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 : 골든메이지8 저자명 : 김현우 펴낸이 : 신현호 출판사 : 디앤씨미디어 출판년도 : 2008년 6월 12일 봉사자 : 정재은 <지은이소개 /김현우> 마음만은 여전히 신인. 오늘도 매일같이 키보드를 두드린다. <차례> 1. 9클래스 마법사의 절대적인 힘 2. 또 다른 제련제강의 마법 3. 블리어드 제국과의 동맹 4. 톨리안 왕국의 근심 5. 한 발 빠른 자와 한 발 늦는 자 6. 백탑주 유클레이 7. 금탑주를 사칭하는 사기꾼 8. 스톰 메이지, 게드릭 9. 톨리안 왕국의 제의를 받다 10. 에리스 공주의 생일 파티 11. 마도 제국의 선언 part. 1 1. 9클래스 마법사의 절대적인 힘 루이아스의 등장! 갑작스런 그의 등장에 루이넨스 등의 표정이 급격하게 변화를 일으켰다. 수백여 쌍의 시선을 받으며 루이아스는 루이넨스에게 빙긋 웃어 보였다.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 왔는데 설마 이런 변수가 있었을 줄은 몰랐구나. 하마터면 부하들을 대거 잃을 뻔했어. 조금 더 일찍 왔다면 데리오머도 당하지 않았을 것인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루이아스는 여전히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도저히 그의 심중을 알기 어려웠다. 부하를 아끼는 것인지 아니면 경시하는 것인지 말이다. 루이아스가 말했다. "너희들은 제법 심각한 상처를 입었으니 가서 상처를 치료하고 있어라. 나는 모든 일들을 처리하고 갈 테니." 그 말과 함께 루이아스가 손을 휘젓자 엘이 전개했던 마법 방해장이 흔적도 없이 소멸되었다. 동시에 마법 발현이 지속화되어, 루이넨스 등은 그대로 빛에 휩싸이며 사라졌다. 삽시간에 루이아스와 엘들만이 남았다. 엘은 루이아스를 보며 두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의 얼굴은 일찍이 한 번 보았던 얼굴이기 때문이다. 엘이 루이아스를 보며 외쳤다. "설마...... 그때 당신이 이 모든 일들의 주모자란 말입니까?“ 루이아스는 엘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게 바로 나지. 그때는 그럭저럭 주목할 만한 마법사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우리들의 앞을 가로막는 최대의 적이 되어 있군. 정말 대단해, 내가 여태껏 살아오면서 너 같은 아이는 보지 못했다."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는 설마 이십 대에 불과한 엘이 이토록 자신의 앞을 가로막을지 몰랐다. 그의 능력을 과소평가함으로써 상당 부분 피해를 입어야만 했다. 한때 그의 재능을 탐냈으나 지금은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온 상태였다. 이렇게 되면 해결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이렇게 강적들이 모두 모여 있으니 더없이 반갑구나. 이참에 모두 죽여주마. 오늘은...... 아름다운 밤이 될 것 같구나." 시종일관 웃음을 짓고 있는 루이아스에게는 강자의 여유가 절로 배어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엘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상대는 대륙 역사상 전무후무한 9클래스 마법사! 그런 자가 상대라니 상황은 절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대륙 제1기사인 아토빌 공작과 엘프 수호검주 엘리엔이 있다. 도저히 패배를 할 거라 믿기지 않는 이들이라면 이 상황을 오히려 기회로 전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엘이 어깨를 피며 당당하게 외쳤다. "죽는 것은 당신이 될 것입니다." 루이아스의 입가에 걸린 웃음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 했다. "그런 자신감이 있었기에 여태까지의 난관을 헤쳐 나온 것이겠지. 그럼 덤벼 보게나, 여러 후배님들."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어느새 루이아스의 주변을 엘 등이 포위하고 있었다. 선두에는 엘리엔과 아토빌 공작이 서 있었다. 그랜드 마스터 중 가장 강한 그들이니 만큼 결코 쉽게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뒤를 골든 나이트가 받치고 있었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뛰어난 회복력을 지닌 골든 나이트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 뒤를 아이넨스와 카디어스를 받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상당히 지친 상태였기에 직접적으로 전투에 참가하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따른다. 엘은 루이아스와 가장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그와 엘 사이에는 1클래스라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당장 클래스 프레셔를 가하면 엘로서는 버틸 재간이 없었기에 먼 거리에 떨어져 있으면서 보조적인 도움을 주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쉬익! 아토빌 공작과 엘리엔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검을 뻗었다. 둘의 검이 번개 치듯 대기를 가르며 순식간에 루이아스를 양분하듯 휘둘러졌다. "꽤 매서운데?“ 루이아스는 2개의 검이 쇄도하는 것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랜드 마스터에게도 통하는 매서운 공격이었지만 루이아스에게는 그런 것이 통용되지 않았다. 그의 몸이 살짝 기울어지더니, 2개의 검을 가볍게 피했다. 어떤 마법도 사용하지 않은 순수한 몸놀림으로 말이다. "세상에! 저게 가능하단 말인가?“ 루이아스의 회피 동작을 보며 아이넨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엘 또한 마찬가지였다. 마법사인 그의 상식으로 마법사가 저런 몸놀림을 보일 수 없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저런 몸놀림을 보이다니? 방금 전 보인 몸동작은 설사 그랜드 마스터라 할지라도 쉽게 보일 수 없는 빠른 몸놀림이었다. 루이아스는 놀란 아토빌 공작과 엘리엔에게 가볍게 혀를 찼다. "이런, 누가 방심해도 좋다고 했지?" “헉!" 루이아스가 지척에 이르자 엘리엔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네이처 소드를 휘둘렀다. 순간 그녀의 검이 3개로 변하며 루이아스를 베어갔다. 하나는 얼굴을 하나는 가슴을, 하나는 허리를 베어 가는 그녀의 검은 그 어디에도 피할 길이 보이지 않는 완벽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루이아스였다. 엘리엔의 검이 그에게 닿는 순간 검 지척에 3개의 실드가 생겨났다. 따다당! 실드는 오러를 머금은 엘리엔의 공격을 완벽하게 막아 냈다. 3번의 연속 공격을 단번에 막아 낸 것이다. 놀라운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엘리엔은 그랜드 마스터 중 오러의 위력만큼은 최강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그녀의 공격을 단순한 실드로 막아 냈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실드는 대단한 방어력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 된다. 루이아스는 엘리엔을 일별하며 웃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한 번에 덤벼도 좋은데 말이지." "흡!" 그때 아토빌 공작이 뒤에서 검을 휘둘러 왔다. 빈틈을 비집고 공격한 완벽한 공격이었다. 검이 막 루이아스를 갈라 버릴 때, 그의 몸이 흐릿해지며 사라졌다. 짧은 순간 블링크를 전개한 것이다. 아토빌 공작으로부터 약 20여 m떨어진 곳에 모습을 드러내자 골든 나이트가 빠른 속도로 맹렬하게 접근해 왔다. 루이아스는 한 손을 내밀었고, 골든 나이트는 룬 블레 이드를 휘둘렀다. 띠이잉! 루이아스가 펼친 방어막과 골든 나이트의 룬 블레이드가 서로 충돌을 일으키며 충격파가 사방으로 뻗쳐 나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룬 블레이드의 위력을 견뎌 내지 못한 루이아스의 방어막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꽝! 처음으로 루이아스의 방어막이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산산이 조각난 실드 파편을 보며 루이아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9클래스에 이른 자신이 펼치는 실드 마법은 하나하나가 모두 절대 방어에 버금가는 스킬이다. 절대 방어는 드래곤 본에 버금가는 최강의 방어력을 지니고 있다. 헌데 그런 절대 방어가 깨지다니? 있을 수 없는 일에 루이아스는 한순간 평정이 깨졌다. 순간 드러난 그 틈을 놓칠 골든 나이트가 아니었다. 골든 나이트에게서 푸른 청광이 뿜어지더니 룬 블레이 드에 찬란한 빛이 사방에 뿜어졌다. 단칼에 루이아스의 몸을 동강내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모든 마법에 통달한 루이아스가 한순간 방심으로 인해 목숨을 잃을 턱이 없다. 그의 눈이 순간 냉정하게 가라앉았고, 동시에 양손을 앞으로 뻗어 절대 방어를 전개했다. 콰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루이아스의 몸이 주르륵 밀려났다. 그러나 이번에는 방어 마법이 깨지지 않았다. 9클래스에 이르는 마법사의 눈이 룬 블레이드에 적용 된 마법의 원리를 단번에 꿰뚫어보았기 때문이다. "정말 대단하군. 마법을 저런 용도로 활용할 수 있다니. 중첩 마법진이 매직 메탈의 한계치만큼 중첩되었군. 오로지 한 가지 용도를 위해 수백 번의 중첩이 반복되었으니 그 힘은 가히 신검에 부족하지 않을 정도구나." 이것을 만든 이라면 분명 금탑주일 것이 분명할 터. 신검에 버금가는 아티팩트를 만들어 낸 그를 보며 루이 아스는 엘이 탐나는 것을 느꼈다. 비록 자신들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고 하나 엘의 가치는 그 정도의 리스크를 감수하고서라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 싶을 만큼 큰 가치가 있었다. 루이아스가 허공에 몸을 고정한 채 엘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정말 대단하군! 룬 블레이드라고 했던가? 성국의 성물과도 자웅을 겨루었다던 저 검은 정말 대단하기 그지없군. 분명 저 검은 네가 만든 것일 테지?“ 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하, 정말 대단하다. 난 솔직히 지금 이것을 만들라고 해도 만들 자신이 없어. 신검에 버금가는 아티팩트라니! 너의 재능은 정말 놀랍구나." 비록 적이라 할지라도 9클래스 마법사의 칭찬이다. 이는 그랜드 마스터가 소드 마스터의 검법을 극찬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기에 엘은 적의 칭찬일지라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루이아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정말 대단해. 그리고 이 정도 재능을 이대로 사라지게 하는 건 더더욱 아까운 법이지." 그의 말투가 모해졌다. 엘은 그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무슨......?“ "나에게로 와라." “......” “지금 너희가 나에게 대항한들 모두가 부질없는 짓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9클래스의 힘은 그랜드 마스터 열 명이 한 번에 달려들어도 승산을 점칠 수 없는 최강의 힘을 지녔기 때문이다." 정말 놀라운 말이 아닐 수 없었다. 흔히 그랜드 마스터가 수십 명의 소드 마스터를 감당할 수 있고, 8클래스 마법사는 수십 명의 7클래스 마법사를 감당할 수 있다고 한다. 이는 한 단계지만 월등히 앞서 나간 자가 하수를 압도적으로 상대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랜드 마스터는 7클래스 마법사 수십 명을 감당하지 못한다. 이는 8클래스 마법사도 마찬가지여서, 수 십 명은커녕 다섯 명의 소드 마스터가 합공한다 해도 고 전할 수밖에 없다. 마법사와 기사의 걷는 길은 원천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그들이 가장 우선적으로 점할 수 있는 우위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치라면 9클래스의 마법사도 그랜드 마스터의 협공에 고전할 수밖에 없을 터. 때문에 엘은 그랜드 마스터 다섯이 있는 지금 9클래스 마법사인 루이아스를 견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그 생각은 철저한 오산에 불과했다. 루이아스는 설사 10명의 그랜드 마스터가 합공해도 자신이 결코 진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놀라운 말임이 틀림없다. 그는 애초에 8클래스 마법사들을 생각에 넣지도 않았다. 엘의 생각을 읽은 것인지 루이아스가 자신의 손을 들어 보였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이게 있기 때문이지." 그의 손에는 반지가 껴 있었다. ‘반지? 특별한 능력을 지닌 것인가?’ 순간 엘이 생각에 잠겼을 때, 루이아스가 엘의 의문을 풀어 주었다. "이것은 카르마 링. 다른 말로 부서진 경계의 운명을 정하는 반지라고도 불리지." “......” 한순간 침묵이 홀렀다. "저주 받은 마병!"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엘리엔이었다. 그녀는 수많은 세월을 살아가는 엘프였기에 신검이나 마병에 대한 지식이 인간들보다 월등했다. 마병 중에서 반지의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다. 그 상대가 절대자 드래곤이라도 피할 수 없는 엄청난 마병! 카르마 링을 말이다. "아...... 카르마 링이라면......!" 엘 또한 루이아스의 손가락에 끼여 있는 반지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아니, 대륙에 존재하는 신검과 마병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지식이 있는 이들이라면 이 반지를 모를 리 없다. 카르마 링. 인과를 자신의 뜻대로 결정할 수 있는 이 반지는 마법사에게 있어 쥐약과도 같은 최악의 상성을 지닌 마병이다. 오죽하면 마법의 조종이라 불리는 드래곤마저도 이 마병에 자유롭지 못할까? 루이아스가 카르마 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딱 한 가 지 사실을 시사한다. 바로 마법사는 절대 그에게 타격을 입힐 수 없다는 것이다. 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렇다면 나는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는 건가?“ 카르마 링은 마법사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데 그 능력을 입증받았다. 그 전설이 사실이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뜻한다. 8클래스의 경지에 이른 자신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니? 정녕 믿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세상에 그런 물건은 없어!" 콰아아아! 엘의 주변에 모인 마나가 요동쳤다. 8클래스 마법을 캐스팅하기 시작한 것이다. 파츠츠! 마나가 빠르게 배열되며 마법이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저것은 루이아스로서도 차마 엄두도 내지 못할 엄청난 캐스팅 속도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카르마 링이 있다. 그에게 저런 엘의 모습은 자포자기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루이아스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어리석군. 현실을 도피하려 하다니." 그는 카르마 링에 마나를 주입했다. 마나를 주입받은 카르마 링에 찬란한 빛이 감돌더니 이내 그 빛이 사방으로 폭사했다. 파앗! 눈부신 빛과 함께 알 수 없는 미증유의 힘이 엘에게 향했다. 그것은 빠르게 배열되는 마나의 흐름에 끼어들더니 곧 이어 그 배열을 산산이 흩어 버리기 시작했다. 물론 엘의 마나 배열은 고속 캐스팅이라 칭할 정도로 빨랐다. 그러나 마나가 흩어지는 속도는 엘이 마나를 배열하는 속도보다 더 빨랐다. 마침내 힘을 잃은 마나는 대기에 수백 수천 단위로 흩어지고 말았다. 털썩! 마나가 흩어져 버리자 엘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배열된 마나가 강제로 흩어지면서 엘의 내부에 엄청난 충격이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 마법사에게 있어 마나 역류는 엄청난 충격과 같다. 기사에게는 마나 폭주와 비견되는 것이 바로 마나 역류인 것이다. 눈을 까뒤집은 엘이 몸을 움찔움찔 떨었다. 마나가 역류하면서 무시무시한 충격이 그를 휩쓸었다. 2. 또 다른 제련제강의 마법 보통 마나 역류는 캐스팅 도중 강제로 취소가 되면서 벌어진다. 그 같은 상황은 캐스팅 도중 강한 충격을 받거나 더 은 경지의 마법사가 강제적인 캔슬을 전개할 때 일어난다. 그런 현상이 지금 엘에게 발생한 것이다. 물론 루이아스가 엘에게 캔슬을 전개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카르마 링에서 발현된 힘은 엘의 마법을 강제로 흩어놓음으로써 캔슬에 비견되는 효과를 낳은 것이다. 드래곤의 경우 강인한 육체 때문에 마나 역류와 같은 타격을 입지 않지만 인간은 다른 것이다. 엘은 바닥에 쓰러져 전신 가득 역류하는 마나의 흐름에 몸을 움찔했다. “......”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이들의 눈이 참담해졌다. 설마하니 엘이 이토록 무력하게 제압당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특히 엘리엔의 놀라움은 더욱 그러했는데, 그녀는 하루가 다르게 놀랍도록 강해지는 엘이 고작 한 수에 제압당한 것에 온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그녀의 눈은 절로 카르마 링에 향했다. '설마하니 이렇게 무력하게 당할 줄이야. 한 명이 당한 이상 모든 힘을 동원해야 해.' 엘리엔이 검을 고쳐 잡고 오러를 주입했다. 웅웅! 그녀의 의지를 느낀 네이처 소드가 공명하며 강렬한 녹색 기류를 홀리기 시작했다. 5대 신검 중 하나인 네이처 소드다. 그 검의 힘은 주변의 마나를 삽시간에 조화롭게 만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엘 또한 마찬가지여서, 사납게 날뛰던 그의 마나는 네이처 소드의 힘에 점차 잔잔해지기 시작했다. 급격하게 안정되는 마나의 흐름을 느끼며 루이아스의 눈이 빛났다. "호오? 이 정도의 힘이라......" 네이처 소드가 발산하는 힘을 못 느낄 루이아스가 아니다. "그렇군! 네이처 소드였어. 오대 신검 중 하나라더니 과연 소문대로군! 어그러지는 마나의 흐름을 금세 바로 잡다니 말이야. 헌데 그것은 엘프들의 신물이라 들었는데...... 그럼 그대가 바로 당대 엘프 수호검주란 건가?“ “......” 엘리엔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검을 휘두르며 곧장 루이아스에게 쇄도했던 것이다. 쐐액! 한줄기 섬광과도 같이 뿜어진 그녀의 검은 대기를 갈랐다. 루이아스가 몸을 틀어 검을 피한 것이다. 그러나 미처 완벽하게 피하지는 못했는지 그가 착용한 로브가 스윽 잘려 나갔다. 네이처 소드를 사용하면서 한결 강해진 엘리엔의 실력에 루이아스는 가슴 한편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신검을 사용하니 더욱 강해졌군. 이거 방심하지 못하겠어." 루이아스의 안색이 찡그려졌다. 그에게 있어 네이처 소드의 등장은 하나의 변수와도 같았기 때문이다. 현재 그가 보유하고 있는 초인의 숫자는 도합 10명이다. 그리고 아직 그에게 동조하지 않은 초인이 있었는데,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아토빌 공작과 백탑주 유클레이였다. 백탑주 유클레이는 8클래스 마법사 중 최고령에 이른 인물로 대륙 제1기사는 아토빌 공작이고, 대륙제일마법사는 유클라이라 불릴 정도로 강한 인물이다. 하지만 마법사는 카르마 링을 지니고 있는 루이아스에게 별다른 위협이 되지 않기에 그대로 놔두고 있었다. 그런데 유클레이는 반항을 그치지 않고 서부에 위치한 그랜드 마스터 둘과 8클래스 마법사 둘을 끌어들여 그에게 대항하고 있었다. 초인 다섯의 규합은 왜 골치 아픈 거리였기에 루이아스는 그들을 잠시 보류한 뒤, 아직 힘을 규합하지 못한 소수의 초인들을 처리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1번째 대상이 알비어드 대공이었다. 그는 루이아스의 예상대로 라이젠, 레이벨, 데리오머의 협공에 목숨을 잃었다. 2번째 대상은 아토빌 공작이었다. 그러나 그는 대륙 제1기사라는 이름답게 놀랍도록 강한 힘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계획을 실패하게끔 하였고, 결국 다수의 초인이 나서게 하였다. 초인 둘을 상대할 수 있는 그는 무척 거치적거리는 적이었다. 그런데 그에 비견되는 엘과 신검의 주인이 손을 잡았단다. 거기에 예상치 못한 엘프 수호검주까지...... 예상치 못한 변수가 점점 나타나자 루이아스가 처음으로 짙은 살기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만큼 신검의 힘은 그에게 위협적이었다. 마병이 전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기사에게 신검까지 더해진다면 그 실력은 엄청난 플러스 알파가 되기 때문이다. 루이아스가 양손을 뻗었다. 동시에 주변의 마나가 급속한 회전을 하더니 마나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마나를 배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 깜빡할 사이에 2개의 마법을 캐스팅 해냈다. 바로 헬 파이어였다. 9클래스를 완성한 그는 이미 엘에 버금가는 캐스팅 속도를 구사하고 있었다. "사라져라." 그의 나직한 외침과 함께 2개의 헬 파이어가 맹렬한 기세로 엘리엔에게 쇄도했다. "큭!" 엘리엔이 신음을 흘리며 검을 곧추 세웠다. 제아무리 그녀가 그랜드 마스터라도 8클래스 마법을 정면으로 받아치는 것은 부담스러웠다. 8클래스 마법은 그만큼 강한 위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할 수 없다. 이미 2개의 헬 파이어는 피할 모든 곳을 태워 버리며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이상 모든 힘을 발휘하여 헬 파이어를 베어 버리는 수밖에 없다. 그녀의 검에 솟은 오러가 길게 자라났다. 확연한 오러 블레이드가 그녀의 검에 자리 잡았고, 그녀는 세상을 베어 버리는 기세로 헬 파이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하압!" 혼신의 힘을 담은 오러 블레이드다. 거기에 네이처 소드가 한몫 보태어 헬 파이어와 오러 블레이드가 부딪치는 순간, 눈부신 빛을 발하는가 싶더니 헬 파이어가 단번에 두 동강이 났다. 콰아아아! 화끈한 열기가 전신을 엄습했다. 그러나 엘리엔은 그 열기를 느낄 틈도 없이 곧장 다른 헬 파이어를 베어 갔다. 카앙! 단번에 베어 버린 방금 전과는 달리 지금은 베어 버리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왜냐하면 1번째 헬 파이어가 예상 보다 강한 힘을 지니고 있어 상당 부분의 힘을 소모해 버린 것이다. 9클래스 마법사가 전개하는 8클래스 마법은 이미 8클래스 마법이라 부를 수 없는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그녀의 눈이 암울하게 변해갔다. '막을 수 없어.' 이대로 가면 그녀의 오러와 헬 파이어가 동시에 폭발해 버릴 것이 분명했다. 폭발이 일어나면 일대 전체가 화염에 잠길 터. 그렇게 되면 무사할 리 없다. 그때, 한 줄기 기운이 뿜어지더니 곧이어 수십 가닥의 기운이 헬 파이어를 향해 뿜어졌다. 그것은 그녀의 오러 블레이드와 힘을 합쳐 단번에 헬 파이어를 베어 버렸다. "이건......?“ 그녀가 놀란 표정으로 시선을 돌리니 그곳에는 아이넨스가 검을 든 채 엘리엔을 바라보고 있었다. 엘리엔의 어려움을 목격한 아이넨스가 디멘션 소드의 힘을 발휘하여 단번에 헬 파이어를 베어 버린 것이다. "함께 루이아스를 처치하지요." 아이넨스는 부상을 입은 몸임에도 불구하고 검을 든 채 루이아스에게 기세를 발산했다. 그로서는 루이아스를 용서할 수 없었다. 루이넨스가 분명 신검가에 반감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자신의 손으로 가문을 멸할 정도로 독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누군가의 부추김을 받았을 확률이 높은데, 그 것을 부추긴 것이 다름 아닌 루이아스일 확률이 높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씻을 수 없는 강렬한 증오가 올라왔다. 아이넨스는 살기를 피워 올리며 루이아스에게 말했다. "용서할 수 없다, 루이아스. 너를 처치하고 누이를 꼭 데려가겠다." 그의 말에 루이아스가 웃음을 지었다. "그건 쉽지 않을 거야. 이미 루이넨스는 나에게 충성을 맹세했거든. 내 입장에서도 그녀는 특별하지. 아마 마도 제국을 세운 뒤 내 부인이 될 확률이 가장 높은 여인이니까. 아아, 물론 마도 제국의 제일 기사의 자리도 그녀에게 예약되어 있는 상태야. 후후, 과연 제국의 제일 기사 자리를 걷어차고 본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까?" “용서할 수 없다!" 스팟! 아이넨스의 디멘션 소드가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번개 같은 속도로 루이아스에게 향했다. "이건......!" 루이아스는 디멘션 소드의 급속한 움직임을 느끼고는 재빨리 블링크를 하였다. 파앗! 몸이 사라짐과 동시에 루이아스가 있던 자리에 디멘션 소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넨스는 루이아스의 몸속에 디멘션 소드를 이동시켰던 것이다. 제아무리 무적이라도 몸 안에 검이 생성된다면 죽을 수 밖에 없다. 루이아스는 방심할 수 없는 아이넨스의 일격에 눈을 빛냈다. 나직한 감탄이 이어졌다. "대단하군. 공간을 지배하는 검의 특성을 이용하여 이런 공격을 펼칠 줄이야. 놀랍다." "글쎄, 방심하기에는 이르지 않아?“ 아이넨스가 빈정거렸다. 그와 동시에 엘리엔이 루이아스에게 검을 휘둘렀다. 루이아스는 한 손을 뻗어 그녀의 검을 받아냈다. 좌아아앙! 반투명한 막에 휩싸인 루이아스의 손과 부딪치며 그녀의 오러가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이런 걸로 날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했나? 음......“ 루이아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반대편에서 한 자루의 검이 휘둘러졌다. 다시금 그의 손이 뻗어졌고, 이번에도 반투명한 막에 휩싸인 그의 손이 오러를 부숴 버렸다. 공격했던 이는 다름 아닌 아토빌 공작이었다. 반탄력에 몸을 맡겨 뒤로 물러난 아토빌 공작이 루이아 스를 보며 말했다. "분명 강하긴 하지만 더 이상 하수 취급하는 걸 볼 수 없군."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린 루이아스가 고소를 베어 물었다. "호오, 그래서 그것을 쓰겠다?“ “......” "그것은 분명 대단한 힘을 지니고 있지. 하지만 엄청난 기력을 소모하는 그 검을 장시간 사용하면 어떻게 될지 잘 알리라 생각한다." 루이아스는 자신만만했다. 아토빌 공작이 생각하는 걸 모를 리 없는 그였다. 그는 지금 갓 소드를 사용하려 한다. 하지만 갓 소드는 강한 힘을 주는 만큼 대가를 받는 저주받은 검. 사용자의 기력을 갉아먹는 검을 사용할 리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토빌 공작은 단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산중에 오우거는 한 마리인 법. 야망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그대의 존재를 결코 인정할 수 없소." 아토빌 공작이 검을 빼어들었다. 순백의 새하얀 검신을 지닌 검이 눈부신 빛을 내뿜으며 그 자태를 드러냈다. 대륙 5대 신검 중 최강의 위력을 지닌 갓 소드, 패왕의 검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아토빌 공작은 엘리엔과 아이넨스를 보며 말했다. "이제부터 딱 오 분 동안 내가 저자를 상대하겠습니다. 그러니 틈을 보아 그를 처치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의 얼굴에는 비장한 감정까지 서려 있어 엘리엔과 아이넨스는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두 분을 믿습니다 그럼." 아토빌 공작이 루이아스에게 향했다. 루이아스에게 향하는 그의 기세는 방금 전과 전혀 다른 기세를 품고 있었다. 폭발적인 기세를 품고 있는 그는 놀라운 속도로 루이아스에게 접근해 나갔다. 과거 수십 마리의 드래곤을 죽인 신장의 힘이 갓 소드에 서려 있다. 그 힘은 거의 무한대라 할 수 있어 신체가 버텨 내는 만큼 끌어낸다면 더욱 더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아토빌 공작은 지금 신체가 버틸 수 있는 힘의 한계를 초월하여 더욱 더 강한 힘을 사용하는 상태였다. 라이젠과 레이벨을 격퇴했을 때보다 더욱 강한 힘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때 딱 10분을 버텼으니 그때보다 2배를 사용하는 지금 그 절반인 5분 정도 아니, 그만큼도 버티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그 사이에 승부를 봐야 하는 것이 아토빌 공작의 입장 이었던 것이다. 루이아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런 개자식이......“ 설마하니 아토빌 공작이 죽자 살자 하는 식으로 나올 줄 몰랐던 것이다. 갓 소드가 쇄도하는 속도는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였다. 더군다나 신장의 힘이었기에 공간을 가르는 힘도 있어, 블링크로 피했다가 몸이 양분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정면으로도 막기 힘들다. 가장 좋은 방법은 피하면서 시간을 끄는 것이다. "좋아." 루이아스의 양손에 방어막이 생겨났다. 9클래스 마법사만이 전개할 수 있는 절대 방어였다. 절대 방어는 그 어떤 것으로도 뚫을 수 없다. 전해지는 최강의 방어 마법이다. 과거 골드 피닉스도 이 절대 방어를 뚫지 못했으니 그 위력만큼은 능히 대륙 최강이라고 인정받을 만하다. 루이아스가 전개한 절대 방어와 갓 소드가 충돌하였다. 푸카앙! 눈부신 불똥이 일어나며 절대 방어를 향해 갓 소드가 짓쳐 들었다. 하지만 절대 방어는 이미 대륙 최강의 방어막으로 이름이 정평이 나있다. 과연 쉽사리 뚫리지 않았다. "으음!" 아토빌 공작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동시에 갓 소드에 폭발적인 빛이 뿜어져 나오며 절대 방어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쩌적! 쩍! 힘을 견디지 못한 절대 방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루이아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제기랄!" 그가 재빨리 몸을 뒤로 물렸다. 쩌저정! 균열이 간 절대 방어는 금방 깨져 나갔고, 뒤로 물러난 루이아스의 몸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러나 그 전에 한 자루의 검이 벼락 치듯 그의 몸을 그어 왔다. 순간의 틈을 포착한 엘리엔의 네이처 소드가 루이아스의 몸을 양단해 온 것이다. "칫!" 루이아스의 양손이 빠르게 움직이며 수인을 맺어 버렸다. 세이지 실드 2개가 순식간에 중첩되며 네이처 소드가 뻗어오는 경로를 막아 갔다. 그때 네이처 소드에서 찬란한 빛이 뿜어졌다. 조화의 힘이 발현된 것이다. 그것은 곧장 세이지 실드의 흐름을 본래대로 되돌리려 하였다. 확고한 루이아스의 마나 장악력 덕분에 마법이 무효화 되지는 않았지만 루이아스를 당혹케 하기에는 충분했다. 한순간 마법이 흔들리자 엘리엔의 네이처 소드는 세이 지 실드를 부숴 버렸다. 콰앙! "큭" 세이지 실드가 부서지는 충격에 루이아스가 블링크를 써서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허공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사방에서 느껴지는 마나의 흐름에 다급하게 외쳤다. "절대 방어!" 반투명한 막이 그를 휘감기 무섭게 수십 줄기의 오러가 나타났다. 따다다다당! 디멘션 소드의 힘으로 궤도를 예측할 수 없는 수십 줄기의 오러가 사정없이 절대 방어를 두들겼다. "이렇게 강할 줄이야." 루이아스는 허공에서 자신을 합공한 세 검사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랜드 마스터 열이라도 그는 이길 자신이 있다. 그러나 신검의 힘을 본격적으로 발휘하고 있는 세 검사를 상대로는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제대로 싸운다면 이길 자신이 있다. 하지만 그는 준비가 부족했다. 당장 비장의 한 수를 사용하기 위한준비도 되지 않고 있던 것이다. "아쉽지만...... 이만 물러가야겠군." 지금 당장 결론을 볼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하다가는 자신 또한 만만치 않은 타격을 입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느니 당장 물러난 다음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후일을 기약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가면 안 되겠지." 그의 시선이 쓰러진 엘에게 향했다. 그는 당장 엘을 제 거한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지만, 이내 그 아쉬움을 접고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자그마한 보석이 그의 손에 잡혀 있었다. 그의 손에 쥐어진 보석들은 1캐럿 정도 되어 보이는 다이아몬드였다. 루이아스가 3개의 다이아몬드를 손가락에 낀 채 마나를 불어 넣었다. 최강의 방어 카르마 링이 그에게 있다면 최강의 공격으로는 이것이 있다. 우우웅! 마나를 주입하니, 새하얀 광채가 발현되며 동그랗던 다이아몬드가 길게 형태를 변형했다. 쐐액! 삽시간에 형태를 갖춘 그것이 세 개로 흩어지며 빠르게 쏘아졌다. 심상치 않은 기세를 동반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재빨리 검을 들어 화살을 후려치려 하였다. 가장 먼저 그것과 맞닥뜨린 것은 엘리엔이었다. 그녀는 루이아스가 자신에게 쏘아 보낸 것이 범상치 않은 것임을 느끼고는 네이처 소드에 오러를 충만하게 뿜어내며 곧장 그것을 베어 나갔다. 그러나 오러를 뿜어내면 베어 버릴 수 있을 거라 생각 하던 것은 엘리엔만의 착각이었다. 화살은 강렬한 회전을 동반하며 그녀에게 향하더니, 이윽고 오러를 머금은 네이처 소드와 엄청난 충돌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콰아앙! "으윽!" 손을 시작으로 팔꿈치, 어깨까지 시큰거릴 정도로 대단 한 충격이었다. "이, 이런 힘이라니......“ 아토빌 공작과 아이넨스의 모습 또한 그녀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들은 당초 예상과는 다른 강력한 공격을 받자 신음을 흘리며 비틀비틀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읏!" 엘리엔은 오른팔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면 서검을 통해 그녀가 동원할 수 있는 오러를 최대한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푸캉! 마침내 끈질기게 그녀를 괴롭히던 것이 백색 빛을 내뿜으며 튕겨 나갔다. 동시에 그녀가 세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토빌 공작과 아이넨스도 낭패를 면치 못했다. 그들은 자신을 공격한 수법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 표정이었다. 허공에 떠 있던 루이아스는 그런 그들에게 경고하듯 외쳤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도록 하지. 신검 세 자루를 상대로 정면 대결을 벌이는 것은 나로서도 무척 손해니까 말이야. 부디 다음에 만날 때까지 목숨을 잘 붙들고 있도록." 말을 남긴 루이아스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9클래스 마법사인 그의 마법 행사를 방해할 이는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곧이어 그의 신형이 백광에 휩싸이더니, 이내 그 모습을 감추었다. “......” 루이아스가 사라지자 장내는 침묵이 찾아왔다. 압도적인 그의 힘을 한바탕 겪고 나니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던 것이다.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지고, 그 침묵은 아토빌 공작의 너틸웃음으로 끝을 맺었다. "허허허, 9클래스 마법사라 하여 설마 설마 했거늘......“ 아토빌 공작에게는 숨기기 어려운 허탈함이 서려 있었다. 대륙 제1기사라 불리며 만인의 우러름을 받던 그였다. 실제로 그의 인생 100년 동안 수련을 거르던 적이 없었고, 남들이 최고라 치켜세워 줄 때도 그는 묵묵히 검을 수련했다. 그랬기에 지금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 초인 중에서도 상위권이라 평가 받는 라이젠과 레이벨의 협공을 단신으로 압도할 수 있을 만큼 높은 경지에 이른 것이다. 누가 보아도 그는 최강임이 틀림없었다. 대적할 자들이 없다 하여 초인이라는 명칭을 받은 그들을 상대로 압도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오늘 산산이 깨져 버리고 말았다. 그와 비견되는 2명의 검사와 그를 뛰어넘는 한 사람의 마법사의 등장으로 말이다. 엘리엔과 루이넨스의 등장은 그만큼 그에게 뜻밖이었다. 설마하니 대륙에 자신과 비견될 만한 실력을 지닌 검사가 둘이나 존재했을 줄이야. 더군다나 두 사람 모두 여인이었다. 그중 루이넨스라 불린 여인은 채 마흔도 되지 않은 나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오러의 위력에서부터 검술, 실전 겸비까지 어느 것 하나 아토빌 공작에게 떨어지는 것이 없었다. 그 정도로 대단했던 것이다. 그리고 루이아스. 그의 존재는 너무나 충격이었다. 한동안 침묵을 지켜야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아토빌 공작은 주변을 둘러보였다. 주변에 모인 이들 또한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엘리엔과 아이넨스의 표정은 침통했다. 루이아스의 강함도 강함이지만 신검을 다루는 그들의 힘이 제대로 효과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 착각이 너무 심했군." 특히 신검의 힘이라면 능히 루이아스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던 아이넨스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신검의 힘을 모두 발휘하고, 그보다 강한 아토빌 공작과 엘리엔이 힘을 합쳤는데도 이기지 못했으니 그럴 만하다. 검을 갈무리하던 그가 돌연 신음을 흘리며 몸을 비틀거렸다. "콕! 부상이 심하군." 이미 루이넨스와의 격전으로 심각한 부상을 입은 그였다. 거기에 루이아스와 겨룰 때 맹공을 퍼부어 댔으니 부상이 악화되는 건 당연한 현상이었다. 재빨리 지혈을 하고 간단히 응급조치를 한 그가 자신의 상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라면 전문 신관에게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처다. "그러고 보니......“ 아이넨스는 퍼뜩 엘이 심각한 부상을 입었음을 깨닫고는 재빨리 그가 쓰러져 있는 곳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엘이 몸을 일으킨 채 멍한 시선으로 한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엘이 부상을 입은 것은 외상이 아닌 내상이다. 캐스팅 하던 마법이 강제적으로 종료되었으니 그 충격이 만만치 않았을 터. 어떻게 보면 자신보다 더욱 심각한 부상을 입은 것이 엘이었다. 그 생각은 다른 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가장 심각한 외상을 입었던 카디어스조차 엘을 염려스러운 눈으로 바라볼 정도였으니 말이다. 내상은 그만큼 회복하기도 어렵고, 한번 상처를 입으면 회복하기 어려운 깊은 상처이기도 하다. 엘리엔 또한 엘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던 중 그녀는 그녀 자신이 엘을 걱정하고 있음을 깨닫고는 살짝 놀랐다. '내가 인간을 걱정하다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간을 벌레와 동급처럼 치부해 온 그녀가 한 생각치고는 너무나 급격한 변화였다. '그래, 그는 대장로가 인정한 인간이기 때문이야.' 엘리엔은 그런 자신의 변화를 아카벨 대장로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그녀 스스로가 변화를 일으켰다는 걸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 사람들이 염려의 시선을 보냄에도 불구하고 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멍한 시선으로 한 곳을 응시했다. 다른 사람들의 염려와는 다르게 엘이 입은 내상은 그리 심하지 않았다. 마법이 중도에 강제 중단된 일이다. 만약 일반 마법사였다면 마나가 역류하여 자칫하면 목숨까지 위험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엘은 단전호흡을 익혔다. 마나를 정제하여 체내에 가두는 단전호흡은 그 어떤 마나 연공법보다도 안전함을 자랑했다. 뛰어난 단전호흡을 익혔기에 엘은 마나가 역류함에도 착실하게 그 마나들을 수습하여 큰 부상으로 이어지는 걸 모면했던 것이다. 그런 엘이 이렇듯 넋을 놓고 있는 까닭은 하나다. 바로 루이아스가 마지막으로 펼친 공격이 무엇인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왜 모르겠는가. 자신의 숨은 비장의 한 수인 그것을...... "루이아스도 제련제강의 마법을 익혔단 말인가." 제련제강의 마법. 그것은 기존의 마법 틀을 완전히 깨는 최강의 마법이라 할 수 있다. 레드 드래곤 브릴켄드가 그랬다. 제련제강의 마법은 드래곤이 창안한 것이라고. 그가 말하길, 제련제강의 마법 중 인간계에 나와 있는 것은 황금을 다루는 종류뿐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황금이 아니었어. 더욱 강력한 것......‘ 엘은 그가 무슨 제련제강의 마법을 익혔는지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자신이 익힌 것보다 강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9클래스 마법 실력에 제련제강 마법까지......“ 신검을 지닌 그랜드 마스터 셋을 상대로 팽팽하게 싸운 루이아스. 만약 제련제강의 마법을 자유자재로 펼쳤다면 승부는 점칠 수 없었을 것이다. "그토록 강한 실력에 제련제강의 마법까지 겸비했으니 앞으로 무척 힘들겠군." 염려 때문인지 엘의 얼굴은 초췌해져 있었다. 9클래스 마법사와의 격전. 처음엔 살려 보내지 않을 거란 생각에서 지금은 살아남은 것을 고맙게 여겨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는 데에 엘은 심각한 허탈감을 느꼈다. 3. 블리어드 제국과의 동맹 엘은 당초 예정을 변경해야 했다. 아토빌 공작과 동맹을 맺으러 온 자리에서 한 차례 큰 싸움을 벌여 모두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 크지 않지만 엘 역시 약간의 내상을 입었고, 아이넨스는 상당한 외상을, 그리고 엘리엔은 상당한 무리를 하여 마나 홀에 약간의 타격을 받은 상태였다. 아이넨스 같은 경우 치료 마법으로 외상이 깔끔하게 나았다. 하지만 완전히 회복되는 시간이 10여 일 정도가 필요했기에 엘은 부득이하게 아토빌 공작가에서 10일가량 머물렀다. 그 후 엘 일행은 아토빌 공작가를 벗어났다. 아토빌 공작은 떠나는 엘을 저택 밖으로까지 나와 배웅 하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처음에는 이용만 하려던 엘이 지금은 그에게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엘은 그에게 말했다. 그가 어떤 야망을 가지고 있건 그것은 자신이 신경 쓸 게 아니라고. 단지 자신을 도와달라는 게 전부였고, 후일 평화가 찾아오면 그가 자신의 야망에 한 힘 보태 주겠다고 말했다. 아토빌 공작은 이미 사태가 자신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깨닫고 있었기에 그런 엘의 제안이 내심 반가웠다. 그래서 신중히 생각하는 척하며 제의를 수락했다 그랬으니 그로서는 엘을 처음과 달리 중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상처는 괜찮으신가요?" 아토빌 공작가를 벗어난 엘은 아이넨스를 보며 염려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오러에 당한 상처다. 오러에 당하면 상처가 쉽사리 낫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깔끔하게 나은 외상에 우려를 표하는 것이다. 엘의 물음에 아이넨스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직접적인 타격은 모두 피해 상처가 크지 않았지, 그나저나 너는 마나가 역류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멀쩡할 수 있는 거지?“ 아이넨스가 도리어 엘에게 궁금증을 표현했다. 마나 역류를 당한 마법사는 십중팔구 폐인이 되거나 죽음을 당한다. 그런데 엘은 내상은커녕 어디 불편한 구석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물음에 엘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사실 마나 역류가 왜 심각했지만 다행히 마나를 통제 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별다른 상처를 입은 게 아니고요" "그렇군. 이십 대에 8클래스에 올랐으니 마나를 특별하게 통제하는 다른 방법이 있겠지." 아이넨스는 고개를 고덕이고는 달리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의 다음 목표는 블리어드 제국이었다. 엘은 엘리엔을 바라보며 말했다. "몸은 괜찮나요?" 엘리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난 따로 상처를 입은 게 아니니까." 치열하게 벌어진 싸움에서 그녀는 가장 손쉬운 상대를 만났다고 할 수 있다. 데리오머의 실력이 제아무리 높다고 해도 엘리엔보다 한두 수 뒤지는 실력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는 방어만 할 것을 명령 받아 엘리엔은 공격을 그리 염려하지 않은 채 공격만 퍼부을 수 있었다. 공격을 당하지 않았으니 다칠 리가 없는 것이다. 엘리엔이 따로 상처 입은 것이 없다고 하자 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다음 목적지는 다름 아닌 블리어드 제국이거든요. 블리어드 제국은 제가 개인적으로 원한을 가진 곳이기도 해요." “......” "물론 그곳에서도 저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겠죠. 제가 제국의 유일한 8클래스 마법사인 게이런즈를 죽였으니까요. 하지만 시국이 급해요." "어째서?“ 엘리엔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엘은 자신이 판단한 상황을 설명하였다. "루이아스가 본격적인 마각을 드러내 세 제국을 통합 한 이상 그들에게도 손이 뻗쳤을 가능성이 높아요. 제아무리 제국이라도 그들의 세력에 비하면 극히 미미하죠. 그 점을 파고들어 과거의 원한을 잊고 손을 잡아야 해요." “......” "그 과정에서 다소 충돌이 벌어질지도 몰라요. 그래서 가급적 몸 상태가 최적일 때 가는 게 좋거든요." 아이넨스와 엘리엔이 동시에 대답했다. “난 문제없어." “나 또한." 둘 모두 남에게 절대 폐를 끼치기 싫어하는 인물이다. 이미 극에 오른 실력자였으니 그들에게는 하늘같은 자존심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자존심을 어찌 엘이 모르랴. 엘 또한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존심이 존재했기에 그들의 그런 반응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둘 모두 괜찮다는 말에 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곧장 블리어드 제국으로 가도 되겠네요. 황도인 캐퍼밀은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곳이에요. 잘 부탁드릴게요." "그래, 우리만큼 든든한 호위는 없겠지. 안 그렇습니까?“ 아이넨스의 물음에 엘리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륙 최고의 호위지." "그렇고말고요." 엘은 웃음을 지었다. *** 블리어드 제국은 최근 무척 어수선했다. 왜냐하면 수백여 기의 골렘이 등장하여 한차례 황성을 침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성에는 블리어드 제국의 수호신 클라이언 공작이 존재한다. 그랜드 마스터인 클라이언 공작과 블리어드 기사단의 활약으로 골렘들을 모두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성공을 얻어 내기 위해 버려야 했던 것이 너무도 많았다. 50명 전원 마스터로 이루어진 블리어드 기사단의 기사들 중 무려 10명이 골렘들과의 격전으로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다른 20명은 심한 중상을 입었으며, 남은 20명은 자잘한 경상을 입었다. 그러나 그것도 엄연히 중상자들에 비해 경상인 것으로 결코 만만치 않은 상처들이었다. 단숨에 블리어드 기사단의 전력 절반이 깎여 나간 셈이다. 더군다나 상대는 인간도 아닌 골렘이다. 당장 적들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이상 그들은 불안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겠는가? 엄청난 피해를 입었음에도 적이 누구인지 모르는 상황. 혼란이 아닌 불안감에 빠진 것만 해도 능히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그 일로 인해 캐퍼밀의 단속은 엄청나게 강화되었다. 캐퍼밀을 드나드는 이들은 하나하나 병사들의 검증을 받 아야 했다. 마법 결계도 풀렸다. 그리고 황탑의 마법사들과 아인하트 후작가 마법사들이 대대로 황도 곳곳에 퍼지며 탐색을 하며 수상하다 싶은 자들은 모조리 감옥으로 끌고 갔다. 하지만 적의 정체는 드러나지 않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한 감정이 제국 전체를 뒤덮기 시작했다. 그때, 캐퍼밀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엘 일행이었다. 엘은 어수선한 캐퍼밀의 분위기에 피식 웃음을 지었다. "이미 한 차례 푸닥거린 것 같은데요? 안 그러면 이렇게 경계를 취하지 않을 텐데 말이죠." "그렇군. 보아하니 황궁만 건드린 것 같은데." 아일라스 제국에서 벌어진 상황과 하등 다를바 없는 상황이었다. 단지 다른 점이라면 아토빌 공작을 제거하기 위해 이쪽 에 전력을 집중했다는 점이다. "그래도 골렘들의 힘은 마스터급 혹은 마스터에 근접한 실력이에요. 분명 만만치 않은 피해를 입었을 거예요." 엘은 안경을 만지작거렸다. 언제부턴가 그는 안경을 계속 쓰고 있는 습관을 들이게 되었다. 안경을 쓰고 있으면 특유의 집중력이 올라가는 게 엘의 장점이다. 이렇게 안경을 만지니 그는 상황이 단번에 이해가 갔다. "아마 그들로서도 단번에 아일라스 제국에 전력을 집중하고 싶었을 테죠. 더군다나 블리어드 제국의 황도인 캐퍼밀은 마법사에게 무력한 곳. 아마 그랜드 마스터 여럿을 보내서 이곳을 점령해야 했을 텐데 얼마 전 카시아스 왕국에서 일이 벌어진 것이죠." 린은 카시아스 왕국에서 매직 메탈의 판매권 때문에 2명의 그랜드 마스터에게 습격을 당했다. 바로 벨로세크 제국의 그랜드 마스터인 그레시오스 공작과 트루먼 공작이 그들이다. 엘리엔에 의해 그레시오스 공작이 부상을 입지 않았더라면 그들의 검은 블리어드 제국에게 향했을 것이다. 본의 아니게 엘은 간접적으로 제국을 도운 꼴이 된 셈이다. 엘은 루이아스가 노림 직했던 것들을 떠올려 보았다. "아마 그는 블리어드 제국에게 씻을 수 없는 불안감을 심어 주려 했던 것 같네요.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이 제국을 노리고 있다. 그러니 계속 불안해 하라! 이런 의도가 아닐까요?" "그럴듯하군.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이 자신을 노린다면 쓸데없이 심력 소모를 할 수 있지. 어차피 그들에게 골렘은 주 전력이 아닐 테니." 아토빌 공작에게 듣길, 그들은 수십 명의 소드 마스터들을 예사로 동원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제국을 장악했다면 그 정도는 일도 아닐 것이다. 대륙 최강의 제국인 벨로세크 제국 같은 경우 전원 소드 마스터로 이루어진 기사단이 무려 셋이나 존재했기 때문이다. 만약 벨로세크 제국을 온전하게 장악했다면 그들은 무려 수백에 이르는 소드 마스터들을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거기에 다른 두 제국의 소드 마스터들에 그들이 독자적으로 기른 세력들을 합한다면 골렘들은 장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이야기를 하면서 그들은 캐퍼밀 안으로 들어섰다. 당연히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몰래 안으로 들어선 것이다. 캐퍼밀 안으로 들어선 그들은 경계심을 끌어올렸다. 여기서부터는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안티 매직 존 (Anti magic zone)이다. 8클래스 마법사는 물론 9클래스 마법사도 상당한 제약을 받게 되는 곳이 바로 이곳 캐퍼밀이다. "응?" 캐퍼밀 안으로 들어선 엘은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전에 캐퍼밀에서 느꼈던 마나의 반발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캐퍼밀은 마법사들이 의도적으로 마나를 헝클어 놓았다. 때문에 그것을 풀기 위해서는 몇 배의 노력을 필요로 했다. 그것을 중첩에 중첩을 거듭하니 설사 8클래스 마법사라도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것들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캐퍼밀에는 무척 많은 숫자의 마법사가 존재한다. 게이 런즈가 죽었지만 황탑의 세력이 여전히 건재했고, 아인하트 후작가의 마법사들도 다수 존재했기 때문이다. 알카이드 황제는 그들을 활용하기 위해 캐퍼밀에 가해진 마나의 흐름을 수복한 것일지도 모른다. 엘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멍청한! 적의 세력도 모르면서 함부로 이런 결정을 내리다니.' 적들의 세력 중 초인의 숫자는 그랜드 마스터 반, 8클래스 마법사 반이라고 할 수 있다. 블리어드 제국이 심열을 기울인다면 그들이 막아야 할 존재는 그랜드 마스터 다섯이 전부다. 마법사는 캐퍼밀에서 힘을 전혀 쓸 수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마나의 흐름을 복귀시킴으로써 그들은 마법사들에게 힘을 부여한 셈이 되었다. 만약 엘이 이곳을 방문 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단시일 내에 루이아스에게 복속되는 결과를 가지고 왔을지도 모른다. 엘은 혹시나 싶어 마법을 전개해 보았다. "아이스 미사일." 그의 전개어가 흘러나오기 무섭게 수십 개의 아이스 미사일이 생겨났다. "이건?“ 아이넨스와 엘리엔이 놀란 눈으로 엘을 바라보았다.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캐퍼밀에서 마법을 전개했으니 놀란 것이다. 엘은 굳은 표정으로 그들에게 말했다. "미지의 적에게 공격을 받은 나머지 마법사들을 써먹기 위해 마법 방해를 풀어 버린 것 같아요. 가서 경고를 해 줘야겠네요." 말과 함에 엘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의 뒤를 아이넨스와 엘리엔이 따랐다. *** 아인하트 후작가는 적들의 침공을 받음에 따라 무척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금탑주가 공식적인 첫 등장을 보이면서 아인하트 후작 가는 그 체면을 구겼다. 자타가 공인하던 7클래스 최강의 마법사인 아인하트 후작이 그의 아들인 글레톤과 협공을 하고도 외려 패하는 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단 한 사람, 새파랗게 어린 나이의 마법사에게 패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극도의 침울함을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그 일이 왜 큰 충격이었기에 아인하트 후작은 한때 귀족파의 수장이었던 자리를 내버린 채 무기한 칩거에 들어갔다. 아인하트 후작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린 청년은 얼마 후 금탑이란 마탑을 세워 모습을 드러냈고, 신탁 거부를 통해 성국과 맞서 싸워 나갔다. 그 후 성국과 몇 차례나 접전을 벌였고, 다이어드 공작과 게이런즈가 포함된 토벌대를 패배시키기도 했다. 거기에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흑탑주와도 접전을 벌였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이 대륙을 강타했다 바로 금탑주가 적탑주 카로스만을 이김으로써 8클래스의 경지에 들어섰던 것이다. 이십 대 초반의 나이에 8클래스에 다다르다니! 믿기 힘든 소식은 블리어드 제국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금탑과 블리어드 제국간의 관계는 결코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단지 그렇게 말하기 어렵다. 관점을 달리하면 금탑과 블리어드 제국의 관계는 그야말로 최악이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금탑추의 나이가 고작 이십 초반인 것을 감안할 때 차기 대륙의 주도권은 그에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 때문인지 아인하트 후작가는 그 분위기가 더욱 침울해졌다. 블리어드 제국에서 그와 가장 밀접한 원한을 맺은 곳이 그곳이었기 때문이다. 금탑주가 8클래스의 경지에 오르자 아인하트 후작가의 힘이 되어 주던 주변 세력이 점차 떠나갔다. 행여 아인하트 후작가와 밀접한 관련을 맺어 금탑과 원한 살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아인하트 후작가의 덩치는 몇 년 전에 비해 절반도 되지 않았다. 저택 가득 차 있던 손님들이 모두 떠났기 때문이다. 충성심 높은 부하들이 있었지만 모두 떠나 버린 빈 공 간을 매우기는 어려운 법. 최근 소란을 맞아 아인하트 후 작가가 분주하게 움직이기는 했지만 비어 버린 허탈감을 매우기란 어려워 보였다. 그런 아인하트 후작가에 접근하는 세 인영이 있었다. 좌측에는 30대로 보이는 사내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검을 매고 가벼운 갑옷 차림을 한 그는 마치 한 자루의 보검을 보는 듯 날카로운 예기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우측에는 눈부신 아름다운 미녀가 자리하고 있었다. 통상적으로 보기 힘든 독특한 갑옷 차림에 살랑대는 녹색 머리, 빛나는 눈동자는 빠져나을 수 없는 아름다움을 내뿜고 있었다. 과거 블리어드 제국의 제1미녀라 불렸던 실피르도 저 여인에 비해 엄연히 한 수 떨어지는 느낌이 들 정도였으니 여인이 외모는 눈부신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중앙에 위치한 자, 금색 로브를 두른 청년은 안경을 쓴 채 무척 이지적이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아인하트 후작가 정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저런 복장을 한 청년을 잘 알고 있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저 청년의 등장으로 오늘날 아 인하트 후작가의 영향력이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졌거늘. 그들은 정 가운데에 위치한 엘을 보고는 엘리엔의 아름다움에 감탄할 틈도 없이 두 눈을 부릅떠야 했다. "저, 저......" “뭐냐?” 병사들이 놀라움을 표하자 근처에 대기하던 재빨리 다가왔다. 황궁을 침범한 의문의 범인들로 인해 그들의 신경은 날카로울 대로 날카로운 상태였다. "아니?“ 엘에게 시선을 옮긴 기사들은 그를 보며 놀라움에 빠져 들었다.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골든 나이트의 검에 단번에 무력화 되던 자신들아 아니던가? 그것을 수족처럼 부리던 저 청년을 잊으려야 잊을 수 없었다. 그들도 병사와 마찬가지로 놀라 버렸다. 한 기사가 소리쳤다. "금탑주!" “......!" 기사의 외침에 아직까지 엘의 정체를 깨닫지 못하던 이들의 표정에 놀라움이 서렸다. 금탑주 엘리미스. 당대 8클래스 마법사 중 1명이자 20대 초반의 나이에 그 경지에 올라 하나의 신화라 불려도 부족함이 없는 존재. 그런 존재가 이곳을 방문했다니 놀라울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몇 년 전 살기 짙은 전투를 한 차례 벌이지 않았던가. 기사들은 재빨리 경계심을 끌어올리며 언제라도 검을 뽑을 듯한 자세를 취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직감하고 있었다. 소드 익스퍼트에 불과한 자신들로는 결코 금탑주의 발걸음을 막을 수 없다는 걸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인하트 후작가에 대한 충성심이 상당 했기에 결코 물러설 기세가 아니었다. 엘이 점점 접근하자 기세를 뿜던 그들은 돌연 몸을 움찔했다. 갑자기 엘이 손을 들어 올리자 그들이 피워 올리던 기세가 씻은 듯 사라졌기 때문이다. 마나 장악력. 엘은 그들에게 8클래스 마법사만이 펼칠 수 있는 고절한 수법을 펼쳐 그들의 기세를 무력화시킨 것이다. 최고조로 끌어올렸던 기세가 단번에 제압당하자 기사들의 눈이 암울하게 젖어 갔다. '너무 강하다! 대항조차 할 수 없어.' 금탑주가 이곳에 왔다면 결코 좋은 목적이 아닐 가능성이 농후했다. 어쩌면 그가 골렘들의 배후일 수도 있는 것이다. 기사들의 눈이 암울하게 젖어 들자, 주변에 포진되어 있던 병사들이 무기를 든 채 경계의 태세를 취했다. 그때, 엘의 입이 열렸다. "나쁜 의미로 온 게 아니다. 아인하트 후작을 만나고자 왔으니 그에게 내가 왔음을 알려라." 엘의 태도는 여유로우면서 당당했다. 어디까지나 블리어드 제국을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이곳을 찾았다. 이미 전에 있던 일로 아인하트 후작가에 있던 앙금을 모두 털어 버린 엘로서는 굳이 소란을 일으킬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저, 정말입니까?“ 기사가 비틀거리며 엘에게 물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 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나는 블리어드 제국을 습격한 이들의 정체를 알기에 그것을 아인하트 후작과 이야기하고자 찾아온 것뿐이다. 그러니 어서 소식을 알려라. 아인하트 후작가에 위해를 가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음을 알리는 바이다." "아, 알겠습니다. 금탑주님의 말씀을 믿겠습니다." 행여 엘의 말이 바뀔까 그것을 강조한 기사는 재빨리 몸을 돌려 저택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기사는 허겁지겁 달려왔다. "모시랍니다." 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저택 입구에 나타난 수많은 병사들과 기사, 마법사들은 좌우로 갈라져 길을 만들었다. 수많은 이들이 떠났음에도 여전히 아인하트 후작가에 남아 있는 자들은 많았다. 엘은 그들을 스쳐 지나가며 나직이 미소를 지었다. "극한의 상황에 처했음에도 이 정도 숫자의 수하들에게 충성을 받다니, 역시 보통이 아니구나," 그렇게 엘은 기사의 안내에 아인하트 후작이 머물고 있는 응접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오랜만입니다." 응접실로 안내된 엘은 아인하트 후작을 보며 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겪은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는지 아인하트 후작은 무척 초췌한 안색을 하고 있었다. 보기 좋던 전체적인 풍모의 노인이 몇 년도 채 안 되어 깡말라 버린 노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엘은 불현 듯 아인하트 후작에 대한 동정심이 치밀었지만 그것은 인과응보에 지나지 않았다. 먼저 일을 벌였으니 벌을 받는 것이라 생각하며 아인하트 후작에 대한 동정심을 떨쳐 버렸다 · “오랜만이구려, 이곳에 앉으시오." 아인하트 후작은 엘을 바라보며 힘없는 목소리로 자리를 권했다. 엘은 그런 아인하트 후작의 권유에 따라 자리에 앉았고, 아이넨스와 엘리엔이 각각 양옆에 자리했다. 아인하트 후작은 힘없는 눈동자로 엘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래, 무엇 때문에 이곳을 찾은 것이오? 복수를 하고자 왔다면 우리는 금탑주 그대를 감당할 자신이 전혀 없소이다. 아니, 감당을 못한다고 할 수 있겠지." 그는 모든 것에 미련을 버린 상태인 듯했다. 전에 보았던 그는 권력욕에 모든 것이 잠식당한 존재였다. 권력을 위해 가족도 희생물로 삼을 수 있었으며, 오로지 가문의 영광을 위하는 그런 인물 말이다. 그런데 지금 그는 미련은 물론 자신에 대한 원한마저도 털어 버린 듯했다. 아니,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일지도. 엘이 아인하트 후작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내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황제에게 경고를 하기 위함입니다." "경고? 도대체 무엇을?“ 아인하트 후작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곧이어 그의 표정이 미약하게 일그러졌다. 엘이 직접 찾아와 경고를 하는 것이라면 결코 좋은 의도가 아닐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아인하트 후작의 반응에 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닙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 블리어드 제국이 큰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큰 위험이라니......“ 아직도 의아한 표정을 짓는 아인하트 후작에게 엘은 그가 깜짝 놀랄 만한 사실을 언급했다. "얼마 전 블리어드 제국의 황궁을 습격한 무리라면 말이 되려나요?“ 아인하트 후작의 눈이 크게 뜨였다. "뭐, 뭣이...... 그게 사실이오?“ 놀라움이 컸는지 아인하트 후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국은 지금 황궁을 습격한 무리들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오죽하면 캐퍼밀에 가해진 마나의 흐름을 본래대로 돌려 마법사들을 전력으로 삼으려고까지 하겠는가. 놀란 아인하트 후작에게 엘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만약 예전의 일 때문에 마음이 그랬다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전 일은 이제 잊었으니까요. 제가 원하는 것은 후작님이 황제에게 전갈을 보내 저와 만남을 주 선해 주시는 것뿐입니다. 아시다시피 저와 황제는 사이가 좋지 않으니까요." "......" 엘의 말에 아인하트 후작이 말을 잃었다. 그의 말은 무척 많은 것을 시사한다. 한때 클라이언 공작가와 쌍벽을 이루던 아인하트 후작가는 금탑주와의 악연으로 그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하지만 엘이 공식적으로 아인하트 후작가와의 악연을 철회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다시 한 번 도약의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게이런즈까지 사라진 마당에 8클래스에 근접한 아인하트 후작은 블리어드 제국 최고의 마법사다. 황탑의 마법사들까지 흡수할 수 있기에 예전보다 더욱 강한 세력을 지닐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셈이다. 그러나 아인하트 후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미 그는 한없이 높은 곳에서 바닥까지 추락한 경험이 있다. 이 경험을 통해 그는 권력이란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깨달은 상태다. 그가 힘없는 어조로 말했다. "난 권력이 얼마나 쓸모없는 것인지 이미 느낀 상태라오. 다 부질없는 것이지.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은 실피르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나로 인해 손해 볼 나의 후손들이라오. 후우! 지금 생각하면 한때 내 고집으로 피해를 본 그들에게 미안할 따름이오." "......" 이번에는 엘이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아인하트 후작의 말의 진위 여부를 가리려는 듯, 그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그는 아인하트 후작의 말이 사실인지에 대해 파악할 의무가 있다. 왜냐하면 아인하트 후작가는 엄밀히 말해 그의 외가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실피르는 아인하트 후작가에 대한 그리움을 완전히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다. 내색하지는 않지만 이미 엘은 그것을 다 알고 있다. 그랬기에 엘은 아인하트 후작이 반성하는 기색만 있다면 어느 정도 관계를 개선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정도로 반성하고 있을 줄이야. 아니, 지금 같은 상태라면 아예 새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엘이 힐끗 엘리엔에게 시선을 옮겼다. 진실을 꿰뚫어보는 엘리엔의 앞에서 거짓을 말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런 그녀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아인하트 후작의 말이 진실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비록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는 데 일조하고 실피르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피가 절반은 이어져 있는 가족이었으니 묵은 원한은 청산해 두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엘은 아인하트 후작이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음을 느끼고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일이 쉽게 해결되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아인하트 후작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할아버지. 황제와 만날 수 있게 주선해 주세요." “......!” 엘의 말에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짓는 아인하트 후작. 이윽고 그의 표정이 한결 풀어지기 시작했다. 엘이 자신을 용서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가 용서했다는 걸 느끼자 마음 속 무거웠던 짐 하나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아인하트 후작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물론, 해 주고말고. 나를, 그리고 가문을 용서해 줘서 고맙다, 엘." 이렇게 포기하면 편한 것을. 절로 안도감이 드는 아인하트 후작이었다. *** 비록 아인하트 후작가의 영향력이 줄었다지만 그 위세는 여전했다. 제국에 몇 되지 않는 그를 막을 존재는 몇 없을 뿐더러 금탑주가 아인하트 후작가에 방문했다는 말은 실로 많은 억측을 낳았기 때문이다. 아인하트 후작가와 금탑주의 원한은 이미 제국은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 또한 알고 있는 사실이다. 더군다나 금탑은 황가와도 원한을 맺고 있어 몇몇 귀족 은 이번 황궁 침공이 금탑주가 벌인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어쨌든 제국 귀족들은 이번에도 사단이 일어날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금탑주가 아인하트 후작가에 들른 이유가 결코 호의적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은 멋지게 빗나갔다. 금탑주는 아인하트 후작가를 용서한 것이다. 더불어 그는 아인하트 후작가를 자신의 외가로 인정하였다. 이것은 실로 엄청난 일이어서, 극도로 침체되어 있던 아인하트 후작가의 위명이 단숨에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 전력 자체만으로도 제국 최상위 가문으로 부족함이 없는데 금탑과 혈연으로 맺어져 있으니 오죽하겠는가. 수많은 귀족들이 아인하트 후작을 찾았지만 그는 일절 다른 귀족들을 만나지 않았다. 이미 그는 권력이 얼마나부질없는 것인지 인지한 상태였다. 저렇게 아부하려고 오는 이들도 자신이 힘이 없을 때는 전부 등을 돌릴 자였으니 말이다. 하루가 지나자 아인하트 후작은 황궁으로 입궁을 하였다. 큰 근심을 털어 버려서인지 초췌했던 그의 안색은 혈기를 띠고 있었다. 황궁으로 입궁한 그는 곧장 알카이드 황제와 대면하였다. 알카이드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처음 대면하는 자리였다. 아인하트 후작은 알카이드 황제에게 엘이 말했던 것을 고했다. "금탑주는 황궁을 침공한 자들이 누구인지 안다고 했습니다." "뭣이?“ 알카이드 황제는 아인하트 후작의 말에 표정이 급변했다. 사실 그는 황궁을 침공한 골렘들의 배후에 엘이 있다고 생각했다. 블리어드 제국에 딱히 원한을 가질 만한 존재는 엘밖에 없거니와 골렘에 관한 마법적 지식은 대륙에서 엘을 따를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걸리는 점이라면 엘이 언제 그만큼의 골렘을 만들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 정도 골렘들을 만들려면 엄청난 양의 물자가 금탑으로 흘러가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금탑에 흘러간 물자가 만만치 않지만 수백여 기에 이르는 골렘들을 제작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런데 설마하니 다른 배후가 있었을 줄이야. 금탑이 배후일 거라 생각하던 알카이드 황제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아인하트 후작이 고했다. "금탑주는 폐하와 대면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어쩌시겠습니까?“ "흐음!" 아인하트 후작의 말에 알카이드 황제가 생각에 잠기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삼 일 후 황궁에 들라하라." 금탑주가 캐퍼밀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시점에서 그는 마나의 흐름을 바꾸어 버렸다. 이렇게 한다면 금탑주는 전혀 힘을 쓸 수 없을 터. 경계해야 하는 것은 골든 나이트뿐이니 그것은 클라이언 공작과 블리어드 기사단으로도 충분히 견제가 가능했다. "알겠습니다, 폐하." 알카이드 황제의 대답을 들은 아인하트 후작이 물러났다. 3일이란 시간은 왜 길었다. 그동안 아인하트 후작가를 찾은 귀족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다. 그들의 목적은 모두 같았다. 바로 아인하트 후작과 관계를 공고히 하고 어떻게든 금탑주와 인연을 맺기 위함이 다. 금탑주가 제국의 8클래스 마법사인 게이런즈를 죽였지만 그것은 이쪽에서 먼저 공격해 갔다는 걸 모르는 이가 없었다. 더군다나 패자는 빨리 잊히기 마련이어서 그들의 뇌리에 게이런즈는 이미 죽은 자이자 패자였다. 죽은 자와의 의리보다 당장의 이익이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런 면에서 금탑주와의 친분은 앞날이 보장되는 최고의 대인관계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엘은 물론 아인하트 후작 또한 아무 귀족도 만나지 않았다. 이미 아인하트 후작은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바로 후작의 작위를 아들인 글레톤에게 물려주고 본인은 이루지 못한 마법의 경지를 이루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엘은 그런 아인하트 후작의 변화를 무척 반겼다. 그가 보기에 욕심을 버린 아인하트 후작은 이미 8클래스 경지에 근접해 가고 있었다. 소드 마스터로 치면 최상급에 다다른 존재가 바로 아인 하트 후작이다. 수련에 매진하여 8클래스의 모리를 깨달았을 때, 그는 새로운 경지에 올라설 것이다 글레톤 또한 아버지 아인하트 후작 못지않게 후회한 상태였다. 처음 엘에게 패하고 그는 극심한 자괴감에 빠졌다. 이어서 영향력을 잃어 가는 가문을 보며 권력의 무상함을 깨달았다. 그와 같은 변화를 엘은 무척 반겼으며, 글레톤과의 묵은 관계도 청산할 수 있었다. 엘이 글레톤을 외삼촌이라 부르자 글레톤은 든든한 조카가 생겼다고 웃었다. 3일이 지나고, 엘은 아이넨스, 엘리엔과 함께 황궁으로 입궁했다. 엘이 황궁 안으로 들어서자 대기에 흐르던 마나가 급격한 어그러짐을 보였다. ‘마나를 비틀었구나.' 이 정도 비틀림이라면 마법을 전개할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힘이 봉인 당했지만 엘은 태평했다. 그에게는 든든한 지원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넨스와 엘리엔. 그들이라면 제국 최고의 기사인 클라이언 공작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다. 거기에 골든 나이트까지 있으니 뭣하면 황궁을 쑥대밭 으로 만드는 건 일도 아니다. 황궁에 들어선 지 10여 분이 지났을 무렵, 일단의 무리가 엘을 가로막았다. 엘의 앞을 가로막는 선두에는 화려한 갑주를 차려 입은 중년의 기사가 서 있었다. 바로 클라이언 공작이었다. 그리고 주변에 포진해 있는 기사들은 블리어드 기사단이었다. 저번 접전에서 10명이 죽는 사태가 발생했기에 주변에 서 있는 기사들의 숫자는 40명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절반은 상당한 부상을 입어 요양을 필요로 하고 있는 상태. 그렇지만 그들의 눈빛은 형형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엘이 먼저 클라이언 공작을 알아보았다. "오랜만에 뵙네요, 클라이언 공작님." "음, 그렇군. 그런데 그대가 이곳에 무슨 연유로 온 것 이오?“ 클라이언 공작의 태도는 차가웠다. 하지만 과거처럼 하대는 하지 못했다. 지금 엘의 위치는 클라이언 공작 본인과 대등한 위치에 섰기 때문이다. 8클래스의 경지는 그로서도 쉽사리 볼 수 없는 지고한 경지. 비록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지만 어떤 꿍꿍이인지 몰랐기에 그는 엘을 경계했다. 엘이 어떤 이유로 황궁에 들렸는지 몰랐기에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저는 황궁에 아주 유익한 정보를, 그리고 제의를 하기 위해 온 것이에요. 자, 그럼 새로운 황제 폐하께 안내를 부탁드리지요." “......좋소 단, 허튼 짓 하지 말기 바라오." "그러려고 온 게 아니니까요." "모두 길을 열어라." 엘의 답을 들은 기사들이 길을 비켜섰다. 클라이언 공작의 시선이 엘에게 향했다. “안내를 하도록 하지. 나를 따라오시오." 그 말과 함께 클라이언 공작이 발걸음을 옮겼다. 엘은 그런 클라이언 공작의 뒤를 따랐다. 약 5분여를 더 걷자 황제가 머무는 거대한 대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클라이언 공작은 대전 앞에 경계를 서고 있는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폐하를 찾아온 손님이시다. 페하께 고하라." 처척!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기사 하나가 대전 안으로 들어섰다. 잠시 후, 대전 밖으로 나온 기사가 클라이언 공작에게 입을 열었다. "모시랍니다." "대전 문을 열어라." 클라이언 공작의 말에 따라 거대한 대전 문이 열렸고, 블리어드 기사단이 대전 안으로 스며들 듯 빠르게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각각 좌우로 포진 되어 경계의 자세를 취했다. 클라이언 공작이 선두로 들어가 황상에 앉아 있는 알카이드 황제에게 고개를 숙였다. "손님을 모셔 왔습니다, 폐하." 그 말에 알카이드 황제가 시선을 들어 뒤이어 들어오는 엘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하셨소, 공작. 손님들은 이리 오시오." 알카이드 황제의 말을 들은 클라이언 공작은 그와 약 5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자리했다. 행여 황제에게 위해를 가할까 경호를 한 것이다. “......” 엘은 알카이드 황제에게 시선을 주었다. 황제의 자리에 오른 그는 전보다 더욱 깊은 눈을 하고 있었다. 디벨 상단의 정보요원들이 판단하길, 알카이드 황제는 인간적인 면은 어떨지 몰라도 황제의 자질에 있어서는 이보다 더 적합한 이는 없다고 판단했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 판단하는 것보다 하나의 황제가 되기 위해 만들어진 것과 다름없는 알카이드 황제는 분명 능력이 뛰어난 황제임은 분명했다. 한동안 알카이드 황제를 바라보던 엘은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이렇게 다시 만나 뵙게 되어 뭐라 말하기 어려운 심정 입니다. 알카이드 황제 폐하." 엘의 어조가 결코 고울 리 없다. 왜냐하면 알카이드 황제는 엘을 제거하기 위해 황탑주 게이런즈를 파견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엘의 곱지 않은 어조를 느꼈지만 알카이드 황제는 한 점 내색도 하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과거는 과거인 법이고 현재는 현재인 법이지. 금탑주 그대가 나를 찾은 이유는 무언가 할 말이 있어서 온 것일 터. 난 그것을 알고 싶다."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알카이드 황제의 행동에 엘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무척 무례한 행동이었기에 순간 블리어드 기사단이 짙은 살기를 뿜어냈다. 순식간에 대전 안에 농도 짙은 살기가 가득 차기 했다. 그 순간 엘의 좌측에 위치해 있던 아이넨스가 손을 휘둘렀다. 단순한 손놀림이었지만 그 속에는 어마어마한 마나가 내포되어 있었다. 사락. 손을 한 차례 휘두름으로써 살기 짙던 삽시간에 평소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 가볍게 펼친 아이넨스의 한 수에 클라이언 공작이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대전의 공기가 잔뜩 방금 전 아이넨스가 펼친 한 수는 그랜드 마스터가 아니라면 펼칠 수 없는 한 수였기 때문이다. 40명에 이르는 소드 마스터의 살기를 단 번에 흩어버릴 수 있다면 그것은 그랜드 마스터일 것이 분명했다. 그러한 사실은 알카이드 황제 또한 알고 있었기에 그는 삽시간에 기사들의 살기를 무력화시킨 아이넨스에게 시선이 향했다. 엘은 그런 그들에게 아이넨스의 소개를 하였다. "이분을 소개해야겠군요. 이분은 당대 신검을 계승하신 신검의 주인, 아이넨스 님이십니다. 현재 특별한 이유로 잠시 저와 함께하고 있지요, 참고로 아이넨스님도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신 상태입니다." “......” 아이넨스의 소개에 대전의 모든 이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만큼 그의 정체는 그들에게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신검은 검을 휘두르는 모든 존재들에게 전설이나 다름없다. 신화 속에서나 전해지는 신검의 힘은 누구도 범접치 못할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신검의 주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경악스러운데 본신의 실력 또한 그랜드 마스터라니. 이 정도라면 클라이언 공작보다 최소 한 수는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놀라움이 채 가시기도 전에 엘은 엘리엔을 소개 하였다. 가뜩이나 아이넨스의 정체가 범상치 않자 그들은 엘리엔의 정체도 범상치 않을 것임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하기야 저 정도로 아름다운 미녀가 여태껏 소문이 나지 않았으니 그 정체는 신비에 감싸져 있을 게 분명했다. "이분의 이름은 엘리엔. 엘프 숲에서 나오신 당대 엘프 신검의 수호검주이십니다. 이분 또한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셨지요." 더 놀랄 것도 없다. 신검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낸 마당에 엘프라니, 더군다나 엘프의 신검이라면 양대 신물 중 하나인 네이처 소드가 분명했다. 신검의 주인이 2명이라, 이 정도면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최강의 세력임이 분명했다. 거기에 골든 나이트까지 더해진다면? 블리어드 제국의 황가는 그야말로 위기에 처한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알카이드 황제의 안색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제기랄.' 사실 그는 엘에게 흉수의 정체를 전해 들은 뒤 인정사정없이 그를 협박 혹은 제거하여 골든 나이트를 취하려고 하였다. 그에게는 결코 엘과 손을 잡을 생각이 없었거니와 아직 실릭르를 잊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그런 생각도 엘리엔을 보면서 한 차례 흔들렸다. 저토록 아름다운 여인은 태어나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맹세코 여태까지 실피르보다 아름다운 여인을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로서는 그보다 아름다운 엘리엔의 등 장이 큰 혼란을 주었다. 거기에 이어진 엘의 소개는 그의 그런 생각을 말끔하게 걷히게 하였다. 신검의 주인에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까지. 누구도 얕볼 수 없는 존재였고, 당장 엘이 마음만 달리 먹는다면 자신의 목숨은 엘에 의해 좌우될 가능성이 농후 했다. 잡아먹을 수 있는 초식동물인 줄 알고 손을 뻗었더니 오히려 자신을 잡아먹을 맹수였던 것이다. '실수했어. 이미 저 녀석은 모든 상황을 예상하고 저들 을 데리고 온 것이야.' 살기를 내뿜던 블리어드 기사단은 물론이고 클라이언 공작조차 몸을 움찔했다. 초인 셋에 힘을 봉인 당했지만 황궁 밖으로 나가면 8클래스 마법을 발휘할 수 있는 엘의 존재는 그들이 지닌 힘을 월등히 능가하고 있었다. 싱긋. 주도권을 잡은 엘은 웃음을 지었다. 그가 아이넨스와 엘리엔을 함께 데리고 이렇게 방문한 의도가 제대로 먹혀 들어가는 시점이었다. 완벽하게 기선을 제압한 엘이 입을 열었다. "별다른 의도는 없으니 그리 경계할 필요는 없어요. 저는 누구와 달라서 사소한 일에 마음을 두지 않거든요." 엘은 알카이드 황제를 보며 씨익 웃음을 지었다. 노골적인 표현이었지만 알카이드 황제는 함부로 경거망동 하지 못했다. 주도권을 쥐고 있는 건 엘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속내는 달랐다. '빌어먹을 자식. 기회만 있다면 반드시 씹어 버리겠다!' 속내와는 다르게 표정을 담담하게 하며 말했다. "그대가 이곳 황궁을 침공한 세력에 대해 알고 있다 들었다. 그것에 대해 말해 주었으면 한다." 엘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알려드리지요. 자고로 적의 적은 공동의 적이니까요. 황궁을 습격한 세력은 벨로세크 제국을 중심으로......“ 그렇게 서두를 꺼낸 엘은 자세한 설명을 읖조리기 시작했다. 9클래스 마법사인 루이아스와 그를 따르는 열 명의 초인. 그리고 벨로세크 제국을 중심으로 한 추측할 수 없는 소드 마스터와 세 제국의 광활한 영토까지. 어느 하나 놀랍지 않은 사실이 없었고, 이야기를 듣는 내내 알카이드 황제는 물론 클라이언 공작 또한 경악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되어 아토빌 공작님에게도 동맹 승낙을 받고 이제 블리어드 제국으로 온 것입니다." 아토빌 공작을 제거하기 위해 무려 6명의 초인까지 동원, 신검을 다루는 최상위 그랜드 마스터 셋이 합공을 하고도 루이아스를 못 이겼다는 말로 엘의 말은 끝을 맺었다. “......” 엘의 말을 모두 들은 이들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못했다. 정말 놀랍기 그지없는 말이다. 세상에 자신들이 모르는 사이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니 더군다나 알카이드 황제는 흑탑주 지크릴이 그들의 조직에 속해 있던 존재란 말에 가슴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아마 9클래스 마법사란 존재는 각 제국에 다양한 방법으로 첩자들을 심어 놓았을 것이다. 그중 블리어드 제국에 심어 놓은 첩자 중 가장 비중 높은 자가 지크릴이었을 확률이 높았다. 만약 그가 죽지 않았더라면 블리어드 제국 또한 그들의 수중에 넘어갔을 확률이 높았다. 자신을 황제의 자리로 올려 주는 데 가장 지대한 공을 세운 지크릴이 사라짐으로써 블리어드 제국이 무사할 수 있었다니, 절로 식은땀이 흐르는 알카이드 황제였다. 그러던 알카이드 황제가 돌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느긋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분명 위험한 세력이긴 하지만 적의 적이란 공식은 그 쪽에서만 성립되는 게 아니야. 이쪽에서도 통용되지. 내가 저쪽 세력과 손을 잡는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하지 않겠나?“ “......” 알카이드 황제의 말에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하니 황궁을 습격한 적하고 손을 잡겠다는 말을 하다니.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게 아닐 수 없다. 위협적인 말을 들었음에도 엘은 태평했다. 엘은 알카이드 황제의 말이 그냥 해 본 것임을 간파한 상태였다. "과연 그들의 습성을 알고서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들은 오로지 실력 위주로 신분의 높낮이를 결정합니다. 기존의 귀족 출신들이 투항한다고 해도 그들이 인정할 리 없죠. 뭐, 그래도 제국의 황제가 알아서 항복 한다면 어느 정도 보장이 되겠지만 그런 어리석은 짓은 하 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반박할 거리가 존재하지 않았다. 엘의 말이 대충 추측성 말이긴 했으나 어느 정도 사실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무력으로 충분히 차지가 가능한데 투항한다고 해서 뭘 봐 주겠는가. 알카이드 황제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 내가 실수했음을 인정하지. 그래, 원하는 게 무엇이지?" “제국을 전복하려 하고 황궁에 대놓고 침공한다는 것은 그들이 야망을 본격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동맹을 맺은 뒤 곧장 백탑주 유클레이를 비롯하여 서부 왕국의 초인들과 동맹을 맺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이쪽의 초인은 무려 열셋! 저쪽은 9클래스 마법사 한 명에 초인 아홉이니 어느 정도 펑펑한 구도가 만들어질 것입니다. 기회를 보아 적들을 하나씩 제거하고, 마침내 루이아스를 제거했을 때 모든 일은 끝날 것입니다." 엘의 계획은 루이아스의 야망에 맞서 적들의 초인을 하나씩 줄인다는 것에 있다. 물론 그것이 쉽지 않겠지만 현재로서는 이것이 최선이기에 알카이드 황제는 순순히 납득했다. "좋아, 그 이야기는 옳다. 나 또한 찬성하도록 하지. 클라이언 공작, 경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클라이언 공작이 기사의 예를 취하며 말했다. "대륙의 평화에 제가 도움이 된다면 기쁠 따름입니다. 황명을 내려 주신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그 문제는 클라이언 공작에게 일임하지. 부디 금탑주를 도와 대륙의 평화를 찾는데 일조하라." "예, 폐하!" 클라이언 공작이 고개를 깊게 숙였다. 엘이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좋아, 블리어드 제국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어. 이제 조금만 더 노력하면 돼.' 엘의 안색이 밝아졌다. 이제 그와 직간접적으로 맺어진 초인의 숫자는 무려 8명. 앞으로 5명만 더 끌어들인다면 루이아스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 세력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 남지 않았어. 분발하자.' 그들만 있다면 루이아스와도 능히 자웅을 겨룰 수 있을 것이다. 블리어드 제국을 벗어나는 엘의 안색은 밝았다. 4. 톨리안 왕국의 근심 아일라스 제국으로 침공한 적들을 막아 내고 블리어드 제국을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엘의 앞길에는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무려 8명의 초인이다. 비록 루이아스가 결집한 세력에 비해 처지는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8명의 초인이 뭉친 것은 결코 쉽사리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더군다나 8명의 초인 중 셋은 대륙에 전설로 내려오던 신검을 소유하고 있다. 신검을 다루는 그들의 힘은 일반 초인에 비해 확실히 한 단계 높은 힘을 보유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그들이 더욱 많은 초인들을 끌어들인다면? 루이아스가 추구하는 마도 제국에 심각한 방해 요소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 아니, 지금 그 자체만으로도 심각한 방해 요소였다. 때문에 루이아스는 부상이 그리 심하지 않은 루이넨스와 샤이어드, 실로프 공작에게 명령을 내렸다. "지금 곧장 아드라인 왕국과 덱스론 왕국으로 가서 그 곳에 존재하는 그랜드 마스터들을 제거하라!" 아드라인 왕국과 덱스론 왕국은 제국들과 국경을 접한 서부의 왕국으로, 서부 대왕국 중 한 곳으로 통하는 강력 한 왕국이다. 두 왕국은 각각 1명의 그랜드 마스터를 보유하고 있으며, 그들의 존재로 인해 여태껏 제국들의 야욕으로부터 왕국들을 지켜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 성국의 다이어드 공작까지 합하여 그들을 일컬어 서부의 방패라 불린다. 그들이 존재했기에 여태껏 대륙이 5대 제국에 잠식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3명의 8클래스 마법사가 서부 왕국에 존재했기에 제국의 야욕을 막아 낼 수 있었다. '금탑주가 서부 왕국까지 세력으로 끌어안으면 무척 골치가 아파진다.' 루이아스는 서부 왕국들의 사정을 비교적 잘 파악하고 있다. 서부 왕국의 6명의 초인 중 다이어드 공작을 제외한 5명은 현재 하나의 모임을 결성하여 루이아스에게 대항하고 있었다. 그들의 중심에 선 자는 다름 아닌 백탑주 유클레이로, 8클래스 마법사들 중에서도 상위권으로 평가받는 존재가 바로 그였다. 루이아스는 유클레이를 떠올리고는 혀를 찼다. ‘미련한 녀석, 나에게 대항할 생각을 하다니.' 그렇게 말은 했지만 유클레이의 존재로 루이아스는 여태껏 서부 왕국에는 별다른 공작을 벌이지 못했다. 왜냐하면 유클레이는 모든 일에 철저하게 대비하여 루이아스의 야욕을 하나씩 분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이아스에게는 무려 10명의 초인이 존재했기에 반격은 꿈도 꾸지 못했다 당장 루이아스만 나서도 5명이 감당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방해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루이아스에게 무척 귀찮은 일임 이 분명했다. 거기에 금탑주가 힘을 합친다면? 골치가 아픈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가장 큰 방해 요소가 될 것 이다. 일전에 겪은 격전으로 현재 금탑주를 중심으로 뭉친 이들의 힘을 잘 알았기에 그들과 힘을 합치는 사태를 미연 에 방지하려는 속셈이었다. "예, 마스터!" 루이넨스가 고개를 숙이며 힘차게 외쳤다. 대답과 함께 그녀가 물러나자, 홀로 남은 루이아스는 틱을 매만졌다. "하나씩 싹을 잘라 주겠어. 더 이상 재롱을 봐주는 것도 못 참겠으니 말이야." 루이아스가 작게 웃었다. *** 그 시각 베르디스 내에 위치한 왕궁에서는 톨리안 왕국의 국왕인 레도프 국왕과 톨리안 왕국의 제1기사 라이어스 공작이 독대를 하고 있었다. 독대를 청한 것은 다름 아닌 라이어스 공작이었다. 사실 라이어스 공작은 진작 레도프 국왕에게 독대를 신청하려 하였다. 그러나 반란으로 인해 쌓인 일들이 보통이 아니었던지라 총사령관인 그가 굵직한 일들만 처리했음에도 상당한 시일이 걸린 것이다. 그래서 당초 의도와 달리 몇 달 후에야 이렇듯 레도프 국왕과 마주할 수 있었다. 레도프 국왕이 라이어스 공작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 무슨 일이기에 그런 것입니까?" 라이어스 공작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맺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반란 진압이 끝나고 톨리안 왕국의 왕권은 비약적으로 강해졌기 때문이다. 제1왕자인 맥셀 왕자가 반란을 일으킬 때 그를 동조하고 나선 것이 왕국의 절반에 해당하는 귀족들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대부분 왕국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던 중앙 귀족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반란에 가담하고, 반란이 실패했으니 그동안 나누어졌던 권력에 공백이 생긴 셈이다. 그 권력은 승자인 왕국군에게 들어왔고, 그중 가장 많이 득을 본 게 다름 아닌 레도프 국왕이다. 왕권이 약하던 톨리안 왕국 역사상 그 누구보다 강대한 왕권을 구축할 수 있었으니 그의 입가에 미소가 머물고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리라.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는 레도프 국왕에 비해 라이어스 공작의 표정은 신중했다. 그제야 라이어스 공작이 무언가 심각한 사항을 들고 왔음을 느낀 레도프 국왕이 입가에 미소를 지우고 라이어스 공작을 바라볼 때, 그의 입이 열렸다. "제가 전하를 청한 이유는 바로 금탑의 문제 때문입니다." “......” 라이어스 공작의 말에 레도프 국왕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단 한마디로 라이어스 공작이 어떠한 의중을 갖고 온 것인지 단번에 파악한 것이다. "음." 레포드 국왕의 입을 비집고 무거운 신음이 흘러 나왔다. 반란을 진압함으로써 기쁜 일도 있었지만 그에 못지않은 걱정도 생겨났다. 그것이 바로 금탑주다. 서부의 대왕국인 톨리안 왕국으로서 8클래스 마법사가 등장했다는 것은 응당 반겨야 함이 옳다. 하지만 깊게 파고들면 그렇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 금탑은 톨리안 왕국의 소속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연결 고리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마탑은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유지 된다. 간혹 부족한 실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각종 아티팩트를 팔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부족한 부분을 충당하기 위함이지, 대부분의 비용은 국가에 의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일반적인 마탑의 구조와는 다르게 금탑은 톨리안 왕국으로부터 따로 지원을 받지 않고 있다 처음 엘을 받아들일 때 레도프 국왕은 엘이 막대한 조 건을 제시하지 않자 무척 기뻐했다. 마탑의 존재는 왕국에 있어 무척 필요했지만 그들에게 하는 지원이 자칫 과할 경우 나라의 재정이 휘청할 위기에 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레도프 국왕은 그 점을 감안했기에 엘의 말을 기꺼이 수락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때의 결정이 엄청난 후회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엄밀히 따지면 금탑은 톨리안 왕국에게 아무런 지원을 받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금탑이 세워진 곳은 톨리안 왕국의 영토이기는 하지만, 그간 감히 토벌할 엄두도 내지 못하던 트롤 벨리다. 금탑주는 스스로의 능력만으로 트롤 벨리를 소탕하여 그곳에 금탑을 세웠다. 다른 왕국이 마탑이 어느 정도 스스로 자립이 가능하도록 수많은 봉토를 내려 주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게다가 트롤 벨리는 톨리안 왕국의 영토라 할 수 있지만 깊게 들어가면 감히 손댈 엄두도 못낸 곳이었으니 오히려 금탑주가 수고를 한 셈이다. 단지 소속이 톨리안 왕국일 뿐, 그 외에 어느 것 하나 인연이 없는 게 금탑주와 톨리안 왕국의 관계인 것이다. 미간에 깊게 골을 판 채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레도프 국왕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확실히...... 금탑주에 관한 문제가 있지요." 어느 것 하나 끈이 없는 인연. 그것이 끊어지기는 너무나 쉬운 것이리라. 단지 협력 관계로서 서로의 인연을 맺은 것이기에 당장 금탑주가 떠난다고 하면 아무 말도 못하는 것이 톨리안 왕국의 입장이다. 비록 금탑주가 배신할 성품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누구도 짐작하지 못할 성질이기 때문이다. "8클래스의 힘에 골든 나이트의 힘까지. 둘이 합쳐진다면 그 누구도 금탑주를 막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이 설령 본 왕국이라도 말입니다." "그건 그렇지만......“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막상 다시금 금탑의 전력을 듣게 되자 레도프 국왕의 안색이 더욱 무겁게 변했다. 당장 금탑의 전력은 제국의 핵심 전력과 비교해 전혀 떨어지지 않는 상태다. 그런 강대한 힘을 톨리안 왕국이 어떻게 통제를 할 수 있을까? 예로부터 과식을 하면 체한다는 말이 있듯이, 금탑은 톨리안 왕국이 가지기에 너무나 큰 세력이 되었다. 통제 못할 힘은 자칫 화를 부를 수 있었기에, 이토록 심각한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런 레도프 국왕을 바라보며 라이어스 공작이 입을 열었다. "제가 그동안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이런 상황에서 가 장 효율적인 수단은 혈연관계를 맺어 놓는 것입니다." “혈연이라......” 레도프 국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자고로 내 사람을 만드는 데 혈연관계만큼 좋은 게 없다. 대부분의 그랜드 마스터들이 각국의 작위와 함께 아리따운 공주 혹은 귀족 영애를 부인으로 맞아들여 혈연관계를 확고히 한 상태다. 혈연을 맺음으로써 관계를 확실히 한다 이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다. "때마침 에리스가 있으니......“ 레도프 국왕의 슬하에 마침 혼기가 꽉 찬 에리스 공주가 있다. 용모가 무척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현명하기까지 한 에리스 공주. 그녀를 금탑주와 맺어 주기만 한다면 지금 이 걱정거리는 단번에 해소된다고 할 수 있다. 혈기왕성한 금탑주라면 분명 아름다운 에리스 공주를 거절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도 허점이 존재했다. "하지만 금탑주에게는 이미 장래를 약속한 여인이 있습니다." 레도프 국왕이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라이어스 공작의 안색도 다소 어두워졌다. 금탑주와 장래를 약속한 여인은 2명이었다. 그리고 그 2명 모두 결코 에리스 공주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 외모를 지니고 있다. 라이어스 공작은 금탑주의 여인 중 한 사람인 카이나를 본 적이 있다. 붉은 머리가 인상적인 아름다운 미녀...... 더군다나 20대의 나이에 소드 마스터에 이르기까지 하여 장래 그랜드 마스터가 될지 그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게다가 다른 여인은 가이아 여신에게 성녀로 선택을 받았다. 자고로 성녀 중에 외모가 못난 여인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니 보지 않아도 성녀로 채택된 여인의 외모가 아름다울 것은 분명할 터였다. 더군다나 금탑주는 그런 자신의 여인을 구하기 위해 성국과 맞섰고, 기어이 신의 의지를 꺾어 버렸다. 놀라운 일이다. 설마하니 일개 인간이 신의 의지를 꺾어 버리는 일이 발생하다니...... 그 과정에서 엄청난 전투를 연이어 치뤘고, 대륙인들은 금탑주가 자신의 여인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여인들을 뚫고 에리스 공주가 그와 인연을 만들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하면 장담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이 둘의 공통된 견해였다. 라이어스 공작이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방법이 이것밖에 없습니다, 전하. 상대는 금탑주, 결코 무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때문에 이런 방법이라도 사용해야지요." 레도프 국왕이 고개를 저었다. "가능성이 없어 보여서 어쩔 수 없군요. 게다가 에리스에게 무작정 희생을 요구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랬다. 레도프 국왕은 금탑주와 인연을 만드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하나뿐인 딸이 행복하길 빌었다. 그런데 정략적 도구로 사용하려 하다니. 비록 왕족이 정략적 결혼에 종종 이용되고는 하지만 대왕국 중 한 곳인 톨리안 왕국에서 그 정도는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는 사항이었다. 마음 약한 레도프 국왕의 말에 라이어스 공작이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하지만 왕국을 위한 일입니다, 전하! 금탑주 같이 젊은 나이라면 열 여자를 마다하지 않을 터. 필요하다면 제 손녀도 금탑주에게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라이어스 공작의 손년 또한 뛰어난 미녀다. 평소 라이 어스 공작이 손녀를 끔찍이도 아낀 것을 감안하면 그의 각오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 “......” 두 사람의 안색이 심각하게 굳어져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일견하기에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었지만 행여 금탑주가 다른 마음을 먹을 경우 최악의 사태가 도래할 수 있다. 그랬기에 지금 이 자리에서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 그들의 지상과제였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고, 라이어스 공작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방안이 있습니다." "방안이라, 어떤 것입니까?“ 레도프 국왕이 귀가 번쩍이는 소리에 지대한 관심을 표했다. 그러자 라이어스 공작이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자신이 생각한 내용을 말했다. "바로 루비어스 백작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허?" 레도프 국왕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라이어스 공작이 미간에 살짝 주름을 잡으며 말했다.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나 금탑주는 루비어스 백작을 무척 아끼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그녀를 이용하여 금탑주의 발목을 붙잡고, 금탑주로 하여금 왕국에 충성을 바치게 하는 것입니다." 회심의 제안이었지만 레도프 국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건 안 될 것 같습니다. 만약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깊지 않은 관계라면 금탑주는 단순히 루비어스 백작을 동업자이자 이웃으로 생각했을 터. 공연히 금탑주의 반감을 사는 행위가 될 수도 있지요. 아무래도 그 방법은 옳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미 수십 년 동안 국왕의 자리에 앉아 귀족들을 다스린 레도프 국왕의 말이다. 그렇게까지 말하자 라이어스 공작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 그러하시다니 그런 것이겠지요. 이것은 최후의 방법으로 밀어 두고, 일단 첫 번째 방법을 선택해야겠군요. 금탑주와 왕실 간에 혈연관계를 맺어 놓는 걸로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잠시 말을 하지 못하던 레도프 국왕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비록 에리스의 희생이 걱정된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왕국을 위한 길. 현명한 그녀라면 순순히 납득할 것이라는 게 레도프 국왕의 생각이다. 이들이 이렇듯 금탑주를 잡아 두려고 하는 이유는 하나다. 금탑주가 톨리안 왕국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왕국의 위상이 비약적으로 상승하기 때문이다. 현재 서부 대륙에 8클래스 마법사가 탑주로 있는 마탑은 총 3곳이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 국가에도 소속되지 않은, 여러 국가에 지원을 받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마탑에 지원을 하는 국가들의 위상은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왜냐? 바로 그들과 인연을 맺어 놓음으로써 8클래스 마법사의 가호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랜드 마스터가 해당 국가의 수호신이라 불리지만 전쟁이 일어날 때 8클래스 마법사는 그랜드 마스터보다 더욱 큰 힘을 발휘한다. 만약 상대 국가에 8클래스 마법사가 없다면 침공하는 데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8클래스 마법사의 힘이 대단한 것이다. 해당 국가에 소속하지 못했을 경우에도 그 정도 위상이 올라갈진대 만약 한 국가에 충성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국가는 곽력에 관계없이 주변 국가의 패자가 될 것 이다. 주변 국가에서는 8클래스 마법사의 존재를 두려워하여 조공을 바쳐올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그 국가의 국력은 순식간에 상승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혹여 정복전쟁을 벌인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8클래스 마법사의 클래스 프레셔로 하위 클래스 마법사는 제대로 힘도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고, 헬 파이어나 블리자드 같은 8클래스 마법에 겁을 먹은 적들은 함부로 공격을 하지 못할 것이다. 단 한 사람의 존재로 이렇게 압도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 그것이 바로 8클래스 마법사의 위력인 것이 다 레도프 국왕이나 라이어스 공작은 딱히 주변의 국가를 제패할 야망은 없다. 아직 개척 중이라 말할 수 있는 톨리안 왕국은 서부를 가로 막고 있는 트롤 벨리와 오크 포레스트만 제거하면 비옥한 서부의 옥토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곳의 끝이 레베탄 고원과 인접한 곳이라 방비하는데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만 서부의 옥토만 얻는 다면 톨리안 왕국은 대대로 서부의 패자로 남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금탑주의 절대적인 협력이 필요했다. 그랬기에 아무런 연고가 없는 지금 그들은 혈연관계로서 금탑을 옭아매려 하는 것이다. 아마 각국의 정보부라면 이미 톨리안 왕국과 금탑주간에 각별한 고리가 없다는 것을 눈치 챘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반드시 금탑주를 잡아 둬야 합니다." 라이어스 공작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5. 한 발 빠른 자와 한 발 늦는 자 블리어드 제국과 성공적으로 동맹을 맺은 엘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이로써 루이아스에게 복속되지 않은 두 제국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안는데 성공한 셈이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건 서부의 왕국들뿐인가." 엘은 밝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사실 엘이 먼저 제국을 방문한 까닭은 설득하기 어려운 대상이 제국이었기 때문이다. 제국은 고질적으로 왕국과 사이가 좋지 않다. 영토를 넓히려는 제국과 필사적으로 영토를 수호하려는 왕국은 사이가 좋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거기다 왕국 출신이 따로 가릴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왕국들 전체가 거대한 연합을 조성하여 합동으로 제국을 견제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수많은 거대 연합체인 만큼 내분이 일어날 수 있기에 각 대왕국들로 하여금 통제를 하도록 하는 효율적인 시스템이 있기에 여태껏 그들의 연합은 무너지지 않은 것이다. 어쨌든 제국과 왕국은 서로 원수와도 같아서 톨리안 왕국에 둥지를 튼 자신이 상대방을 설득하는 게 상당히 힘들 거라 생각한 게 엘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아토빌 공작은 일촉즉발의 상황에 놓여 있어 엘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알카이드 황제는 비록 인간성이 개차반이지만 그 두뇌는 뛰어났기에 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제 남은 것은 서부에 존재하는 그랜드 마스터 둘과 8클래스 마법사 3명이었다. "이쪽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게 도합 일곱. 다섯 명까지 모두 끌어들이면 열두 명......“ 거기에 남은 1명인 다이어드 공작까지 설득한다면 합 13명의 초인이 한데 묶이게 되는 것이다. "신검을 보유한 세 사람이면 루이아스를 막아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서로 간의 실력으로 승부를 봐야 해." 엘은 그렇게 생각하며 아직 부족한 자신의 실력을 자책 했다 자신의 실력이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계획은 더 수정되어 좀 더 공격적으로 변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월의 힘을 뒤집기는 힘든 법. 어린 나이에 8클래스의 경지에 오른 것도 경이로운데 다른 초인들과 대등하게 맞설 힘을 바라는 것은 오히려 헛된 욕심이다. "아직 나에게는 잠재적인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것을 발전시키자. 그리고 한 사람분의 몫만 해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힘이 될 수 있어." 일대일로는 감히 엄두도 못 낼 초인 셋을 대등 아니, 압도적으로 밀어붙이던 루이아스의 모습이 떠오를 때면 자신이 헛된 몸부림을 치는 게 아닐까 생각되었지만 이미 호랑이 등을 탄 기세라 멈출 수 없는 게 그의 입장이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힘을 불리는 것이었다. “다음 목적지는 어디지?” 아이넨스가 엘을 바라보며 물었다. 엘리엔의 시선도 그에게 향하자 엘은 서쪽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다음 목적지는 덱스론 왕국. 대륙 십 대 그랜드 마스터 중 한 사람인 카르닐 공작이에요." "머뭇거릴 필요 없이 곧장 가지." "예, 그러죠." 엘이 마법을 캐스팅하기 시작했고, 곧이어 그들은 새하얀 빛과 함께 그 장소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아드리안 왕국. 서부에 위치한 대왕국 중 하나로, 덱스론 왕국과 함께 서부 출신 그랜드 마스터를 보유한 국가 중 하나다. 현재 아드리안 왕국에서 가장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존재라고 하면 사람들은 국왕을 꼽지 않고 한 귀족을 꼽았다. 안티오네드 공작. 아드리안 왕국의 수호신으로 군림하고 있는 그랜드 마스터이자 아드리안 왕국의 제1권력자라 할 수 있는 존재다. "후후후, 즐겁군. 이 넓은 왕국을 내 손으로 좌지우지 할 수 있다니." 안티오네드 공작은 자신의 저택 집무실에서 내려다보이는 수도의 정경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정말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서부를 좌지우지하는 대왕국인 아드리안 왕국을 자신의 손 위에 올려놓을 수 있다니. 매일 밤 내려다보는 풍경이지만 이 광경은 그때마다 그에게 새로운 느낌을 불어넣어 주었다. 안티오네드 공작은 아드리안 왕국의 후작가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권세 있는 후작가의 아들이지만 어미의 출신이 천하고 형제들의 자질이 뛰어난 덕택에 안티오네드 공작은 일찍 부터 초라한 대우를 받아야 했다. 그런 가문의 대우에 안티오네드 공작은 이를 악물어야 했고, 남은 것은 독기밖에 없었던 그는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러야 했다. 허나 검을 수련하는 것도 가문의 막강한 지원이 있어야 마음 놓고 수련에 전념할 수 있다. 형제들에 비해 자질이 떨어질 뿐더러 출신까지 천한 안티오네드 공작에게 가문의 지원이 갈 리 만무했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것인가. 실의에 빠진 안티오네드 공작은 아드리안 왕국에서 대 대적으로 인재를 모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뛰어난 기사를 키워 내기 위해 왕국에서 비교적 자질이 뛰어난 인재들을 대대적으로 모집한 것이다. 안티오네드 공작은 그 소문을 들은 즉시 망설일 것 없이 지원했다. 가문의 푸대접과 자신의 미천한 자질을 매울 수 있는 부분은 오직 노력밖에 없다는 일념 하에 마침내 그랜드 마스터에 오를 수 있었다. 자질이 그리 뛰어나지 않은 안티오네드 공작이 그랜드 마스터에 오르자 아드리안 왕국, 특히 안티오네드 공작을 버리다시피 한 가문은 발칵 뒤집혔다. 형제들에 비해 딱히 자질이 뛰어나지 않던 그가 그랜드 마스터에 오른 것은 그만큼 충격적인 사실이었던 것이다. 안티오네드 공작이 그랜드 마스터에 오르자 가문에서는 부랴부랴 사신을 보내 적당히 타이르며 가문에 돌아올 것을 종용했다. 하지만 이미 가문에서 식은 수프 대접을 받던 안티오네드 공작이 거기에 응할 리 없었다. "가문이 날 버렸듯이 나 또한 가문을 버린 것뿐이다." 이미 과거에 그러했던 전적이 있었기에 안티오네드 공작을 설득하기 위해 찾아왔던 사신은 아무런 말도 못한 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안티오네드 공작의 앞날은 창창함 그 자체였다. 국왕과 최고위 귀족들의 압도적인 찬성 아래 왕국에서 가장 아리따운 공주를 부인으로 맞이할 수 있었고, 드넓은 영지를 하사 받아 마음 놓고 수련에 전념할 수 있게 되 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아드리안 왕국의 수호신 안티오네드 공작의 탄생 비화였다. 당금에 이르러서는 아드리안 왕국의 기사들이 그를 신처럼 떠받들음으로 인하여 창국 군부는 모두 그의 손에 쥐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시 사람에게는 힘이 있어야 하는 법이지. 힘없는 자가 외치는 정의는 모두 헛소리가 되는 것처럼 말이야." 안티오네드 공작은 불현듯 과거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이 하는 한마디의 차이를 떠올리며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응?“ 그때, 강렬한 기파가 안티오네드 공작의 감각에 포착되었다. "이건......“ 마치 덱스론 왕국의 카르닐 공작을 대할 때나 느낄 법한 기세에 안티오네드 공작이 두 눈을 크게 뜨며 재빨리 기파가 느껴진 곳으로 향했다. 일국의, 그것도 수호신이라 불리는 그가 이동하는 데 혼자일 순 없는 법. 기파가 느껴지는 곳으로 향하다 보니 어느새 공작가에 소속된 수십 명의 기사들이 호위로 붙어 있었다. 바쁘게 움직인 안티오네드 공작의 걸음이 멈춘 곳은 저택의 정문이었다. 굳게 닫혀 있던 정문은 무슨 이유인지 활짝 열려 있었고, 그곳에는 세 사람이 사위를 압도하는 기세를 흘리며 저택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에게 다가가던 안티오네드 공작의 걸음이 멈추었다. 동시에 그의 표정이 판이하게 달라졌다. 저택 정문에 서 있는 세 사람의 기세를 단번에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주변에 퍼져 있는 마나가 진동할 정도로 강렬한 기세를 품은 존재, 그것은 그랜드 마스터와 8클래스 마법사밖에 할 수 없는 전유물과도 같다. '이럴 수가...... 설마 그들이란 말인가?‘ 그들을 본 안티오네드 공작은 대륙을 지배하려고 한다는 그 조직에 소속된 인물들임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최측근도 모르는 사실이지만 안티오네드 공작은 서부에 존재하는 초인들이 가입한 단체에 속해 있다. 이는 어느 날 백탑주 유클레이가 자신을 찾아와 함께 속해 있길 원한 것인데, 백탑주의 명성이 워낙 높고 그의 말에 거짓이 담겨 있지 않았기에 안티오네드 공작은 그 제의를 수락했다. 그 후 곳곳에서 여러 알 수 없는 정체불명 적들의 음모 를 분쇄함으로써 그 조직이 실존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다만 안티오네드 공작이 의심한 것은 한 가지, 그것은 바로 적 조직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초인이 존재한다는 말이었다. 다른 말은 모두 믿을 수 있어도 그 말만은 믿을 수 없는 안티오네드 공작이었다. 그랜드 마스터에 오른 만큼 그늘 다른 이들의 자존심이 얼마나 높은지 잘 알고 있다. 그들은 결코 타인과 협상을 하지 않는 존재들이다. 각 방면에서 절대의 경지에 오른 만큼 그 자존심은 응당 하늘을 찌를 듯 높았기 때문이다. 그런 존재들이 혜아릴 수 없이 많이 속해 있는 단체가 있다? 그것만큼은 절대 믿지 않던 안티오네드 공작이다. 당장 그가 유클레이의 제안을 수락한 이유도 그와의 내기에서 졌기 때문이다. 물론 그 내기 내용을 떠올리면 지금도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기약 없는 수련에 몰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힌 안티오네드 공작이 저택 앞을 가로막고 있는 존재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대들은 누구인가?“ 묵직하고 위엄 있는 목소리가 주변에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만약 그보다 하수라면 목소리만으로도 전의를 잃어버릴 듯한 강렬한 음성이었다. 하지만 안티오네드 공작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세 사람 누구도 반응을 보이는 존재가 없었다. 이는 그들 셋 중 안티오네드 공작보다 하수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안티오네드 공작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오늘 일진은 최악이군.' 이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이렇게 자신을 찾아온 것에는 결코 좋은 이유가 없을 것이 분명했다. "안티오네드 공작, 맞겠지?“ 선두에 선 흑기사에게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중성 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음성에는 조금 전 안티오네드 공작이 전개했던 것이 그대로 전개되어 있었다. 안티오네드 공작은 흑기사의 음성에 순간 가슴이 진탕 되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크윽!" 비틀! 큰 충격을 받았는지 몸을 가누지 못하다가 한순간 가까스로 몸을 바로 잡았다. 그러나 그가 받은 충격은 결코 작지 않았다. '이럴 수가!' 안티오네드 공작은 경악했다 방금 전 음성 하나만으로 상대는 자신에게 큰 충격을 줬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 바로 상대의 실력이 자신보다 월등히 강하다는 것이다. 비록 자신이 대륙 최강은 아니더라도 상위권에는 꼽힐 거라 생각했던 그에게 이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놀란 안티오네드 공작에게 흑기사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번에 는 별다른 위력을 담지 않고 있었다. "우리의 정체는 대충 짐작하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기회를 주지, 우리들 궁 하나를 택해 대결을 벌여라. 만약 네가 승리한다면 우리는 조용히 물러갈 것이다." “......” 안티오네드 공작은 아무 말도 못했다. 그랜드 마스터에 이른 그에게 더없는 치욕이었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상대에게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충분했다. 같은 그랜드 마스터임에도 수준이 다른 실력. 그것 하나만으로도 상대가 얼마나 뼈를 깎는 수련을 해 왔는지 알 수 있었다. 안티오네드 공작은 한참 동안 세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선두에 선 흑기사를 제외한 나머지 둘은 자신과 호각의 실력을 지니고 있다. 어느 누구를 택해도 승부가 쉽지 않다고 느끼는 안티오네드 공작. 이윽고 그는 결심을 굳힌 듯 고개를 나직이 끄덕였다. "좋아, 그럼 그대를 택하도록 하지." 그가 택한 대상은 다름 아닌 선두에 선 흑기사였다. 안티오네드 공작의 음성이 이어졌다. "비록 권력의 맛을 안 나라고 해도 뜨거운 혼을 지닌 기사. 모처럼 나보다 실력이 뛰어난 기사가 찾아왔는데 이 기회를 날려 버릴 수는 없겠지."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 그에게 하늘 위에 하늘 이 있음을 보여 주겠다." 흑기사, 루이넨스가 앞으로 나섰다. 안티오네드 공작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바라던 바요. 어디 하늘 위에 하늘이 어떻게 생겼음을 한번 보도록 하지." 그와 함께 그의 시선이 뒤로 향하며 휘하 기사들에게 소리쳤다. "이것은 신성한 기사의 대결이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 그라나 설령 결과가 안 좋게 나오더라도 너희들은 경거망동하지 마라. 그것은 목숨을 버리는 일과도 같으니......“ 그렇게 말한 안티오네드 공작이 루이넨스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연무장이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그곳에서 승부를 보도록 하지." "뜻대로." 루이넨스는 시종일관 여유 있는 태도를 취하며 아무래 도 상관없다는 몸짓을 보였다. "그럼 따라오도록." 안티오네드 공작은 몸을 돌려 연무장으로 걸음을 옮겼고, 휘하 기사들과 루이넨스 등이 그 뒤를 따랐다. "길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잠시나마 하늘의 힘을 맛보도록.“ 검은색을 띠고 있는 검을 뽑아든 루이넨스가 입을 열었다. 그것이 무척 무례한 태도인지라 기사들 몇몇이 발끈한 표정을 지었으나 안티오네드 공작이 사전에 해 놓은 말이 있었기에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 루이넨스의 말에 안티오네드 공작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묵묵한 태도로 일관한 그는 자신의 검을 뽑아들었다. 자신이 그랜드 마스터에 오르던 날, 국왕이 크게 기뻐하며 하사한 명검 중 명검이었다. 수십 년 동안 애검이었던 검을 쥐는 순간 안티오네드 공작의 눈에 푸른 안광이 뿜어졌다. '이길 수 있다.' 검을 잡은 후 그의 기세는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손에 한 자루의 검만 쥐어져 있다면 무서울 게 없다는 그랜드 마스터다. 검을 든 뒤 확실히 달라진 기세를 보이자 안면 보호대에 가려진 루이넨스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그래야 내가 직접 대결에 임하는 의미가 있지." 그런 그녀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몸을 돌린 안티오네드 공작이 세상을 찍어 누르는 듯한 엄청난 기운을 내뿜기 시작했다. 과연 한 사람의 그랜드 마스터라 해도 모자람이 없는 기세였다. 루이넨스는 그런 그의 기세에 맞서며 마검을 치켜들었다. “과연, 그랜드 마스터라기에 부족함이 없는 실력이다.” "그건 그대 또한 마찬가지다." 안티오네드 공작은 자신의 기세를 가볍게 튕겨 내는 루이넨스를 보며 눈을 빛냈다. 그리고 자신이 확실히 한 수 처짐을 느끼며 검을 루이넨스에게 곧추 세웠다. "먼저 선공하겠소." "얼마든지." 루이넨스의 승낙이 떨어지자 안티오네드 공작이 선공을 가했다. 묵직한 바스타드 소드가 대기를 갈라 버릴 듯한 착각을 일으키며 공간을 쪼개 왔다. 가로막는 산이라도 일격에 갈라 버릴 듯한 무시무시한 기세였으나 루이넨스는 태연자약하게 검에 오러를 뿜어내며 안티오네드 공작의 검을 막아갔다. 꽈앙! 귀가 멍멍할 정도로 강렬한 폭음과 함께 오러가 폭발하며 푸른빛을 뿜어냈다. 그것들은 초인들에게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는지 안티오네드 공작은 제2격, 제3격을 거리낌 없이 퍼부었다. 산조차 갈라 버릴 듯한 일격임에도 루이넨스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안티오네드 공작과의 정면대결을 주저하지 않았다. 쾅! 콰광! 쾅! 쾅! 오러가 부딪칠 때마다 연무장을 뒤집어 버리는 듯한 무시무시한 폭음이 울려 퍼졌고, 그에 따라 루이넨스와 안티오네드 공작의 검이 얽히다가 떨어지길 반복했다. 안티오네드 공작은 지금 자신의 지닌바 실력을 모두 발휘하고 있었다. 왕국 유일의 그랜드 마스터이니 만큼 그는 여태껏 다른 나라의 그랜드 마스터와 실력을 나눠 볼 기회가 전혀 없었다. 단지 겨뤄 본 초인이라면 유클레이가 유일했지만, 그는 기사가 아닌 마법사였기에 그랜드 마스터와의 대결은 이번이 처음이라 할 수 있었다. 꿈에도 그렸던 대결을 함으로써 안티오네드 공작은 평소 타 그랜드 마스터와 겨룰 때를 대비해 준비해 놓았던 자신의 검을 마음껏 발휘했다. 그러나 루이넨스는 그런 그의 검을 빠짐없이 모두 막아 냈고, 그럴 때마다 안티오네드 공작은 화색을 발하며 또 다른 검을 펼쳐 내기에 바빴다. 순식간에 대결은 10분을 경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티오네드 공작과 루이넨스의 기세는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빛이 번쩍임과 동시에 수십 번의 오러 폭발이 일어났고, 부서진 연무장의 잔재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렇게 대결이 1시간 정도 흐르자 안티오네드 공작의 공세가 점점 수그러들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검의 정화를 마음껏 펼쳐 댔으니 제아무리 그랜드 마스터라 할지라도 한계가 존재했던 것이다. “헉헉!" 단내가 흘러나오는 듯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안티오네 공작이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여태껏 수비로 일관된 자세를 취하던 루이넨스가 안티오네드 공작의 검을 튕겨내며 말했다. 그녀는 지쳐 보이는 안티오네드 공작과 달리 처음과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알고 있는 모든 기술을 펼친 듯하니 이제 나의 힘을 보여 주지." 쐐액! 루이넨스의 검이 일변했다. 수비만 취하던 그녀의 검이 공세를 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시무시한 기세를 머금은 검을 보며 안티오네드 공작이 검을 맞받아치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좌아앙! 둔중한 소리가 연무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와 함께 신형 하나가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바로 안티오네드 공작의 신형이었다. "이, 이럴 수가!" 안티오네드 공작은 형편없이 뒤로 밀려난 자신의 모습에 경악했다. 방금 전 공격으로 자신이 물러난 까닭은 바로 압도적인 오러의 위력 때문이다. 오러의 위력, 그것은 세월의 힘에 의해 그 힘의 위력이 달라진다. 대륙 10대 그랜드 마스터 중 능히 5번째 이내로 탄생한 안티오네드 공작은 여태껏 오러의 위력으로 밀려본 적이 없다. 그런데 순수한 오러의 위력으로 밀려나다니, 이만큼 충격적인 일은 없었다. 놀라는 안티오네드 공작에게 루이넨스는 불과 얼마 전 아니넨스에게 했던 말을 반복하였다. "오러는 고이 모셔 두는 보물이 아니야. 두들길수록 강해지는 쇠처럼 끊임없이 단련에 단련을 거듭해야 강해지는 것이지. 뭐, 이런 수법은 여태껏 존재하지 않았으니 놀랄 것이 분명해." “......” 안티오네드 공작의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가 억눌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여태껏 날 봐 주었단 말이군." 루이넨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대결에 임하는 자세가 왜 마음에 들어서 그런 것뿐이야. 다른 뜻은 없어." “나에게 그런 것은 필요 없다." 분노한 안티오네드 공작의 검이 새파란 빛을 머금었다. 다시금 세상을 양단해오는 그의 검을 보며 루이넨스가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사정없이 제거해 주지." 루이넨스의 마검도 푸른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두 검이 부딪쳤다. 꽝! 강렬한 오러를 머금은 두 검은 부딪침과 동시에 푸른 청광을 사정없이 폭사시켰다. 그 폭발 속에서 안티오네드 공작의 신음이 흘러나왔다. “크으으......” 오러의 위력에서 차이가 너무 났다. 뒤로 물러난 안티오네드 공작이 조금 전 충격에 터진 입술의 피를 거칠게 훔쳤다. "이렇게 강하다니......“ 그때, 루이넨쓰가 안티오네드 공작 앞에 나타났다. 안면 보호대 사이로 드러난 루이넨스의 눈에는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방심하기에는 일러." 슈악! 검이 섬광처럼 휘둘러졌다. "큭!" 루이넨스의 등장을 알아차린 안티오네드 공작이 재빨리 뒤로 물러서며 검을 종횡으로 10여 번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루이넨스의 오러를 해소하지 못한 채 일격을 허용해야 했다. 우지직! 어깨 보호대가 고철처럼 찌그러졌다. 안티오네드 공작의 신형은 계속해서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루이넨스의 신형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와 안티 오네드 공작의 앞에 나타났다. "애초에 정해진 결과대로 승부를 내 주지," 루이넨스의 검이 십자로 그어졌다. 안티오네드 공작이 황급히 검을 치켜 올렸으나 압도적 인 위력을 연이어 견뎌 냄으로써 그의 검은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태였다. 쩌저적! 쩡! 루이넨스의 오러를 견텨내지 못한 안티오네드 공작의 검이 마침내 균열을 일으키며 부서졌다. 그 틈을 비집고 나타난 루이넨스가 거침없이 안티오네드 공작의 가슴에 검을 꽃아 넣었다. “......!” 검이 자신의 몸을 관통하는 섬뜩한 고통에 눈을 부릅뜬 안티오네드 공작. 그런 그의 모습을 루이넨스가 여유로운 시선으로 바라 볼 뿐이었다. "저, 정말...... 가, 강하군......“ 루이넨스의 압도적인 힘에 감탄사를 토해 낸 안티오네드 공작. 곧이어 그의 눈이 뒤집히며 그대로 몸이 넘어갔다. 쿵! 지난 수십 년 동안 아드리안 왕국의 수호신이었던 안티 오네드 공작의 최후였다. “......” 안티오네드 공작이 눈앞에서 죽음을 당하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공작가 기사들은 아직도 안티오네드 공작이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눈이었고, 루이넨스를 따라 온 실로프 공작과 샤이어드는 묵묵한 시선으로 장내의 결과를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실력에 비해 자존심은 왜 높군." 루이넨스는 무심한 어조로 안티오네드 공작의 심장에 박힌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분노에 가득 찬 표정을 짓고 있는 기사들을 무심한 눈으로 훑었다. “......!” 기사들은 루이넨스의 시선에 가슴이 서늘해짐을 느끼고는 저도 모르게 한 발짝씩 물러났다. 그러고 보니 대결이 시작하기 전 안티오네드 공작의 말이 떠올랐다. 결과가 어찌 되든 결코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기사들이 주춤거릴 뿐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루이넨스는 코웃음을 쳤다. "기개가 없는 것들이군." 그렇게 말한 루이넨스가 샤이어드에게 시선을 주었다. "돌아간다." "알겠습니다." 샤이어드가 캐스팅을 시작했고, 잠시 후 새하얀 빛이 그들을 감싸며 순식간에 그들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때까지 기사들은 루이넨스의 압도적인 기세에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었다. *** "호오, 덱스론 왕국도 왜 괜찮은데?“ 덱스론 왕국에 도착한 엘은 수도의 이곳저곳을 뜯어보며 나직한 감탄사를 흘렸다. 덱스론 왕국은 대륙의 중남부에 위치한 왕국이다. 때문에 제국에서 서부 왕국으로 향하거나, 혹은 제국으로 향하는 상단들의 중요한 교역로가 되는 곳이 바로 이 곳이다. 더군다나 상당히 비옥한 옥토까지 접하고 있었기에 식량으로 자급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인구 숫자도 많아 은 연중 대왕국들 중에서 가장 강한 국가로 꼽히기도 하는 곳이 바로 덱스론 왕국이다. 처음 동부에서 개척을 나온 이들이 대부분 지금의 덱스론 왕국에 정착했으니 말이다. 덕분에 서부 왕국 중에서 가장 역사도 깊으며, 평민은 물론 농노들도 이곳에 살면 굶지 않는다는 말이 나을 정도로 체제적인 면에서도 월등한 국가가 바로 이곳이다. 엘은 덱스론 왕국을 둘러보며 눈을 빛냈다. 이 세계는 전형적인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보이고 있었는데, 귀족들이 모든 부를 독점하고 평민과 농노들은 그들의 재산을 불려 주는 도구에 불과했다. 그들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궁극적으로 귀족들의 재산만 불려 주는 시스템이 이곳에 정착화되어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국가가 그런데 이곳은 사뭇 그 분위기가 달랐다. 우선 길을 걷는 이들 중 평민들이 상당수란 걸 발견한 것이다. 더군다나 평민들의 행색이 그리 못난 것도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상당히 부유해 보이는 듯한 그런 차림새여서 엘을 놀라게 하였다. 이런 모습은 제국에서밖에 보지 못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제국은 긴 역사를 토대로 체제를 보완에 보완을 거듭하였기 때문에 그 체제가 무척 우수하다. 그들은 평민들과 농노들을 무작정 착취하는 게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농노들에게 소작료를 낮추어 열심히 일할수록 내 몫이 많아진다는 것을 미끼로 의욕을 고취시키며, 평민들에게는 배움의 길을 일부분 열어 그들을 수족으로 부리고, 그로 인한 재정 부족은 고가품에 세금을 붙여 간접적으로 재산을 불렸다. 그런 모습은 오직 제국에서밖에 보지 못했는데 지금 덱스론 왕국에서 비슷한 모습을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대왕국이라는 말에 손색이 없어." 엘은 감탄하며 아이넨스와 엘리엔에게 슬쩍 시선을 주었다. 감탄하는 엘에 비해 그들은 별로 감흥이 없는 듯했다. 하기야, 오직 검만을 휘두르는 그들이 어디 이런 것에 관심이 있겠는가. '반응을 바란 내가 잘못이지.' 쓴웃음을 지은 엘이 앞장서서 발걸음을 옮겼다. 이미 디벨 상단의 정보 요원에 의해 덱스론 왕국의 그 랜드 마스터인 카르닐 공작의 저택을 알아놓은 뒤였다. 카르닐 공작가로 걸음을 옮기면서 엘은 슬쩍 아이넨스에게 시선을 주었다. "덱스론 왕국의 카르닐 공작은 대륙 십 대 그랜드 마스 터 중 중간권에 있다고 평가되는 인물이지만 무척 역사 깊은 가문의 검을 수련한 초인이에요. 한번 검을 나눠 보고 싶지 않나요?“ 엘의 물음에 길을 걷던 아이넨스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물론 검을 나눠 보고 싶기는 하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실은 별로 내키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기야 대륙 제1기사라는 아토빌 공작을 보았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뭐든지 큰 걸 보게 되면 작은 건 한없이 작게 보이는 것 아닌가? 그것과 비슷한 것이라 생각하며 엘은 발걸음을 옮겼다. 수도 남문에서 카르닐 공작가 저택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약 30분을 걸으니 카르닐 공작가 저택이 보이기 시작 했고, 엘은 저택을 발견하자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응?“ 카르닐 공작가 저택 문앞에 도착한 엘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택 앞을 지키고 있는 이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엘은 엘리엔의 목소리에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안쪽에서 무언가 싸움을 벌이고 있나 보군. 최소 그랜드 마스터에 이른 이들의 싸움이다.“ "그랜드 마스터들의 싸움?“ 그렇다면 범상치 않은 것임이 분명했다. 덱스론 왕국의 그랜드 마스터는 카르닐 공작이 유일했거니와 다른 그랜드 마스터와 싸움을 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설마?“ 엘의 표정이 급변했다. 얼마 전 루이아스와의 조우에서 그는 자신들이 그랜드 마스터와 8클래스 마법사를 포섭하려 한다는 것을 알아 차렸을 공산이 크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자신들보다 한발 먼저 그들을 제거 하려 든 것이라면? 자칫 서부의 초인들이 제대로 반항조차 못한 채 죽어 나갈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엘의 얼굴에 다급함이 어렸다. "일단 가 보죠!" 엘의 신형이 블링크로 사라졌다. 그의 얼굴에 서린 다급함을 읽었는지 아이넨스와 엘리 엔은 몸을 날려 대결이 벌어지는 곳을 향했다. "이럴 수가!" 엘은 카르닐 공작가의 연무장에 벌어진 참상에 차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연무장 중앙에는 중년인이 심장을 꿰뚫린 채 죽음을 당해 있었다. 아마 그가 카르닐 공작일 확률이 높았다. 일국의 그랜드 마스터인 그가 이렇게 당하다니. 그뿐만이 아니라 카르닐 공작가의 기사들로 짐작되는 기사들이 그야말로 몰살을 당해 있었다. 최소 소드 익스퍼트에 들었을 기사 100명이 제대로 대항조차 못한 채 몰살을 당한 것이다. 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아무래도 루이아스가 먼저 손을 쓴 것 같네요. 우리가 연합하지 못하도록 아직 포섭되지 않은 각국의 초인들을 각개 격파하는 것 같아요." 눈앞에 증거가 있으니 아니라고 말하기에도 어려웠다. "으음!" 아이넨스가 신음을 흘렸다. 보아하니 카르닐 공작은 상대에게 제대로 타격을 주지 못한 것 같았다. 제아무리 약하다고 해도 그랜드 마스터를 쉽게 제거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른 검사는 흔하지 않다. 이 정도로 일방적으로 몰아붙일 사람이라면 1명밖에 없다. "루이넨스......“ 압도적인 오러에 역대 신검가 중 최강의 재능을 지니고 태어난 천재 중 천재 루이넨스밖에 없다. "끝까지 이런 일을 벌이다니......“ 아이넨스는 루이넨스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관계까지 왔음을 느끼고는 눈을 감았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 잡기 위함이다. "일단 덱스론 왕국에 알려야겠어요. 이것은 국가적 차원의 일이에요." "하지만 잘못하면 이번 일의 책임을 우리가 뒤집어 쓸 수도 있다." 아이넨스의 말에 엘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어요. 현 덱스론 왕국의 국왕은 현명한 국왕이라 들었어요. 자세한 설명을 한다면 이해해 줄 거예요." “힘들 것 같은데......” 그들이 이야기를 나눌 때, 연무장에 급격한 마나 흐름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건 텔레포트......“ 엘이 갑자기 텔레포트가 전개되는 것을 보고는 눈에 빛을 냈다. 마나 흐름은 점점 강렬해졌고, 곧이어 새하얀 백광이 터져 나왔다. 파앗! 그와 함께 한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백발 백미에 족히 일흔은 되었을 직한 모습의 백색 로브를 걸친 노마법사. 노마법사와 엘은 정확히 시선을 마주했다, 엘을 바라보는 노마법사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6. 백탑주 유클레이 하지만 그 이채도 곧이어 분노로 변했다. 연무장에 벌어진 참상을 목격한 것이다. 노마법사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엘에게 입을 열었다. "이 일을 자행한 것이 그대들인가." 의지 않은 음성이었지만 엄청난 힘을 내포하고 있었다. 심신을 울리는 힘에 엘을 비롯한 아이넨스와 엘리엔의 안색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들이 인상을 찌푸릴 만큼 노마법사의 음성에 담긴 힘은 엄청났다. 엘은 재빨리 요동치는 마나를 안정시키며 앞으로 나섰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믿지 않겠지요?" 시기가 정말 좋지 않았다. 카르닐 공작을 죽인 흥수들은 이미 모습을 감추었고, 그 자리에 자신들이 나타났으니 말이다.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엘은 완전히 걸려들었다고 생각하며 노마법사를 응시했다. 노마법사는 그런 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카르닐 공작을 제거하고 나를 제거하려고 음모를 꾸민 것이겠지." "후, 아닌데......“ 엘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지만 노마법사는 전혀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노마법사의 양손에 붉은 화염이 맺히기 시작했다. "무엇이 옳은지 판단하지 못한 채 그저 힘에 이끌린 마도 제국의 추종자들이여. 내가 오늘 그대들을 심판할 것이다." 백색 로브가 한차례 펄럭이는 듯하더니, 공간 전체가 백색으로 물드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엘이 앞으로 튀어나가며 아이넨스와 엘리엔에게 외쳤다. "제가 상대할게요!" 엘의 양손에 붉은 화염이 맺히며 노마법사의 마법과 마주쳐 나갔다. 꽝! 꽈르릉! 붉은 화염이 대기 곳곳에 폭발하며 붉은 비를 수놓았다. 마법의 위력에서 차이가 났던 것이다. 이는 노마법사가 전개하는 마법의 위력이 엘보다 더욱 강력하다는 걸 의미한다. "이런......“ 노마법사는 엘이 자신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 내자 놀란 기색을 띠었다. 엘 또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는데, 여태껏 자신이 마법의 파괴력으로 밀려나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단전호흡의 위력으로 극도로 빨라진 마나 호응과 캐스팅은 마법을 보다 완벽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그 위력도 월등히 향상시켜 준다. 그 덕에 동급 마법사 둘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 자신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인 마법의 위력에서 밀려 버린 것이다. 엘은 노마법사의 실력이 예상을 훨씬 웃도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선배님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내 이름은 유클레이다." 노마법사, 유클fl이가 딱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의 소개에 엘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유클레이라면 현존하는 마법사들 중 나이가 제일 많은 8클래스 마법사다. "과연......오랜 세월을 살아온 만큼 녹록하지 않다는 건가." "나의 소개를 했으니 너의 소개를 함은 당연한 예의일 터. 이름을 밝혀라." 유클레이의 음성에 엘은 자신의 소개를 하였다. "제 이름은 엘리미스. 남들은 저를 금탑주라 칭합니다, 선배님." "금탑주라...... 으음, 금탑주도 그들과 한패였다니." 유클레이의 주변에 포진된 마나가 빠르게 유동하기 시작했다. "오늘 벌인 일에 대하여 변명할 거리는 없을 터. 반드시 악의 싹을 제거해 주겠다." "자, 잠깐......“ 엘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유클레이의 공세는 시작되었다. 최고령 8클래스 마법사의 경험은 어디에 가는 것이 아닌지 유클레이의 주변에 수십 개의 마법이 생성되었다. 모두 무시 못할 위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자칫 실수를 한다면 몸이 성치 못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큭, 8클래스 최강의 마법사라 불리니 어디 한번 해 보도록 하지요." 현재 엘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경험이다. 보유한 마나 양도, 캐스팅 면에서도 8클래스 마법사를 웃도는 시점에서 그가 부족한 것은 경험이었기에 엘은 이참에 유클레이와 제대로 한번 싸워 볼 셈이었다. 콰광! 콰과광! 엘의 마법과 유클레이의 마법이 부딪치며 허공을 수놓았다. 이번에는 엘 또한 섣불리 밀리지 않았다. 마법 하나하나에 극도로 집중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 유클레이는 엘이 자신의 마법과 대등하게 맞서자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이어 유클레이의 주변에 수십 개의 마법이 재전개되면서 재차 엘에게 쇄도했다. "후우!" 엘은 자신에게 쇄도하는 마법을 보며 가볍게 숨을 몰아 쉬었다. 그리고는 곧장 마법을 전개했다. "헤이스트! 리터레이트!" 몸의 움직임을 빠르게 하는 헤이스트에 리터레이트를 중첩시키자 그의 몸이 빛살과도 같이 유클레이에게 쇄도 했다. 중거리 혹은 원거리로 마법을 겨룰 경우 마법의 위력이 더 강한 유클레이에게 유리했기에 헤이스트를 중첩시켜 근접전으로 나가려 한 것이다. 파밧! 파바밧! 엘의 몸이 섬광같이 쏘아지며 유클레이의 마법을 모조리 피해 냈다. 수십 개의 마법을 모두 피해 내고 막 유클레이의 앞에 나타나 마법으로 그를 강타하려 할 때, 유클레이의 입가 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거기에 불안감을 느낀 엘은 지체 없이 블링크를 전개하였다. 슈아악! 공간의 틈에 몸이 숨겨질 때 섬뜩한 기운이 엘의 머리 칼 바로 위를 스쳐 지나갔다. "후읍!" 순간 등골이 서늘해진 엘은 유클레이와 약 이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엘은 볼 수 있었다. 유클레이의 손에 붉은 기운이 응집된 예리한 칼날이 생성되어 있었음을. 만약 자신이 블링크를 전개하는 데 조금이라도 머뭇거렸다면 자칫 목이 날아갈 수도 있었던 상황이다. 유클레이가 여유를 찾은 안색으로 엘을 응시했다. 그의 입가에는 모한 미소가 서려 있었다. "대륙 사람들이 우리 8클래스 마법사들을 칭할 때 분류를 정해 놓은 걸 못 들었나 보군? 8클래스 마법사 중에서 근접전에 있어 최강은 바로 나를 가리킨다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청탑주 라이젠과 적탑주 카로스만을 칭하지. 금탑주가 카로스만을 이겼다니 나를 상대로 얼마나 실력을 선보일지 기대하겠네." "큭!" 유클레이의 말에 엘이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물러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자신 또한 근접전에서 강한 힘을 발휘하는 마법사였으니 말이다. "플레임 블레이드." 엘은 양손에 불꽃의 검을 전개했다. 그러자 그의 양손에 기다란 불꽃의 검이 생겨났다. 그것을 양손에 쥔 엘이 다시 유클레이에게 쇄도했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엘을 보며 유클레이는 양손을 좌우로 펼쳤다. 동시에 보이지 않는 기운이 언뜻 사라졌다. 그러더니 펼쳐진 손으로 이번에는 붉은 기운이 일렁였다. 플레임 버스터를 양손에 응집시킨 기운이었다. 콰아앙! 불꽃이 충돌하며 주변의 산소를 삽시간에 태워 버렸다 서로 힘을 겨루는 두 사람의 표정은 판이하게 달랐는데, 유클레이의 얼굴에는 여유가 있는 반면 엘의 표정은 일그러져 있었다. 조금씩 자신의 마법이 밀리고 있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엘은 기합을 지르며 플레임 블레이드를 앞으로 내밀었다. "흐아아압!" 파츠츠! 극도의 마나를 불어넣은 플레임 블레이드가 유클레이의 플레임 버스터를 깨 버렸다. 그 충격으로 유클레이는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엘은 그런 유클레이를 베어 버리기 위해 다가갔는데, 순식간에 유클레이가 블링크를 전개하여 자리를 벗어나는 게 아닌가. 유클레이가 사라짐과 동시에 엘은 자신의 뒷부분에서 섬뜩한 예기가 느껴짐을 알고는 경악했다. “헉!" 비명을 지르며 재빨리 몸을 돌린 엘은 손을 좌우로 교차하며 실드를 생성했다. 그러자 엘의 뒤로 날아오던 예기가 곧장 실드와 충돌하였다. 떵! 실드가 요동치는 소리와 함께 엘의 몸이 뒤로 주르륵 밀려 지면에 부딪쳤다. 콰당! 자욱한 모래 먼지와 함께 모습을 감춘 엘. 그 틈을 놓칠 유클레이가 아니었다. 어느새 엘이 밀려난 위치 바로 위에 도착한 유클레이는 수십 개의 마법을 전개한 뒤 엘이 모습을 감춘 곳에 마법 폭격을 감행했다. 콰광! 콰과과광! 무시무시한 폭음이 사방에 울려 퍼졌고, 그럴 때마다 모래 먼지는 더욱 자욱해졌다. 수백 수천 발의 마법 폭격을 감행한 유클레이가 마침내 마법 폭격을 멈추었다. 그는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곳에 시선을 두며 장내의 모습을 확인하고자 마법을 전개했다. "클린." 샤아아아! 유클레이의 마법 전개과 함께 자욱하던 모래 먼지가 빠르게 걷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러난 장내의 모습. 드러난 광경에 유클레이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음!"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바로 멀쩡한 엘의 모습이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숫자의 마법을 폭격했건만 엘은 상처 하나 입지 않았던 것이다. 양손을 들어 실드를 전개하고 있던 엘은 더 이상 마법 폭격이 이어지지 않자 실드를 해제한 상태였다. 그는 유클레이를 보며 입을 열었다. "후, 역시 강하군요. 자, 그럼 이제 대화를 나누어 보지 않겠습니까? 저는 카르닐 공작을 해친 범인이 아닙니다." “......” 유클레이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엘이 자신까지 제거하려 했다면 그와 함께 온 동료들은 물론 금탑주의 수호 기사라는 골든 나이트도 모습을 드러냈을 것이다. 하지만 엘은 그러한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자신을 해칠 의사가 없다는 것이다. 엘의 의사를 충분히 파악한 유클레이가 지면으로 하강 했다. 유클레이가 순순히 적의를 지우자 엘은 그를 향해 웃음을 띠며 말했다. "하하, 정말 강하시군요. 일대일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엘은 정말 유클레이 실력에 감탄한 상태였다. 유클레이는 수많은 실전을 쌓은 경험의 결정체와도 같았다. 그의 마법 응용과 마나 컨트롤 실력은 단순히 마나가 많고 캐스팅 시간이 빠르다고 하여 이길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더 나은 것처럼 백 번 머릿속으로 수련을 하는 것보다 딱 한 번의 실전이 나은 법이다. 엘은 유클레이와 전투를 겪으면서 여러 가지를 깨달 고, 그것은 후일 엘에게 뼈와 살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는 유클레이를 보며 말을 이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카르닐 공작님을 해친 것은 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저는 루이아스와 협력하는 관계가 아닌 대립하는 관계이기 때문이죠." 엘의 말에 침묵하던 유클레이의 눈이 빛났다. 루이아스란 이름이 반응한 것이다. "루이아스를 아나?“ 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얼마 전 싸움까지 했을 정도니까요." "허어......“ 엘의 말에 유클레이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더니 엘에게 말했다. "이곳은 이야기를 하기에 별로 좋지 않군. 내 탑에 가서 이야기를 하지 않겠나?“ 엘은 아이넨스와 엘리엔을 힐끗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단 저분들도 함께 하겠습니다." "좋네." 고개를 끄덕인 유클레이가 엘리엔과 아이넨스에게 다가가서는 텔레포트 마법을 캐스팅하였다. "메스텔레포트(Mas Teleport)!" 파앗! 유클레이의 전개어와 함께 엘을 비롯한 다른 이들의 몸이 새하얀 빛이 발하며 사라졌다. 백탑은 서부에 위치한 네 국가의 국경에 위치한 마탑이다. 백탑은 대륙에 단 10명뿐인 8클래스 마법사 유클레이에 의해서 세워진 마탑으로서, 인접한 네 국가의 지원을 모두 받음으로써 네 국가의 철저한 장벽이 되어 주었다. 네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백탑에는 무려 500여 명에 이르는 많은 숫자의 마법사들이 머물고 있다. 7클래스의 경지에 이른 부탑주가 2명이며, 그 아래로 장로급 6클래스 마법사가 무려 10명이 넘고, 5클래스 마법사가 100명이 넘는다. 마탑으로서는 초인 둘을 보유하고 있는 금탑과 호각을 이루는 곳이 바로 백탑인 것이다. 유클레이와 엘 등이 모습을 드러낸 곳은 백탑의 텔레포트 마법진이었다. 그는 엘 등을 응접실로 안내하고는 짤막하게 입을 열었다. "잠시 차를 들도록 하세." 그리고 무슨 볼일이 있는지 모습을 감추었다. 유클레이가 사라지자 엘은 넓은 소파에 앉아 조용히 차를 들었다. 엘은 차 한 모금을 마시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첫 만남이 좋지 못한 만큼 조금 번거로운 일을 겪을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백탑주의 존재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 정도 힘이라면......” 아이넨스는 방금 전 엘과 격전을 벌이던 유클레이의 실력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 정도라면 8클래스 마법사들 중 상위권에 속할 것이 명했다. 그가 보기에 유클레이는 청탑주 라이젠보다 강해 보였다. "엘리엔 님이 보기에는 어때요?“ 엘이 엘리엔을 보며 물었다. 그러자 엘리엔이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방금 전 나간 인간의 실력은...... 아카벨 대장로님과 엇비슷할 정도다." "아카벨 대장로님과?“ 엘리엔으로서는 적절한 비유를 든 것이겠지만 엘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로서는 아카벨 대장로의 실력을 알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엘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엘리엔은 다시 설명을 해 주었다. "인간으로 치면...... 신검을 쓰지 않은 아토빌 공작과 자웅을 겨룰 수 있을 것 같다." “......!” 그녀의 말에 엘은 물론 아이넨스까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분명 강한 것은 알았지만 설마하니 아토빌 공작과 자웅을 겨룰 수 있을 정도일 줄이야. 놀란 그들에게 엘리엔의 말이 이어졌다. "그는 아까 너와 겨룰 때도 진짜 실력을 발휘하지 않았다. 아마 본 실력을 발휘하면 오래 버티지 못했겠지." “......하하하!" 엘리엔의 말에 엘은 웃음을 터뜨렸다. 내심 유클레이와 대등하게 맞서 자신의 실력이 괜찮아 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설마하니 유클레이가 봐주었을 줄이야. 치밀어 오르는 자괴감...... 정말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것이 다 자신의 실력이 부족해서 겪는 일일 텐데. 전신에 엄습하는 자괴감을 느끼며 엘은 결심했다. 앞으로 이런 일을 져지 않도록 더욱더 열심히 수련하는 수밖에. 엘은 침묵을 지키고, 아이넨스와 엘리엔은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잠시 후, 응접실 문이 열리면서 유클레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래 기다렸네. 손님들을 데리고 오느라." 응접실로 들어서는 유클레이의 뒤를 따라 두 노마법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얼핏 보기에 평범한 노인처럼 보이는 두 마법사에게서 풍겨 나오는 기운은 겉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모든 것에 초탈한 듯한 기운. 그것은 8클래스 마법사에 게서나 느낄 수 있는 기운이었다. '두 사람 모두 8클래스 마법사다! 그렇다면?' 한순간 엘의 눈이 반짝였다. 유클레이와 모습을 드러낸 2명의 8클래스 마법사. 그들은 서부에 존재하는 8클래스 마법사일 확률이 높았던 것이다. 엘의 맞은편에 선 유클레이가 노인들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소개하지. 이분은 코린트라고 하고 이분은 멜뤼스라고 하네. 방금 알아차렸겠지만 이 두 분은 서부에 존재하는 8클래스 마법사라네." 엘이 인사를 먼저 하였다. "서부 톨리안 왕국에 자리한 금탑의 탑주 엘리미스라고 합니다. 여러 선배님을 뵙게 되어 반갑군요." "허, 대륙을 술렁이게 하는 풍운아를 이렇게 보게 되어 반갑네," "정말 어린 나이에 대단한 성취를 이루었군. 정말 대단 해." 두 대마법사의 칭찬에 엘은 약간 쑥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상대방이 먼저 소개를 하였으니 이쪽도 자기소개를 해야 함이 응당 옳다. 때문에 엘은 아이넨스와 엘리엔을 소개하였다. "이분은 당대 신검의 계승자이신 아이넨스 님이십니다. 그리고 이분은 대륙에 걷힌 암운을 걷어내고자 도움을 주시는 엘리엔 님이시고요." "반갑습니다." "반가워요." 아이렌스와 엘리엔은 짧게 인사를 건넸다. "오오, 신검의 계승자와 엘프라니! 정말 놀랍구려." 예상대로 놀라움을 표한 그들은 나직한 감탄사를 흘린 후 본격적인 대화로 들어갔다. 엘은 우선 유클레이가 초면부터 안 좋은 이미지를 심어 준 것을 걷어내야 했기에 자세한 정황을 먼저 풀어 나갔다. "자세히 말씀드리면 아까도 말했던 바와같이 저와 이 분들은 현재 마도 제국을 세우려는 루이아스와 대립하고 있는 관계입니다. 그가 염원하는 마도 제국이 세워진다면 분명 대륙은 피로 잠길 터. 때문에 각국의 초인들과 교섭을 벌여 아토빌 공작님과 그의 아들이신 카디어스님, 그리고 블리어드 제국의 클라이언 공작님을 비롯하여 여기에 있는 두 분, 그리고 엘프 숲의 대장로님, 저와 골든 나이트까지 초인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 여덟 명을 끌 어들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여덟 명이자...... 허어! 놀랍군!" 엘의 말에 유클레이는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나직이 끄덕였다. 이미 5대 제국은 모두 루이아스의 손에 넘어갔을 거라 생각한 유클레이다. 그런데 아직 두 제국이 그의 마수에 무사했다는 점과 도합 8명의 초인이 한데 묶였다는 것에 놀라움을 느낀 것이다. 그것은 코린트와 멜뤼스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일찍부터 루이아스의 존재를 알아차린 유클레이와 합께 힘을 합하여 루이아스의 야욕을 막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을 해 왔다. 그래서 눈앞의 젊은 대마법사가 단시간 내에 이룩한 것 에 감탄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엘은 유클레이를 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여덟 명이 모였다고 하지만 아직 부족합니다. 아직 저 쪽에는 루이아스와 도합 아홈 명의 초인이 존재하니까요. 그래서 그를 견제하기 위해 남은 열세 명의 초인이 모두 힘을 합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인데...... 카르닐 공작님이 당하셨더군요." 유클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카르닐 공작뿐만이 아니네. 안티오네드 공작도 당했네." "안티오네드 공작님까지?" 엘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하니 안티오네드 공작까지 당했을 줄이야. 그렇다면 서부에 존재하는 그랜드 마스터는 모두 당한 것이 아닌가. 놀란 엘에게 유클레이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무래도 그쪽과 이쪽이 힘을 합할 것을 우려했나 보군. 열세 명의 초인이 힘을 합하게 되면 제아무리 루이아 스래도 골치가 아파지기 때문이지." "그렇겠군요. 그에게는 아직 멀정한 수많은 초인이 존재하니까요." 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그리고 궁금해진 듯 입을 열었다. "그런데 선배님은 언제부터 루이아스의 존재를 아시게 된 것입니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유클레이가 루이아스를 무척 잘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미 악연으로 얽혀 버린 엘로서는 유클레이가 어찌하여 루이아스를 잘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엘의 말에 유클레이는 잠시 침묵을 하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실...... 루이아스는 나의 할아버지라네." “,,,,,,!” 유클레이의 충격적인 선언에 엘은 물론 응접실에 있는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클레이는 무려 100살이 넘은 노마법사다. 그런 그의 할아버지라니? 그렇다는 건 최소 150살이 넘었다는 게 아닌가? 아니, 그건 둘째 치더라도 유클레이의 할아버지가 루이 아스라는 건 무척 충격적이었다. 유클레이가 말을 이어 나갔다. "대륙 그 누구도 내 나이를 모르지만 실은 내 나이는 올해 백이십이 넘었지. 그리고 루이아스는 이백 살이 넘었다네." "이백 살...... 그 정도라면 충격적이군요." 엘로서는 전혀 실감이 안 나는 나이였다. 인간이 무려 200살이라니. 여태까지 그 정도로 길게 살아온 인간이 있다는 걸 들 어본 적이 없다. 유클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충격적이겠지. 8클래스나 그랜드 마스터에 오른 이가 아무리 오래 살아도 이백 살을 넘기기 힘드니 말이네. 하지만 9클래스의 경지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이미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9클래스에 이른다면 능히 오백 살을 넘게 살 수 있다네." 정말 놀라운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인간이 500년 동안 살다니? 단명하는 엘프의 수명이 오백 년이라는 걸 감안하면 거의 엘프에 버금가게 사는 셈이다. "9클래스의 경지니 그것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요. 그런데 루이아스는 확실한 9클래스가 맞습니까?“ “확실한 9클래스라네. 이미 마스터의 경지에 접어들었지." "인간이 9클래스 마스터라니...... 전무후무한 경지겠군요." 엘은 루이아스의 엄청난 실력에 놀라며 고개를 선선히 끄덕였다. 여태껏 인간의 한계는 8클래스의 경지에 고착화되어 있었다. 과거 몇몇 9클래스 마법사가등장한 적이 있으나 마법 사들은 그것을 대부분 드래곤의 유희라 단정 지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몸으로 9클래스에 오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는 간단하다. 인간의 몸이라는 것이 어느 한계까지 버텨 내는 견고함을 지니고 있지만 9클래스 마법을 실현할 때 유동하는 마나를 인간의 몸으로 견뎌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의 몸으로 9클래스까지 오르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놀란 엘에게 유클레이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놀랍겠지. 하지만 루이아스는 정상적인 경로로 9클래스에 오른 것이 아니네." "예? 그렇다면......“ 엘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유클레이가 잠시 흠! 하더니 설명을 이어 나갔다. "비록 깨달음으로 9클래스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으나 인간의 연약한 몸으로는 결코 9클래스 마법을 전개할 수 없다네. 하지만 이야기를 바꾸어 보면 간단하지 9클래스 마법에 견뎌 내는 강인한 몸을 지니면 되는 것이 아닌가? 8클래스 로드의 경지에 거의 백 년간 머물렀던 루이아스 는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네, 그리고 과거 신검에 의해 강제 귀환된 마왕의 심장, 데몬 하트를 자신의 몸에 이식 했다네." "데몬 하트를......“ 거듭 놀라움이 이어졌다 데몬 하트라니! 과거 마왕의 심장을 이루었던 것이니 얼마나 강대한 힘을 지니고 있단 말인가? "루이아스는 데몬 하트를 자신의 몸에 이식함으로써 서서히 몸을 강화시켰지. 데몬 하트에는 엄청난 힘이 서려 있었기에 그것을 이식하면 인간의 몸은 그것에 적응하기 위해 서서히 강해지기 마련이네. 그렇게 오십 년 동안 데몬 하트를 견뎌 내기 위한 몸을 만들었고, 마침내 9클래스 마법을 전개할 수 있는 강인한 몸을 얻었네. 그것이 바로 지금의 루이아스라 할 수 있지." 정말 놀라운 사실이었다. 인간의 몸으로 마왕의 심장을 담다니! 제아무리 그 가능성의 한계가 없는 인간이라지만 이런 일은 일찍이 존재 하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루이아스는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것과 같았다. 데몬 하트는 말 그대로 마왕의 심장이니 그의 몸은 마족에 가까울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모든 사실을 안 엘은 무겁게 신음을 흘렸다. "음...... 그럼 더욱 일이 어려워지는 셈이겠군요. 9클래스를 이루기 위해 설마하니 그런 선택을 할 줄이야." "인간의 욕심은 무한한 법이지. 솔직히 내가 그 입장에 처하더라도 나도 그렇게 행동할 것이네. 그만큼 마법사에 게 있어 9클래스는 염원과도 같은 경지이기 때문이지." 유클레이의 말에 응접실에 존재하는 마법사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중 엘은 유클레이의 말에 생각에 잠겨들었다. 그는 유클레이가 말한 것을 떠올리며 여러 가지를 생각 하고 있었다. '9클래스에 이르기 위해서는 강한 신체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나는 7클래스에 오르면서 단전호흡에 의해 더욱 더 강한 육체를 지니게 되었다. 그렇다면 깨달음이 받쳐 줄 시 9클래스에 오를 수도 있다는 말인데...... 나중에 평화가 찾아온다면 수련에 몰두하여 한번 도전해 보는 게 좋겠군.' 엘은 생각에 빠져나오며 입을 열었다. "일단 루이아스는 마법사들로는 절대 대항할 수 없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엘에게 집중되었다. 엘은 자신이 겪었던 현상을 설명했다. "루이아스에게는 저주받을 마병 중 하나인 카르마 링이 있습니다. 모든 마나의 흐름을 역행시켜 버리기에 마법사들에게 있어 최악의 아티팩트와 다름이 없죠." 유클레이의 표정이 급변했다. "그런 것을 갖고 있다니......“ 그렇다면 상황은 최악이나 마찬가지다. 카르마 링은 제 아무리 9클래스 마법사 아니, 드래곤이라도 마나를 사용 할 수 없게 만드는 희대의 마병이자 아티팩트였기 때문이다. 엘은 책에서 읽은 내용을 떠올리며 간략하게 설명했다. "책에 나와 있는 전설에 따르면 카르마 링은 드래곤들이 전개한 봉인에 갇혀 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그의 손에 들어가 있다는 건...... 데몬 하트와 관련이 있을 확률이 높죠." "데몬 하트라......“ 데몬 하트가 언급될 때마다 아이넨스의 표정이 무겁게 변했다. 그것으로 루이아스가 9클래스의 경지에 이르고, 지금의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이 왠지 완벽한 조치를 취하지 못한 자신의 책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심정을 느낀 걸까? 엘은 아이넨스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지만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그것은 누구의 실수가 아닙니다. 단지 마법사로서 호기심이 지금에 이르게 한 것이니 괜히 자책하실 필요 없어요." 엘의 말에 아이넨스의 표정이 한결 풀어졌다. 아이넨스가 가볍게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고맙다." “당연한 일을 가지고......” 그때, 유클레이가 가볍게 손을 저었다. 그러자 마나가 움직이면서 온화한 흐름을 만들어 냈다. 순간 엘은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꼈다 그의 눈이 빛났다. '정신계 마법 인가?' 가볍게 주변을 환기시킨 유클레이가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일단 시급한 건 초인들 간의 확실한 통신망을 만드는 것이 되겠군." 그에 엘이 자신이 해 둔 것을 말하였다. "그건 제가 이미 조치를 취해 두었습니다. 여러 사람에 게 통신구와 스크롤을 주었습니다. 만약 위기에 처하게 된다면 그것을 사용하여 곧장 금탑으로 올 수 있게 모든 조치를 취해 두었지요." "일단 겉으로는 우리가 합류하는 형태로 하여 암묵적으로 집결 장소를 금탑으로 하겠네. 어디까지나 우리가 소수니 말이네." 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모두 각자 위하는 것이 있기에 이번 일에 가담한 것이지요. 거기에 다수와 소수를 가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멋진 말이로군." 엘과 유클레이가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엘이 코린트와 멜뤼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마 루이아스는 저희들이 눈치 챈 이상 더 일을 벌이려 하지 않을 거예요. 어차피 그에게 마법사들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이죠." "그렇겠군. 마법사가 힘을 못 쓴다라...... 정말 문제로군, 하다못해 마법을 봉인할 수만 있다면......“ ‘마법의 봉인이라?' 순간 엘은 뇌리에 무언가 번쩍 스쳐가는 충격을 느꼈다. 하지만 아직 확실하지 않은 것. 그랬기에 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무언가가 확실히 떠올랐기에 엘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차분히 유클레이의 이야기를 들어 나갔다. 서로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던 것. 그것이 합쳐지면서 전혀 새로운 관점으로 상대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무척 유익한 변화였다. 7. 금탑주를 사칭하는 사기꾼 백탑주 유클레이와 성공적으로 동맹을 맺은 엘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금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엘이 금탑주로 가자 많은 사람이 엘을 반겼다. "어서 와, 엘리!" 실피르부터 시작하여, "어서 오세요, 엘님." "너무 늦으셨어요." 출장 나간 남편을 다소곳이 받아들이는 듯한 세레나와 카이나의 태도, "탑주님, 명하신 명령을 완수했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매직 나이트들까지 말이다. 엘은 그들의 환대에 오랜만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반갑습니다, 여러분들. 응?“ 매직 나이트에게 시선을 주던 엘은 12명의 매직 나이트 중 한 사람이 부족함을 느끼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엘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마이더가 설명했다. "모스 대장님은 아직 조건에 부합되는 아이들을 찾아 내지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하기야 제가 내세운 조건이 쉽게 이룰 수 있는 조건이 아니지요." 확실히 자질이 뛰어나면서 고아인 아이를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안 나는 것처럼 고아이면서 자질 있는 아이들이 흔한 것도 아니니 말이다. "흐음, 하지만 시기가 촉박한데." 턱을 매만지며 고민했다. 지금 시기가 별로 좋지 않아 금탑의 소속원이라는 이유로 루이아스에게 공격을 받을 수 있다. 그랬기에 지금쯤이면 모두들 임무를 완수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자신의 요구가 예상외로 까다로웠던 것이다. "좋아. 어쩔 수 없지."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엘은 마침내 결심을 굳혔다. 모스를 돕기로 말이다. 엘은 실피르 등을 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모스 경을 도와야 할 것 같아. 그러니 길지는 않겠지만 기다려 줘." 그리고 아이넨스와 엘리엔에게 시선을 옮겼다. "제가 없는 동안 금탑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끄덕. 엘의 말에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안심하고 금탑을 떠날 수 있었다. 스팟! 텔레포트에 휩싸여 엘이 모습을 감추자 세레나와 카이나가 거의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야속해도 이렇게 야속한 사람이 또 없었다. 엘이 모습을 감추자 실피르가 앞으로 나서며 아이넨스와 엘리엔에게 말을 건넸다. “오랜 여행으로 지치셨을 거예요. 편안히 쉬세요."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 월트만 왕국은 대륙 북서부에 위치한 소국이다. 본래 대륙 북서부는 기름진 옥토가 많아 부유한 왕국이 상당히 많은 편이지만 월트만 왕국은 그런 왕국들에 비해 상당히 가난한 왕국이었다. 바로 기름진 평원을 인근 왕국들이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월트만 왕국은 북부에서 국력이 강한 축에 속하는 퓨린 왕국과 레이어드 왕국 사이의 요충지로서 국토의 90%가 간지로 이루어져 있다. 국토에 별다른 광물도 나지 않고, 단지 나라가 유지될 정도의 철광만 존재했기에 퓨린 왕국과 레이어드 왕국도 별다른 메리트가 없는 월트만 왕국을 침공하지 않았다. 그러했기에 철광에서 나는 철로 월트만 왕국은 유지되고 있었고, 인구가 채 10만도 되지 않는 월트만 왕국이 긴 세월 명맥을 유지할 수 있던 이유이기도 했다. "후, 탑주님의 명령이 이토록 어려운 거였다니." 월트만 왕국에서 몇 존재하지 않는 영지 중 하나인 하이엔 백작령에 위치한 여관에서 모스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엘의 명령을 받고 세상에 나와 자신의 뒤를 이을 만한 재목을 찾기에 바빴다. 그가 배정받은 영역은 레이어드 왕국을 시작으로 월트만 왕국과 퓨린 왕국까지였다 지난 몇 달 동안 그는 세 국가를 돌아다니며 엘이 내세 운 조건에 걸맞은 인재를 찾기에 바빴지만 한 명도 찾지 못했다. 자질이 뛰어나면서 고아인 아이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것은 못한 것. 더군다나 다른 매직 나이트들은 모두 임무 수행을 완료했는데 자신 혼자 실패를 하다니...... "후, 운이 나쁜 거라고 하기에는 차마 변명도 안 되겠군." 끼익. 그가 자조적인 웃음을 짓고 있을 때, 여관 문이 열렸다. 여관 안에 들어온 이는 젊은 청년이었다. 평범한 여행복을 입었지만 준수한 얼굴에 금발, 거기에 푸른 눈......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의 모습이었기에 모스는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탑......” "쉿!" 재빨리 모스의 말을 가로막은 엘이 손을 저어 보이자 말을 끝맺지 않았다. 모스는 엘이 자신의 맞은편에 털썩 앉자 한껏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여기는 어쩐 일로......" “모스 경이 고생한다는 말을 들어서 말입니다. 마침 할 일을 모두 끝마친 참이라 도우러 왔습니다."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엘이 빙긋 웃음을 지었다. 편안한 미소였다. 전혀 자신을 책망하지 않는 엘의 태도에 모스는 절로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후!" 모스는 그런 엘의 모습에 절로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실 그는 그동안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데에 적잖은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엘은 시원한 차 한 잔을 한 모금에 비워 내고는 들이켜며 말했다. "일단 주변을 둘러보도록 하지요. 제가 내세운 조건은 반드시 지켜야 할 전제 조건이 아니니까요. 어느 정도 융통성을 보인다면 금방 조건에 부합되는 아이를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엘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모스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이엔 백작령은 분지에 위치해 있었는데, 이곳에 대부분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엘과 모스는 하이엔 백작령 곳곳을 둘러보았다. 주로 빈민가 쪽을 둘러봄으로써 부합되는 인재를 찾아보려 했으나 자질이 뛰어난 아이는 없었다. 워낙 좁은 영지여서 하루 만에 모두 다 둘러볼 수 있었다. "과연, 힘든 일이었겠군요." 처음 만났던 여관에 마주앉은 엘이 쓴웃음을 지었다. 검을 다루는 기사가 아닌 엘로서는 누가 자질이 뛰어난 지 한눈에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대신 마나에 대한 자질이 뛰어난 아이들을 알아볼 수 있었는데, 그나마 오늘 본 아이들 중 그런 아이들도 없었다. 출신이 미천하면서 자질이 뛰어난 것. 그런 경우는 거의 없던 것이다. 엘은 오늘 왜 평민 출신 소드 마스터가 그렇게 드문지 이해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노릇이지.' 엘은 모스를 바라보며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모스는 매직 나이트의 대장이다. 매직 나이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으며, 통솔력이나 그 밖의 것도 매직 나이트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 그런 그가 엘이 내린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다면 알게 모르게 후일 그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그것은 결코 엘이 바라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엘로서는 반드시 자질이 뛰어난 아이를 찾아 모스의 체면을 세워 주어야 했다. 모스는 엘이 생각에 빠진 모습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 "탑주님께는 송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제가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여 이런 일을 하게 만들고......“ “음, 아니에요. 단지 제가 돕고 싶어서 그런 것이니 모스 경은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되요." 엘의 말에 모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둘이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을 때, 식당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야기의 내용은 놀랍게도 엘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봐, 이곳 하이엔 영지에 금탑주가 왔다면서?" "월트만 왕국에 볼일이 있다면서 왔다더군." "허어, 금탑주 같은 인물이 어째서 이런 척박한 왕국에......“ 그들의 이야기에 엘과 모스의 귀가 쫑긋 섰다. 엘은 속으로 경악했다. ‘내가 이곳에 온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도대체 누가 퍼뜨린 거야?’ 금탑의 일원들에게만 일러두고 왔는데 설마하니 저런 평범한 상인들이 자신이 이곳에 온 것을 알고 있다니. 엘은 순간 루이아스의 정보망이 금탑 안쪽까지 뻗어 있나 생각하며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그러나 다음 말을 들은 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런데 금탑주가 무슨 볼일로 하이엔 백작님을 방문 한 거지? 제국에서도 능히 후작과 동급의 대우를 받는 금탑주가 이런 척박한 곳에......" “뭐든지 뭐에 쓰려면 필요한 곳이 있는 게 아닌가? 하이엔 백작님은 작은 영지를 다스리고 있다 해도 국왕 전하와 친분이 있으니 이곳을 방문한 것일 수도 있지." “그런데 어떻게 금탑주인 것을 안 것이지? 사칭하는 사기꾼일 수도 있지 않은가?" “말도 말게. 의심하는 기사들 앞에서 무려 일곱 가지 마법을 동시에 캐스팅했다는 게 아닌가? 그 정도 실력에 젊은 외모라면 금탑주가 틀림없겠지." 이야기를 들어 본 엘은 자세한 정황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사칭하고 이곳 하이엔 영지에 방문한 것이다. 엘은 전생에서 겪어 봤던 것을 이곳에서도 겪자 새로운 기분이 들었다. '전생에서도 나를 사칭하던 게이머가 많더니 이곳도 그리 다르지 않군. 하기야, 대부분 금탑에 머물고 있다고 알려진 나는 사칭하기에 최고의 대상이지. 그나저나, 그런 대담한 행동을 하는 게 누구지? 한번 보고 싶군.' 이상하게 분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리 좋은 기분도 아니었기에 엘은 약간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엘에게 모스가 강한 기세를 담은 어조로 말했다. "누군가가 탑주님으로 행세하고 사기를 치고 있나 보군요. 당장 찾아가서 본때를 보여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모스의 말에 엘은 손을 살짝 저었다. "아니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도대체 무슨 이유로 절 사칭하는지 궁금하긴 하군요." 엘은 사기꾼에게 화가 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측은함이 들었다. '나를 사칭하다가는 루이아스의 손에 무사하지 못할 텐데 굳이 내가 손을 쓸 필요는 없지,' 하지만 궁금했다. 도대체 자신을 사칭하는 존재가 누구인지. 엘은 모스를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한 번쯤 확인해 보는 게 좋겠군요. 불법이지만 하이엔 백작 저택에 한번 잠입해 볼까요?“ 모스가 고개를 숙였다. “탑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한번 가 보죠." 여관을 벗어난 엘은 곧장 하이엔 백작이 머물고 있는 저택으로 향했다. 워낙 작은 영지라 약 10분여를 걷자 하이엔 백작의 저택이 보였다. 저 멀리 정문에 보초를 서고 있는 병사들이 보였기에 엘은 자신과 모스에게 투명화 마법을 전개했다. "인비저빌리티!" 마법의 전개과 함께 엘과 모스의 모습이 주변 환경에 완전히 동화되었다. 인비저빌리티가 완전히 전개되었음을 확인한 엘은 플라이 마법으로 자신과 모스를 끌어올려 가볍게 하이엔 백작의 저택으로 잠입할 수 있었다. 행여 소드 마스터 같은 이가 있다면 엘과 모스의 기척 을 알아차렸을 수도 있지만 엘은 그것까지 염두해 두고 기척 차단 마법까지 걸어 놓은 상태였다. 물론 하이엔 백작가에는 소드 마스터는커녕 모스보다 뛰어난 실력을 지닌 기사도 없었다. 저택 안으로 들어선 엘은 곧장 집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미 여러 번 귀족가의 저택을방문했기에 어디에 집무실이 있는지 파악하는 건 간단했다. 집무실 앞에 이르자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엘은 살짝 문을 열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집무실 안에는 40대 초반의 중년인과 금색 로브와 후드를 눌러써 얼굴을 가리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얼펏 보기에도 20대 중반을 넘지 않아 보이는 모습, 엘은 그가 자신을 사칭하는 가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중년인, 하이엔 백작은 금탑주를 사칭한 가짜의 이야기를 들으며 연방 놀라움을 표했다. "오! 그래서 아인하트 후작님과 글레톤 님을 꺾을 수 있었던 것이군요." 가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무척 강했습니다. 하지만 기존의 마법과 전혀 다른 체제를 세운 저에게는 모자람이 있었지요." 가짜는 마치 자신이 진짜 금탑주인 것처럼 여러 가지 상황을 실감나게 하이엔 백작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대부분 사실이었던 것이어서 엘로 하여금 놀라게 하였다. '이 사람 날 언제 본 적이 있던가?‘ 아인하트 후작과 글레톤, 둘과 겨룬 이야기가 끝나고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골든 나이트와 클라이언 공작의 대결로 넘어갔다. 가짜는 유창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골든 나이트는 본인의 모든 마법 정수가 총 망라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누가 조종하지 않는 무인 골렘이면서 그랜드 마스터와 대등한 실력을 지닐 수 있게 된 것이죠." 누가 보면 진짜 금탑주라고 의심치 않을 말을 가짜는 정말로 자신이 겪었던 일인 것처럼 늘어놓았다. 그것이 워낙 실감났기에 하이엔 백작은 시시각각 다른 반응을 보이며 연방 감탄사를 토해 놓기에 바빴다. "정말 대단하군요! 그런데 금탑주님, 제가 그 골든 나이트를 한번 보고 싶은데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무척 난감한 질문이었다. 왜냐하면 가짜에게 골든 나이트가 있을 리 없었기 때문이다. 가짜는 익숙하다는 듯, 하이엔 백작의 말을 받았다. "보여 드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아직 다이어드 공작과의 대결에서 입은 파손이 회복되지 않아 보여 드리기 여의치 않습니다." "그것은 이미 한참 전의 일이 아닙니까?" 하이엔 백작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가짜가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은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랜드 마스터 에 이르면 이미 그 오러의 위력은 전설상의 드래곤 본도 파괴할 수 있는 엄청난 위력입니다. 그만큼 대단한 파괴력이지요. 제아무리 골든 나이트가 자체적인 수복력을 지니고 있다 해도 그랜드 마스터의 오러에 당한 이상 수복에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때마침 거의 다 수복되었으니 나중에 하이엔 백작님에게 보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기약 없는 말이었지만 그 말에 하이엔 백작은 기쁜 표정을 지었다. 금탑주가 다시 방문해 준다는 것은 그만큼 기쁜 일이었다. "그렇게 해 주시기만 한다면 본인은 영광 또 영광입니다." "하하,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닌데 너무 고마워할 필요 없습니다.“ 엘은 하이엔 백작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는 가짜를 보고는 할 말을 잃었다. 도대체 얼마나 담이 큰 자란 말인가 제아무리 소국의 백작이래도 백작은 백작이다. 엘은 하이엔 백작 앞에서 뻔뻔스레 거짓말을 늘어놓는 가짜를 보며 차마 화내는 것조차 잊은 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모스는 그렇지 않은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듯한 모습이었다. 엘은 그런 모스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재빨리 그를 제지하였다. 여기서 모습을 드러내 봤자 좋을 것 하나 없다는 판단에 의해서다. 엘은 메시지 마법으로 자신의 생각을 모스에게 전달했다. -지금 우리는 무단 침입을 한 상태예요. 여기서 정체를 밝혀 봤자 진실을 들어 주기는커녕 오히려 우리가 오해를 받을 공산이 커요. 엘의 논리정연한 말에 모스는 흥분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가짜와 하이엔 백작은 이야기를 끝낸 듯했다. 막 자리에 일어서려던 가짜. 그러나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온 기사로 인해 엉거주춤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냐?“ 갑자기 들어온 기사를 보며 하이엔 백작이 입을 열자 기사가 짧게 숨을 고르고는 말했다. "백작님, 지금 저택 밖에서 금탑주님에게 도전하겠다는 자가 나타났습니다." "뭣이?“ 하이엔 백작의 얼굴에 분노가 서렸다. 금탑주는 당금 9명밖에 존재하지 않는 8클래스 마법사 중 한 사람이다. 그런 자에게 도전이라니? 금탑주와 맞서 싸울 만한 존재는 동급의 8클래스 마법사나 그랜드 마스터밖에 없다. 하이엔 백작의 분노한 표정을 본 기사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것이...... 금탑주님에게 도전하는 마법사가 다름 아닌 스톰 메이지입니다." "뭐라? 스톰 메이지?“ 하이엔 백작의 얼굴에 놀라움이 서렸다. 스톰 메이지는 대륙에 100명이 약간 넘는 7클래스 마법사 중 한 사람이다. 물론 그것만이라면 금탑주에게 도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자격이다. 그러나 스톰 메이지는 그것보다 더욱 큰 가치를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바로 스톰 메이지는 불과 20대에 7클래스의 경지에 이른 천재 중의 천재였기 때문이다. 그는 대왕국 중 하나인 카시아스 왕국 출신으로 어렸을 적부터 천재적인 재능을 보여 이십 대 중반에 7클래스의 벽을 돌파했다. 만약 금탑주 엘리미스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모든 관심은 그에게 돌아갔을 정도로 당금 대륙의 기대를 한데 모으고 있는 천재 중의 천재였다. 그런 천재가 금탑주에게 도전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하이엔 백작의 시선이 가짜에게 향했다. 그의 눈에는 한껏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그는 기대감에 찬 어조로 말했다. "스톰 메이지가 도전을 했는데 어떻게 하실 겁니까, 금 탑주님?“ 저렇게 기대에 찬 눈을 보내면 응당 기대에 부흥해 주는 것이 사람의 도리다. 하지만 가짜는 그런 하이엔 백작의 시선을 외면했다. 가짜인 그로서 7클래스의 경지에 이른 스톰 메이지를 이길 수 있는 실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본인은 얼마 전 겨뤘던 적탑주와의 대전으로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고 전해 주십시오. 몸이 온전해지거든 한 수 가르쳐 주겠노라고." 이런 말을 했으면 응당 고개를 끄덕이고 나가야 했지만 기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기사는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스톰 메이지께서 말하길, 금탑주가 그런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본인이 8클래스 마법사에게 가르침을 받고 싶어 그러니 부디 거절하지 말아 달라고 하셨습니다." "으음......“ 가짜가 신음을 흘렸다. 눈치가 빠른 가짜로서는 더 이상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골든 나이트를 보여 달라는 요구와, 방금 전 실력 행사를 거부함으로써 하이엔 백작과 기사의 눈에 의심이 서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데 어쩌랴. 그들의 눈빛에 가짜는 승낙하는 수밖에 없었다. "후우, 어쩔 수 없군요.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말에 기사가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스톰 메이지께 말을 전하겠습니다." "허허, 여기서 금탑주님의 실력을 견식하게 되다니, 무척 영광이로군요." 기사는 물론 하이엔 백작도 기대에 찬 표정을 지어 보였다. 8클래스 마법사가 실력을 선보이는 것은 아무데서나 볼 수 없는 진귀한 장면이다. 그런데 오늘 8클래스 마법사의 실력을 볼 수 있게 되다니. 정말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자, 그럼 가시지요." 가짜는 하이엔 백작이 이끌자 어쩔 수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런 가짜의 모습을 엘이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8. 스톰 메이지,게드릭 하이에 백작이 가짜를 안내한 곳은 기사들이 수련하는 연무장이었다. 본래 기사들이 수련해야 하는 용도지만 그는 기꺼이 마법사들 간의 대결에 이곳을 제공했다. 연무장이 부서질 가능성이 농후했지만 8클래스 마법사의 실력을 견식한다는 것은 모든 단점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금탑주와 스톰 메이지가 대결을 한다는 말에 하이엔 백작의 모든 식솔들과 기사들이 연무장에 모여들었다. 하이엔 백작은 2명의 부인과 슬하에 5남3녀를 두고 있었다. 그중 한 아이가 무척 반짝반짝하는 눈으로 연무장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바로 하이엔 백작의 막내아들 티란이었다. 티란은 하이엔 백작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금탑주님과 스톰 메이지님의 대결을 좀 더 앞에서 보고 싶은데 안 될까요?“ 티란 딴에는 무척 용기를 낸 것이었지만 하이엔 백작은 매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 네가 기사 정도의 실력을 지녔다면 모를까 넌 아직 아무것도 못하지 않느냐." 하이엔 백작의 태도는 무척 싸늘한 면이 있었다. “......네." 그런 그의 태도에 티란은 풀이 죽은 얼굴로 뒤로 물러났다. 물러나는 티란의 모습을 보며 형제들이 이죽거렸다. "천한 신분 주제에 중요한 대결은 알아 가지고는......“ "형, 그렇게 말하면 다 들려." "들려도 상관없잖아?" 형제들의 말을 들은 티란은 더욱 풀이 죽은 채 뒤로 물러나야 했다. 티란은 하이엔 백작의 아들이지만 그의 어미의 출신이 천했기에 하이엔 백작가에서는 애물단지와 같은 존재였다.만약 티란의 자질이 뛰어났다면 모르겠다. 하이엔 백작의 아들들이 모두 뛰어난 자질을 지녀 나이 대에 비해 상당한 검술을 익혔다. 그에 비해 티란의 자질은 보통에서 조금 뛰어난 정도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의 어머니가 천한 출신이라는 것에 형제들은 사사건건 걸고 넘어져 티란은 매일 책이나 읽는 신세였다. 하지만 티란에게는 한 가지 꿈이 있었다. 바로 기사가 되는 것. 주군에게 충성을 하고 기사도를 지키며 약한 자와 여자를 위하며 악에 맞서는 기사는 티란의 꿈과도 같았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가문의 지지가 필요하다. 모든 경제생활을 등한시한 채 오로지 수련에 몰두해야 했기 때문이다. 우선 체질에 맞는 검술을 구해야 하고, 때때로 막힌 벽을 헐어 내기 위해 마나를 보유하고 있는 영초와 기사의 품위를 지키기 인한 비용이 필요했다. 그런 것 하나하나가 어마어마한 자금을 필요로 했기에 범재에 불과한 티란에게 애당초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풀이 죽은 티란의 모습을 보며 연무장 한편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엘은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스톰 메이지다!" 한 기사의 외침과 함께 연무장 위로 스톰 메이지가 등장했다. 스톰 메이지는 대륙에 알려진 대로 20대 후반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눈빛은 날카로웠으며, 발산하는 기세는 마치 기사처럼 날카로운 예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는 오연한 태도로 연무장에 버티고 서 상대인 금탑주가 등장하길 기다렸다. "금탑주다!" 장내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한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금빛 로브를 걸친 가짜가 느릿한 걸음으로 연무장 위를 오르고 있었다. 후드를 눌러써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소문대로라면 그는 20대 초반인 것이 확실했다. 그의 드러난 피부는 20대의 그것처럼 젊었던 것이다. 가짜가 스톰 메이지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대가 나에게 도전한 마법사인가?“ 가짜의 말에 스톰 메이지의 입가가 실룩였다. 그리고 비틀린 채로 말아 올라가며 물었다. "뭐야 날 모르는 건가? 꽤 오랜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고 그때의 모습 그대로일 텐데?" “......?” 스톰 메이지의 말에 가짜는 한순간 아무런 말도 못했다. 상대가 머뭇거리자 스톰 메이지의 눈매가 말려 올라갔다. "난 네가 금탑주임을 믿지 못하겠군. 나에게 증명을 해보아라.“ 스톰 메이지의 말에 가짜의 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뭣이......지금 나의 정체를 의심하는 건가?" “세상에 가짜는 많지 않나? 왜, 증명하기가 어렵나?" “흥, 상상도 못할 마법을 보여 주지. 너 따위 7클래스 마법사들이 감히 흉내 내지 못할 고위 마법의......” 금탑주가 가볍게 손을 휘젓자 순간 7개의 작은 구가 생겨났다. 그것은 제각각 다른 색을 띠고 있었는데, 모두 일곱 빛깔을 띤 아름다운 구였다. 7개의 구는 가짜를 중심으로 빠르게 회전했다.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이었기에 구경하는 사람들 모두가 감탄사를 흘렸다. "오오!" “......” 모두가 놀라고 있건만 스톰 메이지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가짜가 전개한 마법이 사라지자 비웃으며 말했다. "지금 그걸로 날 속이려 한 건가? 정말 어이가 없군." 스톰 메이지가 분노한 표정을 지었다. "고작 2클래스 라이트 마법에 눈속임 효과를 첨가하면 내가 지레 겁을 먹고 항복할 거라 생각했나?“ 가짜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분노한 스톰 메이지의 전신에서 진한 살기가 주욱 뿜어 져 나왔기 때문이다. 파앗! 순간 가짜의 앞에 엄청난 기세를 머금은 화염이 쏘아지다가 바로 가짜 앞에서 흩어졌다. 오금을 저리게 하는 장면이었기에 구경하던 모든 존재들이 가슴 한구석 섬뜩해져 옴을 느꼈다. 사람들은 금탑주가 스톰 메이지의 무례한 도발에 곧장 대응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상황은 그들의 예상과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털썩! 스톰 메이지의 무례한 태도에 금탑주가 분노하기는 커녕 오히려 바닥에 주저앉은 것이다. 그는 부들부들 떨며 스톰 메이지에게 애걸했다. "사, 살려 주십시오." “......” 장내에 모인 사람들은 한순간 가짜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저게 무슨 행동이란 말인가? 금탑주가 왜 주저앉는단 말인가? 의아한 기색을 띠고 있던 그들의 얼굴에는 곧이어 분노가 서렸다. 가짜가 진실을 밝혔기 때문이다. "저, 저는 금탑주를 사칭한 가짜입니다. 부디 용서를......“ 모든 사람들의 분노가 자신에게 쏠리자 가짜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애원했다. 제아무리 소국의 백작이래도 백작은 백작이다. 자신을 기만한 대가로 얼마든지 상대방의 목을 날려 버릴 수 있는 존재가 바로 그였던 것이다. 하이엔 백작이 뭐라 하기도 전에 스톰 메이지의 싸늘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나를 속여 이곳까지 발걸음을 하게 해 놓고 말이 많군. 그 죄는 죽음으로 갚아라." 파앗! 스톰 메이지의 손에서 강렬한 바람의 기운이 모이더니 가짜에게 쏘아졌다. 바람의 칼날, 윈드 커트가 가짜에게 전개된 것이다. 만약 막지 못하면 가짜는 그대로 목이 잘려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라. 변변찮은 2클래스 마법사인 가짜로서는 윈드 커트를 막아 낼 능력이 없었다. "히익!" 비명을 지르며 눈을 질끈 감은 가짜. 날카로운 바람의 칼날이 자신의 목을 자를 거라 생각하던 그의 귀에 들려온 건 둔탁한 소리였다. 카앙! “......” 두려움에 빠진 가짜가 살며시 눈을 뜨니 반투명한 막이 가짜의 앞에 생겨나 윈드 커트를 막아 내고 있었다. 강력한 실드의 위력에 윈드 커트는 주인의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채 소멸되었다. "이건?“ 자신의 마법이 막히자 스톰 메이지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곧이어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외쳤다. "누구냐! 누가 나의 마법을 막아 낸 것이냐! 모습을 드러내라!" "오랜만이군, 스톰 메이지. 아니, 게드릭이라 불러야 하나?“ 스르륵! 스톰 메이지의 앞에 유령처럼 한 청년이 등장했다. 금색 로브를 둘러쓴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진 청년. 사람들은 청년이 쓰고 있는 안경을 보고 그가 누구인지 단번에 유추할 수 있었다. "금탑주!" "오랜만이군, 게드릭." 엘은 스톰 메이지, 아니 게드릭을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몸을 숨기고 있던 엘은 스톰 메이지를 보는 순간 화들짝 놀랐다. 왜냐하면 스톰 메이지는 다름 아닌 과거 반자크 마탑에서 만났던 게드릭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실피르는 돈을 벌기 위해 반자크 마탑에 여러 가지 일을 받아 그 대가로 엘과 살아가고 있었다. 그때 실피르가 반자크 마탑에서 주로 접선하던 것이 바로 부탑주 베클록이었는데, 그는 아름다운 실피르를 마음에 두고 여러 가지 일을 준 것이다. 그런 베클록의 아들이 바로 게드릭이었는데, 당시 12살 이었던 그는 1클래스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만든 천재였다. 베클록은 그런 아들을 보여 줌으로써 실피르가 스스로 자신에게 오도록 하게 하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당시 8살 이었던 엘이 게드릭보다 더욱 강력한 마법을 전개함으로써 그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어렸을 적 12살에 불과한 나이로 1클래스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게드릭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존재가 바로 자신인 줄 알았다. 때문에 극도의 오만에 빠져 있었으며, 세상이 모두 자신의 아래처럼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때 그의 착각은 불과 8살에 불과한 소년에 의 해 깨지게 되었다. 12살인 자신에 비해 훨씬 강력한 마법을 전개해 보이던 엘에게 그는 자존심에 엄청난 상처를 입은 것이다. 그때부터 게드릭은 모든 자만심을 버린 채 불철주야 수련에 몰두하게 된다. 그리고 20대 초반에 6클래스에 올랐을 때 그는 자신감을 회복했다. "됐어! 이십 대에 6클래스에 오른 건 나밖에 없어!" 그는 지난날 상처 입은 자신의 자존심을 회복하고자 엘을 찾았다. 그러나 엘은 이미 반자크를 떠난 상태였다. 얼마 후, 게드릭은 놀라운 사실을 듣는다. 최연소 7클래스 마법사의 등장! 그것이 엘임을 깨달은 게드릭은 심각한 자괴감에 빠졌다. 자신이 6클래스의 경지에 올라 자신감에 가득 차 있는 동안 엘은 그랜드 마스터와 자웅을 겨룰 수 있는 나이트 골렘을 만들어 냈으며, 대륙에 단 100여 명밖에 없다는 7클래스 경지에 올랐기 때문이다. "엘을 따라잡기 전까지 절대 다른 일은 안 하겠다!" 게드릭은 브리온의 반자크 마탑의 부탑주가 되어 달라는 말을 거부한 채 기약 없는 수련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수련에 몰두하길 몇 년.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게드릭은 마침내 7클래스의 경지에 오르게 되었다. 마침내 엘과 동등한 경지에 오르게 되었다고 기뻐하던 게드릭에게 들리는 소문은 더욱 참혹했으니...... 금탑주 엘리미스는 황탑주 게이런즈를 꺾고 적탑주 카로스만을 이겼다! 황탑주와 적탑주는 당금 대륙에 10명밖에 없다는 8클래스 마법사다. 그런 존재를 꺾었다면 엘 또한 8클래스의 경지에 올랐다는 뜻. 그 소문은 게드릭으로 하여금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었다. "나는 금탑주를 뛰어넘을 수 없단 말인가?“ 7클래스와 8클래스는 그 수준이 다른 경지다. 6클래스에서 7클래스로 넘어가는 건 평생의 노력으로 가능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8클래스로 넘어가는 건 평생 노력해도 불가능한 경지 였기 때문이다. "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련을 가겠다!" 게드릭은 사방에서 모여드는 파티 초대와 혼인 제의를 모두 거절한 채 대륙을 여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부에 산재해 있는 마탑주들에게 도전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번번이 패하기 일쑤였으나 경험이 쌓이고 쌓이면서 차츰 승리하는 횟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잔인하지만 냉정하고 카리스마 있는 그의 모습은 그를 따르는 수많은 존재들을 만들어 냈고, 사람들은 거침없는 행보를 보이는 게드릭에게 스톰 메이지라는 칭호를 만들어 주었다. 20대 중반에 7클래스에 올라 3년 동안 대륙을 떠돈 게 드릭은 마침내 7클래스 마스터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그는 엘에게 도전하기 위해 금탑으로 향했다. 하지만 엘은 이미 금탑을 떠나 대륙 각지를 여행하는 중이었다. 할 수 없이 게드릭은 금탑주에게 도전하는 것을 다음으로 미루고 각지를 떠돌던 중에 마침 월트만 왕국 하이엔 백작령에 금탑주가 머물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것이다. 어렸을 적 악연이라면 악연이 남아 있었기에 자신의 얼굴을 기억할 것이 분명한데 가짜가 자신의 얼굴을 못 알아보자 그는 단번에 가짜임을 알아차렸다. "감히......금탑주를 사칭하다니!" 분노한 그는 가짜를 가차 없이 제거하려 하였다. 그때 나타난 젊은 청년 마법사, 그는 바로 금탑주 엘리미스였던 것이다. 게드릭은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엘을 응시했다. 엘은 그에게서 뜨거운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너와 겨루기 위해 금탑을 찾아가고 여러 곳을 떠돌았다. 운이 좋았던지 마침내 이곳에서 만나게 되었구나." "확실히 오랜만이군, 반자크에서 만났을 때가 마지막 이었으니까." 엘은 틱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당시 게드릭이 자신에게 보낸 도전적인 눈빛을 기억하고 있었다. 불과 몇 년 전이었건만 그는 수련에 수련을 거듭하여 마침내 최강의 도전자로 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겠지. 나 게드릭! 금탑주인 너에게 도전하고 싶다." 엘은 게드릭의 뜨거운 열정을 느끼며 빙긋 웃었다. "나와 대결하기 위해 대륙을 떠돌았는데 그 정도는 해 줘야겠지." 그렇게 말한 엘은 하이엔 백작에게 시선을 옮겼다. 하이엔 백작은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가짜임이 드러나 응당 분노를 해야 하는데 갑자기 진짜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는 스톰 메이지와 아는 사이인 듯했다. 도저히 정리되지 않는 상황이었기에 복잡한 표정을 짓 는 것이다. 엘은 그런 하이엔 백작을 보며 간단하게 상황을 정리해 주었다. "저는 이곳 근처를 지나던 도중 제가 이곳에 머물고 있다는 소문에 잠시 들려 본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 스톰 메이지와 면식이 있고, 비록 저를 사칭했다고 하나 사람이 죽는 걸 두고 볼 수 없기에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아......예! 그러시군요." 엘의 말에 하이엔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 하니 엘이 갑자기 나타나고, 스톰 메이지와 이야기를 나눈 내용이 모두 이해가 되었다. "부득이하게 스톰 메이지와 이곳에서 대결을 하게 되었군요. 연무장이 파괴되더라도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무, 물론입니다." 아직 얼떨떨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하이엔 백작을 보며 엘은 이번에 뒤쪽으로 물러난 티란에게 시선을 주었다. 티란은 자신에게 시선을 주는 엘을 보며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엘은 자상한 어조로 물었다. "아까 앞에서 보고 싶다고 했지?" “네? 네, 네......” 당황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티란을 보며 엘은 웃음을 지었다. "앞으로 나와서 봐도 된단다. 너는 저분께서 보호를 해 줄 테니 말이야." 엘이 한쪽을 가리키자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한다. 그곳에는 모스가 서 있었다. 모스는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되자 정중하게 예를 취해 보였다. "금탑 소속 매직 나이트 모스라고 합니다." "오오......“ “매직 나이트......” 매직 나이트란 말에 모두가 눈을 반짝였다. 특히 티란의 눈이 더욱 반짝였는데, 기사가 꿈이었던 그에게 매직 나이트는 꿈에서나 바라던 환상의 기사였기 때문이다. 한 번이라도 꼭 보고 싶었는데 지금 이 자리에서 보다니 무척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티란은 약간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모스에게 다가갔다. 그는 모스를 보며 어물어물 입을 열었다. “매, 매직 나이트를 뵈어요." 순진한 티란의 모습에 모스는 웃음을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앞에서 보고 싶다고 했으니 나를 따라오렴." 모스는 티란을 보는 순간 엘의 의도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검을 익히기 위한 재능은 보통에서 약간 뛰어난 정도였지만 티란에게는 반드시 기사가 되고 싶어 하는 열의가 보였다. 때로는 열의가 재능을 뛰어넘는 법. 모스는 그것을 단번에 간파한 것이다. ‘탑주님께서는 이 아이를 매직 나이트로 들이시고자 하는 것이로군.' 나직이 고개를 끄덕인 그는 티란을 데리고 비교적 연무장에서 가까운 곳으로 향했다. '내 의도를 바로 알아차리다니, 모스 경도 눈치가 제법 인걸?‘ 엘은 모스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살짝 웃고는 완벽 한 안전을 위해 골든 나이트를 소환했다. “타나!" 엘의 외침에 그의 뒤에 공간의 균열이 일어나며 기괴한 소리를 흘리기 시작했다. 키이잉! 키이잉! 치이잉! 치이잉! 세로로 3m가량 쭉 벌어진 아공간에서 황금빛 나이트 골렘이 등장했다. 바로 오늘날 금탑주의 수호 기사로 자리매김한 골든 나이트의 등장이었다. “......” 골든 나이트의 등장에 모두가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게드릭조차 할 말을 잃은 채 골든 나이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엘은 골든 나이트에게 명령을 내렸다. “타나! 지금부터 연무장 밖으로 튕겨져 나오는 모든 마법을 해소시켜!" -주군의 명. 령을 받겠. 습니다. 처음 두 글자에서 이제는 네 글자씩 끊어 말할 수 있게 된 골든 나이트였다. 골든 나이트까지 소환한 엘은 자신을 사칭했던 가짜에게 시선을 주었다. 가짜의 안색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가 비록 금탑주를 사칭했지만 막상 진짜를 보니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을 사칭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 그가 과연 사칭한 자신을 어떻게 할 것인가? 여러 결과를 생각해 봤지만 그 결말은 모두 끔찍한 것이었다. 엘은 그를 바라보며 무감정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은 저쪽에 가 있도록. 이 대결이 끝난 뒤 당신을 어떻게 할지 결정하겠어." "아, 알겠습니다." 당장 죽이지는 않으니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다. 가짜가 부랴부랴 연무장 아래로 내려가자 엘은 게드릭을 보며 말했다. "자, 그럼 이제 대결할 준비가 완료되었군." "정말 요란하기 그지없군. 예전 그대로야," 게드릭의 말에 엘이 콧잔등을 만지며 약간 쑥스러워했다. 그가 말하는 예전이란 바로 처음 만났을 때를 말하는 것임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때 엘은 실피르가 실의에 빠지지 않게 게드릭보다 몇 배는 강력한 마법을 전개했다. 게드릭은 지금 그것을 꼬집고 있는 것이다. "뭐 성격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니...... 내가 클래스가 더 높으니 선공을 양보하는 게 좋겠지?" "물론." 게드릭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를 취했다. 엘 또한 감히 경시하지 않은 채 게드릭을 경계했다. 사라랑! 게드릭의 손에 작은 미풍이 이는가 싶더니 이내 무시무시한 폭풍이 되어 엘을 휩쓸어 갔다. "흐음!" 엘은 게드릭이 마법을 전개하는 모습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곧장 손을 뻗어 마법을 전개했다. "실드." 엘의 손에 반투명한 막이 생겨나며 폭풍과 부딪쳐 나갔다. 하지만 폭풍은 어디까지나 눈을 속이기 위한 마법에 불과하다. 폭풍 속 숨겨진 바람의 칼날의 존재를 알아차린 엘은 실드를 유지한 채 곧장 손을 뻗었다. 파지직! 금빛 뇌전에 팔에 아른거리며 곧장 직선으로 뿜어져 나갔다. 강렬한 파괴력을 머금은 뇌전은 단번에 바람의 칼날을 부숴 버렸다. "쳇!" 자신의 공격이 허무하게 실패로 돌아가자 게드릭이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손을 자우로 교차했다. "플레임 애로우." 수십 개의 불꽃 화살이 엘의 시선을 교란시키며 어지럽게 쏘아졌다. "내 앞에서 물량을 논하다니." 엘은 자신에게 쇄도하는 플레임 애로우를 보며 빙긋 웃음을 지었다. 곧이어 그의 주변에 수백 발의 매직 애로우가 생겨났다. 극도의 마나 호응이 아니고서 펼쳐 낼 수 없는 절대적 인 신기였다. 파바바밧! 수십 발의 플레임 애로우와 수백 발의 매직 애로우의 대결은 뻔한 결과를 보여 주었다. "큭!" 시간을 벌기 위해 전개했던 플레임 애로우가 허망하게 사라지고 도리어 매직 애로우가 전역을 뒤덮자, 게드릭은 재빨리 실드를 전개했다. 하지만 그것은 게드릭의 실책이었다. 마나 호응이 좋은 엘의 마법 위력은 기존의 마법보다 월등히 강한 위력을 지니고 있던 것이다. 아인하트 후작도 매직 애로우 앞에 무릎을 꿇지 않았던가. 수백 발의 매직 애로우가 사정없이 게드릭의 실드를 두드렸다. 쿠구구구구궁! "크윽!" 둔중한 무기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끼며 게드릭이 몸을 비틀거렸다. 그럼에도 매직 애로우는 끊임없이 쏘아졌다. 매직 애로우는 기본 중의 기본 마법으로 엘은 거의 무한에 가까운 매직 애로우를 전개할 수 있다. 만약 상대가 실드를 전개하고 방어 체제를 굳힌다면 매직 애로우만으로 그 누구라도 쓰러뜨릴 자신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이기기 위한 승부가 아니니까,' 한동안 실드를 두드리던 엘은 매직 애로우를 그만 전개 했다. 어차피 클래스 프레셔를 이용하면 엘은 게드릭을 손쉽게 제압할 수 있다. 클래스간의 격차가 있다면 이것만으로도 상대를 무력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루이아스도 엘에게 클래스 프레셔를 사용할 수 있 었다. 그러나 그때는 그랜드 마스터가 있었기에 클래스 프레셔를 사용하지 못했을 뿐이다. 클래스 프레셔를 사용하는 순간 빈틈이 드러나 아토빌 공작 등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허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콕! 정말 강하군." 게드릭은 엘이 매직 애로우를 그만 전개하자 실드를 거두어들이며 한순간 비틀거렸다. 실드를 유지하는 데 모든 힘을 소진한 것이다. 이것만_으로도 그는 자신과 엘의 실력 차이가 얼마나 현격한지 알 수 있었다. 엘은 다른 고 클래스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오로지 기본 마법으로만 자신을 제압한 것이다. 만약 엘이 매직 애로우를 거두지 않았다면 자신은 실드를 유지하다가 차마 버티지 못하고 매직 애로우에 의해 벌집이 되어 쓰러졌을 것이다. 막상 실력 차이가 존재한다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로 심각하자 게드릭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크윽! 오늘은 졌다. 다음에 다시 도전하겠다. 그때도 내 도전을 받아 주겠지?“ "물론." 엘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게드릭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다. 단지 자신에게 경쟁심을 불사르는 모습을 보며 '그래도 나에게도 경쟁자가 있었구나' 라는 마음이 들 뿐이다. 비틀거리던 게드릭은 잠시 후 힘이 일부나마 회복되었는지 텔레포트 마법을 전개하여 장내를 벗어났다. 엘은 그가 사라지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아직도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하이엔 백작에게 향했다. 하이엔 백작의 눈은 멍하니 풀려 있었다. 그에게 있어 엘과 게드릭의 대결은 정말 하늘 위에 존재하는 이들의 대결이 아닐 수 없었다. 갑자기 광풍이 몰아치더니 천둥이 내리친다. 그리고 하늘 가득 뒤덮는 매직 애로우는 가히 재앙이 아닐까 하는 착각을 가져다주었다. 그야말로 인간의 힘이 아니었다. 엘을 보는 그의 눈에 절로 경외심이 생걱났다. 하이엔 백작에게 다가간 엘은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조금 자제를 했어야 했는데 연무장을 완전히 부숴 먹었군요. 죄송합니다." 제국에서도 능히 후작 아니, 공작 위를 받을 수 있는 존재의 사과다. 하이엔 백작은 펄쩍 뛰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연무장 정도는 금방 복원할 수 있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 정도 되는 연무장을 복원하려면 상당히 큰 금액이 들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엘은 그런 하이엔 백작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자신을 위해서는 돈을 아끼지 않지만 남에게는 상당히 인색한 엘이 아니던가? 이런 호의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것에 대해서 정말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아, 예에." 하이엔 백작은 엘을 대하면서 알지 못할 어려움을 느껴야 했다. 그는 그것이 대륙에 단 9명뿐인 8클래스 마법사가 낼 수 있는 존재감이라고 생각하며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엘은 자신을 사칭했던 가짜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그리고 저 가짜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게 있는데......" “아, 가짜 말이십니까?” 하이엔 백작의 표정에 분노가 서렸다 가짜에게 속아 아낌없이 대접하고, 자신의 딸과 이어 주려고 생각하던 것을 떠올리니 절로 부아가 치민 것이다. 그는 이를 갈며 말했다. "감히 금탑주님을 사칭한 만큼 확실한 대가를 치르게 해야지요." "히익!" 하이엔 백작의 말에 가짜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금탑주 대접을 받으며 세상에 무서 울 것이 없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졌다. 엘은 그런 가짜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사실 그는 자신을 사칭했다고 해서 별다른 감정이 들지 않았다. 만약 자신의 이름으로 악행을 벌였다면 모를까 부유한 귀족가에 돈 좀 뜯어 낸 정도였으니 말이다. 귀족들에게 있는 건 돈뿐이었으니 그 정도 손해를 봐 봤자 그게 그거라는 생각이 강했다. 때문에 엘은 가짜를 그리 혹독하게 처벌할 생각이 없었다. 생각을 정리한 엘이 말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보는군요. 그냥 적당히 몇 대 때린 뒤 풀어 주었으면 합니다." “당장에 목을......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분노로 이를 갈던 하이엔 백작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엘이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 "죽이려 했다면 아까 전 게드릭에게 죽게 놔두었을 것 입니다. 비록 저를 사칭했지만 죽을지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나서서 살려 준 것이지요. 그러니 하이엔 백작님께서도 자비를 베풀어 가벼운 처벌로 끝냈으면 합니다." "으음!" 엘의 말에 하이엔 백작은 신음을 흘릴 뿐 아무런 말도 못했다. 어차피 자신이 손해를 본 건 약간의 돈뿐이 아닌가? 게다가 당사자인 금탑주가 가벼운 처벌을 원할 뿐이니 그로서는 별로 손해 볼 것이 없다. 더군다나 금탑주의 말을 들어 준다는 것은 그가 금탑주의 부탁을 들어준 것과 다름없다. "알겠습니다. 금탑주님이 그렇게까지 말하시니 어쩔 수 없군요." "좋은 판단이십니다." 엘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이 아니라 제 저택에서 조금 쉬어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아무 것도 아끼지 않고 정성을 다해 대접하겠습니다." 하이엔 백작은 이참에 엘과 친분을 만들기로 결정을 한 상태다. 금탑주와 친분을 쌓게 되면 하이엔 백작은 월트만 왕국에서 그야말로 무서울 것이 없게 된다. 하지만 엘은 하이엔 백작에게 대접을 받을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 마음만 고맙게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살짝 고개를 저어 보였을 뿐이지만 그 의지는 확고해 보였다. 하이엔 백작으로서는 재차 권유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아쉽군요. 그럼 다음 기회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백작님의 배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 아이는 백작님의 아드님 입니까?“ 엘은 시선을 돌려 모스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티란을 보았다. 그러자 하이엔 백작의 얼굴이 붉어지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못난 아들이지요. 티란! 이리 오지 못하겠느냐!" 하이엔 백작의 호통에 모스와 이야기를 나누던 티란의 몸이 움찔했다. 그리고는 하이엔 백작에게 쪼르르 달려왔다. "부, 부르셨습니까." "부르긴. 저 뒤에 있기나 하거라." "예에......“ 티란이 힘없이 고개를 숙인 채 터덜터덜 걸어갔다. 하이엔 백작은 엘을 보며 사과를 했다. "철없는 아들이 실수를 한 듯합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오, 괜찮습니다. 그런데 자질이 괜찮아 보이는데 기사 수련을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엘이 티란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묻자 하이엔 백작 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형들에 비해 자질이 미천하여 굳이 기사 수업을 시키지 않고 있습니다." "호오, 그렇군요. 들었나요, 모스 경?“ 엘이 약 20m 떨어진 모스에게 묻자, 순간 모스의 신형이 사라지며 엘의 뒤에 나타났다. 블링크 마법이었다. "예, 똑똑히 들었습니다, 탑주님." “......” 20미터 공간을 격하고 나타나는 모스의 모습에 사람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최소 익스퍼트 상급에 다다른 기사임이 분명한데 마법까지 자유자재로 사용하니 놀라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엘은 모스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이야기를 나눠 보니 어떻던가요?" “훌륭합니다. 자질은 그럭저럭 쓸 만한 정도지만 안에 내재된 뜨거운 열정은 자질을 압도하고도 남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결정을 내린 건가요?“ "예, 이야기를 나눠 본 결과 결정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잘 되었군요." 엘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렇게 일이 쉽게 해결 될 줄 몰랐다. 그는 하이엔 백작에게 시선을 옮겼다. "하이엔 백작님." "예, 금탑주님." “백작님의 아드님인 티란을 여기 모스 경께서 제자로 삼고 싶다고 하시네요. 어떻습니까, 괜찮겠습니까?” "예에?“ 하이엔 백작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리고 놀란 눈으로 엘과 모스를 번갈아 보았다. 매직 나이트는 대륙에 무척 유명하다. 각지에 제자를 구하기 위해 대륙에 퍼져 나가 미래의 매직 나이트가 될 아이들을 구하며, 그 아이들의 원한을 해결해 줌으로써 그 압도적인 무력을 모두가 목격한 것이 다 매직 나이트는 개개인의 실력이 소드 마스터에 이르지 못했지만 각자의 아티팩트로 소드 마스터에 맞먹는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라 매직 나이트들이 탑승할 수 있는 골든 매직 나이트는 능히 소드 마스터를 압도하고도 남는다. 금탑의 매직 나이트! 그것은 모든 기사 지망생의 꿈과도 같은 말이다. 그런데 자신의 아들이 매직 나이트 후보생으로 가다니? 하이엔 백작으로서는 생각의 필요도 없는 제안이었다. "물론입니다. 매직 나이트가 된다면 영광입니다." 행여 엘의 마음이 바뀔까 서둘러 대답한 그가 침울한 기색으로 서 있는 티란을 불렀다. "티란, 이리 오너라!" 하이엔 백작의 부름에 엉거주춤 다가오는 티란. 티란이 다가오자 하이엔 백작은 모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분이 앞으로 너의 사부님이(스승님이) 되어 주실 것이다." "예에?“ 놀라는 티란.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고 있었다. 그러자 모스가 자세 한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너는 앞으로 금탑의 매직 나이트 후보생이 될 것이다. 혹독한 수련을 통과하는 자만이 매직 나이트가 될 수 있는 것이지. 어때, 금탑의 매직 나이트가 되어 보지 않겠느냐?“ “매, 매직 나이트요? 제가요?” 믿기지 않는 듯 눈을 크게 뜬 티란에게 모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탑주님께서는 네가 금탑의 매직 나이트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하시더구나. 나 또한 마찬가지고 말이다.“ "제가 금탑의 매직 나이트를......“ 기사를 꿈꿔 왔던 티란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행운이었다. 엘은 그런 티란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부디 뛰어난 매직 나이트가 되어 금탑을 지켜다오." "예, 예! 잘 부탁드립니다." 엘의 말에 티란은 황급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티란을 보며 엘은 하이엔 백작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내일쯤 가야 할 것 같군요. 그때까지 티란이 금탑으로 갈 채비를 다 해 주셨으면 합니다. 하루쯤 신세를 져도 될는지요?“ 하이엔 백작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물론입니다." 사실 그는 무척 큰 행운을 잡은 것이다. 그의 아들이 금탑의 매직 나이트가 된다면 하이엔 백작가의 명성이 비약적으로 상승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이엔 백작은 티란의 손을 부여잡았다. "잘했다, 티란! 난 네가 무척 자랑스럽구나." 갑작스레 뒤바뀐 하이엔 백작의 태도에 티란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아버지......” 하지만 결코 기분 나쁜 표정은 아니었다. 그로서는 처음 아버지의 인정을 받았으니 오히려 기쁠 수밖에...... 엘은 그 모습을 보며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뒤를 이을 인재를 발견했기에 모스 또한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9. 톨리안 왕국의 제의를 받다 하이엔 백작가에서 하루 머문 엘은 곧장 금탑에 돌아왔다. 당초 최소 며칠, 길면 몇 주를 예상했는데 티란을 발견함으로써 3일도 안 되어 금탑으로 돌아온 것이다. 금탑으로 돌아온 엘은 모처럼 편안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간 제국들을 돌아다니고 서부 여러 왕국들을 전전하며 움직였으니 알게 모르게 피로가 쌓여 있었던 것이다. 타지 생활을 하면 집 좋은 걸 알게 된다고, 엘 또한 장기간 밖으로 나가 있게 되자 금탑이 제일 편안하게 느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음, 이제 어떻게 한다." 남아 있는 초인들을 모두 규합하는 데 성공했다. 루이아스의 방해로 2명의 초인이 목숨을 잃었지만 그래도 도합 10명의 어마어마한 숫자의 초인이 힘을 합치게 되었다. 대륙에 존재하는 초인 중 절반이 넘는 초인이 힘을 합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산재한 위험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아직 적들의 정점에 9클래스 마법사가 존재하고 9명의 초인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초인 개개인의 기량을 따져 보면 루이아스 측의 초인이 더욱 우세하다. 당장 엘은 초인들 중 가장 약한 축에 속하고 골든 나이트도 기껏해야 중간급에 속하기 때문이다. 아토빌 공작과 엘리엔, 아이넨스, 유클레이가 초인들 중 가장 상위권에 들어가지만 그중 셋이 루이아스를 견제하면 전체적인 레벨에서 처지게 된다. 무엇보다 부족한 건 중간급 고수들이다 엘은 루이아스가 소드 마스터와 7클래스 마법사들을 얼마나 거느리고 있는지 모른다. 그에 반해 이쪽은 중간급 고수가 전무했다. 기껏해야 매직 나이트들과 아일라스, 블리어드 제국의 기사들, 그리고 마탑의 마법사들뿐. 그 부분은 확실히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다. 이럴 때 엘의 사고방식은 고민을 해결하는 데 무척 유용하다. 엘은 세상의 모든 이치가 자신이 하던 게임에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탁월한 심리전과 여러 전쟁의 방법, 그것은 모두 게임에서 나오는 방법을 응용하면 손쉽게 해결할 수 있다. 이번에도 엘은 이번 상황을 게임에 대입해 보았다. 주력 부대가 없고 강한 유닛들만 있는 자신. 그 상황에 처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은 금방 나왔다. 소수의 강한 유닛들로 치고 빠지는 게 정답이었다. "게릴라식 공격을 해야 하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방법만큼 좋은 방법은 없다. 적의 세력은 강대하니 게릴라식으로 조금씩 갉아먹어 전력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 "루이아스도 바보가 아니니 방비를 할 게 분명해. 그렇다면 최대한 힘을 응집해서 큰 타격을 줘야 하는데......“ 방법을 정해 놓았으니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에 한번 움직여야 한다. "무슨 일 있어요?“ 엘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세레나가 다가왔다. "아, 세레나 왔어?“ 세레나를 볼 때면 마음이 절로 편안해지는 엘이었다. 한순간 모든 고민을 잊을 수 있을 만큼 세레나는 엘에게 포근함을 가져다주었다. "아니, 일이라기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거지." "모든 것은 순리대로 흘러가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너무 고민하지 마세요. 이 세상에는 엘 님 말고 다른 이들도 많으니까요." 모든 짐을 홀로 짊어지려는 엘에게 건네주는 그녀의 주옥과도 같은 한마디에 엘은 어깨에 놓인 부담감이 절로 해소되는 기분을 느꼈다. 엘은 그런 세레나에게 미소 지어 보였다. "고마워." 감사의 인사를 건넨 엘은 세레나를 천천히 살폈다. '6클래스의 경지라......‘ 그동안 신경을 못 써서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세레나는 이미 6클래스의 경지에 돌입해 있었다. '계기만 있으면 7클래스에 접어들 수도 있을 텐데......‘ 하지만 그 계기가 아무 때나 오는 것이 아니다. 그 계기를 찾지 못해 일평생 7클래스에 오르지 못한 채 정체되어 있는 이들이 어디 한둘인가. 아직 세레나에게는 시간이 많고 그러니 당분간 지켜볼 생각이었다. 엘은 세레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요즘 같이 지내지 못해서 미안해. 핑계 같지만 일이 많아서......“ 세레나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큰일을 위해 움직이는 거 다 알아요. 저랑 카이나는 참을 수 있으니 그 일에 전념하세요. 대신 나중에 저희들을 위해 시간을 내주셔야 해요." "물론이지." 엘은 이렇게 자신을 이해해 주는 세레나와 카이나가 너무나 고마웠다. 자고로 외부에서 일을 하려면 우선 내부가 평안해야 한다. 세레나가 자신을 이해해 주니 엘로서는 마음이 한결 편안해짐을 느꼈다. "고마워, 세레나." "뭘요, 당연한 건데요." 빙그레 미소 짓는 세레나의 모습을 보며 엘 또한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우선 베기는 이렇게......“ 금탑을 나선 엘의 눈에 매직 나이트가 데려온 아이들을 가르치는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엘의 명령에 따라 매직 나이트들이 데려온 아이들의 숫자는 적게는 1명에서 많게는 5명이었다. 12명이 데려온 아이들의 숫자는 다 합쳐서 40명이었기에 이들이 후일 매직 나이트로 자라나면 아티팩트를 만드는 엘은 조금 고생해야 할 것이다. 엘이 지나칠 때면 훈련을 하던 매직 나이트는 물론 아이들도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특히 엘에게 인사를 하는 아이들의 눈에는 존경심이 잔뜩 서려 있었는데,그 모습을 보며 엘은 어느새 자신이 저런 눈길을 받을 만한 위치에 섰는가에 대해 종종 어색함을 느끼고는 한다. 엘은 연합을 결성하게 된 초인들 중하위권에 속하지만 모두가 그로 인해 연결 고리를 두고 있다. 또한 기발한 발상과 나이에 걸맞지 않는 깊은 생각으로 초인들은 엘이 암묵적으로 앞으로의 행보를 계획하게끔 양보를 하였다. 10명의 초인을 자신의 계획대로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엄청난 권한을 얻은 것이다. 자신에게 작전권이 오자 엘은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부담감을 느꼈다. 비록 10명의 초인이 모였지만 그들에게는 모두 각자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다. 때문에 그 이해관계를 모두 고려하여 움직이지 않으면 계획은 시작하기도 전에 무산될 확률이 높았다. 그걸 알았기에 엘은 그러한 것들을 모두 염두에 두고 움직여야 했다. "현재 바로 움직일 수 있는 초인들은 나와 골든 나이트, 그리고 아이넨스 님과 엘리엔 님밖에 없어." 나머지는 모두 각자의 일이 막중한 인물들이기에 섣불리 본진을 비울 수 없다. 아카벨 대장로는 엘프 숲을, 아토빌 공작과 클라이언 공작은 각각의 제국을 수호해야 하는 등 말이다. "결국 모든 국가들을 연합시켜야 한다는 것인데......“ 물과 기름과 같은 왕국과 제국 간의 관계를 생각하자니 그것도 힘들어 보였다. "후, 힘들구나, 힘들어," 각국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떠올리며 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안이 보이지 않았다. 루이아스가 거느린 소드 마스터와 7클래스 마법사의 숫자가 많지 않다면 국가들 간의 이해관계를 깡그리 무시한 채 엄청난 대군을 편성하게 하여 일거에 밀어 버릴 수 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에는 3개의 제국을 통합한 루이아스의 저력이 너무나 엄청날 것이기에 엘은 차마 그렇게 주장하지는 못했다. "남아 있는 단 한 명의 그랜드 마스터인 다이어드 공작을 끌어들여야 하는데......“ 이쪽의 초인은 도합 10명 저쪽은 9명이다. 초인의 숫자에서 1명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하나 루이 아스를 감안하면 저쪽은 최소 15명의 초인을 보유하고 있는 것과 같다. 특히 8클래스 마법사들은 루이아스에게 전혀 힘을 못 씀을 감안할 때 그를 상대하는 건 아토빌 공작과 엘리엔, 아이넨스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초인의 숫자 나 질에서 상당히 뒤처지게 된다. "일단 게릴라 공격을 한번 해 보고 결정을 내리자. 일단 목표는 각개격파다." 루이아스의 명령을 받아 일부 떨어져 나온 초인들이 가장 제거하기가 쉽다. 하지만 루이아스도 바보가 아닌지라 결코 부족한 전력 을 보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문제였다. "이리 생각해도 저리 생각해도 어렵군." 앞으로의 전개에 엘이 복잡해진 머리를 부여잡고 있을 때, 카이나가 엘에게 다가왔다. "왕궁에서 전언이 왔어요, 엘 님." "응? 왕궁에서 무슨 일로 나를?" 엘은 왕궁에서 자신에게 전언을 보냈다는 사실에 의아 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카이나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에리스 공주님의 생일 파티를 하는데 거기에 참석해 달라는 초대장이에요. 한동안 왕국이 극히 뒤숭숭했잖아요? 그런 분위기를 해소할 겸해서 파티를 열려는 건가 봐요." "그렇군 파티라......“ 엘은 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사실 자신이 하고 있는 고민은 답이 없는 난제와도 같았다. 이런 복잡한 기분을 털어 버리기에는 파티만큼 좋은 것도 없을 터. 비록 사방팔방에서 달려드는 부나방들이 있겠지만 조용히 파티를 즐기는 방법도 얼마든지 있었다. 엘은 고개를 들고는 카이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그동안 왜나 여러 행사를 참가하지 못했으니 참가하는 것도 좋겠지. 카이나도 같이 갈래?“ "네? 저도요?" 엘의 말에 카이나가 기쁜 표정을 지었다. 오랫동안 엘과 떨어져 있었으니 카이나로서는 엘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이내 그녀는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세레나에게 한동안 엘을 혼자 놔두자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엘 님은 큰일을 떠안고 계시다고 했어. 괜히 나 의 사적인 감정을 내보여 봤자 도움되는 건 없어.' 자신에게 있어 이러한 감정만큼 큰일은 없지만 그녀는 엘이 대충 어떤 일을 떠안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차마 같이 가자는 말을 하지 못했다. "저는 괜찮아요. 그러니 엘 님만 갔다 오세요." “......” 엘은 한동안 카이나의 아름다운 얼굴을 응시했다. 이윽고 그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후우! 미안해, 카이나!" 카이나는 엘을 응시할 뿐이었다. "모든 일이 끝나고, 내 모든 시간을 너희들에게만 낼게. 약속할게!" 카이나의 표정이 급변했다. 무언가 감동을 먹은 듯한 표정이었다. 이렇게까지 자신들을 생각하고 있는데 어찌 투정을 부릴 수 있겠는가. 그 또한 이 시대의 피해자나 마찬가지이 거늘, 서운한마음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마음속으로 자신들을 생각해 주고 있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카이나에게 충분히 위로가 되었다. 엘이 자신들을 생각해 주고 있다는 걸 느꼈기에 카이나는 웃을 수 있었다. "아니에요. 엘 님은 지금 큰일을 맡고 계신 걸요. 아, 아내가 될 여자로서 나, 남편의 일을 방해할 수 없잖아요" 아내와 남편이란 말을 꺼내자 카이나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엘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난 남편이고 카이는 아내지, 서로가 이해를 해 주지 못하면 언제나 불협화음이 나는 그런 부부관계 말이야! 날 이해해 줘서 고마워, 카이나." "고맙긴요. 당연한 일인 걸요." '대부분이 세레나 언니가 했던 말이지만요.' 카이나는 본의 아니게 엘에게 점수를 딴 것 같아 서운한 기분도 잊고 기분이 좋아졌다. 어렸을 때부터 그녀는 그렇게 커 왔다. 엘에 의해 행복과 슬픔을 느끼는, 종속적이라 할 수 있는 그런 삶...... 남들은 불행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카이나는 그런 감정을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다. 엘에 의해 일희일비가 교차하는 것, 그리고 이렇게 위대한 남자의 아내가 될 수 있는 것을 오히려 신의 은총이라 여겼다. "어쨌든 오랜만에 가는 거니 선물을 준비해야겠는걸. 이제 나에게 위신이라는 것이 생겼으니 그걸 지켜야 할 테니 말이야." "엘 님의 아티팩트 제작 실력은 대륙 제일이잖아요? 아마 선물을 받는 공주님은 하늘에 대고 감사의 인사를 올릴 거예요." ‘......제발 반하지는 않았으면 좋겠고요.' 카이나는 마지막 말을 하지 않은 채 그 말을 꿀꺽 삼켰다. 엘은 절로 손을 뻗어 카이나의 고운 머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원한다면 카이나에게도 얼마든지 만들어 줄게. 백 개든, 천 개든." “......고, 고마워요." 카이나의 얼굴이 다시금 빨개졌다. 반란을 진압한 톨리안 왕국의 정국은 극히 어수선했다. 우선 가장 큰 변화는 정계의 대대적인 변화였다. 톨리안 왕국의 중앙 귀족들은 대부분 제1왕자파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이 반란에 가담하여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빈자리를 제3왕자파와 소수의 제2왕자파였던 귀족들이 차지했다. 제3왕자파의 귀족들은 대부분 힘이 없는 지방 귀족들로서 금탑주를 뒤에 두고 있는 루비어스 백작의 배경을 보고 모여든 존재들이었다. 로웰린은 이곳저곳에 남겨진 제1왕자파 귀족들의 이권 을 날름 삼키려는 제3왕자파 귀족들에게 크게 소리쳤다. "이것은 모두 왕국의 재산이에요! 그대들이 탐할 게 못 되요!" 그렇게 선언한 로웰린은 귀족들의 이권들을 모두 레도프 국왕에게 바쳤다. 제3왕자파 귀족들의 불만이 대단했지만 로웰린의 서슬 퍼런 기세에 아무 말도 못하고 끙끙댈 뿐이었다. 힘없는 지방 귀족 출신인 그들로서는 금탑주를 배경으로 둔 루비 어스 백작의 말을 감히 어길 엄두를 내지 못했다. 로웰린의 결정으로 톨리안 왕국의 왕권은 단시간에 비약적으로 강해졌다. 보통 대왕국이라 불리는 큰 왕국들은 왕권이 약한 축에 속한다. 대왕국이라 불리는 왕국들은 대부분 기름진 토지에 광산 혹은 여러 가지 특산물을 바탕으로 엄청난 부, 혹은 식량과 무기를 지닌 곳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느 귀족 영지에서 나오기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귀족들의 힘이 강해지면서 귀족들의 발언 이 강해지고 왕권은 절로 약해지는 법이다. 제1왕자파 귀족들도 대부분 부유한 영지를 발판 삼아 중앙으로 진출한 귀족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영지가 대부분 왕의 소유로 넘어가니 드넓고 많은 재산을 보유하게 된 왕의 발언권이 비약적으로 강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루비어슨 백작은 충신 중의 충신이다!" 레도프 국왕은 로웰린의 결단에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만약 로웰린이 욕심을 부렸다면 그녀의 힘은 단시간에 레도프 국왕을 위협할 정도로 강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욕심을 버리고 모든 이권을 국왕에게 바쳤다. 자기 입으로 충신이라 떠드는 귀족들도 하기 힘든 행동 이었던 것이다. "왕국에 혼란이 있었으나 루비어스 백작의 갸륵한 충성으로 죄가 가벼운 죄인들의 죄를 삭감하노라!" 왕권이 비약적으로 강해진 레도프 국왕은 기분이 좋아져 왕국에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렸다. 그러자 각종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있다가 출옥된 이들은 레도프 국왕을 찬양했다. 백성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게 되니 레도프 국왕은 비단 귀족들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열렬한 지지를 받게 되었다. 죄인들의 사면령을 내린 레도프 국왕은 곧이어 왕국에 대대적인 축제를 벌일 것을 선언한다. "얼마 후 본국의 공주인 에리스 공주의 생일이 된다! 그때 온 나라에 축제를 열도록 한다!" 제1왕자파 귀족들이 지닌 재물은 엄청났기에 나라 전체에 축제를 여는 것은 쉽고도 쉬웠다. 반란 후 뒤숭숭한 정국에 왕국 차원에서 대대적인 지원을 하여 축제를 연다 하자 백성들은 다시 한 번 열광했다. 백성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와 같은 결정을 내린 레도프 국왕을 찬양했고, 국왕에게 힘을 실어 준 로웰린을 칭찬 했다. 그리고 반란 진압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엘 또한 왕국의 수호신이라며 그를 존경하기에 바빴다. 엘은 카이나에게 에리스 공주 파티의 내용을 듣고는 꼬박 3일 동안 아티팩트 제작에 몰두했다. 8클래스에 이른 엘은 이미 웬만한 마법의 이치를 간단하게 풀어낼 정도로 이해력이 높아져 있었다. 때문에 7클래스 시절에 제작하던 아티팩트는 8클래스에 오른 지금에 이르러 그 제작 속도가 거의 2배 정도는 빨라졌다. 3일이라는 시간 동안 아티팩트 제작을 완료한 엘은 곧장 베르디스로 왔다. 당장 왕궁으로 텔레포트를 할 수 있지만 엘은 곧장 왕궁으로 향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 타인의 특별 대우가 낯설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이렇게 강대한 힘을 보유하고, 여러 가지 사업을 벌인 것은 모두 가족과 행복하게 살기 위함이다. 적이 강하다 보니 자신도 강한 힘을 보유해야 했고, 그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니 마침내 대륙에 단 9명밖에 없는 8클래스 마법사가 된 것이다. 본래대로라면 '열한 명밖에 없는 8클래스 마법사' 가 되어야 했지만 공교롭게도 2명의 8클래스 마법사가 죽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엘의 목숨을 노렸던 존재들이었다. 어쨌든 이런저런 이유로 엘은 아직도 남이 해 주는 특별 대우가 낯설었기에 평범하게 파티에 참가하고 평범하게 즐기고자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그것은 원천적으로 힘든 일이었다. 왜냐하면 자신의 신분은 금탑주였고, 금탑주가 왔다고 하면 왕국의 모든 귀족들이 단번에 자신들에게 모여들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모든 건 평범한 게 좋지.' 이제는 비정상적인 경지에 이른 엘이기에 불현듯 평범함이 그리워졌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일하고 평범하게 하루를 보내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상인가. 이미 그러기에는 불가능한 곳까지 이르렀지만 말이다. "어디 보자...... 오, 저거 괜찮은걸?“ 엘은 베르디스 거리를 걸으며 노점에서 파는 장신구를 보고는 눈을 빛냈다. "이거 카이나에게 잘 어울리겠어." 카이나는 검 수련에 방해된다고 장신구를 잘 착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속으로는 여자답게 꾸미는 것을 몹시 좋아했기에 엘은 카이나에게 잘 어울릴 법한 장신구를 발견 하자 망설임 없이 그것을 구매했다. "카이나만 사 줬다가는 뒷감당을 못하지." 세레나 같은 경우 뭐라 말은 하지 않지만 불편한 기분을 유감없이 표출하기에 엘은 행여 차별했다는 소리를 들을까 세레나의 것과 실피르의 것까지 샀다. 모두 그녀들에게 잘 어울림직한 장신구들이었다. "후우! 이거 마음에 들다 보니 한 아름 사 버렸녜." 베르디스 시내를 약 1시간 정도를 돌아다닌 엘은 이곳 저곳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사다 보니 자신의 짐이 한 아름 되는 것을 보고는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쇼핑의 즐거움을 느끼다니, 후후후!" 엘은 자신 혼자 처음 해 보는 쇼핑이 즐겁다는 듯 웃음 을 지었다. 전생에서 그는 무척 가난했다. 부모님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10억 이나 되는 빚을 떠안아 버려 어렸을 때부터 아낄 건 최대 한 아끼면서 살아와야 했던 것이다. 그랬기에 자연히 그의 꿈 중 하나가 돈을 바리바리 싸 들고 마음껏 쇼핑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와서 그것을 이루었다는 것이 엘에게 왠지 모를 즐거움을 안겨다 주었다. "그래, 돈을 많이 버니 한번 왕창 써 보는 것도 즐거움 이지. 뭐 충동구매는 좋지 않다고 하지만 이것으로 시장 상인들 살리는 면도 없지 않아 있을 테고......“ 스스로의 충동구매를 정당화하며 엘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서 공간 확대 마법이 걸린 주머니에 짐을 모두 챙겨 넣었다. 그때, 골목에서 몇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흐흐, 비싼 물건 한 아름 들고 어딜 가시나?" "응?“ 엘이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한 힘쓰게 생긴 흉악한 인상의 장한들이 엘에게 음충맞은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애초에 비싼 물건들을 싸들고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왔다는 것은 그들에게 ‘털어 주시오!' 하는 것과도 같다. 장한들은 엘을 보며 한껏 인상을 찡그렸다. 평범한 일반인이었다면 오금이 저릴 정도로 흉악한 얼굴이었다. "어이, 형씨! 돈도 많아 보이는데 돈 없어 보이는 우리들에게 적선 좀 하는 게 어때." 장한들의 말에 엘은 어이가 없어 웃음을 흘렸다. "하하, 지금 나를 삥 뜯으려 하는 건가요?" “뭘 뜯어?" "아차." 엘은 전생의 일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한국어를 말하자 아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쪽의 말에 맞게 번역해 주었다. "무력으로 제 돈을 모두 빼앗으려는 거 아닙니까?" “맞다고 할 수 있지. 괜히 다치기 전에 순순히 내놓는 게 좋을 거요, 형씨." 의외로 엘이 말이 통하는 듯하자 장한들은 실실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애당초 엘이 그들에게 줄 돈은 한 푼도 없었다. 엘은 빙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하하, 방금 돈을 다 써서 드릴 게 없군요. 무척 아쉽네요." "이놈이! 우리를 놀린 거냐!" "그렇게 생각했다면 무척 유감이군요." "이놈!" 장한 중 하나가 분노하며 엘에게 달려들었다. 얼핏 보니 뒷골목에서 상당히 굴러먹은듯한주먹이었다. 주먹에 살기가 담겨 있을 정도니 말이다. "흐음!" 엘은 장한의 주먹을 보며 순간 두 눈을 크게 떴다. 마법사라고 하여 신체가 약하다는 것은 대륙의 통설이나 그것은 옛말이 된 지 오래였다. 마법을 익히기 위해서 건강한 신체가 그 바탕이 된다는 점을 볼 때 마법사도 꾸준히 몸을 단련시키는 것이 실력 증진에 오히려 도움이 된다는 마탑들의 발표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엘은 일반 마법사들과 마법을 익히는 과정이 극히 달랐다. 그는 단전호흡을 바탕으로 우선 체력의 바탕을 만들었고, 그로 인해 엘의 신체적 조건은 고된 수련을 거친 기사들에 비해 결코 뒤처지지 않았다. 살짝 고개를 돌려 장한의 주먹을 피해 낸 엘이 주먹을 뻗었다. 그것은 거침없이 장한의 배에 틀어박혔다. 퍼억! "꺽!" 외마디 신음과 함께 풀썩 꺾여 버리는 장한의 신형. 엘은 쓰러진 장한을 보며 빙그fp 웃었다. "어라? 생각보다 허약한걸?" 너무나 간단하게 자신의 동료를 쓰러뜨리자 장한들이 움찔하여 몸을 뒤로 뼜다. “너......" “보통 놈이 아니구나! 누가 보냈냐! 독전갈파에서 보냈냐!" 엘이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독전갈이고 뭐고 난 그런 거 몰라. 애당초 너희들이 먼저 나에게 온 거잖아." “......” 엘의 말에 무안해진 장한들은 아무 말도 못했다. 사실 말이 그렇지 먼저 다가와 박살 난 건 자신들이었으니 말이다. "자, 그럼 정리를 시작해 볼까." 엘은 빙긋 웃으며 천천히 장한들에게 다가갔다. 엘이 다가옴에 따라 장한들이 천천히 뒷걸음질쳤다. 방금 전 자신의 동료를 쓰러뜨릴 때의 한 수로 엘의 실력이 감히 자신들로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그들이었다. 엘은 장한들이 몸을 뒤로 빼며 도망가려 하자 가볍게 마법을 전개했다. "어딜 도망가려고. 홀드!" 마법이 전개되자 뒤로 물러나던 장한들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들은 경악하며 외쳤다. "허, 허억!" “마, 마법이다!" 상대가 마법사란 걸 알아차린 그들의 안색이 파랗게 변했다. 상대를 잘못 건드려도 톡톡히 잘못 건드린 것이다. 엘은 그런 장한들을 보며 비웃듯 말했다. "그러니 사람을 잘 보고 건드렸어야지. 그동안 너희들 에게 돈을 털린 사람들도 적지 않을 테지? 그럼 변명할 거리도 없을 테니." 느릿한 걸음으로 다가간 엘은 굳은 장한들에게 주먹을 먹였다. 파괴력은 없어 보였지만 마나가 실려서 내부를 한차례 꼬아 버리는 지독한 주먹이었다. 아마 기절하고 깨어난 장한들은 한동안 고생할 것이 분명하리라. 5명에 이르는 장한들 중 4명이 엘의 주먹을 맞고 바닥에 널브러졌다. "마지막이군." 엘이 남은 1명에게 주먹을 선사하기 위해 다가가는데, 비교적 호리호리한 체격에 20대 후반의 외모를 하고 있는 사내는 비명을 지르며 외쳤다. “나, 날 건드리지 마라! 나, 난 롤프 자작님의 사촌 동생이다!" "롤프 자작?" 순간 엘의 몸이 멈칫했다. 롤프 자작이 누구인지 생각을 더듬어 보는 것이다. 하지만 사내에게 엘의 그런 모습은 자신의 신분에 겁을 먹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기가 살아 외쳤다. “나, 날 풀어 주면 오늘 일은 불문에 붙여 주겠다! 그러니 어서 나를 풀어 줘라!" “한 가지 물어보지. 롤프 자작이 누구지?” 엘이 모르겠다는 듯 묻자 청년이 인상을 찡그리며 외쳤다. "감히 사촌 형님을 모르다니! 롤프 자작님은 이번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루비어스 백작님의 최측근 중 한 분이시다!" "최측근? 그렇군." 엘의 말에 사내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러나 이어진 엘의 말에 얼굴이 시커멓게 변해 갔다. "롤프 자작인지 뭔지 내가 알바 아냐. 단지 내 돈을 노리고 온 너희들이 불쾌할 뿐." 뻐억! 엘은 더 많은 마나를 담아 사내를 가격했다. 게거품을 물며 쓰러진 사내를 보며 엘이 말했다. "뒷골목 패거리들을 이끌고 드잡이를 하는 걸 보니 를프 자작도 뻔해 보이는군. 복수를 하고 싶다면 이번 파티에서 엘을 찾으라고 해. 제대로 상대해 줄 용의가 있다고 말이야." 말을 남긴 엘은 미련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조금 심했나?“ 자신의 행동이 심했는지 반문해 봤지만 엘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저들은 자신보다 약한 이들을 등쳐먹는 인간들이다. 그런 인간들에게 한 번쯤 따끔한 맛을 보여 준 것이 결코 잘못이 될 수 없다. "그나저나 롤프 자작이라...... 보아하니 뒷골목 일에 관여하고 있는 것 같은데 주도권을 누가 쥐던 간에 바뀌는 것은 없나 보군." 엘은 새삼 롤프 자작이란 자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이 생겨나는 걸 느끼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생각대로 뒷골목 뒤를 보아 주던 제1왕자파 귀족들이 사라짐으로써 베르디스 뒷골목계 사정은 무척 복잡 했다. 그리고 뒷골목에서 파생하는 수입이 왜나 컸기에 새로 정권을 잡은 제3왕자파 귀족 중 몇몇이 베르디스 뒷골목을 장악하기 위해 여러 가지 술수를 벌이고 있었다. 그것이 뜻하지 않게 엘의 눈에 띄게 됨으로써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었다. 10. 에리스 공주의 생일 파티 베르디스에서 하루를 머문 엘은 발걸음을 왕궁으로 돌렸다. 이미 하루 동안 베르디스 곳곳을 둘러본 엘이었다. 마음에 드는 옷을 보면 망설임 없이 샀고, 각종 장신구와 여러 가지 물건들을 잔뜩 산 상태였다. 오랜만에 즐거운 마음으로 쇼핑을 했기에 왕궁으로 향하는 엘의 발걸음은 극히 가벼웠다. 에리스 공주의 생일 파티라 그런지 여관은 모두 손님이 꽉 차 있었는데, 그 때문에 엘은 생전 처음으로 남들도 다 꺼리는 최하급 여관에서 하루를 머물러야 했다. 아침을 먹은 둥 마는 둥 한 엘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왕궁 앞에 당도할 수 있었다. 점심부터 시작하는 에리스 공주의 생일 파티에 참가하기 위해 귀족가 마차들이 이미 줄을 지어 들어가길 기다리고 있었다. 왕궁 앞에선 근위병들은 그것을 완전히 질린 안색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후우! 마차를 가지고 오지 않길 잘했군." 엘은 길게 밀린 마차 줄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차가 꼬박꼬박 한 대씩 들어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줄이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나고 있었다. 조금 시간을 때우다가 마차가 모두 들어서면 조용히 들어가려던 엘은 줄이 점점 늘어나자 애초에 세워 놓은 계획을 바꿔야 함을 느꼈다. "뭐, 입단속만 잘 시키면 되니까." 그렇게 생각한 엘은 성큼성큼 왕궁의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 마차들을 단속하던 근위병들은 갑자기 한 사람이 단신으로 다가오자 약간 짜증기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에 들어온 청년의 행색은 그야말로 평범하였다. 일반 여행객들이 입을 법한 갈색 여행복에 단지 다르다면 남들보다 수려한 외모에 고급스러워 보이는 금발에 푸른 눈이랄까? 안경을 쓰지 않았기에 엘의 모습은 평소에 다니던 모습과는 다르게 살짝 날카로운 준수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하여 본모습을 감출 수 없는 노릇. 만약 여기서 엘의 모습을 모르는 근위병들만 있었다면 경을 칠 수도 있었겠으나 다행히 왕궁 사람들은 현명한 편이어서 소박하게 다니는 엘의 성품을 알아차리고는 엘의 모습을 여러 번 본 근위병 하나를 배치해 둔 상태였다. 시간제로 교대해도 행여 엘의 모습을 몰라보고 실례하지 않도록 말이다. 근위병 중 하나는 지금 다가오는 엘의 모습에 금색 로브를 씌우고 안경을 쓴 모습을 상상하자 단번에 엘의 정 체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저, 저......" “쉿." 엘은 자신을 가리키며 어버버 하는 근위병을 향해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하고는 조용히 다가갔다. 그리고는 근위병에게 말을 건넸다. "조용히 들어가고 싶으니 양해를, 알겠지요?" “예, 예! 무, 물론입니다!" 가까이서 엘을 대하게 된 근위병은 바짝 굳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수고하시길." 가볍게 인사를 건넨 엘은 곧장 왕궁으로 들어갔다. 그런 엘의 모습을 바라보던 귀족들은 모두 고개를 갸웃했다. "왕궁에서 일하는 자인가? 거참 평민치고 잘생기기도 했군." '어서 국왕 전하에게 알려야 한다!' 엘을 본 근위병 중 하나는 다급한 표정을 지으며 발이 빠른 근위병 하나에게 손짓을 했다. "무슨 일입니까?“ 불려온 근위병이 묻자 조용히 심호흡을 한 그는 엘의 정체를 알려 주었다. "방금 지나간 분의 정체가 누구인지 아는가?" "왕궁에서 일하는 일꾼 아닙니까? 보아하니 내 눈이 틀린 것 같지는 않은데." "아니야, 저분의 정체는 다름 아닌 금탑주님이시네." 선배 근위병의 말에 그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예, 뭐라고요? 금탑주......읍!" 자신의 입을 막은 선배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 그였다. "금탑주님은 자신의 정체를 알리고 들어가길 꺼려하셨네. 그러니 자네는 어서 국왕 전하께 이 사실을 알리고 오게나." "아, 알겠수." 선배의 말에 근위병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왕궁 안으로 사라졌다. "이 정도면 내 할 일도 다한 것이겠지." 자신의 임무를 완수했다 생각한 근위병은 다시 자세를 바로 하고 귀족들을 맞아들이기 시작했다. "역시 왕궁은 멋지단 말이야. 수백 년 동안 유지되어온 고풍스러움도 있고, 그 지방의 특징도 고스란히 있고 말이야." 엘은 한가롭게 왕궁 정원을 거닐며 아름다운 왕궁의 향취에 푹 빠졌다. 전통적인 서부의 강국 톨리안 왕국의 왕궁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불론 부국 중 부국인 카시아스 왕국의 왕궁에 비해 그 멋은 다소 떨어질지 몰라도 톨리안 왕국의 왕궁은 서부의 건축 양식과 대왕국을 상징하는 웅장스러움이 잘 어우러져 서부의 패자에 걸맞은 웅장함을 자아내고 있었다. "나도 마탑 말고 이런 곳에서 살고 싶은데...... 나와 몇명이 함께 살기에 이런 곳은 너무 크겠지." 한다면 못할 것도 없지만 엘은 스스로 생각해 봐도 이건 과했다고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요즘 불안정해진 미래 때문에 엘은 유달리 여러 가지 미래를 설계하고 있었다. 9클래스 마스터인 루이아스와의 싸움을 앞두고 이런 행동은 마음 약한 이의 행동일지 모르겠으나 오직 자신만을, 그리고 자신의 주변만을 위하는 엘의 성격상 대륙을 위한다는 거창한 대의명분을 안고 10명에 이르는 초인들을 이끌고 계획을 세우려니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닐 수 없었다. "오늘은 파티니까 마음껏 즐기자. 내 의중을 국왕 전하께 전하면 국왕 전하도 딱히 나를 방해하지 않겠지." 오늘만큼은 마음껏 취하고 먹고 싶은 것이 엘의 솔직한 생각. 그랬기에 파티에 참가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국왕이 순순히 놓아 줄까? 그것이 염려되기도 했지만 자신이 부탁한다면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엘의 생각이었다. "일단 부딪쳐 보는 게 좋지." 자신의 얼굴을 알아본 근위병이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국왕이 자진을 보자고 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왕궁을 거닐고 있으니 빠른 걸음으로 엘에게 다가오는 기사가 있었다. 아마 레도프 국왕이 보낸 기사일 것이다. 엘은 기사를 보며 입을 열었다. "국왕 전하께서 보내셨겠죠?“ "그, 그렇습니다." 엘이 먼저 묻자 기사가 오히려 얼떨떨한 표정이 지었다. 그런 기사에게 웃음을 지어 보인 엘은 손짓을 했다. "자, 그럼 앞장서 주세요. 제가왕궁의 지리를 잘 몰라서 말입니다." "아, 알겠습니다." 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기사. 곧이어 기사는 앞장서기 시작했고, 엘은 그런 기사를 뒤따랐다. 왕궁은 무척 넓었다. 레도프 국왕이 머무는 곳을 무려 15분이나 걸어가야 했으니 말이다. '길을 잃지 않는 게 신기하군.' 엘은 드넓은 왕궁에서 길을 잃지 않는 사람들을 신기하게 여기며 마침내 레도프 국왕이 머무는 궁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입니다." "안내 고맙습니다." 기사는 더 이상 진입할 수 없는지 발걸음을 멈추었고, 엘은 간략한 인사와 함께 궁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큰 문 앞에 멈춰 섰을 때, 시종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금탑주님.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고해 주세요." 엘의 말에 시종이 외쳤다. "전하, 금탑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어서 들라 하라." 승낙의 목소리와 함제 문이 열렸고, 엘은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그의 눈에 오랜만에 보는 레도프 국왕의 모습이 나타났다. "어서 오십시오, 금탑주님. 무척 오랜만입니다." 한 나라의 국왕 아니, 대왕국이라 칭해지는 톨리안 왕국의 국왕이 존대하는 것을 보면 엘의 위치가 얼마나 높은가를 알 수 있다. "오랜만입니다, 국왕 전하." 엘은 그런 레도프 국왕의 존대가 다소 거북했지만 순순히 받아들였다. 이미 자신은 대륙에 단 9명뿐인 8클래스 마법사다. 모든 마법사들이 우러러보는 경지에 이른 자이며 국가에 있어 중요한 척도가 되는 비밀 병기와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위치를 자각했기에 레도프 국왕의 말에 불편함을 느낄지언정 거절하지는 않았다. "초대를 해 주셔서 무척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오는 파티라 무척 설레는군요." "허허, 금탑주님이라면 어디에서라도 초대가 쇄도할 텐데 말입니다." 웃음을 띤 레도프 국왕의 말. 하지만 실상은 그러하지 못했다. 금탑은 무척 폐쇄적인 곳이다. 걸어서는 절대 들어갈 수 없으며, 오로지 텔레포트만으로 들어설 수 있는 곳이 바로 금탑이었다. 그것도 금탑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존재는 디벨 상단에 소속된 상인들뿐이었으며, 다른 이들의 침입은 일체 허용되지 않았다. 금탑과 연락하는 곳도 톨리안 왕국에서 왕궁이 유일했다. 통신 채널을 맞춰 놓았기에 왕궁과 통신이 가능한 것이지 육로로도, 텔레포트로도 접근이 불가능했기에 누구도 금탑과 연락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금탑과 유일하게 접점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금탑주와 직접 만나는 것뿐이다. 그랬기에 사람들이 그토록 엘을 만나려고 기를 쓰는 것이다. 엘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초대를 하고 싶어도 못하겠지요. 금탑은 무척 폐쇄적인 곳이니까요." "허허, 그렇군요. 제가 그런 것을 잘 몰랐습니다." 레도프 국왕은 여전히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만." 엘은 레도프 국왕을 보며 말을 꺼냈다. "부탁이라...... 무엇입니까?“ 금탑주가 자신에게 할 만한 부탁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갑자기 금탑주가 부탁이라니? 레도프 국왕의 눈에 호기심이 어리자 엘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별로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이번 파티에서 제 정체를 가급적 숨겨 주셨으면 싶어서 말입니다. 오늘 파티는 가급적 조용히 즐기고 싶습니다. 그러니 국왕 전하께서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흐음......“ 엘의 말에 레도프 국왕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사실 엘의 말을 들어주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그렇게 되면 레도프 국왕의 의도에 상당히 어긋나게 된다. 이번 파티에 주역은 어디까지나 에리스 공주이지만 그 자리를 빛내 주는 인물은 어디까지나 금탑주여야 한다. 금탑주를 소개시키면서 톨리안 왕국과의 관계가 공고함을 대륙에 널리 알리려 했는데 엘이 지금 그것이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던 것이다. "무척 쉬우면서 무척 어려운 부탁이군요." 레도프 국왕이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말했다. 엘 또한 자신의 의도를 모르지 않으리라. "음, 금탑과 왕국의 관계 때문이라면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톨리안 왕국을 떠나지 않을 거니까요." 엘이 말을 했지만 레도프 국왕은 그 말을 믿기 힘들었다. 젊은 사람의 말은 쉽게 변한다는 건 둘째 치더라도 당장 톨리안 왕국과 금탑에 어떠한 연결 고리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소한 일이 틀어지기만 해도 떠나 버릴 수 있는 존재가 바로 금탑주였다. 톨리안 왕국으로서는 반드시 금탑주를 잡아야 하는 입장이었기에 레도프 국왕은 그런 엘의 말에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다. "흠, 제 말에 부족함을 느끼고 계시는군요." 엘은 그런 레도프 국왕의 심정을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하기야 자신의 입장만 하더라도 아무런 연고도 없는 막 강한 힘은 불안하기 짝이 없는 존재에 불과할 것이다. 그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갔기에 엘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하고 있던 레도프 국왕이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현재 톨리안 왕국의 정세는 무척 어수선합니다. 비록 왕권이 강해졌다고 하지만 제1왕자파 귀족들의 빈 공백으로 기존의 귀족들과 새로 자리를 차지한 귀족들의 다툼이 심하지요. 그런 마당에 금탑이 우리 왕실을 확실하게 지지하지 않는다면...... 상당히 복잡한 지경에 놓일 수 있습니다." 레도프 국왕의 말이 십분 이해가 갔기에 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만 해도 으슥한 뒷골목에서 건달들과 조우하지 않았던가. 그들이 귀족들과 연이 닿아 있다는 것은 새로운 귀족들도 사라진 제1왕자파 귀족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존의 귀족들과 그들이 충돌한다면 톨리안 왕국은 자칫 내전에 빠질 수 있었기에 그들이 함부로 경거망동 못 하도록 금탑주가 왕실을 지지해 준다면 그들은 눈치만 볼 뿐 더 이상 움직임을 보이지 못할 것이라는 게 레도프 국왕의 계산이었다. 엘은 그 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파티가 끝나고 제가 지지 선언을 해 드리면 어떻겠습니까?“ "으음...... 그것도 좋지만 파급 효과가 부족합니다." 레도프 국왕의 부정적인 말에 엘은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조용히 파티를 즐기려고 찾아왔는데 자칫하면 또다시 고약하게 얽힐 수 있었던 것이다. “......” 한동안 조용히 생각에 잠긴 엘. 그런 엘의 모습을 레도프 국왕은 묵묵히 바라보았다. 잠시 후, 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렇게 하도록 하지요. 우선 제가 파티 초반에 등장하여 국왕 전하께서 바라시는 것을 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퇴장하고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 조용히 파티를 즐기다가 돌아가겠습니다. 어떻습니까?" 레도프 국왕으로서는 그리 나쁜 제안이 아니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금탑이 왕실을 지지해 주는 것이다. 확실하게 혈연관계를 맺는 것이 목표이긴 하지만 일단은 지지를 해 주는 것만으로도 지금의 혼란을 잠재울 수 있었기에 레도프 국왕으로서는 감지덕지였다. 금탑주가 파티에 머물러 주어 확실한 관계를 보여 주면 더 좋겠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엘이 상당히 양보해 주는 것이었기에 레도프 국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금탑주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넵니다." "뭘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만큼 이런 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엘이 웃으며 말했지만 레도프 국왕은 차마 대꾸해 줄 수가 없었다. 그의 귀에 들리길 엘의 말은 필요성이 없어졌을 때 톨리안 왕국을 떠나겠다는 말로 들린 것이다. 금탑주가 온다면 반겨 줄 국가는 무수히 많다 레도프 국왕은 금탑주가 그것을 노리고 말한 것인지 의심했으나 여태껏 겪어 본 바로 금탑주가 그런 인물이 아니란 것을 알았기에 이내 의심을 털어 버렸다. 레도프 국왕은 슬쩍 시계를 바라보았다가 엘과 이야기를 나눈 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을 알고는 미안한 웃 을 흘렸다. "허허, 제가 금탑주님을 너무 오랫동안 잡아 두었군요. 파티가 시작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럼 부탁드리도록 하지요." "알겠습니다. 그럼 파티 때 뵙겠습니다." 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방 밖으로 나온 엘은 시종을 보며 물었다. "옷을 갈아입어야 할 것 같은데 혹시 갈아입을 만한 공간이 없습니까?“ 시종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없을 리 있겠습니까.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엘은 앞장서는 시종의 뒤를 따랐다. 파티가 벌어지는 연회장에는 수백 명이 넘는 귀족들이 모여 있었다. 오늘 파티에 참석하는 귀족들은 유난히 귀족가 자제들 을 많이 동반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어떻게든 에리스 공주와 인연을 맺게 하려는 귀족들의 속셈이 있었기 때문이다. 에리스 공주는 혼기가 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에리스 공주와 혼인을 할 수만 있다면 단숨에 왕실과 사돈을 맺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현재 톨리안 왕국의 왕권이 비약적으로 강해진 만큼 왕 실과 인연을 맺어 둬서 나쁠 건 없었다. 그런 속셈으로 연회장에는 남자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렇다고 귀족 영애의 숫자가 적은 건 아니었다. 왜냐하면 참가할지 확실치는 않지만 금탑주가 참가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귀족들이 귀족가 영애들도 모두 데려 와 참석했기 때문이다. 혼기가 찬 여인부터 시작하여 아직 어린 나이의 영애까지. 일부 귀족들은 능력이 있음에도 아직까지 결혼하지 않은 엘에게 심각한 성적 결함이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기에 나이가 어린 아이들까지 데리고 온 것이다. 엘이 안다면 땅을 치고 분해 할 일이었다. 마침내 파티 시작 시간이 되고, 시종의 큰 목소리가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국왕 전하와 왕비 마마, 유드미온 왕자 전하와 오늘 파티의 주인공이신 에리스 공주 마마께서 드시옵니다." 시종의 외침에 시끌벅적하던 연회장이 조용해졌다.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는데, 그곳으로 레도프 국왕을 비롯한 국왕 일가가 입장하고 있었다. 한때 왕자 셋을 중심으로 치열한 권력 투쟁을 벌였지만 현재 톨리안 왕국에는 왕자가 단 한 명뿐이었다. 바로 승자인 유드미온 왕자뿐이었던 것이다. 입장하는 유드미온 왕자의 입가에 미소가 맺혀 있었다.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유드미온 왕자의 입가에 미소가 가시질 않았다. 짧으면 10년, 길면 20년 후에 자신이 대왕국 중 하나인 톨리안 왕국을 물려받게 되었으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파티에 참석하는 에리스 공주의 표정은 결코 밝지 않았다. 그것을 본 유드미온 왕자가 말을 건넸다. "왜 그러냐, 에리스. 표정이 좋지 않구나." 유드미온 왕자의 말에 에리스 공주의 몸이 움찔했다. "아, 아니에요." 그렇게 말한 에리스 공주는 평소의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레도프 국왕이 높은 곳에 서서 신하들을 내려다보았다. 이런 국가적인 파티에서는 국왕이 축사를 한 뒤 파티를 시작하는 것이 의례였다. 하지만 레도프 국왕은 이번만큼은 그런 의례를 지키지 않았다. 그는 귀족들을 보며 말했다. "오늘같이 기쁜 날 특별한 귀빈을 모셔 축사를 대신 하도록 했으니 모두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소." 귀빈이라는 말에 귀족들의 눈이 반짝였다. 레도프 국왕이 귀빈이라 칭할 정도면 누구인지 대충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소개하겠소, 우리 왕국의 자랑이자 왕국의 수호신인 금탑주님 이시오." 스팟! 레도프 국왕의 말에 눈부신 백색 광채가 모여들더니 한 순간 빛이 폭사했다. 잠시 후 빛이 걷혔을 때 엘이 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엘이 등장했음을 본 레도프 국왕은 단상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엘이 단상 위로 올라가 짧게 축사를 하였다. "오늘 같이 기쁜 파티의 축사를 하게 되어 무척 영광입니다. 다함께 즐겁게 마시고 먹고, 즐겁게 어울렸으면 합니다. 이만 짧게 줄이겠습니다. 모두 파티를 즐겨 주세요." “......” 너무 짧은 축사에 한순간 침묵이 흘렀다. 8클래스 마법사의 축사라 하여 무언가 현기 있는 말을 기대했는데 현기는 커녕 고작 몇 마디로 축사를 끝마친 것이다. 번거로운 걸 싫어하는 엘의 성격이 그대로 반영된 축사이기도 했다. "허허, 무척 간단한 축사로군." 레도프 국왕은 간단하게 축사를 하는 엘의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은근한 눈으로 에리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에리스, 금탑주가 어떻더냐? 정말 괜찮은 인물 아니더냐?“ "네...... 정말 대단한 사람이지요." 엘의 모습을 바라보던 에리스는 레도프 국왕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몇 년 전 파티에서 엘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 엘은 자신을 도와주겠다고 했다. 진심으로 도와주려는 모습, 그녀는 그때 정말 감동했다. 하지만 운명이란 것은 정말 얄궂나 보다. 다른 이들과 결혼하는 걸 염두에도 두지 않던 자신에게 금탑주와 결혼을 하라고 하다니...... 현명한 에리스 공주는 그런 레도프 국왕의 심중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톨리안 왕국과 금탑의 불안정한 관계를 혈연관계로 안정시키려는 레도프 국왕의 생각을 말이다. 금탑이 톨리안 왕국에 완전히 정착시키는 것은 무척 중요한 사항이었기에 에리스 공주는 차마 레도프 국왕의 말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녀 하나의 희생으로 톨리안 왕국 은 대대손손 번영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에리스 공주 본인이 금탑주에게 알지 못 할 묘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도 한몫했다. 레도프 국왕이 에리스 공주에게 말했다. "너만 믿겠다, 에리스." “......알겠습니다." 자신을 믿는다는 레도프 국왕의 말에 에리스 공주는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축사를 마친 엘이 텔레포트로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어떻게든 금탑주와 인연을 만들어 보려는 귀족들은 발을 동동 굴렀지만 에리스 공주는 그런 것에 흔들리지 않았다. 이미 금탑주가 모습을 바꾸어 파티에 참가한다는 걸 레도프 국왕에게 들어 알고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모습으로 바꾼 엘에게 다가가 청혼한다. 이것이 레도프 국왕이 부탁한 내용이다. 이 세계에서 여자가 먼저 남자에게 청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약 남자가 거절한다면 여자는 평생 결혼할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의 외모가 웬만큼 모나지 않고 집안이 괜찮다면 남자들은 그 청혼을 받아들인다. 물론 정치 적 입장이나 복잡한 사정이 얽혀 있다면 생각지도 않고 매몰차게 거절하기도 한다. 어쨌든 여자가 먼저 청혼을 한다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 이었기에 에리스 공주는 속에서 올라오는 모욕감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하지만 어쩌랴. 이것이 다 왕궁의 번영을 위한 일인데. 엘이 모습을 감추자 잠시 혼란이 일어났지만 잠시 후 파티는 정상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금탑주는 사라졌지만 아직 에리스 공주가 있다. 그랬기에 귀족들은 서로 어울리면서 호시탐탐 에리스 공주가 있는 곳을 살폈다. 그러나 에리스 공주는 처음 등장한 그 자리에서 못이 박힌 듯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 그녀가 찾아야 하는 것은 금탑주, 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백 명이 모인 연회장에서 금탑주를 찾는 것은 척 힘든 일이었다. 더군다나 축사를 하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귀족들이 금탑주의 모습을 보지 않았던가. 그러니 모습을 바꾸고 올 수밖에 없다. 그렇게 약 1시간이 흘러갔다. 그럼에도 에리스 공주는 자리에 못이 박힌 듯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때, 한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더니 이내 고성 이 들려왔다. "아앗! 너는!"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고성이 들려온 곳을 향했다. 그곳에는 20대 후반의 사내와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청년이 서 있었다. 20대 후반의 사내는 청년을 잘 만났다는 듯 씩씩거리고 있었고, 청년은 무언가 난감한 듯 볼을 긁적이고 있었다. '저 사람은......‘ 에리스는 청년의 모습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복장이 바뀌고 머리 스타일이 바뀌었다고 해도 그녀는 알아볼 수 있었다. 단정하게 내려진 앞머리를 평소와 달리 쓸어 넘겼고, 즐겨 쓰던 안경을 쓰지 않아 준수한 외모가 그대로 드러나는 20대 초반의 청년은 에리스가 1시간 넘게 기다려 오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난감한 듯 볼을 긁적이는 청년, 바로 엘이었다. 에리스 공주의 발걸음이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11. 마도 제국의 선언 part. 1 '좋아, 축사를 했으니 이 정도로 되겠지.' 짧은 축사를 한 엘은 곧장 텔레포트 주문을 외워 연회장을 벗어났다. 비록 축사를 짧게 하긴 했지만 그 속에는 레도프 국왕이 원하던 것이 모두 들어 있었다. 우선 즐겁게라는 말은 결코 먼 사이에서 쓸 수 없는 말이었다. 가까운 사이만이 즐겁게 즐길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말을 여러 번 반복했으니 귀족들은 금탑이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을 알았을 터. 그렇다면 별 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후후!' 그랬기에 짧은 축사를 하고 엘이 마음 놓고 몸을 뻘 수 있었던 것이다. '하기야 걱정이 되긴 하겠지.' 속으로 웃는 한편 엘은 레도프 국왕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생각대로 금탑과 왕국 간에 아무런 연결 고리도 없다. 그들로서는 자신들의 필요성이 떨어지면 금탑이 언제든지 떠날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엘은 그랬기에 레도프 국왕의 제안을 승낙한 것이다. 그의 고민을 알았기 때문일까? 하지만 엘은 톨리안 왕국을 떠날 마음이 절대 없었다. '아직 로웰린 누나에게 사촌 관계인 것을 밝히지도 않았고, 이곳에 벌여 놓은 각종 사업들도 많은데 갈 수 없지. 무엇보다 이곳이 정이 들었고 말이야.' 텔레포트를 하던 순간 엘은 에리스 공주와 잠깐이나마 시선을 마주칠 수 있었다. 그가 본 그녀의 눈은 무언가 슬픈 빛을 띠고 있었다. 무언가 강제적인 것이 작용한 듯한 모습. 엘은 그런 에리스 공주의 모습에 과거 자신이 그녀를 도와주겠다고 한 던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여러 가지로 바쁘다 보니 그것을 깜빡 잊었나 보군. 이참에 잘 도와줘야겠어.' 그렇게 마음먹으며 왕궁 한편에 모습을 드러낸 엘은 곧장 복장을 바꿔 입기 시작했다. 같은 사람이지만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엘의 특기와도 같았다. 전생에서도 안경 하나로 전혀 다른 사람의 모습이 되지 않았던가. 엘은 우선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와 같은 안경을 벗고, 이마를 가리고 있는 앞머리를 적당히 넘겼다. 마법으로 처리된 무스 같은 것이 있었기에 엘은 이마를 확 터놓은 얼굴이 되었다. 게다가 안경을 쓰지 않아 지적 인 이미를 풍기던 것이 단번에 준수한 이미지를 풍기기 시작했다. 마무리로 귀족가 자제나 입을 법한 귀한 옷감의 파티복을 챙겨 입었다. 혼자 입는 옷이 아니어서 입는 데 무척 고생을 했지만 그 정도는 엘에게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좋아, 다 됐어." 파티에 참석하기 위한 복장을 다 챙겨 입은 엘이 매직 미러로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매직 미러에는 이지적인 청년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의 청년이 자리하고 있었다. 멋들어진 파티복에 깔끔하게 처리된 머리 스타일은 일반 귀족 자제들과 차별을 이루면서 무척 준수한 느낌을 주었다. "이 정도면 나도 무척 괜찮은 인물인데? 하하하!" 나쁘게 보면 여자나 흘리고 다니는 제비와 같은 느낌이었으니 좋은 게 좋은 거라, 엘은 좋게 생각하며 넘어갔다. 분장을 마친 엘은 곧장 파티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평범하게 파티를 즐겨 보는 것도 엘이 소망한 것들 중 하나다. 그도 그럴 것이 국가적 차원으로 여는 파티는 무척 호화스럽다. 국가에서 연주를 잘하기로 유명한 악사들을 초빙하여 음악을 연주하게 하고, 맛깔 나는 음식과 고급스러운 술, 그리고 아름다운 레이디는 파티에서 가장 매력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더군다나 이번 파티에서는 유난히 아름다운 귀족가 영애들이 많았다. 바로 금탑주와 대면시켜 어떻게든 금탑주와 엮어 보려는 귀족들이 자신의 딸들을 예쁘게 치장시켜 데려왔기 때문이다. '세레나와 카이나에게 미안하지만 춤만 추는 것은 괜찮지 않겠어? 음, 아니다. 역시 미안하네. 그냥 다음에 세레나와 카이나랑 같이 춤을 추는 게 낫겠군.' 파티에 참석한 엘은 레이디와 춤을 추는 것도 목표로 삼았으나 세레나와 카이나를 배신하는 행위 같아 차마 그것을 하지 못했다. '음식과 술이나 즐기지. 이런 흥겨운 분위기에서는 분위기가 곧 반찬이니 말이야.' 연회장 안으로 들어선 엘은 아까 전 보았던 화려함을 다시 보고는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흥겨운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동화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쌓여 있던 부담감과 고민들이 날아가 버리는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저 즐기는 자리, 이 파티장이 그러했다. '이래서 귀족들이 파티에 참석하는 거로군.' 불과 몇 년 전에 주최된 파티에서는 정치적 이유가 합쳐져 흥겹지 못했지만 오늘의 파티는 반란이 진압되고 그것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다. 당연히 내전으로 지친 귀족 들이 파티를 즐기려고 하니, 절로 분위기가 즐기는 분위기로 기우는 것이다. "음, 좋군. 확실히 맛있어. 왕실 주방장들은 음식을 잘 하는가 보군. 술도 향긋하니 맛있고." 엘은 연회장 이곳저곳을 누비며 음식과 술을 마음껏 들었다. 처음 보는 엘의 모습에 귀족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신경을 껐다. 무척 준수하긴 했지만 자신들이 모를 정도면 어디 시골 남작가 자제나 될 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의 생각은 오히려 엘에게 도움을 주었다. 덕분에 엘은 연회장 곳곳을 다니며 여러 가지 음식을 맛볼 수 있었고, 술 또한 마음껏 마실 수 있었다. "후우! 역시 파티가 좋단 말이야. 이참에 나도 파티나 여러 곳 다녀 볼까......“ 적당히 알콜이 들어가니 기분이 좋아지는 걸 느끼며 엘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런 즐거움도 한 사람을 마주함으로써 깨지게 되었다. 갑자기 한쪽에서 큰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아앗! 너는!" "응?“ 엘은 절로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시선이 향했다. 그곳에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귀족과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사내가 말이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엘이 보기에 사내의 얼굴이 어딘가 눈에 익었다. '해독.'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해독 주문을 외운 엘은 알콜이 완전히 해소된 것을 느끼며 말짱한 정신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중 20대의 사내가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엘은 그 사내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 어제 그 건달......“ “다, 닥쳐라!" 엘이 자신을 가리키며 건달이라 말하자 사내가 당황한 듯 소리쳐 엘의 말을 막았다. 그런 사내의 외침에 30대 중반의 귀족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무슨 일이냐, 펄스." “형님, 이자입니다. 어제 저를 그 지경으로 만들었던 자가요." 펄스라 불린 사내의 말에 귀족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너를 그렇게 만든 이가 바로 이 사람이군." 귀족은 그렇게 말하고는 엘의 위아래를 훑었다. 그리고 신중한 목소리로 자기소개를 하였 다. "나는 롤프 자작이라 하오." 상대가 소개를 했는데 자신은 소개를 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 엘은 자기소개를 하였다. "저는 엘이라고 합니다." 엘의 태도에 롤프 자즉의 눈썹이 꿈틀거리더니 대번에 태도가 바뀌었다. "엘? 귀족이 아닌가?“ "일단 작위는 없습니다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는 엘의 태도에 롤프 자작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그런가. 작위가 없군. 어느 가문 출신이지?“ 롤프 자작이라는 자는 무척 치밀한 자인 듯했다. 작위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을 확인했으면서 가문까지 확인하려는 걸 보니 말이다. 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소속된 가문도 없습니다만." "그럼 평민이로군. 너 같은 평민이 어떻게 이곳에 온 거지?“ 분위기는 삽시간에 싸늘해졌다. 모든 귀족들의 시선이 롤프 자작과 엘에게 향했다. 그들의 표정은 다양했다. 웅성거리는 자와 대놓고 경멸 어린 표정을 짓는 자, 그리고 아무 상관없다는 듯 방관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 등 말이다. 딱히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이지 대부분 롤프 자작의 편인 것이 분명했다. 롤프 자작은 차가운 미소를 머금은 채 엘에게 말을 이어 나갔다. "너는 어제 나의 사촌 동생을 부상입히는 중한 죄를 저질렀다. 내 사촌 동생이 비록 작위는 없으나 귀족은 귀족. 귀족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어떻게 되는지 아나?" “모릅니다만......” 정말 몰라서 물은 것이지만 롤프 자작에게는 비꼬는 것처럼 들렸나 보다. 한차레 눈썹을 꿈틀거린 롤프 자작이 다시 냉정을 되찾고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바로 즉결 처형이다. 하찮은 평민이 귀족을 건드렸다는 것은 그만큼 중죄이기 때문이지." 롤프 자작의 말에 대부분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귀족들. 그들 모두가 제3왕자파에 속한 귀족들이었다. 그들은 전혀 승리하지 못할 권력 투쟁에서 승리하자 극도로 오만해진 상태였다. 지방의 백작, 자작, 남작에 불과 한 자신들에게 과거 떵떵거리던 백작 이상의 귀족들이 함부로 기를 못 펴니 당연하지 않겠는가. 몇몇 귀족들은 롤프 자작보다 더 심한 말을 하였다. "그냥 죽이지는 않지. 사지를 찢어 죽이거나, 온갖 고문을 가한 뒤 마법으로 치료를 하여 정신적으로 죽게 만들지." "고귀한 피를 다치게 한 죄는 그만큼 큰 법이지." 귀족들이 모두 자신의 편을 들어 주자 롤프 자작의 얼굴에는 더욱 자신감이 서렸다. 그는 오만한 어조로 말했다. "보통 귀족들은 그렇게 처벌을 하지만 나는 비교적 관대한 편이다. 편안하게 죽고 싶다면 그렇게 죽여 줄 수도 있지." 씰룩. 엘의 입가에 파르르 경련이 일어났다. 롤프 자작은 그것이 엘이 겁을 먹은 것 때문에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생각과 판이하게 다른 것이었다. 엘은 내심 충격을 받았다. 설마하니 귀족들이 평민을 이렇게 심하게 대할 줄 몰랐던 것이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착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지킬 건 지키는 사람이었다. 사람에게는 존중을 해 주었고,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 주었다. 하지만 이게 무엇인가. 귀족이란 작자들은 귀족이 아닌 인간들을 인간으로 치지도 않지 않는가. 귀족들은 예상보다 인간들을 더욱 하찮게 여기고 있던 것이다. 롤프 자작의 어조로 인해 엘은 좋았던 기분이 급속도로 가라앉는 걸 느꼈다. 현실을 마주하다 보니 역시 세상은 힘이 좌우한다는 것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엘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자 롤프 자작은 엘이 심각한 두려움에 차마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라 판단했다. 그리고 엘에게 결정을 독촉했다. "자, 정해라. 어떻게 죽고 싶은가." "보자 보자 하니 못하는 말이 없군요. 롤프 자작." 차갑게 웃음을 짓고 있던 롤프 자작은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웃음을 지워 나갔다. 그리고 돌아간 그의 시야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로웰린이 자리하고 있었다. 로웰런은 차가운 눈으로 롤프 자작을 훑었다. 그녀의 시선에 롤프 자작은 저도 모르게 몸에 오한이 감도는 걸 느꼈다. 로웰린이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가 비록 귀족이지만 오늘같이 귀족을 망신시키는 건 처음 보는군요. 비록 이분이 어떤 일을 벌인지 모르겠지만, 또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지 어떤 이유로 일이 발생 했는지 전혀 모르지만 단순히 평민이라는 이유로 막말을 하고 죽음을 논하는 걸 보면서 같은 귀족인 내가 다 부끄러워지는군요." 정면으로 받은 면박이었기에 롤프 자작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이런 빌어먹을 년이!' 롤프 자작뿐만 아니라 파티장에 모인 대부분의 귀족들 또한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비록 로웰린이 제3왕자파의 수장이지만 제3왕자파 족들은 대부분 로웰린을 불쾌하게 여기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에게 막대한 이윤을 가져다줄 제1왕자파의 이권들을 모두 레도프 국왕에게 넘겼기 때문이다. 만약 로웰린이 평범한 귀족이었다면 그녀의 가문은 진작 풍비박산 났을 것이다. 하지만 귀족들은 감히 그녀에게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그녀의 뒤에 있는 거대한 존재. 바로 금탑 때문이다. 제국에서도 한 수 접어주는 금탑은 이미 톨리안 왕국의 국력보다 더욱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그가 로웰린의 뒤에 있는데 어떤 귀족이 감히 로웰린에게 대들 수 있겠는가. 그것은 롤프 자작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그는 속으로 분기를 씹어 삼킬 뿐,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성급했습니다." "성급한 걸 알았으니 다행이군요." 날카로운 눈으로 쏘아본 로웰린이 이번에는 엘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 아버지?“ 엘을 본 로웰린의 몸이 순간 움찔했다. 얼핏 본 엘의 모습이 그녀의 아버지와 무척 닮았기 때문이다. 하긴 그럴 수도 있다. 로웰린의 아버지는 엘에게 있어 작은 아버지였으니 말이다. 로웰린은 자신의 착각이었음을 깨닫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게 설명을 해 줄 수 있나요? 그럼 제가 가급적 공평하게 판단을 해 드리겠습니다." “......” 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한동안 로웰린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입을 열었다. “백작님께서는 다른 귀족들과는 다르시군요. 귀족답지 않다고 해야 할까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 엘의 말에 연회장은 한차례 술렁였다. 이미 평민이라고 암묵적으로 인정한 엘이었다. 그런 그가 최고위 귀족 중 하나인 로웰린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충격적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로웰린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로웰린은 한동안 엘을 응시하더니 말했다. "제가 귀족답지 않다고요?" "그렇습니다. 다른 귀족들은 모두 고압적인 자세로 자신들이 마냥 우수하다고만 역설하던데 말이죠." "그건 아니에요. 저 같은 귀족도 있으니 말이죠." "아, 그림 말을 정정하겠습니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이죠." 엘의 말에 로웰린은 살짝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아시는 분 중에 귀족이 아니면서 무척 놀라운 능력을 지니신 분이 있어요. 맨손으로 지금은 그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세력을 일구셨고, 모든 사람들은 그분을 우러러보죠." '내 이야기다!' 엘의 눈이 반짝였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로웰린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저는 그분을 보면서 평민과 귀족의 차이점을 잘 모르겠더군요. 그분 또한 직위는 제국의 공작에 밀릴 것은 없지만 엄연한 신분은 평민이거든요." 탑주란것은 작위가 아니었기에 엄연히 말하면 평민이다. 로웰린의 말이 맞았다. "그분을 보면서 저는 평민들 중에서도 무척 능력이 뛰어난 이들도 많다는 것을 느꼈죠. 아마 당신도 제가 느끼길, 결코 범상치 않은 분일 것이 분명해요. 그렇지 않은가요?" “......” 엘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로웰린의 말에 무언가 알 수 없는 쑥스러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자, 그럼 제게 설명을 해 주실 수 있나요? 무슨 일로 이런 사태가 일어난 것이죠?“ 로웰린이 엘을 재촉할 때, 한 여인이 바람처럼 나타났다. "그만하세요, 루비어스 백작님." "아, 공주님을 뵙습니다." 로웰린의 고개가 숙여졌다. 하지만 에리스 공주는 그런 로웰린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엘에게 시선을 주었다. 엘 또한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조용히 에리스 공주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을 보는 순간 엘은 그녀가 자신의 정체를 모두 알고 있음을 깨달았다. 에리스 공주는 엘에게 조용히 물었다. “도저히 감내하기 힘든 모욕을 받고도 참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제가 참으면 일을 조용히 넘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엘의 태도는 당당했다. 에리스 공주 또한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물었단. "모든 사태를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데 참았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힘으로 해결하는 것은 능사가 아니며, 힘으로 남을 억누르는 것은 무뢰배나 하는 짓이기 때문입니다." “힘으로 해결하지도 않고 마냥 참는다면 일은 해결되지 않아요. 과연 그게 좋은 방법이라 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누구도 피해를 보지 않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최선이고 단지 즐기기 위한 자리에서 누구도 피해 보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에리스 공주는 입을 닫고 한동안 엘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한참 후에 조용히 입을 열었다. "처음 보았을 때도 느꼈지만 당신은 무척 현명하신 분이군요. 힘이 있으되 그것을 남용하지 않고, 모든 사태를 가장 이상적으로 해결하시려는 태도. 정말 힘을 가진 분의 올바른 태도라 생각합니다." "과찬이십니다." 엘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락. 그런 엘에게 에리스 공주가 조용히 다가갔다. 알 수 없는 문답에 귀족들은 모두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에리스 공주와 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로웰린 또한 다르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 엘에게 다가간 에리스 공주는 새하얗고 섬세한 손을 들어 엘의 손을 잡았다. 에리스 공주는 경건하다 할 수 있는 태도로 조용히 엘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나직하지만 또 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륙에 존재하는 대마법사 중 한 분이신 위대한 금탑 주이시여. 가이아 여신의 축복을 받은 저 에리스가 당신의 영원한 반려가 되고자 합니다. 부디 부족한 저를 받아 주시옵소서," “......” 에리스 공주의 말에 연회장에는 싸늘한 침묵이 찾아왔다. 우선 에리스 공주의 말을 들은 롤프 자작과 펄스는 경악으로 입이 떡 벌어져 있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다그치던 청년이 금탑주라는 점 때문이다. 로웰린 또한 마찬가지다. 설마하니 자신이 구해 주려고 하던 사람이 엘이었을 줄이야. 사람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오늘에서야 알았다. 귀족들 또한 경악했다. 설마하니 자신들이 몰아붙이던 이가 금탑주였을 줄 몰랐던 것이다. 더구나 금탑주에게 그런 말을 내뱉다니, 귀족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탈색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공통적인 점에 경악하고 있었다. 바로 도도하고 아름답기로 이름 높은 에리스 공주가 금 탑주에게 청혼을 했기 때문이다. 귀족계에서 여인이 청혼을 거절당하면 평생 결혼을 할 수 없는 몸이 된다. 그것을 에리스 공주 또한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 분명 한데 청혼이라니...... 금탑주에게 이미 장래를 약속한 여인이 있다는 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모두의 시선이 엘과 에리스 공주에게 집중되었다. 한참의 침묵이 흐르고, 한동안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엘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는......” (골든 메이지 10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