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 : 골든메이지7 저자명 : 김현우 펴낸이 : 신현호 출판사 : 디앤씨미디어 출판년도 : 2008년 6월 12일 봉사자 : 정재은 <지은이소개 /김현우> 마음만은 여전히 신인. 오늘도 매일같이 키보드를 두드린다. <차례> 1. 엘의 명령 2. 맥셀 왕자의 반란 선언 3. 인간의 도시 4. 게일라스 자작가의 소멸 5. 루비어스 백작가를 방어하라! 6. 맥셀 왕자로 위장한 카로스만의 강함! 7. 최연소 8클래스 마법사의 탄생 8. 아일라스 제국으로 불어오는 핏빛 바람 9. 세상을 가르는 패왕의 검 10. 엘과 엘리엔의 조우 1. 엘의 명령 한번 지나온 길을 다시 지나는 것이 쉬운 까닭일까? 골든 매직 나이트 1호를 생산할 때에는 1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지만, 나머지 11기의 골렘을 생산하는 데에는 채 2개월도 걸리지 않았다. 아낌없이 재료를 공급하고, 장인들이 열과 성을 다하니 제작에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던 것이다. 나중에 가서는 오히려 엘이 마법진을 새기는 속도가 더 딘 것이 문제가 될 정도였다. 골든 매직 나이트를 모두 생산한 후, 장인들은 무기들 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장인들은 12명의 매직 나이트들이 사용하는 것과 똑같은 형태의 무기들을 각각의 골든 매직 나이트들에게 부여하고자 했다. 작업은 계속되었다. 엘 역시 골든 매직 나이트에 마법진을 모두 새긴 뒤에도 곧장 무기에 마법진을 새기는 작업을 해야 했다. 덕분에 그동안 엘은 완전 초주검이 되어야 했다. 8클래스의 경지에 이르자 신체의 힘과 정신력이 놀라울 정도로 강해졌지만, 막대한 작업량의 중노동은 그런 그로서도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그렇다고 얼렁뚱땅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의 손을 거친 무기들은 곧 그의 기사들이 사용할 것. 그렇기에 엘은 잠까지 아껴 가며 최선을 다해 무기를 제작했고, 3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에 11기의 골렘과 무기들을 모두 제작하는 기적을 이뤄 냈다. 물론 그 이면에는 막대한 양의 자금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마음 같아서는 골든 매직 나이트를 양산하고 수많은 기사들을 모집하여 매직 나이트의 세를 더욱 크게 불리고 싶었지만 골든 매직 나이트 1기를 제작하는 데 드는 비용이 부담이 되었다. 골렘 1기에 수십만 골드가 들었으니 그걸 12배만 곱해도 수백만 골드다. 수백만 골드. 말이 수백만 골드지 이 정도 금액이면 골든 벨리 주민들이 평생 일하지 않고 놀고먹어도 등 따스하고 배 터지게 먹고살 수 있는 금액이다. 엘은 골든 매직 나이트가 모두 완성되자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던 것, 자신의 기사들에게 나이트 골렘을 타게 하고 자신은 그 뒤에서 강력한 마법으로 보조하겠다던 꿈이 지금에서야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아직 방심하기에는 이르다. 엘은 지크릴이 했던 말을 기억한다. 자신이 모시던 마스터는 9클래스 마스터에 다다랐다고...... 솔직히 그 말을 듣던 당시 엘은 9클래스의 강함이 어느 정도인지 몰랐다. 막연히 7클래스 마스터였던 자신과 골든 나이트의 합공에도 끄떡하지 않는 지크릴이 주인으로 모시는 자이니 엄청나게 강할 거라는 생각 정도밖에 없었다. 그러나 막상 8클래스의 경지에 오르니 9클래스의 힘을 어림잡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가히 끝이 보이지 않는 무한의 힘. 8클래스의 경지에 이르면서 마나를 지배할 수 있다고 하지만 9클래스 마법사의 마나 지배와는 차원이 다르다. 8클래스 마법사의 마나 지배가 어린아이 수준이라면 9클래스는 어른 수준인, 그 정도 차이가 있던 것이다. 어린아이가 제아무리 많아도 어른 하나를 당해 내기 어려운 것. 8클래스와 9클래스는 그 정도의 차이다. 때문에 엘은 자신의 결정을 다시 한 번 되짚어봐야 할 정도였다. '9클래스 마법사. 과연 그자를 따르지 않고서 살아갈 있을까?‘ 사실 남들이 떠드는 정의요, 평화라는 것은 엘에게 상관없는 일이다. 엘이 원하는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마법으로 자신의 여인들과 어머니를 지키며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 결정이 다시 흔들리고 있다. 9클래스, 그 마법사의 존재로 인해 말이다. 그런 엘이 흔들리고 있는 걸 알아차린 탓일까? 세레나와 카이나가 엘에게 다가왔다. "괜찮으신가요, 엘 님?“ "괜찮으세요, 주인님?" 상반된 두 사람의 호칭. 하지만 엘을 바라보는 두 여인의 시선은 더없이 따스했다. 세레나는 성녀 사건 때 엘과의 사랑을 확인했다. 그 일 이후로 두 사람의 관계는 한 단계 더 발전했으며, 엘은 세레나를 하나의 안식처로 편안하게 대할 수 있었다. 카이나는 블러드 카먼 때 이후로 더욱 관계가 깊어졌다. 여전히 엘에게 수줍음과 부끄러움이 많지만 자신의 몸속에 엘의 피가 흐른다는 말에 괜히 부끄러워지는 그녀였다. 엘은 그녀들을 보며 복잡했던 마음이 절로 풀어지는 걸 느끼며 미소 지었다. "응, 괜찮아. 잠시 생각을 하느라고." "무엇을 생각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엘이 세레나에게 시선을 주었다. 세레나는 그런 엘에게 빙긋 웃어 주며 말했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이 흘러갈 때는, 한 번쯤 단순하게 생각해 보세요. 때로는 복잡한 것 보다 단순한 것이 더 나 을 때가 있으니까요." 그녀의 미소는 더없이 포근하여 엘은 그동안 쌓였던 감정이 해소되는 걸 느꼈다. 그러자 카이나가 수줍게 엘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래요, 그동안 주인님께서는 수많은 시련을 이겨 내셨어요. 제 일만 해도...... 어, 어쨌든 수많은 시련을 이겨냈고 이곳까지 왔어요." "그래." 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여인의 말은 엘의 결심을 굳히게 하기에 충분했다. 무엇이 필요하랴! 자신의 사람을 자신이 지키려는 것이! 어려움이 있다면 그 어려움을 돌파하면 된다. 예전의 자신이 그러했고, 지금의 자신이 그러하다. 하물며 9클래스 마법사가 웬 말인가. 이곳에는 마계의 대공도 나타났었고, 드래곤도 나타났었다. 설마하니 9클래스 마법사가 드래곤보다 두려우랴? 그렇게 생각하며 엘은 생각을 정리했다. 자기 사람은 자신이 지킬 것이다! 남에게 굽실거릴 이유도, 고민할 이유도 없다. 생각을 정리한 엘이 두 여인에게 말했다. "너희들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너희들을 만 난 건 나에게 행운인 것 같아." 엘의 말에 두 여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방금 그가 한 말은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욱 진하게 다가왔다. 자신이 옆에 있어 행복하다니,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들으면 얼마나 기쁘겠는가. 사실 세레나와 카이나는 한 번씩 이런 생각을 해 봤다. 자신이 엘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게 아닌지...... 그것 때문에 엘이 괴로워하고 힘들어하는 게 아닌지 말이다. 그런데 오늘 이런 말을 들으니 그녀들도 그동안 알게 모르게 괴롭혀 오던 것들이 단번에 쑤욱 내려가는 것 같았다. 정말 행복했다. 엘은 두 여인을 꼬옥 끌어안으며 말했다. "내 말은 진심이야. 그러니 너희들이 혹여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일찌감치 털어 버려. 내 말은 진심이니까." 그렇게 말하며 두 여인을 더욱 강하게 끌어안는 엘. 두 여인은 엘의 품속을 더욱 깊게 파고들었다. '내게는 과분한 여인들,' 전생의 관념 때문인지 두 여인을 받아들인다는 건 사실 엘에게 무척 꺼려지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사랑하지 않는 여인이 없었기에 엘은 그녀들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된 것이다. 서로 포옹한 그들은 긴 시간 동안 그 모습을 유지하였다. *** "너무 웅크리고 있었어." 여인들과의 달콤한 시간을 보낸 엘은 집무실에서 앞으로 금탑이 나아가야 할 길을 생각해 보았다. 골든 벨리는 너무 폐쇄성이 짙다. 그것을 주도한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지만 이것은 자신에게도, 골든 벨리에게도 안 좋다는 것을 알았다. 더군다나 당장 금탑을 위해 일할 인재가 부족했다. 매직 나이트들의 식솔이 있지만 그들은 대부분 어렸을 적부 터 체계적인 단련을 받지 못했기에 재능이 별로여서 당대 매직 나이트의 뒤를 잇기는 힘들어 보였다. 엘이 주목한 것은 차기 매직 나이트 후보다. 그때쯤이면 골든 매직 나이트들도 더욱 증강될 것이다. 매직 나이트들의 수련 아래 차세대 매직 나이트들이 금탑을 지탱하여야 금탑이 본연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 현재 엘이 8클래스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그런 면에 있어서는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가 8클래스에 들었다는 게 알려지기만 한다면 당장 왕국의 전폭적인 지지는 물론 각 지에서 엘에게 마법을 배우고자 하는 지망생들이 모여들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을 모두 정리한 엘은 매직 나이트들을 불러 모았다. 매직 나이트들은 요즘 골든 매직 나이트들을 다루는 연습에 한창이었다. 하루 3시간이 기동의 한계였는데, 당초 엘이 말한 3.0의 출력은 단순한 계산일 뿐, 매직 나이트가 골든 매직 나이트에 탑승하면 서너 명의 소드 마스터는 무리 없이 상대할 만큼 강했다. 우선 골든 매직 나이트의 전신을 구성하는 것은 다름 아닌 매직 메탈이다. 중첩에 중첩을 거친 최강의 뼈대에 매직 메탈을 입히고 거기에 방어 마법을 중첩에 중첩을 거치니 웬만한 오러 블레이드에도 타격을 입지 않는다. 게다가 자체적인 복구 능력이 있어 탑승자가 목숨을 잃지 않는 한 골든 매직 나이트는 자체 수복을 한다. 이런 능력이 얼마만큼의 돈을 들여야 나오는 것인지는 매직 나이트들도 모르지만 전신을 도금한 것 자체부터 엄청난 돈을 들였음을 그들은 알 수 있었다. 때문에 이런 엄청난 가치를 지닌 나이트 골렘을 자신들에게 내려 준 엘에게 그들은 깊이 고개 숙이며 감사하고 있었고, 그런 엘의 기대에 부흥하고자 골든 매직 나이트 의 성능을 하나하나 깨우치고 있었던 것이다. 매직 나이트들이 모두 모이자 엘이 입을 열었다. “한창 훈련 중이신데 불러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가 부른 것은 까닭이 있어서 그런 것이니 일단 들어 보세요." 매직 나이트의 수장 모스가 나서며 말했다. ”탑주님께서 죄송해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저희는 탑 주님께 충성을 바치기로 한 몸, 탑주님의 명령에 얼마든지 불만 없이 따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엘은 충성심 어린 모스의 말에 빙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매직 나이트들은 현재 엘에게 완전히 감복한 상태다. 사실 그들은 요 몇 년 동안 엘을 모시면서 엘만큼 뛰어난 주군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중이다. 그대로 두었다면 트롤의 밥이 되었을 자신들을 거두어 주고, 자신들의 가족을 인간답게 살게 해 줄 터전을 마련 해 주었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힘을 주었으며, 모두가 함께 지켜 나가자고 주장하고 있다. 그동안 엘을 겪어 오면서 감복한 그들은 이 모든 것은 엘이 이룩한 것이며, 자신들의 모든 것은 엘의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충성심이 넘쳐나는 그들의 눈빛에 엘은 내심 과분한 충성심을 받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음과 동시에 기분이 상승하는 걸 느꼈다. "제가 여러분들을 소집한 것은 매직 나이트들이 할 일 이 있어서예요." “할 일 말씀이십니까?" 모스 등의 눈이 빛났다. 사실 그동안 엘이 매직 나이트들에게 내린 명령은 간단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다. 그것도 대부분 전쟁에 임박했을 때 내린 임무였다. 그런데 지금같이 평화로운 시기에 명령이라니, 내심 그 내용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런 그들의 궁금증을 엘은 풀어 주었다. “무척 안타까운 얘기지만 현재 이곳 골든 벨리에는 여러분의 뒤를 이을 만한 재목이 부족합니다. " ”......“ 엘의 말에 매직 나이트들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어렸을 적부터 체계적인 수련을 받지 못했기에 골든 벨리에 존재하는 이들 대부분이 매직 나이트의 뒤를 잇기 어렵다는 것을 말이다. 엘은 말을 이어 나갔다. “해서 저는 여러분의 뒤를 이을 만한 재목들을 외부에서 끌어 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여러분 들을 모두 대륙으로 파견하여 자신의 뒤를 이을 만한 재능을 지닌 아이 네 명에서 다섯 명 정도 데려올 것을 명령 합니다. 성별에 구애받을 필요 없습니다. 재능이 있다면 남자 아이든 여자 아이든 상관없습니다."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마이더가 손을 들고 질문을 하였다. 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 "질문해 보세요, 마이더 경." "저희들의 뒤를 잇는다고 하나 부끄럽지만 저를 비롯한 다른 기사들은 체계적인 검술이 상당히 부족한 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괜찮겠습니까." 마이더의 말에 매직 나이트들은 모두 얼굴이 붉어졌으나 부인하지는 않았다. 마이더를 제외한 11명의 매직 나이트들은 제이머 남작 가의 검술을 익혔다.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에서 소드 마스터를 넘봤던 제이머 남작가의 검술은 분명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결정적인 단점이 있다. 제이머 남작가의 마나 연공법은 검술에 비해 무척 급수가 떨어졌던 것이다. 사실 모스 등이 부단한 노력과 실전을 겸비하였기에 소드 익스퍼트 상급에 다다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만약 다른 이였다면 그들의 나이에 상급 익스퍼트에 드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일 것이다. 마이더 또한 체계적인 마나 연공법을 익히지 않고 실전 에서 경지를 키워 나간 창수였기에 그의 말은 무척 중요 한 점을 짚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엘이 입을 열었다. “마이더 경의 물음은 어쩌면 당연한 겁니다. 저 또한 왜 이런 질문을 안 하나 했거든요. 여기에 답을 하자면, 우선 마나 연공법은 필요 없습니다. 다들 카이나를 아시죠?” 매직 나이트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나를 모를 리 없다. 엘 외의 다른 남자에게 무척 차가워서 카이나는 남자들 에게 얼음의 꽃이라 불릴 정도다. 게다가 검술 실력만큼은 골든 벨리 제일이라 할 수 있다. 얼마 전 20대 초반의 나이에 소드 마스터에 올라 매직 나이트들을 경악하게 만 들었으니 그녀를 모른다면 골든 벨리 주민이 아니라고 자 신 있게 호언장담할 수 있다. 어쨌든 엘은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자 설명을 이어 나갔다. "여러분들이 데려온 이들에게는 제가 카이나가 익힌 마나 연공법을 전수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약간의 금제가 있어서 남에게 어떤 방식으로 익혔는지 가르쳐 주지는 못한다는 점이 조금 치명적입니다만, 그런 면은 어쩔 수가 없으니 여러분 모두 이해해 주실 거라 믿습니다." 끄덕끄덕. 엘의 말에 매직 나이트들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 연공법은 대륙에 있어 무척 귀중한 비전 중 하나다. 이름난 검가는 각자 고유의 마나 연공법을 하나씩 지니고 있으며, 그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도 손쉽게 저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더군다나 엘이 전수하겠다고 하는 마나 연공법은 20대 초반의 카이나를 소드 마스터로 이끌 정도로 대단한 것이다. 비록 드래곤 블러드의 도움이 있긴 했지만 카이나가 몇 년 정도 오러를 축적하고 벽을 허물려고 했으면 충분히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럴 정도로 귀중한 마나 연공법을 전수하면서 약간의 금제를 거는 건 어쩌면 너무 약한 것이라 할 정도로 엘의 행동은 당연한 것이었다. 모두가 동의하자 엘은 대륙 전도를 펼치며 말했다. "우선 제국에는 가지 않는 걸로 하겠습니다." 엘은 대륙 동부에 위치한 제국들을 가리키며 고개를 저었다. 현재 제국들은 무척 혼란스러웠다. 정보가 차단되어 자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얼마 전 데이 제크 제국의 황도에서 무슨 변고가 일어났다고 한다. 게다가 아일라스 제국에서도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5개 제국 중 9개 제국에 기이한 일이 벌어지니 그 파급 효과는 대륙 전체로 퍼질 만큼 대단했다. 때문에 엘은 다른 제국에서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매직 나이트들을 그곳으로 보내지 않기로 한 것이다. "일단 재능 있는 아이들을 구하려면 어리되 소속이 없는 아이들이 많은 곳을 가야겠지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가난한 왕국이 낫다. 먹을 것이 없어야 거지가 생기고, 그런 거지들 중 재능 있는 아이들을 선별하여 데려오는 것이 엘에게 있어 손쉬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는 모스 경은 이곳에, 피랜더 경은 이곳, 로보 경은 이곳에......“ 엘은 자신이 계획한 대로 매직 나이트들을 하나하나 호명하며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해 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나하나 짚어 주며 엘은 그들에게 말했다. "여행할 돈은 넉넉하게 드릴 겁니다. 그러니 확실하게 이 아이다! 싶은 아이들을 데려와 주세요. 기한은 무제한입니다. 아, 그리고......” 엘은 매직 나이트들의 주의를 집중시 켰다. 모든 매직 나이트들이 자신을 바라보자 엘은 씨익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한 가지 말을 안 했군요. 만약 금탑의 소속이 될 아이가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하면 주저 말고 대신 응징을 가해 주세요. 일단 금탑의 소속이 된 이상 전 그들을 제 가족처럼 대할 것입니다. 그 가족들에게 원한이 남아 있어서는 안 되겠지요. 모든 것은 제가 책임집니다. 설사 상대가 공작가이건 후작가이건 상관은 없어요. 여러분은 금탑의 매직 나이트이며, 최강의 병기 골든 매직 나이트를 손에 넣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예, 탑주님 !" 매직 나이트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입가에 미소가 맺혀 있었다. 당연하다. 엘이 말한 것, 그것이 그들이 가장 원하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엘이 말한 가난한 왕국은 대부분 귀족들의 착취가 극심하다. 때문에 금탑에 데려오려는 아이들 상당수가 원한에 사무친 아이들일 것이고, 엘은 그들의 심리를 정확하게 파악한 것이다. 자신의 원수를 갚아 준 이에게 충성을 바칠 것은 당연한 사실. 더군다나 힘을 주고,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해 줄 것이지 않은가. 게다가 뒤처리를 모두 해 준다니, 생각해 보니 그것도 너무나 쉽다. 누가 감히 금탑을 건드리겠는가. 성국과블리어드 제국이 힘을 합쳐 침공했다가 톡톡히 망신을 당할 정도로 강한 힘을 지닌 곳이 금탑이다. 더군다나 금탑의 탑주인 엘은 8클래스의 경지에 올라 명실상부 대륙 최고의 위치에 올라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8클래스 금탑주와 그랜드 마스터 골든 나이트, 그리고 여러 명의 소드 마스터들을 상대할 수 있는 골든 매직 나이트들이 있는 이상 금탑은 제국과도 자웅을 겨를 수 있을 만한 엄청난 힘을 손에 넣은 것이기 때문이다. 매직 나이트들이 모두 밖으로 나가자 엘은 창에 비친 골든 벨리를 내려다보았다. 더없이 아름다운 도시다. 그리고 이곳의 주인은 자신이다. “반드시 지켜 내겠어." 굳은 각오. 금탑을 대륙에 널리, 그리고 그 힘의 크기를 더욱 크게 키워 가기 위한 계획 첫 번째가 시작되었다. 2. 맥셀 왕자의 반란선언 금탑의 무한한 확장이 시작될 때 톨리안 왕국의 정국은 무척 어수선했다. 제2왕자파가 해산되었다. 브릴켄드 후작의 부재로 응집력을 잃은 제2왕자파는 자연스러운 해산의 길을 걸었고, 남은 제1왕자파와 제3왕자파의 왕권 쟁탈전으로 변했다. 우선 두 파벌 중 유리한 것은 당연히 제1왕자파였다. 힘에서 제3왕자파가 앞선다고 하나 중심 귀족들은 하나 같이 제1왕자파에 속해 있었고, 제2왕자파가 사라지면서 그 힘의 자리를 교묘하게 제1왕자파가 차지했으니 단순히 왕국에서 행사할 수 있는 힘은 제1왕자파가 더욱 막강했다. 하지만 그렇게 정황을 판단했다면 제1왕자파는 이미 패배했을 것이다. 중앙 귀족들로 이루어진 제1왕자파, 그들은 대부분 정치판에서 살아남은 여우들이었기에 힘의 우위나 눈치 보기는 선수 급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한수 위의 입장에 서 있다고 하나 함부로 경거망동을 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제3왕자파에는 국왕의 지지가 있으며, 무엇보다도 금탑이 있기 때문이다. 금탑. 7클래스 마법사가 세운 것치고 금탑은 너무나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우선 금탑에는 탑주 엘리미스가 존재한다. 그 경지가 7클래스 마스터라고 하지만 실제 힘은 7클래스 마법사 2명을 압도하고도 남을 정도다. 7클래스 마법사 중 최강이라는 아인하트 후작을 꺾을 정도였으니 7클래스 마법사 중 엘리미스의 상대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가장 골치 아픈 골든 나이트. 엘의 호위 나이트 골렘인 골든 나이트가 그랜드 마스터와 자웅을 겨룰 수 있다는 건 이미 대륙 전역에 알려진 사실이다. 블리어드 제국에서 클라이언 공작과 평수를 이뤘으며, 성국과 블리어드 제국의 합작 때 다이어드 공작과도 팽팽한 대결을 벌였다. 그런 면에서 골든 나이트는 의심할 나위 없는 그랜드 마스터이며, 그랜드 마스터를 보유하고 있지 않은 톨리안 왕국에게 있어 금탑의 존재는 그야말로 천군만마와도 같다. 그런 금탑이, 아니 금탑주가 지지하는 존재가 다름 아닌 루비어스 백작이다. 그리고 루비어스 백작은 현재 제3왕자파의 수장 노릇을 하고 있다. 그런 루비어스 백작을 건드린다? 그랬다가 제2왕자파의 세 백작가가 산산조각 난 것을 제1왕자파는 똑똑히 지켜보았다. 건드리기에 금탑은 너무나 무서운 세력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제1왕자파도 조심스레 행동하면서 제3왕자파를 건드리지 않으려 하였다. 하지만 그것도 최근 들어 변했다. 귀족들에게 가급적 제3왕자파를 건드리지 말라고 명령 하던 제1왕자 맥셀이 갑자기 제3왕자파 귀족들에게 공격적인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덩달아 제1왕자파에 속한 귀족들도 압박하니 갑작스러운 공격에 제3왕자파 귀족들은 맥을 못 추었다. 당연한 현상이다. 애당초 귀족의 급수에서부터 제1왕자파와 제3왕자파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중앙 귀족 중심 의 제1왕자파는 귀족 개개인이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고, 제3왕자파는 버림받은 어중이떠중이 지방 귀족의 모임체였기 때문이다. 그 권력의 크기에서 비교할 바가 되지 못했고, 세력 면에서도 비교할 바가 못 되었다. 그런 제3왕자파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방패막이 금탑이었는데 돌연 제1왕자파가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공격을 감행하고 있던 것이다. 갑작스런 제1왕자파의 공격에 제3왕자파 귀족들은 당황하면서도 곧장 로웰린을 채근하기 시작했다. 제3왕자파 귀족들이 믿을 수 있는 존재는 로웰린뿐이다. 물론 로웰린을 믿는 것이 아닌 그 뒤에 존재하는 금탑을 믿는 것이다. 귀족들의 채근에 로웰린 또한 별다른 수가 없었다. 그녀는 부끄럽고 미안했지만 엘에게 도움을 청했다. 금탑주의 정치 개입. 그것은 톨리안 왕국 정치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폭풍이 될 것이다. 그 시각, 제1왕자파 귀족들은 은밀한 회동을 갖고 있었다. 제1왕자파에는 3명의 후작이 존재하며, 8명의 백작이 그 주축을 이루고 있다. 이 11명의 귀족은 모두 오랫동안 중앙 정계에서 힘을 축적한 가문이었고, 실제로 톨리안 왕국을 주도하는 세력 은 대부분 제1왕자파에 결집되어 있다. 더군다나 제1왕자파는 오랫동안 중앙 정계에서 힘을 비축했기에 숨겨진 패가 무척 많았다. 여기서 말하는 숨겨진 패, 그것은 최후의 순간에 적용 할 수 있는 힘을 일컫는 것이다. 사람들은 제1왕자파와 제5왕자파가 서로 대립할 때 권력은 제1왕자파가, 무력은 제2왕자파가 강하다고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제1왕자파의 무력은 결코 제2왕자파에 비해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그런 말이 나왔는가 하면 제1왕자파의 실질 적인 수장 맥셀 왕자가 최소한의 피해로 적들을 물리쳐야 왕국을 원활하게 다스릴 수 있다고 주장했기에 제1왕자파는 다소 소극적인 면으로 임했던 것이다. 제1왕자파는 애당초 제2왕자파는 경쟁 상대로 보지 않았고, 그들에게 있어 제2왕자파는 단순한 골칫덩어리 그 자체였다. 오늘 이 비밀 회동을 주재한 것도 바로 맥셀 왕자다. 모든 귀족들은 의아한 기색으로 이 모임에 참석했다. 권력의 주축인 자신들이 이렇게 은밀하게 만날 정도면 무언가 큰 비밀이 있을 것이라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말이다. 11명의 귀족이 모두 자리에 앉고, 마지막으로 맥셀 왕자가 나타났다. 맥셀 왕자가 나타나자 일제히 일어나는 귀족들. 맥셀 왕자는 그런 귀족들에게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자리에 앉으시오." 단순히 한마디 한 것뿐인데 그의 어조에서 사람을 억누르는 무시무시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왕자님께서 달라졌다!' 그 한마디에 분위기에서 밀려 버린 귀족들은 안색을 바꾼 채 자리에 앉았다. 귀족들이 모두 자리에 앉자, 맥셀 왕자도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다소 오만한 얼굴로 주변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모두가 중앙 정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는 귀족들이다. 이들의 힘은 톨리안 왕국의 절반이라 할 수 있을 만큼 대단했고, 맥셀 왕자는 실제로 이들이 지닌 힘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었다. "왜 내가 이렇게 은밀하게 만나자고 했는지 모르겠지?“ 맥셀 왕자의 물음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맥셀 왕자는 훗 웃음을 짓더니 여유로운 어조로 말했다. "내가 그동안 곰곰이 생각해 봤어. 힘이나 세력 면에서 월등한 내가 어째서 왕세자로 책봉되지 못하는지. 그렇다고 툭 터놓고 말해서 내가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거든." 모두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맥셀 왕자는 무척 재능 있는 왕자였다. 다소 오만하지만 그것은 왕으로서 전혀 흠이 되지 않는 문제였다. 그의 오만함을 가릴 만한 재능이 있었고, 그 재능은 서부의 강국 톨리안을 이끌기에 충분한 재능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흠이 그의 길을 가로막았다. 바로 후궁의 소생이라는 것. 왕비의 소생인 제3왕자에 게 밀리는 것이 바로 그거였다. 맥셀 왕자는 바로 태생의 문제 때문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음에도 왕세자로 책봉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는 귀족들을 한차례 훑어보았다. 맥셀 왕자의 시선을 받은 귀족들은 밑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한기에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그런 귀족들을 향해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난 결심했어. 이제 이 지긋지긋한 왕권 다툼을 그만두고 싶어. 그대들도 그러하겠지?” "물론입니다." 제1왕자파의 가장 수뇌 귀족이라 할 수 있는 테란델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제1왕자파 귀족들도 기나긴 왕권 다툼 때문에 무척 피곤했다. 게다가 상대는 제2왕자파도 아닌 제3왕자 파였기에 더욱 그러했다. 제3왕자파에는 왕실의 숨겨진 힘이 뒷받침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 힘이 결코 녹록치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게다가 금탑의 존재도 거슬렸다. 보통 마탑이 정치에 뛰어들지 않는 게 일반론이지만 금탑의 탑주는 젊다. 젊은 혈기에 언제라도 정치에 손을 뻗을 수 있는 것이다. 그걸 모두가 알았기에 당연히 예의 주시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오랜 시간이 지나자 서서히 지쳐 가고 있던 것이다. 맥셀 왕자는 그런 그들의 심정을 정확하게 짚어 낸 것이다. 모두가 동의하자 맥셀 왕자는 느긋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때문에 난 결정을 내렸어. 지긋지긋한 이 왕권 다툼을 끝내자고.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고." "그것이 무엇입니까?" 귀족들은 잔뜩 기대에 찬 표정으로 물었다. 그에 맥셀 왕자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 내용은 결코 쉽게 들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다 뒤집어 버리는 거야. 나쁘게 말하면 반란, 좋게 말 하면 혁명." "......” 맥셀 왕자의 말에 귀족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어찌 안 그러하겠는가! 지금 한 왕국의 왕자 입에서 반란이란 말이 언급된 것이다! 그것도 무척 간단하다는 형식으로 말이다. 귀족들은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반란. 이 얼마나 두려운 말인가. 반란을 모의하다가 잡히면 그 귀족은 변명의 여지조차 없이 그대로 처형이다. 비단 귀족만 죽는 게 아니라, 그 귀족의 피를 이은 사람 전체, 설사 왕족이라도 그 여파를 벗어나기 힘들다. 그런 무시무시한 단어를 지금 맥셀 왕자가 언급한 것이다. 맥셀 왕자는 달콤한 어조로 공황에 빠진 그들을 다독였다. "잘 생각해 봐. 지금 이 지긋지긋한 왕권 다툼이 길어지게 된 것은 모두 금탑의 등장 때문이야. 이대로 간다면 상황은 점점 제3왕자파에게 유리하게 돌아갈 것이고, 종내에는 그들의 세상이 오겠지. 애당초 우리에게는 이 길 밖에 없어. 내가 알기로 제3왕자파의 수장인 루비어스 백작이 금탑에 도움을 청했어. 젊은 금탑주라면 혈기 때문에라도 돕겠지.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되겠나? 저 기회주의자들인 제3왕자파 귀족들이 정권을 잡을 것이고, 자네들은 모두 지방으로 밀려나게 될 것이야." 이보다 더 잔인한 말은 없었다. 중앙 정계 귀족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말이 지방으로 밀 려나는 것이다. 중앙 정계로 진출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막강한 권력을 지닌 귀족들에게 뇌물을 바치고, 달콤한 언변으로 꼬드기고 그들의 사냥개처럼 이리저리 따르다 가 마침내 기회가 와야 한자리 차지할 수 있는 게 바로 중앙 귀족이다. 지금 그 기득권이 사라질 것이라 이야기하다니. 제1왕 자파 귀족들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맥셀 왕자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물론 내가 이렇게 말을 해도 반란에 가담하지 않으려는 귀족이 있겠지. 하지만 그랬다가는......“ 그가, 웃었다. "이곳에서 살아 나가지 못할 것이야." 채앵! 순간 10명이 넘는 기사들이 주변에 나타났다. 그들은 모두 왕궁을 호위하는 근위기사단이었으며, 개개인 모두가 소드 익스퍼트 상급에 이른 기사들이었다. 게다가 맥셀 왕자가 갑자기 손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붉은 화염이 일렁이더니 기다란 칼날을 만들어 냈다. 제1왕자파 귀족들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프, 플레임 블레이드(Flame Blade)......” 5클래스 마법 플레임 블레이드. 지금 맥셀 왕자는 그것을 너무나 손쉽게 시전한 것이다. 맥셀 왕자는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내가 괜히 반란을 일으키자고 한 줄 아나? 다 자신감이 있어서 그런 것이야. 보다시피 난 7클래스의 경지에 올랐다. 그동안 검을 수련한 척하던 것은 사실 마법사로서 체력을 다지기 위한 운동에 지나지 않았지." 확실히 맥셀 왕자는 검술 수련을 함에 있어 그리 열정적이지 않았다. 각종 책을 읽고, 계책을 세우느라 그런 것이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이런 말은 귀족들을 납득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완벽한 의문을 해소하지 못했는지 귀족들이 의심 반 걱정 반인 눈으로 맥셀 왕자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들의 시선에 맥셀 왕자가 살짝 기운을 방출하며 말했다. "왜, 의심이 가나? 하지만 이것은 엄연한 현실이야. 나보다 어린 금탑주도 7클래스의 경지에 들어섰어. 그보다 나이가 많은 내가 7클래스에 올라서 안 될 이유가 있나? 어디 한번 말해 봐!"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그의 전신에 폭발적인 기운이 장내 귀족들을 모두 휘감았다. 이곳에서 가장 강한 상급 소드 마스터 테란델 후작조차 기세에 압도되었을 정도니 다른 귀족들은 말할 것도 없다. 심신이 꼼짝없이 사로잡힌 귀족들을 보며 맥셀 왕자가 입을 열었다. "그럼 결정을 내려. 나를 따라 새로운 세상을 볼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나를 떠나 목숨을 잃고 가문은 반란 모의 죄로 몰살당할 것인가." 이미 모든 것을 조치한 상태였다.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귀족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맥셀 왕자가 펼쳐 놓은 그물에 꼼짝없이 걸려든 것이다. 테란델 후작은 입술을 질끈 깨물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왕자님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제1왕자파를 대표하는 테란델 후작의 말이었다. 그의 승낙에 다른 귀족들의 대답도 연이어 들려왔다. "왕자님을 따르겠습니다."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그동안 막대한 힘을 쌓아 온 귀족들의 반란 모의. 그들 모두의 승낙을 얻은 맥셀 왕자는 씨익 웃었다. "최고의 선택을 한 그대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다. 너희들은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반짝이는 맥셀 왕자의 눈. 계획하던 하나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 톨리안 왕국의 국왕 자리에 오르고 금탑주란 녀석을 제거하는 것만 남았군.' 맥셀 왕자, 아니, 적탑주 카로스만은 귀족들의 모습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새로운 세계. 그것이 눈앞에 다가온 것이다. 톨리안 왕국에 혼란의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 한 달 뒤 놀라운 소식이 톨리안 왕국을 강타했다. 제1왕자 맥셀이 반란을 일으켰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다. 그러나 그 소식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맥셀 왕자를 따라 반란을 일으킨 이들이 제1왕자파 귀족 전체였던 것이다. 제1왕자파 귀족들은 무척 강한 힘을 지녔다. 권력은 물론이고 그 권력으로 축적해 온 힘은 제2왕자파보다 무서 울 정도다. 더군다나 반란을 일으키면서 제2왕자파의 강력한 군권을 지닌 귀족들 몇 명도 함께하여 삽시간에 왕국의 절반이 넘는 이들이 반란군으로 돌변했다. 특히 베르디스는 그 경향이 심했다. 제1왕자파 귀족들은 대부분 비옥한 왕국 서부에 영지를 두고 있다. 그렇기에 왕국 서부 전체가 반란군으로 돌변했고, 그 속에 낀 루비어스 백작령이 완전히 고립되었다. 게다가 동부의 귀족들 몇몇도 반란에 동조하면서 베천 디스는 서쪽과 동쪽에 적을 두게 되었다. 최악의 결말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곳곳에서 들려오는 보고. 그중 반란군이 지닌 힘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하여 반란군의 군사력은 동원 가능 군대가 도합 삼십 오만에 이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허어......“ 라이어스 공작의 보고에 레도프 국왕은 어이가 없는지 머리를 부여잡았다. 정말 대단한 전력이 아닐 수 없었다. 처음 반란이 일어나고 상황 보고를 들었을 때 레도프 국왕은 충분히 진압할수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반란군의 군대는 30만이었고, 왕국 측 군대는 동원하면 35만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보고를 들으니 중앙 귀족들이 그동안 길러 놓은 힘이 보통이 아니었다. 군사력에 있어 양측인 팽팽한 전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사의 질도 엇비슷한 걸로 나타났습니다. 맥셀 왕자를 따라 근위기사 상당수가 사라지는 바람에...... 게다가 중앙 귀족들의 기사들은 대부분 이름 높은 이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따라 반란을 일으킨 동부 귀족들의 기사들은 실전에 단련된 기사들입니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레도프 국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 믿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제가 좀 더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는데 ." 트겐발리 공작이 레도프 국왕에게 죄송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사실 제2왕자파 귀족들 중 몇몇이 가담한 것은 그나마 중앙 진출의 꿈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때 제2왕자파에 속했던 이들인 만큼 트겐발리 공작은 자신의 책임을 뼈저리게 통감하고 있었다. "숙부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이게 다 부덕한 통치를 한 내 잘못이지요." 트겐발리 공작의 말에 레도프 국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권력에 욕심이 많지만 트겐발리 공작도 톨리안 왕국의 충신이라 부를 수 있는 위인이다. 라이어스 공작과 트겐 발리 공작. 두 사람 모두 왕국 최고의 실력을 지녔으니 레도프 국왕은 자책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든든해지는 걸 느꼈다. 그런 레도프 국왕의 기색을 읽은 라이어스 공작이 입을 열었다. "이건 왕국의 위기라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왕국에 속한 국민이라면 왕국을 수호해야 할 터. 전하, 이번 기회에 금탑에 부탁을 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금탑에 말입니까?” 라이어스 공작의 말에 레도프 국왕은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상황이 급박했지만 그는 금탑에 구원을 청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금탑. 성국과 블리어드 제국의 합공도 막아 낸 그곳은 톨리안 왕국이 품기에는 너무나 큰 곳이었다. 비록 금탑이 톨리안 왕국의 허가를 얻어 세워졌지만 왕국의 지원을 받은 적은 없고, 막상 도움이 필요할 때도 도움을 받지 못했다. 한마디로 톨리안 왕국의 허가하에 있지만 실제로는 남남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런 레도프 국왕의 걱정을 읽은 라이어스 공작이 말했다. “비록 우리가 도움을 주지 못했지만 금탑은 엄연히 본 왕국의 영토에 세워진 마탑입니다. 그리고 지금 왕국이 반란으로 위태롭습니다. 이럴 때 금탑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제압한다면 그들과 좀 더 긴밀한 관계로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렇습니다, 전하." 라이어스 공작의 말에 트겐발리 공작도 맞장구를 쳤다. 언젠가 한번 보았던 엘은 결코 녹록하지 않은 청년이었다. 자신만의 뚜렷한 가치관이 있었고, 젊은 사람답지 않게 신중했다. 게다가 본신의 실력 또한 뛰어났으니 톨리안 왕국으로서 가까이하면 이로울 것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두 공작이 모두 동의하자 레도프 국왕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 지금 이 상황에서 금탑주의 합류는 사기가 떨어진 병사들에게 큰 힘으로 작용할 것이고, 정황 또한 이곳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금탑주와 관계가 긴밀한 루비어스 백작에게 연락을 넣도록 하지요."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레도프 국왕의 결단에 두 공작이 미소를 지었다. 금탑주. 이 존재라면 분명 반란을 진압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할 것이기에. 베르디스 왕궁이 분주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 "흐음!" 한편, 반란군을 이끄는 맥셀 왕자는 귀족들의 보고에 다소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언짢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병사들이 자신들이 반란군이라는 것을 마땅치 않게 생각한다?” 맥셀 왕자 앞에 있는 테란델 후작은 그가 뿜어내는 위압감에 고개를 조아렸다. '정말 대단하다. 상급 소드 마스터인 내가 절로 고개를 숙이게 될 정도라니.' "그렇습니다, 전하. 자신들이 반란군이라는 것 때문에 병사들의 사기가 말이 아닙니다. 이러다가 왕국군과 부딪치게 된다면 틀림없이 아무것도 못해 보고 흩어질 것이 자명합니다." "그렇군." 맥셀 왕자, 아니 카로스만은 사실 이런 대군을 이끌어 본 경험이 전무하다. 그가 이끄는 세력은 오로지 적탑뿐인데 마법사들은 더 높은 경지에 이른 이에게 순종적인 태도를 보이기에 미처 그 부분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어차피 인간이란 다 똑같다. 강한 힘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는 법이지.' 비록 대군을 이끌어 본 적이 없다고 하지만 그는 기본 적으로 사람을 이끄는 법은 잘 알고 있다. 때문에 그는 곧장 결단을 내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병사들을 모두 소집해라. 사기가 떨어졌다면 사기를 북돋워 주면 되겠지" "예? 예, 알겠습니다." 테란델 후작은 순간 '어떻게? 라고 물음을 던지려다가 그 물음을 삼켜 버리고는 대답했다. 맥셀 왕자는 자신의 의도를 알려는 사람을 무척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가 밖으로 나가자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맥셀 왕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두려움에 덜덜 떠는 병사들에게 용기를 북 돋워 주러 가 볼까?“ 장관이었다. 현재 서부에 위치한 반란군의 군대는 도합 35만이었다. 본래 알려진 바라면 20만 군대가 모여야 정상인데 그 동안 중앙 귀족들이 꾸준히 힘을 증강하고 또 증강하여 무려 2배 가까이 그 병사 수가 늘어난 것이다. 하지만 전쟁은 병사 숫자로 하는 것이 아니다. 우선 병사들의 사기가 높아야 하며, 지휘관과 병사들의 호흡이 잘 맞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반란군 병사들은 부족함을 보였다. 여러 영지에서 차출되고 합동 훈련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상 사람들은 맥셀 왕자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당연히 자신이 반란군에 속해 있다면 사기가 떨어질 것이고, 그 분위기가 삽시간에 번져 나가 지금 반란군의 분위기는 말이 아니었다. 그런 분위기를 상쇄하기 위해 맥셀 왕자는 전군을 모두 소집했다. '장관이군.' 맥셀 왕자는 35만 군대가 모인 광경을 보며 나직이 감탄을 흘렸다. 최근 평화의 연속인 제국에서도 이 정도 군대가 모인 광경은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모인 수십만 사람들을 보니 맥셀 왕자는 저도 모르게 기세가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너희들은 스스로가 반란군이라 생각하는가?“ 맥셀 왕자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그 목소리는 주변에 우렁우렁 울려 퍼졌다. 그 현상에 귀족들은 물론 병사들의 표정도 일변했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이런 능력을 펼쳤다는 건 맥셀 왕자의 힘이 범상치 않다는 걸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이렇게 일컫겠지. 배신자라고, 반란군이라고. 나라를 말아먹을 놈이라고." “......” 맥셀 왕자의 조용하면서도 우렁우렁한 말은 주변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병사들은 그 말에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맥셀 왕자가 이런 말을 하는 건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것 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그의 말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해 봤자 우리에게 무엇이 손해가 되는가? 나는 그들을 보며 당당하게 말할 것이다. 나는 반란군이 아니라 나라의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는 혁명군이라고. 지금 이 나라는 잘못되었다. 가장 먼저 태어난 장자인 나를 미뤄 두고 총애하는 왕자를 왕으로 삼으려는 국왕이 잘못되었으며, 정통성을 따지며 허수아비 국왕을 세우려는 제3왕자파의 귀족이 잘못되었다. 왜냐고 묻는다면 난 이렇게 말하겠다. 톨리안 왕국에서 국왕이 될 자는 바로 나, 맥셀 왕자이기 때문이다." 맥셀 왕자의 목소리는 주변을 압도했다. 단 한 사람이 펼쳐 내는 신기. 그의 말은 35만 군대를 사로잡았으며, 귀족들을 사로잡았다. "그대들은 사람들의 손짓에 반응할 필요가 없다. 역사는 후대가 평가하는 법. 그때 그들은 우리를 이렇게 일컬을 것이다. 나 맥셀 왕자를 따르던 귀족들과 혁명군. 왕국의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톨리안 왕국을 대륙 서부의 강 국으로 이끌었다고. 그러니 그대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나 맥셀 왕자를 따라라. 내가 너희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 주겠다." 그 말과 함께 맥셀 왕자가 양손을 들었다. 그와 함께 붉은 화염이 그의 손에서 생성되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캐스팅 속도와 마나 호응. 마법은 삽시간에 캐스팅되었고, 그것은 거대한 화염을 만들어 냈다. 몇몇 병사는 맥셀 왕자가 시전한 마법을 알아보았다. "프, 플레임 스트라이크다!" "7클래스 마법 !" "왕자 전하께서 7클래스 마법사였단 말이야?“ 병사들에게서 동요가 일어났다. 그럴 수밖에 없다. 7클래스 마법. 그것은 수천 명의 병사들을 학살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마법을 알아본 척하는 병사들은 맥셀 왕자가 미리 심어 놓은 병사들이다. 그들의 군중 선동 행위는 멋지게 성공하여 35만의 병사들은 선망 어린 눈으로 맥셀 왕자를 바라보았다. 맥셀 왕자는 마법을 캔슬했다. 그리고 병사들에게 말했다. “난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본 왕자는 얼마 전 7클래스의 경지에 올랐다. 나의 이 힘이라면, 나라의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는 그대들이 있다면 이 나라를, 대륙의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톨리안 왕국의 자랑스러운 혁명군이여! 날 따를 준비가 되었는가!" 준비된 말, 준비된 행동, 그에 딸려 오는 군중심리, 자신들이 반란군이었다는 생각은 잠깐이었다. 병사들의 뇌리에 자신들은 반란군이 아닌 혁명군이라 는 생각이 가득 차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들은 환호했다. "물론입니다. 저희들은 맥셀 왕자님을 따르겠습니다!" "왕국의 흐트러진 것들을 바로잡자!" "맥셀 왕자 전하 만세!" “왕자 전하 만세!" 삽시간에 35만 군대는 맥셀 왕자 만세'를 외치기 시작 했다. 놀라운 파급력이 아닐 수 없었다. 삽시간에 병사들을 휘어잡는 연설! 귀족들마저도 멕셀 왕자의 연설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낄 정도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다. 역사는 승자의 것이다! 자신들이 승리하면 역사는 다시 쓰일 것이고, 후대에 자신들은 반란군이 아닌 왕국을 바로잡은 혁명군이 될 것 이다. 맥셀 왕자는 병사들에게 외쳤다. “나의 병사들이여, 그리고 왕국의 혁명군들이여, 우리는 곧장 루비어스 백작령으로 간다. 그리고 그곳을 휩쓸고 잘못된 제3왕자파에게 경고를 할 것이다. 병사들이여, 날 따르겠는가?” "예! 왕자 전하!" 병사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쉽군.' 자신의 힘을 한번 보여 주고 그럴듯한 말에 곧장 자신의 충실한 부하가 되어 버린 병사들을 보며 맥셀 왕자는 빙긋 웃었다. 맥셀 왕자의 선언대로 반란군은 곧장 군대를 정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비 병력 20만을 남겨 둔 채 15만 대군을 출격시켰다. 그들의 목표는 서부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제3왕자파 귀족! 루비어스 백작령이었다. 3. 인간의 도시 엘프 숲에서 회의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 엘리엔은 아카벨 대장로의 명령에 따라 인간계로 나갈 준비를 마쳤다. 우선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인간으로 변장하는 것이다. 그녀는 엘프라서 무척이나 아름답다. 단순히 아름다운 수준이 아니라 100여 년 동안 검술로 단련되어, 나을 데 나오고 들어갈 데 들어간 늘씬한 몸매로 엘프 중에서도 탁월한 미모를 지닌 그녀는 대륙에 나가면 곧장 파란을 일으킬 것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녀의 귀였다. 엘프의 귀는 인간의 귀보다 좀 더 길며 끝이 뽀족했다. 그래서일까, 엘프의 청각은 인간의 몇 배는 되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청각보다, 귀의 형태 때문에 그녀가 엘프라는 것이 곧장 들킬지도 모른단 것이었다. "귀를 감추어야 한다." 아카벨 대장로도 그녀의 귀를 걱정했다. 엘프가 나타난다면 그녀를 노린 노예 상인들이 벌 떼같이 달려들 것은 자명한 일. 하지만, 아카벨 대장로가 걱정하는 건 엘리엔의 신변이 아니다. 괜히 그녀를 납치하려고 달려든 노예 상인들은 물론 그에 관련된 이들까지 모조리 목숨을 잃을 수 있기에 걱정한 것이다. 그녀를 걱정하기보다는 인간을 걱정한 것이다. "이 귀고리는 너의 귀를 변형시켜 줄 것이다. 이 정도 속임수를 알아차리려면 나와 동급에 이른 마법사라야 할 터, 하지만 네가 대륙에 나간다면 그런 이들은 보기 힘들 것이다. 그러니 너는 안심하고 인간계로 나가면 된다." "고맙습니다." 엘리엔은 담담하게 인사하며 귀고리를 받아 들었다. 수백 년 전부터 8클래스 마스터에 이른 아카벨 대장로이니 인간계에서 그보다 뛰어난 마법사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엘리엔은 아카벨 대장로에게 받은 귀고리를 곧장 착용 했다. 그러자 그녀의 가늘고 뽀족했던 귀가 서서히 둥근 모양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아카벨 대장로가 입을 열었다. "골드 스타는 분명 그 빛을 발하는 것처럼 황금과 관련 된 인물일 확률이 높다. 황금이라면 인간들 중 상인일 확률도 높고, 지체 높은 사람일 확률도 높다. 너는 대륙으로 나아가 황금과 관련된 이들을 찾아보고, 너의 느낌으로 눈가 골드 스타인지 찾아내면 된다." 엘리엔은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검사다. 대륙에 수많은 검사가 있고, 무려 10명이 넘는 그랜드 마스터가 존재한다고 하지만 이미 100년 전부터 그랜드 마스터에 올라 매일같이 검을 휘두른 그녀의 목숨을 위협 할 만한 검사가 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아카벨 대장로는 엘리엔에게 여러 가지를 꼼꼼하게 챙겨 주었다. "이것은 인간들이 사용하는 돈이다. 만약 돈이 부족하면 보석을 팔면 된다. 엘리엔, 너는 진실의 눈을 지녔으니 인간들에게 속지 않으리라 믿는다." 엘리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믿으세요, 대장로님." 하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만약 그런 자가 있다면...... 제 검에 목숨을 잃을 거예요.' 그녀가 끔찍이도 싫어하는 인간이다. 만약 거짓을 말하고, 자신에게 해를 끼치려 한다면 그 인간은 반드시 자신의 검에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안다면 아카벨 대장로는 그녀를 만류할 터. 그녀는 자신의 복수심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엘프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외부로 나가야 했다. 아카벨 대장로는 엘리엔에게 말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했다. 남은 것은 네가 골드 스타를 만나 우리 대륙의 안위를 위해 노력하는 것 뿐, 나는 네가 좋은 소식을 가져올 거라 믿는다." "저를 믿으세요." "그럼, 가 보아라." 엘리엔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방을 나섰고, 아카벨 대장로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인간계로 나가서 느껴 보아라, 엘리엔. 인간들이 모두 추악하고 욕심 많은 게 아니란 것을. 그리고 인간들 중 좋은 이들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말하며 아카벨 대장로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는 진심으로 기원했다. 인간계로 나간 그녀가 착한 인간들을 보며 꽁꽁 얼어붙은 마음을 조금이라도 녹여 버리기를...... 그러나 하늘은 그런 그의 기원을 무심히도 거절했다. *** 엘프 숲은 광활한 영토를 가지고 있다. 제국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인구를 가지고 있지만 그 크기는 제국 못지않아서 걸어서 숲을 벗어난다면 족히 열흘은 전력으로 달려야 한다. 하지만 엘프들에게도 텔레포트 게이트가 설치되어 있다. 정식 명칭이 엘프 숲이라고 하지만 엘프 숲 곳곳에는 몬스터들이 존재했고, 그런 몬스터들이 나타나 물리치지 못할 정도의 상황이 되면 곧장 텔레포트 게이트로 이동하여 후퇴하는 것이다. 그런 경우를 위해 엘프 숲 곳곳에 텔레포트 게이트를 설치했기에 엘리엔은 여행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엘프 숲 외곽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입니다, 수호검주님." 엘프 숲 외곽까지 함께한 엘프가 엘리엔에게 말했다. 엘리엔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과 함께 온 것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수고하셨어요. 그럼 이만 가 보세요." "예, 수호검주님. 그럼......“ 인사를 올림과 함께 엘프는 숲 속으로 사라졌고, 엘리 엔은 광활하게 펼쳐진 평야를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제는 나 혼자야.' 두려움? 그런 게 아니다. 단지 엘프 숲을 벗어난 적이 없었기에 낯설음이 조금 들었을 뿐이다. 현재 그녀의 차림새는 평범한 여행복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평범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는데, 그녀가 입고 있는 여행복은 다름 아닌 엘프 특유의 가공 비법으로 제작된 매직 메탈 실로 짠 것이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녀의 여행복에는 그 자체에 대 마법진이 그려져 있다 또한 강도도 대단하여 웬만한 공격에 관통되지 않을 정도다. 그녀는 평야를 조용히 걷기 시작했다. 그녀의 걸음은 언뜻 보면 느린 것처럼 보였지만 그 속도는 무척 빨랐다. 그런 속도로 약 하루를 걷자, 그녀의 눈에 도시가 보이기 시작했다. 엘리엔은 저것이 들어만 보았던 도시임을 깨닫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인간의 도시......“ 불현듯 살기가 물결처럼 뿜어져 나오다가 순식간에 소멸되었다. 엘리엔은 잠시 마음을 골랐다. 인간을 보았다고 하여 흥분하면 안 된다. 지금 자신에게는 중대한 사명이 있다. 엘프들에게 있어 반드시 필요한, 엘프 전체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무거운 임무가 말이다. 자신의 임무를 떠올리며 그녀는 차분하게 숨을 골랐다. 그리고 조용히 인간의 도시로 걷기 시작했다. 레탄 왕국은 대륙 왕국들 중 그저 그런 평범한 크기에 평범한 인구를 거느린 국가로, 몇 개의 광산과 몇 개의 평야가 있어 먹고사는 데 부족함이 없는 평범한 국가다. 엘리엔이 도착한 도시는 톨리안 북부에 위치한 레탄 왕국에 속한 도시로, 레탄 왕국의 귀족 중 한 사람인 게일라스 자작가에 속하는 도시로, 레탄 왕국에서 몇 안 되는 큰 도시 중 하나다. 게일라스 자작은 비록 작위가 낮지만 레탄 왕국에서 제일가는 부자로서, 무척 탐욕이 많고, 권력에 대한 집착이 대단했다. 특히 그가 밝히는 것이 여색이었는데, 오죽하면 게일라스 자작령의 아름다운 미녀는 게일라스 자작을 모두 거쳤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엘리엔은 아카벨 대장로가 준 신분패를 가지고 조용히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전신에 로브를 둘렀기에 경비병도 그녀의 외모를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씨였던 것이 별다른 의심을 사지 않는 데 한몫했다고 할 수 있다. 엘리엔은 근처 여관에 들어갔다. 그리고 자리에 앉자, 16세 정도에 다다른 예쁜 소녀가 조르르 달려와 밝은 미소를 지었다. "무엇을 드시겠어요? 어머, 여자셨군요. 언니, 무엇을 드시겠어요? 저희 여관은 차로 무척 유명한 곳이랍니다." 친근감 있는 미소를 지으며 엘리엔에게 말을 건네는 소녀. 그 모습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편안함을 자아냈기에 엘리엔은 경계심을 풀고 주문을 하였다. 어린 소녀였기 때문일까, 인간에 대한 증오가 그 소녀에게는 그렇게 많이 생기지 않았다. “그럼, 차 한 잔 먼저 부탁할게. 식사로는 야채샐러드가 좋겠는데......" “어머, 육식을 하지 않나요? 여행 다니시려면 배가 많이 고프실 텐데." "응, 내가 육식을 하지 않거든." 엘리엔은 소녀의 물음에 고개를 선선히 끄덕였다. "육식을 안 한다는 예쁜 목소리의 언니라...... 마치 엘프 같네요? 헤헤! 그럼, 금방 차와 야채샐러드를 가져올게요." 소녀의 나직한 농담에 엘리엔의 몸이 움찔했지만 로브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소녀가 주방으로 달려가고 곧이어 차가 나오자 엘리엔 차를 한 모금 마셔 보았다. 확실히 차 맛은 괜찮은 편이었다. 하지만 차의 달인이라 불리는 엘프에 비할 바가 못 되는 건 사실이다. 왜냐하면 엘프가 구하는 차는 일단 그 품질이 다를 뿐더러 어떻게 하면 최상의 맛을 내는지 그들만의 특유한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차의 맛이 그리 나쁜 것은 아니기에 엘리엔은 나름대로 훌륭하다고 생각하며 기대감에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는 소녀에게 호평을 해 주었다. "차 맛이 괜찮네." "헤헤! 그렇죠?“ 엘리엔의 말에 밝은 표정을 짓는 소녀. 그 모습이 무척 순수해 보였기에 엘리엔은 약간의 호감을 가지며 물었다. "이름이 뭐니?“ "엘린이요, 엘린." 엘린이라 소개한 소녀의 말에 엘리엔의 몸이 한차례 움찔했다. 엘린. 그것은 엘리엔이 어렸을 적 그녀의 부모님이 불러 주었던 그녀의 애칭이기 때문이다. "어디 아프세요?" 그녀가 움찔 떤 게 그녀가 아파서 그런 것인 줄 착각한 엘린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에 엘리엔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잠시 생각난 게 있어서...... 그래, 맛있는 차를 추천해 줘서 고마워. 그럼, 야채샐러드도 기대할게." 엘리엔의 말에 엘린이 살짝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저희 아버지의 음식 솜씨는 이곳 자작령 제일...... 아니, 왕국 제일이라고요!" 다소 과장된 몸짓을 보이며 엘린이 다른 주문을 받기 위해 사라졌다. "아버지를 돕는 착한 딸이라...... 저런 인간도 있었나?“ 엘리엔은 후드 속 가려진 눈으로 엘린의 모습을 좇으며 중얼거렸다. 그녀가 보아 온 인간은 그야말로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말아야 할 더러움의 종합체와 같았다. 엘프 숲에 들어오는 엘프 사냥꾼들은 모두 더럽고 추악한 욕망을 흘리며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런 인간들만 보아 온 엘리엔이었기에 그녀는 어쩌면 자신이 여태껏 인간들을 잘못 생각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모르겠지. 저 소녀 같은 인간이 이 세상이 많은 건지 아니면 추악한 인간들이 많은 건지......좀 더 지켜봐야겠어." 잠시 후 엘린이 가져온 야채샐러드는 그녀의 장담처럼 꽤 맛이 있었다. 엘리엔은 싱싱한 야채와 맛깔 나는 드레싱이 잘 어우러진 샐러드를 먹은 뒤 다시 차 한 잔을 시켜 조용히 마셨다. 꽈앙! 그때, 식당 문이 열렸다. 열린 문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험악한 인상의 병사 셋이었다. 병사들은 험악한 얼굴을 힘껏 구기며 크게 소리쳤다. "알렉스, 어서 나와!" 갑자기 병사들이 나타나 소리를 지르자 식당 안에 있던 지금 나타난 병사들은 게일라스 자작의 심복 라든의 직속 병사였기 때문이다. 게일라스 자작령의 실질적 이인자인 라든은 게일라스 자작령에서 무척 악명이 높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바로 알게 모르게 고리대금업을 하고 그것을 빌미로 예쁜 여자들을 끌고 와 게일라스 자작에게 바치는 역할을 하고 있 었기 때문이다. 보아하니 이 식당의 주인도 무언가 건수가 걸린 듯했다. 병사들의 외침에 식당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인이 나타났다. 그는 곧장 병사들에게 매달려 사정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병사님들! 이자를 갚은 지가 일주일밖에 안 되었습니다. 이제 원금만 갚으면 되는데 왜 이러시는지요." 알렉스의 간절한 어조에 병사들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3명의 병사 중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코웃음 치며 말했다. "흥! 무슨 원금이냐? 아직 이자가 오 골드나 남았거늘. 어디서 발뺌하나?“ "오, 오 골드?“ 병사의 말에 알렉스가 사색으로 변했다. 그가 고리대금업자에게 3골드를 빌린 것이 3달 전이다. 알렉스는 왜 잘나가는 식당의 주인이었지만 갑작스럽게 딸이 아파 치료비가 부족하여 부득이하게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빌리게 되었다. 다행히 빌린 돈으로 딸을 치료할 수 있었고, 식당도 잘 되는 편이었기에 다음 달에 곧장 3골드를 가지고 가서 갚았다. 그런데 이게 무슨 말인가? 고리대금업자가 그동안 이자가 3골드 올랐다고 말하며 계약서를 보며 주는 것이 아닌가? 알렉스는 고리대금업자의 살인적인 이자에 치를 떨며 돌아갔다. 그리고 열심히 일을 했다. 다행히 알렉스는 인간성이 좋아 그를 위하는 사람들이 자주 그의 식당에 손님으로가 음식을 사 먹었다. 그런 주민들의 도움으로 알렉스는 1달 사이 6골드를 벌 수 있었고, 고리대금업자에게 찾아가 빚을 갚았다. 그런데 이번에도 고리대금업자는 갚을 돈이 있다고 하였고, 계약서를 보여 주었다 1달에 무려 5골드의 이자, 위조된 것이 분명하지만 알렉스에게는 이것을 해명할 여지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가지고 있던 계약서도 어느새 내용이 변해 있던 것이다. 그때부터 그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빚은 빚대로 불어나고 원금은커녕 이자도 갚기 힘든 처지가 되어 갔다. 많은 주민들이 그의 식당을 이용하여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었지만 그것만으로 살인적인 이자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알렉스는 고리대금업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 뒤에 있는 라든이 자신의 딸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자신의 딸은 자랑은 아니지만 이제 막 한창 피어오르는 꽃봉오리였다. 막 아름다움을 발산하기 시작하는 16세의 나이였기에 풋풋함이 넘쳤고, 많은 주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런데 지금 라든이 그런 그의 딸을 노리고 마수를 뻗쳐 오기 시작한 것이다. 으드득! 우연히 정황을 알게 된 알렉스는 가든을 생각하며 이를 갈아붙였다. 다행히 소리가 작았기에 병사들은 듣지 못한 듯했다. 병사가 알렉스에게 말했다. “이대로 계속 빚을 갚지 못하면 이쪽도 곤란해. 그러니 다음 주까지 갚아줘야겠어. 만약 갚지 못하면......” 병사의 시선이 식당 한쪽에 있는 엘린에게 향했다. 음욕에 찬 남자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자 엘린은 몸을 파르르 떨었다. 마치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남자의 시선은 두렵기 짝이 없었다. 시선을 견디지 못한 엘린이 주방으로 숨어 버리자 병사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무언가로 대체해야 할 거라고." 그렇게 말하며 그는 몸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고 했다. 그런 그에게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전신을 로브로 둘러싼 사람. 펑퍼짐하여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지만 우연스럽게 찻잔을 잡고 있는 손을 병사는 볼 수 있었다. 새하얀 손. 손 하나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구나 하는 느낌을 주는 것이 분명 여자의 손임이 분명했다. 병사의 눈이 순간 번뜩였다. 잘하면 대어가 낚인 것일 수도 있다. 로브를 둘러싼 정체불명의 여인. 무언가를 숨기거나 무언가에 쫓기지 않는다면 굳이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을 리 없었다. 만약 저 여인이 미인이라면? 그것을 찾아낸 자신은 한몫 단단히 받게 될 것이다. 순식간에 상황을 판단한 병사가 여인에게 다가갔다. 조용히 차를 마시며 장내의 상황를 살피던 엘리엔은 갑자기 험상궂은 인상의 병사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의아한 빛을 띠었다. 왜 자신에게 다가온단 말인가? 자신은 저들과 아무런 연관도 없는데 말이다. 그사이 병사가 다가와 짐짓 시비조로 입을 열었다. “이 봐." "무슨 일이지?“ 인간 따위에게 존댓말은 필요 없다. 어차피 자신의 나이가 더 많을 뿐더러 추악한 인간에게 존댓말을 쓸 생각은 조금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반말은 병사의 화를 돋우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여자란 것을 확인했다. "뭐, 무슨 일이지? 너 지금 우리가 누구인지 알고 그러 것이냐?“ “영지의 병사 아닌가? 설마 그 복장을 하고서 내가 못 알아볼 거라 생각하는 건가?” 엘리엔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그녀는 인간이 아니었기에 병사의 의도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쾅! “지금 장난하나? 내가 불렀는데 왜 반말을 하는 거지? 너 누구야? 다른 곳에서 도둑질하다가 이곳으로 온 것이냐? 안 그러면 왜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거야, 엉?” 험악한 인상의 병사가 탁자를 엎더니 험악한 기세를 발산하니 삽시간에 식당분위기는 싸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엘리엔은 너무도 어이가 없는 나머지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그녀는 후회했다. 왜 자신이 순간 인간에 대한 재평가를 하려 했던가. 인간은 모두 이렇다. 추악하고 더러운 그런 생명체...... 식당의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알렉스는 안절부절못했다. 주방에서 몰래 상황을 지켜보던 엘린이 쪼르르 달려와 병사의 앞을 가로막았다. "어, 언니를 괴롭히지 마세요. 언니는 이 식당의 손님 이고 병사님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요!" 갑작스럽게 끼어든 엘린은 병사의 화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그는 두터운 손을 엘린에게 휘둘렀다. "어린것은 꺼져!" 짝! "꺄악!" 병사에게 손찌검당한 엘린이 얼굴을 부여잡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엘린!" 알렉스가 주저앉은 엘린을 껴안으며 병사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차마 병사에게 싸움이 되지 않는 걸 알았기에 덤비지는 않았다. "그만." 엘리엔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엘린에게 으르렁거리던 병사가 엘리엔에게 시 선을 옮겼다. 엘리엔은 그런 인간 병사가 한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녀가 보기에 인간 남자는 허약하기 그지없었다. 알렉스 모녀에게 힘자랑깨나 하지만 마나도 다루지 못하는 인간 병사는 그녀 자신의 손짓 하나만으로도 죽을 수 있는 허약한 생명체였던 것이다. 그런 생명체가 도토리 키 재기 식으로 자기보다 약한 이들을 괴롭히다니. 약자는 응당 보호받는 것이 옳은 것 아닌가? 정말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다 너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더냐?” 병사가 엘리엔에게 으르렁거렸다. 적반하장도 유분수가 따로 없었지만 엘리엔은 여타 다 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강렬한 기세를 뿜어냈다. 그것은 틀림없는 마나. "윽!" 상대가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여인이란 걸 깨달은 병사는 뒤로 주춤 물러났다. 마나를 다룰 수 있다니! 자신의 상대가 아니었다. 엘리엔은 그런 병사를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인간이라는 동물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한없이 약한 꼴이라니. 그녀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어린아이에게 손찌검이라니. 그러고도 네가 이곳을 지키는 병사라 할 수 있나?" 사악! 그와 함께 엘리엔이 자신의 얼굴을 가린 후드를 벗었다. 그러자 엘리엔의 얼굴이 드러났다. 머엉! 엘리엔의 얼굴을 보는 순간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은 할 말을 잃었다. 심지어 분노에 몸을 떨던 알렉스와 고통스러워하던 엘린마저도 말이다. 그만큼 엘리엔의 미모는 대단했다. 그녀의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 식당 안에 찬란한 태양이 떠오른 것으로 착각 할 정도로 말이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엘리엔의 얼굴이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무엇보다 차가웠다. 그녀는 얼음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눈으로 병사를 바라보았다. "으으!" 단지 바라보는 것뿐이었지만 그녀에게서 뿜어지는 기세는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일반 병사가 견딜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병사는 신음하며 물러설 뿐이었고, 엘리엔은 그에게 추 상과도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한 번 말하겠다. 약자에게 한없이 강하고 강자에게 한없이 약한 모습. 그것이 바로 너의 참모습인가?” 병사는 아무 말도 못했다. 단지 엘리엔의 기세에 압도되어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 뿐이었다. 엘리엔은 그런 병사를 한동안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가라.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라. 두 번 다시 보기도 싫으니." "으으으......“ 살길을 열어 준 엘리엔의 한마디로 병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부하 2명과 함께 식당을 도망치듯 벗어났다. 엘리엔은 병사들이 나간 뒤 식당을 둘러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에 기분이 불쾌해진 그녀가 벗은 로브를 둘렀다. "방을 안내해라." "제, 제가 안내할게요." 엘린은 알렉스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을 깨닫고는 아픈 뺨을 만지작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엘리엔은 그런 엘린의 뺨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그녀는 그랜드 마스터에 이른 검사지만 기본적인 기초 마법도 가능했다. 새하얀 빛이 손에서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는가 싶더니 이내 부어오른 엘린의 뺨이 본래대로 돌아왔다. "와아!" 엘리엔은 완전히 회복된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엘리엔이 그녀에게 말했다. “방을 안내해 주렴," "네, 네! 저를 따라오세요." 정신을 차린 그녀가 앞장서자 엘리엔이 그 뒤를 따랐다. 엘린과 엘리엔이 사라지자 식당은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주된 내용은 방금 사라진 엘리엔의 정체에 대해서이다. "그 여자는 누굴까? 정말 아름답던데......" “게다가 병사들을 압도하던 기백을 봐. 정말 대단해!" 한동안 식당은 그 이야기로 소란스러웠고, 그 소문은 삽시간에 도시로 퍼져 소문의 여인의 외모를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식당을 이용하였다. 그 소식을 제일 먼저 접한 것은 라든이었다. 그는 게일라스 자작을 보조하는 작위로 남작의 작위를 받았는데, 방금 전에 온 병사의 말을 듣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라? 엘린을 데리러 갔더니 눈부신 미인이 여관에 있어? 그런데 그 실력이 마나를 다루는 익스퍼트라?" 라든은 재빨리 머리를 굴려 여인의 정체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대륙에는 무척 아름다운 여인이 많다. 하지만 그 여인 들은 대부분 유명한 귀족가에 소속된 여인들이었고, 그런 여인들이 이곳에 여행을 왔다면 수행원을 데려와야 옳았다. 그런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에메랄드와 같은 녹색의 머리를 가진 여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결론은 새로 나타났다는 건데. 만약 귀한 집의 여식이었으면 수행원들을 데리고 왔을 터. 그런 그들이 없다는 것은 즉, 뒤탈이 없다는 말과 같으렷다." 라든이 입맛을 다셨다. 병사의 보고가 사실이라면 여인은 정말 대륙에서 두 번 다시 보기 힘든 절세미인임이 분명했다. "도대체 얼마나 예쁘기에 그런 말을 하는걸까? 한번 봐야겠군." 라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곧장 기사들에 게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 병사를 상하게 한 죄인이 있다. 그 죄인의 실력이 고강한 듯하니 기사 열 명과 병사 백 명을 준비하라." "예!" 대답과 함께 기사들이 곧장 병사들을 집결시키기 시작했다. “만약 그 정도로 아름답다면...... 내가 차지해 주지." 입맛을 다시는 라든. 그 모습은 무척 음흉했다. *** 기사 10명과 병사 100명을 모으는 건 순식간이었다. 병사가 돌아와 보고를 한 지 2시간 만에 기사 10명과 병사 100명을 모은 라든은 곧장 그들을 이끌고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 안은 인산인해였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이 등장했다는 말에 그 얼굴을 보고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것이다. 기사 하나가 앞으로 나가 외쳤다. "베이류 남작님이 오셨다. 모두 길을 비켜라!" 그 말에 주민들의 안색이 삽시간에 사색이 되며 분분히 비켜섰다. 그들에게 있어 베이류 남작, 라든은 왕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었다. 당장 딸이 있는 사람들은 라든 때문에 걱정해야 할 정도니 그가 게일라스 자작령에서 얼마나 악명을 떨치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던 식당은 삽시간에 썰렁하게 비었고, 라든은 그 안에 들어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죄인은 모습을 드러내라!" “......” 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청각이 좋은 엘리엔은 물론 이 소리를 들었지만 죄인이 라는 말에 신경을 껐다. 자신은 죄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때, 엘리엔의 방에 엘린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는 엘리엔의 팔을 잡으며 사색이 된 얼굴로 발을 동동 굴렀다. "어떡해요, 언니! 사람들이 언니를 잡으러 왔어요!" "날 왜 잡니?" 엘리엔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자신이 잘못한 것은 없었다. 단지 잘못된 것을 바로잡았을 뿐, 나머지는 조용히 식사를 하고 조용히 이곳에 있었던 것이 전부였다. 그런 그녀의 의문을 엘린이 풀어 주었다 "그러니까...... 아까 그 병사들이 윗사람한테 이른 모양이에요. 그리고 언니에 대해 나쁘게 말했나 봐요. 지금 저희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베이류 남작도 왔거든요." "잘못? 난 잘못을 한 적이 없어. 오해가 있다면 그것을 풀면 되겠지." 엘리엔은 여유롭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벽에 걸린 로브를 둘렀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는 대화로 쉽사리 일이 해결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상대가 이미 일방적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데 그녀의 말을 들어 줄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부딪쳐 봐야 저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검까지 모두 챙긴 엘리엔은 식당으로 내려갔다. "으으!" 라든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자신이 나타나라고 외친 지 5분이 지났는데 상대방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것은 상대가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뜻. 그리고 자신에 대한 무시였다. 결국 참다못한 라든이 죄인을 잡아 오라고 명령을 내리려 할 때, 위층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내려왔다. 전신을 로브로 둘러싸고 있어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 로브인이 병사가 말했던 여인이 분명했다. 로브인, 엘리엔이 라든을 바라보며 물었다. “나를 찾았나?” ‘일단 목소리는 여자다. 그것도 아주 고운 목소리를 지닌.' 라든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여자란 걸 확인 한 것이다. "이것이! 감히 귀족에게!" 그와 동시에 엘리엔의 말에 발끈한 한 귀족이 소리쳤다. 하지만 그 소리는 엘리엔에게 뉘 집 개 짖는 소리냐는 말과도 같았다. 당연하다. 인간들이 정한 계급 따위는 엘프에게 상관없기 때문이다. "이이 !" 흥분한 기사가 당장에라도 엘리엔에게 달려들 듯한 태도를 취했다. 그런 그를 제지하는 손이 있었다. 바로 라든이었다. 라든은 엘리엔의 모습을 이리저리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가 우리 병사들을 폭행했다고 들었다. 그 말이 사실이냐?“ 엘리엔으로서는 생각할 가치도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을 한 적도, 할 생각도 없다. 내가 왜 쓰레기를 처리해야 하지? 난 쓰레기 청소부가 아니야." 병사를 쓰레기로 격하시키는 적나라한 발언이다. 그 말에 병사들은 안색을 굳히며 살기를 피워 올렸다. 엘리엔의 말이 모욕적으로 들린 것이다. 라든은 그런 병사들에게 손을 들어 휘휘 저었다. 여기서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 필요가 없다. 지금 저 여인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른다. 확실한 건 기사 10명과 병사 100명을 앞두고 당당할 만큼 그녀의 실력이 대단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침착한 성격을 지닌 라든은 그 점을 파악하고 험악한 분위기가 될 뻔한 상황을 중지시킨 것이다. 분위기를 어느 정도 가라앉힌 그는 엘리엔에게 말했다. "그런데 왜 넌 얼굴을 가리고 있지? 만약 네가 당당하다면 굳이 얼굴을 가릴 필요가 없지 않나? 얼굴을 가린다는 것 자체가 무언가 켕기는 점이 있다는 것 아닌가?“ 이는 엘리엔의 얼굴을 보기 위한 의도가 다분히 숨어 있었다. 그리고 그런 라든의 속셈을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는 그녀였다. 하지만 이대로 넘긴다면 자신이 모두 앞에 나쁜 짓을 했다고 인정하는 꼴이기에 그녀는 로브를 벗어 보였다. 사락! 로브가 벗겨지는 소리와 함께 드러나는 그녀의 외모. 마치 에메랄드와도 같은 녹발은 반짝반짝 빛을 뿌리고 있었다. 거기에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외모! 이 정도로 완벽한 외모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 라든은 처음 알았다. 꿀꺽. 누군지 모르지만 엘리엔의 얼굴을 보고 마른침을 집어 삼켰다. 당연한 일이다. 그녀의 완벽한 외모를 보고서 침이 바싹 마르지 않는다면 남자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 이다. "흠흠!" 인간들 중 가장 먼저 평정을 찾은 것은 라든이었다. 실제로 보니 병사가 말한 것보다 몇 배, 아니 수십 배는 더 아름다웠다. 그리고 불같은 욕심이 일어났다. 이 여인을 갖고 싶다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평생 자신의 곁에 두고 싶다고 말이다. "귀인께 실례를 끼쳤군요." 외모를 보니 적대할 마음이 싸악 사라졌다. 지금 라든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해야 이 여인의 호감을 살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런 라든의 표정과 호의에 속을 엘리엔이 아니다. 그녀는 진실의 눈을 소유하고 있다. 안색과 말투를 바꿨지만 저 눈 속 깊은 곳에서 이글거리는 욕망을 읽지 못 할 리 없었다. 추악하고 더러운 욕망. 전신을 기분 나쁜 끈적끈적한 점액질에 담가 놓은 듯한 더러운 기분에 엘리엔이 살기를 피워 올렸다. 라든의 모습을 보니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올랐다. 과거 자신의 부모님이 죽어 가던 모습, 그 모습이 떠오르니 절로 살기가 일어났다. 스르릉! 어느 샌가 엘리엔은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라든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때, 엘리엔은 살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더러운 욕망을 제대로 숨기고서 말을 하여라." 슈악! 그녀의 검이 섬전과도 같이 쏘아졌다. 그녀가 노리는 표적은 라든이었다. “막아라! 남작님을 보호해!" 기사들은 모두 소드 익스퍼트에 든 기사들이었기에 엘리엔이 검을 뽑아 든 순간부터 경계심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엘리엔이 검을 휘두르자 그것을 막고자 저 마다 검을 뽑아 들고 검에 오러를 생성하였다. 하지만 그 격차가 너무나 심했다. 엘리엔은 100년 전에 그랜드 마스터에 든 엘프 최강의 검사다. 그런 그녀가 고작 익스퍼트에 불과한 이들에게 공격이 막힐 리 없었다. 그녀의 검에 서린 오러가 주욱 뿜어지며 앞을 가로막은 검사들의 오러를 갈가리 찢어 버리고 검을 모조리 부숴 버렸다. 오러를 충만하게 머금은 검을 마치 종잇장처럼 간단하게 찢어 버린 것이다. 서걱! 그와 함께 오러는 너무나 간단하게 라든의 목을 베었다. 엘리엔을 자신의 여인으로 만들겠다고 다짐하던 라든. 그는 더러운 욕망을 보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허망하게 삶을 마감한 것이다. “나, 남작님!" 기사들은 자신들의 검이 허무하게 뚫리고 라든의 목이 잘리자 당황했다. 그러다가 기사들 중 수장으로 보이는 이가 외쳤다. "모두 쳐라! 이 여자는 마녀다! 마녀가 남작님을 죽였다!" 그와 함께 예비용 검을 뽑아 들고는 다시 오러를 생성 해냈다. 기사들도 모두 예비용 검을 뽑아 들고 다시 엘리엔에게 접근했다. “......” 엘리엔은 그런 기사들과 병사들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기사들의 검이 지척에 이르자 나직이 입을 열었다. “나에게 검을 겨눈 자, 그리고 인간. 살아갈 가치가 없다." 라든으로 인해 봉인해 놓았던 지난날의 기억이 떠오르자 그녀는 더 없이 차가워졌으며, 더없이 잔인해졌다. 그녀의 검에 오러가 실타래처럼 풀려 나왔다. 그리고 그것들은 정확히 10줄기로 나뉘어 기사들에게 향했다. 기사들은 자신에게 향하는 오러가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품은 걸 눈치 채고는 곧장 방어 태세를 취했다. 오러를 충만하게 머금은 검이 중요한 급소를 가렸다. 통상적이라면 이 방어를 뚫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너무 나빴다. 상대는 그들과 같은 익스 퍼트가 아닌 그랜드 마스터였다. 엘리엔의 오러는 너무나 쉽게 상대의 검을 꿰뚫었다. 퍽! 그녀의 오러가 기사들의 검을 부수고, 갑옷을 꿰뚫은 뒤 피륙을 파고들었다. 10줄기 오러는 정확한 컨트롤로 기사들의 심장을 꿰뚫었다. "커......헉 !" 쩡그렁! 힘없이 떨어지는 검! 그와 함께 기사들의 몸이 허물어졌다. 털썩. 너무나 허망한 최후가 아닐 수 없다. 단지 검에서 오러가 뿜어져 나왔을 뿐인데 그걸 막아 내지 못하고 그대로 심장이 꿰뚫려 죽어 버린 것이다. 쓰러진 기사들을 보며 엘리엔은 여전히 차가운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녀가 병사에게 시선을 옮겼다. "히엑!" 엘리엔의 시선을 받은 병사들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병사들도 눈치가 있다. 그녀가 기사들을 손쉽게 죽이는 모습에 그녀의 실력이 엄청나다는 걸 눈치 챘다. 그녀는 말로만 듣던 소드 마스터, 소드 마스터임이 분명했다. "너희들은 별로 상관없으니 그냥 보내 주겠다. 가라." 기사들을 모두 죽인 엘리엔은 굳이 병사들까지 죽일 필요를 못 느꼈다. 마나도 못 쓰는 그들은 엘리엔에게 있어 벌레 죽이듯 손쉽게 죽일 수 있는 존재다. 하지만 그녀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다. 그녀가 무차별적으로 검을 휘둘렀다면 살인마이지, 엘프의 수호검주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애당초 저항 자체가 안 되는 병사들을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녀의 말에 병사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기사들이 맥없이 죽는 걸 보고 자신들도 꼼짝없이 죽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살길이 열린 것이다. 병사 하나가 재빨리 몸을 돌려 도망쳤다. "도, 도망가자!" 그것이 시작이었다. 엘리엔을 힐끗 본 병사들이 한둘 몸을 돌리더니 이내 빠른 속도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 엘리엔은 병사들이 도망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병사들이 모두 사라지자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알렉스를 향해 말했다. "더 이상 내가 있으면 피해가 미칠 테니 나가겠다. 그 전에 이 시체를 밖으로 옮길 테니 그렇게 염려 담긴 눈으로 바라보지 않아도 된다." “네, 네!" 엘리엔의 말에 알렉스는 더듬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가 제일 걱정하던 부분이 바로 그것이었다. 자신의 식당에서 기사가 죽은 것. 그것 때문에 행여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염려스러웠던 것이다. 엘리엔은 그것을 정확하게 짚어 낸 것이다. 그녀는 인간의 마음을 알아보는 데 능숙했고, 알렉스의 그런 마음을 읽었기에 이 식당을 나가기로 한 것이다. 이미 상당한 증인이 있기에 굳이 그녀와 알렉스가 관련 있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가벼운 손짓으로 시체를 모두 밖으로 내보낸 그녀는 곧 장 식당 밖으로 나섰다. 그러자 엘린이 조르르 달려왔다 그녀는 엘린을 붙잡으며 말했다. "언니 ! 어디 가시는 거예요?“ 엘리엔은 로브를 둘러쓰며 엘린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그녀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가 여기에 있으면 너희에게 피해가 돼서 나가려는 거야." 엘리엔은 엘린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의 존재가 엘리엔에게 한 가지 깨닫게 해 주었다. 인간일지라도 아이는 어느 정도 순수하다는 것을. 그리고 극소수지만 착한 인간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안 돼요! 언니는 베이류 남작을 죽였어요! 그리고 기사도 죽였고요! 이대로 언니가 가 버린다면 언니는 추적에 쫓겨서 죽을 거예요." 그녀는 진심으로 엘리엔을 걱정해 주었다. 엘리엔은 엘린의 걱정에 고개를 저었다. "나는 강해. 이 세상에서 나보다 강한 사람이 몇 없을 정도로. 그런 내가 고작 기사 몇 명에게 죽을 리가 없어." “하지만......하지만...... ” 엘린은 걱정이 되는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런 엘린을 바라보며 엘리엔은 살짝 눈을 감았다. 자신이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고, 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가에 대해 떠올려 보았다. "아." 그리고 이유는 간단하게 도출되었다. 바로 이곳의 통치자 때문이다. 모든 일은통치자에서부터 시작된다. 이곳의 통치자가 제대로 되지 않았기에 고리대금업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고, 말도 안 되는 인간들이 나타나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먹이는 것이다. 결국 모든 잘못은 통치자의 잘못이라는 것이다. 지금 이 도시의 통치자는 누구인가? 엘리엔이 물었다. "이곳을 다스리는 사람은 누구야?“ 엘린이 엘리엔을 곁눈질로 살짝 바라보며 말했다. "게일라스 자작님이요. 방금 전 언니가 죽였던 분은 게일라스 자작님이 아끼시는 수하 베이류 남작님이에요." "자작이 라......“ 인간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계급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상식을 가지고 있다. 자작이라면 귀족이다. 스스로를 귀한 종족이라 일컬을 정도니 그 행실은 안 봐도 뻔할 것이다. '그런 인간은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게 대륙을 위해 도움이 될 거야.' 마음을 굳힌 엘리엔은 엘린에게 말했다. "그럼 잠시 너희 여관에서 머물게. 나도 할 일이 있으니까." "네, 언니." 엘린이 밝게 고개를 끄덕이며 엘리엔을 다시 안내했다. 하지만 이것은 무척 큰 변화를 초래한 것이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이대로 엘리엔이 떠났다면 그간의 일이 흐지부지되었을 수도 있는데 엘리엔이 이곳에 머물게 됨으로써 새로운 일들을 초래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라든, 베이류 남작이 죽은 것과 기사 10명이 죽은 사실은 빠르게 게일라스 자작에게 향하고 있었다. 4. 게일라스 자작가의 소멸 편안하게 파티를 즐기며 휴식을 취하던 게일라스 자작은 갑작스러운 보고에 펄쩍 뛰었다. "뭐? 베이류 남작이 죽어? 그리고 기사 열 명도 죽어?“ "그, 그렇습니다. 아주 악마 같은 여자였습니다. 일 검에 베이류 남작님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기사님들 또한 한 번의 공격에 전멸했습니다." 게일라스 자작은 병사의 말에 안색이 변했다. "어이가 없군. 그러니까, 일 검을 휘둘렀더니 베이류 남작이 죽었고, 뒤이어 일 검을 휘둘렀더니 열 명의 기사가 죽었다, 지금 내 말이 맞느냐?" "그렇습니다, 자작님. 정말 위험한 여자입니다." 병사는 보고를 하면서 조금 전 엘리엔의 신위를 떠올렸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허어, 참!" 게일라스 자작은 병사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헛기침을 내뱉었다. 당연하지 않겠는가? 갑자기 나타난 여자가 검을 휘둘렀더니 10명의 기사가 호위하고 있는 베이류 남작이 죽었고, 다시 검을 휘두르니 10명의 기사가 죽었단다. 제아무리 소드 마스터라 하여도 이런 일은 못 벌일 것이다. "에잉! 멍청한 것!" 게일라스 자작은 병사가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적을 조금이라도 강하게 묘사한다고 결정 내리며 불편한 소리를 냈다. "일단 준비를 해라. 베이류 남작을 죽였다는데 잡아들이지 않을 수 없지." 그러면서 게일라스 자작은 내심 안타까웠다. 베이류 남작은 그의 뜻을 잘 받들어 열심히 일하던 이다. 그런 이가 이렇게 맥없이 죽어 버리다니. 그로서는 베이류 남작이 무척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일은 잘하던 놈인데 허망하게 죽다니...... 아쉽군." 게일라스 자작은 곧장 대기 중이던 기사 80명과 정규 군 500명을 데리고 병사가 말했던 장소로 향했다. 미리 도망칠 수도 있었기에 명령을 내려 성문을 닫고,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했다. 기사와 병사들을 거느린 게일라스 자작은 곧장 베이류 남작이 죽었다는 식당으로 갔다. 식당으로 간 그의 눈에 보인 것은 맥없이 죽어 버린 베이류 남작과 10명의 기사였다. "이 런!" 병사의 말이 사실로 드러나자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 게일라스 자작. 거짓이길 바랐는데 정말로 베이류 남작이 죽은 것이다. 게다가 기사 10명도 죽었다. 기사는 귀족의 힘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도구 역할도 한다. 게일라스 자작가에 소속된 기사 중 소드 마스터는 없지만 익스퍼트에 든 기사 100여 명이 존재한다. 그런 이들 중 무려 10명이 목숨을 잃다니...... 게일라스 자작은 상대의 힘이 만만치 않다는 걸 느끼면 서 내심 돈만 받아먹고 태평하던 기사들이 방심하다 죽은 걸 고소하게 여겼다. "뭐, 그렇다 해도 남작과 기사를 죽인 년을 찾아야겠지" 그렇게 말하며 게일라스 자작이 눈짓을 하자 자작가의 기사단장 오멜트가 앞으로 나서며 마나를 실어 외쳤다. "우리는 게일라스 자작가의 기사들이다! 지금 게일라스 자작님과 함께 이곳에 왔으니 본 영지의 남작과 기사 들을 죽인 죄인은 즉각 모습을 드러내라." 마나가 실린 그의 말은 또렷했고, 여관에 울려 퍼졌다. "포위망을 구축하라." 게일라스 자작의 명령에 병사들은 구경꾼들을 밀어내며 긴 포위망을 만들어 냈다. 잠시의 시간이 흐르자, 로브를 쓴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엘리엔이었다. 게일라스 자작은 모습을 드러낸 엘리엔에게 물었다. "네가 바로 베이류 남작과 기사들을 죽인 범인이냐?“ 80명의 기사와 500명의 병사가 함께한다. 상대가 제아무리 소드 마스터라도 제압할 자신이 있는 그였다. 그랬기에 그의 어조는 사뭇 위압적이었다. "......“ 엘리엔은 게일라스 자작의 말에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꽤 일이 커진 듯하다. 쓰레기 같은 인간 몇 명을 죽였다고 이렇게 많이 몰려오다니. 차라리...... “다 죽일까?” 엘리엔은 오늘 하루만 몇 번이나 이런 일에 휩싸이자 급속도로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자신이 병사들을 왜 살렸는가? 쓸데없이 약한 인간들의 목숨을 빼앗기에 조금 꺼려져서 살린 것이다. 그런데 그런 병사들이 도망치기는커녕 게일라스 자작 에게 일러바쳐서 더 많은 병사들을 끌고 왔다. 그것이 엘리엔을 자극했고, 지금의 상황을 최악의 길로 이끌려고 하는 것이다. "죄인은 모습을 드러내라! 이곳을 다스리는 나 게일라스 자작 앞에서 무슨 무례한 모습이더냐." 게일라스 자작이 앞으로 나섰다. 그의 위세는 사뭇 당당했다. 하지만 엘리엔에게는 무슨 오크같이 생긴 뚱뚱한 인간이 앞으로 나와 소리치는 것에 불과했다. 그래도 그녀는 이야기를 나누는 데 로브를 벗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임을 알았기에 얼굴을 가린 후드를 걷어 냈다. 순간 조용해진 장내. 누구나 엘리엔의 얼굴을 보면 이러한 반응을 보인다. 완벽한 신의 작품을 보는 듯한 얼굴. 비록 자기 지방에서 제왕 같은 위세를 누리는 게일라스 자작이라지만 그가 언제 이런 미녀를 본 적이 있겠는가. 대륙으로 치면 게일라스 자작은 평범한 레탄 왕국의 중간 귀족에 불과했고, 대륙에서 아름답다는 여인들은 모두 제국, 또는 대왕국의 유명한 귀족 영애나 공주였으니말이다. 게일라스 자작이나 기사들이나 그 반응은 다르지 않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기사들을 살해했다니! 분명 고강한 힘을 지닌 것처럼 보이긴 했다. 그러나 기사들이 죽은 것은 이 여인에게 무례를 범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자고로 세상은 예쁘고 볼 일이었다. 게일라스 자작의 생각은 삽시간에 바뀌어 베이류 남작이 엘리엔에게 치근거리려다가 죽은 것으로 생각했다. '죽어도 싸지. 감히 영주인 나를 놔두고 이렇게 아름다 여자를 독차지하려 하다니.' 이 여인을 만약 놓쳤다면 자신은 얼마나 후회했을지 생각하니 절로 속이 쓰려 오는 걸 느쪘다. 하지만 그것뿐, 실제 결말은 그것이 아니었기에 게일라스 자작은 희망이 있음을 느꼈다. 게일라스 자작은 눈을 감았다. 이윽고 눈을 뜬 그의 눈은 좀 전과 달리 부드러운 웃음을 띠고 있었다. “소리쳐서 미안하오. 나는 이곳을 다스리는 게일라스 자작이라 하오." 오만하고 평소 다른 것들을 모조리 깔아 보는 그의 성격상 절대 나올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래 봤자 엘리엔에게는 웬 돼지가 눈웃음 짓고 있는 정도로 보였다. 엘리엔은 게일라스 자작의 눈에 아른거리는 욕망을 읽었으나 짐짓 모른 척하며 말했다. “난 엘리엔이라고 한다." 반말을 했지만 그는 결코 개의치 않았다. 소드 마스터라면 당장 레탄 왕국에서 백작의 작위를 받을 수 있을 정도의 위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런 것으로 화를 내면 자칫 속 좁은 남자로 보일 수 있다. 그렇게 되는 건 곧 엘리엔이라 밝힌 여인과 사이가 멀어지는 걸 뜻한다. 그것만은 막고 싶었다. "오오, 엘리엔. 이름만큼 아름답구려." 게일라스 자작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미성을 내며 말했다. “......” 엘리엔은 그런 게일라스 자작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게일라스 자작이 입을 열었다. "레이디 엘리엔, 나 게일라스 자작은 먼 곳을 여행 온 당신에게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고 싶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식사에 무엇을 탈지 모르겠지만. 흐흐!' 소드 마스터를 상대하는 방법은 검을 맞대는 것뿐만이 아니다. 약을 쓰면 손쉽게 제압할 수 있는데 뭣 하러 기사들을 희생시킨단 말인가? 게일라스 자작은 나름대로 흉계가 있었던 것이다. 만약 엘리엔이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게일라스 자작의 호의에 무척 감사를 표하며 따라갔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엘리엔은 인간이 아닌 엘프였다. 더군다나 진실의 눈을 지닌 그녀는 게일라스 자작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어렴풋이 알 수 있었 다. 그녀는 게일라스 자작의 눈에 어린 음심을 읽어 들였다. 그의 눈에 끈적거리는 더러운 욕망. 그것은 자신을 노리는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눈치 챈 엘리엔은 힘들게 참던 화를 폭발시켰다. "이 추악한 인간이!" 콰콰콰콰......! 끈적하고 더러운 욕망을 느낀 엘리엔의 전신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뿜어졌다. 그것은 감히 인간이 뿜어낼 만한 기운이 아니었다. 마치 세상을 지배해 버릴 듯한 기운. 주변을 압도하는 기운으로 인해 기사들은 모두 몸이 뺏뻣하게 굳는 걸 느꼈다. 엘리엔의 얼굴이 서릿발처럼 차갑게 변한 채 게일라스 자작에게 다가왔다. 게일라스 자작은 자신의 예상보다 엘리엔이 훨씬 강하다는 데 당황했고, 몸이 말을 듣지 않자 다시 당황했다. 그는 엘리엔이 자신에게 다가오자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자, 잠시만 기다리시오! 우리 이러지 말고 이야기로 풀어 나갑시다. 워, 원하시는 게 무엇이오? 뭐, 뭐든지 말 해 보시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컥!" 하지만 게일라스 자작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엘리엔은 더 이상 말을 듣기 싫다는 듯, 그의 심장에 검을 박은 것이다. “더럽고 추악한 욕망을 가진 인간. 난 너의 눈만 봐도 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느낄 수 있다." 생기가 빠져나가는 게일라스 자작의 시신에 차갑게 일갈한 그녀는 기사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기사들은 엘리엔의 시선을 받자 안색이 사색이 되었다. 자신의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에 생각이 그친 게일라스 자작과 달리 검을 익히고 경지를 높인 기사들은 이것이 무슨 현상인지 잘 안다. 마나 지배! 주변에 퍼진 마나를 일순간 자신의 통제하에 놓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시전할 수 있는 자, 마나 지배는 오로지 그랜드 마스터만이 펼칠 수 있는 전유물이었다. 엘리엔은 기사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마나 지배로 인해 기사들은 뻣뻣하게 굳어 제대로 운신할 수 없었다. 마나 지배로 그들의 전신에 쌓인 오러가 사용할 수 없게 되었으며, 신체 기능이 현저하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엘리엔은 기사단장 오멜트 바로 앞으로 다가가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흡!' 오멜트는 엘리엔이 바로 자신 앞에 나타나자 숨을 집어 삼켰다. 그야말로 숨 막히는 아름다움이었다. 마치 인간의 아름다움이 아닌, 무언가를 초월하는 아름다움이었다. 그가 엘리엔의 외모에 감탄하기 바쁠 때 엘리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없이 혼탁한 눈. 너 역시 더럽고 추악한 인간에 불과했구나," 그녀가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기사들을 한차례 둘러보며 말했다. "모두가 같아. 더럽고 추악해. 너희들을 본 것만으로도 난 역겨워. 더러운 욕망, 그것을 나에게 드러내지 마." 어쩌면 말도 안 되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 누가, 그 어떤 사람이 엘리엔의 외모를 보고 욕망을 품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운 외모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더러운 욕망, 모두 내가 사라지게 해 주겠어." 천천히 검을 뽑아 들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녀를 막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기사 모두가 마나 지배에 걸려들어 무기력했고, 병사들 또한 엘리엔의 기세에 밀려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을 뿐이었다. 우웅! 그녀의 검에 오러가 맺히기 시작했다. 실같이 뿜어진 오러는 곧이어 검에 넘쳐나더니, 이내 실타래처럼 풀려 나오기 시작했다. 그 오러는 무려 80줄기로 뻗어 나갔다. 푹! 오러는 정확하게, 그리고 느릿하게 다가가 기사들의 심장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 심장을 꿰뚫고 들어오는 오러의 감촉에 눈을 부릅뜨는 기사들. 그들이 어찌 이런 최후를 예상했겠는가. 그나마 소망이 있다면 기사답게 죽는 것인데 그들은 반항조차 못한 채, 자신을 죽이기 위해 천천히 다가오는 오러를 보면서 그대로 심장이 꿰뚫려 죽은 것이다. 그 광경을 보며 병사들은 입가에 침이 흘러내리는 것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굳어 버렸다. 그들은 봐 버렸다 눈앞에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이 게일라스 자작을 죽이고 베이류 남작을 죽였으며, 기사들을 죽인 것을 말이다. 병사들 중 상당수는 오멜트가 죽기 전에 한 말을 들었다. 그는 죽기 전에 엘리엔을 보며 '그랜드 마스터'라 하였다. 그렇다는 건 눈앞의 여인이 그랜드 마스터에 이른 검사라는 걸 뜻한다. 그랜드 마스터? 대륙에 단 10명밖에 존재하지 않는 검사를 말하는 것 아닌가? 일신의 무력으로 수십 명의 소드 마스터를 상대할 수 있는 그랜드 마스터는 대륙 최강의 검사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런 그에게 덤빈다면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일 것이다. 병사들은 삽시간에 겁에 질렸다. 상대가 누구란 걸 몰랐으면 달려들기라도 하겠지만 그랜드 마스터란 걸 알아 놓고 달려들 정도로 멍청한 이는 여기에 아무도 없었다. "아, 아무리 정예병이라고 해도 그랜드 마스터는 너무 하잖아!" 병사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무기를 버리고 줄행랑을 쳤다. 그것을 시발점으로 다른 병사들도 등을 돌려 도망가기 시작했다. “......” 엘리엔은 도망가는 병사들을 보며 검을 검집에 꽃아 넣었다. 그리고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행동이 인간의 방식에 맞지 않다는 걸 무엇보다 그녀 본인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고칠 수가 없었다. 인간의 방식에 따르려면 그녀는 자신에게 서슴없이 욕망을 드러내던 게일라스 자작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고, 복잡한 형식 절차와 욕망에 가득 찬 그와 마주해야 하는 것이다. 그걸 생각하니 갑자기 불같은 살심이 일었다. 자신이 왜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 것인가? 엘프 숲에만 있었다면 매일같이 검을 수련하고 평온한 나날을 보내면 된다. 그런데 왜 자신이 이런 고초를 겪어야 하는가? 그래, 이것이 모두 다 인간 때문이다. 인간의 욕망 때문에 자신의 부모님을 잃었고, 인간 때문에 대륙이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모든 게 인간 때문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모두 죽여야 한다. 추악한 욕망을 발산하는 이 동물들을...... 그녀가 인간에 대해 더욱 원한을 키워 갈 때 여관 밖으로 나온 엘린은 엘리엔이 펼친 참상을 보고는 할 말을 잃었다. "언니......" “엘 린." 엘리엔은 엘린을 보자 순간 발산되던 살기가 말끔하게 사라졌다. 그녀가 인간 세계에 나와서 유일하게 마음에 든 인간이 바로 엘린이다. 최소한 엘린에게만큼은 이런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거늘...... 이제 이곳을 떠나야 한다. 자신이 이곳에 있어 봤자 좋을 일은 없을 것이다. "이제 난 이곳을 떠나야겠어. 엘린, 너도 보았지? 난 이 곳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야." "언니......“ 엘린은 차가운 표정으로 말하는 엘리엔의 모습이 너무나 안쓰러웠다. 그녀가 결코 좋아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닐 것이다. 무언가 맺힌 것이 있기에,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기 에 사람을 죽이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와는 사는 세계가 다르다. 때문에 엘린은 엘리엔에게 차마 가지 말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내가 임무를 마치면 언젠가 볼 일이 있겠지." 그 말과 함께 그녀가 몸을 돌렸다. 엘린은 그런 엘리엔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단지 음욕을 보였다는 이유만으로 레탄 왕국에 강력한 힘을 끼치던 게일라스 자작가는 그대로 소멸하고 말았다. 나중에 게일라스 자작과 그 기사들이 모조리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레탄 왕국은 경악했다. 그랜드 마스터! 대륙에 존재하는 그랜드 마스터는 딱 10명뿐이다. 그중 7명이 제국에 속해 있으며, 나머지 3명은 대왕국 이라 불릴 만큼 강한 왕국에 속해 있다. 만약 군소 왕국이 그랜드 마스터를 보유하게 된다면 그 왕국은 주변 국가의 패자가 될 수 있다. 그랜드 마스터는 그만큼 대단한 존재인 것이다 더군다나 레탄 왕국은 남부에 톨리안 왕국이라는 서부 의 맹주국과 마주하고 있다. 때문에 외교적으로 여러모로 불리하게 대우받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그랜드 마스터가 자신의 왕국에 편입된다면? 그 양상은 확연히 뒤바꿔다. 비록 톨리안 왕국에 금탑이 존재한다고 하지만 마탑주와 그랜드 마스터는 확연히 다르다. 그랜드 마스터는 소속된 국가를 위해 열성적으로 일하지만 마탑주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제아무리 골든 나이트가 있다고 해도 양국의 입장은 동등해질 수 있을 터. 그랜드 마스터는 그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레탄 왕국은 게일라스 자작을 죽인 그랜드 마스터에 대 해 격렬한 회의를 벌였다. 귀족들 사이에서는 그랜드 마스터를 영입해야 한다는 의견과 게일라스 자작을 죽인 그랜드 마스터를 처벌해야 한다는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했다. 그러나 그 일을 벌인 당사자는 거리낌 없이 레탄 왕국을 활보했고, 마침내 그랜드 마스터를 영입하자고 결정을 내린 레탄 왕국에서 엘리엔을 찾았을 때 그녀는 이미 레탄 왕국을 벗어나 톨리안 왕국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5. 루비어스 백작가를 방어하라! 맥셀 왕자의 반란! 그것은 톨리안 왕국을 삽시간에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가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맥셀 왕자를 따라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의 힘은 무려 톨리안 왕국의 국력 절반에 해당했다. 톨리안 왕국의 힘이 응집되어 있는 서부 영지 전체가 맥셀 왕자의 편에 섬으로써 사실상 왕국은 둘로 분열되어 멸망에 치닫는 전쟁을 벌이게 된 것이다. 왕국 서부 영지들은 대부분 제1왕자파 소속이어서 맥셀 왕자를 지지했지만 서부 영지 중 유일하게 제1왕자파에 속하지 않은 영지가 있다. 루비어스 백작령. 바다와 인접하여 풍부한 해산물이 나는 루비어스 백작가는 당대에 이르러 제3왕자파 수장 역할을 할 정도로 그 세력이 커져 있었다. 제2왕자파의 음모로 엄청난 타격을 입은 적이 있지만 도리어 보복을 하여 백작령 3곳을 빼앗기도 할 정도로 루비어스 백작가의 힘은 강성했다. 하지만 루비어스 백작령이 진짜 강한 것은 그것 때문만이 아니다. 루비어스 백작령이 강한 이유, 그것은 바로 루비어스 백작령 서부에 금탑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금탑주 엘리미스와 루비어스 백작이 친한 사이라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금탑주는 쓰레기와 다름없는 루비어스 백작의 해산물을 비싼 가격에 사주었고, 정치적 입장에서 뒷받침을 해 주어 루비어스 백작가가 부흥의 깃발을 올리는 데 도움을 주었다. 게다가 세 백작가가 침공했을 때 직접적으로 돕기까지 했으니 두 곳의 사이가 얼마나 친한지는 다른 나라도 알 정도였다. 그런 루비어스 백작령을 침공하는 군대는 무려 15만에 이르렀다. 총사령관은 맥셀 왕자였고, 부사령관은 테란델 후작과 아스텔 후작이었다. 제1왕자파를 대표하는 테란델 후작은 상급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아스텔 후작 또한 중급에 이른 소드 마스터였다. 게다가 300명의 소드 익스퍼트 기사들이 루비어스 백작령을 공격하는 데 힘을 보태고 있었다. 그에 반해 루비어스 백작령의 힘은 처참할 정도였다. 전 병력을 동원해야 간신히 1만 5천에 이르며, 기사는 불과 10여 명에 이른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소드 마스터를 막을 검사가 없다. 무려 병력이 10배 차이이고, 소드 마스터에서도 차이가 나는 것이다. 더군다나 맥셀 왕자는 7클래스 마법사. 금탑주가 날고 긴다 하여도 7클래스 마법사와 2명의 소드 마스터면 버티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에 테란델 후작이 골든 나이트의 존재에 염려를 표했지만 맥셀 왕자는 그것에 대한 대책이 있다는 말로 걱정을 축약시켰다. 그러나 실제 방안이 있을 리 없었다. 맥셀 왕자가 믿는 것,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실력이었으니 말이다. 8클래스 마스터에 이른 자신의 힘이라면 그랜드 마스터급 골렘과 7클래스 마법사를 상대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지크릴도 했다지 않은가? 나라고 못할 이유가 없지. 후후!‘ 흑탑주 지크릴이 8클래스 마법사였지만 그것에서도 엄연히 실력 차가 존재한다. 지크릴은 8클래스 마법사였지만 익스퍼트에 불과했다. 그러나 맥셀 왕자, 카로스만은 8클래스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렀다. 익스퍼트와 마스터! 그 실력의 차이는 대단했다. 제아무리 지크릴이 흑마법을 익혀 한층 강한 공격을 펼칠 수 있다고 하나 카로스만을 비롯한 다른 탑주들은 자신들이 지크릴보다 약하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자신보다 약한 지크릴이 엘과 골든 나이트를 동시에 상대하면서 밀리지 않았는데 자신이 밀릴 리 없었다. 때문에 카로스만은 엘이 나타나면 언제라도 제거할 자신이 있었다. '제아무리 강해 봤자 결국 7클래스 마법사이고, 깡통 나이트 골렘이니 말이지' 그렇게 생각하며 진군을 하니 반란군은 마침내 루비어스 백작령에 접어들었다. 루비어스 백작령은 그 전력 자체가 형편없지만 그 방어력만큼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금탑이 들어서기 전까지 루비어스 백작령은 몬스터들과 매년 싸워 왔다. 때문에 성벽을 좀 더 견고하게 쌓을 필요를 느꼈고, 어떻게 하면 몬스터들이 함락시키기 어려울까를 고민하고 또 고민하여 성벽을 쌓았다. 그렇게 긴 역사를 거친 루비어스 백작령의 성벽 내구도는 톨리안 왕국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마침내 반란군은 루비어스 백작령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곳에 반란군은 곧장 진영을 짜기 시작했다. 루비어스 백작령의 방어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 더군다나 지금 공격하려는 성은 루비어스 백작령 최후의 보루라 불리는 벨리튼 성이었다. 단번에 넘을 수 있을 만한 관문이 아니었다. "까다롭겠군," 육안으로도 확인하기 힘들 정도로 먼 거리였지만 8클래스에 이른 맥셀 왕자는 성벽이 뚜렷하게 보였다. 옆에 있던 테란델 후작이 맞장구쳤다. "그렇습니다. 오크 포레스트와 인접했던 저희 영지와 달리 루비어스 백작령은 오크의 침공과 트롤들의 침공을 걱정해야 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성벽을 다른 곳들보다 훨씬 높게 쌓았고, 언제 고립될지 모르는 것을 염려하여 풍부한 식량을 비축해 놓았습니다. 벨리튼 성은 그런 루비어스 백작령의 성들 중 최고로 견고한 성입니다. 십만의 병사로 백만의 군대를 막을 수 있다고 알려질 정도니 말입니다." "확실히 그래." 맥셀 왕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8클래스에 이른 그에게도 골치 아플 만큼 벨리튼 성의 방어력은 대단해 보였다. 처음에는 ‘마법으로 다 부숴 버릴까?' 라고 생각했다가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벨리튼 성에는 놀랍게도 대마법진이 새겨져 있던 것이다. 물론 그리 고위급은 아니었기에 7클래스 마법을 연달아 시전하면 뚫릴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자신이 왕자로 변장하고 반란을 일으킨 이유가 없어진다. 단순히 그렇게 하려면 본래 모습으로 와서 맥셀 왕자를 도와 죄다 태워 버리면 되기 때문이다. 영웅은 위기의 순간에서 탄생하는 법. 카로스만은 맥셀 왕자의 탈을 쓰고 톨리안 왕국의 영웅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이 반란이 성공하여 혁명으로 탈바꿈하고, 백성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왕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왕의 자리를 차지하면 곧장 전쟁의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자 주변 왕국을 침공할 것이다. 그렇게 하나 둘 다른 왕국을 병탄하고, 마침내 몇 배에 달하는 영토를 얻게 되면 제국이라 칭할 것이다. 그 후 황제 자리에 올라 미친 척하고 폭정을 일삼을 것 이며, 백성들을 피폐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루이아스가 건국한 마도제국에 흡수된다. 그렇게 되면 수많은 왕국이 단 한 번의 전쟁으로 마도제국에 편입하게 되는 것이다. 연이은 전쟁에 피폐해진 백성들은 맥셀 국왕을 욕할 것이다. 그에 반해 자신들에게 선정을 베푼 루이아스에게는 호의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런 감정을 갖게 되면 모든 공작은 성공적으로 끝나는 것이다. 영토도 영토일뿐더러 민심마저도 루이아스에게 모조리 기울게 된다. 카로스만은 그것을 노리고 있다. 때문에 이번 전쟁은 매우 중요했다. 맥셀 왕자라는 녀석의 껍데기를 이용하여 영웅의 자리에 오르려면 그런 상황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아쉽게도 루비어스 백작령을 칠 때에는 그런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다. 15만의 군사로 고작 1만의 군대를 거느린 백작가를 공격하는데 자신이 나선다면 도리어 숫자로 찍어 눌렀다는 평가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전쟁은 자신을 따르는 귀족들의 능력을 한 번 지켜볼 생각이었다. 자신이 나설 때는 바로 왕국군과 전쟁을 벌이는 때, 그 때 톨리안 왕국에서는 새로운 영웅 한 명이 떠오르게 될 것이다. 변수라면 금탑주인데, 금탑주가 나타난다면 맥셀 왕자는 그를 죽일 것이다. 금탑주는 자신들에게 방해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이제 시작일 뿐, 아직 이루어진 건 없다." 맥셀 왕자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모든 것은 그의 계획이라는 범위 안에 척척 진행되고 있었다. 벨리튼 성. 그곳 성벽 위에는 로웰린이 서 있었다. 15만 군대가 공격해 온다는 이야기에 1만 군대를 모두 끌고 온 그녀. 그녀는 15만이라는 엄청난 숫자에 초조했는지 옆의 기사에게 물었다. "왕국에 연락이 왔나요?" "예! 지금 본 성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곳까지 오려면 최소한 하루는 걸립니다." “하루, 하루요." 로웰린은 하루란 것이 이렇게 길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상대가 몬스터였다면 그녀가 이렇게 초조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인간이었다. 그것도 같은 나라의 군대였 다. 만약 상대가 순수 병사들로 성을 차지하려 든다면 하루쯤은 간단하게 막아 낼 수 있다. 그러나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기사였다. 성에는 대마법진이 새겨져 있어 마법을 견뎌 낼 수 있다. 마법을 견뎌 낼 수 있다면 마법사들은 그리 겁낼 필요가 없다. 하지만 문제는 기사. 기사들이 성벽을 넘어 성문을 열려고 한다면 루비어스 백작군은 상당한 난처함을 겪을 것이다. 왜냐하면 적들의 기사 전력은 루비어스 백작군의 수십 배에 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드 마스터의 부재는 심각한 것이어서, 소드 마스터가 앞장서서 돌격해 오면 그를 견제할 수 있는 이가 없다. "하지만 하루야. 하루만 버티면 지원군이 와. 그때까지는 버텨야 해." 그녀의 눈에 굳은 결의가 떠올랐다. 제아무리 루비어스 백작가가 부흥의 길을 걷고 있다고 하지만 그 힘은 아직 여느 백작가보다 딱히 뛰어나지 않았다. 도리어 제2왕자파의 음모로 기사들을 잃고, 병사들을 잃었기에 그 전력은 현저히 감소해 있는 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루비어스 백작가의 힘이 강해졌다고 말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하나다. 금탑과의 친밀한 관계 때문이다. 지금 벨리튼 성을 노리는 적들의 세력이 무시무시한 것을 자신이 모를 리 없다. 기사 전력은 수십 배 차이였고 군사력도 15배 차이였다. 금탑에 도움을 청해야 하지만 공교롭게도 금탑에서는 당분간 도와줄 수 없다는 말을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엘이 8클래스의 경지에 올라 당분간 수련에 전념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무심하게 방치한 것은 아니다. 엘이 곧장 조치를 취하여 왕궁과 루비어스 백작가로 직통할 수 있는 텔레포트 게이트를 설치해 준 것이다. 엘이 말한 것은 하나다. 최대한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 달라. 그가 당부한 것은 그거다. 지금 엘에게 있어서 수련할 시간은 반드시 필요했다. 8클래스의 경지에 올랐지만 정작 익힌 마법은 하나도 없을뿐더러 월등히 향상된 힘에 적응이 덜 되었기 때문이다. 그 힘에 적응하고, 새로운 마법 체제를 확립해야 8클래스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 그랬기에 엘은 사촌 누나인 로웰린의 부탁에도 거절하고 당분간 버텨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 왕국의 도움이 있다면 로웰린이 충분 히 반란군을 막아 낼 수 있을 거란 계산이 깔려 있었다. "후우!" 로웰린은 눈에 마나를 집중하여 적들의 모습을 살폈다. 그녀가 살핀 제1왕자파의 모습은 들려오는 이야기와 사뭇 달랐다. 소문에 듣길, 제1왕자파는 자신들이 반란군임을 깨닫고 그 사기가 무척 저하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눈에 보이길, 제1왕자파의 사기는 무척 높아 보였다. 아니, 마치 사기가 최고조로 올라간 상태처럼 보였다. "소문이 틀린 건가?" 지니고 있던 정보와 전혀 다른 모습이니 그녀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을 만하다. "적들의 사기가 높으면 불리한데......“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군사와 기사였다. "기사들도 충분히 성벽을 의지하여 버텨 낼 수는 있어. 희생은 있겠지만, 하지만 소드 마스터는 견제할 수 없어......“ 적의 진영을 살피던 그녀의 표정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진영을 짜고 식사를 한 반란군의 군대 진영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다. 적들이 공격하려는 것이다. "굳이 이곳에서 시간을 지체할 필요는 없지." 맥셀 왕자는 병사들에게 식사를 하게끔 하고 곧장 공격 준비를 하게 했다. 지금 루비어스 백작가는 반란군에게 있어 별로 위협이 되지 못하는 존재였다. 저 높은 성벽과 곳곳에 설치된 엄폐물들은 분명 일반 병사들에게 위협이 되었지만 소드 마스터란 존재에게는 무용지물이었기 때문이다. 기사들까지는 어떻게 막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기사들이 마나를 사용하지만 성벽에 의지하고,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 병사들이 힘을 합한다면 기사들을 충분히 견제할 수 있다. 하지만 소드 마스터는 다르다. 그들은 기사처럼 마나를 사용하지만 하나의 거대한 벽을 넘은 존재. 그들에게 있어 성벽은 큰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 당장 지면을 박차고 도약하면 성벽의 중간까지 뛰어오를 수 있고, 성벽 위에 떨어져도 큰 부상을 입지 않는데, 어찌 성벽 오르는 것을 두려워하겠는가. 때문에 맥셀 왕자는 소드 마스터를 앞세워 곧장 벨리튼 성을 넘어 빠르게 루비어스 백작령을 접수할 생각이었다. "이번 전쟁에서 성벽을 넘는 일은 테란델 후작이 하라." "예, 전하." 테란델 후작이 고개를 숙였다. 상급 소드 마스터인 테란델 후작이라면 벨리튼 성을 넘는 대장으로서 손색이 없다. 그는 몬스터들의 침공을 겪으면서 풍부한 실전을 거쳤고, 대규모 싸움을 자주 한 탓에 반란군 첫 전쟁의 통솔자로 적합했다. "모두 적들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 주자." 테란델 후작은 선봉군으로 선발된 기사 50명과 5만의 병사들을 이끌었다. 이 정도로 벨리튼 성을 넘는 데 충분할 것이다. "소드 마스터의 유무가 얼마나 중요한지 적에게 알려 주는 첫 싸움이 되겠군." 맥셀 왕자의 입에 미소가 맺혔다. "오는군요." 로웰린은 적들의 선봉군이 앞으로 나오자 긴장한 얼굴로 살폈다. 서서히 벨리튼 성으로 다가오는 병사들의 숫자는 어림잡아 5~6만 정도로 보였다. 일반 병사만으로 성을 차지하려면 그 숫자는 현재 벨리튼 성에 있는 1만 군대로도 충분히 막을 수 있다. 그러나 선봉군을 이끄는 존재를 보게 되자 로웰린의 안색이 사색으로 변했다. "테란델 후작......“ 왕국제일기사인 라이어스 공작의 뒤를 이어 트겐발리 공작과 함께 왕국의 두 번째 실력자로 알려진 기사. 그 경지가 상급 소드 마스터에 이르렀다고 하며, 풍부한 몬스터들을 상대한 경험은 테란델 후작의 최대 강점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선봉장이라니......“ 그녀는 맥셀 왕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보통 선봉장은 공적을 차지하기 위한 남작이나 자작이 차지한다. 때로는 백작도 차지하는데, 보통 후작이 선봉장이 되는 경우는 없다. 왜냐하면 선봉장은 무척 전사율이 높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선봉장으로 임명된 이들의 실력이 그렇게 높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테란델 후작같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검사가 선봉장이라면 죽이려 해도 죽일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한다. 당장 그를 맞상대할 기사가 있다면 모를까, 루비어스 백작령에는 그를 상대할 검사가 없기 때문이다. 5만에 이르는 군대들이 벨리트 성 앞을 가득 메우며 접근해 왔다. 그리고 일정 거리에서 멈춰 서고, 테란델 후작이 앞으로 나왔다. 그는 성벽 위에 있는 로웰린을 정확히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왕국의 후작 테란델 후작이다." 웅성웅성. 테란델 후작의 소개에 병사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작게 수군거렸다. 병사들도 잘 안다. 테란델 후작이라면 왕국을 대표하는 소드 마스터 중 한 사람인 것이다. 로웰린이 나섰다. 그녀는 테란델 후작이 앞으로 나설 줄 몰랐기에 다소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테란델 후작을 꾸짖듯 말했다. “반란을 일으킨 주범 중 하나가 당당하게 후작이라 주장하는 게 조금 우습군요. 저는 톨리안 왕국의 루비어스 백작이라고 합니다. 무슨 일이시죠?" 왕궁에서 몇 번이나 얼굴을 본 사이지만 로웰린은 테란델 후작을 모르는 척했다. 그는 어차피 반란군. 굳이 아는 척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로웰린의 일침에 테란델 후작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한 방 먹었군. 과연 왕국을 대표하는 여장부 중 하나로세! 하지만 반란군이라는 말은 좀 거슬리는군. 왜냐하면 나는 반란군 소속이 아니라 이 나라의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일어선 혁명군 소속이기 때문이네." "흔히 성공하면 혁명군, 패배하면 반란군이 되는 법이죠. 저는 이번 당신들의 반란이 성공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네요." 로웰린은 테란델 후작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러자 테란델 후작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네. 우리의 혁명은 반드시 성공할 수밖에 없네. 왜냐하면 우리의 전력은 왕국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방대하기 때문이네." 테란델 후작의 말에는 거짓이 없어 보였다. 그 진심을 느껴서일까? 병사들의 표정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본래 드러난 것보다 숨겨져 있는 것이 두 무서운 법이다. 만약 드러난 것보다 반란군의 힘이 훨씬 강하다면? 상상만 해도 오싹했다. 하지만 로웰린은 그 말에 현혹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믿을 만한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왕국 측에는 금탑이 있어요. 성국과 블리어드 제국의 합공도 막아 낸 금탑! 과연 금탑이 합류하면 당신들이 무사할 수 있을까요?” 그녀의 말은 병사들의 불안한 표정을 말끔하게 걷히게 하기에 충분했다. 금탑! 이미 금탑은 전설이 되어 있었다. 대륙을 대표하는 두 국가의 합공도 막아 낸 금탑이 자신들의 편인데 무엇이 두려우랴? 병사들의 얼굴에 두려움이 걷힘은 물론 한층 사기가 충천된 표정을 하였다. “하, 하하! 이거 정말 한 마디도 지지 않는군." 테란델 후작은 자신의 말에 노련하게 대처하는 로웰린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된 이상 대화는 어렵다. 그렇다면 행동으로 보여 주는 수밖에. "금탑을 믿는 건 대충 이해가 가네. 하지만 곧 그걸 후 회하게 될 것이네." "누가 후회할지는 뚜껑을 열어 보면 알겠지요." 로웰린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겠지."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병사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반란군에게 크게 외치기 시작했다. "왕국의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혁명군이여! 불행하게도 저들은 이 왕국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적에게 현혹되어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역사를 바로잡을 위대 한 혁명군! 저들이 스스로 잘못된 길을 걷고 있음을 인지시켜 줄 의무가 있다. 모두 공격하라! 저들의 피로써 누가 옳은지 증명하라!" "전군 공격!" 50명에 이르는 기사들이 모두 검을 뽑아 들며 외쳤다. "와아아아아!" 공격 명령에 반란군이 함성을 지르며 돌격하기 시작했다. 그 선두에는 테란델 루작이 존재했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다. 맥셀 왕자가 자신을 선봉으로 내세운 것.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자신이 제일 먼저 성벽을 넘고 적들을 휩쓸어 성문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차피 적에게는 소드 마스터가 없다. 그렇다는 건 자신을 해할 존재는 아무도 없다는 뜻. 테란델 후작이 빠르게 성벽을 향해 접근해 왔다. “막아! 모두 목숨을 걸고 이곳을 지켜라! 이곳을 지키지 못하면 다른 곳도 지키지 못한다! 궁수는 모두 선두에 달려오는 저자를 쏴라!" 로웰린은 테란델 후작이 선두에 달려오는 걸 보고는 소리쳤다. 그가 성벽을 넘어오면 자신들은 대항할 수단을 잃는다. 그를 어떻게든 견제하려면 성벽에 근접하지 못한 지금밖에 방법이 없다. 피 비비비빙! 로웰린의 명령에 수백 발의 화살이 테란델 후작을 노리고 쏘아졌다.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을 보며 테란델 후작은 손에 든 검을 휘둘렀다. 쓰쓰쓰! 그러자 솟아오르는 오러 블레이드! 테란델 후작은 그것을 휘둘러 자신에게 향하는 화살들 을 쳐냈다. 팅! 티디딩! 매끄럽게 검을 놀리며 화살들을 쳐 내는 테란델 후작의 모습은 가히 전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수백 발의 화살이 집중되고 있지만 모두 그의 몸을 채 스치지 못한 채 오러 블레이드에 베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점점 성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초조해진 로웰린이 외쳤다. “막아! 어떻게든 접근을 막아야 한다! 궁수들은 계속해서 활을 쏘고 기사들은 오러를 사용하여 투창을 한다." 로웰린의 명령에 병사들은 물론 기사들도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계속해서 테란델 후작에게 화살을 쏘았다. 그리고 그 틈을 타 기사들은 랜스보다 3배 정도 작은 투창 용 재블린을 쥐고 오러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재블린에 충만한 마나가 서리기 시작했다. 로웰린 본인 또한 재블린을 쥐고서 오러를 주입하고는 외쳤다. "투창!" 후웅! 10개가 넘는 재블린이 테란델 후작에게 투척되었다. 투척된 재블린은 10발에 2~3발 정도 테란델 후작에게 가는 수준과는 달랐다. 모두가 정규 기사였고, 실력도 녹록지 않았기에 재블린은 정확히 테란델 후작을 노리고 있었다. 오러를 머금어 강한 힘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쏘아진 힘과 회전력이 더해져 무시무시한 위력을 지닌 채 테란델 후작에게 향하고 있었다. 단순히 관통력만 따지면 오러 블레이드를 능가할지도 모른다. "허!" 테란델 후작도 날아오는 재블린을 보며 두 눈을 크게 떴다. 화살은 무리 없이 쳐 낼 수 있지만 저것은 다르다. 정확하게 자신을 노리고 날아오는 재블린. 오러를 머금고 가속력과 회전력을 머금었기에 정면으로 막는다면 위험해질 것이 분명했다. 테란델 후작은 재빨리 상황 판단을 했다. 그의 몸이 살짝 기울어졌고, 동시에 오러 블레이드를 휘둘러 재블린의 측면을 정확하게 튕겨 내기 시작했다. 땅! 따당! 테란델 후작의 검은 정확했다.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는 재블린들을 순간 옆으로 쳐 내 충격을 최소화하고 재블린을 피해 내고 있던 것이다 "이럴 수가." 로웰린은 테란델 후작이 재블린마저 손쉽게 피해 내는 것을 보고는 입을 떡 벌렸다. 비단 그만이 문제인 게 아니라 그의 뒤를 기사들이, 그리고 그 뒤를 5만의 병사들이 파죽지세로 몰려오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테란델 후작에 의해 성벽이 정리되고, 성문이 열려 성이 함락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렇게는 안 돼!" 로웰린은 어느새 성벽을 타고 올라오는 테란델 후작을 보며 검에 오러를 뿜어냈다. 그녀의 검에 흐릿하게 맺히는 오러 블레이드! 최상급 경지에 올라 어느 정도 오러 블레이드를 시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녀는 테란델 후작이 성벽을 넘자 곧장 검을 휘둘렀다. 갑작스러운 기습이었다. "훗!" 하지만 그 기습도 그의 예상 범주에 있었던 것일까? 테란델 후작은 너무나 여유로운 표정으로 검을 들어 로웰린의 검과 부딪쳐 나갔다. 그의 검에는 선명한 오러 블레이드가 맺혀 있었다. 로웰린의 검과 테란델 후작의 검이 부딪쳤다. 쩌엉! 파사사! 로웰린의 검에 서린 오러 블레이드가 맥없이 부서져 나갔다. 경지의 차이가 확실했고, 지닌 오러의 양 또한 차이가 확실했던 것이다. "아악!" 로웰린은 부서지는 오러 블레이드로 인해 손아귀가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며 뒤로 물러났다. "그래도 아직 소드 익스퍼트이면서 내 검을 버텨 내는 건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그녀는 속절없이 밀렸지만 테란델 후작은 약간 감탄을 한 듯하다. 왜냐하면 그녀의 나이에 오러 블레이드를 흉내 낼 수 있다는 건 그녀가 보통 재능을 지닌 여인이 아니란 걸 뜻했기 때문이다. '순순히 내 며느리가 되었다면 더할 나위 없이 멋진 가족이 되었을 테지만 지금은 적일 뿐.' 로웰린은 결코 자신의 편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낀 테란델 후작이다. 미래의 될 성싶은 싹은 일찌감치 잘라 버리는 것이 옳다. 테란델 후작의 검에 서린 오러 블레이드가 이글거리며 선명한 푸른빛을 뿜어냈다. 그리로 그것은 곧장 로웰린의 머리를 양단해 나갔다. '끝이다!' 그의 눈에 승리감이 감돌았다. 로웰린을 벤다면 루비어스 백작령은 그대로 무너진다! 첫 전쟁을 승리로 장식하고 맥셀 왕자를 왕으로 추대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하늘은 순순히 그가 로웰린을 죽이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갑자기 뻗은 검이 로웰린을 향해 휘둘러지는 테란델 후 작의 검을 튕겨 낸 것이다. 꽈앙! 검이 충돌하면서 무시무시한 폭음을 냈다. "큭!" "윽!" 두 신음이 들려왔다. "어떻게......“ 테란델 후작은 갑자기 자신의 검을 막아 내는 이가 나타나자 경악한 눈을 하였다. 왜냐하면 자신의 검을 막아 내는 찰나의 순간에 상대방의 검에 오러 블레이드가 솟아났던 것이다. 워낙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테란델 후작은 똑똑히 보았다. 그의 눈이 검이 비집고 들어온 방향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뜨였다. "어, 어떻게!" 테란델 후작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는지 눈을 깜빡 이며 상대를 살폈다. 그러나 몇 번을 반복해도 변함이 없었다. 지금 자신의 검을 받아 낸 검사! 그 정체는 바로 젊디젊은 여인이었던 것이다. 정열을 상징하는 붉은 머리와 침착하게 가라앉은 눈 그리고 검에 솟아난 오러 블레이드! 그녀는 다름 아닌 엘의 여인인 카이나! 그녀였던 것이다. 그녀가 차분한 기색으로 테란델 후작에게 검을 겨누고 있었다. "괜찮아요, 언니?“ 카이나는 테란델 후작을 경계하면서 로웰린에게 말을 건네는 것을 잊지 않았다. “으, 음! 난 괜찮아. 구해 줘서 고마워. 그런데 넌...... 아니?!” 로웰린은 자신을 구해 준 이가 카이나임을 깨닫고 감사의 인사를 건네다가 그녀의 검에 서린 오러 블레이드를 보고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녀 또한 테란델 후작과 마찬가지로 경악에 빠진 것이다. "너, 너 어떻게......“ 너무나 놀란 나머지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는 로웰 린. 그럴 수밖에 없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그녀와 자신은 검을 나누던 사이가 아니었던가! 게다가 실력 면에서 자신이 우위에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오러 블레이드를 시전하고 있다니? 순간 로웰린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지 착각을 할 정도였다. 놀라움과 여러 가지 감각으로 뒤범벅된 로웰린의 시선에 카이나가 약간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러 가지 일이 있었어요. 그리고 그중에 운이 좋아 소드 마스터에 오를 수 있었어요. 아,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카이나는 정면을 응시했다. 벌써 반란군과 루비어스 백작군과의 전투가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성벽 위로 올라오는 기사들을 견제하느라 전투 의 양상은 유리할 듯하면서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일단 저자를 제거해야 해요. 그러니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할게요." 카이나는 침착한 표정으로 테란델 후작에게 검을 겨누었다. 그러자 테란델 후작도 긴장하며 검을 겨누었다. 지금 그의 심정은 경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눈앞에 있는 여인의 모습을 보라! 기껏해야 20대 초반, 많이 쳐주어야 20대 중반 정도가 아닌가? 그런데 소드 마스터라니! 대륙 어디에서도 이 나이에 소드 마스터에 오른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분야는 다르지만 금탑주 또한 20대의 나이에 소드 마스터와 동급인 7클래스의 경지에 올랐으니까. "가만." 금탑주를 떠올리는 순간 테란델 후작의 뇌리에 번개같이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20대 소드 마스터. 그런 존재가 하늘에서 뚝 떨어질 리 없다. 더군다나 지금 전쟁은 톨리안 왕국의 내전. 다른 왕국 소속이라면 개입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 전쟁에 개입할 만한 곳 하나를 테란델 후작은 잘 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었다. "금탑?“ 대답은 로웰린이 해 주었다. "그녀는 금탑의 소속입니다. 이 전쟁에 금탑도 끼어들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것이죠." 로웰린이 웃음을 지었다. 지금 그녀의 말은 단순한 위협이었다. 엘이 카이나를 이곳에 보낸 이유는 자신이 당분간 수련을 해야 하니 그 빈틈을 메우기 위해 카이나를 보낸 것이다. 소드 마스터에 이른 카이나는 당장 위기에 처한 루비어스 백작가에 합류해도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더군다나 루비어스 백작령을 침공한 반란군 중 소드 마스터가 있다는 걸 알았기에 그녀를 보낸 것이다. 카이나 또한소드 마스터에 갓 올라 아직 미흡한 면이 없지 않아 있는데도 말이다. "과연, 소드 마스터이긴 하군," 테란델 후작은 카이나의 검에 솟아난 오러 블레이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차분한 오러 블레이드를 시전할 정도니 이 여인은 두말이 필요 없는 소드 마스터가 분명했다. 하지만...... "분명 소드 마스터이긴 하지만 그 실력이 모두 비슷한 것은 아니지. 소드 마스터에도 상당한 실력 차이가 존재 한다. 내가 오늘 그것을 알려 주겠다." 분명 20대 초반의 나이에 소드 마스터에 오른 것은 대단하지만 경험, 실력 모든 면에서 자신이 이 여인보다 우월하다. 결코 뒤질 이유가 없는 것이다. 수십 년의 경험은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테란델 후작은 몬스터 침공에 맞서면서 끊임없이 오러를 연마하였고, 덕분에 그의 오러 위력은 라이어스 공작과 맞서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그에 반해 갓 소드 마스터에 오른 카이나는 그렇지 못 할 터. 초급 소드 마스터와 상급 소드 마스터의 오러 블레이드 위력은 확연히 차이가 난다. 그것은 카이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랬기에 카이나는 신중한 표정으로 테란델 후작을 경계했다. 두 소드 마스터의 숨 막히는 대립이 첨예하게 이루어졌다. '음! 나이는 어리지만 대단하군.' 테란델 후작은 경계의 자세를 취하는 카이나를 보며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모든 면에서 자신이 우월한데다가 선공으로 기선을 제압하면 승부는 자신의 승리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카이나가 검을 겨누고 있는 방향과 살짝 옆으로 몸을 틀고 있는 그녀의 몸은 테란델 후작의 검이 비집고 들어갈 틈을 한없이 작게 만들고 있었다. 자신이 공격을 가하면 곧장 역공을 가할 수 있는 자세. 첫 공격을 하면 도리어 자신이 선공을 빼앗기는 모습이 연출될 수 있었기에 테란델 후작은 함부로 공격을 가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상급 소드 마스터. 과연 강해.' 속으로 치열하게 고민하는 테란델 후작과 다르게 카이 나는 상대가 뿜어내는 기세에 자신이 압도되는 걸 느끼며 식은땀을 한 방울 흘렸다. 과연 상급 소드 마스터의 실력은 명불허전이었다. 실력 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그녀가 선공을 가해 기선을 잡고 몰아붙여야 하는데 상대방의 틈을 도저히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내게 남은 무기는 있지만 일단 내 실력으로 상급 소드 마스터와 맞붙어 보고 싶어.' 카이나에게는 본신의 실력을 더욱 강하게 해 줄 여러 가지 실용적인 것들이 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다. 소드 마스터에 오른 자신이 어느 정도 실력을 지니고 있는지 테란델 후작을 통해 확인하려고 한 것이다. 두 소드 마스터가 대립할 때 전투는 점점 루비어스 백작군에게 승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기사들을 처치하고 성문을 열어야 할 테란델 후작이 제 역할을 못하니 벨리튼 성의 험준한 성벽을 의지하고 싸우는 루비어스 백작군에게 상황이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던 것이다. 이대로만 계속 전세가 유지된다면 루비어스 백작군의 승리가 확실시될 터. 하지만 로웰린은 아직 그것을 확신할 수 없었다. '카이나가 테란델 후작을 막아 내지 못하면 어려워진다.' 카이나가 소드 마스터에 올랐지만 과연 어느 정도 실력 일지 몰랐기에 로웰린은 불안했다. 만약 카이나의 실력이 부족하다면 테란델 후작에게 별 다른 위협이 되지 못한 채 패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다시 전세는 역전될 것이고, 그 결과는 베이튼 성의 함락이다. 그것을 막아야 하기에 로웰린은 속으로 간절히 기원했다. '제발 테란델 후작을 막아 줘, 카이나! 지금 넌 우리의 희망이야!' 테란델 후작이 힐끗 시선을 돌려 전투가 벌어지는 곳을 바라보았다. 상황이 안 좋았다. 그의 가슴속에 불안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시간을 끌면 불리해지는 건 나다.' 성벽에 의지하여 전투를 벌이는 루비어스 백작군이 압도적으로 유리해 보였다. 만약 이대로 자신이 성문을 열지 못한다면 군사들의 사기는 꺾일 것이고, 결과는 섬 함락의 실패로 이어질 것이다. '어쩔 수 없군. 어떤 함정이 오든 간에 상관하지 않겠다. 일단 이 전투에서 이겨야 하니까.' 마침내 마음을 굳힌 테란델 후작의 검이 움직였다. 그의 검이 대기를 가르며 카이나를 베어 왔다. 놀랍도록 빠른 속도였다. “맞선다!” 카이나는 테란델 후작의 검을 정확하게 보며 그의 검과 부딪쳐 나갔다. 차앙! 오러 블레이드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두 오러가 폭발 할 듯 어그러졌다. 하지만 역시 시간의 힘은 극복하기 힘든지 카이나의 오러 블레이드가 테란델 후작에 비해 밀리고 있었다. 그때, 돌연 카이나의 검이 마치 미끄러운 것에 밀려가 듯 테란델 후작의 검을 타고 찔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찰나의 순간에 벌어진 일이다. “헉!" 갑작스러운 공격에 화들짝 놀란 테란델 후작이 검을 치켜 올렸다. 그러자 테란델 후작의 목을 찔러 가던 검의 궤도가 바뀌며 튕겨 나갔다. 그런데 반해 테란델 후작은 검을 튕긴 반동을 이용하여 카이나를 베어 갔다. 쐐액! 충만한 오러를 머금은 검의 예기는 닿지 않았음에도 살갗을 벨만큼 예리했다. "이런!" 카이나는 테란델 후작의 공격에 살짝 당황했다. 여태껏 그녀가 겪은 실전 중 이런 공격을 펼친 검사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지만 완벽하게 피하지 못한 나머지 경장 갑옷 옆구리 부분이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슈악! 하지만 이 세상 모든 것을 베어 버리는 오러 블레이드였기에 그녀의 갑옷은 종잇장처럼 찢겨져 나갔다. "음!" 회심의 일격을 피하자 테란델 후작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스쳤다. 생각보다 카이나가 강했던 것이다. "하지만 기회는 또 오는 법이지." 한 번의 기회를 놓쳤다고 안타까워할 이유가 없다. 기회는 앞으로도 계속 올 테니 말이다. 카이나는 오러 블레이드가 스친 자신의 옆구리를 바라보았다. 살짝 스쳤지만 갑옷이 종잇장처럼 찢겨져 버렸다. 만약 자신의 반응이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내 실력은 여기까지구나.' 상급 소드 마스터와의 격차는 컸다. 게다가 아직 자신은 소드 마스터의 힘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했다. 실전도 부족하며, 오러의 위력도 부족하다. 결국 승산이 없었던 것이다. ‘하는 수 없지.' 카이나는 가슴 부분에 단 브로치에 마나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전어를 외쳤다. "마테리얼라이즈(Materialize)!" 파아앗! 카이나의 외침과 함께 그녀의 가슴 부분에 달린 브로치가 푸른 광채를 뿜어냈다. 그와 동시에 그녀를 휘감는 전신 갑옷! 푸른 광채가 사라졌을 때 나타난 그녀의 모습은 얼굴부터 발끝까지 빈틈없이 무장된 전신 갑옷 차림이었다. "이건......“ 테란델 후작은 카이나를 감싼 갑옷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매직 아머?“ 들어 본 적이 있다. 그 방어력은 오러조차 견뎌 낼 수 있다는 마법의 갑옷을...... 금탑 출신 소드 마스터는 매직 아머를 가지고 있던 것이다. "이런 것을 숨기고 있었나." 매직 아머를 착용했다면 자신의 오러 블레이드의 위력도 상당히 감소시킬 것이다. 가뜩이나 상대하기 까다로운 적이 골치 아픈 방어력을 손에 넣은 것이다. “하지만 못 이길 것도 없다." 방어력이 강하다고 하나 오러 블레이드의 위력은 자신이 위다. 매직 아머가 견고하다고 한다지만 오러 블레이드에 의해 결국 부서질 것이다. 하지만 카이나가 숨겨 두고 있는 것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녀는 검을 치켜들며 외쳤다. "디유 레임!" 우웅! 외침과 함께 빛에 휩싸인 그녀의 검! 오러 블레이드에도 견딜 수 있는 디유 레임을 시전한 것이다. "저건 뭐지?“ 테란델 후작은 카이나의 검에 일어난 빛이 무엇인지 몰랐다. 물론 자신에게 상관없는 일이다.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은 카이나를 베는 것이기에. 그의 검에 오러 블레이드가 뿜어지며 카이나에게 달려 들었다. 카이나는 디유 레임에 오러 블레이드를 시전하여 테란델 후작의 검에 맞서 나갔다. 차앙! 창! 창! 오러 블레이드가 부딪칠 때마다 부서진 오러의 파편들이 찬란한 빛을 발했다. 두 소드 마스터는 검을 부딪치며 검격을 교환하더니, 순식간에 30여 합을 겨루기 시작했다. 테란델 후작은 카이나와 검을 나누며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강하다! 분명 나보다 부족한 실력이었는데 이렇게 강해지다니. 게다가 오러의 위력도 나보다 약했다. 그런데 대등하다니.' 아까 처음 충돌했을 때 카이나의 오러는 테란델 후작보다 역력히 약했다. 그런데 지금은 밀리기는커녕 팽팽한 대결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설마 아까 전 검에 일어난 빛 때문인가?' 테란델 후작의 생각은 계속 이어졌다. 그사이 카이나와 그는 검을 나누었고, 둘의 대결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나보다 강해. 그리고 이대로 가다가 내가 당하겠어,' 그리고 검을 나누면 나눌수록 카이나는 자신이 밀릴 거라는 걸 깨달았다. 오러의 양은 카이나가 테란델 후작보다 월등히 많이 보유하고 있다. 장기전으로 간다면 분명 카이나가 유리해질 것임이 분명했으나 테란델 후작도 수십 년 전에 소드 마스터에 올라 축적한 오러의 양이 만만치 않았다. 더군다나 검을 나누면서 검을 응용하는 면에서 자신이 부족함을 느꼈다. 이러다가는 지구전으로 가는 게 아니라 검초에 져서 패하게 될 것이다. '젠장!' 서서히 승기를 잡아 가고 있음에도 테란델 후작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전장의 상황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또한 이대로 싸움을 계속 벌이면 자신이 이길 것이 라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당장 제압할 수 없다는 면이 현실로 다가왔다. 그가 이 여인을 제압하려면 최소한 몇 시간은 걸릴 것이 분명했다. 승리는 확신했다. 하지만 그때가 되면 선봉군은 패할 것이 분명했다. 그는 선택해야 했다. 이 여인을 죽이느냐, 아니면 물러나느냐. 대답은 이미 정해진 것과 다름없다. 지금 자신이 후퇴 명령을 하지 않으면 기사들이 밀릴 것이 분명했고, 그렇게 되면 자신은 루비어스 백작가 기사들에게 합공을 받을 것이다. 결국 그는 다 잡은 고기를 놓아줘야만 하는 처지에 이른 것이다. "큭! 어쩔 수 없군." 입술을 질끈 깨문 그는 강한 힘을 담아 카이나를 밀어 냈다. 쾅! “읏!” 큰 폭음과 함께 카이나가 뒤로 밀려났다. 테란델 후작도 뒤로 물러났는데, 그는 그 반동을 이용하여 성벽에서 그대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쉴 새 없이 공격을 펼치는 병사들에게 외쳤다. "후퇴한다! 오늘은 이만 후퇴한다!" "후퇴하라! 후퇴하라!" 테랄델 후작의 외침에 기사들이 후퇴를 명령했다. 지휘관들의 명령에 병사들이 물살처럼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루비어스 백작군은 환호성을 질렀다. "와아아아아!" "우리가 이겼다!" “만세! 우리가 승리했다!" 그리 길지 않은 전투였지만 정말 힘들었다. 적들은 자신의 몇 배였고, 뒤에 10만에 이르는 대군이 버티고 있으니 병사들에게 심리적 압박이 상당했던 것이다. 반란군이 뒤로 물러나자 병사들은 긴장이 풀렸는지 자리에 틸썩 주저앉는 이가 다반사였다. 지휘관들은 그런 병사들을 타박하지 않았다. 자신들도 긴장감이 풀려 주저앉고 싶을 정돈데 직접 전투를 치른 병사들은 오죽하겠는가. "카이나!" 전투가 끝나자 로웰린은 곧장 카이나를 찾았다. 그녀는 무사한 카이나의 모습을 보며 안색에 화색이 돌았다. “다행이야! 어떻게 된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다고!" 로웰린의 말에 카이나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대로 계속 전투를 했다면 졌을 거예요. 걱정해 주신 덕분에 무사했어요." 카이나의 말에 로웰린이 기쁜 기색을 맘껏 드러내며 답했다. “고마워! 카이나가 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이 성은 적들에게 넘어갔을 거야. 정말 고마워! 그런데 다치지는 않았니?" 카이나의 상대는 톨리안 왕국에서 이름 높은 테란델 후작이다. 상급 소드 마스터로 이름 높은 그에게 카이나가 다치지 않았을까 걱정하는 것은 당연했다. 로웰린의 걱정에 카이나가 고개를 저었다. "몇 군데 자상이 있고 크게 다치지는 않았어요. 이런 것은 힐링으로 치료가 가능해요." 카이나는 어느새 디유 레임이 풀린 매직 소드를 들어 상처 입은 곳에 힐링을 시전하였다. 로웰린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카이나가 상처를 모두 치료하자 그녀를 이끌었다. “힘든 싸움을 벌였으니 좀 쉬어. 내가 안내할게." 카이나는 자신을 잡아끄는 로웰린의 심정을 이해했는지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제가 어떻게 소드 마스터에 올랐는지 궁금하겠지요." "너무 노골적이었나? 호호!" 잠시 멈칫하더니 웃음을 짓는 로웰린. 역시 카이나가 어떻게 소드 마스터에 올랐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가서 이야기해 드릴게요. 그럼, 안내해 주세요." 흔쾌히 이야기해 주겠다는 말에 로웰린의 안색이 밝아 졌다. "응! 나에게 맡겨!" 그 말과 함께 로웰린은 카이나를 쉴 곳으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루비어스 백작군과 반란군의 첫 전투는 백작군의 힘든 승리로 끝이 났다. 6. 맥셀 왕자로 위장한 카로스만의 강함! 첫 공방전에서 방어를 한 것이 컸다. 루비어스 백작군이 힘든 첫 방어전을 치른 뒤 하루가 지나자 톨리안 왕국의 정규군이 도착했다. 그 규모는 13만에 이르러서, 첫 전투로 피로가 쌓여 있던 루비어스 백작군은 한숨을 놓을 수 있었다. "이곳까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이어스 공작 전하." 간밤에 카이나와 이야기꽃을 피운 로웰린은 군대를 이끌고 온 사령관인 라이마스 공작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그에 라이어스 공작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네. 반란군을 토벌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근데 이 여인은 누구신가?" 라이어스 공작은 로웰린 옆에 서 있는 눈부신 미녀에게 시선을 주며 그녀의 정체를 물었다. 사실 방 안에 있던 귀족들은 모두 카이나에게 시선이가 있는 상태였다. 불타오를 듯한 정열적인 붉은 머리에 침착하고 냉정한 얼굴을 한 카이나의 모순적인 아름다움에 모두 시선을 빼 앗긴 것이다. 로웰린은 라이어스 공작의 물음에 답을 해 주었다. "제가 반가운 마음에 소개를 먼저 하는 걸 깜빡했네요. 이쪽은 어제 반란군의 공격에서 테란델 후작을 막아 준분이에요. 은인이나 다름없죠." “테란델 후작을!" 라이어스 공작을 비롯하여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톨리안 왕국 내에서 테란델 후작을 상대할 수 있는 기사는 라이어스 공작과 트겐발리 공작뿐이다. 그런데 20대 초반의 여인이 테란델 후작을 막아 내다니! "과연! 루비어스 백작의 말대로군. 20대 나이에 소드 마스터라니......“ 라이어스 공작은 잠시 카이나를 눈여겨보더니, 이내 감탄사를 터뜨렸다. 미세하게 감춰져 있지만 최상급 소드 마스터에 이른 그의 안목으로 카이나의 경지를 알아낸 것이다. 그러다가 순간 라이어스 공작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이런 젊은 여자 소드 마스터가 어디에서 나타난 것인가? 주변 귀족들도 모두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일부 귀족들은 카이나를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을 알아챈 로웰린이 카이나의 소개를 마저 하였다. "그리고 이분은 금탑의 소속이자, 금탑주이신 엘리미 스님의 여인이신 카이나 님입니다." 이런 공적인 자리에서 말을 놓을 수 없었기에 로웰린은 소개를 하면서 카이나를 높여 불렀다. 그도 그럴 것이 작금에 이르러 금탑은 그 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는 중이며, 금탑주의 명성은 결코 대륙 십대 그랜드 마스터나 8클래스 마법사에게 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는 8클래스 마법사인 게이런즈를 상대로 승리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사람들이 금탑을 경외시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상대로 로웰린의 말이 끝나자 모든 귀족들이 경외하는 눈으로 카이나를 바라보았다. 같은 왕국에 소속된 금탑이지만 그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어왔다. 덕분에 카이나를 의심스럽게 바라보던 귀족들 이 지금은 약간 경외하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흠!" 라이어스 공작은 로웰린의 말에 귀족들이 모두 감탄만 하고 있자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헛기침을 하였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라이어스 공작이 로웰린에게 물었다. "일단 적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게," "예, 일단 적의 군대는 십오만 정도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반란군의 수괴인 맥셀 왕자본인이 참전했으며, 테란델 후작을 비롯한 두 명의 후작이 왔어요. 즉, 두 명의 소드 마스터가 있다는 이야기죠." 로웰린의 말에 귀족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라이어스 공작도 웃으며 말했다. "허허! 그럼 다행이군. 저쪽은 두 명의 소드 마스터인데 반해 이쪽은 세 명이니 말이네." 라이어스 공작은 부사령관 자리를 맡은 유스번 후작을 소개하였다. "본래 양상이라면 두 명의 소드 마스터끼리의 대결이 되겠지만 여기 카이나 경도 있으니 소드 마스터의 숫자에서 우리가 우위를 점하게 되었군. 전장에서 소드 마스터의 숫자는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정도니 이 전투는 우리 에게 유리해졌네." 라이어스 공작의 말에 모두가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전쟁에서 소드 마스터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더군다나 라이어스 공작은 톨리안 왕국에서 제일 강한 소드 마스터다. 그런 그가 테란델 후작을 맡는다면 전황은 삽시간에 왕국군에게 기울 것이다. 귀족들의 얼굴에 승리감이 떠오를 때, 라이어스 공작이 충고를 하였다. "그렇다고 이긴 것처럼 행동하지 말게. 우리는 아직 전쟁을 하지도 않았어. 기뻐하는 건 승리를 한 뒤에 해도 충분해." "예, 공작 전하." 라이어스 공작의 말에 귀족들은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럼 인사는 이것으로 하고, 카이나 경, 잠시 나와 이야기를 할 수 있소?“ 라이어스 공작이 카이나를 보며 말했다. 순간 귀족들의 시선이 집중되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카이나, 이윽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어스 공작이 로웰린을 보며 말했다. "조용히 이야기할 만한 곳을 안내 좀 해 주게." “예, 예!" 로웰린도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대답하고는 사람을 불러 두 사람을 자신의 집무실로 안내하게 했다. 그리고 귀족들은 라이어스 공작과 카이나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무엇 때문에 라이어스 공작이 카이나와 이야기를 나누려는지 궁금한 기색이었다. "허허! 이렇게 따로 불러서 미안하네. 아, 내가 말을 놔도 되려나." 이미 놓고 있는 상황에서 따져 봤자 서로 얼굴만 붉힐 뿐이다. 더군다나 상대가 자신보다 나이가 월등히 많았기에 카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습니다." "고맙네. 아, 내가 경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건 다름이 아니라 금탑주님은 언제쯤 전쟁에 참가해 주실 수 있나 물어보려는 것이네." 금탑주의 참전! 이것은 전쟁의 전황을 삽시간에 뒤집을 수 있는 어마어마한 사항이었다. 어떻게 보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라이어스 공작이 카이나를 이렇게 따로 불러 물어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바로 금탑주가 참전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왕국군은 곧장 승리라도 한 듯한 분위기에 휩싸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자신감에서 오만함으로 변질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왕국군에게 악영향을 끼친다. 라이어스 공작은 그것을 염려했기에 카이나를 따로 불러 조용히 묻는 것이다. 카이나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솔직하게 대답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탑주님께서는 한창 수련 중이셔서......" “수련 말인가?" “네." "흐음! 수련이라......“ 카이나의 말에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빠진 라이어스 공작. 굳이 이런 시기에 수련에 열중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왕국에서의 반란은 금탑에게도 무척 중요한 일로 작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수련에 열중하고 있을까? "설마......“ 라이어스 공작은 한 가지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스스로 생각을 해도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 금탑주의 나이는 20대 초반이다. 그 나이에 7클래스의 경지에 든 것은 대륙에 파란을 일으키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8클래스에 든다? 말도 안 된다. 라이어스 공작은 웃음을 지었다. "허허! 내가 늙은 건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지금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한데 다음 단계라니! 더군다나 다음 단계는 대륙에서도 몇 오르지 못한 절대의 경지다. "무언가 실마리를 잡은 걸지도 모르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그는 카이나에게 말했다. "그럼 부탁하겠네. 우리로서는 가급적 금탑주님이 빨리 참전해 주셨으면 하는 바이니 말이네." 일국의 공작에게 존대를 받을 만한 남자 카이나는 엘이 공작에게 존대를 받자 기분이 좋아져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엘이 인정을 받고 있다는 말일 테니까.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내색하지 않은 채 담담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대답을 한 카이나는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괜히 기분이 좋아져 무표정이 풀어지려 했기 때문이다. "그럼." 카이나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방을 나섰다. 라이어스 공작은 그것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허허! 정말 재미있는 여인이구나. 단지 좋아하는 표정을 참기 위해 그리 애를 쓰다니." 카이나가 왜 저럴까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라이어스 공작은 이내 고개를 저어 고민을 털어 버렸다. 그렇게 왕국군의 합류가 무사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니까...... 왕국군이 합류했다고?“ "예, 전하. 죄송합니다, 제가 성을 함락시키지 못해서......“ 맥셀 왕자의 말에 테란델 후작이 고개를 숙였다. 그에 맥셀 왕자가 손을 저었다. "아아, 상관없어. 소드 마스터가 시간을 끌었다는데 그걸 가지고 뭐라 하면 안 되지. 세상에 변수는 다양한 법이니까. 그나저나 적의 전력은 알고 있나?" “예, 십삼만의 정규군과 오십 명의 기사, 두 명의 소드 마스터가 왔다고 합니다. 두 명의 소드 마스터 중 한 사람이 바로 라이어스 공작입니다." "그래?“ 맥셀 왕자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예, 저를 제압할 목적으로 온 듯합니다." 톨리안 왕국에서 테란델 후작을 제압할 만한 검사는 라이어스 공작밖에 없다. 그가 이곳에 있으니 라이어스 공작이 온 것도 당연한 현상이다. "그렇군." 고개를 끄덕인 맥셀 왕자가 생각에 잠겼다. 그는 양군의 전력을 비교해 본 뒤 말했다. "일단 전력은 비슷하군." "전력에서 밀리는 것 아닙니까?“ 적은 소드 마스터가 셋이다. 그리고 이쪽은 둘이다. 더군다나 왕국군 쪽에는 라이어스 공작이 있다. 그라면 테란델 후작과 아스텍 후작이 합공을 한다고 해도 쉬이 제압될 인물이 아니다. 설령 자신이 라이어스 공작을 상대하고 아스텍 후작이 유스번 후작을 상대한다고 하여도 그 여자 소드 마스터를 견제할 검사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그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다. 맥셀 왕자는 그런 테란델 후작에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바보 같군. 왜 그 전력에서 나를 논외로 치는 거지?“ "아......“ 테란델 후작이 신음 비슷한 소리를 흘렸다. 그렇다. 그는 맥셀 왕자를 빼놓고 비교하여 전력이 불리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맥셀 왕자는 얼마 전 7클래스 마법을 병사들 앞에서 시전하여 자신이 7클래스 마법사라는 것을 증명하였다. 7클래스 마법사는 소드 마스터와 같은 경지. 일대일 대결에서 소드 마스터보다 취약한 점을 보이지만 여러 명이 싸울 때는 오히려 소드 마스터를 능가하는 위력을 발휘한다. 특히 이런 경우에 더욱 그러하다. 저쪽은 소드 마스터 3명이고 이쪽은 소드 마스터 2명 7클래스 마법사가 1명이다. 조합 면에서 우수한 것이다. "이제야 알아차리다니 조금 둔하군." 맥셀 왕자는 테란델 후작의 표정이 밝아지는 걸 보며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그리고 그가 구상한 것과 전혀 다른 말을 하였다. "대인전으로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라이어스 공작을 맡겠다. 그리고 후작은 유스번 후작을, 아스텍 후작은 그 여자 소드 마스터를 상대한다." 맥셀 왕자의 말에 테란델 후작의 표정이 화악 변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 라이어스 공작은 내가 상대하겠다고. 그가 우리 왕국 최고의 기사잖아? 그러니 이쪽에서도 제일 고수인 사람이 나서야지. 그게 바로 나고." "그런......“ 자신감 있는 맥셀 왕자의 말에 뭐라 입을 열려던 테란델 후작이 입을 다물었다. 지금 맥셀 왕자에게 무엇을 말하든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7클래스의 경지에 오르면서 너무 오만해진 걸 수도 있다.' 라이어스 공작은 의심할 것 없는 최상급 소드 마스터다. 그의 검은 매서웠고, 오러는 웅혼하며 강했다. 퍼내도 퍼내도 끝이 없는 샘물처럼 그의 오러 보유량은 끝이 보이지 않아 테란델 후작을 질리게 할 정도였다. 그랜드 마스터나 8클래스 마법사가 아니라면 절대 제압할 수 없는 존재, 그가 바로 라이어스 공작인 것이다. 그런데 갓 7클래스의 경지에 오른 맥셀 왕자가 그를 막겠다니? 정말 믿기지 않는 소리였다. '일단은 지켜보자. 여태껏 허언을 하지 않았으니. 내 상대가 유스번 후작이라면 나에게 다소 여유가 있다. 위험에 빠지면 그때 도움을 줘도 늦지 않아.' 생각을 정리한 테란델 후작이 공손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전하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라고. 군사들을 다시 정비시켜. 내일 총공격을 하겠다." 총사령관인 맥셀 왕자의 명령이다. 때마침 베이튼 성이 14만 군대를 수용하기 벅차 라이어스 공작은 성 밖으로 나와 진을 친 상태다. 내일은 그야말로 계책이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힘 싸움이 될 것이다. 테란델 후작은 막사를 벗어나면서 맥셀 왕자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는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톨리안 왕국제일기사인 라이어스 공작과 대결을 하겠다고 말하면서 이토록 여유를 부린다는 건 그에게 무슨 복안이 있다는 뜻이리라. '내일 뚜껑을 열어 보면 알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테란델 후작은 복잡한 생각을 정리했다. 내일! 모든 것이 점해질 것이다. *** "후우, 질리게 많군." 다음 날, 병사들을 든든하게 먹인 맥셀 왕자는 왕국군을 공격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그는 짐짓 귀찮은 듯 눈살을 찡그리고 있었지만 두 눈은 원활하게 움직이며 왕국군을 살피고 있었다. "숫자는 비슷하군." 첫 공격에서 반란군이 입은 타격이 좀 컸다. 때문에 군사가 상당히 줄어들었는데, 부상자까지 제외하니 왕국 측 병력과 엇비슷해졌다. "어차피 병사가 많다고 이기는 싸움이 아니니까. 싸움은 어디까지나 절대자들의 대결 승패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다." 그것이 그의 지론. 그 지론은 여태껏 그를 배반하지 않았다. 양측 군대는 서로를 바라보며 전의를 불태웠다. 이 전쟁의 승패에 따라 향후 왕국군이 우세를 점하느냐 반란군이 우세를 점하느냐가 정해질 것이다. 루비어스 백작령을 잃는다면 톨리안 왕국은 비옥한 토지인 서부 전체를 잃게 된다. 때문에 이곳을 지키고 다른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두 군대의 대립이 첨예하게 이루어졌다. 분위기가 고조되고 점점 살기가 끓어오르는 가운데 왕국군 진영이 웅성웅성거리더니 이내 좌우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로 한 사람이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저벅저벅. 선명한 발걸음 소리. 동시에 서릿발 같은 기세를 발산 하는 존재가 앞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의 정체는 바로 라이어스 공작이었다. 톨리안 왕국제일기사 라이어스 공작, 그가 사령탑에서 나와 반란군에게로 다가간 것이다. “으으......” 반란군들은 서서히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라이어스 공작을 보며 신음을 흘렸다. 그들에게 있어 라이어스 공작은 왕국의 수호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는 왕국 최고의 기사였고, 한해 기사를 꿈꾸던 이들 이라면 모두 라이어스 공작을 동경하고 있다. 그런 존재가 자신들에게 기세를 발산하며 다가오니 절로 위축된 것이다. 천천히 걸어 나오던 라이어스 공작은 양측 군대 사이에 멈춰 섰다. 우뚝! “나는 톨리안 왕국의 공작인 라이어스 공작이다. 우매한 병사들이여! 너희들은 어찌하여 왕국을 배반하고 하늘을 거역하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마나를 실은 그의 목소리는 반란군 전체에 들리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라이어스 공작의 말에 반란군 병사들의 표정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그들 또한 알고 있다. 자신들이 반란에 가담하게 되었다는 것을. 예로부터 반란에 참가하면 그의 가족들은 물론, 그와 관련된 모든 이들을 죽인다. 그걸 생각하니 절로 두려움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몸으로 즉각 반응이 나타나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왕국은 관대하다. 지금이라도 너희들이 배신의 깃발을 버리고 왕국의 깃발 아래에 선다면 포용력 넓으신 국왕 전하에서는 너희들을 웃으시며 받아들일 것이다. 배덕의 병사들이여! 그대들이 여태껏 누구 덕에 이렇게 평온한 삶을 살았는지를 떠올려 보아라!" 라이어스 공작의 외침! 그 외침은 반란군들을 흔들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깊이 따져 보면 레도프 국왕은 톨리안 왕국을 무척 잘 다스린 편이다. 그가 왕국을 다스리는 때에는 몬스터의 침입도 그렇게 심하지 않았고, 왕국민들이 굶주리는 상황도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곰곰이 생각해 본 그들은 그 말이 모두 들어맞자 혼란스러워하기 시작했다. 반란군이 혼란에 빠졌을 때, 맥셀 왕자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소리쳤다. "적의 말에 흔들리지 마라! 무엇이 평온인가? 이곳 서부 영지만 해도 얼마 전까지 몬스터의 침공에 신음하던 곳이다. 그 일이 왜 벌어졌는가? 다 귀족들의 파벌 다툼 때문에 벌어진 것이다. 애당초 국왕이 올바른 결정을 내려서 나를 왕세자로 삼았으면 서부 백성들이 고통에 신음 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귀족이 나를 지지했고, 나 또한 스스로 능력이 있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국왕은 자신의 고집을 내세워 왕국을 이 지경으로 몰아갔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보이지 않는가?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한 국왕으로 인해 우리는 몬스터의 침공에 신음해야 했다. 이래도 적의 말에 흔들리는가?“ “......” 맥셀 왕자의 말에 반란군의 표정이 돌변했다. 그의 말에 깊은 감복을 받은 것이다. 사실 그가 말한 것은 진실이란 바탕에, 약간의 억지에, 약간의 거짓을 첨가한 것이다. 하지만 진실이 그 바탕을 이루었기에 병사들은 그 말을 믿고, 자신들을 고통으로 내몬 왕국군에 강한 반발심을 일으켰다. 라이어스 공작이 병사들의 태도가 급변하자 살짝 당황했다. 맥셀 왕자의 병사 장악력이 생각 외로 대단했던 것이다 그가 외쳤다. "속지 마라! 이것은 모두 맥셀 왕자가 너희들을 현혹시키기 위한 말에 불과하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서로 간의 우열을 정한 뒤 에 이야기해도 늦지 않는다!" 맥셀 왕자의 양손에 붉은 화염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내 두 자루의 창으로 변하더니, 섬전과도 같은 속도로 라이어스 공작에게 쏘아졌다. 검을 수련하던 맥셀 왕자가 마법을 시전하자 라이어스 공작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맥셀 왕자가 마법이라니." 그러나 마법은 마법. 라이어스 공작은 화염의 창을 보고 곧장 반응하며 검을 휘둘렀다. 오러 블레이드를 충만하게 머금은 검이다. 땅! 따앙! "윽!" 오러 블레이드가 두 자루의 창을 튕켜 내는 데 성공했으나 라이어스 공작은 검에 전해지는 충격에 두 눈을 부릅떴다. 자칫했으면 화염의 기운에 오러 블fp이드가 부서져 버릴 뻔했다. 맥셀 왕자가 외쳤다. "제법 잘 막는구나." 화르륵. 그의 양손이 다시 불타오르며 화끈한 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의 몸이 쏜살같이 쏘아지며 양손을 뻗었다. 끼아아아! 양손에서 뿜어진 화염은 레드 드래곤의 형상을 갖추며 라이어스 공작에게 쏘아졌다. 라이어스 공작은 검을 휘둘러 화염을 흩어 버리려 하였다. 땅! 따당! 땅! 레드 드래곤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라이어스 공작과 겨루기 시작했다. 약 10합을 겨룬 뒤 레드 드래곤은 소멸하였고, 그 뒤에 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맥셀 왕자의 마법이었다. "플레임 스트라이크(Flame Strike)!" "헉! 7클래스 마법이란 말인가!" 스트라이크 계열 마법은 모두 7클래스에 속한다. 지금 맥셀 왕자가 시전한 플레임 스트라이크! 그것은 7 클래스 화염계 마법을 대표하는 마법이었던 것이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수천 명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마법이다. 라이어스 공작은 전신에서 오러를 뿜어내며 마법을 막아 내기 위해 검에 오러를 최대한 끌어올렸다. 약 10미터까지 늘어난 오러 블레이드. 라이어스 공작은 그것을 휘둘러 플레임 스트라이크를 베어 버리려 하였다. 카앙! 끽! 끼기긱! 오러 블레이드와 플레임 스트라이크는 서로 충돌한 뒤 듣기 싫은 소음을 흘렸다. 지금 두 힘은 누가 더 센지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결코 질 수 없다며 버티는 자존심 대결. 지금 그들은 자존심 대결을 벌이고 있었다. '이쯤 하면 되겠지.' 맥셀 왕자는 자신이 라이어스 공작을 단번에 꺾으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랜드 마스터나 8클래스 마법사가 아니면 꺾기 힘든 라이어스 공작을 자신이 꺾으면 의심에 찬 눈들이 쏟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는 짐짓 밀리는 척하면서 플레임 스트라이크를 캔슬하였다. "후우!" 속이 안 좋은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나는 맥셀 왕자 방금 전 격돌에서 누가 우세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였다. "과연 왕국 최고의 기사구려, 공작." 하지만 라이어스 공작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 그의 머리는 너무나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맥셀 왕자가 이 정도로 강하다니? 도대체 무슨 수련을 해 왔기에......“ 그가 놀라는 것도 문제는 아니다. 맥셀 왕자의 나이는 30대 초반. 아직 젊다. 그런 그가 소드 마스터에 올랐다면 라이어스 공작은 어느 정도 납득했을 것이다.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검사들이 가끔 30대 나이에 소드 마스터에 오르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심각했다. 설마하니 금탑주를 제외하고 이토록 젊은 나이에 7클래스의 경지에 이른 자가 있을 줄이야! 게다가 금탑주처럼 빠른 캐스팅이 주 무기도 아니었다. 맥셀 왕자의 주 무기는 화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파괴력이다. 방금 전 라이어스 공작의 오러 블레이드와 플레임 스트라이크의 충돌, 두 힘이 부딪칠 때 라이어스 공작은 전력을 다했다. 그의 오러 위력은 소드 마스터 중 최고라 할 수 있을 정도다. 수십 년 동안 위력을 늘려 온 오러 블레이드의 위력은 한 단계 높은 경지가 아니면 결코 막아 낼 수 없는 성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힘과 평수를 이루다니. 플레임 스트라이크가 나중에 해제되었다고 하지만 제대로 살펴보면 그것이 팽팽함 그 자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라이어스 공작이 놀랄 수밖에. 맥셀 왕자는 나이를 초월하는 힘을 지니고 있던 것이다. '이런 힘을 지니고 있었다면 나는 진작 맥셀 왕자를 지지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반란을 일으켰단 말인가?‘ 라이어스 공작의 뇌리는 엉망진창으로 헝클어지기 시작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도무지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때, 맥셀 왕자가 외쳤다. "나의 힘을 보았는가! 나를 믿어라, 위대한 혁명군들이여. 우리가 흘린 피는 나중에 왕국의 초석이 되어 영원히 우리를 영웅이라 칭할 것이다. 전군, 돌격하라! 가서 숭고한 피로 왕국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자!" "와아아아아아!" "공격 ! 공격하라!" 뿌우우우우! 둥! 둥! 둥! 나팔 소리와 북소리가 들리며 반란군은 힘차게 전진하기 시작했다. 이에 왕국군이 질 수 없었다. 여기서 밀리면 기세를 빼앗기는 것, 라이어스 공작이 검을 치켜들며 외쳤다. "모두 공격하라! 우리 손으로 왕국을 지키자!" "와아아아아!" 거대한 함성이 메아리치는 베이튼 성. 그 앞에서 두 군대는 무시무시한 기세를 뿜어내며 서로를 향해 창칼을 겨누었다. 슈악! 검이 반짝이면 어김없이 한 명이 베어졌다. 우웅! 푸른 오러를 머금은 검! 유스번 후작은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버리며 전방을 바라보았다. 그의 앞에는 테란델 후작이 여유로운 자세로 서 있었다. 그는 유스번 후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쉽지만 죽어 줘야겠다, 유스번." 유스번 후작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검을 겨누었다. "쉽게는 되지 않을 것이다, 테란델." 상급 소드 마스터와 중급 마스터, 단 한 단계 차이지만 그 속에는 절대 메울 수 없는 차이가 존재했다. 그러나 테란델 후작은 방심할 수 없었다. 소드 마스터의 대결에서 잠깐의 방심이 목숨을 앗아 간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차앙! 창! 창! 두 기사의 검이 부딪치며 푸른 오러 파편을 사방에 흩뿌리기 시작했다. 왕국의 기둥인 소드 마스터. 그들이 지금 왕국군과 반란군으로 나뉘어 서로를 향해 검을 겨누는 처지가 되어 있었다. "네가 바로 테란델 후작이 말하던 그 여자로군." 딱히 사람을 죽이기 싫어 조용히 후방에 있던 카이나는 중년 남성의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그녀의 예상과 한 치의 틀림도 없는 중년인이 검을 든 채 서 있었다. 그는 자기소개를 하였다. “나는 아스텍 후작이다 그리고 너를 상대할 검사이기도 하지." “......” 카이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묵묵히 검을 치켜들 뿐이었다. 쓰쓰쓰! 말보다는 행동! 카이나의 검에 푸른 오러 블레이드가 솟아났다. 아스텍 후작이 그걸 보며 웃었다. "모처럼 재미있는 실전을 겪게 되겠군." 중급 소드 마스터인 아스텍 후작과 이제 갓 소드 마스터에 오른 카이나. 얼핏 보면 승부는 뻔해 보이지만 카이나에게는 매직 아머와 디유 레임이 있다. 승부를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차앙! 두 사람의 검이 부딪치면서 본격적인 대결에 들어갔다. 그렇게 왕국군과 반란군은 각자 최고의 실력을 지닌 이들을 빼고 모두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오랜만이군, 라이어스 공작." 맥셀 왕자는 자신 앞에 있는 라이어스 공작에게 짐짓 반가운 듯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라이어스 공작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맥셀 왕자, 그 정도로 강한 힘을 지녔으면서 어찌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이오. 그 힘이라면 나와 다른 귀족들의 지지는 물론 국왕 전하의 마음을 돌리는 데도 충분했을 텐데." 라이어스 공작의 말은 맞았다. 후궁의 소생이지만 확실한 능력을 보이면 국왕이 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맥셀 왕자가 7클래스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은 그가 충분히 국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을 갖췄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반란이라니? 그의 반란 때문에 왕국은 지금 반 토막이 났다. 맥셀 왕자가 웃으며 말했다. "아까도 말하지 않았나? 난 우유부단한 것이 싫어. 한 나라의 국왕이면 지닌바 재능을 꿰뚫어 보는 눈을 지녀야 하는 것 아니겠어? 그런데 국왕은 나의 그런 재능도 못 알아봤어. 오히려 왕비 소생인 유드미온만 애지중지하며 세력으로 꽁꽁 둘러싸 그를 보호하려 했지. 난 그게 싫었어. 그래서 반란을 일으킨 거야." "그게...... 전부요?“ 라이어스 공작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맥셀 왕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게 전부지." "그런 단순한 이유로...... 어떻게...... 어떻게 수백만 사람들의 가슴에 피를 흘리게 하는 일을......“ 분노에 몸을 떨며 말끝을 흐리는 라이어스 공작. 맥셀 왕자는 빙긋 웃었다. “혁명을 위해서는 피가 필요한 법이야. 난 지금의 왕국을 완전히 개혁할 거야. 지긋지긋한 몬스터들을 모두 이 세상에서 지워 버릴 것이며, 막강한 국력으로 주변국을 정복한 다음 톨리안 제국의 초대 황제가 되는 거지, 어때, 매력적이지 않아?” 확실히 그의 말은 무척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라이어스 공작이 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영토가 넓어지는 것도 좋다. 하지만 다른 방향도 있지 않은가? 그가 입을 열려 할 때 맥셀 왕자가 그를 제지했다. "그만. 어차피 공작과 나는 생각하는 가치관 자체가 달라. 더 이상 이야기를 해 봤자 입만 아플 뿐이지. 어때, 힘으로 승부를 내는 건. 역사가 우리를 반란군으로 인식할 지, 혁명군으로 인식할지는 승자의 논리대로 이루어지겠." 라이어스 공작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무척 간단하면서 효율적인 것을 알고 있구려." "세상을 살기 위해서는 우선 힘이 필요한 법이거든." 라이어스 공작이 검을 치켜들자 맥셀 왕자도 웃음을 지우며 양손을 뻗었다. 화르륵! 붉은 화염이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라이어스 공작을 위협했다. 그가 맥셀 왕자에게 말했다. "얼마 전 적탑주가 은밀하게 들렀다고 하더니, 설마 그의 마법을 전수받은 것이오?“ 맥셀 왕자, 카로스만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 놀란 것이다. 설마하니 그가 이런 정보를 알고 있을 줄이야! 하지만 자신이 맥셀 왕자를 죽이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 것은 모르는 듯했다. "그걸 알고 있다니 놀라운데?" "우연히 알게 되었소. 그런데 그 반응을 보니 사실인가 보군." 맥셀 왕자가 다시 웃었다. "화염이란 좋거든. 모든 것을 태워 버리고...... 무엇보다 증거를 남기지 않잖아. 모든 것을 태워 버린 뒤 승자의 논리대로 재편하는 것도 하나의 매력이라 할 수 있지." "아직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소. 난 전력을 다해 당신을 저지할 것이오. 만약 제압이 어렵다면...... 그대의 목숨을 빼앗는 한이 있어도 반란을 종식시키겠소." "재미있군" 콰아아아아! 맥셀 왕자의 전신에서 패도적인 화염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라이어스 공작에게서도 오러가 뿜어지기 시작했다. 먼저 공격한 것은 맥셀 왕자였다. 그가 손을 뻗자 화염이 수십 개로 나뉘며 불꽃의 화살로 변했다. "가라!" 피비비 빙! 화염의 화살이 그의 명령을 따라 제각각 흩어지며 라이어스 공작에게 쇄도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라이어스 공작. 그는 검을 빠르게 휘두르며 화살을 쳐 내기 시작했다. 따당! 따다당! 오러와 부딪친 화염의 화살은 빠르게 소멸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미끼. 진짜는 라이어스 공작에게 바짝 접근하고 있었다. 그의 왼손에 붉은 화염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합!" 회전하며 무시무시한 화염 기류를 일으키는 공격이 라이어스 공작의 심장을 향했다. 하지만 쉽게 당할 라이어스 공작이 아니다. 화염의 화살을 막던 그의 검이 휘어지더니, 이내 그 검이 화염의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동시에 검에서 오러 블레이드가 뿜어졌다. 꽈앙! "윽!" "큭!" 전신을 횝쓰는 반탄력에 두 사람이 신음을 흘리며 물러났다. 하지만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두 사람이 동일하게 물러났으니 평수를 이루었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정말 대단하군! 그 재능을 왕국에 쓴다면 왕국은 더욱 더 살기 좋은 곳이 될 텐데." "큭! 재능이란 다 쓸 곳이 있어서 주어진 것. 내 재능은 새로운 질서를 정립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푸른 오러와 붉은 화염이 허공을 수놓으며 격전에 격전을 거듭하였다. 라이어스 공작은 백전노장이었다. 수많은 실전과 그걸 토대로 발전해 온 실력은 빈틈이 없고, 전체적인 균형이 잡혀 있어 웬만해선 무너지지 않았다. 그런 라이어스 공작과 다르게 맥셀 왕자는 이제 갓 경지에 접어들었을 것이고, 실전 경험도 미천할 것이 분명 했다. 라이어스 공작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 맥셀 왕자는 이미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이가 아니다. 지금의 맥셀 왕자는 대륙 십대 8클래스 마법사 중 한 사람인 카로스만 이며, 그는 언제라도 라이어스 공작을 제압할 만한 실력을 지닌 인물이다. 그것을 모르는 라이어스 공작으로서는 맥셀 왕자를 제압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붉은 화염이 오러와 부딪쳤다. 쩌저정! 오러가 부서지고 화염은 허공을 수놓는다. 화염에 의해 주변 공기는 급격히 상승했으며, 주변 일대는 온통 불바다였다. 맥셀 왕자는 이곳저곳 오러에 베여 있었지만 정작 입은 부상은 옅은 자상이 다였다. 라이어스 공작 또한 몸 이곳저곳이 그을려 있었지만 정작 심한 상처는 없었다. "정말 강하구려, 맥셀 왕자." "그대도 마찬가지다, 공작." '정말 놀랍다. 이 정도 실력이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랜드 마스터에 오를지도.' 맥셀 왕자는 거짓된 실력으로 싸움에 임했지만 라이어스 공작의 실력을 겪고 놀랐다. 검술, 오러, 실전 이 세 가지가 놀라울 정도로 밸런스를 유지하고 있던 것이다. '그랜드 마스터에 오를지도 모르는 재목. 제거할까?‘ 그의 눈에 처음으로 살기가 스쳤다. 본래 라이어스 공작을 제거할 마음은 없었다. 최상급 소드 마스터이니만큼 자신이 국왕이 된 후 유능한 신하로 써먹으려고 결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기사는 예상을 뛰어넘는 실력을 보였다. 이미 모든 걸 갖추고 있었다. 남은 것은 깨달음뿐, 언제 그랜드 마스터에 올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본인은 그것을 잘 모르고 있는 듯했지만 말이다. '일단은 죽이지 않는다. 어차피 그랜드 마스터에 올라도 죽일 마음만 있다면 죽이는 건 쉬우니까.' 결정을 내리며 그는 양손의 화염을 라이어스 공작에게 쏘아 보냈다. 쩡! 쩌정! 라이어스 공작이 화염을 쳐 내자 그의 검에 서린 오러도 산산이 부서졌다. 얼핏 보면 그들의 실력은 막상막하로 보여 전혀 승부에 진전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는 맥셀 왕자가 라이어스 공작의 실력에 맞추어 상대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는 라이어스 공작을 꺾을 생각은 없었다. 일단 팽팽한 접전을 벌여 병사들의 사기를 드높일 것이다. 자신들을 이끄는 분이 최상급 소드 마스터와 비등한 실력을 지녔다고 말이다. 그렇게 병사들을 하나로 통합시킨 뒤 왕국군을 상대하면서 금탑주를 끌어낸다. 라이어스 공작은 죽이지 않아도 되지만 금탑주 엘리미 스는 반드시 죽여야 할 상대 자신은 엘에게 일대일 대결 제안을 할 것이고, 거기서 모든 실력을 보여 금탑주를 죽일 것이다. 금탑주를 죽이면 목적의 절반을 달성하게 된다. 그 후 더욱 강해진 힘을 보이며 왕국군을 격파, 국왕을 페위시킨 뒤 국왕의 자리에 오른다. 꽈앙! 강한 폭발과 함께 맥셀 왕자와 라이어스 공작이 물러난다. 이 정도면 맥셀 왕자는 충분히 시간을 끌었다고 생각했다. 이제 전투를 멈추고 시간을 주면 소문이 퍼져 나갈 터, 더 이상의 싸움은 무의미했다. 맥셀 왕자가 입을 열었다. "이대로는 승부가 나지 않겠어. 게다가 희생이 많아질 수도 있으니 이만 하는 게 어떤가?“ 라이어스 공작으로서는 바라던 바였다. "좋소." "그럼 군대를 물리기로 하지." 서로를 잠시 바라보던 두 사람은 이내 뒤로 물러났다. "모두 물러나라!" "후퇴한다! 후퇴하라!" 후퇴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양군이 질서정연하게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워낙 힘의 균형이 팽팽했기에 양군 다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테란델 후작은 낭패한 몰골을 하고 있는 유스번 후작을 조용히 바라보며 말했다. "운이 좋은 줄 알아라," 그 말과 함께 테란델 후작은 사라졌다. 유스번 후작은 쓴웃음을 지었다. "상급 소드 마스터와 중급 소드 마스터라...... 한 단계가 이리도 차이 날 줄이야." 완벽하게 지지는 않았지만 이대로 승부가 계속되었다가는 어떻게 되었을지 불 보듯 뻔했다. 명백한 패배. 그것을 알았기에 유스번 후작의 입맛은 썼다. "강하군." 아스텍 후작은 전신 갑옷의 보호를 받고 있는 카이나를 보며 나직이 말했다. 순수 실력을 따지면 자신이 더 강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상대에게는 방어력을 높여 주는 막강한 매직 아머와 공격력을 상승시켜 주는 디유 레임이 있었다. 팽팽하게 겨루었지만 결과는 카이나의 근소한 우위였다. 매직 아머와 디유 레임은 중급 소드 마스터인 아스텍 후작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다음에 다시 겨루도록 하지. 그때는 반드시 승부를 내주겠다." 카이나를 한동안 바라보던 그가 몸을 돌렸다. 그녀는 떠나는 아스텍 후작을 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직 자신의 실력이 부족함을 통감했다. 왕국군과 반란군의 첫 전투는 누가 승자인지를 가리지 못한 채 끝이 났다. 단지 알려진 거라면 맥셀 왕자는 7클래스 마법사란 것이고, 놀라운 실력으로 최상급 소드 마스터인 라이어스 공작과 맞대결을 벌였다는 것이다. 톨리안 왕국제일기사와의 맞대결. 그것은 삽시간에 왕국 내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고, 그것은 반란군의 기세를 한층 더 키워 주는 꼴이 되었다. 이렇게 되니 왕국군은 섣부른 대응보다는 차분한 방어를 중점적으로 하게 되었다. 반란군이 겁쟁이라 놀려도, 비겁자라 욕해도 그들은 대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 전쟁을 끝낼 왕국 비장의 카드, 금탑주를 말이다. 7. 최연소 8플래스 마법사의 탄생 이렇듯 세상이 소란에 휩싸여 있을 때 엘은 금탑에서 조용히 수련에 몰두하고 있었다. 8클래스에 올랐지만 아직 힘의 활용이 부족하다. 지닌바 힘은 강하지만 정작 제대로 시전할 수 있는 8클래스 마법은 몇 되지 않았기에 엘은 8클래스 마법을 공부해야 했고, 몇 번의 마법 연습을 해야 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마법을 습득했다고 생각한 엘은 새로운 수련을 시작했다. "부탁하겠습니다." 엘은 자신 앞에 서 있는 사내에게 부탁의 말을 건넸다. 그가 하려는 수련, 그것은 바로 실전 연습이다. 8클래스의 경지에 들어서면 6클래스 마법을시전어 없이도 시전할 수 있다. 게다가 8클래스 마법의 위력은 대재앙이라 부를 만금 강했기에 대륙 사람들 둘 중 하나는 그랜드 마스터보다 8 클래스 마법사를 더 두려워한다. 하지만 그런 마법도, 응용력도 모두 실전에서 체득되는 것이다. 실전을 겪어야 마법 운용이 부드러워지고, 마법을 시전 함에 있어 실수가 준다. 그런 의미에서 엘 앞에 존재하는 사내는 최고의 실전 상대라 할 수 있다. "어쩔 수 없군. 그렇게 부탁을 하니, 상관없겠지. 어차피 나도 몸이 근질근질하던 차니까." 엘 앞에 서 있는 사내, 아이넨스는 엘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이넨스는 마계의 대공 베르아문트와 일전을 벌이고 근 몇 달 동안 금탑에서 요양을 해야 했다. 마계의 대공에게 입은 상처가 매우 심각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는 천천히 몸을 회복시키기 시작했고, 지금에 이르러 내상이나 외상이 깔끔하게 다 나은 상태였다. 본신의 실력이 그랜드 마스터에 이름과 동시에 신검을 다루는 검사! 그에게 엘이 실전 연습을 부탁했던 것이다. 아이넨스는 그런 엘의 제의를 순순히 수락했다. 상처를 회복한 그는 엘이 7클래스의 경지를 뛰어넘어 새로운 경지인 8클래스에 이른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과 같은 경지! 그런 경지를 20대 초반에 다다를 수 있다니! 경악으로 한동안 입을 떡 벌리고 있었을 정도였다. 아이넨스가 말했다. "사실 내 본신의 실력은 대륙 십대 그랜드 마스터 누구 보다 강하다고 말하기 힘드네. 나이의 한계가 있기 때문이지." 갑작스러운 아이넨스의 말. 뜬금없었지만 엘은 조용히 경청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나의 검술은 오로지 신검의 힘을 이끌어 내기 위한 쪽으로 치우쳐져 있네. 덕분에 내 본신의 실력은 여타의 그랜드 마스터와 비교해서 누가 더 뛰어나다고 할 수 없지만 신검을 쥔 나의 실력은 그랜드 마스터 중 수위라 할 수 있네." 정말 대단하면서 오만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감히 자신의 실력이 그랜드 마스터 중 수위라 칭할 정도라니! 하지만 그런 그의 자신감은 사실이었다. 차원을 지배하는 신검, 디멘션 소드. 공간을 지배하는 이 검의 힘은 그 누구도 대응하기 힘든 성질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넨스가 검을 치켜들었다. "실전 같은 연습을 바랐으니 난 서슴없이 신검의 힘을 사용할 것이네. 그 과정에서 왜 다칠 수 있어." 엘의 얼굴에 웃음이 번져 나갔다. "물론, 그것은 제가 바라던 바입니다." "그럼 시작하도록 하지." 아이넨스의 검에 오러가 은은하게 맺히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 압도적인 기세가 뿜어지기 시작했다. 콰콰콰콰-! 모든 걸 압도하는 듯한 그랜드 마스터의 기세! 아이넨스는 자신이 한 말대로 대충 할 생각이 없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엘을 죽이려는 듯 살기까지 비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엘이 바라던 바! 그는 자신의 실력이 부족함을 알았기에 먼저 선공을 가했다. 쉬익! 엘의 손이 앞으로 뻗어지는가 싶더니 전신을 얼려 버릴 듯한 한기가 뿜어졌다. 시전어 없이 곧장 발동이 가능한 6클래스 빙계 마법 아이스 블레이드를 시전한 것이다. 날카로운 예기를 뿜어내는 아이스 블레이드는 사정없이 아이넨스를 난도질해 갔다. "흡!" 아이넨스는 가볍게 숨을 들이쉬더니 검을 들어 아이스 블레이드를 베어 갔다.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기에 충분한 아이스 블레이드지만 그랜드 마스터에 든 아이넨스에게는 그리 큰 위협이 되지 않는 마법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엘이 노린 수였다. 아이넨스의 검이 휘둘러지는 순간, 엘의 신형이 잔상을 남기며 사라졌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곳은 다름 아닌 아이넨스 바로 앞이었다. 그가 막 아이스 블fp이드를 부숴 버릴 때, 엘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것이다. 어느새 그의 몸에는 헤이스트와 그것을 중첩하는 리터레이트 마법이 시전되어 있었다. "핫!" 기합성을 지르며 엘은 왼 주먹에 서린 화염을 아이넨스에게 내질렀다. 아이넨스의 검이 미처 회수하지 못한, 절묘한 틈이었다. 만약 그가 일반 그랜드 마스터였다면 엘의 공격을 막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제아무리 그랜드 마스터라도 인간의 관절이 해낼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못하는 것, 아이넨스는 할 수 있었다. 팟! 아이스 블레이드를 가른 디멘션 소드가 그의 손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곳은 엘의 주먹이 내질러지는 곳이었다. 아이넨스는 재빨리 왼손을 뻗어 디멘션 소드를 쥐고 엘의 공격을 막아 냈다. 쩡! 쩌정! 오러와 화염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그들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10여 합을 겨룬 뒤 엘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기세를 풀었다. 아이넨스 또한 엘이 기세를 풀자 자신 또한 기세를 풀었다. 오랜만에 움직이는데 굳이 무리할 필요가 없었다. 엘이 입을 열었다. "후, 한 방 먹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안 되는군요. 신검이 사라져서 왼손에 쥘 수 있는 곳에 나타났을 때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 가문은 대대로 오른손으로 검을 쓰지만 위기 상황을 염려하여 왼손으로도 검을 익히지. 그렇기에 나도 왼손과 오른손을 크게 구분하지 않네." "그렇군요." 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된 점을 찾아보았다. 길게 승부가 벌어졌다면 자신이 졌을 것이다. 직접 겪어 본 신검의 힘은 그가 감히 자신 있게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엘의 생각일 뿐, 아이넨스의 생각은 달랐다. 아이넨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스스로 졌다고 생각했겠지만 길어졌다면 어떨지 모른다.' 그는 엘의 저력에 오한이 돋는 걸 느꼈다. 이 정도의 강함이라니. 분명 8클래스의 경지에 오른 지 그리 긴 시간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직 경지를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했을 것이고, 힘의 컨트롤에 좀 더 익숙해져야 할 터이다. 그런데도 이 정도의 힘을 지녔다는 건 그가 앞으로도 무한한 성장을 할 수 있다는 걸 뜻했다. 아이넨스는 엘을 상대하면서 자신이 상대했던 인간 중 최강의 인간, 지크릴을 상대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종합적인 전투력은 지크릴이 위였다. 하지만 그는 엘의 손에 어린 힘과 부딪칠 때, 하마터면 오러가 부서지 는 듯한 착각을 느쪘다. 그의 손에 어렸던 화염은 6클래스가 아닌, 필경 7클래스의 위력이었기 때문이다. 7클래스라면 아직 캐스팅이 필요한데 그 짧은 시간에 그걸 시전하다니. '적이 된다면 매우 까다로울 것이다.' 그는 엘이 적이 되었을 경우를 상상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와 엘이 칼을 맞대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엘은 루이아스를 따르는 것을 거절했으니까. 9클래스 마스터 루이아스. 그를 거절했다면 엘은 그와 같은 동지가 될 것이다. 그리고 거절한 이상 동지와 같다. 그럴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하며 아이넨스는 검을 갈무리 했다. 엘과 겨뤄 보니 아직 완벽하게 부상에서 나은 게 아니 란걸 느꼈다. 몸은 문제가 없다. 다만 몇 달간 검을 놓았더니 감이 녹슨 걸 발견한 것이다. 그 감을 다시 갈고닦기 위해서는...... ‘한동안 이곳에 신세를 져야겠군.' 녹슨 감각을 날카롭게 벼리는 것. 그것은 그에게 꼭 필요한 작업이다. 각자에게 생각할 계기를 준 짧은 실전 연습! 그것은 두 사람에게 있어 몹시 유익한 것이었다. "뭐? 맥셀 왕자가?“ 카이나의 보고에 엘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얼마 전 8클래스의 경지에 올랐다. 그랬기에 지금도 그 경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수련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왕국의 부탁도 거절하기 뭐했기에 한창 수련 중인 카이나를 파견했다. 현재 금탑에는 매직 나이트도 없고, 즉시 전력이 될 만 한 이는 카이나와 세레나, 그리고 실피르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중 가장 강한 것이 카이나였기에 한창 수련 중인 그녀를 보냈다. 그리고 그녀는 전쟁의 정황을 엘에게 틈틈이 전해 주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얼마 전 놀라운 사실을 듣게 되었다. 제1왕자인 맥셀 왕자가 7클래스 마법사가 되어 나타나 왕국 최고의 기사인 라이어스 공작과 대등한 대결을 벌였다는 이야기다. 정말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맥셀 왕자가 서 른 중반의 나이인 걸 감안하면 파격적인 진보였다. '그가 그런 경지에 들어 있었나?‘ 맥셀 왕자는 검을 익혔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난데없이 7클래스 마법사가 되어 나타나다니? 무언가 숨겨진 내막이 있는 듯했다. 그때는 그렇게 치부했는데 요즘 카이나가 말하길,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서서히 라이어스 공작을 압도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갓 7클래스에 든 마법사가 라이어스 공작을 압도한다? 말도 안 된다! 무언가 내막이 있는 것이다. 그랬기에 엘은 맥셀 왕자의 정체를 의심했다. 누군가 그의 자리를 차지하고 대역을 행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몰래 맥셀 왕자에게 느껴지는 마나를 조사해 보았다. 변신 마법인 트랜스포메이션(Transformation)을 시전하고 있는 상태인지 조사해 본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아니었다. 맥셀 왕자는 트랜스포메이션을 시전하고 있지 않았다. '8클래스의 경지에 든 내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어. 그렇다면 한 가지밖에 없지. 맥셀 왕자의 실력이 진짜이거나...... 아니면 내가 느낄 수 없는, 한 차원 높은 영역의 마법이 사용된 것.' 번뜩! 순간 엘의 뇌리에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있었다! 자신보다 높은 경지에 이른 마법사가! 그리고 그들은 금탑을 노렸고, 대륙에 어떠한 마각을 드러내려 하였다. 그런 그들이 톨리안 왕국에 마각을 드러내지 말라는 법은 없다 엘의 생각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맥셀 왕자를 제거하고 그 자리를 차지한다. 그리고 어떠한 목적으로 왕국을 반으로 갈라 전쟁을 한다. 여기서 라이어스 공작을 압도하는 걸로 보아 최소한 8클래스에 이른 마법사임이 분명하다." 맥셀 왕자의 나이가 있으니 라이어스 공작을 단번에 꺾지 못할 터. 단지 그와 팽팽한 대결을 벌이는 것만으로도 명성을 올릴 수 있고, 서서히 제압하는 모양새로 병사들의 마음을 완전히 휘어잡을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적 병사들은 사기를 잃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왕국은 삽시간 에 무너지게 될 것이 자명했다. "꽤 머리를 썼군. 하지만 다 들켰어." 물론 이게 사실일지는 불투명하다. 하지만 확인할 가치는 있다. “첸?진짜 8클래스 마법사라면 조금 벅차겠지만......” 엘은 그렇게 말했지만 자기 자신을 믿었다. 갓 8클래스 마법사에 올랐지만 다른 8클래스 마법사를 상대해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왜냐하면 엘이 그들에게 밀리던 이유는 마나 장악력과 클래스 프레셔, 그리고 운용하는 마법의 등급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같은 8클래스에 이르렀으니 조건은 동등해진 셈이다. 6클래스 마법까지 시전어로 시전할 수 있 으며, 그의 빠른 캐스팅은 한결 더 빨라졌다. "지지 않아." 자기 자신에게 말하듯 중얼거린 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카이나에게 통신을 보냈다. 자신이 전장에 참가하겠다는 것. 그는 그것으로 자신의 뜻을 피력했다. 금탑주가 참전한다! 왕국군 진영에 강타한 소식이다. 금탑주가 합류한다는 말에 침울했던 왕국군의 분위기 가 단번에 급변했다. 왜냐하면 금탑주는 현 대륙에 살아 있는 전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대륙의 전설이 누구냐? 라고 물으면 그들은 대륙에 존재하는 십대 그랜드 마스터와 십대 8클래스 마법사들을 지칭할 것이다. 그들은 대륙 검사와 마법사들의 정점에 섰을뿐더러, 실제로 엄청난 신위를 대륙인들에게 똑똑히 목격하게끔 하였기 때문이다. 그럼, 질문을 바꾸어 다음 세대 대륙의 전설은 누구냐? 라고 물으면 사람들은 주저 없이 금탑주! 그만을 외칠 것이다. 그만큼 금탑주는 대단하다 20대의 나이에 7클래스에 올라 동급 마법사 2명을 상대로 대결을 벌여 당당하게 승리했다. 게다가 특유의 마법 체계로 그랜드 마스터와 자웅을 겨루는 나이트 골렘을 만들어 냈으며, 각종 사업으로 대륙십대상단 중 하나인 디벨 상단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뿐인가! 대륙의 강국 중 강국인 성국의 공격을 여러 차례 막아 내고, 도리어 교황청을 습격하는 대담함을 보였다. 거기에 초인 2명이 포함된 성국, 블리어드 제국의 합공을 막아 내고 초인 게이런즈를 죽였다. 의심할 것 없는 대륙의 한 전설인 것이다. 그런 존재가 자신들의 편에 서 준다니? 정말 용기가 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엘의 경지는 7클래스였으나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이미 초인의 영역을 넘어섰다. 반대로 반란군의 진영은 침울함 그 자체였다. 그들에게 엘이란 존재는 이 전쟁에서 반드시 중립에 서 주었으면 하는 존재였다. 7클래스 마법사와 그랜드 마스터급 나이트 골렘의 힘 은 그들의 힘으로 도저히 막아 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금탑이 돕는다는 말에 왕국군은 당장에라도 승리한 분위기처럼 들떴고, 반란군은 마치 패배한 것처럼 급격히 침울해지기 시작했다. 이 모두가 엘이란 존재가 만들어 낸 여파였다. "병사들이 이렇게 심약하다니." 맥셀 왕자는 금탑주가 합류한다는 소식을 듣고 침울함에 빠진 병사들을 보고는 인상을 찡그렸다. 정말 한심한 모습이었다. 전황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건만 지금 이 분위기는 마치 패배한 분위기가 아닌가. 못마땅한 맥셀 왕자의 표정을 본 테란델 후작이 말했 다. "금탑주는 이미 톨리안 왕국에 사는 모든 존재들에게 전설이 되었습니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은 채 대륙에서 알아주는 존재들의 공격을 받고 훌륭하게 막아 낸 그를 경외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요. 그런 존재가 이 전쟁에 끼어든다고 하니 급격히 양상이 바뀐 것입니다." "그렇군." 테란델 후작의 말에 맥셀 왕자는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동부 벨로세크 제국에 있던 카로스만으로서는 알 수 없는 사실이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가 보는 엘은 단지 운이 좋아 몇 번의 위기를 넘긴 애송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약한 존재들만 모인 이곳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맥셀 왕자가 입을 열었다. "금탑주라면 걱정하지 마라. 내가 그를 감당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병사들의 사기가......“ 맥셀 왕자가 라이어스 공작을 연신 밀어붙이는 모습을 보았기에 테란델 후작은 어느 정도 그의 말을 믿으며 염려하던 부분을 말했다. 그에 맥셀 왕자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가 금탑주를 꺾게 되면 모든 상황은 다시 변하게 되어 있어.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금탑주가 등장하면 나에게 보고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나가 봐." 맥셀 왕자의 축객령에 고개를 숙인 테란델 후작이 밖으로 나갔다. "이제야 오는군, 금탑주. 그런데 상황이 절묘해. 내가 라이어스 공작을 완벽하게 압도하고 나타나야 하는데 말이지."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게 나타난 금탑주. 그로 인해 카로스만이 세운 계획 중 하나가 물거품이 되려 했다. "뭐, 허용 범위에 속하니 상관은 없겠지. 좀 더 빨리 죽으러 왔다고 생각하면 되니까." 맥셀 왕자가 웃었다. 그 웃음은 여태껏 지어 보인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가운 살기가 깃든 웃음이었다. 그가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와라, 금탑주. 너의 무덤이 될 이곳으로." 번쩍! 푸른빛이 반짝임과 동시에 한 사람의 동체가 나타난다. 모습을 드러낸 건 20대 초반의 잘생긴 금발 청년이다. 엘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라이어스 공작과 다른 귀족들은 모두 그에게 다가갔다. "어서 오십시오, 금탑주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라이어스 공작님." 라이어스 공작의 인사에 엘이 공손히 자세를 취하고 마주 인사를 했다. 공작의 인사가 끝나자 유스번 후작이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금탑주님. 저는 유스번 후작이라고 합니다." "예,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그 뒤로 엘은 다른 귀족들과 차례대로 인사를 나누었다. 그는 라이어스 공작에게 시선을 옮겨 물음을 건넸다. "듣기로는 맥셀 왕자가 아주 강해져서 나타났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라이어스 공작의 표정이 굳었다. 이윽고 그는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함께 라이어스 공작은 엘을 작전 막사로 안내하면서 상황을 설명하였다. 맥셀 왕자는 본래 검을 수련했는데 갑자기 7클래스 마법사가 되어 나타났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무위로 자신을 밀어붙였으며, 처음에는 호각이었으나 점차 자신이 압도당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가 이야기한 것은 엘이 알고 있는 것과 한 치도 다를 바가 없었다. 엘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나서 라이어스 공작을 힐끗 바라보고는 물었다. "공작님도 의심하고 계시는 겁니까? 맥셀 왕자가 가짜 일지도 모른다는......“ 엘의 말에 라이어스 공작이 몸을 움찔하였다. 그러더니 그는 이윽고 고개를 끄덕 였다. "가짜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검을 수련하던 이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난 사실 7클래스 마법사였어!' 이러면 누가 쉽게 믿을 수 있겠는가? 당연히 믿음이 가지 않을 것이다. 아마 지금쯤 다른 귀족들도 맥셀 왕자의 정체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졌을 것이다. 30대 중반인 맥셀 왕자가 왕국 제일기사인 라이어스 공작을 압도했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엘이 말했다. "어떨지는 저도 확신하기 힘듭니다. 사실 몰래 그의 정체를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만...... 모습을 변하게 하는 마법을 사용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으음!" 엘의 말에 무거운 신음을 흘리는 라이어스 공작 7클래스 마법사인 엘이라면 설사 8클래스 라법사가 마법을 시전했을지라도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맥셀 왕자가 마법을 사용하여 모습을 바꾸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엘이 그런 그의 생각을 알아차리고는 말했다. "아직 어떨지는 잘 모릅니다. 일단 살펴보는 수밖에요. 오늘부터 맥셀 왕자는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라이어스 공작의 눈이 빛났다. "골든 나이트를 데리고 오신 겁니까?“ 그랜드 마스터급의 실력을 지닌 나이트 골렘! 그것만 있다면 맥셀 왕자를 제압하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다. 설사 맥셀 왕자가 8클래스 마법사라고 하여도 골든 나이트의 합격과 엘의 공격이라면 패배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나 엘은 그런 라이어스 공작의 기대를 무참히 저버렸다. "아쉽지만 골든 나이트는 전투에서 크게 파손이 되어 현재 수리 중에 있습니다." 라이어스 공작의 눈에 아쉬움이 스쳤다. "무척 아쉬운 소식이군요."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맥셀 왕자가 저보다 뛰어난 마법사라면 공작님이 합류하여 저를 도와주시면 되니까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음, 알겠습니다." 난전 중에 협공하는 것을 뭐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이 병법이지만 왕국군과 반란군은 그 방법을 사용하지 못했다. 워낙 전력이 대등하여 한쪽을 제거하기 위해 나섰다가는 자칫 한쪽의 균형이 무너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탑주가 합류한 이상 왕국군에서 한 수 위의 힘을 지니게 된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맥셀 왕자를 압도, 혹은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라이어스 공작의 눈이 밝게 빛날 때, 병사 한 명이 허겁지겁 달려와 외쳤다. "공작님! 지금 맥셀 왕자가 반란군 진영에서 홀로 나오고 있습니다." "뭐라, 홀로?" 대경한 라이어스 공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 그에게 엘이 말했다. 그 또한 한 방 먹었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당했군요. 제가 이렇게 나을 줄 알고 맥셀 왕자가 저를 일대일로 상대하려고 먼저 나선 것 같습니다. 웬만한 자신감이 아니고서는 힘든 일이지요." 당연한 일이다. 최상급 소드 마스터인 라이어스 공작을 압도할 정도인데 그 정도 자신감이 없겠는가. '그런 자신감의 종류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엘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라이어 공작에게 말했다. "제가 가 보겠습니다." "음, 그럼 우리는 금탑주님만 믿겠습니다. 부디 맥셀 왕자를 제압...... 힘들다면 제거해 주십시오." "물론입니다." '진짜 맥셀 왕자가 아니라면 죽이는 방법밖에 없지요.' 그렇게 생각하며 엘이 막사를 나섰다. 넓은 성 앞마당에 양군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그들의 중앙에는 상당히 널찍한 공간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한 사내가 팔짱을 낀 채 오만한 자세로 왕국군을 바라보고 있었다. "흐음! 텔레포트 파동이 느껴졌으니 애송이 금탑주가 온 게 분명하군. 머리를 굴리기 전에 일찌감치 제거를 하는 게 좋겠지." 맥셀 왕자, 아니, 카로스만은 전방을 주시하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마 전투가 벌어지면 라이어스 공작과 금탑주가 힘을 합쳐 자신을 상대할 확률이 상당히 높아진다. 그렇게 되면 자신 또한 본신의 힘을 사용해야 할 터. 각각 그 실력의 절정에 다다른 두 존재의 협공을 받게 되면 카로스만은 자신이 지닌 본신의 힘을 발휘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주변의 의심을 사게 된다. 가뜩이나 현재 그에게 집중되는 의심이 상당한데 두 존재를 상대로 버텨 낸다면 그 의심은 한층 가중될 것이 분명할 터. 그렇게 되면 카로스만으로서는 금탑주를 제거하는 것이 상당히 껄끄러워진다. 그것 때문에 그는 먼저 선수를 친 것이다. 자신이 이렇게 나온 것은 적의 강자와 겨루기 위한 것 라이어스 공작은 이미 자신에게 밀렸으니 이곳에 금탑 주가 나을 것이 분명한 일이었다. "흐흐, 어서 나오너라. 처음 그 등장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금탑주여." 카로스만은 금탑주를 기다리며 살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그와 트루먼 공작이 톨리안 국왕을 제거하려고 할 때 그 일을 방해한 것이 바로 금탑주다. 그로 인해 톨리안 왕국을 장악하려던 계획이 상당 기간 미루어져야 했으며, 그로 인해 트루먼 공작과 카로스만은 엘에게 살기를 피워 올린 적이 있다. 고작 7클래스에 불과한 벌거숭이 때문에 위대한 마스터의 신뢰를 잃어야 하다니! 그 주범을 오늘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흐흐흐!" 웃음이 주변에 잔잔하게 퍼져 나갈 때 왕국군 진영에서 한 청년이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호오!" 카로스만은 청년의 모습을 보며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청년은 한눈에 보아도 ‘나 금탑 소속이오!' 라고 말하듯 황금색 로브를 쓰고 있었다. 금발에 푸른 눈을 하고 있으며, 눈에는 기이한 것을 끼고 있는데 카로스만으로서는 자세한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엘을 바라보던 그의 자세가 더욱 오만하게 변했다. 그리고 목소리 또한 한층 오만함을 띠었다. "네가 금탑주더냐?" 카로스만의 물음에 엘은 살짝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예전에 나를 한번 보았을 텐데 그것을 묻는 의도는 무엇입니까, 왕자 전하?"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엘의 미소는 카로스만에게 살짝 불안감을 심어 주었다. '하지만 알 리가 없지. 이것은 마스터께서 만든 아티팩트다. 7클래스 마법 수준으로 알아차릴 수 없어.‘ 그는 자신했다. 때문에 그는 엘의 말에 태연하게 대꾸했다. "하하! 좀 오래된 일이라 잊어 먹고 있었을 뿐이다." "그렇군요." 여전히 미소를 띤 채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는 엘. 카로스만은 그런 엘의 모습이 심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다른 말로 대꾸하지 않은 채 자신의 용건을 말했다. "난 너와 대결을 하고 싶다. 왕국 최고의 마법사는 모두 너라고 하더군. 하지만 난 인정할 수 없다. 그래서 난 너와 대결을 하여 왕국 최고의 마법사를 가리고자 한다." “그렇군요. 하기야 왕자님이 계신데 제가 왕국 최고라는 타이틀을 쓰고 있었으니 그런 기분을 느낄 만도 하겠군요." "더 말이 필요 있겠나? 검사는 검으로 말하고 마법사는 마법으로 말하는 법이지." 카로스만이 자세를 취하자 엘 또한 경계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던 중 엘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맥셀 왕자 전하를 시해하고 그 껍데기를 둘러 쓴 겁니까?“ 움찔! 엘의 갑작스러운 말에 카로스만의 몸이 보이지 않게 떨렸다. 그는 태연하게 말했다. "누가 감히 나를 시해하나? 나는 나일 뿐이다! 그 누구도 감히 나를 해할 수 없어!" 엘은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을 해야겠지요." "이노옴!" 카로스만은 엘의 말에 심각한 위기감을 느꼈다. 때문에 그가 먼저 선공을 했다. 쐐액! 모든 것을 태워 버리는 붉은 불꽃. 살아 있는 뱀처럼 기이한 경로를 그리며 엘에게 쏘아졌다. 엘은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몸이 흐릿해지더니, 이내 공간을 넘어 카로스만의 뒤에 나타났다. 블링크였다. 피비빙! 카로스만의 뒤에 나타난 엘의 손짓에 화염의 화살이 생각나 그에게 쏘아졌다. '감히 내 앞에서 화염 마법을 시전하다니!' 카로스만의 눈에 순간 붉은 불길이 일렁였다. 자신이 누군가! 불의 왕이라 불리는 적탑주 카로스만이다! 화염 마법이 특기인 자신 앞에서 화염 마법을 사용하다니! 정말 가소로운 일이었다. 카로스만은 한 손을 휘둘러 그것들을 쳐 냈다. 후두둑! 저 클래스 마법인 플레임 애로우는 힘없이 소멸되었다. 그리고 분노한 카로스만은 곧장 반격에 나섰다. 그의 양손에 불꽃이 일렁이더니 하나는 창으로, 하나는 검으로 변했던 것이다. 카로스만은 헤이스트를 걸어 엘에게 쏜살같이 접근하며 플레임 스피어를 엘에게 투척하고는 플레임 블레이드를 휘두르며 그를 양단해 갔다. 동시 공격을 감행하는 카로스만의 공격에 엘의 안색이 변하였다. 그것도 잠시, 그는 곧장 한손을 들어 방어 마법을 시전 하여 플레임 스피어를 막아 냈다. 카아앙! 섬뜩한 금속음이 울려 퍼지며 붉은 불꽃이 화악 퍼져 나갔다. 플레임 스피어의 위력은 무척 강했다. 모든 것을 태워 버리는 열기와 관통력을 동반하여 엘의 방어막을 깨려 하였다. 그러나 엘의 방어막도 내구도가 단단하여 쉽사리 부서 지지 않았다. 결국 그 힘이 다한 둘은 함께 사라졌다. 파삭! 하지만 공격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어느새 엘의 지척에 접근한 카로스만이 엘에게 플레임 블레이드를 휘두르고 있던 것이다. 부웅! 화끈한 열기가 전신으로 퍼져 나가는 기분이다. 그러나 플레임 블레이드는 엘의 몸을 가르지 못했다. 엘이 순간 블링크를 시전한 것이다. 플레임 블레이드는 애꿎은 허공을 갈랐고, 약 2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엘이 모습을 드러냈다. 엘은 카로스만에게 말했다. "정말 강하군요. 감탄했습니다, 적탑주 카로스만 님." 카로스만의 몸이 잠시 움찔했다. 상대는 자신의 정체를 정확하게 알아차린 것이다. 하지만 완벽하게 확신을 가진 것이 아닐 터, 그는 시치미를 뗐다. "카로스만? 그는 내 스승이다." "그렇게 말하고 싶겠지요. 뭐, 증거는 없지만 확신은 하고 있습니다.“ 방금 전 공방을 벌이고 나서 엘은 그가 카로스만임을 확신했다. 물론 카로스만이 그것을 인정할 리 없겠지만 말이다. “당신이 인정하고 안 하고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와 함에 엘의 전신에서 심상치 않은 마나 파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자신의 상상을 뛰어넘는 엘의 힘에 카로스만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이 정도면 7클래스의 경지를 벗어나기 시작한 힘이다. 카로스만이 상대했던 라이어스 공작보다 휠씬 강한 힘이다. 카로스만의 뇌리에 적색 경고 표시가 켜졌다. '위험하다. 20대 나이에 이 정도라니? 반드시 죽여야 한다.' 라이어스 공작이 그랜드 마스터에 오르기 위한 준비를 완벽하게 갖춘 이라면 엘은 이미 그 경지를 뛰어넘고 있는 듯했다. 이대로 둔다면 10년이 지났을 때 카로스만 본인이 승리를 장담하지 못할 정도로 강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것이 카로스만의 심기를 자극했다. 화르륵! 카로스만의 양손에 붉은 화염이 일어났다. 그는 자신의 살기를 굳이 숨기지 않았다. 보아하니 엘 또한 어차피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니 최대한 빨리 승부를 마무리 지어야 한다. '이런.' 엘은 눈앞의 맥셀 왕자가 살기를 내뿜으며 강렬한 기운을 내뿜자 내심 자신이 너무 자극했나 작게 후회했다. 지금 그가 뿜어내고 있는 힘은 확실히 7클래스의 경지를 뛰어넘는 것이 었기 때문이다. 엘은 그런 반응을 보고서 이제야 확신할 수 있었다. '내 예상이 맞았어. 적탑주 카로스만이야.' 카로스만의 양손에 어린 화염이 점점 강해지는 것을 보며 엘 또한 마주 방비를 하였다. 그때, 카로스만이 선공을 가했다. 화염은 삽시간에 엘의 면전에 도달하더니, 그의 전신을 갈라 버릴 듯한 기세로 쏘아졌다. 차앙! 엘 또한 양손에 붉은 화염을 뿜어내며 카로스만의 공격 을 막아 냈다. 그러나 엘의 이런 모습은 카로스만에게 가소롭기 그지없는 행동이다. 감히! 대륙 8클래스 마법사 중 최강의 화염계 마법사이자 불의 왕이라 불리는 자신 앞에서 화염 마법을 시전하다니! 내심 가소로우면서도 괘씸하기 그지없어 카로스만의 공격은 한층 더 강렬해졌다. 쾅! 콰광! 쾅! 두 마법사의 마법이 곳곳에 부딪치면서 삽시간에 주변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런 두 마법사의 대결을 지켜보는 양군의 사람들은 경악의 표정을 띠고 있었다. 7클래스 마법사의 싸움은 모두 이러한 것인가! 근접전을 펼치는가 하더니 중거리에서 마법을 교환하고, 때로는 멀리 떨어져 장거리 마법으로 상대를 교란한다. 거리를 조절하는 데 능숙했으며, 블링크와 회피 동작을 적절하게 섞어 상대방을 혼란시키려는 모습도 보였다. 치열한 심리전! 두 마법사는 서로의 마법을 교환하면서 치열한 심리전 을 벌이고 있던 것이다. 카로스만은 그런 점에 있어서는 자신이 월등한 우위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세월이 가져다주는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경험! 서로 실력이 엇비슷할 때 무엇으로 결판이 나느냐 하면 바로 경험 차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다. 어떤 상황을 겪었고, 그로 인해 막상 다급한 일에 처했을 때 어떻게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느냐는 전적으로 경험의 유무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카로스만은 엘보다 확연히 우위에 속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수십 수백 번의 전투를 치러 본 마법사였고, 자신과 비슷한 경지에 이른 마법사들과도 종종 전투를 벌여 보았을 정도니 말이다. 그러나 카로스만이 한 가지 모르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엘에게는 전생의 경험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전생에 엘은 프로게이머였다. 그는 게임을 하면서 적과 심리전을 벌이는 데 이골이 날 정도였으며, 덕분에 그는 아무도 모르지만 심리전의 달인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그는 수많은 심리전이 오가는 게임 대회에서 모든 우승을 휩쓸었던 최고의 게이머였다. 상대방의 의중을 꿰뚫어 보고, 행동을 간파는 것, 그것은 사실 엘이 가장 자신 있는 분야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이런 심리전이 오가는 전투는 엘에게 있어 최상의 실력을 선보이게 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나에게 심리전을 걸다니......‘ 엘은 빙긋 웃었다. 그와 함께 엘의 손에 어린 화염이 카로스만에게 쇄도했다. '훗!' 카로스만은 엘의 마법을 보며 속으로 비웃음을 지었다. 직선, 자신의 가슴으로 날아오는 화염의 끝에 한 줄기 떨림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화염 마법의 대가인 그는 저 떨림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바로 방향 선회. 마법의 방향을 순간 바꾸기 위해 일어나는 떨림인 것을 눈치 챈 것이다. '아래!' 그는 자신의 가슴이 아닌 배를 노릴 것이라 생각하며 곧장 배를 보호했다. 그러나 엘의 공격은 카로스만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엘은 일부러 의도적인 떨림을 넣어 카로스만을 기만한 것이다. 화염 마법은 그대로 쏘아져 카로스만의 가슴을 강타했다. 터엉! "크윽!" 방향을 바꾸지 않고 곧장 자신에게 쏘아지자 카로스만은 당황하면서 다급히 방어막을 형성하여 막아 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충격을 모두 해소하지 못하여 그의 몸이 순간 비틀거렸다. 그것을 호기라 여긴 엘은 곧장 그에게 접근해 들어갔다. "이노옴!" 카로스만은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는 엘의 공격을 허용하자 자존심에 타격을 받고는 불같이 노했다. 동시에 그의 전신이 불타오르기 시작하더니, 이내 하나의 불꽃을 형성하였다. 그것은 주변의 마나를 끌어들여 불꽃을 형성하는 것, 7클래스 수준으로 어림없는 8클래스 수준의 마법이었다. 분노한 카로스만은 자신의 모든 힘을 개방하여 엘을 제거하려 든 것이다. 카로스만의 이런 반응은 엘이 예상한바, 그의 마나 파동도 점차 강해지며 그의 전신이 마치 푸른 마나에 휩싸인 듯한 형상을 취했다. 그 또한 8클래스의 힘을 개방한 것이다. “헉!" 카로스만은 엘의 전신에 어린 힘을 보고는 경악성을 내질렀다. 그럴 수밖에 없다. 지금, 지금 엘이 내보이는 힘은 다름 아닌 8클래스의 힘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어떻게 20대 초반의 나이에 8클래스의 힘을 보일 수 있단 말인가! 정말 경악스러운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사실이었다. 엘은 자신과 대등한 8클래스의 경지에 이르렀고, 진실로 얕볼 수 없는 힘을 지니고 있던 것이다. "말도 안 된다! 어떻게 20대에 불과한 놈이 8클래스에 이를 수 있단 말이더냐!" "엄연한 사실이 눈에 보이는데도 믿지 않는군요." 엘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기실 8클래스의 힘을 개방했지만 누가 열세인지는 한눈에 보아도 파악할 수 있을 만큼 그 힘의 크기가 명확했다. 카로스만의 힘은 점차 주변으로 영역을 넓혀 가고 있는 데 반해 엘의 힘은 더 이상 확장을 못하고 있던 것이다. 카로스만이 말했다. "어떻게 8클래스의 경지에 이르렀지?“ "굳이 대답해야 할 필요를 못 느낍니다만. 그럼 왜 당신은 맥셀 왕자를 죽이고 그 모습으로 변신한 거죠? “......내가 괜한 걸 물었군. 그냥 죽어라." 화악! 좀 전과는 다른 기세였다. 붉은 빛줄기가 생기는 듯하더니, 카로스만의 신형이 어느새 엘의 지척에 접근해 있었다. 엘은 그런 카로스만의 움직임을 간파하고는 헤이스트와 중첩 마법을 걸어 공격을 피해 냈다. 하지만 카로스만은 집요하게 다가왔다. "알아챈 이상 살려 둘 수 없다. 죽어라." 핏핏! 카로스만의 손가락에 붉은 기운이 어리며 날카로운 예기를 뿜어내며 엘의 주요 부위에 쏘아졌다. "이런." 엘은 그 공격이 결코 경시할 만한 것이 아님을 깨닫고 곧장 몸을 뒤로 날리며 방어막을 생성했다. 터엉! 텅! "큭!" 전신을 뒤흔드는 반탄력을 느끼며 그가 재차 뒤로 물러 날 때, 카로스만은 엘의 지척에 접근해 있었다. "8클래스에 올랐지만 실력 차이는 명확하다. 죽어라.“ 붉은 화염이 죽음의 독니를 날름거리며 엘의 가슴을 정확하게 질러 왔다. 피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 화염이 바로 앞까지 이르렀을 때, 엘의 몸이 살짝 기울어졌다. 덕분에 화염은 엘의 가슴이 아닌, 그의 어깨를 꿰뚫어야만 했다. 푹! 치이이익! "으윽!" 화염을 머금은 손에 어깨에 틀어박히자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엘은 신음만 흘리지 않았다. 카로스만의 손이 어깨를 파고드는 순간, 움직이며 제련제강의 마법을 시전한 것이다. 카앙! 황금빛을 발하며 쏘아진 금빛 화살은 애석하게도 카로스만의 몸을 꿰뚫지 못했다. 그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부숴 버리는 데 그친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큭?!“ 목에 전해져 오는 은은한 충격에 카로스만이 인상을 찡그리며 물러났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목걸이가 부서지자 그의 몸에 걸린 마법이 해제되기 시작한 것이다. 확연한 갈색 머리가 점점 하얀 머리로 변해 갔다. 동시에 30대 중반이던 얼굴은 노인의 얼굴로 변해 버렸다. 루이아스가 준 목걸이가 부서짐으로써 9클래스 마법인 폴리모프가 해제된 것이다. 엘은 본래 모습으로 돌아온 카로스만을 보며 웃었다. "이걸로 비긴 셈이군요," "이노옴! 감히!" 카로스만은 진심으로 분노했다. 설마하니 이것을 노릴 줄은 몰랐다. 마스터에게 받은 목걸이를 노리다니. 더군다나 자신의 어깨를 희생하면서까지 말이다. 어깨가 상하면 마법을 시전하기도 힘들뿐더러 원활하게 움직이기도 힘들다. 엘은 살을 주고 뼈를 취함으로써 카로스만의 정체를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에게 알려 버린 것이다.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카로스만의 계획은 엘을 제거하고 톨리안 왕국의 국왕에 오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허망하게 모습을 들켜 버리다니. 실제로 양군 사람들은 맥셀 왕자가 갑자기 노인의 모습으로 변하자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었다. 특히 그의 실력에 의구심을 가진 사람들은 더욱 그러했다. 그들은 곧장 카로스만에게 달려들 모양새를 취했다 제아무리 카로스만이 8클래스 마법사라고 하나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을 상대하기란 불가능하다. 본래 같으면 몸을 빼야 하는 상황. 하지만 그는 내려진 임무를 하나도 수행하지 못한 상태였다. 카로스만의 표정이 무섭게 변했다 이렇게 된 이상 임무를 하나라도 수행해야 했다. "임무는 실패했다. 하지만 너를 죽여 다른 임무는 완수 해야겠다." 카로스만의 전신이 반투명한 막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8클래스 마법을 시전하기 위해 먼저 몸을 방어 마법으로 보호한 것이다. 아마 그가 시전하려는 마법은 8클래스 마법일 터, 그것도 가장 자신 있는 헬 파이어일 확률이 높다. 엘은 당장 이곳으로 다가오려는 이들을 향해 외쳤다. "오지 마세요! 8클래스 마법입니다!" 엘의 외침에 곧장 그를 도우려 하던 이들은 모두 화들짝 놀랐다. 8클래스 영역! 대륙에 단 10명밖에 오르지 못한 지고한 영역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 8클래스 마법이라니? 그렇다면 엘이 상대 하고 있던 마법사는 8클래스 마법사란 말인가? 그들의 그런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새 카로스만이 양팔 위로 평원 전체를 뜨겁게 달굴 정도로 강력한 최강의 마법, 헬 파이어를 캐스팅하고 있던 것이다. 그 크기가 워낙 커서 사람들이 알아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헬 파이어다!" "주, 죽음의 불꽃! 내가 설마 저것을 보게 되다니!" 병사들은 물론 귀족들도 사색이 된 채 마구 소리쳤다. 헬 파이어 마법은 8클래스 마법 중 최강의 화염 마법이다. 그 위력은 이곳에 존재한 양군 중 최소 절반을 태워 버릴 정도로 지독했다. 카로스만은 엘을 바라보며 말했다. "흐흐, 네가 도망간다면 이곳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모두 죽겠지. 하지만 도망가지 않는다고 해도 막을 방법이 없을 터. 어떻게든 너의 죽음은 정해진 것과 같다." 자신만만한 카로스만의 말에 이상하게도 엘의 반응은 태연했다.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된다면 좋겠지만 글쎄요, 과연 그렇게 될까요?“ “무슨 수작이지?” 카로스만의 의심 서린 말에 엘이 씨익 웃었다. "수작이라니요. 단지 숨겨 두었던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어야겠다고 느낀 것뿐이죠." 그때였다. 갑자기 허공에서 황금색 빛이 번쩍이더니, 이내 엄청난 속도로 카로스만에게 쏘아지기 시작했다. 엘이 말했다. "골드 피닉스! 골든 나이트가 지닌 기술 중 최강의 파워를 지닌 화살입니다. 그걸 과연 세이지 실드로 막아 낼 수 있을까요? 어디 한번 지켜보지요." 그 말과 함께 엘의 몸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거대한 황금빛 화살이 카로스만에게 날아 왔다. 헬 파이어를 캐스팅하던 카로스만은 골드 피닉스를 보고 이를 갈았다. "이노옴!" 쿠우웅! 골드 피닉스와 세이지 실드가 부딪치며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정말 엄청난 위력이 아닐 수 없었다. 덕분에 캐스팅 중이던 헬 파이어도 휘말려 폭발을 키우는 데 일조하였다. 후드득! 골드 피닉스가 쏘아진 자리에는 무려 지름 10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크레이터가 파여 있었다. 구덩이 깊이만 해도 족히 10미터는 될 만한 엄청난 위력! 방금 전 폭발이 얼마나 강했는지 반증하는 바이다. "큭!" 그런 폭발의 중심지에서 일어나는 한 사람이 있었다. 낭패한 몰골이지만 변함없이 형형한 안광을 뿌려 대는 인물, 그는 카로스만이었다. 골드 피닉스에 당했지만 목숨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이 정도 위력이라니." 카로스만은 방금 전 날아온 골드 피닉스의 위력에 치를 떨었다. 그것도 잠시, 그는 자신의 몸을 추슬렀다. "물러가야겠다. 이대로라면 승산이 없어." “그건 안 되겠는데요." “......!” 카로스만은 갑자기 들린 엘의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엘이 서 있었다. 엘은 카로스만을 보며 말했다. "이대로 가면 섭섭하지요. 당신을 위해 힘들게 마법을 캐스팅 했는데." 그의 양손에 어린 새하얀 기운. 그것은 보지 않아도 무엇인지 뻔했다. 카로스만의 안색이 처음으로 창백하게 변했다. "그, 그건 브......" “블리자드(Blizzard)!" 카로스만이 말하기 전에 엘의 시전어가 터져 나왔다. 헬 파이어가 8클래스 최강의 화염 마법이라면 블리자드는 8클래스 최강의 얼음 마법이었다. 그것이 지금 엘의 손에 시전된 것이다. 엘의 시전어와 함께 카로스만에게 강렬한 눈 폭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된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8클래스 마법을......“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무시무시한 한기를 머금은 블리자드가 삽시간에 그를 꽁꽁 얼려 버린 것이다. 엘은 얼음 동상이 된 카로스만을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캐스팅이 끝나자 그가 외쳤다. "자신의 특기인 화염계 마법으로 생을 마치길, 헬 파이어!" 빠른 캐스팅! 그것으로 엘은 블리자드를 시전한 뒤 곧장 헬 파이어를 시전한 것이다. 엘의 외침과 함에 작은 태양과도 같은 화염구가 얼어 버린 하로스만에게 향했다. 그러자 꽁꽁 얼어 있던 카로스만의 몸이 녹으며 삽시간에 헬 파이어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대륙 위에 군림하던 적탑주의 죽음이었다. “......” 카로스만을 제거한 뒤 헬 파이어가 사라지자 모두 할 말을 잃고는 엘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정녕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지금 눈앞에 기적이 펼쳐진 것이다. 새로운 전설. 대륙 위에 군림하던 8클래스 마법사 카로스만이 금탑주인 엘에게 꺾인 것이다. 그리고 분명한 사실은 엘이 방금 전 시전했던 마법은 모두 8클래스 마법이란 것이다. 사상 최연소 8클래스 마법사! 그들은 지금 새로운 전설을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눈에 기이한 열기를 담고 엘을 바라보았다. 엘은 그런 그들의 눈빛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부담스럽군." 파앗! 그와 함에 엘의 신형이 사라졌다. 왕국군 진영으로 돌아가면 골치만 아파질 것이 분명하니 금탑으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 할 말을 잃고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라이어스 공작은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그는 반란군에게 외쳤다. “반란군들은 즉각 항복하라! 너희들을 이끌던 사람은 맥셀 왕자가 아니다. 너희들은 거짓된 주군을 모시고 있던 것이다. 항복하라! 항복하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왕국군의 사기는 끝없이 올라갔다. 방금 전 보여 준 엘의 신위, 그리고 8클래스의 마법. 그 러한 마법을 시전할 수 있는 존재가 자신의 편이라는 것만으로도 무한한 용기를 주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와 반대로 반란군의 사기는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자신들을 이끌던 맥셀 왕자가 가짜란다. 그렇다는 건 진짜 맥셀 왕자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확률이 높다는 뜻이며, 자신들이 믿었던 말들은 모두 거짓이었다는 이야기다. "싸워라! 적들을 막아!" 하지만 그들의 말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장 본인들도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는데 오죽 하겠는가. 챙그랑! 결국 반란군들은 하나 둘 병장기를 손에서 놓기 시작했 고, 팽팽하게 대립하던 전황은 너무나 손쉽게 결말이 났다. 반란군을 제압한 라이어스 공작은 반란군을 정리하는 왕국군의 모습을 보며 놀라움을 터뜨렸다. "허, 정말 놀랍구나. 20대의 나이에 8클래스라니...... 정말 그 끝을 알 수 없어." 하지만 불안감도 들었다. 금탑주. 그는 톨리안 왕국에서 품기에는 너무나 큰 인물이다. "만약 그가 다른 욕심을 부린다면? 우리는 그를 막을 힘이 없다." 그의 눈이 침중해졌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조치를 취해야겠지." 무사히 진압한 반란. 그러나 그 반란을 제압하면서 라이어스 공작은 금탑에 불안감을 느꼈다.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힘. 그것은 나중에 불행을 초래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것을 어떻게든 통제하기 위해 라이어스 공작은 방책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너무 뛰어난 재능이 종종 발목을 잡을 수도 있는 것이다. 8. 아일라스 제국으로 불어오는 핏빛 바람 오대 제국 중 하나인 아일라스 제국. 대륙을 호령하는 오대 제국 중 하나인 아일라스 제국 그런 아일라스 제국에 심상치 않은 기운이 휘돌았다. 바로 제국 최고의 기사인 아토빌 공작이 대대적으로 기사를 움직여 적의 첩자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수도를 비상 상태로 접어들게 하였기 때문이다. 적의 첩자! 여기서 적의 첩자가 누구인지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 다. 심지어 황제조차 적의 첩자가 누구인지 몰랐다. 하지만 그들은 조용히 명령에 따랐다. 왜냐하면 명령을 내린 자가 다름 아닌 아토빌 공작이었으니까. 아일라스 제국에서 아토빌 공작의 말은 곧 법이었다. 아토빌 공작가 집무실. 그곳에는 아토빌 공작이 홀로 자리에 앉아 상황을 정리 하고 있었다. "적의 정보에 의하면 데이제크 제국은 이미 당했다." 적의 정보! 지난 시간 동안 아토빌 공작가는 끊임없이 아일라스 제국에서 암약하고 있는 암중 세력을 찾으려 애썼다. 그리고 서서히 그 꼬리를 잡아냈고, 적의 세력의 상당 부분을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적의 조직은 방대하다." 아토빌 공작의 중얼거림대로 적의 조직은 방대하기 이를 데 없었다. 수십 명의 소드 마스터는 예사로 동원할 수 있을 정도였으며, 그것은 비단 아일라스 제국뿐만이 아닌 다른 제 국들도 마찬가지였다. 즉, 적들은 적어도 한 제국 이상의 세력을 지니고 있으며, 그들의 장점에는 자신들과 같은 반열로 평가받는 그랜드 마스터와 8클래스 마법사, 또는 그보다 더 높은 경지에 이른 자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랜드 마스터를 뛰어넘는 경지라......“ 대륙 역사상 어딜 보아도 그랜드 마스터를 뛰어넘은 검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가능성이 있는 존재라면 현 그랜드 마스터 중 최강으로 꼽히는 자신 정도랄까? 하지만 아쉽게도 자신은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다. 아직 그랜드 마스터의 끝자락에도 도달하지 못했는데 그보다 더 높은 경지라면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그럼 9클래스 마법사?" 물론 단순히 예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 아일라스 제국이 적의 세력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며, 적의 세력을 쫓다가 얼마 전 얻게 된 정보는 놀랍게도 데이제크 제국이 그들의 세력에 당했다는 이야기다. 데이제크 제국에는 1명의 그랜드 마스터와 1명의 마탑주가 있다. 그런데 제국이 당하다니? 이는 곧 적의 세력이 최소 초인 2명 이상을 보유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보이지 않는 적의 세력은 정말 무섭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다음 목표가 이곳일 확률이 높다는 거다." 데이제크 제국에 이미 일이 벌어졌으니 그 다음 표적은 나머지 네 제국 중 하나일 확률이 높다. 그중에서 아토빌 공작은 자신 있게 다음 목표는 이곳이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다른 제국들에 비해 이곳에서는 이미 적의 세력이 노출되었고, 아토빌 공작의 끈질긴 추적으로 상당 부분 정체가 밝혀졌기 때문이다. 밝혀진 정체를 다시 덮어 버리기 위해서는 아는 이들을 모두 제거해야 할 터. 그렇다면 재빨리 이곳을 공격하여 자신을 비롯한 가문을 깔끔히 지워 버리는 것이 좋다. 야망이 있는 자의 일 처리는 야망 있는 자가 아는 법. 황제가 되려는 야망이 있는 아토빌 공작가는 그 점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았다. 때문에 비상경계령을 내려 황도를 단단하게 봉하고 황궁 또한 전투태세로 돌입하게 한 것이다. "내 예상은 맞아떨어질 것이다." 자신만만한 아토빌 공작이었다. 그런 아토빌 공작의 예상은 정확하게 적중하였다. 며칠 후 황도 전체에 심상치 않은 마나 파동이 일어나더니, 이내 수백에 달하는 무리가 이동하는 것이 잡혔다. "왔구나!" 공작가 저택에 있던 그는 마나의 흐름을 느끼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곧장 준비된 텔레포트 게이트를 통해 황궁으로 이동하였다. 황궁 앞에는 두 명의 로브인과 수백 기의 골렘이 있었다. 로브인은 다름 아닌 라이젠과 레이벨이었다. 그들은 데이제크 제국을 통제권하에 놓는 데 성공한 뒤 곧장 아일라스 제국을 정벌하기 위해 온 것이다. 사실 그들의 다음 목표는 블리어드 제국이었다. 그런데 아일라스 제국에서 아토빌 공작가가 자신들의 정체를 거의 다 밝혔다는 연락이 왔고, 그런 아토빌 공작가의 입을 막기 위해 블리어드 제국이 아닌 아일라스 제국에 먼저 온 것이다. 어느새 황궁으로 이동한 아토빌 공작은 바람과 같은 몸놀림으로 두 대마법사를 마주하며 말했다. “반갑네, 조만간 올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왔군. 나는 아토빌 공작이라 하네. 복장을 보아하니 둘은 청탑주 라이젠과 녹탑주 레이벨인 듯하군. 설마 이번 일의 배후는 벨로세크 제국이었나?"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인사를 건네는 아토빌 공작의 행동에 두 대마법사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설마하니 자신들의 정체마저 파악하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전력에 있어 우위는 자신들이었기에 냉정함을 되찾았다. 이미 정체도 알고 있으니 굳이 후드로 가릴 필요도 없었다. 라이젠이 후드를 먼저 넘기며 말했다. "후우! 알고 있다니 감출 필요도 없군. 어떻게 알았지? 설마 정보가 거기까지 샌 건가?“ 그렇게 말했지만 라이젠은 정보가 샜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아일라스 제국으로 오는 판단은 순전히 자신들이 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토빌 공작이 웃음을 지었다. "허허허! 내 어찌 거기까지 정보를 알고 있겠나? 단지 악당의 심리는 악당이 잘 안다고, 야망이 있는 자는 야망이 있는자의 심리를 잘 아는 편이지. 아마 그대들은 내가 필요 이상의 정보를 알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제거할 필요를 느꼈겠지. 어디 내 말이 틀렸는가?" 라이젠은 아무 말도 못했다. 아토빌 공작의 말이 모두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아토빌 공작의 손 위에서 놀아났음을 깨닫고는 표정을 굳혔다. 그런 그를 대신해 레이벨이 나섰다. "정말 대단하시군요, 아토빌 공작님. 설마하니 이렇게 상세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을지 몰랐습니다." 아토빌 공작이 어깨를 으쓱했다. "말했듯이 같은 종류의 사람의 생각은 알아차리기 쉽지." "그렇군요. 그렇게 되었으니 저희는 공작님을 더더욱 살려 드릴 수 없겠군요. 야망이 있는 자는 결코 남의 밑으로 들어가지 않는 법이니까요." 레이벨의 말에 아토빌 공작이 씨익 웃었다. “나는 남의 밑에 들어가 야망을 쟁취할 만큼 약하지 않네." “하지만 한 손으로 두 손을 막기 어려운 법. 저희 둘을 상대로 그렇게 여유를 부려도 될는지요?" "그건 손속을 겨뤄 보면 알겠지." 간접적인 자신감 표출에 분위기가 삽시간에 싸늘하게 내려앉았다. 아토빌 공작의 기세와 두 대마법사의 기세가 서로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첨예한 대립이 이루어지자 두 대마법사의 뒤에는 골렘들이, 아토빌 공작의 뒤로 카디어스를 비롯한 광풍, 폭풍 기사단과 근위기사단이 자리를 잡았다.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질 때, 분위기를 깬 것은 일단의 무리가 등장하고서다. "오, 은탑주!" 그들의 등장에 아토빌 공작의 표정이 밝아졌다. 은탑주 넬리어스는 자타가 공인하는 8클래스 마법사였기 때문이다. 넬리어스는 마나 흐름이 일어나자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끼고는 은탑의 정예 마법사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온 것 이다. 그가 합류함으로써 전황은 아일라스 제국으로 기우는 듯했다. 아토빌 공작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정말 잘 왔소, 은탑주." "이들은 누구입니까, 공작님." 넬리어스는 굳은 표정으로 아토빌 공작에게 물었다. 그러자 아토빌 공작이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이들은 우리 제국을 통째로 삼키려는 자들이오. 아마 벨로세크 제국에서 파견된 이들일 터, 얼마 전 데이제크 제국이 저들에게 당했다고 하오." "그렇습니까." 아토빌 공작의 말에 넬리어스의 얼굴이 굳었다. "그러니 은탑주가 저들을 물리치는 데 일조해 주었으면 하오." 아토빌 공작의 말에 은탑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일이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넬리어스의 말에 아토빌 공작의 얼굴에는 자신감 어린 표정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는 두 대마법사에게 말했다. "이대로 물러난다면 용서해 줄 용의가 있다. 폐하께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빈다면 내가 그대들을 용서하고 보내 줄 것을 약속하지. 어떤가?" 한눈에 보아도 전력의 열세. 이대로 승부를 벌인다면 아일라스 제국 측의 승리가 확실할 것이다. 만약 저항한다면 죽을 수도 있다. 아토빌 공작과 넬리어스는 결코 녹록한 인물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엇이라도 믿고 있는 걸까? 라이젠의 입에서는 자신감 어린 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는 물러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희를 이길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 그렇군." 아토빌 공작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 갔다. 그리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마 믿는 구석이 있겠지 지금 이 상황에서 믿고 있다? 누구를? 그래, 그런 거였군. 사실이 아니길 바랐건만......“ 아토빌 공작의 표정이 냉혹해졌다. 동시에 명령을 내렸다. "카디어스 아토빌 백작!" "예! 공작 전하!" 카디어스가 허리를 굽히며 힘차게 대답했다. 아토빌 공작이 명령을 내렸다. "배신자 넬리어스를 죽여라! 그리고 폭풍 기사단은 마법사들을 죽여라! 그들은 나라를 배신한 역적이다." 은탑주, 아일라스 제국을 이루는 기둥 중 하나인 그를 제거하라니! 하지만 명령이다. 그들에게 있어 아토빌 공작의 말은 곧 법. 검을 뽑아 든 폭풍 기사단이 마법사들에게 달려들었다. 갑작스러운 아토빌 공작의 명령에 넬리어스는 사색이 된 얼굴로 말했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공작님." “......” 아토빌 공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외면할 뿐. 그사이 카디어스는 놀라운 속도로 넬리어스의 지척에 접관했다. 그의 검에 푸른색 오러 블레이드가 뿜어지며 넬리어스 를 베어 갔다. 부웅! 하지만 그의 검은 넬리어스를 가르지 못했다. 검이 닿는 순간 그의 몸이 흐릿해지며 사라진 것이다. 카디어스에게서 50미터 떨어진 곳에 등장한 넬리어스는 잔뜩 성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는 따지듯 물었다. "왜 갑작스럽게 저에게 살수를 펼친 겁니까? 설마 절 죽이고 싶었던 것입니까?" "그 이유는 네 녀석이 더 잘 알 터. 배신을 해 놓고 그 정도로 연기를 하다니 연기도 대륙에서 수준급으로 쳐주겠군." “......” 차가운 아토빌 공작의 말에 순간 말이 막혀 버린 넬리어스. 잠시 후,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긴 시간 동안 정보를 수집해 왔지. 그러던 중 제국에 암약하던 비밀 세력이 묘하게 은탑과 연관성을 이루고 있더군. 그리고 나는 대륙 최강의 그랜드 마스터라 불린다. 그런 나를 확실하게 제압하기 위해서는 두 명의 초인이 아닌 세 명의 초인을 동원하는 것이 더 낫지. 그런데 지금 이곳에 쳐들어온 초인은 두 명이다. 그렇다면 다른 한 명은 누굴까? 무척 간단한 생각이지." "그렇군요." 넬리어스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설마하니 저런 추측으로 자신의 정체를 간파할 수 있을 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아토빌 공작의 말은 자신의 실력에 대한 절대부동한 자신감이 없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성질이었기 때문이다. 대륙 최강 그랜드 마스터의 자신감! 넬리어스는 그가 충분히 이런 자신감을 보일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말했다. "확실히 대단한 추리이긴 하지만 그것이 사실로 판명 된 이상 공작님께서는 대항할 방법이 없겠지요. 제아무리 최강의 그랜드 마스터라 하여도 동급 고수 세 명을 상대로 싸움을 벌이기에는 부족할 테니 말입니다." "글세...... 과연 어떨지 나도 궁금하군." 아토빌 공작의 입가에 순간 미소가 맺혔다. 동시에 그는 날카로운 음성으로 소리쳤다. "카디어스! 불쌍한 나의 아들이여! 지난 시간 동안 숨겨 온 너의 힘을 보일 때가 왔다. 은탑주를 죽여라! 그리고 너의 실력을 세상에 알려라!" "알겠습니다, 아버지!" 콰콰콰콰-! 대답과 함께 카디어스의 전신에서 항거할 수 없는 절대적인 마나가 뿜어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주변의 마나가 모두 그에 의해 장악되기 시작했다. 마나 장악. 그것은 그랜드 마스터의 전유물. 그렇다. 지금 카디어스는 자신의 모든 힘을 처음으로 선보이고 있던 것이다. 대륙 최강의 그랜드 마스터인 아토빌 공작에 의해 차분히 힘을 길러 온 카디어스의 힘은 결코 십대 그랜드 마스터에 뒤처지는 게 아니다. 주변을 장악하는 마나 기류와 함께 그의 검에서 찬란한 꼬러 블레이드가 넬리어스를 양단해 왔다. 일격을 허용한다면 몸 전체가 양분될 정도로 강한 공격! 넬리어스는 카디어스를 감히 경시하지 못하고 블링크로 몸을 피했다. 팟! 그런 넬리어스의 행동을 예상하기라도 했듯 그가 공간 이동한 곳으로 곧장 향하는 카디어스. 넬리어스는 서둘러 방어막을 형성하였다. 쩌정! 정! 카디어스의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넬리어스가 시전한 방어막은 허망하게 깨져 나갔다. "어때, 강하지?“ 아토빌 공작은 카디어스의 공격에 주르륵 밀려난 넬리어스를 보며 빙긋 웃었다. 그에 넬리어스 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과연, 대단하군요. 하지만 방심하지 마시길. 저 두 분이라면 공작님을 제압하기에는 충분하니까요. 저는 단지 일을 확실하게 하기 위한 것임을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위협적인 말이었지만 아토빌 공작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글세...... 과연 그 말대로 될는지 궁금하군." 그 말과 함께 그의 시선이 라이젠과 레이벨에게 향했다. "둘이 날 제압할 수 있다고? 어디 그 실력 한번 견식 했으면 좋겠군." 라이젠의 표정이 굳었다. 동시에 그의 양손에 푸른 기운이 일렁였다. "후회할 터." "누가 후회할지는 대결이 끝난 후 알게 되겠지." 라이젠의 몸이 흐릿해지더니 공간을 넘어 단숨에 아토빌 공작에게 주먹을 뻗었다. 푸른 뇌전이 일렁이는 기운은 적중한다면 단번에 전신의 자유를 빼앗고, 내부를 태워 버릴 듯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임에도 아토빌 공작의 눈에는 한 치의 당혹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검이 직선으로 뻗어 가며 라이젠의 주먹과 부딪쳐 나갔다. 따당! 땅! 검 전체를 감싸고 있는 푸른 오러와 라이젠의 주먹이 충돌하며 주변 전체를 푸른 물결로 뒤덮어 나갔다. 순식간에 10여 합의 공격이 교환되고, 두 사람의 공방이 점점 치열해질 때, 아토빌 공작의 빈틈으로 교모하게 비집고 들어오는 공격이 있었다. 바로 레이벨의 마법이었다. 그의 마법이 막 아토빌 공작의 몸에 적중하려던 순간, 그의 어깨가 살며시 움직이더니 라이젠의 공격을 튕겨 낸 뒤 곧장 오러가 뻗어 나와 마법을 튕겨 냈다. 파사사! 소리 없이 다가오던 마법은 오러와 부딪치며 단번에 부서져 나갔고, 동시에 아토빌 공작의 검에서 푸른 오러 서클이 생겨나며 라이젠에게 쏘아졌다. 꽈과과광! “크윽!" 오러 서클을 막아 내던 라이젠은 강렬한 충격이 전신을 휩쓸자 신음을 흘리며 한 걸음 물러났다. '정말 대단한 위력이다.' 한 걸음 물러나며 표정을 일그러뜨린 라이젠. 아토빌 공작의 공격은 강맹하기 짝이 없었다. 대륙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최고령 그랜드 마스터이니 만큼 근 100년 가깝게 축적해 온 그의 오러의 위력은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사들과 겨뤄 본 라이젠이지만 이 정도로 강한 위력을 지닌 오러를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비단 오러의 위력만 강한 것이 아니라 검술의 응용도 교묘하다. 빈틈을 잘 노리는 레이벨의 공격이 무효화된 것만으로도 그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얼마 전 상대한 알비어드 대공보다 훨씬 강한 실력. 대륙 최강이라는 수식어가 왜 달렸는지 느낄 정도로 상대의 힘은 압도적이었다. 자신의 실력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진 라이젠조차 승산을 희박하게 느낄 정도로......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일대일 대결을 하러 온 것이 아니다. 바로 수를 써서라도 아토빌 공작을 제거하는 것! 그것이 그들의 임무다. 라이젠이 레이벨에게 소리쳤다. "상대의 실력이 예상보다 뛰어나다. 본격적으로 가자." 끄덕. 고개를 끄덕인 레이벨도 한층 신중해진 표정으로 마법을 시전했다. 회심의 일격을 너무나 손쉽게 막아 낸 걸로 보아 그 또한 상대의 실력이 예상을 웃돌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콰아아아! 알비어드 대공을 상대할 때도 보이지 않았던 전력 그 힘을 라이젠과 레이벨은 개방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는 삼 대 일이었지만 지금은 이 대 일. 더군다나 상대방의 힘은 그때 상대했던 이보다 휠씬 강하다. 숨겨 두었던 모든 힘을 다하여 제거할 필요를 느낀 것이다. 파직! 파지직! 라이젠의 주먹에 어린 힘도 한층 강렬해졌다. 내부로 갈무리되던 폭발적인 뇌전의 힘이 그 용량의 한계를 넘어 설 정도로 강렬해진 것이다. 반면 레이벨의 주변에도 보이지 않던 작은 미풍이 점차 기세를 더하면서 폭풍과도 같은 움직임을 보였다. 모두가 제대로 아토빌 공작을 제거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호오......“ 두 마법사가 본신의 힘을 모두 끌어내자 눈을 빛내는 아토빌 공작. 수십 년 동안 상대를 만나지 못했던 그에게 이 두 마법사의 힘은 그야말로 가뭄에 단비였다. "이거, 재미있군. 은탑주보다 더 강하잖아?" 아토빌 공작에게서 폭발적으로 뿜어지는 오러. 상대의 힘에 자극받아 그 또한 모든 힘을 발휘하려고 마음먹은 것이다. "오라! 나의 것을 노리는 어리석은 이들이여!" 아토빌 공작이 검을 곧추세우며 두 마법사의 공격을 받아 냈다. 카디어스와 넬리어스의 공방은 치열했다. 넬리어스는 이미 널리 인정받은 대륙 십대 8클래스 마법사 중 하나. 그동안 축적된 경험과 실력은 과연 대륙 마법사들의 숭배를 받는 대마법사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그와 맞서 싸우는 카디어스의 실력은 정말 놀라웠다. 대륙 십대 8클래스 마법사인 넬리어스와 겨루면서 한 치의 밀림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간혹 거센 공격으로 넬리어스를 밀어붙이기까지 하니 단순히 분투를 하고 있다고 보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카디어스의 실력은 뛰어났다. 꽈앙! 넬리어스의 6클래스 윈드 블레이드가 카디어스의 검과 부딪치며 산산 조각이 났다. 그의 오러는 모든 것을 조개는 패도적인 힘을 지니고 있었다. 카디어스는 과거의 아토빌 공작이라 불릴 만큼 시종일관 직선적인 공격을 하면서 세밀한 몸놀림으로 상대방의 공격을 최소화시키고 있었다. '정말 대단하다.' 제삼자가 보기에 카디어스는 그저 앞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처럼 보였지만 상대하는 넬리어스는 그런 카디어스의 숨은 회피 동작을 진작 알아차리고 있었다. 전형적인 원거리 전문 마법사인 넬리어스는 계속해서 접근해 오는 카디어스를 떨어뜨리기 위해 수많은 마법을 시전했다. 워낙 많은 마법을 시전했기에 종종 방어할 수 없는 상황이 오고는 했는데, 그때마다 카디어스는 최소한의 동작으로 마법들을 회피, 혹은 위력을 반감시켜 막아 내는 행동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지금 상황은 수많은 마법을 시전한 넬리어스에게 도리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카디어스, 그는 단순히 그랜드 마스터에 든 검사가 아니었다. 자신이 얻은 깨달음을 모두 몸에 체득하였고, 그 깨달음을 바탕으로 충분히 넬리어스, 자신과 맞설 만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파앗! 수많은 마법을 시전한 넬리어스는 블링크를 통해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그는 놀라움을 표했다. "정말 대단하오, 카디어스 경. 설마하니 이런 실력을 지니고 있었을 줄이야." “......” 넬리어스의 찬사에 카디어스는 조용히 고개를 들며 검을 고쳐 쥐었다. 카디어스는 지금 이 대결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붓고 있었다. 그랜드 마스터에 오르고 나서 아버지인 아토빌 공작의 명령에 따라 그 힘을 감추며 오로지 수련에 수련을 거듭 해 왔다. 아토빌 공작의 말로 자신의 힘은 대륙 십대 그랜드 마스터나 8클래스 마법사들에 비해 결코 떨어지는 성질이 아니라고 했지만 카디어스는 늘 의문을 품었고, 궁금해했다. 과연 자신의 실력이 어디까지 통할지 말이다. 그러던 중 오늘 그 기회가 왔다. 그동안 수련해 온 자신의 실력을 확인할 기회가 말이다. 은탑주 넬리어스라면 아일라스 제국에서 마법사들의 신으로 추앙받는 대륙 8클래스 마법사 중 한 사람이다. 워낙 인간성이 좋아 마법사들은 물론 수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이 사람이 설마하니 제국을 배신한 남자였을 줄이야. 아일라스 제국에 흔들리지 않는 충성심을 가진 그에게 넬리어스는 반드시 죽여야 할 적이었다. "이런." 간단하게 몇 마디를 나눔으로써 한숨 돌리려 했으나 상대방의 반응을 본 넬리어스는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황급히 자세를 취하였다. 그가 자세를 취하는 순간, 카디어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파파팟! 수많은 오러가 16개로 나뉘며 강렬한 기세로 뻗어 나갔다. 오러가 자신에게 향하자 넬리어스는 가볍게 숨을 몰아쉬며 양손에 마법을 시전했다. "흡!" 콰광! 콰과과광! 오러와 부딪치며 끝없는 폭발을 일으키는 마법들. 공격이 막혀 주춤할 법도 하지만 여전히 공격 일변도를 추구하는 카디어스의 모습에 넬리어스는 인상을 찡그렸다. '길어지겠군.' 분하지만 카디어스의 실력과 자신의 실력은 엇비슷했다. 그렇다면 승부는 길어질 수밖에 없다. 넬리어스의 눈이 슬쩍 아토빌 공작과 두 마법사에게 향했다. '과연 차토빌 공작을 이길 수 있을까.' 루이아스의 압도적인 힘에 이끌려 조직에 가입했지만 늘 품어 오던 의문. 언제나 그가 생각하길, 대륙 최강 검사인 아토빌 공작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마스터 루이아스가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던 그였다. 조직의 중추인 청탑주와 녹탑주. 과연 그들 둘이서 대륙 최강의 검사를 막아 낼 수 있을까? 순간 넬리어스의 뇌리에 스친 불안감이었다. 9. 세상을 가르는 패왕의 검 콰아아아! 이것이 인간이 내뿜는 기세인가? 각각 뿜어내는 기운에 휩싸여 부딪치는 그들의 대결은 정말 인간이 이런 힘을 낼 수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품게 할 정도로 엄청난 힘을 발산하고 있었다. 콰앙! 콰아앙! 공격과 공격이 충돌할 때마다 땅거죽이 갈라지며, 주변 일 대가 모조리 부서져 나갔으며, 공격이 적중한 바닥은 각각의 크레이터를 만들어 낸 채 처참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결의 중심에는 세 사람이 있었다. 오러에 휩싸여 엄청난 기운을 발산하는 검사는 아토빌 공작이었으며, 그런 그를 합공하는 이들은 바로 청탑주 라이젠과 녹탑주 레이벨이었다. 어딜 가나 황제 못지않은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존재들! 그런 존재들이 지금 자신의 목숨을 건 채 인간이 상상 할 수 없는 엄청난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꽈아앙! 세 사람의 공격이 다시 한 번 충돌하며 황궁의 한 귀퉁이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나갔다. 초인들의 대결로 인해 골렘과 기사, 마법사들의 전투는 멈춘 지 오래였다. 이들의 싸움으로 인해 자칫 기세에 휘말려 그대로 온몸이 터져 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골렘들 또한 마찬가지다. 이 기세는 오러 블레이드를 견딜 수 있는 내구도라 하여 버텨 낼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때문에 대결은 아토빌 공작과 두 대마법사, 그리고 카디어스와 은탑주의 대결로 압축되었다. “......” 초인들의 대결을 바라보는 기사들에게는 하염없는 존경심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초인의 힘인가! 대륙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이들을 꼽으라면 다름 아닌 그랜드 마스터와 8클래스 마법사를 꼽는다. 그들의 힘은 국가에 숨겨진 최후의 비밀 병기라 불릴 만큼 대단한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기사들은 아토빌 공작이 막연히 그랜드 마스터라 하여 절대적인 충성심을 보였지만 그의 힘이 어느 정도인 지는 확인한 적이 없다. 왜냐하면 제국 내에 아토빌 공작과 대적할 만한 검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령 전원 소드 마스터인 광풍 기사단이 모두 합공해도 아토빌 공작의 상대가 되지 않으니 오죽하겠는가. 그나마 상대가 될 만한 은탑주도 자신의 힘이 아토빌 공작에게 미치지 않음을 은연중 인정할 정도니 그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증거로 대륙 십대 마법사 중 수위에 꼽히는 벨로세크 제국의 마탑주 라이젠과 레이벨이 서로 모든 힘을 다해 합공해도 아토빌 공작은 전혀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던 것이다. 초인의 힘을 목격한 기사들의 눈에는 지울 수 없는 존경심이 확고부동하게 자리하기 시작했다. 두 명의 대마법사들을 상대로 팽팽하게 맞서 싸울 수 있는 절대적인 힘! 이것이 바로 아토빌 공작의 힘이었다. '이런 괴물이 있나!' 공방을 나눈 지 수백여 합. 근접 마법을 즐겨 사용하는 라이젠은 아토빌 공작을 보며 질린 표정을 하였다. 여태껏 두려움을 모르고 산 그에게 처음 두려움이란 걸 깨닫게 해 준 인물이 바로 루이아스였다. 그를 만나고 느낀 끝없는 힘. 절대 넘을 수 없는 벽을 만난 그는 루이아스를 한없이 두려워하였고, 그에게 절대 충성을 맹세하였다. 그리고 수십 년 후 대륙에서 수위에 꼽히는 마법사가 된 그에게 나타난 또 다른 벽. 그 벽은 다름 아닌 아토빌 공작이었다. 아토빌 공작에게서 루이아스에게 느꼈던 끝없는 힘과 두려움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것! 그것은 바로 모든 것을 다 받아 낼 듯한 그의 저력이었다. 자신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는 레이벨이 모든 힘을 다하여 공격을 감행하고 있지만 이렇다 할 유효 공격이 없다. 도리어 어떨 때는 자신들이 밀리고 있어, 대결이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라이젠과 레이벨은 아토빌 공작이 왜 대륙 최강의 검사라는 타이틀을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죽여라!" 수백 번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라이젠이 마침내 살기가 담긴 목소리로 지독한 살수를 쏟아 냈다. 콰콰콰콰-! 푸른 뇌전으로 번들거리는 그의 양손. 닿기만 하면 모든 것을 태워 버리는 그 위력은 등골을 서늘하게 할 법도 하지만 아토빌 공작은 그 공격을 여유롭게 받아넘길 정도였다. 따당! 땅!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라이젠과 아토빌 공작이 뒤로 물러났다. 그는 두 대마법사를 보며 말했다. "정말 대단하군. 설마하니 이 정도의 실력을 지니고 있을 줄이야." 오랜만에 팽팽한 대결을 벌였기 때문일까? 아토빌 공작은 즐거운 듯 웃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라이젠과 레이벨은 자존심이 상했다. 온 힘을 다해 공격을 했건만 자신들의 공격은 아토빌 공작에게 즐거운 정도에 그쳤던 것이다. 아토빌 공작이 입을 열었다. "무척 즐거운 대결이지만 이제는 끝내야 할 필요를 느꼈어. 아무리 내 아들이 그랜드 마스터라 해도 오랫동안 쌓아 온 저력을 무시할 수 없는 법이거든." 그의 말을 들은 두 대마법사의 시선이 넬리어스와 카디어스의 대결로 향했다. 두 초인은 치열하게 공방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아주 미세하게, 얼핏 봐서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우세함이 넬리어스에게 있었다. 8클래스의 경지에 이른 자신들이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보지 못했을 정도로 미세한 승부의 방향. 그것을 아토빌 공작은 자신들과 대결을 벌이며 보았다 는 것이다. 순간 자존심이 퍽이나 상하는 걸 느낀 두 대마법사. 그들에게 아토빌 공작은 돌연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동시에 발산되는 기세. 그것은 마치 수십 톤의 압력이 그들을 짓누르는 듯한 엄청난 기세였다. 아토빌 공작이 말했다. "그래서 난 이제 모든 힘을 다할 것이네. 방심하지 말게나. 즐거운 게임이 시들해지지 않게 말야." 그는 웃고 있었다. 동시에 뿜어지는 기운이 점점 더 가중되고 있었다. "큭!" 라이젠의 입가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항거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기세. 그것을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던 것이다. 스르릉! 동시에 여태껏 허리춤에 걸려 있던 그의 검이 뽑혀 나왔다. 아토빌 공작이 검을 가리키며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일단 그렇게 말한 데에는 이유가 있지. 바로 이 검, 이것은 다름 아닌 대륙 오대 신검 중 하나인 세상을 가르는 패왕의 검이기 때문이네." "패왕의 검!" 라이젠과 레이벨의 얼굴이 처음으로 창백해졌다. 해박한 지식을 지닌 그들이 어찌 그것을 모르겠는가! "서, 설마......" "그렇네. 과거 대륙을 통틀어 가장 암흑기라 불렸던 시기에 등장했던 검이지." "그럴 수가......" 아토빌 공작의 말에 두 대마법사는 넋을 잃은 표정을 지었다. 이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왜냐하면 패왕의 검, 달리 갓 소드라 불리는 이 검은 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신검이기 때문이다. 대륙에서 5개의 절대적인 능력을 지닌 신검을 통틀어 오대 신검이라 한다. 그중 하나가 과거 마왕을 베었던 디멘션 소드이고, 엘프들에게 존재하는 네이처 소드 또한 5대 신검 중 하나다. 다른 3개의 검 중 패왕의 검은 그 역사가 가장 오래되었는데, 실제 패왕의 검은 신검이라 불릴 만한 검이 못 되었다. 굳이 분류하라면 마검에 가까운, 수많은 피를 먹은 검이기 때문이다. 패왕의 검은 아득히 먼 시절에 등장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역사는 현재 기록된 것보다 길어, 부흥과 멸망 을 번갈아 하며 오늘날에 이르렀다. 그러던 중 일부 사람들이 제시하는 이론 중 소위 말하는 암흑 제국과 빛의 제국, 그리고 마도제국설이 존재하는데, 이 중 패왕의 검은 빛의 제국에서 등장한 신검이다. 빛의 제국은 얼핏 들으면 무척 살기 좋은 환경이었을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 빛의 제국은 암흑 제국 시대 보다 더 살기 힘든, 대륙 역사상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한다. 그 시대를 이룩한 이는 천계에서 추방된 신장 중 하나로, 이후 우연찮게 마계로 넘어가 마왕과 결투, 마왕을 죽이는 데 성공한다. 마왕을 죽이면서 그의 힘을 고스란히 흡수한 신장은 마계를 탈출하여 인간계로 넘어오며, 당시 다 망해가는 왕국 중 하나였던 베이드 왕국 국왕의 몸에 들어가 통일 전쟁을 일으킨다. 인간의 몸에 들어간 터라 모든 힘을 발휘할 수 없었지만 그의 힘은 당시 9클래스에 이르는 힘을 발휘할 수 있어 삽시간에 대륙의 모든 왕국을 통합했고, 마침내 하나로 통일된 대륙, 빛의 제국을 세울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장장 200여 년에 이르는 통치를 했는데, 그 당시 행해졌던 가혹한 제도로 인구가 무려 30%나 줄어들 정도로 혹독한 시기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보다 못한 가이아 여신이 신탁을 내리는데, 무려 50여 마리에 이르는 드래곤들이 그를 상대하기 위해 나타난다. 마왕의 힘까지 모두 흡수하고 본신의 힘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킨 신장은 드래곤들을 비웃으며 인간의 껍데기를 벗고 본신의 힘을 모두 발휘했으며, 장장 칠 주야를 싸운 끝에 마침내 힘이 다하여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그 당시 50마리 드래곤들은 신장을 상대로 싸우면서 힘이 부족함을 느껴 헤츨링을 제외한 모든 드래곤들을 동원하기에 이르렀고, 근 150마리에 이르는 드래곤들 중 신장이 쓰러졌을 때 살아남은 수는 고작 50마리에 이르지 못했다. 신장이 쓰러지자 빛의 제국은 빠르게 분열되기 시작했으며, 그의 마법 전파로 인간 마법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 하여 수백 년간의 다툼 끝에 마도제국이라는 새로운 문명을 이룩하기에 이르렀다. 그때, 드래곤들이 모르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신장이 드래곤들에게 쓰러지기 직전 본신의 힘을 자신의 애검에 모두 주입했던 것이다. 검에 자신의 영혼까지 불어넣어 추후 인간의 육신을 차지하여 모든 힘을 회복, 드래곤에게 복수할 계획이었으리라. 그러나 행운이었던지 그의 영혼이 막 검에 들어가기 직전 육체는 소멸하였고, 영혼 또한 함께 소멸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패왕의 검에는 과거 신장이 사용했던 모든 힘이 담겨 있었다. 본래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마검이라는 소리를 듣기에 충분하지만 단 한 번 모습을 드러낸 패왕의 검은 그 쓰임새가 훌륭한 곳에 쓰였기에 마검이 아닌 신검의 반열 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대륙 오대 신검을 말할 때 이렇게 말한다. 가장 예측할 수 없는 검은 디멘션 소드이며, 가장 쓰러뜨리기 어려운 검은 네이처 소드라. 그러나 확고부동한 단 한 가지 사실. 그것은 바로 패왕의 검, 갓 소드가 신검 중 가장 강한 위력을 지니고 있다! 일격에 모든 것을 부숴 버리는 검! 그것이 긴 세월을 지 나 아토빌 공작의 손에 나타난 것이다. 아토빌 공작이 말했다. "이 검의 주인이 되는 데 장장 오십 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행운인지 얼마 전에 검의 주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지. 패왕의 검! 혹은 갓 소드라 불리는 이 힘을 오늘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선보이겠네," "패왕의 검......“ 대륙의 많은 사람들은 아직 인간의 역사가 벨로세크 제 국에서 시작된 줄 알지만 마법사들은 대부분 인간의 역사 가 암흑 제국에서 빛의 제국, 마도제국에서 현재에 이른 것을 잘 알고 있으며, 당연히 당시 빛의 제국에서 발휘된 패왕의 검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일 뿐이다. 오늘 이 자리에서 과거의 잔재와 함께 대륙 최강의 검사를 제거하겠다." 패왕의 검이 나타났다 하여 잠시 주춤했지만 겁먹을 위인은 아니다. 라이젠과 레이벨은 폭풍과도 같은 기세를 뿜어냈고, 아토빌 공작은 그들의 기세에 만족한 듯 웃음을 지었다. "허허허! 아주 마음에 드는군! 좋아, 그 기세여야지. 어디 모든 힘을 보여 봐라." 콰아아아! 패왕의 검에 푸른 오러가 주입되자 검이 미친 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푸른색 오러가 점차 하얀색으로 뒤바꿔더니, 이내 무시무시한 기세를 품으며 하얀색 오러가 뿜어졌다. "모든 것을 부숴 버린다는 역사를 오늘 내가 부숴 주겠다!" 라이젠은 모든 것을 조개 버릴 듯한 기세를 품은 하얀 오러를 상대로 물러나지 않은 채 도리어 양손에 더욱 힘을 집중하고는 그것에 맞서려 하였다. 하지만 그것과 부딪치는 순간, 라이젠은 자신이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콰드드득! 무시무시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와 함께 드러난 광경. 거기에는 라이젠의 손에 어린 푸른 뇌전이 하얀 오러에 의해 부서지면서 삽시간에 형태를 잃어 가는 모습이 보였다. 푸른 뇌전이 형태를 잃음과 동시에 기운이 흩어져 사라지자 그대로 노출된 그의 팔은 순식간에 하얀 오러에 의해 부서지기 시작했다. "크으으으!" 손가락, 손목을 통해 전신으로 번져 가는 어마어마한 기운! 그 고통이 얼마나 강력했던지 라이젠은 뇌리가 하얗게 비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그는 본능적으로 왼손을 들어 기운이 흘러들어 오는 오른손을 어깻죽지부터 잘라 냈다. 서걱! "콕!" 스스로 팔을 잘라 내자 고통에서 해방된 라이젠이 뒤로 물러났다. 그의 안색은 잠시 경험한 고통으로 인해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단 한 번의 공격. 그것으로 라이젠이 자신의 팔을 포기한 것이다. "이럴 수가." 자신의 팔을 스스로 잘라 내는 라이젠의 모습에 레이벨은 경악에 가득 찬 탄성을 내질렀다.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지금 대륙 십대 8클래스 마법사 중 하나인 라이젠이 단 한 번의 공격을 막아 내지 못하여 자신의 팔을 스스로 잘라 냈다. 도대체 저 하얀 오러에 어떤 위력이 숨어 있기에...... 그때, 아토빌 공작의 공격이 재차 감행되었다. 하얀 오러가 다시금 뿜어지자 라이젠이 뒤로 물러나며 외쳤다. "정면으로 맞서지 말고 메모라이즈해 놓았던 한 수로 공격한다." 마지막까지 숨겨 두었던 최후의 한 수! 라이젠은 지금 그것을 사용하자고 외친 것이다. 끄덕.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레이벨이 곧장 마법을 시전했다. 그 마법은 8클래스 최강의 화염 마법! "헬 파이어!" 라이젠과 레이벨의 입에서 동시에 시전어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급격한 흐름을 보이는 마나! 곧이어 태양을 축소해 놓은 듯한 헬 파이어가 생성되어 하얀 오러에 맞서 전진했다. 곧이어 일어난 충돌. 쿠우우웅! 황궁 전체를 울리는 엄청난 폭음! 사실 헬 파이어 두 번이면 황궁을 반파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지금 그것은 황궁을 전혀 파괴하지 못했다. 아토빌 공작이 뿜어낸 하얀 오러에 맞서느라 본연의 위력을 내지 못한 것이다. 두 힘은 팽팽히 대립하는 듯했다. 헬 파이어의 열기는 주변 공기를 모두 증발시켜 버리는 듯했다. 가히 최강의 마법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위력이었다. 하지만 이변은 일어났다. 한참 힘을 겨루던 헬 파이어에 서서히 금이 가더니, 이내 산산이 부서져 버린 것이다. “말도 안 돼!" 두 개의 헬 파이어가 부서지는 것을 보며 라이젠과 레이벨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릅떴다. 어찌 이 광경을 믿을 수 있을까! 8클래스 최강 화염 마법이 지금 눈앞에서 깨져 버린 것이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헬 파이어를 깨 버린 공격은 그대로 두 대마법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재빨리 뒤로 물러서서 메모라이즈해 놓았던 마법을 시전했다. "세이지 실드!" 8클래스 최강의 방어 마법 세이지 실드! 그것이 무려 두 겹으로 시전된 것이다. 하나에서 둘로 합쳐지면 그 위력은 2배가 아닌 3배, 4 배가 된다. 지금의 경우가 그러했다. 하얀 오러는 세이지 실드를 향해 곧장 돌진했다. 콰아아아앙! 강렬한 충격이 퍼져 나가며 하얀 오러와 세이지 실드는 팽팽한 싸움에 돌입했다. "크윽!" "윽!" 만만치 않은 충격이 전신을 휩쓸자 신음을 흘리며 애써 버티는 두 사람. 그러나 전설에 나오는 패왕의 검은 결코 소문에 뒤지지 않는 엄청난 힘을 보유하고 있었다. 과거 150에 이르는 드래곤과 맞서 싸운 신장의 힘! 그 힘이 담긴 패왕의 검은 이 세상 모든 것을 부숴 버 리는 패도의 힘을 담고 있다. 하얀 오러는 곧장 세이지 실드를 부숴 버렸다. 다소 단단했지만 이 정도는 패왕의 검에 있어 번거로운 정도에 불과했다. 쩌저적! 콰앙! "크아악!" 실드가 깨짐과 동시에 엄청난 충격에 두 사람의 몸이 뒤로 튕겨 나갔다. 그와 동시에 아토빌 공작의 몸이 앞으로 쏘아졌다. 쐐액! 그리고 섬전과 같은 속도로 휘둘러지는 검! 레이벨은 자신의 몸을 양단해 오는 검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검이 너무나 빨라 완벽하게 피해 내기란 불가능 했다. 서걱! 필사적으로 몸을 비튼 탓인지 다행히 양분되지는 않았지만 그의 오른팔과 오른 다리가 잘려 .버렸다. "으윽!" 다리가 잘려 균형을 잡지 못하는 레이벨은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아토빌 공작은 쓰러진 레이벨의 목을 베기 위해 재차 검을 휘두르려 했다. 그러나 그때, 라이젠이 모든 마나를 끌어올려 마법을 무차별적으로 난사했다. 퍼벙! 펑! 근접 거리에서 날아오는 마법이라 제아무리 아토빌 공작이라도 몇 발자국 물러날 수발에 없었다. 그 틈을 타 라이젠은 재빨리 레이벨을 챙겼다. 잘린 그의 팔과 파리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팔을 보관한 주머니에 레이벨의 팔과 다리 집어넣은 뒤 외쳤다. "골렘들은 모두 각자의 공간에 대기하라! 그리고 넬리어스! 후퇴한다!" 후퇴를 외친 그는 품에서 스크롤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찢으며 시전어를 외쳤다. "매스 텔레포트(Mass Teleport)!" 혹시나 몰라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챙겨 온 매스 텔레포트 스크롤이 이렇게 유용할 줄 몰랐다. 스팟! 골렘들이 아공간으로 돌아감과 동시에 라이젠과 레이벨의 신형이 빛으로 화하며 사라졌다. 넬리어스도 강한 공격을 카디어스에게 퍼부은 뒤, 뒤로 물러나 텔레포트 스크롤을 찢었다. 곧이어 그의 몸도 새하얀 빛에 휩싸이며 사라졌다. “......” 갑자기 적들이 사라지자 내려앉은 고요한 침묵. 한창 넬리어스와 싸우던 카디어스는 광풍 기사단과 폭풍 기사단에게 명령을 내렸다. "저들을 사로잡아라!" 카디어스가 가리킨 이들은 은탑의 마법사들이었다. "예, 단장님!" 넬리어스와 호각을 이루던 카디어스의 명령에 기사들 존경심 가득한 목소리로 외치며 즉각 행동으로 옮겼다. 수장을 잃은 마법사들은 이미 저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명령을 내린 카디어스는 곧장 아토빌 공작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아버지." 2명의 8클래스 대마법사와 전투를 벌인 아토빌 공작. 카디 어스의 걱정은 당연한 것이다. 상대가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상대한 넬리어스보다 더 강하다고 평가되는 마법사를 2명이나 동시에 상대했으니 말이다. "카디어스." 아토빌 공작은 그에게 다가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리고 카디어스가 아토빌 공작에게 다가가자, 그는 팔을 뻗어 카디어스의 어깨에 둘렀다. "아버지?" 갑작스런 아토빌 공작의 행동에 화들짝 놀라는 카디어스. 그가 놀란 것은 아토빌 공작이 갑자기 팔을 어깨에 두른 것 때문이 아니다. 팔을 두름과 동시에 아토빌 공작의 몸이 무겁게 축 늘어졌기 때문이다. 아토빌 공작이 말했다. "패왕의 검은 인간의 힘이 아니다. 때문에 그 힘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힘이 소모되는 건 당연한 현상이다. 만약 그들이 조금만 더 버텼다면 쓰러지는 건 나였을 거다. 지금 저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으니 잠시만 이렇게 있어 다오." "예." 카디 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패왕의 검을 뽑아 들고 나서 아토빌 공작의 힘은 엄청나다고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팽팽하던 대결을 삽시간에 기울게 했을 뿐만 아니라 라이젠과 레이벨의 사지 몇 개를 잘라 버렸으니 말이다. 그것들을 모두 챙겨 갔으니 다음에 나타날 때는 상처를 모두 회복해서 나타날 테지만 패왕의 검이 지닌 힘을 몸소 겪어 봤으니 함부로 덤비지는 못할 것이다. 잠깐의 시간으로 기력을 어느 정도 회복한 아토빌 공작이 팔을 풀고는 기사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기사들은 어느새 마법사들을 모두 사로잡은 상태였다. 그걸 보며 아토빌 공작이 외쳤다. "자랑스러운 제국의 기사들이여! 그대들은 오늘 제국을 멋지게 수호했다! 보다시피 앞으로 나타날 적은 무섭다. 하지만 겁내지 마라. 그대들의 선봉에는 언제나 나, 아토빌 공작이 있을 테니 말이다!" 부르르! 대륙의 초인인 8클래스 마법사 2명을 압도하던 아토빌 공작의 모습을 떠올리며 기사들은 몸을 떨었다. 아까의 그 대결이 다시금 머릿속에 그려지는 듯했다. 그런 초인이 자신들 편이다: 기사들은 절로 마음이 동하여 외쳤다. "아일라스 제국 만세!" "아토빌 공작 만세!" 절대적인 무위로 절대적인 충성을 얻어 낸 아토빌 공작. 그 대상이 비단 광풍 기사단과 폭풍 기사단만이 아닌 근위기사단까지 포함되어 있자, 아토빌 공작은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이로써 한층 더 가까워진 셈이군.' 아토빌 공작의 눈에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이 땅을 지배할 황제의 자리가! 위기를 기회로 바꾼 아토빌 공작은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하는 속내를 품고서. 10. 엘과 엘리 엔의 조우 대륙이 술렁였다. 최연소 8클래스 마법사의 등장! 그것도 최근 대륙에 풍운을 일으킨 금탑주가 8클래스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에 대륙은 경악했다. 20대 초반의 8클래스 마법사!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8클래스, 이 경지가 얼마나 지고하던가? 그랜드 마스터와 함께 8클래스 마법사는 그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비밀 병기'로 대우받는다. 왜냐하면 그랜드 마스터의 경우 마나 장악력으로 소드 마스터보다 낮은 익스퍼트급 기사들을 일제히 무력화시 킬 수 있으며, 8클래스 마법사는 수많은 이들을 단번에 살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초인 중 누가 더 쓸모가 있느냐? 라고 물으면 그것은 당연히 8클래스 마법사다. 8클래스 마법사는 그 자체만으로도 그랜드 마스터를 뛰어넘는 대량 학살을 자행할 수 있다. 왜냐하면 8클래스 마법은 설사 그랜드 마스터라도 버텨 내기 힘든 엄청난 위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8클래스 마법사들은 자신들의 그러한 위치를 자각하고 스스로 국가에 소속될지라도 중립의 입장에 서게 된다. 행여 자신들의 힘이 악용된다면 얼마나 큰 일이 벌어질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8클래스 마법사가 마냥 자신의 힘을 사용하지 않는 건 아니다. 만약 자국이 침공을 당했을 시에는 서슴없이 자국을 수호하기 위해 나선다. 그걸 잘 알기에 8클래스 마법사를 보유하지 못한 국가는 절대 8클래스 마법사가 존재하는 국가에 침공하지 못한다. 즉, 8클래스 마법사를 보유한 국가는 전쟁 억지력을 가지게 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것은 일반론에 불과하다. 이번에 새로 8클래스에 올라선 금탑주 엘리미스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젊은 나이에 지고한 경지에 오르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 나이에 지닐 수 있는 젊은 혈기가 아직 남아 있을 확률이 높다. 강한 힘을 지녔으면 그것을 사용해 보고 싶은 것이 당연한 사람의 심리. 만약 그가 자신의 힘을 시험해 보기 위해, 그리고 을 위해 그 힘을 사용한다면? 톨리안 왕국 주변에 위치한 왕국들은 버텨 내지 못할 것이다. 단 한 사람의 존재로 뒤바뀔 수 있는 대륙의 판도. 그 존재가 바로 8클래스 마법사였기 때문이다. 당장 내전을 치렀다고 하나 그 피해가 그리 크지 않을 뿐더러 새로 정권을 잡은 제3왕자파의 수장은 다름 아닌 루비어스 백작이다. 금탑과 밀접한 인연을 맺고 있는 루비어스 백작이라면 전쟁을 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렇게 된다면? 대륙은 오대 제국이 아닌 육대 제국으로 불리게 될 것이다. 서부의 맹주국이라 불리는 톨리안 왕국을 견제할 만한 힘을 지닌 국가는 성국과 다른 초인을 보유한 국가들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대륙 중부에 위치해 있어 사실상 톨리안 왕국을 견제하기 어렵다. 즉, 금탑주의 마음이 어떤가에 따라 대륙 서부의 운명이 뒤바뀔 수 있다는 말이다. 바짝 긴장하는 서부 왕국들. 대륙이 술렁이고 있다. *** "그러니까 당분간 머물겠다고요?“ 엘은 갑작스러운 아이넨스의 부탁에 눈을 크게 떴다. "그래, 부탁을 좀 하고 싶군." 아이넨스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의 대답이 엘로서는 의외일 수밖에 없다. 엘이 보기에 아이넨스는 할 일이 있는 사람이다. 그랜드 마스터에 신검을 지닌 그이니만큼 그가 할 일은 당연히 만만치 않은 일일 터. 그런 그가 금탑에 잠시 머물겠다는 말은 엘로서도 상당히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의 생각, 엘은 곧이어 웃으며 승낙했다. "저로서는 환영하는 바입니다." 엘의 입장에서 아이넨스가 금탑에 머물러 주는 것만큼 좋은 일이 없다. 아이넨스는 신검을 다루는 그랜드 마스터다. 본신의 힘은 이곳 금탑 중에서 최고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런 그가 금탑에 머물러 준다면 엘로서는 금탑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있기에 그로서도 이득이었다. 엘의 생각을 어찌 아이넨스가 모르겠는가. 그는 즐거운 듯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아직 엘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어느덧 엘은 자신과 같은 적을 두게 되었다. 9클래스 마스터 루이아스. 지크릴과 같은 수하들을 거느린 그의 힘이라면 결코 혼자 상대할 수 없다. 때문에 아이넨스는 같은 입장에 놓인 엘과 힘을 합하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앞으로 잘 부탁하지." "저도 마찬가지예요." 각자의 생각을 가진 두 사람. 그것은 서로에게 있어 결코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다. “카시아스 왕국으로 갈 생각이에요." “......!” 엘의 말에 실피르를 비롯한 여인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카시아스 왕국은 과거 자신들이 살던 왕국이 아니던가.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짓자 엘이 자세한 설명을 곁들였다. "카시아스 왕국에 대량의 매직 메탈 광산이 발견되었다고 하네요. 매직 메탈이라면 마탑에서 몹시 필요로 하는 광물이잖아요. 때문에 디벨 님과 같이 가려고 생각중인데...... 같이 가지 않겠어요? 오랜만에 가족끼리 나들이를 겸해서요." 얼마 전 카시아스 왕국에서 매직 메탈이 대량으로 발견 되었다는 소식이 대륙에 퍼졌다. 분명 대단한 소식이었지만 그것은 대륙에 널리 퍼지지 못했다. 왜냐하면 때마침 엘이 8클래스의 경지에 올라 그것이 대륙에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분명 매직 메탈이 대단한 광물이기는 하지만 8클래스 마법사의 새로운 등장보다 대단할 수 없다. 덕분에 매직 메탈 발견 사건은 대륙에 널리 퍼지지 않는 비운을 맞이해야 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륙의 시점에 불과했다. 매직 메탈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대륙 상단들이 눈에 불을 켜기 시작한 것이다. 마법을 인챈트시킬 수 있는 환상의 금속, 매직 메탈. 특히 마법사들에게 그 가치를 발휘하는 금속이기에 무척 값비싸다. 더군다나 카시아스 왕국에서 발견된 금속의 양은 무척 많았기에 전매권을 따 내기만 한다면 막대한 부를 창출하는 것은 손쉬운 일일 것이다. 디벨 상단은 물론 다른 대륙 십대 상단들도 참가할 것이 분명했기에 8클래스의 경지에 오른 엘이 직접 카시아스 왕국으로 찾아가 협상을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 과정에 과거 살았던 곳과 지인들을 만나 보는 것은 일종의 나들이. 엘은 그동안 여러 가지 일로 이곳에 있어야 했던 여인들에게 나름대로 보상을 하려고 말을 꺼낸 것이다. 아니다 다를까, 엘의 말에 모두들 기쁜 표정을 지었다. "카시아스 왕국이라니! 정말 오랜만이구나." 실피르가 과거 카시아스 왕국에 살았을 때를 떠올리며 입가에 웃음을 그려 넣었다. 과거 아인하트 후작가의 마수에 도망치듯 숨어들었던 카시아스 왕국인데 지금은 8클래스 마법사가 탑주로 있는 금탑의 마법사가 되어 당당하게 갈 수 있다니. 무엇보다 기쁜 건 8클래스의 경지를 이룩하여 더욱 당당해진 자신의 아들의 모습이었지만 말이다. "정말 기대되네요." "저도요." 세레나와 카이나도 오랜만에 카시아스 왕국으로 간다니 기대가 되는 모양이다. 그런 여인들의 모습을 보며 엘은 미소를 지었다. *** "여기 인가......“ 녹빛 머리가 아름답게 휘날리는 차가운 인상의 미녀가 험준한 계곡을 보며 나직이 중얼거 렸다. 그녀의 이름은 엘리엔. 엘프 숲의 수호검주이자 엘프의 신물인 네이처 소드의 주인 엘리엔이 지금 골든 벨리 초입에 도착한 것이다. 레탄 왕국에서 이곳까지 오는 데 그녀가 겪은 여정. 그것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엘프인 엘리엔은 무척 아름다운 미모를 지니고 있다. 에메랄드 가루를 뿌린 듯 은은하게 빛을 발하는 녹빛 머리와 차가운 인상은 감히 범접하지 못하게끔 하면서도 사람의 소유욕을 자극하는 매력이 있었다. 때문에 그녀를 본 남자들은 모두 그녀를 소유하기 위해 어떠한 공작을 벌였다. 자신의 신분을 내세우고...... 무력을 사용하고...... 심지어 약까지 사용하여 그녀를 가지려 하였다. 그러나 이미 그랜드 마스터에 이르고, 약초술에 능한 엘프인 그녀에게 그러한 것들이 통용될 리 없다. 도리어 그녀는 자신에게 추악한 짓을 벌이려 한 인간들 모조리 죽였다. 그리하여 그녀가 레탄 왕국에서 이곳 골든 벨리 입구까지 오는 데 죽은 사람의 숫자는 물경 1천을 헤아리고 있었다. 절대적인 무위를 지닌 그녀의 힘에 인간들은 아무런 반항조차 못한 채 그녀의 앞길을 여는 수밖에 없었고, 그녀는 엘프 숲에서 벗어난 지 몇 달 걸리지 않아 골든 벨리 입구에 도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만약 그녀가 이곳으로 올 때 왕국이 내전 중이 아니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지도 모른다. "금탑주라...... 너무 찾기 쉬운 이름이었어." 세상을 멸망시킬 수도, 구할 수도 있는 골드 스타를 찾기 위해 그녀는 엘프 숲에서 나와 여러 방면으로 수소문한 끝에 골드 스타의 자격에 부합하는 인물들을 찾아냈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금탑주 엘리미스였다. 어린 나이에 7클래스에 오른 천재 마법사. 게다가 대륙 십대 상단 중 하나의 실질적인 주인이라고 한다. 절로 황금이 모여드는 그를 보며 어찌 골드 스타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금탑주가 골드 스타일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며 금탑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골든 벨리에 도착하기 전 놀라운 소문을 듣게 되었다. 금탑주! 그가 8클래스의 경지에 들었다는 것이다. 그 소문은 엘리엔이라도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20대 초반의 나이! 어떻게 그토록 어린 나이에 그토록 지고한 경지에 오를 수 있단 말인가? 인간보다 월등한 재능을 지닌 엘프들도 8클래스의 경지에 오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 따위가! 그렇게 높은 경지에......! “확인을 할 수 있겠지." 엘리엔은 골든 벨리를 오르기 시작했다. 험준한 계곡이라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범주에 지나지 않는다. 엘프 숲에도 험준한 계곡이 여러 군데 존재한다. 본디 숲이라는 존재에 더없이 친숙한 엘프였기에 엘리 엔에겐 인간들이 잘 닦아 놓은 길보다 이런 험준한 길이 더욱 친숙하고 자연스러웠다. 인간들이 하루는 꼬박 올라야 할 계곡을 엘리엔은 불과 3시간밖에 걸리지 않은 채 도착할 수 있었다. 이는 그녀가 초인의 경지에 들어서이기도 하지만 숲에 더없이 친숙한 엘프란 점에서도 한몫했다. "이건......“ 사람들이 말하는 골든 벨리의 입구에 도착한 엘리엔. 계곡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자욱하게 깔린 검은 안개를 보며 그녀의 눈이 커졌다. 저 안개에 어린 힘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모든 흐름을 비틀어 버린 뒤 그 속에 설치된 마법의 힘. 그것은 그녀가 이룩한 그랜드 마스터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견뎌 내지 못할 만큼 강한 기운이었다. "비틀린 기운은 조화와 균형에 맞지 않아." 골든 벨리 입구에 설치된 다크 포그를 보며 엘리엔은 눈을 빛냈다. 그와 동시에 뽑히는 그녀의 검!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신검 네이처 소드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네이처 소드의 모습은 그 외향만 보면 수수하기 그지없었다. 검신이 은은한 녹빛을 띠고 있다는 것 외에 일반 롱 소드와 다른 점이 전혀 없었으니 말이다. "비틀린 균형을 되잡는 것. 그것이 네이처 소드를 지닌 자로서 지켜야 할 사명." 그녀는 다크 포그를 향해 네이처 소드를 휘둘렀다. 샤악! 네이처 소드의 검신을 닮은 녹빛이 은은하게 퍼지며 다크 포그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작았지만 점점 다크 포그를 품어 가기 시작하더니, 이내 다크 포그가 서서히 사라지고 은은한 녹빛이 자리하고 있었다.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신검, 네이처 소드! 그 힘이 지금 여기서 발현된 것이다. 파앗! 다크 포그의 잔재까지 말끔하게 걷히자 엘리엔이 골든 벨리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침입자!' 오늘도 수련에 빠져 있던 엘은 골든 벨리 입구에 어떤 변고가 일어났음을 깨닫고는 두 눈을 번쩍 떴다. 얼핏 느끼기에도 대단한 기운이었다. '그랜드 마스터다!' 주변의 마나가 한순간 장악된 듯한 기운에 엘은 상대방 이 그랜드 마스터에 이른 검사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데 마나 장악에 어째서 마나가 저렇게 자유로울 수 있지?“ 마나를 장악한다는 건 주변의 마나를 일시에 자신의 통제하에 두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방금 전 느낀 기운에는 마나가 장악당할지언정 그 마나가 결코 속박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통제 속에서 자유로움이 느껴졌다고 할까. "일단 확인해 봐야겠어." 다크 포그를 제거했다면 보통 실력자가 아니라는 뜻. 엘은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마법을 시전했다. 스팟! 7클래스 마법 텔레포트가 곧장 시전되었다. 극히 짧은 시간! 엘은 다른 8클래스 마법사들이 해낼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7클래스 마법을 시전했다. 이것은 엘의 실력이 한층 진일보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엘의 몸이 빛에 휩싸이며 사라졌다. 골든 벨리 입구로 들어서던 엘리엔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감각에 급격한 마나 흐름이 느껴진 것이다. "이건......“ 마나의 움직임으로 보아 결코 평범한 마나 유동량이 아니었다. 최소 7클래스 마법이 발현되는 마나의 움직임이었던 것이다, 급격한 마나 흐름은 곧이어 새하얀 빛을 발생시켰다. 스팟! 그와 함께 한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금발에 금색의 로브를 두르고 있는 청년. 바로 엘이었다. 엘은 허공에서 엘리엔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굽니까? 보아하니 인간은 아닌 듯한데......“ 엘의 시선이 엘리엔의 가려진 얼굴에 향했다. 8클래스에 이른 그는 로브 속 엘리엔의 귀에 걸린 귀고리가 어떠한 마법 작용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무엇보다 엘리엔 주변에 은은하게 퍼져 있는 기도는 인간의 것이라 말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있었다. “......” 엘리엔은 엘이 자신의 정체를 단번에 뚫어 보자 기분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본래 그녀는 인간에게 호의 자체가 없었다. 다만 인간 세계로 나온 이유라면 과연 인간에게 도움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 그리고 인간의 참모습이 어떤지 보기 위해서 나온 것이다. 그런 그녀가 경험한 인간들은 말 그대로 살아 있을 가 치가 없는 이들이었다. 소수의 착한 인간이 존재했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추악하기 그지없는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탐욕스러운 욕망. 그것을 위해 타인을 짓밟고, 타인의 것을 빼앗아야 직성이 풀린다. 실제로 그녀의 미모를 노리고 접근한 수많은 인간들이 있으니 그녀가 인식하는 인간의 평가는 숲에서 나을 때보다 더더욱 안 좋아진 상태였다. 스르릉! 검집에 꽃혔던 네이처 소드가 다시 뽑혀 나왔다. 동시에 뿜어지는 강렬한 기운. 그것은 좀 전에 다크 포그를 제거하던 기운과는 사뭇 다른 살기 짙은 기운이었다. 엘리엔의 입이 열렸다. "내 이름은 엘리엔. 엘프 숲의 수호검주이자 대륙의 운명을 정할 수 있다는 골드 스타를 찾으러 나온 엘프의 사자이다. 난 지금부터 네가 대륙을 구원할 힘이 있는지에 대해 시험을 할 것이다." 콰콰콰콰-! 주변을 잠식하는 무시무시한 기운. 그것은 곧이어 엘을 휩쓸어 갔다. "어 엇!" 아이넨스와 대련을 하면서 그랜드 마스터에 익숙해진 엘이 느껴 보지 못한 엄청난 기운, 마치 주변의 마나 전체 가 엘의 적으로 돌변한 듯하다. 엘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을 때, 엘리엔의 몸이 흐릿해지며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엘을 향해 휘둘러져 오는 네이처 소드! 최고의 아군이 될 수 있었던 엘프가 최악의 적으로 돌변하는 순간이었다. (골든 메이지 8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