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 : 골든메이지 2 지은이 : 김현우 출판사 : 파피루스 출판년도 : 2008년 1월 21|일 봉사자 : 곽남주 <지은이 소개/ 김현우> 마음만은 여전히 신인. 오늘도 매일같이 키보드를 두드린다. <옮긴이 소개/ > <차례> 1 밝혀진 진실 2 최강의 골렘! 최강의 마법사! 3 최연소 7클래스 마스터 4 미래를 설계하다 5 톨리안 왕국의 국왕을 구하다 6 국왕과의 협상 7 트롤 벨리(Troll Valley) 8 기상천외한 특산물 <소개 글, 서평> 1 밝혀진 진실 약 3m에 이르는 거대한 황금 기사. 아인하트 후작이 골든 나이트를 보고 한껏 경악을 담은 채 입을 열었다. “이, 이건...... 설마...... 나, 나이트 골렘!” 나이트 골렘. 마법사 시대를 종말로 몰고 간 마법사들의 최고의 작품. 단순히 삐꺽거리며 움직이는 골렘과 달리 인간과 같은 움직임이 가능하며, 그 위력은 탑승자의 다섯 배 이상을 웃돈다. 나이트 골렘을 만드는 설계도는 웬만한 세력을 이룬 곳이라면 모두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이 나이트 골렘을 만들지 못했던 이유는 딱 하나다. 마법의 부족. 아무리 무수히 많은 마법서 사본이 대륙 전역에 뿌려졌다지만 각 세력의 비전 마법이라 할 수 있는 건 조금도 유출되지 않았다. 나이트 골렘을 만들기 위해서는 비전 마법 중 가장 중요한 마법이라 불리는 마법진의 중첩이 필요하다. 기존의 것과는 다른, 수십 개의 마법진을 충돌 없이 중첩하게 하는 중첩 마법진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중첩 마법진은 이미 유실된 지 수백 년이 넘었기에 다들 나이트 골렘의 복원은 포기하고 있었다. 지금 나이트 골렘이 나타난다면 대륙 모든 마법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것이다. 나이트 골렘에 쓰인 중첩 마법진은 마법 아티팩트를 만드는 데 매우 유용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마법 아티팩트보다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는 것이 바로 나이트 골렘에 쓰이는 중첩 마법진이었다. “마법 진이라......” 아인하트 후작의 탐욕 어린 시선이 골든 나이트에게 향했다. 저것을 연구하면 아인하트 후작가의 힘은 한층 더 강해지리라. 지금 이 순간에도 가문의 이익을 생각하는 안인하트 후작이었다. 골든 나이트의 전신에는 은은한 금광이 어려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연출이 아니다. 골든 나이트를 은은하게 감싼 금광은 사실 골든 나이트에 새겨진 수백 개의 마법이 발현된 실드 마법의 효과였다. 얇은 옷도 여러 개를 겹쳐 입으면 웬만한 추위엔 견딜 수 있듯, 골든 나이트 주변에 응집된 실드는 낮은 클래스 마법이지만 중첩되고 중첩되어 5클래스 마법까지 무리 없이 튕겨 낼 수 있게끔 되어 있었다. 골든 나이트의 단전 부근에 응집된 수백 개의 마나석이 움직였다. 수백 개의 마나석이 합쳐진 골든 나이트의 마나 홀에는 소드 마스터의 오러를 월등히 뛰어넘는 양이 응집되어 있다. 콰콰콰콰-! 살을 에는 듯한 강렬한 마나가 뿜어진다. 그것은 마치 소드 마스터 이상의 검사가 뿜어내는 기운과 같았다. “크윽!” 골든 나이트의 기세에 7클래스 익스퍼트에 든 글레톤 이 미약한 신음을 흘렸다. 그렇다는 것은 골든 나이트가 뿜어낸 기운이 최소한 소드 마스터 급이란 이야기다. '놀랍군. 정말 놀라워!' 글레톤 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아인하트 후작도 내심 경악하고 있었다. 방금 전 저 나이트 골렘이 보인 기세, 그것은 최소 소드 마스터를 상회하는 엄청난 능력이었기 때문이다. 아인하트 후작은 엘게 시선을 옮겼다. 엘 또한 허공 위에서 아인하트 후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 순간 아인하트 후작의 입가에 비웃음 비슷한 미소가 떠올랐다. 7클래스 마스터인 자신 앞에 서 있는 엘이 가소로웠기 때문이다. '가소롭군...... 아니, 잠깐! 그렇다면 방금 전 저택에서 7클래스 마법은, 그건 누가 시전한 것인가?' 기이하게 변하는 아인하트 후작의 표정. 그도 그럴 것이 방금 전 집무실에서 7클래스 마법이 폭발했다. 그런데 눈앞의 엘은 이제 갓 5클래스 익스퍼트에 든 마법사라고 들었다. 대체 7클래스 마법은 누가 시전한 것인가? "설마......!" 냉정한 아인하트 후작의 입에서 경악이 서린 음성이 터져 나왔다. 설마, 설마하니 자신이 속았단 말인가! 자타가 공인하는 7클래스 마스터 최강의 마법사인 이 아인하트 후작이? 아인하트 후작은 떨리는 눈으로 엘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인하트 후작이 웃었던 것처럼 비웃음을 머금는 엘. 그 모습에 아인하트 후작은 확신할 수 있었다. 엘은 자신을 속였다. 7클래스 마스터 인 자신을! 비웃음을 머금고 있었지만 엘의 눈은 한없이 차가웠다. 모든 것을 얼려 버릴 듯한 싸늘한 안광이 아인하트 후작과 글레톤을 훑고 있었다. 끓어오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7클래스 마법을 시전 했지만, 지금 이 순간 엘은 너무도 냉정했다. 상대할 가치도 못 느낄 정도로 어이를 상실하면 외려 웃는다고 하지 않는가? 엘 또한 분노가 지나쳐 더없이 차가운 냉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그리고 실피르를 이용하려 했던 할아버지와 삼촌...... 아니, 그렇게 부를 가치도 없다. 아인하트 후작과 글레톤에게 엘이 입을 열려던 찰나 실피르의 음성이 들려 왔다. “엘리! 이게 무슨 일이니?” 무서우리만치 냉랭하던 엘의 표정이 순간 풀어졌다. “엄마......” 너무나 급격한 변화였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은 엘의 표정이 실피르의 등장으로 변한 것이 었다. 사실 엘은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내심 실피르가 나타나지 않기를 빌고 있었다. 앞으로 벌일 자신의 행동을 차마 실피르에게 보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피르에게 진실을 알려 주기가 겁이 났다. 더럽고, 비열하며 잔인한 아인하트 후작과 글레톤의 대화...... 그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들었다가는 실피르가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주인님, 이게 무슨......” 실피르 뒤에 나타난 세레나와 카이나도 방금 전 폭발이 엘에 의해 일어난 것임을 알고는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어서 말해! 엘!” 실피르가 엘을 다그쳤다. 녀는 지금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조마조마하기 짝이 없는 게 그녀의 내심이었다. 한 번도 어긋난 일을 하지 않은 엘이다. 분명 이유가 있어서 이런 일을 벌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 큰일이 일어났다는 걸 의미했다. 자신의 아들 엘이 저렇게까지 분노하는 모습을 보이는 걸 보면 말이다. “엄마......” 엘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막막했다. 갈등하고 있는 것이다. 머뭇거리는 엘의 모습 때문일까? 실피르가 한층 더 다그쳤다. “어서 말해!” “후!” 한숨을 내쉬는 엘. 모든 걸 포기했다. 그리고 마법을 캐스팅하기 시작했다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다. 그것은 아인하트 후작과 글레톤이 나눈 대화 내용을 빠짐없이 담은 매직 캡처(Magic Capture)라는 마법이었다. ‘안 돼!’ 아인하트 후작은 엘의 행동을 보고 그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파악했다. 엘은 아마도 자신과 글레톤의 대화를 엿들었을 확률이 높다. 그리고 그것을 매직 캡처로 담아 놨을 것이다. 그들의 대화는 차마 알릴 수 없는 사실들이 수두룩했다. ‘그 내용이 알려지면 우리 가문은...... 끝장이다!’ 아인하트 후작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는 폭발의 진원지를 찾아 모여든 기사들에게 외쳤다. 엘의 행동을 막아야 한다. 잘못하면 가문의 멸문은 고사하고 그 후손들은 평생 노예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모두, 공격하라! 이 녀석이 폭발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다급하게 외치는 아인하트 후작의 모습에 사태가 시급함을 느낀 기사들. 그들 또한 제국의 상위권에 못 든다 말하면 서러울 실력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재빨리 검을 뽑아 들고는 엘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아버지! 전후 사정도 들어 보지 않은 채......” “다물어라!” 아인하트 후작이 무시무시한 눈으로 실피르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실피르도 물러나지 않았다. “엘리는...... 아버지의 손자라고요! 그런데 공격하라니요!” 하지만 아인하트 후작은 들은 척도 안 했다. 그는 오히려 기사들의 행위를 재촉했다. “어서 사로잡아라! 외모와 달리 고 클래스 마법사이니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라!” 고 클래스 마법사란 걸 언급하지 않아도 이미 폭발의 크기가 어마어마했으므로 기사들은 바짝 긴장감을 곧추 세우고 있었다. 엘은 자신의 주변을 에워싼 채 접근하고 있는 기사들을 보고는 골든 나이트에게 시선을 돌렸다. 골든 나이트는 묵묵히 자리를 지킨 채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엘이 골든 나이트의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타나! 저들을 모조리 제압하라. 단, 죽이지는 마.” 실피르가 보는 앞에서 차마 사람이 죽이기는 싫었다. “주군 명령. 받듦.” 그와 함께 골든 나이트, 타나가 움직였다. 사념을 응집하여 만든 에고에는 과거 숱한 경험을 치른 이들의 사념이 함께하고 있었다. 덕분에 타나의 전투 경험은 그 누구보다 풍부하다고 할 수 있다. 골든 소드(Golden Sword)를 뽑아 든 타나는 빠른 몸놀림으로 기사들에게 달려들었다. 골든 소드는 골든 나이트를 상징하는 무기다. 철 중에서도 불순물이 적은 드워프제 순철을 사용해서 뼈대를 세웠고, 마법진을 새기기 위해 매직 메탈을 겉에 둘렀다. 마지막으로 검 면에 금을 두른 뒤 마법 코팅 처리를 한 최고급 검이었다. 검 자체에는 검의 예리함을 더해 주는 샤프니스(Sharpness)와 검과 충돌할 때 발생하는 반탄력을 흘려주는 셰드(Shed) 마법이 걸려 있어 골든 나이트의 강력함을 한층 더 살려 주고 있다. 철을 접어서 제련하면 그 강도가 몇 배 이상 높아지는 것처럼 엘 또한 샤프니스 마법을 중첩에 중첩을 하였다. 그것이 매직 메탈이 견딜 수 있는 한계까지 중첩했기에 골든 소드에서 뿜어지는 예기는 가히 신검 수준에 버금간 다고 할 수 있다. '흔히 책에서는 아무리 잘난 무기라도 무기의 도움으로 강해지는 건 한계가 있다고 하지만, 그런 무기와 함께 해서 더욱 강해지는 게 중요한 거야.' 스타크래프트에서도 그러하다. 최강의 유닛이라 불리는 것들도 업그레이드를 하지 않으면 업그레이드를 한 다른 유닛에게 그대로 죽지 않던가? 그러니 그때그때의 능력을 최고조로 살려 주어야 한다 는 것이 바로 엘의 생각이었다. 이상주의가 아닌, 실용주의! 그것이 바로 엘이 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빛을 발하고 있다. 골든 나이트가 기사에게 접근하자 기사들은 긴장의 빛을 띠며 검에 오러를 생성했다. 아인하트 후작가 기사답게 그들 모두가 소드 익스퍼트에 든 기사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러는 기사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골든 나이트의 손에 들린 골든 소드에도 은은한 푸른빛이 어리기 시작한 것이다. 기사들과 같은 오러였다. 하지만 위력은 천차만별이었다. 기사들이 들고 있는 검보다 족히 두 배는 더 큰 골든 소드에 오러가 서려, 기사들보다 몇 배는 더 큰 오러가 생성된 것이다. 골든 나이트는 골든 소드를 그대로 횡으로 그었다. 눈부신 푸른빛과 황금빛이 반짝이며 광채를 발했다. 퍼억! 둔중한 타격음. 골든 소드에서 뿜어진 오러가 폭풍을 일으키며 다섯 명에 이르는 기사들에게 적중한 것이다. “어억!” 신음을 흘린 채 부웅 날아가 바닥에 처박히는 기사들. “우웃! 뭐냐, 이건!” 골든 나이트의 신위에 기사들이 움찔했다. 그 사이 골든 나이트는 움직이고 있었다. 거대한 몸과는 다르게 빠르게 움직이는 골든 나이트. 그 움직임은 기사들보다 월등하게 빨랐다. 어느새 기사들에게 접근한 골든 나이트가 또다시 골든 소드를 휘둘렀다. “우리가 바보인 줄 아느냐!” 기사들 중 한 명이 골든 나이트에게 외치며 검에 오러를 생성했다. 기사들도 바보가 아니다. 그들은 방금 전 골든 나이트가 기사들을 어떻게 튕겨 냈는지 보았기에 재차 대응했다. 검에 오러를 생성한 기사들이 골든 소드에 대항해 들어갔다. 하지만 그것은 명백한 오산. 골든 나이트라면 설사 소드 마스터라도 가볍게 이길 수 있을 거라 예상한 엘이다. 그런데 소드 마스터조차 제대로 상대하지 못하는 소드 익스퍼트들이 골든 나이트들이 어찌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쩡! 골든 소드와 기사들의 검이 부딪쳤다. 그와 함께 기사 들이 검이 모조리 부서져 나갔다. 쩌저적! 그리고 오러 폭풍이 휘몰아치며 삽시간에 기사들을 쓸 어 버렸다. 콰당! 처음 당한 기사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널브러진 것이다. 골든 나이트가 몸을 돌리자 기사들의 몸이 일제히 움찔 한다. 방금 전 기사들이 대응한 걸 간단하게 눌러 버린 골든 나이트가 최소한 소드 마스터 급 실력자란 걸 알아차린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후작가의 기사. 상대가 설사 그랜드 마스터라고 해도 물러나면 안 되는 기사인 것이다. 기사의 본분은 주군을 수호하고 주군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다. 그들이 재차 전의를 다질 때, 그들에게 구원군이 왔다. 아인하트 후작가 직속 기사단인 화이트 윙 기사단이 나타난 것이다. 총 50명으로 이루어진 화이트 윙 기사단은 단장이 소드 마스터 상급이며. 부단장 세 명 또한 소드 마스터 의 실력자다. 다른 기사들 또한 모두 소드 익스퍼트 상급으로 이루어져있다. 제국 후작가의 기사단답게 엄청난 전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마법사 가문임에도 아인하트 후작가의 기사단 전력은 제국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후작 각하.” 화이트 윙 기사단장 롬펠 남작이 아인하트 후작에게 고개를 깊게 숙였다. 그리고는 화이트 윙 기사단과 다른 기사들에게 외쳤다. “우린 아인하트 후작가의 기사들이다! 물러서지 마라!” 쓰쓰쓰! 그와 함께 그의 검에 솟아나는 푸른색 오러 블레이드! 이 세상 모든 것을 잘라 버릴 수 있다고 알려진 오러 블레이드는 기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리기에 충분했다. “오오!” 오러 블레이드를 보며 감탄사를 터뜨리는 기사들. 동시에 그들의 검에 푸른 오러가 맺히기 시작했다. 오러 블레이드를 보고 용기를 되찾은 것이다. 허공에서 기사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엘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골든 나이트를 향해 외쳤다. “타나! 제2단계 모드를 발동하라.” 그러자 골든 나이트의 동공에서 푸른 안광이 뿜어졌다. 동시에 은은하게 뿜어지던 금광이 폭발하듯 주변을 물들여 나갔다. “봉인. 해제.” 너무 오랫동안 가동을 하지 않았기에 제1단계 모드로 충분히 몸을 풀지 않았다면 다단계로 가동을 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기사들을 상대하면서 충분히 움직여 주었기에 제3단계까지 무리 없이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엘이 가늠해 보길, 제1단계의 힘이면 소드 익스퍼트 기사들을 무리 없이 상대할 수 있고, 제2단계면 소드 마스터를, 제3단계면 그랜드 마스터도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제2단계 상태로 들어선 이상 소드 마스터라 하여도 골든 나이트를 위협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골든 소드에 맺힌 오러가 휘황찬란하게 뭉치더니 이내 거대한 오러 블레이드를 생성하기 시작했다. 쓰! 쓰! 쓰! 솟아오르는 오러 블레이드! 골든 소드에 생겅된 오러 블레이드를 보고 입을 떡 벌린 롬펠 남작을 향해 골든 나이트가 그대로 달려들었다. “내가 그렇게 쉽게 보이나! 커다랗기만 한 오러 블레이드 따위로는 날 상대할 수 없다!” 오러 블레이드를 머금은 골든 소드를 보며 롬펠 남작이 마주 검을 휘둘렀다. 상급 소드 마스터인 롬펠 남작. 그 이름에 걸맞게 오러 블레이드 또한 초급 소드 마스터와 확연히 다른 위력을 지니고 있다. 기사들 또한 롬펠 남작이 아인하트 후작가를 무법 지대로 누비는 골든 나이트를 막아 줄 거라 믿었다. 그들의 기대가 담긴 롬펠 남작의 검과 골든 소드가 부딪쳤다. 꽈앙! 거대한 폭발음! 그와 함께 드러난 광경은 모든 기사들의 바람을 산산이 깨부수는 것이었다. 롬펠 남작이 피거품을 문 채 한쪽 무릎을 꿇고 있던 것이다! “끄으으! 미, 믿을 수 없다. 내가 이렇게......” 단 한 번의 충돌로 자신을 이렇게 만든 골든 나이트를 보며 신음을 흘리는 롬펠 남작! “끄윽!” 짧은 신음과 함께 롬펠 남작이 기절하자 골든 나이트가 다시 움직였다. 상급 소드 마스터조차 한 방에 기절시킨 골든 나이트다. 그보다 수준이 갖은 기사들이 기겁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우리가 상대하겠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화이트 윙 기사단의 부단장 세 명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의 눈에 비친 골든 나이트는 괴물이었다. 정면 싸움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괴물인 것이다. “제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머리가 좋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말한 화이트 윙 기사단의 부단장 렉필은 골든 소드를 정면으로 받는 듯하면서 옆으로 비껴 내려 하였다. 그의 외침대로 골든 나이트는 머리가 좋지 않다. 하지만 골든 나이트의 에고를 구성하고 있는 사념은 대부분 전투 경험이 풍부한 것들의 사념이다. “으헉!” 정면으로 부딪치는 척하며 검을 비끼던 렉필은 골든 소드 또한 검로를 비틀자 기겁했다. 그와 함께 골든 소드에 어린 오러 블레이드에 단숨에 휘말려 버렸다. “커헉!” 그리고 검을 고쳐 쥔 골든 나이트는 다른 두 명의 부단장마저도 모두 때려눕혔다. 잠시 후. 후작가 내에 존재하던 기사들 모두가 골든 소드에 얻어맞고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다. 골든 나이트가 100여 명이 넘는 기사들을 때려눕히는 데 걸린 시간이 그렇게 짧았다. 아인하트 후작과 실피르, 그리고 구경하던 모든 이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후우......” 후작가 내의 모든 마법사들을 때려눕힌 골든 나이트를 옆에 세워 둔 엘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큰 소란을 피워서인지 후작가 내에 존재하던 모든 마법사들이 몰려온 듯했다. 물경 수백 명에 이르는 마법사들. 로브를 두르고 있는 그들 모두가 최소한 4클래스 이상의 마법사들이었다. 가히 한 왕궁의 전력을 능가하는 엄청난 전력이 아인하트 후작가에 웅크리고 있던 것이다. 게다가모든 전력을 이곳에 집중시킨 것이 아니니 후작령에도 많은 전력이 존재할 것이다. 예상보다 훨씬 강한 아인하트 후작가의 전력에 엘은 자신의 행동이 경솔했던 게 아닌지 갈등했다. 하지만 기호지세란 말이 있지 않은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걸어왔다. 여기서 멈추려 한다면 무사할 수 없음을 엘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엘이 실피르에게 시선을 옮겼다. 실피르 또한 연신 불안한 얼굴로 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엘이 실피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까 왜 이 소란을 일으켰는지 알고 싶다고 하셨죠?” “그래.” 실피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인하트 후작을 힐 끗 보더니 이어서 말했다. “나에게만 보여 줘.” 그녀 또한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다. 엘이 이렇게 일을 크게 벌일 정도면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가문의 영광에만 미쳐 있는 아버지나 오라버니에게 큰 타격이 될 수 있음을 말이다. 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런 엘을 아인하트 후작이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공격해서 저놈이 캡처한 내용 들을 소거해 버리고 싶다. 하지만 저 골렘과 엘의 조합은 만만해 보이지 않았다. 우선 나이트 골렘은 대륙에 단 열 명만 존재한다는 그랜드 마스터가 아니고서는 제압하기가 불가능해 보일 정도다. 엘이야 아무리 7클래스 마스터라고 해도, 7클래스 마스터인 본인과 글레톤, 그리고 후작가 마법사들이 대거 나선다면 분명 제압할 수 있다. 하지만 도망치고자 하면 절대 잡을 수 없다. 그렇게 되면 끝장이다. 만약 캡처한 내용을 대륙에 퍼뜨리면 아인하트 후작가는 존립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된단 말인가.’ 아인하트 후작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 아인하트 후작이 생각에 빠진 사이, 엘은 실피르에게 마법을 시전하고 있었다. 엘이 캐스팅하고 있는 마법은 6클래스 아이솔레이션 스페이스(Isolation Space)란 마법으로, 상대방을 홀로 고립된 공간에 들어가게 할 수 있는 마법이다. 7클래스 마법사인 엘이었기에 6클래스 마법을 시전 하면서 동시에 매직 캡처를 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아이솔레이션 스페이스.” 실피르에게 마법을 시전한 엘은 매직 캡처를 시전했다. 그리고 실피르에게 보이는 영상. 자신의 남편에 대한 비밀과 매직 스톤에 대한 내용. 그리고 황태자에 대해 얽힌 내용과 엘리를 세뇌시켜 가문의 마법사로 삼겠다는 이야기 등등. 너무나 패륜적이고 잔인한 이야기들. 실피르의 입에서 절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으흑!” 엄습해 오는 절망감. 17년 만에 가문에 찾아왔더니 가문은 자신을 가문의 희생양으로 이용하려 할 줄이야...... 게다가 매직 스톤을 차지하기 위해 엘을 납치하려 한 것을 눈으로 직접 보니 치가 떨렸다. 눈물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리고 자책감이 물밀듯 몰려 왔다. 가문에 대한 매정함을 몸으로 직접 겪었지 않은가. 그런데 엘리를 직접 데리고 와 버렸다니...... 아무리 가문이 잔인해도, 아무리 가문이 매정해도 최소한 정이라도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가문은 말 그대로 잔인하고 매정했다. 가족에 대한 정이라고는 일말만큽도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은 어찌 되어도 괜찮다. 엘리만 위한다면...... 하지만...... 가문은 자신뿐만 아니라 엘리마저도 이용하려 하였다. 그것도 세뇌라니! 손자이며 조카이다. 그런데 가문에 대한 반발심이 있을 수 있다고 세뇌를 하겠다고 한다. 처음으로 가족을 미워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남편을 죽였을 때도 원망할지언정 미워하지는 않았다. 황태자의 압박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가족을 가족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단지 가족이 가문의 영광을 위한 ‘도구’ 에 불과했던 것이다.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싶었다.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었다. ‘안 돼, 약속했잖아. 그럴 수는 없어.’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감정이 들자 실피르는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이가 파고들어 입술에서 피가 배어 나왔지만 실피르는 그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마법을 시전하기 전 실피르는 엘과 약속을 했다. 진실을 알더라도 절망하지 않기로. 현실을 당당히 받아들이겠다고. 엘리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해 주었으니 이제는 자신이 약속을 지켜야 할 때였다. 그런 실피르의 의지를 6클래스에 이른 정신력이 도와주었다. 도피하고 싶은 현실이지만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진실이고 참된 사실이었으니까, 슬프고 절망스럽다고 해도 거짓된 세상에 갇혀 있는 것보다 그것이 훨씬 났다. 마법이 해제되었다. 그러자 실피르의 몸이 한 차례 휘청였다. “흐윽!” 눈물이 흘러나왔다. 현실을 직시하자고 마음먹었지만 막상 아인하트 후작과 글레톤을 보니 절로 눈물이 흘러나온 것이다. 그만큼 실피르의 슬픔은 컸다. 가족에 대한 한 줄기 믿음마저도 깨진 것이...... “엄마......” 그런 실피르의 마음을 엘이 모를 리 없다.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에 어린 감정이 모두 엘에게 전해졌기 때문이다. “용서 못해......” 엘의 두 눈에서 푸른 안광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그와 함께 엘의 주변 마나가 들끓기 시작했다. 극도로 높은 그의 마나 호응이 절로 엘의 의지에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건......” 엘의 기세가 전해지자 아인하트 후작과 글레톤도 감히 경시하지 못하고 기세를 끌어 올렸다. 그와 함께 그들의 주변에 포진한 마나가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면서 엘의 기운에 맞서 나갔다. 일촉즉발의 사태였던 것이다. 엘의 입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2. 최강의 골렘! 최강의 마법사! ‘당신들...... 어떻게 인간이면서...... 어떻게 가족에게 그럴 수가 있는 거지?’ 여린 얼굴. 여린 음성. 하지만 그 음성에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힘이 담겨 있었다. 목소리로 상대방의 전의를 단숨에 끌어 내리는 5클래스 마법, 사운드 포스(Sound Force)가 시전된 것이다. 사운드 포스는 엘의 무시무시한 마나 호응에 힘입어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 “크윽!” 순간 글레톤이 비틀거릴 정도로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그것은 주변을 포위한 이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 그들은 한순간 들끓던 전의를 깨끗이 잃고 말았다. 그 모습에 아인하트 후작이 약간이지만 감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정말 대단하군. 5클래스 마법으로 글레톤까지 흔들리게 하다니...... 어떻게 열일곱 살의 나이로 7클래스에 오른 거지?” “내가 먼저 물었는데?” 엘의 반말에 아인하트 후작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피고는 말했다. “나도 순순히 말해 줄 생각이 없다. 하지만 네가 궁금해하는 게 있고 내가궁금해하는 게 있으니 서로 한 가지씩 질문을 하도록 하지.” “좋다.” 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알맹이만 빼 버리면 자신의 성취를 알 수가 없으니까. “내가 먼저 대답하지. 난 가문의 영광에 모든 것을 걸었다. 제국에서는 오로지 힘이 권력을 유지하는 데, 그리고 가문의 성세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래서 그런 것이다. 실제로 나 말고 다른 고위 귀족들에게 딸을 팔아 버리듯이 보내어 놓고 권력을 유지하는 귀족들도 꽤 많지. 대답이 되었나?” “그렇군.” 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 반론하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과 아인하트 후작의 생각하는 관점 자체가 달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인하트 후작이 말한 건 지극히 일반 귀족들에게도 당연한 일상사였기에 지켜보는 사람들도 특별히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번에는 아인하트 후작이 질문을 던졌다. “이번엔 내 차례군. 마법은 어떻게 익혔지? 어떻게 열일곱 살에 7클래스에 오를 수 있었지?” 아인하트 후작의 질문에 수백 쌍의 시선이 엘에게 모여 들었다. 아인하트 후작의 궁금증은 비단 그뿐만이 아닌, 여기 모인 모든 이들의 궁금증이었다. 하지만 엘은 그 질문에 성실이 대답해 줄 이유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마법을 배운 것 그대로 말했다. 아주 짧고 간단하게. “독학.” “......” 순간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깨고 엘이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내 차례 인가?” 그에 아인하트 후작이 노성을 터뜨렸다. 엘의 성의 없는 대답에 화가 난 것이다. “지금 장난치는 것이냐!”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야. 모든 건 독학으로 배웠어.” 그리고 입을 다무니 아인하트 후작은 엘을 보며 말했다. “더 이상 이야기가 하기 싫다는 거로군.” 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아인하트 후작과 이야기를 하기도 싫었다. “정답이야. 나는 가족을 도구로 보는 사람들은 사람으로 취급하기도 싫거든. 하지만...... 한 가지 제안이 필요 할 것 같군.” “제안? 말해 봐라.” “이번 일이 벌어진 것은 내가 스스로 화를 참지 못했기에 벌어진 일. 만약 엄마와 함께 조용히 사라진 다음 매직 캡처의 내용을 퍼뜨렸다면 당신들이 무사하지 못했겠지.” “......” 아인하트 후작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엘의 말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엘이 매직 캡처로 담은 것은 아인하트 후작가의 최대 비밀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실피르를 이용하여 매직스톤을 취하려 했던 것은 손가락질을 받고 끝낼 수 있지만 거기에 황태자가 연관되어 있다는 게 문제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타국의 인재들을 납치하여 세뇌시킨 것이다. 만약 납치당한 세력들이 들고일어난다면 아무리 아인하트 후작가의 힘이 강하다고 해도 역부족이다. 아인하트 후작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엘이 입을 열었다. “만약 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이걸 그대로 소거시키겠어.” 엘이 1골드짜리 동전 하나를 꺼내 들었다. 동전에 은은하게 마나가 서려 있는 걸 보아 마법이 걸려 있는 듯했다. 바로 매직 캡처 마법이 동전에 걸려 있던 것이다. 그것을 본 아인하트 후작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엘의 의도대로 끌려가는 것 같아 답답하고 짜증났지만 칼은 엘이 쥐고 있던 것이다. “원하는 게 무엇이냐?” 엘이 손을 뻗어 아인하트 후작과 글레톤을 가리켰다. “당신과, 당신이 나와 마법 대결을 펼치는 거야. 아무 사람의 간섭 없이! 당신들을 꼭 밟아 줘야 내 성이 풀릴성싶어.” “네가 원하는 게 그것이더냐?” 아인하트 후작의 물음에 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동전을 흔들며 말했다. “아,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날 죽이려 들면 안 될 거야. 여차하면 도망가 버리면 되니까. 죽이지 말고 제압해 봐. 그럼 스스로 이걸 부수고 사라져 주지.” “아주 쉬운 조건이군.” 아인하트 후작의 입에 가소로운 미소가 걸렸다. 제법 뛰어나다고 생각했더니 아직 어린아이였다. 감히 7클래스 마스터와 7클래스 익스퍼트를 동시에 상대하겠다고 선언하다니. 7클래스 마스터 중 최강이라 불리는 아인하트 후작도 7클래스 익스퍼트 두 명만 상대해도 벅차다. 그런데 엘은 7클래스 마스터인 자신과 7클래스 익스퍼트인 글레톤을 동시에 상대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위신 같은 건 집어 치운 지 오래였다. 가문의 정중앙이라 할 수 있는 집무실에서 마법이 폭발했고, 나이트 골렘에 의해 가문의 기사들이 싹쓸이 당했다. 더 이상 떨어질 위신조차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이참에 엘을 확실히 밟아 줘야겠다고 생각한 아인하트 후작이었다. 엘을 제압한다면 매직 캡처한 동전쯤이야 빼앗는 건 손쉬울 테니까. “재미있군. 얼마만의 도전이던가. 확실히 그동안 적조했지.” 그리고 글레톤을 보며 말했다. “준비해라. 우리 둘을 상대하겠다는데 이왕이면 제대로 상대해 주는 것이 좋지 않더냐.” 그 말의 뜻을 단박에 알아들은 글레톤. 그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알겠습니다.” 서서히 주변의 마나를 통제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엘은 안경을 고쳐 썼다. 익숙한 일이다. 강한 상대를 맞서 싸우는 것은. 그것이 단지 전생에서는 게임이었고, 이곳에서는 마법 이란 것이 다를 뿐이었다. “나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당신들이 먼저 절망을 맛 볼 거야. 이렇게 보여도 나는 매우 세거든.” 단전에서 솟아오른 마나가 주변의 마나 호응을 끌어 올리며 엘의 주변에 퍼진 마나가 농밀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아인하트 후작가 정중앙에서 세 명의 7클래스 마법사가 격돌하기 시작한 것이다. 엘이 시전한 7클래스 마법은 제도 캐퍼밀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고위 귀족 저택들이 모여 있는 중앙에 위치한 아인하트 후작가다. 그곳에 난데없는 7클래스 마법 발현은 사전에 예고가 없는 큰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도 아인하트 후작가에 접근하지 못했다. 당금 제국에서 아인하트 후작가보다 큰 권세를 누리고 있는 곳은 그랜드 마스터를 배출한 클라이언 공작가뿐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는 나중에 불똥이 튈 수 있었기에 몇몇 귀족가는 이 사건을 곧장 황궁에 보고했다. 황궁에서도 이미 아인하트 후작가에 발현된 7클래스 마법의 존재를 알아채고 있었다. 과거 미티어 스트라이크로 캐퍼밀이 절반 이상 날아간 적이 있으니 그만큼 마법 발현에 대해서는 철저했던 것이다. 블리어드 제국의 황제인 오스칼 대제는 클라이언 공작을 소환했다. 제국 자체에 소속된 7클래스 마법사는 다섯 명밖에 되지 않는다. 아인하트 후작가 중앙에서 7클래스 마법이 발현되었으니 새로운 7클래스 마법의 등장일 확률이 높았던 것이다. 클라이언 공작가는 아인하트 후작가와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 있었기에 진즉에 그 마법의 발현을 알아채고 있었다. 그래서 클라이언 공작은 오스칼 대제가 입궁령을 내리기도 전에 황궁에 도착해 있었다. 오스칼 대제가 머무는 대전으로 든 클라이언 공작이 한 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어서 오게. 공작도 소식을 들어서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네.” “예, 폐하. 저 또한 아인하트 후작가에서 7클래스 마법이 발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으음......” 오스칼 대제가 한동안 눈을 감고 생각에 빠졌다. 이윽고, 눈을 뜬 그가 클라이언 공작에게 말했다. “이 일은 매우 중대한 사항이라 할 수 있네. 좋은 쪽이든 안 좋은 쪽이든 이용이 가능하지. 만약 아인하트 후작가 자체에서 마법 실험 같은 걸 하다가 폭발이 일어난 거라면 그에 대한 책임을 묻게. 만약 내부에 변고가 있는 거라면 최대한 방치하다가 사태를 수습하게나.” 클라이언 공작이 고개를 들어 오스칼 대제를 바라보았다. “그 말씀은......?” 오스칼 대제가 웃음을 머금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표정에는 숨겨진 날카로운 칼이 숨어 있었다. “그동안 아인하트 후작가가 너무 날뛰지 않았나? 이번 기회에 정신을 한 번쯤 차리게 해 주는 게 좋겠지. 근위기사단 열 명과 중앙기사단 백 명을 주겠네. 공작이라면 사태를 잘 수습할 수 있겠지.” “알겠습니다, 폐하.” 그제야 황제의 의도를 파악한 클라이언 공작. 황제는 지금 아인하트 후작가에 일어난 일을 활용하여 아인하트 후작가의 힘을 줄이려는 것이다. 적절한 반대 세력이 존재해야 한다고 하면서 아인하트 후작이 귀족파를 이끌 수 있게 은연중 주도하던 황제였다. 그러나 최근 그 세력이 점점 커지자 약간 깎아 낼 필요를 느낀 것이다. 황제란 것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자! 자칫하면 나태함에 빠져 들 수 있기에 오스칼 대제는 의도적으로 내부의 적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을 적절히 컨트롤하면서 오늘날까지 제국을 이끌어 온 것이다. ‘정말 무서우신 분이시다. 하지만 이런 분이기에 제국을 무리 없이 이끌어 오신 것이다.’ 특별히 검이나 마법을 익히지 않았음에도 은연중 상대를 억누르는 클라이언 공작의 기세에 밀리지 않는 위엄을 내뿜는 오스칼 대제였다. 클라이언 공작은 이런 분이야말로 진정 제국을 다스릴 황제의 모습이라 생각했다. “그럼, 폐하. 저는 이만......” 클라이언 공작이 자리에 일어나 막 대전을 나가려 할 때,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태자 전하가 오셨습니다.” “들라 하라.” “예, 폐하.” 오스칼 대제의 말과 함께 대전 문이 열리며 알카이드 황태자가 걸어 들어왔다. 그는 클라이언 공작을 보고 살짝 눈인사를 한 뒤 황제 앞에 서서 허리를 숙였다. “폐하를 뵙습니다.” “무슨 일로 왔더냐?” 곧장 용건을 묻는 오스칼 대제. 그에 알카이드 황태자가 대답했다. “예, 폐하. 방금 전 아인하트 후작가에 7클래스 마법이 발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소식이 빠르군.” 오스칼 대제의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알카이드 황태자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솔직하게 틸어놓았다. 황제 앞에서는 숨기면 안 된다. 오스칼 대제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 이참에 자신이 구축해 놓은 정보통을 고함으로써 점수를 따는 게 더 현명한 처사다. “황제의 정보통은 무릇 제국 자체에서 운영하는 것만으로 보고 들으면 안 되지 않습니까. 저 또한 객관적인 정보를 듣기 위해 여러 가지 정보 조직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그런 알카이드 황태자의 심정을 어찌 모르겠는가. 이미 알카이드 황태자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는 오스칼 대제였다. 그리고 그의 꿍꿍이마저도 파악한 오스칼 대제가 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아들이 이제 제법 황제의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제법이군.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너의 행동이 지극히 옳다. 이곳에 온 이유는 무엇이더냐?” “예! 분명 아인하트 후작가로 향하는 조사대가 파견될 거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맞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그것은...... 바로 저도 그 조사대에 포함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황제가 알카이드 황태자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해도 실피르에 대한 것은 자세하게 알지 못한다. 암행을 나갔다가 실피르를 만나고, 마법 편지를 아인하트 후작가에 몰래 보낸 것은 모두 황제 몰래 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아니, 실피르를 만난 것은 이미 황제의 귀에 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알카이드 황태자는 실피르의 이름을 언급 하지 않았다. 미리 이것까지 염두하고 실피르를 실리라 부른 것이 아니던가. 실리는 알카이드 황태자가 실피르를 부르던 애칭이었다. 아인하트 후작가에 보낸 마법 편지 답장이 날아와 아인하트 후작가에 가려고 한다는 꿍꿍이를 숨기는 알카이드 황태자였다. 대신 그는 그럴듯한 이유를 댔다. “아인하트 후작가라면 현재 귀족파를 이끌고 있는 반대파 수장입니다. 이번 기회만 잘 살리면 그 힘을 상당 부분 깎아 놓을 수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저는 그 조사대에 포함되어 경험을 쌓고 싶습니다.” “호오......” 오스칼 대제가 감탄 섞인 소리를 냈다. 알카이드 황태자가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을 줄은 그조차도 생각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스칼 대제 그가 알카이드 황태자의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 그것은 알카이드 황태자가 그의 예상보다 더욱 성장했다는 이야기 가 된다.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한 알카이드 황태자의 모습에 기분이 좋아진 오스칼 대제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하하! 제법이구나! 좋다! 근위기사단 열 명과 중앙기사단 백 명, 그리고 근위병 오백 명을 파견하겠다. 아인하트 후작가에 벌어진 일을 철저하게 조사하고 오너라.” “예, 폐하!” “공작, 황태자가 아직 부족하니 잘 이끌어 주게나.” 오스칼 대제의 말에 클라이언 공작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워낙 영민하신 황태자 전하이신지라 제가 따로 신경 쓸 것이 있을 지 의문입니다.” 자식 칭찬에 기분 나빠 할 부모 없다. 지금 황태자의 성장에 기뻐하는 오스칼 대제에게 이보다 더 좋은 아부는 없을 것이다. “하하, 그렇겠지. 하지만 공작은 경험이 있지 않은가? 공작이 잘 이끌어 주면 오늘 같은 경험도 드물 걸세.”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더 이상 황태자를 추켜세울 수 없다. “알겠습니다.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그럼 일을 잘 마무리해 보게.” 오스칼 대제의 격려 섞인 말에 두 사람이 다시 고개를 숙인 뒤 대전을 벗어났다. 잠시 후, 110기의 기사들과 500명의 근위병들이 황궁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들의 목적지는 아인하트 후작가였다. 마법사와 마법사 간의 싸움은 기본적으로 원거리전이다. 워 메이지가 싸우는 방식은 온몸에 보조 마법을 두르고 싸우지만 기본적으로 거리를 유지한 채 공격 마법과 방어 마법을 활용하여 싸운다. 물론 이것은 저 클래스에서 중간 단계 클래스까지의 마법사들의 전투다. 고 클래스 마법사는 낮은 클래스 마법사를 시동어만으로 발현시킬 수 있다. 자신의 클래스에 맞는 마법을 캐스팅하는 데 시간이 걸리지만 저 클래스 마법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면 이보다 더 유용한 것이 없다. 하지만 같은 클래스 마법사는 바로 캔슬을 할 수 있기에 유용하면서도 한없이 쓸모없는 게 된다. 엘은 다른 마법사들처럼 원거리전을 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워 메이지처럼 근접전만을 고집할 생각도 없었다. 두 가지를 모두 섞어서 사용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고 클래스 마법사는 이런 거에 제약이 없다지만 엘은 두 가지를 확연히 구분하고 있다. 그래야 상대에게 더욱 혼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근접전부터!’ 근접전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빠른 속도다! 저글링이 발업이 되고 안 되었을 때의 차이가 얼마나 크던가! 전투에 있어서 스피드는 필수였다. 엘이 마법을 시전했다. 5클래스 이하 마법은 캐스팅이 필요가 없다. “헤이스트(Haste)! 리터레이트(Reiterate)!” 파앗! 엘의 신형이 섬전처럼 쏘아졌다. 엘이 노린 이는 아인하트 후작이었다. 처음부터 강한 놈을 죽인다! 이것이야말로 싸움에서 필수적인 사항이었다. 엘이 갑작스럽게 달려들고 있음에도 아인하트 후작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백전노장. 수많은 싸움을 겪어 왔고 지켜봤다. 이런 패턴쯤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훗! 기습적으로 노리는 공격은 충분히 계산 범주에 들어가 있다. 헤이스트!” 상대가 헤이스트를 걸고 달려들면 자신도 헤이스트를 걸고 피하면 된다. 속도는 엇비슷, 그렇다면 기존의 거리는 그대로 유지되는 셈이다. 하지만 여기서 아인하트 후작은 한 가지 실수를 했다. 엘이 ‘리터레이트’를 외쳤음을 신경 쓰지 않은 것이다. 리터레이트. 그것은 반복한다는 뜻으로, 중첩을 의미한다. 엘은 아티팩트에만 중첩 마법진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전투에서도 중첩을 사용하는 것이다. 쇠를 접으면 강도가 몇 배 올라가듯이 마법을 중첩하면 그 위력도 몇 배로 상승한다. 지금 엘이 시전한 헤이스트도 사실 보통 헤이스트가 아니었던 것이다. 엄청난 속도로 쏘아진 엘의 신형이 순식간에 아인하트 후작 앞에 다다랐다. “헉!” 아인하트 후작은 기겁했다. 엘의 속도가 빨라도 너무 빨랐던 것이다. 70년 이상을 살아오면서 이렇게 빠르게 접근하는 마법이 있다는 것은 들어 본 적이 없다. 엘이 놀라는 아인하트 후작에게 말했다. “오늘 분명히 말했지. 끝없는 절망을 맛볼 거라고. 세상에는 당신이 알지 못하는 것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그러면서 엘이 마법을 시전했다. 캐스팅 없이 펼칠 수 있는 근접 파괴 마법을 말이다. “빅바이스 인터포싱 핸드(Bigby's Jnterposing Hand)!” 엘의 양손에 마나가 농밀하게 응집되며 마법이 펼쳐졌다. 족히 3m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손! 푸른색 마나가 응집된 거인의 손이 아인하트 후작을 향해 사정없이 덮쳐졌다. 본래 마법 전투라면 아인하트 후작은 블링크를 시전했을 것이다. 하지만 엘의 마법 시전은 빨라도 너무 빨랐다. 짧게 외치고, 마나가 움직이는 시간만 있으면 얼마든지 펼칠 수 있는 블링크를 시전할 시간조차 없던 것이다. 아인하트 후작이 양손을 뻗었다. 지금 마법을 펼쳐 맞대응하면 명백한 그의 손해다. 하지만 손해를 감수해서라도 벗어나야 했다. 지금 블링크를 시전했다가는 몸이 반 토막 날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때 아인하트 후작에게서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글레톤이 마법을 캐스팅한 것이다 “플레 임 스톰(Flame Storm)!” 6클래스 범위 최강 마법, 플레임 스톰이 엘에게 시전된 것이다. 아인하트 후작가의 비전인 단축 캐스팅이 가능했기에 짧은 시간에 6클래스 마법을 펼친 것이다. “칫! 빠르네.” 아인하트 후작을 궁지에 몰아넣은 엘은 빅바이스 인터 포싱 핸드를 캔슬한 뒤 왼손에 버닝 핸드(Burning Hand)를 시전하여 아인하트 후작을 향해 뻗으면서 반대 손으로 다른 마법을 시전했다. 더블 캐스팅이었다. “월 오브 스톤(Wall of Stone)!” 엘이 빅바이스 인터포싱 핸드를 캔슬하자 순간 틈을 얻은 아인하트 후작이 그대로 블링크를 시전했다. “블링크(Blink)!” 그러자 엘의 버닝 핸드는 허공을 갈랐고, 그 사이 플레임 스톰이 월 오브 스톤을 가격했다. 콰과과과광! “실드(Shield).” 전신에 가볍게 실드 마법을 두른 엘. 요란한 폭음이 들렸지만 엘에게 끼치는 피해는 하나도 없었다. 월 오브 스톤이 5클래스 방어 마법이지만 속성상 스톤 마법은 플레임 계열 마법에 대한 속성에 우위를 점하고 있다. 6클래스 마법 자체의 위력을 견디지 못하고 마법 자체가 파괴되었지만 실드 마법을 두른 엘에게 튄 돌의 파편은 그대로 튕겨 나갔다. 6클래스 마법을 5클래스와 3클래스 마법을 조합하여 손쉽게 막아 낸 것이다. 플레임 스톰을 막아 낸 엘의 몸이 잠시 움찔했다. 그러더니 이내 그의 주변에 뭉친 농밀한 마나가 거센 폭풍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화르륵! 일렁이는 불꽃! 그것은 다름 아닌 플레임 스톰, 방금 전 글레톤이 시전한 마법이었던 것이다. 글레톤이 경악에 빠졌다. “저, 저...... 마, 말도 안 되는!” 6클래스 마법이 채 1분도 걸리지 않은 채 완성되다니! 엘은 다른 마법사와 비교가 되지 않을, 그야말로 엄청난 속도로 마법을 시전하고 있었다. 눈으로 직접 보고 있음에도 믿을 수가 없었다. 아인하트 후작가의 비전으로 시전한 플레임 스톰도 캐스팅하는 데 2, 3분이 걸렸다. 그런데 그보다 월등히 짧은 시간이라니? 절대 믿을 수 없는 일이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플레 임 스톰(Flame storm)!” 그 사이 캐스팅을 마친 엘이 플레임 스톰을 시전했다. 목표는 방금 전 마법을 시전한 글레톤이었다. 글레톤은 기겁했다. 그리고 재빨리 마나를 끌어 올려 마법을 시전했다. 하지만 글레톤은 엘처럼 마법의 합리성을 따지며 시전한 것이 아닌 남들보다 압도적으로 짧은 캐스팅 속도를 무기로 싸워 왔다. 여태까지 짧은 캐스팅 속도만으로도 동급 마법사에게 절대적인 우위를 점해 왔던 그였다. 그런데, 설마하니 자신에게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다. 엘과 그들의 상성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던 것이다. 의외의 상황이 닥쳤으니 별수 있나. 대부분의 마법사가 그러하듯 방어 마법을 시전하고 블링크로 도망치겠지. 역시 글레톤도 그렇게 했다. 마구잡이로 최대한 방어 마법을 많이 시전 한 것이다. “실드! 실드! 실드!” 세 번의 영창과 함께 글레톤의 주변에 반투명한 막이 생겨났다. 실드로 플레임 스톰을 막는 건 애당초 불가능했다. 단지 시간을 끌 수 있을 뿐. 그것도 찰나에 불과했다. 잠시 시간을 번 글레톤이 코앞에 닥쳐온 플레임 스톰을 보고는 재빨리 몸을 피했다. “블링크!” 파앗! 글레톤의 몸이 공간의 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저 멀리에서 그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때, 엘이 눈을 빛내며 몸을 그곳으로 날렸다. 헤이스트가 중첩된 그의 몸은 그 누구보다 빨랐다. “허억! 이런 속도라니!” 글레톤은 자신에게 접근하는 엘의 속도에 경악했다. 너무나 빨랐던 것이다. “플라이(Fly)!” 엘에게 벗어나고자 플라이 마법을 시전한 그의 몸이 막 허공에 떴다. 그때, 엘이 마법을 시전했다. “웹(Web)!” 3클래스 홀드 퍼슨과 함께 타인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마법이 펼쳐진 것이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홀드 퍼슨은 타인에게 직접 시전하는 것이고 웹은 타인 주변에 시전하는 것이다. 엘과 글레톤은 7클래스 마법사였기에 홀드 퍼슨은 큰 효과를 볼 수 없다. 하지만 웹은 달랐다. 우선 허공에 펼치는 것이었기에 큰 제약이 없었다. 그리고 고 클래스 마법사라 해도 허공에 떠 있을 때 웹을 시전하면 자연히 신경이 분산될 수밖에 없다. 몸을 속박하는 마법이 펼쳐졌으니 웹을 제거하거나 다른 마법을 신전해서 제거해야 했던 것이다. “웃! 파이 어 (Fire)!” 웹 마법은 화염계 마법에 무척 약하다. 그것을 활용하여 글레톤이 웹 마법을 태워 버렸다. 하지만 그것은 엘이 의도한 것이었다. 마법을 캐스팅할 때 잠시라도 시간을 필요로 하니 그 틈이면 충분히 공격 할 시간을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적중했다. 웹 마법이 막 사라졌을 때, 엘은 이미 글레톤의 앞에 도착한 것이다. 엘은 아까 전 아인하트 후작을 궁지로 몰아넣었던 마법을 시전했다. “빅바이스 인터포싱 핸드!” 거대하게 팽창하는 손! 5클래스 근접전 최강의 마법이 시전된 것이다. 그때 아인하트 후작이 마법을 시전했다. 아까 전 경우처럼 결정적 인 순간에 도움을 준 것이다. 그리고 아인하트 후작이 시전한 마법은 글레톤이 시전한 6클래스보다 한 단계 더 강력한 7클래스 마법이었다. “썬더 스트라이크(Thunder Strike)!” 파지지지직! 금빛 뇌전이 아인하트 전체를 뒤덮는 듯한 착각을 주었다. 화염계를 능가하는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지닌 뇌전계 마법이 펼쳐진 것이다! 그것도 철제 방어구를 두른 병사들에게 시전하면 족히 수천 명은 감전사시킬 수 있는 썬더 스트라이크였다. 7클래스 범위 마법 최강의 위력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분명 아인하트 후작은 썬더 스트라이크가 7클래스 마법 중 최강에 속하여 시전한 것일 터. 다른 사람들에게는 최강의 마법일지도 모르지만 엘에게 뇌전계 마법은 너무나 손쉽게 막을 수 있는 마법이었다. 엘은 그대로 빅바이스 인터포싱 핸드를 글레톤에게 쏘았다. 아인하트 후작의 썬더 스트라이크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던 글레톤의 두 눈이 커졌다. 퍼억! 둔중한 타격음! 그와함께 글레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억!” 당연한 반응이다. 강철과도 같은 육체를 지닌 기사들도 적중되면 피거품을 무는 마법이 바로 빅바이스 인터포싱 핸드다. 하물며 일반인보다 조금 더 좋은 몸을 지닌 글레톤이 적중되고 무사할 리 없다. 게거품을 문 채 바닥에 쓰러져 꿈틀거리는 글레톤을 차가운 눈으로 일별한 엘이 곧장 아인하트 후작이 펼친 썬더 스트라이크에 맞서 갔다. 지금 펼치는 마법은 엘이 창안한 마법이었다. 모든 뇌전계 마법을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려 버릴 마법이었다. “라이트닝 컨덕터(Lightning Conductor)!” 파파! 엘의 외침과 함께 거대한 강철 침이 생성되었다. 그리고 맹렬한 기세로 쏘아지던 썬더 스트라이크가 한 순간 기이한 움직임을 보이더니 엄청난 속도로 강철 침에 쏘아졌다. 쿠르르릉! 천둥이 내려치는 듯한 소리! 요란한 폭음과 함께 강철 침이 부르르 떨리더니 이내 모든 뇌전을 집어삼켰다. 너무나 말끔하게 사라진 썬더 스트라이크. 그것을 소멸시킨 강철 침은 한바탕 포식을 했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고 있을 뿐이었다. “......” 구경하던 사람들 모두 넋이 나갔다. 그것은 아인하트 후작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찌 안 그러하겠는가! 7클래스 썬더 스트라이크가 웬 보지도 못한 이상한 강철 침에 흡수되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사람들과 다른 의미지만 엘 또한 놀랐다. 생각보다 효과가 좋은 것이다. “호오! 쓸 만한데?” “도, 도대체 이 마법이 무엇이냐?” 회심의 일격인 썬더 스트라이크가 허무하게 사라져서 그런 탓일까. 글레톤이 쓰러졌지만 아인하트 후작은 그것을 미처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신경은 온통 썬더 스트라이크를 흔적도 없이 소멸시킨 강철 침에 향해 있었다. 7클래스 마법인 썬더 스트라이크가 저 강철 침에 그대로 소멸했다. 엘이 단순한 시전어로만 마법을 시전한 것으로 보아 5클래스 이하의 마법이 분명했다. 5클래스 이하의 마법으로 7클래스 마법을 저렇게 간단하게 막아 낼 수 있다니! 경악하지 않을 도리가 없던 것이다. 두 단계나 낮은 마법이 고 클래스 마법을 이토록 간단하게 소멸시키다니. 마법은 수준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그 위력의 편차가 심하다. 당연히 5클래스와 7클래스는 그 위력이 하늘과 땅 차이였던 것이다. 모두가 놀라는 엘은 피식 웃었다. “뭐, 그걸 말해 줄 필요가 있나? 적에게 정보를 가르쳐 주는 건 어리석은 짓인데.” “큭!” 엘의 말에 아인하트 후작의 표정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다. ‘역시! 뇌전계 마법은 피뢰침에 모두 흡수되는군, 내 예상대로야.’ 엘은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사실 엘은 마법을 펼치는 데 있어 상성을 무척 중요시하였다. 일반적으로 화 속성 마법은 수 속성 마법을 반대 속성으로 여기지만 마법을 막아 내는 데 있어 그 조합은 매우 불합리했다. 화 속성 마법에 의해 가열된 수 속성 마법의 물은 자칫 시전자에게 화상을 입힐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엘은 마법 간에 서로 극성을 지닌 속성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우선 화 속성 마법은 지 속성, 흙과 돌 계열의 마법으로 손쉽게 막을 수 있다. 수 속성 마법은 식물계 마법으로 손쉽게 막을 수 있으며, 풍 속성 마법은 중량이 큰 돌 계열과 강철 계열 마법으로 막기가 쉬웠다. 그리고 뇌 속성 마법은 사실 엘이 제일 까다로워 했다. 돌 계열과 흙 계열 마법으로도 막을 수 있지만 관통력이 어마어마할 정도로 강한 뇌 속성의 마법을 막아 내기에는 무리가 따랐던 탓이다. 그때 엘은 지구에서 쓰이던 물건을 하나 생각해 냈다. 뇌전을 유도하여 그대로 땅으로 흡수시키는 물건을 말이다. 피뢰침. 바로 그것을 생각해 낸 것이다. 그 후 강철 계열의 마법 수식을 변경하여 피뢰침을 생성하는 마법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뇌전 마법에 실험을 한 것이다. 결과는 대성공. 엘이 시전할 수 있는 7클래스 뇌전 마법까지 모조리 막아 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 결과 지금 이러한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다. 뇌전 속성 마법을 모조리 파훼하는 절대무적 마법의 등장을 알리면서 말이다. 엘이 쓰러진 글레톤을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 “한 명이 쓰러졌으니 이제 일대일 상황이군. 뭐, 두 명이어서 제대로 실력을 발휘 못했다는 말은 하지 않겠어. 하지만 지금부터 좀 더 매서워질 거야.” 글레톤은 그렇다 쳐도 아인하트 후작은 용서할 수 없다. 모든 것을 조종하고, 모든 음모를 세운 아인하트 후작은 엘의 입장에서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이였던 것이다. 물론 글레톤도 가볍게 처벌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빅바이스 인터포싱 핸드를 적중시킨 것이지만 말이다. 빅바이스 인터포싱 핸드에 적중되어 내장이 모조리 뒤 집어지고 인체 내부가 완전히 헝클어졌다. 최소 1년은 요양해야 몸이 제 상태로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마법 실력 을 되찾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엘의 손이 아인하트 후작을 가리켰다. 동시에 시전어를 외쳤다. “플레임 애로우(Flame arrow)!” 피비비비빙! 수십여 개의 불꽃 화살이 아인하트 후작에게 쏘아졌다. 낮은 클래스 마법이지만 7클래스 마법사인 엘이 시전 하는 것이니 만큼 그 위력과 속도는 감히 얕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단전호흡으로 인해 극도로 끌어올려진 마나 호응은 기존의 9클래스 마법을 뛰어넘는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가져다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파괴력은 3클래스 마법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실드! 플레임 버스터(Flame buster)!” 자신의 몸에 실드를 두른 뒤 강력한 화염계 마법을 시전하는 아인하트 후작. 중첩된 헤이스트를 시전한 엘이 가볍게 피하고는 외쳤다. “인피티니 매직 애로우(Infitiny magic arrow)!” 무한이라는 말이 섞여 있듯이 엘의 주변에 끊임없는 마법의 화살이 생성되었다. 그리고 쏟아지는 화살 세례! 그것은 차라리 하늘 위에서 쏟아지는 폭우라 해도 이상함이 없었다. 단전에서 용솟음치는 마나와 대기의 농밀한 마나가 끊임없이 호응에 호응을 거듭하고 있다. 그리고 엘의 시전어에 의해 수백, 수천 개의 매직 애로우가 생성되고 있었다. 여태껏 근접전을 펼쳐오던 엘이 원거리전에서도 막강함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비록 매직 애로우가 저 클래스라고 하지만 낙숫물로 돌을 꿰뚫는다 하지 않던가! 세상사가 모두 그러한 것이다. 아무리 작고 약한 것이라 해도 그 양이 많고 뭉치면 그 위력은 강해진다. 이것은 스타크래프트에도 적용되는 사실이다. 아무리 강한 유닛도 결국은 숫자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다. 한마디로 물량 앞에 장사 없는 것이다. 그걸 증명하듯 견고하게만 보이던 아인하트 후작의 실드가 점차 금이 가고 있었다. “크윽! 내가...... 이런 저급한 마법에......” 아인하트 후작은 이를 악다물었다. 그리고 전신에 엄습해 오는 모멸감에 몸을 떨었다. 대륙에 존재하는 7클래스 마법사 중 최강이라 불리던 자신이다. 다른 이들보다 압도적으로 짧은 수식어는 누구보다 그를 강하게 해 주었다. 오만한 눈으로 모든 이들을 내려다보아야 할 자신이 이런 처지에 놓이다니? 2클래스 마법. 3클래스 공격 마법과는 비교도 안 되는 약한 마법이다. 그런데 고작 9클래스에 불과한 매직 애로우에 이 무슨 고전이란 말인가! 꽈직! 꽈지직! 실드가 조금씩 깨지고 있었다. 조금씩. 조금씩. 2클래스 마법에 불과한 매직 애로우에 자신의 실드 마법이 깨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실드가 깨졌다. 꽝! 부서진 유리 조각처럼 깨져 버린 실드의 틈을 매직 애로우가 비집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아인하트 후작의 전신을 난자하기 시작했다. 피비비비빙! “끄악! 끄아아아악!” 그것은 너무나 처절한 고통이었다. 전신을 난자당하는 듯한 그 기분을 아는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게다가 제국 최고의 위치에 서 있던 그가 언제 이런 고통을 겪은 적이 있겠는가? 수많은 전투에 참여했지만 고통을 주는 쪽은 당연히 그였지, 고통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예리한 관통력을 지닌 매직 애로우는 아인하트 후작의 전신을 관통했다. 그것도 엘이 교모하게 조종하여, 중요한 부분이 있는 곳은 노리지 않고 오직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부분만 집중적으로 노렸다. “캔슬(Cancel)!” 수백 발의 매직 애로우로 아인하트 후작을 난자한 엘이 마법을 취소했다. 그러자 사람들의 눈에 아인하트 후작의 끔찍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모두 경악했다. “압소사!” “후, 후작 각하가 저런 모습으로......” 아인하트 후작의 몰골은 끔찍했다. 전신이 난자되어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고 그 구멍에서 배어 나온 피는 전신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당장 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게 바로 지금 아인하트 후작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제국 귀족들을 이끌던 귀족파 수장이 지금 이렇듯 끔찍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던 것이다. 비참한 몰골이었지만 엘은 이대로 아인하트 후작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엘이 천천히 손을 들었다. “죽이지는 않겠어. 하지만 마법사 능력만큼은 빼앗아 주겠어. 엄마에게 하려고 했던 것처럼 말이지.” 동시에 엘의 손을 둘러싼 마나가 맹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법을 캐스팅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바로 시전할 수 있는 5클래스 이하 마법이 아닌, 최소 6클래스 이상의 마법을 말이다. 엘은 아주 단호하게 마음을 먹고 있는 것이다. 아주 철저하게 부숴 주겠어. 다시는 허튼 생각 따위를 못하도록...... 인간의 내부를 모조리 부숴 버리는 6클래스 마법 본 브레이크(Bone Break)를 시전하려던 찰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만 해!” 3 최연소 7클래스 마스터 멈칫. 마무리를 하려던 엘이 행동을 중지했다. 그리고 실피르에게 시선을 옮겼다. 아인하트 후작의 엉망이 된 모습을 보고 정신을 차린 실피르는 엘에게 간절한 어조로 말했다. “그만...... 그만 하자, 엘리.” 그녀는 지금 여러 가지 감정이 복합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우선 엘의 강함 때문이다. 10년 전 반자크 마탑에서 보였던 천재성은 익히 기억하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열일곱살이라는 나이에 7클래스에 올랐을 줄이야...... 아인하트 후작을 어렵지 않게 꺾은 모습을 보아 7클래스 익스퍼트가 아닌 마스터가 분명했다. 실피르는 엘이 더 이상 자신의 품 안에 있는 아들이 아님을 느꼈다. 누구보다 더 뛰어나고, 누구보다 더 훌륭하게 자라나 자신의 품 안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것이 한편으로는 뿌듯했고 또 한편으로는 섭섭했다. 골든 나이트의 신위도 놀랍다. 소드 마스터에 든 기사를 단 한 방에 쓸어 버리는 능력. 골든 나이트와 엘이 서로 조합된다면 어떨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아인하트 후작에 대한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났다. 자신을 이용하고 엘에게 위해를 끼치려 했던 그가 원망스럽고 밉다. 하지만...... 왜일까. 정작 처참한 모습이 그녀의 눈에 들어오자 알 수 없는 감정이 불쑥 치솟았다. 왜 이런 감정이 드는 것일까. 분명 가족의 연마저 거부한 저들에게 왜 이런 감정이 드는 것일까. 글레톤의 처참한 모습, 아인하트 후작의 참혹한 모습. 7클래스 마법사 두 명을 압도적인 힘으로 누른 엘은 확실하게 마무리를 하려 했다. 힘에는 힘으로. 그리고 복수를 꿈꾸지 못하게 마무리는 확실하게. 엘의 행동은 가장 확실하게 결말을 낼 수 있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실피르의 마음속에서 다른 외침이 들려왔다. 아무리 밉고 원망스럽다고 해도 피가 이어진 사이다. 엘에게 더 이상 저들의 피를 묻히게 놔둔다면, 사람들은 엘을 패륜아라고 손가락질할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엘이 하려는 행동은 아인하트 후작을 죽음으로 몰아넣거나 그에 준하는 행동일 확률이 높다. 그래서 엘을 말린 것이다. 자신의 외침에 엘이 멈칫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시선을 돌린다. 실피르는 외쳤다. 엘에게, 더 이상 이런 일을 하면 안 된다고. “그만 하자, 응? 엘리...... 아마 이들도 단단히 혼이 나서 앞으로 우리를 건드리려 하지 않을 거야.” 그녀는 엘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돌아온 엘의 답은 부정적인 것이었다. “그럴 수는 없어요, 엄마 이들은 제가 이대로 놓아준다면 끝까지 복수를 하겠다고 쫓아올 사람들이에요.” 제대로 보았다. 엘이 제대로 본 것이다. 이들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실피르도 그 사실을 공감했다. 하지만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엘에게 말했다. 최대한 말에 설득력을 담아서. “하지만 이건 아니라고 봐. 엘, 매직 캡처의 내용이 있잖니? 그걸 가지고 가자. 그럼 우리를 섣불리 건드리지 못할 거야.”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매직 캡처에 담긴 내용을 제거하기 위해 이들이 이렇게 된 것이 아닌가. 매직 캡처에 담긴 내용만 잘 활용한다면 이들의 귀찮은 추격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엘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야 하지만 말이다. “으음......” 실피르의 외침에 엘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이대로 아인하트 후작에게 더 위해를 끼쳤다가는 위험할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단순히 대결로 볼 수 있는 수준이었다고 치더라도 아인하트 후작의 마법적 능력을 제거하면 제국 전체가 나설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대륙에 열 명밖에 존재하지 않는 8클래스 마법사를 제외하고 가장 강한 축에 꼽히는 아인하트 후작이다. 마법사가 마탑에 소속되지 않고 국가에 충성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기에 제국 내에서 아인하트 후작을 매우 아낄 확률이 높다. 그런 그의 마법 능력을 상실하게 한다면 당연히 제국이 나설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난다면 마법 능력을 제거하지 않았기에 단순히 아인하트 후작에서 나서는 문제로 끝이 날 수 있다. 그리고 그건 매직 캡처에 담긴 내용으로 적당히 위협을 한다면 아인하트 후작가의 추격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엄마의 말도 일리가 있다. 여기서 아인하트 후작을 더 몰아넣었다가는 자칫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위험에 처할 수 있어. 찢어 버리고 싶을 뿐이지만......’ 결정을 내린 엘. 금빛 안경을 한 차례 고쳐 쓴 엘이 대답했다. “그렇게 할게요.” 그리고 가볍게 손을 젓자 그의 손을 둘러싸고 맹렬하게 회전하던 마나가 그대로 흩어졌다. 허공에 떠 있던 엘의 신형이 지면으로 하강했다. 땅을 밟은 엘이 실피르를 보며 말했다. “이 지긋지긋한 곳을 떠나요. 다시는 이곳을 오지 않고, 우리 가족기리 요순도순 살아요. 제 능력과 엄마의 능력이면 어딜 가도 귀족의 작위를 얻을 수 있잖아요. 조용한 곳에서 마음 편히 살아요, 우리.” 엘의 말에 실피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자, 엘리. 이 엄마가 어리석었어. 아무리 살아가는 데 권력이 필요하다고 하나 가족 간의 정이 더 중요한 건데 말이야. 이 엄마가 미안해.” 진정한 행복에는 권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실피르. 하지만 지금 그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냥 지금처럼 살아도 이보다 더 행복한 것이 없거늘. 괜히 부끄러워졌다. 그런 실피르의 모습에 담담하게 미소 짓는 엘. 그가 실피르에게 손을 뻗었다. “가요. 어서 이곳을 벗어나죠.” “그래......” 실피르가 엘에게 걸어갔다. 엘은 연신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세레나와 카이나에 게도 손을 뻗었다. “너희도...... 나와 함께 가 주었으면 해. 저번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하지? 너희가 원한다면...... 난 너희와 끝까지 함께하고 싶어.” 그에 세레나와 카이나가 밝은 표정을 짓고 엘에게 달려 왔다. 그리고 엘의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저희는 언제나 주인님과 함께예요.” “저도요.” “고마워.” 두 여인의 말에 살짝 미소 짓는 엘. 그리고 7클래스 마법 텔레포트를 캐스팅하기 시작했다. “그럼 가 볼까......” 모든 캐스팅을 마친 엘. 이제 시전어만 외치면 이곳을 벗어날 수 있다. 그때, 묵직한 저음이 엘의 귀에 꽃혔다. “그렇게는 안 되지.” 갑작스럽게 들려온 말. 그와 함께 노도와 같은 기세가 일어나며 엘에게 폭사되었다. 콰콰콰콰-! 주변의 마나가 모두 한 사람의 통제 안에 갇힌 듯한 착각을 주었다. 그리고 엘에게 쇄도하는 엄청난 기세. 그것은 골든 나이트가 엘의 앞을 막아서면서 자연스럽게 골든 나이트에게 쏘아졌다. 은은하게 빛나는 금광이 폭발적으로 뿜어지며 골든 나이트도 기세를 뿜어냈다. 그러자 충돌하는 두 가지 기운. 파방! 팡! 푸른색 기운과 금색 기운이 팽팽하게 맞서며 물결이 치는 듯한 모습을 보이며 서로의 기운을 밀어내려 하였다. ‘이건......’ 엘이 엄청난 기세를 일으키고 있는 중년인을 보며 안색을 달리했다. 골든 나이트와 대등 아니, 압도하는 기운을 흘리는 중년인의 정체가 범상치 않음을 느낀 것이다. 그리고 그 중년인 앞에 있는 사내를 보았을 때, 엘의 표정이 또 변화했다. ‘그렇군 황태자...... 그의 옆에 있는 중년인이라면...... 근위기사단장을 맡고 있는 클라이언 공작인가? 대륙에 열 명밖에 존재하지 않는 그랜드 마스터......’ 그랜드 마스터! 무려 열 명에 이르는 소드 마스터가 합공을 해야 간신히 저지할 수 있는 존재가 등장한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수치상 계산일 뿐, 그랜드 마스터가 정면 대결을 택하지 않으면 최소 오십 명의 소드 마스터를 동원해야 그랜드 마스터와 대등하게 맞설 수 있다. 걸어 다니는 국가의 무기가 바로 그랜드 마스터인 것이다. 엘의 안색이 침중해졌다. 그랜드 마스터의 힘을 확실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그 힘을 수치화시켰을 때 발휘할 수 있는 힘은 골든 나이트와 거의 대등! 수백 개의 마나석을 품고 있는 골든 나이트와 힘을 지닌 것이다. 엘이 골든 나이트의 마지막 봉인을 풀었다. “타나! 제3단계 모드를 발동하라!” 그러자 골든 나이트의 주변에서 뿜어지던 금광이 한층 더 강렬해졌다. “웃......!” 골든 나이트와 기세를 겨루던 클라이언 공작의 입에서 놀라움이 담긴 신음이 터져 나올 때, 골든 나이트의 눈에서 푸른 안광이 뿜어졌다. “봉인. 해제.” 콰콰-! 콰콰콰-! 폭발하듯 뿜어지는 기세. 한순간 골든 나이트의 기세가 클라이언 공작의 기세를 밀어냈다. “큭! 황태자 전하, 물러나십시오.” “알겠소.” 황태자가 옆에 있어 전력을 기울일 수 없던 클라이언 공작이 입을 열자 황태자가 대답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제대로 힘을 방출하려던 순간 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타나. 그만.” 그러자 마치 장난이었던 것처럼 골든 나이트의 기세가 사라졌다. 그에 클라이언 공작의 눈이 크게 뜨였다. 골든 나이트의 기세가 마치 장난처럼 사라진 것이다. 이것은 하나를 의미한다. 방금 전 골든 나이트가 끌어 올린 힘이 진정한 힘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여력을 남겨 두고 있던 상황이었으니, 클라이언 공작의 생각보다 훨씬 강하다는 뜻이다. ‘쉽지 않겠군.’ 아인하트 후작가에 일어난 소동의 주범. 한눈에 보아도 누가 소동을 일으켰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있다. 곳곳에 널브러진 100여 명의 기사들 모두 소드 익스퍼트 기사들인 걸 감안하면 정말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분명 기사들은 저 골렘이 쓰러뜨렸을 테니까. 게다가 저쪽에 참혹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는 두 사람. 그들은 아인하트 후작과 그의 후계자인 글레톤이 분명 했다. 놀라웠다. 세상에 7클래스 마법사인 그들을 이러한 모습으로 만들 수 있는 이가 도대체 얼마나 되겠는가? 게다가 외모를 보라. 채 스무 살도 되어 보이지 않은 저 외모를...... 정황상 두 사람을 이렇게 만든 이는 저 소년밖에 없었다. 클라이언 공작이 작게 숨을 골랐다. 그리고 엘을 바라보았다. 그랜드 마스터인 자신의 시선을 마주하고 있음에도 물러서지 않는 저 모습. 반짝이는 푸른 눈에 서린 맑은 빛을 보고 그가 작게 감탄했다. ‘어린 나이에 대단한 성취를 이루었군.’ “그대는 누군가? 지금 이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이 바로 그대인가?” 엘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클라이언 공작의 눈을 응시했다. 맑고 강한 눈이다. 권력에 물든 아인하트 후작과는 다른 느낌을 주었다. 강직하고 올곧은 느낌이랄까. 엘이 느낀 바는 그랬다. 대륙 10대 그랜드 마스터 중 한 사람인 그와 척을 지고 싶지 않았기에 엘이 예의를 차려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범인을 찾는다면 제가 그 범인이지요.” “정말 그대가 이런 일을 벌인 것이란 말인가?” 재차 확인차 묻는 클라이언 공작의 모습. 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가 벌인 일에 책임을 회피할 생각이 없었다. “제가 그랬습니다.” “허허! 놀랍군, 놀라워! 보아하니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러면서 클라이언 공작은 엘을 한 번 훑어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그를 붙잡고 싶었다. 어찌 안 그러하겠는가. 스물도 되지 않은 나이에 7클래스 마법사를 능가하는 마법 실력. 그리고 자신마저 주춤하게 만드는 저 골렘. 필시 저 골렘은 실전되었다던 나이트 골렘이 분명하다. 만약 저 소년을 끌어들인다면 황제파...... 아니, 블리어드 제국은 한층 더 힘이 강해질 것이다. 클라이언 공작은 저 소년에게 그러한 가치를 느꼈다. 하지만 붙잡을 수 없었다. 아니, 붙잡을 수 없는 상황이다. 정적이라고 하지만 아인하트 후작은 블리어드 제국의 소중한 전력이다. 그의 가문의 힘은 곧 제국의 힘이었다. 그런 그를 상처 입혔다는 것은 즉 제국 전체에 선전 포고를 했다는 것과 같다. 물론 이것은 조금 과장했을 때의 문제다. 정적의 입장에서 보면 엘은 요즘 더 날뛰는 아인하트 후작가의 기를 꺾어 준 이가 된다. 그래서 클라이언 공작은 딱히 그를 잡아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그래서 그는 엘에게 권유했다. “나는 딱히 그대와 충돌하고 싶지 않다네. 이대로 물러난다면 눈감아 줄 용의가 있지. 어떤가?” “......” 클라이언 공작의 말에 엘은 고민에 잠겼다. 마음 같아서는 클라이언 공작 옆에 있는 황태자에게 한 방 먹여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클라이언 공작과 기사들은 물론, 블리어드 제국 전체와 척을 지게 된다. 아인하트 후작가를 건드린 것만으로도 큰일이다. 그런데 황태자까지 건드리다가는 더 힘들어질 수도 있다. ‘어떻게 한다......’ 엘이 고민에 빠졌을 때 황태자가 클라이언 공작에게 말했다. 무언가 대단히 불만스럽고 다급한 기색이 배어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클라이언 공작! 아인하트 후작가를 이렇게 만든 저 역적들을 이대로 보내 주겠다니? 그럴 수 는 없소! 그랬다가는 자칫 제국의 위엄이 무너질 것이오. 제국에 속한 가문을 건드린 역적들을 그대로 보내 준다면 누가 제국의 황가에 충성을 하겠소? 어서 저 역적들을 잡도록 하시오!” 그러면서 황태자의 눈은 엘의 뒤에 서 있는 실피르를 향하고 있었다. 끈적끈적한 음욕이 담긴 그 눈길에 실피르가 고개를 돌리며 외면했다. 엘이 그런 황태자의 눈을 보지 못했을 리 없다. 그리고 그것으로 엘은 결정을 내렸다. 그가 클라이언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가운 목소리를 내며 입을 열었다. “공작님의 제안, 무척 감사하지만 옆에 있는 분이 원하시지 않나 보군요. 저 또한 받아들일 생각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허......!” 클라이언 공작의 입에서 안타까운 소리가 흘러나오려 할 때, 엘이 외쳤다. “타나! 클라이언 공작을 막아라. 너의 모든 힘을 다해서!” 골든 나이트의 푸른 안광이 번쩍였다. “주군. 명령. 이행.” 그와 함께 골든 소드에 푸른색 창연한 빛을 머금은 오러 블레이드가 솟아났다. 여태까지 시전한 오러 블레이드와 질적으로 다른, 월등한 위력을 지닌 오러 블레이드가 솟아난 것이다. 쓰! 쓰! 쓰! 처억! 오러 블레이드를 머금은 골든 소드를 클라이언 공작에게 겨누는 골든 나이트. 그 기세는 너무나 강렬하여 클라이언 공작 또한 마주 기세를 끌어 올렸다. 쿠콰콰콰콰-! 주변 공기가 팽창하며 무시무시한 폭풍을 일으켰다. 어느새 검을 뽑아 든 클라이언 공작. 그는 방금 전 온화한 표정과 다른 진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는 골든 나이트에게 검을 겨누며 외쳤다. “오라!” 꽈광! 두 기운이 충돌하면서 주변으로 강렬한 충격파가 번지기 시작했다. 대륙을 통틀어 단 한 기밖에 존재하지 않는 무인 나이트 골렘 골든 나이트와 대륙 십대 그랜드 마스터 중 한 사람인 클라이언 공작. 그 둘이 대치하고 틈을 노리는 모습을 힐끗 본 엘이 시선을 황태자에게 옮겼다. 그 순간 엘의 눈에 차가운 한광이 뿜어졌다. 엘의 시선을 받은 황태자가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철렁한 기분을 느꼈을 때, 엘의 스산한 말이 흘러 나왔다. “여관에서도 한 번 참았는데...... 그런데, 두 번씩이나 그런 눈을 해? 용서하지 않겠다!” 그리고 엘은 마법을 시전했다. 아인하트 후작과 글레톤을 꺾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 된 마법이었다. “헤이스트! 리터레이트!” 그와 함께 엘의 몸이 살짝 기우는가 싶더니 엄청난 속도로 황태자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어찌나 빨랐던지 잔상이 남을 정도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황태자에게 접근한 엘.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을 짓는 황태자를 보며 엘이 양손을 뻗었다. 글레톤을 곤죽으로 만든 5클래스 근접 마법이었다. “빅바이스 인터포싱 핸드!” 엘의 양손 앞에 생겨나는 거대한 손! 이것이 적중한다면 황태자는 최소 1년 동안 고생해야 할 것이다. 아니, 황태자니 최상위 신관들이 대동되어 치료에 치료를 거듭하여 몇 개월 안에 거뜬하게 일어설 테지. 그리고 보란 듯이 황태자 노릇을 하면서 세월을 보낼 테고...... 그걸 생각하자 엘의 양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그와 함께 거대한 손이 더욱 선명한 빛을 띠며 황태자에게 달려들었다. 황태자에게 막 마법이 적중하려 할 때, 날카로운 예기가 느껴졌다. 위험을 느낀 엘은 재빨리 마법을 시전했다. “블링크!” 시전어와 함께 공간의 틈으로 사라진 엘의 신형. 약간의 시간 차를 두고 푸른색 오러 블레이드를 머금은 검이 엘의 마법을 베었다. 서걱! 5클래스 빅바이스 인터포싱 핸드를 단번에 베어 버리는 오러 블레이드의 위력! 자칫하면 자신이 베일 수 있었다는 생각에 저편에 나타난 엘은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어느새 황태자의 주변에 은은한 금빛이 도는 기사 열 명과 은빛 갑옷을 입은 100명의 기사들이 모여 있었다. 엘은 은은한 금빛이 도는 갑옷을 입은 기사들에게 시선이 향했다. 그들이었다! 처음 황태자를 만났을 때 그를 호위하던 그 기사들...... 개개인이 모두 소드 마스터에 올랐고, 그들의 갑옷은 최상급 철제 갑옷에 매직 메탈을 둘러 경량화 마법과 대 마법진을 새겼다. 저 정도라면 3클래스 이하 마법은 모조리 무시할 수 있고, 한 점에 힘을 집중하면 5클래스 마법도 거뜬히 막아 낼 수 있을 것이다. 하나하나가 아까 전 골든 나이트를 상대하던 롬펠 남작보다 약해 보였으나 그들 두 명이 모이면 롬펠 남작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그만큼 저들의 실력은 무시할 것이 못 되었고, 피워 올리는 기세는 설사 드래곤이라도 베어 버릴 기세였다. 열 명의 근위기사 중 수장으로 보이는 이가 다른 기사들을 향해 외쳤다. “모두 황태자 전하를 지키는 데 주력하라! 상대는 7클래스 이상의 마법사! 방심하지 마라!” “옛!” 근위기사 전체가 오러 블레이드를 생성하며 엘을 경계했다. “이런......” 열 명에 이르는 소드 마스터를 보고는 엘이 작게 신음을 흘리듯 탄식했다. 아무리 그가 강하더라도 소드 마스터 열 명을 동시에 상대하기에는 무리였던 것이다. 골든 나이트를 동원하면 가능했지만 골든 나이트는 지금 클라이언 공작을 상대하는 것으로도 벅찬 듯했다. 이대로 포기해야 한단 말인가? 그때, 그의 뒤에서 걱정스러움이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리......” 엘이 살짝 시선을 돌리니 실피르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실피르가 엘에게 말했다. “이대로...... 이대로 그냥 가면 안 되겠니? 황태자는 건드리기에는 그는 너무 큰 인물이야.” 그녀의 말에 살짝 미소를 짓는 엘. 그리고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게 다 생각이 있어요.” 그리고 다시 시선을 전방으로 향해 옮긴다. 엘은 생각을 바꾸었다. 굳이 정면 대결을 고집할 필요를 못 느낀 것이다. 그의 표적은 단 한 명. 황태자뿐이었으니까. “열 명의 소드 마스터. 분명 이길 수 없는 전력이지만 굳이 정면 대결을 할 필요는 없지.” 그 순간 엘의 주변에 수많은 매직 애로우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인하트 후작을 쓰러뜨린 매직 애로우가 다시 시전된 것이다. “인피티니 매직 애로우(Infinity Magic Arrow)!” 피비비비빙! 수백 개의 마법 화살이 일제히 지면을 향해 쏘아지기 시작했다. 7클래스에 이른 마법사가 시전하는 매직 애로우. 마난 호응이 다른 마법사보다 월등함이 그대로 파괴력 상승으로 이어진 매직 애로우. 엘이 시전한 매직 애로우는 3클래스 마법과 비등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소드 마스터에 이른 검사는 일반인이나 마법사와 달리 그 육체가 또 하나의 갑옷과 같다. 그래서 매직 애로우로 큰 타격을 입힐 수는 없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충분히 묶어 놓을 수 있다. 바로 지금과 같이 말이다. “막아라!” 한 기사의 외침과 함께 그들은 모두 빠르게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파삭! 파사삭 매직 애로우가 그들의 검에 부딪치면서 부서져 나갔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엘이 노리는 바. 날아오는 매직 애로우를 막기 바쁘니 기사들에게 다른 여유가 없어 보였다. 그때, 엘이 다른 마법을 캐스팅했다. 허공에 뜬 플라이(Fly)마법과 매직 애로우(Magic Arrow)에 이어 세 번째 마법, 트리플 캐스팅(Triple Casting)을 한 것이다. 엘의 금빛 안경이 은은하게 빛났다. 안경에 걸린 마법 매직 아이(Magic Eye)가 시전된 것이다. 마나의 흐름이 더욱 원활하게 느껴지는 가운데, 캐스팅을 마친 엘이 마법을 시전했다. “포스 해머(Force Hammer)!” 파앗! 그러자 기사들이 매직 애로우를 막아 내기 바쁜 가운데 어느새 여유를 되찾은 황태자의 뒤에 거대한 해머가 생겨났다. 쐐애액! 황태자 뒤에 생겨난 포스 해머는 대기가 찢어지는 파공음과 함께 황태자를 향해 휘둘러졌다. 순간 의아한 느낌을 받은 황태자가 몸을 돌렸다가 경악했다. “허억!” 그런 경악성에 아랑곳없이 포스 해머는 그대로 황태자를 가격했다. 빠아악-! 포스 해머에 적중된 황태자의 몸이 'ㄱ' 자로 꺾였다. 입에 게거품을 문 황태자가 세상이 떠나가라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악!” 엄습해 오는 엄청난 고통! 그가 언제 이러한 고통을 겪어 보았겠는가! 언제나 타인의 고통을 즐겨 왔던 그로서는 이러한 고통이 생소하고 너무나 무섭게 다가왔다. 방금 전 포스 해머로 황태자 내부가 뒤집어졌다. 외상에는 신관의 신성 마법이 잘 먹히나 내상은 꽤 시간이 걸 릴 것이다. 그걸 감안하고 엘이 황태자의 내부를 뒤집어 버린 것이다. 내상은 겉으로 티가 전혀 나지 않으니 말이다. 황태자의 비명 소리가 들리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황태자에게 향했다. 그리고 고통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황태자를 불렀다. “황태자 전하!” 기사들과 근위병들이 황태자 주변에 모여들었다. 그 순간 거짓말같이 매직 애로우가 그쳐 있었다. “으음!” 클라이언 공작은 황태자가 쓰러진 모습을 보고 신음을 흘렸다. 마음 같아서는 그도 쓰러진 황태자의 상태를 살피고 싶었다. 하지만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자칫 틈을 보였다가는 골든 나이트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골든 나이트는 클라이언 공작조차 위협을 느낄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한순간 방심하면 패배를 불러올 수 있는 그런 어마어마한 힘을 품고 있는 존재...... 최대한 빨리 승부를 보고 황태자의 상태를 살피고자 했기에 클라이언 공작은 의도적으로 빈틈을 만들었다. 그러자 골든 나이트가 그 빈틈을 보고 반응을 했다. 골든 나이트가 막 골든 소드를 뻗으려는 순간, 엘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만! 네가 할 일은 끝났다. 타나, 공간의 저편에 대기 하라!” 그에 언제 폭발적인 기세를 뿜어냈냐는 듯 모든 기세를 제거한 골든 나이트. 그는 푸른 안광을 뿜어내며 엘의 명령에 응했다. “공간. 저편. 대기.” 파아앗! 골든 나이트의 전신에서 환한 금광이 뿜어지더니 바로 옆 공간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 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클라이언 공작이 아니었다. “이대로 못 간다!” 그는 노성을 터뜨리며 골든 나이트에게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수십 개로 나뉘어 쏘아지는 오러 블레이드! 정확한 컨트롤로 쏘아진 오러 블레이드는 그대로 골든 나이트의 왼팔과 왼쪽 다리에 적중되었다. 서걱! 오러 블레이드의 예리함을 견디지 못하고 집중 공격 당한 골든 나이트의 왼팔이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떨어진 팔이 금광에 휩싸이더니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다시 어깨에 달라붙었다. 그 리고 공간의 저편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허허!” 사라진 골든 나이트의 자취를 바라보며 클라이언 공작이 허탈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어찌 허탈하지 않겠는가! 지겨운 신경전 끝에 공격을 펼쳐 팔을 취했는데 그것이 순식간에 달라붙다니! 클라이언 공작의 시선이 엘에게 향했다. 엘 또한 클라이언 공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엘은 클라이언 공작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은은한 푸른빛을 띠고 있는 동전을 꺼냈다. 매직 캡처가 걸린 동전이었다. 엘은 그것을 잠시 바라보더니 이윽고 손을 젓자 푸른빛이 흘러나와 다른 곳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 후 엘은 동전을 부숴 버렸다. 그리고 쓰러진 아인하트 후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걸 소거한다고 했지, 복제를 안 한다고는 말을 안 했으니까.” 그 말을 들었는지 누워 있는 아인하트 후작의 몸이 움찔했다. 엘은 시선을 황태자에게 옮겼다. 포스 해머에 가격당한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널브러진 황태자가 몸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런 그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며 엘이 말했다. “네가 행한 모든 것이 이 매직 캡처에 담겨 있어. 그 내용이 궁금하면 아인하트 후작에게 물어봐. 만약 날 쫓으려 한다면 이 내용을 퍼뜨려 버릴 테니까.” 그리고 다시 클라이언 공작에게 시선을 옮겼다. 엘은 그에게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더니 말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소란을 피웠군요. 이런 소란이 았고 하니 다시는 뵐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그럼......” 엘의 주변에 푸른 빛이 반짝였다. 동시에 엘이 시전어를 외쳤다. “텔레포트(Teleport)!” 스파앗! 그와 함께 엘 일행이 새하얀 기류에 휩싸여 그대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허탈하게 바라보던 클라이언 공작. 잠시 그런 모습을 보인 그는 이내 본래 모습을 되찾고는 강한 기세를 풍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클라이언 공작의 기세에 압도되었다. 장내를 압도한 클라이언 공작이 언성에 강한 마나를 담아 말했다. “오늘 있던 일은 모두 함구하도록. 이것들은 제국의 큰 누가 될 수 있는 사항이다. 모두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오늘 일을 비밀로 해야 한다. 알겠느냐?” “아, 알겠습니다.” 한 기사가 대답하는 걸 필두로 모든 사람이 알겠다고 대답을 하였다. 하지만 클라이언 공작도 알고 있다. 이런 함구령을 내려도 이야기는 새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그래도 이렇게라도 하면 그래도 그나마 소문이 최소한으로 퍼질 수 있고, 그것을 제국 자체가 조율할 능력이 있었기에 이러한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 아인하트 후작가에서 일어난 대소동은 조용히 함구령에 묻혀 지나갔다. 그러나 그 사건의 전말은 조용히, 아주 조용히 소문을 타고 흘러갔다. 그랜드 마스터와 호각을 이루는 황금 나이트 골렘을 데리고 다니는 최연소 7클래스 마법사가 대륙에 등장했다고. 그렇게 엘의 첫 등장은 모든 사람들에게 충격적으로 조금씩 알려져 나갔다. 4 미래를 설계하다 톡톡. 한 소년이 왼손으로 턱을 괸 채 오른손으로 연신 탁자를 두드리고 있었다. 머리가 살짝 움직일 때마다 찰랑이는 금발은 싱그러움과 고귀함을 느끼게 해 주었고, 잘생긴 얼굴에 턱 선이 가늘어 중성적인 느낌마저 주는 소년은 무척 신비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소년, 엘은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엘은 자신이 블리어드 제국에서 일으킨 거대한 소동을 떠올려 보았다. 제국의 중추라 할 수 있는 아인하트 후작가를 거의 초토화시켰다. 그리고 차기 제국의 황제인 황태자를 중상 입혔다. 어느 것 하나 평범한 것이 없다. 당장 사로잡혀 목이 잘려도 변명할 거리가 없는, 그야말로 즉결참의 대죄였던 것이다. 하지만 엘은 그것에서 무사하게 빠져나왔고, 그들이 함부로 쫓지 못할 약점을 쥐었다. 그러니 블리어드 제국에서 함부로 엘을 뒤쫓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하지 못할 것이다. 이번 일로 엘이 느낀 것이 많다. 우선 자신이 지닌 실력에 대해서다. 남들보다 압도적으로 빠른 캐스팅 시간, 그리고 적절한 마법의 조합은 누구보다 월등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거기에 보조 마법을 좀 더 곁들인다면 더욱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골든 나이트의 힘도 새삼 다시 느낄 수 있었다. 막연히 그랜드 마스터를 상대할 수 있을 거라 예상했는데 정말 그의 예상대로 클라이언 공작과 대등한 대결을 벌였다. 5년 동안 심열을 기울여 만든 골든 나이트의 진정한 실력이 드러난 것이다. 양산만 할 수 있다면 세계 정복도 가능하겠지만 골든 나이트를 만드는 데 드는 시간은 어림잡아 3년이다. 재료비도 무시무시하지만 그 노력 또한 엄청나게 들기에 다시 만들라고 하면 절대 무리였다. 하지만 그랜드 마스터 급 호위가 생겼으니 이보다 더 든든한 것이 없다. 마지막은 집단의 힘이었다. 엘, 자신이 지닌 개인의 힘은 강했지만 집단 앞에서는 개인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이 많았다. 예를 들어 블리어드 제국을 보자. 근위71사단인 블리어드 기사단은 오십 명 전원이 소드 마스터이며, 단장은 그랜드 마스터인 클라이언 공작이 맡고 있다. 또한 제국 각지에 퍼져 있는 소드 마스터들은 다 합쳐 백 명이 넘었다. 개개인으로 싸운다면 엘이 이길 수 있지만 그들이 뭉친 다면? 절대 이길 수 없다. 개인과 집단의 차이를 뼈저리게 느낀 엘은 앞으로 살아감에 있어 절대 혼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다. 그래서 자신 또한 세력을 이루어야 함을 느꼈고, 그것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 것이다. 블리어드 제국에서 일어난 일은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을 것이다. 결국 각 세력에 그 일이 흘러 들어갈 것이고, 그들은 자신을 찾기 위해 움직일 것이 분명했다. 확실하게 확인을 하지 않기에는 그 소문에 대한 내용이 너무나 매력적일 테니까. 엘은 그들이 손을 뻗치기 전에 세력을 이뤄야 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상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때, 방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똑! “엘, 자고 있니?” 실피르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느껴지는 기척으로 보아 실피르만 온 게 아니라 세레나와 카이나도 온 듯했다. 엘이 대답했다. “아뇨, 아직 안 자고 있어요. 들어오세요.” 엘의 승낙에 실피르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 실피르의 뒤를 따라 세레나와 카이나도 조심스러운 행동으로 방 안에 들어왔다. 어디를 가더라도 눈부신 아름다움을 뽐내는 그녀들의 모습에 엘은 복잡한 생각이 가시는 느낌을 받았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밝은 표정을 지은 엘이 실피르에게 묻자, 그녀는 잠시 우물쭈물하는 듯한 기색을 보였다. 그때 엘은 실피르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음을 느꼈다. 그것은 세레나와 카이나도 마찬가지였다. 하기야 뛰어난 소년인 줄 알았던 자신이 남들이 모두 경외하는 경지에 올랐으니 그 이질감은 당장 적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작게 한숨을 내쉰 엘이 실피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엄마, 제가 십 년 전 반자크 마탑에서 브리온 할아버지와 만났을 때 했던 이야기를 기억하세요?” “응? 아......” 실피르는 그때를 떠올려 보았다. 그때 분명 엘은 이렇게 말했었지. “저는 엄마의 하나뿐인 아들 엘이에요. 그 사실은 어딜 가나 바뀌지 않아요. 제가 남들이 믿지 못할 성취를 이뤄 숨겼지만 저는 여전히 엄마의 아들인 엘이에요.” “......” 엘의 말에 실피르는 두 눈을 감았다. 그때도 이렇게 생각했었지. 이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고. 고민할 가치가 없는 일이라고. 엘은 여전히 자신의 아들이고, 자신의 모든 것과 다름없는 자랑스러운 아들이라고. 이윽고 눈을 뜬 그녀의 눈은 유난히 맑은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붉은 입술이 완만하게 휘어지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때는 이렇게 말했었지. 엄마는 엘리를 믿는다고. 미안해, 엘리. 엘리가 실력을 숨겼다면 응당 이유가 있었을 텐데 그것을 모르고 태도를 다르게 해서......” 엘이 고개를 저었다. 이해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분위기를 전환하고자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 “아니에요. 사실 실력을 숨긴 이유가 나이에 비해 너무 뛰어난 실력을 지녀서 그런 거예요. 만약 제 실력이 알려지면 다른 곳에서 얼마나 귀찮게 굴겠어요?” 그에 실피르와 두 여인의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이윽고 그녀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너무 자신감이 과한 것 아니니? 7클래스에 을랐으면 겸손할 줄도 알아야지......” “호호! 그러게요.” 엘의 의도대로 분위기가 가벼워졌다. 그리고 화기애애한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러길 10여 분, 이 정도면 충분히 예전 관계대로 돌아갔다고 판단한 엘이 진중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사실 제가 지금 고민하고 있는 것이 있었어요. 마침 엄마랑 세레나, 카이나도 왔으니 함께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어요.” 엘의 말에 여인들이 궁금증을 드러냈다. “뭐니? 말해 보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문제랄까요? 블리어드 제국에 큰 소동을 일으켰으니 반자크로 돌아가 다시 살 수 없는 노릇이잖아요.” “그건 그렇구나.” 블리어드 제국 이야기가 나오자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던 실피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엘에게 말을 건넸다. “우선 이야기를 꺼낸 걸로 보아 엘리가 생각하고 있는게 있을 것 같구나.” 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피르가 들어오기 전에 전체적인 윤곽을 그려 놓았기 때문이다. 딱! 키이잉! 엘이 손을 튀기자 허공에서 아공간이 열렸다. 그리고 그 속에 손을 넣고 뒤적거리던 엘이 지도를 꺼내 들었다. 그 지도는 세르디아 제국을 그려 놓은 대륙 전도였다. 엘이 세르디아 대륙의 동부를 짚으며 설명했다. “아시다시피 대륙 동부는 다섯 개의 제국이 버티고 있어요. 제국에는 많은 숫자의 마탑이 있고, 수많은 검사들 이 존재하죠.” 실피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륙 동부를 다섯 개로 나누어 다스리고 있는 제국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엘이 이번에는 대륙 서부를 짚었다. “대륙 서부는 수백 개의 국가로 나뉘어 있지요. 제국 대부분에 마탑이 몰려 있기에 대륙 서부는 일부 강국을 제외하고 마탑이 없는 곳이 많아요. 그래서 저는 마탑이 없는 나라에 마탑을 세우고자 해요.” 마탑! 7클래스 이상에 오른 마법사만이 건설할 수 있으며, 국가에 등록하면 소속 국가에서 엄청난 양의 예산을 지원해 준다. 그만큼 마탑은 국가에 있어 엄청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마탑은 보통 수비를 위해 나서는데, 이때 보통 마탑의 전력이면 수만의 군대는 대인 마법으로 전멸이 가능하다. 물론 상대측에도 마법사가 존재하면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마법사는 그 정도로 국가에 있어 가치가 있는 존재인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마탑의 위상은 국가에게도 영향을 끼쳐, 8클래스 마법사가 세운 마탑을 보유하고 있는 제국의 경우 인근 수십 개의 왕국에게서 매년 막대한 조공을 받고 있다. 8클래스 마법사가 수십 개의 마나석의 마나를 끌어 모아 펼친 헬 파이어는 왕국 수도 하나를 절반 이상 날려 버릴 수 있는 어마어마한 위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8클래스만큼은 못하지만 7클래스 마법사가 세운 마탑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인근왕국에 7클래스 마법사를 보유하지 못했다면, 그 국가는 언제나 7클래스 왕국을 보유한 왕국의 침입을 두려워해야만 한다. 7클래스 마법사가 이웃 왕국에 워프 게이트를 설치하고 병사들이 쳐들어온다면 그 국가로서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소드 마스터에게 일대일에서 밀림에도 불구하고 대륙에 단 100여 명쯤 존재하는 7클래스 마법사가 극히 귀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다. 엘의 말에 세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7클래스 마법사를 보유하고 있는 곳보다 보유하지 못한 곳이 더 대우가 좋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세레나가 엘을 바라보며 질문했다. 엘이 마탑을 세운다고 하니 여러 가지 궁금한 점이 많은 듯했다. “그럼 주인님은 어디에 마탑을 세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세요?” “세레나의 생각은 어떤데?” 이미 엘은 후보지를 생각해 놓은 상태였다. 과연 세레나는 어디를 고를지 궁금하여 그녀의 의견을 물었다. “으음......” 엘의 물음에 세레나는 진지하게 고민에 빠졌다. 잠시 그렇게 생각에 빠져 있던 세레나가 마침내 결정한 듯 서부 대륙 중간에 위치한 국가를 짚었다. 그곳은 트랜켈리 산맥에서 넓게 분포한 분지에 위치한 듀모스 왕국이었다. 사면이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교통이 무척 불편하여 주로 자급자족으로 먹고사는 왕국이었다. 하지만 특산물이라 할 수 있는 광물들로 인해 산악 국가치고 무척 부유한 국가이기도 하였다. 엘이 세레나가 가리킨 왕국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그곳을 고른 이유는?” 엘의 말에 세레나가 대답했다. “네, 우선 제가 책에서 읽기로는 듀모스 왕국은 광물 수출로 상당히 재정이 부유하고 들었어요. 그렇다면 마탑을 세우는 데 많은 금전을 지원해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리고 산악 국가인 듀모스 왕국은 산에 서린 마나를 백성들이 친숙하게 받아들이기에 마나에 자질이 있는 아이들이 많을 확률이 높아요.” 세레나는 자신이 듀모스 왕국을 지목한 이유를 하나씩 조목조목 짚어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엘은 물론, 실피르와 카이나는 눈을 반짝이며 듣고 있었다. 확실히 세레나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듀모스 왕국은 왕국민 전체가 그리 잘살지는 않지만 국가 재정은 매우 풍부하다. 그리고 마나 밀도가 높은 산에 살고 있으니 마나에 자질이 많은 아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아직 마탑이 들어서지 않았으니 엘이 마탑을 세우기에는 최적의 환경이었다. 하지만 엘의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물론 세레나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 하지만 그것은 주변 요건만 그런 거야. 듀모스 왕국의 국왕은 능력에 비해 야심이 많아. 그리고 교활하지. 만약 그곳에 마탑을 세운다면 이용을 당할 확률이 무척 높아. 그리고 자신의 뜻대로 따르지 않는다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지.” 세레나가 생각했던 것을 어찌 엘이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러한 것을 고려해 봤지만 듀모스 국왕의 성격을 듣고 바로 포기했다. 이야기는 안 했지만 듀모스 국왕은 미녀에 사족을 못 쓴다는 사실도 끼어 있던 것이다. 엘이 손을 뻗었다. 그곳은 바로 대륙 제일 서부에 위치한 톨리안 왕국이었다. 상당히 넓은 영토를 지니고 있고 비옥한 평원도 있다. 인구도 많아 군사력이 강하지만 톨리안 왕국 북쪽에는 드래곤 레어가 있고, 서쪽에는 몬스터 랜드가 존재한다. 때문에 강한 군사력에도 매년 몬스터 랜드에서 진출하는 몬스터들을 막는 것만으로도 벅찬 곳이 바로 톨리안 왕국이었다. 다행이라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세 왕국이 톨리안 왕국보다 약한 곳이랄까? 세 왕국의 모든 힘을 합해야 톨리안 왕국과 자웅을 겨룰 수 있을 정도니 몬스터 랜드에 힘을 쏟고 있음에도 톨리안 왕국은 자국을 지키는 데 문제가 없었다. 엘이 톨리안 왕국 서부에 위치한 몬스터 랜드를 가리켰다. 그리고 설명을 시작하였다. “우선 톨리안 왕국을 고른 이유는 왕국 자체의 힘이 주변에서 가장 강한 데 반해 마탑이 없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곳!” 몬스터 랜드 중 톨리안 왕국과 가장 가까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트롤 벨리(Troll Valley)라 쓰여 있었다. 엘이 설명을 계속하였다. “정보를 얻어 보니 이곳에는 톨리안 왕국 내의 악덕 귀족들의 지배를 피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꽤 많다고 하네요. 그리고 이 지형 자체가 험난함 그 자체라 왕국 내에서도 토벌할 엄두를 못 내고 있어요. 톨리안 왕국으로서는 이곳을 토벌해 준다는 저의 제의를 당연히 받아들일 거예요.” “톨리안 국왕의 성격은 어떠니?” 엘이 방금 전 세레나의 의견에 반대한 것이 듀모스 국왕의 성격 문제이다 보니 실피르가 톨리안 국왕의 성격을 물었다. 그 질문을 할 줄 알았다는 듯, 엘이 거침없이 대답했다. “톨리안 국왕의 성격은 괜찮은 편이에요. 왕국을 경영하는 능력도 괜찮고, 주요 귀족들에게 충성을 맹세 받고 있어요. 하지만 단점은 조금 유약한 편이어서 현재 왕자들이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음에도 달리 손을 쓰지 못하고 있지요.” “그건 좀 문제가 있는 거 아니니?” 왕권 다툼이 걸렸던 것일까? 실피르가 그걸 지적하자 엘이 대답했다. 사실 그도 이 문제로 상당한 고민을 해야 했다. 하지만 마탑에 관한 정보를 조합한 결과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괜찮아요. 대륙의 마탑은 전통적으로 왕권 다툼에 관여하지 않아요. 권력에 관심이 많은 일부 마법사들이나 관여를 하지 마탑의 탑주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경지를 높이는 데 혈안이 되어 있으니까요. 왕권 같은 건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은 거죠. 그게 관례예요.” 엘의 말에 실피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륙에 존재하는 마탑들이 왕권 다툼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떠올린 것이다. 마법 그 자체가 자연의 법칙을 깨는 것이다. 때문에 마법사들은 법칙을 깨는 걸 무척이나 꺼려 했고, 전쟁이나 큰 다툼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해당 국가가 바라면 그것을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는 것이 바로 마탑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사용하는 대부분의 돈이 바로 국가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들은 권력을 탐하지 않는다. 물론 이건 절대적인 사실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실이다. 권력을 탐하는 마법사도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마법사는 권력을 그리 탐하지 않는다. 엘 또한 이 점을 노렸다. 현재 톨리안 왕국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트롤 벨리와 오크 포레스트(Orc Forest)였다. 트롤 벨리는 지형적 요건으로 인해 토벌할 수 없지만 오크 포레스트는 충분히 토벌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러려면 상당한 전력을 집중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트롤 벨리에서 쏟아져 나오는 트롤들을 감당할 수 없다. 엘이 그중 하나인 트롤 벨리를 감당해 준다면 톨리안 왕국은 오크 포레스트를 토벌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엘은 충분히 톨리안 왕국에게 은혜를 입히는 것이 된다. 톨리안 왕국을 괴롭히던 몬스터들을 모두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왕국의 국력 상승으로 이어질 것이다. “......” 엘의 말에 세 여인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자신들의 미래가 연관된 일이니 최대한 신중하게 생각해야 했던 것이다. 그때 카이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질문은 마탑에 관련된 것이 아닌 자신에 관한 문제였다. “세레나 언니는 수련시켜 주시면서...... 저는...... 그러니까......” “아, 그렇구나.” 엘은 그녀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파악했다. 카이나는 소드 익스피트 중급에 이르렀다. 나이 대에 비해 대단한 성취였지만 그녀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 줄 스승이 없었다. 단전호흡이 대단하다지만 그것이 그녀의 진보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아니, 스스로도 실력을 증진시킬 수 있겠지만 스승의 유무에 따라 그 차이는 확연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 문제도 엘이 이미 생각해 놓은 게 있었다. 그러나 아직 사실을 밝힐 만한 사항이 아니었기에 엘은 카이나에게 둘러댔다. “일단 톨리안 왕국에 가서 생각해 보자. 그곳에는 뛰어난 검사들이 많으니까 카이나의 스승이 될 만한 검사가 있을 거야.” “고맙습니다.” 카이나는 엘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세레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저도 앞으로 많은 지도를 부탁드릴게요.” 배움의 욕구가 활활 타오르는 그녀를 보며 엘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앞으로 세레나를 집중 지도해 줄게.” 엘의 승낙에 세레나와 카이나가 순간 서로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들은 이번 소동에서 느꼈다. 자신들의 힘이 미약하다는 것을. 최소한 자신들을 지킬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는데 대륙은 넓고 실력자들은 많았다. 그래서 그녀들은 결심했다. 엘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스스로 강해지자고. 그리고 지금 그것을 엘에게 간접적으로나마 보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실피르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도 엘을 보며 말했다. “나도 부탁할게. 6클래스 마스터가 되었지만 더 높은 고지가 있으니까.” 엘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물심양면 돕겠어요.” “고마워. 그럼 엘리의 의견대로 톨리안 왕국에 가도록 하자. 엘리의 의견이 가장 타당하게 들리니깐. 너희들은 어떠니?” 실피르가 세레나와 카이나를 보며 묻자, 두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타당한 근거를 지니고 있는 엘의 의견에 반대할 생각이 없었다. “저 또한 좋다고 생각해요, 어머니.” “저도요.” “모두가 찬성하는걸?” 실피르가 엘에게 시선을 옮기며 싱긋 웃자 엘도 싱긋 웃음을 지었다. “자, 그럼 가 볼까요? 우리의 장밋빛 미래를 위해서!” “위해서!” 그렇게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운 그들은 밝은 표정을 지었다. 앞으로 그들 앞에 기다리고 있을 미래처럼. 5 톨리안 왕국의 국왕을 구하다 잘 훈련된 정규군 30만 군대를 지닌 톨리안 왕국은 대륙 서부에서도 강한 축에 속하는 왕국이다. 특히 톨리안 왕국 주변에 위치한 국가들은 모두 톨리안 왕국보다 반도 안 되는 힘을 지니고 있어 사실상 서부 대륙 맹주국을 자처할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톨리안 왕국은 그리하지 못했다. 바로 세르디아 대륙 삼대 죽음의 장소 중 하나인 몬스터 랜드를 서쪽에 접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년 먹을거리가 사라지는 겨울철에 10만 이상의 오크와 1만 이상의 트롤들이 봇물처럼 쏟아진다. 그리고 그것을 막기 위해 톨리안 왕국은 매년 엄청난 수의 군대를 동원하여 몬스터들을 막는다. 1만 이하의 피해가 났을 때는 그나마 양호하다. 하지만 2, 3만이 넘는 피해가 날 때도 종종 있기 때문에, 톨리안 왕국의 국력은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거대한 벽에 막혀 있었다. 가끔 몬스터들이 진출하지 않을 때는 왕국의 축제가 벌어질 정도니, 몬스터들의 습격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반증하는 바이다. 마법사의 도움이 간절했지만 마탑은 대부분 오대 제국에 위치해 있었고, 그나마 마탑이 위치한 곳들은 대부분 서부 대륙에서 제일 강력한 축에 속하는 왕국에 속해 있었다. 그렇다고 아무 소속이 없는 마법사들을 끌어들이자니 정작 왕국에서 원하는 고 클래스 마법사는 없었다. 현 대륙에 존재하는 7클래스 마법사는 모두 소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법사를 영입하고 있음에도 톨리안 왕국에 존재하는 최고 클래스 마법사는 6클래스 익스퍼트 마법사였다. 몬스터를 막아 내는 데도 버거운 톨리안 왕국은 최근 들어 더욱 심해진 왕권 다툼으로 더욱 어지러워지고 있다. 후궁 소생인 제1왕자와 제2왕자, 그리고 왕비가 낳은 제3왕자가 각각 파벌로 나뉘어 치열한 정치 공작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귀족들도 각각의 이해득실에 따라 세 파로 나뉘어 있었기에 요즘 들어 톨리안 국왕의 얼굴에 주름살이 하나씩 늘어 가고 있었다. “왕위 다툼이 날로 심해지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 톨리안 왕국을 다스리는 지배자, 레도프 국왕은 갈수록 심해지는 왕자들의 왕권 다툼을 생각하며 생각에 잠겼다. 본래 그는 현 왕비의 소생인 제3왕자 유드미온 왕자를 왕세자로 삼을 생각이었다. 그것이 가장 정통성에 걸맞고, 귀족들이 지지해 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빗나갔다. 야심이 많은 제1왕자 맥셀과 제9왕자인 크란은 언제인지 모르게 슬금슬금 자신들의 영향력을 늘려 왔던 것이다. 그걸 뒤늦게 알아차렸지만 이미 맥셀 왕자는 톨리안 정계에 활동하는 귀족들 중 절반에 해당하는 이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크란 왕자 또한 그 나머지 대부분 귀족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레도프 국왕이 제3왕자를 밀어 주려고 했을 때 믿을 수 있는 이는 최상급 소드 마스터이자 근위기사단장인 라이어스 공작과 상급 소드 마스터이자 수도 중앙기사단장인 루밀 백작밖에 없었다. 수도의 병사를 한 손에 쥐고 있는 두 사람이 제3왕자인 유드미온 왕자파 측에 섰기에 세 왕자 파벌은 각각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룬 채 여태까지 버틸 수 있었다. 이제 그것도 끝이었는지 점점 암중 공격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그것은 점점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라이어스 공작과 루밀 백작이 지지한다고 하나 두 왕자 파 어느 곳도 감당할 수 없는 게 바로 제3왕자파다. 때문에 레도프 국왕의 근심은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근접 호위하는 기사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중 40대 초반의 장한이 돌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의 이름은 리더벨. 소드 익스퍼트 상급의 기사로 국왕을 호위하는 근위기사 중 한 사람이다. “전하, 신이 한 말씀 올려도 되나이까?” 갑자기 나선 그를 보며 레도프 국왕이 입을 열었다. “말해 보라, 리더벨 경.” “예! 신이 알기로는 이런 때를 대비하여 선대가 준비해 놓은 힘이 있다고 알고 있사옵니다.” 왕위 다툼이 점점 심해지자 요즘 그런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톨리안 왕국의 역대 국왕들은 후대가 왕위 다툼을 할 경우 국왕이 다음 대 국왕을 정하게 할 수 있는 숨은 힘이 있다.’ 표면적인 소문은 아니지만 이미 왕위 다툼에 관련된 대부분의 귀족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만약 그러한 것이 있다면 왕권 다툼은 단번에 뒤집힐 수가 있다. 그 때문에 귀족들은 모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형국이었다. “으음......” 리더벨의 말에 레도프 국왕은 신음을 흘리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소문대로 숨겨진 힘이 있는 건 사실이다. 역대 톨리안 국왕들이 왕위를 왕의 뜻대로 잇게 하기 위해 모은 힘은 레도프 국왕이 놀랄 정도로 대단했다. 하지만 소문처럼 단번에 왕위 다툼을 뒤집어 버릴 수 있을 정도의 힘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지금 톨리안 왕국 대부분의 귀족이 제1왕자파와 제2왕자파로 나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압도하려면 귀족 전체를 압도하는 힘을 지녀야 한다. 하지만 숨겨 놓은 힘은 한쪽을 압도할 수는 있지만 두 쪽을 상대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벅찼다. 왕국의 90퍼센트에 해당하는 귀족들이 제1왕자파와 제 2왕자파에 포진되어 있는 것이다. 숨겨 놓은 힘을 사용한다 쳐도 두 왕자파를 모두 압도하지 못하기에 레도프 국왕이 고민하는 것이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힘은 어느 때나 필요한 것이다. 특히 지금과 같은 이강 일약의 상황에서 자칫 두 왕자파가 손을 잡고 제3왕자파를 밀어내려 할 수도 있었기에 레도프 국왕은 결정을 내렸다. 레도프 국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근위기사들을 보며 말했다. “암행을 나가겠다. 모두 최대한 빠르게 준비를 하라.” “알겠습니다, 전하.” 기사들이 예를 취했다. 그들 중 레도프 국왕에게 질문을 하였던 리더벨의 눈이 요사스럽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암행 사실은 근위기사단장인 라이어스 공작에게 알려졌고, 왕국의 숨은 힘을 사용하려 한다는 말에 그 또한 암행에 참석했다. 준비를 마친 레도프 국왕은 근위기사단장인 라이어스 공작과 근위기사 스무 명을 동행한 채 조용히 왕궁을 벗어났다. 넓은 회의실. 사방이 확 트였다고 할 정도로 넓은 공간과 높은 천장은 사람을 압도하는 강렬함을 심어 주었다. 그리고 중앙에는 커다란 원형 탁자가 놓여 있었다. 족히 100여 명은 앉을 수 있는 그곳에는 일곱 명의 인물이 착석해 있었다. 날카로운 한 자루의 검을 연상시키는 세 명의 중년인과 새하얀 백발 백염을 지니고 있는 네 명의 노인이 바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인물들이었다. 일견하기에도 범상치 않은 기운을 흘리고 있으며, 그들의 모습 하나하나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날카로운 검을 연상시키는 세 명의 중년인은 당금 십대 그랜드 마스터 중 세 사람이며, 네 명의 노인은 열 명의 8 클래스 마법사에 속하는 마법사들이었기 때문이다. 대륙 각지에 퍼져 그야말로 절대자로 군림하고 있는 그들이 왜 이런 자리에 모여 있단 말인가? 모두가 침묵을 지키고 있는 가운데 붉은 로브를 걸치고 있는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마탑 중에서 가장 전투력이 뛰어나다고 알려진 적탑의 탑주 카로스만이었다. 한눈에 보아도 강인함이 느껴지는 그는 은은한 붉은 기운이 도는 흰머리를 휘날리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만나 모두 반갑군. 오늘 회의에 마스터(Master)가 못 오신다기에 내가 직접 회의를 이끌게 되었다.” “마스터가 참석하지 못하시는데 회의를 열다니...... 무언가 중요한 사항이 있는 건가?” 카로스만에게 질문을 던지는 중년인, 그는 대륙 최강의 제국인 벨로세크 제국의 삼대 근위기사단 중 하나인 헬 라이언 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트루엘 공작이었다. 트루엘 공작의 물음에 다른 이들 또한 모두 동감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이곳에 모인 이유는 마스터의 명령을 듣기 위해서였다. 카로스만의 말을 들을 이유는 없다. 그들 하나하나가 전부 카로스만에게 밀리지 않는 대륙의 정점에 이른 강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카로스만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당당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럼 내가 너희들을 어디 뜻대로 움직일 수 있겠는가? 마스터께서 중요한 사항을 내게 일러 주시면서 회의를 하시라 하셨다.” “그게 무엇인가? 우리들 모두가 바쁘다는 건 잊지 않았겠지?” 트루엘 공작의 말에 카로스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스터에게 들은 사항을 말하기 시작했다. “뭐도 못 해 보고 빨리 끝내야겠군. 좋다 마스터께서 내리신 내용은 딱 두 가지다. 우선 하나는 톨리안 국왕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워프 게이트를 열 테니 톨리안 국왕을 처리해야 한다.” 그와 함께 카로스만의 시선이 트루엘 공작에게 향했다. 그의 시선을 받은 트루엘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를 빨리 끝내길 종용했으니 원만한 회의 종료를 위해 그가 나서야 했던 것이다. 트루엘 공작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군. 좋다. 소드 마스터 세 명과 소드 익스퍼트 오십 명을 지원하겠다. 이 정도면 되겠지?” 소드 마스터 세 명과 소드 익스퍼트 기사 오십 명을 아무렇지도 않게 언급하는 트루엘 공작의 모습은 너무나 놀라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소드 마스터는 제국에서도 채 이백 명도 되지 않는 귀중한 인재였기 때문이다. 서부 웬만한 왕국은 소드 마스터가 열 명도 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하지만 회의장에 착석해 있는 이들은 그것이 당연하다는 표정이다. 도대체 각각 어느 정도의 세력을 지녔기에 이 정도의 전력을 그토록 가볍게 여기는 걸까? 톨리안 국왕이 암행에 데려가는 세력을 계산한 카로스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다음 사항은 블리어드 제국에 나이트 골렘이 출현했다는 소식이다.” “뭐? 나이트 골렘이?” 카로스만의 말에 청색 로브를 입은 노인이 부드러운 얼굴에 걸맞지 않게 다급한 기색을 띠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이름은 라이젠. 대륙에서 골렘 제조술에 가장 뛰어난 기술을 보유한 청탑의 탑주이자 8클래스 마스터이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로스만을 노려보듯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급함이 담긴 어조로 물음을 재촉했다. “카로스만! 그게 무슨 말이지? 나이트 골렘이 출현했다니? 대륙에서 나이트 골렘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밖에 없다! 그런데 그게 무슨 말이더냐?” “침착해라, 라이젠! 설명해 줄 테니. 블리어드 제국의 아인하트 후작가에서 큰 소동이 일어났다. 그곳에서 7클래스 마법사와 나이트 골렘이 등장다고 한다. 그곳에서 보였던 나이트 골렘의 신위는......” “신위는?” 라이젠이 재촉하듯 묻자 카로스만이 라이젠을 바라보며 힘주어 말했다. “무인 탑승! 그 무위는 최소 그랜드 마스터!” “으음......” 카로스만의 말에 라이젠은 신음을 흘렸다. 그것은 회의장에 착석한 다른 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침묵을 지키자 카로스만이 재차 말을 이었다. “눈으로 확인한 것이 아니기에 모든 걸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무인 나이트 골렘이 블리어드 제국의 그랜드 마스터인 클라이언 공작과 대등한 대결을 펼쳤다고 한다. 그걸 보아 나이트 골렘은 최소 그랜드 마스터에 필적하는 무위를 지녔다고 봐야 되지. 라이젠, 네가 만들 수 있는 골렘은 어느 정도 수준이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라이젠이 대답했다. “기사가 탑승하는 나이트 골렘은 지금 사라진 환상의 금속 오르하르콘을 나이트 골렘 마나 홀에 섞어야 기동이 된다. 오르하르콘이 사라진 지금 무인 나이트 골렘밖에 만들지 못하지. 하지만 그것도 한 달에 한 대씩밖에 생산 못하는 지경이다.” 그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카로스만이 말했다. “그랜드 마스터 급 나이트 골렘이 있다고 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정도 나이트 골렘을 만들려면 최소 한 몇 년은 걸릴 테니까. 하지만 확실한 정보 없이 이대로 넘기기에는 사항이 조금 크다고 마스터께서 말씀하셨다. 때문에 나이트 골렘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라 하셨다. 그걸 알아보는 걸 네게 맡겨도 되겠지?” “알았다.” 라이젠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로스만이 따로 부탁을 안 해도 혼자 독자적으로 알아볼 생각이었다. 평생을 다하여 복원하는 데 성공한 나이트 골렘을 다른 사람도 복원했다는 사실에 경쟁심과 질투심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마스터에서 전달하라고 하신 사항은 이 두 개다. 트루엘이 알아서 하겠지만 톨리안 국왕을 죽이면 우리의 명령을 받는 맥셀이란 놈이 왕좌에 오를 것이다. 그리고 나이트 골렘을 동원하여 몬스터 랜드를 쓸어버린 뒤 톨리안 왕국의 군사력으로 주변 국가를 복속시키라고 하셨다.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트루엘은 최대한 신경을 써라.” “소드 마스터 세 명과 소드 익스퍼트 오십 명이면 충분할 것이다. 뭣하면 전력을 더 붙이지.” 그 말에 카로스만은 고개를 저었다. 오크 잡는 데 오우거 잡는 칼을 쓸 필요는 없다. “아니, 내가 말한 것은 부하들에게 방심을 심어 주지 말라는 이야기다. 뭐, 네 부하들이니 스스로 알아서 하겠지만.”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기대하도록 하지. 두 가지 사항을 모두 전했으니 회의는 이것으로 끝마치도록 하지.” 오늘 진행할 두 가지 사항을 모두 전달한 카로스만이 새하얀 기류에 휩싸여 사라지자 다른 세 명의 노인도 카로스만과 마찬가지인 모습을 보이며 사라졌다. 그리고 세 명의 중년인은 품에서 꺼낸 스크롤을 찢으니, 그들 또한 새하얀 기류에 휩싸여 사라졌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엘을 향한 날카로운 비수가 그를 겨누고 있었다. 암행을 나선 레도프 국왕은 말을 타고 왕궁 주변을 벗어나고 있었다. 그런 그의 곁을 최상급 소드 마스터로 알려진 라이어스 공작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이십 명의 근위기사가 철저하게 호위를 하고 있었다. “으음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왕궁을 벗어나면서부터 레도프 국왕은 계속해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점점 심화되는 왕권 다툼을 어떻게 종식시킨단 말인가. 톨리안 왕국이 귀족의 힘이 그렇게 센 왕국은 아니지만 국왕이 모든 귀족들을 찍어 누를 만한 힘 또한 없었다. 귀족들의 힘이 모두 두 왕자에게 집중되었으니 레도프 국왕으로서는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런 레도프 국왕의 곁으로 라이어스 공작이 다가왔다. 선대 국왕의 동생인 그는 순수한 실력으로 공작의 작위를 차지한 진정한 검사였다. “국왕 전하, 힘을 내십시오.” 레도프 국왕이 라이어스 공작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 미소는 너무나 피곤해 보이는 미소였다. “후! 고맙습니다, 숙부님. 하지만 힘이 드는군요. 제가 현명하게 처신하지 못하여 왕국이 점점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게 아닌지 두렵습니다.” 그 말에 라이어스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전하. 비가 오고 땅이 굳는 것처럼 지금의 다툼도 나중에는 왕국의 미래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선 전하께서 신경 써야 할 일은 왕가에 숨겨진 힘을 활용 하여 최소한의 충돌과 최소한의 피해로 유드미온 왕자 전하를 왕세자로 책봉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렵군요. 귀족들이 모두 맥셀과 크란을 지지하고 있으니... 자기들은 모르고 있지만 저는 그 아이들의 성격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왕의 재질이 아니에요.” 레도프 국왕의 어조에는 진한 근심이 담겨 있었다. 맥셀 왕자와 크란 왕자가 몰래 일을 저지르고 다닌다고 하여 어찌 레도프 국왕이 그걸 모르겠는가. 맥셀 왕자는 그 성격이 포악하다.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고 모든 것이 제 것인 양 행동하는 것은 결코 왕자에게 어울리는 행동이 아니다. 크란 왕자도 맥셀 왕자와 비슷하다. 단지 그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자신의 교활함과 잔인함을 감추고 있을 뿐이다. 두 왕자 모두 왕의 재질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능력에 비해 욕심이 많았다. 그리고 외척의 세력도 강성했기에 어쩌면 왕권 다툼은 막을 수 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유드미온 왕자는 진짜 왕의 재질을 지니고 있다. 정통성도 정통성이지만 그는 다른 두 왕자와 다르게 다정다감한 성격과 사람들을 이끌 줄 아는 포용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재질을 지녔기에 레도프 국왕이 유드미온 왕자를 왕세자로 책봉하려 하는 것이다. 만약 맥셀 왕자나 크란 왕자가 왕의 재질을 지녔다면 그는 진즉에 그들 중 한 사람을 왕세자로 책봉했을 것이다. 레도프 국왕이 한숨을 내쉬며 라이어스 공작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일을 보고 술이라도 한잔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 왜 그러십니까?” 슬쩍 라이어스 공작을 바라보니, 그는 잔뜩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모두 경계심을 끌어 올려라.” 그가 조용히 손을 위로 치켜들었다. 그러자 변복한 기사들이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은 채 언제라도 검을 뽑을 수 있는 자세를 취했다. 기사들이 모두 경계 태세를 취하자 라이어스 공작이 레도프 국왕을 보며 말했다. “전하, 알 수 없지만 적의를 품은 이들이 지금 이곳을 포위하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레도프 국왕이 놀란 표정을 짓자 라이어스 공작이 잔뜩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것도 보통 수준이 아닙니다. 아마 전하의 암행이 누군가로부터 흘러 나간 것 같습니다.” 레도프 국왕의 얼굴도 잔뜩 굳어 갈 때, 그들을 포위한 이들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빛마저 흡수하는 듯한 검은색 갑옷에 검은색 투구를 눌러쓴 이들이었다. 라이어스 공작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매서운 눈으로 전방을 훑으며 외쳤다. “너희들은 누구냐? 왜 우리의 앞을 가로막는 거지?” 이곳은 사람이 머물지 않는 지대다. 덕분에 습격을 받기에 최적의 장소였던 셈이다. 라이어스 공작의 물음은 적들이 의도적으로 이곳에서 자신들을 기다렸나 확인하려는 질문이었던 것이다. “그대가 라이어스 공작?” 선두에 선 검은색 일색의 기사가 묻자 라이어스 공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들이 자신들임을 알고 접근했다는 걸 확인한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당당하게 나가는 것이 좋다. 자신감이라는 것이 사기에 큰 영향을 미치니 말이다. 라이어스 공작은 가슴을 쭉 폈다. 그리고 전신에 기세를 피워 올리며 당당하게 말했다. “맞다, 내가 바로 라이어스 공작이다.” “그럼 옆에 있는 자는 레도프 국왕이 분명하겠군.” 기사의 말에 라이어스 공작이 소리쳤다. “놈! 무례하다!” 하지만 기사는 그런 라이어스 공작의 외침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도리어 검을 뽑더니, 오러를 끌어 올렸다. 쓰쓰쓰! 특유의 음향과 함께 솟아나는 오러 블레이드! 그것을 본 라이어스 공작이 놀랄 때, 기사의 음성이 들려왔다. “무례하고 안 하고는 우리에게 상관이 없다. 우리는 그저 목적을 이루기만 하면 될 뿐......” “너 희들의 목적은?” 그에 기사의 무심한 어조로 말이 튀어나왔다. “너희들의 말살!” 그와 함께 그의 곁에 선 두 기사의 검에서도 오러 블레이드가 뿜어지며 라이어스 공작에게 달려들었다. 그걸 시작으로 그들이 데려온 50여 명의 기사들도 일제히 오러를 뿜어내며 달려들었다. 왕궁과 멀지 않은 곳에서 짙은 혈향이 풍기는 혈전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순식간에 소드 마스터 세 명을 상대하게 된 라이어스 공작은 연신 밀리기 시작했고, 50여 명의 소드 익스퍼트를 맞아 근위기사들도 힘겨운 혈전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그때, 검을 뽑아 흑기사들을 상대하려는 모습을 보이던 기사 한 명이 갑자기 자신의 동료들을 공격하였다. 소드 익스퍼트에 든 기사는 갑자기 공격하는 이의 검을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지만 부상을 피하지는 못했다. 기사는 피가 솟구치는 팔을 부여잡으며 자신을 공격한 기사에게 소리쳤다. “뭐냐! 리더벨!” 그러자 검을 휘두른 기사, 리더벨이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흐흐! 뭐긴 뭐란 말이냐. 애초에 적이었으니 이러는 것뿐이다.” 그와 함께 검을 뽑아 들고 달려들자 부상을 입은 기사는 입을 악다물고는 검에 오러를 뿜어내며 검을 휘둘렀다. 창창창! 순식간에 20여 합이 지나고, 근처에 있던 근위기사가 부상 입은 기사를 돕자 리더벨은 하는 수 없이 뒤로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하나라도 줄이려 했는데 실패했군.” 그는 물러나면서 레도프 국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히죽 웃음을 지어 보였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전하. 전하의 목은 제가 친히 베어 드릴 테니까요.” “감히...... 감히 네가 나를 배신하다니.” 레도프 국왕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배신당한 것에 대한 울분이 전신을 휘감았다. 울분이 가득 담긴 레도프 국왕의 어조에 리더벨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뭐, 세상은 배신에 배신으로 이어지는 연속 아니겠습니까? 애초에 저는 충성심으로 톨리안 왕국에 투신한 것이 아니니 그리 분해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뒤로 물러나니, 흑기사들이 전진하기 시작했다. 잠시 중지되었던 혈전이 다시 벌어지기 시작했다. 리더벨은 그런 흑기사들에 섞여 근위기사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숫자에서 열세였는데 리더벨마저 배신하자 근위기사들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때문에 그들은 속수무책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혈전 속에서 레도프 국왕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원망했다. “아아...... 신이시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그의 외침이 혈전 속에 아릿하게 번져 나갔다. 엘 일행은 톨리안 왕국의 수도인 베르디스에 도착한 상태였다. 매직 캡처의 내용을 가지고 있었던 탓인지 아인하트 후작가는 엘을 쫓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워프 게이트를 통해 손쉽게 톨리안 왕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흐음...... 어떻게 해야 톨리안 국왕을 만날 수 있을 까?” 베르디스에 위치한 여관에 자리를 잡은 엘은 어떻게 톨리안 국왕을 만날까 그 방법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었다. 제일 간단한 방법으로는 직접 찾아가서 만나는 것이다. 7클래스 마법사인 엘이 자국에 마탑을 세우고 싶다고 하면 톨리안 국왕은 맨발로 나와 환영하면서 엘을 받아들이라 할 것이다. “이건 좋지 않지. 죄를 지은 건 아니지만 내 등장을 요란스럽게 하면 자칫 아인하트 후작가나 블리어드 제국에서 방해가 들어올 수 있어.” 그것은 엘이 원하는 것이 아니다. 요란스러운 것은 엘의 취향에도 맞지 않거니와 당장 상대할 적이 거대한데 자신의 모습을 노출시키면 좋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엘이 원하는 것은 최대한 조용히 톨리안 국왕을 만나는 것!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몇 가지 사항을 국왕에게 승인받고 곧장 트롤 벨리로 향하여 마탑을 세우는 것이 엘이 가장 원하는 전개다. 그러려면 톨리안 국왕을 자연스럽게, 그리고 은밀히 만나야 하는데 그 방법이 마땅한 게 없던 것이다. 왕궁을 무단 침입해서 만나는 방법도 있지만 그렇게 하다가는 첫 이미지가 안 좋게 기억될 수도 있다. “어떻게 한다......” 엘이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었을 때 그의 감각에 엄청난 힘의 파장이 걸렸다. 최소 소드 마스터 이상의 사람들이 힘을 분출하고 있던 것이다. 엘이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건 뭐야?” 자리에서 일어난 엘은 황급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어디서 이런 힘의 파장이 흘러나오는지 파악하기 시작했다. 아인하트 후작가가 뒤쫓지 않지만 엘은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래서 베르디스에 도착한 즉시 수도 곳곳에 강자들의 기척을 알아차릴 수 있는 감지 마법을 펼쳐 왔다. 왕궁에는 대마법진이 있어 불가능했지만 수도에 엘 보다 뛰어난 마법사가 없었기에 충분히 감지 마법을 펼칠 수 있었다. ‘북쪽!’ 잠시 정신 집중을 한 엘이 어디서 충돌이 일어났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힘의 충돌이 일어난 곳은 엘이 머물고 있는 여관에서 북쪽에 위치한 곳이었다. 엘이 기억하기로 그곳은 인적이 없고 넓은 부지가 펼쳐져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왕궁과 가까운 곳이기도 했다. 그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다!’ 그때, 실피르가 엘의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엘리!” “엄마도 느끼셨죠? 방금 전 힘의 파장을......” 베르디스에 감지 마법을 설치한 것은 엘과 실피르였다. 두 사람이 같이 마법을 설치했으니 힘의 파장도 두 사람이 모두 느낀 것이다. “......” 잠시 두 사람 간에 침묵이 감돌았다. 그 침묵을 깬 것은 엘이었다. 엘은 실피르를 향해 말했다. “제가 나가 볼게요.” “하지만......” 걱정스러운 실피르의 얼굴에 엘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지켜보고 올게요. 위험은 무릅쓰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실피르는 엘의 말을 승낙하는 수밖에 없었다. 저렇게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엘의 내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숨겨져 있으니까. 그리고 7클래스에 이른 마법사니까...... 애초에 걱정할 필요가 없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피르는 그런 엘의 모습에 못내 걱정스러웠다. 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엘이 어린아이이고 돌봐 줘야 할 대상이었기에...... 그러나 그것은 그것이고 인정할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엘은 대륙에 백 명이 조금 넘는 7클래스 마법사다. 그를 해할 수 있는 존재는 8클래스 마법사와 그랜드 마스터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녀오렴. 대신 위험한 일이면 나서면 안 돼.” 결국 떨어진 승낙. 엘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실피르의 볼에 입맞춤을 하며 말했다. “안심하세요. 제 목숨은 엄마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챙기거든요. 그럼......” 그 말과 함께 방을 나서는 엘. 그의 됫모습을 바라보는 실피르가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엘이 입을 맞춘 볼을 쓰다듬으며 실피르는 흐뭇함과 서운함이 담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우리 아들 다 컸네? 여자 대하는 법도 알고...... 이러다 나중에 여자가 꼬이는 거 아닌지 몰라?” 그러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는 실피르였다. “후욱!” 파바박! 헤이스트 중첩 마법을 스스로에게 건 엘의 몸이 바람처럼 빠르게 쏘아졌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건물들을 보며 엘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정리해 보기 시작했다. “일단 왕궁 근처니까 왕궁에 관련된 인물일 텐데...... 왕권 다툼이 심화면서 벌어지는 대결인가?” 그렇게 생각해 보지만 결론은 내려지지 않았다. 톨리안 왕국의 공식 소드 마스터는 열다섯 명이다. 하지만 항상 국경을 지키느라 영지에 얽매인 소드 마스터 귀족이 다섯 명이었고, 몬스터 랜드 쪽에 한 명의 소드 마스터가 있다. 남은 건 아홉 명의 소드 마스터인데 그들 대부분이 작위를 가지고 있는 귀족이라 이런 곳에서 싸울 이유가 없다. 결론은 다시 원점. 알아낸 것이 하나도 없다. “뭐, 직접 보면 알겠지.” 감지 마법에 느껴지는 걸 보아 얼마 남지 않았다. 일단 숨어서 지켜볼 생각이었기에 엘은 마법을 시전했다. 투명화 마법이었다. “인비저빌리티(Invisibility).” 그와 함에 빠르게 쏘아지는 엘의 몸이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은 언덕 하나에 올라서자 넓은 평지가 엘의 눈에 들어왔다. “이건......” 평지에 펼쳐진 광경을 본 엘이 말끝을 흐렸다. 그곳에는 피 튀기는 혈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숫자가 압도적인 검은색 갑옷의 기사들의 시체가 십여 구 어지럽게 쓰러져 있었고, 아직 쓰러지지 않았지만 순백의 갑옷을 입은 기사들은 전신에 피 칠을 한 채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리고 한쪽에는 중년 기사가 세 명의 흑기사들을 상대로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그들의 검에 서린 오러 블레이드를 보아 모두 소드 마스터로 보였다. 잘 버티고 있지만 중년 기사가 차츰 밀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 혈전이 벌어지는 곳 조금 떨어진 곳에 한 중년인이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변복을 했지만 숨길 수 없는 위엄과 고귀함. 불안함이 배어 있지만 결코 두려움이 없는 당당함이 느껴지는 눈빛. 중년인의 얼굴은 엘에게 매우 낯익게 다가왔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엘. 이내 중년인이 누군지 떠올릴 수 있었다. “톨리안 국왕!” 바로 그였다! 엘이 그토록 만날 방법을 강구하던 톨리안 국왕이 지금 혈전의 중앙에 서 있는 것이다! 엘은 곧장 생각을 정했다 검은색 갑옷을 입고 나타난 흑기사들이 분명 나쁜 쪽이었다. 이런 밤에 저런 검은 갑옷이 어둠과 동화되어 보다 행동을 자유롭게 해 주기 때문이다. 올바른 일을 하는데 저런 칙칙한 갑옷을 입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투명화마법이 풀렸다. 엘의 모습이 드러났다. 엘은 아공간을 열어 안경을 썼다. 그러자 익숙한 느낌과 함께 집중력이 더욱 올라가는 느낌이 들었다. 순간 바람이 불어오며 엘의 머리를 휩쓸었다. 금발이 어지럽게 흩날리며 엘의 마법이 시전되었다. 상대방의 전의를 상실케 하는 5클래스 마법, 사운드 포스(Sound Force)가 시전된 것이다. “모두 멈춰라!” 엘의 음성이 장내를 휩쓸었다. 엘의 마법에 영향을 받은 이들이 몸을 일순간 움찔했다.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엘을 향했다. 언덕 위에 선 엘이 그들을 오연한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엘의 시선이 톨리안 국왕에게 향했다. 레포드 국왕도 엘을 바라보다 일순간 그들의 시선이 마주쳤다. 엘이 레포드 국왕을 향해 싱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검은색 갑옷을 입은 흑기사들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들은 갑작스런 엘의 등장에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었다. 엘이 흑기사들을 향해 미소를 날렸다. 그리고 표정과 다르게 스산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떳떳한 일은 아니겠지. 왜냐하면 내가 저분의 얼굴을 알고 있거든. 당신들, 오늘 살아 돌아갈 생각은 하지 마.” 그와 함께 엘의 뒤에서 은은한 금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동시에 공간의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키이잉! 키이잉! 듣기 싫은 공간의 균열음과 함께 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의 앞을 가로막는 이에게 오로지 절망만을...... 그리고 모든 것을 파괴하라! 골든 나이트!” 파아앗! 치이잉! 치이잉! 금색 광채가 폭발하듯 뿜어지며 공간의 균열로 골든 나이트가 등장했다. 그 모습에 순간 모든 사람들이 홀린 듯한 시선을 하고 있었다. 엘이 흑기사들을 향해 다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에게 기회를 만들어 준 건 고맙지만 여기서 죽어 줘야겠어.” 엘의 신형이 떠오르고 골든 나이트는 골든 소드를 뽑아 흑기사들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6 국왕과의 협상 먼저 달려든 것은 골든 나이트였다. 3m에 달하는 큰 덩치에 걸맞지 않는 빠른 몸놀림을 보이며 골든 나이트는 오러가 서린 골든 소드를 그대로 휘둘렀다. 후웅! 묵직한 골든 소드가 일으키는 검풍과 오러가 강렬한 힘을 내포한 채 흑기사들을 쓸어 갔다. “마, 막아!” 누군가가 그렇게 외치자, 흑기사들은 검에 오러를 생성하여 골든 소드를 막으려 하였다. 하지만 골든 나이트가 생성한 오러는 일반 기사들이 막아낼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위력도 위력이거니와 육중한 골든 소드가 자체적으로 일으키는 검풍은 어마어마한 힘을 지니고 있다. 그 위력은 이미 아인하트 후작가에서 증명한 바 있다. 오러를 일으킨 흑기사의 검이 골든 소드와 충돌하였다. 두 개의 검이 충돌하자 충만한 오러를 머금은 흑기사의 검이 그대로 동강 나며 부서졌다. 그리고 그 기세를 몰아 골든 소드는 오러를 머금은 채 그대로 흑기사의 몸을 강타했다. 3m 거구인 골든 나이트가 체중을 실어 육중한 골든 소드를 최대한 휘두른 걸 맞고 무사할 리 없다. 뻐어억! 골든 소드에 적중된 흑기사의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그러자 골든 소드에 적중당한 흑기사 또한 뼈와 살이 분리되는 듯한 엄청난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끄아악!” 콰앙! 그런 흑기사를 골든 나이트가 다리를 들어 그대로 밟아 버렸다. 그대로 압사 당한 흑기사. 아니, 숨이 붙어 있기는 한지 간헐적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잔인하게 보일 정도로 깔끔한 마무리를 한 골든 나이트가 골든 소드에 오러를 한층 더 강하게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다섯 명의 기사에게 골든 소드를 휘둘렀다. 후웅! 검을 휘두르자 일어나는 오러 폭풍! 오러를 머금은 검으로 달려오던 흑기사들은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뭐냐, 이건!” 방금 전 동료 한 명이 처참하게 박살나는 모습을 보았기에 그들은 신중하게 행동했다. 정면 대결로는 무리다! 하지만 자신들은 정면 대결이 아닌 합공에도 능숙하다! 지금 시전된 오러 폭풍도 혼자서는 무리지만 힘을 합치면 충분히 막아 낼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 흑기사들은 능숙한 몸놀림으로 오러를 머금은 검을 휘둘렀다. 그러한 그들의 행동도 철저한 오산이었다. 아인하트 후작가에서 그들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 다섯 명의 기사들도 저 오러에 휘말리지 않았던가! 애초에 저것은 소드 마스터 이상이 아니면 막아 낼 수 없는 공격이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흑기사가 검을 휘두르며 오러 폭풍을 쳐 내려 했지만 그것마저도 그대로 휩쓸려 버렸다. 그게 한 명 이 아니라 모든 흑기사였다. “커, 커헉!” 오러 폭풍에 휘말린 흑기사들은 내부가 그대로 뒤집혀 어마어마한 내상을 입고 바닥에 쓰러졌다. 다섯 명의 기사들을 손쉽게 쓰러뜨린 골든 나이트가 재차 흑기사들에게 다가가려 하자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던 우두머리가 검에 오러 블레이드를 생성하며 외쳤다. “이 괴물은 내가 앞장서서 상대하겠다. 너희들은 모두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접근하라!” 그리고는 오러 블레이드를 휘두르며 골든 나이트를 향해 맹렬하게 돌진하였다. 그의 양옆에는 시종일관 라이어스 공작을 몰아붙이던 두 명의 소드 마스터도 함께하고 있었다. 세 명의 소드 마스터가 압박해 오자 골든 나이트의 골든 소드에서도 찬연한 오러 블레이드가 솟구쳤다. 쓰! 쓰! 쓰! 남들보다 더욱 거대한 오러 블레이드를 생성한 골든 나이트! 콰콰콰콰-! 그와 함께 무시무시한 기세를 피워 올리며 달려들었다. 상관의 명령을 받은 흑기사들은 골든 나이트에게서 거리를 유지한 채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었다. 이미 골든 나이트의 힘을 보았기에 그들은 밀집 진영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골든 나이트의 힘은 그들 개개인이 막을 수 있는 성질이 아님을 여섯 명의 기사의 희생으로 제대로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정면 대결을 고집하는 기사들의 특성을 엘이 제대로 꿰뚫은 것이다. 전생에 그가 왜 악신으로 불렸던가! 상대의 심리를 철저하게 예측하고 그걸 철저하게 이용하여 상대를 철저하게 부숴 버렸기 때문이 아니던가! 기사들의 특성을 파악하고, 힘이 부족하면 그들이 어떻게 행동할지를 모두 예측하고 있는 엘의 예상대로 상황이 진행되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허공 위에서 마법 아이템에 의해 공중에 떠 있는 엘의 눈에 생생하게 보이고 있었다. 기사들이 모두 골든 나이트에게 집중하느라 자신 주변에 움직이고 있는 마나의 흐름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엘은 빠르게 캐스팅을 마칠 수 있었다. 엘의 주변에 무시무시한 마나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마나 호응에 극에 달하여 마나를 느끼지 못하는 일반인도 마나의 존재를 느낄 수 있을 만큼 엘의 주변에는 농밀한 마나가 밀집되어 있었다. 캐스팅을 마친 엘의 양손이 천천히 들렸다. 희미한 금빛이 아지랑이처럼 엘의 손을 휘감고 있었다. 천천히 들린 엘의 양팔이 쭉 뻗어졌을 때, 엘이 마법을 시전했다. “퓨리 오브 더 헤븐(Fury o# The Heaven)!” 위이이잉! 새하얀 기둥이 하늘에서 지름 lOrn가 넘는 원기둥은 그대로 하강하여 흑기사들이 밀집한 곳에 안착했다. “이, 이건!”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온 원기둥에 의아한 표정을 짓는 흑기사들. 그러나 이내 한 기사의 외침으로 그들은 혼비백산한 표정을 지었다. “이, 이건! 마법이야! 어서 피해!” 하지만 피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엘이 시전한 퓨리 오브 더 헤븐은 원기둥뿐만 아니라 그 주변의 모든 것마저 모조리 태워 버리는 7클래스 뇌전계 마법이었기 때문이다. 기사의 외침과 동시에 어마어마한 양의 금빛 뇌전이 하늘에서 번쩍거리며 지면을 향해 쏘아졌다. 가히 빛의 속도라 할 수 있는 강력한 뇌전은 그대로 원기둥에 서 있는 흑기사들을 강타했다. 꽈르르르르릉! 천국의 분노라 불리는 퓨리 오브 더 헤븐. 평소 온화하지만 분노했을 때는 그 누구보다 무서운 것처럼 어마어마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뇌전계 마법이라 기사들이 착용하고 있는 금속 갑옷에 연이어 타격을 주고 있었다. 꽈르르릉! 꽈르릉! 마법은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계속해서 상대를 완전히 태워 버릴 때까지 뇌전은 지면을 향해 끊임없이 쏟아졌다. 원기둥은 금빛 뇌전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안의 광경은 어떤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정도로 뇌전의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파직! 파지직! 마법이 끝났다. 그럼에도 그 여파는 상당하여 금빛 뇌전이 혀를 날름거리며 스파크를 일으키고 있었다. 잔해가 걷히면서 원기둥이 위치했던 곳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골든 나이트를 상대하려던 세 명의 흑기사들도 접근을 멈추고 그곳을 돌아보았다. 이윽고 잔해가 완전히 걷히고, 그 광경이 드러났다. 드러난 부하들의 모습에 흑기사수장은 탄성을 내질렀다. “이럴 수가! 흑기사들이 전멸하다니......” 그의 옆에 선 두 흑기사도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30명이 넘는 소드 익스퍼트 기사! 그들이 마법 한 방에 전멸한 것이다. 장내는 다시 한 번 침묵에 잠겼다. 놀란 것은 레도프 국왕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나타난 어린 용모의 마법사와 황금색 골렘. 근위기사들을 끈질기게 괴롭히고 시종일관 몰아치던 흑기사들이 황금색 골렘의 검에 너무나 손쉽게 튕겨 나갔다. 그러다 흑기사들의 우두머리가 나섰다. 톨리안 왕국 최고 기사인 라이어스 공작을 몰아붙이던 세 명의 소드 마스터가 모두 말이다. 그리고 살아남은 30여 명의 흑기사들이 밀집 대형으로 골렘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까마득한 허공에 떠 있던 마법사가 마법을 시전했다. 신탁이 내려오는 듯한 원기둥. 그 원기둥을 향해 내리치는 뇌전! 레도프 국왕은 그 마법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동안 왕국 내에서 고위 마법사를 모시고자 했지만 그 의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 전 어렵사리 회유하는 데 성공한 마법사는 6클래스 마법사였다. 그 당시 6클래스 마법사가 펼친 마법을 본 적이 있는 레도프 국왕은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마법에 그만 넋을 잃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시전되는 마법은 대륙에 100여 명 밖에 존재하지 않는 7클래스 마법사만이 시전할 수 있는 7클래스 마법이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 이 마법이 7클래스 마스터만이 펼칠 수 있는 마법이란 건 레도프 국왕에게 중요치 않았다. 누가 말을 해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펼쳐진 이 마법은 7클래스 마법이라는걸! 그리고 레도프 국왕 본인에게 지금 인생의 또 다른 구심점이 될 기회가 찾아왔다는 걸! 레도프 국왕의 시선이 허공에서 서서히 하강하는 마법사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마법사의 모습이 드러나자 레도프 국왕은 경악했다. 그의 눈에 들어오는 마법사는 채 스무 살도 되어 보이지 않는 어린 나이였기 때문이다. “저렇게 젊다니...... 설마 외모를 젊게 한 건가?” 그 순간, 레도프 국왕의 뇌리에 스치는 한 가지 소문이 있었다. 블리어드 제국에 한 소년 마법사가 나타났다. 소년 마법사는 압도적인 마법 실력으로 7클래스 마법사들 중 최강이라 불리는 아인하트 후작과 그의 아들 글레톤을 손쉽게 꺾었으며, 그가 데리고 다니는 나이트 골렘은 제국 최고의 검사인 클라이언 공작과 호각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 소문이 너무 허황되고 믿기지 않는 내용들이라 거짓이라 치부했다. 어찌 안 그러하겠는가? 통상적인 계산으로 7클래스 마법사가 아무리 강하다고 하여도 두 명의 7클래스 마법사를 압도하기 힘들다. 만약 7클래스 마스터가 두 명의 7클래스 익스퍼트와 호각을 이루었다면 모를까 상대 중 한 사람은 7클래스 마스터에 든 지 수십 년이 넘은 아인하트 후작이었다. 게다가 아인하트 후작가의 비전으로 7클래스 마스터와 겨뤄도 지지 않는 글레톤을 함께 상대하고도 이길 수 있다니? 그것은 8클래스 마법사가 아니고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헛된 소문이라 치부했는데 지금 이곳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저 소년 마법사가 과연 소문대로의 실력을 지니고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저 황금 골렘, 아까 전 보인 신위는 그 소문의 일부분이 사실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 그 압도적인 강함은 레도프 국왕에게 믿음을 심어 주고 있었다. 레도프 국왕의 얼굴에 흥분감이 서렸다. 그리고 느낄 수 있었다. 이 기회는 자신의 인생에 구심점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아니라 이 나라의 미래를 결정지을 수 있는 미래라는 것을. “응?” 허공에서 내려오던 엘은 톨리안 국왕이 자신을 보고 놀라는 모습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잠시, 자신이 시전한 7클래스 마법으로 톨리안 국왕이 자신의 경지를 알았다는 것에 웃음을 흘렸다. “그렇지. 7클래스 마법사로 보기에는 내가 좀 어리지.” 톨리안 국왕에게서 시선을 거둔 엘은 마법이 작렬한 곳을 향해 슬쩍 시선을 옮겼다. 그곳은 그야말로 죽음의 대지였다. 강렬한 뇌전이 연이어 강타를 한 탓인지 지면이 검게 타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갑옷과 살을 구분할 수 없게 된 30여 구의 시체가 있었다. 아니, 재빨리 몸을 날렸던 다섯 명 정도는 꿈틀거리며 자기가 살아 있다는 걸 알리고 있었다. 하지만 부상의 정도로 보아 중상이 분명했다. 엘은 시선을 골든 나이트 쪽으로 옮겼다. 그곳에는 유일하게 온전한 모습을 하고 있는 흑기사 세 명이 서 있었다. 소드 마스터로 보이는 세 명의 흑기사를 보며 엘이 골든 나이트에게 외쳤다. 이참에 자신과 골든 나이트의 조합을 시험해 볼 참이었다. “타나! 이들을 공격하라!” 골든 나이트의 눈에 푸른 안광이 뿜어졌다. “적의. 말살.” 쓰! 쓰! 쓰! 골든 소드에서 화려한 오러 블레이드가 다시 솟구치며 흑기사들을 압박해 들어갔다. “일단 정면으로 맞서지 마라!” 오러 블레이드를 생성한 흑기사 우두머리가 외치자 다른 흑기사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골든 나이트에 맞서 나갔다. 골든 나이트가 검을 휘두르는 순간, 막 몸을 틀어 피하려던 흑기사를 향해 엘이 마법을 시전했다. “홀드 퍼슨(Hold person).” 움찔! 마법에 걸린 흑기사의 몸이 순간 멈췄다. 엘의 마법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7클래스 엘과 소드 마스터인 흑기사는 엄연히 비슷한 경지라 말할 수 있다. 때문에 홀드 퍼슨이 제대로 먹히지 않지만 순간적인 움직임은 방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찰나의 틈은 골든 나이트에게 너무나 큰 기회로 다가왔다. 퍼억! “억!” 육중한 골든 소드가 몸을 강타하자 흑기사 중 한 사람이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대로 튕겨 나갔다. 오러 블레이드가 서린 검을 들고 있어 베이지는 않았지만 골든 소드에 서린 오러 블레이드는 예기보다는 둔기에 가까웠다. 한 명의 흑기사를 처리한 골든 나이트가 다른 흑기사에게 달려들었다. 이미 자신의 동료가 어떻게 당했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에 흑기사는 전신의 오러를 끌어 올려 항마력을 극도로 끌어 올리며 골든 나이트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같은 수법을 두 번이나 사용할 만큼 어수룩한 엘도 아니었다. 골든 나이트를 향해 맞서 가는 흑기사에게 엘은 마법을 시전했다. “웹(Web)!” 신체가 아닌 외부에다가 시전하는 웹은 아무런 저항 없이 흑기사에게 시전되었다. 그리고 마법의 거미줄은 그대로 흑기사를 꽁꽁 묶었다. “이익!” 자신을 옭아맨 웹을 풀어 버리기 위해 오러를 뿜어내는 흑기사. 간단하게 웹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지만 웹을 푼 그의 눈앞에 보인 것인 황금빛 골든 소드였다. 그것은 인정사정없이 그대로 그를 후려쳤다. 퍽! 얼마나 강력한 공격이었던지 흑기사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lOrn 이상을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남은 것은 딱 한 명. 바로 오늘의 습격을 주도한 우두머리였다. 골든 나이트 또한 마지막 적이 가장 강하다는 걸 인식한 듯, 골든 소드에 서린 오러 블레이드를 더욱 강렬하게 피워 올렸다. 엘은 그런 골든 나이트를 힐끗 보고 가벼운 몸놀림으로 훌쩍 뛰어올라 골든 나이트의 어깨에 올라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그에게 권유하듯 말했다. “이만 항복하지? 이쯤 되면 이길 수 없는 것 정도는 알 거 아냐?” 하지만 흑기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입을 꾸욱 다물더니, 이내 무언가 결심한 듯 엘을 향해 말했다. “비록 상황이 불리해졌다고 하여 포기하지 않는다. 받아라!" 순간 빠른 몸놀림으로 기습하듯 엘에게 달려드는 흑기사. 하지만 일반 마법사와 달리 엘은 기사와 비견될 정도로 뛰어난 반사 신경과 체력을 지니고 있다. 특히 매직 아이가 걸린 안경을 쓰고 있는 엘은 흑기사의 움직임을 생생히 볼 수 있었다. “어리석은!” 엘의 표정이 냉혹하게 변했다. 그리고 왼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자 수십 수백 개의 매직 애로우가 순식간에 시전되었다. 엘은 쭉 뻗은 손을 그대로 흑기사에게 가리키며 외쳤다. “가라!” 피비비비빙! 수백 개의 마법 화살이 일제히 흑기사에게 쏘아졌다. 2클래스 마법이라지만 엘 특유의 마나 호응으로 기존의 매직 애로우보다 반 배는 더 강하다. 거기에 끊임없이 쏘아지는 연사력으로 3클래스 마법이 난사되는 것과 같다. 엘에게 달려들던 흑기사는 수백 개의 마법이 자신을 향해 쏘아지자 오러 블레이드를 머금은 검을 그대로 휘둘렀다. 팍! 파박! 팍! 아무리 강화된 마법이라고 해도 오러 블레이드와 충돌하자 그대로 부서져 나갔다. 하지만 엘의 마법은 많고, 계속 생겨나고 있었다. 막아도 막아도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 틈을 놓칠 골든 나이트가 아니다. 어느새 엘이 허공 위로 올라가자 골든 나이트가 그대로 흑기사에게 달려든 것이다. 후웅! 눈부신 오러 블레이드를 머금은 골든 소드가 휘둘러졌다. 그러자 흑기사는 검을 휘둘러 그것을 막으려 했지만 상급 소드 마스터조차 한 방에 날려 버린 골든 소드를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카강! 우선 검이 부러졌다. 오러 블레이드를 머금고 있는 검이 허무하리만치 쉽게 부러진 것이다. 골든 소드가 부러진 검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그리고 날카로운 예기가 폭발적으로 뿜어지며 흑기사를 단숨에 베어 버렸다. 서걱! “......!” 순식간에 몸이 두 동강 난 흑기사. 그는 놀란 눈으로 뭐라 입을 열려 했지만 이미 그의 목숨은 육체를 떠난 뒤였다. 파바바바박! 엘의 매직 애로우가 죽어 버린 흑기사의 몸을 난자하였다. 사람 몸인지 다져진 고깃덩어리인지 분간이 안 가는 흑기사의 몸은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던 엘은 냉혹하던 표정을 풀고 본래의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한쪽에서 넋이 나간 듯 자신을 바라보는 레도프 국왕에게 말을 건넸다. “포로가 필요하겠지요?” “......그, 그렇습니다.” 엘과 골든 나이트의 신위에 완전히 압도된 레도프 국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레도프 국왕의 대답을 들은 엘은 퓨리 오브 더 헤븐에서 살아남은 몇몇 흑기사들에게 힐링을 시전하였다. 중상이지만 이렇게 치료 마법을 시전하면 병신이 될지언정 죽지는 않을 것이다. “......” 반면 엘과 한쪽에 서 있는 골든 나이트를 바라보는 톨리안 왕국 사람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왕국 최고의 기사인 라이어스 공작과 근위기사 스무 명이 고전하던 이들을 엘은 마치 가벼운 운동을 하는 것처럼 그대로 전멸시켜 버린 것이다. 삼십 명의 소드 익스퍼트를 순식간에 전멸시킨 엘의 신위! 그리고 소드 마스터 세 명을 가볍게 압도한 황금 골렘! 특히 골든 나이트를 바라보는 라이어스 공작의 심정은 복잡했다. 그의 힘으로 도저히 골든 나이트의 힘을 측정할 수 없던 것이다. 이것은 단 하나의 사실만을 뜻한다. ‘최소한 나보다 한 단계 이상 강하다!’ 톨리안 왕국 제일 기사로서 최상급 소드 마스터에 오른 이가 바로 라이어스 공작이다. 그런 그보다 한 단계 이상 강하다는 건 한 가지를 뜻한다. ‘그랜드 마스터!’ 그렇다! 저 골든 나이트는 라이어스 공작이 감히 상대할 수 없는, 그랜드 마스터에 달하는 힘을 지니고 있던 것이다. 경악이었다! 일개 골렘이 그랜드 마스터에 달하는 실력을 지녔다니! 톨리안 국왕의 최측근으로서 그 또한 블리어드 제국 아인하트 후작가에서 일어난 일을 잘 알고 있다. 스무 살도 안 된 7클래스 마법사와 그랜드 마스터와 자웅을 겨룰 수 있는 나이트 골렘이라니? 그 또한 톨리안 국왕과 함께 그 사실을 거짓으로 치부했다. 하지만 오늘 확인했다. 그 소문은 진실이라는 것을. 아니, 어쩌면 소문보다 더 대단한 힘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라이어스 공작의 뇌리를 강하게 자극했다. ‘놓치면 안 된다! 이 마법사를 끌어들인다면 왕권 다툼은 단숨에 끝낼 수 있어!’ 톨리안 국왕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로서는 엘의 존재가 이번 왕권 다툼 최대의 변수가 될 수 있다는 걸 느꼈다. 그것은 레도프 국왕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의 머릿속은 지금 왕권 다툼보다 왕국의 오랜 숙원이었던 7클래스 마법사를 보유할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 닥쳤다는 걸 중요시했다. 7클래스 마법사의 협력만 있다면 왕국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몬스터 랜드의 몬스터들을 소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순간 수십 가지 생각이 레도프 국왕의 뇌리에 교차했다. 그 생각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절대 명제는 하나였다. ‘반드시 붙잡아야 한다!’ 고민은 잠시, 찰나의 머뭇거림이 인생에 다가온 가장 큰 기회를 놓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레도프 국왕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오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상대는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소년이다. 마법으로 외모를 젊게 한 게 아닌가 싶었지만 특별한 마나 반응이 느껴지지도 않았고, 노인이 젊은 외모를 하고 있는 이질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레도프 국왕은 엘에게 존대를 했다. 그것도 의도적으로 하는 것이 아닌, 진심이 깃든 어조였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대륙에서 7클래스에 든 마법사는 현자라 불리며 칭송한다. 제국의 황제마저도 7클래스 마법사에게는 함부로 하대를 하지 못한다. 물론 여기서 쓰이는 현자의 의미는 변질된 지 오래다. 그러나 7클래스 마법사는 일반인과는 다른 정신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어떤 형태이든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그런 정신을 지니고 있는 건 분명했다. 같은 7클래스 마법사마저도 예측하지 못하는 것이 7클래스 마법사의 생각이다. 지금은 도와줬지만 언제 적으로 돌변하여 자신을 공격할지 모르는 것이다. 7클래스 마법사는 그런 불가사의한 정신을 지닌 존재였다. 전혀 예측 불가의 7클래스 마법사였기에 레도프 국왕은 처음부터 공손하게 엘에게 말을 건넨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7클래스 마법사에게 통용되는 이야기다. 7클래스 마법사 대부분이 육십이 넘은 노인들인데, 그들은 7클래스에 오르기 위해 매일 마나를 체내에 받아들이다 보니 마나가 골수에 영향을 미쳐 그렇게 된 것이다. 본래 일반인이 그렇게 되면 미치겠지만 그나마 일반인보다 월등한 정신력을 지닌 마법사였기에 단순히 성격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만으로 그친 것이다. 하지만 엘은 다르다. 단전호흡과 지구의 수식이라는 편법(?)으로 엄청난 성취를 이룬 엘에게 그런 것은 적용되지 않는다.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를 지닌 엘은 레도프 국왕의 인사에 정중히 답했다. “아닙니다. 나쁜 목적을 가진 이들의 음모에 한 팔을 거든 것뿐인데요. 제 이름은 엘리미스, 엘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자신이 둥지를 틀 왕국의 국왕이다. 그랬기에 엘은 최대한 예의를 차려 남들에게 밝히지 않던 자신의 이름 전체를 말했다. 엘의 정중한 소개에 레도프 국왕은 엘이 정상적인 사고를 지닌(?) 마법사임을 알고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미소를 띤 얼굴로 엘에게 말을 건넸다. “그렇게 생각하신다고 해도 제 목숨을 구해 주신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엘 님에게 식사를 한번 대접해 드리고 싶습니다. 이대로 엘 님을 보내면 제 인심이 얼마나 박하게 보이겠습니까? 부디 대접할 기회를 주십시오.” 지극히 정중하고 예의 있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 숨은 내용은 엘을 끌어들이려는 의도가 환하게 보였다. 지난 수백 년 동안 몬스터 랜드에서 쏟아지는 몬스터들에게 시달린 왕국이다. 제국에 대부분 몰려 있는 7클래스 마법사를 어떻게 빼올 수도 없던 터라 어떻게 하면 7클래스 마법을 보유할 수 있을까 전전긍긍하던 차에 나타난 엘은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으음...... 어떻게 한다......” 레도프 국왕의 부탁에 엘은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본래 손쉽게 승낙하는 것보다 어렵사리 승낙해야 상대는 더 고마운 줄 알고 더 소중한지 안다. 심리전의 달인인 엘은 그러한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이러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물론 노련한 정치인인 국왕도 엘에게 밀리지 않을 심기의 소유자지만 현재 급한 쪽은 국왕이고 칼자루를 쥔 쪽은 엘이었다. 어디에서나 환영받을 수 있는 존재가 7클래스 마법사이고 그들을 필사적으로 자국에 소속시키려는 이들이 국가의 국왕이었기 때문이다. 엘의 내심을 알 리 없는 레도프 국왕은 고민하는 척하는 엘의 모습에 더욱 애가 달았다. 결국 레도프 국왕에게서 애절한 부탁 조의 어조가 흘러 나왔다. “꼭 한번 대접하게 해 주십시오. 제가 부탁드리겠습니다.” ‘훗!’ 속으로 승리의 미소를 짓는 엘. 레도프 국왕이 이런 반응을 보이길 기다린 것이다. 그에 잠시 뜸을 들이던 엘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국왕 전하의 청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면서 어지러운 주변 환경을 한번 훑었다. 새까맣게 타서 죽은 오십여 구의 시체와 살아남은 다섯 명의 흑기사가 애처롭게 몸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오늘은 힘들 것 같군요. 국왕 전하께서도 이들을 처리해야 할 것 같고요. 삼 일 후, 제가 왕궁으로 조용히 찾아 뵙겠습니다. 그때 궁정 마법사께 왕궁 내 텔레포트를 돕게 해 주십시오.” 엘의 시선을 따라 주변을 둘러본 레도프 국왕은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레도프 국왕의 대답을 들은 엘의 몸이 허공 위로 두둥실 떠올랐다. 그리고 골든 나이트를 향해 외쳤다. “타나! 공간의 저편에서 대기해.” 그에 한쪽에서 조용히 서 있던 골든 나이트가 기사의 예를 취하며 말했다. “공간.저편.대기.” 그와 함께 공간의 틈이 열리며 골든 나이트의 동체가 아공간의 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엘의 몸이 서서히 허공으로 사라져 갔다. 그러면서 엘은 레도프 국왕에게 음성을 전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하하!” 그 음성에 레도프 국왕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기대를 해야지요. 그래야 우리 왕국에 있고 싶은 마음이 들 테니...... 하하!” 그렇게 웃음을 짓는 레도프 국왕의 곁으로 라이어스 공작이 다가왔다. 세 명의 소드 마스터를 상대하느라 무척 피곤해 보였지만 표정만은 밝아 보였다. “잘되어 다행입니다, 전하.” “하하! 그러게요. 마법의 명문으로 이름 높은 아인하트 후작가를 그 지경으로 만들었다면 필시 그 능력은 대단할 터. 그걸 직접 두 눈으로 봤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지요. 그리고 그렇게 당한 아인하트 후작가가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건 생각보다 능력이 더 대단할 수도 있는 겁니다. 게다가 나이가 어려 미래에 8클래스에 오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마법사와 인연의 줄을 만들었으니 기분 좋을 수밖에요.” 라이어스 공작도 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모시는 주군이 즐거워하는 모습에 덩달아 즐거워진 것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 앞으로 왕국의 큰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엘과의 인연도 한몫했다. 대마법사와의 인연은 누구도 손쉽게 볼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웃음을 짓고 있던 두 사람은 살아 있는 흑기사에게 시선이 향한 순간 비슷하게 굳은 표정이 되었다. 레도프 국왕은 응급 포션으로 상처를 치료했지만 여전히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근위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힘들겠지만 이들을 데리고 왕궁으로 간다.” “알겠습니다.” 근위기사들 중 비교적 상처가 얕은 이들이 흑기사들을 챙겼다. 살아 있는 흑기사들 틈에는 리더벨도 끼어 있었다. 한때 동료였지만 지금은 배신자인 리더벨을 차가운 눈으로 일별한 근위기사는 리더벨의 몸을 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다른 흑기사들도 비슷하게 말 위에 올려놓고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왕궁 쪽으로 말을 몰던 레도프 국왕은 시선을 힐끗 뒤로 돌렸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누군지는 몰라도 후회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맥셀...... 크란...... 부디 너희가 아니기를 빌겠다.” 레도프 국왕은 시리도록 차가운 눈을 하고 있었다. 여관으로 돌아간 엘은 실피르와 세레나, 카이나에게 자신이 본 일을 그대로 이야기했다. 엘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실피르가 염려가 담긴 어조로 말을 꺼냈다. “그러면 위험한 거 아니니? 소드 마스터 세 명과 오십 여 명의 소드 익스퍼트를 그렇게 동원할 수 있다면 분명 심상치 않은 세력일 텐데......” 그에 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그 정도 전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버리듯 하는 조직에 대해 위험을 느끼고 있었다. 엘이 실피르에게 말했다. “하지만 괜찮아요. 일단 그들이 어떤 연락도 취하지 못하게 했으니까요. 그리고 톨리안 국왕을 만나기로 했으니 국왕을 만들고 트롤 벨리에 자리를 잡으면 그 누구도 우리를 건드릴 수 없어요. 8클래스 마스터와 그랜드 마스터 여럿만 아니라면 말이죠.” 여럿이라는 말에 유독 힘을 주는 엘. 그 말은 그들 중 한 명만 온다면 충분히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이 함께 하고 있었다. 역시나, 엘의 말에 셋은 잔뜩 기대가 서린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륙 최강의 골렘을 만들겠다고 공언한 뒤 엘은 골든 나이트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 골든 나이트는 그랜드 마스터인 클라이언 공작과 겨뤄도 밀리지 않는 위용을 보였다. 엘은 허언을 하지 않는다! 그녀들은 그것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실피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를 믿고 이곳까지 왔는데 여기서 안 믿을 수는 없지. 왕국의 지원은 어떻게 얻으려 하니?” “그건 말이죠......” 엘은 살짝 미소를 지은 채 자신이 구상한 것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엘의 말에 셋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엘의 생각이 너무나 기발했기 때문이다. “정말 대단해요.” “그렇지?” 세레나가 감탄을 금치 못하고 말하자 엘은 피식 웃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제한이 있지 않을까?” 그에 엘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마침 이웃 영지가 바다를 접하고 있어서 비싸지 않은 가격으로 구해 올 수 있어요. 즉, 이거 하나만 잡으면 돈 걱정은 전혀 할 이유가 없는 거죠.” 엘의 말에 세 명은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말 엘의 생각대로라면 엄청난 돈을 앉아서 벌어들일 수 있게 되는 셈이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엘의 마지막 말로 끝맺음을 하게 되었다. “일단 국왕을 만나 협상을 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야 할 것 같아요. 전체적인 윤곽은 다 짜놨으니 이제 세세하게 수정하는 일만 남았죠.” “그래. 오늘 힘 좀 써서 힘이 들 텐데 이만 나갈게.” 그러면서 실피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세레나와 카이나는 미적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무언가 아쉬운 눈길이다. 그에 실피르의 입에서 짓궂은 미소가 걸렸다. 그녀는 세레나와 카이나를 슬쩍 보더니 농담을 던졌다. “왜 일어나지 않니? 설마 엘리하고 이대로 헤어지는 게 아쉬운 거야? 걱정 마렴. 바로 옆방이니...... 밤에 몰래 들어와 같이 자면 돼......” “그게 무슨 말이에요!” 실픽르의 엄청난 발언에 엘이 소리쳐서 그녀의 말을 끊었다. 뒷말이 무슨 말인지 생각만 해도 오한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에 실피르가 왜 그러냐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양이 눈을 떴다. 이럴 때는 영락없는 짓궂은 장난꾸러기의 모습이었다. “왜, 그러니? 엘리, 지금 네 나이가 딱 결혼하기 좋은 나이란다. 설마! 옆에 이렇게 아름다운 두 아이를 놔두고 피가 끓어오르지 않니?” “그, 그만!” 실피르의 말을 감당하지 못한 엘이 얼굴을 잔뜩 붉힌 채 소리쳤다. 세레나와 카이나도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호호!” 그런 그들의 모습에 실피르는 웃음을 지었다. 연애에 관해서 완전 꽝인 그들의 모습은 답답하기보다는 귀엽고 재미있기만 한 그녀였다. 사실 세레나와 카이나는 그 어딜 가도 손색없는 미녀였다. 블리어드 제국 제일미녀로 불리던 실피르에 견줘도 모자람이 없는 그녀들의 외모는 어딜 가도 눈에 띄는 아름다운 미녀 였다. 게다가 한창 피어나고 있는 그녀들의 미모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빛이 날 것이 분명했다. 엘 또한 실피르의 피를 물려받아 그 누구보다 잘생긴 소년이었다. 저토록 아름다운 여인들이 엘을 열렬히 사모하고 있는데 정작 피 끓는 나이의 엘은 덤덤하기만 하니 실피르는 엘의 엄마로서 엘이 제대로 된 남자인지 아닌지 확인할 의무(?)가 있었다. 기회를 잡은 실피르가 더욱 맹렬하게 엘을 몰아붙였다. “하지만 할 말은 해야 하지 않겠니? 엘리, 솔직히 말해 봐! 너 세레나와 카이나를 보면서 무언가 끓어오르지 않니? 넌 지금 그럴 나이야. 그래야만 해!” “하아!” 실피르의 추궁에 엘은 머리를 부여잡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실피르에게 천천히 또박또박 말하기 시작했다. “엄마, 저는 7클래스 마법사예요. 이성과 본능을 다스릴 줄 아는 경지에 이르렀다고요.” “웃! 그건......” 엘의 반박에 실피르는 그만 말이 막히고 말았다. 그러길 잠시, 실피르는 시무룩한 얼굴로 세레나와 카이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해, 얘들아. 내가 말재간이 부족해서 엘리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어. 우리 엘리는 아직 너희들에게 마음이 없나 봐.” “그런......” 실피르의 말에 두 여인도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오직 엘만을 바라보았건만 정작 엘은 자신들에게 마음이 없다니! “아, 아니...... 이건......” 두 여인의 반응에 엘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하니 실피르가 이렇게 물고 늘어질 줄 몰랐던 것이다. 그런 엘의 모습을 본 실피르가 엘을 더욱 몰아붙였다. “그럼 뭐라는 거니? 네가 세레나와 카이나가 싫지 않다면 이런 반응을 보일 리 없잖아. 안 그래?” “아,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실피르의 말을 엘이 거절했다. 그리고 방을 나서며 세레나와 카이나에게 외치듯 소리쳤다. “절대 엄마 말대로가 아니니 오해하지 마! 난 너희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고!” 그렇게 말한 엘은 방을 나갔다. 나가는 그의 얼굴을 붉게 물들어 있었다. 엘의 그러한 모습에 세레나와 카이나의 얼굴도 자아졌다. 그 모습을 실피르가 즐겁게 지켜보고 있었다. "호호!" 빠르게 3일이 흘러갔다. 왕궁에 방문하는 것 외에 딱히 다른 일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엘과 여인들은 한가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엘은 방 안에서 누워 조용히 명상에 잠겨 있었다. 현재 엘이 다다른 경지는 7클래스의 경지. 7클래스 마법 대다수가 숙달되어 7클래스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아직 완벽한 7클래스 마스터는 아니다. 그랬기에 시간이 나는 틈틈이 수련에 수련을 거듭하고 있다. 7클래스 마스터는 말 그대로 7클래스의 모든 마법을 마스터한 마법사를 지칭한다. 소드 익스퍼트와 소드 마스터의 차이가 명확하듯 마법사 또한 익스퍼트와 마스터의 차이가 컸다. 현재 엘이 지닌 능력이라면 8클래스 마법사와 그랜드 마스터를 제외한 그 누구도 그를 건드릴 수 없다. 하지만 엘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제자리에 멈춰서 만족하는 사람이 아닌, 끊임없이 달리고 무언가를 성취하려는 사람이다. 허무하게 낭비하는 걸 싫어하고 작은 틈마저도 실용적으로 활용하는 걸 좋아했다. 7클래스 익스퍼트에서 7클래스 마스터가 되는 건 깨달음이 아니다. 계속해서 수련하여 마법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 모든 마법을 마스터한 이에게 마스터의 칭호가 주어지는 것이다. 엘이 비록 지구의 수식으로 이곳의 마법 수식을 효과적으로 줄였다고 하지만 7클래스 마법은 보통 수준의 마법이 아니었다. 복잡한수식이 줄줄이 달려 있었고, 그게 복합적으로 꼬아져 있어 제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지닌 그라도 충분한 시간을 필요로 했다. 얼마나 명상에 잠겨 있었을까? 죽은 듯 자리에 누워 있던 엘이 두 눈을 떴다. 번쩍! 엘의 푸른 눈동자에서 은은한 청광이 뿜어지다 이내 그에게 갈무리되었다. 엘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머리를 매만졌다. “후! 아무리 수식이 짧다고 해도 이 복잡한 수식을 마스터해야 된다는 건 정말 힘들어. 응? 꽤 시간이 흐른 것 같네.” 아침을 먹고 곧장 명상에 잠겼는데 지금 보니 한창 낮 시간 때인 듯했다. “슬슬 왕국으로 가 봐야겠군.” 그러면서 엘은 실피르 등이 머물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방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던 실피르가 엘을 맞이했다. “어서 오렴. 이제 왕궁으로 가려고 하니?” “네. 보아하니 점심시간도 지난 것 같아서요.” 엘이 슬쩍 시선을 돌리니 조금 떨어진 곳에 세레나와 카이나도 책을 읽고 있었다. 그녀들이 읽고 있는 것은 톨리안 왕국의 문화가 적힌 책이었다. 이제 이곳에서 살게 될 것이니 미리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본 엘이 다시 실피르에게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혹시 모르니 이곳에 텔레포트 좌표를 새기고 갈게요. 무슨 일이 있으면 즉시 제게 신호를 보내 주세요.” 매직 캡처의 내용을 가지고 있다지만 아직은 불안하기만 한 엘이었다. 그런 엘의 걱정을 실피르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국왕을 기다리게 하면 안 되니 어서 가보렴.” “네, 알겠어요.” 그렇게 대답한 엘은 실피르의 방에 텔레포트 좌표를 새겼다. 그 후, 왕궁을 향해 텔레포트를 캐스팅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말한 게 있으니 마법 방해 없이 왕궁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잠시 후, 캐스팅을 마친 엘이 마법을 시전했다. “텔레포트(Teleport)!” 스파앗! 새하얀 빛이 엘의 몸을 휘감으며 그대로 꺼지듯 사라졌다. “허어...... 도대체 누가 오기에 마법 방해를 해제하라고 하신 걸까.” 왕궁 안에 설치된 텔레포트 게이트에 선 노인 마법사가 마법진 주변을 서성이며 중얼거 렸다. 마법사의 이름은 데실론. 일흔이 넘은 노만법사이며, 6클래스 마법사로 톨리안 왕국의 궁정 마법사로 있다. 그는 본래 톨리안 왕국 출신 귀족이면서 마탑에 들어가 마법을 익힌 이로, 레도프 국왕의 간곡한 요청에 마탑에서 나와 톨리안 왕국의 궁정 마법사로 일하게 되었다. 왕국에서 유일한 6클래스 마법사인 그는 후학 양성에 최대한 힘을 쏟았다. 다행히 유능한 인재들이 있어 그의 뒤를 이을 마법사들 양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긴 시간이 흐른 뒤라는 게 문제였다. 데실론의 나이는 이제 칠십. 더 이상의 성취를 기대하기에는 늦은 나이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을 마법사는 최소 20년은 흘러야 나타날 것이다. 그것 때문에 걱정이 태산 같은 데실론은 오늘 레도프 국왕의 명령을 받고 왕궁에 설치된 마법 방해 마법진을 해제하고 있었다. 귀한 손님이 올 거라나...... “그 귀한 손님은 언제 오려는지 모르겠군. 흐음......” 그때였다. 갑자기 왕궁 내에서 급격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누군가 마법을 시전하고 있는 것이다. 본래라면 마법 방해로 마법 발현이 불가능하겠지만 그것을 해제한 지금 왕궁 안에서는 마나가 급격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것을 못 느낄 데실론이 아니다. 마나를 느낀 것도 잠시, 마나가 점점 강렬하게 휘몰아치기 시작하가 데실론의 눈이 크게 뜨였다. “오오! 이건......!” 그의 놀라움은 당연하다. 지금 왕궁에서 느껴지는 마나의 흐름은 7클래스의 마법이 발현되는 흐름이었기 때문이다. 도저히 그가 따를 수 없는 엄청난 양의 마나 유동! 이러한 마법은 7클래스 이상 마법밖에 없다. 아니다 다를까, 급격한 마나 유동을 보이던 것이 한순간 맹렬하게 회전하더니, 이내 환한 빛을 내뿜었다. 스파앗! 새하얀 빛이 뿜어졌다. 그와 함께 한 사람의 신형이 나타났다. 데실론이 두 눈에 열망을 담고 그 신형을 바라보았다. 7클래스 마법사다! 웬만해서는 그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7클래스 마법사가 나타난 것이다. 허공 위에 한 사람이 떠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엘이었다. 톨리안 왕궁에 텔레포트로 곧장 이동해 온 엘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무사히 이동했네.” 그러면서 엘은 아래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두 눈에 붉은 열망을 가득 담고 있는 데실론이 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엘이 데실론을 향해 슬쩍 미소를 흘렸다. 그리고 바닥에 내려온 뒤 입을 열었다. “국왕 전하의 배려로 오신 건가요?” 엘의 말에 데실론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엘의 외모가 너무나 젊었기 때문이다. 지금 그가 본 것은 엄연한 7클래스 텔레포트 마법이다. 그렇다면 엘이 7클래스 마법사인 건 분명한데 그 외모가 너무 젊어 순간 데실론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외모가 젊다고 하여도 오랜 세월 살아온 연륜만큼은 흉내 낼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엘의 모습은 마법으로 꾸민 것이 아닌, 그 모습 그대로였다. “예, 예.” 당혹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엘이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말했다. “그럼 안내해 주시겠어요?” 상대가 어린들 어쩌랴? 어리건 늙었건 그는 이미 7클래스 마법사인 것을. 그렇게 생각한 데실론이 7클래스 마법사와 마주했다는 것에 기뻐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부탁하겠습니다.” 톨리안 왕궁은 대륙 극서부의 강국답게 크고 아름다웠다. 드넓은 평원을 끼고 있어 식량이 넉넉하고 각종 지하자원도 풍부하기에 이토록 넓고 아름다운 왕궁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데실론은 엘을 국왕 전겹실로 데려가면서 그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7클래스 마법사를 만나기란 매우 힘든 일이었기에 이참에 그를 가로막고 있던 것을 엘에게 질문하여 답을 구한 것이다. 그런 데실론의 질문을 엘은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었다. 그가 톨리안 왕국에 정착할 것이기도 했지만 그의 눈에 보인 데실론은 순수한 마법사의 학구열에 타오르는 진정한 마법사였기 때문이다. 엘의 마법 이론은 여타 다른 마법사들과 차원을 달리한다. 애초에 지구의 수식이 바탕이 되었기에 마법에 대한 엘의 이론은 어느 마법사보다 훨씬 간단하면서 조리가 있었다. 그랬기에 엘의 설명은 누구보다 손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엘의 대답을 들은 데실론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 이런 방법이! 정말 대단하군요!” 엘이 어리다는 건 이미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데실론에게 있어 엘은 누구보다 뛰어난 마법사로 눈에 비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엘의 이론은 마법학계 그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은 새로운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 이론을 자신의 제자들에게 가르칠 수만 있다면 그 성취가 대단해질 것이다. 빙산의 일각만 본 셈이지만 데실론은 그러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런 데실론의 생각을 눈치 챈 듯 엘이 말을 꺼냈다. 즐거웠던 방금 전 분위기와 달리 무척 무거운 힘이 담긴 어조였다. “물론 이건 새로운 개념의 마법이지요. 벽에 막힌 사람은 능히 벽을 허물 수 있는 그런 것 말입니다. 이 이론은 제가 새롭게 정립한 것으로, 데실론 님이 마음에 들어 가르쳐 드린 것이지 결코 남에게 전수할 생각이 없습니다.” “아!” 엘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데실론, 엘은 자신의 생각을 눈치 채고 있던 것이다. 하기야 당연한 일이다. 마법에 대한 독자적인 이론은 비전으로까지 대우를 받는다. 스승과 제자 간이라도 전수하지 않는 게 바로 마법의 비전이었던 것이다. 그걸 감히 전수하려 하다니! 지금 이렇게 베풀어 준 것도 고마워해야 하는 마당에! 데실론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그 모습에 엘은 고개를 저었다. 칠십이 다 된 데실론이 고개를 숙인 모습이 거북했던 것이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단지 제 생각을 말씀드린 거니까요. 아, 저기 인가요?” “그렇습니다.” 엘이 앞에 있는 거대한 문을 가리키자 데실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까지 엘을 안내한 데실론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오늘 가르침을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에 엘이 고개를 저으며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아닙니다. 같은 길을 걸어가는 분께 조금의 도움을 드린 것뿐입니다.”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겁니다.” 그렇게 말한 데실론이 시종장을 보며 말했다. “이분은 국왕 전하께서 직접 초청하신 마법사 엘 님이십니다. 국왕 전하께 어서 알리십시오.” 그 후 데실론은 엘에게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국왕 전하와 깊은 대화를 나누시길.” “안녕히 가십시오.” 그렇게 데실론과 일별한 엘이 시종장을 바라보자 시종장이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외쳤다. “국왕 전하! 초대를 받으신 손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러자 안에서 곧장 대답이 들려왔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티가 역력하게 드러났다. “어서 뫼시어라.” “예, 전하! 드시지요.” 시종장에 엘에게 말함과 동시에 문이 스르륵 열렸다. 그리고 엘이 접견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미소를 머금고 앉아 있는 레도프 국왕이 있었다. 엘은 레도프 국왕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삼 일 만에 뵙습니다, 국왕 전하.” “하하! 삼 일이 어찌나 안 흐르던지...... 내 삼 일이 이렇게 길게 느껴진 적은 처음입니다.” 레도프 국왕이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엘을 대했다. 이미 엘을 톨리안 왕국으로 끌어들이려고 마음먹고 있는 레도프 국왕이다. 엘의 성취도 성취지만 그의 인품이나 성격이 무척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사람 속이란 것이 몇 년을 같이 지내도 알 수 없지만 딱 한 번에 그 사람의 성격을 짚어 내는 사람도 있다. 레도프 국왕이 바로 그런 사람으로, 그는 엘의 성격을 어느 정도 유추하고 있었다. 자신을 건드리지 않는 사람은 건드리지 않는다. 하지만 목적을 위해서는 단호하게 마음을 먹을 수 있는 사람으로, 이런 사람이 마음을 먹으면 설사 제국이라도 맞설 사람이다. 만약 이런 사람의 충성을 얻을 수 있다면 영원히 배신하지 않을 충신이 될 것이고, 이런 사람의 친분을 얻을 수 있다면 영원히 우정을 잃지 않는 든든한 지기를 얻는 게 된다. 레도프 국왕은 엘에게 충성을 바라지 않는다. 단지, 그와 지기와 같은 친분을 얻을 수 있길 원했다. 자신이 아무리 강국인 톨리안 왕국의 국왕이라고 해도 엘을 품을 수 있을 정도의 그릇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설사 제국의 황제일지라도 엘을 품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엘은 그런 큰 인물이다. 레도프 국왕이 엘에게 말을 건넸다. “식사를 대접하려 했는데 아직 시간이 이르군요. 그 사이 이야기라도 나뒀으면 합니다.” 저녁 식사 시간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의 여유가 있다. 레도프 국왕은 그 시간 동안 엘을 최대한 설득하여 자국에 소속되도록 하게 하기 위해 노력할 생각이었다. 엘이 어찌 그러한 레도프 국왕의 생각을 모르겠는가? 그 생각이 빤히 보였기에 그는 미소를 흘리며 짐짓 의미 모를 말을 꺼냈다. “글쎄요...... 제가 살아온 이야기 같은 건 의미가 없고...... 딱히 이야깃거리가 없는데 말입니다.” ‘이 말은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건가? 아니면 회피하는 건가?’ 언뜻 들으면 이야기할 거리가 없으니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다는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말의 뉘앙스를 느끼면 진짜 할 이야기가 없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이야기 할 거리가 없어서 그런 것이다!’ 레도프 국왕은 그렇게 믿었다. 엘의 나이가 어리고 줄곧 한곳에서 마법 수련만 했기에 그런 것일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는 생각도 한몫했다. “하하! 그럼 제가 이야기를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모름지기 이야기란 한 사람이 하고 한 사람은 대꾸만 해 주면 되는 것이지요.” “그렇지요.” 그러면서 엘은 레도프 국왕에 대한 평가를 내렸다. 방금 전 의미 모를 말을 한 것은 레도프 국왕이 어떻게 나오나 보기 위함이다. 거기에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곧장 결정을 내리고 말을 꺼낸 것은 결단력이 있다는 뜻이다. ‘결단력은 있는 국왕이야. 정보대로야.’ 정보에 나와 있길, 레도프 국왕은 국왕으로서 능력이 무척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톨리안 왕국을 무리 없이 이끌어 온 그가 유일하게 한 실수는 정통 왕자인 제3왕자 유드미온을 일찍 밀어 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어차피 그런 점은 엘하고 관련이 없다. 단지 그가 알고 싶었던 것은 레도프 국왕의 성격이었으니까. 엘과 레도프 국왕은 별다른 주제 없이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이야기의 시간은 서로가 상대방에 대해 더 잘 알게 하기 위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통해 점차 상대에 대해 알아가고 있었다. 레도프 국왕은 엘과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그가 뛰어난 인재임을 알 수 있었다. 어린 나이에 7클래스 마법사가 되었다. 그렇다면 젊은 혈기에 귀족의 작위도 원하고 아름다운 여자를 바랄 만도 하지만 엘의 행동은 절제되어 있었고,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신중을 불어넣는 모습을 보였다. 이토록 뛰어난 모습을 보일 수 있다니! 레도프 국왕은 점점 엘에게 매료되어 가는 자신을 볼 수 있었다. ‘꼭 본국의 마법사로 영입하겠다.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수용해서 라도.’ 레도프 국왕은 아무도 몰래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한편, 엘 또한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레도프 국왕이 마음에 들었다. 처음에는 자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파악할 수 있었다. 레도프 국왕은 호위를 모두 물리친 상태였던 것이다. 한 나라의 지배자에게는 항상 근접 호위가 따라붙는다. 그런데 레도프 국왕의 근처에 오러를 지닌 기사가 존재하지 않던 것이다. 엘은 그것이 레도프 국왕이 자신에게 배려한 모습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이런 접견실에서 마법사와 마주 앉은 자리에 기사가 있으면 그것은 자칫 위협으로 비추어질 수 있다. 레도프 국왕은 그걸 배려한 것이다. 그리고 엘은 이제야 그것을 발견한 것이다. 본디 사람이란 사소한 것에 은근하게 감동하는 동물이다. 엘 또한 이러한 레도프 국왕의 행동에 작지만 감동을 받았다. 그에 대한 호감이 올라가자, 엘은 처음 계획했던 걸 중지하려는 생각을 가졌다. 엘이 처음 계획한 것은 레도프 국왕의 애를 최대한 닳게 하는 것이었다. 애가 닳은 레도프 국왕은 자신의 요구 조건을 모두 승낙한다. 이렇게 될 것을 계획세고 세운 것이다. 잠시 생각에 잠긴 엘. 이윽고 그는 자세를 바로 하고 레도프 국왕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엘이 자세를 바로 하자 레도프 국왕은 영문도 모른 채 긴장의 빛을 띠었다. 엘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사실 저는 이곳에 왔을 때 국왕 전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실지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강국 어디서나 존재하는 마탑이 톨리안 왕국에는 없지요. 아마 저를 영입하여 왕국 내에 마탑을 세우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틀립니까?” “음! 맞습니다.” 갑자기 직설적으로 묻고 들어오는 엘의 모습에 레도프 국왕은 약간 당황의 빛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황도 잠시, 그는 이것이 기회란 걸 눈치 채고는 두 눈을 빛내며 말을 꺼냈다. “저는 엘리미스 님께서 꼭 저희 왕국에 소속되셨으면 합니다. 이것은 단지 국왕으로서 왕국의 힘이 강해지길 바라는 욕심이 아닙니다. 매년 몬스터 랜드에서 쏟아지는 몬스터로 인해 수만 명의 목숨이 사라집니다. 저는 꼭 엘리미스 님이 저희 왕국에 오셔서 그들의 불필요한 희생을 막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 말에 엘이 순간 고개를 들어 레도프 국왕의 눈을 바라보았다. 왕국의 힘이 강해지는 게 목표가 아니란다. 매년 죽어 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자신이 이 왕국으로 왔으면 한단다. 레도프 국왕의 눈을 바라본 엘은 그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굳은 의지가 빛나는 눈. 그것은 결코 사적인 욕망을 위한 눈이 아니었다. 아니, 그런 욕심은 뒤로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건 걱정과 안쓰러움이었다. 매년 몬스터 랜드에서 쏟아지는 엄청난 숫자의 몬스터! 그들로 인해 해마다 수만 명의 목숨이 사라진다. 어찌 국왕으로서 그것이 안쓰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레도프 국왕의 눈빛은 엘의 마음을 사정없이 뒤흔들었다. 그리고 결정했다. 이곳에 정착하겠다고 말이다. 한 나라의 국왕이라지만 백성의 목숨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그의 마음이 엘에게 와 닿은 것이다. 심사숙고한 그의 모습에 레도프 국왕은 초조한 눈으로 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곰곰이 무언가를 곱씹어 보던 엘이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승낙의 표시였다. 엘이 왼손을 오른쪽 어깨에 댄 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국왕 전하와 함께 톨리안 왕국을 부흥시키는 데 최대한 돕도록 하겠습니다.” 그에 레도프 국왕의 얼굴에 태양이 떠올랐다. 어찌나 기뻤는지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엘의 양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하하하! 잘 생각하셨습니다! 앞으로 엘리미스 님이 마탑을 세우는 데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부디 무고하게 죽어 가는 우리 왕국민을 구해 주십시오!” 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톨리안 왕국에 정착하기로 한 이상 매년 톨리안 왕국에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히는 몬스터들을 그만 놔둘 생각이 없었다. “그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왕국에 소속되겠다고 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지금 말하는 것이 더 확실할 것 같습니다. 괜찮겠습니까?” 레도프 국왕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지금 결정 난 사항이니만큼 지금 마무리를 맺는 게 가장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던 터였다. “그러십시오.” 레도프 국왕의 승낙에 엘이 감사의 인사를 건네며 방금 전까지 곰곰이 고민하던 조건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일단 제가 생각하고 있는 걸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삼 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레도프 국왕의 표정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삼 년? 엘리미스 님께 죄송하지만 본 왕국에 삼 년이라는 여유가 없을 것 같습니다.” 레도프 국왕의 말대로다. 현재 톨리안 왕국은 그야말로 삼분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각각 왕국의 절반의 세력을 차지하고 있는 제1왕자파와 그에 못지않은 세력을 지닌 제2왕자파가 철저하게 대립에 대립을 거듭하여 언제라도 유혈 사태가 발생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왕권 다툼으로 정계가 뒤숭숭하니 왕국의 분위기 또한 뒤숭숭했다. 중앙의 통제력이 약해지면서 곳곳에 악덕 영주들이 기회를 보며 영지민들을 쥐어짜기 시작했기에 현재 민심도 최악을 달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왕국의 분위기면 몬스터 랜드에서 쏟아지는 몬스터들을 막아 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서로 전력을 아끼려 들다 보니 주력 병력을 출동시키지 않는 것이다. 그로 인해 벌써 서부 영지 세 개가몬스터 랜드에서 쏟아지는 몬스터들에게 초토화가 되었다. 세 개의 영지가 모두 서부의 강자 테란델 후작령에 속한 작은 남작령이었지만 그 다음은 접하게 된 곳은 테란델 후작령과 루비어스 백작령이었다. 테란델 후작령은 제1왕자파의 중요한 구심점 역할을 하는 귀족 중 하나로, 올해에는 몬스터 랜드에서 쏟아지는 몬스터들을 막아야 한다고 제1왕자파에서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루비어스 백작령에서는 아무도 몬스터들을 막자는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한때 천재 마법사 레이언 루비어스의 등장으로 화려한 영광을 누렸지만 갑자기 들이닥친 괴한들로 인해 레이언 루비어스는 실종되고, 루비어스 백작은 거의 초토화가 되었다. 지금에 이르러 레이언 루비어스를 뛰어넘는 또 다른 천재 로웰린 루비어스 여백작의 등장으로 예전의 영광을 되찾아 가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그것은 말뿐이지 멸문해 가는 가문을 간신히 일으켜 세워 영지를 유지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면서 레도프 국왕은 몬스터 랜드에 대한 설명을 햐였다. “현재 본 왕국에 가장 큰 피해를 끼치는 곳이 두 곳입니다. 한 곳은 오크 포레스트라 불리는 오크들의 대지이며, 또 한 곳은 트롤 벨리라 불리는 곳입니다. 매년 오크 포레스트에서는 십만에 달하는 오크가 쏟아져 나옵니다. 이걸 보아 오크 포레스트에 거주하는 오크들의 숫자는 약 이십만 정도로 유추하고 있습니다. 위험하긴 하지만 그 정도 전력은 왕국의 군사로 충분히 토벌이 가능합니다. 문제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레도프 국왕의 설명이 거듭 이어졌다. “문제는 트롤 벨리입니다. 매년 일만에 달하는 트롤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왕국 레인져들이 목숨을 건 탐사 끝에 알아낸 트롤의 숫자는 물경 오만에 달합니다. 트롤 벨리는 현재 루비어스 백작가와 접하고 있으며, 만약 이번에 트롤 벨리에서 트롤들이 쏟아져 나온다면 루비어스 백작가는 멸문을 막지 못할 것입니다.” “루비어스 백작가라......” 엘은 루비어스 백작가를 곱씹어 보았다. 자신의 아버지가 태어난 가문...... 뛰어난 검가로 유명하며, 톨리안 왕국의 명문가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엘은 불현듯 레도프 국왕이 루비어스 백작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루이버스 백작가는 어떤 곳입니까?” 그의 물음에 레도프 국왕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말 했다. “한마디로 충신 가문입니다. 선대 루비어스 백작은 뛰어난 경영력으로 멸문 직전에 빠진 루비어스 백작가 부흥에 기틀을 세웠고, 그의 하나뿐인 딸인 로웰린 루비어스는 천재적인 검술로 현재 스물두 살의 나이에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에 다다라 있습니다. 탁월한 검술뿐만 아니라 영지를 경영하는 능력도 훌륭하고 외모 또한 아름다워 테란델 후작가의 둘째 아들이 그녀를 노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녀와 결혼을 하면 루비어스 백작가는 자연스럽게 테란델 후작가에 흡수될 테니까요.” “그렇군요......” 레도프 국왕의 말에 엘은 생각에 잠겼다. 설마하니 루비어스 백작가에 그렇게 큰일이 닥친 줄 몰랐다. 그리고 새삼 아인하트 후작가의 잔인함에 치를 떨었다. 아인하트 후작가는 자신의 아버지인 레이언 루비어스를 납치하여 세뇌한 것뿐만 아니라 가문의 힘을 동원하여 루비어스 백작가에 치명타를 입혔던 것이다. 제아무리 왕국의 명문 백작가라 하더라도 제국 최고의 가문인 아인하트 후작가와 비교할 수는 없다. 압도적인 아인하트 후작가의 힘에 변변찮은 대응도 못했을 터이고 그 결과 멸문에 가까운 타격을 입게 된 것이다. 그 당시 트롤 벨리에서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들을 막기 위해 중앙군이 영지에 머물지 않았다면 루비어스 백작가는 테란델 후작가에 먹혔을 것이 분명했다. 그걸 생각하니 엘은 마음을 굳힐 수 있었다. 루비어스 백작가를 돕겠다고 말이다. 생각에 잠겼던 엘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삼 년의 기간은 철회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마탑을 세우는 데 그 정도 시간이 꼭 필요하거든요.” “하지만......” 레도프 국왕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하려 하자 엘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대신 트롤 벨리를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 순간 눈을 크게 뜬 레도프 국왕. 그는 자신이 지금 말을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 레도프 국왕에게 엘은 자신이 내세웠던 조건에 대해 설명을 하였다. “사실 삼 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던 건 트롤 벨리를 정리하기 위한 시간이었습니다. 어느 정도 숫자인지 몰랐는데 오만이라면 시간이 꽤 걸리겠군요.” 엘의 말에 레도프 국왕은 정신이 깨었다. 그리고 그는 경악이 가득 담긴 어조로 엘에게 되물었다. “지, 지금 트롤 벨리를 정리하겠다고 하셨습니까? 그 죽음의 대지를?” 그에 엘이 싱긋 웃었다. 그리고 자기 손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국왕 전하께서는 가끔 제가 누구신지 망각하시는군요. 저는 7클래스 마법사입니다. 그리고 그랜드 마스터에 버금가는 나이트 골렘을 가지고 있지요. 이래도 불가능할 것 같습니까?” “아......” 엘의 말에 레도프 국왕은 자신의 실수를 자각했다. 그렇다! 눈앞에 있는 소년은 7클래스에 이른 마법사인 것이다. 그리고 8클래스 마법사가 아니면 누구도 상대할 수 없는 7클래스 최강의 마법사였다. 그런 그와 그랜드 마스터와 호각을 이룬 나이트 골렘이 함께한다면? 불가능이란 없다! 트롤 벨리를 토벌할 수 있는 것이다! 레도프 국왕의 표정이 밝아지는 것을 본 엘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제가 국왕 전하께 원하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얼마든지 말하십시오.” 그에 레도프 국왕은 흔쾌히 대답했다. 어찌 안 그러하겠는가! 왕국을 지긋지긋하게 괴롭히던 트롤 벨리를 정리해 준단다. 만약 그렇게 해 줄 수만 있다면 억만금을 줘서라도 부탁하고 싶은 것이 바로 레도프 국왕의 심정이다. 그만큼 여태까지 트롤 벨리에서 쏟아져 나온 트롤들이 왕국에 입힌 피해는 천문학적이다. “그럼......” 레도프 국왕의 흔쾌한 대답에 엘은 몇 가지 조건을 말하기 시작했다. “음......” 그리고 그걸 모두 들은 레도프 국왕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생각을 마친 레도프 국왕이 입을 열었다. “다른 조건들은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만...... 아니, 오히려 왕국에 좋은 조건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조건은 좀 힘들 것 같습니다.” “역시 그런가요?” 엘은 자신의 마지막 조건이 약간 과했다고 생각하며 살짝 한숨을 내쉬자 레도프 국왕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솔직히 허가를 내 주는 건 문제가 없지만, 그곳들은 이미 다른 귀족들이 꽉 쥐고 있는 상태입니다.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엘의 표정이 약간 밝아졌다. “그것 때문에 그러신 것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만......” 약간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레도프 국왕을 보며 엘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것이라면 상관없습니다. 제가 모든 걸 알아서 할 테니까요.” 엘의 말에 레도프 국왕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러시다면 상관없습니다.” “제게 그것들만 약속해 주시면 충분합니다.” 그러면서 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에 레도프 국왕이 눈을 크게 뜨며 말한다. “이대로 가시렵니까?” “앞으로 할 일이 구체적으로 정해졌으니 가 봐야지요. 제게는 기다리는 사람이 있거든요.” “저런......” 엘의 말에 레도프 국왕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에 엘이 미소를 지었다. “식사 대접은 일이 잘된 뒤에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에 제 입장에서 더 편하고요.” “그러시다니 더 이상권하기 어렵군요.” 그렇게 말하면서 레도프 국왕은 불현듯 무언가가 생각난 듯 엘에게 물었다. “엘리미스 님,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엘이 레도프 국왕을 바라보다가 말하였다. “제 나이는 올해 열일곱입니다. 그럼......” 고개를 숙인 엘이 접견실을 벗어났다. 그리고 레도프 국왕은 그렇게 사라지는 엘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엘이 접견실을 나서자, 레도프 국왕이 사라진 엘의 뒷모습을 쫓으며 중얼거렸다. “올해 열일곱이라...... 에리스보다 한 살 많구나. 하하하!” 7클래스 마법사를 얻고 마음에 드는 사윗감을 발견한 레도프 국왕은 시원스러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지금 이 시점을 시작으로 톨리안 국왕은 엄청난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그것은 후일 대륙 제일 마탑으로 불리게 될 금탑의 탑주 엘에 의해서 그렇게 변하게 되는 것이다. 후일, 대륙 서부에서 어마어마한 폭풍을 몰고 올 그들의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 났다. 7 트롤 벨리(Troll Valley) 몬스터 랜드(Monster Land). 대륙 3대 금역 중 하나로 불리는 곳으로, 과거 마왕이 강림한 레베탄 고원에 마왕이 남긴 다크 소울에 수백만 이상의 몬스터가 몰려들어 오늘날 몬스터 랜드를 구성하게 되었다. 대륙 서쪽의 끝이라 불리는 레베탄 고원은 그 넓이가 무척 넓었지만 무차별적으로 모여든 몬스터들로 인해 그 수용 인원을 넘어서게 되었다. 그 후에 벌어진 것은 몬스터 간의 약육강식 법칙이었다. 강한 몬스터는 약한 몬스터를 끊임없이 죽이고 잡아먹었다. 그리고 약한 몬스터는 강한 몬스터를 피해 레베탄 고원과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약육강식의 철저한 법칙이 지켜지는 가운데 오크와 트롤은 레베탄 고원에서 완전히 나오게 되었다. 몬스터들 중 제일 약한 축에 꼽히던 오크들은 쫓겨 나 온 것이고, 중간축에 속하던 트롤들은 트롤 중 몇 백 년 마다 한 번씩 출현한다는 트롤 킹(Troll King)의 등장으로 트롤 킹을 따라 레베탄 고원을 벗어난 것이다. 트롤 킹. 보통 트롤보다 족히 두 배는 큰 덩치와 어마어마한 완력은 오우거마저 밟아 으깨 버리는 엄청난 완력을 소유하고 있다. 트롤 킹의 이마에는 은은한 핏빛을 띤 보석이 박혀 있는데, 다크 소울의 힘을 받아 생성된 그 보석은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트롤들을 지배하는 권능이 담겨있다. 트롤 킹의 능력은 이것이 끝이 아니다. 트롤 킹의 진정한 무서움은 바로 다크 소울의 힘을 받아들여 그 힘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반 성인 트롤이 소드 익스퍼트 기사 한 명과 대등하다. 그런 트롤 100여 마리가 달려들어도 트롤 킹을 어쩌지 못한다. 즉, 트롤 킹은 100여 명의 소드 익스퍼트 기사를 능가한다는 말이며, 그것은 소드 마스터를 능가하는 엄청난 힘을 지녔다는 말이 된다. 물론 이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는 것도 어디까지나 추정일 뿐이다. 실제로 트롤 킹이 지니고 있는 힘이 어느 정도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도 트롤 킹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위의 추측도 최소한이라 할 수 있었다. 톨리안 왕국으로서는 단순히 추측만을 믿고서 트롤 벨리 토벌전에 소드 마스터를 투입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트롤 벨리는 완전히 트롤들의 대지로 자리 잡을 수 있었고, 지금은 약 오만여 마리의 트롤이 이곳에 상주하고 있다. 하지만 트롤 벨리에는 트롤들만 살고 있는 게 아니다. 사방이 험한 계곡으로 이루어져 있고, 트롤이나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곳은 단 한 곳밖에 존재하지 않는 트롤 벨리에는 적지 않은 숫자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곳곳이 험한 계곡이며 낭떠러지요, 절벽이었지만 트롤 벨리 안쪽에는 크나큰 분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톨리안 왕국 악덕 영주들의 손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곳곳에 분포하여 살고 있다. 그러나 트롤 벨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다. 항상 트롤들의 습격으로 몇몇 마을들은 그대로 전멸하고 사라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적응력은 위대하다. 그들은 살기 위해 뭉치기 시작했고, 그렇게 생겨난 곳이 트롤 벨리 초입 부분에 존재하는 십여 개의 마을이다. 켄 마을도 그러한 곳들 중 한 곳이다. 약 이백여 호가 살고 있는 켄 마을은 전체 인구가 천 명이 조금 안 되는 마을이었다. 비록 뭉쳤다고 하지만 기사 급 실력자가 존재하지 않는 한 트롤 한 마리는 인간 수십 명이 감당해야 한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늘 트롤들의 습격을 경계해야만 했다. 싸울 수 있는 성인 남자가 약 200여 명이었는데, 트롤 열 마리만 나타나도 막아 내기에 벅찼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1년마다 벌어지는 트롤들의 진출일이 다가와서일까. 켄 마을에 무려 이십 마리가 넘는 트롤들이 습격해 왔다. 그러자 마을은 난리가 났다. 가장 많은 숫자의 트롤들이 습격해도 열다섯 마리가 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무려 스무 마리가 넘는 트롤들이 습격해 온 것이다. “노약자와 여자들을 모두 마을 후미로 대피시켜! 그리고 싸울 수 있는 남자는 모두 앞으로 나와!” 켄 마을의 경비대장인 마이더는 창을 움켜잡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는 켄 마을의 하나뿐인 익스퍼트 급 실력자로서, 본래 견습기사로 있던 자였다. 그 재능이 뛰어나고 품행이 곧아 한때 기대주로 자라났지만 그의 여동생을 넘보는 소영주로 인해 이곳으로 도망쳐 온 자였다. 본래 검보다 창을 더 좋아하던 그는 켄 마을에 정착한 지 5년이 지난 지금, 20대 후반의 나이에 익스퍼트 중급에 오른 실력자였다. 그의 창에 은은한 푸른빛이 어리자 마을을 수비하기 위해 나선 이들의 눈에 강한 믿음이 서렸다. 마을에서 트롤과 유일하게 일대일 대결이 가능한 그는 마을 사람들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와라!” 오러가 서린 창을 들며 마이더가 외쳤다. 전방에서 트롤들이 육중한 나무 방망이를 들고 달려들고 있었다. 켄 마을은 방어를 위해 약간 경사 있는 언덕 위에 방어진을 마련했다. 그리고 입구가 좁아 트롤들이 한꺼번에 두 마리 이상 들이닥칠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 마이더가 그 좁은 입구에 버티고 서서 오러가 서린 창을 휘둘렀다. 창창! 오러가 서린 창과 트롤의 나무 방망이가 부딪치며 요란한 굉음을 냈다. 트롤들이 들고 있는 저 나무 방망이는 다크 소울의 힘이 깃든 나무로, 웬만한 강철을 능가하는 강력한 강도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오러의 힘을 이길 수 없었는지 트롤의 나무 방망이가 튕겨 나갔고, 그 틈을 마이더가 비집고 창을 내지르려던 찰나 어느새 옆에 들이닥친 트롤이 나무 방망이를 휘둘렀다. “어딜!” 창, 차장! 창! 트롤과 공방을 나누며 마이더의 창이 현란하게 움직였다. 세르디아 대륙에 창수는 흔치 않다. 길이가 길고 찌르기에 보편화된 창은 훈련하는 기간이 적어 주로 징집병에게 주어지는 기본 병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이더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검보다 휠씬 길이가 긴 창을 활용하면 동급 기사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여러 가지 지식을 총동원하여 자신만의 창술을 만들어 냈다. 단순히 찌르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길이가 긴 만큼 베기를 할 때 검보다 강력한 힘을 담아낸다. 잘만 활용하면 검보다 더욱 유용한 것이 바로 창이었던 것이다. 두 마리의 트롤을 상대로 마이더는 한 치의 밀림 없이 팽팽하게 싸우고 있었다. 그의 수준은 익스퍼트 중급이라지만 실전에 단련되어 두 마리는 큰 무리 없이 상대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른 것이다. 마이더가 이를 꽉 물며 창에 모든 힘을 집중했다. 한순간 그의 창에 푸른빛이 강하게 감돌더니 트롤들의 나무 방망이와 충돌했다. 꽝! “큭!” 두 마리의 트롤을 밀어냈지만 그 또한 큰 충격을 받은 듯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모두 쏴라!” 그 순간 목책 위에 서 있던 이가 소리쳤다. 그러자 100여 명의 남자들이 화살을 쏘았다. 피비비빙! 파바박! 맞춰야 할 대상은 두 마리의 트롤! 표적이 크고 쏘는 공간은 한정되어 있었기에 백여 발의 화살은 그대로 트롤들에게 적중되었다. “크어어어어어!” 고통스러운 듯 비명을 내지르는 트롤 두 마리! 제아무리 재생력이 뛰어나다고 하나 고통은 어쩔 수 없었다. ‘이때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들의 모습에 마이더의 두 눈이 빛났다. 그리고 득달같이 달려들어 창을 휘둘렀다. 오러를 머금은 그의 창이 눈부시게 빛났다. 서걱! 서걱! 제아무리 재생력이 강하다고 하나 목이 베이고서 살 수 없는 법! 오러가 서린 창에 의해 순식간에 목이 잘린 두 마리의 트롤은 그대로 쓰러졌다. “후! 이제 두 마리 인가.” 한숨을 내쉬며 마이더가 앞에 다가오는 또 다른 트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트롤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커졌다. 방금 전 상대했던 트롤보다 족히 한 배 반 정도 더 큰 트롤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트롤 벨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저 트롤을 가리켜 이렇게 말한다. 절망의 트롤. 일반 트롤보다 몇 배는 강한 저 트롤은 트롤 킹을 호위하는 100여 마리의 트롤 대전사 중 하나다. 트롤 대전사가 등장할 때면 그 마을은 무사하지 못한 채 모조리 전멸 당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트롤을 절망의 트롤이라 부르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도 그 트롤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절망이 담긴 어조로 부르짖었다. “오오! 신께서는 우리를 버리시는 것이란 말인가......” 절망에 빠진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마이더가 이를 악물었다. 자신마저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마을 사람들의 사기는 더욱 곤두박질칠 것이다. 자신이 솔선수범하여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 트롤을 제거하는 방법이 최선이다. “절망의 트롤이건 뭐건 오늘 한번 붙어 보자!” 마이더가 창을 굳게 움켜쥐고 달려들었다. 그러자 트롤 대전사도 보통 트롤이 든 나무 방망이보다 족히 두 배는 큰 방망이를 휘두르며 맞대응하였다. 하지만 용기는 용기이고 현실은 전혀 달랐다. “헉헉!” 피를 흠뻑 흘린 마이더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비틀거렸다. 그에 반해 그를 상대하는 트롤 대전사는 여전히 생생한 모습을 보였다. ‘너무 강하다! 트롤 킹이 아니라 트롤 대전사가 소드 마스터와 비등한 무위를 보이다니!’ 트롤 대전사는 소문대로 정말 강했다. 솔직히 마이더는 자신이 전력을 발휘하면 트롤 대전사를 상대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트롤 대전사는 너무나 강했다. 익스퍼트 중급인 자신이 터무니없이 밀리다니! 익스퍼트 최상급 정도는 되어야 트롤 대전사와 대등하게 맞설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대로는 진다!’ 마이더는 지금 이 승부의 결과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몸을 뺄 수 없었다. 그러다가는 마을 사람들이 트롤들에게 처참하게 유린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익!” 이를 악다물며 마이더는 체내에 축적된 오러를 모두 끌어 올렸다. 그리고 푸른빛으로 빛나는 창을 찔렀다. 까강! 회심의 지르기가 허무하게 막혔다. 마이더가 허무한 표정을 짓자 트롤 대전사의 입꼬리가 살짝 비틀려 있었다. 마치 이것밖에 되지 않느냐는 듯한 비웃음처럼 보였다. “헉헉!” 하지만 마이더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미 체내의 모든 오러를 소모했기 때문이다. 이제 저 묵직한 방망이가 자신의 몸을 강타하고 자신은 곤죽이 되어 죽어 버릴 테지. 마이더가 모든 걸 포기할 때, 그에게 구원군이 등장하였다. “비켜요!” 그의 뒤에서 여인의 음성이 들려온 것이다. 마이더는 저도 모르게 몸을 비켜섰다. 그리고 그 틈 사이로 한 여인이 트롤 대전사에게 달려들었다. 은은한 은빛으로 빛나는 갑옷에는 룬어가 아름다우면서도 복잡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여인의 붉은 머리가 아름답게 휘날리며 그녀의 롱소드가 뻗어 나오고 있었다. “크릉!” 사냥감을 막 제거하려던 찰나 끼어든 여인을 보며 트롤 대전사는 귀찮음과 분노가 섞인 소리를 냈다. 그리고 나무 방망이를 막 휘두르려 할 때, 여인의 검이 폭발적인 속도로 쏘아졌다. 조금 전 마이더가 시전한 오러보다 더욱 선명한 오러. 그것은 중급을 뛰어넘은 소드 익스퍼트 상급의 오러였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쏘아진 여인의 검은 그대로 트롤 대전사의 목을 꿰뚫었다. 제아무리 피부가 질기다지만 오러를 견딜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크어어어어! 크아아아아!” 가볍게 본 여인에게 목이 꿰뚫린 트롤 대전사가 세상이 떠나가라 비명을 내질렀다. 어마어마한 고통이 전신을 강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트롤 대전사의 행동이 조금씩 멈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완전히 멈추었을 때, 트롤 대전사의 몸이 허무하게 쓰러지고 말았다. 쿵! “후우!” 트롤 대전사를 가볍게 처리한 여인이 가볍게 한숨을 몰아쉬고는 검을 그대로 검집에 꽃아 넣었다. 그제야 마이더는 여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놀랍게도 채 스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소녀의 얼굴이었다. 화려한 은빛 갑옷을 입고, 붉은 머리를 휘날리며 드러나는 아름다운 얼굴은...... 마치 전쟁의 여신을 보는 듯했다. 저렇게 어린 나이에 소드 익스퍼트 상급에 이르다니! 아니, 그 전에 저 여인이 여기 왜 나타났단 말인가? 여러 가지 의문이 교차할 때, 여인은 바닥에 앉아 있는 마이더를 슬쩍 보더니 매몰차게 고개를 돌리고는 한 곳으로 향했다. 마을 사람들의 감탄과 경외, 그리고 의문이 담긴 시선을 받으며 여인은 한쪽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명대로 했습니다, 주인님.” 주인님?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옮겨졌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허공에 금발을 휘날리며 미소를 머금고 있는 마법사의 모습이. 마법사라기에는 너무나 어린 외모였지만 허공에 떠 있는 그 마법은 틀림없는 플라이 마법이었다. 금발 마법사, 엘은 트롤 대전사를 처리한 카이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잘했어, 카이나. 실력이 대단한데? 한시라도 빨리 검을 가르쳐 줄 스승을 모셔야겠어.” “아, 아니에요. 아직 많이 부족해요.” 카이나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조금 전 냉랭했던 얼굴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남들에게는 차가운 카이나지만 유독 자신에게만 부끄러움을 타는 그녀의 모습이 귀여워 엘은 미소를 지었다. “후후후! 그래! 카이나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렇게 말한 엘은 사람들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상대가 마법사라 그런 걸까? 평소 외부인을 보면 극도의 경계심을 보이던 마을 사람들은 감히 엘에게 경계심을 보이지 않았다. 엘은 마을 사람들에게 입을 열었다. “안심하세요. 저는 여러분들에게 피해를 입힐 생각이 없으니까요. 저는 앞으로 여러분들에게 평안한 생활을 제공할 마법사입니다. 앞으로 이곳은 저의 땅이 될테니까요.” 그 말에 마을 사람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감히 마법사의 말에 반박할 수 없다는 것이 옳았다. 왜냐 하면 그들의 상상에 박힌 마법사란 불과 물을 다루는 무시무시한 능력자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기사보다 더 무서워하는 것이 바로 마법사였다. 그런 침묵을 깬 것은 마이더였다. 마이더는 창을 의지해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곳이 왜 당신의 땅이 되는 것입니까?” 그의 말에 반응한 건 카이나였다. “감히! 주인님에게......” 그녀는 감히 구해 준 엘에게 불손하게 나오는 마이더를 보며 기세를 끌어 올렸다. 엘이 전수한 단전호흡과 스스로의 뛰어난 재능이 합쳐져 그녀는 이미 소드 익스퍼트 상급에 이른 실력자다. 하지만 그녀의 오러 보유량은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을 뛰어 넘는 무시무시한 양이었다. “크으......” 그녀의 오러가 강렬하게 뿜어지자 마이더가 신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한 단계 높은 경지에 있는 그녀의 기세를 정상도 아닌 몸으로 받아 내기란 무리였기 때문이다. 그런 카이나를 제지한 건 엘이었다. “카이나, 그만!” 그러자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오던 그녀의 기세가 씻은 듯 사라졌다. 카이나는 조금 전 부끄러워하던 얼굴과는 전혀 상반된 싸늘한 얼굴로 마이더를 바라보았다. “감히 주인님에게 무례한 행동은 하지 말도록.” ‘후!’ 과거 사람들에게 감금당한 카이나의 폐쇄성을 알고 있는 엘은 그녀의 모습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마이더를 보며 말했다. “아까 말했던 그대로입니다. 앞으로 이곳은 저의 땅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곳에 제 마탑이 들어설 것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마탑이 들어서는데 가장 방해가 되는 트롤들입니다. 때문에 저는 트롤들을 이곳에서 모조리 몰아내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그 말에 마을 사람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트롤들을 몰아내겠다는 말. 그것은 즉, 눈앞의 마법사가 트롤들을 모두 제거하겠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이더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물었다. “후욱!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의 말에 엘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냥 평소대로 사시면 됩니다. 기본적인 시스템은 그냥 일반 영지로 생각하면 되는 겁니다. 아아, 물론 저를 악덕 영주와 비교하시면 안 되지요. 그저 여러분들은 나중에 트롤들을 모두 몰아낸 뒤 드넓은 분지에서 사시면 됩니다. 세금 같은 건 그때 가서 이야기하면 되지요. 뭐, 저 같은 경우는 안 받아도 상관없지만 왕국과 연관이 되어서 말이죠. 어쨌든 제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여러분들은 이제 모두 행복하게 살 권리가 생겼다는 말입니다. 제가 세울 마탑의 영역에 속해 있다는 것만으로 말이죠.” 그러면서 엘은 저 멀리서 접근해 오는 트롤들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마을 사람들도 트롤의 존재를 눈치 채고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절망적인 표정은 아니었다. 눈앞에 마법사의 말이 묘하게 신뢰감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나누는 데 방해가 되는군.” 그러면서 엘은 손을 번쩍 들었다. 키잉! 키잉! 치이잉! 치이잉! 그러자 공간의 균열음이 들리며 아공간이 열렸다. 그 속에서 세 기의 골렘이 튀어나왔다. 5m에 이르는 당당한 체구. 그것들은 엘이 골든 나이트를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로 만들어 본 실험체 골렘이었다. 그러나 말이 실험체였지, 저 골렘 하나하나가 소드 마스터와 맞먹는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엘은 세 기의 골렘에게 외쳤다. “적들을 모두 말살하라!” 그에 골렘이 반응했다. 움직임이 약간 둔탁했지만 몸놀림은 그 누구보다 빨랐다. 그 뒤에 벌어진 것은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거의 이십 마리에 달하는 트롤들이 세 기의 골렘에 의해 완전히 다져져 버린 것이다. “세상에......” 마을 사람들은 입을 떡 벌린 채 아무런 말도 못했다. 자신들이 매번 목숨을 걸고 막았던 트롤들이! 그런 트롤들이 지금 힘도 못 쓴 채 장난처럼 죽어 버린 것이다. 너무나 경악스러운 장면이었다. 자신들이 매번 목숨을 걸었던 것이 저 마법사에게 있어서는 아무런 일도 아니었단 말인가! 자신들보다 조금 뛰어난 사람이 있으면 사람들은 시기한다. 하지만 그 범위를 뛰어넘은 사람을 보면 시기하기 보다는 기대고 싶은 마음이 강해진다. 켄 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절망이 깃들었던 그들의 눈은 어느덧 희망이 감돌기 시작했고, 그들의 그런 감정은 엘에게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트롤들을 모두 제거하고 돌아온 골렘이 엘 앞에 공손히 무릎을 꿇을 때, 마을 사람들의 눈은 기대감이 가득 담겨있었다. 그런 시선을 받으며 엘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어떻습니까? 이제 믿음이 가죠?” 가장 먼저 대답한 것은 마이더였다. 그는 엘에 의해 소환된 골렘의 무용을 보고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의 눈은 마을 사람들처럼 희망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 골렘들만 있어도 충분한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 하지만 내 눈에 보기에 저 마법사는 아직 모든 패를 꺼내지 않았다.’ 소드 마스터에 버금가는 골렘을 거느리고 소드 익스퍼트 상급에 이른 여검사를 대동한 마법사. 그러나 정작 마법사는 아직 실력을 보인 적이 없다. 만약 마법사의 실력까지 합쳐진다면? 어쩌면 트롤 벨리를 자신의 땅으로 만들겠다는 말이 허언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건 기회다. 저 마법사의 눈을 보면 사악한 느낌은 안 들어. 믿어 보자.’ 마이더는 자신의 감을 믿었다. 그리고 그는 엘의 말에 서슴없이 고개를 숙였다. “여태까지 의심을 해서 죄송합니다.” 마이더의 모습을 보며 엘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보아 하니 마이더가 이 마을의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자인 듯했기 때문이다. 슬쩍 마나 스캔을 해 보니 익스퍼트 중급에 이른 실력자가 아니던가? 사람됨도 괜찮아 보였기에 엘은 앞으로 그를 중하게 사용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처음 온 사람을 의심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그런데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 마이더의 물음에 엘이 미소를 띤 얼굴로 대답했다. “일단 트롤들을 몰아내야겠지요. 그 전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의 힘을 하나로 모아야 하고요.” 트롤들의 습격은 양쪽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을 확인했기에 엘이 제 시간이 맞추어 이곳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 지금쯤이면 실피르와 세레나가 다른 쪽에 나타나 그 마을 사람들을 설득했을 것이다. 골든 나이트를 대동했으니 실패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엘은 마이더를 보며 말했다. “조만간 마을의 대표들을 모두 모을 것입니다. 그때 자세한 계획을 말해 줄 테니 지금은 참으세요.” 이미 트롤 벨리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활용할지 엘에게 모든 계획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계획의 첫 번째 단추인 마을 사람들의 믿음을 이끌어 냈다는 것에 엘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더욱 짙어지게 하였다. 마을의 대표들을 모으는 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엘의 압도적인 힘을 본 마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연락하여 모두 참가하길 종용한 것이다. 모인 이들은 대부분 젊은 남자들이었다. 보통 마을 대표라 함은 촌장을 일컫지만 트롤 벨리에 형성된 마을들은 대부분 몇 년 되지 않았기에 촌장은 마을을 이끄는 위치에 있는 것이지, 그들이 대부분 따르는 이들은 마을을 지켜 주는 이들이었다. 따라서 마을에 모인 이들은 마을에서 가장 강한 이들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들은 모두 놀랍게도 익스퍼트에 든 이들이었다. 게다가 나이도 젊으니 무척 뛰어난 인재들임이 분명했다. 엘이 그들을 보며 눈에 빛을 냈다. 이곳에 모인 열두 명의 인물 중 마이더를 제외한 열한 명의 남자가 거의 동일한 근육의 발달과 오러의 기질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것 봐라?’ 그들에게서 딱히 악한 기질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무언가 수상쩍은 것은 분명했다. 지금 사람들이 모인 장소는 탁 트인 장소다. 게다가 곁에 카이나가 있으니 갑작스러운 기습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엘이 입을 열었다. “다 모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모두 같은 검술을 익혔군요. 이곳 트롤 벨리에 무슨 일이신지?” 엘의 말에 의해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마이더는 영문 모를 눈으로 다른 이들을 쳐다보고 있었으며, 카이나는 언제라도 검을 뽑을 수 있는 자세를 취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급변하자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30대 중반의 사내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역시 마탑을 세우시려는 마법사가 맞으시군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딱히 적의를 드러내지 않았기에 엘은 편안한 자세로 대꾸했다. “당신들의 근육 발달과 오러의 기질이 서로 비슷하더군요. 그래서 알아차렸지요.” “혹시나 했는데 역시 대마법사님의 날카로운 눈을 속일 수는 없군요. 저희는 제이머 남작가의 기사들입니다.” 그에 놀란 것은 마이더였다. 그는 제이머 남작가를 잘 알고 있었다. “제이머 남작가? 소드 마스터에 오를 것으로 가장 유망하던...... 설마 모스 님이 제이머 남작가의 기사였을 줄이야......” 마이더의 반응에 모스라 불린 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래 나를 비롯한 이들 모두가 제이머 남작가의 기사들이었지.” “자세한 사정을 알고 싶은데...... 말해 줄 수 있나요?” 엘의 물음에 모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지난 이야기인데 이야기를 못할 리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모스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모스를 비롯한 다른 기사들 모두 제이머 남작가의 기사였다. 검술이 뛰어나기로 유명한 제이머 남작은 30대 초반의 나이에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에 오르는 기염을 통한다. 그 다음 단계인 소드 마스터에 올라설 확률이 현저하게 높아진 것이다. 그러자 사방에서 제이머 남작을 회유하기 위해 공작을 벌이기 시작했다. 왕권 다툼이 심해지고 있는 그 시기에 소드 마스터가 될 사람이 몸을 담는다면 그 파벌의 힘이 순식간에 강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이머 남작가 또한 매우 실속 있는 가문이어서, 오러를 다루는 소드 익스퍼트 기사가 열 명이 넘었다. 견습기사들도 모두 소드 익스퍼트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주변의 끈질긴 유혹이 있었지만 권력을 탐하지 않는 전형적인 기사였던 제이머 남작은 모든 권유를 물리쳤다. 그러자 제이머 남작을 권유하기 위해 찾아왔던 귀족들이 모두 화를 내며 돌아갔다. 그리고 몬스터 랜드의 습격 시간이 다가왔다. 그때, 제이머 남작을 도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제이머 남작은 오천 명의 군사와 사투를 벌였으나 결과는 멸문이었다. 몬스터들을 필사적으로 막아 내면서 제이머 남작은 최대한 사람들을 피신시켰다. 3만에 달하는 영지민들을 모조리 내보내고, 남은 기사와 병사들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한 것이다. 이야기를 하면서 감정이 격해졌는지 모스는 두 눈에 붉은 기운을 담은 채 말했다. “그 당시 저희들은 견습기사였습니다. 남작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에 저희들에게 도망쳐서 살아남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희에게 가전 검술을 전수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남작님을 외면한 귀족들에게 가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일가족을 모두 데리고 이곳에 정착하게 된 것입니다.” 모스의 긴 이야기가 끝났다. 엘은 붉어진 그의 두 눈을 보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이더를 제외한 다른 마을 대표들의 두 눈도 붉어져있었다. “음......” 엘은 그들을 보며 뭐라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들의 슬픔이 충분히 전해졌지만 그들을 완전히 이해한 것도 아닌데 어설프게 위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엘은 그들의 어리석음을 질책하고 싶었다. 그들의 실력이면 다른 나라에 가서 충분히 기사의 작위를 얻을 수 있다. 그러면 그들의 가족 또한 편안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그런데 왜 굳이 죽음의 장소라 불리는 이곳에 가족을 데리고 와서 고생을 시키는 것인가? 엘은 그들의 고지식함에 전혀 공감을 얻지 못했다. 하지만 어쩌랴. 세상 사람들은 모두 다른 생각과 사상을 가지고 있는 것을. 엘은 그것을 이해하고 오히려 이걸 하나의 기회로 여겼다. 저들을 잘 회유하면 자신의 휘하에 끌어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당장 끌어들이는 것은 엘도 싫고, 저들도 싫어할 것이다.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그들의 슬픔이 가시길 기다린 엘이 말하였다. “사실 이곳 트롤들을 몰아내는 건 제게 있어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엘의 말에 몇몇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이 지닌 골렘의 신위를 보아서이다. 엘이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는 트롤을 가지고 몇 가지 일을 해 볼 생각입니다. 그러기에는 트롤들의 결속력이 너무나 끈끈하죠.” 마이더의 눈이 번뜩였다. 엘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느낀 것이다. “그렇다면......?” “눈치 채셨군요. 그렇습니다. 일단트롤 킹을 제거하려 합니다.” “......!” 엘의 말에 모두들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엘의 말이 너무 파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곳 트롤 벨리 안으로 들어와 여태껏 트롤 킹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아니 볼 여유가 없었다. 쉬지 않고 쳐들어오는 트롤을 막아 내는 것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만에 이르는 트롤들을 뒤로하고 트롤 킹부터 처치하자니? 엘의 말이 마냥 무모하게만 들리는 그들이었다. 엘은 불신이 가득 담긴 그들을 힐끗 보며 말했다. “제 말이 어떨지는 결과가 보여 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제가 분지에 존재하는 트롤들을 모두 제거하면 제 일을 도와주시면 됩니다.” 그렇게 말한 엘은 몸을 돌려 그들에게서 멀어져 갔다. 카이나가 그들을 한 번 본 뒤 엘의 뒤를 따랐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사람들은 여전히 불신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카시아스 왕국 디벨 상단 본부. 최근 대륙 100대 상단에 들어 그 영향력이 하루가 다르게 커지고 있는 디벨 상단에 손님이 찾아왔다. 손님은 놀랍게도 디벨 상단이 딱 세 개만 발행한 최상급 손님만 지닐 수 있는 패를 지니고 있었다. 그 소식은 곧장 디벨에게 전해졌고, 디벨은 서둘러 업무를 마치고 자신을 찾은 손님에게 향했다. 그리고 그 손님을 보는 순간 표정이 환하게 변했다. 그는 손님에게 얼른 인사를 건넸다. “무사하셨군요, 엘 님.” 그렇다. 디벨을 찾은 손님은 다름 아닌 엘이었던 것이다. 대륙 극서부라 할 수 있는 트롤 벨리에서 카시아스 왕국 반자크까지 무척 먼 거리였지만 마법진과 매직 스톤의 도움을 받은 엘은 무리 없이 이곳에 올 수 있었다. 디벨은 엘이 무척 반가웠다. 대륙 100대 상단에 속한 상단을 이끌고 있는 만큼 그의 정보망은 무척 넓었기 때문이다. 디벨은 걱정 어린 표정으로 엘에게 물었다. “블리어드 제국에서 큰일이 일어났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엘은 빙긋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저도 제 한 몸 귀한 줄 잘 알고 있으니까요.” “잘되었군요. 혹시 다치시지 않으셨을까 무척 걱정했는데 말입니다.” 엘은 그런 디벨의 말이 무척 기분 좋게 들려왔다. 누구라도 자신을 걱정해 주면 그것만으로도 고맙다. 엘은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겠다고 했지만 자신을 주군이 아닌 한 사람으로서 걱정해 주는 디벨이 무척 고마웠다.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은 것인 줄 몰랐네요.” “하하! 저야 재물이 모든 것이지만 엘 님은 몸 하나가 전부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몸을 조심하셔야죠.” “그렇게 되는 건가요?” 두 사람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즈음 엘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제가 이번에 찾아온 것인 디벨 님에게 부탁이 있어서 입니다.” 디벨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별로 변하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말씀하십시오.” “이번에 마탑을 세우려고 합니다.” “마탑을요?” 이번에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디벨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탑은 7클래스 마법사만 세울 수 있는 전유물이다. 디벨도 여느 사람처럼 엘이 블리어드 제국에서 일으킨 소동이 어느 정도 과장되어 퍼져 나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었다. 설마...... 설마 엘이 7클래스 마법사였단 말인가? 그런 디벨의 생각을 예상이라도 하듯, 엘이 말해 주었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저는 7클래스 마법사입니다.”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놀라움이 가득 담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디벨은 재빨리 제정신을 되찾고는 물었다. “마탑을 세우신다고 하셨지요? 어디다가 세우려고 하 십니까?” “트롤 벨리에 세우려고 합니다.” “트롤 벨리...... 트롤 벨리......” 잠시 엘이 말한 장소를 중얼거리던 디벨이 곧이어 경악이 담긴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대륙 3대 금역 중 한 곳인 몬스터 랜드 트롤 벨리를 말하시는 겁니까?” “맞습니다.” 거침없이 대답하는 엘의 태도에 할 말을 잃은 디벨. 그는 역시 마법사는 자신 같은 범인의 생각에 맞출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당연하지 않은가? 세상은 넓고 마탑을 세울 곳은 많다. 어느 왕국이나, 제국이라고 해도 마탑을 세우고 싶다고 하면 쌍수를 벌려 환영한다. 그리고 얼마든지 좋은 위치에 세울 수 있다. 그런데 트롤 벨리라니? 트롤 킹을 중심으로 수만 마리의 트롤들이 머물고 있는 곳에 무슨 마탑을 세운단 말인가? 정녕 믿기 힘든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엘은 디벨의 심정을 알기라도 하듯 말을 꺼냈다. “물론 놀랍고 제가 정상적으로 보이시지 않으시겠죠. 하지만 제 말을 들으면 생각이 바뀌실 겁니다.” 엘은 자신이 구상한 사업을 디벨에게 설명하였다. 디벨의 얼굴은 흥미진진하더니, 엘의 이야기가 이어짐에 따라 놀라움, 그리고 마지막에는 경악이 자리 잡았다. 엘의 말이 끝나고 디벨은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그만큼 엘의 생각은 기발했기 때문이다. 한참 동안 침묵하던 디벨. 그가 정신을 차리고 한 말은 경악이 가득 담긴 어조로 감탄하는 것이었다. “정말 놀랍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계셨다니...... 만약 그 사업이 성공한다면 저희 상단은 대륙 10대 상단으로 부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는 일이었다. 대륙 10대 상단이라니? 이는 대륙 100대 상단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거대한 이름이다. 대륙 10대 상단은 나머지 대륙 100대 상단이 연합해도 그 힘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대륙 10대 상단의 이름은 높은 벽이었고,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할 거대한 아성이었다. 그런데 지금 디벨은 엘의 사업 구상을 듣고 대륙 10대 상단을 언급하였다. 그것은 즉 엘이 말한 사업이 그만큼 가치가 크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다니 무척 영광입니다.” 디벨의 말에 엘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다. 아무리 엘이 뛰어나다고 하나 그는 마법사다. 상인의 관점에서 본 사업의 구상은 당연히 틀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내심 자신의 말을 듣고 디벨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다. 그런데 반응은 엘의 예상을 뛰어넘는 대단한 것이었다. 자신의 구상이 좋은 반응을 끌어냈다는 것에 엘 또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엘의 사업 구상으로 잠시 기분이 좋아진 그들은 이야기의 논점으로 돌아왔다. 디벨이 엘에게 물었다. “그렇다떤 마탑을 만들 사람들을 모집해야겠군요. 언제까지 모아야겠습니까?” “최대한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오늘 디벨 님과 이야기를 나눈 뒤 곧장 트롤 벨리로 돌아가 그곳을 정리할 것입니다.” “그럼 최대한 사람을 빨리 모아 보겠습니다.” “부탁드리 겠습니다.” 엘의 말에 디벨은 손사래를 쳤다. “엘 님이 제 상단에게 해 주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그렇게 생각해 주시면 저 또한 무척 기쁘군요.” “엘 님이 부디 일을 수월하게 진행하길 빌겠습니다.” 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 일이 많다. 이제 트롤벨리를 정리해야 한다. “저는 그럼......” “안녕히......” 사라진 엘의 모습을 쫓으며 디벨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보면 볼수록 끝을 알 수 없는 소년이었다. 저 어린 나이에 7클래스의 경지에 이르다니 ...... 그리고 누구도 생각해 내지 못할 기발한 생각을 연이어 한다. 디벨은 사라진 엘에게 던지듯, 질문을 던졌다. “당신의 끝은 도대체 어디까지입니까......” 그렇게 엘은 마탑을 세우는 데 가장 큰 지원군을 얻게 되었다. 트롤 벨리를 지배하는 위대한 지배자, 트롤 킹은 자신의 감각에 걸려온 은밀한 기운에 단잠에서 깨었다. “크르르르!” 단잠에 깨어 무척 기분이 나쁜 듯 사나운 소리를 내며 트롤 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놀랍게도 자리에서 일어선 트롤 킹의 키는 무려 8m에 달했다. 대륙에 알려진 트롤 킹보다 족히 2m는 더 큰 키였다. 놀라운 건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트롤 킹 주변에 서린 은은한 기운, 그것은 다크 소울에서 뿜어지던 다크 오러였다. 싸울 때만 미약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다크 오러를 트롤 킹은 전신에서 은은하게 뿜어낼 수 있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대륙에 알려진 정보만 해도 소드 마스터보다 강할 거라 추측되는 트롤 킹이다. 그런 트롤 킹이 정보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면 도대체 얼마나 강하다는 이야기란 말인가? 자리에서 일어난 트롤 킹은 자신의 감각을 자극하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세상 사람들은 트롤 킹이 항상 주변에 엄청난 호위를 달고 다닌다고 알고 있지만 실제로 전혀 그러하지 않다. 아니, 지금 이 트롤 킹이 특이한 것이다. 트롤 킹은 자신의 힘을 믿었고 세상에 자신을 해할 수 있는 건 아무도 없다고 자신했다. 지금 자신이 부하들을 이끌고 레베탄 고원으로 향한다면 충분히 그곳의 지배자가 될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 정도로 강한 것이다, 트롤 킹은. 그랬기에 그는 지금 자신의 감각에 거슬리는 것도 잠에서 깨고 난 뒤 가볍게 운동을 위한 것으로 여겼다. 그것이 그의 자존심이었고 자신감이었다. 이윽고 트롤 킹의 발걸음이 넓은 분지 한곳에 이르렀다. 그러자 그곳에는 5m에 달하는 골렘이 세 기가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허공 위, 그곳에 떠 있던 엘은 두 눈을 빛냈다. 그가 트롤 킹이 머물고 있는 곳에 골렘을 소환하여 트롤 킹의 감각을 자극하여 그것을 이끌어 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성공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엘은 트롤 킹의 모습을 보고는 경악이 담긴 어조로 소리를 질렀다. “이게 뭐야...... 완전 괴물이잖아?” 엘은 트롤 킹을 꾀어 내기 위해 몇 가지 준비를 하였다. 그중 몇 가지 방법을 시도했지만 실패, 최후의 한 수인 트롤 킹의 감각 자극하기 방법이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막상 본 트롤 킹은 완전 괴물이었다. 세상에 트롤의 덩치가 어떻게 8m에 이를 수 있단 말인가! 얼마 전에 본 트롤 대전사보다 월등한 크기였다. “정말 괴물이야. 하기야 이러니 오만이 넘는 트롤들이 따르는 거겠지.” 그러면서 엘은 트롤 킹을 유심히 살폈다. 트롤 킹의 움직임에는 여유가 넘쳤다. 엘은 그것을 강자의 여유로 보았다. 확실히 트롤 킹의 주변에 풍기는 기세는 대단했다. 그리고 전신을 은은하게 감싸고 있는 다크 오러에서는 한 줄기 위험을 느끼고 있었다. “위험할지도......” 엘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트롤 킹에게서 느껴지는 다크 오러는 보통 힘이 아니었다. 애당초 엘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했고, 그 무위는 어느 정도일지 섣불리 예측하기 힘들었다. 다크 오러는 일반 오러보다 그 파괴력이 월등하다. 일반 오러보다 방어력이 약하다는 약점이 있지만 트롤에게는 특유의 회복력과 질긴 가죽이 있다. 그야말로 최고의 특징이 서로 만난 셈이다. “일단 어느 정도인지 살펴볼까......” 일반 사람이었다면 목숨을 걸어야겠지만 엘에게는 골렘이 있다. 골렘은 부서져도 부서져도 끊임없이 복구된다. 그것이 골렘의 장점이고 골렘의 장점이었다. “가라!” 파앗! 세 기의 골렘이 바람과 같이 트롤 킹에게 달려들었다. “크르르!” 자신에게 접근하는 골렘에게 가소롭다는 듯 비웃음을 지은 트롤 킹! 곧이어 트롤 킹의 손에 어마어마한 크기의 나무 몽둥이가 휘둘러졌다. 아니, 저건 나무 몽둥이라기보다 차라리 나무 한 그루를 통째로 뽑아온 듯했다. 퍼억! 트롤 킹이 휘두른 방망이가 골렘에 적중했다. 그러자 골렘의 가슴이 함몰되며 뒤로 자빠졌다. 그 틈을 타 다른 두 기의 골렘이 트롤 킹에게 달려들었다. 두 골렘은 강한 힘을 담은 주먹을 트롤 킹에게 내질렀다. 퍽. 하지만 골렘이 내지른 주먹은 트롤 킹에게 큰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크르...... 크르르!” 골렘을 비웃듯 바라본 트롤이 그대로 방망이를 휘둘렀다. 퍼억! 퍼억! 두 번의 타격음과 함께 강렬한 타격을 입은 두 골렘. 골렘의 공격은 트롤 킹에게 전혀 타격을 입히지 못한 듯했다. 그에 반해 트롤 킹의 공격에 골렘은 강한 타격을 입혔다. 차라리 검을 썼으면 모른다. 하지만 트롤 킹이 사용하는 건 둔기였기에 골렘에게 주는 타격이 훨씬 컸다. 강력한 일격에 골렘의 수복 속도는 더뎠다. 그런 모습에 엘이 미간을 좁혔다. “생각보다 너무 강하군.” 엘은 골든 나이트가 아니면 상대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트롤 킹의 힘을 더 알아보고 싶었지만 그러다간 자칫 골렘이 수복 불가능에 이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모두 아공간으로 돌아가라!” 엘의 외침에 세 골렘의 주변으로 공간의 틈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공간의 틈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그리고 외쳤다. “타나!” 그러자 분지 한쪽에 나 있던 곳에서 금빛 신형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것은 엄청난 속도로 트롤 킹에게 쏘아졌다. 쐐애액! “크르?” 트롤 킹은 자신의 위에서 무언가 엄습해 오는 걸 느끼고는 본능적으로 나무 방망이를 추켜올렸다. 그리고 그 방망이 위로 골든 소드에 두른 오러 블레이드가 부딪쳤다. 꽈아아앙! 어마어마한 폭음이 분지에 울려 퍼졌다. 그 크기가 3m밖에 되지 않지만 매직 메탈과 황금을 두른 골든 나이트다. 그 무게가 어마어마할 수밖에 없다. 골든 나이트는 지금 그 무게를 모두 실어 공격을 펼친 것이다. 당연히 그 파괴력은 엄청날 수밖에 없다. 하물며 오러 블레이드가 둘러진 검과 충돌했는데 말이다. “크으으으! 크어어어어! 크아아아아아!” 트롤 킹은 분지가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다. 트롤 킹의 손에 쥐어졌던 나무 방망이는 반 토막으로 부러져 있었고, 방망이를 쥐었던 손은 탈골된 듯 축 늘어져 있었다. “이걸 버티다니......” 그런 트롤 킹의 모습에 엘은 질린 얼굴을 하였다. 방금 전 골든 나이트의 일격은 트롤 킹을 단숨에 죽이기 위한 공격이었다. 그런데 트롤 킹은 그 공격을 버틴 것이다. 정말 괴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기야 일반 트롤 덩치의 세 배나 되니 지금으로도 충분히 괴물이지만 말이다. 엘은 탈골되어 있는 트롤 킹을 보며 골든 나이트에게 처리하라고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잠깐! 저걸 죽이지 말고 사로잡아서 부하로 쓰면 더 좋지 않을까?” 순간적으로 든 생각이다. 왜, 그거 있지 않던가! 적의 마음을 돌려놓는 궁극의 마법, 마인드 컨트롤! “후후!” 그것을 생각해 낸 엘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트롤 킹이 강하다고 하나 결국은 몬스터다. 몬스터를 부하로 삼는 마법은 비록 흑마법이지만 여러 가지가 있다. 정신 마법과 적절히 섞는다면 충분히 부하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트롤 킹을 부하로 삼는다라...... 그 순간부터 엘의 마음은 정해져 있었다. 엘이 외쳤다. “타나! 죽이지 말고 사로잡아라!” “주군. 명령. 승낙.” 골든 나이트의 안면 가리개에서 푸른 안광이 뿜어져 나오며 골든 소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쏜살같이 트롤 킹에게 달려들었다. “크어어어!” 놀라운 회복력으로 탈골된 팔에 쥐어진 반 토막 난 방망이를 휘두르는 트롤 킹이었지만 골든 나이트를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만큼 방금 전 일격에 입은 타격이 컸기 때문이다. 트롤 킹이 휘두르는 나무 몽둥이를 가볍게 피한 골든 나이트가 검 면으로 트롤 킹을 강하게 후려쳤다. 퍼억! 트롤 킹 내부로 강렬한 마나가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트롤 킹의 내부를 사정없이 뒤흔들었다. “크르르......” 굳세게 버티던 트롤 킹의 눈이 서서히 넘어가기 시작했다. 쿵! 8m에 이르는 거구가 넘어가자 요란한 굉음이 주변에 울려 퍼졌다. 그 모습을 보며 엘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 무슨 맷집이 저렇게 강한 거지?” 골든 나이트의 공격에 끝까지 버티려는 트롤 킹의 서슬 퍼런 기세에 기가 질린 엘은 아공간에서 세 기의 골렘을 소환했다. 느리게 수복되는 골렘들을 보며 엘은 트롤 킹을 옮길 것을 명령했다. 잠시 후, 완전히 수복된 골렘은 트롤 킹을 짊어지고 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엘은 조용히 웃었다. 8 기상천외한 특산물 “......” 마을대표들은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금 그들의 눈앞에 있는 것 때문이다. 무려 8m에 이르는 거대한 덩치. 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질릴 듯하다. “이, 이게 그러니까...... 트롤 킹이란 말입니까?” 마이더가 떨리는 손길로 트롤 킹을 가리킨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떨리고 있었다. 그들이 언제 이러한 것을 볼 수 있었겠는가. 막연하게 트롤 킹이라고 하여 오우거만한 크기의 트롤일 줄 알았다. 그런데 이게 무엇인가. 오우거의 두 배 정도에 해당하는 크기가 아닌가. 그리고 전신에 은은하게 뿜어지는 기운은 트롤 킹을 더욱 위압감 있게 보이게 하였다. “보면 딱 알 수 있지 않나요? 잡느라 엄청 고생했는데......” 엘의 말에 그들은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경악, 놀라움, 경외 등등 갖가지 감정이 섞인 표정이었다. 마이더가 궁금한 표정으로 트롤 킹을 가리켰다. “트롤 킹의 무력은 어느 정도죠?” 그 말에 다른 사람들도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에게 알려진 트롤 킹의 무위는 소드 마스터 정도다. 그런데 보통 트롤 킹보다 월등한 크기에 전신을 감싼 은은한 기운은 알려진 것보다 더욱 강할 것이라 알려 주고 있었다. 그들의 물음에 못 대답할 것 없는 엘이다. 엘은 트롤 킹의 무위에 대해 대답해 주었다. “소드 마스터 이상. 준 그랜드 마스터 급.” “......” 침묵이 감돌았다. 모두들 믿기지 않는 눈으로 트롤 킹을 바라보았다. 설마하니 그 정도 무위를 지니고 있을 거라 생각했겠는가! 마이더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그, 그게 정말인가요?” “그 정도 될 거예요.” 대답을 하면서 엘은 마을 대표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미소를 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트롤 킹을 잡는 데 성공했으니 이제 트롤들을 분지에서 몰아낼 때가 되었군요. 조만간 마탑을 건설할 사람들이 올 테니 여러분들은 제게 최대한 협력해 주셔야 합니다.” 트롤 킹을 잡은 엘의 말이다. 트롤 킹의 무위가 그랜드 마스터에 준한다는 말도 거의 사실일 것이다. 마을 대표들은 엘의 말에 따라야 함을 느꼈다. 엘의 추진력도 추진력이지만 자신이 한 말을 지키는 그의 태도에서 그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제 뜻에 따라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뜻에 따라 주자 엘은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의 얼굴이 점점 감탄으로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3개월이라는 시간은 트롤 벨리를 너무나 빠르게 변화시켰다. 우선 트롤 킹의 실종이다. 오만의 트롤들의 구심점을 하던 트롤 킹이 사라지니 자연히 트롤들은 더 이상 뭉쳐있지 못했다. 각자 강한 트롤의 휘하로 흩어진 트롤들은 트롤 킹이 머물던 분지에서 사라졌다. 트롤들은 보통 굴에서 생활하기 때문이다. 그 틈을 파고들어 트롤 벨리에 머물던 사람들이 분지에 거점을 마련했다. 엘은 디벨 상단의 거점과 트롤 벨리에 텔레포트 게이트를 설치했다. 그리고 실피르에게 도움을 청하여 텔레포트 게이트를 사이로 디벨 상단이 구한 사람들을 데려왔다. 디벨에게 많은 돈을 받았는지 마탑 제조자들은 값비싼 재료를 들고 마탑을 세우기 시작했다. 거기에 엘의 마법과 골렘의 괴력이 더해지자 마탑은 빠르게 외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 외에도 엘은 마탑 옆에 거대한 건물 하나를 더 지었다. 족히 수만 명은 머물 수 있는 건물은 엘이 짐꾼용 골렘 몇 기를 더 만듦으로써 빠르게 만들어 낼 수 있다. 그 사이 간혹 나이트 골렘이 사라져 트롤들을 건물에 집어넣고는 하였다. 마침내 세 달의 시간이 모두 흐르자 분지 주변에 트롤은 씨가 말랐다. 그리고 마탑 주변에 열두 개 마을의 주민들이 모두 이주해 와 살 집을 건설했다. 사람들의 숫자는 얼추 1만 5천 명에 달했다. 거의 천 명에 달하는 건설가들이 왔기에 마을도 계획성 있게 건설되었다. “이제 슬슬 윤곽이 잡히네요.” 엘은 오랜만에 편안하게 앉아 차를 즐기며 입을 열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실피르와 세레나, 카이나가 평화로운 표정으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잖아.” “그렇죠. 이제 시작인걸요.” 엘이 슬쩍 웃으며 말하자 세레나가 궁금한 듯 물었다. “그럼 이제부터 무엇을 하시려고요?” “뭘 하긴. 이제 마탑을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확실한 자금원을 만들고 우방 세력을 만들어야지.” “우방 세력이요?” 세레나의 반문에 엘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더욱 짙어졌다. “그래 우방 세력. 아주 가까운 곳에 있지. 아주 가까운 곳에......” 엘의 시선은 동쪽을 향하고 있었다. 루비어스 백작령. 톨리안 왕국 서부에 위치한 곳으로, 북으로 바다를 접하고 있어 해산물이 풍부한 영지였다. 하지만 마법사가 극도로 적은 톨리안 왕국의 사정상 그 해산물을 외부로 진출시키지 못하여 무척 가난한 영지이기도 했다. 최근 루비어스 백작령은 이 대를 걸쳐 천재를 배출했다. 첫째는 마법의 천재 레이언 루비어스고 둘째는 로웰린 루비어스다. 하지만 루비어스 백작가는 성세는커녕 간신히 가문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영문 모를 괴한들의 습격으로 멸문에 가까운 타격을 한 차례 입었기 때문이다. 멸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루비어스 백작가를 일으켜 세운 이는 실종된 레이언의 동생 루이 루비어스였다. 그는 탁월한 경영력으로 영지 부활의 틀을 마련하였고, 그의 딸인 로웰린이 당당하게 여백작으로 인정받으며 루비어스 백작가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루비어스 백작가 옆에는 서부의 강자 테란델 후작령이 존재한다. 야심이 많은 테란델 후작은 호시탐탐 루비어스 백작령을 노렸다. 루비어스 백작령이 테란델 후작령에 속한다면 서부 영지 전체가 테란델 후작 영향 아래 놓이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평소 루비어스 백작의 미모에 반해 있던 테란델 후작의 둘째 아들 라크를 내세워 청혼을 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현재 루비어스 백작가는 왕권 다툼 그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고 있다. 때문에 중앙군을꽉 쥐고 있는 귀족들이 병력을 전혀 보내 주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최소한 가문을 보호하고 싶으면 테란델 후작가의 청혼을 받아들이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하지만 루비어스 여백작은 그것에 응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가문의 보전을 중요시하지만 가훈인 부끄러운 일을 하지 말자에 최선을 다하는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중앙군의 도움 없이 그녀는 오크 포레스트에서 쏟아진 오크들을 상대하고 있다. 매년 오크 포레스트에서 약 십만의 오크가 쏟아져 나온다. 루비어스 백작령은 오크 포레스트와 직접 맞대고 있지 않았기에 상대하는 오크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전체 숫자에 비해 적다는 것이지, 실제로 일만에 달하는 오크는 무시무시한 숫자임이 분명했다. 루비어스 백작령에 상주하고 있는 군대는 총 일만이다. 본래 더 동원할 수 있지만 영지 특성상 부유하지 않아 더 많은 군대를 보유하지 못한 것이다. 일만의 군대로 일만의 오크는 매우 막기 힘들다. 비록 성벽에 의지한다고 하나 매년 성벽을 상대하다 보니 오크들 스스로 성벽에 의지한 인간들을 상대하는 방법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선두에 선 오크들이 긴 사다리를 성벽에 걸친다. 그리고 그걸 잡고서 올라간 뒤 병사에게 달려든다. 수백 수천 발의 화살이 쏘아지고 있지만 성벽 위로 올라오는 오크들을 막기에는 무리였던 것이다. “막아라! 오크들이 올라오지 못하게 막아!” 로웰린이 푸른 오러가 서린 검을 휘두르며 외쳤다. 수십 마리의 오크들을 베어 낸 그녀의 갑옷에는 오크들의 피가 흥건하게 묻어 있었다. 사방에서 악전고투가 벌어지고 있다. 루비어스 백작가 기사들이 오크들을 베어 넘기고 있었지만 성벽 위로 넘어오는 오크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재정이 충분하지 않은 루비어스 백작가의 사정 때문에 기사들이나 그나마 괜찮은 방어구를 걸치고 있을 뿐, 병사들의 장비는 형편이 없었다. 간단한 경갑에 창칼을 소지한 정도였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오크는 성인 남자 세 명분의 힘을 발휘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대륙에 퍼진 일반 오크들이지, 오크 포레스트에서 나온 오크들은 끝없는 약육강식에서 살아남은 강한 오크들이다. 최소 대륙에 퍼진 오크들보다 두 배 이상 강한 게 바로 오크 포레스트의 오크인 것이다. 훈련도는 충분하지만 장비가 따라 주지 않는 게 바로 루비어스 백작가의 군대인 것이다. 성 아래에는 아직 처리하지 못한 오크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성벽 위로 올라오는 오크들을 베어 넘기며 로웰린이 절망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아아, 이 위기를 어떻게 넘긴단 말인가?” 현재 루비어스 백작가의 전력으로는 이 오크들을 처리하기도 힘들다. 하물며 이곳과 맞닿게 된 트롤 벨리에서 트롤들이 쏟아져 나온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루비어스 백작가는 그대로 멸문하게 될 것이다. 그것을 생각한 로웰린은 이를 악다물었다. 중앙군이 이곳으로 지원을 왔다면 오크들을 막아 내는데 이토록 고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가문을 흡수하기 위해 이토록 비겁한 전략을 사용하다니...... “익!” 이미 첩을 다섯이나 거느리고 있으면서 뻔뻔한 얼굴로 자신에게 청혼을 요구하는 라크의 얼굴을 떠올리자 로웰린은 짙은 분노를 내뿜으며 검을 휘둘린다. 순간 오크의 얼굴이 라크로 보인 것은 그녀의 검을 더욱 강하게 휘두르게 해 주는 원동력이 되어 주고 있었다. 하지만 오크들의 숫자는 너무나 많았고, 기력이 다한 기사들의 검에 서린 오러도 점차 희미해지고 있었다. “하아! 하아!” 쉼 없이 오크들을 상대한 로웰린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병사들은 그리 큰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기력이 다한 듯했다. 그에 반해 성벽 위로 올라오는 오크들은 아직 생생해 보였다. “아! 오크 일만도 막기 힘든 건가......” 오크 1만 마리 정도는 쉽게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녀는 지금 상황이 힘들다고 여겼다. 기력이 다한 병사들이 이대로 검을 쥐고 싸우기란 무척 힘들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늘이 우리 루비어스가를 버리는 거란 말인가......” 그녀가 그렇게 외칠 때, 돌연 그녀의 귓가에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썬더 스트라이크(Thunder Strike)!” 그와 함께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마나의 유동! 순간 세상이 금빛으로 물들며 하늘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뇌전이 지면을 향해 내리꽂혔다. 꽈르르릉! 뇌전의 저주인가. 금빛 뇌전은 모든 것을 부숴 버리는 어마어마한 기세를 담고 지면을 향해 연속하여 내리꽂혔다. 꽈릉! 꽈르릉! 그러자 지면에 우글거리던 오크들은 비명을 지르며 뇌전에 적중되어 타 죽기 시작했다. “쿠엑!” “쿠에엑!” 7클래스 뇌전계 최강의 마법 썬더 스트라이크. 그 마법에 적중당한 오크들은 속절없이 타 죽었다. 7클래스 범위 마법은 능히 수천에 해당하는 생명체를 살상할 수 있는 엄청난 마법이다. 세상을 금빛으로 뒤덮던 뇌전이 걷혔을 때, 드러난 광경은 검게 타 버린 오크들의 시체뿐이었다.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은 입이 찢어져라 크게 벌렸다. “맙소사!” 로웰린도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녀는 방금 전 자신이 본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어찌 안 그러할 수 있겠는가! 갑자기 세상이 금빛으로 물들더니 지면 가득 존재하던 오크들이 모두 새까맣게 변해 죽어 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로웰린은 이 현상이 일어나기 전 들렸던 한 줄기 목소리와 거대한 마나 유동을 생각해 내고는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서, 설마 이게 마법?” 너무나 강력한 파괴력을 보였기에 순간 깨닫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톨리안 왕국에는 6클래스 마법사가 최고 마법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제나 궁에 상주했기에 로웰린이 본 최고 마법은 5클래스 마법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어디 7클래스 마법이 5클래스 마법과 비교가 가능한가. 초자연현상인 듯한 방금 전 현상은 로웰린의 넋을 송두리째 빼앗기에 충분했다. “바, 방금 전 마법을 시전한 건 누구?” 살아남은 수백의 오크는 더 이상 로웰린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방금 전 오크들을 전멸시킨 마법사만 존재할 뿐이었다. 그녀가 시선을 위로 옮기자 까마득한 상공에서 서서히 하강하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무언가 빛이 번쩍하더니, 로웰린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어머?” 로웰린은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러자 로웰린 앞에 나타난 이, 로브를 뒤집어쓴 엘은 살짝 미소를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놀라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아, 아니에요.” 엘의 사과에 로웰린은 재빨리 자세를 고쳐 정중하게 대답했다. 목적이 무엇이던 간에 오크들의 공격에서 구해 준 은인이 아닌가. 게다가 방금 전 마법은 분명 7클래스 마법이었다. 즉, 눈앞에 있는 마법사는 7클래스 마법사임이 분명했던 것이다. “아, 제가 실수를 했군요. 먼저 자기소개를 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말한 엘은 로브를 벗었다. 그러자 로웰린이 흠칫한다. 엘의 외모가 너무 젊었기 때문이다. 엘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정중한 어조로 자기소개를 하였다. “엘리미스라고 합니다. 이번에 톨리안 왕국에 소속된 마법사이기도 합니다.” “왕국에 소속된 마법사요?” 로웰린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러자 엘이 주변을 한 차례 둘러보고 말한다. “이곳에서 말할 사항이 아닌 것 같군요. 안으로 좀 안내해 주실 수 있나요?” 그에 로웰린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그녀는 엘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여 사과를 하였다. 왕국에 소속된 7클래스 마법사는 보통 후작급 귀족으로 대우받는다. 게다가 엘은 자신의 영지를 구해 준 은인이 아닌가. 이런 곳에서 이야기하는 건 무척 실례다. “죄송합니다. 자, 이리로......” “뭘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엘은 로웰린의 뒤를 따랐다. 그러면서 그의 눈은 루비어스 백작령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 “마땅히 대접할 게 없어서 죄송합니다.” 로웰린이 엘에게 차를 내오고 한 말이다. 엘은 로웩린의 미안해하는 모습에 고개를 살짝 저었다. “아니에요. 이 정도면 훌륭한걸요.” 그러면서 엘은 차를 한 모금 마신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차 맛이 좋은걸요? 백작님이 직접 끓여 주셔서 그런 건가요? 소문으로 듣기에는 백작님은 검에 모든 것을 건 검사라 불리시는데 말이죠.” “아니에요. 검 말고 여러 가지도 한답니다.” 방금 전 전장에서 보였던 용맹한 모습과 달리 로웰린은 지금 아주 다소곳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고립무원의 처지에서 구해 준 엘이다. 바라보기만 해도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맑은 눈은 그가 한 점 사심이 없다는 걸 로웰린에게 알려 주고 있었다. 지난 세월 끊임없이 귀족들에게 시달려 온 로웰린은 자신이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자신 있어 했다. ‘이거...... 생각보다 심각한데?’ 로웰린이 끓인 차를 마시며 엘은 그녀를 힐끗 바라보고는 생각에 잠겼다. 루비어스 백작령이 심각한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다는 걸 엘 또한 알고 있다. 하지만 직접 와서 본 결과 그 정도가 생각보다 더 심했다. 처음 보았을 때 병사들의 무장 상태에선 확인할 수 있었다. 병사들의 무장조차 제대로 못 시킬 정도라면 도대체 얼마나 자금이 부족한 것이란 말인가. 엘은 혹시나 로웰린이 사치를 하고 있나 해서 그녀에게 차를 부탁했다. 그런데 눈으로 확인한 결과 로웰린 스스로가 무척 절약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지금 엘이 마시고 있는 차는 부유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실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차였다. 게다가 저택을 둘러보니 휑한 것이, 값진 것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이 정도였단 말인가......’ 엘은 루비어스 백작가의 참담한 모습을 보고는 속으로 무언가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엄연히 자신은 루비어스 백작가의 가족이라 할 수 있지 않던가! 그런데 루비어스 백작가가 이렇게 참담한 모습을 하고 있으니 참을 수가 없었다. 후루룩. 차를 모두 마신 엘이 로웰린을 강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엘의 눈빛을 받은 로웰린이 움찔한다. 엘이 입을 열었다.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오크에게 고전하는 루비어스 백작님을 도와 드리기 위함이기도 하고 루비어스 백작님에게 알려 드릴 것이 있기도 해서 온 것입니다.” “알려 줄 것이요?” 약간 불안한 표정을 지은 로웰린이 고개를 갸웃하자 엘이 특유의 미소를 지은 채 입을 열었다. “모두 좋은 것들이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러면 다행이네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엘이 말을 꺼냈다. “우선 오크들의 습격을 막았지만 트롤들의 습격이 있을 겁니다. 그걸 알고 계시겠죠?” “네......” 로웰린의 안색이 극도로 어두워졌다. 트롤 벨리에서 쏟아져 나올 트롤들을 상대할 걸 생각하니 기분이 급격히 암울해진 것이다. 트롤 하나하나가 소드 익스퍼트에 버금간다. 작년에는 중앙군의 지원과 성벽에 의지하여 간신히 막아 냈지만 지금은 다르다. 루비어스 백작가에 중앙군의 지원이 오지 않은 것이다. 이대로 트롤 벨리에서 트롤들이 공격해 온다면 루비어스 백작가는 멸문을 면치 못하리라. 당면한 현실이 너무 잔혹했기에 로웰린의 안색이 어두워진 것이다. 그렇다고 피하자니 다른 곳이 피해를 입게된다. 빠져나갈 길이 없는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눈앞의 마법사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다. 눈앞에서 목격한 7클래스 마법. 그것이라면 트롤 수만 마리가 달려들어도 무섭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이 마법사는 왕국에 속한 마법사다. 대부분 귀족들처럼 왕자 파벌에 속해 있을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자신을 도와줄 확률은 거의 없다. 이번에 도와준 것도 아마 무슨 요구 조건이 있을 게 분명했다. 엘의 행동을 순수한 선의로 받아들이기에는 그녀가 그동안 겪은 일들이 너무나 가혹했다. 그런 로웰린의 심정을 이해한 엘이 곧장 말을 이었다. “저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저는 국왕 전하에게 마탑 설립을 부탁받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제가 좋은 소식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럼......” 로웰린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녀의 마음속에 희망이 생겨나고 있었다. 7클래스 마법사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수천 마리의 오크들을 일거에 쓸어 버린 마법이라면 트롤도 두렵지 않았다. 엘이 계속 말을 이었다. “트롤들은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로웰린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도와주시는 건가요?” “아니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게 무슨......?” 로웰린이 다소 풀 죽은 얼굴로 엘에게 물었다. 트롤들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에 엘이 도와줄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나 보다. 그에 엘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또박또박 말하기 시작했다. “트롤 벨리의 트롤들은 정리 중입니다. 그러니 트롤 벨리 밖으로 나오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 아직 엘의 말을 파악하지 못한 로웰린. 잠시 후, 그녀는 엘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는 입을 크게 벌렸다. “에에에?”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이번에 톨리안 왕국에 정착하게 된 엘리미스입니다. 제가 마탑을 세운 곳은 트롤 벨리로, 현재 대부분의 트롤들을 제거한 상태입니다.” “......” 정신 공황에 빠진 로웰린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멍하니 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로웰린은 한참이 지나서야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제정신을 차린 그녀는 엘에게 질문을 던졌다. “바, 방금 전 하신 말씀이 사실인가요?” 그런 그녀의 반응을 예상한 엘이 미소를 띤 얼굴로 대답해 주었다. “물론입니다. 그러니 트롤들이 못 뛰쳐나오지 않습니까? 현재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트롤들이 제거된 상태입니다. 조만간 모든 트롤들이 제거될 것입니다.” “......” 로웰린은 아무런 말도 못했다. 아니, 그녀는 눈물을 글썽인 채 벅차오르는 감정을 추스르기 바빴다. 내심 포기했었다. 사방이 적이었고 그녀를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었다. 그런데 오늘 여기서 갑자기 나타난 마법사가 도와주었다. 오크들을 물리치는 걸 도와준 것뿐만 아니라 트롤 벨리의 트롤들도 모두 제거했단다. 기뻤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제 살았다는 감정이 전신을 휩쓸고 지나갔다. 지난 세월 가문을 이끌어 오느라 얼마나 고생했던가. 트롤 벨리를 접한 곳에 영지를 두고 늘 가슴을 졸이며 살아왔다. 당장 유지하기에도 벅찬 가문이 몬스터들의 습격으로 멸문할까 봐,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무고하게 잃게 할까 봐. 트롤 벨리가 사라진 것은 그녀에게 무엇보다 큰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엘은 속으로 미소 지은 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만으로 기뻐하면 안 되는데요. 앞으로 루비어스가는 톨리안 왕국 제일가문이 될 것입니다. 저로 인해서 말이죠.’ 로웰린은 엘의 사촌 누나가 된다. 항상 근심하고 있던 그녀가 기쁨이 가득한 울음을 터뜨리고 있으니 엘의 마음이 뭉클해지며 그녀의 감정과 동화되고 있었다. 잠시 후, 눈물을 닦아 내며 그녀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못난 모습을 보였네요.” “아닙니다. 그나저나 이 일로 이렇게 기뻐하실 줄 몰랐네요. 아직 몇 가지 더 할 말이 있는데요. 후후!” “그런가요?” 로웰린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자 엘은 다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루비어스 백작령에 바다와 접하고 있는 땅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로웰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희 영지 삼분의 일이 바다와 접하고 있어요.” “그럼 미역과 굴이 나는지요?” “네, 넘칠 정도로 납니다만......” 그에 엘이 밝은 표정을 지었다. 혹시나 했는데 저것들도 바다에 나는 것이다. 엘은 로웰린에게 말했다. “제가 그것들을 모두 사도록 하겠습니다. 루비어스 백작령에서 나는 모든 해산물을요.” “네? 해산물을요?” 로웰린이 화들짝 놀라며 엘에게 물었다. 그러자 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해산물이 많이 필요하거든요. 가격은 대륙의 일반 가격으로 매기고 사겠습니다. 어떻습니까?” 로웰린의 표정이 급격히 밝아졌다. 루비어스 백작령에는 변변한 수입원이 없다. 넓은 평야가 펼쳐져 식량이 풍부한 것도 아니고, 광산이 있는 것도 아니다. 딱 하나, 해산물이 백작령의 수입원이 될 수 있지만 마법이 덜 발달된 톨리안 왕국에서 그것은 수입원이 될 수 없다. 루비어스 백작령에서 해산물은 썩어 넘칠 정도로 많이 난다. 그런데 지금 엘이 그것들을 모두 구입하겠다고 한 것이다. 엘은 로웰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마탑을 세운 트롤 벨리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이 곳이죠. 해산물은 모두 마법 처리를 해서 운반할 생각입니다. 그러니 백작님의 승낙만 떨어지면 됩니다.” “정말...... 모두 사시는 건가요?” 로웰린은 아직도 믿을 수 없었다. 해산물. 잘만 하면 루비어스 백작가의 주요 수입원이 될 수 있겠지만 톨리안 왕국 마법 수준이 떨어지는 것에 절망하며 애물단지로 취급하던 것이 아닌가! 그런데 눈앞의 마법사는 해산물을 싼 가격도 아닌, 대륙의 일반 가격에 모두 구입하겠다고 한다. 한해 바다에서 잡히는 해산물이 얼마나 많던가! 대충 영지에서 나는 해산물을 일반가로 계산한 로웰린의 입에서 신음 비슷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오, 오천 골드......” 루비어스 백작가 1년 수입이 채 1천 골드밖에 안 된다. 그런데 해산물을 모두 팔 경우 5천 골드를 벌 수 있는 것이다. 5천 골드면 테란델 후작가의 1년 수입을 넘어서는 양이다. 로웰린이 엘을 힐끗 바라보았다. 과연 5천 골드나 하는 금액에 해당하는 해산물을 엘이 모두 살지 염려스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엘에게 있어 5천 골드는 그리 큰 금액이 아니다. 그의 뒤에는 디벨 상단이 있지 않은가! 게다가 매직 스톤으로 번 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엘은 로웰린의 걱정이 우스울 정도로 말했다. “오천 골드인가요? 그럼 계약금으로 천 골드를 드리겠습니다.” 그러면서 아공간을 연 엘은 돈 주머니를 꺼냈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엘은 곧이어 열 개의 동전을 꺼냈다. 그것은 황금에 최고급 금속인 매직 메탈을 둘러 위조가 불가능한 100골드짜리 동전이었다. 엘은 그것을 로웰린에게 내밀었다. “우선 계약금으로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조만간 해산물을 보관할 거대한 마법 상자를 드릴 것입니다. 그곳에 해산물을 넣어서 트롤 벨리까지 옮겨 주십시오. 아, 물론 운반 비용은 따로 지불하겠습니다.” “네에......” 로웰린은 아직도 적응이 덜 된 얼굴로 엘이 내민 100골드짜리 동전을 받아들였다. 순식간에 영지 1년 수입을 벌게 된 것이다. 이는 오크들의 침공으로 죽은 병사들의 가족에게 어떻게 보상하고, 영지를 운영할까 고민하던 로웰린에게 너무나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웃차. 일이 끝났으니 전 이만 가 봐야겠군요.” 자리에서 일어나는 엘을 보며 로웰린은 반색했다. 그냥 보내기에는 엘이 그녀에게 베푼 것이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아니, 벌써 가시게요? 조금 더 쉬다 가시지......” 그러자 엘이 웃으며 정중하게 거절했다. “이제 막 마탑을 세워서 해야 할 일이 많거든요. 게다가 아직 트롤 벨리에 트롤들도 많아서 소탕을 해야 합니다.” “아, 그러시군요.” 엘의 말에 납득한 로웰린. 불현듯 그녀는 엘을 붙잡아도 대접할 게 변변치 않다는 것을 떠올렸다. ‘다음에 오시면 좀 더 잘 모셔야겠어. 앞으로 우리 영지를 부흥의 길로 이끌어 줄 분이니까.’ 로웰린은 이미 엘에게 깊은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영지를 구해 주고, 쓸모없다고 생각하던 해산물을 모조리 구입해 준 엘은 그녀의 가문을 다시 한 번 부흥의 길로 이끌어 주는 구세주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녀가 엘을 대하는 태도가 깍듯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에 꼭 한번 들러 주세요.” 그에 엘이 빙긋 웃었다. 그러자 순간 로웰린의 얼굴이 화악 붉어지며 고개를 돌렸다. “물론입니다. 이웃인데요. 그럼......” 그와 함께 엘의 몸이 사라졌다. 어느 사이엔가 텔레포트를 캐스팅한 것이다. 사라진 엘의 뒷모습을 로웰린은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대륙에 신전은 무수히 많이 존재한다. 신의 힘을 받아 그것을 사람들에게 베푸는 신관은 딱히 약초술이 널리 전파되지 않은 대륙에 무척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관이 신성력으로 펼치는 치료는 웬만한 상처를 모두 흔적도 없이 낫게 한다. 특히 외상에 발휘되는 신성력의 능력은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대륙에는 수천수만이 넘는 신전이 존재하며, 수백만에 달하는 신관들이 대륙에 널리 퍼져 있다. 그런 신전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포션이다. 포션은 신체에 재생력을 극도로 활성화시켜 외상을 낫게 하는 약으로서, 주성분은 트롤의 피를 신전 특유의 비법으로 정화시켜 포션으로 만든다. 하지만 포션의 양은 늘 부족하다 수요는 많은데 정작 주재료인 트롤의 피 공급이 따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트롤의 피 가격은 무척 높다. 트롤 한 마리를 잡으면 보통 다섯 병에서 열 병을 채취할 수 있는데, 한 병에 3골드나 했기 때문이다. 포션 한 병의 가격이 5골드인 걸 감안하면 신전에서 벌어들이는 수익도 꽤 많다고 할 수 있다. 어찌 됐건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기에 신전에서는 트롤의 피를 구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일 정도였다. 포션이 가장 많이 소비되는 곳은 주 고객인 용병들이 많은 곳이다. 대륙 오대 제국 중 하나인 데이제크 제국은 내륙 깊숙한 곳에 위치한 사막 제국이다. 국토의 절반이 짧은 풀이 돋아나는 스텝 기후이며, 나머지 절반은 온통 모래만 휘날리는 사막으로 이루어져 있다. 스텝 기후에 위치한 사람들은 어느 정도 정착 생활을 하지만 사막 기후에 위치한 사람들은 그야말로 삶 자체가 전투였다. 데이제크 제국이 일어난 사막이기에 붙여진 데이제크 사막은 오아시스를 차지하기 위해 매일같이 영지전을 벌이는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수만에 이르는 용병들이 다치고 죽고 하는 곳이다. 전투가 빈번하다 보니 포션의 수요가 많은 곳이었고, 이곳의 포션은 하나당 5골드가 아닌 7골드까지 올라갈 때가 빈번했다. 데이제크 제국에 가장 큰 힘을 지닌 교단은 레이나드 여신을 모시는 교단으로, 늘 척박한 사막 주민들이 모시는 풍요의 여신이다. 레이나드 교단은 데이제크 사막 곳곳에 퍼져 있으며, 그중 제도 다음으로 큰 신전이 위치한 곳이 사막의 실권자라 불리는 오포르 공작령에 위치한 신전이다. 이곳 신전을 이끌고 있는 자는 뷔렉 대신관으로, 레이나드 교단 열두 명의 대신관 중 두 번째 서열에 해당하는 대신관이다. 그런 뷔렉 대신관을 찾은 사람이 있다. 웬만한 고위 귀족이 아니면 만날 수 없는 뷔렉 대신관이지만, 상대는 대놓고 무시하기에는 조금 대단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최근 매직 스톤으로 일약 대륙 100대 상단에 들어서게 된 디벨 상단의 상단주였다. “어서 오세요, 디벨 친우님.” 레이나드 교단에서는 교단과 가까이 지내는 사람에게 친우님이라는 호칭을 붙여 준다. 디벨에게 이러한 호칭을 붙인 것은 평소 레이나드 교단에 꽤 많은 헌금을 냈기 때문이다. 디벨이 정중하게 뷔렉 신관에게 고개를 숙였다. “만남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신관님.” “디벨 친우님은 우리 교단과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는 사이 아닙니까? 이렇게 와 주셨는데 제가 모른 척할 수 없지요.” 뷔렉 대신관은 신앙심이 무척 깊은 사람이기도 했지만 물질적 욕심도 굉장히 많은 사람이기도 했다. 그가 디벨의 만남 요청을 승낙한 이유는 디벨이 상단의 주인이었기에 무언가 돈과 관련된 일을 연관되었음을 느끼고 허락한 것이다. 디벨은 그런 뷔렉 대신관의 성격을 꿰뚫고 있다. 그는 연신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뷔렉 대신관을 대하면서 적절한 때를 노려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제가 실은 뷔렉 대신관님을 청한 이유는 제게도 좋고, 뷔렉 대신관님에게도 좋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그 이야기에 돈 냄새를 맡은 뷔렉 대신관이 두 눈을 빛냈다. “호오?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면 앞으로 디벨 친우님과 저희 교단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질 수 있지요. 그래, 부담가지지 말고 이야기해 보세요.” “대신관님의 배려에 감사합니다. 사실은 제가 아는 분께서 트롤의 피를 대량으로 보유하고 계십니다.” “트롤의 피?” 뷔렉 대신관이 두 눈에 빛을 냈다. 트롤의 피, 그것은 포션의 재료로서 신전 수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만큼 대단한 수입원이었기 때문이다. 뷔렉 대신관의 눈에 기대감이 감돌았다. “어느 정도 양이기에 그렇게 말하시는 것이오?” 은근한 어조로 물어 오는 그의 모습에 디벨은 짐짓 미간을 좁히더니 물었다. “신전에서는 어느 정도 양을 소화하실 수 있습니까?” “흐음......” 뷔렉 대신관이 짐짓 눈썹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지금 디벨이 행동을 전혀 종잡을수 없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수백 병 정도가 아니었단 말인가? 뷔렉 대신관은 트롤의 피가 부족하여 포션의 공급이 원활치 않은 걸 빌미로 가격을 높이려는 게 아닐까 생각하였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리 없지. 머리가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이니 그러지는 않을 텐데......’ 디벨의 의도를 종잡지 못한 그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음,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교단에서는 최소 일만 병에서 많으면 삼만 병을 소화할 수 있습니다.” 포션을 만들기 위해서는 신관이 신성 마법을 펼쳐야 한다. 일반 신관은 하루에 수십 개밖에 하지 못하지만 뷔렉 대신관은 풍부한 신성력을 바탕으로 일천 개에 해당하는 트롤의 피에 신성 마법을 펼칠 수 있다. 물론 매일같이 마법을 펼치는 게 아니니 그 점을 고려하여 말한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디벨은 여전히 미간을 좁힌 채 말했다. “이런...... 생각보다 적군요. 그럼 어쩔 수 없군요.” ‘무슨 말이지?’ 디벨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뷔렉 대신관이 물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디벨 친우님?” 뷔렉 대신관의 말에 디벨이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최소한 십만 병은 소화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라서 그랬습니다.” 디벨의 말에 뷔렉 대신관은 정신이 번쩍 드는 걸 느꼈다. 지금 디벨의 말은 트롤의 피를 최소한 십만 병 이상 가지고 있다는 것 아닌가? 트롤의 피는 신전의 재산을 부풀려 주는 중요한 수입원이다. 뷔렉 대신관이 재빨리 말했다. 신전에서 한 달 동안 가공할 수 있는 최대 물량을 말해서 말이다. “우리 신전에서는 한 달에 오만 병 이상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트롤의 피를 지니고 있는 분이 얼마나 많이 가지고 계시기에 그러시는 겁니까?” 그러자 디벨이 웃으며 말했다. “그분께서는 삼십만 병에 해당하는 트롤의 피를 가지고 계십니다.” “헉!” 뷔렉 대신관은 체면도 잊고 헛바람을 삼켰다. 세상에 트롤의 피가 삼십만 병이라니! 데이제크 사막에서 포션 가격은 7골드다. 30만 병을 모두 가공해서 팔면 무려 210만 골드다. 감히 평생 만져 보기도 힘든 거액을 만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 뷔렉 대신관을 웃는 낯으로 바라본 디벨이 말했다. “일단 대신관님과 면식이 있으니 십만 병을 팔겠습니다. 트롤의 피는 대륙 신전 어느 곳에서나 원하는 것이니 할인 없이 삼십만 골드로 팔겠습니다. 어떻습니까?” 뷔렉 대신관은 감히 흥정할 자신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정도 트롤의 피를 공급받으면 자신의 힘이 교단 내에서 더욱 강력해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오만 병을 소화할 수 있지만 그의 영향력이 미치는 신전을 모두 동원하면 얼추 십만 병을 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재빨리 계산을 마친 뷔렉 대신관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행여나 디벨이 다른 말을 할 것 같아서 말이다. “알겠습니다. 십만 병을 받겠습니다. 앞으로 디벨 친우님은 저희 교단의 제일 손님이 될 것입니다.” 그에 디벨이 웃으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신관님의 말씀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매달 십만 병씩 신전에 트롤의 피가 공급될 것입니다.” 뷔렉 대신관은 더 놀랄 것도 없었다. 그저 그걸 공급받고 늘어날 자신의 영향력에 절로 웃음이 흘러나을 뿐이었다. “허허!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디벨 친우님.” “하하! 뷔렉 대신관님과 돈독한 사이인 제게 그런 말씀은 실례입니다. 실례지요. 하하!” “그렇게 되는군요. 허허허!” 그들의 웃음은 아주 오랫동안 퍼져 나갔다. 뷔렉 대신관은 늘어날 자신의 영향력을 상상하며 즐거워했고, 디벨은 데이제크 제국에 큰 영향을 끼치는 레이나드 교단의 대신관과 돈독한 사이를 만들었다는데 만족했다. 디벨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포션의 수요가 많은 신전 곳곳을 돌아다니며 트롤의 피 공급을 약속했다. 트롤의 피 30만 병. 한 달에 90만 골드를 벌게 된 셈이다. 대륙 상계가 격동했다. 매직 스톤에 이어 트롤의 피라는 기상천외한 상품을 내놓은 디벨 상단. 그들은 대륙 상계의 폭풍의 핵이었다. 한때 트롤 벨리라 불렸던 이곳. 지금 이 계곡에는 새로 개파한 마탑이 들어서 있었다. 마탑의 이름은 외관의 화려함을 말하듯이 금탑. 그곳의 마탑주는 엘이었다. 엘은 마탑의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눈에 들어오는 절경. 마탑을 중심으로 1만 5천여 명이 거주하는 마을이 질서 정연하게 들어서 있었다. 그리고 마탑 옆에 존재하는 거대한 건물. 그곳에는 시시각각 사로잡히는 트롤들이 갇힌다. 그리고 엘의 정신 마법에 의해 정신이 파괴되고 육체만 남은 트롤들만 존재한다. 마을 사람들은 그런 트롤에게서 일정량 피를 빼내고, 루비어스 백작령과 곳곳에서 수입해 온 음식들을 먹인다. 모두 피 생성에 도움이 되는 음식 이었다. 음식과 트롤 특유의 재생력이 합쳐지니, 트롤의 피는 그야말로 무한정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약 5천 마리밖에 안 되었지만 지금은 거의 3만 마리에 달하는 트롤들이 존재한다. 이것이 지난 6개월 동안 이루어 낸 것이다. 골렘을 이용하여 트롤들을 사로잡아 엘은 그것을 이용한 것이다. 애초에 인간이 아닌지라 죄책감은 존재하지 않았다. 톨리안 왕국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가져다주던 트롤들이 지금은 엘의 최대 수입원이 되어 주고 있던 것이다. 엘은 트롤의 피를 본격적으로 유통한 지난 두 달 동안 자신의 마탑에 모든 것을 투자했다. 순수익 90만 골드 중 디벨 상단에게 돌아가는 10만 골드와 주민들의 복지를 위해 돌아가는 5만 골드를 제외한 75만 골드를 두 차례나 모조리 마탑에 들이부은 것이다. 그래서 외관상 드러난 엘의 마탑은 그 어디보다 화려함을 자랑했다. 마탑 전체에 매직 메탈을 둘러 언제라도 마법을 새길 수 있게 하였으며, 겉은 도금하여 금빛이 나게 했다. 덕분에 멀리서 봐도 엘의 마탑은 한눈에 확연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마탑을 중심으로 건설된 마을들을 보라. 엘은 자신의 말을 지켰다. 마을 사람들이 단순히 자신의 땅이 될 곳에 살았으니,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그 말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다. 대대적으로 건설가들을 모집하여 확실하게 길을 만들고, 건물들을 지었다. 위생을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건설자들과 함께 상수도와 하수도를 깔았고, 계획도시칙럼 건물의 배치도를 일일이 정했다. 그로 인해 엘의 마탑은 규모는 마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모습은 웬만한 도시 못지않게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엘은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전생에서 게임을 하면서 느꼈던 자신만의 요새를 꼭 가지고 싶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침공하지 못하는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고 싶었다. 그것을 위해 엘은 계곡 전체에 강력한 결계를 칠 생각이었다. 실피르도 엘의 생각에 동의하여 함께 작업 중이지만 워낙 거대한 계곡인지라 그 시간이 꽤 걸릴 듯하였다. 들어오는 입구가 하나인 이곳에 엘의 생각대로 마탑이 완성된다면 그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는, 그야말로 엘만을 위한 장소가 완성될 것이다. 사람들은 아직 트롤 벨리가 있던 곳에 마탑이 들어선 것을 모른다. 건설자들도 텔레포트로 이곳에 왔기에 막연히 어딘가에 마탑이 하나 생긴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덕분에 소문은 아주 조용하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대륙 어딘가에 마탑이 자리 잡았다고. 그리고 그곳은 그 어떤 도시보다 화려하고 아름다우며 실용적으로 만들어졌다고. 마탑 위에 서서 계곡의 절경을 바라보던 엘은 밑에서 인기척을 느끼고는 블링크 마법으로 마탑 꼭대기에 마련된 집무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붉은 머리에 갑옷 차림을 하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이 서 있었다. 어느덧 열여덟 살의 여인이 된 카이나였다. “무슨 일이야?” “아!” 엘의 물음에 정신을 차린 카이나가 두 눈에 눈물을 글썽거린다. “세레나 언니가...... 세레나 언니가......” “뭐? 세레나가?” 엘이 화들짝 놀라며 말하자 두 눈에 눈물을 머금은 카이나가 고개를 끄덕인다. “어서 가 보자!” 엘이 집무실을 박차고 달려 나가자 카이나가 그를 뒤따른다. 그리고 세레나의 방에 도착하자 그곳에는 실피르가 세레나를 침대에 눕힌 뒤 간호하고 있었다. 방 안에 들어선 엘이 다급하게 물었다. “엄마! 세레나에게 무슨 이상이 있나요?” “어서 오렴. 엄마도 무슨 현상인지 모르겠구나. 한번 살펴보렴.” “네.” 실피르가 자리를 비켜 주자 엘이 그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세레나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무엇이 그렇게 힘든지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가뜩이나 새하얀 얼굴은 더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전신에는 땀이 송골송골 배어 나오고 있었다. 엘은 그녀의 가느다란 하얀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감각을 끌어 올리자 그녀에게서 무슨 현상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었다. “이건......!” 실피르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확신을 못 해서 말하지 못했던 것이라. “세레나의 몸에서 마나가 사라지고 있어......” 마나는 곧 세상이다. 세상의 근본을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힘 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세레나의 몸에서 지금 마나가 사라지고 있었다. 엘이 가르쳐 준 단전호흡으로 그동안 꾸준히 모았던 마나가 서서히......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다른 이질적인 게 차오르고 있었다. 뭐랄까, 새하얀 느낌이 드는 그것. 그것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마나를 밀어내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힘은......” 엘은 그 힘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힘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중간계의 마나. 마계의 다크 오러. 천계의 홀리 오러. 그리고 신계의 신성력. 세레나의 몸에 차오르는 것은 신성력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엘은 한 가지 결론을 유추할 수 있었다. “설마......” 차마 말을 담지 못하는 엘. 동시에 그의 주먹이 확 쥐어졌다. 자칫 실수하면 대륙 전체와 싸울 수 있는 어마어마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걱정 어린 눈으로 세레나를 보다가 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을 느끼며 말했다.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 확실한 건 몸에는 문제가 없다는 거예요. 카이나, 네가 세레나를 좀 돌봐 줘.” “네, 네에!” 대답하는 카이나를 뒤로하고 엘은 실피르를 향해 말했다. “엄마, 오늘부터 저와 같이 결계를 완성시켜요.” 그러자 실피르는 놀란 표정을 짓는다. “결계를?” “네. 얼마 후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어요. 그러니 그것을 위해서라도 결계를 완성해야겠어요.” 계곡 전체에 결계를 치는 건 엄청난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하지만 엘은 세레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진 이상 모든 힘을 집중하여 결계를 완성시킬 생각이었다. 그런 엘의 의지가 전해진 듯 실피르도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해 도울게.” 6클래스 마스터인 실피르가 돕는다면 최소한 두 배는 빨라진다. 엘은 실피르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요. 그럼 저는 잠시......” 실피르를 일별한 엘은 바쁜 걸음으로 집무실을 향해 걸어갔다. 집무실을 향하는 엘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입술을 질끈 깨물고 주먹을 강하게 움켜쥔 엘에게서는 비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엘이 굳게 자신에게 맹세했다. 어떠한 위협이 들어와도 반드시 지켜 주겠다고. 대륙에서 어디가 가장 신에 대한 믿음이 투철한가를 거론하면 사람들은 이곳을 꼽는다. 가이아 성국. 주신이자 대지의 여신인 가이아 여신은 대륙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믿는 주신이며, 그러한 사람 수백만 명이 모여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국가가 바로 가이아 성국이다. 세르디아 대륙 정중앙에 위치하여 어마어마한 숫자의 사람들이 오가는 국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곳을 오갈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가이아 여신만 믿는 신도들뿐이다. 다른 사람들이 불만을 토로할 만하지만 아무도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이 없다. 그만큼 가이아 여신을 믿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다른 종교에 대해 배타적이지는 않지만 가이아 여신이야말로 신들 중 으뜸이라는 우월감은 존재했기에 대륙인들은 물론 제국들조차 가이아 성국을 무척이나 꺼렸다. 신앙심으로 무장된 성군은 그야말로 순교를 외치며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대 제국 중 하나인 데이제크 제국이 사막 기마병 십만을 끌고 가이아 성국에 쳐들어왔다가 성군에게 전멸당한 것은 아직도 회자될 만큼 유명하다. 그 당시 이십만 성군은 죽어도 죽어도 시체의 산을 쌓으면서 끊임없이 순교를 외치며 달려들었다고 한다. 그때 살아남은 데이제크 기마병들은 지금도 순교를 외치던 성군이 모습이 훤하다고 온몸에 경기를 일으키며 말한다. 침공을 당하면 온 나라가 일어서며 달려드니 어찌 가이아 성국을 꺼리지 않겠는가. 때문에 외침에서 가장 안전한 국가가 바로 가이아 성국이기도 했다. 가이아 성국은 교단의 지배자이자 가이아 여신에게 가장 가까운 교황을 중심으로 열두 명의 대신관이 존재한다. 이들은 가이아 성국 열두 곳을 나누어 다스리며, 그 아래 신관들이 점점 면적을 좁혀 가며 신앙 활동을 벌인다. 가이아 성국 백성들은 수입의 오십 퍼센트를 자발적으로 교단에 헌납하며, 성국 곳곳을 순례하며 수련하는 신관들의 존재로 가이아 왕국은 유일하게 병으로 죽는 사람이 없는 국가이기도 했다. 그런 가이아 성국의 수도에서는 지금 어떠한 일로 인해 술렁이고 있었다. 세레나가 갑자기 이상 증세를 보이며 쓰러진 시간과 비슷한 시간. 가이아 성국의 수도이자 교단의 실세들만 모인 가이야 신전에서는 교황을 비롯한 열두 명의 대신관이 모여 있었다. 이날은 1년마다 교황을 비롯한 대신관들이 함께 기도를 올리는 날이다. 가이아 여신을 조각한 조각상 앞에 제단이 놓여 있다. 그리고 제단 위에는 가이아 여신의 성전이 펼쳐져 있으며, 그 앞에는 교황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좌우에는 각각 여섯 명의 대신관이 무릎을 꿇고 교황과 마찬가지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파아앗! 그러던 어느 순간, 하늘에서 휘황찬란한 빛이 어리더니 이내 새하얀 빛이 내려와 신전 전체를 밝혔다. 경건하고 차분한 느낌이 절로 드는 순백의 새하얀 기운. 농밀한 신성력의 충만함을 느끼며 열두 명의 대신관들은 절로 탄성을 자아냈다. “오오! 이것은......” “신의 강림......” 그러면서 신관들은 바닥에 엎드렸다. 그리고 신의 은총을 좀 더 느끼기 위해 모든 감각을 끌어 올렸다. 그들은 충만한 신성력에 온몸을 떨었다. 그러한 분위기 가운데 오로지 교황만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들고 있었다. 순백의 빛이 눈부시게 빛나는 가운데 흐릿한 사람의 현상이 나타났다. 그것이 직감적으로 가이아 여신임을 느낀 교황은 감동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미천한 종이 여신을 배알하나이다!” 그러자 흐릿하게 사람의 모습을 이룬 곳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편안하고, 그 무엇보다 황홀하며, 그 무엇보다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나를 받드는 이들이여. 오백 년 만에 나의 유지를 이어받을 아이가 지상에 내려왔습니다. 부디 그 아이를 찾아 대륙의 평화에 기여하기를......” 그와 함께 신탁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무려 300년 만에 내려오는 신탁이자, 성녀의 등장을 알리는 신탁이었다. 신탁의 내용은 이러했다. 어둠의 영혼이 빛나는 그곳에 끝이되 끝이 아닌 환상의 세계가 존재하나니, 흐름에 비틀린 인위적인 세상. 때로는 더 없이 다정하지만 때로는 더 없이 무서운 그것. 단 한 번의 이해도 받지 못한 장소. 험난함 속에 아름다움이 빛나는 곳. 밝지만 더없이 어두운 곳에 빛과 어둠이 교차하니, 그곳에서 피어나는 한 줄기 성스러운 꽃을 찾아 주세요. 무슨 말인지 평범한 사람이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신의 뜻을 받드는 자들이다. 그들은 즉시 신탁의 내용을 해석하기 시작했다. “한· 줄기 성스러운 꽃은 성녀를 가리킴이 분명하오. 그리고 신탁의 내용으로 보아 흐름 속에 비틀린 곳에 있는 것이 분명할 터.” 교황의 말에 대신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른 대신관이 자신의 의견을 내놓았다. “흐름에 비틀렸다는 건 마법을 뜻할 확률이 높습니다.” “단 한 번의 이해도 받지 못했다는 건 모두가 편견을 가지고 접근하지 않은 곳을 말하는 듯합니다.” “험난한 건 주변 지형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수많은 의견이 나왔다. 그리고 그 의견들을 교황은 날카로운 눈으로 고르고 또 골라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침묵을 지키던 대신관이 입을 열었다. 그는 대신관 중 가장 현명한 아르디모스 대신관이었다. “어둠의 영혼이 빛나는 곳이라 함은 사라졌으나 여전히 그 힘이 활발하게 발휘되는 곳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곳은 대륙에서 한 곳밖에 없습니다. 다크 소울이 존재하는 레베탄 고원입니다.” 그러자 교황이 두 눈에 빛을 냈다. 아르디모스 대신관의 말이 타당하게 들린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끝이되 끝이 아닌 곳. 이것은 레베탄 고원이 대륙 서부의 끝일 수도 있지만 아니라는 뜻일 수도 있고, 레베탄 고원보다 더 전에 위치한 곳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호오......” 교황을 비롯한 대신관들은 아르디모스 대신관의 말에 점점 빠져 들었다. 신탁의 의미를 정확하게 짚어 내는 그의 말이 타당성 있게 들린 것이다. 아르디모스 대신관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흐름에 비틀렸다는 건 마법을 뜻할 확률이 높다는 뜻, 단 한 번의 이해도 받지 못했다는 건 사람들의 선입견으로 외면 받는 곳을 뜻합니다. 여기서 그리고 때로는 더없이 부드럽지만 때로는 더없이 무서운 그것. 그곳이 아닌 그것이라 칭한 건 무언가 사물이 아닌 사람일 확률이 높습니다.” 하나하나 설명하는 아르디모스 대신관의 말에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거의 반박할 게 없는 완벽한 해석이었다. 교황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계속 말해 보게.” 아르디모스가 대답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 “예. 험난함 속에 아름다움이 빛난다는 건 말 그대로 지형일 확률이 높습니다. 그리고 본래 어두웠지만 누군가에 의해 밝아져 빛과 어둠이 교차한다는 것입니다. 즉, 다크 소울이 존재하는 레베탄 고원 근처에 험난한 지형에 마법이 펼쳐진 곳. 그곳에 성녀님이 계실 확률이 높습니다.” 아르디모스 대신관의 해석에 교황이 탄성을 자아냈다. “완벽하군. 더 없이 완벽한 해석이야.” “과찬이십니다. 아직 확인된 사실이 아니니 더 이상 칭찬을 하지 말아 주십시오.” 겸손한 아르디모스 대신관의 모습을 보며 교황은 웃음을 지었다. “허허! 신탁을 완벽하게 해석한 아르디모스 대신관에게 어찌 칭찬을 안 할 수 있겠소.” 그러면서 교황은 대신관을 한 차례 둘러보았다. 대신관들의 눈에는 성녀가 내려왔다는 말에 눈에 빛을 내고 있었다. 교황이 대신관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지금부터 대륙에 성녀가 내려왔음을 알리고 볼레크 대신관은 광휘의 기사단을 이끌고 톨리안 왕국으로 가서 협력을 구하시오. 그리고 레베탄 고원 근처를 샅샅이 뒤져 성녀의 소재를 찾아내시오.” “알겠습니다.” 듬직하게 대답하는 볼레크 대신관을 흐뭇하게 바라본 교황은 선언하듯 외쳤다. “본 성국은 역대 사상 최강의 힘을 지니고 있소! 설사 제국이 상대라 하더라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오! 성녀를 찾는 데 방해하는 자는 본 성국의 응징을 피하지 못할 것이오. 성녀의 등장은 곧 여신의 의지요! 모두 각자의 신앙심을 걸고 움직여야 하오. 알겠소?” “예, 예하.” 깊게 고개를 숙이는 대신관들. 교황의 눈은 어느 때보다 생생하게 빛나고 있었다. “여신의 의지를 거부하는 자,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여신의 신탁과 갑작스런 세레나의 변화.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대륙에 폭풍이 다가오고 있다. 아주 험하고 강렬한 폭풍이. 신앙을 위해서는 목숨을 아끼지 않는 성국의 인물들과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대륙 전체와도 싸울 각오가 되어 있는 금탑의 탑주 엘. 그들의 필연적인 충돌은 조금씩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골든 메이지 3권에서 계속) [편집자후기] 가끔 이렇게 밤새우고 작업을 할 때면, 생각나는 건 하나입니다. 사실 우리 디앤씨 미디어는 사업장이 아니라, 국가에서 만든 특수 부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무조건적인 방임주의를 내세우고, 자유롭게 하라는 듯한 취지로 말을 하지만, 사실 필름 날짜를 어기면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대앙탈 포스를 내뿜으시는 저희 사장님을뵐 때면...... 차라리 입대를 하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어헝헝. 마감 때문에 병들어 가고 있는데 아무도 신경을 안 써주지요. 잇몸을 뚫고 자라는 사랑니도, 잇몸을 째고 긁어내는 수술을 해야 한다는 어금니도, 양 어깨에 내리신 디스크도, 허리, 목 디스크도...... 에잇! 만날 속으로 아프니까 이건 뭐, 남들은 아프다고 조퇴할 때 사장님이 떡하니 가리키면서 “얘처럼 튼튼해 봐라!”라고 말하시는 표본밖에 안 되는 것 같고. 하아...... 제발 불쌍한 이 계부를 어여삐 여기셔서 마감 지옥에서 구해 주시길 간절히 비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