떡해애! 이제 곧 연회인데! 어디 가서 안 나타나시는 거야아-!' 그리고 그녀와 마찬가지로 발을 구르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찾아라! 마왕성 구석구석을 뒤져서 꼭 찾아내야 한다! 대체 어디로 사라지셔서는 안 나오시는 거람? 어휴!" 바로 아크로였다. 아크로와 메를리나, 두 사람 모두 사라진 둘 때문에 속이 타 죽을 지경이었던 것이다. 쌍으로 사라지시다니, 설마 이 두 사람의 애를 태우기 위해 둘이 짠 것은 아닌지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비록 아크로는 얼마 안 되긴 했지만 마왕의 담당 시녀였다. 마왕이 시녀를 필요로 하지 않고 간단한 일들만 시종을 통해 처리하는 바람에 그녀의 '마왕님 담당 시녀'자리는 유명무실한 자리가 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연회 준비는 완벽하게 해 놓았는데 정작 있어야 할 두 사람이 없다니! 아크로는 입술을 깨물며 초조하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녀는 이 마왕성에서 '시녀장'으로서는 오래 일해 왔지만 '마왕 담당 시녀'로서는 그다지 경력이 오래되지 않았다. 그것은 현 마왕이 태어난 후부터 쭉 돌봐왔던 '마녀'가 있었기 때문인데, 마왕이 직위에 오르자마자 그 마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물러났다. 마녀의 결정에 아크로는 의문을 금할 수 없었다. 이제껏 쭉 키워왔던 사람이 마계 최고의 권력자가 되지 않았는가? 조금쯤은 편한 생활을 기대할 수 있을 텐데, 왜 본격적으로 편할 수 있는 시기에 물러났던 것일까? 어쨌건, 마녀가 사라진 뒤 아크로, 그녀가 마왕 담당시녀가 되었는데, 마왕은 그녀를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 뒤로도 단지 시녀장으로서의 자리만 확실하게 굳혔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마왕에게 특별한 총애(?)를 원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도 시녀장의 확고한 자리로도 충분해하고 만족해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그녀에게 맡겨진 임무를 게을리 하겠다는 뜻도 아니었다. 아크로는 자신의 일을 완벽하게 해내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마왕의 의복 등을 완벽하게 갖춰 드리는 건 그녀의 일이란 얘기다. 아크로는 눈을 꼭 감았다. 벌써 10분이 다 지나고, 연회를 열어야 할 때가 다 된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연회를 시작해. 군주께선, 늦더라도 반드시 오실 거다." 아크로가 이렇게 입술을 깨물며 연회를 시작하라 할 때, 그녀들의 속을 태운 두 사람은 참으로 유유자적하기 그지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마왕은 의자에서 잠이 든 여자를 바라보며 살짝 미간을 접었다. 참 마음 편하게 자는군. 앞에서 이렇게 편안해 보일 수 있다니, 참 대단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앞에서 편하게 자는 여자(아니, 마족과 인간을 모두)는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 앞에서 뻣뻣하게 어는 사람들은 많이 보아 왔지만, 이렇게까지 편하게 잠까지 자는 사람은 처음 봤다. 거기다, 잠버릇도 상-당히 안 좋아 보였다. 소파에 펼쳐 놓았던 천자락은 이미 그녀의 몸에 둘둘 둘러져 있었고, 눈은 얌전하게 감고 있었지만 몸은 이미 한쪽으로 기운 지 오래였다. 이대로 가다가는 아무래도 바닥으로 추락하는 비운의 사태가 일어날 듯 싶었다. 하지만 마왕은 그녀를 깨우지 않았다. 사실, 시도는 해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흔들어도 일어나지 않는 루피아 덕분에 그는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정말이지 어떤 의미로든 참 대단한 여자였다. 윤기를 머금고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과, 지금은 감고 있는- 가장 인상적인 보라색 눈동자. 그와 마주한 채 긴장한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꼭 쥐었던 주먹 등, 기억에 남는 게 많은 인간이었다. 창문에 다리를 걸치고 뛰어 내리지를 않나, 먼지 투성이가 된 채 초상화 앞에서 중얼중얼거리지를 않나. 그것도 모자라 그의 바로 옆에서 편하게 잠을 자기도 한다(이게 제일 인상적이다). 기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 오늘 연회가 있다고 하던가?' 그는 겨우 그 사실을 떠올렸다. 뭐, 그런 게 열리든 말든 그는 신경쓰지 않았지만, 그의 세 부하는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이 여자를 데리고 연회에 가긴 해야 한다는 말이다. 마왕은 잠자고 있는 루피아를 안아 들었다. 우응, 하면서 루피아가 꼼지락거렸지만 마왕은 당연히 무시했다. 한동안 꼼지락거리며 벗어나려 하던 루피아는, 결국 포기했는지 이제는 그의 품 안으로 더 파고들기 시작했다. 마왕은 그런 그녀를 다시 인상을 찌푸리며 봐야 했지만, 루피아는 꿈 속을 여행 중이니 그걸 알 턱이 없다. '…시녀에게 데려다 주면 되겠지.' 한편, 루피아는 정말 편하게 수면에 취해 있었다. 이제껏 편하게 자지 못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리고 포근하게 따뜻한 것이 가까이 오자 처음에는 낯설어 경계했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파고 들었던 것이다. 그녀는 정말 편안했다. 그래서, "웅… 오빠아……." 그녀는 잠꼬대까지 웅얼댔던 것이다. * * * * * * * * * * * * * * * 연회가 열리는 중앙홀로 걸어가는 동안, 세키라와 에리나는 한 가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녀들이 5일 전에 본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새롭게 꾸며진 마왕성을 보며, 이런 일을 한 장본인이 다름아닌 '루피아'라는 것. 세키라와 에리나는 절규(?)했다. '그렇게 얌전히 있길 바랐건만-!!' 분명히 예전의 그 음침하고 낡은 모습보다는 훨씬 나은 모습이기는 했다. 어디선가 물방울이 똑- 똑- 떨어질 것 같은 검고 추운 복도나, 안 그래도 음침한데 벽 곳곳에 걸려있는 몬스터의 박제는 그녀들도 뜯어놓고 싶을 만큼 끔찍했다. 또, 눈만 돌리면 보이는 찬바람 들어오는 깨진 창문은 어떠한가! 아무리 방이 고급스럽고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고 하더라도 복도나 외관은 '유령의 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에 비해, 지금의 마왕성은 아주 판이하게 달라진 모습이었다. 그래도 '마왕성'이라는 느낌을 주도록 주로 사용된 색은 검은색이었으나 그 검은색이 주는 느낌이 아주 달랐다. 예전의 것이 좀 칙칙한 색이었다면 지금은 아주 산뜻한 색이었던 것이다. 검은색의 폭신한 카펫이 복도마다 깔려 있고, 복도의 벽에는 괴상한 몬스터 박제 대신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반투명천을 덮은 마법등(魔法燈)이 은은한 빛을 내고 있었다. 창문의 유리는 깨지기는커녕 반딱반딱하게 닦여 있었고, 보랏빛과 푸른빛의 두겹 커튼이 내려져 있었다. 한마디로, 음침하고 낡은 느낌에서 신비로운 분위기로 탈바꿈했다는 소리다. 에리나와 세키라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 아이가 활동적인 성격은 마계에 와서도 전혀 변하지 않은 모양이지. 하긴, 루피아가 그녀들처럼 찔찔 짜고 있는 모습은, 전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어렸을 때부터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누구보다 침착하고 현명하게 대처했다. 넘어져서 다쳐도, 금방 일어나 웃어 보이며 '괜찮다'고 말했다. "역시, 루피아가 가만히 있어주길 원했던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나 봐." 에리나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말하자, 세키라도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옆에서 달라진 마왕성을 구경하던 아로데가 피식 웃었다. "아아, 노느라 몇 일동안 들르지 못했더니 확 바뀌어 버렸네. 흠- 괜찮은데? 이 마왕성은 이제껏 아무도 바꿀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아마- 초대 마왕부터 바뀌지 않은 유일한 것이라지? 훗, 그 오랜 세월동안 잘도 버텼어." 로이드윈이 받아 쳤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그의 옆에는 분홍색 머리카락을 동글동글하게 말아 양옆으로 고정해 묶은 귀여운 여인이 입을 꾹 다물고 서 있었다. 표정이 보이지 않게 고개를 푹 숙인 그녀는 예전 '제비뽑기'에서 로이드윈에게 배정된 '아유니'였다. "뭐-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으니 벌인 일이겠지." 쿡쿡 웃으며 로이드윈이 다시 말했다. 다시 걸음을 옮기려던 그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뭔가 못 볼 것이라도 본 듯한 표정이었다. 그의 표정에 의아함을 느낀 아로데가 왜 그래, 라고 물으며 그가 뚫어져라 응시하는 곳에 시선을 주었고, 곧 그도 굳어 버렸다. 차례로 세키라, 에리나, 심지어는 유리아덴마저 굳어갔다. 아유니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구, 군주님……?" "루피아!" 세상에! 저걸 믿어야 해, 말아야 해? 마왕이 루피아를 두 팔에 안고 걸어오고 있는 모습을 그들이 믿어야 하나? 비록 마왕의 표정이 굳어 있고, 루피아는 세상 모르고 잠에 빠져든 모습이었지만 그들은 믿을 수가 없었다. 마왕은 그들을 발견하고는 안고 있던 루피아를 로이드윈에게 넘겨 주며 말했다. 로이드윈은 엉겁결에 루피아를 받아 안아 들었다. "…이 여자가 깨어나면- 아니, 깨워서 연회로 데리고 나와라." "네?" "…그럼 나중에 보지." 마왕은 그렇게 말하고는 냉정하게 돌아서 걸어가 버렸다. 에리나와 세키라는 로이드윈의 품에 안겨있는 루피아를 살펴 보고는 단순히 잠든 것 뿐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마왕의 품에서 잠이 들다니… 루피아는 정말 못말려… 윽.' '이렇게 세상 모르고 자다니…….' 루피아의 안전(?)을 확인하자 세키라와 에리나는 그 다음 생각으로 긴장했다. 방금 마왕의 그 표정! 무표정이었지만 분명히 굳어 있었다. 화가 난 것일까? 그리고 또한, 마왕이 화를 낼 이유로는 유일하게- 바뀐 마왕성! 세상 모르고 잠든 루피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세키라와 에리나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서, 설마 루피아 얘! "루피아…… 설마, 설마. 허락도 없이 무작정 마왕성에 손을 댔었던 거야?!" "…역시 대단한 인간이다. 그런 간 큰 짓을… 어쨌든, 이 여자 담당 시녀한테 빨리 맡기는 게 좋겠군. 늦더라도 준비시켜서 보내라고 하지." 로이드윈이 경악하며 루피아를 바라보는 두 여자를 제지했다. 로이드윈은 지나가는 시녀(?)에게 루피아에게 내보였고, 시녀의 눈이 루피아에게 닿았다. "아악! 루피아 님! 사라지셨다더니~ 이런! 지금 메를리나가 폭발하기 직전이란 말… 이럴 때가 아니지! 실례하겠습니다, 로이드윈 님! 아로데 님, 유리아덴 님. 최대한 빨리……." "그려, 얼른 가." 시녀의 호들갑에 아로데는 그녀를 번쩍 안아들고 사라지는(시녀도 마족이니까 기본적인 근력이 강하다) 그녀를 그냥 놓아 주었다. 아마 사라지기 전에 꽤 많은 일(?)이 있었던 듯 싶은 모습이었다. 세키라와 에리나는 5일만에 감격의 재회를 맛볼 기회도 없이 허망하게 보내 버리게 되자, 달려가는 시녀의 뒷모습만 바라 볼 뿐이었다. * * * * * * * * * * * * * * * 달콤한 꿈 속을 유영하던 루피아는, 순간 눈을 번쩍 떴다. 꼭 몸 위에 벌레가 수십 마리 무리지어 움직이고 있는 듯한 끔찍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눈을 뜨자 마자 보이는 광경에 비명과 절규를 질러야 했다. "어, 어째서 메를리나가 여기에…?" 분명히 마왕 옆에서… 헉?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은 루피아의 안색에서 점차 핏기가 빠져 나갔다. 거기서 잠이 들다니! 아무리 요즘 들어 잠을 설쳤다고 해도 그렇지, 잠이 들 장소가 따로 있는 것이다. 하필이면 그의 옆에서! 자신이 분명 얌전하게 자지는 않았을 거라는 것을 떠올린 그녀의 안색은 다시 창백해졌다. 심각한 자기 혐오에 빠질 뻔한 그녀를 구해준 것은 의외로 메를리나였다. "정신 차리세요, 루피아 님! 쳇, 시간이 없다구요… 아아, 대체 어디에 숨으셨던 거예요? 자, 팔 드세요!" 쏘옥- 드레스의 소매 부분이 그녀의 팔에 끼워졌다. 그녀가 잠든 사이, 그녀의 옷을 홰까닥 벗기고 다시 입힌 그녀들은 한쪽은 그녀의 머리를, 한쪽은 그녀의 입술에 뭔가를 바르고 있었다. 다행히 분칠을 한 것은 아닌 듯 싶었다. 상황을 깨달은 루피아가 발버둥을 치려고 했지만 그 전에 메를리나가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움직이기만 해 봐요! 군주께서 루피아 님을 얼른 데려 오라고 하셨단 말이예요… 대체 무슨 짓을 하셨길래 그래요? 화가 나신 것 같았다고 했어요!" 로이드윈에게 전언을 받은 그 시녀가 읊은 것을 그대로 읊어주는 메를리나였다. 루피아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심정이었지만 메를리나는 달랐다. 이 못말리는 인간 여자가 대체 무슨 일을 저질러 놓았는지 골치가 아팠던 것이다. 이제껏 그녀가 알던 '인간'에 대한 상식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루피아에게 메를리나는 호감을 느꼈다. 사실 재수없게 구는 여성체 마족보다 훨씬 나은 모습이기도 했다. 비록 서열 500위 안에 여성체는 들어있지 못했지만, 그 이후의 여성체라면 많기에 시녀들은 그녀들에게 은근한 무시와(당연스럽게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벨이 꼬이긴 한다) 경멸을 얻고 있었다. 마왕성에서 일한다는 지위적인 것이 있기는 했기에 큰 일이 있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그런 루피아가 마왕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지 모르는데, 메를리나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태연하기만 하다니. 으득! "제가 루피아 님 덕분에 얼마나 속을 태웠는지 알기나 하세요? 내가 죽지! 자, 다 됐어요! 거울이고 뭐고 볼 시간 없으니까 달려욧!" 메를리나는 다 완성된(?) 루피아의 손을 잡아끌고 무작정 달렸다. 루피아는 메를리나가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도 모른 채 이마에 퀘스천 마크를 그려놓고 달려야 했다. "우, 우와아아아아~ 천천히 좀 달려어, 메를리나앗!" 잠시 뒤, 연회장에 들어선 루피아는 자신을 응시하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늦게 홀에 들어선 그녀에게 모이는 마족과 공녀들의 시선도, 걱정스레 자신을 쳐다보는 세키라, 에리나의 시선도 아니었다. 루피아의 시선도 바로 위로 향했다. 맨 처음 보았던 그 때처럼, 그는 여유롭게 그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가장 위에서, 아래에 서 있는 그녀를 내려다 보는 눈으로. '분노….' 머릿속에 새하얗게 새겨지는 단어. 화를 낼 거라고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지금 상황은 더하다. 몸에서 힘이 한꺼번에 빠져 나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조금 전, 바로 몇 시간 전에는 그렇게나 편하게 느껴졌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달랐다. 마왕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소름끼치도록 아름다운, 위험스런 미소였다. 무섭도록 차갑게 절제된 느낌, 그에게서 베어 나오는 느낌은 바로 그 것이었다. 날카로운 예기(銳氣)를 담고 단련된 얼음빛 칼날같은 느낌. 루피아는 이를 꽉 앙다물었다. 이 낯선 땅에 와서 늘 느끼고 있었지만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바로 그 감정이다. 다른 공녀들 역시 마찬가지인 듯 했다. 차마 움직이지도 못하고 몸을 덜덜 떨며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만 주르르 흘리고 있었다. 마왕은 아무런 움직임도,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영향력은 이미 홀 안에 가득 퍼져 있었다. 마족들 역시, 공녀들처럼 흉한 꼴은 아니었지만 얼굴이 창백해진 채 못박힌 듯 멈춰 서 있었다. '막아야 한다. 아무리 군주께서 화가 나셨더라도, 클리오라께서 명하신 일이야. 말려 드려야 해… 하지만.' 아로데는 주먹을 꽉 쥐었다. 어쩌면, 20년 전 일이 이 곳에서 되풀이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아니, 그 일과는 아예 일의 비중이 다르기는 하지만, 결국은 똑같다. 그는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가, 그의 앞을 가로막으려 달려 나가는 걸 그는 막지 못했다. 그는 죽일 필요가 없었다는 걸 군주에게 말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막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루피아는 가만히 단아한 마왕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그는 아직도 그 위험스런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그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긴장감, 모든 신경이 곤두서서 그를 올려다 보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두려움보다, '질 수 없다'는 마음이 더 강했다. 공포라는 감정따위, 인정하기 싫었다. 마왕의 단아한 얼굴은, 몇 시간 전에 보았던 얼굴과 똑같았지만 주는 느낌은 달랐다. 몇 시간 전에는 절로 잠이 들 정도로 편안했다면, 이번에는 공포다. 온몸을 쿡쿡 찌르는 것 같은 느낌이 전해져 왔다. 그의 시선 앞에, 마치 속이 드러내는 것 같아 기분이 불편했다. "그래, 알고 있나? 네가 한 일이 어떤 것인지." "…무, 무엇이든 해도 된다고… 허락하셨습니다." 풍성하고 낮은 보이스, 태연하려 했지만 떨려오는 목소리를 막을 수는 없었다. 마왕은 그런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눈썹을 휘었다. 루피아는 입술을 꾹 깨물고 자수정빛 눈동자를 그를 똑바로 올려다 보았다. 그래, 될 대로 되라! 분명 그쪽이 허락한 거야! 한편, 마왕은 놀라고 있었다. 그는 이 인간에게는 계속 놀라는 것 같았다. 그 앞에서 이렇게 태연하고 당당했던 존재가 그의 세 수하 말고 또 있었나? 루피아를 안고 마왕성으로 들어서던 마왕은 바뀐 마왕성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가 안고 있는 인간에게로 자연히 시선이 돌아갔다. 점점 불쾌해 졌다. 그의 공간을, 그가 이제껏 시간을 보내 왔던 그의 '성'을, 이 인간이 손을 대고 고쳤던 것이다. 당장 던져 버릴까도 했었지만 마왕은 로이드윈에게 넘기는 것으로 끝을 보았다. 나중에, 나중에 잠이 깨고 난 뒤에 화를 내도 늦지 않았다. 잠시 뒤,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고- 그와 시선을 마주치고 바라보았던 것이다. 비록 손이 떨리고 있긴 하지만 입술을 꾹 깨물고 그를 직시했다. 피식,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마왕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멈춰져 버린 음악, 집중되어 있는 시선을 느끼고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연회는 계속 진행하도록. 그리고 넌… 따라와라." --------------------------------------------------------------- 어째... 이 부분 어색한 건 영 달라지지 않는 듯 합니다=.=;; 으흑- 새벽이네요ㅠㅠ 이로써 매일연재 실패인가요? 지금이 새벽 1:22분인데, 그냥 봐 주세요~ㅡ0ㅜ 제 목: [수정판] 공녀(貢女) : 제7화 [루피아가 받은 벌](1) #. 제7화 [루피아가 받은 벌] * * * * * * * * * * * * * * * 베키가 그 위험한 방문(?)을 끝낸 지도 벌써 3일이 흘렀다. 그녀가 들리고 난 뒤 이데카른은 하루 동안 방 안에서 꼼짝 않고 내리 잠만 자다가, 이틀째 되는 날에는 드디어 식사를 제대로 다 했고, 삼일째 되는 날에는 말끔한 모습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그리고, 이데카른은 카에리드와 트로에를 데리고 베키 앞에 나타났다. "서두르셔야 할 것 같은데요. 아마 오후 중으로 에스베크 저택에서 이쪽으로 뭔가 물건을 보내 달라고 연락이 올 것 같으니까요. 세 도련님께서 모습을 드러내셨다는 얘기는 이미 소문으로 퍼졌을 테니까, 그 꼬… 아니, 에스베크 공자께서 곧 뭔가 사고를 치시겠지요." 그녀의 말에 셋은 고개를 끄덕였다. 3일 전에 소식을 전해듣고 푹 쉰 이데카른은 깔끔하고 혈색도 그런대로 좋았지만, 트로에와 카에리드의 안색은 영 아니올시다였다. 베키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아, 이 모습을 루피아 아가씨께서 보셨다면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 여동생 앞에서 곧잘 망가지곤 했던 세 남자이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 수도의 영원한 우상이자 스타, 매력적인 세 형제가 이렇게 변하다니. 뭐- 베키 역시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저 상태로 뛰쳐 나가고 싶어 안달인 두 사람을 그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베키는 눈물이 그렁그렁해 진 두 사람에게 말했다. "우선 씻고, 식사부터 챙겨 드세요. 아마 그 때쯤이면 에스베크 저택에서 연락이 올 겁니다. 그 때 이데카른 도련님께서 절 추천해 주시고… 기왕이면 같이 가 주시면 더 좋지요. 한 번은 만나야 할 것 아니예요?" 그녀의 말에 두 사람의 눈이 반짝이자, 베키는 단호하게 톡 쏘아 붙였다. "두 사람은 안 돼요! 그런 망가진 몰골을 해 가지고 어딜 간단 말이예요?" 베키가 서슴없이 '망가졌다'는 표현을 쓸 정도로, 두 사람의 모습은 형편없었다. 열흘 동안 자란 수염이 얼굴을 덮고 있었고, 세수고 뭐고 씻지를 않아 때가 꼬질꼬질했고, 머리는 산발이었고, 제대로 먹지 않고 술만 진탕으로 마신 덕분에 얼굴도 초췌했다. 뿐인가? 푸석푸석해 진 피부나 퀭-한 눈빛 등, 제대로인 게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데카른은 3일 정도 요양의 시간을 가졌었기에 은거(?)에 들어가기 전의 모습과 별반 다른 게 없었다. 그리고 그 것을 깨달은 두 사람은 '치사하다'고 중얼거리며 이데카른을 째려 봤지만 돌아오는 건 베키의 날카로운 시선과 가차없는 이데카른의 외면 뿐이었다. 결국 터덜터덜 힘없는 걸음으로 걸어 나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베키는 킥 웃었다. 어쨌든, 확실히 정신을 차리시긴 한 것 같았다. "…고맙군. 네가 아니었더라면, 우린…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거야." 이데카른이 베키를 보며 씨익 웃으며 말했다. 베키의 크게 뜨여진 눈에 경악이 서렸다. 저, 저 얼음 왕자가 웃다니! 여동생 앞이 아니면 그 어떤 일에도 변화가 없다는 미스릴의 표정이 무너지다니? 입을 딱- 하니 벌리고 베키가 아무 말 없이 쳐다만 보자, 이데카른은 연락이 오면 부르라고 말한 뒤 가 버렸다. 베키는 그 뒤로도 한참이나 뒤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저 철의 인간에게서 눈물을 나게 하고, 그것도 모자라 시녀일 뿐인 그녀에게 미소까지 짓게 했으며, '고맙다'고 인사까지 하게 만들다니. 역시 루피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저택의 분위기는 아직도 침울했다. 하긴, 열흘 전처럼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밝은 분위기로는 절대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시녀장 말처럼, 루피아가 돌아올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는 것을 저택 사람들도 잘 알고 있기에, 슬픔에 빠진 공작 내외와 세 형제를 돌봐주기 위해 시녀와 시종들에 의해 그나마 저택이 돌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칼르니르 저택은… 아, 그쪽 도련님은 기사수행을 떠나셨다고 들은 것 같은데? 대충, 1년 전쯤 떠나셨으니… 돌아오실 때가 되었네. …바빠지겠어.' 잠시 후, 베키의 예상대로 에스베크 저택에서 연락이 왔다. 이번에 깨진 것은 '유리의 눈'이라는 것이라고 하는데, 원상복귀 시키기 위해서는 엘 세느안트 저택에 있는 재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베키는 그 '재료'를 받아들고 식은땀을 흘렸다. 깨뜨리기는 깨뜨리되 엘 세느안트 저택에서만 조달할 수 있는 재료가 필요한 것으로, 물건 선정하기가 참 까다로왔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데카른의 조언(?)으로 심부름은 베키에게 맡겨졌고, 호위 겸 산책으로 이데카른이 따라가게 되었다. "칼르니르 저택 쪽의 칼르니르 공자님에게도 연락을 취해야 하지 않을까요?" 베키가 묻자, 마차 밖의 풍경을 내다보던 이데카른이 그녀에게 힐끔 시선을 던지고 말했다. "그래야 할 거다.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만, 곧 돌아올 거야." "휴, 걱정이네요. 거기서도 사고를 치라고 할 수도 없을 테고… 어쩔 수 없이 제가 열심히 다녀야 하겠죠?" "……당연한 말을." 적어도, 공작들의 눈에서 자유롭게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베키 뿐이었다. 비록 공녀들이 마계로 간 뒤 공작들은 정치에서 한 발 물러나 있긴 하지만, 그 정보력은 아마 변함없을 것이다. 물론 베키의 움직임이 수상하게 여겨 진다거나 한다면 베키 역시 자유롭지는 못하겠지만일일이 이유를 만들어 움직이는 베키가 수상하게 여겨질 턱이 없었다. 단지, 괜히 사고치는 에드윈드 덕분에 고생한다고만 생각할 것이다. 그 것을 잘 알고 있는 베키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같은 수도 안이라고는 하지만 칼르니르 저택과 에스베크 저택, 그리고 엘 세느안트 저택의 거리가 가깝지만은 않은 탓이었다. 마차를 타고 돌아 다니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상당히 긴 거리임에는 틀림이 없다. 베키가 그런 생각을 할 동안, 마차는 에스베크 저택에 다다라 있었다. "베- 에- 키- 이- 이----!!"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그녀를 향해 괴 생물체(?)가 달려 들었다. 베키의 이름을 길게 늘여 부 르며, 두다다다- 하고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그 괴 생물체는… 바로 에드윈드였다. 지체높은 명문가의 도련님이 저런 망측한 행동을 하다니. 베키는 어이가 없었다. 물론, 저번에 봤을 때에도 어렴풋한 선수(?)의 끼가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저런 식으로 광기(狂氣)가 느껴지지는 않았는데. 베키는 혀를 찼다. 이런, 아가씨때문에 망가진 도련님들과 거의 매일반의 모습이잖아. 베키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에드윈드에게서 살짝 비켜 서며, 그녀가 들고 온 재료의 무사를 꾀했다. "우아앙- 너무해! 베키 양, 나는 너무 오랜만에 베키 양을 만나는 거라 두근 반, 세근 반 콩닥콩닥하는 심정으로 기다렸는데에- 히잉, 아파~" 엘 세느안트 가문의 마차에 머리를 부딪치고 울먹이며 말하는 에드윈드를 보며 베키는 다시 혀를 찼다. 아, 저런 게 과연 귀족 명문가의 도련님이 맞는 것일까? 비록 마법사 가문이라 그런 것을 잘 따지지는 않는다고 들었지만, 그래도 체면이란 게 있을 텐데. "재료를 가지고 왔습니다, 에스베크 공자님. 더불어, 엘 세느안트 둘째 도련님께서도 오셨습니다만, 인사하지 않으셔도 됩니까?" 아까부터 잊혀진 이데카른의 존재를 확인시켜주자, 그제야 에드윈드의 눈이 그에게로 향했다. 원래 중요한 건 이데카른 도련님인데, 이 정신없는 꼬마 도련님께서는 까맣게 잊어버렸던 모양이었다. 에드윈드는 소년 특유의 짖궂음이 베어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셨네요, 이데카른 형님. 몇 번 뵌 적이 있죠?" "…그래." "귀한 분이 오셨는데, 여기서 이럴 수는 없죠. 자, 들어가요. 자세한 얘기는 들어가서 하죠. 아, 베키 양. 어딜 가? 빨리 와요!" 뒤로 슬쩍 빠져서 존재감 없이 뒤따라 가려던 베키는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아아, 역시 이 제멋대로인 꼬마 도련님은 감당하기 힘들었다. 이데카른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 봤지만, 베키는 손사레를 치며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도 모르겠다니까~ 저 꼬마 도련님이 왜 나한테 저렇게 살갑게 대하는지!' * * * * * * * * * * * * * * * 세키라는 이번에는 거울을 들어 올렸다. 적어도 350년 전의 물건임에 틀림없었다. 그녀의 기억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역사적으로도 엄청난 가치가 있는 물건들이었다. 거기다 굉장히 잘 보존되어 있었다. 이 정도로 잘 보존되어 있는 물건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있다고 하더라도 <현자의 탑>에 보관되어 있거나 해서 그녀같은 신분의 사람이라도 보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널리고 널렸다니! "대단해… 전부 <드벨 전쟁> 전의 것들이야! 그 때 그 엄청난 전쟁으로 그 당시 물건같은 게 잘 전해지지 못했는데… 대단해!" 세키라의 갈색 눈이 흥분으로 반짝였다. 시리어스 제국의 역사는 근 삼천년에 가깝지만, 그 동안 크고 작은 전쟁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물론 반정도 일어났고, 다른 나라의 침공, 영역 전투같은 것도 빈번히 일어났으며, 그 과정에서 큰 전투 때에는 당시 건물이나 물건 등이 많이 사라지는 등의 일이 있었다. 350년 전 일어났던 <드벨 전쟁>는 시리어스 제국도 삐걱했을 정도로 큰 전쟁 대륙 전쟁이었고 30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공포'로 자리하고 있을 정도로 큰 전쟁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저택의 양식도 300년 전에 유행했던 것이고… 대단해.' 벌써 연회가 열렸던 밤이 지나고, 벌써 3일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세키라는 천으로 감싸인 커튼 뒤에 몸을 기대어 스르륵 주저 앉았다. 그 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등골이 오싹해 지고 다리에 힘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그 때의 그, 온몸을 엄습하던 싸늘한 공포란… 생각하기도, 떠올리기도 싫었다. 복도 끝에서 루피아를 안고 걸어오는 마왕을 보았을 때, 세키라는 꼭 루피아의 몸이 축 늘어진 것만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루피아는 단지 잠이 든 것 뿐이었다. 함께 사라졌던 마왕이 먼저 돌아와 바로 사라졌고, 세키라와 에리나는 연회장의 한쪽 발코니에서 루피아를 발견했다. 어딘가 얼이 빠진 것 같았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다. '문제는… 도통 그 일에 대해서는 열지 않으니 문제지. 연회가 끝난 그 밤에 아로데 님은 나를 바로 데리고 돌아와 버리셨고… 에휴.'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 같긴 한데, 루피아는 도통 입을 열지 않았다. '괜찮아, 괜찮아'라고만 연신 말하면서 그 일에 관한 언급은 피하는 것 같았다. '네가 걱정이 되어 이러는 거잖아!'하고 볼기짝을 두드려 주면서 알아내고 싶지만,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그랬으면 꽤 재미있는 진풍경이 펼쳐졌을 것이다) 세키라는 한 걸음 물러서 주었다. 게다가 아로데는 어제 일 때문이라며 마왕성으로 가 버렸다. 데려가 주었으면, 하고 바랐지만 세키라는 입을 열지 못했다. 용기없는 자신을 탓해도 봤지만, 아로데는 씨익 웃으면서 시간이 남으면 수집품이나 구경하라고 말했다. 대체, 일이 어떻게 되려고 이러는 것일까? 평생 동안 이렇게 살게 된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괜찮았다. 이제 세키라는 '마족'에 대한 이유없는 공포감은 어느 정도 극복해 낸 상태였다. 거기에는 아로데의 공이 전적으로 컸지만, 계속 허송세월하며 울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무엇보다, 한심했기 때문에. 귀족 영애들의 삶은 다 똑같다. 어느 특수한 경우만을 제외한다면, 다 똑같았다. 온실 안의 화초처럼 곱게 곱게 자라서, 배우는 것이라고는 사치, 허영, 욕심, 불만같은 것들 뿐이다. 가문에서 정해주는 '괜찮은 조건'을 가진 남자와 약혼해서 어느 정도 시간을 두었다가 부모님이 쥐어 주시는 지참금을 바리바리 싸 들고 그 남자와 결혼한다. 돈과 몸을 함께 들고 '맡아달라'고 애원하는 것과 같은 신세라는 것이다. 세키라는 오래 전부터 그걸 알았다. 비록 자신이 신랑감을 정할 자유 정도는 있겠지만 결국 그 이상이 되기는 힘들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부터, 아버지는 더욱 더 일에 매달리셨다. 그렇다고 그녀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동생 에드윈드에게 그렇게 많은 애정을 쏟았다고 볼 수도 없었다. 표현을 안 했을 뿐 사실은 많이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고, 에드윈드가 어느 정도 크고 난 뒤에는 마법을 가르쳐 주고 있지만 말이다. 에드윈드는 아주 아기 때부터 세키라가 돌봐왔다. 유모나 시녀, 하녀가 해야 하는 일도 세키라는 될 수 있으면 그녀 스스로가 직접 했다. 그래서, 그 아이에 대한 애정이 더욱 컸다. '…모르겠어. 이제 앞으로 어떻게 될지… 희망을, 품어도 될까?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져도 되는 걸까?' 차마 희망을 가지기가 두렵다. 괜히 그렇게 생각하고 믿었다가, 그 가능성이 짓밟히게 되었을 때 받게 되는 상처, 절망이 두려웠다. "루피아…… 대체 마왕과 무슨 말을 했길래 그러는 거야…." 세키라는 차가운 자신의 손을 눈가에 올려 놓으며 중얼거렸다. * * * * * * * * * * * * * * * 마왕성에는 아로데, 로이드윈, 유리아덴을 위해 만들어진 집무실이 있다. 일명 '마왕성 뉴 인테리어 24시간 계획'이라는 시녀와 루피아의 단합으로 보다 우아하고 고급스럽게 꾸며진 이 곳에서, 세 마족은 어제부터 불철주야 일에 매달리고 있었다. 그 이유는 마왕이 처리해야만 하는 중요 서류들은 이미 다 처리되었고, 이제 그의 명령대로 세 마족이 자잘한 것들을 확인, 절차를 따라 실행하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마왕은 그가 해야 할 일을 부하들에게 미루지 않는다. 단, 그가 해야 하지 않아도 될 일 역시 손대지 않았다. 세 마족의 능력을 낭비하는 바 없이 철저하게 활용했고, 세 마족 역시 그의 뜻에 따라 충분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먼저 밑에서 들어 온 서류들을 세 마족이 검토한 후 마왕에게 넘긴다. 이 선에서 쓰잘데기 없는 일들은 그들 선에서 걸러진다. 그리고 마왕이 검토한 후 서류를 체크하면 세 마족이 다시 그걸 받아 재확인, 실행하는 것이다. "근데 말이야 로이드윈. 너… 혹시 군주께서 그 여자에게 무슨 말을 하셨는지 알아?" 이쪽에서도 그것은 의문이었다. 마왕에게는 말해봤자 소용이 없고, 루피아는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글쎄, 나라고 다 아는 것은 아니니까. 특히, 군주와 관련된 일은 더 알 수 없지. 내 능력은 군주께 한해서는 지극히 제한적이니까." 아로데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마왕에 대해서는 로이드윈의 능력이 제한적이다. 마왕이 마음만 먹는다면 그는 절대 마왕을 볼 수 없었다. 비록 천계라도 어느 정도는 투시(透視)가 가능한 그의 마안(魔眼)이라지만, 군주에 한해서는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다. "흠… 그렇지. 군주께서 그냥 넘어가실 리는 없는데 말이야." "절대 그럴 리가 없지." 로이드윈이 단호하게 말했다. 마왕의 성격은 딱히 정의를 내리기 힘들었다. 성격이 '나쁘다' 고 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좋다' 고 하기에도 문제가 있다. 뭐랄까. '무관심' 정도가 무난한 표현일 것이다. 그는 모든 것에 초연했다. 특별한 집착도 없었으며, 특별한 관심도 없었다. 아니, 관심거리가 있다면 오직 하나, '힘'에 대한 것 뿐이었다. 하지만 그게 결코 쉬운 성격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소유에 대한 것은 확실히 했으며, 그 소유의 것에 손을 댔을 때는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이번 일도 그런 맥락에 속하는 것이다. 설마, 그 간 큰 여자가 마계에 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아 간 크게 마왕성에 덥석 손을 대리라고는 예상하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 여자는, 분명 자신의 이 곳에서의 위치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분명 뭔가 믿는 구석이 있었기에 일을 벌여 놓았겠지. 그나마 아무 상처 없이 멀쩡한 것만 봐도 그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뒤, 그 여자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고- 마왕도 그 일에 대해서는 깨끗하게 언급하지 않는게 이상했다. 분명 둘 사이에 뭔가 말이 오갔음은 분명한데, 둘 중 아무도 그 일에 대해서는 얘기를 꺼내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로이드윈은 거기까지 생각하고 피식 웃었다. 적어도 그의 군주께서 그 여자에게 관심을 갖게 되신 것만은 틀림없는 일이었다. '흐흐흐.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 같은 걸.' 로이드윈은 히죽 웃었다. 그리고는 유리아덴이 넘겨 준 서류를 한 장 넘겼다. 어디보자, 이번에는 어떤 불만을 적어 놓으셨을라나? 서류들의 태반이 서열 500위까지의 마족들에게서 날아 온 공녀에 대한 불만사항들이었다. 보고서 형식으로 짧게 글을 올리라고 말해 놓기는 했지만 써 있는 것이라고는 온통 불만 사항 뿐이었다. 하긴, 다른 것을 기대하지도 않았었다. 그 사항들을 살펴 보자면 비슷한 유형을 띠고 있는 게 많았다. 공녀들의 반응이 그만큼 다양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첫째, 밤낮없이 방에 틀어 박혀서 울기만 하는 여자들. 이런 유형들은 굉장히 성가시다. 아니, 어떤 면으로는 가장 다루기 편한 부류이기도 할 것이다. 어르려고 한다면 굉장히 성가실 테고, 그냥 내버려 둔다면 가장 편할 테니 말이다. 이 경우, 마계에 대한, 그리고 마족의 대한 적응이 아예 이루어 지지 않은 상태다. 자신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무작정 두려움에만 휩싸여 있는 상태. 둘째, 극심한 우울증과 향수병이 겹친 여자들. 이 경우, 마족들은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고들 한다. 다가가면 비명을 지르거나 울음을 터뜨리지는 않지만, 마치 넋이 나간 것처럼 허공의 어딘가를 응시하는데, 가족의 이름을 부르면서 멍하니 눈물만 뚝- 뚝 흘린다는 것이다(마족들은 그런 그녀들을 보고 반 미친 상태인 거라고 하면서 혀를 찼다고 한다). 다른 유형은 거의 없다. 예외적이라고 해 봐야, 그들 셋이 맡고 있는 여자들과 마왕성에 머무르고 있는 루피아 정도다. 세키라의 경우는 아로데의 적극적인 접근(작업?)덕분에 어느 정도 마족에 대한 적응과 두려움에 대한 극복이 이루어진 상태다. 또 에리나의 경우는 '방치'의 상태로(유리아덴의 성격상 이 방법 외에는 없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녀 스스로가 저택 안에서 잘 생활하고 있는 편이었다. 무심하게 서류를 살피던 로이드윈의 눈이 커졌다. "…아로데. 설마… 그 자리에 그 녀석도 있었어?" "글쎄? 아마 있었지 않을까. 그래뵈도 그 녀석, 서열 8위라고. 아마 공녀 건 때문에 모였을 때는 다 참석해 있었을 거야. 티는 안 났지만." 로이드윈은 왜, 라고 묻는 듯한 아로데에게 서류 한 장을 불쑥 내밀어 보였다. 꼴에 보고서라고 형식을 갖춰 놓기는 했지만 도저히 정상적으로 보기는 힘든 서류가 아로데의 코 앞으로 내밀어 졌다. 로이드윈의 손에서 서류를 받아 든 아로데의 얼굴에 점차 어색한 미소가 덧씌워 졌다. "……찍힌 것 같지?" 로이드윈과 어느새 슬쩍 끼어든 유리아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로이드윈은 어쩌면 동정심이라고 불리울 만한 감정과 함께 재밌겠다는 식의 흥미를 반짝이고 있었다. 아로데는 그 특유의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였으며, 유리아덴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무표정하다. 아아, 하필이면 이런 녀석한테 걸리다니. 군주님과도 무슨 일이 있었던 듯 싶은데… 그녀의 일이 계속해서 꼬일 전망이 보이자, 아로데와 로이드윈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비록 이런 녀석이 꼬이게 되는 건 기분이 나빴지만, 그 정도야 세 사람이 얼마든지 견제할 수 있었다. "좋아! 내일부터는 마왕성에서 생활하는 거다! 각자 맡겨진 공녀 데리고 와!" 루피아에게는 종신형 선고와도 같은, 아니- 지옥행 선고와도 같은 결정이었다. 마왕을 제외한다면 마계에서 최고의 권력을 구가하는 세 마족의 눈살을 한꺼번에 찌푸리게 한 보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P.S> 마왕성을 바꾸었다는 여자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 이번 화는... 글쎄요, 제목에 대한 게 별로 나오지 않았죠? 흠, 다음 편에는 나오겠죠 뭐.^^(무책임하다) '루피아가 받은 벌'이 제목이니까 아마 마왕이 벌을 내린 모양입니다-_- 에- 우선 늦어서 죄송하구요. 역시 매일 연재란 저에게 무리였나 봅니다..(털썩) 어흐흑- 놀고 싶은 이 마음 어찌 하리오!(...) 열심히, 그리고 성실하게 쓰려고 했지만.. 역시, 요즘에는 풀어져서 말이죠...-_-; 신혼 일기에 대한 독촉도 많이 들어오구요. 공녀가 일단락 될 때까지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지금은 공녀 하나만으로도 정신이 없어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너무 뻔뻔한가?) 공녀가 일단락되면 신혼 일기 왕창 쓸 생각이니깐^^ 뭐... 저도 신혼 일기 리메 하겠다고 나선지 얼마 되지 않아서 공녀 출판 계약을 해 버려서 여러 가지로 머리가 아팠거든요.ㅠ_ㅠ 아, 이제 막 1:00로 바뀌었네요. 멜은 donghee425@hanmail.net 이구요. 음- 에, 즐독하세요~^-^ 제 목: [수정판] 공녀(貢女) : 제7화 [루피아가 받은 벌](2) #. 제7화 [루피아가 받은 벌] * * * * * * * * * * * * * * * 싱그러운 신록의 잔디, 시리도록 파란 하늘. 향기를 실은 미풍(微風)과 잔뜩 만개한 꽃잎이 투명한 이슬을 매달고 있었다. 거대한 아름드리 나무에 잘잘히 부서져 내리는 햇빛이 눈부시게 아름답다. 이 세상에 '자연'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그 어떤 조형물도, 생명체도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는 없다. 그리고, 그것들과 함께 조화롭게 어울려 피리 소리가 끊일 듯 말듯 가냘프게 들려오고 있었다. 《슬슬 올 때가 되었는데 말이야. 그의 성격에 가만히 있어줄 리가 없는데.》 정형되지 않고 허공으로 울려 퍼지는 목소리는, 풍부하고 낮은 듯 했다.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커다란 아름드리 나무의 굵은 기둥에 몸을 기대었다. 낮은 속삭임처럼,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려 사그락거렸다. 짙은 청남빛 머리카락이 땅에 질질 끌리고 있었다. 섬세한 얼굴선과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가진 그 소년은, 아주 인상적인 새카만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하얀 피부라 그런지 더욱 도드라지는 검은 눈동자의 눈매는, 살짝 치켜 올라가 있었다. 특별하게 아름답지는 않지만, 그래서 더 주위와 조화롭게 느껴지는 건지도 모른다. 손에 잡고 있던 피리를 더 불 요양인지 입가로 가져다 대려는 그의 움직임이 멈칫했다. 그리고 그 새카만 눈동자를 하늘로 향했다. 《아… 왔다. 예상보다는 많이 늦었지만.》 소년은 허공에서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그와 동시에, 주위 풍경에 쩌억 쩌억 금이 가기 시작했다. 놀랍도록 아름다운 '자연'의 배경이, 그의 가벼운 손짓 하나에 공간 자체로 부서지고 금이 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윽고 유리창이 부서지듯 자잘한 부스러기만이 허공에 날려 소년의 손 안에 모아졌다. 색색의 가루로 변한 그 것들은 소년의 손 안에서 둥근 구슬로 변했다. 색색이 층을 이룬 채 둥그렇게 변한 구슬의 매끈한 표면을 매만지며 소년은 빙긋 웃었다. 《…여전한 취미로군, 클리오라. 이딴 것을 만들면 재미있는가? 어차피 영원한 것도 아닌데 말이야.》 빛을 모아 만든 듯 밝은 금발이 구불거리며 흘러 내리고, 뭔가 안 좋은 일이 있는지 밝은 금빛의 눈동자를 가진 눈매를 살짝 찌푸리고 있는 남자가 공간을 가르며 나타났다. '소년', 아니 '클리오라'라 불린 그는 살풋이 웃으며 그를 반겼다. 하지만 금발의 남자는 그의 환영을 기뻐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생각인가? 그런 짓을 하다니! 비록 가만히 침묵하고 있긴 했지만 이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네. 내 밑의 아이들도 움직이려 하네. 자네가 행한 일이 끌고 올 영향을 알기나 하는 겐가? 이 '세계'는 아직 더 버틸 수 있어.》 클리오라는 금발의 남자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아니, 오히려 약간의 백치미가 섞인 미소를 지어 보이기도 했다. 《자네와 내가 해야 하는 일이 무언가? 우리의 존재 이유가 무언지 생각해 보게. 카오스, 혼돈의 어머니에게서 우리가 태어난 이유가 무엇인가? 이런 일은 '규칙'을 깨는 일의 시발(蓍發)이 될 수도 있는 걸세.》 《그럴 수도 있는 일에, 자네는 침묵했지, 오르가프?》 금발의 남자- 오르가프는 클리오라의 말에 무언가 말하려는 듯 하다 입을 꾹 다물었다. 클리오라는, 싱긋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었을 거야. …오르가프, 우리는 이제껏 너무- '규칙'에 매달렸던 것 같다고 생각하지 않나?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네. 이제껏 우리가 반복했던 창조(創造)와 파괴(破壞). 그 순환을, 그만 끊고 싶다 생각해 본 적 없나?》 클리오라는 하지만, 이라고 말하고 싶은 듯한 오르가프의 얼굴을 올려다 보며 말했다. 《같은 세계에 사는 생명들이지만, 서로 다른 특성과 외형으로 배척하고, 시기하며, 살육한다. 이렇게 반복되다 한계에 이르면 파괴한다… 이게 이제껏 반복되어 온 일이지 않나. 계속하고 싶은가, 자네는?》 이제껏 몇 번이나 반복되어 온 의미없는 일들. 빛의 신이자 창조의 신인 오르가프, 어둠의 신이자 파괴의 신인 클리오라였지만 카오스의 시기부터 늘 반복되어 온 그 의미없는 행위에 염증을 느낄 만 했다. 클리오라는 오르가프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그래서 이번 일을 만든 거라네. 흠- 생각보다 일이 재미있게 돌아갈 것 같긴 하지만, 애초 내가 생각했던 목표는 대충 이뤄질 것 같다고 보네. 하하! 자네도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될 거야. 나야, 어차피 체면차릴 것 없으니 문제될 게 없다고는 하지만, 자네는 어쩔텐가?》 《…….》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지켜보는 것 뿐이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지. 과연, 선(線)의 경계를 무너뜨릴 수 있을까.》 클리오라는 피식 웃었다. 왠지 자조적인 끼가 스며 쓰게 보였지만 곧 지워버린 그는, 주머니에서 다시 구슬을 꺼내 들었다. 그의 손 안에 들어있던 구슬에, 검은 마기가 스며들자 점차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파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오르가프가 등장하기 전의 풍경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생겨났다. 오르가프는 뒤돌아 걸어 나가다 모습을 지웠다. 클리오라는 낮게 한숨을 내쉰 뒤, 다시 아름드리 나무의 나뭇가지 위에 앉아 피리를 불었다. 가느다란, 아주 가냘픈 피리 소리가 바람을 타고 멀리 퍼져가기 시작했다. * * * * * * * * * * * * * * * "우… 메를리나. 지금 몇 시쯤 되었어?" "벌써 정오예요. 정말 안 일어나실 거예요?" 루피아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지금 그녀는 그녀의 큰 침대에 누워 이불로 온몸을 꽁꽁 싸맨 채 나오지 않는 상태였다. 3일 전 연회가 끝난 이후부터 계속 이 모양이었다. 그녀는 침대 밖으로 나오게 하기 위해, 메를리나는 그야말로 별 짓을 다 해 보았다. 식사를 안 주겠다는 협박부터, 아무 것도 묻지 않겠다고 얼러 보기도 했으며, 힘으로 탈탈 털어내 보기도 했지만 꾸물거리며 끝내 침대 안으로 기어 들어가는 루피아 덕분에 몽창 실패해 버려 그만 포기해 버렸던 것이다. "벌써 정오란 말이야? 윽, 나 어떻게 해…!" 이불 밖으로 빼꼼히 고개를 내민 루피아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뭔가 큰 일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초조해 보이기도 했다. 메를리나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며 미간을 모았다. 직감적으로 루피아의 이런 반응이 3일 전 밤의 일과 결부된다는 걸 알았지만 메를리나는 그녀에게 묻는 것을 포기했다. 물을 때마다- 아니, 물으려는 기색만 보여도 고치 안의 애벌레처럼 이불 속으로 쏘옥 들어가 버리는 루피아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겨우겨우 저 정도 꺼내(?) 놨는데 다시 들어가게 할 수는 없지. "에휴. 3일 전부터 아무 것도 안 하시고 침대 속에만 틀어박혀 계시더니, 고작 하는 말이 그거예요? 대체 뭘 알아야 도와 드리든지 말든지 하죠. 무슨 일이세요?" 메를리나의 물음을 받은 루피아는 힘없이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았다. 애처로움이 잔뜩 묻어나는 눈을 한 채 메를리나를 올려다 본 루피아는 시트 위에 놓인 두 손을 꼭 쥐었다. 그리곤 뭔가 결심했다는 듯이 결연한 태도로 비장하게 벌떡 일어섰다! "그래! 계속 이렇게 있을 수는 없지. 어디보자. 한 2시간쯤 남았나? 에잇! 어떻게든 될 거야!" 대체 무슨 소리인지, 메를리나는 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3일 동안 쭉 땅파고 우울하게 누워 있더니, 2시간 남았다고? 어떻게든 될 거라고? …하지만 적어도 아까보다는 나은 듯 하다. 움직이기는 하니까 말이다. 메를리나는 정말이지 알 수 없는 루피아의 행동에 포기했다는 듯한 낮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도대체가, 어디로 튈 지 모르겠다니까. 뒤돌아 어디론가 나갈 준비를 하는 루피아에게 다가간 메를리나는 그녀의 일을 도와주며 물었다. "무슨 일이길래 그러세요? 어디 나가시려구요?" 루피아의 몸이 움찔했다. 입을 꾹 다문 채 굳은 표정으로 딴 곳으로 시선을 주던 루피아는, 자신을 빤히 올려다 보는 메를리나를 보며 작게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가." "네?" "벌 받으러 간다고! 무슨 놈의 벌이 그 모양이야? 쳇쳇, 내가 어떻게 이런 신세가… 우앙, 우연히 마주치거나 꼭 봐야 할 때가 아니면 그다지 만나고 싶지 않단 말이야!" 메를리나는 소리지르듯 말한 루피아가 숨을 몰아쉬자 그제야 그녀가 한 말의 의미 해석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벌을 받았다는 말인 것 같았다. 누가? 그야 그녀의 군주가. '그다지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한 사람도 아마 군주일 것이다. 그럼 그녀가 받을 벌은 군주와 마주해야 하는 종류인 것 같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내가 약간… 주제넘은 짓을 했다는 건 나도 인정하고는 있고, …권력이 안 따라주는 걸, 무엇보다." 루피아가 작게 투덜거렸다. 아마 3일 동안 괴로워(?) 하고 내린 결론이 이것인 것 같았다. 메를리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 라는 듯이 루피아가 눈을 가늘게 뜨자, 메를리나는 씨익 웃어 주면서 말했다. "식사 하실래요?" * * * * * * * * * * * * * * * 루피아는 따듯한 물 속에 몸을 담그고 눈을 감았다. 짙은 장미향이 코를 찔러왔다. 3일 전 밤 이후, 아무리 괴로워하고 현실도피를 해 봐도 역시 달라지는 건 없었다. 속으로 울음을 삼킨 루피아는 아우우, 하고 신음을 흘리며 따뜻한 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하필이면… 하필이면! 아아, 물론 가벼운 편이긴 하지만… 제길, 마왕 그 자식, 무슨 변태 끼라도 있는 거 아냐?' "'시중 들기'가 뭐야, '시중 들기'가!! 아우욱,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딴 '제안'을 한 거야!" 그렇다. 마왕은 그녀에게 이번 일을 넘겨 주는 대신 그의 '시중'을 들어주는 것을 벌로 내렸던 것이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걸까? 그것 역시, 루피아를 3일 동안 침대에서 나오지 않게 발목을 붙잡던 고민거리였다. 처음에는 화가 나 보였는데, 발코니에서 그 얘기를 할 때에는 오히려 짖궂은 끼가 엿보였다. 그때, 그 얼굴이 얼마나 열받던지. 의외의 제안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표정의 루피아에게 마지막으로 날려 보내던 그 깔끔한 '피식' 미소까지! 그는, 그 날 이후 3일 뒤 2시부터 그의 집무실로 와서 그의 '시중'을 들라고 했다. 지금은 메를리나가 주는 식사를 하고, 목욕을 하고 있으니 대충 1시쯤 되었을 것이다. 고로, 이제 1시간 뒤면 마왕의 '시중'을 들어줘야 한다는 말이다. 이래뵈도(?) 루피아는 명문 귀족가문의 아가씨다. 시중을 들어주는 것에 익숙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목욕이나 옷 갈아입는 것 등 많은 것을 혼자서 해 왔지만(덕분에 베키는 할 일이 거의 없었다) 시중들어 주는 것까지 익숙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중'이라니? 비록 이 곳에서의 그녀 위치는 형편없는 것이라고 해도, 또 그걸 확실하게 자각하고 있다고 해도 그런 일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명망있고 평판좋은 귀족 부인이라면, 황태자의 선생이 되기도 한다. 다른 아가씨라면, 마왕의 시중을 들라고 한다면-(어디까지나 예를 들어 볼 경우에) 약간 간탱이가 부은 아가씨라면 '난 그런 일은 못하오!'라고 말할 것이고(사실, 이런 경우는 절대 없다고 보는 게 맞다. 누가 이런 간부은 짓거리를 하겠는가?), 정상적인 심장을 가진 경우라면 덜덜 떨면서, 그리고 가끔은 질질 짜면서 시중을 들겠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루피아는, 절대 이 두 가지 경우에 들지 않는다. 간탱이 붓다 못해 밖으로 유람을 나왔으며, 거기 미스릴 코팅까지 되어 있는 경우였던 것이다. 이런 경우, 예측하지 못할 돌발의 사태를 만들 가능성이 충분하다. 물론 루피아 본인은 절대 사고를 만들 생각은 없다. 하지만 조용하고 평범하게만 살고 싶은 그녀의 바람과는 달리, 상황은 절대 그녀의 생각대로 움직여 주지 않으니 문제인 것이다. 아니, 엘 세느안트 가문이라는 제국의 명문가의 아가씨로 태어났던 것 자체가, 그리고 '팔불출'이라 불리는 종류의 부모님과 오라비들을 둔 것, 귀족가문 아가씨 주제에 사교계 데뷔는 하지도 않고 마법이나 배웠던 것 자체가 '평범'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녀는 어려서부터 늘 사고를 몰고 다녔다. 보통 사람이라면 생각도 못할 곳에 흥미를 나타내 대범하게(생각없이) 일을 저지르는가 하면, 그 일을 수습하려다 뒤통수를 맞는 경우는 더욱 허다했다(마치 이번 일처럼). 어쨌든,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는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할 지가 문제다. 언제 시중을 들어 봤어야 뭘 할지 감이라도 잡을 것이 아닌가? 게다가 마왕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서류를 체크하면서 보낸다고(메를리나 왈) 했다. 그가 일하는 동안 그녀는 무엇을 해야 하며, 또 시중을 든다고 해도 뭐 어떤 종류의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인가. 마왕이 식사를 하면서 그녀에게 투정을 부린다든가, 옷을 입는데 단추를 못 잠근다든가 하는 것은 도저히 상상이 안 된다. 보통, 시중이라 하면 그런 것들인데. 그녀는 논외였지만, 어쨌든 멍청한 귀족 남자들 중에는 혼자 단추도 제대로 못 잠그는 족속도 더러 있다는 말을 세키라와 에리나에게 들은 기억이 있다. 그녀의 삶에서 '시중' 비스무리한 것을 한 것은,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이 일을 할 때 차를 가져다 주거나 간식 등을 가져다 주는 것 등 뿐이었다. 그럼, 그녀가 마왕의 밤참, 간식, 차(茶) 등을 가져가야 한다는 말인가? 그럴 지도 모른다. 마왕의 이미지, 이제까지의 말들, 그리고 모습, 분위기 등을 떠올려 본 루피아는 피식 헛웃음을 지었다. 그 남자에게 '시중을 들 시녀'가 필요하다고? 그럴 리가 없다. 아주 하찮은 것이라면 몰라도 자신에 관한 일들은 스스로 빈틈없이 해내는 타입의 사람으로 보였으니까. '단순한 변덕이거나, 아니면 재미라는 얘기지, 결국은.' 그렇게 결론을 내린 루피아는 몸을 일으켰다. 너무 오래 물 속에 있었더니 머리가 어찔한 느낌마저 들었다. 가운을 입은 루피아는 준비된 의복에 손을 뻗었다. 좋아. 좋다고. 무슨 일이든지 시켜만 줘. 능력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네 말에 최대한 따라 줄 테니. 내 입장이 이러니 어쩌겠어? 하지만…… 내가 고분고분하리라는 생각은 죽어도 하지 말아줬음 해. 나는 또한, 내 능력이 허락하는 최대한 네 말에 반항할 테니! * * * * * * * * * * * * * * * "크, 크아아아악! 딜레에에에엔!!!!" 콰아앙-!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괴성(?)이 터져 나왔다. 찢어질 듯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회색의 연기를 뚫고 부서진 벽의 파편을 밟으며 걸어 나왔다. 물빛의 짧은 머리카락에 이마에 붉은색 두건을 두른 그는, 부들부들 몸을 떨며 이를 아드득 갈았다. "딜레에에에엔~ 훗훗훗! 이제 실험이고 뭐고 없다! 이봐! 당장 이놈의 실험실 막아버렷! 뭘 연구한다고 그러는 거야? 딜렌 잡아 왓!" 이제 더는 못 봐주겠다! 뭔가를 연구, 개발하겠답시고 연구실까지 만들어서 연구하는 것까지는 좋다. 아무 것도 안 하고 절망에 빠져있는 것보다는 훨씬 생산적이지 않은가. 하지만, 카른은 그런 생각을 했던 옛날을 저주했다. 뭐? '생산적'? 이게 생산적이면 도대체 뭔들 생산적이지 않겠는가? 궁 지붕 몇 개 날려먹은 것까지는 좋다. 벽도 몇 번 날려먹은 것 정도는 봐 주겠다. 아니, 그에 들어가는 수리비도 중간에 빼돌려 연구비로 쓴 것도 연구에 대한 열성 차원에서 곱게 봐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궁 안 사람들을 대상으로 연구를 실험해 보는 건 용서할 수 없었다!! 이게 도대체 몇 번째 폭발인가! 그 동안의 수없는 고생, 고난이 떠오르자 카른은 눈물을 흘리며 몸을 떨었다.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 수없이 작아져야 했고, 커져야 했으며, 납작해져야 하기도 했으며, 동물로 변한 게 수십 종이었다. 아아, 그 때의 그 고생! "저… 딜렌 님은 벌써 증발(?)하셨습니다. 한동안은 또 잠적해 계실 것 같은데요." "뭐? 끄으으윽, 이 자식이!" 카른은 머리를 쥐어 뜯으며 소리를 질렀다. 이제껏의 경험으로 봐서, 딜렌은 적어도 일주일은 모습을 감추고 나오지 않을 게 뻔했다. 협박, 회유 등 갖은 수단을 동원해서 나오게 하려고 했지만, 어디 있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이딴 녀석과 인연따윌 맺는 게 아니었어! 딜렌이 그의 인생에 꼬이고부터는 되는 일이 없었다. 카른은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올리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봤자, 다시 그 때로 되돌아가더라도 나는 그 녀석과 인연을 맺을 테지. 쳇!' 그래, 한탄해 보았자 무슨 소용이겠는가. 일단, 딜렌을 찾아 한 바탕 잔소리를 퍼부어 준 뒤 밥이나 먹여야 겠다. 숨어있는 동안은(스스로 어련히 잘 찾아 먹었을까마는) 잘 먹지 못했을 테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딜렌을 찾기 위한 수색부터 해야 할 것이다. 카른은 반복되는 상황, 그리고 발전없는 상황을 한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고, 내 신세야." 그림자 족의 영역, '은자(隱者)의 숲' 중앙 '귀영궁(鬼影宮)'의 날씨좋은 어느날에 일어난 일이었다. 제 목: [수정판] 공녀(貢女) : 제8화 [도를 아십니까?](1) #. 제8화 [도를 아십니까?] * * * * * * * * * * * * * * * 로아이나 드 캐플리츠. 그에 대한 기억을 회상해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역시 '신비'다. 그의 직업이 직업인만큼, 그는 철저하게 자신의 속마음을 숨겼다. 결국… 그렇게 어이없이 허물어지고 만 그이지만, 그래서 더욱 측은지심이 생기는 지도 모른다. 지금도 가끔 생각해 본다. 가끔 나를 향해 짓던 그 쓴웃음은 그의 후회의 증거였을까? 무엇을 후회했을까. 그리고, 후회하면서도 그는 그녀를 사랑했을까? 그의 사랑의 정의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가 다시 돌아 온다면, 나는 말해 주고 싶다. 사랑했을 거라고. 당신이 그토록 온몸으로 전하려 했던 당신의 감정은, 반드시 그녀에게 전해졌을 거라고. 별의 움직임을 읽을 수 있음을, 운명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졌음을 괴로워했으며, 예정된 감정임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로 인한 절망과 불행의 늪에서 허우적대야 했었던 불행한 영혼, 로아이나. 그리고, 묻고 싶다. 당신은… 행복했어? ==================루피아 자서전' 中 발췌========================== 흑과 백의 단조로운 디자인의 메이드 복, 예의바른 얼굴, 짧게 끝나는 순종적인 말투. '시중드는 시녀'라고 하면 흔히 떠오르는 사항들이다. 절대! 네버! 루피아와는 관련이 없는 말들이기도 하다. 루피아는 조용히 그녀의 시녀였던 '베키'의 이미지를 떠올려 보았다. 순진, 순박, 솜씨좋은 손, 약간 잔소리가 심하긴 했지만 애정섞인 미소까지. 그리고 그것들과 함께 '베키와 루피아' 구도를 '루피아와 마왕'으로 바꿔 보았다. 아아, 어색함의 극치다. 하지만, 루피아는 조금 전까지의 그 생각을 수정해야 했다. 자존심 상하지만, 정말정말 인정하기 싫지만, '루피아와 마왕' 구도는 생각보더 훨씬 더 자연스러웠다. 물론, 루피아도 금방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었다. 마왕 집무실의 문 손잡이를 돌리기 전까지, 척척 명령을 내리는 마왕의 말에 어처구니없게도 너무 순순하게 따라 버리기 전까지는 '반항해 주리라!'는 생각만 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게 아니었다(우길 수도 없는 상황이다)! 루피아는 그 이유를 생각해 보다가, 결국은 '마왕의 분위기 탓'이라고 결론을 내려 버렸다. 이 남자, 명령 내리는 게 너무 자연스럽다. 이런 타입의 사람들은 많이 봐 왔다. 살면서 가장 옆에서 봐온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가까운, 그러니까- 그녀의 오빠들이나 아버지가 바로 이런 타입의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을 이끌고, 명령을 내리는 타입. '……여러 가지를 수정해야 했지만, 하나는 틀림없군. 이 남자는 절대로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하자' 타입이야. 남의 손에 자기 일을 맡겨 버리는 타입이 아냐. 고로, 시녀따위는 전혀! 아무 곳에도 쓸모가 없다고 느끼는 사람이란 말야.' 처음과는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하는 루피아였다. 맨 처음- 홀의 상석에 앉아 오만하게 그녀를 내려다 보던 그때 느꼈던 무조건적인 '공포'와는 달리(아아, 정말 인정하기 싫은 일이다), 지금은… 뭐랄까, 조금 더 개인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게 되었다고나 할까. 어쩐지, 조금 더 가깝게 느껴지는 느낌이라는…… 헉?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아니얏! 단지, '쉬고 있는 모습'을 본 거라든지, 심술궂은 모습이라든지 그런 것 때문에 그렇게 느껴졌던 것 뿐이라고!' 그래그래, 너무 사적인 모습들을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거야. 루피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철렁한 가슴을 쓰다듬었다. "차 한 잔 따르는 데 원래 이렇게 오래 걸리나?" 이디스의 목소리에 루피아는 얼른 정신을 추스렸다. 잠시 차 심부름을 하던 중에 생각이 삼천포로 빠졌던 것이다. 그렇지만 꼭 그렇게 말을 비비 꼬아야 하는 건 아니었다고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며 루피아는 따른 찻잔을 쟁반에 받쳐들고 마왕 앞으로 걸어갔다. 이 곳에서 그녀가 하는 일은 그야말로 '잡일'이었다. 하긴, 마왕에게는 그것 말고는 그녀에게 시킬 일이 없었을 것이다. 뭐든 자신이 알아서 하는 마왕같은 남자가 애초에 '시중들기'를 조건으로 내걸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 비정상적인 일이다. 고급스러운 원목으로 만들어 진 큰 책상에 수북히 쌓여있는 서류를 보며, 루피아는 혀를 끌끌 찼다. 이건 도저히 한 사람이 하루에 할 수 있는 양이 아니다. 그렇지만 빠르게 척척 처리해 나가는 마왕의 경이로운 속도에(이 것도 그나마 양이 많이 준 것이라는 걸 루피아는 모른다) 루피아는 고개를 내저어야 했다. "흠, 차 맛은 괜찮군." 마왕은 그렇게 말하며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혹시, 마계어 읽을 줄 아나?" "…그야, 어려운 단어는 잘 몰라도 어느 정도는……." "그래? 그럼, 이 서류들을 가장 상단에 쓰여있는 지역대로 나눠 정리해." 마왕- 이디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서류 한 뭉탱이를 가르켰다. 아까부터 '가만히 서 있자니 좀이 쑤신다'는 표정으로 꼼지락거리던 루피아는 차라리 잘 되었다는 심정으로 서류에 손을 뻗었다. '잡일'이라고 해도 끝이 없을 수는 없다. 따라서 겨우겨우, 억지로 일이 생길 때에만 루피아는 움직일 수 있었고, 그 외의 시간에는 그저 마왕의 옆에서 가만히 서 있기만 해야 했던 것이다. 그녀 성격에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런 루피아를 보며, 이디스는 속으로 씨익 웃었다. 그와의 '약속'대로 2시 정각에 그의 집무실 문을 두드린 루피아는, 비록 말하지는 않았지만 뚱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아니, 않고 있었다(일부러 지우지 않는다, 라는 생각이 다 드러났으니까). 애초에 '시중들기'를 제안한 것은 그저 그녀를 옆에서 지켜보고 싶었을 뿐이었으니, 그녀에게 무엇을 시킬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청소하라든가, 이것 저것 갖다 놓으라든가 하는 잡일을 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이디스는 일부러 약간 꼬인 어투로 말을 했다. 그게 그녀에게 더 재미있는 반응을 끌어 낸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약간만 건드려도 그 반응은 너무나 솔직하게 즉각즉각 나타났다. 그리고 그러던 중, '나 할 일 없어 심심하다'는 것을 써 놓은 듯한 루피아의 얼굴을 보고 서류 정리를 시켰던 것이다. 이디스는 다시 손 안의 서류로 눈을 돌렸다. 그러고보니, '서열 대회'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10년에 한 번 돌아오는 서열 대회는, 자신의 서열을 바꿀 수 있는 기회였다. 그 해의 서열 2위로 결정된 자가 원한다면, 그 자는 서열 4, 3위에게서 승리를 얻어낸 후 마왕에게 도전할 수 있는 권리까지 가진다. 물론, '원한다면' 말이다. 보통 마왕의 계승자는 마왕의 자식이 권리를 가진다. 하지만 그것은 의무적인 것이고, 마왕의 자리를 쟁탈할 수 있는 기회는 다른 이들에게도 열려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껏 그러한 예는 단 한 번도 없었고, '도전'을 한 예는 몇 있었다고 해도 그 결과는 아주 비참했다. 서열 대회에서 단 한 자리라도 자리를 올린다면 그 자는 운이 아주 좋은 것이다. '…이건… 어쩌면…….' '서열 대회'와 '공녀'. 그리고, 로이드윈이 말한 '마신 클리오라에게서의 축복'을 떠올려 본 마왕은 의외로 가능성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공녀들이 이 마계에서 제대로 인정을 받고, 자리를 굳힌다면… 이 수북하게 쌓인 '보고서'를 빙자한 '공녀에 대한 불평 불만 모음집'을 없앨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디스는 그런 생각에 슬쩍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 * * * * * * * * * * * * * * "…결국은 또 나군요." 베키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당연하다는 듯 에드윈드와 이데카른의 고개가 끄덕여 졌다. 이렇게 될 줄 알았지만, 저렇게 당연하다는 반응은 조금 열받는다. 어쨌든, 의논의 결과를 총정리 해 보면 이렇다. 첫째, 바르에든 칼르니르가 돌아 왔다는 소식을 접하면 그 즉시 칼르니르 저택으로 달려 가 소식을 전한다. 그의 의사를 묻고, 만약 응할 의사가 있다면 그와의 연락책의 역할도 베키가 겸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바르에든의 문제는 젖혀두고- 에드윈드와 트로에, 이데카른과 카에리드, 이렇게 팀을 짜서 한 쪽은 엘 세느안트 공작에게 직접적으로 묻고, 나머지는 다시 에스베크 공작의 연구실을 뒤진다는 것이다. 저번의 그 허술하디허술한 작전이 아닌 더욱 탄탄하고 빈틈없는 전략을 사용해서 말이다. 셋째, 이 모든 일은 당일이 올 때까지 비밀로 붙인다는 것. 이 세 가지가 이제까지 결정지은 모든 것이었다. 베키는 그 사항들을 되새기며 이 일에서 자신의 역할의 중대함- 또, 그 중역을 짊어짐으로 인해 오게 될 스트레스, 피곤을 떠올렸다. 아아, 거기에 시녀일까지 해야 되잖아, 의심사지 않으려면. 내가 과로로 쓰러지지 않으면 나는 철인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걸 거야. "네가 원래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조금 편의를 봐 주도록 하지. 너, 주위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나 소문 같은 것에 많이 신경쓰는 타입인가?" 이데카른이 '힘들 것 같다'라고 써 놓은 듯한 베키의 표정을 보더니 말했다. 소문? 베키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남이 뭐라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죠?" 그런 것쯤이야, 개야 짖어라 나는 내 갈 길 갈란다, 하는 심정으로 무시해 버리면 그만이다. 물론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러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하지만 베키는 만인에게 사랑받겠다, 라는 멍청한 생각따위는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베키는 어렸을 시절 '노예'로 엘 세느안트 저택에 팔려왔다. 운 좋게도 두 번째로 팔린 곳이 명문 귀족가문이었던 것이다. 예전 성격을 생각해 보면 지금은 많이 명랑해지고 밝아진 베키이지만, 그렇다고 바탕에 깔린 성격이 달라졌을 리 없었다. 애초에 남을 염두에 두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이러한 생각은, 루피아의 '제 멋대로 사고방식'에 약간이지만 영향을 미쳤다. 그녀의 대답을 들은 이데카른은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다. 뭔가 생각이 있지만 말하지는 않겠다는 뜻일 듯하다. 베키는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신경을 껐다. 아니, 신경을 쓸 틈이 없다고 해야 옳으리라. '……웬만하면, 저 시선 좀 치워 주지…… 되게 끈질기네.' 식은땀이 주르르 흘렀다. 아까부터 끈질기게 그녀의 얼굴을 응시하는 에드윈드의 시선에 베키는 꼭 바늘로 피부가 쿡쿡 찔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게다가 어쩌다 눈이 마주쳤다 싶으면 생글생글 거리니, 부담스럽기가 천근같았다. "그럼, 이제 용건은 끝났으니 가 보도록 하겠다. …넌 어쩔 거지?" 베키는 이데카른을 따라 일어섰다가 의사를 묻는 그의 물음에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이데카른이 그렇게 물은 이유를 베키는 금방 알 수가 있었다. "…좀 놓아 주시죠, 에드윈드 공자님." "헷. 싫어요." 에드윈드가 어느 사이에 베키의 소맷자락을 쥐고 있었던 것이다. 생글생글. 윽! 저 천진난만한 웃음이라니.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게다가, 베키 그녀는 그럴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어쩔 건가?" "저야 당연히, 같이 돌아……." 필살 눈빛 공격! '갑니다'라고 말하려고 하던 베키의 입술은 당연히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이데카른도 그녀를 빤히 쳐다본다. 에드윈드는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힌 눈빛으로 잡힌 소매를 당겼다. 베키는, ……어쩌겠나. 항복을 선언했다. "…가고 싶지만, 잠시 후에 돌아가겠습니다." 승리! 에드윈드는 하품으로 촉촉해진 눈가를 닦으며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베키는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고, 이데카른은 의아한 눈길을 지었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씨익 웃으며 재빨리 이데카른을 배웅(내쫓는 것에 가까웠다)했다. 베키는 내키지 않는지 인상을 쓰고 있었지만 그것 역시 에드윈드는 과감하게 무시했다. "이봐요, 에드윈드 공자님. 잠깐 이것 좀 놔 봐요! 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그는 그제야 잡고 있던 베키의 소맷자락을 놓았다. 그리고 생글- 웃어 보였다. 그 미소에, 베키는 어깨에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어린 아이를 앉혀놓고 이게 뭣하는 짓거리람. "왜요? 나하고 좀 놀아줘요. 난 당신이 맘에 든다고 말했잖아요." 물론, '어린 아이'라고 하기에는 좀 조숙하고, 키도 그녀보다 크긴 하다. 하지만 그것은 베키에게 고려 사항이 되지는 못했다. 그녀는 최대한 건방지게 느껴지지 않을 톤으로 들리게 노력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말했다. "…장난은 그만 하라고 말씀드리려 남은 거예요, 꼬마 도련님." 에드윈드의 눈썹이 움찔했다. 아마 '꼬마'라는 단어에 신경이 꼬인 것이리라. 훤히 읽히는 반응에 베키는 나지막한 웃음을 베어 물었다. "저는 지금, 루피아 아가씨에 대한 생각으로 도련님의 장난을 너그럽게 받아들일 만한 여유가 없어요. 그러니 이런 식의 장난은 그만둬 주길 바랍니다." "어째서 장난이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진심일 수도 있잖아요." 하! 진심? 베키는 발끈한 듯한 에드윈드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물론 표나지 않게). 에드윈드의 얼굴은 굳은 채 그녀를 향하고 있었고, 베키는 최대한 부드럽게 말하려고 노력하며 입을 뗐다. "…자! 장난은 여기까지. 특별히 전할 말이 없으시다면, 저는 이만 가 보죠. 이데카른 도련님께서 먼저 떠나시는 바람에 저는 따로 걸어가야 해요. 뛰어가도 2시간이라 걸어가면 3시간이나 걸린다구요. 빨리 출발하지 않으면 하루가 다 저물어서 위험한 밤거리에서 저 혼자 헤매게 될 지도 몰라요." 아아, 그러고보니, 이데카른 도련님이 떠나셨으니 마차도 없다. 그 먼 거리를 걸어가야 하나? 발목이 삔 것의 후유증이 아직 채 가시지 않았는데 말이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퉁퉁 부은 발과 발목을 보게 되리라는 생각에 베키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다 이 철없는 도련님이 쓸데없이 붙잡은 것 때문이야. 그런 베키의 생각을 아는 지 모르는지, 에드윈드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꼬마 도련님'이라는 말은 좀 심한 모양이었다. 18살이면 성년임을 인정받는 이 제국에서, 이제 2년 후면 성인이 되는 귀족 도련님이 아니었던가. '꼬마'라는 말은 아무리 7살의 나이차가 난다고 해도 좀 심했던 모양이다. 어쩔까 고민해 보던 베키였지만 이내 관두기로 했다. 어쩌기는 뭘 어째? 가만 놔 두는 수밖에 없다. 사실, 에드윈드 정도의 신분이라면 베키를 유린(?)하는 건 아무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 베키가 맡은 역할이 역할이고(그걸 믿고 이러는 것이다), 하도 루피아 옆에 있다보니 그녀의 '막가라 제 멋대로 사고방식'이 약간 옮아버렸다. 덤으로, 미스릴 갑옷입고 소풍가는 정도는 아니더라도 철판을 두르기는 한 간도 가졌고 말이다. 어색하게 서서 볼을 긁적이던 베키는, 서서히 들려지는 에드윈드의 얼굴을 보고 인상을 팍! 일그러뜨렸다. "대단해! 더욱 마음에 들었어요, 베키 양! 후훗- 그 배짱이라니! 아아, 더 포기할 수 없겠는 걸요? 음- 내 행동에 약간 장난기가 베였던 것은 어쩔 수 없어요. 성격이 그런 걸. 거기다 '꼬마 도련님'이라니, 그런 친밀한 표현(?)을 할 정도로 내가 가깝게 느껴졌던 거예요? 이거 장족의 발전이네!" 참담함과 패배감에 버무려진 얼굴이 아닌, 흥분을 가라앉히려 애쓴 흔적이 다분히 보이는 얼굴이 보였던 것이다. 눈이 반짝거리는 에드윈드의 부담스러운 시선에서, 베키는 겨우 고개를 돌렸다. "거기다 어찌 보면 우울해 보이는 내 태도에도 '동정따윈 꿈도 꾸지 마!'라는 듯 냉정한 태도라니. 더 반해 버렸어~ 그리고 걱정 말아요. 마차는 내가 잡아줄게." 반말과 존대를 섞어가며 밝게 말하는 에드윈드의 태도에 베키는 질렸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아, 이 꼬마 도련님은 어깨에 힘이 쭉 빠지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아. 정말… 힘빠져. 베키는 '그럼 마차나 잡아 주세요'라고 말한 뒤 힘없이 뒤돌았다. 그녀의 발걸음은 패잔병의 그 것이었다. 저 힘 넘치는 꼬마 도련님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 이라고 베키는 판단했다. 어깨에 힘이 쭉 빠진 채 뒤돌아 가 버리는 베키의 뒷모습을 보며, 에드윈드는 만족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흠, '장난'이라… 시녀의 입장인 그녀가 느끼기에 자신의 행동은 충분히 그렇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그걸 생각 못 했네. 에드윈드는 가볍게 웃었다. 확실히 그런 태도는 그의 성격 탓이었다. 하지만 아까 그녀에게 말했듯이 절대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근데… <꼬마 도련님>이라고? 7살밖에 차이나지 않으면서. 그건 좀 신경쓰이네.' * * * * * * * * * * * * * * * 마계의 들판은 황량하다. 태양은 없지만 언제나 회색빛 가득한 하늘 아래, 적빛 토양이 깔린 땅이 대부분인 것이다. 물론, 나무나 꽃, 풀이 아예 없다는 건 아니다. 울창한 숲의 나무는 마계 전역에 깔린 어두운 마기를 양분으로 하여 자라고 있고, 풀과 꽃 역시 마찬가지다. 태양의 빛 대신 마기를 마시며 자란다는 것이 중간계와의 차이점일 뿐이다. 하지만 자라는 식물들은 받아들인 마기를 견디고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 아니면 마기에 타 죽어 버리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울창한 숲이 있는 지역의 풀, 나무, 꽃들만이 울창하고, 아닌 곳은 아예 풀 한 포기 찾아볼 수 없다. 이 곳은, 아주아주 황량한, 진하디진한 적빛 토양이 넓게 펼쳐져 있는 마계의 일반적인 땅 위였다. 건조한 바람이 불어 와, 그 땅 한 가운데에 서 있는 자의 붉은 머리카락을 휘저었다. "…여기가 어디지?" 아주아주 선명한 붉은색 머리카락이었다. 루비를 그대로 뽑아 만들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정말 선명하고 붉은색이었다. 하얀 피부를 가지고, 물기 촉촉한 붉은 입술을 옹알거린 그 자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휘이잉- 바람이 불어 다시 한 번 그의 머리카락을 흐트렸다. 그는 의아함으로 얼굴을 살짝 찡그러뜨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금빛 섞인 붉은 눈동자에는 약간의 짜증이 섞이는 듯 하자, 곧 절규(?)가 터져 나왔다. "실패야, 또? 으아악~ 쉽게 성공할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이게 뭐야아! 여긴 또 어디란 말이야아~ 으아아아앙- 카른, 나 데리러 와줘~ 로이비스으으~" 딜렌은 우아악- 하고 절규하며 손에 들린 조그마한 병을 내던져 버렸다. 콰아앙- 하고 작은 규모의 폭발이 일어났다. 병 안에 들어있던 것은 투명한 소량의 액체로, 아마 조금만 잘못 다뤄도 폭발하는 것이었던 모양이다. 카른의 궁 벽을 날려버린 폭발물의 정체가 이 것이라는 것은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물로 변해서 나 자신을 컨트롤할 수 있는 연구였는데! 이 것만 성공하면 되는데! 거의 다 된 것 같았는데에~ 흐아아앙- 으아아앙- 카르으으은- 히에엥, 로이비스-!" 그는 소리높여 울었다. 그러나 황량한 바람만이 그의 몸을 훑고 지나갈 뿐, 그가 애타게 찾는 카른과 '로이비스'라는 자는 올 기미가 없어 보였다. 이 곳이 어딘지 본인조차 모르는 데야, 이런 곳에서 소리높여 운다 한들 불리는 사람이 올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런 기본적이고도 당연한 상식을 타파하고, 그의 울음소리에 곧 대답하는 이의 목소리가 더해졌다. "~~~이, 이, 이 골칫덩이야아아앗!!!" 땅에서 불쑥- 무엇가가 솟구쳐 올랐다. 아니, 땅이 아니었다. 그것- 아니 그는 바로 딜렌의 그림자 속에서 솟아 나왔던 것이다. 그림자에서 몸을 다 빼자마자 딜렌에게 달려들어 꿀밤을 먹여 버리는 자는, 바로 물빛 머리의 카른이었다. 훌쩍대던 딜렌은 바로 카른의 허리에 엉겨 들었고, 카른은 주먹을 꾹 쥐고 부들부들 떨었지만 곧 딜렌의 머리를 토닥여주기 시작했다. "우아앙- 조금만 더 하면 됐었는데! 다 해낼 수 있었는데!" "……딜렌. 너, 이제 연구 그만 해라." 가망없다는 걸 알면서도 하는 말이었다. 카른의 예상대로, 딜렌은 머리를 강하게 내저었다. "싫엇! 계속할 거야." "……널 누가 말리겠냐. 그래그래. 가서 밥이나 먹자." 종적을 감췄던 딜렌을 찾아 다니는 도중, 카른은 아주아주 먼 곳에서 자신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예전에 맺었던 그와 딜렌 사이의 <맹약盟約>덕분이었다. 한 일주일은 모습을 드러내기는커녕 기척도 내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카른은 뒤통수를 맞은 느낌을 받으며, 그를 부르는 딜렌 곁으로 당장 몸을 옮겼다. 하지만 도착한 곳은 마계 어딘가에 있을 황량한 들판이었고, 그를 맞은 것은 훌쩍이며 울고 있는 딜렌이었다. 결국, 딜렌의 눈물에 약한 카른은 그를 얼렁뚱땅 용서해 넘기는 수밖에 없었다. "훌쩍. 나, 너무 안타까워. 배고파~ 졸려어." "딜레엔~ 너, 또 연구한답히고 밥도 굶고 밤도 샜지? …무조건 쉬어! 너, 또 연구실로 달려가면 다시는 연구 못 하게 할 줄 알아! 내 옆에 꼭 붙어 있어!" 카른은 딜렌의 어깨에 손을 얹고 텔레포트의 수인을 맺었다. 칭얼거리는 딜렌과 잔소리하는 카른은… 마치 다정한 모.녀.(母女)같았다. --------------------------------------------------------------------------- ...결국은 이렇게 다시 늘어지고 마는군요..ㅠㅠ 요즘 분위기가 분위기이다보니(완전 놀자판!) 기합 넣기가 힘들어요. 에구야..-_- 멜은 donghee425@hanmail.net으로 보내 주시구요~ 리플^-^ 즐독하세요! 제 목: [수정판] 공녀(貢女) : 제8화 [도를 아십니까?](2) #. 제8화 [도를 아십니까?] * * * * * * * * * * * * * * * 세키라는 눈앞에서 배경이 점차 확실한 형태를 갖추어 가자 눈을 꼬옥 감았다 다시 떴다. 머리가 어지러운 기분이었다. 주위의 모든 것이 흐릿하게 사라졌다 완전 다른 모습으로 윤곽이 잡히는 것은, 많이 겪어보지 않은 이상 쉽게 적응하기 힘든 일일 것이다. 속까지 울렁거리는 게, 심하면 멀미가 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괜찮아?" "예… 예. 괜찮습니다." 방금 아로데의 텔레포트로 이동해 온 곳은, 다름아닌 '마왕성'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녀를 데리고 이 곳으로 온 그는, 그의 행동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해 주지 않았다. 물론 그가 그녀에게 일일이 다 말을 해 주어야 할 의무는 없었지만 말이다. 첫 번째 이 곳에서 연회를 치르고 난 뒤 3일 동안, 그녀는 줄곧 아로데의 수집품들에 둘러싸여 생활했다. 루피아 걱정도 하곤 했지만, 누구보다 자신의 앞가림을 잘 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괜찮았다. <드벨 전쟁> 이전의 물건들이라 세키라는 그 것들에 대해 이것 저것 연구를 하거나 마계어 익히기, 짧은 문장 읽기 등을 반복하며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어제 마왕성으로 갔던 아로데는, 그런 그녀를 무작정 이 성으로 끌고 와 버렸다. "음… 어떻게 보면 네 친구를 위한 일이니까 수집품 둘러보는 건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지. 우선은 방부터 정하는 게 좋겠어."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주위를 휙휙 둘러 보았다. 도착한 곳은 마왕성 어딘가의 복도였고, 주위를 살피던 아로데는 세키라를 문 앞에 두고 문을 벌컥 열어 보였다. 아무래도 이 방이 가장 좋겠다는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다. "이 방하고 내 방은 저기, 저 문으로 연결되어 있어. 필요하면 부르고, 음… 우선은 밤이 늦었으니 자도록 해. 나는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서." 세키라는 그야말로 어리둥절한 심정이었다. 정말 빠르게 일어난 일이었던 것이다. 수집품을 보고 있던 그녀 앞에 불쑥 나타나서, 그녀 손을 이끌고 무작정 마왕성의 복도로 텔레포트, 그 다음 마음대로 방을 정해 '자'라는 한 마디를 남긴 채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 이 모든 것은 1시간도 채 안 되어 이루어진 일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는 굉장히 바빠 보였다. 세키라는 우선 방을 둘러 보았다. 고급스럽지만 우아하게, 그리고 심플하게 꾸며져 있는 방은 중앙의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불꽃과 마법등으로 밝혀져 덥혀진 공기로 훈훈했다. -그러니까, 예전 그녀가 맨 처음 묵었던 방과 별반 다른 점이 없다는 것이다. 마왕성의 방은 이 방이나 저 방이나 다 똑같은 건가? 어쨌든, 마왕성- 내일이면 루피아를 만날 수 있을 게다. 그럼, 그 이상한 행동들도 해명을 부탁할 수 있겠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작 자신의 발등에 난 불은 끌 수 없으면서, 남의 난롯불에 불 번질까 걱정하는 꼴이라니. 그녀는 생각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 아로데, '마족'이라는 그녀의 상식에 걸맞지 않게 그녀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어 머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사람. 더불어, 미심쩍은 찜찜함을 불러 일으키는 사람이기도 하다. 이제껏 꾹꾹 눌러오기만 했던 이상한 기분의 정체도 궁금했다. 적어도 맨 처음 생각했던 '불쌍한 인질 신세'는 아닐 듯 싶었다. 마족은, 그녀들을 존중해 주는 편이었고-(상황을 보건데, 아마 공녀들 쪽에서 오히려 마족들을 존중하지 않는 듯하다) 무리한 요구를 하지도 않았다. 이 시점에서- 그녀들이 취해야 하는 태도는? 행동은? '……모르겠어.' 모른다. 알 수 없다. 수동적인 자세만 취해 왔던 자신이었다.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행동하는 데에 익숙하지 않았다. 세키라는 그런 자신을 저주하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에리나라면, 루피아라면 이런 상황에서 주저함이란 없었을 테지. 분명, 자신의 가치관과 인생관에 따라 옳은 판단을 내리고 행동하는 데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을 터였다. 세키라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 내일 생각하자. 루피아를 만나보고, 얘기하고, 에리나를 만나보고, 얘기하고 나서 생각하고 결정해도 늦지 않다. 그녀는 목욕을 하기 위해 가운과 욕실을 찾았다. 욕실로 향하는 발걸음을 옮기는 세키라의 입술에서는, 다시 낮은 한숨이 내쉬어지고 있었다. * * * * * * * * * * * * * * * 세키라와 에리나의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차이점라면, 에리나는 '수집품 창고'가 아니라 밤중에 정원을 나돌아 다니다 유리아덴에게 끌려(?) 왔다는 것뿐이다.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한데…….' 에리나는 불만스럽게 눈썹을 모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확실하게 챙겨 온 세이버(Saber)를 응시했다. 그리고 한숨. 이미 머릿속에는 계획이 그러져 있었다. 그녀가 어려서부터 원해 왔으며, 지금도 변함없이 원하는 그 것에 대한 계획이 말이다. 하지만 망설여졌다.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란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꺼려지는 것이다. 에리나는 이제껏 자신이 살아 왔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무뚝뚝하지만 자상하셨던 아버지, 늘 활달하고 밝은 성격이었던 3살 위의 오라버니, 연약하신 어머니. 아름답고 상냥하지만 몸이 약하셨던 어머니덕분에, 에리나도 가족들에게서 항상 '연약'하게 다뤄졌다. 어머니의 성격은 지극히 '여성'다우셨다. 그리고 딸에게도 항상 그런 것을 바라셨다. 물론 에리나도 그런 것이 싫다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절친한 친구 중 하나인 세키라 역시 여성스럽고 연약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녀는 약하지 않다. 어머니처럼 손 대면 부서질 듯한 연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오라버니나 아버지는 그것을 전혀 알아주지 않으셨다. 간단한 체력단련 정도는 허락하셨지만, 결코 검을 잡는 것을 허락하시지는 않으셨다. 불면 날아갈까, 만지면 부서질까 그녀를 걱정하시는 어머니 때문에라도, 그녀는 함부로 '검을 배우고 싶다'는 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체력단련을 하겠답시고 간단한 운동을 하는 것조차 걱정하시던 어머니가 아니시던가. 그리고… 에리나는 천천히 떠올렸다.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의 눈을 직시하며 유리아덴이 했던 말들. 주술처럼 그녀를 잡고 놔주지 않던 그 말. '이 손으로… 하고 싶은 것.' 막지 않는다, 고 했던가. 에리나는 피식 웃었다. 그래, 알고 있다. 그 마족이라면 그녀가 원하던 바를 이루어 줄 수 있으리라. 그녀는 자신의 하얀 손을 들어 쳐다 보았다. 잘 다듬어진 손톱, 새하얀 손, 가느다란 손가락. 더없이 '예쁜' 손이었다. 하지만, 결코 그녀가 원하는 손은 아니다. 그녀는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꾸욱, 힘을 주며 에리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 * * * * * * * * * * * * * * "음- 우선 서열 2위이신 '아로데 드 벨로시스'님은 벌써 2대째 마계의 이인자 자리를 고수하고 계시구요, 서열 3위이신 분은 '로이드윈 드 스켈로테'님이신데 이 분의 신경에 거슬리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다는 소문이 뒤따르고 있어요." 오랜만에 메를리나의 <마계, 이제는 당신도 전문가!> 특강을 듣던 루피아는 로이드윈에 대한 설명에 어색하게 웃었다. 역시 그는 뒷공작을 하는 타입이었던 것이다. 신경에 거슬리면 두고두고 후회하게 되는, 무서운 타입. "서열 4위는 '유리아덴 드 샤벨'님이 차지하고 계세요. 이 세 분은 마계에서 군주님을 제외하면 가장 강력한 권력을 구사하고 계신답니다. 군주님을 제외한 서열 2, 3, 4위에게는 특별히 주어지는 특권이 있는데, 그 자신의 성(姓)과 이름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에요. 서열 5위부터는, 이름은 몰라도 성은 정해져 있는 것을 써야 하죠. 서열 5위부터 50위까지는 모두 <캐플리츠>라는 성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51위부터 100위까지는 <스카필타>, 그 뒤부터 150위까지는 <테스켈트>, 그 뒤부터 500위까지는 <다크시언>을 쓰죠. 이 500명은 마계의 곳곳을 관리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뒤부터는 성이 없어요. 그렇게 최고위 마족과 고위 마족이 구분되죠." "그럼 '고위 마족'이라 칭해지는 이들은 어떻게 구별이 돼?" "보통 '고위 마족'이라 칭해지는 건, '붉은 눈' 일족, '그림자' 일족, 그리고 '안개' 일족의 순수혈통을 말해요. 최고위 마족도 거기에서 뽑아진 거랍니다. 물론 500위까지의 최고위 마족은 모두 '붉은 눈' 일족의 순수혈통들이지만 말이에요." 루피아는 메를리나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족 중에서도 저러한 구분은 있는 모양이었다. 말을 하는 메를리나의 눈에 떠오른 자부심을 봐서는 그녀는 자신이 '붉은 눈' 일족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보면 이제껏 그녀가 본 모든 마족들의 눈이 붉은 색이었다는 것이 설명이 되었다. 마족은 다 눈이 빨간 줄 알았는데. "이 성에서 일하고 있는 모두는 순수혈통은 아니지만 자부심을 가지고 있답니다." "알았어. 계속해 봐." 눈을 반짝이는 루피아를 보며 메를리나는 풋, 하고 웃음을 작게 터뜨렸다. 귀를 쫑긋 세우고 자신의 말을 듣는 루피아를 보자니, 꼭 어린 동생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에게 동생은 없지만, 그래도 동생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 거다, 라고 메를리나는 생각했다. "마족 중에서도 조금… '괴짜' 소리를 듣는 사람에 대해 말해 볼까요?" 루피아는 왜 갑자기 그런 얘기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곧 흥미를 느끼며 눈을 반짝거렸다. 메를리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제 일순위로 꼽히는 분은 서열 8위이신 '로아이나 드 캐플리츠'님이시죠." "로아이나? 여자?" 여성형 마족은 600위부터라는 말을 언뜻 들은 기억이 났다. 메를리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틀림없는 남성형이세요. 여성형 고위 마족은 서열 600위부터 있어요. 분명 멋… 있으시고……." 메를리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이런 경우, '멋있다'는 수식어를 써야 할까? 잠시 고민하던 메를리나는 '멋있다'고 해 두기로 결정을 내렸다. 누가 뭐라 하든 '멋'은 있었으니 말이다. "괴짜라고 하면, 남들보다 특별히 개성이 강한 사람을 말하는 거잖아. 그 사람은 대체 뭐때문에 괴짜라고 불리우는 거야?" 고개를 갸웃거리는 루피아에게 메를리나는 생긋 웃어주며 말했다. "훗! 쪽집게 점집을 하시거든요." 루피아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점집? 대체 무슨 말이냐고 물어 보려고 하자, 메를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늦었어요. 주무셔야죠. 내일도 군주님께 가시려면." 팍, 루피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왜 하필이면 그 말이야? 구겨진 루피아의 얼굴에 풋, 웃음을 터뜨린 메를리나는 실핏한 웃음을 띠고 말했다. "자, 자. 어서 주무세요." 그리고서, 메를리나는 불을 꺼 주고 가 버렸다. 꼭 어린애 달래는 듯한 행동이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쳇, 메를리나는 내가 동생인 줄 아나 봐. 요즘들어- 아니, 이 마계에 오고 부터, 루피아는 제대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왠지 잠이 잘 오지 않는 것이다. 이 곳에 온 지 벌써 열흘이 지났지만, 그 동안 제대로 잔 시간은 하루에 겨우 두, 세시간 정도 뿐이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아무리 쉬고 싶어도 잠은 오지 않았다. 몸은 피곤한데, 침대에 몸을 뉘여도 눈은 말똥말똥하게 뜨여지는 것이다. 밤만 되면 정신은 더욱 맑아졌다. 마치 차가운 물 속에 들어앉아 있는 것만 같이 말이다. 눈을 감으면, 그려지는 얼굴들이 있다. 밝고 부드러운 어머니, 아버지, 그녀를 끔찍히 아껴 주었던 세 오빠들. 베키를 비롯한 저택 안의 모든 사람들. 하나 하나, 루피아는 천천히 그려 보았다. 어둠 속에서 차차 형상을 갖춰가며 따스하게 웃는 사람들의 얼굴을, 아주 천천히. 코 끝을 자극해 오는 향기로운 아카시아 향기… 정원을 커다랗게 차지하고 있던 아카시아 나무에 가득히 피었던 꽃, 아찔하리만큼 강렬했던 그 향기. '이 아카시아 나무가 조금 더 빨리 왔더라면 좋았을 걸. 루피아, 이 나무는 말이야. 아버지께서 네가 태어난 걸 기념하시려고 에스베크 공작각하께 특별히 부탁해서 숲에서 옮겨오신 거야. 어때… 자, 봐. 예쁘지?' 5월이면 눈 앞 가득 하얀 꽃망울이 터지며 향기로운 향기를 잔뜩 뿜어냈다. 그럴 때면 그 향기에 취하는 듯한 느낌도 들어 머리가 어질해졌던 기억이 있다. 빙글빙글, 세상이 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늘하늘 떨어져 가는 아카시아 꽃잎의 춤을, 루피아는 가장 좋아했다. 창 밖에서 아카시아 꽃잎들을 바라보거나, 아니면 직접 아카시아 나무 위에 올라가서 바라보곤 했다. 그럴 때면, 옷 자락에 꽃잎이 묻어 베키에게 한 바탕 잔소리를 들었다. '……울어서는 안 돼. 아직은 안 돼. 꾹, 꾹 참았다가… 나중에. 그래, 나중에.' 잠시 뒤척이다가, 루피아는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 뒤척이면서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다는, 잠시 산책이라도 하는 것이 낫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루피아는 마법등 하나를 조심스럽게 켜서 옷을 갈아 입었다. 마계에 와서 편해진 것을 하나 대라면, 루피아는 의복을 선택할 것이다. 복잡하고 미묘하며 불편한 구조를 가졌던 중간계의 드레스와는 달리, 마계의 의복은 너무나 간단하고 간편했으며, 활동하기 편한 디자인이었다. 간단하고 간결한 최소한의 바느질로, 매듭으로 실용성을 중시한 디자인. 루피아는 몇 분만에 옷을 갈아 입고 방문을 열고 복도로 나섰다. * * * * * * * * * * * * * * * 루피아는, 어렸을 때부터 복잡한 길이 싫었다. 무엇을 그리도 꼬아 놓았는지, 꼭 사람을 놀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루피아도 '미로'의 필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귀족이라면 으레 걱정해야 하는 암살이나 정치적 대립관계에 있는 적에 대한 경계로 대귀족에 속하는 사람들의 저택은 하나같이 복잡한 미로의 형태를 띤다. 그 점에 있어서, 엘 세느안트 저택은 정말이지 아주 충실한 귀족가의 저택 형식을 따랐다고 볼 수 있었다. 엘 세느안트 공작의 성격상, 그는 아주 철저하게 일을 처리했다. 하지만 그런 방식에는 적이 따르기 마련이었다. 그 점을 잘 알고 있는 엘 세느안트 공작은, 단 1%의 위험 가능성도 남겨놓지 않았다. 더군다나, 엘 세느안트 공작의 극성스런 성격 탓에(루피아에 대한), 느닷없이 숲에서 엘 세느안트 저택 정원으로 옮겨져 버린 아카시아 나무 탓에 엘 세느안트 저택의 길은 정말 복잡했다. 그런 곳에서, 루피아는 길치와 방향치의 설움을 잔뜩 만끽하며 자랐던 것이다. 내부 지도로 길을 외우고, 외우고, 또 외워도 루피아는 늘 길을 잃었었다. 지금이야 살았던 세월이 세월이니만큼 다 외우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외웠다는 것 뿐, 결코 길을 잘 찾을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여긴 어디야?" 그 실수를 번복하지 않기 위해 루피아는 마왕성 내부 인테리어를 할 때, 길을 잃을 경우도 대비했었다. 길목마다 일정한 표식을 해 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루피아는 '그때 해 놓았던 표식이 대체 왜 사라진 걸까?'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그때 루피아가 해 놓았던 표식이란 간단한 장식물을 말한다. 루피아는 이 방식으로 엘 세느안트 저택의 길을 외웠고, 그 방법으로 이 곳에서도 해 보리라 생각하고 장식물을 놓아 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시녀들의 협조가 있었을 때의 얘기다. 엘 세느안트 저택에서야, 그녀가 길치임을 잘 알고 있는 친숙한 시녀들이 그녀를 많이 도와 주었다. 하지만 이 곳에서는 아예 얘기가 다른 것이다. 마왕성을 관리, 청소하는 시녀들의 손에 닦이고, 옮겨지고, 깨어지는 장식물은 이미 루피아가 놓아 두었던 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이런… 내가 같이 꾸며 놓고 길을 잃다니. 나란 앤 정말… 어이구." 메를리나를 부를까? 잠시 고민하던 루피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어차피 산책하자고 나온 것이 아닌가. 어차피 부를 거라면 조금 후에 불러도 늦지 않다. 그런 속편한 생각으로 잠시 걷던 루피아는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복도 내부. 주위와 어울리지 않는 '어떤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상하다? 저런 게 여기 있었나? …없었던 것 같은데." 화려하지는 않지만 '우아하고 신비롭게'라는 테마로 꾸며져 있는 내부와는 너무 맞지가 않았다. 그러기에는 너무 꾀죄죄했던 것이다. 어슴프레하게 밝혀진 약한 마법등의 빛으로는 색을 확인할 수 없었으나 어두운 색조에, 나무 재질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문을 빤히 들여다 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슬쩍 열렸다. 그냥 갈까 했다. 저 문 안을 들여다 보면, 아니- 조금만 더 지켜보고 있으면 왠지 이상한 일에 휘말리게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피아는 그 자리를 뜨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이 '마법사'라는 것을 한없이 저주해야 했다. '이놈의 호기심때문에……!!' 실제로 호기심때문에 발등을 데인 적이 몇 번 있었지만, 다시 이런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루피아는 호기심에 져 버리고 말았다. 그녀가 한 발짝 앞으로 발을 내밀자, 문이 더 벌어지며 검은 망토 자락이 내비쳤다. "허, 헉?!" 화들짝 놀란 루피아가 다시 뒷걸음질로 한 걸음 물러서자, 그녀 앞에 자리한 문 안에서 고운 미성(美聲)이 들려 왔다. 무언가를 홀리기라도 할 듯 유혹적인 보이스. 조금은 가늘고 높은 듯한 목소리라 루피아는 처음에 그가 여자인 줄 알았다. 검은색 로브를 걸친 그는, 문 밖으로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후드를 깊숙하게 뒤집어 쓰고 있어 밖으로 드러난 것은 희미한 등불빛에 비추어지는 새하얀 피부와, 유혹적인 곡선을 그리는 새빨간 입술 뿐. 그리고,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한 마디. "도를 아십니까?" --------------------------------------------------------- 음.. 오늘은 좀 짧은가요?^-^ 멜은 donghee425@hanmail.net입니다. 의견, 감상 등등 보내 주세요^^ ...갈수록 짧아지는 꼬랑지. 즐독하세요^^; -------------------------------------------------------------- 자아- 카른 등장^^ 간접적이기는 했지만 딜렌도 나왔군요. 클리오라와 오르가프는, 뭐- 얘네들 얘기도 잘 적어야 하겠죠. 음! 훗, 벌칙은 그냥 시중들기였답니다. 뜸을 너무 많이 들였나?;; 어쨌든. 즐독하세요~(...;) 제 목: [수정판] 공녀(貢女) : 제8화 [도를 아십니까?](3) #. 제8화 [도를 아십니까?] * * * * * * * * * * * * * * * "이런… 제가 너무 수상해 보였나요? 다짜고짜 이런 질문을 하다니, 그런 오해를 받고도 남음이 있겠지만 말입니다." 생긋- 그의 입술이 다시금 유혹적인 곡선을 그렸다. 색기(色氣) 가득하다, 는 표현을 이럴 때 쓰는 거구나, 하고 루피아는 피식 웃었다. "아니요, 다만… 음, 조금 의외였을 뿐이에요.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거든요." "다행이군요. 그럼 혹시, 점(占) 보고 싶으신 생각이 없으신가요? 이렇게 아름다우신 분을 놀라게 한 대가로 복채는 특별히 공짜로 해 드리지요." 너무나 능숙하고 자연스럽게, 그는 그녀를 그가 등장했던 후줄근한 문으로 이끌었다. 루피아는 짐짓 경계했지만 그에게서 특별히 나쁜 의도는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아(미심쩍기는 했지만) 한 발짝 앞으로 내딛었다. 사실, 무슨 일이 있으면 메를리나를 부르면 된다는 생각의 결과였을 것이다. 이 마왕성이면 어디에서든 그녀를 부를 수 있을 것이고, 일단 그녀가 온다면 최악의 사태로 치닫는 것정도는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이런 식으로 간단하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결론을 내려 버리는 탓에 초래된 사태로 인해 그녀의 세 오빠들은 몇 번이나 고생을 해야 했음을, 루피아는 모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수상한 남자'는 유혹적인 미소를 띠우고 말했다. "이동식 점집, 성하(星河)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루피아 님." 점집? 순간적으로 루피아의 머릿속에 스치는 한 마디가 있었다. '쪽집게 점집을 하시거든요'라고 하던 메를리나의 말. 그리고 한 가지 의문도 떠올랐다. 이 남자, 대체 어떻게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는 걸까? 자신이 그렇게 유명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마계의 골칫덩이일 뿐인 그녀들, 그 중에 마왕성에서 머물고 있다 하더라도 마족들의 관심거리가 될 수는 없었다는 걸 루피아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스친 의문, 그리고 가벼운 깨달음을 본 것인지 그는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절 아시는 듯 하니, 그리 긴 소개는 필요하지 않겠군요. 그리고… 저는 점쟁이랍니다. 그래서 아는 거라고 하면… 훗, 믿지 않으시겠지요?" 당연하다는 듯이 루피아의 표정에 실풋 웃음이 어렸다. 그- 로아이나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그녀의 의문을 풀어 주었다. "군주님께 여쭈었지요. 덕분에 당신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답니다. 아… 군주께서는 제 질문을 그다지 달가워 하지 않으신 모양이지만요." 루피아는 그의 답에 눈가를 팍 찌푸렸다. 그래, 내 이름 정도는 알고 있는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의 이름을 모른다는 약간 이상한 생각도 들었다. "자… 여기 앉으시지요."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 루피아를, 로아이나는 의자로 이끌었다. 루피아는 상념에서 깨어나 주위를 자세하게 둘러 보았다. 그 낡은 출입구와는 달리 신비로운 별빛으로 가득한 주위는, 마치 밤 하늘 속에 둥둥 떠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은은히 비치는 달빛으로만 시야를 확보할 수 있는 어두운 공간 속에서, 루피아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로아이나와 마주 보았다. 갈색의 고급스러운 탁자 위에는 여러 가지 도구들이 널려 있었다.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는 여러 도구들은, 아마도 점을 치는 데에 쓰이는 모양이었다. 루피아는 그다지 점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런 것에 신경을 쓰는 성격도 아니었고, 어차피 닥칠 일, 괜히 불확실한 예정같은 걸 들어 무엇하겠냐는 생각도 가지고 들었기 때문이다. 들은 바로, 확실하게 명료하게 끝나는 말은 점쟁이들은 쓰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애매한 것을 루피아는 싫어했다. 뭐든지 하려면 확실하게 하는 것이 좋았다. 그렇다고 점쟁이가 무조건 사기꾼이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불확실한 말로 괜한 불안만 가지게 되는 게 싫을 뿐이다. 마치 밤 하늘에 떠 있는 것같은 주위 배경은, 그녀에게 약간이지만 경계심을 풀어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녀로 인해 바뀐 마왕성이 '100% 신비'를 자랑한다면, 이 곳은 '신비 97% 색기 3%'였다. 이 곳 주인의 분위기를 닮은 모양이었다. 로아이나는 우선 루피아에게 손을 내밀어 달라고 했다. 루피아는 아무 생각 없이 그에게 손을 불쑥 내밀었다. 약간 웃음기어린 입매의 그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고는 손바닥을 보며 말했다. "일명 손금이라는 건데… 사기성이 짙죠. 오, 생명선이 아주 기시군요. 재물, 행복선도 아주 좋아요. 운이 좋은 타입이시군요." 운이 좋다는데 누군들 기분 나쁘겠는가? 루피아가 싱긋 웃음을 짓자 로아이나는 그녀의 손을 놓아주며 다시 말했다. 그의 입가에는 어쩐지 장난기 섞인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말씀드렸지만, 사기성이 짙습니다. 그렇게 함부로 남에게 손을 불쑥 내밀면 안 돼요. 특히 루피아 님같은 미인이시라면. 그리고, 상대가 저같은 마족이라면. 마족은 조금 더 의심을 해 봐야 한답니다." "…충고, 감사하군요." 놀림당한 건가? 의도가 애매한 그의 말에 루피아는 말했다. 하지만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만약 상대가 마왕이었더라면 그녀는 아주 분했을 테지만, 이 사람에게는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로아이나는 어색하게 웃는 루피아를 보며 테이블에 놓아 두었던 카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는 능숙하게 카드를 섞었다. 빠르고 깨끗한 그의 손놀림에 루피아는 짧은 감탄을 터뜨렸다. 과연 전문 점술가, 라는 생각과 함께 어쩐지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흥미로운 표정을 보던 로아이나는 풋, 하고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한 두어번 더 카드를 섞던 그는 그녀의 앞에 섞인 카드를 ?, 부채처럼 펼쳐 보였다. 그리고 고르라고 했다. 참, 저것도 능력이다. 루피아는 짧게 웃어 보이며 그의 손에 아슬아슬하게 펼쳐져 있는 카드를 훑어 보았다. 어떻게 한 손에 저 많은 카드가 다 펼쳐질까? 역시 전문가라는 거다. 어쩐지 웃음이 나올 것 같은 느낌에 루피아는 중앙의 카드를 하나 뽑았다. 그리고 그 카드를 받아 든 로아이나는 루피아의 첫 번째 카드를 가장 오른쪽에 놓았다. 그는 다시 카드를 내밀었다. 루피아는 또 하나를 뽑았고, 다시 내밀어진 카드 중에 다시 하나를 뽑았다. 모두 세 개의 카드가 뽑히자, 탁자 위에는 그녀가 뽑은 세 장의 카드가 오른쪽부터 놓여져 있게 되었다. 로아이나는 세 개의 카드를 섞었고, 다시 카드를 뽑으라며 놓아 두었던 카드를 펼쳐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가 뽑은 카드는 가장 위에 놓이게 되었다. "저는 해석은 안 합니다. 제일 위 카드를 뽑아 보세요. 당신의 과거가 보일 겁니다." 루피아는 그녀가 제일 마지막으로 뽑은 카드를 뒤집어 보았다. 하지만 카드에는 아무런 그림도 보이지 않았다. 의아하게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자, 곧 그녀가 뒤집은 카드에서 어둠이 희석되어가며 그림이 드러났다. 하지만, 루피아는 알아볼 수 없었다. 웬 꽃 그림이 만발되어 있는 것이다. 이게 대체 무슨 뜻인지, 원. 하지만 로아이나는 그녀의 카드를 건네받더니 피식 웃었다.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셨군요. 저는 복잡한 걸 굉장히 싫어한답니다. 그냥 그림을 보았을 때 느껴지는 것으로 판단하면 되지요. 덕분에 카드도 이렇게 간단하고 말입니다. 정형화된 그림이란 없답니다. 카드 자체에 당신의 운명을 읽고, 거기에서 조금이나마 간단한 그림으로 표현하는 능력이 있어요. 물론, 저에게서 얻어진 능력이기는 할 테지만 말입니다." 꽃이 만발한 카드 그림이라니, 루피아는 하하 웃었다. 그래, 사랑을 많이 받긴 했다. 과분할 정도로, 부담스러울 정도로 많이 받았다는 것을, 그리고 아직까지 틀림없이 그녀는 사랑받고 있을 것이다. 가족들의 생각이 나자 루피아의 얼굴에 슬픔이 잠깐 떠올랐다 사라졌다. "자, 이제 오른쪽을 뒤집어 보세요. 현재를 의미하죠." 루피아는 오른쪽 카드를 뒤집었다. 뒤집힌 카드는 아까처럼 검은색이 점차 옅어지며 그림이 드러났다. 그림은 아주 선명했다. 검은 새장과, 그 새장 속에 갇힌 채 사슬에 묶여있는 보랏빛 새. 그리고 가장 위에는 X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건 특별히 해석이 필요 없을 듯 했다. 의미하는 바가 너무나 뚜렷하고, 대입시키기도 쉬우니 말이다. "지금, 당신은 불행하십니까?" 로아이나가 물었다. 루피아는 얼굴에 처연한 미소를 띠웠다. 그래, 알고 있었다. 이 상황은 운이 좋은 편이라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결코 행복하다고 할 수는 없다. 사랑하던 사람과 영원히 헤어지게 되었는데 과연 누가 행복하다 말할 수 있을까. 친구들이 함께 오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위안으로 삼기에는 그녀들에게 너무나 미안하다. 그녀들도 괴로울 텐데, 그것을 위안으로 삼자니 뭔가 죄를 짓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마치, 그녀들이 같이 불행해 진 것을 기뻐하기라도 하는 것 같지 않은가. 그녀의 미소를 본 로아이나의 입가가 굳어갔다. 로아이나는 카드를 내려 놓더니 물었다.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루피아의 눈썹이 꿈틀했다. 저런 것을 왜 묻는 것일까? 입으로 내어 설명하기 힘든 단어였다. '행복', 그것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아니, 애초 그런 것을 묻는다는 건, 저 사람은… 행복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일까? 비록 눈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루피아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왜 나에게 이런 것을 묻는 것일까. "글쎄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에게 행복이란… 상대적인 거예요. 불행해 본 사람만이 행복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행복해도, 그것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거든요. 상황이 변하고 나서 생각할 때, '아- 그때는 참 행복했지'라고 생각하는 게 보통이거든요. 그리고 나서 갑자기 행복하게 되면, 사람은 불안해 지죠. 언제라도 깨질 수 있는 유리처럼 느껴질 거예요." 불안할 것이다. 금방이라도 이 행복이 사라질까 봐. 그는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사랑'을 아는 사람이 좋을까요, 아니면 '사랑' 자체를 모르고 사는 게 좋은 걸까요?" 에? 루피아의 얼굴이 찌푸려지자, 로아이나는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사랑을 느낀 뒤, 그 달콤함에 메말라 애타도록 갈구하는 게 좋은 가요, 아니면 처음부터 그 감정 자체를 모르는 게 좋은 건가요." 그렇게 말하는 로아이나가 너무 아파 보여서, 루피아는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단 하나, 알 수 있는 건, 그는 분명 아픈 사랑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짐작뿐이었다. 아파하는 게 좋은걸까, 과연? 처음부터 몰랐다면, 그랬다면 행복할 수 있을까? 분명 행복이란, 사랑이란 좋은 거겠지만 말이다. 언뜻, 어디선가 들은 말이 기억났다. 차라리 몰랐다면, 차라리 사랑을 몰랐다면 더 행복했을 거라고 했던 것을 말이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세키라에게 들은 사교계의 한 귀부인 얘기였다. 귀족가문의 한 레이디가 사랑도 모른 채 정략 결혼을 하고, 그 뒤 진정한 사랑을 만나 행복해 하다가 남편에게 들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우연하게 세키라를 만나 속내를 털어 놓았다고 한다. 그것을 세키라는 루피아에게 이야기해 주었고, 루피아는 혀를 찼었다. 루피아는 눈을 감았다. 아직 로아이나가 느끼고 있는 것(아마도)과 같은 종류의 사랑은 아니겠지만,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처음부터, 그들이 주는 사랑을 몰랐다면… 나는……. 그렇게 생각하니 답은 간단하게 나왔다. "난… 아무리 아프더라도, 그래도 아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해요. 만약 모른다면." 루피아는 잠깐 말을 끊었다. "사랑도 모른 채 무미건조한 일상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요? 누군가를 그리워할 수 있다면, 그 대상이라도 있다면, 나는 정말 행복한 거라고 생각해요. 누군가… 그리워할 대상조차 없는 사람은, 그 사람이 정말 불행한 거죠." 갑자기 한 가지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마왕은, 그 사람에게는 '그리움의 대상'이라는 게 있을까? 그 남자에게, 과연 그러한 대상이 있을까. 하지만 루피아는 그 의문이 떠오르자 마자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알아서 뭐 하려고? 네가 알아서 뭐 하게, 루피아. 네가 알 것 없잖아, 그의 일은. 루피아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미래'가 남았지만, 루피아는 별로 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로아이나는 그녀의 대답을 곱씹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그녀를 향해 고개를 들었을 뿐이다. 루피아는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며 말했다. "미래는… 조금 더 나중에 알려 주세요. 안녕히 계시구요, 음… 다음에 만날 땐, 얼굴 보여 주세요?" 그리고 루피아는 출입구로 발을 옮겼다. 출입구 밖으로 몸을 빼고 돌아보니, 아까 그 꾀죄죄한 문은 사라져 있었다. 루피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이런 문이 처음부터 있었으면 애초 이 마왕성을 고칠 때 그녀에게 보고가 들어왔을 것이다. 그녀는 메를리나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허공에서 그녀의 시녀, 메를리나가 뚝- 떨어졌다. "…욱! 루피아 님… 자고 있었는데. 이 밤중에 대체 뭘 하시는 거예요?" 메를리나는 잠옷 차림이었다. 자고 있는 중에 소환된 것인 듯, 메를리나의 눈가에는 졸음이 가득했다. 그것을 본 루피아는 조금 미안하게 웃으면서 산책하다 길을 잃었다고 말하자 메를리나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이 밤중에 산책은 무슨 산책이야. "에휴, 왠만하면 길 좀 외우시라니까요. 아님 돌아다니질 마시던가요. 자, 돌아가요. 밤이 너무 늦어서 지금 돌아가도 몇 시간 못 주무실 테지만, 그래도 잠은 자야죠." 루피아는 하하 웃어 넘겨 버렸다. 따따따 쏘아대는 메를리나의 잔소리 신공은 계속되었고, 루피아는 연타에 연타를 맞으며 어색한 웃음으로 일관했다. 잠자던 도중 불려와서 심통이 난 메를리나의 잔소리는 평소보다 한층 더 강력한 데미지를 남겼고, 루피아는 미안함과 동시에 이러한 결심을 하게 되었다. '결코! 이제부터는 무슨 일이 있어도 메를리나를 부르지 않으리!' 과연 지켜질까 의심부터 되는 결심이었다. * * * * * * * * * * * * * * * 루피아가 그의 '공간'을 나서고 난 뒤, 한참 동안이나 로아이나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대로 숨이라도 쉬는지 하는 의심마저 들 정도로, 그는 어떤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움직이지 않던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렇겠지요… 그렇지만, 차라리 몰랐으면 했습니다." 그 사람은 알아주지 않을 테니까. 돌아봐 주지 않는 상대를 향한 사랑은, 그 어떤 것보다 괴롭다. 그가 아무리 사랑을 갈구해도 그 사람은 그에게 원하는 바를 주지 않는다. 그는 그녀의 원하는 바를 이루어줄 수밖에 없을 테고, 그녀는 그에게 아무런 대가없이 원하는 바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이리라. 그녀가 원하는 바가, 설령 그의 목숨이라도. 하지만, 아주 조그마한 가능성 때문에 그는 그녀의 바람을 거역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을 돌아 봐 줄 지도 모른다는, 아주 조그만 가능성 때문에. 존재 여부조차 알 수 없는 그 사실 때문에 말이다. 후드에 가려진 로아이나의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흘렀다. 하얀 볼 위로 흐른 눈물은, 그의 로브 자락에 떨어져 짙은 얼룩을 그렸다. 눈물이 흐르는 것을 의식도 못한 것일까. 로아이나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듯 했다. "…알아 주세요. 나를 봐요…… 다른 곳을 보지 마세요. 난……." 그렇게 해 주지는 않을 테죠. 나를 봐주지 않겠지요. 그게 당신이니까. 누구보다 냉정하고, 누구보다 나에게 잔인할 수 있는 사람이 그대니까요. 그리고 나는… 당신이 봐 주지 않음을 원망하지도 못한 채, 그저 기다리기만 하겠지요. 그대가 무엇을 원해도, 나는 그것을 이뤄주기 위해 발버둥을 치겠지요. 설령, 그것이… 이제껏 내 살아 온 모든 것이라 하여도… 내 영혼이라 해도, 목숨이라 해도, 나는 그대에게 모든 것을 바치겠지요…. ----------------------------------------------------------- 의외로 로아이나, 인기가 많더군요. 흠-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인물입니다, 로아이나는요. 후훗, 로아이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과연 누굴까요오~ 오호홋. 이번 편은.. 에, 원래 짧습니다. 원래 없던 부분이 로아이나 혼자 나오는 부분이죠. 괜한 신비주의는 이미 때려 치우기로 했기 때문에, 흠.. 딜렌이랑 카른의 사생활(?)도 나올 거예요. 이디스와 루피아가 나오는 장면은 더 늘리기로 했구요, 어떻게든 자연스러운 분위기로 만들어 보고자 노력 중입니다. 윽... 저 둘이 나오는 부분은 왜 그렇게 어색할까요. 에휴-...;; 멜은 donghee425@hanmail.net으로 보내 주세요. 비평, 의견, 감상 등등.. 즐독하세요!!^-^ 제 목: [수정판] 공녀(貢女) : 제9화 [마왕의 제안] #. 제9화 [마왕의 제안] * * * * * * * * * * * * * * * 오늘 하루, 이디스는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 까닭으로 짐작되는 사실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그의 기분은 더욱 저조했다. 그의 간단한 심부름을 해 주던 시종의 연약한 심장은 그의 조그마한 행동 하나 하나에 들어졌다 놓아졌다 하는 것을 모르는 이디스는 자신의 기분을 스스럼없이 팍팍 드러냈다(알았다 하더라도 관계없었을 테지만). 마찬가지로, 그녀- 루피아의 기분 역시 그다지 좋지 않았다. 옆에서 인상 팍팍 쓰면서 '나 지금 기분 나빠' 기류를 온몸으로 뿜어내고 있는 이디스의 모습 역시 한 몫을 하긴 했지만 그것보다 그녀의 기분을 하강시킨 건, 아침부터 들러서 조잘대고 갔던 로이드윈 때문이었다. 무슨 놈의 사내자식이 그렇게 말이 많아! 지극히 성차별적인 발언이었지만 루피아는 서슴지 않았다. 평소에, 그녀는 말 많은 남자를 싫어하는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좋아했다. 아니, 나쁘지 않게 생각했다고 하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너무 심하면 좋지 않겠지만, 적당히 말이 많아 심심하지 않게 해 주는 사람이라면 환영이라던 그녀였다. 하지만, 상대가 로이드윈이라면 달랐다. 옆에 불편한 얼굴인 '아유니'라는 여자까지 끼고 아침부터 달려 와서는 득달같이 달라붙는 꼴이라니. 요즘 '마족'에 대한 경계와 두려움이 무너지고 있는 차에 결정타를 먹인 행동이었다. 생긴 건 안 그럴 것처럼 말쑥하니 생겨갖고 하는 짓거리를 보면 영락없는 '바보'다(사실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루피아의 눈은 활활 불타 오르고 있다)! 뿐인가? 어젯밤에 도착했다고 하는 아로데와 유리아덴까지 등장해 그녀의 속을 박박 긁고 사라졌다. 물론 같이 이 곳에 온 세키라와 에리나는 정말 반가웠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아무 말도 없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 사라진 유리아덴은 그 속을 알 수 없어 더더욱 신경을 쓰이게 만들었다. 그녀의 하소연 아닌 하소연(…이라기보다는 그냥 흉보기에 가까웠다)을 듣던 에리나는 어깨를 으쓱, 해 보이며 '그 사람 원래 그래'라는 말로 간단하게 일축해 버렸다. 그녀의 말에 루피아가 할 말을 잃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 '마왕'이라는 직위의 남자가 그들이 사라지자마자 그녀의 앞에 와 이것 저것 잡다한 일거리를 던져주고 간 것도 기분이 나빠지게 하는 데 일조했다. 아아, 그러고보니 제일 신경쓰이는 건 이 옆이 마왕이잖아. 왜 인상을 찡그리고 앉아있는 거야? 루피아의 불만에 가득 찬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디스는 이디스 나름대로 자신의 저조한 기분에 대한 이유를 알아내어 보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짐작되는 이유가 하나 있긴 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너무 막연한 범위라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 사실이 더욱 그의 기분을 하락케 했다. 아침, 어제 떠올린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그는 루피아의 방으로 향했다. 오후에 그녀가 오면 전해도 될 것을, 왜 아침부터 그렇게 서둘렀는지는 그 자신도 정확히 알 수 없는 일이었긴 하다. 그가 본 광경은, 그녀와 그의 부하 로이드윈이 다정스레(그건 로이드윈뿐이고, 루피아는 이를 갈았다)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었다. 그의 불쾌감은 그 때부터 시작되었다. 왠지모를 불쾌함을 느낀 그는 로이드윈이 사라지자마자 그녀에게 달려가 할 필요도 없는 일까지 다 시켜 버리고 말았다. 그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요소'가 그의 안에서 그렇게 하도록 시킨 것 같았다. 이제까지 겪여본 적 없던 일이라 낯설기도 했고, 기분이 나쁘기도 했다. 그의 기분을 나쁘게 하는 요소들은 거기서도 그치지 않았다. 불만 가득한 얼굴로 찌푸린 인상으로 그의 집무실로 발을 들여놓은 루피아의 얼굴을 보자 가라앉혔던 짜증이 다시 밀려왔던 것이다. 하지만 짜증을 억지로 누르면서 인상만 찌푸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갑자기 떠오른 한 가지 기억은 그의 기분을 더욱 하락시켰다. 그가 떠올린 기억은, 어제 느닷없이 찾아 와 루피아의 이름을 묻던 로아이나의 모습이었다. 언제부터인가 푹 눌러쓰고 다니던 후드는, 이제 그의 일부가 되어 버린 듯 했다. 너무나 자연스러웠으니까. 그는 로아이나의 후드 속 얼굴을 떠올렸다. 하지만 왠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새하얀 얼굴과 유난히 붉던 도톰한 입술… 그리고 언제나 웃음기를 담고 있고 미소를 지으면 반달형으로 곱게 휘던 눈매가 생각났다. 그렇지만, 정확하게 떠오르는 사항은 없었다. 하지만 굳이 신경써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에 그에 대한 생각은 거기서 접기로 했다. 대체 왜 저 여자의 이름을 물었던 것일까? 그 점에 대해서는 궁금증이 동했지만, 그 것 역시 접어 두었다. 일단 그는 '어제 생각했던 것'을 실행으로 옮겨야 한다. 하지만 왠일인지 타이밍이 맞질 않았다. 그는 그녀가 들어 온 이후 시선을 놓지 않았던 서류에서 눈을 들어 그녀를 보았다. "루……." "군주님! 좀 쉬고 하시죠? 차와 간식 왔습니다아~" …이디스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서류를 정리하던 루피아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문가를 쳐다 보았고, 문가에는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서 있는 로이드윈과 아로데, 유리아덴이 보였다. 유리아덴을 제외한 두 마족은 참… 희한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에리나와 세키라, 아유니가 골치아프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래절래 젖고 있었다. 그들이 충분히 그럴 만 했다. 로이드윈과 아로데는, 자기가 무슨 성의 시녀라도 되는 마냥 하얀 프릴이 달린 앞치마를 두르고, 머리에는 프릴과 레이스로 화려하게 꾸며진 머리쓰개를, 손에는 차와 간식이 달린 쟁반을 들고 생긋생긋 웃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치마를 안 입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판이었다. 아아, 머리가! 마족에 대한 상식에 금이 쩍- 쩍 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호호호, 이 과자 좀 드셔 보세요. 이 로이드윈이 직접 구웠답니다. 솜씨 발휘를 좀 해보았지요. 오호호홋!" 거기다, 잔뜩 거만한 귀족 귀부인 흉내를 내며 콧소리를 내는 로이드윈의 말투는 그야말로 엽기, 그 자체였다. 이디스는 어이없는 듯한 헛웃음만 낼 뿐이고, 루피아는 할 말을 잃어 버렸다. 과자를 굽던 도중 많이 보았던 장면인지 세키라와 에리나, 아유니는 만성이 된 표정을 짓고 질렸다, 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더 가관인 것은 맞장구를 치는 아로데였다. "어멋! 정말 맛있게 잘 구워 졌네요, 로이드윈 부인. 호호호호- 어떻게 하면 이렇게 고소한 향내와 맛깔스런 색이 나올까요? 자자, 과자에는 차가 있어야지요. 제가 직접 재배한 찻잎으로 끓인 차랍니다. 향이 굉장히 좋을 거예요." 로이드윈은 그나마 유약해 보이는 몸, 여리여리한 얼굴이었기에 못 보아 줄 정도는 아니었다고 한다면, 아로데는 절대! 눈 뜨고는 못 볼 정도였다. 아로데 특유의 검은 얼굴에, 건장하게 떡 벌어진 어깨, 척 봐도 남자 티가 줄래줄래 나는 그가, 콧소리를 내며 다소곳한 행동으로 무장한 채 무차별 정신 공격을 퍼붓고 있는 것이다. 세키라는 울 것 같은 표정마저 지었다. "제발, 그만 하죠?" 루피아는 안 그래도 찌푸렸던 미간을 더욱 찌푸리며 말했다. 아아, 이런 상황에서도 경어를 사용해 주다니, 그녀 스스로가 생각해도 자신이 너무나 대견스러웠다. 로이드윈과 아로데는 질린 듯한 루피아의 표정이 비죽한 웃음을 짓고는 허리에 둘렀던 레이스 앞치마와 머리쓰개를 벗었다. 그제야 루피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음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여긴 왜 온 건가?" 침묵하고 있던 이디스가 입을 열었다. 그는, 자신의 말이 아무도 모르게 끊긴 것에 대해 무척이나 불쾌해 하고 있었다. 하긴, 누군들 안 그러겠냐마는. "건의드릴 사항이 몇 가지 있어서 말입니다. 사실, 누군가에 대한 경계의 의미도 있어서 이 성에 아예 자리를 펴 버린 겁니다마는 그건 제쳐 두기로 하고- 흐음, 교육이 너무 헐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이디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헐렁하다? 확실히, 이디스, 그의 명령으로 많은 마족들이 공녀들을 신전에 입문시키는 등 여러 교육활동(?)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성과는 미비했다. 신전에서 신력은 많이 늘었지만 아직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공녀가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마족들은 그녀들에게 별다른 기대도 걸지 않았다. 한 마디로 열의가 없다. 뭔가 조치가 필요할 듯했다. 현재, 공녀들의 대부분은 신전에 신관으로써 등록이 된 상태였다. 마왕성 가까이에 거주하거나 들락날락거리는 네 사람만 빼놓고는 거의가 다 어둠의 신 클리오라의 신관이 되었다고 봐도 무방했을 정도다. 하지만 공녀들이 듣고 배운 것은, '빛의 신이 무조건 옳고, 어둠의 신은 무조건 악하다'는 사상을 기반으로 이뤄진 것들이다. 어둠의 신 클리오라는 그녀들의 안락하고 풍요로운 생활을 앗아간 장본인이며 악의 표본이자 우두머리, 마족을 이끄는 마두(魔頭)였던 것이다. 비록 강압적인 마족들의 협박 아닌 협박, 강요 아닌 강요로 인해 신관이 되기는 했다. 하지만 진정한 어둠의 사제로 거듭나려면 '그래! 이미 이렇게 된 거, 난 모르겠다. 난 나한테 힘 주는 신한테로 갈란다! 진짜 빛의 신이 무조건 옳았다면 내가 이렇게 이런 곳에 올 리가 없다! 무조건 도움주는 신이 진짜 신이닷!'이라는 아주아주 편리하고도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지녀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는 게 어디 쉬운가? 루피아정도 되는 사고회로를 가지지 않고서야 저렇게 뛰어난 적응력을 갖기는 힘들다. 따라서, 각자 '보호자'가 된 마족의 저택에서 신관복 입고 '흑흑! 어머님, 아버님, 보고 싶어요!'하고 우는 게 보통 케이스가 되겠다. 그러한 여자들에게 짜증이 나 '불만토로 보고서'를 수십 장씩 써 올리는 마족들때문에 실질적으로 가장 고생하게 된 이디스가 그러한 것들을 모를 리 없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로데는 어느새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어 말을 매끄럽게 쏟아내기 시작했다. "따라서, 조치가 필요합니다. 공녀들에게는 정신상태를 뜯어 고치기 위한 계기가 필요하고, 마족들에게는 그녀들의 인상을 새롭게 심어 줄 필요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어떻게든 좋게 좋게 풀어 나가야 이득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려면, 일단 공녀들의 가치부터 올려야 합니다. 이 마계에서 통용되는 법칙은 단 하나! 약육강식(弱肉强食), 강자존(强者存)! 강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저와 로이드윈, 유리아덴이 머리를 맞대고 굴려가며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결과! 특별 강화 프로그램을 준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특, 특별 강화 프로그램?" 자신들에 관련된 일이기에 귀를 쫑긋 세우고 듣던 넷이 동시에 의문성을 발했다. "대부분의 공녀들은 현재 신전에 신관으로써 등록이 된 상태! 마신 클리오라 님의 축복으로 상당히 강한 신성력을 쓸 수가 있다고 보고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확실하게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물론 아직 미등록인 사람도 몇 있습니다만, 그들은 다른 특기를 개발해야 할 겁니다. 마족들이 달라붙어 직접!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군주님의 명령이 필요합니다." 아로데의 청산유수같은 말이 드디어 끝났다. 그의 입에 집중하고 있던 루피아들의 눈이 왠지 이상하게 변해갔다. 저렇게 말발이 세다니… 세월을 허투루 보낸 건 아니었나 보다. "그럼, 내가 해야 할 일은 네가 말한 것에 대한 명령을 내려주는 것뿐인가?" 이디스가 묻자 아로데는 씨익,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왠지 심기가 불편해진 이디스의 눈썹이 꿈틀하자, 아로데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물론, 그것 뿐입니다." "루피아는 제가 맡겠습니다." 아로데의 말에 이어 로이드윈이 재빨리 받았다. 왠지 이디스의 미간이 더 찌푸려 진다고 생각한 순간, 그의 입에서 그 자신도 생각지 못한 말이 튀어 나왔다. "…내가 맡지. 그만들 물러가 봐." 이디스는 갑자기 로이드윈이 튀어나와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말하는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다. 아침부터 루피아 앞에서 괜히 웃으면서 얘기를 나눠서가 절대 아니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다시 서류로 눈을 돌렸다. 며칠 동안 똑같은 내용만이 조금씩 문체가 바뀌어져 똑같은 레퍼토리로 늘여 놓아져 있었다. "왜, 왜요? 왜 굳이 맡으시겠다는 거예요? 바, 바쁘시잖아요!" 루피아는 굳어 있다가 겨우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 가지의 의문을 품은 눈을 하고 있었다. 차라리 저 귀찮고 수다스런 로이드윈이 낫지, 마왕하고 더 같이 있게 된다면 난 질식사하고 말 거야! 난 일찍 죽기 싫엇! 그러한 루피아의 외침을 모르는 이디스는, 거부 반응을 보이는 루피아가 신경에 거슬렸다. 정말 이상하게도, 아주 거슬렸다. "이제 볼 일은 다 끝났나? 너… 너만 남고 다 나가라." 마왕이 그녀를 지목하고 말하자 다른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사정- 루피아가 시중을 들어 주기로 한 사정을 알고 있었기에 순순히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마왕의 생각이 바뀐 것은 이상한 일이었지만, 어디 그들의 군주가 생각이나 행동을 예측할 수 있는 인물이었던가. '부디 살아 돌아오길 빌어줄게.' 세 마족은 자신들이 맡은 공녀를 하나씩 옆구리에 끼고 재빨리 방을 빠져 나갔다. 그들- 유리아덴마저도, 마왕을 혼자 감당(?)하게 될 루피아에 대한 묵념을 조용히 올렸다. '어째서! 대체 왜 저 사람이 나서는 거야?!' 루피아는 깜깜할 앞날을 생각하며 울부 짖었다. 하지만, 그녀의 앞에는 그저 침묵한 채 서류에 사인하는 마왕만이 있을 뿐, 구원해 줄 이는 없었다. * * * * * * * * * * * * * * * "……뭐, 라구요?" 지, 지금 내가 들은 말이 뭐였지? 루피아는 긴장으로 마른 목으로 침을 넘기며 귓가에서 떠나지 않고 웅웅 울리는 듯한 그 말을 되새겼다. "지금… 그 말의 뜻은……." 그러니까, 그러니까…. 루피아는 눈을 들어 태연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마왕을 보았다. 언제나처럼 태연한 시선이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어쩌면, 공녀들이 무시를 당하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 루피아도 현재 공녀들이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단순히 마신의 명령때문에 얻은 성가신 짐덩어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 이하도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방금 마왕이 뱉은 '제안'은, 그 상황을 바뀌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뜻했다. "서열 대회에서 적당한 순위 안에 들 수 있다면, 그게 설령 어떻게 얻은 힘이라도 관계없는 거지. 이 상황을 타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마계에서 공녀들은 상당히 어정쩡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단순히 마족들이 얻게 된 짐덩어리에 불과하긴 했지만 그 '신분'은 마족의 '아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마족들은 그녀들을 무시하고 경멸하긴 하지만 어느 정도는 존중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지키는 이는 거의 없지만 말이다(그들로서는 가만히 놔 두는 게 가장 최선의 배려다). 이디스로서도 그 제안은 이득이 있는 것이다. 그의 책상에 아직도 수북히 쌓인 보고서를 빙자한 불만들이 사라지는 것, 그리고 공녀들의 존재로 인해 시끄러워진 마계 정리였다. "……현실성은 있는 거예요? 어떻게 아무 힘도 없는……." "물론. 공녀들은 지금 대부분 신전에 몸담고 있지. 클리오라께서는 그녀들에게 축복을 내려 주셨다. 그 성력은 무시할 게 못 돼. 잘 갈고 닦는다면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리고… 제대로 정신만 차린다면." 마지막 말에는 미미한 비웃음이 곁들여졌다. "정…… 말?" "그래." 확인사살 끝! 루피아는 헤벌쭉- 벌어지는 입을 막을 수가 없었다. 아아, 갑자기 눈앞에 선 이 마왕이 너무너무 예뻐 보인다! 짜증으로 찌푸려진 미간도 그렇게 귀여워 보일 수가 없었고, 아름답던 외모는 뒤에 후광까지 비춰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1분 후에라도 후회할 짓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말았다. "…이… 야호오오오오! 아자아~ 꺄하하, 드래곤 레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거라더니! 딱 그 짝이야! 하하핫! 좋았어어어~" …하고 괴성을 지르며 이디스의 품 안으로 뛰어 들었던 것이다.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루피아가 앞에 있던 상대가 누군지 알 리 만무했고, 갑자기 루피아를 품에 안게 된 이디스의 몸은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그로서는 예상치 못한 기습(?)이었던 것이다. 굳어 있던 이디스는 방방 뛰는 루피아를 잠시 후 밀쳐 내 버렸고, 루피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자신이 한 짓을 깨달았다. 자신이 저지른 만행에 뒤늦게 굳어버린 루피아를 두고, 마왕은 재빨리 등을 돌리고 집무실을 걸어 나가며 말했다. "오늘은 그만 가 봐!" 결국 혼자 남겨 진 루피아의 굳어있던 얼굴이, 점차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아아, 희망이 보인다! 깜깜하기만 했던 앞길이 점차 열리는 것같은 느낌이었다. 그래도 힘들겠지만, 그래도 아직 힘든 상황이겠지만, 마족들의 경멸과 무시를 비켜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힘이 났다. 그녀는 아직까지 이렇다 할 무시나 경멸은 당해보지 못했다. 하지만……! "맞다! 이 소식을 빨리 세키라하고 에리나한테 전해 줘야지! 오늘 일도 끝났겠다… 아자!" 루피아는 재빨리 집무실의 문을 열고 달려 나갔다. 그녀가 복도 저 너머로 사라진 뒤, 문 뒤에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 그림자는, 루피아의 모습이 완전히 까만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나오지 않고 있다 겨우 모습을 빛에 드러냈다. 까만 어둠처럼 흐르는 긴 머리채, 단아한 얼굴. 굉장히 수려(秀麗)한 외모의 그는, 하얗고 가는 손으로 입가를 막고 있었다. 왜인지, 하얗고 투명한 그 얼굴이… 굉장히 붉어 보였다. "어… 어째서……?" 그래, 굉장히 붉어 보였다. * * * * * * * * * * * * * * * 우우웅- 거칠은 바람 소리가 귀를 자극해 왔다. 아멜리아는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더욱 움치리며 보드라운 이불을 끌어 당겼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대체 무엇이 잘못되어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녀는 평범한 백작 가문의 영양이었다. 그리 세도가 세지도, 약하지도 않은 딱 중간의 아주 평범한 집안의 딸이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커다란 능력이 있지는 않았지만 전형적인 귀족이었고, 그녀 역시 사치를 좋아하고 보석을 사랑하며, 자신과 결혼할 멋진 신랑감을 물색하며 사교계를 어머니와 함께 돌아 다니던 귀족영애였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이 바뀌어 버렸다. 이제 그녀는 적당한 신랑감을 찾아 결혼할 필요도 없었고, 그녀의 뒤를 보아 주던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어 버렸다. 이 곳은 그녀가 살던 곳이 아니었다.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곳이 아니었다. 이 곳에서 그녀는, 단순히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가치없는 약한 인간'일 따름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곁에는 악의 대명사이자 공포의 상징인 마족이 있었다.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거야… 훌쩍, 싫어. 싫어어. 나, 나는…… 무서워어." 아멜리아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는 '마족'에 대한 이미지는, 그다지 뚜렷하지 않았다.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온몸을 찌를 듯 엄습해 오던 아찔한 느낌과 선명한 붉은색의 두 눈동자뿐이었다. 그녀는 차마 그의 얼굴을 올려다 볼 수도 없었다. "구해 줘요. 누가 날… 흑흑, 나 좀 도와 줘요. 으흑흑!" 아멜리아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 상황을, 창밖에 서 있는 나무 위에서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검은 로브을 얼굴에 푹 눌러쓰고, 로브로 온몸을 온통 둘러 싼 그는, 로아이나 드 캐플리츠였다. 그는 뭔가 곤란하다는 듯한 기색이었다. 턱을 손가락으로 두어 번 두들긴 그는 어깨를 으쓱, 해 보이며 말했다. "…어떻게, 하나같이 저런 반응들밖에 없는 거지? 귀족 여자들은 자존심이 무척 강하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야… 휴우- 어쩔 수 없지." 마음에 들었으니, 좀 도와 줘야겠다. 로아이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뭇가지 위에서 모습을 지웠다. 그가 원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공녀들이 이렇게 수동적이면 안 되었다. 자발적인 움직임, 그게 그가 원하는 목적을 위해 필요한 요소였으니까 말이다. 허공 위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 낸 로아이나는 멀리, 비죽하게 솟아오른 탑만이 보이는 마왕성을 보며 빙그레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럼…… 설득하러 가 볼까. 후훗! 점술가를 하려면 말발은 필수지. 이런 건 내 전문이야." ============================== 음.. 상당히 오랜만이군요.=.=; 크리스마스도 있었구.. 상당한 일들이 겹치는 바람에 제가 풀어졌었다고나 할까요? 하여튼 놀고 싶은 마음이 자꾸자꾸 드는 바람에 한 동안 손을 못 댔었습니다. 으..;; 으아아, 이놈의 귀차니즘·게으름병 좀 고쳐야 하는데 말이에요. 이것도 병인데..ㅠ0ㅠ 그리고, 신혼 일기에 올라 온 리플들은 정말 고마웠습니다. 감사드려요^^ 그 리플들 보고 감동의 물결에서 한동안 헤어나지 못했다는 네르..; 멜은 donghee425@hanmail.net이구요. 의견, 감상 등등 환영입니다. 즐독하세요, 모두!^^ 제 목: [수정판] 공녀(貢女) : 제10화 [괴상한 밤손님](1) #. 제10화 [괴상한 밤손님] * * * * * * * * * * * * * * * 옛날 있었던 일을 돌이키다 보면, 지금은 볼 수 없는 사람을 생각하느라 눈물을 짓게 되기도 하고, 추억들을 떠올리며 웃음짓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나에게 있어 마계에 있었던 당시의 일을 되새기는데 이 사람을 빼 놓을 수는 없다. 비록, 나에게는 독(毒)이 된 사람이지만.아아, 그는- 만나서는 안 되었을 사람일런지도 모른다. 그는 나에게 술친구이자 대화 상대였다. 그리고 '마왕'에 대한 투정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정체를 모른다는 점도 편하게 맘을 가지게 하는 데에 한몫 하기도 했다(사실, 그는 참 이상… 아니 아주 많이 이상해서 그렇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나는). 그를 만났던 그때는- 글쎄, 많이 복잡하고 어색한 상황이었다. '적응하는 시기'라고나 할까? 여러 가지로 내 인생에 많은 영향을 미칠 사람들과의 만남이 있었던 때라고나 할까… 어쨌든, 그는……. ==================루피아 자서전' 中 발췌========================== 쉬익! 쉭! 때는 야심한 밤. 어둠에 잠겨 청, 은, 적색의 달만 덩그러니 떠 있는 마계의 밤을 가르는 한 인영(人影)이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피는 폼이, 결코 당당한 입장은 아닌 것 같았다. 검은 두건을 머리에 쓰고있고, 온통 검은 옷으로 두른 것을 보아도 그건 자명한 일이었다. 어쨌든, 그는 황금빛 섞인 붉은 눈동자를 불안하게 굴리며 주위를 홰홰 돌아 보았다. 분명히 아무도 있지 않았다. 하긴, 이 야심한 밤에 어둠 속에 녹아 움직이는 그를 주시하는 사람이 이상한 것이다. 지금의 그보다 수십 배는 수상한 축에 속하겠지. 슬쩍 웃은 그는 품에서 자그마한 병 하나를 꺼내었다. 녹색 액체가 찰랑이는, 손가락 두 마디만한 그 병을 보며 므흐흐한 웃음을 지은 그는, 다시금 주위를 둘러 살펴 아무도 없음을 확인했다. 아아! 이 것을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했나! 그는 감격에 젖어 가늘게 몸을 떨었다. 하지만 이럴 때가 아님을 금방 자각하고는 발 앞에 놓은 맑은 호숫물을 바라 보았다. 그리고, 다시 므흐흐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아, 클리오라시여! 쪼르륵…. 작은 유리병의 뚜껑을 따고, 그는 초록빛 액체를 그 물에 조금씩 흘리기 시작했다. 혹시 독이 아닐까, 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만 액체를 푼 호숫물에 조심스레 발을 담그는 것을 보아서는 그건 아닌 듯 싶다. 그는, 조심스레 초록빛 액체를 푼 물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찰랑이는 호숫물은 굉장히 찼다. 하지만 상관없다는 듯 결국 그는 물이 가슴까지 잠길 정도의 깊이, 호수 정중앙까지 걸어갔다. 그 호수는 꽤 작았던 것이다. 그는 쥐고 있던 유리병을 호수 중앙에서 떨어뜨렸다. 그리고, 다시 므흐흐. "좋아. 이제… 후후. 후후후… 후후후후후후훗!" 씨익. 그의 입꼬리가 양옆으로 쭈욱 올라갔다. 어쩐지 기묘한, 그리고 음흉한 기색이 엿보이는 웃음이었다. 마계, 검게 물든 밤하늘로 음흉한 그의 웃음소리가 스산한 바람소리와 함께 어울려 넓게 퍼져 나갔다. "므흐흐흣! 후후후! 후흐흐흐흐흐…." * * * * * * * * * * * * * * * "정령… 으으으으음!" 뒹굴, 루피아는 몸을 굴려 천장을 바라봤다. 양미간에 주름이 그려진 얼굴로, 영 개의치 않은 표정이었다. 손바닥을 쫙 펴 천장 쪽으로 올려 본 그녀는 그대로 손으로 눈을 덮어 버렸다. 현재 그녀는, 마왕이 마지막에 던지고 간 말을 생각하는 중이었다. '마법, 그리고 정령… 클리오라의 힘을 빌리지 않는 한 내가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은 이 두 가지 뿐이라고… 그런데 대체 마계에 정령이 있기나 한 거야? 마계에는… 글쎄, 그다지 자연적 요소가 많을 거라고는 상상이 안 되는 걸.' 위기감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웃기는 얘기지만, 이대로 있다가는 마신 클리오라의 축복을 힘입은 어둠의 프리스트가 된 공녀들에게 뒤질 것 같아 루피아는 약간 초조했다. 적어도 자신이 발에 걸리는 일은 없어야 할 것 아닌가. 그리고, 그녀 자신으로서도 약한 채 무기력한 상태에 계속 놓이는 건 사양이었다. 힘을 얻을 수 있는 조그만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도전해 봐야 했다. "내게 정령과의 친화력이 과연 있을까도 걱정이고… 에휴, 여러 가지로 머리 아파. 그렇다고 단기간에 클래스를 화악! 올려버릴 수도 없고 말야… 그럴 수만 있다면 좀 좋겠어? 그럴 수 없으니 문제지. 난 아직 4클래스 마스터니까." 어쩔 수 없이, 남은 가능성은 '정령'뿐이었다. 루피아는 마계 쪽의 '정령'에 관한 자료들을 얻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다시 그 먼지 가득한 도서실을 뒤지는 건 사양이었다. 먼지를 잔뜩 마신 건 기본적 지식을 얻기 위해 썼던 그 때로 충분했다. 그치만 중요한데……. "루피아 님! 잠깐 이 책들 좀 보세요." 메를리나가 뒹굴대던 그녀의 옆에 세, 네권의 책을 놓았다. 하나같이 손가락 세 마디는 될 듯한 두께의 책들로, 꽤나 낡아 보였다. 책을 훑어보던 루피아는 메를리나를 올려다 보았다. 메를리나는 생글 웃으며 말했다. "아크로 님께서 주시던 걸요. 군주께서 루피아 님께 드리라고 하신 모양이에요. 후훗! 이 메를리나에게 말해 주지 않으셔도 군주님과 잘 되어가고 있으신 모양……." "아니얏!" 능글맞게 웃으며 말하는 메를리나의 말을 잘라 버리며 루피아는 소리를 질렀다. 왜! 대체 왜 얘기가 그쪽으로 흘러 버린단 말인가! 그, 그 마왕과 자신이 '잘 되어간다'고? 말 되는 소리라야 웃든지 하지, 말도 안 되는 그딴 소리는 웃을 만한 거리도 못 되었다. 그런데도 괜히 얼굴이 화끈거리는 루피아였다. 쳇, 하고 작게 투덜거린 루피아는 책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표지에는 정갈한 필체로 '마계의 정령에 관한 모든 것, 여기 있다!'라고 적혀 있었다. 흐음, 서적이 필요한 걸 배려해 준 건가? 루피아는 천천히 첫장을 넘겼다. 「마계에도 정령계는 분명히 영향을 미친다. 미약하지만 자연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연력이 풍부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게 당금의 현실이다. 본 필자는 미약한 자연력으로 인해 이미 잊혀져 버린 지 오래인 마계의 정령들에 대해 설명하려 한다.」 예상한 대로, 마계에는 자연력이 약했다. 하지만 분명 정령은 있다고 했다. 지금은 잊혀져 버린지 오래라고 하지만 말이다. 루피아는 눈을 반짝, 빛냈다. 하긴 없는 얘길 마왕이 할 리가 없지. 「우리 마족들에게 '정령'이라는 존재가 친숙하지 않고 어색한 것은, 아까도 언급했던 것처럼 마계의 환경적인 문제도 있으나, 우리들 자체의 성정에 가장 주요한 이유가 있다. 우리는 마족, 파괴의 종족인 만큼-아, 물론 우리는 즐기는 거라 하지만 타종족의 표현을 빌려 썼을때- 자연 친화적 성격을 띠기 어렵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다. 아아,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 정령이 우리 실생활에 많이 이용되었다면 우리는 한 차원 편리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글 쓴 녀석, 대체 누구야? 흐음… 하지만 분명 마족들 성정에 정령과의 친화력이 있다고 생각하긴 힘들어…?" 당연하다. 루피아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푸르른 녹음 속에 누워 있는 마왕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상… 당히…… 세상에, 어울렸다! '에잇! 미인이라서 그래, 잘 생겨서! 분하지만 그건 사실이니까! 젠장, 넘어가자.' 괜히 성질이 난 루피아는 재빨리 다음 문장으로 눈을 옮겨 버렸다. 그래, 잘 생기긴 했다. 「이 시점에서, 본 필자는 필자의 능력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본 필자도 어쩔 수 없는 마족, 그러나 나는 분명 '정령 다루기'에 성공했다! 이 것은 필자가 긴긴 생을 통해 이룬 업적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다른 이들에게는 하찮게 보일 지 몰라도, 적어도 본 필자에게는 그렇다. 본 필자가 다루기에 성공한 정령은 '불'의 정령이다. 이쯤에서, 필자는 정령에 대한 정의와 상세한 설명을 곁들여야 하겠다. 이쯤은 상식이나, 상식을 갖추지 못한 자들을 위한 친절이다. 아! 본 필자가 생각해도 참 훌륭한 생각이다.」 "…이 자식…… 분명 사회에서 따돌림 받은 녀석일 거야. 그러니 할 짓이 없을 거고, 할 짓이 없으니 정령이나 연구했겠지. …상대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불러내는 수밖에… 그래도 마족 체면에 몬스터들과 어울리지는 못하고, 정령이나 불러내 보자- 하는 생각에 생을 낭비하며 보냈을 거야. 그리고 이렇게 잘난 체하며 글을 끄적거린 거고." 상당히 진실에 가까운… 아니, 거의 진실인 추측이었다. 루피아는 반드시 그럴 거다, 라는 생각에 피식 웃고는 다음 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필자가 왕따건 전따건, 은따건 무슨 상관인가? 결과적으로는 그녀에게 도움이 되었는데. 「자연력이 풍부한 중간계의 정령체계따위 어떤지 본 필자는 모르나- 내가 다루게 된 '불'의 정령에게 얻은 정보들에 의하면, 이 마계에 존재하는 정령은 딱 넷이다. '바람', '물', '불', '땅'. 이 4원소의 정령만이 이 마계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다른 잡다한-그러니까 숲의 정령이라든지, 잠의 정령, 꽃, 나무 등등의 정령-은 힘이 미약해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한다. 모습을 드러내 힘을 쓸 수 있는 건 이 4원소의 정령 뿐이라고 들었다.」 다른 잡다한 정령은 아예 모습을 드러낼 정도로 힘이 있지도 않다는 얘기다. 하긴, 정령 하나도 다루기 힘든 지경에 다른 정령까지 있어 뭐하겠는가. 「우선 정령을 다루려면, 다루고 싶은 정령의 매개체가 될 물질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불의 정령이라면 불을, 물의 정령이라면 물을. 시간은 밤이나 낮이나 관계없다. 그 이후 주문을 중얼거리면서 자연의 기운을 강하게 느끼면 된다. 말이 너무 추상적이라고 생각하긴 하는 필자나, 더 이상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뭐야! 제대로 된 설명이 아니잖앗! '자연의 기운을 강하게 느끼면 된다'고? 대체 어떻게!" 뒷내용이라고 해 봤자, 고작해야 마족들이 자신의 능력을 몰라준다, 안 놀아준다… 뭐 이런 내용 등의 푸념이 대부분이었다. 정령에 관해서라면 윗부분밖에 설명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내용을 가지고 대체 뭘 하라고… 루피아는 나머지 책도 살폈지만 위의 설명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한다지? 잠시 고민해 보던 루피아는 일단 어떻게든 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결정을 내린 그녀는 재빨리 가운을 덧입고 밖으로 향했다. * * * * * * * * * * * * * * * 잘 닦여진 복도 위로 발자국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나갔다. 은은하게 퍼지는 푸른 촛불의 빛이 앞을 밝혔고, 그 뒤로 부드러운 하늘빛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의 찌푸려진 얼굴이 보였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잔뜩 찌푸려진 얼굴이었다. "누가 점쟁이 아니랄까 봐, 말발 하나는 죽여주는군. 젠장…." 그는 서열 제14위 스키야 드 캐플리츠였다. 스키야는 복도를 걸어가며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어제, 무슨 일에서인지 그를 찾아 온 사람은 다름아닌 로아이나였다. 비록 말을 나눈 적은 몇 번 없었지만 서열의 상위에 있는 존재라 예의바르게 접대했다. 마족들 사이에 로아이나는, 점술가를 하는 방랑하는 마족이라는 것 외에 그다지 알려진 것이 없었다. 정확한 능력치조차도 말이다. 그는 아주, 아주 오래 전부터 '노마족 3인방'과 함께 서열 8위를 지켜왔다. 그가 자신의 능력과 얼굴을 드러냈던 건, 이미 아주 오래 전 일이었다. "짜증납니다. 대체 뭐때문에 저런 것을 데리고 오라 하신 건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로이드윈에 의해 신전에 등록되고, 신관복이 입혀지긴 했지만 하루종일 방에 틀어박혀 울기만 했다. 당연히 짜증이 날 일이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클리오라의 축복때문인지 무엇때문인지 식음을 전폐해도 지치는 일이 없었다. "인간이란, 아주 약한 존재입니다. 반대로 아주 강한 존재가 되기도 한답니다. 역사를 돌아도면, 인간은 아주 미약한 힘밖에 지니지 못했지만- 가끔 우리 마족과도, 드래곤과도 맞서기도 했습니다. 무엇때문인지 혹시 아십니까?" 스키야의 생각은 달랐다. 그런 인간들이 돌연변이인 거라고 생각했다. '인간' 전체로 놓고 보기보다는, '돌연변이'라는 '예외'로 보는 게 더 정확한 것이라고. "인간은, 아주 이상한 생물이죠. 자신의 영리(營利)를 위해 자식, 친구를 버리거나 팔아 버리기도 하고, 사랑하는 존재를 위해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던져 버리기도 합니다. 아주 모순된 존재라 '인간' 자체를 이해하는 건 무척 어렵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각개의 생물체죠. 우리 마족이나 혹은 천족, 엘프, 드워프들처럼 뚜렷하게 드러나는 종족적 특징이 없습니다. 뭐- 비열하다든지, 약하다든지 하는 의견 등이 있습니다만 다 그런 것은 아니죠. 일부일 뿐입니다. '인간' 전체로 보기보다는, 눈앞에 놓인 '인간'을 이해하려 해 보는 게 중요합니다." "…인간을…… 이해하라고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중얼거리는 스키야를 향해 로아이나는 생긋이 웃어 보였다. 아주 상큼하게 말이다. 그는 뭔가 아주 난해하다는 듯이 얼굴에 손을 얹더니 말했다. "아주 특이한 케이스도 가끔 나타나죠. 그런 경우, 아주 즐겁죠. 지켜보기 좋답니다. 하아- 저는 요즘 그 즐거움으로 산다 해도 과언이 아니죠. 음- 제 이런 행동을 맘에 들어하지 않는 네쌍의 눈초리가 아주 무섭지만." 그의 요염한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웃음지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죠. 후후후."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스키야는 식은땀을 주르륵 흘렸다. 그와 얘기하다보니 어느 사이엔가 '반드시 얘기는 해 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버렸다. 이상한 일이지만 어쨌든 그랬다. 이게 '설득력'이라는 건가? 묘하게 아닌 듯 싶었지만 스키야는 그렇게 생각해 버리기로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하더라도 하기 싫은 건 하기 싫은 것이다. 스키야는 드디어 도착한 방문 앞에 서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이 문을 열면, 하얗게 질린 얼굴로 훌쩍대고 있는 여자가 나올 것이다. "비… 빛? 으, 으흑… 살려 줘요! 나, 난… 난……." 불빛에 비친 여자는 갈색 머리카락이 헝크러진 채 침대 위에서 몸을 떨고 있었다. 저번에 스치듯 보았을 때보다 더 가늘어 보이는 선에 스키야는 낮게 혀를 찼다. 아무리 축복을 받았다 하더라도 몸이 마르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채 공포와 경계를 잔뜩 담고 있는 고동색 눈동자에 스키야는 미간을 찌푸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것도 무척. "아무도 널 해치지 않는다. 그러니 살려달라는 말도 할 필요가 없어." 흠칫! 그가 누군지 깨달은 모양인지 여자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그는 그녀의 곁으로 걸어 다가가며 점차 뒤로 물러나려는 여자의 팔을 재빨리 잡았다. 생각보다 더 가늘고, 연약한 팔. 살짝 힘만 쥐도 부러져 버릴 것 같다. "앉아. 난… 우선 불을 켜도록 하지. 다시 말하지만, 난 널 해칠 생각이 없어." 아, 정말 마음에 안 드는 것 투성이라니까. 스키야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녀의 팔을 놓고 일어서자, 아멜리아는 그의 손이 닿았던 팔로 손을 가져가 보았다. 화끈거리기는 했지만 특별히 아프거나 하지는 않았다. 톡. 톡. 방 안에 가라앉아 있었던 어둠을 빛이 찢어내자, 아멜리아는 그제야 '마족'의 얼굴을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부드럽게 흘러 내리는 하늘빛 머리카락, 불빛에 비친 얼굴은 아주 아름다웠다. 붉은 눈동자가 점차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저번처럼, 온몸을 조이는 압박감은 느낄 수 없었다. 더… 편한 느낌. 아, 하고 아멜리아는 작게 신음을 흘렸다. 뭔가… 아주 이상했다. 열흘이 넘게 흘렀는데, '마족'을 마주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를 마주보면 죽을 것 같았는데,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줄 알았는데… 아무렇지도 않다! "난 널 해치지 않아. 겁낼 필요가 없다. 널 죽이면, 그건 마신 클리오라 님의 명령을 어기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난… 제길! 울지 말라고!" "아, …네!" 어라? 이상하다? 왜 하나도 안 무섭지? 뭔가 초조한 듯 소리지르는 마족이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짜증난다는 듯 머리를 쓸어 올리는 게, 정말 하- 나도 안 무서웠다. 아멜리아는 어? 어? 하면서 눈을 깜빡였다. 너무 울어 부은 눈이 따가웠다. "…제기랄~ 난 하나도 안 당황스러워! 난 네가 울어도 아무렇지도 않다고!! 그러니까 울지 좀 마! 알았어? 짜증나니까! 제길, 눈물 좀 그쳐!" 그 말이 '당황스러우니까 그만 울어'라고 들리는 건 왜일까? 아멜리아는 왠지모를 허탈함에 하, 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으아악! 젠자아아앙- 또 왜 웃는 거야아!!!" ----------------------------------------------------------- 이거야, 너무 오랜만이라 돌 맞을지도...-_-;; 연말이라 외갓집에 다녀 왔습니다.; 거기서 지내느라 계속 글을 못 올렸어요. 으음.. 게다가 이상한 데서 글이 막혀서요..; 갑자기 클래스를 올리는 것보다는 정령을 붙여주는 쪽이 낫겠다, 고 결론이 났어요. 리플을 다시 보니까 갑자기 쑤욱 올려 버리니까 이상하다는 말이 있더라구요. 동감하는 부분이기도 하고. 강하게 만들긴 해야 하는데, 영 능력이 안 따라 주는군요.-_-;; 정령, 이것들은.. 아마도 돌연변이가 나올 듯 싶습니다..; 끄응.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이제부터는 새해를 맞아 더 열심히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제 목: [수정판] 공녀(貢女) : 제10화 [괴상한 밤손님](2) #. 제10화 [괴상한 밤손님] * * * * * * * * * * * * * * * "에… 정령계의 문이여, 열려라. 고대부터 이어져 온 위대한 약속에 따라 너의 존재와 나의 존재, 영원한 결속을 맺고자 하노니. 나, 루피아의 부름에 응하여 너의 모습을 내 앞에 드러내기를. 물의 정령, 운디네!" ……. 이게 몇 번째지? 쳇! 루피아는 신경질적으로 물에서 손을 뺐다. 안 그래도 추운데, 손이 시려 죽을 지경이었다. 네 정령 중에 루피아는 '물'에게 도전해 보기로 했고, 결국 몇 번이나 허탕을 쳤다. 오밤중에 마왕성 뒷편에 있는 작은 호숫가에서 하는 짓 치고는 참 웃겼다. 누가 보면 미친 여자로 알 것이다. 이만하고 들어갈까, 했지만, 루피아는 딱 한 번만 더 해 보기로 했다. 중요한 건, '물'의 기운을 느끼는 것인데… 말이 쉽지, 이제까지 한 번도 느끼지 못했다. 입으로 주구리장창 주문만 외면 뭐하겠는가. 물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걸. 에휴- 하고 깊게 한숨을 내쉰 루피아는 일단 눈을 감았다. "물… 물… 물의 기우운… 물… 무우울… 물… 물물물물물……." 물, 하면 생각나는 건… 루피아는 차가운 물의 감촉을 떠올렸다. 손을 감싸던 부드러움, 그리고 물이 가질 수 있는 무서움까지도. 물의 이미지를 그려보던 그녀의 감각에, 푸른 빛이 스쳤다. "……!!" 놓치면 안 된다! 루피아는 감각에 스치듯 걸린 푸른 이미지를 잡아내려 애썼다. 그래, 그래. 그렇게… 푸른 이미지와 함께 시린 느낌이 점차 더해졌다. 그런데… 어째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착각인가, 했지만 아닌 것 같았다. 루피아는 조심스레 눈을 떠 보기로 했다. 황금빛 섞인 붉은 눈동자. 물 밖으로 상체만 내밀고 있는 검은 두건을 쓴… 얼라리? '물의 정령이 붉은 눈동자를 가졌나? 난 아직 주문 안 외웠는데…… 이상하네?' 물의 정령은 아닌 듯했다. 설마, 물의 정령이 검은 두건을 쓰고, 금빛 섞인 붉은 눈을 하고, 검은 옷을 입고 있겠는가. 상체만 물 밖으로 내고 있다는 점도 아주 수상했다. 루피아는, 결국 이 남자를 '수상한 괴생물체'라고 결론지었다. "뭐해, 예쁜 아가씨? 나하고 술 한 잔 할래?" "…당신 뭐야?" 루피아의 입장에서는 아주 당연한 물음이었다. 야심한 밤, 인기척없는 깊숙한 숲 호숫가에서 '수상한'이라는 단어에 딱! 부합되는 남자를 만나 던질 대사로는 아주 적합했다. 하지만 정작 그녀의 물음에 답해줘야 할 '수상한 괴생물체'는 그녀의 물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머리를 가리고 있는 두건으로 손을 가져가 스륵- 풀어 내렸다. "아, 답답해. 푸우- 역시 이런 두건은 나랑 안 어울려. 음… 아가씨. 술 한 잔 하는데 그런 게 필요해?" 물에 젖은 붉은 머리카락이, 달빛에 반짝이며 하얀 피부 위로 내려 앉았다. 하얀 피부 위의 붉은 머리카락은, 선명한 대비를 이루며 잘 어울려서- 루피아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는 어딘가-아마 허리춤이라고 생각되는 곳-를 뒤지더니 술병 하나를 꺼냈다. 품 안을 뒤져 술잔으로 생각되는 잔 두 개를 꺼내 든 그는, 다시 시원스레 웃었다. "자, 자. 아가씨. 거기 앉아. 난 정말 축배를 들고 싶은 기분이라고. 15년간 해 왔던 연구가 드디어 성공을 맺었단 말야. 후훗. 자… 과일주니까 맛있을 거야~" 루피아는 얼떨결에 그가 내미는 잔을 받았다. 그녀를 향해 씨익 웃은 그는 그녀가 받은 잔에 과일주를 가득 따라 주었다. "자- 쭉~ 마셔. 푸후후후훗… 걱정 마. 독 안 들었어. 봐, 나도… 캬아~ 마시잖아." "어? 아, 응… 음? 맛있다…." "크흐흣. 그렇지? 내가 아끼는 거니까 당연하지. 크윽~ 연구가 성공한 보름달 밤, 미인과 함께 마시는 술이라니. 죽여주는군!" 이, 이상한 사람이야! 루피아는 물의 기운을 느꼈던 걸 이 괴한 때문에 놓친 것이라는 걸 어느 새 까맣게 잊어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정말 정신없이 상황을 끌고 가 버리는 이 괴한은 지독한 마이페이스였던 것이다. …과일주도 맛있었고. "어이, 아가씨. 물어볼 게 있는데 말야." "으… 응?" "여기, 마왕성 맞지? 마계를 다스리는 마왕의 거주지. 마왕성!" 루피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쪼오금 벗어나긴 했지만, 어쨌든 마왕성이 맞았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 괴한의 얼굴이 눈에 띠게 밝아졌다. 캬캬캬, 하고 웃은 그는 과일주를 한 잔 더 따라 마셨다. "카른이 눈치채기 전에 돌아가야 하긴 하지만… 후후훗." "…나도 메를리나가 눈치채기 전에 가야 하는데… 우우웅." "그런데 아가씨. 아까 뭐 하고 있었어?" 그제야, 루피아는 그가 나타나기 전까지 정령을 불러내기 위해 애썼던 일을 떠올렸다. 거의 다 될 뻔한 일이었던 것도. 루피아가 뜨악한 표정을 짓자, 괴한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혹시, 정령 불러내는 일을 하고 있었던 거야?" 그, 그걸 어떻게? 루피아의 얼굴에 다시 놀람이 떠오르자, 그는 다시 씨-익 웃었다. "다 아는 수가 있지. 후후훗- 뭐 좋은 거 알려줄…… 제길!" "에?" 갑자기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뭔가 일이 잘못된 모양이다. '좋은 것'을 알려 주겠다는 그의 말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루피아는 그가 얼굴을 찌푸리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알려주고 가야지! 하지만 그는 이미 뒤돌아 호수 중앙으로 헤엄쳐 가고 있었다. 그는 뭔가 이대로는 아쉽다는 듯 그녀를 다시 돌아 보았다. "나는 딜렌! 딜렌이야, 아가씨! 나중에… 나중에 내가 찾아갈게! 날 보고 싶으면 물가나, 모습이 비치는 곳에 가서 내 이름을 불러! 내가 갈 테니… 알겠지?" "어? 어? 야! 야…?" 정말, 아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멍하니 호숫가에 다시 혼자 남게 된 그녀는, 손에 들린 작은 술잔에 시선을 주었다. 술잔이 아직 그녀의 손에 남아있는 것을 보면, 꿈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하긴 꿈이라고 해도 이런 이상한 꿈은 없을 것이다. 갑자기 물에서 나타난 괴한과 얘기하며 술을 마셨다니? 입 안에 맴도는 달콤한 과일향을 생각해 봐도 꿈은 아니다. 그런데…. 루피아는 씨익- 웃는 '딜렌'의 얼굴을 떠올렸다. 강하게 인상을 남긴 금빛 도는 붉은색 눈동자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물기어린 피부 위에 흘러 내린 젖은 붉은 머리카락. 아주, 아주 아름다운 남자였다. 역시 마족은 다 예쁜 모양이다. 게다가. 엄청난 마이페이스였다. 도망치듯 재빨리 사라져 버린 그를 떠올리며, 루피아는 술잔을 들어 올려 헛웃음을 지었다. 하, 하, 하고 웃은 그녀는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마계에는 약간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 꽤 많은 모양이다. 아니, 제정신이 박힌 마족을 찾기 어려울 수도. 로아이나도, 미안한 말이지만 꽤… 이상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정신이상자 취급을 하기에는 너무 마음에 들지만. 술잔을 가운 주머니에 넣고, 그녀는 가볍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 어둠 속에서 노란 눈이 요사스럽게 빛났다. 하나 둘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 곳이 어디였던가를 조심스럽게 떠올렸다. 마왕성 주변의 숲, 그 중에서도 작은 호숫가. 그녀는 아로데의 당부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마왕성 안에서는 실컷 돌아 다니더라도, 마왕성 밖으로 나가지는 말라고 했던 당부를. 마왕성 주위에는 난폭한 마물들이 많아서 왠만한 마족도 살아남기 힘들다고 했다. 마왕성을 지키는 별도의 기사단이 없는 대신, 성질 난폭하고 강한 마물들이 바글거린다고 했… 으아악! 그, 그럼 난 스스로 죽으러 들어 온 거잖아아아!! "……난… 죽었다……." * * * * * * * * * * * * * * * 제길! 제기랄! 베키는 낮게 욕설을 중얼거리며 이를 바드득 갈았다. 대체 왜! 무엇때문에 그녀가 이런 괴상망측한 차림으로 거리를 돌아 다녀야 한다는 말인가? 이게 다 그 꼬마 도련님 탓이라고 탓하며, 그녀는 화끈거리는 얼굴이 일그러지려는 것을 가까스로 폈다. 웃어라, 웃어! 베키, 웃는 거야! 그녀의 몰골은 차마 말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였다. 구불구불하게 말은 머리카락이 볼 옆에서 나풀거리고, 주근깨 앉은 코 아래에 자리한 입술에는 새빨간 연지가 발라져 있었다. 짙은 푸른색 색조 화장이 해진 눈가는 마녀 같았고, 가무잡잡한 뺨 위에는 유독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그게 얼굴이 붉어져서인지, 아니면 붉은색의 볼터치때문인지는 구분하기 어려웠다.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온몸을 축 늘어뜨려 몸놀림을 둔하게 만드는 보석들이 잔뜩 달린 옷자락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용케 찢어지지 않는 옷감을 칭찬하면서, 베키는 이를 악물었다. 이런 역을 할 만한 사람이 그녀밖에 없다는 걸 알긴 하지만, 그래도 정말 그만두고 도망가고만 싶었다. 마치 광대가 된 기분이었다. 이 사람 복작대는 거리에서 몸을 부딪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은, 사람들이 그녀를 피한다는 걸 가르쳐 주었다. 게다가 그녀의 뚫을 것처럼 쏟아지는 시선은… 아아, 죽고만 싶다. 다행히도 짙은 색조화장이 그녀의 본 얼굴을 가려 주었다. 그녀가 보아도 최악, 그리고 본판을 전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으니 혹여라도 아는 사람이 그녀를 본다 하더라도 알아볼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되어 주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녀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들은 달랐다. 저기, 어두운 골목 구석에서 아주 배를 잡고(눈물까지 찔끔거리는 게 보였다) 킬킬대는 다섯 사람의 모습을 흘끗 바라보며 베키는 다시 울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이를 악물어야 했다. 얼마 전 돌아 온 바르에든까지 합세해 세운 계획은, 우선 에스베크 공작 연구실의 지도부터 구하자는 거였다. 에드윈드 입장에서는 약간 불쾌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려면 우선 도둑 길드부터 들러보는 게 최고일 것 같다는 결론 역시 내려졌다. 베키가 알고 있기로, 황궁 지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왠만한 귀족 저택의 지도는 다 가지고 있다고 알려진 곳이 바로 도둑길드였던 것이다. 물론, 마법 트릭까지 벗어날 방법이 있다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략적인 지도는 구할 수 있을 터였다. 도둑길드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우선 미끼가 필요했다. 허영심 많고, 생각이 없으며, 돈 많고 멍청한 사람 역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 꼴로 길거리를 나다니면 당연히 도둑이 하나 걸려들 것이고, 그 때 도둑을 덮쳐 도둑길드의 본거지를 알아낸 다음 의뢰한다! 이게 대략적인 1차 계획이었다. 얼굴이 잘 알려진 다섯 공자들은 절대 이 계획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게 문제이긴 했다. 도둑들을 잡는 데에는 나설 수 있겠지만 공자들이 그런 웃긴 꼴로 거리를 나돌아다닌다면 대번에 미쳤다는 소문이 날 게 뻔했다. 그렇게 때문에 이 계획 가담자 중 유일하게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베키가 필연적으로 '미끼' 역을 해야만 했다. 탁! 생각에 빠져 있던 베키를 상념에서 깨운 건, 그녀의 몸을 툭 치고 지나가는 한 사람때문이었다. 어째 한 쪽의 무게가 가벼워진다 싶은 순간, 베키는 알았다. 이제 이거 때려쳐도 되는 때가 온 거야아! 그녀는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도, 도둑이야아아- 꺄아아아아아아아-!!" "불어! 빨리 안 불어? 앙? 죽고 싶어!! 너 죽어볼래? 그래, 너 죽고 나 살자!" 퍽! 퍽퍽! "쿠엑! 쿨럭, 케에엑!" 로키는 눈물을 그렁그렁단 채 비명을 질렀다. 오늘 영 일진이 안 좋다 싶었다! 길거리에 왠 멍청한 여자 하나가 '나 잡아잡수~'하는 듯한 차림으로 나다닌다 싶어 옳거니 하며 보석 한 움큼을 뜯어 냈는데, 설마… 설마 미친 여자였을 줄이야! 건강한 남자가 되어서 여자 하나 이기지 못하냐고 묻는다면, 로키는 한 번 자신의 입장이 되어 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도망치는 그의 뒷편에서 '도둑이야-'하고 소리를 지르는 여자를 비웃어주며 달려가던 그는, 갑자기 목덜미가 붙잡혀 구석진 골목으로 내팽개쳐져야 했다. 그를 잡아 내던진 사람들은 모두 다섯 명으로, 모두 귀하게 자란 몸들이신지 화려하고 잘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실력 또한 만만치 않아 보였다. 그들을 경계하며 몸을 사리고 있는데, 갑자기 급하게 화장을 지워 번진, 그러나 아까 보석을 얻었던(?) 여자임이 분명한 여자가 구석에서 나타났다. 잔뜩 화가 난 채로 말이다. 그 여자는 구석에 처박혀진 그를 보자마자 도끼눈을 치켜 뜨더니, 느닷없이 하이힐을 신은 발로 그를 걷어 찼다. "도둑길드 본거지가 어디야! 빨랑 부는 게 신상에 좋을 거야… 이 바닥에서 먹고사는 녀석이니 맷집 하나는 좋겠지? 죽기 싫으면, 10초 줄 테니 빨리 입 열어." "윽… 크으윽. 그…, 그건……!" 로키는 순순히 말하려고 그랬다. 저 뒤에서 버티고 있는 다섯 명은 알아낼 능력이 있는 것 같았고, 괜히 버틴다고 해서 이익이 되는 일도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그렇게 버텨서 잘 되는 인간 하나 못 봤다는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저 미친 여자는 도저히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빨리 불어!! 안 불어? 그래, 버틴다 이거지? 좋아, 너 한 번 죽어 봐!!" 잔인하게도, 그녀는 굽 높은 구두를 그대로 신고 그를 밟았다. 크윽, 신음을 흘리고 비명을 질러봐도 전혀 동요가 없었다. 안타깝게도, 광기(狂氣)어린 그녀의 행동에 제동을 가할 수 있을 것같은 다섯 명은 그를 위해 그녀를 멈추게 할 뜻이 없는 것 같았다. "우와… 많이 쌓였었나 보네요, 형들." 백금발의 초록빛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 말했다. 제발 좀 멈춰 줘!! "…그러게 말이다. 이번 일이 좀- 큭, 심하긴 했지." 검은 머리칼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청년이 대답했다. "게다가 우리 중에 제일 바쁘잖아." 푸른 머리카락에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나이가 어려 보이는 동안(童顔)에, 큰 키를 가지고 있었다. 얻어 터지느라 정신이 없는 도중에도, 그의 음성에 스며있는 웃음기를 로키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으으으으… 이 악마같은 것들! 크으으! 저 여자는 틀림없는 마녀야! 마녀가 틀림없어!!' 로키는 배를 감싸쥐고 몸을 둥글게 웅크리며 때린 곳을 또 때리는 여자를 올려다 보았다. 갈색 머리칼은 많이 풀려서 맨 처음 봤던 것처럼 웃기지는 않았지만 악독하게 보이는 데에 한몫했다. 눈가의 푸른색 짙은 색조화장은 옆으로 번져 마치 멍든 것같은 장면을 연출케 했고, 입술의 붉은 연지 역시 번져 꼭 피가 묻은 것 같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갈색 눈은 꼭 일렁이는 것 같아 불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을 퍽- 퍽 내리치는 다리힘은, 크윽, 처음부터 시종일관 줄지를 않았다! 게다가 여자 힘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셌다. "마, 말… 말… 꾸에에엑!" "뭐? 아직도 말 못하겠어? 허! 이거 질기네. 오냐, 죽어랏!!" 베키는 제 임무를 다하고 찢어진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어 올린 채 다리를 들어 남자를 팍팍, 잘근잘근 밟아 주었다. 창피함과 부끄러움으로 그 자리에서 땅 파고 들어가고 싶은 기분이 계속해서 떠오르자, 그 화풀이를 이 남자에게 하고 있는 것이다. "네가 조금만 더 빨리 나타나서 보석 훔쳐 갔어도, 내가 그 꼴로 거리에 30분이나 나돌아다닐 필요는 없었단 말야! 차려 준 밥상도 못 먹어? 어? 네가 그러고도 도둑이야! 딱- 먹이가 나타나면 바로바로 와서 훔쳐 가야 할 것 아냐! 도둑으로서 자존심도 없어? 먹이를 두고도 못 먹냐? 꼭 입에 넣어줘야 먹겠냐고오!!" 본심은 이랬던 모양이다. 로키는 신기한 구경거리라서 놓치지 아까웠다는 말은 차마 입밖으로 내지 못한 채 입을 꾹 다물어야 했다. 지치지도 않고 남자를 두드려패는 베키의 모습을 지켜보던 다섯 공자들은 이제 슬슬 베키를 말려야 되겠다 싶었다. 계속 저렇게 놔두었다가는 남자가 살아남지 못할 것 같았다. 이데카른이 베키에게 다가가 그녀를 말리자, 베키는 잠시 헉헉대며 숨을 몰아 쉬다가 마지막으로 그를 한 대 더 차주고서야 겨우 움직임을 멈췄다. "나… 나는… 계, 계속… 흐으윽, 마, 말… 하려고… 흐윽, 콜록! 했는데에에……." 트로에는 그렇게 억울한 듯 계속 중얼대는 로키를 보며 혀를 찼다. 쯧쯧, 정말 운이 안 좋은 남자다. 하필이면 그 때 베키 손에 걸려서… 얌전한 것 같았던 베키의 새로운 일면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로키의 실토(?)로 도둑길드의 본거지를 알아낸 다섯 공자들은, 그의 불행에 혀를 찼다. 에드윈드는 베키 몰래 그에게 힐링을 써 주기도 했을 정도였다. 무겁게 덧입었던 보석 옷을 벗어 버리고, 부드러운 비단으로 얼굴을 박박 문질러 화장을 지우는 베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다섯 공자들은 생각했다. 이제부터는 좀 적당히 부려 먹어야겠다, 하고 말이다. * * * * * * * * * * * * * * * "…생각보다 훨씬 사태가 심각해. 겨우- 겨우 30년 사이에, 천계는 너무 변했어." 미카엘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눈두덩을 꾹 눌렀다. 그를 비롯한 12대천사 역시 동감한다는 듯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대체,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다 말고 그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로, 사태는 심각했다. 천계는…… 썩어가고 있었다.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듯, 정적인 천계의 사회는 점차 썩어가고 있었다. 겨우 30년- 그 짧디짧은 시간 사이에, 천족들의 정신상태는 아주 변해 있었다. 요 며칠 사이, 그들은 그 이유를 어렵사리 알아낼 수 있었다. <에우로카엘> 그들이 없는 사이 천계의 '지배자'로 떠오른 자였다. 사람들 사이에 모습도 잘 드러내지 않는 그녀는, 이미 천족들 사이에 또다른 믿음으로 떠올라 있었다. '오르가프의 열 세번째 아이', 에우로카엘. "…그 아이가… 훗, 그래. 가만히 있으리라 기대했던 우리가 바보였지." 카마엘이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쓰게 말했다. 입맛이 썼다- 마지막으로 그 아이를 본 게 언제였더라? 희미해진 기억 저편의 모습을 떠올리려 애쓰며, 카마엘은 코 끝을 떠도는 바닐라 향기를 기억해 냈다. 그래, 그 향기가 아주 인상적이었지-. 600년 전이었나? 옅은 회색빛의 두 날개를 가진 어린 천사였다. 아니, '천사'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지도 모른다. 살아왔던 땅에서 뿌리뽑힌 채 잔뜩 상처입고 웅크린 모습으로 자신을 공격적으로 바라보던 시선. 하지만 곧, 그녀는 그들에게 '따스함'을 요구했다. '정'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녀를 무시해 버리고 말았다. 아니, 무시라기보다- 신경써 주지 못했다고 하는 편이 옳으리라. 그녀가 어떻게 느꼈든, 그때 그들은 일에 바빠 그다지 그녀에게 신경써 주지 못했다. 누구라도, 그녀의 상처를 아주 조금만 신경써 돌보아 주었다면, 이런 사태는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르는데-……. 30년, 그녀는 천계를 양분해 지배하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아마 그 훨씬 전부터 조금씩, 아주 조금씩 준비해 오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뒤로 물러 선 그 30년 간, 재빨리 행동을 개시했겠지. 12명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까. "-일단, 오르가프 님부터 만나뵙는 게 좋겠어. 그게 순서지." 미카엘이 말했다. "미카엘. 난… 중간계에 내려가 보겠어. '루피아'가 마계로 갔다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 셋은. 도와 주겠어." 카마엘의 말에, 미카엘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카마엘은 엘 세느안트 가문의 세 형제와 특히 인연이 깊으니까 말이다. 어차피 중간계에도 한 명이 내려가야 했는데, 카마엘이라면 괜찮겠다 싶었다. "체르비엘, 에리엘, 하즈아리, 시즈니엘, 요시피아나! 너희들은 에우로카엘의 감시를 비롯한 모든 것을 맡아라." 미카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머지 다섯 세라핌을 보며 그가 말했다. "나머지는 나와 함께 오르가프 님을 뵈러 간다." 미카엘의 머릿속에도 옛날, 흐린 기억 속의 에우로카엘이 떠올려 지고 있었다. 그녀의 몸에서 풍겨나던 달콤한 바닐라 향도, 공격적인 눈빛도, 강아지처럼 온순한 눈빛도 떠올려졌다. 아름답게 돋아나 있던 회색빛 날개 역시.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다른 날개색으로 인해, 그 아이는 고통받지 않았을까? 어린 나이에, 가졌던 모든 것을 빼앗긴 채 천계에 던져져야 했던 그 아이는, 남들과 다른 날개색으로 고통받지 않았을까? 카마엘 역시 검은 날개로 많은 말을 들어야 했다. 오르가프의 두 번째 아이이기도 했고, 강한 힘은 그의 검은 날개가 경외의 대상이 되도록 만들었지만, 과연… 에우로카엘에게도 천족들은 너그러웠을까. 아닐 것 같았다. 특히, 어린 아이들의 잔인함은 그 아이를 더욱 상처입혔을 것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났다. 선악(善惡)을 구분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내뱉는 말의 잔인함. 미카엘은 그 생각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그들을 원망할까? 그녀를 지켜주지 못한 그들을 원망할 것이다. 오르가프의 명령을 받들고 그녀를 데려 온 건 그들이었으니까. 데려와 놓고 돌봐주지 못한 건 그들이니까. '에우로카엘…….' ============================== 음- 루피아, 딜렌 만나다.-_-;; 이번에는 이디스가 안 나왔군요. 다음에 출현합니다.+_+ 딜렌... 다시 보니 꽤나 사이코군요. 원래 컨셉이 '사이코'였지만.. 연구에 미친 사이코죠. 카른이 이쯤에서 나와 줘야 하는데.. 담편에는 아마도 카른의 사생활이 좀 나오지 않을까.. 합니다.^^ 이번 편에 베키는 꽤나.. 하하, 과격해요, 과격해.; 성격 나오는구나, 베키야.^^; 에우로카엘 얘기도 나왔죠? 으음.. 다양하네.; 에우로카엘의 정체는 이미 본판에서 밝혀진 바 있지만, 그래도 여기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니- 하긴, 여기서는 아직 아유니가 튀지도 않았어요;; 슬슬 걔가 좀 튀어줘야 하는데..; 멜은 donghee425@hanmail.net으로 보내 주세요. 리플..^^ 즐독하세요^^ 제 목: [수정판] 공녀(貢女) : 제11화 [그녀가 그 곳에 있었던 이유] #. 제11화 [그녀가 그 곳에 있었던 이유] * * * * * * * * * * * * * * * 허억, 헉! 거칠어진 숨결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루피아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주위를 살폈다. 사삭, 사사삭. 아주 작은 소리라도 지금 그녀에게는 위협적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입안에서는 단내가 풍겼고, 가슴께는 싸하게 아팠다. 미끈하게 피부를 적시는 땀이 질척거렸고, 펄럭거리며 거치적거렸던 가운은 이미 나뭇가지에 걸려 넝마가 되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신이 한심해서, 이런 상황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나 무기력하게 느껴져서 루피아는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마법이 4클래스면 뭐 하겠는가! 이 곳의 마물들에게는 조금의 효과도 없었다. 나이에 비해 천재적이라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그녀의 나이에 4클래스 마스터인 사람은 에스베크 가문의 아들밖에는 없었다. 특별히 마법사적 피를 타고나지도 않은 그녀가 아직 10대의 나이에 4클래스를 마스터했다고 하면 사람들은 놀라움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단지 도망치는 것 뿐이다. '어디로 가야 하지? 젠장… 젠장! 대체 어디로? 여기서 이렇게 죽으라고? 그럴 순 없어!' 루피아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나무를 짚고 겨우 일어섰다. 이렇게 주저앉아 죽을 때를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일어나서 달리라고 소리치고 있는 그녀의 뇌와는 달리, 그녀의 몸은 힘없이 후들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사사삭!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찬바람이 얼굴을 때렸고, 눈이 시렸다. 제기랄, 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건지! 몸을 돌려 젖먹던 힘까지 쏟아내 달리려고 할 때, 루피아는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왜… 왜 당신이……?" 검은 숲을 배경으로, 양갈래로 묶인 분홍빛 머리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귀여운 인상의 큰 눈동자는 맑은 반짝임을 담고 있었고, 베이지색의 가운이 바람에 신비롭게 펄럭였다. 루피아는 기억 속에서, 그녀가 '아유니 드 포르티칼'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녀는 허공에서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뭔지모를 푸른 빛이 그녀의 손가락 주변에 어린다 싶은 순간, 루피아는 앗, 하고 탄성을 지르며 멈칫해야 했다. 환상처럼, 그녀의 손가락에 어렸던 푸른 빛이 그녀에게 향해 달려드는 것이다. 푸르른 빛이 잔상을 남기며 그녀의 주위를 몇 번 흘렀다. 싸한 느낌이 들었다. 왠지 몽롱하게, 취하는 듯한 느낌. "…'아유니'가 아니에요. 내 이름은……." 루피아는 귓가를 잔잔하게 울리는 그 음성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든 그녀의 눈에 들어 온 아유니는, 왠지 잔잔한 슬픔을 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 하고 루피아는 입을 살짝 벌렸다. 그녀의 얼굴은, 그녀에게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얼굴이었고, 그녀 역시 아유니를 보며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은 느낌에, 루피아는 입을 열었다. "아, 아… 그러니까… 예, 예뻐요!" "…네?" 으악! 이게 무슨 바보같은 말이람! 하지만 이미 연 입은 그녀의 의지와는 반대로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쁘다구요. 아주, 아주 예뻐요. 이거… 이 푸른빛, 굉장히 예뻐요. 에… 아, 이게 아니야. 분명 나, 무슨 말을 하고 싶었다구요… 그런데……." "아…… 그래. 고마워요." 또… 루피아는 그녀가 왜 저렇게 슬픈 미소를 짓는지 알 수 없었다. 저게 아니다. 웃는 거라면, 미소라면 조금 더 행복한 느낌이 들어야 했다. 그런데, 그런데 그녀의 미소는 가슴 한 구석을 아리게 하는 듯한 슬픈 느낌만을 만들었다. "앗! 맞다! 여기서 얼른 빠져 나가야 해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이 숲엔 마물들이 득실거려요! 빨리 안 나가면 죽는다구요… 오?" 어, 어디로 간 거지? 루피아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했다. 손에 꼭 쥐고 있는 술잔이나, 찢어진 가운, 서늘한 공기, 몸에 난 잔상처들이 아니라면 그녀는 꿈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까지 눈앞에 있었던 사람이 갑자기 휑- 하니 사라져 버린 것이다! 루피아는 벙-한 느낌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하룻밤에 믿을 수 없는 일이 대체 몇 번이나 일어난 거지? 딴 사람들은 한 번도 겪기 힘들다는 일을 난… 하룻밤에 두 번씩이나… 하, 이거 참.' 루피아는 간신히 정신을 그러모아 이성을 차릴 수 있었다. 지금 내가 이럴 때가 아니야! 방금까지 폐가 터질 정도로 달려댔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 이러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따름이지만, 간간이 청각에 잡히는 알 수 없는 생물들의 위협적인 울음소리를 듣고 있자니 소름이 오싹오싹 돋았다. 이제껏 살아있는 게 신기해! 생각해 보면, 아직까지는 마물들에게 직접적인 공격을 받지 않았다. 소름끼치는 노오란 눈이나, 나뭇가지 부딪치는 소리같은 것에 겁을 먹고 도망쳤었다. 젠장- 이런 자신의 몰골이 한심하고 무력해서, 루피아는 입술을 꽈악 깨물었다. 파사사삭! 부스럭. "……!!" 나뭇잎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들려온 인기척에, 루피아는 흠칫 몸을 떨었다. 마물들일까? 아니면 또 다른 이상한 존재일까(이미 조금 전에 보았던 '아유니 드 포르티칼'의 모습을 '정체모를 이상한 존재'라고 분류지어 놓았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모습을 드러낸 것은…. "…마왕?"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가! 어리석게, 밤을 틈타 나오면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했나? 어떤 방법으로! 여기는 마계야, 너같은 어리석고 약한 인간들따위가 있는 곳이 아니라고! 죽으려고 작정을 한 건가!" 어? 어? 루피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르는 마왕에게, 기분이 나쁘다기보다… 의외였다. 이 사람도 이렇게 감정이 격해질 수 있다는 게 아주 의외였다. "제길! 성에서 네 기척이 사라졌길래 설마해 나와 봤더니 진짜 여기서 이러고 있을 줄이야… 대체- 어떤 생각으로 이런 곳엘 들어온 거냐? 설마하니, 진짜로 죽으려고 작정을 한 거냐!" 그는 흑단같이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루피아는 마치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과 같은 심정으로 벙하니 넋을 빼 놓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이, 모든 일에 초연할 것만 같았던 이 사람이, 이렇게 감정을 드러내다니? 어느 새 잡혀있는 어깨가 살살 아파 왔지만, 이미 루피아는 찡그려진 이디스의 얼굴에 시선을 못박아두고 있는 상태였다. "…어… 그게… 난, 그런 게 아니라……." 어벙하게 떠듬거리며 그녀가 입을 열자, 이디스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입을 다물었다. 그도 그 자신이 어울리지 않는 짓을 했다는 걸 인식한 모양이었다. 왠지 화가 난 듯한 얼굴에 루피아는 비틀거리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따라 와라. 여긴 유리아덴에게 개조된 마물들이 득실대는 곳이야. 그것들은 웬만한 고위급 마족이라도 상대하기가 힘들어! 이런 곳에 발을 들이다니… 젠장!" 천천히 그의 말을 곱씹던 그녀의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렸다. '웬만한 고위급 마족이라도 상대하기가 힘들다'고? 그럼- 나는 오늘 여기서 죽을 수도 있었다는 말이야?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루피아는 다리가 풀렸다. 털썩, 주저앉아 루피아는 으윽, 하고 신음을 흘렸다. "뭐하고 있는 건가. 나오지 않으면 그냥 두고 가겠어." "…다리가 풀려서 어쩔 수가 없어요!" 젠장- 젠장! 저 사람 앞에서 이게 무슨 망신이야! 찢어진 가운과 잠옷에, 곳곳에 난 상처에서는 피가 찔끔찔끔 나고 있었다. 달리다 넘어져서 흙투성이가 되었을 게 뻔한 얼굴, 산발인 머리에, 다리까지 풀리다니! 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다! 귀찮다는 듯한 이디스의 표정에 루피아의 얼굴이 붉어진 건 더 설명할 것도 없는 일이다. 이디스는 루피아를 안아들고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루피아는 왠지 그의 품 안에서 마음에 놓이는 것을 느꼈다. 아, 그래. 이 사람은 '마왕'이다. 그러니 마물따위에게 당할 걱정은 없겠지. 자신은, 생각보다 더 긴장한 상태였나보다. 이런 사람 팔 안에서 '안도감'따위를 느끼다니 말이다. 나중에 자괴감이 들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졸렸다. 그래, 긴장이 풀려서 그런 거야. 긴장이 풀려서… 갑작스레 긴장이 풀려서 그런 거라고… 점차 시야에 어둠이 퍼지는 것을 느끼며 루피아는 멀어져가는 이성을 애써 붙잡지 않았다. * * * * * * * * * * * * * * * 이디스의 품에 안겨 루피아가 막 잠이 들자, 검게 물든 하늘에 떠오른 달에 희미한 그림자가 졌다. 허상처럼, 그리고 신기루처럼 흐릿하게 뒤를 투영하는 그 그림자는, 선명한 붉은 머리카락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는 남자였다. 바람이 부는 가운데 차분하게 가라앉은 그 붉은 머리는 어깨에 겨우 가라앉을 정도로 짧았고,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는 적금색이었다. 세 개의 달이 서로 닿을 듯, 그러나 닿지 않게 얽혀있는 마계의 밤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이디스의 모습이 사라지자, 그의 입이 열렸다. "…많이 변했군."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얼음장처럼 한기마저 느껴지는 그 목소리는, 왠지모를 분노를 담고 있었다. "쿡! 킥킥, 키킥… 고작 여자 하나때문에 감정을 일으키다니? 하, 아하하… 하하하!" 광기(狂氣)섞인 웃음소리. 공허하게 울려 퍼지는 그 웃음소리는 분노에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웠다. 고작 그 정도야? 만나게 된 지 열흘이 조금 넘을 그 여자가 일으킬 수 있을 정도의 '감정'이었어? 100년에 가까이 내가 갈망(渴望)해 온 그것이? 딜렌은 허탈한 웃음을 다시 뱉더니, 결국에는 어깨만을 들썩였다. 왜? 왜, 대체 왜! 원망스러울 정도로, 자신의 눈은 그만을 쫓고 있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봐 왔던 그, 그의 애정만을 바랐던 자신. 설령 그가, 그의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았다 하더라도, 그는 그의 뒷모습을 쫓는 것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그는, 단 한 번도 돌아봐 주지 않았는데. 눈가에는 따듯한 눈물이 흘렀다. 적금색의 눈동자는, 물기로 얼룩져 슬픔을 자아냈다. "카른… 카른! 카르은!!" 주위가 점차 흐릿해졌다. 그의 몸은 그와 반대로 점차 뚜렷해졌다. 종내에는 비틀거리며 후들거리는 다리까지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내자, 그는 으읏- 하고 신음을 흘리며 뒤로 쓰러지며 주저앉았다. 입안으로는 주문처럼 '카른'을 웅얼댔다. "카… 른…… 카른…… 얼, 얼른 와…!" 콰당, 멀리서 맴도는 메아리처럼 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와 동시에, 흐릿해진 시야 사이로 물빛 머리칼이 비쳤다. 걱정스럽게 자신을 내려다 보는 눈동자도, 자신의 쓰러진 몸을 일으키는 손도 느껴졌다. 딜렌은 길잃은 아이가 겨우 엄마를 찾은 듯 카른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누, 눈물이… 눈물이 멈추지 않아, 카른. 카른. -슬퍼. 아파. 아파… 아파, 카른." 카른은 천천히 그의 친우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결국에는 보고 말았다. 20년의 공백이 있더라도, 그를 향한 친우의 집착같은 갈구는 멈추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가 밉다'고 말하고 있지만, 본인도 그렇게 믿는 모양이지만, 카른도- 그도 알고 있는 사실은- 결국 그는-…. "미워. 그가 미워. 미워, 카른. 미워, 카른. 아파. 가슴이 아파." 딜렌의 숨이 천천히 잦아갔다. 카른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고른 숨을 내뱉는 딜렌의 허리춤의 술병을 빼냈다. 아무리 그래도 마족의 피가 흐르는 이상 술따위에 취할 리가 없을 텐데도, 그는 습관처럼 늘 술병을 달고 다녔다. 향기로운 과일주의 향이 나는 것을 보니, 이미 한 잔 한 모양이다. 늘 달고 다니는 두 개의 술잔… 응? "…술잔 하나가 어디 간 거지?" 그 술잔은 카른이 그에게 만들어 준 거였다. 그들이 술을 나눌 때 한 잔씩 사용했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는 어디에 버려두고 하나만 달랑 들고왔단 말인가? 카른은 딜렌의 쓰러진 뒤통수를 노려보며(차마 불쌍해서 치지는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노무 자식, 궁을 박살내다 질려서 이제는 물건을 흘리고 다니냐? 제길, 돈 한 푼이라도 벌어오고 저러면 내가 말을 않지… 으악! 그러고보니, 이 과일주… 내가 나중에 마시려고 아껴둔 거잖아! 이거라도 팔면 돈이 얼만데… 으아아악!" 카른은 비명을 질렀다. 아아, 내가 어쩌다 이런 자식을 친구로 만나 이 고생이란 말인가. 안 그래도 <붉은 눈>족과 반목하는 형편에 밥 굶지 않고 살려면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상황이건만! 친우 카른이 이렇게 비명을 지르는 것도 모르고, 딜렌은 달콤한… 아니, 어쩌면 쓰디쓸 지도 모르는 꿈에 빠져 중얼댔다. "……형…님…." * * * * * * * * * * * * * * * 이디스는 루피아를 침대에 내려놓고 인상을 작게 찌푸렸다. 흙투성이가 된 얼굴의 뺨에 난 가느다란 상처에서 핏물이 베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잘 살펴보니 다리, 팔 할 것 없이 드러난 곳에는 생채기들로 가득했다. "…어째서 밖에 나간 거지? 무작정 도망친다고 마계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거라 믿을 정도로 어리석어 보이지는 않는데…." 성 안에서 느껴지던 그녀의 기척이 사라지자, 이디스는 착각인가 했다가 설마하는 마음으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이동한 곳에서 발견한 그녀는, 아주 이상한 모습이었다. 무언가에 넋을 놓고 있는 모습으로, 그의 기척에 놀란 듯 어깨를 움찔했다. 걸치고 있는 옷은 마구 찢어져 헤져 있었고, 멍한 보랏빛 눈은 경계심과 함께 옅은 공포심이 깔려 있었다. 그 모습에 그는 순간적으로 정신이 나가 버린 것이다. 왜? 어째서? 자문(自問)해 보아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생각해 보던 이디스는, 이런 상황이 전에도 한 번 있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과거, 그녀는 전에도 한 번 이런 식으로 그의 감정을 두드려 깨웠다. 나에게, 이런 느낌이, 감정이 있었었나? 생전 처음 느껴보는 '이질감'이 드는 그 '무엇'. 그것이 혹시 예전 '카마프'가 말했던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아닐까. 그런 생각에 그는 그녀를 곁에 두기로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정도가 조금 더 심해졌다. 방금, 그가 느낀, 그 '격한 어떤 것'. 단순히 그녀가 그의 명령을 무시하고 '떠나려고 했다'고 느낀 것 때문일까? 아니면, 조금 더 다른 성질의 무엇일까…….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올렸다. 하얗게 드러난 얼굴은 흙투성이였지만 '아름답다'고 느낄 만한 요소가 다 갖추어져 있었다. 투명한 피부, 짙은색 곧은 눈썹, 그 아래에 자리한 꼭 감긴 눈의 속눈썹은 길었고, 오뚝한 코와 핏방울처럼 붉고 도톰한 입술-. 이디스는 천천히 얼굴을 내려 그녀의 얼굴을 가까이 댔다. 붉은색 혀를 살짝 내밀어 그녀의 얼굴에 난 상처를 가볍게 핥은 그는, 이번에는 그녀의 입술 쪽에 혀를 살짝 댔다. 달콤한 향기가 코로 스며 들었다- 가만히 그렇게 있던 그는, 고개를 들었다. 가슴 안쪽에서 두근대는 느낌… 어제 느꼈던 느낌 그대로였다. 이번에는, 묘하게도 <이질감>이 드는 그 느낌이 싫지 않아서, 그는 한동안 그렇게 가만히 있기로 했다. 그런 그들 위로, 삼색의 달빛이 어우러지며 뿌려지고 있었다. * * * * * * * * * * * * * * *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허공을 찢으며 로아이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유니는 허공을 넋놓고 바라보던 멍한 눈동자를 치켜뜨며 날카롭게 그를 노려 보았다. "감히… 나를 기다리게 해? 그리고 왜, 루피아 님이 여기서 헤매고 계신 것이냐?!" 로아이나의 입술선이 희미하게 곡선을 그렸다. 버럭 소리를 지르는 아유니의 앞에서도 여유로운 그는, 생글 웃으면서 말했다. "들킬 뻔 한 게 아니라, 단지 여기서 헤메고 계셨던 것 때문에 화를 내시는 겁니까?" "뭐야?" "아아- 그렇다면 놀랄만한 일인데요. '로헤델의 별'인 당신께서 말이에요. 그렇지 않나요?" 그의 어조에서는 왠지 빈정대는 기색이 완연했다. "닥쳐!! 감히 너같이 더러운 것이-!! 너같은 더러운 족속이 내 심정을 어찌안다 그러느냐!!" "…'더러운 것'이라… 후훗! 그럴 지도 모르죠. 하지만 기억해 두시죠. 저도 추악하지만, 당신 역시 만만찮게 추악하단 걸." 차갑게 내려앉은 목소리는, 루피아를 대하던 부드러운 목소리와는 달랐다. 비꼬는 말에 어울리는 냉정한 어조는, 푸른 얼음을 연상시켰다. "당신은… 들키기 싫은 거겠죠? 당신의 진짜 모습을. 루피아 양에게 말입니다. 그… 더럽고 추악한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외모를 한 인간의 모습으로 다가가고 싶은 걸 겁니다. 제 말이 틀렸나요?" "…그 입, 다물어라." 부들대는 아유니의 입가가 꾹 앙다물렸다. 주먹을 다져 쥔 그녀는 분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주먹 사이에서 손가락을 타고 핏물이 가늘게 흘렀다. "아직 다가가기 힘들죠? 자신을 완벽하게 숨길 자신이 없으니까! 틀렸나요?" "…닥쳐." "…훗… 오늘은 그냥 가야 겠군요. 하긴, 소득도 없긴 하지만 말입니다." "……." "후후후! 자, 이제 그만 하도록 하죠. 저와 당신은 맞지 않는 것 같으니까요." "빨리 사라져." "어째서 그녀가 당신같은 분을 옆에 두시는지… 저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너 따위가 신경쓸 게 아냐!!" 아유니는 싸늘하게 말했다. 그녀의 그런 모습에 쿡, 하고 비웃음인지 아닌지 모호한 웃음을 흘린 로아이나는 천천히 뒤쪽으로 뒷걸음쳤다. 한 발짝 한 발짝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의 모습이 점차 지워져 갔다. 아유니는 그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중얼거렸다. "'로헤델의 별'…… 벗어날 수 없다고? 킥! 그래, 성하(星河)의 점술가 로아이나 드 캐플리츠. 당신의 점 실력만은 인정해 주겠어. 당신 말처럼, 그 이름은…… 당신 말대로 날 평생 따라다닐 거야……." 언젠가 그가 자신을 보며 했던 말을 떠올리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제발, 제발. 오르가프여. 나의 어버이여. 나의 신이여." 목소리가 울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아유니는 눈을 감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도와 주세요… 도와 줘. '복수'할 수 있도록……." ============================== 으에.. 바, 바빠서 덧말은 그리 많이는 못 적고, 멜은 donghee425@hanmail.net!! 입니다.^^; 제 목: [수정판] 공녀(貢女) : 제12화 [공녀들의 모임] #. 제12화 [공녀들의 모임] * * * * * * * * * * * * * * * 뿌연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보일 듯, 희미하고 어렴풋한 그림자가 아른거리자 무의식적으로 나는 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스락, 바삭. 마른 풀잎이 부딪쳐 내는 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툭. 투툭. 뭔가가 그 위를 붉게 물들이고 있다. 온통 무채색으로 가득한 이 곳에서, 유일하게 생명력을 가진 따듯한 붉은색. 나는 손을 뻗는다. ……나의 모든 것이 희미했던 그 시절. 이제는 빛바랜 추억으로 기억되는 그 때. 만남이 시작되었다. 시작과 함께 끝이 된 기억. 그리고, 나는 또다른 시작과 함께 모든 것을 잊었다. 그게, 가슴이 이토록이나 저리게 아픈 이유. ==================루피아 자서전' 中 발췌========================== 저런 걸 어디서 구했나 싶을 정도로, 화려하고 세세한 레이스들이 잔뜩 달려있는 드레스들이 수도 없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루피아는 등줄기로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 내리는 것을 느끼며 하, 하, 하고 기막힌 듯 웃음을 터뜨렸다. 옆에서는 세키라와 에리나가 동정심어린 눈길로 루피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좀 도와 주지이…….' 애절한 루피아의 눈길에도 아랑곳없이, 세키라와 에리나는 그녀를 매몰차게 외면해 버렸다. 그녀들로서는 저 무시무시하게 불타 오르는 시녀들의 눈길을 받아낼 자신이 아직은 없었던 것이다. 그저, 마음 속으로만 루피아의 명복을 정성스레 빌어줄 뿐. 아침이 되어 괜스레 걱정되는 마음에 찾아간 루피아의 방에서, 그녀들은 엄청나게 기막힌 광경을 보아야 했다. 저게, 저게 대체 무슨 꼴이야, 라는 경악성이 섞인 중얼거림이 절로 나올 정도로 루피아의 몰골은 끔찍(?)했던 것이다. 결좋고 곱게 빗어져 있던 머리는 온데없고 산발한 귀신머리가 떡-하니 대신 자리잡고 있는 데다, 두 사람의 감탄를 자아내던 맑고 투명한 피부는 흙투성이가 된 것으로도 부족해 곳곳에 생채기마저 나 있었다. 옷 또한 그녀들을 할 말 없게 만들었다. 이게 웬 넝마인가 싶은 헝겊만 겨우 두르고 있는 형색이었던 것이다. 팔과 다리에 나 있는 생채기에서는 핏물이 찔끔 흘러나와 있었다. 문 앞에서 얼어버린 그녀들과는 달리, 루피아의 시녀라 하는 마족은 허리에 손을 얹고 화를 내고 있었다. "대체 한밤 중에 무슨 일을 저지르셨길래 이런 꼴로 마왕님께 안겨 오세요!!" 콰쾅, 하고 마른 하늘에 번개가 내려치는 느낌이 이럴까. 그 순간, 두 사람은 다시 얼어 붙어야 했다. 부정해 주길 바랐던 루피아는 하하, 하고 어색한 웃음만 흘려대고 있으니 더욱 기막힐 노릇이었다. 밤? 일을 저질러? 더구나, 마왕? 루피아의 시녀 메를리나의 한 바탕 잔소리가 끝난 후에는, 연회 준비가 곧바로 이어졌다. 오늘은 마계에 온 지 딱 2주일이 되는 날. 연회가 열리는 날인 것이다. 에리나와 세키라는 간단하게 스스로 치장을 끝냈다. "난 화려한 건 싫어! 최대한 심플하게 끝……." "안 돼요! 저번처럼 이상한 몰골로 나가시면 제 시녀로서의 프라이드가 무너진다구요! 다른 시녀들이 절 얼마나 우습게 보겠어요? 저번 연회를 기억해 보세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셔서 제가 얼마나 애탔는 줄 아세요? 아악- 이렇게 잘 어울리는 옷이 많은데, 저번에 그 옷은… 하여튼 안 돼요! 이번에도 잘못했는 줄 아시죠? 한밤 중에 그런 꼴로 나다니시고- 더군다나 군주님의 품에 안겨 돌아오시기도 하셨잖아요! …그건 제가 원하는 바이긴 하지만 말예요. 이번만은 제 말을 들어요!!" 말도 안 된다는 듯한 표정으로 쏘아대는 메를리나를 보며 루피아의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왜, 대체 왜, 메를리나의 얼굴에 베키의 얼굴이 자꾸 겹쳐 보일까? 하나도 닮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래, 닮지 않았는데. 루피아가 어물거리는 사이, 메를리나는 드레스를 하나 보여 주었다. 드레스를 본 루피아의 얼굴이 다시 하얗게 질려 버렸다. "저, 저건 안 돼! 세… 세상에, 적어도 어울리는 걸로 해 달란 말이야!" "시끄러워요!" …가… 강력하다. 에리나, 세키라는 메를리나라는 시녀를 보며 자신이 저 꼴이 되지 않았음에 한없이 감사해야 했다. '다시 한 번 명복을 빌어, 루피아.' 그 후부터, 루피아는 메를리나의 인형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었다. 이것 저것, 메를리나가 입어보라는 드레스는 다 입어봐야 했고, 목걸이, 귀걸이 등등 악세서리 역시 이것 저것 달았다 떼야 했다. 잠시 후, 메를리나는 드디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에게 완성된(?) 루피아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우선, 옅은 회색에서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짙어져 검은색이 되는 드레스는 목을 온전히 덮었다. 목 부분에는 수수한 레이스가 장식하고 있었고, 똑같은 레이스로 드레스 제일 하단을 장식했다. 어깨를 드러낸 형태였다. 잠자리 날개같이 가볍고 투명한 소재로 만들어진 가운을 걸치고 있었는데, 허리 부분은 사슬 모양의 허리띠가 둘러져 있었다. 머리카락은 오른쪽으로 묶어져 일부는 땋아서 동그랗게 말았고, 일부는 내려 놓았다. 그리고 동그랗게 만 사이에는 크고 작은 비녀 두 개를 꼽아 장식했다. 의외로 수수한 모습에, 두 사람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음부터는 그런 말 어림없어요." "…그렇게 화려한 건 생리적으로 안 맞아, 메를리나." 확실히, 어울리는 차림이긴 했지만… 하고 중얼거리는 메를리나의 얼굴에는 뭔지모를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다. 루피아가 마지막으로 목걸이 등을 고르기 위해 다른 시녀의 손에 넘겨지자, 메를리나는 허리춤에서 작은 메모지와 함께 펜을 꺼냈다. 에리나와 세키라는 메모지에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를 끄적대는 메를리나의 모습이 이상스럽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메를리나. 이리 좀 와 봐!" 바깥에서 그녀를 부르자, 그녀는 한창 적던 것을 중단하고 그 곳으로 달려갔다. 에리나와 세키라는, 그녀가 열심히 적던 메모지를 들어 올렸다. 마계어를 약간이나마 익힌 세키라는 그곳에 적혀있는 글을 떠듬떠듬 읽어 나갔다. "…르- 루… 피아 님의…… 후, 츠, 취향… 보고서?" 다음의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1. 화려한 것을 즐기지 않으신다. 심플, 단조로움이 무조건 최고. 2. 무채색 계열을 좋아하시는 편. 원색은 삼가도록 한다. 3. 프릴, 레이스는 병적으로 질색하시는 편이다. 4. 보석 종류는 '무겁다'며 싫어하신다. '보석은 돌 아니냐!'는 말을 하셨다. P.S- 술 사는 거 잊지 '마'라는 말을 채 적지 못한 것 같았다. 내용을 겨우 다 읽은 세키라와 에리나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 메모지를 원래의 자리로 내려놓은 두 사람은 다시 입가로 찻잔을 가져가며 어색하게 웃고는 말했다. "…우린 못 본 거야." "하… 찻빛이 참 곱다, 그렇지?" * * * * * * * * * * * * * * * 오늘 연회는, 연회지만 연회가 아니었다. 넓은 연회장을 가득 차지하고 있는 건 오직 공녀들뿐이고, 마족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연회장 한 구석에 발을 들인 세 사람은 다른 곳에 모여 공녀들을 잘근잘근 씹고 있을 마족들의 모습이 눈에 훤히 보이는 것 같았다. 일주일 전의 그 정신없는 연회 이후로 이렇게 모인 것은 처음이다. 핼쑥한 얼굴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지만, 그들에게서 귀족의 자존심같은 것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어느 곳에나 자존심이 강하고, 남의 위에 서야 만족하는 직성을 가진 자들이 있다. 아마도 이번에 그녀들이 제정신을 차리게 된다면 서서히 그 특성이 드러날 것이다. 때이른 걱정일지도 모르지만, 만약 그러한 하나 하나의 특성이 나타나게 된다면 그걸 어떻게 제어할 지……. '…대체 어떻게 한담.' 우선 그녀는 공녀들을 하나 하나 뜯어 보았다. 에리나, 세키라의 모습에게로 눈이 향했다. 예전보다 많이 나빠진 안색이지만, 뭔가 아주 후련한 표정이었다. 그녀들은, 그녀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고 스스로 일어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다음, 그녀의 시선이 연회장 구석에 서 있는 '아유니 드 포르티칼'을 향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특유의 귀여운 미소를 지어 주었다. 얼결에 싱긋 미소를 보낸 루피아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숲에서 본 건, …그래, 스스로도 아유니가 아니라 말했으니 저 사람은 아닐 거야. 그렇게 결론을 내리자 후련해졌다. 대륙의 여섯 왕국, 그리고 제국의 공녀들이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그러나 하나같이 핼쑥한 모습으로 그녀에게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이, 이제 우린 어떻게 되는 거죠?" 침묵을 깬 것은, 네이코 국 특유의 억센 발음이 묻어나는 공용어였다. 공녀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루피아에게로 옮겨왔다. "그것을 왜 제게 묻는 겁니까?" "네?" "그 해답을 어째서 제게 구하시는 겁니까. 아시다시피, 저는 이들 중 가장 나이어린 18세 어린아이에 불과합니다만." 멍하니 되묻는 여자에게 루피아는 차갑게 대답해 주었다. 공녀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지금 그녀들에게 필요한 건 '구심점'이다. 누군가 이끌어 주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루피아는 스스로 그 구심점을 자초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당, 당신이 가장 높은 사람이잖아요! 당신의 신분……." "여기서 신분의 구별따윈 없어요! 나뿐 아니라, 에리나와 세키라 역시 제국의 공녀 신분이에요! 여기서 그런 구별따위가 무슨 소용이란 말이에요? 정신 차려요! 스스로 일어서지 않으면 아무도 도와줄 수 없어!" 애초 나오면서부터 매몰차게 굴자고 결심하고 나온 루피아였다. 조금 심한 말을 해서라도 이번 기회에 정신을 똑바로 차리게 만들어주고 말 테다. "노예나 다름없는 신세라구요, 우리는! 먹을 거 주고, 입을 거 주고, 잠잘 곳을 주는데다, 강해질 수 있는 수단까지 내놓고 있어요! 그런데 한 게 뭐야?" "아니야! 나, 나는 크니르 왕국의…!!" 루피아는 그 말을 한 여자를 노려 보았다. 그리고 한 자 한 자 끊어 또박또박 말해 주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그 따위 구별은 전혀 소용없어요! 강해져! 우리는, 다른 마족보다 강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요. 이 곳으로 온 대신에, 마신 클리오라는 우리에게 축복을 내려 줬어요. 그 점을 확실하게 이용하란 말이에요!" "하, 하지만 어찌 마신에게……?" "그딴 것 신경쓰지 마요! 이용할 수 있는 건 모두 이용하란 말이에요! 한심해, 정말!" 공녀들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들은 악에 받힌 듯이 루피아를 노려 보았다. 루피아는 팔짱을 끼고 거만한 얼굴로 그들을 내려 보았다. 악역을 자처하긴 했지만, 달가운 역할은 아니었다. 잠시 후,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보다는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얼마 후… 마족들의 서열 대회가 열려요. 거기서 축복받은 신력을 이용해 괄목할 만한 성적을 낸다면, 우리는 무시받지 않을 수 있어. 알아요? 아직까지 우리는, 마족의 '보호' 아래 있어서 직접적인 무시나 경멸은 받지 않을 수 있었어요. 울면서 청승을 떨 기회조차 없을 수도 있었단 말예요. 이제 그만 정신차릴 때도 되지 않았나요?" 루피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뒤돌아 연회장을 나가 버렸다. 마지막으로 공녀들을 흘끗 바라봐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에리나와 세키라는 루피아가 스스로 악역을 자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뭐하러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는지. 그녀라면 조금 더 자신에게 유리하게 상황을 이끌어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어르고 달래면, 공녀들은 미적거릴 것이 틀림없었다. "뭐야! 자기가 뭐라고 저런 말을 하는 거야?" …세키라와 에리나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화를 내는 것을 보아하니, 정신을 차린 것 같기는 했다. 감정이 격해졌기 때문인지 눈물을 한 두 방울씩 짜내는 공녀들도 보였다. 그들에게 손을 뻗으며, 두 사람은 퍼뜩 깨달았다. '……설마! 달래주는 게 싫어서 악역을 자처한 건 아니겠지?' '설마가 사람잡는다'는 명언이 두 사람의 뇌리로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연회장을 빠져나온 루피아는, 문에 기대서서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잠시 후면 저 곳은 울음바다가 되리라. 다시 한 번 마계에 오던 날의 악몽(?)을 반복하느니 차라리 악역을 맡는 게 백번 나았다. 진짜로 그녀를 미워할 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없길 바랄 뿐이지만, 그녀의 계획대로 세키라와 에리나가 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된다면… 루피아는 씨익 웃었다. '돌아가서 물이라도 떠 놓고 정령 불러내는 거 다시 해 봐야겠어… 으읏, 저번 생각하니까 더 아까워~ 메를리나한테 쿠키도 좀 달라고 해 놓고…….' 그런 생각을 하며 몸을 돌리는 루피아의 뒷 모습을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 핑크색의 차갑게 가라앉은 그 눈은, 희희낙락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가는 그녀를 바라보며 조그만 웃음기를 띠었다. * * * * * * * * * * * * * * * 에리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방에 오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씻긴 했지만 피곤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동시에, 자신의 약한 체력에 대해 짜증이 나는 것도 어쩔 수 없다. 그 악착같이 달라붙는…… 에리나는 생각을 멈췄다. 아무래도 루피아가 달래주는 것을 피하기 위해 악역을 맡았을 거라는 생각이 마구마구 들었다. 그녀라도, 그 많은 인원을 다시 달래주느니 차라리 미움을 받고 말겠다, 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테이블에 상체를 엎드리고 후우, 하고 숨을 길게 내쉰 그녀의 시선이 침상 옆에 놓여있는 길다란 세이버로 향했다. '아직… 할 일이 남았지.' 그녀는 그대로 드러눕고 싶은 생각을 애써 떨치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세이버를 집어 들었다. 흰 천이 사락, 거리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흰 색의 검집과 세세하게 새겨진 비상하는 드래곤. 에리나는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에리나는 짧게 쉼호흡을 하고는 유리아덴의 방으로 통하는 문을 밀었다. 작은 소음 하나 없이 부드럽게 밀리는 문 안쪽으로 방의 풍경이 보였다. 그녀의 방과 별다른 차이 없는 방이었지만, 침상에 기대듯 누워있는 유리아덴 덕분에 180도 다르게 보였다. 그녀를 보며 눈썹을 치켜 올리는 유리아덴을 보며 에리나는 싱긋 웃음을 지어 보이며 손 안에 든 세이버를 들어올려 보였다. "……-말씀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도움을 청하는 건 내게 어울리는 일이 아냐. 에리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남의 도움을 바라고 손을 내미는 짓, 내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아. "저와 계약해 주세요." 그녀는 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두근두근, 심장이 뛰는 소리가 몸을 울렸다. 그는 침상에 눕듯 기대어 보던 고동색 표지의 책을 덮었다. 하얗고 길다란 손가락으로 보랏빛 머리카락을 쓸어올린 그는, 언제나처럼 감정이 떠오르지 않은 유리알같은 붉은 눈동자로 말했다. "…너는 나에게 무엇을 줄 테냐?" '계약'이라 함은 주고 받는 것.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요구만으로는 이뤄질 수 없다. 에리나도 그 점을 잘 알고 있기에 계약을 요구한 것이다. "나의 시간, 나의 영혼, 나의 육체, 나의 모든 것. '기억'과 '마음'을 제외한 모든 것을 드리겠습니다. 지금으로써 내가 걸 수 있는 건 이 것이 전부입니다." "너의 조건은?" "…강하게 만들어 주세요. 검으로 강해질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어떤 방법이든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그의 유리알같은 붉은색 눈동자에, 잠시 희열(喜悅)이란 감정이 스쳤다고 생각되는 것은 착각일까? 에리나는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지금에 와서 아무리 애써봤자 검의 고수가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기본기는커녕 검을 제대로 잡아본 적도 없는 그녀에게 그 것은 무리다. 클리오라의 축복? 그 점도 잘 이용하면 강해질 수단이 될 수 있을 게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바는 아니었다. "어떤 방법이든… 마다 않겠다?" 확인하듯 그녀를 보며 웃는 그에게 그녀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유리아덴의 입가가 빙긋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뭔가 아주 만족한 듯한 웃음이었다. '……저 목석도 웃을 줄 알아?' 아주아주 엄청난 발견을 한 에리나가 때에 안 맞게 중얼거렸다. "좋아. 너와 계약을 하도록 하지." "에… 네? 아, 네." 유리아덴은 그녀에게로 가까이 다가 오더니 손가락으로 뺨을 훑었다. 에리나의 몸이 굳어지자 그는 입을 열었다. "<계약 완료>." "…에엥?" 이게 끝? 에리나는 왠지모를 허탈감에 젖어 그를 쳐다 보았다. "이게 끝이에요? 이게 다예요?" 왜, 소설이나 전설에 보면 많이 나오지 않는가. 흑마법사가 결연하게 자신의 핏물로 마법진을 그리고, 긴 주문을 외우며 마족을 불러내어서는 금방 꺼낸 심장 등 제물을 바치고는 계약을 한다. 계약을 할 때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꼭 단검으로 심장을 찌르는 등 온갖 사이코적인 쇼는 다 하고 난 뒤인 것이다. 거기다 마족도 그에 보답이라도 하듯 손가락으로 요상한 문장을 그려주고 파악- 하는 조명, 음향 등 효과를 살려 계약을 완료한다. 이 곳은 마계고 겨우 몇 발자국 앞에 마족이 있으니 핏물로 마법진을 그리거나 불러 내느라 제물바치고, 심장 찌르기 등 쇼는 넘어간다 하더라도 뭐 거창한 거 하나쯤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말이다. 그래도 자신을 다 내던지는(?) 약속이었는데! "그럼 뭘 바란 건가." "으… 그건…."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이라고 대답하기에는 에리나의 낯이 너무 얇았다. 그런 그녀의 속을 읽은 모양인지, 유리아덴은 다시 침상에 기대듯 앉아 책을 펴며 말했다. "이 이상 필요한 건 없다. 계약에 필요한 건 쌍방의 만족일 뿐이지. 그 외의 나머지 것은 모두 쓸데없는 짓거리에 불과하다." 에리나는 허탈감에 비틀거렸다. 마족이니까 이러이러할 것이다, 라는 예상 하에 심장 한 가득 모아놓고 피 비린내 가득한 곳에서 주문 외고 온갖 폼 다 잡은 건 다 흑마법사의 쓸데없는 짓이고, 마족은 그 꼴을 보며 비웃었다는 뜻이 아닌가! '…이 사실을 흑마법사들이 알면 얼마나 허탈할까. 자기들은 그 짓 한다고 욕 얻어먹고 살았는데.' 에리나는 흑마법사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동정심을 금할 수 없다는 게 진심이었다. 게다가, 마족과 계약한 건 그녀 역시 똑같지 않은가. 비틀거리는 발을 움직여 방으로 다시 돌아가려던 에리나는, 뒤에서 그녀를 끄는 목소리에 잠시 멈춰서야 했다. "기억해 두도록. 이 시간 이후부터, 너는 '내'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내 곁을 떠나는 건, 용납하지 않겠다." 에리나는 멈춰섰던 발걸음을 다시 옮기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흐윽. 늦어서 죄송합니다.ㅠㅠ 즐독하세요... 우으으~;; 제 목: [루피아와 네르의 첫 좌담회] [루피아와 네르의 첫 좌담회] ◀▷ ◀▷ ◀▷ ◀▷ ◀▷ ◀▷ ◀▷ ◀▷ ◀▷ ◀▷ ◀▷ ◀▷ 잔잔한 어둠이 흐르는 밤. 스산한 분위기로 삼색의 달빛이 요요한 빛을 내뿜고 있다. 음모를 꾸미기 좋은 밤, 마왕성이 내려다 보이는 허공에는 한 사람이 후드와 로브로 온 몸을 감싼 채 므흐흐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형체도 없이 흐릿한 그 사람은 마왕성의 창으로 들여다 보이는 응접실을 내려다보며 한참을 웃다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안녕하세요? 작가 네이에르라고 합니다. 이번에 첫 좌담회로 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제 소설의 인물들이 워낙… 음, 개성이 뛰어난(?) 인물들이라 다소 소란스러울 수 있다는 점을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후훗, 아아. 기대가 되네요. 이번에는 특별 게스트로 출연하니까 주목해 주세요." 그리고 그녀는 작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마무리한 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아, 그녀의 효용가치는 이 정도였던 것이다. 좌담회를 열 첫 맨트를 날리기 위한. 장소는 다시 이동하여 마왕성의 응접실로 배경이 바뀐다. 과연 마왕성답게 화려하게 꾸며진 응접실 중앙에는 촛불로 주위를 밝힌 채 이디스가 독서를 즐기고 있었다. 모처럼 생긴 여유로운 시간을, 그는 우아하게도 독서로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하기만 이 '여유로운 시간'이 생긴 까닭은 다름아닌 작가의 특별출연 부탁으로 생긴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주었으면 한다. 응접실의 문이 열리며 한 무더기의 인물이 대거 출연했다. "어? 이디스 님, 뭐 읽어요?" 루피아가 맨 먼저 눈을 반짝 빛내며 그에게 다가갔다. 출연 외에는 꽤나 다정한 시간을 보내는 커플인 두 사람이다. 이디스는 보던 책을 덮어 건네주었다. 세키라와 에리나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고, 아로데, 로이드윈, 그리고 유리아덴 역시 간단한 인사를 마쳤다. 아유니 역시 평소의 발랄한 성격 그대로를 보여주며 생긋 인사했다. 로아이나는 이 곳에서 후드를 벗을까 말까 고민하다 그냥 쓰고 있기로 결정했다. "역시 공녀 팀이 먼저 도착했군요. 신혼 일기 팀은 요즘 너무 오래 잠수해서 오랜만에 움직이기가 힘들다나요. 아아, 부럽기 그지없어라. 신혼 일기 팀, 요즘 작가가 신경도 안 써줘서 좀 섭섭한 감은 있지만 모처럼의 휴가를 이용해서 대륙투어를 다니고 있대요." 세키라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로데는 글쎄, 라고 말하며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다. 에리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는… 요즘 강해지기 위해서 영혼을 팔아버린 여자로 만들어 버렸더라?" "어머머. 나는 어떻구. 하- 책이나 읽으면서 얌전히 지내라잖아 완전히. 그래도 루피아만 하겠느냐마는 말이야. 맨날 넘어지구, 쫓기구, 길 잃구, 먼지 마시구… 그 애가 제일 고생이지. 이디스 님이 많이 챙겨주시기는 하지만… 후훗, 걔는 모르는 것 같더라." 세키라가 뭔가 아주 즐거운 듯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아로데 옆에 있더니 점점 그를 닮아가는 모양이다. 에리나는 훗, 하고 짧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똑같지, 뭐… 둘 다. 극중 캐릭터가 괜히 나왔겠니? 성격이 다 똑같잖아. 너와 나도…." "이거 때문에 마계로 왔지, 언제 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 이렇게나마 푸념할 수 있는 것도 다행이지. 에휴- 작가, 그 사람이 앞에 있으면 나도 내가 어떻게 할 지 모르겠어." …허공에 몸을 숨긴 채 쳐다보는 작가의 머리에 식은땀이 한 방울 또르르 흘렀다. 세키라, 에리나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고 그녀의 시선은 루피아&이디스에게 돌려졌다. 그들 커플은 극외에서도 애정전선이 형성될 거라는 기대를 모으고 있기 때문에 작가 역시 흥미진진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디스, 루피아는 아로데, 로이드윈, 유리아덴, 로아이나, 아유니와 함께 같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신혼 일기 팀이 올 때까지 수다나 떨어 보자는 의도인 것 같았다. 작가가 시선을 돌렸던 두 여인네도 그들에게 합류했다. "난 말야. 왜 맨날 구르고 뛰고 해야 하는지. 자, 봐봐. 이 멍. 저번에 그 숲에서 자기 혼자 뛰는 이상한 장면 찍을 때 생긴 거야. 게다가 이디스 님이 그……." 말을 잇던 루피아의 얼굴이 빨갛게 타올랐다. 비록 극중에서는 그 장면은 루피아가 잠든 사이 일어난 일이지만, 장면을 찍는 도중 루피아는 정신이 말짱한 상태였던 것이다. 그 때 그 장면을 떠올린 루피아가 말을 멈추자 이디스가 그녀의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어디 아픈가? 왜 얼굴이 갑자기 빨갛게…." "아냐! 안 아파요! 으악, 얼굴 들이밀지 마욧!!" 극중과 극외 캐릭의 성격은 모두 똑같다. 그 점을 다시 한 번 깨달으며 이상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는 이디스를 좌중 인물들은 웃음을 참으며 지켜봤다. 여기서마저 감정상 둔한 마왕의 모습이 너무나 귀여웠던 탓이다. 그에 따른 루피아의 반응 또한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아직까지는 이렇다 할 사건이 하나도 없잖아? 아, 그래놓고도 벌써 10몇 회를 수정하고 있다니. 이건 기적이야." "음… 이번에 가는 길에 꽤 많은 일이 있을 예정이라던데? 대본이 와야 알겠지만, 제발 연기하기 힘든 건 피해 줬으면 좋겠어. 어차피 우리들은 액션신도 별로 없지만." 루피아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그녀로서는 부담스러운 액션 연기는 별로였다. 액션신이 한 번도 없었던 지금도 이렇게 멍 투성이인데, 액션신이 나오면 작가 취향상 심한 하드는 아니더라도 고통이 심한 소프트로 연속해 이어질 것 같다는 느낌이 물씬물씬 들기 때문이다. 에리나는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유리아덴을 통해 강해지게 될 그녀로서는 그 방법이 대체 어떤 것일지 괜한 불안감만 느끼고 있는 상태였다. 사악하게도, 작가는 그 부분에서 대본을 끊어 버렸다. 작가를 만나면 반드시 한 대 패줘야겠다는 다짐을 다시금 굳히며, 에리나는 작게 인상을 썼다. 파트너 유리아덴 역시 어떻게 할 지는 지시받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도 가장 기구한 운명이 되는 건 저라구요. 소식 들으셨어요? 제 역할 때문에 저는 동정표를 많이 얻고 있는데, 작가가 슬쩍 내비친 바로는 저는 더 불쌍해질 거라더군요. 뭐라고 하는 줄 아세요? 내가 인기 걱정을 하니까 '후후훗! 걱정 마. 너는 더 불쌍해질 예정이기 때문에 동정표라도 많이 얻을 거야~'라더군요." 좌중 인물들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루피아는 로아이나의 어깨를 토닥여주며 심심한 위로를 건넸다. "걱정 마.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그 사람은 비극은 취급 안 해. 스토리 상 어쩔 수 없는 부분에서는 몇 사람씩 죽겠지마… 안……. 하하핫! 하여튼 힘내!" 그 사람이라면 여차해서 성질을 건드리거나 기분 나쁘면 그럴 지도 모른다! 는 생각이 불현듯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자 루피아의 얼굴이 굳었다.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어깨를 툭툭 두드려 준 루피아의 위로는, 로아이나에게는 전혀 위로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 하핫. 그, 그러고보니 극외인데 왜 후드 안 벗어? 그거 기대한 사람도 꽤 있을 텐데." 루피아가 주제도 돌릴 겸해서 말하자 로아이나의 숙여졌던 고개가 들리며 붉은 입술이 슬쩍 올라갔다. 그로서는 기다렸던 물음이었다. "이렇게라도 궁금증을 끌어야지요. 아, 얼마나 답답한 줄 아세요? 앞은 잘 보이지도 않고, 이거 바람에도 안 벗겨지게 하려고 안에 머리에 고정시켜 놨단 말이에요. 가발 알죠? 가발 안쪽에 달린 것만 따로 사서 후드에 안착시켜 놓고, 그걸 삔으로 머리와 고정시켜 놨어요. 이건 사비까지 들여가며 만든 거라구요. 극중에는 '바람에도 안 벗겨지는 신기한 후드'라고만 서술해 놓은 거 있죠? 내가 이걸 얼마나 말하고 싶었는지…." 얼마나 억울했으면. 작가는 반성과 동시에 조금 더 자세하게 서술해 줘야 겠다는 다짐을 했다. 하지만 그래봤자 어차피 '불쌍한 역할로 동정표 모을' 역할이기 때문에 서술에 큰 변동은 없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 그것보다는 당신 얼굴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을 거예요." 세키라가 말했다. 로아이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중얼거렸다. "마족이니까 아름답게 생겼을 거다, 는 의견이 대부분이긴 한데 말이에요. …나도 언제 내 얼굴 공개되냐고 작가한테 물었었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는 줄 알아요? '동정표만 받아서는 인기몰이가 안 되잖아. 이런 식으로 궁금증을 하나 더해주면 그나마 인기가 더 갈 거야. 아! 혹여라도 다른 사람 앞에서 네 얼굴에 대한 정보 흘리고 다닐 생각 말아라. 만약 그럴 시에는 당장 성형외과에 예약 잡아주마'라고 하잖아요! 흑흑… 나쁜 사람!" 로아이나의 이미지가 많이 깨졌다. 더 이상 그의 정체를 노출시키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작가는 인상을 썼다. 그리고 허공에서 손을 휘저어 그를 강제이동시켜 버렸다. 갑자기 그가 휘익, 하고 사라져 버리자 좌중 인물들의 눈이 휘둥그레 떠 졌지만 이내 가라앉았다. 평소 로아이나의 이미지가 워낙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뭐, 하는 사고인 것이다. 그 잇점을 이용하여 작가는 대담하게도 로아이나를 강제이동시켜 마왕성 옥탑에 감금시켜 버리는 범죄를 저질렀다. "하아- 신혼 일기 팀은 대체 언제 도착한담. 그 사람들이 와야 빨리 다음으로 넘어가지."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고, 루피아가 투덜거리듯 그 말을 하자마자 응접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문가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응접실의 문을 붙잡고, 헉헉 숨을 몰아쉬며 그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는 그들은, 다름아닌 신혼 일기 팀이었다. 결고운 검푸른 머리카락을 포니테일로 높이 묶고 세르디잔식의 하늘하늘한 옷을 입은 그녀는, 이마 정 중앙에 다색(多色) 보석이 박혀있어 인상적이었다. 각종 엽기적인 행각으로 세인(世人)들을 경악에 몰아넣은 주인공, 그녀는 네이에르였다. 그녀의 옆에서 세이가 부축을 해 주며 공녀팀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아아, 네르. 그러게 너무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고 했잖습니까." "으에엑. 세, 세르디잔 왕국에서 너무 놀았나 봐. 타마르랑 논다고 시간가는 줄도 몰랐는데. 하아, 루피아. 안녕? 이디스, 안녕하세요. 아, 그리고…[좌중을 돌아본 후]… 다들 안녕!" 아아, 그녀는 다른 모든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기가 귀찮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녀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아유니가 제일 먼저 일어나 네이에르에게 다가가 달라 붙으며 눈을 반짝였다. "아아, 언니! 너무 오랜만이에요. 그 동안 뭐하셨어요?" 아유니의 실제 나이는 아직 15세다. 엄청난 동안, 이라는 설정이 필요했기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22살의 노땅(?)이 되어야 했다. 7년의 세월을 뛰어넘은 설정인 것이다. 비록 설정이고, 소설이긴 하지만 그들에게는 실제상황인 이상 아유니는 상당히 불행한 입장이다. 그리고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아유니는 네이에르와 루피아의 엄청난 팬이라는 점이다. 그녀의 캐스팅 이유는, 상당히 불쌍하고 어찌보면 사이코틱할 수 있는 역할인데도 불구하고 그녀가 스스로 지원했다는 점에 있다. 22살의 동안을 찾기란 상당히 어려워서, 작가는 간단하게 그녀를 '아유니' 역에 캐스팅하고 말았단다. 그녀는 루피아와 네이에르를 맨 처음 만나자마자 감격의 눈물을 짓기도 하고 너무 울어 기절까지 한, 아주 못말리는 소녀였다. "아유니… 라고 했던가. 아아, 그래. 잘 있었어? 나야 뭐, 작가가 너희 팀에 정신팔려 있는 동안 꽤 여러 군데 돌아다니면서 놀았지. 흠, 우리 팀 전체가 길눈이 상당히 어두운 탓에 예정에도 없는 곳에 가게 되기도 했지만 작가가 다시 연재를 시작하면 적어도 녹화 장소 찾아가는 데 늦는 일은 없을 거야." 네이에르의 녹화장에서 가장 유명한 일화는, 신혼 일기 팀 전부가 도착했는데도 녹화 장소에 도착하지 않은 '네이에르, 녹화 펑크' 사건이었다. 나중에 대륙 북부의 이름모를 야산에서 발견된 그녀가 그 곳에 있던 이유는 다름아닌 '길을 잃어서'였다. 어쩌다 거기까지 가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지만, 세이도 없이 그곳에 홀로 떨어지게 된 네이에르는 제일 먼저 세이에게 실생활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마법진 몇 개를 배웠다고 한다. 비록 극중에는 쓸 수 없지만. "엣? 그런데 페리니카와 로드님은 어디 가셨나요? 안 보이네요." 루피아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거기에 이디스가 덧붙였다. "에드라프와 에릭도 보이지 않는군." 같은 마왕 직업에 있는 에드라프가 보이지 않자 이디스가 상기시켜 준 것이었다. 네이에르는 그들을 보며 답해 주었다. "조금 있다 올 거야. 이래뵈도 주인공들인데 너무 늦을 수는 없으니까 우리 먼저 온 거거든. 아, 맞아. 페리니카 말이야~ 그 사이 더 귀여워졌잖아~ 루피아, 걔 오면 우리 같이 데리고 놀까?" "그거 좋지! 아, 그러고보니 대체 왜 '공녀'에는 귀여운 애가 안 나오는 거야? 데리고 놀 만한 애 어디 없나?" 루피아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네이에르의 '신혼 일기'에는 페리니카, 타마르를 비롯한 어린 아이가 끊임없이 나오는 데에 비해 공녀에는 눈이 즐거울 만한 미남, 미녀들은 넘쳐 흐르지만(신혼 일기 측도 마찬가지이긴 하다) 어린아이는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네이에르는 자세를 낮춰 사람들의 얼굴을 탁자 위에 모이게 한 다음 낮게 말했다. "그 이유는 말이야… 작가가 신혼 일기 연재 중에 리플에서 '로리콘'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거든. 그 때문에 꼬마들을 등장시키는 걸 자중하고 있다나? 그딴 거 신경쓰지 말고 좀 등장시켜 달라고 내가 네 대신 말한 적이 있거든? 뭐라고 그랬는 줄 아니? '너희들을 위해 로리콘 소리 들어가면서 애들 등장시킬 생각은 없다. 혹시 몰라. 너희들이 잘 하면 내가 등장시켜 줄지 말야. 아아- 요즘 아역배우 캐스팅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줄 알아? 애들 몸값이 금값이야. 신혼 일기 드래곤 배역 캐스팅하는 데는 얼마나 돈이 많이 들었는지! 걔네들은 엉덩이가 무거워서 왠만해서는 잘 안 움직인단 말이야'라고 하는 거 있지?" 오늘은 아주 작가 욕을 하기로 작정을 한 모양이다. 작가는 어둠 속에서 남몰래 눈물을 짜내며 이를 갈았다. 내 아주 저것들을 다 죽여 버릴까! 늘 생각만 하고 행동으로는 옮기지 못하는 작가는 언제나처럼 이만 부득부득 갈 따름이다. 어쨌든, 네이에르는 이번 기회에 작가 욕을 실컷 하고 말겠다며 다짐에 다짐을 더하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치면, 나는 출연비도 잘 안 주는 거 있죠. 스스로 지원한 거라고는 하지만 그러는 게 어딨어요? 저번에 그 숲에서 등장했던 장면 있잖아요? 참나, 그때 떠 있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장면 연출하느라 힘들었는데, 그쯤 하면 보너스 정도는 줘야 하는거 아닌가요?" "세상에, 보너스도 안 줬단 말이야? 그러고보니 나도 보너스같은 거 받은 적 없어." 루피아도 맞장구를 쳤다. 그 말에는 네이에르 역시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녀는 출연비마저도 잘 주지 않는 작가였단 말인가? 작가는 가슴에 뭔가가 박힌 듯 크윽, 크윽 하는 신음을 연신 흘리면서 비틀거렸다. "아아, 수정하기 전에는 그나마 내 정체가 밝혀져서 딱 재밌으려는 부분이었는데. 아! 로아이나 님의 열렬한 사랑을 받으시는 분이 누군지 혹시 아는 사람?" 좌중의 모든 인물들의 고개가 가로저어 졌다. 아유니는 골몰히 생각에 잠기며 '대체 누구지?'하며 중얼거렸다. 아아, 그녀는 아니란 말인가. 독자들이 예상이 빗나간 것에 대해 어떤 반응일까 궁금해하며 작가는 히죽 웃었다. 어쩌면 뒤통수를 칠 만한 인물일지도 모르지. 본문 내에 '그녀'라고 서술된 사람을 생각하며 작가는 키득키득 웃었다. "요즘 타마르는 어때?" "아아. 잘 크고 있어. 얼마나 귀엽던지. 옷 보면 알겠지만, 우리는 방금까지 세르디잔 왕국에서 놀다 왔거든. 그러고보니 우리 페리는 언제 오려나. 세이, 혹시 알아?" "음… 안타깝게도 그는 못 올 것 같군요. 로드님과 함께 이 곳에는 참석을 못 하겠다고 정중한 사과를 보내 왔습니다. 전언이 있습니다. '로드님과 쥬리에가 붙잡고 놓아주시질 않아서 참석 못 하겠어. 안타깝지만, 다음에는 꼭 참석하도록 할게, 누나. 으윽- 되도록이면 빨리 와서 나 좀 구해줘어-'라는 군요." "으음. 쥬리에는 어떻게든 빨리 떼어 버려야 하겠어." "그렇게 치자면 네르, 당신께 붙은 남자가 더 많지 않습니까? 클레이오냐 왕국의 왕자 일루카를 첫 필두로 해서 기사 알티온도 상당한 호감을 보이고 있고, 어쌔신 길드 마스터 킬레인, 세르디잔 왕국의 카지르 다바딘, 아지르 타마르도 크면 상당하겠더군요? 아아, 빠뜨릴 뻔 했군요. 페리니카*레드 역시 가장 대표적인 당신의 추종자죠. 안 그래요?" 가시가 돋힌 그의 말에 네이에르는 히죽 웃어보일 따름이었다. 속으로 상당히 많이 쌓인 모양이다. 하긴, 신혼 여행을 떠났는데 부인이 돌아다니며 온갖 염문설(?)을 일으키고 다니니 남편 입장에서 오죽이나 불쾌하랴. 이쪽 사정도 결코 좋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작가는 이쯤에서, 사람을 좀 물갈이(?)시켜야 하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구석에서 '오빠들이 없어, 오빠들이…'라고 중얼거리는 루피아도 있고, 따로 노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아까부터 한 마디도 없었던 세키라, 에리나, 아로데, 유리아덴, 로이드윈 등등의 공녀 팀이다. 이디스, 루피아는 그래도 주인공이니 남겨 두기로 하자. 그녀는 이미 분위기 상 떨어져야 할 사람들 명단에 오른 자들의 뒤로 스르르 몸을 옮겨 강제이동시켜 버렸다. 그리고, 메모지에 재빨리 글씨를 휘갈겨 적고는 사라졌다. "어? 세, 세키…… 이런 제길! 당했다!" 루피아는 허공을 바라보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 시선에 작가가 움찔했음은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 메모지에는 지렁이 트위스트 추는 듯한 필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마왕성 옥탑에 가둬 놓겠음. 작가 권한으로 명령하니, 이번 좌담회가 끝날 때까지 찾을 생각은 하지 말아라. 만약 찾으러 나선다면, … 후후, 내 수많은 돌과 사시미를 각오하고 두 소설 다 비극으로 만들어 버리겠다!」 휘이잉- 순식간에 비어버린 마왕성의 응접실. 이제 남은 것은 이디스&루피아, 네이에르&세이카루스 뿐이다. 그들은 차마 자신들을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협박에 움직이지도 못한 채 이만 부드득 부드득 갈았다. "그놈의 작가 다시 만나면 반드시 모가지를 분질러 놓으리라!" 그렇게 다짐에 다짐을 거듭할 때였다. 갑자기 응접실의 창문이 벌컥- 열리면서 때아닌 한파가 몰려 들었다! 네 사람의 시선이 창가를 향했다. "오- 호호호호호호홋! 호호호호- 흠흠, 이렇게 웃는 거 맞나? 다시. 호호호호호호-" "자중하렴, 딸아. 우리는 납치해 온 얘네들만 놔두고 가면 되는 거야." 검은 후드와 로브를 두르고 있는 두 여인의 등장! 긴 폐활량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크게 여왕님 웃음을 터뜨린 사람과 그 사람을 '딸'이라 지칭한 사람은 '아, 그랬나요?', '그랬단다' 등등의 대화를 서로 잠시 나누다 그들을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네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위에서 언급했던 '특별 게스트' 신기, 이쪽은 어머니 시온. 이대로라면 공녀 팀의 중간계 부분의 사람들은 아예 등장하지 못할 것 같아서 작가가 특별히 투입한 인원이지. '납치하여 사라지는 괴한 1, 2'!" 아아, 그게 아닌데. 잠시나마 등장시키기 위해 애썼던 내 노력을 알아줘요. 언니, 엄마. 두 사람이 가르킨 곳에는 입에 천을 물고 팔 다리가 묶인 여섯 사람이 몸부림치고 있었다. 루피아는 거리가 있는 데도 불구하고 그 중 세 사람이 자신의 오빠, 그리고 한 사람은 자신의 시녀라는 것을 알아 보았다. "오-호호호호홋, 나는 역할에 충실할 거야! 자, 자. 여기서 얘기만 해! 만질 수는 없을 테니까~ 호호호호호호호호홋-" 역할에 너무나 몰입한 그대, 아름다워라.[의미불명] "이, 이! 이 사악한!" "호호호호호호호호홋- 원래 특별 게스트 설정이 그래!" 어머니 시온은 역에 완전히 몰입해버린 딸을 바라보며 살풋 인상을 썼다. 슬며시 딸의 뒤로 다가간 그녀는 신나게 웃고 있는 딸의 목을 살짝 툭 쳐 버렸다. '신기'의 몸이 푹- 꺾이며 쓰러져 버렸다. 어머니 시온은 안타까운 듯 한숨을 살짝 내쉬더니 말했다. "그럼 남은 좌담회를 즐겨요. 우리는 이만 사라져 줄 테니. 읏차!" 그녀는 딸의 옷자락을 잡더니 하늘로 둥실 떠올랐다. 두 사람의 느닷없는 등장으로 황당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던 네 사람은 이어 남은 여섯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이에르와 세이카루스는 어깨를 으쓱, 하며 중얼거렸다. "하여간 웃기는 작가라니까. 아, 그 작가 맏딸이라면서. 근데 왠 언니?" "글쎄요, 네르. 아- 이 쿠키 좀 드셔 보시겠습니까? 맛이 좋군요." "아아, 고마워. 그래도 세이가 만든 게 제일 맛있다구." 이 커플은… 대륙투어를 다니면서 사이가 더 좋아져 온 듯 싶다. 세 쌍의 감격적인 남매상봉은 꽤나 소란스러우니 넘어가도록 하자. 서술하기 피곤하다.[;;] 잠시간 장내는 소란스러움에 빠져 들었다. 작가 네이에르는 이쯤에서 모습을 드러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아아, 그러나 작가 네르. 저 주인공들의 폭력을 정면으로 맞닥뜨릴 자신이 없었으니. 그녀는 그냥 이대로 있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이대로는 분위기가 진정될 기미가 안 보인다. 좌담회의 본 요지[…그게 뭔데?]를 살리기 위해, 편집!! 삐리리리- 피리리리리리릿- 대략 1시간 반 후. "……새, 새벽이 밝아 와… 큰일이다. 베키, 우웃… 오빠들 잘 부탁해." "이, 이런 게 어딨어요! 오자마자 막을 내려야 하다닛!! 이렇게 불공평할 데가아아아아~~" "이럴 수는 없어!" 무시. 무시하자. 작가는 다시 손을 휘저었다. 다음 좌담회 장소는 마왕성이 아니라 중간계로 해 줄게. 중간계 출연자들의 안타까운 비명을 뒤로하고, 그들 여섯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네이에르는 애초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태연작약한 태도로 쿠키를 우물대고 있다. 세이카루스 또한 신경쓰는 분위기가 아니다. 루피아만이 안타까운 눈으로 털썩 주저앉을 뿐. "……마무리가 안 돼. 이 사람은 언제나 마무리가 안 돼." -루피아 "동감이야, 루피아. 너무 그렇게 절망하지 말라구. 본편에서 곧 만나게 해 준다잖아? 아아, 그에 비해 나는 울 아빠 만날 때가 아직 까마득히 멀었으니 나보다는 나은 거지. 수정판도 아예, 라고 해도 될 만큼 진도가 안 나갔잖아." -네르 "슬슬 이런 거 적는 거 보니까 할 짓이 없나 보군요. 글 적기는 싫고, 놀고는 싶고." -세이 "그 사람은 언제나 그랬다." -이디스 "……그래! 난 언제나 마무리가 안 된다, 어쩔래!!" 느닷없는 등장. 버럭- 소리를 지르며 난데없이 등장한 작가의 출현에 다들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작가는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다가 소리 질렀다. "나, 난 그래도… 그래도… 에잇! 젠장, 너희들 다 죽여버릴 테다아아아아-" 그리고 사라져 가는 작가. 네 주인공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적응하지 못한 채 눈만 끔뻑거렸고, 작가는 저 멀리 세 개의 달 사이로 사라져 갔다. 1초. 2초. 3초. 4초. 5초. 6초……10분 후. "……이노무 작가아아아- 할 말만 하고 도망간 거야야아!! 다음편 대본이랑 사라진 애들 돌려주고 가아아아-!!!!" "신혼 일기 촬영재개 좀 하자!! 이 작가야- 우리도 출연비 좀 받자구우!!! 일상생활에서 로드 상대하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알아아아아-!!!!!!" 한 편. 마왕성의 옥탑에서는. "에잇, 좌담회 아직도 안 끝났나? …꺄앗! 아로데, 나 쓰리 고!" "뭐야? …이, 이런." "세키라, 너 너무 잘하는 거 아니야? 진짜 처음하는 거 맞아?" "다음! 빨리 다음 사람 해요." ……고스톱이 한창이었다.[…;;] ============================== 아아. 이런 거 해 보고 싶었어요.-_-;; 좌담회같은 쓸데없는 짓 치고는 상당히 긴 듯.. 싶지만 말이예요. 네이에르와 세이카루스의 오랜만의 등장이군요. 이제 글 쓰러 사라져.. 야죠. 즐독하세요~^^; 제 목: [수정판] 공녀(貢女) : 제13화 [술(酒)](1) #. 제13화 [술(酒)] * * * * * * * * * * * * * * * "-계, 계약?" 턱, 하고 숨이 목에서 막혔다. 하지만 에리나는 태연한 안색으로 찻잔을 들어 마시며 빵을 찢어 입안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세키라도 할 말을 잊은 듯 멍한 얼굴이었다. 루피아는 당혹감에 아, 하고 꽉 막힌 소리를 냈다. "그래. 현재 내가 강해질 수 있는 수단은 그것뿐이야. 클리오라의 도움을 얻는 것 마음에 안 들고- 동정을 구하는 것처럼 '도와달라'고 말하는 것 또한 내 취향이 아냐. 쌍방이 주고 받는 것. 내가 걸 수 있는 모든 것을 걸어 계약하는 게 내 방식이야. 알잖아?" 물론 알고는 있었다. 이렇게 강하게 나갈 줄 몰랐던 것 뿐이다. 루피아는 하아, 하고 한숨을 뱉으며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예상하지 못했던 것뿐, 잘 생각해보면 에리나는 충분히 그럴 사람이다. "어떤 경우에도 떠나지 않겠다니… 그럼, 만약 이 곳을 떠날 기회가 와도?" "안 가." 에리나는 단호하게 끊어 말했다. 그 가능성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열흘동안 많이 생각해 봤다. 하지만 없을지도 모르는 가능성에 전체를 거느니, 차라리 이 곳에서 강해지는데 모든 것을 거는 쪽이 이득이었다. 그런 결정을 내리는 데, 고민과 갈등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충분히 고민했고, 충분한 갈등을 겪었다. 이러한 결정을 내리고도 스스로가 기가 막혀 울기도 했다. 하지만 나약한 채로 살아가는 것은 사양이다. "나는 이 곳에서 나약하게 살아가지 않겠어. 강자로 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면, 그 기회를 100% 활용할 거야." 지금 이 말이야말로 에리나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 주는 말이 아닐까? 루피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쓰게 웃음지었다. 세키라도 마찬가지였다. 루피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그녀는 그녀 자신을 마계에 얽어매는 짓은 할 수 없지만, 강해질 수 있는 수단은 무엇이든 이용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알았어." "오늘 오후에 어떻게 해 주기로 했는데, …기대해 봐야지. 안 그래?" 루피아는 식사를 한 후 마왕에게로 가 봐야 했다. '마왕'? 그러고보니 그녀는 마왕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 그 사실이 어째 이상하게 느껴졌다. 아직 이 곳에 온 지… 오늘로 딱 15일 째다. 그녀는 마왕과 있었던 일을 차근하게 되살려 보았다. 머릿속으로 하나 하나 떠올리던 루피아는 퍼뜩 깨달았다. '마왕이 흐트러졌던 건 숲에서밖에 없었고, 몽땅 나 혼자 안절부절 못했… 윽!' 마왕이 한 번이라도 흐트러졌었다는 사실이 중요하지만, 루피아에게는 그리 신경쓰이는 사항이 아니었다. 어쨌든 지금 신경쓰이는 건 '아유니'라는 여자와 에리나의 계약 문제다. 그녀는 아직 마계에서 빠져 나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비록 지금은 막막하지만 말이다. 식사를 마친 후 그녀들은 다같이 마왕이 집무실로 향했다. 루피아는 아유니에 대해서 에리나와 세키라에게 말할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아유니가 수상쩍다고 느껴지긴 하지만 그게 '아유니'라는 사람이 아닐 가능성도 있는 상태에서 함부로 말하기가 꺼려지기 때문이다. 그녀가 본 것을 그대로 말하라면, 그건 '유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멀쩡한 사람 유령 취급 하기가 미안했던 것이다. 하지만 말하지 않고 있으려니 두 사람을 기만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망설이던 루피아가 막 입을 열어 '있…'이라고 말하려고 할 때. "루피아니이이이이임-" 두두두두- 광기마저 느껴지는 외침과 함께 자신의 허리쪽에 무언가가 엉겨 붙었다. 정체불명의 분홍색 실뭉치는 다름아닌… '아유니 드 포르티칼'이었다. "다시 뵙게 되서 정말정말 영광이에요- 어제 그 모습, 정말 멋있었어요! 아아- 그 냉정하고 차가운 모습! 일부러 그러신 거라는 거 알지만 그래도 너무 멋있었어~" "예? 멋… 있어……?" 품 안으로 파고들어 부빗거리며 하는 말은 위험성까지 느끼게 한다. 루피아는 난감한 표정으로 기막힌 웃음을 흘렸다. 멋있어? 그게 어제 일이 있고 난 후의 정상적인 반응이란 말인가? 아유니의 갑작스런 습격과 돌변에 세키라와 에리나도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들의 머릿속의 아유니란, 얌전하고 귀여운 동안의 여자일 뿐이었다. 그런데. '…역시… 사람은 겉만 보고는 모르는 거야.' "조, 좀 떨어져 주겠- 어요? 하. 하핫, 약간 아프네요. 아하하." 당혹스럽기는 루피아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어제 자신이 제대로 재수없는 역할을 하기는 했었는지 의심마저 들 정도였다. "그래, 이만 떨어져라. 루피아는 내가 인수해 가도록 하지." 아유니를 루피아에게서 슬쩍 밀어내며, 로이드윈이 말했다. 루피아 입장에서는 그다지 달갑지 않은 일이었지만 말이다. 아유니는 그의 말에 어깨를 움찔하며 움직임을 멈췄다. 그녀는 순진하고 맑은 분홍빛 눈동자로 로이드윈을 똑바로 올려다 보았다. 아주, 순간이면 놓칠만큼의 찰나에 불과했지만- 그 눈동자에는 싸늘한 분노와 증오, 그리고 살의마저 내비쳤다. 싸늘한 한기가 돌 만큼.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찰나에 불과했다. 아유니는 금방 루피아의 허리를 잡았던 팔을 풀었다. 조금, 힘없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로이드윈은 아유니의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마안(魔眼)이라는 직위는 괜히 생긴 것이 아니다. 얌전하기만 한 여자로 생각했던 것은 오판이었던 것이다. '…혹시.' 그의 붉은색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 * * * * * * * * * * * * * * "…예?" 아로데는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듯이 얼굴을 팍 일그러뜨렸다. "뭐, 뭐라고 하셨는지… 잠깐, 다시 말해주시겠습니까?" 마왕의 얼굴이 살풋 일그러졌다. 약간 짜증스러웠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로데에게는 그것까지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방금 들은 폭탄선언에 온 신경을 쏟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자신의 군주의 입술이 다시 달싹이며 음성을 흘려냈다. "그 여자를 '가지고 싶다'고 말했다." 잘못들은 게 아니다! 아로데는 낮게 신음을 흘리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가지고 싶다'고 말했다. 힘과 마왕의 자리 외에는 아무 것도 원해본 적이 없었던 자신의 군주가! 무엇이든지 흥미를 나타내지 못하고 언제나 감정의 변화를 일으키지 않던 군주가! "무엇인가- 심장을 뛰게 만든다. 그 느낌이 낯설지만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아." 하. 하하. 아로데는 크게 웃음이라도 터뜨리고 싶었다. 무엇에도 애착을 보이지 않던 그의 군주가 처음으로 무엇인가를 '갖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게 무엇이라도 그는 군주 앞에 가져다 바쳐야 했다. '그 '무엇'이 뭔지는 모르시는 것 같지만… 후훗. 이거야… 큭! 크크큭!' 입가를 손으로 막은 채 가늘게 어깨를 떠는 아로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디스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러나." "-하… 하하. 큭, 키킥!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 정말… 아하하! 아무 것도 아닙니다." "…어디 아프기라도 한 겐가." 생각보다 증세(?)가 심각한 것 같다. 배를 움켜쥐고 이를 악무는 아로데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던 이디스는 뭔가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 그는 그냥 넘겨 버렸다. 한편, 그런 주군을 바라보던 아로데는 웃겨 죽을 지경이었다. 상당히, 아니 꽤 많이 불경한 짓이긴 했지만 어쩌랴! 500년이 넘는 세월동안 감정의 변화를 느끼지 못한 그의 주군은, 당연히 감정적으로 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늘 냉정하고 차갑기만 하던 주군의 그런 모습을 보는 건, 상당히… 즐거웠다. 아로데는 이 일을 유리아덴과 로이드윈에게 알려주면 과연 어떤 반응일까 즐거운 상상을 하며 히죽 웃었다. 그리고, 주군의 뜻에 의하면 공녀들은 이번 서열 대회에 참가하니- 그 곳까지 가는 기일이 비록 얼마 안 걸린다고 하지만 꽤나 기대될 수밖에 없었다. 가는 길에 들려야 할 일이 조금씩 있어서 한꺼번에 갈 수 있는 거리를 시간을 들여 가는 것이다. 마왕이 직접 나서야 할 정도의 일은 거의 없을 테지만. 그가 직접 나서야 되는 일은, <그림자> 족과의 일 정도 될까. 이번 루트에는 그 곳을 비껴가기는 하지만 몇 해 전부터 그들의 공격적인 태도가 더욱 확실해졌다. 아로데는 '딜렌'을 떠올리며 안색을 굳혔다. 그래, 그가 나서야 할 일은 '그' 정도의 일뿐일 것이다. "-소식 들으셨는지. 딜렌… 아니, 그림자 족에 관한 보고 말입니다. 얼마 전, 작은 충돌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런 소식은 언제나 있어왔던 게 아닌가. 그리 신경쓸 게 못 돼." 그림자 족과 다른 족과의 충돌은 언제나 있어왔던 일이긴 했다. 하지만 냉정하게 잘라 말하는 군주에게 아로데는 조금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감정이 가까스로 움직이긴 했어도, 아직 딜렌- 그에게 미치기는 힘든 모양이다…… 아! '그래! 밑져야 본전이지. 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어.' 5000살이 다 되어가는 고령의 마족, 아로데의 머릿속에서는 검은 기류가 풀풀 풍기는 음흉한 계획이 차근히 세워지고 있었다. * * * * * * * * * * * * * * * 어쩌다가! 내가 대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루피아는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제길! 이 찬장은 또 왜 이렇게 깊은 거야. 불행 중 다행으로 이 자리에 마왕이 없다 는 게 지금 루피아에게는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우잇!! 젠장할. 어디 적당한 데 없나! 여긴 도저히 안 되겠…. "지금 뭘 하고 있는건가?" 쾅! "우아앗!" 제길! 제기랄! 빌어먹으으을!! 루피아는 찬장에 박은 머리를 부여잡고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렸다. 오늘은 대체 왜 이렇게 재수가 없는 거야!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 곳에 와서 운이 좋은 적은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괜찮은가. 거긴 왜 들어갔던 거지." "아우우… 예? 아, 아하하. 시, 신경쓰지 말아요." 마왕은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다행히도 아무 말 없이 그냥 넘어가 주었다. 루피아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뒤에서 슬쩍 찬장의 문을 닫았다. '그나마 다행이야. 저 속에 던져 버렸으니… 설마 마왕이 직접 이 찬장을 뒤져볼 리도 없겠고 말이야. 한동안은 내가 시중을 들 거니까… 이 사실이 이렇게 다행스러웠던 때는 없었어.'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잠시 마왕이 아로데와 볼 일을 보러 간 사이 루피아는 차라도 끓여 마실까 해서 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수로 그만 서류뭉치 위에 차를 쏟고 말았고, 증거인멸을 위해 마왕의 집무실을 뒤지던 중 찬장을 발견하고 찬장 깊숙이 서류뭉치를 숨길 생각으로 부스럭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와중 마왕의 목소리가 갑작스레 들렸으니 깜짝 놀랄 수밖에. "아로데가 함께 저녁식사를 하자고 제의해 왔다. 어쩔 텐가?" "저녁… 식사요?" 루피아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마왕성에 와서는 한 번도 식사한답시고 누구와 같이 식탁에 모여 앉아서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중간계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 때는 아버지가 바쁘실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식구들과 함께 식사를 했었다. 오늘 아침은 세키라, 에리나와 같이 먹을 수 있었긴 했지만 이 곳에 와서는 처음이었다. "정령을 다뤄 보겠다고 했던 일은 어떻게 되었지?" 으윽! 루피아의 머릿속에 안타깝게 물의 기운을 놓쳤던 일이 떠올랐다. 어제 해 보려고는 했지만 또다시 절묘한 타이밍에 그녀를 부른 메를리나 덕분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지자 이디스는 실패했군, 이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는 서류 쪽으로 눈을 돌리면서 말했다. "지금부터 저녁식사 전까지는 자유시간을 줄 테니 계속해 봐. 그러고보니 저녁식사 후에는 유리아덴이 그의 공녀에게 무언가 행한다고 하는 것을 들은 것 같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루피아는 마왕의 마음이 바뀔 세라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유리아덴은 에리나에게 계약을 이행하려는 것일 게다. 그 일을 떠올린 루피아는 다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들어 한숨쉬는 일이 많은 것 같았다. 대체 어떤 방법으로 에리나를 강하게 만들어 줄 지, 그것도 상당히 궁금했지만- 무슨 생각으로 에리나의 계약을 받아들인 것인지 그것도 궁금했다. 물론 에리나가 그만큼의 가치가 없다는 건 아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생각일 뿐이다. 에리나는 인간이고, 유리아덴은 마족이다. 마족이 인간을 '가져서' 어쩌겠다는 얘기지?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마왕은 짧게 고개만 끄덕였을 뿐 그녀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루피아는 그의 집무실을 나서기 전 찬장 쪽에 다시 한 번 시선을 주었다. 설마. 저 많은 서류뭉치 중에서 조금 없어졌다고 그걸 눈치채지는 못하겠지? * * * * * * * * * * * * * * * 물, 그리고 정령. 정령에 대한 것들은 마계에 와서 처음 접한 것이지만, 물과 루피아는 상당히 깊은 인연이 있었다. 그게 악연(惡緣)인지 아닌지는 구분하기 힘들지만 말이다. 어렸을 때- 가족들과 함께 피크닉을 나간 루피아는 호수에 빠졌던 경험이 있었다. 그때는 거의 죽다 살아났고, 덕분에 루피아는 한동안 물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그녀는 겨우 보통 사람들(?)처럼 물에 대한 거부감을 없앨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가 하필이면 물의 정령에 가장 먼저 도전하는 데에는 다- 아 이유가 있었다. '물의 정령을 다룰 수 있게 되면 물에 빠져도 걱정없잖아!' 이게 이유다. 하지만 물과 그녀는 과연 악연인가 보다. 아무리 노력해도 잘 되지 않는 것을 보니까 말이다. 어쨌건, 마왕이 준 자유시간에 루피아는 대접에 물을 한 사발 떠놓고 한 손을 집어넣은 채 물의 기운을 느끼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물, 하면 생각나는… 시냇물… 강… 바다… 에잇! 이런 막연하게 떠오르는 것 말고 조금 더 자세한 느낌이 필요할 것 같은데….' 손가락을 슬며시 움직여 보았다. 손가락 사이로 물이 움직이는 느낌이 묘하다. 순간, 그녀는 감각을 스치는 싸한 기운을 느꼈다. 루피아는 그 느낌을 놓칠세라 재빨리 입속으로 주문을 웅얼거렸다. "정령계의 문이여, 열려라. 고대부터 이어져 온 위대한 약속에 따라 너의 존재와 나의 존재, 영원한 결속을 맺고자 하노니. 나, 루피아의 부름에 응하여 너의 모습을 내 앞에 드러내기를. 물의 정령, 운디네!" ……. 잠잠하다. 뭔가 될 것 같은 분위기가 팍팍 고조되었으면 뭐, 물이 찰랑거린다든지 하는 작은 일이라도 있어야 될 것 아닌가! 루피아는 인상을 팍 찌푸리며 침대에 팍 엎어졌다. "나한테 친화력이 부족한 건가? 아우우- 그럼 나도 신관이 되야하는 건가- 맘에 안 드는데! 이잇, 이제 나도 몰라!" 아무래도 그녀도 종교계에 귀의(歸依)하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듯 싶다. 그럼 우선 신전에 가야 하나? 일단 마왕한테 얘기부터 해야 하겠구나. 실패했다고 어떻게 말한담? 이것 저것 고민하던 루피아의 귀에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이봐, 이봐!》 그녀는 깜짝 놀라 재빨리 뒤를 돌아 보았다. 그리고, 굳었다. 《쳇- 오랜만에 불러내는 녀석이 있어서 달려 왔더니, 정작 불러낸 녀석은 뒤돌아서 뭐라고 꿍얼꿍얼대고- 쳇쳇!》 이, 이건 아니야! 아무리 마계의 정령이라지만, 변형이 되었을 거라고 예상했었지만! 루피아는 눈앞에 나타난 '물의 정령 운디네'를 자세하게 살폈다. 전체적인 몸은 일단 푸른 색이었다. 차가운 푸른 눈동자에 그려진 세로 홍채는 유독 진한 색이다. 부드럽게 타고 흐르는 유연한 몸의 선이 아름다웠다. 커다란 몸집에서 느껴지는 위압감, 아아- 하여간 고양이의 확대판! 즉- 청(靑)색의 표범이었다! 아, 등에 달린 날개도 있었다. 오랜만의 소환자가 자신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자, '운디네'는 기분이 상한 듯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정령을 불러 냈으면 계약을 하자든지 무엇이든 말을 해야할 것 아니야! 그렇게 빤히 쳐다보면 실례라는 생각도 안 드나?》 "어? 아, 아… 미안해." 《흥! 알면 됐다. 그래, 나와 계약할 거냐?》 루피아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운디네는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세이준. 마계에 가장 적합한 형태로 변화한 물의 정령 운디네. 그대, 루피아는 나와 고대부터 이어 온 위대한 약속에 따라 계약을 체결하겠는가?》 "계약을 체결하겠습니다." 자신의 소환자, 아니 계약자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인 것 같았다. 세이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앞발을 혀로 핥았다. 정령을 불러내는 일이 아예 없다시피 하는 마족이다보니 이렇게 마계에서 소환되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주, 아주 예전에 할 짓 없는 마족 하나가 불의 정령을 한 번 불러낸 적이 있었다고 한 말을 들은 적이 있었고 그 이후로는 아마 자신이 처음일 게다. 까만 어둠처럼 흘러 내리는 윤기나는 머리카락, 자수정을 박아 놓은 것 같은 눈동자는 선명한 보랏빛이었고, 약간 얼이 빠진 것 같은 멍한 얼굴은 투명하고 하얗다. 붉은 입술은 살짝 벌어져 있었는데, '계약자'를 살피던 세이준은 한 가지 사실을 눈치챘다. 《너- 마족이 아니었어?》 "어? 응. 난 마족이 아니야. 인간이지." 《흠- 하긴, 제정신이 박힌 마족이라면 정령을 불러내는 일은 하지 않겠지.》 루피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정령 세이준은 그녀를 호기심 섞인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쨌든 결과는 성공이지만… 정령에 대한 환상이 와장창 깨지는 걸.' 루피아는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가볍게 머리를 흔든 루피아는 생긋 웃으면서 세이준에게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해, 세이준." 세이준은 앞발을 핥다말고 루피아가 내민 손을 빤히 쳐다 보았다. 잠시 생각하는 표정이던 그는, 곧 앞발을 들어 그녀의 손에 턱- 얹었다. 그리고는 어째 장난기가 느껴진다 싶은 표정으로 씨익- 이빨을 드러내 보이며 말했다. 《나야말로. 재밌는 것을 많이 구경시켜 주길 기대하지.》 싸악- 루피아의 얼굴이 굳어졌다. 저, 저 송곳니는 대체 뭐야! 표, 표범이 웃다니. 생각보다 훨씬, 훨씬 징그러운 표정이었다. 입이 쭈욱 벌어지면서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나는 광경이라니. 게다가, 즐겁다는 듯이 휘휘 흔들어대는 꼬리는 잘못 부딪쳤다가는 그대로 황천길이 될 것만 같았다. 어쩐지 이 정령과는 절대 순조롭게 일이 풀리지 않을 것만 같다는 느낌이 팍팍 든다. '…나… 어쩌면, 완전히 길을 잘못든 게 아닐까나……?' ============================== ...요즘에 잘 안 써져요.[;;] 써 보겠다고 컴퓨터 앞에 오래 앉아있기는 한데.. 쓰니까 또 맘에 안 들고..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다 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ㅠㅠ 또 새로운 등장인물.. 안 그래도 등장인물이 많아 복잡하다고들 하시는데, 이 일을 어쩌면 좋아.[그치만 정령이 없으면 루피아는..;;] ...[털썩]...딜렌과 카른의 사생활은 대체 언제 나올까아아~ 흐으윽, 밝히고 싶은 사실이 있는데에에.. 입이 근질근질해애..ㅜ.ㅠ 다시 줄기 시작하는 한 회 분량.. 즐독하세요.[...] 제 목: [수정판] 공녀(貢女) : 제13화 [술(酒)](2) Re. 맘에 안 들어서 고쳤습니다. 저녁식사는 아예 빼기로 결정했습니다.[;;] *** "정령을 다뤄 보겠다고 했던 일은 어떻게 되었지?" 으윽! 루피아의 머릿속에 안타깝게 물의 기운을 놓쳤던 일이 떠올랐다. 어제 해 보려고는 했지만 또다시 절묘한 타이밍에 그녀를 부른 메를리나 덕분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지자 이디스는 실패했군, 이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는 서류 쪽으로 눈을 돌리면서 말했다. "지금부터 자유시간을 줄 테니 계속해 봐. 그러고보니 유리아덴이 그의 공녀에게 무언가 행한다고 하는 것을 들은 것 같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루피아는 마왕의 마음이 바뀔 세라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유리아덴은 에리나에게 계약을 이행하려는 것일 게다. 그 일을 떠올린 루피아는 다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들어 한숨쉬는 일이 많은 것 같았다. 대체 어떤 방법으로 에리나를 강하게 만들어 줄 지, 그것도 상당히 궁금했지만- 무슨 생각으로 에리나의 계약을 받아들인 것인지 그것도 궁금했다. 물론 에리나가 그만큼의 가치가 없다는 건 아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생각일 뿐이다. 에리나는 인간이고, 유리아덴은 마족이다. 마족이 인간을 '가져서' 어쩌겠다는 얘기지?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마왕은 짧게 고개만 끄덕였을 뿐 그녀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루피아는 그의 집무실을 나서기 전 찬장 쪽에 다시 한 번 시선을 주었다. 설마. 저 많은 서류뭉치 중에서 조금 없어졌다고 그걸 눈치채지는 못하겠지? ============================================= #. 제13화 [술(酒)] * * * * * * * * * * * * * * * "그런 짓은 할 수 없어요, 아로데 님!" 정말이지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계획의 장애물이 튀어 나왔다. 아로데는 절-대로 그런 짓을 할 수는 없다며 얼굴까지 붉히고 분개하며 외치는 시녀를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성 내의 시녀들에게 인기가 좋은 건 알고 있었지만 감히 서열 2위에게 덤비는 배짱까지 갖게 할 줄이야. 하지만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 않은 아로데였다. "아아, 나쁜 짓이 아니야. 단지 약간의 장난을 쳐 보겠다는 거라고. 단지 이걸 루피아에게 전해 주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래도…." '메를리나'라는 이름을 가진 시녀는 조금 수그러진 자세를 보였다. 그녀로서도 서열 2위의 그에게 바락바락 대드는 일을 하고서 마음이 편했을 리는 없었다. 그것을 알아챈 아로데가 재빨리 말문을 열었다. "나는 그녀에게 해 되는 일은 하지 않는다. 마신 클리오라 님의 명령으로 데리고 오게 된 여자들인데 내가 해 되는 일을, 이렇게 일부러 비밀스럽게 하지도 않아. 내 말을 믿지 못하나?" "그건… 아니지만…." 우물쭈물하며 메를리나가 말했다. 아로데는 그녀의 머리를 톡톡 두드려 주면서 준비해 온 '그 것'을 건네 주었다. 그리고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나쁜 게 아니라니까? 이건 비밀인데 말야… 어쩌면, 이 일이 루피아가 '마황비(魔皇妃)'가 되는 데에 결정적인 공헌을 할 지도 몰라." "정말인가요?!" 단번에 시녀의 눈빛이 바뀌었다. 진지하게 활활 불타 오르는 시녀의 기세에 아로데는 움찔했지만 강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좋았어! 제가 반-드시 이 일을 성사시킬게요!" "훗… 그래. 잘 부탁하지." 시녀 메를리나는 그에게 받은 것을 받아들고 씩씩하게 루피아의 방을 향해 달려갔다. 아로데는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면서 빙그레 웃었다. 중간 과정이야 어쨌든, 그의 계획을 성사시키기 위한 기반은 거의 다 마련된 것이다. 이제 그와 로이드윈이 할 일만 남았다. 그 뒤에는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어느 새 다가 온 로이드윈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피식 웃었다.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지 대충 짐작이 가는군, 친구." 아로데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로윈, 네가 짐작하지 못하는 일도 있나? 하핫. 도와줄 테지?" "군주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아, 조금 더 센 게 낫지 않겠나? 그거 갖고는 부족할 것 같은데." "특별히 유리아덴이 제조한 약도 넣어 놨으니 충분하긴 할 거야. 아! 이건 네가 가지고 있는 게 낫겠다." 아로데는 로이드윈에게 동그란 알약 하나를 내밀었다. 로이드윈은 아로데가 내미는 알약을 받아 품 안에 넣으면서 훗, 하고 웃었다. 이 일이야말로 마계 역사 이래 최고의 경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말이다. 아로데에게서 얘기를 전해들은 로이드윈은 아로데의 계획에 기꺼이 동참하겠다고 나섰다. 비록 유리아덴은… 사정이 있어 동참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제조한 약을 내주었다. 해약(解藥)까지 완벽하게 준비해서. "이 일이 끝나고 난 뒤의 네 역할은 잘 알고 있겠지?" 로이드윈에게 아로데는 의미심장한 눈길을 보내며 물었다. 그의 물음에 로이드윈은 잊을 리가 없잖아, 라고 대답하며 씨익 웃었다. …그렇게, 한 남자와 한 여자를 향한 검은 음모는 점차 형체를 잡아가고 있었다. * * * * * * * * * * * * * * * 하늘에는 이제 세 개의 달이 점차 뚜렷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비록 촘촘히 박힌 별은 없었지만, 잿빛에서 바로 검게 물드는 하늘이지만. 루피아는 허리를 펴며 낮게 투덜거렸다. "무슨 놈의 정령 성격이 그 모양인지. 온갖 '고양이 다운 짓'은 다 하고, 침대가 넓다고 뒹굴거리기까지… 뿐이면 말을 안 해. 뭐? 나는 물의 정령이니까 물이 필요해, 라고? 젠장. 아무래도 내가 계약을 잘못한 거지 싶어." 그나마 다행인 점은, 아직 그녀의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점이랄까. 그 큰 덩치로 마왕성을 헤집고 다니기 시작하면 도저히 감당이 안 될 것 같았다. 앞날을 생각하니 그저 눈앞이 깜깜하기만 한 루피아였다. 정원에 도착한 루피아는, 한 가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어? 이게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정원 한가운데에 왠 와인? 왠 테이블? 게다가 의자는 두 개였다. 와인병 옆에는 그녀더러 마시라고 준비라도 해 놓은 듯이 유리잔까지 있다. 이걸 마셔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마신다고 해도 별 일은 없을 테지만, 내 것이 아닌데…… 하지만 오늘은 분히 자축해도 될 날이다. 처음으로 마계 정령과 계약을 한 날이지 않은가. 메를리나가 마시라고 갖다 줬겠지, 라고 간단하게 생각해도 될 일이지만, 가정교육을 철저하게 받은 루피아는 남의 것에 손을 대기가 영 꺼려졌다. 마왕의 것이면 어떡해? '거기다, 그 이유란 게 욕탕에서 물장난치고 있는 표범이라고.' 그녀는 고민했다. * * * * * * * * * * * * * * * 세키라는 만족감이 담긴 숨을 내쉬며 책을 덮었다. 비록 해석하는 데에 약간씩 시간이 걸리기는 하지만 이제 책을 읽는 데에는 그럭저럭 익숙해지고 있었다. "마족에게 술은 아무런 영향도 못 주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구나…." 비록 그 영향이 아주 조금이기는 하지만(체질에 따라 미묘한 차이는 있겠지만) 분명 마족이라도 체내에 알콜이 들어가면 반응하기는 하는 모양이었다. 세키라는 피식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그 마왕이 취한 모습을 한 번 보고 싶어지네. 그, 유리아덴이라는 마족도…." 그 중얼거림은, 어디에서인가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을 지도 모른다. * * * * * * * * * * * * * * * '…내가 왜 여기에 서 있는 거지? 이 쓸데없는 것까지 가지고….' 이디스는 손 안에 들린 와인병을 바라보며 미간을 접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서류를 결재하던 그의 집무실에 갑자기 들이닥친 두 수하가 느닷없이 그에게 이 술병을 쥐어주며 정원에서 좀 쉬다 오라며 내쫓아 버렸던 것이다. 그는 단지 '거들어 준다는데 나쁠 것 없지'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요즘들어 뭔가 달라진 듯한 느낌이 자주 들었다. 그건 외부의 문제가 아니라 그 자신의 내부 문제에 관한 일이라는 걸 그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원인에 관해서도 그는 잘 인지하고 있었다. 차가운 밤바람이 뺨을 스쳤다. 언제인가. 시야가 트이고- 주위 사물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을 때부터 들어 온 말이 있다. '강해져라. 그게 네가 살아있는 이유다.' 기억의 탁류(濁流) 속에 묻혀져 희미해진 그 목소리는,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귓가에서 울리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그 후부터, 그는 오직 그것만을 위해 살았다. 세뇌(洗腦), 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오직 그것만이 그의 존재를 증명하는 일이고, 살아가는 이유이며, 존재의 이유였다. 그 외의 것은 필요가 없었다.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다른 이들이 당연하다 여기는 모든 것. 슬픔, 기쁨, 괴로움, 사랑, 질투, 증오같은 모든 것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째서? 그들은 왜 웃고, 왜 슬퍼하며, 왜 기뻐하지? 언젠가 한 번 자신에게 던졌던 물음. 그 때에도 그는 답을 찾지 못했다. 그녀와 그가 말했던 그대로, 그는 '인형'과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건 그 자신도 인정하는 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무슨 상관이지?' 인형이면 어떻단 말인가. 그가 신경써야 하는 건 그게 아니었다. '인형'은 '강해질 수' 없다- 그것만이 중요하고 신경쓰일 뿐이었다. 생각에 빠져있던 이디스의 눈가에 뭔가가 비췄다. "아우우- 마실까? 말까? 젠장, 이렇게 고민할 거면 차라리 그냥 마시고 말아- 그래! 마셔 버리는 거야! …하지만 내 게 아닌데… 아우웃!" 그는 피식 웃었다. 테이블 위의 와인을 보며 머리를 쥐어 뜯어가며 고민하는 여자, 다름아닌 루피아였던 것이다. 루피아도 그를 발견했는지 보랏빛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 마왕님? 여- 여긴 왠일이세요?" "내가 내 정원에도 오지 못하는 건가." 루피아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 못 올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녀 입장에서는 놀랄 만 하지 않은가. 와인을 마실까 말까 고민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루피아의 머릿속에 문득, 그녀가 이 밤중에 정원에 나와야 했던 이유가 떠올랐다. 서류!! '으아아! 난 몰라! 확인해 봐야 속 시원하게 잠들 수 있겠는데… 에잇, 이놈의 와인 때문에!' 이디스는 그녀의 앞으로 걸어 와 테이블에 마련된 의자에 털썩 걸터 앉았다. 마침 준비되어 있던 두 개의 잔 중 하나를 집어 들고 가져 온 와인을 따랐다. 그는 나머지 잔 하나에도 와인을 약간 따라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 "한 잔 하지. 앉아." "……." 더 고민할 게 뭐 있겠는가? 루피아는 그 자리에 앉아 이디스와 술(酒)을 마셨다. '나도 모르겠다! 어떻게 되겠지 뭐… 술 맛 조오타~' * * * * * * * * * * * * * * * 중간계에 있을 때, 루피아는 술을 자주 접해보지 못했다. 물론 포도주나 와인은 식사를 할 때 가끔 접해 봤지만 그렇다고 자주 마시는 편은 아니었다. 제국 '시리어스'에서는 18세가 되면 성인으로 인정을 해 준다. 당연히 그녀는 술을 자주 접해봤을 리 없는 것이다. 술을 자주 마시지 않는데 그에 대한 면역이 강하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선천적으로 알코올에 강한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그녀는 그 범주에 들지 않았고- 만약 강했다고 하더라도 지금같은 상황에서는 전혀 소용이 없는 얘기다. 잊은 건지 모르지만, 현재 이디스와 루피아가 마시고 있는 술은 유리아덴 특제 약(정체불명의)이 들어가 있는 술인 것이다. '눈… 앞이 가물가물해… 이게, 취했다는 건가….' 루피아는 제정신을 차리려고 흐릿해져 가는 시야를 다잡았다. 잔에 따라져 있는 짙은 붉은 액체를 들이킬 수록 정신이 몽롱해지고 이상하게 입에서 헤헤, 하는 웃음이 비집고 흘러 나오려고 했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며 바로 앞에 마주 앉은 마왕을 바라봤다. 그녀는 이렇게 몽롱하고 가물가물한 데, 눈앞의 이 마족은 말짱하고 또렷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괜히 울컥한 루피아는 술기운을 빌어 미간을 접으며 그를 노려 봤다. 그의 붉은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당신!!" "…뭐지." "당신… 당신 괴물이지? 그렇지?" "뭐?" "괴물. 당신 틀림없는 괴물이야. 아니면 감정이 없는 인형이거나… 제길! 좀 흐트러져 보란 말이야~" 결국 그녀는 빽 소리를 질러 버리고 말았다. "맨날 나만… 나만 넘어지고, 나만 망가지고, 나만 안절부절 못하니까 불공평하잖아! 당신, 당신은 내 이름도 다 알고, 망가진 꼴도 다 봤고 그런데… 왜, 왜 나는 당신 이름도 몰라야 하는 건데? 뭐가 이상하단 생각 안 들어?" "…괴물?" 멍하니 되뇌는 이디스의 말에 루피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울컥하는 느낌에, 곰곰히 생각을 해 보면 해 볼수록 괜스레 눈물마저 나올 것 같았다. 지금 이 상황도 그녀 혼자 망가져 있는 것 아닌가. "단순히 이름을 모르는 게 불만이라면, 내 이름은 '이디스'다. 그리고 나는 '괴물'이 아니라 '마족'이야. 겨우 그게 불만인 건가?"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그런 종류의 문제가 아니란 말야~" "그럼 대체 뭐가 문제인 건가." 루피아는 몽롱한 가운데에서도 눈을 똑바로 치켜 떴다. 언제나처럼 무덤덤한 붉은 눈동자가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붉은 눈동자에 그녀의 모습이 비치고 있다. '이, 이 마족이 진짜!! 우아아아악!! 다, 답답해!' 왜, 대체 내가 왜 이렇게 답답해 하는 걸까? 아니, 답답해 하는 것마저 마음에 안 들었다. 이 마족을 보면서 혼자 안절부절 못하고, 그에게 불만을 품고 혼자 투덜대고, 혼자 화내고 하는 것 자체가 정말 맘에 들지 않았다. 루피아는 에잇, 하고 술병을 집어 병 채로 꿀꺽꿀꺽 마셔 버렸다. 안 그래도 취했던 상태에서 병 채로 나발을 불듯 마셔 버렸으니 정신이 멀쩡할 리 없다. 루피아가 몸을 휘청대자 이디스는 그녀의 팔을 잡고 물었다. "괜찮은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그 말이 결정타였다. 몽롱한 정신 속을 헤매던 루피아는 순간적으로 마왕의 손을 파악 뿌리쳐 버리고는 그의 멱살을 꽉 붙들어 잡았다. 그리고 그의 눈을 올려다 쳐다보며 말했다. "뭐야! 당신 그렇게 잘났어? 제정신이 아니야? 그래, 나 제정신 아니다, 어쩔래! 어쩔건데에!" "뭐?" "그, 그래도 우리 오빠들은… 우리 아버지랑 어머니느으으은…… 흑, 흑… 흐아아아아아아앙~" 결국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울컥, 하고 속에서 올라오는 무언가와 가슴이 꽉 막히는 답답함, 술 기운이 겹쳐졌고 서러움에 가족을 향한 그리움까지 북받쳐 올랐던 것이다. 루피아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려 버리자 이디스는 움찔했다. '왜… 왜 우는 거지?' 그의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술 몇 잔 마시더니 헤롱헤롱 해 져서는 그를 노려 보면서 괴물이라고 말하고, 빽 소리를 지르기도 한 것으로도 모자라 술을 나발로 불어 버린 후에는 비틀거리는 것을 잡아 줬더니 서러운 듯이 펑펑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그를 노려보던 보랏빛 눈동자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 나오자 그는 알 수 없는 초조함을 느꼈다. 가슴께가 지끈거리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어떻게 해서든 멈추게 해야 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가 울음을 그치게 하는 법 따위 알 리가 없었다. "우, 울지 마라." "히, 히끅! 내, 내 맘… 쿨쩍, 흐아아아아아앙-" "울지 말라니까!" 이디스는 그 말밖에 할 줄 모르는 어린애처럼 그 말만을 반복했다. 울음보가 터져버린 듯 눈물을 주르륵 주르륵 흘려 대던 루피아의 어깨가 차츰 진정되어 가자, 그제야 이디스는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그들 주위에 침묵이 가라앉고 잠시 뒤, 루피아가 입을 열었다. 한참을 울어 갈라진 목소리였다. "……오빠들은 말이에요… 아주, 아주 엄청난 팔불출이에요……." 루피아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중얼거리듯 다시 말을 이었다. "엄마도… 아빠도…… 나는 아주 좋아해요. 카에리드 오빠도 좋고… 이데카른 오빠도 좋고… 트로에 오빠도 아주 많이 사랑해요." 술 기운. 정신이 몽롱해서 저지른 실수. 루피아는 그를 올려다 보며 물었다. "…마왕님은, 있으세요? 형제나… 가족." "……." 가족, 그리고 형제. 이디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있다. 단순히 핏줄을 나눈 존재를 말하는 거라면." 잠시 침묵이 흘렀다. 루피아가 그를 빤히 올려다 보고만 있자 이디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알고 있는 가족이라는 것에는 안 맞을지 모르나- 나에게 있어 '가족'이라는 존재는, 단순히 핏줄을 나눈 존재. 그 이상의, 그 이하의 가치도 갖지 않는다." 언제나 그를 보며 비웃음인지 아닌지 모호한 표정을 짓던 '아버지'라는 존재가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마계에, '이례(異例)'를 몇 번이나 만들어 놓은 장본인. 더불어, 표범같은 금빛 눈동자를 가진 은발의 여인도 떠올랐다. 그리고- 불타는 듯한 붉은 머리와, 금빛 섞인 적색의 눈동자를 가진…. "이해할 수 없다. 어째서 우는 지. 어째서 웃는 지. 어째서 슬퍼하는 지." 루피아는 그의 붉은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 보았다. 말 그대로 유리구슬같은 눈동자가 그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녀가 물었다. "…울어 본 적도 없죠?" "어째서 울어야 하는 건가." "……." 루피아는 푸우, 하고 한숨을 쉬었다. 정신이 몽롱~ 하고 몸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테이블에 팔을 얹은 그녀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래… 당신이 우는 거…… 상상이 안 돼…." "……." 그는 말이 없었다. "…「인형」… 그래, 꼭 감정이 없는 인형같아, 당신은…." "…그런가." 이디스는 가슴께에 손을 가져갔다. 뭔가, 한 구석이 아련하게 아파오는 느낌이 들었다. 어째서? 그가 '인형'같다는 것은 그 자신도 인정한 일이 아니었는가. 그런데 왜… 이런 느낌이 드는 걸까? 갑자기 루피아가 벌떡 일어났다. 이디스가 그녀를 쳐다보자, 그녀는 테이블 위에 손을 얹고 소리쳤다. "당신이 진- 짜 싫어!!" 그는 아무 말 않고 묵묵히 인상만 찌푸렸다. 루피아는 그렇게 소리치고는 가만히 그를 노려 보다가 점차 인상을 구겼다. 뭔가 기색이 이상하다 싶어 이디스가 뭐라고 입을 열려 한 그 순간. "읍… 우웨에에에엑~" 그는 굳어 버렸다. * * * * * * * * * * * * * * * "…어떡하지? 나서야 하나." 난감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로이드윈이 중얼거렸다. 아아, 작전 완전 실패. 사실, 그들의 주군까지 고주망태가 되어 버리는 것은 그다지 바라지 않았다. 보고 싶긴 했지만 말이다. 그들의 주인이 술에 취해 엉망이 될 정도로 자기 관리가 허술하다고 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충분한 성과는 있었다. 우는 루피아를 달래기 위해 나름대로 애를 쓰던 모습이 떠오르자 그들은 피식 웃음 지었다. 분명 그런 모습은 이제껏 보지 못한 새로운 일면이었다. 놀람, 아니 경악 그 자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으리라. 그래도 마무리가 안 좋다. 그들은 로이드윈이 만들어 놓은 커다란 수경(水鏡)에 비친 모습을 보며 다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수경에는 그들의 주군이 명치께부터 다리까지 모락모락 김이 피어나는 걸쭉한 액체(…)를 덮고(?) 있었다. 얼이 빠진 채 굳어서는. 그 발치에는 한 바탕 속을 게워내고 그대로 쓰러져 버린 루피아가 있었다. 그들은 고민해야 했다. 지금 달려가서 곤경에 빠진 주군을 구해내야 하나, 아니면 그들의 안위와 완전범죄를 위해 구경만 하고 있어야 하나? "이대로 있는 건 조금 걸리는데…." "하지만 나서자니, 우리가 지켜보고 있던 걸 알아채실 거고……." 그리고 그냥 놔두면 날이 밝은 뒤 뒷감당도 만만치 않을 게다. 걸쭉한 액체를 덮고(?) 있는 마왕과 그 옆에 쓰러진 공녀 루피아. 이 둘의 광경을 다른 이는 대체 어떻게 보고 생각할 것이겠는가.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가는 법. 주군의 위상에 흠이 될 만한 일을 그냥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물론 재미는 있었지만. "……우리가… 처리해야 겠지?" "……가지." "이참에 해약까지 단단히 먹여 놓자." ================================================ 으아아... 슬럼프... 입니다.[;;] 계속 지우고, 다시 쓰고, 지우고... 아무리 고쳐도 맘에 안 들어요. 어색하고... 수정하는 거긴 하지만 거의 다시 쓰는 수준이니...[쿨럭!] 나란 애는 정말...[털썩].. 흐으윽... 아아. 카른과 딜렌의 사생활. ...어쩌면 영원히 나오지 못할 수도...[;;] 중간계의 베키네 사정은 아예 한 회를 잡아 버리고 걔네 얘기를 쭉- 써야 겠어요. 이렇게 계속 미루고 그러다가는 수정판 전처럼 변해버릴 지도 몰라..[어찔] 18살에 술 먹고 깽판(?) 부리는 루피아 양. 울고, 멱살잡고, 투정부리고, 욕하고.. 아아, 할 거 다 하는군요.(별로 안 튀나?;;) 물의 정령하고 계약한 건 아주 뒷전이 되어 버렸네... 그 서류,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해줘야 하는데. 으음... 다 잊어 버리셨을라나.[먼산] 메일은 donghee425@hanmail.net... 이구요. 카페는 http://cafe.daum.net/fantastiknovel 랍니다. 카페 가입~[홍보;] ...해 주세요.[비굴?;] 감기...[목이, 머리가 아파아...] .....다들 조심하시구요.. 즐독하세요^^; 제 목: [수정판] 공녀(貢女) : 제14화 [연구실 습격사건] #. 제14화 [연구실 습격사건] * * * * * * * * * * * * * * * "뭐해, 베키? 이제 얼른 방에 가서 자야지. 일은 다 끝났잖아." "어? 아… 그래. 그래야지. 잠깐… 생각할 게 좀 있어서 그랬어." 베키는 샤리의 말에 대답하며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오늘같은 날,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요즘 너 이상해- 넋이 나가 있기도 하고, 꾸벅꾸벅 졸기도 하고, 부르면 화들짝 놀라지를 않나, 자면서 이상한 잠꼬대도 하고 말이야.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니?" 샤리가 걱정스러운 듯 인상을 작게 찌푸리며 물어 왔다. 베키는 고개를 저으면서 걸레를 주욱 짰다. 물이 쫘악 빠지자 베키는 탈탈 털어 건조대에 널었다. 무슨 일? 당연히 있다. 말하지를 못할 뿐이다. 루피아 아가씨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 밤낮없이 다섯 공자들과 계획을 짜고 정보를 전달하는 도우미 역할을 하느라 힘들어 죽겠다고 말하라고? '결국 이렇게 결정적인 순간에는 빠지게 되… 었지만. 휴…….' 나름대로 억울한 점이라고나 할까. 오늘은 계획이 실행되는 날이었다. 카에리드, 이데카른, 트로에 도련님은 세 공작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하여 공녀에 대한 얘기를 마무리짓게 하고, 비밀을 캐어 낸다. 뭐라고 해야 할까- 공작들이 공녀들을 돌아오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것은 몇 퍼센트 안 되는 가능성에 불과하지만, 지금으로서는 확신이어야 할 사실이다. 생각해 보면, 공녀들이 돌아오게 될 수 있을 방법이 있을 거라는 추측은 에드윈드의 확신어린 말에서 비롯된 얘기일 뿐이다. 어디에도, 그 증거가 될 만한 것은 없다. 그 생각이 뒤늦게 떠올랐을 때는 이미 그들은 에스베크 공작의 연구실을 뒤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아버지가 우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중얼거리시더군요. 차라리 몰랐더라면, 그랬더라면…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확신합니다.' 그녀는 에드윈드 에스베크의 모습과 그의 말을 떠올리며 한숨을 지었다. 그 어린 도련님은, 지금 그녀에게 상당한 고민거리를 안겨주고 있는 장본인이기도 했다. 루피아 아가씨의 문제를 떠나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귀족으로서의 상식도 없는 걸까.'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으면서 에드윈드에 대한 생각을 떨쳐 내었다. 지금은 그런 생각으로 머리아파 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지금쯤 공작들이 모인, 그리고 엘 세느안트 공자들이 갔을 방에서는 어떤 말들이 오가고 있을까. …희망은 있는 걸까. 지금처럼, 이 순간처럼 초조했던 적은 없었다. 노예로 무대에 설 때도 이토록이나 떨리지는 않았다. 내게는 저 곳에서 일어나고 있을 언쟁에 끼어들 자격이 없다. 알고 있다. 할 수 있는 건 기도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자신의 입장을 혼동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베키는 입술을 깨물며 차가워진 손을 맞잡고 기도했다. '루피아 아가씨가 돌아올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세요!' * * * * * * * * * * * * * * * "어서 오너라. 오늘쯤 올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세 사람이 방에 들어왔을 때 그들의 아버지가 말했다. 카에리드와 이데카른, 트로에의 몸이 살짝 굳었다. "그렇게 굳을 필요는 없다. 우리가 모를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겠지? 베키라는 시녀를 매개로 이용한 건 좋은 생각이었다만 그렇게 부산을 떠는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느냐?" "…알고 계실거라 예상했었습니다." 이데카른이 낮고 절제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엘 세느안트 공작은 피식 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내 예상대로라면, 지금 에스베크 공작가의 연구실은 엉망이 되었겠구만. 안 그런가?" 에스베크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잠금장치를 해제해 놓았으니 그 아이들 걱정은 없네. 흠, 뒤져봤자 아무 것도 나올 게 없을 테지만 말일세. 약간… 의 심술도 부려 놓았고. 하여간 연구실 걱정은 안 해." 카에리드는 에스베크 공작의 말에 에드윈드와 바르에든이 은근히 걱정되었다. '약간의 심술'이라고 했지만 결코 고운 모양새로 두 사람을 돌려 보낼만한 건 아닐 게 분명했다. "…마계로 간 동생들을 찾을 방법을 알아내려 왔을 테지?" 의자에 앉아 묵묵히 와인만 마시던 칼르니르 공작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네." 대답은 이데카른이 짧고 단호하게 했다. 적어도 포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것을 확연히 드러내는 음성이었다. 그의 대답에 세 공작은 서로 마주보며 피식 쓰게 웃었다. 엘 세느안트 공작은 준비해 두었던 듯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조그마한 상자를 손으로 집어 들었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상자의 입구가 열렸다. 엘 세느안트 공작은 상자 안에서 무언가를 빼 들었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자조적인 기색이 묻어나는 웃음소리였다. "이게 다 호이른, 자네 때문일세. 그러게 감당치 못할 술을 왜 마셔 꼬리를 잡히나." 에스베크 공작이 움찔했다. 묵묵히 잔을 기울여 와인을 홀짝이던 칼르니르 공작은 엘 세느안트 공작의 말에 나즈막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드디어 노망이 난 게지." "쿨럭! 큼, 크험! 자네들 무슨 말을 그리 섭하게 하나? …어차피 애들이 눈치채지 못했으면 우리가 먼저 말했을 게 아니었던가…." 에스베크 공작의 마지막 말은 조금 씁쓸한 여운을 남겼다. 엘 세느안트 공작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든 것을 세 사람에게 내보였다. 그 것은 열쇠였다. 타원형의 은색, 붉은색, 푸른색의 보석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고, 금색의 실처럼 얇게 뽑아진 금이 그 주위를 두르게 되어 있었다. 녹색의 작은 에메랄드가 부분 눈에 띄었는데 세심한 세공은 그 열쇠가 결코 범상한 물건이 아니며, 인간의 손을 거친 게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 그게 무엇입니까?" 트로에가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이런 물건이 집 안에 있었다는 것을 까맣게 몰랐던 그들이었다. "루피아와 에리나, 세키라를… 마계로 간 모든 공녀들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들 셋은 구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게 해 줄 물건이다." 세 사람이 경악으로 눈을 크게 떴다. 에스베크 공작은 엘 세느안트 공작에게 조심스레 그 열쇠를 받아 들더니 설명을 이었다. "……이 물건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딱 너희만 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책과 함께 그걸 엘 세느안트 저택의 지하실에서 발견했지." 에스베크 공작은 로브 안을 뒤져 갈색의 두꺼운 표지를 가진 책을 꺼냈다. 손가락 마디 하나만한 두께의 그 책을, 그는 손바닥으로 정성스레 한 번 쓸었다. "맨 처음 그걸 발견한 너희 아버지는 우리 둘을 불렀다. 고대어의 해석에는 저 노망한 놈이 더 낫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거지. 그리고 우리는, 그 책에 적힌 곳으로 여행을 가 보기로 했다." 칼르니르 공작이 이어 말했다. '노망한 놈'이라는 표현에 에스베크 공작이 윽, 하고 작은 신음을 흘렸지만 그는 무시해 버렸다. 물론 에스베크 공작이 중얼거린 '검밖에 모르는 무식한 놈'이라는 말도 함께 무시했다. "책에는 열쇠의 정체가 분명히 적혀 있었다. 이 열쇠는, 마계로 가는 문을 열 수 있어." 세 사람의 입술이 바르르 떨려 왔다. 카에리드와 이데카른, 그리고 트로에는 입술을 꽉 깨물고 주먹을 쥐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세 공작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면서 빨리 말해 달라고 재촉할 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얘기를 너희에게 하기까지, 우리도 많은 고민을 했다. 만약, 만약 일이 잘못되었을 경우를 생각해 보았느냐? 마계의 문이 열린다는 것은, 우리가 그 쪽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것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반대로, 마계에서 우리 세계로 넘어올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한다. 마계에 사는 마물과 마족- 그런 것들이 이 곳으로 넘어 오게 될 경우를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이 잘못된다면." 엘 세느안트 공작은 지친 표정으로 눈두덩을 눌렀다. 머리가 욱씬거리며 아파 왔다- 그 아이들을 보내고 난 뒤 그들은 제국과 황제를 위하는 충성심, 대륙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 그들 마음대로 하고 싶은 이기심의 충돌로 인한 갈등과 고민을 겪어야 했다. 결국 승리한 건, 그들 속의 이기심이었다. "…대륙의 모든 생명들은 목숨을 잃을 가능성도 있다. 얼마 남지 않은 드래곤이 나설 수도 있다고 가정해 보지만 고작 인간들 때문에 드래곤이 나선다는 건 말도 되지 않는 소리야. 엘프? 계약의 힘에 제약받지 않는 한 마족은 드래곤과도 비견될 수 있다고 하는 종족이다. 천족? 그래- 천족이 강림해 우리를 지켜줄 수는 있을 게다. 그렇지만 그 둘의 충돌은 중간계에서 이뤄질 거야. 그건 대륙은 초토화나 다름없는 상태로 몰고 갈 거다." 에스베크 공작이 휴우- 하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은 해 보았느냐? 우리는, 우리 손으로 자식을 버린 것이나 다름이 없다. 게다가 구할 방법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 것도 못 하는 우리 심정을…." 엘 세느안트 공작은 카에리드에게 열쇠가 담긴 상자를 건넸다. 건네기 직전, 그의 손이 잠시 떨렸다. 이 행동이 의미하는 뜻을 잘,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탓이었다. ……대륙을 버린다는 뜻임을. "가거라. 에드윈드와 바르에든이 돌아오면 곧장 말을 타고 떠나거나. 가야 할 곳과 주의할 점은 여기 모두 적어 두었다." 에스베크 공작은 보라색의 끈으로 묶인 두루마리 하나를 그들에게 건넸다. 카에리드는 그것들을 받아 두 손에 꼭 쥐더니 고개를 깊게 숙여 보이고는 두 형제와 함께 방문을 나섰다. 말 한 마디 없이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는 세 아들을 보며 엘 세느안트 공작은 허탈한 표정과 함께 속 시원하다는 듯한 긴 한숨을 쉬었다. "…이제는 은퇴해야 할 듯 싶군." "그래야 할 것 같네. 후후… 대륙과 제국, 황제의 신의(信義)를 져버린 자로서 정치를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자네도 가끔 옳은 말을 하는군? 노망한 놈, 그리고 팔불출! 거기서 한숨이나 쉬지 말고 앉아서 한 잔 해." 칼르니르 공작의 말에 두 사람은 작게 눈살을 찌푸렸다가 하, 하고 기막힌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칼르니르 공작의 옆에 앉아 술을 따라 둔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하여간 자네 독설은 알아줘야 해. 그리고 난 팔불출이 아니야!" "노망나기는 누가!" * * * * * * * * * * * * * * * 한편, 에스베크 공작의 연구실로 침투(?)한 두 사람은 두 사람 나름대로의 고역을 겪고 있었다. '도둑 길드에서 구해 준 시간표가 잘못 된 건가? 왜 이렇게 사람이 많아?' 에스베크와 바르에든은 구석의 어둠에 몸을 숨긴 채 숨죽이고 있었다. 사람이 많은 건 아니었지만 분명 적은 수도 아니었다. 보초가 세 넷씩 조를 이뤄 저택 곳곳을 돌아 다니고 있었고, 연구실 앞에는 두 사람이 창을 들고 눈에 불을 켜고 지키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일단 잘 숨어 들어서 저 두 사람한테 슬립 마법을 걸어야 한다는 소리인데… 저 연구실로 대체 어떻게 숨어 드느냔 말이야?' 바르에든은 살며시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에드윈드의 귓가에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저 둘을 처리하지." 에드윈드가 그에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바르에든은 움직였다. 그는 빠르게 몸을 날려 두 보초 가까이로 다가가 목 뒤를 수도(手刀)로 내리쳐 버렸다. 사태가 어떻게 흘러 가는지 의식도 하지 못한 채, 거의 동시에 두 사내의 몸이 푹 꺾였다. 에드윈드는 바람같이 빠른 그의 행동에 입을 벙하니 다물지 못하고 있다가 멀리서 그의 재촉에 재빨리 몸을 일으켜 곁으로 달려갔다. '과연… 대륙 최고의 검의 천재! 칼르니르 공작과 엘 세느안트 공작이 물러나면 제국 최고의 기사가 될 거라는 말은 헛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네. 카에리드 형님과 이데카른, 트로에 형님들도 검에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그 세 분들은 검보다는 정치 쪽으로 나가실 것 같고… 학문 쪽에도 상당한 흥미를 보이고 계신 것 같고.' 두 사람은 연구실 안쪽 문을 슬쩍 밀었다. 이 안은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아니, 도둑길드원은 어떻게 알아냈다고 하지만 그게 진짜인지는 아직 모르는 일인 것이다. 에드윈드도 한 번 침투한 적이 있긴 했지만 무작정 처들어 갔었던 탓에 효율적인 조사는 이루지 못했다. "…굉장히 어둡네. 횃불……." 에드윈드는 간단한 라이팅을 시전해 주위를 밝히고 도둑길드에서 얻은 지도를 보며 더듬더듬 발걸음을 옮겼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에드윈드가 들어왔을 때만 하더라도 복잡하게 얽혀있던 마법 트릭들이 다 풀려 있었다. 허탈감을 느끼며 그는 아마도 제일 중요하고 깊숙한 곳이리라 생각되는 방의 문 앞에 섰다. "일이 잘 풀리는 건… 좋은 징조이지만, 어째 불안한 기분이 드는 건 왜지?" "저도… 그런 기분이 드는 걸요, 형님." 에드윈드는 문고리를 슬쩍 잡아 당겼다. 끽- 하는 소리가 정적이 가라앉은 복도 사이로 유난히 크게 들리면서 문이 매끄럽게 열렸다. 두 사람은 긴장되는 기분을 느끼며 문 안 쪽을 들여다 보았다. "……!!" 두 사람은 방 안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깔끔하게 치워 진 연구실, 깨끗하게 정리된 책장과 책상에는 티 하나도 없었다. 다만 책상 위에는 하얀 봉투의 편지 하나만이 보일 뿐이었다. 두 사람은 책상에 다가가 편지를 뜯었다. [연구실을 뒤지러 왔을 두 사내 놈에게] …서문은 이랬다. 두 사람은 에스베크 공작이 그들의 행동을 읽고 있다는 걸 알고는 눈살을 찌푸리고는 다음 글로 눈을 옮겼다. [감히 내 연구실을 뒤지려 들어? 벌을 받아도 마땅하다는 건 말 안 해도 아리라 믿고 벌을 내린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았다. 벌? 대체 무슨 벌을 내린단 말인가. 지금 에스베크 공작은 엘 세느안트 저택에 있지 않은가. 하지만 두 사람은 곧 그 말의 뜻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발 밑에서 금빛이 뿜어져 나오며 둥그런 원형의 마법진을 그렸던 것이다. 헉, 하며 숨을 들이키는 사이 두 사람의 모습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버렸다. 두 사람이 미처 읽지 못한 마지막 한 줄은 이랬다. [욕 좀 먹어봐라, 이놈들아! …여탕은 처음 들어가 볼 게다!] * * * * * * * * * * * * * * * 그리고, 수도의 한 여탕에서는. "꺄아아아악- 변태, 변태야아아아아-" "남자다아아아-!!!" 하고 비명을 지르는 여자들, 그녀들이 던진 목욕용구와 바가지. "으아아아악! 아, 아버지 두고 봅시다아아!!" 에스베크 공작을 향해 이를 갈며 소리 지르는 에드윈드, 그리고. "기, 기사로서의 명예가아- 명예가! 레이디, 죄송합… 크윽! 죄송합니다!" 연신 여자들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면서 바가지에 맞고 신음을 흘리는 바르에든이 있었다. ======================================================== 아아. 심술입니다. 심술이에요.. 이번 화에는 애석하게도 우리 루피아 양이 안 나왔네요.[싱글] 죄송해요. 며칠 간 감기때문에 아팠어요. 막 구토하고, 머리는 어찔, 불면증때문에 잠도 안 오고 말이에요. 음... 요즘 너무 안 올리는 것 같아..[중얼] 휴-... 여탕으로 떨어져 버린 바르에든 칼르니르 경과 에드윈드 에스베크. 열쇠를 얻게 된 두 사람. 이제 또 따로 다녀야 할 사람들인데... 저걸 언제 다 적지. 으휴우우우.. 멜은 donghee425@hanmail.net으로 보내 주시구요. 리플... 많이 달아 주세요^^ 즐독하세요~ 제 목: [수정판] 공녀(貢女) : 제15화 [마녀는 마녀가 아니었다?!](1) #. 제15화 [마녀는 마녀가 아니었다?!] * * * * * * * * * * * * * * * "적어도 어디로 가는 지는 알려 달란 말이에요! 무작정 끌고 나오… 잠깐만!!" 루피아는 느닷없이 들이닥쳐 자신을 어디론가 질질 끌고 가려는 로이드윈에게 외쳤다. 하지만 그녀의 애처로운(?) 외침이 전혀 먹혀 들지 않았는지 로이드윈은 짧게 한 마디만을 던져 그녀의 입을 막아 놓았다. "주군의 호출이야." 그 말에, 루피아의 입은 꿀먹은 벙어리처럼 딱- 다물려졌다. 만족할 만한 효과에 로이드윈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그녀의 팔을 잡아 끌었다. 부- 하고 불만스런 표정이었지만 반항은 하지 않았다. 그 음주 사건 이후,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고 있는지 루피아는 자신의 방 안에 처박혀 나오지를 않았다. 세 마족과 마왕, 그리고 그녀만이 알고 있는 그 사건에 대해서는 다들 함구하고 있기에 다행히도 그녀의 폭주(?)를 아는 이는 단 다섯 뿐이었다. '이 얘길 두 사람에게 했다가는 충격받을 거야. 차라리 입 다물고 말지, 그런 말을 어떻게 해? 술 먹고 마왕에게 구토를 해 버렸다는 걸? 으아아악! 멱살까지 잡았었지, 아마? '싫다'는 말도 했고, 꺄아아아- 울기도 해 버렸어어- 여기 와서는 한 번도 운 적이 없었는데!' 정말, 정말 싫다! 말도 안 되는 이유(그 웃기는 정령과 계약한)로 마왕과 술을 마시고, 추태까지 보여버린 자신이 정말 한심스럽고 싫었다. 그 이유로 무려 4일 동안이나 들어야 하는 시중은 고사하고 방 밖으로 한 걸음도 빼지 않은 그녀였다. 마왕도 그녀에게 오라는 말은 하지 않은 게 다행스럽다면 다행스럽달까. 그러나 걱정으로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다. 문제는, 바로 그 서류다!! 그 늦은 시간에 일부러 마왕의 집무실로 발걸음을 옮기게 했던 문제의 서류. 그녀가 시중을 들지 않으니 혹시, 혹시, 아주 혹시 그 서류가 발견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 게다가 들키면 그게 또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지금쯤이면 말라 증발해 버렸을 서류가 홍차로 쭈글쭈글해진 모습을 보면 누구나 다 '차를 쏟아서 숨겼구나'할 것이다. 그 동안 시중을 든 게 루피아, 바로 그녀이니 그녀가 그런 짓을 했다는 것은 바로 알 것! 술 마시고 주정을 부린 것으로도 모자라 그런 창피한 일까지 들킬 수는 없다! 그런 각오로 밤중에 몰래 집무실로 향할 생각도 해 보았으나 저번에도 밤중에 서류를 확인해 보기 위해 가다가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 기억나 도저히 불가능했다. "다 왔어. 이봐, 눈이라도 좀 뜨는 게 어때? 쯧- 아무리 내가 끌어 줘서 눈을 뜰 필요가 없었다고는 하지만 눈마저 감고 있는 건 너무하잖아. 확 키스해 버린다?" "뭣?!" 눈이 번쩍 뜨인다. "…윽. 그렇게 노골적으로 '싫다'는 표정을 지을 것까지는 없잖아? 이 여린 가슴에 크나큰 상처가 되는 행동이라구. 그렇게까지 내가 싫어?" 당연하지, 라고 루피아는 입속으로 중얼거렸지만 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참자, 참자. 저 버터끼 넘치는 말에 3일 전에 먹은 게 올라올 것 같아도 참자. "…흠. 어쨌든, 다 왔다." 루피아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로이드윈에게 끌려 도착한 곳은, …마왕성 내부 어딘가였다. 그녀에게 그 이상 중요한 게 어디 있겠는가? 그나마 마왕성 내부이면 다행인 것이다. 그녀의 앞에는 큰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룬어와 고대어, 마계어가 복잡하게 조합된 채 금색의 빛을 뿌리고 있는 마법진은 대략 20m 정도 되어 보였다. 루피아가 마법진을 살펴보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며 세키라를 비롯한 세 공녀와 두 마족이 들어왔다. "루, 루피아!" 마왕성에 같이 있었으면서도 4일 동안이나 얼굴을 보지 못한 친구들이 그녀에게 다가오며 외쳤다. 루피아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보였다. "대체 그 동안 왜 방에서 나오지 않았던 거야?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지?" "사고라도 친 거 아니야?" '…내가 사고만 치는 어린애냐…….' 듣는 루피아 입장에서는 그다지 듣기 좋은 말이 아니었지만, 두 사람 입장에서는 그런 생각부터 날 수 밖에 없었다. 제 앞가림은 잘 하는 아이이긴 하지만 어쩔 때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바보.같이 둔해서 자기도 모르게 사고를 치고는 했던 것이다. 비록 의도하지 않은 바이기는 했지만 그 사고는 치는 족족 엄청났다. "하. 하하. 그나저나, 여기는 왜 와야 하는 거야?" "어? 몰랐어?" 루피아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주지 않았으니 알 턱이 없었던 것이다. 무작정 방 안에서 끌고 나오기만 했지, 말해준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음… 로이드윈 님께서 말을 했으리라 생각했는데. 할 수 없지. 내가 말해줄게." 세키라가 말했다. 루피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어째서 느닷없이 큰 마법진 앞에 느닷없이 끌려 와야 하는 건지 알고 싶었다. "네가 방 안에서 두문불출(杜門不出)하는 4일 동안 서열 대회의 날짜와 함께 '공녀'들도 이번 대회에 참여한다는 공문이 전 마계에 내려졌어. 그에 말도 안 된다는 의견의 마족들이 대부분이고, 마왕님께 올라온 상소(上疏)에 역시 똑같은 말이 적혀 있었다고 해. 아, 이건 아로데 님의 말씀이야. 날짜가 정해졌기 때문에- 우리 역시 서열대회에 열리는 장소로 향해야 해. 들를 곳도 몇 군데 있기 때문에 오늘 출발하기로 결정되었는데, 네가 방에서 나오지를 않아서 알려 주지를 못했어. '메를리나'라고 하는 시녀 얘길 들어보니 너, '마왕님'의 'ㅁ'만 나와도 소리를 질러 대면서 말하지 말라고 했다면서?" "아……." 그러고 보니 그랬다. 벌써 소문이 퍼진 건가 싶어서 일단 소리를 질러 입부터 막고 봤던 것이다. 그게 아닌데, 라고 중얼거리던 메를리나의 모습이 생각나 루피아는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지금 출발하는 거야?" "응? 아, 뭐… 그런 셈이야." "아, 그렇구…… 뭐어어엇?!" "어? 어?" 서류는!! 확인도 못해보고 갈 수는 없어! 게다가 준비도 안 된 상태였다. 루피아가 와락 소리를 지르자 세 마족과 세 사람의 시선이 모였다. "어이, 오랜만이야?" "…1시간만 기다려 줘요! 잠깐 볼일이 있어서 그러니까!" "볼일?" 루피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로데는 잠깐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마왕이 올 때까지는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는 데다가, 굳이 서둘러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아직 그 사건(?) 이후로 마왕과 루피아가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부끄러워 그러나, 하는 생각도 있었고 말이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이유야 어쨌든 간에, 아로데의 허락이 떨어지자 마자 루피아는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마왕의 집무실로 달려갔다. 물론 그 과정에서 약간 헤매는 일이 있긴 했다. '죽겠네!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여긴 너무 넓어! 인간적… 아니, 그 수준을 뛰어넘어 불필요할 정도로 넓다고! 어차피 쓰는 방은 몇 개 밖에 없으면서 뭐 때문에 이렇게 넓게 지은 거야? 그러고 보니 황성도 그래. 쓸데없이 넓기만 하잖아? 윽- 한 시간 갖고는 부족한 거 아닐까?' 가까스로 마왕의 집무실에 닿은 루피아는 잠시 문 앞에서 숨을 골랐다. 마왕은 지금 출발준비를 하는 중일 테니 안에는 없겠지.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매끄럽게 열린 문틈 사이로 빼꼼, 얼굴을 들이민 루피아는 방 안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조심스레 발을 들여 놓았다. '서류… 를 숨겨 놓았던 찬장이… 아, 저거다.' 꿈에서도 그렸던(?) 찬장으로 다가간 루피아는 찬장 문을 열고 손을 뻗어 안을 뒤졌다. 부스럭, 하는 소리와 함께 서류뭉치가 손에 잡혔다. 그것을 꺼내 든 루피아는 다시 좌우를 살핀 후, 서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과연, 그녀의 생각대로 차의 물기가 다 증발해 쪼글쪼글해 지고 갈색의 옅은 흔적만이 남은 서류뭉치가 그녀의 손에 잡혀 있었다. 흑, 내가 이것 때문에 얼마나 맘을 졸였던가! "됐어! 남은 건 증거인멸 뿐이야!" 힘차게 소리친 그녀는 서류뭉치를 어떻게 처리할까 잠시 생각했다. …뭘 어떡해, 방법은 하나 뿐이지. 그녀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숨겨 놓기로 했다. 속옷 더미에 숨겨 놓을까, 드레스 자락 사이에 끼워 놓을까? 아냐, 그건 메를리나가 빨래한다고 손을 댈 수도 있으니 목욕용구 사이에 끼워 놓는 게 어떨까? 아… 그것도 좀 불안하다, 안 되겠어. 침대 시트 밑… 아냐 아냐, 그것보다는 베개 안에 넣어 놓는 게 나을 것 같다. 고민하던 그녀는 문득, 왜 자신이 이런 처지가 되었는지- 무척 한심해져 버렸다.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느냐고. 으으윽- 마왕 얼굴을 이제 어떻게 보지? 아악! 죽겠어, 죽겠어! 하필이면 그 날 홍차를 서류 위에 엎어 버릴 게 뭐냐고!! 바보 같잖아? 젠장!" 누가 이렇게 되도록 저주를 건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던 루피아는 시간이 없음을 깨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복도를 달려가는 그녀는, 다시 떠오른 그 때의 생각에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마왕 얼굴을 어떻게 보려고 그 짓을 한 거냐, 바보야!! 젠장- 내가 못 살아!' * * * * * * * * * * * * * * * "됐어! 남은 건 증거인멸 뿐이야!" 증거인멸? 집무실로 막 들어서려 할 때 안에서 들려 오는 낯익은 목소리에 이디스는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열린 문 틈 사이로 왠 쭈글쭈글한 종이뭉치를 들고 생글거리는 루피아의 얼굴이 보이자 그는 이대로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그는 곧 쉽게 결론을 내렸다. 잠시 이대로, 그녀가 하는 양을 지켜 보기로 했던 것이다. 그 충격적인 사건(?)은 그 역시 잘 기억하고 있었다. 마지막에 그녀가 자신에게 그… 약간 불쾌한 짓을 하기는 했지만, 어느새 정신을 차려 보니 그는 말끔한 모습으로 집무실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 중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나, 그의 세 수하가 깔끔하게 처리한 것이라 예상했다. 그 이후, 그녀는 4일 간이나 그의 시중(?)을 들러 오지 않았다. 나름대로 예상한 일이라 굳이 오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뭔가 아쉬운 감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나저나… '증거인멸'이라니. 이디스는 그녀가 들고 있는 종이뭉치로 시선을 옮겼다. '저게 뭐지?' 하얀색 바탕에 남아있는 연갈색의 옅은 흔적, 젖어 있었던 듯 쭈글쭈글한 종이뭉치였다. 검은 잉크가 번진 흔적도 있었고, 멀쩡한 글자도 몇 자 보였다. 마계어로 쓰인 것을 보아서는 그녀가 적은 것은 아닌 듯 싶었다. '…무슨 일이라도 꾸미는 건가.' 물론, 저런 꾸깃꾸깃, 쭈글쭈글한 종이뭉치로 뭔 일을 꾸민다는 건은 뭔가 안 맞지만 말이다. 이것 저것 생각하고 있던 그의 궁금증은 잠시 후 그녀가 중얼거리는 말로 인해 깨끗하게 풀렸다.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느냐고. 으으윽- 마왕 얼굴을 이제 어떻게 보지? 아악! 죽겠어, 죽겠어! 하필이면 그 날 홍차를 서류 위에 엎어 버릴 게 뭐냐고!! 바보 같잖아? 젠장!" …그렇게 된 거였군. 그러고 보니, 그 음주사건이 있던 날 그녀는 지금 그녀 앞에 있는 찬장 앞에 앉아 꼼지락거리고 있었던 게 기억이 났다. 그 때는, 청소하나 보다 하고 가볍게 넘겼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그녀의 중얼거림에 이디스는 피식 웃었다. '그 날의 기억이 있기는 한 모양이지?' 그녀는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서류뭉치를 가지고 문을 향해 빠르게 걸어왔다. 그는 옆으로 살짝 비껴 서기만 했지만, 아쉽게도 그녀는 딴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가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만약 이 장면을 아무런 상황설명 없이 본다면 그녀는 상당히 수상해 보일 게 틀림없었다. 마왕의 집무실을 뒤져 서류뭉치(…라고 보기에는 좀 그렇지만)를 꺼내 희희낙락하며 좋아하는 모습이니 말이다. 몸을 돌려 다른 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장소로 향하는 그의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매달려 있었다. * * * * * * * * * * * * * * * "……어때? 두 사람, 만났어? 로윈, 말 좀 해 봐!" 조용히 눈을 감은 채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로이드윈이 답답했는지 아로데가 그를 흔들어 재촉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루피아가 집무실로 향하는 것을 눈치챈 아로데는 아직 그 곳에 있을 마왕과 루피아가 만나는 장면이 굉장히 궁금했다. 하지만 정작 그 장면을 볼 수 있는 마안(魔眼)을 지닌 로이드윈은 본다고 하며 눈을 감더니 뜨지를 않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무척이나 심각한 표정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치기에는 너무 조용하지 않은가. 로이드윈이 아로데의 재촉에 눈을 뜨더니 인상을 찌푸린 채로 입을 열었다. "…수상한데……." "뭐?" 로이드윈은 묵묵히 눈살을 찌푸렸다. 유쾌한 두 사람의 만남을 보기 위해 집무실의 장면을 보려고 했던 그는, 예상치 않았던 장면을 보고 말았다. 집무실 찬장에서 뭔가를 찾기 위해 꼬무락거리던 루피아의 모습과, 뭔가(종이뭉치라 짐작되는 것)를 꺼내 들더니 빙그레 웃음을 띄는 얼굴을. 그 뒤부터는 마왕이 가까이에 왔는지 볼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라도 저지르는 것인가?' …어떻게 사람과 마족이 이렇게 똑같은 생각을 할 수가 있는지. 적어도 이 순간 로이드윈은 세키라, 에리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마안은 음향설비까지 갖춰지지 않았다. 다시 말해, 말소리까지 들을 수는 없다는 말이다. 말소리를 알기 위해서는 입모양을 보고 스스로 알아내야 한다. '루피아와, 아유니 드 포르티칼. 적어도 이 둘을 주시하는 게 좋겠어.' 비록, 자신의 주군이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수상한 점을 확실히 하고 데리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야! 로윈!! -진짜 말 안 해줄 거야?!" "시끄러워!!" * * * * * * * * * * * * * * * "루피아가 좀 늦는 모양이네. 또 길을 잃은 건가…." 세키라는 조용히 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1시간, 이라고 했지만 시간은 이미 1시간하고도 15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어차피 마왕성에서 그녀가 1시간만에 볼일을 다 끝낼 거라고는(다시말해, 길을 잃지 않고 볼 일을 볼 거라는) 예상은 애초 하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이렇게 기다리기만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짓은 상당히(가 아니라 아주) 무료하고 심심한 일이다. 에리나도 생각할 것이 있는지 조용히 침묵하고 있고, '아유니'라는 사람은 아예 표정을 걸지 않은 얼굴로 눈을 내리 감고 있었다. 세키라는 '아유니'라는 사람을 자세하게 살폈다. 로이드윈이 맡게 된 공녀로, 핑크빛 머리카락과 순수해 보이는 진분홍빛 커다란 눈동자가 귀여운 여자였다. 21살이라는,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나이… 아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외모, 가 맞는 말일 것이다. 엄청난 동안(童顔)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아주 차분해 보였다. 믿기지 않는 말일 수도 있으나, 아주 차분해 보이는 분위기였다- 적어도 지금은. 루피아의 앞에만 서면, 호들갑스럽게 보일 만큼 얼굴이 상기되고 목소리가 들뜨지만, 지금은 아주 차분하고 우아한 여성상을 그리고 있었다-, 차가워 보일 만큼. '이상하네. …이중인격이신가?' ……그럴리가. 잠시 생각해 보던 세키라는 가능성이 미미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조금, 조금 루피아에게 이상한 반응을 보이기는 하지만 고작 그 이유 하나로 이중인격자 취급을 하는 건 무례한 일이다 싶었다. 잘 생각해 보면, 이 아가씨에 대한 기억은- 그다지 없다. 다만, 루피아에게 이상한 쪽의 집착을 보였다뿐이지, 그 외에는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말을 시키지도, 걸지도 않았어, 이 사람….' 이상하게 여겨야 하는 걸까? 그녀는 조용히 '아유니 드 포르티칼'에 대한 사교계 정보를 탐색해 보았다. '포르티칼'… 귀에 익지 않은 가문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세 있는 귀족가는 아니리라. 웬만한 다른 왕국의 귀족가도 꿰뚫고 있는 그녀로서는, 이상하게 여겨질 만도 한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적어도 백작 이상의 신분을 갖고 있다면 물망(?)에 오를 만도 했기 때문이다. 너무 오래 뚫어져라 쳐다봤기 때문일까. 아유니의 눈이 천천히 뜨여지며 시선이 마주쳤다. 괜스레 화들짝 놀란 세키라가 움찔하자, 아유니가 말했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은 게 아니라면, 시선을 옮겨 주시는 게 어떠시련지. 불편합니다." "아, 아… 네!" 이상한 일이다. 거만하게 들릴 지도 모르지만, 웬만한 귀족가 아가씨들은 그녀가 공작가의 여식이라는 것을 불편하게(다시말해, 굽실거린다는 소리다. 아니, 적어도 저런 말을 할 정도는 아니다) 생각한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그런 기색이 전혀 없다. 그런 수준을 초월한 듯, 어찌 보면 성직자같은 분위기도 난다. '…이상하네.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봐도 포르티칼이라는 가문 이름은 생각이 안 나. 제국에 있는 백작 이상… 아니, 적어도 자작 가문부터는 다 외웠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자. 페투리아 자작가, 브라이튼 자작가, 브테즌 자작가….' 세키라는 제국의 자작 이상 귀족가 이름을 하나 하나 짚어보고 있었다. 에리나는 뭔가를 세며 중얼중얼 거리는 친구의 어깨를 툭 치며 이름을 불렀다. "뭘 그렇게 중얼거려? 세키라. 정신차려." "어? …응. 에리나, 아무래도 이상해. 내가 기억하는 한, 포르티칼이라는 이름을 가진 백작가는 없단 말야… 제국 안에서. 후작가는 더더욱 아니고(공작가는 아예 입에 올릴 필요도 없다)." "…뭘 그렇게 과민반응을 보이고 그래? 그 많은 백작가문, 혹은 후작가문 중에 하나 빠뜨렸다고 큰 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잖니? 네가 깜빡 잊어버린 거겠지." "…그렇겠지?" "그래." 세키라는 영 개운치 않다는 표정이었지만 어쨌든 넘긴 것 같았다. 에리나는 피식 웃었다. 그녀의 친구는, 이상한 데에서 묘하게 집착하는 모습을 가끔 보이고는 했던 것이다. "…아직 계약이 이행되지는 않았지, 에리나?" 에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4일 전 저녁에 행해지기로 했었지만, 아쉽게도 그건 유리아덴이 일이 있다고 미루는 바람에 이제까지 미뤄지고 말았다(그 일이 세 노마족, 마왕, 그리고 루피아밖에 모르는 음주사건이라는 것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알 것이라 믿는다). "…과연, 어떤 방법으로 널 강하게 만들어 줄까." 대가없는 힘이란, 아니- 대가는 있더라도 스스로 노력해 얻은 힘이 아닌 힘이란, 분명 좋은 것만은 아닐 것이다. 에리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얻은 힘에 노력을 더한다면, 이라는 안일한 생각은 하지 않는다. 어쨌든! "몰라. 그치만 강해지게 만들어 주기는 하겠지. 그거 하나는 확실해, 그리고- 난." 그녀는 잠시 말을 끊었다. "…난, 내 영혼을 맡긴 사람- 아니, 마족을 믿기로 했어. 그 동안- 20일 동안 내가 이 마계에서 지내면서 나는 그의 가장 가까이 있어 봤고, 그 경험이 내린 결론은, 적어도 내가 이제껏 만난 '최악'보다는 훨씬 낫다는 거야. 그래서 믿기로 했어. 세키라, 너는 어떠니?" 에리나는 세키라의 갈색 눈으로 시선을 돌렸다. 세키라는 미미한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로 한 마디 했다. "글쎄?" ============================================================= 아아, ....오랜만이에요.[생글] 신혼일기를 재개했지만.. 그래도 속도가 느린 건 여전하군요.. 이런, 순식간에 몇 편 뚝딱 해치워 버릴 수 있는 능력이라도 생기면 좋겠다..[쓸데없는 말] ...흠흠, 헛소리였어요. 공녀도 수정판이 낫다, 예전 게 낫다, 하는 소리가 있는 데요.. 그래도 저는 이번 게 더 좋아요.[당연한 건가?;;] 예전의 것은.. 글쎄요, 뭔가 핀트가 좀 엇나갔다고나 할까요. 둘 다요.[;;] 적어도 공녀는 한 번쯤은 수정할 생각이었고[안 하고 그냥 책낼 수는 없잖아요?;;], 신혼일기는 무엇보다 수정이 필요했으니까.. 게다가 신혼일기는 그대로 갔으면 언젠가 연중했을 거예요.[삐질] 에잇- 몰라요. 멜은 donghee425@hanmail.net!! 비평, 감상 등을 보내주세요. 리플은.. 필수고요..[점점 작아지는 말소리] 즐독하세요. 제 목: [수정판] 공녀(貢女) : 제15화 [마녀는 마녀가 아니었다?!](2) #. 제15화 [마녀는 마녀가 아니었다?!] * * * * * * * * * * * * * * * 잠시 후, 루피아와 세키라, 에리나, 세 노마족과 아유니, 마왕까지 모두 마법진이 그려진 장소에 모였다. "이 마법진으로 어디로 가게 되는데?" 루피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최종 목적지야 알지만(서열 대회가 열리는 곳이라는 것만 알지, 구체적인 장소는 모른다) 중간에 들른다는 몇 군데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의문은 세키라가 간단하게 풀어 주었다. "서열 87위 '에크 스카필타'라는 이름의 마족이 계시는, '에크 성'에 가게 될 거야. 그 외 몇 군데에 들러 그 곳을 거점으로 주변을 둘러볼 생각이라고 하셔. 다시 말해, 가는 도중 몇 군데에서 쉬기도 하겠다는 말이지." 루피아는 메를리나에게 서열 51위부터 100위까지는 '스카필타'라는 성을 쓴다는 말을 들었던 걸 기억해 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열 대회에 관해 메를리나가 설명해 준 것에 대해 상기했다. 10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행사인 서열 대회는, 마족들에게 자신의 서열을 변동시킬 수 있는 기회다. 대회가 열릴 때, 자신이 가지고 싶은 서열에 앉은 마족에게 도전을 하고, 도전자가 이긴다면 그 서열은 자신의 것이 된다. 도전하고, 이기고, 지고… 그런 식으로 이뤄지는 것이 바로 서열 대회였다. 이번 대회에서 목적은 아무리 하위라도 '서열에 들고', 공녀가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상위는 꿈도 안 꾼다). 아마 그녀들의 상대는 하급 마족 정도가 될 것.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힘든 상대이기는 매한가지다. 그녀를 상념에서 깨운 것은 자신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닭살스럽게도 귀에 훅- 하고 숨결(?)을 불어넣은 로이드윈이었다. "끼야아아아아…!" "뭔 생각을 그렇게 심각하게 해?" 턱- 하니 루피아의 정수리에 턱을 얹으며 로이드윈이 물었다. 루피아는 주먹쥐어진 손이 그의 면상으로 향하려는 것을 억지로, 억지로 막고는 온몸에 난 닭살을 긁었다. 난 이런 쪽으로는 전혀 면역력이 없단 말이얏! "떨… 어져 주시겠어… 요……?" "흠. 싫어." 자연스럽게, 최대한 자연스럽게. 파르르 떨리는 얼굴 근육을 억지로 움직여 미소를 띄운 루피아는 그렇게 되뇌이며 입을 열었다. "무겁거든요오?" …퍽도 자연스럽다. '제발 떨어져'라고 써 놓은 듯한 루피아의 얼굴을 바라보던 로이드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아, 이렇게 읽기 쉬운 사람이 또 있을까 싶다. 그는 팔을 둘러 루피아의 목을 껴안았다. 으악, 하는 신음이 그녀에게서 흘러 나왔다. "궁금한 게 있는데." "으… 으에? 그… 게 뭔데요?" 이놈의 마족이 갑자기 왜 이래. 캑캑! 목 졸려 죽겠다. 정수리에서 로이드윈의 턱이 움직이는 게 느껴지자 루피아는 머리를 흔들어 털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언제부터 중간계의 미의식(美意識)이 바뀌어 버린 거냐?" "……네?" 갑자기 왠 자다 봉창 두드리는 소리? "미의식(美意識)이 변하지 않았다면 너희들이 나나 아로데, 유리아덴을 보면서 그렇게 태연할 리 없어! 이 정도면 우리, 무지하게 잘생긴 거 아니냐?" "……." 이럴 때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걸까. 루피아는 잠시 고민했다. 왕자병은 불치 정신병이에요? 하지만 진짜 왕자… 아니, 황태자보다 더 잘생겼으니 이 말은 뭔가 어폐(語幣)가 있는 게 아닐까. 로이드윈과 루피아가 하는 양을 보고 있던 세키라가 말했다. "인간들의 미의식은 거의 변한 게 없답니다, 로이드윈 님. 300년, 400년 전부터 변하지 않았죠.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저희 눈으로 보기에도 아로데 님이나 로이드윈 님, 유리아덴 님은 무척 잘생기시긴 했어요. 음… 하지만 루피아는 어떨지, 저는 잘 모르겠네요." "흐응… 왜?" 세키라는 웃음기가 묻어나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루피아의 세 오라버니들은 세 분에게 지지않을 정도로 무척 잘생기신 분들이거든요. 그런 오라버니들과 아버지 사이에서 자랐으니, 눈이 높아질 만도 하지 않겠어요?" "흐음- 그럴 수도 있겠네." 로이드윈은 고개를 끄덕이며 발버둥 치는 루피아를 놓아 주었다. 그리고, 아로데 쪽으로 눈을 찡긋- 해 보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뭔가 석연찮은 게 있는 듯 아로데의 표정은 편치 않아 보였지만 어쨌든 아로데 역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으읏, 젠장. 무슨 놈의 힘이 그렇게 세! 팔꿈치로 명치를 세게 때렸는 데도 꿈쩍도 안 하네. 아으- 망할 놈! 이제 보니 자뻑 증세까지 있었던 모양이야. 쳇!' 캑캑거리던 루피아는, 문득 자신의 뒤로 시선을 느꼈다. 힐끔 돌아보니, 그곳에는 마왕과… 아유니가 서 있었다. 자신을 향해 방긋- 웃어 보이는 아유니와는 달리 고개를 돌린 마왕이었지만 말이다. '뭐야, 이건?' 노골적으로 그녀를 외면해 버리는 마왕의 태도에 루피아는 괜히 울컥하는 기분을 느꼈다. 물론, 물론 그녀가 그에게 바로 구토를 해 버리는(…) 짓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저런 반응을 보여도 할 말이 없지만. 그 모습을 보며 아로데와 로이드윈은 흐뭇- 한 웃음을 지었다. '그나저나- 다른 공녀들은 어쩌고 있을까? 내가 쿡쿡 찔러 놨으니 나에 대한 감정이 곱지만은 않을 테지. 이런, 나, 지금 무지무지 미움받고 있는 거 아니야? 공녀들 중에서, 내가 일부러 그랬다는 걸 알아 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으련만… 에휴, 그 것도 걱정이구나. 나중에 서열대회 전에 공녀들끼리 한 번 모여 봐야 하겠어. 에라, 에리나하고 세키라가 있으니 어떻게 잘 되겠지.' 간단히 결론을 내려버린 루피아는 마법진 위에 발을 얹어 놓았다. 마법진에는 룬어와 마계어, 고대어가 아주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다. 그 배열을 살펴 보던 그녀는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본다고 해서 쓸 수 있을 것도 아니고,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리를 더 복잡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자연스레 물의 정령 세이준을 떠올린 루피아의 미간이 찡그려 졌다. 욕실에서 물장난치던 것을 가까스로 돌려보내 놓고 다시 부르지 않았다. 불러 놨다가는 괜히 사고만 잔뜩 치게 될 것 같아서 였지만, 정작 일은 자신이 치고 말았다. 마법진이 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루피아는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톡, 하고 건드리자 뒤를 돌아 보았다. 그 곳에는 아유니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그녀가 별안간 말했다. "…조심하세요." "네? …어어?" 이디스는 루피아의 팔을 잡아 자신의 쪽으로 당겼다. 팔을 그녀의 목에 감고는, 한쪽 팔로는 그녀의 허리를 둘렀다. 그리고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이, 이게 뭐하는 짓……." "다녀 오겠다." 이디스와 루피아는, 마법진 밖으로 사라졌다. 다시 마법진이 밝은 금빛으로 빛나며, 망연한 표정의 공녀들과 피식 웃는 마족들의 모습이 흐려지듯 사라져 버렸다. * * * * * * * * * * * * * * * "……사라졌어." 망연한 표정으로 세키라가 입을 열었다. 에리나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녀들의 표정과는 대조적으로 마족들의 얼굴은 너무나 태연했다. 어느 새 도착한 주변을 태연하게 살피며, 아로데가 말했다. 아, 꽤 괜찮게 꾸며 놨는데.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 말라고. 설마 주군께서 루피아를 잡아 먹기야 하시겠어? 아. 이건 이중적인 의미지. 흠… 한쪽으로는 그럴 지도 모르겠다. 야아, 이거 기대되는데." 세키라와 에리나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눈을 감고 태연하던 아유니마저 아로데의 그 말에는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어서 오십시오. '에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군주시… 여…?" 한 박자 늦게 허리를 숙여 보이며 인사를 올리는 마족은, 마왕이 보이지 않자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로이드윈은 그에게 말했다. "이런, 주군께서 오지 않아 실망했나? 조금 있다 오실 거네." "그, 그렇군요." "그래." 에리나는 차분히 '에크 스카필타'의 모습을 살폈다. 짙은 고동색 머리카락이 목 뒤까지 흘러 내렸고, 조금 짙은 듯한 피부색을 가지고 있었다. 내리깔은 붉은색 눈동자에서는, 강자에 대한 존경이 느껴졌다. 그것만 봐도 마계에서 얼마나 체계질서가 잘 잡혀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에리나는 피식 웃었다. 잠시 아로데와 얘기를 나누던 에크 스카필타는 공녀들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직접 그들을 방으로 안내했다. 마족이 잘 대해 줄 거라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기에 묵묵히 뒤를 따르던 에리나는, 성의없이 에크가 가리키는 방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다 유리아덴의 목소리에 멈칫했다. "주군께서 돌아 오시면 바로 시작하겠다. 기다리고 있도록." 세키라가 걱정스레 쳐다 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에리나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만 끄덕였다. 에리나, 세키라, 아유니는 한 방에 배정되었다. "아아, 이 녀석은 안 돼. 내 거라구. 내 옆방으로 줘." "예?" 하지만 아유니의 팔을 끌어 당기며 로이드윈이 말하자, 에크는 어리둥절한 듯 눈을 깜빡였다. 세키라는 로이드윈의 그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이 마족, 루피아를 좋아하던 게 아니었나? 의외인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유리아덴과 아로데 역시 두 사람을 자신 쪽으로 당기고 입을 열었다. "나도! 질 수야 없지." "……." 비록 유리아덴은 입을 열지 않았지만. 세키라와 에리나는 당황한 듯 눈만 깜빡였다. 갑자기 하지도 않던 짓(?)을 하니 당황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둘, 아니 세 마족은 너무나 태연했다. "주군은 아마 그에게 가셨겠지? 언제쯤이나 돌아 오실까." "곧 오실 거야. 이봐, 지금 식사 할 수 있나?" 결국, 세 사람은 세 마족의 옆방을 각각 차지하게 되었다. 아유니는 약간 불쾌한 듯 찌푸린 얼굴로, 세키라와 에리나는 아직 당황한 기색이 남아있는 얼굴로 방에 들어가자, 세 마족은 에크의 안내를 받아 식당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감시 잘 하라고, 로윈." "아아… 걱정 마." * * * * * * * * * * * * * * * 미카엘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장로'라는 직함을 달고 있는 천족이 모여 불평을 늘어 놓고 있었다. '…후우. 30년 전만 해도 고개를 조아리기 바빴던 자들이….' 어느 새 이렇게 컸나 싶었다. 불만스런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반항적인 눈매를 하고 있는 그들을 보며 화가 나기 보다는 헛웃음만 새어 나왔다. "어째서 안 된다는 겁니까?! 마족은 이미 계약조건을 깨어 버렸습니다! 중간계의 인간들을 납치해 갔단 말입니다! 중립을 지키기로 한 계약이 깨져 버렸습니다!" "그들의 방자한 행동을 보고만 계실 겁니까?" 최대한 전쟁을 막고자 해야 할 인물들이, 오히려 전쟁을 하자고 나서고 있다. 이 기막힌 상황에 미카엘은 할 말을 잃어 버렸다. 에우로카엘은 보다 빠른 시간에, 그리고 보다 깊게 이들의 뒤에 서서 완벽하게 조종해 내고 있었다. 한숨만이 나오는 이 상황에, 미카엘은 미간만 찌푸릴 뿐이었다. '정작 그녀는 어디 있는지 행방이 묘연하고….' 에우로카엘의 세력은 모두 잠잠하다. 그리고 천계 내에서도 그녀의 행방이 묘연했다. 미카엘은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한 가지 물어 보겠습니다." "네?" "에우로카엘이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미카엘은 날카롭게 장로들을 내려다 보며 말했다. 장로들의 몸이 움찔, 했지만 그들은 곧 시선을 맞추지 않고 말했다. "그 분이 어디 계시는 지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거처에 계시겠지요." "……그렇습니까?" 푸우. 말해 줄 리가 없나. 미카엘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빨리 오르가프 님을 뵈러 가 봐야 하는데… 이제 그녀의 행방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체르비엘들이 그녀를 찾아내는 것이다. 아니면, 속셈을 알아 내거나. 미카엘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오르가프 님을 뵈러 다녀 오겠습니다." "미카엘 님!" 마계는 어째서 여자들을 데려간 것일까. 마신 클리오라는 어째서 그런 신탁을 내린 것일까. 오르가프 님은 어째서 아무런 말씀이 없으신 것일까. 그리고… 에우로카엘, 그녀의 속셈은 무엇일까. * * * * * * * * * * * * * * * 『널… 데리러 왔다, 꼬마야.』 낮고 풍부한 음성이 귓가에 울렸다. 고개를 들었다. 희고 고와 보이는, 커다란 손이 눈앞에 내밀어져 있다. 흐릿하게- 안개로 흐려진 듯 자세하지 않은 윤곽의 얼굴이 앞에 있었다. 『데리러 와요? 나를요?』 두렵다. 춥다. 희미해져 가는 시야 사이로 엿보이는 그 사람은, 자신을 보며 웃는다. 따스하게, 아름답게… 단 한 번, 단 한 번 보았던 그 '빛'처럼. 손을 내민다- 나를, 이 곳에서 데리고 나가 줄 건가요? 손이 닿았다- 나를, 거부하지 않을 건가요? 손을 잡았다- 나를, 버리지 않을 건가요? 손이 끌린다- 나를, 데리고 가 줘요. 몸이 일으켜진다. 주변의 모습이 점차 바뀌어 갔다. 빛으로 가득 찼다. 순간, 루피아는 정신을 차렸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나, 나는, 마법진 위에 있었는… 아, 마왕이 나를 끌어 당겼지. 그런데 내가 왜 이곳에 서 있는 거야?'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작은 손, 고작 다섯 살 난 아이의 손처럼 아주 자그마한 손이, 아까 보았던 그 큰 손에 잡혀 있었다. 그와 동시에, 아까 느꼈던 감정이 밀려 들어왔다. 『꼬마야, 저기야. 저기를 봐. 저기가 바로…….』 쿠궁! 쿵!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루피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가슴이 찢어질 듯한, 깊은 곳을 아리는, 조이는, 눈물이 날 것 같은 아픔에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슬플까. 왜 이렇게 아플까. 왜… 왜. 입술을 꽉 깨물었다. 무릎을 꿇고 가슴에 손을 가져갔다. 『하지 마.』 '이건… 내 목소리가 아니야.' 『하지 마! 아파! 아파! 아프단 말이야! 하지 마!』 루피아는 눈을 감았다. 목소리가 귓가에서 웅웅거리고 있었다. 온몸이 울렁거리는 감각에 멀미가 날 것 같다. 숨이 막힐 듯한 아픔에, 루피아는 무릎을 꿇었다.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유리가 부서지듯, 투명한 균열을 일으키며 주위가 점점 부서져 내렸다. 루피아는 무릎을 끌어 안고 고개를 묻고 있었다. 아직, 가슴 한켠에 아픔이, 슬픔이, 괴로움이 남아 눈물이 흘러 내릴 것만 같았다. 누구지? 누가 이렇게 슬픈 걸까? 누가 이렇게 아파하고 있는 걸까. 내가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의 주인은 대체 누굴까. 그녀는 살짝 고개를 들었다. 감정은 점차 옅어져, 루피아는 크게 쉼호흡을 했다. 차가운 공기, 습기가 폐부로 스며 들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루피아는 주변이 바뀌었음을 인식할 수 있었다. '여기는 또 어디야? 아, 망할, 꿈인가?' 루피아는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시선이 옮겨져, '몸'의 손을 비추었다. 아까 보았던 손보다 큰, 곱고 흰 손이었다. 그리고 시선은 다시 위로 향했다. 빛으로 가득한, 황금빛 하늘. 『부탁, 하시는 건가요…?』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옆에 누군가가 있는 듯 한데, 루피아는 그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해야 겠지요. 거절할 수 없으니까요.』 그 음성에는 자조적인 느낌과 함께, 지독한 고통이 깔려 있었다. 생살이라도 파내는 건가?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지만, 가슴 깊이 느껴지는 그 생생한 아픔에 루피아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아까부터 계속,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루피아는 눈을 감아 버리고 싶었다. 귀에서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가 점차 멀어져 갔다. 시야도 흐릿해져 갔다. 모든 것에서의 감각이 차단되듯, 점차 멀어져 갔다. '…회색의……?' 환상같은, 그림자를 본 듯한 느낌. 그녀는 다시 천천히 눈을 떴다. 연한 갈빛의 천정이 보였다. '천정… 천정?!' 루피아는 멍-한 머리를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왠지 모르게 뒤통수가 화끈거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주위를 살펴 보았다. 그녀가 지금 누워 있는 곳은- 집이었다. 아, 말 그래도 '집'이다. 약간은 까칠한 느낌이 나는 이불이 몸에서 흘러 내렸다. 푹신한, 풀잎 냄새가 나는 침대 위에서 내린 그녀는 다시 주변을 살폈다. 연갈색의 정갈하게 정리된 바닥, 벽. 그리고 아기자기하게 올려진 장식장이 아주 예뻤다. 손길이 꼼꼼한 이가 청소해 놓은 듯, 먼지 한 톨 보이지 않았다. "아, 깨어 나셨군요." "……?!" 문이 열리는 소리도 없이 들리는 난데없는 목소리에 루피아의 시선이 재빨리 목소리의 진원으로 향했다. 그는 아주 화려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반짝이는 금발머리에, 깊어 보이는 진녹색 눈동자가 아름다웠다. 루피아가 잠시 얼이 빠진 듯 멍하니 입을 다물지 못하자, 그 사람은 부드럽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군주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유도 없이 기절해 버리시는 바람에 깜짝 놀라셨던 모양이에요." …깜짝 놀라? 그 사람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머리는 괜찮으세요? 침대 머리맡에 부딪쳐 버리셨지 뭐예요. 갑자기 벌떡 일어나시더니 눈을 번쩍! 뜨고는 다시 누워 버리셨을 때 부딪치셨어요." "……아." 화끈! 얼굴이 달아 올랐다. 이런 쪽팔릴 데가. 그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다시 한 번 온화하게 웃고는 말했다. "마녀의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해요, 아가씨." ============================================================== 안녕하세요! 엄-청 오랜만이네요;; 모두 설은 잘 쉬셨죠? 떡국도 많이 드셨죠? 음.. 세뱃돈도 많이 챙기셨죠?+_+ ^^; 멜은 donghee425@hanmail.net.. 입니다. 즐독하세요~ 제 목: [수정판] 공녀(貢女) : 제15화 [마녀는 마녀가 아니었다?!](3) #. 제15화 [마녀는 마녀가 아니었다?!] * * * * * * * * * * * * * * * "마… 녀라고요? 마녀(魔女)?!" 보통, 마녀(魔女)라고 하면 무엇을 떠올리는가? 음침한 분위기의 검은 로브를 칭칭 둘러 매고, 커다란 냄비 앞에서 '끼히히히' 또는 '클클클' 등의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는 메부리코의 음침한 할머니가 생각나지 않는가? 옵션으로는 지팡이와 검은 고양이, 부엉이 등이 있다. 루피아는 자신의 앞에서 우아하고도 여유롭게, 아름답게 미소 지으며 생긋생긋 거리는 이 '남자'가 절대! 마녀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마녀'란 보통, 마족에게 영혼을 판 여자를 마녀라고 한다. 100년 가량 전에는 오르가프 교단의 성기사를 비롯한 성직자들이 그녀들을 처단하는, '마녀 사냥'이라고 불리우는 사건이 터졌었다. 그 도중, 무고한 여자들 역시 수없이 죽어 나갔다. 그 혼란을 틈타 온갖 사악한 만행을 스스럼없이 저지르고는 마녀로 모함하여 여자를 죽이는, 그런 일들도 비일비재했다. 훗날 그 사실이 밝혀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일그러진 루피아의 표정을 본 '마녀'가 푸훗,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중간계에서의 마녀의 정의가 어떤 것인지는 저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표정을 지으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죠." "아…." "단지, 마녀라는 종족명을 지닌 일족일 뿐이지만요. 수없는 마족의 일족이 사는 이 마계에 사는 일족일 따름이랍니다. 종족명이 '마녀'라고 붙은 이유는, 종족 중 대부분이 여자이고, 주도권을 잡은 쪽도 여성이기 때문이죠. 마계의 여성 중 유일하게 남성보다 강한 종족이 마녀입니다. 활동 또한 여성이 활발한데, 대부분 중간계에서 활동합니다. 진짜 마녀는 드물지만, 일단 중간계에서 생활하는 마녀들은 '마녀' 종족이랍니다." 루피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한 듯 하자 그는 다시 한 번 허리를 약간 숙여 인사를 해 보이며 말했다. "마녀 에드라스라고 합니다. 잘 부탁해요." "네? 아, 아. 네에." 루피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마주 고개를 숙여 보였다. 에드라스는 다급히 일어나는 그녀를 보고 다시 싱긋 웃어 주면서 말했다. "군주께서 기다리십니다. 이리로 따라 오세요." 남자가 마녀? 머릿속이 엉키는 느낌이었지만 루피아는 정신을 차리고 문을 열고 발걸음을 옮기는 에드라스의 뒤를 쫓았다. 방과 마찬가지로, 곳곳에 그의 손길이 묻어나는 듯 정성스러운 장식이 되어 있는 연갈색 톤의 우아한 집은 정말 아늑하기 그지없었다. 그다지 길지 않은 복도의 끝에는 밑으로 내려 가는 계단이 보였다. 그제야 루피아는 쓰러졌다는 자신을(세상에, 내가 쓰러지다니!) 누가 여기까지 옮긴 걸까? '……역시…… 하나밖에 없겠지?' 하긴, 생판 모르는 이 마녀가 자신을 옮겼겠는가? 설령 집 안에서는 그가 옮겼다고해도 그 전까지는 아마… 후우, 루피아는 답을 삼켜 버렸다. "…곁에 계시기 힘든 분이실 테죠?" "네?" "군주 말입니다. 저는, 옛날부터 그 분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는 행운을 입었었답니다. 그 행운에는 지금도 클리오라께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그의 말을 곰곰히 씹어보던 루피아는 '옛날부터 곁에서 지켜볼 수 있는'이라는 말에 주목했다. 그녀의 얼굴에 의문이 피어 오르자 에드라스는 미미한 웃음기 서린 음성으로 말했다. "정말 얼굴이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시는군요. 저는, 옛날 그 분의 보모였지요. 유모라고 생각하면 되실 겝니다. 아… 그 때 역시 참, 말이 없는 분이셨지요." 그건 단순히 말이 없는 차원이 아니야! 루피아는 그렇게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려 아랫입술을 꼭 깨물어야 했다. 그래도 '키운' 사람 앞에서 그런 말을 하면 실례일 거라 생각해서 였다. …사실이라 해도. "…껍데기를 보시면 더욱 힘드실 겁니다. 그 분을, 제대로 보아 주십시오." "네? 그게 무슨…?" 에드라스의 표정은 어느새 진지해져 있었다. 그는 복도에 멈춰선 채 뒤돌아 그녀를 직시하며 말하고 있다. 루피아는, 그의 진지한 진초록빛 눈동자에 몸이 굳는 것 같았다. "……아직은, 그 분은, 자신을 모르고 계십니다. 분명히, 차갑고- 말이 없으신 분이시기는 하지만-… 아직은 저 역시 그 분을 잘 알지 못하지만… 알아 주십시오. 그 분은, 단지-……." 단지? 단지 뭐가 어떻다는 거지? "…내가 나의 뭘 모른다는 건가, 에드라스." 복도의 반대편 계단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디스였다. 차갑게 굳힌 얼굴에는 미약한 불쾌감이 서려 있었다. 뒷말은 뭘까? 루피아는 궁금했지만 성큼성큼 다가오는 이디스 때문에 물어볼 수가 없었다. "말해 봐. 내가 나의 뭘 모른다는 거지?" "…그건 군주님 스스로 알아 내셔야 할 것. 제가 가르쳐 드릴 성질의 것이 못 됩니다. 만약 제가 가르쳐 드린다면, 그건 전혀 소용없는 것이 되어 버릴 것이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명령 불복인가?"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군주님. 허나, 그러한 뜻은 없었다는 것을 유념해 주십시오." 생긋- 아마 그의 최대 무기라 생각되는 온화한 웃음을 에드라스는 이디스에게 보냈다. 곁에서 지켜 보던 루피아는 와아- 하고 작게 탄성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저렇게 부드럽고 유연하게 마왕을 '다루다'니! 굉장해! 작게 눈살을 찌푸려 보인 이디스는, 그 옆에 서 있는 루피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동경(?)의 눈빛으로 에드라스를 보고 있던 루피아는 흠칫하며 눈을 마주 올렸다. "생각보다 빨리 정신을 차렸군. 그깟 충격도 이기지 못해 기절을 하나?" 뭔가, 말투에 가시가 돋힌 듯 했다. 그것을 느낀 루피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내가 저번에 저지른 실수(?)… 아니, 만행(?)을 잊지 못한 건가? '남자가 쪼잔하게 그깟 일 가지고 삐져서는….' 나직하게 투덜거린 루피아는 입을 열었다. "삐졌군…." "뭐?" "……아무 것도 아니에요."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에드라스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대단하다는 듯이 쳐다볼 것 없었다는 뜻으로 루피아를 쳐다보던 그는 본능적으로 한 가지 사실을 잡아낼 수 있었다. '군주께서는….' 그와 동시에 그의 입가에는 뭔가를 꾸미는 사람의 미소가 떠올랐다. 방금 그가 하려던 말은 잘못된 게 아니었다. 오히려 필요한 말이었다. 느닷없이 연락도 없던 군주가 오랜만에 찾아온 게 너무나 반가워서 스쳐갔던 사실이지만, 지금 그에게는 간과(看過)할 수 없는, 그가 찾아왔을 때 저 여자를 안고 있었다는 점이다. 지금, 그가 품고 있는 이 생각이, 계획이, 훗날 어떠한 영향을 미칠 지는 모른다. 아무리 확고부동한 미래라 하더라도 변수는 얼마든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에드라스는 생각대로 하리라 마음먹었다. '이 늙은이의 마지막 심술입니다, 군주님. …이런 것도 제대로 피하지 못하신다면, 그건, 제가 당신을 잘못 키웠다는 것의 반증이 되겠지요.' 마녀 에드라스, 그의 나이는 8천 살에 가까웠다. * * * * * * * * * * * * * * * "루피아 님, 혹시 관심이 있으시다면 제 정원을 구경하시러 가시는 건 어떠실런지요. 특별히 문제될 건 없으니 군주께서도 허락해 주실 거고, 마녀의 정원에는 희귀한 게 많답니다." "희귀한 거요?" 호기심에 루피아의 눈이 반짝 빛났다(잊지 않았으리라 믿는다, 그녀는 마법사다!). 에드라스는 평소보다 더 온화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예. 심심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마침 만드라고라 꽃이 활짝 피었을 때군요. 혹시 사일런스 마법을 쓸 줄 아십니까?" "네? 그야… 그건 3클래스 마법이잖아요. 할 줄 알아요." "잘 되었군요. 정원에 있는데, 사일런스 마법을 두 번 걸고 하나 뽑아 보세요. 만드라고라의 비명소리는 그냥 들으면 저희 마족에게도 영향을 줄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하거든요. 알고… 계시나요?" '다 알고 있어요'라고 써 놓은 듯한 루피아의 얼굴에 머쓱해하며 설명을 멈춘 에드라스는 피식 웃어 보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또한, '빨리 가고 싶어 죽겠어요'라고 쓰인 듯 했기 때문이다. 그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다녀 오세요. 이리로 나가 집 뒤로 가십시오. 실컷 구경하고 오셔도 상관없습니다. …그렇죠, 군주님? 별 문제될 것은 없지 않습니까." 뭔가 께름칙한 듯 루피아를 쳐다 보던 이디스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죽겠다는 듯이 뒤도 안 돌아보고 두다다 달려 나가는 그녀를 보고는 피식 웃어버린 그는 에드라스를 올려다 보았다. 옛날과 조금도 다름없이 온화한 웃음을 띄운 채 자신을 따듯하게 바라보고 있는 그를 보며 이디스는 조금, 아주 조금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그가 갑작스럽게 계획에도 없이 이 곳에 와 버린 건, 그도 특별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왠지 모를 불쾌감과-(그 까닭에 로이드윈과 루피아가 일조하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왠지 모르게 그에게 말하고 싶은 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일로 인해 하루나 이틀 정도 일정이 늦어 지기야 하겠지만 그게 어디 대수이겠는가. "일부러 그녀를 쫓아버린 이유가 뭐지, 에드라스?" 진한 미소가 에드라스의 얼굴에 떠올랐다. "군주께서 더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설마 모르고 계시다라고는 말씀하지 마시길, 알고 계실 테니까요." 다시 그의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디스가 아는 한, 에드라스는 언제나 웃는 얼굴이었다. 저 얼굴이 가면처럼 느껴질 때도 있을 정도로, 언제나 웃는 얼굴이었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상냥하고 온화한 얼굴로 마주했다. 자신을 향해는 따듯한, 온정어린 눈길을 항상 보냈다. 그런 그가 얼굴에서 미소를 지운 것은 20년 전, 그를 떠나던 날 딱 한 번 뿐이었다. 「그들은 행복해 했습니다. 이디스님, 바라던 일을 이루셔서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그 때, 그 질문의 답은- 아직도 찾아내지 못하셨습니까?" "……." 이디스는 입을 열지 않았다. 뭔가 부족한 것- 허전한 것. 이전, 훨씬 옛날부터 느끼고 있던 허전함, 가슴 한 구석이 빈 것 같은, 충족감이 없었다. 일시적으로 충족감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마치 자신이 아닌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미미한 혼란감을 본 에드라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제 생각이 맞는 것 같군요…." 비록 이 일로 인해 훗날 당신이 저를 원망하는 일이 생긴다고 하여도, 지금 이대로 놓아 두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당신은 죽어서도 행복해지지 못할 것이기에…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하렵니다. "할 말이 있으신 거로군요. 해 보십시오, 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오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래." 분명,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충족감을 느끼지 못하니, 그건 행복하다고 할 수 없다. 행복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몰라도- 그는, 자신의 현재 상황에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뭔가가 허전하고 비어 있는데, 그게 어떤 것인지 모르는 답답함, 채우고 싶다는 갈망, 목마름. 그 모든 것이 뒤엉켜 속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허전하다. 무엇인가가 빠졌어. 그 공백은 느껴 지는데, 어떤 것에도 채워지지 않는다." "예전에도 그러셨죠. 그래서 더더욱 필사적이 되신 것이 아니십니까? 마왕이 되는 것에, 선대 마왕을 이기시는 것에. 그러나 결국 소용없는 일이 되어 버렸지요. 하지만- 지금은, 변화가 생겼기에 저를 찾은 것이시겠죠." 이디스는 침묵했다. 에드라스는 참을성 있게 그가 먼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서둘러서는 안 되는 법이다. 그래서는 될 것도 안 된다. 그는 차를 타 가지고 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일시적으로, 충족감을 느낄 때가… 있긴 하다." "네… 그래서요?" 에드라스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의 말을 받아 주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일시적일 뿐, 더욱 허전하기만 하다." "더욱?" "…나를 흐트러뜨려. 나 자신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 말을 한 뒤 이디스는 시선을 돌려 딴 곳을 응시했다. 에드라스는 만족감에 찬 흐뭇한 웃음을 속으로 흘리며 이디스에게 말했다. "무엇을 원하시는 지, 알고 계십니까?" 이디스는 다시 에드라스를 쳐다 보았다. 원하는 것? "요지는 하나이지 않습니까? 충족되고 싶다는 것. 설령 그게 어떠한 형태의 것이더라도 말입니다. 욕망이든, 소유욕이든 말입니다." "…소유욕?" 그는 중얼거렸다. 드물게도,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이었다. 웃음이 흘러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목 뒤로 삼키고(참 힘든 작업이었다), 에드라스는 말했다. "예. 군주님의 생각은 어떠하신지?" "…가지고 싶다, 라는 건가…." 에드라스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렇군. 나는, 그 여자를 '가지고' 싶어 한 거였나." "새삼스럽게 무슨 말씀이신지. 군주께서는 이미 그 분의 주인이지 않습니까? 공녀들은 마족에게 바쳐진 제물, 어느 마족의 것이 될 지는 모르나 가지려 한다면 얼마든지 가질 수 있으실 겝니다. 이 미천한 마녀는 그렇게 생각이 되는 군요. 공녀에게 선택권이 없다면, 군주께서는 가지면 되십니다." 에드라스는 '선택권'에, 그리고 '가지면'에 강조를 주었다. 물론 그의 말에는 한치의 거짓도 없었다. 공녀는 분명 '바쳐진 제물'임이 분명하고, 그 소유권은 마족, 그 중에서도 굳이 꼽으라면 마왕인 그에게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 소유권은 몸에 한정된다는 게 문제였다. 마음이나 정신같은 손으로 잡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은 가지고 싶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그것을 말하지 않은 것 뿐이었다.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죄가 된다면, 그는 그 죗값을 치를 것이다. 이렇게 부추기는 것 또한 죄가 될 수 있다. 이 대화를 끝낸 후 이디스는 루피아에게 강한 소유권을 행사할 것이며, 그 행동은 그녀의 마음을 이디스에게서 더욱 멀어지게 하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이대로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시게 놔둘 줄 아십니까? 절대로, 이대로 그 분을 놓쳐버리게 만들지는 않겠습니다.' "그렇군." '소유욕'이라는 거였나? 단지 '흐트러뜨린다'라는 아주 제한된 표현을 썼지만 과연 그 말에 충족되는 느낌인지는 불확실했다. 그를, 에드라스는 아주 흐뭇하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 * * * * * * * * * * * * * "새삼스럽게 무슨 말씀이신지. 군주께서는 이미 그 분의 주인이지 않습니까? 공녀들은 마족에게 바쳐진 제물, 어느 마족의 것이 될 지는 모르나 가지려 한다면 얼마든지 가질 수 있으실 겝니다. 이 미천한 마녀는 그렇게 생각이 되는 군요. 공녀에게 선택권이 없다면, 군주께서는 가지면 되십니다." 열린 문을 보고 노크를 해야 하나 잠시 머뭇거리던 루피아의 몸이 움찔했다. 문 손잡이에서 손을 내린 그녀는 길게 이어지는 에드라스의 말에 하얗게 얼굴이 질렸다. 친절하다 생각했더니,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왜 이렇게 뻔하게 이어지는 거야? 둘의 대화를 엿듣고 충격받는 여주인공, 뭐 이렇게 흘러가는 건 너무 뻔하잖아? 조금 더 획기적인 연출 방법은 없는 거냐고… 쳇.' "그렇군." 힘이 빠진 루피아는 다시 발걸음을 되돌리기로 했다. 두 마족 다, 대화에 열중하느라 평소 같으면 금방 그녀가 온 것을 알아차렸을 텐데도 그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모르는 것 같았다. 발걸음을 돌린 지 채 얼마 되지도 않아, 뒤에서 달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괜히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린 그녀는, 놀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에드라스를 볼 수 있었다. 괜스레 어색하게 하하 웃음을 흘린 뒤 씨익- 웃어보인 그녀는, …냅다 뛰어가 버리고 말았다. 어디로 가는 건지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말이다. 결국 두다다 뛰어 아까까지 있었던 후원으로 와 버리고 만 그녀는, 멍청하게 그 자리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자신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손은 어느 새 풀잎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뭐라고 말하느냐구? '다 들어서 죄송해요'하고 사과를 해, 아니면 '그래, 나 제물이다! 보태줄 거 있냐?'고 윽박을 질러?" "차라리 화를 내시는 게 저에게는 편할 겁니다." "히이익!" 루피아는 급히 숨을 들이키며 고개를 들었다. 바로 앞에 차분한 숨을 내쉬고 있는 에드라스가 미안함 가득한 얼굴로 서 있었다. '정말! 여기에서는 마음 놓고 혼자 있지를 못 하겠다니까? 언제 어디서 불쑥불쑥 나타날 지 모르니… 에구.'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어색하게 웃음을 띄워 보였다. 에드라스는 미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후우- 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어 보였다. 방금 자신이 저지른 일도 결국에는 그녀를 괴롭히게 되는 것이 될 텐데(물론 그 못지않게 이디스도 괴로울 수 있겠지만), 이렇게 해서 또 상처를 주게 되는 건 못할 짓이라 여겨졌다. 에드라스는, 괜히 풀잎을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맞추려 들지 않는 루피아를 보며 다시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게 제일 중요한 건 마왕 이디스이지만, 그는 이 인간 여자가 싫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에 들고, 좋아하는 편이었다. 무엇보다, '변화'를 가져 온 장본인이기에. "……이 것을, 받아 주시겠습니까?" 그는 그녀에게, 기회를 만드는 데 도움을 주기로 결심했다. 이건, 어쩌면 그녀가 군주의 손에서 벗어나는 데에 크게 일조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옭아 맸지만, 이 정도 혜택도 없다면 그는 그녀에게 너무한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내민 손에는, 엄지 손톱만한 크기의 루비가 달려 있는 목걸이가 올려 놓아져 있었다. "…사과의 뜻입니다. 부디 받아 주시기를… 의도한 바가 아니었지만, 결국 그런 심한 말을 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진심은 아니었습니다." 루피아는 피식 웃으며 그가 내미는 목걸이를 받아 들었다. 잘 살펴 보니, 그건 단순한 루비가 아니었다. 목걸이 안에, 아주 정교하게- 아니, 이건 세공이 아니다. 자연석? 신기하게도- 루비 안에는 아주 작은, 정말 작은 장미가 하나, 둘, 셋… 셋이나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 목걸이의 용도는, 스스로 알아 내셔야 할 것입니다. 허나, 저는 이 것으로 한 시름 덜겠군요…."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루피아는 목걸이를 주머니에 넣었다. 에드라스는, 어느 새 다시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까는 이상한 꿈을 꾸고, 이번에는 마족에게(마녀) 사과를 받았다. 참- 이상한 날. 그 꿈은 무엇이었을까? 다시 꾸게 될까? 잠시 생각하던 그녀는 피식 웃었다. '…모르겠다, 그냥 개꿈이겠지.' 그 날, 다시 본래 목적지였던 '에크 성'에 도착한 루피아는 에리나와 세키라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녀는 마녀가 아니었어." …라고. ======================================== 늦습니다, 늦고요..[;;;] 아아, 에드라스는 성격이 약간 변해버린 듯-... 싶네요.[아닌가?] 멜은 donghee425@hanmail.net으로 보내 주시구요- 즐독하세요![오늘은 유난히 꼬랑지가 짧군요;] 제 목: [수정판] 공녀(貢女) : 제16화 [파워 업! 미움수치 up!](1) #. 제16화 [파워 업! 미움 수치 UP!! ] * * * * * * * * * * * * * * *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 너무나, 너무나 영광입니다. 미천한 저로서는 감히 고개를 들 수가 없는 바, 부디 고개를 들 수 있는 은혜를 내려 주시길 간절히 비옵나이다." "……." 루피아와 에리나, 세키라는 망연한 표정을 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여자를 바라 보았다. 황급히 정신을 차린 세키라가 얼른 그녀의 허리를 세우게 했고, 그제야 그녀는 여자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그녀는 풍성한 적갈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주홍빛으로 보이는 연갈색 눈동자의 소유자였다. 아름답다기보다는 예쁘다, 는 표현이 어울릴 법한 얼굴의 그녀는 대략 22살에서 25살 사이로 보였다. 즉, 한창 시즌을 맞고 있을 시기라는 것이다. 25살이라면 조금 아슬아슬하지만, 어쨌거나 아직 '노처녀' 딱지가 붙을 시기는 아닌 것이다(노처녀! 처녀들이 피하고 싶어하는 것의 베스트 1위의 영광스런 그 단어가 아니던가?). 소문만큼 잔인한 것도 없다. 그리고 소문만큼 부풀려 지기 좋은 것도 없으며, 남자들 술안주에 씹기 좋은 것도 소문만큼 나은 게 없다. 귀부인들 사이에 오가는 '우아한 대화'에 주로 등장하는 것들도 사교계의 온갖 소문이다. '노처녀'라고 불리는 레이디는, 금세 '결함이 있다'느니 하는 등의 소문에 휘말려 금세 사교계의 뒷전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귀족 신사들의 결혼 적령기는 그보다 더 늦은 24세~27세 정도다. 교황과 6왕국의 왕, 그리고 황제가 정한 <대륙 공통의 법>에 의해 귀족의 남자들은 모두 24세까지는 기사 수업을 받아야 했고(이건 의무다), 가족을 부양할 경제력을 갖춰야 했기 때문이다. 유산에 의존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 엄청난 자산가가 아니라면 스스로 경제력을 지녀야만 <레이디의 어머니>들에게 좋은 <신랑감>으로 찍히게 되는 것이다(일명 '대어'라고도 한다. '대어'로 찍힌 신사는, 그 해 시즌에 예비 신부를 딸로 둔 어머니들의 집단 공격을 받는다고 한다). 어쨌거나- 루피아는 들려진 얼굴에서 느껴지는 확연한 적대감에 등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마계로 온 여자들 중 유·일·하게 제·정·신을 가진 루피아 엘 세느안트 공녀님, 만나뵙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다니엘라 드 카루크라고 하옵니다." 아아, 저런 적개감 어린 어투라니. 작게 한숨을 내쉰 루피아는 어쩔 수 없이 '재수없는 악역' 역할을 계속 맡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 할 수 없지. 내 일이 언제 잘 풀리는 것 봤냐고. 루피아는 한쪽 입꼬리를 슬쩍 들어 올리면서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안다니 다행이군요. -뭐라도 성과는 있으셨는지?" 다니엘라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다행히도 그녀의 말투가 자존심을 쿡쿡 찔렀던 모양이다. 그녀는 이 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네! 클리오라의 신력(神力)을 다루는 법을 배웠습니다. 다행히, 공격 계통으로는 거의 모든 것을 마스터했고, 치료 계열과 보조 마법 계열은 아직 많은 것이 남았지만, 서열대회에 나가서 순식간에 지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루피아는 눈을 깜빡였다. 벌써? 벌써 그렇게나 성과를 올렸단 말인가? 그녀의 놀란 기색을 읽었는지 다니엘라는 약간 우쭐한 기분이 들었는지 고무된 표정으로 그녀들의 의문을 풀어 주었다. "신력은, 믿음을 기반으로 합니다. 하지만 저희는, 정확히 말해 저는 그런 것과는 관계가 없기에 오히려 더 컨트롤하기가 쉬웠습니다." 다행이야. 안도감이 몰려 왔다. 의도적으로 오만한 표정을 지어 딱딱하게 굳히고 있던 루피아의 안면 근육이 저절로 풀려나며, 미소가 피어났다. 하지만 그 미소는 다니엘라가 눈치채기 전에 사라졌고, 루피아는 휙, 하고 몸을 돌리며 말했다. "그럼, 나중에 다시 뵙도록 하죠. 지금은 밤이 너무 늦었으니까요." 루피아는 에크의 성에 도착하자 마자 에리나와 세키라를 만났고, 그 뒤로 바로 다니엘라가 찾아 들었다. 아유니도 같이 있었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일이 차근히 잘 진행되고 있다면, 성과가 좋다면 그것보다 더한 희소식은 없으리라. 루피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만족감 어린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에리나는 어떻게 되려나? 조금 있다 계약을 이행하겠다고 말했다는 건 들었는데… 뭘 어떡하려는 걸까?' …알 리가 없지 않은가. 조금도 짐작가는 사항이 없었다. 복도의 벽에 기대어, 루피아는 낮은 한숨을 쉬었다. 남자 마녀를 만나고, 사과를 받고, 목걸이를 받고, 레이디 다니엘라의 적개심을 한몸에 받고… 이제부터 일어나게 될 일이 너무도 뻔하게 보여 웃음마저 나왔다. 레이디 다니엘라, 그나마 얌전해 보이는 그녀가 그 정도라니, 성격 있는(?) 사람이라면 대체 반응이 어떨까? 다행히도, 레이디 다니엘라는 직접적으로 해꼬지를 한다던가 하는 타입은 아닌 것 같았다.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조금은 무책임한 생각과 함께 루피아는 벽에 기대었던 몸을 일으켰다. 아니, 적어도 그래야겠다고 생각했다. "…어?" 눈앞이 핑- 하고 돌았다. 아찔한 현기증과 함께 눈앞이 깜깜해졌다. 싸아한 느낌이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타고 내려간다. 루피아는 눈을 꼭 감았다 떴다. 까맣기만 하던 시야가 점점 하얗게 밝혀지고 있었다. "…내가 요새 좀, 피곤했나…?" 하긴,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고, 잠을 제대로 잔 적도 거의 없으니 멀쩡하기를 바란다면 그건 기적을 바라는 꼴이 되리라. 답답한 속에 머리를 쓸어올린 루피아는, 다시 다리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켰다. "쩝! 내가 현기증을 느끼다니, 오빠들이 알면 일주일은 놀렸을 거야." * * * * * * * * * * * * * * * 알벤은 크게 하품을 했다. 교대 시간까지는 이제 겨우 2시간 가량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린 그는, 한 달 전 결혼한 아내가 기다리고 있을 집으로 돌아가는 상상을 하며 비죽이 웃었다. 그의 결혼은 가히 기적이라 할 만한 쾌거였다. 영지에서 가장 예쁘다는 제분소 켈디 노인의 손녀딸 케리가 자신의 청혼을 받아 들였을 땐, 세상을 다 가진 듯이 기뻤다. 성문 문지기인 알벤은 그다지 잘생기지 않은 외모 덕에(아니, 약간은 못 생긴) 영지 처녀들에게 그다지 인기기 없었고, 우연하게 인연을 맺은 케리에게 청혼을 하면서도 '안 받아 주겠지'하는 확신 아닌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케리는 기껍게 그의 청혼을 받아 들였고, 그는 지금 한창 깨소금맛 나는 신혼을 한창 즐기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 어찌 교대 시간이 기다려지지 않겠는가. 그리고, 2시간 가량이라도 얼마나 지겹게 느껴지겠는가. 게다가 지금은 늦은 밤이었다. 어차피 이 시골의 남작령까지는 거의 오지 않기 때문에 몇몇 다녀가는 여행자 외에는 오고 가는 자가 없었다. 그래서 성문지기도 고작 한 명 뿐인 것이다. 하지만 '성문지기'라는 직업에서 잘려 케리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은 알벤은 1분이라도 시간을 채우지 않고 집에 가 버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다시 한 번 지루하고 느리게 흘러 가는 시간 속에서 늘어져라 하품을 하던 알벤은, 멀리서 스치듯 보인 먼지구름에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시골에 왠? 서, 설마 몬스터?' 퍼뜩 정신을 차린 알벤은 다시 한 번 멀리 내다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 있는 시력 없는 시력 모두 모아모아 눈길을 준 그 곳에서는, 분명 먼지구름이 한껏 일어나고 있었다. 몬스터인가? 하고 바짝 긴장하고 있던 알벤의 눈에, 이상한 것들이 비췄다. "…엉? 사람?" 그렇다.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흐릿하게지만, 무서운 속도로 말을 몰며 말 위에 찰싹 달라붙어 있듯 해 있는 네 필의 말을 그는 틀림없이 볼 수 있었다. 그는 안도감과 함께, 저런 속도로 급히 말을 달리는 인물들의 면상때기가 아주 궁금해졌다. 잠시 후(과연 무서운 곳도였는지, 그다지 시간을 걸리지 않았다), 알벤은 그 '이상한' 사람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이 곳이 '비에른' 남작령이오?" "그렇습니다만…." 그의 바로 앞에 말을 멈춘 그는, 제법 쉬었지만 낮고 부드러운 음성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목소리만 듣고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는 법. 알벤은 찬찬히 그들을 살폈다. 하나같이 꾀죄죄한 모습에,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모양이었다. 말은 네 필이었지만 사람은 다섯, 그 중 하나는 소년인 것인지 키가 작았다. 또 그들은 빛바랜 갈빛 로브를 두르고 있었다. 물론 그 로브도 아주 더러웠다. 머리도 헝클어진 지 오래고, 아주 기름 범벅이 되어 떡이 져 있었다. 거기에 먼지를 먹어 원래 색이 뭔지조차 알아내기 힘들다. 하나 하나 형색을 뜯어보고 있는 알벤 앞에서, 소년이라 생각되었던 인물이 입을 열었다. "저희는 수상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렇게 수상하다는 듯이 살펴 보지 않으셔도 돼요. 여기, 통행증." 수상하다는 기색을 지우지 않은 채, 알벤은 소년이 내미는 종이조각을 받아 들었다. 분명, 신분을 확인하는 도장이 찍혀 있었다. 신분이 확실한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왠지 미심쩍었으나 알벤은 그들을 통과시켜 주기로 했다. 법이 그러하니 어쩌겠는가. "고맙습니다. 그럼, 계속 수고하세요. 당신께 오르가프의 축복이 함께 하길." "네… 네." 네 필의 말을 끌고, 다섯 명의 수상한 사람들은 천천히 영지 안으로 걸음을 옮겨 들어갔다. 뒤에 남은 알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축복? …신관이었나…?" 마법사였다. 드디어 왔다! 에드윈드는 목적을 향해 뭔가 한 발 내딛었다는 느낌에 뿌듯하게 벅차 오르는 가슴을 느꼈다. 4일 동안 그야말로 쉴 새 없이 말을 내달려 도착한 곳이 바로 이곳 '비에른'이었다(물론 그 중간에 마법사 길드를 이용한 텔레포트 등이 쓰여졌다). 제국의 끝자락에 자리잡은 작은 시골 남작령. 제국의 위로는 '숲과 엘프의 나라'라고 불리우는 에크라가 있고 옆은 '드래곤의 산맥'이 쭉 펼쳐져 있었다. 드래곤의 주요 서식지인 그 곳은, 대륙의 금지(禁地) 중 하나로, 간단히 말해 '안 가는 게 사는 길'이다. 포도주가 유명한 에크라는, 숲이 국토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고, 큰 몇몇 개의 숲에는 엘프들의 마을이 있다. 엘프와의 교류도 활발한 유일한 나라라서 엘프들의 활을 주무기로 쓰는 궁수부대가 따로 있다. 부드러운, 노래하는 듯한 언어가 특징적인데, 그만큼 문자가 복잡해서 문맹률은 대륙 최고를 자랑한다. 네이코와 함께 제국의 위에 나란히 위치한 나라로, 네이코와는 역사적으로 깊게 얽혀 있기도 하다. 옛날 네이코가 에크라를 지배한 적이 있었는데, 엘프들의 도움으로 겨우 멸망을 모면한 에크라는 그 일 이후로 더더욱 엘프들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이제부터 헤어져 가야 할 곳은, 이 곳과, 이 곳입니다." 에드윈드는 정교하게 그려 진 지도의 한 부분을 가르키며 말했다. 이 지도 또한 아버지인 에스베크 공작의 연구실에서 가지고 토낀 것들 중 하나로, 군사용이라 대단히 상세하다. 잘못 유출이 되기라도 하면 큰일인 것이다. 하지만 그 중요한 지도를 에드윈드는 얼마나 아무렇게나 다루었는지 가장자리가 벌써 닳아 있었다(그만큼 열심히 지도를 봤다는 얘기도 되지만). "…어디라고?" "여기요, 여기. 그리고 여기." 황당하다는 듯 물어 오는 바르에든을 위해 에드윈드는 다시 확실하게 지도의 한 부분을 가르켜 주었다. 손가락으로 짚은 뒤, 그는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일명 '드래곤의 산맥' 혹은 '죽음의 산맥'이라 불리우는 곳. 원래 이름은 '파이드니롤 산맥'이었지만 그 이름은 이미 잊혀진 지 오래죠. 이 곳에서 사는 실버 드래곤을 찾아가야 해요. 실버 드래곤은 산맥에서 가장 높은 산의 꼭대기에 산다고 하죠. 그에게서 지도 조각을 얻어야 합니다." "…드… 래곤에… 게?" 기가 막히다는 듯이 트로에가 중얼거렸다. 이런 터무니없는! "해야 해요." "말도 안 돼! 드래곤에게 어떻게 찾아간다는 말이야? 에드, 이건 좀 심해!" 트로에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소리쳤다. '드래곤'이라는 말에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자, 에드윈드는 황급히 그의 입을 막으면서 낮게 말했다. "그걸 그렇게 크게 말하면 어떡합니까! 조용히 하세요, 조용히!" "하, 하지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누님들을 구할 수 있다고요. 그렇게 하라고 적힌 걸 난들 어떡합니까." 트로에의 입이 꾹 다물려 졌다. 심각하게 얼굴을 굳히고 있던 이데카른이 말문을 열었다. "그게 확실한가?" "제가 이런 거짓말 해서 뭐에 씁니까? 정말이니 하는 말이지요." "……그래. 그럼 가야 겠군." "하, 하지만 형…!" 트로에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반문하려 입을 열자, 카에리드가 트로에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저었다. 바르에든 역시 심각한 표정이었다. 카에리드는 후우, 하고 한숨을 낮게 내쉬며 말했다. "어쩔 수 없다. 해야지. 죽기보다 더하겠니?" "그럼, 거기에 제가 합세해도 별 문제는 없겠군요." "……!!" 테이블에 둘러 앉아 얘기를 나누던 다섯 사람의 눈이 한꺼번에 뒤로 돌아갔다. 이제까지의 얘기를 몽땅 듣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비록 가장 중요한 단어는 나오지 않았지만. "아아, 그렇게 놀라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공작 각하들께서 보낸 용병이니까요. 드래곤을 만나러 가는데 여러분의 전력만으로는 상당히 부족한 감이 있죠." 등에 맨 커다란 투 핸드 소드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길게 기른 흑청발 머리카락을 높이 올려 묶고 두건을 두른 그는, 다섯 사람을 보며 씨익 웃고는 가까이 다가 왔다. "그걸 어떻게 믿지?" 바르에든이 날카롭게 물었다. 그 사람은 눈썹을 치켜떴다. "…믿기 싫으면 믿지 마라. 네가 믿지 않는다고 내가 무슨 영향을 받을 것 같나? 내가 볼 일이 있는 건 엘 세느안트의 성을 가진 세 사람 뿐이야." 그리고는 세 사람을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정말… 아버지가?" 너무나 비교되는 반응에 머쓱해 진 카에리드가 중얼거리자 그 사람은 생글생글 웃어 보이며 말했다. "네. 몇 년 전의 약속을 지킬 때이니 왔습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고, 제가 방을 잡아 두었으니 그리로 들어가죠. 제 이름은 '카엘'입니다." 카엘은 카에리드와 이데카른, 트로에에게 각각 열쇠 하나씩을 내밀었다. 당연히 두 사람 몫의 방은 없었고, 손을 내미려고 했다 급히 손을 내린 에드윈드는 카엘에게 잡혀 2층으로 끌려(?) 가는 세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너무해……." "수상하군." 뻘쭘하게 서 있는 두 사람을 놔 두고 갑자기 나타난 괴한(?)에게 잡혀 2층으로 올라가게 된 세 사람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넓은 특실에 들어 와 있었다. "이, 이봐요! 무작정 끌고 오면 어떡합니까?" 당황스러운 듯한 목소리로 카에리드가 말했다. 눈 깜짝 할 새에 세 명은 테이블에 앉아 있었고, 앞에는 모락모락 김이 피어나는 홍차가 한 잔씩 놓아져 있었다. 이데카른은 형의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눈만 멍하니 깜빡이고 있었다. "…내, 내가…… 이런." "혀, 형님. 이게 대체…." '카엘'이라고 이름을 밝힌 그 사람은 자신들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얼굴을 뜯어(?)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테이블에 손으로 턱까지 받히고 신난 얼굴로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많이 변했네." "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저와 당신들은, 예전에 안면이 있었습니다… 비록 그 모습은 달랐지만 말입니다. 그게 어떤 형태였는지는 스스로 맞춰 보십시오." "그게 무슨…." 카엘은 이데카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방문으로 빠져 나갔다. 방 안에 남게 된 세 형제는, 너무나도 빠르게 전개된 상황에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 만났었다고?" "정말 못 알아 보는군. 당연한 거지만… 그래도 조금 섭섭한 걸. …알아차릴 수나 있을까." 카엘은 피식 웃었다. 전체적인 모습은 똑같지만, 무기나 연령대, 혹은 종족이 틀리니 당연한 결과였다. 자신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던 세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자 그는 다시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멍하니 넋을 놓고 있을 때 하나 하나 뜯어 본 얼굴은, 그가 기억하고 있는 그들의 얼굴과는 많이 틀렸다. 하지만 옛 모습을 조금씩 찾아낼 수 있었다. 카에리드의 차분한 눈이라던가, 이데카른의 냉정한 분위기, 트로에의 막내티 나는 얼굴. 비록 인위적이었지만 그 역시 많이 변한 모습이었다. 그에게는 순간이지만, 그들에게는 긴 시간이었음을 이제야 실감할 수 있었다. ====================================================== 그제 졸업을 하고, 오늘 배치고사를 쳤습니다. 요새는 귀차니즘이 발동이 걸려서, 늦고 늦고 늦고 또 늦습니다.;; 죄송할 따름이지요.; 카엘이 누군지 아시는 분은 다 아실 겝니다. 쿨럭! 아직 루피아가 변을 당하지 않았지만.. 아마 곧 이디스와 다니엘라(얘 성격 엄청 변했습니다;)에게 집중공격을 받을 것 같습니다;(←예고에요, 나름대로;;) 메일은 donghee425@hanmail.net으로 보내 주세요. 리플 꼭 달아 주시구요;; 즐독하세요. 제 목: [수정판] 공녀(貢女) : 제16화 [파워 업! 미움수치 up!](2) #. 제16화 [파워 업! 미움 수치 UP!! ] * * * * * * * * * * * * * * * "여기가 머무르실 방입니다.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군요.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제가 직접 치우고 꾸민 방입니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주르르 흘렀다. 척 봐도 가시가 쫙쫙 돋은 어투의 다니엘라는 시종일관 루피아에게 찌리릿 거리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루피아는 머리가 어찔해짐을 느끼며 아무도 모르게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이거, 생각보다 어려워 지겠는 걸. 방은 아주 깨끗했다. 적당히 넓고, 적당히 꾸며져 있는 게 마음에 들었다. 물론 저 아가씨 입장에서는 소소한 거겠지만 말야. 그렇게 생각하며 루피아는 피식 웃었다. '이제부터 어떤 방법으로 나를 못살게 할까. 이런 식으로 기대하는 나도 이상한 건가?' 루피아는 웃음을 속으로 삭히며 다니엘라를 돌아보며 물었다. "에리나의 방은 어디죠?" 아, 이런 말투가 익숙해질 것 같아. 안 되는데. "그건 왜…." "알 것 없습니다. 어딥니까." 다니엘라의 눈초리가 한껏 날카로워졌다. 저런, 저런 고압적인 태도라니! 마치 아랫것을 대하는 듯한 루피아의 말에 다니엘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루피아 엘 세느안트' 공녀는 맨 처음 공녀들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한 치의 흔들림없는 태도로 마계로 건너온 것부터 시작해서 따듯하게 우는 자신들을 달래어 주기도 했으니까 말이다(게다가 '예쁘다'는 말로 부족할 정도로 아주 아름다웠다!). 마왕의 곁에 유일하게 남게 되었으면서도 그녀의 얼굴에서는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점이 공녀들에게는 의지가 되었던 것이다. 어느 상황에서도 침착한 그 모습이. 하지만 그 다음 만남에서 그녀들의 환상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환멸어린 눈길, 무시하는 말투, 표정. 그녀들이 가지고 있던 '천사'의 이미지와는 정반대의 모습이 되어 버리자 뒷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과 배신감을 느꼈다. "저도 잘 모른답니다. 제가 세세한 일까지 자세히 알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신지, 제게 자세한 것은 가르쳐 주시지 않아요. 그것보다- 루피아 님, 저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시겠어요?" * * * * * * * * * * * * * * * "이건……." 에리나는 떨리는 한숨을 내쉬며 눈을 깜박였다. 손끝이 차가워져 있었다. 마른 입술을 축이며 그녀는 침을 삼켰다. "마검(魔劍)이지. 약한 인간인 널 강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은 단 둘이다. 너를 반(半)마족화 시키거나 강한 무기를 주는 것. 하지만 클리오라의 축복을 받은 인간인 너에게 직접적으로 손을 대는 일은 허락되지 않는다. 따라서 강한 무기를 너에게 쥐어주는 수밖에 없지." "아…." 유리아덴은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마검을 집어들고 에리나에게 내밀었다. "네게 주었던 세이버(Saber)를 개조해서 만들었다. 잡아." 우윳빛 검신에 흰색의 검집, 달라진 것이라고는 검 전제에 보랏빛이 더해졌다는 것 뿐이었다. 예전과 그다지 달라진 게 눈에 띄지도 않았다. 시린 푸른빛, 신비로운 보랏빛. 눈부신 우윳빛… 매혹적인, 지나치게 매혹적인 검. 뭔가에 홀린 듯이 에리나는 손을 내밀었다. 망울거리는 희미한 빛이 가까이 다가오는 에리나의 흰 손가락을 감아 왔다. 움찔, 하던 에리나는 다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것만 잡으면… 잡으면. 손잡이의 늘씬한 촉감이 손바닥에서 느껴졌다. 에리나는 입술을 꽈악 깨물고, 손에 힘을 주었다. 그와 동시에 뭔가가 손바닥을 밀어내며 검 안에서 터져 나왔다. '뭐야, 이건? 윽… 손바닥을 뚫을 것 같아! 살이 타는 것 같아!' 본능적으로 손을 놓아 버리려던 에리나는 퍼뜩 깨달았다. 쉽게는 안 된다는 것이다. 힘을 얻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대가가 무엇이 될 지는 몰라도, 그녀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놓아서는 안 돼! 절대 안 돼! "꺄아아아아아아!!" 아뜩한 느낌과 함께, 에리나는 더욱더 손에 힘을 주었다. 손이, 팔 전체가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지독한 아픔, 고통.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이제는 비명조차 지를 수 없다. 비명이 목에서 콱 막혀 나오지 않았다. 뜨거운, 화르륵거리는 작은 소리가 귀를 점령했다. 숨을 쉴 수가 없다. "허리를 똑바로 펴고, 눈을 떠라. 손에 힘을 주고, 두 다리로 똑바로 일어서." "……!" "이대로 지고 싶은가?" 진다? 진다고? 이 에리나 칼르니르가? 칼르니르가? 에리나는 이를 앙다물었다. 겨우, 나 자신을 내던지고 잡은 기회다. 이대로 놓쳐 버리기는 싫었다.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눌러 참고, 에리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너무 아파 이미 감각이 사라져 버린 팔에 억지로 힘을 주었다. 찌릿거리는 느낌과 함께 사라져가던 고통이 되살아났다. 입을 너무 세게 앙다물었는지 비릿한 핏물이 입안에서 느껴졌다. 이가 상한 모양이었다. 숨을 쉴 수 없던 입으로 공기가 한 가득 들이켜 보냈다. 억지로 허리를 펴고,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떨리는 입술을 다시 깨물자, 비릿한 맛이 혀를 자극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질끈 감고 있던 눈을 스르륵 떴다. 땀인가? 얼굴을 덮은 끈적한 액체에 눈이 따가웠지만 결코 다시 감지 않았다. 마치 한겹의 물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은 듯 했다. 촛점이 잡히지 않는 시야에는 초연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유리아덴의 모습이 비춰 들어왔다. 피잉- '……어?' 가까스로 힘을 주고 있던 다리에서 힘이 빠져 나갔다. 털썩, 하고 주저앉았는데도 감각이 없다. 어리둥절함에 눈을 동그랗게 뜬 에리나의 어깨에 유리아덴의 손이 툭 하고 얹어졌다. "어?" "……그만 자라." 이게 아닌데… 조금 더, 뭔가 있었으면 했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허탈함 비슷한 게 느껴지다니 참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에리나는 잠이 들었다. 언젠가-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이 일을 후회할 지 모른다. 섣부른 판단으로, 성급하게 '계약'으로 '힘'을 얻은 것에 대해- 비록 대가를 치뤘다 하더라도 이 힘은 자신의 것이 아니고, 그녀는 자신 힘으로 이것을 얻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게 내 최선이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일을 한 거야. "알아 둬라. 대가는, 네 '자유'다." * * * * * * * * * * * * * * * 세키라는 깊게 숨을 내쉬며 책을 덮었다. 마계에 온지 정확히 20일 째다. 다행히도 고대어와 상당히 비슷한 부분이 많은 마계어는 그녀가 익히기에 그다지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아직은 동화 수준이지만, 건져낼 게 나름대로 하나씩 있는 데다, 지금 마계에 대한 그녀의 지식 수준에 딱 맞으니 웃음이 나오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약하지만 강하다… 하지만 결국 약하다… 그래서 잡을 수 없다? 무슨 뜻일까.' 계속해서 뇌리를 떠도는 말. 지워 버리려다 결국 포기한 세키라는 아예 진지하게 고민해 보기로 했다. 아무래도, 경험이겠지?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이겠지? 그럴 가능성이 가장 컸다. 잠시 생각해 보던 세키라는 피식 웃었다. 내가 알 리가 없잖아. 푹신한 쿠션이 받쳐져 있는 소파에 몸을 기대고 무릎을 끓어당겨 팔에 가둔 세키라는 무릎에 얼굴을 대고 중얼거렸다. "에리나와는… 이제 어긋나 버린 건가? 도망칠 기회가 생겨도, 에리나는 갈 수 없을- 아니, 갈 수 있다 하더라도 가지 않을 테니." 늘 그랬다. 에리나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되는 일만 했다. '천상 기사'인 그녀의 오빠 바르에든과 그 점은 쏙 빼 닮았다. 칼르니르 가의 핏줄에게 흐르는 천성인지도 모른다. 칼르니르 공작 역시 강직함으로 유명하니까. 그런 점이 부러웠다. 언제나,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할 수 있다는 게 부러웠다. 그런 점에서는 루피아도 똑같았다. 상황에 따라 합리적인 선택을 하지만, 그래도 그 '필요'의 기준은 언제나 자신이 정해 왔다. 가끔씩,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 보고는 한다. 너는? 너는 어때? …라고. 너는, 이제까지 살면서 너의 무엇을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결정했지? 언제나 너는 다른 이들이 원하는 모습대로 살아 왔잖아. 어린 동생에게 필요한 것은 따듯한 엄마와 누나. 힘들고 바쁜 아버지에게 필요한 것은 집안 내의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는 착한 딸. 네가 진정으로 원한 모습은 뭐였는데? 네가 속으로 원하는 것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언데? "잠깐 들어간다~" 짧은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세키라는 퍼뜩 놀라 얼른 일어섰다. "저녁 안 먹었지? 주군께서 저녁 생각은 없다고 하시는 바람에 우리도 그냥 안 먹겠다고 했는데… 생각해 보니 너는 저녁 먹어야 하잖냐." "…그러고 보니, 식사를 안 했군요…." "…인식을 못 하고 있었던 거냐, 안 하고 있었던 거냐?" "그 둘의 차이점이 뭔데요?" "-글쎄?" 아로데는 피식 웃으며 책을 치우고 손에 들고 있던 간단한 음식을 내려 놓았다. 세키라는 그제야 공복감을 느끼며 샌드위치를 하나 들어 베어 물었다. 아로데는 그녀의 옆 의자에 앉아 쿠션을 안은 채 그녀를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뭐가 묻었나요?" "아니-" "그런데 왜 빤히 쳐다 보세요?" "그러면 안 되는 거냐?" "…그다지요." "그럼 신경 꺼." "…그럴 수가 없잖아요. 제가 관련된 일인데." "그런 건가?" "그런 거랍니다." "그렇군." 그래도 아로데는 시선을 치우지 않았다. 다시 한 입 샌드위치를 베어 문 세키라는 우물거면서 얼굴이 발개지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먹는 걸 구경하면 신경이 안 쓰일 리가 없잖아? 이렇게 먹다가는 채하고 말 거야- 라는 결론에 다다른 세키라는 결국 손을 놓았다. 이런 상황에서 먹는다는 건 영 편하지가 않았다. "…한 가지 여쭤볼 게 있는데요." "물어 봐." "'잡을 수 없다'라는 건… 저번에 한 그 얘기, 무슨 말이었는지- 말해주실 수 있나요?" 질문이 의외였는지 아로데는 눈만 깜박였다. "그건 왜 물어보는 건데?" "그냥, 궁금해서요." "흐으음- 그래애?" 세키라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아로데는 다시 씨익 웃었다. "뭐, 별다른 건 없었어. 그다지 다른 뜻으로 얘기한 건 아니었고- 내가 아는 한 인간의 이야기가 갑자기 떠올라서 말이지." 그가 아는… 인간? 세키라는 그가 꽤 나이가 있는 마족이라는 것과 계약으로 중간계로 갈 수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럼 흑마법사, 아니면 마녀? "꽤… 아니, 강한 능력을 가진 흑마법사였지. 나와 로윈, 유덴 녀석을- 그러니까 로이드윈과 유리아덴 말이야- 한꺼번에 불러낼 만큼 능력이 강한 녀석이었거든. 흠, 우리 셋을 그냥 '심심해서' 혹은 '그냥' 불러낼 만큼 강한 녀석이었으니 말할 것도 없지." "……그냥…… 심심해서…… 최고위 마족… 셋을?" 이런 걸 바로 '기가 막히다'라고 하는 것이다. 세키라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한 얼굴을 하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금까지, 흑마법사 계통의 역사는 잘 모르지만, 그런 '대마법사'가 나왔다면 에스베크 가문이 모를 리가 없는데? 설마, 에스베크 가문이 탄생되기 이전의 일인가? "아마… 한 100년쯤 됐을 걸? 그 녀석이 우리를 불러낸 후, 우리 셋이 한꺼번에 불려가자 흥미를 느낀 전대 마왕님께서 중간계에 직접 가셨어." 이 대목에서 세키라의 표정을 더 일그러질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졌다. 마왕이, 마왕이, 100년 전에 중간계에 나타났었다고? 말도 안 돼! 절대, 이건 절대 말이 되지 않아! "하핫, 그렇게 놀란 표정 지을 거 없어. 계약으로 인한 거니까, 천계와의 규정에도 저촉되지 않는 행위였다고. 그만큼 그 녀석의 능력이 컸던 거지." "…대체, 얼마나 큰 힘을 지녔었길래…?" "나도 아직 잘 몰라. 크흠, 어쨌던 간에, 그 녀석은 그 자리에서 우리의 소개로-아니면 못 했을 걸?- 마왕님과 계약을 맺었어. 그리고 마계로 왔지." 잠시, 세키라는 그가 한 말을 곰곰이 되새겨 생각해 보았다. '마왕과 계약', '마계로 왔다'……? '마계로 왔다'…? 왔다? 왔다? 왔……다? 점차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갔다. 마계에 먼저 왔던 사람? "20년 전에 죽었지. 마왕 교체식 때, 현 주군이신… 군주님의 손에 의해. 전대 마왕님과 함께." 충격으로 세키라의 눈이 떨렸다. "그 녀석은 강했지. 하지만 계약자였던 전대 마왕님의 교체식이 치뤄지기 전날 그 녀석이 질렀던 비명이 아직도 생생하게 귀속을 꿰뚫어. 광기마저 느껴지는 그 얼굴, 그 표정이… 흐흣, 꿈에 나타나면 상당히 무섭다구~" "…윽." "하여간, 그렇게 약한 녀석이기도 했다는 거다. 정신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그렇기에… '잡을 수가 없다'는 거야. 아아, 설명이 너무 길었나? 여하튼간에 그랬지. 그래서 그런 말을 한 거였어. 너는…… 풋, 특히 더 약해 보이는군." 뭐라고 반박할 말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약하지 않다고, 잡아도 부숴지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지만, 그 말은, 그 말의 의미는, '잡아달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세키라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녀가 가만히 침묵하고 있자, 아로데는 피식 웃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중에 생각 있으면 먹고- 참! 이 일은 비밀이다? 크흠, 이건- 글쎄, 상당히 쉬쉬되는 일이라. 그럼!" 얼떨결에 몸을 일으킨 채 한 마디도 못 한 세키라는, 문 뒤로 사라져 버린 아로데가 앉았다 간 의자와 구겨진 쿠션을 바라보며 한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잠시 뒤 힘없이 쿠션을 들어 품안에 꼭 안은 세키라는, 소파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비밀……." * * * * * * * * * * * * * * * "그 목걸이는 뭔가요? 두 개나 되네요." 드디어 걸려 버렸다!!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루피아는 본능적으로 손을 목으로 가져갔다. 손에 잡히는 두 개의 목걸이를 손 안에서 꼭 쥐며, 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띄웠다. 가야 하는데, 에리나에게 가 봐야 하는데 이게 대체 무슨 꼴이야! "하나는 어머니의 것이고… 하나는 받은 겁니다. 마녀한테요." "어머나! 마녀요?" "네… 에. 마왕님의 유모였다고… 하더군요." 혹시나 건드릴까 해서 루피아는 한 마디 덧붙였다. "무슨 저주가 걸려 있을지… 아직 아무도 모른답니다." 생긋. 그녀는 다시 빙글 웃어 주었다. 다니엘라의 표정이 아주 기묘해져 있었다. 그녀는 다시 '마녀의 목걸이'에서 '어머니의 목걸이'로 시선을 옮겼다. 물방울 모양의 푸른 보석에 금빛 쇠사슬이 감겨 있는 모양으로, 엄지 손톱만한 보석이 달려 있는 은줄의 목걸이였다. 그 모양을 유심하게 살피던 다니엘라가 입을 열었다. "그 목걸이는… 아주 소중한 것이겠죠?" "……? 그야… 그렇죠. 하나 남은, 어머니의, 가족의 흔적이니까요." …아. 문득 생각이 났다. 그래, 난 이것 외에는 가족의 흔적이 하나도 없구나. 언제나 걸고 다니던 목걸이라 깜박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새삼 목걸이의 매끄러운 표면을 매 만지며 루피아는 눈을 감았다. "아주…… 소중하시겠죠…." 여운을 남기며 중얼거리는 다니엘라의 말이 마음에 걸렸지만, 목걸이를 매만지며 딴 생각에 잠겨 있던 루피아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못했다. ======================================================== -아아. 12:41분.. 결국 어제가 되고 말았습니다.[털썩] 신혼일기 써야 하는데... 으음, 지금부터 쓰러 가야 겠어요;; 귀차니즘이 극에 달한 요즘, 인터넷 연결이 안 됩니다아아아!![절규] 이놈의 컴퓨터가 미쳤나 봐요. 흑흑. 계속 다운이 돼 버려서.. 푸우. 컴퓨터 아저씨~ ...빨리 오세요. 멜은 donghee425@hanmail.net(이제 이거 쓰는 것도 귀찮아지려 해요. 살려 주세요..;)이구요, 리플 필수!! 로 달아 주세요~[애원?] 즐독하세요.;; 제 목: [수정판] 공녀(貢女) : 제17화 [목걸이 실종사건](1) #. 제17화 [목걸이 실종사건] * * * * * * * * * * * * * * * “마검(魔劍)? 그럼… 이게?” 세키라는 에리나의 옆에 뉘여져 있는 새하얀 검에 시선을 주었다. 침상에 누워 핼쓱한 안색으로 힘없이 웃던 에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 새하얀 검은 ‘마검’과는 영 이미지가 맞지 않았다. 검의 새하얀 색도 그랬고(고정관념일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느껴지는 분위기 또한 너무나 고고하고 매혹적이다. 루피아도 그 검에 흥미를 보였다. 희미한 보랏빛이 어려 있는 검에 흥미로운 시선을 보내다, 문득 루피아는 에리나를 올려다 보았다. “어디 아픈 데는 없고?” “별로. 달라진 점이라고는… 글쎄, 그다지 없는 것 같긴 한데….” “그래? 그럼 다행이야.” 에리나는 씨익 웃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날이 밝아 있었고, 그녀의 두 친구와 아유니가 그녀를 둘러싼 채 정신을 차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찾아가서 지켜 봐 주려고 했는데, 레이디 다니엘라가 잡고 놓아 주시질 않아서 말이야. 적의가 한가득 담긴 눈길로 쏘아 보면서 이상한 웃음만 씨익 띄우는데, 왠지 소름이 끼치는 기분이었어.” 루피아는 투덜거리듯 말했다. 결국 밤 늦게까지 붙잡혀 있어야 했던 그녀는 에리나의 방으로는 가까이 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잠들어야 했다. 결국 그 날도 잠들지 못하고 뜬 눈으로 이것 저것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신경이 쓰였던 건 역시 에리나였다. “조심해. 내가 보기에도 쉽게 그냥 넘어갈 것 같지는 않더라. 그렇게 태평하게 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해?” 세키라의 말에는 약간의 불만이 섞여 있었다. 그녀가 이 친구에게 늘 불만인 건, 언제나 자기 일에는 너무하리만치 둔하다는 점이었다. 위험이 코 앞까지 다가와도 모른다니까, 정말. 막상 일이 닥치면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한 양 가장 좋은 방법을 택해 해결하지만, 그래도 곁에서 보기에는 참 아슬아슬했다. “에이, 설마~ 얌전해 보이던 걸? 좀… 사납게 느껴지는 눈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무작정 일을 벌일 만큼 막 나가는 성격은 아닌 것 같았어.” “사람 속은 아무도 모르는 거라니까? 너도 걱정 좀 해.” 루피아는 헤죽 웃었다. 하지만, 그다지 마음에 걸리는 면은 없었다. “그… 레이디 다니엘라 얘기인데, 계속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름이다 싶었는데 이제야 기억이 났어.” 세키라가 손가락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까부터 계속 곰곰히 생각해 보는 눈치더니 결국 기억을 해낸 모양이었다. 모두의 눈이 모아지자, 세키라는 입을 열었다. “성이 ‘카루크’잖아, 그 레이디? ‘드 카루크’. 이 가문의 가주인 ‘크리스 드 카루크’는 아주 실력있는 외교관이야. 자주 외국을 들락날락거리기 때문인지 외국의 명망있는 한 가문과 친분이 있었던 모양인데, 그 분의 장녀… ‘다니엘라 드 크루크’께서 외국의 가문과 약혼을 하게 되어 한 동안 소문에 오르내린 적이 있었어.” “외국의 가문과 약혼하는 건 그다지 큰 이슈가 아닐 텐데? 드 카루크 가문은 백작가문이기는 하지만 그다지… 세가 강하다고 볼 수 없잖아. 나는 전혀 기억 안 나.” 에리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말했다. 그녀가 전혀 알지 못하는 건 워낙 사교계의 입소문에는 신경을 안 썼던 데다가 다른 레이디들과 잡담을 하는 취미가 없어서이기도 했다. 세키라는 그렇게 말하며 살풋 웃었고, 에리나는 그런가, 하며 머쓱하게 웃었다. “큰 이슈가 아닐 뻔 했지만, 그게… 이번 경우에는 충분한 소문 거리가 돼. 왜냐하면 그 상대가 ‘데큐벨 감옥’에서 2년을 복역한 죄수… 였거든. 후작 가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악명높은 데큐벨 감옥에서 2년이나 복역해야 할 정도로 큰 죄를 지은 모양이야. 그 죄명이 뭔지는… 글쎄, 잘 모르겠지만.” 데큐벨 감옥이라면, 아마도 레이디 다니엘라의 약혼자가 있는 왕국은 네이코 왕국일 것이다. 에크라 왕국과 함께 시리어스 제국 위쪽에 위치한 네이코 왕국은, 무력을 최우선 사항으로 다루는 것으로 유명했다. 국민들의 대표적 성격이 아주 급하고 호탕하며, 약간 나쁘게 말하자면 난폭했던만큼 범죄 역시 성성했고 다루기 힘든 죄수 역시 많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데큐벨 감옥’이었다. 다른 감옥에서는 특급 죄수가 이 곳에서는 3급 죄수로 다뤄지기 일쑤였으니 그 수준이 얼마만큼인지 가늠해볼 만 하다. 그런 감옥에서 2년이라니! 그것도 네이코 왕국에서-웬만한 사고는 장난(?)으로 넘기는!-, 귀족이! “이유는 두 가지. 백작이 여러 가지로 받기로 한 대가, 즉, 재물이나 보석… 뭐 이런 것과, 그 후작 역시 외교쪽 담당자였으니 그때쯤 백작이 맡고 있던 네이코와의 무역 건을 해결해 주는 거였어. 한 마디로, 팔아넘긴 거라는 얘기지.” 에리나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고, 루피아의 얼굴은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아유니에게서는 다른 표정의 변화도 볼 수가 없었다. 에리나와 루피아 역시 귀족의 영애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결국 가문을 위한 정략결혼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 들어도 불쾌한 일이다. “여하튼, 그래서, 한 동안 레이디 다니엘라를 두고 소문이 돈 적이 있었다. 곧 모두들 쉬쉬하게 돼서, 다시 말해 다른 이슈가 떠오르는 바람에 잠잠해지기는 했지만 레이디 다니엘라가 약혼을 파한다 하더라도 다른 혼처를 잡기란 불가능하다고들 했지. 이미 레이디 다니엘라는 몇 번씩이나 네이코 왕국에 가서 그 ‘약혼자’를 만나고는 했거든.” 세키라는 말을 끝내고 입을 다물었다 ‘약혼자- 라… 나한테는 그런 게 없었지만(약혼자는커녕 사교계에도 데뷔하지 않았다) 약혼자가 있는 공녀들은- 모두 어떻게 된 걸까. 정략결혼이 아니었다면? 후우, 이거 또다른 문제인 걸.’ 루피아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 * * * * * * * * * * * 다니엘라는 어둠의 신 클리오라의 ‘사제복’과 함께 내려진 두꺼운 ‘신서(神書)’를 덮었다. 고대어로 쓰여 있어 좀 읽기 불편하긴 했지만 아예 모르는 마계어로 쓰여진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나마 번역판이라도 있어서 다행이지, 이게 아니었다면 넘쳐나는 신력을 제어하는 방법조차 몰랐을 것이다. 거의 모든 공녀들이 자신이 걷는 길을 걷고 있다. 이 곳에 와 처음으로 주위를 둘러 볼 여유를 갖게 되었을 때 자신을 ‘담당’하고 있는 마족에게 근처 신전으로 이끌려 가 사제복과 신서를 받고 신학을 공부한다, 그리고 축복아닌 축복을 받아 넘쳐나는 어둠의 신력을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운다. 이게 전반적인 과정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다니엘라는 이 곳에 오게 된 것에 대해 한 가지 감사하는 게 있었다. 바로, 그 ‘끔찍한’ 약혼자와 결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나는 아직 24살이야! 하고 싶은 것도, 원하는 것도 많다고! 그… 그 끔찍한 인간에게 붙잡혀 맞고 사는 건 정말 싫었다고… 게다가, 불구라니! 말이나 돼, 그게?’ 그녀가 본 그녀의 약혼자의 모습은 정말 끔찍했다. 얼굴의 반은 화상으로 흉측했고, 다리마저 절었다. 두 팔은 멀쩡했지만, 힘이 세고 성격도 더러워서 맞기 십상으로 보였다. 저택에 떠돌던 소문을 들어보니 그의 시녀의 몸에는 언제나 상처가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녀를 보며 뱉었던 모욕적인 언사와, 그 옆에 같이 있었음에도 자신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던 아버지. 그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죽고만 싶었다. “크렐.” 다니엘라의 옆에 서 있던 시종이 그녀의 부름에 대답하며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그는 진홍색 머리카락이 목 부근까지 오도록 짧게 커트한 머리와 새하얀 얼굴, 모든 것을 그대로 투영해 버릴 듯한 황금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이제 겨우 10세나 되었을 법한 아이. “시켰던 일은 했니?” “네… 여기 있어요. 그, 그렇지만 이런 짓을 해도 될까요?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 아닐까요? 그 분은, 그 분은 군주님의 소유예요. 허튼 짓을 했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 지 몰라요.” 크렐은 손가락 사이에서 빠져 나가려는 목걸이의 은줄을 다잡으며 불안하게 말했다. 다니엘라는 크렐에게서 목걸이를 받아 만족스럽게 쳐다 보며 웃었다. “걱정하지 마. 나를 죽이지는 못할 테니까. 후후후, 이게 없어졌다는 걸 알았을 때 그 여자의 얼굴이 보고 싶어.” “다니엘라 님….” 크렐이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다니엘라는 들은 척도 않은 채 목걸이를 가지고 일어서며 말했다. “자. 이게 이걸 처리해야 하겠지? 같이 가자, 크렐.” 크렐은 다니엘라가 이 마계에 와서 두 번째로 만나게 된 마족이었으며, 가장 먼저 마음을 열게 된 마족이었다. 다른 마족이라면 몰라도 크렐만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다니엘라였다. 이 성의 성주인 ‘에크’에게 끌려 와 방 안에서 울기만 하던 그녀를 곁에서 계속 염려하며 붙어 있었던 이도 크렐이었고, 날마다 음식을 가져 와 먹으라며 채근했던 자도 크렐이었다. 그러니 가장 먼저 마음을 열게 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다른 시종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 다니엘라다. 이 성 대부분의 시종, 시녀들은 ‘다크 엘프(Dark Elf)’였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크렐은 다크 엘프가 아니었다. 그 점이 이상하게 생각되었지만 다니엘라는 묻지 않았다.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노릇이었으니 말이다. “크렐? 어디가 좋을까? 그 여자가 절대 찾을 수 없을만한 곳 어디 없을까?” 없애거나 부수지는 않기로 했다. 왠지, 그러자니 마음 한 구석이 껄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녀 역시 ‘공녀(貢女)’ 중 한 사람이고-… 아예 없애 버리는 건, 설명할 수는 없지만 굉장히 마음에 걸렸다. “성 뒤에 있는 호수가 어떨까요? 그 곳에는 괴수(怪獸)같은 건 없지만 물이 굉장히 시리면서 깊다고 해요. 굉장히 맑아서 속이 비치죠. 하지만 비가 내리면 그 속에서 목걸이를 다시 찾는 건 고사하고 보는 것조차 불가능한 일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녀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을 거고요.” 크렐은 결국 어쩔 수 없다, 라는 어조로 의견을 내놓았다. 그게 좋겠다고 생각한 다니엘라는 희색이 만면한 표정을 지으며 크렐을 이끌었다. “그런데 비는 안 내릴 수도 있잖아.” “걱정 마세요, 다니엘라 님. 제게 그 정도 능력은 있으니까요….” 크렐은 말을 살짝 끌며 여운을 남기곤 싱긋 웃었다. 다니엘라는 그의 말에 활짝 웃으면서 손을 끌어 당겼다. 작은 아이의 손이 손 안에 따듯한 온기를 지니고 들어왔다. ‘골탕 좀 먹어 보라지!’ * * * * * * * * * * * * * * * "레이디 다니엘라와는 무슨 얘기를 나눴어, 루피아?” 그녀가 목걸이가 사라졌다는 것을 눈치챈 것은, 이렇게, 에리나가 가볍게 화제를 전환하려 한 마디를 던졌을 때였다. 대수롭지 않게 ‘아, 그건…’하고 말하며 손을 목걸이로 가져 갔을 때. ‘…목걸이가… 하나?’ 루피아는 퍼뜩 놀라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평소처럼 두 개 걸려 있어야 할 목걸이 중 하나가, 그것도, 어머니의 것이 없다! 순식간에 루피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왜 그러세요, 루피아 님?”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아유니가 물어 왔다. 루피아는 새하얗게 질린 채 손에 쥐어 진 새빨간 루비를 바라 보았다. 어, 어떻게 된 거지? 나는, 나는 잘 때도 목걸이를 빼지 않는데? 새벽에 잠깐 선잠이 들었을… 뿐이었는데! 언제나처럼, 목걸이가 있을 줄 알았는데?! “어, 없어.” 꽉 막힌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입만 떠듬거렸을 뿐, 목소리는 제대로 흘러 나오지 않았다. 그게 어떤 건데! “없다니?” “없어! 어, 어머니의 목걸이가 없어! 내가 16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께 받은 목걸이가!” 루피아는 재빨리 머릿속을 더듬었다. 그래, 어디서 끈이 끊어졌을 수도 있잖아. 내가 워낙 정신이 없어서 눈치채지 못했거나, 그럴 수도 있어. 가령, 오늘 아침 에리나에게 달려오던 때라던가… 차, 찾아봐야 겠어! “잘 생각해 봐, 어딘가에 떨어뜨렸을 거야.” 루피아가 새하얗게 질려 벌떡 일어나자 세키라가 팔을 꽉 잡아주며 말했다. 루피아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다시 한 번 기억을 더듬었다. 일어나서… 간단히 씻고, 에리나의 방으로 왔다. 세키라, 아유니를 만나 아침식사를 마치고… 그리고… 그리고…. “레이디 다니엘라!” “뭐?” “어제, 어젯밤에, 레이디 다니엘라와 목걸이에 대한 얘기를 나눴어. 이런 생각, 하면 안되겠지만, 그것밖에는 짐작가는 게 없어.” 게다가, 그녀에 대해 한창 적개심을 키워가고 있지 않은가. 에리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마검을 집어 들었다. 루피아는 ‘일단 찾아봐야 겠어’라고 하며 밖으로 뛰쳐 나갔고, 나머지 세 사람 역시 같이 뛰쳐 나갔다. “…성 뒷편. 이 성 뒷편에 있을 거에요. 시종 하나와 같이 있는 것 같네요.” “네?” “지금은 일단 묻지 마시고, 그리로 가 보세요.” 아유니가 말했다. 루피아는 정신없는 와중에 의문을 표했지만 아유니는 싱긋 웃으면서 넘겼다. 그리고 걸음을 멈추고 세키라를 끌어 당기더니 고개를 저어 보였다. 어차피 두 사람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을 테니 이쯤에서 멈추자는 뜻이었다. 루피아는 아유니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에리나와 함께 성 뒷편으로 달렸다(…라고 해 봤자 에리나 뒤를 따라 달린 것밖에 되지 않았다. 길을 모르니까 앞장 설 수가 없었다). “어머? 루피아 님!” 루피아는 숨을 몰아 쉬며 달리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보았다. 우아하게 차려 입은 다니엘라와 그녀의 시종인 것 같은 아이 하나가 그녀들의 뒤에 서 있었다. ‘성 뒷편에 있지는 않지만, 정말- 시종 하나와 같이 있잖아. 아유니는 그걸 대체 어떻게 안 거지?’ “어딜 그렇게 급히 가시는 길이었나요? 여쭤봐도 될까요?” 다니엘라는 싱긋 웃었다. 에리나는 불쾌감을 숨기지 않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 그녀로서는 저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네가 왜 그러는지 다 안다’는 듯한 미소가 아주 불쾌했다. 에리나는 가시가 돋힌 말투 그대로 말했다. “…우린 지….” “우리는 지금 바빠. 나중에 얘기하도록.” 루피아는 얼른 에리나의 말을 뺏었다. 기껏 쌓아 온 이미지(?)인데 여기서 무너뜨릴 수는 없지 않은가! 이런 고압적인 역할은 모두 자신의 몫이었다. 에리나는 과묵하고 믿음직한 역할을 해 줘야 했다. 그런데 지금 저런 고압적인 말투로 그녀가 말해서는 안 되지 않은가. “어머? 바쁘시다고요? 이런, 제가 실례를 했네요. 그런데 혹시…….” 다니엘라는 말 끝을 흐렸다. 살풋 인상을 써 보이며 손가락으로 턱을 짚은 그녀는 아주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주 눈에 빤히 보이는 연기라, 루피아는 상황에 안 맞게 웃음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다니엘라 님! 이제 그만 하시…….” “혹시, 어제 말씀하셨던 어머님의 ‘목걸이’를 찾고 계시나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루피아의 말에 다니엘라는 의기양양한 얼굴을 해 보였다. “모를 리가 있나요… 제가 숨겼는데요.” “……!!” 에리나의 눈썹이 꿈틀했다. 루피아는 어안이 벙벙해 한 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렸지만 금방 ‘화가 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대, 대체 속셈이 뭐야?! “한 번 찾아 보시죠, 잘나신 ‘루피아 엘 세느안트’ 공녀(公女)님!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말이에요, 지금 밖에는 크렐의 주문(呪文)으로 비가 내리고 있어요. 더불어, 성 뒷편 호숫가 어딘가에 있다는 것 역시 말씀드리죠!” …유치했다. 자신이 비 속에서, 호수에 들어가 목걸이를 찾아 헤매는 꼴을 보고 싶다는 게 아닌가. 머릿속에 차갑게 얼어갔다. 아무리 미워한다, 미워한다 하지만 어머니의 물건에 손을 대다니? 그것도 같은 공녀(貢女)가 말이다. 루피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을수록 다니엘라의 얼굴에는 웃음이 커져 갔다. 루피아는 싱긋 웃으며 다니엘라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코 앞까지 얼굴을 들이밀고 루피아는 다니엘라에게 눈을 맞춘 채 다시 한 번 생-긋 밝고 예쁘게 웃어 주었다. 그리고는 다니엘라의 얼굴이 일그러짐과 동시에 주먹을 들어 바로 옆의 벽을 세게 쳤다. “뭐, 뭐….” “……다음에 뵙죠.” 뭐라고 따지거나 복수를 하는 건 일단 목걸이를 찾고 난 다음에! 루피아는 일단 성 뒷편으로 달려가기로 했다. 그러나, 그녀는 금방 궤도를 수정해야 했다. “루피아! 그쪽은 반대야! 성 앞문으로 가는 길이라구!” 오호통재라(의미불명). 그녀는 오늘도(그리고 영원할) 방향치였다. ========================================================= -유난히 어색한 한편이로군요;; 뭐라 할 말이 없어요;; 자자. ....이디스가 두 편째 등장을 안 했습니다;; 얘는 대체 언제 나올 생각일까요? 남주가 맞기나 한지 모르겠습니다.[그, 그래도 남주 맞아요!] 슬슬 이디스가 망가질 때가 됐는데... 푸, 너무 완벽한 이미지라 차마 건드릴 엄두가 안 나요.; 아아, 그래도 망가뜨릴 건 망가뜨려야 해..ㅠㅠ 멜은 donghee425@hanmail.net! 리플 필수~>_<;; ....구요오..[작아지는] 즐독하세요.[털썩] 덧. 대구지하철 참사 희생자 분들께 진심으로 애도를 표합니다.ㅠㅠ 제 목: [수정판] 공녀(貢女) : 제17화 [목걸이 실종사건](2) #. 제17화 [목걸이 실종사건] * * * * * * * * * * * * * * * + “일단 목걸이 비슷하게 생긴 건 다 건져 올려 와, 세이준!” 세이준을 소환하자마자 루피아가 던진 말이다. 계약 후 첫 번째 소환이라 은근히 뭔가를(?) 기대하고 있었던 세 이준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이봐, 그게 오랜만에 만난 정령에게 하는 첫 마디냐?》 “시끄러워! 급해, 빨리 시킨 거부터 해!” 유일하게 남은 어머니의 흔적을 영영 잃어버리게 될까 초조한 루피아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런 루피아의 모 습에서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모양인지 세이준은 투덜거리면서도 몸을 돌려 호수쪽을 바라 보았다. 넓디넓은 호수에는, 하늘을 가린 검은 먹구름에서 쏟아지는 빗물로 작은 동심원들이 그려지고 있었다. 그 물의 영향을 받아서일까, 세이준의 몸은 맨 처음 보았던 투명하고 맑은 푸른빛이 아니라 흐린 묵빛이었다. 세이준이 호수 속을 사라지자, 루피아는 호숫가에 털썩 주저 앉았다. “루피아~ 모, 목걸이는? 찾았어?” 뒤늦게 쫓아 온 에리나가 루피아에게 가까이 다가오며 말했다. 루피아는 고개를 숙인 채 좌우로 흔들어 보였다. “아니, 아직. 방금 세이준이 찾으러 들어갔어. …괜찮아, 곧 찾아 오겠지. 이 호수 속에 던져 버렸다고 했으니까, 물 속이라면 세이준이 찾을 수 있을 거야.” 루피아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물이 떨어지는 소리에 울컥 짜증이 솟았다. 어떻게, 어떻게, 그녀에게 단 하나밖에 남지 않은 ‘어머니의 물건’에 손을 댈 수가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에게 받은 모욕을 아무리 심하게 해석해여 받아 들였다고 해도, 이건 너무 심했다. “…가만히 두지 않겠어. 루피아, 이번에는 네가 아무리 말려도 진짜 가만있지 않을 거야!” “나도 이대로 넘어갈 생각은 없어.” 심장이 초조함으로 세게 뛰면 뛸수록, 머릿속은 찬물을 끼얹은듯 가라앉았다. 루피아는 얼굴 위로 쏟아져 내리 는 빗물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 * * * * * * * * * * * * * * 루피아와 에리나의 뒷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다니엘라는 다리 힘이 풀린 듯 그 자리에 풀썩 주저 앉았다. 아랫입술을 질끈 물어뜯은 다니엘라는 독이 오른 눈으로 복도 끝을 노려 보았다. ‘네가 뭔데… 저는 얼마나 잘났기에? 얼마나 잘났기에 나를 무시하는 건데!’ 비척거리며 다니엘라는 겨우 몸을 일으켰다. 자신을 뚫어져라 노려보던 보랏빛 눈이 뇌리에 박혀 사라지지 않 았다. 고개를 홰홰 저어 겨우 그 모습을 흩어버린 다니엘라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크렐에게 가 볍게 웃어 보였다. 그래, 이 아이는 나를 무시하지 않아. 이 아이만은. “걸을 수 있겠어요, 다니엘라 님?” “’다니 누나’하고 부르라고 했잖아, 크렐. 그러기 싫은 거니?” 다니엘라는 싱긋 웃었다. 크렐이 약간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이자 다니엘라는 피식 웃고는 앞서 걸음을 옮겼다. 중간계에서, 일찍 어머니를 여읜 다니엘라는 그녀의 오빠와 함께 아버지와 살았다. 그녀의 아버지와 오라비는 철저하게 남성우월주의에 물든 사람들로, 그들보다 신분이 낮은 여자는 벌레만도 못하게 취급했다. 외교관으로써 명성을 높여가고 있는 아버지나, 그런 아버지의 보좌관이 되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외교관이 되 겠다는 오라비나 다니엘라를 사람취급해 주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그런 취급을 받아와서일까, 다니엘라는 그녀를 무시하는 발언에 있어서는 아주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다니엘라는 이모에게서 들은 말들을 믿고 의지하며 살았다. ‘어머니는 휼륭한 귀부인이셨다’, ‘너는 뛰어난 아이 야’, ‘자랑스러운 나의 조카’……. 하지만 아무리 이모이더라도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를 결혼시키겠다는데 막을 도리는 없었다. 네이코 왕국의 후 작가 망나니. 그게 그녀의 혼처였다.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다니엘라는 끝없는 늪으로 빠져드는 것만 같았 다. 게다가 그녀의 남편이 될 사람은 그녀의 아버지, 오라비와 다를 것 없는 사람이었다! 여자를 벌레만도 못하게 취 급하는, 그런. 기사도? 웃기지도 않는다. 꼴에 기사라고 자존심은 셌다. 하지만 그것은 다니엘라가 조금이라도 의사표시를 하면 폭력으로 돌아오는 결과를 낳을 씨앗이라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때에, 마계에서 소환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이제, 적어도 동등한 입장의 여자들에게는 무시받지 않으리라 마음 먹었다. 마족에게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제 동등한 입장이 된 이 여자들에게는 무시받지 않으리라고. 그런 그녀에게, ‘루피아 엘 세느안트’는-… 모두들 그녀를 믿었다. 의지했다. 기대했던 만큼, 실망도 컸다. 방으로 돌아 온 다니엘라는 푹신한 쿠션이 놓여져 있는 의자에 몸을 맡겼다. “지금쯤… 빗속에서 목걸이를 찾아 헤매고 있겠지? 쿡쿡! 아아, 어쩌면, 찾으러 들어가지도 못하고 물가에서 울 고 있을지도. 못 보는 게 안타까워, 정말… 키키킥.” 벌컥! “…벌써 찾아내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 건가.” 다니엘라는 눈을 크게 떴다. 벌떡, 몸을 일으킨 다니엘라의 얼굴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문가에는 물기를 뚝뚝 흘리며 기대 서 있는 루피아와 에리나, 그리고 정체모를 푸른색 표범이 있었던 것이다. 두 발로 서면 그녀의 키 정도는 가볍게 뛰어넘을 것 같은 표범은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제법이야. 꽤나 꼭꼭 숨겨 뒀던데. 찾느라 눈 빠지는 줄 알았어’…라고 전해 달라는군, 세이준이.” 루피아는 표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리고는 왼손을 들어 손가락에 감겨있는 목걸이를 꺼내 보였다. 그녀가 숨겼던, ‘어머니의 물건’이었다. “어, 어떻게 벌써…!” “네가 신성력이라면 나는 정령 소환술이야. 며칠 전에 물의 정령과의 계약에 성공했지. 힘들었지만 어떻게 할 수 있었어. 그래서 이번 일은 쉽게 해결될 수 있었지.” 루피아는 뚜벅뚜벅 걸어 와 다니엘라의 바로 앞에 섰다.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씹어뱉듯 말했다. “어떻게! 어떻게, 같은 공녀면서, 같은 처지면서 어머니의 물건에 손을 댈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거냐! 나에게는 단 하나 남은, 가족의 흔적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 “나, 난…!!” 반박을 하려 다니엘라가 입을 열자 루피아는 번쩍 손을 들어올렸다. “꺄아악!” 뺨이라도 후려치려는 줄 알았는지 다니엘라는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루피아는 손을 들어올린 채 그녀의 얼굴 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이 떠오르자, 루피아는 피식 웃으며 손을 내렸다. “너를 상대로 흥분하는 게 우스워.” 다분히 무시하는 끼가 베어있는 어투였다. 다니엘라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고도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 이 너무나 분했다. 그녀가 이를 악물었지만 루피아는 그대로 몸을 돌려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그녀가 움직인 길 로 투명한 물이 똑똑 떨어져 붉은 카펫이 짙은 색으로 물들었다. “이… 이이!! 이익!” 루피아는 방을 걸어나가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에리나를 보았다.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며! 이대로 넘길 거야?” 루피아는 눈을 깜박였다. 속눈썹에 물기가 맺혀 눈물이 그렁거리는 것 같았다. 루피아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가만히 있을 거야?” 에리나는 루피아가 한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잠시 눈만 깜박였다. 하지만, 그녀는 곧 이해했다. 사악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녀는 말했다. “그럴 리가!” 이대로 넘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녀에게 맡겨진(…이 아니라 스스로 떠맡은) ‘악녀’라는 역할에 충실할 생 각이기도 했다. 정말 어머니의 것에 손을 대었다는 사실에 스스로도 놀랄 만큼 흥분하기는 했지만, 그녀는 이쯤 에서 정리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번에 당한 것은, 아직 남아 있는 시간을 통해 풀면 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혼자 하는 것보다 다니엘라가 아직은 ‘존경심’을 품고 있을(그 ‘존경심’이라는 것이 어디서 나왔 는지는 미지수다) 그녀의 두 친구를 이용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는 상황에서 이용하지 않는 것은 바보나 할 짓. ‘나를 건드린 걸 후회하게 해 주겠어!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천천히, 아주 천천히. 원래 복수란, 천천히 시간을 들여가며 해야 제 맛인 거니까!’ …갑자기 다니엘라가 불쌍해지는 이유는 무얼까? * * * * * * * * * * * * * * * 평소와 다름없는 통증. 가슴 한 구석을 날카롭게 찌르는 아픔에 아유니는 일그러진 얼굴 그대로 눈을 감았다. 점점, 시간이 갈수록 가슴을 압박하는 고통의 크기도 커져 가고 있었다. 상성에 맞지 않는 이 곳의 공기가 그녀 를 조이고 있는 것이리라. 신음이 흘러나올 것 같아 아유니는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아무리 큰 시간동안 고통을 겪었다해도 고통이란 익 숙해질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익숙해지고 싶지도 않았다. ‘살아있음’을 알게 해 주는 고통이란 것에 그녀는 아직 도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잊어버렸어. 너를 몰라. 지금 넌 헛수고를 하는 거야. 머릿속에서는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이성으로는, 지금 이 곳에 더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적색 위험경 고를 띄우고 있었다. 안다. 안다. 안다. 알고 있다.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미련’이라는 것을 쉽게 놓아 버리지 못하겠다. 고 통스럽게 일그러진 입가 사이로 바람소리가 새어 나왔다. 숨이 가빴다. 가슴께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숨쉬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관절이 새하얗게 변할 때까지 아유니는 시트를 꽉 움켜 쥐었다. 싫다. 싫다. 싫다. 이대로, 확인도 하지 못한 체 떠나는 것은 싫다. ‘이 곳에 온 이유가 무언데… 이제까지 살아있어 온 이유가 무언데. …내가, 내가, 이제까지 버텨온 이유가 무언데 .’ 그러면 뭐해? 널 잊어버렸잖아. 알아주지 않잖아. 아무도 널 모르잖아. 알아. 알아. 고통스러울 정도로 너무나 잘 알아. 그런데 여기서 뭐해? 넌, 이제까지 쌓아올린 모든 것들을 두고 도박을 하는 거야.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어. 알아. 알아. 알아. 알고 있어. 이 지독한 곳으로 ‘돌아 온’ 이유가 대체 무어야? 너에게, 이 곳은 떠올리기조차 끔찍한 곳이 아니었나? 너의 모 든 것을 비틀어 놓은 곳이잖아. 맞아. 지독해. 고통스러워. 아파. “…드디어 오셨나?” 아유니의 입이 벌어지며 차가운 음성이 흘러 나왔다. 고통이 일그러진 표정은 간데 없고 태연한 무표정이 가면 처럼 얼굴을 덮고 있었다. 그녀의 말을 맞받아친 것은 다름아닌 로아이나였다. “힘들어보이는군요. 괴로우신가요?” “네가 신경쓸 바가 아니야. 닥치고 말이나 전해라.” 로아이나의 얼굴에 불쾌감이 스쳤다. 하지만 아유니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 태도로 그를 바라보지도 않고 있 다. 로아이나의 얼굴은 금세 풀렸다. “부정은 않으시는군요.” “…거짓말은 하지 않으니까.” 아유니는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라는 듯이 그를 조용히 노려봤다. 로아이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당신을 걱정한 게 아닙니다. 단지, 나는 당신의…….”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 말이나 전해라.” “이번에도 별 것 없습니다. 12대천사가 움직였다는 것이 조금 일이라면 일이랄까요. 하지만 결말이 정해져있는 마당에 그게 무슨 소용일까요? 그저 조금 귀찮아졌… 아니, 그게 아니겠군요. 이번 일 역시 당신의 계획에 있는 것일 테니.” 아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르릉- 하고,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낮은 울림이 하늘에 퍼져 나갔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천둥소리에는, 반응을 하시나 보군요.” “내가 아냐.” 아유니는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이 자신의 의지가 아닌 다른 것에 컨트롤된다는 것을 느낄 때만 큼 불쾌한 게 또 있을까? “알고 있습니다. 제가 걱정하나 하지 않는 건 그 때문이지요.” “…일 끝났으면 그만 가라.” 아유니는 눈살을 찌푸린 채 말했다. 로아이나는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지었다. 무엇보다 만족스러운 기분에 나 른해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비록 아유니는 그런 그의 표정에 기분나쁘다는 기색을 드러냈지만, 상관없었다. “그럼, 안녕히. ‘로헤델의 별’이여. 그대가 그대일수밖에 없기에, 나는 고개를 숙입니다.” 아유니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더러운 것주제에 건방지게! 눈이 멀어버린 점쟁이밖에 되지 않으면서 그녀의 신 경을 건드리는 말만 늘어놓고 사라진다, 언제나! 그녀는 로아이나를 처음 보았을 때를 떠올렸다. 얼마 되지 않았다, 그저, 기억하고 싶지 않아 흐릿한 기억일 뿐 이다. 그녀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게 해 준 근본적 ‘힘’을 얻은 날, 그녀는 그를 만났다. “’로헤델의 별’…… 그 말이, 내게, 얼마나….” 이를 아득 악물었다. 눈 앞이 빛으로 가득 차던 날. 신이, 아버지가 처음으로 그녀의 손을 들어 주었던 날. 이제껏 버려 두었다 그녀를 비추던 때. “…싫어. 이대로 물러나지 않을거야. 난, 난, 내가, 원하는 것은 하나야.”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거울 앞에 서서, 그 안에 비친 소녀의 얼굴을 살폈다. 귀여운 동안(童顔)의 소녀. 그녀는 빙긋이 웃음을 지어 보였다. 보여요? ‘웃는 얼굴이 제일 예뻐.’ …그렇게 말해 주었으니까. 그녀는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오늘 내로 끝내야 할 일이 한 가지 있었다. 그녀는 이 성에 배정되었다던 여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다니엘라’? ‘ 다네엘드’던가?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이름. 기억해 두었던 방문 앞에 서서, 그녀는 문을 두드렸다. 기다려도 먼저 문을 열어 줄 기색은 보이지 않자 아유니 는 스스로 방문을 열었다. “무슨 일로 온 거지요? 저는 지금, 혼자 있고 싶…….” 방에서 혼자 입술을 깨물며 분함을 삭히고 있던 다니엘라는 뭐라 말을 잇지 못했다. 문 너머로 한 걸음 안으로 들어 온 아유니가 싸늘한 표정으로- 아니다, 이건 ‘싸늘한 표정’이 아니었다. 그래, 뭐랄까, …’최면을 거는 듯한’ 눈(眼)이다. “…기억해두길, 인간.” 핑크빛으로 순진하게 빛나던 것으로 기억하는 큰 눈이 점차 붉게, 붉게 물들어나갔다. 가장자리에 금빛 테두리 가 쳐져 있는, 새빨간 핏빛으로. 순간 다니엘라의 몸이 굳었다. 굳은 다니엘라의 목으로 아유니가 손을 가져갔다 . 아유니의 키가 더 작았지만 목으로 손을 뻗기에는 무리가 없는 차이였다. “더 이상, 건방진 행동을 용납하지는 않겠다. 알아들었나?” “…네…….” 아유니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중앙, 붉은 눈 정중앙에- ‘짐승의 눈’의 중앙에서 요사스러운 기운이 흘러나와 다 니엘라의 몸을 꽉 붙드는 것 같았다. 그대로, 아유니는 싱긋 웃었다. “좋아. 이제, 너는, 내가 이곳에 왔던 기억을 잊는다.” “네…….” 아유니는 만족스럽게 몸을 돌렸다. 문을 나서려던 아유니는 순간 몸을 멈칫했다. 불유쾌한 ‘냄새’가 방 안을 떠도 는 걸 감지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문고리에 손을 댄 그대로 몸도 돌리지 않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너 역시 마찬가지라는 걸 명심해라.” ================================================= 무지 카리스마틱하게 나온 아유니.-ㅅ-;; 저는 나름대로 좋아하는 캐릭터인데, 어째 싫어하시는 듯 하다는. 아아. 입안이 아파요. 사랑니라나 뭐라나.[...] 제목을 바꿨습니다. '목걸이 실종사건'. 이게 더 낫지 않나 싶어서요^^ 제목 바꾼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닌 걸로 기억하는데-... 뭐 어쩌겠어요;;[퍽!] 흐음. 다니엘라. 무지 싫어하시네요; 그다지, 튀는 짓은 안 했- 는데.[제 기준에는] 멜은 donghee425@hanmail.net이구요, 리플은 꼭 달아 주세요^^ 즐독하세요! 제 목: [공녀+신혼일기 합작 외전]백설공주 신혼 일기, 공녀 합작 외전! <백설공주> * * * * * * * * * * * * * * * 백설공주:이디스 마녀(왕비):네르 왕자:로드 왕자의 백마용 드래곤:페리 말없는 거울:유리아덴 이동용 손거울:에리나 사과 심부름 마녀:루피아 왕:아유니 숲의 요정:세키라 난장이:공녀 구출대(?)+아로데, 세이카루스 +++++배역 설정에는 ‘마틴’님이 수고해 주셨습니다.+++++ 아주 아주 오랜 옛날에, 아무 걱정도 없는 평화로운 왕국에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왜 하필이면 옛날 옛적 이야기이냐고는 묻지 마세요. 몇 년도, 며칠에 일어난 일이라고 일일이 따질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여하튼, 그런 평화로운 왕국의 왕과 왕비에게는 걱정거리가 따-악 하나 있었답니다. 바로, 둘 사이에 아기가 몇 년째 태어나지 않았다는 거예요. 원래 이런 일은 시기적절하게 해결되는 거예요. 그래야 이야기가 풀리잖아요? 곧 왕과 왕비 사이에는 어여쁜 공주님이 태어났고, 왕비는 아이를 낳다 하늘나라 천사님의 인도를 받아 천국으로 떠나게 되었지만(한 마디로 죽었다는 거에요) 왕은 공주님을 ‘백설’이라 명명하며 정성스레 키웠답니다. 그래봤자 시녀들이 알아서 키워 줬겠지만 말이에요. “…오늘, 재… 미있게 놀았느… 냐?” “상관할 것 없지 않은가.” 참 사이좋은 부녀(父女)죠? 아유니 왕의 볼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네요. 왜일까요? 사랑하는 이디스 백설이 너무나 귀여웠던 탓에 꼭 껴안아 주고 싶은데, 체면 때문에 차마 그럴 수 없어 참느라 그런 것일까요? 왕도 참 할 짓 못 되네요. 그런데 사랑하는 딸을 보는 아유니 왕의 눈이 뜨겁게 불타오르는 것은 대체 왜이며, 아버지를 바라보는 딸(?) 백설 이디스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있는 것은 대체 왜일까요? 두 사람이 꼭 원수처럼 느껴지는 건 이 필자만의 착각일까요?(그렇겠지요) 딸을 바라보는 아버지 아유니 왕의 눈이 걱정스럽게 빛났습니다. (흠, ‘걱정스럽게’치고는 너무 밝군요. 좀 감아 주세요. 아, 좋아요. 그 정도면 됐군요) 아유니 왕은 결심했습니다. 왕비가 필요하다고 조르는 대신들도 그렇고, 딸에게도 어머니의 존재가 필요하리라 생각한 거지요. 그(그녀)는 새 아내를 맞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왜 당신이 온 거야!” 새로 온 왕비를 본 아유니 왕이 외쳤습니다. 아, 이런, 어떡해요. 왕의 안색이 창백하군요. 반면에 네르 왕비는 방 안의 물건들을 구경하기에 바쁩니다. “왜 루피아 님이 안 오시고 네가 온 거냐구우~” “어? 몰라. 나보고 이리로 오라고 시킨 걸 어떡해. 그러고보니 내정자가 루피아였나? 이디스하고 모녀지간이 되기 싫다고 절규하던 게. 아아- 세이는 언제 오려나.” 아유니 왕은 털썩 주저 앉았습니다. 앗? 제가 말 안 했었나요? 왕비는 네르로 이미 배역이 끝났는데요. 어쨌든, 그건 나중에 하시고, 대사부터 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아유니 왕은 부들부들 떨며 입을 열었습니다. 참으로 힘겨워 보이네요. “걱정 마. 이제 너 대사 끝났어. 나중에 루피아가 내 심부름 하러 오면 그때 만나.” 네르 왕비께서는 사악하게 웃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방 구석으로 아유니 왕을 몰아 버리시고는, 그 위로 직접 준비해온 검은 천을 마구마구 두르셨습니다. 이런! 화려했던 방이 온통 어두침침하게 변해 버리고 말았네요. 네르 왕비는 씨-익 웃으시며 벽에 거울을 하나 걸고, 크게 쉼호흡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거울에 이마를 박으셨습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거울 중앙에 정확하게 금이 갔군요. 네르 왕비는 그 다음 동그랗게 중앙의 거울 조각을 떼어 내셨습니다. 그리고 말하셨지요. “거울아 나와랏!” 아아, 정말 간편하기 짝이없는 주문 아닌가요? 그녀가 부쉈던(…;) 거울 구멍 사이로 한 사람의 얼굴이 들이밀어 졌습니다. 싫은 표정이 역력한 짜증스런 얼굴이군요. 아아, 유리아덴 벽거울입니다. “키하하하하! 캬캬캬! 너, 너무 웃겨! 거, 거울…… 거울! 아하하! 하하하핫!” 네르 왕비, 그만 웃고 얘기 진행시켜 주세요. 네르 왕비는 한참을 신나게 웃었습니다. 유리아덴 거울님의 얼굴에 불쾌감이 서리네요. 무섭습니다. 네르 왕비는 배를 잡고 낄낄대다가 주머니에서 이동용 손거울 에리나 양을 꺼내십니다. 작게 변한 에리나 양께서 얼굴만 쏘옥 내밀고 계시네요. 안녕하세요, 에리나 양? 반가워요. “그다지 안녕하지 못해요… 왜 하필이면 이런 역이에요!” 글쎄요. 마틴 양께 여쭤 보세요. 그녀가 부쉈던(…;) 거울 구멍 사이로 한 사람의 얼굴이 들이밀어 졌습니다. 네르 왕비께서는 가까스로 웃음을 누르시고는 말씀하십니다. 아아, 동작 잊지 마세요. 네르 왕비는 손을 허공에 휘저으며 애써 낮은 목소리로 말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가 누구냐?” “…….” 유리아덴 거울님, 심통이 난 것일까요? 말은 안 합니다. 대사가 있는데… 이쪽은 아무리 말해봤자 소용없을 것 같습니다. 유리아덴 거울님께서 대답이 없자 네르 왕비께서는 다시 자지러지게 웃기 시작하십니다. 분위기 흐려지는군요… 아아, 안 되겠네요. “여자는 없고, 남자는 있… 아니아니, 여장남자가 있어요!” 에리나가 재빨리 유리아덴 거울님의 대사를 말합니다. 다행이에요. 이야기가 진행되겠네요. 네르 왕비님은 고개를 끄덕이십니다. 그렇군요. 이디스 백설공주님이 아무리 예쁘다고는 해도 여장남자 이상은 못 되시지요. 통탄할 노릇입니다. “그래? 누군데? 아, 이 장면 빨리 끝내고 싶다.” “이, 이디스 백설공주세요. 당신의 양녀이지요. …저도 마찬가지에요.” 에리나 손거울께서 말씀하십니다. 결국 유리아덴 거울님께서는 입도 뻥긋 안 하시네요. 대사 없이 지나가려는 모양입니다. 그런 유리아덴 거울님을 보며 네르 왕비께서는 또다시 웃기 시작하십니다. …독백은 저 웃음소리에 곁들여 보내 드리겠습니다. 분위기 좋군요. 네르 왕비의 웃음소리는 괴기에 가깝습니다. “캬캬캬캬! 키킥, 하하하하하~ 크쿠쿠쿠쿠!” ‘남장여자주제에 가장 예쁘단 말이지? 좋아, 혼쭐을 내주마! 다시는 그런 건방진 생각을 못 하게 해 주겠다!’ …라고 독백해야 하지만, 네르 왕비께서는 이 대사를 읽어줄 의향이 전혀 없으신 모양입니다. 자, 다음 장면으로 넘어 가지요. 이쪽은 이미 통제불능의 상황 같습니다. 말없는 유리아덴과 그런 그를 보며 죽어라 웃어 재끼는 네르 왕비, 구석에서 침울하게 머리 박고 계신 아유니 왕. 그들을 바라보며 에리나 손거울만이 식은땀을 줄줄 흘리십니다. …거기, 여기 문 잠가버려! * * * * * * * * * * * * * * * 어찌 됐든, 이리하야 심술궂은 ‘새어머니’를 맞게 된 이디스 백설공주님. 공주님의 고생길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군요. 참으로 험난한 가시밭길입니다. “…넌 왜 여기있나.” “왜긴 왜야~ 네 새어머니니까 그렇지! 히야, 과연 어울리기는 하는구나. 세이보다는 덜 예쁘지만, 어쨌든.” 왕비 네르, 신기하다는 듯이 이디스 백설공주님의 이모저모를 뜯어 보십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남편인(…아유니 왕?) 세이카루스의 자랑을 빼놓지 않으십니다. 이디스 백설공주님은 약간 심기가 불편하기는 하셨지만 꾹 참으셨습니다. 왜냐구요? 그래야 스토리가 진행되기 때문이죠. 이디스 백설공주님은 현명하게도 이 역할을 빨리 끝낼 수 있는 방법이 빨리빨리 장면전개가 되는 방법밖에는 없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기특도 해라~ “이 왕궁 구석구석을 이 걸레로 깨끗하게 닦고, 닦고, 또 닦아. 거울도 깨끗하게 닦고 말이야.” 우선 왕비 네르는 일차적인 것부터 시키셨습니다. 심기가 불편하신 듯, 이디스 백설공주님, 눈썹을 치켜 올리십니다. 하지만 네르 왕비가 끄덕할 리가 있나요. 그냥 생긋이 웃어 주십니다. 아, 안 돼요. 거기서 웃으시면 안 된다고요. “싫다.” “엥?” 이렇게 나올 줄은 모르셨던 네르 왕비님. 조금은 벙찐 모습이십니다. 그러나 곧 페이스를 되찾으시고는 말씀하십니다. “분명, 대본에는 ‘네, 하고 대답한 뒤 걸레 가지고 뒤뜰로 가서 욕을 바가지로 한다’고 되어 있는데?” 물론, 거기서는 약간 무리가 있을 법하지만 그래도 어쩝니까? 대본이 그러한데 말이에요. 네르 왕비님의 말에 이디스 백설공주님은 그냥 빤히 쳐다봐 주십니다. 네르 왕비님은 머리를 긁적대시다가 말씀하십니다. “…아무나 시켜~” “그러지.” 죽이 척척 맞는 커플입니다. 하여간 네르 왕비는 그날 이후 계속해서 이디스 백설공주님을 괴롭히셨고(?), 이디스 백설공주님은 슬펐습니다(???). 그래서 성에서 도망치기로 하셨지요. 이디스 백설공주님은 눈물을 뿌리며(…) 성에서 도망치셨습니다. 허공에 떠오른 달을 보고 이디스 공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텔레포트.” 네, 그렇습니다. 이디스 백설공주님은 귀찮으셨던 겁니다. …여하튼 그래서, 이디스 백설공주님은 난장이의 집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난장이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무지무지하게 큰 침대들 일곱개가 주르륵- 놓여 있습니다. 졸리셨던 모양인지, 이디스 백설공주님은 그 중 하나를 선택해 그 속으로 꾸무럭거리며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잠이 드셨죠. 대기하고 있던 일곱 명이 한꺼번에 주르륵 몰려오셨습니다. 방 한 쪽에, 화면에 비추지 않도록 죽어라 노력하며 처박혀 있었던 게 힘들었던 모양이신지 연신 팔다리어깨를 외치며 주무럭거리십니다. 불쌍한 세이카루스 난장이님, 제일 밑에 깔리셨던 모양이군요. 아로데 난장이는 세이카루스 난장이님 바로 위에 있었던 주제에 쪼르르 제일 먼저 이디스 백설공주님께 달려가 눈을 반짝이십니다. 힘들지도 않은 모양입니다. “…오호! 과연~” 뭐가 ‘과연’이라는 걸까요. 알 길이 없지만, 이디스 백설공주님의 이마에 핏줄이 하나 솟아오른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일곱 난장이들, 상당히… 귀여운 모습입니다♡ 머리 위에 올려쓴 난장이모자, 하나같이 초록색 조끼에 꽤나 후줄근한 옷차림들이지만, 아아, 너무 귀엽습니다.(디즈니의 백설공주에 나오는 난장이의 복장을 참조하십시오) 아로데 난장이는 이상하게 색기를 흘리는군요. 희한한 일입니다. 카에리드, 이데카른, 트로에 난장이는 침대 위에 누운 이디스 백설공주님을 보시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하십니다. “…감히, 우리 루피아를…!!” 오오, 그렇군요! 비록 이 극에서는 아니지만 루피아라는 여동생을 빼앗아간 ‘괘씸한 놈’이 바로 이 이디스 백설공주님이신 겁니다! 오빠된 입장에서 당연히 곱게 보일 리가 없지요. 또한 그녀(?)의 본직을 떠올리며 분노하는 바르에든과 에드윈드가 있지요. 다섯 명의 불타는 시선과 한 명의 흥미로운 시선, 그리고 외면한 채 바깥만 쳐다보는 사이에서 이디스 백설공주님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몸을 일으키셨습니다. “……씻을 물 내놔.” “후… 후후후훗. 큭큭, 자, 잘 어울리시는군요. 키키킥!” 아로데 난장이님, 이디스 공주님을 어찌 아시는 걸까요?[갸웃] 상당히 이상한 일입니다아. 아로데 난장이님의 말에 이디스 공주님, 그의 뒤통수에 주먹을 곱게 날려 주신 뒤 일어나십니다. 스스로 준비할 모양입니다.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아로데 난장이님, 그대로 킬킬대며 배를 잡고 바닥을 구르십니다. “…지금은, 이대로 넘기지만- 본편에서 만나면! 으드득.” “시끄럽다. 만나려면 멀었다고 들었어.” 흐음, 더 이상 얘기가 진행되면 스토리 유출이 될 수도 있겠군요. 그건 곤란합니다. 카에리드 난장이가 이를 부드득 갈며 말씀하시자 이디스 공주님께서 차갑게 대꾸해주십니다. 이때, 세이카루스 난장이께서 등장하시어 이디스 공주님 앞에 서십니다. 그는 가볍게 웃으시며 손을 내미셨습니다. “저번 죄담회 때 만나고 처음 뵙는군요. 오랜만입니다.” “…그렇군.” 세이카루스 난장이께서는 피식 웃으셨습니다. 그리고는 함께 방을 나서시며 말씀하십니다. “고생이… 심하시군요.” 네에. 그렇습니다. 이디스 공주님, 찌푸려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십니다…. * * * * * * * * * * * * * * * 그럭저럭, 이디스 공주님과 일곱 난장이는 행복한(???) 생활을 보내셨습니다. 네에, 만날 이디스 공주님께 깨지는 생활이 행복하다면 행복한 거죠. 적어도 미인(…)의 손에 깨지잖아요? “흐야아압!” “…늦다.” 이디스 공주님, 곡괭이(무기가 지급되지 않았다고 합니다)를 들고 휘두르는 카에리드, 에드윈드 난장이의 위로 가볍게 뛰어올라 뒤통수를 가볍게 차 주십니다. 이제 만성이 되신 모양입니다. 구경하고 있던 아로데 난장이께서는 박수를 칩니다. 세이카루스 난장이는 우아하게 독서를 하고 계시는군요. 빨리 스토리 진행이 되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모양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곧 마녀가 올 테니까요. 예정대로, 사과를 파는 마녀로 변장한 루피아가 난장이들의 집 앞에 서 계십니다. 그러나 난장이의 집은 그야말로 ‘난장판’! ?아아, 이게 어디를 봐서 ‘집’입니까. 지붕도 없고, 부서진 벽의 잔해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평화로워 보이는 곳이라고는 세이카루스 난장이께서 독서를 하시고 아로데 난장이께서 구경하시는 곳 뿐입니다. 루피아 마녀는 시선을 모을 필요성을 느끼셨습니다. “후읍~ …-사과 사세요오오오오오오오오오!!!!” 네에, 엄청난 성량!! 단번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모입니다. 그녀는 대충 근처에서 따온 사과 하나를 옷에 문질러 닦은 뒤 이디스 공주님께 내미셨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사과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바로, 이디스 백설공주님의 옷차림!! ?때문이었습니다. 이건 영락없는 여자가 아닙니까아아. 루피아 마녀는 충격에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조금 쑥스러우신가요, 이디스 공주님? 얼른 사과를 짚어 한 입 베어 뭅니다. 그리고는 루피아 마녀의 팔목을 끌어 당기십니다. 에? 에? 하는 사이, 루피아 마녀는 오빠들과 감격적인 해후도 나누지 못한 채(오빠들은 이미 다 기절하셨다고 합니다) 숲 어딘가로 끌려 가십니다. 어어? 어디 가세요! 대사 남았어요오! 이디스 공주님은 결국 숲 깊숙이까지 들어오셨습니다. 루피아 마녀의 손목을 잡은 채 말이에요. 드디어 멈춰서자, 루피아 마녀님… 결국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고 마십니다. “아하하하하! 하하하하핫, 키킥, 하하하하하~” “…웃지 마.” 이디스 공주님, 심기가 불편하신 걸까요? 왠지 얼굴이 빠알개 보이는 건 대체 왜일까요. 룰루루~ “…하… 하하하. 킥킥… 자. 이제 여기 누우세요. 킥킥… 아, 배아파라.” “…왜?” “왜긴 왜에요. 빨리 끝내야죠. 계속 이짓 할 생각이세요? 얼른얼른 해야 빨리 지나간다고요~” 이디스 공주님, 동감이신 모양입니다. 우후훗~ 루피아 마녀님,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같이 왕자(!!)를 기다려 주기로 하신 듯합니다. 왕자가 누군지 참 궁금하기도 했고요. 아직 배우(?)들에게는 누가 어떤 역할인지 다 전해지지 않은 듯 하네요. 뭐, 좋아요. 아무렇게나 누워있던 이디스 공주님은 정녕 아무 것도 모르고 계신 듯 합니다아. 므흐흐흐, 잠든 공주님을 깨우는 건 왕자님의 키! 스! 라는 걸 왜 모르시고 계시는지? 갑자기 너무 즐거워집니다. 기다리고 계시던 때가 왔습니다![두둥] 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왕자님이 등장하실 때가 된 겁니다아. 숲에 갑자기 커다란 그늘이 졌습니다. 구구구구구궁- 하는 떨림과 함께 숲 저편에서 붉은 드래곤이 나타났습니다! 악룡의 등장인 걸까요? 아닙니다. ‘왕자님’의 등장입니다. “홀홀홀홀홀홀~ 여기 내 새 부인이 될 사람이 있다고 하던데에~” “다 늙어서 무슨 주책이에요, 로드님!! 이거, 이거 안 놔요? 젠장, 네르 누나한테 데려다 준다며~ 근데 내가 왜 여기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건데에!!” 페리 백마(?)님과 로드 왕자님의 등장이십니다. 화려한 등장에 루피아 마녀, 벙찐 표정이십니다. 이디스 공주님은 무지하게 심기가 불편하신 모양이군요. 하긴, 나라도 싫겠어요. 페리 백마는 네르 왕비님께 가는 줄 알고 따라 온 모양이네요. “…이디스 님, …저 사람하고……?” “…끔찍한 소리.” “그쵸?” “이제 그만 가는 게 낫겠군.” 루피아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나 로드 왕자님은 자박자박 그들의 곁에 다가오셨습니다. 명색이 로드!! 아니겠어요. 이디스 공주님은 루피아 마녀님의 손목을 붙잡고 얼굴을 찌푸리셨습니다. 그 모습을 본 로드님의 눈이 심상찮게 반짝였습니다! 로드는 눈을 반짝이며 달려와 그들의 앞에서 소리치셨습니다. “미소녀, 미소녀라니! 오오오, 그림이 되는 구나! 자, 포즈를 잡아 보아라~ 미소녀는 언제 어느 때나 갚어치가 있는 법! 거기다 기막힌 미소녀(?) 둘이면 더 말할 것도 없지. 베리 큐티 걸(참고로, 이디스 공주님을 말하는 거래요)과 창백한 병색 미소녀(…마녀의 로브가 그렇게 보였나봐요)라니~” ……로드 왕자의 취미는 변함이 없으십니다. 루피아 마녀와 이디스 공주, 때려 치기로 결심한 마당에 뭐가 더 필요할까요. 서로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본 두 명은 동시에 입꼬리를 올려 웃으셨습니다. 그리고, 루피아 마녀는 로드의 안면에 주먹을 메다 꽂으시고 이디스 공주는 그 뒤 마력탄을 날리시는군요. 호흡이 척척! 과연 베스트 커플입니다. 다른 장면으로 잠시 넘어가볼까요? 숲에서 평화롭게 살던 숲의 요정, 요정 세키라. 갑작스런 드래곤의 등장에 너무 놀라 벌떡 일어났다가 난장이 하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게 바로… 누구긴 누구에요, 아로데 난장이지요. “가, 감사합니다. 도와주셔서… 으응?” “뭐어얼~ 우리 사이에. 키킥! 요정 복장도 잘 어울리는 걸? 정말 작군.” …아로데 난장이, 대사를 해 주세요. 대사를! 세키라 요정, 순간 당황한 듯 하더니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십니다. 그리고 생긋 웃으시며 말씀하시는군요. “고마워요….” 아. 깜찍하군요. 아로데 난장이는 히죽 웃으시며 세키라 요정을 어깨 위에 올려 놓으십니다. 이미 볼장 다 봤다는 태도로군요. 이런이런, 같은 숲에 살면서 어떻게 한 번도 못 만났던 거냐고 묻지는 마세요. 세상이 다~ 그렇고 그런 거 아니겠어요? 따지면 곤란해요. 독서를 하고 계시던 세이카루스 난장이께서는 이제 슬슬 부인(?)을 데리러 가야 할 때라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 오래 떨어뜨려 놓은 게 아닌가 싶었거든요. 몸이 근질근질해 진 네르 왕비께서 언제 어떤 사고를 치실 지 모르잖아요. 게다가 말이에요, 이번 세이카루스 난장이의 역할은……. “텔레포트!” 두고 보면 아십니다. 왕궁에 도착한 세이카루스 난장이,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십니다. 그리고는 곧 유리아덴 거울 앞에서 배를 잡고 웃고 계시는 네르 왕비를 부르셨습니다. “어? 세이! …아, 이게 아니지. 넌 누구냐. …누군지는 알지만, 일단.” 네르 왕비, 그 와중에 대사 하겠다고 저러십니다. 세이카루스 난장이, 유리아덴 거울의 띠꺼운 눈빛에 괜히 불편해지십니다. 그리고는 얼른 대사 끝내고 이딴 극 때려 치워야 겠다는 생각을 하시지요. “가죠. 이제 끝낼 때가 다 되었습니다.” “에에, 벌써? 쳇. 나름대로 재밌었는데.” “…대본에는 ‘세이카루스가 꼬시면 냉큼 일어나 같이 간다’고 되어 있습니다. 제 역할은 왕비를 꼬시는 역할이라는 걸 잊으셨습니까?” “그야 안 잊었지. 그치만 ‘좀 놀다 가도 된다’고 괄호 안에 적혀있는 거 안 보여?” “저는 더 안 놀고 싶습니다.” “야? 야! 싫어, 더 놀다 가자니깐~ 야아!!” ……세이카루스 난장이. 삐지셨군요. 네르 왕비가 자신 없는 새 너무 재미있게 놀아서 심통이 나신 모양입니다. 후후훗- 어쨌든, 이러저러하게 막을 내리게 되는 군요. 아아, 안타까워라. 재미있으셨습니까, 여러분? 비록 좀… 난잡하기는 했지만 이상 연합극 ‘백설공주’는 막을 내리겠습니다. 끝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에에, 결국 끝까지 대사 한 마디 없으신 몇몇 분께는 상당한 벌을 드리기로 약속드리지요. 예를 들어 감봉이라든지 하는 것 말예요. 그럼, 안녕히 계시길~ =========================== 신혼일기 안 읽으신 분들은, 부분부분 이해가 안 가실 수도;; 있겠군요. 하하핫. 갑자기 놀고 싶어져서.. 말이에요. 이제 다음 주면 고등학생이 되는데...-ㅅ- 하하하하. 아. <목걸이 실종사건>(2)가 부분 수정되었습니다. 에.. 역시 다음으로 넘기자니 좀 부자연스럽기도 하고, 이디스 문제로 넘어가야 할 것 같아서요. 그거 양해해 주시구요~;; 메일은 donghee425@hanmail.net!! 리플 꼭 달아 주시구요. 즐독하세요^^ 제 목: [수정판] 공녀(貢女) : 제18화 [축제는 즐겁다](1) #. 제18화 [축제는 즐겁다] * * * * * * * * * * * * * * * 나에게 ‘마왕’이라는 직위를 가진 그 남자는 아주 먼 곳의 ‘커다란’ 존재였다.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그 커다란 존재감은 결코 그를 가볍게 느끼지 못하게 했다. ‘마족’의 ‘마왕’이라는 직위의 그 커다란 벽은, 내 바로 옆에 존재함에도 저 멀리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다고 늘 말하고는 했다. ‘마왕’이라고 새겨넣은 채 더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던 그가, ……. ==================루피아 자서전' 中 발췌======================= “아족(兒族)이?” 이디스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에크는 잔뜩 긴장한 채 그에게 남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예. 그들은 일정한 거처를 두고 살지 않는 종족이고, 어릴 때는 아무 보호나 능력도 없이 혼자 성장해야 하기에 수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같은 아족이라고 해도 일단 성장한 아족은 먼저 싸우고 볼 정도로 호전적인 종족이죠.” “그 정도는 알고 있다. 용건이나 말해.”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는 에크에게 나지막하게 이디스가 말했다. 쓸데없는 말을 듣는 건 시간낭비밖에 되지 않는다. 에크가 서열 87위의 꽤나 강한 축에 드는 마족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의 이러한 태도는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아로데나 로이드윈, 유리아덴은 정말 편했다. 예전부터 계속 같이해왔기 때문인 걸까, 그들은 그가 듣고 싶어 하는 말만을, 정말 필요한 말만을 했다. 쓸데없다고 생각되는 일들은 일체 말하지 않았다. “그들이… 그림자 족에 붙을 것 같습니다.” 같이 에크의 말을 듣고 있던 아로데의 눈이 커졌다. 지금까지, ‘마왕 교체식’이 있고 20년 후인 지금까지도 그림자 족에 붙으려고 했던 종족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장로급의 지위를 가진 아족 하나가 제 영지에 와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림자 족에서 오는 자와 접촉을 시도하려고 하는 듯 한데, 제가 부리는 안개족이 우연히 기척을 잡아내서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디스는 작게 미간을 접었다. 안개족의 말이라면 거의 틀림없을 터였다. 안개족은 그들의 몸을 안개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종족이니까 말이다. 미세한 수분으로 변화해 정탐하는 데에는 그들을 따라갈 종족이 없다고 한다. 몸을 변화시키는 것 외에 다른 능력은 조금도 없지만, 순수 ‘붉은 눈’족이라면 누구나 부릴 수 있는 그들은 ‘붉은 눈’족의 눈귀가 되길 자청하며 이제껏 맥을 이어오고 있었다. 그림자 족을 제외하면 현재 마왕에게 반(反)하도고 살아남아 명맥을 잇고 있는 종족은 없다. 그리고 그나마 그들이 맥을 이어갈 수 있는 이유도 그들이 강해서가 아니었다. “이유는?” “아… 거기까지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에크는 허리를 푹 숙이며 말했다. “하지만 오늘 밤 있을 축제 때에는 꼭 잡아 내겠습니다. 그 틈에 접촉을 시도할 게 뻔하니까 말입니다.” 에크의 다짐어린 말에 이디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축제가 있다, 라. 그는 머릿속 한 구석에서 루피아의 모습을 자연스레 떠올렸다. 에드라스에게서 다녀 온 날 밤 본 이후로는 보지 못했다. 고작 하루 못 본 것일 뿐인데, 어째서인지 꽤나 오랫동안 못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주 이상한 느낌. 생소한 기분이었다. “여기에서 처리해야 할 일은 그게 다인가?” 에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디스는 에크의 방을 나서며 이 곳의 축제기간 동안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에크 성에서의 축제는 마계에서도 아주 유명한 편에 속했다. 전대 마왕과 카마프, 딜렌은 이런 이 성의 축제에 매번 왔고, 카디스- 그의 아버지와 세 측근들, 그리고 딜렌의 강요(?)에 의해 그 역시 매번 이 축제에 참석했다. 그는 그 때마다 이 성에서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이디스는 축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로 시끄러울 뿐만 아니라 성가셨기 때문에. 물론 그 생각에 ‘딜렌’이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딜렌은 그와는 달랐다. 근본부터가, 처음부터 ‘다른’ 종류였다. 같은 카디스의 피를 타고 났으면서도- 그와 딜렌은. 카마프, 그녀의 영향일까? 아니면 무언가 나에게 모자란 부분이 있는 것일까. 조심스레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 그는 언제나 답을 찾지 못해 묻어놓고는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딜렌과 그가 다른 점을 구체적으로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와 다르구나.」 이디스는 가만히 미간을 접었다. 카마프에 대한 것을 생각할 때마다 카마프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오고는 했다. 「인형! 당신은 인형이야! 어머님이 그랬어. 당신은, '감정'도 못 느끼는 단순한 '인형'일 뿐이라고-!! 그래서 당신은 절대 '강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고…」 * * * * * * * * * * * * * * * 《생각보다 전개가 느리기는 하지만- 이대로라면 조금 복잡하긴 하더라도 내가 생각했던대로 진행되어 가겠는 걸. 조금만 더 기다리면 결과가 나오겠어.》 클리오라는 빙긋이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둥근 수경(水鏡)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수면에 그려져있던 이디스의 모습이 흐려지며 투명한 물빛으로 덮였다. 《너의 그런 점이 마음에 안 들어, 클리오라.》 오르가프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는 수경 옆에 내려 앉으며 재밌다는 듯 자신을 보는 클리오라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나는 지겨운 게 싫다네, 오르가프.》 그렇게 말하며 클리오라는 수경 속에 물에 손을 담궜다. 그리고는 휘휘 젓기 시작했다. 《이제 와서 쓸데없는 격식차리지 마.》 오르가프는 한숨을 내쉬고 골치아프다는 듯이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비록 몇 백년 간 간섭하지는 않았지만 천계의 상황이 그에게는 충분히 두통거리가 될 만했다. 언제나 그래왔던 ‘천계’이지만, 이번의 경우는 더욱 복잡했다. 특히 얽히고설킨 인연들은 사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어가고 있었다. 쓸데없는 감정마저 더해진 지금 이 상황은-. 《한 가지 물어보겠는데, 클리오라.》 《뭔데?》 《-…네가 만들었냐?》 오르가프의 뜬금없는 질문에 클리오라는 ‘무슨?’이라고 쓰여진 것 같이 순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 표정은 오르가프의 이마에 혈관마크 하나를 새기는 것 외에 어떠한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글쎄… 후후, 뭘 말하는 건지 말해줘야 말이지. 두서없이 그렇게 물으면 돼?》 《내가 뭘 말하는 지는 이미 알고 있잖아.》 미간을 찡그린 오르가프의 말에 클리오라는 빙그레 웃기만 했다. 오르가프는 골치아프다는 듯이 끄응, 신음을 흘렸다. 대체 또 무얼 꾸미고 있는 걸까. 언제나 그랬듯, 클리오라는 저런 미소를 지을 때면 무엇이든 일이 터질 때까지 말해주지 않았다. 《원래는, 우리 단 둘뿐이지, 오르가프?》 클리오라가 싱긋 웃는 얼굴로 말했다. 《…당연하지.》 《왜?》 《둘이서 태어났잖아. 다른 존재는 없었잖아. 그렇게 만들어졌잖아.》 세상에서 자의(自意)로 태어난 존재는 그들 단 둘 뿐이다. ‘진짜’는 그들 둘 뿐이고, 아무도 ‘진짜’가 아니다. 모두 ‘가짜’. 《그럼, 우리는 왜 여기 있지?》 《…? 그거야- 우리가 태어난 이유는, 어머니 ‘카오스’의 뜻에 따라 세상을 흘러가게 하기 위해서지.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닐 텐데?》 《몰라서 묻는 것이 맞아. 원래부터 단 둘이었는데, 다른 것들을 굳이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지? 의미없는 창조와 파괴를 계속해야 하는 이유가 뭐야? 세상이 ‘흘러간다’고? 흘러가지 않아. 반복할 뿐이지. 우리만으로도 세상은 충분히 숨쉬고 살아가.》 잠시 클리오라는 숨을 골랐다. 《우리는 왜 쓸데없는 일을 반복하지? 이제 그만… 끝내고 싶지 않아? 난, 모든 걸 부숴버리는 짓- 이제는 지쳐서 못 하겠어.》 클리오라의 말에 오르가프의 침묵은 더욱 짙어졌다. 잠시간 그들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아 사라질 줄 몰랐다. 오르가프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둘 뿐이지?》 《그래.》 * * * * * * * * * * * * * * * 뭔가 잘못됐다. 이건, 이 상황은, 절대 이렇게 흘러가서는 안 된다! 심각한 상황의 오류를 느낀 루피아는 아찔함에 눈을 질끈 감았다. 옆에 선 세키라나 에리나 역시 이 의외의 상황과 반응에 놀란, 아니, 경악한 눈치였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둘의 표정을 들여다보듯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어째서! 단 하루만에 이렇게 사람이 180도 바뀌어버릴 수가 있는 거냐고?’ 루피아는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저, 저, 저 웃는 낯짝을 어디다 치워버릴 수는 없는 거야?! 어머니의 목걸이에 손을 대었다는 걸 알았을 때는 자신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그냥 확 일을 저질러(?) 버릴까 심각하게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루피아는 단순하게 ‘괴롭혀주는’ 선에서 봐 주기로 했다. 물론 저지른 짓은 용서못할 테지만 일을 더 크게 번지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청했던 ‘악녀’ 역할에도 충실할 겸, 독톡히 괴롭혀주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이게 뭐야?! “제, 제가 뭘 잘못했나요? 왜 그렇게 쳐다 보세요?” …저 여자 누구야? 다니엘라의 ‘순진한’ 눈이 반짝 빛남과 동시에 흘러나온 말에 루피아의 표정이 더욱 굳었다. 일부러 저러는 걸까? 아니다, 그렇지는 않아 보였다. ‘저런 몰골’로 저렇게 ‘퍼질러 앉아’서 ‘저런 눈’을 할 인간으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았었으니까 말이다. 검은 기름을 덕지덕지 묻히고 헤~ 하고 멍청하게 웃는 저 여자는 절대 다니엘라가 아닐 것이다. 절대로! 그렇게 믿느니 차라리 달이 하나라고 하는 게 더 신빙성이 있겠다. 아침에 루피아가 뿌려놓은 검은 기름을 밟고 미끄러져 넘어진 다니엘라에게 다가가 비웃어주려 하던 중, 루피아는 아주 황당한 말을 들어야 했다. “어머? 루피아 님, 편히 주무셨어요?” …라는, 안부 인사를. 그것도 다니엘라는 아직 기름 위에 주저앉아 몸을 일으키지 않은 채였다. 그런 모양새로 베시시 웃으며 하는 안부인사라니, 순간적으로 소름마저 끼쳤다. “누구세요?!” “예? 저 다니엘라에요. 다니엘라 드 카루크. 호호, 벌써 얼굴을 잊으신 건 아니시겠죠?” ‘당신 얼굴을 어떻게 잊어!’ 다니엘라는 기름 위에서 벌떡 일어나 시꺼매진 드레스는 신경도 쓰지 않고 싱글벙글 웃으며 루피아들에게 다가왔다. “식사 아직 안 하셨죠? 어서 가요.” “…….” 루피아는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다니엘라의 기름묻은 손에 질질 끌렸다. 네 사람의 뒷모습을 가만히 자리에 서서 쳐다보던 아유니는 슬쩍 뒷머리를 긁적였다. 어젯밤 다니엘라에게 그녀는 ‘최면’을 걸었다. 그런데 그 효과가 너무- 이르게 나타난 것 같았다. 갑자기 루피아에게 미안해 진 아유니는 짧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음… 실수다.” * * * * * * * * * * * * * * * “다니엘라 님? 왜 그러세요? 왜… 갑자기….” “응? 왜? 지금 나 뭐가 이상하니?” 크렐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갑자기 다니엘라가 바뀌어 버렸다.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는 거나, 뭐가 묻은 게 있는지 얼굴을 더듬으며 확인해보는 다니엘라는, 절대 그가 알던 다니엘라가 아니었던 것이다. ‘어젯밤에 왔던 그 여자가… 대체, 무슨 짓을 해 놓은 거야!’ 얼음같이 싸늘한 얼굴로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경고하던 냉랭한 음성이 다시금 떠오르자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진홍빛 머리카락 사이로 가라앉은 황금빛 눈이 침착하게 빛났다. 그는 다시 한 번 다니엘라를 보며 그녀를 불렀다. “다니 누나.” 크렐의 부름에 다니엘라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베시시 웃으며 말했다. “…왜 그렇게 불러? 나야 나쁘지 않지만… 호호, 그러고보니 그것도 좋네.” “…….” 크렐은 그녀의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먼저 그렇게 부르라고 한 건 다니엘라였다. 그녀가 그렇게 부르라고 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와의 일을 완전히 잊어버린 듯했다. “…내가… 누구인지 아세요?” “응? 그야 내게 배치된 상냥한 시종 크렐이지, 누구긴 누구겠어. 안 그래?” 생긋. 다니엘라는 다시 웃었다. 크렐은 그런 그녀를 보며 얼굴을 굳혔다. 싸늘하게 굳은 그의 표정에 뭔가 이상함을 느낀 다니엘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잠시 뒤 크렐은 다시 빙그레 웃었다. 조금 전 굳었던 표정은 충분히 희미해지게 만들 정도로 밝은 표정이었다. “그래요. ‘시종 크렐’이지요.” ============================================================= 죄송합니다아; 너무 오랫동안 잠수하고 있었죠? 흑, 반성하고 있습니다아;; 그 사이, 저는 고등학교에 입학했어요.^^ 그리고 이래저래 적응하느라 시간을 보내고, 그러느라 글은 쓰지 못했네요. 입학선물 겸 해서! -봐 주세요.[베시시;;] 이제부터는 또 야간자습해야 하고, 학원도 가야 하니까... 시간이 많이 못 나겠네요; 그치만 틈틈이 꼭 써서 올리도록 노력할게요. 성적이 떨어지면 연재는커녕 컴퓨터도 못 하게 될 테니까, 음, 공부는...[...] 꼭 열심히 해야..; 연재주기는- 설마 여기서 더 느려지겠어요?=ㅅ=;;[...] 수정판보다 원판이 더 좋다, 고 하시는 분들! ...어쩔 수 없어요;; 제가 생각해봤는데요, 음, ...어쩔 수 없는 걸 어떡해요.[퍽!] 메일은 donghee425@hanmail.net으로 보내 주시고요, 리플은 꼭꼭 달아 주세요^^ 즐독하시구요, 입학하신 분들은 입학축하 드려요. 제 목: [수정판] 공녀(貢女) : 제18화 [축제는 즐겁다](2) #. 제18화 [축제는 즐겁다] * * * * * * * * * * * * * * * 정말 미쳐버리기라도 한 걸까? 루피아는 그렇게 의심하며 지끈거리는 관자놀이 부근을 꾹 눌렀다. 겨우 다니엘라가 사라지고 세키라와 에리나도 자기 거처로 돌아갔다. 혼자 남게 된 루피아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이제 모르겠다. 미쳐버렸든 어떻게 되었든 신경을 끄기로, 그녀는 마음먹었다. 더 이상은 모르겠다, 이제. 침대에 풀썩 드러누워 있던 루피아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무슨 생각에서인지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거울 안에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자신의 모습이 숨쉬고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기억을 더듬어 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해내 입 밖으로 꺼냈다. “디… 딜렌.” 예전, 달밤에 만났던 사이코의 이름이었다. 왜 갑자기 그 이름이 기억나는지 모르지만 갑자기 기억이 났다. 왜인지 모르게, 그는 자신에게 아주 중요한 사람일 것만 같았다. 마음이 끌린다고 해야 할까. 문득 문득 생각이 나는 게 이상했다. ‘모습이 비치는 곳에 라고 했으니 거울도 될 거야. 안 되면 물이라도 떠 넣고 빌어보지, 뭐.’ 그녀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거울을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1분. 그랴, 좀 늦을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 바로 나타날 수는 없는 거겠지. 3분. 인내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야. 10분. …거짓말한 건 아닐까? 이러고 있는 거 자제가 미친 짓 아냐? 30분. 다시 한 번 만나면, 모가지를 비틀어 버리겠어! “뻥인 거잖아!!” 루피아는 결국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만나 얼굴을 보고 얘기한 시간이 아무리 길어도 3분 내지 5분밖에 안 될 상대가 자신을 기억할 지조차 미지수가 아니었나. 그녀는 미친 짓을 30분이나 계속했던 자신에게 투덜거렸다. 그녀가 이제는 그따위 거짓말을 했던 딜렌을 실컷 맛나게 씹고 있을 때였다. “잘 있었어?” “거짓말쟁이, 멍청이… 엑?” 루피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딜렌은 어색하게 작은 미소를 띠고 말했다. “‘멍청이’는 좀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아가씨?” 루피아는 싱글거리는 딜렌을 위아래로 훑어 봤다. 신기한 광경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거울 속에 사람이 들어있는(?) 광경은 생전 처음 보았던 것이다. 그녀는 거울 앞으로 다가가서 얼굴을 들이밀었다. 코 바로 앞까지 얼굴이 내밀어져서는 심각하게 쳐다보기 시작하자 당황하는 건 오히려 딜렌이었다. “영상마법의 일종인가? 신기해, 신기해.” “…좀 떨어져 줘….” 루피아는 손가락으로 거울을 쿡 찔렀다. 폭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따뜻한 체온은 느낄 수 있었다. 굉장히 신기했다! 한동안 루피아를 무슨 괴물이라도 되는 듯 쳐다보던 딜렌도(질겁하기도 했던) 잠시 후가 되자 포기한 심정이 되었다. 눈을 반짝거리는 그녀를 보며 딜렌을 한숨을 내쉬었다. ‘형님이 선택한 여자가 이런 여자였다니.’ 고작 20년 사이 많이 변해버린 게 아닐까, 하는 의심도 품어보는 딜렌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리가 없지. “그래, 저번에 하던 정령소환은 어떻게 되었어?” 그만 떨어져 주었으면. “성공했어. 그런데… 맞다, 당신 누구야?” “네가 불러내 놓고 그런 거 묻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 그건 그런 것도 같았다. 불러낸 건 자신이면서 정체를 묻다니. 루피아도 웃어 버렸다. 어차피 그런 건 중요하지 않은 사항이지 않은가. “이름은? 나는 이미 밝혔어.” “루피아야. 루피아 엘 세느안트.” 루피아는 싱긋 웃으면서 거울 옆 침대로 걸어가 앉았다. 그리고 찬찬히, 딜렌의 모습을 살피기 시작했다. 역시 마계의 마족이라 그런 건지 굉장히 예쁜 외모였다. 실처럼 가는 머리카락은 새빨간 색이었고, 흐르는 윤기는 비단 같아 보였다. 밀랍인형처럼 새하얀 피부, 오뚝한 코와 붉은색 입술이 요염한 분위기를 냈다. 하지만, 그런 생김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귀여운 얼굴이었다. “루피아? 루피아. 루피아라.” 딜렌은 그렇게 되뇌며 웃음 지었다. 사실은, 그동안 그녀가 불러내어 주기만을 기다렸다. 숲에서 루피아와 이디스의 모습을 본 후, 그는 곧 저번의 그 여자라는 걸 알 수가 있었다. 그래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는… 에크의 성인가? 그래, 지금쯤이면 축제기간이겠네. 축제는 구경했어?” “축제?” “몰랐나보네. 꽤나 유명하잖아, 이곳의 축제는? 매년 이 기간이면 성대한 축제가 열려.” 루피아는 딜렌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전혀 몰랐던 사항이었다. 오늘 아침, 아니, 어제부터 다니엘라의 일에 매달려 다른 것은 생각해 볼 여력이 없었던 터였다. "가 보고는 싶지만… 내 처지가 처지인지라 그럴 수가 없겠네.“ 그녀는 자신의 위치를 상기시키며 말했다. 축제라, 정말 가고 싶었다. 예전에도 자주 가보지 못한 곳이 축제였다. ‘공녀(公女)’라는 신분은 자유롭게 축제 같은 데를 돌아다니기에는 자유롭지 못하다. “한 가지만 해주면 내가 데려가줄 수 있는데.” 딜렌이 말했다. 루피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뭔데?” 솔깃한 그녀를 보며 딜렌은 히죽 뭔가가 있는 듯한 미소를 띠웠다. “뭔데? 말을 해야 알 거 아냐. 말해 봐. 들어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딜렌은 재촉하는 루피아의 말에 더더욱 느긋한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건 말이야…….” 그리고 그는 손짓을 해서 그녀를 가까이 오게 했다. 루피아는 거울 앞까지 얼굴을 가져가서 다음 말을 기다렸다. 딜렌이 말을 한 것과,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거의 동시였다. “…….” “거기 있나?” 깜짝 놀랐다. 정말이지 놀랐다. 죽을 만큼 놀랐다. 루피아는 작다란 비명을 지르며 거울 옆에 흘러내려 있는 천을 끌어당겨 거울을 가렸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천을 꼭 붙들고 거울 앞에 바짝 붙었다. 이디스는 거울 앞에 뻣뻣하게 서 있는 루피아를 보며 뭔가 있음을 짐작했다. 사실, 그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얼굴이 뻣뻣하게 굳어있고 거울 앞에 서서는 절대 비켜나려 하지 않는다면 누구라도 뭔가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뭘 하던 거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는 이대로 넘어가야 할까 생각했다. 하얗게 질린 채 그녀는 정말 부들부들 떨고 있었던 것이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가야할 곳이 있다. 준비하도록.” 루피아는 세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발 이대로 이 자리에서 사라지기만 해 줘! 이디스는 그런 그녀를 의심스럽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떴으나 곧 방문 너머로 몸을 옮겼다. 뚜벅뚜벅 멀어져가는 이디스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루피아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리고 천천히 손에서 힘을 빼고 긴 숨을 내쉬며 주저앉았다. “……괜찮아?” 거울을 가리던 천 자락이 흘러내리자 얼굴을 드러낸 딜렌이 물었다. 루피아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만 저었다. 그리고 잠시 후, 고개를 뒤로 젖히고 말했다. “꼭 이럴 때만 나타나지, 망할 마왕 자식…!” 그녀의 중얼거림에 딜렌은 의외라는 듯 말했다. “마왕을 좋아하는 게 아니었어?” “미쳤어?!!” 딜렌의 말에 그녀는 기겁하며 소리쳤다. 발딱 일어나 얼굴이 빨개져서 소리를 빽 지르는 그녀의 모습에 딜렌은 움찔했다. 꼭 한 대 칠 듯한 무시무시한 기세였다. “내 위치를 생각해보라고! 난 공녀인데, 마왕을 좋아할 수 있을 리가 있겠어? 한 번도 그런 생각 해 본 적 없고, 할 리도 없어! 내 적이나 마찬가지인 존재라고, 마왕이라는 건!!” “아, 알았어. 진정해.” “게다가 성격도 안 좋다고!” 꼭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따따따 말해대는 그녀를 진정시키며 딜렌은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 이 사실은 앞으로의 계획에 도움이 되면 되었지 해가 될 만한 게 아니었다. “싫어, 싫어, 싫어, 정말로 싫어!” 하지만 이 정도로 과민반응을 보이면 그 이유가 궁금한 법이다. 그는 순수한 의문에 질문을 던졌다. “왜?” “아까도 말했듯 나는 공녀고, 그 사람은 마왕이니까! 언제나 무표정 일색이고, 말도 없고 벌준답시고 시중을 들라고 하질 않나, 나 보면서 피식피식 웃질 않나 기분 나빠! 여하튼 이상한 구석도 있고- 늘 명령만 해대!” 딜렌은 루피아의 말을 들으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형님이 사람 사귀는 데에 익숙할 리가 없지.’ 라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남과 동시에 그녀 앞에서는 웃기도 한다는 소리가 되니 울어야 할 것도 같았다. 그리고, 그만큼 아직도 그에게 휘둘리는 자신의 한심함에 화도 나는 것 같았다. 딜렌은 기억을 더듬어 옛날 이디스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늘 혼자였다. 평소에도 그는 늘 혼자 있는 것을 즐겼고, 누군가와 같이 서 있다 하더라도 혼자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더라도 혼자 있는 것으로 보였었다. 그 모습을 동경했다. 하지만 그런 반면,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귀는 것에 익숙할 리가 없다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의외로 그런 부분에서는 무지 서툴 거라고 딜렌은 짐작했다. 저번에 본 그 장면에서 짐작한 것처럼 두 사람이 연인관계인 것은커녕 원수지간이나 아니면 다행일 사이라는 사실에 딜렌은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형님은 분명, 이 여자를 ‘좋아하고’ 있을 게 틀림없는데. ‘이 여자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걸까?’ 그는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루피아에게 시선을 주며 생각했다. “왜?” “뭘 그렇게 열심히 생각하나 해서 말이지. 아, 그래, 하려던 말이 뭐야?” “난 벌써 말했어. 네가 대답할 차례라고.” “뭐? 다시 안 말해줄 거야?” “물론. 난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겠는데….” 빙글거리는 딜렌을 보며 루피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들어줄 테야? 간단한 거야. 쉬운 거라고. 그러니 그냥 승낙해버리고 나와 같이 축제구경을 하는 게 어때? 형… 아니, 마왕과 함께 어딜 나간다고 했잖아. 그때 내가 나오라는 장소로 오라고. 그럼 충분히 축제를 구경할 수 있도록 해 줄게.” 루피아는 꿀꺽 타액을 삼켰다. 꼭 악마의 속삭임 같은 말. ‘잘만 하면’이라는 생각이 들자 그녀는 꼭 안 될 것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루피아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야 말았다. ‘에라, 모르겠다! 여기서 더 나빠질 상황이 있겠어, 어디?’ * * * * * * * * * * * * * * * 있었다. 충분히 더 있었다. 그 이상 나쁜 상황이 더 있었다. “……축제… 요.” “그래.” 신은 분명 나를 미워하는 거야! 그래, 그럴 거야. 루피아는 속으로 절규하며 부들거렸다. 일그러지는 루피아의 표정에 이디스는 물었다. “무슨 문제가 있는가?” 루피아는 고개를 저었다. 네, 없고말고요! 없습니다! 라는 듯. 하지만 문제는 많았다. 많아도 아주 많았다. 단순히 ‘갈 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축제에 가는 것’이라는 게 문제였다. ‘빨리 마왕과의 일을 보고 슬쩍 오면 될 것’이라고 했는데! “나와 가는 게 그렇게 싫은가.” “…….” 이디스의 물음에 루피아는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대로 예, 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고 거짓말도 하기 싫었다. 적어도 이 점에 대해서는. 루피아가 대답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자 이디스는 가슴 한 구석이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가야 한다.” “……네, 알고 있습니다.” 내키지 않아 하는 목소리에도 가슴을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축제에 간다고 하면 좋아할 줄 알았고, 그런 표정을 기대했던 이디스는 그런 자신이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는, 눈앞에 쓰러뜨려야 할 적이 있을 때의 대처방법이나 싸우는 법에 대한 것에는 잘 알았고 많이 배웠지만, 적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배운 적이 없었다. ‘소유욕? 그냥 그것뿐인가? 갖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뿐?’ 그저 그것뿐인데 아프기도 할까? 그는 처음으로, 에드라프의 말에 의심을 가졌다. ============================================================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죄송하다고 말씀드리는 것도 이제는 민망하군요. 며칠 못 올렸죠? 열흘을 넘어 보름가까이 되는 모양이군요. 그저 적응기가 오래 갔다고밖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정말 많이 다르더군요. '야자'라는 게 끼고 0교시와 7, 8교시가 더 늘은 것뿐인데 적응하기가 정말 엄청 힘들었습니다. 지금도 아주 적응한 게 아니에요. 6시 반에 일어나서 야자하고 나면 9시반, 학원까지 다녀오고 나면 12시 반입니다.[학원은, 제 개인적으로 땡땡이(?)도 많이 깝니다만;] 생활 적응력이 워낙 떨어지는 저이고, 잠을 못 자는 건 못 견뎌하는 AB형이거든요. 잠에 정말 약하죠. 수업시간에도 졸은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가물가물, 정신이 몽롱할 지경입니다. 이런 저런 거 다 늘어놔봤자 어차피 변명이겠지만요.[웃음] 열심히 열심히, 틈틈히 적어 보았지만 요즘은 또 슬럼프라-[아아, 망할 것.]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 지면에 쓰면 찢어버리기도 여러 차례였습니다. 이놈의 다혈질, 결국 멀쩡한 종이 많이도 버리게 만들더군요. 그동안 욕도 많이 나오셨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하긴, 저라도 짜증냈을 거에요; 저 네르, 연애경험이 없다보니, 남녀의 얘기를 적는 게 무척, 무척, 무척, ...어색해 죽겠군요. 어느 님께서 지적해주신 바, '신혼일기랑 성격이 똑같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전에도 여러 차례 들은 말입니다만, 그래도 쿠궁- 하는 게; 그럴 거면 왜 시작했냐!! -고 하실 지 모르지만-....[한숨] 메일은 donghee425@hanmail.net으로 보내 주시고, 리플 많이 달아주세요. 즐독하십시오.[꾸벅] 덧. '아이슈마' 님,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왕'이라는 사실은, 그가 내 바로 앞에 존재함에도 저 멀리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라고 고쳤는데, 이것도 이상한가요?[삐질] -확실히 예전 것은 어색하더군요.[삐질] '연세의백곰'님도 감사합니다^^ 제 목: [수정판] 공녀(貢女) : 제18화 [축제는 즐겁다](3) #. 제18화 [축제는 즐겁다] * * * * * * * * * * * * * * * 루피아는, 자신이 그럭저럭 남과 잘 어울릴 수 있는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성격상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보통’의 사교성 정도는 지니고 있다고. 그러니 어색함 그 자체인 이 공기는 그녀의 탓이 아니라 저기 저, ‘마왕’ 탓이다. ‘어색해! 이 남자와 있으면 왜 이렇게 어색해지고 마는 거야. …에잇! 뻔하잖아, 저 남자가 말을 안 하니까! 할 말이 없는 걸. 어색해질 수밖에 없지.’ 오가는 대화가 없는데 무얼 바라랴. 루피아는 포기했다. 그래, 뭘 바랄 수 있겠어. 그녀는 혼자 나왔다고 생각하고 하고 싶은 것을 찾아 해보기로 했다. 설마 버리고 가겠어, 하는 마음에 그녀는 무작정 걸음을 멈춰 섰다. 그에 따라 일정한 보폭으로 두, 세 걸음 앞서 걷던 그의 움직임도 딱 멈췄다. 역시! 그녀는 그가 돌아보기 전에 얼른 주위 아무 곳이나 사람, 아니 마족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파고들었다. 뭘 하든 어때, 일단 해본다는 것에 의의가 있는 거야. “아가씨, 아가씨. 여기 와서 이거 한 번 해 봐. 재미있어.” “어허 이 사람! 어디 남의 손님 뺏으려고 드나? 아가씨, 아가씨, 여기 거 해 보려고 온 게 맞지? 자자, 얼른 이리 와.” 루피아는 주인의 손에 이끌려 얼결에 망치까지 받고 서게 되었다. 멀뚱히 눈만 껌벅이고 있는 그녀에게 주인은 싱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 “어여 해.” 과연, 아무리 평범한 가게 주인아저씨(!)라도 마족이라 그런지 뛰어난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루피아는 그 어색함에 하, 하하 하고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할 줄을 몰라요.” 어느새 마왕은 뒷전으로 미뤄져 있었다. 루피아는 꽤 무게가 나가는 망치를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꽈악 잡고 있었다. 그대로 손을 놓으면 쿵! 하고 발등을 찍게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내려놓기에는 열심히 게임 방법을 설명하는 주인에게 미안했다. “이걸로 여길 세게 치는 거요. 콰앙 하고 말이지. 그리고 이게 저- 기 위로 올라가서 종을 울리면 되는 거야. 최대한 높이 올라가도록 쳐. 그러면 상품도 준다고.”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이걸 휘둘러 내리치라고? 루피아는 부들부들 떨리는 팔과 손에 들린 망치를 번갈아보며 가능성을 재봤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생각해봐도 가능하다, 라는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어떡해? 너무 무작정 덤빈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뭔지도 모르고 무작정 마족들 사이를 파고들어 앞으로 튀어나왔으니- 루피아는 억지로 입 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루피아는 이를 악물고 망치를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휘청, 허리가 부들. 팔목이 삐끗. ‘뭐 이런 걸 가지고 휘두른대? 잘못 맞으면 바로 골로 가겠다!!’ 물론 루피아 입장에서야 무거워도 무지 무거운 거지만 마족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솜뭉치다. 그렇게 차이가 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고 루피아는 이를 악물고 몸이 뒤로 넘어가지 않게 안간힘을 썼다. 더 이상 견디기는 무리야. 그녀는 몸의 중심을 앞으로 쏠리게 한 채 그냥 힘을 놓아 버렸다. 부웅- 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 아니 팔이 망치의 무게에 이끌려 앞으로 넘어졌다. 쿠우우우우우웅!! “…….” 요란하기는 엄청 요란한 소리가 났다. 루피아는 찌잉- 하고 저릿하게 울려오는 팔의 감각에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골이 울리는 느낌. 그녀가 그대로 주저앉아 울리는 머리를 붙잡고 있으려니, 그녀의 어깨에 얹어지는 손이 있었다. 그녀는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뒤를 돌아봤다. “조준을 잘 했어야지.” “……??” 이디스의 말에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앞을 봤다. 망치가 ‘땅’에 푸욱-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내려쳐’라고 적힌 판이 떠억 하니 있다. 망치는 그 바로 옆에 푸욱 하니 꽂혀 있었다. 뭐야? “하하하! 아가씨, 그 말이 맞아.” 루피아는 망연하게 망치를 봤다. 내려치는 것에만 집중해서 어디에 내려쳐야 할지는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화끈,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렇게 망신스러울 데가! 새빨개진 채 일어나지 못하는 루피아를 일으켜 세운 이디스는 그대로 그녀를 끌고 근처 가게로 들어갔다. 루피아는 마왕의 손에 끌려가면서도 ‘망치가 너무 무거웠어!’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적당히 마실 것 두 개.” 그리고는 루피아를 자리에 앉히고 그 맞은편에 앉았다. 음료가 나오자 루피아는 정신을 차렸는지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런 데에 와도 돼요?” 루피아는 미심쩍게 물었다. 주위를 살펴봤지만 그들의 또래처럼(?) 보이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있다고 해봤자 술잔 나르는 소년 정도? 하지만 이렇게 당당히 음료를 주문해놓고 앉은 이들은 없었다. 이디스의 모습에서 아무리 접근하기 힘든 분위기가 흐른다고 해도 얼굴은 소년이었다. 다 큰(?) 어른의 모습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루피아는 마족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녀와 이디스는 비슷한 또래일거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모습만. 그는 500살이 넘었다고 들었고, 그녀는 고작해야 18살이었다. 400년이 훨씬 넘게 차이가 나는 것이다. “그런 건 왜 묻지?” “그야… 아무리 봐도 우리는 여기 들어올 연령대가 안 되는 것 같은 걸요.” 이디스의 나이는 502세. 평균적으로 마족이 성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나이는 800대에 들어선 이후였다. 따지고 보면 성인식을 했으니 안 될 것은 없었지만 마왕이라는 것을 드러낼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한 얘기였다. ‘나가야… 하나.’ 그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무력으로 밀고 나가면 안 될 것도 없겠지만, 그렇게 해서 아족이 도망가 버린다면 귀찮게 되지 않겠는가? 그는 다시 스윽 일어섰다. “나가자.” 너무나 담담히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모습에 루피아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도 실수를 한다는 게 왠지 너무나 신기하게 느껴졌다.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서자마자, 가게의 문이 요란스럽게 열리며 한 마족이 뛰어 들어왔다. “빅뉴스야, 빅뉴스!” …어딜 가나 저런 사람이 있구나. 루피아는 호들갑스럽게 뛰어 들어오는 사람과 그 사람에게 ‘또냐?’하는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이번에 북부에서 열리는 서열대회 있잖아? 거기에 그림자 족이 나온다네? 그 왜, 있잖아. ‘그’가 나온대.” “정말이야? 또 어디서 헛소리 듣고 온 것 아냐?” “아니야. 믿을만한 정보통에게서 듣고 온 소리라니까. 두고 봐. 또 무슨 일이 날 거야.” ‘…’그‘?’ 이디스의 얼굴이 미세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그것을 눈치 챈 루피아는 그에게 물어보려던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루피아의 팔을 홱 잡아 당겼다. 그리고 저벅저벅 가게를 걸어 나섰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또 있어! 나, 이 근처에서 ‘그’를 봤다고!” “……!!” 멈칫, 걸어 나가던 이디스가 갑자기 멈추자 따라 나가던 루피아는 그의 등에 쿡 코를 박았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신경 쓰지 않은 채 그는 홰액 뒤돌아섰다. 뛰어 들어온 그 사람은 잔뜩 흥분한 채 떠벌떠벌 얘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정말이야! 피처럼 새빨간 머리카락에 금빛 섞인 빨간 눈이 어디 흔하나? 증표처럼 허리에 붙어있는 호리병은 어떻고? 틀림없다고! 나를 보고 웃기까지 했어! 꼭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게 맞다, 라고 대답해주는 듯이 말이야.” “에이 이 사람, 허튼 소리 말어.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어?” 이디스의 얼굴은 이제 완전히 굳어있었다. 서서히 힘이 들어간 팔이 욱씬 하고 아파왔다. 루피아는 결국 참지 못하고 슬쩍 신음을 흘렸다. 그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이디스는 손에 힘을 얼른 풀었다. '부러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정말! 뭐 때문에 저렇게 흥분이야 흥분이? ‘그’가 누구길래 저러는 거냐고? 젠장, 무지 아프다아.‘ 힘의 차이가 얼만가? 슬쩍 힘이 들어갔었기에 망정이지 꽈악 쥐어졌다면 이미 그녀의 팔뚝은 뭉그러지고도 남았을 게다. “…미안하다. 괜찮은가?” 쿠궁- 미, 미안?! “많이 아픈가?” 많이 아픈가, 라고? 오, 오르가프여! 루피아는 고개를 들었다. 제발, 제발, 이게 꿈이길. 아니면 눈앞에 다른 사람이 있는 거다. 아로데나, 로이드윈이나, 하다못해 유리아덴이라도. 아니, 그 사이코 딜렌놈도 좋다. 제발 마왕만 눈앞에 없으면 된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을 신은 다 무시해버렸다. 아니 애당초, 오지도 않은 그 노마족 3인방이나 어디 있는 줄 모르는 딜렌이 여기 있겠는가. 고개를 들어올린 그녀는 충격적인 것을, 아주아주 충격적인 것을 봐 버렸다. 어쩌면 봐서는 안 되었을. 바로 지척에 걱정스러운 듯한 이디스의 얼굴이 내려와 있었다. 아, 빌어먹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표정이었다. 걱정스럽게?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루피아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루피아는 숨을 턱 하고 멎은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디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표정을 지웠다. 루피아는 깔깔한 목으로 타액을 삼켰다. “그 녀석이 여기 있다고… 잠시 여기서 기다리도록." 루피아는 이디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 제대로 인식도 못한 채 고개만 끄덕이기에 바빴다. 두근두근. 미친 듯한 심장이 팔딱거리고 있다. 부들부들 떨리는 아랫입술을 그녀는 꼬옥 깨물었다. 점차 사람들 사이에 싸여 사라져 가는, 멀어져 가는 마왕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루피아는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겨 가게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길가 끝에 다리 힘이 풀린 것처럼 철퍽 주저앉았다. “……말도, 안 돼…!” * * * * * * * * * * * * * * * 너무나 오랜만이었다. 이렇게 당당하게 거리를 다녀보는 것이. ‘워낙 카른이 극성인데다, 나도 바빴고….’ 그는 싱글거리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설마, 설마’하는 마음으로 그를 발견하는 사람에게는 빙긋이 웃어 주기도 했다. 20년 전에만 하더라도 그럭저럭 자주 왔던 곳이니 그의 얼굴을 아는 사람도 꽤나 있을 게다. ‘아직 만나는 건 성급해’라고 말하던 카른의 얼굴이 떠오르자 딜렌은 불만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20년이나 기다렸다. 그런데도 모자라다고? 말도 안 된다. 그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반(半)마족이다. 그의 형이나 카른처럼 수명이 그렇게 길지 않은 것이다. 아니, 인간보다는 길다 치더라도 얼마쯤이나 될지 가늠하기 힘들다. 그는 방금까지 함께 있었던 루피아를 떠올리며 군것질거리를 하나 사 날름 물어 베었다. ‘꽤나 재미있고 특이한 인간이었어.’ 형이 ‘감정’을 품고 있는 상대. 그가 그렇게나 원하던 것을 너무나 손쉽게,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 손에 넣어버린 여자. 또, 그리고…. 그는 한입에 과자를 넣어 삼켰다. ‘나도 꽤나 마음에 들어, 그 여자.’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싱긋 웃었다. 약속시간까지는 아직 조금 남았기에 그는 조금 더 돌아다녀 볼 생각이었다. 또 다른 군것질거리를 찾는 그의 눈에, 구석에 쪼그리고, 아니, 주저앉아 있는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헤에?" 뭔가 얼이 나가버린 듯한 멍한 표정. 그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바로 앞에 앉아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그가 바로 지척에 왔는데도 루피아는 인식하지 못한 듯 멍한 표정이었다. 그는 그녀를 불렀다. “야.” “…….” 아직도 모르는 듯하다. 그는 조금 더 크게 불렀다. “야!” “……어, 어? …으아악! 네가 왜 여기 있어?” “내가 할 소리다. 몇 번을 불렀는데 대답도 안 하고. 너 왜 지금 여기에 있는 거냐?” 루피아는 인상을 찡그렸다. 얘가 대체 언제 여기 와 있었대? 그리고는 멍한 정신을 다잡아 정신을 차린 뒤 말했다. “마왕이 기다리래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야.” “흐음.” 딜렌은 루피아의 옆에 주저앉았다. 형이 기다리라고 했다고? 그렇다면 아마 곧 돌아올 것이다. 그는 곧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대체 ‘그’라는 사람이 누구인데 그러는 건지.” “…‘그’?” “그래, 아까 저 뒤의 가게에서 어떤 사람이 ‘그’가 여기 있다고 했거든. 그러더니 바로 기다리라고 하더니 가 버리던 걸.” 루피아는 지금 자신이 뭐라고 말하는 지 정확하게 생각할 수 없었다.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느낌, 속이 울렁거린다. “음… 아, 그래. ‘피처럼 새빨간 머리카락에 금빛 섞인 빨간 눈, 증표처럼 허리에 붙어있는 호리병‘이라고 했어.” 딜렌이 피식 웃었다. 아아, 결국 귀에 들어갔구나. 좀 더 서둘러야 할 것 같았다. 그는 자리에서 툭툭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이제 가야겠다.” “너 왜 왔냐?” 딜렌은 루피아의 톡 쏘는 듯한 말에 하하 웃었다. 그리고 품을 뒤적거려 무엇을 하나 꺼내더니 그녀에게 내밀었다. “부탁 하나만 하자.” ========================================== 음.. 늦었네요. 주말이지만, 딱 하나.[삐질삐질] 목요일날 모의고사를 쳤어요.[웃음] -힘빠져...[털썩] 즐거운 주말, 행복한 하루 되세요. 즐독하시구요. 멜은 donghee425@hanmail.net으로 보내 주시고요, 리플 많이 달아 주세요.^^ 제 목: [수정판] 공녀(貢女) : 제18화 [축제는 즐겁다](4) #. 제18화 [축제는 즐겁다] * * * * * * * * * * * * * * * 가장 높다 싶은 장소에서 이디스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서서히 닫아두었던 ‘감각’을 열기 시작했다.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등이 지극하게 미세해져 온갖 정보가 그의 몸으로 직접 전달되기 시작했다. 그가 애초에 나오려고 했던 이유인 ‘아족’의 흔적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제쳐 두었다. 아족 따위의 문제는 언제든 해결할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 지금 그에게는 그보다 우선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 근처에 있다.’ 역시, 반(半) 뿐이라고 하더라도 같은 피가 흐르기는 하는 모양이다. 그는 그의 이복동생이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조금 더 감각을 다듬어 정확한 위치를 찾아냈다. 그리고 곧바로 몸을 옮겼다. 텔레포트를 할 때면 늘 그렇듯이 주변의 풍경이 흐려졌다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재구성되어 시야에 펼쳐졌다. 그는 ‘기다리고 있는’ 그의 동생을 볼 수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형님.” 전혀 변하지 않은 모습, 전혀 변함이 없는 표정, 말투. 20년 전 봤을 때보다 조금 더 짧아진 것 같은 붉은 머리카락을 제외하고는 딜렌의 모습은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 그는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형님은, 전혀 달라진 게 없네? 아하하. 너무 변하지 않아서 놀랐어.” 동감이다. 이디스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딜렌의 웃는 얼굴에 그는 무의식중에 말하려 하던 것을 속으로 삼켰다. “말이 없는 것도 여전하네.” 딜렌은 올라가있던 건물의 잔해 위에서 내려와 땅에 발을 디뎠다. 그들이 있는 곳은 무너진 건물 잔해더미 안이었던 것이다. 이디스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왜 온 건가.” 그리고 이디스는 다시 속으로 다음 말을 이었다. 나를 평생 증오하겠다고 하지 않았었나. 그가 ‘인형’이라 강해지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해보이겠다고. “당연한 거 아냐? 난 매년 이곳에 축제를 즐기러 왔었다고요. 올해도 다름없이 축제를 즐기기 위해 온 거지. 형님이 몰랐을 뿐, 저는 늘 이곳에 왔었습니다.” 딜렌은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이디스는 가늘게 미간에 금을 그었다. 왠지 예전과는 다른 느낌이 드는 얼굴이었다. 이제야 그 차이를 느끼겠다. ‘확실히… 조금 변했군.’ 아직은 그 차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뭔가 받아들여지는 느낌이 다른 것만은 확연했다. 딜렌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평온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속은 부글부글 끓는 느낌과 함께 긴장으로 속이 꽉 죄어왔다. 20년 동안, 20년 동안, 나는 그렇게나…! 그는 한 치의 동요도 보이지 않은 채 기다리고 있던 그의 앞에 나타났다. 일부러 그가 느낄 수 있게 기척을 흘리고 다녔지만, 적어도 조금은 놀라주길 바랐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얼굴과 그를 보는 무심한 눈길은 차가웠다. “전해 줄 말이 있어. 남을 통해 듣는 것보다, 이런 말은 직접 전해야 할 것 같아서.” 이디스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는 자신의 이복동생의 웃는 얼굴을 무감각하게 쳐다봤다. 저 웃는 얼굴이 깨진 것을 본 유일한 날은, 20년 전 그 날밖에 없었다. 자신에게 ‘인형’이라고 외쳤던 그 날. 딜렌은 품에서 꼬깃꼬깃 접혀진 종이조각을 꺼내 그에게 던졌다. 허공에서 날렵하게 잡아채어 종이를 편 이디스는 삐뚤삐뚤 ‘선전포고’라고 적혀져 있는 것을 소리 내어 읽었다. “선전… 이 다음은 뭐냐.” “포고! 선전포고!!” “…글씨 좀 똑바로 쓰지. 읽지 못할 지경이다.” 그러고 보니 예전부터 딜렌은 엄청난 악필이었다. 단번에 딜렌이 쓴 글씨를 읽을 수 있다면 그건 괴물일 거라고 아로데가 장난처럼 말하고는 했었다. “글씨 못 쓰는 건 하나도 안 변했군.” 그렇게 중얼거린 뒤 이디스는 종이를 두 갈래로 찢어 손에서 놨다. 딜렌은 벙한 표정으로 그가 한 행동을 쳐다봤다. 그래도, 한 집단의 우두머리 자격으로 선전포고를 한 건데? 딜렌의 표정에서 그런 생각을 읽은 이디스가 야지막이 비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림자 족이 우리에게 반(反)하는 세력이라는 건 전 마계가 다 아는 사실인데, 굳이 이렇게 나설 필요까지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드는군.” 확실히 그건 그랬다. 이미 모두가 다 아는 상황에 이런 짓은 새삼스러울 뿐만 아니라 쓸데없는 짓이기도 했다. “너무 예상과 빗나가지 않는 행동이라 전혀 놀랍지 않은 걸. 솔직히 말해, 이런 반응을 예상했었으니까요.” 딜렌은 한쪽 입 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말했다. 순간 너무나 냉정하게 보여 지는 얼굴에 이디스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비록 티는 안 나지만) 저 애가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나. “이거 외에도 다른 볼일이 있….” “빨리 말하고 가라.” 이디스는 냉정하게 말을 잘랐다. 더 이상 시간을 할애해주기도 귀찮다는 투로. 딜렌은 움찔했지만 침착하게 응수했다. “과연, 흠, 놔두고 온 여자가 걱정되나 봐?” 그의 눈썹이 꿈틀했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그는 그 말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요구하기라도 하는 듯이 날카롭게 딜렌을 응시했다. 하지만 딜렌은 그 무언의 추궁에도 어깨만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흠, 그럴 만도 해.” “…….” “킥… 킥킥. 오죽하겠어? 형님이 소리까지 지르게 만든 대단한 여자잖아. 당연히 형님 입장에서는 아주 소중할 거야. 그렇지?” 이디스는 묵묵히 인상만 쓰고 서 있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쿡쿡대는 딜렌이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딜렌은 고개 숙여 킥킥대다 머리카락을 쓸어 올림과 동시에 진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어떡해? 내가 알기로, 루피아는 형님을 싫어한다는데…?” “……!” ‘루피아라고? 루피아? 이 녀석이 어떻게… 그 이름을 알지?’ 공녀에 대한 대체적인 정보가 딜렌의 손에 들어가 있다는 건 알고 있다. 특별히 정보 유출에 대해 주의하지도 않았고, 현재 거의 전역에 퍼져 있다시피 하는 공녀들에 대한 신상정보를 일일이 세어나가지 않게 지키는 것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공녀들에 대한 가치가 제로라고 여기는 마족들이 애초 지키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데 정보가 넘어가지 않았다는 건 오히려 그게 이상한 얘기였다. 하지만 루피아라면 얘기가 다르다. 그녀는 이 마계에 발을 디딘 그 순간부터 마왕성을 벗어나본 적이 없다. 그가 아는 한, 그녀는 마왕성 곁의 숲에 들어갔던 적은 있어도 성을 벗어나지는 않았던 것이다. “내가 루피아를 알고 있는 게 이상해요?” 딜렌은 히죽거리며 말했다. “이상하겠지. 이상할 거예요. 우리는 벌써 몇 번 만났었는걸.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딜렌은 그에게 다가가 귀엣말로 작게 무어라고 속삭였다. 그가 말을 이으면 이을수록 미세하게 일그러져가고 있던 이디스의 얼굴이 확 드러나 보이도록 일그러졌다. 그 얼굴에 딜렌은 만족스러운 듯한, 마치 생선을 입에 문 고양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 이디스의 턱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강한 마력이 그의 손에 모아져 후우웅, 하는 기음(氣音)과 함께 딜렌이 서 있던 공간을 세게 때렸다. 딜렌의 모습에 마치 잔물결이 서리는 듯한 파동이 퍼져 나갔다. “…-꺼져!” “아아, …치지직. …형님. ……치직… 치익-…… 너무 흥분하지 말…… 치지지익.” 간간히 끊어지던 말소리에 잡음이 섞이더니 이윽고 찌익- 하며 완전히 음성이 들리지 않게 되었다. 다른 부위는 다 사라지고, 하얀 얼굴에 핏빛 입술만이 옴싹 달싹하는 영상만이 허공에 떴다. 이디스는 손에 응집(應集)했던 기운을 풀어버리며 마지막 흐려지는 영상에서 보았던 입 모양으로 딜렌이 마지막에 하려던 말이 무엇인가를 짐작해보려 했다. 하지만 그는 곧 그만두었다. 그는 재빨리 몸을 돌려 루피아의 기척을 찾았다. ‘……움직였군.’ 벌써, 그의 몸은 메마른 모래가 날리듯 서 있던 공간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 * * * * * * * * * * * * * * 당황스럽다. 황당하다. 지금 그녀가 느끼고 있는 기분이란, 위의 저 두 마디로 표현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그녀 앞의 상대방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크렐?” 루피아는 보라색 두 눈을 크게 뜨며 상대방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진홍색 머리칼과 황금빛 두 눈. 굉장히 귀여운, 무엇보다 중요한 건 레이디 다니엘라의 시종이라는 점이었다. 루피아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추, 축제를 즐기러 왔나 봐요…?” 잠시 그녀를 찌푸린 듯한 눈으로 쳐다보던 크렐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피아는 하하, 하고 웃으며 슬쩍 인상을 썼다. 축제? 축제! 그래, 축제. 여러 가지 불만사항들이 많았지만 나름대로 만족하고, 또 구경하는 것과 약간 즐긴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그만큼 께름칙한 느낌 역시 남겼다. 크렐이 아직 가지 않고 옆에 서 있음을 깨달았지만 루피아는 일부러 무시했다. 애초 하려면 철저하게 하자 주의인 그녀는 다니엘라의 시종 앞에서도 ‘척하는’ 짓을 해야 했다. 그리고 루피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던 그 순간을 다시 떠올렸다. 뭐였을까, 그건? 초조한 기분에 루피아는 입을 꼭 다물고 눈을 감아 숨을 들이마셨다. ‘숨이 콱 막히는 것 같았어. 젠장, 아, 제길! 뭔가 느껴서는 안 될 걸 느껴버린 것 같아!’ 불길함에 손끝이 차가워져 왔다. 두근거림은 아직도 멈추지 않았다. 달아올랐던 느낌이 몸에 남아있어 여운을 남긴다. 혼란스럽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쓸어 올리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언제까지 옆에 서 있을 참이죠?” 빨리 이딴 부탁 끝내고 돌아가야 하는데. 여기 앉아있기만 하면 잽싸게 튀어나올 거라는 ‘녀석’은 어디에 콱 처박혀 안 나오는 거야. 그녀의 옆에는 아직도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서 있는 크렐만이 있을 뿐이었다. “한 가지 여쭈겠습니다. 혹시, 누군가의 부탁으로 여기 나오신 건지?” 루피아는 크렐의 물음에 그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다니엘라 옆에 있을 때와는 달리 냉랭한 얼굴을 한 귀여운 마스크의 아이를 의심스럽게 쳐다봤다. 그러다 그녀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을 받기는 했지만… 설마?” 그녀의 대답을 들은 크렐의 얼굴이 잠시 놀란 듯한 빛이 떠오르더니 이내 미약한 비웃음, 그리고 이어 공손한 표정이 되었다. 그는 순식간에 딱딱한 얼굴을 풀며 약간의 웃음을 곁들인 공손한 태도로 절해 보였다.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같은 뜻을 지닌 분이신지 미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뭐…?”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같은 뜻? 그건 또 뭔 옆집 괭이 다리 쥐어뜯는 소리인고? 하지만 어리둥절한 그녀의 반응은 신경쓰지 않은 채 크렐은 다음 말을 이어갔다.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쿡… 아, 서류를 내어 주시죠.” 루피아는 알지 못할 말을 지껄이는 크렐을 이상하게 쳐다보다 사이코에게서 받았던 서류를 툭 던져 주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눈을 아래로 깔고 말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만, 부탁받은 일을 끝냈으니 나는 가겠다.” ‘같은 뜻이라니, 무슨 소리야? 설마 내가 그 사이코랑 같은 편이다, 뭐 이런 식의 오해를 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젠장- 아, 그건 정말 사양이야.’ 속으로 중얼거리며 루피아는 몸을 돌렸다. 벌써 마왕이 돌아와 있으면 어떡한다? 기다리기 지루해서 좀 돌아다녔다고 말해야 하나. 딴생각을 하느라 미처 앞을 보지 못한 그녀는 코에 통증을 느끼며 멈춰서야 했다. 앞에 서 있는 사람의 가슴에 코를 박은 것이다. “윽… 죄, 죄송해… 억?!” 루피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의 앞에는, 결-코 지금은 보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 서 있었다. 이디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두근. 루피아는 마른 목으로 타액을 넘겼다. 다시 가슴이 뛰어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턱, 하고 가슴 근처에서 뭔가 막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아, 하고 숨을 깊게 내쉬었으면 좋겠는데, 지금은 가능할 것 같지 않다. ‘왜… 저렇게 빤히 쳐다보는 거야.’ 죄를 지은 느낌. 뭔가 켕기는 느낌에 루피아는 눈동자만 또르륵 굴려 위를 쳐다보았다. 굳게 다문 입술, 턱만 보였다. 부모의 징계를 기다리는 어린아이가 된 느낌이다. 한참을 루피아를 내려다보던 이디스가 드디어 움직였다. 그는 간단히 손을 내밀어 루피아의 손목을 잡았다. 손바닥이 위를 향하게 하여 손목 부근을 한참 바라보던 그는, 아무 말 없이 손목을 끌고 몸을 돌렸다. ‘소, 소, 손 좀 놔아-.’ 유일한 불만이라면, 자신의 손목을 꽉 쥐고 안 놔준다는 점이랄까. 자꾸 얼굴로 피가 고이는 것 같고 숨쉬기가 힘들었다. 아까, 아까 그 표정을 본 게 잘못이었다. 그 메마른 얼굴 위에 ‘걱정’이 분명한 감정이 만들어낸 표정이 어린 그 따위 것을 본 게. 그 뒤로는 심장이 고장이라도 난 것 같았다. 그녀는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누, 눈물이 날 거 같아. 아, …제기라아알!’ 어느 사이인지, 벌써 성 안에 텔레포트 해 온 것 같았다.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텔레포트를 한 것마저 느끼지 못했다. 루피아는 도착하자마자 이디스의 손에서 재빨리 손목을 빼냈다. “즐거운 축제였습니다아아앗-!!” 이디스가 서 있는 반대편으로 달려가며 루피아는 소리쳤다. 젠장할, 즐겁기는 개뿔! ================================================== 음, 음, ...한없이, 턱없이 부족한;; -시간.;;; 열흘 넘도록 공녀를 안 올렸군요. 이상한 데서 막히는 바람에;; 왜 저리도 마음에 안 드는 걸까요오.[그걸 네가 물으면 어떡해!] 빨리 빨리 나머지를 써야 할 텐데에... 일단 쓴 건 족족 올리는 게 습관이 된 네르입니다. 사실, 연참하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저장해뒀다 날려먹은 적이 한 두번이 아니거든요.[싱글] 여러 번 말했지만.;; 이번에는 (4)까지 가네요.. 우와. 길어라아. 보통 (2)정도에서 끝내는데 말이죠.; 이번 주말까지, ...다 써야 하는데에.[울먹] 에잇. 에잇.;;[퍽!] 메일은 donghee425@hanmail.net으로 보내 주시고요, 리플은 꼭꼭 달아 주세요. 메일은, 요즘들어 답장을 잘 못하고 있습니다. 음, 확인을 하고 나면 답장 나중에 써야지, 하고 미뤄뒀다 메일 확인하러 다시 못 가는 경우가 발생..;; 아하핫. 즐독하세요-^^ 제 목: [수정판] 공녀(貢女) : 제19화 [꿈] #. 제19화 [꿈] * * * * * * * * * * * * * * * 인간과 마족은 수명부터가 엄- 청 차이가 난다. ‘엄청’이라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긴긴 시간이 두 종족 사이에는 존재하는 것이다. 마족의 평균 수명은 대략 8000세, 인간은 잘, 그리고 오래 살아봐야 70세를 넘길까 말까다. 마법사라면 조금 더 넉넉히 쳐 주어도 120세 정도가 고작이다. 그것도, 인간은 추하게 늙어간다. 점점 약해지면서. 그럼 마족으로서는 아무리 길게 잡아도 100년만 참으면 공녀들로부터 해방인 셈이었다. 그렇다면 애초에 우리들은 왜 이 곳에 와야 했을까? ==================루피아 자서전' 中 발췌======================= “…벌써 새벽이군.” 희미하게나마 어둠이 가시며 여린 빛 자락이 창문을 통해 들어오자 이디스는 손에 들고 있었던 펜을 놓으며 말했다. 마왕으로서의 업무는 늘 넘쳐나고, 그 일을 하다 보면 시간의 흐름을 느낄 새도 없이 하루는 지나가 있었다. 요즘처럼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게 이상한 일이다. 언제나 그는 빠른 시간 속을 살았던 것이다. 그게 바빠서이든, 단조로운 생활 때문이든. 이디스는 옆에 준비해두었던 와인 잔에 와인을 따라 한 모금 삼키며 몸을 일으켰다. 지금은 하루 중 그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대였다. 밤을 새느라 조금 입이 껄껄한 것을 빼고는 기분도 좋은 편이었다. 그는 책상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창문 밖을 바라봤다. 사실 따지자면 어둠을 멀리하는 천계에는 ‘밤’이 없어야 하고, 빛을 적대하는 마계에는 ‘낮’이 없어야 했다. 하지만 비록 그 구분이 명확하지는 않아도 천계에도 밤이 있고, 마계에도 낮이라 불리는 게 있다. 아주 조금이라도 빛이 그들 영역에 비치는 시간이 있다면 새벽이 다였다. 그 뒤로는 흐린 회색의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어 어둡게 만들어버린다. 차츰, 주위가 밝아져가기 시작했다. 그 빛은 그대로 그에게 내렸다. 그는 시야가 환하게 밝아지는 것을 느끼며 와인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내가 처음 이 빛을 봤던 게 언제더라.’ 그는 기억을 더듬으며 생각했다. 태어나자마자 ‘그곳’에 갇혀 버렸고, 의식이 깨어나고 시야가 트이기도 전에 그는 혼자 남겨졌다. 아무도 없는, 어둠만이 존재하는 그 곳에. 지금도 떠오른다. 여린 피부에 처음으로 느껴졌던 건 차가운 돌바닥의 감촉. 콧잔등 위로 떨어진 시린 물방울. 하나도 잊지 않고 있었다. 아니, 잊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건, 상당히 끔찍한 기억이었으니까 말이다. 지금까지도 그는 ‘끔찍하다’라는 수식어를 붙일 만큼 그때의 기억을 불쾌해하고 있었다. 그곳에 들어가게 된 지 얼마나의 시간이 흘렀는지 의식도 하지 못한 채, 그는 점차 의식이 깨이고 시야를 트게 되었다. 단순히 ‘느껴 받아들이는 것’밖에 하지 못했던 그는 빠른 속도로 몸을 움직이고 소리를 내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작업을 해야 했다. 너무나 고요한 적막, 그를 감싼 어둠이 그의 존재를 덮어버릴 것 같았기에 그는 끊임없이 그 자신을 자신에게 확인시켜야 했다. 그가 평생 유일하게 상대했던, 그리고 처음으로 상대해야 했던 ‘무형의 적’은 바로 어둠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가게 된 날, 그는 처음으로 ‘빛’을 보았다. 어떻게 그 느낌이 ‘빛’이라는 걸 알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보았고, 처음 느꼈다. “이 아이인가, 라고 했던가.” 그의 ‘어머니’라는 여자는 그를 낳고 바로 죽었다고 한다. 물론,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아로데와 로이드윈, 유리아덴들이 그렇게 말했기에 그렇게 ‘아는’ 것이다. 그는 귀찮게 그런 것까지 확인할 생각이 없었다. 대대로, 마왕의 아내들은, 다시 말해 마왕비(魔王妃)들은 그다지 영향력을 가지지 못했다. 여성체 마족들이 강한 경우도 적잖지만 적어도 지금 시대에는 서열 600위내에 여성체 마족은 없다. 그게 나대기(?) 좋아하는 여성체 마족의 공통적인 특징 때문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 그는 그곳에서 나가는 날 난생 처음으로 ‘아버지’를 봤다. “흐음. 이 아이가 나의 ‘아들’이라는 말이지?” 라고도 했다. 그는 그때 처음 남의 음성의 들을 수 있었다. 막 새벽이었던 때가 분명했다. 그는 뒤에서 비춰오는 빛을 받고 있었는데, 역광 때문에 얼굴을 잘 볼 수가 없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 뒤부터, 그의 삶은 단순했다. 그 자신을 죽이고 마왕이 되라는, 강해지라는 아버지가 내린 삶의 이유를 ‘반드시 해야 할 일’로 받아들인 뒤 그는 오직 그것만을 위해 살았다. 무엇하나 부족한 건 없었다. 다른 이가 그렇게 갈구하는 힘조차도, 그에게는 너무나 손쉽게 얻어지는 것 중 하나였던 것이다. 강해지기 위한 남다른 노력은 필요 없었다. 어차피 마족에게 ‘힘’이란 태어났을 때부터 얻어지는 것과 약간의 노력, 천재성이었다. 그는 태어났을 때부터 강했고, 마왕이 되기 위해 노력한 것은 그가 원하는 목표를 조금 더 빨리 달성시켜주는 역할을 했다. “내가 널 왜 낳았느냐고?” 언젠가, 그곳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에게 왜 낳았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는 왜 이 자리에 자신이 있는 것인지가 궁금했던 것이다. 그 질문에 ‘아버지’ 카디스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내가 필요해서. 그리고 널 낳은 건 내가 아니다. 죽은 네 어미지.” 확실히 그의 ‘어머니’라는 여자는 죽은 게 맞는 것 같았다. 그는 무엇 때문에 필요한 것이냐고 물었다. 그 질문에도 카디스는 쉽게, 그리고 냉정하고 짧게 대답했다. “의무이기 때문에.” 그리고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날 죽일, 그리고 핏줄을 잇는 건 내 의무 중 하나다.” “이제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은?” 카디스의 입가에 비스듬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디스는 키가 큰 그를 올려다보았다. 카디스는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날 죽이는 일. 마왕이 되는 것.” 그날부터 그건 그의 목표가 되었다. 처음에는, ‘강한’ 그만큼 강해지는 게 아주 오래 걸릴 것이라 여겨졌다. 불가능할 것이라고는 생각한 적 없다. 단지, 조금 오래 걸리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강해졌다. 그는 준비가 다 되었다고 생각될 때쯤, 그 여자가 왔다. 이디스는 잔 안에서 찰랑거리는 호박색 액체를 들여다봤다. 어느 새, 하늘에는 회색 먹구름이 여느 때처럼 가득 차 있다. 상념(想念)에 빠져있는 사이 그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너무도 짧게 흘러가버렸던 것이다. 그는 잔 안에 든 와인을 날름 마셔버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졸음이 몰려오고 있었다. 피곤한 눈두덩을 누르며, 그는 침실로 발을 옮겼다. * * * * * * * * * * * * * * * 꿈? 꿈인가? 이디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가만히 눈살을 찌푸렸다. 하긴, ‘꿈’이라는 게 아니라면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형님! 형님- 이리 오세요!” 붉은 머리칼과 금빛 섞인 눈동자를 가진 남자아이가 그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물빛 머리칼을 가진, 붉은 머리칼의 아이보다 조금은 더 커 보이는 소년이 침착한 눈을 하고 꼭 붙어 있었다. 그는 조금 더 시선을 돌려봤다. 느긋하게 누워있는 그의 ‘아버지’ 카디스와, …선명히 알 수 있을 정도의 적개심을 말없이 퍼붓고 있는 여인 카마프. 너무나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라 절로 실소(失笑)가 흘러 나왔다. “왜 그러고 서 계세요? 네? 형님!” 맹목적으로 주인을 따르는 개처럼 순하게 빛나는 눈이 그를 향해 웃음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그대로 차갑게 시선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보지 않아도 실망해서 축 늘어져 있을 게 뻔한 아이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많이 봤었으니까.’ 그는 자신의 몸을 살폈다. 그가 기억하는 자신의 손이 아니었다. 아까 네 살이나 되었을 법한 어린아이보다는 컸지만 겨우 열 서넛 되었을까 싶은 소년의 손이다. 그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한 탓에, 무의식과 몽계(夢界)가 이어져버린 모양이다. 흔하지는 않지만 가끔 이런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 ‘가끔’에 그는 속해버린 것이다. 그는 자신의 방에 들어와 새삼스럽게 둘러봤다. 다시 어린아이의 시각에서 보니 색달라 보였다. 그는 창문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봤다. 그를 발견한 ‘딜렌’이 반갑게 손을 흔든다. 카마프가 뭐라고 한 마디 한다. 뭔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딜렌이 꾸물대며 그에게 눈짓을 하고, 다시 생글생글 웃어준다. 그리고 그걸 카마프가 볼까 물빛 머리의 소년이 슬쩍 몸을 틀어 딜렌을 가려준다. 그 일련의 상황들을 지켜보며 슬쩍 웃음을 짓는 건, 나른한 표정의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그 표정을 보며 이디스는 마음 한 구석이 뭔가 불편함을 깨달았다. 그때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린 현상이었지만, 지금의 그는… 인정하기는 싫지만 ‘감정’적으로 예전보다 훨씬 예민해져 있었다. ‘…꿈에서 잠이 들면 꿈이 깨나?’ 그런 생각을 하며 이디스는 조용히 침대에 걸터앉았다. 딱히 할 일도 특별히 없었으니 그냥 가만히 빨리 꿈이 깨길 기다리자는 생각에서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똑똑- 하는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달칵 열리며, 조금 전 정원에서 봤을 때보다 조금 더 큰 듯한 딜렌이 그의 방으로 들어왔다. “형님, 형님.” ‘상황이 어떻게 되어가는 거지. 내가 느낀 것보다 시간이 더 많이 흐른 것은 틀림없는 것 같기기는 한데.’ 자신의 몸도 훨씬 더 자라 있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시선을 딜렌에게 던졌다. “내일 축제에 같이 가실 거죠? 에크 성에서 열리는 축제 말이에요. 매년 같이 가셨으니까.” 그건 그의 자의(自意)가 아니었다. ‘아버지’의 종용(慫慂)을 가장한 강요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사항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는 아무런 조건 따위 내걸지 않았지만, 그가 ‘아버지’를 죽이기 전까지 그는 분명 ‘아버지’의 아래에 있는 존재였고, 그렇다면 그가 하는 말을 따라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그래.” 그는 짧게 대답했다. 당연히, 이런 식으로 딜렌에게 말하는 게 아주 어색했다. “잘됐다! 저는 매년 이때가 제일 즐거워요. 형님과 같이 축제에 가는 게 얼마나 즐거운 데요! 삶의 낙이랄까? 히힛.” 그는 그곳에 가서도 특별히 뭔가를 한 기억이 없다. 하지만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딜렌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입을 열면 말이 더 많아질 것 같은 예감에 그는 애초 말을 안 하기로 했다. 딜렌이 희희낙락해서 방을 나서고 난 뒤, 그는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정말 모르는 걸까, 저 아이는? 그와 저 자신은 입장이 같을 수 없다는 걸 모르는 걸까. 아니면 알고도 모르는 척을 하는 걸까. 매번 ‘저네’들 사이로 끼어들게 만들려는 노력은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의도는 가상하나, 애초 그 바람은 성립될 수가 없다는 걸 그는 알았다. 표면적으로나마 저 아이가 원하는 방식으로 그가 약간 움직이는 건, 카디스의 ‘명령’때문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아까운 시간을 저 아이를 위해 할애할 리 없다. 침대에 몸을 뉘인 그는 눈을 감았다. 언제쯤, 이 꿈에서 깨어나게 될까. * * * * * * * * * * * * * * * 자신이 죽인 게 분명한 인물들의 살아있는 모습을 다시 보는 건 역시 께름칙한 기분이다. ‘기분이 묘하군.’ 이 시간에 대한 기억들은 그다지 선명하지 않았다. 아니, 대체적인 흐름을 제외하고는 선명한 기억이란 그의 머리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늘, 그는 흘려버리고 흘려들었으니까.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죽지 마… 절대, 절대 죽지 말아 줘.” “카마프.” 고의는 아니었지만, 본의 아니게 엿듣는 형태가 되고 말았다. 장담하건데, 지금 그의 ‘아버지’는 그의 존재를 알 수가 없다. 이디스는 냉정한 눈으로 서로 부둥켜 끌어안고 있는 그들을 내려다봤다. 무엇 때문에, 저들은 저렇게 절박한 심정이 되는 걸까. 타인과 타인이다. 어차피 ‘남’이지 않은가? 무엇 때문에 저들은 저리도 서로에게 매달리는 것일까. “어쩔 수 없는 거야. 어쩔 수 없는, 순리이며 자연스러운 결과야, 그것이. 카마프.” “어째서? 왜? 왜 그래야만 하는 건데!” 카마프는 눈물 젖은 얼굴로 소리쳤다. 그 음성에는 다급한 절망감과 쓰라린 아픔이 절어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제야 행복해졌는데… 응? 죽지 마. 죽지 마.” “……아직 멀었어. 시간은 많아, 응? 너는 인간이야… 죽기 전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 줄 테니. 울지 마.” “만약, 내 삶에 행복이라는 게 찾아온다면… 두 손으로 꽉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으리라 생각했어. 다시는,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고.” “나는, 카마프. 너를 알고 나서야 ‘감정’이라는 걸 깨달았으니까. 나는 그 전까지, 살아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살아있는 게 아니다? 그의 ‘아버지’는 카마프의 황금빛 눈에 흐르는 눈물을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닦아냈다. 그리고 그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어르는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의 ‘이디스’가 예전의 나였다. 스스로의 의지로 살아가는 게 아닌 상태였지. 마왕의 자식이기 때문에 나는 감정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했어.” 스스로의 의지로 살아가는 게 아닌 상태. 이디스는 속으로 조심스럽게 되뇌었다. 그리고 다시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스스로의 의지로 살아가는 게 아닌 상태. “네가 ‘인형’이라 표현했지. 내가 바로 그 상태였다.” 카마프가 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자 카디스는 희미한 웃음을 띠면서 말을 이었다. “말한 적이 있으려나, 전에.” 카마프의 고개가 좌우로 흔들어진다. 카디스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이디스는 자신의 기척을 숨기며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이제까지 늘 그래왔지. 나 역시 내 아버지를 죽이고 이 자리에 오른 거야. 그렇기 때문에, 이건 피할 수 없는 순리인 거지. 이 자리에 있는 존재는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해야 해. 보통 자식에게 당하지. 이제까지 그래왔고, 안 그랬던 적은 한 번도 없어.” “먼저 죽여 버리면 되잖아! 죽여 버리면, 그냥 지금 죽여 버리면……!!” 카마프의 외침에 카디스는 쓰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이미 늦었어. ‘이디스’는 강하다. 아마 지금도 나보다 강할 거야.” 하얗게 질려가는 카마프의 얼굴. 카디스는 쓰게 말을 이었다. “마왕이 되는 게 내 목표였어. 지금의 ‘이디스’가 그렇듯이. 나의 ‘아버지’ 역시 지금의 나와 같은 말을 했지. ‘날 죽이고 마왕이 돼라. 강해져라’라고 말이야.” 어쩌면 이디스 역시 그의 ‘아들’에게 같은 말을 할지 모른다. “널 처음 만나고, 나는 혼란스러웠다. 왜냐하면, 한 번도 감정이란 것을 느껴본 적 없는 나로서는 내게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너라는 존재가 참… 뭐랄까, 낯설었다고나 할까. 그리고 난 누군가가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데에 익숙하지 않았어.” 이디스는 얼굴을 굳혔다. 낯설다? “생각해 봐. 인형이었던 존재가 처음으로 감정을 갖고 움직이려 했다고. 처음부터 그걸 인정하고 움직이는 게 쉬울 거 같아? 네가 보기에는 쉽게 보였겠지만, 카마프, 나는 정말 그랬어.” 그렇게 말하는 카디스의 표정은 참 온화해보였다. 아주 편안하고 행복하며 만족스러워 보였다. 이디스는 그들의 방에서 빠져나와 텅 빈 허공의 밤하늘에 몸을 띄웠다. 그리고 창문으로 그들을 내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낯설고… 영향을 미치다? 혼란스럽다?’ 이게 그의 ‘아버지’와 어울리는 단어이던가? 그런 생각을 하며 이디스는 피식 웃었다. 그의 아버지 말 그대로였다. 확실히, 그의 아버지와 그는 닮았다. 아니, 카마프를 데리고 오기 전까지는 완전 판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닮았다. 외모뿐만이 아니었다. 성격, 살아오면서 밟은 과정 같은 것들도 모두 똑같다 싶을 만큼 다르지 않았다. ‘혼란스럽다. 낯설다.’ 그랬다. 지금의 그도 그랬다. 혼란스럽다. 아주 많이, 그런 자신이 낯설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단 한 번도 그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이는 아무도 없었기에 마음대로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그녀’가 그는 낯설기도 했으며 약간은, 글쎄, 두려운 면도 없잖아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는 뒤에서 그녀를 지켜보기만 했다. 예전과는 확실히 달라져가는 자신을 보며 스스로 너무나 신기해하기만 했다. 한 발 뒤로 물러서 지켜만 봤던 것이다. 그녀를 보면 기분이 좋다. 지켜보고 있노라면 웃음이 나온다. 왜 그런지는 모른다. 어쩌면, 아무 이유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알았다. 이제야 알겠다. 그는, 그녀를 ‘좋아하는’ 것이다. 적어도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이 거짓이 아니라면, 이건 그의 삶 최초로 느끼는 ‘감정’이라는 것이다. “하… 하하하! 크큭… 킥킥… 쿡, 아하핫!” 깨닫고 나니, 이디스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 없었다. 그는 킥킥대며 문득 깨달아지는 한 가지 사실에 다시 잔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에드라프, 멋지게 나를 골렸군.’ 소유욕이라? 쿡, 잘도. 아마 그는 자신보다 먼저 그 감정을 알아차렸을 게 자명했다. 그러고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고 이상한 곳으로 생각이 새게 만들었다는 건, 그를 골려줄 의도가 다분한 게 분명했다. ‘그런데… 여기는……. …아아, 깨어난 거로군. 언제부터였지?’ 알 수 없다.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굳이 따지지 않기로 했다, 그는. 푹신한 쿠션에 몸을 기대며, 그는 눈을 가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다시 싱긋 웃었다. 개운한 느낌. 답답하도록 오랫동안 너무 헤매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아버지’도 본의는 아니었겠지만 그의 일생 단 한 번 ‘아버지’ 노릇을 한 것이다. 그와 너무나 똑같은 전철을 밟아가는 아들에게 그는 가르쳐줬다. ‘감정’을 깨닫는 법을. 이 날을 훗날 이디스는 이렇게 말했다. “내 모든 것이 바뀐 날이었다. 비록, 그 시간은 터무니없이 짧았지만.” 그날 그가 꾼 꿈은, 그렇게 끝이 났다. ================================================================================ 에잇. 어색하다고 하셔도 별 수 없어요;; 이디스의 독무대[..]인 이번 편. 자자, 빨리 넘어 갑시다아!;;; 즐독! 하세요^^ 제 목: [수정판] 공녀(貢女) : 제20화 [비올레타를 잡아라!](1) #. 제20화 [비올레타를 잡아라!] * * * * * * * * * * * * * * * “그러니까! 저 산맥으로 들어갈 수 있게만 해 주면 된다니까요!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요?!” 에드윈드는 답답하다는 듯 크게 소리쳤다. 죽어도 우리가 죽겠다는데 왜 저 사람이 나서서 난리인 거야? 하지만 그런 그의 답답한 심정을 모르는 남자는 젊은, 아니 어린 나이에 사지(死地)로 뛰어들겠다는 에드윈드를 말려야 한다는 사명감에 취해 있었다. “어린 나이에 벌써 세상을 포기하면 쓰나! 엉? 자포자기하기 말게! 살아야지!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라네!” “이… 이이익! 죽으러 들어가는 게 아니라니까 그러네, 이 아저씨야!” “드래곤 레어가 있는 줄 뻔히 알면서 산에 들어가겠다는 게 자살하러 가는 게지, 그럼 뭔가? 대답해 보게! 이 사람아. 얼굴도 반반허니 잘 생겼구만 왜 그리 인생사에 비관적인가 그래?” “아아악! 남의 일에 신경 쓰지 말고 제발 통행증이나 내 달라고요! 여기서 나가서 저 너머로 가려면 그게 필요하니까! 죽어도 내가 죽는데 왜 아저씨가 나서서 그러느냐고요! 과도한 친절은 전혀 반갑지 않아요!”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브레이크가 걸린 에드윈드는 열을 내며 소리쳤다. 요즘은 정말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너무 많았다. ‘베키는 내가 떠난 지 꽤 됐는데도 연락 한 번 안 하지. 특별히 연락 달라고 통신용 수정구슬까지 줬는데! 엘 세느안트 가에서 보낸 용병이라는 놈은 세 형제에게만 붙었지. 이번에는 또 이 아저씨가 태클을 걸어? 아악! 요즘 내 인생 왜 이러니.’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하기 짝이 없는 ‘카엘’이라는 남자. 눈앞의 아저씨와 실랑이를 하던 에드윈드는 잠시 말을 멈추고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떠올렸다. 처음 만났을 때는 워낙 정신이 없었기에 자세히 살피지 못했지만, 그 남자는 외모 또한 범상치 않았다. 한 마디로 아름답다, 이거지만, 왠지 모를 오만함이 더해진 덕분에 아주- 귀족스럽다(?)고나 할까. 진짜 귀족인 그들보다 더 귀족다운 면모가 보였다. 그러고도 용병이라니, 뭔가 숨겨진 게 있을 거라고 에드윈드는 짐작했다.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던 그가 입을 꾹 다물자 남자는 드디어 자신의 설득이 먹혔다고 생각하며 더욱 소리를 높였다. “거봐. 잘 생각해보니 내 말이 맞지? 가족을 생각해 봐. 부모님, 형제 같은 이들을 떠올려 보라고. 네가 죽으면 그분들이 얼마나 슬퍼하시겠어.” 이쯤 되면 성질이 날 만도 하지 않은가. 에드윈드의 이마에 가느다란 실핏줄이 올랐다. 그 가족이라는 것 때문에라도 꼭 저 산에 가야 했다. “그러니까 더 가야 해요! 좀 보내 달라니까요? 우리가 다 알아서 할게요!” “어떻게 믿고? 너희를 보내줬다가 화난 드래곤의 성질을 우리가 다 받을 수도 있다고. 그때는 어떡하려고 그러나? 그런 점에서도 그렇고, 자네가 함부로 목숨을 버리는 것을 막는다는 점에서도 나는 허락할 수 없네.” 남자는 가차 없었다. 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투에 베인 굳건한 의지(?)를 읽은 에드윈드는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 * * * * * * * * * * * * * * “그렇다니까요. 전혀 꼼짝을 안 해요. 얼마나 질긴 사람이던지… 에휴, 나 절대 다시 안 가요. 형님들이 한 번 가 보세요.” 카에리드는 혀를 내두르며 말을 늘어놓는 에드윈드를 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부터 상대해야 할 드래곤도 문제지만, 이 영지에서 산맥 쪽으로 가는 것 역시 문제였다. ‘비에른’은 드래곤의 산맥 옆에 붙어있고 시골이기는 하지만 엄연한 영지다. 영주의 관리 하에 있는 남작 령인 것이다. 영지에 들어오고 나가는 것은 모두 영주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한 것인데, 비에른의 영주는 드래곤의 산맥으로 들어가는 것 자체를 막고 있었다. 드래곤의 레어 옆에 살고 있다는 것은 굉장히 불안한 일이다. 언제 드래곤의 변덕으로 인해 초토화될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드래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살았다. 그들에게 제일 무서운 건 국가도, 타국가의 침략도 아닌 드래곤이었다. 무작정 영지부터 들어오고 보자는 발상 자체부터가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카에리드는 한숨을 쉬었다. “그 사람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야. 원래 저 산맥으로 들어가는 막고 있었던 데다 요즘 이 비에른이 어수선한 분위기야.” 바르에든이 말했다. 그는 이 영지 내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여행을 떠나오기 전 기사수행을 하기 위해 곳곳을 돌아다녀 본 그였기에 그런 것에 민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괴도(怪盜) ‘비올레타’라는 여자 때문이다.”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던 카엘의 말에 일행들의 시선이 그에게 모였다. 카엘은 카에리드를 직시하며 말했다. “알아본 바로, 요즘 이 영지 내가 어수선한 것은 비올레타라는 여자 도적 때문입니다. 그녀의 정체는 아무도 모르는데, 영주가 하는 일마다 훼방을 놓으면서 재물을 훔쳐 사람들에게 나누어준다고 하더군요. 그것 때문에 영주가 골머리를 썩는 모양이야. 덕분에 영지 내의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는 거고요.” 일행들의 얼굴에 옅은 감탄이 스쳐갔다. 이 시골 영지에서는 중앙의 세력이 미치지 않기 때문에 영주의 말이 곧 법일 정도로 영주의 권력이 강했다. 그래서 이렇게 시골일수록 영주의 괴롭힘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그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영주에 대한 평가는 어떻습니까?” “뻔하지 않습니까? 높은 세금에 착취로 악평이 자자합니다. 그러니 그런 도적이 설치는 게지요.” 일행들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신분을 드러내놓고 ‘보내 달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대륙 어디서든 신분이 밝혀지면 사람들의 시선이 모아질게 뻔하기 때문에 함부로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카에리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이번에는 내가 영주를 만나보고 올게. 설득해보고 안 되면- 어쩔 수 없지, 그냥 가자.” 어쩔 수 없지. 기사로서 법을 어기는 건 반갑지 않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그들은 충분히 이 도시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굳이 그러지 않은 건, 어떤 상황이라도 기사는 법을 어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들은 ‘바른 생활 청년(소년)’들이었던 것이다. “나도 같이…….” “아니요, 저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카에리드는 같이 가겠다며 일어서는 카엘을 만류하며 말했다. 솔직히 아직 카엘이 의심스럽기도 하고, 믿을 수 없었다. 여러 모로 미심쩍은 면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읽었는지 카엘은 고소(苦笑)를 지으며 생각했다. ‘좀… 씁쓸하군.’ 누군가 자신을 기억해주지 못한다는 건 아픈 일이다. 그의 기억 속에는 선명하게 기억되어 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까맣게 잊고 있다는 건. 물론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고, 태도도 약간 바뀌기는 했지만- 카엘은 섭섭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지. …나중에, 나중에.’ 그렇게 생각하며 카엘은 여관을 나서는 카에리드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 * * * * * * * * * * * * * * 이거면 되겠지. 아무리 시골 영주라도 영주는 영주고, 만나는 데에 어느 정도의 절차는 필요하다. 카에리드는 옛날 맨 처음 받았던 기사의 패를 만지며 생각했다. ‘적어도 신분보장은 되는 거니까, 이게.’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만약을 대비해 가지고 왔던 기사의 패는 영주를 만날 수 있게 해 주었고, ‘조금만 기다려라’고 하는 말에 따라 그는 얌전히 영주와 만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제국의 로열 나이트이기도 하고, 공작의 맏아들이기도 하기 때문에,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은 그다지 없었다. 있어봤자 가족이나 친구들일까? 보통은 그가 기다리지 않게 먼저 와서 기다리는 쪽이었던 것이다. 잠시 후, 맞은편의 문이 열리며 육중한 무게를 가진 남자가 비뚱비뚱 걸어 들어왔다. 카에리드는 그가 이 비에른의 영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걸치고 있는 의상은 ‘반짝’거렸고, 영주 몸의 한 3분의 1이나 될까 하는 남자 둘이서 그를 힘들게 부축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가 영주인 게 확실했다. 기사라면 주군 외에 그 어느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된다. 황제를 제외하고 말이다. 카에리드는 가볍게 인사를 했다. “나를, 헉헉, 만나 보겠다고 한 이유가 무엇인가?” 세상에. 여기까지 오는 데에도 힘이 들어 헉헉거리다니. 카에리드는 속으로 혀를 차며 말했다. “드래곤의 산맥으로 가고 싶습니다. 허락해주십시오.” 처음부터 본론을 꺼낸 카에리드는 영주를 바로 직시했다. 영주의 크고 넓은 얼굴에는 땀이 찐득하니 흐르고 있었고, 그의 말에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영주는 단호하게 끊었다. “안 되네.” “부탁드립니다. 꼭 가야 합니다.” 꿈틀. 카에리드는 영주의 턱 근육이 당겨지는 것을 보았다. 이곳에서 최고의 권력을 휘두르던 영주는 자신의 말이 거절당하는 게 익숙하지 않을 터다. 그것을 잘 아는 카에리드는 강경한 어조를 조금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결코 이 비에른에 피해가 오지 않게 하겠습니다.” “그래도… 혹여나 드래곤의 분노를 사면 어찌할 텐가? 자네들이 죽는 것에는 상관 안 하네. 우리 영지에 피해가 오면 나만 손해를 본다는 말일세. 혹여 그런 일이 생기면….”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겁니다. 약속드립니다.” 그래도 영주의 얼굴에서는 불만스러움이 가시지를 않았다. 카에리드는 한숨을 내쉬며 마지막 카드를 꺼내 보이기로 했다. “만약… 허락해주시면, 영주님의 고민거리를 해결해드리죠. 도적 비올레타를 잡아 드리겠습니다.” “뭐?” 솔깃한 모양이군. 카에리드는 계속 말을 이었다. “이 정도면 파격적인 제안입니다. 저희도 시간이 없습니다.” 진짜 그녀를 잡을 생각은 없었다. 거짓말을 하는 게 조금 양심에 찔리기는 했지만, 그는 이렇게 말해놓고 소동을 일으킨 후 그 틈을 타 영지를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그게 가장 빠른 길이었다. 허가해주지 않는다면 몰래 가는 방법밖에 없는데, 성벽을 보니 꽤나- 글쎄, 아무리 에드윈드가 용(?)을 쓴다고 해도 마법으로 소리 없이 넘어가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은 높이였다. 조금이라도 수월하게 빠져나가려면 소란을 틈타 움직이는 편이 훨씬 나았다. 그렇게 계산을 마쳤기에 이런 제안을 한 것이다. 영주는 그런 그가 미심쩍다는 듯이 물었다. “그 년을 잡을 실력은 되는가?” “이래봬도 기사입니다. 실력 있는 용병 한 명과 기사인 일행이 셋 더 있습니다. 4클래스를 마스터한 마법사도 있고 말입니다. 이 정도면 여자 도적 하나 잡는 데는 무리가 없는 전력일 겁니다.” “음…….” 영주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아마 이해타산을 맞춰보는 것이리라. 카에리드는 영주가 허락할 것을 알고 있었다. 쉽게 보이지 않으려고 일부러 저러는 것일 게다. 그런 생각을 하며 그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알았네. 그 년을 잡는다면 갈 수 있게 해 주지.” 선심을 쓰겠다는 듯한 말투에 저절로 비웃음이 입 밖으로 비집고 나올 것 같았지만 꾹 눌러 참은 그는 일어나며 살짝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리고 영주의 방을 나서며 그는 킥 웃었다. ‘저러니 도적에게 눌리지. 분명 좋은 영주는 아닌 듯싶군. 이번 일이 끝나면 조치를 취해야겠어.’ “도적 비올레타를 잡겠다고요? 그것 참 무모한 선언을 하셨군요.” 응? 카에리드는 바로 앞에서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당신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을 거예요.” 오만하게 쳐든 고개, 내리깐 눈, 척 보기에도 참…… 뭐랄까, 사나워 보인다고나 할까. 카에리드는 그녀가 영주의 딸인 것을 깨달았다. 드레스를 갖춰 입은 것으로 봐서는 말이다. 그런데 왜 저렇게 닮지가 않았을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지만! 그녀는 절대로 안 잡혀요.” “영주의 딸인 것 같은데… 당신 입장에서는 그녀가 잡혀야 좋은 게 아니오?” 꿈틀, 하고 여자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날카롭게 눈을 떠 보인 그녀는 그를 옆으로 화악 밀쳐내며 말했다. “내 마음이에요! 여하튼, 당신은 그녀를 잡을 수 없어!” 얼떨결에 옆으로 밀쳐진 카에리드는 문을 열고 영주의 방으로 들어가는 그녀를 보며 허, 하고 기막힌 웃음을 흘렸다. ================================================== 이번 화는 오라버니's의 이야기입니다. 얘네들도 진도(?)가 좀 나가야지요. 그래야 나중에 만났을 때 어떻게 해 보든가 하지..; 이번 얘기가 끝나고 한 챕터 정도 더 오빠들 얘기가 나갈 것 같아요. 그 다음에 음, 루피아 얘기가 나오겠지요? ...그때까지 루피아는 꼬르륵- 잠수랍니다.[삐질] 오빠들도 좀 사랑해달라고요;; 불쌍하잖아요.[먼산] 메일은 donghee425@hanmail.net으로 보내 주세요. 리플은 필수인 거 아시죠? 그럼, 즐독하세요^^ 덧. 오늘 새벽에 몇 개 더 올라갈 거예요, 아마.[생글] 덧2. ...잠이 부족해요, 잠이.. 요새 맨날 3, 4시간밖에 못 자는.;; 제 목: [수정판] 공녀(貢女) : 제20화 [비올레타를 잡아라!](2) #. 제20화 [비올레타를 잡아라!] * * * * * * * * * * * * * * * “일단 그렇게 됐으니까, 잡는 시늉만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카에리드의 말에 카엘과 에드윈드를 제외한 일행들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하긴, 껄끄럽기는 할 것이다. “이게 제일 좋은 방법이야.” 어쩔 수 없다고 어르듯이 말한 카에리드는 그 영주 딸이라는 여자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해야 할까 고민했다. 하지만 곧 그만두었다. 말해야 할 이유가 없어서였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데?” 이데카른이 물었다. “이제부터 ‘시늉’을 해야지. 그 비올레타라는 여자가 빨리 움직여주면 움직여줄 수록 좋아. 그래야 우리가 그 틈을 타서 움직이지.” “그러니까 어떻게?” “아마… 그 여자의 본거지를 찾아가서 쑤시면(?) 되지 않을까 하는데.” “본거지라면, 씨프(thief) 길드?” “도적이면, 거기 속해있지 않을까?” 카에리드가 확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데카른은 글쎄, 라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럴 지도.” 씨프 길드 하니까 생각이 나는 것이 있었다. 모두 같은 생각을 한 것인지, 모두 희미한 웃음이 서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영문을 모르는 카엘을 제외하고. “…너도?” “아아. 형도?” 그들은 피식 웃었다. 그들은 모두, 지도를 구한답시고 베키를 미끼로 씨프 길드 일원을 하나 잡아내 죽도록 팼던 기억을 떠올렸던 것이다. 그때 그 생각을 하니 웃음이 실실 새어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는 그들이었다. “아마도 그 여자 쪽에서 먼저 움직일 것 같아. 우리는 가만있다가 잡는 시늉만 하고 얼른 빠져 나오자고.” 카에리드의 말은 맞았다. 대화를 나눈 지 몇 시간 되지도 않았는데 영주가 보냈다는 사람이 그들이 묵고 있는 여관에 찾아와 들이닥치며 비올레타가 경고장을 보냈다고 하는 것이다. 괴도는 괴도답게, 그녀는 예고장, 경고장 등등을 날리는 것을 즐긴다고 한다. “할 건 다 하네.” 그 얘기를 듣고 영주의 성에 오게 된 카에리드가 비올레타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듣고 한 말이었다. 아무리 작은 영지에서 활동하는 괴도라고 하더라도 괴도는 괴도인 모양이다. 예고장, 경고장은 물론이고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활동, 단독 활동을 하며 아무도 정체를 모르게 그림자만 남기고 도주하는 게 그 패턴이다. “잡을 수 없을 게 뻔하니까 포기하고 가는 게 어때요?” 영주의 딸이 옆에서 빈정거렸다. 카에리드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건지?” “아버지가 대신 보냈어요. 여러분을 잘 지켜보라고요. 지금 설명한 사람의 이름이나 아나요?” 당연히, 모른다. 소개조차 주고받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카에리드와 ‘설명해 준 사람’이 서로 말했다. “영주님의 보좌관인 보들루프라고 합니다.” “카에리드입니다.” 자신을 보들루프라고 소개한 사람은 전형적인 ‘소심’한 사람으로 보였다. 비쩍 마른 체구에 고개를 숙이며 굽실거리는 게 습관이 된 듯 보인다. 카에리드의 시선이 영주의 딸에게로 옮겨갔다. 그쪽은 이름을 말하지 않느냐는 듯한 시선이었다. “에딜위나 비에른입니다.” 과연, 그가 짐작한 성격답게 그녀는 오만한 어조로 말했다. “좋습니다. 에딜위나, 계속 설명해주시죠.” “괴도 비올레타는 지금으로부터 대략 1년가량 전쯤에 출현했어요. 맨 처음에는 비에른과 가장 가까운 영지로 보내는 영주의 마차를 공격해 그 재물을 훔쳤고, 그 다음에는 여러 차례 영주의 성에 침입해 재물을 훔쳐갔습니다. 많지는 않지만 가끔 이 영지에 있는 부자 상인의 별장에서도 재물을 훔친다고 하는군요. 예고 시간은 8시, 지금으로부터 1시간정도 후입니다.” 열심히 설명을 해 줘서 고맙긴 하지만, 비올레타를 잡을 생각이 없는 그로서는 전혀 쓸모가 없는 말들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당신들은 그녀를 못 잡아요.” “알았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하군요. 하지만 저희 일입니다.” 지금 카에리드의 머릿속에는 비올레타를 잡는 게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길을 확보하느냐가 문제였다. 그는 에딜위나에게 말했다. “혹시 이 영지의 지도가 있습니까? 있으면 좀 보여 주십시오.” “지도요?” “효율적인 일을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핑계를 써 먹을 수도 있군. 에딜위나는 탐탁찮은 표정을 짓긴 했지만 곧 그에게 지도 한 장을 가져다주었다. 생각보다 상세한 지도였다. 진지하게 지도를 바라보는 그에게, 에딜위나가 한 마디 했다. “일행들은 어디 있죠? 혼자라고는 하지 않으셨잖아요.” “올 겁니다.” 에딜위나는 이 남자가 심-하게 마음에 안 들었다. 짧게 끝나는 성의 없는 대꾸도 그랬고, 뭣도 모르고 비올레타를 잡겠다고 나선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그녀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돌아섰다. “자-알 해 보세요. 그녀가 잡히나 안 잡히나!” * * * * * * * * * * * * * * * “준비는 됐니, 에드?” 에드윈드는 씩 웃어 보이며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다 되었다는 뜻이다. 트로에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우고 영주의 성을 올려다봤다. 마침(단순하게도) 소식을 접하자마자 비올레타가 움직여주는 덕분에 그들은 빨리 이곳을 나설 수 있게 되었다. 비올레타가 나타나는 소동과 동시에, 그들은 폭죽을 터뜨리기로 했다. 폭죽은 상당히 비싼 데다 구하기도 힘든 물건이었지만 다행히 에드윈드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트로에와 에드윈드, 그리고 이데카른은 엘프의 숲으로 향할 계획이었기에 일단 빠지고, 바르에든과 카에리드, 그리고 카엘만이 드래곤 레어로 향하기 위해 소동을 틈타 움직일 계획이었다. “준비는 다 됐어요. 이제 나타나주기만 하면 되는데, 그 괴도라는 여자.” 에드윈드는 에휴- 하고 한숨을 내쉬며 주저앉았다. “대체 우리가 왜 이런 곳에서 발목을 붙잡혀갖고 이런 짓까지 해야 하냐고요.” “글쎄?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에드.” 트로에는 어색하게 웃어주며 말했다. 솔직하게 투덜대는 에드윈드의 모습이 자칫 철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그의 눈에는 귀여워 보였다. 남동생 같았던 것이다. “엘프의 숲에서는 뭘 어떻게 해야 해?” “음… 그건요, 거기서 가져와야 할 게 있는데- 이번에 드래곤만 어떻게 잘 해결되면 그건 신경 안 써도 돼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러니까, 음…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엘프를 잘 설득해서 그들이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돌 하나를 가져오면 되는 거거든요. 그치만 이번에 드래곤 건이 잘 해결되면, 그러니까 에… 드래곤을 우리 편으로 만들면 그건 쉬워져요. 드래곤이 말하는 데 안 들어줄 간 큰 엘프가 어디 있어.” 트로에는 어색하게 웃음을 띠운 얼굴로 말했다. “그럼 우리가 가는 중간에 드래곤 일이 해결되면?” “그야 당연히! …드래곤의 도움을 받아 같이 엘프들에게로 가야지요.” “중간에 돌아온다는 얘기?” 에드윈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트로에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 * * * * * * * * * * * * * * * 확실히, 에딜위나가 그런 말을 해야 할 만 했다. 카에리드는 약하게 인상을 쓰며 팔목을 잡아챈 손에 힘을 주었다. 아아, 너무나 뻔해서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다. “…이런 실력으로 일을 벌일 생각을 했습니까?” 정말 황당한 아가씨다. 하긴, 이러니 그렇게 그에게 적대적이었던 거다. 비올레타는 안간힘을 쓰며 그의 손을 벗어나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너무나도 쉽게 자신의 저항을 무시해버리자 화가 치민 그녀는 소리쳤다. “이거 안 놔요?!” 어차피 그녀를 잡을 생각은 없었으니 이만하면 놔 줘도 되긴 하다- 뒤에서 당황한 얼굴로 바르에든이 말했다. 그로서도 이런 일은 상상해 본 적이 없었기에 많이 황당했을 것이다. 영주의 재고(在庫)를 터는 도둑이 그 딸이었다니. “레이디는 놓아드리고 그냥 가는 게 좋겠어.”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카에리드, 빨리 가지요.” 카엘은 약간 망설이는 듯한 카에리드를 보며 피식 웃었다. 저렇게 참견(?)하기 좋아하는 성격은 여전한 듯 했다. ‘하는 수 없지.’ 뭔가 남는 듯한 표정의 카에리드를 본 카엘은 말했다. “저희 먼저 가지요. 할 말 하고, 다 끝낸 뒤에 오십시오. 설마, 정체를 눈감아 주는데 빠져나오도록 도와주지 않겠습니까?” 정 안 되면 내가 데리고 나와도 되고 말이야. 카엘의 생각은 그랬다. “하, 하지만 카엘 씨!” “괜찮다. 내가 책임지지. 그럼 카에리드, 되도록 빨리 오십시오.” 바르에든은 정신이 없었다. 이 남자,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정체는 둘째치고라도, 수상한 데도 그를 떨쳐내지 못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카엘이 이 여행의 목적을 알고 있고, 그 정보가 다른 곳으로 새어나가면 안 되기 때문에 같이 다니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나 제멋대로인 이 남자를 바르에든은 도저히 파악할 수가 없었다. ‘이건 너무 심하잖아!’ 자신의 팔을 잡아끄는 힘도 엄청났다. 엘 세느안트 가문의 형제들에게만 살갑게 대하는 건 그 자신을 고용한 고용주가 엘 세느안트 공작이라서가 아닌 것 같았다. 분명 뭔가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음을 바르에든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결국 바깥까지 끌려나온 바르에든이 그제야 카엘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카엘은 그가 그렇게 말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인상을 쓰고 있었다. 바르에든은 더 기가 막혔다. “시끄럽다.” “아니, 대체…!” “네가 원하는 건 네 동생을 구해내는 게 아니냐? 이번 일은 상관없는 거니 신경 꺼.” 차갑게 딱 잘라 말한 카엘은 단호하게 뒤돌아 먼저 걸어갔다. 잠시 멍-히 서 있던 바르에든은 기가 막혀 하! 하고 헛웃음을 흘리며 결국 그를 뒤쫓아 갔다. 카엘과 바르에든이 나가자 카에리드와 비올레타는 둘만 남았다. 카에리드는 잡았던 비올레타의 손목을 놔 주며 말했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인 겁니까?” 그녀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는 그였다. 1년 동안 잡히지도 않고 용케 도망을 다닌 것을 보면 운동신경은 좋은 것 같지만, 중앙에서 기사 몇 명만 보냈어도 그녀는 꼼짝없이 붙잡혔을 것이다. “제-기랄! 당신이 신경 쓸 게 아니잖아! 신경 끄고 빨리 꺼져요!” 비올레타, 아니, 에딜위나는 화가 나 외쳤다. 그녀 입장에서는 별 상관도 없는 사람이 나타나 참견하는 꼴이었다. 남 이사 뭘 하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이유부터 들어봐야겠습니다만?” “당신이 왜! 당신 일행들처럼 사라져버리라니까?” “궁금해서. 다른 뜻은 없습니다. 당신 정체를 눈감아 주는데 그 정도 보상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여차하면 다 불어 버리겠다는 뜻이 숨어있는 그의 말에 에딜위나는 움찔하며 그를 노려봤다. 카에리드는 정말 궁금했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말이다. “난 아버지가 미워요.” “흐음?” 카에리드는 더 말해 보라는 듯 그녀를 쳐다봤다. 그런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얼굴에 써 붙여 놓은 것 같은 표정으로 에딜위나가 말했다. “세금을 높이 매겨 거두기 때문에 사람들 생활도 어렵다고요. 내가 하는 일은 꼭 필요한 일이에요.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미웠고, 사람들은 생활이 어려웠기 때문에 이 일은 아주 적절한 거예요.” 이제 됐냐고 묻듯 에딜위나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더 이상은 사생활이 섞여있어 말해 주기도 어려웠다. “당신은? 당신은 왜 드래곤의 산맥으로 가려 하는 건데요?”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에딜위나는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어,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사지 멀쩡하고 상판떼기 멀쩡해갖고는 죽으려고 별 짓을 다 한다는 생각이.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죽으러 가는 것은 아닙니다만.” 점점 ‘미친놈 아냐, 이거!’하는 눈으로 그녀가 쳐다보자 카에리드가 덧붙였다. “이제 됐죠? 나 놓아주고 당신도 빨리 사라져요.” 에딜위나는 욱신거리는 손목을 문지르며 돌아섰다. 카에리드는 뭔가 불만족스러웠다. 일부러 남아서 얘기를 나누는 거고, 될 수 있는 한 빨리 돌아가야 하는 걸 알지만 이대로 돌아서 가버리기에는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 가지 더. 당신은 왜 당신 아버지를 미워하지?” 물론 미워할 이유는 충분한 듯 했다. 딸과 아버지의 성격이 이렇게 극명하게 다른데 말이다. 영주는 소위 ‘속물’이라고 불리는 사람인 것 같고, 딸은 아! 주! 정의로움이 철철 넘치다 못해 콸콸 쏟아져 내릴 정도인 것 같았다. 어쩌면 달라도 저리 다를까? “당신이 신경 쓸 게 아니에요! 더 이상 주제넘은 참견 그만두고 그만 꺼지지 그래요? 우리는 고작 오늘 만난 사이라고요! 내가 뭐 때문에 당신한테 그런 것까지 말해야 하죠?” 카에리드는 가시 돋친 그녀의 말에도 그냥 빙그레 웃어만 보였다. 빙긋빙긋 웃는 그의 얼굴을 독하게 노려보다, 에딜위나는 이 사람은 말해줄 때까지 웃고만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았어요. 말해주면 될 거 아니에요. 하나도 안 예쁘니까 그만 웃어요.” 에딜위나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깊게 한숨을 내쉬고 입을 벌렸다. 정말 오늘은 운수가 안 좋은 날인 듯싶다. 웬 놈 하나가 느닷없이 찾아와서는 드래곤의 산맥으로 넘어가겠다고 미친 소리를 지껄인다고 하기에 호기심에 갔다가 ‘비올레타를 잡아주겠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 열 받아서 ‘가만두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그들 앞에 나타나기는 했지만, 그녀는 꼼짝없이 잡히는 신세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은…… 하아. “우리 어머니는 다른 영지에서 시집을 왔어요. 옛날에 돌아가셨는데,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폭력을 쓰셨어요. 내가 보는 앞에서! 아직도 기억해요. 그때만 생각하면 소름이 돋아. 나는 그때부터 아버지에게 복수할 방법을 찾았어요. 그 방법이 바로 이 일이에요.” 그리고 다시 한숨. 내가 왜 이런 얘기를 이 사람에게 해야 하는 거야? “그래서?”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예요? 나는 아버지가 세금으로 거둔 제물을 적정량만 빼고는 모두 훔쳐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줬죠. 영지의 주요 수뇌부, 그러니까- 보들루프를 비롯한 몇몇은 내가 비올레타라는 걸 알아요. 아버지가 망하면 내가 바로 그 뒤를 이어야 하니까.” “그래도- 당신 실력으로는 무리가 있는 듯 하군.” “당신네들이 오기 전까지는 괜찮았어요!” 발끈하며 에딜위나가 소리쳤다. “아, 젠장, 왜 나서서 참견이냐고요! 난 당신 참견 따위 필요 없으니까 궁금한 거 다 풀렸으면 이제 그만 사라져주시죠? 내가 시선을 끌어 줄 테니 사라져달라고요! 당신한테 필요한 건 그거잖아!” 카에리드는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씩씩하다 못해 괄괄한(?) 말괄량이 아가씨인 것 같았다. 처음의 인상대로 오만한 구석도 있지만. 그를 노려보며 씩씩거리는 에딜위나를 보던 카에리드는 그녀의 팔목에 파랗게 나 있는 멍 자국을 보고 기겁했다. “이건? 아까 내가 잡아서 그런 겁니까?” “쳇! 보고도 몰라요! 좀 살살 잡지!” 카에리드는 파랗게 붉게 멍이 든 팔목을 보며 걱정스럽게 미간을 접었다. 그 정도로 잡지 않았으면 어떻게든 그를 뿌리치고 도망갈 위인(?)이기는 했지만. “분명 내게 당신이 하는 일에 참견할 자격이 없는 건 분명하지만.” 이건 습관이야. 카에리드가 속으로 말했다. 맏아들로, 형으로, 오빠로 태어난 건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이건 동생들 돌보던 습관인 거라고. “그런 식으로 복수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만 말해두겠어. 당신이 그런다고 해 봤자 당신이 원망하는 걸, 그리고 그 이유를 당신 아버지가 모르면 아무 소용이 없잖아? 그것보다는 차라리….” 차라리? “그냥 당신이 당신 아버지 영주자리를 빼앗아 버리면 되잖아.” “……뭐?” 카에리드는 명쾌하게 말했다. 그는 멍하게 변해버린 그녀의 얼굴을 보며 쿡 웃었다. 아무래도, 더 시간을 끌었다가는 위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있어라!” 카에리드가 나가고 혼자 남은 에딜위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다 맞는 말이잖아.’ 그녀는 나직이 투덜거리며 창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약속대로 시선을 끌어줘야 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그녀라는 것을 아는 보들루프는 그녀를 잡으려고 하지 않겠지만- 그녀는 때마침 떠오른 ‘좋은 생각’에 씨익 미소를 지었다. * * * * * * * * * * * * * * * 영주의 성을 빠져나온 카에리드는 미리 봐뒀던 길로 뛰어나가며 준비해 둔 말에 올라탔다. “비올레타다!” “와아아아-” 약속은 확실히 지키는군. 카에리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얼른 빠져 나가려고 했다. 그때 마침 들려 온 그 말만 아니었더라면. “저, 저게 뭐지?” “뭐라고 써 있는데? 뭐야, 저 말은?” 그의 시선이 저절로 ‘저’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쪽을 본 그는… 어이없음에 하.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의 시선의 끝은 영주의 성 꼭대기에 펄럭이는 새하얀 천에 닿아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새하얀 색에 대비되는 새빨간 색으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책임져!’ ……라고. ‘그 여자 정말… 킥킥, 아, 그래. 두고 보자.’ 카에리드는 코가 꿰였다. ================================================== ...거의 외전격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본편입니다.=ㅅ= 저는 비올레타 겸 에딜위나가 마음에 들어요. 성격이 참.. 불같죠.[피식] 나중에 루피아와 만나면 어떨지 차-암 기대가 됩니다.[히죽히죽] 그냥 후딱후딱 써 버려서 전개가 너무 빨랐지만, 뭐 어때요. 어차피 끝까지 끌고 갈 것도 아니고 딱 두 개로 끝냈는데요.[삐질] 빨랑빨랑 써야 하는데.[주르륵] 훗훗훗. 이번 타자(?)는 바르에든입니다. 이번에 바르에든을 코 꿰어주고 다시 마계 이야기로 돌아갈 겁니다. 오빠들 얘기만 적는다고 너무 뭐라하지 말아요;; 걔네들도 다- 필요하다니까요? 메일은 donghee425@hanmail.net으로 보내 주세요. 리플은 필수필수^^ 이렇게 자주 올리는 건 또 처음인 것 같네요;; 즐독하세요-^-^ 제 목: [수정판] 공녀(貢女) : 제21화 [드래곤의 구애] #. 제21화 [드래곤의 구애] * * * * * * * * * * * * * * * 바르에든은, 다른 이들이 지어 준 별명처럼 ‘천상 기사’다. 범법행위라고는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일명 ‘바른 생활 사나이’이고, 무조건 레이디 퍼스트, 약자 우선이며, 주군(아직까지 없지만)의 명령이라면 하늘의 뜻이라도 어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긴 기사수행을 겨우 끝내고 돌아온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그의 하나뿐인 여동생이 마계에 ‘공녀’로 바쳐졌다는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에리나는, 도도하고 자존심이 강하지만 그에게는 여리고 약한 여동생이었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어렸을 때야 검을 배우겠다고 떼를 부리던 때가 있었지만, 어머니를 닮아 여린 외모를 갖춘 그의 여동생은 언제나 그의 자랑거리였다. 그런 여동생을 구하겠다고 나선 것은 ‘천상 기사’인 그로서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며 명예로운 일이다. 하지만 그는 상상도 해 보지 않았다. 마족과 붙는 것 정도야 어느 정도까지 상상을 해 본 일이지만, 그 이름도 유명한 드래곤과 마주해야 하는 상황까지 오게 될 줄이야. 갑작스레 일행이라고 끼어든 카엘 역시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어떻게 드래곤 레어로 가는 길을 아는 거지?’ 여러 가지로 수상한 남자였다. 슥슥 길을 헤쳐 가는데, 자연스럽고 빠르게 그는 걸어가고 있었다. 카에리드도 뭔가 불편한 표정인 것을 보니, 그 역시 바르에든과 같은 심정인 것 같았다. “여기서부터는 조심해야 할 겁니다.” 드래곤 레어로 찾아가는 길 치고는 너무나 평안했다. 카엘의 충고에 새삼 두 사람은 지금이 드래곤 레어로 가는 중이라는 것을 깨닫고 긴장했다. ‘그런데… 뭘 조심하라는 거야.’ 뭐 조심할 게 있어야 조심하든지 말든지 할 게 아닌가. 몬스터가 어디서 툭 튀어나오는 것도 아니었고, 마법 트릭이 깔려있어 마법이 날아온다든지 하는 것도 아니었다. 가장 먼저 앞장서서 걸어가고 있는 카엘이 조심성 없이 저벅저벅 걷는 모양을 봐서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 같았다. 카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왜 하필- 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카에리드는 이미 찍힌(?) 것 같은데… 이번 재물은…….’ 그는 불쌍하다는 의미를 가득 담아 바르에든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제 슬슬 나타날 때가 되었다. 그가 여기 왔다고 아까부터 신호를 계속 보내왔으니, 아무리 게으른 드래곤이라도 몸을 일으킬 때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는 속으로 카운트를 세었다. ‘하나, 둘, 셋, 넷….’ 쿠구구궁- 이제 일어난 모양이다. 게으른 족속들 같으니. ‘다섯, 여섯….’ 휘우우웅- 무거운 바람소리가 날카롭게 허공을 휘저었다. ‘일곱, 여덟, 아홉,….’ 아마 지금쯤 폴리모프를 하고 옷 찾는다고 난리를 치는 중일 게다. 보지 않아도 눈에 빤히 보이는 그 과정에 카엘은 한숨을 쉬었다. 이런 건 그다지 알고 싶지 않았다. ‘열.’ “꺄아아아아악- 카에에에에에엘-” “헉?!” 그가 속으로 열을 셈과 동시에, 허공에서 뚝- 하고 뭔가가 떨어졌다.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카엘의 위에서 아래로 툭, 하고 떨어진 그 괴물체(?)에 놀란 두 사람이 놀란 숨을 삼켰다. ‘그’것은 새하얀 긴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였다. 몸에 색소가 하나도 없는지 길게 늘어뜨린 백발은 윤기가 흘렀지만 은발과는 차이가 있었고, 깜빡이는 긴 속눈썹도 새하얗기만 한 색이었다. 다행히 눈동자에는 조금 색소가 있었는지 진하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구별이 가는 은청색이다. “오랜만이야, 카엘-” “아아. 오랜만이다. 카에리드, 인사하십시오. 이쪽은-” “안녀엉! 화이트 드래곤, ‘히투니아’라고 해애- 잘 부탁해!” 반달모양으로 그녀의 눈이 휘어졌다. 그녀는 마치 평가하는 듯한 눈으로 카엘의 뒤에 선 두 사람을 뜯어봤다. 카에리드를 볼 때에는 시들했던 그녀의 눈이 바르에든 쪽으로 옮겨가자 반짝 하고 빛났다. 그때까지도 두 남자는 아직까지도 사태파악을 못하고 어리둥절해 있었다. “……명복을 빌어.” 움찔.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 깨달은 바르에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카엘은 슬그머니 카에리드를 자신 쪽으로 빼었다. ‘서, 설마 나를 드래곤에게 제물(?)로 바치려고?’ 이상하게 일그러지려고 하는 얼굴을 간신히 제어하며 바르에든이 카엘을 쳐다봤다. 하지만 카엘은 무정하게도(?)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저어보였다. 말도 안 되는 상상과 온갖 설정들이 그의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바른 생활 사나이 바르에든의 온갖 망상들을 멈추게 한 것은, 그 하얀 머리 소녀의 한 마디였다. “멋있다. 나, 이 사람 부인 할래.” 쿵! 마치 명치를 얻어맞은 듯 바르에든의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그래도 돼지? 응? 그래도 돼지, 카엘? 안 되는 거 없지?” “아아. …누가 널 말리겠어?” 카엘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가 처음 바르에든을 봤을 때 한 생각이 바로 ‘딱 히투니아 취향’이라는 거였다. 단정하게 정돈되어진 금발머리와 초록색 눈동자, 예의바르고 진지하며 여인에게 친절하고, 정상적(?)이며 단아한 외모, 출중한 실력까지. 과연 히투니아는 그녀 자신의 이상형을 정확하게 알아보고 눈을 빛냈다. “야호! 헤헤, 그럼 나 이제부터 이 사람… 웅….” “바르에든이야. 바르에든 칼르니르.” “그래! 바르에든의 부인이야. 헤헤헤.” 바르에든은 충격으로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런 그에게 히투니아는 좋아서 팔짱을 끼고 볼을 쭉 잡아 당겨 늘려보는 등 장난을 쳐댔다. “……조심하라고 했던 게, 저런 뜻?” 카에리드가 물었다. 카엘은 한숨섞인 말투로 대답했다. “네.” * * * * * * * * * * * * * * * “싫습니다!” 카엘은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간이 크기도 하지. 바르에든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히투니아를 얼른 떼어낸 뒤 선언했다. “왜? 왜? 히투니아가 싫어? 히니가 싫어? 미워?” 이 드래곤은……. 바르에든은 난감했다. 보통 드래곤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상식들과는 전혀 매치가 안 되는 모습이었다. 히투니아는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그에게 묻고 있었다. ‘레이디 퍼스트’를 외치는 페미니스트 기사 바르에든은 난감했다. 아주, 아주 난감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면 왜? 왜 히니가 부인이 되면 안 돼?” “저, 그런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카엘은 앞에 놓인 쿠키를 한 조각 베어 물며 저 꽉 막힌 기사가 어떻게 대답할지 기대하는 눈으로 지켜봤다. 이 정도야 어느 정도 예상한 상황이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그로서도 상상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불편한 기분으로 앉아있던 카에리드는 여유로워 보이는 카엘에게 물었다. “도와주지 않아도 될까요?” “뭐… 도와줄 것도 없는데다, 저건 해결하지 않으면 아마 평생이 괴로울 테니 놔두는 게 나을 겁니다.” 게다가 재미있기도 하고. 카엘은 덧붙였다. 하지만 영 보기가 안 좋았다. 카에리드는 난감해하는 바르에든을 구경(?)하며 어색한 미소를 띠었다. “우리가 만났었다고 하셨죠? 대체 언제쯤입니까?” 카에리드는 아무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 남자도 자기 또래인 것 같은데, 언제라도 만났었고 조금이라도 친했었다면 분명 아무리 조금이라도 기억이 나기는 해야 할 터다. 그런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의 물음에 카엘은 먹던 쿠키를 내려놓았다. “예전… 오래 전입니다. 제게는 그리 오래 전이 아닙니다만.” “…….” “지금의 저는 이 모습이 아니었죠. 말투도, 태도도 전혀 달랐습니다. 기억 못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겁니다.” 카엘의 말에 카에리드는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본인도 저렇게 말하고 단서도 전혀 없는데 뭘 어떻게 기억해내라는 말인가? 막연한 느낌도 들지 않는 터무니없는 기분이었다. ‘대체 뭐야? 카엘- 카엘.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이름이기는 한데.’ “하여간 안 된다니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바르에든의 목소리에 카에리드는 퍼뜩 생각에서 깨어나 바르에든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왜 안 되는데? 히니가 싫지 않다며. 밉지 않다며.” “싫지 않다고, 밉지 않다고 결혼하는 건 아니잖습니까.” 제발 말 좀 들으세요. 바르에든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꼭 어린애를 어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히투니아는 두 눈 가득 투명한 눈물을 잔뜩 고인 채 울먹였다. “그럼? 그럼 어떻게 해야 결혼하는 건데. 히니는, 히니는 꼭 바르에든의 부인 하고 싶어.” “그, 그건… 서로 사랑해야…….” 어이구, 저 순진한. 카엘은 혀를 찼다. 요즘 세상에도(?) 저런 희귀종이 다 있었다. 히죽거리던 그는 곧 생각을 정정해야 했다. ‘아니군. 카에리드를 비롯한 내가 아는 녀석들은 전부 순종 희귀파인 모양이야.’ 그는 카에리드의 심히 공감한다는 듯한 얼굴을 봤던 것이다. “나, 나, 히니, 히니, 히니 바르에든 사랑해!” 그 말에 바르에든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제 됐지? 나 바르에든 사랑해. 첫눈에 그랬어. 응?” 그래도 바르에든이 고개를 흔들자 이제는 울 태세였다. 다급해진 바르에든은 비장한 표정으로 다짐을 한 듯 주먹을 꼭 쥐었다. “왜 안 되냐 하면….” 그는 마른 목으로 타액을 넘겼다. 이 말을 하는 데는 그만한 용기가 필요했다. 그는 충분히 뜸을 들인 후 ‘왜?’라는 듯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는 히투니아에게 말했다. “저는 남자가 좋습니다!!” 폭탄선언! 카에리드가 바르에든의 말에 벙-해있는 사이, 카엘은 쯧쯧 하고 혀를 찼다. 저렇게까지 발버둥을 치다니. 그냥 넘어가면 좋으련만. “…안 됐군. 저런 말은 전혀 소용이 없는데….” “네?” 카엘은 혀를 쯧쯧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다른 종족도 아닌 드래곤에게 커밍아웃 선언을 해 버리다니 저 녀석도 참 바보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소리입니까?” “아, 그건…….” 내가 너무 심했나? 떼어놓으려면 이 방법이 가장 좋겠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어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바르에든은 충격 속에서 눈만 깜박이는 히투니아를 보며 후회했다. “저… 히투니아 님?” “아… 아. 바르에든… 남자가 좋아?” 히투니아는 멍해 보였다. 바르에든은 심하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히투니아는 곧 정신을 제대로 차린 듯 그에게 씨익 웃어 보이면서 말했다. “히니가 여자라서 그래? 남자가 아니라서? 그래서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야?” “네? 네…… 네.” 카엘은 그의 대답에 다시 혀를 쯧쯧 찼다. 저런 바보 같은. “그럼 히니가 남자가 될게!” “아… 넷?!!” “히니는 남자도 될 수 있어! 볼래?” 기본적으로 드래곤은 양성체(兩性體)이다. 자신이 선호하는 성별(性別)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게 보통이지만 마음먹기에 따라서 남자도 될 수 있고 여자도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고, 그걸 몰랐던 바르에든은 뭣도 모르고 커밍아웃을 선언했던 것이다. “폴리모프 셀프!”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터져 나온 새하얀 빛이 히투니아를 감쌌다. 바르에든은, 빛이 점점 걷혀가는 것을 바라보며 점점 새하얗게 질려갔다. 카엘이 중얼거렸다. 불쌍한 중생. “나 남자가 됐어! 이제 히니가 부인해도 되는 거지?” 바르에든은 윽, 하고 목 막힌 신음을 흘리며 비칠비칠 뒤로 물러났다. 남자로 변한 히투니아는 그에게로 달려들어(그보다 키가 컸다) 안겨 들었다. 그는 뒤로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 히니는 바르에든 부인이다? 헤헤.” “차라리 여자가 나아!!!” 그의 절규는, …그저 레어 안에서만 절박하게 울려 퍼졌다. 카엘과 카에리드는 조용히 성호(聖號)를 내리그으며 손을 모았다. “부디 명복을.” * * * * * * * * * * * * * * * “어?” 에리나는 뭔가 귀에서 앵앵거리며 울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이상하다. 잘못 들었나? 누가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는데.” 이상하기도 하지. 오늘따라 왜 이렇게 귀가 간지럽고 뭐가 앵앵거릴까. 벌레라도 들어간 걸까? 에리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철컥거리며 차가운 감촉을 전하는 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검을 품에 꼭 감싸안은 그녀는 쓰게 웃음을 지었다. ‘오라버니는, 내가 굉장히 여리고 약하기만 한 줄 알 테지, 아직도.’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녀가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택한 방법이지만 그녀의 오빠가 그걸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것도 마족과의 계약을 통한 일이지 않은가. 자신의 힘으로 강해졌다면 몰라도, 그런 식으로의 힘은 반기지 않을 게 뻔했다. 에리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래도… 후회는 안 해. 아니, 못해. 내가 원했어.’ 후회한다면, 그렇게 넘겨버린 자신이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그리고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고 살아남기 위한 방도였으며 그녀가 택한 길이었다. ==================================================== 이번 편은.. 바르에든을 위한 편;; 에리나도 잠시 나왔군요. 얘 등장 안 한지 꽤 된 거 같애요. 세키라도 그렇고. 제가 드디어 돌아버린 걸지도 몰라요;; 아직도 조-금 모자라는데.[한숨] 5:13분이 막 지나고 있네요. 이거 연참이죠?[싱글];; 분량이 좀 적긴 하지만. 즐독하세요;; 제 목: 공녀(貢女) 외전 1> 라푼젤 이야기! 마계공녀(魔界貢女) 외전 1> 라푼젤 이야기! ◀▷ ◀▷ ◀▷ ◀▷ ◀▷ ◀▷ ◀▷ ◀▷ ◀▷ ◀▷ ◀▷ ◀▷ **본 이야기는 스토리와는 전혀 관계없는 것임을 미리 알려 드립니다** * * * * * * * * * * * * * * * 라푼젤 : 세키라 마녀 : 루피아 왕자님 : 이디스 라푼젤 엄마 : 아로데 라푼젤 아빠 : 유리아덴 해설자 : 로이드윈 왕자 시종 : 에리나 마왕 : 아유니 * * * 옛- 날, 아주아주 오-랜 옛날 어느 마을, 아기를 가진 여인이 있었습니다. "아! 아가야. 어서 나오렴(후훗, 이거 엄마 역도 꽤 재밌잖아)." 여인은 무척이나 아름다운 초록빛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약간 검은 피부가 꽤 활동적인 여인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 주었지만, 어쨌든 그녀의(...) 배는 남산만하게 불러 있었습니다. 가슴은 하나도 안 나왔는데, 이상하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그녀는 창문으로 그녀의 남편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무거운 몸을 일으켜 문가로 다가갔습니다. "어머, 다~ 알~ 리~ 잉~ 보고 시퍼써~" 아! 닭살이 숭숭 돋는군요. 남편은 보랏빛 긴 머리를 날리며 그런 아내를 살포시… 밀어 버렸습니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아기 벤 몸이라고 다치지 않게 뒤에 폭신한 쿠션이 있는 곳에 밀었군요. 양심적인 아버집니다. "……." 남편은 싸늘하게 노려봤습니다. 아아, 불쌍한 여인. 남편에게 버림받는 것일까요? 하지만 여인은 꿋꿋하게 일어서서 남편에게로 다가갔습니다. "아아잉~ 지금 아니면 언제 해보겠어. 그치? 달리이잉~" "……." 더더욱 달라붙는 아내를 피해, 유리아덴 남편께서는 강력한 애정 공세를 펼치시는 아내를 피해 도망쳤습니다. 물론, 남겨진 아내는 집 기둥에 꽁꽁 묶여 발버둥쳐야 했지만 말입니다. 아아, 이런 상황 속에서도 아기는 꿋꿋하게 지킵니다! 그야말로 모범적인 남편 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쪽으로 가라고 했던가?)" 유리아덴 남편께서는 고개를 갸웃하셨습니다. 표지판 앞에 선 그는 대본에 적혀있던 방향을 까먹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오른 쪽? 왼쪽?' 그는 고민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표지판을 마력을 이용해 부숴 버리고는 당당하게 중간 길로 걸어 갔습니다. 대체 왜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단 말이야? 내가 가는 길이 길이다! -라는, 아주 간단하고도 심오한 인생모토 아래 말이에요. 여하튼, 길도 아닌 요상한 길을 간 남편은, 자신이 도착한 곳이 마녀의 집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호호호호호호! 넌 또 뭐냐! 내 실험재료가 되어주기 위해 친히 온 녀석이냐?(여왕님 웃음이라니! 크윽..)" 마녀 루피아, 연기 기막힙니다. 마녀 루피아는 크게 웃으며 자신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유리아덴을 보고 소리쳤습니다. "……(대사가.. 뭐더라)." "……(누가 저 답답한 녀석을 아빠 시켰어! 쟤가 대사 안 하니까 나도 못하잖아!)." 유리아덴 아빠가 대답이 없자, 결국 루피아는 혼자 결론을 내리기로 결정했습니다. "오-호호호홋! 그래, 이 위대한 루피아 님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겠다-는 게 아니구나! 분-명 '먹으면 힘 100배 세지고 파워 만땅에 건강해 병 다 고친다 풀뿌리'를 구하기 위해 온 거겠지? 오-호호호호홋, 어림없는 소리!" "……." "호호호호호홋! 하지만 곧 태어날 네 아기를 내게 준다면 생각해 보지. 어때?" 마녀의 말에 아빠는 뭣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여 버렸습니다. 사실, 마녀가 옆에서 '고개 내려! 고개 올려!'라고 속삭이긴 했습니다만, 이야기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위해 말 하지 않는 게 좋겠죠? "……." "그럼 잘 가라! 후에, 네 아기가 태어나는 날 약속을 지키러 오겠다! 자, 이거 가져 가!" 마녀는 유리아덴 아빠를 향해 '먹으면 힘 100배 세지고 파워 만땅에 건강해 병 다 고친다 풀뿌리'를 던져 주었습니다. 마치 무처럼 생긴 그것은 희한하게도 눈이 달려 있어서, 유리아덴 쪽으로 눈동자를 또르르- 돌리더니 말을 하는 게 아닙니까! "키에에에에에- 캬아아아아아- 해- 방이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무슨 말일까요? 유리아덴 아빠는 울부짖는(?) 풀뿌리를 가볍게 즈려밟으신 후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지독히 가기 싫었지만, 어쩌겠습니까? 대본대로 해야 지. "어머낭? 달리이잉- 아잉, 그거 뭐야?" "……." 역시 묵묵부답! 아로데 엄마는 혼자 대화를 이끌어 가야 할 중대한 사명감을 느꼈습니다. "흑흑흑- 이건 마녀의 풀뿌리! 분명 우리 아기를 요구했겠죠? 아이, 바보~(아, 이거 너무 재밌다!) 우리 아기, 어쩌면 좋을까~ 아? 하하, 아니 아니. 흑흑흑~" 마치 책 읽는 것 같군요. 닭살연기를 자연스럽게 해낸 낮의 연기와는 딴판인 모습을 보여주는 아로데 엄마입니다. * * * 어쨌든, 드디어 라푼젤은 태어났고, 마녀 루피아는 그녀를 데려 갔습니다. 라푼젤은 그후 이십 년이 지나도록 마녀가 가둬 놓은 탑 안에서만 지내야 했죠. "어머니- 어머니! 저 잘했죠? 칭찬해 주세요~" 생글생글, 방글방글. 어쩐지 너무 즐거워 보이는 세키라 라푼젤 양입니다. 루피아 마녀께서는 식은땀을 삐질, 흘리시며 세키라 라푼젤 양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그, 그래- 자, 잘했다(대체 뭘 시키는 거야!)." 쑥쑥 자라는 세키라 라푼젤 양을 보며, 마녀 루피아 양은 큰 위기감을 느끼셨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키우고 먹여주고 재워 준 세키라 라푼젤 양께서 드디어! 드디어 시집 갈 나이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평생 여기서 썩힐 수도 없고… 아, 근데 왜 그 부모라는 것들은 한 번도 안 찾아 오는거지? 신랑감은 지들이 알아서 구해다 줘야 할 거 아냐! 으- 그렇다고 하나 납치해 올 수도-…… 오옷?' 마녀 루피아는 떠오르는 기발한 생각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세키라 라푼젤 양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한 후 탑을 빠져나온 마녀 루피아께서는 그 길로 왕궁으로 향했습니다. '내 새낀데 적어도 상대가 왕자 정도는 되어야지!' -라는 생각에서였지만, 상황은 말도 안 되는 사태로 흘러가고 말았습니다. 바로! 바로- 왕자와 마녀가 눈이 맞아 버렸던 것입니다! (쿨럭...) 아아, 사랑은 언제나 알 수 없는 것! '아아, 세키라 라푼젤한테 신랑감 가져다 줘야 하는데… 결혼시켜야 하는데…….' 이디스 왕자는 마녀를 그윽하게(덤덤하게)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이리 와." 꼭 '뽀삐야, 이리 와' 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과연 만인지상 일인지하 자리에 있는 왕자다운 태도였습니다. 우리의 마녀 루피아, 뿅 갔군요! "명이시라면……(명은 무슨 얼어죽을! 제길, 이거 뭐야! '가서 살포시 안긴다'? 이 대본 누가 썼어!)." "음(입 다물고 가만 있어)." 왕자는 마녀 루피아를 꼬-옥 안아 주었습니다. 그런데 마녀 루피아,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걸까요? 안색이 왠지 안 좋은 것 같네요. 그대로 자고만 싶었던 마녀 루피아는 문득 라푼젤 생각이 떠오르자 눈물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이디스 왕자를 보며 말했습니다. "(안약 어디갔지? 안약!)왕자님… 흑흑, 제가 돌봐 온 아이가 있는데, 걔가 지금 결혼 적령기라, 적당한 신랑감 하나 적당한 거 없을까요(대체 이런 걸 왜 하는 거야아아-;;)?" "있다." 언제나 간단명료한 대답의 왕자 이디스 군입니다! 마녀 루피아는 솔깃해서 말했습니다. "누군데요(정말.. 누구지?)?" "시종!" "에에엑- 겨우 시종이에요? 조금 더 인심 써 줘요!" 조르는 루피아를 카리스카틱한 눈빛으로 단번에 재워버린 왕자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에리나에게 말했다. "너 장가 가." "쿨럭! 무슨 소리예요! 저는 여자…." "시끄러워. 가라면 가." "하지만 저는 여……!!" 시종 에리나의 말이 먹혀들 리가 없었습니다. 마녀 루피아는 시종 에리나가 꽤 예쁘장하고 멋있게 생겼다는 것을 알고 좋아라- 하며 왕자와 시종을 데리고 탑으로 갔습니다. "세키라 라푼젤, 라푼젤- 머리를 내려 다오." 20년 간 한 번도 자르지 않고 길러 온 머리니 얼마나 길겠습니까? 마녀 루피아는 조금 찝찝했지만(샴푸 값이 얼마나 드는 줄 알어!) 갈색 머리칼을 잡고 암벽등반하듯 열심히, 열심히 탑을 올랐습니다. "……(제기랄! 내 다시 이딴 역 하나 봐라!)." "……(동감이군)." "……(이젠 시켜먹을 게 없어서 이딴 거나 시키냐!)." 세 사람이 올라타고 와도 전혀 모르는 강력 무신경 두피를 가지신 우리의 라푼젤 양! 그녀는 머리를 타고 올라오는 에리나 양의 아름다운 자태에 그만 푹- 빠지고 마셨습니다! "…사랑해요(미안... 에리나..ㅠㅠ)." "아름다…… 워… 어어(어, 나두..ㅠㅠ)." 크- 으윽! 너무 아름다운 장면 아닙니까? 근데 왜 이렇게 찝찝하고 기분이 이상할까요? 왜 저들이 저렇게 불.쌍.해. 보이는 걸까요-오? 그 때였습니다! 갑자기 아름다운 장면을 방해하며 거친 바람이 휘몰아 치더니! 검은 그림자를 풍기는 '마왕'이 등장한 것입니다! "캬-하하하하하하하! 감히 나의 루피아 님의 어깨에 손을 얹다니- 죽음으로 사죄해라, 왕자 이디스!" "……." 우리의 왕자 이디스! 자신의 자리(?)를 뺏긴 기분에 불쾌해졌습니다. 마녀 루피아는 왜 '나의'가 들어가는지 의문스러워 했지만 곧 그냥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너희 둘! 평소에 계속 나의 루피아 님께 붙어 다니며 친한 척 했지!" '친한 척'이 아니라 진짜 '친한 것'이랍니다, 마왕 아유니 양. "내 본편에서의 스트레스를 다 풀어 버리리! 오-호호호호홋, 감히 나한테만 찜찜한 역을 시켰겠다! 죽어봐라! 캬- 캬캬캬캬캬캬캬캬!!" 원래 저런 성격이었던 걸까요? 마왕의 횡포로 인해, 탑이 무너졌습니다. 마녀 루피아는 왕자 이디스와 함께 공중으로 날아 올랐고, 나머지는 알아서 각자 목숨 챙겼겠죠? 하지만 약한 라푼젤! 시종 에리나의 손을 놓치고 맙니다! "꺄아아아아악-!!" 마녀 루피아가 손을 쓰기에는 너무 늦은 듯! 아, 라푼젤은 이대로 죽고 말 것인가! "꺄아아아…… 어?" "아아, 그러게 조심하랬잖아, 세키라 라푼젤…." "…아로데…… 엄마." 아! 결국 '엄마'라는 말까지 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저 차림, 저 모습 어디가 '엄마'로 보이는 걸까요? 세키라 라푼젤 양, 시간이 나는대로 안과부터 가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로데 엄마께서는 세키라의 가볍게 안아들고는 이마에 입맞췄습니다. 모녀 사이의 다정한 모습은 어디로 가고, 대체 왜 이상한 기운… 찐득한 기운이 느껴지는 걸까요? "어, 엄마……." "세키라……." ……무시하도록 합시다. 라푼젤이 이렇게 엄마와의 눈물겨운 재회(?)에 감격(?)하고 있을 때, 왕자 이디스와 마왕 루피아 측도 한참 러브리 모드를 진행중이셨습니다. 자! 한 번 가 볼까요? "……." "……." ……;; 나, 나레이터가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생명보다는 가볍습니다! 그, 그럼 에리나 쪽으로… 아! 유리아덴 아빠가 아로데 엄마와 같이 왔던 것일까요? 지금 한창……. "……(괜찮은가?)." "아, 예. 괘… 괜찮아요. 그런데 어떻게 오셨어요?" "……(그냥)." "에? 그냥요? 으음… 신기하다." 와~ 상대방이 말을 안 해도 다 알아 듣는군요! 신기합니다, 시종 에리나 군(양..?). * * * 이리하야 <왕자 이디스와 마녀 루피아> 커플, <유리아덴 아빠와 시종 에리나> 커플(이거, 남+남인 겁니까?;;), <아로데 엄마와 세키라 라푼젤 딸> 커플(제일 위험합니다..;; 모녀 사이라니!!)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저, 나레이션 해설자 로이드윈과 쓸쓸히 사라져간 단컷 마왕 아유니는 커플은커녕 원수가 될 것 같습니다. 정말 지독히도 재미없는 캐릭터였거든요. "뭐얏?! 너 죽어볼래?!" 흥! 할 수 있으면 해 보세요. 저는 어차피 지금은 몸도 없거든요! 후-하하하하하! "으- 으아아아아아악-!!" 다음에 보죠! 아듀~^^ * * * * * * * * * * * * * * * 루피아 : 저거 대체 뭐 한 거래?! 에리나 : 몰라. 결말이 이게 뭐야? 라푼젤이랑 왕자랑 맺어지는 거 아니었어? 근데 왜 마녀랑 왕자가... 세키라 : 나도 몰라. 그치만 잘 됐지 뭐야. 마왕님이랑 맺어지게 ?었다면 난...(울먹울먹) 에리나 : 진정해. 근데 기분나빠! 왜 하고많은 역 중에 하필이면 시종이야? 시녀도 아니고! 그리고 우린 대체 뭐 때문에 한 순간이라도 커플로 맺어졌어야 했던 거냐고! 세키라 : 에, 에리나... 에리나는... 에리나는, 에리나는 세키라가 싫은 거야?! 에리나 : 아아, 그런 게 아니고... 아로데 : 어이, 우리도 좀 대화에 끼워 달라고. 본편에서도 미움받고 있는 난데 여기서도 그럴거야? 루피아. 루피아 : 그냥 조용히 사라져 주시지? 본편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지겨워, 넌. 아로데 : (눈물을 글썽이며 세키라에게 안긴다)세키라~ 루피아가 날 미워해! 세키라 : (부드럽게 웃으면서)저리 가요. 로이드윈, 유리아덴, 이디스가 등장한다. 로이드윈 : 헤이! 분위기 좋은데? 아, 정말 재밌는 결말이었어~ 이디스 : 닥쳐라. 로이드윈 : (거수경례를 하며)옛! 유리아덴 : ...... 로아이나 등장, 아유니를 끌고 온다. 루피아 : 어? 로아이나 님, ...그건 뭐예요? 로아이나 : 응, 이거요? 가지고 가라고 해서 가지고 왔는데, 처리가 좀 힘드네요. 계속 뭐라고 중얼중얼 대서... 아유니 : 중얼중얼... 하필이면 마왕이.... 루피아 님과도 못 이뤄지고... 중얼중얼... 등장도 짧고... 루피아 : ......무시하죠. 로아이나 : (활짝 웃으며 가져 오느라 아픈 팔을 주무른다) 그쵸? 그게 좋겠죠? 루피아 : 그런데 로아이나 님, 이제 슬슬 정리를 부탁해도 될까요? 다른 사람이 하면 너무 난잡해질 것 같아서요. 로아이나 : 아, 그럴까요? 루피아 : 예, 부탁해요. 로아이나 : (헛기침을 하며 장내를 조용히 시킨다)흠흠! 주목해 주세요. 여기 지금 이 자리에서, <연극 라푼젤 이야기>에 대해 말해 보겠습니다. 결말이 조금 황당하긴 했지만, 나름대로 커플을 잘 맺어준 얘기였어요. 물론, 역할이 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실제적으로 따져 보아 문제는 없습니다. 이디스 : 그렇긴 하지. 로아이나 : 본편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지요. 그냥 자까가 심심해서 적어 본 거라고 하니, 우리는 특별수당을 받아내야 합니다. 쿨럭! 나 적잔데...ㅠㅠ 이디스 : 받을 건 받아야지. 루피아 : 맞아요! 이디스 님, 우리 지금 가서 빨리 받아내요! 이디스 : 그러지. 루피아와 이디스, 자리에서 일어나 자까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남겨진 사람들, 로아이나의 정리를 계속 듣는다. 로아이나 : 우리도 빨리 받으러 가야죠. 요즘 적자라는 핑계로 본편 출연료도 잘 안 주더라구요? 쳇! 그냥 출연 거부해 버릴까요? 세키라 : 불.쌍.하잖아요. 로아이나 : (고개를 끄덕이며)그것도 그렇군요. 그럼 이제 슬슬 우리도 가죠. 여러분! 받을 건 받고, 챙길 건 챙기는 현명하고 똑똑한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세상 사는 지혜라니까요? 후후후. 로아이나, 깊숙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곤 총총총 사라진다. 그 뒤를 나머지 사람도 뒤따른다. -------------------------------------------------------------- 그, 그냥 심심해서.... 즐독하세요! 근데, 이거 합하면 2연참인가요? 좋은 하루 보내시기를! 제 목: 공녀(貢女) 외전 2> EDIS -마왕의 애인(1) 마계공녀(魔界貢女) [외전] EDIS -마왕 교체식 :마왕의 애인 ◀▷ ◀▷ ◀▷ ◀▷ ◀▷ ◀▷ ◀▷ ◀▷ ◀▷ ◀▷ ◀▷ ◀▷ 맨 처음 '인간'을 본 것은, 그가 382살 때였다. 늘 아버지의 곁에 있던 세 마족과 함께, 아버지의 옆에 서서 걸어오던 은발의 그 「인간」. 얼굴에는 그 어떠한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시린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 "네가 그의 후계자이냐?" 낮은 듯한, 풍성한 보이스의 그 「인간」이 그에게 건넨 첫 마디는 바로 이 말이었다. 여성체라고 할 만한 특징은 조금도 없었던 데다 모습이나 행동까지도 모두 남성체, 그 자체였기 때문에 맨 처음 이디스는 그 「인간」이 남성체인 줄로만 알았다. 평소처럼 누군가의 피를 뒤집어 쓴 채 그 따스함을 즐기고 있던 이디스는 '낯선 존재'에 대한 경계를 보였다. 언젠가 넘어야만 할 자, 반드시 쓰러 뜨려야 할 자, 그럼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켜 줄 존재가 그녀의 옆에서 옅게 웃고 있었다. "그와 다르구나." 달라? 이디스는 그녀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자신은 그와 똑같은 피를 지닌 존재인데, 어째서 다르다는 거지? 물론, 그는 그이고 자신은 자신이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녀는 그런 것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분명, 그녀가 말한 건 달랐다. 그녀는 검은 로브를 두르고, 그에 선명한 대비를 이루는 새하얀 은색 머리카락을 아래로 쏟아 내리고 있었다. 자신을 뚫어져라 '관찰'하는 그녀의 눈동자가, 마치 고양이- 아니, 표범같다고 생각했다. "어때? 괜찮지? 훗- 귀엽지 않아?" "그래." "후후- 마음에 든 모양이야? 저래뵈도 저 녀석, 강하다고. 강한 걸 좋아하잖아?" 그 자- '아버지'의 말에, 그녀의 노란 눈이 다시 그를 향했다. 새롭게 등장한 존재는 그에게 위협이 되지 못한다고 판단한 그는 다시 핏물 위에 주저앉아 마지막 여운을 즐기려 눈을 감고 있었다. 인간은 다시 그의 아버지에게로 눈을 돌리며 말했다. "너와는 다르지. 강할지는 모르지만- 위협은 아냐."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뒤돌아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그의 아버지는 피식 웃더니 이디스에게로 다가 와 핏물로 젖은 그의 검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핏물이 그의 손에 묻었지만 그는 신경쓰지 않는 듯했다. 새하얗고 투명한 피부 위로 여울진 붉은색의 핏물... '아버지'는 긴 손가락으로 그의 뺨에 묻는 피를 쓸었다. "강해 지거라. 그 것이 네가 살아가는 이유다." 그의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고는 뒤돌아 그녀를 쫓아갔다. 아버지가 뒤를 돌자마자 이디스는 슬며시 눈을 떴다.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 어렸을 때부터 인식해 왔고, 지금에 와서는 당연한 것이 된 그가 살아가는 '이유'. 어둠 속에서 숨만을 내쉴 때도, 그는 그의 아버지에게서 똑같은 말을 들어왔다. '강해 지거라. 그 것이 네가 살아가는 이유다.' 서열 2, 3, 4위의 세 마족- 아로데, 로이드윈, 유리아덴은 잠시 그의 '아버지'가 그녀를 쫓아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마족 앞에서 저렇게 당당한 인간은 저 녀석 하나뿐일 거야. 맹세코!" 기가 찬 듯한 말투였다. 하긴, 저 여자가 마족 앞이라고 벌벌 떨거나 겁을 먹어 하얗게 질린 꼴은 상상도 되지 않는다. "하여간 괴물이라니까. 우리 셋을 한꺼번에 소환해 놓고는 했던 소리 기억해? '심심해서'?" 언뜻 스쳐 들은 기억이 났다. 셋이 한꺼번에 소환되었던 사건은, 마계 전역으로 퍼진 유명한 사건이었다. 귀는 열어 두었으므로, 그 역시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저들을 소환한 게 그녀인가. "그나저나, 요즘 말이야. 군주께서 너무 저 녀석과 붙어 계시는 것 같지 않아? 우리들 소개로 계약을 하기로 하셨긴 하지만." "그런 것 같군." "군주께서 취향이- 에, 설마~ 아닌데? 군주께서는 여자를 좋아하셔. 아무리 여자가 궁하셔도 남자한테는 손 안 대신 분이시라구. 남자는......" "그, 그렇지?" 남자? 여자 아니었나? 이디스는 그들의 대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그다지 정정의 필요성을 느끼지는 못했다. 아마도 그들은 그녀를 남성체로 인식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긴, 그녀를 보고 여자라고 생각하는 것도- 정상은 아닐 게다. "어? 이디스님, 가세요?" 서열 2위 아로데가 말했다. 이디스는 슬쩍 뒤돌아 그를 일별하고는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피가 식었어." * * * * * * * * * * * * * * * * * * * * "네 동생이다, 이디스." 이디스는 시선을 내려 '아버지'의 손에 들린 아기를 바라 보았다. 하얀 강보에 쌓인 아기는, 작고 새하얗기만 했다. 볼에 붉그스름한 홍조가 피어 있었고, 피처럼 선명한 붉은 머리카락이 하얀 강보에서 두드러졌다. 아기의 눈동자는- 붉었다. '아니, 금색이야.' 물론 언뜻 보면 붉은 색이라는 말이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금빛이 섞인 붉은 색이었다. 그리고, 이디스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아이가, '그녀'의 아이라는 걸. '아버지'의 옆에 언제나처럼 서 있는 그녀를, 그는 말없이 일별했다. "그렇군요." "그래. 안아보지 않겠느냐?" '권유'였지만, '명령'이었다. 조용히 숨죽인 채 자신을 올려다 보는 마족들의 시선을, 이디스는 느낄 수 있었다. 본디 마왕의 자식은 단 하나, 후계자 뿐이어야 한다. 그건 전통이었고, 법규였다. 그런데, 마왕은 당당하게 '또 하나의 자식'이라며 이 아이를 들고 온 것이다. 이 시점에서, 이디스는 어떠한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이디스는 손을 뻗어 아이가 쌓인 강보를 받았다. 낯선 이의 품인 것을 알았는지 아기는 잠시 다시 부모의 품으로 돌아가려 발버둥쳤지만 이디스와 눈이 마주치자 오히려 그의 품 안으로 파고 들었다. 꺄아, 꺄아 거리며 그의 품 안에서 떠나려 하지 않는 아기를, 이디스는 무감정한 표정으로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는 아이를 억지로 떼어내 아버지에게 돌려 주며 말했다. "제가 아이를 안게 함으로써 마족들에게 이 아이의 자리를 만들려 하셨군요. 그리 오래가지는 못할 겁니다." "오호~ 알았느냐?" 흥미롭다는 표정이다. 설마, 그 정도도 모를거라 여겼을까. "동시에, 누구와의 아이인가도요, 아버님. 그렇기에 신경쓰지 않는 것 뿐. 언제든 죽일 수 있는 존재는 위협이 되지 못합니다. 애석하게도 저 셋은 모르는 모양입니다만." 그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역시 인간에게 '자식'이란 중요한 요소인 모양이다. 한 순간도 변함없던 그녀의 표정이 변한 것을 보면 말이다. 그의 아버지는 픽 웃으며 그녀의 한쪽 팔을 끌어 당겼다. 그녀의 손가락 하나 하나에 입맞추고, 마지막으로 그는 그녀의 손등에 부드럽게 키스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절대 변하지 않을 것만 같던 그녀의 표정이 사르르 녹으며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던 것이다. 이디스의 얼굴에 조금이지만 놀람이 번졌다. "그래, 그렇다면 된 거지. 그걸로도 충분해." 그 아이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은, 따스함으로 충만했다. "당연하니까." "그래, 그렇지? 그걸 모르는 저 셋이 이상한 거라고. 쳇!" 그런 식으로 치지면 이 공간 안의 모든 마족의 눈이 이상한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디스는 그러지 않았다. 이번에도 굳이 고쳐주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에게 인사를 올리고 조용히 물러났다. * * * * * * * * * * * * * * * * * * * * 세 개의 달이 서로 엉켜 시린 빛을 내뿜고 있었다. '마왕'은 자신의 '아들'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의 품에 안긴 아기가 아니라, 지겨운 듯 무료한 표정으로 숨쉬는 '인형' 아들을 말이다. "어이, 카마프. 너, 내 아이가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했지? 오늘은 그 녀석도 이 아이에게 똑같은 말을 했어. 어떻게 생각해?" 침대 위에서, 그녀의 알몸을 달빛이 내려 비추자 하얗게 빛났다. 카마프는 긴 은발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그에게서 아기를 받아들었다. 그는 아기를 넘겨주며 그녀를 뒤에서 꼬옥 안았다. "그래도, 그는 '인형'에 불과해. 너도 알잖아?" "알지. 그 아이는 그렇게 키워졌으니까. 나도 그렇고." 그의 말에 카마프는 피식 웃었다. 마왕은 그녀의 뒤에서 아기를 데리고 장난을 쳤다. 아기는 꺄아 꺄아 거리며 즐거워 했고, 그의 입가에는 즐거운 듯한 미소가 피어 올랐다. "...이 아이도, 그에게는 위협이 되지 못할 거야." "어째서?" "약하니까. 아니, 지금 네가 생각하는 그런 쪽의 강약이 아니야. 이 아이는... 그에게 반했어." "...그래?" 카마프는 아기를 안아 이마를 맞대었다. 아이의 붉은 머리칼과 카마프의 은빛 머리칼이 섞여 묘한 아름다움을 그려냈다. 조각처럼 아름답지만 차가운 그녀의 외모가, 달빛에 드러나자 시린 빛을 뿜었다. 마왕은 그런 카마프를 뒤에서 더 세게 안아 주었다. 전해지는 온기- 따뜻해. "그러지 않길 바랐어. 알고 있었지만.... 이 아이는, 그를 위협하지 못할 거야. 설사......" 우리가 그에게 죽는다고 하더라도. 카마프는 뒷말을 삼켰다. 언젠가는 오게 될 일. 위협이 되지 못한다고 했지만, 그건 거짓말이야. 충분히 위협이 돼. 그는, 정말 강하지는 않지만, 이 행복을 깨 버릴 수는 있을 테니까. "카디스. 죽지 마." 마왕- 카디스는 피식 웃어 버렸다. 그의 부하 셋을 한꺼번에 소환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인간. 그리고, 사상 최초로 마왕의 계약자가 된 여자. 마왕의 자식을 낳은 인간. 얼음같이 시린 사람이지만, 그 속은 굉장히 여리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처음 만난 그 순간, 차가운 얼굴로 그를 대했던 그녀를 보는 순간, 그는 그녀의 속은 굉장히 따뜻하리란 것을 직감했다.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서로에게 끌렸고, 그 결과 지금 이런 상황을 만들어 냈다. 그는 처음으로 마왕으로서 두 번째 자식을 낳았고, 오늘 마족들에게 그 아기를 보였다. 다행히 이디스, 그의 도움으로 아기는 마족들 사이에서 받아들여 졌다. 카마프는 아이를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가 내게 준 아이. 혼자 아파하던, 혼자 힘들어 하던 내 옆에 함께 서 주고, 무엇보다 사랑할 존재가 되어 주었다. 지금, 카디스만큼 소중한 아이- '딜렌'을, 규칙을 깨어가며 그녀에게 주었다. 카마프의 볼에 투명한 눈물이 흘렀다. "안 돼. 조금만... 조금만 더, 이 순간 지속될 수 있게 해 줘. 조금만......" 그녀는 고아였다. 처음부터 혼자였고, 끝까지 혼자일 줄 알았다. 태어나면서 버림받고, 사랑하는 이들에게 버림받았다. 그녀는 결국 세상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할 존재가 되었고, 또다시 혼자 아프고, 혼자 괴로웠다. 누구 하나 그녀의 곁에 있어주지 않았고, 그녀는- 그렇게 혼자서 누구보다 강한 존재가 되었다. 그런 그녀 곁에, 드디어 누군가 다가섰다. 그게 카디스였다. 그녀는 불안했다. 이 유리알같은 행복이, 금방이라도 깨어질 듯한 이 행복이. 행복하지만 불안했다. "...카마프." "이 아이가, 아파하지 않을 수 있을 때까지만... 내가, 견딜 수 있게......" 카디스는 그녀를 꽉 껴안았다. 이 순간만큼은, 정말 이 순간만큼은 그의 '아들'이 원망스러웠다. 똑같은 자식인데도, 카디스는 이디스와 딜렌을 달리 보고 있었다. 언젠가 자신을 죽일 존재. 그게 자식이다. 하지만 딜렌은 달랐다. 누구보다 사랑해줘야 할 존재. 그만큼이나, 달랐다. 이디스, 자신의 아들이 미웠다. 너무나 빨리 강해진 그가, 그녀와 함께 할 이 시간을 끝내게 될 그가. "조금만- 더 행복할 수 있게 해 줘......" * * * * * * * * * * * * * * * * * * * * 딜렌은 불만스럽게 입을 내밀었다. '이디스 형님은 놀아 주지도 않으시고......' 아버지는 바쁘고, 이디스는 그를 상대해 주지 않았다. 언제나 무료한 눈빛으로 그를 보지만, 딜렌은 아주 가끔 그가 성의없게 툭툭 내뱉는 대답이나- 잠깐 머문 시선이 좋았다. 많이 쳐다봐 주지 않아도, 열성으로 상대해 주지 않아도 좋았다. 그는, 그저 그의 형이 좋았다. 강하고, 아름다운 자신의 형이 좋았다. "나, 형님이 좋아요! 정말- 아름답고, 강해!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좋아요! 그냥... 좋아." 그렇게 말할 때마다, 그의 어머니는 왠지 안타까운 듯한 미소를 짓곤 했지만, 딜렌은 그래도 형이 좋았다. 오늘은 아버지를 따라 아버지의 무릎에 걸터 앉아 오랜만에 마왕성에 온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어? 어린애네?' '손님' 중에는, 생전 처음 본 자신의 '또래'가 있었다. 한 번도 또래 아이들과는 놀아보지 못한 딜렌은, 카른에게 흥미를 느꼈다. 딜렌은 카른에게 쪼르르 달려가 말똥말똥 그를 빤히 쳐다 보았다. 물빛 머리카락과 눈동자, 어린아이답지 않게 초연한 눈빛으로 상황을 마주하던 카른을, 딜렌은 빤-히 쳐다 보았다. 카른이 끝끝내 무시하자 딜렌은 아예 자리까지 깔고 앉아서 그를 올려다 보았다. 흥미롭다고 눈빛을 반짝이는 것도 아니고, 그저 멍하니 바라 보았을 뿐이었다. "뭐야. 딜렌, 이 녀석이 갖고 싶니?" 아버지가 물었다. 카른의 아미가 팍 찌푸려졌다. 저런 모욕이라니! 그림자 족의 후계로써, 아무리 '인질'로 왔다지만 저건 너무한 대우였다. 카디스의 모욕적인 발언 후, 카른은 아까부터 자신을 멀뚱멀뚱 쳐다보던 짜증나는 녀석의 이름이 '딜렌'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제 이 아이는 '갖고 싶어'라고 하겠지? 아까부터 자신에게 흥미를 보였으니까. 카른은 애써 치욕감을 달랬다. "아뇨. 갖고 싶지 않아요." 딜렌은 그를 보며 히죽 웃었다. 의외였다. 카른이 의외라는 표정을 짓자, 딜렌은 헤헤 웃으면서 그의 손을 탁 잡아 챘다. 카른이 깜짝 놀라 손을 잡아빼려 했지만 딜렌은 그의 손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당황스런 표정의 그와 눈맞추며, 딜렌은 다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 얘하고 놀래." 딜렌은 그렇게 말하고서는 카른의 손을 잡아 끌었다. 어? 어? 하면서 딜렌이 끄는 대로 카른은 달려야 했다. '이 녀석! 조그만 녀석이 힘은 왜 이렇게 세?!' 황망한 표정의 그림자 족 사신들과,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킥킥대는 마왕을 뒤로 한 채, 카른과 딜렌은 그렇게 내빼 버렸다. -그림자 족의 수장 '카른', 마왕의 아이 '딜렌'. 그들의 첫 만남이었다. -------------------------------------------------------------- 안녕하세요- 네르입니다! 상-당히 오랜만이네요..-_-;; 에에- 요즘들어 너무 게을러 진 것 같애요.. 시험 후유증이랄까? 시험이 끝나면 무조건 놀아야 한다!! 는 생각 때문에... 게다가 다음 주에는 또 시험이고...ㅠㅠ 더 수정량을 늘리고 싶지 않은 마음에, 외전으로...;; 언젠가 한 번 써야 할 것들이었으니 이번 기회에 다 써보려고요. 외전은 모두 네 개나 세 개가 될 듯 싶은데요. 조금 길 듯...-_-; 물론 외전 올리는 중간 중간에 본편도 들어가겠지만요. 음... 아아- 외전 쓸 게 많아요~^^; 카마프! 본편에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지만, 삭제된 것 중에는 카마프에 대한 설명이 나왔으리라 생각합니다. 카마프가 마왕의 애인이고, 딜렌 엄마에요^^ 자연스럽지 못하지만, 수정편에서는... 에에- 좀 더 자연스럽게 나오도록 해야겠죠. 우우- 저거 써놓고 보니까 카마프&카디스 커플도 좋아져 버렸어요. 참고로, 저는 카디스를 싫어합니다. 자식차별 하잖아요! 제가 저렇게 만들어 놨다고는 하지만... 으흠, 이디스도 불쌍해요~ 카마프도 불쌍한 인간이긴 하지만. 현재 우중충-하게 멈춰있는 본편... 아, 쓰기 싫어집니다ㅠㅠ 외전은 대충, 1. 세키라의 첫 사랑- 백합의 반란. 2. 에리나와 유리아덴- 제목미정. 3. 루피아가 태어나던 날- 시스터 콤플렉스. 음, 종류(?)는 이 정도...? 만약 하나 더 올라가게 된다면, 더 후에 나오겠지만 천계의 카마엘이나 미카엘 등과 루피아의 얘기를 쓰게 될 것 같습니다. 아마 그 외전은, 한참이나 뒤에 나오겠지만...-_-; 멜은 donghee425@hanmail.net 으로 주시구요, 리플은 마니마니^^ 요즘 조회수가 떨어져서... 흑, 슬픕니다~>ㅁ<;; 그러고보니 멜도 잘 안 오고.. 헉! 재, 재미 없나요?0_0;; 어, 어쨌든 즐독하세요~^-^;;; 제 목: 공녀(貢女) 외전 2> EDIS -마왕의 애인(2) 마계공녀(魔界貢女) [외전] EDIS -마왕 교체식 :마왕의 애인 ◀▷ ◀▷ ◀▷ ◀▷ ◀▷ ◀▷ ◀▷ ◀▷ ◀▷ ◀▷ ◀▷ ◀▷ 흑마법사로서, 그녀는 최고의 위치에 올랐다. 적어도 '마왕'과 계약자가 되고, 서열 2, 3, 4위를 한꺼번에 소환해냈던 인간은 그녀밖에 없었으니까. 비록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강했고, 또 아름다웠다. 그녀는 태어나자 마자 부모님이 그녀를 버리고 가는 뒷모습을 봐야 했고, 다음 순간 그녀를 키워 준 사람들이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파는 장면을 봐야 했다. 그 다음, 그녀는 그녀에게 사랑한다 했던 남자가 자신을 버리는 것을 봐야 했으며, 그 다음에는 세상 사람들이 자신에게 등을 돌리는 모습을 봐야 했다. 강해져야 했다! 필사적으로, 강해지기 위해 무엇이든 했다. 몸을 팔든, 생명을 팔든, 시간을 팔든 있는 것을 모두 그러모아 강해지기 위해 제물로 바쳤다. 악착같이 덤벼 들었다. 그 결과, 30살이 되기 전 그녀는 최고의 위치에 올랐다. 자신을 버린 자들에게 복수를 했다. 죽이고, 또 죽여도, 돌아오는 건 허무 뿐이었다. 충족감이 오지 않았다. 허무했다. 모든 것이, 손 안에 쥐어진 모래처럼 흩어져 버리는 것 같았다. "나하고 계약할래? 그럼, 더 오래살 수 있어." 그가 그녀에게 건넨 첫 마디였다. 한참동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가 건넨 첫 마디가 바로 이 말이었다. 오래사는 건, 이미 그녀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내밀어진 손. 그게 전부였다. 뿌리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잡았다. 그렇게, 마왕의 계약자가 되었다. 손을 잡았을 때- 마치, 뭔가가 채워진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도 그랬을까? 모른다. 하지만 충분했다. 그야 어떻든, 그녀는 채워졌다. 그걸로 만족했다. 하지만- 인간이란, 욕심이란 만족할 줄 모른다. 욕심은 더 커지고, 더 채워지고 싶었다. 그래서 그에게 안겼고, 그는 그녀를 안았다. 그리고, 그녀는 행복했다. "카마프. 나하고 같이 가자. 아이를 줄게." 그건, 그가 그녀에게 한 약속이었다. 그런데- '이디스'가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 그는, 겨우 찾은 이 행복을, 언제라도 깨뜨릴 수 있는 자였다. 그래서 싫었다. * * * * * * * * * * * * * * * * * * * * 이디스의 기억 속에, '카마프'란 인간은 그다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무표정한 얼굴로 '아버지'의 옆에서 그를 내려다 보았을 뿐이며, 대화라고는 조금밖에 나눠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마족과 비교한다고 해도 떨어지는 실력이 아니며 오히려 강하다는 것,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 "난, 네가 싫다." 그의 삶에서 아주,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하는 기억 속에서,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요요한 매력을 뿜어내는 표범같은 눈동자는 그를 향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맨 처음부터- 그녀는 그를 싫어했다. "네가 싫어. 죽도록!" 드물게도, 그녀는 그를 향해 감정을 드러냈다. 그는 언제나처럼 조용히 그녀를 지켜보고 있을 뿐 별다른 말도, 행동도 하지 않았다. 적개심으로 불타는 듯한 금빛 눈은, 언제 그랬냐는 듯 금새 가라 앉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를 보며 비웃듯 말했었다. "너는 인형이야. 강해지기 위한 인형. 하지만... 넌 강해지지 못해. 절대!" 그게, 그녀가 유일하게 그 앞에서 그를 향해 드러냈던 말이고, 진심이고, 감정이었다. * * * * * * * * * * * * * * * * * * * * "형님~ 이디스 형님! 나하고 놀아요!" 문이 벌컥, 열리며 짧은 적발을 한 소년이 뛰어 들어왔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낮잠을 즐기던 이디스는, 작게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적어도, 딜렌에게는 무시하기란 통하지 않는다. 딜렌을 상대할 때는, 최대한 빨리 원하는 바를 이뤄주고 쫓아내는 게 최선이라는 걸 이미 오래 전에 깨달은 바 있는 그였다. "어? 아직 자는 거에요? 에이~ 나하고 놀자니까요! 카른도 왔어요!" 한쪽 팔을 끌어 당기며 딜렌이 말했다. 딜렌의 뒤에는, 약간 떨떠름한 표정으로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서 있는 물빛 소년이 보였다. 이디스는 잠이 덜 깨 몽롱한 기분을 떨쳐 내려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딜렌이 환하게 웃으며 그를 끌어 당겼다. "오늘은 뭐하고 놀까요? 술래잡기? 고스톱? 얼음땡? 체스? 형님이 정해 봐요~ 헤헤헤." 고스톱, 얼음땡, 체스, 술래잡기를 하는 이디스의 모습! 상상이 되지 않는다(상상하기 두렵다). 솔직히 그의 취미에는 아무 것도 맞지 않았지만, 딜렌의 취미에 맞으니 할 수 없었다. 하긴, 그의 취미는 아무나 죽여 놓고 피에 주저앉아 즐기는 것이니, 딜렌이 질색할 만 하기도 했다(정상적인 취미가 아니기는 하다). 이디스는 미간에 주름을 새겨 넣으며 낮게 말했다. "체스." "에~? 싫어요, 싫어! 우리, 밖에 나가서 얼음땡 해요!" 처음부터 뭘 정해도 자기 자신이 하고 싶은 할 작정이었을 것이다. 언제나 그랬으니까. 피곤하게 투정을 다 듣느니 그는 아무 말 없이 따르는 것을 택했다. 오전에 업무를 다 끝내놓고 쉬고 있던 중이었으니, 일 핑계로 빠질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귀찮아.' "자~ 이거 눈에 감구요. 음음, 형님이 술래에요! 나 잡아 봐요~ 후훗." 딜렌은 그에게 흰 천을 불쑥 건넸다. 이런 것까지 준비해 온 것을 보니, 처음부터 이걸 하려고 아예 정해놨던 모양이다. 이디스는 느릿하게 천을 받아들어 눈가에 감으면서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옆에서는 카른이 복잡한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자, 얼른 하지." 카른은, 그런 마왕 후계자를 정말 복잡한 심경으로 봐야 했다. 그가 처음 봤을 때, 이디스는 절대! 자신의 이복 동생이 술래잡기같은 유치하기 그지없는 놀이를 하자고 할 때 기꺼이(?) 같이 해 주는 그런 자가 아니었다. 카른은 새삼 딜렌의 위대함(?)을 절실하게 느꼈다. '처음에, 그렇게 무섭게 노려보던 것도 무시하고 조르더니... 결국 이렇게 상황을 반전(?)시켰군!'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더니, 조르고, 또 조르고, 조르고, 조르고, 조르고.... 그 상황의 반복이다 보니 이디스도 결국 두 손을 들었다. 그 과정을 옆에서 하나 하나 다 지켜 보았던 카른에게 딜렌은 아주아주 위대하게만 보였다. 그 노려보는 눈빛을 무시하다니, 정말 감탄스러웠다. "아이~ 형님! 나 잡아 봐- 라아~" '...저런 면도,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아무리 형이라고 하지만, 저런 자 앞에서 저런 여유(?)라니......' 카른은 질려 버렸다. * * * * * * * * * * * * * * * * * * * * 마왕 교체식은, 마왕의 후계자가 태어난 후 그가 준비가 다 되었다고 생각하는 날에 치러진다. 그 시기를 결정하는 것은 오직 후계자만이 가지는 권리인 것이다. 마왕 후계자는, 그 자신의 의지로 모든 것을 행하고 결정한다. 마족의 '몸'이 성년이 되는 건 태어나 300년이면 충분하다. 키, 근육, 피, 신경 모든 것이 300년이 되는 날 최적의 상태가 되어 성장을 멈추게 되는 것이다. 임의대로 변할 수 있게 할 수 있긴 하나 마족은 언제나 싸우기에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는 게 보통이다. '몸'이 완성되었다는 건 그 육체가 마족 본연의 마력을 완전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뜻하고, 그렇다는 건 사실 마족은 300살에 성년이 되는 것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하지만, 마족의 성년은 그런 육체적인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일신(一身)에 지닌 모든 힘을 완벽하게 컨트롤할 수 있을 때에야 진정한 성년으로써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껏, 800살 이전에 성년임을 인정받은 전례는 없었다. "마왕 후계자 이디스, 교체식을 신청합니다." 그가 482세가 되던 날- '인간 카마프'가 마계로 온 지 100년이 되던 날, 그는 교체식을 신청했다. 딜렌이 99살이 되던 날의 일이었다. 15, 16세쯤 되는 소년으로 보이게끔 큰 딜렌은, 언제나처럼 '아버지'와 카마프 사이에 앉아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딜렌의 눈이 놀람으로 크게 떠졌다. "시기를 결정짓는 건 후계자의 권리. 제 결정에 이의는 없으실 겁니다." "하지만, 아직 넌 성년이 되지 않았......" '아버지'의 얼굴은 눈에 띄게 창백해져 있었다. 이디스는 언제나처럼 싸늘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 보며 말해 주었다. "충분합니다. 내일 이 시간- 다시 오겠습니다. 준비해 주시기를." 아버지의 옆에는, 카마프가 처음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얗게 질려 벌벌 떨고 있었다. 금빛 두 눈에 어린 공포감을, 이디스마저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녀는 덜덜 떨며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아버지의 몸을 붙들며 힘들게 지탱하고 있었다. "아직 시간이 좀 남아 있다. 조금 더 준비를 한 후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아뇨. 저는 제가 준비되었다 생각한 때부터 100년을 더 준비했습니다.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디스가 단호하게 끊어 말하자, 카디스는 할 말이 없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카디스도 알고 있었다, 아들의 실력이 벌써 자신을 뛰어 넘었다는 것을. 이제- 끝나게 될 것이란 것을. "......알았다." 그가 대답하자, 이디스는 미련없이 몸을 돌려 그가 앉아 있는 공간을 떠났다. 카디스와 카마프 사이에서, 딜렌이 넋놓고 이디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카디스와 카마프가 귀하게 길렀다고 하더라도, 딜렌도 알 것은 아는 나이였다. 99살이면, 적어도 마계의 상식 정도는 알 정도의 나이다. 마왕 후계자가 마왕과 서열 2, 3, 4위를 '이겨야' 하고, 그래야만 마왕의 자리를 이어받을 수 있다는 것 정도는 딜렌도 알았다. "안 돼... 카디스, 카디스 죽지 마. 죽지 마... 싫어! 싫어... 싫어!!" 카마프가 카디스에게 매달리며 소리쳤다. 평소 냉정하고 이성적이셨던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매달리며 눈물흘리고 계셨다. 딜렌은 이를 악물고 이디스의 뒤를 쫓아갔다. "미워... 그가 미워. 죽도록, 미치도록 증오스러워! 왜? 왜 내 행복을 깨뜨리는 거야?! 싫어어어---!!" 어머니가 소리지르는 목소리가, 딜렌의 귀에 웅웅대며 떨쳐지지 않았다. * * * * * * * * * * * * * * * * * * * * 어머니가 형님을 싫어하는 건 알고 있었다. 딜렌은, 이미 복도 저 너머로 사라져 버린 이디스를 쫓아가며 생각했다. 아버지와 자신을 제외한 타인에게는 아무런 관심을 보인 적 없었던 자신의 어머니가, 형님을 향해서만 적의를 드러냈던 것을 떠올렸다. 그럴 때마다, 딜렌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디스의 팔에만 매달렸다. 이상했다. 성에 들르며 '아버지'에게 복종하는 마족들은, 모두 딜렌을 '이상하게' 쳐다 봤다. 그는 언제나 마족들에게서 예외의 대상이었고, 특수 케이스였다. 하지만 형 이디스는 달랐다. 검은 폭포수처럼 흘러 내리는 밤하늘같은 머리채, 투명한 하얀 피부. 모든 것이 지루하다는 듯한 선명한 선홍빛 눈동자. 온 몸에서 뿜어져 흘러 내리는 강한 마력과 힘, 그리고 압도감. 꼭, 보석같다고 생각했다. "형님! 이디스 형님! 잠깐, 잠깐만요!" 앞서 걸어가던 이디스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 보았다. 딜렌은 뛰어 오느라 거칠어진 숨을 가다 듬으며 이디스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언제나, 그의 형은 걸어가고 있고- 자신은 뒤쫓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놔두고 사라져 버릴까 걱정되었던 것이다. "헉, 헉... 하아, 어떻게 그렇게 빨리 걸어요? 아니아니, 헤엑, 그게 아니다. 후, 후우... 형님!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실 순 없으신가요? 많이 바라지 않을 게요. 단, 단 3년 만...... 네?" 이디스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교체식은 내일로 결정이 났고, 마왕도 허가했다. 서두를 이유도 없지만 그렇다고 미룰 이유 또한 없었다. 딜렌을 쫓아 와 숨을 고르던 카른의 얼굴에도 안타까움이 드리웠다. '......왜? 자신이 위험해 지는 것도 아닌데?' 이해할 수 없었다. 이번 일과 그림자 일족은 전혀 관계가 없다. 그런데, 카른의 얼굴에는 왜 안타까움이 어리는 것일까? 딜렌은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그럼, 이기시면, 형님께서 이기시면, 그럼 되는 거겠죠? 서, 설마- 그 이상의 일이 일어나지는 않겠죠?" 이디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물론, 단순히 '이기기만' 하면 되는 일이기는 하다. 형식상, 그 이상의 일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나와 있다. 하지만, 그럴 수 있을까? 서열 2, 3, 4위는 수월하게 이길 수 있을 테지만 마왕은 미지수였다. 서로의 목숨을 앗지 않고서는, 싸움을 끝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를 확실하게 뛰어 넘는 것만이, 그가 가졌던 삶의 이유였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지금 숨을 내쉬는 이 순간까지. 내일이면 끝나게 될, 그에게 주어 진 '임무'다. "형님도, 부모님도, 모두모두 제겐 정말 소중해요. 서로 싸우지 않으셨음 좋겠는데.... 그럴 수는 없겠죠? 딜렌은,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럴 수 없다는 걸 아니까. 그러니까... 흑! 그, 그러니까......" 딜렌의 눈에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이디스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또다시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왜 우는 거지? 아니- 눈물이란 게, 왜 흘러 내리는 것인지 조차, 그는 알 수가 없었다. "왜 울지?" "예? 훌쩍, 뭐라고 하셨어요, 형님?" 이디스는 입을 다물었다. 딜렌은 침묵하는 그를 보며 생긋 웃은 다음, 꾸벅-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잘 부탁해요, 형님! 내일... 살살해야 해요~ 헤헤헷." 왜 우는 것일까? 나는 울 수 없는데, 어째서 저 아이는 울 수 있을까. 왜 웃는 것일까? 나는 웃는 방법을 알 수 없는데, 저 아이는 어떻게 아는 것일까. 왜 기뻐하는 것일까? 나는 이유를 모르겠는데, 당연한 것이 왜 저 아이에게는 기쁠까. 왜 슬퍼하는 것일까? 왜 안타까워 하는 것일까? "...몰라." 모른다. 배우지 않았으니까. 가르쳐 주지 않았으니까. -처음부터, 그는- <강해지기 위한 인형>이었을 뿐이었으니까. --------------------------------------------------------------- 음- 지금 공녀를 수정하고 있는데, 외전 올리고 나서 수정판을 차례대로 올릴까... 생각 중이랍니다. 외전 갯수나 양이 상-당히 많으니까 아마 외전 다 썼을 때쯤에는 수정한 양이 꽤 될 거라고 생각하구요. 방학이니 뭐니 해서 많이 쉴 테니까 그 때에 많이 쓸 예정입니다. 이번 방학에는 놀 시간이 없겠네..ㅠㅠ 지금 목표로 잡고 있는 건!! 제 뒤를 졸- 졸 따라 다니는! '극악연재작가'라는 꼬리표를 이번 기회에 떼버리는 겁니다!!(두둥! 비장하다;;) '하루 한 개 성실연재'를 목표로 하고 있는데 잘 될 지는 미지수... 라지요? 하, 하, 하..;; 그래도 열심히 노력해 볼 생각입니다. 솔직히, 예전 연재 초기에는 매일 분량 많이 해서 하나씩 올렸었는데.. 지금은 영- 어렵네요^^; 겨울방학에 책 내려면 빨리빨리 많이 써야 하잖아요? 음..-_-; 공녀, 지금 내용이 좀 뒤틀려 버렸어요. 음, 제가 복잡한 일(?)이 좀 있고 해서 머리가 복잡하고 하다 보니 내용이 좀... 늘어졌다고나 할까요? 외전, 그 4개나 되는 외전 다 쓰고(종류만 4개..;;) 수정판을 마니씩 올릴 예정입니다. 음- 으, 진도 안 나간다고 돌 날아오면...ㅠㅠ 우에- 몰라요, 몰라. 욕 하셔도 할 말 없답니다~^^; 그렇다고 수정을 안 할 수도 없잖아요? 수정판을 안 올리자니 그것도 좀 그렇구요^^; 멜은 donghee425@hanmail.net으로 날리시구요~ 리플은 마니마니 달아 주시와요~>ㅁ<; 그럼 즐독!!^-^ ...하세요~ 제 목: 공녀(貢女) 외전 2> EDIS -마왕의 애인(3) 마계공녀(魔界貢女) [외전] EDIS -마왕 교체식 :마왕의 애인 ◀▷ ◀▷ ◀▷ ◀▷ ◀▷ ◀▷ ◀▷ ◀▷ ◀▷ ◀▷ ◀▷ ◀▷ 넓은 대전을 꽉 채운 마족들이 중앙에 둥그런 공간을 남겨놓고 서 있었다. 숙연한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 중앙에는 네 명이 이디스와 대치한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고, 딜렌과 카마프는 마족들 사이에 앉은 채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딜렌은 언제나처럼 밝은 표정으로 어머니의 품에 안겨 기대어린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 보고 있었다. '약속하셨으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헤헷, 따뜻하다...' 이디스는 한 손을 붕대로 검에 연결시켜 놓고 있었다. 검은 색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오히려 투박하게 가다듬어 진 평범한 검인 것 같지만, 그 검에서는 그의 마기가 검고 뿌옇게 흘러 나오고 있어 오히려 위압적이면 위압적이지 쉽게 보이지는 않았다. 이디스는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시작하죠." 맨 처음에는 유리아덴이었다. 보랏빛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한 갈래로 묶어놓고, 그 특유의 침착하고 무덤덤한 표정으로 유리아덴은 자신의 주무기인 길다란 창을 허공에 생성시켰다. 유리아덴의 손 아래로 뿌옇게 보랏빛 마기가 모이며 긴 창을 만들어 냈다. 창을 잡아 공격태세를 취한 유리아덴은, 시작하겠다는 선언이고 뭐고 없이 순식간에 달려 들었다. 슈우우욱! 검을 위로 들어 올리고 있었던 이디스는 그대로 몸을 돌리면서 빠르게 찔러오는 유리아덴의 창을 피했다. 그리고 팔으로 곡선을 그리며 유리아덴의 허리를 노렸다. 하지만 유리아덴 역시 부드럽고 빠르게 피해 버렸다. 이디스는 공격하던 태세 그대로 팔을 휘둘렀다. 유리아덴은 창을 창날에 가깝게 잡아 그의 검을 막았다. 이디스의 검에서, 그의 마기가 충만하게 묻어 나오기 시작했다. 검과 맞닿은 창이 점차 검게 물들어 가려는 기색이 보이자 서로 힘싸움을 하던 유리아덴은 재빨리 창을 길게 잡아 안으로 끌어 당겼다. 이디스는 안쪽으로 끌어 당겨지는 유리아덴의 창을 검으로 뱀처럼 쫓아가며 안쪽으로 돌아 파고 들었다. "......-핫?!" 파아아앗- 안쪽으로 파고 든 이디스의 몸에서, 유리아덴의 몸을 그대로 가려버릴 듯한 짙은 안개같은 마기가 한꺼번에 흘러 나왔다.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짙은 마력에 유리아덴은 얼른 몸을 떼려 했다. 하지만 그 때, 유리아덴의 가슴에 이디스의 손에터 터져 나온 마력이 터졌다. "크헉!!" 유리아덴의 가슴에서 터진 마력은 스멀스멀 움직이며 포박하듯 사지를 붙잡았다. 유리아덴의 가슴 부분의 옷은 꺼멓게 타 있었고 피가 흘러 나오고 있다. 그리고 피가 흘러 나오는 중앙에는 조금 전 이디스가 파고들어 박아넣은 검은 마력이 구를 이루고 있었다. 마력은 괴로워 몸부림치는 유리아덴을 놓아주지 않고 끝까지 안으로 파고 들었다. "크허어- 으아아악!! 헉, 헉헉! 흐... 흐아아아아아-!!!!" 유리아덴의 가슴에 파고든 검은 마력 덩어리는, 점차 파고들어 끝내 유리아덴의 몸을 통과했다. 찐득한 선홍빛 피를 묻힌 채 꿈틀거리는 검은 마력은 다시 한 번 안개처럼 흩어져 유리아덴의 몸을 감쌌다. 심한 고통에 정신을 잃을 지경까지 와 버린 듯 이미 유리아덴의 몸은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끝났다." 한 사람이, 서열 4위라는 마족이 너무나 쉽게 끝나 버렸다. 미리 준비해 놓았던 의료진이 유리아덴을 데리고 가고, 대전 안의 모든 마족들은 침묵했다. 딜렌은, 딜렌은 아직 바닥에 미끌하게 남아 있는 유리아덴의 피를 충격적인 눈빛으로 보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혀, 형님." 카른이 딜렌의 옆으로 다가 와 두 손으로 딜렌의 눈을 가려 주었다. 딜렌의 몸이 충격으로 부들부들 떨렸다. "다음은?" 아로데와 로이드윈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아로데는 두 손 가득 그의 청록색 마력을 모아 놓고 자세를 취했고, 로이드윈은 가느다란 실에 붉은색 기류를 얇게 흘리며 안경을 고쳐썼다. 이디스는 그런 그들을 보며 이번에는 검을 횡으로 눕혀 들었다. 먼저, 로이드윈의 와이어가 굽이치며 달려 들었다. 이디스는 살아있는 뱀처럼 움직이는 와이어를 피해 살짝 살짝 몸을 움직이다가 가볍게 위로 뛰어 올랐다. 횡으로 들고 있던 검을 자신을 향해 조금 당기더니, 허공을 향해 길게 그었다. "네 방법은 알고 있다. 무작위로 공격하는 듯 하지만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면 움직일 수 없게 만들어져 있지. 하지만- 이런 건 애초에 원천봉쇄하면 그만이야." 이디스는 다시 솟구쳐 들어오는 와이어를 검에 감아 안으로 잡아 당겼다. 로이드윈이 그가 끄는 대로 따라오자, 이디스는 와이어로 마력을 흘려 보냈다. 선명한 붉은색으로 빛나던 와이어가, 점차 탁하게 물들어 갔다. "...크, 하지만... 그것 가지고는 3위 자리를 고수할 수 없었을 겁니다, 이디스님." 힘겨운 듯, 로이드윈이 입가로 피를 한 줄기 흘리며 말했다. 그가 말하자 마자, 이디스는 뭔가 눈치챈 듯 눈을 번쩍 떴다. 고개를 쳐든 그의 시야에, 붉은 실들이 주변에 가득 쳐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로이드윈의 마력으로 섬세하게 뿜어내어 진 붉은 실들은, 촘촘하게 그의 움직임을 봉쇄하고 있었다. 이디스의 입가가 슬그머니 곡선을 그렸다. 확실히, 촘촘하게 짜여진 그물같은 로이드윈의 마력은, 위협적이기는 했다. 웬만한 마력으로는 이 실을 절대 끊을 수 없을 것이다. 와이어에 의지해 형태를 유지하던 마력과는 달리 완전하게 로이드윈의 마력으로만 이뤄진 것이니까 말이다. 말하자면, 발출된 검기와도 같은 상태의 마력이었다. 날카롭고, 위협적인. "과연... 한데, 아로데- 넌 언제 덤빌 거지?" 아로데는, 아직까지 그를 노려보고 있기만 할 뿐 아무런 공격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아로데는 이디스를 향해 평소처럼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글쎄요, 아마도- 곧 시작하겠죠. 자,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디스는 검을 점점 앞으로 들어 올렸다. 움직임을 막고 있다고는 하지만, 검을 들어올릴 공간 정도는 충분했다. 로이드윈은 내상을 입었는지 이미 뒤로 물러나고 그 자리를 아로데가 메꾸고 있을 사이, 이디스는 그의 검에 마력을 모으고 있었다. 스멀스멀, 마기가 검게 피어 오르며 마력의 향기가 진동했다. 푸아악! "......!!" 로이드윈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평범해 보이기만 했던 이디스의 검이 순식간에 엄청난 크기로 커져 버렸던 것이다. 마기가 거미줄처럼 거대해진 검을 감싸고 윌고 피어 올랐다. 이디스는 놀라는 다른 이들의 모습을 보며 검을 크게 그었다. 피- 피이이이잇! 후두둑! 끊어진 로이드윈의 마력은, 그대로 허공에서 하나로 모아 져 이디스에게로 쏘아 들어갔다. 하지만 이미 로이드윈의 통제를 벗어 나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고 한 방향으로만 가게 되는 단순한 마력 덩어리가 이디스에게 맞춰질 리가 없었다. 이디스는 몸을 옆으로 약간 틀어 마력 덩어리를 피했다. 그 때, 이디스는 뭔가 기척을 느끼고 급히 몸을 반대 방향으로 틀었다. 피잇, 하는 소리와 함께, 이디스의 뺨에 미끌한 액체가 흘렀다. 이디스는 미간에 주름을 그리며 손을 올려 뺨을 만졌다. 뺨에서는 붉은 혈액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아로데의 기습적인 공격에 스친 모양이다. "훌륭하십니다. 피하셨군요. 당신의 무술 스승으로써, 아주 흡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피를 보고 미친 모양이다. 언제나처럼 장난기 가득하게 빛나던 눈동자가 아니라 약간 흐린 듯한 눈동자를 보고 이디스가 생각했다. 전투 때가 되면 언제나, 아로데는 싱글싱글 웃으면서 남의 살을 가르곤 했다. 그러면서도 만족할 때까지 마력을 휘두르고, 또 휘두른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리 쉽지 않을 겝니다." 핏! 아로데의 모습이 사라졌다. 마음껏 싸우기에는 그다지 적당하지 않았지만 공간을 잘 활용하며 싸우는 것도 주어진 조건 중 하나였다. 공간이 그다지 넓지 않기에 숨을 공간따위는 없다. 이디스의 주위에서는 피피피피핏, 하는 소리만이 들려 왔다. 어느 순간, 마법처럼 이디스의 우측에서 아로데가 몸을 드러냈다. 이디스는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마력이 가득 담긴 주먹을 휘두르는 아로데의 팔을 잡아 옆으로 던졌다. 그리고 그 때를 놓치지 않고 빠르게 움직여 아로데의 배에 발을 날렸다. 하지만 발에 닿는 감촉은 없다. 이디스의 발이 닿는 바로 그 때 바깥으로 몸을 움직여 피했던 것이다. 이디스는 발을 차던 동작 그대로 내려앉아 연결된 검으로 바닥을 짚었다. 끼기긱, 하는 듣기 싫은 소음과 함께 멈춘 검에는, 조그만 옷자락이 걸려 있었다. "...놓쳤군." "하하! 대단해요! 아주, 정말 대단해요! 이런... 하마터면 그대로 죽을 뻔 했습니다." 아로데의 목 근처의 옷이 튿어져 있었다. 목에는, 피가 베어나오지는 않았지만 붉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말 그대로 간발의 차였던 것이다. 이디스가 다시 자세를 잡았다. 확실하게 승리를 얻겠다는 게 목표였다. 게다가, 이미 피에 미쳐버린(?) 아로데가 쉽게 멈출지, 아닐지도 미지수였다. "다시 시작하지." "앗- 잠깐! 항복, 항복이에요! 나, 항복한다고요!" "...뭐?" 대전 안에 썰렁한 바람이 불었다. 황당한 표정으로 아로데를 바라보는 마족들의 시선에, 아로데는 살짝 윙크를(...) 해 줌으로써 보답을 하고 말했다. 그의 눈은 어느 사이엔가 정상적으로(?) 돌아 와 있었다. "에휴- 나도 목숨 아까운 줄은 안다구요. 흑! 알아서 기어야죠, 뭐. 아아-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2위 자리라도 잘 지켜야지." "너... 아이고, 내가 왜 속을 다쳐 가면서 공격했던 건지. 너 때문에 내가 늙는다, 늙어." 유리아덴이 쓰린 속을 붙잡으며 투덜거렸다. 아로데는 히죽 웃으며 받아쳤다. "이미 늙었으면서 뭘 그래?" 맞는 말이기는 하다. 어쨌거나 결국, 유리아덴만 심하게 터진(?) 격이 되었다. 상처가 심해 이 자리에 그가 없는 게 다행이라고나 할까. 아마 있었다면 기가 막혀 죽었을런지도(?) 몰랐다. 아로데가 물러나고 나자, 이제 마왕만이 남았다. 포도주를 홀짝거리던 마왕은, 앉아있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단번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죽지 마... 카디스. 제발." 카마프가 애절한 어조로 말했다. 동시에, 두 마족은 그녀를 이상스런 눈초리로 쏘아 보면서 의심스럽게 중얼거렸다. "쟤는 또 왜 저래? 아무리 계약자라지만 요즘에는 좀 심한 것 같지 않아?" "그러게. 딜렌님은 저 녀석을 보고 '어머니'라고 부르시더라구. 교육을 시켜도 한참 잘못 된 거 같애. 그러면서도 군주께선 싱글싱글 웃기만 하시고... 이상해, 이상해~" 두 마족이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농담을 주고 받으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안, 딜렌은 카른을 꼭 껴안은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래, 죽이시진 않으셨어. 지금은 세 마족 중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떨고 있는 딜렌을 안은 카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기대는 않는 게 좋을 텐데... 딜렌, 안 보여? 저건- 그의 눈에선, 자비라고는 찾을 수 없어.' 카랑, 이디스의 커다래진 검이 바닥에 끌리면서 쇳소리를 냈다. 두 마족도 주고받던 농담을 멈추고 굳은 얼굴로 중앙을 응시했다. 카디스의 손에서, 검은 마기가 모여 들어 손목 부근에서 날카로운 검날이 솟아 올랐다. 카디스의 시선이 이디스에게 잠시 머물렀다. 그의 아들이, 한 치의 동요 없는 모습으로 고른 숨을 내뱉고 있었다. 카디스의 눈에, 오래 전- 그 자신이 저 자리에서 아버지와 대치하고 있을 때가 떠올랐다. 그 때 자신은 이디스처럼 냉정하지도 못했고, 침착하지도 못했다. 그에게 있어, 이디스는 '아들'이 아니었다. 그저, 언제나 '경계해야 할 대상'일 뿐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 준비를 하며 힘을 키우는 존재다. 그도 그랬다. 그 역시, 그의 아버지의 몸에 검을 박아 넣으며 '마왕' 자리에 올랐다. 검을 박는 그 순간, 아버지의 얼굴에 떠올랐던 그 미묘한 미소만을 빼면- 그다지 기억에 남는 순간은 아니었다. "그럼." * * * * * * * * * * * * * * * * * * * * 푸우욱! 검 끝에서 손바닥으로, 살덩이를 가르는 물컹한 감촉이 느껴졌다. 이디스는 시선을 내려 검 끝이 향한 곳을 바라 보았다. 두 개의 육체가 서로 엉킨 채,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은빛의 머리카락에, 피가 물들어 갔다. "커... 커억." 검에 꿰뚫린 카마프의 입에서 왈칵, 핏덩이가 토해졌다. 이디스의 검에 의해 카마프의 몸을 통과해 내질러진 검에 카디스가 찔렸던 것이다. 하지만 카디스의 눈동자에는 이미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손만이 부들부들 떨리며 품에 안겨진 카마프를 꽉 껴안을 뿐이었다. "아, 안 돼!!! 아버지! 어머니이이이---!!!! 아- 안 돼애애애- 아아아아악!" 소름끼치는 절규가 대전을 크게 울렸다. 군데 군데 입은 검상과 방금 공격으로 인해 튄 피로 피투성이가 된 이디스는 피부로 느껴지는 피의 감촉과 온기를 즐기며 검을 두 사람의 몸에서 쑥 뺐다. 이디스가 검을 빼자마자, 딜렌이 달려나와 두 사람의 시신을 끌어 안았다. 떨리는 두 손으로 생명력이 빠져나간 두 사람의 육체를 끌어안은 딜렌이 다시 절규했다. "아... 아아아! 아아악- 아아아... 형님, 형님- 대체 왜! 어째서- 어째서? 왜애애애애!!!!!" 이디스는, 손에서 검을 흐트러 뜨렸다. 허공으로 검은 마기가 흩어져 가며 검이 사라졌다. 그는 여느 때 딜렌을 상대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필요했으니까." "이러지 않는다고 하셨잖아요! 이럴 필요, 없었다고 하셨잖아요... 단순히, '이기기만' 하면 된다고 하셨잖아요!" "'나'보다 강하지 않은 '그'는 필요가 없다. 내가 살아왔던 이유는 하나- 그를 이기기 위해서였다. 그건 나의 의무고, 내가 태어난, 내 존재의 이유." 그의 대답에, 그 아이는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이었다. 새빨간 머리카락, 붉은 피가 하얀 피부를 적시고 있었고 떨리는 금색이 섞인 붉은 눈동자에서는 쉼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에도, 이디스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 아이가 말했다. 천천히 입을 열어, 이제는 증오와 분노로 타오르는 눈동자로. "저도.... 죽이실 건가요? '필요'없어서?" "아니. 그럴 필요는 못 느껴."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천천히 그 아이에게서 뒤돌아 섰다. 숨죽이고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최고위 마족들을 싸늘하게 훑어보며 이디스는 그만 식어버린 피를 씻어내기 위해 돌아가려 했다. 이제 목적은 달성했다. 그가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가졌던 '목표', 그가 삶을 이어갔던, 강해져야 했던 이유를 이겼다. 그로써, 그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했다. 돌아가려 한 발짝씩 옮기던 그의 발걸음이, 그 아이의 한 마디에 잠시 멈췄다. "인형! 당신은 인형이야! 어머님이 그랬어. 당신은, '감정'도 못 느끼는 단순한 '인형'일 뿐이라고-!! 그래서 당신은 절대 '강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고... 핫?" 그렇게 말하고도 자신이 놀란 것 같은 그 아이는 자신의 입을 막았다. 하지만 오기가 생기는 듯 다시 증오로 불타는 눈으로 그를 쏘아 보았다. 이디스는 슬쩍 뒤돌아 그 아이를 일별하고는 슬쩍 웃었다. 비웃음은 아니었다. 오히려 쓴웃음과 비슷했다. 그 아이는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려 대면서도 자신의 모습을 눈동자에 담아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는 그였다. "그런가? 그래서?" "증오할 거야!! 평생, 평생 용서하지 않을 거야- 절대로!!" 이디스는 다시 길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다시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용서하지 않을 거야'라고 소리치는 그 아이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지만 무시했다. 온몸을 따뜻하게 적셔주던 피의 온기는 이미 날아가 버린 지 오래였다. 방금 뿌려진 따뜻한 피는 좋아하는 편이지만 식어버린 피는 불쾌하기만 했다. 문가에 다다른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인형'? 강해지지 못한다? 그렇다면 딜렌, 네가 날 죽여 봐라. 그로써 네 말을 증명해. 난 강해지겠다." 의무는 끝났다. 하지만, 가슴 속에 뭔가 석연찮은 것이 남았다. 뭔가 턱 막힌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뭘까? 대체 무엇이, 이처럼 그를 불쾌하게 할까? 멀리서 '아버지'와 카마프, 딜렌을 바라보고 있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딜렌이 그를 향해 웃을 때 뭔가에 울컥하고 이유를 몰라 눈살을 찌푸렸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에드라스가 그를 향해 웃을 때, 답답해지던 느낌과 같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조금만... 이디스님, 그러셨다면 지금과 같은 사태는 막을 수도 있으셨을 텐데요." 에드라스가 그에게 수건을 건네며 말했다. 이디스는 수건을 받아 머리에 묻은 핏물을 대충 닦으며 피식 웃어 보였다. 막을 수도 있었을 텐데, 라고? 어림도 없는 소리다. 결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더 나아지지는 않았으리라. "그들은 행복해 했습니다. 이디스님, 바라던 일을 이루셔서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행복?" 그렇게 되묻는 이디스를 보는 에드라스의 입가에 작은 쓴웃음이 머물렀다. 에드라스는 머리를 쓸어 올리는 이디스를 보며 허리를 숙여 말했다. "이제, 저는 이 일을 그만두겠습니다. 군주가 되셨으니 이 쓸모없는 마녀는 이제 그만 물러나야 하겠지요. 이디스님, 끝내기 전- 한 가지만 여쭤 보겠습니다." "뭐지?" 에드라스는, 이디스가 태어났을 때부터 가장 가까이에 있어왔던 자였다. "저는, 당신으로 인해 행복했습니다. 당신은... 행복하셨습니까?" 이디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피에 물든 수건을 에드라스에게 건내고 물에 몸을 담글 뿐이었다. 에드라스는 깊게 허리를 숙였다. 많은 세월을 함께 한 만큼, 에드라스는 이디스가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그의 대답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들 하나 하나를,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느껴본 적이 없으시니까... 이디스님, 저는... 당신에게 '행복'을 드리기는 고사하고, 작은 기쁨, 슬픔, 아픔마저도- 가르쳐 드리지 못한 모양이군요. 당신의 유모로써, 당신의 곁에 있을 자격이, 저에게는 없습니다.' 이디스는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며 눈을 감았다. 가슴 속에, 답답함이 커져 갔다. 허전함도 커갔다. 그의 목표를 이루었으니, 이제는 마왕으로서의 의무만이 남았다. 바랐었다. '아버지'를 이기고 마왕의 자리에 오르기를. 그 일만이 그의 존재를 확인하고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며, 태어나기 전부터 정해진 그의 임무이자, 설정된 목표였다. 그렇다면- 이기고 나면, 끝내고 나면, 그는 뭘 위해 살아가야 하지? 「증오할 거야!! 평생, 평생 용서하지 않을 거야- 절대로!!」 '......강해지기 위해서.' 강해지기 위해서. 나 자신이 '인형'이 아님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 그리고, 20년 후. "…이름은?" "루피아. '루피아 엘 세느안트'……." -------------------------------------------------------------- 역시!! 전투씬은 어렵군요.. 전투경험이 없는 저로써는 저게 한계랍니다.ㅠㅠ 카디스와 이디스 전투 장면은, 아예 생략해 버렸고. 잘 쓸 자신이 없어서..-_-; 일단! 이디스 편은 이게 끝이구요~ 담에는 세키라의 첫 사랑, 아니면 시스터 콤플레스.. 가 올라갈 듯 합니다^^ 수정판 다 올리고 외전 다 올리면, 본판은 언제 진도 나가냐?! 라고 묻는 분이 계신데... 일단 수정을 다 해야...-_-; 저도 본편 나가고 싶지만 수정하고 있는데 너무 어정쩡한 상태라서요^^; 아아- 에드라스, 그 남자 마녀- 잊어버리셨음 큰일나는데요.0_0;; 저기서 설명도 안 적어놓고 그냥 이름만(아, 마녀라는 건 나왔나?) 적어놔서 누군지 모르시는 건... 설마, 아니시겠죠?^^; 멜은 donghee425@hanmail.net 으로 주시구요, 리플 마니마니!^^ 그럼 즐독하세요~>0< 제 목: 공녀(貢女) 외전 3] 시스터 콤플렉스(1) 마계공녀(魔界貢女) [외전] 시스터 콤플렉스 :루피아 태어나던 날 ◀▷ ◀▷ ◀▷ ◀▷ ◀▷ ◀▷ ◀▷ ◀▷ ◀▷ ◀▷ ◀▷ ◀▷ "예에~? 또, 동생?" 아침 훈련을 마친 카에리드와 이데카른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물론, 다른 아이 많은 집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아직 젊으신 데다 건강하시니 걱정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둘에게는 또 동생이 생긴다는 말이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아기 돌보는 경험은 한 번이면 족해!!' 문제는, 어머니가 아기를 안고 쩔쩔매는 카에리드와 이데카른을 보고 즐거워 하신다는 데에 있다. 현재 2살인 트로에가 태어나고 거의 1년 동안 카에리드와 이데카른은 아이를 재우고 어르며 온갖 고생을 다 해야 했다. 그 악몽이 겨우 끝나고, 이제 좀 살만해 졌다 싶었더니, 또 동생? "호호호. 여보, 이번에는 꼭 여자 아이였으면 좋겠네요. 그쵸?" "그럼. 아들은 셋이나 있으니 이번에는 꼭 여자아이일 거야. 후후후..." 여자 아이라니... 남자 아이인 트로에를 돌볼 때도 그 우렁찬 울음소리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는데, 여자 아이이면 얼마나 더할까? 머릿속으로 이제 곧 찾아 올 지옥같은 나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카에리드와 이데카른은 아찔함에 몸을 휘청였다. '시, 싫어어어어~~~!!' 절규하는 그들이었지만, 차마 밖으로는 내뱉지 못했다. 너무 행복해 하시는 두 분을 보자니 뭐라고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생글거리는 부모님 앞에서 그저 속으로만 처참한 앞날을 위해 묵념을 하는 이데카른과 카에리드였다. "아! 카에리드, 이데카른. 오늘 이 아비의 심부름 좀 다녀 오겠니?" "예?" 행복한 표정을 짓고 계시던 아버지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둘에게 말했다. 서로를 눈빛으로 위로하고 있던 둘이 자신을 올려다 보자 그들의 아버지, 레인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오늘 에스베크 공작가, 칼르니르 공작가에 좀 다녀오렴. 내가 가기로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서... 의외로 가까우니 제이닉과 함께 가면 금방 갔다올 수 있을 거다." "여보! 이제 겨우 6살, 4살 난 애들을 그 먼 곳에까지 심부름 보내실려구요? 위험할 텐데!" 물론 상식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보통, 공작가문 정도 되는 가문의 아이라면 적어도 10살 때까지는 저택 안에서 잡다한 공부며 검술수련이며 하는 것들을 해야 정상인 것이다. 외출을 하더라도 부모가 동행하는 것이 상식적이다. 하지만 정작 그들의 아버지, 레인은 전-혀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사내녀석들이 네, 여섯 정도면 다 큰 거야. 게다가 제이닉도 따라가는 데 뭘 걱정이야? 마차도 타고 갈 텐데. 나도 그 정도부터 나돌아다니기 시작했다고. 너무 곱게 키우면 버릇없어져, 여보. 게다가 어디 멀리가는 것도 아니고......" "그건 그렇지만......" 카멜라는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은 했지만 그다지 말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이데카른과 카에리드는 물론 나쁘지는 않았지만 왜 아버지 레인이 못 가는지 궁금했다. 이렇게 어머니와 함께 농담을 즐기고 계실 정도라면 못 가실 이유는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카에리드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카에리드가 묻자 레인은 하하하하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야, 난 여기서 너희들 어머니와 뱃속의 예-쁜 네 동생과 함께 있어야지! 세상에 그것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 하하하하하..." "...다, 다녀 오겠습니다......" * * * * * * * * * * * * * * * * * * * * 창문 밖으로 거리의 풍경이 휙휙 지나갔다. '엘 세느안트 가문'의 문장이 찍혀있는 마차를 타고 에스베크 저택으로 향하는 카에리드는 마차 안 상황을 둘러 보았다. 무슨 책인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아주 두꺼운 책을 집중하여 보고 있는 이데카른,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자신, 가신(家臣) 제이닉의 무릎에 앉아 장난치며 놀고 있는 트로에. '나와 이데카른만 가면 될 걸, 뭐하러 트로에까지 딸려 보냈담. 뭐, 보나마나 두 분이서만 오붓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내쫓은 것일 테지만 말이야...... 아아, 우리 부모님은 참 아직도 청춘이시라니까.' 이제 겨우 6살이지만, 그래도 알 건 다 아는 카에리드였다. 다른 집보다 자신의 부모님의 사이가 더 좋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 정도가 좀... 심각하다는 것도. 카에리드는 등 뒤의 쿠션에 몸을 묻으며 기지개를 길게 폈다. "이데, 그거 무슨 책이야? 재밌어?" "글쎄? 아버지 서재에 있는 책 중에서 아무거나 뽑아온 건데... '고대 문자와 룬어의 상관관계, 그리고 현재의 언어생활에 대한 의미있는 고찰'이라는데." 카에리드는 인상을 찡그렸다. 이데카른의 단점이라면, 책을 종류에 관계없이 본다는 것이다. 장점이 될 수도 있지만, 카에리드는 절대 단점이라고 생각했다. 4살 짜리가 저런 책을 본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6살짜리 아이가 '청춘이야'라고 하며 한숨을 내쉬는 것도, 물론 그다지 미관상 좋지는 않은 모습이긴 하지만. "제이닉, 얼마나 더 가야 하죠? 아, 트로에는 이리 주세요." "10분 정도만 더 가면 도착하겠군요, 도련님. 셋째 도련님은 제가 안고 있을 테니 편하게 계세요. 집에서 시달리시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밖에서는 제가 모시고 있지요."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제이닉." 카에리드는 감동받은 표정으로 말했다. 제이닉은 그런 카에리드를 보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하하 웃었다. 제이닉은 엘 세느안트 가문의 집사이며 가신이었다. 아는 것이 많아서 엘 세느안트 공작은 그를 무척 믿었다. 카에리드가 태어났을 때부터 항상 같이 있어 준 가족같은 존재라서, 카에리드 역시 제이닉을 무척이나 따랐다. 카에리드는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초여름의 날씨는, 무척이나 좋았다. 여름의 문턱을 막 넘을 시기지만 아직 본격적인 더위는 시작되지 않아 봄과 여름 사이의, 조금 따사로운 오후의 날씨다. 카에리드는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즐기며 눈을 살짝 감았다. 그 때, 갑자기 마차가 덜커덩거리며 멈췄다. "워- 워워! 이 녀석! 갑자기 길 앞으로 뛰어들면 어떡해!!" 마부의 목소리가 들리자 카에리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마차 앞으로 누군가 뛰어든 모양이다. 제이닉이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마부에게 소리쳤다. "무슨 일인가!" "제이닉 님. 아무 일도 아닙니다. 마차 앞으로 갑자기 고양이 한 마리가 뛰어 들어서......" "그래? 그럼 가도록 하... 카에리드 도련님?!" 카에리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마차 밖으로 문을 열고 나가자, 제이닉이 깜짝 놀라며 뒤쫓아 가려 했다. 하지만 이데카른마저 밖으로 그의 형을 따라 나가 버리자 제이닉도 낮게 한숨을 내쉬며 트로에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 카에리드가 밖으로 나왔을 때에도 길 앞에 뛰어 들었다는 고양이는 아직 길에 앉아 있었다. 검은 털을 가진 그 고양이는, 카에리드가 다가오는 데도 도망가지 않고 오히려 털을 다듬는 등 여유를 부렸다. 카에리드는, 고양이의 선명한 초록색 눈과 마주쳤다. "...고양아, 이리 와 보렴. 놀라지 않았니?" 왠지, 그냥 보내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에 카에리드는 손짓해 고양이를 불렀다. 낯을 가리기로 유명한 고양이가 손짓 한 번 했다고 달려올 리는 없겠지만 카에리드는 미소를 지으면서 고양이를 불렀다. 그러자 고양이는 큰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카에리드에게로 다가왔다. "냐아아아- 냐아앙." 고양이의 검은 털은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카에리드는 옅게 미소지으며 고양이를 안아 들었다. 그의 품을 떠날 생각이 없는 것인지, 고양이는 오히려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며 냐앙 거렸다. 카에리드는 고양이를 안고 돌아섰다. "형, 데리고 갈 거야?" 이데카른이 물었다. 뒤에서는 제이닉이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카에리드는 생긋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것도 인연 아니겠어? 어서 가자고. 빨리 에스베크 저택에 가서 아버지께서 주신 편지를 전달해 드려야 할 것 아니겠어?" "하, 하지만 도련님......" "안 될 것 없어요, 제이닉. 부모님께는 제가 말씀드릴게요. 정 난처하다면 제 방에서만 키우도록 하겠구요. 어서 가죠." "그래요, 제이닉. 형이 키우고 싶다는데 뭐라 할 수는 없죠. 나도 저 고양이가 맘에 들고요." "둘째 도련님까지.... 하아- 어쩔 수 없지요." 이데카른이 말하자, 제이닉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품에 안은 트로에가 꺄아 거리며 카에리드의 품에 안긴 고양이 쪽으로 손을 뻗었다. 제이닉은 고양이가 트로에를 물까 얼른 트로에를 안아 당기려고 했지만, 고양이의 반응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양이는 오히려 트로에의 손 아래에 고개를 비비며 기분 좋은 듯 가르릉거렸던 것이다. 이렇게까지 낯을 가리지 않는 고양이는 처음 보는 제이닉이었다. '게다가, 저런 초록색 눈이라니......' 여러 가지로 특이한 고양이였지만, 일단 내버려 두기로 했다. 제이닉은 마부에게 서둘러 가 달라고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어느 새 마차 안으로 들어가 버린 카에리드와 이데카른은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장난치고 있었다. '나참, 그래도 아직 어린애시라니까......' * * * * * * * * * * * * * * * * * * * * "아! 연락 받았다. 심부름 왔다면서?" 황궁 마법사라는 흰색 로브를 두른 에스베크 공작이 세 형제와 제이닉을 반갑게 맞아 들이면서 말했다. 카에리드는 첫째답게 예의 바르게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십니까, 에스베크 공작 각하. 아버지 심부름으로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여기, 아버지께서 전달해 주시라는 편지입니다." 물론, 에스베크 공작을 자주 보고, 또 친하기는 했지만 카에리드는 예의를 차렸다. 그건 이데카른도 마찬가지였다. 이데카른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카에리드 옆에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런 그들의 딱딱한 모습에 내심 쓴웃음을 짓던 에스베크 공작은 엘 세느안트 공작의 편지를 읽어 보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 그 친구가 넷째를 가졌군? 축하할 일이로군. 선물을 뭘로 해 주면 좋을까..." "네? 아버지의 편지에 적힌 내용이 그 얘기였습니까?" 카에리드는 약간 허탈감이 들어 말했다. 이데카른도 약간이지만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그냥 마법 통신구로 전해도 될 얘기를, 굳이 자신들을 보내다니. 자신들의 아버지지만, 그들은 도저히 엘 세느안트 공작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독특한 사고구조란! 그들의 표정을 본 에스베크 공작은 하하 웃어 보이며 말했다. "아마 너희들에게 선물을 들려 보내라는 심보일 게야, 이 친구. 기다리게나, 어린 기사분들. 내 선물을 가지고 오지." "아... 예, 기다리겠습니다." 에스베크 공작이 허허허 웃으면서 응접실을 나갔다. 제이닉은 자기 주인의 행동에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나 부인과 둘고 계시고 싶으셨나? 이런 핑계 아닌 핑계까지 대 가며 자식들을 내쫓을(?) 정도로. "...우리 아버지지만,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동감이야, 형." "냐아앙- 냥." 마치 자신도 그렇다는 듯이, 초록색 눈동자의 검은 고양이가 길게 울었다. 잠시 소파 위에 놓아 둔 고양이를 떠올린 카에리드는 얼른 고양이를 안아 들었다. 에스베크 공작이 올 동안 소파에 앉아 기다리기로 한 카에리드는 고양이를 안아올려 눈을 맞췄다. "이데, 이데! 이 녀석- 이름은 뭘로 하는 게 좋을까? 계속 고양이야, 라고 부를 순 없지 않겠어? 이름 정해주자." 그러는 게 좋을 것 같기는 했다. 이데카른은 고개를 끄덕였다. 카에리드는 고양이 눈을 뚫어져라 쳐다 보면서 말했다. "뭐가 좋을까. 냐옹이? 나비? 흐음- 다 너무 평범하잖아. 뭐 좋은 거 없나? 베리로 할까?" 고양이 머리에 식은땀이 달린 것 같았다면, 그건 착각일까? 카에리드는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고민했다. 이데카른이 그가 들고 온 두꺼운 책을 뒤져 보더니 말했다. "'카마'가 어때?" "뭐? '카마'?"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단어에 카에리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일단 부르기 편하고, 소리도 좋긴 한데, 무슨 뜻인지 몰라 영 어색했다. 이데카른은 '카마'라는 말이 있는 부분을 보여주며 말했다. "12대천사 중 하나인 '카마엘'의 줄임말이야. '카마'. 음- 어때? 카마엘은 징벌의 천사라 날개가 까맣잖아. 그리고, 얘 털도 까맣고." "좋네. 좋아! 그걸로 하자." 카에리드는 히죽 웃으면서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고양이는 새로 정해진 이름이 마음에 드는지 냐앙- 거리면서 그의 품을 파고 들었다. 정말 사람 안 가리는 고양이라고, 카에리드는 생각했다. 잘 따라줘소 좋기는 했지만 말이다. "좋았어~ 네 이름은 '카마'다! 잘 부탁해, 카마~ 훗, 내 동생이 생겼다는 걸 안 날에 만나다니. 우리 보통 인연이 아닌가 보다~?" 잠시 뒤, 그들은 에스베크 공작의 선물을 쥐고 칼르니르 공작가로 향했다. 에스베크 공작의 선물은, 그의 '마법사'라는 직업답게 생활에 편리한 실용성 마법용품들이었다. 태교에 좋은 음악들이 저장되어 있는 수정구슬이라든지, 공기를 정화시켜주는 용구라던가 하는 것들 등, 좋은 것들이 많았다. "트로에... 자나? 아함- 그러고 보니 나도 졸려... 제이닉, 도착하면 나 좀 깨워 줘." "으하암- 나도... 부탁해요, 제이닉." 트로에가 자는 것을 보니 갑자기 졸음이 몰려왔다. 카에리드와 이데카른은 제이닉에게 그렇게 부탁하고는 소파 위에서 몸을 웅크렸다. 아기 돌보는 일에 치여 노이로제에 걸리는 꿈을 꿀 것 같았다. --------------------------------------------------------------- 아아- 어렸을 때 루피아 오빠들 등장! 아직 루피아는 태어나기 전이랍니다. 루피아는... 으흠, 담편 쯤에야 겨우 태어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더 늦으면 담담편이 되려나? 아니, 거기까지 늘어질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네요. 이거 다 적고 나서 수정판 적어야 돼요-ㅠㅠ 우아, 정신없어..-_-; 이번 꼬랑지는 짧게 끝내죠, 그다지 보기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멜은 donghee425@hanmail.net 으로 보내주시구요, 리플 마니 달아 주세요~>< 즐독하세요! 제 목: 공녀(貢女) 외전 3> 시스터 콤플렉스(2) 마계공녀(魔界貢女) [외전] 시스터 콤플렉스 :루피아 태어나던 날 ◀▷ ◀▷ ◀▷ ◀▷ ◀▷ ◀▷ ◀▷ ◀▷ ◀▷ ◀▷ ◀▷ ◀▷ 카에리드는 달콤한 잠에 취해 있었다. 그런데 왠지 이상했다. 아무리 좋은 마차라고 해도 조금쯤은 덜컹거리는 움직임이 있어야 할 텐데, 아까부터 그런 게 전혀 없는 것이다. 분명 그는 마차에서 잠이 들었는데... 카에리드는 살짝 눈을 떠 양옆으로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리며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어, 어? "어? 왜 내가 집에 있는 거지?" 그의 저택, 그 중에서도 그의 방의 풍경이었다. 카에리드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며 어리둥절함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 때, 옆에서 냐아- 하는 고양이 울음소리와 함께 왼쪽 다리 부근에 조금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카에리드의 시야에 그의 고양이, 카마의 모습이 비춰졌다. 그는 카마를 가볍게 안아 품으로 끌어 당기며 갸웃거렸다. "분명 칼르니르 저택으로 가던 도중이었는데......" "아! 일어나셨군요, 도련님." 문이 달칵 열리며 제이닉이 들어왔다. 카에리드는 제이닉을 보자마자 자신이 왜 마차를 타고 칼르니르 저택으로 가지 않고 집에서 태평하게 잠을 쿨쿨 자고 있었는지를 물었다. 그의 물음에 제이닉은 허허 웃으며 말했다. "도련님들께서 하도 곤히 주무셔서 깨울 수가 없었답니다. 칼르니르 공작 각하께는 제가 주인님의 편지를 전해 드렸지요. 아직 새벽이니 더 주무셔도 됩니다." "이데는요?" "둘째 도련님께서는 진작에 일어나셔서 정원에서 체력단련 중이십니다. 가 보시겠습니까?" 카에리드는 겉옷을 챙겨 입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움직이기 편하도록 간편한 차림을 한 그는 한 손으로 카마를 들어 품에 안으면서 쪼르르 달려 나갔다. 동생이 먼저 일어나서 훈련을 한다니, 자신도 뒤쳐지고 싶지 않았다. 초여름이라고 해도 아직 이른 새벽이었다. 새벽의 공기는 차가웠고, 카에리드는 따뜻한 카마를 더욱 꼭 껴안으면서 헤헤 웃었다. 그런데 갑자기 품안에 얌전히 있던 카마가 그의 품을 뛰쳐 나갔다. "어? 어? 카마! 카마!!" 카마의 검은 꼬리가 숨어 버렸다. 허망한 듯이 카마가 숨은 곳을 바라보던 카에리드는 카마가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곧 친근하게 굴던 카마의 모습이 떠올라 그 생각을 지워 버렸다. 카에리드는 다시 이데카른이 있는 수련장으로 달려갔다. 수련을 끝내고 카에리드와 이데카른은 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아직 4살, 6살밖에 안 된 그들이 벌써부터 검술수련을 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기특하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겠지만, 그들의 생각은 전적으로 달랐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세뇌 교육'의 효과라고 할 수 있었다. '아버지도 4살부터 수련을 시작했다고 하던데, 뭘.' 그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거지, 결코 특별하거나 기특하다고 칭찬받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어쨌거나, 수련을 힘들고 힘든 수련을 끝내면 시원한 물 한 잔이 그리워지는 게 당연한 것일 것이다. 하지만 물 가지러 가는 것은 더 힘들 것 같았다. "여기, 물." 카에리드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내밀어지는 물컵을 받아 꿀꺽꿀꺽 마셨다. 이데카른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갑자기 등 뒤에서 내밀어진 두 개의 물컵이 어디서 툭 튀어 나온 것인지도 확인하지 않은 채 시원한 물의 느낌만 만끽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물컵을 건네주며 아주아주 자연- 스럽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어, 고마워." "별말씀을." "......" "......" 잠시 생각했다. 수련을 끝내고 쉬고 있는 우리에게 자연스레 물을 건넬 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둘의 머릿속에 여러 사람의 프로필이 스쳐 지나갔다. 제이닉? 아니야, 제이닉이라고 하기에는 목소리가 너무 앳돼. 그럼 시종 팔레? 아니, 아니야. 시종이라면 이렇게 당당하게 반말을 쓸 리가 없잖아. 앗, 그러고 보니 이 집에서 우리한테 반말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부모님 뿐이야! 그런데 부모님 목소리도 아니었다. 두 사람의 안색이 점차 하얗게 탈색되어 갔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난 귀신이 아니야." 마치 둘의 생각을 읽기라도 하듯 뒤에 선 '정체모를 녀석'이 말했다. 카에리드와 이데카른은 그들에게 물을 건넨 녀석의 정체를 알아내기 재빨리 뒤돌았다. 사실 재빨리 뒤돌아 볼 필요는 없었지만 왠지 사라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긴 검은머리를 늘어 뜨리고, 한심스런 표정을 한 미소년이 그들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깊은 초록색 눈동자. 카에리드와 이데카른은, 순간적으로 고양이 '카마'를 떠올렸지만 이내 지워 버렸다. 고양이와 비교한다는 게 상대에게 미안해졌기 때문이다. "하여간 생각하는 거 하고는... 내가 누군지 궁금하겠지? 이 저택의 시종? 흥! 택도 없는 소리, 이 몸이 겨우 시종으로 보여? 그것도 모자라 겨우 하찮은 영계의 조각 따위로 생각하다니... 불쾌해." 소년의 초록색 눈동자는 오만함과 자신감을 담고 있었다. 나이는- 대략 7, 8살 정도로 보였고, 아까도 말했듯이 무척 아름다웠다. 자신에 대한 믿음과 자부심에서 흘러 나오는 매력이라고나 할까, 하여간 명령을 내리는 데 무척 익숙한 타입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면은, 엘 세느안트 가문의 사람들에게서도 보이는 성격인 것이다. "넌 누구야?" 먼저 카에리드가 입을 열었다. 눈에는 미심쩍음을 가득 담고. 이데카른도 경계하는 의미로 소년을 살짝 쏘아보고 있다. 소년은 작게 코웃음을 치더니 손사레를 하며 말했다. "나도 내가 원해서 너희들 앞에 나타난 게 아니다, 꼬맹이들아." "꼬맹이?" 카에리드와 이데카른은 기가 막혔다. 하! 꼬맹이라니! 그러는 자신은 대체 얼마나 크다고 생각하는 걸까? 한 14, 15살 정도 된 사람에게 그 말을 듣는다면 둘은 '내가 꼬마여서 당신보다 이득인 점'이라는 주제로 한 바탕 연설을 펼칠 것이다. 하지만 그들보다 많아봐야 한 두살 차이가 날 것 같은 꼬.마.에게 그런 말을 듣자니 벨이 꼬였다. 이데카른이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리고 말했다. "그러는 너는 어디가 어른같다는 거지?" 소년의 얼굴에 비뚜름한 미소가 걸렸다. 킥, 하고 웃은 소년은 엄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모두!" "하! 웃겨. 봐, 키도 얼마 차이 안 나잖아? 어디가 어른이라는 거야? 하는 짓도, 흐음. 절대 어른이라고는 봐줄 수 없을 정도구만." 오만하고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 꽉 차 겸손하지도 못한 녀석이 어디서 어른이라는 거야? 카에리드는 부모님에게 들은 <어른에 대한 정의와 그 조건> 중 하나를 떠올리며 말했다. 눈앞의 소년은 그의 말에 무척이나 화를 내는 듯 했지만 순간 무얼 깨달았는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나 잘났소' 노래를 들을 준비를 하던 둘은 소년에게 어리둥절한 시선을 던졌다. "쳇! 어린애들 상대하다가는 끝이 없겠어. 이봐! 내가 너희들을 찾아온 건, 할 말이 있어서다. 귀 파고 눈 씻고 손 모으고 잘 들어. 이 존귀하신 내가 직접 내려온 거란 말이야." "흥! 네가 뭐 천사라도 되냐, 존귀하게?" "이- 이익!!" 계속해서 빈정대는 카에리드의 말에 소년은 무척이나 분한 듯 입술을 꽉 깨물었다. 물론 그 모습에 통쾌함만을 느낀 카에리드였지만 말이다. 소년은 이를 바득 바득 갈다가 겨우 화를 진정시켰는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 동생 생겼지?" "...뭐? 네가 어떻게 알고있는 거야?! 아직 정식적인 공표는 없었는데!" 카에리드와 이데카른의 얼굴에 경악이 내비치자 소년은 마치 무언가에서 이긴 듯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소년은 훗, 하고 웃은 다음 계속 말을 이었다. "다 아는 수가 있어. 알려고 하지 마, 다쳐. 너 말이야.... 동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응?" 카에리드와 이데카른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꼭 오크 자다 오우거 되는 소리 아닌가. 두 사람이 고개를 갸웃하자 소년은 답답한지 소리를 꽥 질러 버렸다. "그러니까, 동생 태어나면 어떻게 대해 줄 거냐고!" 그걸 네가 알아서 뭐 하려고? 정작 소년의 질문에 답을 찾아내기 보다 두 사람의 관심은 대체 저 녀석이 누구길래 그 따위 것을 묻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 질문을 표정에서 읽은 듯한 소년이었지만 과감하게 무시해 버렸다. 처음 봤을 때 카마같다고 생각했던 깊은 초록색 눈동자가 진지한 빛을 띠고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카에리드는 순간 당황해 버벅거리며 말을 꺼냈다. "그, 그게... 그러니까, 자- 잘, 잘 해 줘야지. 음, 그, 그래야지." "넌!" "...마찬가지일 듯 한데." 소년의 눈에 의구심이 떠올랐다. 카에리드와 이데카른은 영문도 모른 채 소년의 집요한 눈길에 관찰당해야 했다. 꼭 벌거벗고 황궁출두를 한 것 같은, 그런 느낌이랄까. 소년의 눈길은 마치 속을 헤집는 것 같았다. 저 눈 앞에서 비밀따위는 없다고 말하는 듯한. "......명심해 둬, 곧 태어날 네 <여동생>은.... 그녀의 행복을 위해 그녀를 아주아주, 무척이나 아끼는 사람들이 떠나보낸 것이라는 걸." "...그게 무, 무슨 소리야?" 소년은 다시 코웃음을 쳤다. 소년의 두 손이 이데카른과 카에리드의 이마 위로 올라갔다. 손의 감촉은 부드러웠고, 또 차가웠다. 소년의 입은 다시 상향곡선을 그리더니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 "좋아. 일단은 통과야. 하지만- 지켜 보겠어. 그녀를 지킬만한 자격이 되는지." 갑자기 어지러움이 몰려왔다. 주위가 뱅글뱅글 돌며 머리가 아찔해 졌다. 카에리드와 이데카른은 점차 눈이 감겨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흐릿해져 가는 시야 사이로, 슬며시 미소짓는 소년의 모습과...... 고양이 '카마'의 모습, 그리고...... 아아, 아카시아 향이다. * * * * * * * * * * * * * * * * * * * * 그로부터 8개월 뒤, 엘 세느안트 가문의 넷째이자, 카에리드, 이데카른, 트로에의 '여동생'이 태어났다. 그 날, 기이한 소년을 만난 뒤로 바뀐 게 있다면 카에리드와 이데카른, 트로에가 한 살씩 더 먹었다는 점, 고양이 '카마'가 이 집안의 완전한 식구가 되었다는 점 등이었다. '우, 우와! 엄청 긴장돼!' 어젯밤, 어머니의 기나긴 투쟁(?) 끝에 터져나온 약간의 시간간격을 두고 터져나온 울음소리를 제외하고는 여동생에 대한 정보는 하나도 없었다. 카에리드는 얼마나 긴장이 되던지 손끝마저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아마 그다지 티나지는 않지만 이데카른도 그러할 테고, 기대 가득한 표정인 트로에도 그럴 것이다. 카에리드는 긴장으로 언 손으로 어머니와 아기의 방을 열었다. 달칵, 소리와 함께 부드럽게 문이 열리고...... 방 안의 모습이 점점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편안한 모습으로 그들을 반기셨다. "어머, 우리 왕자님들 오셨구나. 여동생 보러 왔니?" 어제야 겨우 아이를 낳으셔서 그런지, 아직은 조금 창백해 보이는 모습이셨다. 카에리드는 우선 쪼르르 어머니 앞으로 달려가 손을 꼭 잡아 드렸다. 카멜라는 장남의 머리를 쓸어넘겨 주시며 환하게 웃었다. "동생 보러 온 거지?" "...네." 카멜라는 잔뜩 긴장한 아들들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그녀는 옆에 뉘여 놓은 강보에 쌓인 아이를 가슴께로 안아 올렸다. 아직 강보에 싸여 아기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점차 가까이 다가올 수록 아들들의 얼굴은 더 긴장감이 서려 갔다. 카멜라는 그 웃긴 모습에 속으로 킥킥 웃어야 했다. 아들들의 분위기가 너무 진지해서 차마 웃어버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자..... 보렴. 예쁘지?" 세 명의 표정이, 놀람으로 물들었다. 그 정도로, 강보에 쌓인 아기는 무척이나.... 귀여웠다. 하얗고 보드라워 보이는 피부, 발갛게 물든 뺨. 오물거리는 작고 빨간 입술이나, 아직 많이 없은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아버지의 것을 쏙 빼닮은 짙은 보라색 눈동자. "아직 눈이 잘 보이지는 않는단다. 다만 흐릿하게만 보일 뿐이지. 자... 아이한테는 너희 모습이 아직 흐리게만 보일 거야. 어떠니?" "아......" 세 형제는 한 동안 얼을 빼놓고 아기의 얼굴만을 들여다 보았다. 아아, 손가락을 꼼지락거린다. 이번에는 입술이 조물거리네. 뭐라고 하고싶은 걸까? 우와, 눈이 깜빡였어. 아주아주 사소한 것들이라도 너무너무 신기하고 예쁘게만 느껴졌다. 가슴 속에, 경이로움과 사랑스러움이 천천히 꽃피었다. "우, 우웅......" 아기의 입술이 다시 한 번 조물거렸다. 우물거리던 아기의 말을 자세하게 듣기 위해서, 카에리드와 이데카른, 트로에는 아기에게로 귀를 모았다. 아기의 말을 듣기위해 필사적이 된 아들들의 사랑스런 모습에 어머니 카멜라는 다시 한 번 풋, 하고 웃음을 숨죽여 토해냈다. "빠.... 빠!" "빠?" 그들에게 시선을 주고는 있지만 아직 한 번도 웃지 않은 아기였다. 갑자기 '빠'라니, 무슨 소리일까? 세 형제는 의문에 찬 시선을 서로 주고 받고는 다시 아기에게로 시선을 모았다. 아기는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라는 듯한 눈으로 다시 손으로 강보를 쥐고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세 형제의 의문스런 얼굴이 슬- 슬 풀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헤- 늘어지기 시작했다. 아아, 귀여워라! 세 형제는 헤에- 하고 잔뜩 늘어진 얼굴로 침대 위에서 강보에 싸여 장난치는 아기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바로 그 때였다. "헤에- 빠! 빠~ 꺄아!" 웃었다! 분명, 분명 자신들을 보고 웃었다! 세 형제는 서로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봤다. 아직 아기는 그들을 향해 웃고 있었다. 아니, 그들의 여동생은. 조금 전도 사랑스럽고 귀엽기 그지없는 아기였지만, 웃고 있는 지금은.... 아아, 하늘에서 강림한 천사가 따로 없었다! 세 형제는 그야말로 감동에 빠져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웃었어! 웃었어~ 크윽, 너무 귀여워~" "사, 사랑스러워..." "너무 귀여버......" 아직 3살 밖에 안 된 트로에마저도 어눌한 어투로 눈물을 글썽이며 말할 정도니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정말 눈물마저 다 날 것 같았다. 자신들을 보고 웃은 게 아닐 수도 있는데, 웃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정말 기뻤다. 정말이지- 처음 본 순간, 하염없이 빠져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여동생에게. "어머니! 저희 동생- 이름이 뭐에요? 네? 이름이요." 자식들을 그저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던 카멜라가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루피아. 루피아 엘 세느안트란다, 아들들아." "루피아......" 세 형제는 입 안으로 그 이름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너무나도 순결해 보이는 아기였기에, 차마 손조차 댈 수가 없었다. 손조차 뻗어보지 못하고 말똥말똥 눈으로만 아기를 지켜보던 그들은, 결국 저녁 때까지 지켜 보다 어머니에게 쫓겨나고 말았다. 그것도, 안 나가겠다고 생떼를 부리다 제이닉의 손에 이끌려 말이다. 방에서 나오고도 세 형제는 한 동안 멍- 하니 정신을 놓고 있었다. 잠시 후, 카에리드가 뭔가 결심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두다다다 방으로 달려 간 카에리드는, 곧 뭔가를 쥐고 뛰어 나왔다. "형, 어디 가?" "맹세하러!" 이데카른과 트로에는 저 멀리 정원 한 쪽으로 달려가는 카에리드를 따라 달렸다. 어느 한 구석, 정원에 서 있는 은행나무 아래에서 멈춰 선 카에리드는 잠시 숨을 고르고 방에서 가져 온 물건에 감싸여져 있던 천을 풀었다. "형... 그거, 검(劍)이잖아?" 카에리드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데카른과 트로에는 두어 걸음 뒤에서 카에리드가 하는 양을 지켜 보기로 했다. 카에리드는 검을 천천히 뽑아 들었다. 비록 아직 작아서 검을 한꺼번에, 그리고 멋지게 뽑기는 무리였지만 어찌어찌 뽑을 수는 있었다. 카에리드는 검을 뽑아 한껏 진지한 표정으로 검을 땅에 꽂았다. 그리고, 그는 손등을 칼날 쪽으로 가져가 스윽 그었다. 그리고 그 피를 뚝뚝 흘리면서 하늘에 대고 맹세의 말을 읊조렸다. "나, '카에리드 엘 세느안트'는, 내 이름, 내 명예, 내 모든 것을 걸고- 나의 사랑스러운 여동생, '루피아 엘 세느안트'를 지키기로 여기 이 칼에 대고 맹세한다." 그것은 맹세였다. 아직 기사는 아니었지만,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자신의 이름과, 명예와, 모든 것을 대고 하는 맹세였던 것이다. 그것을 바라보던 이데카른도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 와 칼에 손등을 그었다. 스윽, 하고 그의 손등에도 길게 베인 자국이 났고, 피가 흘렀다. "나, '이데카른 엘 세느안트'는, 내 이름, 내 명예, 내 모든 것을 걸고- 나의 사랑스러운 여동생, '루피아 엘 세느안트'를 지키기로 여기 이 칼에 대고 맹세한다." 겨우 3살 배기가 뭘 알겠는가. 여기까지 쫓아 온 것만도 다행이었다. 트로에는 멀뚱히 형들이 하는 양을 쳐다보다가,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그들이 무릎을 꿇은 칼 앞에 그도 무릎을 꿇었다. 트로에는 뭔가 하고야 말겠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뗐다. "나, 나도, 맹세하겠습니다! 바, 반드시 루피아를 지킬 거에요!! 진짜로!" 트로에의 귀여운(?) 맹세에 카에리드와 이데카른의 입가가 점점 위로 곡선을 그렸다. 이 얼마나 기특한 노릇인가? 카에리드는 동생의 머리칼을 헤집어 놓으며 하하 웃었다. 루피아가 탄생한 날 저녁, 엘 세느안트 저택의 정원 은행나무 아래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 아아, 현재 시작 새벽 1:22...-_-; 12시 전에 올리려고 그렇게 애를 썼건마아안!!ㅠ0ㅠ 그, 그래도 봐주실 거죠? 겨우 1시간 22분(겨, 겨우가 아니네;;) 차이잖아요^^; 아아- 이것으로 3일도 채 가지 못하고 성실연재 못하는 건가? 흑, 새벽에 올리니까 좀 봐 주세요~>< ...루피아가 태어 났네요. 리플 많이 달아 주시구요, 즐독하세요~^-^ 제 목: [루피아와 네르의 첫 좌담회] [루피아와 네르의 첫 좌담회] ◀▷ ◀▷ ◀▷ ◀▷ ◀▷ ◀▷ ◀▷ ◀▷ ◀▷ ◀▷ ◀▷ ◀▷ 잔잔한 어둠이 흐르는 밤. 스산한 분위기로 삼색의 달빛이 요요한 빛을 내뿜고 있다. 음모를 꾸미기 좋은 밤, 마왕성이 내려다 보이는 허공에는 한 사람이 후드와 로브로 온 몸을 감싼 채 므흐흐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형체도 없이 흐릿한 그 사람은 마왕성의 창으로 들여다 보이는 응접실을 내려다보며 한참을 웃다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안녕하세요? 작가 네이에르라고 합니다. 이번에 첫 좌담회로 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제 소설의 인물들이 워낙… 음, 개성이 뛰어난(?) 인물들이라 다소 소란스러울 수 있다는 점을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후훗, 아아. 기대가 되네요. 이번에는 특별 게스트로 출연하니까 주목해 주세요." 그리고 그녀는 작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마무리한 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아, 그녀의 효용가치는 이 정도였던 것이다. 좌담회를 열 첫 맨트를 날리기 위한. 장소는 다시 이동하여 마왕성의 응접실로 배경이 바뀐다. 과연 마왕성답게 화려하게 꾸며진 응접실 중앙에는 촛불로 주위를 밝힌 채 이디스가 독서를 즐기고 있었다. 모처럼 생긴 여유로운 시간을, 그는 우아하게도 독서로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하기만 이 '여유로운 시간'이 생긴 까닭은 다름아닌 작가의 특별출연 부탁으로 생긴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주었으면 한다. 응접실의 문이 열리며 한 무더기의 인물이 대거 출연했다. "어? 이디스 님, 뭐 읽어요?" 루피아가 맨 먼저 눈을 반짝 빛내며 그에게 다가갔다. 출연 외에는 꽤나 다정한 시간을 보내는 커플인 두 사람이다. 이디스는 보던 책을 덮어 건네주었다. 세키라와 에리나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고, 아로데, 로이드윈, 그리고 유리아덴 역시 간단한 인사를 마쳤다. 아유니 역시 평소의 발랄한 성격 그대로를 보여주며 생긋 인사했다. 로아이나는 이 곳에서 후드를 벗을까 말까 고민하다 그냥 쓰고 있기로 결정했다. "역시 공녀 팀이 먼저 도착했군요. 신혼 일기 팀은 요즘 너무 오래 잠수해서 오랜만에 움직이기가 힘들다나요. 아아, 부럽기 그지없어라. 신혼 일기 팀, 요즘 작가가 신경도 안 써줘서 좀 섭섭한 감은 있지만 모처럼의 휴가를 이용해서 대륙투어를 다니고 있대요." 세키라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로데는 글쎄, 라고 말하며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다. 에리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는… 요즘 강해지기 위해서 영혼을 팔아버린 여자로 만들어 버렸더라?" "어머머. 나는 어떻구. 하- 책이나 읽으면서 얌전히 지내라잖아 완전히. 그래도 루피아만 하겠느냐마는 말이야. 맨날 넘어지구, 쫓기구, 길 잃구, 먼지 마시구… 그 애가 제일 고생이지. 이디스 님이 많이 챙겨주시기는 하지만… 후훗, 걔는 모르는 것 같더라." 세키라가 뭔가 아주 즐거운 듯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아로데 옆에 있더니 점점 그를 닮아가는 모양이다. 에리나는 훗, 하고 짧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똑같지, 뭐… 둘 다. 극중 캐릭터가 괜히 나왔겠니? 성격이 다 똑같잖아. 너와 나도…." "이거 때문에 마계로 왔지, 언제 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 이렇게나마 푸념할 수 있는 것도 다행이지. 에휴- 작가, 그 사람이 앞에 있으면 나도 내가 어떻게 할 지 모르겠어." …허공에 몸을 숨긴 채 쳐다보는 작가의 머리에 식은땀이 한 방울 또르르 흘렀다. 세키라, 에리나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고 그녀의 시선은 루피아&이디스에게 돌려졌다. 그들 커플은 극외에서도 애정전선이 형성될 거라는 기대를 모으고 있기 때문에 작가 역시 흥미진진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디스, 루피아는 아로데, 로이드윈, 유리아덴, 로아이나, 아유니와 함께 같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신혼 일기 팀이 올 때까지 수다나 떨어 보자는 의도인 것 같았다. 작가가 시선을 돌렸던 두 여인네도 그들에게 합류했다. "난 말야. 왜 맨날 구르고 뛰고 해야 하는지. 자, 봐봐. 이 멍. 저번에 그 숲에서 자기 혼자 뛰는 이상한 장면 찍을 때 생긴 거야. 게다가 이디스 님이 그……." 말을 잇던 루피아의 얼굴이 빨갛게 타올랐다. 비록 극중에서는 그 장면은 루피아가 잠든 사이 일어난 일이지만, 장면을 찍는 도중 루피아는 정신이 말짱한 상태였던 것이다. 그 때 그 장면을 떠올린 루피아가 말을 멈추자 이디스가 그녀의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어디 아픈가? 왜 얼굴이 갑자기 빨갛게…." "아냐! 안 아파요! 으악, 얼굴 들이밀지 마욧!!" 극중과 극외 캐릭의 성격은 모두 똑같다. 그 점을 다시 한 번 깨달으며 이상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는 이디스를 좌중 인물들은 웃음을 참으며 지켜봤다. 여기서마저 감정상 둔한 마왕의 모습이 너무나 귀여웠던 탓이다. 그에 따른 루피아의 반응 또한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아직까지는 이렇다 할 사건이 하나도 없잖아? 아, 그래놓고도 벌써 10몇 회를 수정하고 있다니. 이건 기적이야." "음… 이번에 가는 길에 꽤 많은 일이 있을 예정이라던데? 대본이 와야 알겠지만, 제발 연기하기 힘든 건 피해 줬으면 좋겠어. 어차피 우리들은 액션신도 별로 없지만." 루피아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그녀로서는 부담스러운 액션 연기는 별로였다. 액션신이 한 번도 없었던 지금도 이렇게 멍 투성이인데, 액션신이 나오면 작가 취향상 심한 하드는 아니더라도 고통이 심한 소프트로 연속해 이어질 것 같다는 느낌이 물씬물씬 들기 때문이다. 에리나는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유리아덴을 통해 강해지게 될 그녀로서는 그 방법이 대체 어떤 것일지 괜한 불안감만 느끼고 있는 상태였다. 사악하게도, 작가는 그 부분에서 대본을 끊어 버렸다. 작가를 만나면 반드시 한 대 패줘야겠다는 다짐을 다시금 굳히며, 에리나는 작게 인상을 썼다. 파트너 유리아덴 역시 어떻게 할 지는 지시받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도 가장 기구한 운명이 되는 건 저라구요. 소식 들으셨어요? 제 역할 때문에 저는 동정표를 많이 얻고 있는데, 작가가 슬쩍 내비친 바로는 저는 더 불쌍해질 거라더군요. 뭐라고 하는 줄 아세요? 내가 인기 걱정을 하니까 '후후훗! 걱정 마. 너는 더 불쌍해질 예정이기 때문에 동정표라도 많이 얻을 거야~'라더군요." 좌중 인물들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루피아는 로아이나의 어깨를 토닥여주며 심심한 위로를 건넸다. "걱정 마.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그 사람은 비극은 취급 안 해. 스토리 상 어쩔 수 없는 부분에서는 몇 사람씩 죽겠지마… 안……. 하하핫! 하여튼 힘내!" 그 사람이라면 여차해서 성질을 건드리거나 기분 나쁘면 그럴 지도 모른다! 는 생각이 불현듯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자 루피아의 얼굴이 굳었다.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어깨를 툭툭 두드려 준 루피아의 위로는, 로아이나에게는 전혀 위로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 하핫. 그, 그러고보니 극외인데 왜 후드 안 벗어? 그거 기대한 사람도 꽤 있을 텐데." 루피아가 주제도 돌릴 겸해서 말하자 로아이나의 숙여졌던 고개가 들리며 붉은 입술이 슬쩍 올라갔다. 그로서는 기다렸던 물음이었다. "이렇게라도 궁금증을 끌어야지요. 아, 얼마나 답답한 줄 아세요? 앞은 잘 보이지도 않고, 이거 바람에도 안 벗겨지게 하려고 안에 머리에 고정시켜 놨단 말이에요. 가발 알죠? 가발 안쪽에 달린 것만 따로 사서 후드에 안착시켜 놓고, 그걸 삔으로 머리와 고정시켜 놨어요. 이건 사비까지 들여가며 만든 거라구요. 극중에는 '바람에도 안 벗겨지는 신기한 후드'라고만 서술해 놓은 거 있죠? 내가 이걸 얼마나 말하고 싶었는지…." 얼마나 억울했으면. 작가는 반성과 동시에 조금 더 자세하게 서술해 줘야 겠다는 다짐을 했다. 하지만 그래봤자 어차피 '불쌍한 역할로 동정표 모을' 역할이기 때문에 서술에 큰 변동은 없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 그것보다는 당신 얼굴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을 거예요." 세키라가 말했다. 로아이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중얼거렸다. "마족이니까 아름답게 생겼을 거다, 는 의견이 대부분이긴 한데 말이에요. …나도 언제 내 얼굴 공개되냐고 작가한테 물었었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는 줄 알아요? '동정표만 받아서는 인기몰이가 안 되잖아. 이런 식으로 궁금증을 하나 더해주면 그나마 인기가 더 갈 거야. 아! 혹여라도 다른 사람 앞에서 네 얼굴에 대한 정보 흘리고 다닐 생각 말아라. 만약 그럴 시에는 당장 성형외과에 예약 잡아주마'라고 하잖아요! 흑흑… 나쁜 사람!" 로아이나의 이미지가 많이 깨졌다. 더 이상 그의 정체를 노출시키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작가는 인상을 썼다. 그리고 허공에서 손을 휘저어 그를 강제이동시켜 버렸다. 갑자기 그가 휘익, 하고 사라져 버리자 좌중 인물들의 눈이 휘둥그레 떠 졌지만 이내 가라앉았다. 평소 로아이나의 이미지가 워낙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뭐, 하는 사고인 것이다. 그 잇점을 이용하여 작가는 대담하게도 로아이나를 강제이동시켜 마왕성 옥탑에 감금시켜 버리는 범죄를 저질렀다. "하아- 신혼 일기 팀은 대체 언제 도착한담. 그 사람들이 와야 빨리 다음으로 넘어가지."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고, 루피아가 투덜거리듯 그 말을 하자마자 응접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문가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응접실의 문을 붙잡고, 헉헉 숨을 몰아쉬며 그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는 그들은, 다름아닌 신혼 일기 팀이었다. 결고운 검푸른 머리카락을 포니테일로 높이 묶고 세르디잔식의 하늘하늘한 옷을 입은 그녀는, 이마 정 중앙에 다색(多色) 보석이 박혀있어 인상적이었다. 각종 엽기적인 행각으로 세인(世人)들을 경악에 몰아넣은 주인공, 그녀는 네이에르였다. 그녀의 옆에서 세이가 부축을 해 주며 공녀팀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아아, 네르. 그러게 너무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고 했잖습니까." "으에엑. 세, 세르디잔 왕국에서 너무 놀았나 봐. 타마르랑 논다고 시간가는 줄도 몰랐는데. 하아, 루피아. 안녕? 이디스, 안녕하세요. 아, 그리고…[좌중을 돌아본 후]… 다들 안녕!" 아아, 그녀는 다른 모든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기가 귀찮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녀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아유니가 제일 먼저 일어나 네이에르에게 다가가 달라 붙으며 눈을 반짝였다. "아아, 언니! 너무 오랜만이에요. 그 동안 뭐하셨어요?" 아유니의 실제 나이는 아직 15세다. 엄청난 동안, 이라는 설정이 필요했기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22살의 노땅(?)이 되어야 했다. 7년의 세월을 뛰어넘은 설정인 것이다. 비록 설정이고, 소설이긴 하지만 그들에게는 실제상황인 이상 아유니는 상당히 불행한 입장이다. 그리고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아유니는 네이에르와 루피아의 엄청난 팬이라는 점이다. 그녀의 캐스팅 이유는, 상당히 불쌍하고 어찌보면 사이코틱할 수 있는 역할인데도 불구하고 그녀가 스스로 지원했다는 점에 있다. 22살의 동안을 찾기란 상당히 어려워서, 작가는 간단하게 그녀를 '아유니' 역에 캐스팅하고 말았단다. 그녀는 루피아와 네이에르를 맨 처음 만나자마자 감격의 눈물을 짓기도 하고 너무 울어 기절까지 한, 아주 못말리는 소녀였다. "아유니… 라고 했던가. 아아, 그래. 잘 있었어? 나야 뭐, 작가가 너희 팀에 정신팔려 있는 동안 꽤 여러 군데 돌아다니면서 놀았지. 흠, 우리 팀 전체가 길눈이 상당히 어두운 탓에 예정에도 없는 곳에 가게 되기도 했지만 작가가 다시 연재를 시작하면 적어도 녹화 장소 찾아가는 데 늦는 일은 없을 거야." 네이에르의 녹화장에서 가장 유명한 일화는, 신혼 일기 팀 전부가 도착했는데도 녹화 장소에 도착하지 않은 '네이에르, 녹화 펑크' 사건이었다. 나중에 대륙 북부의 이름모를 야산에서 발견된 그녀가 그 곳에 있던 이유는 다름아닌 '길을 잃어서'였다. 어쩌다 거기까지 가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지만, 세이도 없이 그곳에 홀로 떨어지게 된 네이에르는 제일 먼저 세이에게 실생활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마법진 몇 개를 배웠다고 한다. 비록 극중에는 쓸 수 없지만. "엣? 그런데 페리니카와 로드님은 어디 가셨나요? 안 보이네요." 루피아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거기에 이디스가 덧붙였다. "에드라프와 에릭도 보이지 않는군." 같은 마왕 직업에 있는 에드라프가 보이지 않자 이디스가 상기시켜 준 것이었다. 네이에르는 그들을 보며 답해 주었다. "조금 있다 올 거야. 이래뵈도 주인공들인데 너무 늦을 수는 없으니까 우리 먼저 온 거거든. 아, 맞아. 페리니카 말이야~ 그 사이 더 귀여워졌잖아~ 루피아, 걔 오면 우리 같이 데리고 놀까?" "그거 좋지! 아, 그러고보니 대체 왜 '공녀'에는 귀여운 애가 안 나오는 거야? 데리고 놀 만한 애 어디 없나?" 루피아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네이에르의 '신혼 일기'에는 페리니카, 타마르를 비롯한 어린 아이가 끊임없이 나오는 데에 비해 공녀에는 눈이 즐거울 만한 미남, 미녀들은 넘쳐 흐르지만(신혼 일기 측도 마찬가지이긴 하다) 어린아이는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네이에르는 자세를 낮춰 사람들의 얼굴을 탁자 위에 모이게 한 다음 낮게 말했다. "그 이유는 말이야… 작가가 신혼 일기 연재 중에 리플에서 '로리콘'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거든. 그 때문에 꼬마들을 등장시키는 걸 자중하고 있다나? 그딴 거 신경쓰지 말고 좀 등장시켜 달라고 내가 네 대신 말한 적이 있거든? 뭐라고 그랬는 줄 아니? '너희들을 위해 로리콘 소리 들어가면서 애들 등장시킬 생각은 없다. 혹시 몰라. 너희들이 잘 하면 내가 등장시켜 줄지 말야. 아아- 요즘 아역배우 캐스팅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줄 알아? 애들 몸값이 금값이야. 신혼 일기 드래곤 배역 캐스팅하는 데는 얼마나 돈이 많이 들었는지! 걔네들은 엉덩이가 무거워서 왠만해서는 잘 안 움직인단 말이야'라고 하는 거 있지?" 오늘은 아주 작가 욕을 하기로 작정을 한 모양이다. 작가는 어둠 속에서 남몰래 눈물을 짜내며 이를 갈았다. 내 아주 저것들을 다 죽여 버릴까! 늘 생각만 하고 행동으로는 옮기지 못하는 작가는 언제나처럼 이만 부득부득 갈 따름이다. 어쨌든, 네이에르는 이번 기회에 작가 욕을 실컷 하고 말겠다며 다짐에 다짐을 더하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치면, 나는 출연비도 잘 안 주는 거 있죠. 스스로 지원한 거라고는 하지만 그러는 게 어딨어요? 저번에 그 숲에서 등장했던 장면 있잖아요? 참나, 그때 떠 있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장면 연출하느라 힘들었는데, 그쯤 하면 보너스 정도는 줘야 하는거 아닌가요?" "세상에, 보너스도 안 줬단 말이야? 그러고보니 나도 보너스같은 거 받은 적 없어." 루피아도 맞장구를 쳤다. 그 말에는 네이에르 역시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녀는 출연비마저도 잘 주지 않는 작가였단 말인가? 작가는 가슴에 뭔가가 박힌 듯 크윽, 크윽 하는 신음을 연신 흘리면서 비틀거렸다. "아아, 수정하기 전에는 그나마 내 정체가 밝혀져서 딱 재밌으려는 부분이었는데. 아! 로아이나 님의 열렬한 사랑을 받으시는 분이 누군지 혹시 아는 사람?" 좌중의 모든 인물들의 고개가 가로저어 졌다. 아유니는 골몰히 생각에 잠기며 '대체 누구지?'하며 중얼거렸다. 아아, 그녀는 아니란 말인가. 독자들이 예상이 빗나간 것에 대해 어떤 반응일까 궁금해하며 작가는 히죽 웃었다. 어쩌면 뒤통수를 칠 만한 인물일지도 모르지. 본문 내에 '그녀'라고 서술된 사람을 생각하며 작가는 키득키득 웃었다. "요즘 타마르는 어때?" "아아. 잘 크고 있어. 얼마나 귀엽던지. 옷 보면 알겠지만, 우리는 방금까지 세르디잔 왕국에서 놀다 왔거든. 그러고보니 우리 페리는 언제 오려나. 세이, 혹시 알아?" "음… 안타깝게도 그는 못 올 것 같군요. 로드님과 함께 이 곳에는 참석을 못 하겠다고 정중한 사과를 보내 왔습니다. 전언이 있습니다. '로드님과 쥬리에가 붙잡고 놓아주시질 않아서 참석 못 하겠어. 안타깝지만, 다음에는 꼭 참석하도록 할게, 누나. 으윽- 되도록이면 빨리 와서 나 좀 구해줘어-'라는 군요." "으음. 쥬리에는 어떻게든 빨리 떼어 버려야 하겠어." "그렇게 치자면 네르, 당신께 붙은 남자가 더 많지 않습니까? 클레이오냐 왕국의 왕자 일루카를 첫 필두로 해서 기사 알티온도 상당한 호감을 보이고 있고, 어쌔신 길드 마스터 킬레인, 세르디잔 왕국의 카지르 다바딘, 아지르 타마르도 크면 상당하겠더군요? 아아, 빠뜨릴 뻔 했군요. 페리니카*레드 역시 가장 대표적인 당신의 추종자죠. 안 그래요?" 가시가 돋힌 그의 말에 네이에르는 히죽 웃어보일 따름이었다. 속으로 상당히 많이 쌓인 모양이다. 하긴, 신혼 여행을 떠났는데 부인이 돌아다니며 온갖 염문설(?)을 일으키고 다니니 남편 입장에서 오죽이나 불쾌하랴. 이쪽 사정도 결코 좋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작가는 이쯤에서, 사람을 좀 물갈이(?)시켜야 하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구석에서 '오빠들이 없어, 오빠들이…'라고 중얼거리는 루피아도 있고, 따로 노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아까부터 한 마디도 없었던 세키라, 에리나, 아로데, 유리아덴, 로이드윈 등등의 공녀 팀이다. 이디스, 루피아는 그래도 주인공이니 남겨 두기로 하자. 그녀는 이미 분위기 상 떨어져야 할 사람들 명단에 오른 자들의 뒤로 스르르 몸을 옮겨 강제이동시켜 버렸다. 그리고, 메모지에 재빨리 글씨를 휘갈겨 적고는 사라졌다. "어? 세, 세키…… 이런 제길! 당했다!" 루피아는 허공을 바라보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 시선에 작가가 움찔했음은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 메모지에는 지렁이 트위스트 추는 듯한 필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마왕성 옥탑에 가둬 놓겠음. 작가 권한으로 명령하니, 이번 좌담회가 끝날 때까지 찾을 생각은 하지 말아라. 만약 찾으러 나선다면, … 후후, 내 수많은 돌과 사시미를 각오하고 두 소설 다 비극으로 만들어 버리겠다!」 휘이잉- 순식간에 비어버린 마왕성의 응접실. 이제 남은 것은 이디스&루피아, 네이에르&세이카루스 뿐이다. 그들은 차마 자신들을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협박에 움직이지도 못한 채 이만 부드득 부드득 갈았다. "그놈의 작가 다시 만나면 반드시 모가지를 분질러 놓으리라!" 그렇게 다짐에 다짐을 거듭할 때였다. 갑자기 응접실의 창문이 벌컥- 열리면서 때아닌 한파가 몰려 들었다! 네 사람의 시선이 창가를 향했다. "오- 호호호호호호홋! 호호호호- 흠흠, 이렇게 웃는 거 맞나? 다시. 호호호호호호-" "자중하렴, 딸아. 우리는 납치해 온 얘네들만 놔두고 가면 되는 거야." 검은 후드와 로브를 두르고 있는 두 여인의 등장! 긴 폐활량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크게 여왕님 웃음을 터뜨린 사람과 그 사람을 '딸'이라 지칭한 사람은 '아, 그랬나요?', '그랬단다' 등등의 대화를 서로 잠시 나누다 그들을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네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위에서 언급했던 '특별 게스트' 신기, 이쪽은 어머니 시온. 이대로라면 공녀 팀의 중간계 부분의 사람들은 아예 등장하지 못할 것 같아서 작가가 특별히 투입한 인원이지. '납치하여 사라지는 괴한 1, 2'!" 아아, 그게 아닌데. 잠시나마 등장시키기 위해 애썼던 내 노력을 알아줘요. 언니, 엄마. 두 사람이 가르킨 곳에는 입에 천을 물고 팔 다리가 묶인 여섯 사람이 몸부림치고 있었다. 루피아는 거리가 있는 데도 불구하고 그 중 세 사람이 자신의 오빠, 그리고 한 사람은 자신의 시녀라는 것을 알아 보았다. "오-호호호호홋, 나는 역할에 충실할 거야! 자, 자. 여기서 얘기만 해! 만질 수는 없을 테니까~ 호호호호호호호호홋-" 역할에 너무나 몰입한 그대, 아름다워라.[의미불명] "이, 이! 이 사악한!" "호호호호호호호호홋- 원래 특별 게스트 설정이 그래!" 어머니 시온은 역에 완전히 몰입해버린 딸을 바라보며 살풋 인상을 썼다. 슬며시 딸의 뒤로 다가간 그녀는 신나게 웃고 있는 딸의 목을 살짝 툭 쳐 버렸다. '신기'의 몸이 푹- 꺾이며 쓰러져 버렸다. 어머니 시온은 안타까운 듯 한숨을 살짝 내쉬더니 말했다. "그럼 남은 좌담회를 즐겨요. 우리는 이만 사라져 줄 테니. 읏차!" 그녀는 딸의 옷자락을 잡더니 하늘로 둥실 떠올랐다. 두 사람의 느닷없는 등장으로 황당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던 네 사람은 이어 남은 여섯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이에르와 세이카루스는 어깨를 으쓱, 하며 중얼거렸다. "하여간 웃기는 작가라니까. 아, 그 작가 맏딸이라면서. 근데 왠 언니?" "글쎄요, 네르. 아- 이 쿠키 좀 드셔 보시겠습니까? 맛이 좋군요." "아아, 고마워. 그래도 세이가 만든 게 제일 맛있다구." 이 커플은… 대륙투어를 다니면서 사이가 더 좋아져 온 듯 싶다. 세 쌍의 감격적인 남매상봉은 꽤나 소란스러우니 넘어가도록 하자. 서술하기 피곤하다.[;;] 잠시간 장내는 소란스러움에 빠져 들었다. 작가 네이에르는 이쯤에서 모습을 드러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아아, 그러나 작가 네르. 저 주인공들의 폭력을 정면으로 맞닥뜨릴 자신이 없었으니. 그녀는 그냥 이대로 있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이대로는 분위기가 진정될 기미가 안 보인다. 좌담회의 본 요지[…그게 뭔데?]를 살리기 위해, 편집!! 삐리리리- 피리리리리리릿- 대략 1시간 반 후. "……새, 새벽이 밝아 와… 큰일이다. 베키, 우웃… 오빠들 잘 부탁해." "이, 이런 게 어딨어요! 오자마자 막을 내려야 하다닛!! 이렇게 불공평할 데가아아아아~~" "이럴 수는 없어!" 무시. 무시하자. 작가는 다시 손을 휘저었다. 다음 좌담회 장소는 마왕성이 아니라 중간계로 해 줄게. 중간계 출연자들의 안타까운 비명을 뒤로하고, 그들 여섯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네이에르는 애초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태연작약한 태도로 쿠키를 우물대고 있다. 세이카루스 또한 신경쓰는 분위기가 아니다. 루피아만이 안타까운 눈으로 털썩 주저앉을 뿐. "……마무리가 안 돼. 이 사람은 언제나 마무리가 안 돼." -루피아 "동감이야, 루피아. 너무 그렇게 절망하지 말라구. 본편에서 곧 만나게 해 준다잖아? 아아, 그에 비해 나는 울 아빠 만날 때가 아직 까마득히 멀었으니 나보다는 나은 거지. 수정판도 아예, 라고 해도 될 만큼 진도가 안 나갔잖아." -네르 "슬슬 이런 거 적는 거 보니까 할 짓이 없나 보군요. 글 적기는 싫고, 놀고는 싶고." -세이 "그 사람은 언제나 그랬다." -이디스 "……그래! 난 언제나 마무리가 안 된다, 어쩔래!!" 느닷없는 등장. 버럭- 소리를 지르며 난데없이 등장한 작가의 출현에 다들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작가는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다가 소리 질렀다. "나, 난 그래도… 그래도… 에잇! 젠장, 너희들 다 죽여버릴 테다아아아아-" 그리고 사라져 가는 작가. 네 주인공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적응하지 못한 채 눈만 끔뻑거렸고, 작가는 저 멀리 세 개의 달 사이로 사라져 갔다. 1초. 2초. 3초. 4초. 5초. 6초……10분 후. "……이노무 작가아아아- 할 말만 하고 도망간 거야야아!! 다음편 대본이랑 사라진 애들 돌려주고 가아아아-!!!!" "신혼 일기 촬영재개 좀 하자!! 이 작가야- 우리도 출연비 좀 받자구우!!! 일상생활에서 로드 상대하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알아아아아-!!!!!!" 한 편. 마왕성의 옥탑에서는. "에잇, 좌담회 아직도 안 끝났나? …꺄앗! 아로데, 나 쓰리 고!" "뭐야? …이, 이런." "세키라, 너 너무 잘하는 거 아니야? 진짜 처음하는 거 맞아?" "다음! 빨리 다음 사람 해요." ……고스톱이 한창이었다.[…;;] ============================== 아아. 이런 거 해 보고 싶었어요.-_-;; 좌담회같은 쓸데없는 짓 치고는 상당히 긴 듯.. 싶지만 말이예요. 네이에르와 세이카루스의 오랜만의 등장이군요. 이제 글 쓰러 사라져.. 야죠. 즐독하세요~^^; 제 목: [공녀+신혼일기 합작 외전]백설공주 신혼 일기, 공녀 합작 외전! <백설공주> * * * * * * * * * * * * * * * 백설공주:이디스 마녀(왕비):네르 왕자:로드 왕자의 백마용 드래곤:페리 말없는 거울:유리아덴 이동용 손거울:에리나 사과 심부름 마녀:루피아 왕:아유니 숲의 요정:세키라 난장이:공녀 구출대(?)+아로데, 세이카루스 +++++배역 설정에는 ‘마틴’님이 수고해 주셨습니다.+++++ 아주 아주 오랜 옛날에, 아무 걱정도 없는 평화로운 왕국에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왜 하필이면 옛날 옛적 이야기이냐고는 묻지 마세요. 몇 년도, 며칠에 일어난 일이라고 일일이 따질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여하튼, 그런 평화로운 왕국의 왕과 왕비에게는 걱정거리가 따-악 하나 있었답니다. 바로, 둘 사이에 아기가 몇 년째 태어나지 않았다는 거예요. 원래 이런 일은 시기적절하게 해결되는 거예요. 그래야 이야기가 풀리잖아요? 곧 왕과 왕비 사이에는 어여쁜 공주님이 태어났고, 왕비는 아이를 낳다 하늘나라 천사님의 인도를 받아 천국으로 떠나게 되었지만(한 마디로 죽었다는 거에요) 왕은 공주님을 ‘백설’이라 명명하며 정성스레 키웠답니다. 그래봤자 시녀들이 알아서 키워 줬겠지만 말이에요. “…오늘, 재… 미있게 놀았느… 냐?” “상관할 것 없지 않은가.” 참 사이좋은 부녀(父女)죠? 아유니 왕의 볼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네요. 왜일까요? 사랑하는 이디스 백설이 너무나 귀여웠던 탓에 꼭 껴안아 주고 싶은데, 체면 때문에 차마 그럴 수 없어 참느라 그런 것일까요? 왕도 참 할 짓 못 되네요. 그런데 사랑하는 딸을 보는 아유니 왕의 눈이 뜨겁게 불타오르는 것은 대체 왜이며, 아버지를 바라보는 딸(?) 백설 이디스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있는 것은 대체 왜일까요? 두 사람이 꼭 원수처럼 느껴지는 건 이 필자만의 착각일까요?(그렇겠지요) 딸을 바라보는 아버지 아유니 왕의 눈이 걱정스럽게 빛났습니다. (흠, ‘걱정스럽게’치고는 너무 밝군요. 좀 감아 주세요. 아, 좋아요. 그 정도면 됐군요) 아유니 왕은 결심했습니다. 왕비가 필요하다고 조르는 대신들도 그렇고, 딸에게도 어머니의 존재가 필요하리라 생각한 거지요. 그(그녀)는 새 아내를 맞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왜 당신이 온 거야!” 새로 온 왕비를 본 아유니 왕이 외쳤습니다. 아, 이런, 어떡해요. 왕의 안색이 창백하군요. 반면에 네르 왕비는 방 안의 물건들을 구경하기에 바쁩니다. “왜 루피아 님이 안 오시고 네가 온 거냐구우~” “어? 몰라. 나보고 이리로 오라고 시킨 걸 어떡해. 그러고보니 내정자가 루피아였나? 이디스하고 모녀지간이 되기 싫다고 절규하던 게. 아아- 세이는 언제 오려나.” 아유니 왕은 털썩 주저 앉았습니다. 앗? 제가 말 안 했었나요? 왕비는 네르로 이미 배역이 끝났는데요. 어쨌든, 그건 나중에 하시고, 대사부터 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아유니 왕은 부들부들 떨며 입을 열었습니다. 참으로 힘겨워 보이네요. “걱정 마. 이제 너 대사 끝났어. 나중에 루피아가 내 심부름 하러 오면 그때 만나.” 네르 왕비께서는 사악하게 웃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방 구석으로 아유니 왕을 몰아 버리시고는, 그 위로 직접 준비해온 검은 천을 마구마구 두르셨습니다. 이런! 화려했던 방이 온통 어두침침하게 변해 버리고 말았네요. 네르 왕비는 씨-익 웃으시며 벽에 거울을 하나 걸고, 크게 쉼호흡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거울에 이마를 박으셨습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거울 중앙에 정확하게 금이 갔군요. 네르 왕비는 그 다음 동그랗게 중앙의 거울 조각을 떼어 내셨습니다. 그리고 말하셨지요. “거울아 나와랏!” 아아, 정말 간편하기 짝이없는 주문 아닌가요? 그녀가 부쉈던(…;) 거울 구멍 사이로 한 사람의 얼굴이 들이밀어 졌습니다. 싫은 표정이 역력한 짜증스런 얼굴이군요. 아아, 유리아덴 벽거울입니다. “키하하하하! 캬캬캬! 너, 너무 웃겨! 거, 거울…… 거울! 아하하! 하하하핫!” 네르 왕비, 그만 웃고 얘기 진행시켜 주세요. 네르 왕비는 한참을 신나게 웃었습니다. 유리아덴 거울님의 얼굴에 불쾌감이 서리네요. 무섭습니다. 네르 왕비는 배를 잡고 낄낄대다가 주머니에서 이동용 손거울 에리나 양을 꺼내십니다. 작게 변한 에리나 양께서 얼굴만 쏘옥 내밀고 계시네요. 안녕하세요, 에리나 양? 반가워요. “그다지 안녕하지 못해요… 왜 하필이면 이런 역이에요!” 글쎄요. 마틴 양께 여쭤 보세요. 그녀가 부쉈던(…;) 거울 구멍 사이로 한 사람의 얼굴이 들이밀어 졌습니다. 네르 왕비께서는 가까스로 웃음을 누르시고는 말씀하십니다. 아아, 동작 잊지 마세요. 네르 왕비는 손을 허공에 휘저으며 애써 낮은 목소리로 말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가 누구냐?” “…….” 유리아덴 거울님, 심통이 난 것일까요? 말은 안 합니다. 대사가 있는데… 이쪽은 아무리 말해봤자 소용없을 것 같습니다. 유리아덴 거울님께서 대답이 없자 네르 왕비께서는 다시 자지러지게 웃기 시작하십니다. 분위기 흐려지는군요… 아아, 안 되겠네요. “여자는 없고, 남자는 있… 아니아니, 여장남자가 있어요!” 에리나가 재빨리 유리아덴 거울님의 대사를 말합니다. 다행이에요. 이야기가 진행되겠네요. 네르 왕비님은 고개를 끄덕이십니다. 그렇군요. 이디스 백설공주님이 아무리 예쁘다고는 해도 여장남자 이상은 못 되시지요. 통탄할 노릇입니다. “그래? 누군데? 아, 이 장면 빨리 끝내고 싶다.” “이, 이디스 백설공주세요. 당신의 양녀이지요. …저도 마찬가지에요.” 에리나 손거울께서 말씀하십니다. 결국 유리아덴 거울님께서는 입도 뻥긋 안 하시네요. 대사 없이 지나가려는 모양입니다. 그런 유리아덴 거울님을 보며 네르 왕비께서는 또다시 웃기 시작하십니다. …독백은 저 웃음소리에 곁들여 보내 드리겠습니다. 분위기 좋군요. 네르 왕비의 웃음소리는 괴기에 가깝습니다. “캬캬캬캬! 키킥, 하하하하하~ 크쿠쿠쿠쿠!” ‘남장여자주제에 가장 예쁘단 말이지? 좋아, 혼쭐을 내주마! 다시는 그런 건방진 생각을 못 하게 해 주겠다!’ …라고 독백해야 하지만, 네르 왕비께서는 이 대사를 읽어줄 의향이 전혀 없으신 모양입니다. 자, 다음 장면으로 넘어 가지요. 이쪽은 이미 통제불능의 상황 같습니다. 말없는 유리아덴과 그런 그를 보며 죽어라 웃어 재끼는 네르 왕비, 구석에서 침울하게 머리 박고 계신 아유니 왕. 그들을 바라보며 에리나 손거울만이 식은땀을 줄줄 흘리십니다. …거기, 여기 문 잠가버려! * * * * * * * * * * * * * * * 어찌 됐든, 이리하야 심술궂은 ‘새어머니’를 맞게 된 이디스 백설공주님. 공주님의 고생길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군요. 참으로 험난한 가시밭길입니다. “…넌 왜 여기있나.” “왜긴 왜야~ 네 새어머니니까 그렇지! 히야, 과연 어울리기는 하는구나. 세이보다는 덜 예쁘지만, 어쨌든.” 왕비 네르, 신기하다는 듯이 이디스 백설공주님의 이모저모를 뜯어 보십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남편인(…아유니 왕?) 세이카루스의 자랑을 빼놓지 않으십니다. 이디스 백설공주님은 약간 심기가 불편하기는 하셨지만 꾹 참으셨습니다. 왜냐구요? 그래야 스토리가 진행되기 때문이죠. 이디스 백설공주님은 현명하게도 이 역할을 빨리 끝낼 수 있는 방법이 빨리빨리 장면전개가 되는 방법밖에는 없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기특도 해라~ “이 왕궁 구석구석을 이 걸레로 깨끗하게 닦고, 닦고, 또 닦아. 거울도 깨끗하게 닦고 말이야.” 우선 왕비 네르는 일차적인 것부터 시키셨습니다. 심기가 불편하신 듯, 이디스 백설공주님, 눈썹을 치켜 올리십니다. 하지만 네르 왕비가 끄덕할 리가 있나요. 그냥 생긋이 웃어 주십니다. 아, 안 돼요. 거기서 웃으시면 안 된다고요. “싫다.” “엥?” 이렇게 나올 줄은 모르셨던 네르 왕비님. 조금은 벙찐 모습이십니다. 그러나 곧 페이스를 되찾으시고는 말씀하십니다. “분명, 대본에는 ‘네, 하고 대답한 뒤 걸레 가지고 뒤뜰로 가서 욕을 바가지로 한다’고 되어 있는데?” 물론, 거기서는 약간 무리가 있을 법하지만 그래도 어쩝니까? 대본이 그러한데 말이에요. 네르 왕비님의 말에 이디스 백설공주님은 그냥 빤히 쳐다봐 주십니다. 네르 왕비님은 머리를 긁적대시다가 말씀하십니다. “…아무나 시켜~” “그러지.” 죽이 척척 맞는 커플입니다. 하여간 네르 왕비는 그날 이후 계속해서 이디스 백설공주님을 괴롭히셨고(?), 이디스 백설공주님은 슬펐습니다(???). 그래서 성에서 도망치기로 하셨지요. 이디스 백설공주님은 눈물을 뿌리며(…) 성에서 도망치셨습니다. 허공에 떠오른 달을 보고 이디스 공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텔레포트.” 네, 그렇습니다. 이디스 백설공주님은 귀찮으셨던 겁니다. …여하튼 그래서, 이디스 백설공주님은 난장이의 집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난장이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무지무지하게 큰 침대들 일곱개가 주르륵- 놓여 있습니다. 졸리셨던 모양인지, 이디스 백설공주님은 그 중 하나를 선택해 그 속으로 꾸무럭거리며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잠이 드셨죠. 대기하고 있던 일곱 명이 한꺼번에 주르륵 몰려오셨습니다. 방 한 쪽에, 화면에 비추지 않도록 죽어라 노력하며 처박혀 있었던 게 힘들었던 모양이신지 연신 팔다리어깨를 외치며 주무럭거리십니다. 불쌍한 세이카루스 난장이님, 제일 밑에 깔리셨던 모양이군요. 아로데 난장이는 세이카루스 난장이님 바로 위에 있었던 주제에 쪼르르 제일 먼저 이디스 백설공주님께 달려가 눈을 반짝이십니다. 힘들지도 않은 모양입니다. “…오호! 과연~” 뭐가 ‘과연’이라는 걸까요. 알 길이 없지만, 이디스 백설공주님의 이마에 핏줄이 하나 솟아오른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일곱 난장이들, 상당히… 귀여운 모습입니다♡ 머리 위에 올려쓴 난장이모자, 하나같이 초록색 조끼에 꽤나 후줄근한 옷차림들이지만, 아아, 너무 귀엽습니다.(디즈니의 백설공주에 나오는 난장이의 복장을 참조하십시오) 아로데 난장이는 이상하게 색기를 흘리는군요. 희한한 일입니다. 카에리드, 이데카른, 트로에 난장이는 침대 위에 누운 이디스 백설공주님을 보시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하십니다. “…감히, 우리 루피아를…!!” 오오, 그렇군요! 비록 이 극에서는 아니지만 루피아라는 여동생을 빼앗아간 ‘괘씸한 놈’이 바로 이 이디스 백설공주님이신 겁니다! 오빠된 입장에서 당연히 곱게 보일 리가 없지요. 또한 그녀(?)의 본직을 떠올리며 분노하는 바르에든과 에드윈드가 있지요. 다섯 명의 불타는 시선과 한 명의 흥미로운 시선, 그리고 외면한 채 바깥만 쳐다보는 사이에서 이디스 백설공주님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몸을 일으키셨습니다. “……씻을 물 내놔.” “후… 후후후훗. 큭큭, 자, 잘 어울리시는군요. 키키킥!” 아로데 난장이님, 이디스 공주님을 어찌 아시는 걸까요?[갸웃] 상당히 이상한 일입니다아. 아로데 난장이님의 말에 이디스 공주님, 그의 뒤통수에 주먹을 곱게 날려 주신 뒤 일어나십니다. 스스로 준비할 모양입니다.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아로데 난장이님, 그대로 킬킬대며 배를 잡고 바닥을 구르십니다. “…지금은, 이대로 넘기지만- 본편에서 만나면! 으드득.” “시끄럽다. 만나려면 멀었다고 들었어.” 흐음, 더 이상 얘기가 진행되면 스토리 유출이 될 수도 있겠군요. 그건 곤란합니다. 카에리드 난장이가 이를 부드득 갈며 말씀하시자 이디스 공주님께서 차갑게 대꾸해주십니다. 이때, 세이카루스 난장이께서 등장하시어 이디스 공주님 앞에 서십니다. 그는 가볍게 웃으시며 손을 내미셨습니다. “저번 죄담회 때 만나고 처음 뵙는군요. 오랜만입니다.” “…그렇군.” 세이카루스 난장이께서는 피식 웃으셨습니다. 그리고는 함께 방을 나서시며 말씀하십니다. “고생이… 심하시군요.” 네에. 그렇습니다. 이디스 공주님, 찌푸려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십니다…. * * * * * * * * * * * * * * * 그럭저럭, 이디스 공주님과 일곱 난장이는 행복한(???) 생활을 보내셨습니다. 네에, 만날 이디스 공주님께 깨지는 생활이 행복하다면 행복한 거죠. 적어도 미인(…)의 손에 깨지잖아요? “흐야아압!” “…늦다.” 이디스 공주님, 곡괭이(무기가 지급되지 않았다고 합니다)를 들고 휘두르는 카에리드, 에드윈드 난장이의 위로 가볍게 뛰어올라 뒤통수를 가볍게 차 주십니다. 이제 만성이 되신 모양입니다. 구경하고 있던 아로데 난장이께서는 박수를 칩니다. 세이카루스 난장이는 우아하게 독서를 하고 계시는군요. 빨리 스토리 진행이 되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모양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곧 마녀가 올 테니까요. 예정대로, 사과를 파는 마녀로 변장한 루피아가 난장이들의 집 앞에 서 계십니다. 그러나 난장이의 집은 그야말로 ‘난장판’! ?아아, 이게 어디를 봐서 ‘집’입니까. 지붕도 없고, 부서진 벽의 잔해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평화로워 보이는 곳이라고는 세이카루스 난장이께서 독서를 하시고 아로데 난장이께서 구경하시는 곳 뿐입니다. 루피아 마녀는 시선을 모을 필요성을 느끼셨습니다. “후읍~ …-사과 사세요오오오오오오오오오!!!!” 네에, 엄청난 성량!! 단번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모입니다. 그녀는 대충 근처에서 따온 사과 하나를 옷에 문질러 닦은 뒤 이디스 공주님께 내미셨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사과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바로, 이디스 백설공주님의 옷차림!! ?때문이었습니다. 이건 영락없는 여자가 아닙니까아아. 루피아 마녀는 충격에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조금 쑥스러우신가요, 이디스 공주님? 얼른 사과를 짚어 한 입 베어 뭅니다. 그리고는 루피아 마녀의 팔목을 끌어 당기십니다. 에? 에? 하는 사이, 루피아 마녀는 오빠들과 감격적인 해후도 나누지 못한 채(오빠들은 이미 다 기절하셨다고 합니다) 숲 어딘가로 끌려 가십니다. 어어? 어디 가세요! 대사 남았어요오! 이디스 공주님은 결국 숲 깊숙이까지 들어오셨습니다. 루피아 마녀의 손목을 잡은 채 말이에요. 드디어 멈춰서자, 루피아 마녀님… 결국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고 마십니다. “아하하하하! 하하하하핫, 키킥, 하하하하하~” “…웃지 마.” 이디스 공주님, 심기가 불편하신 걸까요? 왠지 얼굴이 빠알개 보이는 건 대체 왜일까요. 룰루루~ “…하… 하하하. 킥킥… 자. 이제 여기 누우세요. 킥킥… 아, 배아파라.” “…왜?” “왜긴 왜에요. 빨리 끝내야죠. 계속 이짓 할 생각이세요? 얼른얼른 해야 빨리 지나간다고요~” 이디스 공주님, 동감이신 모양입니다. 우후훗~ 루피아 마녀님,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같이 왕자(!!)를 기다려 주기로 하신 듯합니다. 왕자가 누군지 참 궁금하기도 했고요. 아직 배우(?)들에게는 누가 어떤 역할인지 다 전해지지 않은 듯 하네요. 뭐, 좋아요. 아무렇게나 누워있던 이디스 공주님은 정녕 아무 것도 모르고 계신 듯 합니다아. 므흐흐흐, 잠든 공주님을 깨우는 건 왕자님의 키! 스! 라는 걸 왜 모르시고 계시는지? 갑자기 너무 즐거워집니다. 기다리고 계시던 때가 왔습니다![두둥] 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왕자님이 등장하실 때가 된 겁니다아. 숲에 갑자기 커다란 그늘이 졌습니다. 구구구구구궁- 하는 떨림과 함께 숲 저편에서 붉은 드래곤이 나타났습니다! 악룡의 등장인 걸까요? 아닙니다. ‘왕자님’의 등장입니다. “홀홀홀홀홀홀~ 여기 내 새 부인이 될 사람이 있다고 하던데에~” “다 늙어서 무슨 주책이에요, 로드님!! 이거, 이거 안 놔요? 젠장, 네르 누나한테 데려다 준다며~ 근데 내가 왜 여기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건데에!!” 페리 백마(?)님과 로드 왕자님의 등장이십니다. 화려한 등장에 루피아 마녀, 벙찐 표정이십니다. 이디스 공주님은 무지하게 심기가 불편하신 모양이군요. 하긴, 나라도 싫겠어요. 페리 백마는 네르 왕비님께 가는 줄 알고 따라 온 모양이네요. “…이디스 님, …저 사람하고……?” “…끔찍한 소리.” “그쵸?” “이제 그만 가는 게 낫겠군.” 루피아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나 로드 왕자님은 자박자박 그들의 곁에 다가오셨습니다. 명색이 로드!! 아니겠어요. 이디스 공주님은 루피아 마녀님의 손목을 붙잡고 얼굴을 찌푸리셨습니다. 그 모습을 본 로드님의 눈이 심상찮게 반짝였습니다! 로드는 눈을 반짝이며 달려와 그들의 앞에서 소리치셨습니다. “미소녀, 미소녀라니! 오오오, 그림이 되는 구나! 자, 포즈를 잡아 보아라~ 미소녀는 언제 어느 때나 갚어치가 있는 법! 거기다 기막힌 미소녀(?) 둘이면 더 말할 것도 없지. 베리 큐티 걸(참고로, 이디스 공주님을 말하는 거래요)과 창백한 병색 미소녀(…마녀의 로브가 그렇게 보였나봐요)라니~” ……로드 왕자의 취미는 변함이 없으십니다. 루피아 마녀와 이디스 공주, 때려 치기로 결심한 마당에 뭐가 더 필요할까요. 서로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본 두 명은 동시에 입꼬리를 올려 웃으셨습니다. 그리고, 루피아 마녀는 로드의 안면에 주먹을 메다 꽂으시고 이디스 공주는 그 뒤 마력탄을 날리시는군요. 호흡이 척척! 과연 베스트 커플입니다. 다른 장면으로 잠시 넘어가볼까요? 숲에서 평화롭게 살던 숲의 요정, 요정 세키라. 갑작스런 드래곤의 등장에 너무 놀라 벌떡 일어났다가 난장이 하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게 바로… 누구긴 누구에요, 아로데 난장이지요. “가, 감사합니다. 도와주셔서… 으응?” “뭐어얼~ 우리 사이에. 키킥! 요정 복장도 잘 어울리는 걸? 정말 작군.” …아로데 난장이, 대사를 해 주세요. 대사를! 세키라 요정, 순간 당황한 듯 하더니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십니다. 그리고 생긋 웃으시며 말씀하시는군요. “고마워요….” 아. 깜찍하군요. 아로데 난장이는 히죽 웃으시며 세키라 요정을 어깨 위에 올려 놓으십니다. 이미 볼장 다 봤다는 태도로군요. 이런이런, 같은 숲에 살면서 어떻게 한 번도 못 만났던 거냐고 묻지는 마세요. 세상이 다~ 그렇고 그런 거 아니겠어요? 따지면 곤란해요. 독서를 하고 계시던 세이카루스 난장이께서는 이제 슬슬 부인(?)을 데리러 가야 할 때라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 오래 떨어뜨려 놓은 게 아닌가 싶었거든요. 몸이 근질근질해 진 네르 왕비께서 언제 어떤 사고를 치실 지 모르잖아요. 게다가 말이에요, 이번 세이카루스 난장이의 역할은……. “텔레포트!” 두고 보면 아십니다. 왕궁에 도착한 세이카루스 난장이,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십니다. 그리고는 곧 유리아덴 거울 앞에서 배를 잡고 웃고 계시는 네르 왕비를 부르셨습니다. “어? 세이! …아, 이게 아니지. 넌 누구냐. …누군지는 알지만, 일단.” 네르 왕비, 그 와중에 대사 하겠다고 저러십니다. 세이카루스 난장이, 유리아덴 거울의 띠꺼운 눈빛에 괜히 불편해지십니다. 그리고는 얼른 대사 끝내고 이딴 극 때려 치워야 겠다는 생각을 하시지요. “가죠. 이제 끝낼 때가 다 되었습니다.” “에에, 벌써? 쳇. 나름대로 재밌었는데.” “…대본에는 ‘세이카루스가 꼬시면 냉큼 일어나 같이 간다’고 되어 있습니다. 제 역할은 왕비를 꼬시는 역할이라는 걸 잊으셨습니까?” “그야 안 잊었지. 그치만 ‘좀 놀다 가도 된다’고 괄호 안에 적혀있는 거 안 보여?” “저는 더 안 놀고 싶습니다.” “야? 야! 싫어, 더 놀다 가자니깐~ 야아!!” ……세이카루스 난장이. 삐지셨군요. 네르 왕비가 자신 없는 새 너무 재미있게 놀아서 심통이 나신 모양입니다. 후후훗- 어쨌든, 이러저러하게 막을 내리게 되는 군요. 아아, 안타까워라. 재미있으셨습니까, 여러분? 비록 좀… 난잡하기는 했지만 이상 연합극 ‘백설공주’는 막을 내리겠습니다. 끝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에에, 결국 끝까지 대사 한 마디 없으신 몇몇 분께는 상당한 벌을 드리기로 약속드리지요. 예를 들어 감봉이라든지 하는 것 말예요. 그럼, 안녕히 계시길~ =========================== 신혼일기 안 읽으신 분들은, 부분부분 이해가 안 가실 수도;; 있겠군요. 하하핫. 갑자기 놀고 싶어져서.. 말이에요. 이제 다음 주면 고등학생이 되는데...-ㅅ- 하하하하. 아. <목걸이 실종사건>(2)가 부분 수정되었습니다. 에.. 역시 다음으로 넘기자니 좀 부자연스럽기도 하고, 이디스 문제로 넘어가야 할 것 같아서요. 그거 양해해 주시구요~;; 메일은 donghee425@hanmail.net!! 리플 꼭 달아 주시구요. 즐독하세요^^ 제 목: 공녀(貢女) : 제22화 [진정한 악녀를 만나다!](1) #. 제22화 [진정한 악녀를 만나다!] * * * * * * * * * * * * * * *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나라는 애는, 언제나 제멋대로에다 약아빠졌었다. 내 멋대로, 멋대로, 멋대로. 하고 싶은 걸 다 해야 직성이 풀렸고, 궁금한 것은 무엇이든 알아야 했다. 못할 이유도 없었고,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건 그 대가라고 생각했다. 내가 제멋대로인 결과, 대가. ======================================루피아의 자서전================== 이른 아침이었지만, 여전히 흐린 회색빛 하늘만이 펼쳐져 있었다. 루피아는 그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침대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 곳에 온 뒤로 제대로 잠들어 본 적이 없었긴 하지만, 이번은 좀 달랐다. 뭔가가 명치 부근에 걸린 것 같았다. 그렇지만 체한 느낌과는 많이 달랐다-당연할지 모르지만 어쨌든-. 입 안이 꺼끌꺼끌했다. ‘이상해. 나 정말 어디 이상해진 거 아냐? 기분이 이상해….’ 도망치듯 달려 방에 들어왔지만-어떻게 돌아갔는지는 알 수 없다. 그새 귀소본능이라도 생긴 걸까- 잠이 들 수는 없었다. 선잠이라도 들 수 없게 그녀를 계속 괴롭히는 건, -그건. ‘제길, 제길. 아아, 망할. 제발 더 떠올리지 마, 이 바보야. 그 얼굴, 그 표정이 계속 떠오르는 건 단순히 희한한 것을 봐서 그런 거야. 다른 건 없어. 그래, 없고말고. 네 기억력이 좋아서야-그래, 좋은 거야-. 다른 사람이라면 절대 보지 못했을 신기한 걸 봐서 좀 심하다싶게 각인된 거야. 그것뿐야.’ 하지만, 가슴 속이 울렁거리는 이상한 느낌은 설명할 수 없었다. 어쩐지- 이제까지 그녀가 생각해 왔던 마왕 이디스와는 좀 다른 이미지였다. 그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잠깐 스쳐지나갔던 ‘감정’의 잔재(殘滓). 감정? 감정? 그런 게 그에게도 있나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보았던 건 분명-. 아아, 이럴 때만은, 그녀 자신에게 그런 것 따위를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저주했다. 왜 쓸데없는 것만 잡아내고, 기억해버리는 걸까. 그리고 그것을 보았을 때의 자신의 표정 역시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뭔가가, 펑! 하고 폭발해버린 것만 같이 정신이 쏙 빠져 버렸다. 그때부터 계속 이 모양이다. 아무리 못 볼 걸 봤다고 해도 이게 뭐야. 루피아는 입술을 당겨 물었다. 알 게 뭐야. 좋게, 좋게.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가슴 속 깊이 숨을 들이마셔 내쉬었다. “몰라, 난!” * * * * * * * * * * * * * * * 루피아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두 모여 있었다. 몇 번 보지 못한 ‘에크’라는 마족과 그 옆에 서서 헤실헤실 바보 같은 웃음을 흘리고 있는-적어도 좋지 못한 상태로 변한 게 틀림없는- 다니엘라, 그 옆을 꼭 지키고 서 있는 꼬마 시종 크렐. 그녀를 보는 크렐의 눈이 잠시 차갑게 얼었지만 그는 눈을 내리깜으로써 능숙하게 눈빛을 숨겼다. 로이드윈과 아로데, 유리아덴도 있었다. 루피아는 자연스럽게 세키라와 에리나, 아유니가 있는 곳으로 발을 향했다. 그녀는 일부러 세 마족이 있는 곳에서 시선을 끊었다. 이디스의 존재감 따위야, 이 방에 들어선 순간부터 무시할 수 없는 게 아니었던가. 굳이 확인할 필요 없다고 그녀는 자신에게 말했다. “루피아!” “어- 어어?” 세키라는 한숨을 쉬었다. 넋을 멍하니 빼놓고 있더라니, 안 듣고 있을 줄 알았다. “어차피 못 들었을 게 확실하니까 한 번 더 말해줄게. 이번에는 잘 들어.” 그녀의 친구는 오늘도 잠을 못 잔 듯싶었다. 모른 체 하고는 있지만, 이제는 더 보아주기도 힘들었다. 저렇게 눈 밑이 시꺼먼데 에리나와 그녀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짐작은 하고 있었다. 아니, 예전부터 알았었지만 요새 들어서야 실감을 했다는 편이 더 옳았다. 확실히, 그녀들의 친구는 무엇이든 혼자 속으로만 삭이는 타입이다. 도무지 고민거리를 말해주질 않으니, 그녀가 자신들에게 신경을 써주는 만큼 돌려줄 수가 없는 것이다. ‘어쩌면, 이게 내게 편하니까 그런 걸지도 모르지.’ “이번에 가는 곳은 ‘라샤린’이라는 성주의 성이야. 이름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성주는 여자야. 아직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서열이 높은 축에 속하는 여자 마족을 보게 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다니엘라의 일 때문에 정신이 없었고, 이제까지 만난 마족들은 그녀가 ‘공녀’라는 걸 깨닫게 하기보다는 떠올리지 않게 해주는 편이었다. 노마족 3인방이 특히나. “어이~ 빨리 안 와?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올라 와!” 아로데가 외쳤다. 세키라는 퍼뜩 놀라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아니 네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각오를 다지듯 입술을 앙다물었다. 이디스는 루피아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같은 공간에 발을 들여놓은 뒤 한 번도, 그녀는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심지어 안을 둘러볼 때조차도 그의 방향으로는 눈길 한 번 던지지 않았다. 하지만 의식하고 있다. 그녀의 신경이 그에게로 쏠려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의식적으로 그를 보지 않고 있다는 말은, 보지 않고도 그의 존재를 알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아무리 그래도- 포기할 생각은 없다.’ 왜? 모른다. 이유 따위는 알고 싶지도 않고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단순한, 그저 단순한 끌림이고 느낌이며 감정이었다. 그는 겨우 잡은, ‘인형’으로서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던져버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 * * * * * * * * * * * * * * 속이 뒤집어질 것 같이 울렁거린다. 아무 것도 먹지 않은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만약 뭣이라도 먹었으면 몽땅 게워내 버릴 뻔 했으니까 말이다. 그녀는 에리나의 어깨를 짚고 간신히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있었다. 몇 번 받았던 느낌이지만, 이번은 전보다 강도가 더 셌다. “난 아무렇지도 않아.” 에리나도 얼떨떨한 느낌인 것 같았다.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키느라 정신이 없던 루피아가 작은 목소리로 대꾸해주었다. “계약을 한 효과인가 보지.” 세키라는 하얗게 질려서는 입가를 틀어막고 있었다. 아유니 역시 말하지는 않지만 힘들어 보이는 표정이었다. 루피아는 아유니의 작은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보다 못해 가까이 다가가서 등을 토닥여주었다. 흠칫, 아유니의 몸이 긴장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쯧쯧, 얼마나 긴장해 있었으면.’ 저번에 봤던, 그 호들갑스런 모습은 이미 루피아의 뇌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마왕성의 숲 근처에서 봤던 이상한 모습도, 말도 다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아유니의 눈썹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이번에는 저번보다 거리가 거의 두 배야. 당연히 너희들에게는 힘들었을 거다. 넌 어떠냐? 지금 남 걱정할 때가 아니잖아.” 로이드윈이 끼어들며 루피아를 자신에게로 가까이 끌어당겼다. 뭔가 이상한 표정으로 루피아를 보고 있던 아유니가 깨이듯 퍼뜩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루피아는 로이드윈을 밀어내며 아유니를 보았다. 이상하다, 이 사람은. 언제나 하는 생각이긴 하지만, 이 사람은 어딘가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저번에 봤던 이미지하고는 여-엉 다르다. ‘알 수가 없어…….’ 그녀는 고개를 들며 이디스와 눈이 마주쳐버렸다. 바보처럼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재빨리 눈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팔이 그의 손에 탁, 하고 채였다. “뭐, 뭐예요?!” 루피아는 손을 빼내려고 당겼다. 하지만 이디스는 그녀의 손을 놔주지 않았다. 그제야 루피아는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소리치려고 그랬다. 그러려고 했는데- 루피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힘이 스물 스물 빠지는 것 같다. 그의 붉은 눈과 마주치는 순간, 힘이 쭉 빠져 버렸다. 그는 그대로 그녀를 이끌고 걸었다. 루피아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한 마디 뱉을 수 있었다. “이거 놔! 나도 발 있어요!” “이제 좀, 이쪽을 볼 마음이 생겼나?” “뭐…?” 이디스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루피아가 멍청하게 되묻자 그는 더 강하게 말했다. “이제 이쪽을 볼 마음이 생겼느냐고 물었다.” 한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알고 있었던 거다, 그녀가 의도적으로 그를 보지 않으려 했다는 걸. 하지만, 하지만 그래서 뭐?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거야. 그녀는 그를 올려다 노려보며 말했다. “그럴 리가 없죠. 가능하면 평생 보고 싶지 않아요.” 그래, 이래야 했다. 이거다. 어째서 가슴 한 구석이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쏘는 듯한 어조로 말하면서 루피아는 안심했다. 들떴던 기분이 한순간에 진정되었다. “내가 없는 존재로 느껴지나? 없는 것처럼 보이나?” 이디스는 불길할 정도로 조용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그럴 리가 없죠. 없는 것처럼 느끼려고 해도 안 될 정도로.” 이 말은 진짜였다. 어떻게 그를 ‘없는’ 것처럼 느낄 수 있겠는가. 오히려 그 반대였다. ‘없는’이라고? 말도 안 된다.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나.” 움칫! 소름이 돋았다. 새빨간, 새빨간 눈동자가 숨을 턱, 막히게 만들었다. 그의 몸에 흐르는 위압감이 한꺼번에 그녀에게 달려드는 느낌이었다. 덜덜 떨리려고 하는 손을 그녀는 꽉 쥐었다. “마왕이시죠. 마계의 왕.” 간신히, 메이는 목에서 간신히 떨리지 않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상대를 꼽으라면 그녀는 단연 이디스를 뽑을 것이다. “그…… 그게 뭐 어쨌다는 거죠?”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턱을 잡아 올렸다. 수치심과 함께-…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화악,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그를 뒤로 밀어냈다. ‘말도 안 돼! 이건,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그녀는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그리고 그와 거리를 만든 상태에서 그를 노려봤다. 나는! “나는 공녀고, 한낱 제물이고, 위대한 당신께 바쳐진 ‘것’에 불과하죠. 그에 비해 당신은 마계의 왕이고, 거리낄 게 없어요. 그렇죠? 하지만, 그걸 새삼 내게 가르쳐서 뭘 어쩌겠다는 건가요?!” 나는 당신이 싫어. 그래, 싫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는 마왕이니까. 자신은 공녀니까. 이상한 강박관념이 그녀를 초조하게 조여 왔다. 안 돼, 안 돼, 안 돼! “그렇게나 자신의 지위를 내게 가르쳐주고 싶은가요? 걱정하지 마시죠. 그렇게 강조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으니까!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녀는 도망치듯 그에게서 벗어났다. 폭포수처럼 쏟아 부은 그녀의 말을 듣던 이디스는 그녀를 잡지 않았다. 루피아는 이디스에게서 벗어나 달리면서 숨이 더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이게 아냐. 아냐. 이게 아니란 말이야. 뭔가 잘못돼가고 있어.’ 마음을 조여 오는 초조함.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아니다. 정말,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끼겠는데, 그게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알고 싶어.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제부터 몸 어딘가가 고장나버린 것 같았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녀는 발을 멈추고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았다. 갑자기 추워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럴 리가 없지만, 그럴 리 없을 테지만 추워지는 느낌이었다. 이디스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붉은, 새빨간 붉은색 눈동자. 결국 그녀는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입술이 덜덜 떨렸다. 정말 추운 것 마냥, 아니 정말 추워서,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떨었다. “힘들어… 오빠…….” * * * * * * * * * * * * * * * 세 마족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로이드윈이 코끝에 걸쳐진 은테안경을 밀어 올리며 말했다. “주군은 지금 완전 어린애나 마찬가지인 상태야. 우리 의도대로 성공하기는 한 모양이지만-.” 다음 말은 아로데가 이었다. 유리아덴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만 있었다. “이게 당연해. 처음부터 아예 성장을 하지 못했던 부분이니까. 감정표현에 미숙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야.” 이건 뭐,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원래부터 외곬수적인 기색이 비쳐보이던 이디스를 생각해볼 때, 잘못되면 완전 모든 게 끝나는 방향으로 수틀릴 가능성도 있다. 아로데는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여기서는 우리가 나설 방도가 없는 것 같군.” 아쉽지만 가만히 놔두는 것이 최상의 방도인 듯싶었다. 로이드윈이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아로데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이쪽 혈통은 왜 이렇게 성격이 복잡한지. 전 군주부터 시작해서 주군에, 딜렌까지.” 카디스는 이해할 수 없는 쪽이었다. 그는 언제나 냉정했지만, ‘카마프’라는 ‘끝을 함께 한 인간’이 온 뒤부터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보는 이가 웃음이 나올 정도로 행복해 보이는 웃음을 언제나 짓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 뒤에 선 이디스의 얼굴이 더더욱 차가워 보였다. 그들은 지켜봤다. 이디스가 태어나고, 마황비가 죽고, 카마프가 오고, 딜렌이 태어나고… 결국 두 사람이 죽고, 둘만 남게 될 때까지-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지켜보기만 했다. 공통점이라면, 모두 외곬수적인 성격이 강한 점이랄까. 무엇 하나에 집착하는 기질은 혈통처럼 전해졌다. 이제껏 이디스에게 ‘집착할 만한 것’이란 존재하지 않았지만-. “루피아도 강하게 나간다고 순순히 굴복할 만한 성격이 아니야. 설사 죽더라도-그럴 일은 없겠지만- 자존심을 지키려 들겠지. 실리적인 인간이지만, 그렇다고 귀족적인 기질이 없지는 않아. 오히려 누구보다 세지.” “고집도 세.” 로이드윈의 말에 유리아덴이 덧붙였다. 그들의 입에서 짧은 웃음을 흘러 나왔다. “대대로 마왕은 모두가 그랬지. ‘인형’처럼 ‘감정’이란 존재하지 않아. 그래서 더 냉정하고 합리적인 선택을 더욱 수월하게 할 수가 이었다고 하지.” “어쩌면, 그딴 방에 집어넣는 것이 전통이 된 이유가 더 완벽하고 강한 마왕을 만들어내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셋은 서로 마주보며 피식 웃었다. ================================================================= ...정말 오랜만의 복귀♡[부담스러운 하트~;] 그에 비해 굉장히 짧은 한 편입니다. 하지만, 오랜만에 쓰려니 정말 손에 안 붙는군요. 이제부터는 수정판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진도(??)를 나가는 건데=_=; 제목 정해놓고 한참동안 끙끙댔다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지 전혀 감이 안 잡혀서 말예요. 이제 슬슬 시험 후유증에서 벗어나야겠습니다아.; 이번 시험 완전 망쳐버렸어요~ㅜㅁㅠ 메일은 donghee425@hanmail.net으로 주시고요, 리플 많이 달아 주세요^^ 즐독하세요! 제 목: 공녀(貢女) : 제22화 [진정한 악녀를 만나다!](2) #. 제22화 [진정한 악녀를 만나다!] * * * * * * * * * * * * * * * “왜 이런 곳에서 울고 있나요?” 루피아는 흠칫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놀라 번쩍 뜨여진 보랏빛 눈동자에는 생긋 웃는 여자의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다. 그녀는 얼른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벌떡 일어났다. ‘이 여자는 누구야? …윽! 아, 젠장! 나 아까 도대체 왜 그랬대? 미친 거 아냐! 아악. 루피아, 너 정말 미친 거 아니니!’ 그제야 자신이 무얼 했는가에 대한 자각이 들기 시작하자, 루피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의 이상한 반응도 정말 이상하고 싫었고,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일에 과민반응을 보이는 마왕도 이해할 수 없었다. 생각해보니, 정말 이상했다. 왜 그렇게 숨넘어갈 것처럼 느껴졌을까? 그때는 정말 절박하게, 누가 뒤에서 쫓아오는 것처럼 긴장됐지만- 지금 생각하고 보니 별 일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만한 일 정도는 넘어가도 되는 거 아냐? 왜 그렇게 과민반응인 거냐구!’ “쿡쿡! 정말 재미있는 분이시네요.” 어? 루피아는 그제야 눈앞에 서 있는 여자의 존재를 떠올렸다. 정말, 오늘 원맨쇼라는 원맨쇼는 혼자 다 하는구나! 루피아가 무슨 말이라도 하기 위해 입을 열려는 직전, 눈앞의 그녀가 쿡쿡 웃으며 말했다. “어머머- 맞다! 오늘 군주님께서 오신다고 그랬지! 내 정신 좀 봐. 그럼… 당신이 바로 그 소문의 공녀(貢女)?”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너무나 발랄하게 여자가 말하자 루피아는 몸을 움찔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여자는 방방 뛰며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그녀의 볼을 꾹 눌러보고, 잡아당겨도 보고, 눈을 빤히 들여다보기도 하는 등의 행동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무…… 슨 짓입니까?” 일단 같은 공녀, 아니, 인간이 아니라는 판단이 든 루피아의 말투는 사무적이었다. 여자는 그게 굉장히 아쉽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말로 하지는 않았다. 이 여자 뭐야?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차마 대들 수 있는 입장이 아닌 루피아는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여자의 입술이 서서히 상향곡선을 그렸다. 그리고 루피아를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시선을 피하기도 뭣하고 그래서, 그녀는 같이 빤히 바라봐 주었다. 그리고 그제야 그녀는 여자를 자세히 살필 여유가 생겼다. 일단…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녀가 꼽는 ‘마족 제1의 공통점’은 모두 ‘미인’이라는 것인데 말이다. 하물며 시장의 아저씨도 멋지고 잘생긴 판에-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신분이 높아 보이는 여자라면 말 다 했다. 차분하게 흘러내린 깊은 푸른색 머리카락, 생기로 반짝이는 조금은 탁한 와인빛깔 눈동자. 적당히 그을린 갈색 피부와 무슨 동물의 것인지 모를 가죽과 질겨 보이는 재질로 이루어진 활발한 의상이 활발한 이미지를 심어 주었다. 노출이 상당한 의상도 그렇지만, 자신 있게 웃는 얼굴이 아주 아름답고 자신감 있어 보였다. ‘예쁘다.’ 그런 그녀의 생각을 읽은 것일까. 여자는 생긋, 밝은 미소를 얼굴 가득 띠웠다. 순간 루피아는 핫, 하고 제정신을 차렸다. “아아, 시간이 있음 실컷 놀아주는 건데. 안타까워.” ‘놀아 준다’고? 루피아가 그 진의(眞意)를 파악하지 못해 눈을 깜박거리고 있는데 여자가 너무나 끈적끈적하게 그녀의 볼을 쓰다듬어 왔다. “히익!” “어머? 왜 그렇게 과민반응이야? 그런데 너 피부 정말 좋다. 어떻게 관리하니? 응?” 온몸에 소름이 파바박! 돋았다. 본능적으로 몸을 사리며 움츠리는 그녀를 향해 아예 팔을 어깨에 걸쳐오며 생긋, 웃는 여자에게 루피아는 위험을 느꼈다. “아, 아, 아무런… 것도.” 그런 그녀의 생각을 읽은 것일까. 여자는 생긋, 밝은 미소를 얼굴 가득 띠웠다. 순간 루피아는 핫, 하고 제정신을 차렸다. “아아, 시간이 있음 실컷 놀아주는 건데. 안타까워.” ‘놀아 준다’고? 루피아가 그 진의(眞意)를 파악하지 못해 눈을 깜박거리고 있는데 여자가 너무나 끈적끈적하게 그녀의 볼을 쓰다듬어 왔다. “히익!” “어머? 왜 그렇게 과민반응이야? 그런데 너 피부 정말 좋다. 어떻게 관리하니? 응?” 온몸에 소름이 파바박! 돋았다. 본능적으로 몸을 사리며 움츠리는 그녀를 향해 아예 팔을 어깨에 걸쳐오며 생긋, 웃는 여자에게 루피아는 위험을 느꼈다. “아, 아, 아무런… 것도.” ‘난 이런 타입에 약해! 뭐야, 이 여자! 레즈비언이야?’ 루피아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최대한 돌렸다. 차라리 다니엘라처럼 비아냥거리며 시비를 걸어오는 게 훨씬 상대하기가 편하다. 이런 식으로 엉겨 붙으면 정말 응수하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루피아는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을 모색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 상태고, 상대의 정체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저쪽이 마족, 이쪽이 공녀, 라는 건 알겠는데, 그 외의 상황은 전혀 아는 게 없는, 그런 상황. 상황은 더욱 절망적으로 느껴졌고, 여자는 더더욱 그녀에게 달라붙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덮치려는 것같이 보이자 루피아의 몸이 점점 더 얼어갔다. 그러나 죽으란 법은 없는 모양이다. “너 여기서 뭐하냐? 둘이서 껴안고….” 갑자기 나타난 로이드윈의 말에 여자는 겨우 루피아의 목에 둘렀던 팔을 풀었다. 어? 하고 의외라는 듯이 눈을 크게 뜬 여자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튀어나왔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오빠? 로이드윈 더러? 그, 그럼 이 여자가 저 녀석의 여동생이란 말이야?!’ 로이드윈은 콧등에 얹어 쓴 은테안경을 위로 밀어 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여자의 그 말이 그다지 반갑지 않은 듯 보였다. “라샤린. 오랜만이군.” “그래요. 연락이 왔었지만, 깜박하고 있었어요. 잠시 외출한 사이 오실 줄은… 마중을 나가지 못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생긋. 그녀는 아주 상큼하게 웃었다. 루피아는 왠지 그 웃음이 로이드윈의 그것과 닮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미소가 닮은 남매… 랄까. 뭔가 꿍꿍이가 있는 듯한 웃음. 로이드윈이 그녀의 미소를 보며 다시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뒤에서 얼빠진 채 그들 둘을 바라보고 있는 루피아에게 말했다. “뭐해? 챙겨서 들어가야지. 이쪽 지방은 날씨가 추운 편이야. 빨리 실내로 들어가지 않으면 네 약한 몸에는 병이 들고 말 걸.” “아앗! 맞아, 그러네요. 깜박하고 있었어요. 피부 촉감이 너무 좋아서. 그럼 라샤린은 먼저 들어가 점심 준비를 해 놓을게요, 오라버니.” “…오라버니 소리는 듣기 거북하군.” 노골적으로 ‘싫다’고, 온몸으로 말하는 듯한 로이드윈의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라샤린’이라는 여자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그를 대했다. 상대적으로 로이드윈이 악당, 라샤린은 마치 천사처럼 비춰지는 그런 상황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라샤린이 명랑한 웃음을 지으며 성 내부로 발걸음을 옮기자, 로이드윈은 그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에 덩달아 루피아도 라샤린의 뒷모습을 허망하게 쳐다봤다. 잠시 뒤, 로이드윈이 기분이 나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기분이 나쁘군, 저 애를 상대하는 건.” “동생이 아니에요?” 루피아의 질문에 로이드윈의 얼굴에는 꽤나 다양한 답이 나타났다. ‘정말 싫어’, ‘말도 안 되는 소리’, ‘생각만 해도 징그러운 사실이야’ 등등. 가족애가 상당히-아니 굉장히 많이- 두터운 루피아로서는 그런 그의 반응이 실상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가족이라면, 그것도 동생이라면,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거지? “…생각하고 싶지 않은 애다. 기분이 나빠- 저 애를 상대하고 있노라면.” 왜? 라고 물으려다 루피아는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침묵하고 있으면 다 말해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은 적중했다. “분명, 같은 배에서 태어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같이 자라지는 않았으니 공감대를 형성하거나, 친분을 쌓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또 그게 대부분 마계에서의 남매들 실태이기도 하고. 제길, 내 입으로 남매라고 하려니 기분이 또 더러워지는군.” 그 여자를 굉장히 싫어하는 모양이다. “그래도 피는 어쩔 수 없는지, 나와 너무도 닮아서- 아아, 저렇게 보여도 속은 시꺼먼, 나와 비슷한 타입이라고나 할까, 저 애는.” 한 마디로 겉과 속이 다르다는 얘기다. 루피아는 아까 그 여자의 모습과 행동을 곰곰이 되새겨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만한 인물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로이드윈은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를 보며 짐짓 진지한 얼굴로 충고했다. “조심해야 할 거다. 애매한 상태인 건 알지만 말이야. 이대로 가다가는 흔들릴지도 모르거든. 후훗- 이제 너 하기 나름이야.” “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뭐 그런 말이지.” 이 말을 하고 로이드윈은 훌쩍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루피아는 알아듣지 못할 말을 늘어놓고 사라지려는 로이드윈의 뒤를 쫓아가려 발을 놀리면서 다시 그의 말뜻을 곱씹었다. ‘뭐야? 대체 무슨 말이야? 저 여자가 뭘 어쨌는데!’ * * * * * * * * * * * * * * * ‘이게 아닌데- 마음대로 되질 않는군.’ 이디스는 인상을 쓰며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자신이 자신을 제어할 수 없으리라고는 생각해보지도 못했었다. 그는 언제나 자기 절제에 뛰어났고, 무엇이든 수월하게 처리했다. 그런데…. ‘뭔가 울컥 솟아오르면 나도 모르게 움직이고 있다.’ 자신을 도저히 제어할 수가 없었다. 그는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 뭔가 특별히 한 것도 아닌데 굉장히 피곤한 기분이었다. 화를 내던 루피아의 얼굴을 떠올리자 이상한 욱신거림과 동시에 답답함, 그리고 화가 치솟았다. 그는 쾅 하고 세게 테이블을 내리쳤다. “제길….” 그는 알았다. 분명, 자신의 감정을 명확히 알았다. 마치 짜릿한 전류가 온몸을 훑고 지나가듯 순간이었지만 그는 그의 아버지를 통해 감정을 알게 되었고, 자신의 상태가 어떻다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다 잘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님을 그는 이제 알 수가 있었다. ‘깨닫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음을 말이다. 그건 단지 시작, 아니 준비과정에 불과할 뿐이고 이제부터 그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의 그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리가 없었다. 그는 다시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뭐 때문에 그렇게 한숨을 쉬시는지, 군주시여.” 사락, 옷자락이 끌리는 소리가 귓가에 자그맣게 울렸다. 그는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문가에 시선을 던졌다. 푸른 머리카락의 활동적인 인상의 미녀가 문가에 서 있었다. 그녀는 하늘거리는 연한 하늘빛 옷자락을 양손으로 살포시 잡아들어 보이며 곱게 고개를 숙였다. 마치 나비처럼, 우아하고도 아름다운 몸짓이었다. “마계와 어둠, 그를 다스리는 나의 군주여, 그대에게 영원한 어둠의 안식이 따르기를.” 약간 변형(變形)된 의례적인 인사말이 그녀의 붉은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아름답기로 따지자면 루피아 역시 뒤지지 않지만-오히려 아주 뛰어나지만- 루피아와는 다른 아름다움을 가진 그녀의 몸짓과 행동, 언행은 무척 아름다운 것이었다. 활동적인 외모에 비해 하는 양은 얌전한 요조숙녀의 그것이었다. “라샤린.” 이 이름이 맞던가. 르샤린? 로쟈르던가. 그는 잠시 생각해봤지만 아마도 제일 먼저의 것이 가장 맞는 것 같았다. 과연 맞는지 라샤린은 기쁜 듯한 웃음을 띠우며 말했다. “하찮은 저 같은 것의 이름을 기억해주시다니 황송할 따름입니다.” “아아… 됐다. 무슨 일이지?” 그는 무척 귀찮은 심정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라샤린, 그의 기억 속에 그녀는 이름마저도 명확하지 않은, 로이드윈과 같은 피를 지녔다는 것 외에는 특이사항이 없는 평범한 마계의 여자일 뿐이었다. “별 것 아닙니다. 저의 ‘라샤린’ 성에 오신 것을 환영하는 뜻을 밝히러 왔을 뿐입니다, 군주님. 미처 마중을 나가지 못해 죄송합니다.” 라샤린은 생긋 화려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이디스는 그녀의 미소를 쳐다보며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루피아와 다른 여자들의 차이는?’ 무엇 때문에 그는 하필이면 루피아에게 ‘호감’을 느끼게 됐던 것일까. 맨 처음 그의 감정의 문을 두드렸던 그녀는- 다른, 이를테면 여기 서 있는 이 ‘마계 여자’와 무엇이 다른 것일까. 뭔가 특별한 것이라도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던 그는 딜렌이 남긴 마지막 말을 상기했다. 하지만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래, 만약 그렇다고 해도-. “뭔가 생각할 게 있으신 모양이로군요. 제가 방해가 되는 모양이니, 저는 이만 물러나지요. 하지만 뭔가 필요하시거나- 불편한 점이 있으시면 거리낌 없이 저를 불러주세요. 부디 평안히 쉬시길 바랍니다, 나의 군주여.” 라샤린은 다시 우아한 몸짓으로 절을 하며 인사를 했다. 그리고 천천히 뒤로 몸을 옮겨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그녀가 나가자 이디스는 로이드윈이 그녀를 탐탁찮게, 아니 아주 경멸한다는 것을 떠올렸다.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게다. ‘…뭔가 특별한 게 있는 거다, 루피아에게는-.’ 그래. 그럴 것이다. 그는 그게 뭔지 궁금했다. 뭐 때문에, 어떤 힘으로, 그녀는 그의 맘에 쉽게 들어와 감정의 문을 열었을까? 특별히 한 것도 없다. 그저 그녀를 지켜보며 그 혼자 ‘호감’을 느낀 게 다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벌써 그의 안에서 특별해져 버렸다. 깨닫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다 잘 될 것 같았던 것도, 어제의 그 순간뿐이다. 정작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것을 오늘 일로 그는 그것을 절절하게 깨달았다. * * * * * * * * * * * * * * * “흐응… 더 멋있어졌는데? 어쩐지 전에 만났던 때하고는 좀 다른 느낌이네.” 복도를 걸어가는 라샤린의 입술이 상향곡선을 그렸다.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그녀는 우뚝 멈춰서 뒤를 돌아보았다. 오랜만에 만난 ‘나의 군주’는 더욱 성숙해져 있었고, 여전히 인형처럼 차가운 무표정이었다. 여전히 냉담한 태도와 말투, 눈빛이었지만 뭔가 달라져있음을 그녀는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이래봬도 그녀는 ‘그’ 로이드윈의 친여동생인 것이다. 피는 속일 수 없다는 말이 있듯이, 남을 꿰뚫어보는 눈이라면 그녀도 뒤지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마안(魔眼)은 나눌 수 없었지만 지략과 포커페이스는 로이드윈에 버금갈 만큼 뛰어났다. 그녀는 잠시간의 외출 후 만난, ‘귀여운 아가씨’를 떠올렸다. 오랜만에 맘에 드는 여자를 만났다. ‘가지고 놀기 딱 일 것 같은 아가씨야. 아아, 오라버니도 그 애가 마음에 들은 것 같은데.’ 뺨을 쓰다듬을 때 하얗게 질려가던 그 얼굴하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다양한 표정까지. 그녀는 어느새 자신의 방 앞에 도착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며 라샤린은 다시 쿡쿡 웃었다. 방 안의 정경은 무척 아기자기했다. 그녀의 외모에 어울리는 확 트인 디자인의 시원스런 그 방에는 여러 개의 새장이 있었다. 노란 색, 붉은 색, 하얀 색… 다양한 색의 새들이 맑은 소리를 토해내며 예쁜 화음을 그려냈다. 라샤린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로이드윈- 남매이지만 남보다 더 먼 남자. 그녀의 입가에 차가운 비소(誹笑)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미소는 천천히 더 진해져갔다. ‘노려볼 만한 여지가 있겠어. 좋아, 좋아. 시간은… 많지. 기대하세요, 나의 군주여.’ 라샤린은 새장 안에서 울부짖고 있던 새하얀 새 한 마리를 꺼냈다.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 위에 새가 내려앉자 그대로 입을 맞춘 그녀는 새를 정성스레 쓰다듬으며 다정다감한 미소를 지었다. 새의 부드러운 깃털에 뺨을 부비며 애정을 표현한 그녀의 눈이 일순간 짐승의 노란 눈으로 돌변했다. 파삭! 와자작. 섬뜩한 소리를 내며 라샤린의 손에 잡혀있던 새의 연약한 몸이 부스러졌다. 새하얗던 깃털에 점차 붉은 색이 물들며 손가락을 적셔갔다. 뚝- 뚝. 붉은 핏물이 바닥을 적셨다. 그녀는 킥킥 웃으며 새를 던져버리고는 혀로 피를 살짝 핥았다. 노란색의 눈을 몇 번 깜박이자 감쪽같이 원래의 진홍색 눈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아아, 하고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어쩔 수 없단다. 네가 너무 마음에 들었거든-.” 그리고 그녀는 소리 높여 웃었다. 높은 음색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허공을 맑게 채워갔다. ===================================================== 음... 3일만인가요? 14일날 올렸었으니까.-_-; 요즘 턱이 무-척 이상합니다; 예전부터 삐그덕(?)거리기는 했지만 심각할 정도는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요즘에는 밥 먹을 때도 삐그덕거립니다;; 병원 가봤더니 약 먹어보고 안 되면 큰 병원 가서 검사해보래요.=_= 아아. 노는 날이 많아서 너무 행복해요♡ 메일은 donghee425@hanmail.net으로 보내주시고요. 리플 많이 달아주세요. 즐독하시고,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제 목: 공녀(貢女) : 제22화 [진정한 악녀를 만나다!](3) #. 제22화 [진정한 악녀를 만나다!] * * * * * * * * * * * * * * * “대체 어떤 건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가 없어.” 에리나는 미간을 모으고 눈앞에 놓인 새하얀 검을 노려봤다. 그 끔찍한 고통 이후, 가장 먼저 드러난 ‘변화’는 바로 체력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는 점이었다. 근력이나, 다른 자잘한 것들은 제쳐 두더라도 체력은 금방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좋아졌다. 문제는 그 외에 그 어떤 변화가 있는지, 그리고 그 ‘힘’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느낌인지 전혀 감이 안 잡힌다는 데에 있다. “이 검이 내게 준, 계약을 함으로써 얻은 힘이 아무리 크다 해도… 내가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면 전혀 소용이 없는 거잖아.” 물론, 유리아덴에게 물어볼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물어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유리아덴의 ‘한심하다’는 듯한 눈빛과 애매하게 툭- 던져진 말들뿐이었다. 그녀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유리아덴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혹시, 마나(Mana)를 사용하지 못하는 건가?” ‘설마, 그럴 리가’라고 써있는 듯한 눈빛에 에리나는 발끈했다. 물론, 그의 입장에서야 마나를 다루는 것이 너무나 일상화되어 있고 또 당연한 것일 테지만 그 어떤 마법적 재능도 가지고 있지 않은 에리나로서는 너무나 터무니없는 개념일 뿐이었다. 그것이 무언지조차 모를 정도로 지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마나(Mana)라고 하는 것의 정의(定意)따위야 아주 어릴 적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온 것이 아니었는가. ‘세상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모든 마법적 힘의 근원이 되는 것’… 하지만 이런 말로 그, 감조차 제대로 잡을 수 없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정말로 불가능에 가까웠다. 살면서,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또한,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접해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 뻔한- 그 마나라는 것! “……막막하군.”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한숨을 쉬며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유리아덴의 말에 에리나가 속으로 외쳤다. 보기 드물게도 그는 미간을 약간 모은 얼굴이었다.(이것조차 신기해해야 하다니!) “이 이상,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없다고 본다. 말로 하는 것보다야 직접 체험해보는 게 나을 것 같으니 네 친구에게 조언을 구하는 게 좋을 듯 하군.” 루피아가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에리나가 모를 리 없다. 세키라 역시 마법을 익히지는 않았지만 ‘현자의 가문’이라고 불리는 에스베크 가(家)의 장녀이니 마나 정도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니, 하다못해 그게 무엇인지 기본적인 개념만은 알고 있을 것이다. 에리나는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 마검(魔劍)은, 분명 이제 네 것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네가 사용할지는 순전히 네게 달렸다. 네가 사용하지 못한다면 그건 완전히 무용지물이 되어버릴 수도 있지. 마나를 깨닫기만 하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일 수 있을 것이다. 아마- 내 생각에는.” 말을 쏟아내던 유리아덴이 에리나의 손에 곱게 들려있는 검으로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네가 네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전에 어떻게든 될 것 같다만….” “……?” 유리아덴의 눈이 검에서 떨어져 그대로 에리나에게 향했다. 그 속뜻을 파악할 수 없는, 깊디깊은 붉은색 눈동자가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에 그대로 와 닿았다. 철렁, 하고 가슴이 내려앉았다. 이제, 이 곳에 온 지, 거의 두 달이 다되어가는 기간 동안 쭉 그를 봐 왔지만, 에리나는 아직도 이 ‘유리아덴’이라는 마족이 어떤 성격인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원래 불가능한 것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지나치게 말이 없고, 가끔씩 툭툭 말을 뱉지만 그것도 그때뿐이다. 유일하게 알아낸 거라고는, 이렇게 상대의 눈을 직접 보면서-… 아무 말도 안 한다는 거랄까. 그렇다. 마계 서열 4위의 존귀(尊貴)하신 이 마족께서는, 그런 취미가 있으셨던 것이다. 아무런 느낌도 없는 유리구슬 같은 붉은 눈으로 그녀의 눈을 빤히 쳐다보는데, 그건 에리나 입장에서는 도저히 편하게 느낄 수 없는 것이었다. 무안해져서 그녀가 먼저 시선을 돌릴 만 하면, 그때서야 유리아덴은 시선을 거둔다. 그 타이밍이 또 워낙 절묘해서, 이제까지 에리나는 그 점에 대해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사람이야.’ 또 한 번 빤히 쳐다보고는 그대로 말없이 나가버렸던 유리아덴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검을 집어 들었다. 요즘 들어, 혼자 가만히 있을 때면 자연스럽게 유리아덴의 생각이 떠오르거나 중간계의 가족들 생각이 났다. 검을 쥐고 만지작거리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다. 옛날부터 그토록 만지고 싶었던, 그러나 만질 수 있게 허락되지 않았던 것. ‘마계로 오게 된 건, 어쩌면… 더 잘 된 일일지도 몰라.’ 천벌 받을, 말 그대로 ‘안 될 생각’이겠지만,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진짜 그럴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가족들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분명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그녀를 아껴주었고, 그녀 역시 그 두 사람을 더없이 사랑했다. 하지만 가족을 사랑했다는 사실과 그녀의 인생은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그대로 중간계에 있었을 때의 미래 같은 건 너무나 뻔하다. 분명, 아무리 특별한 신분이고, 또 도도했었다고 해도 결국에는 남자에게 시집을 가서 평범한 귀부인으로 늙어죽겠지. 에리나는 그대로 문을 열고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일단은 먼저, 세키라에게 가서 마나에 대한 것부터 물어봐야겠다. * * * * * * * * * * * * * * * “음흉해.” 로이드윈은 복도를 힘차게 걸어 나가는 에리나의 뒷모습을 보며 작게 말했다. 그 말에, 그와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서 있던 유리아덴의 시선이 그에게 돌아갔다. 로이드윈의 얼굴에 씨익, 하고 약간은 능글맞은 미소가 떠오르자 유리아덴의 미간이 미미하지만 찌푸려졌다. “뭐야, 그 눈길은? 내 말이 틀리기라도 했다는 거야?” 유리아덴은 말이 없었다. 로이드윈은 예의 그 능글맞은 웃음을 지어보이며 그에게 다가가 팔에 어깨를 턱 하니 둘렀다. 그리고 다시 씩 웃었다. 유리아덴의 미간에 패인 주름이 조금 더 깊어졌다. “계약으로 발을 묶어놓은 다음, 키워서 잡아먹겠다는 거잖아, 지금.” “…….” “아아, 그야말로 ‘마족’다운 행동이에요, 유리아덴 군.” “……너한테, 그런 말을 들을 줄이야.” 미미하게 얼굴을 찌푸리며 말하는 유리아덴의 말에 로이드윈은 그저 싱글싱글 웃을 뿐이었다. 말이 없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자주 하는 친구지만, 그래도 잘 보면 아주 귀엽다.(…) 물론 그런 생각에 유리아덴은 동의하지 않는 모양이지만. “저 애한테 강해질 만한 가능성이 보여? 인간일 뿐인데.” “……글쎄.” “마검을 줬다지? 보아하니 마나도 제대로 느낄 줄 모르는 것 같던데 잘 다룰 수 있을 것 같아?” 유리아덴은 대답하지 않았다. 로이드윈은 굳이 대답을 바라고 물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두 번 묻는 수고는 하지 않았지만 에리나가 걸어간 복도를 쳐다보고 있는 유리아덴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마검(魔劍)이라는 건 종류에 따라 능력이나 위험도 등이 크게 다르다. 유리아덴이 그냥 ‘웬만한’ 것을 줬을 리도 없고, 주었다면 분명 ‘엄청난’ 것을 줬을 텐데- 그렇다면, 제대로 다루지 못할 경우 목숨마저 위험하다. 그걸 모를 리도 없고…. 유리아덴은 에리나가 사라진 곳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강해질 거다.” “……!” 그는 에리나의 초록색 눈동자를 떠올리며 확신했다. 그로서는 색다른, 자존심 강하고 긍지 높은 초록색의 곧은 눈동자. “저렇게 약한데?” “기회만 주어졌었더라면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었다. 지금도, 늦다고 보지는 않아.” 선명한 색채의 강한 초록색 눈동자 속에 담겨있는 열망. ‘강해지고 싶다’, 라는 생각을 그는 읽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말했던 것이고, 계약을 하자고 해 왔을 때 그녀답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지금은 아직 터무니없이 약하지만 곧,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그는 에리나가 강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마검을 얻은 건 시작에 불과하다. 보통 사람들은 ‘마검’이라는 것을 얻으면 모든 게 다 끝, 누구나 다 강해지는 줄 알고 있지만, 그건 아무런 근거 없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일시적으로는 힘을 가질 수 있겠지만 그 힘을 제어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면 검에 잡아먹히고 만다. 정신이 서서히 붕괴되고 스스로의 행동을 제어할 수 없게 되며, 육신은 마검의 꼭두각시가 되고 마는 것이다. 마검을 ‘사용’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 마검을 제압할 수 있을만한 정신력. 그리고 자아가 있는 검이라면, 아마 이제 얼마 가지 않아 스스로 제 주인을 시험할 게다. “흐응…….” 로이드윈은 무표정한 유리아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콧잔등 위의 안경을 밀어 올렸다. 재미있다고 해야 하나, 흥미롭다고 해야 하나. 유리아덴이 이렇게까지 말하면 안 믿을 수도 없었다. 아무런 근거 없이 저런 말을 할 마족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도 로이드윈 그 자신이 제일 잘 아니까. “그래서, 너 쟤 좋아해?” 괜히 심술이 생긴 로이드윈이 툭 내뱉었다. 유리아덴은 그의 그 말에 심각하게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잠시 뒤 말했다. “……너보다는.” “…….” * * * * * * * * * * * * * * * “라샤린… 그, 로이드윈의 동생…… 이라.” 어쩐지, 기묘한 느낌이 드는 예쁜 사람이었다. 게다가 상대하기도 가장 힘든 타입. ‘그’ 로이드윈의 친동생이라니 평범한 여자는 절대 아닐 것이다. 하긴 그거야, 이미 경험해 본 바 있지 않은가. 그리고 로이드윈이 마지막에 가면서 남긴 말도 마음에 걸렸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니? ‘무슨 소리야. 어떤 일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건지 가르쳐 줘야 해야 할 것 아냐.’ 하지만, 묘하게 마음에 걸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루피아는 찝찝함에 인상을 찌푸렸다. 걸리는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뭔가 변했어. 분명 크게 변했는데-…… 모르겠어.’ 오늘 이전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서 직접적으로 나서는 일이 없는 자였다. 간혹 화를 내거나 이해하지 못할 행동들을 하기는 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쩐지 모든 일에 무관심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분명, 그는 변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이리 와서 너도 설명 좀 해 봐. 난 더 이상 뭘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루피아는 퍼뜩 놀라 어? 하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녀 앞에는 세키라가 골치 아프다는 듯한 얼굴로 서 있었다. 아, 그래, 맞다. 루피아는 에리나가 찾아와서 ‘마나’에 관한 것을 가르쳐 달라고 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런 걸 말로 설명하라니… 직접 느껴봐야 해.” 세키라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에리나 역시 이해하지 못해 답답한 표정이었다. 마나라는 건 무형의 ‘어떤 것’이다. 평민들 중 어떤 이들은 그것이 존재하는 지조차 모르고 있는 게 보통이었다.(귀족들 중에 만약 그런 자가 있다면 그건 덜떨어진 거겠지만) “어떻게? 난 마법사 체질이 아니야. 그런 쪽으로는 전혀- 재능이 없다구. 나도 답답해.” 에리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확실히 문제이기는 했다. 루피아는 어색하게 웃어주며 에리나의 손에 들린 마검을 복잡한 심경으로 쳐다봤다. 저 검은, 지금은 에리나에게 더없이 필요한 것이겠지만, 후에 가서는 에리나의 발목을 붙잡을 족쇄가 될 것이다. 탈출할 루트가 뚫린다는 전제 하의 얘기이겠지만 말이다.(하지만 그래도 착잡한 건 어쩔 수 없다) “마나를 느끼는 건 각자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누구나 느낄 수는 있어. 마나를 ‘다루는’ 데에서 재능의 차이가 발생하는 거지, ‘느끼는’ 것에는 별반 차이가 없는 게 보통이거든. 느끼는 건 문제가 아니야. ‘어떻게 다루나’가 관건인 거지. 섬세하게 다룰 수 있게 되면 될 수록 마나에 대한 감도(感導) 또한 느는 거거든.” 세키라는 동감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세키라는 마나를 느낄 수는 있었지만 컨트롤할 능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아직까지 마법을 익히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만약 능력이 되었다면 그녀는 벌써 아버지에게 간단한 마법 한 두가지는 배워놓았을 것이다. “그건 단순한 정신력과 감각 문제지. 에리나는 내가 보기에 감각은 있을 것 같으니까, 일단 마나를 느껴보기만 하면 될 거야. 그걸 어떻게 느끼느냐 하는 건….” 결국 원점이다. 실컷 설명하던 루피아는 뺨을 긁적이며 머쓱하게 말했다. “직접 체험하는 게… 낫지 않을까?” “직접?” “아… 응. 그게 제일 나을 것 같아. 조-오금 위험한 방법이긴 하겠지만.” 세키라가 표정일 이상하게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조금이라니? 설마, 너, 네 마력을 직접 에리나에게 흘려보내려고?” “응. 컨트롤만 잘하면 별로 위험하지는 않을 거야.” “‘별로’가 아니잖아, 이건….” 루피아는 싱긋 웃으며 괜찮을 거야, 하고 말했다. 마력이 서로 반발하면 받을 충격이 엄청날 텐데,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는지. 하지만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세키라는 입을 벙긋거리다 다물었다. “자, 손 이리 내 봐.” 에리나는 세키라의 말에 약간 불안해졌지만 루피아가 시키는 대로 한쪽 손을 내밀었다. 루피아는 에리나의 손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건 4클래스 급의 마력. 많은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기준으로 보면-그리고 루피아의 나이를 생각해보면- 적은 것도 아니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4클래스를 이룬 것이, 무척이나 자랑스러웠지만-… 루피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곳에 오고 나서는 4클래스 정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지고 있었다. 실제로, 정말 별 것 아니었고 말이다. 이제껏 그녀가 가져왔던 기준-4클래스 정도면 괜찮은 수준이라는-같은 건 이곳에서는 전혀 통용되지 않으니까. ‘뭐, 그거라도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수 있으니 다행이지.’ 루피아는 그렇게 스스로를 위안하며 눈을 감고 손을 통해 자신의 마력을 내보냈다. 몸 안에 흐르던 것이 손끝을 통해 찌릿, 하고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눈을 떠 에리나의 표정을 확인했다. 뭔가 느낀 것이 있는지 눈을 크게 뜬, 충격적인 표정을 하고 있었다. 더불어 그녀의 손에도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이만하면 됐다 싶어서, 루피아는 마력을 끊었다. “……어때?” “…….” “…에리나?” 뭐가 잘못된 건가? 루피아는 에리나의 이마를 짚어보며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별다른 이상은 없어 보였다. “아까 손으로… ‘뭔가’가 들어오기는 했는데.” “그게 맞을 거야.” “뭔가 따끔하고… 저릿하고.” “내 마력이라 그래. 지금도 이 주위에 존재하는 마나와는 달리 ‘나’라는 속성이 개입해있어서 원래 네게 있던 마력과는 반발이 있을 수밖에 없거든.” 된 것 같다. 에리나는 어딘가 멍해 보였다. 어떤 것인지 안다고만 해서 그것을 다루거나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닌 만큼, 여전히 힘들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에리나라면, 일단 시작만 하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갈게!” 느닷없이 에리나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루피아는 싱글싱글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에리나가 잘 돼야 할 텐데.” 세키라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루피아는 괜찮을 거다, 라고 말하며 세키라의 어깨를 툭 쳐 주었다. 그러자 세키라는 그것도 그렇다며 피식 웃었다. ================================================ ...좀, 짧긴 하지만-_-; 아직 주말입니다. 비록 2시간밖에 남지 않았어두요.. 하핫. 남은 하루 행복하게 보내시고요, 즐독하세요.^^; 멜은 donghee425@hanmail.net으로 보내주세요. 제 목: 공녀(貢女) : 제22화 [진정한 악녀를 만나다!](4) #. 제22화 [진정한 악녀를 만나다!] * * * * * * * * * * * * * * * “몇 시간만이네요!” 루피아는 어색하게 굳은 표정으로 하하 웃었다. 아까 사냥꾼 차림새는 온데간데없고, 하늘하늘한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푸른 머리카락의 여자, ‘라샤린’이 그녀 앞에서 우아하게 웃고 있었다. ‘여자의 변신이 아무리 무죄라지만….’ 이 정도면 범죄다. 활동적인 매력이 물씬 풍겼던 그녀는 이제 우아함과 세련미를 풍기는 얌전한 여자가 되어 있었다. 몸짓 하나하나에 베어나는 우아함. 이것도 아름답지만, 루피아는 아까의 차림이 훨씬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귀엽게 웃으면 잡아먹고 싶어져요.” “…….” …차림이 달라도 속은 똑같다는 걸, 루피아는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깨달았다. “이 차림도 예쁘시네요.” “흠? 이게 보통 때의 차림이에요. 음, 이름이?” “루피아요.” “그래, 루피아. 루피아를 만났을 때는 좀 특별한 때였던 거지요. 앉아요.” 라샤린은 생긋 호의적인 미소를 보내며 스윽- 하고 루피아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오싹, 하고 소림이 돋는다. 라샤린이 가리킨 의자에 앉으며 루피아는 긴장한 속을 달랬다. 이제껏 꽤나 많은 시간을 마계에서 보냈지만, 이렇게 모여 앉아서 ‘식사’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저절로 가장 상석에 앉아있는 이디스에게로 향했다. 그리고는 누가 볼 세라 재빨리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려버렸다. 라샤린이 이디스의 바로 옆 자리에 앉아서 그녀를 향해 생긋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나쁜 짓이라도 한 것처럼, 볼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러고 보니 군주님, 이번 서열대회에는 공녀들도 나간다고 하던데요? 그게 정말인가요?” 라샤린이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상체를 기대며 물었다. 그러자 자연히 이디스 앞으로 몸을 내민 것 같은 모양이 되었고, 가슴이 파인 드레스라 유혹적인 자세가 되었다. “사실이다.” “호오? 그럼, 저기 있는 루피아 양도요?” 루피아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그 말은, 상대가 될 턱이 없는데 나가봤자 소용없다는 거잖아! 이디스는 알 수 없는 얼굴로 잠시 라샤린을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안타깝군요. 뭐 도와줄 것이 있으면 좋겠는데…. 루피아, 뭔가 필요한 게 있거든 주저하지 말고 내게 말해요, 알았죠? 난 당신이 마음에 들었으니까.” 생긋 밝게 웃는 얼굴로 말하는 라샤린을 보며 루피아는 묘한 기분이 되었다. 로이드윈이 말하길, 조심하라고 그랬는데- 저렇게 말하는 것을 들으니 도저히 악감정이 생기지 않는다. 로이드윈은 라샤린을 보며 시종일관 기분 나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군주님.” 달콤한 미소를 흘리며 라샤린이 이디스를 부드럽게 불렀다. 루피아는 그 표정을 보며 갑자기 가슴이 싸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두근두근, 가슴이 불안하게 뛰었다. 여전히 이디스는 어딘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라샤린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잠시 후에 찾아뵈어도 될까요? 물론, 개인적으로.” 어쩐지 낮게 가르랑거리는 듯이 들리는 어조였다. 그리고 목소리 잔뜩 묻어나는 유혹적인 냄새. “그건 안…!” “일 때문이에요.” 로이드윈이 ‘안 된다’는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라샤린이 가로채어 말했다. 로이드윈은 그 말에 다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디스는 다시 수프로 시선을 돌리며 간단하게 말했다. “알았다.” 쿵! 다시 한 번, 싸한 느낌이 강해짐과 동시에 가슴 한 구석이 내려앉았다. 루피아는 생소한 감각에 놀라며 가슴께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심정으로 숟가락을 다시 들어올렸다. * * * * * * * * * * * * * * * “할 말이란?” 이디스는 간단하고 짧게 끝내기 위해 물었다. 그의 기억 속에 ‘라샤린’이라는 여자가 차지하고 있는 부분은 없었다. 간단히 스쳐 지나간, 얼굴을 기억할 필요 없는 ‘것’들 중 하나인 것이다. 그의 냉담하고 싸늘한 표정과 말투에도 불구하고 라샤린은 얼굴 가득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떼었다. “여전히…, 아름다우시군요.” 무슨? 이디시는 미간을 모았다. 할 말이 있다고 해 놓고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란 말인가. 하지만 그런 그의 기색에도 라샤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위험한 맹수에게서 나는… 그런 냄새가 나요.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도, 이런 느낌을 받았죠.” 스윽- 사락거리며 옷자락이 끌리는, 자극적인 소리가 울렸다. 그와 함께 라샤린의 몸이 움직여 이디스에게 조금 기대었다. 이디스의 미간이 더욱 모아졌다. 이 요녀(妖女)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지? “후훗-. 그리고… 그, 얼음 같은 눈빛도.” 라샤린은 입가에 색기 넘치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의 입술이 상향곡선을 그렸다 싶은 순간, 그녀는 한 발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목에 팔을 둘렀다. “아름다워요.” 이디스는 조금의 미동(微動)도 하지 않은 채 그런 그녀의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라샤린은 속으로 차가운 비소(非笑)를 흘렸다. 그리고 이디스의 긴 목에 입술을 갖다 대었다. ‘보기보다 쉽군. 이거야, 싱겁잖아. 역시… 여자 경험이 없는 거야.’ 어쩐지 맥이 풀린다고나 할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녀는 뒤로 팍 떠밀려졌다. “…역겹군.” “……!!” 느닷없는 그의 말에 라샤린이 눈을 크게 떴다. 가만히 있었기에 다 끝났다고, 이제 된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순간이라 그런지 더욱 더 놀랐다. “떨어져.” “……아… 군주님…?” 그녀를 떨쳐내고, 이디스는 그녀가 기댔던 옷자락을 툭툭 털었다. 속에서 뭔가 올라올 것만 같은 역겨움을 느꼈던 터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왜인지는 몰라도 기분이 나빴다. “확실히, 로이드윈이 그대를 멀리할 만 해. 기분 나쁜 여자로군, 너.” 라샤린은 금방 평정심을 회복하고 이디스가 하는 말을 차분히 들었다. ‘기분 나쁜’이라…. “다시는 이런 일, 없길 바라지.” 이디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냉정하게 돌아섰다. 라샤린은 호오, 하고 의외라는 듯 감탄했다. 한때 ‘피에 미쳤다’는 말까지 들었던 그인데, 아무런 일 없이 그녀를 내버려둔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에게 잘못 걸리면 그대로 비명횡사하기 십상이라는, 마왕성 전체에 떠돌았던-벌써 20년 전의 얘기이긴 하지만- 소문의 주인공이라는 게 믿겨지지가 않았다. ‘냉정하긴 하지만, 소문처럼 잔인하지는 않아. …이거야, -재미있는데?’ 라샤린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머물렀다. 그때, 그녀의 생각을 깨놓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무슨 짓을 꾸미는 거냐.” 익숙한 목소리. 라샤린은 뒤돌아보지 않고도 그 음성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궁금하시면, 생각을 읽어보시면 되잖아요, 오라버니?” “…너 따위의 거무튀튀한 속 같은 건 죽어도 들여다보고 싶지 않다.” 게다가 요즘엔 맑은 것들만 봐서, 라고 로이드윈이 작게 덧붙였다. 그 말을 들은 라샤린의 얼굴에 즐겁다는 듯한 표정이 걸렸다. “아아, 그 예쁜이?” “…예쁜이라니, …맞는 것 같긴 하지만, 네가 부르니 기분 좋지 않군.” 라샤린은 쿡쿡, 하고 잔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루피아’는 예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미의식(美意識)에 관한 한 그 어떤 종족보다 높은 안목을 지니고 있다는 마족-근거 없는 말이기는 하나, 일단은 그렇다고 알려져 있다-의 눈으로 보기에도 굉장히 아름다운 여자였다. 사실, 그녀는 외모보다는 성격이나 하는 짓이 더 마음에 들었다. 라샤린은 ‘아름다운 것’을 무척 좋아했다. 아름다운 것들을 수집하는 것은, 그녀의 취미 중 하나였다. 안타깝게도, 공녀(貢女)는 수집할 수가 없는 것이었지만. “아무리 네가 유혹해봐야 소용없다.” “…흐응? 과연 그럴까요….” 생긋. 라샤린이 밝게 웃었다. 그에 따라 로이드윈의 얼굴은 팍 일그러졌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당연히. 너 따위에 주군께서 넘어가시면, 내 바로 손목을 긋지.” “어머? 손목 따위 긋는다고 죽나요? 목이 뎅겅 해야지.” “……목을 자르라고? 내가 날?” “호? 그거 재미있겠는걸요.” “…그 따위 꼴사나운 짓은 안 할 거다.” “쿡! 아아, 당연히, 이지적이고 냉철하신 로이드윈 드 스켈로테 님께서 그럴 리가 없으실 테죠.” “비꼬는 거냐, 지금?” “그럴 리가요. 그나저나, 감히 여쭤 봐도 될까요? 그 ‘근거 없는’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건지? 제 유혹에 군주께서 넘어가지 않으시리라는 걸.” 로이드윈은 피식 코웃음을 쳤다. 정말 그 일에 관해서라면 목을 내걸어도 자신 있었다. 이디스가 살아온 날들을 모두, 곁에서 함께했기 때문에, 그에 관해서라면 그 자신보다 더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는 그였다. “주인이 있기 때문이다.” “……?” “이 이상은 못 말해. 너 같은, 속이 시꺼먼 것한테 말했다가는 내 혀가 잘릴지도 모르거든. 유리아덴이나 아로데한테.” “……흐응.” 무엇보다 말하기 싫었다. 저 여자 앞에서는 입 밖으로 꺼내기조차 싫은 말들인 것이다. “뭐- 대충 예상을 하기는 하지만-.” 라샤린이 활짝 미소 지었다. “그렇게 아까우시다면야, 어쩔 수 없지요.” 로이드윈은 기분 나쁜 기색을 얼굴 가득 드러내며 거칠게 방을 나가버렸다. 혼자 남겨진 라샤린은 여유만만하게 손까지 흔들어주며 작별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허전한, 기계적인 미소를 지은 채로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로이드윈. 나의 오라비….” 그와 처음 만났을 때가 눈앞에 선명히 떠올랐다. 그녀는 눈을 감고 천천히 그 순간을 떠올려 기억을 되감아보았다. 아아, 그래. 첫 만남은…. ‘그때부터. 처음부터 날 저런 눈으로 봤지. 킥킥! 한눈에 본질을 꿰뚫어본 거야.’ 그녀는 어머니와, 그는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된 그 날, 로이드윈은 그녀의 본질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꿰뚫어보았다. 아무런 문제도 없이 그녀의 어머니를 철저하게 속여가고 있었던 그녀가 처음으로 당황한 날이었다. ‘기분 나쁜 것’이라고 했던가? 그게 그의 오라비의 첫마디였다. 나름대로는 얼굴 모르는 오라버니에게 부푼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꿈이 와장창 깨져버리게 만드는 한 마디였다고나 할까. “킥킥! 아아, 삶은 이래서 즐거운 거야. 변하는 것이 있고, 변하지 않는 것이 있지.” 그녀는 이디스의 얼굴을 그리듯 허공에서 손을 움직였다. 마치 그가 앞에 있는 듯 매력적인, 그리고 유혹적인 미소를 지은 그녀는 말했다. “진심이 되어 버렸어. …내 것으로 만들겠다.” * * * * * * * * * * * * * * * ‘뭐지? 뭐지. 이 생소한 기분… 은.’ 왜 거기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던 것일까.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뛰었던 이유는 뭐였을까. 괜히 마왕에게 화가 난 것은 왜? 그런 질문들이 스스로에게 던져지고, 덮여지고, 다시 떠오르고, 묻어지기를 반복했다. 머릿속이 복잡해져 더 이상 앉아있을 수가 없을 지경이 되었을 때 루피아는 가느다란 실핏줄이 픽, 하고 끊어지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아아아악! 내가 왜 이런 걸로 고민해야 해!” 우아하게 걸어가는 라샤린과, 그 뒤를 뭔가 이상한 표정으로 걸어가는 마왕의 모습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고 그녀를 계속 괴롭혔다. 계속, 계속, 아무리 눈을 감아도 지워지지 않고 따라붙는 두 사람의 모습 때문에, 그녀는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여어, 루피아! 지금 시간 있어요?” “……!” 아까부터 그녀의 망막에 각인이라도 된 듯이 사라지지 않던 영상의 한 부분이 빼꼼히 문 뒤로 나타났다. 너무나 밝고 경쾌하게 말하는, 그러나 아까와는 달리 조금 ‘편한’ 어투에 루피아는 보랏빛 자수정 눈을 크게 떴다. “후후, 왜 그렇게 놀라고 그래? 지금 시간이 좀 남아서 그러는데, 같이 안 놀래?” …‘놀자’라. 대체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루피아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자니, 뭔가 의심스럽고 껄쩍지근(?)한 게 혀에 남았다. ‘게다가, 뭘 하고 놀아. 설마 쎄쎄쎄는 아닐 테고, 숨바꼭질? 술래잡기?’ “쿡! 뭘 생각하는지 얼굴에 다 써 있어. ‘뭐 하고 논다는 말이야’하고 생각하고 있었지?” 정곡을 찔렸다.(…) “쿡쿡! 하여튼 귀엽다니까. 자자, 일어나 봐. 내가 재미있는 데에 데려가 줄게.” 라샤린은 즐거워 못 참겠다는 듯이 말했다. 루피아는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면서도 찝찝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끌려가는 듯한 느낌도 들어서, 과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결국 루피아는 라샤린을 따라 시원하게 뚫린 복도를 걷게 되었다. 이곳에 와서는, 자신의 페이스를 잘 지키지 못하는 것 같은 서글픈(?) 느낌에, 루피아는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혼란스러운 기분까지 겹쳐, 그녀는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자아! 여기야!” 푸드득. 푸득. 루피아는 망연히 입을 벙하니 벌렸다. 새 날갯짓 소리와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 어떻게 된 건지 새하얀 방. 곳곳에 흘러내린 고운 실크와 빛의 오묘한 조화, 그리고 많은 새장과 그 안의 새들의 노랫소리가 어우러진 방 안의 풍경은, 절로 감탄이 나오게 했다. 그 안으로 척척 걸어 들어간 라샤린은 루피아의 손목을 끌어 방안으로 잡아끌었다. “여긴…?” “내 방이야. 어때, 귀엽지? 내 애완동물들이지. 다들 머리가 좋다구.” …새 머리가 좋아 봤자 얼마나 좋겠느냐마는, 루피아는 감탄을 흘리며 손가락을 새장 안으로 집어넣어 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새까지 키우는 거 보면, 정말 나쁜 사람은 아닌 거 같아.’ 동물 키우는 사람 중에 악인은 없다지 않은가? 그녀는 그런 낙관적인 생각을 하며 웃었다. 그래, 로이드윈이 너무 과민한 반응을 보인 것을 게다. 이후, 얼마나 바보 같은, 낙관적인 생각이었는지를 깨달은 루피아는 이 생각을 한 걸 죽도록 후회했다. 하지만 편하지 않았다. 아니, 편하길 바라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일 테지만, 자꾸 그, 마왕에게 보내던 유혹적인 눈빛과 모습이 떠올라서 심기가 불편해지고 만다. 그런 그녀에게 자꾸 구석에서 뭔가를 뒤지던 라샤린이 방긋, 해맑게(?) 웃는 모습으로 다가왔다. “루~ 피~ 아~♡” 간드러진 목소리에 온몸에 두드러기가 솟는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녀는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굉장히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뒤에는 뭘 숨기고 있는 거야? 바보처럼, 맹하니 따라오지 말아야 했을까? 바로 다음 순간 자신을 찔러죽일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는 이 마족을 따라오지 말아야 했을까? 내가 너무 바보 같았던 걸까.(후일, 바보 같았다는 것은 인정한다) 씨익- 라샤린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싸악- 하고 루피아의 얼굴에서도 핏기가 가신다. 그리고 라샤린이 쨘- 하면서 내놓은 ‘것’을 보고는 새하얗던 얼굴이 새파랗게 변해버렸다. 차라리 날 찔러! 하고 소리치고 싶을 정도로, ‘그것’은 아주 끔찍했다. 그녀의 안색이 수시로 변하는 것을 본 라샤린은 더더욱 은밀한 미소를 흘리며 루피아에게 다가갔다. 뒷걸음질치던 루피아의 뒤꿈치에 뭔가가 걸렸다. 아악, 하는 짧은 비명과 함께 엎어진 루피아는 생긋, 밝게 웃는 라샤린의 얼굴에 진저리를 쳤다. ‘예쁘다’고 생각한 얼굴이지만, 지금은 더없이 무섭기만 했다. 라샤린은 쓰러진 루피아의 위에 걸터앉아(?) 손에 든 것을 펼쳐보였다. “꼭 해 보고 싶었어. 처음 본 순간부터 이것만 생각했다구.” “제발, 참아주세요….”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절대 못 참지. 킥킥!” 어찌 들으면 굉장히 이상한 대화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둘 다 그런 것에는 하등 신경 쓰지 않았다. 라샤린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프릴과 레이스의 홍수에 묻힌 루피아! …를 꼭 보고 말 거야♡” ……아아. 그녀는 그런 취향이었다. 잠시 후, 루피아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옷 갈아입는 게 힘든 것인 줄은 알았지만… 이건 너무 훌렁거리고, 나풀거리고, 팔랑거려서(?) 더 힘들어! 체력소모가 장난이 아니야…!’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옆에서 힘이 넘치게 돌아다니고 있어서 그런지 더욱 힘이 안 났다. 목도 말랐고, 나른한 기분마저 들었다. 라샤린이 그런 그녀에게 찻잔을 내밀었다. “마실래요?” 그녀는 냉큼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건네받았다. 목이 마르고 힘들었기 때문에, 그리고 방안에 흐르는 공기 때문인지 굉장히 나른해져 있었다. 달콤한 액체가 목을 타고 흘러들었다. 혀끝에 도는 상큼한 맛도 마음에 들었다. “자, 들어봐요. 루피아….” “……?” “새의 지저귐은, 굉장히 맑고 아름답죠. 자장가로 그만이죠. 그래서 나도 이 많은 새들을 키우는 것인지도 몰라요….” 어찔한 감각이 나른함과 같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눈꺼풀이 굉장히, 무거운…? ‘맙소사! 나, 나라는 애는!’ 하지만 이미 늦었다. 머리는 깨달았어도, 이제 몸이 말을 들어주지 않는 것이다. 보랏빛 눈에 스쳐지나간 생각을 읽었는지 라샤린이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저 미소! 이제는 정말 소름이 돋았다. “혹시, 새가 얼마나 좋은 동물인지 알아요?” 라샤린은 스르륵- 무너져 내리는 루피아를 곱게 베개로 받쳐주며 새장에 가까이 다가갔다. “얘들은 말예요, 머리가 무척 나빠요. ‘새머리’라고들 하죠? 킥, 정말, 정말 머리가 나빠요.” 눈물이 찬 듯 흐릿해지는 시야와 멀어져가는 정신의 한 가닥을 붙잡은 채 간신히 이성을 유지하는 루피아의 귓가로, 점차 퍼지는 울림으로 라샤린의 말이 파고들었다. “그래서, …이렇게, 죽여도 모르죠.” 라샤린은 차갑게 언 눈으로 루피아를 내려다보며 짧게 킥킥거렸다. “알아? 어리석은 인간이여. 어리버리하고, 멍청한 인간이여.” 바보 같은 맹한 성격. 놀려먹기 쉽고 재미있지만, 그리고 꽤나 좋아하는 성격이지만. “진정한 악녀란,” 나는 악녀지. 아, 그래, 나는 나쁜 여자라니까. “웃으면서 비수를 꽂을 수 있어야 해.” 그녀는 휙 돌았다. 그녀의 ‘그림자’에게 손짓하며 그녀는 눈을 가늘게 하며 말했다. “첩 정도는 시켜주지!” ==================================================== ...은근히 라샤린을 좋아하는 네르♡입니다. 지금 루피아는, 한 마디로 '정신없는' 상황입니다. 이러저러, 여차저차한(??) 상황과 자신의 감정이 겹치고 겹쳐, 제대로 성질(?) 발휘를 못 하는 상태죠. 저렇게 당할 수밖에 없는 거에요=_=; 우리의 마왕군(?)을 사이에 둔 치정싸움, 정도 될까요...[...] 신혼일기가 늦어지지만, ....어떡해요.ㅠㅠ 연재가 늦어지는 점, 늘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변명을 하자면 밑도 끝도 없겠지만, ...저도 맘이 편하진 않아요~ㅜㅁㅠ 메일은 donghee425@hanmail.net으로 보내주세요.; 즐독하세요! 제 목: 공녀(貢女) : 제23화 ['함정'에 빠지다!](1) #. 제23화 [‘함정’에 빠지다!] * * * * * * * * * * * * * * * 마계에서 남매란, ‘남’보다 더 먼 존재. 라샤린과 로이드윈의 경우 역시 그랬다. 그 둘은 라샤린은 어머니, 로이드윈은 아버지에게서 각각 자라면서 다 자라 성체(成體)가 되고 나서야-다시 말해, 독립할 때가 되고 나서야-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 전까지는 아버지라는 존재가, 그리고 어머니라는 존재가 누구인지조차 몰랐다고.(라샤린과 로이드윈, 그 두 남매의 어머니는 ‘라샤린’ 성의 예전 주인으로, 그런대로 마계에서 강한 편이라고 이름난 여자라고 한다.) 마계의 서열대회가 개최되기 일주일 전……. ============================루피아의 자서전================= 세키라는 뭔가 부족한 느낌으로 책을 덮었다. 자신이 스스로에게 칭찬해줄 수 있을 정도로 열심히 공부하고 책을 읽은 결과, 이제 조금 난이도가 있는 책이라도 무난하게 읽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수준이 많이 오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쓸모’가 있을 정도는 아직 아니었다. ‘이런 책들 갖고는,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없어.’ 마계에 대한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녀들에게 유리한 점을 많이 찾아낼 수 있기는 하겠지만, 그것 가지고는 부족하다는 느낌을 그녀는 지울 수가 없었다. “뭐야? 또 책 읽어? 지겹지도 않냐, 넌.” 아로데가 그녀의 방에 들어서다 멈칫하며 말했다. 세키라는 얼른 일어나 책을 옆으로 치우며 말했다. “다 읽었어요.” 요 사이 그가 그녀를 찾아왔다가, 그녀가 책을 읽고 있는 중이라는 걸 알고는 그냥 가 버렸다는 얘기를 몇 번 들은 적이 있었다. “어디보자. 대체 뭘 읽어? …‘마계의 정치와 지도자에 대한 고찰’, ‘각 부족의 풍습’, ‘부족의 기원에 대하여’….” 점점 굳어가는 아로데의 표정을 보며 세키라는 어색한 웃음만 흘렸다. 왠지, 아로데와 이런 딱딱한 제목의 책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대로 아로데는 이런 책은 거의 읽지 않는 편이었다. 필요하다면 읽지만, 그는 이런 종류의 책보다는 살아있는 교육(…)을 선호하는 편이다. “알아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변명하듯 세키라가 말하자 아로데는 맞은편 의자에 몸을 턱- 걸치며 말했다. “이런 것보다는 로이드윈이 다루는 일이 더 유용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네? 하, 하지만 저한테는 그런 쪽의 루트가 없고….” 그런 것쯤은 세키라 역시 알고 있었다. 정보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그녀는 빠른 정보를 다룰 수 있다면 무력(武力)에 지지 않게 도움이 될 수 있으리란 사실 역시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하! 그거야 로이드윈한테 도와달라고 하면 되잖아.” “그, 그렇지만….” 너무나 쉽게 말하는 아로데에게, 세키라는 조금이지만 질려 버렸다. “네가 그가 얻는 정보를 나쁜 곳에 쓰려는 것이 아니라면, 그는 기꺼이 널 도와줄걸. 말하자면, 공유(共有)인 거지. 약간의, 대가는 필요하겠지만.” 그 ‘대가’가 문제였다. 현재 세키라의 입장에서는 로이드윈에게 뭔가 ‘줄’만한 것이 없었다. 에리나처럼 자신의 몸으로 계약을 제의할 배짱이나 용기도 없었을 뿐더러, 로이드윈 같은 남자가 저 같은 것을 필요하게 여길 것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 근심이 물들자 아로데는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그 대가라는 것도 네게 기대할 거라고 보기는 힘들다. 아마 나에게 요구할 거야. 흥, 그 녀석 수준에서 요구해봤자 내가 가지고 있는 수집품 중에 좀 희귀하다 싶은 것뿐일 걸? 나야, 현재 네 보호자인 입장이니 그 정도는 들어줘야 할 테고.” ‘뭐, 그 정도야.’라고 덧붙이는 아로데의 뒷말에 세키라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도대체 왜 그게 당연한 게 되는 건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세키라에게 아로데는 피식 웃어 보였다. “왜? 왜 그게 그렇게 당연하다는, 그런 얼굴인 거예요?” 아로데는 그녀의 그 질문이 의외라는 듯이 쳐다 보다 한 마디 툭 던졌다. “내 마음이지.” “……!” “내가 그러고 싶으니까 하는 건데, 그게 당연한 거지 그럼?” 말을 하던 아로데는 ‘아아!’하는 탄성과 함께 뭔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하더니 쿡 하고 웃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뭔지는 알 수 없으나, 마족에게 중요한 건 자기 감정이야.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지.” 자신의 감정에 너무나 충실하기 때문에, 그들을 사람들은 ‘악(惡)’이라 부르는 것이다. 사람들이 악마를 두려워하는 건, 그 ‘힘’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악마’가 그 자신 속의 ‘악’이라 불리는 마음을 끄집어내는 것 때문이기도 하다. 세키라는 어쩐지, 그렇게 말하며 웃는 아로데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마족은 마족이고, 인간은 인간이지. 변하지 않는 사실이야. 따라서 가치관도 다를 거고,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바라보는 시각도 다를 테지. 수명도, 살아가는 모습도, 환경도, 모두가 달라.” 뜨끔! 당연한 사실인데도 새삼스레 다가오는 그 말들은, 세키라의 가슴 한 구석을 따끔하게 찔러왔다. “인간은 가장 솔직하지 못해.” “…….” “어쩌면, 가장 반대 속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후, 사실은 가장 가까울 지도 모르지. 인간과 마족은.” 반드시 배척해야 할, 그들이 믿고 따르는 신과 반대되는 속성을 지닌 종족, 마족. 어려서부터 마족이란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조차 없는, 절대 악(絶對樂)이라고 배워왔다. 성서(聖書)에나 어디에나 마족이란 더없이 비열하고 사악한 존재로 나타나 있고, 그들이 저지른 만행은 그녀는 책에서 아주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하나같이 더럽고, 비열하고, 사악하고 잔인한 일들만 저질렀다고. ‘하지만- 그런 악마들을 불러낸 건 다름아닌 인간이 아닌가? 정말, 정말 악마들이 사악한 걸까-. 그들이 한 짓은 정말 잔인하고 사악한 짓일지 모르지만, 결국 그건 인간의 생각과 염원(念願)을 그들이 구체화 시킨 것밖에 되지 않는 게 아닐까.’ 이제까지 배워온 것은, 단순히 ‘교과서’적인 내용이었다. 어디에나 써 있든, 도덕적이고 올바른 이야기들. 하지만 그게 정말 ‘사실’일까? 이 마계에 와서 ‘공녀’라는 애매한 위치로 아슬아슬하게 서 있게 되면서 품게 된 의문이 세키라의 머릿속을 점차 점령해갔다. 굳게 믿어왔다. 그 책에 쓰인 대로 살아가는 게 가장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그게 그녀가 배운 것이었으며, 이제껏 그녀의 가치관의 기준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단 말이야…….’ 이제껏 삶을 살아오면서 모든 욕구를 참고 눌러왔던 세키라에게, 아로데는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너무나도 자유로워 보이는 그를 보고 있자면, 자신 역시 저렇게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용기 없고 바보 같기만 한 자신이 바뀔 수도 있을 것만 같은…… 그런 기분. * * * * * * * * * * * * * * * 똑. 또옥. 습기 차고 눅눅하며 축축한 공기가 피부를 통해 느껴졌다. 싸늘한 돌바닥의 냉기가 뺨을 타고 올라와 막 깨어나기 시작한 신경을 자극한다. 루피아는 몸을 움찔, 하고 슬쩍 움직여보았다. 좀 뻐근하고 손목 부근이 욱신거리는 것을 제외하면 이렇다 하게 망가진 곳은 없는 듯 느껴졌다. ‘이게 무슨 꼴이야. 젠장, 나라는 애는- 어떻게, 이렇게 바보 같을 수 있어.’ 의식을 차리자마자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회상의 장면들을 되새긴 루피아는 욕설을 나지막이 뇌까리며 뒤로 묶인 손목을 어떻게든 하기 위해 꼼지락거렸다. 정령 세이준을 부를까, 라는 생각을 해봤지만 역시 관두었다. 그다지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무(無) 마나 지역에서 마력을 움직이려고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바보 같은 짓이야.’ 아마도 결계를 쳐 놓은 듯 했다. 늘 느끼고 있던 마나가 사라졌다는 것쯤,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무리 정령과의 계약이라고 하지만 본인의 마력이 조금도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기에, 이 곳에서 정령을 불러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4클래스밖에 안 되지만, 당연히 마법도 사용이 불가능하다. 손목을 풀기 위해 힘을 꽉 주어봤지만 소용이 없자, 루피아는 힘을 탁, 풀며 등을 옆으로 기대었다. 하아, 하고 한숨이 절로 새어나왔다. 요즘은- 아아, 정말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마계에 와서 자신의 페이스가 흐트러지기는 했지만 요즘처럼 망가지지는 않았었다. 그, 축제의 밤 이후- 마왕을 볼 때마다 그녀는 그 자신의 페이스가 망가지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더불어 점점 크게 자리잡아가는 불안감과- 두근거림까지. 모든 것이 그녀를 흐트러뜨려 놓았다. “생각보다는 빨리 정신을 차리네.” 흠칫! 날카롭게 동굴의 습기 찬 공기를 울리는 하이소프라노의 목소리에 루피아는 몸을 긴장시켰다. 그리고 점차 드러나는 실루엣과 조금씩 선명해지는 음성에 그녀는 곧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알 수 있었다. “…라샤린.” 약까지 먹여 어딘지도 모르는-하지만 분명 좋은 곳은 아닐- 곳에 감금까지 시킨 여자에게 존칭을 붙여줄 정도로 루피아는 너그럽지 못했다. “어머, 화가 난 거야? 호호, 화 풀어. 어쩔 수 없었어. 바보처럼 너는 확실하게 행동하지 않고 있지만, 언제 적으로 돌변할지 모를 존재를 옆에 두고 사냥을 시작하는 건 분명 어리석은 짓일 테니.” “적? 사냥?” 라샤린의 모양 좋은 눈이 곱게 반달모양으로 휘었다. “그래. 분하지만 나보다 더 사냥감을 확실하게 낚아챌 수 있을, 그런 강력한 적을 말이야. 후훗, 비록, 그 ‘적’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상태이지만 말이야. 만약이란 언제든 대비해야 하는 것이니까.” 루피아는 마치 선문답 같은 그녀의 대답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 ‘적’이라는 말이 지칭하고 있는 상대는 분명 그녀 자신이 맞는 것 같기는 한데- ‘사냥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드러나게 지어보이자 라샤린은 다시 한 번 킥킥 웃으며 말했다. “역시 놀려먹는 재미가 쏠쏠해! 쿡, 루피아. 미안하지만- 대충 5일쯤 거기서 있어 줘. 먹을 건 갖다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말이야. 너 역시 이번 서열대회에 참석해야 하니- 5일 안에 끝내도록 할게.” “뭘, 끝내겠다는 말이야! 그리고 5일 안에 끝내겠다는 건 또 무슨 말이야! 거기서 서열 대회가 왜 나와?” “어? 몰랐던 거야? 이제 일주일 후면 열리잖아, 서열 대회. 대회장에 가서 준비하는 건 길어야 하루, 이틀이면 충분할 테니 아마 5일 정도는 이 성에 머물겠지. 정말 몰랐던 거야?” “몰랐어….” 멍하니 루피아는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 대회와 일정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듣지 못했던 것이다. 애초에 물어보지도 않았었다고 하면 할 말이 없을 테지만 말이다. 그녀의 그런 멍한 표정을 비웃듯, 라샤린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여기도 그다지 불편하지는 않을 거야…. 일단 같은 사냥감을 노리는 이상 넌 내게 있어 적이거든. 네가 얼마나 내 맘에 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아, 킥킥! 첩 정도라면 시켜 줄 아량은 있으니 말만 해.” 화악! 모욕적인 그녀의 언사에 루피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발개진 그녀의 뺨을 손톱이 기다란 손으로 슬슬 쓰다듬으며 라샤린은 히죽히죽 웃었다. 그리고 루피아는 그제야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사냥감이라는 게, 마왕이었어?!’ 묘한 충격과, 알 수 없는 가슴 저림. 그리고 분노. 대체, 대체 자신이 왜 마왕 때문에 이딴 일을 당해야 하고, 저딴 말을 들어야 하는가! 비록 다른 여자들에 비해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지닌 루피아이지만 그녀 역시 귀족가의 영애였다. 그런 입장으로 ‘첩’ 따위 운운하는 게 모욕적이지 않을 리 없는 것이다. 아니, 이건 귀족가의 영애이고 아니고를 떠나서도 절대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당신이 노리는 게…, ‘마왕 이디스’야?” ‘이디스’라는 이름이 그녀의 입에 올려지자마자 라샤린의 눈이 불편하게 반짝거렸다. 그리고 쫘악, 루피아의 뺨이 세게 돌아갔다. 주륵, 뜨거운 감각과 함께 따끔한 느낌, 피가 흘렀다. 라샤린은 불쾌하게 찡그려진 눈으로 느릿하게 말했다. “감히, 미천한 인간 주제에 누구 이름을 그 더러운 입에 담는가?!” 길게 길러진 라샤린의 손톱은 루피아의 뺨에 상처를 남겼다. 앗, 하고 라샤린도 그제야 제정신을 차린 듯 아차 하는 눈으로 루피아를 쳐다봤다. “건방지게 굴지 마라, 인간 여자여. 비록 네가 마음에 들긴 했다만, 그렇다고 그런 방자한 짓거리까지 눈감아 줄 수 있을 정도는 아니야. 내 남편으로 만들기로 한 이상, 그 분은 내게 있어 마왕 이상의 의미다.” 그리고 작게 덧붙였다. “이 손톱에는, 소량이나마 강한 독(毒)이 들어있는데… 뭐, 5일 정도야 버틸 수 있겠지.” “내가, 내가 어째서 이런 짓을 당해야 하는 거야! 뭐 때문에!!” 억울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자신이 이런 짓을 당해야 할 이유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조용히, 그러나 정확하게 이를 악물고 말하는 루피아의 말에 라샤린은 지그시 그녀를 바라보다 뒤로 결박당해 묶인 그녀의 배를 발로 세게 퍽, 차 버렸다. 커헉, 거칠게 숨을 삼키고, 루피아는 신음을 흘렸다. “인간이 솔직하지 못하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 너 역시, 평범한 인간과 다름없었군.” “그… 그게 무슨!” 라샤린은 싱긋, 짧게 웃음을 흘리고는 말했다. “너… 나의 군주를 좋아하잖아?” “……!!” “네 눈이 언제나 그를 쫓고 있다는 건 누구나 다 알아. 아니, 만약 알고 있는 게 나뿐이라 하더라도, 그건 명백한 사실이지. 아아, 너는 공녀고 그는 마왕이라는 둥의 그딴 변명을 하면 정말 죽여 버릴 테다. 그게 말도 안 된다는 핑계라는 건 이 상황이라면 그 누구나 알 테니까 말이야.” “아, 아니… 나는!” 아니다. 아니다!! “거짓말 하지 마. 이건 명백해. 쿡… 왜? 용서할 수 없나? 인정할 수 없나? 미워해야 할 대상을 좋아해버린 게?” “웃기지 마! 나는 그가 싫어!”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말도… 말도 안 돼…!! 필사적으로 그렇게 되뇌는 루피아에게 라샤린은 손톱으로 그녀의 가슴, 정확히는 심장 부분을 쿡 찔렀다. 그리고 속삭이듯 낮게 말했다. “솔직하게 말해 봐. 두근거리지? 그가 볼 때면- 눈을 맞출 수가 없어 곤란했을 거야. 그리고 내가 옆에 있을 때는 저리듯 아팠겠지? 아마- 이렇게.” 그녀의 손톱이 주욱- 옆으로 그어지자 옷감이 뜯기고 적은 양의 피가 흘러나와 주위를 가볍게 적셨다. 루피아는 충격을 받아 입술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이제 그만 인정하는 게 어때? 어차피, 없어지는 사실도 아니잖아? 이대로 입 다물고 얌전히만 있으면- 나는 네 비밀을 평생 지켜줄 용의도 있어. 5일. 5일만 얌전히 이곳에 있으라고.” 라샤린은 벌떡 일어나 승리감에 찬 얼굴로 루피아를 내려다보았다. 조금 더 가지고 놀고 싶었는데, 조금 안타까운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어차피 ‘사냥감’만 손에 넣으면 그 정도야 얼마든지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렇게 아쉬움을 달래고 그녀는 돌아섰다. ‘어차피… 조금 힘들겠지만 내 손에 들어올 테지. 내가 손에 넣지 못하는 건,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으니까.’ =============================================== 연휴♡ 행복하기만 한 네르입니다.^^* 즐독하세요! 제 목: 공녀(貢女) : 제23화 ['함정'에 빠지다!](2) #. 제23화 [‘함정’에 빠지다!] * * * * * * * * * * * * * * * 라샤린이 나가자 숨 막히는 정적이 돌바닥 위로 내려앉았다. 손톱으로 그어진 뺨과 가슴의 상처가 따끔거리고 욱신거렸지만 루피아는 귓가에서 떨어지지 않는 라샤린의 말들 덕분에 그다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말을 들은 건 정말 분하고, 또 분하지만- 정말 억울한 건, 반박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루피아는 그것을 아프도록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녀도 바보는 아니었으니까. ‘알고 있어.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는지 몰라.’ 인식했든 그렇지 못했든, 라샤린의 말마따나 그녀의 눈은 언제나 마왕 이디스에게 못 박혀 있었다. 싫어서, 혹은 경계해야 하니까 라는 등의 말들로 쉼 없이 자기 자신에게 변명함으로써 스스로를 지켜왔지만, 이제 더 이상은 그러지 못하리라는 걸 루피아는 알 수 있었다. 루피아는 비틀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라샤린에게 차인 배가 욱신거렸지만 그럭저럭 참을 만 했다. 그 상황에서도 죽지 않을 정도로만 찼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어울리지도 않는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녀는 이제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미처 보지 못했던 주변을 둘러보았다. 굵은 쇠창살과 그다지 깨끗해 보이지는 않는 돌바닥, 저 구석에는 짚더미도 보였다. 한숨 돌리고 나자 그제야 머리가 맑아지기 시작했다. 그녀 자신의 숨소리만이 들릴 정도로 짙은 정적(靜寂)이 그녀를 감싸 돌고 있었다. 머릿속이 점차 차분해져가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눈을 감았다. 마계로 오는 마법진 위에 서서 느꼈던,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한 긴장감과 초조, 두려움. 애써 태연한 척 하고 있긴 했지만 정말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죽을 만큼’ 무서웠다. 한 세계의 정점(頂點)에 서 있는 자의 그 오만한 위압감이란, 정말 평생 못 잊을 만한 것이었다. 그리고… 처음 본 ‘마왕’이라는 존재. 차라리 처음처럼, 그 엄청난 위압감과 오만함으로 무장한 그대로였다면-. 그랬더라면 이런 식의 상황이 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에 루피아는 벽에 머리를 기대었다. 정말 말 한 마디 던지기가 무서울 정도로 두려워했으니까 말이다. 말 그대로 ‘마왕’이라는, 그런 느낌이 들도록 해 주었더라면…. 하지만 일은 그녀의 바람처럼 움직여주지 않았다. 직접 옆에서 지켜 본 마왕은, 그녀의 예상과는 아주 달랐던 것이다. 그녀가 알게 된 마왕은, 화도 내고, 약간이지만 당황하기도 하는, 그리고 그녀에게 걱정스러운 말도 해줄 줄 아는, 그런 마족이었다. 그건 그녀의 예상에 없는 사실들이었다. 자신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그녀는 그런 그에게 시선을 빼앗겨 버렸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처음 그녀를 본 라샤린조차 쉽게 눈치 챌 수 있을 정도로 그녀는 마왕의 일거수일투족에 일일이 영향을 받게 되었다. 절대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고만 했던 두근거림이나 가슴 저림 등은, 일부러 외면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사실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제는… 이제는.’ 라샤린이 했던 말들이 머릿속을 떠돌아 어지럽혔다. 루피아는 서서히 눈을 떴다. 탁한 어둠 속에서, 벽에 몸을 기대어 몸을 일으켰다. 어질한 감각이 온몸을 덮쳐와 그대로 엎어질 뻔 했지만, 그녀는 두 다리에 힘을 주어 간신히 몸을 바로 세울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대로 굳게 입을 앙다물었다. 요 며칠 혼란스럽기만 했던 머릿속이 말끔히 정리가 되는 느낌이었다. 그 동안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조차 제대로 인식이 불가능할 정도로 혼란스럽고 또 정신없는 상황이었다면, 그녀는 이제야 자신을 되찾은 것이다. ‘부정한다고 사라지는 사실은 아니지. ……그래. 나는… 정말 바보처럼, 마왕에게 반해버린 거야.' 그, 유리알 같은 붉은 마성(魔性)의 눈동자에. 그, 인형 같은 그와는 다른 그에게. 인정하고 나자, 너무나 상쾌해졌다. 뭐 때문에 그렇게 두려워하고, 그리고 그토록 초조해했던 것일까 싶을 정도였다. 라샤린의 그 말들이 가슴을 뻥 뚫고 들어와 온몸을 훑고 지나간다. 다시 뜨인 루피아의 보랏빛 눈동자는, 평소보다 더 밝고 단호하게 빛나고 있었다. 라벤더의 그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묘한 빛으로 빛났다. * * * * * * * * * * * * * * * “루피아가 없어졌어요!” 세키라의 비명과 울음이 섞인 외침이 울리자 모두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로데가 거의 쓰러질 듯 숨을 헐떡이는 세키라를 받쳐 들고 물었다. “무슨 말이야, 그게?” “말 그대로예요. 말 그대로, 아무리 샅샅이 찾아봐도 루피아가… 없어요.” 세키라의 옆에 선 에리나가 그렇게 말하고는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죽을 듯 숨가빠하는 세키라와는 대조적으로 한결 숨조차 흐트러지지 않은 채였다. 그녀는 말을 마치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디에도?” 확인하듯 묻는 아로데의 말에 에리나는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에리나는 초조해졌다. 그 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 아닐까? 칠칠맞지 못하니까 어디서 떨어져 다쳤을 수도 있다. 아니, 상상도 못할 만한 곳에서 길을 잃어버렸을 수도 있어. 이곳은 위험한데, 정말위험한 곳인데…. “도망친 게 아닐까요? 이 성은 경비에 많이 신경을 쓰지 않아요.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도망칠 수 있죠.” 라샤린이 끼어들어 말했다. 그 말에 에리나가 날카롭게 반박했다. “루피아는 절대 도망 같은 걸 칠 애가 아니에요!!” 절대, 절대로. 그것도 그녀들을 놔두고 그녀가 도망친다는 건 정말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도망을 치느니 차라리 마왕에게 ‘보내 달라’고 요구할 애가 바로 루피아였다. “어머? 그걸 어떻게 장담하죠? 인간이란, 원래 그런 동물이잖아.” 생긋- 단순히 아름답다고만 생각했던 라샤린의 웃음에, 에리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느꼈다. 루피아는, 이 여자 손에 있는 거야! 처음부터 저 여자에 대해 뭔가 꺼림칙한 느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될 수 있는 한 멀리 하라고 루피아에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가 아직 없었다. 에리나는 이를 악물었다. 직감은 분명 저 여자가 루피아에게 손을 댄 거라고 말하고 있지만…! “아니에요. 루피아는… 루피아는 도망가지 않았어요. 그건 제가 장담할 수 있습니다.” 겨우 숨을 돌린 세키라는 그렇게 말을 꺼내며 손에 들고 있던 목걸이를 내밀어보였다. 그리고 눈물이 맺혀 있는 눈을 들어 라샤린을 직시하며 말했다. “이건 루피아의 어머님이 루피아에게 준 목걸이에요. 그 애가 이걸 놔두고 갈 리 없죠. 만약 도망쳤다면, 루피아는 분명 이걸 들고 갔을 겁니다.” 그녀의 강한 어조에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인 라샤린은 여유롭게 말했다. “그럼…… 대체 어디에 있다는 거죠, 당신들의 ‘친구’는?” “그걸 모르니까 이러는 거죠!” 답답하다는 듯이 세키라가 외쳤다. 아로데는 파랗게 질린 채 입술을 부들부들 떠는 세키라를 한쪽 팔로 안아 받친 채 그녀의 목 부근을 다독여주었다. “…확실히… 말 그대로 ‘사라진’ 것 같군.” 조용히 울리는 낮은 이디스의 목소리에 장내는 순식간에 침묵 속에 잠겨 들어갔다. 에리나는 그의 표정에 오싹함을 느꼈다. “루피아의 기운을 느낄 수가 없다. 어디에서도.” “……!!” 그의 말이 담고 있는 이중적인 의미를 알아들은 세키라와 에리나의 얼굴이 단박에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그, 그 말은…? ‘주, 죽었다는 거야?! 루피아가?!!’ 마왕인, 마계의 주인인 그가 이 곳에서 루피아의 기운을 ‘느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 곳에서는 거의 신과 다름없는 능력을 지닌 그가! 세키라의 몸이 스륵, 하고 주저앉았다. 이지(理智)의 빛을 잃은 갈색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또로록, 흘러내렸다. 에리나 역시 눈에 띠게 질려서는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뭔가 더 말하려고 하는 마왕의 입술에 그녀의 시선은 못 박힌 채 떨어질 줄 몰랐다. “죽었다고 하지는 않았다.” “……!!” 그, 그럼? “살아 있다. 어차피, 이 곳에서 공녀들은 죽지 못해. 마신 클리오라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는 한 그 어떤 형태로든 반드시 ‘살아’있게 되지.” 죽어서도 공녀는 마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아니, 죽으면 더더욱 벗어나지 못한다. 마신 클리오라의 허락이 있지 않는 한 말이다. “……아로데, 로이드윈, 유리아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절제된 힘이 느껴졌다. 이디스는 세 사람의 눈을 쳐다보며 조용하게 말했다. “반드시 찾아라. 찾아서, 내 앞으로 데려 와. 반드시!” 파앗- 무형(無形)의 기류가 그들을 덮쳐 엄청난 압력으로 내리눌렀다. 검붉은 색의 기류가 스멀스멀 그의 몸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울컥, 하고 유리아덴의 입에서 가느다란 실핏줄이 흘러내렸다. 세 마족의 뒤에서 에리나와 세키라는 거의 실신할 듯 떨고 있었다. 세 마족이 막아주고는 있지만…. ‘무서워…!’ 무서웠다. 창백하리만치 하얀 얼굴, 차갑게 번뜩이는 유리알 같은 붉은 눈동자. 화가 난 것이 분명히 드러나는 그 붉은 눈동자에는 누군가를 향한 분노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혹여, 혹여 그것이 루피아를 향한 것일까 봐 에리나와 세키라는 몸을 떨었다. “로이드윈! 짐작 가는 곳은 없나?” “…죄송합니다.” 이디스가 찾지 못했다면 로이드윈으로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디스는 다시 한 번, 그의 모든 감각을 집중했다. 찾아야한다…! 그녀가 그의 감각권 안에 없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는 초조함에 먹혀버릴 것 같았다. 그녀가 죽어버릴 리 없는데도, 공녀라면 이 마계 안에서 죽음과는 가장 거리가 먼 존재일 텐데도. 두 공녀가 말해주기 전까지는 그것조차 눈치 채지 못했다. 에리나와 세키라, 그리고 세 마족이 루피아를 찾기 위해 흩어지자 넓은 응접실 안에는 라샤린과 그만이 남았다. “군주님.” 라샤린이 부드럽게 그를 불렀다. 사각거리며 하늘하늘한 옷자락이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그녀는 부드럽게 그에게 안겨가며 몸을 그에게 밀착시켰다. “…….” “이 순간만을 기다렸어요. 부디, 제 마음을 거절하지 마시길…….”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그에게 입 맞췄다. “진심이에요, 나의 군주님. 부디 제 마음을 밀어내지 말아주세요…. 언제나 당신만을 바라봐왔어요….” 라샤린은 초조해졌다. 저번에도 그는 그녀의 포옹을 그대로 받고 있지 않았던가? 그러고도 태연히 그녀를 밀쳐냈던 그였다. 아무런 반응이 없는 목석(木石)같은 그에게, 그녀는 점차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왜? 왜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거지!’ 피식, 어느 순간 그가 짧은 웃음을 뱉었다. “…군주님?” “역시.” “네? 그게 무슨……?” 이디스는 그녀를 거칠게 팍 떼어냈다. 팔락거리며 하늘하늘한 얇은 천이 그녀의 알몸을 덮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비웃으며 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핏. 싸악- 라샤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사락. 사그락. 그녀의 푸른색 머리카락이 그녀의 하얀 몸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핏, 핏- 하는 연속적인 소리와 함께 그녀의 하얀 몸 위에 붉은 혈선이 그어졌다. “너 정도로 될 것 같나? 어서 대라. 루피아는, 어디 있지-?” “그, 그, 그… 그게 무슨……. 저, 저는 군주님…!” 파아앗- 그의 몸을 휘돌아 감던 검붉은 기류가 한층 거세졌다. 그의 붉은색 눈에 선명하게 비치는 자신의 모습에 라샤린은 처음으로 ‘공포’를 맛봤다. 그의 눈이 더욱 더 차갑게 얼어갔다. “저, 저는… 저는 모르……!” 픽! 그녀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녀의 하얀 목에 새빨갛게 그어진 상처. 저절로 몸이 떨렸다. 이 정도 가지고 죽지는 않겠지만, 조금만 옆으로 방향이 틀어졌었다면 그녀는 벌써 죽은 목숨이었다. “…너에게서, 루피아의 냄새가 난다.” “……!!” “……그리고, 너 가지고 내가 만족할 것 같은가? 내가 그렇게 쉽게 보이던가?” “…….” “천천히…… 그녀를 찾고 난 뒤 천천히 죽여주지. 대라. 그녀는, 루피아는 어디 있나!” * * * * * * * * * * * * * * * ‘내 예상이 맞으면, ……분명히 성공할 수 있을 거야.’ 머릿속으로 다시 한 번 주문을 확인해본 후, 그녀는 입을 달싹였다. “정령계의 문이여, 열려라.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위대한 약속에 따라, 너의 존재와 나의 존재- 모든 것을 초월하는 영원한 결속을 맺고자 하노니. 나, 루피아의 부름에 응하여 너의 모습을 드러내라.” 그녀는 숨을 들이마신 후 힘을 주어 외쳤다. “정신계의 정령왕, 히에로스!!” 그녀의 앞에 놓인 짚더미에서 스멀스멀- 탁한 붉은색 기류가 올라왔다. 그 옆에 놓인 너덜너덜한 천에서 흐린 잿빛 기류가 올라와 그에 더해졌고, 루피아의 몸에서 뿜어져 올라온 보랏빛 기류가 더해졌다. 그녀의 눈이 흐릿하게 빛났다. ‘이 곳이, 내 예상처럼 고문실이었다면…, 분명.’ 강한 ‘감정’들이 묻어나 있을 것이다. 약간의 주문과, 물의 정령을 부를 수 있을 만큼의 친화력, 또 거기에 더해진 약간의 운(運)만 있다면 정신계 정령을 부르는 것도 꿈이 아니었다. 바닥 곳곳에 드러나 보이는 굳은 피와 오싹한 공기까지- 루피아는 허공에 모아져 뭉쳐진 ‘기운’들이 점점 형체를 드러내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고문실이 뭐냐-! 에이, 젠장. 나가기만 해 봐라, 그냥 밟아줄 테다!’ 그녀는 욱신거리는 뺨의 상처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점점 통증이 더해져, 이제는 얼굴 전체가 욱신거렸다. 그건 가슴 부근의 상처도 마찬가지였다. “독이 있다더니… 거짓말은 아니었던 모양이군.” 하긴, 그녀가 자신에게 그런 거짓말 따위를 할 이유가 없었다. 바로 앞에서 ‘정체모를 것’이 꾸물거리며 형체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채, 그녀는 생각에 몰두했다. 라샤린의 그 말들로,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정말이지 불쾌한 일이었지만, 사실이니 어쩔 수 없다고, 그녀는 인정하기로 했다. 그래도 18년 인생에 처음으로 찾아온 ‘사랑’이 아니던가?(정말 간지러운 단어다, 저건) 비록 이런 식이라고는 해도 말이다. ‘부정하고, 도망치는 건 역시 내 성미에 안 맞아.’ 인정할 건 하기로 했다. 영~ 오래 걸릴 것 같은 ‘꾸물거리는 것’을 앞에 두고, 그녀는 두 손을 뒤로 결박당한 불편한 자세로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껏 멍청하게 당하고만 있었지만… 이제부터 시작이야. 이 수모는, 어떻게든 갚아주고 말겠어! 라샤린….’ 하아. 하아… 그녀는 조금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두통이 점차 심해지고 있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그녀는 흐릿해지려는 눈에 힘을 줬다. 「재미있는 걸, 그대.」 “……!” 「쿡쿡, 그렇게 놀랄 필요 없다. 그대가 나를 불러냈지 않은가? 그나저나 정말 희한한 곳이로군. 용케 이런 곳에서 날 불러낼 생각을 했어.」 루피아는 짚더미에서 천천히 위로, 위로 시선을 올려갔다. 흐릿한 밑, 회색의 연기 위로 남자의 형상이 드러나 있었다. 사라락- 회색의 머리카락이 바닥에 끌릴 듯 흘러내리다 바닥에 닿기 전에 사라졌다. 이지적인 진회색의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정령왕…… 히에로스?” 설마, 설마, 설마?! 「뭘 그렇게 경악스레 쳐다보는지? 날 불러낸 건, 다름없는 그대 아니던가?」 희미한 웃음기를 띤 입에서 울림이 풍부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정말 성공할 줄이야? 루피아는 그녀 스스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소환된 전례(前例)가 없었다고 했는데. 「…그렇게 쳐다보지 말기를, 소환자여. 나 역시 조금은 경악스런 기분이니 말이다. 태초 이래 한 번도 소환된 적이 없었기에 나를 소환해 낼만한 역량을 지닌 자는 없을 줄 알았는데. 실례가 되는 질문이지만 궁금하니 물어보겠다. 그대 혹시…….」 “……?” 「정신 분열증 환자나, 이중, 혹은 다중 인격자인가?」 “……!!” 루피아는 그 질문에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다중 인격자? 정신 분열증 환자?!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날 불러낼 수 있었는지, 정말 모를 일이야. 생긴 걸로 봐서는 멀쩡한데.」 “정상인입니다!” 「아, 그렇다면 미안하게 됐군. 뭐… 나도 모처럼만에 만난, 나를 소환해 낸 자를 두고 그냥 돌아갈 마음은 없어. 어때? 나와 계약하겠는가?」 “물론, 그러려고 불러낸 거였으니까요.” 루피아는 생긋 웃었다. 설마 정말 단번에 성공할 줄은 몰랐지만, 그녀는 정말 이런 쪽으로는 운이 좋은 편인 모양이었다. 히에로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악수하듯 꽉 잡더니-연기와 손을 잡다니! 묘한 기분- 말했다. 「잘 부탁한다.」 “……엉? 이게 끝?” 루피아는 허탈한 기분에 빠졌다. 더 뭘 바래, 라고 하는 듯한 히에로스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자니 상당히 심란했다. 하지만 뭐 어떻게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좋아! 무난하게 1단계 계획 성립이군. 기다려, 라샤린. 이번에는, 다니엘라 때처럼 어영부영 넘어가지 않을 테니까.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받은 만큼, 이자까지 쳐서 톡톡히 돌려주겠어!’ 날 건드린 걸, 후회하게 될 거야! ================================================== 낯선 여자에게서, 내 여자(??)의 냄새가 난다? ...개코 이디스 마왕군.; 하필이면 냄새가 뭐랍니까-_-; 자자. 어설픈 심리묘사였지만[각혈], ...하루 동안 붙잡고 끙끙댄 결과예요; 맨 처음 루피아 장면에서 몇 시간을 헤매었다죠;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 너무 오래 컴퓨터 앞에 앉아있었더니 머리가 지끈거려요; 이번 연휴 때 많이 많이 써두지 않음 후회할 거 같애요;; 메일은 donghee425@hanmail.net 으로 보내주시고요, 즐독하세요!^^ 제 목: 공녀(貢女) : 제23화 ['함정'에 빠지다!](3) #. 제23화 [‘함정’에 빠지다!] * * * * * * * * * * * * * * * 이럴 순 없어! 절대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어! 라샤린은 거칠게 숨을 헐떡이며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벽을 짚고 걸었다. 이디스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는 라샤린을 짜증스럽게 바라보다가 로이드윈이 불러내자 가 버렸다. 그의 경멸스런 눈초리를 기억해 낸 라샤린은 원통함에 이를 갈았다. “손쉬운… 사냥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만은 오산이었던 모양이야……. 쿡! 하지만, 아직까지는 나의 사냥감일 뿐이야!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 해서라도 손에 넣고 말겠어!”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핏물에 절은 옷을 추슬렀다. 그리고 짚고 가던 벽을 더듬어 그 중 한 곳을 꾹 누르고 그 밑의 벽돌을 뺐다. 쿠르릉- 약간 거친 소리와 함께 벽이 한쪽으로 밀려났다. 그녀는 찡그린 얼굴로 힘겹게 그 안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이 ‘라샤린’ 성은 그녀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었다. 이 성에 대해서라면 설계사보다 더 자세하게 안다고 자부할 수 있는 그녀인 것이다. 결계가 쳐져있는 그 ‘특수한’ 곳을 향한 통로라면 그 누구보다 그녀가 더 자세하게 알았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 곳은, ……그녀의 어머니가 죽은 곳이니까 말이다. 잊을 리가 없다. 잊을 리가…! 힘겹게 계단을 내려가던 라샤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쳤다. 어찌나 원통하고 억울해하던지, 그 곳은 그녀가 느끼기에도 불쾌하고 강렬한 ‘한(恨)’이 늘 맴돌고 있었다. 정상적인 마족이라도 그 곳에 들어가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궁금했다. ‘하긴, 키워준 딸한테, 그것도 ‘착한 딸’한테 죽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강해지기 위해서는 그 생육(生肉)이라도 먹어야 했단 말이야.’ 짚더미 위에서 흘리던 생혈(生血)을 받아마시던 기억을 떠올리자 절로 불쾌해졌다. 그때 그녀의 ‘돼지 멱따는 듯한’ 비명소리가 귓가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하나부터 끝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여자였다. 벌컥! 결계가 쳐져있는 지하에 도착한 그녀는 문을 열어 재꼈다. 어머니를 죽이고 난 뒤 그 생육을 뜯어먹고 생혈을 마신 그녀는, 바로 그곳에 무(無)마나 결계를 쳤다. 라샤린 성의 중앙부에 위치한 이 곳은 보다 많은 마나가 모이는 곳이라 그 흐름을 조금만 틀어주는 것만으로도 보다 강력한 결계가 쳐질 수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은혜’로 더욱 강해진 그녀는 그 결계의 존재를 숨길 수 있을만한 컨트롤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가 로이드윈이나 마왕이라면 그녀의 그 수법은 서투르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그녀는 더욱 더 서둘러 루피아가 있는 곳을 향했다. 드디어 루피아가 있는 감옥의 앞에 다다른 그녀는, 다시 한 번 깜짝 놀라야 했다. “어, 없어?!” 덜컹! 라샤린은 굵은 쇠창살을 붙잡고 경악스레 감옥 안을 쳐다봤다. 분명 저기 쓰러져 있어야 할 루피아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지금쯤 몸에 침투한 독 때문에 움직이기도 힘들 텐데, 그 상황 속에서 결박까지 풀고 탈출을 했단 말인가? 마법도, 정령도 없이? “어떻게… 너라는 여자는.” 흠칫! 그녀는 휘익 뒤돌아봤다. 뺨과 가슴에서 검은 피를 쉴 새 없이 흘리고 있는, 그러나 고통스러운 표정은 보이지 않는 루피아가 그녀를 경멸과 경악이 섞인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무슨 소리인지? 루피아.” 루피아는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운’이 좋았다고 하지만 단 한 번의 부름으로 정령왕이라는 건 도대체가 말도 안 되기에 히에로스에게 물어봤었다. 어떻게 이렇게 올 수 있던 거냐고, 자신의 역량은 무시하고라도-물의 정령 한 번 부르기도 어려웠다!- 말이다. 그러자 히에로스는 싱긋 웃으며 이곳만큼 강렬한 원한이 서린 곳도 드물다고 대답했다. 단순한 고문실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루피아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고문실이라면 마왕성이나 여타 다른 부족에도 여러 곳 있지 않은가?(그런 걸 알았다면 왜 시도를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히에로스는 히죽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이곳은 마계지? 마족은 물질 정령계보다는 정신 정령계와 가까워. 여기는 특히 강하거든, 계약자. 그것도 그런 게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후후, 여자의 한은 조심해야 한다 하던가? 여자에, 마족에, 어미에… 이곳도 참 재미있는 곳이로군?’ 그러면서 그는 이곳에 얽힌 끔찍한 장면을 그대로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루피아는 끝까지 보지도 못하고 ‘여자’가 라샤린의 손끝에서 가슴을 파헤쳐지는 장면에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고도 모자라는지 라샤린은 한 번, 두 번, 세 번… 그녀를 좋아하던 남자들의 심장까지 피 한 방울 안 남기고 모조리 ‘먹어치웠다’. ‘사냥, 이라는 게, 그런 의미였어?!’ 말 그대로 사냥, 이라는 것이다. 설마 기차게도 마왕을 잡아먹을 생각을 했겠냐마는(어쩌면, 다른 의미로 그럴 지도), 그 말이 담고 있는 소름끼치는 의미에 루피아는 몸서리를 쳤다. “어머니를 잡아먹다니, 제정신이야? 아무리 마족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 심한 거 아니냐구!” 루피아의 말에 라샤린은 잠깐 의외인 듯한 표정을 짓다가 실풋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뭐가 그렇게 웃긴지 하하하 크게 웃기 시작했다. “뭐가 그렇게 웃겨?!” “하하하! 하… 호호! 아니, 너… 굉장히 순진하구나! 역시 내 장난감 보는 눈은 죽여준다니까? 그런, 세상모르는 말이라니 말이야.” “뭐?” 어이없는 듯한 루피아의 반응에 라샤린은 싱긋 웃었다. 푸른 머리카락은 뭉텅뭉텅 잘려져 나가 있고 몸 구석구석에 붉은 혈선이 그어져 있는 그녀의 웃는 모습은, 정말이지 끔찍했다. “이 마계에서는 강한 자만이 법이 돼. 다시 말해, 강하기만 하면 그 외의 모든 행동은 정당화될 수 있다는 거지. 난 강해지고 싶어서 어머니와 다른 마족들을 죽여서 먹었고, 그런 일은 많이는 아니더라도 가끔 일어나는 일이라고.” 루피아는 그 말에 이를 바드득 갈았다. 그게 짐승이지 어디 이지(理智)를 가진 존재가 할 짓이란 말인가 말이다. 비록 그것 때문에 그녀가 히에로스를 만날 수 있었다고는 하지만…! “하아…. 이런 데에 쓸 시간 따위 없어. 나의 능력 좋은 오라비는, 곧 네가 있는 곳을 찾아낼 거거든. 그렇기 때문에- 나는 너를 최대한, 이용해야 해.” 비틀! 그녀의 몸이 비칠비칠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루피아는 가만히 인상을 썼다. “그렇게, 귀여운 표정 짓지 말라니까? 정말- ‘잡아먹고’ 싶어지잖아-. 쿡쿡!” 차창! 그녀의 손톱이 급속히 길어지며 검게 물들었다. 히에로스가 보여 주었던 영상-저 손톱이 여자의 몸을 파고드는-이 떠오르자 루피아의 얼굴은 더더욱 찌푸려졌다. “후훗, 후후… 들키고 싶지 않겠지요, 응? 네가 그를 좋아한다는 것 말이에요. 그럴 만도 하죠. 그것 자체가 중간계에 있을 네 가족들에 대한 배신인데 말이야-. 자, 비밀은 지켜줄게요. 얌전히 이리 와요.” 그 말에 굳어있던 루피아의 얼굴에 한 줄기 비소(誹笑)가 스쳐갔다. 라샤린이 아는 정신없고 뭔가에 쫓기듯 초조해 했던 루피아라면 분명히 저 말에 크게 동요하며 충격을 받을 것이다. 그만큼 그녀는 초조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할 만큼. “내가 왜?” “……!” 루피아의 그 말에 라샤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루피아는 덤덤하게 그녀의 시선을 받아내며 하아- 하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 라샤린이 말했던 독은 그녀의 숨통을 점차 죄이고 있었다. 루피아는 통증을 꾹 눌러 참고 입을 달싹였다. “히에로스.” “……!!” 라샤린의 몸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부드득- 부득. 바득. 이상한 소리가 그녀의 귀를 자극했다. 스르륵- 몸을 타고 올라오는 회색 연기에 더욱더 질려가는 라샤린을 보며 루피아는 싱그럽게 웃었다. “하나 더. 네가 잘못 생각한 게 있어.” “뭐…?” 그녀의 뒤로 묶여있던 손이 풀리며 그녀의 팔이 밑으로 내려졌다. 라샤린의 눈이 다시 한 번 경악으로 물들 때, 루피아는 서 있는 라샤린의 배를 그대로 걷어차 버렸다. 콰당-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라샤린의 몸이 그대로 루피아의 발아래 쓰러졌다. 루피아는 라샤린의 손톱을 밟아 와득- 소리가 날 때까지 부서뜨려 주었다. “내가 널 무서워할 거라고 생각했어?” “으윽- 윽!” 루피아는 발을 떼었다. 산산조각이 난 라샤린의 손톱과, 그에의 영향인지 핏물이 흐르고 있는 손끝. “분명, 내가 가족들의 믿음을 배반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이제 더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 자신이 싫고- 또 믿을 수도 없지만, 라샤린의 말마따나 ‘사라지는’ 사실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 봤다. 라샤린이 다시 이곳에 올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이 어둠 속에서, 폐부를 파고드는 한기 서린 이 공기 안에서 생각해봤다.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는. 아무 것도 시작된 것은 없는데, 그녀 안에서 무엇 하나를 인정 하는 것 하나가 이토록 힘들 줄이야 생각도 못했다. ‘그래, 아무 것도 시작된 것은 없어. 아무 것도.’ 히에로스가 라샤린의 몸 위에서 점차 형상을 드러내가고 있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 없는지 입술까지 파득거리는 라샤린의 모습은, 동정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히에로스는 그녀의 머릿속까지 침투해 들어가 그녀의 생에 가장 어두웠던 부분을-없다면 만들어서라도- 끄집어 낼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 어머니의 인생을 대신 살아보게 될 것이다. 탄생, 자라오며 보낸 시간, 딸의 탄생, 마족의 여인으로서의 삶, 딸에게 품은 애정, 배신에 의한 한 어린 죽음까지 말이다. 이게 가장 적절한 벌일 것이라고 루피아는 생각했다. 점차 현실에서 멀어져가는 라샤린의 탁한 붉은색 눈을 보며 루피아는 말했다. “모르나 본데.” 루피아의 입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난, 너 못지않게 연기력이 좋아.” * * * * * * * * * * * * * * * “잠깐, 잠깐 기다리십시오, 주군!” 당황한 듯 아로데가 급하게 이디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기다려주십시오, 조금 있으면 로이드윈이 정확한 소재지를 알아낼 것입니다. 그때 가서 행동하셔도 늦지 않을 것…!” 말을 하던 아로데는 흠칫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가만히 그를 노려보는 이디스의 눈이 새빨갛게 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속에 담긴 광포함과 성급함을 그는 똑똑하게 볼 수 있었다. 이디스는 으르렁대듯 조용하게 말했다. “비켜.” 아로데의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조금 전 보았던 검붉은 기류는 없었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무형의 압력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가 20년 전보다 훨씬 강해졌다는 사실을 아로데는 실감했다.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한 압력. 단지 노려본 것뿐인데도 이 정도라면-…. “이대로 다 날려버리실 생각입니까?” 그를 지나쳐 더욱 빠르게 걸어가던 이디스의 몸이 아로데의 그 한 마디에 멈칫했다. 이디스는 싸늘하게 언 표정으로 그를 뒤돌아보았다. “만약 그렇다면?” 그의 입가에는 싸늘한 비웃음이 곁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는 손을 들어 그의 앞에 거치적거리는 문을 부숴버렸다. 으아악, 하고 그 안에 있던 성의 시종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다시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마왕을 보고 파랗게 질린 그들은 구석에 웅크려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이 성의 성주는, 지금 어디 있나.” “어, 어버버… 모, 모……!” 그는 다크 엘프 시종 중 하나의 멱살을 들어올려 물었다. 아로데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져 가기 시작했다. 거품까지 물 정도로 겁에 질려 모른다고 대답하는 시종을 이디스는 벽을 향해 세게 던져 버렸다. “참아 주십시오, 주군!” “이거…… 좋은 말로 할 때 놔라.” 아로데는 밖으로 향하려고 하는 이디스의 팔을 있는 힘을 다해 잡아 당겼다. 화를 참는 기색이 역력한 이디스의 얼굴이 그를 향했다. ‘제길! 로윈하고 유덴은 대체 어디 있는 거얏!! 이런 버거운 일을 나 하나한테 맡겨도 되는 거냐고!’ “무슨 생각이십니까! 여길 다 날려버리면 루피아마저 위험할 지도 모르는 일인데!” 그의 말에 이디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되었나, 싶어 아로데는 몰래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래, 적어도 루피아도 위험할지도 모르는 일을 하지는 않겠지. 그러나 다음 순간 아로데는 그것이 순전히 그의 착각임을 깨달았다. “나의 눈마저 피할 수 있는 결계인데, 설마 성이 내려앉는다고 무너지겠나?” “그……! 젠장, 주군!!” 감히 불경하게도 주군 앞에서 욕설을 내뱉은 아로데는 창가를 향해 걸어가는 이디스를 무력하게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죽었구나, 싶었다. 이성을 깡그리 날려버린 게 분명해 보이는 그의 주군은, 정말 성을 통째로 날려버릴 모양이었다. 바로 그 때였다. 쿠아아앙!! “……!!” 커다란 폭발음이 지축을 뒤흔들었다. 이디스의 눈이 아래를 향했다. 그는 창가에서 그대로 뛰어내렸다. 아로데는 다시 한 번 ‘무슨 일이야!’하고 외치며 그를 따라 뛰어내렸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매캐한 흑연(黑煙) 속에서 한 사람의 그림자가 비춰졌다. 이디스와 아로데의 눈이 그 그림자의 점점 선명해지는 윤곽으로 향했다. “쿨럭쿨럭! 캑! 어휴, 좀 더 조심할 걸! 캑캑!” “……루… 피아?” 이디스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띄엄띄엄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루피아는 어? 하고 약간 놀란 듯이 이디스와 아로데가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된 거지?” 루피아는 이디스의 그 물음에 약간 곤란한 듯한 웃음을 흘렸다. 그녀의 발밑에는 아까 그 폭발의 잔재가 널려져 있었다. 무(無) 마나 지역을 빠져나가자마자 될 수 있는 한 빨리 움직이기 위해 마법을 썼던 것인데, 어처구니없게도 마왕과 떡- 하니 마주쳐 버렸다. ‘이거 참! 대체 어떻게 대답한다지? 납치?’ 고민하고 있는 그녀 앞에, 이디스가 큰 걸음으로 다가왔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한 채 그녀는 그대로 그를 올려다봤다. 혹시, 도망친 거라고 생각했을까? 왠지 모르게 딱딱하게 굳어 보이는 그의 얼굴에 그녀는 다시 난처하게 웃어 보였다. “……독인가.” “아? 아… 네.” 이디스는 굳은 얼굴로 그녀를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손을 들어올려 뺨의 상처를 쓸어본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루피아가 그의 반응에 흠칫 놀라자, 그는 그대로 그녀를 걸치고 있던 망토 안으로 안았다. 깜짝 놀란 루피아가 그를 올려다보자 그는 짧게 말했다. “무리하지 말고…… 이제 쉬어.” =========================================================== 좀 짧습니다만, 어쨌든-_-; 즐독하세요^^ 제 목: 공녀(貢女) : 제24화 [탈출](1) #. 24화 [탈출] * * * * * * * * * * * * * * * 서열 대회를 단 일주일 앞둔 상황, 나를 비롯한 공녀들은 모두 엄청난 정신적 압박에 시달렸다. 인간의 몸으로 마족을 능가하기란 불가능한 일인데다, 어느 정도까지만 가치의 효용성을 보여주면 되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그녀들과 나는, 자신의 ‘힘’을 도저히 신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건 단기간에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 테지만 사실은 실전에는 전혀 경험이 없다는 점 역시 이유로 작용하고 있었다. 나 역시 그에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실전? 하! 말도 안 되는 소리. 실전은 무슨 놈의 실전인가. 결국 제대로 된 전투라고는 단 한 번도 치러본 적 없는 나는 그때 계약을 맺고 있었던 물의 정령 ‘세이준’마저 제대로 활용하고 있지 못하던 터였다. 하물며 정신계의 최고 정령왕 ‘히에로스’라니. 운이 좋아도 너무 좋았던 것이다. 너무 큰 운과 능력은, 감당할 능력이 없으면 오히려 짐이 되기도 한다. 뭐, 내 상황에서는 그 정도로까지 작용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아유니는 내게 제안을 했다. 그건 바로……. ============================루피아의 자서전================= “어때요? 괜, 괜찮은 거겠죠?” 에리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유리아덴을 붙잡고 물었다. 유리아덴은 말없이 간단히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것만으로 대답을 끝냈다. 그 간단한 동작에 에리나는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세키라는 긴장이 풀린 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독이라니……. 너무 놀랐어.” 뺨과 가슴께에서 검은 피를 줄줄 흘리고 있던 루피아를 봤을 땐 그야말로 심장마비에 걸리는 줄 알았던 두 사람이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히도, 루피아는 이제 편안히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녀의 안색을 확인한 세키라와 에리나는 서로 시선을 마주치며 살짝 웃었다. 무엇보다, 왠지 개운해 보이는 표정이 그녀들을 안심시켜 주었다. “아직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두 사람 사이로 불쑥 얼굴을 들이밀며 아로데가 말했다. “네?” “이제 서열대회가 고작 일주일 앞이잖아. 아니, 딱 6일 뒤로군. 다른 공녀들은 그렇다 치고, 너희들은 대체 어떻게 할 건지? 아니, 에리나- 그쪽은 괜찮겠고, 세키라나 루피아는? 저런 몸으로 어디 온전히 살아나 돌아오겠나?” 그 말에 두 사람의 얼굴은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서열대회. 분명 공녀들의 가치를 신장시켜 줄 좋은 기회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호락호락한 것도 아니었다. 조그만 실수라도 한다면 그건 바로 엄청난 타격이 되어 돌아올 테니까. 게다가 그런 것에 출전한다는 것은, 바로 마족 앞에 ‘드러나는’ 것을 의미했다. “그나저나 라샤린은, 어때요?”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던 세키라가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아로데의 얼굴이 잠깐 심각해지만 금방 풀어지며 약간 과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정신 못 차리고 있지, 뭐.” “네에…….” 세키라는 침울하게 대답했다. 이번 일에서 루피아의 상태 다음으로 놀란 것은, 다름 아닌 라샤린의 이상한 상태였다. 그녀는 마치 어딘가에 넋이 나간 듯, 멍하니 허공만을 주시하는 흐린 눈동자로 뭔가를 중얼대고 있었다. 미친 것처럼. 게다가 로이드윈에게 들은 그녀 삶의 전말도 정말이지 끔찍했다. “어머니를, 잡아먹다니…!” 아무리 마계라지만, 마계라지만. 그녀의 질린 안색을 보고 아로데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상습적이지는 않지만 생존을 위해서라면 태어나자마자 어미를 잡아먹는 종족은 많아.” 사실 그녀들이 모르고 있다 뿐이지 인간들 중에서 하층민들은 굶어죽지 않기 위해 부모의 시신을 뜯어먹는 자들도 더러 있다고 들었다. 실제로 본 적도 있고 말이다. 아로데는 그런 말을 했다가는 아주 기절할 것 같은 세키라를 위해 조용히 입을 다물기로 결정을 내렸다. “정말, 어떻게 해야 짐이 되지 않을 수 있는지. 저는 정말 모르겠어요.” 아로데의 말처럼 로이드윈에게 의지해보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건 단순히 그녀의 자기만족일 뿐이지 정말 힘이 되는 방법은 아니라고 여겼다. 세키라는 옅게 한숨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로데는 난감한 듯 뺨을 긁적였다. “그건 나로서도 도저히 방법이 없군.” 해답을 바라고 말하는 건 아니었다. 세키라는 고개를 저으며 힘없이 웃어보였다. 아로데는 특유의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흘리며 그녀의 머리를 툭툭 쓰다듬어 주었다. 둘의 대화를 들으며 루피아의 곁을 지키고 있던 에리나는 유리아덴과 함께 생각했다. ‘난 완전히 잊어버린 거야….’ 그들이 있다는 사실을 저 우주 멀리로 던져버린 것 같은 세키라와 아로데의 대화였다. “역시…… 실전이 필요해.” 계속해서 느끼고 있던 불안감을 해소시켜 줄 수 있는 방법은, 역시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너무나 단시간에 얻은 능력이고, 또 믿음을 가지기에는 그 크기나 용도, 사용법에 너무나 미숙하다는 것을 에리나는 느끼고 있었다. “검 다루는 법은 가르쳐주지 않으실 거예요?” 문득 생각이 난 듯, 에리나는 유리아덴에게 물었다. 루피아가 쓸 약을 제조하고 있던 유리아덴은 에리나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리 필요하다고 보지 않는데.” “……무슨?” “말 그대로의 의미다. 어차피 빙의(憑依)되어 싸울 건데 네가 알아봤자 별 필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 빙의? 빙의라니? 그 단어의 뜻을 떠올리며 에리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유리아덴을 쳐다봤다. 그녀의 그 시선을 유리아덴은 간단하게 묵살해버렸다. “그 말은…… 제가 이 마검에 지배되어 버린다는?” “…해석은 자유지만, 그건 아니다.” “그럼요?!” 빙의? 지배? 그런 건 용납할 수 없다. 아무리 육체와 영혼을 팔아버렸다고는 하지만 그녀가 원한 것은 그녀의 힘이었지, 다른 뭔가의 힘 따위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 자체의 힘이 아니라면 그딴 힘은 필요 없었다. “네가 그 마검의 정령을 이용하는 것이지. 그 정령에 대한 지배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네가 빙의되어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은 더해질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너는 잡아먹히고 마는 거다.” “…….” “다른 방법으로 너를 강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예를 들면 인체 개조나, 너를 반마족으로 만들거나 하는 방법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런 건, 네 쪽에서 거절했을 테지?” 물론 그런 방법은 절대 사양이었다. 인간이 아니게 되느니, 차라리 죽고 말겠다. 에리나는 답답해졌다. ‘나는, 왜 이렇게 약해빠진 거야-!!’ “이제 그만 다 나가도록 하지. 이쪽은 좀더 자야 해.” 유리아덴이 말했다. 세키라와 에리나는 뭔가 석연찮은 기분이었지만, 치료사(유리아덴)가 나가라고 하는데 별 수 있겠는가. 힘없이 터덜터덜 걸어 나가는 그녀들의 눈에, 아주 의외의 인물이 들어왔다. ‘아유니?’ 며칠 새에 아주 핼쑥해진 모습이었다. 핏기 하나 없어 보이는 창백한 안색으로 늘 양옆으로 동그랗게 말고 다니던 머리카락을 풀어 내린 그녀는 병색이 완연해보였다. 어디 아픈 게 아닌가 걱정이 되어 세키라는 걱정스레 말을 건네었다. 아니, 그러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그 전에 아유니가 먼저 말을 꺼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두 분만 저를 따라와 주세요.” * * * * * * * * * * * * * * * “푸하핫!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다!” 모두가 나가고 난 뒤 루피아는 눈을 뜨고 숨을 푸핫, 하고 내쉬었다. 유리아덴이 그때 나가자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그러나 정말 눈뜨기 미안한-미안하다기보다 민망한- 상황이었다. 각자 ‘둘만의 세계’를 만들어 버리면 그 분위기를 깨기가 정말이지 미안해진다. 그래서 일찌감치 눈을 뜬 루피아는 깨어났다는 표시 한 번 제대로 못한 채 움칠움칠 거려야만 했다. 일찍 눈치를 채고 나가자고 해 준 유리아덴의 그 무표정한 얼굴이 어찌나 성스러워 보이던지. 그녀의 두 친구는 그녀가 누워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렸던 모양이다.(…) “정신이… 들었나.” “…….” 루피아는 비교적 놀라지 않고 고개를 들어 창가 쪽을 보았다. 역시나 그곳에는, 그녀가 예상한 인물이 앉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될 수 있는 한 침착하게 그 말에 응수했다. “움직일 수는 없지만요.” 아직까지는 거동이 불편한 루피아는 몸을 일으키려 노력했다. 하지만 가슴의 상처가 욱신거리자 그녀는 금방 포기하고 아예 몸에서 힘을 빼 버리고 피식 웃었다. ‘……저렇게 뚫어져라 노려보는데 모를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이디스는 그녀를 아무 말 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째 불편한 느낌에 루피아는 그냥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그는 다시 말없이 그녀의 침대 옆에 마련된 의자 위에 몸을 털썩 맡겨 버렸다. 나갈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불편한 게 있으면 말해.” “……?” 루피아는 그 말에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자진해서 저런 이상한 짓을 하는 이유가 대체 뭐란 말인가. 그녀가 아는 한, 마왕은 절대 저런 말을 할 마족이 아니었던 것이다. 침묵은 길게 둘 사이를 흘렀다. 루피아는 입을 꾹 다문 채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은 대략 정오보다 조금 더 지난 시간 같았다. 창가로 보이는 회색의 하늘은, 시간의 여과를 조금도 느낄 수 없었지만 말이다. “나는…… 새벽이 가장 좋다.” “……?” 느닷없이 침묵을 깨며, 이디스가 말문을 열었다. 루피아는 그대로 창가에서 그에게로 시선을 옮겨 그를 쳐다보았다. 새벽? “천계의 소유인 빛이, 이 마계에 스며드는 짧은 그 시간이.” 그의 짧은 그 한 마디에 루피아는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는, 마계에서 마왕인 그는 이제까지 어떤 시간을 보내왔을까. 그리고 생각해냈다. 그녀는 그에 대해 무엇도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그저, 그가 보여준 짧은 시간의 그 표정에 반해서, 그래서 그렇게 혼자 괴로워했던 것뿐이었다. ‘숨겨야 하겠지만.’ 사실은 아직까지 그다지 확신은 없었다. 내가 정말, 이 마족을 좋아하는 걸까- 하고 의심이 든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분명 심장이 그에게 두근거리기는 하지만 겨우 그것 가지고 판단하는 것은 속단이 아닐까 생각되는 것이다-어디가 좋은 지도 알 수 없다-. 그리고 아직까지 그건, 가족들과 비교하면 너무나 터무니없이 작은 마음일 뿐이다. 아직까지, 그녀의 마음을 아는 것은 라샤린 단 한 명뿐이었다. 그리고 그녀 자신. 어차피 라샤린은 제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녀의 수명이 다 끝나도록, 그녀는 절대 그 꿈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그러니까-. ‘모르게 해야지. 아무도 모르게 해야지. 절대, 아직 작은 이 마음이, 누구에게도 들키는 일은 없게 해야지. 될 수 있으면 죽여야지. 그래야지.’ “어떻게 라샤린에게 당하지 않을 수 있었지? 넌 인간인데.” 잠시 후 이디스가 다시 물었다. 어떻게 대답할까 생각하던 루피아는 곧 그냥 있는 대로 말해주기로 마음먹었다. “히에로스를 소환해서요.” “…히에로스…?” 이디스가 어이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물론 그 사실에 대해서는 루피아도 알딸딸했다. 믿을 수가 없다고나 할까-정령왕이 어디 지나가는 개 이름인가 말이다-. 결코, 그녀가 계속 중간계에 있었다면 평생 노력해도 못 만날 존재였다. 하지만 이디스는 생각보다 그리 놀란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렇군.” “…겨우 그것뿐이에요?” 보통 ‘믿을 수 없다’라든가, ‘거짓말 하지 마’라든가 하는 반응을 보이는 게 정상 아니던가? 왠지 섭섭(?)하다는 듯이 그녀가 말하자 이디스가 입을 열었다. “마계는 물질 정령계보다 정신 정령계 쪽에 훨씬 가깝다. 따라서 공포의 엔릴이나 분노의 란테아, 란시스트- 같은 것들은 생각보다 자주 볼 수 있지.” 단, 소환하려는 마족은 그다지 없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마족은 순수한 그들의 힘만으로 싸우길 원한다. 그 외에 여타 다른 개체나 힘이 영향을 미치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령술은 그다지 마족의 체질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걸 불러낼 생각을 용케 했군. 그것도, 분노나 공포가 아닌 정령왕을 말이다.” ‘그런 걸’이라. 분명 이 말을 히에로스가 들으면 그다지 기뻐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루피아가 말했다. “다른 것은 이름이 안 떠올랐거든요. 소환하고 싶어도 못 했죠.” 정신계 정령에 대해서라면, 이름은 대충 알아두고 있었지만 그 상황에서 이름들은 뒤죽박죽 엉망이 되어 제대로 생각나지 않았다. 정확하게 기억나는 것은 히에로스의 이름 하나, 그래서 그녀는 무작정 정령왕을 불러낼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렇군.” “나가지 않을 건가요?” 이제 그만 자고 싶었다. 졸음의 무거운 무게로 아래로 내려가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올리며 루피아는 말했다. 배고프기도 배고프고, 피곤하기도 많이 피곤했다. 하지만 이디스는 그녀의 말에 태연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가지 않는다.” “에?!” “나가지 않는다. 지켜 줄 테니… 자라.” 지켜준다니, 대체 누가 누굴?! 루피아는 어이없이 이디스를 쳐다봤다. ‘아까도 생각한 거지만, 그렇게 빤히 쳐다보면서 누구더러 쉬라는 거야, 지금! 으악- 내 심장 정말 미친 거 아니야? 대체 저 남자 어딜 보고 두근거린 거냐고!’ 모를 일이다. 이디스는 결국 불편한 얼굴로 잠이 든 루피아를 내려다보며 다시 눈을 감았다. 그녀가 그를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잘 알았다. 핼쑥하게 창백한 안색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속이 뒤틀려왔다. 역시 더 손을 봐주는 거였는데- 그냥 넘어간 것이 후회스러웠다. 창 밖을 바라보던 루피아의 시선이 떠오르자 그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녀는 공녀다. 마계의 마왕인 그를 좋아할 리 없는 것이다. 그리고…… 돌아가고 싶어 한다. ‘게다가 인간이지.’ 그는 소파에 길게 몸을 기대어 머리를 뒤로 젖혔다. 그는 요즘 종종 그 스스로에 대해 낯설음을 느꼈다. 이제껏 숨죽이고 있던 그의 본 성격이리라. ‘죽어있던’ 때에는 간간이 머리를 내밀기만 했던 그의 본래 성격이 이제 완전히 껍질을 벗어버리고 드러나려 하고 있었다. “좋아하지 않는다면…… 좋아하게 만들면 된다.” =================================================== 후후훗. 지금 새벽 3:45분을 막 지나고 있군요; ...아무래도 네르가 진짜 미친 모양입니다. 무섭다는 분도 계시네요; 늘 이런 페이스면 좋을 텐데.. 합니다; 즐독하세요! 제 목: 공녀(貢女) : 제24화 [탈출](2) #. 제24화 [탈출] * * * * * * * * * * * * * * * 에리나는 수상쩍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눈앞의 여자를 보며 노골적으로 인상을 썼다. 그 얼굴을 보고 세키라가 옆구리를 쿡쿡 찔러 신호를 주었지만,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이런 그녀의 솔직한 성격은 이전 사교계에서도 유명한 것이었기에 세키라는 그만 포기해버렸다. 상황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표정을 바꾼다면 몰라도, 지금 같은 그럴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는 에리나는 자신의 느낌을 숨기는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세키라는 잘 아는 것이다. “왜 우리를 불러냈죠, 아유니 드 포르티칼 영애?” 에리나가 도전적인 어투로 입을 열었다. 아유니는 그녀들을 차가운 태도로 평가하듯 뜯어보고 있었다. 그렇게 기분 나쁘게 구는 데야, 아무리 성격 좋은 세키라라도 한 마디 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입을 막 열려는 찰나, 아유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계속… 이렇게 이곳에 계실 생각입니까?” “……!” 아유니의 분홍색 눈이 차분하게 빛나며 그들의 눈을 응시했다. 세키라와 에리나는, 뒤통수를 한 방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입을 꾹 다물었다. 조개처럼 입을 다물어버린 그들을 보며 아유니는 마치 질책하는 것 같은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잊으셨습니까, 다들? 어째서 이곳을 탈출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 탈출? 탈출이라고 했었나, 지금. 에리나와 세키라는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잘못 들은, 걸까. 그런 그녀들의 생각을 읽은 것인지, 아유니가 미미한 코웃음을 곁들여 말해 주었다. “잘못 들으신 게 아닙니다. 탈출-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생각들 하셨겠죠. 그러나 시도도 안 해 보고 그런 생각을 하신 게 아닙니까?” 따끔. 두 사람의 가슴 속 한 구석이 따끔거렸다. 마치 찔리기라도 한 듯이, 아유니의 목소리가 매가 되어 그들을 후려쳤다. 하지만 그녀가 그런 소리를 해서 아프다는 게 아니었다. 그들의 머릿속에, 그녀가 한 말과 동시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탈출을 원하는 공녀가… 있을 거야. 대체 언제부터- 탈출을 포기하게 된 거지!’ 언제부터인가 생각하지 않게 된 것이었다. 이곳에서 빨리 적응하려고만 했지, 탈출을 하려는 것은, 그 기회조차 노리지 않게 된 것은,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에리나는 어차피 가지 못할 테지만, 세키라나 루피아는 아니었다. 그 외에 다른 공녀들도 말이다. 계약의 법으로 묶인 것도 아닌데 탈출을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녀가 그만큼 이곳에 익숙해져 버렸다는 이야기다. “아… 이, 잊은 건 아니에요. 기회가 없었을 뿐…….” 세키라가 더듬더듬 변명하듯 말을 꺼냈다. 하지만 아유니는 차갑게 그녀의 말을 잘라버렸다. “그랬다면 우리는 벌써 이곳에 없어야 했습니다. 이 라샤린 성은 경계가 아주 소홀해요. 라샤린이라는 마족의 성격 탓 때문도 있겠지만, 우리는 분명 도망갈 수는 있었을 겁니다.” 두 사람은 라샤린이 루피아가 도망친 게 아니냐고 물었던 것이 생각났다. 마왕이나 로이드윈이 금방 찾아내버리겠지만-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에리나는 세키라의 말을 차갑게 잘라버리는 아유니의 태도에 울컥 해서 말했다. “어차피 마왕이나 로이드윈 같은 마족이 있는 한 우리는 쉽게 발각될 것이고 잡힐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이런 상태나마 유지할 수 없을지 몰라요!” “당신이 언제부터 현재의 안전 따위에 신경을 썼지요? 당신에게는 이루고 싶은 목표만이 최우선 아니었습니까? 훗, 에리나 칼르니르… 당신도 별 수 없군요.” “무슨!!” “아닙니까? 유리아덴이라는 마족에게 반한 것. 후후… 당신도 어쩔 수 없는 여자였군요.” 짜악!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아유니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에리나는 순간적으로 그만 아유니의 뺨을 때려버리고 만 것이다. 에리나는 아직도 분노가 가시지 않은 날카로운 초록색 눈동자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닥쳐라! 해도 될 말과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있는 거야. 감히… 네깟 게 뭐라고 떠드는 거냐!” 그러나 아유니는 그런 그녀의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오늘 밤.” “…….” “오늘 밤입니다. 루피아님께도 전해주십시오. 이곳에, 오늘 밤 저 종각의 종이 세 번 울릴 때 나오십시오. …조금이라도 자신이 공녀라는, 그리고 인간이라는 자각이 남아있으시면 말입니다.” 그렇게 말을 끝낸 아유니는 미련 없이 돌아서 버렸다. 얼굴의 한쪽 뺨이 붉게 물들어있음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쳐들고 당당히 걸어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은 굉장히 당당해보였다. 뒤에 남은 에리나와 세키라는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인간? 인간이라는 자각? 공녀라는 것? 탈출이라고!’ 아유니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방문을 닫았다. 점차 몸 상태가 안 좋아지고 있다는 것을 날마다 확연히 느낄 수가 있었다. ‘피곤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곳의 공기는 그녀를 밀어내고 있었고, 저주스러운 그녀의 반쪽은 금방이라도 풀어질 듯한 이성의 고삐에 묶여 기뻐하고 있었다. 두근두근- 심장 고동소리를 느끼며 그녀는 다시 한 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어.’ 그녀의 날카로운 본능은 상황의 미묘하게 어긋난 점을 발견해냈다. 아유니의 입가에 냉소적인 웃음이 걸쳐졌다. 그녀는 마왕의 얼음 같은 무표정한 얼굴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어리석은…. 결국 너 역시 서툰 미숙아에 불과할 뿐이지. 마왕 주제에 웃기지도 않아!” 아유니는 그에 잇따라 떠오르는 불쾌한 기억에 가볍게 머리를 내저었다. 성큼 성큼 큰 걸음으로 걸어 푹신한 소파에 몸을 파묻은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녀가 아는 한 역대 모든 ‘마왕’들은, 늘 ‘이전’의 이디스와 똑같았다. 그것이 오래 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계획에 의한 것이라는 걸, 그들은 알까? -모를 게 분명하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마왕이 무섭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느꼈다. 이디스의 변화 계기가, 다름 아닌 루피아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어떤 이유에서든 원하고 있다는 것을. 태어나서부터 통제되고 제어되어 왔던 마왕의 감정과 성격이, 어떤 식으로 드러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그런 것 따위, 인정하지 않겠다. 그 따위 불안정하고 위험스런 것 따위는 절대 루피아 곁에 놔둘 수 없는 것이다. 창백하고 파랗게 질린 루피아의 얼굴을 떠올리며 아유니는 주먹을 세게 다져쥐었다. “단 한 번도, 잊어본 적 없어. ‘로헤델의 별’… 그래, ‘당신’을 만난 건 분명 내게 있어서는-….” 행운? 저주? 그녀는 결정을 미뤄두었다. * * * * * * * * * * * * * * * 문득 눈이 떠졌다. 루피아는 점차 초점이 잡혀져가는 눈을 깜박이며 나른한 몸을 움칠거렸다. 몸이 무거웠다. 꽤나 오래 잤구나 싶었다. 얼마나 오래 잤으면 머리가 지끈거릴까. 잠에 취했다, 라고나 할까. 한 번 눈을 뜨자 다시 잠들 생각은 싹 사라졌다. 점차 머리는 맑아져만 갔다. 나른했던 몸도,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뿐해지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더 이상 자는 건 불가능한 일인 듯했다. 루피아는 몸을 일으키려 뒤척거리다 침대 옆에 무언가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시선의 끝에서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마왕??’ 그녀는 잠시 눈을 의심해야 했다. 아니면, 뇌나 정신에 이상이 생겨서 헛것을 보는 중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이도저도 아님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환각이 숨을 쉴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니까. 가만히 고르게 숨을 내쉬며 곤히 자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다, 그녀는 피식 웃었다. 지켜줄 테니 자라고 했던가. 그 어색한 표정하며- 어투하며. 그녀는 킥킥 웃었다. 하지만 덕분에 푹 잤다. 이 마왕은 분명 남에게 그런 식의 말을 건네 보는 게 처음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왠지 유쾌해져서, 루피아는 다시금 킥킥거렸다. ‘……왠지 기분 나쁠 정도로, …예쁘다.’ 멋지다거나, 아름답다거나 하는 수식어도 잔뜩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예쁘다’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렸다. 매끄러워 보이는 우윳빛 피부나, 붉디붉은 선홍빛 눈동자를 감싸고 있을 눈꺼풀의 긴 속눈썹. 시원하게 쭉 뻗은 눈썹이라든지, 귀족적인 코라든가 하는 그런 것들은 모두 무시하더라도 곤히 자는 모습을 보면 그 말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다. 그녀가 자는 침대에 엎드려서 자는 모습을 루피아는 한참동안 구경했다. 뭐, 확실한 구경거리이기는 하다. 세상에, 마왕이 이렇게 곤히 자는 모습이라니. 어디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은 분명 아니다. ‘어쩌면, 음… 정말 인정하기 싫지만, 나, 이 남자 얼굴에 끌린 건지도?’ 일단 막연하게 ‘좋아 한다’고는 알고 있지만, 그게 도통 어떤 이유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그저… 저 얼음 같기만 한 얼굴에 조그마한 표정이 떠오를 때면 주체할 수 없이 가슴이 두근거리고, …좋다, 는 것뿐이었다. 정말 그럴 지도 몰라. 그녀는 가벼운 자기혐오에 빠져들었다. 외모에 끌린다니! 오빠들의 외모에 반해 따라다니던 아가씨들의 얘기를 들으며 얼마나 한심해했던가 말이다. 어차피 영원한 것도 아닌데 그런 데 열광하면 뭐하냐고 말이다. 그런데 자신이 바로 그 짝이 날지도 모른다니. 나쁘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그녀는 스스로에게 자문(自問)해 보았다. 이제, 뭐가 어떻게 되길 바라느냐고. 물론 되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답은 너무나 뻔했다.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가볍기만 한 이 감정, 아니 ‘기분’은 어딘가에 던져 묻어버리고, 기회를 봐서 탈출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우선으로 해야 할 것들이었다. ‘가벼워. 가벼운 호감 수준이야… 아아, 나 뭐가 그리 심각했었담?’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스윽- 소리도 없이, 그녀의 방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루피아는 고개를 번쩍 들며 온몸을 긴장시켰다. 누구냐고, 막 외치려고 할 때 낯익은 목소리가 그녀를 멈추게 했다. “루피아.” * * * * * * * * * * * * * * 챠르륵. 루피아는 이곳에 온 이후 하고 다녔던 목걸이를 풀었다. 그리고 씁쓸한 표정으로 쓰게 웃다가, 그녀는 마왕의 옆에 그것을 내려놓았다. ‘내가 왜 이러는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뒤에서 침묵으로 그녀를 조심스레 재촉하는 세 사람의 인영이 비춰보였다. 어떻게 이제까지 마왕이 깨지 않았나, 궁금하지만, 그가 잠에서 깬다면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큰일이기에 그저 다행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사실은, 내가 무서워서 그런 것일지도 몰라.’ ========================================================= ....어영부영 탈출하기.;; 이번에는 늦어버렸군요; 기말 준비도 있고, 이것저것 수행평가에다.. 으윽, 공부를 너무 안 했더니(=탱자탱자 놀기만 놀고) 너무..[...] 메일은 donghee425@hanmail.net으로 주시고요. 즐독하세요~^^ 제 목: 공녀(貢女) : 제25화 [어둠의 신전을 향해!](1) #. 제25화 [어둠의 신전을 향해!] * * * * * * * * * * * * * * * ‘하나에서 열까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수상쩍은> 기운을 풀풀 풍기고 다니고 있다’는 말이 가장 적당할까. ============================루피아의 자서전================= “여기서는 이쪽으로 가면 돼요.” “…….” 환히 웃으며 말하는 아유니를 바라보는 루피아의 얼굴근육에 가느다란 경련이 일었다. 잔뜩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최대한 자제한다고 하는 것이겠지만, 차라리 어그러진 얼굴이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의 얼굴은 괴상해졌다-그리고, 그 얼굴에는 ‘어떻게 그걸 다 알아!’라고 써 있다-. ‘여기는 대체 어디야…?’ 그녀는 짧게 한숨을 내쉬면서-물론 아무도 모르게- 아유니가 그녀의 눈을 또렷하게 쳐다보며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어째서 그런 것들을 알고 있는지, ‘하나에서 열까지’ 의심스럽지만, 본인이 확실하다고 말하고, 또 그런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다. ‘이곳에 온 근본적인 이유는 마신 클리오라의 신탁 때문이죠.’ 그래, 한동안 잊고 있었지만. ‘그렇다면, 그 근본적인 원인을 푸는 것이 가장 빠른 해결방법이 아닐까요?’ 그야 그렇기는 하다. 그래서 이렇게 무모한 일임을 알면서도 도망쳐 나온 것이고 말이다. 사실 행운이었다. ‘첫 번째로, 라샤린이 성의 경비에는 저어어어언-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것과, 그 주인인 라샤린도 비몽사몽(?) 중이라서 탈출이 쉬웠다는 것. 그리고, 어떻게 된 일인지 마왕이 너무 허술했다는 것, 세 번째로…….’ 저 아유니라는 여자가 탈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 정말이지 빈틈없다, 라는 말은 그녀를 위해 있는 것 같았다. 전혀 무대책, 아무런 생각 없이 몸만 쫄래쫄래 따라 온 그녀와는 다르게 말이다. 어떻게 그런 것들을-밧줄, 비상식량, 두꺼운 로브 등등- 구할 수 있었냐고 물어보면 돌아오는 대답은, 언제나 한결같이 ‘주웠어요.’로 일관되었다-말도 안 되는 얘기야, 도 똑같이 되돌아갔다-. 그녀들은 지금 축축한 공기로 가득 차 있는 어두운 지하 동굴에 들어와 있었다. 정적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크게 울리는 발자국 소리와 때때로 들려오는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뿐이다. 아유니의 얘기를 들으며 루피아가 떠올렸던 것은, 이곳에 처음 왔을 때의 생각이었다. 궁극적인 목표는 탈출. 필수조건으로는 그녀와 그녀의 친인에게 아무런 피해가 가지 않는 것. 섣불리 탈출을 시도할 생각을 하지 못했던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녀가 도망해서, 만에 하나 성공적으로 탈출을 한다 해도 그랬다가는 금방 그녀의 가족들에게 피해가-라고 불리기에는 너무 큰 것-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6일 이내로는 돌아가야 해.’ 정확히 말하면, 주어진 시간은 5일 정도였다. 지금은 아마 아침일 테고, 오늘까지 합한 시간이었다. 왜냐하면 ‘서열 대회’에 출전해야 하니까 말이다. 순조롭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출발하면서부터 버렸지만 말이다. 루피아가 나지막이 내쉬는 한숨소리를 들은 세키라 역시 덩달아 한숨을 쉬었다. 어딘지 가슴 한 구석이 굉장히 답답했다. 숨쉬기가 힘들 정도로. 내색하고 있지는 않지만 에리나 역시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을 것임을 세키라는 확신했다. 자신과는 달리 에리나는 지금 이 곳에 발을 디디고 있는 일 자체가 계약위반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유리아덴이라는 마족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을 대가로 마검을 얻었고, 에리나 성격에 계약위반일 수도 있는 일을 하는데 마음이 편할 리가 없을 터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유니가 제의한 이 일은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에리나에게는 영영 무리이겠지만, 세키라와 루피아, 다른 공녀들에게 있어서는-… 하다못해, 이유라도 알고 싶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클리오라의 암흑교황이라면 알고 있을 수도 있어요. 그는, 마신 클리오라와 직접적인 교신을 경험한 사람이니까요. 신탁이란 언어로써 전달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의지(意志)가 전달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유를 알고 있을 수도 있어요.’ ‘제가 교황이 자주 찾는 은신처를 알고 있어요. 그곳으로 가는 지름길도. 이곳에서 탈출을 시도하자고 말했던 것은 지름길이 아주 가까워서죠.’ 에리나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에리나는, 칼날 같은 눈으로 아유니를 쏘아보고 있었다. 세키라는 지끈지끈거리는 발을 억지로 떼어 걸음을 옮겼다. 이럴 때면 스스로가 정말이지 한심스러워지고 만다. 저절로 그녀의 머릿속에는 두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의 동생 에드윈드와, 아로데. 일이 이렇게 진행되어 버렸으니, 아마 전처럼 편하게 대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묘하게 바래버린 기억이 세키라의 머릿속에 잠시 들어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드는 왠지 모를 상실감. “…….” 세키라는 다시 걸었다. * * * * * * * * * * * * * * * “희미하게 남아있는 흔적으로 봐서는, 역시 그 네 사람 중에 ‘에우로카엘’이 있는 게 확실합니다.” 로이드윈의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아로데와 유리아덴의 얼굴 역시 차갑게 굳어 있었다. 이디스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 있지 않은 무표정한 얼굴로 셋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로이드윈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에우로카엘이 공녀들 사이에 섞여 이 마계에 왔다는 것은 익히 짐작하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 능구렁이 같은 여자가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을 뿐더러, 그 여자라면 마계에서도 충분히 그들 모르게 섞여 숨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스파이로, 그녀만큼 좋은 조건을 가진 이가 있을까. 하지만, 그 넷, 아니 정확하게는 그 셋 중에는 에우로카엘이 없기를 바랐다. 그는 아유니를 의심했다. 아유니가 에우로카엘이라면 일이 훨씬 쉬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루피아에 대한 의심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에리나는 아니었다. 그 여자의 성격이나 입장으로 볼 때, ‘계약’같은 허위로 꾸밀 수 없는 짓을 할 리가 없으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세키라라고 보기에는 그것도 무리가 있는 것 같았다. 그 유약한 성격에 말이다. 하지만, 루피아나 아유니는 달랐다. 수상한 것으로 치면 아유니가 더 수상하지만, 그녀에게는 이렇다 할 것이 없었다. 가끔씩 내보이는 이상한 눈빛만을 제외하면, ‘조용하다’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머릿속이 어지러워지자 그는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가만히 그의 보고를 듣고만 있던 이디스의 입이 열렸다. “3일. 단 3일만을 주겠다. 그 안에 찾아내.” 로이드윈은 비장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는 바로 몸을 옮겼다. 아로데는 로이드윈이 몸을 옮긴 그 자리에 서서 이디스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유리아덴은 그의 뒤에 가만히 섰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로데는 이디스를 똑바로 올려다봤다. 이디스 역시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맞받았다. 그리고 슬쩍 입 꼬리를 끌어올려 피식 웃었다. “뭘 말인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로데의 얼굴은 마치 얇은 얼음막이라도 둘러놓은 것처럼 차갑고 딱딱했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표정이라고 생각하면서 이디스는 다시 피식 웃었다. 그가 기억하는 것이 옳다면 저토록 차갑게 굳은 표정은 20년 전 그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것도 아주 한순간이었다. 말하자면, 그가 그의 아버지와 카마프를 죽이고 난 뒤 아주 잠시 지었던 그 표정이었다.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가?” 지금 공녀들이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이유는, 클리오라의 뜻이 그러했기 때문이었다. 친히 그녀들에게 ‘축복’까지 내리면서 그녀들이 이곳에서 살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주었다는 것은 어찌 되었든 일단 최소한의 대우는 해주라는 뜻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마족들이 다른 때 인간들을 대하는 것처럼 그녀들을 대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균형이 깨어졌다. 그녀들은 그들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탈출을 감행했다. 특히 유리아덴은-. 그는 에리나와 ‘계약’을 했다. 그 조건은 에리나가 그의 곁을 떠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의 것이 되었고, 그 대가로 힘을 얻었다. 아로데는 힐긋 유리아덴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속을 읽을 수 없는 얼굴을 하고, 그는 이디스를 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아로데는 알 수 있었다. 이럴 때는 건드리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다만, 이 일에 대한 책임은 확실히 지게 해 주셔야 합니다.”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유리아덴이 끼어들었다. “제 공녀에 대한 일은 제가 직접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저 역시.” 두 마족의 단호한 눈빛과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보며 이디스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두 마족을 응시하던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 가지 묻겠다.” 그는 팔걸이에 얹은 한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대들은 지금, 공녀들이 감히 탈출을 했다는 것에 대해 건방지다고 느껴 그러한 행동을 보이는 것인가? 아니면, 배신감인가?” “…….” 아로데와 유리아덴은 입을 꾹 다물었다. 분명 이것은 배신감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이걸 두고 갔다. 이게 무엇인지 알고 있나?” 이디스는 루피아가 두고 간 물방울 모양의 보석이 달린 목걸이를 들어올려 보였다. 아로데는 차근히 기억을 더듬어, 그것은 분명 세키라가 내밀었던 루피아가 절대 두고 갈 리 없다던 그 물건임을 떠올렸다. “루피아는 실수를 한 가지 했다.” 이디스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아로데와 유리아덴의 얼굴에 짧은 깨달음이 스치고, 놀란 시선이 그의 손에 쥐어져있는 목걸이로 향했다. “아로데.” “네- 넷!” “만약, 치를 떨도록 싫어한다면, …놓아주려고 생각했다.” 어울리지 않게 유약한 말이었지만, 그건 그의 진심이었다. 너무나 맹목적이 되어버리기 전에 그는 그녀에게 자신에게서 빠져나갈 기회를 주려고… 했었다. 그의 기억 속의 아버지는, 카마프에게 굉장히 맹목적이었다. 오직 그녀 하나만이 그를 숨쉬고 살아갈 수 있게 할 수 있는 것처럼. 그는 모든 것을 혼자 하는데 익숙했다. 이 마계에서 살아남아 강해지는 것까지, 그는 언제나 모든 것을 혼자 처리해왔다. 지금은 아로데와 로윈, 유덴이 그의 곁에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20년 전부터일 뿐이었다. 그 전까지 그들은 그저 방관자일 따름이었으니까. 그는 알고 있었다. 그날, 그 꿈을 꾼 이후부터 아버지의 말과 모습에서 그는 이후 자신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예측할 수 있었다. 분명 아버지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말이다. 두려움. 그는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가끔씩 눈앞에, 20년 전 카마프의 마지막 얼굴이 어른거린다. 그건, 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표정과, 얼굴은. 그제까지 그가 보아왔던 얼굴들과는 확실히 차이가 났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가 무너지면서 그녀의 심장을 뚫고 지나간 검에 심장을 꿰뚫린 아버지의 표정이 떠올랐다. 이제야 카마프가 그에게 남기고 간 수수께끼 같은 말들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그는 인형에 불과했다- 그건 그녀가 정확히 꿰뚫어 본 것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느끼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인형에 불과했다.(스스로 너무나 많이 되뇌어 지겨워져버린 말이지만) 희망이 생겼다. 이 목걸이를 놓고 간 것은, 그녀가 그를 ‘치를 떨 정도’로는 싫어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아닐까. 깊은 안도감이 다시금 그를 감싸 안았다. “내가 요즘 느끼고 있는 게 뭔지 아나?” “주군.” “나는, 의외로 너와 비슷했었다는 사실이다.” “네?” 아로데와 유리아덴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모양을 보고, 이디스는 보기 드문 웃음을 짧게 흘렸다. * * * * * * * * * * * * * * * “유덴.” “…….” 아로데는 유리아덴을 불러 세웠다. 유리아덴은 멈춰 섰지만, 그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어떻게 할 생각이지?” “…….” 마족의 계약은 그 무게가 가볍지 않다. 마족도, 한 번 계약을 잘못해버리면 그 자신도 충분히 자멸되어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것이 계약이라는 ‘약속’인 것이다. 인간을 제외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 생명체란 없다. 특히 그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한 계약이고 약속이라면 생명보다 더한 무게를 지닌다. 그런 계약을, 에리나는 어겨버렸던 것이다. “글쎄, 너는?” 유리아덴이 되물었다. 차갑게 언 표정으로 아로데가 대답했다. “주군께도 말씀드렸듯이, 이 일에 대한 책임은 확실하게 지게 할 생각이다.” "…마찬가지.” …라고 해 두지. 유리아덴은 속으로 말을 잘라 삼켰다. 여전히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발길을 옮겨 사라지는 유리아덴의 뒷모습을 보며 아로데가 중얼거렸다. “어리석은 짓을 했군. …에리나.” ================================================================= 자♡ 일단, 복귀의 스타트는 이걸로-. 이제 방학만이 남았습니다. 신혼일기도 분발해야겠죠. 음음..; 시험을 완- 전히 망쳐 버려서('망친다'는 걸로는 부족할 정도로요), 좀 찝찌비리한 감이 남지만, 이제 지나가 버린 것을 어떻게 하겠어요. 다음을 기약해야죠. 수행평가도 그렇고, 시험도 그렇고. 학원도..[버엉] 아하하. 여름방학이 되기 전에, 많이 많이 써 두어야죠. 여름방학에도 많이 써야 할 테고..; 흐음, 정신없네요.[..] 메일은 donghee425@hanmail.net으로 보내주시고요. 리플도 많이 달아주세요. 그럼 즐독하세요^^ 제 목: 공녀(貢女) : 제25화 [어둠의 신전을 향해!](2) #. 제25화 [어둠의 신전을 향해!] * * * * * * * * * * * * * * * “그래서…… 지금 이 상황이 된 겁니까? 형님.” 카에리드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트로에와 에드윈드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눈앞에 펼쳐진 기이한 풍경을 바라보았다. 전말을 대충 들어보자면, 지금 이 화이트 드래곤이 바르에든에게 반했다는 줄거리인데-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트로에는 다 이해할 수 있었다. 안 그래도 화이트 드래곤에게 도움을 구해야 하는 상황이라 암담하기만 했고, 카에리드 형님을 그렇게 보내는 것도 마치 사지(死地)로 내모는 것 같아 굉장히 불안했었기 때문이다. 그런 형국에 드래곤이 바르에든에게 반했다니, 잘된 일이 아니겠는가.(보아하니 본인에게는 불행인 것 같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그것 말고도 또 하나 더 있었다. “……바르에든 형님. 한 가지 묻겠습니다만.” 괴롭다기보다 굉장히 난처한 얼굴을 하고 한쪽 팔을 히투니아(화이트 드래곤)에게 내맡기고 있던 바르에든이 트로에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트로에는 뭔가 고민하는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째서 ‘남자’이신 거죠?” “…….” 그렇다! 마치 강아지처럼 바르에든의 팔에 찰싹 붙어서 아양(…)을 떨고 있는 히투니아는 다름 아닌 남자였던 것이다. 그것을, 트로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일부 귀족 중에는 남색(男色)을 즐기는 사람이 더러 있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바르에든이 설마? 에드윈드와 트로에의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소문과 상황, 그리고 예측들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단 한 번도 레이디와의 소문이라곤 없었어! 저 얼굴로 말이지.’ ‘어울려 다니던 친구들의 말도 훈련소와 저택을 오가는 생활뿐이었다고 하고-.’ 설마, 설마, 설마, 설마! 하얗게 질려가는 두 사람의 얼굴을 보며 바르에든이 소리를 빽 질렀다. “대체 무슨 생각들을 하는 건가! 아니야!!” 그리고는 히투니아를 떼어놓으려 하다 결국 실패하고, 다시 발악. 이제까지 이곳에 오면서 보아왔던 패턴이 다시 시작되려하자, 카에리드는 그쯤에서 동생들의 시선을 끊었다. 뭔가 엄청난 것을 본 듯이 멍한 얼굴을 하고 있던 두 사람의 뺨을 두드려주면서 그는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을 그들에게 상기시켰다. “이제부터 에크라의 ‘엘프의 숲’에 가서 그들에게서 ‘돌’을 받아내는 것만 남았어. 맞아, 에드윈드?” “네… 네? 아, 네.” “그럼, 서둘러야겠군.” 지금 에드윈드의 수중에는 히투니아에게서 받은-거의 내던지듯 주던- 지도조각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 엘프의 마을에 가서 ‘돌’을 받아내면 모든 준비는 끝나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돌에 그려진 지도조각의 나머지가 목표였다. 다시 말해, 한 번 볼 수 있기만 하면 끝나는 일이라는 것이다. ‘잠시 빌리기만 하는 건데 뭐. 괜찮을 거야~’ 문제는, 과연 엘프들도 그들의 말을 믿어줄까 하는 것과, 그들이라면 돌 위에 새겨진 지도조각의 나머지가 무엇을 막는 것인지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에드윈드는 그런 생각을 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베키가 보고 싶다! 으아악! 어떻게 끝까지 연락 한 번 없어?! 돌아가기만 해 봐라!’ 그 시각, 베키는 왠지 모를 오한에 몸을 떨었다고 한다. * * * * * * * * * * * * * * * 똑, 하는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루피아는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왜인지 머릿속이 멍하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은, 분명 불안하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녀는, 이 상황이 굉장히…… 그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말 이 동굴의 끝에 암흑교황의 은신처가 있기는 한 걸까? 뭔가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질러버린 것만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에리나가 지금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잘 안다. 하지만 꼭 같이 가고야 말겠다는 에리나를 말릴 도리가 없어 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이다. 에리나의 고집은 자타가 공인하는 것이니까. 목이 허전했다. 그녀의 목에는 마녀 에드라스가 준 붉은 루비가 달린 목걸이만이 걸려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끌러놓고 와 버린 어머니의 목걸이. 그것 또한 그녀의 마음속에 앙금처럼 남아 그녀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루피아…… 안 자?” 에리나가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루피아는 에리나가 누워있던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졸리지 않으니까. 난 한참 잤잖아.” 에리나는 옆에 있는 세키라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조심하며 몸을 일으켜 루피아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루피아는 옆의 모포를 더 넓게 깔아 자리를 마련해주며 앉으라며 바닥을 툭툭 두드렸다. “…어떻게 생각해? 루피아, 내가 잘못한 걸까? 그런 계약 따위 하지 말았어야 했을까?” 루피아는 아직 한 번도 그 문제에 대해 뭐라고 자신의 생각을 말한 적이 없었다. 에리나는 무슨 말이냐는 듯이 자신을 바라보는 루피아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봤다. 계약을 지켜야하지만, 그녀로서는 세키라와 루피아만을 보내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정말 이 마계를 떠나느냐, 떠나지 않느냐라는 선택의 순간이 오면 그녀의 선택은 당연히 ‘떠나지 않는다.’이겠지만 지금은 아직 아니었다. “아니…… 뭐.” 에리나는 루피아의 다음 말을 침착하게 기다렸다. “잘못한 것은 아니야. 에리나. 그 점은 안심해도 좋아.” 루피아가 피식 웃으며 에리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2살이나 어린 이 친구는, 마치 동생을 대하듯이 지금 그녀를 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이 기분이 나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바로 에리나가 한 계약이라는 것일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다들 그럴 정도의 용기와 결단력이 부족했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뿐이야.” 하지만 개인적으로 루피아는 섭섭했다. 이곳에서 같이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을 함께 찾았으면 했는데 말이다. 에리나는 굳은 표정이 되어서 말했다. 비장한 얼굴. “아무도…… 날 비난할 수 없어. 나조차도. 그리고 우리들 중 누구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서 그 어떠한 비난과 비꼬인 말들을 들어서는 안 돼!” 에리나는 이곳에 왔던 날을 다시 상기했다. 스스로의 발로 황실의 마차에 오르던 그 때, 아버지와…… 멀리 떠나가 있는 오라버니. 변변찮은 작별의 시간조차 가지지 못한 채 그녀는 이곳으로 왔다. 그곳에서의 생활을 정리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똑똑히 알았다. 나라에서 ‘팔아버린’ 하찮은 ‘제물’이란 것을. 그녀들의 ‘목숨’으로 그들의 생명을 이어가고 있으니-… 에리나는 그때 다짐했다. ‘절대로, 누구에게도 비난 따위 할 수 있도록 허용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그 누구에게도 그럴만한 자격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있는 존재가 생겨 버렸다. “난…… 내가 스스로 약속을 어겨버리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어.” 에리나가 한숨을 쉬듯이 말했다. 이 말 한 마디로, 루피아는 에리나가 후회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가는 치를 거야. 정당하게. 하지만…… 휴우.” 에리나는 말을 멈추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루피아는 싱긋 웃으며 몸을 일으키는 에리나에게 말했다. “조만간 결론이 나겠지, 어떻게든…….” 기분이 시원치가 않았다. 이건 분명, 자신이 ‘도망’을 치고 말았다는 데에서 오는 수치심 비슷한 감정일 것이다. 이 루피아가 도망 따위를 치다니. 절대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하지만 루피아는 등을 꼿꼿이 펴고 고개를 들었다. 부끄러운 짓 따위가 아니다. 그녀는, 스스로가 판단해 가장 합리적이고 현명하다고 생각되는 행동을 취한 것이다. 그래, 그녀가 이제까지 그래왔듯 이곳에 온 뒤로 단 하나밖에 없었던 목적을 향해 달려가면 되는 것이다. ‘살아남느냐, 살아서 돌아가느냐.’ * * * * * * * * * * * * * * * 조용하고 안온한, 부드러운 기운이 모든 것을 감싸 안을 것만 같은 신성한 땅. 암흑교황 라우데스는 언제나와 같이 평온한 마음으로 그의 신께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가슴에 새겨진 교황임을 상징하는 클리오라 교단의 신성마크를 제외하고는 그의 신분을 알려주는 표식 따위는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그의 의복까지 수수하고 낡았다. 구름처럼 하얗게 기른 수염이 그의 얼굴의 반을 덮고 가슴까지 내려와 있었으며 내리깐 두 눈 주위에는 주름이 가득했다. 클리오라의 의지를 한 몸에 받은 마족. 그는 마족들에게 적절한 양의 경외를 받고 있었다. 기도를 하고 있던 그의 주름잡힌 눈이 슬며시 뜨여졌다. 지혜와 현명함을 담은 총명한 푸른 눈이 드러났고, 모든 마족은 아름답다는 일반적인 상식에 맞지 않게 늙은 그의 몸이 움직여, 그는 등을 꼿꼿이 세우고 일어섰다. “드디어 이 곳에 오려는가.” 그는 클리오라의 신상(神像)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런 그의 옆으로 길게 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라우데스.” 부드러운 톤의 음성이 교황의 이름을 불렀다. 마계에서 그를 이름으로 직접 부를 이는 몇 없다. 라우데스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에드라스인가. 오랜만이로군.” “아아, 그래요. 라우데스…… 나는 그대가 이곳에 있는 줄 알면서도 일부러 찾지 않았으니까요.” 라우데스와 에드라스는 그 연배가 비슷했다. 하지만 에드라스의 겉모습이 늙지 않은 것은, 그가 신을 섬기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신을 섬기는 자들은 신에게 보호를 받고, 따라서 싸울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육체는 늙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랑스러운 것이었다. “그대는 알고 있겠지, 에드라스. ……이제 곧 도착하게 된다는 것을. 나에게.” “……예.” “클리오라님께서 그런 신탁을 내리셨을 때 나는 이 사태를 예상할 수 있었다네. 이것 또한 그분 의지의 하나, 신을 섬기는 자로서 나는 무엇도 할 수가 없었네.” 그는 클리오라의 뜻이 반역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분의 뜻이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가기도 했다. “후후… 필연적인 것이죠, 라우데스님.” “으음…… 이제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예언자이기도 하신 암흑교황께서 모르신다면 그것을 저 또한 알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단 한 가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저는 군주를 믿습니다.” 라우데스는 피식 웃고는 밝게 웃는 에드라스를 보며 ‘역시’하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걱정을 지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강금 당하고, 그리고 거의 내쫓김을 당하고 말았지, 그 아이는…….” “…예.” “에드라스, 한 가지만 말해드리지. 이건 이 라우데스가 단 하나 남은 친우를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말이 될 게야.” 에드라스는 말없이 기다렸다. 라우데스는 다시 본연의 기도하는 모습으로 돌아가 그를 등 뒤에 둔 채로 말했다. 마치 기도문을 읽는 듯한 톤으로 말이다. “이제 곧…… 머지않았네.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날 거야. 모든 것은 비틀리게 될 걸세.” ================================================= ...이게 과연 뭣하는 짓일지? 빨리 사건종료(...)를 외쳐버리고 싶은 네르입니다.[;;] 빨리빨리 적어야 할 텐데... 알고는 있지만 머리가 안 따라주네요. 으휴.. 멜은 donghee425@hanmail.net으로 보내주시고요, 리플 많이 달아주세요. 즐독하세요♡ 제 목: 공녀(貢女) : 제26화 [이곳에 온 이유](1) #. 제26화 [이곳에 온 이유] * * * * * * * * * * * * * * * “그런…….” 미카엘이 꽉 막힌 숨을 뱉으며 어이없게 중얼거렸다. 그의 앞에는 에우로카엘에 관한 것을 알아오라고 했던 시즈니엘, 하즈아리, 요시피아나, 에리엘, 체르비엘이 서 있었다. 그들이 한 말들을 머릿속에서 천천히 되새겨 본 미카엘은 끔찍하다는 듯이 눈을 꽉 감았다. ‘이렇게나 일이 커져버렸을 줄은…….’ 표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30년 전부터이지만, 사실은 그 훨씬 이전부터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음이 틀림없었다. 미카엘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손끝이 차게 아려오며 식은땀이 흘렀다. 아직도 보고한 내용을 사무적으로 읽던 요시피아나의 음성과 그 내용이 귓가에서 쟁쟁하게 울리고 있었다. 600년 전 그녀를 데려온 사람이 바로 미카엘 그 자신이었기에, 그가 현재 상황에 대해 죄책감과 책임감을 느꼈다. 그는 답답한 마음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옛날의 기억을 슬그머니 끄집어내었다. 게다가 그녀의 존재가 드러나게 된 것도 그녀가 태어나고 100여년이 지난 후라고 한다. 다시 말해, 그때까지 그녀는 마계에서 살아남아야 했다는 것이다. 그 연약하고 작은 아이는 ‘그’ 마계에서 살아남아…… 아니, ‘살아남다’라고 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을 듯싶었다. 그녀는 마왕성 깊은 곳에 감금당해 있었으니까 말이다. 마계에서 천족과의 혼혈아는 당연히 배척과 경멸의 대상이었으며 그녀 같은 어린 아이는 차라리 감금당해 있는 것이 나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는 그녀가 감금당해 있는 상태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마계의 그 약한 빛에도 익숙하지 않은 듯 잔뜩 낯을 찌푸리고 그를 신기하게 올려다보던 꼬맹이의 얼굴이 다시금 떠오르자 그의 심장을 옥죄는 듯한 죄책감은 더 심해졌다. 그 아이를 데리고 오기는 했으나 미처 돌봐야한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한 그는 그녀에게 그다지 신경을 써주지 못했고, 그 결과 그녀는 이 천계에서마저 천천히 고립되어 갔다. 문득문득 ‘전에 데리고 온 그 애는 어떻게 됐을까’하는 궁금증이 떠오를라 치면 그를 들볶는 다른 문제가 연이어 발생하곤 했다. 천계장의 자리는 그만큼이나 바빴으며 그는 그 오랜 시간동안 변변찮은 휴가 한 번 없이 늘 일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애가 설마, 그 ‘로헤델의 별’이었을 줄은.” “끔찍한 일이지.” 하즈아리가 이를 악물고 되받아쳤다. 미카엘과는 달리 그는 지금까지도 에우로카엘을 감싸주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물론 그 전까지는 죄책감과 미안함이 있었다. 그 어린 아이를 홀로 내버려뒀다는, 순전히 그런 것들에게서 발생한 감정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아니었다. “미카엘이 에우로카엘을 천계에 데리고 올 때까지는 전혀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았어.” 체르비엘이 말했다. “알고 있어……. 요시피아나, 말해 봐. 이제 어떻게 될 것 같지?” 미카엘은 침중한 어조로 체르비엘의 말에 답한 뒤 요시피아나에게 말했다. 시종일관 냉정하고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던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내 말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지금 가장 심각한 문제는 ‘로헤델의 별’을 따르는 무리들이라고 본다. 그들은 이미 천족의 틀을 벗어났어. 오르가프님을 가장 믿고 따라야 할 우리 천족들에게, 오르가프님 외에 다른 존재를 우러러본다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 일이지. 그들은 천족이자 천족이 아니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다시 뜨여진 요시피아나의 눈에서는 새파란 분노가 흘렀다. “바로 그런 ‘천족이나 천족이 아닌 자’가…… 이 천계의 반을 넘어섰다는 것이지!!” ‘로헤델의 별’… 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로헤델’은 타락천사 중 하나의 이름이었다. 맨 처음 타락천사가 되었던 루시퍼를 제외하고 천계사상 두 번째로 탄생한 타락천사의 이름. 그녀는 모든 이의 눈을 멀게 할 만큼 아름다웠고, 또한 영리하고 똑똑했다. 그리고 강했으며 오르가프 또한 그녀를 사랑해 그녀는 열세 번째 아이의 후보에- 아니, 거의 열세 번째 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녀는 뛰어남을 자랑했다. 그러나 그녀는 언제나 자기보다 나을 것이 없다고 여겨지는 12대천사가 그녀의 위에 있는 것을 싫어했고, 또 그들을 시기했다. 그리고 그녀는 반란을 꾀했고 자신의 매력과 능력을 이용해 제2의 내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 능력의 일부만을 남겨둔 채 소멸되어 버렸다. 그 파편은 이 천계 어딘가에 있다고 하지만 그것의 정확한 소재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로헤델의 그 파편을 천족들은 ‘로헤델의 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유와 결과야 어찌되었든 타락천사가 된 그녀는 천계사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었고, 숨은 그녀의 추종자들도 많다고 들었다. 언제나 ‘빛’과 ‘선’만을 추구했었기 때문에-비록 뒤에서 어떤 일이 있다고 해도 겉으로는- 그녀의 거리낌 없는 대담한 행동이 그들에게 대단하게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로헤델의 별’은, 에우로카엘의 손에 들어갔다. 어찌된 일인지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그 여자와 에우로카엘은……. 미카엘은 점점 더 꼬여만 가는 상황에 머릿속이 폭발할 것만 같았다. 조만간 마계에서는 서열대회가 열린다. 조그마한 계기라도 있으면 폭발해버릴 것만 같은 마계와의 외교, 둘로 쪼개져 이미 반 이상이 ‘천족이자 천족이 아닌’ 상태로 되어버린 속사정. 그들 중 하나는 중간계에 나가 있으며 오르가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말 그대로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상황이었다. ‘이 상황이라면…… 아무리 우리가 나서봤자 마계와의 <제3차 천마전쟁>은 도저히 피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미카엘은 그렇게 생각하며 10명의 대천사에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천천히…… 전쟁을 각오해두는 것이 좋겠어.” * * * * * * * * * * * * * * * 하얗게 센 긴 수염이 길게 늘어뜨려져 있고, 지혜가 가득 담긴 푸른 눈동자는 현명하게 빛났다. 비록 의복은 낡았지만 루피아들은 그의 몸에서 풍겨져 나오는 자연스러운 위압감과 존재감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동굴의 끝은, 수상쩍은 문과 연결되어 있었다. 새벽에 출발해서 동굴에서 잠들고, 그리고 다시 꼬박 반나절을 더 걸어서 그들은 그 문 앞에 설 수 있었다. 아유니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문을 혼자서 열어 재껴서 척척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전에 와 봤나? 뭐 저렇게 자연스러워? 길을 다 아는 거 보면 분명히 와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대체 언제 와봤었느냐는 말이야.’ 그녀는 거침없이 걸어서 간 길을 그대로 따라간 루피아들은 곧,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 속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는 ‘암흑교황’을 만날 수 있었다. 상상과는 다른 너무나…… 너무나 다른 그의 모습과 분위기에 루피아는 순간 할말을 잃어버렸다. 중간계에 있는 교황을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눈앞의 이 남자보다 더 ‘교황’다운 분위기가 날까? 하지만 루피아는 금방 정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암흑교황 라우데스는 당당하게 그의 앞으로 걸어온 여자가-가장 앞에 있는 여자가- 에우로카엘임을 알아보았다. 에우로카엘은 전과는 많이……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적어도 그가 기억하고 있는 모습과는. 많은 시간이 흘렀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인간의 냄새가 짙게 풍기는 것으로 봐서는 아무래도 인간을 가장하고 있는 듯했다. 그는 그것을 꿰뚫어보았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어서들 오십시오. 오시느라 수고가 많았습니다.” 교황은 인자한 웃음을 만면 가득 띠우며 먼저 인사를 건네 왔다. 루피아와 세키라, 에리나는 조금 놀랐지만 침착하게 대답했다. “루피아 엘 세느안트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쪽은 에리나 칼르니르, 세키라 에스베크입니다.” 세키라와 에리나가 중간계의 예법에 맞게 정중히 절하고, 이어 루피아도 대충 인사를 했다. 라우데스는 마주 절하며 말했다. “클리오라님의 종, 라우데스라고 합니다. 자아…… 분명 이 늙은 신관에게 찾아오신 것은, 볼 일이 있으시기 때문이겠지요? 차를 내올 테니 이쪽으로…….” 루피아는 라우데스가 뒤돌아 그녀들이 있는 이 공간을 빠져나가자, 그제야 숨통이 트인 듯 숨을 후아~ 하고 내쉬었다. 세상에! 정말 교황이야! “내 생애 암흑교황을 만나보게 될 줄이야…….” 에리나와 세키라가 꿀꺽, 하고 타액을 넘기며 긴장어린 어조로 내뱉었다. 교황은 아무리 권세가 높은 귀족가의 영애라도 그렇게 쉽게 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왕권과 신권(神權)이 잘 조화를 이루었다고 하는 시리어스 제국이다. 그래도 교황이란 분명 고위 신관이 아닌 그들로서는 감히 접하기가 어려운 높은 곳의 존재였다. 더군다나 마계의, 마신 클리오라의 암흑교황이다! ‘아무리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를 알고 싶어서 찾아온 것이지만- 어휴, 이곳에 와서는 정말 스케일 크게 노는 것 같아! 젠장, 마왕에- 최고위 마족들에, 그 다음은 교황이냐?’ 어쩌다 일이 이렇게 순식간에 진행되어 버렸는지- 한 달이 조금 넘는 마왕성에서의 생활과 이곳으로 오면서 지나왔던 에크 성과 라샤린 성에서의 일들이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정말이지… 18년이라는 살아왔던 그 긴 시간보다 훨씬 많은 일이 일어난 것 같았다. 지금에 와서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어떤 입장인지 생각하는 것조차 지겨웠다. 싫었다. 정신없고 머리가 아파서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욕심을 부려 이곳까지 왔지만(이곳에 온 이유를 알고 싶다는),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고 앉은 앙금 같은 석연찮음이 그녀를 괴롭혔다. 답답하고 답답한 마음에 그녀는 습관이 되어버린 것 같은 긴 한숨을 쉬었다. “이런…… 너무 한숨을 쉬는 것은 안 좋습니다. 차가 왔으니 들겠어요?” 헉! 루피아는 놀란 숨을 들이키며 화들짝 머리를 들어올렸다. 생각에 너무 깊이 빠져버린 나머지 교황이 다시 들어오는 것조차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그 말이 많던 아유니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건 변신이야.’ 그건 루피아의 진심이었다. 그녀에게 갖은 아양(…)을 떨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침착하게 찻잔을 들어 우아하게 차향을 음미하는 요조숙녀의 모습만이 남았다. “이제 얘기를 해보도록 하죠. 나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황은 여전히 인자한 미소를 띤 채 말하고 있었다. 두근두근, 루피아의 심장이 다시 격하게 뛰기 시작했다. 긴장을 한 모양인지 손에서 땀이 배어 나와 미끈거렸다. 교황의 모습은 이제껏 그녀가 알던 ‘마족’의 모습과는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뭐랄까, 그녀는 확실히 ‘늙은’ 마족의 모습을 처음 보았지만, 그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인자하고 현명한 느낌. 약간 상상해보았던, ‘암흑교황’다운 데는 전혀 눈에 띠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던 루피아가 문득 피식 웃었다. ‘이 마계에서 내가 상상하던 대로 이뤄진 것이 무엇 하나 있던가?’ 없었다. 마왕부터가 상상과는 정반대의 모습인데 무얼 더 바라랴? 루피아는 심호흡을 하고 숨을 고른 뒤 침착하게 자신을 다스렸다. 그리고 차분해진 마음으로 교황을 다시 똑바로 응시했다. “가르쳐 주십시오. 우리가 이곳에 와야 했던 이유를…….” ================================================== ...죄송해요, 늦었습니다. 멜은 donghee425@hanmail.net으로 보내주세요. 주말.. 이니까- 음, ...하나 정도는 더 올려야겠죠.; 제 목: 공녀(貢女) : 제26화 [이곳에 온 이유](2) #. 제26화 [이곳에 온 이유] * * * * * * * * * * * * * * * 교황의 은신처는 그의 위치에 비하면 터무니없을 만치 좁았다. 아직 일부밖에 보지 못한 그들이 확언할 수는 없었으나 그의 주 거처로 짐작되는 이 공간은 무척 검소했다. 썰렁하다는 생각이 들만큼 생활에 꼭 필요한 최소한의 가구를 제외하고는 클리오라의 성물 몇 가지가 다였다. 공녀 네 명과 교황까지 모두 다섯 명은 이곳을 충분히 꽉 차 보이게 만들었다. 루피아의 질문은, 그리고 교황의 침묵은 이 공간의 공기를 더욱 무겁게 가라앉혔다. 잠시나마 굳었던 표정이 거짓말이라는 듯, 라우데스의 눈가가 풀리며 냉각된 공기를 녹여 풀었다. 그는 여유로운 몸놀림으로 찻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을 그는 차를 마시는 데에 열중했다. 루피아는 재촉하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저 늙은 교황의 멱살을 움켜쥐고 ‘뜸 그만 들이고 빨리 불지 못해!’라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녀는 주먹을 쥐어가며 참았다. “고작해야 신관에 불과한 이 늙은이가, 알고 있다고 확신하시는 듯합니다만…?” 그거야, 하고 대답하려던 루피아는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힐끗 아유니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 짧은 눈짓을 보고 상황을 대강 짐작할 수 있었던 라우데스는 알았다는 듯이 그녀에게 그 특유의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의 눈길이 루피아를 거쳐, 아유니에게 잠시 머물렀다가 세키라와 에리나에게 닿았다. 그는 세키라에게 물었다. “아로데님은 요즘 어떠십니까?” “네?” 마치 불에 덴 듯이 화들짝 놀라며 세키라가 되물었다. “어리셨을 적에는 꽤나 말썽쟁이이셨죠. 여전하십니까?” 문득 세키라의 머릿속에 시녀, 하인들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며 좋아했던 아로데의 모습이 떠올랐다. 가슴이 아려왔지만 그녀는 쓴물을 삼키는 듯한 표정으로 간신히 짧게 대답했다. “네…….” 라우데스는 만족한 듯이 웃었다. 그리고 에리나에게 말했다. “서둘러 돌아가시는 것이 나을 겁니다. 유덴님께서 직접 잡으러 오시기 전에 말입니다.” 그 말에 에리나의 안색이 단박에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모르는 게 무얼까, 대체? 점점 더 이 신관이 그녀들이 이곳에 온 이유와 돌아갈 방법을 알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확신이 들어갔다. 그는 아유니를 왠지 모를 눈으로 잠시 바라보다 잠시 남아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슬슬 본론에 들어가려는 듯이 짧은 한숨을 토해냈다. “제가 알기로……,” “…….” “이곳에서의 생활이, 그다지 불편하지는 않으셨던 것으로 압니다만.” 마치 ‘뭐가 불만이냐?’라고 묻는 듯 들려, 에리나는 순간적으로 발끈하고 말았다. “불편하지 않으면 다 됩니까? 그렇다고 편안할 줄 아셨습니까? 이제껏 살아왔던 세계를 송두리째 빼앗겨 버렸는데-!” “그런 의도로 말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렇게 들렸다면 죄송하군요. 다만 알아보고 싶었던 것이, 제가 군주께 부탁드렸던 것들이 지켜졌나 싶어서…….” 가볍게 웃으며 라우데스가 말하자 에리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라우데스는 에리나가 뭐라고 말을 할 시간도 주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이곳에 오게 된 것은…… 분명 클리오라님의 뜻이었으나, 그대들께는 무척이나 가혹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녀들은 드디어 돌아갈 수 있는 실마리를 얻는가 싶어서 귀를 기울였다. “그러므로, 저는 클리오라님의 뜻을 거역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대들을 돕겠습니다. 허나… 클리오라님의 뜻에 대해서는 해드릴 수 있는 말이 없습니다.” “…….” 라우데스는 마족이었지만, 중간계에서 마계와 마족의 인식이 어떤지를 충분히 생각하고, 또 이런 상황에 닥친 그녀들이 어떤 마음이었을지 충분히 생각해주고 있었다. “앞으로…… 힘든 일이 있을 것입니다. 부디, 돌아서지는 말아주십시오. 이곳으로부터.” “…예?” “그대들마저 돌아서게 된다면…… 이제…….” 라우데스는 끝말을 삼키듯이 입과 눈을 꾹 닫았다. 그것은 분명, 부탁이었고, 애원이었다. 강제성을 띠지 않는. 혼란해져 오는 머릿속 때문에 그녀들 셋의 얼굴은 살짝 일그러졌다. 해명을 바라는 듯이 라우데스를 바라보았지만, 셋은 알 수 있었다. 라우데스는 더 이상 말하지 않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충분히……, 도움이 되었어요.” 루피아가 앞으로 한발 나서며 말했다. 그래, 충분히 도움이 되었다. 게다가 교황이 그녀들을 ‘도와준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대들 편이’라고 말했다. 그는 두고두고 그녀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교황이니까! ‘……이제 다 해결돼 버렸지… 만! 너무 빠르잖아?! 오늘까지 합해서 5일이나 시간이 남아 버렸다구! 어떻게 이렇게 빨리 이곳까지 온 거냐? 아니, 그것보다 여긴 어디쯤이야? 젠장!’ 될 수 있으면, 될 수 있으면 돌아가는 시기를 늦추고 싶었다. 이 마계로 온 뒤부터 한 번도 마왕의 영향권을 벗어나 본 적이 없었기에 그런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지금은 절대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뭔가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듯한 느낌이, 그를 만나면 폭발해 버릴 것만 같았다. “에리나님. 돌아가시겠습니까……?” 에리나는 라우데스의 말에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여기까지야. 여기까지.’ 그녀는 선을 그었다. 여기까지라고, 이제 더는 아니라고, 그렇게 진하고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공녀(貢女)’로 함께 행동하는 것은 이제…… 여기까지다. 에리나는 늘, 세키라가 걱정스러웠다. 의외로 아주 무모한 구석이 있는 친구라서 그런지(본인은 모르겠지만) 그녀의 눈에 세키라는 늘 위태하게만 보였다. 하지만 아니었다. 세키라는 그녀의 생각보다 훨씬 강했다. 본인은 스스로가 아주, 나약하다고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정작 다급할 때 침착한 것은 세키라였다. 아주 오래 전부터, 세 사람은 늘 함께 지냈다. 생각도 나지 않던 아주 오래 전부터 그녀들은 아마도 같이 있었던 것 같다. 울고 웃으면서, 그렇게…… 같이. 그건, 아주 오래도록-… 절대로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고, 에리나는 생각했다. “돌려보내 주세요. 부탁합니다. 라샤린 성의…… 제가 있던 방으로.”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라는 듯이 에리나가 말했다. 라우데스는 할 수 없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에 그의 큰 손을 얹었다. 그리고 눈앞을 스윽 가려주면서 인자하게 웃었다. “ΨÅ∏.(이동)” 에리나의 몸이 점차 흐릿해지면서, 에리나의 손이 얼굴 쪽으로 올라갔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라우데스의 손을 꽉 쥐더니, 이내 가루로 변해 날리듯이 사라져버렸다. “자아, 그럼… 이제 두, 아니 세 분께서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에리나의 사라진 장소를 보고 있던 두 사람은 라우데스에게로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서로 마주보고 다시 시선을 마주친 다음, 그녀들은 라우데스를 빤히 응시했다. 먼저, 루피아가 먼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 이 수밖에 없다! 그래, 도와준다고 했으니 이제 와서 발뺌하지는 않겠지? 루피아는, 라우데스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으며 말했다. “숨겨 주세요! 딱, 4일만!” * * * * * * * * * * * * * * * 이디스는 어둠이 가라앉은 바닥 위로 가볍게 내려섰다. 익숙하게 그의 몸을 휘감은 차분한 공기. 그는 뚜벅뚜벅 일정한 걸음걸이로 그 위를 가로질렀다. 그리고 얼마 걷지 않아, 그는 어둠에 녹아들어 기도를 올리고 있는 라우데스를 만날 수 있었다. 라우데스는 그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놀란 기색 하나 없이 그대로 고개를 숙여 신의 종으로써 내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었다. 이디스는 자연스럽게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곳에 있겠지?” 다 알고 있다는 투였다. 그도 그럴 것이, 로이드윈이 알아내 온 것이었으니 의심의 여지는 없었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이디스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래? 그럼 할 수 없지.” 그는 가볍게 대답하고는 다시 피식 웃었다. 그러자 라우데스가 이상해진 표정이 되었다. “……군주님. 무슨…… 기분 좋으신 일이 있으십니까?” 적어도 그가 아는 군주는 절대! 절대 이렇게 헤프게(?) 웃음을 흘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한 번 웃으면 천지가 개벽이라도 하는 듯 절대 웃는 법이 없던 마족이었던 것이다. 그는 마왕 가(家)에 대해, 충성은 하지만 결코 좋게 보지는 않는 쪽이었다. 말하자면 마왕을 ‘만드는’ 것에 대해 그는 좋지 않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것을 마왕은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그는 마계가, 아니, 마계와 천계가 무언가 아주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전대 마왕의 시절부터 그가 느껴온 것이었다. 교황의 자리에 오르고, 세월이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자 그는 어느 사이엔가 마왕 가(家)에 측은지심을 갖게 되었다. 바로 그렇게 쌓이고 쌓여왔던 마왕 가(家)의 모든 것이, ‘카디스’ 즉- 전대 마왕 시절에 터져버린 것이었다. 그 결정체가 바로 딜렌이었다. 그는 딜렌을, 하지만 그보다는 이디스를 동정했다. 그런데…… 그런데? “아니, 그다지. 그런 일은 없다.” “네? 아…… 마, 많이… 변하셨군요. 군주님.” “그런가? 하지만, 오히려 불쾌한 일이라면 생긴 편이지- 오늘도 그것 때문에 온 것이니까. 무슨 얘기인지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어디 있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다시 페이스를 되찾은 라우데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디스는 눈썹을 치켜떴지만 그 외 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즐기듯이 느긋하게 응수했다. “그렇단 말이지…… 훗! 재미있게 되려나 보군.” 확실히 마왕은 변했다. 그것을 느끼는 것은 교황이 아니라, 바로 이디스 그 자신이었다. 조그만 여유를 갖은 것 뿐인데도, 그는 그 전의 자신의 모습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말과 행동을 하고 있었다. 웃는 것이라든지, 여유롭게 대답하는 것 따위 등등, 그는 스스로의 모습에 스스로가 놀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스스로가 싫지 않았다. 그는 알았다. 분명 이 근처에-아주 가까운- 그녀가 있다. 이제…… 어떻게 할까. 우위에 선 자의 여유를 만끽하며, 그는 일단 몸을 돌렸다. 남은 4일, 아니 약 3일 동안 그는 그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었다.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은. 할 일과 목표가 정해지지 않은, 무엇을 할지 몰라서 혼란스러운 것과는 달리 그것은 굉장히… ‘색다르다’고나 해야 할까. ‘아, 아닌가? 결국 목표는 있으니까…….’ 루피아가 있을 곳으로 향하는 그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가볍게 피어올랐다. ==================================================== 에헤.. 이디스는 별로 화 안 난 모양이지만, 에리나, 세키라는 어떻게 될런지?; 일요일에 올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할머니 생신이었답니다; 이번 주 주말은, 외할머니 생신이라 부산에 가게 될 것 같고요.. 으음, 또 18일은 제 생일이에요*^^* ...[생일이 넘쳐나는 요즘] 메일은 donghee425@hanmail.net(요즘 답장 잘 못해드리죠; 죄송해요)으로 보내주시구, 즐독하세요^^ 제 목: 공녀(貢女) : 제27화 [탈출, 그 후] #. 제27화 [탈출, 그 후] * * * * * * * * * * * * * * * 기절할 것 같다. 에리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긴장한 탓에 맞잡은 두 손에서 땀이 배어나왔다. 유리아덴은 그녀가 처음 생각한 것보다 훨씬, 훨씬 더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유리알 같은 붉은 눈동자가, 전에 없이 짙었다. “계약을 어기는 일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키라와 루피아만 보낼 수는 없었어요.” “…….” 그는 대답 없이, 아무런 생각도 읽어낼 수 없는 담담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침묵에 에리나는 더 숨이 막혔다. 그녀는 교황의 도움으로 그가 기다리고 있던 그녀의 방에 올 수 있었고 대답이 없는 그의 앞에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차라리…… 오지 않았었다면.’ 잠시 그런 생각을 하다가, 에리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만약 그랬다면 사태는 지금보다 더욱 걷잡을 수 없었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에리나와 유리아덴 사이를 흐르는 공기는 무겁고 그녀를 숨 막히게 했다. 그녀는 잘못을 했으므로, 어떤 식으로든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계약을 어겨도 된다고 생각할 정도로, 계약이 쉽게 보였군.” 결론을 내리듯이 유리아덴이 말하자 에리나는 뭔가 반박할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말한 그 말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더라도 그렇게 비추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그녀에게 절절하게 깨닫게 했다. 그래,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지 않았는가? 그녀는 어렵게 말했다. “가볍게 본 것은 아니었어요…….” 친구들의 무게가 더 무거웠던 것뿐이다. 그러나 에리나는 뒷말을 삼켰다. “……웃기는군. 가볍게 본 것은 아니다? 그럼, 내가 만만하게 보였던 모양이군.” “절대 아니에요!”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에리나는 깨달았다. 그의 눈이 유리알처럼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은 그녀만의 멍청한 착각에 불과했었음을. 그 짙은 눈은 그녀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을 만큼의 깊은 분노를 담고 있었다. “절대…… 그럴 의도는. 그럴 생각은…….” 멍청하긴! 에리나는 스스로가 가장 생각하고 싶지 않은 모양새가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이미 유리아덴은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뭔가 착각하고 있나본데…….” 에리나는 왠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싸늘하게 그녀를 응시하며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러나 한 줄기 남은 자존심이 그녀를 무너지지 않게 받쳐주고 있었다. 에리나는 유리아덴의 그 시선을 마주 대하며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여기는 마계다.” “…….” 유리아덴은 이제껏 지키고 앉아있던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단호하게 말했다. 그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그녀를 비웃듯 그가 말했다. “너의 그 하찮은 자존심 따위를 내세울 곳이 아니란 말이다. 알겠나?” “하찮은 자존심 따위가 아니에요……. 친구들이에요!” 이미 미묘하게 어긋나 버렸다. 유리아덴이 있는 이 곳에 도착할 때부터 그들과 확실하게 어긋나버렸음을 에리나는 감지할 수 있었다. “마지막이에요…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라고 약속드릴게요……. 이번 한 번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에리나의 마음속에서는 체념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유리아덴이 말한 것처럼, 그녀가 하는 것은 단순한 어리광에 불과하다. 이곳에서 그딴 것이 통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녀의 어깨가 내려앉았다. “…….” “…….” 유리아덴은 말을 하지 않았다. 에리나는 이번 일로 그와의 사이에 있었던 ‘뭔가’도 확실히 깨져버렸음을 인지했다. 그게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것이 그녀를 더 안타깝게 했다. “서열대회 출전권 박탈.” “……!!”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순간 숨이 목에 덜컥 막혀버린 듯이 절망적인 눈으로 유리아덴을 바라보던 에리나는 깨달았다. ‘이제 어쩔 수 없구나. 나는…….’ 그는 정말, 정말 엄청나게 분노하고 있음을, 단순히 계약을 어긴 것 말고도 그녀가 뭔가 실수한 게 있음을 그녀는 깨달았다. 에리나의 커다란 초록색 눈동자에 체념과 함께 씁쓸함이 서렸다. “명심하도록.” “…….” “다음번이 있어서도 안 되겠지만, 만약 다음에도 이런 일이 생긴다면 이 정도에서 끝나지 않는다.” 에리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녀에게서 멀어지며 들릴 듯 말 듯 덧붙였다. “날 더 이상 실망시키지 말도록.” 순간, 에리나는 알았다. 계약 말고도 그에게 잘못한 것. 탕, 하고 문 닫히는 소리가 귓가에 닿자, 에리나는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런 바보 같은……! 아마 라샤린 저택의 고용인 중 하나일 것이 분명한 마족 하나가 그 문에서 들어서며 그녀에게 말했다. “기적이로군요. 저 상태의 유리아덴 드 샤벨님 앞에서 살아남다니. 제2차 천마전쟁 때 이후로 저 분께서 저토록 분노하신 모습은 뵌 적 없어요.” “……쓸데없는 참견.” 에리나는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말을 건네는 그를 보고 말했다. 고용인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챙기십시오. 서열대회에 갈 준비를 마치게 도와드리라는 명령입니다.” 에리나는 낮은 한숨을 내쉬고, 몸을 일으켰다. ‘신뢰. 그는 나를 믿고 있었던 거야… 그런데 그걸 나는 깨뜨려 버렸어. 계약을 어기는 것과 동시에. 그는…… 나를 다시는 믿지 않을 거야.’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말했던, 막지 않는다고 말했던 그의 말과 계약이 체결되던 때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라 눈앞을 가로막자 에리나는 마치 발에 족쇄라도 달린 듯 발걸음이 무거워짐을 느꼈다. * * * * * * * * * * * * * * * 분명 이 문 뒤에 그녀가 있음을 아는데, 이디스는 그 안으로 한 발도 들여놓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인상을 구기며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늙은 교황을 노려보았다. “왜 안 된다는 거냐!” 교황은 여유롭게 이곳을 향해 걸어가던 마왕의 표정이 점차 일그러지던 것을 생각하며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 그의 얼굴은, ……확실히 ‘볼 만한 것’이었다. “약속을 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그는 간절하게 그의 손을 붙잡고 부탁하는 그녀의 말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방금 전에는 분명 그의 기억과는 너무나 다른 마왕의 모습에, 그의 변화에 당황해 막지 못했었지만 지금 그는 그의 페이스를 되찾았다. “그래서… 내 앞을 막겠다고?”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를 내며 그를 향해 붉은 눈동자를 더욱 짙게 붉히는 마왕이 말했다. 그건 분명 그의 인내심이 슬슬 한계에 이르렀다는 증거이겠지만 교황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라우데스는 마왕을 어르듯 말했다. “마족이라면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져야 하는 법. 저 역시 마족입니다, 군주님.” “…내가 네 사정까지 봐줘야 하는가?” 교황은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는 허탈함을 느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로서는 할 만큼 다 한 셈이었다. “알았습니다. 할 수 없군요. …휴우!” 라우데스는 그의 친우, 마녀 에드라스를 떠올렸다. 목표만을 향해 달려가는 이 마왕은, 어쩌면 가능성이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그가 보기에는 참 아슬아슬했다. 이다지도 맹목적이다가는 자칫 잘못하면 모두 잃고 상처투성이가 되어 버리기 십상이었다. ‘주변도 둘러볼 줄 알아야 할 텐데…… 쯧쯧!’ 그는 마왕의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했다. 처음이어서, 그래도 더 맹목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밀어붙이다가 잘 되지 않으면.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렇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 문 뒤에 세키라와 루피아가 있는 것은 확실하나, 교황이 비킨다고 문이 저절로 열린다는 것은 아니다. 이디스는 성큼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문…… 열어.” 지켜보고 있던 교황은 쯧쯧 혀를 찼다. 그런다고 열리나, 열리길. 쯧쯔…… 어? 달칵! 너무나도 허무하게 문이 열려버렸다. 열면 안 된다고 버틴 교황이 한순간에 바보가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열린 문틈으로 이디스가 발을 내딛었다. 그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비장하게 그를 응시하는 루피아를 만날 수가 있었다. 세키라는 등을 떠미는 루피아의 손길에 못 이겨 루피아와 이디스가 마주하고 있는 그 곳을 빠져나갔다. 결국 둘만 남은 상황 속에, 루피아는 그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다. 이디스는 그를 노려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루피아가 그의 시야 안에 들어오자 안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알았다, 불안해하고 있었음을. 마음이 푹 놓일 만큼 그는 그녀를 다시 만나기 이전에 뭔가에 불안해하고 있었고 초조해했다. 또, 그녀를 만나고 싶어 했다. 그는 품을 뒤적거려 그녀가 남기고 간 목걸이를 꺼냈다. 그의 손에 걸린 목걸이를 보는 그녀의 눈이 순간 흔들렸다. “놔두고 간 것은 가져가야지.” 그는 루피아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그것을 그녀 앞에 내밀어보였다. 루피아는 잠시 망설이다 손을 내밀었다. 그는 그녀가 목걸이에 손을 대는 바로 그 순간, 그녀의 손목을 홱 잡아채 그녀를 꼭 껴안았다. 흠칫 놀란 루피아가 팍 하고 급히 손을 거둬가려고 들었지만 그때 이미 그녀는 그의 품안에 있었다. 마치 고양이가 가르랑거리듯이 그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거 놔요!” “싫어.” “이것…… 놓으란 말예요!” 루피아는 다시 도망치려고 그랬다. 문 앞에서 교황이 마왕을 막고자 말다툼하는 소리를 어렴풋이 들었을 때, 그녀는 다시 도망치고자 했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마음을 고쳐먹었다. 지금 도망친다고 해도 나중에는, 그리 머지않은 나중에는 반드시 마주쳐야 할 일이다. 지금 도망친다고 해도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싫어…… 싫다구요! 이거 놔요!!” “소용없어. 이제…… 너무 늦었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마주하기로 결심했지만- 루피아는 마구 몸부림쳤다. 안 돼! 그녀는 결코 마왕, 이디스가 무서워서 탈출 따위를 결심한 게 아니었다. 그래서 도망치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이 마계에 공녀들이 와야 했던 이유를 알고자 했던 이유가 있기는 했지만 그것보다 루피아는…… 그녀는, 자기 자신이 더 무서웠다. 결코 이디스가 무섭다거나 한 것이 아니었다. 그날 새벽, 이디스에게서 벗어나면서 그녀는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생각보다 상황이, 그녀 자신의 상태가 훨씬 더 심각하다는 것을. 가볍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실제로, 실제로 그녀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던 것은, 저 자신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 상태에서 그를 만났다가는 정말 큰일이 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보고 싶었어. 네가 이걸 남겨두고 가지 않았더라면, 나는 미쳐버렸을 지도 모른다.” 덜컹!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녀는 자신을 안은 채 웃음을 띠우는 그를 보며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멍청이! 바보! ……너, 결국 사고를 치고야 말았구나.’ 루피아, 그녀는, 자기 자신을 잘 알았다. 허튼 발악 따위는 다 자기 변명에 불과한 것이다. 그녀는 어렵사리 인정해야 했다. ‘……사랑하는 구나. 그렇구나. 젠장! 젠장! 제기랄…….’ ================================= 유리아덴이 화를 내는 장면에서 헤매다가..; 이제야 올려요;; 죄송해요. 요즘 너무 늦는 것 같네요;;(하지만 유덴이 대체 어떻게 화를 낼지 막막해져서.;) 토요일날 학교 마치자마자 부산에 갔다 왔어요; 어제 새벽에 도착..; 하고 늦도록 잤더니 머리가 지끈거리네요.[끄응] 23, 24일은 서클에서 놀러갈 것 같은데; 즐독하세요!;[후다닥] 제 목: 공녀(貢女) : 제28화 [고백告白] #. 제28화 [고백告白] * * * * * * * * * * * * * * * 그때 그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무슨 짓을 했는가를 퍼뜩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어버린 후였다. ============================루피아의 자서전================= 빠져나가려고 마구 몸부림을 치던 루피아가 이상하게 조용하자 이디스는 그제야 서서히 팔에서 힘을 풀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에게서 떨어질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조용했다. “왜?” “…….” 마치 무언가에 넋이 나간 것처럼 루피아는 고개를 숙이고 그의 가슴에 놓인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디스는 다시 루피아를 꽉 껴안았다. 이번에는 루피아도 반항하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깨물고, 꽉 쥐어진 주먹에 더욱 힘을 주었을 뿐이었다. “이번뿐이야.” “…….” “이번뿐이다. 내게서 도망친 것을 눈감아 주는 것은. 이번에는, 내게 이것을 남겨주었으니까 봐주는 거다.” 그는 팔 안에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에 안주하듯 눈을 감았다. 피의 그것처럼 금방 식어버리지 않는 따뜻함. 그는 그녀를 두르고 있는 팔에 힘을 주었다. “싫어해도 별 수 없어. 이것으로, 네가 나를 진저리가 날 만큼 싫어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여지를 남겼으니까.” “네 잘못이다. 내가 다시 움직일 수 있게 한.” “설사 죽어서라도…… 나는 널 놓아줄 생각 따위는 없어.” 그가 낮은 목소리로 바로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그녀의 가슴에 비수처럼 날카롭게 와 박혔다. 그의 말이 꽂힌 그 자리에서 붉은 피가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루피아는 눈물을 흘릴 수가 없었다. 눈물이…… 나지 않는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하필이면 왜 지금. 왜 지금… 그런 말을 해.’ 내가 이렇게도 약해빠졌던가? 가슴이 욱신거리며 아파오기 시작하자 루피아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물었다.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보고 싶지 않은 자신은 그의 앞에 더없이 약할 뿐이었다. “어째서?” 그건 그에게 던진 물음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녀 자신에게 묻는 말이기도 했다. “왜죠? 왜 하필이면- 나죠?” 왜? 왜 하필이면- 그였지? 왜 하필 지금이지? 그녀의 질문을 받은 그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스쳐간, 그러나 선명하게 그녀의 눈에 박힌 그 짧은 미소. “그냥. 이유 따위는 없다. 그런 게 필요한가?” “필요해요!” 이디스는 피식 웃었다. 그 ‘이유’라는 것…… 그것은 그도 역시 수도 없이 생각해보고 찾아보았다. 그러나 찾을 수 없었다. 그저 그녀였기 때문이었다는 것? 그것 외에는 딱히 이유라고 할 수 있을 만한 것이 없었다. 그가 그렇게 말하기 바로 직전, 그녀가 외치듯 내뱉었다. “왜 나인지, 어째서 지금인지! 대체 어떤 이유 때문에 이러는 건지!” “……이유 따위는 없어, 아까도 말한 것처럼. 그렇지만,” 그의 새빨간, 붉디붉은 그 눈이 그녀를 옭아맬 듯이 응시했다. 보랏빛의 자수정 눈동자 속에 그 자신의 모습이 온전히 들어가 있는 것을 계속 확인하고 싶어 하듯. “이것 하나만은 분명하다. 너는…… 이제 평생, 내 곁에서 떨어질 수 없어.” “……왜?” “묻지 마라. 클리오라님의 신탁(神託)이 아니었더라도 나는 언젠가 너를 찾아냈을 거다. 반드시.” “…….” “내가 살기 위해서. 숨쉬기 위해서. 이제, 벌써 늦었어.” “……아.” “사랑해.” “……!!!” 아…… 왜? 왜 하필 지금? 아니, 왜 하필 나는 그를- 루피아는 부들부들 떨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새파랗게 질린 그녀를 보며 그는 가슴이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욱신거리는 통증을 애써 무시하면서 그는 말했다. “그렇게나 싫은가?” “…….” 루피아는 무릎에 힘이 빠져 주저앉았다. 아니, 이디스의 팔에 의지해 무릎이 땅에 닿지는 않았지만 연속된 충격으로 넋이 나가버린 것 같았다. 잠시 뒤 루피아는 고개를 숙인 채 그의 옷자락을 꾹 움켜쥐고 부들부들 떨면서 낮게 말했다. “왜……?” 계속, 계속…… 자기 자신과, 또 그에게 묻는 똑같이 되풀이되는 의문. “왜냐구요! 대체 왜! 나는, 나는 당신을 그리 잘 알지 못하는데- 당신 역시 나를 잘 모르잖아!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건데요!!” 너는? 그러는 너는! “같이 있었던 시간조차 그리 길지 않아……. 서로, 서로 좋아할 수 없는 처지인데! 그리고 나는, 당신을 미워해야 하는데!” ‘아무리 발악을 해봐도, 미워한다고, 미워한다고 스스로 최면까지 걸어 봐도 당신이 밉지가 않아. 도저히, 싫어지지 않아.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난 그런 거 배운 적 없어…… 밉지 않은 사람을 미워하는 법 따위 나는 배운 적 없어. 배우지 못했다구…… 그런 거. 왜? 아무리 물어봐도 대답 따위 돌아오지 않아. 누가 대답해 줘!’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래도 눈물은, 어른거리만 하고 흘러내리지 않았다. 루피아는 다시 말했다. “말해 줘요. 어색하기만 했는데, 결코 자연스럽지 않았는데 어째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건지. 왜 내게 이렇게 대하는 것인지.” 그리고 스스로에게도 똑같은 질문이 돌아갔다. 처음부터 그가 마음에 안 들었는데, 거슬리기만 하고, 화가 나기만 하고, 싫기만 했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갑자기 터져버린 감정이 제어되지 않을 정도로…… 되어버린 것인지. “그런 것에도…… 이유가 있어야 하나?” 한참 후에, 이디스가 꺼낸 말이었다. 다른 사람의 상황까지 그녀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녀에게는 그 ‘이유’라는 것이 필요했다. 잠시 생각해보는 듯하던 이디스는 무슨 말을 하려는지 그녀의 손목을 끌어 소파에 앉혔다. 그리고 그 역시 그녀의 옆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는 편하게 앉아 잠시간 고른 숨을 내뱉더니 조용한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내 기억의 처음 시작은…… 온통 새카만 어둠 속에서였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루피아는 낮은 음성으로 말하는 이디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것이 그녀가 던진 질문의 답이라는 것일까? “‘아버지’라는 자가 있었지. ‘카디스’…… 이 마계에 많은 ‘예외’를 만들어 놓고 내 손에 죽었다.” 죽였어? 자기 아버지를? 루피아의 눈에 떠오른 경악을 본 그가 말했다. “그게 내가 마왕이 될 수 있는 길이니까. 카디스도 그렇게 해서 마왕 자리에 올랐어. 그는 늘 내게 ‘강해져, 그것이 네가 태어난 이유’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을 죽이고 마왕 자리에 오르라고.” 루피아는 숨을 죽였다. 이 곳은…… 이 마계는…… 그녀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잔혹한 곳이었구나. “나는 그것만을 위해 살았다. 마왕이 되는 것. 마왕이 되면…… 강해지면, 누구보다 강해져서 그를 죽이면 뭔가 바뀔 것만 같았던 거야.” “…….” “언제인지… 지금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120년 전이었을 거다. 그때, 카디스는 인간을 마계에 데려왔지.” “……!” 세키라가 아로데에게 이 이야기를 듣고 놀란 것처럼 루피아 역시 놀랐다. 마계에 온 인간이 그녀들이 처음이 아니었다니. 그것도 120년 전에, 마왕이 직접! “그녀는- 아, 아로데나 유덴, 로윈은 그녀가 여자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카디스가 ‘사랑’하는 여자였다. 그 후 100년 동안, 그녀는 ‘딜렌’이라는 또 다른 마왕의 아이를 낳고 마계에서 카디스와 살았지. 내 손에 죽기 전까지.” “카디스는, 그녀를 데려오기 전까지는 나와 똑같았다. 그러나 그녀를 데려오고 난 후부터는 달라졌지. 그는 그녀의 앞에서는 이상하리만치…… 약했다. 그리고 ‘카마프’, 그녀에게 맹목적이었지. 카마프가 다치기라도 하면 곧 죽을 것처럼 수선을 떨어댔어. 그건 딜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디스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마왕과 그 후계자는, 언젠가 죽여야 할 대상이지. 일정 기간 동안 후계자가 자신을 죽일 수 있을 만큼 강해지지 못하면 마왕은 그 후계자를 죽인다. 그리고 다시 후계자를 낳지. 그리고 기다린다.” “…….” “카디스는 무엇보다 맹목적으로, 오직 그녀의 존재만으로 숨쉬는 것처럼 행동했다. 난 이해할 수 없었어. 그리고 딜렌에게도. 그 아이는 나를 따랐지만, 그 아이는 몰랐다. 언젠가 내가 카디스를 죽일 것이라는 걸.” 딜렌? 딜렌? 루피아의 머릿속에 스쳐지나가는 그 이름은, 그녀가 기억하는, 분명 그녀의 기억 속에 있는 수수께끼의 붉은 머리 미소년의 이름이었다. 그가 마왕의 이복동생이었다니…… 루피아는 축제 날 그녀가 한 그 일이 혹시라도 정말 큰일을 벌여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다시 이디스가 입을 열자 그녀는 다시 그의 얘기에 빠져들었다. “기뻐한다는 것, 슬프다는 것. 그 아이가 느끼는 것들을 나는 알 수 없었어.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왜 여기가…… 허전했는지. 뭔가 부족하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정확히 알지도 못하는 것을 갈구했는지.” 이디스는 가슴의, 심장이 뛰고 있는 그 곳을 짚으며 말했다. 루피아는 아, 하고 신음 같은 목소리를 흘렸다. ‘정말 몰랐던 거야. 아무 것도…… 처음부터 배우지 않았으니까, 몰랐던 거야.’ 태어날 때부터 그에게 주어진 것은 오직 하나, ‘겉으로만’ 강해지는 방법이었다. 그를 사랑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그가 조그마한 기쁨조차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해 준 존재는 있지 않았다. 그는 그런 것을 배우지 못한 채 자라났고, 결국…… 얼어버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얼어버렸다는 것조차 알지 못한 채 살아왔다. “왜? 그런 것 따위는 모른다. 이유 같은 게 어떤 것인지 그런 것은 모르고, 사실 없을지도 몰라. 그렇지만…… 이곳에 온 너를, 그리고 네 눈이 똑바로 나를 쳐다보았을 때.” 그래, 보랏빛 눈동자가 선명하게 그의 뇌리에 박혀졌던 그 때.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었다. 너라면 가능하다는 걸. 나를, 언젠가 카마프가 말했던 대로 ‘인형’일 뿐이었던 나를 변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란 걸.” 아아, 신이시여. 오르가프여…… 빛의, 위대하신 빛의 신이여. 루피아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당황스러웠다. 알 수 없었지. 그래서 한동안 헤맸다. 그렇지만…… ‘꿈’을 꾸었어. 카디스가 내게 깨달음을 주었지. 그리고 알았다.” 그녀를,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솔직하고…… 맑았다. 공포의 대상 ‘마왕’인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지금 그의 눈은 더없이 맑았으며 올곧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을 숨길 줄 모르는 솔직함. “사랑해. 도망쳐도, 싫다고 해도 소용없다. 네가 내 손에 들어온 이상, 절대 놓지 않을 테니까.” ====================================== 이번에는 루피아하고 이디스만 나왔네요.^^a 저번에도 말씀드렸듯, 23, 24일에는 놀러가게 될 것 같아서...[헤죽] 즐독해주세요.^^ 덧. 삭제요청을 했던 제 글이 불쾌하셨다면 사과를 드리는 바입니다. 하지만 책이 나오면 퍼가는 곳에서는 책 나온 분량은 삭제를 해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삭제 공지도 올렸고...(더이상 서로 감정이 상하는 건 원치 않아요.) 덧2. 유키냥, 만나서 즐거웠어요^^ 케이르님, 그림 기대할게요♡ 덧3.(유난히 덧글이 많은 오늘..;)메일 보내주신 분들, 답변 보내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특히 -SO녀의그림자-님! 님의 소설까지 보내주셨는데.; 다른 분들도.; 죄송해요오ㅠㅠ 제 목: 공녀(貢女) : 제29화 [엘프의 숲] #. 제29화 [엘프의 숲] * * * * * * * * * * * * * * * “봤어? 오늘 아침에 마을에 들어 온 인간들 말이야.” 엘린이 케이르에게 작게 속삭였다. 발목을 물에 담근 채 참방이던 케이르는 엘린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그 소식은 그녀도 익히 듣던 참이었다. 아침부터 온 마을이 들썩거렸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만큼 이슈가 될 만한 일이었다. “인간뿐만이 아니라 드래곤께서도 함께 계시다던데.” 케이르가 덧붙였다. 엘린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래서 장로님들께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거라고.” 대체 어떻게 된 노릇인지……. 케이르는 혀를 차며 다시 한 번 발로 물을 튀겼다. 맑은 물소리가 그녀의 귀를 간질였다. 긴 귀를 쫑긋대며 그녀는 그 촉감을 즐겼다. 그녀의 편안한 표정을 본 엘린은 그녀도 신발을 벗고 케이르의 옆에 털썩 주저앉고 물에 발을 담갔다. “인간이라……. 엘린, 어떻게 생각해?” “뭐? 뭘 말이야, 케이르 언니?” “인간. 그들이 왜 우리들을 찾아왔을까? 듣자하니 에크라인도 아닌 것 같아. 만약 에크라의 인간이라고 해도 그들은 우리를 찾아오지 않잖아. 숲 밖에서만 교류를 하도록 약속을 했으니까. 지금 남아있는 엘프의 터전이라고는 여기, ‘북 엘프 숲’, 그리고 인간들은 모르지만 저기 에웰로니의 중앙에 있는 ‘작은 남 엘프 숲’이 다잖아?” 에크라가 엘프와의 교류가 가장 활발한 나라라는 것은 대륙의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예전, 엘프의 도움으로 네이코와의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에크라는 그 후로 엘프의 영향력이 더욱 강해졌다. 에크라의 군사 주력인 궁수부대는 모두 엘프와의 교류를 통해 얻은 엘프의 활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에웰로니는 가장 마법의 영향력이 적은 나라라 ‘야만인’이라든지, ‘원시인’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역대 사상 시리어스 다음으로 많은 수의 현자를 배출해 낸 나라이다. 대륙 역사 초기에는 발견하지 못한 영토로, 그들만의 독자적인 문화를 자랑하는 에웰로니의 중앙에는 인간들이 모르는 엘프의 숲이 하나 더 있다. “글쎄… 모르겠는 걸. 하지만 드래곤께서 같이 오신 걸 보면 분명 엄청난 일일 거야.” 엘린은 가볍게 대답했다. 벌써 정오가 다 되어가고 있는데, 장로님들과 인간들은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땅 위에 뭔가를 끄적이던 케이르는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엘린! 좋은 생각이 났어. 우리, 점심거리를 가져가면서 살짝 살펴보는 건 어떨까? 지금 회의가 열리는 곳은 우리 집이고, 난 장로의 딸이니까 그 정도는 어색하지 않을 거야!” “그거 좋은 생각이네! 그래, 그러자!” 케이르는 어렸을 때부터 말로만 듣던 ‘인간’이라는 생물체를 한 번 보고 싶었다. 대륙의 수많은 이종족들은 인간을 경계하고, 또한 경멸하기도 하지만 케이르는 그들에 대한 호기심을 숨길 수가 없었다. 가장 알 수 없는 게 인간이라 하지 않았던가? 유일하게 운명이 정해지지 않은 생물도 인간이었고, 그들의 미래에 무엇이 놓였을지는 신조차 모른다고 한다. 케이르와 엘린은 서둘러 발을 닦고 신발을 신었다. 그리고 집으로 달려가며 작게 웃었다. * * * * * * * * * * * * * * * 케이르와 엘린이 궁금해 하던 회의의 상황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그래서 저희가 온 겁니다.” 대표로 말을 하던 카에리드는 장로들의 표정을 살폈다. 하나같이, 마치 떫은 감이라도 씹은 얼굴들이었다. 만약 히투니아와 함께 오지 않았다면, 일을 성공리에 끝마치기는 고사하고 이곳에 들어오는 일조차 요원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당신은, 당신의 가족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대륙의 모두가 위험에 빠져도 좋다는 것이오?” ‘인간이라 할 수 있는 사고방식이군.’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얼굴에 써있는 것 같았다. 카에리드와 이데카른, 트로에, 바르에든, 에드윈드는 엘프들이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한 일처럼 이 일은 도저히 쉽게 보이지 않았다. 히투니아를 내세워서 협박을 한다면 일이 쉽게 풀릴 지도 모르겠지만 절대로 그 방법만은 쓰고 싶지 않았다. 너무 비겁했기 때문이다. ‘하긴…… 저들로서도 스스로가 위험해질 수도 있는 일은 하고 싶지 않을 테지.’ 카에리드는 요즘 들어 늘어버린 한숨을 다시 내쉬었다. “도와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지친 카에리드의 얼굴을 본 이데카른이 대신 나섰다. 엘프의 장로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우리들에게 있어 저 돌은 분명 아무 의미 없는 것이 분명하오. 가치 있는 것임에는 틀림없겠지만 당신들처럼 절실한 이유는 없으니까 말이오. 하지만 이유를 들은 이상 선선히 내주기란 불가능한 일이외다.” 하얗게 센 수염을 늘어뜨린 엘프장로의 말이었다. 트로에는 여기까지 와서 절망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차라리 드래곤을 끌어들이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이었다. “전 대륙이 위험해질 수도 있는 노릇이오. ……탐탁치 않은 것이 사실 아니겠소?” “예,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희는 물러날 수 없습니다.” 이데카른이 단호하게 말했다. 얼음 같이 차가운, 그리고 차분한 어투와 음성. 말처럼 그들은 물러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저희가 지금으로서는 약속드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물론, 물론 내주기 곤란하시겠지요, 예,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에드윈드는 잠깐 말을 끊었다. “한 번만, 단 한 번만…… 누님을, 가족을 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안 될까요? 저희가 시도하려는 일도, 사실은 성공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의 말에도 엘프 장로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에드윈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속으로 ‘피도 눈물도 없는 것들!’하고 생각해보지만, 잘 생각해 보면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것’들은 정작 자신들일 거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 얼굴만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은 엘프들이 옳은 것이다. 모여 있는 엘프의 장로들은, 아마 저 옆에 앉아있는 히투니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의 말을 ‘들어주는’ 것 뿐, 사실 이 말을 듣고 있는 것조차 탐탁치 않을 것이다. ‘이제 어떡하지? 엘프들이 가지고 있는 돌에 새겨진 지도를 보지 못하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데……. 후우!’ 트로에는 길게 한숨을 뱉어냈다. 아마도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서 더더욱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그들에게 닥친 일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것이다. 아니, 인간이라 하더라도 이해는 할지언정 적극적으로 나서며 이 일에 도움을 주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노릇이다. “……저희로서는 동의할 수 없는 노릇이오.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소? 할 수 없지, 생각을 바꿀 때까지 이곳에 묵으시오.” “뭐?” 일선에서 빠져있던 카엘이 크게 반문했다. 순식간에 그에게로 시선이 쏠렸다. 카엘은 곤란하다는 듯이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곤란해. 시간이 없는 걸……. 이제 고작해야 이틀? 아니, 3일 정도인가? 정말 시간이 촉박한데.” “무슨 말이죠, 카엘? 시간이 없다니?” 카에리드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하지만 카엘은 다시 입을 다물고 한발 뒤로 물러났다. 수상쩍다는 듯이 카에리드가 노려봐도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인간들이여, 방을 내주겠소. ……응?” 그때, 방문이 달칵 열리며 밖의 신선한 공기가 안으로 스며들었다. 장로 중 가장 나이가 들어 보이는 노인이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그는 눈을 크게 뜨며 깜짝 놀라 외쳤다. 문이 열리며 드러난 두 엘프 때문일 것이다. “케이르! 엘린! 지금 뭐하는 짓이냐!!” 두 엘프 중 한 명의 모습이, 한 발짝 안으로 더 들어옴으로써 그들의 눈에도 정확히 박혀들었다. ‘미(美)의 종족’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도록, 눈부신 연녹색 머리카락이 길게 내려뜨려져 있고, 하얀, 부드러운 인상의 얼굴과 커다란 진녹색 눈동자가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녀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조금 어려 보이는 엘프는 약간 어린 티가 나기는 하지만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선명한 푸른 눈동자의 엘프였다. 그녀들은 가볍게 자신들이 가지고 온 다과를 탁자 위로 내려놓으며 말했다. “간단한 다과를 내왔어요. 드시면서 말씀들 나누세요.” “케이르! 시키지도 않은 짓을…… 벌써 얘기는 끝났다. 얼른 나가거라!” 들어온 엘프들은 곁눈질로 힐끗 힐끗 그들의 모습을 살폈다. 하지만 날카로운 장로의 호통이 이어지자 결국 아쉬운 표정으로 훔쳐보던 것을 멈추고 말했다. “어쩔 수 없죠……. 알았어요! 나가면 될 거 아니에요?” 약간 토라진 표정으로 케이르와 엘린은 방을 나섰다. 한 차례 일이 끝나고 난 후, 장로는 한숨을 낮게 내쉬며 끄응- 하고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지친 표정으로 그들에게 말했다. “앞으로의 거처로 안내해 드릴 테니 이쪽으로 오십시오. ……어휴!” 카에리드와 이데카른, 트로에, 바르에든, 에드윈드는 갑자기 하나같이 핏, 하고 가는 웃음을 흘렸다. ‘루피아가 사고치고 난 후 수습을 하고 아버지가 지으시는 표정하고 똑같아.’ ‘내가 일벌이고 난 후 누님이 지으시는 표정하고 똑같잖아?’ ‘아버지가 일벌이시고 난 후에 에리나가 짓는 표정하고 똑같아.’ * * * * * * * * * * * * * * * “케이르 언니, 대체 그 사람들…… 어째서 이곳에 왔을까?” “……어…… 어?” “뭐야, 언니! 넋이 나갔잖아!” 엘린이 볼을 부루퉁하게 부풀리며 말했다. 케이르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듯 눈을 깜박였다. 엘린은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다시 아까와 같은 질문을 던졌다. 케이르는 그녀가 묻는 말에 대충 대답을 하며 그녀가 본 광경을 천천히 되살렸다. “……신기했어.” “뭐?” “굉장히 신기했어. ……우리는 인간을 처음 봤잖아? 신기하지 않았니? 어쩜… 생김새가 그렇게 비슷하니? 귀가 좀 짧은 것 빼고는 똑같잖아! 게다가… 우리 마을의 남자 엘프하고는 좀 다른 것도 같아. 모두들 말이야…….” 호리호리하지만, 조금 더…… 응?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케이르는 자신의 뺨을 짝, 소리가 나도록 세게 쳤다. 하지만 그녀는 굉장히 신기했다. 늘 그려오던 엘프 마을의 호리호리하고 가는 남자들이 아닌, 인간들이라니! 다시 한 번 보고 싶다, 고- 그녀는 생각했다. “하여간, 좋은 일로 온 것은 아닌 게 틀림없어. 그치, 언니?” “응.” “조심하자, 우리도. 하아…… 참, 신기한 구경을 한 하루였어.” “그래…… 그러자, 엘린.” * * * * * * * * * * * * * * * “이제 어떻게 할 겁니까, 카에리드?” 카엘은 난감하다는 기색을 지우지 않은 채 구겨진 얼굴로 물었다. 그로서는 지금 이 상황 모든 것이 마음에 안 들었다. 이제 고작해야 이틀 가량이 남았을 뿐인데…… 흘러가는 시간이 너무나 아까웠다. 천계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보고와 긴장된 분위기, 그리고 마계 쪽에서 터질 일만을 기다리고 있는 천족들까지. 이제 정말 시간이 촉박하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저런 옹고집들이라니… 그냥 다 죽이고 돌만 쏙 가져가 버릴까?’ 천족은 이런 생각을 안 할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천족이라고 해서 살상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단지 안 보이게 가릴 뿐이고, 치례에 신경을 쓴다 뿐이었다. 빛, 하면 떠오른 이미지가 선(善)이라 인간들과 천족 자신들이 착각을 하는 것뿐이다. 적어도 카엘은 그 점에 있어서는 중립이라 할 수 있었다. 징벌의 카마엘.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옛날의 그 ‘잠깐’을 잊지 못해 매달리는 것은 그 자신이었다. 이럴 때 뭐하고 있는 짓거리냐, 지금? 어차피 중간계에 한 명이 매달려 있어야 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꼭 그가 와야 하는 일인 것은 아니었다. 열두 세라핌 중 두 번째 아이인 그가 이곳에 있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 “글쎄요. 조금 더, 이곳에 있으면서 방법을 강구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만.” “……정말 시간이 없단 말입니다!” 카에리드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아까부터 시간이 없다고 하시는데……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그게?” 카엘은 입은 조개처럼 다물어졌다. 그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돌림으로써 카에리드의 질문에 대답할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카엘은 대답할 수 없었다. 적어도 그는…… 지금 그가 쓰고 있는 이름만이라도 카에리드가 기억해내 주기를 바랐다. 그의 입으로 말하지 않더라도 말이다.(설령 말한다 해도 기억할지 의문이지만) “정말 어떡하죠, 형님들? 한시라도 아껴야 할 판인데…….” 에드윈드가 긴장된 분위기를 깨뜨리며 다시 똑같은 질문을 했다. 이데카른은 답답하다는 듯 머리를 쓸어 올렸고, 트로에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바르에든은 히투니아 앞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어쩔 수 없어. 설득해보고…… 안 되면, 무력을 행사하는 수밖에.” “……될까요?” “몰라. 하지만…… 그거밖에 방법이 없잖아? 돌에 새겨진 지도만 보고 달아나는 수도 있어.” “……그렇군.” 다시 한참 침묵이 흘렀다. 말없이 바르에든의 팔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히투니아에게 힐긋 시선을 준 이데카른은 피식 웃으며 한 마디 던졌다. “정 뭣하면 엘프 여자를 하나 꼬시던가. 바르에든처럼.” “…….” 침묵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어쩌면…… 정말 그 수밖에 없을 지도? 이 상황에서 믿을 건…….’ 참담할 뿐이었다. ======================================== 늦었나요?; 음..; 바로 다녀와서 바로 잠들어버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답니다^^; 하루 종일 잠에 취해서 비척거리다가.. 음, 음;; 즐독하세요^-^ 덧. 느끼했다니요!! ...너무해요오;; 그리고- 로맨스에 닭살은 '필수생활용품'이라구요.[...] 아니면 대신할 말 찾아보세요![바락바락] ....설마 진짜 적어주시는 건 아니겠죠?-_-; 제 목: 공녀(貢女) : 제30화 [서열대회 개최!](1) #. 제30화 [서열대회 개최!] * * * * * * * * * * * * * * * 서열대회란, 앞에서도 누차 설명을 했었듯이- 10년에 한 번(마족의 기준으로서는 굉장히 잦은 행사다) 열리는, 마족들에게 있어 서열을 높일 기회를 주는 전투시합이다. 그런 대회에 인간인 공녀가 출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으며 그 자체로도 충분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저 ‘사건’은 거기서만 그쳐주지 않았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모든 ‘일’들의 시작을 끊은 것은 서열대회의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와 함께였고, 대회가 개최되는 순간이 바로 모든 일의 시초가 되었다. 지금도, 역사책과 그 당시의 일들을 기록한(다른 공녀들의 말을 토대로) 모든 서적들을 살펴보면 그녀들이 말하는 시작은 모두 똑같을 것이다. ‘서열대회의 북소리가 귓속 가득 울려 퍼지고…….’ 라고. 나 역시 그 상황 그곳에 있었으므로 첫말은 같다.(그러나 생략하겠다) 나는 그때부터 자신과 싸우기 시작했다. ‘천계냐? 마계나? 중간계냐?’ ============================루피아의 자서전================= 둥! 둥! 둥! 둥! 거센 북소리가 공기 가득 울려 퍼졌다. 가슴까지 울리는 커다란 소리와, 피부로 느껴질 정도로 흥분된 분위기. 가는 숨을 내뱉으며 긴장된 심정을 달래보려고 하지만 소용없는 것 같았다. 세키라는 머리 위로 눌러쓴 모자를 더욱 아래로 끌어내렸다. 이럴 때마다 움츠러드는 스스로가 정말이지 싫었지만 왜인지 계속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교황에 의해서 마족들에게 돌아가 버린 에리나는 그대로 연락이 없었고, 루피아는 마왕과의 대면 이후 말이 없어져 버렸다. 그대로 휑하니 가버린 마왕 덕분에 그녀는 지금까지 교황의 보호 아래 있을 수 있었다. 긴박하게 굴러가는 상황 속에 오직 그녀만이 우왕좌왕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곳에 온 이후로 계속 가슴 속에서 떠나지 않는 불안감이 다시 그녀를 덮쳐와, 무릎이 후들거렸다. 세키라는 치미는 불안을 꾹 눌러 내리면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정말, 대체 어찌된 것일까……? 그리고, 이제 어떻게 되어버릴 것인지…….’ 루피아의 태도는 그녀의 불안감을 한층 더 깊게 만들었다. 세키라는 다시 한 번 입매를 다부지게 다물었다. 무서웠다. 두려웠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무서워졌다. 다시 아로데, 그와 마주치는 것이. 그녀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울 것 같은 기분을 쓰게 삼켰다. 둥! 둥! 둥! “이제 거의 다 와 갑니다. 이런 공식적인 행사에 나오는 것도 참 오랜만인 듯한데… 세키라님, 이리 와 보십시오.” 교황이 인자하게 웃음 지으며 그녀를 불렀다. 세키라는 고개를 들었다. 요 며칠 완전히 익숙해진 참이었다. 그 외에 다른 마족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늙수그레한 얼굴에 세키라는 묘한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다. 정말 할아버지가 있으면 이런 느낌이겠지, 하는 생각마저 들었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희미하게 입가를 올렸다. “자, 보십시오. 이들이 이제부터 상대해야 할 이들입니다. 세키라님은 특별히… 준비하신 게 없는 듯하니 참가하지 못하시겠지만. 루피아님께는 지금 말씀드려봤자 소용이 없을 듯하니까 말입니다.” 지금 이 곳은, 교황의 마차 안이었다.(솔직하게 말해서, ‘말’…이라고는 할 수 없는 생물체였다, 그건!) 이제껏 비겁하게 숨어있다 시일이 되자 마차에 타고 슬금슬금 들어오는 꼴이라니! 루피아가 다정스레 그렇게 하자, 라고 먼저 말해주어 다행이었다. 세키라는 이런 자신의 모습이 정말 싫었다. “세키라님은 다정하신 분이군요.” 느닷없이 교황이 말을 꺼냈다. 갑자기 무슨 소리이냐는 듯이 세키라의 동그랗게 떠진 갈색 눈으로 의문이 떠오르자 교황은 가볍게 웃었다. “무의식적으로 웃고 계십니다. 상대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으려는 습관이 어투에서 배어있고. 어느 상황에서도 늘 입 끝이 조금씩 들려져있군요.” 세키라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건, 단순히 사교계에서 익혀야 했던 처세술이 습관으로 자리 잡아 버린 것뿐이었다. 요즘 그녀는 스스로에 대해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저런 말을 듣는 것이 아주 부담스럽다. 예전에는 저런 말을 들으면 웃어 넘겼었는데 말이다. 그만큼 여유가 없다는 거겠지… 세키라는 다시 턱에 짐짓 힘을 주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자가 어디 많겠는가? “……다정하지 않습니다. 저 같은 것보다는 루피아나 에리나가 더 상냥해요. 몇 배나.” 세키라는 우물거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교황 라우데스는 그런 대답이 나올 줄 알고 있었다. 같이 있는 시일이 그리 오래 되지는 않았지만 라우데스는 금방 세키라를 파악할 수 있었다. 제일 먼저 알 수 있었던 그녀의 나쁜 습관은, 상황이 안 좋게 몰려가면 그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돌려버린다는 것, 그리고 스스로의 장점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항상 힘내려고 하는 자세나 열심히 하려는 태도 등은 괜찮지만, 저렇게 자신감이 없다가는 살아남기가 힘들 텐데 말이다. 하지만 괜찮을 거라고, 잘 풀릴 거라고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러면서 세키라에게 말해주었다. “힘내십시오.” 그리고 어깨를 가볍게 토닥여주었다. 덜컹덜컹 흔들리는 마차에 따라 뭔가를 깊게 생각하는 루피아의 눈에는 아무것도 비춰지지 않았다. 마치 넋이 나간 것처럼, 루피아의 눈에는 생기 한 줌 없었다. 늘 생기를 가득 담고 반짝이던 보랏빛 눈동자가 검은색으로 보일 정도로 짙어져 있다. 힘내야 할 것은, 내가 아니라 루피아인 것 같은데. 세키라는 그런 생각에 가느다랗게 비어져 나오는 미소를 물었다. “이제 거의 다 와가는군요.” 덜컹! 마차가 크게 흔들리는 것과 동시에 세키라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두근두근, 그 박동을 점차 빨리해가는 심장은 마치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거세게 뛰어댔다. 이제 다시 마주보게 된다. 제발 멈추지 마! 그녀는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할 수만 있다면- 능력만 된다면, 그녀는 이 마차에서 뛰어내려 저 반대편으로 달려가고만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럴 용기만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세키라는 얌전히 그 자리에 발을 붙이고 움직이지 않았다. 가늘게 몸을 흔들던 마차의 흔들림이 딱 멈췄다. 세키라는 마차가 서는 소리를 들었다. 귀를 어지럽히던, 말 비슷한 생물체의 발걸음 소리도 멈추었다. 그 대신 그녀의 귀를 채우는 것은 바쁘게 뛰는 그녀의 심장소리였다. “자, 이제 내리…….” 라우데스는 말을 다 끝맺지 못했다. 내리지요, 라고 말하면서 마차의 문을 열려고 했던 그의 몸짓은 쓸데없는 것이 되었다. 마차가 멈추자마자, 벌컥 하고 밖에서 그 문을 열어버렸던 것이다. 아마 잠겨있었던 것 같은데. 라우데스는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일단 시선을 올려 무례하게도 교황의 마차 문을 벌컥 열어버린 이가 누구인지 확인했다. “아…….” 숨이 덜컥 막혀버렸다. 목구멍에 뭔가 콱 막힌 듯, 호흡하는 것이 곤란해졌다. 세키라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아로데, 그였다. 그는 철저한 무표정으로 그녀를 차갑게 응시하고 있었다. 얼어버릴 것만 같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손을 내밀어 아래로 내리고 있던 그녀의 팔목을 잡아당겼다. 하릴없이 그에게 끌린 세키라는 작은 저항도 해보지 못했다. 그는 그대로 그녀를 당겨 안아 어깨에 들쳐 안았다. 꺅, 하는 작은 비명이 세키라의 입에서 비어져 나왔다. * * * * * * * * * * * * * * * 털썩! 발을 바동거려보기도 하고, 말아 쥔 손으로 그의 등을 때려보기도 하면서 나름대로의 저항을 하다 포기한 그녀를 그가 내려놓은, 아니, 던져놓은 곳은 어딘가의 푹신하고 기다란 소파 위였다. 푹신하긴 했지만 엉덩이에 전혀 무리가 가지 않을 정도는 아니라서 당연히 세키라의 입에는 약한 신음이 흘러 나왔다. “자, 이제 너를 어떻게 할까?” 오싹! 흠칫 몸을 떨며 세키라가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차마 눈을 맞출 수가 없었다. 무서워서, 두려워서. 하지만 그녀의 의지와는 반대로 서서히 들려진 시야에는 그가 들어와 박혔다. 잔인한 음성, 그리고 차가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붉디붉은 눈동자. 세키라는 주위가 대번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소름이 돋는다.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먹이를 앞에 둔, 잔인한 육식동물의 미소였다, 그건. 마치 쥐를 앞에 둔 고양이 같은.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붉은 눈동자는, 다시금 그녀에게 공포를 불러왔다. 그녀의 점차 질려가는 얼굴을 보며 아로데의 눈썹이 하늘로 치켜 올라갔다. “뭘 잘못했는지는 알고 있겠지? 응?” 가만히 내려다보던 그가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왔다. 뒤로 물러나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공간이 없다. 그는 천천히 몸을 숙이더니, 이내 두 팔 안에 그녀를 가두었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아로데의 얼굴을 피하려고, 세키라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빼었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행동은 오히려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어 버렸다. “왜? 싫은가? 흐응, 그렇다면 내게는 더 잘 되었는걸.” 그는 손가락으로 세키라의 얼굴선을 따라 그리다가, 그녀의 턱을 들어 그와 눈을 맞추었다. 질끈 눈을 감으려는 그녀에게 그는 낮고 단호한 음성으로 명령했다. “눈 떠!” 어느새 세키라의 커다란 갈색 눈동자 가득 눈물이 차올라 있었다. 호도독 떨어진 눈물방울이 그녀의 하얀 뺨을 가로질러 흘러내렸다. 그의 눈썹이 다시 치켜 올려졌다. “말을 해 봐라. 그래… 네 목적은 어차피 그거 하나뿐이었겠지. 탈출! 이 곳에서, 나에게서 빠져나가는 것!” 그의 입매에 맺혀있던 잔웃음이 사라졌다. 그의 단호하게 굳은 입매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그녀의 얼굴선을 따라 그리던 그의 손가락에 꾹, 힘이 들어갔다. 그와 함께 통증이 그의 손가락이 닿은 곳에서 일었다. 세키라의 아미(蛾眉)가 고통으로 찡그러졌다. 그녀는 공녀였다. 그는 마족이었다. 공녀에게 따로 목적이 있을 리 없다, 단지 원래대로 돌아가는 곳. 중간계로 돌아가는 것만이 그녀들의 유일한 목적이고 소망이다. 당연하잖은가? 그녀는 공녀로서 당연하게 탈출을 시도한 것뿐이었다. 적당히 그들이 안심하고 있을 때, 경비가 허술할 그 틈을 노려서 말이다. 그러나 아로데는 그것뿐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원래라면, 그는 ‘그럴 줄 알았어.’라고 히죽거리며 웃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는 건, 아마 그녀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자마자 그의 머릿속을 하얗게 비워버린‘배신감’때문일 것이다. 그는 분노로 가득 찬 붉은 눈동자를 하고, 눈매를 반달모양으로 휘어 웃었다. 그의 손이 좀더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의 가느다란- 채 한 줌도 되지 않는 가느다랗고 새하얀 목을, 그는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힘을 줄 필요도 없겠군.’ 그의 안에 잠자고 있던 마족의 본성이 서서히 깨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파괴하고 싶다, 이 하얀 피부 위를 흐르는 붉은 피를 보고 싶다. 매혹적인 피의 향기와, 빛깔과, 느낌이 모두 그의 손가락 위에서 되살아나 그의 욕망을 부추겼다. “죽여 버릴까? 응? 이렇게, 가볍게 힘을 주기만 해도…… 너는 죽어버릴 텐데.” 꾸욱- 그의 손가락이 가볍게 스치고 간 그 자리에 보랏빛의 멍이 선명하게 박혀들었다. 하얀 피부에 보랏빛 멍은 굉장히 선명하게 눈에 박혀서, 아로데는 피식 웃었다. 으읏, 하고 세키라가 신음을 흘렸다. “제발…… 그만.” 으으- 숨, 숨막혀. 숨을 쉴 수가 없어! 무서워. 무서워. 세키라는 필사적으로 바동거리면서 그의 손에서 풀려나려고 저항했다. 발로 그를 밀어내고, 팔로 그를 떼어내려고도 해봤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던 그는 그녀의 목에서 손을 뗐다. “쿡! 쿡쿡… 너도 살고 싶은가? 난 네가 착해서 죽으라고 하면 그냥 죽어버릴 줄 알았는데? 아, 맞아. 넌 내게서 도망가 버리기도 했었지. 네 발로 말이다.” 비아냥거리는 듯한 차가운 목소리가 날카로운 칼처럼 그녀의 가슴에 푹 깊게 파고들어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녀는 헉헉 숨을 몰아쉬며 가까스로 한 마디를 내뱉었다. “나, 난…… 그렇게 착하지 않아요.” “호오? 어째서? 왜 그런 말을 하나? 넌 늘 착하게 보이고 싶어 하지 않았던가?” 세키라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아로데가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서 늘 그렇게 참는 게 아닌가? 마치 저 천족처럼 말이야. 그래서 우리 같이 ‘타락’한 마족을 늘 멀리하려고 하지 않는가? 자신의 요구는 꾹 밀어 넣은 채 남의 뜻을 위해서 시간을 허비하지. 그게 너 아니었던가?” 그의 그 말은 세키라가 늘 품고 있던 스스로에 대한 모자람을 그대로 끄집어내는 말이었다.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그 얘기는, 그의 혀에서 발음되어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게 상처가 되었다. “악마!” 그녀는 충동적으로 소리쳤다. 그리고 그녀의 말에 아로데의 입 꼬리는 냉소적으로 휘어 말려 올라갔다. “그래, 우리를 너희는 그렇게도 부르는 모양이더군? 왜 그러나, 착하디착하신 인간 나리? 왜 이 미천한 악마 따위를 부르시나!” “어째서…… 어째서 이러는 거예요! 알고 계시지 않으셨나요? 우리들의 소원은 다시 중간계로 돌려보내지는 것이라는 걸?” 다 알고 있었으면서, 그런 건 너무나 당연한 것이니까 모를 리 없으면서. 어째서 그는 예상치 못한 반격을 당한 것이라는 듯한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이유 없던 두려움과, 그리고 가슴 저림. 그가 어째서인지 화를 낼 것이라는 것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그의 반응과 비아냥거림, 차가운 말에 그녀는 외쳤다. 그녀의 외침에 차가운 비웃음이 내려앉아 있던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지워졌다. 무겁고 차갑게, 마치 심해(深海)같은 표정으로 그는 그녀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아아……, 그래. 알고 있었지.” 전혀, 그게 아니라고 그의 눈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는 정말 예상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녀가 도망을 치리라고는? “하지만 배신감을 느꼈다. 화가 나. 그러니 나는 너에게 화를 내는 거다. 화가 나니까! 이러고 싶으니까!” “…….” “우리는 숨기지 않는다. 또한, 숨지도 않는다.” 그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뒤로 몸을 옮기던 그녀는 쿠션이 등 뒤에 닿자 당황해 어쩔 줄을 몰랐다. 그의 입술이 세키라의 쇄골 언저리에 내려앉았다. 쿵! 심장이 떨어져 내렸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아, 어쩌면 좋아? 세키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 의외로, 이 장면을 기대하고 계신 분들이 많으시더군요-_-; 정말 별 거 없는데; 설마하니 아로데가 세키라를 퍽퍽! 하고 발로 차길 하겠어요, 뺨을 내리치길 하겠어요. ...목을 조르기는 했지만. 결국 루피아와 이디스는 이번 편에서도 뒷전.(룰루~) 뭐, 차근히 나오겠죠?^^a 메일은 donghee425@hanmail.net으로 보내주세요. ...답장을 못 받으신 분들, 정말 거듭 사과드려요; 정말이지; 늘 좀 있다, 라고 하면서 넘겨버리고![....결국은;] ..; 그, 그럼 즐독하세요.[삐질] 제 목: 공녀(貢女) : 제30화 [서열대회 개최!](2) #. 제30화 [서열대회 개최!] * * * * * * * * * * * * * * * 고급스러운 양식의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녀는 다만 인식했을 뿐 깊이 생각하지 않고 다시 눈을 내려감았다. 눈을 뜨고 있더라도 눈앞의 상황에 대해 뭔가 생각해 볼 수 있을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잠깐 이곳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이래봬도 교황이라는 직위에 있는 몸인지라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는군요.” 루피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라우데스가 고마웠다. 그는 분명히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고, 그녀는 그 속에서 아무 걱정도 없이 생각에 빠져들 수 있었다.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넋이 나가있는 짙은 보랏빛 눈동자의 그녀를 라우데스는 잠시 응시했다. 교황이라고 해서 특별할 것도 없지만 그래도 지위가 지위이니만큼 대중 앞에서 몇 마디 해야 할 것 같았다. 그 상태의 이디스가 무슨 말을 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간섭할 만한 성질의 일이 아닌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저 상태라니. 그는 동정을 금치 못했다. 그가 보기에는 참 어리고 덧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것 역시 클리오라의 뜻이리라. 아마 그녀를 이렇게 만들어놓은 장본인은 지금쯤 정신없이 바쁠 것이다. 이번에는 10년 전처럼 간단하지는 않을 테니까. 공녀라는, 이변(異變)을 일으키는 이 인간들이 이제부터 이 마계에서 어떻게, 어떤 식으로 자리를 잡아갈지. 분명 이 대회와 함께 모든 것은 마무리가 되고 시작될 것이다. 라우데스의 머릿속에는 그가 느끼는 막연한 불안감과 기대감, 모든 것이 비틀어지고 말 것이라는 희미한 예감(豫感)이 뒤섞여 가시처럼 박혀 있었다. 가만히 생각에 잠긴 채 헤어나지 못하는 루피아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그는 마왕의 변화와 연계된 이 공녀가 일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분명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게다. 그가 할 일이란,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이란 모든 일에 클리오라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피 냄새가 나는구나. 오늘부터 바뀐 이 바람은, 서쪽에서부터 불어오는 이 바람은 짙은 혈향(血香)을 품고 있어.’ 서쪽…… 그림자 족, 그리고 딜렌. 그는 안타까움에 혀를 찼다. 라우데스가 나가자, 루피아는 그제야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지금은 무작정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모든 것이 생각하기 싫고, 온몸이 풀어진 듯 노곤했다. 눈을 뜨는 것조차 싫었다. …아니, 이건 거짓말이다. 사실은, 머릿속이 너무나 많은 고민들과 생각들에 어지럽혀져 혼란할 뿐이었다. 쓸데없는 어리광이었다. 그녀는 요 2~3일간 자신의 모습을 상기시켜 보면서 생각했다. ‘사랑해? 제길- 그 납 같은 얼굴로 잘도 그런 낯간지러운 말을 하는군!’ 하지만 계속 가슴은 덜컥 덜컥 내려앉았다. 그가 그녀에게 해준 그의 이야기가 도무지 머릿속에서 떠나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만큼 그녀는 아팠다. 그녀는 고운 아미(阿媚)를 찌푸렸다. “제길, 제기랄! 정말이지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어!”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녀는 분을 못 참고 축 늘어졌던 팔을 들어 옆자리를 세게 내리쳤다. 말아 쥔 손이 욱신거렸지만 그녀의 접혀진 미간은 풀어질 줄 몰랐다. 그녀는 자신의 이런 모습은 상상도 해보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우물거리다니, 정말이지 나답지 않다. 그녀는 중얼거렸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리고 무엇을 고민하고, 생각하고, 갈등하는가? 그녀가 처음 두근거림을 느꼈던 그 모습으로, 늘 얼음 같기만 한- 심장까지 얼음일 줄 알았던 그가 그녀에게 기쁘다는 듯, 행복한 듯 웃다니. 가슴이 저릿하게 아팠다. 루피아는 바보가 아니었다. 당연히, 진심과 거짓 정도는 구분할 줄 알았다. 그의 말이 참말이라는 것을 알기에, 정말이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순수한 진실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녀는 더욱 괴로웠다. 타이밍도 맞아 떨어지도록, 그녀는 그녀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깨닫고 인정했다. 사랑이 충만한 가정에서 자란 그녀는 ‘사랑’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분명 아닐 거라고- 미워한다, 미워한다, 그리 생각하려 했지만 결국 끝까지 미워하기란 불가능했다. ‘결론은…… 생각하고 말 것도 없지, 하나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고민하고 미련을 떨치지 못했던 것은……. 그녀는 스스로 이곳을 나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은, 바로 코앞에 닥친 「서열대회」에서 그녀들의 능력과 우수성을 내보이는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서, 그녀는 이제껏 머릿속을 지배했던 모든 문제들을 구석으로 밀쳐 두었다. ‘흐유! 일단… 히에로스, 그가 도와주면 될까? 젠장-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 버린 거야!’ 물의 정령 주제에 운디네 같은 고운 소녀의 모습은 고사하고 그 비슷한 모양도 아닌, 덩치만 커다란 청 표범의 형상을 한 세이준. 길게 흘러내리는 금속성의 눈부신 은발을 가진 아름다운 남자의 형상을 한 정신계 정령들의 왕, 히에로스. 자신과 계약을 맺은 두 정령 모두 결코 범상치는 않은 자들이었다. 그것은 그녀에게 행운이었지만, 분명 그들은 어딘가 하나씩이 어긋나 있다는 생각이 마구 들었다. 하! 정신계 정령의 왕, 이라니! 어째 현실성이 없어서 그녀는 한숨만 나왔다. 비척비척 출구를 향해 걸어가는 루피아의 발걸임에 힘이라곤 없었다. ‘……하긴, 세이준 그 녀석이 운디네 같은 모습이면……, 끔찍하겠다.’ * * * * * * * * * * * * * * * 이디스의 눈썹이 꿈틀했다. 로이드윈은 그가 모시는 주인의 심기가 점점 나빠져 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루피아에게 간다고 해 놓고 정작 데리고는 오지 않았다. 대신 처음 보는 시원한 웃음을 지었을 뿐이었다. 그는 나름대로 복잡한 기분이었다. 타고나길 얼음 심장을 가지고 타고 났다던 주인의 그 웃음이라니? 물론 바라던 바였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그런 주인의 모습은 이제 온데간데없고 그의 앞에 앉은 이디스는 마왕, 그 자체였다. “……이것들은 다 뭐지?” 아마 그의 표정이 얼음처럼 딱딱하고 차갑게 굳고, 그의 눈썹이 하늘로 치켜떠진 것은 그의 앞에 놓여진 산더미 같은 서류들 때문일 것이라 생각하며 로이드윈이 간단하게 응수했다. “보시는 대로, ……‘서열대회’에 필요한 서류들입니다, 주군.” 그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의 ‘공녀’는 지금 교황의 보호 아래 있다고 했다. 그건, 그녀들이 탈출한 다음날 밤에 돌아온 에리나를 제외한 세 명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이디스가 무엇 때문에 루피아를 데려오는 것을 포기하고 순순히 돌아왔는가는 모르지만 그는 그의 공녀가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약간 미심쩍은 부분이 있긴 하지만 충분히 넘길 수 있을 만한 것이니까. “‘공녀’가 이 서열대회에 끼어듦으로 인해 발생될 문제들이 많습니다. 형식도 약간씩 수정을 해야 합니다. 일단은 토너먼트 식으로 하는 게 어떨까 합니다만. 그것이 가장 쉽고 공정한 방식이니까요. 이제까지의 서열대회는 그런 형식 따위는 불필요했습니다만, 이번에는 꼭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는 책상에 어지러이 널린 서류조각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팔랑이는 종이 한 장을 들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물론, 예선도 치룰 겁니다. 공녀들 사이에서 말입니다. 기본적인 조건에 부합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축복을 입었다고 해도 서열대회에 끼어들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그렇군.” “네, 그렇습니다. 전야제는 바로 오늘밤- 그리고 예선은 내일, 정식 시합은 그 이튿날부터죠. 서열 변경을 신청한 마족들은 많습니다, 주군. 이들 모두는 공녀들이 섞인 무리에서 함께 서로의 우열을 가리게 됩니다. 그렇게까지 성장했으리라 생각지는 않지만, ‘한 방’에 가지만 않으면- 아니, 아주 잠시나마 버티기만 해 준다면 그녀들의 가치는 그래도 상승하지 않을까 싶군요.” 이번 목표는 공녀들이 서열에 들게 한다거나 하는, 그런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녀들의 ‘능력’을, 축복을 입은 그녀들의 ‘쓸모’를 증명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래도 이 곳에서 적응하고 살아나갈 수 있을 거라는, 그런 식의 증명을 해 주기만 하면 되었다. “이게 다…… 그것에 대한 서류들이란 말인가?” “예. 정확히 말하면 그렇습니다만, 사실 그다지 많지는 않죠.” 짜증스러움이 묻어나는 이디스의 붉은 눈을 보는 것은 의외로 즐거웠다. 언제나 무감각하고 무표정했던 유리알 보다는 이것이 훨씬 낫다고 로윈은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나가 봐.” “예, 주군. 그럼 수고하십시오.” 이디스는 의자에 몸을 파묻으며 길게 숨을 뱉어냈다. 그렇게 그녀에게서 떨어지고 난 후 제대로 자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리 그라도 피곤할 수밖에 없었다. 그조차 잊고 있던 사실이지만, 그 역시 피와 살로 이루어진 생명체였다. 결국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녀가 충격으로 굳어지는 것을, 그는 안고 있었기에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애초에 대답을 바라지 않았다. 그녀가 어쨌든, 그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녀를 곁에 둘 것이므로. 그녀가 그를 좋아할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는 없었다. 질색할 정도로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좋아할 리도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서류를 집어 들어 훑어보며 대강 앞으로의 일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공녀들은 그가 바라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전투 경험이 전무(全無)한 그들이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예상은 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이로써 공녀는 마계에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게 될 것이리라. 원래부터 신관이란 드문 존재이고, 덕분에 치유력 쪽으로는 마계가 천계에 비해 약한 것이 사실이었다. 공녀든 뭐든, 축복을 받은 신관이 500명 가까이 생겼다는 것은 마계에 있어 절대 손해는 아니다. 또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은, 딜렌의 존재다. 이디스는 미간을 접으며 마지막에 만났던 딜렌이 한 말을 떠올렸다. 이디스의 눈이 얼음처럼 차갑게 빛났다. 이번 서열대회 개최와 동시에 웅크리고 있던 그들은 행동을 개시할 것이다. 설령 그 아이가 말했던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는 상관없었다. 팡! 팡팡! 현란한 불꽃이 까만 밤하늘을 수놓았다. 교황의 인도 아래 가까이에 왔을 루피아의 존재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는 한순간 환히 빛나다 사그라지는 불꽃의 화려한 명멸(明滅)을 지켜보았다. 오늘밤은 내일부터 지루하도록 오래 이어질 서열대회의 전야제다-. 그리고 내일이면, 그는 다시 루피아를 보게 될 것이다. 교황은 그녀를 그에게로 데리고 올 테니까. 팡! 다시 한 번 화려한 불꽃이 허공에서 터졌다. 그의 얼굴 위로 빛의 조각들이 내려앉았다. 전야제의 밤은, 그렇게 갔다. 내일, 드디어 서열대회의 개최 날이다! ----------------------------- 너무 늦어졌죠; 죄송합니다;; 올 여름 들어 두 번째로 바다에 다녀왔어요. 가기 전에는 간다고 준비하고, 돌아와서는 이것저것 밀린 것들을 하느라 바쁘고 해서 한동안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보충 수업까지 빼먹고 갔었다니까요;; 서클 일도 있고..[한숨] 엄청난 리플에 감동하기도 하고, 당황하기도 했어요.@_@;; 감사합니다.[꾸벅] 메일은 donghee425@hanmail.net 으로 보내주세요. 즐독하세요! 제 목: 공녀(貢女) : 제31화 [예선豫選](1) #. 제31화 [예선豫選] * * * * * * * * * * * * * * * 지금쯤이면 공녀들 사이에서 예선이 시작되었을 터다. 아유니는 시간을 짐작해보며 생각했다. 다행히도, 아직 오늘이라는 시간이 하루 남아 있었다. 이제껏 준비해 온 것들을 재정비하기에는 충분한 시간- 그녀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이곳에 오래 체류(滯留)하면서 떨어진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서는 잠시라도 이렇게 보충을 해야 했다. “한심하군.” 로아이나의 약간 가늘고 높은 톤의 음성이 아닌, 아직 소년의 티가 묻어나는 목소리가 그녀를 자극했다. 아유니는 닫고 있던 눈을 천천히 뜨며 고개를 돌렸다. 직접 만나기는 서로가 처음이지만, 그들은 서로 익숙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동감이지만, 네 입에서 듣고 싶지는 않군.” “교황의 거처라, 과연 몰래 만나기에는 최적의 장소로군. 안 그래?” 아유니는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서열대회장으로 떠나는 일행에서 발을 뺐다. 핑계이긴 했지만 진실이기도 했기에 교황은 그녀를 이곳에 남게 해 주었다. 굳이 공녀 모두가 서열대회에 참석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는 눈앞에 나타난 상대를 훑었다. 붉은 머리카락에 금빛 섞인 붉은 눈동자. 아직은 소년의 모습이 남아 있는 그는, 분명 그녀가 기다리던 상대였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익숙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아유니는 천족과 마족, 딜렌은 인간과 마족- 모두 어딘가에 모두 다 소속되지 못한 반쪽짜리였다. 딜렌의 경우 가족이라는 안식처가 있었지만, 결국 그는 마족에 속하지 못한다. 반쪽짜리끼리의 공감대라고나 할까? “준비는?” 아유니가 먼저 입을 뗐다. “이쪽은 언제나 완벽하다. 문제는 그쪽이지.” “이쪽도 마찬가지야. 내 체력이 조금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내가 맡은 일을 수행하는 것은 무난해.” 조금, 이 아닌 것 같은데. 딜렌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으리라. 설령 체력이 부족하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맡은 일을 완수해 낼 여자다. 그 정도가 아니라면 30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천계를 양분(兩分)되게 만들어버리지는 못했을 테니. 잠시나마 지켜본 이 아유니, 아니 ‘에우로카엘’이라는 여자는 이제껏 그가 보지 못했던 종류의 여자였다. 지금은 차가운 유리구슬 같기만 한 이 핑크빛 눈동자 깊은 곳에는, 겉만 봐서는 상상도 못할 지독히 차갑고 잔인한 독기(毒氣)가 망울지어져 있었다. “내일- 오후 8시, 한참 열기가 달아올라 있을 때…….” “알았다.” * * * * * * * * * * * * * * * "말도 안 돼! 왜 에리나 칼르니르의 이름이 없는 거야!" 루피아는 질려서 외쳤다. 세키라나, 교황의 거처에 남은 아유니라면 몰라도 에리나의 이름이 이 명단에서 빠질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라우데스는 언제나와 같이 침착하게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본인이 희망하지 않았으니 어쩔 수가 없는 노릇입니다, 루피아님." 희망하지 않았다니… 누구보다 이 서열대회를 기대했던 사람이 바로 에리나인데! 루피아는 다시 명단을 훑어보며 에리나의 이름을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눈이 찾아도 에리나의 이름은 찾을 수가 없었다. 루피아는 결국 성질에 못 이겨 명단을 테이블 위로 세게 내던져 버리고 말았다. 어제 혼자 비칠거리며 방을 나섰던 루피아는 결국 얼마 안 돼 서열대회 운영 위원에게(엄밀히 따지자면 경비원이지만) 잡혀버리고 말았다. 교황과 같이 왔다고 우기고 우긴 끝에 교황이 있는 곳으로 다시 끌려온 루피아는, 예선이 열리기 전까지는 교황과 함께 있게 되었다. 운영 위원에게 끌려 교황 앞까지 끌려온 루피아를 만났을 때 교황의 표정을 루피아는 오랫동안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노릇이야?!" "그걸 제게 물으셔도… 허허허." 라우데스는 아악, 하고 괴성을 지르는 루피아를 보며 난처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정말 그는 에리나가 빠지게 된 경위에 대해 하나도 아는 것이 없었다. 그저 유리아덴이 그렇게 했을 것이려니, 할 뿐이었다. 그러나 차마 그 말을 밖으로 꺼낼 수는 없는 라우데스였다. "자, 이제 그만 진정하십시오. 이것저것 준비를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명단이 마치 원수라도 되듯 찢어발길 것처럼 노려보던 루피아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그가 말했다. 이제 예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예선이 열리기 전까지 그가 그녀를 데리고 있기로 한 것에는 어디까지나 이유가 있었다. 그는 마구 열을 내는 루피아를 보며 눈썹을 조금 찌푸렸다. '미움 살 짓을 할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무슨 일일까?' 물론 루피아도 다를 것이 없는 공녀이기에(예전 그녀가 공녀들에게 강조했듯이) 공녀들이 머물고 있는 대기실로 가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곳에 오래 있지 못했다. 아무리 교황인 라우데스라고 하더라도 공녀들의 내부 사정까지 밝지는 못했다. 공녀들이 대충이라도 정신을 차리게 만들기 위해 루피아가 그녀들의 적이 되길 자처했다는 사실은, 아무리 그라도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루피아를 데리고 공녀들의 대기실로 들어가려던 라우데스는, 그녀와 함께 문 밖에 서서 웅성거리는 공녀들의 목소리를 다 듣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을 수 없어도 적어도 루피아에게 좋은 말들은 아닐 것이라는 사실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져 가면 커져갈 수록 루피아의 안색은, 드러날 정도는 아니었지만 조금씩 창백해져 갔던 것이다. '안 되겠어요. 돌아가죠. 함께 있어도 되겠죠?' 결국 루피아는 그를 돌아보고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 속은 결코 편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라우데스는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라우데스는 그녀를 데리고 그의 거처로 왔던 것이다. 어차피, 예선이 시작되기 전에 그녀를 데리고 오라는 마왕 이디스의 명령도 있었겠다, 그는 잘 되었다 싶기도 했다. 해결해야 할 일이 둘 사이에 있는 것 같으니... 그는 그렇게 자신에게 말했다. "…알았어요. 이 일은 에리나에게 직접 들어야겠죠. 자신의 뜻이 아니면 죽어도 이렇게 둘 애가 아니에요, 에리나는." 안 그래도 공녀들에게 잔뜩 씹힘(?)을 당하고 온 루피아는 기분이 더러웠다. 이런 상황에서 에리나마저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니! 설상가상이라더니- 이 상황에서 그녀의 친한 친구들은 모두 그녀의 곁에 있지 않았다. "루피아님. 군주를 만나보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네?" "군주께서 루피아님을 모시고 오라고, 제게 명령하신 바 있습니다. 저는 힘닿는 데까지 루피아님을 돕기로 약속드렸으니, 만약 원치 않으시다면……." 루피아는 피식 웃었다. 명령 불복은 결코 그의 힘이 닿는 곳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저렇게 말하는 저 배려 깊은 마족에게 그녀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뇨, 만나야죠. 어차피… 해결할 일도 있고요…." 그녀는 어째서인지 마지막 말에는 힘을 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우선 생각해야 할 것은 마왕이나 저 자신의 일이 아니라, 예선전이었다. 서열대회의 공녀 예선전, 그게 그녀가 우선시해야 할 문제였다. "그럼, 가시죠. 군주께서는 예선이 시작되기 전에 만나 뵙기를……." "아니요! 지금 말고요. 예선, 이 끝나면." 예선이 시작되기 전에 그를 만나면, 도저히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시간이 조금 남죠? 예선이 시작되기 전에- 에리나를 만나볼 수 있을까요?" "네?" "에리나 말이에요. 어디에 있는지 혹시 알 수 있을까요?" 세키라나 에리나의 소재가 그녀는 무척이나 궁금했다. 이곳 마계에 와서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어 본 적은 없었다. 특히 에리나와 말이다. 세키라와는 어제까지 같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디스의 고백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던 루피아에게는 떨어져 있던 것과 같았다. "글쎄요, 제가 알 수는……." "그럴 필요 없어, 루피아." 그의 말은 끝을 맺을 수 없었다. 문이 달칵 열리며 에리나가 들어왔던 것이다. 루피아의 얼굴에 단번에 화색이 돌며 그녀는 에리나의 앞으로 달려갔다. "괜찮아?" 루피아는 다가가서 에리나의 몸을 꽉 붙잡아 껴안았다. "괜찮아, 물론. 내가… 내 이름이 어째서 명단에 없는지 가르쳐줄게." 루피아는 에리나에게서 몸을 떼어냈다. '괜찮아'이라고 말하는 에리나의 얼굴은, 그녀가 보기에 절대 괜찮은 것이 아니었다. 만약 세키라가 봤다면 거짓말을 한다며 화를 냈을 터다. 라우데스는 눈치 빠르게 먼저 방을 빠져 나갔다. 이후부터는 공녀들의 문제이지, 그가 터치할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그는 시간이 되면 데리러 오겠다고 말했다. "…벌 받았어." 잠시 뒤(라우데스가 문을 닫고 나간 뒤) 에리나가 입을 열었다. 루피아는 무슨 말인지 몰라 잠시 헤맸지만, 곧 그녀가 무슨 말을 한 것인지 눈치 챘다. "계약조건을 어겼어. 나는… 그의 곁을 떠나서는 안 되었는데. 계약조건을 어긴 대가로, 그는 내게서 서열대회 출전권을 박탈해갔어." 평이한 어조로 말을 이어가던 에리나는 끝에 가서는 루피아에게 미안하다는 듯이 고개를 푹 숙여 보였다. "미안해. …끝까지 도움이 되어주지 못해서." "무슨 소리야?! 문제는 그게 아니야!" 예상은 했었지만… 차라리 명단이 잘못된 것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렇게 되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결국 혼자로군. 루피아는 에리나 모르게 길게 한숨을 뱉었다. '그 마아- 안은 공녀들의 미움들을 어찌 감당한다? 제기랄, 어째서 이 지경인 거야.' 처량하기도 해라. 아마 에리나도 지금 루피아의 상황을 알기에 저런 소리를 하는 것이다. 세키라는 애초 서열대회에 출전할 수 없었던 만큼, 에리나라도 옆에 있어야 그나마 공녀들이 루피아에게 대놓고 시비를 걸지는 않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것도 불가능하게 되었으니… 하지만 단지 피곤하게 되었을 뿐이다. "미안해하지 마. 그것 정도야! 이 루피아님을 어떻게 보는 거야? 그쯤이야 가뿐해!" 루피아는 밝게 웃어주며 에리나에게 말했다. "루피아님, 이제 슬슬 옷이라도 갈아 입으셔야 합니다. 대기실로 가주셔야 하겠습니다." 라우데스가 노크하며 말했다. 이 대단한 교황께서는, 두 여인의 대화를 편하게 해주기 위해 문밖에서 '대기'하고 계셨던 것이다. 루피아는 알았다고 대답하며 일어섰다. "에리나, 너는?"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건지 묻고 있었다. “유리아덴님의 곁에 있을 거야. 그게 계약 조건이었으니까. 절대 어기지 않을 생각이야. 그게 내가 택한 길이고… 그 길을 가장 올바르게 가는 길 같아. 내 신념으로, 내 의지로 이 방법을 택했으니 제대로 해내야지.” 적어도 나는 다른 이들의 뜻에 끌리듯 따라다니지는 않았어. 에리나는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루피아도, 세키라도 그녀들 나름의 뜻을 가지고 있지만 에리나처럼 저런 행동을 하기란 솔직히 힘들었다. 루피아는 괜찮다고, 역시 에리나라고 생각하면서 방문을 나섰다. ‘이제부터가 문제인데… 후우, 어떻게든 되겠지, 뭐. 에라!’ 그녀는 교황의 뒤를 따라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 * * * * * * * * * * * * * * “이번이 기회입니다. 얼마 전, 우리가 그녀에게 받은 모욕을 기억하지 못하시는 것은 아니시겠죠? 마침 ‘세키라 에스베크’님과 ‘에리나 칼르니르’님께서는 이번 서열대회에 나오지 않으신다는 모양이더군요.” 한 여자가 모여 있던 다른 여자들에게 말했다. 넓은 대기실, 공녀들은 모여 1시간 정도 후에 열릴 ‘공녀 예선전’을 준비하기 위해 모여 있었다. 그녀들은 모두 ‘악(惡)’이라 믿었던 클리오라 마신의 축복을 받아 그녀들의 몸속에 잠재된 힘을 컨트롤하는 법을 배우고 기술을 익혀왔다. 마계에 온지 얼마 되지도 않은 때, 그녀들이 가장 나약해져 있을 때 모욕을 퍼부은 ‘악마 같은’ 여자, ‘루피아 엘 세느안트’- 그 이름은 그녀들 모두에게 특별했다. “어머, 그게 정말이에요?” “예, 그럼 정말이지요. 명단을 보세요. 루피아, 그 여자의 이름만이 올라 있잖아요.” 그녀들의 눈이 한꺼번에 자신들의 손에 쥐어져 있던 명단으로 향했다. 정말, 루피아의 이름만이 눈에 들어오고, 나머지 두 공녀(公女)의 이름은 없었다. 제일 먼저 선동(煽動)해대던 여자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번에 기회예요, 여러분. 우리는 그 여자에게 그딴 취급을 받을 이유는 전혀 없어요! 이번 기회에, 맛을 톡톡히 보여주자구요!” 만약 그녀의 이미지가 처음부터 그저 ‘제국의 공녀’정도였다면 이 정도의 미움은 받지 않았었을 것이다. 그때 그 일로 약간의 따돌림과, 미움 정도만을 받았었을 것이다. 그러나 루피아가 마계로 오는 마법진에서 그녀들을 달래주었던 것 때문에 공녀들은 그녀에게 배신감을 느꼈고, 그 때문에 더더욱 모욕을 받았다고 날뛰는 것이다. “그래요,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요…….” “네, 그래요. 후후… 우리가 모두 힘을 합하면 그 여자에게 매운 맛을 보여주는 것은 일도 아닐 거예요.” “맞아요!” 이제는 대기실 안의 모든 공녀들이 웅성거리며 루피아를 혼내주어야 한다, 고 외치고 있었다. 루피아를 상대하게 될 공녀들은 모두 악의를 가지고 그녀에게 덤벼들 것이며, 분명 루피아는 힘겨워하게 되리라. 중간에서 공녀들을 선동하던 여자는, 웅성거리며 흥분하는 공녀들 사이에서 스르륵 빠져나왔다. 그러나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고, 그녀는 대기실 밖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또각또각, 구두발굽 소리가 정갈하게 복도를 울리며 퍼져나갔고, 그녀의 모습은 점차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점차 흐릿해지며 이제는 윤곽조차 흐릿해져 앞을 거의 투영(透映)해 보여줄 때가 될 즈음, 그녀는 획 돌아서며 차갑게 입 꼬리를 들어올렸다. 조소(嘲笑)가 어린 입 꼬리는 스르륵 벌어지며, 짧은 비웃음을 토해냈다. “단순한 것들.” 수가 약 500명가량 되면, 누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는 법이다. 그 사이에 끼어서 저 단순하고 멍청한 인간을 선동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그녀는 이번에는 임무가 너무 쉬웠다며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멍청한 그녀들의 앞날에 부디, 영광이 함께 하기를. 쿡쿡!” 스윽- 건물의 그림자가 그녀를 가렸다. 그녀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그림자 속으로 쏘옥 들어가 버렸다. 그림자 족, 호영(狐影:여우그림자) 디마스. 그녀의 이름이었다. ============================================= 이번에도.. 에, 좀 늦었나요? 어제는 귀찮아서 컴퓨터를 켜지도 않고 그냥 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웜 바이러스 때문에 난리도 아니었나 보네요. 반 친구도 몇 명, 바이러스에 걸렸구요. (처음으로 귀차니즘이 도움이 됐어요;) 훗훗, 이제 보충수업이 끝났어요~[랄라라] 오늘부터는 학원만 다니면 돼요! 제가 사는 곳이 대구라, 낮에는 여간 더운 게 아니거든요.[...] 하지만 오늘은 바람이 아주 선선하게 불더군요! 바람이 시원하게 부니까 더위도 한층 나은 것 같아요. 메일은 donghee425@hanmail.net으로 보내주세요. 이벤트 참여 많이 해 주시구요.[아, 이거 위에 이벤트 공지 올릴 거예요.] ^^ 그럼 즐독하세요! 제 목: 공녀(貢女) : 제31화 [예선豫選](2) #. 제31화 [예선豫選] * * * * * * * * * * * * * * * 꿀꺽, 마른 목으로 침이 넘어갔다. 루피아는 움츠러들려는 어깨를 억지로 펴고, 의식적으로 더 당당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니꼽다는 듯이 쳐다보는 시선, 그녀를 보며 옆 사람과 소곤거리는 소리. 넓게 마련된 이곳은 그녀들 488명을 충분히 수용하고도 남았다. 도착한 곳은 둥근 원형 경기장 같은 곳이었는데, 아마 본선을 치룰 곳처럼 보이는 넓은 연무장이 여섯 개나 늘어져 있었고, 그 주변을 커다란 관중석이 둘러싸고 있다. 내일이면 저 곳이 마계 곳곳에서 몰려든 마족들로 꽉 차게 될 것이다. 흐린 잿빛 하늘과, 이곳에 온 뒤로 늘 맞았던 차가운 바람- 추위가 그녀들의 살갗을 스쳐 지나갔다. 맨 처음 이곳에 왔던 때처럼 아로데와 유리아덴, 로이드윈이 그녀들의 앞에 서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지금 아로데와 유리아덴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 있다는 것이랄까. 두 마족의 굳은 얼굴을 보며 세키라와 에리나를 걱정하던 루피아는 문득 로이드윈과 눈을 마주쳤다. 로이드윈이 생긋 웃자, 루피아는 얼결에 히죽 웃고 말았다. 잠시 후에 자신이 한 짓을 깨닫고 재빨리 얼굴을 굳히기는 했지만 그녀를 노려보던 공녀들은 이미 그것을 다 본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나쁜 평판이 더욱더 아래로, 아래로 추락하겠군. 셋이서 쑥덕대던 그들 중 로이드윈이 손에 몇 장의 서류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 음성을 증폭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음성 확대기 앞으로 다가간 그는 확인 차 서류를 다시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공녀 예선의 방식을 알려 주겠다. 너희들에게 며칠씩이나 소비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오늘 하루 안에 예선을 모두 치러야 한다. 선발되는 것은 단 30명이다. 그 30명 안에 끼는 자들은 서열 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되며, 만약 좋은 성적을 거둔다면 서열에 이름이 랭크될 수도 있다.” 루피아는 세게 주먹을 그러쥐었다. 잘 해야 하겠지만… 그래야만 하겠지만… 그녀들이 제대로만 해준다면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비록 그녀들은 자신을 미워하지만, 그것이 원동력이 되어 투지를 불태워준다면- 그래 준다면 그녀가 뜻하던 대로 되는 것이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나갔다. 세 마족은 뒤로 물러나 마련된 자리에 앉았고, 곧이어 시종들이 그녀의 팔목을 잡고 숫자가 새겨진 도장을 찍었다. 루피아의 팔에는 ‘477’이라는 숫자가 찍혀졌다. 공녀들 모두에게 1에서 497이라는 숫자가 하나씩 찍히자, 다시 시종들이 무엇인가를 들고 나타났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 들어가 설 수 있을만한 크기의 원판이었다. 그러나 평범하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 그 원판 안에는 알아볼 수 없는 글자들이 기하학적인 무늬처럼 나열되어 있었던 것이다. 루피아는 그것이 이곳에 올 때에 보았던 마법진의 문양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종들은 그것 말고도 똑같이 생긴 것을 아홉 개 정도- 그러니까 총 10개를 가져와 그녀들 앞에 늘어놓았다. 그리고 50명을 기준으로, 그녀들을 그것 앞에 줄 세웠다. 루피아는 영문도 모른 채, 가장 마지막 줄에 섰다. 어수선한 상황이 정리되자, 로이드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건, 말하자면 전투력 측정기라고나 할까? 이 마법진은 특수하게 구성된 것이라 마력이고 성력이고 상관하지 않고 순수하게 자신이 ‘싸울 수 있는’ 능력만을 측정하게 되어 있다. …고 하는군. 너희들 중에 수치가 가장 높은 자부터 30위까지 뽑아서 내일 있을 본선에 출전할 수 있게 된다.” 확실히, 가장 간단한 방법이군. 그들 입장에서는 그녀들을 위해 번거로운 수단까지 거칠 필요를 느끼지 못하니까, 이런 방법을 쓰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자! 방법은 다들 알아들었겠지? 시종들이 너희들의 수치를 기록해 내게 넘길 것이고, 선발된 30명은 내가 발표해주겠다. 그럼 알아서들 잘해 보라구.” 그리고 씩- 웃은 로이드윈은 아로데, 유리아덴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뎅그러니 남겨진 그녀들은 일일이 줄 세워진 채, 시종들과 함께 남겨져 버렸다. “뭐, 뭐야! 뭐 저런… 하!” “누가 마족 아니랄까봐서!” 시리어스 어로 투덜거리는 공녀들의 외침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아직까지 자신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걸 자각하지 못한 자들이 조금, -아니, 꽤 있는 것 같아 루피아는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한심하긴…….” “……!!” 울 것 같은 기분으로 주저앉아 있던 루피아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세키라의 목소리도, 에리나의 목소리도 아니다. 순간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 되어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녀의 앞에 선 여자는 그녀를 보며 생긋 웃었다. 한편, 시종들은 웅성거리는 그녀들을 순서대로 앞으로 불러내어 원형의 마법진 안으로 밀어 넣었다. 시종 역시 마족이라 공녀들은 움칠거리며 말을 따랐다. 그 모양을 바라보던 여자는 다시 한 번 짧게 코웃음을 치고 루피아를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당신이 그 유명한 ‘루피아 엘 세느안트’양이시죠?” 쾌활한 어조로 말한 그 여자는, 불쑥 손을 내밀었다. “나는 에웰로니 출신의 ‘델리드’라고 해요. 잘 부탁해요.” 델리드는 살빛이 검었다. 에웰로니의 여러 민족 중에는 살빛이 다크 엘프처럼 검은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풍성하게 퍼진 검은 파마머리가 가슴까지 내려오고, 예선을 치르기 위해 입은 듯한 편한 복장이 그 아래에 있었다. 델리드를 살펴본 루피아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숨기지도 않고 물었다. “나를 싫어하는 게 아닌가요?” “물론, 싫어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죠. 하지만 적어도 나는 아니에요.” 하하, 하고 호탕하게 웃으며 그녀가 말했다. 루피아는 어쩐지 코가 찡한 느낌을 받았다. “여기는 바보가 대부분이죠.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분명히 있다는 걸 알아주길 바라요. 몇 번이나 얘기할 기회를 갖길 바랐었지만- 이제야 만나 얘기하게 되는군요.” 뭐라고 대답도 하지 못하고 루피아가 델리드를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자, 머쓱했던 듯 델리드는 루피아의 어깨를 툭 치며 그녀를 앞으로 조심스레 밀었다. 그제야 조금 정신을 차린 루피아가 아, 하고 델리드를 쳐다보자 그녀는 루피아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미안하지만 얘기하는 것을 들키게 되면 저도 안전하지 못해요. 나중에 다시 얘기하도록 해요. 지금은 예선부터 치르고요.” 그러고 보니 벌써 그녀의 차례가 다 되어간다. 어떤 식으로 되는 건지 하나도 보지 못했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지만…, 델리드… 라. 어쩐지…….’ 예선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루피아는 자신이 서 있어야 할 자리에 바로 서면서 앞을 살폈다. 그녀는 4클래스까지의 원소마법을 쓸 수 있고, 물의 정령 세이준, 정신계 정령왕 히에로스가 있었다. 이쯤이면 30명 안에는 낄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래도 미래는 모르는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히에로스라면 무난할 것 같지만. 공녀들이 마법진 안으로 들어가면, 마법진이 환하게 빛을 발한다. 그러면 공녀들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허둥거리고, 이어 신음을 흘리며 비틀거린다. 아직까지는 별다른 것이 없이 이 순서의 반복이었다. 무엇인가를 보고 시종들이 종이에 뭔가를 끄적이지만, 루피아로서는 아직 뭘 보고 수치를 알아내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또다시 한 사람이 마법진 안에 발을 들여놓았다. 빛이 일어나고, 그리고 그 안의 공녀가 현기증을… 느껴야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빛이 점차 강해지더니, 점차 바람소리가 나며 마법진이 울렸다. 시종은 이색적이다, 라고 중얼거리며 종이에 뭔가를 적어 넣었다. ‘빛이 더 강하게 나고, 진에 들어갔던 사람도 멀쩡하고…….’ 다른 공녀들과는 다른 반응을 이끌어낸 여자는 차분해 보이는 분위기를 가진, 불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였다. 그녀는 루피아 쪽을 한 번 바라보더니 생긋 웃으며 윙크를 날리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뭐야, 이거……? 나, 모르는 사람한테 윙크 받은 거 맞지?’ 이어서 다시 강한 빛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와아- 하는 탄성도 곧이어 터졌다. 몇 번 그런 일이 있고나자 루피아의 차례는 금방 다가왔다. 드디어 마법진 앞에 서게 된 루피아는 후우, 하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녀는 진 안으로 한 발을 먼저 넣었다. 그리고 다른 한 발을 옮겨 완전하게 진 안으로 몸을 넣었다. 그러자, 바람소리가 나며 마법진에서 터져 나온 빛이 그녀의 온몸을 완전하게 휘어 감쌌다. 갑자기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무릎에 힘이 빠지고 곧 주저앉을 것처럼 후들거렸지만 루피아는 이를 악물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이 많은 눈들 앞에서 주저앉아 놀림이 되라고? 조금 길다 싶게 그녀를 감싼 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아찔한 느낌만을 남겨둔 채 빛은 그녀에게서 사라져버렸다. 격해진 숨을 애써 가다듬고 그녀는 마법진에서 걸어 나왔다. ‘제기랄- 나만 시간이 더 긴 것 같아. 마법진도 사람 차별하나?’ 수군거리는 소리가 더 커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도 내 착각이려나? 루피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리에 힘을 주어 발을 옮겼다. ‘델리드… 라, 솔직히 공녀들 중에서 나나 에리나, 세키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 중간계에서 마계로 오게 된 충격에서 다들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만 했었지. 그걸 생각해보면 델리드라는 그 사람은 굉장히 희망적인 징조인데.’ 나중에 다시 만나자고 했으니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대충 예선에 합격될 인원이 추려진 것 같아, 루피아는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 30명에 자신이 낄지, 못 낄지는 모르겠지만- 내일이 앞으로 공녀들의 운명에 지대~ 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것만은 자명하다! ‘……어……?’ 순간 루피아의 눈에 낯익은 것이 설핏 스쳤다. 잘못 본 것인가, 싶어 눈을 비비고 그녀는 다시 그곳을 쳐다보았다. 잘못 본 것이 아니다! 그녀는 어느새 그곳을 향해 빠르게 뛰고 있었다. * * * * * * * * * * * * * * * 쾅! 콰당! 투명한 창문에 부딪친 의자가 거칠게 튕겨져 나갔다. 가쁜 숨을 내쉬며 세키라는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저렇게 밖이 빤히 보이는데… 도저히 저 밖으로 나갈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갇혀버린 지도 꽤 오래 지난 것 같은데, 아로데는 그녀를 찾아올 생각은 도무지 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는!’ 이렇게 손놓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게 된 세키라는, 그녀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이 방에서 탈출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생각처럼 그렇게 쉽지 않다. 유리창은 무슨 수를 써놨는지 의자를 집어던져도 흠집 하나 가지 않고, 문 역시 꼼짝도 하지 않는다. 체력이 약한 세키라로서는 의자를 집어던진다는, 마지막 최후의 발악까지 해봤음에도 불구하고 얄미운 유리창(저게 창문이야? 저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목이 아직도 따끔거리는 것 같다. 목에 아직 거뭇하게 남아있는 멍 자국이 그때 아로데가 얼마나 그녀에게 화를 냈었는지를 가르쳐주는 증표처럼 선명하게 눈에 박혀들었다. 하지만 이대로 있으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녀는 호흡이 한결 진정되자 다시 몸을 일으켰다. 지금의 자신이 무력하기 그지없다는 것을 그녀는 지금 이 순간 뼈저리게 느꼈다. 이깟 유리창 하나 깨지 못해서 쩔쩔매고 있는 꼴이라니, 이 얼마나 한심한가 말이다. 그녀는 마구 흐트러진 바닥에 떨어진 꽃병을 집어 들었다. 도자기인 것 같은데- 의자로도 깨지 못한 것을 깰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던질까, 말까 갈등하던 세키라는 일단 던지고 보기로 했다. 던지기 위해 힘이 다 빠져 부들거리는 두 팔로 화병을 높이 치켜들었을 때였다. “……!!” 유리창 밖에 흐릿하게 사람 형상이 비쳤다. 여긴 분명히 3층, 그리고 그녀의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분명 ‘흐릿한’ 사람 형상이…! 그렇다면 설마, 유령? 흐릿한 인형(人形)은 그녀의 눈앞에서 점차 뚜렷한 형색을 갖춰갔다. 세키라는 곧, ‘그것’이 그녀가 아는 사람의 형상을 갖춰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구름 같은 핑크빛 머리카락이 양 옆에 둥글게 말려있고, 좀 더 진한 색을 가진 눈동자가 꿈꾸는 것처럼 흐려져 있었다. 예쁘다기보다는 귀엽다, 라는 수식어가 더 어울리는 그녀는 분명, 몸이 안 좋다며 교황의 거처에 남겠다고 말한 아유니였다. “어째서 여기에……?” 아니,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녀가 왜 ‘저런’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냐 하는 것이다. 세키라는 혼란스러운 기분이 되어 망연히 아유니의 형색이 뚜렷하게 갖춰진 투명한 연기 같은 것을 보았다. 마치 꿈꾸는 것처럼 흐려져 있었던 그녀의 핑크빛 눈동자가 점차 초점을 맞춰갔다. 반쯤 감겨져 있던 아유니의 눈이 번쩍, 하고 크게 뜨여지자, 구름 같은 그것은 점차 안으로, 세키라의 앞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그토록 깨기 위해 노력했던 유리창을 그대로 투과(透過)하여 아유니는 망연히 주저앉아 있는 세키라 앞에 섰다. ‘이건… 이건 꿈인가? 그런 건가? 대체 저건 뭐란 말이야! 저 연기 같이 뭉글뭉글한 아유니는!’ 그녀에게 있어 아유니는 ‘조금 이상한 공녀’였다. 적어도 저렇게, 유령처럼 유리창을 통과하고, 연기처럼 부유하는 ‘정체 모를 것’은 아니다, 라는 말이다. 저건 아유니가 아닌 건가? 그저 형체만 빌린 걸까- 아니면 정말 아유니가 죽어서? 그래서 한 많은 유령으로 다시 그녀 앞에 나타난 건가? 이것저것 말도 안 되는 온갖 예측이 머릿속에 난무하는 상태에서, 아유니의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파고들었다. 「세키라 에스베크.」 “……!!” 흠칫, 놀라는 세키라에게 아유니는 그대로 손을 내밀며 말했다. 「우리와 손을 잡지 않으시겠습니까?」 =========================== 늦었습니다;(이 말은 맨날 하게 되네요;) 어영부영 끝내버린 예선-_-;; 세키라 꼬시는(?) 아유니.. 으음, 루피아가 쫓아간 사람의 정체는?![두둥] ....핫핫핫. 그냥..; 시간이 없으므로-; 이쯤하고. 즐독하세요! 메일은 donghee425@hanmail.net으로 보내주세요. 제 목: 공녀(貢女) : 제32화 [제안을 받다] #. 제32화 [제안을 받다] * * * * * * * * * * * * * * * “잘못 봤나…? 아니야, 분명 여기 있었는데……?”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루피아가 중얼거렸다. 분명히 잘못 본 것이 아니라는 데에 가진 것 전부를 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텔레포트를 쓸 수 있다. 그러니 아무리 힘껏 달려왔다고 해도 시간차가 나는 이상 놓쳐버리는 것이 당연하다. 어쩐지 허탈해진 루피아는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왜 그렇게 열심히 달려왔을까? 공녀들의 무리(?)에서는 어느새 떨어져버렸다. 하지만 지금 돌아가기도 그다지 내키지 않아서, 루피아는 그 자리에서 호흡부터 진정시키기로 했다. 무슨 생각에서 그를 쫓아 이토록 열심히 달려왔는지, 만나서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스스로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웬만하면 피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후우, 하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대답… 빨리 하면 할수록 좋은 거겠지?” “물론.” 혼자 중얼거린 것이었고, 분명 돌아올 답은 없어야 하건만 대답이 들려오자 루피아는 헉, 하고 숨을 들이키며 고개를 쳐들었다. 가버린 줄 알았는데, 이디스는 그녀의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단 며칠 만에 보는 것인데, 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것처럼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마계에 와서 이제까지 쭉 그녀와 그는 떨어져 있지 않았었던 것이다. 요 근래에 들어 계속 떨어져 있었지만 그 전까지 그와 그녀는 같이 있었다.(비록 인식하지 못했었던 사실이지만) 긴 검은 머리카락이 허리 아래에서 바람에 흔들렸고, 피부는 도자기 인형처럼 새하얗고 매끄러워 보였다. 새빨간 루비처럼, 핏빛으로 빛나는 그의 눈동자는, 어째서인지 처음 그 눈을 봤을 때보다 부드러워져 있었다. 섬뜩하리만치 차가웠던 눈이 아니었다. ‘제길! 사랑이란 거, 하면 눈에 콩깍지가 뒤집어 씐다더니… 그 말이 사실인가 보군. 오빠들이 알면 기절초풍을 하겠는걸.’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자신이 이런 꼴(?)이 될 줄이야 정말이지 상상도 못했다. 그녀는 힘없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안녕… 오랜만이네요.” ……어째서 이런 말이 자꾸 튀어나오는 것인지, 내뱉자마자 후회하는 루피아였지만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느닷없는 그녀의 말에 어이가 없었던 것인지 눈을 몇 번 깜박이던 이디스는 결국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렇군.” 스스로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결국 못 참고 루피아가 있는 곳까지 와버리고 말았다. 500명 가까이 거의 비슷비슷한 복장의 여자들이 모여 있었지만 그는 루피아를 단번에 찾아냈다.(기척을 쫓으면 쉬운 일이다! 별다를 것 없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난생 처음 느껴보는 초조함이었다. 이제껏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던 그이지만 이번만은 어쩔 수가 없던 모양이다. 모든 것이 처음이기에, 그는 당연히 긴장이 되고, 말하기 부끄럽지만 떨리기도 무척 떨렸다. “……대답은?” 흠칫! 루피아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생각해둔 답이 있잖아… 결론은 이미 내렸잖아! 그런데 뭘 망설이는 거냐!’ 하지만 생각처럼 말하기 위해 벌린 입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를 않는다. 아, 아, 입술만 달싹일 뿐 머릿속에서 울리는 말들은 끝내 혀로 발음되기를 거부하는 것만 같다. ‘난 싫다!’고 한 마디만, 눈 딱 감고 한 마디만 하면 되는 거야.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초조하게 타는 심장을 움켜쥐었다. 그래 좋아, 단 한 마디면 돼! “……!!” 그러나 그와 눈을 맞춘 것이 실수였다. 차라리 그냥, 그냥 고개를 숙이고 말해버릴 것을, 그러면 훨씬 편하고 좋았을 것을. 그는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저 투명한 붉은 눈동자로, 그 안에 루피아를 비추면서 아무 말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원래, 루피아는 거짓말을 잘 하지 않는다. ‘하지 않는다.’라는 거지, ‘못한다.’라는 뜻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하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완벽한 거짓말을 했다. 만약 거짓말이라는 것이 들통이 나지 않도록 철저하게 계산해서 거짓말을 했다. 그런 면에서 거짓말이라는 아무런 증거가 없는 이번은 아주 ‘쉬운 거짓말’이었다. “난…….” * * * * * * * * * * * * * * * “그건… 무슨 소리죠?” 「말 그대로입니다. 나와 손을 잡고 함께 이 마계를 빠져나가자는 말이에요.」 유령이! 유령이 레이디 포르티칼의 목소리 그대로를 내고 있다! 저 표정, 저 어조… 분명히 그녀가 알던 아유니가 틀림없었다. 그녀가 알고 있던 상식-아유니는 유령이 아니다. 그런데 유령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죽었다? 잠깐! 그럼 저런 말을 할 리가… 한껏 혼란에서 허우적거리던 세키라는 문득 깨달았다. 지금, 레이디 포르티칼이 내게 뭐라 했지? “뭐……?” 빠져나갈 방법을, 길을 알고 있다는 소리인가? 하지만 어째서인지 아유니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황의 거처를 알고 있었다는 것만 해도 충분히 수상쩍은데, 저런 모습으로 나타난 상황에야 더 뭘 말하랴? 침착함을 되찾은 세키라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자세히 말씀해주십시오. 무슨 방법으로 이곳을 빠져나간다는 것이죠?” 아유니는 방금 전까지 방을 온통 난장판으로 만들었던 그녀가 대번 차갑게 가라앉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안개처럼 흐릿한 형체 그대로 바닥에 발을 내렸다. 그래봤자 단지 외형상의 모습일 뿐 전혀 의미 없는 행위였지만 주의를 집중하는 데에는 눈높이가 비슷한 편이 나았다. 「제 뒤에는 ‘천계’가 있습니다.」 “……!!!” 「그들이 약속했습니다. ‘공녀가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에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라고 말입니다.」 “……약속…….” 마계에 와서 가장 확실하게 느낀 것 중 하나가, 바로 ‘약속’이란 것의 무게였다. 인간에게는 한없이 가벼울 수도, 또한 목숨처럼 무거울 수도 있는 것이 약속이지만, 다른 타 종족들에게 ‘약속’이란 ‘목숨보다 더한’ 무게를 지니는 것이다. 그런 만큼 아유니가 말한 ‘천족의 약속’은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선뜻 ‘물론! 믿겠습니다!’라는 대답이 나오지 않는 것은, 아마도 이제껏 아로데에게 들어온 천족에 대한 이야기들 때문일 것이다. 세키라가 망설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인지 아유니의 한쪽 눈썹이 찌푸려졌다. “공녀가 돌아간다고 해도… 우리가 있을 자리가 있을까요?” 이것은 마계로 오면서부터 가지고 있던 생각이었다. 그러나 대답은 너무나 분명하다. 그녀들이 있을 자리란 중간계에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유니는 다소 신경질적인 어조로 세키라의 질문에 너무나 간단히 대답했다.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라고 했어요! 천계에 머무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세키라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런 기회를 기다려오지 않았던가? 이런 기회를 붙잡으려고 일부러 탈출을 감행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선뜻 가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까……. “…제가 이 자리에서 결정을 내려버리기에는 너무나 큰 문제입니다.” 「결정? 결정이라고 했나요, 지금? 당연한 것 아닌가요!」 칙, 치직! 아유니가 화가 난 듯이 외치자 그녀의 모습이 흔들렸다. 마치 바람에 안개가 흩어지는 모양새와 비슷하다. 아유니는 입술을 깨물고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시간이 다 되어가…… 빨리 결정하세요, 세키라 에스베크!」 “말했습니다. 제가 혼자 결정하기에는 너무나 큰 문제라고…… 당신은 지금 나 하나에게 손을 내민 것이 아니라 ‘공녀(貢女)’ 전부에게 손을 내민 것이니까…… 대표할 자격이 없는 저로서는 대답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유니의 입으로 욕설이 배어나왔다. 그러나 세키라는 시종일관 침착한 태도로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유니는 그녀를 차갑게 노려보며 씹어뱉을 듯 말했다. 「알았어요, 세키라 에스베크! 정 그렇다면… 내일, 6시에- 다시 데리러 오겠습니다. 그때는 확답을 들려주시길. 그때는 정말… 시간이 없을 테니…… 까… 치직.」 세키라의 방 안에 바람이 거칠게 불어 닥쳤다. 아유니의 모습이 흩어지는 안개처럼, 세키라의 눈에 희미한 잔상만을 남겨놓은 채 사라져버렸다. 잠시 뒤, 세키라는 이미 난장판이 되어 흐트러진 침대로 다가갔다. 그리고 푹신한 침대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무릎을 당겨 안았다. ‘정체가 뭐지? 저 아유니 드 포르티칼이라는 여자… 시리어스 제국 어(語)를 쓰지만 나는 <드 포르티칼>이라는 백작 가문을 들어본 적이 없어. 처음에는 잊어버린 것이려니 했지만 모두 기억하는데 유독 그것만 모른다는 것은 말이 안 돼. 그러고 보니 레이디 포르티칼이 우리 말고는 대화 나누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 21살이라면 아무리 늦었어도 데뷔를 했을 나이, 그렇다면 적어도 아는 사람 한 둘 정도는 있어야 하는 거잖아. 다른 공녀들도 아유니에 대한 언급이 단 한 번도 없었고…….’ 점차 아유니의 정체가 불분명한 게 되어가자 단지 ‘공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볍게 넘어가곤 했었던 것이 후회가 되었다. ‘루피아와 에리나한테 말해야 하겠지? 그런데 어째서 평소 따르던(?) 루피아에게 가지 않고 나에게 먼저 왔을까?’ 그렇다면 일단 이곳에서 나가야 한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자 세키라는 아유니 덕분에 더욱 난장판이 되어버린 실내와, 굳건히 닫혀있는 유리창, 흠집은 났지만 여전히 꿈쩍도 안 하는 문 등등을 살펴보며 머리가 지끈거림을 느꼈다. 이왕 말해주려고 들어왔으면, 출구라도 열어주고 갈 것이지! * * * * * * * * * * * * * * * “……나 죽을 때까지, 잘해줄 자신 있어요?” “……!!” 쉬운 거짓말인데, 단 한 마디만 하면 되는데, 끝내 루피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제까지 그녀가 하려고 했던 말과는 정 반대의 말이었다. 루피아의 입에서 그런 대답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는지, 이디스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아직도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루피아는 이디스의 얼굴이 서서히 변해가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처음 놀람만 가득했던 그 얼굴에, 서서히 다른 감정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리고……. 툭! 그가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녀와 눈높이를 마주한 그는, 그녀가 자신의 표정을 보지 못하도록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뭐예요? 자신 없어요? 없음 말구요.” 요령 없는 남자 같으니.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그녀의 어깨만 꽉 움켜쥐고 놔주지 않는 이디스를 보며 루피아는 속으로 혀를 찼다. 하긴, 들었던 그의 과거지사를 생각해보면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그가 잘해준다느니, 영원의 사랑을 맹세하겠다느니 중간계의 여타 다른 귀족들이 하는 소리를 지껄인다는 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생각을 바꿨다. 어차피 공녀가 중간계로 돌아갈 수 있다고 장담할 수도 없는 상황이 아닌가? 이곳에서 평생 살아야 모르는데 있을지 없을지 확실하지도 않은 희박한 가능성에 앞으로의 미래를 모두 걸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자신이 없었다. 가슴속 끝까지 차갑다고, 심장까지 얼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가 상처 입은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그래, 평생 돌아갈 수 없을 가능성이 더 많다. “거짓말은… 아니겠지?” ……아니, 이 남자가! 조개처럼 입 꾹 다물고 있다가 기껏 한다는 말이! 차라리 거짓말이었다면 훨씬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루피아가 뭐라고 반박할 말을 채 찾기도 전에 다시 이디스가 말했다. “거짓말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만약 거짓말이라면, 그냥 계속 거짓말을 해라.” 듣자듣자 하니까! 루피아는 팍, 하고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불만스럽게 그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먼저! 그 말투부터 고치세요! 태어날 때부터 명령하는 데 익숙했던 사람, 아니, 마족인 건 나도 알겠지만 나는 그런 말투, 싫으니까.” “뭐?” 갑자기 무슨? 돌아가는 사태를 파악하지 못해 헤매는 그를 보며 싱긋 웃은 루피아는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못 들었어요? 말투부터 고치세요. 좀더 다르게 말하는 법을 배워보라구요. 그렇게 딱딱 끊어지는 딱딱한 말투 말고, 좀더 다르게….” 하? 이제껏 누가 감히 그 앞에서 저런 말을 했던가? 그는 마왕이었다. 마계의 모든 것을 손에 쥐고 있는 자, 마계 모든 것의 정점(頂点)에 올라서 있는 자였다. 그런 그에게 루피아가 말하는 ‘그런 말투’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고 또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루피아는 그런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애초에 그를 싫어했던 것에는 그의 말투도 한몫을 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루피아는 결심했다. 언제나 혼자 있는 것에만 익숙하고, 사람을 사귀는 데에는 무지하게 서툰 이 남자를 아예 처음부터 싸악- 뜯어고쳐 주겠다고. ‘작은 것부터 차근차근 하는 게 좋겠지? 후후후… 후후후후훗!’ 루피아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갑자기 너무나 마음이 편안하고 가벼워졌다. 이제까지 그녀를 괴롭혀왔던 고민들이 한순간에 재가 되어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간단하고 단순하게 생각하면 이렇게 편한데-. 어쩌겠는가? 좋아져버린 것을. 어쩌겠는가? 솔직하고 싶어진 것을. 어쩌겠는가? 이제껏 얼어있었던 그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아진 것을-. “……어떻게?” 그가 심각하게 굳어진 얼굴로 되묻자, 루피아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혼자 큭큭거리던 그녀는 결국 못 참고 크게 웃어버렸다. 누가 이 남자를 마왕이라고 생각할까? 악의 대명사, 흉악하고 사악하며 온갖 치사하고 비겁한 짓은 몽땅 챙겨 하는 악마 중의 악마인 마왕이라고? “……어째서 웃는 거지?” “아… 하하하! 아하하하! 큭큭… 풋, 하하하핫!”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는 그의 앞에서 루피아는 다시 한 번 크게 웃었다. 그리고는 웃느라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눈에는 눈물까지 달고) 그의 어깨를 짚으며 띄엄띄엄 말했다. “조, 좋아서. 좋아서… 좋아서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건 사실이었으니까. 한번 솔직해지기로 마음먹은 이상 루피아는 더는 자신을 속이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피식피식 웃으면서 이디스의 목에 팔을 둘러 껴안았다. ‘행복하니까 됐잖아. 그래, 됐어. 다 잘 될 거야…….’ 대륙을 위해서, 중간계를 위해서 ‘제물’이 되었다. 한 번 그렇게 모든 것을 포기했으면, 이제껏 살아왔던 곳을 버리고, 가족과 이별해 희생양이 되었으면, 이제는- 지금은, 행복해도 되는 것이 아닐까? 자신에게 솔직해져도 되는 게 아닐까-? ============================== .....슬~럼프♡ 우훗훗훗... 영, 진도가 안 나가네요-_- 드디어 오매불망 바라던, 러브 모드 진행! ...차례가 다가온 것 같습니다![박수~] 지루하다는 분도, 끄는 것 같다는 분도 계신 것 같지만.. 어쩌겠습니까?;(아아, 상처가 됐어요☆) 그렇다고 빼먹고 갈 수 있는(...지금 뺐다가는 오히려 얻어맞을 것 같은데..) 것도 아닌 걸요! 요즘 완전히 올빼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새벽 5, 6시에 잠들고 낮 12시 쯤에 깨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지요.; 덕분에 학교 갈 일이 걱정입니다마는, 그때 가서 어떻게든 되겠지- 란 생각으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즐독하세요!(메일은 donghee425@hanmail.net으로 보내주세요^^) 덧. 위에 “난…….”부분에서 끊고 천계나 아유니 상황을 적으려고 했는데, 그랬다가는 짱돌에 깔릴 것 같아..;; 핫핫핫.[...;] 제 목: 공녀(貢女) : 제33화 [드러난 카엘의 정체!] #. 제33화 [드러난 카엘의 정체!] * * * * * * * * * * * * * * * 「이제까지 뭘 하고 다녔는데 아직 멀었다는 거야! 이제 그만 철수해! 네가 그 세 인간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더 이상 지체할 수는 없는 일이야.」 카마엘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요시피아나의 말이 맞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계속 미련이 남았다. 시간이 없다는 사실은 그도 느끼고 있었기에 초조함만이 날로 쌓여갔다. 자그마한 손거울 속의 요시피아나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상황을 이해하고는 있는 거냐? 마계 서열대회가 열렸어. 이제 남겨진 시간은 많아봤자 하루다. 에우로카엘에게도 남겨진 시간은 많지 않아… 그녀의 ‘한계’를 모르는 건 아닐 텐데? 그녀는 비록 혼혈이라 우리와 다른 점도 많지만, 그래도 그녀는 명백한 열세 번째 아이의 자리를 꿰차고 있는 ‘천족’이야.」 천계의 상황은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고작 30년이라는 짧은 세월 동안, 이렇게 많은 것들이 바뀔 수 있을 줄이야 상상도 못했다. 12대천사의 위명은 모두 헛것이 되었다. 장로들은 그들의 말보다는, 마지막 열세 번째 아이의 명령을 더욱더 절대적으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여타 다른 천족들에게도 이미 마찬가지였다. 거의 모든 천족들에게, ‘에우로카엘’은 거의 신과 같은 위치에 서 있는 자였다. 무슨 수를 썼는지 몰라도… 빠득, 요시피아나는 이를 갈았다. ‘천사(天使)’란 결국 신의 종에 불과하다. 오직 오르가프님, 단 한 분께 모든 생의 의미를 바쳐야 하는 것이 천족이란 종족의 사명이건만! 마족에게는 천족과는 달리, ‘자유’라는 것이 주어져 있다. 그들은 모두 클리오라를 따르고 섬기지만, ‘마왕’이라는, 신과 같이 절대적인 권력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가 있고, 또 허용된다. 하지만 천족에게는 아닌 것이다. 만약 마왕과 같이 오르가프 외에 절대적 권력을 지닌 자가 나타나고, ‘신보다’ 그를 더 따르게 된다면, 천족에게 주어진 ‘존재 이유’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 “…전쟁이… 다시 일어나는 거냐?” 제3차 천마전쟁, 그것이 다시 일어날 모양이다. 카마엘의 말에 요시피아나는 후우- 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카엘이 막으려고 무진 노력을 하는 모양이지만, 이미 대세가 그리로 기울었다고 봐야 했다. 그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언제?” 「아마도, 내일.」 “뭐? 그렇게 빨리!” 「그래서 말했잖아. 시간이 없다고. 연락을 못한 건 미안하지만 여기도 워낙 급박하게 돌아간 터라 연락할 새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카마엘은 생각보다 훨씬 더 시간이 없음을 깨닫고 더욱 초조해졌다. 망할 엘프들, 저렇게까지 버티다니! 생각 같아서는, 마음 같아서는 그냥 다 뒤엎어버리고 싶었으나 죄 없는 다른 엘프들에게까지 피해가 갔다가는 그 뒷수습을 하기도 곤란해질 것 같아 참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상황이 크게 번져버렸다면-. 카마엘의 생각이 눈에 뻔히 보이는 것 같아 요시피아나는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골치 아픈 짓을 벌일 생각 마. 여기서 엘프들을 건드리자면 분명 검술 갖고는 안 될 테니 힘을 쓸 테고, 민감한 엘프들이 너의 기운을 못 느낄 리가 없다고. 이 상황에서 미카엘에게 골칫거리를 떠안겨 줘 봐야 좋은 꼴 못 날 테니 다른 방법을 찾던지 해. 물론, 인간들이!」 진작 그를 불러들이지 않은 것은 정신이 없었던 이유도 있지만, 카마엘이 될 수 있으면 인간들과 함께 있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아서이기도 했다. 다른 천족들에게 인간들이란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존재이지만, 카마엘에게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징벌(懲罰)의 카마엘- 다른 천족들보다 훨씬 인간과 많이 부딪치고, 인간의 감정과 접촉하는, 약간 중립적인 입장의 그이다보니 그런 것이겠지만……. 「여하튼, 내가 할 말은 이거다. 전쟁이 터지기 전에, 에우로카엘- 그 여자가 움직이기 전에 철수해라. …곧 마계로 가게 될 테니.」 “잠깐! 그럼 공녀들은? 그녀들은, 그 사이에 있으면 십중팔구 죽게 될 텐데…?!” 「그 점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미리 세리엘을 보내기로 해 놨어.」 위험한 일이다. 세리엘은, 전에도 몇 번 마계에 사자(使者)로 간 일이 있어 다른 이들보다 마계의 공기에 대해 면역성이 좋은 편이었다. 아마 그래서 이번에도 뽑힌 것일 게다. 믿을 수 있는 자는 현재 12대천사의 일원뿐이고 말이다. 「징벌의 카마엘. 잊지 마라. 시간이 없다. 네 임무를 잊어서는 곤란해.」 요시피아나의 모습이 거울에서 지워졌다. 손바닥에 딱 들어맞는 크기의 거울을 꽉 쥐면서,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천계 측에서 공녀를 구출하기로 했다면, 더 이상 이런 일은 필요 없는 거겠지…. 그렇지만 그걸 카에리드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도 없는 일이라 더 난감했다. 그들 손으로 구해냈다고, 그렇게 하게 해주고 싶었는데. 하지만 할 수 없는 거지. 카마엘은 쓴웃음을 삼키며 돌아섰다. “결국… 잊혀진 건가.” 그가 멀어진 그 곳에 근처의 풀이 술렁였다. 조금씩 이파리를 움직이던 수풀에서, 푸핫, 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가 한꺼번에 우르르 쏟아졌다. “아, 아야. 히니 아파-!” 작은 체구로 돌아온 드래곤 히투니아를 선두로, 카에리드, 이데카른, 트로에, 바르에든, 에드윈드까지- 모두가 그 작은 수풀에서 튀어나와 뒹굴었다. 한꺼번에 갑자기 튀어나오게 되는 바람에 넘어진 히투니아는 팔꿈치가 까져 눈물을 글썽거렸다. “……형님, 들었어요?” “‘징벌의 카마엘’이라는군…?” 혼자서 외진 곳으로 사라지려는 카엘을 수상쩍다 여긴 에드윈드는, 히투니아의 도움을 빌려 그가 하는 것을 모두와 엿보자고 제안했다. 히투니아는 어째서인지 조금 우물거렸지만 바르에든의 ‘부탁합니다.’라는 한 마디에 흔쾌히 그 부탁을 수락했다. “잠깐!! 그것보다, 천마전쟁? 그것도 마계에서~? 아악, 그럼 우리 누나는!!” “천계에서 공녀들을 데려간다고?!!” 에드윈드와 트로에가 이제야 깨달은 듯이 외쳤다. 그, 그럼 마계의 문을 열겠다고 나선 그들을 감시하기 위해 천계에서 보낸 스파이(?)가 바로 카엘, 아니, 카마엘인가? 아니면, 혹시 있을지도 모를 마족들의 중간계 침입 때문에? 허둥지둥 거리며 패닉에 빠져버린 트로에와 에드윈드를 뒷전으로 제쳐두고, 카에리드와 이데카른은 서로 마주보며 눈살을 팍 찌푸렸다. 뭔가 떠오를 듯하면서도 자꾸 머리 뒤로 사라져버리는 기억. 재채기가 나올 듯 하면서도 나오지 않는 것과 비슷한 답답함이다. 그들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채 생각에 잠겨들었다. 카엘… 카엘… 카마엘. 엘 세느안트 형제에게 외에는 굉장히 오만불손한, 그리고 징벌의 천사 카마엘이기도 한……? “……!!” “……!!”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외쳤다. “고양이!!” * * * * * * * * * * * * * * * 이데카른과 카에리드가 벌떡 일어나 카엘이 간 방향으로 달려가 버리자, 에드윈드는 남겨진 트로에에게 물었다. “형은 뭐 기억하는 거 없어요?” “그, 글쎄. 나는 잘… 모르겠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때 트로에는 고작해야 2, 3살에 불과했던 것이다. 아무리 머리가 좋다고 해도 그때를 기억하고 있지는 못하는 것이다. 게다가 아주 짧은 시간이었고, 고양이 ‘카엘’과 친한 것은 카에리드와 이데카른이었다. “징벌의 천사, 카마엘이라. 수상쩍다고 여기기는 했지만… 게다가 인간 같은 냄새도 나지 않는 사람이었고. 설마 천사일 줄은! 게다가 그 성격으로…….” 그야말로 환상이 와자작! 하고 부서지는 순간이라고나 할까. 날카롭고 정의로운 심판의 검으로 악(惡)을 처단하는 징벌의 천사이자 신의 두 번째 아이인 카마엘이-…… 그 동안 자신이 바르에든과 함께 당했던 차별대우들이 떠오르자 에드윈드의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졌다. “천계에서 공녀들의 구출에 성공한다면, 우리는…….” 침묵하고 있던 바르에든이 입을 열었다. 이제까지 단지 마계로 가는 문만을 찾아다녔을 뿐, 뭘 어떻게 구하리라는 계획은 하나도 없었다. 인간들, 그것도 ‘또래’ 중에서는 가장 강한 축에 속한다 하나, 그들은 아직 미숙했고 또 약했다. 그런 그들보다, 천계의 천족이 훨씬 믿음직하며 구출해낼 확률도 높을 것이다. “천계에서 구출해내면, 그 뒤를 맡아야죠. 생각해 보세요. 구해내기만 한다고 끝나는 건 아니라구요. 마계에서 ‘돌아온 여자’들인데, 사람들이 곱게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시겠죠? 그 자리를 만드는 것도 우리 일입니다.” 그것 역시 문제였다. 어떻게 보면 그 문제가 더 심각할 수도 있었다. 바르에든의 표정이 다시 굳어지자 에드윈드는 환하게 웃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수밖에 없으니, 하던 것을 계속 하는 수밖에 없다. 게다가 남은 일도 수없이 많고, 높다. 에드윈드는 음모를 꾸미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두 사람을 보았다. “그래서 말인데…….” * * * * * * * * * * * * * * * “장로들의 꿈에?” 카마엘은 나이에 맞지 않게 음흉한 웃음을(마치 40대 아저씨 같은!) 짓고 있는 에드윈드를 바라보았다. 엘프들 역시 오르가프님을 섬기는 몸, 그렇다면 천사인 카마엘의 말은 절대적인 것이 되리라. 생각지도 못한 방법이었다는 듯, 카마엘이 오호, 하고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만 해결해주면 카엘님 없이도 해결할 수 있잖아요? 그곳까지 가는 것은 히투니아님께서 도와주실 테고요.” 좋은 방법이죠? 하고 말하는 듯 에드윈드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확실히 잔머리(…) 하나는 알아주어야 할 듯 했다. “그나저나 생각도 못 했어. 카엘이… 그 고양이 카엘. 푸후후, 그렇게 생각하면, 이데카른, 우리가 전에 만났던 남자애도 설명이 되잖아.” 카에리드가 갑자기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무표정한 이데카른의 얼굴에도 드문 미소가 떠올랐다. 그들의 공통점이라면, 오만한 초록색 눈동자뿐이었지만, 고양이의 이미지가 어쩌면 그리도 잘 어울릴까 싶었다. “웃지 마! 그게 가장 눈에 안 띄는 방법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고.” 너무나 익숙하게 서로 반말을 하는 모습이, 조금 전과는 아주 딴판이었지만 바르에든과 에드윈드, 트로에는 이제 모두 그러려니- 하고 넘기자고 생각하고 있었다. 루피아가 태어날 즈음에, 카에리드와 이데카른은 초록색 눈을 한 검은 고양이 하나를 주웠었다. 강하고 나른한 초록색 눈동자를 한 그 고양이를, 카에리드와 이데카른은 무척 좋아했고 고양이 역시 그들을 따랐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루피아가 태어난 후에는 사라져버려서 무척 안타까워했는데, 설마 카엘이 그 고양이일 줄이야? 어째서 고양이를 떠올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두 사람의 머릿속에는 갑자기 그런 생각이 스쳤다. “……그런데, 고양이?” 바르에든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계속 귀에 거슬리던 단어였다. 고양이와 천사 카마엘, 그리고 카엘이 무슨 연관이 있다는 거지? 그에 키득거리던 카에리드가 전말을 말해주기 위해 입을 열자, 카엘이 하얗게 얼굴을 탈색시켰다. “너, 너!! 말하기만 해 봐!!” “그, 그게 말이지.” “야!!” 잠시 후, 다섯 사람과 한 마리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숲 속을 요란하게 울렸다. ============================ 될 수 있으면 중간계 상황은 짧게 끝내려고 하지만..[한숨] 너무 간단했나?; 잘 써지지가 않는다니까요..;; 이제 곧 개학인데![눈물] 즐독하세요오.....[...] 메일은 donghee425@hanmail.net으로 보내주세요. 제 목: 공녀(貢女) : 제34화 [본선, 시작되다!](1) #. 제34화 [본선, 시작되다!] * * * * * * * * * * * * * * *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은’이란 말을, 그제야 깨달았다면 충분히 설명이 될까? 아니, 무슨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가슴이 콱 막히고 눈이 따갑게 시리며, 숨조차 쉴 수 없게 되어버렸다. 눈은 뜨고 있으나 보지 못했고, 귀는 열려 있으나 듣지 못했다. ======================루피아의 자서전================= ‘어… 아침, 인가…?’ 부스스한 머리를 한 채, 루피아는 슥, 몸을 일으켰다. 반쯤 뜬 눈으로 좌우를 살피고 다시 꾸벅거리면서 머리를 푹- 베개에 박은 그녀는, 멍하니 비어있는 머릿속에 하나둘씩 생각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마치 안개가 끼어있는 것처럼, 개운하지 않았던 머릿속이 점차 맑게 개여 갔다. 루피아는 유난히 아침에 약했다. 어릴 때부터도 아침에는 늘 다른 사람들보다 늦게 일어나곤 했던 그녀였다. 마법을 배우면서부터는 그나마 나아졌지만 그래도 아버지나 오빠들처럼 일찍 일어나지는 못했다. 아침에는 머리가 멍해서, 정신을 차리는 데 시간이 걸리는데다, 아침만 되면 그놈의 침대가 어찌나 그리도 사랑스러운지! 이불 속에서 보비작거리다 보면 시간은 다 가 버리고 마는 것이다. 마계에 와서는 한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었기 때문에 그 버릇이 나오지 않았지만, 어제는 너무 안심을 해버려서… 뭐? 안심? 가만있어 봐. 어제 무슨 일…. 가만히 기억을 되살려보던 루피아는, 어제 있었던 일을 정확하게 기억해냈다. 결국 일을 쳤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피식, 하는 웃음도 새어 나왔다. 그래,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다. 하지만 후회되지는 않았다. 어제, 말투부터 고치라고 말했지만, 시작부터 그의 말투가 사근사근해 질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게다가, 그에게 사근사근한 말투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고 말이다.(지금에서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나아지면 바랄 게 없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던 모습을 떠올리자 루피아는 다시 킥킥거렸다. 그런 모습을 보면 영락없는 어린애 같다. 꼭 부모한테 칭찬받고 싶어서 애쓰는 어린아이 같았다. 그럼 난 부모 격인 건가, 하고 머리를 긁적이다 루피아는 피식 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베개에 대고 작게 웃었다. “……루피아, 너 어디 아프니?” “…어. 세키라. 에리나.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침대에 누운 채 눈만 굴려, 루피아는 하하 웃었다. 그러자 에리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루피아의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어디가 아픈 거야. 분명히! 아니면 얘가 이럴 이유가 없어!” “…너무하잖아. 그저 잠을 푹 자서 기분이 좋은 것뿐이라고.” 루피아는 침대에서 일어나 작게 마련된 탈의실로 가서 옷을 집어 들었다. 활동하기 편하도록 디자인 되어 있는 마계의 의복은, 중간계에서 입어보지 못했던 바지 형식으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남자 귀족처럼 다리에 착 달라붙는 것이 아니라 약간 펄럭일 정도로 여유가 충분했기 때문에 루피아는 이 의복이 참 마음에 들었다. “요사이 많이 우울해보이더니… 괜찮아졌나 보구나. 무슨 일이 있었니?” “응? 아, 아니 뭐…… 아무 것도.” 뜨끔! 세키라의 말이 괜히 가슴에 푹 찔렸다. 하지만 역시 말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 한숨을 내쉰 그녀는 진지하게 얼굴을 굳히고 자신의 두 친구를 보며 입을 열었다. 잠시 뒤, 두 사람은 충격을 받은 듯 눈조차 깜박이지 못하고 굳었다. 충격을 받을 만도 하지. 믿고 있던 사람한테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일 것이다. 잠시의 시간이 흐른 뒤, 세키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게 된 거구나. 라샤린 성에서는 그래서…….” 모든 것이 정리되었다는 듯이 말은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혼란스러움이 남아 있었다. 만약 루피아가 보았다면 혼란 말고도 다른 감정이 서려있음을 알았을 테지만, 세키라를 보고 있지 않던 루피아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에리나는 어쩐지 얼떨떨한 눈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겠다는 듯이 말했다. “이런 말 하면 안 되겠지만, 나는 이해를 못 하겠어. 대체 어디가 좋다는 거야?” 그도 그럴 것이, 에리나와 세키라에게 마왕은 언제나 무섭기만 한 존재였던 것이다. 늘 위에서 싸늘하게 내려다보던 위압적인 자가 바로 마왕이었다. 온몸이 저릿하도록 두렵기만 한 존재! 특히, 세키라는 언젠가 화를 내던 그의 모습을 봤던 적이 있어서인지 더욱 그가 두려웠다. 에리나의 생각을 읽은 루피아는 하하 웃으면서 말했다. “마왕이니까 할 수 없잖아.” ……문제는 그게 아니야! 에리나와 세키라는 마음속으로 절규했다. “그래도 좋아. 좋은 건 어쩔 수가 없어. 아무리 생각해봐도, 역시 멈출 수가 없을 것 같아. 이제 솔직해지고 싶어… 어린애 같이 불안한 그를, 역시 혼자 둘 수 없어.” * * * * * * * * * * * * * * * 여기인가? 합격통보를 받은 루피아는 안내 받아 도착한 곳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며 두리번거렸다. 30명의 공녀 합격자와 함께, 오늘 그녀들의 ‘상대’가 되어줄 마족들이 함께 기다리는 곳이었다. 토너먼트 식으로 할 거라고 하던데, 근 두 달에 걸쳐 긴 기간을 두고 열리는 서열대회의 첫 날에 출전하게 될 ‘신청자’들은 재수가 없다는 식으로 잔뜩 구겨진 인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길은 모두 한 곳으로 모여 있었기 때문에 루피아는 굳이 공녀들을 힘써 찾을 필요가 없었다. “아! 루피아 양.” 델리드였다. 여전히 쾌활한 인상의 그녀는 반갑게 그녀의 손을 잡아 아래위로 흔들며 루피아를 반겼다. 같은 공녀에게서(세키라와 에리나를 제외하고) 이런 환대를 받아보는 것은 처음이라 루피아는 조금은 어색하게 델리드를 마주했다. “괜찮아요. 어차피 여기에는 나와 친한 사람들밖에 없거든.” 델리드는 루피아에게서 한 걸음 물러서 보이며 뒤에 있는 여자들을 볼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녀들 사이에는, 어제 루피아에게 윙크를 했던 붉은 머리 여자도 끼어 있었다. “우리는 모두 당신에게 감사하고 있어요. 그때… 모진 말을 했던 이유도. 이제 조금 마음을 덜어도 돼요. 우리가 힘이 되어줄 테니까.” 붉은 머리의 여자가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루피아는 어, 하고,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결국 무슨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음, 역시 쑥스러운 건가. 그저 달래주는 역할이 싫었을 뿐이어서 그랬던 것뿐이지만, 미움을 받는 역할도 솔직히 말하면 싫었다. 하지만 이제 그러지 않아도,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괜한 걱정이었나? 그녀는 조금 앞당긴 것일 뿐, 어쩌면 공녀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일어설 수 있었을 것이다. 델리드나 붉은 머리 아가씨 같은 사람들도 있고, ‘바보’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시간은 조금 더 걸렸을 지도 모르겠지만. 붉은 머리 아가씨의 이름은 ‘로위나’라고 했다. 청순한 이미지이지만, 어쩐지 요염함이 느껴지는 상냥한 아가씨였다. 그 외에도 페넬로페, 메이나, 조셀린 등 많았지만 한꺼번에 이름을 다 외우는 것은 무리이다 싶어서 루피아는 천천히 외우기로 했다. ‘조금 더 일찍 알았었더라면 좋았을 걸. 그럼 나 혼자 끙끙댈 필요도 없었을 테고… 뭐, 하지만 나 같은 악역이 하나쯤은 필요하니까 됐어.’ 그런데 바로 그 때였다. “재수도 없지. 하필이면 오늘이 걸릴 게 뭐야?” 이해는 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저런 식으로 시비 거는 것을 들으면 기분이 안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일부러 고대어로 말했으니 들으라고 한 말이 뻔했다. 말을 꺼낸 마족은 루피아가 보기에도 어려 보였다. 인간을 기준으로 치자면 고작해야 17살 정도나 되었을까 싶었다. 뭐, 마족이니 100살은 기본적으로 넘겼겠지만. 아마도 오늘 서열대회를 치르게 될 자들은 막 성체(成體)가 된 마족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 점이 어떻게 보면 더 괴기야. 저 얼굴로 100살을 넘겼다니. …그러고 보니, 아로데나 로이드윈, 유리아덴도 꽤 나이가 들었을 텐데? 그럼 대체 몇 살이라는 거지? …이디스는?’ 설마- 그 얼굴들로 1000년은 더 묵었다(?)거나 뭐 그런 건 아니겠지?(아쉽게도 그 설마가 정확하다) 인간이 아닌 타 종족들은, 특히 마족이나 천족은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육체가 성장을 멈춰버려서, 나이를 짐작하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다. 신관이라면 마족이라도 늙게 되는 모양이지만. “재수 없는 걸로 치자면 이곳에 오게 된 우리가 제일 재수가 없지. 안 그래?” 어리게 생긴 마족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딴 생각을 하고 있던 루피아는 빈정대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쪽에는 로위나가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상대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뭐라고? 이, 이 천한 인간 주제에!” 한눈에 보기에도 울컥했다는 게 보인다. 과연 마족이라 잘생긴 얼굴이 꿈틀거리며 화가 났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로위나는, 무슨 배짱에서인지 오히려 그를 삐딱하게 쳐다보며 피식 웃는 게 아닌가! 솔직히 루피아도 그녀의 그 놀라운 배짱에 놀랐다. 겉보기에도 성격이 불같을 것 같았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네가 말한 그 ‘천한 인간’을 아내로 맞아야 하는 게 네 상관이다, 바보야!” 허리에 손을 얹고 따지는 로위나는 안 그래? 라고 덧붙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우리를 불러들인 건 너희들이 모시는 신이시고 말이야! 다시 말해, 우리가 여기 있는 건 신의 뜻이라는 게 아니겠어? 그런데 이렇게 막 대해도 되는 거냐고?” 그 신의 뜻- 이라는 것을 그녀들도 잘 모르는 처지이긴 하지만 굳이 틀린 것도 아니기에 딱히 할 말이 있지도 않을 것이었다. 말이 막힌 마족은 입을 다물고 그녀들을 노려보며 험악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결국 못 참겠는지 마족은 몸 주위에 푸른 스파크를 튀기며 손 주위에 마력을 모았다. “이봐! 죽이지는 말라고.” 지켜보고 있던 마족 중 하나가 말했다. 로위나가 말했던 것처럼 그녀들이 이곳에 오게 된 이유는 클리오라의 뜻이기 때문에 그녀들을 하나라도 죽여서는 곤란했다. 마족은 알고 있어, 라고 짧게 대답한 후에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전형적인 악당의 상像이다!) 이대로 두면 정말 큰일이 나겠다, 싶어서 루피아는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아니, 열려고 했다. “무슨 소란인가!” 장내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 음성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모두를 얼게 만들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로위나가 어떻게 당할지 기대하며 수군거리던 마족들도, 발끈하며 같이 일어서려던 공녀들도, 이제껏 당당하게 마족과 마주하던 로위나도 굳어 버렸다. “군주님…….” 마족 중의 누군가가 중얼거리듯이 흘린 그 말을 기점으로 침묵이 깨졌다. 이디스는 싸늘한 눈으로 좌중을 훑어 내리다가 루피아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입 꼬리를 슬쩍 올렸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듣지 않아도 뻔한 상황이었다. 공녀와 마족이 시비가 붙은 것이라는 건 말이다. 그러나 이디스는 굳이 설명을 듣고자 하는 사람처럼 마력을 모으고 있던(지금은 파랗게 질려서 굳어버린) 마족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잠시 얼어버린 마족을 바라보다가 뒤돌아서며 말했다. “소란을 일으키지 마라. 시끄러운 일은 질색이니까.” 이디스가 뒤돌아 사라지고 난 뒤, 긴장이 풀린 듯 마족이 털썩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곳곳에서도 참고 있었던 숨을 길게 풀어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공녀들도 다르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중에서도, 공녀들 중에 이디스와 가장 가까이에 서 있었던 로위나는 무의식중에 손까지 덜덜 떨고 있었다. “괜찮아요?” 그 만큼 ‘마왕’이라는 직위 자체가 가지는 위력은 큰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데, 이디스 그 본인이 가지는 위압감은 인간인 공녀들에게나 막 성체(成體)가 된 마족들에게나 무척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루피아는 그녀와 함께 있을 때는 그가 처음과는 달리 편하게 느껴지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던 것을 눈치 챘다. “과…, 과연 마왕이에요. 이렇게나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야…….” 델리드가 말했다. “마족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파다해요. 이거 아세요? 한때 ‘피에 미쳤다’는 소문까지 돌았었다는 것을 말이에요. 시종으로 붙인 자들의 속을 손으로 직접 파헤치며 즐겼다는 거예요. 지금은 아니라고 하지만… 마왕으로 즉위하기 전에는 그랬던 적이 있었다고 해요.” 루피아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버리자 델리드는 ‘들은 거지만요’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그녀는 대륙 공통어로 말했다. “어서 돌아가고 싶어… 언제나 그 생각으로 기도를 올리지만, 내 목소리가 닿기에 신이 계신 곳은 너무 먼 것 같아요. 저 하늘처럼 흐린 하늘이 아닌, 내 고향의 새파란 하늘이 보고 싶어. 이 곳의 눅눅하고 차가운 공기가 아니라 따가운 햇살의 더운 공기가 그리워요.” 어쩐지, 루피아는…… 울고 싶어졌다. * * * * * * * * * * * * * * * “보고 싶었다.” 코너를 돌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디스가 그녀를 안으면서 말했다. 루피아는 방금 델리드에게 그런 말을 들어놓고도 그를 보고 반가워지는 자신이 싫었다. 죄를 짓는 기분이야. 이미 각오한 일이면서도 델리드의 목소리는 그녀의 양심을 쿡쿡 아프게 찔렀다. 이디스는 그녀의 머리에 코를 박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제 살 것 같다.” 그의 입가가 만족스럽게 늘어졌다. 이 얼굴을 보고 있자면, 아까 모두 앞에서의 ‘마왕’인 그와는 완전 딴사람인 것 같았다. 루피아는 그의 어깨에 한숨을 쉬며 이마를 문질렀다. 이렇게, 웃을 줄도 아는 사람인데… 델리드에게서 들었던 섬뜩한 소문을 떠올린 루피아는 그렇게 말해주고 싶은 것을 꾹 참았었다. 에리나와 세키라에게는 비교적 쉽게 말을 했었지만, 델리드나 로위나들에게는 도저히 그런 말, 꺼내지 못할 것 같았다. 차라리, 그들도 나를 그저 못된 악녀로 봤으면 좋았을걸.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이디스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아, 나도 영락없는 여자인가. 평소 남자들에게 매달려 우는 여자들을 보고 닭살 돋게 왜 그래! 라고 말했으면서 그의 말 한 마디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러나 루피아는 그 대신 그를 슬쩍 밀쳐냈다. “그럴 리가요! 그런데, 대체 아까는 거기 왜 나타난 거예요?” 뭔가 미심쩍다는 듯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던 이디스는 루피아의 목을 감싸 끌어당겨 안으면서 말했다. “네가 보고 싶어서.” 너무나 당연하게 말하는 그의 태도에 말문이 막힌 것은 루피아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떠나지 마라. 이제 너 없이는 살 수 없다. 그거 하나만 약속해주면, 모두 다 주겠다. 원하는 건 뭐든지.” 전에도 생각한 거지만, 그는 의외로 저런 말을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루피아는 이디스의 입술에 입술을 겹치면서 속삭이듯 작게 말했다. “약속할게요.” 만약 떠나게 된다면, 이제 견딜 수 없는 건 그녀 자신일 것일 테니까……. * * * * * * * * * * * * * * * 세키라는 아로데의 옆에 앉아 있었다. 그는 그녀를 옆으로 데려와 놓고도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서열 2위의 위력은 과연 대단한지, 그녀는 시합장을 가장 보기 좋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에리나도 유리아덴과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 시합장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내일 6시에……」 아유니의 목소리가 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오늘 아침, 루피아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은 이상-… 세키라는 고통스럽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어떡하지? 이제, 이제 어떻게 하지- 나는, 나는 뭘 어떻게 해야 할까!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대체 어쩌다가-. 차라리, 마왕성에 있었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 가족을 잃은 슬픔에, 괴로움에 몸부림을 치기는 했지만 이토록 가슴이 시리도록 아프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것은, 아로데가 다시는 그때처럼 그녀를 보고 웃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아마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겠지- 중간계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주제에 그의 냉대를 대하기 괴롭다니, 자신이 뻔뻔스러웠다. ‘여기서 움직일 수 없는 확실한 이유가 있는 에리나가, 계약으로 확실하게 묶여져 있는 에리나가 부럽다면, 나쁜 걸까.’ 지금에 와서는 자신의 마음조차 확실하지가 못했다.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지만 가장 멀게 느껴지는 그. 정말 돌아가고 싶은 걸까? 라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마음속으로 질문을 해보지만 답은 그대로 속에 묻어두었다. ‘말해야 하겠지? 그래야겠지?’ 사실, 아침에 말하려고 했었다. 그렇지만 도저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밝게,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행복한 얼굴로 웃으면서 말하는 루피아를 보자니 목구멍이 콱 막혀버린 기분이었다. ‘이제 와서 어떻게 말해?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전쟁이 일어날 거……?’ 생각을 하던 세키라는 악, 하고 짧은 신음을 흘렸다. 전쟁? 전쟁이라고? 그녀의 작고 여린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전쟁이 일어나면- 제3차 천마전쟁이 일어나게 된다면, 아로데 역시 다칠 것이다. 아무리 강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다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어쩌면-, 어쩌면- 죽을 지도 몰라! 본능적으로 세키라는 덥썩, 아로데의 옷자락을 잡았다. 무슨 일이냐는 듯 그녀에게 고개를 돌린 아로데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세키라를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래?” 죽다니- 아로데가 죽다니! 어머니처럼- 죽다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쟁이 일어날 거라고, 천계에서 쳐들어올 거라고 입을 열려던 세키라는 눈물을 후둑후둑 흘리면서 아, 아, 아 하고 의미 없는 짧은 단어만을 나열했다. 말할 수 없어! 나는 그럴 수 없어-!! “이봐! 세키라! 왜 그래? 정신 차려!!” 말할 수 없어- 그럴 수 없어. “아… 아아. 아아아아-!” 말하고 싶었다. 아니, 속으로는 한없이 소리치고 있었다. 크게, 그가 들을 만큼 크게. 전쟁이 일어나요! 천계가 쳐들어온대요. 피해야 해, 아니, 준비라도 해야 해요! 라고. 그렇지만 그 말들은 그저 속에서만 떠돌 뿐,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세키라는 괴로웠다. 그래서 울었다. 말하지 못하는 대신, 그녀는 울었다. 크게, 말하지 못하는 만큼 크게 그녀는 울었다. 서럽게 울었다. 루피아에게도 말하지 못한다. 도저히, 그 아이의 행복을 깨는 짓은 하지 못한다. 이제 겨우 괴로움에서 벗어나 행복을 찾았는데- 진심으로 행복에 젖어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 아이에게 그녀는 도저히 말하지 못한다. 괴로웠을 테지? 그 마음, 인정하기까지 정말 힘들었을 테지- 루피아의 성격을 알기에, 인정하기까지 오랜 시간 괴로워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세키라-? 세키라? 진정해! 갑자기 왜-?” “으, 으… 아아아! 흐어어엉-……!” 아로데는 당황하며 세키라를 세게 끌어안았다. 갑자기 왜 그녀가 우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화가 나 있었음에도 그는 울고 있는 그녀를 그냥 둘 수 없어 세게 끌어안았다. “흐… 미… 안… 해요… 흑, 흐아아아-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뭐? 무슨 말이야!” “세키라! 왜 그래? 세키라!!” “미안해요! 나는…… 아아아아아아아---!!” 울었다.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었다. 탈진할 때까지 세키라는 울었다. 눈물이 하염없이 떨어져 내렸다. 아로데의 품안에 안겨서 세키라는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그 말밖에는 모르는 것처럼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이렇게 못나서. 이렇게 바보 같아서…… 내 진심조차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바보라서 미안해요…… 사랑한다고, 그 말도 못하는 바보라서……. 말하고 싶어도, 내 모든 것을 버릴 용기가 없는 겁쟁이라서…… 미안해요…….’ ================================== 이번에는 좀 길죠?[씨익] 음.. 세키라를 너무 괴롭히는 건가; 그래도 뭐... 핫핫^^; 내일이면 개학입니다.[눈물] 그럼 즐독하세요. 메일은 donghee425@hanmail.net(..이제 바꿔볼까- 생각 중입니다)으로 보내주세요. 덧. 저기.. 저 닉네임, 바꿀까요?-_- 역시 바꾸면 헷갈리시려나... 제 목: 공녀(貢女) : 제35화 [공녀, 파란을 일으키다!](1) #. 제35화 [공녀, 파란을 일으키다!] * * * * * * * * * * * * * * * 언제 어디서나 방심은 금물! 아무리 하찮게 여기던 상대일지라도 그 말을 매순간 되새기며 대하도록 하자. 예상치 못한 일은 늘 뒤통수를 치며 터지기 마련이고, 기적이라는 말이 괜히 존재하는 게 아니다. ==========================루피아의 자서전================= 널따란 시합장을 가운데에 두고 관중석이 둥그렇게 감싸 안고 있었다. 마치 고대에 있었다던 격투 돔을 떠올리게 만드는 형태의 건축물은, 마계의 창세기 시절부터 서열대회에 이용되던 건물이라고 했다. 그만큼 낡았지만 오히려 더 견고해보였다. 서열대회라고 하면, 마족들의 축제나 다름없는 행사였다. 공녀다 뭐다 끼어들어 잠시 처음의 분위기를 흐리기는 했지만 10년에 한 번 가장 크게 열리는 서열대회는 모든 마족들에게 있어 가장 떠들썩하고 크며 기간이 긴 행사였던 것이다. 과연 그 분위기에 걸맞게 어제와는 달리 콜로세움의 밖에는 장사꾼들과 마족들로 복작거렸다. 전투란 그네들에게 있어 생활의 일부분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곳곳에서는 싸움이 일어나기 싸움이 일어나기 일쑤여서 더욱 시끄럽고 소란스러웠지만 모두들 그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기에 아무도 불쾌함을 느끼거나 하지는 않았다. 서열대회의 첫날은, 이제 막 성년이 된 어린 마족들의 시간이다. 이제껏 미성년으로써 서열을 가지지 못했던 그들이 처음으로 마계에서 서열을 가지게 되는 날이라는 것이다. 만약 성년이 되어서 서열을 가진 누군가와 싸워서 이겼다면 그 서열을 가지게 되지만 보통은 성년이 되고 나서 처음 맞는 서열에서 순위를 매기게 된다. 일부러 이 날에 그녀들을 끼워 넣은 것은 수준을 어느 정도라도 맞추려는 의도에서였다. “승률은 얼마나 될까요?” 루피아는 물었다. 그녀의 차례는 아직 세 시합이나 후이기 때문에 아직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세키라와 에리나가 있는 곳으로 올라왔다. 마왕이 있는 곳으로 간다, 고 말했을 때 델리드와 로위나의 그 동정심 어린 얼굴이라니.(지옥으로 간다고 했어도 그런 표정이 나왔을까 싶다) 그러나 세키라와 에리나도 그리 밝은 표정은 아니었기에 루피아의 기분도 덩달아 가라앉았다. “글쎄. 난 공녀들의 실력을 정확히 알지 못해서. 거의 없을 거라고 보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이디스가 대답했다. 그 말에 루피아도 얼굴을 찌푸렸다. 사실 그녀도 공녀들의 실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세키라, 에리나도 그것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기대를 걸게 된다. 델리드나 로위나 등은 이제까지 만났던 다니엘라 같은 여자들하고는 달랐기 때문이었다. 루피아는 일단 믿어보기로 했다. 적어도 그녀가 보기에 로위나와 델리드들은 뭔가 믿는 게 있어 보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벌벌 떨던 마족에게 그렇게 당당할 수가 있겠느냐는 말이다. 아무 생각 없이 그런 짓을 할 사람들로는 안 보이니까. 이디스의 마음을 받아들였다고는 하지만, 그것과 공녀들에 대한 것은 또 다른 일이다. 아자! 공녀 파이팅!! 이겨라! 헤런트는 4년 전에 성년(成年)이 되었다. 서열을 가져 마계 사회의 당당한 일원이 되기 위해, 그는 오늘만을 손꼽아 기다려왔다. 그러나 몇 개월 전, 그는 불쾌한 소식을 접해야만 했다. 공녀와 서열대회에 함께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마족들의 가장 성대한 축제에! 감히 인간 여자 따위가 끼인다는 것은 그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헤런트는 마왕의 그 결정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생각이신 거지? 아무도, 인간 따위에게 질 리가 없지 않은가?’ 헤런트는 엘리트였다. 그는 순수 붉은 눈 일족의 피를 타고났으며, 아카데미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손꼽히는 실력자의 자리를 지켜왔다. 그렇다고 그가 자신의 힘을 과신하는 바보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분명 그의 위에 강한 자를 많이 알고 있고, 자신의 힘이 그에 비하면 얼마나 미약한 것이라는 것도 잘 알았다. 가장 대표적인 마족으로 유리아덴 드 샤벨이 있다. 그는 서열 4위의 마족으로, 다른 2, 3위 분들에 비해 아카데미에 비교적 자주 들리시는 분이었다. 학교 내에 엘리트, 혹은 ‘잘 나가는’ 부류였던 헤런트는 그를 가까이에서 볼 기회가 몇 번 있었다. 서열 4위! 아직 서열도 갖지 못한 애송이 중의 애송이인 그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자리에 서 있는 그는 헤런트의 동경이 대상이 되기에 아주 충분했다. 어떤 일이 닥쳐도 변함없이 침착한 포커페이스!(그러나 그는 한 번도 유리아덴이 당황스러운 상황에 처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우아한 행동거지!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아끼는 신중함!(그저 귀찮았던 것뿐이다) 그는 지금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바로 가까이에! 동경하는 분과 군주 앞에서 자신의 미력한 실력이나마 내보일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 흥분이 되었다. 그리고 그 상대가, 고작해야 인간이라는 사실을 떠올리자 그의 눈썹은 다시 찌푸려졌다. ‘이겨봤자 별 자랑거리도 되지 못하잖아.’ 아마 30명 정도야 금방 나가떨어져 버릴 테지… 그들은 이런 기회나마 준 군주께 감사를 드리며 일찌감치 물러나야 할 것이다. 얼른 끝내고 다음을 준비해야지. 그는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며 사회자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앞으로 나아갔다. 로위나는 사회자가 자신의 이름을 크게 외쳐 부르자 야유하는 관중들을 보며 마른 목으로 타액을 어렵게 넘겼다. 열심히 준비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많이 모자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녀는 애써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걸어 나갔다. 척 보기에도 지겨워 보이는 눈을 하고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는 상대가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사회자가 뭐라고 말을 하자 그제야 그녀를 돌아보며 키득키득 하고 웃었다. 사회자는 마계어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뭐라고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 좋은 말은 아니었을 터였다. 비웃는 표정 하나만 봐도 그것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상대방의 키득거림은 점점 더 심해지더니, 마침내는 관중석 전체까지 퍼져 모두가 로위나를 비웃는 듯한 눈으로 쳐다봤다. 야유소리도 점점 더 심해졌다. 이에 사회자가 한 마디를 더 툭 던지듯 말했다. 모두 커다란 폭소를 터뜨렸다. 로위나는 이를 으득 갈았다.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분함에 주먹만 으스러져라 움켜쥐었다. 더 화가 나는 것은, 모여 있는 공녀들의 모습이었다. 그녀들은 한심하게도 눈물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시끄러- 멍청이들아! 닥치지 못해?! 조용히 하란 말이야!!” 바로 그 때였다. 로위나의 귀를 낯익은 목소리가 때렸다. 로위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사회자의 음성 확대 기구를 뺏어든 루피아가 시리어스 어(語)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질린 듯한 표정의 마왕이 있었다. “알아듣지 못할 말로 계속 지껄일 테야? 비겁하게! 어때, 이건 기분 좋냐?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니까 너희는 기분 좋아?” 사회자가 당황하며 음성 확대 기구를 도로 가져가려 하자 루피아가 인상을 쓰며 그를 밀어내고 지그시 노려보았다. 결국 던지듯 그에게 음성 확대 기구를 주고, 그녀는 에리나에게 끌려 제자리로 돌아갔다. 로위나는 문득 이곳에 오자마자 루피아가 소리를 질렀던 일이 떠올랐다. 어느 정도 긴장이 풀리자, 그녀는 미친 것처럼 두근거리던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있었다. 짧게 심호흡을 한 그녀는, 턱에 힘을 주고 앞을 노려보았다. 상대방은 천지가 개벽한 것을 보기라도 한 듯 튀어나올 것처럼 눈을 커다랗게 뜨고 루피아 쪽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사회자가 약간 더듬는 어투로 뭐라고 말을 하자 그제야 그녀 쪽을 돌아보았다.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지루한 눈빛이었지만 그녀를 마치 희귀한 것을 보듯 보고 있었다. “시작!” 루피아는 아직도 사회자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뭐? 뭐라고? 마계어를 약간이나마 알아들을 수 있던 루피아는 그가 킬킬거리며 한 말이 무엇을 뜻했는지 어느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디스로부터 정확한 해석을 듣고 나서 그녀는 눈이 확 돌아 버렸다. 마족 중에, 서열 600위 이내에는 여성이 없다. 600위 이하부터는 남자보다 여자가 더 높은 서열을 차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600위 이내에 여성이 한 명도 없다는 것 때문에 마계에는 ‘당연히 여자보다 남자가’ 하는 생각이 넓게 퍼져 있었다. 일부 종족을 빼놓고는 남성 위주로 생활이 돌아가는 것도 사실이다. 그 사회자는 공녀들에게, 마족 하층민 사이에서도 아주 심한 경우가 아니면 나오지 않는 욕을 했던 것이다.(여자에게 적용되는) 그리고 관객들에게 동의를 구했다. ‘그렇죠?’라고 말이다. 그래서 마족들이 낄낄대고 웃었던 것이다. 중앙으로 나간 로위나가 진지하게 상대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루피아는 이디스에게 말했다. “난, 마족이 인간보다 그렇게 잘났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천족도 마찬가지야! 모두 함께 오르가프, 클리오라에게서 창조된 생명일 텐데 뭐가 그리 다르다고 그러지? 힘의 차이? 수명의 차이? 어떻게 그런 것이 위대함의 잣대가 될 수 있는 건데!!” 사실 그 말은, 힘의 강약(强弱)이 모든 것을 결정짓는 마계에서 내뱉을 말이 아니었지만 지금 루피아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이제까지 루피아가 생각해왔던 말이기도 했다. 이디스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난 상관없다. 그런 것… 네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 * * * * * * * * * * * * * * “난 저 여자, 아무래도 탐탁치 않아.” 카른이 딜렌에게 말했다. 딜렌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나도 마음에 들지 않아, 딜렌. 기분이 나쁘거든… 그래도 목적이 같잖아?” 그거면 다 된다는 듯이 딜렌이 말했다. 카른은 그의 말이 딱히 틀리지도 않았기에 뭐라고 말하지도 못한 채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그는 정말 저 여자와 함께 일을 벌인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정도 거사(巨事)는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데… 그러나 이제 와서 저 여자가 빠진다면 그것 또한 곤란한 노릇이었다. 솔직히 마계의 마왕을 치는데,(이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천계가 개입한다는 것 자체가 마족으로써 불쾌하고도- 용납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다. 아무리 딜렌이 그의 가장 소중한 친우이지만, 그를 위해 ‘그림자’ 일족의 가는 명맥마저 끊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는 ‘그림자’ 일족의 부흥(復興)을 위해 딜렌이 이어준 ‘에우로카엘’ 즉, ‘아유니’와의 손을 잡았던 것이다. 물론, 그 또 다른 이유는 딜렌을 돕기 위해서였다. 파란 실핏줄이 비춰 보일 것처럼 투명하고 창백한 흰 피부. 조금 동그란 얼굴선과 차분히 닫힌 긴 속눈썹- 앙증맞게 솟은 코, 보랏빛으로 변한 입술. 마치 죽은 이의 육체 같지만 아유니의 가슴은 계속 아주 조금씩 올락 날락 하고 있었다. 코에서는 가느다란 실낱같은 숨이 불어나오고 있다. 웨이브가 져 구불거리는 핑크색 머리칼이 베개 위로 흩어진 것을 내려다보며 카른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나마 이곳에 도착할 때에는 뺨에 핏기라도 있었는데… 이건, 영락없는 시체 아닌가! ‘천계의 공기는 이곳과 달라서, 천계인은 이곳에서 100시간을 넘기면 죽는다던데- 그게 사실이었나 보군. 하프(Half)라도 별 수 없었던 모양이야… 아, 그래서 이제껏 버틴 거겠지.’ 이런 소리는 하면 안 되겠지만, 딜렌은 천계인과의 하프(Half)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카른은 저래서야 어디 이 여자가 도움이 되겠나 싶었다. 출발할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가 괜히 이 여자가 불안해져 탐탁찮게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아.” 아유니의 눈이 어느 사이 뜨여져 있었다. 카른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히익, 하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괴물 아니야? 방금까지 지켜보고 있었는데 언제 눈을 뜬 거지? 그러자 마치 카른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아유니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난 괴물이 아냐.” “…생각을 읽나?” “내가 원한 게 아니다.” 이건 다 그- ‘로헤델의 별’의 힘이지. 아유니, -에우로카엘은 씁쓸하게 입안으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그렇지 않아도 말랐던 몸이 더 말라 뼈만 남은 것 같은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이제 이것도 한계인가…… 그녀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했다. “정확히 오늘 8시… 마계의 하늘이 ‘열린다.’ 그곳으로 천족이 들이닥칠 것이다. 그 사이에 네가 마왕을 ‘죽이고’ 위(位)에 올라라. 알겠나? 너희들이 해줄 것은 그게 다야…… 혹여, 다른 것에 손을 대었다가는 천족의 목표는 바로 너희로 바뀐다.” 기분이 상한 카른이 말을 하려고 입을 열려고 했지만 아유니는 틈을 주지 않았다. “‘그림자’족 혼자 그 자리에 모인 마족들을 제압하는 것은 힘들지. 그래서 딜렌, 당신에게 이제껏 일을 부탁해온 거야. ……알고 있겠지?” “동맹(同盟)은 상당하지. 이제껏 마계는 너무 평화로웠어. ……전투에 미쳐 살아가는 마족이, 이 종족이- 너무 오래 움직이지 않았던 거지. 이제 움직일 때가 되었어. 그래서 그럴까? 이제껏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인데도 동(動)한 종족이 상당히 많아.” 그것은 마왕 이디스의 치세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의 정치는 훌륭했고, 서열 2, 3, 4위의 마족은 그와 함께 마계를 잘 이끌어나갔다. 그러나 너무 ‘잘’ 했던 것이 문제였다. 근래 20년간이 가장 분쟁이 없던 시기였고, 그 전대 마왕 때부터 크고 작은 분란은 있었지만 큰 전쟁 같은 것은 없었다. 모두 몸이 근질근질한 것이다. 아유니는 마족들을 비웃으며 눈을 다시 감았다. 더욱 파리해진 안색이, 이제는 안쓰럽다기보다는 괴기스러웠다. ‘이제 떠날 때가 되었구나…….’ =============================== 오늘 12시가 넘어서야, 겨우 집에 도착했습니다. 전기고 뭐고 쓸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더군요. 방은 엉만진창이고..-_-;; 아빠를 졸라서 겨우겨우 고치고, 컴퓨터를 제일 먼저 켰습니다. 그래서 이제 겨우 하나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저 어제, 아니 이제는 그제군요. 정말 죽을 뻔 했습니다. 약속 못 지킨 건, 정말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는 거지만-(..쓰기는 정말 전에 썼는데, 인터넷 연결이;) 제 가족이 차를 타고 부산을 향해 갔던 때가, 태풍이 한창 강할 때였거든요. 차가 덜컹덜컹 거리면서 바람에 이리저리 치이고.. 거의 떠서 간다고 생각될 정도였습니다. 언양 휴게소까지는 차가 꽉 막혔었는데, 휴게소를 나오니 차가 없더군요. 태풍은 더 세지지.. 결국 통도사 호텔에 가서 하룻밤 지샜습니다. 난리도 아니었어요-_- 호텔 간판 떨어지고(부모님 바로 옆에서요), 지붕 날아가고.. 흐에에;; 부산 외가에 도착해서도..-_-;; ......뭐. 지금 시각 3시 20분을 넘어가네요; 죄송합니다, 늦어서... 덧. ....하루에 한 개 올리신다는 분. ...네! 정말 부럽습니다. 부러워 죽겠어요.[주륵] 제 목: 공녀(貢女) : 제36화 [제3차 천마대전](1) 에리나와 세키라가 마계 반란 소식을 들은 것은, 그로부터 약 30분가량 후였다. #. 제36화 [제3차 천마대전](1) * * * * * * * * * * * * * * * 이제까지 천마대전은 모두 3번에 걸쳐 일어났다. 모두 역사책에 서술되어 있는 대로 끔찍하고도 잔인한 전쟁이었으며 그 피해는 3계에 걸쳐 엄청났다. 차원의 생명체 중 4분의 3이 모두 명계의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말까지 있었으니까 말이다. 4분의 3 정도는 아니더라도 그에 육박할 정도로 많은 생명이 죽어나가지 않았을까. 내가 본 광경은 지옥이었다. 감히 그려낼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한 지옥도(地獄道). ==========================루피아의 자서전================= 몽롱한 기분 속에 무겁게 내리앉아 있던 눈꺼풀이 슬그머니 들어올려졌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것은 흐릿하게, 아직 뚜렷이 잡히지 않아 어지러운 광경뿐이었다. 머리가 지끈거려 왔다. 루피아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두어 번 눈을 깜박였다. 그제야 미친 시야가 겨우 정상으로 돌아왔다. 정신을 차린 루피아는 꼭 뭔가가 온몸을 무겁게 내리누르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아직 몸이 축 늘어지는 게, ‘꼭 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그녀는 기억을 더듬었다. 기억의 끝은 첫 시합에서 유쾌하고 상쾌하게 승리를 거머쥐고, 의기양양하게 이디스에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리고… 그리고……, 기억이 나지 않았다. ‘으씨!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흐트러뜨리던 루피아는 인상을 팍 일그러뜨렸다. 뭐지? 내가 대체 왜 이런 데에 와서 잠이나 퍼자고 있었던 거더라? 그때까지도 축 늘어졌던 그녀의 몸에 단번에 긴장감이 일으켜 세워졌다. “루피아님.” 이 목소리는…? 퍼뜩 정신을 차린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쳐다봤다. 그곳에는 마지막으로 봤던 모습과는 상당히 달라진 모습의 아유니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루피아는 자신이 누워있는 곳이 처음 보는 방의 침대 위라는 것도 깨달았다. 아유니는 상당히 말라 있었다. 마계와 와서 차츰차츰 말라가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아주 삐쩍 말라, 안쓰럽기는커녕 해괴망측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여전히 옆으로 동글동글하게 말아 올린 머리카락은 이미 윤기를 잃어 푸석푸석해 보였다. 여기 와서 음식을 먹기는 한 건가, 이 여자?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죠?” 거두절미하고, 루피아는 가장 궁금한 사항부터 물어 보았다. 직설적인 그녀의 물음에 아유니는 희미한 웃음을 지으면서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직까지 힘이 들어가지 않는 온몸을 긴장시키면서 루피아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마침내 아유니의 입이 열렸다. 조금 전 그녀의 이름을 불렀던 목소리와는 달리, 많이 거칠어진 목소리. “제가 이곳에 데리고 온 것입니다. 당신이 다치는 것은 원하지 않기에.” 다쳐? 다치다니? 어렴풋한 불안이 손끝을 차갑게 만들었다. 아유니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이곳에 있으면 안전합니다. 이미 마계 반란군은 출전을 했습니다. 곧 저의 세력도 이곳에 몰려들 겁니다. 막으려고 해 봤자 소용없습니다.” 불현듯 루피아의 머릿속에 스쳐지나가는 단어가 하나 있었다. 전쟁! 전쟁인가? 루피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벌떡 몸을 일으키려다 윽, 하고 신음만 흘려야했다. 아직도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더 움직이려 하자 몸이 쑤시는 듯이 아파왔다. “너! 무슨 생각이야! 만약 내 친구들하고 이디스들에게 무슨 짓이라도 해 봐!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예견된 전쟁입니다. 한 번은 일어나야 했던 전쟁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마왕군(軍)에게 가능성은 없을 겁니다. 마계의 40%가 넘는 세력과 천계의 세력을 어떻게 감당해낼 수 있겠습니까?” “천계……? 천계가 가담했단 말이야?” 아유니는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루피아는 이를 악물었다. 이딴 것! 루피아는 안간힘을 다해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살과 살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옴폭 들어간 아유니의 볼이 발갛게 부어올랐고 입술이 찢어져 붉은 피가 나왔다. 아유니는 얼굴을 표정을 알 수 없게 돌린 채 푹 숙이고 있었다. 루피아는 한 자 한 자 씹어뱉듯 말을 내뱉었다. “날, 내, 보, 내!!” ‘우리들이 마계에 바쳐질 때에는 꼼짝 않던 것들이! 이제 와서! 뭘 어쩌겠단 얘기야!’ 세키라는? 에리나는? 이디스는? 아로데들은! 나머지 다른 공녀들은! 갑자기 마계에 쳐들어가 전쟁을 일으키겠다면 다 죽이겠단 소리 아냐?! 그리고 이디스는…….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루피아의 입가가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래, 그 사람은 무적이니까. 걱정할 필요 없을 거야. “믿을 줄 알아?! 왜 나만 여기 데려온 거야! 이딴 호의 필요 없어! 날 여기서 내보내 줘!!” 돌려진 채 다시 들려질 줄 모르던 아유니가 다시 그녀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때 그녀의 눈은 처음과 다름없는 아주 침착한 눈동자라 오히려 루피아가 오싹해졌다. “이미 공녀들은 제 세력에게로 넘어 왔습니다. 루피아님의 친구 중 한 분도 그곳에 함께 계십니다.” 아유니의 입가에 희미한 조소(嘲笑)가 떠올랐다. “‘천계’ 그 한 마디에 모두 넘어오던 걸요. 다른 것도 필요 없었습니다. 이래봬도 많이 걱정했는데 말이죠. 바람잡이 한 명의 선동으로 한 치의 의심 없이 나를 믿었습니다.” 아유니는 그 말을 끝으로 알 수 없는 눈으로 루피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루피아는 숨을 몰아쉬면서 아유니를 노려봤지만 아유니는 끝끝내 슬픈 눈으로만 그녀를 바라봤다. 조금 전 루피아가 후려친 따귀로 터진 입술에서는 피가 멈추지 않고 아직도 흐르고 있었다. 이제는 뚝뚝 흘러내려 침대 시트를 적실 정도로. 아유니는 턱 근처에서 피를 닦았지만 피는 여전히 멈출 줄 몰랐다. 아유니는 피식 웃으며 피가 묻은 손바닥을 응시했다. 작은 상처였는데. “이제 슬슬 이 ‘몸’도 한계인가 봅니다.” “뭐?” ‘아무 것도’라고 가볍게 웃으며 대답한 아유니는 그대로 루피아에게서 등을 돌려 걸어 나갔다. 문이 닫힐 때까지, 루피아는 움직일 수 있는 최대한 움직이려고 악을 쓰며 소리소리를 질러댔다. “야! 야!! 너 거기 안 서! 가려거든 날 내보내 놓고 가란 말이다! 움직일 수 있게라도 해 줘어어엇!!” * * * * * * * * * * * * * * * 천계는 철저한 계급 사회다. 마계가 가진 능력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는 사회라면, 천계는 계급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된다. 자신이 가진 계급에 의해 권한, 능력, 임무, 거주지까지 결정되는 것이다. 계급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 9계급 엔젤즈(ANGEL)로 태어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처음부터 제2계급인 케루빔(지천사CHERUBIM)으로 태어나는 자가 있는 것이다. 승급이라는 것이 있긴 하지만, 반드시 승급이 돼야 할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지닌 자가 아니라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반면, 강등은 쉽게 이루어진다. 가령, 날개를 찢어버리거나-이것은 이미 금지된 처벌법 중 하나이다- 능력을 빼앗아버린다면 쉽게 강등되는 것이다. 천계의 장로는 모두 24명. 그들은 모두 제2계급인 케루빔이며, 제2차 천지대전(天地大戰)에서 크게 활약했던 자들이었다. 열두 대천사가 은둔(隱遁)했었던 근 30년 동안, 그들은 에우로카엘의 휘하에서 천계의 지배권을 손에 쥐었다. 이제 천족들에게는 그들의 신(神) ‘오르가프’보다, ‘대천사장 미카엘’이나 열두 대천사보다 ‘장로’와 ‘에우로카엘’이 더 권위 있는 이름이 되었다. ‘징벌’의 카마엘이 지배하는 제6계급 파워즈(능천사)들을 제외하고는 천족 모두가 그들의 명령 한 마디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것이다. 세라핌SERAPHIM이라는 이름은 천계에 있어서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치천사로 6장의 날개를 가지고 있고 ‘성스러움’과 ‘거룩함’을 상징하는 그들은 언제나 천계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런데-. “저희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습니다! 형제들은 가증스러운 마계의 죄악 덩어리들을 처벌하고 싶어 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참아야 하는 것입니까? 그들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죄악이며, 성정 또한 악랄하여 늘 죄를 짓습니다. 그런 그들을 처단하는 것이 어찌하여 오르가프님의 뜻이 아니라 하시며, 한시라도 빨리 진행해야 하는 일을 미루려 드십니까!” 감히 10명의 치천사 앞에서 저따위 말을 하다니! 성정이 급한 시즈니엘과 체르비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들은 노골적으로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24명의 장로 중에 가장 앞에 나선 자는 미카엘도 익히 잘 알고 있는 자였다. “리크비엘, 그렇다면 그대는- 제3차 천마대전을 일으키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미카엘의 질문에 리크비엘은 완고하게 굳힌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장로들 역시 물러날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장로들의 우두머리 격인 리크비엘은 미카엘이 ‘세라핌의 쉼터’에 들어가기 이전부터 사사건건 부딪쳐 왔던 성가신 존재였다. 그의 눈은 언제나 ‘따르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었다. 그러나 그가 하려는 일은 언제나 천계를 위하는 것들뿐이었기에 미카엘은 그를 괜찮게 생각하고 있었다. 고집이 세고 한결같은 그를 이렇게나 바꾸어 놓았다니- 솔직히 미카엘은 에우로카엘의 능력이 아주 놀라웠다. “그렇습니다! 제2차 천마대전으로부터 벌써 1만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많은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에도 마족들은 수없는 죄악을 끊임없이 저질렀고- 우리는 이제 그것을 처단하고 응징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이제껏 체르비엘의 뒤에 가만히 서 있던 에리엘이 말했다. “그러나 리크비엘, 마계와 우리는 제2차 천마대전 때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었지 않습니까? 마계는 아직 한 번도 그 조약을 어긴 적이 없고, 그 이유 때문에라도 우리가 먼저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죄악인 자들, 그들을 치는 것은 정의(定意)를 행하는 일이며, 따라서 명분도, 선전포고도 필요 없다 생각합니다. 오히려 시기를 늦추는 것이 죄인 것입니다.” 과연, 미카엘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무리 천계가 바뀌었다고 해도 리크비엘의 완고한 성격만은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사라카엘(Saraquael)님, 알고 계실 텐데요? 이미 몇 번, 마계가 상호 불가침 조약을 깨뜨린 적이 있었음을 말입니다. 그때마다 그들이 적절한 사과를 해와, 크게 번지지 않고 무마되었습니다만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명분입니다. 형제들은 모든 준비를 끝마친 상태, 모든 것은 에우로카엘님의 선견지명 덕분입니다.” 사라카엘은 굳어진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리크비엘의 입가에 희미한 승리의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카엘은 영혼이 죄를 범하지 않도록 감시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기에 마계가 범하는 ‘죄악’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제길, 사라카엘! 뭐라고 말 좀 해봐! 이미 끝난 일 가지고 저런다는 건 너무 치사한 거 아니야?’ ‘-나보고 뭘 어떡하라고?! 저 녀석이 말하는 건 모두 사실이라 반박할 수가 없단 말이다! 제일 답답한 건 나라고! 그러는 시즈니엘, 너라도 한 마디 해!’ ‘할 말이 없으니 너한테 이러고 있지, 멍청아! 말할 게 있음 벌써 하고도 남았다! 큭, 누가 저 얄미운 얼굴 좀 한 대 쳐 줘!’ 요시피아나는 불쾌한 얼굴로 인상만 구기고 서있었고, 시즈니엘과 체르비엘은 리크비엘이 얄미워 죽겠다는 듯이 노려보고는 있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답답해했다. 하즈아리는 언제나와 같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리크비엘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리크비엘을 싫어한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우리 천족, 천사의 임무는. 우리의 존재 이유는 신의 뜻을 하계(下界)에 전달하는 것입니다. 오르가프님의 끝없는 사랑과 자비, 그리고 축복을 하계에 전해주어 오르가프님의 위대함을 알도록 해주는 것. 또한 오르가프님이 명하신 대로 하계의 모든 생명을 돌보고 관리하며 3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스스로 균형을 깨뜨리는 짓을 하자고 하시는 겁니까?” 미카엘이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그의 나직한 음성에는 위엄과 권위가 배어있어 몇몇 장로의 안색은 불편해졌다. 리크비엘은 아주 또렷한 목소리로 그에 응답을 했다. 자신만의 신념과 믿음이 확고한 자만이 내보일 수 있는 반응이었다. “물론, 이것이 진정한 오르가프님의 ‘뜻’이라고 믿습니다. 그분께서는 분명 ‘악을 멸하고 정의를 실현하라’고 말씀하셨으니…….” 리크비엘은 잠시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것처럼 눈을 감더니, 잠시 후 눈을 떠 선언하듯 말했다. “모두의 뜻은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마계로 향하겠습니다.” “자, 잠깐! 리크비엘……!!” 말릴 새도 없이, 리크비엘과 24장로들은 그들에게 고개를 숙여보이곤 등을 돌려 가버렸다. 미카엘이 아무리 천계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앉아있다고 하지만, 아무런 이유 없이 모두가 원하는 것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떻게 좀 해 봐, 임마!” * * * * * * * * * * * * * * * “풋! 결국 한 대 얻어 맞으셨군?” 입술이 터져 피가 흐르고 뺨이 발갛게 부어오른 채로 나타난 아유니를 보고 딜렌이 내뱉은 말이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것 같은 그녀가 루피아에게 얻어맞은 채 나타난 것이다. 카른도 고소한 표정이었다. 그에 아유니의 반응은 아주 냉담했다. “쓸데없는 참견.” 카른은 욱한 표정으로 인상을 찡그린 반면 딜렌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이었다. 아유니는 카른을 향해 물었다. “상황은?” 그와 함께 귀 고막이 터질 정도로 커다란 함성과 비명,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네모난 사각의 스크린으로 미친 듯이 서로를 죽고 죽이는 광경이 비춰졌다. 아유니는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음향효과는 필요 없어.” 카른은 약간 불만 어린 얼굴을 했지만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 사각의 스크린 안에서는 붉은 눈동자는 더 붉게, 온몸이 피로 물든 마족들이 기쁜 듯, 고통스러운 듯한 얼굴로 서로에 대한 살육전을 펼치고 있었다. 굳이 붉은 눈동자가 아니더라도 마족 모두 붉게 충혈된 눈을 하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보고난 후의 아유니의 결론은 무척 간단했다. “미쳤군.” 간단명료한 그녀의 결론은 옳은 이야기였다. 몇 백 년만의 전쟁에 마족들 모두 기뻐하고 있었고, 서로 죽이고 죽으면서도 좋아하고 있었다. 사실 딜렌에게 가담한 자들 거의 대부분은 현 마왕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단지 이 상황이 ‘지루’해서 반란을 벌인 것이었다. “가겠다.” 아유니는 짧게 말했다. 더 이상 버텨 줄 체력도 없거니와, 이제 이곳에 있어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이제는 돌아가야 할 때다… 곧 천계의 군(軍) 들이닥칠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었다. 그녀의 분홍빛 눈동자가 아릿한 기억으로 흐릿해졌다. 로헤델의 별, 이 이름과 함께 얻은 힘이자, 족쇄이자 저주인 자. 그녀는 강한 어조로 딜렌과 카른을 노려보며 말했다. “만약, 루피아님에게 손을 댄다면…… 죽인다.” 딜렌은 씩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이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아유니가 사라지자 알 수 없는 웃음을 띠고 있던 딜렌이 카른에게 말했다. “웃기는 일이지? 정작 일을 벌인 나는 조용한데 오히려 저것들이 미쳐 날뛰고 있잖아. 형님은 뭘 하고 계실까- 후훗! 아아, 즐겁다.” 카른은 딜렌의 말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딜렌은 말과는 달리 전혀 즐거운 표정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그는 마치 폭발 직전의 폭탄처럼 아슬아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카른은 걱정이 되었다. 폭발하고 난 뒤, 딜렌은 어떻게 될까- 터져버린 폭탄처럼, 갈기갈기 찢어져 버리면……. 그는 기억 속을 더듬어 흐릿하게나마 남아있는 마왕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그의 기억 속에 이디스는 아무 것도 담고 있지 않은 유리알 같은 붉은 눈동자로 모든 것을 방관(傍觀)만 하던 냉정한 인물이었다. 그는 무엇과도 어울리지 않았으며, 오로지 혼자였다. 그리고 아유니가 데리고 온 루피아라는 여자도 함께 떠올렸다. 그리고 이미 죽고 없는 카마프라는 인간과 전대 마왕이 차례로 떠올랐다. 끔찍했던 두 사람의 죽음도. 잔웃음을 흘리고 있는 딜렌은 이미 그때 망가져버린 것처럼 보였다. 카른은 과연 딜렌이 이렇게 분노하는 이유가 과연 부모님을 살해했기 때문에, 단지 그것 때문인지 의문이었다. 그러나 카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딜렌을 가만히 지켜보아야 했다. 딜렌이 그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와 같이 그가 원하는 일에 힘이 되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웃고 있던 딜렌의 얼굴이 점차 굳어져갔다. 딜렌은 술을 홀짝이며 힘없이 말했다. “돌이킬 수 없겠지.” 흠칫! 카른이 놀라 고개를 퍼뜩 들자 딜렌은 마치 어린아이 같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가자.” ================================================= 죄송합니다. 무슨 사정이 있었든, 불성실했던 거니까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제 목: 공녀(貢女) : 제36화 [제3차 천마대전](2) #. 제36화 [제3차 천마대전!](2) * * * * * * * * * * * * * * * 오랜만에 주인을 맞아들이게 된 마왕성의 분위기는 무겁게 침체되어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열대회라는 큰 행사로 인해 들떠 있었던 분위기는 물로 씻은 듯이 깨끗이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이디스는 언제나와 같이 커다란 회의실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중간계로부터 공녀들을 받아들였던 그곳에, 지금은 웅성거리는 ‘붉는 눈’ 일족의 마족들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갑작스런 그림자일족과 그 연합의 공격을 받은 이상,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군중들은 이미 각각 전투태세에 들어 미친 듯이 ‘적’들과 싸우고 있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어. 20년 전에 그 싹을 완전히 잘라버려야 했던 건데…….” “이미 45% 가량의 세력이 그에게 기울었다더군.” 이디스가 모습을 드러내자 간간이 웅성거리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이디스는 모인 이들을 가볍게 훑었다. 그 가벼운 움직임에도 마족들은 숨을 죽였다. 이디스는 아무런 말없이 그의 자리에 앉았다. 그가 자리에 착석(着席)하자 이어 로이드윈이 현재 상황을 명료하게 정리해서 늘어놓았다. “그림자 일족에게 가담한 종족은 ‘아족(兒族)’을 필두로 해서 모두 25여개의 일족입니다. 이는 마계의 근 45% 가량에 해당되는 세력으로, 그 중심에는 그림자 일족의 수장인 ‘카른’이라는 자와, 전대 마왕님의 사생아인 ‘딜렌’이 있습니다.” 딜렌의 이름이 나오자 마족들 사이에 다시 웅성거림이 물안개처럼 피어올랐다. 그들은 물론, 딜렌을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어떤 방법인지는 몰라도 전대 마왕 카디스는 ‘밖’ 어딘가에서 ‘누군가’와 아이를 만들어왔고, 이디스는 그가 아직 후계자였을 적에 딜렌의 위치를 인정했다. 그로 인해 딜렌은 마족들 사이에 받아들여졌고, 그는 최초의 ‘두 번째 마왕의 아이’로 이 마왕성에서 자라났다. 물론 마족들도(지금 이 자리에 있는 마족들 모두 포함해서) 그를 꽤나 귀여워해 주었지만 그가 인간과의 혼혈아라는 사실이 밝혀진 20년 전부터 딜렌은 이미 죽여야 했을 불온한 존재에 불과했다. 현 마왕, 이디스는 ‘전대 마왕의 흔적’이라며 전대 마왕에게 최소한의 예의로써 그를 살려두겠다고 했지만 일이 이렇게 번져버린 이상 딜렌은 반드시 죽여야 할 것이었다. 로이드윈의 말이 끝나자 마족들의 눈이 모두 이디스에게로 향했다. 사실, 그들은 모두 잔뜩 흥분해 있었다. 모처럼만에 찾아온 기회였던 것이다. 하층민들은 모두 그 행운을 만끽하며 즐기고 있는데 그들만 이렇게 모인 것은, 모두 이디스의 허락을 얻기 위해서였다. 군주의 힘이 절대적인 마족들은, 군주에게 바늘구멍만한 틈이라도 보이게 된다면 망설이지 않고 왕을 쓰러뜨리려 하지만 그 전까지는 절대적인 충성을 보장했다. 힘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그들에게 있어서 강력한 군주란 마치 절대적인 신과 같았다. 그러나 당장에라도 달려가 그들을 치라고 말할 줄 알았던 군주의 입에서는 그들의 바람과는 정 반대의 명령이 떨어졌다. “기다려라.” “……!” 마족들의 붉은 눈이 모두 동그랗게 뜨여졌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군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디스의 얼굴에는 한 치의 거짓도 찾아볼 수 없이, 단호함만이 가득했다. 이럴 줄 알고 있었다는 듯, 로이드윈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는 아로데, 유리아덴과 눈이 맞자 먼저 씩 웃었다. 곧 아로데가 피식 웃었고, 이어 유리아덴 역시 작지만 분명하게 피식, 하고 웃었다. “어, 어째서입니까?” 웅성거리던 마족들 가운데 누군가가 물었다. 이디스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내가 누구지?” 그는 느닷없이 물었다. 분명한 질문이었지만 상대방은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이디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형형한 눈빛으로 좌중을 쏘아보며 조용하지만 힘이 실린 목소리로 먼저 말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마왕, 이 마계의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는 자다. 너희는 나의 아래에 있으며, 마계 태초의 법칙에 따라 나의 종이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에게 명령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나의 명령이다.” 가장 먼저 아로데와 로이드윈, 유리아덴이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대어 보이며 복종을 표했다. 이어 마족들 모두가 같은 자세로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빚이 있기 때문이다. 반드시 갚아야 할 빚이… 기다려라.” 다시 한 번 힘주어 명령한 그 말을 끝으로, 이디스는 일어나서 그곳을 나갔다. 불만스럽지만 그의 명령을 어길 수 없는 마족들은 아쉽게 들끓는 피를 애써 잠재울 수밖에 없었다. 금방이라도 본능에 이끌려 피 냄새 자욱한 저 곳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들은 최대한 이성을 발휘해 본능을 억눌렀다. 피와 전투를 원하는 것이 본능이라면, 생존을 원하는 것과 강한 자를 향한 호승심과 굴복 역시 그들의 육신에 선명히 새겨진 본능이었다. 그러나 참는 것은 힘들었고, 따라서 사라지지 않은 불만에 그들의 얼굴은 잔뜩 구겨져 있었다. 그런 그들을 향해 로이드윈은 비릿한 비웃음을 흘렸다. “참기 힘든 자는 당장 가도 좋다.” 마족들의 몸이 마치 하나인 양 움찔거렸다. 로이드윈은 더욱 진한 비웃음을 띠고 말했다. “너희 공녀들은 지금 어디 있는가?” 번쩍, 그때야 마족들은 뭔가 잊고 있었던 무언가를 기억해냈다. 그림자 일족이 기습해 들어오자 그들은 곧 싸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들떠 다른 것을 완전히 잊어버렸던 것이다.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그들의 머리가 싸하게 식어갔다. 로이드윈은 나직이 한숨을 불어내며 말했다. “가장 먼저 잃어버린 내가 할 말은 아닌 것 같다만, 너희는 자신의 것을 지키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울컥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로이드윈님! 그따위 것에 신경을 쓸 겨를은-.” “그래서? 그것을 천계에게 ‘빼앗겨도’ 좋다는 말이냐?” 다시 한 번 마족들이 술렁거렸다. 소용의 정도나, 필요 여부를 떠나 그들의 것을 천계에 빼앗겼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로이드윈은 재빨리 이어 말했다. “천계에서 굳이 공녀들을 ‘구해’ 간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해봐라.” 말을 마친 로이드윈은 이디스와 마찬가지로 아로데, 유리아덴과 함께 그곳을 나갔다. 마족들은 두 가지 충격적인 사실에 심각한 얼굴로 신음을 흘렸다. 사실, 그들 모두 공녀들을 끔찍이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 태도나 약해빠진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이 터지기 전 마족을 열광시킨(?) 로위나나 루피아 등의 공녀들은 공녀들에 인식을 조금이나마 바꿔 놓았다. 특별히 애착같은 것은 없지만 천계에 ‘빼앗겼다’고 생각하니 열이 받았다. 홀을 빠져나온 로이드윈과 아로데, 유리아덴은 곧 이디스를 만나러 나섰다. 조금 전에야 겨우 평소의 얼굴을 되찾은 아로데가 특유의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로윈의 어깨를 툭 쳤다. “뺏겼다, 라니. 뛰어난 어휘 선택이었어.” 실제처럼 ‘스스로 갔다’고 한다면 마족들은 오히려 공녀들에게 분노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로이드윈은 ‘빼앗겼다’고 말을 했고, 그럼으로써 마족들을 자극하고 그 감정이 모조리 천계를 향하도록 한 것이다. “넌 어때?” 아로데는 머쓱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실제, 그는 요사이 세키라의 일로 인해 지나치게 날카로워져 있었고 자신의 모습을 잃었다. 그러나 방금, 그는 겨우 예전의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이 자신답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했다. “물러설 수는 없지. 이 마계 공작(魔界公爵) 아로데 드 벨로시스님께서 이대로 물러선다면 그거야말로 망신이겠지!” 유리아덴은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유리아덴의 공녀인 에리나는 다행히 아직 이 마계에 남아있었다. 그들은 이디스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 긴 기간은 아니었지만 꽤 오랜만에 들어서보는 것 같았다. 집무실 안은, 마치 태풍이라도 분 것 같았다. 성한 가구라고는 남아있지 않았고, 커튼은 마구 찢긴 채였다. 그들은 안으로 들어서며 방 가운데 서 있는 이디스를 보았다. 그의 손 안에는 구겨진 종이 한 장이 쥐어져 있었다. “잘 참으셨습니다.” 이디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손 안에서 구겨진 종이만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서늘한, 냉랭한 붉은색 눈동자에는 아무 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루피아를 비롯한 공녀들이 사라졌다는 것을 안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에리나 칼르니르를 제외한 모든 공녀들이 이 마계에서 싹 사라졌다. 그것도 거의 동시에 말이다. 그때에 맞춰 그림자 일족의 기습 공격이 시작되었고, 혼란 중에 이디스는 지금 그가 찢어죽일 듯 쳐다보는 서신(書信)을 전해 받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딜렌에게서-. 라샤린의 성에서 루피아가 사라졌을 때 난동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반응을 보였던 것을 볼 때, 그의 행동은 확실히 ‘잘 참은’ 것이었다. 로이드윈은 단호하게 힘을 주어 말했다. “자신이 ‘마왕’임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 어떤 경우라고 해도. 어디에서도, ‘왕’이라는 자리는 그 만큼의 책임을 동반하게 마련이다. 당부하는 로이드윈에게 이디스는 오만하게 눈썹을 치켜 올려 보이며 불쾌하다는 듯이 말했다. “잊을 거라 생각했나?” 이디스는 손 안에 쥐어진 서신을 다시 한 번 일별(一瞥)한 후, 손 안에서 불태웠다. 서신은 순식간에 재도 남기지 않고 타들었고, 그는 손 안에 남아있는 불꽃을 보다 주먹을 꽉 쥐어 불꽃을 꺼뜨렸다. “단 한 번도 잊어본 적 없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마왕’이라는 자리에 묶인 삶을 살았고, 단 한 순간도 자신이 마왕임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 그는 묘한 눈으로 불꽃이 사라진 손바닥을 응시했다. 그가 꺼뜨린 불꽃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서신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루피아를 찾고 싶으면 혼자서 내게로 오시길, 형님. -딜렌] * * * * * * * * * * * * * * * 쿠당탕!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루피아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다시 서서히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또 실패인가,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가 부딪친 곳은 다름 아닌 커다란 덩치를 가진 무언가의 물컹한 부분이었다. 이놈의 문은 도무지 열릴 생각을 하지 않고, 나가려고 하면 문은 기분 나쁘게 물컹하게 변해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받았다. 기분 나쁜,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어디선가 흘러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아직은 몸이 어떻게 되었는지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살아 돌아갈 수나 있을까 모를 지경이었다. 겨우 움직이는 것이 가능할 정도였지만, 루피아는 조금도 이 곳에 더 있고 싶지 않았다. 뭔가 아주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뭐냐? 나란 애 팔자는, 뭐가 이리 꼬이고 꼬인 거야? 눈앞에 신이 있다면- 그녀는 멱살이라도 잡고 탈탈 털어주고픈 심정이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무리한 몸을 진정시키고 있던 그녀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이건… 또 뭐야?” * * * * * * * * * * * * * * * “당신이… 어째서 여기에.” 세키라는 말을 더듬으며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그가 이런 곳에 있어서는 안 되었다. 이곳은, 이곳은, 천계인데! 그런데 어째서 그가 이곳에 있는 것일까! 그녀가 아는 상식으로서는, 아니 마계에서 뜯어고친 새로운 상식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궁금증을 풀어줄 생각이 없는지, 상대방은 여전히 알 수 없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얼굴은, 굉장히 슬퍼 보이고 또 안타까워 보였다. 친하지도 않고 잘 알지도 못하는 세키라마저도 그 모습이 얼마나 처연해보이던지, 울고 싶은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것은 델리드나 로위나들에게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들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그를 경계하다 이제는 동정심에 동화되어 있었다. 그만큼 그 사람의 얼굴은 처연하고도 슬프며, 아름다웠다. ‘슬프도록 아름답다’는 말에 꼭 어울리도록 말이다. 세키라는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그녀는 알아차렸다. 이미 공녀들이, 그에 대해 전혀 경계심 따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어떻게 하지? 이제…… 이 사람이 왜 여기에 나타났을까! 이건 대체…….’ 뭘 뜻하는 걸까? 순간 번뜩, 하고 세키라의 머리에 스쳐 지나가는 단어가 있었다. 경악어린 눈으로 그 사람을 쳐다보자 그 사람은 그녀에게 다시 한 번 그 처연한 미소를 보였다. “공녀의 안내를 맡아 파견되었습니다. 이쪽으로.” 그의 뒤에서 서너 명의 펄렁한 옷을 입은 사람이 나와 그녀들을 이끌었다. 마치 존재감이 없는 사람처럼, 맑고 투명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들이었다. 모두 그들에게 넋을 잃을 때, 세키라는 그 와중에도 그 사람을 쳐다보며 멍청히 서 있었다. 저 사람들과는 달리, 연회색의 옷을 입고 있는 그 사람을 말이다. 그 사람은 소리는 내지 않고 입 모양만으로 세키라에게 말을 전달했다. “……!!” 세키라는 이 상황이 처음 공녀로써 마계에 발을 들여놓던 그 순간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곳은 천계고, 그곳은 마계였다는 것뿐이었다. 세키라는 자신을 부르는 공녀들의 재촉에 발걸음을 옮겼다. ‘어째서? 어째서 그런 말을? 이제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어째서? 이곳은 천계니까 가장 안전한 곳일 텐데……. 그럴 텐데.’ 그렇다. 모든 것은 순리대로 흘러가게 될 것이다. 그들은 중간계로 돌아가 그 땅에서 죽을 것이고, 천계는 중간계로 그녀들을 보내줄 것이다. 그렇게 약속했다… 그러므로 틀린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나는 옳은 선택을 했다. 천계를 택하는 것이 옳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서늘한 불안감이 계속 세키라의 가슴 속으로 스며들었다. 막아도 소용없는 거대한 물살처럼 불안은 세키라의 가슴 속에 자리 잡아 손끝을 시리게 만들었다. 세키라는 저도 모르게 낮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도망가라니…? 로아이나님.” =========================================== 죄송합니다. 또 늦고 말았군요. 이 사과말은 언제나 드리는 말씀이지만, 늘 진심임을 알아주세요. 네, 제가 아무리 바쁘고 이래저래 일이 겹쳤다고는 해도 공지 한 장 올릴 틈이 없는 것은 아니었죠. 그것은 사실이므로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다른 분들은 성실한데 반하여 저는 연재 속도도 느린데 슬럼프까지 얹혀져 더 느려져 버렸으니 짜증이 나시는 거 이해합니다. 게다가 요즘은, 제 짧고 못난 실력을 무척, 무우우-척 원망하고 절감하는 중이죠.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답니다. 제가 쓴 것을 다시 읽어보니 더더욱. 그때 그때는 최선을 다했지만 역시..[한숨] 이래저래 벌여놓은 판(?)을 제대로 정리도 못해놓고, 머릿속에는 예정이 그득해서 이러저러하게 나간다! 고 결정을 다 내려놓았으면서도 글로 풀어내는 데서 다시 막히고.. .. 이거 꼭 변명, 투정 같네요; 그만 하겠습니다. 현재 시각이 새벽 3:00를 넘어갔네요. 내일 학교에서 졸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자야 할 것 같아요. 메일은 donghee425@hanmail.net으로 보내주세요. 쪽지도..[퍽!];; 그럼 즐독해주세요. 덧. 오랜만에 복귀하는데 겨우 하나라서 죄송합니다. 제 목: 공녀(貢女) 제37화 [구출이냐, 감금이냐?](1) #. 제37화 [구출이냐, 감금이냐?] * * * * * * * * * * * * * * * 처음 보는 천족은 모두 하나같이 존재감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투명한 색깔을 가지고 있었다. 말 그대로 하나와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분명 다른 생김새인데도 하나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의 머리색은 모두 옅고 밝은 색깔이었으며 피부는 투명하리만치 새하얀 색이었다. 신전이나 고대 유적지의 벽화에서나 보았을 법한 펄렁한 흰 천을 두르고 있는 모습은, 그녀들이 상상하던 천사의 이미지에 딱 들어맞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공녀들을 안심시키는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이제 살았어! 집에 돌아갈 수 있는 거야….” “천사를 보게 되다니 믿을 수가 없어! 아아, 이건 신의 축복이야! 오르가프 신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거야.” 마족과 만났을 때와는 정반대의 반응들이었다. 세키라는 도도하게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사뿐사뿐, 발소리도 없이 걸어가는 네 명의 천족을 보며 과연 그들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깨끗하고 선(善)한 존재들인가 의구심이 들었다. ‘어째서 로아이나님은 내게 도망가라 하신 거지? 아니, 그것보다 어째서 마족인 저 분이 천계인 이 곳에 계신 거야?’ 잘 생각해보면 마계에 왔을 때와 다름이 없는 상황인데도 델리드도, 로위나도 아무런 의심 없이 천족들을 믿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영 꺼림칙한 세키라였다. 그리고 모두 티 하나 없이 깨끗한 하얀색 옷을 입고 있는데 유독 회색의 옷을 걸치고 있는 마족, 로아이나도 마음에 걸렸다. 마계에서는 단 한 번도 벗지 않았던 후드를, 이곳에서는 완전히 벗어 놓고 있었다. 처음 보는 그의 얼굴은, 단정하고 깨끗했지만, 슬프도록 처연한 분위기가 스며 있었다. 요염한 붉은 입술에는 이미 예전에 보았던 즐거운 미소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저기, 저희는 언제 중간계로 돌아가게 되죠?” 델리드가 물었다. 네 명의 천족은 아무 말 없이 힐끗 그녀를 쳐다보았을 뿐이었고, 대답은 로아이나에게서 나왔다.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올 때까지 이곳에 머무르셔야 합니다.” “네? 바로 보내주시는 것 아니었나요?” 친절하게 존대까지 하며 대답을 해주는 로아이나가 그래도 질문하기에 편하게 생각되었는지 공녀 중 하나가 반문해왔다. 로아이나는 이번에도 대답을 해주었다. “아닙니다. 지금은 천계 상부측도 혼란한 상황이라 바로 보내드리지는 못합니다.” 로아이나는 그렇게 말을 하면서 네 명의 천족에게 시선을 던졌지만 여전히 네 명의 천족은 고고한 표정을 흩트리지 않았다. 안내를 해주던 네 명의 천족이 이윽고 커다란 입구 앞에서 멈추었다. 마치 옛 고대의 신전을 생각나게 하는 웅장한 입구에는, 전사 차림의 천사 두 명이 지키고 있었다. 자신의 키의 2배는 넘을 듯한 거대한 낫을 들고 있는 두 명의 천사는, 안내를 하는 네 명의 천사들과는 달리 또렷한 존재감과 날카로운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공녀들을 보고는 서로의 낫을 허공에서 교차시키며 앞길을 막아섰다. “무슨 일이십니까? 관등성명을 대 주십시오.” “에우로카엘님의 직속 로아이나입니다. 리크비엘님과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만.” 챙! 소리가 또랑또랑하게 넓은 허공을 울렸다. 낫을 거둔 두 명의 천사는 네 명의 천사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고, 네 명의 천사는 고개를 꼿꼿이 쳐들고 입구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입구로 들어서기 전, 로아이나가 공녀들에게 충고를 했다. “절대로 돌려보내 달라는 재촉이나 요구를 하지 마십시오. 아셨습니까? 만약 제 충고를 어기셨다가 무슨 일이 일어나도 책임질 수 없습니다.” 그에 공녀들은 웅성거렸으나 델리드와 로위나, 페넬로페 등이 대표로 알겠다고 대답을 하자 이내 조용해졌다. 로아이나는 몸이 걸린 천을 가다듬고는 거대한 입구 안으로 들어섰다. 입구 안은 길게 이어진 넓은 복도였다. 그 끄트머리에는, 대략 여덟 정도 되는 천사들이 서 있었다. 네 명의 천사는 그대로 복도의 끝에 있는 단상 위에 올라 여덟 명과 합류했다. 그들은 무려, 천계의 12장로씩이나 되는 신분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보면 확실히 천계가 마음을 써준 것 같지만, 그들을 ‘내려다’ 보는 리크비엘의 눈빛은 차가웠다. 세키라와 델리드를 비롯한 공녀들은 모두 리크비엘의 눈에서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리크비엘은, 빛나는 황금색 머리카락을 발끝까지 길게 기르고 있었다. 새파란 눈동자는 마치 사파이어처럼 아름다웠고, 신화 속에서 막 빠져나온, 천사 그 자체의 이미지를 가진 자였다. 투명한 피부, 그리고 장밋빛 입술…… 중성적인 매력과 함께, 매혹적인 자태를 뽐내는 그를 보며 모두들 나지막이 탄성을 터뜨렸다. ‘저 사람들은 마족과는 달라! 분명히 잘해 줄 거야.’ 그것은 이상한 믿음이었다. 세키라는 마치 가시가 박힌 것처럼 가슴이 따끔거렸다. 원인 모를 불안감이 그녀를 계속 일깨웠다. 로아이나가 이곳에 있는 것과, 그가 ‘도망치라’고 했던 것. 저 아름다운 천사의 눈이 얼음장처럼 차갑게만 느껴지는 것. 그리고…… 화를 내던 아로데의 모습이 눈에 자꾸 밟히는 것. 그때, 세키라와 리크비엘의 눈이 마주쳤다. 리크비엘의 눈이 점차 반달형을 그렸다. 그리고 그가 입을 열었다. “환영합니다, 인간 여러분.” * * * * * * * * * * * * * * * “이게 뭐지? 먹는 건가?”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자신이 말해놓고도 어이가 없었는지 그녀는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아, 내가 드디어 미쳐가는 건가. 그것은 척 보기에도 먹는 것은 아니었다. 투박한 모양의 돌이 얇은 가죽 끈에 둘둘 묶여있는 것이었는데(그리 단단한 이를 가진 것도 아닌 루피아가 무슨 수로 돌을 씹어 먹겠는가?), 이런 식으로 발견되거나 가죽 끈에 묶여 있을 정도라면 돌이 희귀하다거나 하다못해 특이하기라도 해야 할 텐데 그것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특별히 어떤 용도로 쓰일 것 같지도 않은데…… 루피아는 엄지의 한 마디가 될까 말까한 크기의 그것을 자세히 살폈다. 그러나 영 특이하지도 않은, 그저 가죽 끈에 묶인 돌일 따름이었다. 그때, 방문이 벌컥 열리면서 딜렌과 카른이 들어왔다. 루피아는 인상을 팍 찌그러뜨렸다. “너-!! 네가 마왕의 동생이라는 걸 왜 말하지 않았어?!” “여어, 안녕! 여전히 팔팔하네.” “시끄러워! 어서 날 여기서 내보내 줘!” “아하하, 그렇게는 안 돼. 순순히 보내줄 것 같으면 뭐하려고 잡아왔겠어? 그리고 널 잡아온 건 내가 아니라 아유니, 그 여자라고. 아니, 지금은 ‘에우로카엘’로 돌아갔으려나.” “뭐? 에, 우로카엘…?” 루피아는 그 이름을 입안으로 곱씹었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이름인데? 그러나 뿌옇게 안개가 서린 듯 그 이름은 자꾸 아른아른한 기억 저편으로 넘어가버렸다. 결국 포기한 그녀는 다시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이야?” “글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 딜렌은 의미심장한 웃음만을 빙그레 띠우고 있었다. 정말, 이디스를 미워하는가 보다. 하지만 이디스에게 들었던 딜렌의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그 정도는 당연했다. 바로 눈앞에서 사랑하던 부모님을 동시에 잃었으니… 그가 아직 어렸을 때 일어났던 일인 것을 고려한다면 이디스를 미워하는, 증오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당연한 일인 것이다. 그래서 루피아는 섣불리 하지 말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딜렌. 이제 그만 가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응. 알았어.” “얼마 남지 않았다니? 너, 설마 또 뭔가를 꾸미고 있는 거야?!” “헤에, 글쎄~” 딜렌은 그렇게 가볍게 웃어버리곤 그녀에게서 등을 돌려 버렸다. 루피아는 그들이 나가는 문틈으로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날렸지만, 카른의 팔에 막혀 바닥에 사정없이 내쳐졌다. 카른은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키는 루피아에게 차갑게 끊어 말했다. “딜렌은 마왕을 만나러 가는 거다.” “……!!” “너는 중요한 인질이다. 죽어서는 곤란해.” 스멀스멀, 카른의 손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피어올랐다. 그 그림자는 그녀에게 날아가 그녀를 덮쳤다- 우아악, 하고 루피아는 소리를 내질렀다. 제기랄, 인질, 인질이라니? 스스로가 그렇게 한심할 수가 없었다. 이건 또 뭐야? 이런 빌어먹을! 자신의 그림자에 묶여 꼼지락거리는 그녀를 보며 카른은 중얼거렸다. “목숨 안 건드리고 상처 안 내면 되는 거겠지.” 그는 어쨌든, 아유니와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 늦은 데다가, 짧군요; 죄송합니다; 다음주 토요일이면 기말고사인데..[한숨] 제대로 끝내놓은 과목이 하나도 없어요;ㅁ; 오늘 학력평가에서도 완전 깨졌고.; 서클 과제도 해야 하는데;ㅁ; 못 하고 있고.. 토요일까지라던데[흐끅;].. 독감예방주사도 맞아야 하는데;;[주사맞기 싫..;;] 어쨌든! 요즘따라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루피아 양-_-;입니다. 메일은 donghee425@hanmail.net으로 보내주세요. 쪽지도 환영! 즐독하세요~ 제 목: 공녀(貢女) 제37화 [구출이냐, 감금이냐?](2) 공녀(貢女) 제37화 [구출이냐, 감금이냐?] * * * * * * * * * * * * * * * 마계의 하늘이 고요한 흑색 어둠에 먹혀 들어갔다. 슬픈 사연을 가진 세 개의 달만이 덩그러니 떠 있는 하늘빛은 오늘따라 유난히 허전하게 보였다. 별빛 하나 보이지 않는 어둡고 어두운 하늘. 그, 시간의 흐름마저 잊어버릴 정도로 고요한 풍경 아래, 누군가의 움직임이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스산한 바람이 일어나, 그의 옷자락을 가볍게 희롱했다. “…….” 바람에 흐트러진 긴 검은 머리카락. 어둠 속에서도 그 빛을 잃지 않은, 붉디붉은 선홍색 눈동자. 넋을 잃어버릴 정도로 아름다운, 그의 얼굴이 잠시 스친 달빛에 드러났다. 그의 시선이 뒤를 향했다. 그의 뒤에는,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이 우뚝 솟아 있었다. 뭔가가 마음에 걸리는지 성에 머문 그의 시선은 한동안 떨어질 줄 몰랐다. 하지만 이내 다시 돌아선 그는 돌아보지 않은 채 작게 내뱉었다. “금방 다녀오겠다.” 분명 아무도 없는데도, 그는 마치 누군가에게 말하듯 말하고 있었다. 그저 스산한 바람과 차가운 달빛만이 쏟아지는 풍경 안에서 대답이 돌아올 리 없었다. 그도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닌지 그 말을 끝으로 슥, 하고 사라져 버렸다. 그의 모습이 사라지고 얼마 후, 분명 아무도 없었던 어둠 속에서 세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어둠에 녹아들었던 듯, 마치 원래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나타난 세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아로데, 로이드윈, 유리아덴이었다. 아로데가 약간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투덜거리듯 말했다. “우리가 그렇게 못미더우신가?” “그게 아니지. 혼자 오라고 했을 거야. 쳇! 더럽고 치사한 녀석들 같으니.” 로이드윈 역시 불만스러운 목소리였다. 그는 찡그린 인상으로 이디스가 향했을 서쪽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디스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역시 마음에 걸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로이드윈이 서쪽을 바라보며 떠보듯 말했다. “어쩔까? 그냥 기다릴 거냐?” 아로데의 얼굴이 히죽, 하는 웃음이 떠올랐다. 유리아덴 역시 피식, 하고 웃어 보였다. 로이드윈은 코에 걸쳐 쓴 은테 안경을 벗어 쓱쓱 닦았다. 후, 하고 불어 다시 한 번 안경알을 닦으며 그는 한 번 더 물었다. “그럼? 저쪽에서는 주군만을 초대했을 텐데…….” 아로데는 킥킥 웃으며 말했다. “언제는 초대받아서 간 적이 있냐? 새삼스럽게 말이야.” “그것도 그렇지.” 시선을 마주한 세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그대로 허공에서 사라져 버렸다. * * * * * * * * * * * * * * * “이제 어떻게 하면 좋죠?” 그런 걸 내게 물어봤자… 로위나의 질문에 세키라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녀가 묵게 될 방은 그녀 외에도 델리드, 로위나가 함께 사용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마계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생각하면 할수록, 세키라는 불안해졌다. 신화나 전설, 성경으로만 접해봤던 ‘천사’- 그녀가 만나본 천계의 대표 리크비엘은 그녀 역시 익히 들어본 지위가 높은 천사였다. 세키라는 리크비엘의 차가운 눈빛을 떠올리며 순간 오싹함을 느꼈다. 가슴 속 깊숙한 곳에서 느껴지는 이 일말의 불안감은, 그래, 바로 그 눈빛에서 오는 것이다. “세키라님, 듣고 계세요?” 델리드의 부름에 세키라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세키라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우리,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되겠죠! 아, 꿈만 같아요.” 로위나가 꿈에 부푼 듯한 얼굴과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세키라는 그 말에 ‘네’라고 대답해 줄 수가 없었다. 델리드도 마찬가지로 로위나의 말에는 어두운 얼굴이었다. 그러나 델리드가 어두운 얼굴을 한 것은, 세키라와는 조금 다른 이유였다. “좋기만 한 것도 아니에요. 분명 중간계로 돌아가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사교계는, 우리를 다시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까요…… 아셨죠, 로위나! 우리 공녀끼리 잘 뭉쳐야 해요! 돌아간다 해도 우리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명심하세요.” 세키라는 힘없이 웃으며 그에 동의를 표했다. 그러나 델리드의 말은 중간계로 돌아갈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야 가능한 것이었다. 델리드는 명석한 여인이었지만, 리크비엘의 차가운 눈빛 같은, 천계의 이상한 점은 알아내지 못한 것 같았다. 불안했지만 어디에도 세키라가 상담을 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났다. “잠깐 세키라님 좀 뵐 수 있을지.” 로아이나다! 세키라는 벌떡 일어났다. 델리드와 로위나가 의문이 담긴 눈길로 쳐다봤지만 세키라는 딱히 해줄 말이 없었기에 싱긋 웃음만 지어 주며 얼버무렸다. “할 말이 있는가 보죠. 금방 돌아오겠어요.” 세키라는 서둘러 방을 빠져 나왔다. 문 앞에는 예상한 대로 로아이나가 서 있었다.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기에 세키라는 입을 벌렸지만 로아이나는 쉬- 하고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와 함께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세키라는 이곳이 남의 눈에 그대로 드러난 곳이라는 것을 깨닫고 얼른 로아이나의 뒤를 쫓아갔다. 로아이나는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세키라의 숨이 턱까지 올라 찰 만큼 빠르게 말이다.(세키라는 거의 뛰어야 했다) 세키라가 잠시 멈췄을 때는 저 멀리에서 기다리면서, 그는 한참을 계속 걸었다. 드디어 로아이나가 멈춘 곳은 분명 세키라가 묵을 방과는 한참이나 떨어진 곳이었다. 아마도 그의 방인 듯, 로아이나는 어깨에 걸치고 있던 회색의 로브를 벗으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의 복도에서나, 리크비엘 앞에서보다 훨씬 편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역시, 놀라셨군요?” 희미하게 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로아이나가 물었다. 세키라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영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가 알기로, 로아이나는 분명히 마족이었다. 그것도 계보가 분명한, 서열 8위의 최고위 마족인 것이다. 그런 그가, 마족과는 천적인 천계에- 그것도 그 중심부에서 당당하게 활보하고 있다니! 그것은 오크가 드래곤을 죽였다는 말보다 충격적인 것이었다. “간략하게나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말씀드리지 못할 것도 있겠지마는… 대충의 궁금증은 풀리실 겁니다. 자, 일단 여기 앉으세요.” 세키라는 로아이나가 빼주는 의자에 앉으며 찬찬히 로아이나의 얼굴을 다시 살폈다. 후드로 꽁꽁 숨기고 있던 그의 외모는, 과연 상상했던 대로 무척 아름다웠다. 여느 마족이 그렇듯이 말이다. 여전히 창백한 흰 피부와, 붉은 입술- 허스키하면서도 농염(濃艶)한 목소리. 내리깐 속눈썹은 무척 긴 데다, 흐릿한 회색이었다. 그 아래 박힌 붉은색 눈동자는 보석 같았고, 어깨 밑으로 흘러내리는 은발머리는 눈부신 은하수를 생각나게 했다. 다름없는 것은, 그를 감싸고도는 요염한 분위기. “자! 제일 궁금하신 것부터 대답해 드리도록 하죠. 물어보세요.” 세키라는 활기차게 말하는 로아이나를 마주하며 바로 입을 열었다. “마족인 당신이 왜 천계에 있는 거죠? 그것부터 말씀해주세요!” “이런… 자신의 일부터 물어보지 않구요. 그게 가장 궁금한가요?” “예. 물론 다른 것도 궁금한 게 많지만… 천천히 듣고, 우선 그것부터 말씀해주세요.” 세키라는 긴장하고 물었지만, 그에 대한 로아이나의 답은 아주 간단했다. 단 한 마디로 끝나버렸던 것이다. 긴장하고 있던 세키라가 허탈해질 만큼 허무하고도 간단하게, “배신을 했습니다.” ……라는 한 마디로 그는 대답을 일축했다. * * * * * * * * * * * * * * * 온통 검은 세상이었다. 루피아는 필사적으로 꼼지락거렸다. 이 루피아 엘 세느안트가, 여기서 무너질 줄 알고! 여기서 포기할 줄 알았다면, 그건 오산이야!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인질 같은 한심한 처지가 되지는 않을 테다! 그러나 도저히 빠져나갈 방도가 없었다. 그러나 루피아는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머리를 돌렸다.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마구 몸부림을 쳐 봐도, 소리를 질러 봐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차라리 저택이라거나 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최소한 희망만이라도 보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건 뭐, 빠져나갈 방법은커녕 한치 앞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루피아는 잠시 쉬기로 하고, 한숨을 길게 불어내었다. 딜렌은, 이디스를 만나러 간다고 했다. 그는 마왕이니까 걱정할 것은 없을 텐데도, 그래도 루피아는 어쩐지 불안했다. 뭔가 크게 일을 낼 것 같다. 딜렌은 그저 순순히 물러나주지는 않을 것 같다. 무엇보다 그는 이디스의 이복동생이자, 이디스는 그의 부모를 눈앞에서 죽인 원수이다. 분명- 아주, 아주 미워하고 있을 터다. 그런 두 사람이 만난다. 그것도, 서로 적의를 가지고-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질이라니! 생각하면 할수록 한숨 나오는 처지가 아닌가. 루피아는 다시 파이팅! 을 다졌다. ‘좋아! 언제라도 날 여기서 내보낼 때가 있겠지. 그때… 그때를 노리자.’ 지금은 그 수밖에 없었다. * * * * * * * * * * * * * * * “……그러니까 지금 그 말씀은, 천계 측에서는- 우리를 중간계로 다시 돌려보낼 의향이 없다는?” 로아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키라는 뒤통수를 한 대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이 사람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으니, 이 말은 분명 사실일 것이다. 또한, 그는 처음부터 그녀에게 도망치라고 말을 했다. “천계에 있는 것이 몇 배는 더 위험합니다.” “……!” “특히, 리크비엘… 그 자는.” 세키라는 무릎 위로 주먹을 꾹 쥐었다. 그렇다면, 그녀의 선택은 전적으로 틀린 것이라는 말이 된다. 아니, 틀렸다 뿐만 아니라 위기의 수렁으로 모두를 밀어 넣어버린 것이다. 세키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리크비엘의 서늘한 눈을 떠올리자 그녀의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공녀는 이용가치가 큰 존재입니다. 그걸 아는 천계가 일부러 중간계에 공녀를 돌려보내는 짓은 하지 않겠죠. 이유를 뭐라고 대든, 그들은 당신들을 결코 중간계는 물론 마계에도 돌려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당신들은 ‘구출’된 것이 아니라, 다시 ‘감금’된 겁니다.” ================================================= ....가면 갈수록 한 회가 짧아지는군요; 다음부터는 이렇게 질질 끌지 않을게요ㅠ_ㅠ 진행도; 좀더 빨라져야 하는데..;[이걸 말해서 또 어쩌겠다는건지-_-;] 크리스마스에는 반드시 한 편씩 올리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에..; 모두들 메리 크리스마스☆ 되세요^^ 제 목: 공녀(貢女) : 제38화 [딜렌vs이디스] #. 제38화 [딜렌vs이디스] * * * * * * * * * * * * * * * 두 사람은 한참동안 서로를 노려만 보았다. 에크 성의 축제 때, 잠깐 만났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제대로 서로를 뜯어 살펴볼 시간을 갖지는 못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장장 20년만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지만, 둘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는 너무나도 냉담했다. 마치 불꽃이 튀길 듯한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카른은 딜렌의 안정치 못한 심정을 짚어내었다. ‘긴장하고 있군. 이 바보 같은 녀석!’ 이디스는 혈혈단신이었다. 그들이 불러낸 장소로 오직 혼자 왔다. 20년 전, 그때와 똑같이 오만하고 강력한 자. 솔직히 에우로카엘이 아니었다면 마계세력의 45%에 육박하는 동맹군의 도움이 있었더라도 카른은 쉽게 그에게 덤빌 마음을 먹지 못했을 것이다.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이 미풍에 미끄러지며 흔들렸다. 카른과 딜렌 앞에 나타나자마자 줄곧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그의 입술이 슬쩍 벌어졌다. “루피아는 어디 있나? 이리 내놔.” “내놓으라고 해서 순순히 ‘네, 여기요’하고 내줄 리가 없잖습니까?” 딜렌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디스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처음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다. 사실, 그런 기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웃긴 일이지 않은가. 어차피 그냥 말해본 것뿐이었다. 이디스는 그런가, 하고 말하며 손끝에 마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순순히 내어주지 않는다면 무력을 써서 빼앗아 올 생각이었다. 애초에 그렇게 마음먹고 온 것이었다. 딜렌은 그런 이디스를 보며 여유롭게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품 안을 뒤적거려 어른 장정의 주먹만한 구슬 하나를 꺼냈다. “……!” 그 구슬 안에는 루피아가 정신을 잃은 채 들어가 있었다. 딜렌은 그것을 집어던질 듯이 휙휙 던졌다 받는 것을 반복했다. 이디스의 안색이 확 달라졌다. 그의 몸에서 시꺼먼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눈이 날카롭게 섰다. 딜렌은 싱긋 조용히 웃으며 구슬을 카른에게 넘겨주었다. 딜렌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빼 들었다. 기세가 사뭇 날카로웠다. 딜렌은 이디스를 사납게 노려보며 말했다. “말은 필요 없는 것 아닙니까?” 이디스의 눈길이 딜렌에게 닿았다. 그는 손에 응집시켜 놓았던 마력을 가다듬어 길게 검 모양으로 완성시켰다. 전대 마왕 ‘카디스’를 죽였을 때 썼던 검이었다. 그리고 딜렌의 어머니, ‘카마프’를 카디스와 함께 꿰뚫었던 물건이기도 했다. 자연히 딜렌의 눈빛이 한결 더 날카로워졌다. 그는 검은 마력이 응집되어 이뤄진 검을 딜렌을 향해 세웠다. 딜렌은 그날, 20년 전의 그 날이 저절로 떠올랐다. 그는- 반쪽이라지만 그와 같은 피를 가진 형은 똑같았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의 앞에 선 상대가 아버지가 아닌 자신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는 20년 전 카른의 자리에서 이런 구도의 아버지와 그를 보았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아버지와 어머니는 끔찍한 모습으로 그에게, 저 검에 꿰뚫려 죽음을 맞이했다. 다짐했다. 20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다짐했었다. 죽이겠다고, 반드시 저 자리에서 끌어내주고 말 거라고! 그래서, 그래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복수를 하겠다고! 이제 그 때가 왔다. ‘당신은 달라진 것이 없어! 어머니가 말했던 것처럼 될 거야. 난…… 이길 거야!!’ “그럼.” 그는 똑같이 말했다. 20년 전과 똑같이. * * * * * * * * * * * * * * * 한눈에 보기에도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아름다운 꽃이 만개하여 우아한 자태와 향긋한 향기를 뽐내고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듯한 사실적인 조각들이 곳곳에 적절히 배치되어 있었다. 투명한 물방울이 뿜어져 나오는 분수대 옆에는 조그마한 무지개가 아스라이 떠 있다. 세상에 낙원이라는 곳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라 생각될 정도로 평화롭고 조용한 아름다운 풍경 한 가운데, 그는 서 있었다. 순금을 뽑아 만든 것같이 느껴지는 황금색 긴 머리칼과 짙은 물빛의 보석 같은 푸른 눈동자는 장인의 손길이 세세히 닿아있는 조각상처럼 완벽한 색채와 모양을 가지고 있다. “그를 계속 이곳에 놔두실 생각이십니까? 한계가 있다는 것을 모르시지는 않으실 텐데요!” 그 사람, 리크비엘은 불만스럽게 말했다. “물론 모르는 것은 아니다. 리크비엘. 하지만 이곳에 둘 수도 없다. 잘 알지 않느냐? 지금은 그놈의 힘이 필요하다.” 이상하게도 리크비엘의 말에 대답을 하는 자의 목소리는 명확하지 않고 주위로 울려 퍼졌다. 분명한 음색이 아니라, 물을 먹어 퍼진 그림처럼 흐릿했다. 그리고 모습 역시 드러나 있지 않았다. “그 힘이라는 것도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리크비엘은 인상을 썼다. 그 자는 눈엣가시였다. “12대천사 문제도 이대로 놔둘 수 없습니다. 명분이 없어 움직이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이대로 있을 자들이 아닙니다. 대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12대천사가 움직인다면 천계는 술렁이게 될 것이 분명했다. 마계로 향한 적의가 한창 고조되어 있는 이 시기에 그자들이 끼어들어 분란을 만들면 안 되었다. 천계는 하는 행동 하나, 하나가 자신의 신 오르가프에게 도움이 된다는 명분이 있어야만 움직이는 것이 허락되는 곳이다. 그렇기에 12대천사는 뻔히 눈 뜨고도 리크비엘을 막지 못하고 갇혀있는 것이나 진배없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그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면- 공녀 문제는 어찌 해야 합니까?” “……일단 살려 두어라. ‘세키라 에스베크’라는 여자를 제외하고는 어떻게 하든지 상관없지만, 오르가프의 의중을 알기 전까지는 함부로 죽여서는 안돼. 우리의 어버이이신 그 분이 어쩐 연유로 그들을 마계로 보냈는가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아내야 한다.” “예. 에우로카엘님.” 리크비엘은 예의를 갖춰 머리를 숙였다. 그가 이름을 부르자, 그때서야 흐릿하게나마 에우로카엘의 모습이 드러났다. 아직 그녀는 몽실몽실한 분홍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맨 첫 모습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핼쑥하게 말랐지만 말이다. “킥… 이곳도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지. 마왕의 혼혈 이복동생의 반란에, 마계의 모든 마족들은 평화에 지쳐있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미친 듯이 싸우고 있어. 서로 싸우다 자멸(自滅)하게 되겠지. 더러운 마족들의 최후란 결국 그런 것이야. 마왕… 그것은, 마신 클리오라가 마계를 위해 조종하는 마리오네트일 뿐이다. 실에 묶인 인형과 다름 아니다 이 말이야.” “예…….” 에우로카엘은 그 말을 끝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고개를 든 리크비엘은 빠른 걸음으로 분수대 옆을 지나쳐 걸어갔다. 잠시 뒤, 두 명의 천사가 지키고 있던 문으로 들어간 그는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오자마자 푹신한 의자에 몸을 맡겼다. 지친 듯 한동안 그러고 움직이지 않던 그는, 나지막이 한숨을 풀어내었다. 그는 만족한 얼굴이었다. “마계가 끝날 날도 얼마 남지 않았군.” * * * * * * * * * * * * * * * “지금부터는 우리도 반격을 시작한다!” 붉은 눈 일족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아로데가 선포했다. 이디스가 딜렌에게 가는 것을 본 뒤 아로데, 로이드윈, 유리아덴은 바로 붉은 눈 일족을 소집했다. 일족들은 이디스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들 3인방의 말이라면 믿을 만 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안 그래도 몸이 근질근질했던 일족들은 희소식에 환호했다. “기다리느라 고생했다!” 마족들은 밝게 웃으며 말하는 아로데의 얼굴에 금칠이라도 된 듯 쳐다봤다. 서열 2위 아로데 드 벨로시스. 그들이 아는 한 절대 저런 식의 ‘고생했다’는 둥의 말을 할 남자가 아니었다. 놀리는 말이라면 몰라도 말이다. 약간의 불안이 더해진 눈길을 받던 아로데는 이어서 한 마디를 더 했다. “하는 김에, 천계로도 가자!” “와아아아!” 이유가 뭐 중요하랴! 지금 붉은 눈 일족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살아가며 가장 즐기는 ‘오락’을 할 수 있게 허락이 떨어졌다는 것과 그동안 ‘평화협정’ 어쩌고 하며 질질 끌어온 천계와의 전쟁이 다시 터졌다는 것이었다. 마족은 전투의 종족. 서로 싸우며 쾌락을 느끼는 그들에게는, 진정한 축제의 선포나 다름없는 것이다. 일족의 환호를 온몸에 받으며 웃는 아로데를 보며 로이드윈은 유리아덴에게 작게 말했다. “저 녀석, 본인이 가고 싶은 것인 주제에. 잘도 이용해먹는군. 공권력 남용이야.” “……단순한 놈들.” * * * * * * * * * * * * * * * ‘이대로는 있을 수 없어! 뭐라도 해야 해!’ 에리나는 벌떡 일어났다. 기껏 마계에 남았는데 유리아덴은 한 번도 찾아오지 않고, 루피아는커녕 밉살스러운 로이드윈조차 만나지 못했다. 분명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데 자신 혼자만 도태된 것 같아 그녀는 불안해졌다. 발만 동동 굴러대고 있을 수는 없는 일!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그녀는 속으로 외쳤다. ‘제길. 공기가 나빠. 긴장감 가득한, 팽팽한 느낌- 분명 뭔가 일어나고 있는 거야.’ 반란이 일어나고 그와 거의 동시에 세키라는 공녀들을 데리고 천계로 떠나 버렸다. 계약 때문에 에리나는 마계에 남았지만 바로 마왕성으로 옮겨져 버렸기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러나 ‘붉은 눈’ 일족들이 마왕성으로 모여들고 성 전체에 긴장감 가득한 공기가 흐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이 틀림없다. “아! 루피아님 친구!” “응? 이 목소리는…….”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목소리에 에리나는 멈춰 섰다. 그녀는 금방 자신에게로 달려오는 시녀가 그 목소리의 주인임을 눈치 챘다. 그리고 그 시녀가 루피아의 담당이었던 것도 금방 기억해냈다. 아마 이름이 ‘메를리나’였던 것 같다. “오랜만이군요! 공녀들은 다 천계에서 빼앗아 가 버렸다고 들었는데, 당신은 남아 있네요?” 어쩐지 가시가 돋친 말투에 에리나는 쓰게 웃었다. 기껏 올려놓은 이미지가 다 망쳐져 버린 것 같았다. 인간과 마족이 함께 어울리는 것은 하늘도 도와주지 않는 모양이었다. 시기도 어쩌면 이렇게 절묘할까? “그러나저러나, 루피아님은 어떻게 됐어요? 역시 천계로 가 버렸나요?” “아니요. 루피아도 저와 함께 남았어요. 그렇지만 어디 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루피아님은 절 실망시킬 분이 아니시죠! 남아계실 줄 알았어요. 무엇보다 루피아님은 마왕비가 되셔야 할 분이신 걸요~ 우후후.” 언제 이야기가 이렇게 진행이 되었지? 에리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내심 한숨을 쉬었다. 역시 그녀는 마왕과 루피아가 서로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었다는 것이 못마땅하게 느껴졌다. 절대 그런 일은 없겠지만, 만약 마왕 이디스와 루피아의 오빠들이 만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잠시 상상을 해보던 에리나는 금방 고개를 내저었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끔찍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까? 잠시였지만 곁에서 지켜본 바로는 마왕도 루피아의 오라비들 못지않게 루피아를 옆에서 떨어뜨리지 않던데 말이다. 곁에서 떨어뜨린 순간은 루피아가 시합을 하러 내려간 그때뿐이었다. 어차피 곧 돌아왔겠지만. 에리나는 때에 안 맞게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모르긴 몰라도 한바탕 활극이 벌어질 것이다. 만약 정말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때는 꼭 옆에 있어야겠다. “맞다! 들었어요? 천계와 전쟁이 벌어진대요, 글쎄~” “뭐, 뭐라구요?!!” “어? 못 들었나 보네요? 하긴, 이제 막 결정이 난 거니까 그럴만하네.” 바, 반란도 모자라서 천계와 전쟁까지? 에리나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럼, 천계에 있는 세키라는, 다른 여자들은 어떻게 되는 거야! 메를리나는 여전히 신이 난 어조로 마구 조잘거렸다. 그녀는 잔뜩 들떠 있었다. “평소 마왕님답지 않게 미적미적 대응을 하고 있어서 못마땅한 마음이 있었는데, 사실은 천계까지 한꺼번에 치기 위해 뜸을 들였던 것이던 거예요! 이 얼마나 멋져요? 마침 공녀가 천계로 쳐들어가는 명분이 되어주었고요!” 에리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전쟁이 일어나는데 어떻게 저렇게 기뻐할 수가 있는지. 방글거리던 메를리나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여왔다. “그렇지만 반란 문제는, 역시 좀 골치를 썩을 것 같아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천계와의 전쟁보다 골치가 아플 것 같다니?” “그게 말이에요~ 반란군의 핵심에는 전(煎) 마왕님의 둘째 아들인 ‘딜렌’님이 계시거든요. 눈앞에서 부모님이 살해당하는 장면을 봤으니, 지금의 마왕님께 독을 품을 만 하다는 거지요. 하층 마족들에게야 부모가 별 의미가 없겠지만 웬만한 상층 마족들에게는 부모는 역시 소중하거든요.” 메를리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도 30년 전 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하나였고, 딜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조금 불쌍하게 느껴졌던 탓이었다. “유리아덴님은 어디 계세요?” “예?” “유리아덴님 어디 계시냐고요! 알고 계실 것 아닙니까? 빨리 말해요!” 그때, 마왕성에서는 세 개의 군단(軍團)이 각기 출진(出陣)을 하고 있었다. 각기 선봉(先鋒)은 아로데, 로이드윈, 유리아덴이었고, 그 뒤를 열(列)을 맞춰선 마족들이 따르고 있었다. 로이드윈은 반란군의 진압을 위해 서쪽으로 향하고, 아로데와 유리아덴이 이끄는 두 개 군단은 검은 흑운(黑雲)이 자욱하게 덮인 하늘을 향해, 천계로 향해 날아오르고 있었다. 후에 ‘제3차 천마대전’이라 명명되어진 전쟁의 시발(始發)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가벼운 분위기 속에서 시작되었다. ============================================= ....처음부터 예상했던 대로, 전쟁이 들어가는 부분이 쓰기 힘드네요. 요즘들어 계속 신혼일기에만 눈이 가고_[;] 어서어서 이 부분을 끝내고 중간계 파트에 들어가야 하는데.. 끄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답답~~ 합니다-_- 요새는, 방학인데도 불구하고 학기중보다 더 빡십[;]니다.(←사투리) 게으름과 늦잠이라면 어디 내놔도 으뜸일 제가; 늘 5시에 일어나고 있으니까요. 들어오는 건 늘 밤이고...; 너무 오래 연재를 안 했더니 다 까먹으신 게 아닐까 걱정되는고로, 줄거리도 정리해서 써야 할 것 같아요-;(←정말) 죄송해요; 즐독하세요오.[도망가기] 도, 도, 돌- 던지셔도 이 몸으로! 다 받아줄게요~[...] 즐거운 설날되세요오.[울기] 제 목: 공녀(貢女) : 제38화 [딜렌vs이디스](2) #. 제38화 [딜렌vs이디스] * * * * * * * * * * * * * * * 마계와 천계는 사실, 경계 하나만으로 구분이 지어져 있는 아주 ‘가까운’ 차원이다. 그래서 그 ‘경계’는 언제나 경비가 삼엄하다. 어느 한 쪽에서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고 하던가? 그 경계 가까이에 서서 아유니는 천천히 한 손을 허공으로 내밀었다. 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파란 스파크가 튀었다. 그것을 보며 그녀는 빙그레 웃었다. 이 인간의 몸은 이제 한계다. 더 이상 쓸 수 없다. 얼마나 버텨주었던가? 2개월? 3개월?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녀의 뜻대로 잘 움직여 준 나름대로 마음에 드는 몸이었다. 진짜 이 몸의 주인은 ‘그녀’가 몸에서 빠져나가고 나면 마치 잠을 자고 난 것 같은 기분일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한 모든 일은 그저 한낱 꿈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녀는 벗었다. 답답하게 스스로를 옥죄던 인간의 몸을 벗어버렸다. 푸른빛이 아유니의 몸을 덮고, 얼마나 지났을까? 분홍색의 돌돌 말린 머리카락이 풀어져 흘러 내렸다. 종아리까지는 거뜬히 덮을 정도로 길게 자란 머리카락은 그 끝에서부터 천천히 보랏빛으로 색이 진해져갔다. 윤기를 잃은 피부는 다시 우윳빛 피부로 돌아갔고, 이어 점점 진하게 변하더니 옅은 갈색의 피부가 되었다. 그 위는 눈처럼 새하얀 의복이 둘러졌다. 그녀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핑크빛, 루피아 앞에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하기만 했던 눈동자는, 차가운 얼음의 옅은 회색빛이었다. 날카로운 날이 선 눈매는 한결 차가운 이미지를 더해주었다. 아유니- 아니, ‘에우로카엘’은 입술을 비틀어 비소(誹笑)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이 모습으로 앞에 나서는 것도 참 오랜만이로군.” 그녀는 ‘경계’ 바깥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뒤로, 점점 그림자가 지기 시작한다. 하나 둘이 아니었다. 점점 늘어만 가는 그림자는 모두 틀로 박아 만들어낸 것처럼 똑같은 표정으로 똑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다. 투구를 쓰고 창을 들고, 의복은 새하얗다. 그야말로 신화 속에서 그대로 빠져나온 것같은 모습들이었다. 그들의 앞에는 리크비엘이 있었다. 은빛 투구 사이로 흘러내린 금발과, 날카롭게 번뜩이는 푸른색 눈동자- 그는, 가장 서열이 높은 자답게 다른 천사들보다 훨씬 더 화려한 복장이었다. “오는군요.” “그래. 그네들의 지옥으로 말이지…….” 경계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미약한 지진이 발끝으로 진동을 전해온다. 에우로카엘은 손을 들었다. 그녀의 손끝을 따라 모든 시선이 움직인다. 그녀의 손끝은, 저 경계 너머- 푸른 스파크를 일으키는 ‘벽’ 너머를 가리키고 있었다. “가라! ‘오르가프’님의 뜻에 따라 처벌하라-!!” 들어와라! 어리석은 마족들이여- 너희들이 끝날 자리로! 불꽃에 날아드는 부나방의 꼴이 되리라! * * * * * * * * * * * * * * * 차가운 칼날이 목에 닿는 느낌이 섬뜩하다. 금방이라도 살 속으로 파고들 것처럼 목 줄기에 대어진 검디검은 쇳덩이의 느낌은, 피 냄새마저 날 정도로 비릿했다. 딜렌이 피식 웃자 이디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웃기는군요. 어서 죽여 버리지 그래요? 아직도 날 죽일 ‘필요’가 없습니까?” 딜렌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죽거렸다. 이디스는 독기 서린 딜렌의 눈을 보며 문득 ‘꿈’에서 보았던 옛날의 모습이 떠올랐다. 딜렌- 선왕이 남긴 ‘예외’인, 그의 이복동생.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는 딜렌을 싫어했던 것이었다. 이상하다 싶을 만큼 딜렌은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조잘거렸지만 그를 볼 때마다 이디스는 언제나 가슴 한 구석이 허전한 것을 느껴야 했다. 아마 자신에게 없는 것을, 딜렌을 보며 늘 상기시켜왔기 때문에 그는 딜렌을 싫어했던 것이리라. “아니. 죽여야 할 이유라면 많다.” 그렇게 말하며, 이디스의 검 끝은 살을 조금 파고들었다. 하지만 거기에서 더 움직이지 않았다. 담담한 표정이던 딜렌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딜렌은, 이를 꽉 악문 채 씹어뱉듯 소리쳤다. “그렇다면 죽여! 죽이란 말이다!!” “…….” 딜렌은 계속해서 소리쳤다. 그러나 이디스는 그저 그런 그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어째서야? 왜 그때 아버지, 어머니를 죽였어!! 왜 나를 죽이지 않았어!!” 눈앞에서 잔인하게 어머니, 아버지를 빼앗긴 20년 전 그때가 아직도 눈앞에 현실처럼 생생하게 그려졌다. 지금 그의 목에 대어져 있는 검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꿰뚫고, 붉은 피가 눈앞을 점점이 수놓아간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그 기억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도저히 지워지지 않았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이디스는 검을 딜렌의 목에서 내렸다. 검 끝이 땅에 닿자, 이디스는 딜렌에게 물었다. “넌 네 어머니, 아버지를 죽였기 때문에 날 미워하던 것이 아니었나?” “……!!” “이상하군. 너의 말을 들어보면, 널 죽이지 않아서 날 미워한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아냐! -아니야! 아니야! 난 당신이 미워! 죽도록, 죽도록 증오해! 미워한다구!!” 이디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가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딜렌이 떨리는 목소리로 고함을 내질렀다. “미워해야 해! 그래야만 해!” “뭐?” “모두 다 형 때문이야! 그래서, 나는- 나는!! 아니야! 형 때문이야아!! 난, 난 아니야아아아아아아-!!!” 차라리 그때 나를 같이 죽여 버렸으면, 그랬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딜렌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분노로, 증오로, 미움으로, 사랑하는 부모님을 앗아간 이디스를 저주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딜렌은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태어났을 때부터 그는 아버지의 등 대신에 이디스의 등을 보고 자라며 따랐다. 딜렌은, 이디스보다- 그의 형보다, 부모님이, 그의 손에 죽어버리고 만 부모님이 미웠다. 그런 자신을 인정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그 누구보다 이디스를 저주하고, 미워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자신을 지킬 수 있다. ‘어째서 죽어버린 거예요? 예? 어머니! 형은 약하지 않아요. 형은 더 이상 인형이 아니야. 어머니는 강했잖아요! 아버지도 강했잖아요! 그런데 왜…….’ 하루에도 몇 번이나, 몇 번이나 그런 식으로 생각해버리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차라리 같이 죽여주었다면, 이런 지독한 자기혐오 따위 모르고 살다 갔을 것이다. 깨끗하게, 어렸던 그 때 그대로 깨끗하게 죽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이토록이나 ‘더럽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때였다. 바로 그 때였다. 딜렌의 등 뒤로 거대한, 새하얀 은빛 날개가 펼쳐진 것은-. 우둑. 우두둑. 뭔가 찢어지는 무거운 느낌의 끔찍한 소리와 함께 꿈틀거리며 하얀 날개가 딜렌의 등에 솟아났다. 미끈거릴 것 같은 액체에 뒤덮인 그 날개는, 딜렌의 비명을 먹고 자라나기라도 하는 듯 그의 비명에 맞춰 점점 커져갔다. 딜렌의 몸보다 더 커지고 나서야 성장을 멈춘 날개- 그것에서, 새하얀 빛이 쏟아졌다. 절대 마계에 있을 리가 없는, 또한 있어서는 안 되는 ‘색’- 이디스의 안색이 바뀌었다. 새하얀 은빛, 그리고 눈부신 백색의 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제야 이디스는 뭔가 이질적인 기색을 눈치 챌 수 있었다. 딜렌에게 신경을 쓰느라 미처 눈치 채지 못하고 있던 이상한 느낌- 위험-……!! 푸우욱! 더 이상의 생각은 이어지지 못했다. 뇌리를 파고드는 화끈한 감각……. 그야말로 눈 깜짝 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딜렌의 팔이 가슴팍을 파고들어가 있다. 아마 반대편에서는 딜렌의 손가락이 피에 젖어 꿈틀거리고 있을 것이다. 이상한 것은 가슴이 뚫린 그보다 딜렌이 더 충격을 받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큭. 너…?” 천계와 손을 잡은 거냐? -라고 묻고 싶었지만, 이디스의 말은 울컥, 하고 쏟아져 나오는 핏물 때문에 막혀버렸다. “어- 어‥ 어어, 어……, 아아……!” 경악한 얼굴과는 다르게, 신음과 비슷한 말을 몇 마디 흘린 딜렌은 이디스의 가슴에서 팔을 빼내었다. 흥건한 핏물로 빨갛게 변한 손바닥에 몇 방울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방심했다. 마계의 경계 저편에서 일어나는 일 때문에 ‘변화’한 딜렌을 앞에 두고도 무방비했던 것이다. ‘날개’에서는 마계와는 다른 속성의 힘이 넘쳐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의 생애 전부를 통틀어 이렇게 어이없이 무너지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우우웅- 딜렌의 날개가 우는 것 같은 구슬픈 소리를 내었다. “아‥ 아아… 아아아아……! 으, 으흑. 으흐- 아아아아아악!! 카, 카른! 카른! 카르으은!!”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이디스는, 딜렌의 끔찍한 비명소리와 창백하게 질린 루피아의 얼굴을 보았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물로 흐려진 보라색 눈동자와, 파랗게 질린 입술. 그리고 머리를 관통하는 ‘울림’까지. ‘죽이고 싶다면서? 소원은 이루어졌어. 딜렌…….’ "이디스! 안, 안 돼!! 안 돼애애애애!!!" * * * * * * * * * * * * * * * “이디스! 안, 안 돼!! 안 돼애애애애!!!!”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이게 대체!! 루피아는 정신없이 울부짖으며 이디스의 몸을 마구 흔들어댔다. 무적이라고 생각했다. 절대 무너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안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지, 진, 진정하자. 진정해, 제발, 심장아. 멈춰 줘. 이, 이건 꿈일 거야. 꿈일 거야… 현실일 리가 없어. 마왕이잖아? 마계의 왕이잖아? 강하잖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건…….’ 루피아는 진정이 될 줄 모르는 손끝을 가까스로 움직여 그의 코끝으로 가져다 대었다. 숨을 쉬지 않는다. 뺨으로 손을 옮겼다. 혈색이 사라져가며 창백해진 뺨은 이제 차가워지고 있었다. 그칠 줄 모르는 붉은 색 피가 가슴을 뒤덮고 있다. 아. 아아. 아아아아! 지축을 뒤흔드는 듯한 충격과 굉음(轟音)덕분에 정신을 차린 루피아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장면은 딜렌의 등에서 새하얀 날개가 돋아나는 것이었다. 빠른 속도로 자라나던 그 날개는 이윽고 딜렌의 몸보다 더 커져서는 눈부신 은빛을 쏟아내었다. 그리고……. 믿고 싶지 않은, 끔찍한, 꿈같은 모습. 꿈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어서 깨고 싶은 악몽일 것이다. ‘나이트 메어’의 악질적인 장난임에 틀림이 없다…… 이런 일이 벌어질 리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눈을 감았다 뜨고 나면, 그는-. “혀, 형. 형…… 형! 형!!” 번뜩, 루피아는 정신을 차렸다. 끔찍한 목소리가 그녀를 현실로 불러들였다. 눈을 뜨고 나서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딜렌은 마치 자신이 벌인 일이 아니라는 듯이 경악과 충격이 범벅이 되어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고 있었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형’이라고 중얼거리며. “형…… 형…! 형. 형님…….” 날개는 여전히 눈부신 은색의 빛을 내뿜으며 낮게 울고 있었다. 가늘게 어깨를 떨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니, 루피아는 그나마도 화를 내고 미워할 힘도 빠져버렸다. 마음껏 화를 내고 미워해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자신의 몸을 움직이는 것도 힘들었다. 그녀에게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도저히 허락되지 않는 일이었을까? 쿠르르릉- 콰콰광! 번쩍! 쿠르릉- 하늘은, 마치 마음에 동조해주듯 비를 내려주었다. 안 그래도 흐릿하던 회색의 하늘은 어두운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차가운 빗물에 온몸이 녹아내렸다. 아무 것도 듣고 싶지 않다. 아무 것도 보고 싶지 않다.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아무 것도 느끼고 싶지 않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만 싶었다. “조금 있으면 천군이 마계를 점령할 거다. 그때가 되면, 마왕의 그 시신조차 안전할 수 없을 테니 얼른 그를 데리고 숨는 것이 좋아.” 카른의 말이 슬그머니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살고 싶다면.” 카른은 그 말을 던지고 딜렌의 뒷목을 쳐서 기절시킨 다음 가볍게 안아들었다. 루피아는 이디스의 몸에 열없이 머리를 기대어, 목까지 차오른 슬픔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타오르는 듯. 세상이 끝나버린 듯. 서럽게,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멍든 고통이 그녀를 삼켜버릴 때까지- ============================================ 너무나 오랜만이라서 드릴 말씀이 없군요.; 리플 중에 가슴에 찔리는 말이 있었습니다. '한 달 특집입니까!'.. 정말 제가 게으르죠. 출판사 담당자님께서도 '4권 내셔야죠?'하고 말씀하시고..[삐질] 아아.. 점점 우울 노선을 걷고 있는 공녀. 초창기 밝은 분위기는 다 어디다 버려두고 이 지경인지, 원. 그렇지만 첨부터 말씀드렸다시피 공녀는 원래 좀 진지한 분위기였어요![..;] ...저 지경이 되었으니 저는, 이디스 팬분들께 암살당하는 게 아닌가 모르겠네요-_-;[안 그래도 늦는다고 미움 많이 샀는데..;] 이번주 주말에도 반드시 올리겠습니다. 약속드려요! ..이런 약속, 연재 시작하고 처음 해보는군요-_-; 메일은 donghee425@hanmail.net으로 보내 주십시오. 아. 삼룡넷 쪽지도 환영입니다^^ 리플도 달아주시면 무척 감사할 거예요~[..응?;] 즐독하세요! 제 목: 공녀(貢女) : 39화 [중간계로!](1) #. 제39화 [중간계로!] * * * * * * * * * * * * * * *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은, ……(이런 말 하면 혼나겠지만)쓸데없을 정도로 기운이 넘쳐서, 굉장히 안심이 되었다. 모두들 여전했다. 조금 마르신 듯한 아버지와 어머니, 카에리드 오빠와 이데카른 오빠, 트로에 오빠- 베키까지도. 중간계는 ‘우리’를 환영하지 않았지만, 그런 모든 것들을 잊어버릴 정도로 행복했다. ============================루피아의 자서전================= 오싹, 세키라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한기(寒氣)에 몸을 떨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뭔가 무서운 일이 생긴 것 같은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마를 문지르면서 옅은 한숨을 토했다. 천계에 오기만 하면 무엇이든 다 해결이 될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이었는지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는 중이다. 로아이나의 말을 공녀들에게 전했지만 당연히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선입견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세키라는 그때 절감할 수 있었다. 다들 천계는 ‘무조건 선(善)’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만 객관성을 가지고 생각해본다면 지금 이 상황이 마계 때와 전혀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결국 세키라는 혼자 탈출을 시도했고, 몇 번의 실패 끝에 끝내는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세키라는 피식 웃었다. 이런 일, 예전에는 상상도 못 했었다. 1년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많이 변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 같았다면 벌써 포기했을 것이다. 무모한 일이라며 시도해 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죽을 날만 꼽고 앉았었겠지. ‘그런데…… 왜 아무도 없지? 명색이 감옥이면 지키는 사람 정도는 있어야 할 텐데.’ 설마 지킬 가치도 없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겠지? 하긴, 그녀 자신이라도 그럴 필요를 느끼지는 못할 것이다. 비참한 얘기이지만 말이다. 세키라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천계에도 이런 어두침침한 곳이 있다니, 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곳은 전형적인 감옥이었다. 쾌쾌한 냄새도 났고, 음산한 한기가 떠돌고 있다. 짚더미 위에 앉아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편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곱게 자란 만큼 이런 환경은 더더욱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족쇄를 채우지 않았지만 그녀로서는 도저히 이 굵은 쇠창살 너머로 갈 수가 없었다. 괴물 같은 힘이 있어 와드득! 하고 부술 수도 없고, 갑자기 연체동물처럼 물렁물렁해져서는 스륵~ 하고 지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팔이 쭉- 늘어나 저기 저 멀리에 걸려있는 열쇠를 가져올 수도 없다. 덧붙이자면, 머리핀으로 자물쇠를 따거나 하는-만약 일반 자물쇠라면- 기술도 없었다. 사위(四圍)가 고요한 침묵 속으로 먹혀 들어갔다. 세키라 그녀 자신이 움직이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소리도, 기척도 없다. 불안해진 그녀는 자꾸 딴생각을 해보려 했지만 자꾸 생각은 이어지지 못하고 끊겨 버렸다. 차라리 누구라도 와 주었으면! 하고 바랐던 그때, 마침 누군가의 목소리가 멀리서 두런두런 들려오기 시작했다. “여기가 맞지? 젠장, 그 자식! 우리가 가만히 있으니까 우습게 보이나 보지?” “아- 시끄러워. 목소리가 울리잖아!” “쳇! 좀 시끄러운 게 어때서? 지하니까 어쩔 수 없잖아?” “그러니까 그 입 좀 다물라는 거야.” “둘 다 조용히 해.” 대화 소리는 점점 더 커져갔고, 복도 끝에서부터 옅은 불빛이 비춰오기 시작했다. 세키라는 창살 사이로 최대한 복도 끝을 바라보았다. 누구일까? 설익은 목소리들이었다. “이런 곳이 생기다니…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군.” “그래. 그나저나, 여기가 맞지?” “맞을 거야. 설마 우리에게 거짓말을 했겠어?” 뚜벅뚜벅. 발소리도 점점 커졌다. 불빛이 점점 다가온다. 말소리도 커져갔다. 불빛에 비춰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몇 사람? 대략 5명 정도였다. 이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아! 찾았다! 이봐, 네가 ‘세키라 드 에스베크’지?” 세키라는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빛에 드러난 5명은 모두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빛에 장난기는 있을지언정 적의는 없었기 때문에 세키라는 안심할 수 있었다. 세키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5명 중 한 명이 자물쇠를 따 주었다. 감옥에서 이끌려 나오면서 세키라는 다시 한 번 놀라야 했다. “난 미카엘. 그리고 이쪽은 시즈니엘, 체르비엘, 에리엘, 요시피아나. 널 데리러 왔다.” * * * * * * * * * * * * * * * 에리나는 턱까지 차오른 숨을 몰아쉬었다. 이미 유리아덴을 찾기란 글렀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메를리나가 한 말이 떠나지 않고 자꾸 메아리쳤다. ‘어머! 모르세요? 그야 당연히 천계로 향하셨지요! 지금쯤이면 이미 출발하셨을 걸요?’ 제3차 천지대전(天地大戰). 가슴 속을 꽉 뭉치게 만드는 그 단어를 다시금 되뇌며, 에리나는 문을 벌컥 열어 재꼈다. 다행히 라우데스는 아직 마왕성 안에 있다고 했다. 유리아덴이 없는 지금 찾아갈 마족은 라우데스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오실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에리나님.” 라우데스는 혼자가 아니었다. 라우데스의 옆에는 젊은 남자가 한 사람 더 있었다. 밝은 금발과 에메랄드빛 초록 눈동자를 가진 그 사람은 에리나를 보며 상냥한 웃음을 보냈다. “마녀인 ‘에드라스’라고 합니다. 잘 부탁해요. 예전에는 군주님의 유모였지요.” “…마녀…… 요?” 에드라스는 살풋이 웃었다. 에리나는 꽤나 여성스런 웃음이라고 생각했다. “마녀란 종족 이름이랍니다. 성별은 분명한 남자예요.” 하지만, 성격은 여성스러운 편이 맞는 것 같았다. 말투도 여성스럽고 말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에리나는 라우데스에게 말했다. “천계로 가야 해요! 제발 도와주세요!” “무조건 천계로 간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에리나님, 천계에 가서 뭘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냉정하게 되묻는 라우데스의 말에 에리나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녀 혼자로서는 무엇도 제대로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손놓고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말이다. 설령 아무런 소용이 없는 짓이라고는 해도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다. 에리나가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숙이자 에드라스와 라우데스는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라우데스가 입을 열었다. “12대천사라고 알고 있으십니까?” 엘루시아 대륙에 살면서 12대천사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성경에 지겹도록 등장하는 이름들인데 말이다. 에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30년 전, 갑작스레 은둔을 시작했습니다. 아시다시피, 12대천사는 천계의 모든 분야를 관리하는 자들이었습니다만, 그들이 은둔을 하고부터 천계는 겉으로는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에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30년 동안 천계의 머리에 올라선 자가 있었죠. 그게 바로 ‘13번째 아이’라고 불리는 에우로카엘입니다. 사실 그녀는 몇 백 년 전부터 천계에 존재하고 있었지만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30년 사이, 무서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천계를 차례차례 장악해갔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이 전쟁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예. 그렇지만 왜 이런 얘기를…….” 라우데스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천계에 보내드리겠습니다.” “……!!” 라우데스의 말은 이어졌다. “그리고, 중간계로 가셔서 ‘로헤델의 별’이라는 것에 대해 알아내 주십시오.” * * * * * * * * * * * * * * * 커다란 수경(水鏡)은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풍경이 그려내었다. 가만히 아래를 들여다보던 로아이나는 가볍게 물 속을 휘저었다. 잠잠한 수면 위에 비추어지던 풍경은, 한 번 휘저어지고 난 후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가엾게도…….” 그는 딜렌을 잘 알고 있었다. 가끔이지만 마왕성에 들르던 때마다 딜렌에게 군것질 거리를 쥐어주며 귀여워해주었던 아이였다. 티 한 점 없이 밝게 웃던 얼굴이 무척 인상적이던 어린 아이. 이렇게 이용하게 될 줄 알았기 때문일까? 로아이나는 마왕성에 갈 때마다 딜렌에게 선물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의 밝은 웃음은 사라지고, 슬픔과 절망에 빠진 눈물 젖은 얼굴만이 있을 뿐이다. 가장 사랑했던 형을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는 사실 때문에 딜렌은 더 이상 제정신이 아니었다. “조절하기 힘들었어. 본능적인 거부감 때문인가?” 입맛이 썼다. 가장 가까이 다가왔을 때, 그리고 마왕이 가장 방심하고 있을 때를 노려 딜렌의 몸으로 공격을 하도록 한 것은 바로 그였다. 에우로카엘에게서 받은 ‘날개’는 딜렌의 공격력을 증강시켜주는 기능을 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로아이나가 조종할 수 있게 만드는 일종의 ‘실’의 역할도 했다. 모든 것은 에우로카엘의 지시에 따른 일이다. 딜렌과 손을 잡은 것도, 그를 이용해 마왕을 죽이는 일도-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예견(豫見)하고 있었으면서도 그녀의 명령을 현실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로아이나, 바로 그였다. 그는 가벼운 비웃음을 흘렸다. “이런 짓을 해서 뭘 어쩌겠다는 것인가…… 이런다고 해서 나아지는 것이 없으리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내가 제일 잘 알 텐데.” 그렇지만 거부할 수도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로아이나의 수경에는 점차 다른 풍경이 떠오르고 있었다. 세키라가 12대천사의 손에 이끌려 지하 감옥을 빠져 나가는 장면이었다. 그로서도 짐작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신 클리오라와 오리가프의 속내였다. 그분들은 무슨 속셈으로 인간을 마계로 보내라고 하신 것일까? 무슨 이유로? “이제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그만 두어야 한다. 그렇다고 뭘 어쩔 수도 없을 테지만- 내 손으로 시작한 인연이니만큼 이 손으로 끊어야 한다.” 로아이나의 손은 매끄러운 회색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처음 그의 머리칼은 회색이 아니었다. 붉은 감이 도는 검은 머리칼이었지만 지금은 옛날 모습은 전혀 찾을 수 없는 완연한 회색이었다. 그날, 그녀를 만나고부터 점차 옅어지던 머리카락-. 옛날로 돌아가고 싶었다. 마계에서만 지내던 그때로, 점집 ‘성하(星河)’를 하면서 마계를 떠돌아다니며 여행하던 그 때로, 이 능력을 저주가 아닌 그저 ‘능력’으로만 여겼던 그 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아니, 하다못해 그날, 그날 그녀를 만나지만 않았더라면-……. 충성을 맹세한 주군을 죽이고-비록 딜렌의 손을 빌렸지만-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마계를 배반했으며 이제 또다시 천계마저 돌아서려고 한다. “‘로헤델의 별’-…… 그것은, 에우로카엘뿐만이 아니라 나에게도 저주야.” ================================================== ...11시 10분을 막 지나고 있군요-_-; 아직 주말입니다! 12시 안 지났잖아요.[히죽] 약속 지킨 겁니다? 조~금 아슬아슬했긴 하지만~ 어쨌든, 역시 저, 목숨이 위태롭군요-_-; 메일은 donghee425@hanmail.net으로 보내주시구요. 즐독하세요!^^ 제 목: 공녀(貢女) : 제39화 [중간계로!](2) #. 제39화 [중간계로!] * * * * * * * * * * * * * * * 상황은 순식간에 급변(急變)했다. 로이드윈은 입속으로 낮게 욕설을 읊조렸다. 그들은 천계를, 아니 에우로카엘을 너무 얕보았다. 변수가 너무 많았어.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너무 많았던 것이다. 고작 30년 만에 천계를 장악한 요녀(妖女)였다. 그만큼 비상한 머리와 재주가 있음을 간과해버렸던 것이다. 천계는 철저하게 에우로카엘의 개가 되어 있었다. 원래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들이었지만 말이다. 로이드윈은 이득 이를 갈았다. 설마, 설마 했었건만 완전히 뒤통수를 얻어맞은 격이었다. 그래도 마족인데! 반쪽이라도 분명 마족이건만 딜렌은 천계와 손을 맞잡았다. 그것이 패배의 원인이었다. 그림자족과 천계는 서로 연합하여 그들에게 덤벼들었고 에우로카엘은 가장 앞에 서서 마족들을 베어나갔다. 승패가 어느 정도 겉으로 드러나자 그림자일족의 수장인 카른이 나서서 사태를 진정시키고 딜렌의 이름 앞에 ‘마왕’이라는 수식어를 달아주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소식을 전하면서-… 말이다. “제기랄! 빌어먹을! 그럴 리가 없어! 야, 로윈. 너, 무슨 말이라도 좀 해봐. 그 잘난 마안(魔眼)을 이럴 때 안 써먹고 또 언제 써먹으려고 아껴두는 거냐! 어?” “…….” “뭐라고 말을 좀 해보라고. 답답해서 어디 살겠나, 제길!” 아로데는 성급하게 말하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결과만을 말하자면 그들은 천계군- 정확하게 말해 천계와 그림자족의 연합에게 완패했다. 천계와 싸우는 도중 그림자 일족에게 뒤통수를 얻어맞고 딜렌에게 왕의 자리를 빼앗겨 버린 것이다. 카른은 말했다. 딜렌이 이디스를 죽였다고 말이다. 로이드윈은 참담한 안색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공식적으로 ‘왕’의 자리가 딜렌에게로 옮겨가버린 이 시점에서는 군사의 전권 역시 딜렌과 카른의 손에 들어가 버린 형국이 되었다. 말하자면 그들은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싸울 수 있는 권리를 잃은 셈이었다. 물론 다혈질이 아로데가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었다. 명실공한 서열2위인 그가 마왕에게 덤벼드는 것은 위법도 뭣도 아니지만 로이드윈과 유리아덴은 그런 그를 뜯어 말렸다. 우선 이디스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마구잡이처럼 보이는 마계에도 엄연히 법도가 존재하고 권력이 존재한다. 군사를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을 잃은 상태로서는 아무리 그들의 사병(私兵)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 ‘마왕’이라는 이름은, 마족에게 있어서는 절대적이다. 전투에 대한 기대로 잔뜩 흥분했던 마족들을 단번에 착 가라앉힐 정도로 말이다. “대체…… 누구지? 에우로카엘이라는 그 자.” “지금 그게 문제야!” 아로데가 울컥해서 벌컥 소리를 지르자 로이드윈은 침착하게 말을 받아쳤다. 둘의 성격이 대번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천계는 마계보다 위계질서가 엄격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가장 고위층인 12대천사는 이번에 옷자락도 비치질 않았어. 이게 무엇을 뜻하는 것 같나? 그 고지식한 리크비엘은 에우로카엘이 마치 ‘오르가프’라도 되는 듯이 따랐다.” “……뭐야, 그건?” “몰라. 내가 에우로카엘에 대해서 아는 것은, 몇 백 년 전인가 마계에서 키워지던 혼혈아(混血兒)라는 것뿐이다. 그러고 보면 딜렌도 혼혈아로군.” 에우로카엘이 마계에 이름이 알려진 것은 사실 얼마 되지 않았다. 천족을 신 떠받들 듯 숭배하는 중간계에마저 그 이름은커녕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을 정도로 에우로카엘의 이름은 13번째 신의 아이였음에도 무게를 지니지 못했다. 그런 에우로카엘을 로이드윈이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그녀가 눈에 띄게 활동을 전개하던 30년 전부터였다. “-그딴 것 알 필요 없어! 주군은 어디 계신 거야!” 아로데가 다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로이드윈과 유리아덴이 날뛰려던 그를 뜯어 말린 후부터 그는 마치 꼬리에 불붙은 강아지처럼 안절부절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유리아덴도 대답을 재촉하듯이 로이드윈을 바라보았다. 로이드윈은 다시 한참을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는 마침내 한 마디 툭, 뱉듯 말했다. “중간계.” * * * * * * * * * * * * * * * “아, 아악! 하, 항복! 항복이야!” “어림도 없는 소리! 후후, 자, 이건 어떠냐!” “끼악- 싫어어! 우아아앙. 체르비엘, 도와 줘!” 에리엘의 높은 비명소리가 세키라의 귀를 파고들었다. 시즈니엘은 지켜보는 세키라나 이마에 사거리 마크가 새겨진 미카엘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당당히 에리엘을 십자 꺾기 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에리엘의 비명이 터지자 체르비엘이 나서 시즈니엘을 퍽, 하고 걷어차 버렸다. 지켜보던 요시피아나는 쯧쯧 하고 혀를 찼다. 화를 자초하는군. 미카엘은 그 난장판에서 뒤돌아서 굳어버린 세키라에게 최대한 웃으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스마일, 스마일! 그러나 그런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미소는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워낙 철이 안 들어서…….” 세키라가 아는 그들의 나이만 해도 벌써 햇수로 만(10,000)이라는 경이적인 숫자를 넘어가건만, 미카엘은 ‘철이 안 들어서’라는 한 마디로 이 난장판을 정리해버렸다. 그 사실을 지적해주고 싶은 세키라였지만 미카엘의 웃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그저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하 감옥에서 그녀를 탈출시킨 자들은 다름 아닌, 그 유명한 12대천사들이었다. 사실, 이렇게 면전에서 보고 있어도 그다지 실감은 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어렸을 적 신화(神話) 속의 등장인물들을 이렇게 보고 있자니 기분이 어째 묘했다. 이야기와는 꽤, 아니 엄청나게 다른 모습이었기는 하지만. 그녀는 차근차근 이곳에 오면서 들었던 설명들을 머릿속에 정리했다. 마계와의 전쟁을 일으킨 것은 그들이 아니라 ‘에우로카엘’이라고 하는 열세 번째 대천사라고 했다. 대부분의 장로와 천족들이 들고 나섰기에 그들은 말리지 못했고 그 결과 거의 감금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고 한다. 미카엘이 나서서야 겨우 세 천사가 조용해지자 그제야 세키라와 그들은 조용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었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군요.” “아니에요. 재미있었는 걸요.” 세키라는 진심이었다. 사실 조금 황당했던 것을 빼고 나면 확실히 재미있는 광경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말에 미카엘의 얼굴에 살짝 홍조가 어렸다 금방 사라졌다. 바로 그 때였다. “세키라!!” 낯익은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세키라는 퍼뜩 놀라며 그 목소리의 진원으로 고개를 돌렸다. 만약 귀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이 목소리는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줄곧 들어왔던- “에리나!” 목소리의 주인공은 에리나였다. 에리나는 세키라를 꼭 껴안았다. 어째서 에리나가 이곳에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런 것들보다 반가운 마음이 더 앞섰기에 세키라도 에리나를 꼭 껴안았다. 감격적인 해후를 나누는 두 사람을 떼어놓은 것은 미카엘의 목소리였다. “마음 같아서는 천계에 머무는 공녀 분들을 모두 중간계로 보내드리고 싶지만 저희도 자유로운 처지가 아니라서.” 에리나는 세키라를 살폈다. 다행히 약간의 생채기를 제외하고는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그 사이 더 핼쑥해진 것처럼 보였지만 그래도 무사한 것만 해도 어딘가! 에리나는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교황 라우데스의 힘으로 천계로 온 에리나는 그 유명한 12대천사의 앞으로 뚝 떨어졌고, 에리나는 그들에게 부탁하여 세키라를 구해낼 수 있었다. 처음에 공녀들 중에서 세키라가 없다는 소리를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러나 곧 세키라를 찾아낼 수 있었고,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이다. 에리나는 곧 세키라에게 전후사정을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럼…… 중간계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이야?” 에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키라는 아로데에 대한 것들을 묻고 싶었지만 애써 목구멍 아래로 질문을 삼켰다. 에리나에게도 유리아덴님은 어떻게 하고 왔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렇지만 차마 묻지 못하고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갈 수 있다. 집으로…….’ 가슴이 두근거려 진정이 되지 않았다. 에리나 역시 긴장이 되었는지 세키라의 손을 꼭 붙잡아 왔다. 채 1년도 되지 않는 시간이었건만 너무 많은 일들을 경험해서 마치 10년은 지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족들과 함께 보냈던 시간들은 너무나 까마득히 먼 일이었던 듯 느껴졌다. 현실감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돌아가면, 반겨줄까……? 가족들을 볼 수 있다는 기쁨과 반가움, 그리고 사람들의 냉정한 시선에 대한 두려움 등 온갖 감정들이 복잡하게 섞여들었다. * * * * * * * * * * * * * * * 중간계. 시리어스 제국의 사막지역 「가벨」.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열사의 땅 사막 한 가운데에 서 있는 도시에서 시리어스 제국의 황태자, 루블리츠는 짜증을 내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 작은 움직임에도 가벨의 영주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어깨를 움츠렸지만 다행히 황태자는 그 짜증을 그에게 풀지 않았다. 다만 길게 숨을 내쉬며 물로 목을 더 축였을 뿐이었다. 더운 날씨에 익숙하지 않은 루블리츠였다. 더군다나 황태자로써 최고급의 환경 속에서 자라온 그에게는 더더욱 맞지 않는 날씨다. 그래서인지 불쾌지수와 함께 짜증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그를 이곳까지 오게 한 원인은, 다름이 아니라 가벨과 이웃해 있는 게르노시크와의 외교상의 마찰 때문이었다. 그다지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그는 지금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경험을 쌓는 중이었고 사막지역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었기에 오게 된 것이었다. 사실 황태자인 그가 아니라 외교관이 왔어도 충분히 해결을 볼 만한, 그저 고만고만한 문제였다. ‘어쨌든 해결되었으니까.’ 생각 같아서는 바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 혼자 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내일쯤 되어야 겨우 출발할 수 있을 터였다. 그는 숨을 들이마시며 옷을 펄럭였다. 사실 그가 있는 곳은 마법으로 어느 정도 더위를 낮춘 곳으로, 그마나도 가장 나은 곳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루블리츠는 뭐라고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래도 덥기는 마찬가지로군. 영주, 좀더 시원한 곳은 없소?” 가벨 영주는 얼른 허리를 숙이면서 말했다. “녹지를 늘리기 위해 마법으로 온도를 조절하는 곳이 있사온데, 그곳이 그래도 나은…….” 영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루블리츠는 몸을 일으켰다. 이곳에 와서야 깨달은 것이지만 그는 더위에 특히 약했던 모양이다. 그가 평소에 자신 있어 했던 인내심도 극도로 줄어든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는 병사에게 ‘안내하라’고 이르며 걸음을 옮겼다. 가벨 영주는 그런 그를 쪼르르 서둘러 뒤따라가다, 그만 옷자락을 밟아 혼자 넘어질 뻔한 망신을 당했지만 루블리츠는 신경 쓰지 않았다. 가벨에서 녹지를 늘이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애를 쓰고 있다는 소리는 자주 들어왔다. 사막은 사람이 살기 아주 척박한 땅이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이런 환경을 조금이라도 바꾸어보고자 노력을 했고, 그 때문에 자주 도움을 요청해 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사막에서도 자랄 수 있는 강한 풀이었기에 마법사도 많이 요청했었지만 아직까지는 이렇다 할 성과는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병사가 안내한 곳에 다다르자 루블리츠는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마법으로 완전히 제어되고 있는 그 곳은, 이곳이 사막지역이라는 것을 완전히 잊게 할 만큼 온통 푸르른 빛깔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대단하군! 이곳은 숨쉬기도 편한데…….” 조금 습기 차고, 눅눅한 공기였지만 건조하고 찔 듯한 더운 공기보다야 백 번 나았다. 병사가 물러가자 루블리츠는 아마 가벨 영주가 가끔 와서 쉬었을 듯한 의자에 앉았다. 마침 테이블 위에는 간단한 과일과 와인이 놓여 있었다. 그를 위해 준비된 것은 아닐 테지만 말이다. 며칠간의 찜통더위 속에서 지쳤던 그의 눈에, 문득 수상한 그림자가 눈에 띠었다. ‘뭐지? 여자 같은데?’ 그는 그림자가 어른거렸던 장소로 발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는 그 자리에서 못 박힌 듯 굳어버렸다. ‘저, 저건!’ 가는 물줄기가 그의 옆에서 솟아올랐다. 이 작은 녹지를 유지시키기 위해 끌어놓은 물일 것이다. 물줄기를 사이에 두고, 그의 눈에 박혀든 짧은 환상은 점차 옅어지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황태자 루블리츠의 굳어진 얼굴은 풀릴 줄을 몰랐다. 루블리츠는 그가 보았던 환상과, 예전에 잠깐 보았던 얼굴이 매치되는 것을 깨달았다. 루블리츠는 짧게 중얼거렸다. “공녀 루피아 엘 세느안트……!” ============================== ...여전히 짧은 글입니다-_-; 언젠가 주말은 토요일 까지입니다! 라는 말을 하셨던 것이 기억이 나지만;; 어제는 옛날에 친하던 분들을 만났답니다. 장장 10년만이에요~ 흐릿하지만 조금씩은 기억하고 있어서, 무척 반가웠어요. 에.. 그래서 꽤나 오버한 듯 합니다-_-;[민망..] 메일은 donghee425@hanmail.net으로 보내주시구요. 카페는 http://cafe.daum.net/fantastiknovel입니다. 즐독하세요*^^* 제 목: 공녀(貢女) : 제40화 [재회하다!](1) #. 제40화 [재회하다!] * * * * * * * * * * * * * * * 무척 난감했지만, 한편으로는 무척 재미있는 광경이었다. 그때를 떠올리기만 해도 웃음이 저절로 입가에 걸릴 정도로. ……물론, 당사자들은 참 재미없었을 테지만. ============================루피아의 자서전================= 건조한 바람이 모래먼지를 일으켜 이글거리는 열사의 땅을 부옇게 만들었다. 가죽으로 만들어진 물통의 물은 이미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였다. 마른 물통 속으로 혀를 디밀어 보았지만 바라는 물기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걸음은 더 이상 옮기기도 힘들었다. 체력에는 자신이 있었는데도 이 지경이니 전문가의 도움 없이 무작정 사막으로 길을 나선 자신들이 얼마나 무모했었는지 그들은 깨달을 수 있었다. 그야말로 사지에 뛰어든 격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무거운 걸음을 다시 또 한 걸음 떼었다. 그들 중 가장 앞서 걸어가던 카마엘은 입안으로 욕설을 읊어댔다. 이러려고 중간계로 온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열쇠」는 정말 위험한 물건이었고 그것을 가지고 허튼 짓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가 온 것이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요시피아나가 남긴 말들이 계속 메아리쳤다. 카마엘은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어쩌다 이런 꼴이 되었는지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혼자 소외된 것 같아 기분이 더럽기도 했다. 엘프의 숲에서 미적거리던 것은 그가 장로의 꿈에 등장함으로써 가볍게 해결되었다. 이제껏 평화 운운하며 비협조적으로 나오던 그들의 태도마저 싹 바뀌어 필요한 물자마저 손에 쥐어주는 지경이 되었던 것이다. 카에리드들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뭐라고 말을 하지는 않았다. 카에리드는 어째서인지 자꾸 초조해졌다. 가슴 한 구석이 싸늘하게 옥죄어 와, 도저히 한 곳에 있을 수가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자꾸 떠나가지 않았다. 목구멍이 뜨끔뜨끔하게 아팠다. 여행길에 오른 지 벌써 많은 시간이 흘렀다. 믿기지 않지만 드래곤과도 마주해서 살아 돌아왔고, 엘프의 숲에서도 원하는 것을 얻어내었다. “이곳입니다.” 에드윈드의 짤막한 한마디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하얀 천으로 온몸을 감싼 에드윈드는 눈만을 달랑 내놓고 있었다. 바르에든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만 약한 체력으로는 견디기 힘든 여행이었을 텐데도 그는 불평 한 마디 없었다.(사실, 몇 마디 농담조로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무시되었다) 에드윈드가 가리킨 곳은 돌로 만들어진 작은 신전이었다. 하지만 말이 신전이지, 이미 모래에 거의 다 묻혀서 드러나 있는 것이라고는 돌기둥과 몇 안 되는 층계 위의 신단이 다였다. 바르에든은 가장 앞장서서 신단 위로 걸음을 옮겼다. 단단한 돌로 만들어진 신단은 몇 군데 흠집과 금이 가 있었지만 멀쩡히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에드윈드는 신단 옆면에 새겨진 글자를 읽어 내렸다. “대략, 마계로 통하는 ‘문’이라는 말 같군요. 하아! 겨우 다 왔어!” 그는 감격스럽다는 듯이 가늘게 몸을 떨며 외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쥐약 먹은 쥐처럼 비실거렸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힘찬 외침이었다. 바르에든은 과연 어린애라고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하지만 이제 겨우 시작일 뿐.’ 바르에든은 허리에 찬 검으로 손을 가져가 꾹 쥐었다. 이번 여행으로 스스로의 부족함을 절실히 깨달은 그였다. 시리어스 제국 로열나이트 제1대대에 속해있고, 사하르디나드 축제의 검투 대회에서 우승했던 경력 등은 드래곤 같은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존재 사이에서 통용될 실력이 못 되었다. 하지만, 그는 뛰어난 검사다. 비록 소드 마스터(Sword Master)는 아니라 하지만 미약하나마 검기를 사용할 줄 아는 그는, 20대 중반이라는 나이에 걸맞지 않는 실력을 지녔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꽂는 것 같은데…….” 이데카른이 조그만 홈을 보며 말했다. 카에리드는 품을 뒤적거려 열쇠가 담긴 상자를 꺼냈다. 그가 꺼낸 손바닥만한 상자를 열자, 금빛 열쇠가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열쇠를 바라보는 다섯 사람의 눈동자에 희미한 어둠이 서렸다. 역시 죄책감이 드는 것이다. 가장 마음이 약한 트로에가 제일 먼저 슬그머니 열쇠에서 눈을 뗐다. 그는 두눈을 꾹 감았다. 열쇠를 꽂는 것은 카에리드의 몫이었다. 열쇠를 집어 드는 카에리드를 보는 카마엘의 두 눈이 차갑게 내려앉는다. 사막으로 내리쬐는 강렬한 태양빛 때문일까. 그들은 알 수 없는 현기증을 느꼈다. 달칵. 열쇠를 구멍에 맞추었다. 크기가 꼭 맞았다. 찰칵. 열쇠의 끝만 남겨놓은 채 구멍이 채워졌다. 꾹. 카에리드는 열쇠의 끝 부분을 잡고 힘을 주었다. 너무나 허무하게, 아무런 저항 없이 쑥 들어간 열쇠는 쉽게 돌려졌다.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듯, 긴장이 흐르는 무거운 공기가 그들을 휘돌았다. 그런 그들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쿠구궁’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신전이 흔들렸다. 지진은 오래가지 않았다. 몸이 약한 에드윈드를 감싸 안은 카에리드는 흔들림이 멈추자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부연 연기가 눈앞을 가려 제대로 살필 수가 없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연기에 비치는 사람 모습의 그림자를! 그들은 헉,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세 사람! * * * * * * * * * * * * * * * 「……이게 네가 바라던 거냐? 클리오라?」 싸늘하게 낮아진 오르가프의 물음에 클리오라는 딴청을 피우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에 오르가프의 단정한 금색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클리오라는 가볍게 웃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오르가프는 무슨 말을 해봐야 소용이 없음을 알았다. 오르가프가 입을 꾹 다물자 이번에는 클리오라가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은 나도 유감이야. 나도 손실이 꽤 크다고.」 그러자 오르가프는 빈정대며 말했다. 「그래봤자 너에게는 그다지 상관없는 것이 아닌가? 무슨 생각으로 마계로 인간들을 보낸 거야?」 「아직 말해줄 때가 아니야. 조금만 기다려.」 오르가프의 얼굴이 한결 더 일그러졌다. 예전에도 클리오라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요즘 들어서는 더더욱 이해하기 힘들었다. 속성이 정 반대라서 그런 것일까. 가장 오래 알아왔지만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가 바로 클리오라였다. 「내가 알 바 아니야. 처신 똑바로 하라는 말이다! 내게 피해가 오지 않도록!」 싸늘하게 말을 내뱉는 오르가프를 보는 클리오라의 입가에 다시 짙은 웃음이 걸렸다. 오르가프는 그에 다시 곧게 뻗은 눈썹을 찌푸렸다. 천계는 엉망이었다. 슬슬 손을 놓을까, 하고 생각해봤지만 아직은 내키지 않았다. 아직 무너질 시간이 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전 같았다면 그는 쉽게 손을 놓았으리라. 마계도 만만치 않게 엉망일 텐데 클리오라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포기하기로 작정한 것처럼. 오르가프가 가 버리자 혼자 남겨진 클리오라는 잠시 키들거리며 웃다가 허공으로 손을 쭉 뻗었다. 그의 손에는 꼭두각시 인형이 세 개 들려 있었다. 세 개의 인형을 바라보던 그의 눈이 문득 반달형으로 휘어졌다. 인형 중 하나를 들어올려 손으로 감싸 쥔다. 「넌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어.」 그리고는 손으로 쓰윽, 인형을 훑었다. 「아직 망가지면 곤란하지.」 나무로 만들어진 인형. 두 팔, 두 다리에 연결된 실은 클리오라에게 들려 있다. 까마귀의 깃털같이 새카만 머리카락이 길었다. 그는 인형의 팔다리 관절을 손보았다. '끼릭'거리는 마찰음이 귀에 거슬렸다. 클리오라는 줄을 잡아당겼다. 인형의 얼굴이 서서히 들린다. 붉은 눈, 섬뜩하도록 붉은 인형의 눈이 반짝거렸다. * * * * * * * * * * * * * * * 베키는 언제나와 같이 어스름한 푸른 새벽에 눈을 떴다. 새벽의 찬 공기가 피부에 와 닿자 자잘한 소름이 돋았다. 훌쩍 다가온 가을이 느껴지는 듯했다. 베키는 눈을 몇 번 깜박여 정신을 차리고 곧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길게 기지개를 켠 후 흐트러진 잠자리를 정리한 그녀는 어제 저녁 떠놓은 물에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예전이었다면 이쯤에서 루피아 아가씨를 깨우러 갔을 텐데…….’ 그렇지만 지금 그녀가 깨워줄 사람은 이 저택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새삼 슬픔이 몰려들어 눈시울이 붉어졌다. 하지만 곧 정신을 추스르고 베키는 방을 나섰다. 아직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에드윈드가 건네준 구슬은 베키의 방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 ‘보고 싶을 때 연락해!’라고 말하던 꼬마 도련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했다. 하지만 베키는 결코 먼저 연락을 할 생각이 없었다. 그저 그녀는, 루피아 아가씨가 돌아올 길이 생기길 바라고 바라며 기도를 할 뿐이었다. 그녀의 역할은 거기까지다. “일찍 일어났네. 베키! 좋은 아침!” 같은 시녀인 샤리가 기분 좋게 인사를 건넸다. 베키는 웃으면서 인사를 되돌렸다. 샤리는 언제나 밝고 명랑했다. 게다가 알아주는 정보통이기도 했다. 이 수도 곳곳의 소문이라는 소문은 모두 샤리의 귀에 들어가는 모양인지, 그녀가 모르는 소문이 없을 정도였다. 덤으로 이야기도 아주 잘해서 듣는 이를 재미있게 만들어주는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베키, 얘기 들었니? 어제 새로 시녀가 둘이나 들어왔대!” “뭐? 나는 그런 얘기 못 들었는데?” “그야, 넌 일이 일찍 끝나서 일치감치 들어가 잤으니까 그렇지. 밤늦게 들어왔거든.” 밤늦게 무슨 시녀를 데리고 온다는 말인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베키는 곧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샤리는 그녀들에 대해 ‘그들도 모르는 정보’를 잔뜩 늘어놓을 것이 뻔하다. 그리고 베키의 생각대로 샤리는 말을 시작했다. “시녀장께서 직접 데리고 오셨는데, 둘 다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았어! 사뿐사뿐, 우아한 게 어디서 본격적으로 교육이라도 받았던 모양이야! 외모도 예뻤어! 한 사람은 갈색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긴 데다 초록색 눈동자를 하고 있었고, 한 사람은 특이하게도 푸른색 머리카락을 하고 있었어! 에, 그 파란머리 여자는 눈도 짙은 하늘색이었고. 누가 그러는데, 그 둘이 엘프와의 혼혈일지도 모른대! 아니, 틀림없이 그럴 거야! 목소리도 고운 게 노래 부르면 정말 딱일 것 같았거든!” 어느새 어젯밤 늦게 온 시녀는 엘프와의 혼혈이 되어 있었다. 샤리가 이렇게 말한 이상 거의 99%의 확률을 자랑하는 확실한 사실로 바뀌어 사람들 입을 오르내릴 것이다. 베키는 조용히 한동안 저택 내 사람들에게 온갖 소리를 다 듣게 될 두 사람을 위해 기도해주었다. “만나보면 알게 되겠지…….” 요새는 새로 시녀가 들어오는 일이 없었지만 예전에는 꽤나 많이 있던 일이었다. 지금이야 세 명의 도련님들도 다 여행을 떠나고 없고, 루피아도 없으니 일손이 딸리기는커녕 남아도는 상태였다. 베키는 그 점이 조금 이상스레 생각되었지만 시녀장이 어련히 알아서 하셨을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베키는 이제 샤리의 말을 한쪽 귀로 흘려들으며 걸음을 옮겼다. 아침 조회 시간이 다 되어간다. 그녀의 걸음은 한결 더 빨라졌다. 시녀장의 간단한 말이 끝나자, 시녀장은 뒤에 서 있던 두 사람을 소개했다. “오늘부터 새로 이 저택에서 일하게 될 ‘세나’와 ‘에이미’입니다.” 과연 두 사람은 예뻤다. 시녀로 있기에는 아까운 얼굴들이었지만 베키는 그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할 뿐이었다. ‘세나’라는 사람은 비교적 예의 바르게 인사말을 건네었지만 ‘에이미’는 그저 고개만 까딱할 뿐이었다. 불만은 없었지만. ‘어디서 본 것 같은 기분이 자꾸 드는데…… 착각이겠지.’ 아침조회가 끝나자 베키는 오늘 맡겨진 일의 목록들을 살폈다. 대충 보니 오늘도 일찍 끝날 듯 했다. 시녀장이 특별히 신경을 써줘서 일까? 그녀는 몸으로 일하는 시간보다 시녀장의 곁에서 머리를 쓰며 일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런 그녀의 팔을 누군가가 거칠게 붙들었다. “……!!” 베키가 깜짝 놀라 팔을 잡은 사람을 올려다보니 다름 아닌 ‘에이미’였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팔을 붙잡힌 베키는 살풋 이맛살을 찌푸렸다. “왜 그러시죠?” 그러나 그녀의 불만어린 물음에 ‘에이미’는 대답해 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 다만 그녀는 베키의 귓가에 무엇인가를 작게 소곤거렸다. 베키의 얼굴에 더할 수 없는 경악이 어렸다. 경악과 의문으로 일그러진 베키를 바라보며 ‘에이미’와 ‘세나’는 뭔가 쓴 웃음을 지으며 서로를 보았다. 베키는 입술을 덜덜 떨며 눈을 깜박거렸다. 그리고는 떠듬떠듬 말했다. “세키라… 아가씨와, ……에리나 아가씨…?” ========================================== 에리나&세키라 중간계 무사착륙!>_< 베키도 오랜만에 등장했죠~ 그러고보면 오빠들도 오랜만입니다-_-; 핫! 클리오라도!; ......다들 오랜만이었군요.[땀] 오늘도 루피아는 등장하지 않고-_- 황태자 나리도 나오지 않습니다. 다음편 쯤 되면 나올지도.[사악笑] 메일은 donghee425@hanmail.net으로 보내주시구요. 카페는 http://cafe.daum.net/fantastiknovel 입니다. 쪽지도 환영이에요~ 즐독하세요!^^ 제 목: 공녀(貢女) : 제40화 [만나다!](2) #. 제40화 [만나다!] * * * * * * * * * * * * * * *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처럼 시원한 푸른색 머리카락과 가을의 하늘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짙은 하늘빛 눈동자.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상대를 쏘아보는 강한 눈매였다. 전체적으로 푸른색이었기 때문일까, 금발에 녹안(綠眼)일 때보다 그녀는 한층 더 도도하고 차갑게 보였다. 세키라의 모습도 변했기는 마찬가지였다. 어깨에서 가지런히 정리해놓던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어져 있었지만 예전과 마찬가지로 갈색이었고, 눈동자는 순해 보이는 연한 초록색이었다. 그러나 전체적인 얼굴은 두 사람 다 그다지 변한 것이 없었다. 베키는 두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를 곱씹으며 참담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현재 루피아의 행방을 알지 못한다는 대목까지 이르자 거의 절망적으로 구겨지고 말았다. 베키는 혼란스러운 듯 이마를 문질렀다. 그리고 낮게 한숨을 토했다. 루피아 아가씨도 정말이지 문제다. 어떻게 사랑할 사람이 없어서 마왕을 사랑하게 되었는가 말이다. 언젠가 아가씨는 일을 칠 줄 알았어요. 베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두 분, 어째서 이 저택으로 오신 거지요? 그것도 그런 모습으로…….”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로헤델의 별’이라는 것에 대한 단서를 찾아야 한다면 베키에게로 오기보다는-정확하게는, 이 엘 세느안트 저택으로 오기보다는- 그녀들의 본가(本家)로 찾아가는 것이 훨씬 더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베키의 질문에 세키라는 슬쩍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에리나도 대답을 하지 않고 눈을 아래로 깔았다. 베키는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 십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녀 역시 비슷한 경험을 해보았던 것이다. 엘 세느안트 저택에 정착하고 안정이 되자 그녀는 옛날 살던 마을 근처까지 가보았던 적이 있었다. 그렇게 가보고 싶어 했으면서도 정작 마을 앞에 서자 도저히 안으로 발을 들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망설이고 망설이다 결국 다시 저택으로 돌아오고 말았던 것이다. 그녀의 고향은, 아직까지도 그녀에게는 ‘언젠가 가보아야 할 곳’으로 남아있었다. 아마 두려울 것이다. 돌아갔을 때, 과연 그리워했던 그곳이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모습과 똑같은 모습으로, 똑같은 느낌으로 남아있을까- 하고 말이다. 베키는 말을 돌렸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실 생각이시죠?” “……일단, 아버지께 가보아야 해요. 하지만 이런 얼굴로는 믿어주지 않을 테니까 당신의 도움이 필요한 거예요.” 세키라가 대답했다. 아까부터 느낀 것이지만, 머리색깔과 눈 색깔을 빼고는 별반 달라진 곳이 없는데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것이 이상했다. 베키보다 눈썰미가 좋은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고, 세키라와 에리나는 자주 루피아를 만나기 위해 저택에 드나들었기 때문에 아랫사람들은 거의 다 두 사람의 얼굴을 알 것이었다. 시녀장이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만 봐도 뭔가 이상하다는 점은 눈치 챌 수 있었다. 베키의 의문을 읽은 에리나가 입을 열었다. “간단한 최면이라던데? 우리가 여기 있다는 것이 발각되면 꽤 시끄러워질 테니까.” 말하면서도 씁쓸한 듯 비뚜름한 미소를 그리는 에리나였다. 베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라면 손쉽게 도와줄 수 있는 일이었다. 다섯 도련님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을 보내기 전까지 겪었던 고생하며, 웃기지도 않는 해프닝들을 생각하니 다시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이었다. 그럼 그 모든 것이 다 헛고생이었단 말인가? “그럼…… 잠시 후에 준비해서 뒷문으로 나와 주세요.” “잠시 후라니?” 에리나는 ‘언제?’라는 뜻으로 물은 것이었지만 베키는 다르게 받아들였던 모양이었다. 베키는 오히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답했다. “일하셔야죠! 참. 시녀 일은 처음이시죠? 걱정 마세요. 처음은 할랑하게 대해주거든요. 할당량을 다 마치고 나시면 뒷문으로 나와 주세요. 저는 두 분 나오실 때 즈음까지 제 일을 다 마치고 가 있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깔끔하게 돌아서는 베키는 상큼, 단백 그 자체였다. 에리나와 세키라는 베키가 루피아의 시녀임을 새삼 깨달으며 그녀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 * * * * * * * * * * * * * * “야아! 오랜만이다~” 아로데는 크게 기지개를 펴며 코로 공기를 맘껏 들이마셨다. 황당하다는 눈으로 쳐다보는 일곱 개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는 그의 밑에 깔린 두 마족을 살피기 시작했다. 당당하게 두 마족을 깔고 앉은 그는 미안한 기색도 없이 히죽 웃었다. 그리고는 발딱 일어나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물론, 그를 뜨겁게 쳐다보는 일곱 명은 완전히 무시한 채였다. 로이드윈이 일어서며 얼굴을 구긴 채 지그시 쳐다보자 아로데는 그저 씩 웃어 보였다. 그 모습에 눈썹을 치켜뜨는 로윈이었지만 아로데를 상대로 열을 내는 일은 손해 보는 장사라는 것을 오랜 세월 옆에서 지내오면서 터득한 터였다. 대신 가장 밑에 깔렸던 유리아덴이 아무 말 없이 아로데의 발등을 허리에 차고 있던 칼집으로 꾹 눌러버리자 로이드윈은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한편 그들 셋을 바라보던 카에리드는 어이가 없었다. 그것은 같이 지켜보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는지 모두들 입을 벌린 채 다물지 못했다. 갑자기 튀어나온 그림자에 긴장했던 그들은 순간적으로 어깨의 힘이 쭉 빠져버리는 허탈함을 맛봤다. 그러나 카마엘은 있는 대로 인상을 구기고 그들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마침내 세 사람은 잡담을 멈추고 그들을 돌아다보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카에리드들은 열외였다. 카마엘과 그들은 한참동안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동안 카에리드들은 연기와 함께 돌연히 나타난 세 사람을 자세히 뜯어볼 수 있었다. “참! 여기서 만나다니. 인연도 이런 인연이 없는걸. 카마엘.” 먼저 입을 연 것은 로이드윈이었다.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한 그는 카마엘이 구긴 인상을 풀지 않자 피곤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만 좀 노려봐. 눈 빠지겠다. 우리는 피곤하다고.” 사실 체력적으로는 그다지 피곤하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그들이었지만 본인들이 피곤하다고 우기는데 뭐라고 하겠는가? 그제야 카마엘 옆의 다섯 명과 한 마리(히투니아)에게 시선을 올린 세 마족은 깜짝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에 덩달아 그들도 몸을 움찔했다. 아로데는 놀란 얼굴로 자박자박 에드윈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턱을 짚고 요모조모 살펴보기 시작했다. 에드윈드는 굳어버렸다. “어, 어? 어어……?” 당황한 에드윈드는 가깝게 얼굴을 들이대는 아로데의 행동에 귀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종래에는 머리카락을 걷어내고 얼굴을 만져보기까지 했다. “닮, 닮았다! 이렇게까지 닮을 수 있나?” “네? 닮아?” “그렇지, 로윈? 분명 닮았지? 눈 색깔이랑 머리색 좀 다른 것 빼고는 비슷한데!” 어리둥절한 에드윈드의 물음 따위는 무시해버리고 아로데가 소리치자 로이드윈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무슨 말들을 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어 다들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카마엘이 찡그린 얼굴로 물었다. 그는 아직 천계로부터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해 마족이 중간계로 당당하게 발을 들이민 지금 이 상황이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이러니까 문제라는 거라고! 분명 연락담당이 시즈니엘, 그 녀석이었지! 돌아가서 두고보자!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너희가 왜 이곳에 왔지? 협정을 잊었나!” “전쟁이 난 판에 협정은 무슨 얼어 죽을!” 아로데의 말에 카마엘은 충격을 받은 듯 굳어 버렸다. 아로데는 에드윈드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살피면서 중얼거렸다. “분명 많이 닮았는데… 분위기는 전혀 다르단 말씀이야. 하나, 하나 뜯어보면 똑같은데.” “그게 대체 무슨……?” 에드윈드가 식은땀을 흘리며 물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아로데의 붉은 눈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시선을 돌려대고 있었다. 가까이서 바라본 붉은 눈은, 섬뜩한 핏빛이어서 소름이 돋았지만 반대로 아주 아름다운 색채이기도 했다. 하지만 꼭 해부를 당하는 듯한 느낌마저 드는 날카로운 관찰의 눈이어서 기분이 나빴다. 그런 그를 뭔가 미심쩍은 듯이 바라보던 아로데는 가볍게 인상을 쓰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말할까 말까 망설이는 듯하던 그는 물었다. “혹시, 세키라 에스베크라고 알고 있나?” * * * * * * * * * * * * * * * ============================= 지금 시각 1:40분 조금 넘어가고 있습니다-_-; 새학기라 긴장해서 그런지, 무지하게 졸려요; 다 쓰고 싶었는데..; 곧 나머지 부분 붙여서 더 쓸게요. 일단 이 정도만..[;] (그러니까, 다음 올릴 부분은 제40화 [재회하다!](2)+a 정도쯤인 거죠-_-;) 메일 : donghee425@hanmail.net 즐독하세요!; 제 목: 공녀(貢女) : 제40화 [만나다!](2)+a #. 제40화 [만나다!](2)+a * * * * * * * * * * * * * * * “……하? 황태자 전하?” 상념을 파고드는 목소리에 루블리츠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자꾸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지우기 위해 눈을 감고 손바닥으로 눈가를 지그시 눌렀다. 그러나 각막에 새겨진 듯, 강렬히 눈에 박힌 모습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눈을 뜨고 자신을 걱정스럽게 내다보는 충직한 종을 위해 작게 웃음을 지었다. 시종은 그가 미소를 지어보이자 안심한 듯 허리를 숙이고는 물러났다. 루블리츠는 작게 한숨을 토했다. 잘못 본 것일까? 더위에 취해, 헛것을 본 것일까…… 허면 왜, 왜 하필 그 여자였을까.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 여자 ‘루피아 엘 세느안트’의 모습은 허상인 듯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루블리츠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예전, 단 한 번 보았던 공녀의 모습을 다시금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아주 잠깐 스치듯 본 것임에도 그가 잊지 않았던 것은 그녀의 당당함과 무시 못 할 존재감 때문이었다. 물론 신분도 신분이었지만 말이다. 지금쯤 마계에 있어야 할 공녀(貢女)들 중 하나인 그녀. 만약 그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루블리츠는 피식 웃어버렸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마계와 중간계는 나라와 나라가 아니다. 도망치는 것이란 애초 불가능했다. 루블리츠는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도는 그녀의 뒷모습에 미간을 찌푸리며 머리를 짚었다. 나라의 기둥이라 일컬어지던 세 공작이 갑작스레 은퇴를 선언하자, 제국 시리어스는 발칵 뒤집어졌다. 정계를 이끌어가던 세 우두머리가 동시에 사라져버렸으니 한바탕 난리가 일어나는 것이 당연했다. 지금까지야 공작들의 준비된 안배로 인해 별 탈이 없었다고는 하지만 황제가 황태자인 그에게 일을 가르치며 그를 정치의 한복판으로 밀어버리려 하고 있으니 앞으로 어떻게 일이 진행될지 신중하게 지켜봐야 할 것이다. 그는 공작들이 씁쓸한 표정으로 황제께 은퇴를 고하던 장면을 떠올렸다. 루블리츠도 안타까웠지만 이제껏 공작들이 너무 큰 권력을 쥐고 있었기에 솔직히, 오히려 잘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아들들도 잊어서는 안 된다. 아버지들의 전례로 보아 장차 큰 인재가 될 것은 분명한 일이고 지금도 무시할 수 없는 실력을 뽐내고 있지 않은가. 아마 아버지의 뒤를 이어 시리어스 제국의 기둥 역할을 하게 될 것이었다. 그들은 함께 대륙을 떠돌아다니며 수행을 쌓고 있다고 한다. 루블리츠의 귀에도 그들이 떠돌아다니며 한 일들이 심심치 않게 들려오고 있었다. “전하, 이쯤에서 멈추었다 내일 다시 출발하는 것이 어떠할지…….” “그렇게 하도록 하지.” 아침 일찍 출발한다면 황성까지는 내일 점심 때 즈음하여 도착할 것이다. 루블리츠는 멈춘 마차에서 내리며 어쩐지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뭔가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 자꾸 들었다. 그는 그 느낌을 애써 무시하며 마을에 대한 기본적인 사항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사람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준비되어 있는 여관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관은 비교적 깨끗하고 고급스러웠다. 마을은 꽤 번성한 곳이었으나 특별히 관광으로 먹고 사는 곳도 아니라 여관업이 그다지 발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묵기에 불편함은 없을 정도로 괜찮은 여관이었다. 숨도 쉬지 않는지, 잠시의 쉼도 없이 빠르게 말을 늘어놓는 사람의 말이 귀에 거슬릴 정도가 되자 이제 그만 말하라 이르려던 찰나였다. 남자의 말 가운데 그의 귀에 걸리는 말이 있었다. “지금 뭐라고 그랬나?” “예?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방금, 에, 그러니까…….” “소문 말이다. 무슨 말이 나돈다고 그랬지?” 남자는 황태자가 갑자기 묻고 나오자 깜짝 놀랐는지 말을 더듬었다. 루블리츠가 재촉하자 남자는 얼굴을 붉히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얼마 전 이 마을 근처 호수에서 빛이 번쩍거리면서 괴물이 나왔다고…… 그런 소문이 나돌아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 단순한 헛소문이던가?” “아, 아닙니다. 알아보니, 그 번쩍거리는 빛을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더랍니다. 마을 사람 대부분이 봤다고 합니다. 괴물이 나왔다는 말은 헛소문 같지만, 단순히 그냥 불빛이 번쩍인 것이 아니라 호수 전체가 꽉 찰 정도로 큰 빛이었다고 하더군요.” 루블리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잠들기 전에 산책도 할 겸 호수에 들러 보기로 했다. 마을에 대한 것을 읊던 남자는 그에게 깊게 허리를 숙이고는 물러났다. 마을 인구수와 넓이, 특징, 분위기 등등 짧은 시간 안에 조사한 것 치고는 꽤 많은 양이었다. 루블리츠는 일단 스치듯이 본 그 여자의 모습은 잊기로 마음먹었다. 별 일 아닐 것이다. 더위로 인한 눈의 착시현상쯤 되겠지. 한편, 같은 여관의 카운터에서는 높으신 분들의 일행을 받아 더 남는 방이 없다는 주인의 말을 듣고 여관을 나서는 두 사람이 있었다. 로브를 두르고 후드를 눌러쓴 두 사람은 척 보기에도 무척 수상해보였다. 돈이나 있을지 의심스러운 꾀죄죄한 몰골까지. 최악의 손님이다. 여관 주인은 만약 ‘높으신 분들’이 오셔서 여관이 꽉 차지 않았더라도 저런 사람은 손님으로 받지 않았을 것이라 속으로 생각하며 말했다. “남는 방이라도 하나 있으면 줄 텐데…… 다른 곳을 찾아보면 있을 겁니다. 요 모퉁이를 돌아서 왼쪽으로 가 보세요.” “감사합니다.” 주인은 작은 사람에게서 흘러나오는 의외의 고운 미성에 놀랐다. 가늘고 높은 게, 여자 목소리였던 것이다. 후드를 눌러쓰고 있으니 사내인지 여자인지 알 수가 있나. 딸랑- 하고, 여관의 문에 달린 방울이 맑은 소리로 울렸다. “할 수 없죠. 이디스, 다른 곳으로 가요.” ============================ 어제 말씀드렸던 대로, +a 편입니다-_-; +a인 만큼, 짧지요. 에.. 이것만 달랑 올리기 좀 그러니까 인터뷰라도 하나 넣어보는 게 어떨까, 하고 생각했... 지만! ...오늘도 졸립니다.[눈물] 난 학교 가는 게 왜이리 싫을까요!; 에.. 또, 드디어 이디스와 루피아가 조~금 등장했네요. 다음편 쯤이면 나오겠군요. 루블리츠는 대체 왜 나왔을까..-_-; 메일 : donghee425@hanmail.net 카페 : http://cafe.daum.net/fantastiknovel 즐독☆하세요^^ 제 목: 공녀(貢女) : 제41화 [수상한 사람들](1) #. 제41화 [수상한 사람들] * * * * * * * * * * * * * * * 파아란, 새파란 하늘이 눈에 박혀 들었다. 눈부시도록 파란 쪽빛 하늘. 황궁으로 떠나던 날 창문 밖에 펼쳐져 있던, 따가운 태양이 빛나는 밝은 하늘이. 물이 차올라 하늘은 둥그렇게 일그러져 뚝 떨어져 내렸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너무 오랜만이라서 그랬을까? 다시는 못 볼 하늘이었다고 생각해서 그랬을까? 그를 옆에 두고도 이런 상황을 기뻐하는 사실이 부끄러워서 그랬을까? 중간계로 돌아왔다! ============================루피아의 자서전================ 루블리츠는 천천히 호숫가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의 눈에는 별다른 것이 없어 보였다. 특별히 아름다운 풍경도 아니었고, 특별히 수상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런,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호수일 뿐이었다. 굳이 이상한 점을 들어 보라면 호수 중앙에서 약간 오른쪽으로 어긋난 위치에 조그만 돌이 있다는 것뿐이었다. 이런 호수에서 괴물이 나왔다니. 그는 몬스터 도감을 살피며 이런 크기의 호수에서 살 수 있을 법한 수(水) 계열 몬스터를 찾아보았다. 특별히 위험한 것은……. 마을에 위협이 될 만한 것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루블리츠는 병사들에게 철수 명령을 내렸다. 다들 피곤할 텐데 괜한 일을 시킨 것 같았다. 모두에게 편히 쉬라는 명령을 내린 후, 그는 자신의 호위 기사들에게도 먼저 들어가라고 말했다. 그들은 황태자인 그를 혼자 있도록 할 수는 없다며 극구 사양했지만 루블리츠가 명령이라고, 자신의 실력을 믿으라며 힘주어 말하자 끝내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30분 이내로 돌아오지 않으면 찾으러 가겠다고 당부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조금은 쌀쌀한 밤바람이 폐부를 휩쓸자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모처럼 돌아온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하며 루블리츠는 절로 웃음이 났다. 내일 오전 안에 수도의 황성으로 들어갈 수 있을 테고, 가벨에서의 임무도 무사히 마쳤다.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면 스치듯이 본 그 환영뿐이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정리가 된 상태였다. 그의 마음은 가벼워졌다. 시리어스 제국은 대륙 최강국이었다. 경제나 정치- 그 외, 어느 면으로 보나 시리어스 제국은 가장 살기 좋고 가장 풍요로우며 가장 역사가 깊은 나라였다. 그리고 그 축복은 절정을 누리고 있었다. 물론, 이 영광이 영원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언젠가 이 강대한 제국도 분열되고 멸망할 때가 반드시 올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자신의 대(代)에서 일어날 일은 아니다. 그는 시리어스를 사랑하고 백성의 중요성을 알며, 사랑하고 아낄 줄 알았다. 그러나 그의 행복한 혼자만의 시간도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 그는 수풀 속에서 작은 움직임을 읽어냈다. 사위(四圍)가 이토록 고요하고, 그의 청각(聽覺)이 뛰어나지 못했다면 놓쳐버리고 말았을 정도의 작은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느낌과 동시에 그는 서 있던 그 자리에서 재빨리 피해야만 했다. 황태자- 이 시리어스 제국의 다음 황제가 될 자. 그러나 그럼으로 인해 그는 많은 암살자의 표적이 되어야만 했다. 특히 이렇게 성밖으로 나와 있을 때, 더군다나 혼자 있는 때라면 더더욱 조심해야 했던 것이다. ‘많군. -열다섯…… 정도인가.’ 호위 기사를 보낸 것이 후회되었다. 이렇게 많은 수가 뒤쫓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약속했던 30분이 아직 반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각이었다. 손을 대면 금방이라도 툭, 끊어질 듯한 팽팽히 당겨진 긴장이 그의 주위를 감싸고 흘렀다. 루블리츠는 뽑은 검을 들고 주변을 살피며 숨을 죽였다. 휙! 날카로운 바람소리와 함께 그를 노리고 여러 곳에서 날카로운 단검이 날아왔다. 그는 검을 휘둘러 단검을 쳐내고 몸을 지켜내었다. 조금만 버티면 그의 호위 기사들이 달려와 줄 테고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위험에 빠지게 되면 마법용구도 작동을 할 터였다. 소름 끼치는 쇳소리가 쨍! 하고 났다. 드디어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암살자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루블리츠는 마른 목으로 침을 삼켰다. 열다섯 명은 무리다. 자칫 잘못하면 정말 앗! 하는 사이에 저승길 가는 마차에 오르고 있을 지도 몰랐다. 위기감을 느끼며 몸을 긴장 시킨 그가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한 암살자를 마주하고 있을 때였다. 바스락. 조그마한 소리가 그들의 당겨진 신경을 끌어당겼다. 루블리츠는 벌써 호위 기사가 왔나 싶어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곳에는 그의 호위 기사는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는 긴 로브를 입고 후드를 뒤집어 쓴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충분히 수상해 보이는 차림들이었기 때문에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던 루블리츠를 가리키며, 두 사람 중에 키가 작은 사람이 앗, 하고 탄성을 터뜨렸다. “……황태자 전하?” 그의 얼굴이 보통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을 리가 없다. 어떻게 아느냐고 묻기도 전에, 잠시 잊고 있던 암살자들이 새로운 제거 대상을 향해 달려들었다. 황태자의 정체도 아는 사람에게 암살 장면을 목격하게 할 수는 없었던 이유였다. 키가 작은 쪽은 목소리로 보아 여자인 것 같았다. 그들에게 달려드는 것과 동시에 루블리츠에게도 달려들었기 때문에 그는 ‘위험해!’라고 소리 지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황태자 암살을 맡았을 만큼 전문적인 암살자들이다. 루블리츠는 신분이 신분이었던 만큼 확실히 하기 위해 시간을 들였던 것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과 완전히 달랐다. 키가 큰 쪽이 칼집 째로 크게 휘두르자 덤벼들었던 대여섯 명의 암살자들은 맥도 추리지 못한 채 떨어져 나가 버렸던 것이다. 커억, 하는 신음까지 흘리며 그들은 검붉은 피를 토했다. 루블리츠에게 덤벼들었던 암살자들의 몸이 잠시 멈칫했다. 그 틈을 타 검을 크게 휘둘러 몇 발짝 물러난 그는 ‘수상한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음… 아무리 봐도, 호의를 가진 사람들로는 안 보이는데요. 전하?” 팽팽한 공기가 우습도록, 긴장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어조로 여자가 말했다. 루블리츠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웃음이 나려고 했다. “그렇군. 당신들, 대체 정체가 무엇이오?” 어쩐지 웃음기가 섞인 대답이 되돌아왔다. “저 사람들이 가고 나면 가르쳐드리죠. 그나저나, 저와 한 가지 거래를 하시겠어요?” 루블리츠는 미간을 모았다. 이 상황에 무슨 거래라는 말인가? 그러나 여자는 암살자들의 죽일 듯한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말을 이어 나갔다.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긴장감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목소리였다. 정말 이 상황이 가벼운 상황이라고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말이다. 여자가 말했다. “저 사람들을 모두 없애주겠어요. 그럼 우리가 원하는 일을 한 가지 들어 주세요. 이 거래에는 황태자 전하의 명예와 자존심을 거는 겁니다. 명예와 자존심을 걸고 원하는 일을 들어 주시겠다고 맹세해주세요.” “……제국에 누가 되는 일은 할 수 없소.” 아무리 목숨이 중요하다고 해도 말이다. 그의 대답에 여자는 명쾌하게 대답했다. “결코 누가 되지 않아요! 그럼, 거래 성립이라도 봐도 좋습니까?” 루블리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혼자서는 이 열다섯 명의 암살자들을 해치우는 것이 무리였고, 호위 기사가 온다고 해도 적잖은 피해를 감수해야 할 것 같았다. 아까의 일격으로 보아 남자의 실력이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루블리츠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칼집을 들어올렸다. 그 다음부터는 순식간이었다. 짧은 순간, 짧은 시간이 지나자 남자는 쓰러진 암살자들의 위에 서 있었다. 그는 칼도 채 뽑지 않았다. 칼집 채로 휘두른 것이다. 그 결과는 물론 참혹했다. 루블리츠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자,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여자가 입을 열어 낮은 목소리로 주문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조금이지만 마법에 대한 학문적 지식을 가지고 있던 루블리츠로서는 그 주문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녀는 쓰러진 암살자들을 움직이지도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 슬립(sleep)주문을 쓴 것도 아니었는데, 암살자들은 마치 깊은 잠에 빠진 듯 넋이 나가 버렸던 것이다. 루블리츠는 이런 해괴한 주문은 듣도 보도 못했다. “당신들…… 대체 정체가 무엇이오?” 암살자들을 한데 모아 쌓아 올리는 그들에게 루블리츠가 물었다. 여자는 어쩐지 빙그레 웃는 듯했다. 그녀는 천천히 후드를 걷어 내었다. 후드 사이로 검은 머리카락이 길게 흘러 내렸다. 구름이 달을 가려, 사위는 어둠 속으로 녹아 내렸다. “……!!” 루블리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귀신, 아니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는 괴물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달빛이 구름에게서 벗어나 아름다운 은빛을 흩뿌렸다. 그에 따라, 어둠 속에 묻혀 잘 보이지 않던 얼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새하얀 월광 속에서 까맣게 빛나는 긴 검은 머리카락이 가장 먼저 흘러 내렸다. 단아한 하얀 얼굴과 아름다운 자수정의 보라색 눈동자가 눈에 박혔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가진,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단 한 번, 그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엘 세느안트 공녀……!” 사막 도시 ‘가벨’에서 환영처럼 스치듯 보았던 여자. 그 후로도 그의 각막에서 떠나지 않아 그를 괴롭게 했던 여자였다. 공녀(貢女)의 대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여자, 그 여자가 맞았다. 어째서 이곳에 있는지, 그 옆의 남자는 누군지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한 마디도 제대로 꺼내지 못한 채 입을 다물지 못하는 루블리츠에게 루피아는 예쁘게 웃어 보였다. 그녀는 남자의 옆으로 다가가 그의 후드를 벗겨 주었다. 루블리츠는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놀랐다 루피아가 화려한 꽃과 같은 아름다운 얼굴이었다면 남자는 마치 달과 같았다. 달빛마저 빨아들일 듯한 눈동자와 머리카락의 남자는, 그러나 날카로운 검과 같은 위험한 분위기가 흘렀다. 섣불리 다가갈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덧붙여 얼음 같은 냉정함도 함께 흘렀다. 루피아와 눈을 마주친 그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떠올랐다. 루블리츠는, 삽시간에 변한 그의 인상에 또 한 번 놀라야 했다. 루피아는 입을 열었다. “생명 빚을 지셨죠, 전하?” “…….” “거래를 실행해주시죠. 제 부탁을 들어 주시기로 하셨지요?” 루블리츠는 덧붙였다. 제국에 누가 되지 않는 일이라면, 이라고 말이다. 루피아는 생긋, 다시 꽃같이 화려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이죠! 저도 한때는 시리어스 제국의 백성이었던 몸. 설마하니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들어주어야 했다. 이 거래에 그는 그의 명예와 자존심을 걸었던 것이다. 루피아는 남자의 손을 꼭 붙잡았다. 루블리츠는 정말 묻고 싶었다. 저 남자의 정체를. 적어도 범상치 않은 남자인 것이 분명했다. 외모도, 실력도 말이다. 그리고 공녀(貢女)인 루피아 엘 세느안트가 이곳에 있는 이유도 궁금했다. 만약……. 루피아는 말했다. “저와 이 사람을, 제 아버지께 ‘무사히’ 데려다 주십시오.” ============================= ..아슬아슬..;; 제 목: 공녀(貢女) : 제41화 [수상한 사람들](2) #. 제41화 [수상한 사람들] * * * * * * * * * * * * * * * “뭐야? 그럼 네가 남동생이라는 거냐?” 에드윈드는 놀란 듯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치는 이 남자가 무척 신경에 거슬렸다. 아니 거슬렸다기보다 마음에 안 들었다. 하지만 그의 신분을 알고 있는 에드윈드는 현명하게 처신했다(찌푸리려던 인상을 피고,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인 것). 그들의 입으로 말하는 ‘정체’는 믿기 힘든 것이었지만 카마엘은 그들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증명해주었다. 그들의 ‘정체’는, 빌어먹게도, 그의 누님을 데려간 마족이었다. 그것도, 꽤나 고위의 마족임이 분명했다. 에드윈드는 세 마족을 면밀히 살피기 시작했다. 우선, 외모는 다들 반반하게 생겼다. 하지만 반반하다, 라는 평가는 어디까지나 그의 선입견이 개입되어 내려진 결론일 뿐이지 객관적으로 보자면 그것은 아주 낮은 평가였다. 즉, 잘 생겼다는 것이다. 여자라면 금방 홀려버릴 정도로 말이다. 과연 악마야, 하고 중얼거리며 에드윈드는 그들에 대한 나쁜 인식을 더해만 갔다. 산만큼, 바다만큼. 그에게 누님의 이름을 말하던 마족이 그는 특히 마음에 안 들었다. 목선을 겨우 넘기는 길이의 초록색 머리카락과, 햇볕에 그은 듯한 다갈색 피부, 그리고 선명한 홍색 눈동자를 가진 그 마족은 온몸에서 느껴지는 활동적 에너지와 장난기에도 불구하고 위험한 냄새가 폴폴 났던 것이다. 에드윈드는 그런 면에서는 동물보다 민감했다. 그리고 이 일행의 리더 격이라 할 수 있는 카에리드 역시 그들을 자세히 살피고 있었다. 말하자면 경계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에드윈드와 다른 결론을 내리기는 힘들었다. 그 역시 마족에 대해 그다지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러다 카에리드는 순간 금발의 마족과 눈이 마주쳐 버렸다. 당황한 나머지 움찔하며 시선을 돌리려는데 금발의 마족이 갑자기 씩 웃었다. 카에리드는 미간을 접었다. 이데카른은 그 특유의 쌀쌀함으로 무장한 채 어떠한 표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지만 내심 경계심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었다. 트로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데카른과 다른 점이 있다면 긴장하고 있다는 것이 눈에 빤히 보인다는 것이다. 바르에든은 오른팔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히투니아에게 신경 쓰랴, 세 마족을 살피랴 바빴다. 갑자기 아로데가 툭 내던지듯 말했다. “좋아. 우리를 너희 집으로 안내해라.” “……!” “뭘 그렇게 놀라?” 눈이 동그래진 그들을 바라보며 로이드윈이 말했다. 그들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였다. 카에리드들은 기가 막혔다. “어째서 그래야 합니까?” 카에리드가 모두를 대표해서 예의 바르게 물었다. 아로데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야 우리도 묵을 곳이 필요하고, 흥미가 있으니까. 이것도 인연이잖아?” 그 외에 다른 이유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이 말하는 아로데였다. 실제로도 그가 말한 것이 모든 이유였지만 카에리드를 납득시키기에는 조금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것을 눈치챈 로이드윈이 현명하게 덧붙였다. “우리가 중간계로 온 것을 알면 너희들 입장도 난처해지지 않을까 싶은데…….” 로이드윈으로서는 그저 찔러본 것에 불과했지만 그것은 정곡이었다. 자신들이 한 일들이 발각된다면 그들의 입장은 아주 난처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쯤이야 각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되도록이면 피하고 싶은 것이 진심이다. 결국 승낙을 받아낸 세 마족은 서로 바라보며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이 중간계에 이디스, 그들의 주군이 살아있는 것은 확실했다. 중간계로 오자 그들은 주군의 존재를 한층 더 강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 이디스도 그들의 존재를 감지했을 것이다. 로이드윈은 아무도 몰래 숨을 길게 토해냈다. 다만 걱정이 되는 것은 이디스의 상태였다. 분명 성하지는 않을 터다. 루피아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디스와 루피아는 함께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무 것도 확실한 것은 없었다. 마계도 천계도, 모두 꼬이고 꼬인 채 돌아가고 있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들은 이디스를, 주군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쯤이면 딜렌도 그들이 사라졌다는 것을 눈치 챘을 것이다. 로이드윈은 머리를 꽉 채운 생각을 털어버리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주위를 훑어 내리다 ‘나는 너희들을 경계하고 있어.’라고 써 붙인 듯한 얼굴로 아로데를 노려보는 에드윈드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아로데는 그를 보며 웃고 있었다. 로이드윈의 입가에 동정심 어린 미소가 걸쳐졌다. 고생 좀 하겠군, 어린 녀석. * * * * * * * * * * * * * * * 피부로 느껴지는 어수선한 소란스러움에 루피아는 슬쩍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맑고 시원한 아침공기가 차가웠다. 창문을 조금 열어두었던 모양이다. 창문 틈을 비집고 들어온 아침의 밝은 햇살과 차가운 공기, 사람들의 소란스러움이 루피아의 신경을 자극하고 있었다. 다시 눈을 꽉 감아버리고 싶은 유혹에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그다지 감촉이 좋지 않은 이불 속으로 다시 얼굴을 파묻었다. 잠이 너무 부족했다. 하지만 잠시 후 그녀는 따듯하게 자신을 덮어주던 이불을 잔인하게 강탈당해야 했다. 허전함에 신음 같은 투정을 흘리며 다시 가늘게 눈을 뜬 그녀는 너무나 진지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디스를 마주해야 했다. 루피아는 얼굴을 찡그렸다. “조금만, 5분만 더 잘게요.” “안 돼.” “우우… 오늘 새벽에 들어왔잖아요! 황태자와 얘기하느라 긴장도 했던 데다, 난 원래 잠이 많아요. 조금만 더 봐줘요!” 하지만 이디스는 요지부동이었다. 그가 아무 말 없이 바라보자 투덜거리던 루피아는 결국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겨우 세 시간 남짓 잠들 수 있었다. 그녀에게는 터무니없이 모자란 수면시간이건만 그에게는 충분했던 모양이었다. 얼마 전까지는 환자였던 주제에 말이다. 세수를 하기 위해 방에 딸린 조그만 욕실로 들어가며 루피아는 중간계로 왔던 그 날을 회상했다. 그녀도, 중간계로 오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녀는 한참, 카른이 사라진 뒤로도 한참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넋이 나간 얼굴로 이디스의 시신을 꼭 끌어안고 있을 뿐이었다. 울지도 않았다. 한껏 억눌린 소리를 흘리며 울던 그녀는, 힘이 다 빠져 버렸던 것이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잠시 뒤 루피아는 비칠거리며 일어나 이디스의 팔을 어깨에 둘러매었다. 힘이 부쳤지만 이를 악물고 젖 먹던 힘까지 짜내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어디론가 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그녀를 지배했다. 그녀의 옷까지 붉게 물들인 핏물 냄새가 비 냄새에 섞여 구토증을 불러 일으켰다. 그녀가 휘청거렸다. 얼마나 걸었을까. 비칠거리며 걸음을 뗀 거리는 정말 얼마 되지 않았다. 그저 그녀는 힘이 들었다. 그러나 걸어야 한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힌 채 마치 조종당하는 것처럼 다시 한 발 한 발 떼었다. 자꾸만 미끄러지는 이디스의 몸을 다시, 또다시 붙잡으면서. 기억은 자꾸만 끊겼다. 흐릿한, 얼룩진 회색빛 풍경만이 그녀가 기억하는 그때의 전부이다. 더 이상 뭔가를 기억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정신을 잃은 곳과는 다른 곳에서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옆에는 이디스가 누워 있었다. 기적은 그때부터 일어났다. 분명 죽었다. 그는 숨을 멈추었으니까. 끝도 없이 피가 솟구쳐 나와 몸이 차갑게 식었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그는 다시 숨을 쉬었다! 그 순간을, 그 기적적인 순간을 루피아는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다 쏟아내 버린 줄 알았던 눈물이 마른 눈에서 비어져 나왔다. 기쁨으로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루피아는 벅찬 숨을 가쁘게 뱉었다. 잠이 든 듯, 고르게 숨을 뱉어내며 잠든 그를 보며 안심한 나머지 같이 잠들어 버린 루피아는 깨고 나서야 이곳이 중간계라는 것을 알았고, 그 결과는 지금과 같다. 그녀가 기억하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요? 누가 왔어요?” 이디스는 가만히 창밖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그녀는 소란스러움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이디스가 자신을 굳이 깨운 이유도 알 수 있었다. 밖에는 분명 황태자가 보냈을 기사가 대여섯 명이 와 있었다. 척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갑옷을 잘 차려입은 그들은 이런 허름한 여관 따위에는 어울리지 않는 손님들이기에 구경꾼이 몰려드는 것은 당연했다. 곧이어 정중한 노크가 두 번 울렸다. “루블리츠 도련님께서 보내셔서 왔습니다. 정중히 모셔 오라십니다.” * * * * * * * * * * * * * * * 두근두근! 마구 고동치는 심장소리를 느끼며 세키라와 에리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긴장한 것인지, 두려운 것인지 분간이 잘 되지 않았다. 이렇게 긴장해본 적은 생애에 몇 번 되지 않을 것이다. 세키라는 어쩐지 웃음이 났다. 1년 전만 해도 자신의 집 앞에 서서 이렇게 떨게 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었는가 말이다. 무엇 하나 변한 것이 없는 풍경 속에서 오직 자신만이 이렇게 달라진 모습으로 서게 되었다. 마치 지금이 꿈만 같았다. 긴장하고 있는 것은 세키라만이 아니었다. 에리나 역시 미친 듯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애써 태연한 척 했지만 얼굴이 살짝 굳어 있었다. 못 알아보면 어떻게 하지? 믿어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지금은 모습도 목소리도 모두 다른데 믿어주지 않는다면…… 아무리 꾹꾹 눌러도 계속 불안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들의 상념을 깬 것은 에스베크 공작의 목소리였다. “우리더러 지금 그 말을 믿으란 말인가?” 놀랍도록 차가운 목소리였다. 덜컹, 하고 심장이 내려앉았다. 가슴이 욱신거렸다. 하긴, 바로 믿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생김새도 전혀 다른데- 설상가상으로 증거도 하나 없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두 사람이 받은 상처는 생각보다 컸다. 칼르니르 공작은 그 특유의 찌를 듯한 날카로운 시선으로 두 사람을 샅샅이 살폈다. 엘 세느안트 공작 역시 감정이 담기지 않은 보라색 눈동자로 그녀들을 응시했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외양도 다르고, 머리색이나 눈 색깔마저 달라. 정보가 부족했던 것인가? 사기를 치려면 좀 더 그럴 듯하게 쳐야지. 적어도 내 딸이라고 거짓말을 할 생각이었다면 우리가 속을 만큼 철저하게 준비를 해서 덤비란 말이다.” 한 순간에 세키라와 에리나는 진짜를 사칭하는 사기꾼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 상처가 되는 것은, 세 공작의 냉정하고 차가운 눈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나는 진짜’라고 소리치며 덤벼들었을 에리나가 지금은 세키라 못지않게 얌전한 태도로 그들의 말을 듣고 있는 것은 그만큼 그 말들이 상처가 되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다시는 못 볼 줄만 알았던 아버지. 예전보다 많이 야윈 모습이었다. 눈물을 삼키느라 눈가가 발개졌다. 세키라는 떨리는 목소리로 단 한 마디만을 말했다. “건강하셔서…… 다행이에요.” 공작들의 눈은 더 차갑게 얼어붙었다. 가증스럽다고 생각하겠지. 도저히 믿어줄 것 같지 않으니까 마지막 발악을 하는 것이라고, 저렇게까지 하고 싶나 생각하겠지.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정보 길드에 ‘로헤델의 별’이라는 말에 대한 의뢰를 넣고 속절없이 기다리기만 해야 하나? 이 긴박한 때에 그건 안 될 소리였다. 고(古)서적을 뒤지고 싶어도 지금 그녀의 신분으로 만질 수 있는 책에는 한계가 있었다. 상황이 여러 모로 난감해졌다. 도저히 믿어줄 기미가 보이지 않자, 세키라와 에리나는 체념해버렸다. 무엇 하나 믿을만한 것이 없는데 믿어 주리라 기대했던 것부터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어떻게 여기서 빠져나가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더 생산적인 일일 것이다. “자!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친구들? 감히 우리 딸임을 사칭하며 우리를 속이려 한 이 발칙한 사기꾼들을?” 에리나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세키라를 안고 튀어버릴까? 아버지께 금방 따라잡히고 말 것이 뻔했지만 시도도 하지 않은 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에스베크 공작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서자 동시에 세키라의 손을 잡아채려던 에리나의 몸이 멈칫했다. 칼르니르 공작의 커다란 손이 에리나의 푸른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추운 것도 아닌데 그녀는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던 칼르니르 공작의 손이 아래쪽으로 내려가 에리나의 눈가를 덮었다. 에리나는 억눌린 울음소리를 흘리며 두 손으로 아버지의 손을 꽉 잡았다. 그런 그녀를, 칼르니르 공작은 부드럽게 안아주었다. 세키라의 앞으로 다가온 에스베크 공작은 딸의 어깨를 껴안았다. 엘 세느안트 공작이 어쩐지 쓰게 느껴지는 웃음이 걸린 얼굴로 세키라의 어깨를 격려하듯 툭툭 쳐주었다. 세키라의 빨개진 눈에 눈물이 둥그렇게 차올랐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놀랐지? 아팠지? 꿈일까 두려워서 그랬단다. 혹시라도 꿈이면 어쩌나… 몇 번씩이나 꾸었던 꿈이 아닐까 하고.” 에스베크 공작이 말했다. 두 사람은 마치 아이처럼 엉엉 울어재꼈다. 훗날 말하기를, 그날 쏟아낸 눈물만 해도 족히 한 바가지는 될 것이라고 한다. ============================== ...주말 연재인지-_-;; 이번주는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고 훌쩍 지나버렸군요. 신입생 추가 모집에, 환영회(오늘이었요).. 신학기 문제지 사느라 엄청난 돈이 나가 버렸어요-_-; 이건 그냥 질문인데요- ...제가 글을 너무 자주 끊나요?;_; 메일 : donghee425@hanmail.net 카페 : http://cafe.daum.net/fantastiknovel 즐독하세요~ 제 목: 공녀(貢女) : 제41화 [수상한 사람들](3) #. 제41화 [수상한 사람들] * * * * * * * * * * * * * * * 다웬은 전도유망한 기사였다. 그는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좋은 환경에서 무난히 자라 그가 가진 재능을 키웠다. 그는 아직 스물 하나의 나이였고 그 유명한 공작가문들의 아들들에 비하면 느리지만 또래 중에서는 꽤나 빠른 출세코스를 착실히 밟아왔다고 볼 수 있었다. 착실함과 노력을 인정받은 그는 로열기사단 중에서도 가장 낮은 지위인 제5대대에 속해 있었지만(게다가 견습을 막 벗어났다), 운 좋게도 황태자 전하의 이번 가벨 행에 동행할 수 있게 되었다. 황태자를 존경하던 그는 이 일을 무척이나 영광스럽게 생각했다. 지금까지는 계획에 차질이 없이 무난한 여행이었다. 특별히 위험한 일도 없었고, 특별히 유념해둬야 할 만한 사항도 없었다. 가벨에서의 일도 황태자는 가볍게 해결했고 이제 무사히 황성으로 입성하기만 하면 끝나는 일이다. 그는 계획이 착착 진행되어가는 것에 안심하고 있었다. 바로,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대체 정체가 뭐지? 저 자들은…….’ 다웬은 잔뜩 찡그린 눈으로 황태자와 가까이 서서 얘기를 하고 있는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지체 높으신 황태자 전하께서 저런 ‘수상한 사람들’과 아는 사이라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황태자 전하의 명령을 받고 두 사람을 직접 데려온 것이 바로 다웬, 그였으니 믿지 않고서야 어쩌겠는가. 다웬이 난생 처음 직접 받들게 된 황태자 전하의 명령은, 저 두 사람을 데려오라는 것이었다. 처음 들었을 때 그는 데려오라던 그 인물들에게 뭔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적어도 황태자 전하와 아는 사이이라면 특별한 신분의 사람이겠지 했던 것이다. 그런데……. “선배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인상을 그은 채 중얼거리듯 던진 질문에, 다웬의 1년 선배 키사르는 무엇을 묻는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다웬의 시선이 붙어서 떨어질 줄 모르는 곳을 따라가자 그는 무엇을 묻는 질문이었는지 금방 알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일부러 모르는 체 그는 되물었다. “뭘 말이냐?” “저 사람들 말입니다, 저 사람들! 딱 보기에도 수상하다고 외치고 있는 것 같이 보이지 않습니까? 네? 선배!” 열혈이 소리치는 다웬을 바라보는 키사르는 내심 또 시작이냐고 생각하며 혀를 찼다. 그의 후배는 착실함을 지닌 엄청난 노력파이기는 했지만 가끔 이렇게 너무 열혈하게 나서서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았다. 이번에도 끼어들어서 안 되는 곳에 그는 흥미를 보이고 있었다. 키사르는 어떻게 말을 해야 잘 알아먹을까 고민하며 모르는 척 대답했다. “어디가? 나는 모르겠다만.” “예에? 안 보이십니까, 선배? 저것 보십시오! 저 로브에, 후드 하며! 보기만 해도 음침함과 사악함이 줄줄 흘러나오는 것 같지 않습니까? 분위기마저 꼭 전설에 나오는 마왕 같다고요!” “안 보이는데. 이봐, 난 황태자 전하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만 보여.” 확실히 음침하고 수상쩍어 보이는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마왕 같다는 둥 어이없는 억측에까지 동의해줄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키사르는 다시 한 번 수상쩍은 두 사람을 흘끗 쳐다보았다. 그들은 아침부터 모든 사람의 시선을 온몸에 받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열혈 애송이 다웬과 다른 점이 있다면, 대놓고 쳐다보지 않는다는 점뿐이었다. 키사르는 자꾸 들러붙으며 귀찮게 구는 다웬에게 따끔히 한 소리 늘어놓았다. 그럼에도 투덜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는 다웬에게 키사르가 물었다. “야, 너 저 사람들 얼굴이나 보고 그런 말을 하냐?” 아무 생각 없이 물은 말이었지만 의외로 효과는 좋았다. 순식간에 다웬이 조용해졌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풀이 죽은 듯 고개까지 숙이는 것이 아닌가! 너무 심했나 싶어졌다. 그저 귀찮았을 뿐이었는데. “야, 후배, 삐졌냐? 왜 그래?” 다웬과 눈을 맞추려던 키사르의 눈이 동그래졌다. 가장 시끄러웠던 곳에서 커다란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자 루피아와 이디스, 그리고 루블리츠의 시선이 자연스레 소리의 발원지로 향했다. 선배로 보이는 기사는 배를 잡으며 웃고 있었고 후배 기사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발악하고 있었다.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정겨운(?) 모습이 아닌가? 루블리츠는 빙그레 웃음을 걸었다. “선후배 사이가 좋은 것이 좋지. 안 그런가?” 루블리츠가 그렇게 말하며 묻자 루피아는 조금 난처한 듯이 웃기만 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던 그녀는 마음 편하게 웃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대화 중 한 단어가 그녀의 귀에 거슬렸다. ‘그, 그렇게 티가 나나? 음, 조금 음침하기는 하지만. 누가 내 얼굴을 알지도 모르잖아. 아니야. 이디스 얼굴은 아무도 모를 테니까 드러내놔도 괜찮을까?’ 루피아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사실 그녀 자신의 얼굴도 어디 내놔도 아무도 못 알아볼 얼굴이기는 했다. 마계로 가던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만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몇몇 로열 나이트들 중에 그녀를 황성까지 데려다 주었던 자들도 있을지도 모르고, 로열 나이트 중에는 오빠들의 친구도 있을 테니 어쩌면 얼굴을 보았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녀는 아주 조금의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디스는 달랐다. 그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적어도 이 중간계에는 없을 것이다. 잠시 뒤에 후드는 벗어도 될 것이라고 말해야겠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그녀는 어쩌다 이렇게 얼굴을 숨겨야 하는 지경이 됐나, 하고 중얼거리며 길게 숨을 토했다. 내 신세야! 루블리츠는 결국 사정을 묻지 않고 엘 세느안트 저택까지 안전하게 데려다 주기로 했다. 그는 데려다 준 후는 모르는 일이라고 말했지만 그 후부터는 그녀에게도 계획이 없었다. 일단 지금은 엘 세느안트 저택으로 가는 것만이 목표였던 것이다. 가보면 뭐라고 수가 생기겠지, 하는 조금은 무모한 생각이었다. 이디스를 보는 루피아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중간계에서 깨어난 후 이디스는 이전보다 더 말이 없어졌다. 처음 깨어나서 그녀를 보던 이디스의 얼굴은, 그 표정은, 아마 평생이 가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모습은 평생 가슴 속에만 새겨두자고, 그녀는 다짐했다. ‘으아악! 제기랄, 딜렌! 다음에 보면 그 머리를 콱 물어뜯어 버릴 테다!’ 순간 루피아의 뒤에 여우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면 착각일까? 그녀는 딜렌을 자근자근 밟아 주리라고 결연한 의지를 다졌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의 상황으로 오게 된 과정은 편치 않았지만 그녀는 지금이 좋았다. 물론 세키라나 에리나 등의 문제는 완전히 제하고 오직 그녀의 상황만 보면 말이다. 인간에게 마계보다 중간계가 더 편한 것은 어쩔 수 없는 문제이지 않은가? ‘다시 마왕이 되고 싶을까? 당연히 그렇겠지. 그것보다 무척 혼란스러울 거야. 자존심도 엄청 상했겠지. 태어났을 때부터 마왕이 되기 위해 자라왔다고 했으니까- 게다가, 내가 아는 한 그 누구보다 그 자리에 어울렸고. 그리고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뭐라고 그에게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도 종잡을 수 없었다. 그의 앞에서는 스스로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마음을 인정하고 서로의 마음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직도 그의 앞에 서면 어색한 마음이 들었다. 자꾸 초조하고, 자꾸 두근거리고…… 복잡한 그녀의 마음과는 달리, 이디스는 열 받을 정도로 똑같았기 때문에, 지고 있는 느낌마저 들었다. “한 가지만 물어도 되겠소?” 루블리츠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루피아가 미처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루블리츠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다. “저 자는 대체 누구요?” 루피아는 눈을 깜박거렸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이디스는 여전히 잠자코 그녀에게 대답을 맡길 뿐이었다. 순간 그의 무관심한 태도에 왠지 모를 울컥함과 동시에 장난기가 치민 그녀는 심각한 얼굴의 진지한 황태자에게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들이에요.” “……!!” “……!!” 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래진 황태자의 눈과, 황당해하는 이디스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만족스러워진 그녀는 크게 웃으며 정정했다. “농담! 설마 믿었던 것은 아니죠? 애인(愛人)이에요~” * * * * * * * * * * * * * * * “‘로헤델의 별’이라고?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구나.” 에스베크 공작의 말이 떨어지자 에리나와 세키라의 얼굴이 어둡게 물들었다. 일이 힘들어질 것 같았다. 웬만한 자료로는 그 단어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도 없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야, 자료가 널려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실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에스베크 공작이 덧붙였다. “난 신학(神學)에는 그다지 조예가 깊지 못해서 말이다. 하지만 타락천사라니 분명 신관은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되는구나. 그쪽으로 알아보도록 하자.” 오랜 세월 동안 만들어놓은 인맥은 어찌어찌하여 오르가프 교단의 고위 신관에게까지 닿아 있었다. 로헤델, 이라는 천사가 있기만 했다면 알아내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 일일 것이다. 소문이라도 말이다. 에스베크 공작은 다른 방면으로도 ‘로헤델의 별’이라는 것에 대해 조사해보기로 했다. 그는 당장 일어섰다. “혹시, 루피아에 대한 소식은 모르느냐?” 조심스럽게 엘 세느안트 공작이 물었다. 세키라와 에리나는 서로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수그렸다. 그녀들은 아직 루피아와 마왕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에리나의 계약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루피아에 대한 소식도 아는 바가 없었다. 교황 라우데스는 무작정 중간계로 가보면 된다고만 했고, 12대천사들은 우리도 정보가 한없이 부족하기만 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결국 루피아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르는 셈이었다. 혹시, 그 마족 3인방이라면 알지도 모르지만-… 이내 두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엘 세느안트 공작은 무척 실망한 눈치였지만 희망을 잃지 않은 듯 이내 다시 기운을 차렸다.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은가, 하며 그는 자신을 다독였다. 칼르니르 공작은 친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에리나는 아버지를 보며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사실, 그녀는 이 곳에 있으면 안 되는 몸이지 않은가. 유리아덴이 그녀를 찾으러 오거나, 혹은 그 전에 그녀는 돌아가야 했다. 그것이 계약이었으므로. 비록 대가로 얻은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지만 말이다. 세키라 역시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모든 것이 다 잘됐다고 보기에는 걸리는 것이 너무 많은 것이다. 두 사람 모두의 가슴에 걸리는 것은, 당연히 친구인 루피아 엘 세느안트에 관한 일이었다. 그 난리통속에서 행방이 묘연해져 버렸다. 그녀들이 아는 것은 지극히 단편적인 조각들뿐이었다. 서열대회 도중 루피아가 납치되고, 얼마 안 있어 천계에서 공녀들을 데려갔다(-가 아니라, 사실은 따라간 것이다). 딜렌과 그림자족이 일으킨 반란 때문에 마계가 한 번 뒤집히고, 마왕이 그의 이복동생에게 당했다- 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이것들마저 대부분 들은 내용이었다. 엄청난 소식들이 전해지는 가운데 그 난리의 중심에 있었던 루피아의 존재는 완전히 잊혀지고 말았다. 마왕의 소식도 전혀 전해지지 않았다. 무언가 흔적이라도 남아야 할 텐데 그런 것 따위 전혀 남지 않았다고 한다. 가슴이 답답해져 두 사람은 길게 한숨을 토했다. “그럼, 자료를 찾으면 알려주마. 그동안 이곳에서 편히 쉬도록 해라. 나도 같이 찾겠다.” 두 공작은 일어났다. 칼르니르 공작은 평소 잘 보여주지 않던 미소를 보여주며 에리나의 머리를 다시 한 번 쓰다듬었다. 그 이상 친밀한 행동을 보여주지 않은 것은 예전 그의 모습이 그러했던 것도 이유이겠지만 엘 세느안트 공작을 위한 배려이기도 했다. 훈훈한 공기가 흐르는 가운데, 베키가 불쑥 끼어들었다. “이미 엘 세느안트 저택에 시녀로 눈도장이 찍혔으니, 갑자기 사라지면 모두들 수상하게 생각할 텐데요. 이곳과 저택은 왕래가 많으니 들키는 것도 시간문제일 테구요.” “아. 그러고 보니…….” 난생 처음으로 잡일까지 실컷 해보지 않았던가. 베키의 말에 에리나와 세키라는 인상을 그었다. 특히 세키라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져 있었다. 그런 경험은 한 번으로 충분했다. 끝도 없는 걸레질에, 손 가는 일은 왜 그렇게 많던지! 그러나 베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태연한 얼굴로 입을 움직였다. 어쩐지, 재미있어 하는 듯한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걸려 있다고 생각한 것은 두 사람의 착각일까? “그러니까, 차라리 여기 있는 동안에는 그냥 엘 세느안트 저택에서 시녀로 있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갑자기 식객이 둘이나 들어오면 소문은 금방 날 테고, 수상한 사람을 집에 들였다고… 게다가 그 식객이 시녀였다면…….” “차라리 수상한 사람이 되는 것이 낫겠어!” 베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두 사람은 외쳤다. ================== 지금 시각 새벽 1:10 이 막 넘어가고 있네요. 원래는 12시 이내에 올리려고 했는데 아쉽게도 세이프 실패.-_-; ...그래도 어제라고 생각해주시면.; ...농담이에요; 메일 : donghee425@hanmail.net 카페 : http://cafe.daum.net/fantastiknovel 즐독하세요~>_< 제 목: 공녀(貢女) : 제42화 [재회하다!](1) #. 제42화 [재회하다!] * * * * * * * * * * * * * * *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났다. 그리고,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도 만났다. =========================루피아의 자서전=========== 짙게 어둠이 거리 사이사이로 내려앉은 시각. 평범한 사람이라면 포근하고 따듯한 잠자리 사이로 파고들어야 했을 시간이었지만 그림자에 묻혀 눈에 띠지 않는 구석에서 두런두런한 말소리가 들려 왔다. 조금 높은 음색인 것을 보아 목소리의 주인공은 여자인 듯했다. 조금 과장을 더해,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것 같은 고요함 속에서 여자의 목소리는 선명하게 울렸다. “……역시 숨어서 들어가야 하겠죠?” 숨기는 기색이 전혀 없는, 당당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무언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불만이 묻어 있다. 여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것 같군.” 여자는 당연히 루피아였다. 루블리츠와 헤어지고 엘 세느안트 저택 앞으로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엘 세느안트 공작의 성격을 잘 보여주듯 물샐 틈 없이 치밀하게 온갖 트랩과 마법을 통원한 경비체제가 잘 갖추어져 있어 무작정 들어가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이디스 혼자라면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 루피아에게는 확실히 무리였다. 이디스는 신장의 두 배가 넘는 높다란 담장 너머를 쳐다보았다. 철창 끝에는 날이 날카롭게 서 있어 무척 위험해보였다. 담장 위에서 눈을 떼지 않는 그를 쳐다보던 루피아가 물었다. “설마 뛰어넘을 생각은 아니죠?” 왜 안 되느냐는 듯 그가 쳐다보자 루피아가 기겁을 했다. “안 돼요! 저기 끝에 찔리면 끝장이라고요. 이리 따라와요. 자주 다니던 비상 탈출구가 아마…….” 루피아는 기억을 더듬었다. 오빠들과 함께 저택을 빠져 나올 때 자주 애용하던 비상 탈출구, 다른 말로 ‘개구멍’- 설마 지금 같은 상황에 요긴하게 쓰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만, 뭐 어떠랴. 좋은 게 좋은 것이지 않겠는가. 다행히 구멍은 여전히 있었다. 얽히고설킨 넝쿨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았지만 옛날 그대로였다. 사실 마계로 가기 바로 직전까지도 몇 번이나 사용했던 터라 꽤나 컸는데, 만약 다른 귀족들이 안다면 경비가 소홀하다며 험담거리가 될 것이 뻔했다. 아마 아버지도 어머니도 이 개구멍의 존재를 알고 계실 것이다. 루피아는 구멍을 앞에 두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밤 마실 나갔다 온 것도 아니고, 그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일 뿐인데도 개구멍이나 이용해야 하는 자신의 신세가 참 한심했다. 그렇지만 어쩌겠어. 어깨를 으쓱한 그녀는 몸을 구부리고 앉았다. 오빠들까지 드나들었던 구멍이라 그런지 그녀에게는 넉넉했다. 여유롭다 싶을 정도로 쉽게 구멍을 통과한 그녀는, 들어올 생각은 하지 않고 발만 보여주고 있는 이디스에게 얼른 들어오라고 재촉했다. 하지만 이디스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여길 들어가란 말이냐?” “-나도 이러고 싶지 않다구요. 빨리 와요! 누가 오기 전에.” 누군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아나. 구시렁거리고 있는 사이, 이디스의 상체가 구멍을 통해 쏙, 하고 내밀어졌다. 어쩐지 웃음이 나는 루피아였다. ‘마왕이! 마계 최고 권위이자 두려움의 대상인 마왕이~, -아아, 이런 거 시켰다는 것, 로이드윈이 알면 무진장 혼날 거야.’ 이디스 역시 이런 상황이 무척 불만인지, 미세하게 인상이 그어져 있었다. 그에 루피아는 또다시 웃음이 나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아야 했다. 하지만 어깨가 떨리는 것을 감추지 못한 그녀는 이디스의 불만스런 눈초리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그 누가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는 무려, 무려 마족에다 마왕이었던 몸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개구멍을 통과했다. 이런 모습을 어디 가서 보겠는가? 천만금을 줘도 못 볼 상황이다. 게다가 인상을 긋는 그 모습을 귀엽다고 여기는 루피아는 역시, 취향이 평범하지는 않다. “일단 들어오기는 했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하나.” 말하지 않았던가? 솔직히 루피아는 이 이상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이 전혀 없었다. 무작정 ‘집으로 돌아가고 보자’가 목표였다. 이후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 따위 없는 것이다. 가족들을 만나려면, 일단 여기 있다는 것부터 알려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렇게 숨어있지 말고 당당하게 나서야 할까. 아니, 고용인들에게 알려져서 좋을 것은 없을 것이다. 가족들에게만 알려질 수 있는 방법이 뭐 없을까. 이디스는 그 사이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그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희미한 웃음을 걸었다. “이디스, 일단 이쪽으로…….” “거기 누구야!” 루피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날카로운 고함소리와 함께 불빛이 비추어졌다. 아마 밤새 경비를 서고 있던 기사인 것 같았다. 루피아 역시 소곤거리는 목소리는 아니었으므로 금방 들킬 만 했다. 깜짝 놀란 루피아는 더 이상 상황이고 뭐고 생각도 하기 전에 이디스의 손을 꽉 잡았다. 그리고 돌아서며 말했다. “튀어요!” * * * * * * * * * * * * * * * 에드윈드 에스베크. 방년 16세의 그는, 화려한 백금색의 머리칼과 녹옥(綠玉)을 연상시키는 눈동자를 가진 미소년 초급 마법사이다. 시리어스 제국 3대 가문 중 하나라는, 지(智)의 에스베크 가문의 장자로 태어나 빵빵한 백그라운드(Back Ground)는 물론 잘 돌아가는 두뇌까지 갖추고 태어난, 그야말로 행운아 중의 행운아라고 할 수 있다. 굳이 단점을 짚어 보자면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다는 것이지만, 세키라와 같은 자상한 누님이 있으니 넘어가도록 하자. 어머니 대신 누님의 손에 자랐기 때문일까, 그는 엄청난 시스터 콤플렉스의 소유자였다.(본인이 인정하든 말든 간에) 타고난 자질로 16세의 어린 나이에 4클래스 달성이라는 놀랄만한 경지에 이른 그는, 나름대로 거칠 것 없이 살아온 인생에서 난생 처음으로 천적을 만났다. “더워! 뭐 시원한 것 없냐?” 피부 위에는 땀 한 방울 흐르지 않건만, 아로데는 마치 더워 못 참겠다는 듯이 능청스럽게 과장된 몸짓으로 손부채를 부쳐 대었다. 그러자 에드윈드는 더는 짜증을 숨기지도 않고 아로데를 노려보았다. 아로데는 더없이 상큼한 미소를 지었다. 에드윈드는 벌떡 일어나 일부러 발을 구르면서 문을 세게 쾅 닫고 나갔다. 온몸으로 ‘열 받았음’을 말하고 있었다. 에드윈드가 나가자마자 아로데는 ‘캬하하하!’하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 문 밖에는 에드윈드가 있을 테고, 나무로 만들어진 여관의 문은 그의 웃음을 숨겨줄 정도로 방음에 철저하지 않다. 고로, 그의 웃음소리는 밖의 에드윈드에게도 들릴 것이었지만 아로데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신나게 웃어댔다. 쾅! 밖에 서 있던 누군가(?)에게 걷어차인 문이 가늘게 떨렸지만 웃음소리는 더 커졌다. 이번의 웃음소리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였다. 그것도 적어도 네 개 이상의! 에드윈드는 더욱 신경질을 부리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시원하게 마실 수 있을만한 음료수를 사러 가는 것이다. ‘제길! 망할 악마 녀석! 누님을 미끼로 나를 부려먹다니!’ 생각만 해도 이가 바득바득 갈렸다. 하지만 ‘때려 치워!’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세키라에 대한 이야기가 그만큼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에드윈드는 여관주인에게 ‘아까하고 똑같은 걸로 하나 더!’라고 외쳤다. 벌써 몇 번째인지! 이제까지 마신 것만 해도 배가 부를 텐데도! 더욱 열 받는 것은, 믿었던 ‘형님’들마저 웃음을 감추지 못한다는 것이다. 면전에 대고 웃지는 앉지만 필사적으로 참는 표정이 들여다보이는가 하면, 가늘게 입가에 경련이 일어나는 것이 번번이 눈에 잡히곤 했다. 그리고 숨기려면 제대로 숨길 것이지, 문 하나로 그 큰 웃음소리가 다 가려지리라 생각하는 건가! 도대체! 투덜대며 음료수를 가져간 에드윈드는, 히죽거리는 아로데의 얼굴을 그냥 콱 발로 꾹 눌러 주고 싶다는 욕망에 발이 근질거림을 느꼈다. 에드윈드는, 서열 5위 이하 마족들이 늘 느끼는 충동을 맛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화를 꾹꾹 눌러 가슴 속에 담으며 말했다. “하던 얘기 계속 해줘요.”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누님이 당신의 ‘담당’이 되었다는 것까지 얘기했어요!” “아, 그래? 뭐, 그래서 말이지…….” 말꼬리를 슬슬 늘이던 아로데는 길게 하품을 했다. 졸린 것처럼 눈을 반쯤 감고 깜박거린 그는 홱 돌아서 침대 속으로 꾸물꾸물 들어가 버렸다. 다시 한 번 하품을 하면서. “나머지는 내일! 난 졸려~” “이, 이 자식! 사람 실컷 부려먹어 놓구서!” “내일 하자고, 내일! 내가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아함! 그럼 잘 자라♡” 목이 칼칼하다며 시킨 음료수 심부름만 해도 다섯 손가락이 넘어가고, 덥다며 부채질을 시키는 것은 물론, 뻐근하다며 안마까지 시켰다. 그랬는데… 그랬는데……! 꼭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어 부들부들 떠는 에드윈드의 어깨를 카에리드가 가볍게 두들겨 주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해서는, 에드윈드는 신음인지 울음소리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었다. 솔직히 말해 에드윈드의 상황을 즐겼던 카에리드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형님.” “음?” “언제쯤 도착합니까?” “아무리 늦어도 2일 후면…… 왜?” 카에리드는 ‘왜’라고 되물었던 것을 금세 후회했다. 에드윈드의 얼굴은 마치 세상을 다 산 듯한 얼굴이었던 것이다. 그동안 이런 짓을 계속 반복해야 한단 말인가. 심부름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문제는, 그 심부름을 시키는 자가 아로데, 바로 그라는 것이다! 에드윈드의 축 쳐진 어깨를 보며 카에리드는 혀를 찼다. 이데카른이 말했다. “재미는 있지만 좀 불쌍하군.” * * * * * * * * * * * * * * * 이 늦은 밤- 잠 못 든 이는 루피아, 이디스나 에드윈드 일행만은 아니었다. 시리어스 제국의 중심, 황성에도 깊은 밤 잠 못 이루고 어지러운 고민으로 눈을 뜨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막 가벨에서 돌아온 황태자 루블리츠는, 여행으로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잠이 들지 못하고 있었다. 루피아 엘 세느안트. 그녀는 마계에 공녀(貢女)로 바쳐진 여인들 중 하나였다. 아버지인 엘 세느안트 공작의 과보호로 인해 18세 때까지 단 한 번도 공식적인 자리에 나타난 적이 없었던 그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소문이 많이 나돌았다. 하지만 단 하나도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었다. 완전히 신비한, 수수께끼 그 자체인 것이다. 가족 외에 그녀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에스베크 공작가나 칼르니르 공작가문 뿐이었다. ‘……정보가 없어도 너무 없군.’ 뭐 아는 것이 있어야 대책을 세우든 할 것이 아닌가? 하지만 너무 느닷없이 당한(?) 일이라 루블리츠는 조금 당황한 상태였다. 가벨에서 본 그 환상은, 대체 무슨 의미일까……. 원래는 엘 세느안트 공작가문 앞에 데려다 준 다음, 바로 체포를 하든가 어떻게든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망설이는 이유는, 계속 뒷덜미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 석연찮음 때문이었다. 일단 루피아 엘 세느안트라는 여자에 대해 알아보자고, 그는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조금 더 지켜본 이후에 어떻게 할 것인지를 결정하기로 했다. 루블리츠 황태자는 가슴이 답답해져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공녀, 공녀라. 부끄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큰 일로 번지게 될 지도 몰랐다. 게다가 그녀의 옆에 있던 남자의 정체는-……. 황태자는 결국 밤새도록 눈을 붙이지 못했다. ================== 짧지만, 일단.. 지금 시각 12:17분. ....졸려요ㅠ_-; 메일 : donghee425@hanmail.net 카페 : http://cafe.daum.net/fantastiknovel 즐독하세요~>_< 제 목: 공녀(貢女) : 제42화 [재회하다!](2) #. 제42화 [재회하다!] * * * * * * * * * * * * * * * 잔잔한 옅은 빛을 흩뿌리는 달이 깊은 밤하늘에 떠 있다. 깨어진 유리파편처럼 반짝거리는 별빛은 달 주변을 수놓듯 드리워져 있었다. 미친 듯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루피아는 옅은 달빛을 피해 숨은 곳에서 조심스레 숨을 몰아쉬었다. 끈질기게도 경비원들은 포기할 줄을 몰랐다. 그야 경비가 철저한 것은 좋은 일이지만, 지금 이런 상황에서는-… 어쩐지 일이 꼬인 것 같다. 루피아는 인상을 그었다. 빨리 아버지를 만나야 한다. 그래야 무슨 방법이 생길 것이다. 이러고 있을 상황이 아니다! ‘이디스도 지금은 힘든 때야. 그러니 내가… 어떻게든 방법을 마련해야 해!’ 부모님은 아마 지금 이 시각이면 침실에 계실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이곳에서 자란 루피아는 저택 구석구석을 잘 알고 있었다. 질리도록 했던 놀이가 바로 숨바꼭질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저택 내의 비상탈출구나 비밀통로까지 루피아는 꿰고 있었다. 설계사보다도 까지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이 집안 하수인을 비롯한 가족들 모두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루피아는 자신 있게 발걸음을 다시 떼었다. 잠시 뒤, 루피아는 부모님 침실 바로 앞까지 도착했다. 그녀는 그동안 집안 구조가 변하지 않은 것에 감사했다. 너무 긴장을 했는지 입안이 바짝 말랐다. 떨리는 두 손을 꼭 모아 쥐고, 그녀는 조심스럽게 문손잡이를 당겼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저기다! 잡아랏!” “놓치지 마!” 따돌렸다고 생각한 경비대들이었다.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루피아는 재빨리 손잡이를 비틀었다. 그저 열심히 임무수행을 했을 뿐인 경비대를 욕하면서. 아버지, 어머니를 만나면,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이 생길 거야! 벌컥 침실 문을 연 그녀는, 휑하니 비어 있는 침대를 맞이해야 했다. 당황한 그녀의 목에 날카롭게 벼려진 은색 쇳덩이가 디밀어졌다. 힉, 하고 그녀는 숨을 삼켰다. “누구냐? 무슨 목적으로 날 찾아왔지?” 이디스의 목에도 칼이 디밀어져 있었지만 그의 표정은 변함이 없이 태연했다. 마치 금방이라도 목을 벨 것처럼 가까이에 대어져 있었는데도. 그의 눈은 루피아만 ?고 있었다. 루피아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눈동자를 굴렸다. 루피아는 떨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의 뒤에서 칼로 위협하는, 이 사람들은- 그녀의 귀가 이상해지지 않았다면, 이 목소리의 주인공들은- 루피아는 고개를 돌렸다. 다시는 못 볼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그날 저녁에 본 그게, 마지막일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 달칵! 푹신하게 깔린 카펫 위로 칼이 힘없이 떨어졌다. “각하! 그곳으로 침입자가….” “들어오지 마라!” “예? 무슨…….” “아니, 괜찮다. 다른 곳으로 갔어. 이곳에는 오지 않았다. 다른 곳을 찾아봐라!” “옛! 죄송합니다.” 시야가 물 먹은 듯 흐릿해졌다. 눈을 꾹 감아 앞을 뚜렷하게 만든 뒤, 그녀는 우는지, 웃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이 되었다. “……엄마. 엄마!” * * * * * * * * * * * * * * * “~~~너! 대체 어디 있다가 이제 나타난 거야!” “말도 없이 사라져서는! 우리 화났어!!” 세키라와 에리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실 루피아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었긴 하지만 그래도 그동안 걱정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화가 나는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미안. 정신이 없었어.” 정신이 없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없었다. 딜렌에게 납치되고, 이디스가 죽어버려서 넋이 나갔던 데다가, 느닷없이 중간계에 툭 떨어지고, 혼자서 돈도 없이 엘 세느안트 저택까지 오느라 정신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지금까지 어떻게 된 일이었는지, 또 두 사람은 어떤 일들을 겪었고 어떻게 중간계로 돌아와 있는지, 아로데 등 세 마족의 소식은 알고 있는지, 지금 마계의 돌아가는 정황 따위를 알고 있는지 등등, 궁금한 것이 산더미 같았고 두 사람에게 할 얘기도 너무나 많았지만, 지금은 일단 다시 만난 것을 즐기고 싶었다. “자, 일단 차 한 잔 하면서 이야기 해.” 카멜라가 차를 따라주며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카멜라는 검은색의 굵은 웨이브가 진 머리카락에 진초록의 눈동자의, 부드러운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상냥하고 온화할 것만 같지만 사실, 루피아의 어머니답게(?) 고집불통에 자유분방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거의 몰락해가던 백작의 외동딸로, 파산한 아버지 덕분에 팔려나갈 뻔한 것을 아버지가 구해 주었다고 한다.(루피아는 결코 그 이야기만이 사실이 아닌 것임을 알고 있다!) 세키라와 에리나는 차를 마시면서 겨우 흥분을 가라앉힌 것 같았다. 드물게도, 세키라까지 에리나를 말려주지 않고 화를 내서 어떻게 말리나 난처해하던 참이었다. 에리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어떻게 된 거야? 네가 왜 중간계로 돌아와 있어?” “내가 묻고 싶은 말인걸. 너희들은 어떻게 여기에 있어? …그런 차림으로.” 에리나와 세키라의 얼굴색이 묘하게 어두워졌다. 루피아는 어떻게 두 사람이 엘 세느안트 저택에, 그것도 ‘시녀’ 차림으로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적어도 시녀 차림일 필요까지는 없지 않은가? 세키라와 에리나는, 결국 베키의 의견대로 엘 세느안트 저택에서 시녀로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또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차라리 수상한 사람이 되겠다고 외쳤지만 사실 굳이 수상하게 보여서 좋은 것은 없다. 그래서 다시 결정된 자리는 바로 카멜라 여사의 개인시녀였다. 하루 종일 붙어 있어도 이상할 것 없고, 베키가 그녀 두 사람이 할 몫을 다 해주기 때문에 따로 할 일도 없다. 다만 베키만은 묘하게 아쉬운 눈길로 두 사람을 쳐다보곤 했다.(실제로, 간단한 심부름 따위를 부탁하기도 했다) 베키는 정말 안타까워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사정을 루피아가 알 리 없다. “그런데 루피아, 그 남자 분은 어디로 가셨니?” 카멜라가 다시 끼어들었다. “아, 아까…… 아버지와 함께 나가는 것 같던데요…….” “남자 분? 서, 설마…….” 에리나의 떨리는 목소리와 세키라의 놀란 얼굴에 루피아는 태연하게 화답했다. “응! 맞아, 이디스야.” “-여기 와 있다고? 마, 마- 읍!” “쉿! 그거 비밀이란 말이야.” ‘마왕’이라고 채 말하기도 전에 에리나는 루피아의 손에 의해 입이 막혔다. 카멜라는 모르는 척 방긋 웃었지만, 아마도 뭔가 이상한 것을 눈치 챘을 것이다. “어떻게 된 건지…….” 세키라와 에리나는 자신들이 겪은 일들을 간추려서 말해 주었다. 세키라는 천계에서 로아이나를 만나고 감금되어 12대천사를 만났고, 에리나는 교황을 통해 12대천사를 만났다. 그리고 ‘로헤델의 별’이라는 것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중간계로 왔다고 말이다. 간추리면 너무나 짧은 이야기지만 두 사람에게는 너무나 긴 이야기라는 것을 루피아는 알 수 있었다. 루피아도 이야기를 풀어 놓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요새는 한숨쉬는 것이 버릇처럼 되어버렸다. “……어째, 비현실적인 일들만 일어나는 것 같지?” “…음. 12대천사도, 마왕도, 모두 신화 속에나 나오는 등장인물들이기는 하지.” “……새삼스럽게 말이야.” * * * * * * * * * * * * * * * 눈을 뜨면, 몽롱한 시야 사이로 흐릿하게 맺히는 상(像)이 있다. 그러나 너무나 짧고 흐릿해서, 그것은 미처 손을 뻗기도 전에 흩어져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것이 안타까워서, 늘 처음 눈을 뜨고 나면 따가워서 눈물이 흐를 때까지 눈꺼풀을 덮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오늘은 눈만 따가울 뿐 아니라 머리까지 지끈지끈 아파왔다. 딜렌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더럽게 어지럽혀진 방의 풍경을 훑으며, 그는 기억 속의 이 방이 언제나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던 것이 떠올라 씁쓸해졌다. 불과, 불과 20년 전의 이야기. 그러나 지금 이 곳에서는 그 흔적이 뒤죽박죽이 되어 더욱 머리를 어지럽힌다. 머리가 깨질 것만 같이 아프다. 계속, 계속, 계속, 머리가 아프다. 다시 힘없이 푹신한 쿠션에 상체를 기댄 딜렌의 황적색 눈동자에 그렁그렁한 눈물이 차올랐다. 깜박이지도 않는 눈에서 마른 뺨 위로 흘러내린 눈물은 이불을 동그랗게 적셨다. 울고 있는 것조차 모르는 것인지, 그는 닦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 후로 얼마나 시간이 흐른 것일까. ‘형님! 형님…… 형님.’ 죽여주지 않았다. 죽지 못했다. 사실, 죽고 싶었다. “아직도 정신 못 차렸냐.” 카른이 간단한 음식을 내려놓으며 딜렌의 옆에 섰다. 딜렌은 그를 쳐다보기는커녕 멍하니 초점 없이 뜨고 있던 눈마저 닫아 버렸다. 카른은 딜렌의 차가운 이마를 짚었다.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건만 딜렌의 몸은 하루가 다르게 약해지고 있었다. 그는 걱정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어쩌다가 이런 한심한 녀석한테 코가 꿰였는지. 카른은 투덜거리며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런 모습을 다른 마족에게 보이기는 싫었기에 그는 이 어지러워진 방을 직접 정리하고 청소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딜렌은 멍하니 허공만 쳐다볼 따름이었다. ‘말렸어야 했는데…… 라는 생각이, 자꾸 드는군.' 카른은 사실 알고 있었다. 딜렌이 사실은 이디스를 미워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단지, 그가 한 짓을 용서할 수 없고, 그를 미워하지 않는다는-좋아한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는 것뿐이었다. 또한 그런 자신 역시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을 인정할 수도 없기에 이디스를 미워한다고 스스로에게 암시를 걸고 있을 뿐이었다. 카른은 몇 번이나 그렇게 가르쳐주었지만 딜렌은 한사코 부정했다. 그림자 족의 수장으로서의 지위와 책임도 있었기에 끝까지 말리지 못했지만, 지금은 후회가 되었다. 폭발하고 난 뒤에 딜렌이 어떻게 될까, 걱정한 적이 있었다. 폭발하고 난 뒤엔, 산산조각이 나서 부서져 버리지 않을까, 하고. “딜렌. 내 말 들리나? 딜렌.” “…….” “이봐, 제발 정신 좀 차려. 이러다 죽는다.” 카른이 눈썹을 치켜떴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 더 날카로워졌다. “제길! 안 먹을 거냐! 그 몸은 한계가 있다고!” 카른은 가만히 미간을 접었다. 이번에도 실패인가. 더럽게 고집 센 놈! 저 오거 심줄만한 고집은 대체 누굴 닮은 건지! 제기랄! 인간과 피가 섞여 관리를 해 주어야 하는 주제에, 먹으려 들지도 않고! 그가 무슨 말을 해도, 그 말은 딜렌의 귓가에만 맴도는 것 같았다. 딜렌의 머릿속에는 인식되지 않는 것이다. 햇수로 거의 70년을 가까이해온 사이이건만, 그는 허탈해졌다. 카른은 이번에도 줄지 않은 음식을 그대로 가지고 나가야 했다. 뒤돌아서는 그의 귀에 작은 소리가 스치듯 지나갔다. “……어.” “뭐?” 카른은 귀를 쫑긋 세웠다. 딜렌이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 쉰 목소리로 작게 말을 했다. 그건 말한다기보다 차라리 속삭인다고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루피아를…… 만나고 싶어.” 형님. 형님…. 형님……. =============================== 꺄악! 무적의 브라더 콤플렉스! 이디스가 제대로 말을 하게 될 날은 대체 언제 올런지. 뭐 이제 얼마 안 남았지만요. 이제 곧 <부활! 이디스> mode를 보시게 될 겁니다.[웃음] 오늘도 get! …하지 못한 목표치. 무려 계획보다 4page나 모자랍니다.; 처음부터 너무 무리한 계획이었을까요.[..먼산] 수학여행은 4월 6, 7, 8, 9일이예요. 초, 중학교 때에도 갔던 남해 일대. 하지만 기대되는 건 어쩔 수 없네요. 참참! 아직 오후 11:01분이니까 3월 31일이에요. 신기언니, 생일 축하해요^^ 메일 : donghee425@hanmail.net 카폐 : http://cafe.daum.net/fantastiknovel ...요즘 리플에 목이 말라요. 다른 분들에 비함 어떨지 모르지만, 저, 요즘 예전에 비해 엄청나게 자주 올리지 않아요? 리플이 고파요~[퍽!] 제 목: 공녀(貢女) : 제42화 [재회하다!](3) #. 제42화 [재회하다!] * * * * * * * * * * * * * * * 어느새, 계절은 봄의 막바지에 이르러 있었다. 파릇파릇한 푸른 잎사귀가 나무를 풍성하게 채우고 공기는 싱그럽다. 하늘은 푸르고 구름은 깨끗하며 새의 지저귐도 아름다운데, 단 한 곳만은 막강한 봄의 파워도 소용이 없는지 무거운 침묵이 짙게 깔려 있었다. 이미 이렇게 마주앉은 것도 꽤 되었는데도 두 사람 사이에는 오가는 말 한 마디 없었다. 이디스도, 엘 세느안트 공작도 서로 먼저 말을 꺼낼 생각은 하지도 않은 채 이미 식어버린 차만 후룩후룩 마셨다. 분위기는 자연히 싸늘히 식어갔다. 엘 세느안트 공작, 카일 엘 세느안트는 복잡한 속마음을 미지근한 찻물과 함께 목구멍으로 넘겼다. 이 남자를, 아버지 된 입장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겉보기에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침착하고 담담해보였지만 사실 내심은 엄청 복잡하고, 쓰렸다. 자신이 이 남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우선 남자를 세심하게 살폈다. 외모로만 보자면 합격점 이상이었다. 빛조차 삼켜버릴 듯한 새카만 머리카락에 깨끗한 피부, 단아한 얼굴선. 정갈히 정리된 눈썹 아래에 루비처럼 붉은, 깊이가 느껴지는 눈동자를 가졌다. 키가 커 언뜻 호리호리해 보이지만 단단히 단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적당히 근육이 잡혀 있었다. 전체적으로 보아도 흠잡을 데가 없는 것이다. 예쁘지만 결코 여성스럽지 않은 외모. 그러나 카일은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인간성을 봐야 돼. 외모는 다 필요 없어. 저런 예쁘장한 외모를 해갖고는 바람을 피우기도 쉬울 테니까.’ 카일은 벌써부터 이디스를 싫어하고 있었다. “흠! 쓸데없는 참견 같지만,” 우선 그는 가볍게 말문을 열었다. 말하는 것을 보면 사람을 알 수 있었다. “우리 딸과 어떤 관계인지 말해줄 수 있겠나? 아버지 된 입장에서 분명히 해 두고 넘어가고 싶네만…….” 이디스는 담담한 눈을 들어 카일과 마주 보았다. 카일은 이디스가 그의 목에 칼을 바짝 가져다 대었을 때도 이렇듯 담담했던 것을 기억해내고는 기분이 나빠졌다. 이런 부류는 성질이 더럽거나 다루기 힘들어, 무척 골치가 아프다. 그는 이디스의 점수를 몇 점 더 마이너스 시켰다. 이제껏 침묵으로 일관하던 이디스의 입이 마침내 열렸다. “인간들 사이에서는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가 중요한가?” 카일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마치 자신은 아니라는 듯한 말투! 카일은 그 순간 알아차렸다. 이 남자는 인간이 아니다! 루피아는 ‘누구냐?’는 그의 질문에 빙그레 웃으며 ‘애인’이라고만 말해줬을 뿐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카일은 ‘애인’이라는 그 한 마디에도 엄청난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캐물을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하지만 굳이 관계를 물은 것은, 다시 한 번 사실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였다) 카일은 일단 확인을 위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 마족인가?” “일단은.” 이디스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카일은 세게 테이블을 내리치며 벌떡 일어나 이디스의 멱살을 잡아 쥐고 소리쳤다. 믿을 수가 없었다. 마족이라니. 마족이라니! 자신의 딸도 딸이지만, 그는 무엇보다 이 마족을 믿을 수 없었다. “무슨 속셈이냐!” 이디스는 너무나 손쉽게 멱살을 잡고 있는 카일의 손을 풀었다. “속셈 따위 없다.” “그걸 어떻게 믿나! 어차피 인간의 100년이야 마족에게 있어서는 순간이나 다름없지 않나?” 이디스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확실히 마족의 수명은 8,000년. 인간의 수명보다 무려 80배 이상이나 차이가 난다. 카일은 그따위 스치는 장난 같은 인연에 딸을 넘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비록 한 번 잃었었지만, 소중한 딸이다. 루피아의 신랑감은, 성실하고 능력 있고 잘생기고 성격 원만하며 눈빛이 살아있고, 예의 바르며 지킬 것 지킬 줄 알고, 장래 유망하고…… 등등, 엄청 까다로운 조건에 들어맞는 사람으로 골라 주려고 했다. 카일의 이 말을 들으면 루피아는 분명 화를 내겠지만 어디서 굴러 들어온 지도 모르는 놈팡이에게 어설프게 넘기는 일 따위 용납 할 수 없었다. 카에리드, 이데카른, 트로에는 물론 카멜라와 자신의 심사(?)까지 통과한 남자라야 비로소 ‘합격’인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이디스는 ‘외모’ 하나만 빼고는 어느 것 하나 들어맞는 것이 없다. 말하는 것을 보니 예의는 어디다 처박아 두었는지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고, 성실한 태도 따위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성격? 눈 꼬리 치켜 올라간 것 하며, 짧게 끝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마다 더러운 성격이 엿보였다.(그렇게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장래 유망? 마족에게 뭘 바라겠는가! 능력? 있으면 왜 여기 있겠는가 말이다. 게다가 눈에 그늘이 진 것이,(아까는 깊이 있다더니!) 뭔가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반대하네! 절대 용납할 수 없다. 당장 내 딸에게서 떨어져!” 카일은 단호하게 선포했다. 어쩐지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더라니. 게다가 루피아도 참 대책이 없다. 분명 마족에 대한 반감이 엄청났을 텐데, 마족을 데리고 오다니! 그것도 모자라서 여, 여, 여- 연인이라니! 분명 지금 눈앞에 있었다면 어렸을 때처럼 볼기짝이라도 때려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런데 이디스의 입에 가벼운 웃음이 걸렸다.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웃음이 떠올랐다. “그래서 물었지 않나? 부모와 자식의 사이가 중요하냐고.” “당연히 중요하지! 무엇보다 중요하다!” 카일은 잔뜩 열이 받아 다시 한 번 테이블을 세게 내리쳤다. 이디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노려보는 카일을 마주했다. 이디스는 이죽거리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뭐, 상관없다. 마음껏 반대하시지.” “무, 무엇이라? 이, 이 망할 자식이!" 점수는 이미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나락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렇게, 짧은 카일과 이디스의 만남은 원수지간으로 끝을 맺었다. 이 날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끝까지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았다. * * * * * * * * * * * * * * * 카멜라는 부글부글 끓는 듯한 얼굴로 씩씩거리는 남편을 보며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난감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카일은 루피아가 데리고 온 남자와 나가서 30분가량을 이야기하더니 ‘결사반대’를 부르짖으며 돌아왔다.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모르긴 몰라도, 분명 고운 이야기는 아니었으리라. 하지만 카멜라는 분명 고운 이야기가 오갔다면 그때는 그때대로 ‘너무 예의발라 기분 나빴다’느니 ‘사내다운 면이 부족한 것 아니야?’라며 트집을 잡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결국 상대가 어떻든지 결과는 똑같았으리라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남편의 딸에 대한 과보호는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오죽하면 사교계를 비롯해 귀족들에게 ‘팔불출 공작’이라고까지(물론 뒤에서) 불렸겠는가? 게다가 그것은 아들들도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아서, 루피아는 네 사람에게 꼭꼭 감춰진 보물 같은 아이가 되었다. 카멜라는 좀더 내보이며 자랑하고 같이 쇼핑도 하고 그러고 싶었지만. 하지만 대신 그녀는 루피아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들에게 소문을 하나씩 흘리며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었다. 사실, 지금껏 돌았던 루피아에 대한 소문은 모두 카멜라의 입에서 흘러나왔던 것이었다. 남편을 어떻게 달래줘야 하나 가벼운 고민을 하며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그녀는 느닷없이 벌컥 문을 열고 들이닥친 집사 때문에 그만 찻잔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꽤나 아끼던 찻잔이었기에 인상을 찌푸리며 한 소리 하려고 했지만 집사의 말에 이야기를 꺼내보지도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도련님들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마님, 주인님, 어서…….” 카일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루피아가 돌아왔다는 연락을 보내기는 했지만 아직 도착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벌써 돌아오다니? 카멜라는 이미 집사를 앞장세워 뛰어가고 있었다. 카일도 아내를 ?아가면서 달려갔다.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불쾌했던 ‘그 녀석’의 기억 따위는 싸그리 지워지고 없었다. 그때까지, 카일은 자신의 집이 마족들의 소굴이 될 것이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 죄송해요- 너무 짧죠;_; 일단 여기까지만 올리고, 나머지는 다녀와서 적어 올리겠습니다. 내일부터 수학여행이라.. 그제, 어제 2일간 시내 돌아다니면서 옷 사고 준비하느라 못 올렸어요. 수학여행은 3박 4일이라 그동안 올리지도 못할 텐데.. 그 전에 조금이라도 더 올려놔야겠죠?; 1시가 약속인데..ㅠ_ㅠ 오늘은 조원들이랑 같이 필요한 것-먹을 것 같은 거- 사기로 했거든요. 음..; 그럼 다시 뵈요~;;[후다닥] 메일 : donghee425@hanmail.net 즐독하세요~ 제 목: 공녀(貢女) : 제42화 [재회하다!](4) #. 제42화 [재회하다!] * * * * * * * * * * * * * * * 그때까지, 카일은 자신의 집이 마족들의 소굴이 될 것이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들 녀석들까지 돌아왔으니 오늘 저녁은 오랜만에 모두 함께 먹겠구나.’ 그는 희망에 부풀었다. 세키라와 에리나, 루피아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얼어붙었다. 오빠들이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달려 나온 것이건만, 생각지도 못한 얼굴이 눈앞에 보이자 그들은 당황해 버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운 얼굴로 제자리에 굳어 있는 그녀들과 아로데, 로이드윈, 유리아덴의 눈이 마주쳤다. “누나아! 누님, 누니이임. 와아, 와! 정말 와 계셨네요! 정말…… 아아, 정말 누님이다아.” 에드윈드가 가장 먼저 세키라의 허리에 안겨들며 외쳤다. 세키라의 멈추었던 시간이 그제야 현실감을 되찾고 돌아가기 시작했다. 세키라는, 정말 오랜만에 마주하는 동생을 미처 보지 못했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도 보고 싶었지만, 그래도 가장 보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 어린 동생이었다. 세키라는 오랜 여행에 지쳤는지 피곤해 보이는 얼굴색과 지저분해진 옷차림을 보았다. 마냥 어린 줄로만 알았는데… 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가장 먼저 보지 못했던 것이 미안해졌다. 세키라는 에드윈드를 꽉 껴안았다. “오랜만이야. 걱정했지? 미안해.” “누님도! 미안하긴 뭐가요? 이제부터는 절대… 절대 아무 곳에도 가지 마세요.” “……그래.” 세키라는 고개를 들어 아로데 쪽을 흘깃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시선을 내리고 에드윈드를 감싸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건강해 보이는구나. 다행히.” 그 말이 다였다. 바르에든은 빙그레 웃어주며 에리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게 다였는데도, 에리나는 눈가가 시큼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도 그렇지만, 정말 칼르니르 가문의 남자들은 말재주가 없다-…. 바르에든은 언제나, 이렇게 말로 하기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성격이 쌀쌀맞다거나 하는 이유가 아니라, 본래 말을 신중히 하자는 생각을 갖고 있는데다 말주변도 없기 때문이었다. “와아! 이 여자애가 바르에든의 여동생이야? 예쁘다!” “…어?” 불쑥, 바르에든의 뒤에서 하얀 머리의 여자가 나타났다. 에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그야말로 하얀 순백의 머리카락에 선명한 은색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여자였다. 하지만 ‘아름답다’는 느낌 외에도 뭔가 어긋난 것 같은 느낌을 들게 했다. 여자가 대뜸 에리나 앞으로 다가와 눈동자 바로 앞에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에리나는 바르에든과 아는 사이인 것 같아 뿌리치지도 못하고 망설이는데 바르에든이 여자의 팔을 잡아 뒤로 잡아당겼다. “어어! 바르에든, 왜 히니를 잡아당겨? 안고 싶어?” “그, 그런 것이 아닙니다! 너무 가까이서 보는 것은 실례…….” “왜애? 눈이 예쁜 것 같아 보려고 했을 뿐이야!” “하지만 예의라는 것이…….” ……바르에든이 당황하고 있다! 에리나는 피식 웃음이 새었다. 모든 것에 냉철하고 똑바르던 그녀의 오빠가, 작은 여자를 상대로 곤란해 하고 있는 모습이라니.(그 ‘작은 여자’는 드래곤이라는 것을 에리나는 아직 모른다) 바르에든은 에리나가 웃기 시작하자 당황하면서도 히니에게 말대답을 해주느라 쩔쩔 매었다. 에리나는 유리아덴에게 일부러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분명 이곳에 있는 것은 계약위반이다. 다시는 그의 곁에서 멀어지지 않겠다고 해놓고서는 이렇게 멋대로 와 버렸으니. 하지만 부딪쳐야 할 일이다. 그녀는 유리아덴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음, 좋기는 한데… 너무 숨 막혀.” 루피아의 말에 카에리드와 이데카른, 트로에는 그제야 팔의 힘을 풀고 얼굴을 들었다. 세 사람이 한꺼번에 달려드는(?) 바람에 루피아는 까딱 잘못해 질식사 할 뻔 했다. 카에리드와 이데카른, 트로에는 웃는 얼굴로 그들을 마주하는 동생의 얼굴이, 너무나 오랜만이라- 또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난처해하는 얼굴이 반가워서, 다시 한 번 꼭 껴안았다. 안긴 루피아는 다시 숨 막힌다고 소리쳤지만.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다. 꼬맹아.” “난 이제 어린애 아니야.” “……우리한테는 평생 꼬맹이야, 꼬맹아.” 루피아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너무나 오랜만이었다. 이런 느낌.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안전하고 포근할 것만 같은 느낌- 햇볕을 머금은 부드러운 마른 이불에 얼굴을 대고 돌돌 말아 누웠을 때의, 그런 느낌-……. 그리웠다. 그리웠다. 엄마도, 아버지도, 오빠들도 모두 너무나 보고 싶어서 매일 밤 눈물이 비어져 나오는 것을 억지로 눌러가며 참았었다. 이제야 다시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어, 루피아는 오빠들의 목에 팔을 둘러 매달렸다. 지금은 이런 어리광, 조금쯤은 괜찮겠지…? 모두 어리다. 카에리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리기 때문에 이렇듯 무모해질 수 있는 것이다. 어른이었다면 동생을 구하겠다고 나서지 않았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려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치해도, 뭐 어떤가? 한편 루피아는 앞날이 암담했다. ‘……이디스에 대해서 말했다가는, …-피를 볼지도 모르겠다.’ 아로데와 로윈, 유덴은 감격적인 가족상봉의 장면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인간들에게 있어서 ‘가족’이란 존재는 무척 소중하고, 또 중요하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아로데는 세키라와 어정쩡한, 아직 화해도 하지 않은 상태이고, 유리아덴과 에리나 역시 사이가 그다지 매끄럽지 못한 것을 감안했을 때 지금 마주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방법은 아닌 듯했다. 로이드윈은 정원 쪽에서 걸어 나오는 이디스를 발견했다. 아로데와 유덴 역시 이디스를 발견하고 그에게 다가갔다. 이디스는 마치 그들이 올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전혀 놀라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것은 세 마족도 마찬가지였다. “얼굴, 좋아 보이는군요.” “아아. 그렇지.” 로윈은 씩 웃었다. 이디스는 괜찮아 보였다. 오히려, 마계에서 마왕으로써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여유로워 보였다. 마계에서의 그는, 완벽했지만 무언가 하나를 놓친 것 같은 공허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것은 오랜 세월 가까이서 그를 섬긴 세 마족만이 알 수 있는 점이었다. “바보 같은 녀석들. 유람이라도 온 거냐?” 냉정한 판단력. 강한 마력. 뛰어난 주술(呪術). 단체를 휘어잡을 수 있는 카리스마. 그는, 그들이 아는 한 그 누구보다 ‘마왕’의 자리에 어울리는 존재였다. 선대 마왕이었던 카디스도 이디스에 비하면 부족한 면이 있을 정도다. 세 마족은 작게 미소를 그렸다. 다른 누구도 없지 않은가. 인정할 수 없는 자를 주인으로 모신다는 것은, 그들의 자존심이 용납할 수 없었다. “아, 저번 계약 때 놓아두고 온 것이 있나 보더라고요.” “에이, 칠칠맞지 못한 자식.” “……흥.” 이디스는 가볍게 코웃음만 쳤다. ===================== 다 못 쓴 재회하다(3)의 연장 부분입니다. ...낮에 올린 글 말인데요. 제목에 (貢女)라는 한자도 빼먹고, 숫자도 (3)을 (2)로 잘못 적어놓았더군요-_-; 제가 정신이 없어서.. 죄송해요.^^; 지적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아아, 점점 유치해져만 가는 저 행태! ..들.ㅠ_-[한숨] 메일 : donghee425@hanmail.net 즐독하세요~ 제 목: 공녀(貢女) : 제43화 [인간계에서 지켜야 할 수칙 몇 가지](1) #. 제43화 [인간계에서 지켜야 할 수칙 몇 가지] * * * * * * * * * * * * * * * 그는 마족이고, 나는 인간이고, 그가 살아온 곳은 마계이고, 내가 살아온 곳은 중간계이다. 이 차이는 결코 변하지 않는 사실이며 우리의 거리였다. 내가 마계에 가서 적응하기 힘들었던-다들 절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만큼, 그도 중간계에 적응하기 힘이 들었겠지. 나는 18년- 아니, 거의 19년을 살았다. 그동안의 습관과 사고방식은 이미 몸에 배어 떨쳐버리기 힘들다. 그는 500년을 넘게 살았으니 오죽할까? 그리고 이미 9,000년을 가까이 산-아아, 생각하면 할수록 끔찍한 숫자다!- 세 명의 마족들도 그 오랜 세월의 생활 패턴을 바꾸기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제발, 제발, 제발, 그 말버릇 좀 고쳐 주었으면!(지금도 바란다고! 알아들어?) =======================루피아의 자서전================ 루피아는 돌아왔다.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꿈에도 그리던 중간계의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늦은 밤, 어울리지도 않게 달과 함께 궁상떨며 떠올리던 그 집으로, 가족에게로 돌아온 것이다. 과정은 쪼-오금 마음에 걸리지만, 어쨌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그러나 현재, 그녀는 전혀 행복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녀는 부릅뜬 눈으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손에 들린 종이조각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건 꿈일까? 꿈이 아니라면 절대, 이 망할 종이쪼가리가 손에 들려 있어서는 안 된다. 아니, 꿈에서라도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어서는 안 될 종이였다, 이것은. 그녀는 이마에 내 천(川)자를 그려 넣고 신음을 흘렸다. ‘이것을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이럴 줄 알았으면 아무리 돈이 궁해도 절대 손을 대지 않는 것인데. 그녀는 후회했다. 너무 위험한 상대를 건드린 것 같았다. 황성에 연줄이 닿은, 아니 황성 그 자체라고 해도 될 상대를 건드리다니. 지금 생각해보니 미친 짓이었다.(그때는 기막힌 아이디어였지만) 그녀는 조그맣게 걱정으로 뭉쳐진 숨을 토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종이는, 예쁘고 세련된 문양이 금박으로 입혀져 또박또박한 필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귀하를 황성 무도회에 초대합니다.」 라고. 이것 빼고 저것 뺀, 심하게 생략된 말이었지만 골자는 위와 같았다. 원래는 없는 사람이어야 하는 루피아에게 어째서 저런 종이쪼가리가 전달될 수 있었느냐 하면, 그것은 황태자의 힘이었다. 지금 이 종이쪼가리에 적힌 사람은 그녀가 아니었지만 그녀였다. 종이 위의 여자에게는 신분도, 이름도 없었고 그저 황태자의 인장과 서명만이 선명하게 찍혀져 있다. 뒷장에는 친절하게도 ‘생명의 은인 분께’라고 적어 놓았으니, 그녀가 아니라고 발뺌할 수도 없는 상황. 덧붙여, ‘초대장은 왜 두 장이야!’ 정확히 다시 말하자면, 루피아와 이디스는 황성 무도회에 초대가 된 것이다. 그저 무시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지만 칼자루를 쥐고 있는 사람은 황태자였으니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여차하면 확 불어버리는 수가 있으니까. 그녀는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생각하니 골치가 아팠다. 안 그래도 이디스가 아버지와 오빠들에게 찍힌(?) 것 같아 머리가 아픈데. 여태껏 심각한 척, 계속 굳은 얼굴만 하고 있었더니만 불행이 그녀를 두드리나 보다. 역시 사람은 웃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녀는 절감했다. 이디스, 그가 이런 상황이 된 것도 그가 웃지 않아서다. 음, 이거 말 된다. 세상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은 바로 그녀 자신이다. 저런 남자 어디가 좋은지, 에리나와 세키라가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것처럼 루피아 자신도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눈물로 애원하고, 화도 내고, 협박까지 해가며 ‘저놈은 안돼!’를 외치는 아버지-와 오라버니들-를, 그녀는 솔직히 말해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얌전히 입을 다물고 싱글싱글 웃으며 그들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는 우선 얼굴, 외모는 번드르르하다. 오라버니 말을 빌려 얼굴 매끄러운 녀석 치고 성격 좋은 놈 없다는데 솔직히 성격 참 나쁘다. 더럽다, 까지는 아니더라도 나쁘다, 고는 자신 있게 평할 수 있는 성격이다. 그 성격은 파악하기도 어렵고 헷갈려 속을 알 수가 없다. 그것이 제일 안 좋은 점이다. 어떻게 나쁘냐 하면, 우선 말이 없다. 침묵이 금이라고? 어디서 그런 헛소리를 하나? 지금, 그에게 ‘침묵은 금이니까 말을 아껴요’라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 그에게 침묵은 공기이자 산소이며 마누라다. 말이 없으니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도 없고, 그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천직인 마왕 자리에서 쫓겨나고, 동생에게 칼침을 맞아 배에 구멍 뚫리고, 죽다 살아난 주제에 화도 안 내고, 그렇다고 슬퍼 보이지도 않는다.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원체 티를 내야지! 그녀는 이제껏 ‘힘들 시기니까 자중하자’라며 스스로를 타일러 왔지만, …슬슬 한계다. ‘이런 건 내 스타일이 아니야! 난 성격 급하고, 더러워! 제-에기랄!’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먼저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 했다. 그녀는 일단 에리나와 세키라를 불렀다. 자초지종을 듣고 제일 먼저 두 사람이 한 말은, 간단했다. “미친 짓이야!” 그래, 잘 안다. 이 무도회에 가는 것은 정말 미친 짓이다. 아무리 그녀의 얼굴이 사교계에 알려지지 않았어도, 이디스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해도. 황태자의 초대에 응하는 것은 그야말로 섶을 지고 불로 다이빙하는 꼴이요, 드래곤 레어에서 강도 짓하는 꼴인 것이다. 하지만 거절할 방법이 없다.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는 솔직한 루피아의 얼굴을 마주한 두 친구는 혀를 찼다. 십중팔구, 아니 거의 100%- 그녀들의 예쁜 친구는 아무 생각 없이 돈줄이라고 생각하고 황태자를 덥석 물었으리라. 평소에는 그렇게 침착하고 경제관념 투철하고 이것저것 다 재볼 줄 알면서 어떨 때는 이렇게 무모하다. “그래, 어떻게 할 거야? 그… 분을 데리고 가려면 힘들 텐데. 우선, 예법도 제대로 모르시잖아. 게다가 부모님께는 어떻게 설명할 생각인데?” 에리나는 이디스에게 깍듯이 경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일단 존대를 하는 것은 루피아도 마찬가지지만 루피아의 경우 약간 반말도 섞어 사용하고 있으니 에리나와는 차이가 있었다. 에리나와 세키라는 이디스와 말도 제대로 못해봤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모르지. 이제부터 생각해봐야지. 일단 엄마, 아버지한테는 다 말할 생각이야.” 루피아는 머리를 긁적였다. 자신도 무도회 참석 경험이 없으니 어렵긴 매한가지. 그녀는 커다란 눈을 데구르르 굴려 두 친구를 빤히 보았다.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에 담긴 메시지를, 두 친구는 쉽게 잡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루피아는 실없이 웃어 보인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둘은 눈이 가늘어졌다. “같이 가 줄 거지?” “……대가는 톡톡히 받아낼 거야.” * * * * * * * * * * * * * * * 무도회는 일주일 후이다. 일주일, 길다고 하면 길지만 짧다면 엄청 짧은 기간. “안 간다.” 루피아의 하얀 이마에 실핏줄이 돋아났다. 그녀의 설명을 듣자마자 숨 한 토막 지나갈 틈도 없이 그는 단칼에 잘라 거절해 버렸다. 안 갈 수 있었으면 말도 꺼내지 않았을 거다! 루피아는 다다다 쪼아주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삼킨 후, 다시 말을 꺼냈다. 진정하자, 릴렉스.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혀준다는 주문을 몇 번이나 외웠다. “그러니까, 이미 정체를 저당 잡힌 이상…….” “안 간다.”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단호한 목소리로 자르는 그의 목소리. 루피아의 안에서 뭔가 끊어지는 소리가 ‘뚝’하고 들렸다. 그것은 이제껏 그의 상황을 생각하며 꾹꾹 눌러왔던 성질이었으며, 어울리지도 않게 비련의 여주인공인 듯 착각에 빠졌던 우울함이기도 했다. 즉, 이제껏 참아왔던 그녀의 성질인 것이다. “정말, 제멋대로 굴 거예요! 어린애도 아니고!” “……뭐?” 갑작스런 그녀의 호통에 놀랐는지 그가 되묻는다. 다 큰 남자가 그녀의 호통에 놀란 모습이 귀엽기도 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안 갈 수 있었담 말도 안 꺼냈을 거라고요! 여기 온 이상, 이 정도는 해줘야 하잖아! 계속 이렇게 있을 거야? 앞으로 어쩔 거냐구!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요? 힘들 시기라 생각해서 입 다물고 얌전히 굴었지만, 그런 순종적인 여자상(像), 나한테는 안 맞아요!” 루피아는 이 기회에 할 말 다 하겠다고 결심이라도 한 듯 다다다 말을 쏟아냈다. “왜 하나도 말을 하지 않는 거야? 앞으로 어쩌겠다던가, 지금 기분이 어떻다던가, 그런 것들은 내게 말해줘도 되잖아요? 내가 그렇게 믿을 만한 존재가 못되는 거야! 이래봬도 좋아한다고 인정하는 것도 무지 많이 힘들었고 고민했었는데. 나는 정말 진지한데. 내가 아는 당신은 진짜 요괴 같고, 제멋대로였어! 에이, 젠장! 나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아!” 결국 정리가 되지 않아 자폭하고 만 루피아는 하고 싶었던 말을 다 해서 속이 시원하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이디스는 뭔가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벌리려는 찰나, 초조해진 루피아가 선수를 가로챘다. “하여간 일주일 후 무도회에 갈 준비를 할 거니까 순순히 협조해요!” 이런 빌어먹을! 이게 어디가 ‘사랑하는 연인’의 모습이야? 남들이 보기에는 마왕과 공녀의 신분(?)을 뛰어넘는 아름다운 사랑, …이었지만, 그 실체는 연애 테크닉 꽝! 의, 서툰 남녀-말없는 남자와 성질 더러운 여자-일 뿐이었다. * * * * * * * * * * * * * * * “엄마. ……정말 이 많은 것이 필요해?” 할 일이 많으면 우선 목록부터 만들어 보고 하나씩 차근차근 해 나가라던 옛날 엄마의 조언을 실행에 옮긴 딸은 질려서는 말했다. 끔찍하다는 듯 위에서부터 목록 조항을 읽어 내리던 눈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어두워진다. 카멜라 여사는 딸의 절망어린 물음에 잔인하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크고 정확한 동작으로 두 번씩이나. 솔직히 그녀로서는 이런 식으로라도 그녀를 사교계에 내보일 수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기뻤다. 그동안 딸 가진 엄마들을 얼마나 부러워했던지! 딸이 있으면서도 내보일 수 없다는 것이 카멜라는 무척 슬펐다. “갑자기 에리나하고 세키라가 무지 존경스러워졌어. 이걸 다…… 윽!” 게다가 뒷장은 더더욱 암담하다. 뒷장에는 이디스가 해야 할 일들의 목록이 죽 적혀 있었던 것이다. 이디스의 ‘교육’은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이 담당하기로 했지만 솔직히 루피아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딱 보기에도 거의 원수진 것처럼 달려들 태세였다. 살기가 줄래줄래 뿜어져 나오는 것이 옆에서 봐도 살벌했는데. 정말 괜찮을까? 근심이 어리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카멜라가 살풋이 작은 미소를 지었다. “걱정이 되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설마 죽이기야 하겠니.” 밝게 웃으며 카멜라는 말했다. 카멜라도 많이 놀랐지만 이미 루피아가 결정한 이상 미련을 두어봤자 소용없는 짓이라 판단하고 일치감치 응원해주는 쪽으로 마음을 돌렸다. 드래곤 심줄보다 더 굵고 단단한 루피아의 고집은 익히 알고 있는 바였다. 이 아이는 아주 철저해서, 한 번 결정을 내리면 절대 바꾸지 않지만 그 결정은 어른도 감탄할 정도로 신중하게 내렸다. 카멜라의 말에 루피아는 웃어야 했지만 웃을 수가 없었다. 그래, 설마 죽이기야 할까마는 그 직전까지 갈 가능성이-…… 무엇보다 그는 ‘가족’이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이런 걱정까지 해야 하다니. 어쩐지 한심해져서 루피아의 눈이 하늘을 향했다. 카멜라가 말을 걸어왔다. “우리 막내꼬맹이. 고민이 있는 것 같은데? 말해 봐.” “막내는 맞지만, 나 꼬맹이는 아니야.” 루피아는 투덜대듯 말했지만 정말 싫은 것은 아닌 듯, 입술만 비죽이고 말았다. 잠시 후 루피아의 입에서는 한참 그녀를 괴롭히고 있는 이디스에 대한 불만과 의문이 흘러 나왔다. 그 남자, 너무 말이 없어. 우리, 서로 사랑하고 있는 게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워. 어쩌면 이렇게 어색할 수가 있어? 또, 아무 것도 내게 말을 해주지 않아.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지조차. 비밀이 너무 많은 것 아니야? 마계에 있을 때는 너무 직설적이라 당황할 정도였는데. 나만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아. 너무 태평해보여. …-등등. 그녀의 말을 다 듣고 난 카멜라는 눈매 가득 웃음을 띠고 말했다. “조금 더 고민해보렴. 잘 될 거야.” 그 말이 다였다. 뭔가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해줄까 싶어 기대했건만, 정말 그 말이 끝인지 카멜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목록에 적힌 사항 중 필요한 용품들을 사기 위해서였다. 루피아는 굉장히 신이 나 보이는 엄마가 왠지 원망스러웠다. 그나저나, 이디스를 아버지와 오빠들에게 맡겨도 정말 괜찮은 걸까? 불안하네. 가 볼까? 시리우스 제국의 황성 예법. 상황에 맞는 대답을 해야 하므로 처세술. 정체를 숨겨야 하니까 말투도-대놓고 ‘나 마족이오!’라고 말하는- 고쳐야 한다. 할 일이 많은데 남자 예법은 모르니까 도와줄 수도 없는 노릇.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루피아의 머릿속에 문득 누군가의 얼굴이 번뜩 떠올랐다. 그들이라면 오랜 시간 이디스를 옆에서 모셔 온데다, 자주 중간계를 들락날락했다고 들었으니 예법도 어느 정도 알 터이다. 그렇다며 이런 경우 가장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 ‘잘 됐다. 아버지와 오빠들만으로는 벅찰 거야.’ 그녀는, 그들이 오히려 세 사람을 더 힘들게 만들 것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은 채 룰루랄라 가벼운 발걸음을 떼었다. ========================== 에.. 결국 밤을 꼴딱 세는군요. 금요일 저녁에 돌아와서 오늘이 토요일, 에, 일요일이니까.. 이거 며칠만에 올리는지.-_-; 수학여행 첫날, 오른쪽 눈이 좀 붓더니만 다래끼더군요. 그것도 안에 났어요. 여행 동안 어쩌지도 못하다가(약국도 없더군요) 결국 오늘 안과에 가서 치료를 했답니다. "큰 거네. 너무 오래 방치해둬서 고름을 빼야 겠는데.." 라고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시면서 갑자기 눈을 까뒤집은 채 뭔가 바늘을 쿡! 찔러넣어 후비는데-...; 무지 아팠어요. 엉엉 울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비명 비스무리한 것까지 지르고 눈물 짜고.. 다시는 다래끼같은 거 안 났으면 좋겠어요. 정말. (거기다 코피, 감기까지.. 몸 컨티션은 정말이지 최악이었습니다-_-;) 이제 다시 힘내서 적어야지요. 일단 이번 화(話)를 끝내면 외전 들어갑니다! 다음 편에는 에.. 황태자가 다시 나올라나요. 메일 : donghee425@hanmail.net 카페 : http://cafe.daum.net/fantastiknovel 리플 : 아래에~ 즐독하세요☆ 제 목: 공녀(貢女) : 제43화 [인간계에서 지켜야 할 수칙 몇 가지](2) #. 제43화 [인간계에서 지켜야 할 수칙 몇 가지] * * * * * * * * * * * * * * * 일주일은 후딱 지나갔다. 말 그래도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 일주일은, 모두에게 여러 의미로 폭풍 같은 나날들이었다.(엘 세느안트 가문의 남자들은 입을 모아 그만큼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던 적은 처음이라고 말한다.) 루피아는 신이 난 에리나와 세키라는 물론, 잔뜩 벼르고 있었던 듯 이것저것 꺼내보고 대어보는 카멜라와 베키에게 휘둘렸고 이디스는 엘 세느안트 가문의 네 남정네와 부하 셋에게 여러 가지를 배웠다. 그 과정은 매우 힘들고 거칠었지만(?) 어쨌든 시간은 흘렀고, 연회 첫째날의 하루가 밝았다. “그래서, 가르칠 것들은 다 가르치셨어요?” 잠시 뒤면 카멜라와 베키에게 끌려가야 하겠지만 루피아는 제법 여유 있는 얼굴이었다. 사실 그녀는 예법 정도야 문제가 없었고 필요한 것은 꾸미는 것에 필요한 장신구와 적당한 드레스뿐이었기에 자신이 준비해야 할 것은 그다지 없었다. 주위에서 워낙 비장한 각오로 덤벼들어 맞춰주는 것이 힘들 뿐이었다. 그러나 괴로운 것은 괴로운 것이었는지 조금은 얼굴이 안 좋아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눈앞의 엘 세느안트 공작- 카일에게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鳥足之血)이다. 고작 일주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카일의 얼굴은 눈에 띄게 핼쑥해져 있었다. 스트레스를 얼마나 받았는지 속도 안 좋았고 미간 사이에는 주름이 아예 자리를 잡았다. 눈 밑의 기미는 물론이고 눈도 충혈 되어 있어 심히 보기 안 좋다. 루피아는 ‘가르치는 것이 힘들기는 힘들었던 모양이구나.’하고 조심스레 짐작만 해볼 뿐, 더 깊이 생각하지는 않기로 했다. 정계에서 뼈가 굵고 사람을 다루는 일에 있어서는 따를 자가 없다는 카일이 이럴진대, 세 오라비들은 과연 어떤 몰골일지. 그녀는 혀를 찼다. 카일은 찡그린 얼굴로 대답했다. “배우는 속도는 빠르더구나. 기품이랄지, 뭐랄지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절도가 있어 가르치기에는 편했다. 그래서 예법에 관해서는 완벽하다만…….” 카일은 말끝을 흐렸다. 이미 배운 것이 있어서인지 가르치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게다가 머리도 뛰어나 오히려 그가 놀랄 정도였다. 그는 ‘그 자식’에 관해 가지고 있던 사항 중 하나를 수정해야 했다. ‘그 자식’은 적어도 어느 정도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자다. “……말투는 도저히 고칠 수가 없었다. 허나 말이 많은 편이 아니니 괜찮을 게야.” 그것이 그나마 다행인 점이었다. 말이 많았다면(상상이 안 되지만) 대번에 정체가 들통 날 것이다. 가장 문제인 것은, 본인 스스로가 정체를 감출 마음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그것을 루피아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뭐라 말하지 못했다. 어쩌겠는가? 싫다는 것을. 그것보다 루피아는 조금 걱정이 되었다. 일주일 전, 그렇게 쏘아붙이고 난 뒤 한 번도 얼굴을 마주하지 못했던 것이다. 둘 다 바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참을 이어가던 그녀의 상념은 콰당, 하고 문 여는 소리에 깨어졌다. 그곳에는 당당한 자태(?)를 뽐내는 카멜라를 비롯한 베키, 에리나, 세키라가 서 있었다. 루피아의 얼굴이 살짝 질렸다. 카일은 명성에 걸맞지 않게 어깨를 움찔, 하는 소심함을 보였다. “여기서 뭘 하는 거니! 일찍 오라고 하지 않았니?” 카멜라가 허리에 손을 얹고 엄격하게 말했다. 베키가 옆에서 거들 듯 한 마디 찔러 넣었다. “어서 일어나세요. 지금부터 준비해도 빠듯하단 말예요.” “데뷔 무대잖니. 비공식적이기는 하지만. 그치, 에리나?” “그럼! 우리도 다 겪은 일이야.” 으, 피해봤자 소용없는 일인걸. 이미 요 일주일간 그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한 루피아였다. 그녀는 도망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끈한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난 그녀가 다가오자 카멜라는 흡족한 미소와 함께 딸의 손목을 잡고 이끌었다. “……제발 적당히 해줘요. 부탁이니까.”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루피아는 나지막이 말했다. 그것은 이 상황을 조금이라도 낫게 해보려는, 그녀의 마지막 발악이었다.(너무나 약하고 힘없는) * * * * * * * * * * * * * * * 오랜만에 사교계는 시끄럽게 술렁였다. 그동안 사교계는 꽤나 잠잠하게 가라앉아 있었던 편이었다. 그것은, 일명 ‘사냥감’이라고 할 수 있는 대상 중 굵직굵직(…)한 대어(大漁)들이 모두 한꺼번에 빠져나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제 딸에게 최고의 신랑감을 안겨주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적령기의 딸을 둔 어머니들은 오랜만에 복귀한 공작가문 자제들을 환영했다. 잘만 하면 꽃잎이라도 뿌려 줄 태세였다고 하면 너무 과장인 것일까? 시리어스 제국에서만 공녀(貢女)로 100여명의 아가씨들이 차출되어 바쳐졌고, 시장(?)에 남겨진 아가씨들은 때를 놓친 노처녀거나 너무 어린 아가씨, 혹은 백작 이하의 가문에서 태어난 아가씨들이었다. 또 백작 작위 이상의 가문이지만 언니를 공녀로 보낸 동생들도 남아 있었다. 부족한 아가씨들 때문일까? 사교계는 드물게도 침체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들으셨어요? 이번 연회에는 공작가 자제분들이 모두 참석을 하신다면서요?” “그렇다고 하네요. 황태자 전하께서 돌아오신 것을 축하하는 자리인데 잘 되었군요.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은퇴하신 공작각하께서도…….”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호화로운 분위기이지만 어딘지 답답한 침체된 공기가 흐르는 연회장은 사람들의 호기심으로 점점 더 뜨거워졌다. 출처를 모르는 소문은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와 다른 귀로 들어갈 때마다 점점 커지고 부풀려졌고 결국 터무니없는 말이 되어 입과 입 사이를 떠돌게 되었다. 엘 세느안트, 에스베크, 칼르니르- 세 공작가문은 언제나 사람들의 입을 오가는 좋은 소재거리이자 관심의 대상이었다. 연회의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어 갈 때쯤이었다. 드디어, 문지기의 낭랑한 목소리가 그들이 기다리던 사람들의 이름을 소리 높여 불렀다. “에스베크 각하와 공자께서 납시셨습니다!” “칼르니르 각하와 공자께서 납시셨습니다!” “엘 세느안트 각하와 공작부인, 공자들께서 납시셨습니다!” 과연 사이좋기로 소문난 집안들답게 연회장에도 함께 들어섰다. 공녀 사건 이후로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공작들까지 함께 모습을 드러내니 사람들의 관심은 급속히 그들에게로 쏠렸다. 이 연회가 이루어지는 이유는 이미 사람들 머릿속에서 새카맣게 지워져버린 듯하다.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그들은, 어쩐지 야위어 보였다. 다들 고생이 심했구나, 라고만 생각했을 뿐 별다른 말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살이 요 일주일동안 ‘쏙’ 빠져버린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들은 놀랄 것이다. 스포트라이트가 그들을 화려하게 비추는 동안, 이름마저 불리지 않고 초대장만 쓱 내밀어 연회장으로 발을 들여놓은 두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루피아와 이디스였다. 아무래도 주목을 받으면 위험하다는 판단 하에 루피아가 낸 아이디어였다. 모두가 한꺼번에 등장해 관심을 돌리고 그 사이 재빨리 연회장 사람들 틈에 섞여버리는 것이다. 다행히도 계획은 성공한 듯 보였다. 루피아는 지나치게 하늘거리는 드레스를 다잡아 한손으로 틀어쥐었다. 옆머리를 땋아 말고, 나머지는 자연스레 늘어뜨리도록 했다. 거기에 장식물을 몇 개 달고, 카멜라의 손길을 다시 한 번 거쳤다. 드레스는 세키라와 에리나, 카멜라와 베키가 며칠동안 심사숙고하여 고른, 루피아에게 딱 어울리는 아름다운 연보라색과 하얀색이 조화된 것이었다. 그동안 몇 번씩 입었다 벗은 그 옷들은 뭐냐며 루피아는 속으로 외쳤다. 이디스의 모양새도 더없이 훌륭했다. 특히, 그에게 맞춘 검은색 연미복(燕尾服)은 정말이지 딱 어울린다. 그의 긴 검은 머리카락은 가볍게 뒤에서 묶어 잘 정돈되어 있었고 붉은 눈동자가 인상적인 단아하고도 침착한 얼굴은 쉽게 눈을 떼지 못할 정도였다. 정작 본인은 지루하고 불편하다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황태자 루블리츠는 두 번째 테라스에서 만나자고 했다. 루피아는 약속장소를 들었을 때 세키라와 에리나가 그럴 만 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것을 떠올렸다. 그녀들의 말에 따르면 자고로 테라스는 소위 말하는 ‘잘 나가는 아이들’이 모이는 장소로, 그다지 눈에 띠지도 않으면서 뽑을(?) 것을 뽑을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고 했다. 정원은 연회장과 너무 떨어져 있고 휴게실은 너무 폐쇄적이라 자칫 소문이 잘못 나면 곤란하기 때문에 잘 나가는 아이들은 이미지 관리를 위해 잘 가지 않는다. “오랜만이군. 그동안 잘 지냈소?” 마치 지켜보고 있기라도 한 듯 때를 맞춰 황태자가 들어서며 말을 걸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다지 오랜만인 것은 아니었지만 괜히 시비를 걸고 싶은 마음이 없던 루피아는 살짝 고개만 끄덕이는 것으로 응답을 했다. 황태자는 일주일간 그 고생을 하게 만든 장본인이었으므로 곱게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녀는 슬쩍 흘겨보며 말했다. “얼른 용건을 말씀해주시죠.” “너무 그렇게 재촉하지 마시오. 자, 한 잔 하시겠소?” 루블리츠는 그렇게 말하며 미리 들고 온 잔을 이디스에게 내밀었다. 루블리츠는 루피아 못지않게 이디스에게도 관심이 있는 듯했다. 이디스는 잠시 침묵했으나 곧 자연스럽게 루블리츠가 내미는 잔을 받았다. 루블리츠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동행한 시간은 꽤 길었는데 아직 통성명도 제대로 못했군. 난 루블리츠 드 시리어스라 하오. 그대는?” “이디스.” 이디스는 짧게 대답하고는 루블리츠의 잔에 잔을 부딪쳤다. 챙, 하고 유리 부딪치는 소리가 맑게 퍼졌다. 예법에 맞지 않는 행동이었지만 루블리츠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루피아의 멈췄던 심장이 그제야 미친 듯한 속도로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사실 그녀는 루블리츠가 이디스에게 말을 걸었던 그때부터 숨을 멈추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 안심하게. 나는 그대들에게 해를 끼치려 불러낸 것이 아니야. 단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일 뿐이지. 엘 세느안트 가문을 적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으니 섣불리 손을 대지는 않아.” 루블리츠의 시선이 연회장 안의 엘 세느안트 공작을 향했다. 엘 세느안트 공작의 딸 사랑은 사교계에서 아주 유명했다. 끈질기게 딸을 꼭꼭 감싸 안고 보여주지 않는 주제에 딸 이야기만 나오면 입이 찢어지게 좋아하는 것만 보아도 그의 딸 사랑을 절실히 느낄 수 있다. 평소 그렇게 냉정하던 그이지만 딸 이야기만 꺼내면 사람이 아주 달라졌다. 그래서일까? 신비의 베일로 꼭꼭 감싸인 공녀(工女) ‘루피아 엘 세느안트’는 엄청난 소문을 달고 다녔다. 그 수많은 소문의 주인공을 앞에 두고 루블리츠는 뭔가 남다른 느낌을 받았다. 여타 귀족 여식들과는 많이 다른 느낌이다. 그것은 그녀의 남다른 외모와도 관련이 있지만 그것보다는 특유의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루블리츠의 각막에는, 아직도 ‘가벨’에서 보았던 루피아의 잔상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눈을 감으면, 그 뒷모습이……. 루피아를 보는 루블리츠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하자 이디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래서, 확인하고 싶은 것이라는 것은요?” “아, 별 것 아니오. 사실, 잠시 고민을 했지. 이 제국의 황태자로서, 당신을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에 대해. 잠시 지켜보기로 결론이 났소. 그 동안 우려할 만한 일 따위는 조금도 없었던 점도 없었고.” 우려할 만한 일, 이란 당연히 마족이 ?아오는 것일 테지만 루피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용건이라는 것이 이렇게 간단한 것이었을 줄이야! 요 일주일 간의 고생을 되새기며 그녀는 얼굴을 구겼다. 황태자가 더욱 더 좋게 보이지 않았다. 루블리츠는 가볍게 웃고 있었고 그것은 루피아의 눈에 더없이 느끼하게 보였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아도 되나요?” 상대가 곱게 보이지 않으니, 자연 어투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당장이라도 되돌아갈 듯한 루피아의 손목을 루블리츠가 잡았다. “그래도 그렇게 가면 섭섭하지 않겠소? 잠시 즐기다 가시오.” 사실 두 사람을 한 번 더 보고 결정하려던 것도 있었고, 어쨌든 스스로도 정리를 해야 했기에 부른 것이었지만 속내는 그녀를 한 번 더 보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을 루블리츠는 부정하지 않았다. ‘가벨’에서의 환상을 본 이후 루피아는 분명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만큼 마음이 있다는 소리인 것이다. 그래서 루블리츠는 그녀를 잡았다. “……!!” 아니,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루블리츠의 손은 목표했던 곳에 닿지 못한 채 어긋나 있었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루피아가 고개를 들자 그녀의 뒤에는 이제껏 지켜보기만 하던 이디스가 서 있었다. 그는 루피아의 어깨를 팔로 두른 채 루블리츠의 손을 막아내고 있었다. 의아한 듯 놀란 두 개의 시선이 그에게 가닿았다. “……루블리츠 드 시리어스, 라고 했나.” 제국의 황태자에게 하는 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무례한 어투였다. 덜컹, 심장이 내려앉는 루피아였지만 그녀는 차마 끼어들 수 없었다. 어깨를 감싸 안은 그는, 너무 가까이 있다. 자신의 심장소리가 들릴까 조심스러워질 지경이었다. ‘저 말투는 어떻게 안 되는 거야! 자기 상황을 좀 알아달라구!’ 그저 속으로만 외치는 루피아였다. 그러나 독심술(讀心術)이라도 익히지 않은 이상 그녀의 마음속 외침까지 듣기에는 무리가 있는 이디스는, 평가하는 듯한 눈으로 루블리츠를 아래위로 훑었다. 이것 역시, 예절과는 무우우우-척 거리가 먼 행동이다. 루피아는 다시 한 번, 가르치긴 뭘 가르쳤냐고 속으로 외쳤다. “다시 한 번만 더 그런 눈으로 이 여자를 봤다간,” 이디스는 잠시 말을 끊었다. 선홍색 눈동자. 처음 이 눈을 마주했을 때 루피아가 느꼈던 공포감이 그대로 루블리츠를 훑었다. 핏빛처럼, 선명하고 아름다운 홍(紅)색 눈동자. 마치 꿰뚫어버릴 듯한 직선적인 시선 속에서 루블리츠는 발가벗겨진 것 같은 기분을 맛보았다. 황태자인 자신이, 제국의 황태자인 자신이- 이런! 수치심에 루블리츠의 속은 어지럽혀질 대로 어지럽혀졌다. 그리고 수치심. 순간, 루블리츠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빙설(氷雪)처럼 차갑고 딱딱하다 여겼던 남자의 얼굴이 봄눈이 녹듯 사르르 풀린 것이다. 그것은 맨 처음 그를 보았을 때 여자를 보고 미소했던 때, 딱 한 번 보았던 것 이후로 처음이었다. 단아한 얼굴이 웃는 얼굴로 휘어지자, 마치 보름달의 환한 빛처럼 화려하게 느껴졌다. 넋이 나갈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다. “그 눈깔을 뽑아 버리겠습니다.” 일주일 특별훈련의 결과는 이렇게 나타났다. 교육은 위대하다(?). * * * * * * * * * * * * * * * “으! 생각이 있는 거예요? 그 사람, 그래도(?) 제국의 황태자라고요! 후계자! 그런 사람한테 그렇게 막 말을 하면 어떻게 해요!” 루피아의 추궁에 이디스의 미간이 곱게 찌푸려졌다. 그는 나름대로 예의를 차린답시고 마지막에 평생 쓰지 않던 존대까지 해주었건만 루피아는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럼 어떻게 했어야 하나?” “존대까지는 바라지도 않았어요. 반말을 하더라도-… 윽! ‘눈깔’을 뽑아버리겠다니! 그런 말이 어디 있냐구요! 그 사람, 그래도 우리를 봐주겠다고 했다구요. 잘 넘어간다고 했는데.” 이디스의 얼굴이 더 구겨졌다. 조금 전부터 루피아는 그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가까이 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이 못마땅했다. 투덜거리면서도 거리를 두는 것을 잊지 않는 그녀가 못마땅했다. “남의 것을 건드리려 했으면 그 정도는 당연한 것 아닌가? 오히려 과분하다 느껴지는군.” “나, 나…… 남의 것?”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말을 잇지 못하는 루피아를 이디스는 즐겁게 바라보았다. 그의 것에 눈독을 들였으니 경고는 당연하다. 그로서는 굉장히 많이 참은 것이었지만 그녀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자연스럽게 그녀를 끌어 당겼다. 루피아는 작게 신음을 흘렸지만 이내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왔다. “부탁이니까… 여기서는 말 좀 조심해줘요.” “…….” 이디스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루피아는 조그맣게 뒷말을 이어 붙였다. “난 정말 오래 살지 못할 거야.” ================================ ......이디스가 싫어요! 정말! 저 자식~ 언젠가는 정말로 죽여버릴 겁니다![눈물] 눈은 이제 거의 다 나았어요. 약만 먹으면.[음!;] 이번 편은 좀 길죠? 이제부터는 외전 들어갑니다~>_<; 메일 : donghee425@hanmail.net 카페 : http://cafe.daum.net/fantastiknovel 리플 : 밑에~ 즐독하세요☆ 제 목: [외전] 옛날 옛날에… : 유리아덴의 한(恨) 마계공녀(魔界貢女) [외전] 옛날 옛날에… : 유리아덴의 한(恨) ◀▷ ◀▷ ◀▷ ◀▷ ◀▷ ◀▷ ◀▷ ◀▷ ◀▷ ◀▷ ◀▷ ◀▷ 검은 솥에서 심상찮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러온다. 솥 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끈적끈적한 액체가 부글부글 끓다 폭, 하고 방울을 터뜨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꽤 두꺼운 서책에 눈을 박고 한 손으로 기다란 막대를 솥 안에 넣어 휘휘 젓던 남자는 나머지 한 손을 이용하여 어지럽혀진 테이블을 더듬거려 뭔가를 집더니 솥 안으로 퐁당 집어넣었다. 남자가 집어넣은 물건이 끈끈한 액체 사이로 삼켜지는 사이, 남자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다시 막대를 잡고 휘휘 저었다. 그런데 뭔가가 잘못되었는지 끈끈한 액체는 점차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끓어오르더니 이내 쾅! 하고 터져버렸다. 당연히 남자는 폭발의 여파로 인해 뒤로 세게 넘어지고 말았다. 폭발은 의외로 컸다. 상당히 넓은 편이었던 남자의 거처가 아주 엉망이 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하긴, 폭발 전에도 못지않게 엉망이었던 곳이었다. 검게 그을린 남자는 얼굴을 찡그리며 다시 책에다 눈을 가져갔다. “뭐가 잘못된 것이지? 이상하다…… 적힌 대로 했는데.” 남자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벌써 몇 번째 실패인지 세는 것조차 그만두어 버렸다. 얼굴에 묻은 그을음을 조금이라도 닦아내 보고자 더러운 소매로 눈가와 얼굴을 대충 슥슥 닦던 남자는 소용없음을 알았는지 이내 그만두었다. 대신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닫혀있던 문을 열었다. 매캐한 연기와 역한 냄새로 가득 차 있던 곳에서 나오자 시원한 공기가 달게 느껴졌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던 그는 여전히 흐린 회색의 하늘을 보며 씩 웃었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유덴의 생일이던가?” 남자는 준비해두었던 깨끗한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그을음이 닦여진 그의 얼굴은 아주 깔끔하고 단정한 선을 가지고 있었다. 콧잔등에 아직 지워지지 않은 그을음이 묻어 있었지만 남자는 수건을 내려놓고 옷에 묻은 먼지를 탁탁 털었다. 그 정도 가지고는 턱도 없는 이물질이 잔뜩 묻어 있었지만 남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사실, 남자로서는 몇 번 옷을 턴 것도 최대한의 성의를 보인 것이었다. 검은 그을음과 대비되어 더욱 희게 보이는 피부에 어쩐지 어린아이의 그것 같은 철없는 웃음을 가진, 대충 잡아 묶은 보라색 머리카락에 선홍색 밝은 눈동자가 인상적인 이 남자는 언뜻 보면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였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보다 훨씬 더 어리게도 보였다. 남자는 이쯤이면 되었다 싶었는지 힘차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래도 명색이 아버지인데, 선물이라도 하나 쥐어줘야 하지 않겠어?” 데메디아스 드 캐플리츠. 마계 최고의 괴짜이며 약물 광(狂)인, 일명 ‘Mad doctor'- 마계 서열 제19위에 링크된 남자였다. 아이는, 굉장히 예쁘장했다. 선홍색 핏빛 같은 커다란 두 눈에 윤기 흐르는 보랏빛 머리카락이 어깨 너머까지 꽤 길게 길러져있었고 백설(白雪)같은 하얀 피부, 오뚝한 코와 붉고 앙증맞은 입술을 가지고 있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성별 구분이 참 모호한 외모였다. 게다가 아이는 어쩐지 멍해 보이는 표정이어서 한층 매력을 더했다. 얼굴처럼 그 아이는 무척 말이 없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눈으로 빤히 상대를 쳐다보기만 하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었다. “참 재미없는 아이라니까. 음~ 뭘 주면 좋을까?” 데메디아스는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는 아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올해로 딱 360살이 되는 이 아이는, 아무리 봐도 이해하기 힘든 아이였다. 어린애답지 않게 포커페이스로 늘 자신의 방에만 틀어박혀 그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게 해 주었다. 어른스럽다고나 할까? 문제라는 것을 단 한 번도 일으킨 적이 없는 이 아들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전혀, 라고 할 만큼 없었기에 막상 선물을 주려 하니 무엇을 줘야 할지 막막했다. 잠시 생각을 해보던 그는 좋은 것이 떠올랐는지 손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치는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데메디아스는 싱긋, 하고 웃으며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아들의 결 좋은 보라색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올해로 딱 360살, 아직은 한참 어린 아이이다. 하지만 저택 밖으로 나가본 일이 없는지라 당연히 친구도 없을 터다. 보아하니 사교성도 그리 좋아 뵈지 않다. 소문이 요상하게 나는 바람에 그는 그다지 인기는 없었지만 친구라면 몇 명 사귀어 두고 있었다. 물론 그 친구라는 자들도 그 못지않게 괴짜로 소문이 파다한 자들이었지만 말이다. 다행히도 그 ‘친구’ 중에는 아들 또래의 자식을 가진 자가 몇 있었다. “유덴! 너, 친구가 있냐?” “…….” 유리아덴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그를 올려다 볼 뿐이었다. 그런 그의 반응을 긍정이라 받아들였는지 데메디아스는 다시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리는 어조로 말을 했다. 자신에게 말하는 것인지, 유덴에게 말하는 것인지 구분이 안 되는 말이었다. “어릴 때는 자기또래 애들과 같이 노는 것이 가장 좋은 거야. 이 아버지가 친구를 만들어주마. 어때? 이것이 360번째 생일선물이다!” “…….” 유덴은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데메디아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혼자 말하고 결정을 내렸다. 결국 데메디아스는 지금 당장 가겠다며 외출준비를 하라 시켰고, 잠시 후에 다시 오라고 했다. 사실 유리아덴보다 데메디아스의 상태가 더 심각했다. 그는 온통 그을음투성이인데다 머리는 산발이고 옷까지 더러웠다. 유리아덴은 데메디아스가 혼자 신나서 만족스럽게 웃자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유유상종이라고 하던데…….” “뭐라고?” “…….” * * * * * * * * * * * * * * * “무슨 일로 찾아왔나 했더니, 아들을 보고 싶다고?” “그래!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지 않나. 이번 기회에 소개나 시켜 주려고.” 남자는 데메디아스를 수상한 듯이 훑어보았지만 데메디아스는 태연하고 능청스럽게 싱글거릴 뿐이었다. 유리아덴은 평소처럼 조용히 입을 다물고 두 사람의 농담 섞인 대회를 듣고 있었다. 몇 번 대화가 오가자 유리아덴은 두 사람만의 세계에서 아주 똑 떨어져 버렸다. 데메디아스는 아마도 자신의 아들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결국 유리아덴은 자리에서 일어서 또박또박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렇게 된 것, 시간이나 때우자는 의도였다. 유리아덴이 자리에서 일어났음에도 두 사람은 서로 대화하느라 바빠 채 알아차리지도 못한 듯했다. “그 녀석 아들도 와 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두 모이는군.” “그래? 그거 잘됐네. 얼레? …야, 내 아들 못 봤냐?” 이 말이 오간 것은, 유덴이 일어나고도 무려 30분이 지난 후였다. 이 저택이 어디에 붙어있는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분명, 본래 유덴이 머물던 저택에서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따라서 아직 360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유덴이 혼자 저택까지 찾아가기란 상당히 무리가 있는 노릇이었다. 시간이나 때우자는 의도로 자리를 떴지만 유덴은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유덴은 미미하게 인상을 찡그렸다. 비록 알아차리기도 힘들 정도로 작은 움직임이기는 했지만. 설상가상으로, 저택은 상당히 넓었다. 키도 작은 유덴으로서는 재기도 힘들 정도로 아주 넓다. 돌아가는 길을 기억해내려고 애써보던 유덴은 이내 포기하고 데메디아스가 자신의 부재(不在)를 알아차리기까지 기다리기로 결정을 보았다. 그는 낮잠 자기 좋은 곳을 찾아 나무들 주변을 서성거렸다. 부스럭. 민감한 청각에 인기척이 잡혔다. 유덴의 귀가 쫑긋거렸다. 다시 한 번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자, 유덴은 천천히 그곳으로 발을 옮겼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점점 커졌다. 궁금증이 점점 커져가 발이 절로 빨라졌다. 수풀 위로 머리를 넣어 인기척의 정체를 막 보려던 때에, “와악-!!” “……!” 시꺼먼 것이 수풀 위로 튀어 올랐다. 물론 앞의 비명 아닌 비명은 유리아덴이 지른 것이 아니었다. 유리아덴은 눈썹을 꿈틀거렸을 뿐, 그 외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은 것이다. 아무래도 그를 놀래 줄 요량이었던 듯, 수풀에서 튀어나는 ‘것’은 아쉽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에이, 재미없어. 하나도 놀라지 않잖아? 쳇!” “푸하하! 시킨다고 그걸 곧이곧대로 하냐?” 인기척은 하나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름대로 놀란 유덴이었지만 그의 심장박동수는 평온할 때와 별다르지 않았다. 유리아덴은 꽤 친해 보이는, 자기또래의 아이들을 볼 수가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또래 아이들이었다. 수풀 속에서 튀어나온 아이는, 유리아덴 그보다 적어도 머리 하나 정도는 큰 키였다. 적당히 햇볕에 그을린 연갈색 피부에 초록빛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장난기가 가득 망울져 있는 붉은색 눈동자는 그를 향해 반달형으로 휘어 있었다. 상처 한 두개가 있는 것을 보니 대충 성격을 알만했다. 뒤에서 웃던 아이는 반짝이는 예쁜 금발이 눈에 띠는 아이였다. 언뜻 보면 유약해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마족은 겉모습을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유덴은 알고 있다. 총명해 보이는 붉은 눈동자가 얇은 은테안경 안에서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입가에는 언뜻 보기에는 상냥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무척 사악해보이기도 하는, 애매한 웃음이 걸린 그 아이는 덩치는 자신과 비슷했다. 서로를 살피는 눈초리를 가장 먼저 거둔 것은 초록색 머리칼의 아이였다. “너, 이름이 뭐냐?” “……유리아덴.” “좋아! 난 아로데. 이쪽은 로이드윈이다. 마침 잘 됐어. 안 그래도 둘만 가기에는 뭔가 찝찝했는데…….” 아로데는 굉장히 스스럼없는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을 걸었다. 로이드윈 역시 생글거리며 다가왔다. 뭔가 불길한 예감에 눈살을 찌푸리는 유덴이었지만 정확히 알 수 없어 그저 인상만 일그러뜨리는 것으로 끝낼 수밖에 없었다. 아로데와 로윈은 생글생글 웃으며 그에게 친한 척 어깨동무를 해왔다. “……뭐냐?” “저-기 말이지. 방금까지 우리, 어떤 계획을 하나 세우고 있었는데 말이야.” “…같이 가지 않을래?” 그들의 목적지는 저택 뒤에 있는 울창한 숲이었다. 아직 어린 그들이 감당하기에는 분명 무리가 있는 몬스터(Monster)들로 가득한 숲은, 분명 그들에게는 금지(禁地)임에 틀림없었다. 그것을 모르는 것은 아닐 터, 그들의 제안은 분명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하지만 마족이 어디 가지 말라고 해서 얌전히 움직이지 않을 생물이던가? 얌전히 지내왔다고는 하지만 유리아덴도 분명 마족이었다. 유리아덴은 피식 웃으며 그들의 제안을 수락했다. 훗날, ‘세 노마족(老魔族)’이라고 한 세트로 불려질 그들의 만남은 이러했다. * * * * * * * * * * * * * * * 몬스터란 생물은 상당히, 아니 많이 추한 모습이다. 책으로야 몇 번 보았지만, 직접 썩은 입 냄새를 풍기며 뜨거운 열을 발산하고 있는 실체를 직접 마주하고 느끼는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기름이 번들거리는 징그러운 피부는 닿는 것만으로도 살이 썩을 듯했고 광기로 번뜩이는 노란 눈은 역겨움을 불러 일으켰다. 기형적으로 커다란 거구에 비례가 맞지 않은 몸.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것은, 뜨거운 숨에 섞여 나오는 지독한 입 냄새다. 유리아덴을 비롯한 아로데, 로윈은 절로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 정도의 체구는 한 번 덮어(?) 버리면 그야말로 찍 눌려 쥐포가 될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커다란 거구의 몬스터인데도 그들은 이상하리만치 태연한 안색들이었다. 아무리 마족이라도-또 혈통이 좋아도- 어린 나이인 만큼 겁을 먹어야 정상이 아니던가? 하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겁먹은 얼굴이 되지는 않았다. “음, 도망가야 하나? 이럴 경우는…….” 심각하게 고민하는 듯, 언뜻 진지하게 말하는 로이드윈. 그러나 장난이라도 치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생글거리니 겁을 먹었다고는 볼 수 없었다.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그게 보통 아냐?” 한 술 더 떠서 낄낄거리며 대답하는 아로데 역시 겁먹었다고는 볼 수 없다. “…….” 그런 그들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유리아덴은 말할 필요도 없다. 크르릉- 하고 낮게 으르렁거리며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한 몬스터를 마치 장난감을 보는 어린아이처럼 쳐다보던 아로데가 가장 먼저 달려들었다. 통- 통 튀는 듯 가벼운 몸놀림으로 순식간에 괴물 앞으로 쇄도해나간 아로데는 찝찝함을 감수하고 괴물의 안면에 정통으로 주먹을 꽂아 넣었다. 어지간해서는 손을 버리고 싶지 않았지만 따로 무기가 없었으니 별 수 없는 것이다. “아우~ 찝찝해! 얼른 손 씻고 싶어!” “자, 그럼 내 차례!” 이번에는 로이드윈이 한 발 나섰다. 아로데의 일격으로 뒤로 거꾸러진 괴물이 비틀거리며 막 일어나고 있었다. 그가 품 안에서 재빠르게 꺼내들어 던진 것은, 다름이 아닌 부적이었다. 주술(呪術)이 써진 부적 다섯 개가 괴물의 안면에 순서대로 촤라락 달라붙었다. 로이드윈이 손가락을 탁, 하고 튕기자, 화르륵! 부적이 새빨갛게 빛을 뿌리며 타올랐다. 쿠와악, 하고 괴물이 비명이 날카롭게 허공을 찢었다. 부적은 괴물의 안면만이 아니라 순식간에 전신으로 옮겨 붙었다. 괴물은 고통스럽게 비명만 목 놓아 내지를 뿐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골로 갔다. 결국 한 번도 나서보지 못한 것은 유리아덴 혼자뿐이었다. “아, 이런? 죽어버렸다. 어떡하지? 미안해, 유덴.” “저렇게 약할 줄은 미처 몰랐어.” 유덴은 슬그머니 인상을 찌푸렸다. 내심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서볼 새도 없이 단 두 방으로 괴물이 죽어버리자 그는 허탈해졌다. 로이드윈과 아로데가 미안해하고 있는 사이, 유리아덴은 까맣게 타버린 괴물의 시체 옆으로 다가갔다. 이미 역한 입 냄새는 소독(?)이 되었는지 사라져버린 후였다. 대신 살타는 냄새가 코끝을 맵게 만들었지만. 유리아덴은 품에 늘 넣고 다니던 단도를 꺼내어 들었다. 그리고 몬스터의 시체에 단도를 푹! 하고 꽂아 넣었다. 살덩이가 갈리는 느낌과 물컹한 촉감이 느껴졌다. 그는 손놀림을 더 빨리 했다. 이미 그는 괴물의 초록색 피에 범벅이 되어 있었지만 유덴은 찝찝함을 모르는 듯했다. 괴물의 시체에 반복해서 단도를 꽂아 넣는 유리아덴을 보며 아로데와 로이드윈은 약간이지만 질린 얼굴이 되었다. “우, 우리가 너무한 거였나? 남겨줄 걸.” “많이 억울했던 모양이군.” 푹푹! 푹! 서걱서걱. 소름끼치는 음향들이 계속 귀를 자극하자, 로윈과 아로데는 얼굴을 찡그리며 귀를 막아야 했다. 스트레스를 저렇게라도 풀어야 하겠다면 그래, 놔두자. 그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나름대로의 배려였던 것이다. 계속해서 찌르고, 후비고, 파고, 잡아 뜯는(?) 유덴의 행위는 상당히 오래 지속되다 마침내 멈췄다. 스윽 일어서는 유덴의 손에는 그의 주먹 두 개를 합쳐놓은 것보다 더 큰 녹색 핏덩이 하나가 들려져 있었다. 뺨에 튄 녹혈을 더러워진 옷자락으로 슥 닦으며 일어선 유덴은 입고 있던 옷을 벗어 핏덩이를 둘둘 감아 말았다. 차마 물어보기 두려웠으나 그래도 궁금했던 두 마족은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물었다. “그거…… 뭐냐?” “……간(肝).” “……으, 응. 그러냐?” “…….” 차마 ‘어디다 쓰는데?’라고 물어보지는 못한 두 마족이었다. 이때부터 발동(?)이 걸린 유리아덴의 취미가 바로 ‘몬스터 생체해부 및 개조’였다. 키메라를 만드는 등 하여 실패작은 마왕성 근처 숲에다 내다 버리고, 몬스터를 주워 자르고 꿰매고 붙이고 섞는(?) 등 온갖 엽기적인 행각을 서슴지 않았다. 과연 'Mad doctor'의 피를 이었다며 말들이 오갔지만, 그것들은 유덴의 행동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과연 내 아들! 피가 어디로 가겠어? 하하하!” “……누구?” * * * * * * * * * * * * * * * “……그랬지.” 이야기를 끝마친 아로데는 회상에 젖은 듯 몽롱한 눈빛이었다. 세키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녀로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상대했던 몬스터들도 유리아덴의 작품이었다는 것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런 취미가 있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랬군요. 요즘도 계속하시나요?” “음? 글쎄…… 모르겠는걸. 해부하는 데에 좋은 칼을 찾기 위해 무기를 모아둔 것은 알고 있는데 그 이상은 잘 모르겠다. 난 그런 쪽으로는 그다지…….” 세키라는 에리나에게 들었던 말을 기억해냈다. 무기가 잔뜩 모아져 있었다는. 황홀경에 젖은 눈으로 얘기했던 것이 기억에 남았다. 그런데 그 무기들의 정체가 사실은 수술용으로 적당한 칼을 찾기 위해 모아둔 것이었다니. 에리나에게 말해주면 어떤 얼굴이 될는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것은 나중에 말해주기로 하고, 세키라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때부터 계속 머리를 맴돌던 의문을 꺼냈다. “그런데, 이 얘기는 대체 언젯적 얘기인 거죠? 그건 말씀해주시지 않으셨어요.” “……음?” “그저 ‘옛날 옛날에…’라고 하시면서 시작하셨잖아요? 꼭 옛날이야기 들려주시는 것처럼!” 사실, 정말 옛날이야기가 맞았다. 그것도 아주. “……그, …게 말이지.” 세키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아로데들의 나이에 대해 자세히 들은 기억이 없었다. 8,000살을 넘겼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것 같기도 한데……. 고개를 갸웃거리는 세키라에게, 아로데는 생긋 웃어주며 말했다. “숨기고 싶은 남자의 비밀~♡” -------------------------------- .....뭐라고 말씀하셔도 저는 몰라요. 몰라.[귀 꽉 막고] 즐독하세요..오오; 메일 : donghee425@hanmail.net 카페 : http://cafe.daum.net/fantastiknovel 리플 : 요 아래에~ 쪽지 : ..날려만 주세요>_< 제 목: 공녀(貢女) : 제44화 [로헤델의 별](1) #. 44화 ‘로헤델의 별’ * * * * * * * * * * * * * * * 오르가프에게 반역한 타락천사 루시퍼 이후의 두 번째 타락천사 ‘로헤델’은, 그들을 묶는 저주였다. 더 이상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하지만 한 가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그녀로 인해 많은 불행이 초래(招來)되었다는 것이다. ======================루피아의 자서전================ “찾았어?” 세키라는 루피아에게 깔끔한 종이뭉치를 내밀었다. 그리 두껍지 않은, 오히려 조금 얇다 싶은 두께의 종이의 가장 위에는 ‘로헤델’이라는 글씨가 깨끗한 필체로 적혀 있었다. 냉큼 받아든 루피아는 재빨리 종이의 첫 장을 넘겼다. 생각해보면 루피아는 이제껏 ‘로헤델’이라는 이름을 꽤나 자주 들어왔다. 그녀는 그 여자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쩐지 세키라의 얼굴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눈동자를 굴리며 자료를 읽어 내리던 루피아의 얼굴도 점차 일그러졌다. 그도 그럴 것이, 자료가 없어도 너무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에스베크 공작이 가져다 준 자료도 겨우 이름만 올라 있는 것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거의 쓸데없는 자료에 불과했다. 가장 첫 장의 몇 줄만을 제외하고는 변두리 말만 늘어놓고 있는 형태였다. 세키라의 얼굴이 안 좋은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뭐 하나 제대로 풀리는 일이 없네.” 골치가 슬슬 아파왔다. 교황 라우데스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기에 이런 조건을 내 걸었을까? 중간계에는 ‘에우로카엘’의 이름마저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마계에조차 아는 자가 드문 ‘로헤델’의 자취를 중간계에서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에스베크 공작이 백방으로 손을 써 보았는데도 이 정도가 다라면, 그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루피아의 골치를 썩이는 것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이디스와 아버지, 오라버니들의 문제 역시 그녀의 골치를 썩이는 주된 요인이었다. 사이가 좋은 것까지야 바라지 않았지만, 아니 사이가 안 좋은 것이 오히려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둘 사이에서 치이는 루피아는 고달프기 짝이 없었다. 정신적으로 무척 피곤했던 것이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세키라가 어설픈 웃음을 보냈다. “아! 맞아. 혹시, 아로데라면 ‘로헤델’에 대해 알지 않을까? 그래도 8,000년이 넘게 살았다고 하잖아. 그만큼 살았으면 주워들은 것이라도 있겠지!” 아로데의 이름이 나오자 세키라의 몸이 움칠거렸다. 그것을 눈치 챈 루피아였지만 그녀는 짐짓 모르는 체 말을 이었다. “아로데와는 네가 가장 잘 알지? 그럼 세키라, 부탁할게. 아로데에게 ‘로헤델’에 대해 물어봐 주겠어?” 루피아는 일부러 ‘부탁할게’라고 말하며 세키라를 바라봤다. 순간 세키라의 눈에 당혹한 기색이 떠올랐지만 뭐라고 말은 하지 못하고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역시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음이 더욱 분명해졌다. 루피아는 다시금 분명한 어조로 쐐기를 박았다. “해 주리라 믿어. 그다지 어렵지 않지? 이건 중요한 일이니까.” 세키라는 결국 울상으로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루피아는 만족스럽게 미소했다. 예전에는 자신 스스로에게 여유가 없어서 신경을 쓰지 못하는 바람에 눈치를 해지 못했지만, 지금은 세키라가 아로데를 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금방 눈치 챌 수 있었다. 하지만 세키라가 계속 아로데 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는 사실도 알아차렸다. ‘세키라라면 잘 할 거야.’ 다소 소심한 감이 있기는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칠 만큼 멍청하지는 않다고 믿었다. 가장 인내심이 강한 세키라는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 말하는 편이 아니었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속 깊은 배려를 할 줄 알았지만 이런 경우 그런 그녀의 성격은 상황을 나아지게 만들어 줄 수는 없었다. 곤란해 보이는 세키라의 얼굴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던 루피아는, 문득 에리나가 떠올랐다. 유리아덴의 곁에서 떠나지 않겠다는 것을 조건으로 ‘계약’을 한 에리나는, 이로써 벌써 두 번이나 계약을 어겼다. 계약을 신성시하는 마족으로서는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 일은 조금 애매한 것이, 먼저 에리나를 내버려 둔 것은 유리아덴이었고, 에리나는 그녀 나름대로 유리아덴을 ?으려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데에 고지식한 에리나는 ‘어긴 것은 어긴 것’이라고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에리나는 현재 칼르니르 저택에 시녀로 가 있었다. 기왕 시녀로 있을 것이라면 칼르니르 저택에서 시녀로 머문다고 해도 별 문제는 없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유리아덴도 칼르니르 저택에 손님으로 머물고 있었다. 계약상 에리나는 본래 유리아덴의 곁을 떠나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게 돌아가고 있을지……. “좋아! 한 번 살펴보기도 할 겸, 칼르니르 저택에나 들를까. 그동안 아로데에게 자세히 물어봐 줘, 세키라.” “뭐? 앗! 버, 벌써? 잠깐, 루피아!” 당황한 세키라가 난처한 목소리로 루피아를 불렀다. 하지만 이미 벌컥 문을 열고 나가버린 루피아의 귀에 세키라의 목소리는 닿지 않았다. 혼자 남겨진 세키라는 꼭 잡아 모은 두 손을 가슴께로 가져갔다. * * * * * * * * * * * * * * * 수도의 외곽에 위치한 칼르니르 저택은, 화려하고 커다랗기 보다는, 조금 작은 듯한 느낌과 함께 검소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좁은 것은 아니다. 다른 저택에서 저택을 올리는 것에 쓰는 땅을 연무장의 터로 돌렸을 뿐이니 말이다. 칼르니르 가문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례(一例)라 할 수 있겠다. 저택은 칼르니르 소속의 기사단이 하루도 빠짐없이 기합을 내지르는 소리로 칼르니르 저택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고 한다. 오늘도 어김없이 기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맑은 오늘 오후, 기합 소리에 날카로운 비명이 겹쳐졌다. 루피아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겨우 진정시켰다. 아직도 놀란 심장은 두근두근 빠르게 날뛰고 있었다. 심장 위를 꾹 눌러 진정하려 노력하며, 루피아는 민망한지 얼굴을 붉히고 있는 에리나와 여전히 담담하고 무표정한 유리아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에리나는 루피아와 눈이 마주치자 안 그래도 발갰던 얼굴이 더 벌개져서 아예 고개를 푹 수그렸다. 루피아는 피식 웃음이 새었다. “걱정했는데…… 딱히 필요 없겠다? 나 그만 가 줄까?” 장난을 거는 루피아의 말에 에리나는 발간 얼굴로 급하게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유리아덴은 어째 그래주길 바라는 듯한 얼굴이라 루피아는 어째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헷갈리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에리나 역시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터질 것처럼 벌건 얼굴이 조금 제 혈색을 되찾았다. 미리 기별을 하지 않았던 루피아는 칼르니르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유리아덴이 거처하고 있다고 하는 방의 문을 벌컥 열어 젖혔다. 물론 실례되는 행동이었지만 에리나를 놀라게 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평소 친한 사이일수록 꼭!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어머니 말씀을 온몸으로 느껴야 했다. “…….” 잠시 굳은 듯 멈추었던 루피아는 방문을 다시 쾅 닫고는 크게, 그리고 날카롭게 비명을 내질렀다. 너무 놀란 나머지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었지만, 그로 인해 경비병이 달려오는 등 약간의 작은 소동을 빚기도 했다. “계약 어겼다고 한 것은 어떻게 됐어?” 에리나는 여전히 홍조가 어린 뺨을 찬 손등으로 꾹꾹 누르며 대답했다. “…해결됐어.” “……훗.” 도중의 과정까지 묻기에는 너무한 것 같아 루피아는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대신, 뭔가 음흉한 눈길을 보냈을 뿐이다.(에리나는 그것이 싫었던지 세게 루피아의 팔을 때렸다) 루피아와 에리나끼리 속닥거리는 사이, 같이 온 이디스는 유리아덴과 무슨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사정을 보아하니, 얼른 볼 일을 끝내고 사라져 주는 것이 도와주는 것 같았다. 시원섭섭한 마음으로 루피아는 세키라가 건네주었던 얇은 종이뭉치를 꺼내 놓았다. 아직 이디스도 모르는 일이었다. 두 마족의 눈썹이 ‘로헤델’이라는 글자를 보자 치켜 올라갔다. “혹시, ‘로헤델의 별’이라는 것에 대해 알고 있는 것 있어요?” “그 이름, 어디서 들은 거냐?” 웬일로 유리아덴의 입이 먼저 열렸다. 말 없기로는 이디스와 막상막하, 아니 어찌 보면 이디스보다 더 말이 없는 유리아덴의 목소리는 참 듣기 힘든 것이었다. 그리고 유리아덴의 말에 대답을 한 것은 한 발 빠른 에리나였다. “교황 라우데스께서 말씀해주셨습니다. 중간계에서 알아보라 하시면서…….” 유리아덴과 이디스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이디스는 루피아가 올려놓은 종이뭉치를 집어 들고 무심한 눈으로 훑어 내렸다. 시리어스 어(語)나 대륙 공통어가 아닌 고대 문자로 적힌 자료는 그가 읽기에도 그다지 무리가 없었다. 종이에 적힌 내용을 다 읽어 내린 후 이디스의 평가는 루피아나 세키라가 내린 그것과 다른 것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이디스가 내려놓은 종이를 다시 유리아덴이 가져갔다. “‘로헤델’이라.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로군.” “어? 알아요?” 사실, 이디스나 유리아덴에게 먼저 물어보자는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었지만 로헤델은 굳이 따지자면 천족에 속하는 인물이라 애초에 모를 거라 생각해버렸다.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그녀들을 향해 유리아덴이 조금 인상을 그으며 말했다. “정보부 담당은 로윈이니까.” 왜인지 그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 어쩐지 그 말 한 마디에 묘하게 납득이 가는 에리나와 루피아였다. 이디스는 피식 웃었다. “꼭 죽었다는 것처럼 써 놓았군, 이거.” “에에? 그럼, 죽지 않았다는 거예요? 말도 안 돼!” 비웃음이 섞인 이디스의 말에 루피아가 경악했다. 그렇다면 살아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명색이(?) ‘타락 천사’인데 천계에서 살려둘 리가 없지 않은가! 하다못해 시리어스 제국의 경우만 보라더라도 반역자는 무조건 참수(斬首)였다. 반역자 하나 뿐만이 아니라 그에게 연루된 자들을 모두 처벌할 만큼 반역(反逆)에 대한 대가는 참혹하고 컸던 것이다. ‘설마 여자라서 봐 줬다거나 한 것은 아니겠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천계가 바보도 아니고!’ “살아 있어요? 누군데요?” 게다가 로헤델이 여자라는 보장도 없고 말이다. 이름만 보고서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혼란스러워 하는 루피아를 마치 즐기는 것처럼 바라보고 있던 이디스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 말을 들은 루피아의 눈은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부릅떠졌다. “에우로카엘.” “하아?” * * * * * * * * * * * * * * * 달칵! 데구르르……. 검은 구슬이 둔한 소음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떨어진 테이블은 꽤나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작은 흠집 하나 나지 않은 구슬의 검고 매끄러운 표면 위에 누군가의 모양의 서렸다. 로아이나는 떨어진 구슬을 줍기 위해 돌린 시선을 그대로 들어 갑작스런 방문자를 쳐다보았다. 로아이나는 방문자의 발치에 굴러 떨어진 구슬을 주워 들었다. “생각지도 못한 손님이시로군요.” 요염한 붉은 입술이 매끄럽게 움직여 고운 곡선을 그렸다. 새하얀 얼굴의 창백한 안색과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붉은 입술의 요염함이 화사한 매력을 만들어 내었다. 보통 사내였다면 단번에 혹할 정도로(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는 남자라는 사실을) 유혹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방문자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기는커녕 오히려 불쾌하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여전히 불쾌한 녀석이군!” “이 미천한 것을 몸소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군요. 리크비엘님.” 생긋 웃으며 말하는 로아이나를 보며 방문자, 리크비엘의 얼굴은 한층 더 구겨졌다. 그는 정말 로아이나를 싫어했다. 그가 존경해 마지않는 에우로카엘이 어째서인지 계속 싸고도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지만 무엇보다 로아이나는 마족, 더러운 마족인 것이다. 투명한 푸른색 눈동자 가득 어리는 경멸을 보며 로아이나는 더욱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생각 같아서는 바로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싫은 녀석이었지만 이 사내의 특별한 능력이 유용하게 쓰인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로아이나의 흐릿한 회색 눈동자를 보고는 다시 얼굴을 찌푸린 리크비엘은 날카롭게 날이 선 목소리로 말했다. “따라 와!” ===================================== 와하핫. 괴, 굉장히 오랜만☆입니다아.; ....아하하. 무서워서 그동안 삼룡넷에도 들어가 보지 못하고-_ㅠ; 즈, 즐독하세요![후다닥] 덧. .....주, 죽여주세요.[눈물] 제 목: 공녀(貢女) : 제44화 [로헤델의 별](2) #. 44화 ‘로헤델의 별’ * * * * * * * * * * * * * * * 아유니, 지금은 ‘에우로카엘’인 그녀는 분명 둘이 온 것을 눈치 챘음에도 불구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리크비엘과 로아이나, 둘 모두 그녀의 그런 태도가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보였다. 리크비엘은 정중히 허리를 숙여 그들의 도착을 알렸다. “리크비엘, 넌 나가 있어라.” 에우로카엘의 나지막한 명령에, 리크비엘의 잘 뻗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는 곧 아무 말 없이 에우로카엘의 방을 나갔다. 로아이나는 가만히 서 있다가, 리크비엘이 문을 탁, 하고 닫자 그제야 피식 웃었다. “실패했더군.” “…인형의 손끝이 여물지 못했나 봅니다.” 로아이나의 붉은 입술이 곱게 휘었다. 그 역시 예상치 못한 결과였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실패한 것에 감사했다. 볼 수는 없지만, 아마도 에우로카엘의 얼굴은 지금쯤 일그러져 있을 것이다. 그는 다시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생각해보면 볼수록, 그녀와 자신이 만난 것은 불행이다. 결코 인연이 닿아서도, 닿을 리도 없는 사이인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와 그는 이렇게 만나, 원한 바는 아니라고 하나 같은 배를 타고 있다. 이제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의 눈에는 그들의 운명이 향하는 끄트머리가 희미하게나마 보였다.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그들은 더욱 수렁에서 허우적거리게 될 것이다. 자신은, 이렇게 될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지 않았을까……. ‘어쩌랴? 아무리 바꾸고 싶다 한들, 결국 나는 할 수 없을 텐데.’ 결코 에우로카엘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는 ‘그녀’가 시키는 일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상념에 잠긴 로아이나를 깨운 것은 에우로카엘의 시선이었다. 지금의 에우로카엘에게서는 예전 ‘아유니’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몸은 이미 옛날에 한계에 이르러, 지금은 다시 원래의 주인에게로 돌아가 있었다. 아마 무척 약한 몸이 되어 있을 테고, 평생 요양을 해야 명줄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그녀는, 은빛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천족의 모습이었다. 아유니 때의 동글동글하고 포동포동한 핑크빛 뺨 대신, 갸름한 얼굴선의 성숙한 얼굴이 있다. 달콤한 분홍빛 동그란 눈동자 대신, 아몬드 모양의 눈매가 날카롭게 서 있다. 오뚝하고 앙증맞은 코는 유려한 선을 그리는 콧대로 바뀌었다. “그래? 쓸모없군.” “이미 이용해먹을 대로 이용하시고 하시는 말씀 치고는 매정하시군요.” 에우로카엘의 입가에 비소(誹笑)가 떠올랐다. 그녀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고 말했다. “해야 할 일이 있다.” 얼음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손을 댄다면 쨍! 하고 얼어버릴 것만 같을 정도로 에우로카엘의 그를 대하는 태도는 싸늘하고 차가웠다. “중간계의 나의 기록과 ‘로헤델’의 기록은 모두 말소시켰다고 생각하지만 가능성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 꼬리를 밟을 수 없도록 네가 가서 막아라.” “잊고 계신 것은 아니신지? 일단 저는 그들의 앞에 나설 수 없는 몸입니다만.” “흥! 웃기는 소리. 이미 한 번 뒤돌아 선 네가 다시 한 번 뒤돌아선다 해서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로아이나는 피식 웃었다. “아직 루피아님 손에 죽고 싶지는 않아서 말입니다. 분명 머리카락이 쥐어뜯길 겁니다. 그런 흉한 꼴은, 역시 꺼려지게 마련이라.” 머리카락만 뜯길 것이 아니라, 한 번 잡히면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두들겨 맞을 것이다. 마왕의 동생을 조종한 것이 그라는 사실이 아직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역시, 그다지 좋은 꼴이 날 것 같지는 않다. 에우로카엘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나가 보라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로아이나는 휘적휘적 방문 쪽으로 걸어 나갔다. 문득 문지방을 밟고 멈춰선 그는, 가슴을 묵직하게 내리 누르는 답답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문지방을 넘어서며, 그는 속으로 뇌까렸다. 거절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에게, 저 끝을 향한 길의 방향을 조금이라도 틀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눈이 더 이상 빛을 담아내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때- 죽어버렸더라면. * * * * * * * * * * * * * * * “그, 그러니까, 에우로카엘이 ‘로헤델의 별’이라는 거고, ‘로헤델의 별’이 아유니니까, 아유니가 곧 에우로카엘이고…… 으윽! 대체 무슨 말이야, 이건 다!” 머리가 살살 아파온다. 루피아는 소리를 빽 지르면서 마구 발광하고픈 심정이었다. 대체 무슨 소리인가, 이건! 아유니는 그저 천계의 손을 가장 먼저 잡은 공녀가 아니었나? 마지막으로 보았던, 바싹 마른 아유니의 퀭한 안색이 떠오르자 마음이 불편해지는 루피아였다. 그런 그녀에 반해, 에리나와 세키라는 꽤나 담담한 안색이었다. 로이드윈이 그녀들을 향해 말했다. “놀라지 않았나? 참 재미없는 얼굴들이로군.” “……평범하지 않으리라고는 짐작했었으니까요. 그 정체에 대해서는 상당히 놀랐지만.” 에리나가 먼저 대답했다. 로이드윈은 실망했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지만 아직까지 패닉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한 루피아를 돌아보고는 즐거운 듯이 웃음을 빙글거렸다. 알려주는 보람이 있는 반응인 것이다. 저런 반응을 볼 때면, 그는 늘 자신이 하는 일(?)에 보람을 느끼곤 했다. “교황, 그 영감이 참 재미있는 일을 시켜 놨는걸. 마계보다 이곳에 ‘로헤델’의 자료를 찾기에 낫다는 건가.” 아로데가 소파에 몸을 묻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라우데스와 아로데, 그는 나이 차이가 그다지 많이 나지는 않는다. 그저 ‘조금’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한데도 아로데는 당당히 라우데스에게 ‘영감’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었다. 세 마족과 세 공녀는 일단 한데 모여 의논을 하는 중이었다. 로이드윈은 일단 로헤델의 정체에 대해 ‘에우로카엘=아유니=로헤델의 별’이라고 털어놓았다. 결과는 보는 바와 같았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아무런 수확이 없어요. 이름조차 찾기 힘든데.” 세키라가 대답했다. 루피아는 슬쩍 눈을 들어 세키라를 보았다. 아로데의 옆에 앉아 있는 세키라는, 어떻게 된 일인지 화해에 성공한 것 같았다. 볼이 조금 발갛게 상기된 것을 보아, 무슨 일이 있기는 한 것 같긴 한데…… 문득 루피아의 입가가 음흉하게 벌어졌다. “‘로헤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거냐?” 다시 로이드윈이 물었다. 그리고 세키라가 세 사람을 대표해서 대답했다. “타락 천사 루시퍼 이후 단 하나뿐인 타락 천사이며, 결국 날개를 잘리고 어딘가에 유폐되어 소멸되었다는 것이 다예요.” 날개가 잘린다는 것 자체가 바로 천족의 소멸을 뜻한다고 한다. 마르고 닳도록 되풀이해 읽었던 성서의 내용을 보면, 거의 대부분이 천족에 대한 찬양이기는 하지만 신께 등을 돌리면 어떻게 되는지 확실히 일깨워주기 위해 그런 것에 대해서도 비교적 자세히 적어놓았다. 어렸을 적, 끔찍하다며 몸서리를 쳤던 기억이 났다. “그래, 그래. 맞다. 그런데 그 유폐된 장소가 어디인 줄 혹시 아나?” 로이드윈이 히죽 웃었다. 루피아와 세키라, 에리나는 슬쩍 인상을 구겼다. 설마,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뭐, 영감도 생각이 있으니까 알아오라 하지 않았겠어?” 확신을 주는 로이드윈의 말에 세 사람은 눈을 깜박였다. 마지막으로, 로이드윈은 확실하게 선언했다. “‘로헤델’의 유폐지는 바로 중간계야.” * * * * * * * * * * * * * * * 따사로운 햇살이 싱그러운 풀잎에 내려앉는 축복 받은 오후. 여느 저택에서도 그렇듯, 이곳에서도 성격이 맞는 부인들끼리의 우아한 티타임이 정원 한 귀퉁이를 장식했다. 부채를 살랑거리며 한껏 나른한 오후를 즐거이 보내는 그들은, 분명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가장 한가한 사람들 중 하나일 것이다. 평소라면 그녀들의 머릿속에는 이런 저런 계획들이(가령, 딸을 올 시즌 내로 시집보내겠다든가 하는) 날아다닐 터이지만, 향긋한 차향에 취해 수다를 떠는 이 시간만큼은 그런 계획들은 머리 저 구석으로 밀쳐져 있었다. 우아하고 현숙하며 현명한 귀부인이라면 꼭 갖춰야 할 것은, 예리한 눈썰미와(딸의 신랑감을 물색하기 위한!), 재빠른 몸놀림(경쟁자 귀부인들보다 한 발 빨리 사위 후보에게 다가서기 위한), 그리고 100m 밖에서도 목소리를 포착해낼 수 있는 경이로운 청력이다. 이것들은 결코 빠져서는 안 될, 그러나 가르치지 않아도 저절로 습득하게 되는 놀라운 능력들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귀부인 중 어느 하나 경지에 다다르지 않은 사람이 없기에 그들은 누구보다 소문에 민감할 수 있었다.(이것은 그녀들의 순수한 노력의 산물인 것이다!) “들으셨어요? 그 얘기 말이에요. 세상에, 저는 아직도 가슴이 다 두근거린답니다.” 부채를 파닥파닥 요란스레 저으며, 한 귀부인이 속닥거리듯 낮게 말을 꺼냈다. 차를 맛보던 다른 귀부인들의 시선이 모두 그녀에게로 모이자, 그녀는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부채를 살랑거렸다. “무슨 이야기를요, 부인? 요새 돌아다니는 소문이 워낙 많아야지요.” 부채를 살랑거리던 여자가 갑자기 부채를 탁! 소리 나게 접었다. 그로인해 모두의 시선이 더욱 그녀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녀는 더욱더 소리를 낮추어 비밀 이야기를 하듯이, 거의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기억하시지요? 왜, 아, 거의 1년이 다 되어 가는군요. 그- 그 일 말입니다.” 말하기를 꺼리는지, 그녀는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아직까지 그 단어는 모두에게 금기시 되는 금구(禁句)였던 것이다. 하지만 모두들 제대로 알아들었다. 모두의 흥미가 더욱 고조되자, 귀부인은 신이 났다. “그 일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답니다! 오, 정말 경악할 일이에요!” 귀부인은 과장되게 부채를 팔랑거렸다. 슬슬 짜증이 날 만한 태도였지만 모두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 소문이 궁금했던 것이다. 이쯤 되자, 귀부인도 진정이 되었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돌아왔대요, 글쎄!” “네?”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던 귀부인 모두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그런 반응에 부채를 든 귀부인은 만족스러운 듯한 모습이었다. 그녀 역시 들은 이야기였지만 아직 널리 퍼지지 않은 소문이라 이렇게 이야기할 맛이 나는 것이다. 이곳에 보인 부인들은 모두, 수다라면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뿐이었고, 그녀 역시 뒤지지 않는 재능(?)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흔쾌히 이 소문을 널리 퍼뜨리는 데에 일조하기로 마음먹은 바 있었다. “마, 말도 안 돼요?! 그들은, 그들은 절대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갔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말도 안 됩니다!” 사실 처음 말을 들었을 때는 그녀 역시 똑같은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아무리 허황된 소문이라도 그에 밑거름이 되어 주는 사건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소문의 거의 대부분을 귀담아 듣고, 나중에 밝혀지는 진상을 늘 대조해보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이제까지의 소문은 거의 그에 준하는 진실을 기반에 두고 퍼져 나갔다. 물론, 터무니없이 부풀려져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저도 못 믿었었다니까요! 하지만, 믿을 수 있는 분의 입에서 나온 말이에요. 정말이라니까요! 프리지아 후작부인께서 친히 귀띔하여 주시길, 아마도 사실일 거라 하셨어요.” 부인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슬슬 귀부인들의 생각은 ‘아마 사실’이 아니라, ‘진실’로 슬그머니 기울기 시작했다. 한 귀부인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만일 그 말이 사실이라면, 어머, 대체 어떻게 되는 거죠? 세상에, 위험하지 않나요?” “무서워라!” “세상에! 어떡하면 좋아요?” “보, 복수하려 하지 않을까요? 아, 아니, 그보다, 그들이 찾으러 오지 않을까요?” “그럴 지도 몰라요. 어, 어떡하지요?” 순식간에 불안이 퍼져 나갔다. 귀부인들은 모두 오후의 한가로움을 잊은 채, 새로운 소식이 던져주는 충격과 불안을 헤어나지 못했다. 이들은 모두 딸을 보낸 어머니들이 아니라, 이미 혼기를 놓쳤거나 아직 혼기를 맞지 못한 처녀들의 어머니였다. 그래서인지 그들 중 아무도 이 소식을 기뻐하는 사람이 없었다. “절대 돌아오지 못하게 해야 해요! 만약 돌아왔대도 다시 추방합시다! 막아야지요! 우리 모두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세상에, 세상에…….” =========================== ...유구무언. 드릴 말씀이 없군요. 즐독하세요. 덧. ...충치 생긴 것 같아요..[눈물] 제 목: 공녀(貢女) : 제45화 [유적지](1) #. 45화 ‘유적지’ * * * * * * * * * * * * * * * 마계 서열 제3위의, ‘로이드윈 드 스켈로테’ 마안(魔眼)이라는, 타인의 사생활을 마구 침범하는 괘씸한 눈깔을 가진 이 남자는, 짐작컨대 분명 시꺼먼 능구렁이 열댓 마리를 뱃속에 키우고 있음이 분명하다. 분명 그가 가진 정보는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호감이 가질 않았으니. 가만히 보고 있자면, 저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가게끔 하는 신기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고나 할까. 그는 정말, 천계에다 뚝 떨어뜨려 놓아도 잘 살 마족이다. =============================루피아의 자서전================ 달콤한 차 향내가 후각을 자극해왔다. 달콤하고도 부드러운 은은한 향내에 만족스럽게 미소 지은 카멜라는 찻잔을 받쳐 들고 남편에게로 다가갔다. 그녀의 남편은, 오늘따라 더욱 우울한 듯 눈썹을 있는 대로 찌푸리고 있었다. 사실, 남편은 그 손님들이 등장했을 때부터 계속 우울한 얼굴이었다. “이제 그만 마음 푸는 것이 어때요? 그래봤자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카멜라는 차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녀가 말한 것처럼, 카일이 아무리 ‘마음에 안 든다, 결사반대!’를 외쳐도 루피아는 꿈쩍 할 아이가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카일은 루피아에게 무척 약했던 것이다. 카일이 아무리 큰소리를 쳐도, 그는 결국 팔불출이었다. 그것도 심각한! 카멜라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리 못난 사내도 아닌데…… 과민반응이라구요, 당신.” “모, 못난 게 아니야? 무슨 소리요! 얼굴만 빼면 볼 것도 없는 그딴 녀석한테! 솔직히 뭐가 있어! 뭐가! 그리고 과민반응이라니? 그런 위험한 녀석은 당연히 자식으로부터 멀리 떼어 놓고 싶어야 정상 아니오?” 그것도 그랬다. 솔직히 말해서, 이디스 같은 타입은 부모가 자식으로부터 멀-리 떼어놓고 싶게 만드는 타입이기는 했다. 그야말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위험한 냄새가 폴폴 풍기지 않는가. 게다가 잘생기기까지 했으니 부모로서는 ‘악의 구렁텅이’같은 존재일 것이다. 어떻게 보면 카일의 반응은, 좀 과하다 싶긴 하지만 정상적인 반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카멜라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분명 위험할 타입이지만 그녀가 보기에 생각보다 나쁜 사내는 아닌 것 같았고, 무엇보다 루피아가 반한 상대인 것이다. 만약 마계로 가지 않았더라도 결과는 비슷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당신, 루피아한테 소개시키고 싶은 다른 젊은애 하나 알고 있어요? 있으면 말씀해 보시죠!” “……그건.” 카일의 말문은 턱- 하고 막혀 버렸다. 그는 딸아이의 성깔(…)을 잘 알고 있었다. 사교계의 여느 평범한 남자를 데려다 놨다가는 지루하다며 질색을 하든가, 아니면 느끼하다고(적절한 찬사는 신사의 기본 매너이므로) 도망을 가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대체 언제쯤이 되어야 저 팔불출 기질이 가라앉을까? 아마 루피아가 시집갈 적에는 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카멜라는 가볍게 혀를 찼다. 게다가, 옛날 연애하던 시절에는, 카일 역시 만만찮은 남자였음을 그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어째서! 어째서 안전한 남자를 고르지 않고 그딴 자식을~ 세상에 착한 남자가 얼마나 많은데 말이야! 안 그러오?” 카멜라는 피식 웃었다. “착한 남자는 지루하잖아요.” “…….” 그녀는 대답이 없는 남편을 향해 싱그러운 웃음을 지어 주었다. 향긋한 다향(茶香)을 한껏 음미하며 한 모금 마신 그녀는, 창문 바깥으로 시선을 주었다. 초여름의, 깨끗한 푸른색 하늘 너머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다시는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딸이 돌아왔다. 돌아온 딸은 무척 성장해 있었고, 또다시 어디론가 가 버렸다. 딸이 있음직한 곳을 바라보던 그녀는 문득 말했다. “참! 그러고 보니 말이에요. 요즘 이상한 소문이 돌던데…….” * * * * * * * * * * * * * * * 베키는 무척이나 난감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토록 소원해왔던 아가씨의 귀환이 무사히 이루어졌고, 다소의 문제는 남아 있지만 분명 더없이 행복한 지금, 그녀는 생각지도 못한 문제에 봉착하고 말았다. 베키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계속 조용하기에, 그만 둔 줄 알았는데 말이야…… 이럴 경우, 어떻게 해야 옳은 걸까?’ 그녀는 한 번도 이런 문제에 관해 고민해 본 적이 없었기에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대개의 경우, 이런 식의 장난에 일일이 반응했다가 손해 보는 것은 분명 자신이 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으! 정말! 제 말 듣고 있어요? 크윽- 정말이지 너무하지 않나요? 어떻게, 어떻게 누님을 사랑하는 동생의 마음을 그렇게 이용해 먹을 수가 있는 거예요! 게, 게다가 누, 누님은 그런 녀석 따위르으을!” 얼굴을 발갛게 붉히며 분한 듯이 이를 악무는 소년, 그는 분명 에드윈드 에스베크였다. 밝은 금발의 부드러워 보이는 머리카락에, 귀티 나는 하얀 피부, 선명한 초록색 눈동자를 가진, 영락없는 ‘귀공자’인 그는, 무척 단정하고 깔끔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베키는 그런 그를 심란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어째서 자신이 이런 말을 듣고 있어야 하는지 그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요? 도련님.” “예? 아, 억울하단 얘기죠! 들어봐요, 정말 나, 그 3일이 지옥 같았다니까요!” “……그러셨나요?” 그 외에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솔직히 이런 야심한 시각, 도련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베키로서는 충분한 고통이요, 노동이었다. 몸은 지치고 피곤한데, 눈앞의 도련님은 피곤하지도 않은지 팔팔하게 입을 나불대고 있었다. 분명 내일도 피곤한 일정일 테니 이 밤 시간에 피로를 회복해두어야 한다. 노예로 팔려 엘 세느안트 저택에 오게 된 이후, 오늘처럼 멀리 저택을 벗어나 본 기억은 없었다. 아무리 많이 벗어난다 해도 고작해야 수도 안이 한계였다. 비록 말을 타고 달리는 식의 노동은 아니었지만 난생 처음 경험해보는 텔레포트 마법진은 그야말로 끔찍할 정도의 충격을 주었다. 무릎에서 힘이 쫙 빠지는 것과 함께 울렁거리는 구토증이 덮쳐 왔던 것이다. 그런 식의 경험을, 오늘 하루 동안 무려 세 번이나 반복했다. ‘내일도 또 그런 일을 겪을 것만 생각하면 지금도 속이 까뒤집힐 것만 같은데.’ “어? 어디 안 좋아요? 얼굴이 해쓱한데-….” 너 때문이잖아! 이 철부지 도련님아! 당장 꺼져! -…라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건만, 차마 베키는 입을 떼지 못했다. 마치 비 맞은 강아지 같이 처량하고 걱정 어린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초록색 눈동자를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던 탓이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이 꼬마 도련님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아가씨의 친구이신, 세키라 아가씨의 하나뿐인 동생이 아닌가. 절대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루피아 아가씨가 또 어딘가로 가신다고 하시기에, 있는 힘껏 붙잡아 동행을 하게 된 것까지는 좋았다. ‘힘들 텐데’라고 경고했던 루피아 아가씨의 충고대로, 아주, 아주 힘든 경험이었지만 그럭저럭 버텨낼 수는 있는 일이었기에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문제는, 바로 이 도련님이었다. 베키의 눈에는 에드윈드의 엉덩이에 강아지 꼬리가 붙어있는 것처럼 보였다.(정말!) 그녀는, 길 가다 아주 귀여운 강아지가 옷자락을 덥썩 물고 놓아주지 않는 상황과 지금이, 아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요 강아지를 걷어차, 말아? 하는 식의) ‘아가씨…… 사, 살려 주세요. 졸려요!’ “앗? 앗! 베, 베키! 자지 말아요, 내 말 좀 더 들어줘요! 우아앙. 아무도 내 말은 들어주지도 않고! 베키마저 날 버리면 안 돼! 자면 안 돼요오!” 누가 이 꼬리 붙은 강아지 좀 떼어 줘! 베키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허허 웃으며 눈을 감아 버렸다. 몰라, 이제! 될 대로 돼라. * * * * * * * * * * * * * * * 순금을 녹여 뽑아낸 듯한 기다란 머리카락이 단아한 얼굴선을 감싸 흘렀다. 곱게 호선(弧線)을 그리며 뻗은 금갈색 눈썹 아래로,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깊은 색으로 빛나고 있다. 유려하게 솟은 콧날과 석류를 베어 문 듯한 붉은 입술. 언뜻 보면 여자로 착각할 만큼 화려한 인상의 남자는, 고요한 석실 안으로 발을 밀어 넣었다. 어지럽고 시끄러운 마계의 핏빛 혼란과는 아주 동떨어진 듯, 종이 한 장 떨어지는 소리마저 크게 들릴 것 같은 고요함. 이곳이 같은 마계의 일부분인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에드라스는 언제나와 같이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움직이지 않는 라우데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길은 무척 씁쓸했다.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던 기도문이 어느 순간 뚝 끊겼다. 라우데스는, 늘 그랬던 것처럼 마계 유일의 수염과 자글자글한 주름을 가진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건강도 생각하셔야죠. 식음을 전폐하신 상태라고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얼굴 본 지 며칠 되지 않았음에도, 라우데스의 얼굴은 그때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해쓱하고 안색도 나빠 보였다. 잠도 주무시지 않으시고, 식사조차, 하다못해 물이라도 입에 대려 하지 않으신다며 발을 동동 구르고 애타하던 신관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기본적으로 마족이기에 갖는 체력이 있음에도 이 지경이 되었다는 것은 비단 식음을 전폐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신력(神力)을 소모했기 때문일 것이다. “걱정을 끼치려는 의도는 없었다네. 다만… 뭔가를 목구멍 아래로 넘기는 것이 무척 힘이 드네. 그래서일 뿐이지.” 라우데스는 마치 그 말 한 마디라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기라도 되는 양 태연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상황은 어떤가?” “…예상하신 대로입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셨습니다.” 마왕에게 절대적 충성을 바치고, 주인으로 모셔야 한다는 것은 마족에게는 당연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마왕의 ‘절대적 힘’을 전제로 한다. 그들의 주인은 누구보다, 그 어느 누구보다 강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충성의 밑바탕에 깔린 기본 조건이었다. 마왕성의 주인 자리가 바뀌었다는 것은(믿을 수 있든 없든 간에), 그들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것은 눈으로 확인되지 않은 ‘힘’이었다. 슬슬 불만을 나타내기 시작하는 마족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소리이다. 무엇보다 그들을 제어해야 할 세 마족이 사라져 그 혼란은 더해져만 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딜렌은 전혀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카른만이 표면에서 마왕성을 휘저어대니, 그 꼴이 더욱 눈꼴 시리게 보이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림자’ 일족은 그들의 발아래 있다시피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더욱 심기가 불편해진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무슨 생각이십니까.” “……생각이랄 것 있겠나. 신께 모든 것을 맡긴 이 몸은, 그저 클리오라께서 바라시는 대로 흘러가길 소망할 뿐이야. 모든 것은 그 분의 뜻대로.” 라우데스가 성호를 그었다. 아직까지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다. 마신 클리오라는, 어째서 공녀(貢女) 500명을 바치라 신탁을 내렸던 것일까? 그렇게 하여 무슨 소용이 있다고? 더구나 최고위 마족의 신부로 맞이하라 했던 것은 대체 무슨 연유에서였을까. 일전에 루피아가 질문한 바 있었지만, 그때 라우데스는 슬쩍 대답을 비켜 갔다. ‘신의 뜻’은 결국, 라우데스, 그 한 명밖에 모르는 것이다. 폐 깊숙한 곳에서부터 서늘한 기운이 차고 올라온다. 뱃속에서 시꺼먼 것이 뭉쳐지는 느낌이 들었다. 에드라스는 고개를 들어 경건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는 라우데스를 바라보았다. 깨끗한, 한 치 티 없이 깨끗한 암흑. 에드라스는 입속으로 ‘클리오라’의 이름을 되뇌었다. 그들이 이 자리에 서 있게끔 해 주신, 영원한 그들의 모신(母神). 진정한 어머니이자 아버지. 당신의 뜻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겁니까. ================================================ 유후♡ 칼 맞아도 싼 인간, 네르 등장입니다.[웃음] 아하하.. 자포자기예요, 자포자기. 그간 여러 번 지웠다 썼다 지웠다 썼다를 반복, 하루 종일 컴퓨터에 붙아앉아 있었으면서도 뱉어낸 것은 고작 요것밖에 없습니다. 참.. 제 능력에 한계를 느낀달까요. ...제게 3연참 같은 것은, 꿈의 신기(神技)인가 봅니다.. (먼산) 그런데,(위를 훑어보고) 지금 보니 라우데스&에드라스도 꽤나 묘~한 분위기가 흐르는 것이, 딜렌&카른 못지 않단 말예요. 곳곳에 찾아보니 이럭저럭 얽히는 게 참 많이 눈에 띠네요. 음.. 의도한 것은 딜렌&카른 하나밖에 없는데.; 뭐라고 하셔도! 저는 꿋꿋하게! ....살 거예요! 우아앙![...] 죽이신다 어쩌신다 해도 살고 말 거라구요![←미쳤다;] 메일 : donghee425@hanmail.net ..으로 툭, 던져주시구요, 리플 : 아래다 쭉~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아.; 즐독하세요!^_^; (...죄송해요. 오늘은 좀 주책이네요;;) 제 목: 공녀(貢女) : 제45화 [유적지](2) #. 45화 ‘유적지’ * * * * * * * * * * * * * * * “우욱! 오, 올라올 것 같아.” 역시 하루 네 번은 무리인가. 아주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세키라와 베키를 보며 루피아는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키려 심호흡을 했다. 세키라 옆에는 아로데가, 루피아 옆에는 이디스가 자리를 잡고 그녀들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에리나는 마계에서 그랬듯 아주 말짱하게 안 됐다는 얼굴로 두 친구를 바라보았다. 조금 진정이 되자, 루피아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등을 쭉 폈다. 울렁거리던 속이 조금은 나아지는 듯했다. “괘, 괜찮아? 베키! 베키, 정신 차려요! 죽으면 안돼~” “……이 정도 갖고 안 죽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안색이 정말 새파란 걸! 새하얗다 못해 새파랗다고!” 하얗게 질려서인지 베키의 얼굴에 점점이 박힌 갈색 주근깨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텔레포트에 의한 울렁거림이 아닌, 피곤함이었다. 간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는지 베키의 얼굴은 누렇게 뜬 데다 눈 밑에는 검게 기미까지 그늘지어져 있었다. 루피아는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쯧쯧. 불쌍한 베키. 마치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대는 동생의 모습을 보는 세키라는 그저 얼굴만 발갛게 붉혔다. 아무렴, 부끄럽지! 머리라도 짚고 싶어질 것이다. 에리나가 불쑥 말했다. “신분이 맞지 않는 관계는 껄끄러운 감정만 남길 뿐이야. 말릴 수 있다면 말리는 것이 낫겠어.” 맞는 말이었다. 게다가 보다 큰 타격을 받는 것은 베키 쪽이 될 것이다. 세키라가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했다. 루피아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루피아는 베키를, 그리고 에리나와 세키라는 에드윈드를 어떻게 떼어놓을까 생각하던 중에 로이드윈이 끼어들었다. “이봐! 거기 바보 꼬마! 이리 와서 식사 준비나 해!” “카악! 누구더러 바보 꼬마래요! 그리고 내가 몸종인 줄 알아요! 있는 대로 다 부려먹게! 제발 이번에는 날 좀 가만히 내버려 두란 말이에요!” “시끄럽군. 그럼, 네가 안고 있는 그 여자에게 시킬까?” “우, 욱! 그, 그건…… 안 되지만…….” 얘기를 듣자하니, 에드윈드는 수도까지 오는 동안 계속 세 마족의 장난감이 되었다고 한다.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울컥하는 귀여운 반응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지칠 줄 모르는 스태미나(?)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끝내는 일을 하고 마는 결과까지 모든 것이 놀려먹기에 ‘딱!’ 좋았던 것이다. 세키라는 자신의 이야기를 미끼삼아 동생을 괴롭혔다며 자랑스럽게 말하는 아로데 앞에서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저 조용히, 속으로 잠시나마 동생의 암울한 과거와 미래에 묵념을 올렸다. 아로데와 에드윈드, 로이드윈의 목소리가 한데 섞여 꽥꽥, 하고 소음을 만들자, 루피아는 한쪽 구석으로 물러나 조용히 쉬기로 했다. 이래저래 굉장히 피곤하고 정신없는 하루였다. 그다지 한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몸은 천근만근 무겁기만 했다. 일단 ‘로헤델’의 유폐지로 찾아가 보기로 결정이 났다. 알려지지도 않은 ‘로헤델’의 이름을 중간계의 서적에서 뒤지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라는 생각 하에 내려진 결정이었다. 다행히도 로이드윈은 ‘로헤델’의 유폐 장소를 알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그런 것까지 다 알까? 라고 생각해 물어봤지만, 돌아온 것은 알 수 없는 웃음과 ‘알고 싶어?’라는 되물음이었다. 게다가 어쩐지 로이드윈이라고 하면 그런 것을 알고 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루피아의 생각도 그 의문을 지우기에 충분한 역할을 했다. ‘저 녀석 눈은, 사생활을 엿보는 망원경 같은 거라니까, 뭐. 알고 있어도 이상할 것 없을 지도…….’ 사실, 이렇게 대 부대로 올 생각은 아니었다. 여섯 명만 해도 충분히 많은 인원이었지만 절대 그냥은 못 보낸다는 강력한 항의에 의해 카에리드, 이데카른, 트로에, 그리고 바르에든과 에드윈드, 베키에 히투니아까지. 완전히 총 출동이었다. 물론 말려보려고 했다. 하지만 막무가내로 우겨대는 사람들을 어떻게 당해낼 수가 있었겠는가? 거기다 베키는 눈물까지 동원해 매달렸다. 결국 항기(降旗)를 든 쪽은 루피아 쪽이었다. 그 결과, 이렇게 12명의 화려한 인원이 대이동을 하게 된 것이다. 아직도 유폐지에 도착하려면 이런 식으로 이틀을 더 가야 한다고 한다. 조금 진정된 것처럼 느껴졌던 울렁거리는 속이 다시금 요동을 쳤다.(계속 시간을 끌게 되는 이유도 바로, 인간인 그들의 체력이 받쳐주지 않아서였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녀는 그다지 멀미를 하는 체질은 아니었지만, 텔레포트는 정말이지 맞지 않았다. 세키라와 베키 역시 마찬가지였다. 발밑이 꿈틀거리는 뱀의 살가죽처럼 물컹거리고 시야가 잘게 조각조각 부서지는, 상상만 해도 머리가 깨질 것 같다. 루피아는 길게 한숨을 뱉었다. 하나씩,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해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조급해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일은 없는 것이다. 서로 엉킨 듯 하면서도 닿지 않은 세 개의 달. 마계로 온 첫날 밤 보았던 그 달의 요요함은 잊을 라야 잊을 수 없는 장면일 것이다. 태어나 18년간 쭉 보아왔던 하늘임에도, 루피아의 머릿속에는 그 세 개의 달만이 덩그러니 떠 있는 흐린 마계의 하늘이 떠올랐다. 1년도 채 지내지 않았지만 그 시간은 그녀가 여태껏 살아온 시간보다 더욱 선명하게 머릿속에 그려져 있었다. 유리조각이 잘게 부서져 빛을 발하는 듯, 검푸른 하늘에는 작고 고만고만한 별들이 수없이 퍼져 있다. 마계에서 보는 하늘과, 중간계에서 보는 이 하늘은, 본질은 같으나 분명 다른 것이다. ‘……몸은 피곤한데 잠이 안 와.’ 눈이 감겨지지 않았다. 이곳은 대륙 어디쯤일까? 시리어스 제국 안이기는 할까? 어디에 발을 디디고 서 있는지도 모른 채 무작정 텔레포트만 하다보니 어느새 어디쯤에 와 있는 것인지도 완전히 잊어 버렸다. 루피아는 눈을 감았다. 불안하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마치, 곧 무너질 모래 탑 꼭대기에 발끝을 디디고 서 있는 것만 같은 기분.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그대로 나락을 향해 떨어져 내릴 것만 같은 긴장감. 팽팽하게 잡아당겨진 실위에서 위험한 곡예를 하고 있는 곡예사가 된 것만 같은 기분. 모든 것이 불안하기만 했다. 눈을 뜨면, 섬뜩하리만치 새하얀 얼굴로 파리하게 질린 피투성이의 그가 눈앞에 누워있을 것만 같다. 눈앞이 산산조각이 나던, 까맣게 어둠이 내려몰리던 그 날의 그 기억은 선명하고 생생하다. 가슴을 잡아 뜯기는 것만 같던 아픔도. 가족들과 손을 잡고 있는, 얼굴을 맞대고 있는 이 시간도 꿈일 것만 같아 불안하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신기루 같은 기분이 들어서, 문득문득 불안하고 오싹해지는 것이다. 앞으로 나는, 그는, 우리는, 모두는, ……어떻게 될까. 미래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옆에 있는 그가 사라질 것만 같아 불안하다. 하! 언제 이렇게 약해졌니. 언제 이렇게 약해빠진 멍청이가 되어 버렸니.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잠이 오지 않나?” 조용한 가운데, 그의 목소리가 상념(想念)을 파고들었다. 일부러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시꺼먼 후회와, 새하얀 기쁨과, 시뻘건 두려움도 함께 흐른다. 먼저 침묵을 깨뜨린 것은 그였다. 낮은 음성이 모든 것을 가르고 정확히 귓가에 박혀들었다. “……미안하군.” “뭐가요?” 루피아는 발끈했다. 그는 무엇 하나 자신의 의사나 뜻을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언제나 혼자, 혼자, 혼자! 혼자 생각하고 혼자 결정하고 혼자 행동한다. 조금이라도 말을 해 주면 좋을 텐데, 그는 그녀가 옆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듯하다. 그의 평생 고질병이다, 그것도 불치병! “제기랄! 우라질! 니미럴! 개똥! 말미잘, 해삼, 멍게!” 엎어져 있는 일행들의 침낭이 순간 움찔거렸다면 눈의 착각일까? 하지만 루피아는 과감하게 그것을 무시했다. 안 그래도 센티멘탈한 기분이 된 오늘 같은 밤, 그녀를 건드린(?) 것은 볼 것도 없이 그의 실수였다. “-다시 마왕이 되고 싶죠?” “…….” “아니, 되어야만 할 테죠.” 루피아는 후, 하고 짧게 숨을 뱉었다. “……약속, 지키지 않으면 평생 저주할 거예요.” ‘약속? 그게 뭐지? 제길, 궁금해서 잠이 안 와!’ ‘루피아가 이상해졌어! 내 동생 돌려 놔!’ '저런 욕을! 우리 아가씨 어떻게 해! 누가 가르쳤어!’ ‘이런 식인 거야? 늘 이런 식인 거야아아아?!’ '참…… 입이 험하군.’ 각양각색의 생각들을 속에 담아둔 채, 짧은 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 * * * * * * * * * * * * * * 상당히 애가 달아있나 보군. 피식, 한쪽 입 꼬리가 비죽하게 올라갔다. 명백한 비웃음이 서린 얼굴로, 로이드윈은 은테 안경을 슥 밀어 올렸다. 날카로운 붉은 눈이 이지적인 색깔로 반짝였다. 선명한 선홍색 눈동자 안에, 약간 더 짙은 빛깔의 가는 세로줄이 그려져 있다. 보고픈 의지만이 있다면 어디든 볼 수 있다는 마안(魔眼)답게, 그 색은 깊고 깊다. 제아무리 마계의 정보 줄을 한 손에 쥐고 흔드는 그이더라도, 천계에서조차 최고 기밀 사항일 ‘로헤델’에 관한 상세한 정보는 알아내기 힘들다. 하물며 그 ‘유폐지’를 알아내기란, 그야말로 땅 파서 고래 잡기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마안’도 그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로헤델’의 유폐지가 중간계라는 것을 알았을까? 그것은, 지금 로윈의 손에 쥐어져 있는 서신 덕분이었다. 서신을 내려다보는 로윈의 눈이 고양의 그것처럼 가늘어졌다. “정말 엉덩이에 불이 붙으셨군. 이런 것까지 내어줄 정도라면.” 아로데가 불쑥 나타나 끼어들었다. 아로데는 팔을 로윈의 목에 둘러 고개를 어깨 너머로 쑥 내밀면서 로윈의 손에 들린 서신을 집어 들었다. 팔랑팔랑, 종이는 아로데가 흔드는 대로 힘없이 따라왔다. 천계도 참 우습게 돌아가고 있었다. 혼혈 동생에게 왕위를 빼앗긴 마계도 마계이지만, 천계는 한 술 더 떠, ‘에우로카엘’이라는 반쪽짜리 신의 아이가 오르가프의 자리를 ‘대행(代行)’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뛰어난 신의 열두 아이는 천계의 모든 이에 의해 감금이나 다름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이 서신은 그 중 열외였던 ‘카마엘’의 손에 의해 전해진 것이었다. “킬킬, 시원하게 얻어맞았지. 이제껏 여유부리고 있다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뒤통수를 꽝! 하고 내리쳤으니 말이야.” “…그다지. 남 말 할 처지는 아니라고 보는데 말이다.” 킬킬거리는 아로데에게 유덴이 툭 던지듯 내뱉었다. 맞는 말이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은 똑같았다. 천계와 마계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이 밖으로 드러났느냐- 드러나지 않았느냐 하는 점이다. 적어도 천계는 내부의 분란이 가시화되어 나타나지는 않았으니 겉으로 보았을 때 훨씬 안정적인 장점이 있다. “흥! 그나저나, 어떻게 할 거냐? 너는 찬성하는 거냐?” “뭐- 주군 뜻에 달린 거지.” ------------------------------------------------------------------------------------------ 정확히 일주일 만의 복귀. ....죠?; 지금 방의 전구가 나가서 깜박깜박 거립니다.(눈 나빠지는데..;) 글은 안 써지지,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날마다 더해만 가지..; 제가 스트레스에 참 약한 동물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은 일주일이었습니다-_-; 그야말로 허우적거리는 일주일이었다고나 할까요.[웃음] 그럼 즐독하시구요, ...밤을 꼴딱 새운 저는 이만 자러 가야겠습니다.;(누구 박카스 가지고 계신 분?;) 메일 : donghee425@hanmail.net 리플 : 요 아래에♡ 제 목: 공녀(貢女) : 제45화 [유적지](3) #. 45화 ‘유적지’ * * * * * * * * * * * * * * * 깜빡, 하고 루피아는 크게 떴던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다시 뜬 눈 앞에는, 눈을 감기 전에 그녀의 뇌리에 강렬하게 새겨졌던 광경이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두 눈에 그대로 그 모습이 새겨진 듯, 눈을 감아도 지워지지 않을 것만 같다. 어떻게 이런 곳이 ‘현자의 탑’에 발견되지 않았던 걸까? 거대한 대륙 ‘엘루시아’의 마법사 길드인 ‘현자의 탑’은, 제국 시리어스에 거점을 두고 활동을 하고 있는, 모든 마법사들의 꿈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제국 시리어스에조차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웬만큼 큰 일이 아니고서는 정치에 직접적인 연관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던젼 탐험이나 고(古)유적지 연구에 관해서는 타의추종을 불허할 만큼 열성적이었다. 오죽하면 이 대륙의 모든 유적지는 ‘현자의 탑’에 의해 다 파헤쳐졌다는 유머까지 나돌았을까? 그 정도로 그들은 고유적지나 던젼에 관한 일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루피아, 그녀 역시 4클래스 밖에 되지 않지만 어쨌든 마법사의 일원이다. 그녀 역시 고유적지에 관한 관심은 여느 마법사 못지않은 것이다. “대단해…….” 세키라와 에리나의 눈에도 감탄이 서려 있었다. 특히 에드윈드는 마치 날아갈 듯이 흥분한 모습이었다. 그저 담담한 안색으로 훑어보는 마족들에 비해 인간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곳은 사방이 모두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가파른 절벽은 울퉁불퉁한 회청색의 바위로 깎아질러졌고, 저 높은 꼭대기에는 우윳빛의 구름과 안개가 내려앉아 있었다. 꼭대기의 구름 사이사이로 마치 고운 금가루 같이 밝은 햇살이 내려와 앉았다. 사방의 절벽 한 가운데 옴폭 패인 그곳은 꽤나 넓었다. 부드러워 보이는 싱그러운 연둣빛의 잔디와 기분 좋은 시원한 바람이 분다. 저 한 가운데에 서 있으면, 그대로 잠들고 싶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가장 장관인 것은, 바로 사방(四方)의 절벽을 축으로 하여 만들어진 결계(結界)였다. 마치 거미줄처럼, 얇고 하얀 은빛 실이 어지럽게 엉켜, 하늘을 가리었다. 훑어 내리던 그들 모두의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한 곳으로 모여 들었다. 사라락, 바람이 쓰다듬듯 스치고 지나자 긴 회색 머리카락은 힘없이 아래로 흘러 내렸다. 모두 숨을 죽였다. 죄의 증거. 신께 대항한 숨겨진 폐륜아(廢倫兒). 빈껍데기임을 증명하듯, 단아한 생김, 생김을 가진 그 얼굴은 아름답고 깨끗했지만 섬뜩함만 안겨주었다. 곧게 뻗은 눈썹은 더 이상 힘이 담겨 있지 않았고, 그 눈동자는 아무런 의지도, 빛도 갖고 있지 않았다. 굳게 다문 입술에서는 더 이상 단호한 매서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말 그대로 저것은 타락 천사 ‘로헤델’의 빈껍데기 인형이었다. 로헤델의 등 부분에 문득 시선이 갔다. 그곳에는, 잔인하게 반쯤 잡아 뜯겨진 날개 뿌리가 남아 있었다. 어깻죽지에 찍혀 있는 시꺼먼 타락의 낙인은, 탄 흔적이 아직까지 고스란히 남았다. 가는 은빛 실로 포박된 그녀의 모습은, 마지막의 모습을 담고 있는 듯 했다. “이게-…… ‘로헤델’…?” 에리나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솔직히 말해서, 그녀는 아직도 ‘로헤델’과 ‘에우로카엘’의 관계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로이드윈이 말하길, 로헤델이 곧 에우로카엘이고, 에우로카엘이 곧 로헤델이라고 말을 했지만, ‘로헤델’은 이렇게 결계에 포박되어 죽어 있는데 어떻게 에우로카엘이 로헤델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분신(分身)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또, ‘로헤델의 별’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점점 머리가 복잡해지는 에리나였다. “말하자면, ‘에우로카엘’은 ‘로헤델’의 후인(後人)이라고나 할까. 뭐 그런 개념이다. ‘로헤델의 별’이란 그런 그녀를 지칭하는 말이지. 이제 좀 이해가 가나?” 로이드윈이 때맞춰 설명을 덧붙였다. 그제야 에리나를 비롯한 모두는 조금 이해가 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의문은 남아 있었다. 에우로카엘과 로헤델의 관계를 알았다손 치더라도 무엇을 해야 할 지는 아직까지 모양새가 확실히 잡히지 않은 것이다. 루피아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아유니의 얼굴이 떠올라 얼굴을 찌푸렸다. 살가죽이 뼈에 달라붙은 것처럼, 차라리 괴기였던 그 모습- 오동통하게 살이 올라 ‘루피아님~’하고 외치며 허리에 달라붙던 살가운 모습도 함께 떠올랐다. 도무지 매치가 되지가 않는다. 그저 밝고 명랑한 동안의 공녀라고 생각했건만, 어느 순간 바싹 마른 몸으로 천계의 앞잡이(?)가 되어 있는가 하면 이제는 오르가프의 열세 번째 아이인 ‘에우로카엘’이라고 한다. 게다가 거기에 ‘로헤델의 별’이라는 수식어가 하나 더 붙었다. 도무지 정체를 알 수가 없다. “제길! 하나만 할 것이지, 하나만! 뭐가 이리 복잡해? 좀 단순하게 살면 어디가 어때서?” 어디 털이라도 난대? 루피아는 대놓고 투덜거렸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쿠구궁- 하고,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로헤델의 왼쪽 눈이 반쯤 감겼다. 그리고 천천히, 다시 눈꺼풀이 위로 올라간다. “-이게 뭐야? 엄청 신경 쓴 연출이네!” 아로데가 비틀거리는 세키라의 허리를 안아들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본 에드윈드는 울컥한 모양이었지만 자신은 베키를 잡고 있어서 어떻게 하지도 못했다. 그저 이마에 십자가 마크를 몇 개를 새길 뿐. “과연 천족답군.” 이디스 역시 한 마디 덧붙였다. 루피아의 어깨를 붙잡고 있는 그는, 자신을 노려보는 겁 없는 세 남자들에게 피식, 하고 가벼운 비웃음을 날려 주었다. 이 여행이 시작된 이래로부터, 아니, 서로 마주친 그 순간부터 그들은 눈이 빠져라 그를 노려봤고, 그는 가볍게 비웃어 주었다. 만약 시선으로 누군가를 죽일 수 있다면 이디스는 몇 번이고 찔려 죽었을 것이다. 만개(滿開)된 왼쪽 눈의 눈동자에서 진한 연두색의 빛이 쏟아져 내렸다.(너무나 화려한 연출이었다) “……-어어?” “어라?” “이건 또 뭐야?” * * * * * * * * * * * * * * * “그래, 어떤가. 아킴?” 시종장 아킴은 황태자 루블리츠의 물음에 그 특유의 움푹 들어간 오른쪽 보조개를 내보이며 웃었다. 그리고 여느 때와 같이 그는 루블리츠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황태자가 바라는 대답 그대로를 말해 주었다. “원하는 결과를 얻으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황태자 전하.” 루블리츠는 푹신한 쿠션에 몸을 받치며 굳은 어깨를 손으로 주물렀다. 이내 아킴이 그에게 다가와 굳어진 어깨를 솜씨 좋게 주물러 주기 시작했다. 루블리츠는 아킴의 손에 완전히 어깨를 내맡긴 채 생각에 빠져 들었다. 아킴은 황태자가 어렸을 때부터 곁을 지켜온 믿을 수 있고 능력 있는 시종장이었다. 루블리츠가 검술을 배우기 시작할 때, 그의 뭉친 근육을 처음 풀어준 이후부터 계속 아킴은 황태자의 안마를 맡고 있었다. “그래…… 그럼, 세 공작가문에서 특별히 잡히는 것은 없고?” “예, 전하. 특별히 이렇다 할 만한 것들은…….” 공작가문의 식솔이 몇 명 늘어나기는 했지만 그것들은 그다지 특별한 사항이 아니었다. 지켜보겠다고 말한 루블리츠였지만 그렇다고 마냥 손놓고 있을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그는 바로 아킴에게 지시해 ‘공녀’들에 대한 소문을 흘리도록 했고, 그가 바라던 대로 사교계는 공녀에 대한 이야기로 알게 모르게 술렁이고 있는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공녀의 귀환에 대해 달갑잖은 반응을 보였다. 그 대표적인 한 예가 바로 이 자리에 서 있는 아킴이었다. “만약 그 말씀이 사실이라면 이건 가만히 있을 일이 아닙니다, 전하.” 심각하게 안색을 굳히고 말하는 아킴에게 루블리츠는 피식 웃으며 손을 홰홰 내저었다. “이것은 그저 소문일 뿐일세. 공작들을 견제하기 위한.” 물론 그런 이유도 있었지만 그는 아직 아킴에게까지 사실을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무엇보다 이런 민감한 문제를 함부로 다뤘다가는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일이 크게 벌어질 수가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아직 엘 세느안트 공작가문을 비롯해 에스베크 공작가문, 칼르니르 공작가문은 제국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세 가문에 대한 백성들의 믿음은 그야말로 철석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루블리츠는 그들을 믿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경계하고 있었다. “더러운 마족에게 버려진 몸으로 다시 돌아와서 뭘 합니까? 감히, 무슨 낯으로 그 더러운 몸을 끌고 돌아온단 말입니까!” 아킴은 흥분하고 있었다. 마족에게 더럽혀진 몸으로, 라는 대목에서 루블리츠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지만 아킴은 눈치 채지 못했다. 너무 흥분해 있던 탓이다. ‘…마녀, 라.’ 마족과 정을 통한 여자는 옛날부터 있어 왔다. 마족과 계약을 한 여자들 대부분은 마족과 정을 통해 반마족을 낳았다. 그런 그녀들을 부르는 통칭은 ‘마녀’였다. 처음에는 마족과 정을 통해 반마족을 낳은 여자들을 이르는 말이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마족과 계약을 한 여자들을 몽땅 마녀라 이르고 있었다. 오르가프 신전의 ‘마녀사냥’ 이후, 사람들의 머릿속에 ‘마녀’란 더럽고 천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사람들에게 ‘마족’이란 두렵고 무서운 공포의 상징이었지만, 그와 반대로 오르가프의 교리에 의해 더럽고 천한 존재로도 인식되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마녀는 사람들에게 있어 경멸과 환멸의 대상이었다. ‘그녀들을 그렇게 내몬 것은 바로 우리인데 말이지. 우리의 목숨 값으로 건너간 여자들이 이제는 더럽다, 라? ……후후.’ 새삼스럽게도, 황태자 루블리츠는 입맛이 썼다. 공녀(貢女)의 신세란 결국 그것밖에 되지 못하던가? 타국에서 제국으로 바쳐진 여자들의 경우를 보아도, 고향이 돌아간 여자들은 사람들에게 있어 비난과 환멸의 대상 이상이 되지 못했다. 결국 제국으로 돌아와 버린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그것도 운이 좋은 경우이고, 대부분의 공녀들은 권세 있는 귀족의 노리개로 쓰이다 버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번에는 자신들의 목이 달려있으니 더욱, 심하겠지.’ 문득 루피아 엘 세느안트의 얼굴이 떠올랐다. 목구멍에서 왈칵 쓴물이 솟아오르자 그는 눈을 감아버렸다. 신선한(?) 한 마디를 던지고 사라진 그녀의 연인이라던 남자의 얼굴이 함께 떠올랐다. 수도로 돌아오는 길에 루피아가 남긴 몇 마디가 바로 귓가에서 이야기 하듯 생생하게 떠올랐다. 담담하게 말을 잇던 그녀의 눈은 아련하게 흐려져 있었다. ‘돌아오고 싶었어요. 다시는 이 땅을 못 밟는 줄 알았어요. 검푸른 밤하늘이나, 눈에 익은 별자리나, 이 바람 냄새를, 하늘의 색깔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몰라요.’ 소문을 흘린 것은 그이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이대로 덮어둬야 할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안이 사안인 만큼, 이 정도의 조치는 취해둬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남자였다. 지금쯤이면 엘 세느안트 공작부인의 귀에도 이 소문이 흘러들었을 것임이 틀림없었다. 소문의 루트를 찾아내는 것은 공작부인 정도의 사람이라면 쉬운 일일 것이다. 황태자 자신이 먼저 ‘나는 알고 있다’는 패를 들어 보였으니, 공작의 반응이 궁금해졌다. 그저 알아서 조심할까? 아니면 먼저 찾아와 문을 두드릴까. ‘자, 이제 어떻게 하시겠소?’ =============================================== 음. 황태자의 재등장♡ 저 녀석은 일회용 캐릭터가 아니었습니다-_-; 다들 너무 미워하시는 것 같은데.. 너무 미워하지는 말아 주세요.[웃음] ...솔직히, 저는 이디스보다 차라리 저 녀석이 좋습니다.[...먼산] 5일 만이라니- 너무 늦기는 하지만;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세요ㅠ_ㅠ; 4권은 6월 7일에 나올 예정이라고 합니다. 꼭꼭 다시 봐주시는 거 잊으시면 안돼요!; 요새는 아주 수행평가의 홍수입니다.; 미리미리 좀 내주지 꼭 시험기간 때에 내준다니까요![투덜] ..그래도 될 수 있는 한 꼬박꼬박 적을 생각입니다. 참. 신혼 일기를 요즘 못 적고 있는 데에 대해서 많이 궁금해하시는 것 같은데요. 적어야죠, 적을 겁니다! 당연히! 절대 포기 안 합니다!; 단지, 공녀는 출판된 상태이고 하니까 얼른 끝내려고-_-; 하는 거죠;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면 너무 뻔뻔한 부탁일까요?[..;] 죄송해요. 더 성실해질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메일 : donghee425@hanmail.net 리플 : 요 아래에! 많으면 많을 수록 저는 행복합니다.[씩] 그럼 즐독하시구요, 즐거운 하루 되십시오☆ 제 목: 유적지+a/공녀(貢女) : 제46화 [그와 그녀 사이] #. 45화 '유적지'의 +a * * * * * * * * * * * * * * * “그래, 어떤가. 아킴?” 시종장 아킴은 황태자 루블리츠의 물음에 그 특유의 움푹 들어간 오른쪽 보조개를 내보이며 웃었다. 그리고 여느 때와 같이 그는 루블리츠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황태자가 바라는 대답 그대로를 말해 주었다. “원하는 결과를 얻으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황태자 전하.” 루블리츠는 푹신한 쿠션에 몸을 받치며 굳은 어깨를 손으로 주물렀다. 이내 아킴이 그에게 다가와 굳어진 어깨를 솜씨 좋게 주물러 주기 시작했다. 루블리츠는 아킴의 손에 완전히 어깨를 내맡긴 채 생각에 빠져 들었다. 아킴은 황태자가 어렸을 때부터 곁을 지켜온 믿을 수 있고 능력 있는 시종장이었다. 루블리츠가 검술을 배우기 시작할 때, 그의 뭉친 근육을 처음 풀어준 이후부터 계속 아킴은 황태자의 안마를 맡고 있었다. “그래…… 그럼, 세 공작가문에서 특별히 잡히는 것은 없고?” “예, 전하. 특별히 이렇다 할 만한 것들은…….” 공작가문의 식솔이 몇 명 늘어나기는 했지만 그것들은 그다지 특별한 사항이 아니었다. 지켜보겠다고 말한 루블리츠였지만 그렇다고 마냥 손놓고 있을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그는 바로 아킴에게 지시해 ‘공녀’들에 대한 소문을 흘리도록 했고, 그가 바라던 대로 사교계는 공녀에 대한 이야기로 알게 모르게 술렁이고 있는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공녀의 귀환에 대해 달갑잖은 반응을 보였다. 그 대표적인 한 예가 바로 이 자리에 서 있는 아킴이었다. “만약 그 말씀이 사실이라면 이건 가만히 있을 일이 아닙니다, 전하.” 심각하게 안색을 굳히고 말하는 아킴에게 루블리츠는 피식 웃으며 손을 홰홰 내저었다. “이것은 그저 소문일 뿐일세. 공작들을 견제하기 위한.” 물론 그런 이유도 있었지만 그는 아직 아킴에게까지 사실을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무엇보다 이런 민감한 문제를 함부로 다뤘다가는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일이 크게 벌어질 수가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아직 엘 세느안트 공작가문을 비롯해 에스베크 공작가문, 칼르니르 공작가문은 제국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세 가문에 대한 백성들의 믿음은 그야말로 철석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루블리츠는 그들을 믿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경계하고 있었다. “더러운 마족에게 버려진 몸으로 다시 돌아와서 뭘 합니까? 감히, 무슨 낯으로 그 더러운 몸을 끌고 돌아온단 말입니까!” 아킴은 흥분하고 있었다. 마족에게 더럽혀진 몸으로, 라는 대목에서 루블리츠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지만 아킴은 눈치 채지 못했다. 너무 흥분해 있던 탓이다. ‘…마녀, 라.’ 마족과 정을 통한 여자는 옛날부터 있어 왔다. 마족과 계약을 한 여자들 대부분은 마족과 정을 통해 반마족을 낳았다. 그런 그녀들을 부르는 통칭은 ‘마녀’였다. 처음에는 마족과 정을 통해 반마족을 낳은 여자들을 이르는 말이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마족과 계약을 한 여자들을 몽땅 마녀라 이르고 있었다. 오르가프 신전의 ‘마녀사냥’ 이후, 사람들의 머릿속에 ‘마녀’란 더럽고 천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사람들에게 ‘마족’이란 두렵고 무서운 공포의 상징이었지만, 그와 반대로 오르가프의 교리에 의해 더럽고 천한 존재로도 인식되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마녀는 사람들에게 있어 경멸과 환멸의 대상이었다. ‘그녀들을 그렇게 내몬 것은 바로 우리인데 말이지. 우리의 목숨 값으로 건너간 여자들이 이제는 더럽다, 라? ……후후.’ 새삼스럽게도, 황태자 루블리츠는 입맛이 썼다. 공녀(貢女)의 신세란 결국 그것밖에 되지 못하던가? 타국에서 제국으로 바쳐진 여자들의 경우를 보아도, 고향이 돌아간 여자들은 사람들에게 있어 비난과 환멸의 대상 이상이 되지 못했다. 결국 제국으로 돌아와 버린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그것도 운이 좋은 경우이고, 대부분의 공녀들은 권세 있는 귀족의 노리개로 쓰이다 버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번에는 자신들의 목이 달려있으니 더욱, 심하겠지.’ 문득 루피아 엘 세느안트의 얼굴이 떠올랐다. 목구멍에서 왈칵 쓴물이 솟아오르자 그는 눈을 감아버렸다. 신선한(?) 한 마디를 던지고 사라진 그녀의 연인이라던 남자의 얼굴이 함께 떠올랐다. 수도로 돌아오는 길에 루피아가 남긴 몇 마디가 바로 귓가에서 이야기 하듯 생생하게 떠올랐다. 담담하게 말을 잇던 그녀의 눈은 아련하게 흐려져 있었다. ‘돌아오고 싶었어요. 다시는 이 땅을 못 밟는 줄 알았어요. 검푸른 밤하늘이나, 눈에 익은 별자리나, 이 바람 냄새를, 하늘의 색깔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몰라요.’ 소문을 흘린 것은 그이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이대로 덮어둬야 할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안이 사안인 만큼, 이 정도의 조치는 취해둬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남자였다. 지금쯤이면 엘 세느안트 공작부인의 귀에도 이 소문이 흘러들었을 것임이 틀림없었다. 소문의 루트를 찾아내는 것은 공작부인 정도의 사람이라면 쉬운 일일 것이다. 황태자 자신이 먼저 ‘나는 알고 있다’는 패를 들어 보였으니, 공작의 반응이 궁금해졌다. 그저 알아서 조심할까? 아니면 먼저 찾아와 문을 두드릴까. ‘자, 이제 어떻게 하시겠소?’ 오랜만에 사교계가 크게 술렁였다. 그들은 오랜만에 걸려든 큰 소문을 흘려듣지 않았다. 진원을 알 수 없는 소문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살에 살을 더해 끝내는 마치 사실인 것처럼 옷을 덧입게 되었다. 영향력이 큰 사람의 소문일수록 더 맛있는 법이다. 비록 은퇴를 했지만 제국 제일의 권세를 자랑하던 세 공작이 연루되어 있는 소문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소문은 본래 당사자의 귀에 가장 늦게 들어가는 법이라지만, 이번만은 경우가 조금 달랐다. 가장 늦게 그 소문을 들은 사람은 다름 아닌, 시리어스 제국의 황제였던 것이다. 소문을 접한 황제는 당장 세 공작을 황성으로 불러들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워낙에 민감한 사안이라 아무리 근거 없는 소문이었더라도 흘려들을 수 없었던 탓이다. 황제가 세 공작을 불러들였다는 소식은 금방 퍼졌다. 1년 전, 은퇴를 선언하고 난 이후 공작들은 각자의 영지로 돌아가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연회에 자주 참석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가까운 지인(知人)들의 연회에만 잠시잠깐 얼굴을 내비친다던가 하는 것이 다였다. 그나마도 금방 돌아가 버리기 일쑤였다. 황제는 황성 주최 연회 때마다 세 공작에게 복귀하라고 은근히 종용하는 등 미련을 버리지 못한 기색을 역력히 내비쳤지만 말이다. 오늘, 황제의 명을 받은 세 명의 공작은 조용히 황성에 입성(入城)했다. 약 1년 전만 해도 발바닥에 땀나도록 드나든 곳임에도 불구하고, 세 공작은 어색함과 거북함을 느꼈다. 너무 오랜만이라서 그런가? 아닐 것이다. 간간히 황실 주최 연회에도 얼굴을 내밀던 그들이었으니. 속이 거북한 이유는 그들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 말이 새어나간 것이냐!’ 카일은 이를 바득 갈았다. 처음 카멜라에게 소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야말로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다. 루피아와 불쾌한 식객(?)들의 모습을 들키지 않도록 시녀, 시종까지 거의 다른 곳으로 보내 버렸다. 혹시라도 수상한 말이 퍼져 나가지 않도록 그렇게나 조심했건만! “짐이 그들을 소환한 이유에 대해서는 경께서도 잘 알고 계시리라 믿소.” 황제는 침중한 어조로 말을 꺼내었다. 공작들의 안색도 더욱 가라앉았다. 황제는 맺고 끊는 것이 확실한 사람이었다. 이 소문에 대해 무엇이든 그들이 해명을 하지 않는다면 더욱 수상쩍게 여길 것이 분명했다. 카일이 입을 열기 직전, 황제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확실하지도 않은 소문 하나로 경들을 불러내어 불쾌하실지 모르겠소만, 짐의 입장을 이해해주기 바라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짐도 어쩔 수 없구려. 하하! 뭐, 믿지도 않소만 말이오.” “폐하, 폐하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일은…… 없사옵니다. 하오나 불충하게도, 신(臣)은 매일 밤 그런 일을 꿈꾸옵나이다. 신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카일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했다. 초췌한 얼굴로 담담하게 말을 뱉어내는 그 모습은, 애절하게 소리치는 것보다 더 슬퍼 보였다. 진심이 절절하게 묻어나는 그 어조와 몸짓, 얼굴에는 한 점 거짓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애초에 확인 차 그들을 불러들인 터였고, 소문을 그리 믿지 않았던 황제는 그 한 마디에 문제를 접기로 했다. “하하하! 그러리라 생각했소. 경들께는 무척 미안한 말이지마는, 만약이라도 그들이 돌아오게 된다면 무척 곤란한 노릇이지. 경들이 더 잘 아리라 생각하오만, 짐은 그런 경우를 결코 허락할 수 없다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런 상황을 용납하지는 않겠소.” 황제는 강하게 못을 박았다. 그 말에 세 공작의 안색은 알게 모르게 질려갔다. 황제의 옆을 지키며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황태자 루블리츠의 눈매가 가늘게 찢어졌다. 황제는 이만 가보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물러나는 세 공작의 낯빛은 무척 창백했다. 루블리츠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꿈도 꾸지 마시오.” ============================================================== #. 46화 ‘그와 그녀 사이’ * * * * * * * * * * * * * * * 문득 생각했다. 인간은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이 세상의 진실 중에서 인간이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은 반도 안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루피아의 자서전================ 공기가 ‘살벌하게 얼어붙었다’라는 표현이 절실하게 피부로 실감되었다. 소름이 오독오독 돋을 만큼 한기(寒氣)가 휑하니 돌았다.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떨릴 지경이건만, 세 마족의 폭발적인 살기를 한 몸에 받아내는 본인은 정작 태연한 얼굴로 싱긋 웃기까지 했다. 루피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세 마족은 금방이라도 로아이나의 목을 베어버릴 태세로 으르렁거렸지만 이디스는 덤덤하다. 하지만 그녀는, 세 마족 못지않게 이디스 역시 화가 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붉은 눈동자는 시리도록 투명했지만. 세키라로부터 이야기는 전해 들었지만 직접 보니 또 느낌이 다르다. 로아이나의 머리카락 색깔은 탁한 회색이었다. 마치 억지로 탈색을 시킨 것 같은 회색. 길게 자라난 머리카락은 그의 등허리 부근까지 덮어 내리고 있었다. 그 특유의 요염한 붉은 입술과 새하얀 피부, 그리고 습관처럼 띠고 있는 미소까지 여전했다. “……에우로카엘의 애완동물이었군.” “슬프게도, 제 앞에는 당신을 따를 운명은 준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저의 운명이자 숙명. 벗어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지만…….” 로아이나의 얼굴에 씁쓸한 웃음이 걸렸다. 하지만 그에게는, 앞날을 볼 수 있는 능력은 주어졌어도 그 길을 헤어날 능력은 주어지지 않았다. “죽으러 왔나?” 사실 루피아 자신이 생각해도 지금 로아이나의 등장은 그야말로 미쳤다, 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부풀려지지 않은 이상은 말이다.(루피아가 봤을 때, 이미 튀어나와 있었다) 로아이나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럴 지도 모릅니다만, 아직은 아닌 것 같군요. 사실 저는 그다지 말을 잘 듣는 애완동물이 아니기도 하고 말입니다.” “그런가. …꽤나 여유롭군.” “하하! 반항의 계절이라 말이죠. 저에게 개 목걸이가 채워진 곳도 이곳이라 추억이 새삼 떠오르나 봅니다.” 이디스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어떻든 간에, 로헤델과 로아이나는 뭔가 관련이 있는 모양이었다. 더불어 에우로카엘까지. 에우로카엘이 로헤델의 후인(後人)이라면 그 사이에 끼인 로아이나와는 대체 어떤 관계인 것일까. 적어도 에우로카엘에 대해 말을 할 때 로아이나에게서 호의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좋아하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오히려 싫어하는 쪽 같은데. 말끝마다 가시가 돋쳐있는 것을 보니까.’ 또 한 가지 의문이 있다. 로아이나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천계에 붙은 걸까? 그 정도의 능력이라면 마계에서도 빠지는 실력이 아니고, 또한 부족한 것 없이 풍족한 편이 아니던가. 에우로카엘을 싫어하기까지 한다면 굳이 천계에 가서 백안시(白眼視)당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천계에 붙은 마족이라고(그리고, 도움을 주었다고 해서) 천족이 어디 ‘오! 그래! 너 이번에 도움이 되었다면서? 하하, 어디 잘 지내보자고!’라고 하면서 악수를 해오겠는가, 어깨동무를 해오겠는가? “……루피아님. 아무래도, ‘미래’에 대한 답은 말씀드릴 기회가 없을 것 같습니다.” “뭐?” “대신이라고 하기 뭣하지만, 혹시, 옛날이야기 좋아하십니까?” 루피아는 이디스에게로 시선을 돌리고 다음으로 로이드윈을 쳐다봤다. 이디스는 처음과 똑같이 관심 없다는 듯한 시선을 되돌렸고, 로이드윈은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아로데는 여전히 으르렁거렸지만 그 이상의 행동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의 시선이 다시 되돌아 로아이나에게 닿자, 그는 입을 벌렸다. “제가 아직 어렸을 적…….” * * * * * * * * * * * * * * * “……간추리자면, 늙다리는 얌전히 처박혀 있으라는 말이로군?” 체르비엘이 이죽거리며 멋들어지게 예의를 차려 써놓은 종이쪽지를 흔들었다. 비록 그들은 천계 내(內)에서 오르가프 다음으로 권위와 지위를 가진 존재들이었지만 마계와는 달리 그 뜻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명분이라는 것이 필요했다. 리크비엘 측이 ‘마족의 뿌리를 뽑자’라는 모토를 걸고 나선 이상, 그 이상으로 천족들을 설득할 만한 무언가를 내놓지 않으면 아무리 12대천사라도 그들에게 속한 세력을 멋대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이 실정인 것이다. 최고 명령자는 그들이었고 개인에게 속한 세력이 없을 리 없지만 고작 30년 동안 에우로카엘은 많은 것을 했다. 미카엘은 콧잔등을 찌푸리며 쓰게 웃고는 중얼거렸다. “이럴 때는, 마계의 독재체제가 정말이지 부러워지는군. 이러면 안 되지만.” 그는 피식 웃으며 관자놀이 부근을 꾹 눌렀다. “세리엘, 상황을 정리해서 얘기해 봐라.” 세리엘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계율과 법’의 세리엘은 보기에는 남자보다는 여자 같이 호리호리하게 마른 체형이었지만(이름도 상당히 여성스럽다) 꽤나 귀엽고 오밀조밀한 생김과는 다르게 무척 딱딱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12대천사 중에서는 약한 편에 속했지만 바르고 뛰어난 결단력을 가지고 있다. 연한 하늘색 머리카락과 짙은 푸른색 눈동자를 가진 그는, 특히 무례한 리크비엘이 아주 눈에 거슬렸다. “에우로카엘의 핵심 세력은 아시다시피 리크비엘을 중심으로 한 장로회입니다. 하긴 가장 끌어들이기 쉬운 사냥감이었겠지요. 장로 거의 대부분이 병적이다 싶을 정도로 마족을 싫어하니까 말입니다. 그 선두주자는 말할 필요도 없이 리크비엘이죠.” 세리엘은 피식 웃었다. 정확히 말해 리크비엘은 천족 외에 모든 종족을 싫어했다. 마족, 인간, 요정족 할 것 없이 말이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천족 가운데에서도 자신과 뜻이 같은 자만을 좋아했다. “요시피아나 형님이 맡고 계시다가 에우로카엘이 인수받았던 ‘물의 궁’에 현재 모든 결정권이 넘어가 있는 상태입니다. 들리는 말로는 에우로카엘과 리크비엘은 물의 궁을 한 발짝도 나서지 않는다는군요. 미카엘 형님의 ‘바람의 궁’과 카마엘 형님의 ‘징벌의 궁’, 에리엘과 체르비엘 형님의 ‘거울의 궁’, 시즈니엘 형님의 ‘이름의 궁’, 저를 비롯한 6명이 맡고 있는 ‘하쉬핌’까지 모두 그 가진 바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결국 천계는 에우로카엘과 리크비엘의 손에 의해 돌아가고 있다는 말과 다름이 없지 않은가. 설상가상으로, 그들은 천궁 가장 깊숙한 곳에 갇힌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물론 형태는 예의로 무장한 정중하기 이를 데 없는 부탁이었다) “……아직 답신은 없나?” 세리엘은 고개를 저었다. 하긴,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닌 만큼 조금 더 기다려 보아야 했다. 하지만 시간이 촉박하다. 미카엘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그가 고민하고 마음에 걸려하는 것은 딱 한 가지였다. 상대가 ‘동족(同族)’이라는 것- 한숨이 그의 가슴을 들었다 내려놓았다. 그는 답답한 마음에 중얼거렸다. “그냥 콱, 내려가 버려?” “……!!” 미카엘은 아무런 생각 없이 한 말이었지만 그에 대한 파장은 컸다. 반짝거리는 눈으로, 시즈니엘과 체르비엘은 소리쳤다. “가자!” * * * * * * * * * * * * * * * 꿈을 꾸었다. 의식의 경계마저 희미하게 느껴질 정도로, 길고 긴 꿈. 이것이 자신의 것인지, 아니면 ‘그녀’의 것인지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이미 둘은 하나인 것을 말이다. 상쾌하지 않은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일으켜 이마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서늘한 공기가 이불 속에서 덥혀진 피부를 단번에 식혀주었다. ‘오랜만이로군. 그날의 꿈은……. 한동안 꾸지 않았는데…….’ 거미줄을 연상시키는 투명한 은색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감겨든다. 에우로카엘은 가만히 꿈속의 장면 아니, 기억 속의 그 날을 떠올렸다. ‘저주일까. -축복일까…….’ 13번째 신의 아이. 불과 30년 전만 해도, 그녀는 천계에서조차 그 존재여부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있으나마나한 어린 천사에 불과했다. 더러운 ‘회색’의 날개를 가진 반쪽짜리 신의 아이. 천계 그 어느 곳에도 마계에서 태어난 그녀가 설 자리는 없었다. 천계에 오기 전, 그녀는 딱 한 번 마계에서 벗어난 적이 있었다. 그것은 지금의 그녀가 있도록 해준 힘이자, 원인이자, 동시에 족쇄가 되었다. ‘로아이나를 만난 것도 그때였나?’ 그날도 그녀는 정신없이 도망을 치고 있었다. 마계의 아이들은 난폭하다. 약하고, 깡마르고, 어리며, 보호자마저 없는 그녀는 그런 마계 아이들의 좋은 표적이었고, 아이들의 덤벼들 때마다 그녀는 무작정 도망치기만 했다. 아마 그날도 어디로 향하는 지도 모른 채 무작정 달리기만 했다. 먹은 것도 없는 속에서 쓴 위액이 넘어오던 기억이 났다. 그러다 정신을 잃었던 모양인지, 의식을 차렸을 때는 전혀 모르는 곳에 와 있었다. ‘로헤델’의 유폐지- 어떻게 그곳에 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곳에서 그녀는 로아이나를 처음 만났다. 어림잡아 500세 정도(인간의 연령대로 친다면 17세, 18세 정도) 되었을 법한 소년은 그녀의 노예로 주어졌다. 로헤델의 선물, 이라고나 할까. “흥! 멍청하게… ‘로헤델’에게 반하다니!” 로아이나가 그녀를 결코 배반할 수 없는 이유였다. 그녀의 명령을 들어야만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녀는 아랫입술의 안쪽 살을 슬쩍 깨물었다. 구역질이 올라올 것만 같다. 당시의 기억이 바로 어제의 일처럼 선명하게 떠올라 속을 뒤집어 놓았다. “에우로카엘님. 기침하셨습니까? 리크비엘입니다.” “일어났다. 기다려.” 그때- 상처투성이의 약한 혼혈(混血)족 꼬마아이에게, 그는 스스럼없이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워주고 상처까지 치료해주며 상냥하게 웃었다. 아직 어린 티가 남아있는 얼굴에 어렸던 새하얀 웃음.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어리석어.” * * * * * * * * * * * * * * * “……그렇게 된 것이랍니다. 흠, 참 굴곡진 인생이라고나 할까요.” “어디가? 이건 그냥, ‘여자한테 홀딱 반해서 다 말아 먹었습니다.’ 이거 아냐!” 아로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무나 정확하게 골자(骨子)만을 뽑아 쌈박하게 정리하는 바람에 로아이나는 할 말을 잃은 듯했다. 사실 굳이 틀렸다고 할 만한 것도 없지 않은가. 루피아도 고개를 끄덕이며 아로데의 간단한 한 마디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로헤델님은 정확히 말해 여성이 아니라 중성이십니다만…….” “따지지 마!” ‘여자한테 홀딱 반해 다 말아먹은’ 로아이나가 조그만 목소리로 항변했지만, 당연하게도 무시되었다. 그 역시 달리 할 말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자아- 그럼 이제 헤어질 시간입니까?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 참 안타깝네요.” 너무나 태평스러운 목소리로, 로아이나가 말했다. 동시에 세 마족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조금 전부터 계속 성질을 억눌러왔던 아로데가 매섭게 소리쳤다. 그의 초록색 머리카락이 조금씩 들썩거린다. 선명한 초록색 기운이 그의 몸 주위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재수 없는 자식! 네 멋대로 될 줄 아느냐!” “……그만. 소용없는 짓이다, 아로데.” “……!!” 이디스가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한 아로데를 제지했다. 대신 그는 입매를 한쪽으로 비스듬히 올리고 로아이나를 향해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순식간에 그의 손아귀에서 검붉은 불꽃이 타올라 로아이나를 덮었다. “물에 검을 휘둘러봤자 소용없지.” “하…… 하! 저에게도… 목숨은 하나밖에… 치직. 없어서 말입니다.” 치익- 하고 달궈진 쇠붙이에 물이 끼얹어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이, 저, 저 자시이익!!!” 로아이나는 그런 그를 보며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어째 처음부터 너무 여유롭다 했다! 루피아는 피식 웃었다. 로아이나는 마지막으로 루피아를 향해 싱긋 웃었다. “곧 반가운 자들을 만날 수 있으실 겁니다. 분명…… 가까운 시일 내에.” ======================= ........와하하하♡ 너무 오랫동안 안 썼더니 잘 써지지조차 않는군요.; 요 일주일 동안 풀리지가 않아서 죽을 맛[;]이었습니다ㅠㅠ ...성실해져야 하겠던 걸요.; 반성 많이 했어요. "...." -사랑해요![........후다닥] 즐독하세요.[;] 덧. 앞의 내용을 순서 및 일부삭제 등 수정을 하는 탓에 저번 내용을 삭제합니다^_^;(...리플... 그거 따로 복사 못하나요?ㅠㅠ) 덧2. 줄거리가 기억 안 나신다는 분을 위해! ...다음에 올릴 때 대략의 줄거리까지 더해서 오겠습니다!+_+ 제 목: 공녀(貢女) : 제46화 [그와 그녀 사이](2) #. 46화 ‘그와 그녀 사이’ * * * * * * * * * * * * * * * “상큼, 깔끔하고 반듯-하게 이야기를 정리해 보면 말이죠. 그러니까, 여기 계신 이 분은 가만히 있다가 동생님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아 이리로 내려오셨고, 천계의 12대천사님들은 그, ‘에우로카엘’이라는 열세 번째 천사님께 세력을 다 빼앗겨 버린 상태, 라는 거지요? 그리고 알게 모르게 서로 결탁한 사이… 이고요. 조금 전 그 분은 치사하게 신발을 거꾸로 돌려 신으신 분.” 에드윈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음, 완벽한 정리야’라며 만족스럽게 웃어 보였다. 말하자면 그런 것이다. 본인 앞에서 할 이야기로는 다소 무례할 수 있겠으나, 정작 당사자인 마왕이나 그 측근인 세 마족이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하고 있었으니 뭐라고 할 수도 없다. 세키라는 다만 슬쩍 동생 에드윈드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찔렀다. 루피아는 그저 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로아이나가 남기고 간 말이 계속 귓가를 맴돌아 마음이 불편했지만 ‘반가운 자’들로 예상되는 사람이 딱히 생각나지 않았기에 그저 머리 한 구석으로만 미뤄둘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아는 사람이라고 해 봤자 몇 사람 없는데 말이야. 다 있는데 무슨 반가운 사람을 또 만난다는 말이지?’ 필요 없는 과보호 덕분에 루피아의 사교범위는 무척이나 좁았다. 저택 내의 시녀와 병사, 가신(家臣), 가끔 가출을 할 때에 만나던 몇몇 사람만이 전부인 것이다. 사실, 귀족 영애는 사교계에 진출하지 않으면 그리 넓은 행동반경을 가지지 못한다. 루피아는 사교계 데뷔를 미루고 미뤄오던 상황이었으므로 아는 사람이 극히 적은 것은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그런데 루피아누님, 궁금한 점이 있는데 여쭈어도 될까요?” 에드윈드가 말했다. “물어 봐.” “중간계로 넘어오셨다고 하셨잖아요? 도대체 어떻게 해서 넘어오신 것이지요? 저 세 분은 저희가 열었던 ‘문’을 통해서 이곳으로 오셨고, 누님은 마계의 교황폐하께서 보내주시었다고 하시지만, 마왕님과 누님께서는 어떻게 중간계로 오실 수 있으셨던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루피아에게로 돌연 집중되었다. 모닥불 속에서 장작이 타닥, 하고 불꽃을 틔워 올렸다. 루피아는 부담스러운 시선 속에서 슬쩍 눈길을 돌리면서 볼을 긁었다. “에… 그게 말이지. 하하! 저-언혀 기억이 안 나는 걸. 그다지 기억하고 싶지도 않고 말이야. 그때 기억은 좀 희미해서…… 뭐랄까. 일부러 지운 듯한 느낌? 뭔가 거북해져.” 정말이었다. 자신도 분명 그 부분이 궁금해져서 일부러 기억을 떠올려보려고 시도해 보았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돌아온 것은, 머리 한 복판에서 종소리가 울리는 것 같은 진한 울림과 고통, 그리고 가슴을 파헤치는 것 같은 통증이었다. 하지만 위화감이라고나 할까. 그런 것은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이상한 걸. 그 부분만 기억이 안 나다니. 그거 묘하잖아.” 아로데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의 홍안(紅眼)이 심술궂게 반짝였다. “이봐, 로윈.” 뭔가 생각하고 있던 듯 골몰해 있던 로이드윈이 돌아봤다. 방해를 받아서인지 어쩐지 평소보다 조금 더 눈 꼬리가 올라가 짜증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제2차 천지대전이 양측의 막대한 피해와 사상자를 배출한 후 끝을 맺고 ‘침묵의 사라카엘의 언약(言約)’과 ‘계율(戒律)의 세리엘의 맹세’로 ‘제2차 천마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렇지?” 로윈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 아는 이야기를 뭣 하러 다시 곱씹는 거지? 그 이야기는 이미 인간들의 성서에도 실려 있을 터였다. 사라카엘과 세리엘을 내세운 천계와 마계의 평화협정에 대한 이야기 따위는. “천족과 마족은 인간과의 계약 없이는 인간계에 현신(現身)할 수 없으며 인간들의 역사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도 용납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양 측은 결코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 라는 것이겠지만 분명 이런 사항도 있었어.” “그랬나?” “그랬지. 뭐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 넘어가지. 여기서 포인트! 는 차원의 문을 열어 루피아와 주군을 중간계로 던져버릴 수 있을 정도의 힘과 영향력을 가진 존재가 대체 누구냐, 하는 것이지. 하지만 아까 짚어주었듯이 만약 마계 측에서 억지로 문을 열었다면 그것을 천계에서 모를 리가 없어.” 그리고 그것을 알았다면 지금껏 천계가 조용할 리가 없다. 분명 그것을 가지고 무엇이라도 트집을 잡았을 것. 그렇다는 말은 결국 천계는 이디스와 루피아가 중간계로 뚝, 하고 떨어진 것을 모르고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물론 에우로카엘과 12대천사는 제외하고. “문제가 하나 더 늘어버렸네.” 남의 일 이야기를 하듯이, 물 컵을 입에 가져가며 루피아가 중얼거렸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써왔다. 어차피 꺼내야 할 문제였지만 알고 싶은 마음은 그다지 들지 않는 것이다. 하루 한 번 이상 텔레포트를 하는 것은 몸에 상당히 부담이 가는 행동임에도 불구하고(현자의 탑에서 지정한 표준치의 한계는 하루 두 번이다), 하루 네 번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찾아간 로헤델의 유적지에서는 그리 많은 수익이 있지 않았다. 로이드윈과 로헤델, 그리고 에우로카엘의 관계에 대한 정보를 얻은 것은 분명 이익이라 할 수 있을만한 일이지만- “이대로 이야기만 하고 있어봤자 얻어지는 것은 없을 것 같군. 그만 들어가지.” 이디스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그 말에 로이드윈과 아로데, 유리아덴 역시 미련 없이 일어났고, 나머지도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도와 상당히 떨어진 거리에 있는 도시의 여관에서 하룻밤 묵기로 했던 그들은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따라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려던 루피아는 문득, 이디스와 눈이 마주쳤다. 멈칫한 이디스는 손을 뻗어 루피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어리둥절해서 눈을 동그랗게 뜬 루피아를 보며 피식 웃고는 다시 걸음을 뗐다. “……???” * * * * * * * * * * * * * * * “……애완동물?” “그래. 음, 꼭 그런 느낌이……. 요즘은 내가 정말 그 사람을 좋아하나, 하고 생각할 정도인걸. 너무 멀게 느껴져. ……차라리 마계에 있던 때가 나았다 싶을 정도로.” 요컨대, 연애사업이 잘 풀리지 않는다, 하는 것이다. 에리나와 세키라는 침대에서 뒹굴며 불만을 토로하는 친구를 보며 실풋 웃음을 지었다. 상대가 상대인 만큼 어려운 점이 많을 것이다. 마족의 섬뜩한 핏빛 홍안(紅眼)에도 이제쯤이면 조금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는 지금도, 두 사람은 이디스와 눈이 마주치면 등이 뻣뻣하게 굳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예전에 비해서는 많이 나아진 것이라 생각하는 두 사람이었다. “……역시, 문제가 있는 걸까……. 보통 연인들이 하는 행동들이 아니잖아, 이건.” “내 생각에는 그 분에게 ‘보통’을 바라는 것은 상당히 무리라고 여겨지는데.” “그래도! 다른 사람만큼도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침대에서 뒹굴던 루피아가 몸을 일으켜 앉으며 말했다. 흑단 같은 긴 검은 머리카락이 하얀 시트 위로 흘러내렸다. 불만이 많은 듯, 그녀들의 친구는 단정하게 다듬어진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가끔 2살 연상인 자신들보다 훨씬 현명한 태도를 취하곤 해서 잊어버리곤 하지만 이럴 때는 어린 티가 난다. “이상하다고! 보통 이런 경우, 그러니까- 호감을 가지고 고백을 하고, 서로가 감정을 확인했다면, 뭔가 달라진 것이 있어야 하는 것 아냐? 그런데 말이야. 그 마왕이라는 분께서는, 나를 조금도, 조-금도 의지하지 않고 계셔! 나는 그저 곁다리 같다고!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고, 아무 것도 약속해주지 않아. 입장이 무척 난감해.” 확실히 마왕, 그 남자는 입이 너무 무겁다. 무겁다 못해 천근짜리 추라도 매달아 놓은 것 같을 정도다. 그것은 그녀들도 잘 알 수 있었다. 과묵으로라면 유리아덴 뺨치는 자가 바로 마왕 아니던가 말이다. 게다가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 성격 역시 곁에서 조금만 지켜본다면 곧 알 수 있다. 그녀들의 친구는 그것이 불만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해.” 에리나가 루피아의 목소리를 끊고 단언했다. “너, 원래 그런 수동적인 애였니? 그것은 세키라 전문이잖아.” “에, 에리나. 전문이라니…….” “사실이잖아? 나는 네가 좀더, 적극적인 성격인 줄 알았는데. 이거야 원, 얌전한 세키라 못지않으니.” 에리나는 말을 이었다. 그녀의 직설적인 성격이 여지없이 발휘되고 있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손해야. 좋아하는 쪽은 질 수밖에 없거든. 그렇다면 조금 더 고집이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해도 괜찮잖아. 어차피 마왕님이 질 텐데!” “뭐…?” “너무 상대방을 존중만 하지 마. 가끔 말도 안 되는 고집도 괜찮은 거야.” 너무 한꺼번에 말을 쏟았는지 에리나는 한숨 돌리기 위해 한 박자 쉬었다. 침대 위에 앉아서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친구에게 그녀는 웃으며 마지막 카운터펀치를 날렸다. “그냥 콱 덮쳐 버려!” * * * * * * * * * * * * * * * 결이 좋은 검은 머리카락 위로 새하얀 달빛이 내려앉았다. 깨끗한 우윳빛 피부는 언뜻 보면 유약한 학자 인상이었지만, 치켜 뜬 핏빛 홍안(紅眼)은 금방이라도 베일 듯한 날카로움을 느끼게 해주었다. 단아한 얼굴선이 깨끗하고, 조금 앳된 티가 남아있긴 하지만 소년이라기보다는 청년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법한, 전체적으로 단정하고 아름다운 인상이었다. “주군께서는 뭐 기억나는 것 없으십니까?” “없다. 일단 죽었었으니까.” 마왕은 잘라 말했다. 실제 그는 숨이 멈춘 상태였다. 어떻게 소생할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은 그와 루피아가 어떻게 중간계로 올 수 있었느냐와 함께 현재 알아내야 할 문제였다. 죽은 자가 무엇을 기억할 수 있었겠는가. ‘짐작 가는 자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는 이상 물어볼 수 있는 종류의 문제도 아니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쯤에서 넘기기로 결정을 내렸다. 알 수도 없는 문제 하나를 가지고 끙끙거리는 것은 단순한 시간낭비일 뿐이다. “더 정확하게 알아봐야 하겠지만, 짐작컨대 마계는 엉망입니다. 제대로 된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을 턱이 없죠. 군주께서 돌아오시기를, 바라고 있을 겁니다.” 로이드윈이 말했다. 그의 말은 거의 사실이나 다름이 없다. 게다가 그 통치를 하는 자의 뒤에 있는 세력은 바로 ‘그림자족’인 것이다. ‘붉은 눈’일족에게는 엄청난 치욕이었다. 제대로 굴러갈 리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이디스는 피식 웃었다. “글쎄…… 기다리고 있을지, 어떨는지. 자신이 마왕의 자리를 빼앗아 보겠다고 나서는 이는 없던가?” 일단 기본적인 우선권은 마왕의 자식, 마왕의 ‘후계자’에게 있지만 마왕 위에 오를 수 있는 기회는 어느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지금은 가장 강력했다고 알려진 마왕이었던 이디스가 물러나고(=쫓겨나고) 그를 ?아 서열 제2, 3, 4위의 막강 세 노마족마저 행방불명되어 사라진 처지였다. 다시 말해, 마왕 한 사람만 이길 수 있다면 바로 마왕 위(位)에 오를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이디스는 그것을 물었던 것이다. “물론 있었습니다만, 안타깝게도.” 실패했다. 딜렌은 그래 봬도(?) 그리 호락호락 당할 녀석은 아니었다. “그래? 그거 아깝군.” “예. 아, 그리고 주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것은 그들로서도 상당히 의외인 제안이었다. 아니 아주 파격적인 제안이라 할 수 있었다. 그만큼 12대천사들의 상황이 안 좋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거절할 만큼 그들 자신들의 상황 역시 좋지 못하다. 그러나 이디스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유가 무엇일까? 천족과 마족이 서로를 미워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그저, 서로 정 반대인 속성 때문인 것일까. 지금에 와서는 까닭도 모른 채 ‘싫다’라고 생각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물론 마왕 그 자신도 분명한 마족이므로 천족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때 아로데가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었다. “주군! 공녀들은 어찌할 겁니까? 일단 찾아와야 할 것 같기는 한데.” 공녀들은 대부분 천계에 잡혀있다시피 한 상태였다. 세키라만이 12대천사의 도움으로 빠져나오기는 했지만 말이다.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설마 천족이 그녀들을 함부로 죽이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일단 그녀들은 인질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 못해도 클리오라의 신탁으로 보호를 받고 있는 존재가 아닌가 말이다. “그냥 포기하면 안 되나? 굳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 아로데가 투덜거렸다. 마왕은 피식 웃었다. 신의 뜻을 어찌 알랴마는, 신탁은 도저히 그 까닭을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마왕의 머리에 언뜻 교황 라우데스의 주름 잡힌 얼굴이 떠올랐다. 조금 마른, 그러나 언제나 여유 있는 웃음을 품고 있는 얼굴이. ‘……신의 뜻, 인가…….’ -------------------------------------------------------------------- 학교 가기 직전, 아침입니다. 평소보다 상당히 늦었기는 한데.. 어젯밤 쓰다 잠든 것이-_-; 아무래도 찝찝해서; 비 오는 날 밤에 새끼 고양이를 한마리 주웠습니다. 아무래도 동네 꼬마가 키우다가 버린 듯한데 계속 두면 죽어버릴 것 같아 데려왔어요.; 저희 집이나 같이 주운 언니(그 언니가 발견했어요;)나 고양이를 키우기에는 무리가 있어서 키울 수 있는 집을 알아보기로 했답니다^^ 다행히 찾기는 했지만; 지금껏 둘이서 몰래 키워왔는데 저번에 아버지께 들켜서 난리가 났습니다-_-; ....고양이 키우는 집, 의외로 무지무지 적어서, ..찾느라 고생했어요ㅠㅠ 그럼 즐독하세요. 메일 : donghee425@hanmail.net 리플 : 요 아래~♡ 제 목: 공녀(貢女) : 제47화 [균열](1) #. 47화 ‘균열’ * * * * * * * * * * * * * * * 제국에서도 소문난 잉꼬부부라 하면, 아마도 엘 세느안트 공작부부를 가장 먼저 떠올릴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만큼 부부 금슬이 좋기로 명성(?)이 자자한 부모님이지만, 한 번도 부부싸움을 안 해 봤을 리는 없다. 물론 대개의 경우 어머니의 승리로 끝맺어지기는 하지만 말이다. 심지어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각방을 선언하고 일주일가량을 내 방에서 함께 주무신 적이 있다.(당시 내 나이는 9세였다) 아, 덧붙이자면, 결국 아버지는 두 손 두발을 다 들고 항복을 선언하셨다. ======================루피아의 자서전================ 사방은 온통 어둠이었다. 삼켜버릴 것 같은 어둠 속에 그녀는 혼자 서 있었다. 어디선가 또옥, 하고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간헐적으로 들리는 그 소리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소리도 없다. 그녀는 아래를 보았다. 수면 위에 떠 있는 것처럼 아래에는 어렴풋한 자신의 모습이 비쳐지고 있었다. ‘또 꿈인 건가.’ 특별한 예지의 능력이라거나 하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자꾸만 이런 알 수 없는 꿈을 꾸게 되는 것일까. 누군가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것일까. 끝이 없을 것 같은 어둠 저 건너편에서, 어렴풋한 불꽃이 하늘거린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불꽃을 향해 걸음을 떼었다. 불꽃은 점점 커졌다. 그 속에서 뻗어 나온 빛줄기 하나, 둘, 셋… 빛이 화악, 하고 터져 어둠을 삼켜 버렸다. 루피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도 눈이 부셨다. -저 곳이 천궁(天宮)이다. 넌 저 곳에서 살게 될 것이다. 어디에선가 들었던 낯익은 목소리였다. 부드럽고, 낮고… 듣는 이를 안심시켜 주는 편안한 목소리. 이 목소리, 꿈에서 들었던 목소리인가? 언제였더라. 그래, 마녀의 집에서 꾸었던 꿈에서였던가. -너의 이름은 ‘에우로카엘’이다. 네가 짊어지고 가야 할 이름이다. 기억해 두어라. 열세 번째 아이야. ‘흐에에엑?! 에, 에우로카엘?’ 루피아의 경악과 함께, 장면이 바뀌었다. 마지막으로 들렸던 목소리가 귓속에서 넓게 퍼졌다. 알싸한 풀냄새가 짙게 베어있고 습한 공기가 피부를 적신다. 까칠한 풀 감촉이 손바닥을 통해 느껴졌다. 이번에는 회색 안개가 짙게 깔린 숲이었다. 풀 냄새와 물 냄새, 진한 흙냄새가 났다.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찰박, 찰박. 찰박. 물을 밟는 소리. 이번에는 꽤나 센 소리가 났다. 물가에는 어린아이가 앉아 있었다. 루피아는 호기심에 그곳으로 다가갔다. 어차피 꿈인데, 설마 날 알아보겠어? 어린아이는 이제 여덟, 아홉 살 정도 되어 보였는데 상당히 가는 선을 가지고 있었다. 안개의 색과 닮은 옅은 회색의 머리칼이 지푸라기처럼 거칠어 보였고, 앙칼지게 날큼한 연홍색 눈동자가 고양이의 그것과 닮았다. 작은 몸에는 빈틈없이 상처가 나 있었다. 이 꼬마는 이 상처를 씻기 위해 물가에 온 것 같았다. 그 증거로 상처 근처에는 물이 묻어 있었다. 루피아는 꼬마 옆에 쭈그리고 앉아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나, 계속 이러고 있어도 될까 몰라. 슬슬 깨야 할 것 같긴 한데…….’ 꼬마는 두 눈 가득 그렁그렁한 눈물을 채워두고 있었다. 연분홍색 눈동자가 눈물 속에서 분한 듯 번쩍였다.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눈에다 힘을 잔뜩 주고 있었다. -왜! 왜, 어째서! 나는 그 애들과 다르다는 거야? 결국 또르륵, 하고 눈물이 눈에서 넘쳐흘렀다. -이곳에 오면 괜찮을 거라더니. 이곳이 내가 있을 곳이라더니. 나는 결국 어디에도 속할 수가 없다는 거야! 왜! 꼬마가 물 위를 세게 쳤다. 찰박, 하고 물이 튀었다. 꼬마는 억울하고 분한 얼굴로 다시금 소리를 질렀다. -나도 엄마가 갖고 싶어. 아빠가 갖고 싶어! 난, 난… 어디에 있으면 좋아? 여기도 안 된다면! 오라고 해 놓구서…… ‘똑같다’고 해 놓구서…… 내가 있을 곳은 이곳이다, 라고 해 놓구서……! 꼬마는 무릎을 팔로 감싸 안고 어깨를 떨었다. 루피아는 그 옆에 쪼그리고 앉은 그대로, 손을 뻗어 푸석푸석한 회색 머리카락을 살짝살짝 쓰다듬기 시작했다. 음, 뭐 어차피 모를 테지만 어때. 사실 울고 투정부리는 어린애는 딱 질색이긴 하지만. 그때 루피아의 쓰다듬던 손이 멈칫했다. -뭐가 ‘에우로카엘’이야. 그딴 이름 필요 없어. 허울만 열세 번째 아이이면 뭐해……. 루피아는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아이의 날큼한 눈동자가 느닷없이 자신을 향한 것이다. 마른 얼굴이었지만 눈동자만은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꿈일 텐데? 날 못 볼 텐데? 하는 생각과는 다르게 꼬마, 아니 에우로카엘은 그녀를 확실하게 ‘보고’ 있었다. 다쳤는지, 피가 나는 조그만 입술이 열렸다. 그와 함께 루피아의 머리가 아득해 졌다. -너, 누구야? 이곳은 아무나 들어올 수……. 눈앞이 일그러지고, 목소리는 멀어져 엷게 퍼져 버렸다. * * * * * * * * * * * * * * * 카른은 앞을 내다봤다. 장막 건너편 넓은 홀에는 마족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넋이 빠진 것처럼 탁한 눈을 하고 있는 딜렌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친구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든 해야 할 텐데! 초조했다. ‘역시 잘못이었나? 모른 체 하지 말았어야 했나? 어떻게든 해 줬어야 했던 것이 아닐까!’ 이렇게까지 망가지게 될 줄은. 아니, 심리적인 타격이 있을 것이라 예상은 했었지만. 카른은 죄책감에 주먹을 꾹 쥐었다. 마왕을 밉다고 습관처럼 중얼거리던 것은 본심을 숨기기 위해서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 아니다. 가르쳐 준다고 해서 듣지 않을 것이다, 라는 핑계로 자신을 합리화시킨 것이다. ‘그림자족’의 부흥을 꿈꾸기 위해서는 누가 뭐래도 딜렌의 존재가 필요하다. 천계의 도움을 뒤에 업은 딜렌이라면 ‘그림자족’이 양지로 나가는 일도 결코 꿈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딜렌은 마왕을 미워해야 했다. 가르쳐 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 결과 그는 친구를 잃었다. 친구는 이제 빈껍데기만이 남아, 곁에서 보기도 괴로울 정도였다. 마계에서 ‘마왕’은 절대적 힘의 상징이자 어둠의 주인이다. 복종해야 할 대상이며 순종을 맹세해야 할 자이며, 동시에 뛰어넘어야 할 목표이다. 그러나 지금의 딜렌에게 그러한 위엄이나 카리스마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과연…… 그렇지 않아도 힘든데…… 제길!’ 딜렌이 앞으로 나아갔다. 언제나 그의 형이 앉았던 자리에 딜렌이 앉았다. 웅성거림이 딱 멎었다. 그러나 공기는 더욱 날카로워져갔다. 다시 조금씩 술렁거리기 시작한다. 카른은 인상을 찌푸렸다. 불만이 있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런데 그때였다. 마족 중 누군가가 작은, 그러나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왕님께서 돌아오시기만 한다면…….” “……!!” 벌떡! 딜렌의 몸이 튕기듯 일어났다. 조금 전까지 죽은 사람처럼 넋이 나갔던 모습이 거짓말처럼 빠른 속도로 일어나 그 남자의 멱살을 휘어잡았다. “사실이냐?!” “무슨?” “사실이냐고! 그가, 형이 살아있다는 것이!” 멱살을 잡힌 남자가 거칠게 딜렌의 손을 떼어냈다. 군주에 대한 태도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무례했다. “사실입니다.” “틀림없어?” 딜렌은 재차 물었다. 남자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아마도. 그러나 로이드윈 드 스켈로테님은 거짓말은 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딜렌은 구부리고 있던 등을 곧게 폈다. 그는 마왕 위(位)에 오르고서는 처음으로 웃음을 지었다. 몸집이 가냘픈 그에게는 다소 큰 망토를 펄럭이며 그는 뒤돌아섰다. 딜렌은 카른에게 짧게 말했다. “가자!” “어디로?” “형님이 있는 곳!” 남겨진 마족들과 함께 카른은 딜렌이 벗어던진 망토를 받아들고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 문을 열고 달려가는 딜렌의 뒷모습에 얼핏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그냥 갈 거냐!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는 거야!” * * * * * * * * * * * * * * * “정신 차려! 언제까지 넋을 놓고 있을 거냐.” “……!!” 루피아는 퉁기듯 몸을 일으켜 눈을 두어 번 깜박거렸다. 어느 사이엔가 그녀는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연홍빛 눈동자가 자신에게로 향했을 때의 긴장감을 잊지 못한 몸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으와, 놀랐다! 완전 안심하고 있었는데! 어쩐지 정신이 어지러웠다. “악몽을 꾸었나보군. 어때, 이제 괜찮은가?” 이디스의 손이 그녀의 머리를 짚었다. 앞머리가 그의 손가락 사이로 사락사락 감겨들었다. 어쩐지 괜히 부끄러워져서 루피아는 얼른 손을 잡아뗐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이, 이거…… 괜찮은데.” “식은땀을 흘렸군. 아픈가?” “아뇨! 전혀! 말짱해요! 그러니까 이것 좀…….” 생각 같아서는 ‘너 때문에 흘리는 거야!’하고 소리 지르고 싶은 그녀였지만, 아무리 그녀라도 걱정해주는 사람에게 그런 말은 하지 못했다. 그의 손이 이마에서 떨어지자 겨우 한숨을 돌린 그녀는, 그제야 어째서 그가 이곳에 함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이곳은 그녀의 침실이었다. 유적지에 갔었지만 생각보다 수확이 없어 그대로 엘 세느안트 저택으로 돌아온 것이다. 어젯밤 도착한 직후 그녀가 느낀 것과는 달리 상당히 피곤했던 모양인지 그대로 쓰러져 잠들어 버렸다. 피곤해서였을까? 그런 꿈을 꾼 것은. 차라리 그냥 개꿈이라고 무시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망할, 실명까지 거론이 되었으니 뭘 어떻게 해? 어떻게 왔냐고 묻자, 그의 대답은 엉뚱했다. “문으로 걸어 들어왔다. 문단속 좀 잘해야 하겠더군. 창문도 열려 있었다.” “아니, 내가 묻는 건 그런 게 아니라….” 그가 어째서 이 시간에 이곳에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의 얼굴에 어려 보이는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팔을 둘러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아 버렸다. 당황할 사이도 없이 팔에다 힘을 줘서 빠져나갈 수 없게 한 그는 낮은, 웃음기 배인 목소리로 말했다. “에너지가 다 떨어져서 말이지. 충전하려고 왔다. …음, 좋군.” “그런, 건…… 으윽.” 그의 팔 안에서 그녀의 몸은 눈으로 보고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딱딱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그의 모습이 굉장히 힘없이 느껴졌다. 루피아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가락 아래에서 그의 몸이 움칠거린 것이 느껴졌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끝에 감겨들었다. 묘한 기분이 들어서 루피아는 괜히 눈을 천장으로 돌렸다. 그가 기분 좋은 듯 보이자 자신감이 생긴 그녀는 나머지 한쪽 손도 들어서 그의 등에 가져다 댔다. “……다 됐어요?” “아니, 아직. 조금만 더. …싫은가?” “그게 아니라 늦은 시간 같은데 들키면 곤란하지 않을까 해서…….” 특히 아버지나 오빠들에게 들켰다가는 무우우-척 곤란하지 않을까? 안 그래도 그는 아버지에게 미움을 받고 있는 처지인데 말이다. 오빠들 같은 경우에는 결과야 어찌 되었든 사생결단을 내려고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혹은 아로데나 로이드윈에게 걸린다면? ‘…그게 더 싫어…….’ 잘 생각해 보면 정말이지 대담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늦은 밤, 그것도 자신의 방 침실에서 다 큰 남자와 둘이 껴안고(침대에서!) 있는 것이 아닌가! 두꺼비로 내?은 네 번째 예절담당 가정교사의 끔찍한 비명이 들리는 것 같았다. 만약 그 여자가 이 상황을 보았다면 비명만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게거품을 물고 뒤로 넘어가도 이상할 것이 없었을 것이다. “…이대로 잘까?” “에? 에엑?!” “괜찮아. 아무 짓도 안 해.”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잔다니이?!” 게거품뿐이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도 모자라지 않겠어! 유난히 끔찍스러웠던 하이 소프라노의 비명이 귓가에서 웅웅 울려댔다. 어지러워! 경악하는 루피아와는 다르게, 그는 태연하게 웃으면서 그녀의 어깨에 대고 웃음을 흘렸다. 어깨를 통해 웃음의 떨림이 전해졌다. “~~~~놀린 거죠!” “아니야. 정말이다.” “그건 그것대로 안 돼!!” “어째서?” “그걸 말이라고 해요?! 당연한 거니까….” 이제는 말을 하는 그녀조차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고개를 든 그의 얼굴이 생각보다 너무 가까이 있어서 눈이 팽팽 도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돌연 그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잠을 잘 수가 없더군. 이렇게 있으면 잠이 잘 올 것 같아서 그래.” “윽…….” 루피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지만, 아직 한밤중이라 아무도 못 볼 것이다. 넓게 난 창문 밖으로, 구름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달빛이 두 사람 위로 수줍게 내려앉았다. * * * * * * * * * * * * * * * “우와…… 우리 대장님, 많이 대담해지셨다.” “그러게. 우후후! 가르친 보람이 팍팍 느껴지는군!” 로이드윈이 발그레 볼을 밝히며 말하자 아로데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그런 두 마족을 유리아덴은 한심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이 야밤에 할 짓도 없지. 그의 눈은 딱 그 말을 하고 있었다. 두 쌍의 홍색 눈동자는 부담스럽게 반짝였다. “아~ 내일 아침이 기대되는걸.” ====================================== 제 생일입니다. 어찌어찌 또-_-; 맞게 되네요. 무려 18번째 생일! ..이번 생일 지나면 민증 나오나요?; 좀 있다 약속이 있어서; 올리고 갑니다. 즐독하세요! 메일 : donghee425@hanmail.net 리플 : 요 아래~~~ 제 목: 공녀(貢女) : 제47화 [균열](2) #. 47화 ‘균열’ * * * * * * * * * * * * * * * 그 광경을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역시, 루피아의 아침 일정을 도와주기 위해 아침 일찍 그녀의 방을 찾은 베키였다.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아침잠이 많아 늘 깨워줘야 했던 루피아를 떠올리며 침대의 엷은 천개를 걷은 그녀는,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 베키는 잠시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두 손으로 열심히 비벼 눈을 깨끗하게 한 후에, 자신을 얼어붙게 만든 그 광경을 다시 한 번 똑똑히 두 눈에 새겨 넣었다. 그리고- “~~~~~~~끼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을 취했다. 이른 아침, 베키가 본 ‘믿을 수 없는 광경’은 루피아가 이디스와 함께 사랑스러운 얼굴로 잠들어 있는 모습이었다. ‘새벽에라도, 깨워서 보내려고 그랬는데…….’ 루피아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아침잠이 많았던 것을 그만 깜박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마계로 간 이후부터는 제대로 잠을 잤던 적이 없어 늘 아침에도 멀뚱한 눈으로 쌀쌀한 새벽에 일어나곤 했었다. 그래서 피곤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찍 일어날 것이다, 라는 알 수 없는 믿음 하에 그대로 잠들어 버리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터무니없지만. “소, 솔직하게 불어! 너, 너 왜 거기에 있던 거냐! 무, 무, 무슨 짓, 짓이라거나! 이봐! 진지하게 들어!” “이번만큼은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다!” 베키의 비명소리에 놀라서 달려온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게거품을 물고 쓰러져 버렸고, 오빠들은 그 자리에 딱딱하게 얼어붙어 하얗게 질려 버렸다. 다만 어머니인 카멜라만이 여유롭게 딸과 아침인사를 덤덤히 나누었다. 이 모든 사태의 주범인 루피아는 어머니에게 어색하게 웃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야, 달리 어떻게 하겠는가. 상황으로 말할 것 같으면, 바로 예식장으로 직행해도 문제없을 만한- 아니 반드시 그래야만 할 만큼 심각한 상황이다. 루피아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그러게 자고 가는 것은 안 된다고 했는데! “……-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군?” “뭐야!! 그럼 이게 문제가 아니고 뭐란 말이냐! 얼른 불어! 이 망할 자식아!” 카일은 거의 뒤로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얼마나 흥분했는지, 두 눈에는 시뻘건 핏발까지 줄기줄기 서 있었다. “귀 따갑군. 나는 꽤 청력이 좋아.” 그러나 열을 내는 쪽에 비해서 정작 당사자인 이디스는 아주 담백하고 초연한 대응을 하고 있었다. 태연하게 소파에 걸터앉아, 엘 세느안트가(家) 네 남자의 불타는 듯한 시선을 모르는 척 넘기고 있다. “그 ‘무슨 짓’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거냐?” “뭐……? 그런!” “말을 해 줘야 알지 않나.” 이쯤 해서 그는, 정말 ‘난 아무 것도 몰라’라고 써놓은 것 같은 얼굴로 씩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이렇게 되자 난감하게 된 것은 카일이었다. 딸 앞에서 ‘이러저러하고 여차저차한 일’, 이라고 소리칠 수도 없는 일이 아니던가. 사실 평소의 카일이라면 다른 대답을 찾아냈을 테지만 말이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무엇이 문제라는 건가?” “그게 말이죠. 인간 사회에서는 결혼도 하지 않은 미혼 남녀가 함께 밤을 보내는 것은 상당히, 아니 아주 많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이렇게 난리법석이 날 줄 알고 어제 그렇게 말을 했건만 아직도 그는 이해를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만일 그가 평범한 귀족이었다면, 그리고 루피아가 당당한 입장이었다면 그는 엘 세느안트가(家)의 네 남자에게 결투를 해야만 했을 것이다.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지? 루피아는 잠시 고민했다. “책임지지 않을 거면서 명예를 더럽혔다, 라는…….” “……요는, 책임만 지면된다는 것?”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다. “너 같은 것이 책임져 준다는 것 자체가 싫다는 거다! 절대 안 돼! 용납할 수 없어!!” 카일은 거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지르고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거냐?” 듣고 있기가 답답했던지 아로데가 끼어들었다. 책임을 져 주지 않아서 화를 내는 것이라면, 책임을 지면 될 텐데 그것도 싫다고 한다. 답답할 만도 했다. “그러니까 그건…….” “싫다고 해도 책임진다. 루피아는 내가 데리고 가겠다.” 이번에는 루피아가 놀랄 차례였다. 그리고 그녀를 비롯한 그녀의 아버지, 어머니, 오빠들은 물론 베키나 세 마족까지 놀라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 특히 카일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부들부들 떨었다. 이른 아침부터 그는 십년동안 받을 쇼크를 한꺼번에 몰아서 받은 기분이었다. 오, 오르가프여! 구원하소서. 그는 신의 이름을 주문을 외듯이 외쳤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돌아온 딸 곁에는 어디서 굴러먹던 녀석인지 모를 수상쩍은 사내가 떡하니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고, 그 남자는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단코 떼어놔야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하고 있던 차에, 그 남자와 딸이 한 침대에서 잠이 든 것이 목격된 것이다. 그러나 절망만 있으라는 법은 없던지, 그때 그에게 구원과도 같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누구 마음대로요?” 루피아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누구 마음대로 그런 것을 정해요!” 목소리에 한가득 담겨진 그것은 바로 분노였다. 보라색 자수정 눈동자 가득, 매섭게 날이 선 감정을 칠해 이디스를 노려보았다. 모두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해야 했다. 그러나 당황한 것도 잠시, 마왕은 냉정을 되찾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가지 않을 텐가?” “내가 어디에 있을 것인지는 내가 정해요! 그것을 당신 마음대로 결정한다는 것은 말이 안 돼요! 나를 물건 취급하지 마세요.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그것이 내가 가족과 영원히 이별을 해야 하는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고 생각해.” 루피아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눈앞이 팽글팽글 돌고 있다. 그의 얼굴을 어떻게 보지? 봐야 할까? 차마 볼 용기가 생기지 않는다. “……그런가.” 의외로 그의 목소리와 반응은 침착했다. 어쩐지 눈이 따갑다. “……나는……, 시간이 필요해요. 아직.” 그의 손이 머리 위로 올라왔다. 예전에 그랬듯, 그의 손이 머리를 쓰다듬는다. 루피아는 손을 들어 그의 손을 꼭 잡아서 손바닥 위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짧은 한숨을 내쉰 뒤 빠르게 그곳을 빠져 나갔다. 공기가 꾹, 하고 어깨를 짓누르는 기분이 들었다. ‘……머리 아프다. 힘들구나, 이런 거…….’ 토닥토닥. 어깨를 두드렸다. 우습지만, 굉장히 비장하고 대단한 말을 해버린 느낌이다. 사실 그리 대단할 것도 없는데. 세 마족의 얼빠진 얼굴이 떠오르자 괜히 웃음이 비어져 나온다. 그런 얼굴은 보기 드물 테니까, 제대로 봐 두지 못한 것이 아쉽다. ‘에이, 제기랄. 그러게 자고 가는 것은 안 된다고 얘기했는데…….’ * * * * * * * * * * * * * * * 고아한 흰색 건물이 위압감 넘치는 모습으로 빛 가운데 웅장하게 서 있다. 천족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발을 들여놓길 바라마지 않는, 천족의 성전(聖殿)이자 만물의 어버이이신 오르가프의 본전(本殿), ‘천궁’- 평소라면 발소리도 나지 않을 만큼 조용한 이곳에서, 듣기 거북한 고함이 터졌다. “그게 말이나 됩니까! 대체 그 분은 어디 계신 거요!” 적당히 늙어, 알맞게 수염을 기른 백색 옷의 장로가 소리쳤다. 당당히 외치는 모양새를 보자면 상당히 권력을 가지고 있을 인물이건만 듣고 있는 자는 장로의 추궁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있었다. 이는 듣는 이의 권력이 묻는 자의 그것보다 크기 때문이리라. 상당히 화가 나 있는 장로와는 다르게, 듣는 이는 고함을 듣고도 부드럽게 넘겨버릴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꽤나 듣기 불편한 말씀이로군요. 그분께서 어디에 계시든지, 그것은 저희가 상관할 바가 못 됩니다.”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감히 저희가 그분의 발길을 막을 수야 없는 노릇이기야 하지만, 그렇다고는 하나 지금 이런 판국에 자리를 비우신다는 것은…….” 이번에는 다른 장로가 말을 받았다. 여러 명이 우르르 몰려와서 하는 말들이다. 그들은 애당초, 몰려다니지 않으면 아무 것도 못 하는 족속들이었다. 리크비엘은 그들 모르게 한심한 눈빛을 흘렸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들은 이 천계의 권력을 주름잡고 있는 자들이다. 잘 구슬려 써먹어야 할 것이다. “마계와의 전쟁 말씀이십니까? 그것이 그리 중요하다 하시는 겁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리크비엘은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그건……. 허나, 얕봐서는 안 됩니다.” “말씀하시고자 하는 뜻은 잘 알아듣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빈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중간계로 도망친 ‘전대 마왕’은 행방을 알 수조차 없고, 그를 ?아간 멍청한 자들 덕택에 그들의 소유 군단인 마계주요 전력이 모두 빠졌습니다. 지도해 줄 왕도, 이끌어줄 군단장도 없는 것들인데 무엇을 그리 두려워하십니까?” 장로들은 입을 다물었다. 썩은 퇴물 같으니! 리크비엘은 혀를 찼다. 그리고는 화사한 웃음을 베어 물며 사뭇 상냥한 어조로 말을 했다. “안심하십시오, 장로님들. 그것에 관한 한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를 믿으십시오.” 그러자 장로들의 얼굴이 조금씩 풀렸다. 소리를 지를 정도로 열을 올렸던 것이 민망했던지 조금 전까지 가장 나섰던 장로가 커흠, 하고 헛기침을 크게 하며 다소 높은 톤의 목소리로 말을 했다. “물론 그대를 믿소. 그러나 한시라도 빨리 돌아오셔서 자리를 지켜주셨으면 하는 것이 우리의 바람이오. 윗사람은 아랫사람의 모범이 되어야 하니까. 그 자리까지 올라간 것에 누구의 도움이 가장 컸는가에 대하여 잊지 마시오.” 리크비엘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꼬리가 위로 치솟았다. 그러나 그는 간단하게 고개를 조금 숙여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불편한 심기를 일부러 감추지는 않았다. 눈치는 있었는지, 장로는 커흠! 하고 조금 전보다 조금 더 큰 헛기침을 뱉었다. “안 좋은 소문이 돌고 있다네. 전쟁을 반대하는 무리가 있는 모양이야. 그들은 12대천사님들을 찾고 있네. ……그 분들은 잘 계시겠지?” “아아, 물론입니다. 잘 모시고 있다마다요. 그런 말은 처음 듣는데…… 그야, 장로님들께서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하시어 잘 처리하시리라 믿습니다.” “커흠! 흠! 물론이네. 빠른 시일 내로 처리하겠네. 그럼 이만…….” 들이닥쳤을 때처럼 장로들이 우르르 빠져나가자 그나마 웃는 얼굴을 만들었던 리크비엘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돼지 같은 것들! 권리를 잃지 않기 위해 따지러 왔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은 마계와의 전쟁에도, 전쟁 반대 세력의 처리 따위에도 전혀 관심이 없다. 그것도 알고 있다. 다만 그들은 본능적으로 마계를 저주하고, 마족을 증오했다. 그것에만 능했다. 그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가장 이용하기 쉬웠다. “리크비엘.” 그는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가느다랗고 하얀 손가락이 그의 목 위에 올라가 있었다. 스윽, 하고 목선을 손가락이 타고 내려갔다. 굳었던 몸이 조금 풀렸다. “그들이 사라졌다. 중간계로 간 것 같다.” “네?” “…뭐, 관계는 없다만…….” “방해는 되겠죠.” “잘 알아듣는군. 알아서 해라.” 그는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고개를 숙였다. 그의 주인은 찬란한 은빛 머리카락을 길게 내려뜨리고 탁자 위에 앉아 있다. 연한 홍(紅)빛 눈동자. “몸은… 다 회복되셨습니까?” “그래.” 다행입니다, 하고 말하면서 그는 웃었다. 장로들 앞에서 지었던 화사한 웃음과는 다른 느낌의 미소였다. 그 얼굴을 에우로카엘은 빤히 쳐다보았다. 마치 주인을 쳐다보는 개 같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그녀가 계속 쳐다보자 무안했는지 리크비엘이 눈을 깔았다. “……꿈을 꿨다. 상당히 오래 된 꿈인데… 요새는 자주 꾸는 것 같아. 회복하던 중이라 그런가.” “예.” “그건… 환상이었을 지도 모르지…….” 울고 있던 그녀의 앞에 슬며시 나타나, 조심스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로아이나는?” “…‘거울의 궁’에 있습니다.”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군. 실패했나? 흥!” 에우로카엘은 탁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엷은 잠자리 날개 같은 잠옷을 걸친지라 그녀의 몸은 훤히 다 들여다보였다. 그러나 둘 중 그 어느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녀는 리크비엘을 한 번 슬쩍 보고는 픽, 하고 사라져 버렸다. ----------------------------------------------------------------------- …요즘은 정말, 쪄 죽겠습니다아; 더워서, 너무 더워서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것 자체가 싫어요! 에어컨이 있는 곳으로 도망가고 싶어ㅠ_- 지금은 새벽 2시 50분을 막 지나고 있습니다-_-; 새벽이니 망정이지, 낮에는 컴퓨터 따위 꼴도 보기 싫어요. 그러고보니 홈플인가 뭔가도 생겼던데.[흠흠;] 멋지네요~ 하핫. 사족이 길어집니다만-_-; 오늘 영화를 한 편 봤습니다. '킹아더'인데… 재미있게 봤어요♡ 특히, 다고넷>_< 경과 란슬렛 경이 멋졌어요! 즐독하시구요. 맨날 늦는 연재속도에 대해서는 거듭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기다려주시는 분들, 너무너무 사랑해요.[..퍽!] 메일 : donghee425@hanmail.net 리플 : 요 아래~~ 제 목: 공녀(貢女) : 제48화 [두 남자 두 여자](1) 2004/07/29 20:46:41 1982 3 네이에르 (포인트 : 340점) #. 48화 ‘두 남자와 두 여자’ * * * * * * * * * * * * * * * 모든 것은 나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 같은 공녀는 클리오라의 신탁으로 마계에 가게 되어 휘말리기는 했지만 그저 ‘이방인’일 뿐이라고, 그렇게 여겼다. 그렇기에 나는 나의 일만 생각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디스- 그가 마왕의 자리에서 쫓겨났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함께 중간계로 올 수 있어서 마음 한 구석으로는 기뻤고, 또 가족과 재회하여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어리석고 이기적이게도. (중략) 그것은 내가 할 일이다. 그렇게 자각한 순간에야, 나는 이 일에 이미 깊이 휘말려 있었음을 피부로 깨닫게 되었다. ======================루피아의 자서전================ 생각을 하면 할수록 못된 말을 한 것만 같아 속이 편치 않다. 끄응, 하고 인상을 쓰면서 루피아는 차가운 책상 위로 털썩 엎어져 버렸다. 끝내 보지 못한 이디스의 얼굴이 자꾸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루피아(와 다른 손님들) 때문에 고용인들을 휴가로 내쫓아버린 엘 세느안트 저택은 무척 조용했다. 이 넓은 저택을 깨끗하게 유지하려면 적어도 10명은 필요할 테지만 그나마도 포기해 버렸기 때문에 저택 안에 시녀는 오직 베키 한 명뿐이었다. 베키는 생활하는 데에 필요한 최소한의 청소만을 맡아 하고, 나머지는 저택 밖의 일손을 사용했다. 요리는 괜찮은 식당에서 사 오고, 빨래는 의상실에 맡겼다. 엘 세느안트 기사단 역시 저택 내부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대부분을 영지로 돌려보낸 상태다. 소문이 날 수 있는 가능성을 최대한 낮춘 것이다. ‘이렇게 계속 있을 수는 없어. 나는 이곳에 머물 수 없는 사람이 된 거야.’ 이런 식으로 계속 주변에 피해를 끼쳐 가며 평생 숨어살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어느 공포소설에선가 읽었던 것처럼 탑 속에 숨어서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죽고 말겠다. 날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제 이곳은 ‘우리 집’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것은 무척…… 쓸쓸한 기분이다. ‘발버둥을 친 거야. 아직은 이곳이 우리 집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어. 그래서 안 가겠다고 말해버린 것일지도 몰라. 그럼 이제…… 내가 있을 곳은 어디지?’ 예전에는 이 곳이었다. 공녀(貢女)가 되기 전에도, 마계로 간 후에도 그녀가 돌아올 곳은 가족의 품안이었다. 그것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풋풋한 햇살 냄새가 나는 마른 이불처럼, 포근하고 따스한 느낌은 여전했지만 예전과 무언가 다르다. “으아아악! 머리가 터질 것 같아! 제기랄, 생각 안 해! 이런 거 싫단 말이다!” “에구, 깜짝이야! 뭘 그렇게 소리를 질러?” 루피아는 고개를 들었다. 문간에는 그녀의 비명(?)소리에 놀란 두 친구가 서 있었다. 익숙한 얼굴생김이 아니라서 때때로 놀라곤 하지만 이제는 저 얼굴도 그럭저럭 익숙해졌다. 조금 위화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어, 조금. …그럴 일이 있었어.” “대충은 들어서 알아. 우울해할 것 같아서 위로해주려고 온 거야. 고맙지?” 에리나가 씩 웃으면서 말했다. 세키라는 그 옆에서 조금 난처한 듯한 얼굴을 하고 웃고 있었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대충 알만 하다, 알만 해. 특히 아로데는 시끄럽게 떠들어댔을 것이 틀림없었다. 입이 가벼운 두 마족에게 잠시 저주를 퍼부어주고 있는데, 루피아의 앞에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잘 살펴볼 틈도 없이 어? 하는 사이 그녀의 얼굴 위로 뭔가 답답한 것이 뒤집어 씌어졌다. 질기고 촉촉한, 굉장히 딱 달라붙는 이상한 물건이었다. ‘터프한 손길로 봐선 분명 에리나야! 근데 뭘 하는 거야!’ “-뭐하는 거야! 이건 또 뭐고? 답답해, 벗겨 줘!” 탁! 얼굴을 끊임없이 매만지던 에리나가 드디어 손을 떼자(에리나가 입까지 틀어막아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기다렸던 루피아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이어 뒤에서는 세키라가 머리에 뭔가를 뿌려대고 있었다. 에리나는 착, 하고 루피아의 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는 자세히 살피더니, 이내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완성! 완벽해! 그렇지?” “뭐?” “머리도 다 됐어. 원래 색깔은 못 알아보겠지?” 세키라 역시 짐짓 만족스럽다는 듯한 어투였다. 어리둥절해하는 그녀 앞에 에리나는 준비해 온 거울을 내밀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어때? 이 정도면 전혀 몰라보겠지? 에스베크 공작각하 작품이야.” 루피아는 거울을 들여다보고는 깜짝 놀랐다. 분명 거울에 비친 것은 자신이어야 할 텐데, 거울 속에는 전혀 다른 생김새를 가진 여자가 깜짝 놀란 자수정 눈동자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놀라서 루피아는 더듬더듬 얼굴을 짚어 보았다. 피부와 비슷한 촉감의 무언가가 얼굴 위에 달라붙어 있다. 미인 타입이지만 자수정색 눈동자를 제외하면 루피아와의 공통점은 찾을 수 없는 생김이었다. 심지어 머리색깔까지도 완전히 다른, 타오르는 듯한 붉은색이었다. 세키라는 손 안에 든 스프레이 타입 향수병처럼 생긴 것을 흔들어보였다. 그 안에는 붉은색 액체가 조금 남아 있었다. 아마도 에스베크 공작의 작품인 것 같았다. “신기하긴 하지만…… 왜?” 에리나와 세키라가 화사한 꽃처럼 웃으며 대답했다. “외출하러 나가자.” * * * * * * * * * * * * * * * 후끈한 더운 공기가 훅, 하고 얼굴로 쏟아졌다. 텁텁한 먼지 냄새와 시끄러운 사람들의 고함소리, 발소리. 뜨거운 열기가 온몸으로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 목청이 터져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상인들과 이것저것 재가며 더 싸게 사려고 실랑이하는 사람들.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노점상들과 엄마 손에 이끌려나와 칭얼대는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까지, 생기가 가득 흘러넘치는 광경이었다. “원래 머리가 복잡할 때는 그저 노는 것부터 먼저 하는 거야.” 몸을 길게 늘이며 기지개를 편 후 에리나가 말했다. 그녀는 루피아를 보면서 화사하게 웃었다. ‘입을 다물면 천사, 입을 열면 뱀의 혀를 가진 악마’라는 사람들의 평가를 떠올리며 루피아는 새삼 에리나의 얼굴이 예쁘다고 느꼈다. 주근깨 하나 없이 희디흰 피부와 인형처럼 섬세한 이목구비- 시원한 푸른 머리카락과 연한 하늘색 눈동자도 어울리지만,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예전의 금발녹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최상급 에메랄드 같은 깊이 있는 색과 도도한 눈매는 절묘하도록 어울렸었다. 비록 가시 돋친 독설과 도도한 태도, 높은 자존심으로 대하기 어렵다는 평을 듣지만 사실은 정말 따듯한 마음씨를 가진 것을 많은 시간을 함께 한 친구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연상현상처럼 세키라에게로 시선이 돌아갔다. 얌전한 세키라는 늘 입던 드레스가 아닌 종아리 길이의 스커트가 불편한지 연신 치맛단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친구들 역시 인간이 아닌 마족을 선택했다. 머릿속을 꽉 채우고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던 수많은 생각들이 한결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혼자만의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본격적인 여름이 가까이 다가왔음을 알리듯, 태양은 한낮의 뜨거움을 자랑하며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4월에 열리는 사하르디나드 축제는 그녀들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막을 내렸다. 가장 유력한 우승후보였던 칼르니르 가문의 장남은 나머지 공작 자제들과 함께 훌쩍 떠나버린 상태였기 덕분에 올해 검투대회는 외부인의 차지로 돌아갔다고 한다. 시끌벅적한 사람들 틈 속에서 이런 저런 얘기를 들으며 세 사람은 마주보며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그녀들의 가문 사람들은 제국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고 그만큼 시선을 받고 있었다. 그날, 저녁 시간이 될 때까지 세 사람은 쉴 세 없이 놀았다. 물건을 구경하고, 음식을 사먹고, 떠들고 돌아다니며 웃어댔다. “후…… 다리 아프다. 그래도 재미있었어.” 세키라가 식당 안에서 종아리를 주무르며 말했다. 너무 많이 걷고 돌아다녀 다리와 발바닥이 저릿했지만 만족스러웠다. 그것은 에리나와 루피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루피아는 너무 말을 많이 해서 목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돌아가고 싶지 않아…….” 루피아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이 땅을 사랑했다. 이 공기를 사랑했다. 이 하늘을 사랑했다. 이 나라를 사랑했다. 가족을 사랑했다. 떠나고 싶지 않았다. 있을 곳이 없다고 해도 태어나고 자란 이 세계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난 역시 같이 갈 거야.” 에리나가 말했다. 세키라는 침울하게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친구는 단호했다. “나도 이 곳을 사랑해.” 다시 한 번 에리나가 말했다. 그녀의 눈은 식당 안의 사람들을 차례차례 훑었다. 시끄럽게 수다를 떠는 사람들, 조용히 찻잔을 들고 속삭이는 연인들, 혼자 창밖을 보는 사람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시선 끝에 머물렀다. “하지만 이곳에서 나는 멈춰 버리고 말 것이 분명해. 나는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현모양처를 꿈꾸는 사람도 많으니까- 다른 귀족 여인네처럼 안방을 지키다가 죽는 것은 싫어. 그는 나를 앞으로 나갈 수 있도록 해 줄 거야.” “하, 하지만…… 가족은? 다시는 보지 않고 견딜 수 있어?” 세키라는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보고 싶겠지. 그립겠지. 하지만 계약을 할 때 그 정도는 각오했어.” 에리나는 이미 먼 곳을 보고 있었다. 세키라의 머리는 다시 떨어졌고 루피아는 시선을 위로 던졌다. “……만약 마계로 가지 않았다면…….” 루피아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쯤 무엇이 되어 있을까? “난 가지 않겠어.” 루피아가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말했다. 두 친구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왜 그렇게 놀라? 그렇게 의외였어?” “으, 응?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는 네가 갈 가능성이 더 많다고 생각했어.”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래? 하지만 난 마음을 정했어. 가지 않을 거야.” 의외로 아무렇지 않아서 스스로도 놀라는 루피아였다. 에리나는 잠시 뒤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 것도 먹지 않았지만 무언가 먹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에리나를 따라서 세키라와 루피아도 일어났다. 마차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은 그리 길지 않았다. 식당에서 약 3분 정도만 걸으면 되었다. 문제는 바로 그때 일어났다. 누군가가 뒤에서 루피아의 목에 팔을 두른 것이다. “꺄아아악!” 깜짝 놀란 세키라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곧 다른 사람이 튀어나와 그녀의 입을 막고 팔을 뒤로 잡았다. 그렇지 않아도 지쳐있던 세키라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기절해버렸다. 에리나가 달려들려 했지만 아직 마검을 다룰 수 없는 그녀로서는 꼼짝없이 잡혀야 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대체 누구냐! 황태자가 보낸 녀석들이냐? 놔아아아!!” “놓지 못해!! 제길! 세키라!” 이미 해는 저물어 컴컴한 어둠이 하늘을 구석부터 서서히 물들이고 있었다. * * * * * * * * * * * * * * * “뭣? 돌아오지 않는다고?” 공작의 외침에 베키는 부들부들 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모시는 아가씨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녀는 말을 더듬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며 입을 열었지만 효과는 크게 보지 못했다. “세, 세키라 아가씨와 에리나 아가씨께서 위로, 위로를 해준다고 하시면서 마차를 빌려 달라고, 그렇게 말씀하셔서, 시장에 다녀오신다고 하셔서, 그래서, 그런데, 조금 전 마부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면서, 그러면서 화를 냈어요. 아가씨들은…….” 행방불명이 되었다. 베키는 두 손을 그러모아 쥐고 털썩 주저앉았다. “저, 저 때문이에요! 시장에 나가시는 것을 막았어야 했는데! 아가씨가 너무 힘들어하시는 것 같아서 위로가 되면 좋겠다 싶어서…… 흐윽-” 베키는 하얗게 질려 있었다. 카일은 시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안심을 시켜 주면서도 초조한 마음에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루피아의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예전처럼 병사들을 풀어 찾게 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때 로윈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는 이디스의 귓가에 대고 조그맣게 소곤거렸다. “……!” 이디스는 창가로 걸어갔다.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연 그는 훌쩍 뛰어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어딜 가는 거냐! 이런 상황에!! 제기랄! 그래서 나는,” “시끄러워. 데리러 가는 거잖나.” “뭐야?” 이디스의 입가에 조롱어린 미소가 떠올랐다. 자신을 비웃는 줄 알고 기분이 나빠진 카일이었지만 그는 곧 그 조롱이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향한 것임을 알았다. “걱정 마라.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만약 다쳤다면 용서하지 않아.”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는 있느냐!” “나는 ‘인간’이 아니니까.” 그 말을 끝으로 이디스는 사라졌다. 뒤이어 아로데와 로이드윈, 유리아덴 역시 뒤따라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빌어먹을 녀석들! 정말 왔네.” --------------------------------------------------------------------------- 네르입니다^_^ 그야말로 학교가 피서지입니다. 에어컨이 빵빵해요. 추울 지경입니다. 제 짝은 체육복까지 덧입는답니다-_-; 교실에서 나오면 덥지요; 신문에서 봤는데, 여름 피서지로 현금 지급기 코너가;; 거기 일부러 안 가도 되니까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웃음;] 즐독하시구요- 더운 여름, 냉방병과 일사병, 피부암 조심하세요. 메일 : donghee425@hanmail.net 리플 : 요 아래~ 덧. 미안해요, 시은양; 쓰다보니 까먹었어;; 생일 축하해요~ 이미 하루가 지나버렸지만요.;; 다시 한 번 생일 축하해요. ....노, 노래 불러 줄까요오..?;; 제 목: 공녀(貢女) : 제48화 [두 남자 두 여자](2) 2004/08/01 01:42:08 2018 2 네이에르 (포인트 : 340점) #. 48화 ‘두 남자와 두 여자’ * * * * * * * * * * * * * * * ‘……기절을 자주도 하는군.’ 정신을 차렸음에도 루피아는 그대로 죽은 듯이 누워 눈을 뜨지 않은 채 생각했다. 워낙 건강했었기 때문에 기절 한 번 해봤음 하는 바람이 있었을 정도였는데, 요새는 자주 기절할 일이 생기고 만다. 이러다 습관이 되는 것은 아닐까 무서워질 지경이었다. 있는 힘껏 저항하던 루피아는 범인의 얼굴이라도 보기 위해 최대한 몸부림을 치고, 심지어 가장 가까이에 있던 팔목까지 물어뜯어 버렸다. 그 덕택에 깜짝 놀란 범인은 그녀에게 슬립 마법을 걸었던 것이다. 마법까지 쓸 줄 아는 것을 보면 일반 노상강도나 납치범은 아닐 것이고, 그렇다면 가장 유력한 것은 황태자가 보낸 사람이라는 가정이다. 루피아는 곰곰이 생각했다. 지난 날, 이디스에게 무안을 당했던 이후로는 전혀 소식을 듣지 못했다. 누굴까? 역시 황태자가 보낸 사람? 아니면 전혀 다른 인물? 생각을 계속 하던 그녀의 귓가에 익숙하고 친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 차렸으면 이제 그만 일어나, 루피아.” “세키라!?” 루피아는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조금 꺼끌꺼끌한 침대 시트와 홑이불이 흘러내렸다. 세키라는 물론 에리나까지 아주 멀쩡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멀쩡하다 못해 싱글싱글 웃고 있는 얼굴이었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우리는 분명…….” 납치된 것이 아니었나? 그런데 왜 멀쩡하게 침대에 누워 있는 걸까? 이곳은 꽤나 고급의 여관처럼 보였다. 어리둥절해하는 친구를 위해 세키라가 막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방문 밖에서 떠들썩한 소음이 들려왔다. 에리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납치범들이 납시셨군. 직접 봐. 그럼 이해가 더 빠를 테니까.” 노크 소리가 나고, 세키라가 걸어가 문을 열어주자, 시꺼먼 그림자들이 와르르 몰려들었다! 그것들이 무엇인지 채 깨닫기도 전에 루피아는 자신에게로 달려드는 몇 개의 꺼먼 덩치들에 기겁을 해야 했다. 그리고 그녀는 순식간에 목과 허리, 등을 빼앗겼다. “으, 으아아?!” “꼬마야아아! 많이 컸구나아!” “흐윽- 헤어진 것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만큼이나 자랐다니!” “이쁘기도 하지!” 순식간에 달라붙어 매달린 셋은, 다름 아닌 체르비엘과 시즈니엘, 그리고 세리엘이었다. 가장 키가 큰 체르비엘은 루피아의 등 뒤에서 목을 껴안았고, 시즈니엘은 앞에서 어깨를 껴안았다. 그리고 세리엘은 키가 겨우 루피아 가슴 근처까지밖에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루피아는 기겁을 했다. 이 사람들이 미쳤나! “다, 당신들 대체 누구야! 당신들 나 알어? 난 몰라! 미쳤어? 그리고 왜 우리를 이런 곳으로 데려온 거야! 빨리 떨어져어어!!” 한꺼번에 말을 쏟아낸 그녀는 헉헉 숨을 몰아쉬었다. 피부 위에 다닥다닥 소름이 돋았다. 생각해보라! 모르는 사람이 울부짖으며 달려드는 모습을! 그것만으로도 충분한데 얼굴을 비비며 안겨드는 느낌은 정말이지 죽도록 싫었다. 그런 경험은 공녀로서 마계로 갈 때의 일 정도면 이미 충분하다! “너, 너무해! 아무리 기억하지 못한다구 해도 그렇지, 이렇게 매정하게 밀어내다니!” “뭐? …기억-?” 시즈니엘의 말에 루피아의 몸이 흠칫 굳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자신이 예전에 알던 사람이라는 소리가 아닌가. 그녀는 기억을 더듬으며 눈앞에 널브러진 세 명의 치한(?)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세 사람 다 놀라울 정도로 단정하고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녀의 기억 속에는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 정도로 잘생긴-그리고 독특한- 사람들이라면 자신이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대체 무슨 소리야? 나는 당신들…….” 따위 전혀 알지 못해, 라고 말하려던 그녀의 말을 자르고 에리나가 끼어들었다. “그만! 루피아, 일단 소개부터 해 줄게.” 시즈니엘과 체르비엘, 세리엘을 미처 말릴 수가 없었던 미카엘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준 에리나에게 감사의 눈길을 보냈다. 에리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임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루피아를 포함한 모두가 입을 다물자, 에리나는 흠, 하고 가볍게 헛기침을 하여 시선을 집중시켰다. “루피아는 처음 뵙는 것이겠지만, 이분들은 바로 12대천사 분들이셔.” 루피아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녀의 얼굴은 점차 하얗게 지워져갔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자신에게 무섭게 달려들어 얼굴을 비볐던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에리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우리가 중간계로 오는 것을 도와주셨어. 이분이 바로 미카엘님이시지.” 루피아는 미카엘을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에리나가 하는 말이니 설마 거짓말일까 싶었지만, 그래도 믿고 싶지 않았다. 12대천사가, 엘루시아 대륙민 거의 대부분은 존경하는, 빛의 성스러운 대행자가! 어찌, 어떻게! “변태에 치한……!” 이미 그녀에게는 그렇게 인식되어 버렸다. 그때 문득 그녀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깨달음이 있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굳어버렸다. 갑자기 손끝이 싸하게 식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오싹함이 등허리를 싸늘하게 식혔다. ‘……그런 존재가, 어떻게 나를 알지?’ 무릎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에, 그녀는 두 다리에 힘을 꽉 주어 주저앉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문제를 인식하고 나자 마음에 걸리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아유니, 즉 에우로카엘의 얼굴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녀는 결코 그녀에게 못되게 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불필요할 만큼 친절했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다른 사람에게는 쌀쌀맞게 대하면서도 유독 그녀에게만은 다정하게 굴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참 이상한 일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인 그녀에게 다정하게 굴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것도 하필 그녀 하나만! 그림자족의 습격 때에도 그녀는 아유니에게 잡혀가 혼자만 안전한 곳에 있을 수 있었다. 무엇 때문일까? ‘나, 나는…… 뭔가 잘못된 걸까?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나는 잃어버린 기억이 있는 것일까?’ 뿐만 아니라 결코 그녀를 알 리가 없을 ‘신화 속의 인물’들마저 그녀를 알고 있었다고 말을 하고 있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불안감과 혼란이 공포를 불러와 그녀는 몸을 슬쩍 떨었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그녀에게 빈 기억 따위는 없었다. “……대체 뭐야?” 루피아는 조용히 물었다. ‘미카엘’이라고 하는 천족은 조금 난감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난…… 나는 대체 누구인 거야?” 목소리가 미묘한 음색과 울음기를 담고 흔들렸다. 그때 갑자기 루피아의 뒤에서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휘감아 끌어안았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익숙한 냄새와 기운, 온기. 그녀는 그대로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팔이 그녀를 한층 세게 끌어안아 주었다. “처음 보는군.” “당신이 위(位)에 올랐을 때 우리는 쉬고 있었으니까.” 미카엘은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이디스가 마왕 자리에 오른 것은 20년 전이다. 그리고 미카엘들은 30년 전에 은거를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공식적으로도, 사적으로도 만나는 것이 지금이 처음이었다. 서로를 탐색하듯 살피던 둘 사이로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았다. 잠시 동안 계속되던 침묵을 깬 것은, 다름 아닌 이디스였다. “천족은 꽤나 성질이 급한가 보군.” 답신을 주지도 않았는데 중간계로 내려와 버린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미카엘은 그 특유의 미소를 지어 보내며 대답했다. “아마 개인의 성향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그렇군.” 지금까지 가만히 머리 위를 오가는 두 남자의 대화를 얌전히 듣고 있던 루피아는 잠시 대화가 끊긴 틈을 타 얼른 끼어들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의 시도는 그녀가 입을 채 열기도 전에 실패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이디스가 그녀를 획 하니 잡아끌어 창문틀에 올라섰기 때문이었다. 달랑 그의 팔 하나에 걸쳐져 허공에 붕 떠버린 루피아는 그만 혀를 깨물어버렸다. 찝찝하고 비린 피 냄새가 입안에 퍼져 불쾌해졌다. “앗! 자, 잠깐, 나 아직 얘기 안 끝났……!” “다음에 하도록 하지. 그럼!” “안돼요! 지금 들어야 하는 얘기란 말이에요!! 이거 안 놔요!” 그러나 그는 단호했다. “안 놔.” “왜? 잠깐이면 된단 말이에요!” “글쎄. 잘은 모르지만 짧게 끝낼 이야기라는 느낌은 그다지 들지 않는군. 오늘만 날인 것은 아니지 않나? 어차피 다시 만날 텐데, 굳이 오늘 이 시간 이야기를 해야 하는 이유가 뭐지?”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짧게 끝날 이야기는 아닐 것 같았다. 게다가 자신이 납치된 줄 알고 계실 식구들을 생각하니 더 이상 시간을 늦어져서도 안 될 것 같다. 루피아가 입술을 깨물자, 이디스는 그녀의 입술에 짧게 입 맞췄다. 그녀의 머릿속에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더 떠올랐다. ‘-이야기, 해야지…… 같이 갈 수 없다고……..’ * * * * * * * * * * * * * * * 저택으로 돌아온 루피아는, 제일 먼저 달려드는 카일에게 잠시 시달린 후 밤이 늦기도 하고 힘들었다는 이유로 일찍 방으로 들어갔다. 세키라와 에리나에게 대략 들어 천계도 에우로카엘 덕분에 상황이 무척 안 좋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12대천사가 직접 중간계로 내려오기까지 하다니, 솔직히 굉장히 놀랐다. 뭔가 이디스에게 볼 일이 있는 것 같던데. 궁금했지만 그가 직접 가르쳐주기 전까지는 물어볼 수 없었다. 그때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가도 되겠니?” 카에리드의 목소리였다. 루피아는 선뜻 문을 열어주었다. 문 밖에는 그녀의 세 오라비들이 서 있었다. 그녀는 생긋 웃었다. “물론이지. 늦은 밤 숙녀의 방을 찾는 것은 큰 무례이긴 하지만, 오빠들이니 특별히 봐 줄게.” 카에리드와 이데카른, 트로에를 방안으로 들이면서 루피아는 뭔가 마실 것이 없나 하고 찬장을 살폈다. 언제 한번은 이렇게 찾아올 줄 예상은 하고 있었던 그녀였다. 이디스의 문제라든지, 그녀의 미래나 거처에 대한 것이라든지. 게다가 어제 ‘가지 않겠다.’하고 말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잠시 망설이던 세 형제를 대표해서, 첫째인 카에리드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할 생각이냐?” 루피아가 대답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자, 이데카른이 덧붙였다. “만약 이곳에 남겠다면-아니, 그렇게 해 준다면-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말 그렇게 해 줄 거야?” 이번에는 트로에가 말을 받았다. 그의 말은 더없이 단호했다. “당연하지. 우리를 믿어. 그리고 우리는 네가 그렇게 해 주길 원해. 루피아, 선택은 네 몫이야. 그것은 잊지 마.” 루피아는 잠시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이미 에리나, 세키라와 이야기하면서 마음을 굳힌 그녀였지만,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기가 무척 어려웠다. 목구멍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따끔따끔했다. 간질간질한 것 같기도 했다. 목이 메었다. “……약속을 했었어.” 잠시 그녀는 말을 끊었다. “계속 옆에 있겠다고. 떠나지만 않으면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준다고 그랬어. 그런데…… 나, 그 약속, 못 지킬 것 같아.” 그렇게 말하면서 루피아는 생긋 웃음을 지었다. 가능한 한 가장 밝은 얼굴을 보여주려고 웃었지만, 그녀를 보는 세 형제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동생은 입만 웃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들 형제는 마왕이 마음에 안 들었다. 당연했다! 그따위 녀석에게 귀하고 사랑스러운 여동생을 맡긴다는 것은 말도 안 되었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동생이 좋다는 것을. 하지만 진심을 말하자면, 할 수만 있다면 도시락을 싸 들고 다니며 말리고만 싶었다. “……그러니까 미안해요. 나 같이 안 가요.” 동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또박또박 말을 했다. 어느새 동생의 발코니에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세 형제는 서로 시선을 주고받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을 나서면서 트로에는 힐긋 발코니 쪽으로 시선을 던졌지만 이내 거두었다. 오빠들이 문을 닫고 나가자, 루피아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렇게 말을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해야 할 말이었다. 아직도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떨어뜨린 고개를 들지도 않고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이쪽을 봐.” “…….” 고개를 들지 않았다. “-마지막이다.” “……!!” 그녀는 얼굴을 번쩍 들었다. 바로 눈앞에는 테이블에 걸쳐 앉은 그가 있었다. 그는 얼굴을 내려, 그녀의 얼굴에 키스를 했다. 뺨에, 코에, 이마에, 입술에……. “마지막 기회다. 이번 단 한 번만 너를 놔 주겠다.” 그녀는 눈을 떴다. 바로 앞에, 붉은 홍안이 자신을 담고 빛나고 있다. 그의 손바닥이 뺨을 훑었다. 긴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검은 머리칼의 끄트머리를 잡고 그가 그곳에 입 맞추었다. “만약 네가 다시 돌아오게 된다면, 그때는,” 그는 조금씩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손이 멋대로 그를 잡을 것 같아서 루피아는 최대한 주먹을 움켜쥐었다. 안돼! 지금 그를 잡게 되면 나는 영원히 가족과 헤어지고 말 거야. 이곳에서 살아갈 기회를 잃게 되는 거야. “-……죽여서라도 놓지 않을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이디스는 뚜벅뚜벅 걸어서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한 걸음 한 걸음, 그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루피아는 더 세게 입술을 깨물었다. 아팠다. 아팠다. 너무나 아팠다. 목구멍이 간질간질하고 울렁거려서 숨을 꾸욱 삼켰다. 잘 다듬은 손톱이 손바닥 살을 파고 들 때까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으, 으. 짧은 신음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이러려고 좋아한 걸까? 고작 이렇게 끝을 내려고? 이럴 것이라면 대체 왜 그렇게 고민하고, 고민을 했던 걸까? 그녀는 허무해졌다. “우와…… 나 무지 나쁜 여자 같다.” 그녀는 웃었다. ------------------------------------------------------------------ 요즘 들어 부쩍 대담해진(?) 이디스군. 대사도, 행동도 점점 능수능란-_-;해져가는 느낌입니다. 사실 요령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만. 아, 그리고 5권이 끝 맞습니다. 이제 거의 끝부분이거든요. 다들 아시겠지만요.^_^ 어제가, 아니 지금은 그제군요. 그제가 할머니의 생신이었답니다. 축하해주세요. 홈플 방명록에 가셔서 한 마디 남겨주시면 저는 더욱 힘낼 수 있는(…;) 주말이 될 거예요 ♡(←어이;;) 메일 : donghee425@hanmail.net 리플 : 요 아래~ 그럼 즐독하시구요-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_^ 제 목: 공녀(貢女) : 제48화 [두 남자 두 여자](3) 2004/08/04 22:54:03 2580 2 네이에르 (포인트 : 340점) #. 48화 ‘두 남자와 두 여자’ * * * * * * * * * * * * * * * “날 대체 어떻게 아는 거야?” 그녀의 조용한 추궁에 12대천사들은 대답은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난감해진 미카엘은 경솔하게 행동한 셋에게 질책의 눈초리를 보냈으나 시즈니엘과 체르비엘은 물론이고 예의바른 세리엘마저 그의 눈길을 피해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 사이 루피아는 한층 더 가늘어진 눈으로 미카엘을 노려봤다. 미카엘은 결국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대답했다. “그건… 다소의 오해가…….” “말 돌리려고 하지 마세요! 웃기는 소리 할 생각 마시고, 제대로 된 설명을 해주세요.” 당황을 어느 정도 진정시켰는지 루피아는 존댓말을 사용할 여유까지 되찾았다. 그러나 그런 것과는 달리 한층 더 날카로워진 눈길에 미카엘은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이참에 다 물어봐야겠어요. 대체 천계 사람들이 어떻게 저를 아는 거죠? 에우로카엘도 그렇고, 거기 그쪽 사람들도 그렇고! 비밀리에 제 초상화라도 돌고 있습니까?” 가시가 삐죽삐죽 돋아있는 말이었다. 루피아의 눈길이 미카엘을 거쳐 그의 뒤에 서 있던 카마엘에게 가 닿았다. 잠시의 침묵이 흐르고, 결국 카마엘은 입을 열었다. “이 세계를 구성하는 것은 모두 다섯 개의 차원이라는 것을 알 거야. 천계, 마계, 명계, 중간계, 그리고 정령계. 천계는 빛을 주관하며, 마계는 어둠을 주관하고, 명계는 죽음과 탄생을 주관하지. 정령계는 조화와 균형을 주관하고 중간계는 가능성을 주관한다. 보통 영혼이 죽음을 맞으면 명계의 ‘길’이 열리게 되지.” 사자(死者)는 본능적으로 그 길을 걷게 된다고 한다. 길을 찾지 못하는 영혼은 이승에 대한 미련이나 원한, 집착이 너무 강한 탓으로, 그 원인을 해결해야만 길을 볼 수 있게 된다. ‘길’은 영혼을 명계로 인도하고, 명계는 그 영혼이 새로 태어날 장소를 찾아주는 것이다. 길을 제대로 찾았다고 해도 길에서 벗어나 버린다면 그 영혼은 다시는 길을 찾을 수가 없다. 천계에서 어떻게 그녀를 알고 있는지를 설명해달라고 했더니 엉뚱한 소리만 하고 있자, 루피아의 눈썹이 슬며시 찌푸려졌다. 영혼이며, 명계이며, 하등 그녀와 관계없는 이야기가 아닌가! 무슨 얘기냐고 물어보려 입을 막 열려고 할 때, 카마엘이 그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는 바로 그 길에서 이탈해버린 영혼이었다. 천계와 명계는 다른 차원과 비교해 상당히 가까운 편이지.” 그래서 인간들은 명계가 하는 일과 천계가 하는 일을 간혹 혼동하고는 한다. 예를 들어 죽으면 천사가 데리러 올 것이다, 라고 하는 등의. “원칙대로라면 명계로 돌려보내야 맞을 테지만, 우리는 너를 근 10년이 넘도록 데리고 있었다.” 말을 하는 카마엘의 얼굴은 무척 부드러웠다. 미카엘도, 세리엘도, 심지어 냉철한 요시피아나의 얼굴에마저 부드러운 바람이 불고 간 듯했다. “난…… 전혀 기억이 안 나는데.” “그야 그렇겠지. 기억이 나는 것이 비정상인 거다. 명계의 ‘탄생의 문’을 거치면서 ‘망각의 강’을 건넜을 테니까 말이야.” 루피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카마엘은 당연하다는 듯이 태연하게 말했지만, 어쩐지 미안해졌다.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 일인 것이다. 갑자기 이런 말을 들어봤자 어리둥절하고 난감하기만 할 뿐이었다. 이, 이럴 때는 어떤 말을 해야 하지? ‘빌어먹을! 기억도 나지 않는 일을 뭘 어떻게 한단 말이야? 태어나기도 전의 일을!' “역시 루피아네. 태어나기도 전부터 길치였다는 소리잖아!” 어색한 침묵이 흐르던 중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세키라가 말했다. 에리나가 풋, 하고 웃었다. 그때서야 분위기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미카엘이 자못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도 에우로카엘은 그 때 만난 것 같구나.” 그러니까 이렇게 된 것이다. 천족과 마족의 혼혈이라는, 이상한 아이를 미카엘은 직접 마계에서 데리고 왔다. 어찌된 일인지 그 아이는 마족과의 혼혈임에도 불구하고 오르가프의 열세 번째 아이라는 영광된 이름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 뿐, 12대천사들은 그 아이를 그들의 안으로 끼워 넣으려는 수고를 굳이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그들은 난데없이 길 잃은 영혼을 주웠고, 무려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데리고 있었던 것이다. 에우로카엘은 그런 그들을 곁에서 지켜봤음이 틀림없다. 아마 그래서 에우로카엘과 그녀는 만나게 된 것일 게다. 영혼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12대천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때까지도 깡마르고 어린, 볼품없는 열세 번째 아이 따위는 전혀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음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만한 일이다. “어, 어쨌든, 나는 정상적인 ‘인간’이 맞죠?” “당연하지!” “네가 태어나고부터 쭉 지켜보고 있었단다. 네가 자라는 모습을 계속 보고 있었어.” 미카엘은 흐뭇함과 애틋함을 함께 담아 이야기했지만, 그의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세키라와 에리나, 그리고 루피아의 얼굴이 이상야릇하게 변해갔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눈초리 역시 수상쩍다는 듯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입에서 충격적인 단어가 나왔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미카엘은 그 자리에서 돌이 되어 굳어버렸다. “스토커…….” * * * * * * * * * * * * * * * “30년 전부터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장로회에 넘겼다. 원래는 ‘바람의 궁’, ‘징벌의 궁’, ‘거울의 궁’, ‘이름의 궁’, ‘물의 궁’, ‘하쉬핌’이 천궁과 함께 주축이 되어 천계의 중추 역할을 했지만 장로회는 30년 전 각 궁을 폐쇄하고 전권을 ‘물의 궁’에 몰아 부었지. 물의 궁은 에우로카엘이 임시 계승받은 곳이야.” “그렇다면 너희들은 전혀 세력이 없나?” 설명을 하던 요시피아나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사실상 우리가 복귀하는 그 시점부터 그들은 권리를 잃었다. 그래서 우리가 권리행사를 할 수 없도록 그들은 명분을 붙여 우리를 감금시켜 놓았지. 물의 궁에서 일하는 자들을 빼놓고는 모두 마계에 대한 적의로 동조하고 있는 것뿐이다. 에우로카엘이 어떠한 목적으로 이런 짓을 하는가에 대하여 깨닫기만 한다면…….” “그렇게 말하는 그쪽에야말로 알고 있는 건가?” 요시피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알고 있는 것은 에우로카엘은 천족과 마족의 혼혈이며, 600여 년 전 오르가프의 명령을 받은 미카엘이 데리고 마계에서 데리고 왔다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열세 번째 아이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받았고, ‘로헤델’이라는 가져서는 안 될 이름까지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아니면 그녀가 로헤델의 후인(後人)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거다.” 문제는 그것을 알릴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간단하면서도 쉽지 않은 방법이라는 뜻이다. “이쪽은 간단하다. 애초에 ‘왕’은 가장 강한 자의 것. 도로 가져오면 되는 거야.” 로이드윈은 말을 이었다. “그쪽의 제안을 받아들이려는 이유는, 천계와의 전쟁에는 반대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이쪽도 피해가 크기 때문에 무리하게 싸울 이유는 없다고 결론이 났다.” 미카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의견에 대해서는 그도 동의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에우로카엘을 실각시키는 일이었다. 그 다음 천계와 마계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리고, 이디스는 마왕의 자리를 다시 되찾아야 했다. 말로 정리하면 간단한 일이었지만 사실상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상하지 않나? 일단 그 에우로카엘이라는 인물 자체가 수상쩍기 그지없어. 혼혈 주제에 그쪽과 대등한 지위를 얻는 것은 당연히 이해가 안돼. 뭐 특별할 게 있다고? 그리고 달랑 혼자서 그 짧은 시간 안에 천계 안에서 어떻게 그런 세력을 키울 수 있었느냐는 말이야? 아무리 우수해도 뒤를 받쳐주는 세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야.” 로이드윈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대강 중요한 것은 맥락이 잡힌 셈인가. 방법이야 찾으면 될 테고. 일단 로아이나, 그 자식을 찾아서 불게 하면 될 것 같은데.” 아로데가 중얼거렸다. 이곳에 온 이후부터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처음으로 연 것이다. 모든 것은 이디스의 뜻에 따른 것이지만, 특히 천족을 싫어하는 아로데는 시종 시큰둥한 얼굴로 일관했다. 그리고 지금 그의 얼굴에는 빨리 이 자리를 끝내고 싶다는 의사가 명백했다. 그 뜻을 읽은 미카엘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12대천사 중에서도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자가 있기도 했고, 시간이 더 길어져봤자 나눌 말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협력은 얻어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천계의 일에 마족을 개입시킬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는 그들이었지만 만약 그들이 움직여 천계가 혼란해진 사이 마족과 전쟁이 붙는다면 그것은 그들 스스로 천계를 파괴시키는 짓이 된다. 미카엘과 12대천사가 사라지자, 아로데는 피곤한 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싫다! 이 야밤에 할 짓도 많을 텐데 저런 녀석들이랑 밀회라니!”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무척 피곤한 듯이. 루피아는 대뜸 같이 가지 않겠다고 폭탄선언을 하고, 세키라는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 어찌할 바를 몰라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여전한 것은 유리아덴의 에리나뿐이었다. 아로데는 왜 진즉에 그녀를 미리 계약으로 묶어두지 않았는지 후회하고 있었다. ‘약삭빠른 자식! 이런 일이 생길 줄 알고 일부러 계약을 한 것 아니야?’ 아로데는 여유롭게 와인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는 유리아덴을 노려봤다. 괜히 얄미워 보이는 것이, 한 대 쳐주고 싶을 정도였다. “주군! 어떻게 할 겁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둘 생각이다.” “에-엑? 정말로요? 여기 그냥 놔둘 셈이라구요?” 경악하는 세 마족과는 다르게, 이디스는 태연한 안색이었다. 그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녀가 스스로 내 곁에 있기를 바란다.” 그는 한 템포 쉬었다. “억지로 잡아놓는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이 다시 왔을 때 도망가 버릴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결국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주군.” “이것은 도박이다. 승리를 확언할 수 없는.”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담담한 듯 말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는 자신이 없었다. 그녀가 얼마나 가족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어렴풋이나마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로데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로이드윈이 물었다. “아로데, 너는 어쩔 건데?” “-물을 것을 물어! 당연히, 납치를 해서라도 데리고 갈 거다.” 아로데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 * * * * * * * * * * * * * * 딜렌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설마 이곳에서 그를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옆에 선 카른의 얼굴은 점점 굳어갔다. 그는 보호하듯 한 발 앞으로 나서서 팔 뒤로 딜렌을 숨겼다. 카른의 물빛 눈동자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여기는 어쩐 일이지? 당신이…….” 그 남자는 빙긋 웃었다. 여전히, 빌어먹게 얄미운 얼굴이었다. “그건 제가 묻고 싶은 것인데요. 사실 이곳에 가장 오면 안 되는 것은 다름 아닌 당신들이지 않습니까? 아, 혹시, 그의 생존사실을 알고 처치하러 오셨나요?” 딜렌의 몸이 움찔했다. 그, 로아이나는 말을 이었다. “물론 그러신 거겠죠. 당신은 그를 미워하니까 말입니다.” “그건…….” “미워하기 때문에, 그를 죽이기 위해 내게 부탁을 했었죠. 안 그렇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이건 사과를 드려야 할 일이로군요? 죄송합니다. 그를 제대로 죽이지 못했군요-” 짙은 피 냄새가 다시금 코끝을 아리게 만들었다. 물컹한 살과 딱딱한 뼈가 손가락에 부서지는 그 섬뜩한 감촉- 진득한 핏물이 팔뚝을 타고 뚝- 뚝, 흘러내려 땅으로 스며든다. 그의 몸을 파고든 팔의 끝, 손가락에는 서늘한 공기가 닿아 있었다. 로아이나가 각막에 불러일으킨 생생한 장면과 끔찍한 느낌은,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 그만-.” “아, 그렇군요. 당신은 그를 죽이려 했으니- 당연히 그도 당신을 미워하겠네요.” “그만해-.” 이디스는, 그의 형은 단 한 번도 그를 미워하지는 않았다. 그저 무심할 뿐이었다. 딜렌은 전혀 그의 안중에 없었던 것이다. 딜렌이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입술을 꾹 깨물자, 카른이 보호자인 양 가로막고 나서서 소리쳤다. “닥쳐! 이제 그만 사라져라! 너에게 볼 일 따윈 없어. 너도 굳이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무섭군요.” 그러나 로아이나의 얼굴은 조금도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저는 이만 가 보도록 하죠. 부디 몸조심하시길…… 마왕 폐하.” 로아이나는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사람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카른은 으드득 이를 갈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던지고 간 ‘마왕 폐하’라는 말은 비꼬는 말로밖에는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마왕 폐하’라는 말을 짊어지기에 딜렌은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말이다. 너무 무거운 짐이며, 어울리지 않는 호칭이었다. ‘하지만, 꼭! 꼭 내가, 딜렌을 그에 걸맞도록 만들어놓고 말겠어. 반드시.’ 카른은 다짐했다. 그런 카른의 팔을, 딜렌이 확 잡아당겼다. 아직도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잔상 때문에 딜렌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딜렌은 입술을 질근 깨물며 말했다. “……돌아가겠어.” “뭐?” “형님은 꼭 내게 올 거야. …그렇다면, 나는 기다리겠어.” “딜렌…….” 딜렌은 몸을 뒤로 돌렸다. 아직 어린 소년, 다 자라 성체(成體)가 된 자신에 비해 친구는 아직 너무나 어리고 여리기만 했다. 친구의 몸에 흐르는 피의 반은 인간의 것이고, 나머지 반은 위대한 마왕의 피다. 카른은 딜렌의 어깨를 꽉 안아주었다. 어렸을 때 만나 계속 지켜봐 온, 이 친구는 그에게 너무나 소중하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저, 어색하기 그지없는..[부들부들] (어색해어색해어색해어색해어색해어색해!!!!+몸부림) 사실, 가장 위의 장면은 맨 처음 루피아가 납치되어서 깨어난 그 장면에 집어넣어 버렸습니다. 두 번이나 만나 나눠 얘기하는 것은 좀 그래서요-_-;; 저 장면 때문에 계속 다시 쓰고, 고쳐 썼지만, ..저게 한계입니다. 제 능력으로는 저게 다예요ㅠ_ㅜ 아주 절망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_-;; 훗훗. 몇 번이나 거듭 말씀드렸었듯이, 루피아는 100% 순종 인간입니다.(…!;) 메일 : donghee425@hanmail.net 리플 : 요 아래에~ 즐독하십시오♡ 제 목: 공녀(貢女) : 제49화 [있어야 할 곳] 2004/08/19 19:19:51 1981 4 네이에르 (포인트 : 340점) #. 49화 ‘있어야 할 곳’ * * * * * * * * * * * * * * * ‘잠이 안 와…….’ 그도 그럴 것이, 오늘 하루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선택을 해야 할 시간이 왔다. 지금까지처럼 되는 대로 설렁설렁 넘겨 보낼 수는 없는 것이다. 자신은 공녀(貢女)고, 그 입장은 절대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할 일을, 그리고 있을 곳을 알아야만 하겠지. 우리는 마치 공중에 붕 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야. 잘 생각하자. 그리고 후회 없이 행동하자.’ 마계에 공물로 바쳐졌지만, 지금 그 마계는 더없이 혼란한 상태라 더 이상 그녀들을 구속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공녀는 현재 천계에 잡혀있는 상황이 아닌가. 그녀들의 상황을 알 수도 없다. 그녀들을 그냥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들의 문제도 해결을 해야 한다. 자신의 상태도 무척 어정쩡하다. 이대로 중간계에서, 나 몰라라~ 하고 살아버릴까? 차라리 맘 편하게 시골집 하나 사서 거기서 살아버릴까? 가끔 가족들이 보고 싶으면 만나기도 하고, 중단했던 마법 공부도 다시 시작하고… 아, 이참에 해보고 싶었던 여행을 해보는 것도 좋을 거야. 다 때려치워 버리고? 솔직하게 말하면, 무척 끌렸다. 슬며시 머리 한 켠,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었다. 다른 얼굴은 다 지워버리고, 루피아는 아유니의 얼굴을 선명하게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순진하고 귀엽게만 보였던 그 웃는 얼굴 속에 도대체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들어있었던 걸까? 오늘 12대천사들에게 들었던 이야기까지 범벅이 되어, 머릿속을 어지럽게 헝클어뜨렸다. ‘에우로카엘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와 그녀는 어떤 관계였을까? 그녀는 나를 미워하고 있는 것일까. …내참, 처음부터 끝까지 수수께끼인 사람이네.’ 조금 힘들더라도 중간계에 남을 생각이었던 그녀였다. 대륙 변방, 혹은 깊은 시골에 있는 듯 없는 듯 숨어 살면 되지 않을까- 하고 조금은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혹은, 그냥 이디스를 따라 곁에 붙어 있을까- 하고도 생각을 해봤다. 공녀(貢女)인 것도 잊어버리고, 천계에 있는 여자들이야 어찌 되든 신경도 안 쓰고,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하지만 그렇게 무책임하게 다 벗어던져 버리는 것은, 역시 성미에 맞지 않다. 평생 찝찝하게 여기며 살아가게 될 것이 분명해. 지금 무언가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려면 그와 헤어져야 해. ‘역시…… 괴로워.’ 헤어지고 싶지 않다. 사실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그의 옆에만 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다. 그에 대한 감정이, 마음이 어느새-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만큼이나 자라나버려 주체할 수 없게 되었다. 루피아는 침대에서 일어나, 멍하니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하나밖에 없는 달이 자잘한 별빛과 섞여 어두운 밤을 은은하게 밝혀주고 있었다. 그녀는 발바닥을 차가운 바닥에 대었다.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방을 나섰다. * * * * * * * * * * * * * * * 하늘에 달이 하나밖에 없다. 어쩐지 허전한 느낌이 든다. 세키라는 쓴웃음을 지었다. 마계에서 보낸 시간은 고작해야 1년이 안 되는데, 20년을 아래에서 숨 쉬었던 저 하늘이 낯설고 허전하게 느껴지다니. 자잘하게 뿌려진 별빛이 아름답다. ‘루피아는 남고, 에리나는 떠나고…….’ 결국 이번에도 가장 어정쩡하게 남겨진 것은 자신 혼자뿐이다. 친구들은 둘 다 확실하게 자신의 뜻대로 의사를 결정했다. 세키라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어떤 것이 ‘옳은 결정’인 지는 잘 알고 있다. 이제까지 바라왔던 그대로 그녀는 이 중간계에서 발 디디며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다. 자신은 인간이고, 설령 마계로 따라간다 해도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거기다 그녀는 동생 에드윈드와 약속한 바 있지 않은가. 이제 아무 곳에도 가지 않겠다, 라고 말이다. 아직 그 아이에게는 내가 필요할 거야. 그러니 내가 이 곳에 있어야 해. 세키라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속에서, 이제까지 들어보지 못한 소리가 들렸다. 또 그렇게 변명을 늘어놓니? 또 그렇게 도망만 치려고 하니? 그 목소리는, 날카로운 가시처럼 그녀를 쿡쿡 찔러대었다. 너는 늘 ‘옳은 결정’만을 해서 ‘착한 아이’가 될 생각인 거야. 그래서 그렇게 ‘옳은 결정’을 하려고 신경을 곤두세우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부터였을까? 이제는 언제부터인지조차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내가 정신 차려야지. 내가 에드윈드를 돌봐야 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꾹 참는 법을 배웠다. 예전에는 훨씬 짜증도 잘 부리고, 제멋대로에다 고집도 셌었다. 그대로 자랐다면 상당히 버릇이 없는 아가씨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주위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그녀는 자신에게 이상형의 모습을 덧씌우고 있었다. ‘좋은 딸’, ‘상냥한 누나’- 그러나 그 틀에 스스로 박혀버려, 어느 순간 도저히 빠져나올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내가 싫어. 이런 우유부단한 내가 정말…….’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님, 주무세요?” 에드윈드였다. 세키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주었다. “잠이 안 와서 바람이나 쐬려고 산책을 하고 있는데, 누님 방에 불이 아직 켜져 있는 것을 봤어요.” 정말, 오늘 밤은 쓸데없는 생각이 무척 많이 든다. 이렇게 생각이 많은 밤이면 늘 늦잠을 자고는 했기 때문에, 세키라는 내일 아침에 일어나기가 무척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는- 누님이 여기 계셨으면 좋겠어요!” 갑자기 에드윈드가 소리 높여 말했다. “제게 누님은 어머니이기도 하신 소중한 분이십니다! 꼭, -꼭… 곁에, 계셔주셨으면 좋겠다, 라고…… 그렇지만 이건, 제가 억지로 붙잡는 것만 같아서.” “약속했잖니? 다시는 어디도 가지 않겠다고.” “네! 하지만 누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셔도 좋아요. 하하하! 사실은 무조건 ‘가지 말라’고 떼를 쓰고 싶지만, 이제 어린애가 아니니까요…….” “……!” 그 말을 끝으로 에드윈드는 입을 다물었다. 무안한지 조금 붉어진 얼굴로 머리를 긁적거리던 에드윈드는 이쯤 가서 자겠다, 라고 하며 방을 나섰다. 그때까지 세키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에드윈드도 이제 16살, 아니 17살이 다 되어가는 구나.’ 새삼 깨달았다고나 할까. 이제껏 굳이 나이를 헤아려 보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의 그 애는 굳이 그녀의 도움이 없어도 괜찮을 정도로 컸다. 그 깨달음은, 그녀에게 묘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런 것을 가지고, ‘명분이 사라졌다.’- 라고 하는 걸까.” 피식, 하고 웃음이 새어나와 그녀는 웃어 버렸다. * * * * * * * * * * * * * * * ‘끼-아아악! 나는, 정녕 바보인 거야아! 제길, 제길! 이런 식으로 깨닫고 싶지는 않다고!’ 루피아는 그대로 바닥에 흐물흐물 주저앉았다. 맨발로 멍하니 걷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녀는 가장 오고 싶지 않았던 곳의 바로 코앞에 도착해 있었다. 몽유병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아무런 생각 없이, 말 그대로 머릿속이 백지(白紙)인 상태로 걸어와 버린 것이다. 100% 완벽한 무의식, 이었다고나 할까. 지금은 문 앞에 주저앉아 죽이고 싶을 정도로 멍청한 자기 자신을 비난하며 자책하고 있었다. 아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나! 그녀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머리를 가볍게 흔들고,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문을 올려다보았다. 아래에서 위로 쳐다보기 때문인지 문은 더 크고 위압적으로 보였다. 이 안에는 분명, 지금 가장 보고 싶지 않은, 그러나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이 있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이어지자, 이번에는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헤어져 놓고 무슨 얼굴로 단둘이 마주하겠다는 거야. 말도 안 될 노릇이지, 빌어먹을. 돌아가야지. 고럼, 돌아가야 하고말고.’ 그녀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문 앞에 서서 팔짱을 끼고 문을 노려보았다. 음~ 그, 그래도, 밤이 늦었으니만큼, 아무리 마족이라도 잠을 자고 있지 않을까-아아. 오, 맞아. 여러 가지 일이 있었잖아! 내가 그에게 한 것들도 포함해서 말이야. 으음- 음- 피곤할 거야. 세상 모르고 곯아떨어졌을 거라고! 누가 방에 들어가도 모를 만큼! ‘얼굴만 살짝 보고 나오는 것 정도야…… 괜찮겠지?’ 살짝- 문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에이, 모르겠다! 어차피 내일부터는 보지도 못할 텐데, 이대로 얼굴 못 보게 될지도 모르는데, 한 번쯤, 뭐 어때! 막 힘을 주고 손잡이를 돌리는데, 머릿속에 에리나가 한 말이 생생하게 메아리쳤다. -그냥 콱 덮쳐 버려! 으아! 저리가! 갑자기 이럴 때에 떠오르지 말란 말이야! -그냥 콱 덮쳐 버려! 그냥 콱 덮쳐 버려! 그냥 콱 덮쳐 버려! 그냥 콱 덮쳐 버려! ……. 루피아는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문을 밀었다. 평소에는 가볍게 열리던 문이 괜스레 무겁게 느껴졌다. 끼익, 끽, 나지도 않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심장 두근거리는 소리와 긴장감에 온몸이 잡아먹힐 것만 같다. 두껍게 깔려진 양탄자를 믿고 루피아는 침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침대의 머리맡에 다가가 선 그녀는, 곤히 잠든 이디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역시 그녀의 예상대로 그는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생각하게 되지만, 이 사람은 아름답다. 단순히 눈과 코, 입 등의 이상적인 위치와 형태 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물론 그것들도 무시하지 못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 등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는 얼음처럼 서늘하고, 칼처럼 날카로운 느낌을 준다. 하얗고 깨끗한 피부와 단정한 얼굴선. 곧게 뻗은 눈썹과, 그 아래 섬뜩한 핏빛 홍안(紅眼)은 지금은 긴 속눈썹의 눈꺼풀 아래 감춰져 있다. 유려하게 솟은 콧날과, 입술…. 루피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 위로 얼굴을 숙여, 입을 맞췄다. 스스로도 저지른 짓에 깜짝 놀랐지만. 그래, 마지막인데 뭐 어때? 이 정도는 봐 주라고. 그렇게 생각한 순간, 세상이 빙글 돌아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라?”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어? 깨 있었어요?” “문 앞에서 그렇게 시끄럽게 중얼대는데 안 깰 수가 있겠나.” 음, 그렇게 시끄러웠나.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서 중얼거렸다든가? 그나저나 조금 위험한 자세다. 그렇게 인식을 하자, 얼굴로 피가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어두우니까 안 보일 거야, 안 보일 거야.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아하하! 나 몽유병이 있나 봐요? 나도 모르게 여기까지 와 버렸네.” 진심으로 그런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위험하다는 것은 아나?” “……에, 바, 밤이 늦었으니까. 지금 돌아갈 거예요!”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가 무척, 한심하고 바보 같이 느껴졌다.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만 가.” 그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으음. 조-금만 더 있다 가면 안 될까- 요? 역시.” “무슨 생각이냐, 대체!” ‘무슨 생각이냐’하고 물어도, 스스로도 모를 판에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루피아는 침을 꼴딱 삼켰다. 이런 짓을 하다니- 분명 내일 아침만 돼도 머리를 뜯으며 스스로를 미워하게 될 것이 분명하지만. 이제껏 한 번도 얼굴을 내밀지 않았던 또 다른 루피아가 수면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굴러 떨어진 호박’이 되어주려고 한다. 라고나 할까요.” “…굴러 떨어진…….” “아, 호박은 좀 그런가. 그럼, ‘굴러 떨어진 공녀’. 쯤으로 하죠.” 아무리 그래도 스스로를 호박 취급하는 것은 기분이 좋지 않다. 그렇다고 호박을 싫어한다는 것은, 아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나는. 별별 이상한 생각이 다 들어서 머리가 혼란스럽다. “같이 가지 않겠다고 한 것이 바로 몇 시간 전이다.” “잊어버리지 않았어요. 지금도 변함없어요. 나는 따라갈 수 없어요.” 루피아는 단호하게 생긋 웃으면서 말했다. 이디스의 표정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무슨-…….” “나는 ‘인간’이고, 그건 변하지 않고, ‘공녀(貢女)’이고, 꼭 해야 할 일도 있고… 하지만 인간이라서 이기적이고.” 참 비겁하다, 고 루피아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건 꼭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하는 심보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그것과 조금은 경우가 다를지 몰라도 말이다. 루피아는 두 팔을 올려 손바닥을 그의 뺨 위에 올려놓았다. 부드럽다. 그대로 손바닥을 움직여 그의 목 뒤로 팔을 감았다. 쪽, 가볍게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적막이 가라앉은 가운데 그 소리는 유난히 크게 들렸다. 심장이 무섭게 고동치는 이 소리, 그에게는 들리지 않을까. 한 번 더 쪽, 하고 입을 맞췄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루피아는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으. 제발 뭐라도 좀 해 봐요.” 이런, 이런, 민망한 상황이라니! “난 더 할 줄 모른단 말이에요!” 스스로 입을 맞춰 본 적도 없는 판에 더 이상 혼자서 진도를 어떻게 나가란 말인지. 사실 그 이상의 ‘진도’까지 나가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스스로 시도를 하자니 여간 민망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후회 하지 않을 자신은 있는 건가?” “아니, 뭐, 이런 경우에도 그런 것을 물어요? 저, 말하자면 ‘고이 잡수셔요’하고 굴러 떨어진 경우가 되는데-.” 이번에는 이디스 쪽에서 먼저 입을 맞췄다. 루피아는 얌전히 눈을 감았다. 말랑말랑한 이물질이 입안을 휘저어 놓는다. 이런. 괜히 민망한 기분이 되어, 그녀는 아직 그의 목 뒤를 감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조용하고 적막한 방 안의 공기- 숨이 막힐 것 같은 고요함. “어쩌면 후회하게 되는 쪽은 이쪽이겠군.” 갑자기 키스를 멈추고, 입술이 닿은 채로 그가 말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숨이 가쁘다. 으, 민망해. 이게 정말 내가 만든 소리란 말이야? “뭘요?” “-쓸데없는 도박을 건 것.” 그의 숨이 목에 닿았다. 움찔, 하고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용기를 내서, 목 뒤에 얌전히 놓여있던 손을 움직여 등을 껴안는다. 숨이 멈춰버릴 것만 같아…. 조금, 아니 많이, 무섭다. 그의 손이, 숨이, 입술이- 조금, 조금씩 그녀를 물들일 때마다 가는 숨이 입술 사이에서 흘러 나왔다. 등에 붙어있는 손가락을 펼쳐 그의 등을 쓰다듬었다. 사각사각- 후끈 달아오른 공기 속에서 불타 사라질 것만 같은-. “루피아.” “……으?” “……꼭, 돌아와라.” “아.” “돌아와라… 꼭.” 주르륵- 달구어진 공기 속에서 차가운 눈물이 뺨 위를 흘러 내렸다. 눈물이 지나간 그 자리만 식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 -저, 어설픈 베드신(어쨌든 침대잖아요!)을 적으려고 며칠을 끌었는지![눈물] 로맨스 소설을 며칠 밤을 탐독(?)하고, 하지만 로맨스 소설 속의 베드신은 너무 상세;하고 찐~ 해서 어울리지 않는다고 다시 머리를 쥐어뜯고ㅠ_ㅜ 적어놓고도 어색하다고 다시 지우고, 지우고...; 죄송합니다. 한시가 급한-_-; 상황에 10일이 넘도록 끌었으니 욕 먹어도 싸요ㅠㅠ 조금, 전개를 끄는 듯한 느낌도 분명히 있지만 이 이야기는 분명히 짚어두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니까요. 에.. 공녀 입장에서는 제일 중요한 문제일 테니까.-_-/ 오늘도! 기다려준 독자 여러분께 너무너무너무~~ 감사를 드리구요. 제가 너무 사랑하는 것 다 아시죠? 아하하.[...돌 던지지 마세요;] 메일 : donghee425@hanmail.net/hanmir.com/yahoo.co.kr ←요즘 메일이; 리플 : 요 아래에~ 즐독하세요.^^ 제 목: 공녀(貢女) : 제50화 [뒤집기!](1) 2004/08/26 01:54:27 1396 0 네이에르 (포인트 : 340점) #. 50화 ‘뒤집기!’ * * * * * * * * * * * * * * * 그날 아침(자꾸 곱씹으니 또 슬퍼지려 한다. 젠장), 청천벼락같이 떨어진 황명을 받들어 마계에 바쳐질 적에처럼 눈앞이 캄캄하지는 않지만, 겨우 돌아오게 된 이곳을 스스로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정말이지 가슴이 시리도록 아리었다. 해야 할 일이 있다. 같은 처지가 아니라면 누구도 하지 않을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결코 그녀들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들의 목숨을 포기해버리지 못할 정도만큼 멍청했던 모양이다, 나는. ======================루피아의 자서전================ 내가 뭣에 쓰였던 것이 분명해. 새가 날아들 듯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대담하고도 미친 짓을 저지를 수 있을까!(하지만 만약 정말 뭣에 쓰인 것이었다면 그녀는 그 ‘무엇’에 감사를 해야 했다.) 몸을 옴짝달싹 하기도 싫지만, 이대로 누워 있다면 가장 곤란한 것은 그녀가 될 터이다. 루피아는 억지로 몸에 힘을 주었다. 저릿하게 통증이 찾아왔다. 이 통증과 옆에서 고른 숨을 뱉고 있는 남자가 아니었더라면 그녀는 어젯밤의 일을(겨우 몇 시간 전의 일이지만) 미친 꿈쯤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통증은 분명했고, 온기는 따뜻했다. 그녀는 괜히 민망해서 큼,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의 팔을 걷어내고, 반쯤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위(四圍)는 아직 어두웠다. 창 밖의 어두운 하늘 어느 구석에서 파르른 기운이 슬며시 돋아나고 있었다. 조금 서늘한 새벽 공기가 맨살에 닿자 소름이 돋는다. 여름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새벽은 쌀쌀하다. ‘혹시라도 아로데들이 알게 되면 무-지 곤란하게 될 거야. 오빠들이나 아버지가 알게 된다고 생각해도…… 으, 절대 비밀이야.’ 그녀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아으, 아프구만. 민망해. 그는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아 곤한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슬그머니 침대 곁으로 다가가 잠든 그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았다. 손을 뻗어 만져보려다 그녀는 다시 손을 거둬들였다. 안돼, 마음이 약해져, 약해져. 그녀는 살금살금, 조심스럽게 방을 빠져 나갔다. 복도로 나서자 그녀는 자신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하품을 길게 했다. 잠깐 잠이 든 것 같긴 한데 영 피곤하고 졸렸다. 이대로 가서 한숨 푹 엎어져 잘까나. 들키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새벽의 어둠 속에서 씩, 하고 미소를 짓는 세 쌍의 음흉한 눈동자를. * * * * * * * * * * * * * * * “천계로 데려가 주세요.” 마치 ‘좋은 아침입니다’라고 인사를 하는 것 마냥 덤덤하고 조용조용한 어조였다. 그러나 태평스레 말을 꺼낸 그녀와는 달리 여파는 무척 컸다. 상냥하고 온화한 성품과 항시 침착한 태도로 칭송을 받던 미카엘은 손에 쥐고 있던 홍차 잔을 떨어뜨렸고, 냉철하고 무표정한 요시피아나는 볼썽사납게 입을 벌린 채 다물 줄을 몰랐다. 가장 침착한 둘의 반응이 이럴진대 나머지 다른 이들은 빤하지 않은가? 모두들 하나같이 멍청한 얼굴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 열두 천족에게 호감을 갖고 있지 않았던(오히려 신용 못할 스토커라는 편견이 심하였던) 루피아는 몰래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 그 유명한 12대천사가 맞나? 혹시 사기를 친 것이 아닌가? 다들 생긴 것은 반반하니 잘 생겨가지고 왜 저런담? 하긴 드워프를 제외한 거의 모든 유사인류에게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처럼 붙어 다니는 것이 바로 저 ‘미모’가 아니던가 말이다. 하물며 몬스터 과(科)에 분류되는 세이렌(Seiren : 여자의 얼굴과 새 모양을 한 괴물로, 근해에 나타나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뱃사람들을 홀려 죽게 만든다)마저도 남자를 혹할 만한 아름다운 미모를 가지고 있지 않던가. 모두들 금칠이라도 했는지 빛이 번쩍번쩍 나오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했다. “무슨 이유로……?” 빛이 나는 외모의 선두주자, 미카엘이 물었다. “당연하잖아요. 마계에 바쳐진 공녀의 대부분이 천계에 인질로 잡혀 있는 것을 잊으셨어요? 마계에서 그녀들을 구하러 나설 것 같지는 않고- 천족이 인간들 목숨 다칠세라 조심히 여겨 주리라는 것 역시 기대하지 않으니까요.” 바보 같은 그녀들은, 혹여 아직도 천족들이 그네들의 편이라고 굳게 믿고 있을까. 제발 이번 기회에 그것을 알아주었으면 좋으련만. 스스로의 생각과 믿음과는 달리 그들은 결코 선(善)의 대명사가 아니라는 것을. 천사들도 인간을 하찮게 생각하고 있음을. “그것 때문에?” “제가 해야 할 일 같으니까요. 에우로카엘에 대한 궁금증도 풀어야 하고.” “이곳이 안전하다. 위험해! 만약 리크비엘의 눈에 띄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는 인간과 마족을 혐오하고 있다. 그가 아니더라도 인간을 싫어하는 자는 많다.” 요시피아나가 단칼로 거절했다. “그럼 저더러 그녀들의 목숨을 버리라고요? 구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 것도 안 하고 방관하는 것은 죽이는 거나 마찬가지라고요!” 미카엘은 입을 다물었다. 루피아는 기세를 타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해 이렇게 정의감이 넘치는 것 같은 닭살 돋는 말은 그다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말을 하고 보니 마치 자신이 정의감이 넘쳐흐르는 사람 같지 않은가? “몰래 섞여들면 누가 알아차리겠어요? 하나하나 다 살펴볼 것이 아니면 아무도 못 알아차릴걸요? 에우로카엘만 피하면 되잖아요. 그러니까…….” 하며 생긋, 웃는 그녀의 보라색 눈은 이미 확고한 고집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결국 두 손을 든 것은 12대천사들이었다. 미카엘의 결정에 기뻐하며 달려드는 세리엘과 체르비엘, 시즈니엘을 피해 루피아는 기겁했다. 아무리 옛날에 알았으면 뭐해! 기억이라곤 눈곱만치도 나지 않는걸. 오히려 더 껄끄럽고 부담스럽기만 했다. “기뻐할 일이 아니다, 시즈니엘!” “나만 타박이야! 체르비엘도, 세리엘도 좋아하잖아! 요시피아나, 너는 왜 만날 나만 구박하고 그래?” “좋은 것을 어떻게 하냐. 솔직히 지금이 아니면 언제 같이 있을 수 있겠냐고.” 체르비엘이 퉁퉁 부은 얼굴로 투덜거렸다. 꼭 철없는 어린애 같은 그 모습을 보니 괜히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나오려고 했다. 아아, 그 누가 믿기나 하겠는가? 누군가에게 이런 사실을 말한다 해도 절대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꼭 가야겠니?” 미카엘이 걱정스러운 안색으로 물어왔다. 어쩔 수 없이 데리고 가겠다고 대답을 했지만 영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리크비엘이 인간과 마족에게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특별히 그녀들을 구하고 싶다는 것이 아니에요. 다시 돌아온 이 땅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었어요. 같은 입장인 내가 아니면 그 누가 그녀들을 살리려고 애쓰겠어요? 그들이 굳게 믿고 있을 천족? 마왕에 관한 일로 발칵 뒤집힌 마족이? 아니면 우리를 자신들의 손으로 마족에게 갖다 바친 인간들이 힘을 써줄까요? 그럴 일은 더더욱 없겠죠. 콱 죽어 버리라고 빌지나 않으면 다행일 걸요.” 에리나는 계약으로 몸이 묶여 있고, 세키라는 중간계에 남아있고 싶어 하는데다 몸도 약하다. 그렇다고 그녀 혼자 무엇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들을 찾아온 것이었다.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나 이들과 함께라면 난리 중에 그녀들을 몰래 데리고 나오는 것쯤은 가능하게 될 지도 모른다. “언제쯤에나 갈 수 있죠?” 너무 늦어지거나 해서 다시 이디스의 얼굴을 한참 마주하게 된다면, ……으으! 그것보다 민망한 일이 또 있을까! 마치 마지막인 것처럼 행동해놓고! “아, 그건…….” 미카엘이 대답을 다 하기도 전에 에드윈드가 와락 문을 열어 재끼며 소리쳤다. “로아이나가 잡혔어요!” * * * * * * * * * * * * * * * “아하하하하. 이거야 원, 잡히고 말았군요.” “……지금이 웃을 때냐! 너, 네 상황을 알기나 하는 것이야?” 아로데가 빽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로아이나는 태평스레 웃음만 헤실헤실 지어보였다. 열이 받치는지 아로데가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분이 풀릴 때까지 쥐어 패 주었으면 속이 다 시원하련만! 밧줄로 꽁꽁 묶여 무릎이 꿇려있는 로아이나는 붉어진 얼굴과 꽉 쥐어진 주먹을 보고도 바보 같은 웃음만 실실 흘려대었다. “하아! 이런 것은 예정에 없었는데. 돌아가면 저, 맞을 거예요. 너무 불쌍하지 않습니까?” “……아예 병신으로 만들어주랴?” 빠득, 이 가는 소리가 섬뜩하니 울렸다. “저 같은 것을 잡아봤자 별로 이익 같은 것은 없을 텐데 말입니다.” “어떻게든 써 먹을 곳이 있겠지! 하다못해 비상식량으로라도 쓸 수 있을 것 아니냐?” 아로데는 날카롭게 말했다. 하지만 로아이나는 태연하게 ‘저는 살도 별로 없고 늙어서 맛도 없을 건데요’하고 받아쳤다. 그 때문에 아로데 이마의 핏줄이 서넛 개 더 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카일은 복잡한 얼굴로 꽁꽁 묶여서 무릎이 꿇린 마족청년(?)을 바라보았다. 어쩌다 자신의 저택이 마족이며- 심지어 천족이 모여드는 온상지가 되었을까! 생각을 하면 할수록 미간에 주름이 지어져 갔다. 게다가 이번에는, 죄인으로 보이는 마족청년이 잡혀왔다. 말하는 꼴을 보아하니 나사 하나가 빠진 것 같이 모자란 느낌마저 든다. 솔직히 얄밉던 녀석들이 부들부들 떠는 모습을 보게 만들어주어 그리 나쁘게 보이지는 않았다. “저는 단순한 소모용품이니 그리 쓸모가 있지는 않을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세라핌 미카엘.” 미카엘은 싱긋 웃었다. “아닙니다. 충분한 쓸모가 있으니 걱정 마시죠. 적어도 비상식량 신세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오! 저도 모르는 용도가 있었던 모양이로군요. 이거 기뻐해야 하는 걸까? 하하하.” 로아이나는 마치 모든 것을 자포자기해 버린 사람마냥 보였다. 어떻게 되든지 자신은 상관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길은 없으나 그가 붙잡혀 준 것은 잘된 일이었다. ‘일부러 잡힌 것 같은 기분이 든단 말야.’ 루피아는 가만히 인상을 구겼다. 생긋생긋 예쁘게 웃는 로아이나가 어쩐지 불안한 마음이 들게 만들었다. 그렇게 로아이나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그에게 에리엘이 다가가 그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게다가 더듬는 것으로 멈추지 않고, 옷까지 덜컥 벗기는 것이 아닌가! 에리엘의 느닷없는 행동에 로아이나가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아니! 세라핌 에리엘! 아무리 제가 좋다고 해도 벌써 이러시면…….” 그 말에 벌게진 것은 오히려 에리엘 쪽이었다. “무슨 말이냐! 나, 나는 그저…….” 에리엘은 말을 하면서 로아이나의 윗옷을 훌러덩 벗겼다. 꺅! 하고 우스운 비명을 로아이나가 능청스레 질렀으나 에리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의 왼쪽 어깨 뒤편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새하얀 백옥 피부에 낙인처럼, 시커먼 흉터가 이상한 문양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에리엘이 그곳에 손을 가져다 대자, 마치 반항이라도 하는 것처럼 치직, 하고 파란 스파크가 일었다. 에리엘은 얼른 손을 떼었지만 로아이나는 고통스러운지 인상을 그었다. “이것을 찾으려고 했을 뿐이라고! 오해하지 마!” “…아하하. 농담이었는데 민감하시기는?” 주르륵- 식은땀이 그의 이마 위로 흘러내렸다. 상당히 아픈 모양이었다. 심술이 나 있던 아로데가 일부러 그의 흉터를 발로 꾹- 눌러버렸지만 에리엘 때의 경우와는 달리 스파크도, 무엇도 일지 않았다. 아로데는 쳇, 하고 아쉬운 얼굴이 되었다. 흉터는 끔찍했다. 살이 검게 타 버린 것처럼 시꺼멓다. 그 주위는 흉하게 붉은 색으로 부어오른 살이 올록볼록하게 굴곡이 져 있다. 비록 손바닥만한 크기였지만 금방 생긴 것처럼. 벌건 피가 퐁퐁 솟아오를 것 같았다. “이건?” 세키라가 조금 질린 얼굴로 물었다. “‘노예인장’, 즉- 로헤델의 표식이죠.” 에리엘이 씩 웃으면서 대답했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로아이나도 따라서 생긋 하고 웃었기 때문에, 에리엘의 웃음은 금방 굳어버렸다. “하지만 저 녀석이 그 여자와 연관이 있다는 증거는 없잖나?” 로이드윈이 시큰둥한 얼굴로 말했다. 로헤델의 유적지에서 보았던, 로아이나와 에우로카엘이 로헤델의 유적지에서 마주 보고 서서 대화하는, 그런 영상이 있었다면 더없이 좋았을 테지만 아쉽게도 그런 것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건 그렇지만, 비상식량으로보다야 더 유용한 용도로 이용될 수 있겠지.” 요시피아나가 삐딱하게 말을 받았다. 로이드윈과 요시피아나가 서로를 마땅찮게 노려볼 때에, 미카엘이 그들 사이에 나서 중재를 하며 루피아에게 말했다. “준비는 다 되었겠지?” ---------------------------------------------------------------------------- 뭐라 드릴 말씀이-_-; 저번주 토요일부터 개학을 했답니다. 보충 때의 시간표에 익숙해져 있다가 다시 정상수업을 하려 하니 죽을 맛; 입니다ㅠ_- 9월 초 축제에다- 뭐 이것저것 행사가 많겠네요. 음.. 그림도 빨리 그려서 내야 하는데.(←만화부;) ...모릅니다.[..훗] 메일 : donghee425@hanmail.net/hanmir.com/yahoo.co.kr 리플 : 아래에!^ ^ 즐독하세요☆ 제 목: 공녀(貢女) : 제50화 [뒤집기!](2) 2004/09/04 01:19:07 1722 1 네이에르 (포인트 : 828점) #. 50화 ‘뒤집기!’ * * * * * * * * * * * * * * * “……해서, 천계로 갈 거야.” 대략의 설명을 끝마치고 나서 루피아가 입을 다물자, 정적이 날아들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바로 에리나였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테이블을 내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너무 무모하잖아! 미쳤어?” “미쳤다, 라니. 너무 심하잖아. 그야 나도 무모하다고는 생각하지만.” “생각 정도로 될 문제야? 죽으러 가는 꼴이 아니냐고!” 겨우 그깟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들 때문에! 라고 에리나는 속으로 덧붙였다. 물론 그녀 역시 천계에 있는 공녀들의 죽음을 바라는 입장은 아니었지만 루피아와 비교할 수는 없었다. 버럭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던 에리나는, 멈칫하더니 입술을 깨물면서 다시 의자에 털썩 앉아버렸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은 이런 소리를 하면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같이 가 주지도 못하잖은가. 쓸데없는 책임감 따위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공녀(貢女)라는- ‘같은 입장’으로서 보면 루피아가 하는 행동이 가장 당연한 것일 것이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쓴물을 삼킨 그녀는 옆에 앉은 세키라를 쿡쿡 찔렀다. 대신 말려봐, 좀. 에리나는 세키라가 루피아를 설득시켜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정작 세키라의 입에서 나온 것은 영 딴 소리였다. “과연, 그렇구나.” “뭐?” “루피아, 나도 데리고 가.” “뭐라고!” 에드윈드가 벌떡 일어서고, 아로데의 눈썹은 치켜 올라갔다. 하지만 세키라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듯이 조목조목 차분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내가 있는 편이 너와 다른 공녀들의 사이를 조율하기 쉬울 거야. 잊은 것은 아니겠지? 루피아. 넌 그녀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는 처지잖아. 게다가 나도, 이곳에는 내가 있을 자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 루피아는 그제야 몇몇을 제외한 다른 공녀들과 자신의 관계가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을 상기해내었다. 그에 비해 세키라는 그녀들에게서 상당한 호감을 사고 있으니 분명 그녀가 함께 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걱정되는 것은, 그녀의 약한 체력이다. 그러나 세키라는 그런 루피아의 마음을 알기라도 했던지 생긋 웃으며 걱정하지 마, 라고 말했다. 마계로 간 이후로 그녀의 체력은 이전보다 많이 나아져 있었다. “하, 하지만 누님!” “이 아이는 이제 다 컸으니 나는 필요 없어. ……나는, 늘 너희가 부러웠어. 소신이 또렷하고 단호하고. 하지만 그에 비해 나는, 그러지 못해서, 내가 싫었어.” 에드윈드의 말을 잘라버리고, 세키라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이젠 좋은 딸, 좋은 누이 노릇은 그만 할 거야. 내 마음대로 할 거야. 내가 나를 위해서, 그렇게. 나쁜 생각이지만, 다른 공녀 분들을 도와주고 싶어서가 아니야. 나를 위해서, 지금의 나에게 최선을 다하고 싶어.” 마지막으로 세키라는 멋쩍게 웃었다. 속마음을 털어놓는 고백 같은 말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려니 부끄러웠던 탓이었다. 하지만 털어놓고 나니 굉장히 후련했다. 평생 못할 말까지 다 한 것처럼, 가슴 속이 시원했다.(사실, 일생일대의 고백이잖은가) 에드윈드는 누님, 하고 울먹거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때, 아로데가 벌떡 일어났다. 세키라의 어깨가 움칠했다. 그녀는 두 무릎 위에 놓인 주먹에 꽉 힘을 주었다. 화, 화가 난 걸까? 하지만, 어째서? 아로데는 뚜벅뚜벅 걸어서 다가와, 그녀의 바로 앞에 섰다. 그가 팔을 뻗었다. 아로데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로 벌떡 일어났을 때부터 긴장하며 바라보던 에리나가 움찔거렸지만 유리아덴이 그녀를 막았다. 손가락이 세키라의 작은 머리에 닿기 바로 직전, 갑자기 세키라가 아로데의 소맷자락을 두 손으로 꽉 붙들었다. 부들부들, 소매 끄트머리를 잡은 하얀 손가락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나, 나는…….” 말갰던 하얀 얼굴이 귀 끝, 목까지 새빨개져 있었다. 침을 꼴깍 삼킨 그녀는 간신히 다음 말을 이었다.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였다. 소매 끝을 잡은 손가락은, 떨렸지만 절대 풀어지지는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목 끝까지 올라 차 있다. 목구멍에서 맴도는 말을 뱉어버리면 참 시원해지련만, 목을 콱 막은 화끈한 덩어리는 쉽사리 나올 것 같지가 않았다. “잘했어.” 아로데의 손바닥이 세키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째서인지 안심이 되어서, 세키라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후둑, 후두둑, 굵은 눈물이 흘러내려, 세키라는 두 눈을 꾹 감았다 떴다. 그리고 소매를 끌어, 아로데를 가까이 끌어당겨 귀에다 살며시 작게 속삭였다. “…….” “어이- 거기! 이제 그만 좀 하지? 보기 민망한데.” 로이드윈이 시큰둥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비단 그 뿐만이 아니라 시선을 딴 데로 돌리며 딴청을 부리려고 애쓰는 12대천사들이나 에드윈드, 에리나와 루피아까지 모두 마찬가지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세키라와 아로데를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지켜본 사람은 로이드윈과 이디스, 둘 밖에 없었다. 루피아는 이디스와 혹시 눈이 마주치기라도 할까 봐, 필사적일 정도로 그가 있는 쪽으로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얼굴을 봐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그녀는 주문처럼 속으로 계속 중얼거렸다. 얼굴 보면 안 돼, 얼굴을 보면! “그럼 얼른 가요!” * * * * * * * * * * * * * * * 꿀꺽, 타액을 넘기면서 세키라와 루피아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마계에 가게 될 것이라는 것 역시 전혀 상상치 못한 일이었지만 그때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렇게 두 눈 멀끔 뜨고 제 발로 들어가는 것과는 다른 일이다. 이미 세키라는 두 번째였다. 한 번, 그녀는 12대천사의 도움을 받아 천계에서 중간계로 갈 수 있었다. 그 때만 해도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올 일은 없을 줄 알았다. “천계는 규율이 엄격한 세계다. 정해진 자리에서 정해진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는 것이 최고의 미덕. 상하구분도 엄격하기 때문에 하극상은 절대 범하여서는 안 되는 대죄이지. 한 번 규칙이 깨어지면 질서로 유지되는 이 천계 전체의 밸런스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요시피아나는 그 특유의 표정이 없는 얼굴과 굴곡이 없는 어조로 설명을 하고 있었다. “때문에, 「심판」이라는 것이 있다. 형벌은 엄격하고 용서가 없으며 때로는 잔인하다. 죄를 가리는 데에 있어 신중하지 않으면 안 돼. 로아이나는 에우로카엘의 심판 때에 요긴하게 쓰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지금은 아니라 해도.” “그럼, 지금 다른 공녀(貢女)들은…….” 세키라가 물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세리엘이 해주었다. “중앙 천궁 남쪽 별관에 있다. 남쪽… ‘물의 궁’과 가깝군. 그곳에는, -오르가프님의 거울이 모셔져 있는 신단(神壇)이 있지 않았던가. 그런 곳 가까이에 인간을 두다니!” 세리엘의 마지막 말은 조금 올라갔다. 인간의 몸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신력(神力)이 몸에 스미게 되면 견디지 못한다. 위험한 것이다. 리크비엘이 그런 것까지 신경을 썼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요시피아나의 부연설명을 더해 들은 두 공녀의 눈매가 찌푸려졌다. 특히 세키라는 더욱 걱정스러웠다. 그, 얼어붙을 것만 같았던 푸른 눈동자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지극히 아름다운 외양을 가진 이였지만 뼈 속까지 얼음으로 꽉꽉 뭉쳐진 것 같은 느낌이 났다. ‘피할 수 있을까? 어쩐지 불안한 예감이 자꾸…… 그 사람은 무서워. 소름이 끼칠 만큼.’ 세키라와 루피아, 그리고 12대천사들은 이미 천계에 와 있었다. 그들은 폐쇄된 궁 중 하나인 ‘하쉬핌’에 와 있다. 하지만 요시피아나와 세리엘을 제외한 나머지는 해야 할 일이 있다며 금방 흩어져 버리고 말았고, 남겨진 두 공녀는 일단 요시피아나에게 천계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루피아와 세키라는 아직 이 곳이 천계인 것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눈 깜박할 사이에 ‘떡’ 하니 도착해 있으니 어디 실감할 만한 것이 있을 리가 없다. 세키라 역시 중앙천궁 안을 조금 돌아다녀 보았을 뿐-그리고 천족을 만났을 뿐- 천계의 모습을 제대로 본 적은 없었다. 게다가 이곳은 폐쇄되었다는 궁 내부였다. 천장이 둥글고 무척 높다랗다는 것만을 빼면, 여느 신전과 다른 점이 없는 건물이었던 것이다. 하니 당연히 실감을 못할 밖에. 그들의 최우선 목표는 무엇보다 다른 공녀들의 구출에 있었다. 하지만 시작부터 중앙 천궁이라니! 말만 들어도 힘들 것 같은 냄새가 폴폴 난다. 우선 어떻게 그녀들이 있는 곳까지 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다. 천궁은 모두 다섯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중앙 천궁과 동서남북의 별관. 별관에서는 오르가프님의 신물(神物)이 각각 모셔져 있었다. 천계의 중심축 역할을 하는 중앙천궁과 그 별관 주위로는 모두 여섯 개의 궁(宮)이 세워져 있다. 그중 중앙천궁과 가장 가까운 궁이 바로 물의 궁이었다. “물의 궁을 거쳐 가면 되겠군. 그곳은 중앙 천궁과 바로 통하니까 말이다. 물의 궁- 그곳에는 에우로카엘과 리크비엘이 있어.” 이쯤에서, 요시피아나의 얼굴에 작은 주름이 졌다. 원래 물의 궁은 요시피아나의 것이었다. 에우로카엘에게 잠시 넘겨주기는 했었지만 어디까지나 ‘임시’일 뿐이다. 당연히 돌려받아야 할 때는 지났다. 세리엘이 이어 말을 더했다. “안내는 내가 해주겠어. 그러니 잘 따라와야 해.” * * * * * * * * * * * * * * * 차분히 감겨 있던 라우데스의 눈이 뜨여졌다. 현숙하고 지혜로운 깊은 색채의 붉은 눈동자에 빛이 돌자, 그의 곁에 시립(侍立)해 있던 사제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인다. “돌아오셨구나.” 말을 하는 라우데스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또 한 바탕 피바람이 불게 될까. 그는 막고 싶었다. 딜렌도, 이디스도. 그러나 그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그는 오직 클리오라를 위해서만 움직이는 종이었던 것이다. 달칵. 그는 손에 쥐고 있던 ‘목각인형’을 내려놓았다. 현재 마계는 그야말로 무질서의 극치에 달했다. 그것을 통제해 주어야 할 마왕은 애초 그럴 마음부터가 없어 보이니 그 정도는 날이 갈수록 심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천계에서 쳐들어 올 마음만 먹는다면, 매우 위험한 상황이 될 것은 보나마나 뻔했다. “교황 성하(聖下), 그 말씀은…….” “현 마왕께는 승산이 없으시다. 단언컨대, 그 차이는 단 한 번이면 확연히 드러날 게다.” 실력이나 능력의 차이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현 마왕에게는 마왕의 자질이 전혀 없다. 이대로라면 마계는 분명 멸망일로를 걷게 될 것이다.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왕은 이미 왕이 아니다. 그때였다. 라우데스의 시선이 박힌 그곳에서부터 검은 빛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점점 모여든 검은 빛의 자락은 서서히 사람 모양으로 뭉쳐져, 이윽고 다섯 사람의 실체를 허공에 드러내었다. 다섯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사뿐하게 바닥에 발을 대었다. “생각보다 멀리 돌아서 오신 듯합니다.” “아, 너는, ……주름이 몇 개 더 늘은 것 같구나? 어디보자, 한 세 개쯤?” 아로데의 경쾌한 목소리에 사제들의 이마에 혈관이 솟아올랐다. “기쁜 일이군요. 클리오라께 한층 가까이 다가갈 시기가 가까워진 모양입니다.” “……농담이었어.” 이번에도 아로데가 손을 들었다. 무슨 말을 하던 간에 라우데스는 늘 이런 식으로 그의 농담(?)을 흘려버렸다. “돌아왔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시간이 지났군요-” “그래. 하지만, 이제 충분히 쉬었다. 게으름을 피우는 것은 이제 지겨워졌다. 내 것을 되찾을 때다.” 달칵. 달칵달칵. 라우데스의 품 넓은 소맷자락 곁에서 사락, 하고 투명한 실이 반짝거렸다. 그 실은 길게, 길게 이어져 ‘목각인형’의 양 손과 양 발목에 연결되어 있었다. 나무 무늬의 매끄러운 표면과, 긴 검은 머리채- 붉은 핏빛 눈동자. 이디스는 싱긋 웃었다. 조금 전 라우데스의 손에서 떨어진 ‘목각인형’의 입술 끝자락도 함께 곡선을 그렸다. =============================================== 로이드윈 : 뭐야, 갑자기 호러? 아 로 데 : 여름은 다 지났잖냐? 세 키 라 : …제가 좀 대담했네요. 음. 루 피 아 : 잘 될 거야! 다 잘 될 거야! 그럼, 그렇고 말고! 아자! 에 리 나 : 난 어디 있어?! 어쩌면, 날이 가면 갈수록 나는 말이 없어져! 유리아덴님을 닮아가는 것도 아니고 말야.[투덜투덜] 존재가 희미하다고. 유리아덴 : …불만? 에 리 나 : [도리도리]; 이 디 스 : …귀찮군. 딜 렌 : ~말이지, 나, 너무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여. 카 른 : 그게 사실이잖냐? 결국 내가 다 하잖아. 딜 렌 : …….(;) 축제 중입니다. 축제, 라고 쓰고 지옥, 이라고 읽습니다. 그림이 무척 맘에 안 들..- -; 다른 애들이 너무 잘해서ㅠ 타롯 점을 너무 많이 쳤더니 무리가- ㅜ; 손이 차가워지고 덜덜 떨려요- 속도 울렁거리고요.; 내일, 아니 오늘이면 끝납니다←제일 힘듬 즐독하세요. 좀 짧음을 용서하시와요ㅠ 제 목: 공녀(貢女) : 제50화 [뒤집기](3) 2004/09/10 02:38:02 1666 0 네이에르 (포인트 : 828점) #. 50화 ‘뒤집기!’ * * * * * * * * * * * * * * * ‘계율(戒律)의 세리엘’은 12대천사 중에서도 특히 몸집이 작고 선이 가는 편이다. 하지만 여려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그는 ‘계율’을 관장하는 천사. 냉정하고 철저, 깔끔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모호한 외모의 그는, 인간의 나이 13세에서 14세 가량의 작은 몸집 덕택인지, 굉장히 날랜 몸놀림을 가지고 있었다. “자, 잠깐…… 조, 조금만 천천히…….” 세키라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열심히 뒤쫓고는 있었지만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던 루피아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멈춰 섰다. 세키라는 아주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녀는 땀을 비 오듯 쏟고 있었다. 세리엘이 못마땅한 듯이 말했다. “이 정도 가지고 힘들어하면 곤란해.” 위험한 것은 충분히 알고 있고, 그래서 가슴이 터지도록 힘든 데도 아무 말을 하지 않은 것이었다. 세키라는 다시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섰다. 하지만 약간 비틀. 결국 몇 분만 쉬었다 다시 가기로 결정이 되었다. 세리엘은 여전히 못마땅해 보였지만 세키라의 허연 안색을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주었다. 어쨌든, 세키라는 몸이 약한 것이다. 숲 특유의 찌르는 듯한 냄새와, 습한 공기가 기분 나빴다. 하지만 중간계에서의 숲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이 드는 숲이다. 몸으로 느껴지는 요소는 비슷하지만 시각적으로 보이는 광경은 너무나 다르다, 라는 이야기다. 하얗게 탈색이라도 시켜 놓은 것 같은 느낌으로, 색소가 무척 옅었다. 햇살은 잘게 부서지는 황금색. 하늘도 연한 노란색을 섞은 하얀색이다. 이곳은 물의 궁으로 가는 도중인 숲, 의 막바지이다. 루피아와 세키라는 천계에 발을 들인 후 처음으로 겨우, 숨을 돌리고 주위를 살펴볼 수 있었다. 그리고 감탄했다. “‘물의 궁’의 내부는 상당히 복잡해. 게다가 어디에서 에우로카엘이나 리크비엘과 마주칠지 알 수 없으니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 만에 하나 인간이라는 것을 그 둘이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알았어요. 조심할게요.” 몇 번이나 당부해도 부족하다는 듯, 세리엘은 계속해서 말하고 또 말했다. 걱정해주는 것은 고맙지만 열 손가락 넘어가도록 같은 말을 듣는다면 지겹게 마련이었다. 루피아는 성의 없이 대답했지만 세리엘이 말을 할 때마다 위험성을 인식할 수 있었다. 사실, 계속 생각하면 ‘내가 왜 이런 미친 짓을 하겠다고 나섰을까’하고 후회하게 될 것 같아서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다. ‘젠장, 내가 생각해도 난 정말 바보야. 이렇다 할 힘도 없으면서 구하겠다고 나서서, 실패하면 그 무슨 쪽이냐고. 거기다 이렇게도 위험한 일인데. -아아! 가 봤자 좋은 소리 못 들을 것이 너무나 뻔한데. 눈에 보인다, 보여.’ 지금 루피아가 걱정하는 것 중에 두 번째로 큰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어찌어찌하여 에우로카엘과 리크비엘의 눈을 피해 중앙천궁으로 들어가 공녀들 앞에 다다르게 된다고 해도, 과연 그녀들이 곱게 자신을 따라올까? 세키라의 이름값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녀들은 천족을 ‘신뢰’하고 있을 것이 아닌가. 그녀들 입장에서 보면 자신은, 결코 믿고 따를만한 사람이 아닌 것이다. ‘델리드- 는, 잘 있을까…… 한 번 생각하니까, 문제가 끝이 없구나.’ 암담하다, 라고나 할까. 그런 생각을 하며 한숨을 쉬는데 세리엘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그는 느닷없이 멈추어서는 말했다. “다 왔다.” “에?” 세키라가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소위 ‘궁(宮)’이라고 불릴만한 건물 따위는 눈에 띄지 않았다. 오직 숲, 숲, 숲- 조금 전과 똑같은 풍경뿐인 것이다. 도대체 어디에 다 왔다, 라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 두 사람이 인상을 찌푸리자 세리엘이 간단하게 그들의 의문을 해결해주었다. “숨어야 하는 처지에 당당하게 정문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했어?” 별 생각도 없이 세리엘의 뒤만 졸졸 따라왔었던 두 사람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세리엘은 피식 웃고는 바로 앞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겨우 사람 하나 들어갈 수 있을만한 크기의 구멍이 있었다. “……여기로 들어가면, 어디로 나오는데요?” “글쎄, 나도 거기까지는…… 하지만 ‘물의 궁’ 내부로 들어가는 길인 것은 맞다.” 세리엘은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세키라와 루피아의 안색은 조금씩 질려갔다. 머뭇거리는 두 사람을 내버려두고 세리엘이 훌쩍 구멍 속으로 몸을 던졌다. 다급해진 두 사람도 이어 몸을 던져 구멍 속으로 뛰어내렸다. 루피아가 뛰어내리면서 소리쳤다. “설마, 같은 곳에 떨어지겠죠!” * * * * * * * * * * * * * * * 대답을 미처 듣지는 못했지만, 루피아는 답을 알 수 있었다. “-이런, 망할! 이런 데다 뚝 떨어뜨려 놓으면 어쩌자는 거야!” 말할 것도 없이, 대답은 ‘아니다’였다. 벌떡 일어나며 소리친 그녀는, 순간 자신이 떳떳하게 나다닐 입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핫, 하고 입을 막았다. 혹시나 주변에 누군가 있었으면 어떻게 하나 싶어 살폈지만,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상황. 일단 그녀는 주변 풀숲 뒤로 몸을 숨겼다. 길을 잃었을 때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이 최고라지만, 지금 같은 상황은 경우가 조금 다른 것 같다. 제발 두 사람이 이 근처에 떨어졌기를! 하지만 가까운 곳에 떨어졌다 해도, 마음껏 돌아다닐 수도 없고 소리쳐 부를 수도 없으니, 찾기란 어려울 것이다. 뭐 하나 제대로 풀리는 일이 없고만! 루피아는 크게 한숨이라도 내뱉고 싶은 기분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기로 했지만, 혼자 있자니 이런 저런 생각이 많아져 괴로웠다. 아복잡해생각하고싶지않아이런일도하고싶지않은걸그냥가버릴까몰라몰라모른다고이디스고뭐고가족이고뭐고그런게다뭐야공녀따위되고싶지않았는데다른공녀들도생각하지말고그냥내버려둘걸그랬어…… 어쩌구저쩌구주저리주저리. “이쪽이다! 찾아라!” 화들짝, 본능적으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나, 나를 찾고 있는 건가? 벌써 들킨 거야? “잘 살펴봐! 분명 이 근처에 있을 것이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들킬 것 같아서, 그녀는 슬금슬금 몸을 움직였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고 보는 것이다. 어딘가, 다른 사람의 눈이 없는 곳으로 피하기만 하면- 이라고 생각하며 루피아는 무작정 발을 놀렸다. “앗! 저기다! 쫓아가라!” ‘천사’가 ‘악마’처럼 보이는 순간이다. 윽- 하고 신음을 뱉으며 있는 힘껏 내달리기 시작했다. 우르르. 악! 다들 할 일도 없는 거야? 왜 다들 나만 쫓아오는 것처럼 보이지? 바쁠 것 같으니 나 같은 것 쫓아오기보다 차라리 가서 일이나 하라고! 몰래 들어온 것이 들킨 것인지, 인간이라는 것이 들킨 것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분명 호의적인 뜻으로 그녀를 쫓는 것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녀로서는 최대한 빨리 달리는 것이었지만 거리는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숨은 차오르고, 체력은 한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10걸음, 두다다다. 그러나 거리는 꾸준히 줄어든다. 코너. 주르륵- 미끄러질 뻔 하지만 용케 중심을 잡는다. 그러나 거리는 단번에 8걸음으로 압축되었다. 7걸음, 6걸음- 차근차근 줄어들어 이제 손을 뻗는다면 한 움큼을 남겨두고 닿을만한 거리에 이르렀다. 더 빨리, 더 빨리! 그러나 급한 마음만큼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 4걸음, 3걸음! 자, 잡힌다! 잡힐 거야! 머리카락 뒷자락을 잡아당기는 힘이 느껴졌다. 이렇게 되면 이판사판이다! 하고 생각한 순간, 펄럭- 하고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무슨 일이지?” “핫! 아, 아무 일도 아닙니다! 침입자가 들어왔다는 보고에 따라, 수상한 자를 뒤쫓고 있었습니다!” “이것 말이냐?” 새하얀 천이 그녀의 머리를 덮어버린 것이었다.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낯선 목소리였다. 대체 누구지? 그러나, 적어도 그녀를 도와주는 중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가라.” “예!” 그녀를 쫓아오던 자들은 그 한 마디에 아무런 의문도, 미련도 없이 그 자리를 떠나 버렸다. 그것만 봐도 그녀의 머리에 하얀 천을 씌운 사람이 상당한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대체 누구지? 이 천계에서 그녀를 도와줄 수 있을만한 지위에 있으며, 또한 그녀를 알고 있는 사람은……- 설마? 그녀는 눈앞을 가렸던 하얀 천을 스르륵 끌어내렸다. * * * * * * * * * * * * * * * “정말 괜찮겠나? 두고 가도?” 세리엘이 불안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하지만 세키라의 대답은 오직 하나였다. 그녀는 조금 전과 똑같이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듣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몸짓이었다. 하지만 숙인 고개 밑에서 세키라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세리엘은 깊게 걱정스러운 한숨을 뱉어내었다. “루피아는 꼭 괜찮을 거예요. 이제까지의 전례(前例)를 봐도, 에우로카엘은 절대 루피아에게 해로운 짓은 하지 않아요.” 하지만, 확신과 걱정은 별개이다. 어떻게든 루피아를 찾고 싶은 마음이 울컥울컥 솟아올랐지만, 세키라는 애써 그 충동을 억눌렀다. 괜찮을 거야, 라며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 듯 계속 중얼거리면서 그녀는 발을 놀렸다. 세리엘은 그 모습을 보며 다시 한숨지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수밖에는 없다. 만약 루피아를 찾겠답시고 나섰다가는 그들까지 몽땅 다 잡혀버려, 애초의 시도가 아예 무산으로 돌아감은 물론, 목숨까지 위험해져 버린다. 세키라로서는 굉장히 과감하며 냉정한 결단이었다. 그녀는 꾹 믿기로 했다. 루피아는 절대로 괜찮을 것이라고. 그리고 루피아 몫까지 자신이 잘 해내야 한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지만 그녀는 꾹 참았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거냐?” “우선 공녀들에게 알게 해줘야죠. 천계의 리크비엘은, 절대 우리 편이 아니라고. 지금 당신들은 위험한 처지에 놓인 것이라고- 부디, 알아주었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힘들 거예요. 그리고 알게 되면, 그녀들을 일단 중간계로 보내주세요.” “-힘들겠군.” 세키라는 쓴웃음을 지었다. 상황에 비해 이 말은 너무나 느긋한 것이다. 알게 해 준다, 라니- 말이 통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상황은 끝, 이라는 것이잖은가. 천계를 자신의 편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그녀들에게, 세키라는 책임감을 느꼈다. 자신이 천계와 공녀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혼자 달랑 빠져나왔다. “이곳이다. 이 문을 지나면 바로 남쪽 별관이 보일 거야.” 세키라는 벅찬 숨을 몰아쉬었다. 이렇게 오래 뛰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숨이 탁 막히고 옆구리가 아팠지만, 그녀는 침을 꼴깍 삼키고 눈을 크게 떴다. 커다란 신전 안을 헤매고 다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건물이었다. 넓고, 길고, 높다. 이제부터는 내가 할 일들만 남았다. 세키라는 각오를 다졌다. 혼자 해야 해, 혼자. * * * * * * * * * * * * * * * “마계에서 ‘교황(敎皇)’이라는 지위는 어느 정도 되는 권위를 가지죠?” 중간계에서의 ‘교황’은 여느 황제에 비할 바가 아닌, 독립적이고 절대적인 지위이다. 빛의 신 ‘오르가프’ 교단의 교황은, 제아무리 황제라고 하더라도 한 수 접어주어야 할 정도의 권위를 갖고 있었다. 황제 역시 오르가프를 따르는 신자(信者)이기도 하고, 교황의 군사력과 경제력 등 영향력이 거의 위협이 될 만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교황은 정치적으로 중립의 입장이어야만 하고, 또 이제껏 중립이었으며, 교황이 나서는 것은 전쟁이 날 수 있을 법한 문제에 한하여서였다. “글쎄, 특별히 지위, 라던가 하는 것은 없지만, 존경 정도는 받고 있는 정도라고나 할까요.” 라우데스가 인상 좋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중간계에 비해 마계 교황의 지위는 형편없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따로 주어진 지위도, 권력도 없으며 받는 것이라곤 일종의 존경, 뿐이다. 마계의 모든 권력은 오직 마왕, 한 사람에게만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에리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신탁……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어. 결국, 그 신탁의 의미나 내용을 아는 것은 교황, 한 사람뿐인데…….’ 설마 거짓 신탁을 말했을까마는, 진실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신탁의 내용이 교황이 거짓으로 꾸며낸 내용이었다고 하더라도 그 의도는 대체 무엇일까? 생각하면 할수록 마계에 인간여자가 필요할 일은 없는 것 같다. 신의 의도란, 클리오라의 의도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다들 ‘신의 뜻’이라는 한 마디로 모든 대답을 일축해버리지만, 그것은 전혀 대답이 되지 않는 것이다. 에리나의 손이 슬그머니 허리춤에 매달린 검으로 향했다. 그녀는 찬 감촉의 표면을 쓰다듬다 꼭 쥐었다. 손바닥에 딱 들어맞는 기분 좋은 느낌. 힘이 충만해지는 듯한 기분. 하지만 그와 반대로, 죄책감 역시 그녀를 옭아매었다. “……저, ‘목각인형’은 뭐죠?” 에리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물었다. 라우데스가 가지고 놀 만한 인형은 절대 아니었다. 결이 고운 나무로 만들어진 인형은, 정교하게 다듬어지고 손질되어져 있어 누군가가 꽤나 아껴서 사용했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라우데스는 인형을 집어 들어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기원 인형’입니다. 직접 만들었답니다.” “……마왕님을 닮은 인형이네요?” 까마귀의 깃털 같은 머리칼과 루비를 녹인 것 같은 붉은 유리구슬 눈동자. 싸늘한 표정까지 이디스와 무척 닮아있는 ‘목각인형’은, 어쩐지 섬뜩한 기분을 느끼게 했지만 에리나는 입 밖으로 말을 하지는 않았다. ‘어째서…… 저런 것을?’ ====================================== 이디스 : ...언제나 그렇지만, 이번에는 특히 많이 늦었군. 이번달 내로 끝내기는 할까 모르겠어. 루피아 : 그러게요~ 한심하게스리! 세키라 : ...변명을 하자면, 집안 사정이 많았다나요. 복잡했다, 라고 전하라네요. 축제 때문에 몸도 망가졌고, 라고 말이죠. 아로데 : 다 변명이야, 핑계지! 에리나 : .......난 할 일 없는 것처럼 보이잖아! 작가는 나 싫어하는 게 분명하다고! 세리엘 : 세키라와 이름이 비슷해서 구분이 잘 안 돼. 세키라 : 좀 헷갈리기는 해요; ......뭐, 아하하핫♡ 즐독하세요.[후다닥] 덧. 카페 회원을 모집(?)합니다^ ^ 새로운 바람;이 되어주실 분을 급구! 공녀&신혼일기 팬카페이기는 하지만 친목 위주의 카페입니다.^^ 제 목: 공녀(貢女) : 제50화 [뒤집기](4) 2004/09/15 01:24:41 1368 2 네이에르 (포인트 : 828점) #. 50화 ‘뒤집기!’ * * * * * * * * * * * * * * * “열어주세요! 내보내 달란 말이에요! 이봐요!” “언제까지 이런 곳에 가두어 두려는 거야! 내보내 줘!” 아무리 목을 높여 외쳐 봐도 돌아오는 것은 공허한 침묵뿐이다. 젠장, 하고 로위나는 욕설을 뇌까리며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마치 공간이 단절된 것처럼, 전혀 들리지 않는 척 외면하고 있는 옆모습이 죽도록 미웠다. 바로 옆에서 외치고 있는데도, 미동도 없이 그저 앞만 바라보는 천족은 자신의 일 외에 다른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틀렸어… 전혀 들은 척도 하지 않아.” 목소리가 갈라져, 말을 할 때마다 목이 아팠다. 어떻게 하지? 머리가 어찔해져 델리드는 순간 비틀거렸다. 어쩐지 숨을 쉬기 힘들다. ‘세키라님은 사라져 버리시고, 천계는 우리를 언제 중간계로 돌려보내 줄 것인지 언급조차 하지 않아. 이런 곳에 가두어 버리고… 이상해! 너무 이상하다고!’ 이 위화감을 느낀 것은 세키라가 사라져 버린 뒤 얼마 안 되어서였다. 그녀가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천족에게 물어도, 천족은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그저 그녀들을 이곳으로 옮겨놓고 가린 것이, 대답이라면 대답이었다. 델리드는 다시 한 번 목을 가다듬었다. 천계로 온 뒤부터 힘이 없던 세키라의 어두운 얼굴이 마음에 걸렸다. 그분은 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리신 걸까? 그리고 루피아와 에리나는, 왜 함께 천계에 오지 않았을까. “모르겠어요.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지쳤어.” 페넬로페가 주저앉아 눈물을 글썽거렸다. 천계에 오면, 다 해결될 것이라 믿었다. 그들은 우리들을 구원해주었고, 이제 곧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돌아가서 가슴 아픈 일을 당하더라도 이겨내자고, 돌아갈 수만 있다면 뭐든 좋다고 각오도 다졌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천계에서는 아무런 말이 없었고, 물어도 대답이 없었다. 오직 그들만 이곳에서 아무 것도 모른 채 흐르는 대로 이끌려가는 것만 같았다. “델리드 양, 아직도 계속하세요? 아무래도 쓸데없는 일인 것 같은데요.” “그래요.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세요? 그렇게 재촉하지 않으셔도 천사 분들께서 저희들을 고향으로 데려다 주실 겁니다.” 약간은 한심하다는 듯, 위로조로 말을 붙이는 그녀들에게 델리드는 한 마디 쏴주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갈라질 대로 갈라진 목도 의사소통을 하기에 힘들었던 데에다, 답답함에 스스로도 많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하나의 저택과 같은 구조였다. 그녀들을 충분히 수용할 수 있을 만큼 넓고, 지내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되어 있었다. 굳이 꼽아보라면 숨쉬기에 약간 거북함이 느껴진다는 것일까? 하지만 그리 신경을 쓸 정도는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색소가 반쯤 모자란 듯한 싱거운 느낌이라서인지, 산소도 반쯤 모자란 것 같이 생각되었다. 델리드는 부동(不動)의 자세로 언제까지나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천족을 힘없이 올려다보았다. 그의 안중에 그녀들은 없었다. 목이 터져라 외치고 손을 뻗어보아도 그는 돌아보는 법이 없는 것이다. 차라리 돌에 대고 외치는 것이 훨씬 낫겠다. 애당초의 신성함 따위는 이미 의식 저편으로 사라져 버린 지 오래고, 지금은 그저 귀머거리로만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세상이 끝난다 해도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천족이 움찔거렸다.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입도 열렸다. “이곳은 에우로카엘님의 명령으로, 누구도 출입할 수 없습니다. 돌아가 주십시오.” 누구지? 델리드와 다른 이들의 눈이 함께 천족의 시선 너머로 쏠렸다. 그리고 순식간이었다. 서 있던 천족이 거짓말처럼 앞으로 쓰러져 버리더니, 사악- 하는 날카로운 바람소리와 함께 그들을 가두고 있던 철문이 가로로 잘려 버렸다.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어? 하고 어리둥절해 있을 사이, 그들의 시야 안으로 낯익은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세- 세키라님!” 로위나가 가장 먼저 이름을 부르며 벌떡 일어났다. “아. …이건 너무 과격한 것 같지 않나요? 세리엘님.” “열 받는 소리를 하잖나. 저런 발언은, 말이야.” 미간을 찌푸리며, 세리엘이 말했다. 분명 그를 알아보았을 텐데도 저따위 말을 한다는 것은 에우로카엘과 세리엘의 계급을 따져볼 때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규율의 세리엘’로서 적당한 처벌을 내려준 것뿐이다. “세키라님! 이게 어떻게 된 거지요? 그동안 대체 어디로 사라지셨던 거예요?” 세키라는 조금 난처한 듯이 웃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말을 해줘야 하나, 하고 고민했다. 이곳으로 오면서부터 쭉 고민했던 것이지만, 지금까지도 해결이 나지 않았다. 후우, 하고 가볍게 한숨을 내쉰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고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반가워하는 사람, 그녀가 대체 왜 이러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바라보고 있는 사람 등, 다양했다. “데리러 온 거예요.” “…데리러 온 거라니요? 누가, 누굴?” 세키라의 말과 조금 긴 간격을 두고, 게르노시크 출신인 듯한 공녀가 말문을 열었다. 그녀는 다갈색의 피부를 가진, 진한 검은 머리카락의 미녀다. 조금 처진 눈매가 인상적인 그녀의 말투는 조금 공격적이었다. “제가, 당신들을요.” “어째서요? 이제 우리들은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요! 천계는 우리들을 중간계로 돌려보내 주겠다고 약속했어요!” 다른 곳에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큰 굴곡의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에크라의 공녀였다. “천족이 무조건 우리들의 편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나요? 무엇 때문에 천사는 우리를 도와줄 것이라고 믿고 있는 거예요?” 세키라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거야, 천사이시니까요! 당연히…….”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그녀는 곧 입을 열었다. “그 분들은 빛이시니까, ‘선(善)’이시고, 옳으니까요!” “누가 그렇게 정했지요? 천사가? 악마가? 빛이 옳고, 어둠이 그르다고 누가 정했나요?” “우리들은 그렇게 배웠어요! 그러니 당연한 것 아닌가요? 세키라님의 질문 자체가 이상한 거예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델리드들을 제외한 공녀들은 세키라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세키라는 긴장된 가슴을 억누르면서, 몰래 두 손을 맞잡아 쥐었다. 태연하게, 태연하게-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세키라님. 그 말씀…….” “천계는 우리들을 중간계로 돌려보내주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인 거죠?” 델리드가 끼어들어 말했다. 사실 조금만 생각을 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만약 돌려보내려고만 했으면, 이렇게 시간을 질질 끌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귀찮게 가두어놓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세키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델리드는 ‘역시’하고 납득했지만, 나머지는 달랐다.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요!” “그래요! 세키라님, 당신이 이곳으로 데려왔잖아요! 그런데…….” 공녀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일이에요! 생각할 머리가 없는 거예요? 우리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면 적어도 이런 식으로 취급하지는 않았을 거 아니에요!” 소리를 친 것은 로위나였다.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답게 왈칵 소리를 지른 그녀는 계속해서 내뱉었다. “조금이라도 우리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고, 또 돌려보내 줄 마음이 있었다면 이렇게 감금을 해 놓지는 않았겠죠! 목이 터져라 불러댔을 때, 짧은 대답이라도 해 주었겠죠! 그런 식으로 마치 없는 사람처럼 무시하지는 않았겠지!”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것처럼, 목이 쉴 때까지 고함을 쳐 봐도 꼼짝도 안 했던 천족에게 로위나는 거의 한이 맺힌 듯했다.(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제일 먼저 말문을 열었던 게르노시크 출신의 공녀가 다시 말했다. “그러다가 그게 아니면 어떻게 하려구요? 피치 못할 이유로 조금 늦어져 버린 것뿐이라면? 책임질 거예요?” 로위나가 ‘그걸 왜 내가 책임져야 해!’라고 소리치기 직전, 세키라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말을 막았다. 게르노시크 공녀는 세키라를 노려보았다. 세키라는 조금 간격을 두고, 그녀 특유의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우리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천사는 성스러운 신의 사자(使者)이며 정의이고, 악마는 더럽고 사악한, 가까이해서는 안 될 존재라고 배워왔어요.” 대륙인이라면 누구든지 알, 오르가프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배워왔을 것이고, 그것에 한 치의 의심도 품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역사를 돌이켜야 할 정도로 오래 거슬러 가지 않아도 마족 때문에 일어난 끔찍한 사건은 수없이 많고, 그들이 잔인하고 사악한 일을 거듭해 왔다는 것도 쉽게 알 수 있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족을 무서워하고 배척하는 거예요.” 세키라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렇지만 그것을 바란 것은 역시 인간입니다. 마족을 불러내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주고 잔인한 일을 해주길 바란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이에요.” “세키라님!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천족도 마족처럼, 중간계에서 합법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힘을 필요로 해요. 천사를 ‘강림’시키기 위해서 신관은 생명력을 소모하게 돼요. 그것은 계약의 형태나 다름없어요.” 옆에서 세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은 세리엘이 말해준 것으로, 처음 들었을 때는 세키라도 놀랐지만 잘 생각해보니 납득이 가는 이야기였다. 세키라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공녀들은(델리드들조차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당신들을 이곳으로 데려온 것처럼 되고 만 것에 책임감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그건 당신들의 선택이었고, 저에게는 그것을 빼앗을 권리가 없죠. 또 이번에도 그래요. 선택은 스스로 하세요.” 아직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끝내지 못했지만, 세키라는 입을 다물기로 했다. 전해야 할 말은 다 전했다. 나머지는 그녀들이 어떻게 하느냐, 에 달렸다. * * * * * * * * * * * * * * * ‘천사’ 그 자체, 라고 루피아는 느꼈다. 만약 ‘천사의 모범’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 모습이다! 밝은 금색의 풍성한 머리카락, 깨끗한 흰 피부의 단정한 얼굴. 곧게 뻗은 눈썹 아래에 박힌 가을하늘보다 더 깊은 푸른색의 눈동자까지, 신화 속에서 막 튀어나온 것 같다. 출발하기 전에 요시피아나에게서 ‘리크비엘’에 관한 설명을 들은 기억이 있다. 그때 요시피아나는 피식 웃으며 ‘누구보다 천사 같은 모습’이라고 간단히 정리해 말해 주었다. 지금 루피아는 그때 요시피아나의 말을 십분 이해하고도 남을 심정이었다. ‘어쩌면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는 건지…….’ 하지만 도저히 의중(意中)을 알 수가 없다. 비록 처음 만나는 것이지만, 리크비엘의 입장이라면 보는 즉시 그녀를 죽여 버린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차라리 마주친 것이 에우로카엘이었을 경우가 지금보다는 살 수 있는 확률이 높을 것이다. 이제 자신은 어떻게 될까? 죽게 될까? 하지만 죽일 것이라면 아까 굳이 그녀를 숨길 이유는 없을 텐데- 그때, 그녀의 턱이 번쩍 들렸다. “……확실한 인간, 이로군.” 어느새 리크비엘은 그녀 곁으로 바짝 다가와 있었다. 루피아는 인상을 찡그렸다. 리크비엘의 말에는 ‘혐오스럽다’라는 투가 가득했다. 울컥울컥. “그럼, 내가 인간 말고 다른 생물로 보이시나 보죠?” 어차피 죽게 될 거라면, 할 말은 다 하고 죽자! 거의 자포자기 하는 심정으로 루피아는 톡 쏘았다. “이런 고약한 썩은 냄새를 풍기는 것은 인간과 마족밖에 없지.” 리크비엘이 비아냥거렸다. 루피아는 한 마디 더 하려다 억지로 말을 눌러 삼켰다. 결국 약한 것은 자신이므로 지게 될 것이 뻔했다. “그렇게 인간을 싫어하면서 나를 살려둔 이유가 뭐야?!” 리크비엘은 루피아를 흘긋 일별하며 인상을 찡그렸다. 인간은 냄새나고 더럽다, 라고 생각하며 그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에우로카엘이 아니었다면 저런 인간, 눈에 뜨이는 즉시 죽여 버렸을 것이다. 이렇게 곁에 두는 일 따위 절대 없었을 터다. 에우로카엘을 존경하는 그이지만, 로아이나를 곁에 두는 일이나 이런 인간 따위에 신경을 쓰는 점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특히, 로아이나를 곁에 두는 것은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내고 있었다. 리크비엘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 분은 네가 죽지 않길 바라신다.” “그 분……, 이라면.” “돌아오실 때까지 이곳에 있어라.” ========================================= 리크비엘 : 인간이 싫어. 루피아 : ...왜 만날 나는 납치되고, 감금되고, 넘어지고, 쫓겨야 돼? 세키라 : 그러고보니 그러네?[웃음] 리크비엘 : 마족이 싫어. 세키라 : 말을 너무 해서 그런지 얼굴이 화끈거려; 무리했나...; 즐독하세요^^ 메일 : donghee425@hanmail.net 리플 : 요 아래~ 12시 이전에 올리고 싶었는데ㅠ 1시간20분을 초과;; 홈플 가셔서, 글 남기고 가 주시면♡....[..] ....←소심 제 목: 공녀(貢女) : 제50화 [뒤집기](5) 2004/09/18 15:38:31 1248 0 네이에르 (포인트 : 828점) #. 50화 ‘뒤집기!’ * * * * * * * * * * * * * * * 시선. 굳이 둘러보지 않아도, 온몸으로 시선이 느껴진다. 한 걸음 한 걸음 떼어놓을 때마다, 시선은 그들을 놓치지 않고 진득하게 뒤를 따랐다. 에리나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신분상, 많은 사람들의 시선 아래 노출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지만 지금은 절로 몸이 뻣뻣해질 정도였다. 그러나 긴장한 그녀와는 달리 네 마족은 그 쏟아지는 시선의 중심에서 너무나도 당당하게 몸을 쭉 펴고 있다. 마계는 힘의 논리로 지배되는 세계이니만큼 패자는 승자에게 복종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패자를 비난하지도 않는다. 승자가 있으면 당연히 패자도 있게 마련이고, 패자에게는 언제든지 승자의 자리를 넘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있는 것이다. 단 한 번도 없었던 경우이기는 하지만 그 자리가 왕(王)의 자리라고 해도 법칙은 다르게 적용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는 것이겠지만.’ 그러므로 왕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서는 지금 저 위에 있는 딜렌에게서 패배를 얻어내면 된다, 라는 것이다. 쏟아지는 시선은 다양한 말을 품고 있었다. 그가 다시 왕의 자리에 오를까? 어째서 그는 딜렌에게 졌던 것일까? 그동안 그는 왜 중간계에 머물렀을까? 호기심과, 의문, …. 에리나는 시선을 위로 올려 이디스를 흘끔 쳐다봤다. 그는, 완벽한 포커페이스에 긴장한 기색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말 그대로 ‘되찾으러’ 가는 발걸음인 것이다. 문득 그녀는 ‘딜렌’의 얼굴이 궁금해졌다. 루피아에게 전해들은 말로는, 예쁘장한 얼굴에 괴상한 성격을 가진 빨간 머리 남자애라고 했다. 그, 마왕 이디스의 ‘동생’… “생각보다 잘 버티는걸. 검(劍)의 힘인가. 서서히 힘을 소화해내고 있는 모양이야.” 로이드윈이 말했다. 확실히, 에리나는 생각했다. 아직 검을 다룰 수는 없지만 검을 다루기 좋은 상태로 몸이 변화해나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과연 편법이야, 라고 그녀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편법이라도, 그래도- 내 힘이다. “아직 멀었다.” 유리아덴이 잘라 말했다. “그저 검의 힘을 다루는 것이라고 해도 검을 다루는 개인의 능력에 따라서 많은 차이가 나. 네가 어떻게 검을 사용해 보일지 기대되는군.” 로이드윈의 말을 들으며, 에리나는 검을 꼭 감싸 쥐었다. 바짝 조였던 긴장이 조금씩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주변을 돌아다보았다. 마왕성은 꽤나 오랜만이었지만, 오랜만이라기보다는 처음 오는 곳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분위기가 많이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한층 더 어둡고, 한층 더 서늘했다. ‘그 애들은 잘 해내고 있을까. 아니, 반드시, 반드시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하지만, 왠지 모르게 죄를 지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잘못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에리나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그녀 자신은, 유리아덴과 계약을 한 순간부터 공녀로서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죠?” 에리나는 유리아덴에게 물었다. 마왕성으로 들어온 후부터는, 끈질기게 따라붙던 시선들이 많이 줄어들었다.(없어졌다는 뜻이 아니다) “너도 본 적이 있을 걸? 너희들이 마계로 와서 가장 처음 본 곳이다.” 대답은 아로데에게서 튀어나왔다. 유리아덴은 입을 다물고 고개만 끄덕였다. “제일 넓고 크니까 가장 자주 쓰이거든. 골치 아픈 일이 생겼을 때나- 뭐, 여러 가지 일들을 하지.” 그렇게 말을 하며 아로데는 뭔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그곳은, 20년 전 카디스와 카마프가 이디스에게 죽음을 맞은 장소인 것이다. 그때 절규하던 힘없고 어렸던 그는, 지금 ‘왕’의 자리에 올라 그들을 기다리는 입장이 되었다. 그는 피식 웃었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겠지. 최고위 마족들과 함께.”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어느새 홀(hall)의 정문 앞까지 도착했다. 이디스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홀의 문을 활짝 열었다. 에리나는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딜렌은, 체구로 보면 대략 16세에서 18세쯤으로 보였다. 굳이 비교하자면 에드윈드의 또래 정도 되는 것 같았다. 루피아의 말대로 예쁘장한 하얀 얼굴에 깨끗한 붉은 머리칼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예전, 에리나가 처음 마계로 왔을 때 이디스가 앉아 있었던 그 자리는, 지금 저 사람의 차지이다. 하지만 에리나는 그 그림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그는 왕좌에 어울리지 않았다. ‘왕좌에 앉아있다, 라는 느낌이 아니라 ’파묻혔다‘라는 느낌.’ 아아, 정말이다. 형님은 정말 살아있었다! 딜렌은 진심으로 환하게 웃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형님.” 이디스는 한 발 앞으로 나섰다. * * * * * * * * * * * * * * *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재판’이라니요! 그것도 에우로카엘님을?” 장로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이 커다래진 눈을 즐거운 마음으로 구경하던 시즈니엘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장로는 처음 그를 보았을 때보다 더 하얗게 질려서, 입을 떡- 하니 벌리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아무리 보기 싫은 면상이라도 말이다. “‘재판’을 여는 것은 세라핌의 권리 안에 당연히 들어가 있는 줄 아는데?” 장로는 하얘진 얼굴로 떠듬거렸다. 그는 지금 시즈니엘이 어떻게 그의 앞에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느라 머릿속이 핑핑 도는 것 같았다. 리크비엘에게 확인한 바로, 리크비엘은 분명히 자신이 지키고 있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데, 그런데! 어떻게 시즈니엘이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이며, 그것으로도 모자라 에우로카엘을 ‘재판’하겠다고 하는 것인지! 시즈니엘이 이렇게 잘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다른 12대천사들도 행동이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그들의 행동을 막을 명분도, 권한도 전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 하지만 그것은 이제껏 전례가 없던 일이고… 또, 에우로카엘님 역시 세라핌…….” “하지만 서열은 이쪽이 위다.” 어쨌든 서열을 중요한 것이다. 신분과 능력이 모든 것을 가르는 이 사회에서는, 말이다. 마계가 오직 능력만을 중요시한다면, 천계는 태어난 신분을 따지는 것이다. 신분에 의해 능력도 결정지어진다. 세라핌 사이에서도 서열은 분명하다. 서열 이야기까지 나오자 장로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장로는 포기하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장로의 얼굴을 보던 시즈니엘은 문득 울컥 화가 치솟았다. 물론 30년 동안 무책임하게 일손을 놓은 것은 반성하고 있지만, 그 대가 치고는 지나치지 않은가 말이다. 이 정도까지 완벽하게 넘어가 버리다니.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그 마족 녀석 말대로 배후가 있지 않고는 힘들어…….’ 정말, 정말 인정하기 싫지만. 시즈니엘은 인상을 썼다. 그렇다면 그 ‘배후’에는 과연 누가 있는 것일까? 천계를 이 정도까지 지배할 힘을 에우로카엘에게 실어줄 수 있을 만한 자라면, 대체 누가? “세라핌 사이의 ‘재판’이라니, 이것은…….” “무슨 의견이든, 기각한다. ‘재판’은 금일로부터… 라고 할 것도 없이, 바로 내일이다. 너는 이 소식을 전역에 전하라.” “시즈니엘님!” 미카엘이 ‘아직 증거가 불충분하니까 좀 늦게 잡아’라고 말한 것도 죄다 까먹고 대충 말해버린 시즈니엘은 생각에 몰두했다. 하지만 쉽게 떠오를 리가 없었다. 뭐 힌트라도 있어야 추측이라는 것을 해보기나 하지, 그는 전혀 아는 것이 없다. 그는 에우로카엘이나 리크비엘에 관해 그리 자세하게 알지 못한다. 그리고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그럴 만한 존재는 과연… 아니, 있기나 할까? ‘신’ 외에 말이다- 감히 천계의 배후의 배후에 존재할 만한 자라니. ‘…불경한 생각이었군.’ 그는 옆에서 알짱거리며 귀찮게 해대는 장로를 힐끔 일별했다. 그리곤 생각을 그만두고 저벅저벅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혼자 생각해봤자 답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요시피아나가 필요해.’ 돌아가면서, 그는 재판을 바로 내일로 확정해 버린 것을 깨닫고 그제야 식은땀을 흘렸다. 돌아가면, 미카엘에게 한 소리 들을 각오를 하면서. * * * * * * * * * * * * * * * “이제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나?” 질리지도 않느냐는 듯 리크비엘이 조롱했다. “당신 같으면 포기하겠어? 제기랄- 이쯤하고 내보내 줘! 걱정한단 말이야!” 루피아는 바락 소리를 지르며 대들었다. 리크비엘은 거슬린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리긴 했지만 별다른 제재를 가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것을 보고 그녀는 몰래 슬쩍 웃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에우로카엘이 너무나 고맙기 그지없다. 그녀가 이처럼 간 크게 구는 것이 허용되는 것은, 바로 에우로카엘이 그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어째서 그런 것인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러니 감사할 밖에. 게다가 리크비엘이 에우로카엘의 뜻에 거스르는 짓은 ‘절대’ 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녀는 이제껏 몇 번이나 확인할 수 있었다. “걱정? 누가 걱정을 한다는 말이지?” “그걸 질문이라고 해? 당연히 내 친구-… 흡!” 아차! 그녀는 혀를 깨물고만 싶었다. “-친구라. 걱정한단 말이지. 그럼, 근처에 있겠군?” 리크비엘의 입술이 삐죽하게 올라갔다. 제기랄- 이런 실수를 하다니, 바보. “무슨 속셈으로 여기까지 왔는지는 뻔하군, 인간. 이쪽에서 붙잡아두고 있는 인간들 때문이냐?” 어차피 ‘아니다’라고 해 봐야 별 소용없음을 안 그녀는 입을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리크비엘의 비웃음이 한층 더 진해졌다. 에우로카엘의 뜻으로 마계에서 굳이 데려오기는 했지만 어디에도 써먹을 곳이라곤 없는 그녀들은 리크비엘에게 있어 단순한 애물단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 일이 끝나면 대충 처리해버릴 셈이었던 것이다. “분명 쓸모가 없긴 하지만,” “그럼 풀어 줘!” “그럴 수는 없다. 에우로카엘님의 뜻이니까.” 리크비엘은 그렇게 말하며 문을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그러자 본래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시종으로 보이는 아이 하나가 재빠르게 튀어나왔다. 등 뒤에 앙증맞은 날개 한 쌍을 가진 그 아이는, 아이답지 않게 표정이 없는 서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리크비엘이 그 아이에게 다가가 뭐라고 지시를 내리자 아이는 또다시 잽싸게 뛰어나갔다. 뭐라고 말을 했는지는 뻔하다. 분명, 세키라들을 잡으라고 했겠지… 그게 아니면 공녀들에 대한 경비를 강화하라고 했거나. 루피아는 무작정 시종 아이가 뛰어나간 곳으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제까지 몇 번이나 그랬던 것처럼 리크비엘은 너무나도 쉽게 그녀를 막았다. 그에게 잡힌 팔을 빼내려고 발버둥을 치면서, 루피아는 이를 악물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미안해, 세키라! 얼른 도망쳐! 얼른….’ “어차피 쓸모도 없다고 했으면서 공녀들을 데려온 이유가 대체 뭐야!” “모른다. 그것은 에우로카엘님의 뜻이셨다.” 리크비엘은 가볍게 그녀를 내쳤다. 바닥에 쓰러져 미끄러진 그녀는 이를 으득 갈며 소리쳤다. “그 ‘뜻’이라는 것은 대체 뭔데 그래!” “네게 가르쳐 줘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그 분은 누구보다 완벽한 분이시다. 너 같은 하찮은 인간 따위가 알 수 있는 것이 못 돼.” 추종자 나셨군. 루피아는 바닥에 엎어진 몸을 추스르며, 넘어지면서 긁힌 상처를 대충 닦았다. 로아이나는 그렇다 치고, 이 녀석은 또 무엇 때문에 그녀에게 그렇게 목을 맬까? ‘……에우로카엘이 「완벽한 분」이라고」…? 이 녀석, 에우로카엘이 마족과 혼혈이라는 것을 모르는 걸까? 아니, 타락 천사인 로헤델의 후인(後人)이라는 것만 해도 완벽하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텐데?’ 그렇다면- 모르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마족과 혼혈이라는 것이 알려진 상태에서 그녀가 이 정도의 지위까지 올라왔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아무리 능력이 비상하다고 해도 말이다. 게다가 오늘 처음 만난 그녀도 이렇게 절절하게 느끼리만치 마족과 인간을 경멸하는 리크비엘이 ‘추종자’라니,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이잖은가. 정말 모르는 것일까? 마족과 천족의 혼혈이라는 것을?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저는, 정말 글을 빨리빨리 쓰는 재주라고는 쥐어짜도 없는가 봅니다ㅠ 하루 종일 앉아있어도 안 풀리는 때에는 많아야 한 장![;] 답답해요ㅠ 중간고사 대비 기간 들어가기 전에 얼른 끝내야 하는데.. 반드시 이달 내로 마무리 지을 것을 다시 한 번, 결심! 하면서, 즐독하세요. 메일 : donghee425@hanmail.net←요즘 메일이 안 와서ㅠ; 리플 : 요 아래에 달아주세요^ ^ 덧. 공녀&신혼일기 카페의 새로운 세대가 되어주실(←) 여러분을 모집(;;)합니다♡ http://cafe.daum.net/fantastiknovel 으로 오셔서 꼬~옥 가입해주세요^ ^(..네, 이건 광고입니다!;) 제 목: 공녀(貢女) : 제50화 [뒤집기](6) 2004/09/21 00:55:55 1122 0 네이에르 (포인트 : 828점) #. 50화 ‘뒤집기!’ * * * * * * * * * * * * * * * 어떻게 나올까? 믿어줄까? 조마조마한 속내를 감추면서 세키라는 몰래 옅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긴장이 되어서 손가락 끝이 차가워졌다. 내색하지 않으려 태연한 척 눈을 감았지만 사실은 가슴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내 말이 잘못 전해졌으면 어떻게 하지. 제대로 알아줄까. 긴장된 침묵이 계속되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세키라의 입술은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두근두근. “전 당연히 같이 갈 거예요.” 가장 먼저 나선 것은 역시 델리드였다. 그녀는 친근한 웃음을 보내오면서 세키라의 옆으로 걸어가 섰다. 페넬로페, 조셀린, 로위나 등도 함께 서자, 세키라는 마음이 한층 든든해졌다. 그녀는 눈을 뜨고 아직 망설이고 있는 공녀들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다른 말을 해도 도움이 안 될 것 같아, 세키라는 초조한 마음을 삼키고 입을 열지 않았다. 잠시간의 침묵 후, 게르노시크의 공녀가 말했다. “잘못 돼도 책임을 지는 것은 자기 자신이 된다는 거죠.” 세키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게르노시크의 공녀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잠시 후 선언했다. “나도 함께 가겠어요.” “……!” 의외의 반응이라 모두의 시선이 쏠리자, 그녀는 생긋, 하고 예쁘게 웃었다. “사실은 답답했어요. 무엇이든 스스로 책임질 일은 없이 부모님이 무엇이든 다 해결해 주니까, 나는 아무 것도 책임을 질 필요가 없죠. 그건 물론 편한 일이지만, 나 혼자서는 아무 것도 못한다는 말과 같으니까요.” “…….” “마계에 가고 나서 깨달았어요. 나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고 난 뒤에야 내가 어떻게 자라왔는지, 생각해볼 수 있었던 거예요. 나는 한 권력 한다는 집안에서 태어나 귀하게 자랐고, 이런 일이 없었다면 예쁜 옷과 보석으로 치장되어 전도유망한 청년과 결혼을 하게 되었겠죠. 물론, 귀족 여식의 역할이란 그런 것이니까 싫다는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나는 귀한 몸이니까 아무 것도 할 필요 없어’는, ‘아무 것도 못 한다’와 같은 뜻이라는 것은 무척 답답한 일이었어요.” 그녀는 계속했다. “내가 한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다는 것은 내 스스로 뭔가를 했다, 라는 것이잖아요. 나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그에 책임을 지는 것이라면 적어도…… 마계에 가게 되었을 때처럼 억울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게르노시크의 그녀는 세키라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아직 다른 사람들은 고민을 하는 듯 머뭇거렸다. 하지만 적어도 처음보다는 상황이 고무적인 것은 확실했다. 모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다시 어물어물 시간만 흘렀다.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던 세리엘이 문득 쓰러진 철문 너머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떻게 할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엇이든 빨리 결정하도록.” “네?” “……저쪽에서 누가 오는군. 보나마나 리크비엘이 보냈겠지.” 세리엘은 눈살을 찌푸렸다. 인간들끼리의 일이라 그는 끼어들지 않았지만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기 참 답답한 상황이었다. 무엇이든 딱 부러지는 것을 좋아하는 그는, 아무 말도 않고 선택을 기다리는 세키라 역시 답답하게 보였다. “그냥 가는 것이 어떤가? 이대로는 모두 죽게 돼.” “하지만…….” “-솔직히 말해, 나는 답답하게 느껴지는군. 믿지 않는다면 데리고 가지 않으면 돼. 이대로 놔두면 될 것을, 뭐 때문에 그렇게 집착하나? 너는 이미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세리엘은 그렇게 말한 뒤, 뒤돌아 철문 앞으로 척척 걸어 나갔다. 그는 그가 쓰러뜨린 천족을 옆으로 휙 던져버리고, 그 앞에 서서 허공으로 팔을 들어올렸다. 그의 등 뒤에서- 보기에도 눈부신, 새하얀 날개가 돋아났다. 파드득, 하는 새 날갯짓과 비슷한 소리를 내며 돋아난 날개는 무려 여섯 쌍이나 되었다. 공녀들의 눈이 둥그렇게 변했다. “처, 천사님……?” “하지만 세리엘님… 아직은 조금만 더…….” “그렇다면 빨리 하도록 해. 시간이 없다.” 공녀들의 눈이 세리엘에게로, 그 다음 세키라에게로 돌아갔다. 그녀들은 모두 망설이고 있었다. 세키라는 두 손을 꼭 모아 쥐었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그녀도 느끼고 있다. 게다가 루피아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지도 못하는 상태가 아닌가. 하지만 더 이상 설득하고 싶지는 않다. 그녀들이 스스로 움직여 주었으면 했다. 무리일까. 그건 도저히 무리일까? 그때, 한 명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는 아직 망설이는 듯한 발걸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그녀를 시작으로 한 사람, 한 사람씩 세키라에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다, 다행이다. 아아, 정말… 다행이야…….’ 세키라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한 명도 빠짐없이 그녀 쪽으로 와 서자, 세리엘이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이제 끝났나? 그럼 가자.” “아, 잠깐! 루피아는요?”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잖나! 어떻게 하자는 거냐? ……생각 같아서는 찾으러 가고 싶지만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으니까. 네 말대로 에우로카엘이 그 애를 건드리지 않길 바라는 수밖에.” ‘루피아’의 이름이 나오자 겨우 안정되었던 공녀들이 술렁거렸다. 루피아는, 아직도 공녀들 사이에서 평판이 안 좋았던 것이다. 가장 불안정한 때에 독설을 퍼부었던 일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것을 눈치 챈 세리엘의 눈 꼬리가 올라갔다. 세키라가 얼른 말했다. “여러분들을 데리러 오자고 말한 것은 바로 루피아예요. 그 애를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그때에는… 그렇게 말을 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는 것, 사실은 알고 계시잖아요?” “…….” 공녀들이 아무런 말이 없자, 세키라는 그만두었다. 세리엘은, 아름다운 여섯 쌍의 날개를 펴고 세키라의 앞으로 다가와 섰다. 그가 눈을 감고 조용히 무엇이라 읊조리자, 날개에서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환한 빛 속에서 세키라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두 손을 마주 잡았다. ‘무사해 줘, 루피아. 제발…… 오르가프여, 그 애를 지켜주세요!’ 만약 그 애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녀는 평생 자신을 용서할 수 없게 될 것이다. * * * * * * * * * * * * * * * 챙- 그랑! 대리석 바닥에 쇳덩이가 부딪치며 만들어낸 날카로운 음색이 공기를 찢었다. 좌중은 숨을 죽였다. 모두 이 의외의 결과에 할 말을 잊어 버렸다. 에리나도, 유리아덴도, 카른도, 아로데도, 심지어 로이드윈조차. 에리나는 손끝이 떨려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달려든 것은 거의 동시였다. 순식간에 검은 호선(弧線)이 허공에 그어진다 싶더니, 두 자루의 검이 부딪쳤다. 딜렌이 매섭게 공격해 들어가면, 이디스가 부드럽게 피해 나가다 한 번씩 공격하는 형식이었다. 딜렌의 검이 이디스의 목을 노리고 찔러 들어오고, 이디스는 좁은 움직임으로 가볍게 피한 뒤 빠르게 접근해 딜렌의 배를 긋는다. 이런 식으로 몇 번의 부딪침이 오가자, 싸움에 대해 많은 것을 모르는 에리나가 보아도 두 사람의 실력 차이가 명확하게 보였다. 다시 한 번 더 딜렌은 곧게 검을 눕혀, 전력을 다해 쏘아 들어갔다. 이번에는 이디스도 피하지 않고 곧장 검을 받아 옆으로 쳐 내렸다. 그리고 그대로 힘을 주어 검을 비틀자, 딜렌의 손에서 검이 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딜렌은 검이 손에서 떨어지자, 아예 포기한 것처럼 편한 자세로 서서 이디스를 마주 바라보았다. 이디스가 팔을 들어, 딜렌의 목에 가져다 댔다. 딜렌의 황적색 눈동자는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것처럼 편안해 보였다. “어서…… 죽이세요, 형님.” 어쩌면 그는 이 순간을 기다려 온 것인지도 霽0渼鳴?생각했다. 그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고 참을 수도 없었다. 아직도 손끝이 몸을 관통하던 끔찍한 감촉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20년 전의 그 일이 있었던 때에조차, 자신은 형을 미워하지 못했다. 부모님을 진심으로 사랑했는데, 정말 사랑했는데……. ‘미안해요, 어머니. 아버지. 카른, 미안…….’ 그가 짊어지고 가기에는 너무 무거운 짐이다. 눈앞을 붉게 물들였던 20년 전의 그 일도, 자신이 형을 죽일 뻔 했던 끔찍한 손끝의 감촉도, 그리고 스스로에의 혐오와, ‘왕’의 무게도- 그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다. 마음의 정리를 끝낸 듯, 편안히 눈을 감은 이복동생을 내려다보는 이디스의 눈은 여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일말의 자비도, 동정도 찾아볼 수 없는 눈동자로 그는 가만히 딜렌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지켜봤다. 목까지 드리웠던 검을, 그는 그대로 들었다 내리쳤다. “아- 안돼! 딜렌-……!!!” 카른의 외침이 중간에 뚝 끊겼다. 대신 카른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눈만 깜박였다.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지르며 바닥에 떨어진 것은 이디스의 검이었다. 그의 마력이 엉켜 형성된 검은 칼날은, 그의 발밑에 볼품없이 떨어져 버린 것이다. 다들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해하고 있자 이디스의 입술 끝이 비스듬히 올라갔다. “형님…… 이건……?” 모두의 시선이 바닥에 내팽개쳐진 이디스의 검에 집중되었다. 분명 딜렌의 몸에는 방금 전의 일격으로 인한 상처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검은 끈적끈적하게 엉겨 붙은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선명하고 더운 핏물이. 모두의 의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디스는 손바닥을 폈다. 그의 팔에서부터 스멀스멀 피어오른 마기(魔氣)가 손바닥 한가운데서 모여, 팔뚝 길이만한 길이의 단검을 만들어냈다. 그는 그대로 몸을 뒤로 틀어, 찌르듯 빠르게 허공을 그었다. “감히! 간도 크군! 그리 악취를 풍기고 있는 주제에 모를 것이라 여겼느냐?” 뚝. 투둑. 옅은 회색 바닥에 붉은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허공에 나타난 것은 어렴풋한 여인의 그림자였다. 이디스가 그은 상처의 핏물만이 진실일 뿐, 나머지는 모두 물을 타놓은 것처럼 흐릿했다. 얼굴까지는 알아볼 수 없는 그림자는,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마왕성 내부까지 침입한 것을 몰랐다니? 이거 원, 마계도 다 됐나보군.” 피식, 하고 로이드윈이 이죽거렸다. 옆에서 아로데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딜렌은 얼이 빠진 얼굴로 무릎을 꿇고 그의 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무릎 앞에는 피투성이의 칼날이 떨어져 있다. 피투성이, 의…-. 마치 시험을 하려는 듯이 이디스는 칼날을 뚫어져라 내려다보는 딜렌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잠시 후, 딜렌이 천천히 칼날로 손을 뻗었다. 비릿한 핏물 냄새로 속이 뒤집어질 것만 같은 칼날로. 마침내 딜렌이 칼날을 손에 집어 들었는데도, 이디스는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딜렌은 고개를 들어 카른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푸욱! “……!!” “딜렌!!!” 그대로 자신의 가슴에 내리꽂았다. 놀란 이디스가 가장 먼저 딜렌에게 다가가 가슴에 꽂힌 칼날을 없애 버렸다. 하지만 이미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의 형태로 깊게 가슴에 꽂힌 상처까지 없앨 수는 없었다. 울컥, 하고 딜렌의 입에서 벌건 핏덩어리가 솟구쳐 나왔다. “무슨 짓이냐!!” “나, 나는 죽어야 해! 죽어야 한단 말입니다, 형님!” 이디스의 손에 죽을 수가 없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수밖에 더 있겠는가. 게다가, 다시 천계의 꼭두각시가 될 가능성이 있는 이상, 이것이 최선이었다. 불행히도, 조준이 빗나가 급소를 찌르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딜렌은 입술을 깨물었다. “나를 용서할 수가 없어… 도저히, 도저히 난, 숨이 막히고, 머리가 아파서…… 흐으, 사실은, 사실은 미워하지 못했어요, 형님… 난 당신을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었어요! 차라리 나를 함께 죽여주셨더라면, 그랬다면 좋았을 텐데!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당신 손에 돌아가신 부모님을 탓하고 마는 나를 발견해서, 나는, 미워하고 싶었어, 미워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무엇보다, 가장 사랑하는 형님을 내가 이 손으로, 이 손으로 죽이려 했다는 사실이- 그때의 그, 감촉이…….” 두렵다. 두렵다. 그 소름 끼치는 감촉과, 그때의 절망. 또, 그가 자신을 미워할 것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두려웠다. “바보야! 멍청아! 그렇다고, 그렇다고- 이, 이! 이 천하에 둘도 없을 병신이!!” 카른이 버럭 소리쳤다. 그때 그의 손이, 자신의 몸이 ‘멋대로’ 움직여 이디스의 가슴을 관통해 버렸다. 딜렌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주륵주륵 흘러내렸다. 가슴을 움켜잡고 몸을 웅크린 채, 그는 부들부들 떨었다. “-로윈! 당장 라우데스를 불러와라!” 마계에서 유일한 치유능력술사는 바로 신관뿐이다. 그것도 라우데스를 불러오라는 말은, 반드시 살리라는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이디스의 말에 로윈이 대답했다. “살리실 겁니까?”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단호한 그의 대답에 로이드윈은 시원스레 예! 하고 대답하고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바로 유리아덴이 딜렌의 몸을 붙잡고 지혈 등 치료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특기를 생각해보면 그가 의술을 익힌 것은 그리 신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마계에도 의술(醫術)을 공부하는 자는 있었다. 신관이 소수이니만큼 그들에게만 의존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다만 마족의 경우에는 자연치유능력이 워낙 뛰어나기 때문에 깊은 공부는 필요 없었다. “베인 상처가 깊지만, 급소는 빗나갔기 때문에 목숨에 지장은 없습니다.” 유리아덴의 진단에 가장 안심한 것은 카른이었다. 카른은 딜렌의 손을 꼭 붙잡고, 떨리는 숨을 뱉으며 주저앉았다. “어째서 죽이지 않으셨는지 물어도 될까요?” 히죽, 웃으면서 아로데가 말했다. 이디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비록 대답을 해주지는 않았지만, 아로데는 피식피식 웃었다. 그는 변했다. 분명, 이렇게 보고만 있어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변했다. 하지만 그것은 꽤 좋은 쪽으로의 변화라고 그는 생각했다. 딜렌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차후 생각하도록 하기로 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닌 것이다. 이디스는 너무 자연스럽게 왕좌에 올라가 앉았다. 그 모습은 마치, 원래 자리로 돌아간 것처럼 어울리는 모습이라고 에리나는 생각했다. ‘끝…… 일까, 일단은.’ 그가 왕좌에 앉자, 지켜보고 있던 최고위 마족들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그들은, 천천히 그들의 왕(王)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존경과 복종을 의미하는 것이다. 정돈된 몸짓과 동작으로 하나같이 움직이는 그 모습은, 황실 기사단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때, 라우데스를 데리러 갔던 로이드윈이 나타났다. 그는 심각하게 굳은 얼굴로, 딱딱한 태도로 이디스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교황 ‘라우데스’가- 죽었습니다.” -------------------------------------- 모처럼 일찍 쓰자 마음 먹은 거니까 오늘 안에 올리고 말 테다! 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썼건만; 결국 또 50분을 넘기고 마네요ㅠ 사실 좀 짧게 끊으면 12시 이내로 올릴 수도 있었지만; ...딜렌 자살시도(?) 장면은 짧게 끊을래야 끊을 건덕지;가 없더라구요- -; 내일, 수학빡지 2장? 아니, 4장에, 수학시험에, 영어시험, 일어시험까지 겹쳤건만ㅠ 하~나도 손대지 않고; 새벽을 넘기고 있습니다ㅠ 저 이제 어떡해요ㅠ ..음, 그러고보니 '뒤집기'는 벌써 여섯 개째.; ...길군요- -; 즐독하세요. 메일 : donghee425@hanmail.net 리플 : 많이 주시면 많이 주실수록 행복♡ 카페 : http://cafe.daum.net/fantastiknovel ↑ 많이 가입해주세요♡ 새로운 세대(;)를 모집합니다아- 제 목: 공녀(貢女) : 제51화 [배후와 동기와 과거 사이](1) 2004/09/23 02:42:33 894 0 네이에르 (포인트 : 828점) #. 51화 ‘배후와 동기와 과거 사이’ * * * * * * * * * * * * * * * 그야 물론 나는 세키라의 결정을 이해하고 있으며 또한, 분명 나였더라도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그녀는 아직 내게 미안해하고 있다) 하지만 천계의 가장 위험한 곳에, 그것도 최고 위험인물과 단 둘이 남겨지게 된 나는 도망칠 곳도 없는 신세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말 그대로 덜렁 남겨진 것이다. 불행히도 나는 꽤나 둔감한 편이라(본인도 인정하는 바이다) 내가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처했는지도 모르고 날뛰었다. 그때는 오직 에우로카엘의 인정(人情)에 기대는 형편이었으면서도, 그녀의 추종자인 리크비엘 앞에서 성질을 부려댔으니. 리크비엘이 나를 죽이지 않은 것은, ……기적이려나. ======================루피아의 자서전================ 주륵, 상처에서 피가 흘러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얼굴 바로 옆에서 가느다란 얼음이 섬뜩한 예기(銳氣)를 줄기줄기 흘리고 있다. 등골이 오싹하여 루피아는 침을 꼴깍 삼켰다. 다행히도 뺨의 통증은 별 것 아니었다. 하지만 숨이 막힐 정도로 방 안을 꽉 채운 살기(殺氣)는, 절로 몸이 떨릴 정도였다. 루피아는 방어적으로 몸을 움츠리면서, 벽에 바짝 다가가 붙었다. 벽을 파고들어간 얼음은 그 주변까지 허옇게 얼려버릴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곁눈으로 슬쩍 보고 그녀는, 허투루 말을 내뱉은 것을 후회했다. 현재 처한 입장을 잊고 너무 무작정 말을 해버린 것이다. 그것도 가장 위험한 종류의 말을. 리크비엘은 죽여 버리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 있다는 듯한 얼굴로, 거의 쏘아 죽일 듯이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꽉 말아 쥔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에우로카엘을 생각하며 있는 힘껏 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의 목이 아직까지 붙어있는 것은 오로지 에우로카엘이 그녀에게 가지고 있는 호감 덕분이었다. “그 분의 은혜에 감사드려라. 감히 네깟 것이, 그따위 말을 하다니!” “역시…… 믿지 않는군요.” 하지만 이미 입 밖으로 버려진 말을 어찌하겠는가.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 이미 엎질러진 물이요, 시작되어버린 판인 것이다. “그런 웃기지도 않는 말을 믿으라는 말이냐? 네 말대로라면 그 분이, 누구보다 완벽한 ‘천족’이신 그 분이, 사실은 더러운 마족과 피가 섞인 반쪽이고, 배신자의 후계(後繼)라는 소리라는 것인데, 어디 가당키나 한 말이냐?” “어째서 가당치도 않다는 것인데? 당신,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말이야? 그녀가 당신에게는 아무 것도 숨기고 있지 않다고 자신할 수 있어?” “완벽히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천한 반쪽 따위는 감히 ‘13번째 아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얻을 수는 없음은 물론, 지금의 지위까지 올라오는 것도 불가능하다.” 루피아는 입을 다물었다. 그야 그녀 역시 그 점을 가장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도 ‘반쪽짜리’에 ‘이름만 13번째 아이’였던 그녀를 도와준 배후 세력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확실하지 않은 이상 말을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두 눈으로 똑똑하게 보았다. 로헤델의 유적지에서 로아이나와 에우로카엘이 만나던 장면을. 게다가 로아이나가 직접 인정한 일이지 않은가. “……단지 완벽한 천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따르는 거냐?” 루피아가 대답을 하지 않고 다른 질문으로 말을 돌리자, 리크비엘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루피아에게 다가가 눈높이를 맞춘 뒤,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올려 빤히 쳐다보았다. “내 눈을 자세히 들여다봐라.” “뭐?” 턱에 걸쳐진 손가락을 치우기 위해 계속 몸부림을 치던 루피아는, 리크비엘의 말에 무심코 그의 눈을 쳐다봤다. 마주 봤다, 라고 하기보다는 단순히 그의 눈동자를 쳐다봤다, 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그의 눈동자를 본 순간, 그녀는 저도 모르게 아, 하고 소리를 내었다. 깨끗한 푸른색의 눈동자. 하지만 가까이서 자세히 들여다 본 순간, 그녀는 단순히 푸른색 눈동자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 안에는, 분명 그녀가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던 무늬가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기억을 더듬었다. 저런 것은 분명 흔치 않다. 게다가 근래 들어 저런 것을 본 기억은……. ‘……로아이나의 등에 새겨져 있던, 로헤델의 문양!’ 분명히, 살에 탄 자국으로 남겨졌던 그 끔찍한 화상이 그리는 문양과 같은 형태였다. 루피아는 꿀꺽, 침을 삼켰다. 이런 곳에- 이런 형태로 결정적인 증거가 당당하게 돌아다니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천족의 대표라고 할 수 있을 사람의 눈동자에, 이런 것이 그려져 있다니. “그 분이 내게 주신 것이다. 그 분의 사람이라는 증거이지. 나는 그 분이 내 앞에 나타나시던 날부터 지금까지, 그 분의 능력, 성품, 행동거지- 그 무엇 하나 모자란 것을 본 적이 없다. 그 완벽함은 존경할 만 하며, 반할 만 한 것이다.” 루피아는 긴장으로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가는 것을 느꼈다. “그 말…… 모두의 앞에서 할 수도 있겠지?” 그녀는 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리크비엘은 말할 것도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그녀는 요시피아나가 말해 주었던 ‘재판’을 떠올렸다. 로아이나의 것과, 에우로카엘의 사람임이 분명한 리크비엘이 가지고 있는 것. 리크비엘이 몸을 일으켰다. 때마침, 문 밖에서 시종 아이가 신호를 보내왔기 때문이었다. 시종은 다급하지만 공손하게 말했다. “에우로카엘님께서 재판에 회부(回附)되셨습니다.” * * * * * * * * * * * * * * * “죽다니? 바로 전까지도 멀쩡하던 이가 대체 왜-?” 아로데가 가장 먼저 정신을 가치고 소리쳤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마왕성으로 출발하기 직전까지, 그는 교황과 농담까지 나누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가 알기로 교황의 수명은 아직까지 많이 남아있었다. 비록 몸이 늙기는 하지만, 오히려 독에 대한 내성이 강하고 생활 자체에 싸울 일이 그리(사실, 전혀) 없기 때문에 라우데스 같은 경우 천수(天壽)를 다 누려야 마땅했다. “몰라. ……하지만 죽었다고.” 로이드윈 역시 납득이 안 간다는 얼굴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가 이 손으로 만져 본 라우데스는, 분명 산 자의 온기가 사라진 딱딱하고 차가운 고깃덩어리의 몸을 가지고 있었다. 여러 가지로 확인을 해 본 결과 라우데스는 죽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때 딜렌이 쿨럭 쿨럭, 하고 거친 기침을 하며 피를 토해냈다. 얼른 유리아덴이 달려가 상태를 살폈지만, 다행히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정도의 중상은 아닌 것으로 판명이 되었다.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있을 경우의 일이지만, 다행히 상처는 딜렌의 느린 치유 속도를 생각하더라도 3개월 정도라면 다 나을 수 있을 정도였다. 딜렌은 다른 곳으로 옮겨 제대로 치료를 받도록 하고, 이디스는 일단 라우데스가 있는 곳으로 가기로 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돌연사 따위를 했을 리가 없잖아!” 도저히 이유를 알 수가 없는 아로데는 소리치는 것처럼 크게 말했다. 그러나 ‘그럴 이유가 없다’라고 말을 하던 그도, 직접 라우데스의 시신 앞에 서자 할 말을 잃어버린 듯, 입을 열지 못했다. “정말…… 죽었다.” 유리아덴이 몇 번 라우데스의 시신을 훑고, 검사한 후 말했다. 그가 저렇게 확답을 할 정도라면 100% 사실이라고 해야 한다. 차갑게 식어 핏기가 가신 라우데스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이디스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그는 차분한 얼굴로 눈을 감은 라우데스를 보며 말했다. “이것으로 ‘신의 뜻’은 아무도 모르게 되어버렸군.” 어째서 ‘공녀가 마계에 바쳐져야 했는가’에 관한 진실을 아는 이는 오직 라우데스 한 사람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제 그가 죽었으니, 그것에 대해 가르쳐 줄 이는 오직 ‘신(神)’밖에 없게 되었다. 솔직히 교황이 죽었다는 사실 자체는 그다지 놀라울 것이 없었다. 다만 그가 아무런 이유 없이 돌연사해 버렸다는 것과, 그가 ‘신의 뜻’이 숨겨진 신탁을 받은 장본인이며 그 진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자라는 것이 그의 죽음을 의미 있게 만든 것이다. “이 시신을 어떻게 할 것이냐?” 아로데는 관 옆에서 울고 있는 사제들 중 하나에게 물었다. 사제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무덤에 묻겠다.’라고 대답했다. 지하 무덤에 묻혀지면, 그의 몸은 더더욱 클리오라께 다가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성직자는 모두 그들의 무덤자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간혹 묻지 않고 태우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아로데가 그렇게 물었던 것이다. 슬퍼하면서도, 사제들은 미리 준비해 온 일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볼 일은 끝났다고 생각한 그들은 그냥 돌아가려 했다. “잠깐만요. 잠시 뭐 찾을 것이 있는데…….” 에리나가 찾으려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교황이 만들었다던 인형이었다. 어쩐지 계속 마음에 걸리는 인형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것을 찾아내 가지고 가고 싶었다. “그래? 기다려 주지, 뭐. 뭘 찾는데?” “인형이에요. 교황께서 직접 만드셨다고 하셨는데, 그게 좀 계속 마음에 걸렸거든요. 그래서 가지고 가고 싶어서…… 손바닥 길이만한 크기예요.” 사제가 가지고 온 교황의 개인적 물품을 정리해 놓은 상자는 꽤 작은 편이었다. 깔끔하게 나무로 만들어진 상자의 안쪽에는 그가 생전 즐겨 입던 옷가지 몇 개와 생활용품 몇 가지, 그리고 인형 한 개가 곱게 정리되어 있었다. 사제로부터 상자를 넘겨받은 아로데가 가장 먼저 인형을 발견했다. “오~ 늙다리에게도 이런 섬세한 취미가 있었구만! ……가만?” 그대로 에리나에게 인형을 넘겨주려던 아로데가 다시 굳은 얼굴로 인형을 빼앗아 들었다. 인형을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던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것을 이디스에게 넘겼다. “……이것, 라우데스가 보여 줬나?” “-예. 물어보니 ‘기원’을 담아 만든 것이라고-….” 이디스는 손에 들린 인형을 다시 한 번 훑더니, 그대로 바닥에 내치려 부숴 버렸다. 그리고 그것에서 멈추지 않고 세게 발로 밟았다. 그랬더니 달칵, 하고 배 부분이 정중앙으로 갈라지더니 검은 연기 같은 것이 치직- 하고 올라왔다. 척 보기에도 썩 좋아 보이는 장면이 아니었다. “저, 저건 대체?” “-‘기원’을 담긴 담은 모양이군. 저건 ‘저주’의 인형이다.” 유리아덴이 딱딱한 얼굴로 대답해주었다. 에리나는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저 인형을 만지작거릴 때 라우데스의 얼굴은 더없이 편안하고, 자상하게만 보였는데! 비록 섬뜩한 기분이 들게 하지만, ‘저주’의 인형일 줄이야 꿈도 꾸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놀랄 일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죽은 자에 대한 예의로, 조심스럽게 상자를 뒤지던 아로데가 아예 상자의 내용물을 아래로 엎어 바닥에 쏟아버린 것이다. 바닥에 떨어진 내용물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던 로이드윈이 무언가 하나를 집어 들었다. 처음에는 라우데스의 옷인 줄 알았지만, 펼쳐놓고 보니 옷 따위가 아니었다. 이디스는 천을 펼쳐, 허공에 띄웠다. 그곳에는 전혀 상상도 못 했던 인물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에우로카엘…….” -------------------------------------------------------------- 현재, 새벽 2:40이 넘어가고 있네요- -; 미치긴 미친 모양인지..[한숨] 졸려 죽겠어요ㅠ 에, 저 아직 시험기간이 아닙니다ㅠ 물론 10월 7일부터 중간고사이기는 하고, 또 중간고사 준비에 들어가야 하는 것은 맞지만요; 오해하시는 분들이 계시는 것 같아서^ ^; 그럼, 즐독하세요~ 메일 : donghee425@hanmail.net 리플 : 요 아래에 달아주세요♡ 제 목: 공녀(貢女) : 제51화 [배후와 동기와 과거 사이](2) 2004/09/25 22:00:44 404 0 네이에르 (포인트 : 828점) #. 51화 ‘배후와 동기와 과거 사이’ * * * * * * * * * * * * * * * 난감한 일이다. 세키라는 남몰래 한숨을 지으며 생각했다. 그녀의 옆에는 델리드와 공녀들이 꼭 붙어, 당황한 모양으로 어색하게 서 있었다. 원래의 계획대로 되었다면 그들은 벌써 중간계에 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어찌된 연유인지 그들은 예정대로 중간계로 내려가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천계에 남아 있어야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덕분에 ‘하쉬핌’은 당황한 공녀들의 목소리로 시끄럽게 술렁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결계 따위가 생기다니요!” 문제는 바로 이것이었다. 중간계로의 통로에 결계(結界)가 생겨버린 것이다. 평소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 세리엘이 당황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차원의 문을 열어 중간계로 공녀들을 보내주는 것쯤이야, 그의 실력이라면 그리 힘든 일도 아니었건만 실패를 해버리고 말았으니. 원래 차원의 문을 여는 것은, 천계라면 마계에, 마계라면 천계에 그 신호가 가게 되어 있었다. 그것은 협정에 의한 것이며, 단지 중간계 생물과의 계약에 의해서만 합법적으로 중간계로 현신할 수가 있도록 되어 있다. 그 외의 경우(개인적인 사유 등으로)에 차원의 문을 연다면 협정을 어기는 것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제2차 천지대전의 협약이든 뭐든 관계없는 이야기였다. “그게, 조금 계획이 틀어져서 말이다.” 미카엘이 이마를 문지르며 대답했다. 그의 눈길은 자연히 시즈니엘을 향했고, 시즈니엘은 찔리는 것이 있는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세리엘의 시선이 미카엘을 따라 시즈니엘에게 가 박혔다. 미카엘은 기가 막힌 투로 말했다. “‘재판’이 내일로 정해져서 ‘외부 단절’기간이 되어 버렸다. …저 성질만 급한 멍청이가 그렇게 만들어버렸지.” 그는 ‘한심’이라고 써놓은 듯한 얼굴로 시즈니엘을 노려봤다. 그들이 준비한 증거물(?)이라고는 로아이나 달랑 하나 뿐이건만,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 이렇게 무작정 일을 벌였단 말인가? 미카엘은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에우로카엘을 몰아붙일 증거가 부족하다. 로아이나와 에우로카엘의 연결 고리가 필요한 것이다. 로아이나가 천계에 머물렀다는 것을 아는 이도 극히 적고, 게다가 그가 에우로카엘의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이는 더더욱 없다. 따라서 로아이나의 몸에 찍혀 있는 로헤델의 인장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당장 중간계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말씀이세요?”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세키라가 말했다. 앞뒤 사정을 모르는 공녀들이야 들어도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이겠지만, 대강의 사정을 알고 있는 그녀는 상황이 그녀들에게 위험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이유야 어떻든지, 그들의 말을 들어보자면 적어도 ‘재판’이 끝나기 전까지 그녀들은 천계에 발이 묶였다는 말이다. 세키라는 초조했다. 지금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루피아의 소재조차 모르고 있다. 그 위험한 ‘물의 궁’에 떨어뜨려 놓고 그녀는 돌아와 버렸다. 만약 루피아가 붙잡히지 않았더라도 도망갈 곳이 없는 상황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한 시라도 빨리 어떻게든 하고 싶었지만, 소맷자락을 의지하듯 가볍게 끌어당기는 델리드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러 그녀를 자리에 못 박았다. “미안하군. 금방 보내줄 수 있을 것처럼 말을 해놓고 지키지 못하다니.” 문제는, 지금 그녀들이 도망친 상태라는 것이다. 세리엘이 부숴버린 철문 등 화려한 흔적을 남긴 데다, 한두 명도 아니고 이렇게 우르르 움직였으니 도망쳤다는 것을 들키는 것은 시간문제다. 게다가 세리엘이 말하길, 리크비엘이 보낸 자들이 오던 중이라지 않았던가. 만약 본격적으로 수색이라도 하는 날에는 그녀들의 숫자가 숫자인 만큼 여러 가지로 조건이 안 좋다. “적어도 ‘재판’이 끝나기 전까지는 우리도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다. 하지만 저쪽도 마찬가지일 거야. 그러니 끝낼 때까지 이 ‘하쉬핌’에 머물러 주겠나?” 요시피아나가 말했다.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방법이 없는 것이로군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금 공녀들은 애초 그녀의 행선지를 아예 몰랐었다는 점이었다. 중간계로 갈 수도 있었다는 것을 알면 실망할 테니까 말이다. “…루피아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은 도저히 없는 건가요?” 미카엘은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다른 때였다면 이번에 공녀들을 구해낸 것처럼 몰래 숨어들어서라도 찾아서 데리고 오겠지만 지금은 곤란한 시기였다. 일이 잘못된다면 그들에게도 타격이 크므로 신중해야 하며,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그때, 조금만 더 기다려 보았었다면! 조금 더 찾아보았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지도 모르는데.’ 세키라는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한편, 천족으로 보이는 남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세키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델리드는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비록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다 하더라도 세키라의 말을 믿고 이곳까지 도망쳐 왔는데, 정작 세키라는 심각하고 우울한 표정으로 그들과만 대화를 할 뿐 그녀들에게는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는 것이다. 이곳은 어디일까? 저들은 누구지?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일까? 적어도 자신들이 도망친 신세라는 것쯤 모를 리가 없기에 앞으로 잡히지는 않을까도 걱정이 되었다. “어? 로위나? 로위나?” 그때, 로위나가 가슴을 잡고 괴로운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치 숨쉬기가 괴롭다는 듯, 폐 부위를 움켜잡고 얼굴을 찡그렸다. 로위나 뿐만이 아니었다. 공녀들 중 몇몇이 똑같이 가슴을 움켜잡고 고통을 호소하는 것이다. “로위나! 괜찮아요? 어디가 아픈 거예요?” 로위나는 세키라의 물음에도 대답하지 못하고 가슴을 두드려대면서 숨을 쉬기 위해 노력했다. 이렇게 가다가는 이대로 숨이 멎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입만 벙긋 벙긋거리던 그녀의 입에서 마침내 ‘아-’하고 가느다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것을 기점으로 하여, 로위나는 세게 기침을 했다. “헉, 헉헉- 헉! 허억…….” 로위나의 경우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녀는 다시 숨통이 트일 때까지 버틸 수가 있었지만 다른 공녀들 같은 경우는 참지 못하고 그대로 정신을 놓아버린 것이다. 다행히도 정신을 놓자마자 숨통이 트여, 그대로 질식사하는 경우는 하나도 없었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세키라가 망연히 물었다. 공녀들 중 거의 대부분이 가슴의 통증과 호흡 곤란을 호소하다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신성력에 너무 과다하게 노출이 되어 일시적으로 호흡에 장애가 생긴 것이다. 하필이면 신물(神物)의 옆에 인간들을 놔두었으니 이렇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지. 육체가 수용할 수 없는 신성력은 오히려 해가 된다.” 쓰러진 로위나를 살펴 본 요시피아나가 말했다. 아직 창백한 안색에 식은땀을 흘리는 그녀는 가슴의 심장 부위를 움켜쥐고 힘들게 말을 쥐어짰다. 천계로 온 이후부터 계속 호흡이 힘들었었지만 생활에 큰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라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방금 전에는 마치 주변의 공기가 싹 사라져 버린 것처럼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숨을 쉬려고 입을 벌려 봐도 한 점 공기도 마실 수가 없었고, 거의 숨이 넘어가기 직전, 겨우 숨구멍이 뚫려 숨을 쉴 수가 있었다. “그, 그 얘기는 더 이상 이 천계에 있다면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래.” 숨을 삼킨 세키라는, 황망(慌忙)한 눈으로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의 500명에 달하는 여자들 중 거의 대부분이 쓰러져 괴로워하고 있고, 천계를 빠져나가는 것은 재판이 끝난 후에야 가능하다. 그녀의 소중한 친구는 생사도 모르는 채, 가장 위험한 장소에 버려져 있고 그녀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세키라는 속으로 ‘침착하게’라고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이대로 어떻게 하지? 하며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녀는 예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이다. * * * * * * * * * * * * * * * “잠깐! 잠깐만! 대체 어디로 가는 건데? 놔 봐!” 세게 붙잡힌 리크비엘의 손안을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을 치던 그녀는, 순간 그녀를 향한 얼음 같은 눈길에 얼른 입을 다물었다. 조금 전처럼 까불대다가는 뼛조각도 못 추리게 될 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벌써 「재판」이라니. -하지만 그 스토커들이 이 녀석의 눈깔에 박힌 문양을 알 리가 없는데… 설마 다른 증거를 잡았을까?’ 꽉 잡힌 손목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아마 에우로카엘에게 가는 것일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렇게 다급한 반응인 것을 보면 ‘재판’이라는 것이 대단하기는 대단한 모양이었다. 루피아는 리크비엘의 뒤통수를 쳐다봤다. 이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적 단서는, 바로 로헤델과 에우로카엘의 관계를 밝혀내는 데에 있다. 리크비엘이 에우로카엘의 최측근이라는 것은 천계 사람 누구나가 다 아는 사실. 그런 그의 눈동자에 선명히 박혀 있는 그 문양이라면, 결정적인 증거로서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만약 다른 증거를 잡았다고 해도, 이 사실이 더해진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을 것이다. 어떻게 12대천사들에게 전해줄 수 있을 방법이 없을까. 하지만, 그녀는 이미 붙잡혀 버린 신세였다. 손목의 통증이 한결 나아졌다 싶더니, 이내 그의 손이 풀렸다. 이미 그녀의 손목은 보라색 멍이 들어 있었다. 얇고 하늘하늘한 하얀 천이 몇 겹이나 겹쳐져 내부를 밖으로부터 가리고 있었다. 바람이 살짝만 불어도 안을 훤히 다 보여줄 것 같았다. 리크비엘은 보기에도 조심스러운 손길로 천을 거두어 한 걸음 안으로 들어섰다. “리크비엘입니다.”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가 다시 한 걸음, 안으로 들어서자 루피아는 얼른 그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자신의 숨소리도 크게 들릴 정도로, 너무나 조용했다. 생각해보면, 에우로카엘과는 그리 많이 만나본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주위에서 떠드는 이름을 자주 들었다. ‘아유니’라는 이름의 공녀였던 그녀, 숲에서 신비로운 모습으로 마주쳤던 그녀, 유난히 자신을 따르던 그녀, 소름끼칠 정도로 해쓱한 몰골의 그녀- 그것이 자신이 아는 ‘에우로카엘’의 전부다. 하지만 자신과는 달리, 에우로카엘은 기억 이전부터 자신을 알아왔다고 했다. 과거, 대체 어떠한 사이였기에 그녀는 이토록 자신에게 관대할까-? 밝은 은색 머리카락이 방 안을 떠도는 바람의 자락에 이끌려 흔들렸다. 옛날, 그녀가 알던 ‘아유니’의 모습이라고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인간이 아니라, 천족. 리크비엘이 말한 그대로 그녀는 완벽한 천족이었다. 그녀의 주변에만 공기마저 숨을 죽인 것 같은, 고아한 분위기가 흘렀다- “당분간 찾아오지 말라고, 분명 일렀을 텐데…….” 목소리마저 그녀가 알던 것과는 다르다. 에우로카엘의 연한 홍색 눈동자가 그녀에게 닿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했다. 에우로카엘은 놀란 듯 보였다. ‘왜 당신이 여기에 있어?’라는 듯한 얼굴이었다. “헤매고 계시기에, 모시고 왔습니다.” “어째서 이런 곳에! 당신에게 이곳은 위험해요!” 리크비엘의 말은 듣고 있지도 않았던 듯, 벌떡 일어나며 그녀가 말했다. 진심으로 걱정스러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리크비엘의 얼굴이 조금 구겨진 것 같았다. “-에우로카엘님,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재판’에 회부되시다니요?” “네가 신경 쓸 것 없다.” 보는 이가 민망할 만큼 그녀는 그의 말을 냉정히 외면했다. 하지만 그는 익숙한 듯,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자세하게 알려 주십시오. 그래야만 제가 대처할 수 있습니다.” “이번 일에 한하여, 너는 관계하지 말거라. 나서서도, 알아서도, 알려 하여서도 안 된다.” “예? 하지만,” 말을 하려던 그는, 문득 입을 다물었다. 천계에 온 이유 중 하나는, 자신과 에우로카엘의 관계를 알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물론 주된 이유는 공녀들을 구하기 위해서였지만 말이다. 이렇게 바로 앞에서 쳐다보니, 꿈에서 보았던 꼬마와 무척 닮았다. 그 꿈은 대체 왜, 어떻게 꾸게 되었을까? 꿈속의 그 아이는 정말 에우로카엘이었을까? 아주 오랜 옛날, 도대체 어떤 사이였을까. “제게 잘해주는 이유가 뭐예요?” “……루피아님.” “뭐 때문에 내게 이토록 연연하죠?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 나와 대체 어떤 사이였기에 이러는 것이냐고요? 물론 고마워요, 잘해줘서. 솔직히 이번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은 당신이 내게 호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니까요. 하지만 그래서 더 궁금한 거예요.” “…….” 에우로카엘은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한 걸음 물러섰다. 거리를 두고자 하는 것처럼. 역시 대답을 해주지 않는 것일까. “리크비엘.” “말씀하십시오.” “루피아님을 잘 모시고 있어라. 이 ‘재판’건에 한하여 너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무엇도 알려하지 말고, 기다려야 한다. 알겠느냐?” --------------------------------------------------------------- 델리드 : ..오랜만에 출연한다 싶었더니, 뭐야? 죽을 위기라니! 로위나 : 당신은 그나마 나아요. 난 쓰러지기까지 하잖아- 저번에도 나에게 싸우라고 하더니, 이번에도 내가 쓰러지네? 내가 그렇게 만만한가![] 조셀린 : ..우리는 대사도 없었어요. 세키라 : -흠! 추석 연휴 첫날입니다. 루피아 : 이제 거의 막판이군요~ 이디스 : ...이번에는 등장도 안 하는군. 즐독하세요^ ^ 리플 꼭 달아주세요~[←;] 제 목: 공녀(貢女) : 제52화 [판결! 끝으로, 끝으로](1) 2004/09/26 21:17:11 803 0 네이에르 (포인트 : 978점) #. 52화 ‘판결! 끝으로, 끝으로’ * * * * * * * * * * * * * * *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일까? 결국 따지고 보면 그 역시 결국 실에 매여 춤을 추는 인형에 불과하다. 대체 얼마나 많은 인형이 그 커다란 손 안에서 아무 것도 모른 채 장단을 맞췄던 것일까. 그들은 그저,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루피아의 자서전================ “설득력이 없습니다!” 예상대로의 반응이었다. 그들은 증거가 불충분했고, 장로회는 전적으로 에우로카엘 편으로 돌아서 있었기에 상황은 전적으로 그들에게 불리했다. 이대로 가면 그들은 에우로카엘을 질투해 매도한, 몹쓸 ‘분’들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미카엘은 다시 한 번, 너무 성급히 이런 상황을 만들어버린 시즈니엘에게 욕을 퍼부어주었다. ‘증거가 부족하다’ 혹은 ‘전혀 연관이 없지 않은가’, ‘괜한 매도 아닌가!’ 등등 장로들은 시끄럽게 떠들어 대었지만, 반면 정작 에우로카엘은 차분히 눈을 감고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잠자는 것처럼 말이다. 그녀는 이번 일로 전혀 타격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오히려 그녀는, 이번 일을 즐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상한 점이라면, 늘 그녀의 그림자처럼- 혹은 대변자처럼 옆을 지키던 리크비엘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재판’ 정도의 큰일이라면 그가 옆에 없을 리가 없을 텐데도, 리크비엘은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증거가 너무 부족하다. 로아이나와, 에우로카엘을 이어줄 만한 것이 필요해- 제길!’ 로아이나도, 곧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 너무나 태연한 안색이었다. 그는 오히려 가볍게 웃으며 상황을 관찰하는, 아니 구경을 하는 사람 같았다. 그것은 모든 것을 포기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 상황을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다는 자신감 같았다. 그것이 어떤 방법이든 말이다. 그는 미래를 볼 수 있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미래는 볼 수가 없다고도 말했다. 문득, 에우로카엘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알게 모르게 살포시 웃었다. ‘네 맘대로 잘 돌아가지 않으니, 기분이 어때?’라고 말하는 듯했다. 미카엘은 옛날, 그녀를 처음 천계에 데리고 들어왔을 때를 떠올렸다. 그녀는, 그에 의해 상처를 받았던 것일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닙니까? ‘로헤델’에 관한 이야기는 뒤로 한다 치고, 에우로카엘님께서 ‘마족’과의 혼혈이시라니요? 그런 천한 피가 감히 오르가프의 열세 번째 아이라는 영광된 이름을 받을 수나 있을 것이라 여기십니까. 저 마족은 도대체 왜 이곳에 데리고 오셨는지 그 의도를 알 수 없군요!” “……!!” 모른다? 에우로카엘의 입 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간 것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모르다니? 그녀가 마족과의 혼혈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 아니었던가? 그렇기에 열세 번째 아이라는 이름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외면을 당했던 것인데? 12대천사들은 서로 눈길을 교환했다. 이것이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혼혈인 열세 번째 아이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를 하고, 심지어 죽여 버리자는 말까지 했던 장로들이, 용케도 그녀를 따르는구나 생각했었다. 몰랐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던 것이로군. 그들은 납득했다. 무슨 수를 썼는지 알 길은 없어도, 어떠한 수를 써서 그녀는 모든 이의 머릿속에서 그녀의 출생에 대한 기억을 지운 것이다. “저희는 납득할 수 없습니다. 증거가 없는 이상, 이것은 매도라고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 * * * * * * * * * * * * * * 그녀는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천계에 머문 기간이 짧았기 때문인지, 적어도 그녀는 아직까지는 몸에 이상이 발견되지는 않았다. 다행인 것은 델리드를 비롯한 몇 명은 쓰러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세키라는 쓰러진 공녀들을 돌보기 위해, 어제부터 잠시도 쉬지 않았다. 결국 할 수 있는 것을 최선을 다해 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현재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이 멀쩡한 몸을 최대한 사용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12대천사가 마련해 준 ‘하쉬핌’ 내부는 넓었기 때문에, 다소 불편하긴 했지만 모두를 눕힐 수 있을만한 공간은 충분히 확보할 수가 있었다. 그녀들이 쓰러진 이유는 신성력에 과다 노출되어 생긴 반작용이라고 했다. 그들은 그녀들을 위해 특별히 실드(shield)까지 만들어 주었고, 그 속에서 조금씩이지만 그녀들은 안정을 찾아가는 듯 했다. 숲의 종족이라는 엘프에게는 푸른 숲의 깨끗하고 청정한 공기가 가장 알맞고, 땅의 종족이라는 드워프에게는 지하의 광산이 가장 어울리는 삶터이듯이, 인간에게는 마계의 흐린 하늘도, 천계의 황금빛 하늘도 아닌 중간계의 푸르른 하늘이 가장 필요했다. 거의 1년을 마계에서 생활했음에도 그녀들의 몸에 무리가 가지 않은 것은, 어디까지나 클리오라의 ‘축복’이라는 방패막이가 있었기 덕분이었다. 그것을 세키라는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재판이 잘 끝나야만, 그녀들이 중간계로 돌아갈 수가 있다. 하지만 그리 유리한 것은, 아니 사실 무척 불리한 상황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좀 어때요?” 로위나의 얼굴에는 한결 혈색이 돌았다. 가장 심각한 상태였지만 밝고 호쾌한 성격을 잃지 않고 항상 웃는 얼굴이었다. 그녀 덕에, 다른 공녀들의 분위기도 한층 더 밝아졌다. “괜찮아요. 저는 그렇다 치고 세키라님, 당신이야말로 좀 쉬는 것이 어때요? 전혀 쉬지 못하셨잖아요.” “괜한 걱정을 하시네요.” 세키라는 손사래를 치며 살포시 웃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가 진 것은, 가슴에 돌덩이처럼 얹혀져 있는 루피아에 대한 걱정 때문일 것이다.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그녀의 친구를 구하러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무작정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은, 무척이나 답답한 일이었다. “……중간계로 돌아간다면, 더없이 행복할 것 같아요.” 로위나가 기대에 부푼 얼굴로 말했다. 세키라는 자세한 사정을 숨김없이 공녀들에게 설명을 해 주었고, 그녀들은 납득했다. 아니 납득을 하고, 말고 이전에 스스로의 몸이 안 좋다는 것을 그녀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세키라는 그런 그녀에게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그곳은…… 더 이상 우리가 있을 곳은 아니었어요.” 돌아간다면, 그때부터 그녀들은 함께 그녀들이 ‘있을 곳’을 찾아야만 한다. 집과 가족은 그녀들에게 더 이상 돌아갈 곳이 되어주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그녀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할까? 어디로 가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로위나를 비롯한 공녀들은, 세키라의 말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쭉 귀족사회에서 살아왔으며, 그렇기 때문에 귀족의 생리를 가장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들의 부모 역시 부모이기 이전에 귀족이었다. 가족은 그녀들을 절대로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녀들의 귀환에 관한 문제는 대륙 인간들의 목숨도 달려있다는 것을, 그녀들은 잊어버리지 않았다. “꺄악! 데, 델리드 양! 델리드 양, 정신 차리세요!” 소란이 일어났다. 세키라는 벌떡 일어나, 비명이 들려온 곳을 쳐다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건강하게 움직이던 델리드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델리드 양! 괜찮아요? 눈 좀 떠 봐요!” “수, -숨이……!” 그녀는 숨이 막히는지 가슴을 쥐어뜯으며 부들부들 떨었다. 잠시 세키라에게 매달려 ‘아, 아-’하고 입을 벙긋거리던 그녀는 갑자기 비명을 질러댔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세키라의 팔에 손톱을 박아 넣고, 견딜 수 없다는 듯 고통에 찬 비명을 소리높여 터뜨렸다. “끼, 끼야악! 아아아아아아아아악!” “진정해요! 거기 빨리 팔을 붙잡아요! 다리도! 움직이지 못하게 해요!” 손톱이 박힌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왔지만, 세키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델리드의 어깨를 붙잡았다. 주위의 공녀가 그녀의 몸을 붙잡자, 델리드는 금방 진정이 되었는지 비명을 멈추었고, 이내 몸에 힘이 쭉 빠지며 쓰러졌다. 세키라는 그녀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펴보았다. “심장도 약하게 뛰고, 의식도 없어요. 이대로는, 위험해…….” 에웰로니 국의 공녀가 말했다. 그녀는 로위나가 발작할 때에 함께 호흡곤란을 겪었던 공녀로, 지금은 상태가 많이 호전되어 세키라를 도와 공녀들을 돌보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섬나라인 에웰로니는 마법의 영향력이 거의 제로라고도 할 수 있는 나라였기 때문에, 국민들 모두 일반적으로 의학에 조예가 있는 편이었다. 그녀는 많은 도움이 되고 있었다. “-제가 12대천사를 불러 올게요! 그들 중 누구라도 있으면 고쳐줄 수 있을 거예요. 제가 가겠어요!” 세키라가 말했다. 절대로,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 * * * * * * * * * * * * * * 결국 천계로 와서 이루고자 했던 것 중, 아무 것도 해내지 못한 셈이 되어버렸다. 공녀들을 구하고자 했지만 도중 리크비엘에게 잡혀 실패해 버리고, 에우로카엘에게서 과거 그들의 관계를 묻고자 했지만 에우로카엘이 대답을 피해 버림으로써 그것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세키라는 괜찮을까? 무사히 이곳을 빠져 나갔을까? 공녀들을 구해냈을까. 조금 불안하기는 했지만, 루피아는 세키라를 믿었다. 반드시 잘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리크비엘에게서 그녀에 관한 소식을 듣지 못했다는 것이 희망이었다. 만약 잡혔더라면 틀림없이 그는 그녀에게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게 무슨 꼴이람. 어떻게든, 리크비엘의 눈동자를 보여 주어야 할 텐데도, 그녀는 전혀 손을 쓰지 못한 채 감시를 당하고 있는 처지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재판’은 잘 되어가고 있을까. 가장 의외인 것은, 에우로카엘의 리크비엘에 대한 냉담한 태도였다. 리크비엘은 그녀 앞에서는 마치 순종적인 강아지처럼 스스로를 낮추지만, 에우로카엘은 그런 그의 헌신적인 태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더 냉정하게 그를 대하는 것이다. 보는 이가 민망할 정도로. 현재도 그는 ‘이번 일에 대하여 간섭 말라’는 에우로카엘의 명령 그대로, 오직 그녀만을 감시하며 재판에 대해 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 듯했다. ‘마계 쪽은, 잘 되어가고 있을까…….’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해도, 신경이 안 쓰일 리가 없었다. 뭉클한 아픔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욱신거렸다.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스스로 택한 길이건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미련과 후회에 잡아먹힐 것 같았다. “……에우로카엘은 위험할 걸.” 어떻게든, 재판장까지 데리고 가야 한다. 그러나 그녀의 말에도, 리크비엘은 요지부동으로 전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정말 ‘끼어들지 않을 셈’인 것이다. “혹시 로아이나, 라고 알고 있어?” “…….” “안다고 보겠어. 그럼, 그의 어깻죽지에 찍혀 있는 노예인장을 본 적 있어?” 로아이나의 이름이 나온 순간부터 그가 조금씩 반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마족을 혐오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일까. 그것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는 민감하게 반응을 했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나는 봤어. 아주 끔찍한 화상이었지. 그런데 중요한 것은, 12대천사들이 말하기를 그것은 ‘에우로카엘’의 상징 문양이라고 했어. 그래서 로아이나는 중요한 증거가 되었지. 이번 재판에서 그녀는 마계와 내통(內通)했다는 죄목으로 심판을 받게 될 걸.” 사실 그녀가 본 것은, 에우로카엘의 것이 아니라 로헤델의 상징 문양이었다. 그러나 이 정도의 거짓말 따위, 어차피 리크비엘은 알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는 ‘재판’의 내용도, 뭣도 모른 채 그저 에우로카엘이 회부되었다는 것만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당신, 그녀의 최측근이라고 했지? 그러나 그것, 정말이야? 만약 정말이라면 이런 위기 때 곁에 두지 않을 리가 없어.” 그녀는 슬쩍, ‘로아이나는 곁에 있을 텐데’라고 덧붙였다.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 그녀는 속으로 외쳤다. 마지막으로 그의 등을 떠밀기 위해, 그녀는 한 마디를 더했다. “정말 믿음을 받고 있는 것이 맞아? 그녀는 너에게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잖아.” 그 말이 결정적이었다. 리크비엘은 벌떡 일어나, 문을 박차고 나갔다. 루피아는 그제야 안도하며 숨을 뱉었다. 천족 우월주의에, 타 종족을 모두 버러지 이하로 보는 그- 리크비엘은 의외로, 에우로카엘에 대한 한, 순수하다고 할 수 있을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 추석 연휴 두 번째 날! 시험공부도 해야 하지만ㅠ ..적어도 추석 연휴 전엔(원래 주말까지였는데;) 공녀를 다 끝내야 하므로;; 쉴 수 없습니다![] ...참, 요새는 저도 하면 된다는 것을 느끼고 있어요- -;; 루피아 : 요새 내 활동이 적네. ...흐음-[] 세키라 : ...호호호.; 이디스 : .......[] 에리나 : .......[] 세키라 : ...흠! 즐독하시구요, 풍성한 한가위 되세요^ ^ 메일 : donghee425@hanmail.net 리플 : 요 아래에 달아주세요^ ^ ..요새는 리플이 너무 적어서, 슬퍼요ㅠ 제 목: 공녀(貢女) : 제52화 [판결! 끝으로, 끝으로](2) 2004/09/27 16:55:13 886 0 네이에르 (포인트 : 978점) #. 52화 ‘판결! 끝으로, 끝으로’ * * * * * * * * * * * * * * * 옅은 숨소리만이 방안을 채색했다. 가냘픈 숨을 뱉으며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거린다. 창백해진 얼굴 위에 붉은 머리채가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는 것을 보고, 그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살짝 머리칼을 거둬내 정리해 주었다. 그래도 처음 이 침대에 누웠을 때보다는 많이 나아진 안색이었다. 유리아덴의 말에 따르면, 생명에 지장은 없으며 다소 장애가 생길지는 몰라도 딜렌의 체력에 따라 4개월 전후 정도면 완치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지금 딜렌의 체력은 그야말로 극도로 떨어진 상태이기 때문에, 그는 현재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안정을 취해야 했다.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하는 그에게, 로이드윈은 몇 번이나 질문을 던져댔고, 그럴 때마다 딜렌은 혼미함 속에서도 대답을 하기 위해 애를 썼다. 카른은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딜렌이 그렇게 쓰러진 이후,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그의 곁을 지켰다. 하얗게 질리다 못해, 파랗게까지 보이는 얼굴에는 핏기라곤 없었고, 입술은 보라색에 가깝다. 며칠 밤을 새었는지, 피부는 거칠거칠해져 있었다. 하지만, 무척 편안한 얼굴로 그는 잠자고 있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카른은, 미안함에 고개를 숙였다. 결국 그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 것이다. 말로만 ‘마왕 좌에 어울리도록 만들겠어!’라고 혼자 다짐했을 뿐이지, 정작은, 친구의 괴로운 속내를 알면서도 모른 척한 것이다. 마왕 좌에 앉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친구를 내몰았다. 이용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림자 족은 다시 어둠 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그는 다시 가슴이 아프다. 그는 친구 딜렌을 생각하는 것만큼 일족을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다. 다시 일족이 양지(陽地)로 나올 수 있도록. 그것은 일족의 소원이자, 그의 의무였다. 하지만 그 의무를 위해- 그는 친구를 희생시켰다. 모든 것은 그날, 그 여자가 그들 앞에 나타난 것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 여자는 천계와의 동맹을 요청했고, 그들에게 힘을 빌려줄 것을 제의했다. 그리고 딜렌을 마왕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말했다. 그때 딜렌은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고 있었다. 나는 형을 미워한다, 라고. 마왕을 죽일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말한 그녀를 딜렌이 거절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로아이나가 그들을 찾아왔다. 어떻게 된 것인지 로아이나는 딜렌은 만나지 않고 오직 카른과만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행여나 딜렌이 알게 될까 카른에게도 입단속을 단단히 시키고, 딜렌과 마주칠 기미만 보여도 모습을 감추었던 것이다. 가끔 딜렌이 술에 취해 잠이 들었을 때에만 살짝, 그에게 다가가고는 했다. 딜렌이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제대로 그를 깨우쳐주지 않은 것은, 그림자 일족 수장으로서의 자신이 그것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놓아두면, 반드시 언젠가 딜렌은 산산조각이 나도록 상처를 받을 것이라는 것을 분명 알고 있었으면서도, ‘내가 지켜주겠다’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한 것이다. 결국 그는 딜렌이 스스로를 찌를 때까지 손놓고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으면서도. “……조심…… 그를…….” “뭐?” 떠듬떠듬, 딜렌이 입을 열었다. 그는 이따금 정신을 차릴 때마다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다. “…죽지…… 않았어…….” “누가?” 모기 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였지만, 카른에게는 충분히 크게 들렸다. 카른은 모든 신경을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에만 집중했다. “나는…… 봤어… 그는, 나를… 찾아왔어…… 막아야 해…….” “그래, 알았어. 누가?” “위험…… 해…… 어서…… 막아줘…….” 딜렌의 눈에서 방울방울, 투명한 눈물이 흘러나와 베갯잇을 적셨다. 그는 힘겹게 말을 이으며 서럽게 눈물을 흘려댔다.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신의 뜻은… 오직 그 사람만이…….” * * * * * * * * * * * * * * * 그것은 거의 난입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그만큼 천계에서의 그의 자리가 크다는 반증(反證)이었다. 장로회는 오히려 그의 등장을 반기는 듯, 손수 그를 위한 자리까지 내어주었다. 이제껏 이 자리에 그가 없었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이상한 일이었다. 미카엘마저도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리크비엘의 급작스러운 등장에 당황한 것은 되레 에우로카엘이었다. 그녀는 이 재판장에 들어선 이후 한 번도 무너뜨리지 않았던 포커페이스를 잃은 것이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했던 것이다. 재판의 상황은, 전적으로 12대천사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거의 그들의 패배로 끝날 판이었으며, 판결만을 남겨둔 마지막이었다. 그러나 그때 막 리크비엘이 법정으로 난입해 들어왔다. 덕분에 판결은 뒤로 미뤄져 있었다. 리크비엘은 장로회가 마련해 준 자리에 앉아, 법정 안을 둘러보았다. 내부 가득, 충만한 황금색 빛이 넘치고 있었다. 법정의 정면에 세워져 있는 오르가프의 신상(神像)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고귀하신 그들의 어버이 앞에서 이루어지는 신성한 의식의 터. 창을 통해, 몇 줄기 빛이 비추었다. 고귀와, 신성과, 지혜와, 진실의 판결과 마땅한 죄의 처벌- ‘피고인’석에는 에우로카엘이 다시 의연하고 평안한 얼굴로 앉아 있었고, ‘증인’석에는 로아이나가 양손, 양발이 포박되어 꿇어앉혀져 있었다. 그리고 ‘원고인’석에는 12대천사가 단정한 모습으로 앉아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는 납득할 수 없습니다.” 에우로카엘은 조용히 리크비엘을 노려봤다. 입 다물어! 그녀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리크비엘은 계속해서 말을 했다. 로아이나의 입술 끝이 슬그머니 올라간 것 같았다. 솔직히, 미카엘은 이 상황이 결코 달갑지 않았다. 이 부족한 증거물을 가지고 재판을 승리로 이끌어나가기에는 상황적 조건이 너무나 불리했다. 더더군다나, 그 말솜씨 좋다는 리크비엘까지 난입해 들어왔으니 이제 승리는 거의 물 건너 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에우로카엘의 얼굴은 조금 전보다 나빠졌다는 것을 그는 눈치 챘다. “에우로카엘님께서 마계와 내통을 하셨다는 혐의를 납득할 수 없습니다! 비록 저치의 몸에서 저분의 상징문양이 나왔다고는 하나, 그런 것을 가지고는,” “리크비엘님,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장로 중 하나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고, 답변은 요시피아나가 해 주었다. 요시피아나는 그의 말에서 뭔가 눈치를 채었는지, 일부러 ‘증인’석의 로아이나에게 다가갔다. 증인석으로 가는 도중, 에우로카엘의 얼굴을 곁눈질로 흘깃 보았다. 리크비엘의 등장은 그녀에게 전혀 달갑지 않은 것인 듯, 그녀의 얼굴에는 더 이상 여유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는 없으나 리크비엘은 아직 제대로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마족의 몸에 찍혀있는 것이 ‘로헤델’의 인장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잘못 알고 계신가 보군요. 리크비엘, 그대는 에우로카엘의 상징인장이 찍혀 있다고 알고 계십니까?” ‘로헤델’의 인장에 대해 아는 자는 무척 적다. 애초 그녀의 자료가 희귀했기 때문에, 그녀의 생전 시절을 알았던 자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옳을 정도였다. 따라서 그것을 아는 것은 고작해야 장로 중 몇 명과 12대천사가 전부였다. 그에 비해 리크비엘은, 아주 어린 축에 속하는 젊은 천사인 것이다. 그가 모른다고 하여 놀라울 것은 없었다. 비록 리크비엘이 장로회의 우두머리 격이며, 에우로카엘의 오른팔이라고 하여도. “그럼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항의합니다. 케루빔(지천사) 리크비엘은 이 자리의 합석 자격이 없습니다. 즉시 퇴장시켜 주십시오.” 법정이 들어선 이후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에우로카엘이 벌떡 일어나 말했다. 다들 묵인하고 넘어갔던 문제를 굳이 다시 들추어내, 리크비엘을 퇴장시켜 달라는 요청을 한 것이다. 법정 안에 침묵이 가라앉았다. 도저히 그녀의 속내를 짐작할 수가 없다. 리크비엘의 참석은 그녀에게 이익이면 이익이었지, 결코 손해는 아닐 텐데도 마치 방해라는 듯 굴지 않는가. 에우로카엘은 곧은 시선으로 리크비엘을 노려봤다. 나가! 나가! 그렇게 말하는 듯, 그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은, 북해의 빙정마냥 시리기만 했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에우로카엘은 결코 그의 개입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퇴장하여 주십시오.” “세라핌 에우로카엘, 지천사 리크비엘은 장로회의 일원으로서 이 자리 참석 자격이 충분하다 판단, 항의는 기각한다.” ‘판결자’의 결론이었다. 에우로카엘은 다시 자리에 앉았지만, 확실히 이전보다 굳은 얼굴이었다. ‘판결자’는 법정을 쭉 둘러봤다. 결론은 거의 나 있었고, 리크비엘이 합석한다 하여도 그리 달라질 것은 없었다. “거룩하신 어버이이시자 만물의 창조주이신 오르가프의 권능을 빌어, ‘판결자’의 자리에 앉은 자로서 ‘판결’을 내리겠소. 이 재판의-……,” “기다려!” 낭랑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목소리의 주인을 깨달은 12대천사와 에우로카엘, 리크비엘과 로아이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등장한 외침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루피아였다. 곧장 그를 쫓아간다고 쫓아갔건만, 그녀는 이제야 그를 따라 이곳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아니! 인간이 어떻게!” “눈동자!” “당장! 뭣들 하는가! 얼른 잡아들이지 않고!” 루피아는 고래고래 소리를 내질렀다. 스스로도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로서는 이 방법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리크비엘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눈동자! 저 녀석의 눈동자를 봐! 리크비엘! 말해! 아까 약속했지! 모두의 앞에서 말을 할 수 있다고! 당당하게 말하란 말이야! 에우로카엘에게 받은 ‘신뢰’의 증거를! 네가 그렇게나 자랑스럽게 여기는 네 ‘눈’을!” 잠시 리크비엘에게 시선이 쏠렸다. 미카엘은 이때를 틈타, 재빨리 질문을 던졌다. “무슨 말인지 해명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당장 저 인간을 퇴장시켜 주십시오!” “먼저 어떻게 된 것인지 들어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에우로카엘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리크비엘이 자신의 명령을 어기고 이곳에 나타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루피아의 등장마저 그녀가 원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루피아는, 인간인 그녀는 자칫 잘못하다가는 이대로 목숨을 잃게 된다. 리크비엘은 입을 열려다 꾹 닫았다. 에우로카엘과, 리크비엘 사이에 빠른 시선이 서로 오갔다. 어째서 믿어주지 않으십니까? 저는, 당신께 저 마족보다 못한 존재입니까? 그렇게도 저는, 당신께 신뢰받지 못하는 겁니까? 이곳에 있을 자격조차 없을 만큼? 리크비엘과 가장 가까이 있었던 요시피아나가 그에게 다가왔다. 루피아가 말한 눈동자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때까지도 에우로카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리크비엘의 눈을 가까이서 바라본 요시피아나는 눈을 크게 떴다. “……이것, 은?” “에우로카엘님이 저에게 주신, 상징입니다만.” “-그렇군요.” 요시피아나는 피식 웃었다. 그가 어째서 웃는 것인지, 아직 눈동자를 보지 못한 다른 이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키득거리며, 다시 로아이나의 옆으로 돌아갔다. 로아이나는 어쩐지 처연한 얼굴로 동정심 가득한 눈길을 보냈다. 요시피아나의 손이 로아이나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리크비엘. 잘못 알고 있는 점을 시정하여 드리지요. 본 재판에서 문제시 되는 이 마족의 몸에 찍힌 상징인장은, 에우로카엘의 것이 아닙니다. 잘못 들으신 것 같군요.” “……!” 요시피아나의 손이 로아이나의 옷자락을 벗겨내었다. 그의 어깻죽지가 드러나고, 그 끔찍한 화상이 찬바람을 쐬었다. 요시피아나의 손가락이 그곳에 닿자, 그곳에서는 푸른 스파크가 일었다. 끔찍이 뭉그러진 상처이지만 그 모양만은 선명하다. 마치 못 볼 것을 본 듯이, 리크비엘의 얼굴이 경악에 물들어 갔다. 저 모양은, 저것은, 그가 알고 있는 것과 매우 흡사한 모양- 아니, 똑같은 모양이었다. 저것이 에우로카엘님의 상징인장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그, ……것은.” 그의 목소리는 꽉 억눌려 새어나왔다. “‘로헤델’의 상징문양, 입니다. 당신의 것과 똑같은.” 요시피아나의 손바닥 위에서 리크비엘의 눈동자가 확대되어 펼쳐졌다. 법정 안의 모두가 숨을 삼켰다. 리크비엘은 손바닥으로 자신의 눈동자를 꾹 눌렀다. 뜨겁다. 눈동자가, 타오르는 것처럼 뜨거웠다! 그는 이 눈으로 본, 눈앞의 모든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럴, 그럴 리가…….” 장로들은 벌떡 일어났다. 그들은 요시피아나의 무엇을 뜻하는지 금방 알아차렸던 것이다. 에우로카엘은, 타락천사 로헤델의 ‘후인’임을! 쿠궁! 리크비엘이 그 사실을 채 부정하기도 전에, 굉음(轟音)이 법정 전체를 뒤흔들었다. 법정 바깥의 건물이 폭발해 버린 것이다. 에우로카엘이 몸을 일으켰다. 루피아는 본능적으로, 그녀가 사라지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우로카엘은 허공에 몸을 띄웠다. 순간, 그녀의 뒤에 어렴풋한 남자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루피아는 숨을 삼켰다. 그녀는 그 남자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적어도 그녀가 아는 한, 그는 이럴 때에 나타날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의 외침과 함께, 눈부신 빛이 터져 모든 것을 덮었다. “라우데스님!!” -------------------------------------------------------------------------------- 추석 하루 전날- -; 입니다^ ^ [위를보고]...어색해도, 어색해도, 이것이 최선;[어흑!] 루피아 : 아니, 나는 왜 만날 이런 무모한 역할만 시키는 거야? 어? 세키라 : 주인공의 운명이야, 루피아. 루피아 : 그래도 정도라는 게 있는 거잖아. 능력이라고는 개뿔도 안 줘 놓고← 무작정 이런 일만 시킨다는 게 말이 되냐고! 이디스 보고 싶어-[엉엉] 리크비엘 : .....[] 즐독하세요^ ^ 메일 : donghee425@hanmail.net 리플 : 요새 리플이.. 리플이...[엉엉] 조회수도 그렇고;ㅅ; 홈플에 가셔서 한 말씀씩 남기고 가 주세요♡ 제 목: 공녀(貢女) : 제53화 [공녀의 존재이유](1) 2004/09/29 16:44:12 511 1 네이에르 (포인트 : 978점) #. 53화 ‘공녀(貢女)의 존재이유’ * * * * * * * * * * * * * * * 거의 1년의 세월을 마계에서 보내면서, 그리고 천계와 중간계를 오가는 생활을 하면서 가장 궁금했던 것은 역시, ‘우리가 왜 이곳에 와야 했을까’하는 것이었다. 이곳에 오게 됨으로 인해 인생이 송두리째 뒤집어졌는데 그 이유조차 모르다니,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신의 뜻’이라는 한 마디로 정리하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어째서 공녀가 필요했던 것일까? 클리오라는 어째서 그런 신탁을 내렸던 것일까. ======================루피아의 자서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라우데스의 얼굴은 공녀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그녀에게 ‘힘내라’고 웃어주던 부드러운 모습이었다. 그런 라우데스가, 마계의 교황이 어째서 지금 이 자리에 나타난 걸까? 그는 지금 당연히 마계에 있어야 할 사람이다. 천계에, 하물며 에우로카엘의 뒤에 나타나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머릿속이 마구 뒤헝클어져 어지러웠다.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조차 헷갈렸다.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눈앞을 가득 메웠던 빛이 조금씩 약해지자, 루피아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몇 번 눈을 깜박이자, 흐릿했던 시야가 점차 또렷한 형태를 갖추어갔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한 번 이것이 꿈이 아닌가, 진지하게 의심했다. 분명 빛이 터지기 전에는 함께 있지 않았던 세키라가 그녀의 옆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 있었던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12대천사는 함께 있었지만 리크비엘이나 장로 같은, 다른 천족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무엇보다, 이곳은 ‘법정’이 아니었다. “무, 무사했구나!” 세키라가 덥석 안겨들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루피아가 살아서 자신의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이었다. “세키라, 너야말로? 잘 된 거지? 어디 다치지는 않았고?” “-내가 할 소리야! 어디 있었던 거니? 아프지는 않지? 얼마나 걱정 했는지 알아!” 버럭 소리를 친 세키라의 커다란 갈색 눈 가득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고였다. 쓰러진 공녀들 덕분에 찾으러 가지도 못하고, 어떻게도 할 수 없는 무력감 속에서 걱정으로 속이 얼마나 탔는지, 멀쩡하게 숨쉬고 있는 루피아의 모습이 꿈이 아닐까 두려울 정도였다. 눈물을 쏟는 세키라를 안아주는 그녀를, 이번에는 세리엘이 덮쳤다. 걱정을 해준 그에게 화를 낼 수는 없어서 루피아는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그나저나 이건 대체 어떻게 된 일인 것일까? 세키라를 만난 것은 다행이었지만, 이렇게 되기 직전 보았던 것을 생각하면 결코 다행이 아니었다. 라우데스가 대체 왜 그때 나타났던 것인지- “그때 나타난 남자는 마계의 교황 아니었나? 그 자가 어째서…….” 역시 그녀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었다. 그러나 카마엘의 질문에 대답을 해줄 수 있을 리가 없다. 루피아 역시 어떻게 된 영문인지, 또 어떻게 흘러가는 상황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라우데스고, 에우로카엘이고. 그녀에게는 모두 골칫거리였다. “모르겠어요. 저는… 갑자기 델리드 양의 증세가 너무 악화되어서, 어떻게든 천사 분들 중 누군가를 데려와야겠다 싶어 결계 밖으로 나왔는데 하얀 빛이 터지더니…….” “이쪽도 설명이 좀 필요한데.” 세키라는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숨을 삼켰다. 그녀는 토끼 눈처럼 커다래진 눈으로 눈을 깜박거렸다. 세키라의 시선 끝자락으로 고개를 튼 루피아 역시 똑같은 얼굴이 되었다. 세상에! 뺨이라도 꼬집어야 할까? 이디스와 아로데, 로이드윈, 유리아덴, 그리고 에리나였다. 이번에는 마계에 있어야 할 이들이 눈앞에 서 있는 것이다. 루피아와 세키라는 에리나에게 달려가 서로 꼭 껴안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이야? 아니, 그것보다- 건강하니? 응?” “너야말로 어떻게 ‘천계’에 온 거야?” “…여기가 ‘천계’야?” “에?” 세 사람의 반가운 해후에 뒷전으로 밀려나 있던 이디스와 세 노마족이 앞으로 나섰다. “이쪽이야말로 설명이 필요하다. 이곳은 ‘천계’인가? 어째서 클리오라의 신전과 연결이 되어 있는지 궁금하군.” 이디스가 말했다. 라우데스에 대하여 알아보기 위하여 클리오라의 신전을 방문했던 그들은 갑작스런 폭발과 함께 이곳으로 이동되어졌던 것이다. 어딘지도 모른 채 이동되어진 것이니 황당할 만도 했다. 게다가 그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면 더더욱. “그렇게 물어도, 우리 역시 대답을 해줄 만한 것을 알고 있지 않네. 이곳이 천계인지도 모호한 판에.” 미카엘이 대답했다. 그의 말대로, 이곳이 천계인지조차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주변이 온통 안개로 가득하여 먼 곳은커녕 가까운 곳도 겨우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들 역시 아무 것도 모르므로 이곳이 천계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아! 맞아! 라우데스님! 라우데스님이 여기 있었어요! 천계의 법정에서 에우로카엘의 뒤에 나타나서는, 퍽 하고 빛의 폭발과 함께- 그래서 눈을 떠 보니까 여기였고, 옆에는 세키라가 있었고, 또…….” 말을 하다 보니, 정리가 안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 자신도 혼란스러운 상태라,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은 것이다. 루피아는 말을 멈췄다. 진정을 하고 보니, 이디스가 눈앞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중간계를 떠나기 전날 밤 자신이 저지른 대담무쌍한 짓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디스는 발갛게 달아오른 그녀를 보고 피식 웃었다. “-다시 왕이 되었어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마계의 일은 잘 풀린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이번에는 그가 물었다. “아직 돌아올 생각은 없는 건가.” 루피아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참 민망한 일이지만, 지금 다시 만남으로써 새삼 깨달았다고나 할까. 가슴 속에서부터 뭉클한 느낌이 무엇인지 알았다. 천계에 가겠다고 결심을 했을 때에만 해도, 평생 다시는 못 볼 각오까지 했지 않았던가. 이런 형태로 만나게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정말! 며칠이나 지났다고 이러는 거야! 고작 며칠 갖고 이러면, …….’ “잠깐! 라우데스? 라우데스는 죽었어! 무슨 소리야?” 에리나가 말했다. “-죽었다니? 그럴 리가 없어! 내 두 눈으로 똑똑하게 봤단 말이야? 분명 에우로카엘과 함께 나타나서 빛의 폭발과 함께 사라졌다고!” 죽었다니? 바로 몇 분전에 보았던 사람이 사실은 죽은 사람이었다고? 한여름의 괴기도 아니고 말이다. 그들은 서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천계에 있었던 사람들은 분명히 살아있는 라우데스를 보았고, 마계에 있었던 사람들은 라우데스의 죽음을 직접 확인했다고 말한다. 이디스는 라우데스의 육체가 숨이 멎어 싸늘히 굳은 것까지 확인했다. 아무리 마족이며 교황이라 하여도 죽었다 살아나는 재주가 있을 턱이 없었다. 점차 안개가 걷혀갔다. 주변이 점차 드러남에 따라, 루피아는 저도 모르게 ‘아’하는 신음을 흘렸다. 이곳은 그녀가 아는 곳이었다. 카마엘의 입에서 신음처럼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로헤델’의…… ‘유폐지’…….” 그곳에서 에우로카엘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 * * * * * * * * * * * * * “죽음의 장소로 딱 알맞은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에우로카엘의 목소리는 닿으면 쨍, 하고 얼어버릴 듯 냉기가 줄줄 흘렀다. 루피아의 기억 속에 있는 로헤델의 유폐지와 지금의 유폐지는 판이하게 달랐다. 타락 천사의 유폐지임에도 빛이 넘쳐흘러 무척 아름다웠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온통 무채색으로만 물든 황폐한 절벽이 되어버렸다. 유폐지의 하늘을 가렸던 로헤델의 은색 머리카락은 이미 색이 바랬고, 꽃은 졌다. 에우로카엘의 옆에는 로아이나와 라우데스가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너… 죽은 것 아니었나?” “언제나 말씀드렸듯, 저는 오직 신의 뜻에 따를 뿐입니다.” 라우데스는 평소와 다름없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아무 것도 다를 바 없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그 ‘신의 뜻’이라는 것이 무언데 우리가 공녀로 마계에 바쳐지게 만들고, 당신이 이런 짓을 하게 만드는 건데!” 루피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언제나 그는 ‘신의 뜻’을 말하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하는지 한 번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하다못해 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는 공녀가 마계에 온 것이 신의 뜻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이 진실인지, 또 무엇을 위한 것인지 한 번도 확답을 해준 적이 없었다. 저번에도 그랬던 것처럼 라우데스는 또 그녀의 질문에 대하여 제대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서 있을 수 없을 정도로 큰 지진이었다. 유적지 내부의 땅 전체가 흔들리며, 어느 부분은 솟아오르고 어느 부분은 내려앉기를 반복했다. 루피아는 이디스의 팔에 허리를 감겨 솟아오르는 지형에 올라가 있었다. 세키라는 아로데에게, 다른 이들은 각자 알아서 멋대로 몸부림치는 땅 위에서 자리를 잡았다. 유폐지 절벽의 반을 훌쩍 넘어버릴 높이만큼 솟아오른 땅이 있는가 하면, 내려다보자면 끝이 채 보이지도 않을 만큼 가라앉아버린 땅이 있었다. ‘셋은, 어디?’ ‘로헤델’의 얼굴이 약 열 발자국 정도 차이가 나는 곳에 있다. 루피아는 두리번거렸다. 12대천사들은 각자 높은 곳에 안착해 있었고, 세키라와 에리나 역시 아로데, 유덴, 로윈과 함께 그녀의 근처에 착지해 있었다. 주변에는 유폐지의 하늘을 메웠던 로헤델의 은발이 가득 널려 있었다. 그것을 깨닫고 루피아는 인상을 찌푸렸다. 마치 거미줄 같았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녀가 꾼 꿈의 주인공은 아무래도 에우로카엘 같다는 생각에 확신이 들어갔다. 무엇보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꾼 꿈에서 보았던 어린 꼬마와 그녀는 너무나 닮았던 것이다. 이 이상 확실한 증거가 더 이상 어디에 있겠는가? ‘제길! 그래서 뭐, 뭐 어쩌라는 거야!’ 꿈은, 그딴 꿈은 누가 보여준 것일까. 하필이면 그녀가 꾸게 된 이유는 무얼까.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꿈의 주인공이 에우로카엘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자 적어도 예전보다는 그녀에 대해 동정심이 든다는 것이다. “젠장! 망할 여자 같으니! 목적이 뭐야!” 아로데가 거칠게 소리쳤다. 그는 하마터면 저 아래로 추락할 뻔한 세키라를 고쳐 안아다 제대로 땅에다 놓아주었다. “그것을 지금, 질문이라고 하는 건가? 당연한 것 아닌가? 천계와, 마계의 소멸.” “-미, 미쳤구나?!” 미칠 거면 혼자서 곱게 미칠 것이지! 아로데는 입안으로 중얼거렸다. 그가 보기에 에우로카엘은 도저히 정상적인 정신상태를 가지고 있다고 보기 어려웠다. “아무리 나라도 천계와 마계를 한꺼번에 무너뜨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서로 죽이게 만드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하지. 그러기 위해서는 제대로 붙어줘야 해. 그렇기 때문에, 너희는 방해가 된다.” 만약 이곳이 다른 장소였다면, 에우로카엘의 이 말은 그리 위협적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로헤델의 유폐지였다. 그야말로 그녀의 홈그라운드라고도 할 수 있을 곳이었던 것이다. 날개를 찢는 과정에서 빠져나가지 않은 로헤델의 남은 기운이 오랜 시간동안 채우고, 채워진 곳이었다. 미카엘이 소리쳤다.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에우로카엘의 눈초리가 사납게 치켜 올라갔다.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싶은 순간, 미카엘은 쓰러져 목에 날카로운 창날이 대어졌다.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진 짧은 창날은 시퍼런 예기가 뚝뚝 흘러내려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에우로카엘은 긴 창대를 쥐고 그대로 목을 잘라버릴 것처럼 미카엘을 노려보며 뚝뚝 끊어 말했다. “몰라서 묻나?” “…….” 에우로카엘은 창날을 거뒀다. “단지 허울뿐인 이름으로 내가 천계에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생각했나?” 그 말로 끝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의 부연설명이 필요가 없을 말이기도 했다. 혼혈아였던 그녀가 천계에서 설 수 있는 자리가 허락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천계에 데리고 왔던 미카엘들은 그녀를 외면했고, 그녀는 스스로 살아남을 수 있을 방법을 택해야 했던 것이다. 딜렌의 경우, 그는 카디스와 카마프가 있었지만, 에우로카엘의 경우 그녀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용서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힘없는 어린아이가 살아남을 길이라곤 도망치는 것 외에는 없다. 맞고, 밟히고, 몇 번이나 죽을 지경을 헤매면서 삼킨 것은 억울함이었다. 혼혈로 태어난 것은, 나의 잘못인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렇게 되어야 하는 걸까? 마계의 어린아이들은 거칠기 때문에 그녀는 몇 번이나 몇 번이나 거의 죽을 때까지 맞았지만, 그때마다 살아남았다. 그런 그녀를 천계에서 데리러 왔다. 구원 받는 줄만 알았다. 손이 내밀어지던 날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이곳이 네가 살아갈 곳이다. 이곳에서라면 그녀를 받아줄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곳 역시 그녀가 살아갈 곳이 아니었다. “잊을 수 있을 줄 알았나? 천계에서도, 마계에서도 거부당한 내가, 그럼 가야 할 곳은 어디지? 머무를 수 있는 곳은, 어디란 말이냐! 너는 나더러 이곳에서 살라고 했지만, 어떻게 살아가란 말이었나? 차라리 잔인하기는, 천계가 더 잔인했다.” 존재 자체를 부정당했다. 그녀는, 있어도 없는 것과 같았다. 길가의 돌처럼, 천족은 그녀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던 것이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마계가 훨씬 나았다. “이곳에 처음 온 것은 마계에 있을 때였다. 그때는 무엇을 만났는지, 무엇을 얻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지. 천계에 오게 되고 한참이 지난 후, 라우데스를 만나고 나서야 겨우 알았다. 킥! 웃기는 일이야.” 에우로카엘은 창대를 손에 바로 쥐었다. 미카엘은 땅에 눕혀진 채, 그대로였다. ‘천계에서 라우데스를 만나……?’ 이 의문을 입 밖으로 꺼내기도 전에, 루피아는 비명을 내질러야 했다. 피가 튀었다. * * * * * * * * * * * * * * * -신님, 신님. 행복해지고 싶어요. -아프고 싶지 않아요. 혼혈이라는 것은, 그렇게나 큰 죄인가요? -제 잘못이 아닌데, 그런데도 아파야 하나요? -제가 있을 곳은 어디인가요. 당신의 곁인가요? 아니면 저 빛의 신님 곁인가요? 고요한 가운데, 아이의 목소리만이 또렷이 귀를 파고든다. -더 이상 맞지 않게 해주세요. -제 소원을 들어주세요. 제발……. 바람은, 형태로 남아 머릿속에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 * * * * * * * * * * * * * * “로, 로아이나님.” 에리나가 넋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그녀의 것이 아닌 핏물이 묻어있다. 에리나는 떨리는 손가락을 뺨에 가져다 대어, 미끈거리는 액체의 존재를 눈으로 확인했다. 손가락 끝에 벌건 색의-… 유리아덴의 품에 안긴 순간, 기분 나쁜 소리가 터졌다. 퍼엉! “-끼, 끼야아아아아아아-악!” 못 본 것은 에리나 한 명 뿐이었는지, 세키라의 소스라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굳이 보지 않았어도, 그 소리가 무슨 소리였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코끝에 화악, 하고 퍼지는, 속을 뒤집어 놓는 이 냄새. 그것은 본래 에리나를 노리고 들어온 공격이 아니었다. 그러나 유리아덴이 미처 피하지 못했고, 그 앞을 로아이나가 가로막은 것이다. 피의 주인은 로아이나였다. 그는 마치 이런 때를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보였다. 에우로카엘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로아이나는, 왼쪽 몸통이 절반쯤 날아간 상태였다. 인간이었다면 벌써 정신을 놓은 지 오래였을 테지만, 그는 아직까지 두 다리로 버티고 서 있었다. 거의 쏟아져 내리다시피 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핏물 위로 몇 방울이 뚝, 뚜둑, 떨어져 내린다. 뜯긴 옷자락인지, 내장인지 주변주변 검게 탄 무언가도 보인다. “크, 크- 흣.” 괴롭게 일그러진 와중에도, 로아이나는 힘겹게 입 꼬리를 당겼다. 그는 얼어붙은 에우로카엘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면서, 슬픈 것인지 아픈 것인지 모를 미소를 지었다. 그는 띄엄띄엄, 꺽꺽거리며 말했다. “주, 죽을 때- 쿨럭! 만큼은,” 그는 쓰러져 내렸다. “‘마족’으로서…….” 그것은, 그의 유일한 바람이자 소원이다. 비록 마계를 배신하고,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지만, 죽을 때만큼은 옛날 그대로이고 싶었다. “로아이나?” 쓰러지는 그를, 그녀가 붙잡아 안아 올렸다. 하지만 이미 로아이나는 눈을 감은 뒤였다. 그의 눈감은 얼굴 위로 눈물방울이 또록또록 떨어져 내렸다. 에우로카엘은 울고 있었다. 그녀 스스로도, 그런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더러운 ‘마족’인 그를 싫어한다고, 경멸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로헤델’의 감정인가? 심장이 따끔거리면서 각막 위로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이 떠올라 없어지지 않는다. 상처 입은 혼혈족 꼬마에게, 따듯하게 웃으면서 손을 내밀어주던, ‘마족’-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기억이었지 로헤델의 기억이 아니다. 천계에서 유일하게 그녀를 ‘보아줬던’ 루피아의 기억도, 그녀의 것이지 로헤델의 것이 아니다. 그럼? 그녀의 앞으로 그림자가 졌다. 그녀는 숨을 삼켰다. 앞에는, 이디스가 냉정한 얼굴로 그녀에게 검을 들이대고 있었다. 그녀가 바닥에 떨어뜨린 창을 채 잡아들기도 전에 이디스의 칼이 그녀에게로 쇄도해 들어갔다. * * * * * * * * * * * * * * * “-내게 에우로카엘의 꿈을 보여준 것은 역시 당신이었죠?” 거의 확신에 찬 물음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짐작이 가는 것은 그 하나뿐이었다. 에우로카엘과 그가 어떤 관계인지는 알 수 없지만, 루피아는 확신했다. 이디스의 검은 라우데스의 앞에서 막혀 있었다. 에우로카엘의 앞에 나타난 라우데스에 의해, 지금은 묘한 정적 상태가 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많은 일을 했지요. 허나 저는 그저 대리자일 뿐입니다.” “또 그놈의 ‘신의 뜻’-입니까?” 라우데스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지겨울 정도였다. 그놈의 신의 뜻, 이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이기에! “신의 뜻, 신의 뜻! 지긋지긋해요! 아하- 그래서 에우로카엘을 뒤에서 조정하고, 배후에서 그녀의 뒷받침이 되어 주셨어요? 그놈의 위대하신 신의 뜻이라는 것은, 뭘 원하고 있건대 우리가 공녀로 마계에 가야 했던 거죠!” 딜렌과 리크비엘의 뒤에 있던 것이 에우로카엘이라면, 그녀의 뒤에 있던 것이 바로 라우데스였다. 로아이나를 에우로카엘에게 준 것이 로헤델이었다면, 로헤델과 에우로카엘의 인연이 닿도록 도와준 것은 바로 라우데스였다는 것이다. “신이 원하시는 것이 대체 뭔데요!!” 이대로 모르고 넘어가는 것은 너무 억울하다. 공녀로 바쳐진 덕분에 인생이 송두리째 뿌리 뽑혀 180도 바뀌어 버렸는데, 이대로 이유도 모른 채 살아가기에는 너무 억울했다. 그 해답을 알고 있는 사람을 앞에 두고 절대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신은 무슨 의도였기에 그녀들을 마계에 오게 만들었을까. 신탁이라는 강제적인 수단을 써서까지 그녀들에게서 얻어내고 싶었던 것이 대체 무엇이었을까? 잠시 후 그의 입이 열리면서 나온 말은, 전혀 다른 말이었다. “클리오라께서는, 에우로카엘의 손을 들어주셨습니다.” “-그게 ‘공녀’건과 무슨 관계가 있어요?” “제가 그녀를 ‘로헤델’에게로 인도한 것은 그 분의 가르침 때문입니다. 저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저는, 단지 그분의 대리자이자 따르는 종일 뿐. 여기 있는 저는, 그저 빈껍데기라고 보셔도 좋으실 겁니다. 이미 수명은 다했으니.” 그렇게 말하는 라우데스의 얼굴은 마치 모든 것을 초탈한 사람 같았다. 그는 완벽한 대리자가 되고자 노력했고, 모든 것이 그 분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는 눈을 감았다. 벌써 기억도 못할 만큼 수없이, 세계는 멸망과 탄생을 반복하여 왔다. 그것은 한낱 창조물인 그로서는 느끼지도 못하며, 인식하지도 못하는 억겁의 세월을 통한 반복이었다. 어버이 클리오라는 그에게 그 진실을 ‘인식’할 수 있도록 깨달음을 주었고, 그로 인해 그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러나 어둠은 어둠이오, 빛은 빛이었다. 마계와 천계, 중간계- 간혹 이름과 구조가 바뀐다 하여도 ‘창조물’은 언제나 편을 갈랐다. 그로 인한 전쟁과 질투, 시기의 반복- 또한 그로 인한 멸망이 계속되었다. 물론 그 속에서도 혼혈아(混血兒)는 언제나 있어왔지만, 뚜렷한 경계 속에 스스로 살아갈 곳을 찾지 못한 그들은, 언제나 외면 받고 질타와 무시, 경멸과 기피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게 반복, 반복, 반복……. “당신과 이디스님을 중간계로 보내드린 것도 저입니다.” “……!!” “돌아가셨던 이디스님을 살려내신 것 역시, 그 분이십니다. 이디스님께서는 아직 제3차 천지대전 때에 싸워주셔야 할 임무가 남아 있으니까요.” 딜렌은 로아이나에 의하여 이디스를 죽였었고, 로아이나는 에우로카엘에 의하여 움직이며, 에우로카엘은 라우데스에 의하여, 그리고 라우데스는 클리오라의 뜻에 의해 움직인다. “그, 그런 것이 어디 있어요?! 시, 신이시라면, 천계와 마계가 소멸하지 않길 바라시는 것이 아닌가요? 에우로카엘이 원하는 대로 소멸하도록 돕겠다는 말씀이세요, 지금-?” “그것이 클리오라께서 원하시는 바라면, 기꺼이.” 허허허, 하고 라우데스는 웃었다. 그는 두 팔을 허공으로 들어올렸다. 쿠구궁- 발바닥으로부터 잔한 진동이 타고 올라왔다. 루피아와, 모두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저, 저건! 용암! * * * * * * * * * * * * * * * 숨소리가 점점 더 약해져 갔다. 에웰로니 국의 공녀는 델리드의 손을 주물거리며 오르가프의 이름을 외쳐 불렀다. 리더십이 강한 델리드가 죽게 되면, 솔직히 말해 그 타격은 눈에 띠지 않는 다른 공녀 둘이 죽는 것보다 클 것이다. ‘세키라 님도 제발 아무 일이 없으셔야 할 텐데…….’ 지금에 와서는 그녀의 신상안전이 더 걱정이 되었다. 무모한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말리지 못한 것은, 이대로 손놓고 있는 것보다 나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으나 자칫하다가는 델리드뿐 아니라 세키라마저도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후회가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델리드의 체력은 바닥이 드러나고 있고, 세키라는 돌아오지 않는다. 로위나는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못 참겠어요! 제가 나가서, 찾아보겠어요.” 로위나가 결국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에웰로니 국의 공녀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고 끌어당겼다. “절대 안 돼요! 이 중에 가장 상태가 나쁜 당신이 가긴 어딜 간단 말이에요!” “하지만, 이제 걸어 다닐 만 하도 하고, 무엇보다- 답답해서 못 참겠어요!” “안 돼! 앉아요!! 몸을 망가뜨릴 참이에요? 자기 몸을 자기가 안 챙기면 누가 챙긴다고?” 일일이 자신을 챙겨줄 가족이 없는 이상, 이런 곳에서 몸이 망가지게 된다면 책임져 줄 사람이 없다. 만약 무리하여 몸에 이상이라도 생겨 버린다면, 그것은 폐밖에 되지 않는다. “제가 대신 나가볼게요. 그러니 당신은 가만히 계세요.” 비록 로위나와 함께 호흡곤란을 일으킨 그녀였지만, 그녀는 스스로 몸을 잘 돌봤기 때문에 다른 공녀들에 비해 상태가 월등히 좋았다. “그럼 델리드 양은 누가 진찰해요!” 로위나의 반문에 에웰로니 국의 그녀는 잠시 입술을 깨물고는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이내 결심한 듯 말했다. “-하는 수 없죠. 당신이 가세요. 단, 혼자는 안 돼요.” 그녀는 엄히 말했다. 로위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페넬로페와 조셀린이 그녀의 옆에 따라붙었다. 가만히 있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무엇보다 좋았다. 그러나 그녀가 벌떡 일어나자마자, 낯선 발자국소리가 다가왔다.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가 무거운 것으로 봐서 절대 세키라 공녀는 아니었다. 그것도, 적어도 약 대여섯 명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설마 세키라님께서 먼저 천사들을 보내셨나? 그것도 아니면- 다른 천족이? 그녀들은 바짝 긴장했다. 어디로 도망갈 곳도 없고, 그녀들의 절반 이상이 환자였다. 제발, 제발 다른 천족이 아니기를! 코너 하나를 남겨두고, 발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저벅저벅. 저벅. 세 걸음, 두 걸음, 한 걸음…… 그녀들은 서로를 꼭 껴안았다. 드디어 코너를 돌아, 발자국의 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앗!” “-아앗!” 로위나와 에웰로니국의 공녀를 비롯한 모든 공녀들의 입에서 멍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모두 공통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왜 저들이 여기에 있지? 라는. 그만큼 지금의 만남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입을 다물지 못하던 공녀들 가운데 누군가가 말했다. “-마족?” -------------------------------------------------------------------------- 중간에 끊어서 두 개로 만들까.. 도 생각해 봤지만- -; 끊어 읽으면 안그래도 이상한 게 더 이상해질 것 같아서- -;; 추석 연휴 마지막 날입니다. 이제 한 편.. 정도하고, 에필로그 정도일까. 남은 것은;; 오늘 하루 내에 끝내겠습니다!+_+/ 라우데스 : 허허! 신(新) 기술! [팔을허공으로번쩍]솟아라, 용암~~~ 루피아.이디스: ......[.....] 아로데 : 나이 먹어서 저러고 싶을까- - 제 목: 공녀(貢女) : 제53화 [공녀의 존재이유](2)完 2004/09/30 01:38:39 161 0 네이에르 (포인트 : 978점) #. 53화 ‘공녀(貢女)의 존재이유’ * * * * * * * * * * * * * * * 뜨거운 기운이 얼굴을 향해 화악- 하고 달려든다. 턱, 하고 숨이 콱 막히고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 솟구쳐 오른 시뻘건 용암이 벌름, 벌름 그녀를 잡아먹으려 들었다. 이디스는 팔에 그녀를 안고 망토로 감싼 채 재빠르게 뛰어올랐다. 이디스에게 한 겹 보호받고 있음에도 온몸이 타버릴 것처럼 화끈거렸다. 세키라와 에리나가 무사한 모습을 확인하고, 그녀는 허락된 한에서 최대한 시선을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교황 라우데스는 여유로이 허공에 떠 있었고, 다른 이들은 제대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대충 용암에 휩쓸려 사라진 사람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용암은 일정한 높이 이상으로는 올라오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괜찮은 것 같았다. 그때 에리엘의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미카엘!” 큭, 하고 그는 이를 앙다물었다. 뜨거운 열기 속에서도 에우로카엘의 날카로운 창날의 예기(銳氣)는 빛을 바라지 않고 여전히 시퍼런 빛을 품고 있었다. 그녀의 초승달 모양의 창날이 그대로 미카엘의 목 바로 옆에 꽂혀 있었고, 미카엘은 그것을 검집으로 간신히 막아내고 있었다. 그나마 검집조차 이미 금이 가 있다. “당신만은, 꼭 내 손으로 죽여!” 아직까지 생생히 기억을 하고 있다. 그녀를 빛으로 끌고 가 줄 것이라는 믿음을 담아 잡았던 그 손은, 온통 새하얀 세상 속에서 아무 것도 모르는 그녀를 혼자 내팽개쳤다. 그녀는 전혀 모르는 곳에 혼자 내버려진 것이다. 그 손과, 그 음성. 거칠게 일렁이는 용암 따위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이, 이 열기 속에서도 에우로카엘은 멀쩡한 얼굴이었다. 대신 그녀의 눈길은, 분노와 증오로 뒤얽혀 불길을 뿜어내고 있다. 시퍼런 불길을. 에우로카엘이 미카엘을 잡고 있는 동안, 이디스와 세 노마족은 라우데스에게로 덤벼들었다. 라우데스는 전투 능력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은 그들이 가장 잘 알았다. 신의 가호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용암을 조정하는 능력만 제외하면 그들을 공격할 수단이라고는 늙은 몸밖에 없다. 로이드윈의 손톱이 길게 쑥 늘어났다. 그는 그대로 용암을 향하여 팔을 크게 휘둘러 한 번 긋고, 곧이어 손가락 끝에서 거짓말처럼 가느다란 붉은 와이어를 뽑아냈다. 그것을 몇 개씩 겹쳐서 허공에 발 디딤대를 만든 그는, 그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다음, 아로데가 그대로 주먹에 그의 마력을 둘러, 로이드윈의 와이어에서 한 번 크게 도약한 뒤 라우데스의 위에서 아래로 주먹을 내리 박았다. 그는, 라우데스의 몸 따위야 쉽게 뭉그러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했었다. 그러나 아로데는 라우데스의 몸에 주먹이 닿자마자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단단했다. 마치 특수한 합금에 주먹을 내리친 것처럼, 오히려 그의 주먹에 타격을 되돌릴 만큼 단단했던 것이다. 그는 주먹을 감싸 쥐고 와이어 위로 되돌아왔다. 그 다음은 유리아덴이었다. 부연 보랏빛 마기가 모여 허공에 긴 창을 생성시켰다. 창대의 거의 끝을 잡고, 그는 그대로 창을 라우데스에게로 꽂아 넣었다. 그러나 창은 이상한 소리를 내며 튕겨 나왔다. 키잉! 마치 금속이나 바위에 흠집이 나는 것 같은 소리였다. 이디스와 세 노마족에게 둘러싸인 라우데스는, 용암의 불길 속에서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그는 처음 용암을 불러낼 때처럼 위로 팔을 들어올렸다. 그의 팔짓에 따라 용암이 춤을 춰댔다. 루피아와 세키라, 에리나는 눈앞의 장면들을 정신없이 쳐다봤다. 로이드윈의 붉고 가느다란 와이어 줄 하며, 아로데의 주먹, 유덴의 보라색 장창- 그리고 화려하게 춤추는 용암의 불꽃! 그 화려함에 눈을 빼앗겨, 세키라는 무심코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쭉 뻗은 손에 불꽃의 파편이 튀었다. “꺅! 뜨거워-…… 앗!” 앞으로 내밀었던 몸이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어, 앞으로 기울었다. 옆에 있던 에리나와 루피아가 옷자락을 잡아챘지만, 결국 그녀들마저 함께 떨어져 버렸다! “끼야아아아아아아악!” 죽는다! 그 순간, 틀림없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디스가 남겨준 망토로 몸을 감싸고 있지 않았더라면, 이곳에서 숨쉬고 있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지금, 그녀는 밑으로 떨어지고 있지 않은가! 벌써 몸의 바깥은 오그라들어가는 느낌마저 들었다. 루피아는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두 친구를 꼭 붙들었다. 떨어지면서, 얼핏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것 같다. 하지만 루피아는 그런 것을 제대로 들을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용암이 몸을 덮치지 않고, 이제 더 이상 떨어지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어쩐지 지금은, 숨쉬기가 그리 힘겹지 않은-……? “-아!”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포근해 보이는 회색 날개. 눈부신 여섯 장을 한꺼번에 펴서, 세 사람을 둥글게 감싸고 있는 아름다운 날개였다. 루피아는 고개를 들었다. “괜찮…… 아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자신을 끌어당긴 팔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찡그린 듯, 찡그리지 않은 얼굴에는 고통이 스며있었다. 루피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무심코 에우로카엘의 은색 앞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놀란 얼굴이 되었다가, 다시 방그레 웃었다. “아…… 역시,” “-에우로카엘?!” 에우로카엘의 고개가 점차 뒤로 넘어갔다. 세 사람을 둥글게 감싸 안았던 여섯 장의 날개가 점차 풀려나갔다. 그녀는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환상이 아니었어-…….” “에우로카엘!!!” 그 장면은 마치 불꽃에 잡아먹히는 것 같았다. 뱀의 혀 같은 불꽃이 에우로카엘의 몸뚱이를 날름, 집어삼켰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 중심으로부터 용암이 빠르게 굳어나가기 시작했다. 살아 움직이던 뱀의 몸이 그대로 굳어버린 것 같은 형상으로- 툭. 투둑……. 돌멩이가 용암모양으로 굳은 땅 위로 떨어져 굴렀다. 라우데스는 형편없이 바닥을 구르는 자신의 손가락을 아니, 손가락이었던 돌멩이를 쳐다보았다. 다시 깨어난 이래 감각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떨어져나간 손가락의 울퉁불퉁한 끝에서는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가 경건한 몸가짐으로 무릎을 꿇었다. 이미 발목까지는 돌로 변해있어 굽혀지지도 않았다. 그의 곁으로 루피아가 다가왔다. “공녀는 시작이 되어주길 바랐습니다. 아무리 반복을 거듭하여도 무너지지 않는, 종족간의 경계를 허물러 주기를. 중간계의 생물도, 천계와 마계의 생물도- 모두 함께 같은 어버이의 자식임을 깨달아 주기를. 모두 같건만, 조금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살 곳을 찾지 못하여 방황하는 일이 없도록. ‘나에게’ 소원을 빈-…….” 그의 목까지 진회색의 돌로 변하였다. 그래서인지,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른 톤을 가지고 있었다. “자식들이 행복하기를.” 그 말을 끝으로, 차분히 눈을 내리감은 라우데스의 얼굴 끝까지 돌로 변했다. -제 소원을 들어주세요. 제발……. “결국 그건, 당신의 뜻이었어? 아니면 ‘신의 뜻’이었어-?” * * * * * * * * * * * * * * * “끄으-읕났다아아!” 에리나가 시원스럽게 기지개를 켜면서 말했다. 돌바닥이라 바닥에서부터 찬 기운이 올라오기는 했지만, 바람은 시원하게 불고 하늘은 파랗다! 게다가 복잡한 일이 모두 끝났으니, 이 얼마나 시원한 일인가! 이제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아앗!” 세키라는 자신이 어째서 결계 밖으로 나오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냈다. 델리드! 그녀는 델리드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생명이 경각에 달렸는데도 그녀는 델리드에 관한 일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죄책감에 그녀는 거의 울 듯하게 가장 가까이에 있던 에리엘에게 매달렸다. “크, 큰일 났어요! 델리드 양의 목숨이 위험해요! 얼른 같이 가주세요!” 분명 루피아와 재회했을 때 한번 말했었지만, 그때는 정신도 없고 경황도 없어서 아무도 신경을 쓰지 못했다. 특히 델리드를 알고 있는 에리나와 루피아는 세키라의 말에 벌떡 일어났다. 신성력 과다 노출에 의한 부작용이라니? 세상에 그런 사기 같은 병명이 어디 있어! 서둘러서 천계의 ‘하쉬핌’에 도착한 일행을 반긴 것은, 그대로 세키라의 얼을 빼 놓았다. 분명 이곳은 천계인데, 그런데 어째서 마족이 저렇게 당당하게 돌아다닐 수 있는 걸까? 그녀의 뒤에 서 있는 이디스와 세 노마족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건 뭐 한둘이 아니었다. 세키라는 로위나를 붙잡고 영문을 물었다. “저도 잘 모르겠지만, 결계 안으로 갑자기 들이닥치셔서는- 일단은, 도와주고 계세요.” 로위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처음 마족이 들이닥친 줄 알았을 때는 정말이지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들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로위나는 무작정 부탁했다. 도와달라고, 어떻게든 도와달라고. 다행히도 델리드는 결계 안에서 신성력이 조금씩 중화되어 가는지 상태가 괜찮아졌고, 그 후부터 마족들은 그녀들의 간호를 돕고 있었다. 12대천사의 뒤에 몰래 숨어있던 루피아는 에리나와 서로 눈을 마주치고는 씩 웃었다. 세상천지, 중간계도 천계에서 있을 수 없다면 마계밖에 더 있겠는가. 하지만 공녀들이 마계에 가고 싶어 할 리는 없어서, 어떻게든 중간계에서 다함께 숨어 살자고 제안하려고 했던 루피아였다. 하지만 이 것도, 어쩌면 잘 풀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아직까지도, 그녀는 다른 공녀들과 사이가 안 좋으니까, 괜히 좋은 분위기 깨지 말고 일찌감치 피하자- 라는 생각에서였다. “…아직도 돌아올 생각이 없나.” 이디스였다. 루피아는, 내심 피식 웃었다. 그는 그녀가 천계로 간 그때부터, 어쩔 수 없을 때가 아니면 절대로 먼저 손을 대지 않았다. 지금도 그는 그녀에게서 적어도 두 발짝은 떨어져서 말을 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정한 그녀와의 거리일지도 모른다. “첫째, 하루에 말은 꼭 스무 마디 이상씩 해야 하고, 둘째, 무슨 일이 있을 때는 꼭 나한테 먼저 말해줘야 하고, 셋째, -나 죽을 때까지 잘해줘야 하고요. 이 세 가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킬 자신 있어요?” 그는 무척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푸훗, 하고 웃으면서 단숨에 그 두 걸음의 거리를 좁혔다. 그녀는 팔로 그의 목을 감으면서, 귀에 대고 속삭였다. “다녀왔어요.” 제 목: -Epilogue 2004/09/30 01:44:27 161 0 네이에르 (포인트 : 978점) #. Epilogue -중간계 1. 한가로운 오후의 티타임. 온 가족이 모여 늦봄의 따사로운 햇살을 느끼는 시간이다. 유난히 녹색 이파리가 짙게 우거진, 명문가의 아름다운 저택의 정원- “잘 지내고 있으려나.” 한 남자의 넋두리 비슷한 말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여자가 다가와 쿠키를 내려놓으며 웃었다. 그 여자는 몸의 선이 가느다랗고 유려했으며, 다른 인간과 달리 귀가 길었다. “그럼요, 누구 동생이신데요.” “그렇지? 케이르, 한 잔 더 주겠나?” “네. 엘린, 쟈스민 포트 좀 이리 줘.” 쟈스민 포트를 가져다 준, 또 다른 여자 역시 전체적으로 선이 가늘고 날렵했으며, 귀가 길었다. 그녀는 활기찬 목소리로 외쳤다. “히투니아 언니, 바르에든 오라버니! 지각하셨으니까 벌금♡” “에딜위나, 이 쿠키 너무 달아.” 활기찬 젊은이들을 바라보는 세 남자와 한 부인. 우아한 모습으로 향기로운 차를 마시는 부인은 너무나 평화로워 보이지만, 세 남자는 부인의 한 마디에, 한꺼번에 컵을 깨버린다. “그딴 녀석은 사위가 아니야!”×3 2. 생동감이 넘치는 시장. 호객하는 장사꾼들, 값을 조금이라도 깎으려는 구매자들, 구경하는 사람들로 거리는 넘쳐난다. 그 사이사이를 요령 있게 피해 걸어가며 빠른 걸음으로 걷는 여자 한 명. 갈색 머리카락의, 뺨에는 주근깨가 앉은 평범한 여자다. “생선 사세요! 막 잡은 펄~ 떡 펄떡한 생선!” “밀가루 있어요! 햇살 머금고 자란 밀을 빻아 만든 최상의 밀가루!” “거기 가는 아가씨, 사과 하나 어떠시우?” “베키, 싱싱한 과일 들여놨어!” 대충대충 듣는 것 같으면서도, 여자는 그 많은 말에 일일이 대답을 다 해주고 있었다. 생선은 오늘 안 먹어요. 밀가루는 어제 샀는데 어쩌죠? 사과는 알레르기가 있어서. 조금 있다 가는 길에 사갈 테니까 싸놓아 주세요. 그리고 오늘도 바쁜 하루를 사는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는 목소리. “베키 양♡ 오늘도 마주치다니, 이건 운명…….” 화려한 백금발에 깊고 영리하게 반짝이는 녹색 눈동자, 큰 키와 수려함을 갖춘 미남이다. 아직 소년티가 남아있긴 하지만 그럭저럭 청년이라 불러줄 만한 외모. 여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돌아보게 생겼음에도 여자의 반응은 철저한 무시. “앗! 베키, 그렇게 싸늘하게 무시하다니!” 그러나 남자는 여전히 열렬하다. 여자는 심각하게 귀마개를 하나 가야 할까 고민하다. 무시, 무시! 그녀의 앞길에는 오직 일 뿐이다! 바쁘다, 그녀! 3. 머리가 지끈거리다. 호화로운 방에서 나와 호화로운 복도를 걸어가며 남자, 양 관자놀이를 꾹 누르다. 아직 생각 없다니까 저러시네. 하지만 황태자 된 책임은 져야 하겠지. 머릿속에 온갖 데이터가 다 떠오르다. 이 여자는 아비가 너무 욕심이 많아서 안 되고, 이 여자는 머리에 든 것이 있기나 한가 의심이 가고, 저 여자는 어쩌고, 고 여자는 어쩌고… 그러다 결국 포기. 몇 해 전, 공녀 때문에 골치 썼었던 것이 생각나다. ‘그 여자, 생긴 것은 정말 내 취향이었는데.’ …모종의 사건이 함께 떠올라, 얼굴 빨개지다. -마계 1. 쾅! 쿠우웅! 건물 무너지는 소리, 가느다란(하지만 분명한) 사람들의 비명소리 함께 들리다. 동시에, 하늘로 솟구쳐 오른 회색 연기. 그 사이로 하얀 빛이 반짝이고, 빛은 둥근 호선(弧線)을 그려 연기를 반으로 잘랐다. “오~ 많이 늘었는데, 에리나!” 허리에서 찰랑이는 눈부신 금발을 반으로 묶어 올리고, 도도하게 치켜 뜬 눈매와 아름다운 진 초록색 눈동자가 아름다운 여자다. 그녀의 손에 들린, 백색의 늘씬한 검 한 자루. 승천하는 용이 감싼 검에서 냉기(冷氣)와 품위가 흐른다. 또한 그것을 쥔 여자의 움직임 자체도 깔끔하고 세련되다. 마치 춤이라도 추는 듯. “맞아. 정말 아름다웠는걸.” 감탄하는 여자는, 굵게 진 웨이브의 갈색 머리카락을 어깨 부근까지 기른, 전체적으로 굉장히 가녀리고 하얀 여인이었다. 그녀의 예쁜 왼쪽 손등에는 조그만 화상 흉터가 남아 있다. 그녀의 갈색 눈에는 총기(聰氣)가 가득했다. 두 사람의 찬사에도 불구하고, 검을 든 여인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보라색 머리칼의, 무표정한 얼굴을 한 남자가 ‘잘했다’라고 말하자, 그제야 얼굴이 밝아진다. 그런 두 사람을 보는 여자의 눈이 따듯해졌다. 초록색 머리칼의 다갈색 피부를 가진 남자가 그녀 손등의 화상에 입맞춤. 여자 생긋 웃다. “그나저나 이름을…….” “에? 안 되나요? 그렇게 이상한가.” “……아니, 안 될 것은 없지만…….” 2. 어디선가 들려오는 것 같은 폭발음에 뒤를 돌아봤다. 긴 검은 머리카락을 가볍게 묶어 올리고, 자수정색 눈동자를 반짝거리는 여인은, 아기 침대에서 곱게 아이를 안아 올려 분유 냄새에 코를 박는다. 아기는 한쪽 눈은 보라색, 다른 한쪽 눈은 붉은 색이었다. 하얗고 통통한 볼을 딱 꼬집자 아기가 헤실헤실 웃었다. “-아기 냄새는 다 이래?” “그야 먹는 게 다 분유이니까 어쩔 수 없지. 왜, 싫어?” “아아니. 절대로 아냐. 그냥.” 헤죽 웃으면서 말하는 남자에게 여자는 싱긋 웃어주며 생각했다. 카른이 아주 애를 다 버려 놨구만. 어리광을 자꾸 피우게 내버려두니까 이러잖아. 애교가 많아서 좋긴 하지만. 그때 남자가 들어섰다. 그는 손에 분유통과 아기 옷을 가지고 있었다. 분유를 타기 위해 여자가 분유통과 아기 옷을 받아들고, 남자는 아기를 넘겨받았다. 아기가 남자 손에 넘어가자마자, 아기가 빽빽- 악을 쓰며 울어댄다. “어, 어떻게 해? 루, 루피아!” “좀 달래 봐요. 아빠가 그것도 못해요? 살살 얼러요.” “잠깐…… 윽!” “흠. 그런데 우리 애 이름이 ‘에우로카엘’이고 세키라 애 이름이 ‘로아이나’면, …좀 묘하지 않을까요?” “울음을 안 멈춰.” 남자의 단아하게 생긴 얼굴은, 무섭게 굳어 있었다. “답답하긴. 아기가 울 때는 세 가지라구요. 배고플 때, 아플 때, 찝찝할 때.” “……." 만지면 부서질까, 힘을 주면 깨어질까 조심조심 아기를 얼러 안던 남자의 손이 멈췄다. 여자는 히죽 웃었다. “잠은 이제까지 실~컷 잤고, 분유는 내가 타니까," 여자는 굉장히 즐거워 보였다. “기저귀 좀 갈아줘요♡" -------------------------------------------------- 에필로그 적어보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ㅠ 프롤로그는 적기 쉬워도 에필로그는 쓰기 어려우니까;;← 급하게 쓰느라, 급하게 끊은 감이 있긴 하지만.. 호빵님, 레이님, 죄송합니다ㅠ 제일 먼저 리플을 달아주셨는데 수정할 것이 있어 수정하다 그만; 삭제를 눌러 버렸습니다아아[]<- ..리플ㅠ 메일 : donghee425@hanmail.net 리플 : 요 아래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