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 골든메이지12 지은이: 김현우 펴낸이: 신현호 출판사: 디앤씨미디어 출판년도: 2009년 1월 13일 봉사자: 김진명 <지은이 소개/ 김현우> 마음만은 여전히 신인. 오늘도 매일같이 키보드를 두드린다. 활동하는곳: 소설가의 숲(http://cafe.naver.com/forestofnovelist) 개인미니홈피: (http://www.cyworld.com/golden0121) 출간작: 셀피어드 전기, 프리덤, 검공 아리엘 <차례> Chap.1 금탑 붕괴 계획 Chap.2 프로미넌스 Chap3. 초인 집결 Chap4. 밝혀진 비밀 Chap5. 마도 제국의 황도 켈빙턴으로 Chap6. 초인들의 신위 Chap7. 세상에는 절대 불변의 법칙이 존재하는 법이다 Chap8. 아토빌 공작의 배신 Chap9. 균형이 만들어내는 평화 Epilog. Chap.1 금탑 붕괴 계획 날이 밝았다. 기나긴 밤을 침묵으로 보낸 것은 하나의 암묵적인 약속과 같다. 넓은 평원에서 대군이 진을 치고 있으면 어떠한 전략도 통용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때문에 대군들이 서로 대치하고 있을 때에는 야밤에 조용히 휴식을 취하는 것이 전쟁에 있어 하나의 묵계가 되어 버렸다. 긴 밤이 흐르고 날이 밝으면 그것은 전쟁을 알리는 서 막이라 할 수 있다. 다이어드 공작은 신중한 표정을 지은 채 적진을 둘러보았다. "이상하군." 비단 오늘뿐만이 아니다. 어제도, 그 전날도, 그 전의 전날도. 마도 제국군의 진영을 살피는 다이어드 공작의 눈에는 의아함이 가득했다. "왜 마도 제국에서 공격을 멈추었지?" 다이어드 공작이 오랫동안 고민해 온 것은 바로 마도 제국의 갑작스런 공격의 중단 때문이었다. 얼마 전, 2명의 8클래스 마법사인 멜뤼스와 코린트가 왕국 연합군에 합류하기 전까지 마도 제국군은 그야말로 파상적인 공세를 왕국 연합군에 퍼부어 댔다. 그로 인해 왕국 연합군은 엄청나게 큰 피해를 입어야만 했다. 마도 제국에서 물경 2명의 8클래스 마법사를 전장 터에 지원을 했기 때문이다. 초인은 전쟁에서 정말 대단한 힘을 발휘한다. 당장 초인이 있는 군대와 없는 군대는 그 사기의 차이가 절대적 이며, 다수의 강자들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는 그들의 힘 에 대적할 수 있는 건 같은 급수의 초인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초인 중에서도 전쟁의 악마라 불리는 존재가 있다. 바로 8클래스 마법사들이다. 그들의 강력한 마법은 수천에 이르는 군대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 수 있으며, 강력한 기사단 하나를 전멸시킬 수도 있다.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8클래스 마법사가 무려 2명이나 합세했다. 그들 하나하나가 결코 다이어드 공작에 비해 처지는 인물들이 아니었다. 그들이 나타나자 다이어드 공작은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온 힘을 다해 그들을 막아야 했다. 1명의 그랜드 마스터와 2명의 8클래스 마법사. 이는 초인들 중 최강이라 평가받는 아토빌 공작이나 백탑주 유클레이조차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제 아무리 초인 간에 실력 차이가 존재한다고 하나 초인들 하나하나가 결코 얕볼 수 없는 고강한 실력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다행이라면 그에게 세인트 해머가 있다는 점이었다. 세인트 해머는 마나에 극성의 성질을 지닌다. 당연히 마법에도 극성의 성질을 지니고 있다. 마법은 자연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비튼 결정체였기에 사마를 멸한다는 세인트 해머가 극성의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랬기에 마도 제국에 3명의 초인이 있었음에도 그는 멜뤼스와 코린트가 합류할 때까지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버티는 것만으로도 그는 힘겨웠다. 적국의 초인이 강력한 힘을 지닌 만큼 그들이 동시에 공격해 오는 것은 그가 막아 낼 수 없었던 것이다. 두 손이 열 손을 못 막아 내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로 인해 왕국 연합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만 했다. 다이어드 공작이 미처 막아 내지 못한 8클래스 마법이 군에 작렬하면서 수천 명에 이르는 피해가 발생한 것이다. 만약 멜뤼스와 코린트의 합류가 조금만 늦었어도 왕국 연합군은 8클래스 마법사들에 의해 와해될 뻔하였다. 왕국 연합군에도 세 초인이 합류하자 전선은 빠르게 소강상태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미 8클래스 마법을 톡톡히 맛본 왕국 연합군의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진 후였다. 만약 여기서 마도 제국이 총공세를 퍼부었다면 왕국 연합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냐, 마도 제국." 좀처럼 굳은 표정을 풀지 않은 채 다이어드 공작은 마도 제국군을 노려보았다. 꽤 긴 시간 동안 소강상태로 있었더니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일부 병사들에게는 마도 제국에게 겁을 먹은 게 아니냐는 소문마저 돌고 있었다. 그런 소문을 없애기 위해서는 마도 제국에게 따끔한 공세를 펼쳐야 한다.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라도 마도 제국과 일전을 벌여야 한다." 조만간이 아니라 당장 일전을 벌이고 싶은 다이어드 공작이었다. 하지만 성국만이 아닌 여러 국가의 군대가 모여 있는 연합군의 성격상, 총사령관이 다이어드 공작이랄지라도 홀로 결정을 내리는 건 무모했다. 오늘 회의의 안건에 올려 마도 제국과 일전을 벌이겠다고 다짐한 다이어드 공작은 몸을 돌려 자신의 막사로 향했다. 마도 제국군과 왕국 연합군이 소강상태를 맞이하고 있을 무렵, 금탑은 평소와 달리 무척 분주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지난 몇 년간 금탑에서 살아오던 주민들이 부지런히 짐을 싸고 있다. 단순히 피난이라고 하기에는 그들의 짐 부피가 너무 컸다. 모든 일의 발단은 금탑으로 돌아온 엘이 회의를 소집했기 때문이다. 회의에 참석한 이는 엘을 비롯하여 실피르, 세레나, 카이나, 엘리엔, 아이넨스와 모스 등 12명의 매직 나이트, 그리고 이례적으로 에리스 공주까지 참석하였다. 회의를 소집한 엘은 곧장 자신의 의견을 말하였다. "이곳 골든 벨리를 아무래도 버려야 할 것 같습니다." 엘의 충격적인 발언에 회의장은 침묵에 잠겨들었다. 그 만큼 그의 말이 의외였기 때문이다. 골든 벨리를 버리자니? 그렇다는 건 금탑을 포기하자 말과 다를 바가 없다. 모두가 놀라는 건 물론이고 심지어 외지인이라 할 수 있는 엘리엔이나 아이넨스마저도 경악의 표정을 지었다. 금탑에는 엘의 모든 기반이 있는 곳이다. 그런 곳을 포기하겠다는 말에 놀라지 않을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모두가 놀란 기색을 보였지만 엘에게 뭐라 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들은 엘을 믿고 있는 것이다. 엘은 결코 생각 없이 말을 꺼낼 인물이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엘이 재차 입을 열어 연유를 설명하였다. "이미 모두 아시겠지만 금탑은 적들의 표적이 되어 있습니다. 마도 제국의 황제인 루이아스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저를 반드시 제거하려 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엘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개인의 힘으로 보면 엘은 결코 루이아스에게 위협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엘에게는 여타 다른 초인들에게 없는 젊음과 패기가 존재했으며, 누구도 믿지 못할 빠른 성장이 존재했다. 이대로 놔두다가는 어떠한 발전을 이룰지 감히 장담을 못할 상황인 것이다. 그런데다 엘을 제거해야 하는 까닭은 바로 엘이 다른 초인들과 모두 직간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초인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루이아스의 입장에 있어 엘은 적으로 돌아선 초인들의 사령탑이라 할 수 있다. 엘을 제거한다면 초인들 간의 연계가 끊어짐은 물론 그들이 한데 뭉치지 못하게 할 수도 있으니 루이아스로서는 지금 상황보다 몇 배는 더 쉽게 대륙 통일을 이룩할 수 있다. 그만큼 루이아스의 힘이 강하다는 것이고, 엘의 중요성이 예상보다 대단하다는 걸 뜻한다. 이전에 금탑을 제거하기 위해 4명의 초인을 보냈다. 하지만 금탑에는 엘을 비롯하여 골든 나이트, 그리고 엘리 엔과 아이넨스가 있었다. 만약 금탑을 제거하려 든다면 전에 보낸 숫자보다 휠씬 많은 초인을 보내야 할 것이다. 지금이 전시 상황이고, 초인 다수가 전쟁터에 묶여 있다지만 언제든지 적의 침공을 당할 수 있었기에 엘은 방심할 수 없었다. "일단 적들이 침공할 경우 자칫 피해를 입는 것은 골든 벨리의 주민들뿐입니다. 저는 그들을 다스리는 입장에서 그들을 다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곳을 포기하고자 합니다. 물론 모든 일은 비밀스럽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음! 주민들을 생각하는 모습이 무척 멋지군. 그렇게 생각한다면 외인이지만 한팔 거들고 나서 주지." 엘의 말에 가장 먼저 찬성의 입장을 보인 것은 아이넨스였다. 그의 입장에서 엘의 결정은 정말 훌륭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또한 금탑에서 적과 상대할 때 이곳에서 사는 주민들이 적잖게 신경 쓰였다. 자칫 적 초인이 저들에게 해를 입힐까 걱정이 되어 다소 정신이 분산되는 면이 없잖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마당에 그가 엘의 결정을 반대할 리 만무했다. 엘리엔은 이번 일이 인간들 일이니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실피르와 세레나, 카이나도 모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결정을 내려야 할 이들은 바로 매직 나이트였다. 그들의 가족이 이곳 골든 벨리에 살고 있었으니, 엄연히 말하면 그들은 금탑의 기사이자 이곳 골든 벨리 주민들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감히 함부로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 가족의 생활 기반은 모두 이곳 골든 벨리에 존재한다. 트롤들의 피를 채취하는 것도 바로 그들이었고, 옷감을 생산하는 업무도 모두 그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만약 이곳을 포기하게 되면 그러한 것들을 모두 포기하게 되니 그동안 누려 오던 것을 모두 포기해야 하는 입장에 처하게 된다. 덧붙여 새로 살게 되는 곳에 쉽게 적응할지도 의문이었다. 그만큼 그들이 골든 벨리에서 떠나는 것은 적잖은 부담이 존재했다. 비록 엘이 자신들의 가족 걱정을 해 준다는 것을 알았지만 모든 생활 기반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그들로서 큰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엘은 그런 그들의 걱정이 무엇인지 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그들의 불안을 종식시켜 주고자 입을 열었다. "여러분이 걱정하는 점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점에 대해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미 새로 터전을 마련할 곳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디벨 상단 에서 적극적인 원조를 해 주기로 했으니 말입니다. 게다가...... 언제까지 이들이 골든 벨리에서만 생활할 수 없는 노릇 아닙니까? 지금과 같은 풍족한 벌이는 약속하지 못 하지만 결코 그들이 잘못되는 것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엘의 말은 그들의 결정을 끌어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매직 나이트가 하나 둘 고개를 끄덕였고, 대장인 모스가 입을 열었다. "저희 매직 나이트는 탑주님을 믿습니다. 저희는 전적으로 탑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엘이 빙긋 웃음을 지었다. "쉽지 않은 결정을 내려주어서 정말 고맙습니다, 여러분. 추후 루이아스를 물리친 후에 얻을 모든 영광을 여러 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그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모든 이들의 동의를 이끌어내자 엘의 표정이 한결 편해 졌다. 이로써 한고비를 넘긴 것이다. "그럼 주민들에게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고 최대한 빨리 짐을 싸 주시기 바랍니다." 열두 명의 매직 나이트가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이것이 전쟁이 막 일어날 무렵 벌어진 회의 내용이다. * * * 회의가 끝나고 엘은 실피르와 세레나를 불러 몇 가지 부탁을 했다. 그 내용은 골든 벨리 전체에 거대한 마법진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실피르는 엘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골든 벨리를 포기한다고 했으면서 왜 마법진을 치려 고 하는 거니? 엄마는 이해할 수가 없네."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는 실피르의 모습에 엘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자세한 사정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자세한 건 모든 마법진이 설치가 된 후에 말씀드릴게요. 죄송해요." 엘의 사과에 실피르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엘이 속이 얼마나 깊은지 잘 안다. 엘이 말하지 않는 데에는 필시 어떠한 사정이 있을 것이다. "아니, 엘리가 말을 안 해 주는 것이라면 어떠한 이유가 있는 것이겠지. 그래도 궁금하니깐 나중에라도 꼭 알려 주렴." 궁금한 걸 참지 못하는 걸 보면 실피르도 마법사임이 분명했다. 엘은 그런 실피르의 모습에 웃음을 지으면서도 내심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죄송해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자세한 사정을 말해 드릴게요.' 지금 자신이 계획하고 있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일이다. 절망적인 현 상황을 단번에 타개할 수 있는 기회인 만큼 그 누구에게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금탑 소속 세 마법사는 부지런히 골든 벨리 전체에 마법진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그 작업이 어찌나 방대하던지 전쟁이 일어나고 소강상태로 돌입하기 직전인 3개월에 걸친 긴 시간 동안 계속해서 작업을 해야만 했다. 세 달이 흐르니 골든 벨리에 머물던 주민들의 이주가 차곡차곡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미 레도프 국왕에게 양도 받은 세 영지에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하고 디벨 상단의 후원이 있었기에 이주는 순조로웠다. 모든 주민들이 이주했음에도 금탑은 여전히 방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단지 인적이 없어 유령 마을과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말이다. 엘은 주민들이 모두 이주를 마치자 이번에는 매직 나이트와 실피르 등마저도 이주하길 권했다. 마지막으로 엘리엔과 아이넨스도 골든 벨리에 벗어나자 금탑에 홀로 남은 엘은 집무실에서 눈을 감으며 생각에 잠겼다. "분명 루이아스라면‥‥ 나를 잡으러 조만간 초인들을 보낼 것이다." 눈을 뜬 엘의 눈에는 전날의 치욕을 되갚겠다는 듯,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루이아스의 명령을 받고 금탑을 공격하기 위해 조직된 초인은 모두 6명이었다. 우선 그랜드 마스터로는 트루먼 공작과 지크리스 후작 이었으며, 8클래스 대마법사로는 라이젠과 레이벨, 넬리 어스와 샤이어드였다. 무려 6명에 이르는 초인! 설사 초인 넷이 있는 금탑의 전력이라도 여섯의 초인은 막아 내지 못할 게 분명했다. 여섯 초인의 리더를 맡은 이는 라이젠이었다. 청탑의 탑주인 라이젠은 수십 년 동안의 연구 끝에 개발해 낸 골렘과 지난 기간 동안 루이아스의 명령을 가장 완벽하게 해낸 일등 공신이었기에, 그의 위치는 초인들 중 루이넨스 바로 다음인 2번째 서열이었다. 트루먼 공작이나 지크리스 후작은 불만이 상당했지만 감히 루이아스의 명령을 거스를 담량은 없었다. 이미 그 들은 긴 시간 동안 루이아스의 세뇌 마법에 의해 완벽한 그의 수족이 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라이젠은 다른 다섯 초인에게 금탑을 치기 위한 작전을 설명했다. "우선 우리는 트를 벨리의 입구까지 최대한 조용히 접근해야 한다. 그리고 금탑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처져 있는 다크 포그를 단숨에 뚫고 금탑을 기습해야 한다." "우리의 힘이 더욱 강한데 왜 기습을 해야 한단 말이오?" 트루먼 공작의 짜증어린 물음에 라이젠이 옅은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금탑에서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함이다. 만약 금탑주가 백탑주 유클레이를 부른다면 승부는 어떻게 될지 누구도 장담 못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갑작스럽게 기습하여 그들의 정신을 뒤흔들어야 하는 것이다." 라이젠의 말은 상당히 옳았기에 트루먼 공작을 제외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금탑에 있는 금탑주는 엄연히 말하면 우리들 중 누구도 감당하지 못한다. 초인 간의 실력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골든 나이트와 금탑주가 힘을 합친다면 충분히 2명 분의 힘을 발휘한다. 게다가 다른 두 초인은 모두 신검을 다루기에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없는 존재들이다. 거기에 백탑주 유클레이가 끼어든다면? 마법사들 중 최강이라는 유클레이가 끼어든다면 승부는 삽시간에 종잡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루이아스는 금탑을 지우는 것을 원했지만 무엇보다 초인들의 피해가 더 이상 발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초인은 수천 명의 인재 중 인재를 선발하고 또 선발해 도 나오기 힘든 귀중한 전력이다. 그런 그들이 다수 존재해야 후일 대륙을 통일하더라도 거대 통일 제국을 원활하게 통치할 수 있다. "우리는 여섯인데 상대는 넷. 어떻게 그들을 맡을 것이오?"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은 트루먼 공작이 물었다. 그로서는 지금 상황이 여간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자신은 라이젠에게 말을 놓는 사이 였는데 그놈의 공적 차이로 라이젠이 자신의 위에 서게 되었으니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자존심이 하늘과 같은 트루먼 공작으로서는 정말 짜증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고, 그럴수록 금탑주에 대한 증오가 깊어졌다. 마음 같아서는 자신의 칼로 갈가리 찢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에게 그러한 선택권이 없다는 게 그로 하여금 더욱 짜증나게 만들었다. 그런 트루먼 공작의 심정을 파악한 라이젠이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넌 그렇게 단순해서 윗자리에 오르지 못하는 것이다.' 비웃음으로 트루먼 공작을 일별한 라이젠은 자신이 구상한 것을 설명했다. "금탑에는 총 네 명의 초인이 존재하지. 우선 우리가 조심해야 할 존재들은 네이처 소드를 다루는 엘프다. 그녀의 실력은 근위 기사단장과 맞먹을 정도로 강하다. 그러니 강한 힘을 바탕으로 공격을 펼치는 트루먼 공작과 넬리어스가 합공한다. 그리고 디멘션 소드를 다루는 이는 지크리스 후작과 샤이어드가 상대하고, 나와 레이벨은 금탑주와 골든 나이트를 상대하도록 한다." 트루먼 공작의 얼굴에 서린 짜증이 증폭되었다. "어째서 내가 금탑주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지?" 그에 라이젠이 냉막한 표정을 지었다. "내 판단으로 배정한 것이다. 이미 폐하의 허가를 얻었으니 더 이상 불만하지 마라, 트루먼 공작." "......!" 단호한 라이젠의 말에 트루먼 공작에게서 진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지만 여기서 내분을 일으킬 만큼 어리석은 인물이 아니었기에 이내 살기를 수습했다. 그리고 속으로 그 살기를 키워 나갔다. '언젠가 네놈을 반드시 죽여 주마, 라이젠.'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었기에 참고 넘어가며 속으로 이를 가는 트루먼 공작이었다. 라이젠은 그 나름대로 이미 트루먼 공작의 속내를 파악하고 있었다. '속으로 이를 갈고 있겠지. 하지만 이번 임무를 완수하면 너와 나는 도저히 메울 수 없는 거대한 차이가 생기게 된다. 착각하지 마라, 트루먼. 네가 참고 있기에 내가 나서지 않는 게 아니라 내가 참고 있기에 네가 여태껏 살아 있다는 것을 말이다.' 동료 초인들 간의 끊임없는 암투. 그것은 엄격한 서열이 적용되는 마도 제국이었기에 그들은 더욱 민감하게 반응했다. 여러 잡음이 있었지만 라이젠의 계획은 꽤 훌륭한 편에 속했다. 우선 그의 예상대로 다크 포그의 영역에 설치된 경보 마법 장치가 엘에게 금탑의 위급함을 알려 준다. 그곳을 빠르게 돌락하여 금탑을 기습한다는 건 그동안 금탑을 습격한 게 허투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바였다. 여섯 초인은 빠른 속도로 골든 벨리의 입구를 지나 금탑이 위치한 곳을 향해 나아갔다. 행여 마법 감응 장치가 있지 않을까 하여 신체의 능력을 극대화시키는 마법을 전개하여 곧장 금탑을 향해 나아갔다. 보통 일반인이라면 며칠을 걸려서야 도착했을 거리를 그들은 불과 몇 시간 만에 돌파했다. 초인이 아니면 불가능한 신기였다. 그렇게 그들은 골든 벨리라 불리는 곳으로 통하는 단 하나의 입구에 도착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는 자욱한 안개가 시야를 가로막고 있었다. 바로 다크 포그였다. 라이젠은 다크 포그를 응시하며 앞으로 한걸음 내딛었다. "꽤 오랜만에 보는군. 일단 이것을 단번에 돌파해야 한다. 하지만 다크 포그는 보통 안개가 아니다. 모든 힘을 끌어올리고 단숨에 돌파해야 한다." 이미 이곳을 한차례 돌파해 본 레이벨이나 지크리스 후작이라면 잘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이곳에 처음 오는 트루먼 공작이나 샤이어드, 넬리어스는 이야기가 달랐다. 다크 포그가 어떠한 힘을 지니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습게보고 달려들면 안 된다. 자칫 초인의 경지에 든 자라도 저 안개에 잠식되면 오감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두 힘을 끌어올린 상태로 단번에 돌파한다. 알겠나?" 부리부리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니 다크 포그를 돌파 한 적이 없는 초인들은 다소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중 트루먼 공작은 아예 노골적인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는 트루먼 공작의 모습에 라이젠은 속으로 치솟는 살기를 제어해야만 했다. '지금은 참겠다, 트루먼. 더 이상 날 화나게 하지 마라.' 고개를 획 돌린 라이젠의 전신에 어느새 반투명한 막이 생성되어 있었다. 실드를 온몸에 감싸 외부와의 단절로 다크 포그의 영향에 벗어나려는 속셈이었다. 마법사들은 그런 라이젠을 그대로 따라했다. 반면 지크리스 후작은 검을 한차례 휘두르자 푸른막이 생걱났다. 트루먼 공작은 그걸 보며 따라한다. "단번에 돌파한다." 파앗! 말을 마친 라이젠이 곧장 자리를 박차고 다크 포그를 향해 쇄도했다. 다른 초인들도 군말 없이 곧장 라이젠의 뒤를 따른다. 개개인이 가진 불만을 토로하더라도 막상 임무에 있어 서는 누구보다 열정을 보이는 그들이었다. 초인의 집중력 은 여타 다른 이들과 비교할 것이 못 되었다. 콰콰콰콰! 다크 포그 안으로 들어선 트루먼 공작은 막강한 기운을 뿜어내면서 자신을 옭아매려는 기운을 튕겨 내려 하였다. 그런데 그 순간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트루먼 공작의 기세에 물러나는 듯하던 안개가 오히려 그를 더욱 단단하게 옭아매며 그의 전신으로 침투하려는 것이 아닌가. 일순간 당황한 트루먼 공작은 이를 확 물었다. "해 보자는 거냐." 쿠우우! 다시 한 번 거대한 기운이 그에게 뿜어졌다. 그랜드 마스터만이 전개할 수 있는 마나 장악이 펼쳐진 것이다. 하지만 다크 포그는 그랜드 마스터의 마나 장악에 절대 적인 영향을 받는 검사들과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오히려 다크 포그는 자신들을 밀어내려는 기운이 더욱 광포하게 날뛰며 그를 잠식해 들어갔다. '빌어먹을!' 지크리스 후작을 따라하고 싶지 않았기에 다른 방법으로 들어가려던 트루먼 공작은 전신으로 스며드는 기운에 이를 악 다물었다. 벌써 주변에 느껴지는 오감이 옅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강력한 항마력을 지닌 그랜드 마스터였기에 천천히 마법이 작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부웅! 검을 휘두른 트루먼 공작의 주변에 푸른막이 생성되었다. 지크리스 후작이 전개한 그 방법이었다. 그렇게 하자 트루먼 공작을 잠식해 들어오던 다크 포그 가 외부로 튕겨 나갔다. 트루먼 공작의 주변에 쳐진 오러의 막이 다크 포그를 튕겨 낸 것이다. 자신의 주변에 존재하는 안개가 옅어졌다는 걸 느낀 트루먼 공작은 수차례 검을 휘두르며 다크 포그를 밀어냈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 침입한 다크 포그를 완전히 밀어냈을 때, 트루먼 공작은 다크 포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갑자기 다크 포그가 끝나자 트루먼 공작이 의아한 표정 을 지었다. "응? 다크 포그가 끝난 건가?" 고개를 드니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의 표정에 모두 노골적인 조소가 어려 있었다. '아차!' 그제야 트루먼 공작은 자신이 다크 포그에서 상당 시간을 지체했음을 알 수 있었다. "미, 미안하다." 트루먼 공작은 표정이 일그러지는 걸 필사적으로 참아내며 사과했다. 지금 상황에서 억지를 부려 봤자 손해를 보는 건 자신이었으니까. 애써 자존심을 굽히고 사과했지만 라이젠은 조소어린 어조로 답했다. "아직도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나 보군. 지금 상황에 네가 사과할 이유는 없다." "뭣이......" 트루먼 공작이 막 역정을 내려던 순간 그의 눈이 살짝 커졌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곳, 그곳에 1명의 사람과 하나의 골렘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녀석이었다! 찢어 죽여도 부족할 녀석! 금탑주 엘리미스! 무려 6명에 달하는 초인들의 시선을 받으며 엘은 정중하게 인사했다. "인사드리겠습니다. 금탑주 엘리미스입니다." 엘의 소개와 함께 주변의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지기 시작했다. Chap.2 프로미넌스 '여섯 명...... 인가.' 다크 포그에서 알려온 경보에 엘은 잠을 자다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서둘러 다크 포그가 펼쳐진 외부로 공간 이동을 하였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엘은 라이젠을 비롯한 네 초인이 다크 포그를 막 빠져 나왔을 때 그들의 앞을 가로막을 수 있었다. 어느새 엘의 옆에는 골든 나이트가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엘을 호위하듯 그의 옆에 서 있었다. '다섯 명인가? 생각보다 적군.' 처음에는 다섯 초인이 금탑에 침공한 줄 알았다. 하지만 뒤이어 오는 트루먼 공작까지 보게 되자 6명의 초인이 금탑에 침공했음을 알 수 있었다. 엘은 여섯 초인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인사드리겠습니다. 금탑주 엘리미스입닌다." 여섯 초인들 중 지휘자인 라이젠이 싸늘한 표정으로 인사를 받았다. "몇 번 보았으니 그리 반가운 얼굴은 아니로군. 설마 시시한 인사 따위를 받아 주기 위해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이 아님을 알고 있겠지? "라이젠의 입장으로서 엘은 반드시 제거해야할 적에 불과했다. 게다가 엘에게서 묘하게 자신들을 기다렸다는 느낌을 받고 있자니 기분이 언짢았다. 때문에 곧장 엘을 죽이고 금탑을 지울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그런 그를 가로막은 이가 있었다. 바로 트루먼 공작이었다. 트루먼 공작은 라이젠에게 씩 웃어 보이며 말했다. "왜 그리 서두르는 것이오, 청탑주? 어차피 지금 이곳 에는 금탑주밖에 없고 우리의 전력은 월등한데 그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보오." 트루먼 공작의 말은 다분히 라이젠을 경계해서 한 말이다. 그의 입장에서 라이젠이 서두르는 것이 마음에 들 리가 없다. 다른 초인들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개개인의 자존심이 상당한 초인들. 상대가 강하다고 해도 결코 물러서지 않는 자신들이다. 하물며 지금 자신들의 앞에는 금탑주와 골든 나이트밖에 없다. 골든 나이트는 능히 한 초인의 몫을 발휘한다고 하나 엘은 초인들 중에서 최약체로 평가된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엘에게 질 만한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면 금탑주와 골든 나이트의 합공을 조심해야 할 뿐. 하지만 6명의 초인으로 숫자의 우위를 점하고 있는 이상 그것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황이 그렇다는 것이지 라이젠의 입장에서는 결코 엘에게 시간을 줄 수 없었다. 그가 어떤 짓을 벌일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라이젠은 자신과 사사건건 충돌하는 트루먼 공작에게 진한 살심이 들었다. '이 개자식이!' 허나 그 살기를 외부로 표출시켜 적대감을 살 만큼 그는 어리석지 않았기에 그는 이내 호흡을 가다듬으며 평정심을 되찾았다. 라이젠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그래서 금탑주와 이야기를 나눠 보자는 건가?" "안 될 것이 무엇 있겠소?" 엘은 라이젠과 트루먼 공작의 모습에 그들의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을 보며 엘이 고민에 잠겨들었다. '저들의 저 사이를 이용하면 얻을 게 있을까?' 빠른 시간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계획은 모두 수립되어 있다. 지금 와서 저들을 이간질시켜 봤자 얻을 게 없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젓는다. 엘은 그들에게 미소를 지은 얼굴로 말했다. "금탑에 오신 여러분들게 탑의 주인인 제가 변변찮게 대접해 드릴 게 없어서 무척 아쉽습니다. 아시겠지만 근래에 제가 몹시 힘든 일을 겪어서 말입니다." 트루먼 공작과 신경전을 벌이던 라이젠이 엘의 말에 웃음을 짓는다. "그러겠지. 목숨의 위협을 당해 개처럼 도망가야 했으니 말이네." 라이젠의 말에 엘의 얼굴에 서린 미소가 씻은 듯 사라져 갔다. 그런 엘의 변화에 라이젠은 더 이죽거렸다. "지금 상황이 결코 그때보다 낫다고 할 수 없을 터. 관대하신 마도 제국의 위대한 황제 폐하께서는 지금이라도 두 무릎을 꿇고 영원히 마도 제국에 충성을 맹세한다면 일말의 여지가 있을 거라 하셨다. 어떠한가, 금탑주. 마도 제국에 와서 우리와 함께 영원한 영광을 함께 하지 않겠는가?" 라이젠은 금탑에 온 진짜 목적을 꺼내 놓았다. 루이아스는 지난날 자신의 압도적인 강함을 직접 몸으로 겪은 엘에게 한 가닥 회유의 여지가 있음을 알았다. 초인들 모두가 달려들어도 자신에게는 큰 위협이 되지 않는 다는 걸 힘으로 보여 주었으니 행여 엘의 마음이 변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엘의 마음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유감입니다. 저는 마도 제국이 투신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라이젠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뿐이다. "그래? 그렇다면 너에게 남은 게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겠지?" "그건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웃기는...... 헙!" 코웃음 치던 라이젠의 눈이 돌연 커졌다. 엘이 갑작스럽게 그에게 쇄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압도적으로 불리한 지금 상황에서 기습 공격이라니! 설마하니 금탑주가 기습할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던 라이젠은 일순간 당황의 기색이 만연하게 퍼져 나갔다. 그러나 그 정도로 맥없이 당한다면 그에게 초인이라는 칭호는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엘이 라이젠에게 쇄도하는 순간, 라이젠의 양손에는 푸른 뇌전이 맺힌 후였다. "기습 정도로 어떻게 할 수 있을 만큼 나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그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엘은 양손을 라이젠에게 뻗었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붉은 화염이 일렁이고 있었다. 다른 초인들이 라이젠에게 달려드는 엘을 제압할지 순간 라이젠의 의사를 물었다. 그에 라이젠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금탑주 따위는 나 혼자로도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엘과 라이젠의 양손이 서로 충돌했다. 화르륵! 파지직! 붉은 불꽃과 푸른 뇌전은 서로를 향해 날카로운 독니를 드러내며 강렬한 충돌을 일으켰다. 엘의 손과 라이젠의 손이 민활하게 움직이면서 서로의 빈틈을 노려 갔다. 하지만 상대는 다름 아닌 청탑주 라이젠이다. 그는 대륙에 단 3명뿐인 워 메이지였다. 근접전에서 그와 자웅을 겨룰 수 있는 존재는 백탑주 유클레이밖에 없다. 수십 번의 공방을 나눈 그들의 대결은 한순간 빈틈을 보인 엘에게 라이젠의 공격이 적중하고 나서였다. 라이젠의 푸른 뇌전이 엘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크윽!" 라이젠의 공격이 닿는 순간 실드를 전개했지만 7클래스 마법의 힘은 정말 강했다. 전신이 저릿해지는 걸 느끼며 엘은 재빨리 몸을 뒤로 튕겼다. 허나 자신이 잡은 기회를 놓칠 만큼 라이젠은 녹록하지 않았다. "어딜 도망가려 하느냐!" 쐐애액! 빠른 속도로 엘에게 접근한 라이젠은 그대로 쌍장을 엘에게 후려쳤다. 엘은 양손을 들어 그런 라이젠의 공격을 막았지만 역부족이었다. 떠엉! 강렬한 충격에 엘의 신형이 주르륵 밀려났다. 라이젠이 그대로 여세를 몰아 엘을 궁지에 몰아넣으려 할 때였다. 그때까지 조용히 서 있던 골든 나이트가 번개같이 움직였다. "타나!" 엘의 외침이 있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주인의 위험을 알아차린 골든 나이트가 라이젠을 베어 가고 있었다. 오로지 엘을 죽이기 위해 쇄도하던 라이젠은 측면에서 달려드는 골큰 나이트를 보며 욕설을 내뱉었다. "제기랄!" 엘을 죽이고 자신이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라이젠은 엘을 향해 후려쳐 가던 쌍장을 골든 나이트에게 돌렸다. 룬 블레이드와 라이젠의 쌍장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콰앙! 7클래스 마법의 힘이 집약된 힘과 룬 블레이드의 강력 한 절삭력이 첨예한 대립을 이루었다. 강렬한 충격파가 두 존재를 쉽쓸었지만 하나는 피륙으로 이루어진 인간이었고, 하나는 전신이 금속으로 이루어 진 골렘이었다. "크으윽!" 라이젠은 전신을 휘감는 충격파를 이기지 못한 채 신음을 흘리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뒤로 물러나면서 라이젠은 아직도 구경만 하고 있는 초인들에게 외쳤다. "뭐 하나! 모두 공격해!" 라이젠의 외침에 다섯 초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 중 넷이 골든 나이트에게 달려들었다. 라이젠이 레이벨을 향해 외쳤다. "레이벨은 나와 함께 금탑주를 죽인다!" 파앗! 라이젠과 레이벨의 신형이 금탑으로 물러나는 엘에게 향했다. 골든 나이트는 주인의 위기를 좌시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달려드는 초인 넷을 블링크로 피해 버린 골든 나이트는 라이젠과 레이벨의 앞에 떡하니 나타나 룬 블레이드를 휘두르고 있었다. 라이젠과 레이벨은 강력한 골든 나이트의 공격에 이를 악 물고 방어해야만 했다. 쿠웅! 폭음이 울려 퍼지며 라이젠과 레이벨이 주르륵 밀려났고, 그사이 4명의 초인이 골든 나이트에게 달려들었다. 트루먼 공작의 검은 골든 나이트의 목을 노리고 있었고, 지크리스 후작의 검은 골든 나이트의 허리를 노리고 있었다. 거기에 넬리어스의 마법은 날카로운 예기를 품은 채 사방을 점하고 있었으며, 샤이어드의 마법은 속박 마법으로 골든 나이트의 기동력을 차단하고 있었다. 4명의 초인이 펼친 합공은 그만큼 대단한 위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하지만 골든 나이트 또한 순순히 당하지는 않았다. 어느새 왼손에 골든 소드를 든 골든 나이트는 왼손에는 골든 소드를, 오른손에는 룬 블레이드를 들고 우선 트루먼 공작과 지크리스 후작의 공격을 차단했다. 따당! 따다다당! 순식간에 수십 번의 공방을 나눈 골든 나이트는 재빨리 두 검으로 속박을 끊어 내고 넬리어스의 공격 마법을 파훼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파앗! 네 초인의 공격을 막아 낸 골든 나이트는 곧장 뛰어올라 다시금 라이젠과 레이벨을 막아 갔다. "이 빌어먹을 고철 덩어리가!" 라이젠은 자신의 뒤를 붙잡고 늘어지는 골든 나이트에 의해 분노를 터뜨리며 자리에 멈춰서 골든 나이트에게 쌍장을 후려쳐 갔다. 그 뒤에서는 레이벨이 날카로운 바람의 칼날을 전개하여 골든 나이트를 베어 가고 있었다. 골든 나이트가 양손에 든 검으로 그것들을 막아 갔는데, 돌연 주춤했다. 어느새 샤이어드와 넬리어스가 골든 나이트에게 속박 마법을 전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대로 간다면 골든 나이트는 라이젠과 레이벨의 마법에 의해 큰 타격을 입을 것이 분명했다. 그때 엘이 나섰다. 금탑으로 후퇴하던 엘은 골든 나이트가 위기에 처하자 곧장 제련제강의 마법을 전개했다. "을 플리체!" 엘의 외침과 함께 4개의 금빛 화살이 4명의 8클래스 마법사들에게 뿌려졌다. 루이아스의 다이아몬드 제련제강의 마법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황금으로 펼치는 제련제강의 마법도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을 지니고 있다. 넬리어스와 샤이어드는 방어 마법을 펼치느라 한순간 속박 마법이 느슨해졌고, 그사이 골든 나이트는 속박 마법에 벗어나 라이젠과 레이벨의 마법을 막아 냈다. 콰광! 2명의 8클래스 마법사의 협공이 대단해서 골든 나이트도 뒤로 물러났고, 라이젠과 레이벨도 충격파에 의해 뒤로 물러났다. 엘은 물러서는 골든 나이트를 보며 외쳤다. "타나! 모든 힘을 발휘하라! 이것은......" -너의 모든 힘이 소진될 때까지 지속해야 한다! 뒷말을 적들에게 들려줄 수 없었던 엘은 메시지 마법으로 골든 나이트에게 명령을 내렸다. 번쩍! 엘의 명령에 골든 나이트에게서 강렬한 안광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금빛 동체에 엄청난 광채가 뿜어지기 시작 했다. "주인님의 명령을 받듦. 나의 임무는...... 모든 힘을 발휘하여 적들의 종말을 가져오는 것." 담담하면서 여느 때와 변함없는 골든 나이트의 목소리에 엘의 두 눈이 붉어졌다. -부탁한다, 타나. 너의 마지막 힘을 모두 보여다오. 그렇게 말한 엘의 신형이 금탑으로 빠르게 향한다. 그 모습에 라이젠이 초인들에게 외친다. "나와 레이벨이 금탑주를 잡겠다. 너희들은 골든 나이트를 확실하게 처리해!" 그와 함께 몸을 날리려던 찰나, 라이젠은 뒤에서 엄습해 오는 강렬한 기운에 기겁했다. "헉!" 어느새 그의 뒤에 골든 나이트가 나타나 검을 휘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방금 전과는 다른 엄청난 기세였다. 라이젠은 재빨리 양손을 교차하여 골든 나이트의 공격을 막으려 하였다. 골든 나이트의 검과 부딪치는 순간 라이젠은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파직! 자신의 양손에 맺힌 마법이 베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여태껏 수많은 적들을 제거해 온 푸른 뇌전이 골든 나이트의 룬 블레이드에 의해 부서지고 있었다. '이런 엄청난 힘이......' 압도적인 골든 나이트의 힘에 기겁한 라이젠이 재빨리 뒤로 물러나려 하였다. 하지만 골든 나이트는 그 틈을 주지 않은 채 곧장 라이젠을 베어 나갔다. 그때, 골든 나이트의 다리에 강렬한 바람의 칼날이 쇄도했고, 양팔을 두 그랜드 마스터가 베어 가고 있었으며, 두 8클래스 마법사의 방어 마법에 의해 라이젠의 전면에 실드로 막혀 있었다. 라이젠을 죽이려 들다가는 자신마저 소멸될 위기였던 것이다. 골든 나이트는 재빨리 라이젠을 공격하던 것을 회수하고는 두 그랜드 마스터의 공격을 막아 가면서 바람의 칼날을 막아 내기 위해 표면에 그려져 있던 마법진의 힘을 이용했다. 평소와 같다면 절대 사용하지 못하겠지만 모든 것을 다해 적들을 막으라는 명령에 마지막 한 수마저도 사용하고 있었다. 좌앙! 좌과광! 두 검이 충돌하면서 엄청난 충격파가 몰아쳤고, 바람의 칼날이 실드에 부딪치면서 실드가 당장이라도 찢어질 듯 요동쳤다. 쿠우웅! 무려 세 초인과 충돌한 충격파가 어김없이 골든 나이트를 쉽쓸었다. 이 충격이 워낙 강렬했기에 골든 나이트로서도 물러서지 않고서는 그 충격을 해소시킬 수 없을 지경이었다. 골든 나이트가 뒤로 물러나자 두 그랜드 마스터와 두 8클래스 마법사들이 여세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공격해 들어갔다. 이미 그들은 골든 나이트에 대한 경각심을 버린 지 오래였다. 다른 두 마법사는......? 골든 나이트는 엘을 노리던 라이젠과 레이벨을 찾았다. 하지만 라이젠과 레이벨은 이미 저 멀리 엘을 뒤쫓고 있었다. 골든 나이트는 엘이 자신에게 내린 명령을 생각해 냈다. 모든 힘을 다 발휘할 것. 저 둘을 쫓고 싶지만 네 초인의 공격이 너무 매서웠다. 골든 나이트가 든 두 검에 서린 오러가 한층 짙어졌다. "일단 따돌렸군." 금탑의 내부로 들어선 엘은 외부에 설치된 창으로 초인들의 격전을 살피고는 중얼거렸다. 모든 금제를 푼 골든 나이트의 힘은 정말 대단했다. 비록 일회성 힘이지만 그로 인해 골든 나이트는 결코 엘리엔이나 아토빌 공작에 비해 부족하지 않는 강력한 힘을 얻게 되었다. "미안하다, 타나. 이 작전은 누군가가 희생을 해야 하는 작전이었어. 차마 다른 초인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가 없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고...... 네게 정말 미안하다." 루이아스에게 목숨의 위협을 당하고 금탑에 돌아온 엘은 조만간 루이아스가 금탑에 대대적인 공세를 펼칠 것 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기회를 잘 이용하면 적에게 회생이 불가능한 엄청난 타격을 입힐 수 있다. 그것을 떠올리자 엘의 머리에서 한 가지 계획이 생겨났다. 바로 미끼를 이용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미끼가 커야 대어가 걸리듯이 다수의 초인들을 낚기 위해서는 큰 미끼를 필요로 했다. 바로 초인이라는 미끼 말이다. 허나 여기에는 큰 문제점이 존재했다. 그 미끼 역할을 누가 하느냐에 있던 것이다. 엘은 필사적으로 계획을 가다듬어 어떻게든 미끼 없이 적들에게 타격을 줄 방법을 생각해 보았지만 도저히 그 방법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반드시 미끼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크게 보면 대륙을 위한 것이지만 그 누가 미끼를 하고 싶어 하는가 말이다. 당장 엘도 자신이 미끼 역할을 하는 것은 사양이었으니. 그러나 엘은 아주 큰 미끼가 되어 줄 무언가가 있음을 동시에 깨달았다. 바로 골든 나이트였다. 골든 나이트는 엘의 수족임과 동시에 미끼 역할을 할 수 있는 최적의 위치에 있다. 엘은 그것에 대해서 한동안 긴 고민에 빠져야만 했다. 골든 나이트는 두말할 것 없이 자신의 손과 발이다. 자신이 당금 대륙에서 이렇듯 대우를 받게 된 까닭도 바 로 골든 나이트가 있기에 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륙에서의 대우란 엄연히 힘의 논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자신 혼자의 힘은 8클래스 마법사라지만 거기에 그랜드 마스터인 골든 나이트가 추가되면 무려 두 초인이 함께 다니는 것이 된다. 제아무리 강한 초인이라도 2명의 초인을 상대하는 것은 벅차다. 그러니 엘의 위치가 그만큼 상승하게 되는 것이다. 엘은 금탑을 공격하는 초인들을 속이기 위해 과감하게 골든 나이트를 미끼로 내놓았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대륙을 위한 엘의 희생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엘의 희생이 아니다. 전적으로 자신을 위해 하는 희생이다. 앞으로도 계속 자신을 노릴 적들! 그들을 제거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은 다 자신을 위한 희생이다. 엘의 눈이 깊어졌다. "타나의 희생은 무척 비싸게 먹힐 것이다." - 엘의 몸이 금탑의 꼭대기를 향해 솟구쳤다. 골든 나이트의 희생을 아주 값비싸게 치르게 하려면 자신이 실수를 하면 안 된다. 엘의 신형이 금탑 꼭대기로 사라지자 금탑 입구에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엘의 뒤를 바짝 쫓아온 라이젠과 레이벨이었다. 금탑에 들어선 두 사람은 부리부리한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자신들이 아무리 강하다지만 이곳은 금탑주의 홈그라운드다. 찰나의 방심이 생사를 오가게 만들 수 있는 초인들인 만큼 이곳에서는 만전을 기하는 게 좋다. "함정은?" 주변을 둘러본 라이젠은 레이벨을 보며 물었다. 감각에 서는 함정이 없다고 알려 왔지만 이 방면은 레이벨이 더 유능하다. 라이젠의 물음에 레이벨이 고개를 저어 보였다. 함정이 없다는 뜻이다. "좋아, 그럼 곧장 금탑주를 찾도록 하지." 혼자서 찾는 건 극히 위험하다. 혹여 기습을 당했다가는 큰 낭패를 치룰 수 있으므로 라이젠이 엄호하고, 레이벨이 마법을 전개했다. "스캔!" 레이벨의 나직한 외침과 함께 그를 중심으로 탐지 마법이 뻗어 나갔다. 순식간에 금탑 전역을 탐지한 레이벨이 눈을 빛냈다. 금탑의 위쪽에 강렬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런 기운을 간직한 존재는 단 한 명이다. 금탑주 엘리미스였다. "상층부." 파앗! 레이벨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라이젠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친다. 함정이 없다는 걸 안 이상 거칠 게 없었다. 그런 라이젠의 뒤를 따라 레이벨의 몸도 솟구쳤다. 두 마법사가 빠르게 상층부를 향해 날아오자 대기하고 있던 엘이 마법을 전개했다. "웹!" 엘의 외침과 함께 라이젠과 레이벨의 주변에 마나로 이루어진 거미줄이 잔뜩 생겨났다. 웹으로 라이젠과 레이벨의 움직임을 둔화시키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쉽게 당할 리 만무했다. 웹이 생겨나며 그들의 움직임을 제약하려는 순간, 수십 개의 화염이 그들을 중심으로 생걱났다. 화르륵! 치이익! 화염이 일렁이는 소리와 함께 웹이 화염에 타 들어갔다. 하지만 엘의 노림수는 그것이 아니었다. 웹에 의해 한순간 주춤한 그들에게 향한 것은 금빛 화살이었다. 교묘히 화염의 열기 아래 숨어든 금빛 화살은 은밀하게 그들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허억!" 호흡과 호흡이 교차하는 찰나에 파고드는 금빛 화살의 존재에 두 마법사는 경악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워낙 교모하게 파고든 금빛 화살의 존재 까닭에 그들은 한 가지 선택을 해야만 했다. 하나는 저것을 무시하고 곧장 엘을 쫓는 것. 다른 하나는 이걸 확실하게 피하고 추격을 재개하는 것. 전자를 택하면 심각한 부상을 각오해야만 하고, 후자를 택하면 기껏 따라잡은 거리를 조금이나마 내주게 된다. 전자냐 후자냐. 하지만 이미 답은 정해져 있다. 엘을 얼마든지 잡을 자신이 있는 그들이 굳이 부상을 감수할 리 없는 것이다. 다만 이까짓 공격에 물러나야 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을 뿐. "칫, 피한다." 라이젠의 말과 함께 둘의 신형이 빠르게 아래로 꺼졌다. 플라이 마법을 취소한 것이다. 피유웅! 하층부로 추락하는 두 마법사의 머리 위로 금빛 화살이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여서 라이젠과 레이벨은 순간 간담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두 마법사가 다시 플라이 마법을 펼쳐 빠른 속도로 치고 올라오자 엘의 두 눈이 빛났다. '지금이야말로 이것을 시험할 기회다.' 생각이 떠올림과 동시였다. 엘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던 거대한 마나가 노도처럼 쏟아져 나왔다. 콰콰콰콰! 물결처럼 퍼져 나오면서 엘의 기세가 삽시간에 주변을 장악했다. 동시에 그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던 거대한 마나가 외부로 표출되었다. 마나는 그대로 라이젠과 레이벨의 주변에 펼쳐진 플라이 마법에 얽혀들었다. "어억!?" 라이젠과 레이벨의 입에서 당혹감어린 신음이 흘러 나왔다. 돌연 마법이 취소된 것이다. 저 클래스 마법인 플라이 마법이었기에 그들은 재차 마법을 펼쳐 신형을 허공에 고정시켰지만 엘의 공격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의 마나는 인위적인 흐름이 얽힌 라이젠과 레이벨을 항햐 제2격, 제3격을 가했다. 그것은 그들의 마법 흐름에 간섭하여 본래의 흐름을 뒤바꿔 버리는 역할을 했다. "큭!" 마법이 연달아 취소되자 두 신형은 빠르게 바닥을 향했다. 예상보다 뛰어난 위력에 엘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훨씬 강한 위력을 지녔어. 8클래스 마법사들의 마법을 흩어 버릴 정도였다니. 게다가 반경 삼십 미터까지 영향 을 미칠 수 있어.' 30m나 떨어진 곳까지 마법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한 위력이 아닐 수 없다. 만족감을 표한 엘은 곧장 탑 꼭대기를 향했다. 이제는 탑을 탈출해야 할 때다. '마법을 강제로 해제시켰으니 섣불리 접근하지는 못할 것이다. 마법사는 미지의 것에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을 지니지만 사람이란 게 목숨이 걸린 일에는 신중하기 마련이니까.' 아직까지 자신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두 마법사였기에 엘은 자신의 판단을 신뢰했다. 아니나 다를까, 엘에 의해 마법이 강제로 취소된 두 마법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숨겨 둔 한 수가 있었다니. 설마하니 우리들의 마법을 캔슬할 줄은 몰랐다." 레이벨이 굳은 표정으로 동의의 뜻을 보였다. 마법을 캔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최소 한 단계 높은 마법사가 막대한 마나를 응집하여 단번에 마나의 흐름을 끊어 내는 것이 캔슬 마법인 것을 감안하면, 금탑주가 사용한 캔슬은 엄청나게 무리를 했거나. 아니면 어떠한 방법을 발견해 낸 것이 분명하다. "캔슬당하는 순간 폐하의 카르마 링과 비슷하다고 여 겼지만 그게 아니었어." 카르마 링이라는 말에 라이젠의 표정이 굳는다. 그는 카르마 링이라는 단어 자체를 싫어한다. 그 까닭은 간단하다. 바로 카르마 링에 의해 철저하게 부서진 적이 있기 때문이다. 라이젠의 기질상 루이아스에게 굴복하기까지 가장 많은 저항을 했고, 그로 인해 그는 카르마 링의 위력을 절절하게 느껴야만 했다. 인세에 다시는 나와서는 안 될 마물이 바로 카르마 링이다. 그런데 그것과 비견되다니. 카르마 링은 강제로 마나를 흩어 버리지만 지금은 단순히 마나에 간섭한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라이젠의 의아한 시선에 라이벨이 말한다. "방금 그게 다가 아닐 수 있단 말이오. 만약 그가 위력을 다소 조절했다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이상 그 이상의 위력도 염두에 둬야 하오. 이건 우리 둘의 목숨이 걸린 문제니까." 그제야 라이젠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자신의 임무도 임무지만 무엇보다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위대한 마도 제국에서의 명예는 앞으로 자신의 위치를 더욱 빛나게 해 줄 테니 말이다. 라이젠이 레이벨에게 물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저돌적인 자신보다는 신중한 성격의 레이벨이 더 나았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지?" "일단 천천히 접근하는 게 좋을 것 같소. 괜히 마법을 펼쳐 무리하게 접근하다가는 마법이 풀려 충격을 받을지도 모르니 말이오." "옳은 말이다." 날아가는 것이 가장 빠르지만 안전을 기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라이젠과 레이벨은 마법이 강제로 풀려도 충격이 적은 혜이스트를 펼쳐 빠른 몸놀림으로 엘을 쫓기 시작했다. 미지의 것을 보여 줘, 적으로 하여금 과대 평가를 하게 만들어 소극적으로 나오게 하는 것. 엘의 의도가 정확하게 먹혀 들어가고 있었다. * * * 부웅! 룬 블레이드가 선명한 궤적을 남기면서 빠른 속도로 베어간다. 완벽하게 피하지 못할 만큼 빠르고 간결한 일격에 트루먼 공작이 검을 휘둘러 룬 블레이드를 막아 갔다. 황! "큭!" 룬 블레이드와 검이 부딪침과 동시에 푸른 오러가 파삭 부서져 나간다. 그리고 힘에서 밀린 트루먼 공작이 신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트루먼 공작의 두 눈에는 놀라움이 서려 있었다. '이토록 강한 힘이라니. 골든 나이트가 어찌 이렇게 강하단 말인가.' 분명 카시아스 왕국에서 상대할 때는 엄연히 자신의 한 수 아래였다. 그랬기에 자신 혼자서도 능히 골든 나이트를 상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것이 자신만의 착각이었나 보다. 강한 힘으로 트루먼 공작을 밀쳐 버린 골든 나이트는 그대로 트루먼 공작을 베기 위해 동체를 날렸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와 상황 판단. 나날이 발달해 가는 골든 나이트는 현재 아토빌 공작에 버금가는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기선을 빼앗긴 트루먼 공작이 골든 나이트의 연격을 잇달아 막아 내며 뒤로 물러나자, 그 틈을 지크리스 후작이 파고들었다. 골든 나이트가 상대해야 하는 존재는 트루먼 공작뿐만 아니라 다른 초인도 있었다. 트루먼 공작에게 결정적인 일격을 퍼부으려던 골든 나이트는 돌연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지크리스 후작의 공격 에 공격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의 검과 룬 블레이드가 부딪쳐 나갔다. 황! 꽈광! 꽝! 순식간에 십여 번의 충돌이 일어났고, 골든 나이트에게서 뿜어지는 폭발적인 힘에 지크리스 후작 또한 뒤로 물러서야만 했다. 같은 인간이라면 막강한 그 힘을 흩어 버리고 곧장 반격을 할 수 있지만 골든 나이트는 이미 인간이 낼 수 있는 근력의 한계를 뛰어넘은 상태였다. 충격파가 온몸을 휩쓸어도 강철로 된 동체에는 어떠한 영향도 줄 수 없었다. 피륙으로 이루어진 지크리스 후작으로서는 골든 나이트를 감당하기에 무리였다. 슈악! 충격을 해소하지 못한 지크리스 후작의 빈틈을 정확히 찌른 골든 나이트의 일격이었다. 믿지 못할 강한 위력에 지크리스 후작의 두 눈이 부릅 떠질 무렵, 그의 목숨을 구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블리자드!" 넬리어스와 샤이어드의 입에서 동시에 블리자드가 튀어나왔다. 여태껏 8클래스 최강의 빙계 마법인 블리자드를 캐스팅하느라 전투에 임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8클래스 마법은 그런 시간을 허용해 줄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위력을 지니고 있다. 설사 그랜드 마스터라 하더라도 8클래스 마법에 적중 당하면 엄청난 피해를 각오해야 했으니 말이다. 지금 그들이 굳이 4명이 합공하지 않고 트루먼 공작과 지크리스 후작 둘이 골든 나이트를 감당했던 것도 두 마법사가 8클래스 마법을 캐스팅할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함이었다. 곧이어 어마어마한 눈의 폭풍이 몰아치며 골든 나이트 에게 쇄도했다. 블리자드는 엄청난 한기를 머금고 있어 닿는 즉시 얼려 버리는 힘을 지니고 있다. 적탑주 카로스만 또한 엘의 블지자드에 당했을 정도니 초인이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마법이 바로 블리자드였다. 하지만 골든 나이트는 일반적인 범주에선 상상할 수 없는 존재. 골든 나이트는 엘이 가진 모든 마법의 정화이자, 발전 하는 존재였기에 일찍이 블리자드에 당한 초인 카로스만을 보고 대책을 세워 둔 상태였다. 파앗! 골든 나이트의 황금빛 동체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졌다. 그와 함쩨 골든 나이트의 동체에 새겨진 룬어에 마나의 흐름이 일어나더니, 이내 강력한 반투명한 막이 골든 나이트를 휘감았다. 엘이 새긴 방어 마법진이 극한으로 발휘된 것이다. 반투명한 막은 그대로 블리자드를 튕겨 냈다. 티딕 ! 틱 ! 블리자드는 반투명한 막의 일부를 얼려 갈 뿐 골든 나이트에게 어떠한 피해를 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네 초인의 눈이 부릅떠졌다. 설마하니 두 8 클래스 마법사가 각각 전개한 블리자드를 막아 낼 줄이야. 전혀 믿지 못할 상황이었다. 놀라운 건 비단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검을 치켜 든 골든 나이트가 룬 블fp이드를 그대로 블리자드에 그어 버린 것이다. 샤악! 룬 블레이드는 견고하게 펼쳐져 있던 반투명한 막과 함께 블리자드를 그대로 베어 냈다. 그리고 번개 같은 몸놀림으로 샤이어드와 넬리어스에게 접근했다. "허억!" 갑자기 마법을 베어 버린 것도 놀라운데 자신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며 다가오자 두 마법사는 대경했다. "큭!" 샤이어드는 비장의 세이지 실드를 전개함과 동시에 헤이스트 마법을 사용하여 번개같이 뒤로 빠져나갔다. 실로 놀라운 대처가 아닐 수 없다. 반면 넬리어스는 마법사의 전형적인 회피 수단 블링크를 전개하였다. 넬리어스가 블링크를 전개하자 골든 나이트에게서 짙은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마법사가 블링크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골든 나이트가 의도한 것이었다! 스팟! 넬리어스의 신형이 사라지자 골든 나이트 또한 사라졌다. 블링크를 펼친 것이다. 그리고 넬리어스가 20여 m 떨어진 곳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놀랍게도 바로 지척에 골든 나이트가 나타났다. 골든 나이트가 자신의 옆에 모습을 드러내자 넬리어스가 경악했다. "허억!" 넬리어스가 황급히 양손을 교차하면서 마법을 캐스팅 했다. 하지만 골든 나이트가 더 빨랐다. 이미 넬리어스 옆으로 블링크할 것을 의도했기에 골든 나이트는 블링크를 전개함과 동시에 룬 블레이드를 휘두르고 있었다. 당연히 초인적인 반사 신경을 지닌 넬리어스도 그것에 대비할 수가 없었다. 룬 블레이드가 넬리어스의 정수리를 갈라갔다. 섬뜩한 예기가 정수리를 타고 흐르자 넬리어스의 동공이 확장되어 간다. 룬 블레이드가 넬리어스를 가르는 순간...... 푸학! 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 피는 골든 나이트에게 튀었다. 틱 ! 티딕 ! 실드에 가로막힌 피가 허공에서 주르륵 흘러내렸다. 골든 나이트는 무심한 안광으로 넬리어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넬리어스는 죽지 않았다. 룬 블레이드가 정수리에 박히려는 순간 그가 필사적으로 몸을 틀어 피한 것이다. 허나 간신히 죽는 것만 모면할 정도로 골든 나이트의 공격은 강력했다. 골든 나이트의 룬 블레이드는 넬리어스의 어깨에 박힌 상태다. 오른쪽 어깨를 시작으로 옆구리까지 뭉텅 베어 냈다. 사실상 무력화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오른쪽 몸 일부분이 없어지자 넬리어스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크으으......" 전신에 엄습하는 고통은 둘째다. 여태껏 자신의 일부분 이던 몸을 잃었다는 것에 대한 상실감이 그의 뇌리를 지배했다. 그러다 보니 민첩했던 몸놀림은 둔해질 수밖에 없고, 끝없이 펼쳐지던 마법은 주춤했다. 골든 나이트는 이 사실을 몰랐지만 사람이 무언가를 상실하게 되면 실의에 빠진다는 것을 어렴풋 눈치 채고 있었다. 이것은 골든 나이트가 생각하는 것이 아닌, 골든 나이트의 에고를 구성하고 있는 사념에서 흘러나오는 경험이었다. 서걱! 골든 소드가 빛을 발하며 넬리어스를 양단했다. 두 눈에 충격의 빛을 해소하지 못한 채, 목과 몸이 분리 된 넬리어스의 몸이 서서히 무너졌다. 금탑을 침공한 여섯 초인 중 한 사람의 죽음이었다. 트루먼, 지크리스의 눈이 부릅떠졌고 샤이어드 또한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곧이어 분노로 변했고, 골든 나이트는 초인 셋의 분노를 감당해야만 했다. "후우!" 금탑의 집무실에 도착한 엘이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안도의 한숨이었다. "내 예상대로 되었어. 정말 다행이라 할 수 있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엘의 얼굴에는 자신감만 가득했다. 그것은 자신의 새로운 무기가 무척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쫓아오더라도 이것과 함께 제련제강의 마법을 펼쳤다면 충분히 맞서 싸울 수 있었을 것이다. "마나 장악이라, 마치 그랜드 마스터와 같으면서 더욱 위력적이었어." 그랜드 마스터의 마나 장악은 기사들 내부에 서린 오러의 통제권을 빼앗는 것이다. 하지만 엘의 마나 장악은 인간의 내부가 아닌 외부의 기운을 장악하는 것이다. 특히 그 복잡함이 특출한 마법들에게 마나가 간섭한다면 그 마법은 삽시간에 위력을 잃는다. 엘은 마법사들 간의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클래스 프레셔보다 더욱 강력한 힘을 얻은 셈이다. 든든한 힘에 엘은 고개를 고덕였다. "이것이라면 어쩌면......" 한 가닥 희망을 잡은 듯한 느낌. 엘은 그 성과만으로도 족했다. 집무실에 들어선 엘은 미리 그려 둔 마법진으로 향했다. 현재 금탑은 공간 이동 자체가 금지된 상태였다. 좌표가 뒤죽박죽 얽혀 있었으며, 스크를 같은 것으로도 탈출이 불가능했다. 청탑에서 펼쳐진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엘은 청탑에서 죽음의 위기를 겪으면서 금탑도 그와 비슷하게 해 둘 필요를 느꼈다. 그리고 그것을 생각하는 순간, 이번 계획을 수립할 수 있었다. "일단 물러나야겠지." 마법진 위에 올라선 엘은 마나를 주입했다. 복잡하게 얽어놓은 마나의 흐름에서 단 한 곳, 이곳만 이 복잡한 마법 흐름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게다가 사용하고 난 뒤 말끔하게 흔적이 사라지기에 증거조차 남기지 않는다. 하지만 설치하는 데 무척 오랜 시간이 걸리기에 비상용으로 사용하는 게 대다수였다. 마나가 주입되자 마법진에서 푸른빛이 뿜어졌다 그리 고 삽시간에 마나를 배열하더니 텔레포트 마법을 캐스팅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새하얀 빛과 함께 엘의 신형이 사라졌다. 금탑을 완전히 빠져나간 것이다. 뒤늦게 집무실로 들어선 라이젠과 레이벨은 희미하게 느껴지는 마나의 흐름에 이를 갈았다. 자신들이 완벽하게 속았다는 것을 깨닫고서는. * * * 퍼벅! 퍽 ! 골든 소드와 룬 블레이드가 푸른빛을 발하며 두 그랜드 마스터를 압도한다. 쾅! "우욱!“ 룬 블레이드에 서린 거력을 해소시키지 못한 지크리스 후작이 뒤로 주르륵 밀려난다. 넬리어스의 목숨을 빼앗은 골든 나이트는 세 초인을 상대로 압도적인 힘을 과시하고 있었다. 트루먼 공작과 지크리스 후작, 샤이어드는 골든 나이트를 무척 힘들게 상대하고 있었다. 골든 나이트의 힘은 압도적이었다. 그 힘은 넬리어스를 죽인 뒤 더욱 강해진 듯하여, 세 초인은 시간이 지날수록 현격하게 밀리고 있었다. "제기랄! 어떻게 이렇게 강하단 말인가." 한 수 공방을 나눌 때마다 전신이 저릿해짐을 느끼며 트루먼 공작이 분노에 찬 외침을 토했다. 다른 초인들도 말이 없다 뿐이지, 트루먼 공작과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찌 이렇게 강하단 말인가. 지금 골든 나이트의 힘은 초인을 뛰어넘은 무언가가 있었다. 처음에는 아토빌 공작과 비견되는 듯한 힘이었으나 지금은 더욱 강해져서, 당장 대륙의 초인들 중 제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쾅! "우욱!" 골든 나이트의 공격을 막아 내던 트루먼 공작이 균형을 잃었다. 분노에 휩싸여 미처 제대로 힘을 흘려내지 못한 까닭이다. 그 틈을 골든 나이트가 놓칠 리 없었다. 왼손에 든 골든 소드로 지크리스 후작을 완벽하게 막아 낸 골든 나이트는 오른손에 든 룬 블레이드를 휘둘렀다. 그것은 균형을 잃은 트루먼 공작의 목을 정확하게 노리고 있었다. 내부가 흔들려 당장 운신할 수 없던 트루먼 공작의 두 눈이 급속도로 커졌다. 룬 블레이드를 피할 수 없음을 느낀 것이다. 룬 블레이드가 막 트루먼 공작의 목을 양단하려던 순간 이었다. 푸른빛을 머금은 것이 룬 블레이드를 후려쳤다. 쩌어엉! 짙은 금속음과 함께 룬 블레이드가 뒤로 튕겨났다. 그리고 룬 블레이드를 튕겨 낸 장본인 또한 뒤로 물러났다. 트루먼 공작은 자신을 구한 이를 보며 눈을 부릅떴다. 자신을 구해 준 이가 다름 아닌 라이젠이었던 것이다. 라이젠은 양손에 푸른 뇌전을 머금은 채 골든 나이트와 대치했다. 금탑주를 쫓으러 간 그들이 왜 이곳에 나타난단 말인가? 세 초인의 의문이 가속화될 때, 라이젠이 중얼거렸다. "주인은 빠져나갔는데 수하는 빠져나가지 않았군. 도대체 무얼 노리는 것이지?" 라이젠의 중얼거림에 세 초인은 금탑주가 이곳을 빠져 나갔음을 알 수 있었다. 그사이, 골든 나이트는 검을 휘두르며 라이젠에게 쇄도하고 있었다. 샤이어드가 외쳤다. "조심하시오! 골든 나이트는 무척 강하오!" 하지만 라이젠은 그 말을 무시했다. "훗, 골든 나이트가 강해 봤자 날 상대할 수는 없지." 그리고 양손을 휘두르며 부딪쳐 나갔다. 퍽! 충돌음과 함께 골든 나이트의 동체가 흔들렸고, 라이젠이 주르륵 밀려났다. "이, 이건......" 경악어린 표정의 라이젠은 입가에 피를 주르륵 흘렸다. 그의 양손에 서린 푸른 뇌전은 깨져 있었으며, 내부는 거세게 흔들려 심각한 내상을 입은 상태였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의 라이젠을 보며 트루먼 공작이 한심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내가 이렇게 당할 정도인데 그렇게 경솔하게 달려들다니. 흥분했군, 라이젠." 으드득! 비웃는 트루먼 공작의 표정에 라이젠은 왜 자신이 트루먼 공작을 구했을까 하는 자책과 함께 이를 갈아붙였다.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골든 나이트는 정말 강했던 것이다. "분명 전에는 이렇게 강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 데......" "금탑주가 무언가 수작을 부린 것 같군." 레이벨이 골든 나이트를 살펴보며 말하자 라이젠의 눈이 빛났다. "약점을 알 수 있나." "그건 모르겠소. 다만 저건 금탑주가 따로 손을 본 게 아니란 것은 확신할 수 있지. 아마 잠력 폭발이나 그런 것 같은데......" 레이벨의 말에 라이젠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잠력이라......" 잠력 폭발은 후유증이 확실한 수법이다. 골든 나이트에 게 그러한 수법이 있는지 몰랐지만 확실한 건...... "잠력 폭발이 결코 무한한 것이 아니지." 라이젠의 말에 모든 초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력 폭발은 반드시 그 후유증을 동반한다. 그리고 대다수가 제한 시간이 있다. 즉, 골든 나이트를 상대로 시간을 끌면 골든 나이트는 제풀에 모든 힘을 소진하고 고철 덩어리가 될 거란 말이 된다. 라이젠이 초인들에게 외쳤다. "갑자기 강해진 데에는 분명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잠력 폭발일 가능성이 무척 높지. 일단 골든 나이트를 상대로 시간을 끌면서 힘을 소진시킨다. 유한한 힘이라면 반드시 그 끝을 보이겠지. 그리고......" 라이젠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어느새 그의 지척에 접근한 골든 나이트가 그에게 골든 소드를 내리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이젠은 황급히 양손을 겹치더니 마법을 전개했다. 마음을 먹은 이상 굳이 노력하여 골든 나이트의 공격을 막아 낼 필요가 없다. 퍼벙! 골든 나이트의 힘을 이용한 라이젠은 거기에 저항하지 않고 힘의 방향에 따라 몸을 날렸다. 지금 공격을 맞서봤자 막아 낼 힘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게 불필요하다는 걸 깨달은 이상 맞서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다. 라이젠이 자신의 공격을 받아 내지 않자 골든 나이트는 곧장 레이벨에게 몸을 날렸다. 하지만 레이벨은 근접 전투를 벌이는 워 메이지가 아니다. 곧장 헤이스트를 전개하여 뒤로 물러난 레이벨은 바람의 칼날을 전개하여 골든 나이트에게 쏘아 보냈다. 콰콰콰콰! 보이지 않는 바람의 칼날을 향해 골든 나이트가 강렬한 마나를 내뿜자 동체에 새겨진 실드가 빛을 발하며 반투명한 막을 생성했다. 그리고 그것은 바람의 칼날을 그대로 받아 냈다. 떠덩! 떵! 가볍게 튕겨 낸 골든 나이트가 그대로 레이벨에게 달려 든다. 하지만 좌측에서는 지크리스 후작이, 우측에서는 트루먼 공작이 검을 휘두르니 골든 나이트로서는 그걸 무시하고 레이벨을 처치할 수 없었다. 두 검을 휘두르며 두 그랜드 마스터의 공격을 받아 낸 골든 나이트였지만 어느새 뒤에서 라이젠이 쌍장을 후려 치고 있었다. 골든 나이트는 그걸 막아 내지 못했다. 다만 실드 마법을 최대한 발휘할 뿐이다. 퍼억! 푸른 뇌전이 골든 나이트의 등에 정확하게 박혀 들어갔다. 강렬한 충격이 골든 나이트를 뒤흔들었다. 그럼에도 골든 나이트는 거침이 없었다. 붕! 등을 가격한 라이젠을 향해 검을 휘두르지만 라이젠은 이미 뒤로 물러난 상태였다. 골든 나이트의 힘이 한정된 이상 맞설 필요가 없다. 퍽! 골든 나이트가 빈틈을 보이자 샤이어드의 마법이 적중한다. 막아 내려 분발했지만 그것만으로는 힘들었다. 초인이 무려 5명이다. 그들이 작정하고 치고 빠지기를 하니 골든 나이트로서는 미칠 노릇이었다. 한 초인이 공격을 하면 골든 나이트가 반격한다. 하지만 절대 맞서지 않고 물러난다. 골든 나이트가 뒤를 쫓으려 하여도 힘들었다. 금세 다른 초인들이 달려들어 주위를 분산시켰기 때문이다. 이는 제아무리 사념으로 응집된 골든 나이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있었고, 마침내 골든 나이트에게 허락된 시간이 다 되었다. 퍼엉! 라이젠의 뇌전에 적중된 골든 나이트의 동체가 움푹 파였다. 방금 전까지 실드로 보호되던 것과는 달리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그 뒤를 이어 레이벨의 바람의 칼날이 골든 나이트의 양다리를 절단했으며, 트루먼 공작과 지크리스 후작의 검이 골든 나이트의 양팔을 갈랐다. 쿵! 사지를 잃은 골든 나이트의 동체가 힘없이 나동그라졌다. 그런 골든 나이트에게 샤이어드가 마무리 지었다. "헬 파이어!" 지옥의 불꽃이 주변의 대기마저 태워 버리며 골든 나이트에게 향했다. 이미 다른 네 초인은 멀찍이 뒤로 물러난 상태였다. 헬 파이어가 노리는 자리에는 골든 나이트뿐이었다. 화르륵! 지옥의 불꽃은 그대로 골든 나이트를 덮쳤다. 실드 마법의 힘이 전혀 발휘되지 못했기에 골든 나이트의 동체는 녹아들기 시작했다. 초인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며, 금탑의 수호신이자 첫 번째 부하였던 골든 나이트가 그렇게 형체를 잃어 가고 있었다. 만약 인간이었다면 헬 파이어의 열기에 그대로 의식이 끊기고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하지만 골든 나이트는 엘의 마지막 임무를 기억하고 있었다. 골든 나이트는 드문드문 끊기는 사념을 이어나갔다. "마지막 임무! 그것은......" 번쩍! 동체가 흐물흐물 녹아 버린 골든 나이트에게서 마지막 안광이 번뜩였다. 그리고 골든 나이트에게서 미약한 금광이 뿜어지더니 이내 골든 벨리 전체에 퍼져 있는 복잡한 마나 흐름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파직! 파지직! 골든 나이트에 의해 자극을 받은 골든 벨리의 마나 흐름이 급속도로 변해 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작은 스파크를 일으킬 정도였으나 이내 그것은 급격한 마나의 흐름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알아차린 것은 당연히 8클래스 마법사들이다. 그들은 골든 벨리 내의 마나 흐름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것은......? 대기가 요동치며 마나의 흐름이 복잡하게 얽혀간다. 그것이 결코 범상치 않은 현상이었기에 라이젠이 외쳤다. "심상치 않다! 어서 스크롤을 찢어라!" 초인들은 루이아스가 특별히 제작한 공간 이동 스크롤이 있다. 그것만 있다면 그들이 머물고 있는 마도 제국으로 이동할 수가 있다. 라이젠의 말에 다섯 초인이 품에서 스크롤을 꺼내어 찢었다. 찌익! 종이가 찢겨 나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이럴 수가......" 라이젠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리고 텔레포트 마법을 캐스팅하기 시작했다. 파츠츠! "커헉!" 텔레포트 마법이 중도에 강제로 종료되었다. 골든 벨리의 인위적인 마나의 흐름에 텔레포트에 스며들어 마법 자체에 충격을 준 것이다. 피를 한 움큼 토하고 비틀거린 라이젠이 빠른 판단을 내렸다. "어째서인지 공간 이동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 입구를 통해 밖으로 나간다!" 라이젠의 말에 다섯 초인은 재빨리 걸음을 금탑 입구로 옮겼다. 그러나 그들이 본 금탑의 입구는 완전히 부서진 상태였다. 입구가 완전히 부서져 절벽과 같은 모습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부서진 입구를 망연하게 바라보며 라이젠이 한탄했다. "당했구나, 당했어." "그게 무슨 소리지?" 트루먼 공작이 재촉하듯 묻자 모든 초인들의 시선이 쏠렸다. 라이젠이 말했다. "처음부터 이곳은 함정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금탑주 그놈은 이곳을 탈출했어. 하지만 골든 나이트는 이곳에 남았지. 금탑주, 그 찢어죽일 녀석은 골든 나이트를 미끼로 삼아 우리들을 끌어들인 거야." "뭣이......" 정확한 라이젠의 추리에 모두의 안색이 뒤바뀌었다. 그렇게 듣고 보니 모든 정황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금탑에는 금탑주와 골든 나이트를 제외하고서도 신검을 보유하고 있는 엘프 수호검주와 신검가의 검사가 있다. 초인 여섯이 왔음에도 그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금탑주와 골든 나이트만 모습을 드러낸 것에 의아하게 여겼는데 그런 내막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사이 마나의 흐름은 더욱 맹렬해졌다. 그것은 마치 무슨 수식어를 그리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잠시 눈을 감고 있던 레이벨이 두 눈을 뜨며 외쳤다. "이, 이건...... 헬 파이어다! 지금 골든 벨리 전체의 마나 흐름이 거대한 헬 파이어를 그리고 있다!" "헉! 헬 파이어!" 레이벨의 외침에 샤이어드가 비명에 가까운 경악성을 내질렀다. 그 또한 지금의 이 마나 흐름이 무언가 규칙적이면서도 익숙하게 배열된다는 걸 느꼈는데 그것이 헬 파이어였을 줄이야. 레이벨이 외쳤다. "이 정도라면 통상 헬 파이어보다 그 규모가 족히 다섯 배는 될 것이오. 그리고 그 규모는 이곳 전체를 뒤덮을 것 이지. 이것이 전개 되면 우린 살아남지 못하오." "하지만 탈출할 방법이 없잖나!" 라이젠이 답답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 또한 레이벨의 말에 가슴이 꽉 막혀 버린 상태였다. 5배 규모의 헬 파이어라니. 거기에 위력을 감안하지 않았으니 위력 또한 몇 배가 될 게 분명했다. 완전히 함정에 빠져 버렸다는 생각은 짙은 분노로 바뀌었다. 제정신을 차리고자 숨을 고른 라이젠이 말했다. "일단 위력이 어느 정도가 될지 모르니 최대한 뭉쳐서 방어 마법을 전개한다. 그렇게 하면 살아남을 확률이 높다." 라이젠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지금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수였다. 쿠우우우우! 급격하게 움직이던 마나의 흐름은 마침내 하나의 캐스팅을 모두 끝맺었다. 동시에 붉은 화염이 골든 벨리 전체를 뒤덮으며 허공에서 지면을 향해 접근하기 시작했다. 라이젠과 레이벨, 샤이어드는 방어하기 좋은 장소를 골라 마법을 전개했다. "세이지 실드!" 뒤이어 2번의 외침이 더 울려 퍼지며 총 3개의 세이지 실드가 겹쳤다. 이렇다면 제아무리 헬 파이어가 강하다고 하여도 세이지 실드를 뚫지는 못할 게 분명하다. 점점 거세지며 다가오는 불길을 보며 라이젠이 자신있게 외쳤다. "우리는 살 수 있......!" 하지만 그의 외침은 끝을 맺지 못했다. 쩌어어어엉! 노도처럼 쏘아진 불꽃은 그들의 실드를 단번에 부숴 버렸기 때문이다. 실드를 종잇장처럼 찢어 버린 불꽃은 곧장 그들을 향해 짓쳐 들어왔다. 상상을 뛰어넘는 위력에 다섯 초인 모두가 놀랐다. 특히 레이벨이 대경해서 외쳤다. "이, 이건 헬 파이어가 아니야! 프로미넌스다! 9클래스 화염 마법 프로미넌스! 그래서 그토록 방대한 마나를 사용한 거 였어!" 화르륵! 그 말을 끝으로 레이벨의 전신이 불꽃에 물들었다. 녹탑주이자 벨로세크 3대 마탑주 중 하나였던 레이벨의 최후였다. 뒤이어 샤이어드도 프로미넌스에 목숨을 달리했다. "큭!" 지크리스 후작은 오러로 프로미넌스를 베어 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도리어 불꽃에 먹혀들며 검을 든 손부터 시작하여 몸 전체가 불꽃에 휩싸였다. 그리고 의식의 단절. 목숨을 잃었다. 라이젠은 푸른 뇌전이 이글거리는 손으로 프로미넌스를 밀어내고자 했지만 도리어 불꽃에 뛰어드는 꼴로, 바로 불꽃에 삼켜져 목숨을 잃었다. 불꽃이 전신을 잠식해 들어가자 트루먼 공작이 고통에 몸부림 쳤다. "크아아아! 금탑주 이 개자식! 난 죽어서도 널 잊지 않겠......!" 팟! 미처 외침을 끝맺지 못한 채 트루먼 공작은 모습을 잃었다. 금탑에 침공한 여섯 초인이 모두 목숨을 잃는 순간이었다. 골든 나이트는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미약하지만 옅은 실드가 보호하고 있었기에 초인들이 목숨 잃는 장면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끝까지 엘의 손에서 놀아났다. "임무...... 완수......" 그걸 끝으로 골든 나이트의 의식은 완전히 암흑에 잠겨 들었다. Chap.3 초인 집결 한때는 제1왕자파로 성세를 구가하던 세 백작령은 지금 금탑주인 엘리미스의 개인 영지로 편입되어 있었다. 딱! 딱! 딱! 금탑의 새로운 터전, 뉴 금탑이라 불리는 이곳은 지금 영지 전체가 한창 공사 중이었다. 한 영지에 공사를 한다는 것은 보통 금력으로는 힘든 일이었는데 세 영지를 합친 드넓은 영지 전체를 공사한다는 것은 방대한 자금을 필요로 했다. 하지만 금탑에게는 자금의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금탑에게는 다름 아닌 대륙 10대 상단 중 하나인 디벨 상단이 뒤에 있기 때문이다. 카시아스 왕국의 매직 메탈 판매권을 획득하면서 디벨 상단은 삽시간에 대륙 10대 상단 중 상위권으로 껑충 올라갔다. 대륙 10대 상단은 세르디아 대륙의 상권을 주무르는 방대한 자금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들이 무너지면 한 나라의 경제가 휘청할 정도로 그들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본래대로라면 디벨 상단이 대륙 10대 상단 중에서 상위권으로 뛰어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매직 메탈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하나 그것만으로 대륙 10대 상단의 서열이 뒤바뀔 만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도 제국이 건국되고 전쟁이 일어나자 양상이 달라졌다. 전쟁이 일어나자 전쟁에서 가장 중요하게 쓰이는 포션 의 값이 폭등했기 때문이다. 포션을 만들기 위해서는 트롤의 피가 필요하다. 그러나 트롤의 피가 무한한 것이 아니다. 트롤의 피 공급은 일정 했다. 트롤의 피 공급이 일정하니 자연히 포션의 공급도 일정 할 수밖에 없다. 공급이 일정한데 수요는 폭등하니 가격 또한 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디벨 상단은 이 기회를 잘 살렸다. 디벨 상단은 트롤의 피 공급을 대대적으로 늘린 것이다. 전쟁 상황이 아니라면 절대 소모되지 않을 것들이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의 공급은 어마어마한 이득을 낳았다. 갑작스럽게 많은 수입을 올리게 되자 디벨 상단은 우선 엘의 요청에 따라 금탑령에 거대한 트롤 피 공급소를 세웠다. 물론 이는 극비의 비밀을 요하였기에 디벨 상단 고위층과 골든 벨리 사람들밖에 모르는 사실이었다. 골든 벨리 사람들도 이 사실이 알려지면 자신들의 수입이 줄어든다는 걸 알았기에 알아서 함구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금탑령이 된 이곳에 벌이는 공사를 왕실 측에서 실시하는 것으로 알았으며, 자세한 내막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임시 금탑의 본부라 사용하고 있는 영주 관저. 엘이 금탑의 이전을 비밀로 하였기에 금탑령에는 아직 마탑의 공사를 시작하지도 않은 상태였다. 영주 관저 한편에 그려진 마법진. 이것은 금탑과 이곳 금탑령이 통하는 유일한 마법진이다. 지금 이곳에는 실피르를 비롯하여 세레나, 카이나가 초조한 안색으로 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들은 엘이 세운 계획을 이미 전해 들은 바였다. 그리고 그 계획을 들은 그녀들은 경악했다. 설마하니 골든 벨리 전체를 미끼로 두고 자신과 골든 나이트로 하여금 금탑을 침공할 초인들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다니. 놀라운 건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엘이 실피르와 세레나에게 부탁하여 금탑 전체에 설치한 것, 그것은 바로 9 클래스 절대 화염 마법인 프로미넌스였다. 9클래스 마법 프로미넌스. 헬 파이어보다 강력한 이 마법은 그 자체가 마법이라기보다는 천재지변에 가까운 무시무시한 마법이다. 전쟁에서 9클래스 마법이 펼쳐진다면 그 누구도 승리 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왜냐하면 9클래스 마법의 위력이 너무나 엄청난 나머지 양군 모두 전멸할 가능성이 있다고 할 정도로 강력한 마법이었기 때문이다. 9클래스 마법사 혼자서도 펼칠 수 없다는 궁극 중 궁극의 마법. 그것이 바로 프로미넌스다. 그런 함정을 설치한 만큼 금탑을 침공한 이들은 최후를 맞이할 것이 분명했다. 웅웅웅! 잠시 후 마법진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곧이어 마법진에서 찬란한 빛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스팟! 빛이 폭발하듯 한순간 폭발적인 빛을 뿜어내더니 이내 잠잠해진다. 그리고 그곳에는 한 청년이 자리하고 있었다. 바로 금탑주 엘리미스였다. 엘은 마법진에 서 있는 이들을 보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왜 여기 있는 거야? 걱정하지 말라니깐......" 웃음기를 띤 엘의 말에 카이나가 눈에 이슬 진 눈물을 닦아 내며 말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그곳에 초인이 최소 다섯 명 이상 온다는데......" "여섯 명이었어. 금탑에 온 초인들은." "여섯 명이요? 카이나의 외침에 세레나와 실피르의 얼굴이 굳었다. 초인 여섯 명이란 것은 마도 제국에 속한 초인 아홉 명 중 무려 3분의 2에 해당하는 숫자를 투입했다는 말이 된다. 그만큼 마도 제국 황제인 루이아스가 엘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는 말이 된다.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이자 엘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부상 같은 건 입지 않았으니 걱정할 필요 없어. 무사히 잘 빠져나왔거든." 세레나가 엘을 보며 조심스레 묻는다. "골든 나이트는 어떻게 되었나요?" "타나는......" 엘의 표정이 살짝 굳는다. 세레나가 묻는 순간 골든 나이트와의 심령이 끊기는 것을 느낀 것이다. 심령이 끊겼다는 건 골든 나이트가 최후를 맞이했다는 말이 되고, 계획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뜻한다. 자신의 수호 기사였던 골든 나이트의 최후. 분명 여섯 초인의 목숨과 교환이라는 값비싼 희생이었지만 엘로서는 기뻐할 수도, 슬퍼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전시에는 슬픈 일도 기뻐해야 하는 실정이다. 엘은 애써 밝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타나가 일을 성공적으로 처리했나 봐. 여섯 명의 초인을 제거하다니, 타나는 정말 대단한 일을 했어." 엘의 말에 세 여인의 얼굴이 시무룩하게 변했다. 엘의 말은 바꿔 말하면 골든 나이트가 최후를 맞이했다는 말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시무룩한 표정을 보며 엘도 마음이 아파 왔지만 지금은 기뻐해야 할 때였다. "그렇게 시무룩해 할 필요 없어. 타나가 그들을 처리한 것을 기뻐해야지. 타나의 희생은 값비싼 희생이었어." 엘의 말에 그녀들은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골든 나이트는 엄밀히 말하면 금탑 전력의 절반이다. 골든 나이트가 있었기에 엘이 지금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고, 골든 나이트가 있었기에 엘과 금탑 사람들이 든든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골든 나이트가 이제는 없는 것이다. 마음 한쪽이 빈 듯 허전한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골든 나이트라는 수호신은 이제 없다. 그 없이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 닥친 것이다. 엘이 입을 열었다. "타나가 없어졌지만 누구도 몰라. 일단 이번 전쟁이 끝날 때까지 비밀로 해 두고 전쟁이 끝난 뒤에 타나를 복구하면 될 거야." 그렇게 말은 했지만 실제로 골든 나이트를 복구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았다. 엘이 골든 나이트를 제작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었다. 물론 지금 마법 실력이 부쩍 늘어 제작 기간을 줄인다 쳐도 그 기간이 얼마나 줄어들지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엘은 금탑주다. 하나의 마탑주로서 그 업무가 꽤 많았고, 이제 영지를 부여받은 이상 영지의 관리 일도 피할 수 없다. 그런 마당에 골든 나이트 제작에만 몰두할 수 없는 노릇이다. 물론 시간이 흐르고 엘에게 여유가 생긴다면 반드시 골든 나이트를 제작할 것이다.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일단 초인들을 처리한 이상 이건 기회야.' 엘은 영지에 들렀지만 오래 머물 생각이 없었다. 그의 생각에는 지금 최후의 결전에 다가오고 있었다. 6명의 초인을 잃은 지금, 전선에 나간 두 초인을 제외하면 루이아스가 머물고 있는 곳에는 루이넨스밖에 없다. 당장 전선은 다이어드 공작과 클라이언 공작이 유지하면 된다. 그렇다면 현재 동원 가능한 초인의 숫자는 무려 엘을 포함하여 9명이 된다. '물론 아토빌 공작이 참가한다는 보장이 없지. 하지만 그의 갓 소드는 반드시 필요해. 강력하게 요청하면 카디어스 님에게 지휘권을 양보할 거야.' 루이아스가 얼마나 강한지 잘 알고 있는 아토빌 공작으로서는 엘이 내민 절호의 기회를 거절할 리가 없었다. '그는 야심이 큰 사내니까.' 고개를 작게 끄덕인 엘이 입을 열었다. "이곳에 온 이유는 중간 점검을 하기 위함입니다. 점검을 마치고 바로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의미를 알았기에 세 여인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모든 일은 그가 짊어졌기에...... 야속하지만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 * * 금탑령을 하루 내내 둘러본 엘은 하룻밤조차 쉬지 않은 채 금탑령을 벗어났다. 그런 엘을 보며 세레나와 카이나는 유난히 안타까워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다. 이제 곧 최후의 결전이 벌어 질 테니...... 6명의 초인을 죽이는 데 성공했지만 여전히 루이아스 강한 사내였다. 직접 그 무위를 보지 못했지만 9클래스에 이르렀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의 힘이 얼마나 강대할지 쉽사리 추측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다행이라면 6명의 초인이 사라짐으로써 그의 힘이 상당수 감소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아직 그에게는 600명의 소드 마스터로 이루어진 근위 기사단이 존재한다. 그들을 넘지 않는 한 루이아스에게 도달하기 힘들 것이다. '부디 무사하시길......' 그녀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 * * 엘프 숲은 언제나 그러하듯 평온한 기색을 띠고 있다. 몬스터의 침입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엘프 숲은 평범한 일상이 이어지고 있다. 그것은 평화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정체이기도 했다. 그런 엘프 숲에 격렬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지면 어떻게 될까? 마나에 유난히 민감한 엘프들은 곧장 반응하여 알 수 없는 마나 요동에 대비하려 할 것이다. 지금이 바로 그와 같은 경우이다. 파아아앗! 엘프 마을 중심에 눈부신 빛이 폭사되면서 시력 좋은 엘프들의 시야를 한순간 앗아갔다. 그리고 시력을 회복한 엘프들의 시야에 한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금색 로브를 걸친 인간, 엘이었다. 엘은 모여든 엘프들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너무 요란하게 등장해 버렸네." 엘프들의 시선 집중을 받으면서 엘은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쪘다. 이렇게 많은 이들의 시선을 받는 게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 당장 아군인 엘프가 적대감 가득한 시선으로 보니 오죽 하겠는가. 그렇다고 전처럼 기선을 잡기 위해 기세를 발산할 수도 없으니 난감한 노릇이었다. 엘이 난감한 지경에 놓였을 때 엘프들을 헤치고 오는 이가 있었다. "아!" 다가오는 엘프의 얼굴이 익숙함을 느낀 엘이 밝은 표정을 지었다. 난감한 상황에서 익숙한 이를 만난다는 건 무척 반가운 일이었다. "아카벨 대장로님!" "어허, 금탑주님 아니시오?" 공중에 떠 있던 엘의 신형이 서서히 지면으로 내려오자 엘프들은 진형을 넓게 펼치며 엘을 포위했다. 엘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그를 본 이가 많지 않았기에 일어나는 일이었다. 아카벨 대장로는 그런 엘프들을 보며 외쳤다. "경계하실 일 없소. 이분은 골드 스타이자 우리 엘프들에게 큰 도움을 주는 분이니 말이오." 아카벨 대장로의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엘을 향해 뿜어지던 적의가 상당히 누그러졌다. "골드 스타? 골드 스타라면 점성술에서 나오는 별 아닌 가?" "저 인간이 세상을 파멸시킬 수도, 구원할 수도 있단 말인가?" 긴 세월을 사는 만큼 엘프들은 해박했다. 그랬기에 골드 스타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골드 스타라는 말에 엘프들의 눈에는 적대감보다는 짙은 호기심이 담기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선남선녀들인지라 엘은 괜스레 얼굴이 붉어지는 걸 느끼며 아카벨 대장로에게 말했다. "할 말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엘의 말에 아카벨 대장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알겠습니다." 마침 아카벨 대장로 또한 엘에게 할 말이 있던 터였다. 이렇게 엘이 왔으니 오히려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아카벨 대장로는 모여든 엘프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손님을 모실 테니 모두 제 할 일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 누가 대장로의 명령을 거부하랴. 아카벨 대장로의 말에 엘프들이 삼삼오오 흩어져 제 할 일을 하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엘이 어색한 표정을 띤 채 말했다. "다음에는 조용히 와야겠군요. 방안을 마련해 둬야겠습니다." "허허, 그러시지요. 마침 엘프들에게도 전용 텔레포트 마법진이 있으니 그걸로 종종 오시면 될 것입니다." 아카벨 대장로 또한 엘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엘프들의 일상에 방해가 되는 걸 원치 않았기에 엘의 말에 흔쾌히 대답하며 그를 안내했다. 엘프 대장로답지 않게 아담한 거처에 도착하자 아카벨 대장로는 엘에게 자리를 권한 뒤 차를 끓여 그에게 대접 했다. "변변찮지만 들어 보시지요." 엘프 차는 인간 세계에서 무척 귀한 것이다. 엘이 마다 할 리 없다. "감사합니다." 엘은 감사의 인사를 표한 후 차를 마셨다. 청아한 향기와 함께 머리가 확 맑아지는 느낌이 든다. 복잡하던 머리가 일순간 확 풀려 버리는 듯한 느낌에 엘이 눈을 살짝 크게 뜬다. 인간 세계에 나온 엘프 차란 걸 몇 번 마셔 봤지만 이런 맛은 결코 아니었다. 엘의 입에서 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정말 좋은 차로군요." 아카벨 대장로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 또한 차 한 모금을 마셨다. "인간 세계에서는 구하기 힘든 것일 것입니다. 인간 세계에서 유통되는 엘프 차는 엘프에게 씨앗을 얻은 인간들 이 재배한 산물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그렇군요. 하지만 상당히 맛이 다릅니다. 혹시 재배 방식에 차이가 있는 건가요?" "아닙니다." 아카벨 대장로가 조용히 고개를 젓는다. 엘의 얼굴에 궁금증이 어리자 그가 웃음 지으며 의문을 풀어준다. "애당초 인간들이 재배하는 방식에서 틀렸다고 할 수 있겠군요. 인간들은 엘프 차를 재배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욕망을 품고 그것들을 기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엘프들은 다르죠. 엘프들은 순수한 정성으로 엘프 차를 가꿉니다. 바로 그것이 맛의 차이라 할 수 있지요." 납득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정성이라...... 그렇군요.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전생에서 식물들도 하나의 생명체이며, 감정에 의해 성장 속도 혹은 맛이 달라진다는 걸 들은 엘은 아카벨 대장 로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걸 아시다니, 정말 대단하시군요." 엘은 절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곧이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자세하게 아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하, 어깨너머로 들은 거라 잘은 모릅니다. 하지만 식물을 대할 때 정성을 들여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요." 아카벨 대장로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절반 이상을 알고 있다고 하셔도 무방합니다. 저희 엘프를 제외한 다른 종족들은 도통 식물들을 존중할 줄 모릅니다. 식물들도 엄연한 하나의 생명체입니다. 그들에게 정성을 기울이고 보살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 면에서 금탑주님은 무척 훌륭한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고관도 넓고 다양한 지식들도 포용하실 줄 아시니 말입니다." 엘은 조용히 고개를 저어 보인다. 근 1,000년 가까이 살아온 엘프에게 들을 정도로 자신은 대단한 인물이 아니었다. "분명 감사한 칭찬이지만 저는 그렇게 대단한 인간이 아닙니다. 저는 대장로님과 같은 연륜도, 해박한 지식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이 험난한 대륙에서 살아남고자 가급적 모든 편견을 버리고자 노력할 뿐이지요." "그것만으로도 대단합니다." 그렇게 말한 아카벨 대장로는 더 이상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속으로는 감탄을 하고 있었다. '인간으로 치면 불과 이십 대에 불과한 금탑주가 8클래스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군. 생각에 막힘이 없으니 어떤 장애물이 그를 가로막을 수 있는가. 인간이란 종족은 정말 대단하구나.' 그러면서 아카벨 대장로는 골드 스타에 대한 전설을 떠 올렸다. 세상을 멸망시킬 수도 있으며 세상을 구원할 수도 있다. 정말 마음에 절실하게 닿는 말이다. '동료인 것이 정말 다행이군.' 그렇게 생각하며 아카벨 대장로는 본 주제로 돌아왔다. "그래, 나에게 할 말이 있어 오셨다 했는데 어떤 용건이신지요?" 아카벨 대장로의 물음에 엘의 표정이 변했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무척 기쁜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기쁜 소식?" 엘의 말에 아카벨 대장로의 표정도 기모하게 변했다. 금탑주가 기쁜 소식이라고 가져온 것이라면 결코 범상치 않을 것임이 분명했다.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엘을 바라보니 엘은 작게 숨을 몰아쉬더니 말한다. "다크 스타를 따르던 아홉 명의 초인 중 여섯 초인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 엘의 말에 아카벨 대장로는 한순간 이해하지 못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도대체 엘이 무슨 말을 했는가? 초인 6명을 제거 했다고? 그게 말이 되는가? 초인 6명이라면 엘프 숲 전체를 학살하고도 남는 어마어마한 전력이다. 단일 제국으로 최강이던 벨로세크 제국에서 무려 6명의 초인을 보유하여 대륙 최강으로 군림하지 않았던가. 당장 벨로세크가 본격적인 힘을 발휘하여 다른 네 제국을 압박했다면 지금쯤 대륙의 절반이 벨로세크 제국에 의해 통일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결론을 타당성 있게 해 주는 것이 바로 벨로세크 제국에 소속된 6명의 초인이 존재했기에 가능했다. 가히 일인 군단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초인. 지금 엘은 그런 초인 6명을 제거했다고 한다. 그가 한 말이 아니라면 무척 믿기 힘든 말임이 틀림없다. 아카벨 대장로가 어찌나 놀랐는지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지, 지금 그 말이 사실입니까? 초인 여섯을 제거했다 요?" 하기야 누가 그 말을 쉽게 믿을 수 있겠는가. 엘도 아직 여섯 초인이 그렇게 쉽게 사라졌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비록 결말은 허무했지만 그들을 제거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자금과 노력이 소모되었다. 거기에 골든 나이트까지 희생시켰다. 엘의 입장에서 금탑의 전력 3분의 2에 해당하는 것을 희생시키고서 얻은 성과였다. "예, 초인들을 제거할 수 있었던 것은......" 엘은 어떻게 초인 6명을 제거할 수 있었는지 그 과정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선 루이아스가 자신을 반드시 제거하려고 했다는 점. 그리고 금탑을 칠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계산한 뒤 함정을 설치한 것. 마지막으로 골든 나이트라는 커다란 미끼로 계획을 성공적으로 끝마쳤다는 것 등을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아카벨 대장로는 놀라움을 연신 토해냈다. 그로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발상이었다. 설마하니 자신의 터전 자체를 함정으로 사용할 줄이야. 자신의 터전을 목숨만큼 소중히 하는 엘프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거대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자신의 분신과도 다름없는 골든 나이트의 희생이라니. 이미 엘리엔에게 골든 나이트에 대한 것을 들어 본 아카벨 대장로다. 순수한 골렘이 그랜드 마스터에 버금가는 강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니. 그렇다는 건 골든 나이트가 금탑의 전력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카벨 대장로는 골든 나이트에 대해 감탄하는 한편 일개 골렘이 그랜드 마스터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에 호기심을 가져야 했다. 그 또한 마법사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마법에 대한 비전이 무척 중요하다는 것을 아카벨 대장로 또한 잘 알고 있다. 인간과 다르지만 엘프들 또한 자신의 마법 비전을 무척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여기서 인간과 엘프의 차이점이라면 인간은 그런 비전을 죽을 때까지 가지고 가거나 철저한 이득이 보장된 것에 의해 공개한다. 반면 엘프는 누군가가 배우고자 한다면 기꺼이 그 비전을 공개한다. 아이러니하게 인간과 엘프의 마법 수준이 여기서 극명하게 갈리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엘프들은 점차 자신의 비전을 하나로 통합하게 되었고, 그들만의 체계를 만들게 되었다. 반면에 인간들은 비전이 흘러나오는 경우가 없으니 끊임없이 고민하고 방안을 마련해야만 했다. 그 결과 각자의 길을 개척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바로 인간들이 '천재' 라 부르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각자의 길을 개척한 뒤 자신들만의 비전으로 경지에 올랐다. 그러자 오로지 한 방향을 추구하는 엘프와 달리 인간들은 여러 방면으로 경지를 개척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비전을 개방한 것이 오히려 엘프들에게 족쇄가 된 것이다. '때로는 폐쇄적인 면이, 때로는 개방적인 면이, 인간은 각자 개체마다 모두 다르다. 그러기에 우리 엘프보다 더 한 영화를 누리는 것일지도.' 이것이 개성이다. 오직 인간들에게만 두드러지는 특이한 성질. 개성이 있었기에 지금의 인간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엘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아카벨 대장로는 인간에 대한 나름대로의 정의를 내렸다. 탐욕이 가득한 종족이지만 그 가능성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정말 대단합니다. 초인 여섯 명을 제거하다니, 그렇다는 건 이제 다크 스타를 따르는 초인은 셋에 불과하다는 얘기가 되는군요." "예, 대장로님. 현재 다크 스타와 있는 초인은 단 한 명 뿐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무척 강합니다. 마검의 주인이자 본신의 실력은 엘리엔 님과 견줄 수 있을 정도니 말입니다." "엘리엔과? 정말 대단하군!" 아카벨 대장로에게서 놀라움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가 아는 엘리엔은 그야말로 최고이자 최강의 검사였다. 엘프들은 하나하나가 검 혹은 마법, 정령, 궁술에 뛰어 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 재능을 오랜 시간 갈고 닦으면 엘프 나이 300살에서 400살이 될 때 인간들의 관점으로 그 누구도 넘보기 힘든 강한 경지에 들게 된다. 하지만 큰 변고가 한번 일어날 때 엘프의 전력은 늘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된다. 인간들은 아무리 큰 피해를 입어도 기껏해야 100년에서 200년이면 회복하지만 엘프들은 한번 타격을 입으면 적게는 300년에서 많게는 500년의 시간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엘프들이 선천적으로 베움을 느긋하게 하기 때문이었고, 엘프들은 이 점을 누구도 개선하려 하지 않았다. 엘프의 천성이라 생각한 탓이다. 그런 와중에 별종 엘프가 나타났다. 엘프 숲이 아닌 외곽에서 살던 어린 엘프가 엘프 숲으로 흘러왔다. 그녀의 이름은 엘리엔. 인간들에게 부모를 잃은 어린 엘프였다. 엘리엔은 엘프 숲에 들어오고 여타 엘프와 다른 일과를 보였다. 다른 엘프들은 하루를 숲 돌보기 등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한다면 엘리엔은 오로지 검을 휘둘렀다. 검과 마법, 그리고 정령술과 궁술. 엘리엔은 모든 것을 한 번씩 익혔고, 가장 뛰어난 재능을 보인 검술을 중점적으로 익히기 시작했다. 다른 엘프들이 하루에 2, 3시간 수련한다면 엘리엔은 그것에 4, 5배를 오로지 검에 정진했다. 그 결과 엘프 역사상 전무후무한, 불과 200살 후반의 나이에 그랜드 마스터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그녀가 비단 검술에만 경지를 이룬 것이 아니다. 마법 또한 5클래스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화염, 물, 바람, 대지 4대 정령 또한 모두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궁술 또한 상당한 경지까지 익혔다고 알려져 있으니, 그야말로 대단하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였다. 그중 엘프들이 가장 놀란 것은 그녀가 바로 네이처 소드에게 선택을 받았다는 점이다. 엘프의 신물인 네이처 소드는 5대 신검 중 하나로 그 가치는 엘프에게 각별하다. 수백 년 동안 엘프 숲에서 쌓아 온 정심한 마나와 엘프 최고의 검술, 거기에 네이처 소드까지 대륙에서 엘리엔과 맞설 만한 검사가 없을 거란 것이 아카벨 대장로의 전반적인 평가였다. 그런 엘리엔과 맞설 만한 그랜드 마스터라니? 하물며 엘은 그녀라 일컬었다. 즉, 여성이란 말이 된다. 엘리엔을 제외하고 다른 여성 그랜드 마스터가 있다는 건 분명 놀라운 사실이다. "엘리엔과 견줄 수 있는 이가 여인이란 말인데...... 그 여인의 나이가 몇 살인지 알 수 있습니까?" 엘은 잠시 고민했다. 루이넨스는 아이넨스의 누나다. 그러니 그 나이가 비슷할 것이고, 그렇다면 마흔이 채 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사십이 좀 안 되었을 것입니다." "허! 사십도 안 된 나이에 엘리엔과 동급이라니......" 아카벨 대장로는 입을 떡 벌리며 탄성을 자아냈다. 다시 한 번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에 감탄하는 계기가 되었다. 엘이 그런 아카벨 대장로를 보며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여섯 초인이 사라진 지금, 전 다크 스타를 제거할 유일한 기회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입니다. 이만한 기회가 없지요." 아카벨 대장로도 동의하는 듯했다. 여섯 초인이 사라진 지금 절호의 기회가 맞는 건 분명했다. "현재 다크 스타의 휘하에 있는 초인 중 두 명이 전장에 배치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그들을 견제할 초인 하나 씩을 남겨 둔다면 이쪽에서는 아카벨 대장로님까지 여덟 명이 다크 스타를 습격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 신검의 보유자가 무려 셋입니다.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봅니다." "여덟 명의 초인이라......" 아카벨 대장로는 충분히 승산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상식적인 판단으로 초인 다수가 9클래스 마법사인 루이아스를 이길 가능성은 희박했다. 다이아몬드 제련제강의 마법까지 지닌 루이아스는 그야말로 무적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초인들이 순수한 힘을 발휘할 때의 이야기다. 아토빌 공작의 갓 소드, 엘리엔의 네이처 소드, 아이넨스의 디멘션 소드가 있다면 그 양상은 달라진다. 충분히 승산이 있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8명의 초인이 일치단결하여 루이아스를 견제할 때의 이야기다. 방금 엘이 말한 마검을 다루는 그랜드 마스터까지 합세 한다면 일의 성공 확률은 제로에 가깝게 된다. 그 점을 염려한 아카벨 대장로가 엘을 바라보니 엘은 자신 있는 얼굴로 말한다. "제게 방안이 있습니다. 대장로님께서 참전만 해 주신 다면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아카벨 대장로가 눈을 빛내며 묻자, 엘이 고개를 끄덕 인다. "물론입니다.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 엘의 얼굴에 자신감이 번져 나간다. 그것만으로도 아카벨 대장로에게 믿음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엘프 숲에 조용히 웅크리고 있던 대마법사 아카벨을 이끌어 내는 순간이었다. 아카벨 대장로의 협력을 받아 냈으니 그 뒤는 순탄했다. 백탑에 조용히 사태를 지켜보던 유클레이가 엘의 말에 의해 참전하기로 하였고, 아토빌 공작 또한 루이아스를 제거할 수 있는 기회란 말에 기꺼이 참전을 허락했다. 아이넨스와 엘리엔 또한 참전하기로 하였다. 사전에 코린트, 멜뤼스에게도 동의를 얻어 낸 엘은 무려 7명의 초인과 함께 마도 제국의 제도를 습격하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결전의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Chap.4 밝혀진 비밀 다이어드 공작은 방금 전 엘에게서 온 전언을 듣고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엘이 그에게 준 정보는 간단했다. '현재 마도 제국 진영에는 그레시오스 공작밖에 없습니다. 다른 초인들은 모두 빠져나간 상태입니다. 그러니 곧장 진격을 하여 마도 제국의 사기를 흔들어 주십시오.' "그래, 그래서 이렇게 침묵을 지키고 있었단 말이지......" 왜 전세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해 놓고 공격을 해 오지 않는지 의아하던 차였다. 그동안 다이어드 공작도 놀고 있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엘이 이 사실을 가르쳐 주기 전부터 마도 제국군의 초인 유무를 면밀하게 검토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들이 공격해 오지 않는 이유가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도 제국 측의 보안이 정말 탄탄하여 정보를 얻는 데 상당한 전력을 소모해야만 했다. 그렇다 하여 결정적인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몇 가지 정황상 증거는 얻어 내었으나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그랬기에 심증은 강했으나 마도 제국군을 공격하지 못했다. 생각해보아라. 마도 제국군에 8클래스 마법사들이 없다는 가정 하에 공격을 감행했는데 그들이 있다면? 멜뤼스와 코린트의 실력은 나무랄 데 없는 8클래스다. 하지만 그들의 실력이 라이젠과 레이벨보다 부족하다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계획은 계획대로 실패하고, 그렇게 되면 가뜩이나 큰 피해를 입은 왕국 연합군은 더욱 더 큰 피해를 입고 전쟁에서 사실상 패배하게 될 것이다. 총사령관이란 직책이 모든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했기에 다이어드 공작은 함부로 속단하고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찰나에 엘의 소식이 왔다. 어떤 경로로 얻은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엘의 소식에는 확신이 가득했기에 다이어드 공작은 그를 믿기로 하였다. 일종의 자기 위로였다. 혼자 확신을 못하던 차에 다른 이가 옳은 거라 하니 그걸 믿고 싶어 하는 그런 심정의 감정이었다. "확실하게 해 주지. 마도 제국...... 여신을 거부하는 이단의 존재들이여." 마도 제국군에는 그레시오스 공작밖에 없다. 반면 왕국 연합군에는 자신을 비롯한 2명의 8클래스 마법사가 있다. 3명의 초인과 1명의 초인. 이쪽이 질 리가 없다. 다이어드 공작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공격 개시다. * * * 왕국 연합군에는 2명의 8클래스 마법사가 존재한다. 그들은 다름 아닌 멜뤼스와 코린트. 서부 왕국에 존재 하는 마법사들의 정점인 존재였다. 멜뤼스와 코린트는 곧장 엘과 합류하지 않았다. 엘은 말했다. 떨어진 왕국 연합의 사기를 드높여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이 큰 힘을 발휘해 줘야한다고 말이다. 그 점은 두 마법사 모두 인정하는 부분이었고, 강력한 살상 마법들을 메모라이즈 해 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모든 준비가 끝났을 때, 다이어드 공작의 요청이 들어왔다. 전쟁에 참전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코린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금탑주가 다이어드 공작에게도 언질을 준 모양이군. 정말 대단한 젊은이가 아닐 수 없어." 멜뤼스도 그에 동의했다. "정말 대단하지. 만약 금탑주가 변심하지 않는다면 서부 왕국은 오랫동안 번영을 누릴 수 있겠더군." "변심이라...... 젊음의 상징이라 할 수 있지 않나?" 염려 담긴 코린트의 말에 멜뤼스가 허허, 웃었다. "뭘 그리 걱정하나, 금탑주가 자신의 이익을 위했다면 이미 마도 제국으로 갔겠지." 신중한 코린트에 비해 멜뤼스는 즉흥적일 때가 많다. 하지만 멜뤼스의 직관력은 무척 뛰어나다. 어려운 걸 쉽게 보고 풀어내니 코린트는 그 점에 종종 작은 깨달음을 얻는다. 지금의 경우도 그러했다. "그렇군. 그랬어.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 그랬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이 만들어지지도 않았겠지." 아마 초인들이 뭉쳐 보기도 전에 각개 격파당했을 것이다. 그동안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는데 왜 아직도 의심했을까 하고 생각하며 코린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코린트를 보며 멜뤼스는 피식 웃고는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일단 전쟁을 유리하게 만드는 데 주력하자고. 우리는 할 일이 많은 몸 아닌가?" "아아, 그렇지. 알겠네." 코린트가 나직 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중요한 것은 마도 제국군이다. 그들을 압도하여 서부 왕국군이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 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쟁의 사신. 8클래스 마법사들의 출전이었다. * * *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것은 비단 왕국군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었다. 블리어드 제국 측에도 소식을 전했지만 그쪽은 워낙 전황이 팽팽했기에 별다른 기대를 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효과였다. 클라이언 공작이 이끌고 있는 블리어드 제국군을 감히 경시할 수 없는 마도 제국군으로서는 발이 묶여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지루한 소모전이 이어질 무렵, 전장의 판도를 크게 바꾸는 일이 발생했다. 바로 아일라스 제국의 참전이었다. 현재 아일라스 제국에는 2명의 초인이 존재한다. 1명은 대륙 최강의 검사 아토빌 공작이고, 또 다른 사람은 이번에 새로 초인에 오른 카디어스였다. 아일라스 제국은 마도 제국의 선언의 부당함을 설토하면서 군대를 일으켰다. 그 규모는 무려 30만에 이르렀으며, 그들은 아일라스 제국의 군대 중에서도 최정예를 자랑하는 이들이었다. 카디어스가 이끄는 아일라스 제국군은 거침없이 마도 제국으로 북상하기 시작했다. 마도 제국으로 진격했지만 그들을 막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초인은 반드시 초인으로만 막을 수 있다. 물론 그보다 하위에 속하는 소드 마스터들이 초인을 막아 낼 수 있다지만 카디어스 같은 그랜드 마스터를 완벽하게 막아 내기 위해서는 소드 마스터가 최소 50명 이상은 와야 한다. 하지만 현재 마도 제국은 무척 혼란에 빠져 있는 형국이다.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거대한 덩치를 보유하게 되었지만 아직 그 체제가 완비되지 않은데다 무려 6명의 초인이 실종되고 각지에서 벌어진 공세가 강렬해지자 제국 자체가 마비된 상황이 된 것이다. 카디어스를 막기 위한 초인이라면 제도에 남아 있는 루이넨스밖에 없다. 그러나 그녀는 황제를 수호하는 근위기사단장이기에 제도를 벗어날 수 없다. 그랬기에 카디어스는 아일라스 제국군을 이끈 채 광활한 마도 제국의 영토를 점령해 나갔고, 그것은 왕국 연합군과 블리어드 제국군을 월등히 뛰어넘는 성과가 되었다. 서부의 왕국 연합군이, 동부의 블리어드 제국군이, 남부의 아일라스 제국군이 마도 제국을 시시각각 공격해 오고 있었다. 그토록 강대하게만 보이던 마도 제국이 져는 첫 위기였다. "이제 때가 된 건가." 엘은 곳곳에서 전해져 오는 정보를 접하며 중얼거렸다. 금탑 전체를 불사르며 마도 제국의 여섯 초인을 제거한 엘은 곧장 움직임을 전개했다. 엘프 숲의 대장로 아카벨을 끌어들이고 백탑주 유클레이 또한 끌어들였다. 거기에 아토빌 공작의 협력을 이끌어 내어 아일라스 제국군의 참전 시기를 일러 주었다. 그 외에도 엘이 한 일은 다양했다. 모든 초인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인물이 유일하게 그인 만큼 앞으로의 상황을 예측하고 움직일 것을 지시해야 하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곳곳에서 승전보가 울리고 있어. 하지만 그것은 루이아스가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야." 왕국 연합군이 대승을 거두고 아일라스 제국이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소식은 이미 전해 들었다. 하지만 엘은 그 승리가 일시적인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진정한 승리를 하기 위해서는 마도 제국의 황제, 루이아스를 제거해야만 한다. 아직 그에게는 600명의 소드 마스터와 청탑이 개발한 골렘이 다수 있었다. 그것들과 마도 제국의 정예병들이 움직인다면 전세는 단번에 역전될 소지가 다분했다. "먼저 공격을 해야만 해." 그 전력들을 제대로 정비하지 못했을 때 습격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엘의 짐작대로라면 현재 루이아스는 여섯 초인의 행방을 제대로 알지 못할 확률이 높다. 설사 알았다 하더라도 확신을 하지 못한 채 여러 가지 생각에 빠져 있을 게 분명 했다. 그런 지금이 찬스였다. 만약 루이아스가 한층 더 발전된 생각으로 적들을 쓸어버리기 위해 600명의 소드 마스터와 골렘들을 집결시킨 다면 제아무리 다수의 초인들이 습격한다 하더라도 힘들어진다. 그전에 마도 제국의 제도를 습격하여 승부를 봐야만 한다. 엘은 지금 그 시기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루이아스만 제거하면 돼. 그럼 모든 전쟁을 마무리 지을 수 있어." 그것은 확신이었다. 600명에 이르는 소드 마스터들이 충심으로 뭉쳤을 리 만무했다. 그들은 각기 벨로세크 제국과 루이디스 제국, 그리고 그레시오스, 트루먼, 지크리스 가문 출신의 소드 마스터 들이다. 지금은 루이아스라는 강력한 구심점이 있기에 뭉치지만 루이아스만 제거한다면 그들이 굳이 목숨을 바쳐 자신들과 싸울 이유가 사라진다. 엘은 그 점을 노리고 있다. '최소한의 피를 보고 전쟁을 끝내야 한다. 무고한 사람들이 죽게 할 수는 없어.' 자신은 영웅도 뭣도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모든 일을 끝맺고 싶었다. 그때였다. "엘 님, 손님이 오셨어요." 세레나가 방밖에서 손님이 왔음을 알린다. 그에 엘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이곳에 손님이?" 현재 이곳은 아직 극비로 치부된 곳이다. 자신이 이곳을 하사받은 것을 아는 사람은 레도프 국왕과 지금 이곳에 머물고 있는 이들, 그리고 소수의 초인들 뿐이다. 초인들이 이곳을 찾을 이유가 없고, 그렇다는 건 레도프 국왕이 이곳을 찾아왔다는 것인데 국왕이 왜 이곳을 온단 말인가? 엘이 물었다. "손님이 누구셔?" 대답은 곧장 들려왔다. "루비어스 백작님이세요." "루비어스 백작님이?" 엘의 얼굴에 의외라는 표정이 생겨났다. 지금 이 시기에 방문한 이가 로웰린이란 것에 무척 의아했던 것이다. 하지만 박대할 손님은 아닌지라 엘은 곧장 승낙했다. 자신의 사촌 누나였으니 말이다. "응, 안으로 모셔." "네." 대답과 잠시 하나의 인영이 다가오는 기척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서는 여인이 있었다. 바로 로웰린이었다. 로웰린은 엘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며 입을 열었다. "제가 찾아온 것이 의외셨나 보네요." 엘은 로웰린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그렇습니다. 이곳은 레도프 국왕 전하에게 극비에 하사받은 곳이지요. 설마하니 루비어스 백작님이 찾아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아, 자리에 앉으시죠." 그러면서 엘은 로웰린이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을 깨닫고는 재빨리 자리를 권했다. "......" 자리에 앉은 그들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엘은 로웰린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찾아왔는지 몰랐기에 섣불리 말을 꺼내기 뭐했고, 로웰린은 한동안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침묵은 잠시, 곧이어 로웰린이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입술을 꼭 깨물더니 엘을 향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있어서 찾아왔어요. 금탑주님...... 아니, 엘리미스 님의 아버지가 혹시 레이언이란 이름에 루비어스란 성을 쓰지 않으셨나요?" 묻는 로웰린의 눈은 지극히 날카로웠다. 모든 것을 알 고 온 듯한 표정이었다. 로웰린의 물음이 너무나 뜻밖이었기 때문일까? 엘은 로웰린의 물음에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가 어떻게 자신의 아버지를 알고 있단 말인가? 레이언 루비어스. 그는 전대 루비어스 공작가의 장남이자 마법에 있어 천재라 불린 젊은 인재다. 블리어드 제국의 마인하트 후작가에 납치되어 세뇌된 그는 실피르와 사랑을 하였고, 그 결실이 바로 엘이었다. 그리고 레이언의 동생의 딸이 로웰린이었다. 즉, 레이언 루비어스는 엘의 아버지이자 로웰린의 큰 아버지가 된다. 아인하트 후작가에서조차 찾기 힘든 자료를 설마하니 그녀가 조사를 했단 말인가? 놀라움과 함께 수많은 생각에 스쳐 지나갔지만 엘은 그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다. 모든 것을 알고 온 듯한 로웰린의 모습에 차마 그럴 듯한 말을 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한줄기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그래, 지금 와서 굳이 숨길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어차피 사실인 것을 엘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 맞습니다. 제 아버지는 레이언 루비어스란 이름을 가지신 분이셨으며 백작님의 생각대로 전대 루비어스 백작님의 큰 아들이셨습니다." 엘의 말에 로웰린의 눈이 크게 흔들린다. 이미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짐작은 짐작이다. 본인 입으로 시인하는 것과는 천지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로웰린의 눈에 습기가 차오른다. 지난 세월 한 점 혈육 없이 외롭게 자라온 그녀의 내면에 꼭꼭 눌러져 있던 외로움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아아...... 그럼......" 말을 잇지 못하는 로웰린. 잠시 어깨를 들썩이던 그녀는 손으로 눈가를 훔친다. 흥건하게 배어 나온 눈물을 꼬옥 쥐듯 손을 움켜쥐며 엘을 바라본다. 그런 로웰린을 엘은 무척 미안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그동안 사실을 숨겨 왔다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 심각한 모욕으로 다가올 수 있는 일이었다. "미안합니다. 정말...... 하지만 일부러 속인 것은 아니에요." 수많은 생각, 수많은 말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것들을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미안한 안색을 띠고 있는 엘을 보며 로웰린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다 저를 위한 것이었잖아요. 괜찮아요." 그녀는 전혀 화가 나지 않은 상태였다. 아니, 처음에는 무척 화가 났다. 엘이 왕궁에 온 뒤 그의 모습에서 자신의 아버지 모습을 발견한 로웰린은 차분하게 엘의 뒤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에 관한 자료는 많지 않았다. 단지 그가 공식적으로 첫 모습을 드러낸 것인 블리어드 제국의 아인하트 후작가에서였다. 그는 그곳에서 10대란 나이에 7클래스라는 엄청난 경지를 선보이며 클라이언 공작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금색의 기사를 가디언으로 거느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조사하면 할수록 금탑주에 대한 것에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아라. 통설적으로 대륙에서 7클래스에 오르는건 아무리 빨라도 40대 초반이라 한다. 동급의 경지인 소드 마스터 같은 경우 어렸을 적부터 철저한 지도 아래 고위 기사들의 지도만 있다면 30대 초반에도 충분히 들 수 있다. 하지만 7클래스 마법사는 그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다. 우선 마법에 대한 이해가 1번째다. 세르디아 대륙의 마법 체계는 무척 복잡하다. 무조건 마나 컨트롤이 뛰어나다고 하여 높은 마법을 발현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마법에 대한 이해가 뛰어나다고 하여 마나 컨트롤이 부족하면 마법을 전개할 수 없다. 즉, 마법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해서는 마나 컨트를과 마법 수식에 대한 이해가 함께 해야 한다. 이것은 스스로 터득해야 하는 문제로서, 스승들이 길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선은 존재하나 결국 자신의 길을 개척하지 않는다면 일정 수준 이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만의 경지를 개척한다는 것. 말은 간단하지만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수많은 실패를 넘고 넘어서 비로소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낸 이들만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다. 그런 영역을 10대의 나이에 도달했다?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 말이 되지 않는 영역을 침범한 이가 엘이다. 여기서 로웰린은 한 가지 가정을 세울 수 있었다. 금탑주 엘리미스는 아주 뛰어난 마법사의 혈통을 타고 태어났을 확률이 높다고. 실제로 그 추측은 맞았다. 이미 엘을 레이언 루비어스의 아들로 대입한 채 상황을 맞춰 나가니 마치 퍼즐처럼 딱딱 맞아떨어졌으니 말이다. 그렇게 로웰린은 엘에 대한 정보를 차근차근 수집해 나갔고, 점차 엘이 레이언 루비어스의 아들이란 심증은 커져만 갔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증거를 입수하게 되었다. 가문의 깊은 창고에서 레이언 루비어스의 초상화를 구한 것이다. 거기에서 로웰린은 깨닫게 된다. 엘이 진정 레이언 루비어스의 아들이란 것을 말이다. '그런데 왜 나에게 비밀로 했을까?' 처음에는 무척 화가 났다. 당장 가서 따지고 싶을 정도로. 왜 자신에게 정체를 감추었냐고 말이다. 그러나 그녀에게 있어 엘은 은인이었다. 루비어스 백작가의 부흥을 도와주었고, 나아가 루비어스 백작가가 톨리안 왕국 서부의 패자가 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 은혜에 비하면 자신에게 감춘 이것은 너무나 사소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로웰린은 차근차근 엘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 보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이에게 화를 내기 싫었기에 회피할 수단으로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을 되짚어 보자 금탑주가 왜 자신에게 정체를 감추었는지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금탑주는 제국의 시각으로 중죄인이다. 감히 제국의 유서 깊은 가문인 아인하트 후작에서 난동을 피웠으며, 황제의 명을 받은 클라이언 공작의 앞을 가로막았다. 제국의 입김이 적게 미치는 톨리안 왕국이 아니었다면 금탑주는 운신하는 것조차도 상당히 제약되었을 것이다. 그런 그와 자신이 친척 사이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당장 성세가 기울대로 기울었던 그 순간 제1왕자파에게 빌미를 제공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고, 루비어스 백작가는 채 부흥의 꿈도 꿔 보지 못한 채 산산조각 날 확률도 많았다. 금탑주는 그것을 모두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자신이 사촌 동생이란 사실을 밝히면 루비어스 백작가에 손해가 되어 돌아올 것임을. 그리고 몇 년 동안 숨기다 보니 말하기가 어려워졌다는 것을. 그녀는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로웰린이 엘을 바라보며 말했다. "솔직히 원망도 했어요. 왜 처음부터 말해 주지 않았을 까. 왜 나에게 그 사실을 숨겼을까 하고요." 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녀의 이야기를 최대한 경청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답은 어려운 게 아니었어요. 처음부터 사실을 숨긴 건 모두 탑주님의 배려가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죠." 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면도 분명 있었다. "물론 그런 것도 있었지요. 하지만 숨긴 것에 대해서는......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무슨 이유가 있다고 해도 숨긴 건 숨긴 것이다. 잘못된 건 잘못된 것이기에 엘은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 그에 로웰린이 잠시 엘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젓는다. 저 행동 하나하나에 진심이 배어 있다. 그런 그에게 화를 내면 자신은 너무 나쁜 여자가 되는 것 같다. '나를 위해, 루비어스 백작가를 위했던 것인데 화를 낼 수는 없어.' 그렇게 생각한 로웰린이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절 위한 것이란 걸 아는데 제가 어찌 탑주님을 책망하겠어요." 엘은 로웰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정말 자신을 용서하는 듯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절 용서해 주셔서요. 로웰린...... 누나!" 잠시 말끝을 흐리던 엘은 로웰린을 향해 누나라 불렀다. 본래 그녀에게 할 호칭이 이것이었다. 파르르. 엘의 바뀐 호칭에 로웰린의 눈썹이 떨려왔다. 누나, 누나란다.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느껴 보지 못한 감정이 물밀듯 몰려온다. 그것은 외로이 자신의 가문을 지키고자 했던 한 여성 가장이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 하며 듬직한 가문의 남자를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로웰린 그녀에게도 생긴 것이다. 마음 놓고 기댈 수 있는 든든한 혈육이. 그것도 다른 이가 아닌 대륙 마법사들 위에 군림하는 8클래스 마법사이자 서부 왕국에서 강력한 힘을 끼치는 금탑주가 자신의 사촌 동생 이란다. 그녀는 엘을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엘...... 엘이라 불러도 되...... 지?" 여태껏 공대를 해 온 탓일까? 아니면 금탑주가 차지하는 비중에 눌린 탓일까? 로웰린의 입은 쉽사리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런 로웰린을 보며 엘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편하게 말하세요. 저는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으니까요." "그럼...... 편하게 말할게...... 엘......" 그렇게까지 했건만 로웰린에게는 아직 어색한가 보다. 하지만 어색해하는 로웰린의 모습에서 엘은 이루 말하지 못할 편안함을 느꼈다. "그럼 저희 엄마에게도 인사를 하세요. 누나에게는 큰 어머니가 되니까요. 이참에 세레나, 카이나도 새로 인사를 하는 게 좋겠네요." 끄덕. 로웰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엘은 미소를 지을 뿐이다. 잠시 후, 방에 들어선 실피르와 세레나, 카이나는 정식으로 로웰린과 인사를 나누게 된다. 실피르는 로웰린을 안으며 진한 애정을 보였고, 세레나와 카이나는 로웰린에게 언니라부르며 친근함을 표현했다. 그것은 여태껏 남으로 대하던 것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로웰린을 대함에 있어 알게 모르게 존재했던 벽은 사라졌고, 예전에는 할 수 없었던 이야기도 거리낌 없이 나눌 수 있었다. 그런 모습에 엘은 그저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바라볼 뿐이었다. 지금 그의 마음은 무거운 돌 하나를 치워 낸 것과 같이 가벼움을 느끼고 있었다. 엘은 내내 로웰린에게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있던 것이 마음에 걸렸었다. 하지만 모든 비밀이 밝혀지고, 원만하게 일을 해결했으니 더없이 상쾌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오히려 이렇게 된 것이 다행일지도." 앞으로 큰 접전을 앞둔 시점에서 마음이 편하고 안 편하고의 차이는 크다. 엘은 그러한 점에서 로웰린이 정말 좋은 시기에 찾아와주었다고 생각했다. 그녀와의 허물을 없앰으로써 앞으로 벌어질 대결에 주 력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그의 뇌리를 지배했으니 말이다. "정말 잘되었어." 즐겁게 나누는 여인들의 모습을 보며 엘은 미소를 지었다. 힘이 충만한 느낌이다. Chap. 5 마도 제국의 황도 켈빙턴으로 피가 마르지 않는 나날이 이어졌다. 마도 제국과의 전쟁으로 전 대륙은 신음에 잠겨 갔다. 서부 왕국들 중 패권을 쥐고 있는 대왕국들은 전세를 뒤엎기 위해 대대적으로 군대를 조직했으며, 군소 왕국들 은 이 기회에 대왕국들에게 잘 보이고자, 혹은 어쩔 수 없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자국의 정예병들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조직된 추가 파견병이 무려 20만이다. 그들이 하나같이 정예인 것을 감안하면 정말 대단한 군대가 아닐 수 없다. 정예병은 하루 이틀만에 기를 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실전을 겪으면서 전쟁에 나름대로 노하우를 터득하고 강인한 체력과 정신을 겸비한 군대를 비로소 정예병이라 부른다. 정예병을 한 왕국에 많이 보유했다 쳐도 채 5만을 넘지 못한다. 그만큼 정예병이란 대단한 것이다. 그런 정예병을 무려 20만이나 모았단다. 대왕국들이 1차로 파견한 군대의 숫자를 감안하면 그들이 모든 정예병들을 결집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처음에는 어느 정도의 군대를 아껴 두던 그들이다. 그런 그들의 태도가 변한 이유는 다름 아닌 승전보가 전해지면서이다. 처음에는 밀리는 기색이 역력하다가 멜뤼스와 코린트의 존재로 전황은 급박하게 왕국 연합군 쪽으로 기울었다. 그들의 8클래스 마법을 막아 내지 못한 마도 제국군이 엄청난 피해를 입고 후퇴를 거듭했던 것이다. 그 결과 왕국 연합군에 어마어마한 영토가 수중에 떨어졌고, 더욱더 큰 파이를 원하는 대왕국들로서는 자국은 물론 주변의 군소 왕국 정예병들까지 동원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현재 왕국 연합군의 숫자는 처음 35만에서 부상자 10만을 제외한 25만이다. 거기에 20만 군대가 파견된다면 무려 45만의 군대가 된다. 어마어마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지원된 20만의 군대는 곧장 점령지로 들어섰다. 그들의 목적은 하나다. 더욱더 많은 영토를 정복하는 것! 하지만 그것이 쉽게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 * * "이십만의 군대가 추가 파병된다고?" 다이어드 공작은 2차 파병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표정을 살짝 일그러뜨렸다. 한눈에 보이는 얄팍한 속셈이었다. 왕국 연합군이 승승장구하자 더 많은 것을 원하는 왕국들이 군대를 증강하고 파견한 게 분명했다. "어리석은 것들." 다이어드 공작은 탐욕스러운 각국의 군주들의 얼굴이 떠오르자 성기사로서 하지 않아야 말을 서슴없이 하였다. 그러나 그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 그의 입장에서 이것은 이득을 원하는 전쟁이 아니다. 말 그대로 성전이다. 신을 거부하고 마법사들이 군림하는 오로지 인간들이 세상에서 제일이라는 것을 지향하는 마도 제국 무리를 처단하기 위한 성스러운 전쟁이다. 그런 전쟁에 이런 속물스러운 것들을 포함시키다니. 성스러운 전쟁이 한낱 탐욕을 위한 전쟁으로 전락하는 것 같아 그의 기분이 심히 좋지가 않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전쟁에서 떨어지는 이득이 막대하고, 그렇다면 그것을 노리는 무리들이 꼬이는 것이 당연한 현상이거늘. 큰 전쟁이 일어나면 늘 겪어 오던 것이었기에 다이어드 공작은 심기가 불편해졌을 뿐, 이렇다 할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다이어드 공작의 입가에 돌연 미소가 맺혔다. "그러고 보니 이들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겠군." 이유는 간단했다. 마도 제국군을 단기간에 격파하고 드넓은 땅들을 점령 할 수 있었던 까닭은 바로 2명의 8클래스 마법사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허나 지금 이곳에는 지금의 결과를 있게 한 8클래스 마법사들이 없다. 둘 모두 금탑주 엘리미스의 비밀 요청에 의해 전장을 이탈한 것이다. 그걸 모르는 왕국 연합군은 앞으로도 지금과 같은 성과를 낼 거라 생각했기에 무리하면서 2차 파병을 한 것이다. 정말 어리석은 선택이 아닐 수 없다. "그쪽에서도 몰랐으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이 사실을 알면 그 모습이 참 볼만하겠군. 하지만......" 다이어드 공작의 표정이 미약하게 굳었다. 무언가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레시오스 공작을 견제한다는 것으로 날 여기에 붙잡아 둘 줄이야." 금탑주 엘리미스가 멜뤼스와 코린트가 필요하다 통신 했을 때, 다이어드 공작은 금탑주의 계획을 들을 수 있었다. 다이어드 공작은 금탑주의 계획을 듣고는 자신도 참가하고 싶다고 의사 표현을 하였다. 하지만 엘은 그런 다이어드 공작의 의견을 단번에 거절했다. 자신은 남아서 그레시오스 공작을 견제해야 한다고. 그레시오스 공작을 견제할 이는 자신밖에 없다고 말이다. 인정받는 듯하여 기분이 좋긴 했으나 그것은 한순간에 불과했다. 지금 금탑주가 하려는 작전은 앞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대단한 작전이다. 거기에 자신이 끼지 못한다니 왠지 모를 서운함이 생기는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엘의 의사는 완강했다. 현재 마도 제국에서 대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곳은 세 곳이다. 그중에서 가장 막강한 전력을 보유한 곳이 바로 다이어드 공작이 막고 있는 곳이다. 만약 그가 빠져나갔다가 그레시오스 공작을 앞세운 마도 제국군이 진격해 오면 힘들게 점령한 점령지를 모두 잃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나에게도 해야 할 일이 있으니 그걸로 만족하는 수밖에. 하지만 답답한 마음은 어쩔 수 없군." 그러면서 다이어드 공작은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기분이 좋아지는 생각을 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2차 파병을 하고 그 성과가 지지부진 하여 실망할 군주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점령지가 더 없다고 하여 각국의 군주들이 감히 초인인 자신을 질책하지 못할 터. 이미 점령한 점령지만해도 엄청나다. 거기에서 더 바란다면 그는 욕심쟁이라 욕을 먹을 것이 분명했다. 물먹은 표정을 지어 보일 각국의 군주들을 생각하니 조 금은 후련한 모습이었다. * * *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엘은 자신 앞에 서 있는 7명의 사람들에게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그의 앞에 존재하는 7명의 이들. 그들의 면면은 대륙에서 결코 쉽게 볼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각기 아일라스 제국의 그랜드 마스터이자 대륙 제일 기사라 불리는 아토빌 공작, 그리고 대륙 제일 기사인 아토빌 공작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는 백탑주 유클레이와 서부 왕국의 버팀목 멜뤼스, 코린트, 신검가의 아이넨스, 엘프 숲의 아카벨 대장로, 수호검주 엘리엔이었다. 7명 모두 손색없는 초인의 경지에 이른 이들이며, 가히 일인군단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당금같은 대륙 상황이 아니라면 그들이 이렇게 한자리에 뭉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각기 절대적 경지를 이룩한 그들은 그 자존심 자체가 이미 남들과 다른 차원에 이르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건 이해가 되지만 그런 그들의 자존심이 서로 상충할 수밖에 없기에 뭉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그들은 엘이란 존재가 있었기에 뭉칠 수 있었다. 이미 초인의 경지에 이르렀으되 초인 같이 확 막힌 인물이 아니고, 나이가 젊어 활동력이 넘친다. 그리고 시기를 잘 파악하는 능력이 있기에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다. 그러나 영광이 있으면 어려움도 있는 법. 오늘 이 날이 오기까지 엘이 겪은 고생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런 고생을 이들이 인정해 주었기에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겠지만 말이다. 엘의 인사에 유클레이가 답했다. "아니네. 어찌 우리가 감사의 인사를 받을 입장이 되겠는가. 지금까지 모든 노력을 금탑주가 했는데 말이지, 오히려 우리가 금탑주에게 고마워해야 할 입장이라네." 아토빌 공작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들 대부분은 엘이 여태까지 노력한 것을 보아 온 이들이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반응이 엘에게 부끄러움으로 다가 왔다. 예전에도 말했지만 자신은 대륙을 위해 싸우는 것 이 아니다.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것들이 있기에, 그것을 지키고자 싸우는 것이다. 그러니 남들의 칭찬에 부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진정 칭송받아야 할 이들은 유클레이다. 그는 오래 전부터 루이아스의 존재에 대해 암중으로 견제해 오던 인물이었으니 그가 진정 칭송받아야 함이 옳다. 하지만 자신에게 모든 공을 돌리니 그 부끄러움이 한층 가증될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것을 따질 상황이 아니다. 그랬기에 엘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부끄러움을 감춘 채 입을 열었다. "우선 오늘 할 일을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가 해야 할 일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다시 엘에게 집중된다. 일곱 초인의 시선을 받게 되자 엘은 서서히 긴장되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오늘 우리가 할 일은...... 마도 제국의 황궁을 습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도 제국의 황제이자 모든 일의 원흉인 루이아스를 제거할 것입니다." "......" 엘의 말에 그들의 눈이 빛났다. 그런 시선을 받으며 엘은 차근차근 작전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였다. "우선 작전의 목표는 간단합니다. 최대한 살인을 줄이며 루이아스만을 제거하자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 하지?" 엘의 첫 작전 설명부터 질문에 막혔다. 그가 입을 연 인물을 바라보니 그는 다름 아닌 아토빌 공작이었다. 아토빌 공작은 엘의 말에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가 말을 잇는다. "우리가 공격할 곳은 루이아스가 살고 있는 곳. 그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몇 번의 충돌이 일어날 것이 다." "맞습니다.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지요." 엘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왜 살인을 줄여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제가 최대한 살인을 줄여 달라고 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현재 마도 제국의 근위기사단은 육백 명 전원 소드 마스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힘을 소모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살인을 자제해 달라고 한 이유는 그 소모 할 힘을 줄이기 위함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자세히 설명해 줬으면 좋겠군." 아토빌 공작의 말에 다른 이들도 동의하는 듯한 기색을 보였다. 그들로서는 엘의 말이 조금 뜬금없는 말이었다. 당장 적의 수괴를 죽이러 가는 자리다. 그런 와중에 살인을 자제해 달라니? 언뜻 듣기에 이해가 전혀 되지 않으니 엘의 설명을 기다리는 건 당연했다. 엘은 그런 반응에 자신이 조금 성급 하게 말했음을 깨달았다. "아, 너무 간략하게 말한 듯하군요. 죄송합니다. 우선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의 진정한 적은 그들이 아니란 것입니다." 잠시 숨을 고른 엘이 천천히 명확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이들을 납득시켜야만 자신의 계획이 성공할 수 있다. 반발이 있을 수 있지만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켜야만 한다. 길지만 요점을 정확하게 짚은 엘의 말이 이어졌다. "육백 명의 소드 마스터는 분명 대단한 전력입니다. 당장 저희가 그들을 상대로 정면으로 맞선다면 분명 승리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들을 모두 상대할 동안 루이아스가 가만히 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루이아스가 합세하여 우리 모두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조용히 황궁으로 잠입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우리들이 황궁으로 잠입한 뒤 루이아스와 접전을 벌인다면 힘의 여파 때문이라도 그들이 함부로 끼어들지 못할 것입니다. 도움이 되기도 전에 여파에 휩쓸려 죽을 수 있으니까요. 게다가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루이아스에게 어느 정도의 충성심을 지니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벨로세크 제국의 근위 기사단과, 벨로세크 3대 검가 출신, 그리고 루이디스 제국 근위 기사단이 합친 세력입니다. 그런 그들이 루이아스에게 맹목적인 충성심을 가지고 있을 확률은 희박합니다. 그 점을 파고들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루이아스를 제거하고 그들에게 타 협안을 제안한다면, 그들은 받아들일 용의가 있을 것입니다." 긴 말이 끝을 맺었다. 그들은 저마다 곰곰이 엘의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빠져 들었다. 과연 엘의 말에 어느 정도의 타당성이 있으며, 과연 실현 가능성이 있는지 따져 보는 것이다. 우선 엘의 말대로라면 무척 이상적인 방법이다. 엘프인 아카벨 대장로와 엘리엔 같은 경우 인간사에 큰 영향을 끼칠 필요를 못 느끼기에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았지만 다른 이들의 생각은 제각각이었다. 우선 유클레이와 멜뤼스, 코린트는 엘의 생각에 긍정적 이었다. 그들은 루이아스만 제거한 뒤 그들에게 타협안을 제시한다는 엘의 말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은 멸망한 벨로세크 제국이 재건될 가능성도 높았고, 종주국인 벨로세크 제국이 재건국된다면 흐르는 피가 상당히 줄어들 것이 분명했다. 아이넨스는 대륙을 수호하는 신검가인 만큼 피가 적게 흐를수록 좋다는 반응이었다. 반면 아토빌 공작은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사실 그의 입장이라면 분명 그럴 수밖에 없다. 다른 이들이 최대한 적은 소음으로 이번 일을 마무리 짓고 싶어 하는 반면 아토빌 공작은 최대한 크게 일을 키 운 뒤 마무리 짓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래야 아일라스 제국이 더욱 많은 영토를 취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루이아스가 죽고, 그를 따르던 근위 기사단이 공중분해 된다면 삽시간에 마도 제국은 거대한 부피를 지닌 속빈 강정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런 국가를 집어삼키는 일은 무척 간단한 일이다.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준비해 온 만큼 아일라스 제국의 준비는 충분했다. 그런데 조용히 마무리 짓자니? 아토빌 공작의 입장에서는 얼토당토하지 않은 말이었다. 무려 수십 년 동안 준비해 왔다. 그런 마당에 이 좋은 기회를 마다하고 최대한 조용히 마무리 짓자는 엘의 말이 마음에 들 리가 없다. '마음에 들지 않는군. 하지만......' 아토빌 공작의 시선은 빠르게 주변을 훑고 있었다. 자신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엘의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 이고 있었다. 아무리 자신이 강하다고 하나 다른 여섯 초인의 의견을 무시하고 들이댈 만큼 눈치가 없지는 않다. 언짢았지만 아토빌 공작은 다음 기회를 노리기로 하였다. '아직 일은 성사되지 않았다. 루이아스를 죽이고, 모든 일이 정리되었을 때 다시 한 번 기회가 올 것이다.' 후일을 기약하며 아토빌 공작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긍정의 표시였다. 가장 난관이라 여겼던 아토빌 공작이 동의해 주자 엘의 표정이 급격히 밝아졌다. 사실 엘이 가장 걱정하던 것이 바로 아토빌 공작이었다. 다른 이들은 대륙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루이아스를 타도했지만 아토빌 공작은 전혀 다른 이유로 루이아스를 타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은 명분을 중시한다면 아토빌 공작은 실리를 중시한다. 그런 그의 성품상 자신의 의견에 가장 난적이 될 확률이 농후했는데 그런 그가 긍정을 표해 준 것이다. "감사합니다, 제 의견에 찬성해 주셔서." 진심을 담은 엘의 인사에 아토빌 공작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일단 가장 중요한 것은 루이아스의 타도이고,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니 승낙한 것이다." 실리적인 면을 제외하더라도 엘의 말이 타당성이 있음을 아는 아토빌 공작이었다. 아토빌 공작이 무난하게 찬성하자 다른 이들도 모두 엘의 의견에 긍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감사합니다. 제 의견에 찬성해 주셔서." 감사의 의미를 담으며 고개를 숙인 엘은 곧장 말을 이어나갔다. "진로가 결정된 이상 남은 건 전진뿐입니다. 마도 제국의 황도로 공간 이동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엘이 캐스팅을 하기 시작했다. 마도 제국의 황도에 공간 이동을 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이나 다름없다. 그랬기에 엘은 이미 마도 제국 황도 근처에 비밀 텔레포트 장소를 마련해 놓고 있었다. 이것도 디벨 상단의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8클래스에 이르면서 월등히 빨라진 캐스팅은 곧바로 끝을 보였고, 곧이어 눈부신 빛과 함께 여덟 명의 초인이 흔적도 없이 장내에 모습을 감추었다. 여덟 초인의 마도 제국 황도 습격 개시였다. * * * 넓은 황무지가 펼쳐진 대지. 이곳은 마도 제국의 황도, 구 벨로세크 제국의 황도인 켈빙던을 둘러싸고 있는 드넓은 대지이다. 켈빙던은 계획 도시이다. 벨로세크 제국은 세르디아 대륙의 문명을 시작한 최초의 국가로서, 기름진 키클로스프 강을 중심으로 발전한 국가이다. 키클로스프 강 유역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발전한 벨로세크 제국은 풍부한 식량과 인구수를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마법과 검을 익히면서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벨로세크 제국이다. 벨로세크 제국은 처음 그렇게 큰 국가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문명이 그러하듯 강 유역에 펼쳐진 벨로세크 제국은 점차 세를 불려 가면서 세르디아 대륙 동부 전체를 아우르는 큰 국가로 변모하게 되었다. 그 후 벨로세크 제국에 대항하는 여러 인간들이 국가를 세우기 시작했으며, 그것이 바로 벨로세크 제국을 제외한 다른 네 제국이 되었다. 자신들에게 대항하는 제국들이 잇달아 건국되자 벨로세크 제국에서는 종주국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자신들의 자존심을 뽐내야 할 것이 필요함을 느꼈다. 압도적인 군사력과 압도적인 식량 압도적인 무력을 모두 갖추었지만, 그것은 문화의 척도가 되지 못했기에 벨로세크 제국인들은 자신들의 자존심을 고취시킬 것을 찾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벨로세크 황가에서는 한 가지 문제를 안게 된다. 바로 황도의 이전을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단일 국가였고, 영토가 작았던 시기에는 상관이 없었지만 영토가 드넓어지고 벨로세크 제국을 적대하는 국가들이 잇달아 생겨났으니 키클로스프강 유역에 위치하는 황도가 남부에 치우쳐져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게 된 것이다. 황도로 삼을 곳을 물색하던 중, 벨로세크 제국의 황제는 다른 제국들과는 조금 차별성을 둘 필요를 느꼈다. 바로 벨로세크 제국 특유의 자존심이 발동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벨로세크 제국은 타 제국들이 감히 넘보지 못할 만한 벨로세크 제국의 거대한 문화의 상징이자 지상 최고이자 최강의 국가의 황도를 대대적으로 계획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켈빙턴의 시초이다. 우선 드넓은 평지를 찾은 후 차곡차곡 치밀한 계획 아래 도시를 건설해 나갔다. 수백만에 이르는 인부들이 켈빙턴에 모여들어 황도를 건설하기 시작했으며, 무려 30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완성한 것이 켈빙턴이다. 하지만 30년 동안 완성한 것은 단지 외부의 모습에 지나지 않았다. 켈빙턴의 외적인 모습을갖추는 데 걸린 시간이 30년이고, 황도를 옮긴 뒤 공사는 꾸준히 이어져 무려 수백 년 동안 켈빙턴의 모습을 변모시켜 왔다. 그 결과 켈빙턴의 규모는 다른 제국들의 수도보다 무려 서너 배가량 컸으며, 벨로세크 제국에 온 타 제국의 사신들이나 서부 왕국들의 사신들은 켈빙턴의 방대한 규모에 질려 벨로세크 제국을 종주국으로 치켜세우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의 눈에 켈빙턴의 방대한 규모는 도저히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오로지 종주국만이 가능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유서 깊은 역사를 지닌 켈빙턴. 대마법 공격 보안까지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으며, 공간 이동이란 애초에 불가능한 이곳은 평지이면서도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요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적은 군대로 많은 군대를 막을 수 있는 골든 벨리 같은 구조가 아니라, 오로지 방대한 규모에 걸맞는 제국의 위엄과 실용적인 측면에서 으뜸이라는 표현이 정확하다 할 수 있다. 그런 켈빙턴 근처에 새하얀 광채가 감도는 것은 정말 보기 드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마법 자체가 완전히 차단된 이곳에 마법적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새하얀 광채는 점점 그 크기를 키워 나가더니 곧이어 맹렬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파아앗! 한순간 빛이 폭사함과 동시에 여덟에 이르는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엘을 비롯한 일곱 초인이었다. 모습을 드러낸 초인들 중 몇몇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멜뤼스는 배를 부여잡으며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우욱! 속이 정말 좋지 않군. 이거 마치 처음 공간이동 을 경험할 때와 같은걸?" "그렇군. 먼거리를 건너왔다고 하지만 이런 현상을 겪는 건 오래 전에 멈췄는데 지금에서야 이런 현상을 겪다니, 옛 추억이 떠오르면서도 결코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군." 코린트도 불편한 표정을 지은 채 말했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엘이 어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미리 말씀드리지 않아서 죄송합니다. 실은 이곳 켈빙턴 전체가 마법 차단 지역이고, 이곳으로 강제 공간 이동 마법진을 열다 보니 평범한 공간 이동보다 휠씬 복잡하고 힘든 경로로 이동을 해 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육체적으로 단련이 되지 않은 분들은 약간의 부작용을 겪게 되는데...... 미리 말씀드리지 않아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엘의 말은 정중했으나 그 말을 들은 멜뤼스와 코린트의 표정은 그야말로 떫은 감을 씹은 표정이었다. 듣기에는 정중한 말이었지만 결국 자신들의 육체 단련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말이 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결국 제 얼굴에 침 뱉는 꼴인지라 멜뤼스와 코린트는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 비해 상당히 정상적인 안색을 하고 있는 유클레이가 웃음을 지었다. "허허허, 아주 날카로운 말이로군. 그러니 평소에 단련해 두라고 하지 않았나, 멜뤼스, 코린트. 그렇게 내 말을 듣지 않더니 이렇게 쓴 경험을 결국 하게 되었군." "끙, 그런 말씀 마십시오, 선배님 안 그래도 지금 금탑주의 말에 가슴이 꽁꽁 찔려 죽겠건만." 멜뤼스의 말에 유클레이가 미소를 지었고, 다른 이들도 미소를 지었다. 불쾌한 공간 이동으로 인해 나빠졌던 기 분이 화악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유클레이에게 고맙다는 눈짓을 보낸 엘이 말했다. "우선 저희가 해야 할 일은 켈빙턴에 무사히 들어간 뒤 황궁을 습격하는 것입니다. 신분증은 제가 디벨 상단에 부탁하여 만들어 두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켈빙턴에 들어간 뒤 황궁을 습격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엘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편으로 놀랐다. '과연 보통내기가 아니군.' 켈빙턴에 몰래 잠입할 줄 알았더니 이미 신분증까지 만들어 두었다지 않은가. 특히 유클레이나 아토빌 공작은 켈빙턴 내에 있는 첩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불시 신분 검사를 한다는 걸 잘 알았기에 엘의 철두철미함에 혀를 내둘러야 했다. 엘이 건네는 신분증을 하나하나 받은 그들은 신분증을 살피면서 다시 한 번 놀라야만 했다. 신분증에 기재된 내용들이 자신들의 신체 특징과 한 치의 오차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엘의 철두철미함에 혀를 내둘러야 했고, 다시 한 번 경악을 해야 했다. 정말 모든 일을 함에 있어 틈을 보이지 않는 존재였다. '정말 대단해. 후일 반쪽짜리가 아닌 진정한 9클래스에 오를 재목일지도......' 각각 일곱 쌍의 눈에는 감탄과 경외, 질시의 눈이 섞여 있었다. 그런 그들의 기색을 아는지 모르는지 엘은 신분증을 모두 나누어 주고는 말했다. "신분들이 모두 귀족으로 되어 있는 만큼 유람 나온 것으로 하여 잠입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와 엘리엔 님, 아이넨스 님은 아카벨 대장로님과 아토빌 공작님, 유클7레이 님의 자제로 하면 될 것 같네요." "그럼 자연스럽겠군." 아토빌 공작의 서릿발 같은 기세는 아이넨스와 상당히 비슷했고, 아카벨 대장로와 엘리엔은 엘프 특유의 분위기가 비슷했다. 엘과 유클레이는 마법사 특유의 분위기가 묻어 나왔기에 적절한 조합이었다. 단지 졸지에 홀아비 신세가 된 멜뤼스와 코린트가 약간의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을 뿐이다. 그렇게 위장을 모두 마친 엘 일행은 켈빙턴의 까다로운 검증 절차를 모두 통과한 뒤 무사히 켈빙턴의 내부로 들어설 수 있었다. 켈빙턴으로 들어선 그들은 곧장 여관에 들어가 방을 잡았다. 그리고 몸의 상태를 최선으로 만들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약 3일 동안 최상의 몸 상태를 만든 그들은 조용히 황궁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최후의 결전이 다가오고 있었다. Chap. 6 초인들의 신위 구 벨로세크 제국의 황궁은 9클래스 마법사가 와도 함락시킬 수 없다고 할 만큼 마법에 있어 철두철미한 방비가 이루어진 곳이다. 실제로 벨로세크 제국과 전쟁을 하면서 무수히 많은 국가들이 벨로세크 제국의 황궁을 함락시키려 하였으나, 그 중 황궁의 가장 외부마저도 함락시킨 국가가 전무했다. 당장 기사의 전력에서 벨로세크 제국을 따를 만한 국가가 없었고, 황궁 외부와 내부에 펼쳐진 대마법 방어진은 그야말로 철통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무수히 많은 소문들을 동반하는 벨로세크 황궁은 마법사라면 꼭 한 번 정복해 보고 싶은 대상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엘 또한 마찬가지여서, 벨로세크 황궁을 바라보는 엘의 시선에는 짙은 열기가 담겨 있었다. "이곳이 벨로세크 제국의 황궁. 마법사들의 묘지라 불리는 곳......" 엘의 목소리가 다소 들떠있었다. 하지만 붕 뜬 그런 종류의 목소리가 아닌, 희열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돌아서는 엘의 모습이 방금 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이곳부터는 조심해야 합니다. 제 계획대로 따라 주세요." 평소와 다르게 강렬한 카리스마를 풍기고 있는 엘의 모습에 그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정문에는 강력한 방어 마법과 락 마법이 걸려 있습니다. 탐지 마법이 걸려 있지 않으니 투명화 마법으로 통과하도록 하겠습니다." 엘의 말과 함께 그들의 모습이 그대로 사라졌다. 투명화 마법이 전개된 것이다. 황궁은 마치 미로와도 같다. 어느 구간에는 탐지 마법이 설치되어 있으며, 어느 구간에는 대마법 방어진과 기타 마법들이 설치되어 있다.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마법사는 대륙에 아무도 없다고 할 수 있으며, 마법의 정점인 9클래스에 이르러도 구분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작업이기도 했다. 하지만 엘은 그것이 가능했다. 왜냐하면 엘은 이곳의 마법 체계가 아닌, 지구의 것들과 융화된 자신만의 마법 체계였기 때문이다. 단전호흡으로 끌어들인 마나를 미세하게 내뿜으면서 엘은 전방의 마나들을 조용히 읽어 들였다. 마법은 마나를 인위적으로 배열하여 속성에 따른 현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당연히 그 배열마다 고유의 수식과 속성이 있으며, 엘 은 자신의 마나로 그것들을 촉진하듯 배열을 알아내어 무슨 마법이 설치되어 있는지 알아내는 것이다. 가히 신기에 가까운 수법이라 할 수 있었다. 라이젠과 레이벨을 통해 마나를 방출하는 것에 효과를 알아낸 엘은 이것을 자신의 의지대로 다룰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여러 가지 실험을 해 본 결과 지금과 같은 것이 가능하다는 걸 알아낸 것이다. 유클레이에게 투명화 마법 유지를 부탁한 엘은 외부로 마나를 분출 시킨 뒤 수식을 읽어 들였다. 이것은 무척 복잡한 일이었다. 수식을 차례대로 배열하여 마법을 캐스팅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역으로 수식을 읽어 들여서 자신이 아는 마법의 수식과 매치 시킨 뒤 그 마법의 속성을 알아내는 것이므로 고도의 집중력을 요했다. 그렇게 엘을 선두로 천천히 전진하면서 그들은 아무런 방해없이 황궁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탐지 마법을 모두 피해 가는 엘의 모습에 모든 초인들의 눈에 경악이 떠올랐다. 벨로세크 제국이 황궁을 결코 허투루 만들었을 리가 없다. 종주국이라는 자존심을 지키고자, 수백 년에 걸쳐 완성된 켈빙턴은 그 누구도 함락하지 못한 요새 중 요새이며, 난공불락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그런데 지금 그곳의 심장과 같은 황궁을 엘이 뚫어내고 있는 것이다. 경악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천천히, 한 시간여 동안 황궁으로 진입하던 엘이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집중력의 한계가 드러난 것이다. 한 시간 동안 고도의 집중을 한 것만으로도 엄청나다 할 수 있다. 얼굴에 땀범벅이 된 엘은 유클레이를 보며 메시지 마법을 보냈다. 이곳은 탐지 마법이 없는 구간이다. -죄송하지만 지쳐서...... 잠시 휴식을 취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엘의 말에 유클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지금 엘이 하는 작업이 얼마나 집중력을 요하는 것인지 알 수 있다. 지금 엘이 하는 일은 마법사들이 캔슬 마법을 전개하는 것과 비슷한 것으로, 1시간 동안 이런 일을 펼친 것만으로도 충분히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 엘이 차분하게 숨을 몰아쉬면서 눈을 감고 단전호흡에 빠져들었고, 유클레이는 자세한 사정을 다른이들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미 마법사들은 엘이 하는 일이 엄청난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란 걸 알았기에 아토빌 공작과 아이넨스에게만 이해를 요구하면 되는 것이었다. 아토빌 공작은 방금 전부터 엘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그는 유클레이가 엘이 지금 많이 지쳤다고 말하는 것에도 전혀 신경을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엘이 단전호흡에 빠져든 순간부터 그에게 못 박힌 듯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토빌 공작은 외부의 마나가 조용히 엘에게 흡수되는 것을 보고는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저것은 마나 연공법이다. 설마하니 금탑주가 저런 마나 연공법을 익히고 있었을 줄이야!' 보통 마나 연공법이 아닌 듯했다. 아토빌 공작은 이렇게 방대한 마나를 흡수하는 마나 연공법은 당연히 처음 보았다. 마치 주변의 마나를 모조리 빨아들이듯, 주변의 마나가 급격하게 엘의 내부로 스며드는 걸 발견한 것이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단 말인가. 만약 저런 식으로 마나를 받아들이고 깨달음을 얻는데 주력하게 하면...... 삼십 대에도 그랜드 마스터가 가능할지 모른다!' 물론 30대란 나이에 그랜드 마스터에 이른 아이넨스나 루이넨스가 존재했지만 그들은 조금 특별한 존재였다. 당장 신검을 다루는 것도 다르거니와 철저한 효율로 만들어진 마나 연공법과 그 마나를 단시일 내에 급격하게 키워 주는 가문의 비전이 만났기 때문이다. 지금 엘이 하고 있는 마나 연공법은 그런 면을 제하고 보면 최고라 할 수 있었다. 아토빌 공작의 눈에 짙은 탐욕이 어리기 시작했다. 기사에게 있어 최고의 보물은 검도 갑옷도 아닌 마나 연공법이었다. 기사 중 기사라 불리는 아토빌 공작이 엘의 마나 연공법을 탐내는 건 당연했다. '저 마나 연공법만 손에 넣으면 우리 아토빌 공작가가 대륙을 지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저 마나 연공법으로 기사들을 기른다면? 능히 수천 명의 소드 마스터를 양산할 수 있다. 수천 명에 이르는 소드 마스터라니! 그렇게 된다면 대륙 통일도 꿈만이 아니다.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저것을 손에 넣고 말겠다. 저것만 있다면 영원한 권력을 유지할 수가 있어.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반드시!' 아토빌 공작은 짙은 탐욕 어린 시선으로 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후우우우!' 체감 시간으로 약 한 시간 정도가 흘렀을 때였다. 단전호흡으로 무념무상에 빠져들었던 엘은 어질어질하던 머리가 화악 맑아진 걸 느끼며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내부를 휘돌던 마나가 단전에 자리하면서 얌전한 양처럼 멈춰 선다. 시선을 옮기니 자신들을 바라보는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엘은 그들에게 기다려 주어서 고맙다는 눈인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이 전진을 의미하는 것이었기에 다른 이들 또한 조용히 자리에 일어나 다시 엘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황궁의 규모는 정말 방대했다. 아일라스 제국의 황궁과 블리어드 제국의 황궁을 가 본적이 있는 엘로서는 벨로세크 제국 황궁의 방대한 규모에 기가 질릴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니.' 단순히 황궁을 진입하는 것만으로도 엘은 인간의 위대함을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정말 인간이란 대단한 것 같았다. 어떻게 이렇게 방대 하고 거대한 건축물을 지을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이것들을 건축하는 데 수많은 이들의 피와 땀이 흘렀겠지.' 모든 역사가 그러했다. 무수히 많은 희생자를 짓밟고 그 위에 서는 것이 승자인 것처럼, 누군가의 희생으로 무언가를 창조하는 것은 인간의 순환적 역사라 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엘은 루이아스가 참으로 어리석게 느껴졌다. 이미 멸망한 마도 문명이다. 그런 멸망한 문명을 다시 재건하고자 하는 그의 이상을 보면 참으로 한심하면서도 그렇게 외골수적으로 마도 제국의 건국을 목표로 하는 그에게 일말의 두려움마저 들었다. '하지만 넘어야 할 산에 불과하다. 루이아스를 제거하고, 이 기회를 빌어 나의 입지를 확실하게 다져 놓아야 해. 그렇게 하면 근심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어.' 젊을 때는 사서 고생하란 말이 있는 것이 지금처럼 여실히 느껴질 때가 없다. 엘은 평생 고생할 것을 지금 시기에 몰아서 하는 기분이다. 하지만 그런 고생을 거부할 생각은 없다. 따지고 보면 이것들도 다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자신의 행복을 쟁취하고자, 그리고 넓게는 대륙의 안위를 위해서 움직이는 것이다. 즉, 자신의 행복이 1순위이고, 대륙의 안위는 그에 딸려오는 2순위에 불과하다. 단지 대륙의 안위를 위하는 것이 그럴 듯해 보이고 멋져 보이기에 남들이 치켜세워 주면 조용히 있는 것이다. '후우! 또 한계가 슬슬 오고 있군.' 한 1시간 정도가 흘렀을 무렵 엘은 집중력의 한계가 오는 것을 느꼈다. 다시 1시간 동안 단전호흡을 하며 정신력을 가다듬고 전진하길 반복하였다. 집중력의 한계는 여전히 1시간이었지만 전진하는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할수록 는다는 말이 있듯이, 대부분 비슷한 수식의 마법이 설치되어 있는 만큼 읽어 들이고 회피하는 것이 빨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꼬박 반나절 동안 전진한 그들은 마침내 루이아스가 머무는 궁에 도착할 수 있었다. 솔직히 루이아스가 있는 궁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가장 방비가 삼엄하면서도 많은 기사들이 주둔하고 있었기에 안 봐도 뻔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집중력의 한계로 다시 단전호흡에 빠져든 엘은 전과는 달리 최대한 천천히, 극한까지 힘을 비축해 두기 시작했다. '내 역할이 중요하다.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여기서 내가 실수하면 모두가 죽는다. 최대한, 최대한 힙을 발휘할 수 있도록 힘을 회복해야 해.' 지금 엘의 몸 상태는 최상이라 하기가 힘들다. 건전지를 한 번 다 쓴 뒤 다시 충전하여 쓰면 비슷한 위력을 발휘하긴 해도 처음과 같은 위력을 발휘하기가 힘들다. 그리고 쓰고 충전하길 반복하면 처음과 큰 차이가 나게 된다. 지금 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황궁에 잠입하기 전에는 분명 최상의 몸 상태였으나 집중력의 고갈과 충전을 반복하면서 그의 몸 상태는 상당히 좋지 않은 상태였다. 물론 나쁜 정도는 아니었지만 루이아스와 맞붙게 되면 평상시 100퍼센트의 힘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을지 확신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랬기에 엘은 최대한 힙을 회복시키고자 지금까지와 달리 더욱더 심혈을 기울이며 회복에 힘쓰고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 막대한 부담감을 얹으면서 한계 이상의 힘을 발휘하려는 속셈이었다. 천천히, 마나가 미세한 미풍을 일으키며 엘의 전신에 녹아들기 시작했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집중력 이외에 소모된 체력 등을 회복시키면서 몸 전체의 감각을 극도로 끌어올린다. 천천히 천천히......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엘은 전신에 활력이 넘쳐나는 걸 느끼고 있었다. 두 시간여 동안 힘을 축적한 엘이 눈을 떴다. 푸른 안광이 뿜어지며 그의 몸 상태가 최상에 이르렀음을 알려주었다. 엘이 메시지 마법을 전개했다. -지금부터 황궁에 잠입하겠습니다. 황궁은 갖가지 마법이 중첩되어 있어 피할 곳이 없습니다. 따라서 강행돌파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토빌 공작님과 엘리엔 님이 선두를 서 주시고, 아이넨스 님이 후방을 맡아 주시기 바랍니다. 여태껏 자신이 앞장서던 것과는 달리 이런 일에는 그랜드 마스터가 적임이란 걸 알았기에 엘은 아토빌 공작과 엘리엔에게 선두를 부탁했다. 디멘션 소드를 지닌 아이넨스가 여차하면 원거리 지원이 가능했기에 그것을 모두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이다. 엘의 말에 진영을 바꾼 그들은 투명화 마법을 풀었다. 갑자기 궁 앞에 여덟 인영이 등장하자 경비를 서던 근위병들이 대경했다. 생각해 보아라.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 갑자기 침입자가 나타났다면, 놀라자빠질 일이라 할 수 있다. "너희들은 누구냐!" "침입자들이다! 어서 기사님들을 불러라!" 근위병들이 일시분란하게 움직이며 엘 등을 경계했다. 하지만 그들이 방비하게 놔둘 리가 없었다. 빠르게 황궁을 돌파하기 위해 아토빌 공작이 먼저 몸을 날리며 검을 휘둘렀다. 서걱! 아토빌 공작의 일검에 다섯 근위병의 몸이 반으로 갈라지며 쓰러졌다. 미세한 오러로 최대의 효과를 본 일격이었다. "큭!" 동료가 한순간에 인육 덩어리가 되어 양분되자 근위병 하나가 신음을 흘리며 품속에서 신호탄을 꺼내 들었다. 그것을 터뜨리려던 찰나, 엘리엔의 검이 이미 근위병의 미간을 꿰뚫고 있었다. "끄으윽!" 신음을 흘리며 쓰러지는 근위병을 보며 엘이 외쳤다. "곧장 돌파하세요." 궁 앞의 소란을 알아차린 기사 서넛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엘은 그들이 더 많은 아군을 부르지 못하게 하기 위해 외친 것이다. 그런 엘의 의도를 알아차린 엘리엔이 재빨리 몸을 날렸고, 아토빌 공작이 뒤질세라 몸을 날려 검을 휘둘렀다. 모습을 드러낸 기사는 총 넷이었다. 그들은 죽은 근위병들을 보며 싸늘한 기세를 피워 올렸다. "너희들은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그러나 날아오는 것은 대답이 아닌 검이었다. 갑작스러운 기습임에도 기사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검에서 푸른색 오러 블레이드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의심할 나위 없는 소드 마스터인 것이다. 그것도 4명의 기사 모두 소드 마스터 급 기사였다. 허나 그들은 상대가 너무 나빴다. 그들을 공격하는 이들은 다름 아닌 아토빌 공작과 엘리엔이었으니 말이다. 둘 모두 대륙 최강의 검사라 칭하기071 부족함이 없는 그랜드 마스터, 소드 마스터도 분명 지고한 경지라 하나 그들의 검을 받아 내기에는 손색이 있었다. 서걱! 검이 부딪치면서 충돌음이 아닌 베이는 소리와 함께 검과 몸이 함께 베였다. 단 한 수에 검과 몸이 베어 버린 것이다. 일격에 기사 1명씩 죽인 엘리엔과 아토빌 공작은 곧장 검을 휘둘러 다른 기사들의 목숨도 거두었다. 한순간에 4명의 소드 마스터가 허망하게 목숨을 잃었다. 털썩. 영혼 잃은 육신이 쓰러지면서 궁 앞은 다시 조용한 침묵에 잠겼다. 엘이 시체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당신들에게 죄가 없지만 이렇게 만난 걸 불운으로 여기시길. 그럼 곧장 돌파하지요." 여덟 초인의 신형이 곧장 궁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의 발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궁 안에도 곳곳에 경비를 서는 근위병들과 기사들이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초인 8명이다. 그들이 제국의 정예라 해도 각국의 비밀 병기이자 대륙에서 가장 강한 이들의 발걸음을 막을 정도는 되지 못했다. 일격에 하나의 목숨이 사라진다. 기사들이 응집하지 못하게 속전속결로 그들의 목숨을 거두는 아토빌 공작과 엘리엔은 그들에게 악마의 모습으로 비추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오늘 만큼 악마가 되기로 단단히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그랬기에 손을 씀에 있어 결코 망설임이 없었다. '정말 대단해.' 엘은 아토빌 공작과 엘리엔의 신위를 보면서 눈을 빛냈다. 정말 강해도 너무 강했다. 비록 엘이 8클래스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이들과의 일전은 엄두도 내지 못할 게 분명했다. 실력의 수준 차이가 극명했고, 이룬 경지에서나마 조금 차이가 났다. '아직 난 멀었군.' 20대에 8클래스에 올라 조금은 자신 있어 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렇게 강한 이들을 눈앞에서 보면 새삼 자신이 자만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이번 기회로 내가 더욱더 강해질 수 있다면 좋겠지. 나의 젊음은 자리에 안주하는 걸 원하지 않으니까.' 이번 습격으로 엘은 많은 것을 얻고 있었다. 그것은 후일 그가 더 높은 경지로 올라서는 데 양분이 될 것이다. '지금 이렇게 고민할 때가 아니지.' 궁 안으로 진입하고 꽤 깊은 곳까지 들어선 듯하다. 엘은 점점 깊은 곳으로 들어서고 있다는 걸 느끼면서 기감를 확장시켰다. 이곳에서 가장 기감이 발달한 건 바로 자신이었으니 말이다. '느껴진다!' 먼 곳이지만 엘은 느낄 수 있었다. 저곳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마나의 파장을. 그것은 분명 루이아스가 지닌 마나의 파장이 분명했다. 엘이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루이아스가 있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그가 있는 곤에 도착합니다." 엘의 말에 초인들의 몸이 한층 더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특히 루이아스의 힘을 잘 아는 유클레이, 아토빌 공작, 엘리엔과 아이넨스는 그 긴장 정도가 심했다. 그걸 알았기에 엘이 독려하듯 말했다.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충분히 이길 수 있습니다. 자신의 힘을, 그리고 옆에 있는 분들을 이번 일이 끝날 때까지만 믿으세요. 그럼 우리가 이길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유치하고 단순한 독려였지만 그것은 충분히 효과가 있었다. 쓸데없이 들어간 힘이 빠져나가고 자신감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 엘에게 느껴졌으니 말이다. '공사장 현장 감독하면 잘하겠군.' 농담조로 피식 웃으며 마침내 그들이 거대한 정문 앞에 도착한다. 이 문 너머에 루이아스가 있을 것이다. 아토빌 공작이 앞장 서 문을 열었다. 쿠우우웅! 육중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대전의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이 열리면서 그 너머에 한 인영이 높은 옥좌에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바로 마도 제국의 황제이자 대륙 인간 사상 유일하게 9클래스를 이룩한 존재, 루이아스였다. 루이아스는 옥좌에 앉은 채 양팔을 펼치며 외쳤다. "어서 오라, 나를 거스르는 어리석은 무리들이여." 피부를 찢을 듯한 예리한 살기와 함께 폭풍과도 같은 기세가 몰아쳐 왔다. Chap.7 세상에는 절대 불변의 법칙이 존재하는 법이다 "큭!" 폭풍과 같이 몰아치는 기세가 내부를 뒤흔드는 것을 느끼며 엘이 신음을 흘리며 몸을 비틀거렸다. 그것은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유클레이도, 멜뤼스도, 코린트도, 아카벨 대장로도, 심지어 엘리안마저도 그 기세에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 그들의 공통점은 마법을 익혔다는 점이다. 대전의 문이 열림과 동시에 루이아스가 폭풍과 같은 기세로 클래스 프레셔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한순간 그들의 내부를 뒤흔든 것이다. 샤악! 아이넨스의 디멘션 소드가 보이지 않는 루이아스의 압력의 끈을 베었다. 그러자 폭풍과 같이 몰아치던 압박감이 사라졌고, 엘을 비롯한 다른 이들의 안색이 본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루이아스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제법이군. 과연 나에게 대적할 만한 자격이 있는 이들이야. 하지만 나에게 엄연히 손색이 있지." 루이아스의 말은 오만했다. 여덟 초인을 앞에 두고 자신을 상대하는 데 손색이 있다니. 하지만 그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존재였다. 대륙 역사상 그 누구도 이룩하지 못한 9클래스의 영역을 개척한 존재가 바로 루이아스다. 게다가 단신의 몸으로 드래곤마저 사냥했으니, 그는 인간의 몸으로 누구도 얻지 못했던 9클래스 마스터이자 드래곤 슬레이어라 할 수 있다. 엘은 루이아스를 보며 입을 열었다. "손색이 있고 없고는 지금 있을 결전에서 판가름 날 것이라 생각합니다." 루이아스의 시선이 엘에게 향했다. 서늘하면서도 광폭한 시선에 엘은 전신이 저릿해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엘을 바라보는 그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너는 정말 대단한 존재다. 이렇게까지 내 앞을 가로막다니. 내가 일생에 있어 가장 후회하는 것이라면 바로 너를 과소평가하고 오늘까지 살려 두었다는 점이다." 엘은 루이아스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루이아스를 응시할 뿐이었다. "누군가 죽기 전까지 싸움은 끝이 나지 않을 테지. 묻겠다. 내가 보낸 여섯 명의 초인은 어떻게 되었지?" "모두 죽었습니다." "......" 담담하면서도 거침없이 말하는 엘의 말에 루이아스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가 여섯 초인을 어떤 방법으로 죽였단 말인가? 그런 의문을 풀어주기라도 하듯, 엘이 말을 이었다. "금탑과 골든 나이트를 미끼로 여섯 초인을 끌어들여 금탑 자체를 폭발시켜 버렸습니다." "금탑 자체를? 허어......" 루이아스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내심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금탑 자체를 폭발시킬 생각을 하다니. 게다가 골든 나이트라면 금탑주의 분신과 같은 존재다. 그것을 포기하다니. 평범한 사람이라면 아니, 여기 있는 초인들 누구도 그러한 발상은 하지 못할 것이다. 침묵하던 루이아스가 감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넌 정말 대단하구나, 자신의 것을 포기하면서 그런 계책을 짜다니. 정말 너와 적이라는 사실이 슬프다. 지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나에게 오라. 그렇다면 내 다음 황제의 자리는 너에게 줄 수도 있다." "......!" 루이아스의 폭탄 발언에 모두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하니 루이아스가 이런 발언을 할 줄이야. 특히 유클레이의 놀라움은 더욱 컸다. 그는 루이아스의 야망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루이아스의 목적은 마도 제국을 세운 뒤 영원히 그 제국을 통치하는 것이다. 그런데 루이아스가 그 황제의 자리를 엘에게 넘기겠다? 이건 그만큼 루이아스가 엘을 원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유클레이가 엘을 힐끗 살펴본다. 엘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랐기에 은연중 그를 살피는 것이다. 인간이란 마음이 변하기 쉬운 존재이며 권력이란 것에 더없이 약한 모습을 보인다. 루이아스의 파격적인 제안에 엘의 마음이 뒤바뀔지도 모른다. 그만큼 루이아스의 제안은 유혹적이다. 아카벨 대장로와 엘리엔도 엘을 살폈다. 그들 또한 인간이 얼마나 쉽게 변하는 존재인지 잘 안다. 비록 엘이 믿음직스럽고 자신들과 친밀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지만 그가 돌변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만큼 인간들이 권력에 약하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엘은 침묵했다. 다른 이들에게 그 침묵은 엘이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엘이 입을 열었다. "분명 매력적인 제안입니다. 하지만 전 그럴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엘의 말에 반응이 극명하게 갈렸다. 행여 그가 뒤늦게 루이아스의 편에 설까 노심초사하던 이들이 밝은 표정으로 바뀐 것이다. 반면 루이아스의 표정은 착 가라앉았다. "어째서지?" 루이아스의 물음에 엘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생겨난다. "간단합니다. 귀찮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루이아스뿐만 아니라 그를 따라온 모든 초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로서는 그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다. 설마하니 귀찮다고 할 줄이야! 그들의 입장에서 엘이 별종 중의 별종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여태껏 권력을 마다하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엘이 그들의 생각을 통째로 흔드는 발언을 하였다. 루이아스는 엘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지고한 지위를 주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엘은 거절했다. 절대적인 권력을 거절한 것이다. 그것은 그들을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그만큼 루이아스의 제안은 유혹적이었다. "분명 매력적인 제안이긴 합니다. 만약 제가 아닌 다른 분에게 했으면 동요했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절 잘못 아셨습니다. 제게 있어 권력은 어느 정도 필요하지만 그 이상이 되면 오히려 귀찮은 짐이 되기 때문이죠." 권력을 짐 치부하는 엘을 보며 루이아스는 되려 미소를 지었다. "권력이 귀찮다니. 정말 너 같은 사람은 처음이군. 하지만 그것이 더 마음에 든다." "마음에 든다고 하지만 어차피 절 죽이려고 할 것 아닙니까? 마음에 들지 않은 게 저를 죽이는 데 좀 더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만." 루이아스가 웃음을 지었다. 하얗게 보이는 그 웃음은 무척 섬뜩했다. "날 누구라 생각하는 거지? 난 루이아스다. 내가 죽이고자 하는 이는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저는 여태까지 죽이고 싶지 않았나 보군요?" 죽이려 하다가 실패한 것을 비꼬아서 한 말이다. 화를 낼 법도 하지만 루이아스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난 널 죽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지금도 말이다." "어째서지요?" 엘의 물음에 루이아스가 당연하다는 어조로 말한다. "당연하지 않나? 금탑주, 너는 몇 백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대천재다. 그런 천재를 내 손으로 죽인다는 것은 정말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지. 난 그래서 너를 나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것이다. 내가 진정 너에게 살기를 품고 싶지 않기에. 내가 너를 죽이고 싶어진다면 어쩌면 난 마도 제국의 발전을 몇 백 년 후퇴시키는 일을 초래할지도 모르기에 말이다." 가히 칭송에 가까운 칭찬이 아닐 수 없다. 엘은 9클래스 마스터인 루이아스가 자신을 이토록 높이 평가해 준다는 것에 묘한 기분을 느꼈다. 다른 이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분명 즐거운 일이다. 하물며 9클래스 마법사인 루이아스에게 이런 인정을 받았다는 것에 엘은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게 하였다. 하지만 인정은 인정에 불과하다. 엘은 결국 자신과 루이아스의 생각이 전혀 다름을 느낄 수 있었다. "저에 대해 너무 과찬을 하고 계시는군요. 전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인물이 아닙니다." 엘의 대답이 종지부였다. 루이아스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아아...... 결국 나의 제의를 끝까지 저버리는 건가, 금탑주여." 그와 함께 노도처럼 잠식해 들어가는 끈적한 살기. 감정의 기복 하나만으로 사위를 압도한 루이아스가 엘을 바라본다. 엘은 루이아스의 시선을 받으면서 그가 자신에 대한 살김을 진정 굳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좋아. 죽고 싶다면 어쩔 수 없겠지." 루이아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파아앗! 그의 손짓과 함께 엄청난 풍력의 바람이 불어오며 그들을 압도했다. 그것을 견뎌 내기 위해 실드 마법을 치고 버텨 내자 루이아스가 나직이 입을 연다. "루이넨스. 적을 말살한다. 모든 힘을 다해 적을 죽여라." "알겠습니다." 어느새 나타난 것일까. 루이아스의 뒤에 나타난 무표정한 것이 매력인 루이넨스가 대답한다. 그와 함께 마검을 뽑아든 루이넨스가 달려든다. 퍼벙! 쇄도하던 루이넨스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마법을 막아 내고는 눈을 살짝 치켜뜬다. 그곳에는 유클레이와 아카벨 대장로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미 그들은 사전 협의 하에 루이넨스를 막기로 의견을 본 상태였다. "마법사인 우리들은 루이아스와의 대전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터. 그렇다면 그의 검을 봉쇄하도록 하지." 유클레이와 아카벨 대장로는 다른 8클래스 마법보다는 확실히 한 수 위에 선 8클래스 마스터들이다. 그런 둘이 루이넨스를 막아 선다면 루이넨스로서도 결코 방심할 수 없다. 세 초인 간의 대립이 첨예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아카벨 대장로와 유클레이가 루이넨스를 견제하자 남은 엘과 아이넨스, 엘리엔, 아토빌 공작은 앞으로 나서고 멜뤼스와 코린트는 약간 뒤에 위치했다. 멜뤼스와 코린트는 이번 전투에서 자신들의 비중이 그리 크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이번 전투는 대륙 역사에 길이 남을 전투다.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만족이었다. "그렇다고 방심은 금물이지, 암." "저자를 상대로 방심할 만한 놈은 너밖에 없다. 너나 주의해라." "으음!" 평소 자신의 실력을 잘 알고 있는 멜뤼스로서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자신도 그 부분은 인정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우리의 역할도 결코 비중 없는 게 아니다. 중요한 역할이니 마음을 놓지 마라." "그건 나도 아니 그만 말해라! 네가 그러니 자꾸 내가 시켜서 하는 것 같잖아." 멜뤼스가 벌컥 화를 내자 코린트는 입을 다물었다. 멜뤼스가 평소 남이 시켜서 하는 걸 무척 싫어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사이 루이아스와 다른 이들은 대치하고 있었다. 루이아스는 엘을 보며 웃음을 흘렸다. "저번에 그렇게 당해 놓고 다시 내 앞에 서다니. 정말 용기 하나는 가상하군." 엘도 지지 않았다. "열 번을 패해도 그 패배를 극복하고 승리를 거둔다면 그가 진정한 승자가 아닐까요?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승자가 되고 싶나?" "글쎄요. 그건 두고 봐야겠죠." 그 말과 함께 엘은 뒤로 훌쩍 물러났다. 동시에 아토빌 공작과 엘리엔이 검을 휘두르며 루이아스에게 접근했다. 루이아스는 그들을 보며 코웃음 쳤다. "어리석은 것들." 파앗! 소매가 펄럭이며 붉은색 다이아몬드가 창의 현상을 갖춘다. 제련제강의 마법이 펼쳐진 것이다. 엘리엔이 네이처 소드를 치켜들며 오러를 주입했다. 제련제강의 마법은 저번에 겪어 봐서 그 위력을 잘 알고 있다. 이 위력을 최대한 분산시키려면 일격에 분쇄시켜야 한다. 농도 짙은 오러를 머금은 검이 붉은 창과 부딪쳤다. 떠어어엉! "으윽!" 붉은 창과 충돌하면서 전해져 오는 강렬한 충격에 엘리엔이 신음을 흘리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베어 내는 데 성공했지만 첫 일격에서 오는 피해가 매우 컸다. 엘리엔이 붉은 창을 막아 낸 사이 아토빌 공작이 루이아스에게 접근하여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갓 소드의 힘이 발휘되고 있었다. 때문에 아토빌 공작의 검에 담긴 힘은 독보적이었다. "큭! 갓 소드인가. 방심할 수 없는 힘이지." 그 말과 함께 루이아스의 정면에 푸른 방패가 생겨났다. 이 역시 제련제강의 마법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쿠웅! 갓 소드와 푸른 방패가 부딪치자 둔중한 소리와 함께 충격파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아토빌 공작은 갓 소드의 힘을 사용하고도 푸른 방패를 단번에 부숴 버리지 못하자 경악했다. "이럴 수가! 세상에 갓 소드의 힘을 버텨 내는 방패가 있다니." 아토빌 공작은 갓 소드의 힘을 더욱 끌어올렸다. 그러자 푸른 방패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쾅! 갓 소드의 힘을 견뎌 내지 못한 푸른 방패가 부서지자 아토빌 공작은 성난 기세로 루이아스를 베어 왔다. 그걸 보며 루이아스가 피식 미소 지었다. "내가 마법사인 걸 잊었나 보군." 루이아스의 손이 뻗어 나오며 아토빌 공작의 갓 소드를 채 갔다. 그의 손이 뻗어 오는 경로에 수십 줄기의 뇌전이 서리며 아토빌 공작의 오러를 부숴 나갔고, 나아가 바인딩과 홀드 퍼슨, 그리스와 슬로우 마법이 중첩으로 펼쳐지면서 아토빌 공작의 움직임을 제한했다. 한순간 극도로 무력해진 아토빌 공작을 보며 루이아스가 음침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것이 마법의 힘이다. 어리석은 검사여." 루이아스가 다른 손을 뻗으려 할 때, 그는 전신을 난도질하는 듯한 예기를 느끼고는 곧장 블링크를 하였다. 파바밧! 블링크를 하고 사라진 공간에 수십 줄기의 오러가 내리치며 공간을 난도질했다. 순식간에 피해 낸 것이다. 10여 m 떨어진 곳에 모습을 드러낸 루이아스가 미소를 지었다. "대할 때마다 살 떨리는 검이로군. 정말 예측하기 힘들단 말이지." 그러면서 루이아스는 양손을 뻗었다. 그의 양손에 쥐어 진 붉은색 다이아몬드가 창으로 변하며 아이넨스와 아토빌 공작에게 향했다. 붉은 창이 쇄도하자 두 검사는 검을 들어 그것을 막아간다. 콰광! "우욱!" "윽!" 2번의 충돌음과 2번의 신음이 비슷한 시기에 터져 나왔다. 붉은 창의 위력은 독보적이었다. 신검을 지닌 그랜드 마스터조차 막는 걸 애먹을 정도니 그 위력은 가히 드래곤을 사냥하고도 남을 정도일 것이다. 거기에 더욱 루이아스를 까다롭게 하는 건 바로 마법의 응용이다. 9클래스에 이른 그의 마법 응용은 그랜드 마스터인 그들조차도 무력하게 만들 정도로 대단했다. 제련제강의 마법과 일반 마법의 완벽한 조화. 그것은 루이아스를 한층 더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신검을 보유한 세 그랜드 마스터가 우위를 전혀 점하지 못하는 것만 해도 그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예측하기 힘들었다. "크으으으!" 루이아스의 지척에 접근하여 검을 휘두르던 아토빌 공작의 몸이 돌연 뻣뻣하게 굳었다. 거듭되는 루이아스의 공격에 무리한 공격을 감행하다가 그의 마법에 제대로 걸려 버린 것이다. 루이아스는 오른손에 푸른 뇌전을 생성하며 아토빌 공작에게 쏘아냈다. "우선 첫 번째 주자로군. 잘 가라, 아토빌 공작." "크윽!" 아토빌 공작은 루이아스의 마법에 벗어나기 위해 체내의 마나를 필사적으로 운용하여 벗어나려 하였다. 하지만 이미 단단하게 전개된 루이아스의 마법은 쉽게 벗어날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이대로 가다간 아토빌 공작이 죽음을 맞이하게 될 상황, 그때 그에게 구원군이 나타났다. "고개를 숙이세요, 공작님 !" 파아앗! 외침과 함께 뿜어지는 청색 물결. 그것이 몸에 닿는 순간 전신이 자유로워지는 걸 느끼며 아토빌 공작이 고개를 숙여 루이아스의 공격을 회피했다. 그리고 그걸 뛰어넘어 동시에 공격까지 감행했다. 쾅! 애석하게도 아토빌 공작의 공격은 무산되었다. 하지만 루이아스의 표정은 가히 좋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전 의외의 상황에 미처 대응하지 못하여 하나밖에 메모라이즈되지 않은 절대 방어를 전개 해 버렸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위험할 때 유용하게 사용할 절대 방어를 이렇게 허망하게 사용해 버리자 루이아스의 얼굴에 짙은 분노가 서렸다. "이렇게 쉽게 절대 방어를 내주다니." 불평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어느새 붉은 창을 부숴 버린 엘리엔의 네이처 소드가 루이아스의 허리를 노리며 오러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걸로 나를 죽일 수 있을 것 같더냐." 양손을 내밀며 루이아스가 네이처 소드를 튕겨 내려는 순간, 푸른 물결이 루이아스를 덮쳐 왔다. 빠른 속도로 루이아스에게 접근한 그것은 마법을 전개하려는 그의 손에 다다랐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캐스팅되던 마나에 한줄기 마나가 끼어들더니 완성이 다 된 마법이 허망하게 무위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이, 이럴 수가!" 너무나 놀란 나머지 루이아스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하였다. 하지만 놀라움도 잠시. 엘리엔의 검을 보면서 그는 회피를 택했다. 그 순간 아이넨스의 검이 공간을 격해 오며 한줄기 오러가 루이아스의 왼손을 강타했다. 지지직! "으으!" 뇌전에 베인 것처럼 팔 전체에 긴 상처를 입은 루이아스가 상처 부위를 부여잡으며 뒤로 물러났다. 압도적인 힘으로 몰아치던 때와 달리 지금은 너무나 무기력한 모습이었다. "무슨 사술을 부린 것이냐?" 루이아스는 엘을 보면서 물었다. 그는 분명 보았다. 엘에게서 뿜어진 푸른 기류가 자신의 마법을 무효화시키는 것이.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현상이기에 루이아스의 눈에는 짙은 불신이 서려 있었다. 엘이 외부로 마나를 표출하며 말했다. "간단합니다. 바로 제 몸속에 머물고 있는 마나를 분출하여 당신의 마법 흐름에 간섭한 것이지요. 제 의지대로 다룰 수 있는 마나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마나를 자유자재로 다룬다고? 그것은 9클래스의 영역이다." 루이아스가 믿기지 않는 듯 외쳤지만 엘은 이미 정상적인 마법사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저에게 마검사의 재능이 있었나 봅니다. 체내의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점에서 말이죠." "마검사? 그건 전설에서나 나오는 경지다. 진정한 마검사가 되려면 9클래스에 이르러야 가능하지." "하지만 보시는 바와 같습니다. 제가 마나의 흐름을 간섭할 수 있기에, 사실상 당신의 승산은 없어진 것과 다름이 없지요." 자신감 어린 엘의 말에 루이아스가 웃음을 짓는다. "나의 승산이 없다고? 너는 날 얕보는군. 난 루이아스다! 누구에게도 패배하지 않는 불패의 마법사이기도 하다!" 루이아스의 신형이 번개처럼 엘에게 접근해 나갔다. 어느새 그의 손에 쥐어진 2개의 다이아몬드가 창의 현상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엘은 그것을 예상한 듯 뒤로 물러나며 마나를 분출했다. 루이아스의 마법 전개를 미연에 차단하기 위함이다. 양쪽에서 아이넨스와 엘리엔이 붉은 창을 막아 주고 있으니 피하기에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여유롭게 뒤로 물러나 피하려던 그때, 엘은 짙은 위화감을 느쪘다. 완벽하게 피해 냈음에도 루이아스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감돌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함을 느낀 엘이 황급히 몸을 틀 때, 뒤에서 슈우욱 하는 소리와 함께 화끈한 느낌이 전신을 강타했다. 푸욱! "커......헉!" 전신을 휘감는 화끈한 느낌과 동시에 무시무시한 고통이 엄습해 왔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니 그곳에는 붉은 창이 섬뜩한 빛을 발한 채로 자신의 배 부분을 꿰뚫고 있었다. 바로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중상이었다. 엘이 힘겹게 고개를 들어 루이아스를 보니 그는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너의 마나 분출은 정말 대단한 수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같이 너부터 제거한다면 승기는 나에게 있다고 할 수 있지. 넌 처음부터 오판을 했다. 붉은 창이 내 손에 붙어 있을 때만 모양이 변할 줄 안 것이지. 하지만 붉은 창은 내 의지에 따라 모습이 변하는 시기를 조절할 수 있다. 그것을 모르고 오만했던 너의 최후가 바로 그 모습이다." "......" 루이아스의 말에 엘은 대답할 수 없었다. 과도한 출혈 탓에 의식이 흐릿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푸욱! 엘의 뒤로 간 아이넨스가 붉은 창을 뽑았다. 그리고 멜뤼스와 코린트가 달려들어 힐링을 연이어 전개했다. 재빠른 그들의 응급 조치 탓에 엘은 목숨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유일한 승리의 방안을 가지고 있던 엘이 쓰러진 이상 승리의 길은 한층 더 멀어진 것과 다름없다. 그들이 승리하지 못한다면 엘의 목숨도 구한 게 아니게 된다. 엘리엔이 이를 꼭 문 채 검을 다잡으며 말했다. "반드시 널 제거하겠어, 다크 스타." "너 혼자의 힘으로 날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수호검주여." "내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널 죽여 주겠어." 엘리엔의 말은 날카롭고 평소의 모습과는 상당히 달랐다. 바로 눈앞에서 엘의 처참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까. 엘리엔의 뇌리에는 부모님이 인간의 손에 죽던 날이 그대로 재생되고 있었다. 그만큼 그녀에게 엘은 가족과 같이 소중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반드시, 반드시 죽여 버리겠어!" 콰콰콰콰! 푸른 오러가 줄기차게 뿜어지면서 지금과는 전혀 다른 강맹한 오러를 생성했다. 그리고 검을 휘두르며 루이아스를 덮쳐 갔다. 하지만 냉정함을 유지하며 상대를 공략하던 그녀가 냉정을 잃은 시점에서 이미 승산이 제로가 되었다. 공격을 감행하다가 마법에 움직임이 제한당한 그녀는 루이아스의 마법을 피하기 위해 뒤로 몸을 날려야만 했다. 털썩. 볼썽사납게 쓰러진 엘리엔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검을 루이아스에게 겨누며 방비 태세를 취했다. 아토빌 공작과 아이넨스도 루이아스를 견제했지만 그들의 얼굴에서 승기란 찾아볼 수 없었다. 루이아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이 얼마나 멋진 광경이란 말인가! 대륙 최강의 검사들이 내 앞에서 짓는 이 패배자들의 표정이라니! 정말 좋구나, 하하하!" 자신들을 인정사정없이 깔아뭉개는 루이아스의 말에 그들의 표정이 더욱 처참하게 변했다. 하지만 홀로 오연히 서 있는 루이아스에게 빈틈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쾅! 콰과광! 그들의 대치가 이루어지고 있을 때 한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아카벨 대장로, 유클레이, 루이넨스의 대결도 가속화 되고 있었다. 마검의 힘을 극성으로 다룰 수 있게 된 루이넨스는 두 대마법사들을 상대로 한 치도 밀리지 않는 팽팽한 대결을 펼치고 있었다. 그것을 보며 루이아스가 미소를 흘렸다. "후후후! 저쪽의 대결이 빨리 끝나고 너희들을 도와줬음 싶겠지? 하지만 나에게 마법사들은 하등 도움이 되지 않지." 그렇게 말하면서 루이아스가 오른손을 들었다. 카르마 링의 힘을 발현하여 루이넨스에게 압도적인 전세를 만들어 주기 위함이다. 하지만 그걸 보고만 있을 이들이 아니다. 루이아스가 손을 들면서 한순간 드러난 틈을 엘리엔이 파고들었다. 동시에 아토빌 공작과 아이넨스도 협공해 들어갔다. 쾅! 콰광! 쾅! 세 그랜드 마스터의 합공을 수십여 번이나 받아 내면서도 루이아스의 안색은 태연했다. "대단하기는 하지만 날 이기기란 불가능하지." 그 말과 함께 마법을 발현시키는 루이아스. 그때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절대 발생하지 않아야 할 푸른 기류가 나타나 루이아스의 마법을 무효화시켰던 것이다. "헉!" 한창 대결 도중에 마법이 풀려 버리자 루이아스는 대경했다. 설마하니 갑자기 마법이 풀려 버릴 거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피하려 했지만 이미 완벽하게 기회를 내준 상태였다. 루이아스는 이를 악 물고는 자신을 양단해 오는 아이넨스의 검을 최대한 몸을 틀어 맞아 갔다. 서걱! 예리한 오러를 머금은 아이넨스의 검이 루이아스의 왼쪽 어깨를 단칼에 베어 버렸다. "헉!" 왼쪽 팔이 베여 버리자 루이아스가 신음을 흘리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지만 빠른 응급처치 덕택에 피가 더 흘러나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안색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왜지?" 의문을 가득 품은 루이아스의 눈은 창백한 안색으로 자리에 버티고 서 있는 엘에게 시선이 향했다. 도저히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당장 죽어도 이상이 없을 녀석이 갑자기 일어나 자신을 방해하다니. 직접 겪지 않았으면 절대 믿지 못했을 것이다. "어떻게 네놈이 서 있는 거지?" 루이아스의 물음에 창백한 얼굴의 엘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제 몸에는 특수한 게 있어서 말이죠." 루이아스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엘의 몸 내부에 흐르는 드래곤 블러드의 존재를. 드래곤 블러드는 엘의 몸에 피가 부족하게 되자 빠른 속도로 피의 공급을 촉진하여 최소 활동에 필요한 피를 생성해 낸 것이다. 큰 움직임에는 상당한 제약이 있으나 지금은 격전 중이다. 엘은 무리해서 다시 일어난 것이다. '드래곤 블러드가 이럴 때 도움이 될 줄이야.' 쓰러진 엘은 자신의 내부에 무언가가 빠르게 작용하면서 서서히 활력이 돌아오는 걸 느꼈다. 그것이 드래곤 블러드의 힘임을 깨달은 엘은 조용히 기회를 살폈다. 자신이 이대로 일어서 봤자 루이아스는 다시 자신을 노릴 것이 분명하다. 움직임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지금 판국에 다시 루이아스에게 노림을 당하면 그 다음에는 확실한 죽음이 자신에게 올 것이다. 그래서 기회를 살피던 엘은 절호의 기회를 포착, 마나를 분출하여 루이아스의 마법을 해제하고 그의 왼쪽 팔을 베어 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루이아스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큭큭! 제대로 당했군. 설마하니 내가 이런 꼴을 당하게 될 줄이야." 하지만 그의 눈빛은 죽지 않았다. 아니, 더욱 거세게 타 올랐다. "나는 루이아스다. 절대 패배하지 않는 불패의 상징이다!" 콰아아아아아아아! 루이아스의 외침과 함께 궁을 뒤흔드는 엄청난 마나의 파동. 대지가 흔들리고 하늘이 갈라질 정도로 엄청난 마나의 유동이었다. 하지만 익숙했다. "이, 이건......" 창백한 엘의 안색이 더욱 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어찌 모르겠는가. 이 마나의 파동. 이것은 바로...... "프로미넌스! 9클래스 마법 프로미넌스입니다. 모두 피하세요." 엘의 다급한 외침에 모두의 안색이 뒤바뀐다. 프로미넌스! 모든 것을 태워 버리는 헬 파이어조차 프로미넌스의 열기에 한낱 불덩어리에 불과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의 고위 마법이다. 프로미넌스를 막아 낼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절대 방어뿐이다. '설마하니 이렇게 나을 줄이야.' 엘은 루이아스가 이성을 잃고 프로미넌스를 전개할 줄 몰랐다. 9클래스 대표 마법인 프로미넌스의 전개 유무를 점치기는 했으나, 그의 성격상 9클래스 마법보다는 제련제강의 마법으로 승부를 내려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엘의 예상이 멋지게 빗나간 판단이었다. 그때 엘리엔이 앞으로 나섰다. "내가 막아 보겠어." "예? 그게 가능합니까?" 엘리엔이 프로미넌스를 막겠다고 하자 엘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엘의 시선에 엘리엔은 그를 조용히 바라보며 말한다. "네이처 소드는 이 세상의 조화로움을 추구하는 검. 검의 힘을 극성으로 발휘하면 프로미넌스를 부술 수 있을지 도 몰라." 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신뢰의 표시였다. "믿겠습니다." "으음......" 굳은 신뢰가 담긴 엘의 모습과 목소리에 엘리엔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가 사라졌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네이처 소드의 힘을 발휘한다 하여도 내가 버티지 못 하면 모든 게 소용이 없지. 그러니 나에게 세이지 실드를 전개해 줘." "예,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세이지 실드를 전개하기 위해서는 엘리엔의 앞에 서서 전개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엘리엔이 네이처 소드의 힘을 발휘 할 수가 없게 된다. 게다가 실드의 특성상 보호하는 면적이 적을수록 그 강도가 강해진다. 앞에서 보호할 수 없다면 옆에 서서 보호해야 한다. 엘은 엘리엔 옆에 바짝 붙어 섰다. 그러자 엘리엔이 화들짝 놀란다. "이, 이게 무슨 짓이지?" 어찌나 놀랐는지 말까지 더듬었다. 그런 엘리엔의 말에 엘도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오, 오해하지 마세요. 단지 실드의 면적을 좁히면 그 강도가 더욱 강해지기에 옆에 선 것뿐이에요." "아, 알았다." 부끄러움도 잠시였다. 지금은 대륙을 위한 일을 하는 터. 잠깐의 여유도 허용되지 않는다. 네이처 소드를 든 엘리엔은 조용히 눈을 감는다. 그리고 서서히 마나를 끌어올리면서 그것을 네이처 소드에 조금씩 주입하기 시작했다. 우웅! 평온한 마음으로 네이처 소드와 일체가 되자 녹빛 기류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네이처 소드 자체에 서려 있는 순수한 검의 힘이었다. 엘리엔은 평온한 마음으로 네이처 소드와 일부가 되어 몸과 검이 하나로 합쳐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 순간 네이처 소드의 녹빛 기류가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오더니, 궁 상층부에서 맹렬한 기세로 쏘아져 오던 프로미넌스에게 향했다. 샤아아! 마치 가벼운 미풍이 부는 듯한 효과음이었다. 하지만 그 미풍의 힘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처음엔 가벼웠던 미풍이 곧이어 산들바람처럼 변하였고, 그것이 점점 강렬해지더니 이내 폭풍이 되어 프로미넌스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네이처 소드는 조화의 검. 모든 마나의 흐름을 조화 속으로 돌려놓는다. 반면 9클래스 마법은 인위적으로 뒤트는 마나 흐름의 결정체이다. 2개의 절대적 힘은 자신의 어떠한 것조차 양보하지 않은 채 치열하게 대립했고, 이내 네이처 소드가 아래를, 프로미넌스는 위로 치솟기 시작했다. 콰아아아! 모든 것을 녹여 버리는 프로미넌스는 궁 상층부를 꿰뚫고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주변에 풍기는 열기 자체만으로 모든 것이 녹아내렸다. 삽시간에 궁 주변이 지옥도로 변해 갔다. 그에 반해 궁 내부는 어떠한 피해도 없었다. 세이지 실드를 사용했던 8클래스 마법사들은 엘리엔이 프로미넌스를 밀어내자 경악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엘이 놀란 루이아스를 보며 말했다. "예상치 못했지만 프로미넌스도 막아 냈군요. 이제 당신의 최후만 남은 듯합니다." 루이아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표정이 무섭게 굳어 있는 채로 말이다. 그러던 순간 루이아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손을 뻗었다. 이제 봐주고 뭐고 없었다. 오로지 적을 죽이기 위해 살수를 뻗을 뿐이다. 콰콰! 푸른빛 뇌전이 루이아스의 하나뿐인 오른손에 맺혀 주변을 파괴해 들어갔다. 위협적인 공격이었지만 팔이 2개였을 때보다는 확실히 덜 위협적이었다. 근접 계열 공격을 감행할 때에는 엘이 해제하기 힘들었지만 외부로 표출되는 마법을 전개할 때에는 어김없이 엘의 방해가 계속되었다. 그리고 루이아스가 무력화되는 순간, 멜뤼스와 코린트의 마법이 짓쳐들어갔다. 그 후 괼쳐지는 세 그랜드 마스터의 합공. 신검의 힘을 본격적으로 발휘하는 그들의 압도적인 강함과 엘의 방해, 그리고 두 8클래스 마법사들의 후방 지원에 루이아스의 패색이 점차 짙어지기 시작했다. 치열한 접전이 이어지면서 루이아스의 제련제강의 마법이 펼쳐질 때면 신검을 앞세운 세 그랜드 마스터가 힘을 합쳐 그것을 분쇄해 나갔다. 철저한 차륜전으로 인한 6대 1의 대결이 지속되었고,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루이아스의 힘은 소모되어만 갔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루이아스의 얼굴이 땀이 맺혀 갔고, 숨결도 점차 거칠어져 갔다. 그런 반면 엘을 비롯한 다른 이들은 아직 여유가 있었다. 철저한 체력 안배에 루이아스를 쉼 없이 몰아쳤기에 루이아스의 체력은 급격히 소모되었지만 그를 공격하는 초인들은 지친 기색이 없어 보였다. 루이아스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허억! 정말 대단하군. 날 이렇게까지 몰아칠 줄이야." 그의 어조에는 짙은 감탄사가 배어 있었다. 9클래스에 이른 자신의 방대한 마나량은 쉽게 고갈을 보이지 않는다. 당연히 8클래스보다 월등하고 그랜드 마스터보다도 월등하다. 스스로 100명의 초인과 싸워도 자신이 지치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모습을 보아라. 체력이 급격힌 소모되어 숨 쉬는 것조차 힘들 지경이다. 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세상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다구리에는 장사가 없다는 말입니다. 제아무리 강한 존재라고 하여도 체력에는 한계가 있는 법입니다. 수많은 이들이 체력 안배를 철저히 한 채 한 사람만 몰아친다면 그 사람이 제아무리 강자라 하여도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무척 운이 좋았습니다. 팔이 베인 덕분에 체력 소모가 몇 배는 빨리 이루어졌으니까요. 하늘이 우리의 손을 들어 준 것 같습니다." "그렇군. 그런 것 같아." 루이아스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자신에게 남은 건 없다. 남은 게 있다면 지칠 대로 지친 몸뚱이뿐. "마지막 유언을 하고 싶군." 유언이라니? 패배를 인정하겠다는 말인가? 들어서 나쁠 것은 없다. 이미 승기는 완전히 자신들의 것이 되었으니까. "마도 제국 황제의 유언...... 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나의 모든 비전을 너에게 주고 싶다." "......" 루이아스의 말에 엘은 물론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9클래스 마법사의 비전을 물려주겠다니. 이것은 돈으로 주고도 살 수 없는, 나라 하나를 송두리째 준다고 해도 바꾸지 않을 귀한 것이다. 그걸 엘에게 주겠다니? 방금 전까지 적인 걸 감안하면 루이아스의 속을 알 수 없었다. 루이아스가 미소 지었다. "궁금하겠지. 하지만 별다른 이유는 없다. 단지 내가 최후를 맞이하는 만큼 나의 남은 것은 사라지지 않길 바라는 소망이라 하지. 사람은 자신이 이룩한 걸 누군가 알아주길 원하니까. 난 그걸 네가 알아주었으면 한다." "인정할 수 없소." 루이아스의 말을 제지하고 나선 이가 있다. 바로 아토빌 공작이다. 아토빌 공작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루이아스를 노려보았다. "금탑주가 당신의 비전을 이어받는다면 또 다른 마도 제국이 생겨날지도 모르지." 그의 말도 일리가 있다. 루이아스는 마도 제국을 꿈꿨던 무서운 자. 그의 비전을 접한다면 금탑주 또한 마도 제국을 꿈꾸게 될 가능성이 충분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무척 적었다. 이미 마도 제국을 꿈꾸다가 멸망 직전에 놓은 자가 루이아스다. 그런 그를 처단하는 데 가장 앞장 선 엘이 힘을 합한 대륙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잘 안다. 더군다나 개인이 아무리 강해도 다수의 힘 앞에서 무용지물이란 걸 직접 보여 주지 않았던가. 게다가 가장 결정적인 건 루이아스의 심정이 변한 이유는 다름 아닌 데몬 하트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미 자신만의 체계를 설립한 엘이 루이아스의 비전을 잇는다 해도 탈이 날 이유가 없다. 단지 아토빌 공작이 걱정하는 것은...... "후후, 재미있군, 과연 그 걱정 때문인가? 아니면 추후 위험이 되기에 미연에 방지하려는 건가?" 루이아스는 아토빌 공작의 의중을 단번에 꿰뚫어 보았다. 아토빌 공작이 그런 염려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가 걱정하는 것, 그것은 바로 엘이 지금 상태에서 더욱 정진하여 강해지는 것이다. 언젠가 아토빌 공작이 루이아스에게 말했었다. 자신과 같은 야망을 지닌 존재라고. 그런 존재는 1명으로 족하다고 말이다. 대륙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 여기 모인 이들과 달리 그는 자신의 이득을 위해 참전했다. 루이아스만 사라진다면 그는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 거대한 아일라스 제국의 영토를 다스리는 황제 말이다. 이번 전쟁에서 가장 많은 이득을 취한 것은 바로 아일라스 제국이다. 초인 카디어스를 선봉으로 내세운 아일라스 제국군은 구 데이제크 제국의 절반에 해당하는 광활한 영토를 정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아토빌 공작은 만족할 수 없었다. 더욱더 큰! 더 많은 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루이아스가 죽기 전에 한다는 유언이 자신의 비전을 금탑주에게 모두 주겠단다. 말이 되는가! 가뜩이나 금탑주를 견제하는 아토빌 공작으로선 그의 말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루이아스의 말을 들은 아토빌 공작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말이 좋게 들릴 리 만무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난 당신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군."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하지만 금탑주는 나의 비전을 받아야만 한다." 그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표정은 결코 패배자의 것이 아니었다. "만약 거절한다면 마지막 남은 메모라이즈 마법을 펼칠 생각이거든." "......!" 루이아스의 말에 모두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엘 또한 자신이 한 가지 사실을 놓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마법사는 보통 자신의 클래스에 해당하는 마법을 3개 정도 메모라이즈 해 놓을 수 있다. 그것은 어느 순간 그들의 구명줄이 될 수 있기에 메모라이즈 마법을 펼치는 것을 최대한 금하되 목숨에 위협이 가면 메모라이즈를 해 놓은 마법을 펼친다. 클래스가 높아질수록 마법의 발동 시간이 길어지지만 그 위력만큼은 대단하다. 루이아스가 9클래스 마법을 전개 할 경우 이 황궁 전체가 날아갈 수도 있다. 초인들의 경우 발동 시간이 긴 만큼 어느 정도 피할 가능성이 높지만 9클래스 마법의 영역에 벗어날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없다. 한마디로 루이아스는 지금 마지막 메모라이즈 마법을 최의 한 수로 숨겨 두고 있었던 것이다. 루이아스의 입가에 자조의 미소가 서렸다. "앞서 이 마법을 사용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죽는 건 내가 아니라 너희들이었을 테지. 결국 내 오만이 패배를 자초한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죽는다면 나의 모든 것은 사장되겠지. 난 단지 그것이 아쉬울 뿐이다." 어딘가 광기에 젖어있는 전의 모습과는 다르게 지금의 루이아스는 차분한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기색이었다. 루이아스의 말에 모두가 고민에 빠졌다. 금탑주가 그 비전들을 받게 되면 엄연한 소유주는 금탑주가 된다. 이번 전쟁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것도 금탑주이고, 그런 만큼 그들이 루이아스의 비전이 위험하다 하여 뭐라 참견하기가 애매하다. 금탑주 또한 당당한 8클래스 마법사이고, 고위 마법사이니 만큼 옳고 그른 걸 판단할 능력은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그에게 루이아스의 비전에 대해 참견하는 것은 명백히 금탑주를 무시하는 처사가 될 수 있다. 고민에 잠겨 있던 엘이 입을 열었다. "저한테는 손해가 될 일이 없지요. 받아들이겠습니다." 엘의 승낙에 루이아스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고, 아토빌 공작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루이아스의 메시지 마법이 엘에게 전해졌다. 비밀 좌표가 설정된 아공간을 엘에게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끄덕. 루이아스의 말을 모두 전해 들은 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밀 좌표가 어려운 것은 아니기에 한 번 듣는 것만으로도 암기가 가능했다. "후...... 한평생 마법사들의 성스러운 제국을 위해 몸을 바쳤건만 이루어지지 않는군. 다 내 운이 부족한 탓이겠지." 그러면서 루이아스는 엘에게 말했다. "내 마지막은 금탑주, 네가 장식해 다오. 나의 최후를 장식할 존재는 너밖에 없어 보이는군." 엘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것이 정상은 아닌 듯했지만 마법을 전개할 수는 있다. 그는 루이아스를 보며 말했다. "이렇게 만나지만 않았다면 전 당신을 존경하고 따랐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첫 걸음이 어긋난 것이 이런 결말을 만드는군요." "그렇지. 나도 그 점이 아쉬웠어." 씁쓸하게 미소 짓는 루이아스를 보며 엘은 눈을 감으며 말했다. "마지막 가시는 길은 편안하시길." 파아앗! 마나가 요동치며 엘의 주변에 빠르게 마법이 캐스팅되기 시작했다. 대상자를 조용한 죽음으로 몰아가는 흑마법의 일종 데스 슬립이 펼쳐졌다. 흑마법이지만 상대에게 편안한 죽음을 안겨 주기 위한 것치고 이것보다 나은 마법이 없다. 스으으! 엘에게 형성된 검은 기류는 그대로 루이아스를 감싸 안았다. 루이아스는 그 검은 기류를 거부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대륙 역사상 첫 9클래스 마스터인 루이아스의 죽음이었다. 죽음을 맞이한 루이아스를 보며 엘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드디어 루이아스를 죽이는 데 성공한 것이다. Chap.8 아토빌 공작의 배신 루이아스가 죽었지만 모든 일이 끝난 것이 아니다. 아직 아카벨 대장로와 유클레이가 루이넨스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순수한 실력으로 겨룬다면 루이넨스는 결코 두 마법사의 합공을 견뎌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루이넨스는 마검을 보유하고 있다. 마검의 힘을 온전히 이끌어 내는 루이넨스의 힘은 초인들 중에서도 독보적이어서, 아카벨 대장로와 유클레이는 그녀의 공세를 막아 내는 것만으로도 벅차하였다. 루이넨스는 대결을 펼치는 도중 틈틈이 루이아스의 동향을 살폈다. 아무리 루이아스가 강하다고 하나 여섯 초인의 협공을 받는다는 것은 무척 버거울 거라 생각했다. 하물며 여섯 초인 중 세 초인은 신검을 지닌 그랜드 마스터들이 아닌가. 하지만 전황은 루이아스에게 극히 유리하게 돌아갔다. 그것을 보며 루이넨스 또한 마음껏 무위를 뽐내며 두 대마법사들을 몰아쳤다. 그렇게 대결이 지속되고, 어느덧 마검의 힘에 익숙해진 두 대마법사는 서서히 루이넨스를 압박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루이넨스도 결코 녹록치 않았기에 대결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한참 대결을 하던 루이넨스는 별안간 옆에서 끊임없이 일던 폭음이 그친 걸 느꼈다. 그리고 시선을 옆으로 옳기는 순간, 그녀의 눈이 크게 뜨였다. "마, 마스터!" 그녀의 눈에는 엘의 마법에 의해 서서히 눈을 감고 있는 루이아스의 모습이 맺혔기 때문이다. 금탑주 손에 서린 검은 기류를 보면 결말은 뻔하다. 루이아스가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아아......" 충격을 받은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루이넨스. 그것도 잠시, 곧이어 그녀의 전신에서 무시무시한 검은 기류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가, 감히 마스터를...... 모두 죽여 버리겠다!" 콰콰콰콰! 끈적한 살기가 공간을 장악하며 루이넨스가 몸을 날렸다. 그리고 인정사정없이 마검을 휘둘러 엘을 베어 갔다. 파앗! 루이넨스가 몸을 날리는 순간 엘은 그녀의 살기가 향하는 곳이 자신임을 깨달았기에 곧장 블링크로 몸을 피했다. 그리고 그 틈을 아이넨스와 엘리엔이 차지했다. 푸캉! 마검을 막아 낸 엘리엔이 강력한 위력에 뒤로 밀려났고, 아이넨스가 루이넨스를 막아냈다. "정신 차려! 누나!" 하지만 지금 루이넨스에게 이성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 그녀에게는 오로지 루이아스를 죽인 이들을 죽이는 것만 뇌리에 남은 상태였다. "모두 죽여 버리겠어!" 아이넨스의 검마저 튕겨 낸 루이넨스가 엘에게 재차 접근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강렬한 마법 수십 개가 그녀를 향해 쇄도했기 때문이다. 루이넨스가 마검을 길게 휘둘렀다. 파바바방! 부서진 마법들의 잔해가 흩어지면서 뿌연 연기를 일으켰다. 멜뤼스가 간단하게 마법을 막아 내는 루이넨스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지독하게 강하군. 8클래스 마법을 전개해서 승부를 봐야 하는 건가?" 아직 그들은 8클래스 마법을 전개하지 않았다. 그걸 동시다발적으로 전개한다면 루이넨스를 확실히 죽일 수 있다. 그 말을 들은 엘이 외쳤다. "죽이시면 안 됩니다." "......?" 엘의 말에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아카벨 대장로와 유클레이, 그리고 멜뤼스와 코린트가 엘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들의 시선을 받으며 엘이 말했다. "마검을 다루는 저분은 여기 계신 아이넨스 님의 누이가 되십니다. 그러니 최대한 힘을 소진하게 하여 사로잡아야 합니다." "음, 하지만 그 실력이 너무 대단한데......" 아카벨 대장로가 말끝을 흐리며 부정적인 말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지금의 루이넨스는 정말 강했다. 루이아스가 눈앞에 죽어서 그런 것일까? 방금 전보다 족히 두어 배는 강해진 듯한 모습이었다. "분노로 힘의 안배를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여기 계신 아이넨스 님이 그동안 대륙을 위해 많은 일을 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아이넨스 님을 위해 수고를 좀 해 주십시오." 엘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큰 적인 루이아스를 물리친 마당이다. 마검에 강대한 힘을 보유한 루이넨스지만 그녀는 그랜드 마스터다. 동급의 존재가 8명 있는 만큼 제압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죽이는 것보다 훨씬 힘들긴 하지만 말이다. 모두가 동의를 하자 아이넨스가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하나하나에게 모두 고마움을 표한 아이넨스가 엘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정말 고맙다." "당연한 일인걸요. 게다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루이넨스 님이 정신 마법에 걸려 있을 확률이 높아요. 운이 좋다면 원래대로 되돌릴 방법이 있을 거예요." 분명 그럴 확률도 농후했다. 그랜드 마스터의 항마력은 분명 대단하지만 상대는 9클래스 마법사였으니 말이다. 일단 사로잡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초인들이 루이넨스에게 공격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끼아아아아아아아아! 귀청이 찢어질 듯한 날카로운 고음과 함께 루이넨스의 검이 종횡무진 휘둘러졌지만 여덟 초인의 합공에 버틸 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마검이 움직이는 궤적에는 세 초인의 검이 검의 경로를 막았으며, 다섯 8클래스 마법사들의 마법은 루이넨스의 체력을 급속도로 빼앗아 갔다.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던 대결은 약 2시간가량 흘러갔고, 루이넨스의 전신이 땀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하악! 하악!" 고혹적인 입에서 색감 있는 숨소리가 흘러나오며 루이 넨스의 전신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힘을 남발한 대가였다. 적절한 완급 조절을 했다면 족히 서너 배의 시간을 더 버텄겠지만 흥분한 상태로 체내의 모든 힘을 뽑아 냈으니 지치지 않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검은 멈출 줄 몰랐다. 처음과 변함없는 기세였지만 처음과 지금 비교하면 검에 서린 오러가 어른과 아이의 차이였다. 엘리엔의 검과 충돌한 그녀의 오러가 부서졌다. 뒤이어 날아오는 멜뤼스의 윈드 커터가 그녀의 건틀릿에 적중했으며, 코린트의 마법이 그녀를 붙들었다. 푸하학! 루이넨스의 손아귀가 터져 나가면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고, 동시에 마검을 놓고 말았다. 그녀를 향해 검을 휘두르던 아이넨스가 검을 놓치는 장면을 보고는 재빨리 칼등으로 그녀의 복부를 쳤다. 퍼억! "끅! 끄윽......" 복부에서 전해져 오는 강렬한 충격과 연이은 힘의 남발로 루이넨스가 신음을 흘리면서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후우! 끝난 건가." 루이넨스가 정신을 잃자 유클레이가 길게 숨을 몰아쉬면서 벽에 몸을 기댔다. 다른 이들도 몹시 지쳤는지 유클레이와 비슷한 행동을 보였다. 정신을 잃은 그녀는 아이넨스의 품으로 쓰러졌고, 엘이 재빨리 다가가 루이넨스의 머리에 손을 얹은 채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엘이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역시, 마법이 걸려 있는 것 같습니다. 강한 정신계 마법 같군요. 다른 분들도 한 번씩 봐 주시기 바랍니다." 엘의 말에 유클레이를 비롯한 8클래스 마법사들이 루이넨스의 몸 상태를 체크해 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내린 결론은 모두 엘과 같았다. 루이아스가 루이넨스에게 정신계 마법을 전개한 것이다. "그럼......" 루이넨스가 정신 마법에 걸렸다는 말에 아이넨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9클래스 마법사가 건 마법의 위력이 어느 정도일지 감히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걱정에 잠긴 아이넨스에게 엘이 위로의 말을 건네주었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루이아스가 전개한 마법은 분명 고위 마법이지만 영향력을 끼치던 그가 죽어서 마법의 위력이 약해졌어요. 이대로 간다면 미치광이가 되거나 백치가 되었을 테지만...... 꾸준히 치료를 한다면 마법을 해제하고 본래 성격을 되찾을 수 있을 거예요." 희망이 보이는 엘의 말에 아이넨스가 그의 손을 잡았다. "고맙다, 정말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아이넨스의 말에 엘이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고마워하시지 않으셔도 되요. 이미 저에게 큰 도움을 주셨잖아요." 엘의 말에 분위기는 급격히 훈훈해졌다. 자신에게도 준 도움이 무척 큰데 오히려 위로를 해 주는 말에 아이넨스는 엘에게 큰 고마움을 느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아이넨스의 얼굴에 살짝 의혹이 깃들었다. "그런데 루이아스에게 공격을 허용했는데 상당히 멀쩡하군." "그러네요, 정말......" 아이넨스의 말에 엘은 자신이 거동하는 것이 상당히 편해졌음을 느쪘다. 분명 루이아스에게 입은 상처는 곧장 죽음을 당할 정도로 위중한 상처였다. 응급 조치가 훌륭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생기를 되찾을 정도는 아니다. '드래곤 블러드 때문인가 보군.' 레드 드래곤 브릴켄드가 카이나의 몸에 주입했던 드래곤 블러드. 엘은 카이나의 체내에 있던 드래곤 블러드를 블러드 카먼으로 자신에게 옮겨 와 그 힘으로 8클래스의 벽을 허물었다. 그러면서 드래곤 블러드는 자연히 엘의 몸속에 녹아들었고, 그로 인해 엘의 피 속에는 드래곤 블러드가 섞여 있다고 할 수 있다. 드래곤 블러드는 마법사들에게 그 값을 측량하기 힘든 가치를 발한다. 그 이유는 드래곤 블러드에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방대한 마나와 트롤에 버금가는 치유력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 치유력이 몸속에 남아 자신의 내상을 치료하고 지금도 빠른 속도로 자체 치유를 하고 있다고 엘은 생각했다. 하지만 남들 앞에서 내세울 상황이 아니고, 드래곤 블러드를 얻은 것도 아이넨스밖에 모르는 사실이었기에 그저 조용히 웃으며 대답할 뿐이었다. "제 몸 치유력이 대단한가 보네요. 예전에 얻은 게 있니까요." 뼈 있는 엘의 말에 아이넨스는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 였다. 엘의 말이 무슨 뜻인지 대강 이해한 것이다. "아, 그렇군." "허,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하는 거지? 궁금하군." 엘과 아이넨스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아토빌 공작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현재 다른 이들은 몹시 지쳐 있는 상태였다. 아카벨 대장로와 유클레이는 루이넨스를 저지하면서 거의 한계치까지 체력을 소모한 상태였으며, 루이아스와 격전을 벌이면서 빈틈을 비집기 위해 극도의 집중력을 발휘한 멜뤼스와 코린트도 지친 상태였다. 훈방에서 전투하는 그들이 그 정도로 지쳤는데 최전방 에서 싸운 엘리엔과 아이넨스 또한 오죽하겠는가. 당장 엘과 이야기하는 아이넨스도 들고 있는 검이 버겁게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엘은 루이아스에게 심각한 부상을 입고 몸을 움직일 수 있자마자 곧장 전투에 가담했으니 몸 상태가 무척 좋지 않았다. 그러므로 현재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힘을 온전하게 보유하고 있는 이가 바로 아토빌 공작이었다. 루이아스와의 대결에서도, 루이넨스를 사로잡는 과정에서도 가장 소극적으로 전투에 임한 아토빌 공작은 무척 왕성한 모습이었다. 엘은 다가오는 아토빌 공작을 보며 웃음을 띤 채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공작님. 그리 대단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사소한 것이죠. 그나저나 이렇게 도와주신 것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공작님이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이렇게 승리를 거두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엘의 말에 아토빌 공작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분명 그렇긴 하지만 아직 전투가 모두 끝나지 않았는가? 속단하기는 이르다고 보는데." 궁 밖에 있는 기사들이라면 이미 타협안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 엘의 말은 끝맺지 못했다. 돌연 눈앞이 번쩍이더니 날카로운 예기가 엘의 내부를 사정없이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푸욱! "커...... 헉!" 눈 한 번 깜빡할 사이에 아토빌 공작에게서 출수된 검이 엘의 복부에 박혀 있었다. 검이 꽂힌 곳은 바로 루이아스에게 꿰뚫렸던 그 부분이었다. 믿지 못할 사태에 궁 내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토빌 공작은 자신의 검이 적중한 곳을 보며 입을 열었다. "허어! 정말 대단한 반사 신경이로군. 분명 심장을 노렸건만 극히 짧은 시간에 심장을 비껴 내다니.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괜찮겠지." 엘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시선으로 아토빌 공작을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아토빌 공작님......!" "간단한 이유 아니겠는가? 금탑주, 넌 너무 강해. 그리고 영리하기까지 하지. 지금 이 자리에서 네가 제일 약하다고 하나 십 년 아니, 오 년이 지난 뒤에 과연 네가 초인 들 중 제일 하위일까? 게다가 넌 골든 나이트를 생산할 지식까지 가지고 있지. 거기에 더해 루이아스의 비전까지 얻은 이상 넌 후일 그보다 더욱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갑작스럽게 엘을 공격한 아토빌 공작의 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언뜻 듣기에 무척 설득력 있게 들렸다. 하지만 그것은 궤변이었다. 단지 아토빌 공작은 엘의 장래성을 두려워하여 엘을 공격한 것에 불과했다. 아토빌 공작은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무력화시키는 것도 괜찮겠지. 네가 보유하고 있는 마나 연공법. 그것도 무척 위력적으로 보였으니까. 그것만 보유하게 된다면 우리 아일라스 제국이 오대 제국 을 합병하고 수백 아니 수십 년 후 대륙통일이 가능할지도 모르지 하하하!" 생각하니 정말 유쾌해졌다. 금탑주기 익힌 마나 연공법! 그것은 아토빌 공작의 눈으로 본 결과 나라 하나를 준다 하여도 바꾸지 않을 천금과도 같이 귀한 것이었다. 그것을 바탕으로 기사를 기른다면 수십 년 후 아일라스 제국이 정말 대륙을 통일할지도 모른다. 웃음을 터뜨리는 아토빌 공작을 보며 엘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쉽게 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아토빌 공작님께서는 지금 이곳에 계신 분들을 염려하지 않고 계시는군요." 아니나 다를까, 아토빌 공작의 갑작스런 배신에 다른 초인들은 이미 그를 포위한 후였다. 그런 그들을 보며 아토빌 공작이 미소를 지었다. "후후후, 분명 이렇게 되면 내가 상당히 불리해지지 하지만 말이야." 아토빌 공작에게 쥐어진 검이 짙은 오러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긴 시간 격전을 치른 것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선명한 빛이었다. 반면에 아토빌 공작을 포위한 초인들은 상당히 지친 기색이었다. "동급의 고수들이라고 하나 지치고 안 지치고의 차이는 명백하지. 그 기량에서부터 하늘과 땅만큼 대단한 차이가 나니까. 이참에 몇 명 제거하는 게 좋겠지." 아토빌 공작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이는 엘리엔이었다. 그녀는 몸이 관통당한 엘을 보면서 멍한 표정을 짓다가 외쳤다. "엘...... 엘!" 부르짖듯 외치며 엘리엔의 검에서 오러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토빌 공작이 더욱 빨랐다. 아토빌 공작의 몸이 흐릿해졌다. 그와 함께 갓 소드에서 푸른 오러가 줄기줄기 뿜어지더니, 어느새 막아서는 엘리엔에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따당! "욱!" 엘리엔이 신음을 홀리며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상당한 체력을 소모한 그녀는 온전한 실력을 발휘하기 힘들었다. 단 한 번의 격돌로 엘리엔을 밀어낸 아토빌 공작은 곧장 아이넨스를 공격해 들어갔다. "욱!" 아이넨스 또한 신음을 흘리며 물러났다. 평소라면 무리 없이 막아 냈을 공격이지만 지금 같이 지친 상태에서 효과적인 방어를 하기란 무척 어려웠다. 둘을 압도한 아토빌 공작은 곧장 앞으로 나아갔다. 그랜드 마스터가 앞을 맡고 뒤를 8클래스 마법사가 맡으면 얼마나 귀찮아지는지 방금 전 보아 왔기에 그는 8클래스 마법사들부터 쓰러뜨릴 생각이었다. 아토빌 공작이 가장 먼저 공격한 것은 유클레이였다. 자신과 함께 나란히 하는 유클레이를 쓰러뜨려야 두 그랜드 마스터를 더욱 원활하게 처리할 수 있다. "더러운 배신자 같으니!" 자신에게 달려드는 아토빌 공작을 향해 노호를 지른 유클레이가 양손을 교차시키며 실드를 생성했다. 수십 개의 실드가 겹겹이 생겨나고 8클래스 방어 마법 세이지 실드가 유클레이를 감쌌다. 치이이잉! 갓 소드가 실드에 부딪치면서 기괴한 폭음을 자아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갓 소드의 힘을 이겨 내지 못한 실드가 부서져 나갔다. 파사사! 전개자의 힘을 극도로 이끌어 내는 갓 소드는 5대 신검의 수좌를 차지할 만큼 강력한 위력을 지니고 있다. 순식간에 유클레이가 전개한 수십 개의 실드 마법을 모두 부숴 버린 아토빌 공작은 유클레이를 감싸고 있는 세이지 실드를 가격했다. 그리고 세이지 실드마저 서서히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우웃!" 세이지 실드를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유클레이를 보며 아토빌 공작이 하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 검이 없었다면 대결이 무척 길어졌겠지요. 하지만 갓 소드가 있음으로써 난 최강이 될 수 있습니다, 선배." 대륙에 존재하는 초인들 중 가장 고령이 유클레이다. 이미 일백이 넘은 아토빌 공작보다도 많았으니 말이다. 서부 왕국의 초인과 동부 제국의 초인. 개와 고양이 같은 앙숙같이 보이지만 둘은 오래 전부터 교류가 있었다. 우연찮게 실력을 겨룰 기회가 있었는데 그들은 서로 무승부를 이룩한 적이 있다. 그런데 오늘 유클레이가 아토빌 공작에게 밀리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이건 단순히 지치고 그런 것이 아니다. 야망을 위해 매일 같이 검을 갈고 닦고 갓 소드의 주인으로 선택된 아토빌 공작의 힘이 유클레이를 월등히 뛰어넘고 있었다. 전신을 아릿하게 울리는 충격에 유클레이가 신음을 흘렸다. "으음......" 쩌적! 쩌저적! 세이지 실드가 부서지고 있었다. 8클래스 최강의 방어 마법도 신검의 힘을 견뎌 내기란 무리였던 것이다. 마침내 세이지 실드가 무너질 때, 유클레이는 블링크 마법으로 공간을 벗어나려 하였다. 하지만 유클레이가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신검의 힘은 공간마저 가른다는 것이다. 아토빌 공작의 갓 소드가 공간 너머로 싸라지는 유클레이의 신형을 베었다. 푸하악! "윽!" 어깨부터 복부에 이르는 긴 혈선이 그어지면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다행이라면 유클레이가 상황 판단을 빠르게 하여 미리 피했기에 절단되는 걸 막을 수 있었다. "아쉽군." 유클레이를 죽이지 못하자 아토빌 공작이 입맛을 다셨다. 가장 껄끄러운 적 하나를 죽일 기회를 놓친 것이다. 그사이 그에게 마법이 쇄도해 들어왔다. 아토빌 공작은 빠르게 검을 휘두르며 그 마법들을 베어 냈다. 허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어느새 양쪽에서 엘리엔과 아이넨스의 검이 베어 오고 있었고, 응급 조치를 취한 유클레이가 저 클래스 마법 다수로 아토빌 공작을 혼란시키려 하였다. 대부분의 체력이 소진된 줄 알았던 이들이 힘을 합쳐 자신을 공략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토빌 공작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내가 실수했군. 시기를 잘못 잡았어.' 금탑주가 루이아스의 비전을 이어받고, 그의 마나 연공법을 본 것이 성급함의 원인이었다. 너무나 뛰어난 걸 본 나머지 무리한 욕심을 부리게 되었고, 모든 초인들을 제거하고 금탑주를 납치하려 하였는데 초인들이 의외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초인들은 모두 아토빌 공작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 짐작하고 있었다. 엘이 마나 연공법에 빠져들었을 때 탐욕의 눈길을 보였고, 사사건건 엘의 의견에 반대를 하지 않았던가. 특히 루이아스의 비전을 이어받는다고 할 때 그들은 아토빌 공작의 눈에 비친 살기를 읽을 수 있었다. 혹시라는 생각은 했지만 설마하니 그가 일을 저지를 줄은 몰랐다. 그래서 방비가 늦은 것이다. 다행이라면 모두 약간의 체력을 남겨 둔 거랄까. 즉, 아토빌 공작의 노골적인 탐욕이 그들로 햐여금 한 수 펼칠 최소한의 체력을 남겨두게끔 하였다 할 수 있다. 그걸 아직까지 눈치 채지 못한 아토빌 공작은 자신에게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감을 느꼈다. 지치긴 했어도 초인은 초인이다. 속전속결로 처리하려고 했는데 그들의 숨겨 둔 체력이 의외로 대단했다. '여기서 전투를 하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지.' 이 자리에서 그들과 맞서는 것은 자살행위라 생각한 그는 곧장 뒤로 몸을 날려 엘을 들쳐 업었다. 이 자리를 벗어날 생각을 한 것이다. 그는 품에서 스크롤을 꺼내 들었다. 혹시나 모를 일을 대비하여 준비해 온 텔레포트 스크롤이었다. "흐흐,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아토빌 공작은 이 자리를 벗어난 뒤 곧장 블리어드 제국에게 사절을 보내 동맹을 맺을 생각이었다. 욕심이 많은 알카이드 황제라면 자신의 제의를 기꺼이 승낙할 것이다. 거기에 그는 그레시오스 공작과 실로프 공작에게도 동맹을 제안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되면 제국 측 초인 5명이 연합하게 된다. 거기에 제국들의 방대한 군대로 왕국들을 압박하면 그들은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못할 것이다. 그 틈을 타 벨로세크 제국의 방대한 영토를 모조리 차지한 뒤 금탑주에게서 빼낸 마나 연공법으로 기사단을 대대적으로 기른다면 수십 년 후 대륙의 패권은 자신이 쥐게 될 것이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후일 강적이 될 이들을 여기 에서 모두 제거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어쩔 수 없지." 아쉬움은 아쉬움. 더 아쉬워해 봤자 손해 보는 건 자신이었다. "그럼 다음에 보도록 하지, 전장에서 말이야." 그 말과 함께 아토빌 공작이 스크롤을 막 찢으려고 할 때였다. 돌연 그의 복부에서 화끈한 느낌이 들었다. "크으으으!" 전신을 엄습해 오는 고통에 아토빌 공작이 시선을 옮겼다. 당장 죽을 듯한 얼굴빛의 엘이 아토빌 공작의 복부를 향해 마법을 전개한 모습이 보였다. 상처의 상태를 보면 족히 몇 달간 요양해도 부족할 모습이다. 그런데 벌써 깨어나다니! 놀라움과 분노가 뒤섞인 아토빌 공작의 눈빛에 엘이 창백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제 회복력을 너무 얕보셨군요. 쿨럭!" 가뜩이나 좋지 않은 몸 상태였는데 마법을 전개하여 더욱 엉망이 되었다. 그래도 엘의 기습적인 공격에 아토빌 공작의 상태도 좋지 않아 보였다. "블링크." 내부가 엉망이었지만 아토빌 공작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었다. 엘의 몸이 흐릿해지면서 20여 m 떨어진 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우웩!" 무리하게 마법을 전개한 탓인지 엘은 다시 피를 한 움큼 토해 냈다. 그사이 아토빌 공작의 몸은 하얀 기류에 휩쌓이며 사라졌다. 텔레포트 스크롤의 능력이 발동된 것이다. "금탑주!" "엘리미스!" 엘이 아토빌 공작의 손에서 빠져나오자 초인들이 그의 곁에 모여들었다. 그의 몸 상태는 무척 심각했다. 루이아스에게 입은 상처가 무척 위중했는데 거기에 다시 상처를 입었고, 응급 조치조차 취하지 않았기에 당장 죽는다 해도 이상이 없어 보였다. 멜뤼스와 코린트가 엘에게 응급 치료를 하였다. 그럼에도 엘의 얼굴은 나아지질 않았다. 연속적인 힐링으로 외상을 치료하는 데 성공했지만 내상은 낫지 않았다. 그들의 치료를 받으며 엘은 힘겹게 몸 을 일으켰다. "으윽!" 내부가 뒤집히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몸을 일으키는 데 성공한 엘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정신을 부여잡는 끈이 서서히 옅어짐을 느꼈다. 이 끈을 놓치면 보나마나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난 아직 죽을 수 없어!' 엘은 내부에서 엄습하는 극심한 고통을 애써 무시하려고 노력하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피가 흘러나왔지만 엘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화끈한 느낌 때문에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릴 수 있게 된 것 같다. "큭!" 치밀어 오르는 피를 다시 뱉어 낸 엘은 자신을 걱정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주변인들을 둘러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지금 마나 연공법을 하려고 합니다. 긴 시간이 될 테니 부디 절 지켜 주세요." 그 말과 함께 엘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아 단전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 그는 죽음과 삶 경계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전호흡으로 마나를 흡수하여 몸에 활력을 충전하고, 드래곤 블러드의 효력이 몸에 발휘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효과를 분배해야 한다. 엘이 단전호흡에 빠져들기 무섭게 대전 문이 열렸다. 그리고 기사들이 밀물 차오르듯 대전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도 제국의 근위 기사단이었다. 근위 키사들은 섣불리 궁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궁 안에서 폭음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고, 무엇보다 마도 제국의 황제인 루이아스의 가공할 무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폭음이 잦아들자 궁 안으로 들어왔다. 타국의 충성심 깊은 근위 기사들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그들은 대전 안으로 들어오면서 쓰러진 루이아스와 아이넨스에게 안겨 있는 루이넨스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황제 폐하!" "단장님!" 대전 안으로 들어온 그들은 사태가 어떻게 돌아갔는지 단번에 파악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이 황제 폐하를 시해하고 근위 기사단장을 제압한 것이다. 그들 모두 개개인이 소드 마스터에 이른 존재들 마도 제국에게 충성심은 깊지 않지만 충성을 맹세했기에 날카로운 기도를 내뿜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존재들은 바로 초인들이다. 소드 마스터가 분명 대단한 존재지만 그들이 유일하게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존재들이 바로 초인이다. 엘리엔이 안색을 굳히면서 기세를 발산했다. 콰라라라! 그녀가 내뿜은 기세는 삽시간에 궁 내부를 장악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기운은 소드 마스터들을 사정없이 휘감아 들어갔다. "우욱!" 그랜드 마스터의 기세를 받은 소드 마스터들이 순간 몸을 휘청거렸다. 그랜드 마스터의 기세가 그들의 내부를 사정없이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대전 안으로 들어선 소드 마스터들의 숫자는 300명에 달한다. 하지만 그들은 엘리엔 하나의 기세만으로도 섣불리 달려들 수가 없었다. 그랜드 마스터가 소드 마스터들에게 절대적 힘을 발휘한다는 걸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 근위 기사들은 초인들이 자신들에게 달려들지 않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 의문도 초인들에게 가려지다시피 한 인물을 보고는 해소할 수 있었다. 창백한 안색의 한 청년이 정신없이 마나 연공법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근위 기사들은 고민에 빠졌다. 상식적으로는 황제를 시해한 그들과 맞서 싸우는 것이 맞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들은 루이아스에 대한 충성심이 그리 깊지 않다. 루이아스는 그들에게 정신 마법을 걸지 않았다. 600명 에 달하는 소드 마스터에게 정신 마법을 전개하기에는 너 나 많은 기사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자신의 강함을 믿었고, 루이넨스를 신뢰했기에 정신 마법을 걸지 않았는데 그것이 지금 와서 근위 기사들을 머뭇거리게 만드는 이유가 되었다. 감히 초인들에게 먼저 공격할 수 없기도 했지만 포위되어 있는 초인들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약간의 체력을 비축해 두기는 했지만 그 체력을 믿고 이들을 상대하기에는 이들의 숫자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지금 자신들을 포위하고 있는 이들의 숫자는 약 300명이다. 마도 제국의 근위 기사단이 총 600명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감안하면 밖에도 최소 300명의 근위 기사들이 포위하고 있다고 해야함이 옳다. 600명에 이르는 소드 마스터! 제아무리 초인이라도 그 숫자를 상대하기란 너무나 난해했다. 각자의 사정에 의해 그들은 충돌을 하지 않은 채 지루한 대치를 계속해서 이어 갔다. 1시간...... 2시간...... 그들의 대치는 조금씩 길어져 갔고, 약 4시간가량 대치가 이루어졌다. 그사이 근위 기사들의 포위망은 조금씩 좁혀져 무언가 일이 일어날 듯 위태로워 보였다. 초인들도 4시간 동안 조금씩 체력을 회복했기에 처음보다 다소 나은 표정이었다. 그때였다. 초인들을 헤치고 나오는 한 청년이 있었다. 금발의 20대 마법사. 그는 바로 엘이었다. Chap. 9 균형이 만들어 내는 평화 "욱!" 여태껏 죽은 듯 마나 연공법에 몰두하고 있던 엘이 눈을 뜨며 검은 피를 뱉어 냈다. 단전호흡을 마친 엘의 안색은 조금이나마 혈색이 돌아온 상태였고, 전보다 훨씬 호전된 모습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엘은 긴 시간 자신을 보호해 준 초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이제 제게 맡겨 주십시오." 단전호흡을 하면서 주변의 기감을 느낄 수 있던 엘이었다. 그렇기에 주변의 위태로운 상황도 몸으로 직접 느끼고 있었다. 앞으로 나선 엘은 포위한 근위 기사들을 스윽 둘러보았다. 엘을 바라보는 근위 기사들의 표정은 다양했다. 바짝 긴장한 이들도 있었고 비장한 표정을 짓는 이들도 있다. 경외의 표정, 죽일 듯 노려보는 등 가지각색의 근위 기사들의 시선이 엘에게 집중되었다. 엘이 그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 이곳의 책임자가 누구신지요?" 그의 질문에 근위 기사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그곳에는 50대 후반 초로의 기사가 서 있었다. 그가 앞으로 나서면서 자신의 소개를 하였다. "제일 근위 기사단 소속의 일 번대 대장 리하트만이라고 하오, 금탑주." 엘은 마주 인사하였다. "예, 안녕하십니까, 리하트만 경. 아시겠지만 금탑의 탑주 엘리미스라고 합니다. 우선 이렇게 뵙게 되어 무척 유감입니다." "우리들 또한 마찬가지요. 대륙에 퍼진 금탑주의 소문 반 이상이 사실이라면 사상 최악의 적을 만든 것일 테지." 리하트만이라 불린 기사의 말에 엘은 웃음을 지었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렇겠지요. 하지만 리하트만 경을 비롯한 다른 분들은 저와 적이 아니라고 할 수 있지요." 엘의 말에 리하트만이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그건 그쪽이 더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루이아스는 이미 죽었습니다. 그런 마당에 더 이상 저희가 적대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루이아스 님은 본 제국의 황제 폐하이시오. 그분을 시해한 당신과 우리들이 어찌하여 적이 아니란 말이오?" 리하트만의 말에 엘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지금 엘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이 기사는 루이아스의 충실한 수하인가?' 이야기를 나눠 본 결과 그런 느낌이 물씬 풍겼다. 하지만 묘하게 아닌 구석도 있는 것 같아 엘이 판단하기 무척 까다로웠다. 그러나 이미 내친걸음이다. 엘은 리하트만에게 말했다. "루이아스는 말도 되지 않는 것들을 들먹이며 스스로를 칭제하며 대륙을 일통시키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말을 듣지 않는 이들에게 각종 정신 마법 등 사악한 수법을 사용하여 많은 이들을 희생시켰습니다. 그런 그를 과연 모실 자격이 있을까요? 게다가 저는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과거 모시던 이들을 억지로 버리고 지금의 루이아스에게 충성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엘의 말에 다수의 기사들이 몸을 움찔하였다. 정곡을 찔렀다고 생각한 엘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저희는 루이아스를 적으로 삼았고, 수많은 격전 끝에 그를 죽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더 이상마도 제국은 없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불필요한 희생을 최대한 없애고자, 전투가 아닌 대화로서 여러분을 설득하려 하시는 것입니다. 리하트만 경, 당신은 마도 제국이 건국되기 전 어디 소속의 기사셨습니까?" "나는......" 리하트만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엘은 그런 리하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의 침묵이 이어지고, 리하트만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난 벨로세크 제국의 자랑스러운 근위 기사단 소속이었소." 엘은 물었다. "묻겠습니다. 벨로세크 제국은 한번 모신 주인을 쉽게 저버리시는가요?" "절대 그렇지 않소! 우리들은 오로지 황제 폐하에게만 충성을 바칠 것이며, 언제나 폐하를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소!" 리하트만의 외침에 대부분의 기사들이 동요하는 기색을 보였다. 지금 리하트만의 외침은 마도 제국을 부정하는 외침과 같았기 때문이다. 엘은 웃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리하트만 경은 벨로세크 제국의 기사이십니다. 그런데 어찌 마도 제국의 기사를 자처하십니까? 기사는 결코 두 명의 주군을 모시지 않는다고 하는데 말이죠." "그, 그건......" 리하트만은 말을 잇지 못했다. 엘의 말에서 자신의 태도에 모순점을 찾았기에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엘이 주변 기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리하트만 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마도 제국은 건국 자체가 옳지 못한 곳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마도 제국이 아닌 각기 벨로세크 제국과 루이디스 제국, 그리고 삼 대 검가의 기사들이십니다. 여러분들을 강제하던 마도 제국의 황제 루이아스가 죽은 지금 여러분들은 더 이상 억지 충성을 마도 제국에 바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러분은 자유입니다." 엘의 말에 기사들이 눈에 띄게 동요했다. 억지 충성. 그 말이 무척 가슴에 와 닿는 듯했다. 그런 그들에게 엘이 쐐기를 박았다. "저희를 적대하지 마십시오. 저희는 여러분의 적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저희를 적대한다면 저희들은 여러분 들을 마도 제국과 함께 운명을 같이하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루이아스라는 악당 한 사람으로 인해 여러분들이 희생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부디 제 말을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엘의 말은 모하게 기사들을 자극하고 있었다. 애당초 그들에게 마도 제국에 대한 충성심은 그리 깊지 않다. 게다가 루이아스에 의해 억지로 근위 기사단에 합류하였고, 9클래스에 이르는 그의 강력한 힘에 억지로 따라야만 했다. 그런데 엘은 지금 그들에게 마도 제국의 기사가 아니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기존에 모시던 주군들을 떠올리게 하였고, 그것은 그들의 망설임으로 변해 갔다. 리하트만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후우! 좋소. 그렇다 치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오?" 엘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레시오스 공작님과 실로프 공작님을 대동하여 서로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사실상 유명무실해진 마도 제국을 대표하는 인물은 두 분이 유일하지요. 그분들과 대화를 나누고 타협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리하트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당장 두 공작님께 소식을 전하겠소. 하지만 이곳을 벗어나서는 안 되오. 우리 근위 기사들의 보호 아래 며칠간 이곳에 머물러 준다면 두 공작님을 모시고 오도록 하겠소." 애당초 그들이 초인들을 막을 여력은 없다. 게다가 힘을 봉인하는 것이 아닌 단지 며칠을 머물고 두 초인과 대화를 하라는 말에 엘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곧장 쉴 곳을 향해 안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알겠소." 고개를 끄덕인 리하트만이 시선을 기사들에게 옮겼다. "내 결정에 불만 있는 이 있나?" "......" 아무도 없었다. 하기야 엘이 얘기한 내용들은 모두 그들에게 손해될 것이 없는 이야기다. 반대가 있을 리 만무했다. 애당초 그들이 목숨을 바칠 만큼 루이아스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지 않았으니 말이다. 근위 기사들의 넓은 포위 아래 엘을 비롯한 초인들이 서서히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엘은 근위 기사들과 일시적인 타협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 * * "제 마음대로 결정을 내려서 죄송합니다." 근위 기사들에게 쉴 공간을 제공받은 엘이 가장 먼저 한 말이다. 사실 엘의 행동은 월권이라 할 수 있다. 당장 루이아스를 제거하는 데 그가 가장 큰 공을 세우기는 했지만 다른 이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사과하는 엘을 보며 아카벨 대장로가 먼저 말했다. "저와 엘리엔은 상관없습니다. 저희는 엘프이기에 인간사에 개입하는 것이 옳지 않지요. 게다가 금탑주님의 타협도 적절한 것 같으니 상관없습니다." "우리들 또한 마찬가지라네." 멜뤼스가 코린트의 의견까지 대변하며 말했다. 그들은 근위 기사들과의 결전까지 각오했었으나 엘의 적절한 타협에 싸우지 않게 일이 잘 해결되자 무척 만족한 표정이었다. 유클레이도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다만 아이넨스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들과 타협할 생각을 한 것이지? 솔직히 무력을 사용했다면 그들을 괴멸시킬 수도 있었을 텐데?" 아이넨스의 물음에 엘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들과 전투를 벌이는 것은 무척 좋지 않습니다. 이곳을 습격하기 전에도 말했듯이 그들은 루이아스에게 충성을 바치는 이들이 아닙니다. 억지 충성을 바치고 있는 이들이지요. 그런 그들을 활용한다면 강력한 전쟁 억지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육백 명의 소드 마스터는 분명 대단한 전력이니까요." "그렇군." "그뿐만이 아닙니다. 저는 며칠 후 올 그레시오스 공작과 실로프 공작에게 제안할 것입니다. 벨로세크 제국과 루이디스 제국을 다시 재건할 생각이 없냐고 말입니다?" 엘의 말에 아이넨스는 물론 방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만큼 그의 말은 뜻밖이었다. 설마하니 벨로세크 제국과 루이디스 제국을 재건하라고 할 생각이었다니 놀라운 발상이었다. "벨로세크 제국은 세르디아 대륙의 종주국입니다. 결코 쉽게 무너질 국가가 아니지요. 게다가 어딘가 살아 있는 황족도 있을 테고 그레시오스 공작을 비롯한 벨로세크 제국 출신의 근위 기사단만 있다면 과거의 영광을 완전히 잃지는 않을 것입니다. 루이디스 제국 또한 실로프 공작이 있기에 재건이 가능하지요." "그걸 해서 얻는 이득이 무엇이지?" 아이넨스의 물음에 엘이 답했다. "바로 균형 입니다." "균형?" "예, 바로 균형입니다." 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현재 대륙은 왕국과 제국의 구도로 나누어져 있죠. 하지만 제국들의 힘이 너무 강하여 왕국들이 핍박을 받는 위치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전쟁을 통해 왕국들은 제국 영토의 상당 부분을 차지할 수 있었지요. 거기에 마도 제국이 멸망했다는 소리를 들으면 그들은 더욱 큰 욕심을 부릴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전쟁을 더욱 크게 일으키는 계기가 될 것이고 더 많은 피가 흐를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기에 벨로세크 제국과 루이디스 제국을 재건하려 하는 것입니다. 두 제국이 세워지고 안정을 찾게 되면 왕국들이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호오...... 과연 그렇군." "일리 있는 말이야." 엘의 말에 모두가 감탄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정말 기발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두 제국이 다시 건국되면 마도 제국보다 훨씬 빠르게 사태에 대처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왕국들도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못할 것이고, 블리어드 제국과 아일라스 제국도 더는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한 뒤 아일라스 제국을 압박해야겠지요. 아토빌 공작, 배신자에게 쓴 맛을 단단히 보여 줄 생각입니다." 빛을 발하는 엘의 눈빛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점에 대해서는 그들 모두 같은 생각이었던 것이다. 생사를 함께한 동료에게 칼을 거꾸로 치켜 든 것은 그 누구도 용서할 수 없는 행위였으니까. * * * 그레시오스 공작과 실로프 공작이 켈빙턴으로 오는 데 꼬박 5일이 걸렸다. 그사이 엘을 비롯한 유클레이, 멜뤼스, 코린트는 부지런히 마법 통신을 보내어 마도 제국의 황제 루이아스를 제거하는데 성공하였다고 알렸으며, 더 이상의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해 엘은 성국의 교황을 설득하여 왕국 연합군과 마도 제국군 간의 휴전을 맺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각국의 군주들은 더욱더 많은 영토를 정복하길 원했으나, 이번 전쟁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초인들과 성국에서 강력하게 주장하였기에 더 이상의 사족을 달지 않은 채 순순히 휴전 제의를 수락했다. 블리어드 제국에도 벨로세크 제국 동부 영토의 소유권을 주도록 하겠다는 엘의 설득에 알카이드 황제는 순순히 휴전 제의를 승낙했다. 그 또한 더욱 많은 영토에 욕심이 났으나 왕국 연합군과 이미 휴전 제의를 맺었다는 말에 군말 없이 승낙한 것이다. 만약 전쟁을 지속하게 되면 왕국 연합군과 상대하던 군대가 이쪽으로 몰려들 가능성이 높았으니 말이다. 그렇게 두 곳과 휴전을 맺게 되자 아일라스 제국도 더 이상 진군을 할 수 없었다. 깊이 파고드는 것은 좋았으나 휴전을 맺은 두 곳에서 지원군을 파견하게 되면 마도 제국 영토 깊숙이 진군한 아일라스 제국군이 퇴로를 차단당한 채 전멸 당할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짧은 며칠이라는 시간 동안 전쟁은 모두 중지되었고, 그레시오스 공작과 실로프 공작이 켈빙턴으로 올라와 엘과 회담을 열게 된다. 거기서 엘은 그들에게 다른 이들에게 말했던 것을 그대로 전했다. "벨로세크 제국과 루이디스 제국을 재건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조건을 들어 주셔야 합니다." 첫째, 왕국 연합군이 점령한 구 데이제크 제국의 영토를 왕국 연합군의 소유로 인정한다. 둘째, 블리어드 제국군이 점령한 벨로세크 졔국 동부 지방을 블리어드 제국의 영토로 인정한다. 셋째, 아일라스 제국군이 점령한 구 데이제크 제국의 영토를 아일라스 제국의 소유로 인정한다. 넷째, 마도 제국 루이아스의 자금줄이 되어 주었던 두 상단의 상권을 모두 회수하고, 디벨 상단을 비롯한 루이아스를 제거하는 데 도움을 준 백탑과 론윌탑, 메룬탑의 상단에게 그 상권을 이양한다. 다섯째, 재건되는 벨로세크 제국과 루이디스 제국은 향후 백 년간 타국의 침공을 금지할 것이며, 마도 제국 황제 루이아스에게 피해를 입은 이들에게 피해 보상을 한다. 엘이 제시한 다섯 가지 조건을 그들은 모두 승낙했다. 사실 말이 말이지, 그레시오스 공작은 루이아스의 강대한 힘에 벨로세크 제국이 온전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투항한 것이며, 실로프 공작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 찰나에 엘이 제국을 재건하게 도와주겠다는 말은 가뭄에 단비나 마찬가지였다. 이미 그들은 벨로세크, 루이디스 제국 각국의 적통 황손들을 모처에 모셔 둔 상태였으며, 엘과 협정을 채결하게 되자 두 제국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왕국 연합군이 차지한 영토는 병력을 파견한 대왕국들의 숫자대로 나뉘어 각국에서 파견한 왕족들이 공국을 세워 데이제크 10국 연방을 세우게 되고, 루이아스를 제거하는데 도움을 일조했던 아토빌 공작의 배신이 각지로 퍼져 나가자 아일라스 제국은 외교적 고립을 당하게 되었다. 황제가 자신을 반역을 빌미로 제거하려 한다는 명목 아래 황제를 제거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아토빌 황제는 발빠른 엘의 대처에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자식! 정말 되는 일이 없게 하는군." 이번 전쟁의 승전국인 아일라스 제국의 국력은 한 층 더 강력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적인 모습에 지나지 않았다. 루이아스에게 자금을 대 주던 대륙 10대 상단 중 두 곳이 무너지자 아일라스 제국에 큰 영향을 끼치던 상단들도 잇달아 망했고, 그로 인해 아일라스 제국의 경제력은 형편없이 내려앉고 있었다. 벨로세크 제국과 루이디스 제국은 두 상단을 내치고 디벨 상단이 그 역할을 발 빠르게 대신했기에 그 여파가 훨씬 적었다. 아토빌 공작은 갈수록 악화되는 제국의 재정을 보며 신음을 내뱉었다. "정말 되는 일이 없군. 금탑주, 역시 적을 삼기에는 너무 위험한 인물이었다." 이렇게 되다가는 아일라스 제국의 경제가 파탄이 날 것만 같았다. 다른 상단을 물색하고 싶어도 이미 아토빌 황제의 만행이 대륙 곳곳에 알려졌기에 그 자리를 대신하려는 상단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피 말리는 날이 이어질 무렵, 금탑에서 한 가지 소식이 전해져 왔다. 나 금탑주 엘리미스는 파렴치한 아일라스 제국의 황제 아토빌과 일대일 대결을 신청한다. 이는 그의 파렴치한 행동을 정식 대결로서 그를 벌하려고 하는 것이며, 참관하는 이는 아무도 없이, 오직 둘만의 대결로 끝을 맺고 싶다. 금탑주의 전언에 아토빌 황제가 미소를 지었다. "루이아스의 비전을 얻었다고 자신감이 생긴 건가? 좋다. 이번 기회에 실력의 격차를 보여 주어 제압한 뒤 마나 연공법을 빼내 주겠다. 이것은 나의 기회로군. 흐흐흐!" 다시 한 번 야망을 꿈꾸게 될 수 있게 된 아토빌 황제의 웃음은 길게 이어졌다. * * * "정말 괜찮을까요?" 아일라스 제국으로 통신 내용을 보낸 세레나가 염려 섞인 표정으로 실피르를 바라보았다. 실피르의 표정도 결코 밝지 않았다. "엘리를 믿지 않으면 어쩌겠니. 얻은 것이 있다고 하니 엘리를 믿는 수밖에. 부디 엘리가 승리하기를 빌자꾸나," 세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는 수밖에 없겠네요." 그럼에도 곁에 서 있는 카이나의 얼굴에는 불안함이 가시지 않았다. 그녀는 아토빌 황제에 대한 소문을 끊임없이 들어왔다. 대륙 제일 기사. 대륙 최강 고수. 마법계의 유클레이를 뛰어넘은 명실공이 대륙 제일 강자가 바로 아토빌 황제라 할 수 있다. 그런 그와 대결을 하겠다니. 이제 갓 8클래스에 오른 엘로서 너무 무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랴. 이 모든 것을 결정한 것이 엘인데. 그저 엘을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 * * 넓은 연공실. 골든 벨리에 존재하던 금탑과 비슷한 구조의 연공실에는 엘이 자리하고 있었다. 엘은 단전호흡을 하는 자세를 취한 채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는 지금 자신의 마법 체계를 천천히 되짚어 보고 있었다. '나는 스승 없이 나만의 경지를 이룩하게 되었지. 만약 남들과 같은 방법으로 마법을 익혔다면 지금 7클래스의 벽에 막혀서 절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전생에 살았던 지구의 마법 수식과 단전호흡을 바탕으로 경지를 이룩하는 데 성공했지. 그러다 보니 이것들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무척 컸어.' 엘은 정말 많은 것을 깨닫고 있었다. 루이아스의 비전에는 세르디아 대륙에 존재하던 마도 시대의 마법 비전 절학과 루이아스 본인의 비전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것을 보면서 나는 세르디아 대륙의 마법 체계도 무척 훌륭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지. 수천 년 동안 발전해 온 마법의 비전을 익히면 내 빈 자리를 충분히 채울 수 있을 것이다.' 루이아스의 비전 절학은 혹시나 하는 그런 불순한 사상에 대한 것은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마법에 관한 잣만 존재했으며, 자신만의 체계에서 놀던 엘은 세르디아 대륙의 광활한 마법 체계에 빠져 자신에게 부족하던 점을 솜이 물 빨아들이듯이 힘차게 빨아들이고 있었다. '아토빌 공작...... 아니, 아토빌 황제. 그를 상대하려면 남은 기간 동안 내가 부지런히 마법의 비전들을 흡수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흡수하게 되면 나는 그에게도 밀리지 않는 강한 힘을 손에 넣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힌 엘은 천천히 마법의 체계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창공을 날아오를 수 있는 힘찬 발판이 뒷받침된 상태로. * * * 금탑주가 아토빌 황제에게 전한 기간은 1년이었다. 그 기간 동안 대륙은 전쟁의 여파를 걷어 내고 새로이 확립된 질서를 세우고 있었고, 전쟁의 잔재는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1년이 흐른 뒤 지금은 아토빌 제국으로 변한 구 아일라스 제국의 황궁에 한 청년이 나타났다. 그는 거침없이 황궁 안으로 들어가 황제가 머무는 집무실로 접근해 들어갔다. 황궁 내 마법을 차단하기 위한 곳곳의 트랩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보이지 않는 가공할 신위였다. 마침내 집무실에 도착한 엘은 집무를 보고 있는 황제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집무를 보는 황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이군, 금탑주." 아토빌 황제는 엘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1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잘 지냈나 보군.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한 모습을 보니 말이야." 엘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몸의 한 부분을 쓰다듬는다. 아토빌 황제가 검을 꽂았던 그 부위였다. "글쎄요. 잘 지냈다고 하기에는 상당히 무리가 있는 표현이네요.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한 뒤 암격을 당해서 그 부상을 완전히 회복하는 데만 몇 달이 걸렸으니까요." "아쉽군. 완전히 보내주지 못해서." 아토빌 황제의 말에 엘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토빌 황제 또한 지지 않은 채 엘의 얼굴을 응시했다. 엘이 입을 열었다. "이대로 있기엔 당신과 있는 시간이 불쾌하군요. 자리를 옮기지요." "그러지. 감히 나에게 도전한 것. 그것을 용서할 수 없으니까." 아토빌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앞장서듯 걸으며 엘이 그 뒤를 따랐다. 처억! 그들이 도착한 곳은 연무장이었다. 오로지 아토빌 황제만이 사용하는 개인 연무장이었다. "죽을 수도 있다. 그 정도 준비는 해 두었겠지." 검을 들며 아토빌 공작이 입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사나운 기세가 몰아친다. 엘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불상사는 어느 대결에서나 일어날 수 있으니까요." "잘 알고 있으니 좋군." "이렇게 대결하는 것도 좋지만 내기를 하지 않겠어요?" 갑작스러운 엘의 말에 아토빌 황제의 표정에 의혹이 서렸다. "내기? 그게 무슨 말이지?" "대결을 펼치기만 하는 건 너무 재미가 없는 것 같아서 말이지요. 패자가 승자의 말을 들어 주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가 있을 것 같고 말입니다." 아토빌 황제에게서 미소가 걸린다. "흐흐! 내기를 걸면 동기 부여로 뭔가 강해지는 줄 아나 보군. 좋다. 내기든 뭐든 해 주지. 나 또한 원하는 게 있었으니까." 그가 원하는 것은 바로 엘의 마나 연공법이다. 엘을 사로잡아서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빼내려고 했는데 이렇게 말을 해주니 오히려 고마울 지경이었다. "오라, 금탑주. 내 하늘 위에 하늘이 있음을 가르쳐 주겠다." 파아앗! 아토빌 황제의 갓 소드에서 푸른 오러가 솟아나기 시작했다. 대결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검게 물든 날이 지나고, 찬란한 태양이 황궁을 비출 무렵, 대결은 끝이 났다. 챙그렁. 흉측하고 파인 연무장에 검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곳에는 전신 곳곳에 상처로 뒤덮인 아토빌 황제가 서 있었다. 그 맞은편에는 처음과 변함이 없는 엘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대결의 승리가 누구에게 기울었는지 뻔히 알 수 있었다. 엘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제 승리로군요." 엘의 말에 아토빌 황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1년 동안 엘은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을 하였다. 대결이 길긴 했지만 금탑주는 자신의 공격을 모두 상쇄 하였고, 자신은 금탑주의 공격을 막아 내지 못했다. 루이아스의 비전을 이어받은 엘은, 그가 강력하게 펼치던 다이아몬드 제련제강의 마법은 물론 그동안 펼치지 않았던 다양한 마법들을 전개하여 아토빌 공작을 함락시켜 갔다. 그렇게 천천히 데미지를 입어가면서 마침내 검을 놓치는 상태까지 몰렸으니, 이는 완벽한 자신의 패배였다. 엘은 천천히 아토빌 황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앞에 서면서 입을 열었다. "제 승리로군요. 이제 제 조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첫째. 황제 자리에서 퇴위하십시오. 저를 배신한 당신이 황제 자리에 올라 있는 걸 보니 역겹군요. 두 번째는 이 제국의 상권 전체를 디벨 상단에게 주십시오. 세 번째는 저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를 해야 합니다." 하나하나가 엄청난 것들이었다. 수십 년 동안 노력해서 얻은 황제의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는 것. 자신의 꿈을 완전히 무너뜨리겠다는 의미다. 게다가 제국의 상권을 달라니. 당장 제국의 경제가 어렵긴 하지만 디벨 상단에게 상권 전체를 준다면 추후 금탑주 입김 한 방에 제국의 경제가 무너질 수도 있다. 세 번째 조건 또한 자신의 명성에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된다. 아토빌 황제가 외쳤다. "내, 내가 그것들을 할 것 같더냐!" 그의 외침에 엘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마법을 전개했다. 그러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을 수도 있다. 그 정도 준비는 해두었겠지. -물론입니다. 불상사는 어느 대결에서나 일어날 수 있으니까요. -잘 알고 있으니 좋군. -이렇게 대결하는 것도 좋지만 내기를 하지 않겠어요? -내기? 그게 무슨 말이지? -대결을 펼치기만 하는데 너무 재미가 없는 것 같아서 말이지요. 패자가 승자의 말을 들어 주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가 있을 것 같고 말입니다. -흐흐! 내기를 걸면 동기부여로 뭔가 강해지는 줄 아나 보군. 좋다. 내기든 뭐든 해 주지. 나 또한 원하는 게 있었으니까. 오라, 금탑주. 내 하늘 위에 하늘이 있음을 가르쳐주겠다. "이, 이건......" 아토빌 황제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지금 들려오는 것들은 대결 전 자신이 금탑주와 나눈 이야기의 내용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알려진다면 자신은 그야말로 파병이었다. 간신히 혼란을 수습한 벨로세크 제국과 루이디스 제국에서 이 기회를 빌어 잃은 영토를 수복하려고 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니, 전대륙의 공격 빌미가 될지도 모른다. 지금 아토빌 제국의 경제 취약점은 모든 국가가 아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런 아토빌 황제를 유쾌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엘이 그의 선택을 종용했다. "어쩔 것입니까? 이것을 대륙으로 퍼뜨릴까요, 아니면 제 말을 순순히 들으시겠습니까?" 선택의 여지는 없다. 아토빌 황제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따르겠네......" 대륙 제일 기사라 불렸던 거인의 왜소한 모습이었다. Epilog. 대륙 제일 마탑 금탑! 대륙 제일 상단 디벨! 대륙 제일이 들어가는 두 곳의 지배자가 된 엘은 자신의 영지를 개발하는 데 주력했다. 대륙의 상권 절반 이상을 쥐게 되어 대륙 제일 상단이 된 디벨 상단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금탑령은 빠른 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이전의 금탑보다 더욱더 멋지고 화려한 모습으로 발전해 갔다. "아, 벌써 삼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구나." 이제는 20대 후반의 나이가 된 엘은 집무실에서 내려다보이는 광경을 보며 중얼거렸다. 눈이 소복하게 쌍이는 겨울의 눈을 보며 엘은 어제 자신에게 온 초대장을 보며 2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 "저는 공주님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엘은 에리스 공주에게 진지하게 자신의 마음을 전달했다. 자신에게는 이미 두 여인이 마음에 꽉 차 있었기에 더 이상 다른 여인이 들어올 곳은 없었다. 엘의 말에 에리스 공주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금탑주님의 말씀...... 잘 알겠어요." 억지를 부린다 하여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이 아니다. 에리스 공주는 엘의 완고한 태도에 그것을 실감했다. 그날 에리스 공주는 곧장 왕궁으로 돌아갔다. 더 이상 금탑에 있어 봤자 미련만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에리스 공주는 가이아 신전에 귀화했다. 왕궁의 천덕꾸러기로 취급받느니 평소 독실하게 믿어 온 가이아 신전에 귀화하여 신관의 인생으로 살길 원한 것이다. 그렇게 2년이 흘렀고, 독실한 신앙과 노력으로 에리스 공주가 가비아 여신의 신탁을 받아 성녀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성녀 취임식에 에리스 공주가 엘을 초대한 것이다. 초대장의 내용은 간략했다. 성녀로 발탁되어 취임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황 성하에게 물어보니 성녀도 결혼을 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제 마음속에는 아직 금탑주님이 계시니 제 마음을 받아 주실 수 있다면 언제든지 제 청혼을 받아 주시기 바라요. 신성력의 힘으로 더욱더 예뻐졌답니다. "거참......" 초대장을 보며 엘은 한동안 무척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웃음을 지울 수 없었다. 성녀로 발탁되면서 그녀 본연의 활발한 성격을 되찾고 있는 것 같아 다행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엘이 초대장을 보며 웃고 있을 때, 집무실로 들어오는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아직도 여기 계신 거예요? 어서 오세요. 실린이 당신을 찾고 있어요." 집무실로 들어온 아름다운 여인은 세레나였다. 엘은 2년 전 세레나와 카이나를 데리고 공동 결혼식을 올렸다. 대륙 제일 상단인 디벨 상단이 엄청난 돈을 퍼부어서 국왕의 결혼식보다 더욱 화려하다는 말이 나을 정도로 화려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더욱 놀라운 것은 엘의 결혼식에 다수의 초인들이 참석했다는 것이다. 주례는 백탑의 유클레이가 봐 주었을 정도니 금탑주 엘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다시 한 번 대륙에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결혼을 한 엘은 1년 뒤 세레나와 카이나에게서 각각 일남일녀를 두게 되었다. 바로 실린과 로윈이었다. 각각 두 살이 된 아이의 아버지가 된 엘의 입가에서는 연신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아, 그랬나? 금방 가도록 하지." 세레나의 말에 엘은 실린이 머무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미소는 진정 행복해 보이는 자의 미소였다. 엘은 성녀 취임식에 참석했다. 성녀는 몇 백 년에 1명씩 신탁을 받아 선택되는 고귀한 신분이다. 그 위치는 교황과 동급이며, 각국의 군주와 비슷한 위치로 대접을 받는다. 그런 취임식에 초대를 받는 건 몇 안 되는 소수의 사람들뿐이다. 엘은 세레나와 카이나를 동반한 채 성녀 취임식에 참석 한 상태다. 실피르에게도 참석을 권유했지만 요즘 아이들 보는 재미에 푹 빠진 그녀는 오랜만에 부부들끼리 오붓한 시간을 가져 보라며 엘과 부인들만 가길 권유했다. 그리하여 엘과 여인들만 참가하게 된 것이다. 성스러운 성가와 함께 성녀로 발탁된 에리스 공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참석한 이들은 에리스 공주의 고결한 아름다움에 모두 감탄을 흘렸다. "오오! 정말 아름답군." 엘도 몇 년 사이 더욱 아름다워진 에리스 공주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자신의 손을 떠난 에리스 공주가 오늘따라 유난히 더 아름다워 보였다. '이러다가 바람둥이 소리 들을라.' 잡스런 생각을 재빨리 없애며 엘은 성녀 취임식을 관람했다. 아는 이를 위한 행사라 그런지 더욱 각별하고, 즐거웠다. 2년 전 엘과 이별한 여인은 비단 에리스 공주뿐만이 아니었다. 엘리엔도 비슷한 시기에 금탑을 떠났다. 그녀는 떠나기 전 엘에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나는 널 사랑하는 것 같아." "......" 엘리엔의 말에 엘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그녀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할 줄이야.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바였다. 그런 엘에게 엘리엔이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아니, 사랑하는 것인지 나도 잘 모르겠군. 하지만 이 감정. 이 상태. 이것이 사랑이라고 하니 그런 것 같군." 엘은 여전히 아무 말도 못했다. 그런 그에게 엘리엔이 말했다. "난 너에게 나를 사랑해 달라고 말을 하지는 않겠어. 엘프는 모든 것을 주는 사랑을 하지. 난 내 식대로 널 사랑이란 걸 해 보이겠다. 지금 너에게 이런 고백을 한 나라는 존재는 거북하겠지. 그래서 난 금탑을 떠날 것이다. 그리고 네가 외롭고 쓸쓸한 존재가 되는 날 나는 널 다시 찾을 것이다." 그렇게 말한 엘리엔이 몸을 돌렸다. 그녀는 엘의 대답을 듣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다. 자신의 마음속에 담긴 말을 하기 위해, 이 감정을 그에게 전하기 위해 온 것이다. 엘리엔은 그렇게 금탑을 떠나갔고, 엘은 그로 인해 한동안 깊은 생각에 빠져들어야만 했다. 자신이 과연 그녀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지 생각하면서. "금탑에 남고 싶다." "예?" 아이넨스의 뜻밖의 말에 엘이 눈을 크게 떴다. 그가 루이넨스를 데리고 이곳 금탑에 머문지 상당한 시간이 지났다. 엘은 그동안 루이넨스에게 걸린 마법을 모두 해제할 수 있었다. 루이아스의 비전을 얻어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루이아스가 죽었기에 그 마법의 위력이 많이 약해져 있기 때문이다. 루이넨스에게 걸린 정신 마법이 모두 해제되었으니 엘은 아이넨스가 금탑을 떠날 날이 멀지 않았다고 여겼다. 그런데 아이넨스가 남겠다고 한 것이다. 아이넨스가 웃음을 지었다. "조금 뜻밖이었나 보군. 하지만 우리 신검가는 와해되었고 이대로 떠나 봤자 갈 곳도 없더군. 그래서 금탑에 의탁하고 싶어서 이야기를 꺼낸 것인데...... 우리의 존재가 폐가 되나?" 엘이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오히려 제가 머물러 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차입니다." 아이넨스와 루이넨스, 둘 모두 빠지지 않는 그랜드 마스터다. 그들이 금탑에 머물러 준다면 이보다 더 든든한 아군은 없다. 엘의 승낙에 아이넨스는 미소를 지었다. "고맙군, 우리를 받아 주어서." 그렇게 금탑은 2명의 그랜드 마스터를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엘이 레드 드래곤 브릴켄드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유실되었다고 알려진 수천 년 전의 고서적을 뒤지면서이다. 오래 전 마룡이라 불리며 한 국가를 불바다로 만든 레드 드래곤의 자료를 찾아낸 엘이 눈을 빛냈다. "여기 였군, 브릴켄드가 있는 곳이." 브릴첸드는 오래 전부터 대륙의 금지가 된 붉은 사막에 살고 있다고 한다. 몬스터 랜드 등과 함께 대륙의 금지라 불리는 이곳은 누구의 발걸음도 허용하지 않는 불가침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난 가야 한단 말이지." 카이나에게 드래곤 블러드를 주입했던 브릴켄드. 그 결과는 자신들에게 이롭게 작용했지만 그 의도만큼은 절대 좋은 것이라 할 수 없었다. 중간계의 절대자라 칭하며 자칭 수호자라 불리는 드래곤. 그러나 지난 시간 마족과 천족의 침공이 없으면서 중간계는 그야말로 드래곤들의 놀이터가 된지 오래다. 아마 브릴켄드는 카이나에게 장난감에게 실험을 하는 양 드래곤 블러드를 주입했을 것이다. 그래서 용서할 수 없었다. "내 힘으로 브릴켄드를 막을 수는 없겠지. 하지만 말이야......" 엘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맺혔다. 그의 손에는 전에 볼 수 없었던 익숙한 반지가 빛을 발 하고 있었다. "이건......" 중간계의 지배자이자 오래 전 에인션트 급을 돌파한 브릴첸드는 지금 황당한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몇 년 전 자신의 유희를 망쳐 버리면서 화풀이로 삼았던 인간 마법사.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린 나이에 8클래스란 벽을 돌파한 그가 지금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 이곳은 브릴켄드의 레어이다. 밖에서 살핀다면 그저 황량한 사막이겠지만 브릴켄드의 광범위한 일루전 마법에 의해 그 실상이 가려져 있을 뿐, 내부는 화려하기 그지 없었다. 브릴켄드의 레어를 찾은 엘은 전과 달리 붉은색 아름다운 미남의 브릴켄드에게 입을 열었다. "제가 이곳에 찾아온 이유는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엘의 말에 브릴켄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그는 이 상황에 무척 황당했다. 고작 인간이 자신의 레어에 침입했다는 것에 어이가 없었으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절망에 몸부림치던 인간이 자신의 시련을 이렇게 쉽게 극복했다는 것에 기분이 나빴다. 자연히 그의 말투도 고울 리가 없었다. "감히 인간 따위가 내 레어에 침입해서 못하는 말이 없군." 동시에 브릴켄드의 전신에서 형용할 수 없는 압도적인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하등생물로 하여금 절로 공포에 질리게 만드는 드래곤만의 절대 비기 드래곤 피어가 발동한 것이다. 무서운 살기가 엘의 전신을 잠식해 들어갔다. 그러나 엘의 손에 끼여 있는 반지가 빛을 발하는 순간 브릴켄드의 살기가 씻은 듯 사라졌다. "이건?" 믿기지 못할 사실에 브릴켄드의 눈이 부릅 뜨였다. 사실 그의 놀라움도 결코 과대 반응이 아니었다. 드래곤 피어는 드래곤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성질의 무형으로 펼쳐지는 공격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을 한낱 인간이 무효화시킬 수 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브릴켄드가 놀란 것은 엘의 실력 때문만이 아닌 자신의 살기를 흩어 버린 엘의 반지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 저 반지를 어찌 모르겠는가. 브릴켄드 그 또한 저 반지를 봉인할 때 함께 있었는데 말이다. 저것에 레드 드래곤 베이나스가 죽었다는 이야기는 그 또한 들었다. 드래곤조차 꼼짝하지 못할 만큼 카르마 링의 힘은 가공할 정도였다. 절대자인 그의 입에서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카, 카르마 링...... 저것이 어찌하여 너의 손에......" 브릴켄드의 떨리는 목소리를 감지한 엘이 빙긋 웃으며 손을 쓰다듬었다. 자신이 이곳에 찾아을 수 있게 자신감을 심어 준 것이 바로 이 카르마 링 때문이었다. "누군가에게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것이 아니었다면 이곳에 찾아올 생각도 하지 못했겠지요." 그러면서 엘은 브릴켄드에게 말했다. "저는 길게 말하길 원하지 않습니다. 드래곤인 당신이라면 이런 마병을 한시라도 빨리 회수하길 원할 터. 안 그렇습니까?" "음!" 엘의 말에 브릴켄드는 자존심이 상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조차 꼼짝 못하게 만드는 카르마 링은 정말 위험한 물건이다. 당장 인간의 손에 저것이 들어가고 나쁜 마음을 먹어 드래곤 슬레이어 파티를 구성한다면 드래곤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그만큼 위험한 것이 카르마 링이었다. 브릴켄드의 입장에서는 빨리 회수해야 할 물건이었다. "그래서 제가 제안 한 가지를 하고 싶습니다." 엘의 말에 브릴켄드의 얼굴에 재차 살기가 서렸다. "제안? 감히 나에게......" 하지만 뒤이어 나온 엘의 말에 브릴켄드는 살기를 거두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살기를 내뿜지 마십시오. 저 또한 당신에게 감정이 상당히 좋지 않으니까. 하마터면 제 부인인 카이나가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한마디로 당신과 저는 원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지금 제가 이 카르마 링을 활용한다면 당신을 죽이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자존심 상하는 말이었지만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브릴켄드는 퉁명스레 말했다. "제안이 뭐지? 말하라." 엘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간단합니다. 금탑의 수호룡이 되어 주십시오." "뭣이? 지금 그 제안을 내가 수용하리라 생각하는 것이냐?" 싸늘하게 굳는 브릴켄드를 보며 엘이 말을 이어 나갔다. "수호룡이 되어 주신다면 카르마 링을 넘겨 드리겠습니다." "카르마 링을......" 엘의 말에 브릴켄드는 싸늘한 표정을 풀며 고민에 빠져 들었다. 수호룡이란 드래곤이 인간의 한 단체를 공식적으로 보호해 주겠다는 것을 뜻한다. 만약 수호룡이 있다면 그곳은 초인 수십 명을 보유한 것보다 더욱 강력한 힘을 보유하게 되며, 드래곤의 수명이 다하는 한 무궁한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여태껏 그 누구도 드래곤을 수호룡으로 삼은 국가는 없다. 과거 멸망한 문명에는 존재했다는 설이 있지만 그것을 증명할 만큼의 자료는 남아 있지 않았다. 엘의 말에 브릴켄드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수호룡이란 무척 번거로운 일이다. 하지만 카르마 링은 드래곤의 입장에서 반드시 회수를 해야만 했다. 귀찮음이냐, 드래곤의 임무냐 고민은 길었지만 이미 답은 정해진 것과 같았다. 긴 고민 끝에 브릴켄드가 입을 열었다. "좋다, 인간. 너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그럼 금탑의 수호룡이 되어 준다고 용언으로 천명해 주십시오." 엘은 확실한 대답을 원했기에 곧장 브릴켄드에게 수호룡이 되어 줄 것을 말했다. 드래곤이 두말한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지만 엘 자신이 본 드래곤이 브릴켄드가 유일한 만큼 확실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용언의 맹세는 드래곤에게 내려오는 것으로, 중간계의 수호자인 드래곤 한마디 한마디의 언어가 결코 가볍지 않다고 한다. 마법사들에게도 언령이란 것이 있다. 드래곤 역시 의지를 실어 그것을 맹세한다면 드래곤은 죽음으로써 그 맹세를 지켜야 할 강력한 구속력을 받게 된다고 한다. 엘의 말에 브릴켄드가 그를 노려보더니 외쳤다. "나 에인션트 레드 드래픈 브릴켄드는 인간의 금탑을 내 수명이 다하도록 수호할 것을 맹세한다. 이는 주신을 비롯한 모든 신들이 내려주신 나의 권능으로 천명하는 바이다." 그 외침과 함께 엘은 브릴켄드 주변에 묘한 마나의 변화가 일어난 것을 느쪘다. 엘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수호룡이시여." 브릴켄드는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내밀었다. "하라는 대로 해 주었으니 카르마 링을 내놓아라." 엘이 능청을 떨었다. "아직 확실하지 않잖습니까? 일단 브릴켄드 님이 맹세 하시는 장면을 저장해 놓았으니 각국의 군주들에게 확인을 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게다가 제가 언제 당장 내놓겠다고 했습니까? 제가 모든 수명을 누리고 죽는 날, 브릴켄드님에게 카르마 링을 드릴테니 안심하십시오. 그럼 모든 볼일을 끝마쳤으니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 엘의 말에 브릴켄드는 입을 열지 못했고, 그사이 엘은 브릴켄드의 레어를 벗어났다. 멍한 표정을 짓던 브릴켄드는 이내 허허 웃으며 속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멍청하게도 속았군. 카르마 링에 마음이 다급해졌기 때문이겠지. 허허, 금탑주 놈. 설마하니 드래곤마저 속여 먹는 놈일 줄이야......" 브릴켄드의 얼굴에는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로서 금탑은 2명의 그랜드 마스터뿐만 아니라 드래곤의 가호마저도 얻게 되었다. * * * "이렇게 행복한 시간을 누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정말 좋군." 며칠째 폭설이 내리고 눈이 멎은 날, 엘은 험한 계곡을 날아가고 있었다. 곳곳에 눈이 소복하게 쌓여 위태로웠지만 허공을 나는 엘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었다. 그렇게 공중을 날아 엘이 도착한 곳은 드넓은 분지였다. 쉴 새 없이 폭설이 몰아치는 곳. 그곳을 둘러보며 엘이 중얼거렸다. "삼 년째로군. 올해에는 찾을 수 있을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엘은 탐지 마법을 전개 한 채 계곡 곳곳을 누비기 시작했다. 재작년에도, 작년에도 찾지 못했다. 하지만 1년마다 3분의 1씩 탐색을 했기에 올해에도 찾지 못하면 완전히 찾을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엘은 행여나 미약한 반응도 놓칠세라 반응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며 천천히 탐색을 해나갔다. 그리고 미약한 반응이 일어나는 순간, 엘의 눈이 반짝였다. "찾았다!" 파아앗! 공중에 떠오른 엘의 신형이 폭설을 가르며 빠르게 쏘아졌다. 엘의 신형이 도달한 곳은 눈이 쌓인 언덕이었다. 엘은 그 눈들을 보며 손을 뻗었다. 치이익! 엘의 손에 서린 붉은 기운이 눈을 녹여 나가기 시작했다. 차례차례 눈을 녹이며 두꺼운 눈의 장막을 모두 걷어낸 엘의 시야에는 녹이 잔뜩 슨 고철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바라보는 엘의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스윽. 엘은 양팔을 벌려 그것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마치 소중한 연인을 대하듯, 고철을 쓰다듬었다. "타나, 드디어 너의 에고를 찾을 수 있게 되었구나. 나를 위해 희생한 금탑의 영원한 수호 기사 골든 나이트여. 널 복귀할 수 있게 해 준 신께 감사드리며 내 모든 능력을 다해 널 부활시켜 주겠다." 엘은 골든 나이트의 에고를 쓰다듬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폭설이 몰아치는 속에, 무겁게 울리는 다짐이었다. (골든 메이지 완결) ......끝맺음 말 우선 골든 메이지를 읽어 주신 독자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지난 1년 동안 골든 메이지를 써 오면서 독자 분들의 혹독한 질책과 비평, 많은 칭찬과 격려 속에 이렇게 12권이라는 장편으로 끝을 맺을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책은 신년인 2009년도에 나오겠지만 제가 마감하는 시기는 곧 새해가 다가오는 날이군요. 새해를 맞이하면서 앞 권을 천천히 정독하다 스스로를 반성하는 시간을 가져 볼까 합니다. 좀 더 열정을 기울였을 걸 하는 아쉬움도 가지면서 말입니다. 골든 메이지를 완결 지은 후 약 한 달 동안 재충전의 시간을 가진 뒤, 다가오는 2009년 4월, 신작을 출간하고자 합니다. 신작의 제목은 '레이버'입니다. 더욱더 재미있는 글을 쓰고자 하는 제 욕심이 잔뜩 들어간 작품이 될 테니 독자 분들의 많은 사랑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1년 동안 제 책을 편집하시느라 고생하신 이석원 편집자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이렇게 책을 낼 수 있게 해 주신 파피루스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