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 골든 메이지 5권 지은이: 김현우 발행인: 신현호 출판사: 디앤씨미디어 출판연도: 2008년 4월 21일 봉사자: 김학규 <차례> 1. 성국의 출진 2. 전투 시작! 3. 황탑주와 엘의 대결 4. 접전 part. 1 5. 접전 part. 2 6. 룬 블레이드(Rune Blade) 7. 선택의 기로 8. 카르메인 왕국의 부흥 9. 흑탑주의 힘 10. 슈그르빌의 도움, 상급 마족 베르아문트 성국의 출진 블리어드 제국이 성국과 정식 협정을 맺은 날로부터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 성국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금탑에게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함인 것이다. 소드 마스터조차 진입하지 못하는 금탑의 다크 포그의 존재는 성국에게 있어 가장 뼈아픈 실책 중 하나다. 바로 금탑주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어 막대한 타격을 입은 것이다. 그렇다고 주 국가의 협정을 비밀로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금탑주에게 시간을 주지 않으려면 최대한 빨리 준비를 마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성국의 준비는 놀랍게도 일주일 만에 끝이 났다. 10만에 달하는 성군이 완벽하게 정비된 것이다. 이즈음 성국과 블리어드 제국이 협정 맺은 사실은 서서히 대륙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대륙 도처에 깔려 있는 디벨 상단의 정보망으로 정보를 얻는 엘이 그러한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들이 힘을 합쳤단 말인가........" 엘은 성국과 블리어드 제국이 협정을 맺었다는 사실에 신음을 흘렸다. 블리어드를 지배하던 오스칼 대제가 물러나고 새로운 황제로 알카이드가 즉위했다는 소식을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솔직히 일이 이렇게 될 거라고는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알카이드 같은 사람은 결코 원한을 잊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고두고 이를 갈며 그 원한을 키워 나가는 축에 속한다. 때문에 행여 그가 성국과 손을 잡을지도 모른다고 생각 했는데...... 그것이 지금 현실로 닥쳐 온 것이다. 그것도 군대도 아니고 기사도 아닌 제국 최고의 전력 클라이언 공작과 게이런즈를 지원한다고 한다. 제국을 상징하는 무적 근위병을 지원하는 정도가 아니다. 그야말로 제국을 이루게 하는 근간인 초인 2명을 모두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게이런즈는 공격 부대에 편성해서 말이다. "후...... 힘들겠어." 차라리 10만 군대를 파견했다면 엘이 이 정도로 고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크 포그를 적극 활용한다면 병사 들쯤은 삽시간에 무력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랜드 마스터와 8클래스 마법사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수천 군대 이상의 가치를 지닌 그들의 힘은 절대적 고수를 상대하기 어려운 엘에게 치명적인 비수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게이런즈가 공격 부대에 가담하다니. 클라이언 공작보다 더욱 까다로운 존재가 바로 그인데........ "그걸 알고 그랬겠지만........" 8클래스 마법사의 존재를 생각하자 엘의 얼굴이 흐려졌다. 얼마 전 보았던 8클래스 흑마법사가 떠오른 것이다. 단전호흡으로 인해 내심 8클래스 마법사와 자웅을 겨룰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왔던 엘이다. 하지만 그 자신감을 산산이 부숴 버린 흑마법사와의 만남. 그것은 엘에게 충격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압도적인 마나 프레셔는 7클래스와 8클래스의 현격한 차이를 몸 전체로 느끼게끔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8글래스 마법사의 합류는 엘로 하여금 깊은 근심에 빠져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일단 할 수 있는 모든 수를 동원해야겠어. 교황이 내게 시간을 주지 않으려는 것은 내가 대비를 못하게 하기 위해서니까. 가능한 써먹을 수 있는 모든 수를 동원해서 막아 내야지." 그러면서 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군이 준비하고 블리어드 제국의 지원군을 합쳐 이곳에 도착하려면 약 10일 정도 걸린다. 그 시간 동안 어떤 준비를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위해서는........ 설사 대륙 전체와 맞서 싸우는 한이 있어도 그들을 이겨 내야 한다. 승리를 하기 위해서는 비장의 수를 준비해야 한다. 성국과 블리어드 제국 연합이 깜짝 놀랄 만한 비장의 수를...... 그것을 준비하기 위해 엘은 자신의 연구실로 향했다.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 없었다. 한편, 고심에 빠져 있는 엘을 바라보는 한 쌍의 눈이 있었다. 길게 늘어뜨린 금발에 푸른 눈동자가 더없이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형용하기 힘든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여인, 실피르는 엘을 바라보며 자신도 시름에 잠겼다. "엘리 ........" 그녀는 필사적으로 금탑을 지키고자 하는 엘이 늘 안쓰러웠다. 어찌 그런 마음이 안 들겠는가, 엘의 나이 이제 스물한 살이다. 다시 말해 남들이라면 여인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행복한 가정을 꾸려갈 그런 시기다. 그런데 엘은 어떤 시간을 보냈던가. 이곳에 정착한 뒤 늘 금탑을 노리는 세력들로부터 싸워 왔다. 성녀를 되찾으려는 성국과 영문 모를 목적을 지닌 흑탑으로부터....... 어디 하나 쉬운 세력이 없었고, 그들의 틈바구니 아래 그동안 금탑을 지켜온 엘은 정말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도 힘들어 보였다. 그녀 또한 성국의 침공에 대한 정보를 접했기 때문이다. 그랜드 마스터 다이어드 공작, 8클래스 마법사 게이런즈, 그리고 대신관 6명과 은십자 기사단, 홀리 윙 기사단, 10만에 달하는 성군...... 제국끼리 전쟁을 벌일 때도 이만한 전력을 움직이지 않을 만큼 침공군의 전력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알카이드, 당신이........’ 실피르의 얼굴에 짙은 분노가 서렸다. 이번 성군에 바람을 불어넣은 존재, 알카이드 황제에 대한 분노가 타올랐기 때문이다. 설마하니 그가 이런 일을 벌일 줄은 몰랐다. 황제 자리에 오르기 무섭게 성국에 지원을 약속하여 금탑을 공격하다니. 그 이면에는 알카이드 황제의 추악한 욕망이 숨어 있는 것임을 모르고 있을 실피르가 아니었다. 알카이드는 결코 자신을 쉽게 포기할 자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제는 그 추악한 속에 엘에 대한 원한마저 품고 있지 않은가. 그랬기에 저만큼이나 되는 병력을 동원하게 한 것이리라. 그런 전력을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이 금탑 홀로 맞서야 하다니. 대륙에 존재하는 그 어느 마탑도 이 전력을 상대로 버텨 내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엘은 지금 그 전력에 맞서 싸우려고 한다. 자신의 소중한 존재들을 지키기 위해....... 실피르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더 이상 너 혼자 모든 짐을 짊어지게 하지 않을게. 나를 믿으렴." 굳은 의지가 빛나는 그녀의 눈! 아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그녀는 지난 시간 동안 꾸준히 연구해 오던 것이 있었다. 얼마 전 완성한 그것! 이제 그것을 사용할 때가 온 것이다. 엘의 예상대로 10일이 흐르자 성군은 출진 준비를 마무리 지었다. 이번 원정군의 총사령관인 다이어드 공작이 다소 굳은 표정으로 질서정연하게 도열한 이들을 훑어보았다. 실로 대단한 전력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을 포함하여 초인으로 불리는 이가 2명, 성국 최고의 두 기사단에 10만에 달하는 성군. 가히 제국을 침공할만한 어마어마한 전력이었다. 사뭇 경건한 분위기 속에 굳은 믿음을 바탕으로 전의를 내뿜는 성군을 바라보다, 다이어드 공작은 문득 한편에 서있는 게이런즈를 보게 되었다. 웃는 인상은 서글서글하다. 본래 얼굴은 무척 괴팍하지만 웃고 있으면 영락없는 인상 좋은 노인이었다. 하지만 다이어드 공작은 그런 게이런즈의 진짜 모습을 잘 알고 있다. 목적을 위해 누구보다 잔인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의 잔혹함을. 올곧은 성격을 지니고 있는 다이어드 공작은 그런 게이런즈의 면면을 누구보다 자세히 느낄 수 있었다. 그랜드 마스터에 이르기까지 겪어 온 세월이 그로 하여금 연륜이라는 걸 쌓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종하기 싫다고 하여 세상 모두를 자신 마음대로 할 수는 없는 법. 꼴 보기 싫은 인물이라지만 그의 실력은 진짜배기이고 금탑주를 잡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인물임이 분명 했다. 다이어드 공작이 생각에 잠겼을 때 교황이 모습을 드러냈다. 은은한 광휘에 휩싸인 교황이 등장하자 성군들의 눈이 빛나며 그를 주시했다. 신의 대리인이라 불리는 교황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성군들에게 상징적인 의미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등장에 장내는 조용한 침묵이 잠겨들었다. 교황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언제 봐도 마음이 든든해지는 성군이었다. 이들이 있다면 저 대륙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는 제국이 두렵지 않을 정도로 성군의 기세는 훌륭했다. 지금도 보라, 무려 10만이 넘는 인원이 한자리에 있지만 쥐죽은 듯 조용하지 않은가. 이 정도로 단련된 성군이라면 필시 성녀님을 모시고 을 수 있으리라. 10만여 쌍의 시선을 받으며 교황이 은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출전하기 전 성군의 사기를 충분히 끌어올릴 필요가 있었다. "성전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빛의 자식들이여. 드디어 때가 찾아왔다. 여신님의 가호를 받아 대륙을 구원 하실 성녀님을 모실 기회가! 저 가엾으신 성녀님은 지금도 오만무도한 금탑주의 손아래 갇혀 어떤 고통을 받고 계실지 모른다. 그대들은 흔들릴 필요가 없다. 정의는 우리다. 우리가 정의라 이 말이다. 그대들은 대륙을 구원할 성녀님을 탈환할 빛의 성군이며, 여신님의 보호 아래 있는 여신님의 자식들이다. 죽음을 두려워 말라. 그대들의 숭고한 희생 위에 쌓아진 반석으로 인해 여신님의 축복은 자손만대까지 닿을지니, 가라! 가서 여신님의 위대함을 알려 주고 대륙에 우리 가이아 성국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라!" 와아아아-! 어마어마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교황에게서 뿜어지는 기운은 대륙의 한축을 담당하는 성국의 지배자다웠다. 그뿐만 아니라 그에게서 뿜어진 신성력은 성군의 마음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으며, 특히 여신님의 축복이 내려질 거란 말에 그들은 환호하게 하였다. 지금 벌어질 이 성전에서 순교한다면 그들의 가족은 자손 대대로 축복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평생 여신을 모시면서 여신님을 위해 목숨을 내놓았다고 생각하는데 그 목숨을 대가로 후손들이 축복을 받는 다면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리 길지 않은 연설로 단번에 성군의 마음을 사로잡은 교황은 작게 미소 지었다. 그의 의도가 멋지게 먹혀든 것이다. 이로서 성군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금탑을 공격하게 될 것이다. 피해가 크겠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은 금탑에게 치명적인 비수로 작용할 것이 분명했다. "........자, 출전이다." 성군들의 함성이 서서히 가라앉자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 다이어드 공작이 두 눈을 번쩍 뜨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10만에 이르는 성군의 귓가에 또렷하게 들려왔다. 다이어드 공작이 앞장 선 채 성군이 차례대로 지정된 장소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10만에 이르는 군대를 단번에 금탑 근처로 이동시키기 위한 워프 게이트가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질서정연하게 자리를 벗어나는 성군을 보며 한쪽에 자리하고 있던 게이런즈가 조용히 몸을 움직였다. 그는 로브에 달린 후드를 푹 눌러쓰며 작게 웃었다. "제법이군, 성국. 이 정도라면 충분히 금탑을 제거할 수 있겠어." 알카이드 황제가 약속한 대가를 떠올리며 게이런즈는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일만에 달하는 사람 목숨의 제공. 그것만 있다면 그의 목표인 8클래스 마스터는 물론 숙원인 9클래스의 실마리를 잡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금탑을 토벌하려는 성군이 출전하였다. 화창했던 하늘이 다음에 벌어질 일을 걱정하듯 서서히 검은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전투 시작! 성군이 출전했다는 소식은 곧장 엘에게 전해졌다. 엘은 자신의 예상이 딱 맞아 떨어지자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때로는 예상이 너무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게 슬프군." 애당초 엘이 성군은 출전하는 데 10일의 시간이 걸릴 거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최대한 빨리 준비했을 때의 이야기다. 그런데 성군은 놀랍게도 10일이라는 시간만에 출전을 하고야 만 것이다. "그랜드 마스터와 8클래스 마법사, 그리고 대신관 여섯 명과 성국 최고의 기사단인 은십자 기사단과 홀리 윙 기사단, 성군 십만이라......." 듣기만 해도 대단한 전력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대륙을 대표하는 초인의 가세는 전보다 월등한 전력 향상을 가져왔다. 엘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다이어드 공작은 막을 수 있어. 그렇다는 건 게이런즈를 내가 막아야 한다는 건데...... 과연 내가 8클래스 마법사를 막아 낼 수 있을까?" 그러면서 엘은 무의식적으로 처음 만났던 8클래스 마법사 지크릴을 떠올렸다. 전신을 단번에 옥죄어 버리던 엄청난 마나 프레셔....... 동급의 7클래스 마법사보다 월등한 힘을 지닌 엘로서도 그 정도의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만약 게이런즈도 그 정도의 힘을 보인다면. "아니야. 이길 수 있어." 생각에 잠겼던 엘이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아직 싸움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안 좋은 결과를 생각하는 것은 좋지 않다. 엘은 주먹을 꾸욱 쥐며 자신의 각오를 다시 새겼다. "그래, 상대가 나보다 강하지만 승부는 강한 자가 이기는 게 아니야. 이기는 자가 강한 것이지. 하지만...... 내가 게이런즈를 막는다고 해도 대신관들과 기사단들은 어떻게 막지?" 그것도 문제였다. 다이어드 공작이나 게이런즈만큼 위험하지 않지만 그들 또한 상당한 위협거리였다. 트롤 킹이 있지만 신성 마법에 능한 대신관들로부터 제 능력을 모두 발휘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때, 그런 엘의 귓가에 한줄기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그건 걱정하지 마렴." 고운 여인의 목소리에 엘이 몸을 움찔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금발의 아리따운 20대 후반 미인과 10대 후반의 붉은 머리 미인이 서 있었다. 엘이 목소리에 무의식적으로 답했다. "엄마?" 실피르가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엘에게 말했다. "대신관들과 기사단들은 걱정하지 마렴. 나와 카이나, 그리고 매직 나이트들이 최선을 다해 막아 볼 테니까. 엘리는 게이런즈를 상대하는 데 최선을 다하렴." "하지만........" 자신을 안심시키는 말을 들었음에도 엘은 걱정을 지우지 못했다. 왜냐하면 두 기사단에는 무려 20명이 넘는 마스터가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신관들의 신성 마법으로 그들이 얼마나 강해질지 모른다. 그런 이들을 실피르에게 맞서게 하는 건.... 그들을 희생시키려는 행동과 다름없었다. 엘이 걱정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는지 실피르는 웃음을 지으며 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엘을 포근하게 안았다. "엄마?" 갑작스런 실피르의 행동에 엘의 의문을 담으며 말하자 실피르가 부드럽게 엘의 등을 쓸었다. 그녀는 엘의 귓가에 속삭이듯 작게 말했다. "모든 짐을 혼자 떠안으려 하지 마렴. 네 곁에는 나도 있고 세레나와 카이나도 있단다." 엘은 실피르에게 안긴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염려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적은 강해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요." "후후, 그걸 누가 모르니? 하지만." 실피르가 하던 말을 끊고 엘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녀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이 엄마도 그동안 놀고만 있지 않았단다. 언제고 아들에게 힘이 되어 주기 위해 열심히 준비를 했어. 그러니 이번에는 엄마를 믿어 주렴." 이렇게까지 말하니 믿지 않을 수 없다. 엘은 여전히 염려스러웠지만 실피르가 자신 있게 나오니 선선히 납득했다. "알겠어요. 엄마 말대로 할게요." "엄마는 걱정하지 마. 대신!" 실피르가 다시 한 번 엘과 눈을 마주 했다. 그리고 약간 경직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에는 아들에게 대한 걱정이 배어 있었다. "게이런즈를 상대로 무사할 자신이 있는 거지?" 차마 이길 수 있냐고 말은 하지 못했다. 그녀 또한 마법사. 클래스 간의 실력 격차는 도저히 메울 수 없는 것임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엘이 무모한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에, 엘의 확답을 들음으로써 자신의 걱정을 해소시키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자신이 대신관들과 성기사단을 상대하는 것보다 게이런즈를 상대하는 것이 훨씬 무모한 일이다. "......." 엘은 그런 실피르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그녀가 무슨 답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일은 엘로서도 확답을 내리기 힘들었다. 그는 지금 무모한 도전을 하려고 하는 것이고, 그 무모한 도전으로 살아남을지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지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그만큼 엘은 현실적이었고, 전력의 열세를 인정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하여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엘은 자신의 힘을 믿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는 실피르가 원하던 답과는 조금 다른 답을 내놓았다. "확신하기 힘들어요. 하지만...... 저는 저를 믿어요. 약속할게요, 반드시 살아남겠다고.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믿을게." 거짓으로 확답하는 것보다 훨씬 믿음이 갔기에 실피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은 결코 확답을 내릴 수 없는, 엘로서 처음으로 하는 도전이었다. 엘은 카이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카이나도 무사해야 해. 넌 행복할 자격이 있는 여자니까. 부디 다치지 마." 걱정이 담긴 따뜻한 엘의 말에 카이나가 미소 지었다.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주인님 " 빙그레 미소 지으며 엘은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레이 오크들에 의해 아직 완전히 복구되지 않은 골든 벨리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보며 엘은 자신의 각오를 되새겼다. "그 누구도 내 행복을 넘볼 수 없게 하겠어, 그 상대가 누구라 할지라도." 성국의 침공으로 다시 한 번 단단히 각오를 굳히는 엘. 그런 다짐은 엘로 하여금 한층 더 강한 힘을 지니게 해 주었다. 지킬 것이 있는 자는 강한 법이니까. 워프 게이트롤 통해 성군이 이동하는 것은 신속했다. 10만에 이르는 대군이 움직임에도 이렇듯 신속하게 움 직일 수 있던 것은 다름 아닌 게이런즈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가 어마어마한 마나를 유지함으로써 10만에 이르는 군대는 채 3시간도 지나지 않아 루비어스 백작령에 속한 평야에 도열하게 되었다. 게이런즈가 다이어드 공작에게 물었다. "이대로 가실 거요, 아니면 쉬었다 갈 것이오?' "......." 다이어드 공작이 시선을 옮겨 게이런즈를 바라보았다. 말은 물음이었지만 게이런즈는 이대로 진군하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호감이 가지 않는 상대였기에 그의 의도대로 해 주는 것이 별로였지만 다이어드 공작도 한시라도 빨리 금탑을 토벌하여 게이런즈와 이별하고 싶었으므로 그가 원하는 답을 내놓았다. "이 정도로 휴식할 성군이 아니오. 이대로 진군할 것이오. 모두 진군하라! 곧장 금탑을 향한다!" 자신이 원하던 답을 내놓자 게이런즈가 웃음을 지었다. "허! 그거 마음에 드는 답이구려. 그럼 ........" 다이어드 공작의 외침에 10만의 성군이 서서히 움직이자 게이런즈가 슬쩍 몸을 허공에 띄워 날아가기 시작했다. 보통 10만에 이르는 군대를 통솔하기는 매우 힘들지만 다이어드 공작은 그랜드 마스터에 다다른 그 존재감 하나 만으로도 10만의 성군을 휘어잡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신앙심 하나로 고된 훈련을 견뎌 낸 성군은 그 질적인 면에서도 무척 상위 급이었기에 그들은 짧은 시간 내에 진영을 정비하고 곧장 골든 벨리를 향해 진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군은 골든 벨리 초입에 도달할 수 있었다. 험준하기 짝이 없는 계곡을 보며 다이어드 공작은 전날의 쓴 기억이 떠올라 인상을 찡그렸다. 은십자 기사단과 함께 왔음에도 성녀를 탈환하는데 실패했다. 더군다나 성물의 존재를 노출시키고서도 말이다. 그 때문에 골든 벨리는 다이어드 공작에게 있어 치욕의 장소와 마찬가지였다. 그는 성군을 향해 외쳤다. "이곳 입구부터 무척 험준하니 오늘은 쉬고 내일 아침 일찍 진군한다." "........?" 다이어드 공작의 명령이 뜻밖이었기 때문일까? 성군들은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그의 명령대로 하루 지낼 준비를 분주히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게이런즈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에잉, 성군쯤이야 죽든 말든 무슨 상관이람. 그렇다고 나쁠 건 없지, 나도 만일의 사태를 위해 여벌의 목숨을 준비해 볼까나." 대충 다이어드 공작의 의도를 짐작한 게이런즈는 한곳으로 사라졌다. 자신이 상대할 마법사가 아무리 금탑의 애송이라지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준비를 해 두는 것도 결코 나쁠 것이 없었다. 사실 다이어드 공작은 이대로 진군할 것인가 아니면 이곳에서 하루를 지낼 것인가에 대해 고민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점심시간이 지나고 한창 오후 때였다. 이대로 골든 벨리를 헤치고 다다른다면 그때는 밤이 될 것이 분명 했다. 밤이라고 하니 그것이 떠올라 다이어드 공작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였다. 바로 광휘의 기사단을 단번에 사로잡았던 다크 포그의 존재 때문이다. 소드 마스터조차 무력화시키는 다크 포그는 무척 위험한 마법이다. 행여 그것이 계곡 전체에 펼쳐져 있다면 성국 10만 군대는 삽시간에 전멸하는 건 뻔한 일이다. 어차피 압도적인 전력을 지닌 지금 상황에서 굳이 밤에 진군하여 모험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기에 다이어드 공작은 앞으로 벌어질 결전에 힘을 축적할 겸해서, 지금과 같이 전원에게 휴식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낮이라면 분명 다크 포그를 식별할 수 있을 것이고, 자신과 대신관이 힘을 쓴다면 충분히 길을 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다이어드 공작의 예상은 적중했다. "칫!" 골든 벨리 쪽으로 진입하려다가 돌연 야영 준비를 하는 성군을 보며 엘은 혀를 찼다. 저 성국의 초인은 일신의 무력뿐만이 아니라 무척 뛰어난 지략까지 지니고 있던 것이다. 그렇다. 엘은 다이어드 공작의 짐작처럼 다크 포그를 계곡 전체에 전개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들이 계곡에 들어온다면 분명 밤이 되어서 골든 벨리에 도착할 것이 분명했고, 어둠을 빌어 다크 포그를 은밀히 전개한다면 성군 10만을 삽시간에 무력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절호의 기회가 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눈치 빠른 다이어드 공작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진군을 멈췄다. 그것이 둘도 없는 최선의 선택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엘은 성군을 계곡에 가두어 다크 포그로 무력화시키려는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그리 큰 가능성을 걸지 않았기에 아쉬움은 없었다. 성군의 모습을 한번 스윽 훑은 그는 그대로 계곡 안으로 사라졌다. 엘이 사라지자 조금 떨어진 곳에 한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괴팍하지만 웃는 얼굴은 서글서글한 인상을 지닌 노인 게이런즈였다. 게이런즈는 방금 전 사라진 엘의 모습을 떠올리며 중얼 거렸다. "금탑주라고 했나? 과연, 어린 나이에 대단한 실력을 지니고 있군. 아인하트 후작이 패했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야. 하지만 이게 실력의 전부라면 내일 살아남기 힘들 테지. 후후후!" 그 말과 함께 게이런즈의 몸은 사라졌다. 처음부터 움직임을 읽히고 있는 엘. 그는 싸움의 시작을 앞에 두고 상대에게 고지를 점령당하고 있었다. 이튿날, 계곡 초입 부분에서 이른 아침을 먹은 뒤 다이어드 공작은 곧장 성군을 이끌고 계곡에 진입하였다. 지금 금탑이 자리 잡은 골든 벨리는 본래 수만의 트롤이 살고 있던 계곡이다. 서부의 강대국 톨리안 왕국이 이곳을 토벌할 엄두도 못 냈던 것은 트롤의 강함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라기엔 부족하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험준한 지형 때문이었다. 소수 사람들조차 걸어서 진입하기 힘든 곳이 바로 골든 벨리인데 무려 10만이 넘는 이들이 이곳을 지나려니 오죽 힘들겠는가. 하지만 이런 행군에 도움을 준 것은 다름 아닌 게이런즈였다. 그는 마법을 활용하여 험준하기 짝이 없는 길을 일시적으로 바꾸었고, 그 덕에 늦은 점심시간이 되었을 무렵 골든 벨리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음!" 골든 벨리 입구에 도착한 다이어드 공작은 짙은 안개에 휩싸여 있는 입구를 보며 낮은 신음을 홀렸다. 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넓은 영역에 안개가 내려앉아 있었다. "진군을 중지하라." 안 그래도 전방에 기분 나쁜 안개가 존재했기에 병사들은 다이어드 공작의 명령을 빠르게 받아들여 자리에 멈춰 섰다. 10만의 군대는 모두 진군을 멈추었다. "저것이 다크 포그........" 다크 포그를 본 그들은 그에 대한 감상을 중얼거렸다. 저것이 볼레크 대신관과 광휘의 기사단을 집어 삼켰으며, 이 자리에 있는 은십자 기사단을 무력화시켰다. 초인의 경지에 이르지 않으면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금탑에 이르는 1번째 관문이 바로 다크 포그다. 게이런즈는 다크 포그를 보며 두 눈을 빛냈다. "저게 소문의 다크 포그라는 것인가?" 그 또한 마스터마저 무력화시키는 다크 포그의 소문을 들어보지 못했을 리 없다. "호오....... 마법을 복합적으로 섞었군. 정말 대단해. 자세한 원리는 모르겠지만 저 정도라면 소드 마스터는 가볍게 무력화시킬 수 있겠어." 찬찬히 다크 포그를 살펴보던 게이런즈가 작은 감탄사를 흘렸다. 직접 겪어 보지는 못했지만 8클래스에 이른 그의 안목은 다크 포그가 어떠한 원리로 생성되는 것인지 대략 파악할 수 있던 것이다. 그리고 감탄할 수밖에 없는 것이, 저 전방의 다크 포그를 제거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분적으로 제거하는 것은 가능하다. 8클래스 마법인 헬 파이어나 블리자드를 전개하게 된 다면, 일정 부분에 펼쳐진 다크 포그는 제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그의 능력으로는 다크 포그 일부분만 제거하는 게 가능 할 뿐, 10만의 군대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제거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도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건 다이어드 공작도 마찬가지다. 그에게 3대 성물 중 하나인 사마를 멸하는 신성한 해머가 있지만 그것으로도 다크 포그를 모두 제거하기는 여의치 않았다. 다이어드 공작의 입가에 주름이 잡혔다.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떻게 한다...... 아니!?" 그의 감각에 기이한 느낌이 포착되었다. 재빨리 그곳으로 주의를 기울이니, 상당량의 검은 안개가 주변을 뒤덮고 있는 것이 아닌가? 볼 것도 없다. 다름 아닌 다크 포그였다! 다크 포그가 그들의 후방을 차단한 채 마치 내용물을 채우는 것처럼 서서히 그들을 덮쳐 나가고 있던 것이다. 빠져나갈 곳이 없다. 그렇다면 방법은 2가지 저 다크 포그의 접근을 차단하거나 아니면 그전에 모두 계곡 안으로 들어가는 것뿐이다. 하지만 다크 포그를 차단한다고 해도 상황이 반전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다고 모두 데리고 저 안개를 뚫고 금탑에 진입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다! 정예만 이끌고 금탑 안으로 들어가 모든 상황을 정리하는 것이다. 곧장 판단을 내린 다이어드 공작이 대신관 중 1명을 불렀다. "칼리오 대신관님!" "예, 공작님." 위기를 눈치 챈 탓인지 다이어드 공작의 주변에는 이번 원정에 파견된 6명의 대신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이어드 공작이 물었다. "결계를 쳐서 저 안개의 접근을 막고자 합니다. 대신관님의 힘으로 가능하겠습니까?" "음!" 칼리오 대신관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길 잠시, 그는 고개를 저으며 부정적인 뜻을 보였다. "제 전문 분야가 아닙니다. 신성 결계에 능한 데비어츠 대신관을 중심으로 다른 두 대신관이 힘을 합쳐야 가능할 듯싶군요." "그렇습니까.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데비어츠 대신관님." 다이어드 공작의 말에 데비어츠 대신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공작님." 그러면서 다이어드 공작이 다른 두 대신관을 불렀다. "미앙 대신관님, 게일츠 대신관님이 힘을 합쳐 저 안개를 막아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정예들을 이끌고 금탑에 들어가려고 합니다." "아니, 금탑에 정예들만 이끌고 간다고요? 그럼 성군을 데려온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대신관들이 반문하자 다이어드 공작이 고개를 저었다. "성군을 동원한 것은 성국의 위엄을 살리고자 했던 면이 강합니다. 금탑의 전투 인원은 그리 많은 수가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 성군을 주둔시키고 정예들로 금탑을 치는 것이 훨씬 좋을 것 같습니다." "음 확실히 그렇군요." 금탑의 전력을 정확하게 모르고 있던 대신관들은 다이어드 공작의 말에 순순히 납득했다. 하기야 그들도 일개 마탑에 10만의 군대를 투입하는 건 왠지 납득이 가지 않던 터였다. "그럼 대신관님들에게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면서 다이어드 공작은 한쪽에서 조용히 다크 포그를 바라보는 게이런즈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 시선을 느낀 게이런즈가 다이어드 공작에게 다가왔다. 다이어드 공작이 입을 열었다. "강행 돌파를 하려고 합니다. 탑주님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게이런즈가 미소를 지었다. 가능한 금탑을 빨리 사라지게 하는 건 그도 바라는 바다.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걸 바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대군을 이끌고 가기 어려워 보이는데 소수 정예로 치려고 합니까?" 후방에서 덮쳐오는 다크 포그를 보고 묻는 것이다. 그리고 상황을 정확히 판단, 다이어드 공작의 생각을 짚어 냈다. "그렇습니다." 다이어드 공작이 수긍했다. 정확한 판단력, 역시 8클래스 마법사란 생각이 들었다. 게이런즈가 그런 다이어드 공작의 생각을 알아채고는 나직이 웃으며 말하려던 찰나, 충만한 신성력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다크 포그를 막기 위해 3명의 대신관이 힘을 합친 것이다. 그들은 신성력을 한껏 끌어올리며 동시에 다크 포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파아앗! 새하얀 신성력이 뿜어지며 반투명한 결계가 생겨나며 십만에 이르는 성군을 모두 감쌌다. 정말 대단한 일이 아 닐 수 없었다. "그럼 여기는 저분들에게 맡겨도 되겠군요." 게이런즈의 말에 다이어드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은십자 기사단장 코로네 백작과 흘리 윙 기사단장 레이델 백작에게 말했다. "대신관님 세 분을 모시고 금탑으로 들어간다." "예!" 힘차게 대답하는 그들을 이끌고 다이어드 공작이 앞장섰다. 그리고 그 뒤를 성기사들이 따랐으며, 게이런즈가 한쪽에서 천천히 따라오고 있었다. 그들의 걸음은 다크 포그가 자욱하게 낀 곳에 이르러서야 멈췄다. 다이어드 공작은 어두운 다크 포그를 보며 조용히 워해머를 꺼내 들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이질적인 기운을 제압하는 해머이자 신이 만들어 낸 최고의 물건이라 불리는 3대 성물 중 하나, 사람들은 사마를 멸하는 신성한 해머라 부르는 세인트 해머가 바로 그것이다. 세인트 해머를 쥐고 신성력을 불어넣자 해머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우우웅! 다이어드 공작의 신성력과 공명하면서 은은한 기운이 주변을 압도해 나갔다. 세인트 해머에 한껏 힘이 모여들자 다이어드 공작이 양손으로 해머를 쥐고는 천천히 머리 위로 들었다. 그리고 일격에 모든 것을 부숴 버릴 듯한 기세로 힘껏 세인트 해머를 휘둘렀다. "하압!" 부우웅! 대기를 찢는 파공음과 함께 세인트 해머가 무시무시한 중량감으로 휘둘러졌다. 신성력을 한껏 머금은 세인트 해머는 그대로 전방의 바닥에 충돌하였다. 쩌적! 쩌저적-! 그러자 일어나는 어마어마한 균열. 순간 대기가 요동치는 듯한 현상이 발생하며 세인트 해 머에 서려 있던 신성력이 폭발하듯 뿜어졌다. 파아앗! 대지가 갈라지는가. 신성력은 전방에 가로막은 모든 것을 갈라 버리는 듯한 인상을 주며 다크 포그를 단번에 갈라 버렸다. 그리고 드러나는 풍경! 잘 정돈되어 그 어떤 도시보다 아름다운 모습을 지닌 골든 벨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다이어드 공작의 일격에 의해 다크 포그가 단번에 갈라 진 것이다. 다크 포그를 갈라 버린 다이어드 공작이 세인트 해머를 쥐며 외쳤다. "다크 포그를 갈랐다. 곧장 나를 따르라!" 그러면서 다이어드 공작은 금탑이 있는 곳을 향했다. 그리고 대신관들과 성기사들도 그 뒤를 따랐다. "호오........" 게이런즈 또한 그들의 뒤를 따르며 눈을 빛냈다. 8클래스 마법으로나 제거할 수 있을 것 같던 다크 포그를 다이어드 공작은 비교적 손쉽게 갈라 버린 것이다. "사마를 멸하는 해머라...... 세인트 해머라 부르지? 정말 대단하군. 과연 전설로 전해지는 물건 중 하나야. 정말 대단해." 게이런즈는 신성력을 폭발적으로 증폭시키며 이질적인 기운, 다시 말해 다크 포그를 단번에 제거해 버리는 광경에 적지 않게 놀란 것이다. "저런 힘을 지니고 있다면 금탑을 지우는 건 더욱 쉬운 일이겠군. 후후!" 그의 몸이 두둥실 떠오르며 빠르게 성기사들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다크 포그가 펼쳐져 있는 범위는 무척 넓었다. "음! 정말 대단하군, 금탑주." 다이어드 공작은 저번에 왔을 때보다 다크 포그가 더욱 넓은 범위에 펼쳐져 있음을 알고 신음을 흘렸다. 만약 자신들이 시간을 주고 금탑에 쳐들어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골든 벨리 전역에 다크 포그가 전개되었다 봐도 헛된 생각은 아닐 것 같았다. 그렇게 된다면? 골든 벨리 안으로 진입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미 엘과 한번 만났던 다이어드 공작은 그의 여린 용모 속에 숨겨진 엄청난 능력이 등골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정말 위험하다. 금탑주의 능력은 상상할 범위를 벗어나 있다.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아르디모스 대신관님이 올바른 판단을 한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약 20여 분을 걷자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이어드 공작은 뒤를 힐끗 돌아보고는 성기사들이 바짝 뒤따라오고 있음을 알아차리고는 천천히 다크 포그 범위 밖으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막 다이어드 공작이 다크 포그를 벗어났을 때, 젊은 청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타나!" 쏴아아아! 그와 함께 느껴지는 엄청난 기운! 화들짝 놀란 다이어드 공작이 시선을 측면으로 옮기니, 거대한 활을 들고 있던 골든 나이트가 시위를 있는 힘껏 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기존의 화살과는 비교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황금 화살이 쏘아졌다. 골든 나이트의 기술 중 하나인 골드 피닉스(Gold Phoenix)였다. 골드 피닉스는 막 다크 포그를 빠져나온 그들의 허점을 멋지게 파고들어 그들을 향해 쏘아졌다. "크윽!" 다이어드 공작은 멋지게 허점을 비집고 쏘아지는 골드 피닉스를 보며 신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재빨리 해머를 뽑아 들어 힘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골드 피닉스는 그럴 여유도 주지 않았다. 해머에 충분한 힘이 서리기도 전에, 그들에게 바짝 접근한 것이다! 이대로 골드 피닉스에 적중당한다면 분명 큰 피해를 입을 터. 그렇게 된다면 성녀를 모셔 오는 임무에 막대한 차질을 빚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때, 상황을 본 게이런즈가 두 눈에 빛을 냈다. 금탑을 제거하는 데 차질을 빚는다면 그 또한 상황이 좋지 않게 된다. 그러한 일은 반드시 막아야만 한다. "블링크!" 파앗! 성국 일행 뒤에 있던 게이런즈의 신형이 공간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가 나타난 곳은 다이어드 공작의 앞이었다. 다이어드 공작은 갑자기 자신의 앞으로 게이런즈가 나타나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러자 게이런즈가 다이어드 공작에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번만은 도와 드리겠습니다." 그와 함께 게이런즈가 양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는 휴식 시간을 이용하여 메모라이즈를 해 놓았던 마법을 전개했다. 그 자신이 전개할 수 있는 최강의 8클래스 방어 마법을 말이다. "세이지 실드!" 마법을 전개하자 게이런즈 앞에 투명한 반원형 방어 마법이 생겨났다. 게이런즈가 전개한 마법을 본 다이어드 공작이 두 눈을 부릅떴다. "세이지 실드!" 8클래스 방어 마법 세이지 실드! 성국의 교황이 전개하는 가이아의 가호와 동급으로 인정받는 세이지 실드. 그것은 현존하는 방어 마법 중에서도 최고라는 수식어가 붙어 마땅한 방어 마법이다. 그 마법이 지금 전방에 펼쳐진 것이다! 그리고 세이지 실드는 빠르게 접근하는 골드 피닉스와 충돌하였다. 콰아아앙! 어마어마한 폭음! 골드 피닉스의 강렬한 관통력과 세이지 실드의 막강한 견고함이 서로 겨루면서 강렬한 충격파가 주변을 향해 퍼져나갔다. 그리고 서로 밀고 당기기를 하면서 자웅을 겨루었다. 하지만 결과는 이미 정해진 것과 같다. "큭!" 골드 피닉스에게서 전해져 오는 강렬한 충격파에 게이런즈가 신음을 흘렸다. 당연한 일이다. 세이지 실드가 현존하는 최강의 방어 마법이라지만 골드 피닉스는 이미 세이지 실드와 동급으로 인정받는 가이아의 가호마저 부숴 버린 전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게이런즈가 교황보다 훨씬 실전 경험이 풍부하고 상대의 힘을 상쇄시킬 줄 알아서 이 정도나마 버틴 것 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세이지 실드는 애초에 산산이 부서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인 듯한 상황. 게이런즈는 예상보다 강력한 골드 피닉스의 힘에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언제라도 몸을 뺄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추었다. 그때, 게이런즈의 귀에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피하십시오!" 뒤에서 들려온 다이어드 공작의 목소리에 게이런즈는 한순간 망설임도 없이 블링크를 전개하여 몸을 뒤로 뺐다. 파캉! 게이런즈가 몸을 빼자 주인을 잃은 세이지 실드는 단번에 부서졌다. 그리고 다시 골드 피닉스가 전방을 향해 전진하려던 찰나! 다이어드 공작이 세인트 해머를 골드 피닉스를 향해 휘둘렀다. 부앙! 대기를 찢는 파공음이 들려오고, 신성력을 충만하게 머금은 세인트 해머는 단번에 골드 피닉스를 반으로 갈라 버렸다. 골드 피닉스가 완전히 반으로 갈라지자 다이어드 공작은 세인트 해머를 늘어뜨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위험했군." 빈말이 아니라 정말 위험했다. 방금 전 펼쳐졌던 골드 피닉스의 위력은 세인트 해머로도 쉽사리 제거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위력을 내포 하고 있었다. 만약 골든 나이트가 자신과의 대결에 이걸 사용했다면...... 제대로 된 정보 없이 싸우는 상태에서 당해 버렸을 것이 분명했다. 다이어드 공작은 끝을 알 수 없는 금탑의 힘에 고개를 저어 불안감을 털어 버렸다. 그런 그의 귀에 젊은 청년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환영 인사가 어땠는지 모르겠군요. 나름대로 신경을 쓴 것인데." 목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시선을 옮기니, 그곳에 금색 로브를 걸친 한 청년이 서 있었다. 절대 잊을 수 없는 얼굴과 복장, 다이어드 공작은 그를 보며 나직이 외쳤다. "금탑주!" "오랜만에 봅니다, 다이어드 공작님." 엘이 그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황탑주와 엘의 대결 다이어드 공작을 향해 웃음을 지어 보인 엘은 블링크를 전개하여 그와 10여m 떨어진 곳에 나타났다. 엘은 다이어드 공작을 보며 말을 건넸다. "다크 포그를 갈라 버리고 올 것을 알아 골드 피닉스를 준비했는데 예상을 벗어났군요. 설마하니 전혀 피해를 못 줄 줄이야." 그러면서 난처한 웃음을 짓는 엘. 딴에는 여유를 부리는 것이지만 속으로는 매우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기습적으로 전개한 골드 피닉스로 적어도 적의 전력 상당수를 깎아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이지 실드로 시간을 지연시키고 성물로 마무리를 하다니. 시작부터 우위를 점하고 들어가려던 엘의 계획이 멋지게 무산된 것이다. 그리고 그 계획을 무산시킨 주인공들은 이번 싸움에서 가장 까다로운 상대인 다이어드 공작과 게이런즈였다. 그런 엘에게 다이어드 공작이 신중한 표정을 지으며 세인트 해머를 치켜들었다. 이자만 생포한다면 그동안 성국을 지긋지긋하게 괴롭혀 온 금탑의 존재를 지울 수 있다. "이런, 공작님의 상대는 제가 아닙니다." 자신을 향해 맹렬한 적의를 뿜어내는 다이어드 공작을 보며 엘이 몸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그 틈을 골든 나이트가 날렵한 몸놀림으로 메웠다. 골든 나이트는 어느덧 골든 소드를 뽑아들고 강렬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공작님!" 다이어드 공작을 돕기 위해 접근하던 성기사들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어느새 그들 앞에는 트롤 킹과 실피르, 카이나, 매직 나이트들이 자리하고 있던 것이다. 삽시간에 대결 구도로 들어간 골든 나이트와 다이어드 공작, 그리고 실피르 등을 일별한 엘이 게이런즈에게 시선을 옮겼다. 이제는 눈앞의 상대만 신경 써야 한다. 그는 대륙 최강의 마법사 중 하나니깐. 그는 게이런즈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황탑주 게이런즈 님이신가요? 부족하지만 게이런즈님은 제가 막도록 하겠습니다." "호오........" 자신보다 1클래스 더 높은 자신을 향해 물러섬 없는 모습을 보이는 엘의 모습을 보며 게이런즈가 나직이 감탄사를 흘렸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동급자에게 보내는 감탄사 가 아니었다. 한참 부족한 이에게 보내는 감탄사에 불과 했을 뿐. 게이런즈가 입을 열었다. "과연, 아인하트 후작과 글레톤을 이겼다고 했을 때부터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대로군. 과연 대단해." 그러면서 게이런즈가 손을 휘저었다. 수십 개의 라이트닝 애로우가 생겨나면서 엘을 향해 쏘아졌다. 기습적인 그의 공격에 엘은 양손을 뻗었다. 그러자 9개의 반투명한 막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것은 라이트닝 애로우를 막아 냈다. 콰광! 쾅! 요란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겉모습만 요란할 뿐, 별로 위력은 없었다. 게이런즈가 웃음을 지었다. "이건 인사 대신이라네." 확실히, 위력에 비해 요란한 폭음이 울려 퍼졌으니 인사로 적당한 듯했다. 엘도 마주 웃음을 지었다. "성대한 인사 감사합니다. 그럼........" 엘이 양손을 위로 치켜들자, 수십 개의 매직 애로우가 게이런즈에게 쇄도했다. "훗!" 그것을 본 게이런즈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블링크를 전개했다. 그리고 공간 저편에 나타나자 엘도 마주 블링크를 전개 하여 게이런즈와의 거리를 좁혔다. 엘은 게이런즈에게 5클래스 마법을 내뿜었다. "플레임 버스터!" 붉은 불꽃이 빠르게 게이런즈에게 쏘아졌다. 게이런즈는 그 마법을 피하지 않은 채 오른손을 뻗어 마법을 전개했다. 반투명한 막이 게이런즈의 오른팔에 생겨났고, 그는 그것을 휘둘러 플레임 버스터를 튕겨냈다. 실드였다! 콰과광! "흠!" 불꽃의 폭발을 뒤로하고 엘은 게이런즈에게 다가가 마법을 전개했다. 게이런즈는 엘의 마법을 여유롭게 피해 내거나 막아 냈다. 둘의 마법 공방이 삽시간에 수십여 합까지 이어졌다. 이미 7클래스 마스터에 이른 엘은 5클래스 이하의 마법을 캐스팅 없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 때문에 마법의 응용력 또한 한층 더 발전했으며, 간간히 의표를 찌르는 공격으로 게이런즈의 빈틈을 공략했다. 하지만 게이런즈 또한 대륙에 단 10명뿐이라는 8클래스 마법사였다.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그의 마법 실력은 연륜이라는 무기로 무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의표를 찌르는 엘의 공격도 당황하지 않은 채 유연한 대처로 번번이 막아 내고 있었다. 플레임 버스터로 게이런즈를 튕겨 낸 엘은 재빨리 캐스팅하여 6클래스 마법 썬더 쇼크를 전개했다. 파지직! 날카로운 뇌전이 혀를 날름거리며 게이런즈를 덮쳤다. "웃!" 게이런즈는 그것을 채 막아 내지 못했다. 썬더 쇼크는 그대로 게이런즈에게 적중되었다. 콰과광! 원소계 마법 중 최강의 파괴력을 지닌 뇌전계 마법답게 그 폭발은 대단했다. 방금 전 폭발로 땅거죽이 뒤집히고 자욱한 먼지가 일어났다. "적중 당했다면 한 방 먹인 거겠지." 제대로 적중한다면 수백 명의 병사들을 일거에 몰살시킬 수 있는 마법이니 만큼 엘은 게이런즈를 제거하지 못 하더라도 한 방 먹였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엘의 바람에 불과했다. 자욱한 먼지 속에서 게이런즈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려 온 것이다. "나를 너무 얕보는 게 아닌가?" 그와 함께 강렬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윽!" 눈을 따갑게 만드는 바람에 맞서며 엘이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윽고 서서히 자욱했던 먼지가 걷히고 게이런즈의 모습이 드러났다. 게이런즈의 주변에는 은은한 금빛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방금 전 공격에 전혀 타격을 받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엘을 보며 말했다. "내가 누군지 잊은 것인가? 나는 대륙에서 가장 뇌전계 마법에 능통한 황탑주일세. 그런 나에게 뇌전계 마법으로 타격을 입히려는 건 무리지. 안 그런가?" 게이런즈의 말에 엘은 아무런 말도 못했다. 확실히 그러했다. 황탑주 게이런즈는 대륙에서 뇌전 마법을 가장 잘 다루 는 마법사다. 그의 뇌전 마법은 상대가 누구라도 모든 걸 부숴 버리는 패도를 지향했고, 실제로 그의 적 중 살아남은 이는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했다. 뇌전계 마법이 주특기인 마법사에게 뇌전계 마법으로 타격을 입히려 했다니, 하물며 상대는 대륙에서 가장 뇌전 마법을 잘 다루는 이가 아닌가. 엘은 자신이 경솔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엘의 기색을 알아차린 게이런즈가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이제라도 알았다면 상관없지. 확실히 대단해. 설마하니 나에게 한 방을 먹일 줄이야." 게이런즈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는 설마하니 자신이 엘에게 한 방을 먹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제아무리 엘이 7클래스 마법사라고 해도 어디까지나 자신보다 한참 실력에 부족한 마법사였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동안 축적해 온 연륜이라는 무기로 무장한 자신에게 상대적으로 젊은 엘은 자연히 자신보다 연륜이 부족할 것이라 생각했고, 그로 인해 어느 정도 깔보는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엘은 그의 예상을 뛰어넘는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엘은 단순히 마법 캐스팅이 빠르고 그 위력이 강한 마법을 구사하는 이가 아닌, 정확하고 적절한 마법 응용을 할 줄 아는 마법사였던 것이다. 만약 엘이 썬더 쇼크가 아닌 다른 원소계 마법을 전개 했다면 제아무리 게이런즈라도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그랬기에 게이런즈는 방심을 버리고 엘을 제대로 상대해야 함을 느꼈다. "방심해서 미안하군. 이제 본격적으로 상대해 주겠다." 게이런즈가 양손을 활짝 펼쳤다. 그의 황색 로브가 펄럭이는 듯하더니, 수십 개의 라이트닝 애로우가 마치 장대비처럼 엘에게 쏟아졌다. 게이런즈가 황탑주라는 칭호를 얻게 된 그의 특기 마법! 그 뇌전계 마법이 본격적으로 발휘되기 시작한 것이다. 저 클래스 마법이지만 8클래스 마법사에 의해 발휘된 라이트닝 애로우의 위력은 그 클래스를 뛰어넘는 위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엘은 사방에서 자신을 옥죄어 오는 라이트닝 애로우를 막아서면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읏!" 파앗! 엘의 신형이 블링크에 의해 사라졌고, 그 자리에 쏘아진 라이트닝 애로우가 폭발을 일으켰다. 콰과광! 도저히 2클래스 마법으로 볼 수 없는 폭음이 울려 퍼졌고, 그 폭발 자리로부터 상당히 떨어진 곳에 엘이 자리했다. "합!" 엘은 한손을 뻗으면서 매직 애로우를 전개했고, 수십 개의 매직 애로우가 게이런즈에게 쏘아졌다. "훗!" 게이런즈는 자신에게 쇄도하는 매직 애로우를 보며 코웃음을 치며 블링크를 전개했고, 매직 애로우가 목표를 잃고 방황하며 허망하게 폭발했다. 그리고 20여m 떨어진 곳에 등장한 게이런즈가 엘에게 마법을 전개했고, 엘은 블링크를 전개하며 그 마법을 피해냈다. 콰광! 쾅! 2명의 마법사가 펼쳐 낸 마법이 사방에서 전개되자 주변은 요란한 폭음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각각 푸른빛과 황빛 마법을 전개하는 그들은 한 치의 물러섬 없이 팽팽하게 맞섰다. 피빙! 콰광! 두 사람이 동시에 마법을 전개하고 동시에 블링크를 전개하여 피했다. 그리고 20m 떨어진 곳에 등장하여 서로를 향해 마법을 전개했다. "하압!" "흡!" 두 사람의 애로우 계열 마법이 서로를 향해 쏘아졌고, 매직 애로우와 라이트닝 애로는 서로 충돌하며 폭발했다. "크윽!" 마법이 폭발하는 순간 게이런즈와 엘이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신음을 흘리며 물러난 엘은 게이런즈보다 훨씬 뒤로 밀려나 있었다. 이것은 게이런즈의 마법이 엘의 마법보다 강력한 위력을 지니고 있다는 걸 반증하고 있었다. 또한 제아무리 엘이라도 한 클래스 높은 마법사를 위력 면에서 우위를 점할 수 없는 걸 알려 주는 광경이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밀린 것도 아니기에 그리 낙담할 상황은 아니었다. 그걸 알았기에 게이런즈는 놀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렸다. "정말 놀랍군." 그 말 한마디에 모든 게 포함되어 있었다. 8클래스 마법사인 자신에게 밀리지 않는 엘의 실력, 아직 본 실력을 보이지 않았다지만 평범한 7클래스 마법사였다면 진즉에 나가떨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밀리기는커녕 동수라니! 이는 여태껏 금탑주를 제거하는 것이 여흥으로 여기던 게이런즈의 가슴에 한줄기 불안감을 싹트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이 정도 실력을 보유하고 있는데 만약 이대로 세월이 흐른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마 대륙의 마법계 판도를 뒤흔들 만한 전무후무한 대마법사가 탄생할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분명 마법계에는 좋은 일지만 게이런즈 본인에 게는 좋지 않은 일이다. ‘반드시 죽여야 한다. 지금 이 정도 실력일진대 후일 얼마나 강해질지 모르는 일이다.’ 그는 내심 속으로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 그의 의지를 반영하듯, 황색 빛깔을 머금은 뇌전이 무시무시하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보통 뇌전은 금빛을 띠지만 게이런즈는 특유의 비법 때문에 광채를 잃은 황색 빛을 띠게 되었다. 그 때문에 게이런즈가 황탑주라 불리게 된 것이다. 게이런즈는 8클래스 마법사만이 가능한, 6클래스 마법을 캐스팅 없이 전개하기 시작했다. 우선 전개된 것은 썬더 쇼크였다. 파지직! 뇌전 마법은 원소계 마법 중 가장 빠르고, 가장 강력한 위력을 지니고 있다. 직선적이라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뇌전의 빠르기를 생각하면 딱히 단점이라고 하기도 어려웠다. "가라!" 게이런즈의 외침에 따라 썬더 쇼크가 엘에게 쏘아졌다. "이런!" 엘은 자신이 전개한 썬더 쇼크와 비교도 안 될 만큼 빠르게 쏘아지는 마법을 보고는 본능적으로 몸을 틀었다. 그리고 엘의 바로 옆에 썬더 쇼크가 작렬했다. 콰과광! "크윽!" 마법이 적중하지는 않았지만, 엘은 그 폭발 범위에 말려들었다. 엘은 전신에 상당수 화상을 입고는 비틀거렸다. "이런........" 설마하니 7클래스 마법사와 8클래스 마법사가 전개하는 마법이 이 정도로 차이가 날 줄이야. 8클래스 마법사가 마법을 전개하는 모습을 보지 못한 엘이 범한 치명적인 실수였다. 치료 마법을 사용한다면 치료할 수 있지만 그럴 시간을 게이런즈가 줄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냥 넘기기에는 부상이 컸다. 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것을 본 게이런즈가 미소 지었다. "그래야지, 암." 본래 이렇게 되어야 정상이었다. 7클래스 마법사와 8클래스 마법사의 차이. 그 현격한 실력 차이는 이런 결과를 만들어 내야 옳았던 것이다. 이렇게 되어야만 올바른 전개였던 것이다. "그럼 마무리를 해 볼까." 알카이드 황제에게 데려가기 위해서는 엘을 죽여서는 안 되는 일. 게이런즈는 다시 한 번 썬더 쇼크를 전개하여 엘에게 쏘아 보냈다. 온전한 몸으로도 피하지 못했는데 부상 입은 몸으로 피하지 못할 것이다. 썬더 쇼크는 빠르게 엘에게 쏘아졌다. 하지만 썬더 쇼크가 막 엘에게 적중하려던 찰나, 엘은 블링크를 전개했다. 목표를 잃은 썬더 쇼크는 그대로 폭발했다/ 게이런즈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큭! 쥐새끼 같은!" 시선을 옮기자 폭발 지점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 엘이 등장했다. 그런 엘에게 게이런즈는 체인 라이트닝을 전개했다. 엘은 그때마다 블링크를 전개하여 마법을 교묘히 피해냈다. 반격하고 싶지만 게이런즈의 마법이 너무나 빨라 틈을 잡아 낼 수 없었다. 게이런즈는 미칠 것 같은 갈증을 느꼈다. 속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마법 한 발이 적중하여 다잡는가 싶었는데 상대가 마법을 전개할 때마다 간발의 차이로 피해 내는 것이다. 그것이 여러 번 이어지자 게이런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화가 난 것이다. 게이런즈는 차가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피한다면 어쩔 수 없지. 전 범위에 마법을 전개해 주겠다." 그의 몸이 높은 곳에 두둥실 떴다. 그리고 마법을 캐스팅하기 시작했다. 8클래스에 이른 그만이 할 수 있는 더블 캐스팅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7클래스 마법이 동시에 캐스팅되고 있었다. 그의 목표는 엘, 그가 피할 수 있는 전 범위를 마법으로 공격한다면 피할 수 없을 것이라. 마침내 캐스팅을 끝마친 게이런즈가 마법을 전개했다. "절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썬더 스트라이크(Thunder Strike)!" 파직! 파지직! 순간 공간 전체를 뒤덮는 황색 물결 게이런즈가 전개한 썬더 스트라이크는 공간 전체를 물들이며 사정없이 공간 전체를 향해 쏘아졌다. "큭! 썬더 스트라이크!" 공간 전체를 뒤덮는 썬더 스트라이크를 보고는 엘은 위기임을 느꼈다. 그는 재빨리 비틀거리는 몸을 바로 잡고 마법을 전개했다. 과거 아인하트 후작의 뇌전 마법을 무용지물로 만든 그 마법을 전개하려는 것이다. 엘은 재빨리 마법을 전개했다. "라이트닝 컨덕터(Lightning Conductor)!" 파앗! 엘의 마법에 의해 거대한 쇠침이 생겨났다. 뇌전을 흡수하여 땅으로 인도하는 피뢰침, 엘만이 전개 할 수 있는 마법이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부족하다. 상대는 8클래스 마법사. 그리고 7클래스 마법이 2개나 전개된 만큼 1가지 마법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엘은 재빨리 마법을 전개하여 라이트닝 컨덕터를 다수 소환했다. 그리고 썬더 스트라이크가 작렬할 때 생겨난 라이트닝 컨덕터는 물경 수십 개에 다다랐다. 그 사이 라이트닝 컨덕터는 거침없이 지면을 향해 강하게 내리 꽂혔다. 꽈광! 꽈과광! 물경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 갈 수 있는 썬더 스트라이크였으며, 모든 것을 부숴 버릴 듯한 기세로 내리 꽂힌 썬 더 스트라이크였다. 하지만, 그 자자한 악명과 달리! 썬더 스트라이크는 지면에 내리 꽂힐 때 수십 개의 조각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곧장 피뢰침에 빨려 들어갔으며, 허망하게 땅속으로 사라져 갔다. 뒤이어 쏘아진 썬더 스트라이크도 마찬가지였다. 게이런즈가 전개한 회심의 7클래스 마법 2개가 엘만의 마법, 라이트닝 컨덕터에 의해 허망하게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게이런즈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순식간에 7클래스 마법 두 개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단지 수십 개의 피뢰침만이 포식을 한 듯 간간히 뇌전을 파지직 일으킬 뿐이었다. "......" 요란한 폭음으로 가득하던 엘과 게이런즈가 존재하는 공간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믿을 수 없군." 썬더 스트라이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 게이런즈가 처음 꺼낸 말이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가 전개한 7클래스 썬더 스트라이크는 그가 가장 즐겨 쓰는 마법 중 하나였다. 웬만한 7클래스 마법사가 막을 수 없을 뿐더러, 하물며 그 마법이 5번이나 전개 되었는데 실패했다는 건 믿기 힘든 사실이었다. "저게 무엇이지?" 게이런즈의 시선이 지면에 박혀 있는 수십여 개의 쇠침에 향했다. 썬더 스트라이크가 막힌 것은 분명 저 쇠침 때문일 것이다. 도대체 저 쇠침이 무엇이기에? 게이런즈의 의문이 해소되기 전 선수를 친 건 다름 아닌 엘이었다. 피뢰침 때문에 놀란 게이런즈가 잠시 틈을 내준 사이 치료 마법을 전개한 엘이 공격을 먼저 한 것이다. "그런 공격으로 날 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게이런즈는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파이어 볼을 보며 냉막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의 양손에 황색 뇌전이 어렸다. 그는 양손을 뻗으며 썬더 랜스를 전개했다. 문제는 그 순간이었다. 그가 전개한 썬더 랜스가 갑자기 기묘한 진동을 보이며 지면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아니?" 갑작스런 현상에 게이런즈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현상이란 말인가? 그런 그가 놀라건 말건 엘의 마법은 자비가 없었다. 썬더 랜스가 지면에 있는 피뢰침에 흡수되고, 파이어 볼은 그대로 게이런즈에게 폭발했다. 콰광! 고 클래스 마법사 싸움에서 그리 강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파이어 볼이지만 제대로 적중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왜냐하면 파이어 볼은 적중한다면 충분히 인명을 살상 할 수 있는 마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파이어 볼에 적중당한 게이런즈는 상당한 타격을 입었을 것이라. 아니다 다를까, 폭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게이런즈는 상당히 낭패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8클래스 마법사도 방심하면 작은 칼에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비록 작은 칼이 아닌 저클래스 마법, 파이어 볼이었지 만. "큭! 어찌 이런 일이?" 내상은 입지 않았지만 외상을 입어 버렸다. 게이런즈는 자신이 입은 타격보다 썬더 랜스가 허망하게 사라져 버린 것에 놀란 듯했다. 그 사이 엘은 게이런즈에게 접근하여 마법을 전개했다. 게이런즈는 이를 악 물고는 엘의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방금 전 현상 때문에 함부로 마법을 전개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그 사이 엘은 게이런즈를 몰아붙이며 우세를 점해 나가고 있었다. ‘이길 수 있다!’ 엘의 얼굴에 한줄기 승리감이 떠올랐다. 분명히 몰아붙이고 있는 것이다! 대륙에 단 10명뿐인 8클래스 마법사 게이런즈를! 물론 현격한 실력 차가 존재했지만 게이런즈의 특기인 뇌전 마법을 봉인하고 있었기에 승부는 엘에게 급격히 기울고 있었다. 특기를 봉인당한 게이런즈는 엘에게 연신 밀리고 있었고, 쉼 없이 몰아붙인 탓에 게이런즈는 상처를 치료할 틈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만 몰아붙이면 된다. 그럼 이길 수 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엘은 게이런즈에게 플레임 애로우를 적중시켰다. "크윽!" 플레임 애로우에 의해 어깨가 꿰뚫린 그가 비틀거렸다. ‘마무리!’ 게이런즈의 몸이 멈춘 것을 확인한 엘이 마지막 일격을 가하기 위해 내부를 일거에 뒤집어 버리는 포스 해머를 전개했다. 포스 해머가 막 게이런즈에게 적중하려던 찰나, 그가 돌연 괴성을 질렀다. "크아아!" 그와 함께 전개되는 마법들. 그것은 뇌전계 마법이 아닌 화염계 마법이었다. "이런!" 게이런즈를 끝장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던 엘은 난데없이 화염계 마법이 사방에서 휘몰아치자 재빨리 몸을 뺐다. 포스 해머는 화염에 휘말려 허망하게 사라진 후였다. 쿠우우우! 게이런즈의 주변에 어마어마한 기운이 응집되어 있었다. 그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엘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 일로 깨달은 것이다. 자신의 마법 중 봉인당한 것은 뇌전계 마법뿐이라는 것을. 게이런즈가 입을 열었다. "감히 나를 이 정도로 몰아붙이다니. 그동안 숨겨 왔지만 어쩔 수 없구나." 그 말과 함께 게이런즈가 손을 들었다. 그에 엘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게이런즈의 손에 붉은 기운이 응집되더니 엄청난 속도로 마법이 뿜어진 것이다. "이 런!" 꽝! 엘은 황급히 몸을 피했다. 그러자 그의 신형이 있던 곳에서 큰 폭발이 일어났다. 게이런즈의 공격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의 손에 붉은 기운이 응집되면서 재차 마법이 뿜어지고 있었다. 그 마법 하나하나의 속도가 너무 빨라 엘로서 피하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엘이 경악성을 터뜨렸다. "어떻게 이런 속도를........" 게이런즈가 엘의 의문을 친절하게 풀어 주었다. "그동안 황탑주로 지냈던 것은 내 본 실력을 숨기기 위해서다. 다른 8클래스 마법사들과 싸울 때 사용하게 될 줄 알았던 내 본 실력을 너에게 보이게 될 줄이야........ 하지만 내 본 실력을 본 이상 넌 죽어 줘야겠다." 한 손만 들고 있던 게이런즈가 다른 손도 들었다. 그리고 그의 양손에 붉은 기운이 응집되며 마법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콰광! 콰과광! 엘이 게이런즈의 마법을 피할 때마다 그 장소에 마법이 적중되며 폭발을 일으켰다. 너무나 빠르게 덮쳐 오는 마법으로 인해 엘은 피하기에 급급했고, 차마 반격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 원거리전을 했다가는 절대 승리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엘은 원거리전만 하는 마법사가 아니었다. 근접전도 할 수 있는 마법사인 것이다. 엘은 원거리전에서 승산이 없음을 알고는 자기 자신에게 마법을 전개했다. 아인하트 후작가에서 보여 주었던 근접전을 펼치려는 것이다. "헤이스트! 리터레이트!" 헤이스트 마법이 중첩되어 전개되자 엘의 신형이 마치 빛처럼 빨라졌다. 그리고 엘은 게이런즈의 마법을 피해 내면서 그에게 접근해 나갔다. 마침내 게이런즈의 지척에 접근한 엘은 두 눈을 빛냈다. 그리고 오른손에 아이언 너클 마법을 전개한 채 게이런즈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퍼억! 둔중한 소리! 주먹이 정확하게 복부에 박혀 들었다! "커헉!" 신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게이런즈의 신음이 아니다. 바로 엘의 신음이었다! 그렇다. 방금 전 공격을 성사시킨 것은 엘이 아닌 게이런즈였던 것이다! 초로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게이런즈의 주먹은 짙은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그 공격은 엘의 내부에 그대로 전달되어 엘은 내부가 뒤집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탁! 엘은 게이런즈를 밀어냈다. 그리고 복부를 움켜쥐고 기침을 연발했다. "쿨럭! 쿨럭!" 엄청난 타격이다. 방금 전 일격으로 상당한 내상을 입었다. 엘이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게이런즈를 바라보자 게이런즈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놀랐나? 하기야 놀랄 만도 하지. 하지만 이걸 몰랐군.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8클래스 마법사들은 근접전에도 능숙하다는 것을. 네가 아인하트 후작가에서 근접전으로 재미를 보았다는 걸 듣고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멋지게 걸려들더군. 기다리느라 지칠 뻔했어, 후후!" 상대는 완전히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엘이 근접전을 펼치기를. 그리고 원거리전을 포기하고 근접전을 시도한 엘은 정확히 상대의 의도에 말려든 것이다. "그런 건가....... 하하, 완전히 말려들었군." 엘은 자조의 미소를 지었다. 상대는 자신보다 한 차원 높은 실력자다. 그런데다가 이미 자신의 정보를 얻고 있는데 이렇게 경솔하게 접근전을 시도했다니. 한 방 먹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럼 이제 끝내지. 목숨을 붙여오라고 했지만 뭐, 팔 다리 한두 개쯤은 잘라가도 상관하지 않겠지." 게이런즈의 양손에 붉은 기운이 응집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엘은 순순히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엘은 곧장 블링크를 시도했다. "당연히 블링크를 사용할 줄 알았다!" 그러나 게이런즈는 그런 엘의 생각을 꿰뚫고 있었다. 엘이 있던 장소에 마법을 전개하려는 듯한 제스쳐를 취하던 그는 곧장 엘이 블링크를 전개하여 이동한 곳에 마법을 전개했다. 그것을 본 엘이 화들짝 놀라며 방어 마법을 전개했다. 엘의 전개에 그의 전방에 반투명한 실드가 생겨났다. 하지만 게이런즈의 마법은 그런 엘의 실드를 가볍게 파괴했다! 그리고, 엘의 몸에 마법이 적중했다. "커헉!" 접전 Part. 1 쿠당탕. 마법에 적중 당한 엘이 피를 흘리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어떤 마법이라 정의할 수 없지만 게이런즈의 공격은 정말 강했다. 뇌전 마법보다 더욱 강력한 듯한 그의 공격은 항상 상황을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엘에게 처음으로 ‘패배’란 단어를 떠올리게끔 하였다. 게이런즈는 그동안 엘이 상대한 그 누구보다 강한 상대였던 것이다. 경험, 실력, 연륜에서 모조리 밀린다. 게다가 피뢰침으로 뇌전 마법을 제한했는데도 도리어 그걸 이용하여 엘에게 치명타를 입혔다. 한줄기 희망이던 근접전에서 결정타를 먹었고,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 지금 공격을 받았다. 붉은 피를 흘리며 엘은 몸을 일으켰다. 비록 패색이 짙은 상황이지만 포기할 수 없다. 자신에 게는 지킬 것이 있다. 가족, 소중한 인연들, 그리고 자신을 믿고 있는 골든 벨리 사람들........ 그들을 위해 엘은 결코 쓰러질 수 없었다. "아직도 할 마음이 있는 건가? 재미있군. 후후후!" 이미 상황이 기울 데로 기울어졌는데 계속해서 일어나 전의를 불태우는 엘을 보며 게이런즈가 미소를 지었다. 본래 그러하지 않는가. 반항하지 않는 상대보다 열심히 반항하는 상대가 더욱 괴롭히는 맛이 있는 게. 게이런즈는 한때 자신을 곤경에 빠뜨렸던 엘을 괴롭히는 재미에 빠졌다. "어디까지 버티나 보자, 금탑주." 게이런즈가 가학적인 미소를 지으며 붉은 마법을 뿜어냈다. 엘은 이대로 질 수 없다고 수십 번 의지를 불살랐다. 그는 좋지 않은 몸 상태에서 계속해서 마법을 전개했고, 그럴수록 내상은 깊어져만 갔다. 간간히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오면 최대한 방어 마법을 두텁게 전개했다. 그것 때문인지 최소한의 피해로 막아 낼 수 있었고, 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무려 10분 동안 버텨 낼 수가 있었다. 그렇다고 피해가 없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최소한의 피해로 막아 냈다는 것이지, 전혀 피해가 없는 건 아니다. 데미지는 착실하게 엘의 내부에 쌓이고 있었고, 그것이 점점 견디기 힘든 한계치에 다다르고 있었다. 게이런즈는 그런 엘의 상태를 안 봐도 잘 알았기에 천천히, 여유롭게 엘을 몰아쳤다. 지금도 엘은 게이런즈의 마법을 막아 내지 못했다. "크억!" 몸 상태가 최악이어서 실드 마법조차 전개하지 못한 채 엘은 게이런즈의 마법에 적중되어 비명을 지르며 뒤로 튕겨 나갔다. 그럼에도 엘은 일어났다. 이미 전신 가득 피 칠을 하고 있지만 지킬 것이 있는 그는 꺾일 줄을 모르는 의지를 바탕으로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에 이른 듯하다. 당장 움직이는 것조차 벅찼으며, 게이런즈는 언제라도 그를 죽일 수 있다는 듯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게이런즈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채 엘을 향해 말했다. "이제 한계인가 보군. 쾌 오래 버텼어. 후후후!" 그러면서 그가 마법을 전개하려던 찰나, 한줄기 간절한 고음이 들려왔다. "안 돼, 엘리!" "안 돼요! 이대로 쓰러지면!" "엉?"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게이런즈와 엘의 시선이 목소리의 진원지로 옮겨졌다. 그곳에는 실피르와 카이나가 있었다. 엘이 게이런즈에게 당하는 모습을 보고 외친 것이다. 당장이라도 다가올 듯한 그녀들의 모습을 보며 엘은 외쳤다. "난 괜찮아! 그러니 걱정하지 마!" 지금 그녀들이 이곳에 온다면 게이런즈에 의해 허망하게 희생당할 뿐이다. 더군다나 그녀들도 트롤 킹을 중심으로 성기사들과 교전을 벌이고 있다. 팽팽하기 그지없는 전투에 그녀들이 빠진다면 단번에 전투 상황이 기울 것이 분명했다. 전신 가득 피를 흘리며 외치는 엘의 모습을 부며 게이런즈가 웃음을 지었다. "후후! 눈물 나는 가족애로군 정말 보기가 좋아. 하지만 그것뿐이야." 게이런즈가 마법을 뿜어냈다. 그 마법을 엘은 몸을 틀어 가까스로 피했다. "큭!" 하지만 원활한 움직임이 불가능했기에 엘은 신음을 흘리며 비틀거렸다. 그런 엘의 모습에 게이런즈가 비웃음을 흘렸다. "그만 포기하는 게 어떤가? 승부는 이미 났는데 말이지." "난 포기하지 않아." 엘이 몸을 곧추 세우며 말했다.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그의 눈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흠!" 상황이 절망적임에도 전의가 꺾이지 않은 엘을 보며 게이런즈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다 이내 표정을 바꾸고는 엘에게 말했다. "후후! 그러고 보니 황제 폐하께서 이런 말씀도 하셨지. 금탑주를 생포해 오고 그의 어머니 또한 생포하라는 말을. 과거의 정혼녀를 데려오라고 해서 왠지 궁금했지. 여색을 탐하기에는 지금 그녀의 나이가 삼십 대 중반이기에 말이지. 헌데 오늘 보니 왜인지 이해가 가더군. 과거 블리어드 제일 미녀라는 호칭을 얻을 만해. 안 그런가? 후후후! 아들을 잃은 채 황제 폐하께 넘어간 그녀의 표정이 궁금하군." "네놈........." 엘의 표정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자신을 얼마든지 모욕하든 그런 건 넘겨 버릴 수 있지만 실피르를 모욕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게이런즈도 다 그걸 알면서 엘을 자극한 것이다. 그는 엘을 보며 말했다. "뭐, 이제 가지고 놀기도 질렸으니 슬슬 끝내 주마." 게이런즈의 손이 붉게 빛날 때, 돌연 마법이 그에게 쏘아졌다. 그는 재빨리 양손을 교차하며 방어 마법을 전개했다. 콰앙! "큭!" 마법의 폭발과 함께 게이런즈가 비틀거렸다. 그의 앞에는 엘이 마법을 전개한 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 의표를 찔러 게이런즈를 공격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맹수의 분노에 불을 지핀 것과 같았다. 게이런즈의 눈에 무시무시한 분노가 서렸다. "네 이노옴!" 방심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던 자신에게 일격을 먹이다니! 그것은 게이런즈의 자존심을 금가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게이런즈는 엘을 완벽하게 끝내 버릴 생각을 하게 되었다. "확실하게 끝내 주겠다." 게이런즈의 몸이 허공으로 두둥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극도로 분노한 그는 가장 확실한 8클래스 마법을 전개 하여 엘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상황에 따라 엘을 죽일 수 있다고 알카이드 황제에게 말했기에 게이런즈는 거리낌이 없었다. 어차피 골든 나이트의 비법 같은 거야 서먼 소울로 캐내면 되니 말이다. 허공으로 올라간 게이런즈가 캐스팅을 하기 시작했다. 엘을 확실하게 끝장내 버릴 8클래스 마법을! 우웅! 파아앗! 게이런즈가 캐스팅을 시작하자 엄청난 양의 마나가 그의 주변에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자연의 법칙조차 흔들어 버릴 수 있는 힘, 그것이야 말로 재앙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8클래스 최강의 화염계 마법 헬 파이어가 캐스팅되고 있는 것이다. 엘은 게이런즈가 8클래스 마법을 캐스팅 하고 있음을 눈치채고는 두 눈을 번쩍 떴다. 이 기회를 얼마나 노렸는지 모른다. 게이런즈가 큰 마법을 사용하기를, 빈틈이 드러나는 8클래스 마법을 캐스팅하는 그 순간을 말이다. 엘이 주먹을 치켜들었다. 그 주먹에는 1골드짜리 동전이 쥐어져 있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강의 마법, 제련제강의 마법을 전개했다. 그의 손에 금빛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올 플리체." 전개어를 외치자 금빛 화살이 엘의 손에 쥐어졌다. 엘은 그것을 힘껏 게이런즈에게 던졌다. 쐐액! 금빛 화살이 광채를 뿌리며 빠른 속도로 게이런즈에게 쏘아졌다. 그것은 정확히 게이런즈의 심장을 노리고 있었다. 헬 파이어 캐스팅에 몰두하고 있는 게이런즈는 그야 말로 무방비 상태. 아까 전 골드 피닉스를 막아 내느라 세이지 실드도 써 버렸으니 필시 막아 낼 수 없을 것이라. 엘의 얼굴에 한줄기 빛이 생겨났다. 게이런즈만 물리친다면 성국의 공격을 막아 내는 것이 한층 더 쉬워진다. 황금 화살이 게이런즈의 심장을 꿰뚫기 직전! 엘은 승리를 확신했다. 그런데, 캐스팅을 하던 게이런즈의 입가가 말려 올라갔다. 씨익. 명백한 비웃음. 그것을 본 엘의 가슴에 불안감이 싹텄다. 아니다 다를까, 게이런즈는 캐스팅 하던 동중 한손을 뻗으며 마법을 전개했다. "세이지 실드!" 8클래스 최강의 방어 마법 세이지 실드! 지금 그것이 다시 한 번 게이런즈에 의해 전개된 것이다. 더군다나 캐스팅도 하지 않은 채 말이다! 황금 화살은 그대로 게이런즈의 세이지 실드에 부딪쳤다. 푸캉! 그 위력은 소드 마스터조차 물러서게 만들었지만 8클래스 최강의 방어 마법 세이지 실드를 꿰뚫기에는 역부족 이었다. 한동안 세이지 실드를 관통하기 위해 애쓰던 황금 화살이 점점 기세를 잃더니, 이윽고 소멸하고야 말았다. "이럴 수가!" 엘은 자신의 회심의 일격이 막혀 버린 것을 보고는 경악성을 터뜨렸다. 어찌 안 놀라겠는가! 분명 골드 피닉스를 막을 때 세이지 실드를 전개했다. 캐스팅 없이 전개한 것은 메모라이즈를 한 마법을 전개 했다는 뜻, 그렇다면 세이지 실드는 여분이 없을 텐데....... 그 순간 엘의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엘은 게이런즈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게이런즈를 바라보는 엘의 눈에는 꺾이지 않던 전의가 서서히 수그러들고 있었다. 회심의 일격을 실패한 것에 패배를 직감한 것이다. 그런 엘의 기색을 읽은 걸까? 게이런즈가 웃음을 터뜨렸다. 엘의 전의가 꺾인 걸 그도 느끼고 있었다. "후허허! 드디어 포기한 것인가! 아무렴. 너무 늦게 포기했어. 후후후!" 게이런즈는 언제나 자신의 목숨을 최우선으로 여긴다. 그는 메모라이즈를 할 때도 유사시 몸을 뺄 수 있는 텔레포트와 방어 마법인 여분의 세이지 실드를 저장해 놓는다. 그렇기에 방금 전 엘의 회심의 일격도 세이지 실드로 막아낼 수 있던 것이다. 그로 인해 이제 남은 세이지 실드는 없지만 지금 이 공격으로 끝장을 본다면 그런 것도 상관없게 된다. 언제나 목숨을 우선시했기에 엘의 회심의 일격을 막아낼 호구책을 지니고 있을 수 있던 것이다. "얌전히 죽음을 기다리라!" 게이런즈의 캐스팅에 의해 헬 파이어가 조금씩 그 찬란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불태우는 지옥의 불꽃. 단 한 번의 마법으로 수만에 달하는 인명을 살상할 수 있는 헬 파이어는 최강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캐스팅이 지연되고 있다. "큭! 마나의 흐름을 꼬아 놓았군, 워낙 교묘해서 눈치 채지 못했군그래." 왜 마법이 좀 더 느리게 캐스팅되는지 알아차린 게이런즈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마법만 완성시킨다면 상관없으니까. 그때, 엘이 지면을 박찼다. 그리고 게이런즈가 있는 곳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뭐냐?" 게이런즈가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 붉은 기운이 맺히더니 엘에게 쏘아졌다. 피슉! 게이런즈의 공격이 아슬아슬하게 엘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 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방금 전 마법이 빗나간 건 그의 실수가 아니다. 헬 파이어 캐스팅 때문에 정신이 분산되어 제대로 적중시키지 못한 것이다. 엘은 그의 마법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죽기를 원하는 것처럼 정면으로 게이런즈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런 엘의 모습에 게이런즈가 순간 멈칫했다. 마치 죽으러 오는 듯한 엘의 모습에 정면으로 공격을 퍼부을 수 없던 것이다. 게이런즈의 표정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제기랄.’ 엘을 죽여 버리겠다고 단호하게 마음을 먹은 때가 있지 만 그건 어디까지나 최악의 상황에서 먹은 마음이다. 엘의 머리에는 수많은 유용한 정보가 있기에 죽이기보다 살려서 데려가면 그 가치가 훨씬 뛰어날 것이 분명했다. 게이런즈는 이미 엘이 매직 스톤에 관련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엘을 사로잡아 매직 스톤의 제조 비법만 알아내도 그는 엄청난 이득을 챙길 수 있다. 분명 그 사실을 알카이드 황제도 알고 있을 터, 그런데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 부분에 대해서 묵인 하겠다는 것과 같다. 그러니 게이런즈의 입장에서 엘은 꼭 사로잡아서 데려 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죽자 살자 정면으로 다가오니 게이런즈 로서는 내심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헬 파이어를 캐스팅한 것도 엘이 그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여 그런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된다면 엘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극도로 적어지게 된다. 게이런즈가 격렬한 갈등에 빠져든 사이 엘의 신형이 어느덧 그의 근처에 접근하였다. 그 순간 짙은 절망을 띠고 있던 엘의 눈에 빛이 서렸다. 그는 순간 게이런즈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 황금 화살 2개가 생겨났다. "올 플리체!" 파앗! 황금 화살이 맹렬한 기세로 게이런즈에게 쏘아졌다. "이럴 수가!" 방금 전까지 보인 엘의 모습은 거짓이었단 말인가! 경악의 표정을 짓고 있는 게이런즈에게 황금 화살이 박혀들었다. 세이지 실드도 2발의 황금 화살을 막아 내지 못한 것이다. 그는 경악의 표정을 지은 채 더듬더듬 말했다. "어떻게....... 설마....... 그 모든 것이 연극이었단 말인가?" 엘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반쯤은 진실이었습니다. 정말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으니까요. 하지만 순간 이런 생각이 떠오르더군요. ‘분명 적이라면 날 생포하려 들 것이다. 죽이는 것보다 그 것이 훨씬 이익이 된다.’ 고. 그렇게 생각하니 이렇게 모험을 걸 수 있던 것입니다. 보기 좋게 성공했고요." "큭! 그런가....... 자신을 미끼로 사용했다는 거로군." "도박은 멋지게 성공했지요. 현격한 실력 차가 존재했지만 당신은 패했고 저는 승리를 했습니다." "그런가....... 게이런즈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손을 들어 엘에게 뻗었다. "응?" 게이런즈의 행동에 의아함을 느낀 엘이 고개를 살짝 갸웃할 때, 그의 손에서 붉은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 그것을 본 엘이 화들짝 놀라려던 찰나, 게이런즈의 손에서 마법이 전개되었다. 푸학! 엘의 옆구리 부분 로브가 단번에 날아갔다. 본능적인 위험을 느껴 몸을 틀어 가까스로 피해 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게이런즈의 주변에 수십여 개의 마법이 생겨나더니, 그 대로 엘에게 쏘아진 것이다. "큭!" 엘은 일이 잘못되감을 알아차리고 신음을 흘리며 블링크를 전개했다. 콰아앙! 엘의 신형이 사라지자 그곳에 수십여 개의 마법이 충돌하면서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엘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믿을 수 없는 시선으로 여전히 황금 화살에 꿰뚫려 있는 게이런즈를 바라보았다. 게이런즈는 그런 엘의 시선에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왜? 믿기 힘든 건가?" 파사삭! 그 말과 함께 게이런즈의 몸이 유리처럼 부서져 나갔다. 그러면서 드러난 게이런즈의 모습은 전과 달리 멀쩡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엘이 그런 게이런즈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신음을 흘렸다. "설마....... 환각 마법을 전개한 것인가?" 게이런즈가 피식 웃었다. "너무 늦게 알아차리는군." "이럴 수가." 망연한 표정을 짓는 엘. 그럴 수밖에 없다. 회심의 한 수라 생각했던 제련제강의 마법이 막혀 버린 이상 자신에게 희망은 없던 것이다. "그래, 그래야 옳지." 절망에 젖어드는 엘의 얼굴을 보며 게이런즈가 만족의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지닌 모든 방법을 잃고 거대한 존재 앞에 서게 되었을 때 인간은 절망에 빠진다. 지금 엘의 모습은 그것과 한 치도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럼 이만 끝내지." 게이런즈는 캐스팅하고 있던 헬 파이어에 마나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이걸 전개한다면 엘은 완벽하게 무력화가 될 것이다. "자, 가라! 헬 파이어!" 마지막 캐스팅까지 마친 게이런즈가 지름이 무려 10m나 되는 축소판 태양, 헬 파이어를 전개했다. 화아아아앗! 헬 파이어의 등장으로 주변의 온도가 급격히 상승하며 허공에 태양이 뜬 듯한 착각을 주었다. 그리고 게이런즈의 의지에 따라 헬 파이어는 서서히 엘에게 향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한 엘은 허공에서 자신만만한 웃음을 홀리는 게이런즈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자신이 지닌 모든 패를 활용했지만 게이런즈를 처치하는데 실패했고, 모든 수단을 잃은 그는 8클래스 최강의 화염 마법 헬 파이어를 앞에 두고 있었다. 8클래스 마법. 그건 제아무리 엘이 최강의 7클래스라 하여도 8클래스를 막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런데 눈앞에 8클래스 마법이 캐스팅되고 있다. 보아 하니 완벽한 형태를 갖추고 있어 캐스팅이 다 끝나가는 듯했다. ‘내게 8클래스 마법을 막을 능력이 없다. 정말 이대로 포기해야 하는 건가?’ 엘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그리고 자신이 지니곤 있는 패를 하나하나 점검해 보았다. ‘빠른 캐스팅, 피뢰침, 제련제강의 마법, 근접전.......’ 하지만 모두 게이런즈에 의해 봉쇄되었다. 그것도 완벽 하리라만치. 이제 자신에게 남은 패는 없다. 상식을 뛰어넘는 마법으로 다른 이들을 압도했지만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몸뚱아리밖에 없던 것이다. ‘아냐, 포기할 수 없다. 수를 마련해야 해.’ 엘은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떠올리려 애썼다. 그리고 천천히 살아온 지난날들을 되돌아보았다. 처음 게드릭과 얽히면서 보여 준 마법과 브리온에게 보여 준 마법 실력........ 그리고 아인하트 후작가의 사건....... 알카이드 황태자와 만나면서 그를 공격하던....... ‘알카이드 황태자를 공격하던? 그래, 바로 그거야!’ 짙은 절망이 드리웠던 엘의 눈에 한줄기 빛이 서렸다. 돌파구를 찾아낸 것이다! 그가 알카이드 황태자를 공격할 때 사용했던 그 수법, 그것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러나 확실하지 않은 방법이다. 그때도 거의 우연적으로 성공한 것이기에 이것이 반드시 성공한다고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이것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언젠가 이걸 완성한다면 자신에게 있어 최강의 무기가 될 거라 생각했으니까. "이것에 모든 희망을 걸겠어." 엘이 눈을 감고 캐스팅을 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게이런즈는 헬 파이어 캐스팅을 끝냈다. 그리고 헬 파이어를 엘에게 전개했다. 화아아아앗! 지옥의 불꽃이 뿜어내는 어마어마한 열기가 피부에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 엘은 그것을 보며 조용히 손을 뻗었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마나가 손에 아른거리는 순간, 엘이 힘차게 외쳤다. 자신이 생각하던 최강의 무기! 그것은 바로....... "하트 브레이크!" 콰직!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 그 소리와 함께 지면을 향해 쏘아지던 헬 파이어가 움직임을 멈췄다. 엘이 힘겹게 시선을 위로 옮겼다. 게이런즈 또한 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의 시선 교환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돌연 게이런즈의 입가에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허공에 떠 있던 그의 몸이 비틀거리더니, 지면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은 엘에게 맞추어져 있었다. 그는 처참한 몰골로 자신을 바라보는 엘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경악을 담은 채. "워....... 원거....... 리 캐.......스팅........ 이라니......." 그 말과 함께 그는 눈을 감았다. 그것이 대륙에 존재하는 10대 현자의 최후였다. 콰우우우! 전개자가 죽음을 당하자 마나 공급이 끊긴 헬 파이어가 고삐 풀린 그것처럼 요동치기 시작했다. 잠시 멈춰 있던 헬 파이어는 이윽고 자잘한 폭발을 일으키기 시작했고, 한순간 새하얀 광채를 일으키며 작게 쪼개졌다. 그러자 수백여 개의 화염구로 나눠진 헬 파이어는 우박처럼 지면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후드득! 콰광! 콰과광! 지면에 닿은 화염구는 사방에서 폭발을 일으켰고, 엘이 있는 곳 또한 화염의 폭발에 휩쓸렸다. "엘!!" 멀리서 실피르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화염은 그대로 엘이 있는 곳도 휩쓸었고, 골든 벨리의 한편은 순식간에 불의 지옥으로 화했다. 쿠우우우! 위력이 반감되었지만 헬 파이어의 위력은 무시무시하여 한동안 거센 불길을 일으켰다. 하지만 전개자의 마나 공급이 되지 않는 헬 파이어의 기세는 점차 수그러들기 시작했고, 이윽고 헬 파이어의 불꽃은 완전히 소멸하기에 이르렀다. "......."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에 반투명한 막이 은은한 빛을 발한 채 존재하고 있었다. 그 속에 있는 존재는 다름 아닌 엘! 만신창이의 몸이었지만 어렵사리 실드를 전개하여 화염을 막아 낸 것이다. 기본적인 실드 마법인지라 화염을 완벽하게 막아 내지 못해 곳곳이 불그스름하게 그을렸지만 엘의 안색은 편안했다. 꿈이 아니다. 자신은 대륙에 단 10명뿐인 마법계의 지존, 8클래스 마법사 게이런즈를 꺾은 것이다. "이제 쉴 수 있는 건가........" 게이런즈를 제외하더라도 적은 많다. 그러나 엘은 다른 이들을 믿었다. 자신의 가족들을, 그리고 자신의 부하들을. "제일 힘든 상대를 물리쳤으니 이제 나를 좀 쉬게 해 달라고........" 그 말과 함께 엘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의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맺혀 있었다. 그렇게 금탑에 침입한 성군의 주요 전력 중 하나였던 게이런즈가 죽음을 당하였다. 절대 뒤집을 수 없는 상식이란 걸 완전히 뒤집어 버린 금탑주, 엘리미스라는 존재에게. 접전 part.2 엘이 게이런즈를 막아섰을 무렵, 실피르는 카이나와 매직 나이트, 그리고 트롤 킹과 3기의 골렘을 이끌고 성기사들을 막아서고 있었다. 실피르가 막아 선 이들은 다름 아닌 성국 최고의 성기사단인 은십자 기사단과 홀리 윙 기사단이었다. 게다가 그들을 보조하기 위해 따라온 3명의 대신관도 함께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나아가실 수 없습니다." 실피르가 제일 앞서 성기사들을 막아서며 말했다. 갑자기 미모의 여인이 앞을 가로막자 성기사들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자는 성기사들에게 있어 수호해야 할 인물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실피르가 앞을 가로막음으로 인해 성기사들이 당혹해 하자 칼리오 대신관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작게 성호를 그리며 실피르에게 말을 건넸다. "당신은 누구시기에 우리의 앞을 가로막는 것입니까?" "저 말인가요?" 그러자 실피르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외모는 너무 아름다워 순간 얼굴이 붉어진 젊은 성기사들은 고개를 돌릴 정도였다. 성국의 대신관 중 하나인 칼리오조차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였으니 그 아름다움일 오죽하랴. 그런 칼리오 대신관을 보며 실피르가 자기소개를 하였다. "저는 이곳의 마탑주의 어머니인 실피르라고 합니다." "실피르?"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칼리오 대신관의 표정이 변했다. 그러고 보니 블리어드 제국에서 금탑주가 등장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발단이 아인하트 후작가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는데, 현 아인하트 후작의 딸이 바로 실피르라고 했다. 그렇다는 건 눈앞의 미녀가 과거 블리어드 제국의 제1미녀이자 현 블리어드 제국의 황제인 알카이드 황제의 정혼녀였던 실피르 아인하트라는 것이다. "허....... 블리어드 제일 미녀라 불리던 실피르 양이 금탑주의 어머니였다니........" 교황이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았기에 칼리오 대신관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와 실피르에게 말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소, 실피르 양. 금탑주를 설득하여 성녀님을 성국에 양도한다면 일은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소. 부디 현명하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오." "그럴 순 없어요." 실피르가 미소를 지우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힘 있는 어조로 칼리오 대신관에게 말했다. "비록 여신님에 의해 성녀로 선택 받았다고 하지만 그 아이는 내 아들의 부인이 될 여자예요." 그러면서 실피르가 옆에 서 있는 붉은 머리의 아름다운 여인을 가볍게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카이나의 비단결 같은 붉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 아이도 함께 말이죠." 실피르의 말에 카이나가 얼굴을 붉혔다. "흠흠!" 분위기가 미모하게 변해 버리자 칼리오 대신관이 헛기침을 했다. 그러고는 실피르에게 확답을 구했다. "그러니 결국 협력하지 않겠다는 말이오?" 실피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에요. 그렇지 않다면 제가 왜 이들을 데려왔겠어요?" "그렇구려. 그렇다면 부득이하게 무력을 사용하는 수밖에." 그와 함께 칼리오 대신관이 뒤로 물러나며 코로네 백작에게 눈짓을 하자, 그가 앞으로 나서며 워 해머를 뽑아 들었다. 그러자 성기사들 모두 워 해머를 뽑아들며 경계의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모스가 앞으로 나서며 손을 들었다. "모두 공격 준비." 매직 아머와 매직 소드로 무장한 매직 나이트들도 경계의 태세를 취했다. 당장이라도 피가 흐를 듯한 긴장감이 배어 나오는 상황. 그 팽팽한 분위기를 끊어 버린 것은 칼리오 대신관이었다. 그가 양손을 뻗으며 신성 마법을 전개했다. "매스 블레스(Mass Bless)!" 샤아아! 새하얀 가루가 빛을 발하며 성기사들에게 흡수되듯 사라졌다. 그와 함에 성기사들의 움직임이 급속도로 증가했다. 은은한 성광을 뿜어내며 성기사들이 빠르게 접근하자 트롤 킹이 앞으로 나섰다. "크르르!" 8m에 이르는 거대한 덩치를 앞세운 트롤 킹이 거대한 방망이를 쥔 채 살기를 뿜어냈다. 트롤 특유의 흉악한 생김새와 인간 몸통보다 큰 방망이, 그리고 전신에서 은은히 뿜어져 나오는 검은 기운은 성기사들을 움츠러들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준그랜드 마스터에 해당하는 힘을 지닌 트롤 킹은 이미 소드 마스터조차 압도할 수 있는 엄청난 기세를 발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쿠웅! 트롤 킹이 한 걸음을 내딛었다. 육중한 체구에서 나오는 힘은 지면을 거세게 울리면서 성기사들을 압도해 나갔다. 반면 성기사들은 더욱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트롤 킹, 이 저주받은 마물의 힘을 그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크르?" 패도적인 기세로 성기사들을 압도해 나가던 트롤 킹이 돌연 전진을 멈추었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것이다 처음과 다름없는 진형을 구축하고 있는 성기사들이었지만 전방에 나선 성기사들은 모두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성기사였다. 그들은 다름 아닌 두 기사단에 속한 마스터 급 성기사였다. 트롤 킹의 힘이 만만치 않음을 느끼고 마스터 급 성기사가 앞을 막아서고, 익스퍼트 급 성기사가 뒷받침하는 진형을 구축한 것이다. 은십자 기사단과 홀리 윙 기사단은 성국의 최고 기사단이라는 직책에 걸맞은 실력을 겸비하고 있다. 각지에서 강력한 몬스터를 상대로 싸운 적이 여러 번 있으며, 그로 인해 축적된 경험은 결코 녹록한 것이 아니 다. 지금도 트롤 킹이라는 강력한 몬스터를 상대로 그들은 과거에 여러 번 했던 사냥 모드로 돌입한 것이다. 은십자 기사단의 단장 코로네 백작이 손을 들며 나직이 외쳤다. "포위 성공. 이제 사냥이다. 여신의 축복!" 파앗! 제일 먼저 트롤 킹에게 달려들며 워 해머를 휘두르는 코로네 백작. 칼리오 대신관의 블레스와 여신의 축복으로 그의 움직임은 본래 속도에 비해 몇 배나 빨라져 있었다. 부웅! 대기를 찢는 파공음과 함께 워 해머가 엄청난 무게감으로 휘둘러졌다. 충만한 신성력이 내포되어 있는 그의 워 해머는 일찍이 흉포하다는 여러 몬스터들을 뭉개 버린 경력이 있다. "크르르!" 묵직한 돌덩이 같이 휘둘러지는 워 해머를 보며 트롤 킹도 마주 방망이를 휘둘렀다. 어느새 트롤 킹의 방망이에 검은 기운이 빈틈없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워 해머와 방망이는 서로 충돌했다. 콰앙! 공간을 울리는 어마어마한 소리! 그 충돌이 얼마나 컸던지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그 충격을 은은히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승리는 당연히 트롤 킹의 것이었다. 거대한 몸집에서 나오는 압도적인 파괴력은 일개 인간의 몸으로 맞설 것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두 무기가 충돌하는 순간 코로네 백작의 몸이 붕 떴다. 하지만 그것은 충격을 흡수하기 위해 스스로 몸을 날린 것. 그 덕에 코로네 백작은 그리 큰 충격을 받지 않고 안전하게 착지할 수 있었다. "큭!" 그러나 예상과 달리 코로네 백작의 몸이 순간 비틀거렸다. 그렇다. 그동안 코로네 백작이 상대해 온 몬스터라면 충분히 충격을 분산하고 착지할 수 있겠지만 트롤 킹은 코로네 백작이 그동안 상대해 온 몬스터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힘을 지니고 있었던 것. 게다가 엘이 정신을 지배했다지만 본래 뛰어난 머리를 지니고 있었기에 코로네 백작이 물러서려는 순간 강력한 다크 오러를 뿜어내 내상을 입힌 것이다. 큰 부상은 아니지만 방금 전 충돌에서 트롤 킹이 이익을 본 것은 분명했다. 코로네 백작이 입가에 흘러내린 피를 훔치며 외쳤다. "섣불리 공격하지 마라! 상대는 몬스터답지 않게 강한 힘과 뛰어난 지능을 소유하고 있다." 트롤 킹의 진가는 방금 전 상대한 코로네 백작이 가장 먼저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의 외침에 따라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한 자세를 취하던 성기사들은 좀 더 신중해진 모습으로 트롤 킹의 주변을 포위했다. 잠시 트롤 킹과 성기사들의 대치가 이루어지고, 다시 무기를 고쳐 쥔 코로네 백작을 시작으로 성기사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무려 20명에 달하는 마스터급 성기사들이 트롤 킹을 향해 달려들려고 하자, 카이나의 안색이 심각하게 변했다. 그녀는 가슴 부근에 달려 있는 브로치를 만지며 외쳤다. "마테리얼라이즈" 파앗! 물질 구현화를 위한 외침과 함께 카이나의 전신에 붉은 광채가 뻗어 나갔다. 이윽고 붉은 광채가 사라지면서 드러난 카이나는 전신을 붉은 갑옷으로 무장한 여기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엘이 특별히 순철과 매직 메탈을 섞어 만든 매직 소드 프로스를 치켜들며 오러 블레이드도 견뎌낼 수 있는 디유 레임을 전개했다. 그녀의 애검 프로스는 엘이 특히 심혈을 기울여 만든 마법검이기에 다른 매직 소드가 불가능했던 오러 블레이드의 위력을 흩어 버리는 것이 가능했다. 까앙! 프로스에 맺힌 푸른 마나와 성기사의 새하얀 신성력이 부딪쳤다. "아니?" 카이나와 충돌한 성기사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분명 마스터에 이른 실력자가 아닌데도 마스터에 이른 자신의 해머를 여유 있게 받아 낸 카이나의 모습에 놀란 것이다. 그런 성기사의 모습에 카이나는 투구에 가리지 않은 입을 살짝 말아 올렸다. 실력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실력을 뒷받침해 주는 장비를 중요하게 여기는 엘의 방침으로 그녀는 소드 마스터에 필적하는 힘을 얻었다. 그리고 그 효과를 지금 여기서 발휘하고 있었다. 땅! 카이나가 성기사의 워 해머를 튕겨 내며 오히려 성기사를 몰아쳤다. 특별한 스승 없이 여러 가지 검술을 익힌 그녀는 기초가 부실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 누구도 정형화 된 틀로 가르치지 않은 만큼 그녀만의 독창적인 모습도 소유하고 있었다. "이런........" 상대의 독특한 검술에 미처 적응하지 못한 성기사는 삽시간에 수세에 몰렸고, 수세에 빠진 동료를 돕기 위해 다른 성기사가 카이나를 공격해 들어왔다. 그로 인해 두 명의 마스터를 상대하게 된 카이나는 삽시간에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다. 그런 카이나의 모습을 본 모스가 외쳤다. "모두 카이나 아가씨를 돕자!" 그 말과 함께 12명의 매직 나이트가 뛰쳐나갔다. 성기사의 장점은 방어력이 강하다는 것이다. 반면에 단점은 온화한 신성력을 바탕으로 공격하기에 공격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때문에 마스터급 성기사들의 공격은 오러 블레이드보다 약하다. 그것은 오러 블레이드의 충격을 분산시키기 힘든 매직 나이트들에게 있어 최고의 조건이라 할 수 있다. 받는 충격이 적다면 그만큼 성기사들을 몰아붙일 수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매직 나이트가 합세하자, 3기의 골렘도 나섰다. 그리고 삽시간에 싸움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우선 전력 면에 있어 열세를 면치 못하는 금탑측은 트롤 킹을 중심으로 싸웠다. 준그랜드 마스터의 힘을 지니고 있는 트롤 킹은 압도적인 힘으로 전장을 지배해 나갔다. 하지만 성기사들도 만만치 않았다. 트롤 킹의 압도적인 힘을 대신관들의 신성 마법으로 상쇄시켰으며, 그 틈을 비집고 성기사들이 연신 공략에 나섰다. 그렇게 서로 한 치의 물러섬 없이 팽팽한 싸움을 벌일 무렵, 돌연 칼리오 대신관이 이질적 기운을 느끼고는 외쳤다. "모두 피하시게!" ".......!" 칼리오 대신관의 말에 성기사들은 두말없이 곧장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그 순간 푸른 마력탄이 성기사들이 피한 장소에 쏘아졌다. 콰앙! 삽시간에 주변 지형을 바꿔 버리는 어마어마한 위력! 이 정도 위력이라면 능히 6클래스 공격 마법과 맞먹는다. 성기사들의 시선이 마력탄이 날아온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실피르가 다소 특이한 형태의 막대를 들고 있었다. "아쉽군요." 그녀는 그것의 끝을 성기사들에게 조준한 채 고개를 살짝 저으며 아쉬움을 표했다. 제아무리 성기사들의 항마력이 높다고 하지만 6클래스 마법에 자유로울 수는 없다. 물론 높은 항마력 덕분에 죽지는 않겠지만 전투 불능의 상태에는 빠져 들 수 있었다. 더군다나 방금 전 위력이라면 한 번의 공격에 여러 명을 무력화 시킬 수 있을 만한 위력이었다. 때문에 성기사들은 순간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런 성기사들을 향해 실피르는 최악의 소리를 했다. "이제부터 연사로 갈 테니 잘 막아 보세요." 우웅! 그 말과 함께 실피르가 조준하고 있는 막대에서 푸른 마나가 응집되기 시작했다. 보기만 해도 막대한 양의 마나가 응집되는 것이 느껴졌으며, 약 10여 초의 시간이 흐르자 실피르의 막대 끝에 뭉친 마나가 그대로 쏘아졌다. 그런데 돌연 실피르가 조준을 바꾸었기에 마력탄은 전혀 다른 곳을 향해 날아갔다. 그곳은 마스터급 성기사들을 뒷받침하던 익스퍼트 급 성기사들이 밀집된 곳이었다. 갑자기 마력탄이 날아오자 그들은 재빨리 몸을 피했다. 콰앙! "큭" 하지만 마력탄의 속도가 워낙 빨랐다. 반 정도 되는 성기사들은 몸을 뺄 수 있었지만 나머지 반에 해당하는 성기사들은 그대로 마력탄의 폭발에 휘말린 것이다. 워낙 항마력이 높기에 죽은 이는 없었다. 하지만 꽤 심한 상처를 입어 전투를 계속하기에는 어려워 보였다. 칼리오 대신관은 방금 전 마력탄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찌 안 그러하겠는가! 최소 6클래스의 위력을 지니고 있는 마력탄을 불과 10여 초 만에 전개했다. 실피르가 들고 있는 막대는 보건데 아티팩트일 것이 분명할 터. 만약 그녀가 그것을 무제한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 절로 등골이 서늘해지는 전개가 아닐 수 없었다. 칼리오 대신관이 시선을 옮겨 실피르가 지닌 막대 끝을 자세하게 살폈다. 우선 일반 스태프보다는 다소 짧은 형태였다. 특이하게 반대쪽 끝부분은 컵 같은 형태를 하고 있었고, 마나를 응집하던 부분은 뾰족했다. 그리고 그리 면적이 넓지 않은 막대 곳곳에는 복잡한 룬어가 얽혀 있었다. 순도 높은 매직 메탈을 다수 사용한 것으로 보아 어마어마한 돈과 노력이 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의 정체가 궁금하셨나 보네요." 실피르가 막대를 보며 슬며시 웃음을 흘렸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그동안 절차부심하여 만든 역작이다. 이 정체를 확인한다면 엘조차 놀랄 정도로 대단한 물건이라고 그녀는 자신했다. 그녀는 막대를 소중하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것을 이름 붙이길, 매직 스틱(Magic Stick)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제 모든 마법의 정화가 깃든 것이죠." 그러면서 실피르는 매직 스틱이라 불린 막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실피르의 현재 경지는 6클래스 마스터다. 그런 그녀는 카시아스 왕국에 살 때부터 엘에게 캐스팅 시간을 줄이는 마법 공식과 단전 호흡, 그리고 갖가지 재주들을 알게 모르게 익혔다. 매직 스틱도 그중 하나다. 엘은 실피르와 이야기를 하면서 우연히 지구의 총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일정한 마나를 공급하는 장치와 마나를 응집하는 것. 그리고 그 마나를 빠르게 쏘아 보낼 수 있는 추진력을 갖추면 그 누구도 무시 못할 대단한 아티팩트가 만들어질 거라 하였다. 그리고 실피르는 엘의 말에서 힌트롤 얻게 되었다. 우선 마나를 공급하는 장치에는 매직 스톤이 있다. 엘에게 매직 스톤을 만들 수 있는 매직 실(Magic Seal)을 얻었기에 매직 스톤을 만드는 건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다. 게다가 마나를 응집하는 것은 축적진과 비슷한 개념이 어서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영역이었다. 마지막으로 추진력은 바람을 압축하는 원소계 마법에 존재했기에 모든 조건은 갖추어진 셈이었다. 그렇게 연구에 빠진 지가 2년여. 금탑이 그레이 오크의 침공을 막아 냈을 때 그녀의 역작, 매직 스틱은 완성되어 있었다. 그것도 매직 스톤이 있는 한 무한정 사용할 수 있는 희대의 무기가 말이다. 우선 매직 스틱 위에 존재하는 홈에 매직 스톤을 끼워 넣는다. 그렇게 되면 매직 스틱에 새겨진 마나 흡수진이 매직 스톤의 마나를 흡수하기 시작하고, 전도 현상을 이용하여 반대편으로 향하게 한다. 그리고 응집진에 의해 끝 부분에 뭉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매직 스톤에 모든 마나를 흡수하면 전개어를 외쳐 마력탄을 방출한다. 여기에는 에어 블래스트 마법이 걸려 있어 전개될 시 마력탄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조준된 장소에 쏘아지게 된다. 매직 스톤 하나에 저장할 수 있는 마나의 양은 6클래스 마법 한 번을 전개하는 마나의 양과 비슷했기에 마력탄은 6클래스 마법과 비슷한 위력을 발휘한다. 매직 스틱이 매직 스톤에서 마나를 모두 흡수하는 시간 은 10초 정도. 즉, 매직 스톤만 있다면 실피르는 10초마다 6클래스 마법과 맞먹는 마력탄을 무한정 발사할 수 있는 것이다. 매직 스톤이야 길가에 굴러다니는 괜찮은 모양의 돌만 있으면 무한정 생산해 낼 수 있으니 공급에 문제는 없다. 즉, 마력탄을 사용할 매직 스톤은 무한하다는 말이다. 그것은 매직 스틱을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공포로 다가 드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아......." 상념에서 빠져나온 실피르가 전방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좀 전과는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며 말했다. "이대로 물러서시길 권장하는 바예요. 방금 전 공격은 무한정 가능하거든요." 실피르의 말에 칼리오 대신관을 비롯하여 성기사들의 안색이 바뀌었다. 6클래스 위력의 마력탄을 무한정 전개할 수 있다니. 그것은 다른 의미의 악몽이라 할 수 있다.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마력탄의 존재로 인해 가뜩이나 상대하기 어려운 트롤 킹을 상대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정말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상대하기 어려운 존재를 앞에 두고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상황이라면 그 누구도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으음......." 칼리오 대신관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는 지금 결단을 강요받고 있는 것이다. 저 매직 스틱의 희생자가 되고 싶지 않다면 물러서라고. 안 그러면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고. 칼리오 대신관의 입장에서 성녀님을 모셔 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기사들의 안위도 중요하다. 성기사들이야 말로 성국을 대표하는 자랑이자 근간의 힘이었기 때문이다. 쿠웅! 그때 어마어마한 폭음이 들려왔다.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들리는 폭음이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옮겨졌다. 그리고 그들은 볼 수 있었다. 8클래스 마법사 게이런즈에 의해 사정없이 당하고 있는 금탑주의 모습을. 확연한 실력 차를 과시하기라도 하듯 게이런즈는 압도적인 힘으로 금탑주를 몰아치고 있었다. "커헉!" 당하기가 무섭게 금탑주가 게이런즈의 마법에 적중되어 쓰러졌다. 그런 금탑주의 모습을 즐기듯 바라보던 게이런즈가 마법을 전개하려 하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여유가 흐르던 실피르가 초조한 안색으로 외쳤다. "안 돼! 엘리!" 카이나 또한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한 자세로 외쳤다. "안 돼요! 이대로 쓰러지면!" 그녀들의 외침에 게이런즈와 금탑주의 시선이 잠시 이곳으로 향한다. 금탑주는 애써 자신이 괜찮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게이런즈에게 맞서 가는 그의 모습은 당장 쓰러질 거라고 봐도 무방했다. 칼리오 대신관은 성국을 진동케 하였던 금탑주를 일방적으로 몰아치는 것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과연...... 대륙을 대표하는 8클래스 마법사 중 한 사람이란 말인가.’ 막연히 강하다는 말만 들었는데 저것은 인간의 강함이 아니었다. 괴팍한 외모 속에 저런 힘이라니. 하기야, 그 정도로 강하기에 성국의 수호신 다이어드 공작과 동급의 초인으로 대우받는 게 아닌가. 칼리오 대신관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보아하니 승부는 게이런즈의 승리로 끝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자신들이 굳이 이들과 싸울 이유가 없다. 어차피 금탑의 중심은 금탑주일 터, 굳이 불필요한 희생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는 불안감어린 실피르를 향해 말했다. "과연, 실피르 양의 말이 맞는 것 같소. 그러니 우리는 잠시 휴전을 하는 것이 어떻소." "........" 칼리오 대신관의 말에 실피르는 매직 스틱을 치켜들었다. 그러더니 칼리오 대신관을 보며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해 주지 않네요. 저는 한시라도 빨리 당신들을 쓰러뜨리고 엘리를 도우러 가야겠어요." 상황을 보고 마음이 바뀐 실피르의 반응에 칼리오 대신관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그럼 어쩔 수 없구려, 피를 보는 수밖에." 그의 양손에 새하얀 신성력이 충만하게 맺히기 시작했다. 실피르가 저렇게 반응한 이상, 확실하게 상대해 주기 위함이다. 그런 칼리오 대신관의 뜻을 알아차렸는지 다른 두 대신 관도 신성력을 응집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트롤 킹! 다크 오러로 이루어진 저 마물을 상대하려는 것이다. 그들만큼 마물을 제압하는데 있어 탁월한 실력자는 없다. 이윽고 주문을 마친 칼리오 대신관이 양손을 힘차게 뻗었다. 그는 양손을 십자로 교차하며 전개어를 외쳤다. "그랜드 크로스!" 뒤이어 두 대신관도 그랜드 크로스를 전개했다. \ 파앗! 순백의 십자가가 뻗어 나간다. 그것은 거침없이 트롤 킹에게 향했다. "크르르!" 트롤 킹이 방망이를 휘둘렀다. 다크 오러가 충만하게 맺힌 방망이는 순백의 십자가를 단숨에 갈라 버릴 듯 요동쳤다. 순백의 기운과 칠흑의 기운 두 기운이 서로 부딪쳤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신성력을 가볍게 튕겨 내던 다크 오러가 그랜드 크로스에 의해 흩어지는 것이었다. 그랜드 크로스! 다크 오러를 제압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이 신성 마법은 다른 말로 어둠의 사냥이라 불린다. 일부 대신관만이 펼칠 수 있는 그랜드 크로스는 그 믿음이 유난히 깊은 가이아 대신관에게 펼쳐지자 훨씬 강한 위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랜드 크로스는 다크 오러를 제압한 뒤 곧장 트롤 킹에게 적중했다. 새하얀 십자가가 트롤 킹에게 박혀들며 그대로 흡수되듯 사라졌다. "크아아아아!" 트롤 킹이 괴로운 비명을 질렀다. 언뜻 보면 별 타격이 없어 보이는 공격이지만 실제로 그 위력은 대단했던 것이다. 그에 대신관들이 재차 공격을 시도하였다. 다시 한 번 정통으로 공격을 받는다면 다크 오러로 이루어진 트롤 킹이 견딜 재간이 없을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실피르가 외쳤다. "안돼!" 매직 스틱을 조준하며 마력탄이 쏘아져 나갔다. 그것은 정확히 대신관들이 있는 곳을 향하고 있어, 그들은 몸을 날려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 틈을 타 매직 나이트들이 트롤 킹의 좌우에 포진했다. 그랜드 크로스가 사악한 기운을 멸하는 데 탁월한 위력을 발휘하지만 매직 나이트들에게는 그리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다시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방어력이 탁월한 성기사들은 적절한 팀워크로 큰 타격을 입지 않은 채 싸움을 벌였고, 금탑 측 또한 트롤 킹과 골렘이 전면으로 나서면서 매직 나이트들의 적절한 견제, 그리고 실피르의 후방 지원으로 팽팽히 맞섰다. 좀처럼 깨지지 않는 국면은 점점 장기전으로 향하게끔 하였다. 그러자 서서히 금탑 측이 밀리기 시작하였다. 숫자가 훨씬 많은 성국은 지친 이들을 쉬게 하고, 체력이 남아 있는 이를 앞세우는 이른 바 차륜전을 택했기 때 문이다. 매직 스틱을 사용하는 실피르가 간간히 마법으로 보조했지만 숫자의 차이를 매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나마 지치지 않는 골렘들이 있었기에 이 정도로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매직 나이트도, 카이나도, 실피르도 인간인 이상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지칠 뿐이다. "헉! 헉!"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그들은 전의를 불태웠다. 싸우는 도중 헬 파이어의 어마어마한 폭발이 일어났지만 그 결과가 어떻게 되건 간에 그들은 최선을 다해 맞섰다. 어쩌면 최악의 결말을 떠올리기 싫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서서히 전세가 기울자 성기사들의 표정이 승리감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칼리오 대신관은 거친 숨을 몰아쉬는 이들을 보며 질린 표정을 지었다. "힘들군. 금탑의 인물들은 모두 이렇게 강한 건가." 압도적인 전력을 지니고도 이 고생이다. 단순 전력 비율만으로도 2배에 해당하는데 벌써 몇 시간째 붙잡혀 고전 중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인간인 이상 정해진 체력이 있을 것이고, 그것이 서서히 바닥나는 지금 전세는 기울고 있다. 이대로 간다면 승리는 성국 측에게 기울 것이다. "더욱 강하게 몰아쳐라. 승리가 멀지 않았다!" 형세가 자신들에게 기울고 있음을 느낀 코로네 백작이 한층 기세를 돋우며 외쳤다. 그런 그의 의지를 반영하듯 워 해머에 어린 신성력이 한층 더 강하게 뿜어지며 지쳐 있는 마이더를 향해 휘둘렀다. "큭!" 수십 명의 성기사를 상대로 싸운 마이더는 극도로 지친 상태였지만 상대의 공격에 대응하여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결과는 이미 정해진 법. 충분한 페이스 조절을 하고 있는 코로네 백작에 비해 마이더는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던 것이다. 실력 면에서도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데 체력에서도 달리니 이길 리가 만무했다. 따당! 무기의 충돌음과 함께 마이더의 창이 튕겨 나갔고, 그 또한 신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 뒤를 바짝 쫓으며 코로네 백작이 워 해머를 휘둘렀다. "무력화 정도는 시켜야겠지." 코로네 백작의 워 해머가 마이더의 어깨를 향해 휘둘렀다. 둔기니 만큼 예기가 없어 베어 버리지는 못하지만 완전히 뭉개 버려 무기를 못 쥐게 할 참이었던 것이다. 살벌한 기세를 품은 워 해머가 막 마이더의 어깨에 적중하려던 찰나! 돌연 코로네 백작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워 해머를 휘둘렀다. 쉬익! 금빛 물체가 보이는 순간, 그것은 워 해머와 부딪쳤다. 쩡! 엄청난 충격! 그것은 신성력을 충만하게 머금은 코로네 백작의 워 해머를 튕겨 내고 그대로 그의 어깨에 박혀 들었다. "으윽!" 충돌로 일어난 반탄력과 어깨의 고통으로 인해 그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어깨에 박힌 것을 향했을 때, 다시 한 번 표정이 급변했다. 어깨를 꿰뚫고 있는 화살, 그것은 다름 아닌 황금빛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화살을 쓰는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다. "........" 황금 화살을 목격한 성기사들의 표정 또한 모두 딱딱하게 굳었다. 어찌 이것을 잊을 수 있겠는가. 그들을 모두 악몽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것이거늘.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던 칼리오 대신관도 굳은 표정이었다. 그는 믿기지 않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어, 어찌하여....... 게이런즈가 패했단 말인가......." "운이 좋았죠." 그와 함께 모습을 드러내는 금색 로브의 마법사. 상당히 지친 듯 보였지만 모습을 드러낸 이는 바로 그다! 금탑주 엘리미스! 그가 8클래스 마법사 게이런즈를 꺾고 도움을 주기 위 해 나선 것이다. "엘리!" "주인님!" "주군!" 엘의 등장으로 분위기는 삽시간에 반전되었다. "자, 그럼 일을 마저 처리해 볼까." 자신을 부르는 이들에게 가볍게 웃음을 지어 보인 엘은 양손에 마나를 집중했다. 우웅! 그와 함께 그의 양손에 황금 화살이 생겨났다.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룬 블레이드(Rune Blade) 전황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각각의 상대를 찾아 대치하고 있을 때, 다이어드 공작은 골든 나이트롤 마주하고 있었다. ‘큭, 역시 대단한 나이트 골렘이다. 빈틈을 찾을 수 없어.’ 속으로 신음을 흘리며 다이어드 공작은 한층 기세를 끌어올렸다. 얼핏 보면 서로 마주 보고 있는 형세지만 골든 나이트와 다이어드 공작은 현재 한창 대결에 들어가 있다. 파방! 팡!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운, 이미 모든 기운을 통제할 수 있는 두 존재의 공간 장악이 펼쳐지면서 서로의 힘을 밀어 내기 위해 치열한 대결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주르륵. 한 치의 밀림도 보이지 않는 골든 나이트롤 보며 다이어드 공작이 식은땀을 흘렸다. 이윽고 그는 깨달았다 골든 나이트는 인간이 아닌 기계 같은 존재였기에 실수가 없다는 것을. 그것은 지금 이 힘 싸움이 무의미하다는 걸 뜻한다. ‘약간 손해를 볼 수도 있지만 먼저 움직여 볼까.’ 한 수 뒤지고 들어가는 상황이 되겠지만 다이어드 공작은 여유만만이었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3대 성물 중 하나인 세인트 해머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모든 기운을 멸하는 세인트 해머. 그거라면 골든 나이트는 자신에게 감히 근접전을 펼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시간을 계속 끈다면 게이런즈가 먼저 금탑주를 생포할 가능성이 높았다. 교황에게 금탑주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그로서는 최대한 빨리 골든 나이트롤 무력화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움직여야 한다! 마음을 굳히는 순간, 몸도 절로 움직였다. 다이어드의 공작의 손이 움직이는 순간, 어느새 세인트 해머의 파괴적인 기운이 골든 나이트롤 향해 덮쳐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사에 불과한 것, 골든 나이트는 여유롭게 그 공격을 피하며 골든 소드를 휘둘렀다. 그러자 3개의 오러 서클이 생겨나며 다이어드 공작에게 쏘아졌다. 일전에 그를 붙잡아 둔 원거리전을 하려는 셈이었던 것이다. 그걸 다이어드 공작이 모를 리 없다. "놈! 이번에는 전같이 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노성을 터뜨리며 세인트 해머를 휘둘렀다. 부앙! 세인트 해머가 살인적인 힘을 담고 휘둘러지며 힘을 뿜어냈다. 파사사! 사마를 멸하는 힘과 오러 서클이 충돌하자 오러 서클은 힘없이 부서져 나갔다. 그리고 그 틈을 노린 다이어드 공작이 빠른 속도로 골든 나이트에게 접근했다. 저번에는 미처 흥분하여 골든 나이트롤 잡지 못했지만 지금은 잡을 수 있다. 골든 나이트가 미리 이렇게 나을 줄 알고 축복 마법을 건 것이다. 파앗! 무시무시한 속도로 접근하는 다이어드 공작. 그가 앞으로 나서자 역시나, 골든 나이트는 뒤로 몸을 날렸다. 그와 함께 골든 소드를 휘두르며 오러 스톰을 전개했다. 날카로운 오러의 폭풍이 할퀴듯 다이어드 공작을 옥죄어 왔다. "큭!" 살갗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오러 폭풍에 다이어드 공작이 신음을 흘리며 세인트 해머를 휘둘렀다. 샤앗! 사마를 멸하는 신성한 해머는 오러 스톰을 손쉽게 흩어 버렸다. 하지만 골든 나이트는 포기하지 않았다. 골든 나이트는 빠르게 물러서면서 연신 오러 서클과 오러 스톰을 전개하며 다이어드 공작을 견제했다. 1차례 겨룬 적이 있기에 다이어드 공작을 어떻게 공략 할지 잘 알고 있는 골든 나이트였기에, 그것의 움직임은 전보다 훨씬 원활하고 능숙했다. 날카로운 기세를 품은 오러 서클과 오러 스톰은 결코 경시할 수 없는 것이어서 다이어드 공작은 축복 마법을 걸고서도 고전을 해야 했다. "제기랄!" 급기야 다이어드 공작의 입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다. 명색이 대륙 10대 그랜드 마스터인 자신이 제대로 공격조차 못하다니! 드넓은 수억의 인구 중 우뚝 선 10명의 검의 절대자 중 1명이 바로 자신이다. 본인 스스로가 대륙 10대 그랜드 마스터에게 결코 뒤쳐진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고, 세인트 해머가 있는 이상 그랜드 마스터 중 최강이라 불리는 엘리아 대공에게도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 그런 자신이, 지금 무슨 모습을 보이는 것이란 말인가? 추태도 이런 추태가 없다. 성물을 지니고서도 이런 고전이라니. 골든 나이트롤 뒤쫓던 다이어드 공작이 멈춰 섰다. 그는 억눌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숨지도 쫓지도 않겠다. 나는 성물의 주인이자 대륙 십대 그랜드 마스터인 다이어드 공작이다." 고오오! 자리에 멈춰 선 다이어드 공작에게서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이질적 기운이 발산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검은 기운이었다. 무엇보다 순수한 칠흑 같은 어둠, 마치 마계에서 흘러나오는 다크 오러처럼 음습하고 어두운 기운은 무척 섬뜩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 기운을 골든 나이트도 느꼈기 때문일까. 골든 나이트는 뒤로 물러나던 것을 멈추고 경계의 자세를 취했다. 그와 함께 골든 나이트에게서도 강렬한 마나가 뿜어지기 시작했다. 쿠우우우! 푸른 마나가 엄청난 압력과 함께 물결치듯 주변을 장악해 나갔다. 마나 장악! 그랜드 마스터만이 펼칠 수 있는 기술을 골든 나이트가 구사하는 것이다. 한껏 자신의 힘을 끌어올린 두 존재가 자신의 무기를 동시에 내질렀다. 칠흑같이 검은 기운이 세인트 해머를 휘감으며 악귀 형상을 띠었다. 골든 소드에는 푸른 마나가 마치 온천수처럼 용솟음 치고 있었다. 수십 수백 개의 사념으로 구성한 골든 나이트의 에고. 그 사념 속에 포함된 과거 어느 기사의 공격을 골든 나이트가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펼치는 기술은 과거 다크 나이트라 불렸던 초인, 지플릭스의 크래쉬 붐이라는 기술이다. 마계의 힘을 받아들여 그랜드 마스터에 올랐던 그는 다크 오러의 파괴적인 힘을 절대적으로 활용하여 모든 것을 파괴, 폭발시키는 힘을 발휘했다. 그의 압도적인 힘에 당대 그를 상대할 초인 셋이 나서서야 간신히 제압할 수 있었고, 그 하나의 힘으로 왕국 셋이 날아갔다고 할 정도니. 그게 얼마나 대단한 힘을 지니고 있었는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이다. 그런데 지금 그 공격을 골든 나이트가 구사하려는 것이다. 모든 것을 멸하는 세인트 해머의 힘이 집약되어 있다지만 과거 대륙을 뒤집어 놓은 검사의 기술이 결코 만만할리 없었다. 마침내 모든 힘을 축적한 그들이 공격을 펼쳤다. 다이어드 공작이 힘차게 외치며 세인트 해머를 휘둘렀다. "하앗! 세인트 크래쉬!" "크래쉬. 붐." 두 공격 모두 파괴를 지향하는 패도적인 공격! 쩌저적! 검은 기운과 푸른 기운이 뿜어지는 순간 그들이 뿜어내는 프레셔에 의해 주변 땅이 갈라지는 현상이 일어났다. 이윽고 두 공격이 정 가운데에서 충돌했다. 모든 것을 멸하는 힘! 세인트 해머! 그리고 모든 것을 파괴하는 과거 정점에 오른 최강의 기술 크래쉬 붐! "......!" 두 공격이 충돌하는 순간 주변 지대가 마치 시간이 멈 춘 것처럼 조용해졌다. 잠시 후, 공간자체가 요동치더니, 이내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콰아아앙! 모든 것을 파괴하는 두 공격! 신성력 외에 이질적인 기운을 소멸시키는 세인트 해머의 힘으로도 크래쉬 붐의 파괴력을 제거하지 못한 것이다. 그 결과 엄청난 폭발이 일어난 것이고 말이다. 그랜드 마스터에 이른 이들의 충돌은 무시무시했다. 그들의 힘이 충돌한 지점을 중심으로 지름 30여m에 달하는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겨난 것이다. 이는 결코 8클래스 마법에 뒤처지는 위력이 아니었다. 범위는 작을지언정 그 범위에 속하게 되면 8클래스 마법을 뛰어넘는 파괴력을 방금 전 공격이 내포하고 있었다. "......." "......." 서로의 공격을 이겨 내지 못하고 그대로 폭발하자 두 존재는 마치 눈싸움을 하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장 경계의 자세를 취했다. 골든 나이트는 방금 전 다이어드 공작이 펼친 공격으로 그가 여태껏 상대한 적들 중 최강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던 것이고, 다이어드 공작도 골든 나이트의 힘이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한 수 위라는 것을 느낀 것이다. 방금 전 공격을 처음 만난 순간 펼쳤을 걸 생각하니 절로 오싹함이 일었다. ‘하지만 난 지지 않는다. 여신님의 의지를 잇기 위해, 그리고 그것을 따르기 위해 질 수 없다.’ 적이 강한 만큼 두려움도 들었지만 그에 비례하여 강렬한 투지도 들끓었다. 그가 언제 이런 실력과 맞서 보았겠는가. 그랜드 마스터에 이른 자들은 흔히 검의 정점에 이르렀다고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다이어드 공작이 더 잘 알고 있다. 마법 학문이 끝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검의 길 또한 끝이 없다. 그랜드 마스터란 어디까지나 극에 이르기 위한 단계에 한 발짝 가까워진 것뿐이지 결코 극에 다다른 건 아니란 것이다. 때문에 그랜드 마스터에 이른 이들은 한 발짝 더 나가기 위해 더욱 정진하기 마련이고, 그걸 위해서는 동급의 실력자와 검을 맞대 보는 것이 최고다. 여태껏 자신이 여타 그랜드 마스터에게 지지 않을 거라 확신하던 다이어드 공작은 왜 벨로세크 제국의 그랜드 마스터들이 최강이라 불리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랜드 마스터 셋을 보유하고 있는 그들은 서로가 서로의 실력을 겨뤄 봄으로써 각자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장점은 더욱 극대화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급의 실력자와 언제라도 맞붙어 실력을 기른다. 이것만큼 실력을 빠르게 증진시킬 수 있는 방법은 그랜드 마 스터에게 없다. 하지만 대부분 그런 권한을 누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같은 국가에 2명의 그랜드 마스터가 있는 경우는 많지 않고, 다른 국가의 그랜드 마스터와 겨루려 하여도 각국의 철저한 초인 보호로 그럴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동급의 실력자와 붙어본다는 것. 그것만큼 수련에 좋은 게 없다는 것을 다이어드 공작은 그랜드 마스터에 오르고서 처음 느낄 수 있었다. "난 지지 않는다." 어느새 공격 자세를 취한 그의 해머에는 강렬한 힘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방금 전 충돌에서 평수를 이루었지만 상황은 여전히 다이어드 공작에게 유리하다. 왜냐하면 방금 전 같은 공격을 다이어드 공작은 세인트 해머에 의지하여 여러 번 펼칠 수 있지만 골든 나이트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록 위력이 약하지만 일정한 위력을 지닌 공격을 여러 번 감행할 수 있는 다이어드 공작은 제대로 적중한다면 언제라도 골든 나이트롤 압도할 만한 강력한 힘의 소유자다. 그리고 탁월한 전투 감각을 지닌 골든 나이트도 그것을 인지했기에 섣불리 다이어드 공작에게 접근하지 않는 것이고 말이다. 세인트 해머에 다시금 검은 기운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과거 신에게 버려졌지만 끝가지 신을 위해 충성을 바친 신족의 힘이 담겨 있는 세인트 해머. 신의 형벌에 의해 타락하여 검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지만 그것은 틀림없는 신성력이었고, 신밖에 모르는 그 힘은 여타 다른 능력을 압도하는 패도적인 기운을 뿜어내고 있다. 즉, 세인트 해머에 어린 힘은 신성력이되 다른 신성력과는 다른, 모든 기운에 배타적인 기운인 것이다. 다이어드 공작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세인트 해머를 얻을 당시 신의 의지가 그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있는 악을 멸하기 위해 내려진 세인트 해머. 그것으로 세상의 악을 물리치라는 명령은 다이어드 공작을 그랜드 마스터의 길로 이끌었다. 문득 옛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다이어드 공작은 집중력을 한층 더 끌어올렸다. "하압!" 그리고 다시 한 번 골든 나이트를 향해 세인트 해머를 휘둘렀다. 세인트 해머에서 뿜어진 검은 기운은 삽시간에 골든 나이트에게 향했다. 골든 나이트는 골든 소드에 마나를 충만하게 뿜어내며 그 기운을 튕겨 내기 위해 맞서 나갔다. 콰아아앙! 어마어마한 폭음이 울려 퍼진다. 그 폭음의 중심에는 골든 소드에 어린 마나와 세인트 해머에서 뿜어진 신성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모든 힘을 소멸시키는 세인트 해머의 신성력이 마나를 소멸시키려 하고 있고, 골든 소드에 어린 마나가 그에 반발하면서 연달에 폭발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골든 나이트가 아니라 여타 그랜드 마스터였다면 절대 행하지 못할 일이다. 마나의 힘을 흩어 버리기 위해 달려드는 신성력과의 반발은 인간으로서 견딜 만한 충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골든 나이트에게는 몇 겹의 실드가 쳐져 있다. 게다가 전신이 매직 메탈이었기에 충격을 흡수, 분해하는 마법진은 수십 개가 새겨져 있어 충격을 덜 받는다. 웬만한 충격도 모두 흡수해 버리는 골든 나이트롤 이기기 위해서는 딱 한 방법밖에 없다. 마나 홀을 파괴하는 것! 인간으로 치면 단전에 해당하는 그곳의 마나석을 파괴하지 않으면 골든 나이트는 불사의 힘을 자랑한다. 다이어드 공작은 한차례 골든 나이트와 겨루고 난 뒤 나이트 골렘을 연구했다. 그리고 그는 골든 나이트의 약점이 마나 홀임을 간파했다. 그는 지금이 골든 나이트롤 공략할 수 있는 찬스라는 걸 느꼈다. 신성력과 마나가 치열하게 겨루고 있을 때, 다이어드 공작은 재차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자 골든 나이트는 한층 마나를 끌어올려 신성력을 튕겨 내려 하였다. 하지만 그것도 어려웠다. 다이어드 공작은 이번 기회를 잡아내기 위해 계속해서 공격을 해 왔던 것이다. 따당! 마침내 신성력의 반발을 이겨 내지 못하고 골든 소드가 튕겨져 나갔다. ‘기회!’ 그것을 본 다이어드 공작이 눈을 빛냈다. 생각함과 동시에 그의 세인트 해머가 움직였다. 떵! 1차례 충격을 받았지만 곧장 복귀하려던 골든 소드가 다시 한 번 튕겨 나갔다. 그리고....... 팟! 다이어드 공작의 몸이 튕겨 나갔다. 모처럼 잡아 낸 지금 이 기회를 적극 살리기 위해서다. 그는 방어하기 위해 제 위치로 돌아오는 골든 소드를 향해 세인트 해머를 휘둘렀다. 꽝! 신성력에 적중당한 골든 소드가 재차 튕겨져 나갔다. 그와 함께 골든 나이트에게 바짝 접근한 다이어드 공작이 세인트 해머를 휘둘렀다. 그것이 향하는 곳은 골든 나이트의 유일한 약점, 마나 홀이었다. ‘이겼다!’ 이미 튕겨져 복귀가 불가능한 골든 소드의 위치를 보며 다이어드 공작이 한 생각이다. 제아무리 그랜드 마스터에 달하는 실력을 지녔다고 해도 방어하기는 불가능이다. 하지만 골든 나이트에게 한 가지 수는 있었다. 다이어드 공작이 한 차례 마주쳤을 때 놓쳐 버리고 만 그 수법 말이다. 순간 골든 나이트의 신형이 사라졌다. 위급 상황 시 사용할 수 있는 블링크가 전개된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다이어드 공작은 그것마저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거기냐!" 그는 골든 나이트가 사라지자 재빨리 방향을 틀어 몸을 날렸다. 그의 몸은 정확히 골든 나이트가 모습을 드러낸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채 방어할 틈도 주지 않은 다이어드 공작의 공격은 매섭고 날카롭기 짝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그대로 당해 버릴 것이 뻔할 터! 그때였다. 꼼짝없이 당할 것 같던 골든 나이트에게서 새파란 안광이 강렬하게 뿜어졌다. 여태까지 뿜어낸 안광과는 차원을 달리할 정도로 강렬한 빛. 그 현상과 함께 아무것도 쥐지 않은 골든 나이트의 왼손에서 푸른 마나 기류가 발생했다. 그리고 골든 나이트가 특유의 어조로 입을 열었다. "룬........ 블레이드." 쿠와아아아! 어마어마한 마나 기류가 발생하며 푸른색 검이 골든 나이트의 왼손에 생겨났다. 룬 블레이드. 엘이 다이어드 공작의 성물에 맞서기 위해 만들어 낸 그 검이 지금에서야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푸른색 검은 얼핏 봐서는 골든 나이트에 맞게 제작된 평범한 검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 말은 그대로 사라진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착각할 정도로 룬 블레이드에 푸른 룬어가 빽빽하게 새겨져 있던 것이다. 그 정체불명의 룬어는 단 한 가지 마법을 전개하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 신검에 필적하는 능력을 발휘하기 위한 룬어가 거대한 롱 소드 전체에 새겨진 셈이다. 그리고 골든 나이트는 그 룬 블레이드를 휘둘러 세인트 해머를 막아 냈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콰앙! 여태껏 물러섬이 없던 세인트 해머가 룬 블레이드와 부딪치는 순간 튕겨져 버린 것이다. "큭!" 룬 블레이드와 부딪치면서 엄습한 전신의 충격에 다이어드 공작이 엄청난 충격을 느끼고는 뒤로 주춤 물러났다. 무려 다섯 발자국이나 물러난 그는 아직도 이해가 안가는 얼굴로 골든 나이트롤 바라보았다. 골든 나이트는 두 자루의 검을 쥐고 있었다. 오른손에는 한눈에 보아도 찬란한 황금빛을 발하고 있는 골든 소드가 쥐어져 있었고, 왼손에는 방금 전 자신의 세인트 해머를 튕겨 낸 푸른색 검이 들려 있었다. 그는 믿기지 않는 시선으로 푸른색 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경악이 담긴 목소리를 흘렸다. "도대체 저 검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의 세인트 해머를 튕겨 내다니! 모든 힘을 소멸시키는 것이 바로 세인트 해머의 힘이 아닌가? 그런데 튕겨지다니....... 다이어드 공작이 놀라는 순간에 골든 나이트는 골든 소드를 검집에 꽃아 넣고는 룬 블레이드를 오른손에 옮겨 쥐었다. 그리고 맹렬한 기세로 다이어드 공작에게 돌격했다. "한 번 튕겨 냈다고 자신을 가진 것이더냐!" 세인트 해머를 튕겨냈으니 거칠 것 없다고 말하는 듯한 골든 나이트의 모습에 다이어드 공작이 소리치며 물러서지 않은 채 세인트 해머를 휘둘렀다. 룬 블레이드와 세인트 해머는 다시 한 번 충돌했다. 꽈앙! 아까 전 충돌에 뒤지지 않는 엄청난 폭음이 다시 한 번 울려 퍼졌다. 영혼을 울리는 듯한 어마어마한 충돌! 그 충돌에서 득을 본 것은 다름 아닌 골든 나이트였다. "크윽!" 전신에 퍼져 나가는 강렬한 충격에 다이어드 공작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골든 나이트가 거세게 전진해왔다. 쉬익! 2m에 달하는 거대한 검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휘둘러졌다. 한순간 12번 휘둘러진 룬 블레이드는 12개의 오러 서클을 생성하며 다이어드 공작에게 덮쳐 나갔다. 그것을 보며 다이어드 공작은 기합을 지르며 세인트 해머를 휘둘렀다. "하압! 이 정도로!" 파삭! 파사삭! 세인트 해머에서 뿜어진 신성력으로 오러 서클을 소멸시키고, 다이어드 공작이 재차 외치며 해머를 휘둘렀다. "나를 쓰러뜨릴 수 있을 것 같았나!" 콰과광! 지면을 부수며 세인트 해머의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땅! 따다당! 그것을 골든 나이트는 룬 블레이드를 휘둘러 모조리 제거해나갔다. 그 기운을 제거할 때마다 강렬한 폭발이 일어났다. 하지만 충격을 흡수, 분해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지닌 골든 나이트는 그것들을 모조리 흘려 버린 뒤 재차 달려 든 것이다. "이런 괴물 같은!" 세인트 해머의 힘이 전혀 통하지 않자 다이어드 공작이 처음으로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한두 번이 아니라 세인트 해머의 힘이 정말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믿을......." 뒷말을 이을 수 없었다. 어느새 골든 나이트가 바짝 접근하여 룬 블레이드를 휘두르고 있었다. "흡!" 이럴 때는 맞서는 것이 좋다. 하지만 두 무기가 부딪치는 순간 일어나는 충격이 어마어마하다. 골든 나이트는 그것을 효과적으로 분산시키지만 다이어드 공작은 그러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과 골렘의 차이다. 고통을 느끼는 것과 느끼지 못하는 것. 거기에서 이미 상당한 차이가 나고 있었다. 세인트 해머와 룬 블레이드가 충돌했다. 꽈앙! 아까와 같은 큰 폭음이 울려 퍼지며 그 상황 그대로 재현되듯 다이어드 공작이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큭! 어째서? 설마 저 검 때문인가?" 저 검을 뽑아들면서부터 상황이 급격히 바뀌었다. 그렇다면 저 검 때문이다. 저 검이 어떠한 수단을 써서 세인트 해머의 힘을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미처 엘도 예상하지 못한 바다. 왜냐하면 엘은 룬 블레이드의 능력과 세인트 해머의 능력이 서로 상쇄시킬 줄 미처 몰랐기 때문이다. 룬 블레이드의 능력은 주변의 공기를 한순간 응집시키는 것이다. 응집된 공기는 기존의 검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절삭력을 지니게 된다. 그것은 모든 것을 베어 버리는 능력이 있었기에 세인트 해머의 기운을 베어 버리려 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았다. 세인트 해머의 엘의 예상을 벗어난 강함을 지니고 있었다. 모든 것을 베어 버리는 룬 블레이드의 능력과 모든 기운을 소멸시키는 세인트 해머의 두 능력이 서로 부딪치면서 서로의 능력이 아무것도 발휘되지 못하고 튕겨져 버리는 것이다. 마치 모든 것을 꿰뚫는 창과 모든 것을 막아 내는 방패의 관계처럼 말이다. 두 능력이 서로 상쇄되고 도리어 큰 충격이 서로에게 가기에 전황이 골든 나이트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해졌다. "큭!" 다이어드 공작은 앞이 깜깜해지는 걸 느꼈다. 세인트 해머로 우세를 점하던 근접전도 이제는 그 우위를 점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원거리전을 하자니 골든 나이트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진퇴양난. 어디로 가도 방법이 없는 지금 이 상황에서 다이어드 공작은 막막함을 느껴야했다. 그것도 잠시, 다이어드 공작은 차분하게 숨을 고르며 세인트 해머를 움켜쥐었다. 확실히 자신이 열세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진 것도 아니다. 자신은 성기사다. 공격보다는 탁월한 방어력에 특화되어 있는 성기사, 게다가 아직 몇 가지 방법이 남아 있지 않던가. 다이어드 공작은 룬 블레이드를 휘둘러 오는 골든 나이트롤 보며 세인트 해머로 맞받아쳤다. 꽈앙-! 큰 폭음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전같이 다이어드 공작이 큰 타격을 입지 않은 듯했다. "........" 한 걸음 물러선 채 룬 블레이드를 막아 낸 다이어드 공작. 충격을 완전히 해소한 듯 큰 타격은 없어 보였다. ‘이게 끝이 아니다.’ 하지만 공격을 막아 냈다고 하여 방심할 수는 없다. 골든 나이트가 연속으로 공격해 왔기 때문이다. 다이어드 공작의 세인트 해머가 움직였다. 꽝! 꽝! 꽝! 룬 블레이드와 세인트 해머가 부딪치며 주변 전체를 울렸다. 보이지 않는 공기의 절삭력과 세인트 해머의 신성력이 부딪치며 전해져 오는 충격은 분명 엄청날 터. 실드와 각종 마법진의 도움을 받고 있는 골든 나이트와 다를 바 없을 정도로 다이어드 공작도 충격을 잘 흘려보내고 있던 것이다. 골든 나이트와 공방을 주고받으며 다이어드 공작은 차분하게 기회를 엿보았다.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내심 그의 전신은 공격을 받아 낼 때마다 큰 충격에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웠다. 그나마 이렇게 버틸 수 있는 것은 신성 마법 덕분이다. 하지만 그는 신성 마법을 본격적으로 구사할 수 있는 신관이 아니기에 이 정도가 한계였다. 그럼에도 그는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골든 나이트의 약점은 마나 홀. 차분히 공세를 견뎌 내 고 그곳을 공략한다면 분명 승리는 자신의 것이 될 것이다. 그것 때문에 다이어드 공작은 골든 나이트의 공격을 받아내고 있는 것이다. 꽝! 꽈광! 룬 블레이드와 세인트 해머가 부딪치며 주변을 사정없이 헤집어 놓았다. 이미 그들의 주변 대지는 쩍쩍 갈라지고 깊게 패여 처음의 형태를 기억하기 힘들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그들의 공방이 약 100여 합 정도 되었을 무렵, 다이어드 공작은 골든 나이트의 공격을 피해 냈다.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허점! 순간 다이어드 공작의 눈이 빛났다. 골든 나이트의 약점이 그대로 노출된 것이다! 기회는 지금뿐! 이 기회를 놓치면 승부는 자신의 패배가 될 것이다. "사라져라!" 외침과 함께 세인트 해머를 굳게 움켜쥔 그의 손이 움직였다. 부웅! 파공음을 내며 골든 나이트의 마나 홀을 향해 휘둘러지는 세인트 해머! 제아무리 실드 마법을 전개하고 있다지만 신성력을 머금은 세인트 해머를 막아 낼 리 만무했다. 즉, 적중 당한다면 골든 나이트라도 그 부위가 곤죽이 될 것은 뻔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골든 나이트도 지지 않았다. 어느새 자세를 수습한 골든 나이트가 다이어드 공작의 머리를 쪼갤 듯한 기세로 룬 블레이드를 휘두르고 있던 것이다. 이대로 간다면 어느 누구도 무사하지 못할 터. 골든 나이트는 성능 불능이 될 것이고 다이어드 공작은 중상, 혹은 죽음을 맞이할 확률이 높았다. 두 무기가 각 급소에 적중하기 직전, 강렬한 기세를 머금은 무언가가 빠르게 쏘아졌다. "........!" "........!" 그 공격을 눈치 챈 다이어드 공작은 재빨리 물러섰다. 골든 나이트가 공격해 옴에도 공격을 감행한 건 먼저 쓰러뜨릴 자신이 있어서였다. 하지만 마법을 피할 자신이 없었기에 아쉽지만 기회를 버린 것이다. 그러나 골든 나이트는 물러서지 않았다. 빠르게 쏘아진 무언가는 골든 나이트와 다이어드 공작이 있던 자리에서 그래도 폭발했다. 콰과광! 붉은 불꽃은 삽시간에 주변 일대를 태워 버렸다. 이것은 다름 아닌 5클fp스 마법인 버스트 플레어였다. "누구냐?" 뒤로 물러난 다이어드 공작이 마법이 전개된 곳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그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마법을 전개한 이는 다름 아닌 금탑주, 엘이었기 때문이다. 전신이 상처투성이에 무척 지친 듯 보였지만 움직이는 게 가능해 보였다. 다이어드 공작은 엘의 운신이 자유로운 것을 보고는 믿기지 않는 얼굴을 하였다. "설마........" 이미 그의 궁금증을 파악한 듯, 엘이 먼저 말해주었다. "공작님의 예상대로입니다. 게이런즈는 제 손에 쓰러 졌습니다." "말도 안 돼!" 다이어드 공작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미, 믿을 수 없다. 어떻게 7클래스 마법사가 8클래스 마법사를........" 평소 그답지 않게 말까지 더듬었다. 당연한 반응이다 7클래스 마법사는 통상적으로 8클래 스 마법사를 절대로 이길 수 없다. 그들의 차이는 검사로 치면 소드 마스터와 그랜드 마스 터의 차이였기 때문이다. 소드 마스터가 그랜드 마스터를 정면 대결로 막아내려면 최소 10명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랜드 마스터가 적절한 치고 빠지기를 구사한 다면 소드 마스터 50명으로도 상대하기 벅차다. 8클래스 마법사의 경우 그 실력 차이가 더욱 심하다. 마법의 운용이나 마나 소비 등 어느 것 하나 7클래스 마법사가 8클래스 마법사를 추월할 구석이 없기 때문이다. 어디든지 이동할 수 있는 8클래스 마법사는 설사 100 명의 7클래스 마법사가 존재한다고 해도 막아 낼 수 없다. 그런데 엘이 게이런즈를 꺾다니?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그야말로 대륙의 통설을 산산이 깨 버리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믿기지 않을 만도 하겠지요." 믿기지 않는다는 다이어드 공작의 얼굴을 보며 엘이 어깨를 으쓱했다. 게이런즈를 꺾은 것은 엘 본인조차도 아직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본래 엘의 계획은 게이런즈를 상대로 최대한 시간을 끌고 그 사이 룬 블레이드를 사용한 골든 나이트가 다이어드 공작을 제압, 엘을 돕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이어드 공작의 실력은 예상보다 휠씬 윗줄이었고, 엘이 게이런즈를 꺾는 사태가 발생했다. 무엇 하나 엘의 예상에 맞아 떨어진 게 없지만 상황은 엘에게 유리하게 돌아간 것이다. 다이어드 공작이 엘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끼어든 것이지? 골든 나이트롤 돕겠다는 건가?" ‘힘들게 되었군.’ 엘이 가세하게 된다면 가뜩이나 희박한 승산이 더욱 줄어든다. 하지만 그런 것을 얼굴에 드러낼 정도로 다이어드 공작은 녹록치 않았다. "글쎄요." 다이어드 공작의 물음에 엘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는 한쪽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더 이상의 대결은 무의미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뭣이?" "일단 저길 보시죠." 엘이 한쪽을 가리키자 다이어드 공작의 시선이 옮겨졌다. "아니!!" 그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져 나갔다. 엘이 가리킨 곳에는 3명의 대신관과 은십자, 홀리 윙 기사단 모두가 힘없게 널브러져 있었다. 얼핏 보니 죽인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는 건 제압을 당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지금 이곳에서 정신을 차리고 있는 건 다이어드 공작뿐이다. 다이어드 공작은 언제라도 달려들 듯한 자세를 취하는 트롤 킹과 3기의 골렘, 그리고 실피르와 카이나, 매직 나이트롤 보고 신음을 흘렸다. "큭!" 상황이 최악이다. 비록 엘이 게이런즈를 이겼다고 해도 결코 정상이 아닐 터, 그렇다면 세 대신관과 두 기사단이 잘 상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맥없이 당했다. 그렇다는 건 엘이 예상 외로 강하고, 금탑의 인물 또한 예상보다 훨씬 강했다는 걸 의미한다. 처음부터 너무 강한 전력을 지닌 나머지 금탑의 전력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최악이군." 최악. 그 말보다 지금 이 상황을 잘 표현할 말은 없다. 같이 온 이들 모두가 당했다.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던 게이런즈가 죽었고, 성국의 인물들은 모두 사로잡혔다. 이제 남은 것은 자신뿐. 과연 자신이 대항한다고 하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상대적으로 전력이 월등한 저들이 자신을 제압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테지. ‘하지만 쉽게 당하지 않을 것이다. 난 다이어드 공작이다. 대륙에 단 10명뿐인 그랜드 마스터다. 그 최후도 당당히 맞이할 것이다.’ "이런." 세인트 해머를 쥐며 전의를 내뿜는 다이어드 공작을 보며 엘이 혀를 찼다. 정말 까다로운 이가 아닐 수 없다. 저런 외골수적이고 일방 통행적인 사람은 아군이면 더없이 등장하지만 적이면 더 없이 까다롭다. 만약 저자가 끝까지 대응한다면 더욱 큰 피해를 입을 것이 분명했다. 방금 전만 해도 골든 나이트와 양패구상을 할 뻔했으니 말이다. 더욱 큰 피해를 입지 않고자 엘은 다이어드 공작을 구슬릴 필요를 느꼈다. 그는 다이어드 공작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항복하십시오." ".......?" 엘의 말에 다이어드 공작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항복하라니? 설마 자신에게 저항을 포기하고 순순히 포기 하라는 것인가? 다이어드 공작의 표정이 험악해지자 엘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당신이 항복하지 않으면 이들은 물론 볼레크 대신관과 광휘의 기사단도 모두 죽을 것입니다. 전혀 승산이 없는 싸움. 그래도 하실 것입니까?" 엘의 강경한 태도에 다이어드 공작은 할 말을 잃었다. 아니 그보다 놀랐다. 그가 엘에게 물었다. "설마....... 죽일 생각이 아니었던가?" 자신을 비롯한 모든 이들은 금탑 자체를 말살하고자 왔다. 특히 자신은 교황의 밀명을 받아 엘을 죽이려고 했을 만큼 상대에게 명백한 살의를 가지고 왔다. 그런데 그런 적을 살려 주겠다니? 도저히 금탑주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단 말인가? "물론입니다. 교황청에서는 흥분하여 살인을 했지만 완벽히 이긴 지금 상황에서 굳이 죽일 필요는 없겠지요." 다이어드 공작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엘은 빙긋 웃었다. 피 칠을 하고 웃는 그의 모습은 볼썽사나웠지만 다이어드 공작은 그런 엘의 모습에 등골이 서늘함을 느꼈다. ‘물론 내게 끝까지 적의를 보인다면 평생 포로로 살다 죽겠지만 말이죠.’ 그 말을 삼켜 버린 엘은 다이어드 공작에게 말했다. "선택하십시오. 만약 공작님이 항복한다면 이들의 목숨을 보장하겠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대항한다면....... 저도 극단적인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 "으음.........." 엘의 말에 다이어드 공작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자신 혼자만의 목숨이 달린 일이라면 주저 없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자신의 선택에 모든 이들의 생명이 달린 것이다. 이미 엘의 손에 8클래스 마법사 게이런즈가 죽었다. 자신 혼자서 룬 블레이드를 든 골든 나이트조차 상대하기 벅찬 마당에 금탑주를 비롯한 저들을 상대한다? 불가능하다. 불가능한 임무와 성국 인물들의 목숨. 이 2개를 가지고 고민하던 다이어드 공작이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쿵! 세인트 해머가 지면에 박히며 내는 큰 소리. 그는 항복을 택한 것이다. 성국의 인물들을 위해서 그가 엘을 향해 물었다. "약속은 지키겠지?" 엘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공작님의 힘은 여전히 위협이 되니 잠시 봉인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점은 이해해 주십시오." 포로의 힘을 봉인하는 건 당연한 일. 다이어드 공작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리고 얌전히 엘의 봉인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싸움이 끝났다. 모든 이들의 예상을 완전히 뒤집어 버린 금탑의 승리로 끝난 채. 선택의 기로 싸움이 끝났다. 그 결과는 놀랍게도 금탑의 승리였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승리. 그 바탕에 끝없이 정진하는 자세와 승리에 향한 집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음! 이제 어떻게 한다?" 성국의 침공을 무사히 막아 냈지만 엘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초인 두 명으로 이루어진 대부대를 막아 냈지만 금탑의 밖에는 여전히 10만의 성군이 존재한다. 순순히 물러선다면 좋겠지만 죽자 살자 달려들면 금탑은 상당히 어려운 지경에 처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엘은 게이런즈를 상대하면서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그 상태로 실피르 등을 돕다가 더욱 상처를 크게 입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최소 반년은 요양해야 본래 상태로 돌아을 수 있을 만큼 상태가 좋지 않았다. 실피르와 카이나, 매직 나이트들은 그 상태가 양호했지만 성기사들을 상대하느라 상당한 체력을 소모했다. 며칠 푹 쉬면 체력을 회복할 수 있겠지만 엘이 없는 금탑은 채 절반의 힘밖에 발휘할 수 없다. 다행이라면. 골든 나이트의 존재랄까? 지치지 않는 골든 나이트만 있다면 성군 10만은 어떤 형태로든 막을 수 있기에 엘은 패배라는 것을 떠올리지 않아도 됐다. 물론 이것은 성군이 공격해 올 때의 생각이다. 엘은 다이어드 공작 등이 사로잡힌 사실을 성군에게 알리는 것이 아닌, 성국의 교황청에 직접 알릴 생각이었다. 그들이 이 사실을 알면 어떻게 행동할까? 설마 성국의 힘 절반이 깎여 나가고도 공격을 해 올까? 아니, 그럴 리 없다. 그들이 제아무리 신의 의지를 받든 다고해도 당장 동원할 힘이 절반이나 깎여 나간 이상 또 다시 공격해 올 일은 없을 것이다. 신을 믿는다지만 엄연히 현실의 상황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힘이 줄어든 성국이 예전과도 같은 영향력을 발휘할 리 만무했다. "하지만........" 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리고 그가 생각한 최악의 가설을 떠올렸다. "만약 그들이 또다시 공격해 온다면?" 힘이 깎여 나갔다고 해도 성국은 여전히 성국이다. 주변 수십 왕국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신적 기둥, 그런 국가가 바로 성국이다. 성국이 모든 국력을 집중하고 주변국들의 힘까지 끌어 들인다면 요전번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 힘을 보유할 것이다. 게다가 게이런즈를 잃은 블리어드 제국에서 클라이언 공작을 파견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엘로서도 더 이상 공세를 막아 내기가 힘들어진다. 이번 공격만 해도 성국과의 일에서 블리어드 제국까지 번져 버렸는데 주변 왕국들까지 힘을 합친다면 엘은 수십 개의 왕국과 적대 관계를 형성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즉, 금탑 존재 자체가 대륙의 공적이 될 수도 있다. 제아무리 골든 나이트에 룬 블레이드라는 날개가 달렸다고 하지만 대륙을 상대로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군다나 자신의 실력은 초인 1명 상대하기 벅차지 않은가? 이번만 해도 게이런즈가 방심하지 않았다면 엘은 결코 그를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우연이 여러 번 반복될 거라고 믿을 만큼 엘은 운을 바라지 않는다. "부디 그렇게 되지 않기를........" 피해 갈 방법은 없다. 어디까지나 자신은 승리를 했고 그것을 성국에 말하는 방법밖에 없기에. 단지 바란다면 성국이 이만 포기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이제 그들을 상대하는 것은 엘조차 한계에 다다랐다. 한 국가에 맞선다는 것. 그것은 정신적으로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가져다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반응을 보일지........" 엘은 살며시 눈을 감으며 통신구에 손을 댔다. 그리고 각지의 마탑에 일방적 통보로 승리 소식을 퍼뜨렸다. "이럴 수가! 믿을 수 없다!" 블리어드 제국의 황제, 알카이드 황제는 엘이 퍼뜨린 소식에 믿을 수 없다는 소리만 연발했다. 그가 지원한 게이런즈가 누군가? 대륙 10대 8클래스 마법사이자 제국을 대표하는 대마법사가 아닌가? 그런 그에게 7클래스 마스터에 불과한 엘이 패하다니? 정녕 믿기 힘든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설마 거짓 소문을 퍼뜨린 건가?" 그렇게 생각해 보았지만 그럴 가능성이 없다. 왜냐하면 게이런즈가 승리했다면 지금쯤 그가 엘을 생포하여 이곳으로 데려왔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즉, 엘이 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게이런즈가 죽었다면 블리어드 제국은 보유하고 있는 초인 1명을 잃은 셈이다. 즉, 제국의 힘이 한층 깎여 나간 것이다. 하지만 알카이드 황제는 화가 나기보다는 웃음이 나왔다. "정말 대단하군. 믿을 수가 없을 정도야......." 왜 그런지는 모른다. 하지만 엘이 승리했다는 것, 그것은 왠지 쉽게 패배하지 않는다는 것 같아 알카이드 황제를 더욱 흥분하게끔 했다. 왠지 모르게 목표가 되고 있다고나 할까? 알카이드 황제의 뇌리에 어느덧 엘의 존재가 그렇게 자리 잡은 것인지도 모른다. "정말 재미있군. 설마하니 실패할 줄이야. 안 그런가, 지크릴?" 알카이드 황제의 말에 허공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정말 그렇군요." 스윽. 그와 함께 알카이드 황제의 앞에 검은 로브를 걸친 지크릴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만큼은 그도 놀란 듯, 믿기 힘든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기야 그대도 놀랄 만하지, 8클래스 마법사와 7클래스 마법사의 실력은 명백한 것이 대륙의 통설. 그런데 어떻게 이길 수가 있는 것이지? 혹시 그대는 알고 있나?" 지크릴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확실히 이번만큼은 지크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찌 안 그렇겠는가. 분명 엘의 힘은 지크릴이 저번 그레이 오크 침공 사건 때 실감했다. 그리고 그가 파악한 엘의 힘은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성질이었다. 분명 엘이 강한 것은 맞다. 실제로 엘의 힘은 흑탑에 존재하는 2명의 부탑주가 힘을 합쳐도 이길 수 있을지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 7클래스 간의 격차이다. 결코 8클래스 마법사를 뛰어넘을 수 없는 게 현실이다. 8클래스 마법사가 패하다니? 제아무리 8클래스 마법사가 방심한다 하여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상식이 완전히 뒤집혔다고 할까? 엘의 승리는 대륙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은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뭐, 비장의 무기는 다들 숨걱 두기 마련이니까. 마법이 아니라 다른 수로 이겼을 수도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지크릴은 엘의 승리를 납득했다. 하지만 그러려니 넘어갈 성질은 아니었다. 게이런즈가 실패했다면 자신이 본격적으로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다. 첫 시도가 실패했으니 지금 한창 화가 나 있는 성국을 부채질 할 생각이다. 그렇게 한다면 성국은 주변국의 힘을 끌어 모아 다시 한 번 금탑을 칠 테니 말이다. 처음보다 일이 번거로워졌다고 생각하며 지크릴은 알카이드 황제에게 말했다. "성국을 충동질시켜야 할 것 같군요. 하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할 터, 폐하께서 힘을 보태 주십시오." "어떤 도움을 바라지?" "우선........" 지크릴은 자신이 생각한 바를 말하기 시작했다. 성국을 충동질하기 위한 것들을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폐하께서도 적극적으로 움직이셔야 합니다. 상대적으로 적은 피해를 입은 폐하께서 적극적으로 움직이는데 더 큰 피해를 입은 성국이 움직이지 않는 다면 대륙은 성국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볼 테니 말입니다." "그렇군. 알겠다." "그리 고........" "또 무언가가 필요한가?" 알카이드 황제의 물음에 지크릴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폐하께서 게이런즈에게 약속하신 것에 대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알카이드 황제와 게이런즈가 약속한 것, 그것은 게이런즈가 성공적으로 엘을 데려왔을 시 1만의 죄수를 그에게 제공하겠다는 약속이었다. 지금 그것을 지크릴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알카이드 황제가 물었다. "그걸 왜 묻지?" "혹 그들을 제게 제공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만약 성국을 움직이는 데 실패한다면 제가 직접 움직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들을 제물로 삼는다면 강력한 마수를 소환하여 삽시간에 금탑을 초토화시킬 수 있습니다. " "호오........" 그건 알카이드 황제도 잘 알고 있는 바였다. 과거 흑탑이 대륙을 휩쓸 수 있던 이유 중 하나가 사람을 제물로 삼아 강력한 마수를 소환하여 기사들에게 대응했기 때문이다. 마수 중에서는 그랜드 마스터를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것도 있어, 그런 마수만 있다면 금탑쯤이야 문제없이 소멸시킬 수 있을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알카이드 황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어차피 죽을죄를 진 죄수들이다. 알카이드 황제에게 그들을 활용하여 금탑을 제거할 수 있다면 이 정도로 싼 대가는 없을 것이다. "그럼 물러가도록." "그렇게 하지요." 스르륵! 지크릴의 신형이 어둠과 함께 사라졌다. 그런 광경을 보며 알카이드 황제가 눈을 감았다. "기다려라, 엘. 더욱 큰 선물이 곧 갈 테니." 읊조리듯 말하며 알카이드 황제는 깊은 생각에 빠져 들었다. 가까스로 침공군을 막아 낸 지금, 새로운 위기가 또다 시 엘을 위협하려 하고 있었다. 비슷한 시각, 성국에도 패전 소식이 전해졌다. "........지금 뭐라고 했나? 패해? 그것도 게이런즈가 죽고 다이어드 공작이 사로잡혔다고?" "그렇습니다, 교황 성하." 교황의 물음에 소식을 가지고 온 성기사는 분한 듯 입술을 질끈 깨물며 대답했다. "........허허허!" 너무나 어이없는 사실에 교황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있는 힘껏 의자 손잡이를 내리쳤다. 쿵! "큭!" 체통에 맞지 않는 태도와 함께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대륙을 대표하는 초인 2명이 함께 했다. 그리고 금탑주로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8클래스 마법사가 속해 있다. 어디 그뿐인가? 다이어드 공작은 대륙 3대 성물을 지니고 있다. 모든 기운을 소멸시키는 세인트 해머, 그것만 있다면 골든 나이트는 능히 압도할 수 있다. 그런데 패하다니. 더군다나 게이런즈는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어찌 이런 일이........" 패전 소식에 교황이 큰 충격을 받은 듯 아직도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것은 다른 대신관들도 다를 바가 없었다. 초인 둘에 6명의 대신관, 게다가 성국 최고의 기사단까지. 제국마저 침공할 수 있는 이 전력이 패할 것이라고 그 누가 예측했겠는가? 길 가는 어린 아이라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압도적인 전력이었다. "........." 교황이 고개를 들어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언제나 그의 눈에 들어와야 할 12명의 대신관이 오늘에 이르러 불과 5명으로 줄어들었다. 10만의 성군이 머물고 있는 곳에 3명의 대신관이 있지만 그래 봐야 8명, 무려 4명의 대신관이 사로잡혀 있는 셈이다. "크윽!"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금탑! 그놈의 금탑 때문에 지금 성국은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교황은 뻗쳐 나오는 분기를 가까스로 집어 삼키며 입을 열었다. "그래, 그래서, 금탑주가 뭐라고 했지?" "부득이하게 게이런즈를 죽이게 되었지만 성국의 인물들은 모두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다고 합니다. 만약 성국이 금탑을 영원히 침공하지 않고 성녀님을 포기한다면 그들을 순순히 해방시켜 준다고 했습니다." 쾅! 교황이 다시 한 번 의자 손잡이를 내리치며 입을 열었다. “지금 성녀님을 포기하라고 했나?” 보고하는 성기사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 그렇습니다." "크윽! 금탑주! 성국을 얕보는 것이 분명하구나. 하지만 아직 성국에는 전력이 남아 있다. 주변국의 모든 힘을 합해 다시 한 번 공격하겠다." 광기 어린 교황의 어조에 성기사가 절실한 어조로 말했다. "하, 하지만 성국이 재차 공격을 감행한다면 사로잡은 모든 이들을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교황 성하, 부디 현명한 판단을........" 이 말에 교황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큭!" 현재 금탑에 사로잡혀 있는 전력만 해도 성국의 주축이 되는 전력이다. 그런 그들을 도외시한 채 공격을 감행한다면 성국은 수많은 국가들의 비난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신자들에게 있어 무엇보다 우선시해야 할 것은 신의 말씀이다. 그리고 그런 신의 말씀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포기할 것은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교황의 생각이다. 성기사의 간언에 잠시 고민에 빠졌지만 교황의 생각은 이미 정해져 있다. 마침내 그는 결정을 내렸다. 그는 경직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깝지만 신의 말씀을 이행하기 위함이다! 주변국들에게 모두 전하라! 성전을 치르겠다고. 각자가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을 최대한 지원하라고 말이........" 교황의 말은 끝맺지 못했다. 돌연 교황청 전체를 감싸는 새하얀 빛이 주변을 밝혔기 때문이다. 절로 경건해지는 기분. 이러한 기운을 발산하는 이는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저 높디높은 곳에 위치한 지고하신 존재, 바로 신밖에! 지금 이곳, 교황청에 다시 한 번 여신이 강림하는 것이다. 교황을 비롯한 교황청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이 재빨리 바닥에 무릎을 꿇고 신을 영접할 자세를 취했다. 파앗! 새하얀 빛이 내려오면서 빛의 기둥을 만들었고, 그 기둥 속에 흐릿한 실루엣이 갖추어졌다. 신의 강림. 성녀의 간택 때 등장했던 가이아 여신이 다시 한 번 이곳에 강림한 것이다. 저 깊고 깊은 곳. 무엇 하나 존재하지 않는 새하얀 광휘 아래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윤이 자르르 흐르며 절로 빛을 발하는 은빛 머리칼에 더없이 아름다운 한 여인은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은발의 미녀, 세레나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주변을 둘러보며 붉은 입술을 열었다. "이곳은 어디?" 무척 친숙하면서도 어딘가 접근하기 힘든 그런 분위기 속에 세레나는 문득 자신이 이렇게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이 무척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왜 그런 느낌이 드는지 궁금하니?" 의아한 기분을 느끼던 그녀의 기분을 알아차리기라도 하듯, 허공에서 고운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누구시죠?" 허공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세레나가 한차례 몸을 움찔 하며 목소리의 주인에게 물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이 공간에 누군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아 경계의 자세를 취한 채 말이다. 그러자 다시 한 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경계할 것 없답니다. 나의 아이, 세레나여." 더없이 차분해지는 목소리다. 그 목소리를 들은 세레나는 순간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꼈지만 경계의 자세는 풀지 않았다. 그러나 상대의 목소리를 들어 보니 적의는 없는 듯했다. 그녀는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제게는 당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군요. 부디 모습을 드러내어 이야기를 해 주시지 않으시겠어요? 저는 궁금한 것투성이랍니다." 그녀의 물음에 허공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그렇게 말하니 제가 실수한 것 같군요. 나를 용서하세요." 파앗! 그 말과 함께 새하얀 빛이 강렬하게 뿜어졌다. "웃!" 워낙 눈부신 빛에 세레나가 순간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리고 빛이 잠잠해지자 눈을 가렸던 손을 치우고 앞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방금 전 목소리의 주인인 듯한 여인이 서 있었다.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모습. 하지만 눈에 띄는 것은 그런 모습이 아니다. 단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절로 경건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더없이 성스러운 모습. 당장이라도 허리를 굽혀 경배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여인에게서는 아무런 위엄도, 기세도 발산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 자체만으로도 그 누가 함부로 대하지 못할 만큼의 독특한 분위기가 주변을 장악하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시지요?" 세레나는 여인을 처음 봄에도 이상하게 여인이 친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오래 전 알고 있던 사이라고 할까? 그런 느낌이 그녀의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 세레나의 물음에 여인이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는 세레나에게 손을 뻗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군요, 나의 아이여." "........!" 여인의 말에 세레나의 몸이 순간 뻣뻣하게 굳었다. 순간 그녀의 전신이 전류에 감전된 것처럼 마비되어 버린 것이다. 그녀는 뻣뻣하게 굳은 시선으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인은 세레나를 향해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자 세레나의 뇌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지금 이게 무슨 말이지? 난 분명 평범한 농가 출신인데.......‘ 자신에게는 분명 부모가 존재했다. 어렸을 때부터 성녀가 될 거라 하여 노예 상단의 속임 수에 넘어가기 전까지 그녀를 줄곧 집에 가두었던 그런 부모가 말이다. 그런 세레나의 생각을 읽은 것일까? "그게 아니랍니다." 미소를 짓고 있던 여인은 살래살래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럼 무엇을 말하시는 것이죠? 어찌 제게 아이라고......." 다소 격양된 듯한 세레나. 그러고 보니 생각이 났다. 언젠가 기이한 목소리가 듣고 잠에 빠졌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정신을 잃었던 그 기나긴 시간이, 잠을 잤다고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때의 기이한 목소리 역시 눈앞의 여인과 관계가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랬기에 여인을 추궁하듯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이곳은 어디 인가요?" 세레나의 물음에 여인은 천천히,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이곳은 정신세계. 즉, 나의 힘으로 발현된 그대의 정신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신세계?" 세레나에게 있어 그 말은 처음 듣는 것과 같다. 몸 멀쩡히 아무런 이상 없이 잘 살아온 자신이 갑자기 왜 이런 이상한 곳에 존재하게 된 것인가? 그런 그녀가 채 묻기도 전에 여인은 그녀의 궁금증을 해소해주었다. "그대가 이곳에 오게 된 것은 내가 불러들여서랍니다." 이쯤 되면 세레나도 어렴풋 눈치 챘을 테지만 여인은 세레나의 생각을 읽고 있었다. 여 인의 말에 세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리고 물었다. "도대체 왜 이곳으로 저를 불러들인 것이죠?" "그건........" 잠시 말끝을 흐리는 여인. 그녀는 세레나를 힐끗 보며 말했다. "그대는 저의 선택을 받은 인간이랍니다." "인간? 그렇다는 건 당신은 인간이 아니라는 건가요?" 세레나의 물음에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럼........" 무언가를 물으려던 찰나, 세레나는 순간 뇌리에 무언가가 번쩍이는 것을 느꼈다. "아!" 그리고 기억해 냈다. 이 여인이 누구인지, 그리고 자신에게 왜 선택을 받았다고 하는지. 세레나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는 평소 모습에 걸맞지 않는 더듬거리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서, 설마........" "그래요." 여인이 세레나의 말을 끊고 나섰다.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정체를 말했다 "대륙의 모든 생명체가 저를 칭하는 이름, 가이아. 제가 바로 가이아 여신입니다." "......!" 세레나가 경악에 할 말을 잃고 가이아를 바라보았다. 가이아 여신. 태초에 창조된 신계, 천계, 마계, 중간계, 정령계 중 신계를 총괄하는 여신이다. 이 세상을 창조한 주신이 사라지면서 신들 중 가장 강하고, 모든 신들을 포용할 줄 아는 가이아 여신에게 신계를 지배하는 권한을 준 것이다. 신계에는 가이아 여신을 비롯한 12명의 신과 12신을 받드는 신족들이 존재한다. 신들은 각각 대자연의 조화에 간섭하며, 중간계에 존재 하는 생명체들의 믿음을 바탕으로 간접적인 힘을 행사한다. 그중 중간계 생명체들의 신앙이 가장 깊은 신이 바로 가이아 여신이다. 그녀는 흔히 대지의 여신으로 칭해지지만 넓은 포용의 여신으로도 불리며, 지금껏 대륙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그녀의 뜻을 받드는 성녀나 성자를 내세워 대륙의 위기를 잠재웠다. 과거 마왕을 베었다는 슈그르빌가의 검사도 가이아 여신의 선택을 받아 신검을 얻었기에 마왕을 벨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모든 존재에게 사랑받는 여신이고, 이 세상 그 무엇보다 고귀한 여신이다. 그런 여신이 이곳에 강림하다니? 세레나는 심각한 괴리감에 이해가 전혀 되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여신이었기에 이러한 분위기를 자아 낼 수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가이아 여신에게서 은은하게 퍼지는 기운은 세레나의 불안정한 기분을 절로 편안케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모든 조화를 담당하는 여신이었기에 그 존재감만으로도 이러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일 것이다. "......." 가이아 여신이 자신의 소개를 한 뒤 그 공간은 조용한 침묵에 잠겼다. 세레나는 경악에 빠져 뭐라 말을 할지 몰랐던 것이고, 가이아 여신은 그런 세레나의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던 것이다. 그것도 잠시 세레나를 바라보던 가이아 여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왜 당신을 선택했는지 궁금한 것인가요?" 세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최대한 마음을 안정시키며 궁금증을 물었다. "물론이에요. 여신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제가 성녀로 선택되었다는 뜻, 하지만 저는 어렸을 적 부모님에게 엉터리 이론으로 성녀가 될 것이라는 소리밖에 듣지 못했답니다. 그런데 제가 성녀라니........." 세레나의 음성에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경악이 한껏 서려 있었다. 생각해 보라 어렸을 적부터 엉터리 이론을 바탕으로 자신이 성녀가 된다는 말을 들어오며 자라왔다. 그리고 그것이 거짓임이 확실히 밝혀졌는데 그 순간 자신이 성녀로 선택받았다면? 분명 믿기 힘들 것이다. 어디까지나 거짓으로 알아 왔던 사실이 진실이 된다는 건 흔치 않은 일일뿐더러, 이것은 단순히 흔치 않은 일로 치부하기에는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여신님이 관련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레나의 할 말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분명 성녀는 열다섯 살 이후 그 자질을 보인다고 했어요. 어느 날 갑자기 신성력을 발휘한다거나 알지 못하던 지식을 알게 되거나요. 하지만 제게는 그런 현상이 없었어요. 저를 선택한 건 혹시 여신님의 실수가 아닌가요?" 전지전능한 신에게 실수란다. 세레나는 방금 전 한 자신의 말이 심각하게 오류가 있었음을 느꼈지만 이대로 자신이 성녀라는 걸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성녀란 건 대륙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그녀에게는 소중한 것이 많다. 어느 순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게 된 엘과 어머니 같이 믿고 따르는 실피르, 그리고 친동생과 같은 카이나. 어릴 적 불운한 삶을 살아온 그녀에게 있어 지금의 가족은 더 없이 소중하고 더없이 따뜻한 삶의 활력소였다. 그런데 지금 그들을 버리고 성녀가 되라니. 이는 그녀에게 있어 절대 가이아 여신의 실수라 치부하고 싶은 사실이었다. "......." 간절한 어조로 말하는 세레나를 보며 가이아 여신은 입을 닫았다. 그리고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거기에는 사정이 있답니다." 세레나가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떤 사정이죠?" "그대의 말대로 나의 선택을 받은 아이는 열다섯 살 정도의 나이에 성녀가 될 능력을 보입니다. 하지만 그대는 열다섯이 되기 전에 엘이라는 인간에게서 특이한 마나 연공법을 배웠더군요." 세레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곧장 눈치 챌 수 있었다. ‘단전호흡' 확실히 열다섯 살이 되기 전에 그녀는 엘에게서 단전호흡과 마법을 배웠다. 그런데 지금 그게 왜 거론된단 말인가? "단전호흡....... 그건 저도 처음에 그 진정한 위력을 몰랐습니다. 그저 마나를 흡수하는 여타 마나 연공법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다르더군요. 엘이라는 인간이 당신에게 지닌 마나 연공법은 여타 다른 마나 연공법과 비교도 되지 않는 뛰어난 능력을 지닌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대륙 전체에 퍼진다면....... 세상의 균형 자체가 뒤틀려 버릴 정도로 말이죠." '그 정도로........‘가이아 여신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 세레나는 단전호흡의 위력이 엄청난 것임을 느꼈다. 그녀가 느끼기에는 그저 뛰어난 마나 연공법 정도였는데....... 그러는 사이 가이아 여신의 말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 마나 연공법으로 그대의 전신에 마나가 잘 정리되고 마나 홀이라는 곳에 뭉쳐 있어 성녀의 능력을 보이지 못한 것입니다. 미약한 신성력이 발생하려고 하면 곧장 마나에 의해 사라졌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간혹 이질적인 기운을 느껴졌었어.' 가이아 여신의 말에 어느덧 그녀는 동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이 끝나자 그녀가 물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어째서 의식을 잃은 것이죠?" "그건........" 말끝을 흐리며 가이아 여신이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당신의 몸에 직접적으로 간섭했기 때문이에요." 세레나의 안색이 변했다. 마법사가 된 그녀의 내부에는 잘 정련된 마나가 가득했다. 그런 마나를 비집고 신성력이 자리 잡으려면....... 엄청난 신성력의 양과 마나와 신성력이 충돌할 때 발생하는 어마어마한 충격을 감당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죽게 되는데......." "그건 아닙니다." 가이아 여신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설명을 이어 나갔다. "분명 신성력과 마나는 반발합니다. 실제로 당신의 체내에 있는 마나와 제 신성력이 겨뤘으니까요. 하지만 인간의 몸으로 당신들이 신이라 칭하는 존재의 힘을 당해 낼 수는 없는 법입니다. 당신의 몸은 제 의도에 따라 천천히 마나가 사라지고 신성력으로 가득 차고 있었지요." "그런........" 세레나의 안색이 울상으로 변했다. 신이 간섭했다면 결과는 뻔하지 않은가? 하지만 가이아 여신의 입에서 나온 결과는 놀라운 사실 이었다. "하지만, 그때 그가 나섰습니다. 금탑주라 불리는 엘이 라는 인간이 말이죠." "주인님........" 세레나의 안색이 붉게 물들었다. 그가, 자신을 위해서 나서줬단 말인가. 하지만 세레나의 안색은 이내 어두워졌다. 제아무리 엘이라고 하여도 신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때 가이아 여신이 입을 열었다. "분명 저도 제 의도대로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세레나, 그대의 전신을 신성력으로 가득 채우면서 저를 받드는 성국에 제 의도를 전달했으니까요." "성국까지......." 기쁨에 겨워 붉었던 안색이 삽시간에 파랗게 변하는 순간이었다. 대륙의 중앙에 위치하는 성국. 제국에 결코 뒤처지지 않는 그 저력은 제국조차 피할 만큼 대단하다. 그런 성국이 나섰다면 일은 이미 모두 진행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가이아 여신에게서 이어진 다음 말은 충격적이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신인 저로서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엘이라는 인간이 당신을 성녀로 내주지 않겠다고 공언하고 나선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제 뜻을 받들고 따라 주리라 믿었기에 범한 실수라고 할 수 있지요." 세레나에게 가이아 여신의 뒷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의 귓가에 들린 말은 오로지 하나! 엘이 자신을 내 주지 않겠다고 공언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쁨보다도 걱정이 앞서는 행동이었다. 성국이라면 결코 엘의 말에 물러날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이아 여신의 말이 이어졌다. "그것을 신계에서 지켜본 저조차 한순간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성국은 저의 말을 지키고자 금탑을 공격했지요." 그 말에 세레나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녀는 다급하게 가이아 여신에게 물었다. "그, 금탑을요? 그, 그럼 어떻게 되었죠, 모두?" 그녀가 생각한 결과는 끔찍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제아무리 엘이 강하다고 하나 성국에는 그보다 강한 다이어드 공작이라는 초인이 존재한다. 골든 나이트가 있다고 해도 다른 국가의 정예병보다 월등히 강한 성군과 신앙심으로 뭉친 성기사라면 엘이라고 해도 감당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역시....... 그녀가 부정적인 생각을 할 때, 가이아 여신이 말했다. 그녀가 원하는 내용이 전혀 아닌 다른 내용을 말이다. "사실 그가 그렇게 나온다고 해도 그대가 완벽하게 성녀가 된다면 문제없는 일이었지요. 하지만 그는 여태껏 전혀 등장한 적이 없는 신성력 봉인구라는 것을 만들어 냈어요. 그리고 그것으로 흘러들어오는 당신의 신성력을 봉인하기 시작했어요. 현재 당신에게 흘러간 신성력은 제 신성력을 가장 많이 받아들인 교황과 다이어드 공작이라 불리는 인간보다 월등히 많은 양이에요. 하지만 엘이라는 인간은 그것을 효과적으로 봉인하고 있지요. 때문에 당신 은 성녀가 되지 않았어요." "제 상태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요. 금탑이 어떻게 되었는지 말해 주세요!" 화를 내듯 세레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찌 보면 대담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다. 제아무리 감정을 제어하기 힘든 상태라고 해도 여신에게 소리를 치다니. 하지만 금탑이 성국의 공격을 받았다는 시점에서 그녀의 정신은 온통 엘의 안위에 향해 있었다. 그런 세레나의 모습에 가이아 여신은 화를 내기는커녕 도리어 미소를 짓더니 대답해 주었다. "결과만 말한다면 그는 무사합니다. 아니, 그대가 염려 하는 모든 이들이 전부 무사해요." "그, 그런가요." 가이아 여신의 말에 세레나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사하다면 상관없다. 이미 자신은 신에게 선택된 몸. 신의 결정이 내려진 이상 자신에게 거부권은 없었다. 하지만 그동안 벌어진 일이 궁금했다. "좋아요." 세레나의 물음에, 가이아 여신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여태껏 일어난 일들을 모두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맨 처음 광휘의 기사단을 만난 일부터 시작하여 성국의 첫 침공과 교황청에 쳐들어간 일, 그리고 두 번째 침공에서 사투를 벌인 일 등을 말이다. 가이아 여신의 말을 듣는 내내 세레나의 안색이 이리저리 바뀌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그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가이아 여신의 안색은 어두웠다. "성국은 장차 대륙의 어둠을 몰아내는 데 큰일을 담당해야 할 곳입니다. 하지만 이번에 너무나 많은 피해를 입었어요. 이렇게 된다면 어둠의 세력을 몰아내는 데 힘을 보태지 못할지도 몰라요." "그건........" 그렇게 말하니 가이아 여신의 말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전에 기쁜 것도 사실이다. 엘은 자신을 위해 성국과 싸우고, 블리어드 제국과도 맞섰으니 말이다. 그 어떠한 남자가 자신의 여자를 지키기 위해 국가와 정면으로 맞설 생각을 하겠는가! 엘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남자의 여인이 된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세레나의 생각은 오래 가지 않았다. 가이아 여신이 세레나를 진지한 눈으로 응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동시에 여태껏 느껴지지 않던 그녀의 압도적인 존재감이 피부에 와 닿았다. 가이아 여신이 입을 열었다. 그녀의 어조는 지금껏 해 온 것과는 전혀 다른, 신으로서의 거대한 위엄을 담고 있었다. "나의 아이야, 정녕 내 뜻을 받들지 않겠다는 것이더냐. 너는 나의 뜻을 받들어 대륙을 구원할 운명을 지니고 있다. " "대륙을 구원........" 너무나 웅장한 그 말에 세레나가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항상 조용할 날이 없는 대륙. 그런 대륙에서 성녀가 된 다는 것은 영광이고, 자랑이다. 하지만 그런 자리는 세레나에게 있어 너무나 과분한 것에 불과했다. 만약 엘이 자신을 위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에 대해 듣지 못했다면 세레나는 성녀의 자리를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것이 자신을 위하는 일이고 엘을 위한 일이기에. 하지만 엘이 자신을 위해 어떤 일을 해 왔는지 알아차린 이상,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세레나가 당차게, 그리고 그녀가 지금 가장 바라는 바를 담아 말했다. "저는 대륙을 구원하라는, 그런 거창한 일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단지 제가 바라는 것은 그분의 곁에 있는 것이며, 그분의 여인이 되고 싶을 뿐입니다. 이것이 저의 뜻이고 제가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대륙 모든 이들의 운명과 맞바꾸는 한이 있어도 저는 그분을 택하겠나이다. 여신이시여, 부디 죄 없는 그분에게 더 이상 가혹한 결정을 내리지 말게 해 주시옵소서." 언젠가 엘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세레나를 갖기 위해 대륙인들의 행복을 빼앗겠다고. 그리고 그녀를 지키기 위해 대륙 전체라도 맞서 싸우겠다고. 지금 그와 비슷한 말을 세레나도 하고 있는 것이다. 세레나의 말에 가이아 여신이 처음으로 노여워하는 기색을 보였다. "........설사 그것이 너와 그자를 파멸로 이끄는 길이라도 말이냐?" 그러자 여태까지 평온한 상태를 보이던 빛들이 광폭하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내린 선택을 거부하는 세레나를 진심으로 공격할 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세레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마음은 무엇보다 굳건하게 자리 잡은 상태였다. "......." 동요하지 않는 세레나의 모습을 보며 가이아 여신의 기세는 차츰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이윽고 모든 게 본래 상태로 돌아갔을 때, 세레나가 고개를 깊게 숙였다. "여신님께 죄송할 뿐입니다. 하지만 한 남자를 사랑하는 저의 마음을 이해해 주세요. 그리고 부디 그분에게는 선처를 빌겠습니다." "후우........" 세레나의 말에 가이아 여신이 처음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그녀는 세레나에게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이 세레나의 머리칼에 살며시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가이아 여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좀 전과는 달라진, 처음과 같은 어조였다. "제 의지를 거부했다고 하지만 그걸 가지고 복수를 할 만큼 저는 옹졸한 신이 아니랍니다. 왜냐하면....... 나도 한때 사랑을 해 보았고, 그 감정을 잘 알기 때문이지요." "그런........" 세레나의 눈이 놀라움으로 치켜떠졌다. 여신인 그녀가 사랑을 해 보았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세레나가 그런 가이아 여신의 모습을 알 리 없다. 먼 옛 날 세상이 창조되면서 사라져 갔던 주신을 사랑한, 가이아 여신의 마음을 말이다. 한 여인이 한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 그 속에서 가이아 여신은 먼 옛날의 자신을 본 듯하다. "나의 선택을 거절할 정도니 행복하지 않으면 용서하지 못할지도 몰라요." "물론이에요. 저는 최선을 다할 거예요." 전혀 앙금이 남지 않은 듯한 가이아 여신의 모습에 세레나는 야심차게 대답했다. "......." 세레나의 모습을 보고 빙긋 웃은 가이아 여신의 몸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빛으로 가득 찬 정신세계도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세레나의 정신이 몽롱해질 때, 그녀의 귀에 흐릿한 가이아 여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행복하세요." 파앗! 어둠이 갈라지는 듯하더니 눈부신 빛이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쏟아지는 빛과 현실감 있는 주변의 감촉에 세레나가 신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헉! 헉헉!" 왠지 모르게 숨이 찬 상태였다. 침상에서 일어난 세레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에게 있어 이곳은 눈을 감고 얼마 지나지 않아 뜬것뿐인데 무척 오래된 것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그럴 것이 그녀는 성녀로 선택받고 쓰러진지 거의 2년이 다 되어 가는 시점이었다. 오래된 느낌을 받지 않으면 그것이 이상한 것이다. "응?" 주변을 둘러보던 세레나는 팔다리에 무언가가 달려 있음을 느끼고는 그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그녀의 시선에 새하얀 봉인구가 한가득 들어왔다. 봉인구는 무척 많아서, 그녀의 양팔 양다리 모두 합쳐 50개가 넘는 숫자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나마 무겁지는 않아 거동하는 데에 문제는 없어 보였다. "........좋아!" 자신의 몸 상태에 문제가 없음을 확인한 세레나가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 금탑의 꼭대기에 위치한 집무실을 향해 말이다. 그 시각, 엘은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지금쯤이면 블리어드 제국과 성국에 패전 소식이 흘러 들어갔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패배를 어떻게 인식할까? 자신에게 원한이 있는 알카이드 황제라면 분명 복수를 준비할 것이고, 성국은 큰 손실을 입었으니 이쯤에서 물러날 수도 있지만 자칫하면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모든 전력을 동원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엘은 무척 어려운 상태에 빠지게 된다. 게이런즈를 상대하느라 큰 부상을 입은 자신은 현재 제대로 된 전투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다. 더군다나 공격이 실패했으니 다음 번 공격은 더욱 강력 할 것이 분명했다. 최악의 경우 다른 제국들에게 지원을 부탁하여 엘이 절대로 이길 수 없는, 그런 전력을 동원할 지도 모른다.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돼." 최악의 가정을 떠올리자 엘은 고개를 저으며 그 생각을 흩어 버렸다. 세레나를 위해 대륙 전체를 적으로 돌려놓을 각오를 굳혔지만 그에게는 다른 지켜야 할 것도 많다. 때문에 구체적으로 성녀를 원하는 성국만을 잘 컨트롤 하여 이쯤에서 물러나게 만드는 게 그에게 있어 가장 이익이다. 하지만 엘이 생각하는 바와 성국이 생각하는 바는 엘이 교황청을 습격했을 때 극명하게 드러났다. 서로의 생각이 근본적인 면에서부터 확연하게 차이나는 것이다. 그렇게 의견이 갈라지니 어떻게 절충안을 내놓을 수도 없는 입장이다. 때문에 엘은 성국의 모든 이들을 제거라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정말 그렇게 해야 한다면........"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그렇지, 성국은 반드시 공격을 감행할 것이다. 금탑 앞에 진을 치고 있는 성군 10만은 여전히 건재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공격해 오면 이번에는 모두 죽여야 하나?" 가급적 사람을 죽이는 일에는 손속을 두었던 엘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손속이 도리어 발목을 잡히게끔 하였다. 그가 계속 손속에 사정을 두니 적들이 계속해서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건? 더 이상 손속을 두지 않아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앞으로 덤벼오는 적은 모조리 죽여 경고를 해야 겁을 먹은 적들이 쳐들어오지 않는 억지력을 만들 수 있을 것 이다. "모두를 지켜야 한다면....... 그렇게 하겠다." 엘은 주먹을 굳게 움켜쥐었다.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렇게 그가 결심을 다지고 있을 때, 한 사람이 집무실에 나타났다. "응?" 인기척을 느낀 엘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집무실 문을 열고 등장한 사람을 보았을 때, 엘 의 얼굴이 순간 멍해졌다. 그동안 길어져 무릎까지 닿을 정도로 자란 은발과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았던 에메랄드빛 눈동자. 자상한 포근한 미소로 언제나 엘을 도와왔던 그녀가 그 곳에 서 있었다. 세레나! 바로 그녀가 깨어난 것이다. 엘은 평상심을 깨 버린 채 소리쳤다. "세레나!" "주, 주인님!" 둘은 누구랄 것도 없이 달려가 서로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가만히 서로의 온기를 나누었다. 이렇게 끌어안아보는 것이 얼마만인가! 그동안 세레나가 쓰러져 있는 시간이 무려 2년이었다. 2년 만에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그녀의 행동하는 모습을 보게 될 수 있던 것이다. 한참 동안 서로를 끌어안던 그들은 이윽고 포옹을 풀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푸른색 눈동자와 에메랄드 빛 눈동자에는 이전에 찾아 볼 수 없던 따뜻한 정감이 넘쳐흘렀다. 서로가 서로를 못 보는 사이 그 감정이 더욱 더 깊어진 것이다. 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떻게 깨어난 거야? 난 세레나가 깨어날 방법이 없는 것 같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는데." 엘은 그동안 수시로 각종 서적을 구하여 세레나를 회복시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었다. 하지만 성녀가 되는 걸 인위적으로 막아 버리고, 본래 모습대로 되돌릴 그런 방법이 있을 리 만무했다. 여태껏 성녀로 임명된 이들 중 신의 선택을 어긴 이들은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엘의 물음에 세레나는 살짝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것은 가이아 여신님께서 직접 제 의식을 차단하신 거라서 아마 회복시킬 방법이 없었을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깨어난 거야?" "........여신님을 만났어요." 세레나는 자신의 정신세계에 나타났던 가이아 여신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은 결코 가볍지 않은 말이었다. 엘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뭐? 가이아 여신을 만나? 그게 정말이야?" "물론이에요. 그분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이렇게 제가 깨어날 수 있게 된 거랍니다." "그렇다면? 이제 몸은 괜찮은 거고?" 걱정 어린 엘의 물음에 세레나가 빙긋 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물론이죠." "어디........" 엘은 세레나의 팔목을 잡아 마나를 흘려 보내봤다. 갑작스런 스킨십에 세레나가 살짝 얼굴을 붉혔지만 체내로 흘러오는 엘의 마나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슈우우! 세레나의 체내로 흘러간 엘의 마나는 거침없이 그녀의 내부를 누볐다. '없다! 없어!' 엘은 느낄 수 있었다. 세레나의 전신 가득 차 있던 신성력이 사라졌음을 말이다. 마나가 들어오기만 해도 강력하게 반발하던 신성력이 지금은 깨끗하리만치 사라진 것이다. 정녕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토록 골머리를 앓게 하던 신성력이 사라지다니! '그런데 신성력이 왜 사라진 거지' 문득 의문이 든 엘이 세레나에게 궁금증이 담긴 시선을 보냈다. 그 의문을 이해한 세레나가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가이아 여신님께서 저를 성녀로 선택하신 걸 철회하신다고 해 주셨어요. 이제 저는 성녀가 아니랍니다." "그게 사실이야? 정말?" 엘이 경악 어린 표정을 하였다. 그냥 놀라운 것이 아니라 이건 정말 놀라운 사실이다. 세상에! 신이 그 의지를 꺾다니? 여태껏 신이 내린 결정을 철회한다는 건 들어 보지도, 존재하지도 않았던 일이다. 그런데! 그런데 신이 그 의지를 꺾다니? 이런 놀라운 사실을 전한 세레나는 엘이 그토록 고민하던 점을 짚어 냈다. "그러니 성국과 더 이상 척을 짓지 않아도 돼요. 아마 여신님이라면 성국의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을 거예요. 이제 불필요한 싸움을 하시지 않으셔도 되요." 돌연 엘의 음성이 착 가라앉았다. "불필요한 싸움이아냐." "주인님 ......?" 갑자기 가라앉은 엘의 음성에 세레나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엘은 여전히 차갑게 가라앉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세레나에게 향했다. 그 순간 그는 세레나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말했다. "나에게 있어 성국과의 싸움은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어. 비록 불필요한 피를 보고 희생을 내기도 했지만 난후회하지 않아. 나와 가족을 지키기 위한싸움이었으니까. 그러니 그런 말은 하지마. 난 앞으로 우리들에게 위협을 가한다면 난 또다시 맞서 싸울 거야. 그것이 내 의지야 " 세레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이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다스리기에 바빴다. 이 세상 그 어떤 남자가 이런 말을 해 주겠는가! 자신을 위해 싸우는 것이라면 한 나라와 싸워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멋진 말을, 어찌 그냥 넘길 수 있는가! 세레나는 이 순간 너무나 고마운 엘을 향해 발꿈치를 살짝 들고 입술을 내밀었다. 그리고 엘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추었다. 엘은 그런 세레나의 입맞춤에 조용히 응했다. 서로가 서로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안 지금 이 시간, 그들에게 있어 지금 이 시간은 무엇보다 소중한 시간이었다. "......." 입을 맞춘 그들은 조용히 떨어져 서로를 살짝 외면했다. 막상 이런 분위기가 되니 무척 어색하고 적응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그들의 어색한 분위기는 금세 사라졌다. 엘이 너무 고생하는 것 같아 위로할 겸 카이나와 실피르가 집무실을 찾은 것이다. 그들은 깨어난 세레나를 보고는 놀라는 한편 기뻐하며 이야기 나누기에 바빴고, 엘은 그 모습을 보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가족이란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전생에서부터 느껴온 그는 가족이란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단지 그것을 지키기 위한 힘과 금력이 필요할 뿐. 세레나가 깨어나고 신의 의지가 깨어진 이상 성국이 엘을 위협하지는 않겠지만 엘은 위험이 이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언젠가 찾아왔던 8클래스 흑마법사, 그가 이곳에 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난 더욱더 강해질 것이다.‘ 꾸욱. 엘은 굳세게 주먹을 움켜쥐며 의지를 다졌다. 8클래스의 영역. 그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그 경지에 올라야 했다. 엘은 깨어난 세레나를 바라보며 그 의지를 다시 한 번 불태웠다. 전쟁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은 지금, 뒤숭숭한 정국임에도 엘의 기분은 무엇보다 행복했다. 카르메인 왕국의 부흥 길었다면 갈고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는 금탑과 성국간의 전쟁이 끝났다. 전쟁의 결과는 놀랍게도 모든 이들의 예상을 뒤엎은 금탑의 승리였다. 금탑은 블리어드 제국의 8클래스 마법사 게이런즈를 죽이고 다이어드 공작을 사로잡는 공을 세워 그 이름을 대륙에 널리 퍼뜨렸다. 때문에 대륙 사람들은 금탑의 존재를 대륙 10대 마탑에 올려놓았다. 여기서 10대 마탑이란 대륙에 존재하는 10명의 8클래스 마법사가 세운 마탑을 말한다. 8클래스 마법사가 세운 마탑은 7클래스 마법사가 세운 마탑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거대하고, 그 힘은 몇 배에 달할 정도로 대단했다. 그런 자리를 금탑이 차지하고 들어간 것이다. 그것 때문에 게이런즈를 잃은 황탑은 10대 마탑에서 제외되었다. 어떻게 보면 정말 잔인하기 그지없는 평가였다. 침공군이 사로잡히자 성국은 다시 쳐들어갈 듯한 움직임을 보이다가 돌연 금탑과 싸움을 하지 않겠다고 공표했다. 이에 사람들은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더 이상 피해를 입었다가는 대륙 서부와 중부에 미치는 성국의 영향력을 잃을 수 있다는 생각에 전력 보존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제아무리 성녀라는 존재가 중요하다지만 힘없는 성국의 말을 고분고분 따를 왕국은 그 어떤 곳도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 성국의 이름을 딛고 금탑의 이름은 한층 더 높게 평가되고 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렇게 전쟁이 끝난 지 1달이 되어 갈 무렵, 조용했던 대륙이 다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전쟁의 조짐이 아니라 누군가의 초대에 의해 술렁였던 것이다. 대륙이 술렁인 이유, 그것은 얼마 전 대륙 10대 상단에 들어선 디벨 상단이 대륙 각지의 유명 인사들에게 초대장을 보냈기 때문이다. 초대장의 내용은 간단하다. 이번에 자신들의 상단이 야심차게 준비한 이벤트가 있단다. 특히 귀부인들이 좋아할 만한 이 이벤트는 앞으로 대륙에 큰 인기를 끌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게 초대장을 쓰면서 디벨은 이미 여러 루트로 정보를 흘렸다. 이번에 카르메인 왕국에 엄청난 투자를 하여 그곳에서 특별한 일을 벌이려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게 뭘까?' 디벨 상단의 초대를 받은 귀족들은 머릿속에 의문을 품으면서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였다. 대륙 10대 상단주의 초대. 비록 작위가 없다고 하지만 디벨 상단의 이름값은 이미 웬만한 귀족을 금력으로 찍어 누를 수 있을 만큼 대단했다. 대륙 돈의 흐름 판도를 비틀어 버릴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영향을 발휘할 수 있는 이, 그것이 바로 대륙 10대 상단인 것이다. 때문에 디벨 상단의 초대를 거절하기 어려운 귀족들이 대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가는 곳, 그곳은 대륙 중부에 위치한 카르메인 왕국의 수도 라이엘이었다. 데이브 백작은 대륙 서남부에 위치한 오스턴 왕국의 귀족이다. 오스턴 왕국은 국토의 절반이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 해상 왕국이며, 대륙에 풍부한 어류를 공급하는 상업 국가이기도 한 곳이다. 데이브 백작은 그런 오스턴 왕국의 섬을 영지로 가지고 있는 귀족으로, 그의 영지에서는 무척 많은 어류가 잡히고, 마법사가 그걸 냉동 보관하여 대륙에 팔음으로써 무 척 부유한 귀족이기도 했다. 그가 이번에 카르메인 왕국에 오게 된 것은 그의 의지가 아닌 다름 아닌 그의 부인 때문이었다. 그의 부인 메드린이 우연찮게 상단에서 정보를 전해 듣고는 남편인 데이브 백작을 졸라 이곳에 오게 된 것이다. 데이브 백작은 해산물을 팔기 위해 가문 자체에서 상단을 운영하고 있다. 상단의 기본은 당연히 정보! 그 정보 루트를 통해 이번에 초대장을 보낸 디벨 상단이 카르메인 왕국에서 대대적인 패션쇼를 하려고 함을 알 수 있었다. 여태껏 귀족들에게 있어 패션쇼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왕국에 존재하는 유명한 디자이너에게 옷의 제작을 일임하여 입는 것이 다반사였던 시대였다. 그런데 패션쇼라니? 각국의 디자이너를 모집하여 그들이 만든 옷을 전시한 다는 것에 옷에 관심이 많은 귀부인들은 물론 상당수 귀족들의 마음을 끌었다. 귀족들은 잘 알고 있다. 옷은 곧 그 귀족의 얼굴이 된다는 것을. 가령 사교 파티가 벌어질 때도 얼마나 화려하고 얼마나 독창적인 예복을 입느냐에 따라 그 파티의 주인공이 결정되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데이브 백작은 메드린의 성화에 마지못해 승낙하기는 했지만 내심 패션쇼라는 것에 관심이 갔다. 우선 워프 게이트를 이용하여 데이브 백작 일가는 단번에 라이엘로 이동하였다. "아니?" 그들이 워프 게이트롤 벗어난 순간 두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라이엘의 모습은 그들이 예상했던 황량한 도시와는 전혀 다른 화려함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 이다. 오스턴 왕국과 카르메인 왕국은 그 영토나 군사력에 있어서 거의 비등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국가의 재정은 극과 극이라 할 수 있다. 풍부한 해산물을 바탕으로 바다의 각종 자원으로 부를 축적한 오스턴 왕국은 왕국 중에서 상당히 부유한 축에 속했으며, 반대로 변변한 자원도 없는 카르메인 왕국은 왕국들 중에서도 상당히 가난한 축에 속한다. 그런데 이런 화려함이라니? 카르메인 왕국에는 분명 이렇게 도시를 꾸밀 여력이 없을 터, 그렇다는 건. '디벨 상단이 투자를 했나 보군. 그것도 상당히.' 한눈에 보아도 귀족들을 노리고 도시를 만든 게 분명했다. 퇴폐적인 유흥업소는 다소 적었지만 귀족들이 가족 단위로 편안하게 쉬어 갈 고급 여관이 줄지어 여러 곳 존재했다. 그리고 여관에서 고용한 듯한 어린 아이들이 줄지어 나와 호객 행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데이브 백작의 일가가 눈에 띤 듯, 줄지어 달려와 호객 행위를 하였다. '흠! 어디.......' 데이브 백작은 여러 아이들 중 가장 말솜씨가 괜찮은 아이를 따라 여관에 들어갔다. 본디 그는 이런 여관을 평가하는 데 있어 무척 냉정하다. 가령 여관의 청소가 제대로 되어 있는지, 음식은 어떠한지, 서비스가 어떠한지 꼼꼼한 편인지라 그에게서 후한 점수를 받기란 상당히 까다로운 일이었다. 그런 그도 라이엘에 존재하는 여관의 서비스에 크게 만족을 표했다. 종업원들의 태도가 깍듯했고 요리 또한 만족할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이거 대단하군. 이 정도 서비스라면 귀족들이 다음에 찾아올 것이 분명하다. 그 패션쇼라는 것이 크게 성공한 다면 이곳은 단숨에 패션 도시로 그 이름을 탈바꿈하게 될 것이다.' 상인 출신 귀족답게 그는 이곳에서 돈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그의 얼굴은 기대감에 달아올랐다. 여관도 이 정도로 만족스러운데 과연 패션쇼라는 건 어떻게 준비했을까? 절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디벨 상단이 초대한 장소로 향했다. 디벨 상단이 귀족들을 초대한 장소는 얼마 전 완성된 거대한 건물이었다. 총 4층으로 이루어진 건물은 한눈에 보아도 무척 세련되고 고급스러워 보였다. 게다가 왕궁과도 멀지 않아 왕궁에서 근위병을 지원하는 듯 카르메인 왕국의 근위병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데이브 백작은 건물 앞에서 초대장을 확인하는 경비병에게 다가가 초대장을 내밀었다. "디벨 상단에게서 초대를 받았네." 경비병은 데이브 백작이 내민 초대장을 받아들고 그것이 진짜인지 확인 작업을 하였다. 그리고 진짜라는 것이 확인되자 경비병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의 인사드립니다. 이곳 안으로 들어가시면 패션쇼장으로 안내해 줄 사람이 있을 것 입니다." 경비병은 귀족들을 대하는게 무척 능수능란한 듯했다. "음, 그럼 수고하게." 경비병과 일별한 데이브 백작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과연 경비병의 말대로 안내인이 있었고, 그 안내인을 따라 패션쇼가 시작되는 장소에 도착했다. 패션쇼가 벌어지는 장소는 거대했다 콜로세움의 축소판인 듯한 구조는 위에서도 편안하게 관람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흠, 어떨지 구경이나 해 볼까." 데이브 백작이 앉고, 그의 부인이 옆에 앉았다. 그리고 수행원들이 각자 자리를 잡았다. 조금 일찍 왔기에 패션쇼가 시작될 시간이 거의 다되자 상당수 귀족들이 안으로 들어와 자리에 착석했다. 그중에는 아는 이들도 있는지 서로 인사를 나누기도 하였다. 데이브 백작도 예외가 아니었다. 자리에 앉아 있는 그를 향해 한 중년인이 말을 걸었다. "어, 이거 데이브 백작이 아닌가?" "누구? 아, 클램버 백작이 아닌가?" 고개를 돌린 데이브 백작이 중년인을 보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에게 말을 건 클램버 백작, 그는 오스턴 왕국 이웃에 위치한 트레비온 왕국의 백작이다. 트레비온 왕국은 해산물이 풍부한 오스턴 왕국과 정반대로 광물이 풍부한 왕국이다. 클램버 백작의 영지도 풍부한 광산을 여럿 가지고 있기에 그 또한 매우 부유한 귀족에 속했다. 언젠가 외교 사절단에서 만나 친분을 나누었기에 두 사람은 이 먼 카르메인 왕국에서 만난 것이 무척 신기한 표정이었다. 클램버 백작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디벨 상단이 무슨 의도로 이 일을 꾸미는지 모르겠군. 단순히 돈을 벌려는 게 속셈인가? 이거야 원, 상인의 속을 알 수 있어야지," "큭!" 클램버 백작의 말에 데이브 백작이 웃었다. 그리고 너스레 떠는 그에게 따끔한 일침을 놓았다. "그러는 그대도 상인 아닌가?" 데이브 백작의 말에 클램버 백작이 웃음을 지었다. "그도 그렇군. 후후후!" "그나저나 디벨 상단이 확실히 작정하고 투자를 한 듯 하더군. 여관에서 하루를 머물렀는데 상당한 서비스였어. 디벨 상단은 이곳을 패션 도시로 만들 생각인가 보더군." "자네도 그렇게 생각했나?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네. 확실히 돈 냄새가 풍기더군." 두 사람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때, 갑자기 경쾌한 악기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등장했다. 지적인 외모의 중년인, 대륙 10대 상단에 올라선 디벨 상단의 상단주 디벨이 등장한 것이다. 디벨은 한순간 시선을 집중시킨 뒤 차분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솔직히 이렇게 많은 분들이 오실 줄 몰랐습니다. 우선 먼 길을 오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그렇게 말하며 디벨은 주변의 반응을 유심히 살폈다. 예상대로 반응은 시큰둥함 그 자체였다. 아직 귀족들은 패션쇼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하기야, 디벨조차 엘에게 여러 번 들어서야 있었으니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패션쇼가 끝난 뒤 그대들은 나에게 사정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디벨은 확신했다.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그는 확신을 담아 귀족들에게 외쳤다. "패션쇼라는 용어는 사실 낯선 언어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단언컨대, 결코 후회하시지 않으실 것이라는 점입니다." 디벨이 그렇게 말했지만 반응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역시 눈으로 확인시켜 줘야 함을 깨달은 디벨은 말을 길게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곧장 행동으로 돌입했다. "눈으로 보시는 게 빠르겠지요. 그럼 패션쇼를 시작하겠습니다." 디벨이 내려가고 그와 동시에 형형색색의 마법 조명이 빛을 발했다. 팟! 조명 빛을 받으며 독특한 의상을 걸친 아리따운 여인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옷을 입은 여인은 상당히 특이한 걸음을 구사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단아한 옷과 어울리는 부드럽고 경쾌한 워킹이었다. "오오!" 두 번째 여인의 복장을 본 귀부인들이 곧장 반응을 하였다. 지금 여인이 입고 있는 복장은 대륙 북부의 전통복으로, 열을 보호하기 위해 두터운 가죽으로 이루어졌으면서도 북방의 새하얀 멋을 살려 독특하면서도 순백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렇게 뒤이어 세 번째 여인은 남부의 짧으면서도 각선미를 살리는 대담한 옷을 입고 나왔다. 그 뒤를 이어 각종 독특한 옷들이 나왔고, 그것들이 하나하나 등장할 때마다 장내의 분위기는 화끈하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성공이군." 디벨은 어느덧 열성적인 반응을 보이는 귀족들을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미 이 패션쇼가 성공할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대륙 각지의 디자이너들이 한데 모여 옷을 제작한다. 서로의 경쟁을 통해 그들의 실력을 기르면서 독특하고 멋진 옷을 찾는 귀족들의 심리를 자극하는 패션쇼는 시작하기도 전에 성공을 점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이게 다 의류 사업 덕분이지." 이 계획은 엘이 값싼 의복을 내놓을 때부터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값싼 옷이 대륙 각지에 공급이 되면서 가내 수공업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영향은 일반 평민들에게만 미친 것이 아니다. 바로 옷을 제작해서 파는 디자이너들에게까지 미친 것이다. 대량 생산으로 만들어지는 옷으로 인해 옷의 값이 대폭 하락했다. 그것은 디자이너들이 하는 옷 가게도 피해갈 수 없는 일이었고, 대륙 각지에 존재하는 디자이너들이 줄줄이 파산을 하게 되었다. 엘은 디벨에게 그런 그들에게 손을 뻗으라고 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각자 자신 있는 옷을 만들게끔 하였다. 그런 옷들을 한데 모아 모델들에게 입히고 광고하는 패션쇼를 계획하게 된 것이다. 아직 대륙에 이런 개념이 잡혀 있지 않았기에 그것은 필시 성공할 것이라고 결코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가 눈앞에 드러나고 있었다. 처음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던 귀족들이 지금은 대부분 열성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던 것이다. 특히 귀부인들은 난생 처음 보는 대륙 각지의 옷에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사업이 성공해도 단단히 성공한 것이다. "이걸로 여태껏 투자한 투자금을 모두 회수할 수 있겠어." 디벨은 이번 패션쇼로 굴러 들어올 돈을 생각하게 미소 지었다. 사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이번 패션쇼는 디벨 상단의 여력을 대부분 소모할 만큼 엄청난 돈을 들인 사업이다. 카르메인 왕국이 빛을 진 것도 갚고, 도시 전체에 여관을 세우고, 패션쇼까지 계획하는 등, 상단의 모든 돈을 다 쏟아 부은 것이 바로 이 사업인 것이다. 그리고 멋지게 성공한 지금, 디벨 상단에게 남은 것은 투자금을 회수하는 것뿐이다. 오늘 여기서 패션쇼를 관람한 귀족들은 대륙 각지로 퍼져서 소문을 내줄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귀족들이 이곳으로 몰려들고, 이곳 라이엘은 명실상부한 패션의 도시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옷을 사기 위해 귀족들이 돈을 싸들고 올 것이 분명하고, 그들이 여관에서 머무는 돈과 각종 유흥비까지 계산한다면....... '대박이다!' 디벨은 순간 돈이 하늘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듯한 착각을 하였다. 이번 건은 그 정도로 대박이었다. '대박이다!' 데이브 백작은 패션쇼를 보고 속으로 소리쳤다. 처음에는 그도 시큰둥한 반응 그 자체였다. 돈 냄새를 맡았지만 그 실체를 확인하지 못했기에 쓸데없이 열광할 기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패션쇼가 시작되고 그의 기분은 판이하게 달라졌다. 화려한 의상과 옷을 입고 나오는 여인들 특유의 워킹, 세 번째 모델이 나오는데 이미 분위기는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라 있었다. 이거야 말로 대박! 의심할 여지가 없다. '정말 대단하군.' 데이브 백작은 감탄사를 흘렸다 처음의 시큰둥한 분위기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지금 이곳에 감도는 분위기는 디자이너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을 보며 환호하는 귀부인들과 귀족들뿐이었다. 의복에 관심이 많은 귀족들 대부분 한눈 팔 사이도 없이 패션쇼를 관람하고 있는 것이다. '호, 저 옷은 정말 멋지군.' 데이브 백작 또한 연이어 나오는 옷들을 보면서 점점 패션쇼에 빠져들었다. 이것이 끝나면 반드시 디벨 상단과 연줄을 연결하겠다고 결심하면서 말이다. 패션쇼는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첫 패션쇼가 끝난 뒤, 엄청난 양의 옷은 그야 말로 경쟁 하듯 팔려 나갔다. 오히려 부족할 정도여서 부랴부랴 옷을 추가 생산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귀족들이 여관에서 자고 먹고 하는 비용도 엄청 났다. 라이엘에 있는 모든 여관이 디벨 상단에 속해 있다는 걸 감안할 때, 벌어들이는 돈이 그야 말로 엄청난 것이다. 게다가 각국으로 돌아간 귀족들은 고맙게도 그걸 또 소문 내주었다. 때문에 각지의 귀족들이 라이엘을 몰려오기 시작하였고, 디벨은 귀족들에게 공지 개념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패션쇼를 한다고 공표했다. 그러자 신난 것은 디자이너들이다. 그저 한 도시에서 실력을 발휘하던 그들이 언제 각국의 귀족들에게 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있던가. 보통 이런 이들은 금전적 이득보다 자신의 실력을 증명 받고 싶어 하기 마련이다. 때문에 그들은 3주마다 한 번 열리는 패션쇼를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는 상당히 좋았다. 그들이 열심히 하는 만큼 귀족들의 반응도 더더욱 달라 올랐던 것이다. 그렇게 두세 번 정도 패션쇼를 열자 라이엘은 명실상부 한 패션 도시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돈을 부르기 마련이다. 대박이 터졌다. "정말 고맙네, 금탑주." 아스트로 국왕은 엘의 손을 잡고 연신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런 그의 말에 엘은 살짝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것은 서로의 이해가 맞아 결과가 좋게 된 것뿐입니다. 그렇게 고마움을 표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 말 말게. 그대가 그렇게 말할지 몰라도 내게 있어 그대는 은인이나 다름없네." 아스트로 국왕의 반응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패션쇼로 인해 라이엘에 유동 인구가 엄청나게 늘어나게 되었다. 그것도 대부분이 귀족이니 만큼 그들이 라이엘에게 먹고 자고 하면서 소비하는 금액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고, 그중 세금으로 걷어오는 금액이 엄청났던 것이다. 디벨은 그것이 시작에 불과하고 앞으로도 계속 매출이 증가할 것이라고 말하니 어찌 기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골드 워 상단에게 나라를 빼앗기기 직전에 나타나 구원 해준 엘은 아스트로 국왕에게 은인이고, 카르메인 왕국의 은인이었다.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어렵사리 뿌리친 엘은 아스트로 국왕에게 말했다. "국왕 전하의 호의는 정말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저도 이곳에 여러 가지 일로 온 터라 이만 물러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음! 마음 같아서는 계속 붙잡고 싶지만 그건 예의가 아니겠지. 다음에 꼭 들러 주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스트로 국왕에게 인사를 건넨 엘이 대전을 벗어났다. 그리고 그가 머물고 있는 여관에 도착해서야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후! 분명 좋은 사람이긴 하지만 너무 부담되게 한단 말이야." "누가 주인님을 곤란하게 하죠?" 엘의 중얼거림을 들은 세레나가 물었다. 그러자 엘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야. 아스트로 국왕이 내게 너무 고마움을 표현해서. 그게 지나치니 조금 부담스럽더라고."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 고마움을 너무 뿌리치지 마세요. 주인님에게 있어 그렇게 큰 도움이 아닐지는 모르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한 줄기 희망이었을 거예요." 세레나가 묘한 감흥이 어린 어조로 말했다 과거 그녀도 그렇게 구원을 받았다.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게 되어 그 입장을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으니 묘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 세레나의 말에 엘 또한 생각에 잠겨들었고 그로 인해 잠시 침묵에 빠져 들었다. 그런 침묵을 깬 것은 다름 아닌 실피르였다. 그녀는 카이나와 함께 방안으로 들어오면서 엘과 세레 나를 한 번씩 보고는 입을 열었다. "뭐 하고 있니?" "예? 아, 그냥 이야기요." 엘은 적당히 얼버무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세 여인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아스트로 국왕도 만나 보았으니 이제 여기서 적당히 놀다 가죠. 명색이 패션의 도시인데 옷을 안사면 예의가 아니잖아요? 제가 살 테니 마음에 드는 옷 팍팍 골라 보세요." 엘의 말에 실피르가 활짝 웃음을 지었다. "호호! 그럼 나야 좋지." "저도요........" 카이나도 기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지었다. 세레나는 1차례 미소를 지어 보임으로써 기분 좋음을 표현했다. "그럼 가볼까........" 엘은 아리따운 미녀 셋과 함께 라이엘을 활보하며 그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지난 5달 동안 골든 벨리가 완전히 복구되고 부상도 완전히 나았다. 모든 게 안정된 지금, 엘은 그 어느 때보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위험은 아직 가시지 않았으니....... "일이 상당히 틀어졌어." 지크릴은 드넓은 산맥을 굽어다보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일이 틀어졌다. 애당초 그의 계획은 성국과 블리어드 제국을 이용하여 엘이라는 존재를 제거하는 것이다. 하지만 엘이 지닌 저력은 놀라웠다. 우위를 점하던 성군과 블리어드 제국의 전력을 깨 버리고, 마침내 성국의 의지를 꺾는 데 성공했으니 말이다. 그 덕에 지크릴은 블리어드 제국이란 우군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게 되었다. 충분한 시간이 있다면 다른 국가들도 차례로 우군으로 만들어 금탑을 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에게는 시간이 없다. 루이아스의 명령을 받은 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아무런 성과도 보이지 못했다는 것은 즉, 루이아스의 신뢰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사라진 루이아스의 신뢰. 그것은 즉, 소멸을 뜻한다. 전설의 9클래스 마스터인 루이아스에게 지크릴이 당해낼 리 만무했다. 지크릴의 현재 경지는 8클래스 익스퍼트. 흑마법 특유의 파괴력으로 8클래스 마스터를 상대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9클래스 마스터에게 덤비는 것은 그야말로 오크가 드래곤에게 덤비는 것과 같은 형국이었다. 때문에 그는 임무를 완성하기 위해 자신의 임무를 직접 움직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미 흑탑의 정체를 감추고 말고의 문제에서 벗어났다. 이대로 루이아스의 눈에 벗어나면 흑탑은 그야 말로 깨끗한 소멸을 맞이할 것이 분명했다. 그것 때문에 지크릴은 직접 금탑으로 가서 엘을 사로잡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왔나." 스스슷! 낮은 지크릴의 목소리와 함께 그의 뒤에 24명의 마법사가 나타났다. 그들은 다름 아닌 흑탑을 대표하는 24장로였다. 개개인 모두가 5클래스 이상의 경지를 이룩한 흑탑의 최고 정예였다. 지크릴은 그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상대해야 할 적은 금탑이다. 만만치 않은 적이니 만반의 준비를 취하라." 24장로가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가 볼까. 금탑을 정리하러........" 지크릴의 주변이 새하얀 빛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본인과 24장로가 모두 빛에 휩싸였을 때, 마법이 전개되었다. 다수의 사람을 이동시키는 매스 텔레포트였다. 스팟! 새하얀 빛이 폭사하면서 그들의 몸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드디어 지크릴이 마음을 먹은 건가?" 루이아스는 손톱을 만지작거리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9클래스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그의 눈은 대륙 도처에 깔려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금탑도 그의 눈을 벗어날 수 없는 곳 중 하나이며, 지금 그곳에 강력한 기운을 지닌 이들이 등장한 것을 보고 사실을 짐작하는 것이다. "확실히 금탑주가 게이런즈를 처리한 건 대단한 일이야. 나조차도 예상을 못했으니까. 하지만....... 지크릴을 상대로는 불가능한 일이지. 같은 8클래스 마법사라고 해도 그 실력의 차이는 존재하는 법이니까. 뭐, 지크릴은 분명 권유할 거야. 우리와 함께 하자고. 그걸 받아들이길 바라겠어, 금탑주. 그 아까운 능력을 꺾어 버리기에는 그 재능이 너무나 아까우니까. 굳이 가담하지 않겠다고 하면 뭐, 죽음만 기다리고 있겠지만 말야, 그리고....... 신검의 주인 녀석이 금탑에 가고 있다고 했지? 잘하면 마주 칠 수도 있겠군. 재미있겠어. 아하하하!" 즐거운 듯 웃음을 터뜨리는 루이아스. 하지만 그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더없이 차갑고 냉정한 그 눈은 본래 루이아스의 진면목이라는 걸 한눈에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모습이 그에게 너무나 잘 어울리고 거부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웃음을 거둔 그는 손톱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들어 중지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그의 중지에는 검은색 투박한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루이아스는 그 반지를 보물 만지듯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대계는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마검의 탈취로 시작될 것이야. 이 인과를 비트는 사멸의 반지로 말이지." 파앗! 루이아스의 동공에서 짙은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그 안광은 그 무엇보다도......... 어두웠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대륙은 또다시 요동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흑탑주의 힘 위잉! 위잉! 요란스럽게 울리는 알람 소리. 하지만 그것은 결코 방심할 수 없는 소리였다. 계곡 곳곳에 설치한 알람 마법이 전개되고 있다는 것은 누군가가 골든 벨리로 침공해 오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엘은 언젠가 올 침입자에 대비하고 있었다. 알람이 울리기 무섭게 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설마?" 엘의 몸이 공간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엘이 모습을 드러낸 곳은 계곡의 입구였다. 한눈에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곳에는 검은색 로브를 걸친 20여 명의 흑마법사가 이곳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 그것을 보며 엘은 가슴이 요동치는 걸 느꼈다. 오고 있다. 그가 오고 있는 것이다. 일전에 자신에게 무력함을 느끼게 해 준 그 흑마법사가 지금 이곳을 향해 오고 있는 것이다. "준비를 해야겠어." 얼핏 본 것뿐이지만 저들의 힘은 대단해 보였다. 선두에 있는 흑마법사는 분명 자신이 보았던 8클래스 흑마법사가 분명했고, 그 뒤를 바짝 따라오는 2명의 흑마 법사는 7클래스의 경지에 든 듯했다. 게다가 뒤에 있는 나머지 마법사들도 최소 5클래스 이상에 든 듯했다. 즉 엄청난 전력이 지금 이곳으로 쳐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순수하게 전투에 특화되어 있는 흑마법사들의 침공은 저번에 쳐들어온 성국의 침공군에 못지않은 힘을 발휘 할 것이다. 일단 시간을 끌어야 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저들을 상대할 전력을 갖춰 놓아야 한다. "다크 포그!" 엘은 골든 벨리 진역에 펼쳐져 있는 다크 포그를 전개 했다. 소드 마스터조차 견뎌 내지 못하는 오감 삭제 마법이 걸린 다크 포그. 만약 이것에 당한다면 적들의 전력은 단 번에 절반 이상 줄어들 것이다. 샤아앗! 다크 포그가 전개되자 검은 안개가 빠르게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삽시간에 골든 벨리 입구를 뒤덮고, 주변 일대를 뒤덮어 나가자 거침없이 전진하던 흑마법사들이 멈춰 섰다. 지크릴의 바로 뒤에 서 있는 흑탑의 부탑주, 갈로윈이 물었다. "저게 바로 다크 포그란 마법입니까?" "그래, 보아하니 우리의 침입을 알아차렸나 보군. 조심해라. 저 다크 포그는 그랜드 마스터와 8클래스 아래의 경지에 이른 이들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 미리 준비한 대로 이곳에 결계를 친다. 다크 포그는 내가 제거한다." "알겠습니다, 탑주님." 힘차게 대답한 갈로윈이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또 다른 부탑주인 게로마네와 힘을 합쳐 결계를 형성했다. 지크릴은 이미 다크 포그에 대항하기 위해 그 수단을 준비한 상태였다. 단지 자신은 영향을 받지 않지만 자신을 따라온 장로들은 그 영향을 받을 수 있기에 스스로의 몸을 보호할 수 있는 결계를 치도록 한 것이다. "훗, 전보다 훨씬 범위가 넓어졌군. 힘들지도." 그렇게 말하면서도 지크릴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파앗! 그의 전신에서 검은 다크 오러가 줄기줄기 뿜어지기 시작했다. 다크 오러와 다크 포그는 같은 어둠이라는 점에서 통하는 면이 있다. 몇 달 전 그레이 오크들을 선동하여 이곳을 침공하게 할 때, 다크 오러를 활용하여 다크 포그를 무력화시킨 적이 있다. 그는 그때 사용했던 방법을 그대로 활용하여 다크 포그를 무력화시키려는 생각이었다. 우웅! 콰콰콰! 지크릴의 전신에서 다크 오러가 무시무시하게 뿜어지기 시작했다. 노도처럼 뿜어지는 다크 오러는 짙은 검은색을 띠고 있었고, 그것은 다크 포그와 서서히 융화되기 시작했다. "큭! 과연 쉽지가 않군. 하지만........ 어둠이 있는 한 난 절대 지지 않는다." 전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는 다크 포그가 그를 괴롭히는 듯했지만 지크릴은 도리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모습은 마치 고통을 즐기는 자의 모습이었다. "날 이 정도로 저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지." 그의 손에서 뿜어진 다크 오러가 모든 다크 포그와 융화되었을 때, 다크 포그는 그의 의지를 따르게끔 되어 있다. 어둠은 그에게 있어 힘의 원천. 친구이자 부하이며, 노예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지크릴이 오른손을 튕겼다. 딱! 그와 함께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짙은 어둠에 감싸져 있던 골든 벨리의 입구가 한순간 활짝 열려 버린 것이다. 파앗! 마치 길을 여는 것처럼 다크 포그가 서서히 흩어지며 사람이 지나갈 공간을 마련해 주고 있었다. "훗!" 그것을 본 지크릴은 1차례 코웃음을 치며 24장로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들은 모두 경외에 찬 눈으로 지크릴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크릴은 그런 그들의 시선을 외면하며 말했다. "가자." 파앗! 지크릴의 몸이 쏘아지자 장로들이 그 뒤를 바짝 쫓았다. 이미 다크 포그는 지크릴의 통제하에 있었기에 그것은 그들에게 아무런 장애도 주지 못했다. 그리하여 엘이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든 회심의 역작 다크 포그는 흑탑의 인물들에게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한 채 허망하게 길을 열어 주고야 말았다. 마침내 골든 벨리 입구에 도착한 그들이 막 골든 벨리에 들어서려고 할 때,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이들이 있었다. 약 10여 명의 기사가 좌우로 늘어서 있었고, 안쪽 왼편에는 3기의 골렘이, 안쪽 오른편에는 트롤 킹이 서 있었다. 그리고 중앙에는 3명의 여인과 1명의 청년이 서 있었다. 청년의 뒤에는 황금빛 나이트 골렘이 찬란한 금빛을 발 하며 굳건한 자세로 서 있었다. 지크릴이 다크 포그를 뚫고 온 사이 엘은 빠르게 전투 준비를 끝마쳤던 것이다. "호오....... 한발 빨랐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가? 준비가 빠르군." 지크릴의 감탄 섞인 어조에 엘은 고개를 살짝 가로저으며 말했다. "저번에 크게 당한 게 있어서 말이지. 다크 포그가 먹히지 않는 상대인 걸 빤히 아는데 요행을 바랄 수도 없고 말이야." 기선제압을 위한 싸움. 엘은 눈앞의 흑마법사가 정말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게이런즈와 한번 사투를 벌인 후라 더욱 잘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흑마법사....... 게이런즈보다 강하다. 게이런즈에게 죽을 고비를 넘겼던 엘은 자신 혼자서 지크릴을 상대할 수 없음을 느끼고 있었다. 엘의 말에 지크릴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거 칭찬인가? 고맙군. 과연, 그때보다 더욱 성장한 것 같아. 젊음이란 무섭군. 잠시라도 그 자리에 멈춰 있으려 하지 않으니 말이야." "하지만 당신에게 도달하지는 못한 것 같군. 이왕이면 당신을 뛰어넘고 싶은데 말이야." "그런가? 젊은 패기가 넘치는군." 입가를 말아 올리며 웃음을 짓는 지크릴. 하지만 그 웃음에는 짙은 살기가 맺혀 있었다. "아직 뭘 모르는군, 어린 친구. 세상에서 가장 불공평 한 것은 시간이다. 어린 친구가 나보다 십 년만 일찍 태어났어도 나보다 강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거든. 후후후!" 콰아아아! 다크 오러가 줄기줄기 뿜어지며 삽시간에 주변을 장악해 나갔다. "읏!" 지크릴의 다크 오러 개방은 마치 클래스 프레셔와 같은 위력을 지니고 있어 엘이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쉽사리 당하지 않았다. "호오, 과연. 그때와는 다르다는 건가." 지크릴의 얼굴에 감탄사가 떠올랐다. 저번에는 너무 쉽게 당했던 것을 지금은 손쉽게 막아 낸 것이다. "쉽지 않을 것이다." "너무 쉽다면 재미가 없지." 엘은 전신이 저릿저릿해짐을 느끼면서도 당당하게 말했다. 그런 엘의 기개가 전해진 듯 지크릴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그가 돌연 왼손을 불쑥 들었고, 그것을 엘을 향해 뻗었다. 그와 함께 검은빛이 뭉클 피어오르며 엘을 향해 검은 화살이 쇄도했다. 흑마법 중 기본 마법에 속하는 공격 마법, 다크 애로우였다. 하지만 결코 얕볼 수 없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파괴적은 다크 오러로 전개된 마법인데다가 흑마법의 기본 파괴력은 기존의 마법을 훨씬 뛰어넘기 때문이다. 엘은 자신에게 쏘아지는 다크 애로우를 보며 손에 실드 마법을 전개했다. 그러고는 손을 휘둘러 다크 애로우를 쳐냈다. 따당! 땅! 따당! 놀라운 동체시력으로 화살 하나하나를 모두 쳐낸 엘은 곧장 반격에 나섰다. 붉은 화염이 지크릴에게 쏘아진 것이다. 5클래스 마법 플레임 버스터였다. "훗!" 지크릴은 짧게 웃으며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플레임 버스터가 팡! 하는 소리와 함께 산산이 흩어졌다. "........!" 엘의 눈이 놀라움으로 치켜떠졌다. 그러자 지크릴은 미소를 지은 채 한 손을 들었다. 그 신호를 기다렸다는 듯, 흑탑 24장로는 엘을 제외한 나머지 이들에게 달려들었다. 흑마법사들이 달려들자 골렘을 비롯한 매직 나이트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흥!" 그런 그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흑마법사들은 저마다 흑마법을 전개했다. 그것을 골렘들이 앞장 서 막아 냈다. 콰광! 콰과광! 삽시간에 주변은 폭음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골든 벨리에, 짙은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호오, 그 나이트 골렘하고 같이 덤빌 셈인가?" 지크릴은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엘과 골든 나이트롤 보며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랜드 마스터를 홀로 맞설 수 있는 골든 나이트와 게이런즈를 꺾은 엘이 막아섰는데도 결코 다급함이 없다. 오히려 한 수 아래인 하수를 굽어보는 듯한 인상을 강하게 주고 있었다. "큭!" 엘은 너무나 여유로운 지크릴의 모습을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자신과 골든 나이트를 앞에 두고 여유로움을 보이는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 여유가 어디까지 가나 보겠어." 그 말과 함께 골든 나이트가 지크릴에게 달려갔다. 지크릴은 결코 약한 적이 아니었기에 골든 나이트는 다이어드 공작을 궁지로 몰아넣었던 검, 룬 블레이드를 들고 있었다. 주변의 공기를 압축하여 예리한 무형의 칼날을 만들어 내는 룬 블레이드의 예기가 삽시간에 지크릴을 휩쓸어 나갔다. 룬 블레이드의 힘을 눈치 챈 듯, 지크릴이 두 눈을 크게 뜨며 감탄을 터뜨렸다. "대단하다. 공기를 극도로 압축시켜 이 정도 예기를 뿜어낼 수 있다니." 지크릴이 양손을 머리 위로 들었다. 그러자 그의 양손에 짙은 다크 오러가 생겨났다. 그리고 룬 블레이드의 예기와 충들을 일으켰다. 따당! 따다당! 눈 깜빡할 사이에 20여 번의 충돌을 일으킨 지크릴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골든 나이트와의 체격 차에서 나오는 힘의 우위가 명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러난 지크릴은 전혀 타격을 받은 모습이 아니었다. 몸에 충격을 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 뒤로 물러났던 것이다. 뒤로 물러난 지크릴은 저릿저릿한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보며 격양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정말 놀라워. 이거 재미있군." 오랜만에 전투를 벌이는 것이라 그런가? 지크릴은 무척 즐거운 안색을 하고 있었다. "그럼 이걸 받아 봐라!" 뒤로 뛰어오르며 지크릴이 양손을 뻗었다. 순간 검은색 다크 오러가 소용돌이치며 골든 나이트에게 쏘아졌다. 파악! 골든 나이트는 몸을 돌려 금빛 망토를 휘두르며 강한 풍압을 일으켰다. 망토로 오러 스톰을 일으킨 것이다. 쾅! 콰광! 오러 스톰과 다크 오러는 허공에서 부딪치며 폭발을 일으키고는 사라졌다. 그러나 그 짧은 틈을 활용하여 지크릴의 신형은 골든 나이트 뒤에 접근해 있었다. 블링크로 순식간에 이동한 것이다. "그랜드 마스터는 상대할 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며 그의 손에서 무수히 많은 다크 볼이 전개되었다. "이크!" 그 순간, 지크릴은 본능적인 위험을 느끼고는 고개를 숙였다. 쌔앵! 거의 동시에 지크릴의 머리카락을 훑고 지나쳐 버리는 한 대의 화살. 지크릴이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엘이 마법을 전개한 자세를 취한 채 아까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골든 나이트에게 정신이 팔린 지크릴에게 엘이 황금 화살을 전개했던 것이다. "칫!" 하지만 먹혀들지 않은 것을 보며 엘이 혀를 찼다. 지금 같이 어느 정도 방심할 때가 지크릴을 제거하기에 최대의 기회다. 그러나 방금 전 공격으로 지크릴도 경각심을 가질 것이 분명했다. "너무 방심했군." 아니다 다를까, 여태껏 묘한 장난기가 어려 있던 지크릴의 얼굴이 바뀌었다. 그동안 한 번도 보이지 않은, 무섭도록 차가운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파앗! 지크릴의 손이 엘이 있는 곳을 향해 뻗어 나갔다. 그와 동시에 수십 개의 흑마법이 전개되며 엘에게 쏘아 졌다. 하나하나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흑마법이었다. "칫!" 엘은 흑마법을 보고는 막는 것보다 피하는 것을 택했다. 8클래스 마법사 지크릴이 전개하는 마법은 막으면 손해를 볼 만큼 강한 위력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블링크를 전개한 엘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고, 그 사이 골든 나이트가 지크릴에게 바짝 접근하여 룬 블레이드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러자 지크릴의 몸도 블링크로 사라졌고, 골든 나이트의 뒤에 나타난 그는 다수의 흑마법을 전개했다. 뒤에서 빠르게 쏘아지는 마법을 골든 나이트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른 몸놀림을 보이며 룬 블레이드로 흑마법들을 모두 쳐냈다. 파사사. "오랜만에 임자 만났군 재미있어!" 강력한 위력을 지니고 있는 흑마법들이 맥없이 소멸되는 것을 보며 지크릴이 미소 지었다. 그것은 여태까지 짓던 미소와 다른, 상대를 인정하는 미소였다. 하지만 지크릴이 방심할 틈은 없었다. 그가 골든 나이트에게 마법을 전개하는 사이 엘은 지크릴에게 마법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무서워, 무서워." 지크릴은 자신을 노리는 마법을 피해 그대로 사라졌고, 그 자리에 쏘아진 마법은 요란한 폭발과 함께 사라졌다. "칫!" 공격이 허망하게 실패하자 엘이 나직이 혀를 찼다. 그런 그의 뒤에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나도 방심하지 않는데 네가 너무 방심하는 것 아냐? 그러면 다친다고." "윽!" 바로 뒤에서 속삭이는 지크릴의 모습을 보고는 엘은 인상을 찡그리며 마법을 전개했다. 근접전이라면 자신 있다! 자신에게는 중첩 마법이 있으니까. 엘은 곧장 마법을 전개했다. "헤이스트! 리터레이트!" 속도를 빠르게 하는 헤이스트 마법과 그것을 중첩시키는 리터레이트까지! 이 정도면 그 누구도 쫓아올 수 없는 엄청난 속도를 보유하게 된다. 엘은 그 속도를 활용하여 버닝 핸드를 전개했다. 그때,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엘의 접근을 무방비로 허용하던 지크릴의 입가에 돌연 미소가 맺히더니 정확히 버닝 핸드를 뻗어 오는 엘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헉!" 놀란 엘이 경악성을 터뜨렸고, 그런 엘을 향해 지크릴이 비웃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날 우습게 봤군." 그와 함께 검은 구가 생겨나며 엘을 향해 폭발했다. 쿠웅! "크윽!" 황급히 양손에 실드를 전개하여 충격을 줄였지만 그 위력이 워낙 강해서 엘은 비틀거렸다. "이제 알았겠지? 나와 너의 현격한 차이를." 지크릴은 비틀거리는 엘을 향해 웃어 보이며 손을 뻗었다. 엘의 위기! 그것을 본 골든 나이트가 오러 스톰을 일으키며 지크릴을 견제했다. "이거 번거롭군." 엘을 공격하려고 하면 골든 나이트가 훼방을 놓고, 골든 나이트롤 공격하려면 엘이 훼방을 놓자 지크릴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블링크를 전개했다. 콰과광! 오러 스톰은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걸 산산이 부숴 버렸고, 멀찍이서 모습을 드러낸 지크릴은 엘을 보며 말했다. "난 네가 여태까지 상대한 적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네가 동급의 7클래스 마법사들과 수준 차이가 있는 것처럼 나 또한 8클래스 마법사보다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네가 힘겹게 상대한 게이런즈가 두 명 있어도 나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큭......." 지크릴의 말에 엘이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다. 그는 게이런즈보다 훨씬 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고, 엘과 골든 나이트를 상대로 확연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무언가에 의지하지 않은 순수한 힘의 우위. 지금 그것을 지크릴은 엘에게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실력 차이가 현격하다고 하여 물러날 수 없는 노릇이다. 이대로 자신이 물러선다면 자신의 가족은 물론 골든 벨리의 주민들도 무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한 가지 위기를 넘기니 또 다른 위기가 닥쳐온다. 이 사실에 엘은 여태까지 자신이 상대한 적들 중 자신보다 약한 이가 얼마나 있던가를 떠올리며 다시금 전의를 불태웠다. 힘의 우위에서 밀리기는 했지만 아직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다. 아직 자신에게는 힘이 남아 있었고, 무엇보다 게이런즈를 꺾었던 원거리 캐스팅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지크릴이 고위 마법을 사용할 때, 원거리 캐스팅을 한다면 승기를 찾아올 수 있다. 그는 게이런즈를 꺾을 때를 떠올리며 다시 경계의 자세를 취했다. 큰 마법을 쓸 때다. 그때를 노리면 된다. 엘은 골든 나이트에게 외쳤다. "타나! 멈추지 말고 저자를 쫓아서 공격해!" 골든 나이트에게서 푸른 안광이 뿜어졌다. "명령을. 이행함." 그 말과 함께 룬 블레이드에게서 투명한 기류가 응집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골든 나이트가 황금 망토를 휘날리며 무시무시한 속도와 기세로 지크릴에게 돌진했다. "훗! 검을 다루는 그랜드 마스터에게나 동수를 이룰 수 있지 나를 이길 수는 없다." 지크릴은 허공으로 가볍게 떠오르며 골든 나이트의 공격권에서 자유로워졌다. 그때, 돌연 골든 나이트가 무릎을 구부리더니, 엄청난 도약력으로 지크릴이 있는 곳을 향해 뛰어올랐다. "헛! 나이트 골렘에게 이런 도약력이......." 지크릴은 골든 나이트의 도약력을 보며 경악을 표했다. 그리고 재빨리 블링크 마법을 전개하여 자리를 피했다. 부웅! 아슬아슬한 시간차를 두고 지크릴이 사라진 곳에 룬 블레이드가 섬뜩한 기세를 뿜어내며 지나쳤다. 약 30여 m 떨어진 곳에 나타난 지크릴은 그 모습을 보고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자신이 우위를 점하기는 했지만 상대 역시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절대 방심을 못하게 하는군." 지크릴은 포기하지 않는 엘과 골든 나이트롤 한차례 번갈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럼 본격적으로 상대해 줘야겠지." 콰라라콰! 지크릴의 전신에서 검은색 다크 오러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피어나기 시작했다. 마계의 마족에게서나 볼법한 폭발적인 다크 오러의 양! 그것은 삽시간에 주변 일대를 뒤덮으며 검은색으로 물들여 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지크릴이 드디어 진정한 실력을 보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했다. 지크릴의 기도가 점차 바뀌어 나갔다. "어서 와라, 미친 어둠의 세계에." 지크릴이 본격적인 전투 모드로 접어들 때, 실피르 등도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현재 그들이 상대하고 있는 흑마법사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놀랍기 그지없다. 무려 5명의 7클래스 마법사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중심으로 7명의 6클래스 마법사가 있었으며, 5클래스 마법사가 무려 열다섯 명이었다. 금탑에서 엘을 제외하고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른 마법사 다름 아닌 실피르다. 그러나 실피르도 6클래스 마스터의 경지에 불과하여, 흑탑의 마법사 수준이 휠씬 높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하여 금탑의 열세인 건 아니다. 금탑에는 탑을 수호하는 12명의 매직 나이트가 있다. 이들 3명이면 소드 마스터를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이며, 검과 마법을 동시에 사용하여 때로는 본 실력보다 더욱 큰 힘을 발휘한다. 거기에 3기의 골렘은 마스터급 힘을 지니고 있으며, 트롤 킹은 그랜드 마스터가 아니면 상대할 수 없을 만큼 강대한 힘을 지니고 있다. 만약 정면대결을 한다면 결코 질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변수는 존재한다. 바로 흑마법사라는 이들은 공격 마법에도 강하지만 다른 분야에도 강하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흑마법에 해당하는 것은 모든 비인류적인 방식으로 익히는 마법을 가리킨다. 강력한 공격력을 가지는 흑마법은 마계의 힘인 다크 오러를 바탕으로 힘을 쌓기 때문에 성격이 온전치 못하다. 너무나 강한 힘이기 때문에 그 힘이 뇌까지 미쳐 미쳐버리거나 폐인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그것뿐만 아니라 흑마법에는 독, 소환, 시약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져 있으며, 고위 흑마법사의 경우 당연히 이것들 중 하나에 무척 능숙하다. 흑탑의 부탑주 중 한 사람인 게로마네는 트롤 킹을 상대로 연신 밀리고 있었다. 부웅! 거대한 방망이가 휘둘러지며 대기를 찢었고, 게로마네는 실드 마법을 생성하여 그것을 막으려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판단. 트롤 킹의 일격은 그랜드 마스터에 못지않은 강력한 힘을 내포하고 있었다. 꽈아앙! "큭!" 엄청난 폭음이 울려 퍼지면서 실드가 산산조각 났다. 그리고 게로마네가 비틀하면서 뒤로 물러났다. "역시 강하군. 보통 공격으로는 이길 수 없는 건가." 실드가 깨지면서 내상을 입었는지 그의 입가에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게로마네는 그 피를 훔치며 트롤 킹을 노려보았다. "어쩔 수 없군." 흑마법으로 트롤 킹을 상대하려 했지만 트롤 킹이 너무나 강했다. 때문에 게로마네는 그동안 자신이 숨겨온 비장의 카드를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쉽지 않을 것이다. 후후후!" 팟! 몸을 뒤로 날리면서 게로마네가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 자신의 팔을 그었다. 츄악! 붉은 피가 물방울처럼 흘러내렸다. 그는 그 피를 매개체 삼아 소환술을 펼쳤다. "마계의 저편에서 왕으로 군림하는 그대여, 나의 제물을 받아 이곳에 강림하여 나의 적의 멸하라!" 게로마네의 소환 주문과 함께 돌연 허공에서 붉은 피가 폭포수처럼 뿜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기이한 움직임을 보이며 복잡한 소환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스슷! 스슷! 소환진이 그려지는 시간은 그야말로 눈 깜빡할 사이였다. 불과 10초 정도 걸렸을까? 그 사이 지름 l0m에 이르는 거대한 소환진이 삽시간에 완성되었다. "나와라, 마계의 마수, 히드라여!" 쿠와아아아! 마침내 주문을 다 외운 게로마네가 전개어를 외치자 붉은 소환진이 짙은 핏빛을 뿜어내며 거대한 진동을 일으켰다. 그와 함께 소환진에서 짙은 핏빛 운무가 뿜어지기 시작했다. 피의 안개는 삽시간에 주변을 잠식해 들어갔다. 그러더니 잠시 후, 붉은 광채가 주변에 폭사했다. 번쩍! 시야를 앗아갈 정도로 밝은 붉은 광채가 점차 흐려지기 시작했다. 광채가 완전히 걷히자 주변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저, 저게 뭐야........" 시력을 회복한 실피르는 소환진에서 나타난 것을 보고는 경악에 찬 목소리로 말을 더듬었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 그것은 엄청나게 큰 한 마리의 마수였다. 12개의 머리, 그리고 30m에 이르는 거대한 덩치. 위협적으로 날름거리는 혓바닥들은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고, 주변에 은은히 뿜어지는 독기는 당장이라도 질식사를 시킬 듯 지독한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들어온 거대한 마수, 그것은 다름 아닌 마계에서 최고의 마수로 꼽히는 히드라였다. "후후후! 히드라가 소환된 이상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 게로마네는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히드라의 거대한 덩치를 보며 웃음을 흘렸다. 마수 히드라, 웬만한 마족보다 강한 힘을 지니고 있는 이 마수는 마계에서, 그리고 중간계에서 공포의 대명사로 불릴 만큼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다. 그 가죽은 너무나 두껍고 단단하여 소드 마스터의 오러 블레이드로는 흠집도 낼 수 없다고 하며, 그랜드 마스터 2, 3명이 나서야 간신히 맞설 수 있을 정도다. 그것뿐 아니라 12개의 머리에서 일시에 뿜어내는 포이즌 브레스는 그린 드래곤의 산성 브레스와 비견될 만큼 어마어마한 위력을 지니고 있다. 물론 그런 히드라를 게로마네가 공짜로 소환한 건 아니다. 왜냐하면 게로마네가 이 히드라 소환진을 만들기 위해서 무려 1,000명의 어린아이들의 피를 제물로 바쳤기 때문이다. 1,000명의 어린아이의 깨끗한 피를 먹은 히드라는 게로마네의 요청을 승낙하여 이곳 중간계에 강림한 것이고, 그의 부탁대로 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짙은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게로마네가 히드라에게 외쳤다. "히드라여, 내 앞을 가로막는 적들을 제거하라!" 그러자 히드라의 12개의 머리가 일시에 치켜 들리면서 거대한 포효를 내질렀다. "캬오오오!" 콰아아아아! 히드라의 포효로 주변이 삽시간에 그 존재감으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기세와 흥성을 드러내는 히드라를 보며 실피르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걸 어떻게 막지........" 실피르가 힐끗 고개를 옮겼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트롤 킹이 있었다. 트롤 킹은 히드라의 큰 덩치를 보고는 겁을 먹기는커녕 도리어 전의를 불태우고 있는 듯했다. '그래, 할 수 있을 거야.' 그녀는 압도적인 힘을 지니고 있는 트롤 킹의 힘을 믿으며 명령을 내렸다. "저 마수를 막아! 가능하면 그 목숨을 끊어도 좋아." "크르르!" 실피르의 말에 대답한 트롤 킹이 기세 좋게 방망이를 휘두르며 히드라에게 접근해 나갔다. 8m에 이르는 거대한 건물과 같은 트롤 킹과 30여 m에 이르는 성 같은 히드라의 대결. 누가 최강의 마물인지를 가리듯 두 존재의 대결은 처음부터 팽팽하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무려 8m에 이르는 거대한 덩치지만 트롤 킹은 나름대로 스피드를 지니고 있다. 트롤 킹은 자신의 스피드를 활용하여 히드라의 뒤로 접근하여 방망이를 휘둘렀다. 꽈앙! 꽝! 방망이와 히드라의 가죽이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가 주변 일대를 뒤덮기 시작했다. "캬오오오!" 트롤 킹의 방망이질이 괴로웠는지 히드라가 고통스러운 포효를 내지르면서 트롤 킹을 물어뜯으려 하였다. 하지만 그것을 미리 눈치 챈 트롤 킹은 재빨리 몸을 빼면서 방망이를 연신 휘둘렀고, 히드라 또한 거대한 몸집을 활용하여 육탄전을 벌여 나갔다. 한편, 엘과 골든 나이트는 고전을 겪고 있었다. 진정한 힘을 발휘하는 지크릴의 힘, 그것은 너무나 엄청난 위용이라 감히 표현을 내지 못할 정도였다. 콰앙! 지크릴이 전개한 마법을 엘이 블링크 마법으로 피한다. "훗!" 하지만 지크릴은 코웃음을 치며 엘이 나타난 곳에 곧장 공격을 한다. 두 마법사가 대결을 벌이면 골든 나이트가 지크릴의 틈을 비집는다. 그때마다 지크릴은 절묘한 블링크 마법으로 공격을 피하면서 골든 나이트의 전신에 마법을 고루 전개해 주었다. 만약 골든 나이트가 나이트 골렘이 아니라 그랜드 마스터였다면 진작에 쓰러졌을 것이다. 그만큼 지크릴의 마법은 강한 위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큭!" 콰광! 엘은 지크릴의 마법을 막아내면서 비틀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믿기지 않는 경악을 섞어 중얼거렸다. "8클래스 마법사란 이렇게 강한 존재들을 일컫는 것이었나?" 8클래스 마법사인 게이런즈와도 겪어 본 엘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을 정도다. 그야말로 엄청난 힘. 게이런즈에게서 겪어 보지 못한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지금 지크릴에게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기본 마법도 그 파괴력이 엄청나고, 적절한 회피와 공격, 마법 운용은 그야 말로 톱 클래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이런즈 2명이 있어도 이길 자신이 있다고 하던 지크 릴의 자신감은 결코 헛것이 아니 었던 것이다. 쾅! "큭 이런!" 다시 한 번 지크릴의 공격을 받고 엘이 튕겨 나간다. 그 사이를 골든 나이트가 비집고 들어가지만 지크릴은 유연한 회피와 반격으로 골든 나이트롤 무용지물로 만들기 일쑤였다. "이렇게 차이가 나다니........" 믿을 수 없는 감정이 섞여 엘의 마음을 착잡하게 만들었다. 게이런즈를 상대할 때처럼 자신이 혼자 지크릴과 싸우는 것이 아니다. 대륙 10대 그랜드 마스터인 다이어드 공작을 압도할 힘을 지닌 골든 나이트와 함께 싸우는데도 이와 같이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엘이 원거리 캐스팅을 노리고 있지만 지크릴은 그 존재를 알기라도 하듯 큰 마법은 전개하지 않았다. 하기야, 그가 캐스팅을 하지 않는 마법들의 위력은 능히 6, 7클래스에 가까운 위력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대결이 벌어질수록 엘의 열세는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었고, 밀리던 도중 말로만 듣던 거대 마수, 히드라가 나타나자 그는 급격한 절망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정면에는 도저히 당해 낼 수 없는 8클래스 마법사, 그리고 저편에는 마계의 최강 마수 히드라....... '이대로 끝낼 수는 없어.' 포기할 수 없다고 전의를 불태워 보지만 이미 패색이 짙어지고 있었다. 가랑비에 옷 젖는 법이라고, 지크릴의 공격이 거듭될수록 엘은 물론 골든 나이트마저도 움직임이 둔해지고 있었다. 골든 나이트는 주변의 마나를 흡입하여 무한에 가까운 동력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수십 개의 실드가 중첩된 실드는 웬만한 충격으로 깨 버릴 수 없는 최강의 갑옷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지금 지크릴에 의해 그 갑옷이 금이 가고 골든 나이트가 차곡차곡 데미지를 입고 있었던 것이다. 지크릴을 잡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지만 도저히 그 잡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복구가 될라하면 지크릴의 마법에 데미지를 입어 서서히 무너져 가고 있었다. '아, 이대로 지는 건가?' 점점 무력해져 가는 골든 나이트와 자신을 보며 엘은 절망했다. 그리고 그런 엘의 다짐을 알아차리기라도 하듯, 지크릴이 공격을 멈추고는 웃음을 흘렸다. "후후후! 제법 잘 견디는군. 하지만 그것뿐인가 봐." 엘은 신음을 흘리며 소리쳤다. "큭! 난 포기하지 않아." "호, 근성은 마음에 든다는 말이야." 지크릴이 웃음을 흘리며 만신창이의 엘과 골든 나이트를 훑었다. 그러더니 돌연 어조를 바꾸며 입을 열었다. "너에게 한 가지 제안할 게 있다." 엘이 순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제안이라니? 다 이겨 놓은 상황에서 무슨 제안이란 말인가? 의아한 마음에 입을 열었다. "제안? 무슨 속셈이지?" "아아, 속셈이라고 하지 말아. 단지 네가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어서 널 초빙하려는 거니까." 그러면서 지크릴은 입가에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격양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넌 선택된 것이다. 위대하신 그분에게! 앞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 그분에게 넌 직접 선택되어 신세계의 새로운 창조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을 받은 것이다. 너의 뛰어난 능력! 그것을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데 써 보지 않겠나?" "......." 지크릴의 말에 엘은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그의 말에서 느낀 아득한 절망감 때문이다. 지크릴은 분명 '그분'이라 칭했다. 즉, 그가 속한 조직에서 그가 제일 높은 위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과 골든 나이트를 압도하는 실력자가 최고 지위자가 아니라고 한다. 게다가 지크릴이 말하는 뉘앙스를 들어보면 그자는 직위만 높은 게 아니라 실력 또한 높은 것이 분명하다. 즉, 엘이 모르는 엄청난 실력자가 지크릴의 배후에 존재하고 있던 것이다. 엘이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궁금증을 물었다. "그분이라면....... 너보다 강한가?" 지크릴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그분은 지상에서 가장 강하신 분이다. 역사상 그 누구도 오르지 못한 9클래스 마스터에 이르신 분이기 때문이지. 그분의 존함은 루이아스, 앞으로 대륙에서 가장 위대하신 분으로 추앙받으실 분이다." "9클래스 마스터........" 엘은 할 말을 잃었다. 9클래스 마스터, 그것으로 모든게 설명되었기 때문이다. 지크릴이 저런 표정으로 말할 정도면 진실임이 분명하다. 즉, 엘 자신은 9클래스 마스터가 속한 조직에 속하길 권유받은 것이다. 그건 둘째 치더라도 세상에 9클래스 마법사가 현존하고 있었다니! 어릴 때 곧잘 그랜드 마스터와 비유하던 경지지만 실제로는 세상의 멸망을 관여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경지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자 엘의 생각은 삽시간에 기울기 시작했다. 그래, 대세는 기울지 않았는가. 지크릴에게 이 정도로 당했는데 그 뒤에 있는 루이아스란 자는 얼마나 강할까. 그런 자에게 맞서는 건 자살 행위다. 모든 걸 지키기 위함이다. 실피르를 지키고, 세레나를 지키고, 카이나를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믿는 모든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다.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엘의 마음이 서서히 기울어 갔다. 지크릴의 말에 현혹 되고 있던 것이다. 상대의 힘은 얼핏 들은 것만 해도 엄청나다. 7클래스 마스터인 자신이 도저히 생각지도 못할 만큼. 그런 적에게 맞서 싸우는 건 어리석은 이나 하는 짓이다. 지크릴는 시시각각 변하는 엘의 표정을 보다가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그의 마음이 기울고 있음을 느낀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엘이 마음을 굳힌 듯하자 물었다. "그래, 결정을 내렸나?" "나는........" 엘이 대답하려던 찰나, 묵직한 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이아스란 그 이름, 이곳에서 듣게 될 줄은 몰랐군." "아니?" "이건?"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지크릴과 엘이 동시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와 동시에 푸른색 오러가 지크릴의 주변에 생겨났다. 마치 공간이 왜곡된 듯한 현상이었다. "큭!" 대응할 준비도 없이 닥쳐오는 공격에 지크릴은 순간적으로 방어 마법을 전개하며 블링크를 전개했다. 그리고 멀찍한 곳에 모습을 드러내자 다시 한 번 묵직한 저음이 울렸다. "대단하군. 과연 흑탑주라고 할까나....... 역사 속에 사라져 버린 줄 알았는데 그 정도의 저력을 지니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 말과 함께 한 사내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공간의 굴절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 사내가 공간의 힘을 거두면서 모습이 드러난 것이다. 이윽고 드러난 사내의 모습. 30대 초반에 폭풍 속 고요함의 기세를 지닌 그 사내는 엘이 언젠가 한 번 본 적이 있다. "앗!" 엘이 사내를 보며 놀라자, 사내는 엘에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했다. "오랜만이군." "그렇군요, 아이넨스 님." 그렇다. 모습을 드러낸 검사는 다름 아닌 대륙 5대 신검 중 하나인 공간을 지배하는 신검의 주인, 아이넨스 슈그르빌이었다. 슈그르빌의 도움, 상급 마족 베르아문트 아이넨스의 등장으로 장내는 침묵에 빠져 들었다 지크릴을 공격한 단 한 번의 공격. 그 공격 하나로 아이넨스의 실력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넌 누구지?" 지크릴은 본능적으로 아이넨스가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간파했다. 방금 전 공격. 지크릴의 반응이 조금만 늦었다면 삽시간에 꿰뚫려 죽음을 면치 못할 공격이었다. 그 공격은 빠르고....... 기이하며....... 무서웠다! 그것을 생각하니 지크릴은 등골에 절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쪘다. 여태껏 100년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오면서 무섭다고 생각한 것은 루이아스가 처음이었다. 그런데 오늘 눈앞의 검사에게 2번째로 무섭다고 생각한 것이다. '가만!' 지크릴은 방금 전 공격을 생각하고는 아이넨스를 자세히 훑었다. 그러더니 이윽고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 그에게 물었다. "한 가지 묻겠다. 혹시 네가 대륙 오대 신검 중 하나인 디멘션 소드의 주인인가?" 지크릴의 시선은 정확히 디멘션 소드에 향해 있었다. 공간을 격하고 날아오는 기이한 왜곡 공격. 그런 공격을 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서 단 하나. 디멘션 소드밖에 없다. "바로 알아차리는군. 그렇다, 이것이 바로 오대 신검 중 공간을 지배하는 신검, 디멘션 소드다." "오호....... 전설의 검을 눈앞에서 보게 되다니. 영광이군." 그런 지크릴의 반응에 아이넨스는 신경 쓸 것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나는 방금 전 네가 루이아스를 언급 하는 걸 들었다. 루이아스가 네 상관인가?" 지크릴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네가 마스터를 어떻게 알고 있지?" 그의 반응에서 아이넨스는 자신의 질문이 맞는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맞나 보군. 좋아." "어떻게 알고 있는지 물었는데?" 지크릴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그러자 아이넨스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루이아스는 내가 죽일 자다. 그러니 이름을 아는 건 당연하지." "죽인다고? 그럴 자신이 있나?" "물론이다." 거침없이 대답하는 아이넨스의 모습을 바라보던 지크릴. 그는 돌연 큰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 후하하하!" 명백한 비웃음. 그에 기분이 상한 아이넨스의 눈썹이 꿈틀 거렸다. "왜 웃는 거지?" "너무나 어이가 없으니까. 네놈이 어떻게 마스터의 존함을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분을 죽일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없다." 그것은 확신이오, 믿음이자, 불변의 법칙이었다. 지크릴의 확신 어린 어조에 기분이 상했는지 아이넨스가 거칠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누구인지 잊었나? 난 신검의 주인이다." "그깟 신검으로 마스터를 죽일 수 없다. 무기를 믿고 오만을 떠는 건 하수들이나 하는 것이지." 아이넨스와 지크릴의 사이에 극도로 험악한 기운이 오고가기 시작했다. 아이넨스는 30대의 나이에 그랜드 마스터에 올랐으며, 전설의 가문 슈그르빌가에서 신검을 다루는 모든 비전을 이어받은 자다. 지크릴은 한때 대륙을 절반이나 초토화시킨 흑탑의 탑주이며, 엄청난 위력의 흑마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일대일 대결로는 대륙에서 그를 상대할 이가 채 열이 되지 않을 정도니 그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런 이들이 서로 대치하며 기운을 개방하자 무시무시한 폭풍이 일기 시작했다 아이넨스가 엘을 향해 말했다. "인사는 나중에 제대로 해야겠군. 일단 너와 골든 나이트는 저 히드라를 처치하는 데 힘을 기울여라, 난 이자를 처치하겠다." "........알겠습니다." 잠시 멍하니 있던 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는 순간 지크릴의 권유에 넘어갈 뻔한 자신을 책망했다. 분명 지크릴의 제안은 매력적이다. 상대의 조직에 9클래스 마스터가 있다면 대륙은 앞으로 그의 뜻대로 움직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 그에게 협력하는 것은 어쩌면 엘을 비롯한 그의 가족들이 모두 안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크릴은 자신을 죽이려 한 이다. 그가 자신을 끌어들이려고 하는 것은 분명 자신이 지닌 여러 재주를 탐내서 그러는 것일 터. 즉, 모든 밑천이 털리면 그대로 토사구팽 당할 확률이 높았다. 쓸모 있을 때 대우를 해 주고 쓸모가 없어졌을 때 외면 한다. 이것이 사회의 진리임을 엘은 전생에서부터 너무나 많이 겪어왔다. '내가 실수했던 거야.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 자신을 죽이려던 상대의 제의를 받아들일 뻔하다니. 엘은 자신의 약함에 고개를 저으며 힐끗 아이넨스를 바라보았다. 지크릴과 대치하고 있는 그는 처음 봤을 때 모습과 전혀 다른 절대 검사로서의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도와줘서 다행이야.' 만약 아이넨스가 그때 오지 않았다면....... 이라고 생각 하니 간담이 서늘해지는 엘이었다. 아이넨스가 그때 나타나지 않았다면 자신은 지크릴의 제안에 승낙했을 테니까. '일단은 적들을 최대한 빨리 제압하자. 그리고 아이넨스 님을 돕는 거다.' 그렇게 결정을 내린 엘은 지금 최대의 방해가 되는 히드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골든 나이트에게 명령을 내렸다. "타나! 저 마수를 처리한다. 일단 마수에게 타격을 입히는 것보다 회복에 집중해." 엘의 명령에 골든 나이트가 푸른 안광을 뿜어내며 히드라에게 접근했다. 하지만 엘의 명령 때문인지 섣불리 접근하지 않고 차분 히 기회를 엿보는 듯했다. "........좋아." 골든 나이트와 트롤 킹이라면 능히 히드라를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흑마법사들을 상대해야겠지." 엘은 한쪽에서 치열하게 싸움을 벌이고 있는 이들을 보고는 그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실피르 일행은 무척 고전을 하고 있었다. 흑탑의 부탑주인 게로마네가 히드라를 소환하여 트롤 킹이 빠져 전력의 공백이 생겼기 때문이다. 게다가 또 다른 흑탑의 부탑주인 갈로윈은 독을 사용하는 포이즌 마법의 대가였다. 보랏빛 독이 넓은 범위에 퍼져 있어 함부로 접근은 못함은 물론, 공격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이라면 골렘들이 독에 영향을 받지 않아 앞장서 싸운 덕분에 아슬아슬한 호각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흑마법사들이 연달이 마수를 소환함으로써 금탑 측이 점점 밀리고 있었다. 이럴 때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것은 다름 아닌 실피르의 매직 스틱이었다. 콰광! 6클래스 마법과 비슷한 파괴력을 지닌 마력탄의 위력에 흑마법사들은 분분히 흩어졌다. 매직 스톤으로 무한히 사용할 수 있는 마력탄은 흑탑의 흑마법사들을 당황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쳇! 번거롭군." 마력탄에 의해 자신의 독이 흩어지자 갈로윈이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의 독으로 저쪽이 함부로 공격해 오지 못하는 건 분명 유리하다고 할 수 있는 성질이지만 반대로 저쪽의 마력탄 때문에 이쪽도 섣불리 공격을 못하고 있었다. 흑마법사들이 마수 등을 소환하여 상황이 점차 유리해 지고 있지만 아직 이렇다 할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독을 사용하는 갈로윈에게 독이 통하지 않는 저 골렘들은 귀찮기 짝이 없는 상대였다. 독이 통하지 않을 뿐더러 그 힘은 마스터 급에 준했기에 갈로윈은 게로마네에게 도움을 청했다. "게로마네, 힘을 합쳐서 저 골렘들을 제거하지." 게로마네도 늘어지는 듯한 전황이 마음에 들지 않던 차였다. "좋다. 그렇게 하지." 합의를 본 두 사람이 골렘에게 공격을 퍼부으려 할 때, 뒤에서 마나의 파동이 일어났다. "피해 !" 갈로윈의 외침과 함께 두 사람은 양쪽으로 나뉘어 마법을 피했다. 쾅! 그들의 중앙을 꿰뚫고 나간 마법이 지면에 부딪치며 폭발을 일으켰다. "......." 그 마법의 파괴력이 최소 5클래스였기에 갈로윈과 게로마네는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들의 눈에 금색 로브를 걸친 금발의 청년, 엘이 눈에 들어왔다. 엘이 그들을 향해 손을 까딱였다. "흑탑의 탑주는 다른 분이 상대해 주기로 해서 말이지. 이제부터 너희들은 내가 상대해 주겠어." 오만한 말이다. 혼자서 자신들 둘을 상대하겠다니! 게다가 흑마법의 위력은 보통 마법을 뛰어넘기에 그들의 실질적인 힘은 7클래스 중에서도 최상위에 속한다. 자신들의 경지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그들은 엘의 말에 인상을 구겼다. 게로마네가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네가 아무리 게이런즈를 이겼다고 해도 우리는 상대 할 수 없을 것이다." 엘이 피식 웃었다. "과연 그럴지 안 그럴지....... 말만 앞세우지 말고 덤벼." 지크릴에게 된통 당한 엘로서는 제대로 싸움을 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8클래스 마법사 지크릴에게는 자신의 힘이 전혀 통하지 않았지만 7클래스 마법사에게는 자신의 힘이 통하기 때문이다. 엘의 말에 기분이 나빠진 갈로윈이 욕설을 내뱉었다. "어린놈이 오만하구나," 그러면서 갈로윈이 양손을 뻗었다. 피비빙! 열 개의 다크 볼트가 엘에게 빠르게 쏘아졌다. 2클래스 흑마법이지만 파괴력만 따지면 능히 4클래스 마법에 비견된다. 엘은 그 마법을 비스듬히 몸을 눕혀 피한 다음, 마법을 전개했다. "헤이스트(Haste), 리터레이트(Reiterate)!" 파앗! 엘의 몸이 흐릿해지며 빠른 속도로 쏘아졌다. 그 속도 는 마치 섬전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헛!" 엘의 빠른 접근 속도에 갈로윈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서 엘이 접근해 오지 못하게 다크 볼트를 전개했다. 쾅! 콰과광! 중첩된 헤이스트 마법으로 가볍게 다크 볼트들을 피해 내며 갈로윈에게 다가갔다. "큭!" 엘의 재빠른 접근에 갈로윈이 신음을 흘렸다. 다크 볼트를 너무 쉽게 피해 내 견제의 의미를 잃었던 것이다. 그 사이 엘은 갈로윈의 지척까지 접근했다. 그리고 손에 버닝 핸드를 전개하여 그를 공격하려 하였다. 하지만 피하는 건 갈로윈이 한발 빨랐다. 위기를 느낀 순간 재빨리 블링크 마법을 전개한 것이다. 화르륵! 엘의 버닝 핸드가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칫!" 다잡은 물고기를 놓쳐 버리자 엘이 혀를 차며 재빨리 몸을 피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다크 플레어가 들이닥쳤다. 쾅! 5클래스에 속한 다크 플레어지만 그 위력은 강렬했다. 만약 엘이 휘말리면 단번에 목숨을 잃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엘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곧장 게로마네에게 달려들었다. "제기랄!" 엘이 빠르게 다가오자 게로마네는 욕설을 내뱉으며 갈로윈과 비슷하게 수많은 다크 볼트롤 전개하였다. 그 숫자가 워낙 많아 엘은 모두 피할 수 없음을 깨닫고는 양팔에 실드 마법을 전개했다. 땅! 따당! 땅! 양손에 실드를 전개한 채 다크 볼트롤 튕겨내며 다가오자 게로마네는 재빨리 블링크를 전개했다. 그리고 뒤에서 갈로윈이 공격해 들어왔다. 피하기가 뭐했기에 엘도 맞받아 마법을 전개했다. 두 마법이 중앙에서 충돌했다. 콰과광! 요란한 폭음과 함께 폭발이 일어났다. 갈로윈은 기회라 여겼는지 연신 마법을 전개하여 엘을 공격했다. 엘 또한 이대로 물러설 수 없었기에 수십 개의 마법을 캐스팅하여 정면 대결을 벌였다. 두 대마법사가 정면으로 마법 대결을 벌이자 주변 일대가 삽시간에 불길에 뒤덮이기 시작했다. '역시 마법적 위력으로는 내가 밀려.' 엘은 갈로윈과 연신 마법을 주고받으면서 자신이 마법 위력에는 뒤쳐진다는 걸 인정했다. 단전호흡으로 마나 호응도가 극도로 높아 훨씬 강한 마법을 구사할 수 있지만 흑마법의 위력을 뛰어넘지 못한 것이다. '이대로는.......' 엘은 힐끗 시선을 위로 옮겼다. 그곳에는 게로마네가 마법을 캐스팅하고 있었다. 캐스팅이 길어지는 걸 보아하니 7클래스 마법을 캐스팅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것을 본 엘의 뇌리에 경고음이 스쳐 지나갔다. '위험하다!' 지금 엘은 갈로윈에게 발목을 잡힌 상태다. 이 상태에서 게로마네에게 일격을 맞는다면 분명 위험한 상태에 처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어려운 상황이군.' 게로마네를 공격하려고 해도 갈로윈이 막아 설 것이 분명했다. '분명 예전의 나라면 곤경에 처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상황이 다르다.' 엘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그의 생각대로 예전이라면 위기에 처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엘은 방어 마법을 전개했다. 당분간 갈로윈의 마법을 막아 낼 수 있을 정도로 강한 방어 마법을. 그리고 정신을 집중하여 캐스팅을 하기 시작했다. 그가 노리는 것! 그것은 다름 아닌- "하트 브레이크!" 게이런즈를 이길 때 썼던 원거리 캐스팅 마법이었다! 그때처럼 급박하게 사용한 것이 아닌 충분한 여유를 가지고 전개한 것이기에 캐스팅 시간이 훨씬 빨랐다. "......!" 마법을 캐스팅하던 게로마네는 뭐라 웅얼거리려 하더니 이내 입에서 폭포수 같은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공중에 떠 있던 그의 신형이 실 끊어진 연처럼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엘의 마법으로 인해 심장이 파괴되어 버린 것이다. 아니, 내부의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는 것이 정답이다. "이럴 수가!" 게로마네가 허망하게 당해 버리자 갈로윈이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어찌 안 그럴 수 있겠는가! 게로마네는 7클래스에 이른 흑마법사다. 그런 마법사가 원인도 모르는 공격에 의해 삽시간에 당해 버리니 갈로윈으로서는 등골이 오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게로마네와 갈로윈의 실력은 거의 팽팽하여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자신과 동급의 실력자가 단번에 당해 버렸다고 생각해 보라. 남아 있는 이는 얼마나 불안감에 시달리겠는가! 전의가 꺾이는 건 삽시간이다. 갈로윈이 뒤로 주춤 물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엘은 그런 갈로윈을 순순히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리터레이트!" 사삿! 중첩에 중첩 마법을 또 전개한 엘의 신형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갈로윈을 향해 접근했다. "헉!" 헛바람을 삼키며 갈로윈의 몸이 움찔할 때, 엘의 신형은 이미 그의 뒤에 접근한 상태였다. 엘은 손을 뻗어 갈로윈의 등에 갖다 대며 속삭이듯 말했다. "네가 허무하게 죽음을 당한 이유는 바로 전의가 꺾였기 때문이다. " 엘의 손에서 마나가 거세게 뿜어지며 삽시간에 갈로윈의 내부를 뒤틀었다. 콰득! 콰드득! 내부에서 뼈와 장기가 뒤엉키는 소리가 들리며 갈로윈의 내부를 삽시간에 파괴해 나갔다. "끄륵! 끄으으........" 뭐라 말하려던 갈로윈. 하지만 영혼이 빠져나가고 있는 육체가 그의 통제 하에 있을 리 만무했다. 털썩! 갈로윈의 몸이 맥없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엘은 목숨을 잃은 갈로윈의 시체를 물끄러미 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네게 한 말은 나에게 한 말이기도 하니......." 그러면서 엘이 몸을 돌리자 와아아! 하는 함성이 울려 퍼졌다. 엘이 흑탑의 7클래스 마법사를 제압하는 모습에 금탑의 인물들이 내지른 함성이다. 그에 반해 흑탑의 인물들은 전의를 잃은 듯 뒤로 주춤 물러났다. 흑탑의 힘이 강하다고 하지만 그들을 이끌던 2명의 부탑주가 죽어버린 이상 그 전력은 절반 정도로 줄어든 것이 분명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마치 맹수의 공격을 피하려는 초식 동물과도 같았다. 그리고 맹수의 입장에 처하게 된 엘은 사냥감들을 결코 곱게 놓아 줄 생각이 없었다. "쉽게 보내줄 수 없지." 팟! 엘의 신형이 눈부신 속도로 쏘아졌다. "막, 막아라!" 엘의 접근에 흑마법사들이 외치며 엘에게 맞서려 하였다. 하지만 엘은 혼자가 아니다. 엘을 돕기 위해 사방에서 흑마법사들을 향해 달려든 것이다. 몇몇 흑마법사들이 앞을 가로막고 방어를 하려고 한다. 그리고 뒤에 선 흑마법사들이 고위 마법을 캐스팅하기 시작했다. "......." 엘은 그것을 보며 마법을 캐스팅했다. 그리고 엘의 전개어와 함께 캐스팅하던 흑마법사들이 널브러지기 시작했다. 하트 브레이크. 그 마법이 점점 익숙해지면서 캐스팅 시간도 단축되기 시작한 것이다. '좋아. 이제 확실히 내 무기로 자리 잡았다.' 그 자리에서 가만히 캐스팅하는 마법사를 확실하게 제거할 수 있는 무기, 그것을 엘은 확실하게 손에 넣은 것이다. 엘의 활약으로 5명의 흑마법사가 죽어 버리자 그들은 재빨리 후퇴하기 시작했다. "........굳이 쫓을 필요 없겠지." 엘은 물러나는 흑마법사들을 보며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매직 나이트들을 보며 말했다. "히드라를 제거하는 걸 도와주세요." 매직 나이트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예!" 그들은 무기를 빼어들고 히드라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히드라는 골든 나이트와 트롤 킹을 상대로 맞아 한창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인간의 싸움이 아닌 만큼 그들은 거대한 덩치로 쉴새없이 육탄전을 벌이기가 일쑤였다. 트롤 킹이 거대한 덩치로 히드라를 압박하는 역할이었고, 골든 나이트는 룬 블레이드를 사용하여 히드라를 천천히 무력화시키고 있었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매직 나이트들은 매직 소드를 디유 레임 상태로 만들어 히드라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캬오오오!" 히드라가 괴로운 비명을 지르면서 서서히 죽어갔다. 애당초 히드라를 소환한 게로마네가 죽어 히드라가 더욱 빨리 당한 것인지도 모른다. "......." 엘은 히드라가 쓰러지는 모습을 보며 조용히 침묵에 잠겼다. 그랜드 마스터에 버금간다는 히드라는 결국 그 육체적인 능력만을 얘기한 듯하다. 트롤 킹과 골든 나이트의 협공에 맥없이 무너지고 매직 나이트들의 공격에 마무리가 되었으니 말이다. "이제 저쪽만 남았군." 엘의 시선이 지크릴과 아이넨스가 대결을 벌이는 곳으로 향했다. '강하다!' 지크릴은 아이넨스를 보면서 전신에 전기가 오름을 느꼈다. 눈앞에 있는 아이넨스는 강했다. 신검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줄 알며, 그 본신의 실력은 지크릴이 간신히 파악할 만큼 뛰어났다. '신검에 그랜드 마스터라....... 힘든 싸움이 될지도.' 항상 싸움을 임함에 있어 여유를 가지고 있던 지크릴에게서 지금 여유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여태껏 상대한 적들 중 아이넨스는 당연코 최강이라 할 수 있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지크릴은 섣불리 움직이지 못한 채 조용히 아이넨스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었다. 상대가 강한 것을 느낀 것은 지크릴 뿐만이 아니다. '강하군.' 아이넨스는 지크릴이 만만치 않은 실력자임을 느낄 수 있었다. 한때 대륙의 절반을 초토화시킨 흑탑의 탑주다운 실력이다. 그 본신의 실력은 8클래스 중에서 상위 전투력을 지니고 있으며, 흑마법의 강한 위력을 잘 살린 마법 운용은 매우 까다로운 것임이 분명했다. '본신의 실력은 엇비슷하다. 신검을 가지고 있는 내가 질 리는 없다. 하지만.......방심한다면 자칫 당할 수도 있다.' 아이넨스는 정확하게 자신의 힘과 상대의 힘을 분석했다. 만약 자신에게 신검이 없다면 상당히 불리한 대결이 벌어졌을 것이다. 본래 그랜드 마스터와 8클래스 마법사의 대결에서는 마법사가 우위를 점하기 때문이다. 공간 이동 마법과 캐스팅 없이 전개하는 마법은 무척 까다로운 요소 중 하나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신검이 있다. 이 디멘션 소드만 있다면 적이 어디에 있건 간에 공격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자신의 가문은 신검을 수호하는 가문이 아니던가. 신검의 활용은 예전부터 완벽하게 숙지하고 있었다. 아이넨스는 차분히 동태를 살피는 지크릴을 바라보았다. '먼저 움직이지 않는군.' 하기야 한번 공격을 당해 봤으니 잘 알 것이다. 섣불리 움직이다가는 단번에 당해 버릴 것이라고. 그러니 저런 신중을 기울이는 것일 것이다. '루이아스의 부하다. 루이아스를 죽이려는 내가 그 부하에게 고전을 겪는 건 말이 안 된다. ' 그러면서 아이넨스는 기세를 한 층 더 끌어올렸다. 그러나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지크릴을 보며 아이넨스가 결심을 굳혔다. '그럼 내가 먼저 움직여 주지.' 어차피 선수가 필승이라, 먼저 공격을 하면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 특히 이런 대결에서 주도권을 잡는 건 무척 중요했기에 아이넨스는 차분히 호흡을 고르다 공격을 전개하였다. 스팟! 아이넨스가 공격을 시작하기 무섭게 지크릴의 몸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의 공격이 허공을 가르자 공간 저편에서 나타난 지크릴이 마법을 전개했다. 쑤에엑! 8클래스 마법사인 그는 6클래스 마법까지를 전개어만으로 전개할 수 있다. 6클래스 마법은 제아무리 아이넨스라고 하여도 직격으로 맞으면 위험하다. 하물며 흑마법이 아닌가. 아이넨스가 검을 휘둘렀다. 푸른색 오러가 검에서 뿜어 지더니, 이내 공간의 왜곡으로 사라졌다. 오러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마법이 전개되는 앞이었다. 그는 오러를 방패로 사용한 것이다. 오러와 마법이 부딪치며 폭발을 일으켰다. 콰광! 전신이 아릿해질 정도로 강한 폭발이었지만 아이넨스는 개의치 않고 공격을 하였다. 디멘션 소드에서 뿜어진 오러가 공간의 왜곡을 일으키며 사라졌다. 그것이 나타난 것은 지크릴의 주변이다. "큭!" 사방에서 강력한 오러가 자신을 노려오자 지크릴은 몸을 분주히 움직이며 피해 나갔다. 공간을 지배하는 신검. 그 능력을 활용한 공격은 지크릴조차 막기 힘든 대단한 성질이었다. 지크릴은 블링크와 헤이스트 마법을 병행하며 오러를 피해냈다. 하지만 공격하는 것보다 피하는 것이 더욱 힘든 법. 한번 공격을 막아 내기 시작하자 아이넨스가 둘째, 셋째 공격도 연달아 펼치기 시작했고, 지크릴은 그 공격을 막아 내기에 바빴다. 그리고 마침내 오러를 피하지 못했다. 빈틈을 비집고 솟아난 오러가 지크릴의 어깨를 꿰뚫은 것이다. 츄악! "크으윽!" 오러에 의해 어깨가 꿰뚫리자 지크릴이 신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기회!' 자신의 공격이 적중한 것을 본 아이넨스가 눈을 빛냈다. 그와 함께 디멘션 소드에서 수백여 개의 오러가 솟아났다. 공간 왜곡을 하며 사라진 오러, 그것은 지크릴 주변 전체를 뒤덮으며 나타났다. 슈그르빌가의 비전 신검술 중 하나인 오로스트 헬이었다. 주변 전체를 오러로 감싸 절대 피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드는 공격, 그것이 바로 오로스트 헬이다. 오로스트 헬에 꼼짝없이 갇혀 버린 지크릴을 보며 아이넨스가 눈을 빛냈다. '걸렸다!' 하지만 그건 그의 착각에 불과했다. 오로스트 헬에 적중되려던 찰나, 지크릴은 방어 마법을 전개했다. "세이지 실드!" 8클래스 최강 방어 마법 세이지 실드! 오러 블레이드조차 튕겨 내는 그 마법이 전개된 것이다. 파아앗! 반투명한 막이 지크릴의 주변을 뒤덮으며 오로스트 헬을 그대로 튕겨 냈다. 그러면서 그는 어깨에 힐을 전개했다. 다크 오러를 기반으로 한 힐은 은은한 검은빛을 내며 상처를 치유해 나갔다. 그가 아이넨스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정말 대단하군. 과연 신검의 주인이야." 아이넨스가 무뚝뚝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쪽이야말로. 내 신검을 이렇게까지 받아 낸 이는 그대가 처음이군." 그건 칭찬이었다. 신검의 힘. 그건 결코 인간이 받아 낼 만한 힘이 아닌 것이다. 특히 디멘션 소드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곳에서 공격이 들어오기 때문에 막아 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 공격을 지크릴은 대부분 피해 내고 오로스트 헬을 완벽하게 막아 낸 데에 있어 아이넨스의 감탄을 사기에 충분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 승부는 끝나지 않았다. 지크릴은 아이넨스를 보며 말했다. "솔직히 널 이길 자신이 없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 없지." "물러서지 않는다면 네게 남은 건 죽음뿐이다." 아이넨스가 디멘션 소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오러가 폭발적으로 뿜어지자 지크릴이 웃음을 지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건 아니란 말이지." 그 웃음이 묘한 기운을 띠고 있어 아이넨스는 순간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지크릴에게 주었을 때, 그의 손에 무언가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칠흑같이 검은 돌. 얼핏 보면 평범한 돌에 지나지 않지만 자세히 보니 은은한 다크 오러를 뿜어내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검은색에 다크 오러를 뿜어내는 돌. 그런 돌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다. 아이넨스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건 설마....... 다크 스톤?" "호오, 알아보는군. 이게 바로 다크 스톤이다." 지크릴의 말에 아이넨스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크게 뜨였다. "그런........" 말끝을 흐리는 아이넨스. 당연히 이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다. 다크 스톤! 그것은 다름 아닌 마계에서 생성되는 돌로, 마족을 소환할 때 매개체로 삼는 물건이었다. 여기서 지크릴이 다크 스톤을 꺼냈다는 것은 즉, 마족을 소환하겠다는 의지의 표현과 같았다. 이미 제물을 바쳐 블러드 스톤을 만들어 온 것이 분명 했다. 여기서 블러드 스톤이란 사람의 피를 굳혀서 만든 돌을 말한다. 사람의 숫자가 많을수록 블러드 스톤의 힘은 강해지며 그 힘이 강할수록 강한 마족을 소환할 수 있게 된다. "안 돼! 마족을 소환하려는 것이냐?" 아이넨스가 조급해진 안색으로 말했다. 마족! 인간을 뛰어넘는 육체와 정신력을 지닌 이 종족은 중간계의 드래곤과 비교되는 고등 생명체다. 사람의 마이너스 에너지를 양분으로 삼으며, 그 힘은 인간으로서 막을 것이 못될 정도로 대단하다. 여기서 마족이 소환되면 상황은 극도로 불리하게 돌아가게 된다. 신검을 지닌 아이넨스가 마족을 처치할 수 있지만 그 틈을 노린 지크릴의 공격을 받아 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크릴이 저렇게 자신 있게 나오는 걸 보면 분명 고위 마족을 소환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이곳은 레베탄 고원과 가까운 곳이다. 소환된 마족이 레베탄 고원에 있는 다크 소울을 흡수하고 몬스터들을 이끌고 대륙 진출을 한다면, 또다시 대륙은 피바다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절대 안 된다. 디멘션 소드를 꽉 움켜쥐었다. 지크릴이 마족을 소환하기 전에 그를 베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그의 심정을 미리 알아차린 듯, 지크릴의 신형이 높이 떠올랐다. 그리고 세이지 실드를 한 겹 더 전개했다. 그는 웃는 얼굴로 아이넨스에게 말했다. "그럼 어디 마족의 소환을 눈앞에서 지켜보라고. 후후!" 지크릴이 손에 쥔 블러드 스톤과 다크 스톤을 부숴 가루를 허공에 뿌렸다. 그러자 허공에 복잡한 소환진이 그려졌다. 그곳에 손을 댄 지크릴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어둠보다 더욱 어두운 어둠의 자식들이여. 지금 이곳에 나타나 어리석은 이들에게 어둠보다 더욱 어두운 절망을 선사하고, 붉은 피보다 더욱 붉은 분노의 불길을 보여 주소서." 파아앗! 검붉은 빛이 사방으로 뿜어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몰아치는 어마어마한 양의 다크 오러! 다크 오러가 휘몰아치며 동시에 소환진에서 다크 오러가 폭포수처럼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거대한 존재감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큭!" 아이넨스는 허공에 그려진 소환진을 보며 신음을 삼켰다. 정말 마족을 소환한 것이다. 이 존재감을 보건데 분명 마족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고위 마족을 소환한 것이 분명했다. 고위 마족. 여태껏 고위 마족을 쓰러뜨린 인간은 전설에서 나온 영웅밖에 없었다. '과연 내가 마족을 해치울 수 있을까?' 마족의 강함은 어렸을 적부터 누누이 들어왔던 터다. 인간의 절망을 양분으로 삼으며, 그 무엇보다 강한 힘을 지닌 종족. 그 종족이 지금 아이넨스의 눈앞에 나타나려는 것이다. "아이넨스 님." 그런 아이넨스를 향해 엘이 다가왔다. 엘은 허공에 그려진 마법진을 보며 물었다. "저건 뭔가요?" "마족 소환진." 엘이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예? 마족 소환? 설마 마족을 소환하는 진이란 말입니까?" 아이넨스는 대답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정신이 온통 소환진에 향해 있었다. 소환진은 어느새 짙은 다크 오러에 의해 잠식당한 상태였다. 전신을 짓누르는 듯한 존재감은 당장이라도 무언가가 나을 듯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그때, 돌연 하늘에서 한줄기 천둥이 내려쳤다. 번쩍! 순간 세상이 금빛으로 빛나는 듯한 착각을 주었다. 그와 동시에 금색이 빠르게 사라지고, 검은 다크 오러에 잠식되어 있던 소환진도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리고........ 소환진이 있던 자리에는 한 남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온통 검은색 일색의 날렵한 몸매를 한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 당장이라도 상대를 꿰뚫을 것 같은 예기 속 절대 강자의 여유가 감도는 남자는 느릿한 시선으로 지크릴을 바라보았다. 지크릴은 공중에서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취했다. 그의 입에서 놀라운 사실이 흘러 나왔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제게 존귀하신 이름을 가르쳐 주실 수 있겠습니까?" 지크릴의 물음에 남자는 잠시 그를 빤히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나의 이름은 베르아문트. 마계의 마왕님을 모시는 마계의 대공 중 하나다." "마계의 대공......!" 아이넨스와 엘이 동시에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마계의 대공! 그렇다면 마왕의 다음 서열 마족이 이곳에 강림한 것인가! 하기야 1만 명의 피로 만든 블러드 스톤인데 이 정도 마족은 소환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놀라기에는 아직 이르다. 갑자기 골든 벨리 한쪽에 푸른빛이 감돌더니 이내 엄청난 크기의 실루엣이 골든 벨리에 나타난 것이다. 무려 100m가 넘어가는 매끈한 붉은 동체. 그것은 지상 최강의 생명체라 불리는, 드래곤 족 중 하 나인 레드 드래곤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레드 드래곤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거칠게 포효했다. 쿠오오오오! 지상의 모든 생명체를 무릎 꿇게 만드는 드래곤 피어! "크으으!" 말로만 듣던 드래곤 피어를 직접 겪게 되자 엘은 신음을 흘리며 괴로워했다. 그리고 간신히 드래곤 피어에 견뎌 낸 그는 멍한 시선으로 레드 드래곤과 마계의 대공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두 존재 모두 한평생 살아가면서 볼까 말까만 존재들이었다. 그런 존재들이 어떻게 이곳에....... 마족의 소환과 드래곤의 등장. 그것은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다. 엘은 단지 존재감만으로도 자신을 이렇게 옥죄어 버리는 두 존재를 보며 자신이 너무 미약한 존재임을 느꼈다 멍하던 그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렇다. 이들에게 휘둘리지 않으면 자신 본인의 힘을 스스로 길러야 한다.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힘을....... 엘은 마계의 대공과 레드 드래곤을 보며 각오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강해져야 한다. 그래야만 살아남는다. 그것이 엘이 느낀 소감이자, 다짐이었다. (골든 메이지 6권에서 계속) [편집자후기] 안녕하세요, 이석원입니다. 전 여태까지 그저 장난으로, 김현우 작가님이 절 미워하신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진심이셨나 봅니다. 어떻게, 생일에도 꼼짝 않고 24시간 내내 사무실에 있게 만드셨나이까. 어흑! 덕분에 친구들한테도 죽일 놈으로, 가족에게도 되바라진 놈으로 제 평가가 탈바꿈하고 말았답니다. 뭐, 그건 아무래도 논외로 치는 게 좋을까요? 작년 생일에는 사장님께 린치를 먹었으니, 이번 생일은 작년보단 나은 걸까요? 아니, 근데 입사하고 나서부터 내 생일은 왠지 미묘해 지는 게....... 이건 뭐, 갈수록 암울해지네. 아, 또 눈물 나온다. 그렇게 그렇게 어렵사리 꾸려 낸 5권입니다. 부디 재밌게 읽어 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