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 골든 메이지 3권 지은이: 김현우 발행인: 신현호 출판사: 디앤씨미디어 출판연도: 2008년 2월 22일 봉사자: 김학규 <차례> 1. 베르디스를 향하여 2. 톨리안 왕국 중앙 회의 3. 황금의 마탑주 엘리미스와 에리스 공주 4. 광휘의 기사단 5. 다크포그(Dark Fog) 6. 성국의 그랜드 마스터 다이어드 공작 7. 5대 교단의 합작과 성국의 의지 8. 성국에게 경고를 하다 9. 다가오는 검은손 베르디스를 향하여 넓은 침상에 빛을 반사하는 은발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침상에 누워 있는 미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건강을 상징하던 짙은 분홍빛 입술은 푸른색으로 변해 있었고, 새하얗고 윤이 나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세레나가 체내에 존재하던 마나가 유실되면서 자리에 쓰러진 지 2달이 다 되었다. 자리에 누워 미동조차 하지 않는 세레나를 바라보며 엘은 손을 뻗었다. 스윽. 분가루가 흘러내릴 것 같은 핏기 한 점 없는 그녀의 얼굴을 매만졌다. 그러자 손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 그리고 고른 숨소리. 어딜 보아도 세레나에게 문제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세레나가 일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단 1가지뿐이었다. 마나가 소실되면서 서서히 신성력이 그 자리를 채워 나가고 있었기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외부에 잡음 없이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기에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그 충격이 만만치 않아 세레나가 여태껏 일어나 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거의 모든 마나가 소멸되었구나....." 마나 스캔을 펼치며 엘은 눈을 감았다. 4클래스 마스터에 이른 세레나의 마나 보유량은 일반 기사보다 월등하다고 할 수 있다. 엘이 전수해 준 단전호흡의 위력이 여지없이 발휘되어 극도로 높은 그녀의 마나 호응은 동급 마법사를 훨씬 뛰어넘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돌연 마나가 사라지면서 월등한 양의 신성력이 그녀의 전신을 서서히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단전호흡으로 인해 높아진 마나 호응이 반응하여 농밀한 마나가 신성력을 저지해 보았지만 그 정도로 신의 힘을 막기란 불가능했다. 이미 대부분의 마나가 신성력에 밀려난 상태였다. 조만간 전신에 신성력이 가득 차게 될 것이 분명했다. "마나 흘이라...... 이곳이라면 꽤 시간이 걸릴 터." 엘은 세레나에게 일어나는 일이 무슨 연유인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성녀의 선택. 신이 대륙에 성녀의 등장을 알리면서 성녀로 선택된 여인은 체내에 있는 모든 마나가 사라지고 신의 힘인 신성력으로 가득 차게 된다. 이미 만만치 않은 마나가 체내에 존재하지만 신의 힘은 막을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하지만 단전호흡으로 모인 마나는 그 농도가 남들과 다르다. 아마 신성력이 이곳을 차지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세레나의 얼굴을 매만지던 엘의 손이 그녀의 머리로 향했다. 성스러운 그녀의 은빛 머리칼은 어느덧 은은한 신성력을 동반하고 있었다. 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세레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곧 교단이 올 거야. 하지만 너를 그들에게 넘겨 줄 수는 없어. 성녀가 된다는 건 곧 어렸을 때 부모님에 의해 어두운 생활을 하던 그것과 같을 것이기에...... 그리고 이건 내 이기적인 생각이기도 해. 너 없는 삶은 이제 생각할 수 없으니까, 나는 널 넘겨 줄 수 없어. 넌 내 것이니까, 나만의 것이니까........." 그렇게 말한 엘은 방을 벗어났다. 착각일까? 그 순간 빛에 반사된 세레나의 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듯한 모습을 보인 것은. "후...... 나가서 기분이나 전환할까........." 세레나의 모습을 보아서 그런지 엘은 기분이 우울했다. 실피르도 자신의 연이은 깨달음 전수에 무언가 가닥을 잡은 듯하더니 9달째 마법 연공에 빠져 있었고, 카이나 또한 무언가 실마리를 잡은 듯 검술 연습에 여념이 없었다. "8클래스의 실마리는 구경도 못했지. 뭐, 깨달음이란 게 잡으려 하면 할수록 멀어지는 거니까......." 엘은 깨달음이 불시에 찾아오는 것임을 알았다. 그렇다고 수련을 게을리 하는 건 아니지만 남들처럼 조급해하지는 않았다. 조급해하면 할수록 깨달음은 더욱 멀어진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엘은 매일 충분하게 휴식을 취하곤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엘은 7클래스를 완벽하게 마스터하고 있었다. 충분한 휴식과 수련 시간이 겸비된 탓이다. 전생에서 이러한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한 시간 동안 끝없이 공부하는 것보다 50분 공부하고 10분 휴 식을 취하는 게 능률적으로 더 좋다는 사실을. 적당한 휴식! 수련에서도 이것이 접목되어 엘은 남들이 예상치 못한 무시무시한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마탑에서 벗어난 엘은 어느덧 멋있게 변한 주변 마을을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멋지군. 금탑에 어울리는 멋진 도시가 되었어." 트를 벨리(Troll Valley)라 불리던 죽음의 계곡에서 이제는 금탑이 들어선 골든 벨리(Golden Valley)라 불리는 이곳은, 하나의 마을이라기보다는 도시에 가까운 면모를 하고 있었다. 도시라고 하기에는 그리 많은 인구는 아니지만 엘이 자체적으로 투자한 돈과 주민들 스스로가 트롤 피를 채취하고 도시를 건설하는 데 투자했기에 골든 벨리에 존재하는 마을은 이미 웬만한 대도시의 크기를 능가하고 있었다. 외부 인구는 유입되지 않았다. 하지만 트롤의 피로 벌어들이는 돈이 워낙 많다 보니 주민들 모두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것을 누리며 인간답게 살고 있다. 항상 트롤의 습격으로 마음을 놓지 못하여 늘 긴장하고 여유가 없던 사람들. 그러나 이제는 넉넉한 생활로 얼굴에 늘 웃음을 머금고 즐겁게 살아가고 있다. 벌어들이는 돈이 워낙 넉넉하니 남의 것을 욕심 낼 필요도 없다. 덕분에 마을 사람들은 밤에 문을 활짝 열고 자도 걱정 하나 생기질 않는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이 엘에 의해 시작된 것이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겠는가. "이렇게까지 변하니 흐뭇한 마음은 감출 수 없군. 하하!" 밝고 즐겁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보며 엘은 울적했던 기분이 한결 가시는 걸 느꼈다. 그리고 마탑을 향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몇 분 뒤, 엘은 마탑 입구에 도착했다. "응? 뭐지?" 마탑에 들어서려던 엘은 입구에 서 있는 10여 명의 사람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각 12개의 마을을 이끌던 경비대장들이었다. 개개인이 모두 익스퍼트에 든 실력자들. 그 실력을 탐냈지만 진심으로 충성을 바칠지 의문이 되어 거두기를 망설인 그들이 지금 마탑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엘은 조용히 그들에게 접근하였다. 기사가 아니지만 이미 체내에 축적된 마나는 소드 마스터를 뛰어넘는 어마어마한 양이었기에 엘의 접근은 신속하면서도 은밀했다. "무슨 일로 날 찾은 것이지요?" "........!" 갑작스런 엘의 물음에 그들은 일제히 움찔하며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러더니 엘의 얼굴을 보고는 풀어진 표정을 지었다. "랍주님이셨군요. 깜짝 놀랐습니다." 잔뜩 경계의 표정을 짓던 마이더가 엘의 얼굴을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마이더의 얼굴을 보며 엘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나저나 무슨 일로 절 찾아오셨나요?" 엘은 그들이 무슨 뜻으로 찾아온 것인지 내심 짐작하고 있었다. 전생에 심리전의 달인이라 불렸던 그가 어찌 순박한 그들의 내심을 모를 리 있겠는가! 하지만 모름지기 심리적 우위에 서려면 상대방의 애를 더욱 닳게 만들어야 한다. 울적한 기분이 가신 엘은 그가 지닌 장점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리고 그것은 제대로 먹혀 들어갔다. 털썩! 무릎을 꿇는 12명의 남자. 그 모습에 엘은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물었다. "이걸 무슨 의도라 봐야 하죠?" 그러자 제이머 남작가 출신 기사의 수장인 모스가 외쳤다. "저희를 거두어 주십시오!" 그의 말에 엘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이것이다. 이것이 야말로 그가 예상하던 전개였다. 하지만 겉으로는 아직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무슨 뜻이죠? 거두어 달라니?" 상대방이 자신의 의도를 알아주지 않는다면 더욱 애가 닳는 법이다. 특히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그러한 현상이 더욱 크다. 모스가 고개를 들며 엘에게 외치듯 말했다. "저희는 솔직히 탑주님의 의도를 의심했습니다. 이곳을 차지한 뒤 우리들을 어떻게 해 보려는 게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저희들의 어리석은 생각이었습니다. 탑주님은 아무런 대가없이 저희들을 사람답게 살게 해 주셨으며, 평생 갚기 힘든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덕분에 늘 트롤들에게 위협받던 가족들이 이제는 웃음을 짓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결심했습니다. 이 부족한 한 몸, 평생 탑주님을 위해 바치겠다고 말 입니다. 이것은 비단 저뿐만의 뜻이 아닌 모두의 뜻입니다. 부디 거두어 주십시오." 그 뜻이 진심으로 묻어 나오는 말이다. 하지만 엘은 약간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 "음!" 그러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비장감이 가득했다. 반드시 엘의 승낙을 얻겠다는 의지. 무언가를 바라는 이해타산적인 얼굴이 아닌, 진심이 담긴 얼굴이었다. '좋군.' 그런 그들의 얼굴에 엘은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엘은 이런 이들을 원했다. 비단 자신의 부하가 되는 것이 아니라도 굳은 의지가 있으며, 누군가를 믿을 수 있는 믿음이 가는 사람. 엘은 그런 사람을 원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을 향해 불신을 내뿜던 이들이 자신에 대한 믿음을 뿜어내며 자신의 부하가 되길 청하고 있었다. 흡족했다. 그리고 마음에 들었다. 충분히 그들의 애를 닳게 만든 엘은 잠시 생각하는 모션을 취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승낙의 표시였다. "좋습니다. 사실 저 또한 여러분들의 힘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던 터, 여러분의 맹세는 고맙게 받아들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엘의 승낙에 12명의 사내가 동시에 외쳤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앞으로 여러분들은 매직 나이트라 불리게 될 것입니다. 동급의 기사 여럿을 상대할 수 있는 최강의 기사! 그것이 앞으로 여러분이 될 것입니다." 엘은 언젠가 이들이 자신에게 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을 어떤 형식으로 구성할지 이미 구상을 끝낸 뒤였다. "........." 엘의 말에 그들은 기대에 찬 눈을 했고, 엘은 그들을 보며 웃었다. 이것이 추후 무적이라 불리며 모든 기사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기사, 혹은 환상의 기사 라 일컬어지는 매직 나이트의 탄생이었다. "왕국 중앙 회의에 참석해 달라......?" 모스 등을 거둔 지 3일째 되는 날, 엘은 왕궁에서 온 마법 편지를 받았다. 이미 마탑을 세워 왕궁과 통신 채널을 설정해 놓았기에 이러한 마법 편지를 받는데 하등 불편함이 없었다. 엘은 데실론이 보낸 마법 편지를 받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현재 톨리안 왕국의 상황은 그야말로 이전투구의 모습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왕가의 숨겨진 힘을 활용한 제3왕자파는 어느덧 제일 강해져 두 왕자파를 압도하는 형국이었지만 귀족 세력 면에서는 부족하여 정계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정통성으로 정계에서 어느 정도 버티고 있지만 이미 정 계의 중앙 귀족들은 대부분 제1왕자파와 제2왕자파에 속하여 때로는 힘을 합하고, 때로는 힘겨루기를 하여 그야 말로 왕국을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간 것이다. 특히 이번 몬스터 침공을 완벽에 가깝게 막은 테란델 후작은 제1왕자파 귀족들의 주장으로 레도프 국왕에게 상을 받은 상태였다. 트롤 벨리를 완벽하게 소탕한 엘이나 오크들을 전멸시킨 또 다른 귀족 로웰린을 배제하고 말이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다른 놈이 챙기는 격이었다. "국왕이 무슨 생각일까. 나의 등장을 알림으로써 제3왕자파에게 유익한 영향을 끼치려는 걸까? 아니면 단순히 마탑의 등장을 알리려는 걸까......." 어느 쪽도 상관없다. 하지만 마탑은 대륙의 관례상 항 상 중립을 지켰기에 귀족들은 엘을 승리를 결정적으로 지을 수 있는 조커로 보게 될 것이란 이야기다. 그리고 레도프 국왕이 엘을 소개함으로써 귀족들은 엘을 제3왕자파의 히든카드나 혹은 중립적 성향으로 보게 될 확률이 높았다. 결국 이러한 행동은 엘을 정계에 끌어들여 어느 쪽으로나 제3왕자파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겠다는 레도프 국왕의 의도였다. 엘은 그 의도를 단번에 간파할 수 있었다. 처음 레도프 국왕이 자신에게 제의를 했을 때부터 이럴 거란 걸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엘은 그러한 레도프 국왕의 의도에 순순히 따라 줄 생각이었다. 엘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참에 루비어스 백작가를 중앙 정계로 진출 시켜야 겠군. 이십 대 초반의 나이에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에 든 재능이라면 뒤에 내가 설 시 충분히 중앙 귀족으로 올라 설 수 있다." 엘은 이번 기회를 발판 삼아 로웰린을 중앙 귀족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이미 막대한 양의 해산물 수출로 루비어스 백작령은 부활의 기틀을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가문의 부활은 단순히 재력만 있다고 하여 이루 어지는 것이 아니다. 로웰린이 중앙 귀족이 된다면 어린 나이에 천재적인 재능으로 소드 익스퍼트에 오른 그녀를 추앙하는 기사들이 있을 것이고, 적지 않은 기사들이 루비어스 백작가의 깃발 아래 모일 것이다. 이번 회의에서 귀족들은 루비어스 백작가 뒤에 엘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 어떤 귀족들도 함부로 루비어스 백작 가에 손을 대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국왕도 루비어스 백작가를 은연중 밀어 주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보이 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엘 또한 나름대로 레도프 국왕을 이용하는 것 이다. 비록 나쁜 의미는 아니지만 이용한다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다. "나를 이용했으니 별로 기분 나빠하지 못하겠지." 그렇게 생각한 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이 마법사인 걸 감안한 듯 왕국 중앙 회의는 불과 5일 밖에 남지 않았다. 엘은 한창 마법 수련 중인 실피르와 매직 나이트로 선발된 12명의 기사들과 매일 대련을 벌이는 카이나와 오랜 만에 식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서 혼자 가 보려고요." 식사를 나누면서 엘은 실피르와 카이나에게 왕궁에서 보낸 편지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실피르는 루비어스 백작가에 대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엘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렇게까지 해 주니 정말 고마워. 솔직히 가문의 수작으로 루비어스 백작가가 그 정도가 될 줄은 몰랐거든." 처음 엘이 톨리안 왕국으로 간다고 했을 때 직감적으로 루비어스 백작가가 존재하여 그곳을 선택했다는 걸 느낀 실피르다. 루비어스 백작가는 그녀 남편의 출신 가문이다. 그런데 가문의 수작으로 멸문의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에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른다. 그런데 엘이 지금 최대한 돕겠다고 한다. 그녀의 입장으로서 당연히 고마울 수밖에 없었고, 한편 으로는 아버지의 가문을 돕는 엘의 모습이 흐뭇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루비어스 백작가는 예전의 힘을 되찾을 거예요. 그리고 머지않아 예전의 영광을 되찾겠죠." 웃는 얼굴로 실피르의 말에 대답한 엘이 이번에는 카이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카이나는 이제 몸을 움직이는 수련이 도움이 되지 않을 거야. 단전호흡에 중점을 두고 수련을 하면서 명상을 해 봐." 그러자 카이나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네...... 사실 저도 주인님이 없는 사이 다른 남자들과 검을 나누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세상에서 엘을 제외한 모든 남자에게 거부감을 느끼는 카이나. 그녀가 흔쾌히 말을 받아들이자 실피르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호호! 이렇게 보니 엘이 질투하는 것처럼 보이는걸?" "네? 질투라뇨! 천만의 말씀을......." 엘이 놀라며 손을 저었다. 하지만 실피르는 계속해서 엘을 놀렸다. "그렇게 행동하니 정말 질투처럼 보이는데?" 그러자 카이나가 볼을 발그레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면서 엘은 돌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힐끔 위를 쳐다보았다. 그곳은 세레나의 방이 있는 곳이다. "제가 떠나 있는 동안 세레나를 잘 부탁드릴게요, 엄마. 그리고 카이나한테도 부탁 좀 할게?" 세레나의 이야기가 나오자 실피르와 카이나가 정색을 한다. 그리고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어, 세레나는 우리에게 맡겨 두렴." "맡겨주세요." 그녀들의 말에 엘은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그녀들이 있기에 엘이 마음 놓고 떠날 수 있는 것이다. "네? 지금 뭐라고요?" 로웰린은 당황스러웠다. 가문을 일으키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준 마탑의 탑주. 그가 갑자기 방문하여 왕국 중앙 회의에 참석할 의향이 없냐고 물은 것이다. 가난한 영지를 꾸리느라 중앙 정계에 진출할 생각을 꿈도 꿔보지 못한 그녀다. 이제 막 가문이 살아나고 있는 시점에 엘의 제의는 그녀를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엘이 로웰린에게 말했다 "루비어스 백작가가 성장하기는 했지만 아직 테란델 후작가와 맞설 정도는 아니지 않습니까? 중앙 정계에 나서서 최소한 테란델 후작가가 경거망동 못하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몬스터들의 습격을 막아낸 공로로 상을 받은 테란델 후 작가의 횡포가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다 망해 가는 루비어스 백작가가 몬스터들을 막아 낸 건 다 자신들이 막아 준 덕이라면서 계속해서 혼인을 요구하고 있었다. "......." 엘의 말에 로웰린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오만방자 하던 테란델 후작가 사자의 모습이 떠올라서이다. 그리고 느물느물한 라크의 모습을 떠올리니 당장 주먹을 꽃아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권력이 죄다. 힘이 없어 그렇게 행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엘의 말은 로웰린에게 무척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가문의 힘이 서서히 살아나는 지금 이 시점에 수도에 올라가 더욱 영향력을 증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지방에 있다고 하지만 그녀가 왕국의 사정을 모를 리 없다. 세 왕자파로 나뉘어 현재 정국은 어수선하기 그지없으 며, 이 눈앞의 마탑주가 등장하기만 한다면 단숨에 폭풍의 핵으로 떠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엘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가 자신의 배경이 되어 주겠다는 것을 뜻했다. 엘의 의도를 정확하게 알아차린 것이다. 순간 로웰린은 퍼뜩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자신에게 너무도 잘해 주려는 엘의 의도가 궁금했던 것이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엘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시선을 느낀 엘이 시선을 마주했다. 로웰린이 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도와주는 대가가...... 설마......?" "그게 무슨?" 엘이 고개를 갸웃하며 로웰린을 바라보자 그녀가 순간 몸을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손으로 몸을 감싸며 움츠렸다. 그녀는 그 대가로 엘이 자신의 몸을 요구하리라 착각한 것이다. ‘하?’ 그 모습을 본 엘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로웰린의 반응이 어처구니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잠시 생각해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로웰린의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이러한 반응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다. 홀연히 나타나 오크들의 침공에서 구해 주었고, 쓸모없었던 가문의 상품을 모조리 사 주었다. 그리고 친히 배경이 되어 주어 가문의 부활을 돕겠다고 한다. 로웰린은 엘의 정체를 모른다. 그가 과거 루비어스 백작이 되어야 할 레이언 루비어스의 아들이란 걸 모르고 있다. 그러니 어찌 엘의 이러한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순수한 호의로 받아들이기에는 그녀가 여태껏 겪었던 일들이 너무나 험난했다. "하아!" 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절로 한숨이 나온 것이다. 그동안 로웰린이 어떠한 일을 겪었을지 상상하니 미안하기 그 지 없었다. 엘은 흔들리고 있는 로웰린의 눈을 마주했다. 엘의 눈은 한 점 흔들림도 없이 곧았다. "갑작스러운 제 호의를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언젠가 알게 되겠죠. 안심하세요, 저는 백작님에게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습니다. 단지 필요에 의해 해산물을 모두 사 간 것이고, 제게도 생각이 있어 백작님을 돕는 것 입니다. 순수한 호의...... 정말 받아들이기 힘들겠죠. 그 동안 백작님이 겪은 고생을 생각하면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받아들이세요. 훗날 모든 걸 알게 될 테니 까요. 아시겠습니까?" 로웰린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진심이 담긴 엘의 말이 그녀의 가슴에 그대로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침묵이 잠시 돌고, 마침내 제정신으로 돌아온 로웰린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흔들리던 그녀의 눈은 어느덧 엘처럼 흔들림 없는 또렷한 초점을 맺고 있었다. "믿겠어요.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탑주님의 눈 에 진실이 담겨 있으니까요. 하지만 훗날 저에게 모든 연 유를 털어놓아 주세요. 궁금한 점을 참는 게 힘든 성격이 라......." 그러자 엘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머지않아 모든 것을 말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머지않아서 말입니다........." 그런 엘의 태도에 로웰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엘을 바라보며 말했다. "수도로 떠나는 준비를 하는 데 하루 정도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엘이 느긋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틀이든 사흘이든 괜찮습니다. 텔레포트 마법이 있으니까요. 그럼 편히 준비하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럼 ........." 로웰린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방을 벗어났고, 엘은 그런 그녀를 빙긋 웃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쾅! 거칠게 팔을 내리쳐 탁자를 친다. 손에 마나가 담긴 탓 인지 탁자는 부르르 떨며 거센 진동을 일으켰다. "이번 회의가 기회다! 이번 회의에서 유드미온 왕자를 완전히 떼어 버려야 해! 모두들 알고 있나?" 거대한 회의실에는 가장 상석에 앉아 있는 이를 제외한 4명이 자리에 착석하고 있었다. 가장 상석에 앉아 있는 이는 트겐발리 공작으로, 현 국왕의 숙부이며, 크란 왕자를 지지하는 제2왕자파의 수장이기도 했다. 트겐발리 공작은 전 국왕의 동생이지만 실제 나이는 레도프 국왕보다 몇 살 많은 정도였다. 국왕의 동생이라 하여 공작의 작위를 받았지만 실제로 별다른 권력도 없는 작위였다. 하지만 트겐발리 공작은 탁월한 정치력을 지니고 있었고, 수십 년 동안 정치 활동을 벌여 오늘날 톨리안 왕국을 이끄는 양대 파벌의 수장 중 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시기를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사람 보는 눈이 좋은 트겐발리 공작은 요즘 들어 가슴이 터져 나가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제1왕자파에게 큰 타격을 입히기 위해 시간을 들여 준비했던 회심의 한 수가 갑작스럽게 왕가의 힘을 등에 업고 나타난 제3왕자파로 인해 무산이 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제1왕자파에게 한 방 먹이는 것도 실패하고, 제 3왕자파의 힘이 막대해짐으로 인해 제1왕자파와 연합전선을 벌이면서 주도권을 내주기도 하였다. 그로 인해 현재 트겐발리 공작은 매우 저기압이었다. 그는 주변 귀족을 둘러보며 다시 한 번 탁자를 쳤다. 쾅! 왕국을 지탱하는 소드 마스터답게 그의 주변에서 피어오르는 기세는 무시무시했다. "어서 말을 해 보란 말이다, 말을! 브릴켄드 후작!" 트겐발리 공작에게 호명된 40대 후반의 중년인, 브릴켄드 후작이 대답을 하였다. "예, 공작님 ." "무언가 방도가 없나?" 트겐발리 공작의 재촉에 브릴켄드 후작이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저어, 생각해 둔 게 있긴 있습니다만........." 그러자 트겐발리 공작이 반색했다. 지금 상황이 상당히 비관적이라 여겼는데 제2왕자파의 꾀주머니인 브릴켄드 후작이 한 수를 준비하고 있던 것이다. "오오, 과연 후작이다! 어서 말해 보라." 그러자 브릴켄드 후작이 주변 귀족을 슬쩍 훑더니 헛기침을 하였다. "허험! 우선 공작님의 말씀대로 이번 왕국 중앙 회의가 기회라 할 수 있습니다. 이번 회의에서 군부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 "좀 더 자세히 말해 보실 수 있겠습니까?" 인근 왕국에 영지를 접하여 강력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는 트룬 백작의 물음에 브릴켄드 후작이 답변을 해 주었다 "현재 제1왕자파는 몬스터 랜드에서 쏟아진 몬스터를 잘 막았다는 걸 구실로 그 기세가 최고조로 달해 있소. 때문에 상당한 군사를 지니고 있는 우리 파벌이 제1왕자파보다 못하다는 평가를 듣고 있지." 그의 말에 모든 귀족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파벌을 구성하고 있는 귀족들 중 제1왕자파는 중앙 정계에서 상당한 힘을 지니고 있는 귀족들이다. 그리고 제2왕자파는 국경 부근에 강력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는 귀족들이었다. 때문에 권력 면에서는 제1왕자파가 앞서지만 결정적인 군사력에서는 제2왕자파가 앞서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이번 몬스터 랜드의 습격으로 인해 제1왕자파의 위상이 급격하게 올라가서 제2왕자파는 상당히 곤란한 지경에 처해 있었다. 자칫 그들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이 제1왕자파로 건너가 버릴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브릴켄드 후작이 지적하는 것도 바로 그 부분이다. 그가 계속 말을 이었다. "몬스터 랜드의 습격도 가볍게 막아 내어 제1왕자파의 위상이 올라갔으니 이번에는 우리가 힘을 보여 줘야 할 차례. 그러니 인근 왕국인 헤센 왕국을 침공하는 것이오." "헤센 왕국을?" 주변 귀족들은 물론 심지어 트겐발리 공작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그들의 반응이 마음에 든 듯 브릴켄드 후작이 계속해서 말했다. "사실 본 왕국이 강대한 힘을 지녔음에도 주변 왕국에 힘을 행사하지 못한 이유가 다름 아닌 몬스터 랜드 때문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번 몬스터들의 침공을 손쉽게 막아 냈으니 주변 왕국에 힘을 뻗칠 때입니다. 다른 왕국과 접하고 있는 왕국의 귀족들은 대부분 우리 쪽 사람들이니 몇몇이 힘을 합친다면 최소한 한 개의 왕국은 흡수 할 수 있을 거란 게 제 생각입니다." 브릴켄드 후작의 말을 들은 트겐발리 공작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흐음...... 주변 왕국 하나를 우리가 완전히 점령함으로써 우리의 힘을 외부에 널리 알리고 백성들의 시선을 돌릴 수 있겠군. 게다가 점령 영토엔 우리 측 사람들을 넣을 수 있고. 후일 그들은 우리의 힘이 될 테지. 참으로 멋 진 계획이야." 그에 브릴켄드 후작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공작님. 제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부분입니다. 그리고 제가 헤센 왕국을 지목한 것은 인근 왕국 중 가장 약한 곳이 헤센 왕국이고, 현재 그들은 3년 동안 흥년에 들어 민심이 무척 뒤숭숭하다고 합니다. 아마 두 명의 백작이 힘을 합한다면 헤센 왕국을 충분히 합병할 수 있을 것입니다. " "흐음......." 트룬 백작이 잠시 고민을 하는 듯하더니 이내 결정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군사를 동원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말씀하신 대로 저 혼자의 힘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러자 브릴켄드 후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뒤에서 지원은 걱정하지 마시오. 넉넉하게 지원해 줄 테니. 트룬 백작은 헤센 왕국에서 마음껏 용맹을 떨치면 되오." 트룬 백작 또한 왕국의 국경을 지키고 있는 소드 마스터 중 하나다. 실전을 무척 좋아하는 그였기에 그는 브릴켄드 후작의 말을 반갑게 맞아들였다. "알겠습니다." "결정이 되었군요. 어떻습니까, 공작님?" 트겐발리 공작이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군, 훌릉한 계획이다. 이번에 크게 한건 했어, 후작." "저는 영원히 공작님을 모실 뿐입니다." "하하, 그래야지 암!"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리는 트겐발리 공작을 보면서 브릴켄드 후작의 눈이 한순간 기묘한 빛을 띠다가 본래대로 돌아왔다. 그가 보인 눈빛은 무언가를 성취한 듯 득의양양했다. 그렇게 톨리안 왕국의 수도 베르디스에서 전운을 몰고 올 음흥한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왕권 다툼이 외부로까지 뻗어 나가는 형국이었다. 이것은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전개라고 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와 보는데 여전히 바글 바글하단 말이야." 엘은 준비를 마친 로웰린을 데리고 곧장 베르디스로 텔레포트를 하였다. 항상 매직 스톤을 가지고 다니기에 아무리 먼 거리도 손쉽게 이동할 수 있었다. 베르디스로 접어든 엘은 고개를 돌려 저쪽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로웰린을 향해 말했다. "뭐 하시는 겁니까? 수행원 없이 와서 그런 건가요?" "......." 로웰린이 무언가를 말하려다 멈칫했다. 그리고 다시 우물쭈물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엘은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다가가 영문을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러시는 거예요?" 그러자 로웰린이 고개를 푹 숙이며 모기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게...... 이번에 베르디스에 처음 오는 거여서......." "하아?" 로웰린의 말에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 엘. 그럴 수밖에 없다. 로웰린은 톨리안 왕국의 백작이다. 왕국의 백작이라면 몇 되지 않는 고위 귀족에 속한다. 그런데 그런 귀족이 수도에 한 번 온 적이 없다니? 이게 말이 된단 말인가? 그런 엘의 심정을 알아차린 듯, 로웰린이 변명같이 대답을 하였다. "그게.... 영지 일이 워낙 바빠서 올 시간이 없었어요" "......그렇군요." 엘은 로웰린의 말에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었다. 이윽고 엘의 얼굴이 약간 어두워졌다. 생각해 보니.... 얼마나 가문이 어려웠다면 수도에 한번 올라을 시간도 없었단 말인가? 더 이상 생각하기 복잡하여 엘은 로웰린을 힐끗 보고는 내심 밝게 말하였다. "뭐, 처음일 수도 있는 거죠. 자, 그럼 절 따라오세요. 예전에 와 본 적이 있어서 꽤 좋은 여관을 알고 있거든요" 그러면서 엘은 로웰린을 이끌고 전에 베르디스에 왔을 때 머물던 여관으로 향했다. 시설이 무척 좋아 귀족들이 주로 묵는 고급 여관이었다. 그곳에 각각 1인실 방을 잡은 엘과 로웰린은 내일 벌어 질 왕국 중앙 회의를 위해 각자 편안한 휴식을 취했다. "........뭐야?" 자신의 방에 누워 조용히 명상에 잠겨 있던 엘은 밑에서 누군가 말싸움을 벌이고 있음을 알아채고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다시 한 번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해 보니 상당히 친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렇다. 말싸움을 벌이고 있는 사람 중 한 사람은 다름 아닌 로웰린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로웰린과 말싸움을 벌이고 있는 이는 로웰린보다 한참 미치지 못하지만 그의 곁에 있는 이들이 만만치 않게 느껴졌다. 엘은 다시 조용히 눈을 떴다. 로웰린이 말싸움을 벌이고 있으니 무슨 일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데려왔으니 그녀의 힘이 되어 주어야겠다는 생각도 자리 잡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알아 봐야겠군." 자리에서 일어난 엘이 방을 벗어나 식당으로 내려갔다. 식당으로 내려간 엘의 눈에 로웰린이 들어왔다. 그녀와 마주하고 있는 이는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귀족 자제였으며, 그의 주변에는 소드 익스퍼트 중급과 상급으로 보이는 기사 5명이 호위하듯 서 있었다. 엘이 로웰린을 불렀다. "아니 , 백작님! 무슨 일이십니까?" 그러자 로웰린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엘을 바라보았다. "탑...... 엘 님........." 아직 공개된 탑주가 아니었기에 함부로 탑주라 부르지 못한 로웰린이 엘의 이름으로 불렀다. 그러자 20대 중반의 귀족 청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엘에게 향했다. 그는 귀족 특유의 오만함고 거들먹거림이 배인 행동으로 로웰린에게 입을 열었다. "엘 님? 뭐지, 보아하니 검을 수련한 것도 아닌데...... 마법을 익힌 건가? 하! 보아하니 3클래스 정도인 것 같은 데...... 백작! 설마 저 마법사를 좋아하는 것이오? 나 라크가 그렇게 끈질기게 청혼을 했는데 거부했던 이유가 바로 저 마법사 때문이란 말이오?" 청년이 스스로 정체를 밝혔다. 그는 테란델 후작가의 둘째 아들 라크였던 것이다. 끈질기게 로웰린에게 청혼한, 루비어스 백작가를 집어삼키기 위해 매일같이 로웰린에게 청혼하는 이가 바로 라크였다. "........그게 아니에요." 로웰린은 라크가 엘을 가리키며 함부로 말하자 어쩔 바를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엘은 마탑의 탑주다. 그것은 최소 7클래스 마법사만이 가능한 특권으로, 어느 왕국에서나 최소 후작 대우를 해 주며, 제국에서는 백작의 대우를 해 준다. 라크의 아버지인 테란델 후작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이가 바로 엘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후작도 아니고 후작 자제에 불과한 라크가 엘을 저렇게 대하다니....... 라크는 그런 로웰린의 행동을 오해했다. 그는 자신의 말이 정곡을 찔러 로웰린이 당황한 것으로 판단했다. 라크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엘에게 향했다. 그리고 엘의 잘생긴 얼굴을 보자 그의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이놈이!’ 라크는 옛날부터 뛰어난 외모를 지닌 로웰린을 좋아했다. 거기에 가문의 야망이 더해져 가문의 적극 지원이 있자 당장이라도 로웰린을 차지할 수 있을 것 같아 기뻐했다. 그때부터 여기저기 망나니처럼 사고 치던 것도 그만두고 여자도 끊었다. 그리고 로웰린에게 끊임없이 청혼에 청혼을 거듭했다. 하지만 로웰린은 끝까지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떠한 회유에도 넘어오지 않았고, 어떠한 협박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로웰린이 남자에게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며 막 포기하려던 찰나에 이런 놈이 등장하다니....... 라크가 금방이라도 불똥이 떨어질 듯한 눈으로 엘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누구냐? 몇 클래스 마법사지?" 엘은 고민했다. 순간 자신의 클래스를 말하고 마탑주라 말해 볼까 고민을 해 보았다. 하지만 그것을 말해 봤자 말짱 도루묵이라 는 걸 느꼈다. 자신의 나이가 몇 살이던가? 올해 열여덟이다. 그런데 눈앞의 귀족 청년에게 "난 7클래스 마법사요, 그리고 마탑의 탑주요." 이렇게 말하면 과연 순순히 믿겠는가? 아니다. 오히려 허풍쟁이로 몰리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그리고 정황상 이 귀족 청년은 결코 자신에게 호의를 품고 있지 않은 듯했다. 지금 저렇게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눈이 그걸 증명하지 않는가. 호의는커녕 원한을 품지 않으면 다행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상대는 자신의 마탑이 위치한 곳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귀족의 자제다. 여기서 건드려 봤자 엘로서도 어렵게 계획한 것들을 성공할 수 없었기에 엘은 함부로 나서지 않았다. 엘은 슬쩍 로웰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라크의 행동에 당황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자 순간 장난기가 돌았다. 어차피 이 녀석이 자신을 대하는 게 화나지도 않는다. 오크가 깔짝거려 봤자 드래곤이 눈 하나 깜빡 안 하는 것처럼 상대할 가치도 없는 놈에게 반응할 필요를 못 느낀 것이다. 엘이 대답했다. "저는 루비어스 백작가 주변에 머물고 있는 마법사입니다. 이번에 루비어스 백작가에 신세를 끼치게 되었지요" 그러면서 엘은 로웰린에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러자 로웰린은 한동안 엘의 윙크가 무슨 뜻인지 짐작을 못하다가 이내 본래 표정을 되찾았다. 그렇다! 엘은 지금 눈앞의 라크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 것이다. 솔직히 그렇다. 테란델 후작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하나 그가 대단한 것이지 라크가 대단한 것이 아니다. 본신의 실력이 소드 익스퍼트라고 하나 로웰린 자신보다 약하지 않은가. 게다가 자신은 톨리안 국왕에게 작위를 수여받은 귀족이다. 귀족가 자제인 라크와는 엄연히 다른 귀족 중의 귀족인 셈이다. 로웰린의 어깨가 쭉 펴졌다. 엘이 그녀의 뒤에 있는 이상 왕국의 제일 귀족인 트겐발리 공작이나 라이어스 공작이 두렵지 않았다. 7클래스 마법사는 그 이상의 무게감을 지니고 있다. 로웰린이 라크를 보며 말했다. "본 가문의 마법사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그러자 라크가 순간 움찔했다. 그러더니 로웰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그렇다면 내가 저자의 정체를 물어 보지도 못한단 말이오? 아무리 마법사라고 하나 귀족인 나보다 그 신분이 높다고 할 수 없소." 라크의 말은 귀족적 관점에서 지극히 타당성을 띠고 있다. 마법사가 아무리 고급 인재라고 하나 귀족인 자신보다 높은 신분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마법사는 기사와 다를 바 없는 존재였다. 귀족가를 보호하고 귀찮은 일들을 대신 수행해 주는 그런 존재 말이다. 자신이 한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라크는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말을 너무 잘한 것 같았다. ‘이 정도면 당장 사과하겠지?’ 하지만 그의 눈에 들어온 로웰린의 모습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의기소침하여 쩔쩔매는 모습이 아니라, 도리어 두 눈에 안광을 뿜어내며 라크를 노려보고 있던 것이다.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에 이른 로웰린의 기세다. 제법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는 라크라지만 그녀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아낼 정도는 아니다. 움찔! 로웰린의 눈빛에 압도된 라크가 뒤로 물러나자 그의 호위로 서 있던 기사가 재빨리 앞을 가로막는다. 그리고 경계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로웰린을 바라본다. 기사들이 앞을 가로막았음에도 불구하고 로웰린은 여전히 안광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도리어 그녀는 더욱 강렬한 안광을 뿜어내며 라크를 향해 말했다. "이분이 그런 신분이건 아니건 중요치 않아요. 단지 후작가 자제에 불과한 당신이 제게 이렇게 대하는 태도가 화가 날 뿐이지요. 저는 왕국의 백작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후작가의 자제입니다. 작위를 받은 귀족과 단순히 작위를 받은 귀족의 가족은 그 신분 차가 큰 법. 대륙의 법을 제대로 모르시나 본데 앞으로는 유의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서 로웰린은 엘에게 시선을 돌렸다. 시선을 돌릴 때 그녀의 눈에서 뿜어지던 안광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다. 그녀는 엘에게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을 꺼냈다. "실례를 범하게 되었네요. 죄송해요." 그러자 엘이 아직도 로웰린의 기세에 압도되어 있는 라크를 슬쩍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실례랄 것도 없었습니다. 애초에 저런 인물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죠. 저런 이가 감히 제 신경을 거스를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 말에 로웰린이 대경하여 양손을 크게 내저었다. 고개도 맹렬히 돌리고 있었다. "아, 아니에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가요? 다행이군요." 그러면서 엘은 로웰린에게 말했다. "이만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귀족 정신이 제게 옮겨 붙을 것 같거든요." 명백히 일부러 자극하는 말이었지만 로웰린은 그에 대해 저지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저도 목욕이나 해야겠어요. 고루한 귀족 정신이 몸에 밴 것 같네요." "하하! 저와 같아 다행이군요. 그럼 방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엘이 발걸음을 옮기자 로웰린도 발걸음을 옮겼다. 라크는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다. "그러세요." 그러면서 로웰린도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사라지는 엘과 로웰린을 라크는 두 눈 가득 분노를 담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분통을 터뜨렸다. "제기랄! 감히 내게 이런 모욕을 심어 주다니! 그리고 저 마법사........." 라크는 어느덧 계단 위로 사라진 엘의 됫모습을 쫓았다. 그의 시선에는 진한 분노가 용암처럼 들끓고 있었다. "감히 내게 이런 모욕을 주게끔 만들다니. 두고 봐라! 이번 왕국 중앙 회의에 안건을 붙여서라도 무사치 못하게 하리라!" 사소한 원한을 갚고자 왕국 회의마저 이용하려는 그의 심보. 그것은 귀족들이 어떠한 생각을 지니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증거와도 같았다. 톨리안 왕국 중앙 회의 한편, 레도프 국왕은 라이어스 공작과 독대를 하고 있었다. 연이은 왕권 다툼으로 인해 매일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레도프 국왕이었지만 지금만큼은 무척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레도프 국왕이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트를 벨리가 토벌되어서 다행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러자 레도프 국왕 맞은편에 앉아 있던 라이어스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솔직히 저는 아직도 믿기 힘듭니다. 오년 전 제가 트를 벨리에 잠입했을 때 만났던 트를 킹의 무위는 정면대결로는 도저히 상대하기 힘든 괴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괴물을 처치하고 오만에 이르는 트롤들을 제거했다는 건...... 정말 탑주의 실력이 얼마나 뛰어난가를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탑주가 어느 정도의 실력을 지니고 있는지 짐작하기도 힘듭니다."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는 라이어스 공작. 그는 정말로 놀라고 있었다. 톨리안 왕국을 매년 침공하는 몬스터 랜드의 몬스터들 중 사실 오크 포레스트에서 쏟아지는 오크들은 트롤 벨리 에서 쏟아지는 트롤에 비하면 그렇게 어렵지 않다. 트를들 1마리가 기사 1명과 맞먹는 힘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크들이야 잘 훈련된 병사로도 상대가 가능하지만 트롤은 성벽과 병사들의 합격진이 완전히 조화되어야 막아 낼 수 있다. 그런 트롤이 무려 50,000마리가 존재하는 곳이라고 생각해 보라. 완전 지옥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런 트롤들을 모두 제거했단다. 그리고 트를 벨리 근처에 모여 있던 사람들을 모아 마을을 세웠다고 한다. 자신의 공을 그리 내세우지 않는 엘이었기에 단순히 트롤 벨리를 토벌했다고만 했지만 레도프 국왕은 왕국 전역에 깔린 정보망을 가지고 있다. 자세히는 몰라도 트롤 벨리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흘러나오는 소문으로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환상의 도시, 골든 벨리. 세상에서 그곳보다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 없으며, 끝없는 황금과 끝없는 행복이 넘쳐나는 이 시대의 낙원이라 불리는 곳이다. 그곳이 바로 엘이 세운 마탑이 위치한 트롤 벨리다. "그런 괴물을 상대할 수 있는 건 그때 보았던 나이트 골렘뿐이겠지요." 레도프 국왕이 습격 받았던 당시 압도적인 무력으로 소드 마스터들을 모조리 쓸어버린 골든 나이트의 모습을 떠올리며 말하자 라이어스 공작이 마주 대답했다. "솔직히 그런 나이트 골렘을 소유하고 있는 건 놀라운 일입니다. 어떻게 일개 나이트 골렘이 그랜드 마스터와 맞먹는 힘을 지닐 수 있겠습니까? 엘리미스 탑주는 보면 볼수록 새로운 면모가 보이는, 양파와 같은 인물입니다." 라이어스 공작의 비유에 레도프 국왕이 웃음을 지었다. "하하! 양파라...... 맞는 말이군요. 그는 양파 같은 사람이지요. 끝없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고, 그 누구도 생각 하지 못한 발상을 해내는 사람.... 그런 사람이 우리 왕국에 정착했다는 건 왕국의 홍복이고, 또한 이번 회의에 참석해 주겠다는 것도 큰 힘이 되겠지요." 웃음을 짓고 있는 레도프 국왕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라이어스 공작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탑주가 과연 전하의 의도대로 움직여 주겠습니까? 보통 마탑은 왕권 문제에 전혀 개입을 안 하지 않습니까?" 염려가 담긴 라이어스 공작의 물음에 레도프 국왕은 짓고 있던 웃음을 지우며 대답했다 "허...... 지금 탑주를 무시하는 것입니까? 저는 탑주가 나이가 어리다고 하지만 그 능력만큼은 나이를 뛰어넘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큰 인물입니다. 주변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고, 상대방의 심리를 파악하는 데 뛰어난 인물이지요. 아마 탑주는 제 생각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제 제의를 승낙했다는 것은 이번 왕권 다툼에 조금이라도 제게 힘을 보태 주겠다는 뜻이 되겠지요." "허...... 그렇군요." 레도프 국왕의 말에 감탄의 기색을 띠며 고개를 끄덕이는 라이어스 공작. 라이어스 공작은 일평생 검을 익히며 오로지 검을 바라보는 전형적인 기사다. 동생인 트겐발리 공작과 달리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었기에 정치적 감각이 부족했다. 하지만 끝없는 충성심이 있었기에 레도프 국왕은 그런 라이어스 공작에게 더욱 믿음이 갔다. 레도프 국왕은 그저 옅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제 눈이 정확한지 아닌지는 내일 알게 되겠지요. 내일 회의 때 그가 올 테니까요." "기대가 되는군요." 라이어스 공작이 두 눈을 빛냈다. 사람 보는 눈만큼은 정확한 레도프 국왕이 과연 그 어린 대마법사에게서 무엇을 보았는지, 그리고 그 어린 대마법사가 얼마나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는지 보고 싶었다. 왕국 회의가 불과 하루 남은 시점에서 오간 그들의 대화였다. 왕국 중앙 회의. 1년마다 벌어지는 왕국의 큰 회의로, 무려 100여 명이 넘는 귀족들이 참가하는 톨리안 왕국의 최고 회의를 말한다. 왕국 중앙 회의는 전통적으로 개방형이어서 작위를 받은 귀족들은 모두 참석할 수 있으며, 그들의 직계 가족 2명이 견문을 쌓을 수 있도록 참가를 허락하고 있다. 올해 왕국 중앙 회의는 예년보다 훨씬 많은 숫자가 참석해 있다. 보통 중앙 정계에 진출한 귀족들이 대부분의 참석자 숫자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지방 귀족들도 대거 올라와 회의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예년보다 왕권 다툼이 더욱 심화되어 눈치를 보고 있는 귀족이 많아졌다는 증거이며, 이번 왕권 다툼을 기회로 중앙 정계에 진출하려는 귀족들이 많다는 것을 의미 한다. 500여 자리가 존재하는 회의실은 정확하게 두 개의 파벌로 나뉘어 있었다. 왼쪽은 제1왕자인 맥셀 왕자를 지지하는 귀족들이 주욱 앉아 있었고, 오른쪽에는 제2왕자인 크란 왕자를 지지 하는 귀족들이 앉아 있었던 것이다. 중앙에는 제3왕자인 유드미온 왕자를 지지하는 귀족들 몇몇과 아직 어디에 속해야 할지 모르는 지방 귀족들이 착석하고 있었다. 로웰린도 루비어스 백작의 자격으로 지방 귀족들이 앉는 중앙에 착석해 있는 상태였다. "......." 수백여 명이 모여 있었지만 회의실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자칫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상대 파벌에게 꼬투리를 잡히기 십상이었기에 양측 파벌 귀족들은 한마디도 이야기를 하지 않는 중이었고, 제3왕자파와 귀족들은 회의장 분위기에 짓눌려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침묵이 돌길 잠시, 시종장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오며 국왕의 등장을 알렸다. "톨리안 왕국의 위대한 지배자이신 국왕 전하께서 드십니다." 그와 함께 레도프 국왕이 회의 상석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그의 머리 위에 쓰인 왕관과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가히 일국의 국왕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척척! 레도프 국왕이 나타나자 귀족들은 자리에서 일제히 일어났다. 비록 왕권 다툼으로 파벌이 갈라져 있지만 그들은 여전히 레도프 국왕에게 충성을 바치는 귀족이었던 것이다.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 그들은 동시에 레도프 국왕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레도프 국왕이 자리에 착석하며 말했다. "그래, 본 왕국을 위해 항상 노력하는 그대들을 이렇게 보게 되니 반갑소. 모두 자리에 앉으시오." 레도프 국왕이 자리에 앉자 귀족들도 자리에 착석하였다. 귀족들이 모두 착석하자 레도프 국왕이 묵직한 어조로 회의 시작을 알렸다. "이제 회의를 시작하겠소. 회의는 여느 때처럼 주제가 없는 형태로 나아갈 것이오. 왕국의 미래를 위한 것이면 어떠한 것이든 상관이 없소. 자, 그럼 누가 먼저 의견을 내보겠소?" 레도프 국왕의 말에 귀족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 했다. 우물쭈물하는 지방 귀족들은 아직 회의 분위기에 덜 적응되어 그렇다 쳐도 중앙 귀족들은 이 회의에서 처음 의견을 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처음 의견을 낸 파벌이 회의의 주도권을 쥘 수 있을 뿐 더러 추후 왕국의 정계를 주도하는 데 상당한 이점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첫 발언은 양날의 검과도 같다. 의견을 잘 제시했을 때는 위와 같은 장점들이 있지만 자칫 실수라도 할 때는 수많은 귀족들에게 지적을 받고 그야말로 회복 불능의 타격을 입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보통 첫 발언은 공작이나 후작과 같은 최고위 귀족들이 하는 게 관례였다. 귀족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아무런 말도 하려 하지 않다 연신 제1왕자파 귀족들을 주시하던 트겐발리 공작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수백여 명의 귀족들의 시선이 트겐발리 공작에게 꽃혔다. 그는 그러한 귀족들의 시선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작게 헛기침을 터뜨림으로써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허험! 국왕 전하, 신이 의견을 내보겠사옵니다." "트겐발리 공작, 말해 보시오." 보통 자리에서는 숙부인 라이어스 공작과 트겐발리 공작에게 존대를 하지만 지금은 왕국의 중대한 회의였다. 국왕이 공작에게 존대를 할 수 없었기에 레도프 국왕은 하대를 하였다. 레도프 국왕의 승낙이 떨어지자 트겐발리 공작은 제2왕자파 귀족들이 상의한 내용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말씀을 드리겠사옵니다. 현재 본 왕국의 힘은 최고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하의 홍복으로 매년 왕국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던 몬스터 랜드의 몬스터들도 큰 피해 없이 막아 낼 수 있었고, 작년의 풍작으로 지금 왕국은 십 년 이래 최고의 태평세월을 누리고 있습니다." 몬스터들의 습격을 막아 내어 상을 받은 건 테란델 후작이지만 제1왕자파 귀족을 치켜세울 마음은 조금도 없었기에 트겐발리 공작인 몬스터를 막은 공을 모두 레도프 국왕의 덕이라 칭했다. 하지만 딱히 자신이 한 일도 아닌 걸 가지고 칭찬을 받는 레도프 국왕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쓸데없는 아부처럼 느껴진 것이다. 그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오, 공작?" 그러자 트겐발리 공작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서론이 길어서 죄송합니다, 전하. 신이 하고 싶은 말은 최고의 힘을 지니고 있는 이때가 저는 기회라 여기고 있습니다. 이번 기회엔 왕국의 힘을 널리 알려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호오? 그래서, 지금 그 방법을 생각해 내고 있는 것이오, 공작?" 레도프 국왕이 눈을 빛냈다. 왕권 다툼에 편승해 있지만 트겐발리 공작도 톨리안 왕국이 강해지길 바라는 귀족 중 한 사람이다. 어떤 정치적 목적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 방향은 왕국의 발전을 위한 것임이 분명할 것이다. 그런 그가 이런 말을 하니 구미가 몹시 당겼다. 레도프 국왕의 호기심을 이끈데 성공해서 일까? 트겐발리 공작의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국왕의 호기심을 이끌어 냄으로써 모든 귀족들도 기대에 찬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다. 트겐발리 공작이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사옵니다. 신이 왕국을 걱정하는 충신들과 함께 밤낮으로 고민하여 생각해 낸 것이 있습니다. " ‘제2왕자파 귀족들이겠지.......’ 이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이내 그 말을 해소시킨 레도프 국왕이 트겐발리 공작에게 입을 열었다. "말해 보시오." 레도프 국왕의 재촉에 트겐발리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예. 우선 왕국의 힘을 외부에 널리 알리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은 주변 국가에게 본 왕국의 힘을 각인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자리에서 전하께 헤센 왕국 토벌을 건의 드리는 바입니다." "......!" 트겐발리 공작의 말에 모두가 경악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방 귀족과 제1왕자파는 물론 제2왕자파 귀족들마저 경악이 담긴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트겐발리 공작 옆에 존재하는 몇몇 귀족만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침묵은 오래 가지 않았다. 레도프 국왕이 놀란 어조로 트겐발리 공작에게 물음을 던진 것이다. "지금 그 말 진심이오, 공작?" "그렇습니다, 전하. 제 말은 지금 진심이옵니다." 트겐발리 공작이 흔들림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이런 반응은 예상하고 있었다. 이제부터 자신의 말에 따라 저들은 의견에 동조하게 될 것이다. 그는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띠며 레도프 국왕을 바라보았다. 곤혹스러운 레도프 국왕의 표정을 보며 그가 말을 이었다. "당황스러우실 것입니다. 갑자기 전쟁을 건의한 것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말해 보라." "예, 헤센 왕국은 약 십 년에 걸쳐서 본 왕국을 약탈 했습니다. 그들은 산적들의 짓이라 한사코 책임을 회피했지만 얼마 전 그들이 병사들을 산적으로 위장시켜 백성들의 식량을 약탈하게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습니다. 증거와 정황이 명백하여 토벌의 명분으로 충분합니다." 헤센 왕국은 국토의 80퍼센트가 산으로 이루어진 왕국이다. 그랬기에 당연히 식량이 부족했고, 매년 톨리안 왕국으로부터 막대한 양의 식량을 사들이는 국가이기도 했다. 딱히 중요한 것이 없는 왕국이지만 헤센 왕국은 톨리안 왕국에게 무척 중요한 곳이다. 만약 톨리안 왕국이 헤센 왕국을 차지하게 되면 다른 왕국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트겐발리 공작이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 나갔다. "헤센 왕국을 토벌함으로써 본 왕국의 힘을 대륙에 널리 알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변 왕국에게 본 왕국의 힘을 인식시켜 줄 수 있습니다. 사실 주변에 있는 왕국들은 신경 쓰지 못했지만 모두 본 왕국보다 약한 곳입니다. 그들에게 확실한 힘의 우위를 알려 주고 본 왕국의 위대함을 주변으로 끝없이 알릴 수 있습니다." "그럼 본 왕국은 무엇을 얻게 되지?" 레도프 국왕의 물음에 트겐발리 공작이 말했다. "주변 왕국에게 왕국의 힘을 각인시키는 것. 설사 그들이 연합해도 어쩔 수 없는 압도적인 힘을 보인다면 그들은 살기 위해서 본 왕국의 속국을 자처하게 될 것입니다. 그로 인해 본 왕국은 매년 막대한 양의 조공을 받을 수 있으며, 그 조공으로 본 왕국은 더욱 더 강해질 수 있는 발판을 얻게 되는 셈입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오, 공작. 본 왕국의 힘은 이미 주변 왕국을 압도하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 하지만 몬스터의 침공을 걱정해야 하는 우리에게 주변 왕국이 압도될 만한 힘을 빼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오. 그 힘을 누가 동원할 수 있겠소? 중앙군은 몬스터들의 침공을 막기 위해 항상 대기해야 하니 불가능한 일이 아니겠소?" 레도프 국왕은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톨리안 왕국의 힘은 대단하다. 주변 다섯 왕국이 모두 힘을 합해도 톨리안 왕국에 미치지 못한다. 다른 곳이라면 주변 왕국을 복속시켜 조공을 받아 막대한 힘을 축적할 것이다. 하지만 톨리안 왕국은 몬스터 랜드에 묶여 있어 주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자칫하다가는 힘의 균형이 무너져 양쪽에서 왕국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트겐발리 공작은 헤센 왕국의 토벌을 주장 하고 있다. 헤센 왕국이 성공적으로 토벌된다고 하여도 그 뒤의 일은 안심할 수 없다. 주변국에서 위기감을 느끼고 움직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모든 귀족의 시선이 트겐발리 공작에게 향했다 특히 제1왕자파 귀족들이 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았다. 마치 먹잇감을 발견한 듯한 눈빛, 서로가 서로에게 날카롭게 발톱을 겨누고 있는 상황에 작은 실수 하나가 큰 비수가 되어 돌아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훗!’ 그런 제1왕자파 귀족들을 보며 트겐발리 공작이 회심의 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말에 의해 저들의 표정이 어떻게 변할지 상상만 해도 즐거웠던 것이다. "음!" 잠시 뜸을 들인 트겐발리 공작이 입을 열었다. "헤센 왕국 정벌은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이미 모든 정황을 다 비교하고, 충분히 다른 왕국들을 막아 낼 수 있습니다. 저와 저를 따르는 귀족들이 이십만의 군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전하의 승인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헤센 왕국을 정벌할 수 있습니다." "......!" 트겐발리 공작의 말에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찌 안 그러하겠는가! 무려 200,000명의 군대란다. 트겐발리 공작은 제2왕자파의 수장이다. 중앙 귀족의 지지를 받는 제1왕자와 달리 제2왕자파는 변경의 강력한 군권을 가진 귀족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도 무려 200,000의 군대라니? 톨리안 왕국의 정규군 300,000명에서 제2왕자파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100,000명 정도다. 그렇다는 것은 즉, 제2왕자파가 그동안 비밀리에 어마 어마한 힘을 길러 놨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도 변경을 수비할 100,000명의 군대를 합친다면 최소한 300,000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깨달은 모든 귀족들의 표정이 굳자 트겐발리 공작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권력을 쥐고 있는 제1왕자파라도 힘에서는 제2왕자파를 따를 수 없기 때문이다. 강력한 권력도, 그간 무력에서 앞서 있었던 제3왕자파마저도, 30만 병력이라는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무력하기 마련이다. 특히 이번에 몬스터 침공을 막아 내고 득의양양하던 테란델 후작의 굳은 표정은 그를 무척 유쾌하게 만들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고, 다른 이들의 표정을 살피던 레도프 국왕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트겐발리 공작의 의견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것은, 공작의 의견이 타당하다는 뜻. 그렇다면 트겐발리 공작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헤센 왕국을 정벌하는 건을 승낙하려고 하오." 레도프 국왕의 말에 제1왕자파 귀족들의 표정이 굳어 가려던 찰나, 트겐발리 공작이 입을 열었다. "송구하오나, 전하! 총사령관은 제가 아닌 크란 왕자님으로 삼아 주시옵소서. 맥셀 왕자님은 제1왕자로서 왕국을 지켜야 하지만 크란 왕자님께서는 주변을 두루 둘러보며 경험을 쌓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트겐발리 공작이 본격적인 꿍꿍이를 드러냈다. 그의 의도는 이번 정벌 전쟁에 크란 왕자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그에게 모든 전공을 몰아주려는 데 있었다. 그렇게 되면 크란 왕자에게 왕위는 한층 가까워지리라. 헤센 왕국은 톨리안 왕국이 주변에 힘을 뻗치기 위해 꼭 필요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트겐발리 공작의 말이 이어짐에 따라 제2왕자파 귀족들의 얼굴이 점점 밝아졌다. 타당성을 담고 있는 그의 말은 제2왕자파가 앞으로 무척 유리한 정세를 만들 수 있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흐음!" 트겐발리 공작의 내심을 모를 리 없는 레도프 국왕이지만 그의 제안은 무척 구미가 당겼다. 헤센 왕국만 차지한 다면 톨리안 왕국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하게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레도프 국왕의 시선이 제1왕자파에게 향했다. "크란 왕자를 총사령관으로 삼자는 의견에 아무런 이견이 없으시오? 그렇다면 이번 안건을 통과시키겠소." "전하, 트겐발리 공작님의 의견에 신이 이견을 제시하겠습니다." 여태껏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테란델 후작이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제1왕자파 모든 귀족들이 기대에 찬 눈으로 테란델 후작을 바라본다. 제1왕자파에서 가장 강대한 무력을 지니고 있는 테란델 후작은 리드머프 후작과 함께 제1왕자파를 이끄는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테란델 후작은 트겐발리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묘한표정을 짓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공작님의 의견은 참으로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저와 용맹한 병사들이 몬스터를 막아 내어 왕국의 전력이 최고조에 이른 지금의 시기는 참으로 적절합니다." 서두를 트겐발리 공작의 의견에 동조하는 척하면서 은근히 자신의 공적을 키우는 테란델 후작. 그의 말은 계속 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본 왕국은 몬스터 랜드를 바로 옆에 접하고 있습니다. 작년에는 잘 막아 내었지만 올해는 어떨지 아무도 모릅니다." 테란델 후작의 말에 모든 귀족이 공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에는 피해가 극도로 적었지만 이번 년도에 피해가 적을지는 미지수였기 때문이다. 모든 귀족이 동의하는 모습을 보이자 테란델 후작은 묘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트겐발리 공작을 한차례 바라보고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저는 트겐발리 공작님의 의견에 반대합니다. 차라리 전 헤센 왕국을 침공할 전력을 제게 넘겨주어 몬스터들의 침공에 더욱 대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순간 트겐발리 공작을 비롯한 제2왕자파 귀족들의 얼굴이 똥 씹은 표정으로 변했다. 안 그러겠는가! 지금 테란델 후작은 노골적으로 제2왕자파의 전력을 자신에게 넘기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트겐발리 공작이 자리에 벌떡 일어서서 테란델 후작에게 말했다 "지금 그것은 후작에게 모든 전력을 넘기라는 것인가?" 테란델 후작이 맞대응 했다. "왕국의 힘을 널리 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실을 다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참에 전력을 더욱 증강하여 몬스터 침입에 보다 완벽한 준비를 가하는 게 좋지 않습니까?" "나는 후작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 지금 왕국의 전력은 최고다. 이 힘으로 헤센 왕국을 점령하면 향후 본 왕국은 더욱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 " "하지만 몬스터 침입에 당할 수도 있습니다." 와글와글. 두 사람이 한치의 물러섬 없이 대립하자 회의장은 삽시간에 시끄러워졌다. "역시......." 레도프 국왕은 첨예하게 대립하는 두 왕자파를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저들이 왕국을 위해 선의의 경쟁을 하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점점 치열해지는 다툼은 이 제 선의의 경쟁을 넘어서 음해의 수준까지 다다르고 있었다. 레도프 국왕은 마음을 단호하게 먹었다. 이렇게 해서는 회의가 끝날 것 같지 않다. 분위기를 환기해야 할 필요를 느낀 그는 마탑주 엘을 소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탕탕! 탁자를 두드리자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레도프 국왕에게 향한다. 그는 귀족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이야기가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소. 분위기 환기를 위해 이번에 본 왕국에 몸을 의탁하게 된 마법사를 소개하려 하오." "그러십시오, 전하." 라이어스 공작이 레도프 국왕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동의의 의견을 표했다. 그러자 다른 귀족들도 모두 동의를 표했다 비록 파가 갈리었지만 라이어스 공작은 톨리안 왕국 최고의 귀족이다. 게다가 그들도 의미 없는 싸움이란 걸 느끼고 있었기에 기꺼이 동의를 표했다 "......." 삽시간에 소란은 가라앉고 레도프 국왕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러자 레도프 국왕이 짤막하게 입을 열었다. "본 왕국에 몸을 의탁하게 된 마법사 엘리미스라고 하오." 그 말과 함께 회의장에 한 청년이 걸어왔다. 약 20살로 보이는 모습에 금발 머리. 그리고 여장을 시킨다면 어여쁜 여인으로 보일 정도로 아름다우면서도 중성적인 얼굴....... 금발과 그가 걸치고 있는 금빛 로브는 무척 잘 어울려 금빛 마법사의 느낌이 강렬하게 풍겨 왔다. 그는 엘이었다. 회의장에 등장한 엘은 차분하게 회의장 전체를 둘러보았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라이어스 공작과 데실론, 로웰린은 반가운 기색을 드러냈다. 하지만 다른 귀족들은 그리 유쾌한 표정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입장에서 엘은 큰 위협이 되는 인물이 었기 때문이다. 톨리안 왕국은 마법사가 무척 귀하다. 인근 왕국도 모두 마법사가 적어 마법이 무척 퇴화된 국가 중 하나다. 그랬기에 톨리안 왕국은 마법사가 왕국에 몸을 의탁하게 되면 왕국 회의 때 소개를 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물론 모든 마법사가 그런 대우를 받는 건 아니다. 최소 3클래스 이상의 마법사만이 이러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 3클래스 마법사가 전개하는 공격 마법은 몬스터를 일격에 격살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몬스터 랜드에 존재하는 몬스터들을 상대하기 위해 마법사 우대 정책을 펼치고 있는 것이기에 그러한 기준이 적용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는 것은 눈앞에 나타난 마법사는 최소 3클래스 이상이란 걸 뜻한다. 나이가 많아 외모를 젊게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러한 것은 7클래스 마법사나 가능한 일이다. 즉, 오늘 나타난 마법사는 젊은 나이에 3클래스를 돌파 한 마법사란 뜻이다. 그렇다는 건 무척 뛰어난 인재라는 뜻.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지금의 상황에 엘의 등장은 잔잔한 수면 위에 파문을 일으키는 것과 같았다. 엘은 슬쩍 레도프 국왕을 바라보았다. 이미 한곳에 서서 회의의 모든 내용을 들은 엘은 제1왕자파와 제2왕자파 사이에서 확실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레도프 국왕의 태도에 내심 고개를 저었다. '분명 괜찮은 분이지만 모두를 같게 대하기 위해 어느 쪽에도 확실한 태도를 보이지 못하는군. 그리고 그것이 국왕 전하를 유약하게 보이게끔 하고 있어.' 엘의 시선이 귀족들에게 향했다. 모든 귀족들의 시선은 이미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자 엘은 정중하게 자신의 소개를 하였다. "반갑습니다. 앞으로 톨리안 왕국에 몸을 담게 된 엘리미스라고 합니다." 엘의 인사에 대부분의 귀족들은 경계심에 가득 찬 눈으로 응대해 주었다. 그런 와중에 다른 귀족과 다른 눈빛을 하고 있는 이가 있었다. 바로 테란델 후작을 따라 회의에 참석한 라크가 바로 다른 눈빛의 주인공이었다. 모든 귀족들이 경계에 가득 찬 눈을 하고 있을 때 라크 는 질투에 활활 타오르는 눈빛으로 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저 자식, 분명 루비어스 백작가의 마법사렷다? 분명 로웰린의 외모에 혹하여 그녀에게 접근한 것일 것이다.' 그러면서 라크는 로웰린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녀는 엘을 향해 무척 반가운 감정을 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라크는 오해했다. 그의 눈에는 로웰린이 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느꼈다. 그의 눈에 어린 질투가 더욱 활활 타올랐다. '이대로 로웰린을 놓칠 수가 없다. 로웰린은 나만의 것이야!' 그것이 라크의 판단을 흐리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 와중에 한 가지 결심을 하였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이 소개를 하는 와중에 갑자기 라크가 일어나자 모든 이의 시선이 그리로 향한다. 비록 라크가 작위는 없지만 테란델 후작가의 자제이며, 소드 익스퍼트에 해당하는 왕국의 인재였기에 회의에서 충분히 발언을 할 수 있는 위치였다. 라크가 레도프 국왕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소개를 하는 와중에 죄송합니다. 잠시 할 말이 있어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레도프 국왕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건 소개가 끝난 뒤에 해도 되지 않나? 왜 소개를 하고 있는 와중에 할 말이 있다는 건가?" 레도프 국왕으로서는 당연히 못마땅할 수밖에 없다. 엘은 톨리안 왕국에게 무척 큰 은혜를 입힌 인물이다. 비록 명분상 신하라지만 그를 신하로 부릴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본인이 잘 알고 있다. 7클래스에 이른 마법 실력과 그랜드 마스터와 비등한 힘을 지닌 골렘을 가지고 있다. 이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톨리안 왕국을 뒤집을 수 있는 대단한 힘이다. 그랬기에 레도프 국왕은 엘을 대함에 있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좋게 말하면 그를 존중하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그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어찌 됐든 엘은 왕국에 있어 무척 큰 도움이 될 사람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소개하는 와중에 할 말이 있다고 자리에서 일어나다니..... 이것은 라크의 아버지인 테란델 후작이라고 하여도 함부로 넘어갈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하지만 라크는 물러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렇기도 하지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저 마법사와 얽혀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엘과 얽혀 있다는 말에, 레도프 국왕이 함부로 끼어들 수도 없었다. 엘을 힐끗 보자 엘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레도프 국왕이 라크에게 승낙을 했다. "좋다, 하고 싶은 말을 해 보라." "감사합니다, 전하." 레도프 국왕에게 고개를 숙인 라크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주변 귀족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제가 앞으로 발언할 내용의 요지는, 요즘 왕국의 신분제가 흔들렸다는 데 있습니다. 저는 얼마 전 저 마법사와 마주친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라크는 엘을 한 번 힐끗 본 뒤 로웰린을 보았다. 로웰린은 라크가 여관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하려는 것임을 알고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라크의 입에서 어떠한 말이 나올지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로웰린의 표정을 읽은 라크가 더욱 자신감을 얻어 말을 이어나갔다. "모든 분들이 아시다시피 저는 루비어스 백작님에게 청혼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수도 여관에서 백작님을 만났을 때 저 마법사를 만났습니다." 라크의 목소리가 점점 커져 나갔다. 그때 로웰린이 자신에게 한 말과 엘이 자신에게 한 행동을 생각하니 분기가 올라왔다. 그는 붉어진 얼굴로 열변을 토해냈다. 그리고 엘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때 저 마법사가 저를 모욕했습니다. 제가 아무리 작위가 없다고 하나 왕국의 중추인 테란델 후작가의 둘째 아들입니다. 작위가 없다고 해도 귀족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저를 무시했습니다." 어디서나 말은 가져다 붙이기 나름이다. 힘 있는 자가 거짓된 사실을 가지고 사실이다 말하면 사실이 되는 것이고, 싸움이 나도 힘이 없는 자가 결국 힘 있는 자에게 사과하는 것이 세상이다. 라크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중요치 않다. 하지만 라크의 말은 중요한 건수가 된다. 한 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운 정국에서 귀족을 모욕했다는 것은 저 마법사를 조용히 처리할 수 있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제1왕자파나 제2왕자파는 국왕의 편이 될 것이 분명한 저 마법사가 달갑지 않았기에 라크의 의견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에 라크는 더욱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아무리 제가 작위가 없다고 하지만 이러한 일은 그냥 넘기기 힘듭니다. 그래서 저는 부득이하게 그때 있었던 일들을 폭로하게 된 것입니다. 실례였다면 죄송합니다." 고개를 깊게 숙인 라크가 자리에 앉았다. 말은 끝났지만 분위기는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대부분의 귀족들이 엘을 향해 적의 가득한 눈으로 바라 보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제1왕자파와 제2왕자파 귀족들 이었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흘러가자 로웰린은 어찌 할 바를 몰 라 했다. 라크의 말이 졸지에 왕국 대부분의 귀족들을 적으로 돌려놓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레도프 국왕 또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하니 라크가 이렇게 일을 벌여 놓을 줄은 몰랐다. 여기서 엘의 신분을 밝히면 이 사태를 수습할 수 있다. 하지만 엘이 왕국 귀족들에게 실망했을 가능성이 무척 크다. 레도프 국왕은 그것을 걱정하는 것이다. 그는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엘을 바라보았다. 그의 예상대로 엘의 표정도 굳어져 있었다. 그 또한 라크가 이렇게 일을 크게 벌일 줄 몰랐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귀족들의 시선. 그들의 시선을 받고 있자니 엘은 귀족이란 것들에 대해 또다시 실망을 하고 말았다. 자신보다 잘난 이를 보지 못하는 족속들..... 엘은 자신을 이렇게까지 물고 늘어진 라크를 바라보았다. 엘의 시선을 받은 라크가 순간 움찔했으나 이내 자신감에 찬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는 자신이 친 그물이 완벽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남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도리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 그를 보며 엘은 그에 대해 했던 평가가 바람직했음을 느꼈다. 하지만 최소한의 도리라는 게 있다. 그런데 이게 무엇인가. 사람을 이 지경으로 무안을 주고 몰아넣다니....... 레도프 국왕의 염려스러운 기운이 느껴졌다. 아마 자신의 신분을 말하려나 보다. 여기서 자신의 신분을 말한다면 상황은 변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엘 자신의 모습이 아닌, 마탑주라는 직위에 따라 달라지는 변화일 것이다. 엘은 문득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만의 공간에서 마음 편하게 살고 싶었다. 귀족들의 시선이 한층 더 날카로워지자 레도프 국왕이 재빨리 손을 들었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을 때, 레도프 국왕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엘을 소개했다. "이분은 앞으로 우리 왕국의 가장 큰 힘이 되어 줄 마탑의 탑주, 엘리미스 님이시오." "......!." 레도프 국왕의 말에 모든 귀족들의 얼굴에 경악이 번져 나갔다. 황금의 마탑주 엘리미스와 에리스공주 "......." 장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았다. 회의장에 자리한 모든 귀족들은 경악에 빠졌다. 방금 전 레도프 국왕이 한 말 때문이다. 마탑주! 이게 어디 가벼운 이름이던가. 7클래스 마법사만이 세울 수 있는 마탑. 그것은 각국의 국력을 나타나는 척도라고 할 수 있다. 통상적으로 7클래스 마법사는 소드 마스터와 동급의 경지로 치부된다. 하지만 그 쓰임새는 소드 마스터보다 7클래스 마법사가 월등하게 높다. 7클래스 마법사 혼자서 능히 수천 명의 병사들을 살상할 수 있는 대량 학살 마법을 전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만의 이론을 완성시킨 7클래스 마법사의 곁에는 수많은 마법사가 모여들기 마련이다. 즉 7클래스 마법사의 존재로 그 나라의 마법사 수준이 월등하게 치솟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그 요소는 현 톨리안 왕국에게 너무나 필요한 요소다. 막강한 국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주변에 힘을 뻗히지 못 하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몬스터 랜드에서 진출하는 몬스터들 때문이 아니던가! 톨리안 왕국이 제아무리 강대한 국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나 마법 전력에 부족한 만큼 몬스터와 맞서기에 그 피해가 크다. 그래서 주변 왕국에 감히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7클래스 마법사가 가세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무리 몬스터가 강하다고 하나 7클래스 마법사 앞에서는 그 무엇보다 무력하다. 일대일 대결에서는 소드 마스터에 뒤쳐지지만 그 외 다른 면에서는 그 무엇보다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7클래스 마법사인 것이다. 그리고 현재 왕권 다툼이 심화되고 있는 귀족들의 입장에서 7클래스 마법사의 등장은 단번에 판세를 뒤엎을 수 있을 만한 조커와 마찬가지였다. 적대감에 가득 찼던 귀족들의 눈이 순식간에 계산적으로 변했다. 그들의 뇌리에는 방금 전 일 따위는 깨끗하게 사라져 있는 상태였다. 그 모습을 본 엘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맺혔다. 사람의 신분에 따라 판이하게 바뀌는 저들의 태도에 저절로 비웃음이 튀어나온 것이다. 엘은 슬쩍 라크를 바라보았다. 엘의 시선을 받은 라크가 움찔하며 재빨리 시선을 외면했다. 그는 상대를 잘못 건드려도 한참을 잘못 건드린 것이다. 라크는 엘의 신분에 대해 듣는 순간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렸다. 그리고 엘이 자신을 노려보자 재빨리 시선을 외면하며 자신의 실수를 자책했다. ‘이런 개 같은 일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하기야 누가 저 외모를 보고 7클래스 마법사라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라크였다. 그건 테란델 후작도 마찬가지다. ‘음!’ 그의 눈에도 깊은 근심이 내려앉았다. 방금 전 라크가 주도한 여론에 그는 내심 흐뭇했다.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마법사가 나타나 감각이 예민하게 솟구친 왕권 다툼에 파문을 일으키는 건 절대 봐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라크가 주도하여 비난 일색의 화살을 쏟아 부은 대상이 다름 아닌 톨리안 왕국에 세워 질 마탑의 탑주였던 것이다. 마탑의 탑주는 왕국에서 후작과 비슷한 대우를 받는다. 그러나 오랫동안 7클래스 마법사를 오매불망 기다려온 톨리안 왕국의 경우 7클래스 마법사의 힘과 가치는 능히 공작과 비견될 만하다. 테란델 후작 본인이 아무리 강대한 힘을 지녔다고 하나 지금 혜성처럼 등장한 마탑주와 그 가치를 비교할 수 없다. 중앙군의 도움을 받고 몬스터를 막아 내는 것이 고작인 테란델 후작보다 확실하게 적의 본거지까지 쓸어버릴 수 있는 역량을 지닌 7클래스 마법사가 더 귀중했기 때문이다. 물론 제1왕자파의 중추인 자신이 당할 일은 없다. 하지만 이번 일로 마탑주와 관계를 껄끄럽게 만들었다는 것에 입맛이 썼다. 마탑주가 물고 늘어진다면 자칫 라크의 목숨조차 부지하기 힘든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 테란델 후작과 엘의 시선이 순간 마주쳤다. 그리고 테란델 후작은 볼 수 있었다. 차갑게 가라앉은 엘의 눈을, 그리고 결코 쉽게 넘어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반영하고 있는 굳게 닫힌 입술을 말이다. 수십 년 동안 중앙 귀족 생활을 해 온 테란델 후작이 그런 엘의 내심을 못 느낄 리 없다. '큰일이군.' 엘 또한 테란델 후작을 보며 느낀 게 있었다. '쉽지 않은 인물이야.' 엘은 그가 쉽지 않은 인물이란 걸 느꼈다. 톨리안 왕국 서부의 강자이며, 제1왕자파의 중추란 게 결코 헛된 이름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엘에게는 힘이 있다. 그랜드 마스터와 대등하게 맞설 수 있는 골든 나이트가 있고, 10여명의 기사들도 휘하에 거두어 들였다. 결코 테란델 후작가에 뒤처지지 않는 힘이다. 엘은 이번 일을 넘기기로 하였다. 하지만 그냥 넘길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다음에 쓴맛을 보여 주겠다. 루비어스 백작가에게 행한 지난 일들을 비롯하여 나에게 행한 일까지 이자를 쳐서 말이야.' 그렇게 생각을 굳힌 엘이 레도프 국왕에게 시선을 옮겼다. 라크로 인해 자국의 귀족이 안 좋은 이미지로 박혔을 것이 분명했다. 그로 인해 자국의 호감이 상당히 떨어졌을 거라 생각한 레도프 국왕은 엘의 시선을 차마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다. 그런 레도프 국왕의 모습에 엘은 조금은 마음이 풀어지걸 느꼈다. 그 또한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왕국을 위해 하는 걱정이겠지만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엘에게 조금은 위로가 된 것이다. "자리가 불편하니 물러가도 되겠습니까, 전하." "그러도록 하시오." 여기 있어봤자 좋은 꼴은 못 볼 것이라 생각한 레도프 국왕이 승낙하자 엘은 고개를 살짝 숙인 뒤 회의장에서 물러났다. 엘이 사라지자 장내는 조용해졌다. 7클래스 마법사의 등장으로 순간 잊었던 사실이 떠오른 것이다. 자신들이 방금 그 마법사를 노골적으로 적대했다는 것을 말이다. 트겐발리 공작의 얼굴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제1왕자파인 테란델 후작가가 주도한 여론인 만큼 당연히 그에게 타격이 가야 하지만 귀족 특유의 자존심이 발동하여 모두가 적대감을 내뿜은 것이다. 이 일로 인해 가장 이득을 취할 수 있는 자는, 레도프 국왕일 가능성이 높다. '현재 왕가의 숨겨진 힘으로 밀고 있는 유드미온 왕자가 다음 대 국왕이 될 확률이 제일 높아진다. 우선 그걸 막아야 한다.' 빠르게 판단을 내린 트겐발리 공작이 날카로운 눈으로 레도프 국왕과 제3왕자파 소수 귀족들을 훑었다. 그들의 얼굴에도 갑자기 나타난 7클래스 마법사의 존재로 인해 당혹감이 서 려 있었다. 유일하게 침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는 자신의 형님이자 왕국 최고의 검사인 라이어스 공작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처음 회의에 참석한 루비어스 여백작이었다. 예리한 트겐발리 공작은 로웰린이 침착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순간 그의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몬스터 랜드 습격 당시 오크가 루비어스 백작령에도 침범했다고 했지. 그런데 루비어스 백작가는 그걸 막아 냈다. 즉 오늘 나타난 7클래스 마법사와 모종의 관계일 가능성이 있다.' 날카로운 판단력은 거기까지 결론을 도출하고 있었다. 엘의 퇴장으로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레도프 국왕이 헛기침을 함으로써 분위기를 순환시켰다. "험 ! 탑주님에게 궁금한 점이 있다면 며칠 후 벌어지는 환영 파티에서 질문하도록 하시오. 그럼 회의를 계속하겠소." 그리고 어수선한 분위기 가운데 회의가 계속되었다. 몇 가지 사항이 더 논의되었지만 그것은 딱히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리고 주요 귀족들 대부분이 엘의 등장으로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점치기 바빴기에 회의는 오래 가지 않았다. 그렇게 톨리안 왕국 중앙 회의는 끝을 맞이하게 되었다. 왕국 유일 7클래스 마법사가 된 엘의 등장이 모든 귀족들의 가슴속에 강하게 새겨진 채 말이다. 회의가 끝나고 각자 거처로 돌아간 귀족들은 환영 파티가 열리기까지 긴 고민에 잠겼다. 최고의 한 수가, 그리고 최악의 한 수가 될 수 있는 엘의 존재로 인해 일어난 잔잔한 폭풍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고 마침내 파티 당일이 되었다. 모든 귀족들이 바쁘게 왕궁으로 입궁하기 시작했다. 파티 시작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레도프 국왕은 한 여인과 조용히 독대를 하고 있었다. 약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인의 모습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잡티 하나 없는 부드러운 새하얀 피부와 영롱하게 반짝이는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무척 차분한 느낌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면서 은은하게 우러나오는 고귀함과 감히 범접하지 못할 지적인 느낌은 그녀를 한층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게 하였다. 그녀는 레도프 국왕의 단 하나뿐인 딸, 에리스 공주였다. 올해 열일곱 살이 된 에리스 공주는 나이에 비해 무척 차분하고 신중한 성격을 가진 여인이다. 어렸을 적부터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여 수많은 책을 읽은 그녀는, 왕국 내 여러 학자에게 인정받을 만큼 박식한 여인이었다. 무척 현명한 여인이었기에 레도프 국왕이 가끔씩 찾아 의논을 나눌 정도였다. 레도프 국왕은 에리스 공주에게 말을 하였다. "선택은 네 몫이다, 에리스. 그는 우리 왕국에게 있어 무척 필요한 인물이야," 에리스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레도프 국왕이 원하는 것, 그것은 자신이 마탑주인 엘과 결혼하는 것이다. 마탑은 톨리안 왕국에 있어 무척 큰 가치를 지녔다. 오랜 숙원이었던 만큼 톨리안 왕국의 미래를 송두리째 바꿀 수 있을 정도였던 것이다. 그것을 어찌 총명한 에리스 공주가 모르겠는가. 잠시 후,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붉은 입술을 열었다. "아버지의 말씀을 알겠어요. 그리고 그분이 왕국에 있어 얼마나 필요한 인물인지도 알겠고요. 하지만 일단 그 분을 만나 보겠어요. 그리고 이야기를 나눠 보고 결정을 내리겠어요." 에리스의 긍정적인 대답에 레도프 국왕이 밝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다. 그리고 언제나 고맙다." 레도프 국왕은 에리스 공주의 결정이 내심 고마웠다. 본래 에리스 공주는 결혼을 하지 않고 공부를 하고 싶어 했다. 그러한 공주가 결정을 내리고 이야기를 나눠 보겠다고 한 것은 자신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에리스 공주가 승낙한 것만으로도 레도프 국왕은 하고자 한 것을 모두 이룬 것이다. 남은 것은 엘과 에리스 공주가 눈이 맞는 것뿐. 대륙 서부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칭송되는 에리스 공주의 미모를 굳게 믿고 있었기에 레도프 국왕은 기꺼이 엘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7클래스 마법사라고 하여도 어디까지나 남자니까. 레도프 국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있을 파티에 참석하려면 그나 에리스 공주나 꽤 긴 시간 동안 준비를 해야 했다. "그럼 파티에서 보자꾸나." "그러세요, 아버지." 에리스 공주가 곱게 웃으며 레도프 국왕을 배웅했다. 방에 홀로 남은 에리스 공주가 에메랄드빛 눈을 반짝이며 깊은 생각에 잠겨 들었다. 밝은 햇살이 반사된 눈부신 그녀의 입술이 나지막하게 열렸다. "황금을 상징하는 금색 마탑의 주인, 엘리미스......." 왕국에 새로 들어선 마탑과 마탑주를 환영하기 위한 파티는 그 시작부터 파란을 예고했다. 파티 시작 전부터 하위 귀족들은 물론 중앙 정계를 장악하고 있는 고위 귀족들이 빠짐없이 참가한 것이다. 엘 또한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여관을 나섰다. 그의 옷 차림은 파티 복장이 아닌, 앞으로 금탑을 상징하게 될 고급스러운 황금색 로브를 두른 차림새였다. "백작님, 아직 준비가 덜 되었나요?" 그러자 로웰린이 머물고 있는 방 안쪽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조금만요. 다 되었어요." "하아, 벌써 그 말만 세 번째라고요." 엘은 로웰린이 들리지 않게 작게 푸념을 하며 복도 벽에 등을 기댔다. 복도에서 기다린 시간이 벌써 한 시간이다. 애초에 꾸미고 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엘은 그저 평소 차림에 로 브를 두른 것뿐이지만 로웰린은 그러지 않은가 보다. "애초에 수행원을 데려오지 않은 게 가장 큰 문제였어." 귀족들에게 모름지기 그의 수발을 들어 주는 수행원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엘이 워낙 갑작스럽게 로웰린을 데리고 베르디스로 왔기에 수행원을 데려오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여기에 뼈아픈 실책으로 다가온 것이다. 조금 더 꾸물거리면 파티에 지각할 판이었으니 말 이다. 엘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들은 꾸미는 데 시간이 걸린단 말이야.... 응?" 그때, 문이 열렸다.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로웰린이 걸어 나왔다. 그런데 그녀의 모습은 엘이 상상하던 모습과는 달랐다. 예상과 다른 차림새에 엘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왜 그런 차림새를?" 로웰린의 차림은 여귀족들이 파티에 참석할 때 애용하는 화려한 드레스가 아닌, 깔끔하고 정갈한 기사 제복이었던 것이다. 엘의 말에 로웰린이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드레스를 입고 남자를 유혹할 것도 아닌데요, 뭐. 게다가 전 스스로 기사란 의식도 강하고요. 파티에 이걸 입고 간다고 딱히 문제가 될 것 같진 않은데요?"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인 엘이 여기사로 탈바꿈한 로웰린을 보며 빙긋 웃었다. "이거, 에스코트를 하려고 했더니 그럴 필요가 사라졌네요." 그러자 로웰린이 입을 가리며 웃었다. "호호, 그래도 전 여자랍니다." "하하, 그렇죠. 그래요." 로웰린의 농에 엘 또한 웃으며 살짝 손을 뻗었다. "그럼 오늘은 제가 에스코트를 하겠습니다, 루비어스 기사님?" "영광이에요, 파티의 주인공 마탑주님." 두 남녀는 친근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처음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특히 로웰린의 변화는 발군이었다. 처음에는 대하기 어려웠지만 로웰린은 엘에게서 무척 친숙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의지하고 스스럼없이 대할 수 있게 되었다. 로웰린 그녀도 왜 그런 느낌을 받지 모르지만 그녀는 굳이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그녀는 여태껏 살아오면서 가장 활기찬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의 멸문한 가문을 떠안듯이 맡게 된 것과 테란델 후작가의 혼인 압박에 그녀는 골치를 썩어야 했다. 하지만 갑자기 나타난 마탑주의 존재로 쇠락했던 가문은 힘을 되 찾아가고 있었다. 힘이 있으면 무엇이든 되는 법. 가문의 힘이 회복되면 그녀가 굳이 테란델 후작가의 압박에 골머리를 썩지 않아 도 된다. "제 손을 잡으세요." 로웰린이 엘의 손을 살짝잡자, 엘이 마법을 캐스팅 하더니 이내 구동어를 외쳤다. "텔레포트(Teleport)!" 파앗! 새하얀 빛이 여관복도를 가득 채우더니 엘과 로웰린의 몸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엘과 로웰린이 텔레포트 한 곳은 다름 아닌 왕국 텔레포트 게이트였다. 새하얀 빛과 함께 나타난 그들을 반긴 것은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의 소유자, 데실론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마탑주님 !" "아, 데실론 님이 계셨군요. 감사합니다." 엘이 마주 인사를 하자 데실론이 이번에는 로웰린에게 인사를 건넸다. "인사드립니다. 수석 궁정 마법사 직위를 가지고 있는 데실론입니다." 그러자 로웰린이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부랴부랴 인사했다. "아, 네! 저는 루비어스 백작입니다." 궁정 마법사라는 직위만 가지고 있지만 데실론은 실제로 톨리안 왕국에서 백작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고 있다. 그런 자가 엘의 마중을 나왔다는 것은 그만큼 엘이 왕국에 중요한 인물이란 걸 뜻한다. 로웰린은 새삼 엘이 대단한 사람이란 것을 다시 느끼며 데실론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자 데실론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말을 건넸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절 따라오십시오." "감사합니다." 데실론이 앞장섰다. 그리고 엘과 로웰린이 그 뒤를 따랐다. 파티 규모가 생각보다 매우 큰 듯했다. 왕궁 전체에 은은한 음악이 깔려 있었고, 시종과 시녀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걸 보면 그 규모가 얼마나 큰지 능히 짐작이 갔다. 이것이 다 마탑주인 엘을 환영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엘이 왕국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다시 한 번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이곳이 파티장입니다." "안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엘이 로웰린과 파티장에 들어서자 수많은 귀족들의 시선이 엘에게 꽂혔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금색 로브를 두르고 나타난 엘의 복장은 수많은 사람들의 눈에 절로 띄었던 것이다. 게다가 오늘 파티의 주인공은 바로 그가 아니던가. 엘이 나이가 어리다는 걸 안 귀족들은 자신의 딸을 예쁘게 치장시켜 파티에 참석한 상태였다. 행여 마탑주의 눈에 들어 그를 사위로 삼을 수만 있다면 새로운 권력자로 떠오를 가능성이 다분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귀족들의 시선이 엘과 함에 들어온 여인에게 향했다. 기사 제복을 입고 있어 호위 기사인 줄 알았는데 얼마 전 회의에 참석한 루비어스 백작이 아니던가. 삽시간에 귀족들의 시선이 루비어스 백작에게 향했다. 수많은 귀족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로웰린은 곤혹스러워했지만 이내 당당함을 되찾고 어깨를 쭉 폈다. 마탑주가 자신의 뒤에 있는 이상 두려워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 톨리안 왕국의 신성인 마탑주와 다 망해 가는 루비어스 백작이 함께 파티장에 입장하자 귀족들은 그 광경을 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마탑주와 루비어스 백작가의 관계가 긴밀하다면 왕국 서부의 정세가 재편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은 대부분 엘과 로웰린의 사이를 오해하고 있었다. 그때, 엘에게 접근하는 귀족이 있었다. 초로의 나이에 접어들었지만 위풍당당한 기세를 뿜어내는 이, 바로 트겐발리 공작이었다. 트겐발리 공작은 엘에게 친근한 태도를 보이며 인사를 건넸다. "파티에 참석한 걸 환영하네. 나는 트겐발리 공작이라고 하네. 아, 내가 나이가 많아서 말을 놓았는데 괜찮은가?" 상급 소드 마스터의 감각으로 엘의 나이가 자신보다 어리다고 느꼈기에 바로 말을 놓으며 다가가는 트겐발리 공작. 엘이 자세를 바로하고 그 말을 받았다. "저보다 나이도 많으시고, 왕국에 이루어 놓으신 일도 훨씬 많으십니다. 적당한 선만 지켜 주신다면 상관없습니다." 말을 놓아도 상관없지만 어느 정도 선을 넘지 말라는 얘기다. 얼핏 들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처럼 느껴지지만 노련한 정치가인 트겐발리 공작에게는 친한 척하지 말라는 뜻으로 들렸다. 가시는 없지만 무서운 예기가 느껴지는 엘의 말에 트겐발리 공작은 웃음을 지었다. "하하! 알겠네, 알겠어. 그 정도야 당연한 것이지. 마탑의 주인이라면 다른 곳에서도 최소한 후작의 대우를 받지 않나? 자네가 말한 건 당연한 걸세." 그러면서 트겐발리 공작은 옆에 로웰린을 보며 말했다. "같이 파티장에 들어온 걸 보니 자네하고 루비어스 백작은 무척 친한 모양일세?" 로웰린을 바라보면서 눈을 가늘게 뜬 트겐발리 공작의 눈은 먹잇감을 살피는 살모사의 눈과 같았다. 하지만 트겐발리 공작이 노련한 살모사라면 엘은 패기가 넘치는 맹수다. 그의 기세에 전혀 밀릴 것도 없고, 명분에 있어 밀릴 것도 없었다. 엘은 태연히 응수했다. "제 마탑이 루비어스 백작령 근처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웃이라 할 수 있지요. 이웃끼리는 모름지기 친하게 지내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서로 으르렁거리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이웃이라 친하게 지낸다는 말에 뭐라 반박할 수 없었다. 게다가 마지막 말에는 가시가 박혀 있었다. 서로 으르렁거린다는 것, 그것은 다름 아닌 현 왕국의 왕권 다툼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놈, 마탑주라고 하여 오만하구나!' 표정은 담담했지만 트겐발리 공작의 눈에 순간 불똥이 튀었다. 그때, 시종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톨리안 왕국의 위대한 지배자이신 국왕 전하께서 드십니다." 그와 함께 레도프 국왕이 10대 후반의 아리따운 여인을 동반한 채 나타났다. 부드러운 실크 같은 갈색 머리에 영롱한 빛을 머금은 에메랄드 빛 눈동자를 지닌 아름다운 여인, 그녀는 에리스 공주였다. 왕비나 왕자들은 데려오지 않았다. 가뜩이나 왕권 다툼으로 소란스러운데 괜히 그들을 데려와 분란을 일으킬 소지를 미연에 차단한 것이다. 레도프 국왕은 고급스러운 금색 로브를 차려입은 엘을 곧장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는 트겐발리 공작이 엘에게 접근해 있는 것을 보고는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가 재빨리 표정을 고쳤다. 그리고 귀족들을 향해 시선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오늘 파티에 참석해 주어 무척 고맙게 생각하오. 오늘 파티는 본 왕국이 그토록 학수고대하던 마탑을 환영하기 위함이오. 마탑은 이미 완성되었으며, 아직 위치는 비밀에 붙이나 조만간 그 위치를 밝힐 생각이오. 그리고 오늘 파티의 주인공인 마탑주 엘리미스 님이 참석하였소. 날이 날이고 장소가 장소인 만큼, 마탑주의 한마디 축사를 듣고 파티의 시작을 알리겠소이다." 그러자 귀족들의 시선이 엘에게 집중되었다. 레도프 국왕이 갑자기 자신에게 파티의 시작을 떠넘기자 엘은 멋쩍게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레도프 국왕을 바라보고 시선을 옮길 때, 엘은 자신을 응시하는 아름다운 에메랄드 빛 눈동자와 마주하게 되었다. 크고 맑은 두 눈에 담긴 것은 호기심이었다. 에리스 공주와 눈을 마주 친 엘은 살짝 미소로 그녀를 바라본 뒤 자신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는 귀족들에게 입을 열었다. "이번에 톨리안 왕국에 마탑을 세우게 된 엘리미스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오늘 저를 위해 파티를 열었다고 하니 부담 없이 마음껏 즐겨 주셨으면 합니다." 그와 함께 엘의 양손에 마나가 은은하게 모였다가 뿜어 졌다. 그가 전개한 마법은 보조계 마법 중 하나인 리무브 텐션(Remove Tention)이란 마법이었다. 사람들의 긴장감을 풀어주는 이 마법은 왕권 다툼으로 잔뜩 긴장한 귀족들의 마음을 한결 풀어 주는 효능을 가지고 있다. 엘의 마법에 귀족들은 느끼지 못했지만 마음 한편이 약간이나마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 갑자기 마법이 사용되자 잔뜩 긴장했던 이들도 엘이 축복, 혹은 보조계 마법을 전개했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경계심을 풀었다. 그가 다른 이에게 해가 되는 마법을 전개하지 않은 것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렇게 엘의 마법이 파티장 전체에 은은하게 퍼졌다. 그리고 엘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 이제 즐거운 파티를 즐기시길." 로웰린은 지금 자신의 상황이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을 못했다. 그녀의 주변에는 수많은 귀족들이 몰려 있었다. 지방 시골 남작부터 중앙 정계 고위 귀족까지, 그녀 주변을 둘러싸고 수많은 귀족들이 그녀와 친교를 트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녀에게 이토록 많은 귀족들이 모여든 이유는 하나다. 엘이 트겐발리 공작과 대화를 나누면서 그녀에게 이웃이라 칭한 것 때문이다. 톨리안 왕국은 마법 후진국이다. 때문에 마법에 관련된 물품이 무척 비싸며, 마법사가 다른 나라에 비해 더욱 고급 인력으로 취급받는다. 그런 마법사 중 단연코 최고의 위치에 선 이들이 바로 7클래스 마법사다. 특히 7클래스 마법사가 제작한 마법 아티팩트는 천금을 줘도 사기 힘든 귀한 것들이 잔뜩 있었기에 상단을 운영하는 귀족들은 로웰린과 친분을 터 어떻게 해서라도 엘과 곁다리로 친분을 가지려 하였다. 7클래스 마법사의 능력은 단지 그것뿐만 아니다. 마탑을 세운 7클래스 마법사는 그 나라의 마법사 전체를 이끌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대부분 관심이 없겠지만 은연중 그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은 나라를 흔들 수 있을 만큼 대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왕권 다툼에 속하게 된 귀족들은 마탑주를 자신들 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우선 로웰린을 자신의 파벌로 끌어들이려 혈안이 된 것이다. 감히 마탑주가 뒤에 있는 로웰린에게 협박을 할 수 없었기에 수많은 귀족들이 로웰린에게 하는 것은 대부분 이권에 관련된 회유였다. 이것이 가문의 부흥을 위한 절호의 기회임을 안 로웰린은 차분하고 냉정한 정신으로 귀족들의 권유를 적절히 뿌리치며 최대한의 이익을 챙겼다. '이웃이 든든해야 저 또한 든든하지 않겠어요?' 엘이 파티의 북적거림을 피하고자 창가로 가면서 한 말이다. '그래, 이건 기회야. 가문의 부흥을 위한 기회를 놓칠 수 없어.' 이유로 엘이 자신에게 이렇게 잘 대해 주는지 모른다. 하지만 엘의 언질이 있었기에 로웰린은 거리낌 없이 귀족들의 성의를 받아들였다. 언젠가 자신이 받은 이 도움을 엘에게 갚을 거라 가슴 속 깊이 되새기면서....... "후우!" 파티장 외진 창가에 홀로 나온 엘은 아직 쌀쌀한 공기를 들이쉬며 쓴웃음을 지었다. 전생에서의 영향 때문일까? 사람 많은 곳에 서면 왠지 모르게 이질감이 들었다. 창가에 서서 아직 녹지 않은 눈을 보며 엘은 과거 회상에 잠겼다. 전생에서 엘은 게임의 천재였다. 남들이 죽도록 노력하는 걸 그는 간단한 노력만으로 해냈고, 그것으로 수많은 게이머들을 눌러 버리고 정상에 우뚝 섰다. 돈을 벌기 위해서 게임을 했던 탓일까? 엘은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꺼려졌고, 그래서 가급적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려 하지 않았다. 오늘도 그러했다. 파티의 주인공은 자신이지만 왕권 다툼으로 긴장감에 가득 찬 분위기가 싫었고, 자신을 향해 열망을 담고 바라보는 귀족들의 시선이 싫어 이렇게 창가로 나온 것이다. 그렇게 모처럼 전생을 떠올리며 자신의 시간을 가질 때, 엘의 상념을 깨는 기척이 있었다. 무척 가벼우면서 조심스러운 기색이 담겨 있는 기척. 여러모로 남자가 아닌 여자일 확률이 높았다. 그런 엘의 예상에 정답이라고 말하듯 고운 여성의 목소리가 엘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여기 계셨군요." 엘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그리고 그의 눈에 목소리의 주인이 보였다. 창문을 등지고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윤이 자르르 흐르는 갈색 머리에 에메랄드 같은 아름다운 눈동자를 소유하고 있는 여인, 무척 조신해 보이는 그녀에게서 고귀함이 흐르고 있었다. 여인의 정체를 알아본 엘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에리스 공주님이시군요. 저는 엘리미스라고 합니다." 에리스 공주 또한 기품 있는 행동으로 답을 하였다. "단시일 내에 왕국에서 가장 유명해진 마탑주님의 성함을 어찌 모를까요. 에리스라고 해요." 그러면서 에리스 공주는 사뿐한 걸음으로 엘에게 다가갔다. 엘과 어깨를 나란히 한 에리스 공주가 엘이 바라보던 곳을 한차례 스윽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걸 좋아해요. 마탑주님처럼 이따금 밖을 바라보며 상념에 빠지거든요." "......." 엘은 조용히 입을 여는 에리스 공주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밖을 바라보던 에리스 공주도 조용히 고개를 돌려 엘을 바라보았다. 에리스 공주의 눈동자가 조용히 빛났다. "젊은 나이에 7클래스에 든 마탑주시라면, 제가 왜 이 곳을 찾았는지 아실 거예요." 엘의 푸른 눈동자가 빛났다. "국왕 전하의 부탁입니까?" 엘은 에리스 공주에 대한 정보를 떠올리며 물었다. 그가 알고 있는 에리스 공주는 조용히 학문을 연구하는 여인이다. 귀족들의 혼인 압박이 있지만 레도프 국왕은 에리스 공주의 의사를 존중하여 모든 청혼을 파기시켰다. 결혼에는 흥미가 없고 오로지 학문을 연구하려는 여인이 바로 에리스 공주였던 것이다. 그런 에리스 공주가 스스로 자신에게 접근할 리 없을 터, 그렇다는 것은 누군가의 부탁 혹은 명령으로 이곳에 왔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그녀에게 그러한 부탁을 할 사람은 레도프 국왕 밖에 없다. 에리스 공주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역시 마탑주님이시네요. 순식간에 알아차리시니 말이에요. 하지만 저는 아버지의 부탁만으로 온 게 아니에요. 제 스스로가 마탑주님에게 관심이 있었기에 온 거랍니다." 엘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자신을 가리켰다. "제게, 말입니까?" 그러자 에리스 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와 나이 차가 많지 않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남들이 육칠십이 되어서야 오를 수 있다는 7클래스에 들어서다니 ...... 어찌 관심이 없겠어요?" 그녀의 말에 엘이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아인하트 후작을 패닉으로 몰아넣은 말을 에리스 공주에게 들려주었다. "남들은 신기해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독학으로 익혔습니다." "......." 누구와 마찬가지로 순간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 에리스 공주. 당연히 어이없을 수밖에 없다. 어렸을 때부터 철저한 스승의 가르침 아래 배워야 노년에 7클래스에 접어들 수 있는데 오로지 독학으로 젊은 나이에 7클래스에 들었다니 믿기지 않을 수밖에....... 차분한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어이없는 감정을 본 엘은 웃음을 머금은 채 물음을 던졌다. "그런데 제게 관심을 가진 건 그 부분인가요?" 그의 말에 에리스 공주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 마탑주님이 젊은 나이에 대마법사 경지에 이르셔서 혹 여타 사람들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인지 궁금했어요." "그런데 지금까지 본 모습은?" "다른 사람과 같네요. 전혀 구분하지 못할 만큼 말예요." 에리스 공주의 말에 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하며 그녀에게 말했다. "제가 7클래스이건 8클래스이건 저는 저입니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 중 한 사람에 불과하지요. 단지 다른 게 있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이랄까요? 어찌 됐던 저 또한 한 명의 사람이라는 것 입니다. 칼을 맞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 굳이 다른 사람과 차별될 이유가 없겠지요." 엘의 긴 말을 곰곰이 되씹으며 에리스 공주는 몸을 빙글 돌렸다. 그리고 창가에 몸을 기대며 입을 열었다. "저는 공부가 하고 싶었어요." 엘이 고개를 갸웃하며 에리스 공주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말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저는 톨리안 왕국의 공주예요.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없는, 의무와 권리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여자죠. 지금은 이렇게 제 의지로 버티고 있지만 이것이 결코 왕가에 있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어요. 언젠가는 왕가를 위해 시집을 가야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제 꿈은 이루지 못하겠죠." 그녀의 말에 엘은 에리스 공주가 그동안 얼마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지금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엘이 원한다면 엘에게 시집을 가겠다고, 대신 왕가에 도움을 줘야 한다고. 그러면서 그동안 짊어지고 온 고민을 엘에게 털어놓는 것이다. 엘은 그녀가 안쓰러웠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는 것. 그것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엘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왕권 다툼에 개입할 생각은 없었다. 다소 힘들겠지만 정황상 국왕의 의지대로 이루어질 확률이 높고, 흙탕물이나 다름없는 그곳에 굳이 끼어들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도움을 줄 방법은 충분히 있었다. 엘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순간 흠칫한 그녀가 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녀를 향해 빙긋 웃으며 엘은 어깨를 토닥여 줬다. "그런 고민은 하지 마세요.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 그것은 공주님에게 있어 충분히 가능할 것입니다. 제가 도움을 드리겠어요. 굳이 저에게 시집을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엘은 에리스 공주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러자 에리스 공주의 양 볼이 순간 붉어지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엘이 조용한 음성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대신 공주님께서 노력하고 있는 걸 제게 보여 주세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 저는 그 모습을 무척이나 좋아하거든요." 가족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꿈을 저버릴 각오를 한 에리스 공주. 그 모습이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엘의 가슴에 와 닿은 것이다. 고개를 푹 숙인 에리스 공주가 모기만 한 목소리로 말 했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엘은 그 모습을 보며 빙긋 웃었다. 마탑주 환영 파티였지만 이번 파티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로웰린이었다. 파티가 벌어진 3일 동안 첫날을 제외하고 엘은 파티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것은 대부분의 고위 귀족도 마찬가지였다. 엘이 빠진 파티에 굳이 참석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이다. 그사이 로웰린은 3일 동안 파티에 참석하여 귀족들과 어마어마한 인연을 맺어 놓았다. 아직 어디에 붙을지 눈치를 보던 지방 귀족들이 대거 로웰린을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한 것이다. 본래 그들은 대부분 제1왕자파나 제2왕자파에 가담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왕국 회의에서 나타난 마탑주의 존재는 그들의 생각을 변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힘없는 지방 귀족들은 잘 알고 있다. 가만히 있고 싶어도 힘이 없어 가만히 있지 못한다는 것을. 그리고 파벌에 가담할 때 가장 먼저 내팽개쳐질 것이 바로 자신들이라는 것을. 힘이 없으면 그렇게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존심을 굽히고 로웰린의 그늘에 뭉쳤다. 물론 그들에게 끈끈한 유대감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강대한 힘을 지닌 중앙 귀족의 횡포에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는 동일했다. 로웰린의 뒤에는 마탑주가 있다. 일대일이라면 소드 마스터에 뒤떨어지지만 그 활용도에 있어서는 소드 마스터의 몇 배의 위력을 발휘하는 마탑주. 그라면 왕권 다툼이라는 풍파 속에서 자신들을 지켜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뭉친 것이다. 파티가 끝나고, 제1왕자파와 제2왕자파가 감히 무시하기 힘든 어마어마한 파벌이 생겨났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별로 힘은 없지만 그 힘이 차곡차곡 모이다 보니 무시할 수 없는 큰 힘이 만들어진 것이다. "어서 오세요." 3일 동안 이어진 파티가 끝나고, 엘은 로웰린을 찾았다. 로웰린은 엘이 자신을 찾자 조심스럽게 그를 맞이했다. 그녀에게 있어 엘은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대은인이었던 것이다. 엘은 로웰린의 얼굴을 보며 빙긋 웃었다. "파티에서 좋은 일이 있었다면서요?" "네, 모두 탑주님 덕분이에요. 정말 감사합니다." 로웰린은 진심으로 엘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그녀의 인사에 엘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말을 꺼냈다. 지금 엘이 꺼낼 말은 다소 지나친 간섭으로 보일 수 있는 내용이 었다. "이번에 백작님의 주변에 많은 귀족이 모였을 것입니다." 로웰린이 다소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엘은 말을 이었다. "아마 그들은 제1왕자파나 제2왕자파 말고 마탑주라는 그늘에 숨어들려고 했을 것입니다. 맞지요?" "......." 더 놀랄 것도 없었다. 이틀 동안 파티에 참석하지 않은 엘은 모든 귀족들의 생각을 꿰뚫고 있던 것이다. 놀라움에 말을 하지 못하는 로웰린에게 엘이 말했다. "그럼 제가 주제넘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들어 주세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백작님이 이번에 규합한 귀족들을 데리고 제3왕자파에 투신하셨으면 합니다." "제3왕자파에요?" 다시 한 번 놀라는 로웰린. 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지금 형국은 제1왕자파와 제2왕자파의 구도입니다. 왕가의 숨겨진 힘으로 그들을 압박한다고 하지만 정작 나라를 이끌어 나갈 귀족층이 얇은 편이죠. 만약 백작님이 제3왕자파에 합류하게 되면 왕권 다툼은 삼각 구도로 안정세에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 엘의 말에 로웰린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따지고 보면 엘의 말이 맞다. 대등한 힘을 가진 2세력이 존재하니 적이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아 쉬지 않고 다툼을 벌였겠지만 셋이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둘이 동맹을 맺지 않는 이상 하나를 공격하면 다른 한쪽이 공격해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양대 산맥 체제는 쉽게 무너지지만 삼각 체제는 무너지지 않는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로웰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탑주님의 말씀에 따르겠어요." "감사합니다." "제가 감사해야 할 일인데요." 엘과 로웰린은 서로 바라보며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로웰린은 모르겠지만 엘은 자신이 그녀의 배경이 되어 주면 지방 귀족들이 그녀를 중심으로 뭉칠 거란 걸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귀족들의 생리야 뻔하지 않은가. 지방 귀족들을 쓸모없는 전력으로 치부한 제1왕자파나 제2왕자파에게 있어 이번 일은 제법 큰 손실로 다가을 것이다. 엘과 로웰린은 조용히 각각 영지와 마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파티가 끝난지 2달이 되는 시점에, 로웰린은 규합한 귀족들과 함께 제3왕자인 유드미온 왕자를 지지한다고 하였다. 제1왕자파와 제2왕자파가 술렁이는 그 시기에 톨리안 왕국으로 접어드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순백의 새하얀 갑옷에 예기를 뿜어내는 검이 아닌 둔탁 한 해머를 들고 있는 100명의 기사들. 그들은 다름 아닌 가이아 성국에서 파견된 광휘의 기사단이었다. 광휘의 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볼레크 대신관이 대륙 서부의 끝이라 할 수 있는 톨리안 왕국으로 접어들며 중얼 거렸다. "다른 곳에서는 성녀를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아르디모스 대신관의 말대로 이곳에 성녀가 있을 터 ........." 볼레크 대신관의 두 눈에 굳은 신앙심이 떠올랐다. "기다리십시오, 성녀시여. 저와 신을 모시는 기사들이 곧 당신을 구출하러 가겠나이다." 그렇게 광휘의 기사단이 톨리안 왕국에 들어섰다. 광휘의 기사단 대륙 북부의 강자 적탑의 탑주 카로스만과 벨로세크 제국 그랜드 마스터 트루엘은 비밀스러운 만남을 가지고 있었다. 카로스만이 잔뜩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톨리안 국왕을 죽이는데 실패한 것이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몰랐는데 이제야 그 진실이 밝혀졌군." 트루엘 또한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하니 톨리안 왕국에 마탑주가 나타날 줄 몰랐다. 아마 마탑주의 개입으로 실패한 것이겠지." 톨리안 국왕을 제거하기 위해 3명의 소드 마스터와 50 명의 기사를 투입했다. 최상급 소드 마스터인 라이어스 공작이 있다고 쳐도 그들을 막아 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데 임무에 실패했다고 한다. 애초에 어려운 임무가 아니었다. 서부에서 조금 강력하다지만 마법 후진국에 불과한 국왕 ‘따위’를 제거하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간단한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임무에 실패했다. 이는 그들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의 도움이 있었다는 걸 뜻한다. 그리고 그것이 이번에 새로 나타난 마탑주의 등장일 확률이 높다. 별일 아니긴 하지만 실패는 실패다. 앞으로 그들이 나아감에 있어 흠이 될 것이고, 그들이 모시는 마스터의 신뢰를 잃게 되는 원인이 될 것이다. 아니, 신뢰를 잃지 않더라도 다른 이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트루엘이 기광을 뿜어냈다. 그랜드 마스터에 이른 그의 전신에서 은은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그까짓 일로 마스터의 신뢰를 잃을 수 없다. 내가 직접 가서 톨리안 국왕의 목을 따 오겠다." 그런 그의 행동을 카로스만이 제지했다. 그에게 다른 생각이 있었다.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 톨리안 왕국으로 성국의 기사단이 들어섰지. 신탁이 내려 성녀를 찾는다고 하니 그것을 조금만 이용하면 된다." 트루엘의 눈에 이채로움이 서렸다. "성기사들을?" 카로스만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것도 성국에서 상위권에 들어가는 광휘의 기사단이 톨리안 왕국에 들어섰다. 그들을 이용하여 새로 등장한 마탑주의 실력을 알아본다. 그리고........." 카로스만의 두 눈에 강렬한 불꽃이 일렁였다. 그 또한 이런 사소한 일의 실패로 스스로 흠이 생겼다고 생각하니 트루엘 못지않게 화가 나 있던 것이다. "그 실력을 알아본 뒤 직접 처리하는 거다. 우리 둘이서 말이지." 트루엘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이 열혈의 마탑주도 자신의 생각과 동일했던 것이다. 그 또한 동의의 끄덕임을 보였다. "나와 같은 생각이라 좋군." 두 사람은 서로 보며 다시 한 번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8클래스 마법사와 그랜드 마스터가 주시하는 가운데 광휘의 기사단은 톨리안 왕국의 수도 베르디스에 도착해 있었다. "허허 허 ........." 레도프 국왕은 난감한 표정을 지은 채 눈앞에 위치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초로에 접어든 외모에 순백의 복장을 하고 있는 평범한 남자. 얼핏 봐서는 인자한 중년인 같았다. 하지만 평범한 모습과 다르게 그의 정체는 가이아 성국의 12대신관 중 1명인 볼레크 대신관이었다. 레도프 국왕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끼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신탁에 내려진 성녀가 본 왕국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입니까, 대신관?" 가이아 성국은 톨리안 왕국과 비슷한 영토에 비슷한 군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신앙심으로 무장한 성군과 왕국의 병사는 그 질적인 면에서 차이가 났다. 게다가 성국은 대륙 10대 그랜드 마스터 중 하나를 보유하고 있는 실정이었기에 세르디아 대륙에서 차지하는 그 비중은 톨리안 왕국과 비교할 바가 못 되었다. 그래서 레도프 국왕이 성국의 후작급에 해당하는 볼레크 대신관에게도 말을 놓지 못하는 것이다. 레도프 국왕의 말에 볼레크 대신관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혹시 다른 곳에 성녀께서 계실까하여 이곳에 오는 동안 주변 국가의 도움을 빌어 샅샅이 수색했습니다. 성녀로 간택되셨다면 아마 지금쯤 강력한 신성력을 내뿜고 계실 터. 그런데 저희가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이곳 톨리안 왕국에 계실 확률이 높다는 것을 뜻합니다." "으음......."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으며 레도프 국왕은 눈을 감았다. 성국에 협력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지원을 해야 할지 막막했던 것이다. 게다가 성녀라니! 대륙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성녀가 성국에 들어서게 된다면 성국의 힘이 비약적으로 상승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가까이 있지 않지만 다른 국가의 힘이 강해진다는 것은 곧 다른 국가가 상대적으로 약해진다는 걸 의미했기에 레도프 국왕의 마음이 짐짓 착잡했다. 그러한 국왕의 심정을 여러 왕국을 돌아다닌 볼레크가 모를 리 없었다. 레도프 국왕의 성국의 힘이 강해지는 걸 염려하고 있는 건 모르지만, 성기사단에게 얼마만큼의 지원을 할지 고민 하는 것은 알고 있던 것이다. 그는 안심하라는 듯 차분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그리 많은 지원은 필요 없습니다. 단지 저희 성기사단이 왕국 어느 지방에 접어들었을 때 주변을 안내해 줄 가이드만 있으면 됩니다." "가이드?" 볼레크의 말에 이게 무슨 말이냐는 듯한 표정을 짓는 레도프 국왕. 그런 레도프 국왕의 표정을 보며 여느 국왕과 다를 바 없다고 느끼며 볼레크는 몇 번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성녀께서 뿜어내시는 신성력은 여타 다른 신관과 달리 어마어마한 양이고, 아직 통제가 되지 않기에 일정 범위에만 들어가면 느낄 수 있습니다. 때문에 많은 지원을 필요치 않지요." "그렇군요." 레도프 국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기사단이 각 지방에 접어들 때마다 가이드를 붙여 주기만 한다면 왕국으로서 부담이 갈 이유가 없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레도프 국왕이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혹, 신탁의 내용을 알 수 있습니까? 아무래도 제가 도움이 될 수도 있을 테니 말입니다." 이왕 돕기로 한 것, 최대한 협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야 성녀가 있건 없건 그들의 볼일을 최대한 빨리 보고 빨리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좋습니다." 흔쾌히 도움을 주겠다는 레도프 국왕의 말에 볼레크 또한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신탁의 내용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르디모스 대신관이 말해 주었던 해석에 대해 부연 설명도 덧붙여 주었다. "......이런 내용입니다. 해석으로 보아 대륙 서부에 존재하는 몬스터 랜드 근처에 성녀께서 계실 확률이 높다고 파악되었습니다." "음!" 볼레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레도프 국왕이 생각에 잠겼다.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는 속으로 경악하고 있었다. 볼레크가 말한 내용 중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곳, 그리고 단 1번의 이해도 받지 못한 곳, 그들의 해석이라면 최근 그렇게 변화한 곳을 레도프 국왕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심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하고 있었다. ‘설마 마탑주와 성녀가 연관되어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이들이 마탑주의 등장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터. 이를 어떻게 한다.......’ 아직 이 눈앞의 신관은 거기까지 생각하지 안 했던 듯 했다. 일단 엘에게 연락을 하여 말을 건넬 생각을 한 레도프 국왕은 볼레크에게 말했다. "각 영지에 최대한 협력하라는 지시를 내려놓을 테니, 오늘은 푹 쉬십시오." 볼레크는 레도프 국왕의 제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신성력이 충만한 몸이었지만 그는 기사가 아닌 신관이어서 육체가 단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랜 여정으로 피로가 제법 쌓인 상태였다. 미리미리 쉬어 두어야 최대한의 움직임을 보일 수 있는 걸 잘 아는 볼레크는 레도프 국왕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전하." 레도프 국왕이 짐짓 미소 지으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대륙에 평화를 가져 을 성녀님을 모시는 일입니다.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겠지요." 볼레크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성국은 전하의 도움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드디어 끝이다!" 엘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기쁨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탑을 설립하면서 동시에 계획했던 계획, 트를 벨리 전체에 결계를 치는 작업이 마침내 끝난 것이다. 결계를 치는 데 무척이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7클래스 마법사인 엘과 6클래스 마법사 실피르가 무려 1년 동안 꼬박 작업을 한 것이다. 하기야 그도 그럴 것이 트를 벨리의 크기는 무척 크다. 어지간한 도시 하나가 들어설 수 있는 계곡 전체에 결계를 치는 데 고작 1년이 걸린 거라면 도리어 빠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곳은 안전할 거야." 흐뭇함이 가득 담긴 눈으로 엘은 트를 벨리를 훑었다. 엘이 친 결계는 단순한 결계가 아니다. 남들이 가지지 못한 지구의 수식을 이용해 결계에 강력한 방어 마법을 중첩하여 걸었다. 어디 그뿐인가? 일정한 마나 흐름을 약간 비틀어 엘과 실피르를 제외한 다른 마법사가 마법을 전개할 때 상당한 제약을 받게 하였다. 만약 상대가 이곳을 침입하려면 제 힘을 온전히 발휘하기 힘들 것이다. "수고하셨어요, 엄마." 엘은 실피르를 보며 빙긋 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결계를 치는 데 족히 2배의 시간은 더 걸렸을 것이다. 엘의 인사에 실피르가 웃음을 지었다. "뭘 이 정도 가지고 그러니? 앞으로 우리가 살 곳이니 이 정도는 당연한 거지." 실피르의 안색은 무척 초췌해 보였지만 작업이 끝났다는 것에 대해 기쁨이 가득한 모양이었다. 그녀 또한 엘이 계획한 결계의 위력을 어느 정도 알고 있던 것이다. 그 외에 결계에는 여러 가지 능력이 있다. 지금 가장 큰 기둥을 세우는 데 성공했으니 앞으로 할 일은 세세한 작업뿐이다. 엘의 눈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는 점점 다가오는 성기사단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가장 큰 일을 끝냈으니 이제 남은 건 간단한 일뿐이야. 아직 시간이 어느 정도 있어서 다행이야.’ 디벨 상단은 성실하게 엘의 눈과 귀가 되어 주고 있다. 때문에 엘은 가이아 성국에서 파견된 성기사단이 행군에 행군을 거듭하여 이곳 톨리안 왕국에 접근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서두르자.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훗날 후회할 수도 있으니 ........." 자리에서 일어난 엘이 결계를 손보려고 할 때, 마탑 쪽 에서 카이나가 달려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다급함이 서려 있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엘은 순간 의미 모를 불안감이 일었다. 다가온 카이나가 차분하게 숨을 고르며 엘에게 입을 열었다. "주인님, 왕궁에서 마법 편지가 왔어요." "왕궁이라........." 작게 중얼거린 엘은 실피르에게 시선을 옮겼다. "엄마, 먼저 들어가서 쉬세요." 실피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렴." "그럼......." 엘의 몸이 흐릿해졌다. 블링크를 전개한 것이다. 실피르와 카이나는 불안한 시선으로 엘의 사라진 모습을 쫓고 있었다. 마법 편지란 비상시에 연락받을 수 있도 엘이 창조해 낸 통신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부디 큰일이 아니었으면......." 실피르가 중얼거렸다. 그 옆에 서 있는 카이나도 두 눈에 근심을 가득 담고 있었다. 엘은 마법 편지를 볼 필요를 못 느꼈다. 이 시기에 엘을 필요로 하는 비상이라고 하면 딱 한 가지뿐이다. ‘세레나.... !’ 블링크로 단번에 집무실에 도착한 엘은 통신구 채널을 왕궁 채널과 일치시킨 뒤 곧장 통신 수신을 보냈다. 파직! 파지직! 듣기 싫은 수신음과 함에 잠시 후 통신 채널이 일치되었다는 신호가 보였다. 엘은 통신구의 구동어를 외쳤다. "통신 온!" 띠리링! 푸른색 통신구가 점점 투명해지면서 그 자리에 레도프 국왕의 모습이 나타났다. 엘은 레도프 국왕에게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하." 그러자 레도프 국왕도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탑주님." 왕국 회의가 끝나고 근 몇 달 만에 만나는 것이기에 두 사람은 서로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고 본격적인 대화에 들어갔다. 엘이 레도프 국왕에게 물음을 던졌다. "하실 말씀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국왕 전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실지 확신을 했기에 마법 편지를 확인하지 않고 곧장 통신을 받았습니다." 엘의 말에 레도프 국왕의 표정이 대번 굳었다. 그리고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엘에게 물었다. "그, 그렇다면....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입니까? 레도프 국왕의 말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는 엘. 국왕이 귀족들을 그들이라 칭할 리는 없다. 역시 세레나의 문제가 확실하다. "........그렇습니다." 그러자 레도프 국왕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말했다. "어찌하여...... 성녀가 될 여자를 데리고 있는 것입니까....... 그로서는 이런 말을 할 수 밖에 없다. 그의 입장에서 엘은 왕국에 꼭 데리고 있어야 할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엘이 성녀를 데리고 있음으로써 그는 필연적으로 성국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막강한 신앙심으로 무장한 성국과 척을 지게 될 시에는 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픈 골칫거리를 떠안는 것과 같다. 엘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제가 사랑하는 여인입니다. 그래서 저들에게 내줄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상대는 성국입니다. 신앙심으로 무장한 수십만의 성군을 거느리고 있는...... 제국에 밀리지 않는 강국이 바로 성국입니다. 탑주님이 7클래스 마법사라고 해도 그것은 무리입니다." 그 말이 엘의 가슴에 너무나 무겁게 다가왔다. 성국! 오로지 신만을 바라보며 굳은 신앙심을 가지고 죽음도 불사하는 그들은 상대하기에 너무나 벅찬 이들이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다. 언젠가 결심하지 않았던가. 자신의 가족을.... 반드시 지켜 내겠다고. 성국이 아무리 강하다고 하여도 지켜 낼 것이다. 엘의 눈에 굳은 결의가 떠올랐다. 그리고 레도프 국왕을 향해 입을 열었다.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 것 하나 지키지 못하는 이가 남자라고 할 수 없으니까요. 전하께서는 부디.... 중립을 지켜 주십시오. 제가 전하께 바라는 건 그것뿐입니다." "음! 엘의 굳은 결의를 느껴서일까? 레도프 국왕은 침음을 흘리며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레도프 국왕이 무언가를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 이며 입을 열었다. "제가 할 일은 그것뿐입니까? "그렇습니다." "좋습니다. 그 정도는 해 드릴 수 있겠군요. 그 말에 엘은 고개를 깊게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엘은 이것만으로 족했다. 현재 레도프 국왕이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중립이다. 그래야 엘은 톨리안 왕국과 충돌하지 않고, 성국에 모든 집중을 쏟을 수 있으니 말이다. "이것이 도움이 될는지 모르겠지만.... 레도프 국왕은 엘에게 성국에 대한 것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엘은 그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 였다. 설명이 끝났을 때 엘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부디 무사하길 빌겠습니다. 어쨌거나 탑주님은 저희 왕국의 소중한 일원이니까요. 어디까지나 사람으로서 엘이 아닌 탑주로서 엘을 걱정 하는 것이다. 하지만 엘은 그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자신을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이렇게나 기쁜 것일 줄이야. 팟! 통신이 끊겼다. 그리고 엘은 몸을 돌려 이제는 골든 벨리라 불리는 곳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스스로 다짐을 되새겼다. 골든 벨리를 내려다보는 엘의 모습은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할 강렬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엘, 그가 드디어 결심을 굳힌 것이다. "본 왕국은 성국에게 최대한 협조하되 그 지원은 어디 까지나 성녀를 찾는 것에만 국한할 것입니다." "......!." 볼레크는 레도프 국왕의 말에 의문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레도프 국왕이 풀어서 제대로 말해 주었다. "그러니까 본 왕국은 어디까지나 성녀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만 지원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제야 레도프 국왕의 말을 이해한 볼레크. 그가 눈을 살짝 크게 뜨며 물었다. "그렇다는 건, 혹시 모를 불상사가 생길 경우 지원을 해 줄 수 없다는 것입니까?" 그에 레도프 국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근심이 담긴 어조로 볼레크 대신관을 달래듯 말했다. "그렇습니다. 현재 본 왕국은 세 개의 파벌로 형성되어 그 균형이 하나만 무너져도 위태로운 지경입니다. 어제 하루 종일 심사숙고하여 내린 결정이니 다른 말은 듣지 않겠습니다." 제법 설득력이 있는 말이다. 볼레크도 톨리안 왕국으로 오면서 그 사실을 성국으로부터 자세하게 전해 들은 바다. 무언가 미심쩍은 면이 있었지만 그는 성국의 힘을 믿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원만 해 주어도 감지덕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알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길을 떠나 보겠습니다." "그러도록 하십시오. 부디 대륙의 평화를 가져올 성녀를 찾으시길." 여러 의례적인 말을 주고받은 뒤 볼레크는 왕궁을 벗어났다. 그리고 광휘의 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하이덴 백작에게 말하였다. 그는 하루 만에 바뀐 레도프 국왕의 태도에 미심쩍음을 느끼고 있었다. "하루 만에 달라진 국왕의 태도를 보아 무언가를 숨기고 있을 터, 그렇다는 것은 성녀가 톨리안 왕국에 있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네. 최선을 다해 성녀를 찾도록 하게나." 볼레크의 말에 하이덴이 고개를 깊게 숙였다. "알겠습니다, 대신관님. 휴식을 취했으니 톨리안 왕국 정도는 문제없습니다." 하이덴이 자신감 어린 어조로 대답했다. 그렇게 광휘의 기사단은 톨리안 왕국 동부부터 시작하여 차근차근 성녀를 찾는 작업을 시작해 나갔다. 볼레크가 톨리안 왕국에 성녀가 있다는 것을 거의 확신 했기에 성기사들은 하나하나 꼼꼼히 체크를 하다시피 하여 왕국 곳곳을 누비기 시작했다. 그렇게 동쪽부터 서서히 서쪽으로 향하여 왕국 서부 영지인 루비어스 백작령에 도착하는 것은 1달여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테란델 후작령을 모두 수색해 본 볼레크는 로웰린을 청한 뒤 홀로 자리하여 중얼거렸다. "톨리안 왕국을 모두 수색해 보았다. 이제 남은 곳은 이곳뿐. 이곳도 아니라면 더욱 서쪽에 있는 몬스터 랜드로 가야 한다." 이쯤 되면 자신이 잘못 판단한 게 아닐까 생각해 볼 법도 싶지만 볼레크는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무언가 짚이는 게 없었다면 레도프 국왕이 하루 만에 그렇게 다른 태도를 보일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사이, 로웰린이 방 안으로 들어 왔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검술 수련을 하고 온 터라 그녀는 가벼운 경장 차림을 하고 있었다. 로웰린이 방 안에 들어서자 볼레크도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를 갖추었다. "아닙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오게 되어 도리어 제가 죄송합니다. 저는 성국의 볼레크라고 합니다." "성국의 열두 기둥이신 대신관님의 이름은 누누이 들어왔답니다." 의례적인 인사를 나눈 그들은 본격적인 대화에 들어갔다. 볼레크는 자신의 용건을 꺼냈다. "아마 국왕 전하께서 명령을 내리셨을 것으로 압니다. 현재 저희는 성녀님을 찾아 대륙을 떠돌고 있습니다. 협력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로웰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성녀님을 찾는다는데 당연히 협력해야겠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아낌없이 하겠어요." 그녀의 시원스러운 태도에 볼레크가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백작님." 그리고 볼레크는 로웰린의 지원 아래 루비어스 백작령을 샅샅이 누볐다. 약 3일 동안 루비어스 백작령 전체를 누빈 볼레크는 약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톨리안 왕국에 성녀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톨리안 왕국에 존재하는 모든 영지를 다 둘러보았다. 하지만 성녀를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즉, 성녀가 왕국 영토 안에 없을 확률이 높은 것이다. 볼레크 대신관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끙! 골치 아프군. 내 예상이 틀릴 줄이야." 그런 볼레크의 모습을 본 로웰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좀 더 많은 지원을 했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오히려 백작님에게는 매우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볼레크가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그는 로웰린을 책망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 아니, 적극적인 지원에 오히려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볼레크가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응?’ 그리고 문득 느낄 수 있었다. 루비어스 백작가의 집무실이 다른 귀족가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집무실은 엘이 다른 귀족가에 꿀리지 말라고 새로 보수해 준 것이었다. 볼레크의 뇌리에 의문이 생겨났다. ‘이상하군. 루비어스 백작령은 내가 알기로 무척 가난한 영지인데...... 이 정도 집무실은 테란델 후작령과 다른 공작령에서밖에 보질 못했는데......’ 그러면서 볼레크의 시선이 로웰린에게 향했다. 로웰린은 볼레크가 자신을 바라보자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물었다. "무언가 하실 말씀이 계신가요?" "아아, 백작님의 집무실이 다른 귀족가와 다를 바가 없어서 말입니다. 아니, 도리어 두 공작가와 비견되는 집무실을 가지고 계시군요." "아아." 볼레크의 말에 로웰린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랑스러움이 담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사실 이건 이번에 왕국에 새로 설립된 마탑주님께서 해 주신 집무실이랍니다." "마탑주? 이번 왕국 회의 때 등장했던 마탑주를 말하시는 겁니까?" "네, 그분과 저는 꽤 친한 사이라고 할 수 있어서요. 너무 후줄근한 집무실이라면서 통째로 고쳐 주셨지요. 저에게는 정말 고마우신 분이죠." "마탑주...... 마탑주라........." 작게 중얼거리며 볼레크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문득 두 눈을 크게 떴다. ‘분명...... 왕국 곳곳을 누볐음에도 마탑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다는 것은 마탑이 다른 곳에 위치했다는 것. 그리고 신탁 해석에 있지 않던가. 마법에 차단된 곳에 있을 것이라고.... 그래, 바로 그곳이다. 마탑! 그곳에 성녀님이 계시다!’ 결론은 빠르게 도출되었다. 톨리안 왕국에 광휘의 기사단이 가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런데도 성녀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어딘가에 위치한 마탑에 있을 확률이 현격히 높다는 걸 의미한다. 볼레크의 눈이 번뜩였다. 그리고 로웰린에게 물었다 "마탑! 그곳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에? 마탑요?" 로웰린이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그녀는 단번에 볼레크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지금 그는 마탑으로 가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성녀가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로웰린의 뇌리에 수많은 생각에 교차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결정을 내린 그녀가 빠르게 대답했다. 무 언가 좋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마탑....... 그러고 보니 마탑의 위치를 모르네요. 탑주님은 제게 그것도 안 가르쳐 주셨거든요." "그렇군요...... 볼레크가 아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친분이 있다면서 마탑의 위치를 모르는 게 이상했으나 어차피 알아도 순순히 대답할 확률은 적었을 거라 생각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로웰린을 바라보며 말 했다. "며칠 동안 신세를 끼쳤습니다. 저희는 이만 떠나겠습니다." "다른 왕국으로 가시는 건가요?" 로웰린이 한 가닥 기대를 품고 말했으나 돌아온 대답은 그녀의 기대를 산산이 부숴 버리는 것이었다. "아니, 마탑을 찾으려고 합니다. 아직 그곳에는 가보지 못했으니까요." 그 말과 함께 볼레크가 집무실을 벗어났다. 저택을 벗어나는 성기사단의 모습을 보며 로웰린이 불안감에 가득 찬 어조로 중얼거렸다. "설마...... 엘님이 성녀를......설마, 아니겠지." 고개를 저으며 불안감을 해소하는 로웰린.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녀의 예감은 정확했다. 엘은 성녀로 선택된 세레나를 데리고, 성국과 일전을 벌일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택을 벗어난 볼레크가 하이덴에게 물었다. "톨리안 왕국에 마탑이 들어섰다고 하는데 그 위치를 아는가?" 그 말에 하이덴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쉽게도 마탑주가 나타났다는 말만 들었지, 마탑이 어디에 들어섰다는 것은 어디에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흠! 그렇군. 내 예상에는 그 마탑에 성녀가 있을 것 같네. 헌데 그 마탑을 찾지 못하고 있으니 ......." "그것이라면 제가 대신관님께 할 말이 있습니다." "음?" 볼레크가 말해 보라는 듯 하이덴을 바라보자 하이덴이 자신이 생각하던 바를 털어놓았다. "사실 대신관님이 성녀님께서 톨리안 왕국에 계실 거란 느낌을 받으셨을 때 저 또한 그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루비어스 백작령에서 성녀님을 찾지 못했을 때 혹 마탑에 성녀님이 계시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탑이 어디에 위치했을까 신탁의 해석에 따라 마탑의 위치를 추적해 보았습니다. 물론 성녀님이 마탑에 계시다는 가정 하에 말입니다." "오오! 정말 멋지네! 그래, 그래서 마탑은 어디에 있는 것 같나?" 볼레크가 환희에 하이덴이 웃으며 품속에서 지도를 꺼내들었다. 그것인 톨리안 왕국의 영토가 그려진 지도였다. 하이덴은 왕국 서부를 짚었다. 그곳은 루비어스 백작령 이었다. "신탁의 내용 중 분명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끝이되 끝이 아닌 곳, 단 한 번도 이해받지 못한 곳.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하이덴의 손이 서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의 손이 멈춘 곳에는 오크 포레스트(Orc Forest)와 트를 벨리(Troll Valley)라 쓰인 곳에 멈췄다. 하이덴이 말을 이었다. "끝이되 끝이 아닌 곳. 그리고 단 한 번의 이해도 받지 못한 곳이라면 이 두 곳일 확률이 높습니다. 그리고 둘 중 마탑이 있을 만한 곳은......." 하이덴의 손이 트를 벨리로 향했다. 그는 자신감에 찬 어조로 말했다. "사실 저도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심증이 확실케 하는 사실이 있었습니다. 바로 작년 몬스터 침공 때 트롤 벨리에서 트롤들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떠도는 소문으로는.... 이곳이 사람들이 살기에 최고의 낙원이라는 골든 벨리라 불린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군!" 볼레크의 두 눈이 밝게 빛났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으나 하이덴의 말을 들으니 이곳보다 신탁에 더 잘 맞는 곳은 없는 듯했다. 볼레크가 말했다. "정말 뛰어난 해석이었네. 어서 이곳으로 가 보지. 이 곳이라면 성녀님이 계실 것 같네." 자신의 의견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에 하이덴이 밝은 표정을 지었다. "알겠습니다. 대신관님." 그렇게 광휘의 기사단은 톨리안 왕국에 들어선 지 2달의 시간이 걸려서야 트롤 벨리로 향하기 시작했다. "후! 어느 정도 끝난 건가......." 엘은 결계에 마지막 마법을 중첩시키며 중얼거렸다. 성국의 기사단이 톨리안 왕국에 들어선지 2달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엘은 성기사단을 막기 위해 넓게 펼쳐진 계곡 전체에 다시금 마법을 새기고 다녔다. 이는 엘이 새로운 발상으로 만든 것으로, 확인되지 않았지만 앞으로 엘에게 든든한 방어막이 되어 줄 것이 분명했다. "성국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어. 하지만 그 피해는 최소화해야겠지. 자칫 돌이킬 수 없는 사이로 변한다면 힘들어지는 건 나니깐 말이야." 그러면서 엘은 앞으로 성국을 어떻게 상대할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띠이이잉! 그 찰나, 엘이 계곡 입구에 설치해 놓은 알람 마법이 작동하였다. 그러자 굳어지는 엘. 그가 계곡 입구 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읊조렸다. "왔군." 그와 함께 엘의 몸에 새하얀 빛이 생겨났다. 그가 마법을 전개하였다. "텔레포트(Teleport)!" 스팟! 빛이 폭사하며 엘의 몸이 사라졌다. 엘이 도착한 곳은 계곡 입구였다. 이제는 골든 벨리라 불리는 이곳에 들어서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이곳에는 현재 100명의 사람이 들어서고 있었다. 순백의 신관 복장을 한 이와 새하얀 성갑을 차려입은 그들은 다름 아닌 성국에서 파견된 볼레크와 광휘의 기사단이었다. 계곡 위에서 그들의 모습을 본 엘이 천천히 그들에게 접근했다. "저들인가, 성국에서 파견된 이들이......?" 그와 함께 엘이 그들에게 점점 다가오자 날카로운 감각을 지닌 하이덴이 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볼레크를 붙잡았다. "누군가가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하이덴이 앞으로 나서 외쳤다. "누군지 모르지만 숨어서 지켜보지 말고 앞으로 나서십시오!" 웅혼한 신성력이 은은하게 퍼지며 계곡 전체를 뒤흔들다시피 하였다. 강력한 신성력의 힘을 느낀 엘이 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블링크 마법을 전개하여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 상공에 나타났다. 허공에 멈춰 선 엘이 순간 100쌍의 시선이 꽂혔다. 볼레크는 눈앞에 나타난 청년이 범상치 않은 인물임임을 느꼈다. 그리고 재빨리 앞으로 나서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저는 성국에서 파견된 볼레크라고 합니다. 당신은 누구신지요?" 엘이 볼레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예의를 갖추어 인사를 하였다. "저는 이곳에 위치한 금탑의 탑주 엘리미스라고 합니다. 저의 대지인 이곳에 성국의 인물들이 무슨 볼일로 오신 것입니까?" 세레나를 누구에게도 내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엘과 반드시 성녀를 찾아야 하는 성국의 인물들. 그들이 마침내 트를 벨리, 이제는 골든 벨리라 불리는 이곳에서 만나게 되었다. 다크 포그(DarkFog) 볼레크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저희는 자비롭고 위대하신 가이아 여신께 신탁을 받았습니다. 대륙의 평화를 가지고 올 성녀님을 모시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신탁의 내용을 해석하여 이곳에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볼레크는 엘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는 내심 경악하고 있었다. 볼레크는 가이아 성국을 나누어 다스리는 12대신관 중 한 사람이다. 그랬기에 마법으로 역용하고 있는지 아닌지 정도는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가 본 엘의 모습은 갓 20대가 된 청년의 그것과 일치했다. 그런데 그런 이가 마탑주라니? 마탑주라면 최소 7클래스 이상 접어든 마법사를 일컫는 말이 아니던가? 눈앞의 청년은 분명 자신이 마탑주라고 했다. 그렇다는 것은 즉, 7클래스를 돌파한 대마법사가 분명했다. 소년 대마법사라고 하니 얼핏 들은 소문이 생각났다. 블리어드 제국의 아인하트 후작가를 휘저은 소년 대마법사. 바로 그의 존재가 볼레크의 뇌리에 떠오른 것이다.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 볼레크는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 버렸다. 그가 생각해도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세상에 그랜드 마스터와 자웅을 겨룰 수 있는 골렘을 부리고, 7클래스 마법사 둘을 상대할 수 있는 7클래스 마법사가 어디 있는가? 터무니없는 소문임이 분명했다. 엘은 찬찬히 시선을 옮겨 광휘의 기사단을 훑었다. 그리고 느릿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당신들이 찾고 있는 것이 성녀라고 했습니까? 전신에 어마어마한 신성력을 담고 있는 여자를 제가 데리고 있습니다." 엘의 말에 모두의 표정이 밝아졌다. "오오!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드디어 성녀님을 찾았나이다!" 오랜 여정이었다. 수백 년 전 성녀가 나타났을 때보다 족히 3배 이상의 시간이 걸려서야 성녀가 있는 곳을 찾을 수 있던 것이다. 볼레크 대신관이 기쁨이 담긴 어조로 물었다. "그래, 성녀님은 잘 계십니까?" 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있다면 잘 있을 수 있겠지요." "다행입니다. 마탑주님이 아니었다면 성녀님이 위험에 노출될 수도 있었을 터. 헌데 성녀님과는 어떤 관계이십니까?" "글쎄요........." 그에 엘이 미소를 지었다. 모하게 불안감을 자극하는 미소였다. ‘설마.......’ 그리고 볼레크가 그 표정에 불안한 상상을 할 때, 엘이 결정타를 꽂았다. "당신들이 성녀라 부르는 여인은 저와 결혼할 여인입니다." 쿠궁! 볼레크를 비롯하여 광휘의 기사단원 모두 순간 번갯불에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어찌 안 그러하겠는가. 성녀는 그 누구보다 고결하고 순결한 존재다. 성녀로 선택된 여인은 일평생 결혼을 하지 못할 뿐더러 남자의 신체를 만지는 것조차 금지된다. 그런데 그런 성녀와 결혼할 사이라니? 이는 있어서도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결코 존재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어찌나 충격이 컸는지 볼레크가 말을 더듬었다. "그, 그렇다는 건........." 엘이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물론, 그녀를 내줄 수 없습니다. 내 모든 것을 걸고 당신들을 막을 테니까." "으음!" 엘의 말에 볼레크를 비롯한 성기사들이 신음을 흘렸다. 7클래스 마법사가 공개적으로 자신들을 적대하니 난감했던 것이다. 볼레크가 말했다. "설마 마법으로 저희를 상대하려는 건 아닐 테지요? 성기사들의 항마력은 대단합니다. 아무리 당신이 7클래스 마법사라고 해도 성기사들을 상대하기에는 무리일 겁니다." 그의 말대로다. 성기사가 착용한 성갑은 어마어마한 항마력을 지니고 있으며, 신성력 특유의 방어는 웬만한 마법은 타격을 주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방어력을 지니고 있다. 그들이 신음을 흘린 건 자신들이 임무를 완수하지 못할 것이란 생각 때문이 아니다. 단지 7클래스 마법사가 적이 되면 상당히 껄끄러워지기에 그런 것이다. "보통은 그렇겠지요........." 볼레크의 말에 엘은 빙긋 웃었다. 그리고 양손을 넓게 벌리며 말했다. "하지만 저는 쉽지 않습니다. 처음 제 여인의 변화를 보고 저는 그때부터 준비를 시작했으니까요. 저는 성국 전체와 싸우더라도 그녀를 내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볼레크가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며 말했다. "그럼, 남는 것은 전쟁뿐입니다." "전쟁을 하더라도 물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엘의 몸이 뒤로 향했다. 그리고 엘은 점점 물러나는 속도를 빠르게 하며 말했다. "당신들을 물리치고, 성국에게 제 의지를 보임으로써 제 것에 욕심내는 이들에게 경고할 것입니다. 자, 오십시오!" 그와 함께 엘의 몸이 계곡 속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본 볼레크가 외쳤다. "우리도 전진한다! 계곡 안으로 들어가서 성녀님을 모셔온다!" "알겠습니다. 여신을 위하여!" "여신을 위하여!" 여신을 찬양함과 동시에 성호를 그으며 전진했다. 어느덧 성기사들의 전신에 은은한 신성력이 어리고 있었다. 상대는 7클래스 마법사다. 그리고 마탑이라고 했으니 다른 마법사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발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보통 그들의 방어력으로 5클래스 마법까지 막아 낼 수 있지만 대신관인 볼레크의 신성 마법이면 7클래스 마법도 막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거침없이 전진한 그들은 계곡 안으로 완전히 들어섰다. 그리고 한쪽에서 그들이 계곡 안까지 들어간 것을 확인 한 엘이 마법을 전개했다. "다크 포그(Dark Fog)!" 스으으으! 그와 함께 마나가 요동치더니 곧이어 어두운 계열의 마법이 주변에 전개되기 시작했다. "음! 이건?" 주변 마나움직임이 변하자 볼레크와 하이덴이 가장 먼저 알아차렸다. 그리고 점차 어두워지는 주변을 보며 하이덴이 말했다. "무슨 마법일까요? 처음 보는 마법인데......." "마탑주가 준비한 패가 이거겠지. 아니면 우리를 시험하려는 것일지도.... 일단 항마력을 단단히 끌어올리게. 우리의 목적은 마탑주를 잡는 게 아니라 성녀님을 모셔가는 것이니 말이네." "알겠습니다. 모두 빛의 축복을 사용한다. 빛의 축복!" "빛의 축복!" 하이덴을 비롯한 다른 성기사들이 외치자 그들의 주변에 새하얀 광채가 터져 나왔다. 파아앗! 그와 함께 그들의 주변에 뿜어지던 신성력이 더욱 강렬해졌다. 그들이 전개한 신성 마법은 성기사들에게 가장 기본이 되면서 널리 쓰이는 신성 마법 빛의 축복이다. 항마력을 끌어올려주고 움직임을 빠르게 만들어 주는 효과가 있다. 항마력을 높인 성기사들은 거침없이 전진했다.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엘은 방금 전 전개한 다크 포그의 진짜 힘을 발동했다. "파이브 센시스 리무브(Remove)!" 샤아앗! 어두운 계열의 마법이 요동치며 엘의 구동어에 따라 그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품 안에서 안경을 꺼내 썼다. "자, 이제 가 볼까." 그와 함께 엘은 다크 포그 안으로 스며들었다. 엘이 전개한 다크 포그, 그것은 그가 성국과 일전을 대비하여 만든 희대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다크 포그에서 전개된 파이브 센시스 리무브에는 무려 다섯 가지 마법이 중첩되어 있다. 시야를 빼앗는 블라인드(Blind). 소리를 듣지 못하는 디프(Deaf). 냄새를 못 맡게 하는 센틀리스(Scentless). 미각을 상실시키는 테이스트 센스 리무브(Taste sense remove). 촉각 상실을 유도하는 센스 오브 터치 리무브(Sense of touch remove). 그 다섯 가지 마법이란 위와 같다. 인간의 오감을 삭제한다는, 엘이 아니라면 상상하기 힘든 무시무시한 마법이다. 물론 이러한 마법은 효과가 단시간에 불과하고 저 클래스 마법이라 고위 마법사나 항마력이 뛰어난 이들에게 적용되지 않는 마법이다 하지만 엘이 누구인가.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다와 이곳 사람들과 다른 마법 체계를 세우고,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마법을 여러 개 만 들어 내지 않았던가. 아이러니 하게도 엘은 항마력이 높은 성기사들을 상대하기 위해 고심할 때 생각한 것이 바로 전생에 하던 게임 스타크래프트였다. 물론 상황은 많이 다르다. 하지만 엘이 생각한 것은 상대적으로 낮은 자신의 전력으로 월등한 성기사들을 어떻게 피해 없이 제압하느냐가 관건이었다. 터무니없는 생각이었지만 전생의 게임에서는 그것이 가능했다. 바로 그가 즐기던 저그 종족의 유닛, 디파일러의 다크 스웜을 생각해 낸 것이다! 수많은 벌레 구름으로 근접 유닛을 절대에 버금가게 만드는 그것을 생각해 낸 엘은 결계에 다크 스웜과 비슷한 효과를 낼 마법을 중첩시켰다. 물론 항마력이 높은 성기사들에게 저 클래스인 이 마법들이 효과를 볼 리 만무했다. 엘이 생각해 낸 것은 웹으로 기사들의 움직임을 방해했던 것처럼 주변 환경에다가 감각을 빼앗는 마법을 전개시키는 것이었다. 그 마법은 성기사들에게 직접적으로 전개된 것이 아니다. 단지 대기에 전개된 마법 여러 개가 동시에 발현되어 주변에 있는 성기사들도 덩달아 휘말리게 하는 것이다. 저 클래스 마법 다섯 개가, 인간의 감각 다섯 개를 한꺼번에 빼앗는 것인 만큼 무시하지 못할 강력한 마법으로 재탄생하게 된 것이다. 전개된 마법은 곧장 성기사들을 덮쳐 나갔다. 갑자기 앞이 깜깜해지고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자 성기사들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 이건 뭐야?" 마스터에 들지 못한 성기사들은 모든 감각을 일시에 빼앗기자 삽시간에 혼란의 감정에 지배당했다. 물론 상황은 하이덴도 다르지 않았다. "이, 이건!" 광휘의 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하이덴은 마스터에 든 성기사라 항마력이 다른 성기사보다 월등했다. 하지만 그 또한 완벽하게 마법에 벗어나지 못했다. 거의 모든 감각이 차단된 것이다. 그나마 다른 기사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촉각이 어느 정도 살아 있어 혼란스러워하는 다른 이들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이덴도 내심 당황했지만 그가 무너지면 다른 이들도 무너질 수 있었기에 최대한 감정을 추스르며 외쳤다. "모두 당황하지 마라! 우린 지금 마법에 당한 것뿐이다. 침착하게 자세를 가다듬고 빛의 축복을 외워라! 대신관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을 내려주실 것이다! 빛의 축복!" 그 외침이 귀가 먼 성기사들에게 들릴 리 없다. 하지만 성기사들은 특유의 평정심으로 빛의 축복을 외쳤다. "빛의 축복!" 그러자 새하얀 빛이 그들을 휘감으며 신성 마법이 발현 되었다. 하지만 그것뿐, 그들에게 걸린 마법은 사라지지 않았다. 신성 마법이 효과를 보지 못한 것이다. 경악에 빠진 하이덴이 중얼거렸다. "도대체 이건 무슨 마법이란 말인가........." 이런 종류의 마법은 대부분 5클래스를 넘기지 않는다. 그런데 5클래스 마법까지 무리 없이 무시할 수 있는 성기사들이 마법에 걸려 혼란에 빠지다니. 정말 믿기지 않을 노릇이다. "우리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어." 자신들의 힘으로 빠져나을 수 없음을 느낀 하이덴이 소리쳤다. "볼레크 대신관님!" 크게 소리쳐 불렀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하기야 모든 감각이 차단되었으니 상대방에게 말이 전달될 리 없던 것이다. 설령 들었다고 해도 들을 수 없는 처지였으니 할 말 다한 것이다. "......." 하이덴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엘이 빙긋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의 팔에는 정신을 잃은 볼레크가 축 늘어져 있었다. 대신관이 펼치는 신성 마법은 다크 포그의 영향을 상당 히 줄일 수 있었기에 엘이 미리 손을 쓴 것이다. 엘의 전신에는 은은한 푸른빛이 감돌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안경으로부터 쭉 이어져 있는데, 놀랍게도 오감을 차단하는 다크 포그로부터 자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다섯 개의 마법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만큼 이런 아티팩트는 엘밖에 만들지 못하는 엘만의 아티팩트인 것이다. 엘은 안경을 슬쩍 고쳐 쓰며 말했다. "성녀를 위한 당신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지만 세레나를 내줄 수는 없어요. 그녀는 내 여인이니까요." 스팟! 그와 함께 엘의 몸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블링크를 전개한 것이다. 그리고 엘의 모습은 다크 포그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마탑 근처에 나타났다. 그곳에는 10여 명의 사람이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엘에게 충성을 맹세한 기사들이었다. 엘은 볼레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미 그들에게 모든 사정을 털어놓은 후였다. "결정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저는 제가 결정한 걸 미룰 생각이 없습니다. 무엇을 선택하건 그건 여러분의 몫입니다." 엘의 말에 그들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 침묵을 깬 것은 마이더였다. 그는 자신의 손에 잡힌 창을 굳게 움켜쥐며 입을 열었다. "탑주님은 저희 모두를 사람답게 살게 해 주셨습니다. 설사 지옥에 뛰어드는 일이라도 저는 탑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 말이 기폭제였다. 기사들의 리더격인 모스가 결심을 굳힌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탑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런데......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저희는 승리할 수 있습니까?" 모스의 물음에 모든 기사들의 시선이 엘에게 모였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하나다. 바로 가족들의 행복. 그들은 지난 세월 트를 벨리에서 오직 그것만을 위해 검을 휘둘러 왔다. 엘은 그런 그들의 마음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렇다. 이들도 지킬 것이 있는 이들이다. 과연 자신은 이들을 끝까지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약속해 줄 수 있다. 인간답게 살 수 있게 해 주겠다는 것! 자신이 사는 곳에 함께 사는 것만으로도 이들은 행복할 자격이 있다. 그것이 엘의 신조였다. 엘은 고개를 강하게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저를 믿으세요. 이번 싸움은 승리할 수 있습니다." 확신이 담긴 엘의 말. 그들은 엘의 말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모스가 말했다. 그는 엘의 모습에 믿음을 얻었다. "믿겠습니다." "저도 탑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저 또한......." 10명에 이르는 기사들이 모두 엘을 따르겠다고 하였다. 그들의 말에 엘은 크게 힘을 얻어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엘이 손을 휘젓자 허공에 아공간이 열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엘이 꺼내든 것은 다름 아닌 안경이었다. 엘은 그것을 기사들에게 하나씩 건네주며 말했다. "이건 제가 설치한 저 마법에 영향을 받지 않는 아티팩트입니다. 이걸 쓰면 여러분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물건을 더 꺼내 들었다. 그것은 팔찌 같이 생긴 새하얀 물건이었다. 엘이 설명을 덧붙였다. "이것은 신성력을 봉인할 수 있는 봉인 팔찌예요. 이걸 채우면 저들은 일반인 정도의 힘밖에 내지 못할 것입니다." 기사들에게 1개씩 모두 나눠 준 엘이 다크 포그가 펼쳐진 곳을 가리켰다. "저곳에 갇혀 있는 이들은 성국에서 상위 급에 속하는 광휘의 기사단입니다. 하지만 오감을 차단당한 저들은 여러분의 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상처를 입히지 말고 제압해서 데려오세요." "알겠습니다." 광휘의 기사단! 그 명성은 익히 들어 왔지만 엘을 굳게 믿고 있는 그들은 의심 없이 엘이 건네주는 걸 받아들였다. 그리고 안경을 쓴 뒤 봉인 팔찌를 손에 쥔 채 다크 포그 안으로 들어갔다. "크으으!" 오감을 모두 차단당한 광휘의 기사단은 저마다 신음을 홀리며 마법에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것도 역부족. 다크 포그에 의해 빼앗긴 감각은 도저히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이덴은 이 방법 저 방법을 사용하다가 포기한 듯 몸을 축 늘어뜨렸다. 도저히 사라진 오감을 되찾을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된단 말인가........." 그 순간 하이덴은 자신의 정신이 흐려지는 걸 느꼈다. 그와 함께 그의 몸이 그대로 허물어졌다. 이 순간만큼은 마스터에 도달한 육체적 능력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하이덴이 쓰러진 자리에 한 인영이 등장했다. 그는 마이더였다. 마이더는 쓰러진 하이덴을 보며 중얼거렸다. "탑주님의 말씀이 사실이었군. 좋아, 이런 일이라면 어려울 게 없지." 상황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오감을 잃고 헤매던 기사들은 갑자기 정신이 흐려지는 느낌과 함께 정신을 잃었고, 순조롭게 성기사들을 제압한 기사들은 마침내 100명에 이르는 성기사들을 모두 제압할 수 있었다. "성기사들을 모두 제압했습니다." 모스가 다크 포그 밖으로 나와 엘에게 말했다. 그는 소문으로만 듣던 성기사들을 제압한 것이 몹시 흥분되는지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내셨군요. 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아 다행입니다." 그러면서 엘은 결계 속으로 들어가 다크 포그를 해제했다. 그러자 결계를 가득 채우던 어두운 색 계열의 마법들이 사라지며 결계 안쪽 상황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새하얀 성갑을 차려입은 100명의 기사가 빠짐없이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팔에는 빠짐없이 봉인 팔찌 가 채워져 있었다. 엘이 기사들을 보며 말했다. "수고스럽지만 저들을 옮겨 주세요. 앞으로 긴 시간 동안 이곳에 머물게 될 테니 다치지 않게 신경을 써 주세요." "알겠습니다." 대답을 한 기사들이 성기사들을 1명씩 데리고 옮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엘은 두 눈을 감고 작게 중얼거렸다. "이제 시작인가........." 대신관 1명과 광휘의 기사단 전체가 사라진 이상, 성국은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일 것이다. 대륙에 큰 바람이 불어오려 하고 있다. 아주 큰 바람이....... 성국의 그랜드 마스터 다이어드 공작 성국을 다스리는 신의 대리자 교황은 대신관들을 소집 하였다. 볼레크를 제외한 11명의 대신관이 모인 가운데, 교황은 무거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볼레크 대신관이 트를 벨리로 들어간다고 소식을 전한 지 이 주가 지났소. 그런데 아무런 연락이 없다는 건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걸 뜻하는 거요?" 교황의 말에 대신관들의 얼굴에 짙은 근심이 서렸다. 성국의 기사단인 광휘의 기사단과 대신관 1명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렇다는 건 트를 벨리 안에 들어간 그들의 신변에 무언가 이상이 생겼음을 뜻한다. 교황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볼레크 대신관의 말에 의하면 트를 벨리 안에 이번 톨리안 왕국에 새로 등장한 마탑이 들어섰다고 하오. 대신관은 그 마탑주가 성녀님을 데리고 있을 확률이 높다고 하였소." "마탑주가 성녀님을 데리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한 대신관의 말에 교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볼레크 대신관과 광휘의 기사단이 사라졌으니 그것이 확실한지 모르겠지만 말이오." 그러면서 교황은 대신관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한 바를 말하였다. "상황이 어떻게 되었든 간에 본 성국의 인물들이 실종되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 그래서 추가 조사대를 파견하기로 결정을 내렸소. 대신관들의 생각은 어떻소?" "예하,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아르디모스 대신관의 말에 교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견이 있다면 말해 보시오, 대신관." 그에 아르디모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이번 사항은 결코 간단한 사항이 아닙니다. 수백 년 만에 출현하신 성녀님이신 만큼 필시 여신께서 깊은 뜻을 가지고 계실 터. 그리고 신탁 내용에 직접 구해 달라는 말이 있었으니 애초에 저희가 너무 쉽게 생각했었는지 모릅니다." 아르디모스의 말에는 신탁의 정확한 해석을 담고 있었다. 그랬기에 대신관들은 물론 교황도 공감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모두가 동감하는 눈치를 보이자 아르디모스가 계속해 서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저희들 또한 신의 뜻을 받들어 전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저는 교황 예하의 의견에 적극 찬성합니다. 아니, 이번에 성국 최강의 기사이신 다이어드 공작님과 성국 최강의 기사단인 은십자 기사단이 나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아르디모스의 말에 모두가 놀란 시선을 하였다. 당연하다. 지금 아르디모스가 말한 다이어드 공작과 은십자 기사단은 성국 전력의 30퍼센트를 차지하는 어마어마한 전력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다이어드 공작. 그는 대륙에 단 10명뿐인 그랜드 마스터에 이르렀다. 그 실력은 그랜드 마스터 중 하위권에 속하나 성기사인 그를 제압할 수 있는 이는 전체 그랜드 마스터 중 채 3명을 넘지 못한다고 한다. 웅혼한 신성력으로 펼치는 탄탄한 방어는 그 누구도 꿰뚫기 힘든 철벽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신성력을 바탕으로 펼치는 공격은 그야말로 태산을 부수는 어마어마한 힘이라고 한다. 오늘날 성국이 대륙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도 다름 아닌 다이어드 공작의 존재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것은 다이어드 공작이 홀로 싸울 때 이야기다. 성국에는 수많은 신관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직접적인 전투력은 없으나 탁월한 축복 마법으로 성기사들의 능력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 때문에 대신관 1명이 다이어드 공작에게 축복 마법을 걸 경우 그의 실력은 그랜드 마스터 상위권에 꼽힐 정도로 강해진다. 수십 명의 소드 마스터를 압도할 수 있는 그랜드 마스 터. 성국의 자랑이자 최강의 무기이기도 한 그를 지금 파견 하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가장 먼저 놀라움에서 헤어 나온 교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디모스의 말에 충분히 공감을 한 것이다. "확실히...... 다이어드 공작을 보내는 것만큼 확실한 건 없겠지. 게다가 은십자 기사단도 같이 파견되니......." 은십자 기사단은 성국 최강의 기사단이다. 다이어드 공작이 단장으로 있는 은십자 기사단은 열 명의 마스터와 100명의 상급 익스퍼트로 구성되어 있다. 대인전에 능숙하며, 1인을 상대하는 것도 탁월한, 그야 말로 성국 최강의 기사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교황이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그는 대신관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아르디모스 대신관의 의견을 받아 다이어드 공작과 은십자 기사단을 파견하기로 하겠소," "하지만.... 예하!" 몇몇 대신관이 너무 과한 전력을 보내는 게 염려스러워 자리에서 일어나자 교황이 말에 강하게 악센트를 주었다. "그리고! 보조 마법에 능한 칼리오 대신관과 렉시리온 대신관, 그리고 듀오 대신관을 같이 보내겠소." "......!" 교황의 발언에 모든 대신관들은 물론 의견을 냈던 아르디모스까지 놀란 표정으로 교황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교황이 한결 풀어진 음성으로 말하였다. "성녀님을 찾는 건 우리가 전력을 기울여야 할 일이오. 이번 볼레크 대신관과 광휘의 기사단의 실종을 보아 결코 만만치 않은 힘이 성녀님을 데리고 있을 터. 그렇다면 압도적인 힘으로 그들을 제거하고 성녀님을 찾아와야 하오." 그러면서 교황은 자신이 지명했던 3명의 대신관을 차례대로 바라보며 말했다. "대신관들의 임무가 중요하오. 성녀님을 데리고 있는 이들이 강대한 힘을 지녔다고 하여 피해가 있어서는 안 될 것이오. 알겠소?" 교황의 의지는 확고해 보였다. 성녀를 찾는 데 한차례 실패를 겪자 이번에는 확실하게 일을 처리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런 교황의 의지를 느꼈는지 세 대신관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예하." "좋소." 그들의 대답에 교황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르디모스에게 시선을 옮겼다. "아르디모스 대신관에게는 다이어드 공작을 설득하는 일을 맡기겠소." "맡겨 주십시오, 예하." 아르디모스가 고개를 깊게 숙였다. 교황이 시선을 다시 대신관들에게 옮기며 말했다. "성녀님을 찾는 일에 모든 신자들이 한 마음이 되어 움직여야 할 것이오. 이것은 본인의 의지이기도 하며, 여신님의 의지이기도 하오. 모두 유의하시오!" 11명의 대신관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 예하!" 성국의 수도에 위치한 다이어드 공작가 저택, 본시 귀족의 근본적인 힘이라 할 수 있는 영지를 소유 하지 않은 성국의 귀족은 권력이 없다. 모든 권력을 신관들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이어드 공작가 또한 마찬가지다. 작위는 공작 이지만 다이어드 공작은 영지가 없는 작위만 가지고 있는 귀족이다. 그럼에도 다이어드 공작가는 성국에 막강한 영향을 끼 치고 있다. 허울뿐인 공작이지만 당대 다이어드 공작은 인간의 한 계를 뛰어넘어 위대한 검사라불리는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섰기 때문이다. 때문에 성국의 모든 성기사들은 다이어드 공작을 기사로서 숭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곧 성국 군부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것과 직결된다고 볼 수 있다. 다이어드 공작은 대륙에 존재하는 10명의 그랜드 마스터 중 가장 어리다. 다이어드 공작을 제외하고 가장 나이 어린 그랜드 마스터가 68세고, 다이어드 공작은 올해 57세에 불과하다. 가장 나이가 많은 그랜드 마스터와는 무려 30여 년의 차이가 난다. 10명의 그랜드 마스터 중 가장 마지막에 검증된 그랜드 마스터이기도 했기에 대륙 사람들은 그를 10명의 그랜드 마스터 중에서 하위권으로 순위를 매김 하였다. 나이 차이에서 비롯되는 경험과 검술 실력 차이는 어마 어마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검사이자 신을 모시는 신자인 그는 그랜드 마스터 중 하위권이란 사실 자체가 신께 누가 된다고 생각하였다. 때문에 그는 그랜드 마스터로 불리기 시작한 때부터 줄곧 수련에만 매진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막연히 그가 그랜드 마스터 중 하위권이라 생각하지만 실제 그의 실력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할 수 있다. 근 10년 가까이 저택에서 수련을 쌓고 있는 다이어드 공작가에 한 사람이 방문을 하였다. 그는 교황에게 명령을 받고 방문한 아르디모스였다. 다이어드 공작가 소속 기사에게 안내를 받은 그는 응접실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아르디모스는 양손을 포개며 생각에 잠겼다. "공작님이 승낙을 하셔야 할 텐데......." 교황에게 자신 있게 다이어드 공작을 파견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의 마음에는 불안감이 가득했다. 교황의 생일 파티에도 등장하지 않는 이가 바로 다이어드 공작이었기 때문이다. 오로지 여신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기 위해 수련만 반복 하는 다이어드 공작이 행여 거절할까 내심 걱정이 되었다. "아니지. 누구보다 여신을 존경하고 받드는 공작님이라면 성녀님을 찾는 데 기꺼이 도움을 주실 테지." 그때, 중저음의 음성이 또렷하게 아르디모스의 귓가에 꽂혀 왔다. "오랜만입니다, 대신관님." 아르디모스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곳에는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중년인이 태산처럼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정체는 성국의 자존심이자 10대 그랜드 마스터의 1인인 다이어드 공작이었다. 아르디모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공작님을 뵙습니다." 대신관이란 직책은 성국 내에서 후작과 동급으로 인정받는다. 하지만 공작에 비교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다이어드 공작은 대륙 10대 그랜드 마스터의 1인 아니던가. 모든 기사들의 우상이 되는 그랜드 마스터인 만큼 두 사람의 위치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아르디모스의 인사에 다이어드 공작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인사는 되었습니다. 같은 신을 모시는 신자끼리 상하를 정하는 게 이상하지요. 헌데 항상 성국을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는 대신관님께서 무슨 일로 찾아오신 겁니까?" 그러면서 다이어드 공작이 아르디모스 맞은편에 위치 한 소파에 자리했다. 그가 앉자 아르디모스가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 여신께서 신탁을 내려주셨습니다. 대륙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당신의 힘을 부여받은 성녀께서 지상에 내려오셨다고 말입니다." 다이어드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저택에 조용히 수련을 하며 시간을 보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귀가 막힌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만." "그럼 이야기하기가 편해지겠군요." 아르디모스가 볼레크와 광휘의 기사단 실종 사건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이번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조심스럽게 말했다. "교황 예하께서는 이번에 강력한 의지로 공작님과 은십자 기사단 파견을 주장하셨습니다." 아르디모스의 말에 다이어드 공작이 눈을 감았다. 생각에 잠긴 것이다. 그 모습을 아르디모스는 초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10년 전 자신의 저택에 칩거하면서 다이어드 공작은 설사 교황의 명령이라도 자신의 의지가 따르지 않으면 듣지 않겠다고 말한 바 있다. 자신은 신의 뜻을 받드는 신자지 교황의 명령을 따르는 자가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때문에 이번 사항도 다이어드 공작이 승낙하지 않으면 결코 이뤄지지 않을 사항이었다. "흠!" 한편 다이어드 공작은 아르디모스의 말에 고민에 빠졌다. 대신관인 볼레크와 광휘의 기사단이 실종되었다는 건 성국의 웬만한 힘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걸 뜻한다. 트를 벨리라는 곳에 마탑이 있던 트롤들이 있던 간에 그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성녀라.... 좋아.’ 가이아 여신을 독실하게 믿는 다이어드 공작은 성녀의 출현에 마음이 기우는 걸 느꼈다. 성녀를 찾는 것이야말로 여신의 의지라 생각한 것이다. 다이어드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성녀님을 찾는데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아르디모스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는 다이어드 공작에게 깊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공작님," 다이어드 공작은 당치도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신의 말씀을 따르는 일입니다. 대신관님이 고마워할 필요 없습니다." 그러면서 다이어드 공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등을 돌리며 아르디모스에게 물었다. "예정일은 언제입니까?"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결정될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때 제게 알려 주시지요. 저는 수련하던 걸 끝내야 해서. 그럼........." 그 말과 함께 다이어드 공작이 응접실에서 사라졌다. 사라진 다이어드 공작의 모습을 보며 아르디모스는 미소를 지었다. 그 시각 엘은 디벨 상단주인 디벨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금탑에 직접 찾아온 디벨은 엘이 벌인 일의 전말을 듣고 입을 떡 벌렸다. "지, 지금 무슨 말씀이십니까? 서, 성녀님을 엘 님이 데리고 계시다고요? 게다가 성국의 대신관과 광휘의 기사단을 사로잡았다니...... 허어!" 놀라움이 겹치고 겹쳐 잠시 숨을 몰아쉰 디벨이 엘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쩌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상대는 성국입니다! 제국들도 피하는 성국이라고요!" 하지만 엘에게도 할 말이 있었다. 자신의 것을 지키는 일 아닌가. 그들과 타협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엘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어쩔 수 없잖아요? 세레나는 제가 사랑하는 여자예요. 제 것을 빼앗으려 하는 이는 제국이건 성국이건 가만 놔두지 않겠어요." 눈에 은은한 붉은 기운이 아른거리는 엘을 보며 디벨은 고개를 저었다. 어마어마하게 뛰어난 능력을 가졌지만 이따금 보이는 집착 비슷한 모습은 디벨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잠시 엘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디벨이 입을 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엘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자신이 생각한 바를 말했다. "조만간 성국이 새로 전력을 정비하여 이곳으로 보내겠지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눠 보려고 생각 중입니다. 일단 저에게는 대신관 한 명과 기사단 전체가 포로로 잡혀 있으니까요." 성국의 12기둥 중 하나인 대신관을 사로잡았다. 게다가 기사단 전체의 목숨이 엘의 손에 쥐어져 있으니 일단 한 가지 수단이 마련되는 셈이다.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인 디벨이 엘을 바라보며 말했다. "솔직히 이번 사항은 제가 앞으로 나서기 힘든 사항입니다. 하지만 뒤에서 지원은 얼마든지 가능하니 원하시는 게 있으면 시켜만 주십시오." 그에 엘이 자신이 생각했던 바를 말했다. "갑자기 백 명의 입이 늘어나니 식량을 좀 더 많이 구입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트롤의 피 공급도 조금씩 줄여 주세요." 디벨이 고개를 갸웃했다. "식량은 알겠습니다만 트롤의 피는 왜......." 그에 엘이 빙긋 웃었다. "제 말대로 해 주세요. 다 생각이 있거든요." 말을 하는 엘의 눈은 짙은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출전 준비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항상 출전 준비가 되어 있는 은십자 기사단은 3일 만에 그 준비를 끝마쳤고, 이틀 후 다이어드 공작이 준비를 갖추자 곧장 출전을 하게 된 것이다. 교황은 성녀 탐사대에 참가해 준 다이어드 공작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내 제의를 받아 주어서 고맙네, 공작." 교황의 말에 다이어드 공작은 겸양의 말을 하였다. "아닙니다. 신의 말씀에 따르는 일인데 어찌 감사의 인사를 받겠습니까." 그런 그의 모습이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믿음직스럽게 보이게 하였다. 교황이 웃음을 지었다. "언제나 믿음직하군. 공작과 은십자 기사단의 활약으로 성녀님을 데려오도록 하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다이어드 공작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교황이 한쪽에 서 있는 10여 명의 로브인들에게 시선을 주며 입을 열었다. "부탁하네." "알겠습니다." 수장으로 보이는 이가 대답하며 앞으로 나섰다. 성국에는 마법사가 없다. 성국에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성기사와 신관뿐이다. 때문에 대륙 각지에 깔려 있는 워프 게이트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부득이 공간 이동을 필요로 할 때는 마탑에 의뢰를 한다. 지금 성국에 온 마법사들은 8클래스 마스터 라이젠이 탑주로 있는 청탑의 마법사들이다. 다이어드 공작과 은십자 기사단을 톨리안 왕국으로 워프 시키기 위해 교황이 특별히 초청한 것이다. 그들은 며칠 전부터 이곳에 임시 워프 게이트를 설치하는 작업을 하였다. 그리하여 언제라도 워프 게이트를 발동시킬 수 있었다. 교황은 이번 탐사대에 속한 칼리오 대신관과 렉시리온 대신관, 듀오 대신관을 보며 말했다. "다이어드 공작과 은십자 기사단의 임무도 막중하지만 세 대신관의 임무도 막중하오. 부디 아무 다친 사람 없이 귀환하길 바라오." 3명의 대신관이 고개를 깊게 숙였다. "믿어 주십시오, 예하." "좋소, 내 그대들을 믿겠소." 그러면서 로브인들에게 다시금 시선을 주자 로브인 중 한 사람이 다이어드 공작에게 물었다. "마법을 전개해도 되겠습니까?" 은십자 기사단과 세 대신관을 힐끗 본 다이어드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개해도 좋소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10여 명의 마법사가 워프 게이트에 마나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마나가 주입됨에 따라 워프 게이트에서 강렬한 마나 흐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법사들의 입에서 구동어가 터져 나왔다. "워프(Warp)!" 번쩍! 주변을 압도하는 빛이 폭사되면서 성녀 탐사대에 속한 사람들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교황이 나직하지만 힘 있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다이어드 공작, 성녀님을 모시고 있는 이에게 성국의 의지를 보여 주시오." 성국 일행이 이동을 한 곳은 트를 벨리와 루비어스 백작령 사이에 존재하는 메탄 평원이다. 이곳은 본래 루비어스 백작령에 속한 곳이지만 트를 벨리에서 쏟아져 나오는 트를 때문에 어느 순간부턴가 버려진 평원으로 불리기 시작한 곳이다. 평원에 도착한 다이어드 공작은 은십자 기사단의 부단장인 코로네 백작에게 명령을 내렸다. "상황을 들어 보면 광휘의 기사단은 트를 벨리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멀쩡했다더군. 트를 벨리까지 쉬지 않고 진군한다." "알겠습니다, 전하." 기사의 흠모와 상관에 대한 복종심을 나타내며 코로네 백작은 깊게 고개를 숙인 뒤 성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모두 트를 벨리까지 전진한다. 여신을 위하여!" "여신을 위하여!" 은십자 기사단은 거침없이 넓은 평원을 전진해 나가기 시작했다. 다이어드 공작은 이번에 같이 온 3명의 대신관을 보며 말했다. "세 대신관께서는 기사단 후미에 붙어 따라가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렇게 트를 벨리로 접근한 그들은 반나절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트를 벨리 초입에 들어서게 되었다. 다이어드 공작은 트를 벨리를 한번 스윽 훑어보더니 중얼거렸다. "천혜의 자연 요새로군. 만약 이곳을 지키고자 한다면 일만 군대로 능히 백만 대군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사방이 인간의 손길을 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이곳은 아름다우면서도 험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자신들은 이곳의 풍경을 감상하러 온 것이 아니다. 자신들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 바로 성녀를 찾는 것이다. 다이어드공작이 지체 없이 명령을 내렸다. "모두 전진한다." "예, 전하!" 평원을 거침없이 전진한 것처럼 은십자 기사단은 험하기 그지없는 트를 벨리를 능숙하게 헤쳐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짙은 안개가 내려앉은 공간을 발견하게 되었다. 바로 트를 벨리 분지로 들어서는 곳이었다. 코로네 백작이 다이어드 공작에게 말했다. "성기사 일부를 보내 정찰을 시키도록 하겠습니다." 다이어드 공작은 저 안개가 본능적으로 성녀와 관련이 있을 거란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게." "예! 전하!" 힘차게 대답한 코로네 백작은 마스터 급 성기사 3명과 20명의 성기사를 정찰 보냈다. "......." 한참의 시간이 지났지만 돌아오는 성기사는 아무도 없었다. 코로네 백작이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한참이 지났는데 왜 아무런 보고가 없는 거지?" 그러면서 조바심이 난 그는 다이어드 공작의 허락을 구한 뒤 마스터 급 성기사 3명과 성기사 30명을 투입했다. 하지만 그들 또한 한참의 시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다. 순식간에 6명의 마스터 급 성기사와 50명의 성기사가 사라지자 다이어드 공작이 잔뜩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너무 늦게 알아차렸군. 저 안개에는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능력이 있다. 모두 나를 따라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그 말과 함께 다이어드 공작이 안개를 향해 조심스럽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성기사들과 대신관들이 그 뒤를 따랐다. 안개 속은 어두컴컴했다. 그랜드 마스터에 이른 다이어드 공작조차 방향 감각을 제대로 잡지 못할 만큼 어두웠기에 그는 눈을 똑바로 뜬 채 곧장 앞을 향해 전진했다. "응?" 그러길 잠시, 다이어드 공작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바로 자신의 뒤를 쫓아오는 이들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은 것이다. 그제야 다이어드 공작은 자신의 감각이 이 안개 속에서 상당한 제약을 받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이런, 바보 같은!" 다이어드 공작은 너무 안이한 자신을 책망하면서 곧장 허리춤에서 워 해머(War Hammer)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양의 신성력을 워 해머에 주입하며 그대로 안개를 향해 내리쳤다. 쏴아아아! 새하얀 신성력이 어마어마한 기세를 품고 그대로 안개를 2등분하였다. 눈으로 보고 있으면 신성력이 과연 공격력이 약한 힘인지 의문이 갈 정도의 어마어마한 위력이었다. "이건 뭐란 말인가?" 갈라진 안개 사이로 드러난 광경은 매우 발달된 도시의 모습이었다. 트를 벨리 안에 도시가 있다니? 그 의문에 다이어드 공작이 고개를 갸웃거리려던 찰나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들려왔다. "쳇! 어쩔 수 없군." 그와 함께 짙은 안개가 서서히 걷히며 주변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갑자기 짙은 안개가 걷히자 다이어드 공작은 본능적으로 물러나며 경계의 자세를 취했다. 마침내 안개가 모두 걷히자 다이어드 공작은 침음을 흘렸다. "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정말 멋진 하나의 도시였다. 건물 하나하나가 계획적으로 지어진 듯한 계획 도시...... 집집마다 배치된 도로는 그가 성국 수도에서도 보지 못한 아름다운 도시였다. 그리고 한쪽으로 시선을 옮겼을 때, 다이어드 공작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새하얀 성갑을 차려입은 기사들이 널브러져 있던 것이다. 그 숫자는 50명을 넘어서는 듯했다 그들은 바로 앞서 투입된 은십자 기사단이었던 것이다. "설마?" 다이어드 공작이 재빨리 시선을 뒤로 옮겼다. 그러자 그의 눈에 창백한 안색을 하고 있는 50여 명의 성기사들이 보였다. 탈진한 증상을 보이고 있지만 그래도 괜찮아 보여 다이어드 공작이 막 안도의 숨을 몰아쉴 때, 하나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꽂혀 왔다. "아쉽네요. 조금만 더 눈치를 늦게 챘다면 성국의 최강 기사단인 은십자 기사단과 세 명의 대신관을 생포할 수 있었을 텐데요. 역시 그랜드 마스터라 이건가........." 다이어드 공작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금색 로브를 걸치고 있는 금발의 젊은 마법사를. 금발의 마법사, 엘은 다이어드 공작에게 인사를 건넸다. "인사드립니다. 저는 이번에 새로 생겨난 금탑의 탑주 엘리미스라고 합니다." "......." 다이어드 공작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엘을 노려 보았다. 엘의 나이가 예상보다 어려 그랜드 마스터인 그 또한 지금 엘이 한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분간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한참 후에야 다이어드 공작이 입을 열었다. "그대가 저들을 이렇게 만들었나?" 다이어드 공작의 시선에는 앞서 들어갔다가 실종된 성기사들을 향하고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 쓰러진 성기사들에게 시선을 옮긴 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제가 그랬지요. 어차피 저들도 저에게 순수한 호의로 온 것이 아닐 텐데...... 잘못된 것이라도 있나요?" "......." 엘의 말에 다이어드 공작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한 현상이다. 애초에 그와 성기사들은 순수한 목적으로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아니, 성녀를 찾는다는 것은 지극히 순수한 목적이다. 하지만! 자신들은 혹여 성녀를 누군가 데리고 있다면 그자를 제거하고 성녀를 모시려고 하지 않았던가? 신을 모시는 자인 만큼 다이어드 공작은 엘의 말을 순순히 인정했다. "그대의 말이 맞군. 우리의 목적은 순수한 호의가 아니지. 성녀님을 모시려고 온 것이니 말이야. 그럼 묻지, 성녀님은 그대가 모시고 계신가?" "......." 이번에는 엘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엘은 다이어드 공작을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녀가 성녀로 선택되었건 뭐건 간에 제게 중요한 건 없습니다. 단지 하나, 그녀는 내가 사랑하는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엘의 말은 성녀를 데리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말과 같았다. 다이어드 공작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그렇군. 하지만 그녀는 여신의 선택을 받아 성녀가 되었네. 한낱 인간에 불과한 우리가 신의 뜻을 거스를 순 없지." "뭐가 신의 뜻이고 뭐가 한낱 인간이라는 것입니까?" 엘의 언성이 높아졌다. 그리고 그의 전신에는 도저히 마법사로 보기 어려운 무시무시한 기세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엘이 격정이 담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위대한 여신이면 어떻고 한낱 인간이면 어떻습니까? 여신의 선택을 받았으니 순순히 내 여인을 내놓아야 한다고요? 자신의 여인조차 지키지 못한다면 제가 어찌 그 여인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틀에 박힌 모든 것을 부술 것입니다. 그것이 황제의 의지라면 부술 것이고, 여신의 의지라면 그것 또한 깨부술 것입니다. 그것이 나의 의지이며, 나의 각오입니다." 엘의 말에는 그의 각오와 신념, 그리고 세레나를 생각 하는 모든 것들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각오는 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다이어드 공작조차 감탄하게 할 정도였다. 어찌 안 그러하겠는가! 자신의 여인을 위해서라면 설령 제국의 황제라도 그 의지를 꺾어 버리겠다고 한다. 이 얼마나 멋지고 굳건한 신념을 가진 것이란 말인가! 하지만 어디까지나 엘의 태도에만 감탄한 것이지 그의 생각에 동조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다이어드 공작이 워 해머를 치켜들었다. "생각이 다르다면 어쩔 수 없지, 부득이하게 힘으로 빼앗을 수밖에." 샤아아아! 다이어드 공작의 전신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신성력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대륙 10대 그랜드 마스터! 다이어드 공작은 다름 아닌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그랜드 마스터인 것이다. "과연...... 그랜드 마스터!" 엘은 전신 가득 저릿저릿함을 느끼며 새삼 다이어드 공작이 그랜드 마스터임을 다시 느꼈다. 다이어드 공작 내뿜는 기운은 블리어드 제국에서 겪어 본 클라이언 공작과 전혀 느낌이 달랐다. 클라이언 공작은 모든 것을 꿰뚫어 버릴 듯한 기세였다면 다이어드 공작은 모든 것을 다 부술 듯한 기세였다. 그리고 그 기세는 엘로 하여금 더욱 숨 막히게 하였다. 스윽. 그런 다이어드 공작의 기세를 엘의 앞에 나타난 골든 나이트가 받아냈다. 골든 나이트는 마나 홀에 위치한 마나를 무시무시한 기세로 폭사시켰다. 콰콰콰콰! 파방! 팡! 파바방! 어마어마한 기세! 골든 나이트가 뿜어내는 기세와 다이어드 공작이 뿜어내는 기세는 중간 지점에 부딪쳐 폭발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건?" 갑자기 나타난 골렘이 자신의 기세를 무리 없이 모두 받아 내고, 도리어 반격까지 가하자 다이어드 공작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틈에 엘이 손에 1골드짜리 동전을 쥐고 있었다. 힘을 줘 꽉 쥐는가 싶더니 이내 황금빛을 뿜어내며 일 골드 동전이 기다란 화살 모양으로 변했다. 엘은 그것을 허공에 띄워 마법을 전개했다. "올 플리체(Or Fleche)!" 쐐액! 황금 화살은 어마어마한 기세를 품고 대기를 찢으며 다이어드 공작에게 쏘아졌다. ‘이건?!" 골든 나이트와 한참 기세 싸움을 하던 다이어드 공작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황금 화살을 보며 대경했다. 그리고 재빨리 워 해머를 들어 황금 화살을 후려쳤다. 꽝! 화살을 막아 내는 순간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반탄력에 다이어드 공작이 인상을 찡그렸다. "큭! 이런 힘이라니!" 3걸음이나 물러선 다이어드 공작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낱 마법이 자신을 이렇게 물러서게 만들다니! 놀란 다이어드 공작을 보며 엘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놀라실 필요 없습니다. 방금 그 마법을 전개하려면 그 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니까요. 그나저나 저와 내기를 하시지 않겠습니까?" "내기?"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한 다이어드 공작의 모습에 엘이 자신의 말을 꺼냈다. "그래요, 내기. 여기 있는 골렘은 저의 회심의 역작 골든 나이트입니다. 실력은 그랜드 마스터 급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음! 그랜드 마스터 급 골렘......." 다이어드 공작이 신음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들어 본 적이 있다. 블리어드 제국에서 그랜드 마스터인 클라이언 공작과 자웅을 겨룬 골렘이 나타났다는 말을. 클라이언 공작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10대 그랜드 마스터 중 하위권이지만 그 실력은 결코 얕볼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런 이와 자웅을 겨룬 골렘이라니! 다이어드 공작은 내심 호승심이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엘이 다이어드 공작을 보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제가 하고 싶은 내기는 이들을 건 내기 입니다." 엘이 쓰러진 은십자 기사단을 가리켰다. 그리고 말을 이어 나갔다. "공작님이 이기실 경우 이들을 돌려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제 골렘에게 진다면 포로가 되어 주셔야겠습니다." 포로! 그랜드 마스터인 다이어드 공작에게 매우 낯선 단어였다. 자신이 포로가 되어 볼 거라 언제 생각해 보았겠는가? 다이어드 공작이 미소 지었다. 그 미소에는 짙은 투지가 배어 있었다. "포로라...... 재미있어, 저 골렘이 두 번 다시 쓰지 못하게 되어도 괜찮나 보군?" 엘도 지지 않았다. "공작님의 목숨부터 걱정하셔야 할 듯싶습니다만." "그건 승부가 끝난 뒤 해 보도록 하지." 그와 함께 워 해머에서 어마어마한 신성력이 뿜어져 나왔다. 그러자 엘도 뒤로 멀찍이 물러나며 골든 나이트에게 명령을 내렸다. "타나, 적을 말살하라!" 골든 나이트에게서 푸른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목표. 말살." 그와 함께 골든 소드에서 무시무시한 오러가 뿜어지며 찬란한 오러 블레이드를 생성하였다. 콰콰콰콰! 강렬한 기세가 사방으로 폭사하며 골든 소드와 워 해머가 충돌하였다. 쾅! 콰광! 쾅! 짙푸른 오러 블레이드와 순백의 신성력이 충돌하며 강렬한 충격파를 일으켰다. 다이어드 공작은 워 해머를 휘두르며 예리하게 휘둘러지는 골든 소드를 이리저리 튕겨 냈다. 골든 나이트는 트롤과 비견되는 약 3m의 덩치를 가졌다. 게다가 몸 전체가 금속으로 이루어져 경량화 마법을 걸었어도 그 무게는 어마어마하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골든 나이트는 전투 때 무거운 동체를 최대한 공격에 활용한다. 그리고 그 공격은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워 해머를 휘두르는 다이어드 공작에게 최악의 상성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땅! 땅! 땅! "크읏!" 골든 나이트가 체중을 앞세워 묵직한 공격을 연신 퍼붓자 다이어드 공작은 신음을 흘리며 조금씩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다이어드 공작의 공격 스타일 또한 골든 나이트와 마찬 가지로 강렬한 일격을 끊임없이 퍼붓는 것이다. 하지만 그 상대가 골든 나이트였기에 다이어드 공작은 자신의 실력을 마음껏 펼칠 수가 없었다. 기선을 잡은 골든 나이트가 골든 소드를 더욱 맹렬하게 휘둘렀다. 강렬한 공격이 연신 퍼부어지자 다이어드 공작은 최대 한 힘을 흘리려고 노력하며 날카로운 눈으로 골든 나이트의 이곳저곳을 훑었다. 그러더니 힘을 한껏 응집한 채 골든 소드에 부딪쳐 나갔다. 꽝! 푸른빛과 하얀빛이 폭사되며 주변 땅거죽이 죽죽 균열을 일으켰다. 충돌 시 일어난 반탄력으로 한껏 뒤로 물러난 다이어드 공작이 워 해머를 비스듬히 눕힌 채 골든 나이트를 노려 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숨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 대단하군! 그랜드 마스터에 비해 손색이 없을 정도야. 하지만 그것뿐이다." 스으으! 은은한 신성력이 뿜어지며 워 해머에 어마어마한 힘이 요동치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워 해머 전체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쩌적! 쩌적! 마치 껍질이 벗겨지는 것처럼 워 해머 전체를 감싸고 있던 것들이 떨어져 나가며 짙은 검은색을 띠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워 해머에서는 신성력이 아닌 은은한 검은색 기운을 내뿜기 시작하였다. 그 힘은 좀 전과 비교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힘을 지니고 있었기에 엘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 해머, 그리고 저 기운. 신성력을 제외한 이 세상의 모든 기운을 소멸시키는 그 무기. 그것은 바로...... "설마 신성한 해머(Saint Hammer)? 어떻게 성물이 ........." 그것은, 엘의 말대로 여신의 은총이라 불리는 3가지 성물 중 하나인 사마를 멸하는 신성한 해머였다. 당황스러워 하는 엘의 모습을 보며 다이어드 공작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 "이걸 바로 알아보다니, 눈썰미가 좋군. 나도 웬만해선 이 무기를 사용하고 싶지 않았지만 저 골렘이 너무 강력해서 말이지........." 조금 전까지 밀리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다이어드 공작은 자신감에 넘쳤다. 당연한 일이다.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이 성물이라면 그 정도의 자신감을 가져도 이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륙에는 3종류의 성물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성물들은 각각 어마어마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3대 성물과 5대 신검, 그리고 5대 마병은 대륙 최강의 힘을 지닌 물건이라 할 수 있다. 그중 3대 성물에 속하는 사마를 멸하는 신성한 해머는 신성력을 제외한 모든 기운을 제거하는 어마어마한 권능이 잠들어 있다. 그 기운과 충돌하면 오러 블레이드도 소멸하고, 7클래스 마법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그야말로 신성력을 제외한 모든 기운에 대해 압도적인 위력을 발휘하는 무기였다. 그리고 지금 그 무기가 다이어드 공작의 손에 쥐어진 것이다. 다이어드 공작은 양손으로 해머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질풍같이 골든 나이트에게 쇄도했다. "나에게 이 무기를 사용하게 만들었으니 그것만으로 강한 것이다. 이제 사라져라!" 다이어드 공작이 달려들자 위험을 느낀 골든 나이트가 골든 소드에 더욱 많은 오러를 주입했다. 그리고 검은 기운을 내뿜는 워 해머를 향해 골든 소드를 휘둘렀다. 꽈아아아앙! 어마어마한 폭음! 귀를 멀어 버리게 할 정도로 강렬한 폭음이 주변 전체를 지배했다. 연기가 걷히고 이윽고 충돌 지점이 드러나자 어마어마한 참상이 두 눈 가득 들어왔다. 약 10m에 이르는 크레이터가 생겨나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심한 건 무려 5m 이상을 물러난 골든 나이트의 모습이다. 너덜너덜해진 오른손에는 골든 소드가 느슨하게 쥐어져 있었으며, 골든 나이트의 한쪽 어깨가 완전히 뭉그러져 있었다. "골든 나이트가 이렇게까지 밀리다니......." 엘이 믿기지 않는 듯 한껏 경악이 담긴 목소리로 중얼 거렸다. 당연한 일이다. 골든 나이트는 엘이 발달된 지구의 수식으로 무려 5년 동안 공을 들여 만든 최고의 골렘이다. 통째 매직 메탈을 두른 골든 나이트의 항마력은 최강이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중첩하고 중첩한 실드 마법은 골든 나이트에게 최강의 방어력을 선사했다. 저번 클라이언 공작에 의해 팔이 베인 것도 골든 나이트가 방어를 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지 실상 오러 블레이드로도 흠집 하나 낼 수 없는 것이 바로 골든 나이트의 육체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게 무엇인가. 오러 블레이드조차 견딜 수 있는 골든 나이트의 어깨가 곤죽처럼 으깨져 있었다. 그리고 수백 개의 마나석이 일제히 발동되어 회복력도 눈부신 골든 나이트의 회복력이 지금은 전혀 발휘되지 않고 있었다. 아니, 발휘는 되고 있었지만 그 속도가 너무나 느려 눈으로 확인하기 힘들 정도였다. 골든 나이트 반대편에는 다이어드 공작이 생채기 하나 없는 모습으로 워 해머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성물을 쥔 그의 전신에는 은은한 검은 기운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다이어드 공작이 뜻밖이라는 듯 입을 열었다. "성물의 힘을 버텨 내다니, 정말 대단하군? 하지만 그 것도 한 번에 불과하다." 워 해머를 다시 치켜든 그는 빠른 속도로 골든 나이트에게 접근하였다. 눈부신 속도로 접근한 다이어드 공작이 워 해머를 내리 치자 골든 나이트가 골든 소드를 치켜들어 맞받아치려 하였다. 엘이 소리쳐 제지했다. "멈춰! 대응하지 말고 피해!" 엘의 외침에 골든 나이트가 푸른빛 안광을 내뿜더니 재빨리 몸을 물려 다이어드 공작의 공격을 피했다. 콰아아앙! 골든 나이트가 공격을 피하자 해머가 강타한 곳에 어마 어마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그 파괴력을 보며 엘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저것과 충돌하면 골든 나이트가 무사하지 못할 것임을 깨닫고는 명령을 내렸다. "근접전으로 상대하지 마! 원거리로 상대한다!" "어딜!" 다이어드 공작이 빠르게 접근했다. 하지만 골든 나이트는 그것보다 더 빠르게 물러났다. 애초에 골든 나이트는 근전과 원전을 모두 펼칠 수 있게 하였다. 검사에게 원전이란 무척 어렵고 복잡하지만 골든 나이트는 특유의 강력한 오러로 원전도 가능했다. 뒤로 물러난 골든 나이트는 골든 소드에서 강렬한 오러를 뿜어냈다. 그 기세는 마치 폭풍같이 몰아치며 다이어드 공작을 할퀴어 들어갔다. 그것은 오러 폭풍이라 불리는 기술로, 소드 마스터에 이른 검사들도 전개할 수 있는 기술이다. 하지만 그랜드 마스터에 버금가는 힘과 강렬한 오러는 그 위력을 어마어마하게 바꾸어 놓았다. 다이어드 공작은 전신을 난자하는 듯한 어마어마한 오러 폭풍을 느끼며 재빨리 워 해머를 휘둘렀다. 후우웅! 모든 힘을 소멸시키는 워 해머의 힘이 발현되자 날카롭게 쏘아지던 오러 폭풍이 그대로 소멸되었다. 하지만 그 공격이 끝이 아니었다. 골든 나이트는 계속해서 거리를 불리며 강력한 오러 폭풍을 전개했다. "큭!" 오러 폭풍을 하나하나 모두 파훼시키며 다이어드 공작은 내심 이를 갈았다. 큰 덩치에 걸맞지 않게 골든 나이트의 이동 속도가 너무나 빨라 근접전을 펼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이어드 공작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워 해 머의 힘을 전력으로 끌어올려 워 해머를 그대로 골든 나이트에게 투척했다. 쐐애애액! 어마어마한 속도로 쏘아지는 워 해머! 그것을 본 엘이 경악했다. "헉!" 설마하니 다이어드 공작이 이런 공격을 펼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엘이 골든 나이트에게 여벌 목숨을 벌어 줄 비장의 수단을 전개하게 하였다. 파앗! 워 해머가 골든 나이트에 적중되기 직전 갑자기 공간의 틈이 열리며 골든 나이트의 거대한 몸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약 20m 떨어진 지점에 골든 나이트의 동체가 나타났다. 그 모습을 본 다이어드 공작의 눈이 커졌다. 지금 그가 본 것은 골든 나이트가 공간 이동을 한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설마, 마법인가?" 엘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장의 수단이죠. 설마하니 워 해머를 투척하실 줄은 몰랐네요." 정말 의외였다 대륙 3대 성물이라 불리며 신성력을 제외한 모든 기운을 소멸시킬 수 있는 권능을 지닌 해머를 그대로 투척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렇군." 다이어드 공작이 다시 워 해머를 치켜들자 엘이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골든 나이트가 크게 부서지기도 했지만 더 이상 싸워 봤자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이제 그만 하시는 게 어떨까요?" 갑작스런 엘의 제지에 다이어드 공작이 워 해머를 아래로 늘어뜨리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엘이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였다. "더 이상싸움을 벌여 봤자 남는 게 없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사실 저는 골든 나이트가 공작님을 제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보니 성물을 소유하고 계신 공작님을 제압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군요. 그렇다고 공작님이 계속해서 원전을 펼치는 골든 나이트를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말입니다." "흠!" 엘의 말에 다이어드 공작이 생각에 잠겼다. 사실 그 또 한 골든 나이트를 제압할 자신이 없었다. 정면 대결을 하면 성물로 이길 수 있다. 하지만 정면 대결을 피하고 원전을 펼친다면 그야말로 끝이 없는 싸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엘이 한쪽에 쓰러져 있는 은십자 기사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대신 저들을 데려가게 해 드리겠습니다. 뭐, 저쪽 분들은 특별히 몸에 이상은 없으니 충분히 데려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엘이 가리킨 곳에는 50여 명의 성기사와 3명의 대신관 이 넋을 잃은 표정으로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크 포그에 의해 탈진 증상을 보이다가 정신을 차린 그들은 마치 신들이 싸움을 벌이는 듯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오러와 신성력이 충돌하면서 푸른색과 하얀색이 허공을 물들이는 모습, 그리고 병장기가 부딪치면서 일어나는 강렬한 스파크. 게다가 다이어드 공작이 3대 성물 중 하나인 신성한 해머를 꺼냈을 때에는 모두가 경악에 빠지고 말았다. 3대 성물은 모두 전설로만 내려오는 신의 은총이 담긴 신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보여 주는 압도적인 강함이란! 시종일관 골든 나이트를 몰아치는 모습에 성기사들은 모두 넋이 나갔다. 자신이 벌인 싸움을 성기사들이 모두 보고 있었다는 사실에 다이어드 공작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자신이 성물을 가지고 있는 건 크게 비밀이 아니다. 단지 성물을 가지고 있으면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생길 것 같아 비밀로 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랬기에 대외적으로 성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리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그 사실이 이곳에 와서 알려질 줄이야. 골든 나이트에 모든 신경을 쏟느라 성기사들에게 신경을 쓰지 못 한 것이 실수였다. 엘이 처음 사로잡힌 성기사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들은 이곳에 들어오면서 약간의 반항을 했기에 상처를 입은 상태입니다. 데려가셔서 치료를 한다면 충분히 본래대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 말에 다이어드 공작이 연신 흠모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 코로네 백작에게 말을 건넸다. "저들을 모두 수습하게." "예, 전하! 모두 동료들을 수습하라!" 자리에서 일어나 쓰러진 성기사들을 수습하는 모습을 보던 다이어드 공작이 엘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그가 머릿속에 맴돌던 궁금증을 꺼내들었다. "볼레크 대신관과 광휘의 기사단도 데리고 있나?" 엘이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그건 다음에 가르쳐 드리죠." "음!" 다이어드 공작은 뭐라 더 말하려 했지만 볼레크 대신관과 광휘의 기사단을 데리고 있다면 지금 칼자루를 쥔 쪽 은 다름 아닌 엘이었다. 성기사들을 모두 수습한 걸 본 다이어드 공작이 엘을 보며 말했다. "다음에 다시 오도록 하지. 그때는 성녀님을 반드시 모시고 갈 것이다." 엘도 지지 않았다. "그때면 더욱 데려가기 힘들게 될 것입니다. 분명히요." "기대하지." 그 말과 함께 다이어드 공작이 몸을 돌려 계곡을 빠져 나갔다. 은십자 기사단도 저마다 동료 한 명씩을 짊어진 채 계곡을 벗어났다. 사라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엘이 중얼거렸다. "성물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가 필요해. 그걸 완성시켜야겠군........" 엘의 시선이 골든 소드에게 향하고 있었다. 5대 교단의 합작과 성국의 의지 "다이어드 공작이 말한 대로 그들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거야." 엘은 마탑 꼭대기에서 바깥 풍경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성국의 인물들은 이대로 쉽사리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 물러난 건 동료들이 제압당해서 그것 때문에 순순히 물러난 것이지만 다크 포그의 존재를 알아차린 이상 다음에도 저번 같은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무엇보다 다이어드 공작은 다크 포그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가 지닌 워 해머의 위력은 다크 포그를 단번에 갈라 버리는 어마어마한 권능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방 오진 못할 테지. 그들을 순순히 내준 것도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었으니까." 엘은 옅은 웃음을 지었다. 전생에 그가 무엇으로 불렸던가. 악신이라 불릴 만큼 상대를 철저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무찌르던 절대무적의 프로게이머가 아니었던가. 무슨 일을 하건 간에 앞뒤를 확실하게 계산하고 그 일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계산한 뒤 일을 시작하는 게 바로 엘이었다. 엘이 생각이 없어 애써 사로잡은 성기사들을 순순히 내 준 것이 아니다. 처음 다크 포그로 은십자 기사단 절반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을 때, 엘은 이들을 첫 번째 조커로 사용할 생각을 하였다. 행여 골든 나이트로 다이어드 공작을 제압하지 못할 경우 그들을 활용하여 시간을 벌려고 결심했던 것이다. 그러한 엘의 안배는 멋지게 성공하였다. 다이어드 공작의 실력은 10대 그랜드 마스터 중 하위권 일지 모르나 그가 지니고 있는 성물 사마를 멸하는 신성한 해머는 신의 은총이라 불릴 만큼 어마어마한 위력을 내포하고 있던 것이다. 덕분에 엘은 숨걱 놓은 카드를 활용할 수밖에 없고, 그 결과 성국의 인물들이 순순히 물러나는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다. "돌려준다고만 했지, 그들이 온전하다고 하지는 않았어." 엘은 사로잡은 성기사들에게 깊은 내상을 입혔다. 게다가 신성력을 봉인하는 팔찌와 비슷한 형태의 봉인을 내부에다가 걸어 놓았기에, 그들은 내상을 치료하고 본래의 신성력을 발휘하려면 최소 1달 이상은 요양해야 했다. 때문에 엘은 1달 정도의 시간을 벌어 놓은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 귀하고 값진 시간을 엘은 적극 활용할 생각이었다. "이미 디벨 님에게 말을 해 놓았으니 결과는 드러나겠지. 남은 시간은 한 달. 그사이 룬 블레이드를 완성해야겠군." 엘은 마탑에 마련된 연구실로 향했다 골든 나이트의 실력을 배로 키워 줄 최강의 무기, 룬 블레이드를 제작하기 위해서. 그 시각, 대륙 곳곳은 뜻하지 않은 일로 요동치고 있었다. 바로 신을 믿는 신성한 곳, 신전에 말이다. 5대 제국 중 하나인 사막 제국 데이제크에서 가장 큰 성세를 유지하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레이나드 여신 교단이다. 국토의 절반이 사막이라 오아시스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이 빈번한 이곳은 포션의 수요가 대륙에서 가장 많은 곳 중 하나다. 얼마 전 레이나드 신전에서는 어마어마한 양의 트롤의 피를 공급받게 되었다. 자연히 그 트롤의 피들은 데이제크 사막에 존재하는 레이나드 신전에 옮겨졌고, 신관들은 그것을 가공하여 포션으로 만들어 용병들에게 팔았다. 약 100,000개에 이르는 포션이 정기적으로 공급되자 포션의 귀중함을 잘 알고 있는 이들은 사비를 털어 포션을 대대적으로 구입하기 시작했다. 값이 떨어질 만도 하지만 여벌의 목숨이라 불리는 포션이었기에 그 가격은 떨어지지 않고 도리어 사재기로 값이 오를 기미가 보이기도 하였다. 그것 때문에 레이나드 신전은 어마어마한 이익을 챙겼다. 100,000병에 이르는 포션을 팔 때마다 신전에서 챙기는 이익이 물경 400,000골드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정기적으로 100,000개에 이르는 포션을 제작하게 되자 이 일을 주선한 뷔렉 대신관은 교단 내에서 어마어마한 지지를 얻게 되었다. 신관들에게 있어 신앙심도 무척 중요하지만 금전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했기 때문이다. 정기적으로 공급되는 트롤의 피로 어마어마한 권력을 얻게 된 뷔렉 대신관은 뜻하지 않은 난관을 맞게 되었다. 바로 트롤의 피를 정기적으로 납품하는 디벨 상단에서 갑자기 트롤의 피 공급이 어려워졌다는 소식을 전한 것이다. 이미 트롤의 피는 레이나드 신전에 있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트롤의 피 공급이 어려워지다니? 애가 닳은 뷔렉 대신관은 곧장 디벨을 만나고 싶다고 하였다. 그리고 바쁘다는 핑계로 약 1달 동안 애가 닳고 닳도록 한 뒤 디벨은 뷔렉 대신관이 있는 신전으로 방문을 하였다.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디벨을 보자마자 뷔렉 대신 관이 대뜸 말을 꺼냈다. "디벨 친구님, 트롤의 피 공급이 어렵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애가 닳을 대로 닳은 뷔렉 대신관과 달리 디벨은 지극히 여유로웠다. 그는 신전에서 내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뷔렉 대신관에게 말했다. "아아, 너무 흥분하지 마십시오, 대신관님. 일단 흥분을 가라앉히시고 앉으시지요." "아, 흠흠!" 그제야 자신의 실책을 알아차린 뷔렉 대신관. 그는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디벨에게 물었다. "자, 이제 말해 주시지요, 도대체 무슨 이유로 트롤의 피 공급이 어려워졌다는 것입니까?" 디벨이 헛기침을 하며 짐짓 몸을 뺐다. "흠! 이 게 워낙 비밀적인 이야기라........" 뒤로 빼며 몸을 사리는 디벨을 보며 뷔렉 대신관은 더욱 애가 닳아 디벨에게 사정하듯 말했다. "허어! 디벨 친구님과 나는 이미 한 배를 탄 사이가 아닙니까? 고민은 나누면 가벼워지고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되는 법입니다. 보아하니 함부로 말하기 힘든 고민이 있는 것 같은데, 내 기꺼이 들어 줄 테니 우리 함께 고민하고 해결책을 찾아봅시다." 잠시 생각에 빠진 디벨이 뷔렉 대신관을 힐끗 보더니 다시 고민에 빠졌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 동안 고민하던 디벨이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단, 제 이야기는 매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비밀 보완이 확실해야 하고요. 만약 이 비밀이 새어 나간다면 레이나드 신전에 다시는 트롤의 피 공급을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약간 위협적인 디벨의 말에 뷔렉 대신관이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비밀을 꼭 지키지요." "그럼 말씀 드리겠습니다." 디벨이 천천히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하였다. 그는 일단 트롤의 피 출처를 이야기하였다. "우선 트롤의 피가 어디서 이렇게 대량으로 나는지 알려드리겠습니다. 대륙 서부에 몬스터 랜드라 불리는 곳이 있습니다. 그리고 톨리안 왕국과 접한 곳에 오크 포레트스와 트를 벨리라 불리는 곳이 있지요. 제가 신전에 공급해 드리는 트롤의 피는 다름 아닌 트를 벨리에서 조달해 오는 것입니다." "트를 벨리?"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이다. 하지만 그곳이 어딘지 선뜻 생각이 나지 않은 뷔렉 대신관이 의문을 표하자 디벨이 설명을 이어 나갔다. "예, 그곳에 7클래스 마법사가 마탑을 세우고 트를 벨리에 존재하는 트롤들을 사로잡아 특유의 방법으로 피를 채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와 계약을 맺어 대륙 각지 신전에 트롤의 피를 공급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요즘 그 분이 무척 어려운 일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일이라면?" 디벨이 주변을 한 차례 둘러보더니 한껏 목소리를 죽인 채 속삭이듯 말했다. "바로 그분께서 성녀님을 데리고 계십니다. 때문에 현재 성국과 대치 중에 있습니다." 이제야 생각이 났다. 트를 벨리! 바로 그곳에 성녀를 데리고 있는 오만무도한 마탑주가 있어 현재 대륙 10대 그랜드 마스터 중 1인인 다이어드 공작이 파견되지 않았던가? 뷔렉 대신관이 대경했다. "허억! 성녀, 성국!" 어디 하나 쉬운 단어가 없다. 성녀! 그러고 보니 이번에 신탁이 내려와 수백 년 만에 성녀가 출현했다고 가이아 교단에서 알려오지 않았던가? 대륙에 수많은 교단이 있지만 그중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것은 다름 아닌 가이아 교단이다. 믿는 사람도 많을 뿐더러 가이아 교단은 나라 하나를 통째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레이나드 교단이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가이아 교단은 넘볼 수 없는 벽과 같았다. 놀라 경기를 일으키는 뷔렉 대신관을 보며 디벨이 말을 이었다. "놀라시는 게 당연합니다. 저 또한 놀랐으니까요." "그, 그럼 이제 트롤의 피는 공급을 받지 못하는 겁니까?" 성국의 의지는 곧 여신의 의지와 같다. 성국이 움직이면 가이아 여신을 믿는 수많은 국가가 함께 움직이며, 그 힘의 크기는 제국을 능가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성국과 등을 돌리다니? 그것은 곧 파멸을 뜻하기에 뷔렉 대신관이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이다. 뷔렉 대신관의 말에 디벨은 빙긋 웃음을 지었다. 상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는 일단 이쪽이 한 치의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디벨은 타이르듯 말했다.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마탑주님은 의외로 강력한 힘을 지니고 계시니까요." 그러면서 디벨은 미리 준비했던 말을 하였다. "솔직히 저는 대신관님이 왜 그렇게 가이아 성국을 겁내는지 모르겠습니다. 레이나드 여신님의 교단을 보십시오. 이 얼마나 강대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까?" 하지만 뷔렉 대신관은 비관적인 말을 하였다. "그건 디벨 님이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성국은 제국이라 하여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강국. 분하지만 그 힘의 크기는 우리 레이나드 교단을 월등히 뛰어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괴감이 드는지 뷔렉 대신관은 고개를 떨어트렸다. 사리사욕이 많지만 그 또한 독실한 신앙으로 대신관에 오른 이였다. 그런 그에게 디벨이 희망을 주는 말을 하였다. "누가 혼자라고 했습니까?" "......?" 뷔렉 대신관이 고개를 들자 디벨이 숨겨 놓은 패를 꺼냈다. "제가 언제 레이나드 교단에게만 도와달라고 했습니까? 분명 가이아 성국은 강합니다. 하지만 한 손으로 여러 손을 감당할 수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저는 레이나드 교단에게 부탁한 뒤 다른 교단들에게도 부탁을 드릴 것입니다. 레이나드 교단을 비롯한 네 교단! 오대 제국 에서 막강한 힘을 끼치는 다섯 개의 교단이 설마 가이아 성국 하나를 상대하지 못한단 말입니까? " ........!" 디벨의 말에 뷔렉 대신관의 표정이 밝아졌다. 바로 그 방법이다! 혼자 감당할 수 없다면 여럿이 힘을 합치면 되는 것이다. 각 교단에 어느 정도 인연이 연결되어 있지만 각각이 경쟁 관계에 있기에 절대 뭉칠 수 없는 입장이다. 하지만 트롤의 피가 걸린 사항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만큼 트롤의 피는 각 교단에 있어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자금줄로 굳혀진 상태였다. 뷔렉 대신관에게 약간의 희망을 심어 준 디벨은 결정타를 날렸다. "그리고 마탑주님께서 여러 교단이 도움을 줄시 3달 동안 십오만 병에 해당하는 트롤의 피를 공급해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뷔렉 대신관이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십오만 병!" 100,000병으로 교단이 이익을 보는 금액은 400,000 골드다. 거기에 50000병을 추가하면 순식간에 200,000 골드가 더 늘어나는 셈이 된다. 게다가 그 정도의 양을 3달 동안 공급하겠단다. 그럼 200,000골드가 3번, 도합 600,000골드의 추가 이익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생각하고 말 것도 없다. 뷔렉 대신관이 당장 답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내 최고 대신관님에게 보고하여 긍정적인 대답을 이끌어 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대신관님만 믿겠습니다." 디벨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디벨은 정확히 다섯 군데에서 다섯 명의 대신관과 만남 가졌다. 그리고 모두 디벨이 준비한 한 수에 그들은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때문에 마왕 강림 이후 사상 최초로 5개의 교단이 힘을 합치는 일어났다. 그 배후에는 디벨 상단이 있었고, 5개 교단은 다름 아닌 트롤의 피로 인해 뭉치게 된 것이다. 교단의 자금줄로 뭉치게 되었지만 5개 교단이 뭉친 것은 가히 어마어마한 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힘을 합친 5개 교단은 5대 제국에게 막강한 힘을 끼치는 걸 바탕으로 성국을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쾅!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이오!" 가이아 성국의 교황은 8명의 대신관을 모두 소집하고 언성을 높였다. 교황이 회의를 소집한 이유는 갑자기 5대 제국에서 날아온 편지 때문이다. 갑자기 5대 제국의 황제 옥쇄가 찍힌 편지가 날아왔다. 가이아 성국의 영향력에 제국에 버금간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제국을 무시할 정도로 막강한 건 아니었기에 교황은 그 편지를 무시하지 못하고 읽어보았다. 그리고 그 편지의 내용이 지금 교황을 이렇게 화나게 만든 것이다. "‘성녀인지 확실하지도 않은 걸 가지고 난리법석 피우지 말라.’라. 허허허! 언제부터 제국이 이렇게 오만했던가!" 확실히 트를 벨리에 성녀가 있는지는 아직 확실한 사항이 아니다. 그런데 성국은 그랜드 마스터인 다이어드 공작과 성국 최강의 기사단 은십자 기사단을 파견했다. 그리고 그들을 파견하기 위해 제국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청탑에 도움을 청했으며, 5대 제국에게 서신을 돌려 협력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돌아온 5대 제국의 대답이 바로 이것 이었다. 비록 성국이라 불리지만 제국에게 결코 꿀리지 않는다고 자부하던 교황을 5대 제국의 명령투 어조는 기분을 나쁘게 하기에 충분했다. 화를 내던 교황은 잠시 후, 차분하게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후우! 그래, 좀 말해 보시오. 아르디모스 대신관, 도대체 오대 제국이 왜 이런 대답을 보낸 것인지 알겠소?" 교황으로서는 5대 제국이 왜 갑자기 이런 대답을 보내 왔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솔직히 성녀를 찾으면 제국에게도 이익이 된다. 여신의 대리자인 성녀가 성국에 소속되고 제국을 돌며 황제와 인사를 나누면 그 자체만으로도 제국의 위상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녀가 어디 이름뿐인 성녀인가? 성녀는 순례라는 이름하에 병을 앓고 있는 이들이 성녀의 치료를 받을 수 있다. 신에게 부여받은 권능은 수명이 다한 사람의 목숨을 몇 년 동안 늘릴 수 있을 정도로 성녀의 힘은 대단하다. 그리고 제국들이 협력하면 자연히 특혜를 받는 것도 제국이 된다. 그런데 어째서 이러한 태도를 보인 것이란 말인가? 교황의 지목을 받은 아르디모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예하, 제 생각으로는 이번 일은 제국의 일방적인 의지가 아닌 듯싶습니다." 그에 교황이 고개를 갸웃했다. "일방적인 의지가 아니라니? 그럼 누군가의 개입이 있었단 말인가?" 아르디모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예하 제가 생각하기에는 오대 제국에 존재하는 다섯 개의 교단이 이번 일을 주모한 것 같습니다." 다섯 교단이라는 말에 교황의 눈썹이 꿈틀했다. "다섯 교단이? 어째서 그들이 주모했다는 거지?" 그에 아르디모스가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저는 그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짚이는 것이 있습니다." "짚이는 것? 그게 무엇이지?" 교황의 물음에 아르디모스는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말했다. "그들은 성녀님을 모심으로써 우리 교단의 위세가 한층 더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성녀님의 출현으로 가이아 여신님의 위상이 한층 더 올라갈 것이 두려웠던 것이지요. 때문에 그들끼리 공모하여 이번 일을 주모한 것 같습니다." 아르디모스의 말은 증거도 없고, 사실로 밝혀진 것도 아니다. 하지만 교황이 듣기에는 무척 신빙성 있게 들렸다. 가이아 여신의 위상이 올라가는 것은 곧, 성국의 위상이 올라가는 일이고, 그것은 즉, 성국의 영향력이 확대된다는 말이니 말이다. 성국의 영향력이 늘어난다면 5개의 교단은 자연히 그 영향력이 줄어들 것이 분명했다. 아르디모스의 말을 정확히 이해한 교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그럴 수도 있겠군." "하지만 확실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예하." "아니, 충분히 그럴 수 있소. 다섯 교단은 우리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면서도 은연중 우리들을 경계했지. 아르디모스 대신관의 말대로 이번 일로 자신들의 영향력이 줄어들까 봐 입을 맞추고 이번 일을 공모한 것이 분명해." 확신 어린 교황의 말에 대신관들의 얼굴에 근심이 서렸다. 아무리 가이아 성국의 힘이 강하다고 하나 5대 제국이 의견을 보내왔으니 마냥 무시하기도 부담스러웠다. "허면 어떻게 하실 건지......?" 아르디모스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교황에게 묻자, 교황은 잠시 고심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 일은 혼자 처리하면 안 되겠군. 자칫하다가 우리 성국이 오대 제국과 등을 돌릴 수 있으니...... 오늘부터 이 사항을 가지고 매일 회의를 열겠소. 대신관들은 빠짐없이 자신이 생각한 바를 말할 것이며, 십 일 동안 회의를 열어 의견을 나누도록 하겠소. 그리하여 가장 합당한 결론을 내리도록 할 것이오. 모두 알겠소?" 교황의 말에 대신관들이 모두 고개를 숙였다. "알겠사옵니다, 예하." 대답하는 대신관들을 보며 교황은 인상을 찡그린 채 생각에 잠겼다. "성녀님을 다 찾은 마당에 오대 제국이 물고 늘어지다니...... 정말 골치 아프군." 그래도 트를 벨리에 파견한 다이어드 공작이 잘할 것이라 생각하는 교황이었다. 이대로 시간을 끌면 다이어드 공작이 모든 일을 끝마치고 성녀님을 모셔올 테니 말이다. 그 시각, 다이어드 공작은 뜻하지 않은 일에 당황하고 있었다.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칼리오 대신관에게 물었다. "그게 사실입니까, 대신관님?" 칼리오 대신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공작님. 우리가 구출해 온 성기사들 모두 깊은 내상을 입었습니다. 최소 한 달은 요양해야 합니다. 게다가 알 수 없는 현상으로 신성력이 봉인 당했기에 그 치료도 병행한다면 사실상 치료 기간은 한 달이 넘을 것입니다." "으음!" 다이어드 공작이 신음을 흘렸다. 왠지 힘들게 사로잡은 성기사들을 순순히 내준다고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들에게 심한 부상을 입혀 놓고 자신들에게 넘긴 것이다. 외상이라면 딱히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외상에 탁월한 치유력을 보이는 신성력은 며칠 걸리지 않아 모든 걸 회복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상은 다르다. 내부에 입은 상처는 신성력으로 섣불리 치료할 수 없는 영역이다. 사람의 속을 열어 놓고 치료한다면 모를까 그렇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알 수 없는 현상에 의해 신성력조차 제대로 쓸 수 없다면 이는 무척 심각한 일임이 분명했다. "이런 간특한!" 다이어드 공작이 내심 이를 갈았다. 이 모든 게 엘의 소행이 분명했다. 성기사들이 부상을 입었으니 그들을 치료해야 한다. 절반의 전력을 잃은 지금 성국에 지원을 청하는 것이 현명 하다. 다이어드 공작이 코로네 백작에게 말했다. "지금즉시 성국에 연락을 보내게. 그리고 우리가 겪은 일을 빠짐없이 알리게." 코로네 백작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코로네 백작의 보고에 교황은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는 충격을 받았다 코로네 백작이 보고한 내용은 그로서 차마 믿기 힘든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성국 최강의 기사단인 은십자 기사단 절반이 당했단다. 게다가 큰 상처를 입어 상처를 치료하는 데에만 족히 한 달은 필요하다고 한다. 게다가 이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성국 최강의 기사인 다이어드 공작이 마탑에 존재하는 골렘과 평수를 이뤘다고 한다. 위대한 신의 은총이 담겨 있는 삼대 성물을 가지고 있는 다이어드 공작이 그 골렘을 압도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교황에게 있어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일개 마탑이 그랜드 마스터와 10명의 마스터, 그리고 100명의 익스퍼트로 이루어진 전력을 막아내다니. 이는 단순히 탐사대를 파견하는 것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5대 제국에서 압박이 들어왔지만 그것은 교황이 알 바가 아니었다. 여신께서 선택하신 성녀님을 모시려 하는 자신들에게 이토록 적대하는데 어찌 하겠는가. 5대 제국도 적으로 돌리면 앞으로의 일이 껄끄러워져서 조심하는 것이지, 그것이 여신의 의지를 받드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다이어드 공작마저 실패했다는 말에 교황은 마침내 마음을 굳혔다. 그는 대신관들을 향해 말했다. "톨리안 왕국 트를 벨리에 존재하는 금탑. 그곳에 20만 성군을 투입하겠소." "예, 예하?" 교황의 결단에 모든 대신관들이 화들짝 놀랐다. 성군이라니! 지난 수십 년 동안 성국에서 성군을 움직인 적은 없다. 성군이 치르는 전쟁은 성전이라 하여 수십만의 생명이 사라지는, 그야말로 누군가 하나는 완전히 몰살을 당하는 그런 전쟁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순교를 외치며 죽음을 불사하는 성군에게 후퇴란 존재 하지 않기 때문이다. 적이 다 죽거나 자신들이 다 죽을 때 까지 절대 물러서지 않는 신의 군대! 그것이 바로 성군이었다. 교황이 대신관들을 둘러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어떻게 해야 성녀님을 모셔올 수 있단 말이오! 본 성국의 최강 기사인 다이어드 공작조차 해내지 못했소! 대신관들은 성군 투입 외에 더 나은 방안을 제시할 수 있소?" "......." 교황의 강력한 일갈에 대신관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아르디모스조차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또한 교황이 말한 성군 투입보다 더 합당한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교황이 강한 의지가 실린 어조로 말했다. "오대 제국이 본 성국의 행사를 막아도 이번 일은 강행 할 것이오! 우리는 여신의 의지를 받드는 자들이지, 제국의 눈치를 보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이오! 내 말이 틀렸소?" "아닙니다, 교황 예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아르디모스가 교황의 말에 강력하게 지지하고 나서자 다른 대신관들도 교황의 말에 지지하고 나섰다. 제국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과 여신의 말씀을 따르는 것.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그들은 주저 없이 여신의 말씀을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여신의 말씀을 따르기 위한 것인데 설사 피를 무서워하랴. 교황의 말에 공감을 하며 대신관들은 교황의 의견에 모두 동조했다. "예하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그것으로 사항은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신앙으로 뭉친 그들은 이러한 사항에서 더없이 의견을 통일하기 쉬웠으니까. 하물며 여신의 말씀을 따르는 일 아닌가. 교황이 굳은 의지가 빛나는 눈으로 중얼거렸다. "여신의 말씀을 어기는 자, 피로 그 업보를 씻게 할 것이다. " 성국에게 경고를 하다 성국에서부터 전해져 온 소식에 엘은 화들짝 놀랐다. "성군 투입?" 트롤의 피를 구실로 다섯 교단의 힘을 빌려 성국을 압박하는데 성공했다고 생각하던 찰나 전해진 소식이다. 이 정보는 엘에게 청천벽력이나 다름없었다. 제아무리 성국이라고 하나 5대 제국의 의견을 무시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닌가? 그런데 어째서 왜...... 아니, 지금 생각해 보니 엘이 1가지 간과한 게 있었다. 엘은 어이없는 감정을 웃음으로 흘려보냈다. "하하, 내가 그 신앙심이라는 걸 너무 얕보았구나......" 신자들에게 있어 신앙심은 모든 것이나 다름없다. 엘은 그들의 신앙심을 너무 얕본 것이다. 200,000명의 성군이 이곳으로 올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에 엘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건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게다가 어마어마한 수의 성군이라니. 웬만한 왕국 정예병보다 족히 두 배는 강하다는 성군은 죽음조차 두려워 않는 광신도들이다. 그런 군대와 싸우는 것은 제아무리 엘이라고 해도 역부족이다. 현재 엘의 전력은 7클래스 마스터인 본인과 그랜드 마 스터 급 나이트 골렘 골든 나이트, 그리고 마스터 급 힘을 발휘하는 골렘 3기와 소드 익스퍼트 기사 12명이 전부다. 그에 비해 성국은 그랜드 마스터와 50명이 넘는 마스터, 그리고 10,000을 헤아리는 익스퍼트 급 성기사와 수십만의 성군을 거느리고 있다. 어딜 봐도 상대가 안 되는 전력이다. 때문에 엘은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결심을 굳혔다. 그리고 집무실에서 벗어나 세레나가 잠들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너무나 창백하여 마치 투명한 것처럼 보이는 세레나는 깊은 잠에 빠져든 듯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악몽에 시달리는지 이따금 찡그리는 인상은 그녀를 더욱 고혹적으로 보이게 했으며, 어지럽게 흩어진 은발에는 은은한 신성력이 감돌고 있었다. 그런 세레나의 양팔에는 각각 10개에 달하는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그것은 엘이 개발한 신성력을 봉인하는 아티팩트로, 세레나 체내에 존재하는 모든 마나가 소실되려 하자 엘이 강제적으로 세레나의 몸에 존재하는 신성력을 봉인한 것이다. 때문에 세레나는 신성력의 봉인으로 체내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마나를 지켜 낼 수 있었다. 전신에 신성력이 가득 차면 신의 세례를 받으며 성녀가 된다. 엘은 세레나가 성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녀의 신성력을 강제로 봉인했다. 엘은 잠든 세레나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차가운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입을 말했다. "세레나, 사랑은 아낌없이 뺏는 거래. 그래서 나는 너를 사랑하기 위해 빼앗겠어. 너의 존재로 평화를 얻게 될 모든 존재의 행복을...... 너를 갖기 위해, 그리고 나의 행복을 위해 너를 대륙인들로부터 빼앗을 거야." 굳은 각오가 번뜩이는 엘의 눈. 엘은 잠든 세레나를 뒤로 하고 실피르와 카이나를 찾았다. 그녀들은 불안한 기색을 띤 채 엘을 맞이했다. 엘은 그런 그녀들을 보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너무 불안해하지 마세요. 성국에게서 세레나를 반드시 지켜낼 테니까요." 그런 엘의 말에 실피르가 염려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엘이 고개를 저었다. "염려하지 마세요. 성국의 최고 기사단이라 불리는 은십자 기사단도 결계를 넘지 못했어요. 이곳은 안전해요. 그러면서 엘은 카이나에게 시선을 옮겼다. 카이나는 루비 같은 눈동자로 엘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엘은 그런 그녀에게 자상하고 따뜻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 카이나. 네가 염려하는 일은 어디에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나만 믿어."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난 엘이 카이나에게 다가가 그녀에게 포옹을 해 주었다. "주, 주인님?" 갑작스러운 포옹에 카이나가 당황한 표정을 짓자 엘이 포옹을 풀며 웃음을 지었다. "세레나의 일이 끝나면...... 우리 셋이 식을 올리자." 엘의 말에 순간 흔들리는 카이나의 눈 잠시 흔들리던 그녀의 눈에 이윽고 눈물이 맺히며 엘의 품에 안겼다. 엘은 그런 카이나의 등을 쓸어내리듯 토닥여 주며 실피르에게 말했다. "저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움직일 생각이에요. 결계를 발동하고 다크 포그를 전개시킬 테니 엄마는 성국 측의 움직임과 세레나를 잘 보살펴 주세요." 실피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몸조심하렴." 엘이 딱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실피르는 엘이 무척 위험한 일을 하려고 했음을 느쪘다. 마음 같아서는 말리고 싶다. 자신이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이고 아직 그녀의 눈에 엘은 어린 아이와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말릴 수 없었다. 엘은 이미 다 큰 것이다. 자신의 여인을 위해 저 강력한 성국과 맞서려 한다. 한 여인을 지키기 위해 성국과 맞서려는 엘을 보며 그녀는 엘이 자신의 품을 벗어났음을 다시 한 번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고마워요. 항상." 실피르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 엘이 카이나를 한 번 바라본 뒤 말했다. "그럼 전 잠시 탑을 떠나겠어요. 급한 일이 있다면 저를 불러주세요." "그래, 우리를 믿으렴." 믿음직한 실피르의 대답에 엘은 빙긋 웃고는 마법을 캐스팅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엘의 발아래 놓인 매직 스톤이 진한 마나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 사이 마법을 모두 캐스팅한 엘이 마법 구동어를 외쳤다. "텔fp포트(Teleport)!" 마법을 전개함과 동시에 새하얀 빛이 폭사되었다. 그리고 그 빛은 엘의 신형을 한순간 집어삼켰다. 스팟! 빛이 소멸됨과 함께 엘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실피르는 사라진 엘의 모습을 보며 걱정스러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부디 무사하렴........" 성국의 수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그곳에서 순백의 빛이 뿜어져 나오며 하나의 인영을 만들어 냈다. 허공에 못 박히듯 멈춰선 신형이 저 멀리 내려다보이는 성국의 수도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곳인가...... 성국의 수도가........" 성국의 수도로 텔레포트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엘이다. 엘은 품속에서 안경을 쓰며 성국의 수도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안경에 새겨져 있는 호크 아이(Hawk Eye)가 발현되며 수도의 정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엘은 찬찬히 성국의 수도를 훑어보기 시작하였다. 성국의 수도는 신자들이 사는 곳답게 하나하나가 무척 경건한 느낌이 들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는 곳임에도 도로에 쓰레기 같은 것 하나 보이지 않았고, 수도에 흔히 존재하는 빈민촌이나 됫골목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곧 전쟁이 벌어질 것이 분명한데도 사람들의 얼굴에는 전혀 근심이 보이지 않았다. "과연...... 신의 은총이 닿은 국가라는 건가........" 모두가 행복해 보이지는 않지만 사람들의 근심이 없는 걸로 보아 성국이 얼마나 사람이 살기 좋은 국가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런 면을 보니 엘은 성국에 대해 분노가 치솟는 걸 느꼈다. 자신들의 신앙이 있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 가르침을 베푸는 것은 좋다. 하지만...... 성녀 하나를 탈환하기 위해 20만의 성군을 파견하려 하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이 신을 믿지 않아서 이해를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의 말씀을 따르겠다고 수천수만의 생명이 사라질 수 있는 전쟁을 벌이려는 것은 엘의 머리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성군들 하나하나가 저렇게 근심 없이 살아가는 백성들 중 하나가 아닌가. 성녀 하나를 찾겠다고 그들을 전쟁에 내모는 건 엘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그것은 가치관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지만, 엘은 자신의 가치관을 바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자신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건 주변 사람의 행복이고, 자신의 행복이니까. 세레나가 간다고 하여 절대다수의 사람이 행복할 수 있다는 건 엘이 알 바가 아니다. "내 생각을 강요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당신들이 내게 자신들의 가치관을 이해하라고 하는 건 이해할 수 없단 말이지." 엘이 안경을 고쳐 쓰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엘의 신형이 두둥실 떠오르며 성국의 수도 중심 에 있는 교황청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아함! 전쟁 준비를 하는데도 이곳은 평온하기 그지없구나." 교황청에 들어서는 정문을 지키는 성군 하나가 입을 열자 그 옆에 서있는 성군도 고개를 끄덕였다. "뭐, 대륙의 중심이자 위대한 가이아 여신님을 모시는 이곳에 무슨 일이 있다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겠어?" "그것도 그렇지. 누가 성국에 감히 대항하려 하겠어. 설사 제국이라 하여도 우리 성국에게 한 수 물러서는 모습을 보이지 않나?" "하하! 제아무리 제국이라 해도 신앙심으로 똘똘 뭉친 우리들의 용맹을 당해 낼 수 없는 거겠지." 그렇게 출병할 성군 얘기부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은 교황청에 누군가 다가오는 모습을 보았다. "그래서 그게...... 응, 누구지? 어이, 저기 오는 사람 누군지 알아?" 한 성군의 말에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은 일제히 시선을 옮겨 교황청에 다가오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붉은 노을이 지는 가운데 은은한 금빛을 띠고 있는 로브를 두른 금발의 마법사는 무척 신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교황청을 향해 다가오는 마법사를 보며 성군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모양새를 보니 교황청에 볼일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러면서 성군 하나가 마법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교황청에 접근하는 그를 제지한 채 입을 열었다. "멈추십시오! 이곳은 ,교황 예하가 머무시는 교황청입니다. 교황청에 볼일이 있어서 온 것입니까?" 일단 외양은 마법사의 그것과 같았기에 그는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 마법사를 대했다. 성군의 말에 마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들자 성군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 다. 마법사의 외모가 생각보다 무척 젊었던 것이다. 고작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금발 마법사는 눈에 쓴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그는 다름 아닌 엘이었다. "있지요. 아주 큰 볼일이........" 그와 함께 엘의 위쪽 공간이 쩌억 벌어지더니 3m에 달하는 골렘이 튀어나왔다. 바로 골든 나이트였다. 갑자기 거대한 황금색 골렘이 나타나자 성군들은 혼비백산하여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어헉! 저건 골렘!" "치, 침입자인가?" 그런 그들을 보며 엘이 골든 나이트에게 명령을 내렸다. "타나! 죄가 없는 사람들이다. 죽이지는 말아라." 골든 나이트에게서 푸른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주군. 명령. 받듦." 쐐액! 그와 함께 골든 소드가 육중한 파공음과 함께 휘둘러졌다. 그리고 거침없이 성군들을 강타했다. 털썩! 털썩! "히익!" 동료들이 쓰러지자 마지막 남은 성군은 재빨리 달려가 비상 타종을 울렸다. 땡! 땡! 땡! 땡! 땡! 성군이 거침없이 비상 타종을 울리는 사이 골든 소드가 그에게 작렬했다. 뻐 억 ! 틸썩 ! 입구를 지키던 성군이 모두 쓰러지자 엘이 골든 나이트 어깨 위로 올라타며 명령을 내렸다. "이대로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교황청을 향해 가자." 그에 골든 나이트가 푸른 안광을 뿜어내며 교황청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땡! 땡! 땡 ! 땡! 땡! 갑자기 비상 타종이 울려오자 교황청 안이 부산해졌다. 5번의 종소리, 그것은 침입자가 교황청 안에 들어왔을 때 하는 신호였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냐!" 교황청을 지키는 성기사들이 재빨리 성갑을 차려입고 교황청 입구를 향해 달려 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볼 수 있었다. 주변을 압도하는 거대한 황금빛 골렘과 그 골렘 어깨 위에 올라선 마법사의 존재를. 비상 타종의 존재로 등장하는 성기사의 숫자는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잠깐의 시간이 흘렀을 때에는 100명의 성기사가 골든 나이트를 넓게 포위하고 있었다. "......." 숨 막히는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60대 초반에 이른 초로의 기사가 앞으로 나서며 엘에게 일갈을 터뜨렸다. "너는 누구냐! 누구기에 감히 위대한 여신을 모시는 이곳에 침범한 것이냐!" 그 말에 골든 나이트 어깨 위에 있는 마법사, 엘은 호통 치는 성기사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그 성기사를 향해 내뱉듯 가볍게 말했다. "교황을 만나러 왔다고 해야 할까요?" 아니다 다를까, 초로의 성기사는 엘에게 다시 한 번 일갈을 터뜨렸다. "무엄하다! 감히 여신의 의지를 이행하는 교황 예하께 그런 말투라니 !" "그건 성국의 인물들이나 그런 것이죠. 제 목적을 말했으니 저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움직여야겠군요." 타앗! 가볍게 골든 나이트 아래로 내려선 엘이 명령을 내렸다. "적들이 많다! 최대한 죽이지 말고 제압만 해라!" "적들. 제압." 골든 나이트가 골든 소드를 휘두르며 성기사들에게 달려들었다. 골든 소드에서는 푸른색 오러가 뿜어지고 있었다. 그러자 성기사들의 우두머리인 초로의 성기사가 외쳤다. "막아라, 모두 방심하지 말고 빛의 축복을 전개하고 맞서라! 빛의 축복!" "빛의 축복!" 파아앗! 순백의 기운이 성기사들을 감싸며 골든 나이트와 맞서기 시작했다. 골든 나이트는 처음부터 봉인을 모두 푼 상태로 전투에 임했다. 제국과 비견될 만큼 강한 성국이니 처음부터 여력을 남기지 않고 전력을 다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따다당! 골든 소드와 충돌한 성기사들의 해머가 유리처럼 부서져 나갔다. "우웃!" 무기를 잃고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는 성기사들에게 골든 나이트는 마무리 타격을 입혔다. 퍽! 단 한 번의 공격에 3명의 성기사가 휘말렸다. 그들은 10m 이상을 날아간 채 곧장 땅바닥에 부딪치며 정신을 잃었다. 그 모습을 본 성기사가 외쳤다. "해머를 투척하라! 근접전으로는 힘든 강적이다!" "해머 투척!" 우우웅! 워 해머에 신성력을 불어넣은 성기사들이 그대로 투척 했다. 신성력을 머금은 해머가 강력한 기세를 품은 채 그대로 골든 나이트에게 쏘아졌다. 그러자 골든 나이트가 오러를 강하게 내뿜으며 골든 소드를 내리 그었다. 휘이이익! 강렬한 오러 폭풍이 일어나며 성기사들이 투척한 해머를 그대로 쓸어 버리며 오러 폭풍과 함께 역으로 성기사들에 해머를 날려 보냈다. "으아악!" 오러 폭풍에 포함된 해머에 적중된 성기사 몇몇이 강한 충격에 그대로 쓰러졌다. 그때, 성기사들을 지휘하던 성기사가 골든 나이트 뒤에 나타났다. 놀라울 정도로 빠른 접근이었다. "이놈!" 강력한 신성력을 머금은 해머를 그대로 내리치는 성기사. 제아무리 골든 나이트가 그랜드 마스터 급 실력을 지녔다고 해도 완전히 노출된 무방비 상태는 어쩔 수 없었다. 숨겨둔 한 수인 블링크를 전개해야 했지만 그렇게 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을 플리체!" 그때, 엘의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눈부신 황금빛이 번쩍였다. 피융!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로 쏘아지는 황금빛 물체! 골든 나이트를 그대론 내려치려던 성기사는 갑자기 느껴진 강렬한 기운에 본능적으로 해머를 휘둘렀다. 떠엉! "크윽!" 어마어마한 반탄력! 마치 1톤 쇳덩이를 정면으로 맞받아친 듯한 느낌에 성기사는 신음을 흘리며 물러났다. 그사이 골든 나이트는 몸을 돌려 경계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자신의 공격이 막히자 성기사가 격분한 어조로 말했다. "너는 누구냐! 누구기에 저렇게 강력한 골렘을...... 그리고 이렇게 강력한 마법을 구사하는 것이냐!" 그에 엘이 그 성기사를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골든 나이트의 뒤를 점할 정도의 실력을 지닌 성기사라면.... 성국 최강의 마스터이자 최상급 마스터에 이른 네이그람 후작님밖에 없겠군요. 과연 그 실력, 명불허전 입니다." 자신의 정체를 말하건 말건 네이그람 후작은 엘의 정체를 물었다. 방금 전 마법...... 그것은 ‘잊혀진’ 마법이었다. "그러는 넌 누구지? 누구기에 제련과 제강 마법을......." "제 정체 말인가요?" "그렇다." 엘이 웃었다. 그것은 호의가 아닌, 조소하는 듯한 웃음이었다. 그리고 골든 나이트를 가리켰다가 자신의 금색 로브를 가리키며 말했다. "황금을 상징하는 금색. 저 서부의 골든 벨리라 불리는 곳의 지배자......당신들이 말하는 고귀한 성녀님을 모시고 있는 금탑의 마탑주, 엘리미스라고 합니다." 엘의 소개에 네이그람 후작은 물론 장내에 존재하는 모든 성기사들이 놀라 입을 떡 벌렸다. 한편, 청탑에서 파견된 마법사들은 한쪽에서 성기사와 골든 나이트의 대치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번에 파견된 마법사들 중 청탑의 부탑주도 있었다. 부탑주, 레그릴은 눈을 빛냈다. "저것이 바로 탑주님이 말하시던 그랜드 마스터 급 나이트 골렘이구나. 과연 우리 마탑이 만드는 것보다 월등한 성능이야........" 그러면서 레그릴은 옆에 서있는 마법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저 골렘이 바로 탑주님이 그토록 찾으시던 골렘이다! 너는 저 골렘의 영상을 빠짐없이 저장하고, 너는 탑주님에게 소식을 전해라!" 명령을 받은 두 마법사가 대답하였다. "알겠습니다, 부탑주님!" 그러면서 한 마법사는 매직 캡처를 전개했고, 다른 마법사는 통신구를 들고 청탑의 탑주, 라이젠에게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다. 골든 나이트가 나타났다는 소식은 라이젠에게 곧장 전해졌다. 소식을 전해들은 라이젠은 두 눈을 빛냈다. "교황청에 나타났다고? 간도 크군!" 성국을 적으로 돌린 입장에 누가 감히 교황청에 쳐들어가겠는가. 블리어드 제국에 나타나고 그 다음 마치 증발한 것처럼 사라져 찾는 데 고생을 했다. 그런데 스스로 금탑의 탑주라고 밝히니 찾기가 한결 편해졌다. 라이젠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당장 가서 그놈을 사로잡아야겠군. 어떻게 해서 그랜드 마스터 급에 해당하는 나이트 골렘을 만들어 낸 건지 알아야 하니까......" 골든 나이트가 금탑주를 보호하고 있다지만 라이젠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에게도 골든 나이트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마스터와 자웅을 겨룰 수 있는 마스터 급 골렘을 다수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로 골든 나이트를 상대하게끔 한 뒤 7클래스 마법사인 금탑주를 제압하는 건 라이젠으로서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다. 라이젠이 막 텔레포트 마법을 전개하려고 할 때, 하나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거, 흥미가 동하는군." 젊은 청년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자 라이젠의 몸이 순간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진원지에 시선을 옮겼을 때 라이젠은 또다시 굳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8클래스 마스터에 이르러 모든 이들을 자신의 아래로 바라보는 라이젠의 입에서 전혀 나을 수 없는 존대가 흘러 나왔다. "어, 어떻게 이, 이곳까지 왕림을........" 라이젠이 청년을 대하는 모습은 평민이 귀족을 앞에 두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라이젠의 모습에 청년은 손을 휘휘 저었다. "지나가는 길에 들른 셈이니 너무 어려워하지 마. 항상 말하지만 그대들은 나를 너무 어려워한단 말이지." 하지만 눈앞의 청년은 결코 쉽게 대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도리어 라이젠이 허리를 깊숙이 굽혔다. "이런, 이런. 이래서 내가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다니까." 그러면서 청년은 방금 전 자신의 흥미를 이끈 말을 꺼냈다. "그건 그렇고 방금 말한 그것...... 무척 흥미가 동하는군. 자네 대신 내가 한번 가보고 싶어서 말이지." 누구의 말을 감히 거역하겠는가. 하물며 눈앞에 존재하는 청년은 자신들의 조직의 수장인 ‘마스터’ 임을 알면서 말이다. 라이젠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예에, 그럼 마스터께서 직접 가시는 겁니까?" 마스터라 불린 청년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적적하기도 하고 그 마탑주란 청년도 궁금해서 말이지. 내가 갔다 와서 그 골렘에 대해 자세히 말해 줄 테니 그 마탑주를 건드리려 하지마. 그는 다른 자에게 일임할 거니까." 누구 말이라고 거역하겠는가. 라이젠의 허리가 더욱 깊게 굽혀졌다. "알겠습니다. 마스터 ." 청년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이십 대 초반의 7클래스 마법사라...... 무척 궁금하군." 스팟! 청년의 신형이 그대로 사라졌다. 청년이 사라질 때 캐스팅도, 구동어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9클래스 마법사! 금탑! 대륙 사람들은 아직 이곳의 존재를 잘 모르지만 성국의 인물 중 금탑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다. 모를 수 있겠는가! 성국의 기사단인 광휘의 기사단과 볼레크 대신관이 사로잡혔고, 다이어드 공작과 3명의 대신관, 그리고 은십자 기사단으로 이루어진 그룹을 패퇴시켰다. 마스터 급 성기사들조차 힘을 쓰지 못하는 어마어마한 결계의 위력! 그리고 다이어드 공작과 자웅을 겨루는 강력한 황금 나이트 골렘! 이제야 확신이 섰다. 저 마법사는 금탑의 마탑주이고 저 골렘은 다이어드 공작과 일전을 겨뤘다던 나이트 골렘이 분명한 것이다! "으음. 금탑의 탑주라니...... 설마 교황청을 직접 치고 올 줄이야......" 네이그람 후작이 신음을 흘렸다. 설마하니 교황청에 직접 올 줄 몰랐다. 하기야 누가 교황청에 직접 쳐들어을 것을 예상했겠는가. 200,000명의 성군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들렸다면 어떻게든 방어할 생각을 했겠지 역으로 치고 올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건 주변의 성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십만 성군이 파견되기로 한 이상 성녀님을 모셔오는 건 정해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설마하니 교황청 정문을 통과해 쳐들어을 줄이야........ 네이그람 후작이 워 해머를 치켜들며 입을 열었다. "금탑주, 그대의 목적은 뭐지?" 엘이 무의식적으로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목적이라...... 적인 입장에서 이곳에 쳐들어온 이유를 굳이 말할 필요가 없겠지만...... 굳이 말하자면 교황을 만나 그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겠죠." "무엄한 자로다. " 네이그람 후작의 전신에서 강렬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그걸 시작으로 성기사들도 워 해머에 신성력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골든 나이트가 골든 소드에 오러를 뿜어내기 시 작했다. 엘이 골든 나이트 뒤에 숨듯 몸을 움직이며 말했다. "서로의 생각이 다르니 이런 지경까지 온 것이겠죠. 타나! 모두 제압해!" "적들 제압." 쓰쓰쓰! 골든 소드에 창연한 푸른색 오러 블레이드가 솟아났다. 거대한 골든 소드에 솟아난 오러 블레이드는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만큼 어마어마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모두 겁내지 마라!" 그것을 보고 성기사들이 행여 기세가 죽을까 네이그람 후작이 소리치며 골든 나이트에게 달려들었다. "모두 저 골렘을 처리하라!" 네이그람 후작의 행동에 성기사들이 용기를 얻어 골든 나이트에게 달려들었다. 골든 나이트도 그들의 기세에 밀리지 않은 채 맞서 갔다. 그리고 막상막하의 대결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골든 나이트는 대륙 10대 그랜드 마스터에게 밀리지 않는 강한 힘을 보유하고 있다. 골든 소드에 서린 오러의 힘은 그랜드 마스터의 그것과 비슷하고, 육중한 덩치에서 나오는 힘은 그랜드 마스터를 초월한다. 하지만 골든 나이트를 상대하는 성기사들도 만만치 않았다. 최상급 마스터에 이른 네이그람 후작을 선두로 5명의 마스터 급 성기사가 그를 보조하고 있었다. 그리고 100명 의 성기사가 그들에게 보조 마법을 걸어 주면서 신성력을 그들에게 끊임없이 전달하고 있었다. 성기사들의 장점은 신성력을 다른 성기사들에게 전달 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애초에 개인에 맞게 정착된 힘이 아닌 신이 내려준 힘이기에 그 성질은 변함이 없다.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신성력을 전달해도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의 대결은 끝없이 벌어졌다. 골든 나이트는 골든 소드를 현란하게 휘두르며 시종일관 성기사들을 압박했고, 성기사들은 처음부터 변함없이 강력한 공격을 퍼붓는 골든 나이트의 공격을 봉쇄하기 바빴다. 쾅! 콰광! 쾅! 오러 블레이드와 신성력이 부딪치며 허공에서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 멀찍이 모습을 나타낸 신관들의 눈에 골든 나이트의 황금빛 잔상과 성기사들의 신성력이 어우러지는 흰색 파도 물결만 볼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의 공방은 엄청난 수준을 자랑했다. 엘은 그 대결을 허공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고 있었다. 당장 골든 나이트에게 저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면 대결이 더욱 간단해지겠지만 엘은 성국의 인물들을 가급적 죽이려 하지 않았다. 자칫 저들을 죽이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엘이 원하는 것은 성국의 생각을 돌리는 것, 바로 그것뿐이다. 대결이 벌어진 지 약 30여 분이 흐르자 성기사들 하나하나 지친 표정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기 시작했다. 그에 반해 골든 나이트는 처음과 변함이 없었다. 매직 메탈에 중첩된 실드 마법은 골든 나이트에게 최강의 방어력을 선사하고 있었기에 골든 나이트는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골든 나이트 몸속에 내장된 수백 개의 마나석이 쉬지 않고 발동했기에 그 힘의 크기는 처음과 변함이 없었다. 마나 흡수진이 발동되고 있어 끝없이 마나가 보충되니 대결은 처음부터 결과가 정해져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헉! 헉!" 가장 앞장서서 골든 나이트와 대적하던 네이그람 후작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골든 나이트를 바라보았다. 그는 처음과 변함없는 골든 나이트의 모습에 기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괴, 괴물이군." 그에 반해 네이그람 후작의 모습은 전신 곳곳에 상처가 나 있었다. 골든 나이트에게 직접적으로 입은 상처가 아닌 오러의 여파가 할퀴고 간 상처였다. 상처를 입을 때마다 신성력의 힘으로 상처를 치료했지만 오러에 당한 상처라 쉽사리 아물지 않고 있었다. "공작님이 아니면 저 괴물을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과연 그랜드 마스터를 상대할 만하구나........" 그러면서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골든 나이트와 상대하던 100명의 성기사들이 모두 피로가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신성력을 주입하느라 모두가 지친 것이다. 100명의 신성력을 상대하고도 골든 나이트는 여전히 멀쩡했으니 기가 질릴 만했다. "이대로 포기할 수 없지. 나를 죽이기 전까지 이곳을 넘지 못할 것이다." 힘겹게 워 해머를 고쳐 쥔 네이그람 후작이 마지막 힘을 모두 끌어올릴 때, 신성력이 가득 담긴 웅혼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꽂혔다. "멈추시오!" 익숙한 목소리에 네이그람 후작이 몸을 움찔 떨며 동작을 멈췄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한 네이그람 후작이 경악이 담긴 목소리로 목소리의 주인공의 정체를 확인시켜 주었다. "교, 교황 예하........" 그 말을 엘은 놓치지 않았다. 엘은 저 먼 곳에 나타난 9명의 인물 중 가운데에 선 인물을 보며 눈을 빛냈다. "저 사람이 교황이군." 엘이 교황을 바라보자 교황도 엘의 시선을 느끼고는 엘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잠시 시선이 오갔다. 교황은 잔뜩 지친 성기사들을 한 차례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여신님을 모시는 이곳에서 이런 소란을 피우다니 도대체 정체가 무엇이오?" "당신이 여신의 대리자라 불리는 교황...... 맞습니까?" 교황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은 채 엘은 우선 교황의 정체를 확인했다. 그런 엘의 말에 교황 주변에 있던 대신관이 발작하려 했지만 교황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내가 바로 여신님의 의지를 받드는 성국의 교황, 그레이무스 3세요. 당신의 정체는 무엇이오?" 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저는 성국이 그토록 찾아 헤매는 성녀를 모시고 있는, 금탑의 탑주 엘리미스라고 합니다." "금탑주!" 교황이 두 눈을 번뜩였다. 그러고는 골든 나이트와 성기사들의 결투가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래서 성기사들과 격전을 벌인 거였어." "성국이 먼저 자초한 것입니다만......" 엘의 말에 교황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여신의 의지를 받드는 것은 우리 신자들이 해야 할 일. 그러던 중 수백 년 만에 여신이 직접 말씀을 내려주셨지. 여신님은 위대하신 분. 그분의 힘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얻고, 고통에서 해방되고 있지. 그분의 말씀을 따르는 것은 그분을 믿는 자로서 당연한 일. 그대가 여신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나 그분이 직접 우리들에게 말씀을 내려주신 이상 그 말에 따라야 한다고 본다만......" 엘의 정체를 확인한 교황의 어투도 바뀌었다. 엘에 의해 5대 제국에 압박을 받고, 여러모로 고생한 것 때문에 결코 달가운 마음이 없던 것이다. 교황의 말에 엘은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신앙심으로 가득 찬 저 사람과 자신의 생각은 전혀 달랐던 것이다. "그건 아닙니다. 당신들이 성녀로 생각하는 여인은 제가 사랑하는 여인입니다. 이미 수년 전부터 서로 사랑해 온 사이지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신탁이 내렸다고 그녀를 데려가려고 하는 것, 단지 신탁이 내려왔다고 해서 제가 순순히 따를 것이라 생각했습니까?" 엘의 말에 교황이 자신의 말을 짧게 일축했다. "신의 말씀이다!" "난 신을 믿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엘은 지쳐 일는 성기사들을 가리켰다. 그리고 골든 나이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왜 저들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으면서 아무런 짓도 하지 않은 줄 압니까? 다 성국의 지배자이자 여신의 대리자라불리는 당신과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당신이라면 이야기가 통할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랬기 때문에 누구도 죽이지 않고 제압만 한 것입니다. 만약 독한 마음을 먹었다면 볼레크 대신관과 광휘의 기사단을 사로잡지도 않았을 것이며, 은십자 기사단도 곱게 돌려보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성국의 인물들을 죽이지 않은 것은 바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성국의 인물과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해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한 나라의 지도자이고, 만인의 수장인 교황이라면 자신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교황은 엘의 예상을 산산이 깨버렸다. 그는 두 눈에 불똥을 내뿜으며 일갈했다. "신의 말씀을 따르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신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서는 제 한 목숨도 돌보 지 않는 게 바로 우리들이다!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겠는가." 그러면서 교황은 성기사들을 둘러보며 외쳤다. "여신의 의지를 집행하는 이들이여! 그대들은 신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제 한 목숨 버릴 수 있는가!" 교황의 목소리에 모든 성기사들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기도를 올렸다. "저희는 오로지 신의 말씀을 따를 뿐입니다. 신을 믿는 순간, 저희의 목숨은 오로지 신의 것입니다." 교황은 엘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보았는가! 이것이 바로 신을 따르는 우리들의 의지다! 어쭙잖은 손속을 두었다고 내가 고마워하며 성녀님을 포기할 줄 알았던가! 수백 년 만에 내려온 신의 말씀이시다! 신의 말씀을 따르는 우리는 결코 성녀님을 포기할 수 없다! 대륙의 평화를 위해 성녀님을 순순히 성국으로 모셔 와라, 금탑의 탑주여!" "......." 성기사들의 모습과 교황의 말을 듣는 순간 엘은 여태까지 자신이 헛짓을 했음을 깨달았다. 애초에 이들은 말이 통하는 자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로지 신의 말만 따르고, 신을 위해 제 목숨을 헌신짝 같이 버릴 수 있는 이가 바로 이들이었던 것이다. 좋게 말하면 독실한 신자, 엘의 관점에서 이들은 광신도였다. 엘의 표정이 냉랭해졌다. "그럼 앞으로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아도 되겠군요. 그럼 여기서 당신을 죽이고 내 힘이 닿는 한 여기에 자리한 이들 모두를 죽이겠습니다." 교황도 지지 않았다. "성국의 힘을 얕보지 마라! 신의 힘은 위대하다!" 교황의 외침과 함에 오백에 달하는 성기사들이 몰려 나왔다. 전원 모두 익스퍼트 급 이상에 다다른 성기사들이었다. 엘은 성기사들을 보며 소리쳤다. "성기사들로는 골든 나이트를 이길 수 없다!" 그와 함께 엘의 손에 황금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네이그람 후작이 말했던 사라진 마법, 제련 제강 마법이 전개된 것이다. 엘의 손가락 사이에 네 개의 황금 화살이 생겨났다. "가라!" 피빙! 엘의 손짓에 따라 황금 화살이 네 방향으로 흩어지며 희끗한 잔상을 남겼다. 그리고 그 화살은 빛의 속도로 쏘아져 워 해머를 치켜든 성기사들의 가슴을 꿰뚫었다. 푹! "이, 이건......!" 채 반응도 못하고 자신의 가슴을 꿰뚫은 화살을 바라보는 성기사들. 그것이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마지막 생각이었다. 털썩! 순식간에 쓰러진 4명의 성기사. 그 광경을 보고 다른 이들이 반응할 사이도 없이 엘의 마법 세례는 계속 이어졌다. 피비비빙! 황금 화살의 속도는 너무나 빨라서 마스터에 이르지 못한 성기사들은 방어를 하지도 못한 채 속절없이 쓰러져 나갔다. "모, 모두 피해라!" 순식간에 90명의 성기사가 쓰러지자 네이그람 후작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와 함께 마스터에 이른 성기사들이 앞으로 나서 황금 화살을 쳐내자 수백에 이르는 성기사들이 모두 물러날 수 있었다. 하지만 결코 쉽게 물러나지 못했다. 물러나는 사이 무려 20여명의 성기사들이 황금 화살에 꿰뚫려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 눈 깜짝 할 사이 40명이 넘는 성기사들이 쓰러지자 교황은 입을 열지 못했다. 어찌 안 그러하겠는가. 분명 자신은 신의 말씀을 이행하기 위해 제 한 목숨 바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성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말은 신의 말씀을 이행하기 위해 영광스럽게 죽을 수 있다는 이야기였지, 마법에 속절없이 죽어 나가기 위해 한 말이 아니었다. 교황의 눈에 짙은 분노가 떠올랐다. "이노옴!" 하지만 그렇게 분출한 교황의 분노는 엘의 비웃음을 자아냈다. "왜? 성기사들이 허망하게 죽으니까 그제야 후회하는 건가? 그런 거라면 너무 늦었어." 엘의 손에서 다시 한 번 황금빛이 일렁였다. 그리고 그의 손에 생겨난 황금 화살은 좀 전의 것보다 더 크고 날카로운 예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올 플리체!" 엘은 그것을 마스터 급 성기사에게 쏘아 보냈다. "어딜!" 성국의 마스터 급 성기사이자 성배 기사단 부단장인 라클릭은 워 해머에 강력한 신성력을 뿜어내며 황금 화살을 후려쳤다. 떵! 황금 화살과 충돌하는 순간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반탄력! 당연한 현상이다. 이 황금 화살은 그랜드 마스터인 다이어드 공작조차 밀어내지 않았던가. 그러한 공격을 마스터인 라클릭이 온전히 받아 낼 리 없었다. "크윽! 이런 위력이라니!" 화살을 막아 낸 라클릭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며 워 해머를 늘어뜨렸다. 그런 그의 귀에 네이그람 후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험하다! 피해라!" 그 말에 라클릭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황금빛 잔상이었다. 인정사정없이 쏘아진 황금 화살은 무방비 상태인 라클릭의 심장을 그대로 꿰뚫었다. 푹! "크억!" 심장을 꿰뚫린 상태에서 살아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라클릭의 눈에 생명력이 급속도로 사라지며 그의 몸이 속절없이 허물어졌다. 네이그람 후작이 쓰러지는 라클릭의 이름을 불렀다. "라클릭!" 이미 생명이 떠나간 육체에서 대답을 할 리 없었다. 죽은 것이다. 마스터 급 성기사가. 그것도 8클래스 마법사도 아니고 7클래스 마법사에게 말이다. 이는 7클래스 마법사가 마스터 급 실력자를 이길 수 없다는 공식을 완전히 깨 버린 것과 같았다. 성기사들은 모두 경악이 담긴 눈으로 엘을 바라보았다. 엘은 그런 성기사들을 향해 웃음을 지었다. "마스터라...... 강하긴 하지만 나를 상대할 수 없지."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엘의 얼굴에 땀이 가득했다. 게다가 상당량의 체력을 소모했는지 기복도 고르지 않았다. 이는 당연한 현상이다. 엘이 사용하는 제련 제강 마법은 엄청난 양의 마나로, 전개 대상의 형태와 강도를 강제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때문에 그 마법을 전개할 때마다 소모되는 마나량은 여타 다른 마법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그만큼의 위력을 지니고 있지만 마나량의 소모도 많은, 양날의 검과도 같은 마법이 바로 제련 제강의 마법이었다. 눈에 확연히 드러나는 엘의 상태를 사람들이 못 알아챌 리 없었다. 교황이 성기사들을 둘러보며 외쳤다. "금탑주가 지쳤다! 모두 저자를 사로잡아 신의 말씀을 이행하라!" 교황와 외침에 성기사들은 모두 무기를 치켜들며 외쳤다. "여신을 위하여!" 그와 함께 성기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자 엘은 몸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아직 제련 제강의 마법이 익숙하지 않음을 느끼며 골든 나이트에게 명령을 내렸다. "가라, 타나! 오늘 너의 힘을 대륙에 널리 알려라! 골드 피닉스를 전개하라!" 그에 골든 나이트의 푸른 안광이 폭사했다. "주군. 명령. 이행." 파앗! 약 10m가량을 물러난 골든 나이트가 골든 소드를 허리춤에 매달고는 오른손을 들었다. 키이잉! 키이잉! 치이잉! 치이잉! 공간의 균열음과 함께 공간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공간에서 나온 것은 황금빛으로 이루어진 활이었다. 대륙 최강의 골렘인 골든 나이트의 3가지 무기 중 2번째 무기인 골드 피닉스(Gold Phoenix)였다. 골드 피닉스를 성기사들에게 조준한 골든 나이트가 화살 시위를 당겼다. 그러자 어마어마한 양의 마나가 유동하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주변의 마나가 모조리 골드 피닉스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양의 마나가 골드 피닉스에 흡수되자 금빛 활에 새겨진 촘촘한 룬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황금빛으로 이루어진 화살이 생겨났다. 그것은 주변에서 끌어 모은 마나를 형상화시킨, 오러 블레이 드의 화살 형태였다. 주변의 모든 마나를 끌어 모아 화살을 만든 골든 나이트가 그대로 화살 시위를 놓았다. 쏴아아아아! 황금빛 화살이 대지를 가르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쏘아 졌다. 그 기세는 가히 세상을 갈라 버릴 듯한 어마어마한 기세로, 기존의 공격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그런 기세였다. 그것의 기세를 느낀 네이그람 후작이 외쳤다. "모두 최대한 신성력을 뿜어내 방어 마법을 펼쳐라! 위험하다! 마법을 전개할 여력이 없는 이들은 모두 피하라. 여신의 가호!" 네이그람 후작이 방어 마법을 펼치자 여력이 되는 성기사들도 모두 방어 마법을 펼쳤다. "여신의 가호!" 파아앗! 성기사들의 외침에 순백의 벽이 생겨나며 그들을 감쌌다. 성기사들이 전개할 수 있는 최강의 방어 마법이었다. 하지만 골드 피닉스는 현재 골든 나이트가 지닌 최강의 공격 수단이다. 공격을 펼치는 데 긴 시간이 걸려서 문제가 되지만 대인 공격에 최강의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골드 피닉스였던 것이다. 골드 피닉스는 지체 없이 성기사들의 방어 마법을 깨부셨다. 쩡! "크윽!" 골드 피닉스의 어마어마한 위력에 성기사들이 뒤로 튕겨 나갔다. 전투를 벌이느라 이미 상당 부분의 힘을 소모한 그들이 견고한 방어 마법을 펼칠 리 없거니와 애초에 그들이 펼치는 방어 마법 수준으로 골드 피닉스를 막아 낼 수 없었다. "크으으!" 네이그람 후작도 골드 피닉스를 버티지 못하고 마침내 튕겨나갔다. 한계 이상의 신성력을 끌어올려서 그런지 그의 입에서 피를 가득 흘리고 있었다. 수십 명의 성기사들을 튕겨낸 골드 피닉스는 정확히 교황에게 향하고 있었다. 그러자 수십 명의 성기사가 교황의 앞에 섰다. 그리고 그들은 일제히 방어 마법을 전개했다. "여신의 가호!" 파아앗! 좀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강력한 방어막이 펼쳐졌다. 수십 명의 성기사가 힘을 합쳐 방어 마법을 펼친 것이다. 그 강도와 크기는 개인이 펼치는 것보다 수십 배 강력했다. 하지만 그것도 골드 피닉스를 막지 못했다. 골드 피닉스의 정확한 위력은 8클래스 최강의 방어 마법인 세이지 실드(Sage Shield)를 여러 번 중첩해야 막을 수 있는 위력이다. 하물며 익스퍼트 급 성기사들이 힘을 합친다고 해도 역부족이었다. 골드 피닉스는 거침없이 방어 마법을 돌파했다. 꽝! "크윽!" "끄악!" 비명과 함께 수십 명의 성기사들도 힘없이 튕겨 나갔다. 성기사 벽을 허물고 교황에게 쇄도하자 교황이 양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강력한 신성력을 내뿜으며 교황만이 전개할 수 있는 최강의 신성 방어 마법을 전개했다. "가이아의 가호!" 파아아아앗! 짙은 순백의 방어막. 얼핏 보기에는 여신의 가호와 다를 바가 없지만 가이아의 가호는 8클래스 최강의 방어 마법 세이지 실드와 맞먹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 여태껏 거침없이 전진하던 골드 피닉스가 가이아의 가호에 막혀 처음 주춤했다. 키이잉! 듣기 싫은 소음과 함께 골드 피닉스와 가이아의 가호가 팽팽하게 대립했다. 가이아의 가호를 펼치는 교황의 얼굴은 점차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크윽!" 그와 함께 가이아의 가호에 조금씩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쩍! 쩌적! "아, 아니! 가이아의 가호가......." 대신관들이 입을 떡 벌렸다. 신성 마법 최강의 방어 마법이 바로 가이아의 가호다. 8클래스 세이지 실드와 맞먹는 마법으로 오러 블레이드 조차 방어할 수 있는 마법이 바로 가이아의 가호이건만....... 쩌적! 쩡! 그 사이 가이아의 가호가 완전히 금이 갔다. 그와 함께 골드 피닉스가 그 틈을 비집고 거침없이 쏘아졌다. 이대로라면 교황은 꼼짝없이 화살에 꿰어 죽을 판이었다.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대신관들이 아니다. 대신관들은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최고의 방어 마법을 펼쳤다. "세인트 실드(Saint Shield)!" 무려 여덟 개의 세인트 실드가 펼쳐졌다. 하지만 그것으로 걷잡을 수 없이 강해진 골드 피닉스의 기세를 막아낼 수는 없었다. 골드 피닉스는 8개의 세인트 실드를 모조리 부숴 버렸다. 쩌정! 정! 그러나 그 힘도 여기까지였는지 골드 피닉스의 기세가 급속도로 약해지며 폭발을 일으켰다. 꽝! "크윽!" 그와 함께 교황을 비롯한 여덟 대신관이 튕겨나갔다. 하지만 그들의 방어 마법이 효과를 발휘했기 때문에 그리 큰 피해는 없었다. 단지 충격파에 의해 튕겨 나간 것뿐이다. "이런 위력이........" 자리에서 비틀비틀 일어선 교황이 신음을 흘리며 방금 전 골드 피닉스의 위력에 몸을 떨었다. 정말 대단한 위력이었다. 최강의 방어 마법을 전개하고도 막아 내지 못하다니. "하지만 이걸로는 우리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 자리에서 일어난 교황이 굳건한 의지가 담긴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교황은 말을 하지 못했다. 그의 전방, 골든 나이트가 서 있는 곳을 보고 그대로 굳어 버린 것이다. 골든 나이트는 화살 시위를 당기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어느새 방금 전 막아 낸 화살과 똑같은 모양의 화살이 활에 장전되어 있었다. 그들이 골드 피닉스를 막는 사이 화살을 생성한 것이다. 굳어 버린 교황의 모습을 보며 엘이 차가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보내 버려, 타나!" 쏴아아아아아! 골든 나이트가 시위를 놓자 아까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는 골드 피닉스가 쏘아졌다. "......." 그것을 보며 성기사들은 물론 대신관들과 교황은 포기의 표정을 지었다. 무려 100명에 이르는 성기사들을 튕겨 내고 최강의 방어 마법까지 부숴 버린 골드 피닉스를 도저히 막을 엄두 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교황 근처에 있던 성기사들이 재빨리 교황의 앞에 섰다. 막아 낼 수 없다면 몸을 던져서라도 교황을 보호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때, 하나의 목소리가 격전의 중앙에 정확하게 울려 퍼졌다. "이런, 이런. 아무리 생각이 맞지 않다고 해도 죽이려고 할 것까지야...... 그래도 성국을 다스리는 교황 예하이신 것을." 그와 함께 마치 공간 이동을 한 것처럼 골드 피닉스 앞에 갈색 머리 청년이 나타났다. 청년은 살짝 웃음을 지으며 골드 피닉스를 향해 왼손을 뻗었다. 파앗! 반투명한 막이 청년 앞에 생겨나며 골드 피닉스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반투명한 막과 골드 피닉스는 그대로 충돌했다. 사르르르.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최강의 신성 방어 마법으로도 막을 수 없던 골드 피닉스가 마치 모래 부서지듯 부서져 내리는 것이다. "......." 골드 피닉스의 위력을 몸소 겪었던 성국 측 인물들은 물론 엘 또한 경악이 담긴 눈으로 모래처럼 부서진 골드 피닉스를 바라보았다. 그 후 골드 피닉스를 막아 낸 청년을 바라보자 청년은 슬쩍 웃음을 지었다. "......!" 청년의 웃음에 엘은 순간 전신의 마나가 흔들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헉!" 순간 아득해지는 느낌을 받다가 정신을 다시 차리니 그런 느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다. 엘을 향해 웃음을 짓던 청년은 교황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갑자기 끼어들어 실례했습니다, 교황 예하. 청탑의 탑주이신 라이젠님의 편지를 가지고 왔습니다." 청년의 말에 잠시 정신을 놓고 있던 교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런가." 파견된 청탑의 마법사들을 놔두고 왜 청년이 왔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골드 피닉스를 너무나 손쉽게 막아 낸 청년의 능력에 반쯤 얼이 빠져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여기 있습니다." "아, 고맙네." 어느새 교황에게 다가간 청년이 편지를 건네자 교황이 고개를 끄덕이며 고마움의 인사를 표했다. "제가 할 일인데요." 살짝 웃음을 지은 청년이 교황과 여유롭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 거북한 감정이 든 엘은 잠깐의 시간 동안 회복된 마나와 본신의 마나를 끌어올려 마법을 전개했다. 파앗! 엘의 손에 황금빛이 일렁이더니 황금 화살이 생걱겨났다. 라클릭을 쓰러뜨린 그 황금 화살이었다. "올 플리체!" 피잉! 엘의 손을 떠난 황금 화살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쏘아졌다. 그것을 본 성기사들이 다급하게 외쳤다. "위험합........" 하지만 그들의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교황을 향해 쏘아진 화살은 그와 이야기를 하던 청년의 손에 쥐어져 산산이 부서진 것이다. 마스터에 이른 라클릭조차 변변히 대응을 하지 못한 황금 화살이다. 그런데 지금 그 화살이 청년의 손에 쥐어져 허망하게 부서져 내린 것이다. 그것도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서 말이다. "이런, 이런." 청년은 자신의 손에 쥐어진 황금빛 잔해를 만지며 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청년의 시선을 받은 엘은 속이 거북해지는 걸 느꼈다. 그것은 일종의 경고였다. 저 청년은 자신이 이길 수 없다는.... 마나 호응이 남들보다 월등한 엘만이 느낄 수 있는 특유의 감각이었다. 자신의 감각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엘은 물러나기로 결정했다. 엘은 골든 나이트에게 명령을 내렸다 "타나, 아공간으로 들어가라." 그에 타나가 푸른 안광을 쏟아내며 대답했다. "공간. 저편. 대기." 그와 함께 공간이 벌어지며 골든 나이트의 동체가 공간 저편으로 사라졌다. 엘은 텔레포트를 캐스팅하였다. 텔레포트 캐스팅이 끝나자 엘은 교황을 힐끗 보며 입을 열었다. "이대로 끝내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 일의 끝은 제가 죽거나 성국이 의지를 바꾸거나 둘 중 하나가 확실하게 바뀌어야 결말이 날 것입니다." 그 말을 한 뒤 엘은 청년을 한차례 힐끗 바라본 뒤 마법을 전개했다. "텔레포트(Teleport)!" 스팟! 새하얀 빛이 폭사하며 엘의 몸을 그대로 감쌌다. 그리고 그 빛이 사라졌을 때 엘은 마치 처음부터 존재 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성국 측 인물들은 모두 한바탕 꿈을 꾼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엘에게 위화감을 심어줘 물러나게 만든 청년은 모한 미소를 지으며 엘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젠가 다시 보게 되겠지. 언젠가........" 모한 말을 남기는 청년. 그 말의 여운이 심상치 않았다. 그렇게 성국 중심부 교황청에서 일어난 사건이 끝을 맺게 되었다. 수도에 그것도 교황청이 습격당한 사건 때문에 교황은 큰 충격을 받았다. 골든 나이트의 압도적인 위용에 압도당한 것이다. 그랜드 마스터인 다이어드 공작이 아니면 그 누구도 골든 나이트를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한 교황은 다이어드 공작을 성국으로 소환하고 금탑주를 상대하기 위한 계책을 짜기 시작했다. 그리고 성국은 성군의 출전을 잠정적으로 보류하기로 하였다. 골든 나이트의 힘을 확실하게 느낀 이상, 그것을 제압할 확실한 수단을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은 유리처럼 깨지기 쉬운 평화 상태에 돌입하게 된다. 다가오는 검은손 엘이 교황청에 쳐들어가 일대 접전을 벌인 것이 대륙에 널리 알려졌다. 그리고 그와 함께 골든 나이트의 존재와 금탑의 명성이 퍼져 나갔다. 그랜드 마스터와 호각을 이루는 나이트 골렘! 20대 초반의 나이에 7클래스에 오른 대마법사! 엘과 골든 나이트의 등장으로 블리어드 제국의 아인하트 후작가를 쑥대밭으로 만든 그 소문이 사실로 입증되었다. 교황청을 습격한 것은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다. 현 대륙에서 가장 많은 신자를 보유한 것이 바로 가이 아 교단이다. 때문에 가이아 성국은 물론 그 주변 국가들 대부분이 가이아 여신을 믿는 왕국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금탑주인 엘이 교황청을 습격한 데에 어마어마한 분노를 나타냈다. 그리고 성군 투입에 자신들도 한몫 거들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하지만 교황은 모두 거절했다. 몇 만의 군대가 추가된다 하여도 전날 겪었던 골든 나이트의 압도적인 힘을 당해 낼 수 없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이번에 교황이 느낀 것은 절대자의 존재다. 분명 성국에 그랜드 마스터가 존재한다. 바로 다이어드 공작이 그 그랜드 마스터다. 다이어드 공작이라면 능히 골든 나이트와 일대일로 싸울 수 있고, 도리어 압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원정대에 다이어드 공작이 포함되어 금탑을 친다고 치자. 만약 금탑주가 텔레포트로 다이어드 공작이 없는 교황청을 다시 한 번 치고 온다면? 그 누구도 골든 나이트를 막아 낼 수 없다. 그것 때문에 교황이 다이어드 공작을 성국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여신을 위해 목숨 하나 아깝지 않다. 하지만 여신의 말씀을 지키지도 못한 채 허망하게 죽는다면 그것만큼 허무한 죽음은 없기 때문이다. 금탑을 치기 위해서는 또 한 명의 그랜드 마스터가 필요했다. 그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잠시 모든 대외 활동을 멈춘 것이지만 대륙은 성국이 갑자기 뒤로 물러서는 기색을 보이자 경악했다. 신앙심으로 무장한 그들에게 있어 여신의 말씀을 받드는 것은 죽음을 불사하고 해냈기 때문이다. 성국 내에서는 방안을 강구하기 위해 대외 활동을 멈춘 것이지만 대륙 각국의 눈에서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대륙의 시선은 온통 금탑에 쏠리게 되었다. 각국에서 첩자를 보내려 했지만 강력한 결계에 휩싸인 계곡에 그 누구도의 침입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것 때문에 계곡 입구 주변에 수많은 이목이 깔리기 시작하였다. 자신의 여인을 내주지 않고자 성국과 맞서는 한 남자와 그 남자를 제거하고 여인을 빼앗아 성녀로 모시려는 성국의 움직임. 그것은 온 대륙의 시선을 끌어 모으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일시적인 평화가 찾아오자 세르디아 대륙 동부에서 그동안 은인자중 몸을 숨기던 어둠의 세력이 기지개를 키기 시작하였다. 대륙 최강의 제국 벨로세크. 세르디아의 인간 문명은 동부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었다. 신의 은총이라 불리는 유플리아스 강에 사람들이 모이고 모여 문명을 이루기 시작했으며, 가장 먼저 봉건의 기틀을 마련하여 국가를 이룩한 것이 바로 현 대륙 최강국 벨로세크다. 벨로세크 제국은 그야말로 대륙 최강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다른 4곳의 제국에 비해 영토가 2배 정도 넓으며, 국력 또한 2배 정도 더 큰, 그야말로 최강의 제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영토가 넓고 국력이 강하다고 하여 최강이라는 수식이 붙여지는 게 아니다. 현 대륙에서 국력을 상징하는 1번째 척도는 바로 마탑의 유무이고, 그 다음이 그랜드 마스터의 유무이기 때문이다. 다른 제국들은 각각 1명의 그랜드 마스터를 보유하고 있다. 최고의 자질을 지닌 기사들을 모아 어마어마한 지원을 한 끝에 만들어진 그랜드 마스터들이다. 그런 그랜드 마스터를 벨로세크 제국은 무려 3명이나 보유하고 있다. 그들은 1,000년이 넘는 제국의 유구한 역사와 함께 한 명문가의 비전 검법을 바탕으로 그랜드 마스터에 올랐다. 그 실력은 대륙 10대 그랜드 마스터 중 상위권에 꼽히며, 서로 실력을 갈고 닦으며 날카롭게 벼려진 그들의 검은 최강의 제국, 최강의 기사라는 수식어를 아깝지 않게 하고 있었다. 게다가 벨로세크 제국에는 무려 10여 채가 넘는 마탑이 존재한다. 그중 8클래스 마법사가 세운 마탑이 2군데나 존재하며, 7클래스 마법사가 세운 마탑이 10군데가 넘었다. 가히 대륙 최강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던 것이다. 제국을 다스리는 것은 신의 아들이라 불리는 황제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며, 말 한마디로 수백만의 생명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황제는 제국 최고의 권력자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당대 벨로세크 제국의 황제는 꼭두각시에 불과 하다. 선대 황제가 젊은 나이에 일찍 죽고 어린 황제가 즉위 하자 벨로세크 제국은 3명의 초인과 2명의 마탑주가 권력을 잡았다. 제국의 귀족들은 확고히 기반을 다져 절대 넘보지 못할 권력을 가진 그들을 로드(Lord)라 칭했다. 그 칭호가 아깝지 않을 만큼 그들이 누리는 권력은 가히 제왕에 버금갔다. 족히 수백 명이 앉을 수 있는 회의실 벨로세크 제국의 실권을 잡은 로드만 들어설 수 있는 이곳 회의실에 10명의 인원이 착석해 있었다. 그중 다섯은 제국에서 로드라 불리는 자들이었는데, 놀랍게도 그들은 상석에 자리하지 않았다. 가장 높은 사람이 앉는 상석에는 20대 초반의 젊은 사내가 앉아 있었다. 연신 웃음을 머금고 있는 청년은 무척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는데, 그런 청년 앞에 사람들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면면을 보면 놀랍기 그지없다. 그들 모두가 대륙을 쩌렁쩌렁 울리는 대마법사와 그랜드 마스터였기 때문이다. 각지에서 절대자로 군림하는 그들이 고작 20대 초반에 불과한 청년에게 고개를 들지 못하는 건 무척 뜻밖의 사실이었다. 청년은 그들에게 손을 살짝 흔들며 입을 열었다. "아아, 언제나 그랬듯이 너무 날 어려워하지 말라고. 자네들이 날 어려워 하니 매번 분위기가 이렇지 않나? 모두 고개 들어." 청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개를 숙인 사람들의 고개가 위로 올라갔다. 순간 말 잘 듣는 강아지가 생각나 청년은 빙긋 웃으며 턱을 매만졌다. "아, 일단 이렇게 모이라고 했으니 용건을 말해야겠지. 모두 바쁜 사람들이니까........" 그에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그는 대륙 북부의 강자 적탑의 탑주 카로스만이었다. "천만에 말씀이십니다. 저희 모두는 마스터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르고 있습니다." "아, 그래? 그럼 다행이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인 청년이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우선 한 가지씩 말하지. 라이젠." "예, 마스터!" 청년의 호명에 청탑의 탑주 라이젠이 고개를 깊게 숙이며 대답했다. 그에 청년은 라이젠에게 전에 약속했던 사실을 말하였다. "교황청에 갈 때 골렘에 대해 말해 준다고 했었지?" 라이젠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그 골렘은 실전된 중첩 마법을 더욱 정교하게 짜서 만든 거야. 현 마법 시대에 존재할 수 없는, 아니, 과거 드래곤이 지배하던 마도 제국 시절에도 존재하지 않을 만한 골렘이지." 라이젠이 충격 받은 표정을 하였다. 드래곤의 지배 시절에도 없던 마법이라니. 그렇다면 얼마나 대단한 마법이란 말인가. 그저 실전된 중첩 마법이라고만 생각하던 그가 큰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그런......." 그런 라이젠의 모습이 우스웠는지 청년은 손을 살짝 저었다. "뭐, 그렇게까지 반응할 필요는 없어. 조만간 그 비법을 빼 오도록 할 테니까. 그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기만 해." "예, 마스터." 청년의 말에 라이젠이 공손히 대답하자 이번에는 카로스만과 트루엘 공작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번에 말했던 톨리안 국왕 암살 실패는 유감이야. 하지만 그 일은 금탑주와 얽혀 있는 일이니 그리 신경 쓰지 않겠어. 내가 알기로 금탑주에게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던데...... 맞나?" 청년의 동공은 짙은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그걸 마주한 카로스만과 트루엘은 몸이 빳빳하게 굳는 걸 느꼈다. 그리고 무한한 공포심에 빠져들었다. 8클래스 마법사와 그랜드 마스터인 그들이 느끼는 절대적인 공포. 그들은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눈앞의 마스터에게 절대 비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마스터를 상대할 이는 그 누구도 없는 것을. 카로스만과 트루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자리에 일어나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깊게 숙였다. "요, 용서해 주십시오, 마스터!" 그들이 솔직하게 자백하자 푸른색을 띠던 청년의 동공이 본래 색으로 돌아왔다. 그는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내가 바라는 건 사과가 아니야. 단지 금탑주에게 앙심을 품지 말라는 거지. 알겠나?" 그들은 재빨리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마스터." "좋아, 좋아. 그럼 본 용건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사실 오늘 소집 명령을 내린 것은 앞으로 우리와 목적을 같이 할 새로운 맴버를 소개하기 위함이야. 지크릴." 청년의 말에 허공에서 음침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여러분." 그와 함께 회의석 빈자리 중 한곳에 검은색 기운이 일렁였다. 스르륵!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모습을 드러낸 인물의 모습은 이제 갓 40대로밖에 보이지 않는 중년인이었다. 온통 검은색 일색인 그는 좌중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자기소개를 하였다. "저는 대륙인들이 흑탑주라 부르는, 다크 마스터라고 합니다. 대륙에 쟁쟁한 위명을 날리는 분들을 만나 무척 반갑습니다." 장내에 있던 사람은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흑탑주!" 흑탑! 지금은 전설로 되어 버릴 정도로 유구한 역사를 지닌 곳이다. 흑마법의 본산이라 불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의 흑마법사를 데리고 있는 그들은 한때 마왕을 소환하여 대륙의 절반을 초토화시킬 만큼 강한 위세를 자랑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신검의 주인이 등장하고 마왕이 봉인 당하자 흑탑은 처절한 응징을 당해 대륙 이름 모를 곳에 깊숙이 숨어들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내심 맥이 끊어졌을 거라 생각하던 흑탑이 모습을 드러내다니, 정말 놀랍기 그지없었다. 모두가 놀란 시선으로 지크릴을 바라보자 청년은 그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여기 있는 지크릴은 나와 뜻을 함께하기로 한 이로, 우리와 한 배를 탈 인물이기도 하지. 8클래스 익스퍼트로 마스터에 이른 자네들보다 떨어지지만 전투력은 아마도 엇비슷할 거야." 그러면서 청년은 카로스만과 트루엘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지크릴에게 금탑의 일을 맡기려고 생각하고 있지. 지크릴이 아무리 흑탑의 탑주라고 하나 그대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적어도 하나 이상의 공을 세워야 할 터. 지크릴에게 나이트 골렘의 비전을 빼내게 할 거야." 그러면서 청년은 지크릴을 바라보며 살짝 손을 저었다. "무사히 비전을 빼내 온다면.... 너에게 선물을 주지." 파아앗! 청년의 손에 스태프가 생겼다. 그것은 마탑 어디에서나 구할 수 있는 평범한 스태프였다. 하지만 청년의 손에서 오색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스태프에 어마어마한 속도로 룬어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스태프에 은은한 마나가 어렸다. "오오!" 장내에 있던 모두가 감탄의 표정을 지었다. 지금 청년이 보이는 것은 그야말로 꿈의 경지에 이르러야 전개할 수 있는 마법이었다. 이곳에 모인 마탑주들은 모두 존경 가득한 눈으로 청년을 바라보았다. 청년이 지금 전개한 마법은 인간이되 인간이 아니라 불리는 9클래스 절대 영역. 그 영역에 이르러야 전개할 수 있는 창조 마법이었기 때문이다. 은은한 마나를 뿜어내는 스태프를 가볍게 지크릴에게 넘기며 청년이 말했다. "이 정도는 되어야 스태프라 할 수 있겠지. 뭐, 그건 됐고...... 레이벨." 청년의 호명에 벨로세크 제국 로드 중 한 사람인 녹탑의 탑주 레이벨이 자리에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예, 마스터 !" "신검의 주인은 찾아냈나?" 레이벨이 고개를 깊게 숙였다. "죄송합니다, 마스터. 열심히 정보를 수집하고 있으나 네 개의 신검의 행방은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 마왕을 쓰러뜨린 차원을 지배하는 신검의 행방은 조금씩 윤곽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 말에 청년의 눈이 빛났다. "호오? 좋아, 수고했어, 레이벨. 5대 신검 중 마왕을 쓰러뜨린 차원을 지배하는 신검(Dimension Sword)은 슈르그빌가가 확고하게 주인으로 자리 잡았지. 때문에 5대 신검 중 가장 위협적이라 할 수 있어. 계속 수고하도록 해. 슈그르빌가만 제거해도 대계는 쉬워지니까." 레이벨이 힘차게 대답했다. "예, 마스터." "자, 그럼 이제 복잡한 사항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내가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아 가끔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던데, 가끔 내가 누구인지 생각했으면 좋겠어. 루이아스. 그 이름은 어디 가는 게 아니거든." 청년의 말에 장내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입을 열지 못했다. 청년의 이름, 루이아스라는 이름에 뻣뻣하게 굳은 것이다. 루이아스, 태초에 천지가 창조되고 마법이 발달한 이래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전인미답의 경지, 9클래스 마스터에 이른 대마도사. 그 일신의 능력은 드래곤에 버금가는, 마법의 종주라 불리는 이가 바로 루이아스, 눈앞의 청년이었다. 석상처럼 굳어진 사람들을 보며 청년, 루아이스는 양손을 활짝 편 채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새 시대가 올 거야. 부모를 잘 만나 호의호식 하는 세상이 아닌 오로지 강한 자만이 잘 살 수 있는 세상! 바로 내가 그런 세상을 만들 거니까. 아하하하!" 청년의 웃음이 회의장을 가득 채워 나갔다. 그리고 그것은 새 시대의 바람을 일으키는 자그마한 미풍이 되었다. 블리어드 제국. 5대 제국 중 하나인 블리어드 제국은 요즈음 들어 분위기가 무척 좋지 않았다. 금탑의 탑주 엘에게 관심이 쏠리면서 그에게 당했던 알카이드 황태자와 아인하트 후작가에 상당한 부정적 영향이 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인하트 후작가는 블리어드 제국의 양대 축인 귀족파의 수장이다. 하지만 아인하트 후작과 글레톤이 엘에게 패한 뒤 아인하트 후작가는 급속도로 성세를 잃어 가고 있었다. 귀족파를 이끌던 가문이 급속도로 힘을 잃어가자 귀족파에 속한 귀족들이 무척 혼란스러워 했다. 조금 과장하면 블리어드 제국 절반의 귀족이 속해 있던 귀족파였기에 그들의 혼란은 블리어드 제국에 큰 혼란으로 다가왔다. 엘 때문에 아인하트 후작가만 영향력을 잃은 게 아니다. 알카이드 황태자 또한 엘이 피운 소동 때문에 귀족들에게 끼치던 영향력을 대부분 상실한 상태다. 용의주도한 알카이드 황태자가 후에 적이 될 황자들을 미리 제거하지 않았다면 오스칼 황제에 의해 폐위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음 대 황제가 될 사람은 알카이드 황태자뿐이었기에 오스칼 황태자는 알카이드 황태자에게 무기한 근신을 명령하였다. 제국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던 위치에서 한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위치에 이르자 알카이드 황태자는 엘에 대한 강한 분노를 내뿜었다. "그 녀석만 아니었다면 내가 이런 상황에 처하지도 않았을 텐데......."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의 강력한 지지층이 되어 주던 클라이언 공작은 골든 나이트와의 대결 이후 무기한 수련에 들어갔으며, 귀족파 귀족들의 혼란으로 다른 귀족들도 혼란을 겪고 있었다. 게다가 오스칼 황제의 신임마저 잃었으니, 폐위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미래가 그야말로 어둡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 하나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제가 도움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갑작스런 목소리에 알카이드 황태자가 화들짝 놀라 외쳤다. "누, 누구냐!" 몸을 사리는 그의 모습이 우습기라도 한 듯 목소리의 주인공은 웃음을 지었다. "후후, 전하께 해를 끼치지 않을 테니 너무 경계하지 마시길." 자신의 모습을 비웃음을 느낀 것일까? 알카이드 황태자가 얼굴에 노기를 띠며 외쳤다. "모습을 드러내라!" "이런이런, 상당히 급한 성격을 지니셨군요." 스르륵! 그와 함께 창문 쪽에서 검은 로브를 휘날리며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알카이드 황태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런, 소개가 늦었군요. 제 이름은 지크릴. 대륙인들이 일컫는 흑탑의 탑주입니다." "흐, 흑탑!" 지크릴의 소개에 알카이드 황태자는 경악을 터뜨렸다. 흑탑이 어디인가! 과거 마왕을 소환하여 대륙의 절반을 초토화시킨 흑마법사가 우글거리는 곳이 아니던가! 알카이드 황태자의 반응에 지크릴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너무 안 좋은 쪽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슬프지만 지금의 흑탑은 과거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약하니까요. 아, 물론 그렇다고 실력이 떨어지는 건 아닙니다. 이래 보여도 8클래스 마법사거든요." 알카이드 황태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8클래스 마법사!" 8클래스 마법사가 어디 흔한가! 대륙에 단 10명밖에 되지 않는 게 바로 8클래스 마법사다. 악마의 집단이라 불리는 흑탑의 탑주도 8클래스 마법사였을 줄이야....... 놀라긴 했지만 알카이드 황태자는 후일 제국의 황제가 될 인물이다. 재빨리 평정심을 되찾은 그는 지크릴에게 물음을 던졌다. "그런데 흑탑의 탑주가 왜 나를 찾아왔지?" 그에 지크릴이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알카이드 황태자에게 달콤한 유혹을 던졌다. "저와 힘을 합치지 않으시겠습니까?" 알카이드 황태자가 인상을 찡그렸다. "힘을? 내가 왜 그대와 힘을 합쳐야 하지? 게다가 어둠의 세력이 나에게 힘을 합치자고 하다니......." 그로서는 상당히 꺼려질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지크릴의 제한은 무척 끌렸다. 8클래스 마법사인 지크릴이 도와준다면 잃어버린 자신의 영향력을 회복하는 건 시간 문제였기 때문이다. 아니, 혼란에 빠진 귀족파 귀족들을 수습하여 더욱 큰 힘을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흑탑의 탑주라는게 알카이드 황태자의 마음에 걸렸다. 흑탑주는 결국 흑마법사다. 그런 자와 손을 잡았다간 뒤끝이 좋을 리 없다. 그런 알카이드 황태자의 심리를 지크릴이 모를 리 없다. 그래서 그는 알카이드 황태자에게 미끼를 던졌다. "그렇게 말한다면 어쩔 수 없군요. 전하와 함께라면 금탑의 탑주를 충분히 제거할 수 있을 텐데........" 그 미끼는 알카이드 황태자라는 대어를 낚기에 충분했다. 알카이드 황태자가 눈을 번뜩였다. "뭐? 지금 뭐라고 했지? 금탑주? 지금 금탑주라고 했나?" 지크릴의 입에 미소가 맺혔다. 대어가 미끼를 문 것이다. 그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금탑주를 말한 게 맞습니다만. 전하는 금탑주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요? 제가 전하를 찾은 이유도 그것 때문입니다만......." 지크릴의 말에 알카이드 황태자가 이를 갈았다. "크윽,엘.......!"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날의 일을....... 포스 해머에 적중 당해 엄청난 내상을 입어 몇 달 간 고생했다. 전혀 생소한 고통. 태어나 고통이란 걸 모르고 살아온 알카이드 황태자에게 그것은 너무나 끔찍한 경험이었다. 더군다나 내상이라 아무는 시간도 무척 오래 걸렸다. 게다가 약점까지 잡혔다. 자신이 실피르를 어찌하려 했던 것을 엘이 매직 캡처로 지니고 있던 것이다. 그걸 그냥 가지고 있다면 괜찮지만 만약 그걸 공개한다면 여태껏 흠이 없던 자신에게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할 것이 분명했다. "그 녀석을........" 그때 당했던 고통, 그리고 자신이 약점을 잡혔다는 사실과 사라진 자신의 권력을 떠올리자 걷잡을 수 없었다. 그만큼 엘에 대한 분노가 너무나 컸던 것이다. 그리고 지크릴은 그 틈을 교묘히 이용하였다. 그는 알카이드 황태자가 가장 걱정하던 부분을 해소시켜 주었다. "제가 흑마법사라는 사실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가급적 일을 조용히...... 조용히 처리할 거니까요. 저와 전하가 연합했다는 사실은 누구도 모를 것입니다." "으음........" 지크릴의 말에 알카이드 황태자는 눈을 감았다. 지크릴이 저렇게까지 말하니 무척 갈등이 되었던 것이다. 고민에 빠진 알카이드 황태자에게 지크릴이 마지막 일격을 먹였다. "그리고 보답으로 전하를 다시 권력의 중심에 올라서게 해 드리겠습니다.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황좌에 올려드릴 수도 있습니다." "........!" 알카이드 황태자가 두 눈을 떴다. 마침내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는 지크릴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 말 정말인가?" 지크릴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걸려든 것이다. "그렇습니다.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그 정도는 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 말에 알카이드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이 마음에 걸려하는 점을 털어놓았다. "........사실 나는 엘에게 약점이 될 만한 걸 잡혔다. 그것 때문에 흑탑주를 돕기 상당히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 만약 내가 나선다면 그 녀석이 내 약점을 물고 늘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지." 지크릴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상관이 없었다. "그건 괜찮습니다. 제가 전하께 바라는 건 외적인 도움이 아닌 내적인 도움이기 때문입니다. " "내적인 도움? 그게 뭐지?" 알카이드 황태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지크릴이 자기 머리를 톡톡 치며 말했다. "그건 추후 천천히 말씀 드리도록 하지요. 계획은 제 머릿속에 다 들어 있으니까요." 알카이드 황태자는 순순히 납득했다. "그렇게 하지." "그럼 일단 황태자 전하를 권력의 중심으로 올려 드려야겠군요. 전하께서 원하시는 게 무엇입니까? 권력의 회복입니까?" "내가원하는 거라......." 그의 입가에 한순간 잔혹한 미소가 맺혔다. 그리고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했다. "내가 원하는 건 바로 이 제국의 지배자가 되는 것이다." "과연 제가 선택하신 분입니다." 지크릴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엘과 성국의 전투, 위태로운 평화 뒤에 또 다른 비수가 그를 겨누고 있었다. 조금씩 드러나는 어둠의 세력. 그들의 야망은 무척 위험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랜드 마스터의 무위를 보유하고 있는 골든 나이트를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성국과 엘이 지닌 골든 나이트의 비밀을 빼앗으려는 흑탑주 지크릴. 앞서 엘과 성국의 충돌이 미풍이었다면, 지크릴이 알카이드 황태자의 도움을 얻어 큰 폭풍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흘릴 피로 이루어질 폭풍을. (골든 메이지 4권에서 계속) 편집자 후기 연결권으로는 또 간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안녕하세요, 계부입니다. 분명 전 지난달 신간을 총 3개나 작업했는데, 왜 아직 까지 연결권은 하나밖에 작업하지 못했을까요. 역시 좀 더 강력하게 조건을 달아 놓아야 하는 걸까요? 흐음...... 벌써 보름 가까이 감기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지금도 아파요. 5권에서 사장님이 튼튼 어쩌고 할 때 제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고 써 뒀던 것 같은데 고작 한 달 사이에 이렇게 변할 줄을 생각도 못했습니다. 훗, 요새 들어 아픈게 이렇게 좋은 거구나 생각하고 있답니다. 물론 이 시간에도 제 담당 작가 분들께서는 살판이 나시겠죠. 아프다는 말 따윈 콧등으로 들을 ‘죽일 놈의 퀘스트’ 작가님과, 아픈 것 따윈 없다며 밥 먹자고 할 ‘골든 메이지’ 작가님과, 이때가 기회라며 실컷 놀린 후에 가드나 올리실, 얼마 전 계약한 여류 작가님과 - 그 외에도 담당의 정신을 집단 구타할 작가님들 이시니까요. 뭣보다 아프냐고 싱그럽게 웃으면서 초인동맹에 어서 오세요 3권 편집 작업을 맡길 반 사마와, 아프냐고 착한 척 물어보면서 고양이랑 듀엣으로 밥 달라고 징징댈 달늑대 작가 씨가 나빠! 그리고 아픈 놈에게 무지막지한 일거리를 주시는 사장님과 팀장님이...... 제일 미워요, 크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