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마치 꿈같은 이야기 - 1.꿈같은 이야기와의 만남...(1) 휘이이잉... "어, 춥다" 내 입에서는 자연스럽게 이 소리가 튀어나왔다. 겨울, 한겨울, 그 중에서도 가장 춥 다는 솔로의 크리스마스날 난 이렇게 할 일 없이 이렇게 좋은 날의 서울의 길거리는 어떻게 생겼나 구경이나 다니고 있다. 한심하다. 내가 생각해도. 그러나 어쩌랴? 이것이 인생인 것을. 밤 10시가 넘은 지금도 내 옆에서 걷고 있는 쌍쌍들은 '오호호호! 네 인생은 그러니 ? 우리 인생은 그렇지 않아!'를 외치는 듯한 표정으로 내 주위를 휙휙 걸어가고, 난 그 모습을 보며 다시한번 옷깃을 추스린 채 길을 걷기 시작한다. 집으로 돌아가도 개판 오 분전인 하숙방만이 기다리고 있겠지. 하지만 난 이런 내 삶이 좋다. 대학은 합격했고, 게다가 혼자만의 자유를 얻었다. 원래 우리 집은 지방이다. 그러나 난 원하던 대학에 이렇게 당당히 합격, 서울 지리 와 혼자 사는 생활 등에 익숙해지기 위해 홀로 하숙방을 잡고 서울에 올라온 것이다. 그 말로만 듣던 지하철 구간 대학에 다니게 된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방학 시즌! 나 보고 잔소리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야말로 혼자만의 자유! 멋지지 않은가! ...라고 말해도 추운 것은 어쩔 수 없다. 어, 춥다. 몸의 추위인가, 마음의 추위인 가? 쳇, 친구라도 주위에 하나 있었으면 좋을텐데. 서울에 올라온지 오 일밖에 안 됐 는데 친구는 무슨놈의 얼어죽을 친구? 뭐 이런 잡생각을 하다보니 '개판 오분전인 하숙집' 주위의 '개판인 폐공사장' 앞까 지 다다라 버렸다. 아이엠에프인지 뭔지가 끝난지도 어언 2년 반. 그러나, 이 폐공사 장은 무엇을 뜻하는가? ......소문에 따르면 싸가지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사장이 돈을 가지고 날랐다고 한다. 경제 위기랑은 하등 상관없지. 뭐 어쨌든, 나와도 상관 없는 이야기다. 하숙집 옆 길가에 작은 폐공사장이 있던 작은 화산이 있던. 음, 화산이 있으면 약간 상관이 있겠군. 여러 가지 연상작용으로 이어지는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새 폐공사장 앞의 쓰레기더 미를 지나가는 내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거의 다 왔군. 배고픈데 라면이나 하나 끓 여 먹고 자야겠다. 아...차차차. 설거지를 안 했구나. 젠장. 귀찮으니 그냥 오늘밤도 굶어야겠네. 아냐. 그래도 이렇게 추운 날 라면 하나 끓여먹으면 얼마나 나의 심기에 도움이 되랴! 하숙 생활 5일만에 설거지가 귀찮아 밥을 굶으면 앞으로 지루한 방학생 활동안은 굶어 죽으라는 이야기냐. 게으름은 페인의 지름길! 계란도 넣고, 파도 넣고 ! 라면을 끓여 먹는거야! 그래, 설거지가 싫어서 이 맛들을 놓칠 수는 없어! 이런 생각들을 하니 갑자기 지저분한 집이 무척 보고 싶었다. 그래! 집까지는 바로 눈 앞이다! 뛰어 갓! 여러 가지 생각에 젖어 기쁨에 찬 내가 막 뛰려고 첫 발을 내딛 었을 때였다. 내 꿈같은 이야기가 시작된 것은. "야오오옹" 멈칫. 왠지 나를 붙잡는 소리. "이야야아아아옹" "아니 이놈의 동네는 뭔 도둑고양이가 이리 많아?" 애써 외면하며 다시 집으로 뛰려 했지만. 젠장할. "이야아아아아오오옹!" 마치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듯한 소리를 차마 외면하지 못했다. 난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찾기 시작했다. "야아옹! 야아옹!" 그 소리가 들려오는 장소는 스티로폴, 플라스틱, 합판조각, 부서진 돌덩이 등이 잔 뜩 쌓여 있는 폐공사장의 쓰레기 더미 속이었다. 뭐냐, 설마 저 속에 동네 들고양이 라도 한 마리 갇혀 있는 거냐? 에이 설마. "야옹! 야옹!" "갇혀 있나 보군, 젠장! 그럼 나보고 이걸 다 파내라고? 에이, 말도 안 돼! 이렇게 추운데 짜증나게시리!" 마구 혼잣말을 지껄여 댔지만 차마 싫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쓰레기더미에 갇혀서 천천히 죽어갈 고양이를 생각하니 불쌍해서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어휴, 젠장! 하여튼 나는 운도 없지! 야, 기다려!" 나는 마치 고양이에게 말하듯 허공에 대고 말하면서 손으로 쓰레기 더미를 하나 하 나 헤쳐나가기 시작했다. 젠장! 젠장! 묻혀서 어떻게 이런 데 묻힐 수가 있냐! 물론 가정용 음식 쓰레기가 아니라 냄새는 안 나지만, 몽땅 플라스틱, 스티로폴등이 재료 로 이루어진 이 나름대로 거대한 (쥐의 입장이나 개의 입장이라면) 쓰레기 더미는 하 나 하나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젠장, 안 그래도 추워 죽겠는데! 손 시려 미치겠군! "야아옹...야아옹..." "알았다고! 이제 다 됐다고! 젠장!" 소리를 꽥꽥 질러가며 쓰레기 더미를 제치니 지나가던 동네 아줌마가 이상하게 쳐다 본다. 젠장! 이제 동네에 '새로 이사온 옆집 총각 미쳤나봐...' 이런 식의 소문 돌겠 지. 우아악! 이게 뭐야, 흑! 앞으로 동네 사람들에게 미친 놈 취급 받을 것을 생각하 니 정말 앞날이 암울해졌다. 이 마음 속의 어둠을 억지로 억누르며 쓰레기 더미를 계 속 헤치다보니 마침내 흙더미 속의 거뭇거뭇한 털뭉치가 보였다. 제기랄, 하필이면 재수없게 검은 고양이야? "다 됐다, 나와! 젠장!" "야오옹..." 그 고양이는 힘 없게 꿈틀거리며 가르릉거렸다. "이런 젠장, 혼자 힘으로 나오지도 못해? 내가 꺼내 줘야 되는거야?" 난 계속해서 누가 보면 미친 놈 취급 받기 딱 좋은 말들을 중얼거리며 그 고양이를 거칠게 꺼냈고, 그 고양이는 내 손에 잡힌 채로 허공에 매달려서는 대롱거리며 한 번 가르릉거리더니 나를 쳐다보았다. 자식, 고마운 걸 아나보지? 알면 나중에 하숙집 주 인 아줌마 생선이라도 물어 와라. 그리고 그 고양이는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야, 정말, 정말 고마워. 딱 죽는 줄 알았어. 와아, 뭐 저런 쓰레기 더미가 다 있냐 ? 자다보니 무너지네? 이젠 쓰레기까지 부실이냐? 응? 너 왜 그리 놀란 표정이야?" ......어? "야, 뭐에 놀랐냐니까?" 분명히 무언가에 놀랐는데. 순간적인 정신적 충격이 내가 뭐에 놀랐는지 잊게 만들 었다. "응...으응?" 내 눈앞에는 단지 고양이가 한 마리 있는데 말야. 달은 밝고, 서울의 밤엔 별 하나 없지. 날씨는 춥고, 공기는 나름대로 상쾌해. 이상할 건 하나도 없어. 근데 난 뭔가에 놀랐는데. 뭐에 놀랐던 걸까? "왜? 날씨가 추워서 놀랐어?" 고양이가 묻는다. "아...아냐. 그런 게 아니었어" 나름대로 귀엽게 생겼다고 인정받고 주인 품속에서 매일같이 사랑을 먹고 자라는 애 완동물의 대명사 중 하나가 고양이지만, 난 고양이가 별로 맘에 들지 않는다. 왠지 약삭빠르고, 날카로워 보이고. 게다가 이 고양이는 새카만 색이잖아. 검은 고양이. 신비로운 느낌은 몰라도, 귀여움을 느낄 수 없어. 아니, 무섭다. "그럼 뭐야? 배고프니? 밥이라도 굶어서 경기라도 들린거야?" 말하는 싸가지 봐라. 고양이 주제에 말이나 하고... 말이나... 말이나...? 잠깐, 고 양이가 언제부터 말을 할 수 있게 됐지? "아니 말을 해야 생명의 은인이 놀란 이유에 대한 걱정을 함께 나눌 것 아냐. 내가 말이라도 해서 놀랐냐?" ...맞다!그...러고 보니, 고...양이는 말...을 못하지... "고...고...고...고양이가 말을 한다!!!으악!사람 살려!!!" 내가 소리를 지르니까 고양이가 더 깜짝 놀랐는지, 펄쩍 뛰면서 어깨 위에 올라 앉 아서 소리를 질러댄다. "깜짝 놀랐잖아! 조용히 좀 해! 시끄러워! 시끄럽다구우웃! 아주 온 서울바닥에 고 양이가 말을 한다고 광고를 해라, 광고를 해! 말하는 고양이 처음 보니! 아, 처음 보 겠구나. 어쨌든! 뭘 그런 걸 가지고 놀라고 그래 사내새끼가!" 이런 젠장! 기껏 살려줬더니 이제 덤비네? "그럼 사람이 말하는 고양이 보는 일이 흔할 것 같냐!" 그런데 검은 고양이는 대답을 하는게 아니라 날 멀뚱히 쳐다보더기만 했다. 고양이 눈으로 쳐다보니까 무섭다, 야. 한참 그렇게 나를 쳐다보던 고양이는 이윽고 입을 열 었다. "이야~너, 깡좋다? 원래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가야 되는 거 아냐?" "아, 맞다, 그렇지, 헤헤......가 아니라, 으악! 고양이가 말을 한다! 사람 살려!" 왠지 고양이가 시키는 대로 충실히 따르는 것 같아 찝찝했지만 어쨌든 난 재빨리 아 무 곳으로나 뛰기 시작했다. 탁탁탁... 마구 뛰어가는 내 뒤로 검은 고양이가 중얼거 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거 혹시 바보 아닐까?" 무슨 소리가 들려오던 무시하고 난 무조건 뛰었다. 뒤에서는 계속 누군가 쫓아오는 느낌이 들었지만, 발자국 소리 하나 나지 않는데 그럴리는 없다. 젠장, 젠장, 젠장! 설마 저게 사실 귀신이라서 나에게 달라붙는 건 아니겠지? 아냐! 그럴 가능성이 커! 젠장할! 검은 고양이가 밤마다 나를 괴롭힌다면, 으으! 지옥이야! "헉! 헉! 여기까진 못 쫓아오겠지!" 마구 뛰다보니 어느새 내 앞에는 벽. 즉, 막다른 골목길로 들어왔다는 소리다. 젠 장, 서울 은 길이 너무 복잡해. 도대체 여기가 어디지? 그러나 어쨌든 그 귀신같은 고양이한테서는 도망친 것 같다. "헉, 헉! 십년감수했네! 내가 앞으로 고통받는 동물 도와주면 사람이 아니다! 사람 이!" 젠장!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따위 개나 줘 버려라! 으으으, 살다 보니 정말이지 별 개같은 날이 다 있군! 헉!헉! 그 때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흐흥...너 이제 사람 아니게 생겼네~" "으악!!!어디서 나는 소리야!!!" 난 깜짝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앞. 당연히 아무도 없다. 왼쪽. 벽만 있다. 오 른쪽. 역시 벽만 있다. 뒤. 담이 있고 그 위에 검은 고양이...고양이...고양이? 고양이다아악!!! "우아악! 너...너... 발자국 소리도 안 났는데!" 저 한심하다는 표정. 이제 금수에게까지 무시를 받아야 한단 말인가? 어쨌든 그것은 코웃음을 픽! 치더니 말했다. "원래 고양이는 뛸 때 발자국 소리가 안 나, 이 우스운 친구야..." "왜...왜 날 쫓아오는 거야! 난 너를 살려줬다고! 나...난... 맛 없어!" "누가 뭐래? 너 설마 내가 해코지라도 할 줄 알고 도망친거야? 웃겨, 내가 널 잡아 먹기라도 한대?" 고양이는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야, 춥다. 일단 너희 집에 가서 이야기하자" 난 당황해서 말했다. 겁나 죽겠는데 저 요물을 우리 집까지 끌어들이라고? 솔직히 난 지금 너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조차 현실감이 없다고! 만약 지금 이 상황에 서 현실감을 느꼈다면 난 벌써 기절해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저 녀석을 우리 집으 로 끌어들일 수는 없어! "아...아니...그건 좀..." 버벅대면서 우리 하숙집에 고양이를 데려가지 못하는 이유를 만들어 내려는데, 고양 이가 노려보면서 다시 한 번 못박는다. "가자고" "그래..." 이런 젠장, 우리 집에는 왜 가자는 거야 도대체? 오늘 재수가 없으려니까, 젠장! 망했다...젠장... "이런 젠장...맙소사...어쩌란 말이냐..." 혼자 중얼거리며 어두컴컴한 골목길을 벗어났다. 그런데...여기가 어디냐? 아까 하 도 정신없이 뛰다보니 길을 잃었나? 괜찮아, 곧 찾을 수 있겠지... 난 무작정 걸음을 옮겼고 고양이는 내 뒤를 졸졸 쫓아오기 시작했다. "야, 길은 아냐?" 난 별 걱정을 다한다는 눈빛으로 그 녀석을 마주 노려보며 대꾸했다. "물론이지... 그런 걱정은 하지마 임마... 내가 서울 생활 15년째야..." ...30분 후. "젠장, 또 여기야?" 벌써 세 번째다. 아까 객기를 부리며 골목에서 나온 뒤로 계속 발 가는 대로 걸었건 만 벌써 세 번째 같은 곳을 지나치는 것이다. 고양이는 내 뒤를 졸졸 쫓아오다 한심 한 듯이 말했다. "아주 젠장을 입에 달고 살아라, 달고 살아. 그리고 너 여기에서 15년 살았다는 거 거짓말이지?" "아...아냐! 절대 아냐!" "자꾸 속이려 하지 말고" "...사실은..." "그래, 사실은? 일 년이나 됐냐?" "...한 달도 안 됐어..." 할퀼까봐 일주일도 안 되었다는 말은 못 했다. 어쨌든 그 말을 들은 고양이는 키야 아옹! 하고 털을 쫘악 세우면서 날카롭게 울더니 잠시 나를 쳐다보고는,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휘휘 젓고 나서, 앞발을 들어서 까닥거리고는 말했다. "어이구, 이런 놈을 믿고 따라온 내가 바보지! 야, 따라와" "나도 모르는 우리 집은 네가 어떻게 알어? 웃기는 소리 하지 말고..." "너보다는 이 동네에서 오래 살았어. 됐냐? 아까 거기가 어딘지 외웠으니까 따라왓 !" "...근데 성질은 왜 내고 난리야..." 캬아아옹! 그 고양이는 다시 한 번 날카롭게 소리질렀고 난 재빨리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아우 씨, 확! 안 따라와?" "아, 아, 알았어! 가면 될 거 아냐, 가면! 누가 안 간대? 참 나, 누가 들으면 안 간 다고 한 줄 알겠다, 야" 젠장, 기껏 살려줬더니 이게 뭐야...으으으...짜증나 정말...어쨌든 난 그 고양이의 뒤를 쭐래 쭐래 따라가기 시작했다. 고양이 뒤를 따라가는 사람이라. 어째 우습군. 나 아는 놈이 이 장면을 안 봤으면. 하긴 서울 바닥에 나 아는 놈이 있을 리가 전무 하지만. "...야, 다 왔어. 이제부터는 네가 찾아가" "으,으응..." 건성으로 대답하며 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까 그 우리집 앞 폐공사장이었다. 와! 정말 여기까지 찾아왔네? "정말 길을 외웠었어?똑똑한데? "아무래도 너보다는 약간 나을 듯 싶다는 게 나의 생각이야" "너의 생각은 틀렸다고 주장하고픈게 나의 마음이고 말야" 나는 마주 대답해줬고 그 녀석은 짜증난다는 듯이 날 노려보며 말했다. "......안 가냐? 빨리 가자고" 발톱을 팍! 세우며 날카롭게 말하는 그 모습. 허, 내가 아까는 겁먹어서 굽실거렸지 만, 한낱 너 따위 미물에게 아직도 네네 할 줄 아냐? 나는 참아도 내 자존심이 더는 못 참겠다! 이제부터는 내 신념대로 할 거야! " 지금 간다니깐...왜 화를 내고 난리야..." ...참고로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살려면 무조건 참아야 한다는게 내 신념이다. 후. 어 쨌든 나는 그렇게 천천히 하숙집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몇 분만에 하숙집 대문 앞에 다다랐다. 마침 이웃집 아주머니가 슈퍼에 갔다 오는지 비닐봉지 몇 개를 손에 들고 지나가다 날 보고 픽! 웃는다. "학생...아, 아무것도 아냐" 이런 젠장. 소문 다 났군. 아주머니는 나를 한참 쳐다보며 웃음을 참더니 아무 말 없이자신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곧 그 집안에서 웃음소리가 바깥까지 새어 나왔음은 물론이다. 푸하하하하하! 그리고 고양이가 다시 깐죽대기 시작했다. "오죽 바보짓을 많이 했으면 동네 사람들이 다 너만 보면 웃냐? 네 인간이 어떤 종 류인지 서서히 윤곽이 잡혀간다" "...너 구해 주려다 그렇게 된 거 아냐! 젠장!" "...뭐?" "젠장! 일단 들어가자. 들어가서 이야기 하자고! 동네 사람들에게 '아까는 허공이랑 이야기하더니 지금은 고양이랑 이야기 하네. 정말 미쳤나 봐' 같은 소리는 정말 듣기 싫으니까" "뭐, 그래. 어쨌든 네 말대로 들어가서 이야기 하자구" 그 녀석은 가르랑거며 나를 따라왔다. 그리고 나는 2층의 하숙방으로 올라갔고. 방 문을 열자 순식간에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우우~ 이 방안에만 쳐박혀 있을때는 몰랐는데 밖에 나갔다가 들어와보니 냄새가 장난이 아니다. 고양이도 캬악! 하고 한 번 울부짖더니 말했다. "이게 사람 집이야, 돼지 우리야?" "도심 한복판에서 돼지우리를 바라다니. 웃기는군. 어쨌든 들어오기 싫으면 좀 가 라. 그 편이 너에게도 낫지 않을까? 고양이라면 깔끔하잖아. 이런 데서는 1초도 못 견딜 거라구" "괜찮아, 괜찮아. 쓰레기 더미에서 자다가 죽을뻔한 적도 있는데 뭐. 물론 거기보다 별로 나을 것도 없어보이지만" "그럼 들어오던지" "안 그래도 들어가려고 했다네" 녀석은 나를 따라서 방으로 사뿐히 걸어 들어왔다. 곧 구석에 자리 잡은 고양이. 찌 뿌둥하다는 듯이 몸을 한 번 쫘악 펴고는 나에게 말을 건다. 그런데 그 녀석이 몸을 쫘악 펴는 바람에 유심히 보게 된 건데, 털 색깔이 정말 까맣다. 그리고 윤기가 좌르 르 흐르는게, 못먹고 사는 집 동물같지는 않다. 뭐, 야윈 거 보면 상당히 고생한 것 같기는 하지만, 그 정도로 몸에서 기품이 흐른다는 소리다. "야, 일단 뭐 좀 먹자. 생선 없냐 생선?" ...난 털에서 기품이 흐른다는 나의 마음속의 말을 급히 취소했다. 보자보자하니 점 점...? "나도 라면 먹고 사는데 무슨 생선이야 생선은 얼어죽을" "참 궁하게도 산다. 그럼 우유 없냐 우유?" "참나 원,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오네. 너 줄 우유 있으면 내가 마셨다" "어이구, 참 잘났다. 그럼 빨리 잠이나 자자. 불 꺼라. 아까 자다 깨서 아직도 졸 려" ......헉? 지금 잔다 그랬냐? 진짜 짜증나네! 이게 자꾸 왜 이래? 이러면서 은근슬 쩍 빈대 붙으려는 건 아니겠지? 에이, 아닐거야. "너...너 설마......" "설마 뭐? 불 꺼. 나 잠 좀 자자. 졸린다구" '설마 여기서 눌러 살려구?' 이런 식으로 물었다가 '응' 그러면 할 말이 없어질 것 같다. 좀 빙빙 돌려서 물어봐야지. 뭐라고 할까... 그래! 이게 좋겠다. "응, 그래. 자자. 그런데 너 오늘 여기서 자고 내일 아침 몇 시 쯤에 나갈거야?" 난 천재다! 이렇게 물어보면 몇시에 '간다'는 식의 대답밖에 못 하지. 후, 생각해 내느라 힘들었어. 하지만 이렇게 은근슬쩍 애완동물을 키울 생각은 추호도 없다구! ...그러나 그 녀석은 나의 기대를 산산히 부숴 버렸다. "가긴 어딜 가? 밖이 얼마나 추운데. 나 얼마간 여기서 신세 좀 지자. 뭐? 알았다고 ? 고마워. 자식, 원래 좀 바보스러운 것들이 착하긴 하지" "......뭐?" "여기서 좀 살자구. 밖에서 볼 땐 허름해도 따뜻하고 좋네, 뭐. 거기 이불 좀 줄래 ?" ...옛날 이야기들을 보면 사람의 은혜를 받은 짐승들이 많이 나온다. 사슴과 나무꾼 이나, 은혜 갚은 까치나, 개와 고양이 같은 것들. 어쨌든 그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 도움받은 짐승들'이 다 자신의 생명을 걸고 은혜를 갚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고양이는, 고금에 없었던 천인공노할 짓을 하고 있다. 은인에게 빈대를 붙는다는. 이런 젠장.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다! "야아아!" "왜?" 능청스럽게 나를 쳐다보며 대답하는 고양이. 그리고 난 말했다. "나가" "어딜?" "나갓! 미안하게도 난 아직 애완 동물을 키울 생각같은 건 없거든? 능력 되면 부르 도록 하지. 그러니 나갓!" "...애.완.동.물?" "그랫! 사람이면 몰라도 동물은 절대 이 집에서 살 수 없어! 내가 동물털 알레르기 가 얼마나 많은지 알아? 게다가 동물 우는 소리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킨다고!" 물론 거짓말이다. 젠장. 이렇게 유치한 거짓말까지 해야 하다니. 하지만 난 정말 난 데없이 식객 하나 들이기는 싫다. 난 말을 이었다. "물론, 세상에 말하는 고양이가 흔치 않은 건 알고 그런 널 본 오늘은 일생 중 가장 무서웠던 날 중의 하나로 남을거야. 그러니 제발 너도 오늘을 생명의 은인을 만난 운 좋게 재수 좋은 날로 기억하고 좀 나가줘라. 너와 계속해서 공포의 기억을 쌓고 싶진 않다. 무엇보다..." 그 녀석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말했다. "무엇보다 뭐?" "난 동물이랑은 절대 같이 못 살아! 집주인도 절대 애완동물은 안 된다 그랬어! 그 러니, 당장, 여기에서 나가!" 나는 몸을 휘돌리며 손가락으로 현관을 가리켰고, 그런 나의 멋진 모습을 보며 고양 이는 콧방귀를 흥! 하고 뀌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는 말했다. "그래? 그럼 사람이라면 같이 살 수도 있는거네?" 아니, 이거 이야기가 왜 또 이렇게 전개가 되나? 이런 경우엔... 뭐라고 답해야 하 지? 난 일단 되는대로 둘러댔다. "뭐...음...이야기가 그렇게 되나 보군, 하하하! 뭐, 사람이라면야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어차피 이 비좁은 방 안에서는 같이 살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괜찮다면야, 특 히 여자면 더욱... 흐흐흐...이런,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거지? 어...어쨌든 동물 은 안 돼!" "그래? 그렇단 말이지? 후후...좋아" "좋긴 개뿔이 좋아! 나...응?" 난 '미안하게도 널 내보내야겠다'는 의사를 확실히 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정 말 안타깝게도 미처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 대신 난 말을 잃은 채 멍하니 내 눈 앞의 장관을 쳐다보았다. 내 눈앞에서, 정확히 말하면 고양이에게서 황금색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우으윽! 눈부셔! 이건 또 뭐야, 젠장! 그만해! 눈부셔!" ...물론 내가 그만 하라고 들을 녀석은 절대 아니다. 그 녀석은 내 눈앞을 휘황찬란 한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고, 나는 그 빛 때문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젠장, 눈 을 감으니 불안하잖아! 억지로 실눈을 뜨고 쳐다보자, 온통 황금빛뿐인 방안과 그 빛 가운데의 점점 변해가는 실루엣이 보였다. 이건 또 뭐야? 내 앞의 상황을 쳐다보며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동안 빛은 점점 줄어들었다. 다행이군. 난 또 빛 사이에 서 칼이라도 날아올 줄 알았지. 그러나, 빛이 사라진 뒤에 날 기다리고 있는 장면은 칼 따위 백 개가 날아온다고 해 도 그리 놀랍지 않은 일이라고 치부해 버릴 만한 상황이었다. 내 눈앞에 검은 고양이는 온데 간데 없고 웬 요염하고 아름다운 여자가 한 명 서 있 었던 것이다. 그것도 알몸으로. "으아아아악! 누, 누구세요!" 물론 나는 아직은 평범한 10대 청소년이고, 그렇기에 눈을 똑바로 뜨고 그 모습을 감상할 수는 없었다. 다시 생각할 때마다 아쉬운 일이지만, 젠장, 눈을 떴으면 좋았 을 것을. 그러나 난 눈을 감아버렸고, 거기다 반사적으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온통 암흑뿐인 세상속에서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으으으... 이런, 이런 일이! 설마, 저 예쁜 여자가 아까 그 고양이가 변한 모습은 아니겠지? 어쨌든 난 두 눈을 가리고 벽에 몸이 닿을 때까지 구르듯이 뒤로 물러섰다. 그런데, 앞에서 사라락...사라락... 하는 뭔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서...설마? 설마? "오...오...오지 마요!" 오면 나야 좋지. 흐흐...이리 와... 즐겁게 해줄게...가 아니라! 난 당황해서 소리 치며 어서 가라는 발짓(손으로는 여전히 눈을 가리고 있었다)를 해 보였으나 그 사라 락 거리는 소리는 계속해서 점점 크게 들려왔고 마침내 내 옆에서 멈췄다. 젠장! 질 순 없지! 난 다시 소리가 멈춘 반대쪽으로 물러나며 계속 "가요! 가! 아악! 오지 마 요!"를 외쳤으나 내 의견은 완전히 무시되었는지 사라락...사라락...하는 소리는 계 속 들렸으며 가끔씩 내가 발작적으로 "가라니까요 좀!"을 외치자 "푸훗!" 하는 소리 가 들려오기도 했다. 어쨌든 나는 그런 식으로 발자국 소리를 피해다니느라 방 구석 에까지 몰려 버렸다. 젠장, 뭐야 도대체! 오늘은 왜 이리 황당한 일이 많지? 벽 구석 에 몰려서 '이젠 어쩌지?'를 생각하는 가운데도 그 사라락거리는 소리는 점점 크게 들려왔으며 마침내 내 앞에 그 소리가 멈췄을 때 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떨려 서. 젠장. 이렇게 당하는(?) 거야? 나야 좋지...가 아니라! 이익! 이런 상황에서 자 꾸 삼천포로 빠지는 내 연상작용이여, 저주받으라! "풋, 왜 쳐다 보지를 못하니?" 내 앞에서 말 소리가 들려왔고 난 눈을 더욱 꼭 감으며 말했다. "그럼 그렇게 벗고 있는데 어떻게 똑바로 쳐다봐요! 저...저기, 그러니까, 전 아직 어리고..." "어리니까 뭐?" 뭐?뭐라니?그걸 어떻게 말하냐! "저...그...그러니까" "푸훗!" 뭐...뭐야, 그 웃음은? 시덥잖다는 거야? 어쨌든 난 조금씩 떨면서 말했다. "어, 저, 그러니까, 일단 저기 옷걸이 있으니까 거기서 일단 옷이라도 걸치고 나서, 그리고 나서 지,진솔한 대화를..." 내 의견은 완전히 무시당했다. 중간에 끊긴 것이다. 그것도 그녀의 말이 아닌 행동 으로. 그녀가 점점 다가오는지 사락, 사락, 하는 소리는 계속 들렸고 잠시 후 내 두 눈을 가리고 있어 구부러져 있던 팔에 뭔가 물컹한 게 닿았다. 으으...이...이건... 설마... 꿀꺽. 난 재빨리 '무엇'인가에 닿은 팔을 반사적으로 그 '무엇'으로부터 뗐 고, 순간 내 눈을 가리고 있던 손도 치워졌다. 어, 젠장. 이거 참 곤란하게 됐구만. 손으로 눈을 가리면 다시 '무엇'에 팔이 닿을테고. 그렇다고 그대로 있을수도 없고. 어차피 이리 되도 곤란하고, 저리 되도 곤란한 거, 그나마 감은 눈이나 확 떠버리고 감상이나 할까? ...하는 고민은 전혀 할 필요가 없었다. 손으로 잘 가리고 있다는 생각에 안심하고 이미 아까부터 꽉 감느라 불편했던 눈은 손 아래에서 뜨고 있었으니까. 젠장. 물론 손가락 틈으로 다 봤다는 건 절대! 아니다. 난 정말 양심적으로 내 눈을 가렸으니까. 어쨌든, 내가 손을 치웠을 때, 내 눈에 가득 들어온 것은 눈부신 빛, 그리고 어떤 여 자의 얼굴이었다. 아쉬운 일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그 여자의 얼굴이 워낙 가까이 있어서 다른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 여자는 미소 짓더니 말했다. "뭘 그렇게 겁먹고 그러니?" "아...으으...그게..." 젠장, 이 여자는 부끄러움이고 뭐고 없나? 그건 그렇고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야? 그런데, 가까이에서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니 정말 예쁘다. 왜 tv에서는 지나가는 엑 스트라까지 예쁜데 내 주위에는 평범한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얼굴밖에 없 나... 하는 생각은 오늘로서 끝이다. 지금 내 주위에 그렇지 않은 얼굴이 하나 나타 났으니까. 그것도 평범을 매우 크게 벗어나는. 갸름한 얼굴, 새카만 흑발, 커다랗고 약간 째진 눈, 오똑한 코, 붉고 조그마한 입술, 새하얀 피부. 음, 뭐랄까. 청순가련 이랑은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그 대신 섹시하다고 할까? 아냐. 그런 게 아냐. 이건.. . 요염하다. 마치, 고양이? 그래. 고양이의 분위기처럼. 그 아름다운 얼굴의 붉은 입술이 달싹거렸다. 말을 한 것이다. "내 얼굴만 뚫어져라 쳐다보지 말고, 이제 아까 하던 이야기를 해야지?" 난 황당해서 말했다. "예? 아까 하던 이야기...라뇨? 저...초, 초면...인...데요..." "물론 오늘 보기야 오늘 봤지. 하지만 우린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 이야기를 나누 고 있었잖아?" 웬 헛소리야? 얼굴만 예쁘고 미쳤나? "그...그게 무슨..." 내가 미인과 정신병과의 상관관계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갑자기 내 시야에 손이 들어왔다. 뭐, 뭐야? 나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음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벽을 밀어댔고,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으로 내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까 말했잖아. 사람은 같이 살 수 있다고. 그래서 사람으로 변했잖아. 이제 되는 거야?" "그, 그럼..." 이런 젠장, 이런 젠장, 이런 젠장! "고양이!" "그래, 맞아" 그 검은 고양이였구나! 이런 젠장! 어쩐지 아까 빛나기 직전에 이상하게 웃는다 했어! 젠장! 일부러, 날 놀리려고 그런 걸 거야! 아까 그녀석의 싸가지를 보면 확실해! 난 순간 눈을 질끈 감으며 외쳤다. "아...아니! 아까 말은 다 거짓말이야! 나, 나, 난 동물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 구 해준 거 보면 알지? 동물이랑 얼마든지 같이 살아도 돼! 그, 그러니..." 내 얼굴을 계속해서 쓰다듬던 그녀는, 아니 그 고양이는 '풋' 하고 웃으며 말했다. "그럼 고양이로 돌아와도 되는 거네?" "그렇지! 내가 말하고 싶은 게 바로 그거지! 고양이로 당장 돌아 와! 설마 애완동물 한 마리 못 기르겠냐? 어서! 어서!" "알았어. 거 참 되게 보채네" 곧 내 눈앞이 환하게 밝아졌다. 다시 돌아오나 보군. 빛이 상당히 강해서 눈을 감고 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리고 눈을 감은 내 시야에서 '밝음'이 점점 사라져 가면서, 난 돌아옴이 끝난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혹시 모르지. 난 조그맣게 실눈을 뜨고 앞을 쳐다보았다. 내 앞에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휴우, 다행이군. 내 눈앞에는 아까 그 모습 그대로 돌아온 검은 고양이가 얌전히 앉아 있었다. 허,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앉는다더니...가 아니라! 도대체 저 고양이 정체가 뭐야? "너, 너, 너, 너, 너... 윽, 말이 잘 안 나오네. 어쨌든 너, 저....정체가 뭐야?" 그 녀석은 천연덕스럽게 앞발로 자신을 가리키더니 말했다. "나? 고양이. 그것도 아주 매력적인 검은 털을 자랑하는 고양이. 그건 그렇고 너 아 까랑 태도가 많이 다르다? 아까는 벌벌 떨면서 나한테 제대로 말도 못 걸더니 지금은 완전히 딴판이네? 나 다시 인간으로 변해?" "변하고 나발이고간에! 바른대로 말 해! 너, 귀...귀신이지! 으악! 귀신이야! 틀림 없어! 무서워!" "...아주 혼자서 쇼를 해라, 쇼를 해" "그렇잖아! 고양이가 말도 하고, 게다가 사람으로 변해? 이건 말도 안 돼! 설마... 구미호? 맞아! 구미호는 사람으로 변하지? 그것도 예쁜 여자... 에라이 이 자식아! 생명의 은인을 잡아 먹어? 내 간은 지방간이야, 매일 술에 쩔어서... 맛 없어!" "놀고 있네. 아주 점점 더 연기에 몰입하는구나. 계속 해라, 계속 해. 고작 여우냐? 아주 나를 사자로 만들지 그러냐" "으아악! 점점 더! 이젠 비꼬기까지 하고! 저 인간에 필적할만한 지성! 도대체 너, 너, 정체가 뭐야?" 그 때였다. 굉음과 함께 이웃집에서 비명소리가 들린 것은. 드르르륵! "아 시끄러워! 잠을 못 자겠어 잠을! 사람 잠 좀 자자!" ...나는 멋적게 들리지도 않을만한 목소리로 '예'를 말하며 주저 앉았고, 고양이는 나를 계속해서 노려보다 이윽고 한 마디를 던졌다. "쇼는 끝났냐?" "...너 도대체 정체가 뭐야?" "아직 안 끝났나 보군" "난 진지해! 아까 약속했으니 여기서 잠은 재워 주겠지만, 네 녀석의 정체는 알아야 할 것 아니냐? 응? 그걸 알려줘야 나도 너를 데리고 살 수 있겠어!" 그 녀석은 고개를 몇 번 좌우로 젓더니 앞발로 머리를 톡톡 두드리는, 마치 사람의 골치아프다는 제스쳐를 취하고는 말했다. "그렇게 내 이야기가 듣고 싶냐?" 난 빠르게 대답했다. "아아니! 네 정체를 알고 싶을 뿐이야!" "그거라면 더 말할 것도 없어. 난 고양이일 뿐이야" "난 우리 동네 과부네 고양이가 근육질 남자로 변해서 그 아주머니를 즐겁게 해 준 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 우리 사촌동생의 고양이가 언제나 명랑한 그 녀석 과 즐겁게 이야기하며 뛰어논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들어본적이 없고! 넌 평범한 고양 이가 아냐! 겉모습만 고양이일 뿐이지! 내 말 틀렸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네. 난 고양이가 맞아. 단지 평범한 고양이가 아닐 뿐이지" "그...그런..." 난 황당하다는 표정에 궁금하다는 표정을 섞어서 그 녀석을 쳐다봤고 그 녀석은 다 시 한 번 아까의 골치가 아프다는 제스쳐를 취한 다음 입을 열었다. 도대체 못 알아 들을 소리만 하네. 정말! "내가 왜 평범하지 않은 고양이인지 궁금해?" "물론, 매우 궁금해!" "그건......내가 350년을 살았기 때문이야" 뭐, 뭐, 뭐어어어? 사, 사, 사, 삼백 오십년? "그래. 삼백 오십 년" "마, 마, 말이 되는 소리를 좀 해라. 아니, 그게 말이냐?" 말도 안 되는 소리. 고양이라면, 2~30년 살면 '참 징하게도 오래 산다'는 소리를 들 을 텐데 350년이라니? 지금 나와 장난 치자는 거야, 뭐야? 그 녀석은 나를 침울하게 올려보더니 말했다.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야" "그...그게 무슨... 말도 안돼! 난 믿을 수 없어!" "말하는 고양이나 사람으로 변하는 고양이가 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었을까?" "......" 그렇군. 고양이가 350년을 살았다는 이야기도 '말하는 고양이'보다는 현실적이겠군. 내 눈앞에 '말하는 고양이'가 나에게 말을 걸어 오는데 무슨 이야기를 못 믿을까. 어쨌든 그 녀석은 드러눕듯이 편하게 누워 있던 자세를 바로잡으며 말했다. "듣고 싶어? 내 옛날 이야기를. 뭐 이야기랄것도 없고 한 10분이면 끝날 이야기이지 만" "...응" "별로 들려주고 싶지 않은데" 뭐야? 지가 이야기를 꺼내 놓고 들려주기 싫다 그러면 어쩌자는 거야? 내가 막 항의 하려 할 때 녀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 "됐어, 할 일도 없고 잠은 다 깼는데 밤은 너무 길군. 약간은 신비한 이야기라 믿기 지 않을지도 몰라. 하지만..." "알았어. 믿어 줄게" "그럼 시작할게" 그 녀석은 다시 편안하게 드러눕더니 잠시 털을 가다듬고는 하품을 한 번 한 뒤에 자신의 옛날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기 시작했다. 그 오래된 과거의 이야기. 삼백,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삼백 오십년 전의 옛 이야기 를. 이미 갈색으로 변해버렸을 것 같은 그 묵은 기억을. 부글부글부글... 마녀의 냄비에서는 언제나 무엇인가가 끓고 있다. 내용물의 색은 초록색이 대부분이 며, 냄새 또한 언제나 역한 초록빛 냄새. 고양이는 도저히 그 곳에서 끓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마녀의 실험실은 언제나 어두컴컴했다. 고양이의 주인이었던 마녀 퀴에르는 언제나 마법의 주문을 중얼거리며 냄비를 휘젓고, 마법책을 읽으며, 마법의 진을 그리고, 악 마의 힘을 끌어들이는 의식을 행했다. 마녀는 대부분 자신의 패밀리어로 고양이를 선택한다. 고양이는 대표적인 요물이며 음의 기운을 띈 동물이기 때문이다. 고양이가 개와 상극인 이유도 개는 양의 기운을 띄고 있으며 고양이는 음의 기운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음의 기운을 띈 고양이는 어 두운 곳을 좋아하며, 습한 것을 좋아하며, 조용한 것을 좋아하며, 사람을 홀리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마녀를 좋아한다. 퀴에르의 고양이를 제외하고는. 마녀는 언제나 몸에서 영력을 뿜어낸다. 모든 영적 능력이 강한 자가 그러하듯이. 특히 퀴에르는 20세의 나이로 이미 낭트지역을 넘어선 전 프랑스에 그 이름이 알려져 있는 장래가 촉망받는 천재 마녀라 엄청난 영력을 가지고 있었는데다 언제나 실험실 에 혼자 조용히 흑마법을 연구하느라 있지도 않은적을 주의할 필요가 없어 영력을 의 식적으로 조절하지 않아서 매일같이 엄청난 영력이 뿜어져 나왔고, 그런 퀴에르의 주 위에 붙어 다니는 고양이는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영력을 자신도 모르게 상 당히 많이 흡수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고양이 자신도 모르게-당연히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때는 평범한 고양이었으며 지성이 없었으니까-고양이의 몸에는 영력이 점 점 쌓여갔고, 그러던 어느날. 어느 순간. 퀴에르의 고양이는 자신의 눈이 세상을 생각으로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는... "아 맞아, 너, 아까 여자로 변신했었잖아?" 나는 물어보았다. 궁금한 게 생겼던 것이다. "그렇지. 그게 나한테 편하니까" "그래? 암컷인가 보군?" "그래. 왜? 뭔가 잘못되었나?" 난 참으로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근데 왜 이렇게 싸가지가 없어?" 그녀는 잠시 말을 잃은 채로 나를 노려보더니 말했다. 고양이가 노려보면 정말로 무 섭다는 걸 깨달았다. "...성별과 그런 것은 관계가 없지, 아마. 이야기나 계속 들어. 중간에서 끊지 말 고" 고양이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녀'는 생전 처음으로 자신이 어디 있는지 깨달았다. 그 전까지의 기억은 모두 몽환적인 느낌.안개속의 기억. 무언가 자신이 아닌듯한 느낌. 사람으로 치면 아기때 의 기억이라고 할까? 어두컴컴한 세상속에 자신의 주인의 목소리와 손짓, 그리고 우 유와 생선의 향기만이 기억에 남아 있었다. 습한 느낌과 함께. 그러나 지성을 가지게 된 동시에, 고양이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자각했다. 자신의 주인, 마녀 퀴에르의 무릎 위에. 조금 전까지 자신이 퀴에르의 부드러운 손길에 가르릉거리며 기분좋게 울 었던 기억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지성을 가진 후 참을 수 없이 밀려오는 첫 번째 기 분은. 마녀에 대한 기분나쁨이었다. '으으...뭐야, 이건... 숨막힐 정도로 어둡잖아...' 그녀의 첫 혼잣말은 불행히도 어두움에 대한 불평이었다. 그러나 퀴에르는 아직까지 자신의 사랑스러운 고양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생각하고 있다는 것조차 알 리가 없었다. 고양이가 지금 가르릉거리는 것이 기분나쁨 때문에 생기는 본능적인 신음이라는 것도. 주인이 자신을 사랑하고 아껴주는 것은 알지만 퀴에르의 어둠이, 그리고 실험실의 어둠이 자신은 너무 싫었다. 며칠이 지나가고. 고양이는 퀴에르가 점점 자신을 다른 눈으로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뭔가 자 신에게 놀란듯한 눈빛. 자신이 상당량의 영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들킨 것 같았 다. 지금까지 고양이는 자신의 영력을 잘 갈무리하고 숨기기 위해 상당히 노력했지만 은연중에 흘러나오는 약간의 영기까지 숨기기는 무리였던 것이다. 다시 며칠이 지나가고. 계속되는 기분나쁨. 주인은 언제나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줬지만 그 눈빛에는 왠지 모를 의심과 어둠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주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어둠의 기운. 실험실에서 언제나 풍기는 역한 냄새. 촛불 한자루와 난로 의 모닥불에서 나오는 불빛조차 검게 만드는 이곳이 싫었다. 온통 주위에는 어두움, 어두움, 어두움 뿐. 고양이는 더 참을 수 없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 이 어둠 속에 서,그녀가 느끼는 것은 따뜻한 빛에 대한 끝없는 갈망이었다. 그리고 어느 외롭게 비 내리던 날. 퀴에르가 마녀의 집회에 참석하러 그녀의 자주빛 빗자루를 타고 날아가버린 날. 빗줄기 사이로 무거운 안개들이 세상을 감싸던 날. 고양이는 도망쳤다. 숨막힐 듯한 어둠 속에서. 고양이는 말을 마쳤고 그녀가 들려주는 신비로운 중세시대 마녀의 이야에 난 송두리 채 넋을 잃었다. 마녀...의 고양이었다고? "그럼 마녀라는 게 실제로 있었다는 말이야?" "그래. 그 중에서도 퀴에르는 정말...후. 퀴에르와 같이 살 때는 흑마법이나 주술, 영력 같은 것에 대해 잘 몰라서 그녀의 무서움을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으 으..." "...그런데 마녀와 같이 사는 고양이는 누구든 말을 할 수 있는거냐?" 고양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고양이가 사람처럼 행동하니 정말 이 질감이 느껴지는걸. "아냐. 퀴에르는 나와 언제나 붙어 다녔고, 그래서 난 그녀에게서 영적인 기운을 잔 뜩 받을 수 있었지. 때문에 다른 고양이와 다르게 말을 할 수 있게 된 거고" 계속 못 알아들을 소리만 하는군. 어휴. 어쨌든 나는 다시 물어보았다. "그런데...그 영기라는 것과 네가 말을 하는 것은 무슨 관계인데?" 고양이는 잠시 생각에 빠진 듯 말이 없이 눈만 깜박 깜박 하더니 이윽고 꼬리를 흔 들거리며 입을 열었다. "음...영적인 기운이 동물에게 지성을 주는 원리가 어떤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미안. 하지만, 그 영적인 기운이 오랜시간 쌓이면 동물에게 이성적 생각을 준다는 결 과 하나는 잘 알고 있지. 내가 그런 케이스니까. 음, 그러니까, 옛날 이야기보면 구 미호나, 아니다. 이건 원래 일반 동물과는 다르고, 호랑이, 아니지. 이건 성스러운 동물이니 우리 같은 거와는 좀 다르지...너구리! 그래, 너구리. 옛날 이야기를 보면 천 년 묵는 너구리는 막 말도 하고 도술도 쓰고 그러잖아?" "...하지만 그런 너구리는 천년을 살아야 그렇게 되잖아" "멍청하긴! 퀴에르에게서 계속 엄청난 영기를 받았다고 했잖아. 그 기운은 엄청나다 구. 다른 동물은 절대 그런 기회를 얻을 수 없을 걸. 그리고 그런 밑바탕에서 300년 동안 다시 틈틈히 영기를 쌓는 훈련을 했으니까,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음, 역시 모르겠다. 하여튼 그래서 내 몸에는 엄청난 기운이 쌓여 있다구" 어휴, 머리 아파! 난 빠개질 듯한 머리를 부여 잡으며 생각을 정리한 다음에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어떻게 삼백 오십년이나 살게 됐어?" "그것도 역시 영기가 강해서 그래. 천년 묵은 호랑이나 너구리, 여우 이야기는 많이 들어 봤잖아? 호랑이 같은 경우는 원래 영물, 아니 금수의 왕이니 웬만해선 오래 살 수가 있고, 너구리나 여우도 대표적인 요물이니 호랑이만큼은 안 돼도 운좋게 영기가 뭉치기 시작하면 수 백년을 살 수 있지. 나도 마찬가지고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야. 도사, 뭐 이런 사람들은 수백년을 산다고 전해지잖아. 하지만 사람 중에서는 그런 사 람들이 극히 드물지" "으으...모르겠어. 너무 어려워. 그건 그렇고, 그 사람으로 변하는 것도 영기가 강 해지면 할 수 있는거야?" 고양이는 고개를 가로젓더니 말했다. "아냐, 그건 내가 각고의 수련 끝에 얻은 주술이야" "주...술?" "그래, 주술" "...왜? 사람으로 변하지?" "원래 동물은 그래. 나도 맘에 안 들긴 하지만, 동물은 본능적으로 인간을 회구하 지... 구미호들이 인간의 간을 빼먹는 이유도 그들만의 주술로 인간으로 변하기 위해 서야... 나도 앞으로 얼마의 영력을 쌓아야 할 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으로 변할 생각 이고. 하긴 지금 생활이 너무 편해서 꼭 변하고픈 생각은 없지만" "와~ 너 어려운 말 잘 쓴다? 회구? 그리고 인간으로 변하고 싶다고? 넌 이미 마음만 먹으면 인간으로 변할 수 있잖아?" "진짜 인간 말이야. 진짜 인간. 변신 따위 하지 않아도 영원히 인간의 모습을 유지 할 수 있는, 진짜 인간. 물론 나도 영기가 강해서 사람으로 변할때는 인간이나 다름 없지만, 그런 껍데기는..." 응? 웃긴다, 참. 나같으면 고양이와 인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는 지금이 훨씬 더 편하겠다. 왜 사람이 되려 하는거야? 난 이런 류의 질문을 했고 그 녀석은 묵묵히 서글프게 날 올려보더니 말했다. "동물은...인간이 부러워서...인간이 되고 싶어하지...언제나..." "아니, 인간이 왜 부러운데? 물론, 사람의 사회라는 게 편하긴 하지. 하지만 지금 네 모습도 상당히 편할 것 같은데?" "응... 그냥. 인간이 부러워서. 원래 나같은 동물들은 그래. 음양의 조화를 찾을 수 있는 생물은 인간 밖에 없거든"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럼 너희는? 조화가 없냐?" "조화가 있긴 있지만 어느 한 쪽에 기우는 성격이 짙지. 예를 들면 나같은 고양이들 은 음의 성격을 띄고 있지. 그것도 아주 강한. 우리와 언제나 상극을 이루는 개는 양 의 기운을 품고 있고" "그...런 거냐? 그럼 사람은?" "사람 같은 경우는...개인차는 있지만 음양의 조화가 완벽에 가깝다고 알고 있어. 그리고 이런 음양과는 상관 없는, 훨씬 중요한 인간이 되고 싶은 이유가 있지만, 그 걸 이야기하자면 너무 어려워지고 나도 그 쪽까지는 잘 모르기 때문에 넘어가자" 으아악! 머리 아파! 도대체 계속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난 잠시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대며 생각을 정리하다가 질문을 던졌다. "음...맞아! 아까 너는 어둠이 싫다고 그랬지? 그런데 고양이는 음의 성격을 띄고 있다며? 원래 음이라는게 어둠을 좋아하지 않아?" "그렇지...아마도" "으음, 그런데 넌 아까 네 이야기에서 어둠이 싫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 그런데? 왜 난 어둠을 싫어하냐고?" "응!" "모르겠어. 나도. 언제나 예외라는 게 있으니까 세상이 재밌는 거 아니겠어? 난 이 상하게 지성을 가지게 된 뒤부터 음기를 띄는 것들이 싫더라고. 요물들 말이야" 음기를 띄는 것? 요물? 도대체 어쩌다가 이야기가 여기까지 흘러 버린거야! 젠장! 하나도 이해가 안 되네! 하지만 머릿 속이 뒤죽박죽이 된 가운데에서도 내 호기심은 나에게 계속해서 '주인, 내 대신 질문 좀 해줘. 요물이 뭘까? 궁금해 미치겠어'라고 말하며 안그래도 복잡한 내 머릿속을 뒤집어 놓고 있었다. 젠장! 요물이 뭐긴 뭐야! 요물이지! 싫어! 안 물어봐! "저...요물은 또 뭐야?" 으윽. 결국 호기심에 저버린 나는 어차피 알아듣지도 못할 대답을 해 댈걸 뻔히 알 면서도 물어보고야 말았다. 그리고 고양이는 잠시 나를 노려보더니 대답했다.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열을 알려줘도 하나도 모르는 사 람도 있다더니 네가 바로 그렇구나. 아까부터 다 설명했잖아? 음기를 띄는 동물이 요 물이라고. 세상의 동물들을 굳이 나누자면 영물과 요물 둘로 나눌 수 있는데, 예를 들면 호랑이, 곰, 개등 양기를 띄고 있는 것은 영물이고, 여우, 너구리, 고양이...등 등등. 처럼 음기가 짙은 것들은 요물이야" "그들이 뭔가 틀린가?" "다 틀려! 다! 다! 됐냐? 이제 지긋지긋 하니까 그만 좀 물어봐라. 응? 이제 잠이나 좀 자게 불이나 좀 꺼다오. 응?" "아...알았어" 내 참, 기가 막혀서. 지가 집주인이야? 왜 이래라 저래라야? 젠장! 좀 따져야겠다! "잘 자" "오냐, 오냐. 그리고 난 밝으면 잠이 안 오니까 제발 불 좀 꺼라. 응?" "아까는 어둠이 싫네 어쩌고 그러더니..." "젠장, 마음만 영물이면 뭐하냐. 몸은 요물인데. 그런데 그 불 언제 끌 거냐?" "끄면 될 거 아냐, 끄면! 좀! 보채지 좀 마!" "알았어, 알았으니까 일단 그 불 좀..." 달깍. 난 더 이상 녀석이 졸라대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 불을 꺼 버렸고 녀석은 입을 다물었다. 후우. 이제야 조용해졌네. 나도 좀 자야지. 난 손으로 더듬어 아무렇 게나 개어져 있는 이불을 찾아서는 대충 펴고 잠이 들었다. 주위는 따뜻한 빛 뿐이었고 나는 수십겹의 옷을 껴 입은 채 뒤뚱거리며 길을 걸어가 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걸까. 난. 모르겠다. 누군가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이봐요... 이봐요..." "예?" 대답하며 뒤를 돌아보는 순간 굳어버리는 나. 어젯밤의 그 여자가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난 떨면서 이야기했다. "아...반...반가워요" "언젠가 뵌 적이 있죠? 반가워요. 어머, 그런데 이렇게 따뜻한 날씨에 왠 옷을 이렇 게 많이 입고 있어요?" 응? 따뜻한 날씨라고? 지금은 겨울인데... 의아해하면서 그녀를 보니 반팔 티셔츠 하나에 헐렁한 반바지 하나. 보는 사람도 가볍고 시원하게 느끼도록 입고 있었다. 아, 그러고보니 지금은 여름이지. "아하하하, 제가 왜 이러고 있었죠? 멍청하게. 하하하!" 난 멍청하게 웃으면서 점퍼를 시작으로 두껍게 입었던 옷을 벗어서 내려놓았다. 근 데 참 이상하네. 여름인데 난 왜 이리 춥지? 으으으, 추워. "저...전 조금 추...추운데요...으으으..." 조금이 아니라 많이 춥다. 으으으으... 난 이빨까지 딱딱거리면서 그녀를 바라보았 고 그녀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옷 고마워요. 잘 입을게요!" "아...예...그런데 죄송하지만 무, 무슨...춥다...하...무슨 소리신지..." "고마웠어요. 후훗. 그럼 이만" 그녀는 생긋 웃더니 내 옷가지를 들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아악! 이제 보니 옷 도둑 이잖아! 난 급히 붙잡으려 했지만 이미 그녀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고, 난 미친듯 이 떨면서 몸을 웅크렸다. 으으으...추워...추워... "추워...추워...얼어죽겠다..." 짹짹짹짹! "으으으...추워...죽으려니 새소리가 다 들리는군..." 부우우웅... "젠장...죽으려니 차소리까지 다 들리고...얼어 죽긴 싫었는데..." 그런데 햇볕이 참 따뜻하고 눈부시군... 주위에 새소리, 차소리는 참 시끄럽고... 마치 일어나라고 시위라도 하는 듯 한데. 하아암. 난 비몽사몽간에 눈을 비볐다. 꿈 이었나? 꿈을 꾸고 있었나 보다. 그 증거로 흰 공간은 온데간데 없고 흐릿하게 하숙 방 천장이 보이니까. 그리고 꿈에서는 추웠는데, 지금은...지금은... "제....젠장, 지금도 춥잖아. 어떻게 된 거야? 으...추워...얼어죽겠다...꿈인가?" 난 볼을 꼬집어보았다. 안 아펐다. 꿈인가보군. 그러나 난 곧 얼굴과 손이 차서 신경 이 둔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젠장, 뭐야! 누가 내 이불 가져갔어! "으아악! 추워! 춥단말야! 누가 내 이불 가져갔어 젠장!" 난 순식간에 방금 전까지의 꿈과 현실을 구별 못하던 기분에서 벗어나며 벌떡 일어 났다. 젠장! 이불, 이불 어디갔어! 혼자 사는 집에 내 이불을 집어가다니 그게 말이 돼! 난 주위를 황급히 둘러보았고 내 발쪽에 이불이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젠장. 자다 걷어 찼나보군. 으, 추워. 어쨌든 잠은 다 깼으니 이불이나 치워야겠다. 으음. 난 눈을 부비며 이불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런데 이 이불 꼭 누가 덮고 자는 것 같네 ? 에이, 덮긴 누가 덮어. 혼자 사는 집에. 난 중얼거리며 이불에 손을 가져다댔다. "으으음..." 뭔 소리야, 또? 이불에서 들려온 소리인데. 허, 참 웃긴 일이로세. 이불도 잠꼬대를 다 하고. 그런데 그 이불 참 이상하다. 왜 이불에 얼굴이 하나 달렸냐? 그것도 예쁜 여자 얼굴이. 꼭 꿈 속에 나왔던 그 여자처럼 생겼네? 어쨌든... 음...이상하다...이 상하다...이상...? 아악! "다...당신 누구야!" "으음...시끄러...잠 좀 자자..."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다시 조용해졌다. 아아, 뭐란 말인가? 내가 어제 뭘 했 지? 혼자 쓸쓸히 술 마시고 집에 여자라도 끌여들였단 말인가? 아냐! 난 생각을 정리 했다. 난 혼자 쓸쓸히 집에 돌아왔지. 그런데...음... 아, 맞다. 고양이를 살려줬지. 말하는 고양이었어. 집에 데리고 들어왔지. 그리고 그 고양이는 여자로 변했는... 젠 장. 그렇군. 어제 일도 잊어버리다니, 나 바본가봐. 하하. 순식간에 그 여자에 대한 신비감과 경외감은 싸악 사라졌으며 그 대신 나는 정말 운수도 더럽게 없는 내 인생 을 저주하면서 발로 그 여자 얼굴을 톡톡 찼다. 이봐, 이봐. 이 은혜를 원수로 갚는 싸가지없는 고양이 아가씨. 이제 일어나, 좀. "아우 씨, 누구야. 나 좀 더 잘래... 음..." 후우. 발로 건드려도 안 일어나? 하긴, 내가 너무 무례했군. 숙녀에게는 좀 더 상냥 하게 대해야겠지. 난 천천히 그녀의 귓가에 입을 대고 따뜻하게 속삭였다. "일어나아아아앗! 이 배은망덕한 고양이 자식아아아아! 추워 죽겠단 말이다앗! 그리 고 해가 중천에 떴는데 뭐 하는거야! 엉? 일어나라구우웃!" "꺄아아아악!" 그 녀석은 소리를 빼액 지르며 눈을 번쩍 뜨더니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다가 나를 쳐 다보고는 '아이 씨, 왜 깨우고 난리야, 짜증나게' 비슷한 말을 궁시렁거리며 다시 드 러누웠다. 이런 젠장. 난 다시 그녀를 발로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좀 일어나시지? 해가 중천에 떴어. 안 일어나면 그냥 이불 치운다!" 그 녀석은... 음, 여자로 변하니까 정말 예쁘긴 예쁘군. 하지만 지금 예쁘고 나발이 고는 문제가 아니다. 어쨌든 그 녀석은 그 큰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장난스럽게 날 쳐다보며 대답했다. "나 아무것도 안 입었는데? 치워, 치우던지 말던지. 그렇게 여자 알몸이 보고 싶은 가 보지?" ......아 씨, 혈압 오르려고 해! 그냥 눈 딱 감고, 아니 눈 똑바로 뜨고 확 걷어버 려? 난 뻑뻑해지는 내 뒷목을 마구 주물러댔다. 아프기만 하군. 젠장. "그래, 말이나 묻자?" "쿨..." "잠 좀 그만 자고 들으란 말이야아아아! 허억!헉!콜 록콜록!" "왜 소리는 지르고 난리야..." "...그럼 소리 안 지르게 생겼냐? 이봐, 뭐 좀 묻자. 도대체, 고양이라면 털도 많고 따뜻할텐데 사람으로 변해서 이불까지 뺏어 간 이유가 뭐야?" "이 방 뭐 이러냐? 아주 바람이 사방에서 술술 들어오는게, 집주인한테 집수리 좀 해달라그래, 아주 단열이 최악이야, 최악! 자는데 추워서..." "...털 있는데도 춥다고 떼쓰는 네가 그러면 난 얼마나 추웠겠냐. 이 요물같은 것아 !" "자꾸 요물 요물 하지 마라. 싫어한다 그랬잖아" 으으...저렇게 이불 뒤집어쓰고 누운 채로 눈 감고 말 한마디 한마디 받아치는 거 보면 정말이지 요물같다. 어쨌든 나는 계속해서 따졌다. 빙빙 돌려 말하면 자꾸 꼬투 리 잡히니까 아예 딱 부러지게 물어봐야지! "이불 왜 가져갔냐?" 그녀석 역시 똑 부러지게 대답했다. "추워서" "추.워.서?" "응" "그럼 사람으로는 왜 또 변했는데?" "고양이인 몸으로 이불 쓰면 사이즈가 안 맞거든. 자칫하면 이불 때문에 자다가 숨 막힌다구" 어이구, 참 가지가지 하시는구만. "그럼 이제 그만 고양이로 돌아 오시는게 어때?" "조금만 더 자구" "이제 잠이 깰 때도 되지 않았냐?" "어제 잠을 못 잤더니 아직도 졸리네" "그래? 그럼 잘 자라" "왠 일로 순순하네?" "......" 난 대답없이 몸을 돌렸다. 그냥 자게 놔 둘거냐구? 물론 아니다. 난 그대로 문으로 다가가서 문을 활짝 열어 제꼈다. 휘이이잉! 찬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얼음장 같 다. 와! 시원해. 그리고 그녀는 뒤에서 소리쳤다. "꺄악! 문 닫아!" 당연히 나는 딴청을 피웠고. "공기가 탁하구나...흠, 흠... 환기를 좀 시켜야겠는걸...와! 시원하다. 상쾌한 공 기가 아주 방안으로 퍼 붓는구나, 퍼 부어. 고양아, 너도 시원하지? 아 참, 그러고보 니 고양이는 자겠구나. 응? 안 자는구나. 그런데 왜 그리 날 죽일 듯이 노려보니? 잠 안오나 보지? 그럼 일어나야지. 추우면 고양이로 돌아오는 것도 좋겠다, 야. 털 많으 니까 따뜻할 거 아냐. 푸하하하하!" 난 결국 통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아아, 복수! 기분좋은 복수! 이 복수에의 쾌감이 여! 계속해서 웃음이 나오는구나! "푸하하하헤헷취!" 에취! 크응. 콧물 나오는군. 그러고보니 문을 열어 놓으면 나도 춥다는 사실을 망각 했네. 역시 복수는 복수를 하는 당사자도 망쳐버린다는 옛 말이 맞나보군. "얼씨구, 잘났어. 자기가 문 열고 자기가 감기걸리네" "가, 감기 걸린 거 아냐. 그저 추워서 콧물이 좀..." "잘났어, 정말. 추우면 문이나 좀 닫지 그래?" "아, 안 그래도...다, 닫을 생각이었어. 나, 나한테... 자꾸 보채대지 마. 으, 추 워" 쾅! 난 벌벌 떨면서 문을 닫았고 내 등 뒤에서는 계속 픽! 풋! 훗! 하는 등의 웃음 소리가 들렸다. 그래 잘났다 정말. "어쨌든, 이제 좀 고양이로 돌아 오시지? 추워 죽겠어. 나도 이불 좀 쓰자" "어휴, 남자가 돼 가지고선 엄살은... 참어" "...너는 프랑스 출신이랬지?" "응. 그런데 왜?" 그녀는 그 큰 눈을 깜박이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날 쳐다봤고 난 따뜻하게 내 궁금 증을 속삭였다. "그런데 왜 그리 싸가지가 없어?" "...국적과 그런 것은 별 상관 없다고 알고 있어" 농담 따먹기를 해도 하나도 재미 없군. 언제 이 녀석과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주고받 을 정도로 친해졌는지 모르겠지만. 에휴! 라면이나 하나 끓여 먹어야지. 난 부엌으로 가서, 아, 하숙집에 무슨 부엌이냐구? 우리 하숙방은 말만 하숙방이지 셋집이나 다름 없다. 주인집은 아래층인데, 밥을 끓여먹던 죽을 끓여먹던 신경도 안 쓰고, 그 대신 방 옆에 아주, 정말, 발 디딜 틈도 없을만큼 작은 부엌이 하나 있다. 그 부엌에 있었 던 건 가스레인지 하나와 냉동실 없는 미니 냉장고 하나. 그래서 난 언제나 가스렌지 를 이용해 주로 식사를 해결한다. 물론 라면. 참고로 미니 냉장고에는 계란, 파 등 라면에 넣어먹으면 도움되는 것들로만 꽉 차있다. 어쨌든 난 부엌으로 가서, 며칠 전 부터 언제나 밥때만 되오면 해 오던 짓을 했다. 라면 박스에 손을 넣은 것이다. 이제 하나밖에 안 남았을텐데... "응? 이상하다. 왜 손에 닿는 게 없지?" 그 때 방에서 소리가 들렸다. "야, 춥다. 면은 하나만 넣고, 스프 두 개 넣어서 국물 많이 만들어라. 나도 국물 좀 먹자" 난 무시하고 계속 박스 바닥을 더듬었다. 엉? 없잖아? 서...설마? 난 급하게 라면 박스를 뒤집었고, '제발...제발...'을 기원하던 내 바램과는 달리 아무것도 떨어지지 않았다. 이런 젠장! 운이 없으려니까 정말 계속해서 없군. 이 추운데 나가야 하다니. 난 다시 방으로 들어가서 주섬 주섬 옷을 두껍게 챙겨 입었고, 그런 나를 보며 녀석 이 한마디 했다. "왜? 어디 가게? 라면 없냐?" "어쩜 그리 잘 아냐" "와! 잘 됐다!" 갑자기 그녀가 손뼉을 마주치며 좋아했다. 물론 이불 속에서. 으, 얄미워. 요물은 요물인가보다. 어쨌든 난 물었다. "잘 되긴 뭐가 잘 돼?" "야! 너 매일같이 라면만 먹느라 얼마나 건강이 안 좋아졌니. 어이구, 눈 밑에 푹 들어간 거 봐. 사람 꼴이 말이 아냐, 정말!" 나를...걱정해 주는 거야? 갑자기 마음 속에 감동의 물결이 밀려오는 날 발견할 수 있었다. 난 감동에 젖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뭐, 뭐가 잘 됐는데...? 아니, 인사부터 해야지. 날 걱정해 주다니, 고 마워! 뭐. 뭐가 잘 됐는데...?" 그리고 그녀는 생글거리며 대답했다. "우리 생선 사 먹자!" 이런 젠장. 아주 감동의 물결앞에 댐을 세워라, 댐을 세워. 난 날카롭게 대답했다. "돈 없어!" "돈 많은 거 알어. 꼴을 보아하니 하숙하나 본데, 자식 하숙시키고 맘 편할 부모가 어디 있을까. 생선 한 마리에 얼마나 한다고 그래. 누가 회같이 비싼 거 사 달래? 그 냥 고등어, 아니 꽁치, 아니 겨울을 맞아 동태도 좋고. 네 능력 되는대로 사 주면 돼. 생선 못 먹은 지 너무 오래 됐단 말야" "으으으..." "응, 사줘라, 응? 사 줄거지? 응? 응?" 에구...이러니 어쩌하랴. 꼼짝없이 식객 하나 들였는데 그 기념으로 한 마리 사 줘 야지. 무엇보다... 졸라대는게 예뻐서 차마 거절을 못 하겠다... 어휴... "알았어, 알았으니까 좀 고양이로 돌아와라" "...왜?" "같이 안 갈거야? 네가 사자 그랬으니 네가 골라야 할 것 아냐. 난 뭐가 맛있는지도 잘 모른다구" "그래? 그럼 그냥 이대로 가자" "...왜?" "길 한복판에서 고양이가 말하는 거 보면 사람들이 참 재밌어 할 지도 모르겠지만" "아니, 너 고양이 소리로도 울 수 있잖아?" "그렇게 울어서 말하면 네가 알아 듣냐?" "쩝, 그건 그렇네. 그런데 너 그 차림으로 가려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즐겁겠지만.. ." "너 옷 더 없냐?" "...이젠 옷까지 뺏어 입으시려고?" "이왕 같이 사는 거 하나만 줘라, 응?" 정말 어쩜 이렇게 능글맞을까. 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말했다. "나가 있을테니 옷걸이에서 아무거나 골라 입어. 휴우" 휘잉. 으으 추워. 무슨 날씨가 이렇게 춥냐. 문 밖에 서서 계속 고양이 그 녀석을 기다리고 있자니 너무 추워서 미치겠다. 그런데 그 때 방 안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 다. "꺄아아아악!" "왜, 왜 그래?" 물론 나는 이성이 있기 때문에 '왜 그러는데?'를 외치면서 문을 벌컥 여는 짓 따위 는 하지 않았다. 단지 밖에서 물어 봤을 뿐이다. "아니 도대체 왜 그러는데?" "속옷이 없어..." 화끈! 내 얼굴은 순간 확! 달아올랐다. 이런 젠장. 고양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정말 창피한 걸 모르는군. "아무거나 입어 좀!" "그럼 니꺼 입냐?" "......" 그러고 보니 그것 참 심각한 문제군. 저 자식이 나 아는, 아니 알던 모르던 남자였 으면 '그냥 내꺼 입어...뭘 따져...'했겠지만. 그러지도 못하니. "야! 없어?" 안에서는 계속해서 독촉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난 힘없이 말했다. "옷 쌓인 곳에 뒤져 봐. 새거 있으니까 그거 입어. 젠장" 아아, 빨래하기 싫은 하숙생활에서는 새 속옷만큼 중요한 게 없는데! 이제 그것까지 뺏긴단 말이냐! 크아악! 그 안에서는 잠시 '사각이잖아 젠장'뭐 이런 궁시렁거림이 들렸다. 거 되게 따지네, 진짜. 잠시 잠잠해지더니 또 다시 불평불만. "야! 바지 없어 바지? 아, 여기 청바지 있는거 대충 입으면 되겠네. 야, 신경꺼라. 해결됐다" 뭐? 지금 청바...지라 그랬냐? 아아악! "으아악! 청바지? 안 돼! 그건 내 세 벌의 바지 중에서 홀로 빛을 발하는 유일한 메 이커 바지란 말이야! 제기라아알!나도 한 번도 안 입은거란 말이야아앗!" "그래서?"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이런 식으로 나오면 할 말 없다. '그래서 내 말은 그 옷을 입지 말란 말이지...'뭐 이런 식으로 나갈 수도 있지만. 이미 기세에서 한 발 지고들 어가니. 젠장. 그래, 너 입어라, 너 입어. "이런 젠장. 윗도리도 없어? 아, 여기 셔츠 있네" 뭐? "아아악! 안 돼! 그 셔츠는 집에 내려갈 때 입으려고 라면만 먹으면서 돈을 모으고 모아서 산 거란 말이야! 포장도 안 뜯은 걸 입으려 하다니 네가 사람이냐!" 뭐,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서울에 오기 전에 집에서 옷 사입으라고 준 돈으로 산거 다. 어쨌든. 난 아직 포장도 안 뜯었는데! 내 웃도리중 유일한 비싼 옷이란 말이다악 !네가 정녕 사람이냐! "물론 난 사람이 아니라 고양이야" "......" 젠장. 또 지고 들어가는군. 아이 씨, 그래, 너 입어라, 입어! 으으으, 추워. 그 바 람 한 번 정말 세게 부네. 빨리 안 나오나? 삐이걱. 하숙집의 문이 열리고 녀석이 나왔다. 얼씨구. 파카는 또 어디서 찾았냐. 잘났다, 잘났어. 어휴. 젠장. 아무거나 좀 입지 그렇게 아껴놓은 옷만 골라 입어야 속이 시원하냐? 그런다고 뭐 예쁘냐? ...조금 예쁘긴 하네. 어쨌든. "그래, 이제 맘에 들게 다 입었냐?" "별로 마음에 들진 않지만 뭐 할 수 있니? 네가 워낙 궁하게 사는데" "그래, 그래. 가자" 어휴. 왠지 내가 식객이고 쟤가 주인인 것 같애. 솔직히 고양이를 들여놨다고 하면 당연히 고양이가 애완동물이 되고 내가 주인이 되야 정상 아닌가? 어떻게 된 게 우리 는 거꾸로 되서 쟤가 주인이고 내가 얹혀사는 식객이 된 것 같으니. 안 그래? 애완동 물. 난 옆을 쳐다보았다. 하, 아름다우시군요. 이런 애완동물이라. 음. 생각이 불순 해 지려고 하는군. 미안하다, 야. 난 그녀석을 쳐다보며 마음속으로 사과했다. "야, 무슨 생각하냐? 잡생각 하지 말고 빨리 빨리 좀 가" "알았으니까 좀 보채지 좀 마. 어휴" 이러니 사과고 나발이고 할 마음이 나겠냐? 난 계속 궁시렁거리며 시장으로 향했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시장의 모습은 참 뭐랄까...한국의 분위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게 한다고 할까? 뭐 그런 느낌이다. 세상이 망해도 이것만은 꼭 팔아야겠다고 주장 하는 듯이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들. 음. 삶의 활력이 느껴지는군. "아아악!" 뭐, 뭐야? "아아악! 사과 사세요오오! 사과 좀 사악! 사과!" "......" 가끔씩 깜짝 놀라게는 하지만 사람의 눈길을 끄는 사과 장수도 있고. 저렇게 소리 지르면 목이 안 아픈가? 장사 하루이틀 할 것도 아닌데 자제좀 하지. 어쨌든 참 재밌 는 장면들이 이곳 저곳에 많은데 그래. "뭐 물건을 저렇게 파냐? 나같으면 기분 나빠서 안 사겠다" 내 옆에서 걸어가던 고양이가 말을 걸어왔다. 에휴, 별 걸 다 신경쓴다. 그냥 저런 식으로 장사를 해도 잘 팔리면 되는거지. "그래도, 눈길을 끌면 절반은 성공이잖아" "아니지. 아무리 눈길을 끌면 뭐해. 살 사람이 기분이 나쁘다는데" "그런가?" 잘 모르겠네. 그런가? 그건 그렇고 생선이나 사러 가야지. 아, 참. 그 전에. 난 고 양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자, 손" "손? 손은 왜?" "글쎄 손" 나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 것을 요구했고 그녀가 멀뚱히 쳐다보며 손을 내밀자 난 그 손을 꼬옥 쥐며 말했다. "옛다, 만 원. 이거 가지고 저기 속옷가게 가서 사라, 좀. 아침같은 추태는 다시는 보기 싫구나. 또 언제 사람으로 변할지도 모르는 일이고" 손 안에 꼬깃꼬깃하게 접힌 만 원짜리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흑, 나 불쌍해. 변변히 넣을 지갑도 없어서 돈을 이렇게 꼬깃꼬깃 접어 가지고 다니다니. 어쨌든 그 녀석은 한참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말했다. "너 서울의 물가가 그리 만만해 보이냐?" "......자, 천원 더. 됐냐? 알아서 깎아서 사" "......워낙 인간이 비참해서 봐 줬다. 기다려라, 갔다 올께" 그 녀석은 가게로 뛰어갔고 나는 과일가게 옆에서 녀석을 기다렸다. 어? 날씨가 많 이 풀렸네? 주위의 공기가 많이 따뜻해진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응? 그런데 왜 갑자 기 콧등이 시큰해지지? 갑자기 코 끝이 차가워지는 느낌. 난 의아해하며 코를 만졌고 내 손 끝에 묻어나는 물기를 느끼며 눈이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음. 눈이 오나 보네. 맞군, 오는군. 참, 눈이 온다니. 멋있네. 그런데 어제가 크리스마스였는데. 눈이 오려면 어제 올 것이지. 쳇. 난 머리를 긁적이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눈이 오긴 오는지 주위에서 약간씩 흰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눈이라고도 부를 수 없을 만큼 적은 양이었다. 이 정도면 크리스마스날 눈이 내렸어도 별로 기분은 안 났겠다. 내가 하늘을 쳐다보며 상상에 빠져 있는데 누가 날 툭툭! 친다. 그 녀석인가? 응, 맞 군. 손에 쇼핑백을 들고 있는 걸 보아하니 사 왔나보다. "야, 가자. 속옷 샀다. 이제 생선이나 사러 가자" 속옷 어쩌고 하는 이야기가 나오니까 주위에서 지나가던 사람들이 힐끔 힐끔 쳐다본 다. 젠장. 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거스름돈은?" "이게 보자보자하니까 정말...천 원 깎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어이구. 잘났다. 장하다. 그래, 어떻게 깎았냐?" 그녀는 씨익 웃더니 날 쳐다보며 날카롭게 울었다. 캬아아아옹! "이렇게" "...그래. 어련하겠냐. 생선이나 사러 가자" "아이구, 색시가 참 참하네~ 총각이랑 무슨 사이여? 애인이여?" 어이구, 아주머니. 한 진도 유망한 청년 인생 박살낼 생각 아니라면 그런 말씀은 하 지 마세요. 애완동물과 애인사이라니요. 참. 전 만물의 영장 사람이라고요. 얜 얼굴 만 좀 많이 예쁘지 짐승이에요, 짐승. 아니, 어휘적 표현의 짐승이 아니라 진짜 짐승 이죠. 그런 짐승과 날 애인사이로 맺으려 하다니 말이 됩니까? 난 웃기지도 않는다 는 표정을 지으며 녀석을 쳐다보았고, 그 녀석은 아주 기가 막혀서 미치겠다는 표정 을 짓고 있었다. 그래, 너도 물론 그렇겠지. 난 다시 아주머니에게 말도 안 되는 소 리 하지 마시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참, 아주머니도. 농담도 잘 하셔. 그냥 아는 친구 사이에요. 그치?" 아예 날 모른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버리는 고양이. 알았어, 알았어. 젠장. "거기 생선이나 좀 싸 주세요, 아줌마" "으...응. 뭘로 줄까?" 난 고양이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야, 뭐가 맛있냐?" "음...너 돈 얼마나 있냐?" "왜? 먹고 살만큼 있어" 얼마인지 말하면 돈 되는만큼 다 사려고 그러지? 참 나. 내가 그리 호락호락해 보이 냐? 난 빙빙 돌려서 어중간하게 대답했고 그녀석은 신경에 자극을 받았는지 날카롭게 말했다. "딱 부러지게 말 못하겠어?" 그 때 끼어드는 아줌마. "아이구, 색시가 참 당돌하네" "아, 예, 호호..." 입으로는 웃지만 눈은... 으으. 저 날카로운 눈빛을 아주머니가 봤다면 뭐라고 하셨을까. 아줌마, 나이스 타이밍입니다 그려! 어쨌든 난 말했다. "오늘 물 좋은 거 뭐에요?" "응? 음...오늘은...갈치가 좋지! 왜? 한 마리 살려고? 아유, 갈치 좋아" 그러나 그 때 끼어드는 고양이. "갈치는 잔가시가 많아서 싫어요. 뭐 딴 거 없어요?" "색시가 차암 깐깐하기도 하 지" "......아, 예..." 당황해하는 그 녀석을 보니 나름대로 귀엽긴 했지만 귀엽다는 생각보다는 참으로 쌤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줌마, 더 해요! 더! "그래서, 뭘로 살 거야? 색시가 잔가시가 싫다면 고등어도 좋지!" "아, 예. 고등어요, 그런데 그건..." 아, 짜증나! 뭘 저렇게 따지는 게 많아! "그냥 고등어 한 마리 주세요!" "아이구, 총각이, 사는 김에 두 마리 사!" "......아뇨...그...그냥 한 마리만 주세요..." "...그래? 잠시만 기다려..." 고등어를 다듬는 아줌마. 머리를 잘라내고 막 내장을 긁어내서 버리려는데 고양이가 또 한 마디 한다. "아줌마, 머리랑 내장도 버리지 마세요" ...먹으려고? 하긴, 고양이로 돌아온 다음에 먹으면 되겠지. 근데 그거 맛있냐? 난 좀 짜증난다는 눈빛으로 쳐다봤고 아줌마도 참 여러 가지 트집잡는다는 얼굴로 한참 고양이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아이구, 색시도 참...깐깐해..." "......예, 호호..." 어쨌든 머리와 내장까지 싸서 넣어준 아줌마. "얼마에요?" "2300원만 줘" 다시금 따지는 고양이. 뭔 불만이 그리 많냐...아무래도 아까부터 '색시...깐깐해.. .참..." 뭐 이런 식으로 아주머니가 꼬투리를 잡았던 게 마음에 걸렸나보다. 그냥 넘 어가 좀...사람 피곤해... "아니 2000원이면 2000원이지 300원은 또 뭐에요?" "내장값" 이렇게 나오면 할 말 없지. 내가 돈을 드리려는데 아주머니가 깔깔대며 웃더니 말했 다. 돈 내도 돼! 내도 돼! 아줌마 오늘 좋았어요! "정말 삼백원도 주려고? 됐어, 그냥 2000원만 줘" "아...예, 감사합니다" 원래는 주인아줌마가 인사하고 손님이 인사를 받아야 하지만 너무 당황해서 순서가 바뀌었다. 어쨌든 난 어영부영 인사를 하고 얼른 그 곳을 떠났다. 아줌마가 웃는 소 리가 들려왔다. 깔깔깔! 으으. 왠지 고양이고 나고 다 당한 느낌. 길을 걸어가는데 다시금 고양이가 한마디 한다. "휴우. 당황해서 혼났네. 캬악" "뭘? 재밌더구만" 내 말을 들은 고양이는 잠시 날 쳐다보더니 그대로 생선가게 아주머니의 목소리를 흉내내기 시작했다. "총각, 차암 취향도 독특해?" "......" "그게 재밌냐?" "......" 난 말없이 계속 길을 걸어갔다. 말을 안 하니까 심심해 졌나보다. 고양이가 먼저 말 을 걸어온다. "어디로 가는거야? 이제 돌아 가는거야?" 이제 어디로 갈 거냐구? 그냥 잠시 슈퍼에 들렸다가 집으로 가야지, 뭐. "시장 입구에 있는 슈퍼마켓에 갔다가 집으로 가야지" "그럼 가는 김에 우유 좀 사줘라!" 아주 가지 가지 하는군. "넌 어쩜 그리 부르주아의 상징들만 그렇게 좋아하냐" "우유가 언제부터 부르주아의 상징이었지? 난 건강에 좋은 음료로만 알고 있는데" "아니...뭐...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음, 말을 하다보니 어느새 슈퍼마켓에 다 왔군. 난 말 나온김에 오랜만에 우유 맛 좀 보자고 고양이에게 말했고 녀석은 좋아서 팔짝 팔짝 뛰면서 우유를 가지러 갔다. 좋겠다, 좋아하는 거 먹어서. 나도 나 좋아하는 갈비 좀 뜯어봤으면 좋겠다. 젠장. 난 궁시렁대면서 라면 몇 개를 집었다. "골라왔냐?" "응, 우유랑, 이거" 녀석은 나에게 우유와 참치통조림 두어 개를 내밀었다. 이건 또 뭐냐? "야, 참치는 또 뭐야? 점점..." "응, 걱정마. 그건 내 돈으로 벌써 산 거니까!" 뭐? 네 돈으로 샀다고? 난 황당해서 물었다. "야! 네가 돈이 어디 있어서? 100원짜리 하나 없잖아!" "사실은 아까 옷 사고 거스름돈이 좀 남았지롱~" 으윽...으윽...으윽! 얄미워 미치겠다, 정말... 어쨌든 난 내가 고른 것들을 계산한 후 녀석의 우유와 통조림을 받아든 뒤 가게를 나섰다. 뭐, 은근슬쩍 내가 짐을 다 들 게 된 게 이상하긴 하지만 일단 이렇게 며칠 치 식량을 마련하고 나니 큰 짐을 덜어 낸 기분이다. 휴. 어쨌든 나와 그 얄미운 녀석은 주거니 받거니 상대의 속을 긁으며 집으로 향했다. 아함, 이제 라면이나 끓여먹고 낮잠이나 한 숨 자야지. 후우. 사박 사박. 눈에 띄지 않게 조금씩 내리는 눈이었음에도 땅을 얇게 덮을 만큼 눈이 쌓여서 듣기 좋은 발자국 소리가 났다. 난 많은 날씨들 중에서도 눈 오는 날이 좋더 라. 난 옛날부터 눈이 오면 왠지 가슴이 두근두근 뛰고 마음이 심란해졌었는데, 오늘 더 이렇게 눈이 오니까 괜히 기분이 이상해진다. 난 약간 두근거리며 옆을 쳐다보았 다. 내 옆에는 아름다운 여자 한 명이 지나가고 있었다. 겉모양은 정말 예쁜 여자. 그러나 사실은 버르장머리 없는 고양이. 얘도 눈 오는 날은 기분이 이상해질까? 그런데 갑자기 눈을 크게 뜨는 그녀. 어이구, 갑자기 왜 예쁜 척? 넌 눈 크니까 더 크게 안 떠도 돼. 설마 내 시선 의식한거냐? 난 다정히 말을 걸었다. "뭐야, 갑자기 무섭게 눈은 왜 크게 뜨는데" 내가 장난스럽게 시비를 걸었음에도 상대를 안하고 고갯짓으로 앞을 가리킨다. 왜 그러는데? "잠깐, 저 앞 좀 봐" 내 앞을 보라니? 지금 내 앞에는 그냥 느릿 느릿 굴러가는 정말 비싸고 멋지게 생긴 흰색 메르세데스 벤츠...크악! 사람 속 긁는 거야 뭐야! "그래 우리집은 그 흔한 스쿠터 하나 없다 어쩔랫! 엄마, 우리 집이 지금 고양이한테 무시 당했어요! 그러게 내가 진작 차 한 대 사자고 그렇~게 말을 해도..." "...지금 내가 너희 집 부나 자동차 소유관계 같은 걸 물어봤냐? 내가 너희 집에서 고급차를 모는지 달구지를 끄는지 알 게 뭐야?" "그럼 왜 그러는데? 도대체 왜 앞을 보라고 말 한거야? 우리 앞에는 별 특징없는 사 람들과 그 사이를 지나가는 매우 특징있는 벤츠 한 대밖에 없잖아" 고양이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지, 잘 봤네. 매우 특징있는 저 차에 대한, 아니 정확히 말하면 차주인에 대한 일이야. 일단 저 차가 천천히 가니까 천천히 따라가면서 말하자. 저 차를 따라가" 그녀석은 왠지 모르게 심각해 보였고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그 벤츠를 따라가며 물었 다. "...뭔데 그래?" "잘 들어. 내가 350년을 살았음에도 인간사회는 여전히 나에게 복잡한 곳이지만, 옛 날부터 화려한 수레는 부의 상징이었지. 저거 탄 사람 부자 맞지?" 얘가 갑자기 왜 부자는 따지고 난리야? 웃기네, 참. 도대체 왜 그러는데? "으...응. 그렇겠지. 그런데 왜?" 내 말을 듣자 갑자기 나를 휙! 쳐다보는 그녀석. "너, 아르바이트 하나 안 할래?" 물론 나를 쳐다보느라 발걸음을 멈추거나 한 건 아니다. 내가 지나가는 여인, 심지 어는 고양이까지 걸음을 멈추게 하는 미남은 아닐 뿐더러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는 외모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 같으니까. 어쨌든 그녀는 여전히 벤츠를 종종걸음으로 따라가면서 말했고, 그 이야기는 갑작스러웠지만 내 귀를 솔깃하게 했다. 뭐? 아르바 이트? 나야 좋지! 그런데 네가 아무리 서울에서 오래 살았다고 해도 아르바이트 자리 까지 꿰고 있지는 않을텐데? 그리고 저 벤츠와 아르바이트가 무슨 상관이 있길래 벤 츠를 졸졸 따라가는 거야? 난 의심이 가득 든 눈으로 물었다. "무슨 아르바이트?" "할 거야 안 할거야? 무슨 일인지는 걱정하지 마. 보수도 걱정하지 말고. 돈은 저 차 주인이 줄거야, 아마. 그것도 아주 많이. 그리고 일은 내가 거의 다 할거고, 아 마" "...그래? 정말이지?" 고양이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아마도" 아마도? 여운이 남는 말이다만 하숙집에서 매일같이 뒹굴거리는데는 이제 질렸다고! 좋아! 까짓거, 설마 죽이겠냐. 하자! 해! "까짓거 하지 뭐. 뭔데?" "지금 가서, 차부터 세워" 난 마구 뛰어갔다. 그 차는 여전히 사람이 많이 지나 다니는 차도인지 인도인지 구 분도 안 가는 길을 지나가느라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저런 고속 도로도 성에 안 찰것 같은 차가 왜 시장바닥에 들어선 거지? 뭐, 무슨 이유가 있겠 지. 그런 생각들을 하며 난 차 문 옆에 붙어서, 창문을 두드렸다. 똑똑! 부우우웅... ...물론 나같은 사람에게 호락호락하게 문을 열어줄거라고는 생각 안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무시를 하고 가버리면 너무 무안하잖아. 차는 조용한 엔진음과 함께 내 행동 에 대한 대답없이 계속 앞으로 나아갔고 나는 왠지 모를 오기에 문을 계속 쾅쾅! 두 드려댔다. "이봐요! 이봐요!" 곧 위이잉... 하는 부드러운 모터소리와 함께 창문이 열리고는 안에서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야 이 자식아! 지금 뭐하는 짓이야! 너 지금 무슨 짓 하는지 알기나 하냐! 여기 타 신 분이 누구신지 알기나 하냔 말이다! 너 이 빌어먹을 새끼 안 비키면..." ...그렇게 욕설을 퍼부어댈 것까진 없잖아요. 쳇. 내가 아무리 어리고 보통 사람이 라고 해도 그렇지. 난 조용히 말했다. "아, 예. 죄송합니다. 하지만 잠시 볼 일이..." "이 비루먹은 강아지같은 게 무슨 헛소리야! 안 그래도 길이 막혀서 죽겠구만 자꾸 시비걸래? 엉? 안 비켜?" 비루먹은 강아지라. 비루먹은 강아지...하하하. 젠장. 길 막히는것까지 나한테 성질 내고 난리야. 그러길래 이 시장통에 차는 왜 끌고 오는데. 그것도 흰색 벤츠로 말야. 잠깐 불렀다고 비루먹은 강아지면 이 희디 희고 깨끗한 차에 더러운 거라도 묻으면 묻힌 사람을 아주 갈아마셔버리겠구만 그래. 난 점점 울화가 치밀어 오는 걸 느꼈다. "잠시 볼 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잠시 기다리시면..." "보나마나 비럭질이겠지 뭐! 꺼져!" ......비.럭.질? 꺼. 져? 내가 '아직도 참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심각하게 고민 하고 있을 때 차 뒤에서 한 중후한 중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봐, 김기사. 보아하니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차까지 세울 정도로 급한 일인가 본 데, 왜 이리 사람을 막 대하나. 그러면 듣는 사람이 기분이 나쁘지 않겠나" 보아하니 윗사람의 인품은 됐군. 그러나 기사석에서 나오는 소리는 아랫사람의 인품 은 개판이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느끼게 했다. "아닙니다 사장님! 보나마나 차만 보고 어떻게 국물 좀 안 떨어질까 하고 이 난리를 치는 것이 뻔합니다! 저 몰골을 보십시오! 얼마나 추레합니까!" ...추.레? ...아, 정말 열받게 하네. 아저씨, 자꾸 이러면 저라도 더는 못 참는다구 요. 아르바이트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고 욕이나 확 퍼 붓고 가버려? 젠장! "야, 가! 안 가냐? 쯧쯧! 쉬쉿!" 마치 개를 쫓는듯한 저 손짓과 행동. 젠장! 더는 못참겠다! "아니 보자보자하니..." 그 때 내 뒤에서 들려오는 앙칼진 목소리. "참, 건방짐이 하늘을 찌르는군요. 뭘 믿고 그렇게 건방지죠?" "...뭐?" 예쁘게 생긴(하지만 옷은 좀 부자연스럽게, 한마디로 마치 남자처럼 막 입은...뭐 그래도 나한테는 다 가장 귀한 옷이지만) 지나가던 아가씨가 갑자기 자신에게 시비를 걸자 그 기사아저씨도 기가 막혔나 보다. 당신은 기 좀 더 막혀야 해. 고양이는 계속 해서 기사에게 말했다. "당신 주인이 얼마나 잘 나가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신 정말 성격 나쁘군요. 참, 나이도 어린 것이 말하는 건 참..." 야, 너 말 실수했어 임마...내가 기사아저씨 나이에 저 녀석에게서 저런 소리 들었으 면 기가 막혀서 말이 잘 안 나올 것 같은데. 자기 딸자식 만한 계집애가 나이 운운하 니 내가 기사 아저씨라도 미칠 것 같은 것이다. 그리고 내 예측대로 기사 아저씨는 기 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표정과 정 반대되는 행동을 잘 하는 아 저씨군. "야, 너 몇 살인데 그렇게 싸가지가 없어!" 아, 듣고 싶지 않다! 저렇게 흥분한 저 녀석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는 뻔한 일! "삼백 오십살이에요! 왜욧!" 으으, 그럼 그렇지. "아하하하! 미친 사람이었잖아!" ......오, 젠장. 김 기사인지 뭔지 하는 사람은 말도 안 나오는지 입만 떡 벌리고 고양이를 쳐다보고, 지나가다 싸움 났다고 생각하면서 어느새 웅성웅성 모여들어 쳐 다보던 사람들은 몽땅 우리를 쳐다보며 비웃는다. 내가 구경꾼이라도 미쳤다고 할 거 야. 젠장. 난 억지로 웃으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일부러 주위 사람들 들으라고 크게. "야, 너 왠 농담을 그렇게 심하게 해! 사람들이 너 미친 줄 알잖아!" 그 때서야 자기가 실수했다는 걸 깨달은 고양이. 잠시 머리를 벅벅 긁더니 앙칼지게 말한다. "캬아악! 어휴, 성질나. 그래요, 저 스무 살이에요. 됐어요? 그런데 나이 어린 사람 한테는 그렇게 막 대해도 되요?" 으으, 다 좋은데 고양이 소리로 우는 건 또 뭐냐. 아이구, 골치야. 무슨 아르바이트 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래서는 아르바이트고 나발이고 물 건너 가겠군. 이런 차 모는 사람 밑에서 일하면 보수가 장난이 아닐텐데. 또 알아? 시간당 오천원 씩이나 쳐줄지 ! 내가 내 미래의 아르바이트에 대한 심각한 고려를 하고 있을 때 고양이는 내가 고 민을 하던 말던 말을 이었다. "이래서야 도움을 주려고 해도 도움을 주겠어? 당신, 잔챙이 기사 말고 그 뒤의 사 장님, 대답해봐요. 요즘 뭔가 이상하죠? 마치 집에 귀신이라도 나오는 것 같은 양. 매일 그러죠? 접시가 날아다닌다거나 도깨비불이 떠다닌다거나" 오, 젠장. 이래서야 지나가는 사람 붙잡아놓고 '도를 아십니까? 요즘 집안에 뭔가 이상하죠? 사돈의 팔촌의 범위까지 생각해봐요. 아픈 사람이 있죠? 혹시 동네에 나무 없어요? 있죠? 어이구, 나무가 있어서 당신 친척이 다친거야!' 라고 말하는 사람과 뭐가 틀린가. 눈은 점점 더 펑펑 내리고 있었고 내 기분도 창피함에 펑펑 박살나고 있었다. 젠장. 주위 사람들 속삭이는 거 봐라. '사이비인가 봐''무당아냐?''하튼 요 즘은 별 마케팅이 다 있어''저래서 관심을 끌면 뭐해, 당하는 사람이 싫다는데' 하여 튼 사람을 순식간에 무허가 기공단체 소속 홍보원으로 만들어버리는구만. 어쨌든 나 를 저녀석과 같은 취급하는 소리가 들려올때마다 난 점점 더 고양이에게서 한 발짝씩 멀어지며 시선을 자꾸 다른 곳으로 돌리게 되었고, 내 얼굴은 점점 더 붉어졌다. 창 피해서. 그런데 이상하다. 원래 수순대로라면 김 기사인지 김 전사인지의 욕설이 쏟 아져야 하는데 왜 조용하지? 나는 의아함을 느끼며 고양이와 벤츠를 번갈아 쳐다보았 다. 고양이는 팔짱을 낀 채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당당히 서 있었고 벤츠 안은 여전 히 침묵이었다. 그러다... 벤츠 문이 조용히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 회장이라는 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놀랍군. 일단 타게. 길 한복판에서 이야기하기는 약간 부적당하군. 일단 타고 가면서 이야기하지" ...뭐? 타라고? 지금 나보고 타라고 그런 것 맞지? 에이, 설마. 이런 귀하신 몸께서 나같은 자취생에게 이 비싼 차를 타게 할까. 난 반신반의하면서 물었다. "예...예? 저...저 말입니까? "...그래요. 자네도 타고, 그리고 아름다운 숙녀분도 얼른 타시게나" 이...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주위에서는 아직도 '회장이란 사람 참 순진하기도 하 네. 저렇게 해서 넘어가면 내가 먼저 해볼걸''어이구, 왠 여시같은 계집이 사람 하나 금방 홀리네...''끌끌...저렇게 차에 타서 어쩌려구 저러누...'등등의 소리가 들려왔 다. 그리고 고양이는 차를 타기 전에 자신에게 마구 비난을 퍼부어대는 사람들에게 씨익 웃어 주었고, 그걸 본 남자들은 잠시 얼이 빠져 비난을 멈추고는 멍하니 고양이 를 쳐다보았다. 당연히, 그와 반대로 여자들의 비난은 더욱 심해졌지만. 어쨌든, 우 리는 그 하얀 벤츠에 올라탔고 탁! 소리를 내며 문을 닫자. 벤츠는 천천히 출발했다. 정말, 문까지도 이렇게 소리없이 닫히다니. 신기하네. 햐, 차 안 정말 좋네. 내 하숙집보다 더 편한 것 같아. 의자도 푹신푹신하고. 아니, 시트라고 하나? 어쨌든, 햐, 이거 정말 푹신푹신하네. 드러누워 자도 하숙집 냉돌바 닥보다 훨씬 깊이 잠들 수 있겠는걸? 나는 계속해서 엉덩이를 들썩들썩거렸다. 물론 눈에 안 띌 정도로. 그 때 누가 내 옆구리를 꽈악! 꼬집는다. 으아아아악! 꽤애액~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회장인지 뭔지 하는 사람이 내 왼쪽에 있으니까 그러지 도 못하겠고. 나는 입을 앙다문채로 속으로만 비명을 삭였다. "으...으으윽..." 더 이상해 보였나보다. 옆의 회장이 이상하게 쳐다본다. "자네 어디 불편한가?" 난 손으로 무릎을 꽈악 쥐거나 팔을 비튼다거나 하는 등의 행위로 어떻게든 고통을 참으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괘...괜찮습니다. 하...하...하..." 대충 나의 미소로 옆의 회장의 이상하다는 듯한 눈빛을 무마시킨 후, 나는 고양이에 게 속삭였다. "야, 뭐야! 지금 나랑 장난치자는 거야 뭐야! 왜 꼬집고 난리야!" 그러자 그 녀석은 오히려 한 술 더 떠서 나를 노려보며 몰아붙인다. "차 처음 타보냐? 아주 엉덩이가 춤을 추더구만, 춤을 춰. 아무리 곤궁하게 산다고 해도 그렇지 꼭 그렇게 궁한 티를 내야겠냐? 응? 왜? 아주 드러눕고 잠을 자지 그러 냐. 아주 옆에 있자니 창피해서 원" "야, 뭐 창피? 그럼, 좀 들썩거린다고 창피하면 자신이 삼백 오십살 먹었다고 주장 하는 미친 여자와 한 패거리가 되었던 나의 심정은 어땠겠냐? 응?" "그럼 내가 세 살 오개월이냐? 삼백 오십살이지!" "그걸 누가 몰라! 나이 많이 먹은게 벼슬이냐? 꼭 그렇게 티를 내야 되? 그리고, 내 가 너한테 이만 삼천살 먹었다 그러면 너는 믿겠냐? 이봐, 전혀 무슨 말인지 모르겠 다는 표정 짓지마! 다 알면서! 미안해 죽겠다는 표정도 풀어! 하나도 안 미안한 거 알아! 하여튼 요물은 요물..." 꽈아아악... "으...으으..." 또, 또 꼬집었어! 또! 그것도 아까 꼬집은데! 으으으...젠장, 아프잖아! 난 온 몸을 비비꼬면서 어떻게든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그래서 사색이 된 채로 필사 적으로 비명을 참고 있는 나에게 회장이 말을 걸어왔다. "자, 그건 그렇고 일단 인사부터 하지?" "으...끄으윽...아, 예...제...이름은...영...준, 박영준...입니다" 난 씨익 미소를 지어줬고 회장은 고통을 꾹꾹 참아내며 억지 미소를 짓느라 온 얼굴 근육을 경련시키는 나를 보며 못 볼 것을 본 듯이 잠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나 는 어떻게든 평범한 척 해 보이려고 미소를 지우지 않았고. 곧 내 옆의 고양이가 자 신을 소개하는 소리가 들렸다. 으, 나를 보는 고양이의 저 거짓된 의문스러운 눈빛. 내가 왜 이리 고통스러워하는지 의문이라는 눈빛. 저, 저 앙큼한 것 같으니라구! 어 쨌든 고양이는 그렇게 잠시 나를 쳐다보다가 회장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제 이름은 이요령이라고 해요" 고개까지 꼬박 숙이며 인사하는 그녀. 그런데 너 이름이 이요령이었어? 어쩐지 요령 을 잘 피우더라니...가 아니라. 넌 프랑스 출신이잖아? 프랑스의 유명한 이름이라면 봉주르, 마담, 뤽 베송, 레옹... 어쨌든 이요령, 뭐 이런 이름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데. 난 다시 속삭였다. "야, 네 이름이 이요령이었어? 그 이름 한 번 이상하다" "한국으로 넘어온 뒤 혹시 모를 때를 대비해 지어 놨던 이름이야. 그리고 박영준이 라는 평범하다못해 지루하기까지 한 이름보다는 나을텐데? 아 참, 그러고보니 네 이 름도 몰랐네? 박, 영, 준. 호호호! 평범해라" 속삭이면서도 묻고, 웃고, 할말 다 하는군. 정말 이럴때는 얄밉지 않을 수 없다. 어 쨌든 뭐 이름이 요령이라니. 요령이라고 불러야하나, 고양이라고 불러야 하나? 에이, 고양이가 더 편해. 부를때야 뭐 야, 너, 이렇게 불러도 되겠지 뭐. 어쨌든 회장이라 던 사람은 요령이의, 그러니까 고양이의 소개를 듣자 자신을 소개했다. "그래, 영준군, 요령양, 일단 반갑네. 내 이름은 김정수라고 한다네" 으잉? 김정수?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인데...어디서...들었더라? 내가 김정수라는 이름을 어디서 접했는지 고민하고 있을 때 요령이는 고개를 꾸벅하며 인사했다. "다시 한 번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반갑습니다, 김정수씨. 저는 이요령이라고 합니다" 김정수인가 하는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밝혔는데도 그리 놀라지 않는 우리를 보고는 당황했는지 '허허...'하며 약간은 억지로 웃는듯한 얼굴로 인사를 받았다. 저런 모습 을 보면 나도 알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긴 한데 말야. 김정수...김정수라...누구지? 김정수...정수...정수...정수? 순간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 했다. 김정수! 불과 50대의 나이로 세계 굴지의 대기업을 소유하고 있는, 우리나라 3대 그룹의 하나인 정수그룹의 회장, 김정수! 설. ..마? 에이, 동명이인이겠지. 김정수가 이런 시장바닥에 왜 와. 하지만 벤츠를 모는 걸 보면 정말 김정수인 것 같기도 하고... 젠장, 내 옆에 있는 중년의 사내가 정말로 정수그룹 회장 김정수라면 그거 정말 큰일인데! 그런 사람의 차를 멈추고, 게다가 기 사한테 조롱까지!(내가 한 건 아니지만) 난 그가 정수그룹의 회장 김정수가 아니기를 간절히 빌며 물었다. "저...혹시...회장님께서...정수그룹의..." 그리고 그는 당황해하는 나를 보고 '이제서야 알아 모시는구만'하는 얼굴로 허허 웃 으며 말했다. "맞네, 내가 정수그룹 회장 김정수이네. 나를 알아봐주는 사람이 있다니 반갑군" "회, 회장님! 아까는 제가 너무 실례를...!" 난 나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였고 김회장은 허허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괜찮아. 젊은이가 패기도 있고, 예절도 바르고. 참 괜찮은 청년이야, 허 허허" "아, 그렇습니까? 영광입니다! 하하하!" 난 어떻게든 김회장의 기분을 맞추려고 노력하며 하하 웃었다. 이 기회에 정수그룹 회장에게 잘 보여 놓아야지! 혹시 또 아냐? '이렇게 만난것도 인연인데 용돈 쓰게!' 하면서 단위수 높은 걸로 한 장 주거나 아니면 '자네, 참 성실해 보이는군. 정수그룹 에서 나와 함께 미래를 개척해 보지 않겠나?' 같이 나올지! 난 어떻게든 내 얼굴을 김회장이 익히게 하도록 노력하며 허허 웃었다 .그 때 누군가 내 옆구리를 마악 찌른 다.쿡쿡쿡쿡쿡! 욱! 욱! 난 옆구리가 찔릴 때마다 조금씩 몸을 움찔거렸다. 제발 방 해 좀 하지마! 이 기회에 나도 우울한 내 인생 좀 쫘악 펴보자!응? 그러나 내가 마음 속으로 '제발~제발~'을 외칠 때에도 내 옆구리는 사정없이 찔리고 있었다. 쿡쿡쿡!쿡 쿡!쿡!쿡쿡! 이런 젠장. 난 하는 수 없이 옆을 돌아보며 속삭였다. "찌르지 마!" "야, 저 김정수인가 하는 사람 유명한 사람이야?" 어이구. 그래도 우리말 배울 정도면 나름대로 우리 나라에서 많이 살았잖아? 그런데 아직도 김정수를 몰라? 난 짧게 설명하기로 마음 먹었다. "정수그룹은 알아?" "응. 대기업이잖아" "거기 회장님이셔" "...뭐? 에이, 설마" "...설마가 사람을 잡곤 한다지?" "...난 설마라는 애한테 잡힐 염려는 없겠네,고양이니까...어쨌든, 그 정도 거물이 라면 참 우습네. 그런 사람이라면 몸에서 기본적으로 뿜어지는 양기가 엄청나게 셀 텐데. 그런 기를 보이지도 않게 할 정도로 묻어버릴 정도의 음기를 낸다...그것도 낮 에...참...생각보다 어렵겠는걸" 무슨...소리냐? 내가 저 녀석의 말을 하나 하나 머릿속으로 주워 담고 어떻게든 짜 맞춰 보려고 노력하는동안 저 녀석은 내가 자기 말로 고민을 하는지 마는지는 상관도 안 하는 채 자기 나름대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머리를 벅벅 긁는다. 어휴...추잡해. 그런데 추잡하면서도 귀엽다. 어이구, 참. 나 왜 이러니. 미인 처음 보니? 으음. 하 긴, 이 정도로 미인은 처음 보는군. 미인이라. 미인...미인... 어휴, 얼굴 빨개져. 이런 생각 하면 안 되지. 괜히 혼자 무언가를 상상하고 무안해진 내가 혼자 당황해서 요령이에게 아무거나 말하려고 할 때, 그 녀석이 갑자기 김회장에게 말을 걸었다. 젠 장. 무시당할 뻔 했다. 두 번 무안할 뻔했군. "김회장님, 이제 아까 제가 이야기했던 걸 진지하게 말해보고 싶은데요" 김회장은 반갑다는 듯이 대답했다. "오, 그래. 언제 그 말을 하나 기다리고 있었다네. 아가씨는 내 차를 처음 보자마자 나에게 '혹시 접시가 날아다니거나 도깨비불이 날아다니거나 하지 않으세요?'라고 했 었지. 그게 무슨 뜻이지?" 제 생각에는요, 무슨 비유같아요. 무언가 의미하는 말 같지 않아요? 설마 진짜로 접 시가 날아다니거나 도깨비불이 나타나거나 하지는 않을 거 아닙니까, 회장님. 난 그 렇게 생각하고 요령이를 쳐다보았으나 요령이는 단순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말 그대로에요. 집에 귀신이 나오는 것 같죠?" 얼씨구, 갑자기 왠 헛소리야? 그런 식으로 말하면 김회장이 너를, 아니 너야 어차피 고양이니까 네가 황당한 말을 툭하니 던진 사람이 김회장이던 김대통령이던 상관이 없겠지만, 나야 앞날 창창한 젊은이니 상관이 많단 말이다! 난 어떻게 무마할까 생각 을 하며 급히 김회장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김회장은 그녀의 말에 경악한 것 같 았다. 어떻게 아냐구? 요령의 말을 들은 그가 입을 따악 벌려 버렸으니까. 하, 이제 앞으로 술자리에서 사장이나 회장 이야기나오면 나도 그 이야기에선 안 지겠군. '자 네, 김정수 회장 놀라서 입 떠억 벌리는 것 봤나?' 이런 식으로 말한다면 모두 놀라 겠지. 어쨌든 잠시 내가 손가락을 집어 넣어도 모를 것같은 표정을 짓던 김회장은 잠 시 후 잘 나오지도 않는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어...어떻게...알았나?" 어떻게 알았냐니? 그럼 진짜 집에서 귀신이라도 나온다는 말입니까? 난 김회장의 경 악에 찬 목소리를 듣고는 그의 표정을 그대로 따라하기 시작했다. 입을 떡 벌리고 고 양이, 그러니까 요령이를 쳐다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녀석은 만면에 미소를 띄고는 자신의 머리칼을 잠시 쓸어넘기더니 대답했다. "다 아는 방법이 있어요. 후훗" ...때려 맞췄나 보구나. 젠장. 아까는 음기가 어쩌네 양기가 어쩌네 하더니 다 그냥 해 본 소리였나보군. 그런데 거기서 말이 끝나지 않았나보다. 잠시 뜸을 들이던 요령 이가 말을 이어나갔던 것이다. 때려 맞추진 않았나 보네. "어떻게 알았냐 하면 말이죠. 설명하시면 이해하실 수 있겠어요?" "아...노...노력해 봄세" 김회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요령이는 잠시 손가락을 우두둑! 소리와 함께 깍지껴 돌리며 꺾고, 목을 빙빙 돌려서 푼 다음에, 어깨를 두어 번 정도 톡톡! 두들 겨서 풀고는, 하품이라도 할 듯이 입을 쫘악 벌리려고 하다가 김회장과 그 앞의 기사 의 뜨거운 눈빛을 보고는 최소한 사랑에 빠진 눈빛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그만 두고는 말했다. "이 차, 조금만 무언가 아는 사람이 본다면 알 수 있어요. 아주 조금만이라도 뭔가 아는 사람이 본다면" 요령이 그렇게 말하자 김회장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나 역시 당황했다. 난 아무것도 모르겠단 말이다! 내가 뭘 알던 말던 요령은 계속해서 말했다. "이 차, 아주 어둠의 기운을 풀풀 풍기고 다녀요. 쳐다보기만 해도 기분 나빠서 혼 났다구요. 내색은 안 했지만. 그리고 김회장" 갑자기 김회장을 부르고 그가 자신을 쳐다보자 자신의 얼굴을 바짝 김회장에게 붙이 는 요령. 그녀는 그렇게 김회장의 시선을 자신의 얼굴로 확! 잡아 끌더니 온갖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가며 말했다. 즉, 눈은 최대한 날카롭게 뜨고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 차게 하는 표정을 지으며 약간은 가르랑거리는 소리를 섞어서 이야기를 들려준 것이 다. "당신에게서 특히 어둠의 기운이 많이 느껴져요. 김회장, 대그룹의 회장이라고 했죠 ? 거상이라면 처음부터 어느 정도는 운, 즉 양기를 타고 나는 법. 그런데 당신의 몸 에서는 양기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아요. 아니, 약간은 느껴지지만 무엇인가에 잔뜩 눌려져 있는듯한 느낌이에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죠? 이런 상태라면 요즘 운은 하 나도 따르지 않았고 당신 주위에는 온갖 귀신들이 당신을 괴롭혔으며 매일같이 환청 이 들리고... 하여튼 상당히 괴로웠을텐데. 어떻게 잘 버텼군요. 역시 보통 사람보다 조금은 더 오래 버티네요" "아...아아..." 김회장은 잠시 굳어 있다니 결국 토해내듯 큰 숨을 쉬고는 말했다. "후우, 자네 말이 모두 맞네. 요즘 정말 죽을 지경이야" 그 말을 들은 요령의 표정은 반반이었다. 내 말이 맞지 않냐는 당당하고 자신감 넘 치는 표정과 뭔가 이상하다는 의문섟인 표정. 참, 표정도 다양하지. 그녀는 그런 식 으로 잠시 얼굴에 두가지 표정을 공존시키더니 결국 자신감 넘친다는 표정을 지우고 의문스러운 표정만을 남긴 뒤 김회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참 이상하군요. 몇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말씀해 주실래요?" "그, 그래. 대답해 주지. 어서 물어보게" 그러자 요령이는 등받이에 무게를 실어서 조금 더 편한 자세를 지은 후 대답했다. 그런데, 지금 어디로 가는거지? 그것도 생각 안 했네. 난 창 밖을 보았고, 시장을 완 전히 벗어난 것은 아님을 알고서 안심했다. 휴우. 아직도 차는 느릿느릿 가고 있었 다. 그리고 요령이는 질문을 시작했다. "먼저, 회장님은 보통 유명하고 성공한 사람들이 그렇듯이 태어나면서부터 강한 기 운을 타고 태어나신 분이세요. 그런 분께는 보통 잡귀는 아예 붙을수도 없죠. 하지만 지금 회장님에게는 낮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요기가 흘러나와요. 한 마디로 누가 회 장님께 장난을 쳤다는 소리이지요. 귀신이든, 뭐든. 뭐 짚히는 거 없으세요?" 그러자 김회장은 신음을 내지른다. "그럼 설마... 이럴수가, 그게 사실이었다니... 역시..." 그리고 그의 신음을 들은 요령은 눈을 가늘게 뜨면서 빠르게 물었다. "뭐죠? 역시 뭔가 짚히는 것이 있는 거로군요?" "그렇다네...며칠 전 일이었지..." 김회장은 고개를 푹 떨구며 말을 이어나갔다. "어떤 여자였네...그건...난 그날 집에서 편안히 쉬고 있었지. 매일같이 격무에 시 달리느라 휴식이 좀 필요했거든. 그래서 일부러 마누라가 자식들 데리고 스키장이라 고 가자고 하는걸 난 좀 쉬겠으니 마누라와 자식들만 갔다 오라고 그랬다네. 조용한 집을 위해서 수행원도, 기사도, 파출부 아주머니도 모두 보낸 상태였네. 정말 오래간 만의 휴가라 기분이 좋았지" "...그런데요?" 요령이는 반문했고 김회장은 그 순간을 떠올리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얼굴 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조용하고 적막한 밤이었다. 서울이지만 한적한 곳. 그래서 김정수 회장은 자신의 집이 좋은지도 몰랐다. 그는 오랜만에 편안히 자리에 드러누워서 그동안 못 읽었던 책을 펼쳐들었다. 그러나...매일같이 밤잠도 설치며 미친 듯이 일을 해댄 몸에다 다 시 밤새워 책을 읽으라고 하는데 몸이 좋아라하고 받아들일리 없었다. 결국 김회장의 정신과 몸은 치열한 싸움을 거듭하다가 정신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피로를 견디지 못하고 잠들었다는 소리다. 그렇게 얼마간쯤 잠들었을까. 휘이이이잉... "으으으...왠 바람이지?" 차가운 바람이 김회장의 몸을 휘돌아감고 있었고, 그 때문에 그는 머리를 흔들며 잠 에서 깨어났다. 젠장, 창문을 안 잠그고 잤나? 으윽. 한창 기분좋게 자고 있었는데. 김회장은 잠에 취해 비틀거리며 창문으로 다가가 창문을 확인했다. 어? 이상하다. 창 문은 잠겨있는데? 그럼 그 차가운 느낌은 바람이 아니었나? 그럼 뭐지? ...젠장, 꿈 이라도 꿨나보군. 그가 투덜대며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그의 눈 앞에서는 파르나리하게 빛나는 구체가 두둥실 떠 있었고 그 뒤에는 희미하 게 형체만 알아볼 수 있는 한 여인이 있었다.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띄고 있는 붉은 머 리의 아름다운 이미지의 여인이. 젠장, 아직도 꿈에서 깨어나지 않았나? 분위기를 보 아하니 악몽일 듯 같은데. 꿈 속에서 고통받느니 그만 깨어나야지. 김회장은 중얼거 리며 자신의 뺨을 힘껏 내려쳤다. 쫘아악! "정말 힘껏 내려쳤어요? 자기 뺨을? 쫘아악! 하고?" 난 의심스러운 듯이 말했고 김회장은 우울하게 고개를 끄덕였으며 고양이는, 그러니 까 요령이는... 말 끊지 말라는듯한 시선과 함께 내 옆구리를 꼬집어 버렸다. 아아악 ! 또, 또! 젠장. 아프잖아! 어쨌든 김회장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비틀. 젠장. 아프잖아. 정말 실감나는 꿈일세. 그는 다시 자신의 뺨을 때렸다. 쫘 악! 그래도 꿈에서 깨어나지 않는 자신을 보며, 그는 천천히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대체 이거 어떻게 해야 꿈에서 깰 수 있는거야 젠장? 그는 겁이 별로 없는 편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것은 아예 그의 머릿속에서 떠오르지 않았다. 단지 꿈에서 깨지 않는다는 불안감만 밀려왔 을 뿐... 그리고 그가 '아예 벽에다 머리를 박아볼까'라는 고민에 휩싸여 있을 때 쯤, 갑자기 그의 마음속으로 어떤 '이야기'가 스며들었다. 요염한 여인의 목소리. 불이 말하는 것일까, 여인이 말하는 것일까. 아무래도 여자가 말하는 것이겠지? 하하하. 아직도 꿈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그는 안일하게 마음 속으로 웃어버렸다. 그러나 그가 웃던 말던 자신에게 말하는 누군가의 이야기는 마음 속으로 계속해서 스며들었고, 결국 그 는 집중해서 들을 수 밖에 없었다. '어리석군요. 호호호호호! 꿈 같은가요?' "뭐...뭐야, 젠장" '꿈이 아님을 곧 알게 될 것이니 마음 푹 놓으세요. 이봐요, 로맨틱하게 생긴 중년 아저씨. 아저씨가 이 나라 최고의 부자라던데, 맞나요?' "젠장, 우리나라 최고의 부자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나는 아냐. 우리 회사는 몰라도. 그리고 난 로맨틱한 중년 아저씨가 맞으니 계속 그렇게 불러주게, 섹시한 목소리의 아가씨" '호호호! 섹시한 목소리의 아가씨라. 참, 기분이 나쁘지는 않네요. 하지만 아저씨, 그거 아세요?' "뭘 말인가?" '한 번만 더 그 따위로 말하면 죽여버리겠어요' "...뭐?" 김회장은 갑작스러운 대화 상대자의 싸늘한 태도에 말을 제대로 꺼내지 못했고, 그 가 말을 꺼내던 말던 신경쓰지 않고 그 알 수 없는 여인인지 파란 불덩어리인지는 그 의 마음 속으로 말을 전해왔다. 이미 그녀의 기분은 풀린듯이 느껴졌다. '아저씨와의 대화, 즐겁지만 더 이상 아저씨와 말장난 하고 싶지 않네요. 아이, 참? 자꾸 말을 걸려고 하시면 어떻게 해요. 죄송하지만 닥치고 들어주세요. 천만 달러에 요, 아셨죠? 천만 달러. 준비가 되거든 마음속으로 나를 염원하세요. 내가 그것으로 지금 거는 당신에게의 저주, 풀어드리겠어요. 아이, 아저씨. 뭘 떨어요? 안 아프게 걸어드릴게요. 또 혹시 알아요? 천만 달러를 받고 감동해서 아저씨와 사랑에 빠져 버 릴지, 호호호!' "처...천만? 백이십억원? 놀고 있네, 그거면 우리 그룹의 좀 덜나가는 계열사 순이 익이다 임마. 참 웃기지도 않지. 도대체 천만 달러는 어디 쓰려고? 알아나 놓자. 하 여튼 난 꿈도 황당하다니까. 하하, 젠장. 그리고 난 마누라와 자식새끼들 있으니까 제발 나와 사랑에 빠진다느니 하는 말로 중년의 가슴에 불을 지르진 말아줘" '호호호, 재밌는 아저씨셔. 그럼, 아까 말했듯이 저주를 걸어드릴게요. 아이, 긴장 하시지 마시라니깐요. 하나도 안 아프단 말이에요. 자꾸 긴장하면 저 토라질 거에요? 그래요, 그렇게 힘을 쫘악 빼셔야 저주가 잘 걸리죠. 그리고, 약속하세요, 천만 달러 에요! 천만 달러! 호홋!' 목소리의 주인공, 즉 희미하게 묘한 미소만을 보여주던 신비의 여인은 김회장의 마 음 속에서 말이 끝나자 씨익 웃었다. 이로서 저 여자가 내 마음속에 말을 걸던 여자 임은 확실하군. 김회장은 생각했다. 어쨌든, 상관 없지. 이건 꿈이니까. 참 신비한 꿈이라서 저 여자가 내 마누라쟁이래도 놀라지 않을거야. 김회장은 생각하고는 자기 스스로 웃겨서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 때 다시 그의 마음 속으로 이야기가 들려왔 다. '아이 참 아저씨, 아직도 꿈이라고 생각하시네? 일단 저주를 걸기 전에 꿈이 아니라 는 것부터 보여 드려야지. 잘 보세요! 호홋!' 신비의 여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유리창가로 다가서 몇 번 똑똑 두드렸다. 뭘 하려고 하는거지? 그러나 김회장은 그런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곧 무엇을 하는지 알게 되었으니까. 와장창! 그녀가 손을 휘두르자 유리는 박살이 나 버렸고 그녀는 씨익 웃으며 말했 다. '내일 아침에 달콤한 잠에서 깨어났을 때, 이 깨어진 유리창이 아저씨를 반긴다면 아저씨도 우리의 추억이 하룻밤 꿈이 아님을 알게 되겠죠. 아, 이제 전 저주만 걸고 가면 되겠네요. 아저씨, 이 불빛을 잘 봐요... 아이, 고개 돌리지 마시고. 그렇죠, 자, 시작할께요!' 마음 속의 목소리가 말을 끝내자, 곧 자신의 앞에 있던 붉은 머리의 아가씨가 입술 을 달싹거리기 시작했다. 주문을 외우는 건가? 참 가지가지 하는군, 그래. 붉은 머리의 아가씨는 김회장이 마음 속으로 뭐라고 하던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두 손 위에 푸른 불덩이를 띄워놓고 다시 무어라고 주문을 외웠고, 그러자 갑자기 그 푸른 불덩이가 파악! 하고 폭사되면서 그 속에서 푸른 빛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파아아아앗! 그리고 김회장은 엄청난 빛을 온 몸으로 받으며 정신을 잃어버렸다. 그 가 의식의 끈을 놓으며 마지막으로 한 생각은 '그러고보니 그 푸른 불덩이가 꼭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도깨비불같군'이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비집고 들어온 다른 누군 가의, 즉 붉은 머리의 아가씨의 생각은 '천만 달러, 잊지 마세요. 나를 떠올려요!' 였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긴장해서 그런지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젠장, 남 이 안 들었으려나? 에라, 들었으면 또 어때. 그건 그렇고 이 아저씨의 이야기, 도저 히 믿기지 않는군 그래. 하긴, 이미 내 눈앞에 전설의 고향의 처녀귀신들 뺨을 열번 은 치고 남을 아가씨가 있으니 뭔들 못 믿겠냐마는. 난 김회장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 잠시만. 김기사? 거기 음료수 한 캔만 주겠나? 아, 고맙네" 그는 이야기하느라 힘들었는지 기사에게 음료수를 청한 뒤에 한 캔을 몽땅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대답했다. "난 그대로 아침에 일어났지. 거실에서 잠들어 있더군. '참, 내가 생각해도 잠버릇 요란하네. 그건 그렇고 어젯밤 꿈 참 신기했지. 하하. 뭐? 잊지 말아요? 허허허!'라 고 생각하면서 샤워실로 갔지. 그런데, 허허, 거울을 보니 내 왼뺨에 벌겋게 손자국 이 나 있더군" 허억! 그런...? 난 이야기에 몰입되어서 점점 김회장 쪽으로 몸을 가까이했고, 김회 장은 티는 안 내지만 약간 거북스러워하는 듯했다. 에구, 참 나도 주책이지. 어쨌든 난 다시 몸을 뒤로 뺐고 김회장은 어색하게 잠시 웃다가 말했다. "어디까지 이야기 했지? 아, 왼뺨. 그래. 난 정말 그 때 기절하는 줄 알았어. 난 놀 라서 세면실에서 정신없이 뛰어나와 거실 유리창을 봤지. 빌어먹을, 깨져 있더군. 그 제서야 난 어젯밤에 있었던 일이 꿈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됐어. 하지만, 생 각하게 됐을 뿐이지. 난 아무렇지도 않으려니 했어. 설마 세상에 저주가 어딨냐고 말 이야. 지금 생각해보면 모든 게 믿겨지지만 말이지" "그래서, 어떤 피해를 봤죠?" 뒤에서 요령이가 날카롭게 물었고 김회장은 씨익 웃더니 말했다. "첫날은 별 거 아니었지. 잠을 자는데 밤새도록 여자 울음소리가 들리더군. 옆집에 서 누가 우는 줄 알고 넘어갔지. 둘째날은 좀 더 심각했어. 밥을 먹는데 포크가 내 손을 식탁에 찍어버리더군. 젠장. 난 비명을 좀 질렀지만, 참았지. 그냥 내가 실수한 줄 알고 넘어갔거든. 그리고 그날 밤, 접시들이 하늘을 가르며 자기들끼리 부딪혀서 서로 박살이 나더군. 젠장" "그...그럴수가..." 난 신음을 흘렸다. 저주라는 게 그렇게 무서운 건가? 그런 식으로 도깨비 장난같은 일이 예사로 벌어질 정도로? 그러나 회장의 말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것은 이 정도로 끝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난 그때서야 무엇인가가 무서워지기 시작했지. 하지만 그런 거에 시달린다고 백억 을 줄 미친 사람은 없어. 난 미치지 않았고, 무엇보다 나에겐 정말로 백억원이란 재 산이 없었거든, 그런데, 그냥 참고 넘어가기에는 점점 정도가 장난이 아니게 되더군. 다음날, 우리 첫째가 스키 사고로 다리가 부러졌지. 그 녀석은 그 날로 병원에 실려 갔어. 그 다음 날, 우리 가족은 콘도에서 내 동생을 문병가다 단체로 교통사고가 나 버렸어. 모두 중상 입원중이지. 젠장. 이게 다인줄 알아? 우리 계열사중 위태위태하 던 회사가 지금 부도를 맞게 생겼어! 젠장! 여기서 부도가 나버리면 들어가는 돈은 백억이 문제가 아냐! 그런데, 내가 정말로 불안한 건, 그 저주받을 여자가 천만 달러 를 주지 않으면 저주를 절대로 풀어주지 않겠다고 했다는거지...젠장...나한테는 정 말로 백억은커녕 십억도 없는데! 몇 푼 안되는 재산은 모일 때마다 몽땅 회사에 쏟아 부었다고! 왜 하필 내게! 제기랄! 제기라알!" 소리를 질러대며 자신의 무릎을 치고 분해하는 김회장.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숙연해 지지 않을 수 없었다. 불쌍하군.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긴 하지만, 불쌍해. 그리고 김회장의 분통해하는 모습을 보며 요령이가 무언가를 말하려 했을 때 김회장이 먼저 우리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네들, 자네들은 아까 내가 무언가에 시달리고 있다는 걸 내 차만 보고도 느꼈었 지? 자네들이라면 나를 도와줄 수 있을게야! 부탁하네! 아, 자네들이 아니고 제 옆의 고양이인데요. 뭐, 저와는 별 상관 없는 이야기에요. 아, 참. 그러고보니 너무 황당한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내 아르바이트 건을 까맣게 잊고 있었군. 난 고양이에게 은근슬쩍 물어보았다. "야, 다 좋은데, 내 아르바이트는 어떻게 되는거야? 이 분위기에서는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은데?" "안 되긴 왜 안 돼? 방금 설명까지 다 들었잖아?" "...뭐?" 뭐라그러는지 하나도 모르겠네. 도대체 무얼 어떻게 설명했다는 거야? 난 의문이 잔 뜩 섞인 눈빛으로 요령이를 쳐다보았고 그녀는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참 한심하다는 듯이 한숨까지 푸욱! 쉬며 속삭였다. "야, 이 정도 되면 대충 눈치 챌 때도 됐잖아? 쉬운 아르바이트네, 그 여자만 잡으 면 되니까" ...뭐, 뭐, 뭐, 뭐어? 그 여자를 잡아? 그럼 네가 말한 아르바이트가 설마...? 난 이번에는 의심을 가득 섞어서 그녀를 노려보았고 그녀는 윙크를 찡긋 하더니 말 했다. "맞아, 귀신잡기. 아니, 저주풀기. 그 이상한 여자만 잡으면 되는 거 아냐? 쉽네, 뭐" 이 말을 들은 나는 굳어버릴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젠장. 그 대신 난 계속해서 같은 말만 되뇌었다. 굳어버린 채로. 나는...나는...나는... 보통 사람이란 말이다아아앗!! 우와, 이거 미치겠네? 귀신? 저주? 얼어죽을, 귀신같은 소리하고 앉아있네 젠장! 내가 돈에 뱃속이 환장하고 눈이 뒤집 힌 녀석으로 보이냐? 난 고양이, 그러니까 요령이를 미친듯이 노려봤지만 요령이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배실배실 웃을 뿐이었다. 젠장. 웃지마. 정든다구. 웃지 말라니 까? 이익! 자꾸 웃으니까 마음이 풀리려고 하잖아! 그래. 너 예뻐, 예쁘니까 그만 좀 웃어! 어쭈? 자꾸 웃어? 그런다고 내가 이런 일을 할 것 같아? 난 김회장에게 말했 다. 최대한 슬프고 죄송스러운 표정으로. "아 예, 김회장님의 사연, 정말 심히 안타깝고 할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돕고 싶은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희들에게 무슨 능력이 있겠습니까. 저희들같은 범부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옷, 나 오늘 말 잘 나온다! 내 입에서 이런 유식한 말이! 내 이런 진심어린 말을 들으면 누가 무서워서 부탁을 거부한다고 생각하겠는가? 난 의기양양한채로, 그러나 눈물섞인 표정과 울음섞인 목소리는 유지한 채로 말을 이었다. 물론 이미 내가 하고 싶어하는 말을 눈치챈 김회장은 점점 풀이 죽어버렸다. 쯧, 죄송해요. 하지만 할 수 있나요. "그래서...저흰...김회장님을 도와드릴수가..." 꽈아아악. "으아아아악! 또, 또 꼬집었어! 더 이상은 못 참겠다! 으아악! 야, 왜 아까부터 자 꾸 꼬집고 난리야!" 난 비명을 질러버렸다. 젠장! 요령이 그녀석이 또 꼬집어버린 것이다. 그것도 처음 에 꼬집고 두 번째에 또 꼬집은 곳을 또. 젠장, 꼬집힌 데 또 꼬집히고 또또 꼬집히 면 얼마나 아픈지 알아? 요령이 너, 이번엔 또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러냐? 그럼 능 력 없는 놈이 일 못하겠다 그런것도 잘못이야? 아니 도대체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는 거야 도대체! "야, 도대체 무슨 짓... 웁!" 나는 그녀석에게 나의 생각, 즉 아파 죽겠으니 제발 꼬집지 말고 무서워 죽겠으니 아르바이트고 뭐고간에 때려치고 집에나 가자, 아직 그리 멀리 오지 않았으니 조금만 걸어가면 금방 집이다, 안 가면 혼자 간다...등등을 확실히 전해주고 싶었으나 불행 하게도 그녀석은 내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나보다. 손을 내밀어서 내 입을 막아버린 것이다. 쳇! 이 자식이! 콱 그냥 손을 물어버릴까? 그러나 왠지 그랬다가는 그 녀석이 고양이로 돌아온 다음에 내 얼굴에 다섯 줄기의 붉은 선을 그려줄 것 같았 다. 참아야지 별 수 있나. 젠장. 어쨌든 난 그렇게 내 의사를 표현할 방법을 철저히 봉쇄당했고, 그 녀석은 그런 자세, 즉 내 무릎위에 올라타서 내 얼굴을 김회장의 시 선에서부터 가리면서 동시에 내 입을 막아버린다는 약간은 보기 안 좋고 당사자는 기 분이 좋으려고 하다가도 나빠지는 자세를, 그러나 요령이의 입장으로 봤을때는 상당 히 실용적인 자세를 취하며 김회장에게 말했다. "얘가 원래 농담이랑 장난치는 것을 좀 좋아해요, 호호호! 물론 도와 드려야지요! 저주풀기, 쉽죠 뭐! 호호호!" 그리고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이던 김회장은 요령의 말을 듣고는 얼굴이 환해지며 대답했다. "그, 그런가! 하하하! 젊은이도 참, 나 깜짝 놀랐다네. 어쨌든 도와준다니 고맙구 만, 허허!" "에이, 고맙기는요,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 호호! 그렇지 영준아? 호호 호!" 젠...장... 웃냐? 웃기냐? 그녀석이 웃으니까 내 무릎위에 올라 앉아 있는 그 녀석 의 몸에서 내 몸으로 진동이 그대로 전달된다. 으, 기분나빠. 어쨌든 난 두 손으로 내 입을 막고 있던 그 녀석의 손을 억지로 떼어버렸다. 제기랄, 남이 보면 내가 이상 한 놈이라서 여자 손을 마구 붙잡는 줄 알겠다. 어쨌든 간신히 떼어내자 신선한 공기 가 입 속 가득 밀려들어온다. 그동안 숨이 막혔었나보군. 탁하디 탁한 차 안 공기가 이렇게 맑게 느껴지니. 젠장...이 아니라! 헉! 헉! 답답해 죽는 줄 알았네! "헉, 후우... 야, 무거워, 비켜. 보기에는 안 그래 보이는데 뭐 이리 무거워? 그리 고 김회장님, 전 절대 그 일..." 곧 다시 틀어막히는 내 입. 난 버둥거렸지만 그 녀석은 나를 꽈악 누르며 말했다. "회장님? 얘가 장난이 심하네요. 호호! 잠깐 타일러줘야겠어요!" 그리고 그 녀석은 내 막은 입을 풀어주었다. 푸아아!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네! 난 재빨리 그 녀석에게 아까 전하지 못했던 내 의사를 똑바로 전달하려 했다. 하나 덧붙 여서. 입도 막지 말아줘, 젠장. ...불행히도 내 의사는 또다시 전달되지 못하고 말았다. 내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 에 그 녀석이 내 귀를 잡아당기더니 속삭인 것이다. "작작 좀 해 임마! 그 붉은 머리의 여자인지 뭔지는 내가 잡지 네가 잡어? 왜 네가 발악이야 임마!" "젠장, 무섭단 말이다! 어차피 일반 알바보다 시급 천원이나 더 주겠어? 저 김회장 인가 하는 사람, 생각보다 잘 살지도 못하잖아 젠장! 이 벤츠도 회사차겠지 뭐! 뻔 해, 뻔해! 텃어! 그리고 난 이런 일은 시간당 만원을 준다고 해도 안 해!" 난 마구 손을 내저으며 속삭였다. 아주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서 내 의사를 김회장도 파악했으면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지금도 우리쪽을 안절부절함과 어리둥절함의 시선 을 보내며 계속해서 불안한듯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김회장에게 미안해서 차마 소리치 지는 못하겠다. 내가 착잡한 심정으로 잠시 김회장을 바라보고 있는데, 녀석이 내 귀 에 대고 속삭인다. "캬아악...이 무식한 인간아, 내가 아르바이트라고 했다고 그걸 진짜 일반 아르바이 트로 생각했냐? 뭐? 시급당 만원? 네 겁대가리 잠시만 자르면 얼마가 들어오는지 내 눈으로 보여줄게! 쳇, 너 사는게 하도 불쌍해 보이고 저 사람도 하도 안 돼 보이길래 생활비도 벌어다 주고 불쌍한 사람도 돕겠다는데 그게 그렇게 싫어? 응? 젠장! 똑똑 히 봐, 알았지?" 그 녀석은 캬르릉거리면서 내 귀에 속삭였다. 고양이 특유의 목울림소리 때문에 내 귀에는 그녀석의 입김이 많이 뿜어졌고, 덕분에 난 이야기는 듣는 둥 마는 둥한 채 화끈거리는 얼굴을 어떻게든 원상태로 돌리려 노력해야 했다. 젠장, 왜 얼굴이 빨개 졌지? 더운가 보군. 내가 약간 부끄러워하던 말던 할 말을 끝낸 녀석은 잠시 나에게 보여줬던 답답하다는 표정을 싸악 바꿔서 귀엽게 미소짓더니 김회장에게 물어본다.아 주 연극을 해라, 연극을 해. 정말로 요물을 요물이구만. 뭐? '난 요물이 싫어'라고? 참 나. 웃겨서. "호호, 이 녀석도 좋다고 했어요" "야, 내가 언제..." 텁! 웁! 웁! 다시금 내 입을 효과적으로 가로막는 그 녀석의 왼손. 젠장. 졌다, 졌 어. 난 말하기를 포기하고는 그 녀석이 입을 막던 말던 팔짱을 끼고는 등받이에 몸을 눕혀버렸다. 쳇. 내가 포기한 걸 알자 녀석은 내 입에서 손을 떼고는 생글거리며 말 한다. "저, 그런데요. 궁금한 것이 있어요" "응, 아가씨, 무엇이 궁금하지? 뭐든 물어봐도 좋아!" 요령가 자신의 부탁을 승락하자 금방 죽상에서 환상으로 바뀐 김회장의 얼굴. 우리 가 도와준다니까 기쁘긴 기뻤나보군. 우리를 알지도 못할텐데 도와준다는 말을 그대 로 믿다니. 하긴, 그 정도까지 궁지에 몰렸나보지. 김회장은 허허거리면서 뭐든 물어 보라고 말했고, 그러자 요령은 짖궂게 웃으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이건 그냥 개인적인 궁금함인데요, 회장님이나 되는 높으신 분이 이런 고급차를 타 고 시장까지는 무슨 일로 오셨죠?" 맞아! 나도 그게 궁금했어! 난 맞장구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버릇 없다는 소리 를 들을 것 같은 걱정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입만 열면 요령이 다시 입을 막아버릴 까 봐. 어쨌든 요령은 대답을 기대한다는 눈빛으로 김회장을 쳐다 보았고, 김회장은 별 거 아니라는 듯이, 그러나 당황했는지 이마의 땀을 손수건으로 훔치며 대답했다. "아, 별, 별 건 아니라네. 그저..." "그저 뭐죠?" 그녀는 궁금한 듯이 대답을 재촉했고 그는 더욱 더 당황한 표정이 되었지만 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저...기, 이 주위에 정계 사람들에게도 이름이 퍼진 용한 무당이...있다길래... 굿 이라도...해서..." 그랬구나. 쯧쯧, 얼마나 급했으면 이 나라 최고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무당을 다 찾 았을까. 하지만 우습다, 무당이라니. 요령도 그 이야기를 듣고는 잠시 쿡쿡대더니 간 신히 웃음을 참았는지 말했다. "쿠쿡, 아, 그러세요. 아, 웃어서 죄송해요. 그런데 무당에게 주시려고 했던 돈이 얼마였어요?" 요령의 약간은 무례한 질문. 그러나 김회장은 별로 표정의 변화 없이 대답했다. "일단 달라는대로 줄 생각이었네만...금액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내 쪽에서 방문료로 한 백만원쯤 줄 생각이었다네. 물론 굿값이나 부적값을 요구하면 더 주려고 했고" 배배배배배배백, 백, 백만원! 그냥 찾아만 가서 얼굴만 보는데 백만원! 아니, 이 사 람, 그게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인가? 어느 정도의 금액을 기대했던 요령이도 황당했 는지 안색이 약간 변해서는 더듬으며 대답했다. "예, 백, 백만원. 호호, 차, 참. 얼굴만 마주보는 데는 약간 많은 액수네요, 호호" 김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실 나도 아깝네. 하지만 어쩌겠는가? 대그룹 회장이라는 위신이 있는 내가 만원 짜리 한 두장 툭 던지고 갈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 그렇군요" 요령이는 얼굴에서 흐르는 땀을 닦고 억지로 짓는듯한 미소를 지었다. 꽤나 당황했 나보다. 하긴, 나도 황당했어. 백만원이라니. "백만원이라...회장님, 그럼 어차피 그 돈은 그 무당에게 쓰실 돈이었군요?" 김회장은 약간 고민하는 듯한 표정이 되더니 대답했다. "에? 음...이야기가 그렇게 되나? 그런...가 보군" 그리고 그의 대답을 들은 요령이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렇군요! 회장님?" "왜...그러나?" "잘 들으세요. 아까 약속드린대로 저희가 모두 해결해드리죠. 김회장님 집으로 차 돌리세요. 이 정도로 강한 주술을 걸 수 있는 자에게 굿따위는 별 소용이 없어요. 그 보다, 제가, 아니 저희가 그 붉은 머리의 아가씨인지 머리에 불 붙은 아가씨인지를 잡아서 회장님의 저주를 풀어드릴테니..." 요령이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그 대가로 회장님이 그냥 버릴 뻔했던 백만원을 저희 주시지 않겠어요?" 김회장은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말했다. "아, 그거? 좋아! 어차피 누군가에게 지불하기 위해서 마련한 돈일세, 자네들이 나 를 도와준다니 그 정도를 지불 못 하겠나? 오히려 어느정도로 자네들을 대접해야 약 소할까 고민해야 할 판이었는데, 그 정도라니 얼마든지 주겠네! 걱정하지 말게!" 기뻐하는 김회장. 후우, 요령이는 그 모습을 보며 잠시 이마 주위를 짚으며 숨을 들 이쉬다가 나에게 아쉬운 듯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더 부를 걸 그랬다. 그치?" 뭐...뭐야? 내 의견은 무시해놓고, 멋대로 귀신인지 여우인지 정체도 모르는 그런 이상한 여자를 잡는다는 말을 멋대로 해버리고, 게다가 꼬집고, 입 틀어막고, 하여튼 별 짓은 다 했으면서 지금 나를 쳐다보면서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더 부를 걸 그랬다 . 그치?'라고? 하! 웃기는군. 결국 내 마음 속에서 용솟음치는 순간의 기분을 참지 못한 나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한 마디를 외칠 수 밖에 없었다. "고맙다 고양아! 아니지, 고맙다 요령아! 으하하하하!" 참고로 그 때의 내 기분은 생각도 못했던 엄청난 돈이 굴러들어온다는 생각에 날아 갈 것 같았다. 으하하하! 붉은 머리의 아가씨고 나발이고! 어차피 그녀를 잡는 건 요 령이니, 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구! 내가 집에 복덩이를 굴려들였구나, 어절씨 구, 좋다~! 역시 좋은 일 하면 복을 받는가봐! 백만원 받으면 내가 크게 쏠게 요령아 ! 생선? 우유? 말만 해, 말만! 하하하! 부우우우우웅... 귀를 부드럽게 쓰다듬는듯한 엔진 소리가 멈추고 우리는 차에서 내렸다. 달칵. 음, 역시 문을 닫을때의 소리가 작네. 그럼 세게 닫으면 어떻게 될까? 그래도 소리가 작 을까? 음...궁금해라. 하지만 그런 짓을 했다간 미친 놈 취급 받겠지. 그렇지, 요령 아? 난 그 녀석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 녀석은 문의 손잡이를 잡고 안절부절 못하 고 있었다. 어쩜 나랑 그렇게 생각이 같냐, 그래? 난 피식 웃고는 문을 활짝 연 다음 에 집어 던지듯이 닫아버렸다. 타아아앙! 잠시 차가 부르르르 떨렸다. 흠, 역시 지가 벤츠가 아니라 리무진이라도 문을 세게 닫으면 차가 떨릴 정도로 소리가 크겠지. 이 쉬운 걸 가지고 왜 고민했을까. 내가 고 개를 끄덕이며 눈을 들어올리는 순간, 나를 노려보는 김기사가 보였다. 쳇. "차 부서져! 이 빌어먹고 빌어먹고 또 빌어먹고 지긋지긋하게 빌어먹다 못해 삼대가 빌어먹을 놈아! 이게 얼마인줄 알아 임마! 니놈이 평생 빌어먹..." "그만하게, 김기사" "네, 회장님" 으으...저 얍삽한 놈 같으니라고. 내 옆에서 요령이가 비꼬는 소리가 들려온다. 네, 회장님. 네, 네, 네. 왜? 아주 구두라도 닦지 그러냐. 김기사는 그녀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잠시 노려보았지만 요령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자 곧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그럼 설마 지금 고양이랑 눈싸움하려고 그랬냐? 풋, 잘했다, 요령아. "자네들, 여기가 내 집일세. 들어가세" "예, 예. 회장님" 그런데 그 집 참 크네. 벌써 대문부터 으리으리 하구만 그래. TV드라마에 나오는 사 장님들 집 그대로잖아? 난 김회장을 따라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맙소사, 왠 정원에, 허, 이 겨울에 잔디까지 깔려있고, (도대체 어떻게 한 거야?) 그네에, 맙소사, 연못 까지? 놀랍군, 놀라워. 정말로 놀라운데...데...데...데... 자꾸 내 옆구리를 꼬집는 이 손톱은 뭐냐? 아아악! 아프잖아, 젠장! 난 휙 돌아보며 소리쳤다. "제기랄! 야! 너 자꾸 꼬집을래? 한 번만 더 꼬집으면 아주 손톱을 뽑아버린다" "뽑히기 전에 네 얼굴에 그어줄까? 창피해 죽겠어 정말. 그렇게 두리번거리다 목 빠 져, 목" "야! 신기하니까 볼 수도 있는거지 그걸 가지고 꼬집어?" "잘났다, 잘났어...그래. 니 멋대로 봐라, 왜, 아주 목을 뽑아서 둘러보지 그러니?" 목소리는 예쁜데 말하는 싸가지 하고는... 난 잠시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고는 한 숨을 푹 쉬며 김회장을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휴우. 요령아, 언제쯤 이 시달림 이 끝날까. 너만 마음 고쳐 먹으면 금방 끝날 것 같은데. 난 다시 요령이를 쳐다보았 다. 저 약간 토라진 듯한 얼굴. 젠장. 앞으로도 이 시달림이 끝나려면 멀었나보군. 어느덧 느릿느릿 시간은 지나고. 어느새 어둠이 우리 곁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불을 꺼요" 요령의 말에 김회장과 김 기사가 돌아다니며 집 안의 모든 전등을 끄고 (물론 나와 요령이는 집의 구조를 모르기에 가만히 있었다) 거실로 왔다. 뭘 하고 있느냐고? 저 주를 풀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요령이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떠돌면서 홀로 수련하거나 마녀들의 마법책을 훔쳐서 읽으며 배운 흑마법 중 하나로 이 주술을 충분히 깰 수 있을거야" "어, 그런데, 흑마법은 악마한테 영혼을 팔아야 되지 않아?" "...내가 그렇게 멍청해 보이냐? 영혼을 팔거면 내가 미쳤다고 사람이 되려고 하겠 냐? 어차피 영혼을 팔아야 하는데? 이건 악마의 힘 대신 내 영력을 직접 끌어다 쓰는 거야. 한마디로 내 힘이지" "어, 그래...그런데 무안은 주지 마라 좀. 짜증나" "...오냐" 그 녀석을 그렇게 말하더니 김회장을 가부좌를 틀고 앉게 하고서는 초 여섯 개를 그 의 주위에 두 개의 삼각형이 역으로 겹쳐진 모양으로 놓더니 만화나 소설에서 많이 보고 들은 마법진을 그렸다. 맙소사. 내가 이런 걸 실제로 보게 되다니. 저건 다비드 의 별이잖아? 초를 다 놓은 그녀는 매직으로 초를 꼭지점으로 한 여섯 개의 뿔이 달 린 별을 그리고 그 둘레에 원을 그린, 그리고 그 안에 이상한 글자들을 휘갈겨 놓은 마법진을 완성했다. 봐도 모르겠지만, 촛불에 따라 푸르스름한 빛이 그 마법진 안에 서 일렁이는 것으로 봐서는 뭔가 있긴 있나보다. "김회장님? 마음 편하게 먹으세요. 곧 끝나요" "아, 그래. 그런데 자네 지금 뭘 하는 건가? 굿 같은 거... 안 하나?" "예에? 굿이요? 푸훗, 전 그런 거 할 줄 몰라요. 그 대신 전 마법진으로 저주를 없 앨 거에요" "마법진이...라구요?" "예. 그냥 바닥에 그리는 부적이라고 생각하세요" 요령이는 그렇게 말하고 생긋 웃었지만 왠지 그 미소 속에서도 공포심이 느껴졌다. 저런 녀석에게 겁 먹으면 안 되지, 암, 안 되고 말고. 하지만 무서워, 젠장. 어두컴컴한 방 안. 왠지 모를 공포감이 내 주위를 휩싸고 있었다. 그 속에서 왠지 모르게 빛나는 듯 보이는 요령의 눈. 그리고 겁을 잔뜩 먹은 듯 덜덜 떨고 있는 김회 장의 표정. 그리고 요령은 천천히 일어나서 손을 들어올리고는 주문을 외웠다. "Γδθ υΑ αлжЮ ÐεΦΔΣ..." 왠지모를 요염함이 느껴지는데. 으음. 난 요령이의 몸짓에 눈을 떼지 못했다. 단지 손을 약간씩 흔들면서 주문을 외울 뿐인데도 요령이의 모습은 이상하게 아름다워 보 였다. 하긴, 원판이 예쁘니까. 내가 멍하니 그녀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 갑자기 마법진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번쩍! 파아아앗! 김 회장은 깜짝 놀랐 는지 눈을 가려버렸다. 으음. 나이 많은 사람이 약간은 주책이야. 어쨌든 마법진에서 뿜어져 나온 빛들은 점점 김회장을 둘러싸더니 빙글빙글 돌면서 그의 몸 속으로 스며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 김회장의 외침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땅에서 빛이 나와서 나에게 덤벼들다니 이게 말이 되냔 말이야!" 그리고 놀라버린 요령이. "뭐야, 저렇게 말을 술술 잘 한다는 뜻은 아예 해제의 주술에 걸리지 않았다는 소리 잖아?" 그녀가 말을 마치자마자 김회장의 몸에서 아까 그의 몸으로 스며들었던 파란 빛과 같은 종류의 빛이 도로 뿜어져 나왔다. 파아아아앗! "꺄악!" "으아악! 깜짝이야!" "워메, 저게 뭐야!" 요령이와 나, 그리고 김기사는 동시에 깜짝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젠장! 뭐...뭐야 ? 왜 김회장 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지? 어떻게 된 거얏! "시...실패에요. 도대체 얼마나 저주가 강하게 걸렸길래..." 요령은 털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렸고 난 한숨을 푸욱 쉬었다. 뭐야, 멋만 잔뜩 부리 더니 실패야? 그녀는 입술을 꼬옥 물어뜯더니 손가락을 잠시 잘근거리며 웅얼거리듯 말했다. 초조한가보군. "우웅...젠장(에구, 역시. 그 예쁜 입술에서 나오는 말이 고작 젠장이냐?). 김회장 님? 그 빨간 머리의 여자인가 뭔가가 자기를 떠올리면 온다고 그랬나요?" 김회장은 실패했다는 요령이의 말에 허탈한 듯 멍하니 앉아 있다가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그...그렇지. 그런데... 왜 그러나?" "그렇다면, 젠장, 집 박살날 각오가 되어 있으신가요?" "그...물론...저주만 풀린다면야, 집이야 다시 고칠 수 있으니 박살을 내던 때려 부 수던 마음대로... 해도 좋다만, 그건 왜 물어보는가...?" 그 말을 듣자 요령이는 또 다시 혼자 중얼거리며 고민에 빠져들었다. 어두운 밤, 거실 안에서 신비로운 문자가 새겨진 마법진의 촛불은 붉게 일렁이며 우리 얼굴에 어 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리고 부엉이 우는 소리가 창 밖으로 아련히 들려오는 달 빛 비추는 거실은 마치 요령이가 말한 마녀라도 나올듯이 음침하다. 무섭군. 젠장. 그리고 그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요령이는 속삭이듯 침착하게, 그리고 나직하게 말했 다. "그녀를, 불러요" "...뭐라구?" 김회장은 반문했고, 요령은 다시 대답했다. 손가락을 한 번 깍지 껴서 꺾고, 숨을 크게 쉰 후에. 그녀의 말투는 부드러운 농담같았지만 입술을 꼭 깨물고 있었다. "그녀를 불러요. 붉은 머리의 여인을. 그 아름답다는 얼굴과 붉디 붉다는 머릿결이 보고 싶군요. 입술도 붉을까요? 어쩌면 피를 머금고 있을지도 모르죠. 후훗, 이런 분 위기에 어울리는 여자일 듯 싶네요. 인사라도 나누어 보고 싶어요" 미...미쳤어! 그 붉은 머리인지 파란 머리인지가 건 불운해지는 (정말 불운해지는 저주인지는 모르겠지만 상황을 봐서는 그런 것 같다) 저주조차 풀지 못했으면서, 뭐? 부르라고? 인사가 하고 싶어? 그래서, 인사를 한 다음에는 어쩔건데? 서로 손 잡고 쌔쌔쌔라도 하시려고? 어이구, 그것 참 정답겠어! 젠장! 그리고 김회장도 말했다. "황당한 소리! 자네는 그녀의 저주를 풀지 못하지 않았나! 물론, 지금 보니 신기한 것들을 보여주기는 하네만, 안 돼! 이미 간접적인 대결에서는 자네가 졌다고 보네!" 김회장님! 제가 하고 싶은 소리를 아주 통쾌하게 하시는군요! 그러나 요령은 말했 다. "져도 제가 져요. 신경쓰지 마세요" "지는 건 자네이지만 그 다음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나일세! 만약 그녀가 화가 나서 우리 가족을 몰살시키는 저주라도 건다면... 으으, 생각도 하기 싫네!" 정말로 생각도 하기 싫다는 표정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듯 일그러지는 김회장의 얼 굴. 그러나 요령이는 계속해서 말한다. "제 전문이 저주풀기가 아니라 치고 받기란 말이에요! 제기랄, 이해 못 해요?" 그녀는 머리 주위로 손가락을 마구 흔들면서 격렬하게 이해 못하냐는 손짓을 취하며 더듬거렸다. 답답해서 말이 제대로 안 나오나보다. "어, 그러니까, 제길, 그 빨간 머리의 계집애인가 하는 애가 건 저주는, 그러니까, 점점 갈수록 커지는 거란 말이에요! 젠, 으으...젠장! 답답해 죽겠네! 이해 못 하겠 어요? 제가 지금 그녀를 안 잡으면, 당신이 거부가 아니라 왕의 운을 타고난 자라도 1년안에 망해요! 젠장! 아이 씨, 박영준! 너 때문에 나까지 젠장이 입에 배어 버렸잖 아! 젠장!" 얼씨구, 뭐? 나 때문에 젠장이 입에 배어? 젠장, 물론 내가 젠장이란 말을 잘 쓰긴 하지만, 그래도 만난 지 하루 밖에 안 된 사람에게 그런 식으로 자기 악습관을 뒤집 어 씌우는 건 좀 심했다, 야. 어이구, 저 뾰루퉁한 얼굴 좀 봐라. 마치 원래의 자신 의 입에서는 성스러운 말만 나왔다는 듯이 입을 비쭉 내밀고 나를 째려보는 저 모습. 어이구 귀여워라......뭐? 귀여워? 에이, 설마 내가 잠시라도 그런 생각을 했을까. 쟤가 귀여운 구석이 어디에 있다고. "이해하겠어요?" "하...하지만..." 김회장이 망설이자 그녀는 고함을 빼액 질렀다. "불러요오옷!" "아...알았네... 왜 화는 내고 그러나... 하지만 젠장, 난 모르네!" "내가 다 책임 질게욧! 부르기나 해요!" 요령이가 표독스럽게 소리를 지르자, 김회장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눈을 감고는 무 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젠장, 정말 부르는 거야? 미쳤어, 미쳤어! 분명히 요령 이가 질 거야! 안 돼! 젠장! 안 된단 말야! 난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안 돼요! 이건 말도..." 그 때 눈을 뜬 김회장의 떨리는 목소리. "마음 속에서... 그녀가 응답했어..." 그 순간. 마법진의 여섯 촛불이 갑자기 팍 꺼지고. 거실의 유리창들이 한 장씩 차례 로 박살이 나기 시작했다. 와장창! 차창! 쨍그랑! 와그랑 차창! 한 장씩 부서져 깨어져버린 유리가루들이 달빛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빛나며 허공을 별빛처럼 수놓고. 쐐애액! 콰악! 갑자기 마법진 앞에 한 줄기 적색 빛이 꽂혔다. 뭐지? 내가 눈을 들어 보니 홍적색 붉은 빗자루였다. 빗자루가 날아왔다고? 맙소사! 이게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이게 도대체... 그리고 난 요령이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었다. "자...자주색 빗...자루? 붉은...머리? 붉은 머리의 여자... 서...설마..." "뭐...뭐야? 뭘 보았기에 그렇게 무서워 하는거야? 젠...젠장! 이게 뭐야! 소설 써? 퇴마록이야? 영화 찍어? 젠장! 왜 유리창이 박살이 나고 난리야!" 난 부들부들 떨면서 외쳤다. 참을 수 없는 무기력감. 이게 뭐야! 난 뭘 해야 하지? 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무기를 찾을 때 갑자기 뻐억! 하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벌컥 하고 열렸다. 그리고 김회장은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며 말했다. "그...녀다..." "호호, 김회장님, 손님들이 많네요?" 날카로운 목소리. 한 마디 한 마디가 심장을 찌르는듯한 목소리. 말을 들을 뿐인데 도 고통이 느껴진다. 저 여자... 도대체 누구야? 요령이는 그녀의 목소리에 부르르 떨더니 중얼거렸다. "서...설마...아...아냐...아닐거야...그럴 리 없어...하지만...이 기운은...분명 히..." 현관문 앞의 실루엣. 그림자처럼 보이는 그녀의 실루엣은 아름답다. 요령이는 비교 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요염함. 그녀는 잠시 그렇게 서 있더니 주위를 둘러보고는 한 발짝 달빛으로 그녀의 몸을 드러내었다. 새빨간, 핏빛의 머리카락. 그리고 어깨와 등, 윗가슴이 드러난 가죽 재질의 웃옷과 역시 가죽의 미니스커트, 검은 스타킹과 검 은 하이힐. 검은 립스틱을 바른 그녀는 미소지었다. 그리고 요령이의 날카로운, 겁에 잔뜩 질린 비명소리가 온 집을 울렸다. "꺄아아악! 퀴...퀴에르!" 퀴...에르? 퀴에르가 누구야? 어쨌든 달빛에 완연히 모습을 드러낸 그녀의 자태는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악마같은 요염함이 온 몸을 휘감은 그 모습. 밤 중에서도 짙은 밤같은 검은색과 핏빛을 그대로 따 온 듯한 붉은 빛이 묘한 조화를 이루는 모습. 그 녀는 휘파람을 불어서 붉은 빗자루를 부르더니 그 위에 걸터앉아서는 다리를 꼬았 다. 하, 내 눈앞에 이런 미인이 또 보이는군. 하지만 요령이와는 전혀 틀려. 요령 이가 요염함 속에 발랄함과 밝은 미소를 가지고 있다면 요령이가 퀴에르라고 하던 새 빨간 머리색의 여자는 여자는 온통 성적인 매력과 성숙한 분위기 뿐이었다. 제...젠 장! 그러고보니 내가 이 여자 미모나 평가하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난 온 힘을 짜내 서 물었다. "너...넌 누구야? 왜 이런...짓...을 하는거지?" 그녀는 미친 듯이 깔깔대더니 요염하게 말했다. "호호호호호! 귀여운 아이야, 이 누나는 너에게 그런 것을 대답할 시간이 없어요. 네 옆의 나보다 약간 못생긴 계집애에게 물어보려무나. 날 아는 것 같은데. 호호호호 !" 그러더니 그녀는 아직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요령이에게 물었다. "너, 나보다 약간 못생긴 아이야, 날 어떻게 알고 있지?" "아...퀴...에르...퀴에르..." 그리고 요령이 겁을 잔뜩 먹었는지 대답을 못하자 그녀는 약간 짜증을 부리더니 말 했다. "날 어떻게 알고 있냐고 물었어. 멍청한 계집아" "아...날...못 알아봐?" "당연하지. 그러니 빨리 대답해. 죽여버리기 전에" 참, 죽여버린다는 말을 정말 쉽게 하네. 퀴에르는 짜증이 난다는 듯이 붉은 뒷머리 를 뒤로 넘기며 말했고, 요령이는 계속 조금씩 몸을 떠는 와중에서도 왜 자신을 못 알아보는지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퀴에르가 누구길래? 나도 들어본 이름이기 는 한데... 퀴에르...퀴에르... '마녀의 실험실은 언제나 어두컴컴했다. 고양이의 주인이었던 마녀 퀴에르는 언제나 마법의 주문을 중얼거리며...' 생각났다! 요령이가 옛 일을 말해줄 때, 치를 떨면서 다시는 생각하기도 싫다고 했 던 그 마녀! 자주빛 지팡이를 타고 다닌다던 요령의 원주인, 퀴에르! 그랬구나! 그래 서 요령이가 저 퀴에르라는 여자를 알아 본 것이었구나! 그러나, 그렇다면 퀴에르가 요령이를 알아볼 가능성은 없지! 퀴에르라는 여자는 요령이가 영력을 지니고 있다는 걸 몰랐다고 했으니까! 더구나 요령이가 사람으로 변해 있으면 더욱 알아보기 힘들지 ! 알려줘야 해! 요령이에게 놀랄 것 없다고 말해줘야 해! 난 옆으로 천천히 걸어가서 생각에 잠긴 요령이에게 속삭였다. "저 퀴에르라는 여자는 널 못 알아봐! 저 여자가 네가 영기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 리가 없잖아! 더구나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는 건 더더욱 모르지! 보나마나야! 저 여 자는 네가 자기의 고양이라는 사실을 절대 모를거야! 그러니까 절대 널 알리지 마! 마녀 퀴에르의 이름은 워낙 유명해서 너 같이 힘을 좀 가진 자들은 다 안다고 해! 그 럼 될 거야! 어서!" 그 말을 들은 요령이는 약간 얼굴이 밝아졌다. 그리고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말 했다. 아니, 말하려고 했다. 그 의지를 실현시키지는 못 했지만. 참지 못한 퀴에르가 갑자기 외친 것이다. "하, 이 못생긴 계집이 내 말을 무시했어? 죽어!" 아니 요령이가 뭐가 어때서 그래! 어쨌든 '죽어'라는 살벌한 말을 내뱉은 퀴에르는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 손 끝이 이상했다. 뭐...뭐야? 바지직...바지직... 그녀의 손 끝으로 빠르게 검은 기운이 모이고 있었다. "제...젠장! 주술이다! 영준아! 내 뒤로 숨어!" 뭔지는 모르지만 숨으란 말이지? 지당하신 그 말씀 받드나이다! 난 요령의 뒤에 숨 었고 내가 그녀의 뒤에 숨자 요령이 빠르게 외치기 시작했다. "샐러맨더, 언딘, 실프, 노옴, 그들의 위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가! 전능하신 야훼의 빛의 한줄기를 얻은 아스트랄이 그들 위에 있나니! 샐러맨더! 언딘! 실프! 노옴!" 갑자기 요령의 주위로 붉고 푸르고 누렇고 투명한 네 가닥의 빛줄기들이 나타나서 는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하나로 뭉쳐랏! 아스트랄!" 퀴에르는 요령이를 보고는 피식 웃으며 자신의 손에 뭉친 검은 덩어리를 던졌고 네 줄기의 서로 빛덩이들은 서로 뭉치더니 순백의 광구가 되더니 검은 덩어리와 부딪혔 다. 콰아앙! 으악! 왠 폭발음! 난 요령의 어깨 너머로 얼굴을 빼꼼히 내밀어 쳐다보 았다. 퀴에르와 요령의 가운데 지점의 장판이 녹아버리고 그 주위가 검게 그슬려 있 었다. 맙소사, 이것들, 인간이야? 아니 참, 요령이는 고양이고 퀴에르는 마녀지. 하 지만, 마녀는 사람도 아니냐? 어쨌든 요령이는 중얼거렸다. "이 바닥에서 좀 노는 사람 중에 네 이름 모르는 사람도 있었나? 그건 그렇고 성질 더러운 건 여전하군" "호, 그깟 정령 좀 다룬다고 이 바닥에서 놀았다고 하는거냐? 지나가는 개가 웃겠구 나. 호호호호! 못생긴 게" 요령이는 못생겼다는 말에 피식 웃더니 말했다. 자신감을 얻었나? "그건 그렇고 너 힘이 많이 약해졌구나? 내가 아스트랄을 소환할 시간 동안 영력을 모았는데도 내 힘과 부딪혀서 대등하게 소멸하다니" 그런데 퀴에르라는 여자가 갑자기 그녀의 말에 필요 이상으로 반응했다. 그 색기도 는 얼굴에서 계속해서 여유롭게 짓고 있던 미소가 싸악 사라진 것이다. 섹시하게 꼬 고 있던 다리를 풀고는 벌떡 일어선 그녀. 양 손을 들어올린다. 그러자 갑자기 바즈 즈즉...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온 몸에서 검은 빛이 전류처럼 솟아올랐다. 그녀는 그런 식으로 힘을 모으면서 말했다. "재수없는 계집. 힘이 어쩌고 저째? 기분나빠. 죽어줘야겠어. 김회장, 이런 계집을 끼어들게 한 당신도 각오해요. 돈을 주지 않으면 당신과 당신의 가족 모두를 죽여버 릴거야. 알아 듣겠..." 퀴에르가 손으로 계속 힘을 끌어모으면서 중얼거릴 때, 요령이가 갑자기 소리쳤다. 그녀의 몸 주위에는 빛나는 오망성이 그려저 있었고 은은한 빛의 벽이 그 오망성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빛이여 솟아라악! 아스트랄 익스트림! 샐러맨더! 둘러 싸! 언딘! 물의 방어막을 나 에게 둘러! 절대 막아야 해! 실프! 샐러맨더를 지원해!" 요령의 비명같은 주문인지 뭔지가 끝나자, 갑작스레 내 주위로 투명한, 물같은 질감 의 막이 쳐졌다. 그리고 퀴에르는 울부짖었다. "꺄아아아악!" 그녀의 발 밑에서 빛이 그녀의 몸을 휩쓸고 천장으로 솟아올랐다. 그녀가 손 끝에 맺고 있던 검은 번개는 소멸해 버렸다. 그리고 괴로워하는 그녀의 주위로 붉은 빛이 빙글빙글 돌면서 포위망을 구축했다. 마치 불덩어리 같군. 가끔씩 혀도 낼름거리는 것 같은데? 샐러맨더겠지, 불의 도마뱀. 이 정도는 나도 안다고. 살아 생전 한 번이 라도 이런 걸 볼까하고 고민한 적조차 없어서 현실감이 안 나긴 하지만. 그 샐러맨더 는 계속해서 빙글빙글 돌았으며 가끔씩 투명한 바람같은 기운과 마주칠때마다 색이 짙어지고 크기가 더욱 커졌다. 어쨌든 한차례 그녀의 몸 전체를 빛이 휩쓸고 지나간 후, 퀴에르는 비틀거리고 요령이는 웃기 시작했다. 깔깔깔깔! 뭐야, 아까는 그렇게 겁내더니, 왜 웃어? "영체군?" "닥쳐엇!" 퀴에르의 날카로운 고함소리. 그러나 요령은 웃음을 멈추지 않으며 말했다. "깔깔깔. 난 또. 괜히 놀랐잖아. 어쩐지 마녀 협회를 이끄느라 바쁘신 몸일텐데 여 기까지 와서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아 참, 마녀 협회는 백마도사 협회와 전쟁 끝에 괴멸됐다는 소문이 들리던데 그 때 죽어버리지는 않았나 봐? 그건 그렇고 이 정 도 기운을 가진 영체를 이 나라로 보낸 걸 보니 꽤나 바쁘신가 보군" "이...이익...이 계집이...죽어!" 갑작스러운 퀴에르의 기습. 그녀가 갑자기 손을 마구 휘저으며 온 몸에서 검은 바람 을 뿜어낸다. 쏴아아아! 그러나 엄청난 기세로 뿜어져 나오는 바람들은 몽땅 샐러맨 더와 실프의 포위진에 부딪혀서 소멸되어 버렸고 퀴에르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얼굴을 감싸더니 주저앉아 버렸다. "역시, 영체였어. 샐러맨더 하나 소멸시키지 못하다니. 퀴에르, 아니 퀴에르의 영 체. 어쨌든 유명하신 몸을 이런 곳에서 보게 되다니 너무너무 반갑군. 꺄하하! 감히 나를 겁먹게 했어?" "닥...쳐...못 생긴 게..." "뭐! 못생겨? 내가 못생겼다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너보다는 내가 훨씬 예뻐! 온 통 피 뒤집어쓴 것 같은 머리칼에, 새까만 패션이라니... 참 나, 기가 막혀서! 너 말 야, 내가 인간모습의 얼굴에 별 집착은 없지만... " 야, 너 너무 막 나가잖아! 그 이야기는 하면 안 되지! 쟤가 영체인지 뭔지는 내가 알 바 아니지만, 어쨌든 퀴에르인데! 난 흥분해서 자신이 퀴에르의 검은 고양이라는 것을 밝히려는 그녀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꽈아아악! 솔직히 말해서 지금까지 녀석에 게 미친듯이 꼬집힌데 대한 복수의 의미가 아예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는 말 못하겠 다.그건 그렇고 녀석, 옷 밑으로 잡히는 살인데도 참 부드럽네. 어떻게 아냐고? 꼬집 으니까 그냥 꽈악 꼬집히잖아. 뭐, 저녀석 피부가 부드러운게 아니라 내가 원한이 조 금, 아주 조금 많이 실려서 세게 꼬집은 것일수도 있지만. 어쨌든 좀 아프겠다, 야. "아아아악! 왜 꼬집어!" 아직도 몰라? 젠장! 이것도 눈치 못채면서 나보고 매일같이 멍청하다고 했지? 앞으 로 나보고 멍청하다고 하기만 해 봐! 아주 그냥 콱! 난 그녀석에게 속삭였다. "너 미쳤어? 네가 저 마녀의 고양이라는 걸 밝히려고? 안 그래도 저 여자가 널 약간 은 이상하게 보는 것 같은데! 정말로 밝힐거야? 밝힐거면 아예 내가 말해 주던가!" 내 말을 들은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듯이 급히 입을 가렸다. 이제야 자신 이 무슨 실수를 할 뻔했는지 눈치챘냐? "으읍, 휴우. 말 안했다. 음... 어쨌든, 너 영체 맞지?" "닥치라고...했을 텐데...정말로 죽고 싶나? 내 이름을 안다면 그 소문도 들었을텐 데. 내가 정말 화나면 직접 이 나라로 찾아와서 널 죽여버린다는 것쯤은 예측할 수 있을텐데..." "......영력을 쪼개서 영체를 만들 정도면 고작 화 좀 났다고 이 먼 곳까지 오기 힘 들 정도로 바쁜가본데, 쓸데없는 협박을 하는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말투는 많이 고분고분해졌구나. 이제야 약간은 알아 모시나 보군. 그건 그렇고, 내가 영체라는 사실은 어떻게 알았지? 내 힘이 약해서?" "...그래. 넌 너무 약했어. 내가 알고 있던 퀴에르가... 음. 아냐" 말을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은 고양이. 자신의 주인,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 (실제로 퀴에르가 가장 두렵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퀴에르를 떠올릴 때 그녀의 얼 굴에 떠올랐던 불안감을 생각해보면 추측 가능하다)을 만났다는 불안감이나 긴장 때 문일까? 어쨌든 요령이의 말을 들은 퀴에르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무언가 무척 궁금하다는 듯한 표정. 그녀는 입을 열었다. "너...그 말투는 나를 옛날부터 잘 알고 있었던 말투 같은데..." "잘 알고 있긴 뭘 잘 알아!" 약간씩 추궁당하는 느낌이 들었는지 요령이가 소리를 빼액 질렀다. 그러나 퀴에르는 계속해서 말했다. "너... 아까부터 참 이상한데. 왠 과민반응? 그러고보니 처음부터 뭔가 이상했어. 이 바닥에서 날 알고 있으려면 그만큼 유명해야 하는데 너같은 계집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는 것은 논외로 할께. 하지만, 그렇다해도 이해되지 않는게 너무 많은 데. 처음 나를 봤을때의 그 질려버린 듯한 표정. 마치 나한테 처음부터 무슨 공포심 을 가지고 있는듯한 얼굴이었어. 말로만 나를 들었다고 했는데, 그런 공포심이 마음 속에서 나올수가 있나? 게다가, 아무리 내 힘이 약하다고 해도, 그렇게 쉽게 영체라 는 결론을 내려버리는군. 내 힘이 이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는 듯. 소문만으로 그렇게 나에 대해 쉽게 파악을 할 정도로 네가 머리가 좋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겠지만, 미안하게도 넌 정말 멍청해 보이거든" "이익...멍청하다닛!" 요령이가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던 말던 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계속했다. "이상한 건 아직도 많지. 아까 인간모습의 얼굴은 신경을 안 쓰지만이라고 했는데. 인간이 아니란 소리니?" 당황해버린 요령이. 마구 손을 흔들며 부정한다. "아...아냐! 그건 그냥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소리였어!" "호호호, 외모에 신경을 안 쓴다는 소리와 인간의 모습에 신경을 안 쓴다는 말은 틀 릴텐데? 게다가..." "그만햇!" 자꾸 추궁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지 요령은 소리를 지르며 손을 확 휘둘렀다. 그 러자 퀴에르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던 샐러맨더가 화악! 하며 더욱 크게 번져서 이글댔다. 요령은 그런 식으로 퀴에르를 위협한 뒤 말했다. "너, 소멸시킬거야. 정말이야. 어차피 영체니까 상관은 없겠지만 그래도 퀴에르 자 신에게도 피해가 많이 가겠지? 자신의 기운을 떼어서 만든 거니까" "호호호호호! 나를 좀 알고 있는듯하면서도 파악을 못 하다니, 모르는 체 하는 건가 ? 멍청한 계집. 나는, 그러니까 이 영체는 나, 그러니까 퀴에르의 손가락만도 못한 힘이야. 알텐데? 소멸시키려면 소멸시켜. 상관 없으니까" "...과장이 좀 심하군. 마지막으로 궁금한 것 하나만 묻지. 저주는 너를 소멸시키면 해제되나?" 그 말에 그녀는 깔깔대며 웃더니 윙크를 하며 말했다. "호호, 어차피 소멸되는 마당에 뭘 못 알려주겠니. 안타깝게도 저주는 풀린단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그럼, 죽어" "고마워. 난 영체라 죽는다는 개념은 없지만 융숭한 대접 감사하며 마지막 소원을 너에게 부탁하지" "...뭐지?" "난 정말로 네 정체가 궁금하거든? 알려주지 않을래?" "싫다면?" "강제로 알아야겠지!" 퀴에르는 말을 마치자마자 땅을 타앙! 하고 쳤고 집 전체를 울리는 진동과 동시에 갑자기 요령이의 주위로 오망성이 그려지더니 어두운 기운이 쏟아져나왔다. 파아아앗 ! "꺄아아악! 이게 뭐얏!" 그녀는 어두운 기운에 휩싸여 상당히 당황했는지 마구 허우적댔다. 마법진에서 나오 는 어두운 기운은 검은빛의 장막처럼 요령이를 둘러쌓았고 요령은 그 안에서 비명을 질렀다. 젠장,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거야! 난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기, 무기 없나? 젠장, 저 퀴에르라는 여자를 때려 눕혀버리면 어떻게든 되겠지! 저 샐러맨더인 지 뭔지 하는 머저리는 자기 주인이 이상한 주문에 당하는데도 멍청하게 퀴에르의 주 위를 빙글빙글 돌고만 있다. 어떻게 하면 되는거야! 난 계속해서 주위를 둘러보았지 만 내 주위에는 요령이가 둘러쌓인 커튼같은 어둠과 물빛 장막 뿐이었다. 젠장! 쓸모 없는 건 아무것도 없잖아...가 아니라! 그렇지! 저 물빛 장막! 뭔지는 몰라도 요령이 의 힘이렸다! 그렇다면! 에라! "으라차차차!" 난 어깨로 요령에게, 아니 어둠의 장막에 돌진했다. 으라차! 물빛 장막에 어둠의 덩 어리를 밀어붙여서 서로 부딪히게 해서 없애버리려는 것이다. 그러나, 허무하게도, 내가 온 몸을 그 어둠에 던질 때 갑자기 그 어둠이 사라져 버렸다. 파아앗! 난 놀라 서 허공에서 허우적댔지만 이미 늦은 일. 난 그대로 어둠이 있던 자리를 통과한 뒤 물빛 장막조차도 뚫고 (아무 저항이 없었다) 바닥에 부딪혀 버렸다. 콰아앙! 크으윽, 머리를 정통으로 부딪혔군. 머리 아파. 혹은 안 나려나? 젠장, 그런데 뭐야? 원래대 로라면 어둠의 장막이 사라졌을 때 요령이와 부딪혔어야 하잖아? 내가 '요령이가 어 디로 갔길래 안 부딪힌거지'하고 고민하고 있을 때 퀴에르는 날카로운 웃음소리로 웃 었다. 호호호호호! "호호호호호! 이 누나에게 쇼를 보여주는구나. 아주 재밌어. 나중에 귀여워해 줄게, 꼬마야. 그리고, 너, 못생긴 계집. 꼴이 그게 뭐니? 호호호호! 이제 보니 고양이였잖 아? 그것도 검은 고양이. 마치 내가 옛날에 사랑해 주었던 고양이와 같은 모습이구.. . ...그러고보니 너...설마...?" 뭐? 무슨 소리야? 난 놀라서 요령이가 있던 곳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 곳에는 예 쁘게 생긴, 그러나 옷은 옷이 없다는 티를 내듯 꼭 남자처럼 막입은 여자 대신 마구 바닥에 흐트러진 옷 위에서 새까만 고양이 한 마리가 털을 바짝 세우고는 가르랑대고 있었다. 젠장, 고양아! 결국엔 들켰구나! 그녀석은 날카롭게 울부짖더니 말했다. "캬오옹! 진작 소멸시켰어야 했는데. 젠장" "어떻...게 된 거야, 요령아?" "어떻게 되긴 어떻게 됐냐, 사람으로 변해 있던 주술이 풀린거지.젠장, 방심하다 당 했어" 그리고 퀴에르는 놀란 듯이 말했다. "새까만 고양이? 게다가 나를 닮은 분위기의 이 기운. 너...설마...카르테?" 카르테? 요령이의 원래 이름인가? "...카르테가 누구지? 어쨌든 나는 모르는 이름이군. 미안하지만 나는 이 나라 출신 이라서 말야. 그리고 너같이 재수없는 것의 영기를 닮았다니, 기분나빠" "아냐. 너에게서 느껴지는 기운... 내가 옛날에 미미하게 카르테에게서 느끼던 기운 과 똑같아. 그 녀석은 앙큼하게도 자기가 영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숨기고 있었지. 꼭 지금의 네가 카르테가 아니라고 나를 속이려 하는 것처럼 말이야. 오호호호! 마침 잘 됐어, 내 예상이 맞다면 큰 짐 하나는 덜었군! 자, 카르테? 어서 나의 품으로 오 렴. 널 무척 찾고 있었어. 나와 함께 가자, 호호호!" "놀고 있네. 카르테인지 뭔지, 난 알지도 못하는 이름이야. 그리고 너같은 계집 따 라갈 생각따윈 추호도 없어"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인데, 요령이는 고양이의 모습이 되면 훨씬 사나워 지는 것 같 다. 말투가 딱딱해지고, 귀에 팍팍 꽂히는 듯이 날카로워지거든. 게다가 비꼬는 듯한 말투도 훨씬 많이 쓰고. "쯧쯧, 카르테. 내가 얼마나 널 사랑하는지 알고 있잖니? 어서 나에게로 오렴" "...말 정말 못알아 듣는군. 내 이름은 요령이야, 요령이.그리고 왜 그리 고양이에 게 집착하지? 어디 내가 필요한 곳이라도 있나? 고양이탕이라도 끓여 드시게?" "이유는 알 것 없고, 네가 카르테가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어. 비슷한 애라도 있으면 되니까. 난 너같이 강한 고양이가 꼭 필요하거든? 호호! 이 언니가 사랑해줄게, 이리 오렴!" 퀴에르는 약간의 애교를 섟어가며 부탁했고 그런 퀴에르를 바라보던 고양이는 야옹 하고 한 번 울더니 말했다. "샐러맨더, 태워" 고양이는 차갑게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노려보는 퀴에르를 잠시 쳐다보다 가 맞대응하듯이 차갑게 내뱉었고 그 순간 그녀 주위를 둘러싸며 허공을 살 라먹던 불덩어리가 퀴에르를 덮쳤다. 번쩍! 눈 앞이 환하게 밝아졌다. 폭발 해버린 것이다. 오렌지색 빛이 잠시동안 온 집안을 환하게 물들였고, 큰 진 동이 온 집안을 울렸다. 우르르르르릉! 그리고 기분나쁜 웃음소리와 함께 퀴에르의 마지막 외침이 우리의 마음속을 외쳤다. "호호호호호! 사람으로 변하고 말도 하고. 강해졌구나, 카르테! 300년 이 상 산 고양이라니, 대단해! 내 맘에 꼭 들었어! 호호호호!" "젠장, 소멸되면서도 더럽게 시끄럽네. 도대체 이나라 말은 어디서 배운거 야, 젠장" 고양이는 나직하게 중얼거리더니 앞발을 휘저었다. 그러자 퀴에르를 소멸 시킨 뒤에도 사라지지 않고 허공에서 맹렬히 불타오르던 샐러맨더는 훅! 하 는 소리와 함께 머리카락같은 한 줄기 연기를 남겨두고는 허공에서 사라져 버렸다. 사라진 샐러맨더의 주위는 열기로 주위는 불타고 바닥은 녹아 흐를 거라 생각했던 내 예상을 깨고 멀쩡했다. 거 참 신기하네. 어쨌든 우선적으 로 걱정해야할 것은 집보다는 사람, 아니 고양이겠지. "야, 괜찮아?" 난 요령에게 물어보았다. 아니, 이제 고양이로 변했으니까 고양이라고 불 러야 하나? 에이, 요령이는 요령이지. "젠장, 변신이 강제로 해제되는 기분, 그렇게 좋은 기분은 아냐. 게다가 퀴에르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알았을뿐더러 퀴에르도 내가 살아있다는 것 을 눈치챘을테니까. 뭐, 바쁘신 몸이 고작 나같은 고양이 한 마리 때문에 이곳으로 오겠냐마는, 찝찝한 마음은 지울 수 없군. 제길" 고양이는 앞발로 수염을 쓰다듬더니 가르릉거리며 말했다. 정말 화난 표정 이네. 잘못 건드렸다간 얼굴을 밭고랑으로 만들어 버리겠지? 그 때 뒤에서 나직한 비명 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김회장이었다. 그는 입을 약간 벌리고 는 멍한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으...으윽. 어떻게 된 거지? 폭탄이 터지고, 그리고... 고양이...? 요령 양은 어디로 가고 왠 검은 고양이가...? 나, 난 아직도 이 상황이 이해가 잘 안... 되는데, 누구 설명해 줄 사람 없나?" 으음. 이걸 말해 줘야 하나? 에이, 어차피 이제 알 사람은 다 아는 듯 싶 은데. 김회장 한 명에게 더 말한다고 변할 것 있나? 아니지, 그래도 경솔하 게 요령이의 정체를 밝혀서는 안 되겠지? 내가 막 입을 열었을 때였다. "마법에 걸렸어요" 요령이였다. 자신이 직접 뭔가 핑계를 대려나보군. "으...응? 무슨 소리인...가?" "고양이로 변하는 마술에 걸렸다고요. 쳇" 으음. 뭔가 반대로 된 것 같다. 사실 요령이는 원래가 고양이고 평소에는 주술을 걸어서 사람으로 변한 채로 다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쨌든 요 령이의 말을 들은 김회장은 크게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그런! 말도 안 돼는!" "물론 말이 안 되죠. 하지만 말이 안 되기로 따지자면 퀴에르의 저주나, 저의 저지, 아니면 아까 퀴에르와 제가 주고받았던 술법들, 등등, 등등. 뭐 그런 것 들은 더 할 텐데요" 고양이의 약간은 툴툴거리는 듯한 말이 끝나자 김회장은 머리를 감싸쥐며 울부짖었다. "아아아! 이게 무슨 몹쓸 짓이란 말인가아! 내가 불쌍한 한 아가씨의 인생 을 망쳐 놓았구나! 으흐흑..." 뭐, 뭐야! 누가 갑자기 울어!...어후, 깜짝 놀랐네. 김회장 저 사람 갑자 기 미쳤나? 설마 아까 빗자루에 머리 맞았나? 갑자기 왜 저래? 요령이도 한 참동안 세로로 갈라진 눈동자가 동그랗게 되고 입을 약간 벌리고 뾰족한 귀 를 앞으로 축 늘어뜨린, 한마디로 멍한 표정을 짓더니 (고양이가 멍한 표정 짓는 거 봤는가? 정말 재밌는 표정이다) 물었다. "어이, 어이, 김회장님?" "흐으윽! 나를 부르지 말게. 나는 지금 죄책감에 시달려 미칠 것 같은 기 분이니! 나 때문에... 아아... 이럴수가... " "...이봐요, 회장님. 도대체 왜 그러는데" 그는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훔치더니 대답했다. "그렇게 애써 태연한 척 하지 않아도 되네. 평생을 고양이로 살다니! 이 얼마나 비극인가! 흐흐흑... 나 때문에..." ...무슨 소리냐. 쟤는 원래 고양이야. 원래 평생을 고양이로 살아야 한다 구. 요령이는 김회장의 말을 듣자 피식 웃더니 말했다. "걱정하지 마요. 이건 몇시간 지나면 정상으로 돌아오니까" "......그...그게, 정, 정말인가?" "예, 예. 그러니까 울음 그치세요. 나 참, 다 큰 어른이 엉엉거리니까 그 것 참 보기 그러네요" 어? 무슨 소리지? 몇시간 뒤면 사람으로 돌아온다니? 원래 고양이 아냐? 난 녀석을 불렀다. "요령아- 이리 와 봐. 쯧쯧쯧쯧..." "...이봐, 날 부르는 건 좋은데 그렇게 너희 집 고양이 부르듯 부르지 말 아줄래?" "...얼럴럴러러- 이리 와 봐- " "개 부르듯 하는 건 더욱 싫단다, 참고로" "그래? 그렇다면, 이리와 요령아- 구구구..." 그 녀석은 쏜살같이 달려오더니 내 어깨에 붙어서 말했다. "안 닥칠래?" "음, 왔구나" "......하고 싶은말이 뭔데?" "으...응. 그게 말이지, 그냥 궁금한건데. 몇 시간 뒤에는 돌아온다는 말 이 무슨 말이야? 넌 원래부터 고양이잖아. 돌아오고 자시고 할 게 어디 있 어?" 난 호기심을 담아서 질문했고 녀석은 한숨을 포옥 쉬더니 말했다. "......나 너한테 고백할 거 있는데..." 뭐? 고...고백...? 아이, 부끄럽게, 이런데서... 요령아 미안, 난 아직 애 완동물과는 애정을 나눌 준비가... 아니지. 일단 무슨 고백인지 물어보자. "뭐...뭔...데?" "나...평소부터...널...." 아앗? 이것은 역시 고백의 수순을 하나도 빠짐없이 밟아들어가는 대사? 안 돼!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준비가.... 내가 마음의 준비를 하던 말던 그 녀석은 말을 이었다. "나...평소부터... 널...정말 지긋지긋하도록 멍청하다고 생각해왔어..." ......이런 젠장. 그럼 그렇지. 그 녀석은 나에게 혀까지 낼름 내밀더니 말했다. "뭘? 왜 그리 죽상이야? 못 먹을 것 먹었어? 야, 머리는 어깨가 허전하다 고 아우성쳐서 달았냐? 아니면 목구멍으로 들어가는 바람이 너무 차가워서 막은거냐? 생각을 좀 해봐라. 그럼 김회장한테 내가 '아, 예. 제가 사실은 고양이에요. 놀랐죠? 까꿍? 그래도 검은 고양이치고는 귀엽게 생긴 편이죠? 털도 곱게 났고 송곳니도 귀엽고' 이렇게 말하리? 응? 응?" "......아, 그렇구나" "알면 됐어. 됐고..." 그 녀석은 주위를 휘휘 둘러보더니 김회장 앞으로 걸어가서는 말했다. 아 니,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녀석은 김회장의 얼굴을 올려다보더니 갑자 기 몸을 부르르 떨어대는 것이 마치 사람이 웃음을 참는듯한 행동이었다. 별 거 다하네, 참. "...쿡...쿡쿡" "...왜 웃나?" 난 그 녀석이 온 힘을 다해 웃음을 참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얼굴이 콧 물과 눈물과 침으로 뒤범벅된 채로 방긋이 웃는 사회 지도층 인사를 보는 일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닐뿐더러, 보는 사람에게는 상당히 웃긴 일이다. 그 리고 난 고양이가 쳐다보며 킥킥거리고 있는 '흔하지 않은 우스운 일'을 보 면서 웃음을 참기 위해 무릎을 움켜쥐고 주저앉아야 했다. 쿠쿠쿡. "으음, 아니에요. 회장님, 저희 갈래요" "아, 그, 그래. 잘 가게. 자, 여기. 자네들에게 약속했던 돈일세" 그는 그렇게 말하며 품 속에 손을 넣어서는 흰 봉투를 꺼내어 요령이에게 내밀었다가 요령이에겐 손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이마를 딱! 치며 나에게 그 봉투를 건네었다. 그리고 난 평온한 얼굴을 억지로 유지하며, 억지로 웃 으면서 부들부들 떠는 손으로 그 봉투를 받았고, 역시 미소를 띈 얼굴로 수 전증 환자처럼 미친 듯이 손을 떨어대며 나는 무척 태연하다는 듯이 봉투 속을 쳐다보고는, 백만원 짜리 수표가 한 장 들어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역시 미소를 띈 얼굴로 그 봉투를 주머니에 넣고는 펄쩍 펄쩍 뛰어버렸다. 젠장, 나 왜 이러니? 너무 비굴하잖아! "감사합니다, 회장님!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사실 이건 저 쪽에서 해야 할 말이지만 너무 기쁜 나머지 아무 말이나 막 나온다. 김회장은 약간은 당황한 얼굴이 되어 주춤거리더니 곧 다시 미소를 띄고는 대답했다. "아...하하하. 그건 내가 할 말이지. 나야말로 자네들에게 정말 감사하네. 뭐 어려운 일 있거든 내게 연락하고. 이건 내 명함일세" 그는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에 손을 넣어서는 명함을 하나 꺼내 주었고, 난 그 명함을 대충 주머니에 넣고는 말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생각같아서는 밤을 새면서 회장님을 지켜드리고 싶지만..." 그 때 더 참을 수가 없었던지 요령이가 끼어들었다. "얼씨구, 신났다. 뭘 지켜. 다 끝났는데" ...이런 젠장. 그냥 그러려니 하지 왜 꼭 껴서 일을 망치냐. 요령이는 잠 시 건방지게 나를 노려보다가 내가 마주 노려봐주자 혀를 낼름 내밀더니 (크아악!) 태연하게 회장님을 쳐다보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회장님, 저희 갑니다. 부디 안녕하시고, 다음부터는 조심하시길 바래요" 음. 고개를 까닥이는 것은 자기 나름의 인사였나보지. "아...그, 그래. 난 오늘밤을 절대 잊을 수 없을 것 같군" 그러자 녀석은 제 딴에는 윙크라고 생각하고 하는 짓, 즉 한쪽 눈을 깜박 이는 짓을 하며 말했다. 한쪽 눈을 감은 고양이를 봤는가.... 으으. 애꾸눈 고양이를 잠시나마 봐 버리다니. 젠장. 김회장은 그 행동을 보고는 요령이 가 갑작스럽게 마음이 바뀌어서 위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가보다. 움찔거 리면서 뒤로 조금씩 물러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오늘밤은 잊으시는 게 좋을 거에요. 악몽을 꾸는 것 이외에는 도움되지 않을테니까" "...어, 그, 그, 그래" "안녕히 계세요" "그, 그래. 잘 가게" 난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현관 밖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가다가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유리창은 박살나고, 바닥에는 녹아버린 초들이 범벅을 이루어 서 더럽고, 책장은 넘어져있고, 어쨌든 집은 엉망이었지만 김회장의 얼굴은 밝았다. 그럼 된 거지 뭐. "야, 그런데 너 생각외로 잘 하더라. 그...뭐냐. 그거 정령술이지? 맞지? 맞지?" 난 옆을 쳐다보며 말했고, 꼬리를 위로 꼿꼿이 세우고는 건방지게 가끔씩 폴짝폴짝 가볍게 뛰며 담 위를 걸어가던 요령이는 야옹하고 한 번 나직이 울더니 대답했다. 우리는 골목길을 걷고 있었고, 달빛은 눈이 살짝 쌓여있 는 밤거리를 환상적으로 비추어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달빛은 요령이의 몸 위에도 뿌려져 녀석의 검은색 털을 황금색으로 빛내 주고 있었다. "잘 아네? 맞어" "으흠. 내가 책 좀 봤지" 책이래봤자 퇴마록이나 환타지 소설 말고 뭐가 또 있겠는가. 하지만 녀석 은 믿는 눈치였다. "그래? 그런데 왜 아까는 그렇게 모르는 척 했지?" "그럼 처음 보는데 아냐" 난 대충 대답했고 다시 걸어갔다. 눈이 녹았을법도 한데 김회장의 집에 있 는 동안에 조금 더 내렸는지, 거리는 여전히 눈이 살짝 깔려있다. 난 뽀드 득거리는 눈소리를 들으며 걸어가다가 아무거나 질문하기로 마음먹었다. "넌 마녀의 고양이잖아. 그렇지?" "그렇...지. 마녀는 몰라주기를 바라는. 그런데 왜?" "그런데 흑마법은 쓸 줄 몰라? 아까 낮에 물어보았을 때는 뭐 흑마법을 쓸 줄 안다느니 악마의 힘을 비는게 아니라 자기 힘을 직접 쓰는거라 안전하기 까지 하다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시건방은 혼자 다 떨었잖아" "...시.건.방?" "왜 또박또박 끊어서 말할까- 후-" 난 마치 지나가는 소리처럼 한숨을 섞어서 말했고 그래서 하마터면 녀석은 그냥 넘어갈 뻔 했다. "후우- 그렇지? ...가 아니라! 시건방이라니 이 자식아!" "헤헤. 그냥 넘어가도 좋았을 것을. 그건 그렇고 내가 물어본 것 중 잘못 된 부분은 없잖아. 그럼 대답해 줘도 되겠지" 녀석은 잠시 아무 말없이 그냥 무심히 달을 쳐다보았다. 역시 달밤의 분위 기는 나뿐만이 아니라 녀석의 정신도 느슨하게 만드나보다. 슬쩍 말을 돌렸 더니 시건방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것으로 봐서. 헤헤. "그냥... 흑마법의 대가에게 흑마법을 쓴다는 것도 좀 그렇고... 옛 주인 한테 주인에게서 얻은 힘으로 덤비는 것도 약간 좀 걸리고, 무엇보다도 그 때는 녀석이 영체인 줄 몰라서 영력을 최대한도로 아껴야 도망이라도 칠 수 있겠다고 생각했으니까. 정령술은 흑마법에 비해서 영력이 별로 필요하지 않거든" "그래? 영력이 필요하지 않아?" "응" 우와! 잘 됐네! 나도 하늘에다가 불장난 좀 하고 싶은데! "그럼 나도 그 정령술인지 뭔지 좀 알려줘! 나도 하고 싶어 그거! 알려줘 알려줘알려줘!" 난 갑자기 마구잡이로 말을 쏟아부었고 그런 나를 잠시 쳐다보던 녀석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말했다. "뭐 네가 너도 모르는 잠재력을 가졌다거나, 무슨 기운이 느껴진다거나, 억눌린 힘의 조각이 보인다거나하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냐마는 뭐?" "넌 너무도, 지극히, 심히, 무지막지하게 보통사람이라서 안 돼" "......정말?" 내가 지나가는 말투로, 아무 생각 없이 물어보자 갑자기 녀석은 심각한 얼 굴을 하더니 대답했다. "...사실은 그렇지 않아. 사실 네 몸에는 엄청난 영력이 흐르고 있어. 하 지만 그건 금지된 힘이야. 악마성을 띈 힘이지. 그 힘을 일깨울수는 없어. 너무 위험해... 그런데 만약 네가 정령술이던 뭐든 주술을 하나 배우기라도 한다면 그 어마어마한 힘은 곧 너에게서 깨어나서, 네가 미처 그 힘을 지배 하려고 하기도 전에 그 악마성으로 너를 지배해버리고 말 거야. 그리고 난 불쌍하게 쓰레기더미에서 자다 깔린 척 하고 네게 접근했지만, 사실은 네 힘이 네 밖으로 뛰쳐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파견된 감시원이고" ...뭐? 이건 무슨 헛소리야? 달빛은 여전히 내 어깨에 내리쬐고 있었고, 눈은 여전히 사박거리며 내 발 끝에 밟힌다. 가끔씩 개들이 아스라이 짖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그러나 내 마음은, 내 머릿속은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리고 난 부들부들 떨면서 되는대로 말했 다. "...헛소리지? 거짓말이지?" "......" "어서 말해! 헛소리지? 거짓말이지?" 그리고 녀석은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심각하고 불쌍하고 안쓰럽고 두려워하 는, 말그대로 복합적인 생각이 뒤섞인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어쩜 그렇게 눈치가 화살이냐. 꺄하하하하!" ".......이런 젠장. 그럼 그렇지" "뭐? '어서 말해! 헛소리지? 거짓말이지?' 미안해, 헛소리고 거짓말이야, 꺄하하하하하!" 녀석은 아주 배를 잡고 뒹굴어대며 내 심각해하던 목소리를 흉내내고 있었 다. '헛소리지? 거짓말이지?'를 외쳐대며. "큭큭큭, 너 진짜 웃긴다!" "...이런 젠장, 왜 거짓말 하고 그래!" 그런데 갑자기 미친 듯이 웃던 녀석은 웃음을 뚝 그치더니 잠시 슬픈 눈빛 으로 나를 쳐다보고는 말했다. "...웃어서 아닌 척하려고 했지만 너에게 거짓말을 하려니 너무 미안하다. 언제까지 숨길수도 없는 일이고... 사실... 아까 한 말은 진실이야. 넌 엄 청난 힘을 가지고 있어..." "...진짜?" "...물론 가짜지...꺄하하하! 두 번 속았어! 완전 바보야, 바보! 바보중의 바보! 우킬킬킬! '진짜?' 우하하하!" "이런 젠장! 야! 자꾸 그럴래? 너 도대체 진짜야 거짓말이야..." 그러자 녀석은 갑자기 얼굴 표정을 싸악 바꾸더니 말한다. 이런 젠장. "사실......" "그만해!" 그러자 녀석은 피싯 웃더니 말한다. "세 번은 안 속네. 사실, 솔직히 말하면, 넌 정말 보통 사람 수준밖에 안 돼. 못 믿겠다면 할 수 없지만 이번엔 정말 진짜야. 뭐, 보통 사람이라도 수련을 열심히 한다면 정령을 못 부리거나 영력을 못 얻거나 하는 건 아니 지만, 쩝. 공부도 그런 거 있잖아. 노력하는 녀석들과 머리가 좋은 녀석들 의 차이점. 에이, 뭐 비유가 이렇게 조악하냐. 너같이 멍청한 녀석은 이해 못 하겠지. 딱 잘라 말해서 한 마디로 넌 재능이 없단 소리지, 재능이 없 단. 그냥 살어. 그렇다고 상처받지도 말고. 영적인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네 주위에서 천재를 찾는 것 보다 더 어려울테니까. 그런 놈들이 이상한거 지, 한 마디로. 그리고 이런 거, 그렇게 안 좋아" 녀석은 그렇게 말하더니 앞발의 발톱으로 자신이 서 있던 돌담벽을 톡! 친 다. 그러자 내 주위에서 갑자기 불꽃 한 줄기가 나타나더니 빙글빙글 돌면 서 마치 춤을 추듯이 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와, 예쁘다. 그리고 녀 석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위로의 댄스인가? 낄낄. 자, 잡아봐" "응?" "네 눈앞의 불꽃. 잡아보라고. 안 뜨거우니까" 잡아보라고? 못할것도 없지. 회장집에서 보니까 그 큰 불덩이가 타오를때 도 주위 사물들은 하나도 안 탔던데. 난 손을 뻗어서 그 자그마한 불꽃을 움켜쥐었다. "앗 뜨거! 젠장! 야! 안 뜨겁다며!" 난 팔짝팔짝 뛰면서 외쳤고 녀석은 이제 저러다 담벽에서 떨어지지 않을까 심히 걱정될 정도로 데굴데굴 구르면서 웃어대기 시작했다. "아하하하하! 진짜, 진짜, 진짜 잡았어! 불을, 맨손으로!" 젠장, 지금이 웃을 일이냐! 남은 손이 뜨거워서 죽겠구만! 나 진짜 화났다 구! "꺄하하하, 야, 야!" "......왜" "어? 왜 대답이 시원찮아? 너 화났니?" "......" "어? 진짜 화 났나보네. 야, 주인이 그 정도 장난도 이해 못하고 화를 내 면 어떻게 해?" ......뭐? 주인? 누가? 누가 누구의 주인이야? "누가 주인이야? 누구의 주인이고?" "네가 주인이야. 나의 주인이고" "......이제 장난은 그만 쳐. 지겨우니까" "아냐. 이번엔 진짜야" "응? 진짜?" "그래. 뭐, 어차피 주인없는 고양이가 진득하게 한 곳에서 살아보려면 주 인을 정해야지 할 수 있냐. 나, 여기가 마음에 들었어. 그래서 살려는데, 주인이 없잖아. 한동안 떠돌아 다녔지. 근데, 뭐 너 정도면 괜찮겠다" "...진짜냐? 나보고 네 주인 하라고?" "그래. 원래 고양이는 한 군데에서 살려면 주인이 필요해. 안 그러면 그냥 떠돌아 다니는 들고양이에 불과하지" "......그런 거 안 따졌잖아?" "굳이 따질 필요는 없지만... 뭐, 그래도 인간을 '인간' 하나로만 보는것 과 '주인'과 '주인이 아닌 사람'으로 구별하는 것은 좀 틀려. 설명하기는 좀 그렇고, 고양이라는 것이 좀 그래" "......그래서?" 그녀석은 잠시 입을 다물더니 한숨을 포옥 쉬고는 말했다. "...그래서 네가 내 주인 좀 해 달라고. 너 정도면 따악 알맞을 것 같아" "...뭐가?" "같잖은 주인으로. 깔깔깔!" "뭐? 같잖은 주인! 야!" 녀석은 내가 슬쩍 휘두르는 주먹을 휙! 뛰어서 피하더니 폴짝 폴짝 뛰어갔 고 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내가 저 녀석의 주인이라고? 참, 나 원. 기가 막혀서 미치겠네. 녀석은 내가 한숨을 푸욱 쉬던 말던 신경쓰지 않는지 계속해서 앞으로 뛰어가다가 뒤돌아보더니 말했다. "야! 안 와?" "으...응! 갈게!" 난 녀석을 따라 뛰어가기 시작했다. 달빛 아래에서 통통 뛰어가는 검은 고 양이와 역시 달빛을 받아서 빛나는 미소년... 후. 양심적으로, 그래. 달빛 을 받나 안 받나 마찬가지로 우중충한 평범한 청소년. 쳇. 어쨌든, 내가 저 녀석의 주인이라는 게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아니, 솔직히, 갑자기 약간은 저 앞에서 뛰어가는 고양이가 귀여워 보인다. 아주 조금. 달빛 때문 이야. 쳇. "야! 같이 안 가냐!" "아주 느려 터졌어! 좀 빨리 좀 와!" ......누가 누구를 아주 조금 귀여워 한다고? 젠장. "그런데 너 지금 어디로 가는거야!" "어디로 가긴! 너희 하숙집 가지!" "길 알아? 난 몰라! 안내해! 난 지금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어!" 내 말에 갑자기 녀석은 우뚝 서 버렸다. 뭐냐? 왜 서냐? 설마... 설마? 모. 르. 냐? "......이런 젠장. 진짜 몰라?" "몰라. 어휴, 이런 걸 주인이라고, 젠장, 아이 씨, 또 젠장이라 그랬지 나 ?. 자꾸 네가 젠장거리니까 나도 젠장이 입에 붙었어, 젠장. 어휴, 어휴!" "......젠장은 네 입버릇이 나빠서 그런거고, 어쨌든. 도로 김회장집에 가 서 하루만....재워달라고 그럴까?" "젠장, 인사까지 다하고 '다시는 이런 일, 기억하지 마세요' 하고 멋지게 엔딩을 장식하는 대사까지 던지고 나왔는데 이제와서 도로 가라고? 넌 창피 하지도 않냐?" "......그러고보니 우리가 샀던 라면이랑 생선이랑 참치 같은 걸 그 집에 다 놓고 온 것 같은 기분이 마구 들지 않냐?" "......그래서, 라면 가지러 왔다고 그러면 김회장이 참 얼씨구나 하겠다" 으음. 그런가? 생각을 해보자. 생각을... 생각을... 아! 생각났다! 난 엄 지와 검지 손가락을 따악! 하고 맞부딪혀 소리를 내면서 다급하게 말했다. "내 옷도 놓고 왔어 그곳에!" "......옷이라니?" "네가 고양이로 돌아오면서! 네가 너무 작아져서 벗겨져 버린 옷을 그 곳 에 그대로 놓고 왔잖아!" 그러자 갑자기 녀석은 씨익 웃으며 '주인 하나는 잘 뒀군' 하고 중얼거리 더니 과장된 목소리로 말한다. "아 참, 그렇-군! 그러고 보니 내 옷-을 놓고 왔어! 그럼 다시 돌아가야 하겠군!" 난 기쁜 마음에 철저히 짝짜꿍을 맞춰주기로 결심했다. 물론 걸고 넘어갈 것은 넘어가야지. "그렇-지. 물론 네 옷이 아니라 내 옷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 옷들은 내 기준으로는 상당-히 소중한 추억들이 담긴 옷들이니, 다시 찾으러 가야 하 겠군! 그리고, 그 옷들을 찾으러 간다면 너무 늦은 시각이니 하룻밤 자고 나와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물론 네가 나에게 준 옷이니 내 옷이긴 하지만, 어이쿠, 벌써 달 이 중천에 떳군! 너무 늦은 시각이야! 옷을 찾으러 간 다음에는 아마 김회 장님이 우리를 잡고 가지 말라고 할거야!" ......녀석의 계속된 과장된 말투로 이루어지는 옷에 대한 소유권 주장을 듣던 나는 과장된 몸짓의 짝자꿍 맞춰주기고 나발이고 다 집어치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리고 난 충동을 그렇게 잘 자제하는 사람이 아니고. "야! 그게 어떻게 네 옷이야! 내 옷이지!" 그러자 녀석도 질 수 없다는 듯이 날카롭게 대답했다. "그럼 난 벗고 다니냐!" "그럼 고양이가 옷 입고 다니냐!" "나도 사람으로 다닐거야! 그 땐!" "그 땐 빌려줄거지만 소유권은 분명히 하자구. 그건 내 옷이야!" "어이구, 주인이라는 놈이 옷 몇벌로... 아주 째째의 극치를 달리는구만" "뭐, 째째? 그래? 그럼 주인이 명하노니, 옷 이야기 그만해!" 그런데 녀석은 피식거리며 웃더니 대답한다. 뭐야? 주인이 말하는데 비웃 어? 이게 주인을 무시하네! "야, 너 동물 중에 주인 말을 가장 안 듣고 제멋대로 하는 동물이 뭔지 모 르지?" "......" "바로 고양이야. 고양이에게 주인은 자기를 돌봐주는 존재 이상이 아니라 구" "......한마디로 비공식적인 빈대였던 네가 나를 주인으로 만들면서 공식 적인 빈대가 되어버린거냐?" "야, 너 똑똑하다. 해석력 끝내준다. 하하하!" 젠장! 그래서 정착을 하려면 주인이 필요하다는 거였나보다. 당했군, 당했 어! 난 신경질적으로 눈을 확! 걷어찼고 녀석은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잠 시 깔깔대다가 말했다. "가자구. 어서. 밤이 깊네" "알았어. 알았는데, 그 옷은 내 거야!" "네 마음대로 하세요..." 녀석은 한숨처럼 말하고는 먼저 앞장서서 걸어갔고 나는 그 녀석의 모습을 잠시 쳐다보다가 고개를 흔들고는 추적 추적 녀석을 따라 걸었다. 아스라히 어디선가 아직도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오는 깊은 달밤속의 눈길을. "야, 그런데 우리 김회장에게 받은 100만원으로 몽땅 생선이랑 내 옷 사면 안되...겠지? "크아아아악!" 지겨운 일요일의 어느 나른한, 창밖으로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오 전'. 그렇다. 오후가 아니라 오전이다. 어차피 할 일이 없는 나에게는 오전 의 의미라고 해 봤자 '자려면 한참 남았군. 이 지겨움이 언제나 끝날까' 정 도의 의미 밖에 안 되지만. 뭐, 여기가 고향이었다면 억지로 교회라도 나갔 겠지만, 귀찮아 죽겠는데 교회는 무슨 교회. 아하함. 하도 잤더니 이제 잠 도 안 온다. 찌뿌드드하기만 하고. 난 팔과 다리를 쭈욱 펴며 발광하듯이 몸을 마구 비틀고 바닥에 굴려댔다. 끄드드드드-! "아이 씨, 좁아 죽겠는데 그렇게 굴러대면 어떡하냐 임마!" 그 녀석, 그러니까 요령이는 방바닥에 누워서 나와 똑같이 지겨워 미치겠 다는 표정을 지으며 몸을 데굴데굴 굴려대다가 나와 몸이 부딪히자 짜증을 확! 내며 나를 벽쪽으로 밀어버렸다. 윽. 데굴데굴. "이런 젠장. 야! 여기가 내 집이지 네 집이야? 얹혀사는 주제에 궁시렁 궁 시렁 말은 진짜 많네!" "내가 번 백만원 먹고 입 싹 닦은게 누구더라" "야! 내가 언제 입 싹 닦았어! 네가 나한테 맡긴다고 줬잖아!" 그렇다. 녀석은 김회장의 집에서 돌아온 다음날 나한테 '그거 네가 좀 맡 아놔라. 어차피 얹혀살 거, 뭐 네가 알아서 먹여주고 입혀주고 할테니 돈은 필요없겠지. 그대신 내가 돈 달랄때는 착착 주고'라는 가증스러운 말을 해 대며 나에게 그 돈을 맡겨버렸다. 그럴거면 차라리 나한테 주던가. "아우 씨 몰라, 왜? 그냥 너 가질래? 응? 그럼 그게 너한테 주는 관리비로 생각하고 그 대신 잔소리를 하지 말던가. 돈을 줬으면 대접을 해 줘야 될거 아냐, 대접을!" "......그냥 맡겨둔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정신건강에 좋겠네. 그건 그 렇고, 안 그래도 비좁아 죽겠는데 너까지 아득바득 그렇게 쌩고집을 부려가 면서 사람 모습으로 드러누워 있는 이유가 뭐야? 좁아 죽어, 좁아 죽어! 제 발 부탁이니까 집에 있을때는 고양이로 있어 좀!" 녀석은 지금 사람 모습으로 변해서 누워 있었고 덕분에 안 그래도 좁은 방 안은 꽉 차 버렸다. 그리고 그래서 내가 몸을 뒤틀거나 녀석이 몸을 데굴거 리거나 할 때마다 자꾸 서로 부딪히게 되는 것이다. 뭐, 내 옆에 누워 있는 게 여자라는 생각이 들면 내가 알아서 몸을 움츠리고 자중했을 것이다. 하 지만 요령이 이 녀석은 비록 얼굴은 예쁘지만 여자라는 생각이 절대! 안 들 거든. 실제로도 고양이고. 뭐, 암컷이라니까 여자는 여자인가? "고양이로 있으면 털이 많아서 나도 갑갑하거든. 벼룩 생기고, 진드기 붙 고... 찝찝하다구. 그리고 영기의 순환에도 사람 형태가 가장 이상적이고, 또 주술은 쓰면 쓸수록 느는 거니까 평소에도 이렇게..." "그만해라, 그만 해. 그렇게 불편하면 보통 고양이들은 도대체 어떻게 사 냐?" "사내새끼가 더럽게 딱딱거리네, 거 참. 참아 임마. 야, 그리고 넌 나갈데 도 없냐? 어떻게 된 놈이 하루종일 방안에서만 뒹굴뒹굴뒹굴... 누가 그랬 지, 아마? 나태는 인류의 가장 큰 적이라고 말야" 녀석의 잔소리를 들으며 꾹 참던 나는 결국 톡 쏘아주고야 말았다. "그럼 네가 인류의 가장 큰 적이냐?" "......어쨌든, 할 짓 거리 없으면 나가서 일이라도 좀 하다 오던지, 운동 장이라도 몇바퀴 돌다 오던지. 집에서 그렇게 뒹굴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 면 보는 내가 다 게을러지려고 해" "......내 생각이지만 넌 여기서 더 게을러지는 것은 무리라고 보는데" "어쨌든, 좀 나가라 나가. 응?" 으으으. 저 잔소리. 못 견디겠다. 얹혀사는 주제에 주인을 집 밖으로 몰아 내려 하다니 무서운 놈. 네 계획은 어쨌든 성공이구나. 쳇. 난 벌떡 일어나 서 내 점퍼를 챙겨 입었고 그런 나를 보며 녀석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냥 해 본 소린데 진짜 나가네. 뭐, 그래. 가는 김에 장도 좀 봐오고. 생선 두 마리 밖에 안 남았어" "캇! 네가 며칠 동안 해치워버린 회가 몇 접시고 생선이 몇 마리인줄 알아 ! 넌 생선이 물리지도 않냐! " "뭐 별로" "으으으. 젠장. 할 수 없지. 그 대신 비싼 건 못 사온다. 꽁치나 고등어 사오더라도 나를 욕하지는 마라" "오냐. 아 참!" "뭐? 어디 가냐구?" "아니. 네가 가봤자 만화방 아니면 게임방이지. 네 생활패턴이야 뻔하지 뭐" "......미안하지만 아까 네가 말한대로 놀기도 뭐 해서 아르바이트 구하러 가는 거라네. 그건 그렇고 그럼 왜 불렀어? 잘 갔다 오라구?" "아니. 뭐 잘 갔다오던 오다 동네 날건달한테 붙들리던 그건 네가 알아서 할 일이구" "......그럼 뭐?" 난 끓어오르는 성질을 꾹꾹 누르며 물었고 그런 나를 장난스럽게 바라보던 요령이는 방긋방긋 웃으며 능글맞게 말했다. (녀석은 그게 된다. 방긋방긋 웃으며 능글맞게 말한다던지, 누가봐도 반할만한 모습으로 미소지으며 '이 런 젠장'을 말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원판이 워낙 예쁘니까... 하고 넘어가 주고 싶어도, 미소 뒤에 나오는 행동들이 하나 하나가 사람의 속을 긁는 짓 밖에 없어서 그냥 넘어가주지를 못하겠다) "귀찮아. 밥 좀 차려놓고 가 줘" "크아아악! 주인을 부려먹어도 유분수지! 넌 손이 없어 발이 없어!...... 이라고 말해봐야 소용 없겠지. 젠장. 알았어" "그래, 그렇지. 그래야 착한 주인이지. 그럼 나는 좀 더 잘테니까 구석에 다가 좀 차려놔 줘. 잘 갔다오고" 요령이는 다시 나를 쳐다보고 윙크를 찡긋 하더니 방긋 웃어주었고 그런 녀석을 보면서 짜증에 휩싸여버렸던 내 마음은 다시 풀어져버렸다. 쳇. 왜 웃고 난리야. 웃지마, 정들어. 하지만 녀석은 내가 마음속으로 궁시렁거리 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해서 방긋방긋 웃어주었고 난 그런 녀석을 잠시 쳐다보다가 뒤돌아서 밥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공처가도 아니고, 젠장. 앞 으로는 애완동물을 들일 때에 상당히 조심해야겠군. "미안허이, 하지만 지금은 정말, 자네들 말대로 '쌔끈한' 청년이 와도 아 르바이트를 시켜줄까 말까 할 정도야. 자네같이 평범해서야..." "아니, 도대체 카페에서 서빙하는데 외모가 왜......" "중요하냐고? 자네같으면 우리 옆 가게에 꽃미녀가 있다면 어느 가게로 가 겠나?" "그래도 저 정도면 최소한 어디 가서 빠지는 얼굴은 아닌데..." 주인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고 그런 그를 보며 난 발걸음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후우. 그렇군요. 안녕히 계세요" 벌써 10번째 퇴짜다. 난 시무룩해져서 집으로 돌아갔다. 신문배달은 아침 에 일찍 못 일어나서 못하고. 노가다는 내가 생활고에 시달려서 얼굴이 반 쪽이 되지 않은 이상 할 생각이 없고. 주유소는 아무리 찾아봐도 없고. 삐 끼? 내가 양아치냐? 뭐 이런 식으로 하나 하나 지워나가다보면 남는 건 가 게의 잡일밖에 없단 말이야. 하지만 갈비집에 불판이라도 나르려고 들어가 면 힘 좋게 생긴 사람 아니면 안 뽑는다고 그러고. 레스토랑이나 호프집, 혹은 카페 같은 곳에서 일하려면 외모가 '출중'해야 한다고 하고. 젠장. 그 럼 나는 집에서 놀란 말이냐? 이젠 노는 것도 지겹단 말이다! 콰아앙! 난 문을 세게 닫으며 풀이 팍! 죽은 얼굴로 집 안에 들어섰다. 내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건 밥상에서 밥과 반찬만 싸악 비운 채, 한 마 디로 빈 그릇만 남겨놓고는 쌔근쌔근 자고 있는 요령이었다. 으으으! 난 녀 석의 뺨을 발로 톡톡 차면서 말했다. 으악! 침 묻었잖아! "이봐, 이봐. 일어나 봐. 주인 돌아왔어, 주인!" "냠...... 하-암. 아우 씨, 주인이고 나발이고 왜 깨우고 난리야아아함" 녀석은 그렇게 말하며 돌아누웠고 나는 그런 녀석을 다시 툭툭 쳐서 깨웠 다. "이-봐. 이봐. 일어나 보란 말이야" "왜애애애. 하아아암. 졸려어엄-" 녀석은 눈을 마구 비벼대더니 부시시 일어났다. 얼씨구, 볼에는 자다 질질 흘렸는지 침자국까지 있었고 머리는 마구 헝클어져 있었고 눈은 얼마나 잤 는지 퉁퉁 부어 있었다. 그래, 그래. 다 귀엽게 봐 줄게. 귀엽게 봐 준다 고. 하지만... "제발 손에 침발라서 얼굴에 비비지좀 말아줄래? 보는 사람 추잡해 미치겠 어" "...응? 아, 미안. 지금 내 모습이 고양이인 줄로 착각해서. 헤헤헤... 으 으으으, 찌뿌둥해. 그런데 왜 깨웠어?" "아니, 그냥 주인 왔으니까 좀 일어나 보라구. 그리고 지금 시간이 몇 시 인데 자고 있냐. 너 설마 나 나갈 때 눕더니 지금까지 잤냐?" "아아아니" 도리질치는 요령이. "음, 그래. 아무렴, 사람이 그렇게 잘 수는 없는거지. 암, 없구말구" 녀석은 내 말에 다시 고개를 가로젓더니 말했다. 고개를 가로저을때마다 입 옆에 말라붙은 침이 눈에 언뜻언뜻 비춰서 봐주기 상당히 거북했다. "자다 깨서 30분동안 밥먹고 도로 잤어. 그리고 난 사람 아냐. 고양이지" "......그렇군, 고양이. 고양이라. 그런데 고양이는 그렇게 세상모르게 퍼 자냐?" "미인은 잠꾸러지라지 아마?" "요즘 미인은... 아냐, 아냐. 관 둬. 관 두고, 관 두는데, 음...... 내가 무슨 말 하려고 했지... 아, 그래. 넌 어떻게 먹고는 설거지도 안 하고 그 대로 놔둘수가 있냐? 넌 도대체 손이 없냐?" "손이 아니라 앞..." "손이 아니라 앞발이라 그러려고 했지, 아서라 임마. 좀 치우면 어디가 덧 나냐?" "그냥 귀찮아서 자고 일어나서 치우려고 했지..." "에휴, 네가 그렇고 그렇지 별 수 있냐. 쩝, 그래. 텔레비젼이나 보자. 야, 텔레비전 좀 틀어줘" 그런데 녀석은 내 말에 뒤돌아서 on 버튼을 누르는 대신 내 얼굴을 뚫어져 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아니, 쑥스럽게 얘가 왜 이래? "왜, 내 얼굴에 뭐 묻었냐?" "야, 밖에서 무슨 일 있었냐?" "일은 무슨 일..." "그런데 왜 갑자기 짜증을 내고 그래? 무슨 일 있었지?" "......아니, 별 일은 아니고..." "별일은 아니고 뭐?" 할 수 없군. 난 멋적다는 듯이 머리를 벅벅 긁고는 녀석에게 오늘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렇게 된 거지... 쩝. 뭐, 하루종일 헛고생만 하고 못 구해서... 짜 증이 좀 나서..." 요령이는 내 말을 듣자 혀를 쯧쯧 하고 차더니 말했다. "어휴, 명색이 주인이라는 사람이 기르는 동물한테 하소연이나 하고 있고. .." "야! 네가 물어봤잖아!" 난 성질을 벌컥 냈고 요령은 내가 성질을 내던 말던 신경 안 쓰다는 얼굴 로 건방지게 고개를 까닥거리더니 크게 인심 쓴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 아, 어쨌든. 할 수 없지. 내일은 나와 같이 나가자" "됐어. 둘이 나간다고 뭐가 바뀌겠냐?" "에이, 그래도 하나보다는 둘이 낫지? 안 그래?" "...뭐, 네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그렇지그렇지그렇지그렇지? 내일부터는 같이 나가자, 응? 하루종일 집에만 쳐박혀 있으려니 지겨워 죽겠어 아주. 어쨌든 내일은 같이 찾아보는 거다, 응?" 너 말 진짜 빨리 하는구나. 심심하기는 심심했다보다, 야. "그래, 그래. 그러니 나 밥 좀 차려줘. 참, 네 뒤에 tv 좀 켜고" "......주인님?" 갑자기 녀석은 깍듯하게 말했고, 그래서 나는 '갑자기 녀석이 어떤 무언가 를 느끼고 드디어 주인을 존경하기로 마음 먹었나' 하는 일말의 기대를 가 지고 녀석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네가 님자를 붙이는구나. 왜 부르는데?" "주인님은 손이 없어 발이 없어? 차려 잡숴" "......혹시나하고 기대한 내가 머저리지" "차리는 김에 내것도" "크아아아악!......오냐. 젠장. 어렸을 때 기르던 개는 알아서 찾아 먹더 구만 너는 꼭 밥을 갖다 바쳐야 먹냐" "주인님?" "...어색하니까 그냥 님자 빼고 말해라" "알았어. 그럼 야. 내가 개야? 나를 개 따위랑 비교하지 마" "......알았으니까 그만좀 해라, 응? 그리고 아무리 님자 빼라 그랬다고 야는 또 뭐냐" "너도 그렇게 부르잖아?" "......할 말 없네, 쳇" 난 인상을 잔뜩 찌푸린채로 상에 놓여 있던 요령이 녀석이 먹고는 그대로 놓아둔 그릇을 치우고는 새 그릇에 대충 반찬을 덜어서 탁탁 덜어놓았고, 그런 나를 지켜보던 녀석은 찬장으로 가서는 그대로 수저와 젓가락을 두 짝 을 가지고 와서 탁, 탁! 하고 상에 놓더니 '이 정도면 많이 일했지?' 라고 말하는듯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어차피 시킬 생각도 없었다, 이 녀석아. "당장 일해주게 아가씨! 제발 부탁일세!" 콧수염과 턱수염, 그러니까 얼굴 전체를 뒤덮은 수염들이 아주 멋진 대머 리의 사람좋게 생긴 주인 아저씨는 간절한 눈빛으로 요령이를 쳐다보며 말 했다. "어머, 정말요? 호호호호!" 그리고 요령이는 저 좋다는 말에 온 얼굴로 웃어버렸다. 호호호호! 그리고 나는 같이 '하하하하!' 하고 웃어주는 대신 주인 아저씨를 애타게 바라보며 물었다. "......아저씨, 저는요? 저도 아르바이트 자리 구하러 왔는데요" "자네? 흐흐흠, 에이, 하나면 됐지 뭘 두명씩이나. 요즘같은 불경기에. 제 2의 국가적 위기라지 않나. 미안하네, 자네에게는. 하지만 어쩌겠나. 저 아 가씨와 동시에 들어온 타이밍을 원망해야지. 조금만 빨리 오지 그랬나, 쯧 쯧..." 이런 젠장. 세상은 뭐 이리 불공평하냐? 나도 꾸미면 나름대로 멋져 이 사 람과 고양이야...... 하긴, 요령이가 무슨 죄가 있냐. 나 따라온 죄밖에 없 지. 그럼, 다시. 나도 꾸미면 나름대로 멋져 이 사람아... 젠장. 이렇게 말 해도 기분은 하나도 풀리지 않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구? 오늘 요령이는 어제 나에게 말한대로 대충 차려입고 나를 따라 나섰다. 그 리고 나와 그 녀석은 무작정 시내를 거닐다 '아르바이트 구함' 이라고 써 붙여 놓은 카페에 그냥 무작정 들어갔고. 그런데 주인은 우리를 보자마자 내가 '저... 아르바이트 구하러 왔는데요...'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그야말 로 순간적으로 요령이에게로 달려가서 손을 덥썩 잡으면서 '아가씨! 바로 당신이야! 우리 가게는 아가씨같은 아르바이트생을 찾고 있었어! 아르바이 트 할 거 맞지? 제발 맞다고 말해줘. 응? 응?' 이라고 애걸복걸하다시피 부 탁을 했고 요령이는 저 좋다는 말에 그저 좋아서 헤헤 웃으면서 '아르바이 트 찾으러 온 건 맞거든요' 라고 대답해버렸다. 그리고 그 뒤로는 아까 말 한 대로다. 쳇. "정말 저 안 쓰실 거에요? 진짜?" "정말 안 쓸거네. 진짜로" 그리고 나는 그의 말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요? 그럼 할 수 없네요. 요령아, 가자!" 그리고 주인은 갑자기 얼굴색이 싸악 바뀌더니 나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연 다. "자네, 이 아가씨와 아는 사이인가?" "예, 아는 사이인데요" "구체적으로 무슨 사이인데?" "아르바이트를 같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이입니다만" 물론 요령이는 아니라고 하려고 했다. "나 혼자 충분하니 넌 집에서 잠이 나... 아아악! 왜 발은 밟고 난리야!" "아하하하... 얘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 어쨌든 아저씨, 저도 시 켜줄 거에요, 안 시켜줄 거에요? 안 시켜주면 그냥 도로 가구요. 옆 가게에 도 아르바이트 구한다고 써 있던데 말이죠" 그 아저씨는 심히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옆 가게에는 자네만 가면... 안 되겠지?" 이 아저씨가. 그렇게 노골적으로 싫은 척 하면 안 되지. 그럼 오기가 생겨 서 더욱 달라붙고 싶어지잖아. 난 말없이 고개를 저었고, 그러자 아저씨는 그 사람 좋은 얼굴에 당황스러운 기색을 드리운다. "자... 잘 할 수 있냐?" "그럭저럭이요" "그럼 안 돼" 어떻게든 트집을 잡으려고 무지 애쓰는군. 난 아저씨의 말에 정색을 했다. 에이, 아저씨도. 장난 한 번 한 걸 가지고... "갑자기 매우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한숨을 푸욱- 쉬는 주인아저씨. 고개를 한 번 젓더니 마지못해서 내 손을 쥐고 흔든다. "그래, 그럼 같이 일 해보세" 그 때 요령이가 끼어든다. "저는요오?" 그리고 그 아저씨는 내 손은 던져버리고 요령이의 손을 잡아 흔들며 말한 다. "아가씨는 물론이지요" "봉급은 언제 주는데요오?" 날카로운 질문에 축복 있으라! 요령이는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했고 그 물 음에 주인아저씨는 잠깐 얼굴을 찌푸리더니 대답했다. "으음- 돈이라... 계산이 정확한 아가씨로군. 돈이라, 봉급 말이지. 봉급이 라면 한달에 한 번. 월급처럼 주지. 멋있지 않은가? 자네들도 이제부터 월 급을 받는거야! 안정된 수입원이 생긴 셈이지!" "우와! 월급쟁이다!" 그 녀석은 펄쩍 뛰며 좋아했다......단순한 것 같으니라구. "그냥 하루치씩 챙겨 주세요" 난 무덤덤하게 아무 음색을 섞지 않은채로 말했고 그래서 아저씨는 자신의 말에 찬성했다고 생각했는지 요령이와 함께 펄쩍 펄쩍 뛰며 좋아하다가 내 가 '뭘 그리 좋아해요? 아저씨 말이 싫다는데' 라고 다시 한 번 지적해주자 그제서야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재미있는 아저씨군. "왜...왜? 그냥 한달치 몰아줄게. 뭘 찔끔찔끔 받으려고 하나, 성격은 호 탕해 보이는 젊은이가" 주인 아저씨는 자기가 화끈하게 몰아주기를 좋아하고 내가 화끈하게 생겨 서 몰아주기를 좋아할 것 같아서 돈을 한벌에 몰아주겠다는 듯이 말하고 있 지만, 보나마나 최소한 한 달만이라도 요령이를 확실하게 쓰고 싶으니까 그 런 거겠지. 쳇. 아르바이트에 그런게 어딨어. 언제 무슨일이 생길지 모르는 데. 난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하루치씩 주세요" 만약 이게 나 혼자서 아르바이트를 구한 거라면 주인이 '너, 연봉제로 해 줄게. 화끈하지?' 라고 해도 '와, 화끈하네요' 따위로 대답했을거다. 실실 웃어가며. 하지만 지금 이 쪽에는 요령이라는 히든 카드가 있거든. 물론 본 인은 절대로 인정하지 않을 카드가. 아저씨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이 되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답했다. "그럼 할 수 없지. 좋네, 매일 자네들의 일급을 지급하기로 하지. 수당은. .. 시간당 청년은 2500원, 아가씨는 6000원. 불만 없지?" 와- 사람이 동물의 반값밖에 못 받어? 말도 안 돼! "아저씨!" "왜?" "저도 한 4000원 정도 주세요" "절-대, 안. 돼!" "그래요? 가자, 요령아..." 아저씨는 내 말에 과장되게 헛기침까지 해가면서 우리를 붙잡았다. 참, 여 러 가지 하시네. "으흐흐흐흐흠! 그냥 해 본 소리라네. 하하하! 얼마? 4000원? 에이, 3000 원만 받어. 응? 좋다고? (내가 언제 좋다고 했어?) 그래, 그래. 그래야 착 한 청소년이지. 아 참, 자네들 나이가 몇 살인가?" 결국 오백원을 올리는 선에서 협상은 대강 끝나버린 것이군. 나도 참 째째 하지, 오백원 더 받으려고 딴지를 걸고. 어쨌든 주인 아저씨의 물음에 난 선선히 나이를 말해 주었다. "스물 인데요" "스무 살이요" -물론 사실은 350살이다... "오, 그래. 나이도 딱이군. 좋아. 이름은 뭐지?" "박영준입니다" "이요령이에요" "연락처는" "아, 예..." 주인 아저씨는 손에 들고 있던 메모장에 우리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받아 적더니 웃으며 말했다. "음, 그래. 우리 가게에서 일하게 된 것을 환영하네. 해야할 일을 설명해 주지" "예, 알려주세요" "일단, 저어기 휴게실에 가서 영...뭐였지? 아, 영준이. 영준이는 남자옷 으로 갈아입고, 요령양. 맞지? 말 놓아도 되지? 아, 그래. 요령양은 여자옷 으로 갈아입고 나와요. 옷은 그 안의 큰 캐비냇 안에 보면 몇 벌 있을테니 아무거나 골라 입고. 어차피 디자인은 똑같으니까 몸에 맞는걸로 입는 게 좋겠지. 남자 휴게실은 왼쪽, 여자 휴게실은 오른쪽일세" "오오! 옷까지 줘요?" "비...빌려주는 거네만...일하는 동안은 준다고도 볼 수 있지..." 난 감탄해서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고 주인은 떨떠름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으며 요령이는 심히 창피하다는 듯이 내 옆구리를 계속 꼬집어댔다. '빈티 좀 내지 마! 네가 거지야? 창피해 죽겠어!' 젠장. 알았으니 그만 하 시지. 난 휴게실로 들어가서 캐비닛을 열었다. 안에는 흰 색의 세로줄무늬 와이 셔츠와 검은 색 바지가 있었다. 그리고 난 잠시 내가 입고 있는 헐렁헐렁한 티셔츠와 세미-힙합 바지, 그리고 캐비닛 안 옷걸이에 걸려있는 마치 웨이 터복같이 생긴 정복을 번갈아 바라보며 우울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답답한 옷들은 싫어하는 체질이기 때문이다. 이런 정장같은 옷은 질색인데. 하지만 뭐 할 수 있나. 참아야지. 나는 대충 그 옷으로 갈아입고는 습관적으로 바 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어? 뭐가 걸리네? ......젠장. 나비넥타이군. 이 것만은 매기 싫었던 나는 그걸 다시 주머니에 넣고는 밖으로 나와서 주인 아저씨를 불렀다. "아저씨! 다 갈아입었어요!" "오! 꾸며놓으니 나름대로 볼 만 하군!" "......아, 예. 그건 그렇고 제가 할 일은 뭐죠?" "음, 그건 요령양이 나온 다음에 이야기하기로 할까?" "그러시죠" 나는 선선히 승낙했고, 그 때 여자 휴게실쪽의 문이 삐이-걱 하고 열리며 요령이가 천천히 걸어나왔다. 그리고 주인은 말문이 막힌다는 얼굴로 입을 따악 벌렸다. 나도 솔직히 조금 놀랐고. 주인은 천천히 떨리는 목소리로 말 했다. "정말 아름답네!" "아, 예, 그러세요, 호호호! 제가 원래 좀..." 저 녀석은 저렇게 씨알도 안 먹히는 건방진 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지만 이번에는 별로 꼬투리를 잡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녀석은 내가 주 었던 마치 뒷골목의 힙합 숭배자들이 입는 것 같은 옷(원래 나한테는 그냥 약간 헐렁거리는 정도였지만 녀석은 나보다 키도 작고 날씬하기 때문에 녀 석이 내 옷을 입으면 마치 엄청나게 큰 옷을 입어버린 것처럼 되어 버린다) 을 벗어던지고 이곳의 정복으로 갈아입고 나왔는데, 그 옷이 뭐 그리 특별 하다거나 한 것도 아니다. 그냥 흰색의 검은 줄무늬 블라우스와 검은 스커 트뿐이다. 그런데도, 단지 남자옷에서 여자옷으로 갈아입었다는 것 만으로 도 녀석의 외모는 화악 빛나고 있었다. 진짜로, 약간은 눈부셨다니까. 아주 약간이지만 말야. 그 녀석은 나를 보며 방긋 웃더니 말했다. "야, 나 어떠냐? 네 후즐근한 옷 입었을 때보다 좀 더 나아진 것 같지 않 냐? 하긴, 편하기는 네 옷이 더 편하지만 말야. 이건 약간 죈다 야" 난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을 못했다는 게 더 정확한 말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 때 나는 두가지의 생각에 깊게 빠져 있어서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으니까. 첫 번째는, 저렇게 예쁜 녀석이 내 옆에 있었는데도 지금껏 어떤 감정의 동요도 느끼지 않은 내 자신의 도덕성의 맑고 깨끗함과 감정의 자제력과 절제력, 인간에 대한 굳은 믿음과 신념과...어휴, 하루종 일 간다. 어쨌든 대견한 나 자신에 대한 자랑스러움이었고, 두 번째는 저런 모습을 지금껏 상당히 묻어버렸던 것이 내 옷이었던 것을 떠올리며 생각한 '나도 참 패션감각이 빵점이군...' 하는 생각이었다. "어떠냐니까" "어떠긴 뭘 어때! 널 보고 있자니 호박에 줄긋는다고 수박 되지 않는다는 속담은 영원한 진리라는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뭐!" 주인은 나를 흡사 남자가 아닌 나무토막을 보는듯한 얼굴로 쳐다보았고, 요령이는 약간 눈살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뭐라고오...?" 미안. 사실은 보석은 깎으면 더욱 아름답다는 생각밖에 안 떠올라. 하지만 여기서 내가 입을 헤 벌리고 '우와- 훨씬 예쁘다'라고 하면 내 주인으로서 의 (솔직히 주인이 아니라 꼭 돌봐주는 하인같은 입장이긴 하지만)위치나 지금껏 팽팽한 기싸움을 하면서 간신히 저 녀석에게 휘둘리지 않고 지켜나 간 권위...등등은 어떻게 되겠으며 넌 내가 무심결에 내뱉을 뻔한 한마디를 가지고 얼마나 잘난 체를 하겠니. '그렇지? 원래 내가 좀...너도 인정하는 구나. 깔깔깔!' 이런 식으로 말야. 그래서 나는 녀석이 '눈이 삐었군' 등등 의 소리를 해대며 인상을 찌푸려도 아무 말 못하고 억지로 '영 아닌데' 등 등의 표정을 짓거나 잘 모르겠다는 제스춰, 즉 어깨를 으쓱거리거나 고개를 가로젓거나 하는 행동을 취할 뿐이었다. 으음. 그러고보니 옷만 제대로 입 어도 저렇게 미인인데 화장까지 시키면 어떻게 될까. 주인도 감탄한 듯이 입을 열었다. "허어, 정말 이제 우리 가게의 매상이 몇배로 뛸까... 응? 자네, 그런데 그 신발은 뭔가?" 난 주인의 약간은 당황한듯한 얼굴에 그녀석의 발을 쳐다보고는 요령이의 다리를 몰래 쳐다보느라 잠시 눈을 떼지 못했다. 다리가 정말 희고 늘씬하 군... 흠, 흠! 이런 젠장, 왜 이렇게 생각이 옆길로 샐까. 어쨌든 그 녀석 의 발은 뭐, 별로 특별한 것 없었다. 단지 특이한 게 있다면 옷과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 신발이었는데, 그것은 내가 혹시나도 저 녀석이 훔쳐 신을까 봐 방안 구석 이불 쌓아놓은 곳 아래의 깊은 곳에 꼬옥꼭 숨겨두었던 에어 맥스...이런 젠장! "야! 그건 나도 한 번도 안 신은건데 왜 그걸 신고 있어! 그게 얼마짜리인 줄 알아!" 정말 못 말리겠군. 나는 이마를 딱! 감싸쥐면서 중얼거렸고 그런 나를 바 라보던 녀석은 헤헤거리더니 혀를 쏙 내밀고는 말했다. "메롱" "이런 씨!" 그 녀석은 머리를 벅벅 긁더니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고 녀석이 말을 이을 수록 요령이의 모습에 놀라 상당히 올라갔던 음...뭐냐. 두근거림? 아니고. 동경? 아니고. 호감도? 아니고. 에이, 몰라. 뭐 어쨌든 좌악 올라갔던 아까 언급했던 것과 비슷한 것들에 대한 포인트는 주르륵 떨어지는 반면 '기싸움 을 위한 기력 포인트', 혹은 '빈대를 확실히 휘어잡기 위한 파워 포인트' 등등이 좌르르륵 솟아오르는 것이 마구 느껴지고 있었다. "야, 그럼 때에 찌들어서 구질구질하던데 어떻게 네 신발들을 계속 신고 다니냐. 그냥 나 혼자 있을 때 심심해서 이불을 껴안고 구르면서 놀다가 보 니까 이게 있더라고. 뭐 어차피 넌 신지도 않길래 '아, 네가 이 운동화를 상당히 싫어하나보다' 싶어서 내가 신었지. 그건 그렇고 이거 되게 편하더 라. 살짝만 뛰어도 붕붕 뜨던걸?" 녀석은 그렇게 말하더니 긴 머리를 찰랑거리며 팡팡 뛰어보이기까지 했다. 아, 팡팡 뛰니까 마치 해맑은 어린 아이를 보는 것 같은게 정말 귀엽다! .. ....흠, 흠. 귀엽고 나발이고 녀석이 편하고 나발이고,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지! "너는 혼자 있을 때 이불 같은 거 껴안고 구르면서 노냐?" "털실이 있다면 털실을 껴안고 구르겠지만, 너희 집에는 그런 게 없더라 고. 뭐, 내 크기에 맞는게 이불이다 보니까" 녀석도 저번 퀴에르의 일도 있고 해서 조심하기 때문인지 '원래 고양이가 그런거 안고 잘놀아' 따위의 말은 하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요즘 나갔다 들어오기만 하면 방안이 난장판이다 했지. 그건 그렇 고 말이야..." "응, 왜?" "...너는 싫어하는거랑 너무 아끼는 거랑 구별도 못하냐 임마!" "어차피 안 신는 건 똑같잖아" "아껴 신는거지!" "싫어서 멀리하나 아껴서 멀리하나. 그게 그거 아냐? 어차피 너한테는 안 신는다는 의미에서는 같은거 아니냐고"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못 당하겠네 정말. 그리고 주인은 다른 의 미에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정복 차림에 운동화라니, 확 깨는걸. 자네 그러고보니 스타킹도 안 신었 군 그래? 뭐, 그거야 상관없지만 왠만하면 신발은 구두 종류로 바꾸지. 하 이힐 같은 거 없나?" 저 녀석에게 하이힐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인 아저씨. 내가 사주질 않는 데. 녀석도 그럴 돈 있으면 가서 생선이라도 사오라는 스타일이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집에 신발도 많은데 하필이면 저걸 신냐! 그냥 단화 같은 거 신으면 어디가 덧나냐! "......그건 그렇고 너 그 신발 발에 맞기나 하냐?" "물론 무지 커. 이것 봐, 손가락 들어가는 거" 녀석은 그렇게 말하며 신발 앞부분을 꾹꾹 눌러댔다. 구겨져 임마! "......그렇게 큰데 그냥 신는거야?" "뭐 어때? 편하면 됐지" 이런 젠장. 역시 신발은 하나 사줘야 되겠군. 구두 하나에 돈이 얼마나 하 는데... 휴우, 돈 깨지겠군. 주인 아저씨는 잠시 고민하는 얼굴이 되더니 말했다. "일단 오늘은 그냥 일하게... 아니, 차라리 휴게실 구석에 슬리퍼 있으니 까 그거라도 신고 일하게. 운동화보다는 낫겠지" "예, 알았어요. 그런데 일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나도 그게 궁금해. 주인 아저씨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이 되더니 말했다. "일단 둘은 서빙을 하는데, 요령양은 서빙만 하고, 영준군은 서빙 도중에 라도 내가 부르면 바로바로 달려와서 시키는 일 좀 해주게" "왜 저만..." "1군과 2군,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 월드컵 축구와 국내 실업축구가 같 냐고 되묻는다면 자네는 어쩌겠나" "......그러니까 쟤는 월드컵이고 저는 국내 실업축구란 말이죠. 으음" 이런 멸시를 받고도 일해야 하나? 젠장. 그런데 요령이가 갑자기 눈을 크 게 뜨더니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나에게 물었다. "월드컵이 좋은거야 실업축구가 좋은거야?" "...젠장. 앞에 거야" "역시, 그렇지?" 그 녀석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고 나는 그런 요령이를 보면서 다시금 울화 통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왜 내가 저녀석보다 못한 취급을 받아야 하는데! 나는 씩씩댔고 그런 나를 보며 요령이는 조용히, 그러나 나는 들을 수 있게, 한마디로 나만 들으라는 의도로 웃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비웃음 이지 뭐. 쳇. 주인 아저씨는 나와 녀석에게 메모판을 나누어주며 말했다. "이걸 들고 다니면서 손님들의 주문을 적어서 조리실 앞 바로 가져 오도록 해요. 그럼 내가 주문에 맞게 내어 올테니. 메뉴판은 저쪽 벽에 걸려 있으 니 손님이 원하거든 가져다 주고. 하긴 커피 한잔 시켜 먹으면서 무슨 얼어 죽을 메뉴판이겠냐마는" "예.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그래, 즐장" "......즐 뭐요?" "즐장. 즐거운 장사" "......아, 예. 즐장" 상당히 당황스럽군...즐장이라. 그럼 매출이 올라가면 즐매이고 아르바이 트를 잘하면 즐알이냐? '즐알!' 흐, 흠. 그거 상당히 발음이 듣기 불순하 군. "아가씨, 난 카푸치노" "예, 손님. 또 필요하신 것은 없으신가요?" "아가씨의 사랑이 필요해요" "손님,그런 건 메뉴판에 없는데요" 상당히 당황해버린 손님. 잠시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가증 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 표정을 지워버리고는 말했다. "만들어 주오" "죄송합니다. 그런 건 안 돼요" 요령이는 정말 죄송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꾸벅였고 그런 녀석을 지켜보던 나는 메모장의 맨 뒷페이지에 빽빽히 써진 유형분석표에 '커피와 함께 사랑을 달라는 놈- 특징: 내 기준으로 볼 때 나름대로 잘생겼음' 이라 고 추가하고 '합계:21명'이라고 쓰인 합계표시를 '22'로 올리며 분에 못 이 겨 숨을 씩씩거렸다. 뭐야, 젠장! 왜 저 녀석에게는 온갖 남자들이 별별 말 로 어떻게는 눈길이라도 끌어보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나한테는 어떤 여자도 주문 말고는 아무것도 안 하냔 말이다! 아니, 그것보다... 왜 내가 구석에 쭈그려서 이런거나 적고 있어야 하는거냐고! 왜! 도대체 내가 왜 이걸 적고 있는거야! 내가 설마 지금 저 녀석보다 인기가 없다고 저 녀석을 질투하는 거야? 그럼 저 녀석이 타고난 미녀인걸 어떻게 하냐? 아니지, 내가 그런 걸 가지고 질투할 성격이 아니지. 그럼 다른 방향으로, 다른 것 때문에... 그러니까 저 녀석에게 자꾸 남자들이 관심을 보여서 질 투하는 거야? 아니야! 나는 저 녀석에게 아무 감정이 없다구! 없을거야! 없 겠...지? 어쨌든 저 녀석에게 누가 관심을 가지던 내가 신경쓸 필요는 전혀 없다구! 젠장! 그런데, 왜! "왜 내가 이런 것을 적고 있지? 응? 왜! 왜!" 나는 생각할수록 머리가 지끈거려서 머리를 따악! 하고 움켜잡았고 내가 그러던 말던 그녀의 연예행각(?)은 계속되었다. "그대는 마치 커피 향기처럼 그윽하구료" "어머, 과찬이세요, 저, 주문은 뭘로...?" 내가 머리를 감싸쥐고서 혼자서 외치는 도중에도 요령이에게 말을 걸어오 는 남자가 추가되는군. 나는 다시 '커피향기처럼 그윽하다는 놈 - 특징: 왠 지 지적임'을 메모장에 덧붙이고 '22명'을 '23명'으로 바꾼 뒤 메모장을 덮 고는 중얼거렸다. "왜 난 아무도 없는거야... 왜... 왜...! 아무리 외모가 차이가 난다고 해 도 그렇지... 그리고 요령이 저 녀석은 뭐가 좋아서 저렇게 실실 웃는거야! 쳇! 아아악! 신경쓰여! 아냐! 신경쓰지마! 신경 쓸 이유따윈 없단 말이다!" 나의 고뇌는 계속되었으며 그래서 중얼거림은 결국 고성방가로 이어졌으며 그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나의 쇼를 지켜보던 주인은 결국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내 어깨를 툭툭 치더니 말했다. "잘 논다. 일 안해?" "예? 아, 예" "깨끗이 닦어" "예..." 난 건성으로 대답하며 마포걸레로 바닥을 계속해서 밀면서 다시 그녀석을 힐끔힐끔 쳐다보기 시작했다. 젠장, 이것도 차별이다. 저자식은 서빙만 하 는데 나는 서빙을 하다가도 주인이 부를 때마다 설거지 하고, 테이블 닦고, 커피 갈고, 물 끓이고, 설탕 사오고, 청소 하고, 걸레 빨고... 젠장. 심지 어 가끔씩 커피를 만드는 마스터가 자리를 비울 때에는 단순한 종류의 커피 까지 타는 경우도 있었다. 뭐야! 나도 본업인 서빙만 시켜달란 말이야! 서 빙만! 왜 내가 돈은 적게 받으면서 일은 더 많이 해야 하는 말이야! "아가씨. 난 오렌지 주스" "아, 예" "그대는 황금빛 오렌지보다 더 빛나는군요" "어머, 고마워요. 호호호!" 이런 젠장. 나는 다시 메모장 뒷 페이지를 펴고는 '오렌지보다가 더 빛난 다고 한 놈 - 오렌지족처럼 생겼음' 이라고 쓴 뒤 '23명'을 '24명' 으로 고 쳤다. 제길. 이런 거나 쓰고 있고. 나도 참 한심해. 그런데 정말 아까부터 내가 왜 이런 거나 쓰고 있지? "이봐요! 여기 주문 좀 받아요!" "아, 예..." 바쁘다 바뻐! 나는 마포걸레의 자루를 바닥에 안 보이게 집어던지고는 재 빠르게 뛰어가서 주문을 받았다. 그 곳에는 왠 느끼하게 보이는 커플들이 뭐가 좋은지 계속 까르르거리고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젠장. 왜 난 이런 손님들만... "험, 험" "어머, 웨이터 왔네?" 여자쪽이 눈을 깜박거리면서 (귀여움을 유도했겠지만 짜증만 솟았다) 말하 자 남자쪽에서는 여자에게 괜히 윙크를 찡긋 하고 그런 서로를 잠시 지긋이 응시하다가 결국은 그 둘은 동시에 까르르하며 같이 웃는다. 뭘 어쩌라고 젠장! "뭐 드시겠어요?" "난 그냥 블랙커피" "어머. 누가 카페에서 블랙커피를 마시니? 여기가 자판기나 다방인줄 아니 ? 전 파르페 주세요" "쳇, 자기는? 한 겨울에 파르페는..." "까르르르!" "아하하하!" 웃기냐? 살결에서 두드러기가 미친 듯이 돋아나는군. 하지만 손님은 왕이 다. 나는 억지로 같이 웃어준 뒤 커피와 파르페를 가지러 카페바로 달려갔 다. 그런데 마침 그 때 요령이도 주문과 사랑을 잔뜩 받고 다가오고 있었 다. 흠, 지나가는 듯이 한마디 해볼까? 지나가는 듯이 해야 돼, 의식한다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해선 안 돼! 나는 짐짓 태연한 듯이 말했다. "좋겠네? 너 좋다는 사람 많아서" "그럼 싫니? 호호호. 이 아르바이트 너무 좋다-!" 으으으! 쳇. 좋아서 참 좋기도 하겠다. "그러냐? 그럼 다행이구. 젠장. 그건 그렇고 주인 아저씨 왜 이렇게 사람 차별하나" "왜? 뭘 차별해?" "왜 너는 서빙만 시키고 난 별 빌어먹을 잡일을 다 시키는지... 젠장" "그거야 네가 머슴 스타일에 군소리를 안해서 부려먹기도 편하니까 그렇 지" 나는 풀이 팍 죽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냐?" "그래. 어머? 그건 그렇고 저기 저 녀석이 날 부르네. 나 간다, 오호호호! 아 참, 마스터! 여기 주문들이요. 빨리 제 얼굴 다시 보고 싶다고 다들 빨 리 좀 해달래요" 하면서 녀석은 메모장을 한 장 부욱 찢어서 마스터에게 넘겨주고는 통통거 리며 주문이 나온 쪽으로 가 버렸다. 쳇. 나는 왜 아무도 안 불러주는거야! 왜! 왜! "저, 저기요...!" "아, 예!" 드디어 나를 부르는구나! 나는 입가에 가득 미소를 띄고는 튕겨나가듯이 날 부른 아가씨에게로 달려갔다. 귀엽게 생긴 아가씨네? 그 아가씨는 얼굴 이 빨개진 채로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얼굴 가득 지었고 그래서 나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즉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선량하고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 아가씨는 입을 열었다. "저, 저기... 죄송하지만..." "예, 말씀하세요" "테이블이 너무 더럽거든요, 죄, 죄송하지만 좀 닦아주실래요?" 쳇. 처음 보는 사람에게 심부름 시키기 미안해서 말을 더듬었던 거였군. 나는 앞주머니에서 걸레를 꺼내어 거칠게 테이블을 닦고는 얼굴을 잔뜩 찌 푸리며 돌아섰다. 그리고 그 때 주인이 내 얼굴을 딱! 보았다. "영준군? 내가 뭐라고 했나?" 그리고 나는 내가 억지로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스마일, 언제나 스마-일" "그래. 그리고 덧붙이자면 그렇게 억지로 짓는 미소는 안 돼" "아, 예..." 난 머리를 벅벅 긁으며 무안한 듯한 표정을 짓고 뒤돌아서서는 지옥에서 막 기어나온 악마를 본 듯한 표정을 지어 주었다. 요령이한테도 좀 뭐라고 해봐라. 쳇. "첫날치고는 나름대로 괜찮았네. 자, 일급일세. 낮 1시부터 12시까지 일했 으니, 다 합쳐서... 음. 십일 곱하기 삼천이 얼마지?" "...삼만 삼천원 인데요" "그래? 여기 있네" 이 아저씨 이런 계산감각으로 어떻게 가게를 운영하나? 정말 괜히 나까지 걱정되는군. 그건 그렇고 오늘 너무 힘들었어. 젠장. 왠만하면 아르바이트 생좀 많이 좀 쓰지. 다른 사람 두세명이 해야 할 일을 나 혼자 다 해버렸잖 아? 게다가 주인도 너무 구박을 많이 해대고. 그냥 오늘 그만 둬 버릴까... 에이, 하지만 뭐 어때. 집에서 노는 것보다야 비록 좀 힘들어도 뭔가 보람 있는 일을 하는 게 낫겠지. 게다가 카페 아르바이트라는 게 나름대로 재미 도 있고 말야. 나는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기로 하고는 엷은 미소를 입가에 띄우고 고개를 꾸벅 숙이며 주인에게 양 손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나에게 돈을 건네준 주인은 내 감사하다는 인사 따위는 관심도 없다는 듯 이 대충 손을 까닥여서 받고는 요려이에게로 고개를 돌린 뒤 감격한 듯이 말했다. "요령양! 난 정말 오늘 감동해 버렸다네!" "호호. 뭘 감동까지" "아니야, 아니야! 난 정말 감동했어! 자네를 선보인지 반나절만에 이렇게 많은 손님이 모여들 줄은 몰랐어! 덕분에 오늘의 매상이 얼마나 올랐는지 아는가? 자네, 얼마나 줘야 하지?" 녀석은 말없이 주인에게 싱긋 웃어주더니 순간적으로 내 옆구리를 마구 쿡 쿡 찔러대며 나에게 속삭였다. "얼마지?" "야, 오만 오천원이잖아! 너 초등학교도 안 나왔냐?" "응" "......아 참, 그렇지. 넌 고양이니 공부 같은 건 안 했겠군. 그래도 삶이 불편하거나 하지 않더냐?" "전혀. 그리고 공부를 안 했다지만 글은 읽을 줄 알아" "그래? 의외인걸. 어쨌든 속 편해 좋겠다..." "부러우면 너도 고양이 해. 어쨌든 오만 오천원이라" 고양이는 주인을 향해 빙긋 웃어주며 내가 알려준대로 대답했고 주인은 '자네에게 주는 돈은 하나도 안 아깝다네!'라고 말해서 나의 속을 다시 한 번 뒤집어 놓았다. 결국 나에게 주는 돈은 아깝다는 소리 아닌가. 젠장. "이야, 또 눈 내리네!" 이건 내 말이다. "그렇네. 지겹다, 지겨워" 이건 요령이의 말이구. 그 녀석은 잠시 한숨을 쉬더니 말을 잇는다. "어떻게 된 눈이 하늘에 구멍이 뚫렸나, 하루도 안 빠지고 줄창 쏟아져내 려?" "왜, 눈 내리면 좋잖아?" 나는 그 녀석에게 참 별종 다 보겠다는듯한 눈빛을 보냈고 녀석은 그런 나 를 똑같은 마주 쳐다보았다. 쳇. 한 번을 안 져요. 한 번을. "눈 내리면 개들도 좋아서 펄쩍펄쩍 뛰어다니더구만, 너는 왜 싫어하냐? 어, 하긴 너는 개랑 반대로 노니까" "개랑 나랑 비교하지 좀 말아라. 난 개만 보면 치가 떨려. 그리고 네가 뭘 착각하나본데, 개가 눈이 오면 뛰어다니는게 좋아서 그러는건줄 아냐?" "...그럼?" "걔네들, 눈 내리면 발이 시려워서 팔짝 팔짝 뛰어다니는거야. 호호호! 아 이, 우스워. 몰랐지? 하긴, 너는 눈이 내리면 너도 좋으니까 개들도 좋아하 는 줄 알겠지. 하여튼, 인간들이란. 몽땅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한다니까" "...진짜야? 진짜로 발이 시려서 뛰어 다니는 거였어? 하지만 그렇게치면 고양이들도 뛰어다녀야 하는 거 아냐?" 녀석은 건방지게 웃더니 씨익 말했다. "우리 기품있는 고양이들은 꾸욱 참지" "...어, 그러냐..." 기품있어 좋겠다. 하긴, TV를 보나 영화를 보나 혹은 지나가는 도둑고양이 들을 보나 고양이란 것들은 죄다 꼬리를 하늘로 치켜들고 건방지게 걸어다 니곤 하지. 그래서 너도 그렇게 건방진 거겠고. 눈과 개와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를 끝으로 우린 한동안 침묵했다. 12시가 넘어서 그런지 거리에는 오가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눈은 그래서 더욱 조용 히 내려왔다. 에구, 매일같이 나불대던 녀석이 갑자기 조용하니까 왠지 뭔 가 이상하다. 나도 그렇지만. 하지만, 할 말이 없는걸. 사르륵, 사르륵. 눈 쌓이는 소리. "...가 들릴 리가 없겠지. 하하!" "......너 혼자서 뭐하냐?" 난 멋적은 듯이 눈에 대한 시적인 상상을 혼잣말로 지워버렸고 (시적이라 기보다는 동시적이었다) 그런 나를 녀석은 왠 미친 놈보듯 쳐다보고 있었 다. 그리고 다시 침묵. ......흐음, 왠지 어색해. 역시. 이 녀석과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어 야 재미가 있단말야. 뭔가 화제를 꺼내어야겠는걸. 무슨 이야기가 좋을까. 최근의 가장 할 만한 이야기 꺼리라면... 맞아, 퀴에르! "야, 퀴에르 있잖아..." "응?" 그 녀석도 상당히 이야기를 하고 싶었나보다. 내가 말을 걸자마자 바로 대 답해 오는걸로 봐선. 그러면 이야기를 걸던지 하지. 아닌 척은. 귀여운 것. ......누가? 쟤가? 내가 잠시나마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어쨌든, 퀴에르 말야" "응, 그래" "어떻게 그 여자는 삼백년을 넘게 살 수 있었지? 그 여자도 너처럼 영기를 많이 모아서 그렇게 살 수 있는거야?" "어, 그게 아냐. 인간은 정해진 수명을 넘기가 동물보다도 훨씬 어려워. 그래서 옛날 이집트의 미라같은 걸 봐도 일단 죽은 다음 부활하겠다고 생각 하지 영생을 하겠다고 생각하지는 못하잖아" "그래? 왜?" "몰라. 모르지만, 인간은 일단 생명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너무 강해지 고, 또 이미 인간이라는 것만으로도 동물보다 너무 많은 혜택을 받은 것이 기 때문에 수명의 혜택은 주어지지 않는 것 같아. 확실한 건 아냐" "어쨌든, 자기 힘만으로는 그렇게 오래 살기가 어렵다는 것 아냐?" "그렇지" 요령이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래서 나는 평소에 궁금하던 걸 물어볼 수 있 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어떻게 그렇게 오래살 수 있는거야?" "퀴에르 말야?" "응" 그 녀석은 내 말에 입을 다물었다. 왜 대답이 없지? 나는 조바심이 생겨서 대답을 재촉하려했고, 그 때 녀석이 대답했다. "혼을 팔았어" "......응?" 갑작스러운 대답이라 내 머릿속에 그 대답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 는 되물어야 했다. "뭐...라구? 뭘 팔았다구?" "너 종교가 뭐야? 카톨릭? 이슬람? 설마 조로아스터?" 나? 난... 뭐, 교회를 가끔씩 나가니까 기독교도겠지. 이슬람은 무슨... "으음...그냥, 뭐 독실한 신자나 그런 건 아니지만 가끔씩 교회에 나가니 까 기독교도라고도 할 수 있지" "그래? 기독교라면 개신교를 말하는 것이겠고. 개신교라면 마틴 루터의 그. .." "맞아. 그런데 갑자기 뜬금없이 그건 왜 물어?" "......야훼를 믿는 자들에게는 상당히 불경스러운 이야기가 될 테니까. 그래도 듣고 싶어?" "뭐, 너 자체가 이미 하나의 불경이자 신성모독이니까, 상관없어" "카앗!" 녀석은 짜증을 벌컥 냈고 그런 녀석을 보며 난 낄낄 웃었다. "그래서, 뭔데?" "퀴에르는 자신의 혼을 악마에게 팔았어" "......뭐?" "몇 번 묻냐. 혼을 팔았다니까. 악마에게" "다시 한 번만 묻자. 누구에게 혼을 팔아?" "악마. 악마 누구인지는 몰라. 하여튼 그녀는 악마에게 자신의 혼을 팔고 자신이 원하는 날 늙고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죽을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되 었지. 나도 소문으로만 들은 이야기지만. 옛날 이야기에 보면 많이 나오잖 아?" 뭐? ......그게 말이 되냐? 그런 옛날 이야기에만 나올법한 이야기가... 그럼, 그럼... 아, 잠깐. 생각이 정리가 되질 않는다. 나는 일단 하던 생각 을 멈추고 심호흡을 크게 했다. 차가운 공기에 섟여서 몇 개의 눈이 내 입 속으로 들어왔고, 그것들이 입속에서 스르르 녹으며 잠시동안 시원한 기분 을 느끼게 하면서 내 생각도 동시에 정리가 되었다. 그건 말도 안 돼! "야, 그게 가능하면...!" "......모든 마녀들이 영생을 얻을 수 있지 않냐고?" "......그렇...지, 눈치는 빨라가지구" "눈치가 빠른게 아니고 머리가 좋은거지. 어쨌든, 아까도 말했듯이 나도 듣기만 한 이야기라 잘 모르지만, 퀴에르가 그만큼 거물급의 악마랑 계약을 했기 때문이라지, 아마" "그런거냐? 쩝. 하아..." "왜? 네가 아쉬워 하는데?" "아쉬운 게 아니라... 그냥. 좀 놀랍고, 신비해서. 널 못 봤다면 세상의 뒤쪽에 이런 어두운 세계가 있다는 것도 몰랐겠지...?" "그러니까, 내가 어둠의 메신저라 이 말이냐?" 난 고개를 끄덕여 긍정의 뜻을 뜻했고 그래서 그 녀석은 다시 성질을 내기 시작했다. "아마도" "캬아앗!" "하하하!" 즐거운 세상이다. 뭐, 내가 모르는 곳에서 악마가 나오던 마녀가 나오던, 어쨌든 나와는 관련이 없고, 그러기에 그 모습들을 모르고 사는 나로서는 그런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안 것만으로도 유쾌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내 가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유쾌한 세상이다! 나를 아는 모든 자들중에 세상에 아직도 마녀와 악마같은 중세의 환상이 살아있 다는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리고 나로 하여금 유쾌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준 녀석이자 마법의 시대의 증거물인 녀석은 내가 빙글빙글 웃어대자 괜히 좋은지 따라 웃었다. 빙긋. 그 모습은... 역시 참 예뻐. 쳇. 약간 두근거릴 정도로. ...두근거려? 설마. 난 그냥 태연하게 물었다. "왜 웃어?" "그냥. 웃음은 전염이라나? 내가 아는 가장 멍청한 사람인 누가 웃으니까 괜히 나도 웃음이 나서." "누가, 내가? 난 아닐걸" 나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고 그 녀석은 나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단지 빙긋하고 다시 웃었다. 어느새 그 녀석과 내 머리와 어깨 위에는 눈이 소담스럽게 쌓여서 움직일때마다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왠지 모르 게 보기 좋은 광경이었다. 어쨌든, 저 녀석이 어쨌든간에 나는 눈이 좋으니 까. 하지만 그 녀석은 아까도 말했듯이 눈이 별로 안 좋은가보다. 잠시 부 드럽게 미소를 짓던 그 녀석은 하늘을 바라보더니 다시 눈을 찌푸렸다. "하, 그 눈 참 지겹게도 오네. 이제 그칠때도 안 되었나? 도대체 언제부터 온 거야" "끄으응..." "너 대답을 참 이상하게 한다?" 그 녀석은 눈발을 흩날리며 뒤로 빙글 돌아서 나를 의문스럽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고 그래서 나는 고개를 휘저었다. 내가 아냐. 그러자 녀석은 고개 를 갸우뚱하더니 말했다. 그런데 이게 정말 무슨 소리지? "그래? 그럼 누구지? 으음... 이건 마치 개가... 응? 저게 뭐야?" "끄으으응..." 다시금 들려온 고통에 찬 신음소리. 나와 녀석은 동시에 소리가 난 쪽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 곳에는 눈밖에 없었다. "끄으응... 끄응..." 난 귀를 쫑긋 세웠고 그렇게 계속 집중해서 들어보자 눈이 쌓인 곳 중에서 불거져 나와 있는 곳에서 신음소리가 계속해서 흘러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 었다. 도대체 뭐지? 눈을 찌푸리며 그 곳을 바라보자 무엇인가가 보이긴 보 였다. 눈이 쌓여있는 곳...그 중에서도 이상하게 눈이 많이 쌓여있는, 아니 아래에 무엇이 있어서 눈이 많이 쌓인 것처럼 보이는 곳. 좀 더 집중해서 보자. 흩날리는 눈발이 시야를 방해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사실 그 곳 에 있는 것은 눈이 아니라... 사락 사락 내리는 흰 눈에 점차 묻혀서 몸의 일부만 드러나버린... "개?" 나와 그녀석은 동시에 말했다. 음. 이 녀석을 본 뒤로는 쭈욱 하는 생각인 데, 서로 죽이 참 잘 맞는군. "저 쪽에서 나는 소리였어! 어서 가 보자!" 나는 총알같이 그 곳으로 뛰어갔고 그런 나를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 던 녀석도 투덜거리며 내 뒤를 따라왔다. 나는 마치 가죽주머니처럼 보이는 개인지 뭔지 아직 형체를 알 수 없는 그것의 위로 쌓여 있는 눈을 맨 손으 로 헤쳐내기 시작했다. 젠장, 정말 손 시리군. 그런데 저 녀석은 왜 계속 멀뚱히 쳐다만 보고 있는거야? "으, 손시려... 야, 좀 도와줘!" "내가? 개를? 도우라고? 차라리 쥐를 돕겠다" "지금 그런 말 할 시간 없어! 급하다고!" "야! 하지만..." "잔소리말고 얼른!" 그 녀석은 할 수 없다는 듯이 계속 한숨을 푹푹 내쉬며 나와 같이 눈을 파 헤치기 시작했고, 그렇게 손으로 눈을 몇 번 더 헤쳐내자 마침내 피골이 상 접한, 너무 말라서 무슨 종자인지 알아보지도 못하게 되어버린 지저분한 개 한 마리가 숨을 가쁘게 내쉬며 우리를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우, 불쌍해! 도대체 며칠동안 눈 속에 쳐박혀 있었던거야? 물론 눈이 오기 시작한지는 얼마 안 되었지만 요 며칠간은 계속 눈이 왔으니 이 녀석이 눈 에 묻혀 있었던 기간은 추정 불가능이다. 도대체 어쩌다 여기에 이렇게 쓰 러지게 된 거지? 난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그 녀석의 피부에 손을 가져다 대어 보였다. 와! 몸이 얼음장이잖아! "허, 정말 개잖아?" "쳇, 정말 개잖아" 내뱉은 말은 같았지만 그 뉘앙스는 완전히 달랐다. 난 불쌍해서 못견딜듯 한 말투로, 녀석은 역시 쓸모없는 짓이었다는 듯 짜증을 뒤섞어서 말한 것 이다. "야, 개가 그렇게도 싫으냐?" "내 350년 인생동안 개를 차마 해코지하지 못하고 쫓겨다녔던 경험, 혹은 싸우기만 하면 져버렸던 고양이의 개에 대한 본능적인 원한과 공포를 꼭 다 시 말로 해야겠냐"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죽어가잖아!" "누가 뭐래?" ......하긴, 녀석은 지금 이 상황에 대해 가타부타 반응을 보인 적이 없었 지. 비록 짜증을 조금 내긴 했지만 말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녀석을 들춰매었다. 개의 크기가 꽤 크고 개의 몸에 뼈와 가죽뿐만 아니라 근육도 상당히 붙어 있던지라 볼썽사납게 말랐는데도 상당히 무거웠다. "끄응. 꽤 무거운데?" 난 개를 들춰매고는 집으로 향하려했고 녀석의 입에서는 떨리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 너, 너, 뭐 하는거야?" "뭐 하긴? 집으로 옮겨서 뭐라도 먹여야지. 보아하니 몸 주위에 긁힌 듯한 상처가 군데군데 있긴 하지만, 이 정도는 떠돌이 개에게 흔한 것일테고. 이 녀석이 지금 이렇게 다 죽어가는 듯한 꼴을 한 것은 내가 보기엔 며칠 굶었 기 때문인 것 같아. 집에 네가 먹다 남은 우유라도 남아 있을테니 그거라도 먹여 봐야지" "...뭐? 너 설마 지금 이 개를 집으로 옮기려고...?" "물론 그래. 왜? 문제 있어?" "하, 하지만! 이건 개고...!" "다 죽어가는 개지" 그 녀석은 내 대답에 질렸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런 떠돌이 개는 아무데나 버려놔도 살 수 있어! 개들은 다 생명력이 지 독히도 끈질기다구! 제발, 그냥 두고 가자. 응? 며칠이라도 개와 같이 살아 야 한다니, 끔찍하단 말야! 내, 내가 이게 다른 고양이나, 쥐, 심지어 여기 쓰러져 있는게 호랑이라도 난 네 녀석이 뭘 하든 신경쓰지 않겠어! 하지만 이건, 개..." 이 녀석이 이렇게 나쁜 녀석이었나? 쳇! 내가 며칠동안 봤던 바로는 이렇 게까지 쌀쌀맞은 녀석은 아닌데...? 이 녀석이 지금 내뱉는 말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인지, 아니면 그냥 내 말에 수긍하고 말없이 개를 구해주기에 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서 아무 말이나 나오는대로 말하는건지, 한마디 로 정말인지 아닌지 떠봐야겠다. 나는 성큼성큼 집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 칫하고 멈추고는 그 녀석을 쳐다보며 물었다. "정말 버려두고 갈까?" "......그, 그건......" 역시. 네 녀석은 그렇게 나쁜 녀석이 아니라니깐. 하핫. 나는 성격이 차 가운 사람들이 제일 싫더라. 어쨌든 네 녀석이 그런 녀석이 아니니까 나도 이제 안심하고 네 녀석을 보면서 다시금 두근두근... 으아악! 내가 지금 무 슨 생각을! 어쨌든 나는 계속 녀석을 약간 노려보는듯이 쳐다보며 말했다. "정말 버려두고 가도 돼?" "......하, 하지만...쟤는 개고..." 역시 고양이라서 그런지 개를 마치 사람부르는 듯한 표현으로 부른다. ' 쟤'라. "버려두고 간다?" "몰라! 이 멍청아. 마음대로 해!" 역시 내 생각대로 녀석의 마음씨가 나쁘다거나 한 게 아니었어! 녀석은 갑 자기 눈을 한 움큼 쥐어서 나에게 확 뿌리고는 뒤로 홱! 돌아버리더니 일부 러 그러는 듯이 발을 탕탕! 굴려가며 날카롭게 빼액 하고 외쳤다. 우헤헤! 녀석은 아마도 자신이 지금 무척 화가 났다는 것을 내게 어필하려고 했던 의도로 한 짓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볼 때는... 무지무지 귀엽다! 하하! ......아우, 나 요즘 자꾸 왜 이럴까. 역시 예쁜 여자가 눈 앞에 계속 아 른거리다 보니...흠. 마음을 좀 가다듬어야겠군. 나는 다시 개를 어깨에 들춰맨 채 힘들게 그 녀석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 녀석은 계속 발을 쿵쿵 굴러가면서 훨씬 앞서가고 있었고. 발을 구를 때 마다 마치 깃털처럼 하얀 눈가루가 하늘을 수놓으며 잠시 흩날리다 떨어지 곤 했다. 저 녀석, 진짜 토라졌나? "야아아- 삐졌냐!" "몰라 임마! 얼른 그 개인지 뭔지 메고 오기나 해!" 와, 날카로워. 진짜 화났나본데. "야, 주인에게 말버릇이 그게-" "주인이고 뭐고간에!" 흐음. 정말 화났군. 하지만 나는 이 녀석 뿐만이 아니라 너도 구해 주었었 는걸. 너도 당했던 나란 녀석에게 구해지는 고통을 이 개에게도 줘야겠는 데. 하하. 나는 일부러 녀석 들으라고 노래하듯 외쳤다. 이렇게 하면 은근 슬쩍 넘어갈 수 있으려나? "앞에 가는 아가씨-! 앞에 가는 아가씨-! 얼마 전 눈 오던 날, 그 날 밤의 제길을 라임으로, 젠장을 리듬으로 노래하던 한 청년을 기억하시나요? 하하 하, 그 청년은 참으로 어울리지 않게도 꽃밭대신 쓰레기더미에서 노래하던 한 앙칼지고 자존심강해 매력있는 고양이를 구해 주었죠-!" 내 장난스러운 노래에 요령이는 쾅쾅거리던 걸음을 멈추고는 '드디어 저 녀석이 돌아 버렸나?'하는 듯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하하, 뭘 그리 쳐다 보시나.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노래를 이었다. 내 어깨에 들춰맨 개의 무게를 잊기 위해, 그리고 눈이 내리는 이 날 왠지 모를 유쾌함에 터져버릴 듯한 가슴을 시원하게 뚫기 위해. 그리고 토라진 것 같은 저 녀석의 마음을 어색한 사과 없이 (솔직히 내가 뭘 잘못했어!) 풀어주기 위해. "그리고 또다시 반복되는 눈 오는 날, 그 청년은 이번엔 눈을 집 삼아 잠 자고 공기를 밥삼아 먹던 불쌍한 눈을 하고 사람을 올려다볼줄 알던 개 한 마리를 구해 주었죠. 이미 자신을 구해준 청년을 자기 멋대로 주인으로 삼 은, 그 앙칼지고 자존심 강한 고양이는 주인의 태도에 어떻게 했을까요-?" "그 마음 착한 고양이는 어떻게 했나요? 물론 구해주지 않고 그냥 지나치 려는, 영원히 제기랄을 반복해야 하는 저주를 받아버린 불쌍한 주인을 발톱 으로 잡고 꼬리로 당긴 채 빛나는 미소를 선물하며 불쌍한 개를 구해 주라 고 부탁 했겠지요. 그 고양이는 착하니까-" 얼씨구. 영원히 제기랄을 반복해야 하는 주인은 나고. 그냥 가려는 나를 빛나는 미소를 선물하며 붙잡고 개를 구해주도록 만든건 자신이라 이건가? 흠. 네가 언제? 여하튼 그 녀석은 처음에는 짜증이 나는듯한 표정을 지으면 서도 대꾸를 안 했다간 천하에 빌어먹을 마음나쁜 앙칼진 고양이가 되어버 릴까봐 두려웠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시큰둥하게 대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녀석도 그냥 말하기 어색했는지 조금씩 노래하듯 대답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대답하다가 조금씩 흥이 나기 시작하는지 가끔씩 목소리를 가다듬기도 하고 빙긋 웃기도 하며 점점 빠른 리듬으로 '노래'를 불러나가기 시작했다. 그 럼, 그래야지. 그래야 음정, 박자 엉망인 나의 노래도 어색하지 않고 부드 럽게 이어질 수 있겠고- "아니오, 아가씨. 고양이는-" "조용히 좀 해앳!" 드르륵! 어느 집인지 모르겠다. 창문이 벌컥 열리며 왠 아저씨가 상체를 쑥 내밀고는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에라이 이것들아! 아주 뮤지컬을 찍어라 뮤지컬을 찍어! 시끄러워 죽겠어 아주! 거리 세 냈냐! 잠 좀 자자 이것들아! 12시가 훨씬 넘었어 12시가!" 젠장! 한창 저 녀석의 기분도 풀리고 나도 신나려던 참이었는데! 아주 산 통을 깨라, 산통을 깨! 쳇! 나는 그 창문을 향해 잠시 세상에서 가장 무시 무시한, 그래서 가장 우스꽝스러운 표정인 '메롱'을 지어주었고, (물론 손 으로 어떤 제스춰를 취하는것도 잊지 않았다) 기분이 조금 풀린 것 같았던 요령이는 잠시 '내가 뭘 하고 있었지'를 중얼거린 뒤 -눈이 와서 사방은 조 용했고 그래서 녀석은 나보다 몇걸음 앞에서 혼잣말을 했지만 그 목소리는 나에게까지 똑똑히 들렸다- 다시금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는 앞으로 쿵쿵 거리며 매우 화났다는 듯이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쳇. 거의 화가 풀렸었는 데. 할 수 없지. 나는 한 숨을 쉬고, 눈 때문에 미끄러워 점점 아래로 떨어 지려는 개를 다시 들춰안은채 약간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물었다. "야- 아직도 화났냐?" "집에나 가자고 했지!" 앙칼진 목소리. 에구, 망했다. 평소에도 날카로운데 저렇게 화가 났으니 얼마나 히스테리를 부려댈까. 뭐, 녀석이 무슨 소리를 해도 대충 넘어갈 수 있는게 내 유일한 장점이긴 하겠지만. "허억, 허억, 힘들어 죽겠다! 이 녀석, 뭐 이리 무겁냐!" 분명히 날씨는 추운 겨울이지만 내 몸은 엄청나게 따뜻하다. 아니, 뜨겁 다. 뜨겁다못해 온 몸에서 김까지 확확 올라온다. "와, 김 나는 거 봐라. 멍청이" "'주인 어르신'이라는 호칭은 기대하지도 않을테니, '야'라는 호칭 이하로 는 부르지 말아줄래?" 나는 짜증을 팍팍 내며 말했고, 녀석은 감당하지도 못할 짐을 지고는 끙끙 대며 계단을 오르는 나를 보고는 이를 드러내며 웃더니 이죽거리며 아까 내 가 했던 그 박자와 그 음정 그대로 비꼬듯이 읊조렸다. "흐흥. 뒤에 오는 멍청이, 뒤에 오는 멍청이-! 얼마 전 그는 자신의 고양 이를 화나게 하는 정말 멍청한 짓을 저질러버렸지. 흐흥. 그대 어깨의 무거 운 짐은 그대의 무지의 족쇄인가? 흐흥. 웃겨, 정말" "그만, 헉! 그만 해! 힘들어 죽겠으니!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아, 젠장. 얼굴 달아오르게 아까 그 이야기나 계속 하고 말야. 나도 창피 한 거 아니깐 그만 하라구. 나는 계속 헥헥대며 1분에 한 두계단씩 천천히 올라갔고, 그 녀석은 그런 나를 잠시 볼썽사납다는 듯이 쳐다보더니 손가락 을 따악 튕겼다. 그때 녀석의 손가락이 잠시 빛나는 것 같았는데, 착각이었 나? "바람의 하인, 나의 충실하고도 조용한 하인 에어리얼 서번트. 나와라. 너 의 주인의 주인이 무척 힘드시다는구나. 어이구, 저 멍청이. 그렇게 힘이 없어가지고 어디다 써먹냐? 동네 건달들에게라도 걸리면 박살 나겠구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에 뭐라고 하는지는 몰랐지만 나는 녀석의 '하인' 어쩌구 하는 말에 참지 못하고는 화를 버럭 내어 버렸다. "조, 헉! 조용히 해! 말로만 나불거리지 말고 좀... 어?" -휘루루루루... 우앗! 계단에서 떨어질 뻔 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방향을 잃은 힘 때문에 균형을 잃고 주춤해야 했다. 갑자기 시원한 바람이 내 품을 스치고 지나가 더니 지금껏 계속 들춰매었다 무거워서 고쳐안는 짓을 반복하며 간신히 집 앞 계단까지 데리고 왔던 개의 무게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난 놀 라서 품을 쳐다보았으나 개는 사라지고 없었다. 어떻게 된 거야 도대체? 나 는 정면을 바라보았고, 그러자 내가 지금껏 들고왔던 개가 둥실둥실 허공 에 떠 있는 것이 보였다. 뭐야 이건? "어, 어떻게 된 거야...?" "헥헥대는 꼴이 하도 볼썽사나워서 내가 들어준다. 어휴, 나도 참. 이런 걸 주인이라고..." "에? 아니, 그게 아니고. 이게 어떻게 된 거냐고" 그러자 그 녀석은 고개까지 가로젓더니 한숨을 푹 쉬고는 말했다. "어떻게 대학 갔냐? 영어 몰라? 주문 외울 때 한글로도 말 했잖아?" "뭐라구? 네가 뭐라고... 아! 에어리얼 서번트! 바람의 하인!" 나는 이마를 따악 소리나게 쳤다. 아, 맞다. 저녀석은 이상한 걸 많이 하 지! 지금도 바람의 하인이라는 것을 불러서 나를 도와주는 건가 보다! 나는 허공을 유심히 쳐다보았고, 그러자 개의 몸통 아랫쪽으로 정말 흰 소용돌이 가 언뜻언뜻 보였다. 처음 봤었다면 진짜,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고 팔딱 팔딱 뛰었겠지만 이젠 '그런가보다'하는 수준이 되어버렸다. 에휴. 나도 참. 이런 걸 보면서 담담할 수 있다니. 이 상황이 얼마나 그 동안 고생을 많이 했는지에 대한 증거가 되어 주는군. 그건 그렇고 이런 게 있으면 처음 부터 도와주지 좀! "야, 그럼 처음부터 들고 왔으면 편하잖아! 한참동안 쌩고생을 할 때는 가 만히 지켜만 보다가 이제 와서야 도와주는 저의가 뭐야! 저의가!" 그런데 녀석의 내 말에 갑자기 나를 날카롭게 쏘아본다. 별로 말하고싶지 않은 걸 왜 물어보냐는 듯이. 흐음. 왜 저러지? 생각해보자. 생각. 생각.. .생각하자...생각이 점점 정리된다. 일단, 처음에 저 녀석이 나를 도와주지 않은 이유는...?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였지. 그러면 지금 저 녀석이 나를 도와주는 이유는... 뭐, 화가 풀려서쯤이겠지 ? 결과가 반대니까 원인이 반대인 것이겠지. 화가 나서 내가 뭘 하던 모른 척했으니까, 당연히 화가 풀려서 나를 도와준 것이겠지. 그게 뭐? 응? 화가 풀렸어......? 화가 풀렸구나! 우헤헤헤! 나는 '이제야 녀석의 괜한 짜증에서 벗어나겠구나. 휴우. 다행이다, 좋아 죽어, 좋아 죽어!'라고 속으로만 외치면서도 겉으로는 무덤덤하게 시치미 뚝 떼고 계속 물어봤다. "왜 처음부터 안 도와줬냐고, 왜. 이유나 좀 알자?" 나는 계속해서 녀석을 추궁했고, 그러자 그 녀석의 얼굴이 점점 빨개지기 시작했다. 우헤헤! 부끄럽냐? 그러나. 난 그 녀석의 표정을 봤고, 그 녀석이 절대로 부끄러워서 얼굴이 붉어지는 일은 없을거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아주 눈에서 불을 뿜어라, 불을 뿜어. 뚫어지겠다, 야. 젠장, 적당한 선에서 멈췄어야 했는데. 그 녀 석은 나를 확! 째려보더니 오른손을 옆으로 쫘악! 뻗으며 유리 깨지는 듯한 목소리로 날카롭게 말했다. "서번트, 아직도 있니? 주인 마음을 그렇게 못 읽어? 왜 이리 눈치가 없니 ! 사라져!" -휘루루루... 순식간에 바람은 사라졌다. 그럼, 개는? "이런 젠장!" 나는 간신히 팔을 앞으로 쭈욱 뻗어서 간신히 개를 잡아내는 데 성공했 다. 털썩! 나이스 캐치! 그 녀석은 개 잡으랴, 고양이 눈치보랴 허둥대는 나를 노려보며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다시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가서 하숙방 으로 들어가더니 문을 쾅! 닫아버렸다. 그 녀석이 중얼거린 말은 이것이었 다. "좋게 좋게 봐주려고 해도 봐줄수가 있어야지!" 쳇. 나는 다시금 개를 짊어지고는 터덜터덜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 물론 만화나 드라마처럼 요령이에게 '왜 그러는데?'라고 물어보면 요령 이가 '아이 참, 몰라!' 이러면서 얼굴이 빨개져가지고는 (물론 이 경우에는 부끄러워서이다. 방금 전처럼 화가 나서가 아닌) 마구 뛰어가다 털썩 넘어 지는 애교가 철철 넘치는 녀석이 되어 주기를 바란 건 아냐. 하지만, '쳇, 내가 참아야지 할 수 있냐. 봐 줬다' 이런 대답쯤은 해줘도 되는 거 아니냐 고. "쳇, 내가 참아야지 할 수 있냐. 봐 줬다" 나는 녀석의 말에 수건으로 녹은 눈에 흠뻑 젖은 개의 몸을 연신 닦아 주 면서 말했다. "또 뭐라고 히스테리... 응? 뭐라고?" "두 번 말하게 할래? 그리고 히스테리?" 나는 녀석의 꼬투리잡기를 반문으로 은근슬쩍 넘어갔다. 에구, 말 조심해 야겠군. "응? 봐준다고? 그럼 화가 풀린거야?" "아이 씨 몰라, 넘어가. 그나저나 이 개는 어쩔거야?" '봐줬다'. 내가 개를 데리고 방에 들어오자마자 나를 한참 쳐다보던 녀석 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마음씨 착하고 예쁜 내가 참아야지'라는 말을 중얼거리고는 한 말이었다. 아까 내가 생각했던 말을 그대로 하는군. 하하. "어떻게하긴 어떻게 해. 일단 따뜻하게 해주고 뭐 좀 먹어야지. 일단, 거 기 네 이불 좀 줘 볼래?" "......왜 하필이면 내 거냐. 네 거 쓰지. 떠돌이 개에게 얼마나 많은 벼 룩과 이와 진드기가 있는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그러니까 네 거 쓰자는거지" "캬아아!" 그 녀석은 쉭쉭거렸고, 나는 할 수 없이 말했다. "농담이고, 네 것이 더 두껍잖아. 얼어 죽으려는 녀석에게 그럼 여름담요 를 덮어주리?" 그렇다. 녀석의 이불은 두꺼운 겨울 이불이고 내 것은 얇은데다가 내 몸조 차 다 덮지 못해서 덮으면 발이 드러나버리는 손바닥만한 이불이다. 뭐, 원 래는 지금 내가 덮는 건 여름용으로 가져온거고, 지금 요령이 녀석이 덮는 것은 겨울용으로 가져온온 것이었다. 그러다 저 녀석이 들어오면서 나는 내 여름 이불을 덮고 자라고 주었는데, 그 녀석은 며칠간은 참고 자는 듯 하다 가 점점 내가 내어 준 여름담요는 추워서 못 덮겠다면서 던져버리고는 내가 세상모르고 자는동안 가끔씩 내가 덮는 이불 속으로 굴러들어와서 자더니 결국 어느날 밤에 내가 자는데 이불을 확 빼앗으면서 '도저히 좁고 답답해 서 못 자겠다. 너 그냥 내 거 덮어라. 뭐? 추워? 참어! 사내자식이' 하면서 빼앗아가버렸다. 물론, 그 때도 나는 누누히 '그러니까 평소에도 고양이로 있으라고 좀! 그럼 내 발 밑에서 자도 되고 저 여름담요를 덮어도 안 추울 것 아니냐!'를 강조했지만 물론 녀석은 '참어'라는 말 한마디로 내 의견들 을 무시해 버렸고. 내 말에 녀석은 울상을 짓더니 결국 자기 것을 가져와서 던져주면서 중얼 거렸다. "이제 네 거랑 내 거 이불 바꾼다" 쳇. 그래, 맘 대로 해라. 난 빨아서 쓰면 되니 상관없지롱- 우헤헤. 어쨌 든 이로서 겨울 이불은 다시 내 차지다. 나는 두꺼운 이불을 손으로 추스려 서 개의 몸을 둘둘 감아주면서 다시 말했다. "야, 네 우유 좀 쓰자" "왜?" "얘 먹이게" 그리고 나는 귀를 막아버리고는 녀석의 그릇에 우유를 담아 왔다. 왜 귀를 막았냐고? 녀석이 계속해서 '주인이 되어가지고는 뭘 줘도 모자를 판국에 줬던 것까지 빼앗아가니?''나도 아껴먹는 걸 누굴 주니?' 하면서 궁시렁거 렸기 때문이다. 쳇, 이제 녀석의 잔소리가 완전히 일상사처럼 되어버린 느 낌이다. 아, 갑자기 어린 시절의 다짐이 마구 떠오르는구나. -아빠, 아빠. 색시한테는 어떻게 해야해? -으음. 모름지기 여자란 휘어 잡아야 해. -그런데 왜 맨날 아빠는 엄마에게 지고 살아? -그래서 내가 이렇게 매일같이 고생하잖니. 너는 꼭 네 마누라 될 사람을 바짝 쪼아서 휘어잡아라. 절대 잔소리같은 거 듣고 살면 안 돼! 남자는 그 누구에게도 들볶이면 안 되는거야. 알았지? -응응. 알았어. 여자는 휘어 잡으라고? -오호, 그래. 역시 내 아들은 날 닮아서 똑똑해. 한번 말하면 척척 알아 듣는구나. -여보! 애한테 뭘 가르치는 거에요! -아, 아냐. 아무것도... 난 순간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올라서 씨익 웃고 말았다. 아빠는 남자는 누구에게도 들볶이면 안 된다고 했고, 그래서 난 내 아내조차도 내게 잔소 리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다짐했었지. 그러나, 오, 젠장, 현실은. 아내는커녕 기르는 동물조차도 나를 들볶는구나! 제기랄! 끼이익. 삐걱거리는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후덥한 하숙집 안 공기가 나를 반긴다. "휴우, 오늘도 끝났구나. 요령아. 어? 너 왜 이리 늦냐?" "이거, 계단이 뭐 이리 미끄럽냐? 에코, 휴우, 넘어질 뻔 했다" "조심 조심 올라와, 조심 조심. 또 넘어져서 나한테 짜증부리지 말고" 오늘, 아르바이트 이틀째! 나름대로 잘 해낸 나와 요령이는 어제처럼 일급 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주인 아저씨는 어제처럼 요령이에게 칭찬을 아끼 지 않았다. 흠, 하긴, 내가 주인이라도 그러겠다. 내가 보기에도 단 하루만 에 손님들이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이다. 게다가 그 늘어난 손님들이 다들 눈 이 확확 튀어나올 정도로 비싸디 비싼 것들만 시켜서 한 입 마시고 요령이 쳐다보고 다시 한 입 마시고 요령이 쳐다보고 하다가 나가버리니, 매상이 엄청나게 솟구친 주인으로서는 기뻐 죽을 지경일게다. 흠, 하지만 나도 일 열심히 한다고. 좀 칭찬 좀 해 줘. 나는 바짝 세운 옷깃을 내리며 삐걱대는 문을 열고는 방 안으로 들어왔고, 내 뒤를 따라 녀석도 손을 호호 불어가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밖에는 오늘 도 어김없이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으으, 추워. 게다가 무슨 눈은 이렇 게 매일같이 내리냐. "으으, 추워. 무슨 날씨가 이렇게 춥냐. 주인 아저씨도 참. 이제 완전히 머슴 부리듯이 한다니까. 이 추운 날에 손걸레 빠느라 동상 걸리는 줄 알았 어. 내가 돌쇠도 아니고, 참" "그거야 네가 사서 하는 고생이고" "야!" 녀석은 내가 소리를 빽 지르자 깜짝 놀랐는지 움찔하더니 가슴을 쓸어내리 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말한다. 헤, 깜짝 놀란 얼굴은 못 봤던 것 같은 데. 눈을 동그랗게 뜨니까 그것도 또 무지 귀엽네. "와! 깜짝 놀랐네! 임마! 깜짝 놀랐잖아? 그리고 뭘 그렇게 과민반응하니? 사실이지. 일을 주고 돈을 샀잖아" ......말버릇도 귀여웠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꼭 저렇게 하나 하나 꼬박꼬 박 말대답하지 않으면 뭐, 속이 뒤틀리기라도 하나? 어쨌든 난 녀석의 말에 대답해주었다. "넌 처음엔 돈을 사려고 일을 하는게 아니라 일을 사서 하는 거라고 말했 잖아? 왜 말이 바뀌니?" "흐, 흠. 뭘 따져, 씨. 어쨌든 넘어가고, 그건 그렇고 네가 주워왔던 그 짐짝은 어떻게 됐어?" "무슨... 짐짝?" "개 말이야. 개" "아, 멍멍이?" 그렇다. 나는 그 개를 맘편하게 '멍멍이'라고 부르기로 마음먹었다. "멍...멍이? 그 최악의 작명 센스는 뭐냐 도대체?" "요령이라는 이름보다는 낫지 않나?" "캬아악!" 그 녀석은 성질을 버럭 냈고 나는 그 모습에 미소를 짓다가 다시 멍멍이가 걱정되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흐음. 멍멍이라. 어떻게 되었을까... 에이 몰라. 이제 봐야지" 후우, 개 하니까 갑자기 또 걱정이 되어 버리네. 나는 어제 밤새도록 새벽까지 끙끙대며 앓는 개를 돌보았다. 제길. 밤을 꼬박 새웠더니 하루종일 졸려 죽겠군. 그 개 녀석은 내가 수저로 떠서 넘겨 주는 우유조차 제대로 받아 마시지 못하고 헉헉대었으며, 요령이는 그런 나 를 말없이 잠시 바라보다가 '어휴, 바보짓 좀 그만하고 자! 불을 켜 놓으니 까 잠이 안 오잖아' 라고 궁시렁거리면서 방 구석에서 웅크리고 앉아 나를 지켜보는 것 같더니 내가 봤을때는 어느새인가 잠이 들어 버렸었다. 헤, 그 래도 같이 밤을 새워줄려 그랬었나 보네? 에이, 설마. 그 녀석이 그럴 리 가. ...하긴, 그 때 녀석이 궁시렁거리는 소리에는 평소같이 콕콕 찌르는 '말 속의 가시' 가 없었으니까, 또 혹시 모르지. 진짜 밤을 새려 했던 건지도. 나중에 한 번 물어봐야지. 어쨌든, 그렇게 녀석을 밤새 돌보다가 나도 어느샌가 잠이 들어 버렸고, 아침에 잠에서 깨어 났을때는 그 개도 잠이 들었는지 눈을 감고 있었다. 그 리고 덕분에 나는 내 평생 가장 깜짝 놀라버린 아침을 경험해버렸다. "우아악! 주... 죽었나?" 에휴. 비실비실 앓던 녀석이 아침에 일어나보니 눈을 감았더라... 생각나 는 건 '죽었다'밖에 없잖아. 어쨌든 그 때문에 처음엔 죽은 줄 알고 무지무 지 당황해서 구석에서 쪼그려앉아 잠든 요령이를 깨우고 개를 마구 흔들고, 하여튼 난리도 아니었다. 그래서 자는 걸 어떻게 알았느냐고? 결국 보다 못 한 요령이가 한 마디 했기 때문에 간신히 눈치챌 수 있었지. 음음. "뭐야, 요즘은 죽은 개도 숨을 쉬냐?" ......그 말에 난 결국 내가 호흡부터 확인하지 않고 성급하게 날뛴 것을 인정해야 했고, 결국 하루종일 녀석이 '개야, 일어나봐! 일어나봐!' 하면서 내 모습을 좀 더 어수룩하게 포장해서 흉내내는 것을 말리거나 외면하느라 엄청나게 고생해야 했다. 우우.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얼굴이 붉어진다. 어쨌든, 나는 오전까지 깊이 잠들어 있는 개를 계속 지켜보면서 병원으로 갈까 아르바이트를 나갈까 아니면 그냥 집에서 이 녀석을 돌봐주고 있을까 를 놓고 한참동안 고민했고, 결국 다시 요령이가 '으음. 잠을 잔다는 것 자 체가 지금 계속해서 기력을 회복하고 있다는 증거야. 그리고 취직(?) 한 지 이틀만에 회사(?)를 빠지기도 좀 그렇고. 그냥 가자'라고 말해서 그 녀석의 말에 따라 그냥 카페로 아르바이트를 나가게 되었다. 물론 거기가 회사는 아니고 아르바이트 구한 게 취직은 아니다. 어쨌든 요령이는 거기서 여전히 인기가 많았고, 나는 그냥 어제 하던대로 열심히 일을 했다. 그리고 지금 돌아온 것이다. 흐음, 그런데 멍멍이는 어떻게 된 거지? 역 시 몸이 성치 않은 녀석을 혼자 놔두고 나갔다 오니 걱정이 되네. "하, 멍멍아, 멍멍아. 어떻게 되었니. 멀쩡하면 한 번 짖어봐..." 나는 점퍼를 벗자마자 주위를 둘러보며 개를 불렀고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 던 나에게 갑자기 커다란 것이 불쑥 뛰어들더니 내 얼굴을 마구 핥아댔다. 우와악! 이게 뭐야! "우아아악! 깜짝이야!" 나는 그대로 뒤로 넘어져 버렸다. 콰당! "컹컹! 헥헥헥헥..." 뭐야? 멍멍이잖아? 녀석은 넘어진 내 위로 올라타더니 계속해서 내 얼굴을 핥아댔고 나는 개 가 깨어났다는 기쁨과 떠돌이 개가 내 얼굴을 핥고 있다는 찝찝함을 동시에 느끼며 말했다. "어이쿠, 이 녀석아. 지저분하다. 그만해. 어쨌든 어떻게 한나절만에 이렇 게 기력을 회복하니? 하하하!" "웡웡웡!" 녀석은 계속해서 꼬리를 흔들며 내 얼굴을 핥아댔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개가 덮쳐온다는 -물론 나에게로 덮쳐온 것이지만 녀석은 내 뒤에 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개가 덮쳐온 방향은 요령이 쪽도 된다는 말이다- 돌발 상황에 놀라버린 요령이는 짧게 비명을 지르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물 론 멍멍이가 나를 덮칠 때부터 요령이가 짧은 비명과 함께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 버릴 때까지의 시간은 지극히 짧은 시간이었다. "아, 으으?" 이상한 비명소리군. 어쨌든 자식. 겁먹기는. 개가 뭐가 무섭냐, 응? 그 개 는 내가 그 녀석을 살짝 밀쳐내고 일어서자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짖 어댔다. "월! 월! 월월월!" "하하하! 너 진짜 내가 좋은가 보구나! 야! 요령아! 이 녀석 봐! 진짜 나 를 좋아하나봐! 계속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좋다고 꼬리까지 흔들면서 짖어대잖아! 우하하!" 나는 그 녀석의 얼굴위로 손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고 그러자 그 녀석은 펄쩍펄쩍 뛰면서 헥헥거리더니 내 다리 사이를 빙글빙글 돌면서 내게 매달 렸다. "하하, 정말 좋아하는데? 너 내가 좋니? 네가 좋다니까 나도 기분이 좋다! 하하하!" 그리고 그런 우리를 바라보던 요령이가 가시돋친 한마디를 던졌다. "흥, 충견났네, 충견났어. 너같은 녀석과 개라. 너도 바보고 개도 바보고. 어울린다, 야" 이 말에 개는 요령이를 바라보며 으르릉거렸다. 으르르르.... 뭐야, 말을 알아 듣는거야? 어쨌든 잘한다! 그리고 나도 개의 편을 들어서 요령이에게 궁시렁대기 시작했다. "너 자꾸 말을 그렇게 할래? 야, 너도 이 개 좀 본받아라 임마. 이 개는 자기를 살려주니까 이렇게 나를 따르잖아. 너는 뭐야? 매일같이 부려먹기만 하고. 야야거리기만하고. 매일 투정이나 부리고. 너도 이 녀석 절반만 닮아 봐!" 그러자 그 녀석은 정말 어이가 없다는 듯이 양 손을 살짝 들어올리고 고개 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쉰다. "하아, 정말 어쩔 수 없는 녀석이네. 나보고 개를 닮으라고? 미쳤어, 정 말. 개란 것들은 죄다 멍청하다니까, 여하튼. 너같은 녀석이 뭐가 그리 좋 다고 따르는지. 하긴, 저 녀석도 너란 인간을 깨닫게 되면 아마 질색을 하 고 물려고 덤벼들거다, 아마" "야" "응?" "쟤가 너냐?" "......" 와! 이 재치 넘치는 나의 날카로운 한 마디! 내 한 마디에 녀석은 할 말 없다는 표정이 되어 버려서는 가르릉대었다. "가르르... 쳇. 알았어. 알았으니까 자꾸 저 녀석이랑 나를 비교하지마" "헥헥헥- 컹컹컹컹컹!" 개는 계속해서 나를 바라보며 짖어대었고 나는 그런 녀석을 즐겁게 바라보 면서 빙글거릴 수밖에 없었다. 정말 나를 잘 따르나보네. "어? 이 녀석, 우유도 다 먹었네?" 정신을 차리고 나서는 배가 고팠겠지. 아르바이트를 나가기 전에 혹시나 녀석이 깨어나면 먹으라고 그릇에 따라 놓았던 우유는 한 방울도 남김없이 사라져 있었다. "호, 우유 그릇을 깨끗이 다 비우다니 먹성도 좋네. 녀석. 하하하!" "뭐?" "컹컹!" 첫 번째 말은 내 말, 두 번째 말은 요령이의 말, 세 번째의 말은 개의 말 이다.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던 요령이는 결국 고개를 가로지으며 '처음부 터 개 줬던 우유 따위 먹을 생각 없었어! 어휴! '라고 중얼거리면서 신경질 적으로 자신의 코트(사실 이것도 내 것이다. 쳇)를 벗어서 던져버렸고, 개 는 누가 뭐라고 하던지 신경 쓰지 않고 꿋꿋이 나를 바라보며 컹컹대며 짖 어대었다. "컹! 컹컹컹! 컹컹컹컹컹! 힉-힉! 헥헥헥..." 얼마나 짖어대었으면 목소리가 갈라지냐. 참, 너도 우습다, 야. 나는 고개 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물 줄까?" "월월월!" 어쭈? 대답도 하네? 나는 요령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말도 알아 듣나본데? 너처럼 말야" 녀석은 나의 말을 듣고는 잠시 개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가로젓고는 뭔가 이상하다는 듯 갑자기 묘한 표정이 되었다. 뭘 그런 표정을 지으시나. 말 알아듣는 것 정도로 말야. "물 마셔라-" "월! 월!" 그 녀석은 빠르게 나에게로 다가오더니 꼬리를 흔들며 다시 내 주위를 빙 글빙글 돌면서 짖어대었다. 에구, 정신없어. 물 쏟겠다.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녀석아, 정신없어. 좀 앉아라" 그런데 녀석은 그 말에 갑자기 턱! 하고 앉는다. 허어? 이것 참 신기하네? "일어서" 벌떡! 다시 일어서는 녀석. "앉아" 털썩! "일어서" 벌떡! "우와-! 진짜 말을 알아 듣나봐! 이 개 무지하게 신기하다!" 나는 다시 소리를 질렀고 그 녀석도 좋은지 월월거렸다. 그런데 요령이의 개를 보는 눈빛이 아까보다 조금 더 묘해졌다. 왜 그러지? 뭐 상관없지. 나 는 나를 쳐다보며 헥헥거리는 녀석에게 물그릇을 놓아 주었고, 녀석은 찹찹 거리며 정신없이 물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찹찹찹찹찹...헥헥헥!" "그 녀석 참, 기세 좋게도 들이킨다" 나는 주저 앉아서 물을 마음껏 마시고 있는 녀석을 들여다보며 미소를 지 었다. 그런데 그 때 요령이가 끼어든다. "잠깐, 잠깐만. 야, 개! 으음... 앉아" "찹찹찹찹찹..." 녀석은 신경도 쓰지 않고 물을 들이켠다. 우하하하! 너 이 녀석, 요령이를 그-냥 한 방 먹이는구나! 너 마음에 들었어! "네가 다시 해봐" "앉아!" 요령이의 부탁에 나는 자신만만하게 멍멍이에게 명령했고 멍멍이는 물을 마시다말고 물그릇을 뒤엎을 기세로 주저앉았다. "일어서" 벌떡! 다시 일어서서는 내 다음 명령을 기다리는 멍멍이. 그 모습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요령이는 다시 멍멍이를 보며 말한다. "앉아" "웡!웡! 그르르... 찹찹찹-" "앉아. 앉으라고" "월월! 찹찹찹..." 그 녀석은 완전히 무시해 버리고는 물만을 들이키고 있었고 요령이의 눈에 는 점점 더 이상한... 의혹? 의심? 뭐 그런 눈빛이 짙어지고 있었다. 참, 뭘 그런 걸 가지고 의심을. 그리고 멍멍이 이 녀석아. 너도 저 녀석이 그렇 게 말하는데 한 번 정도는 들어줘라. "찹찹찹찹... 월?" 그런데 갑자기 그 개가 물을 마시는 걸 멈추고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그것도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까지 갸우뚱거리며. 왜 그러는 거야? 무 언가 있는거야? 으음...? 갑자기 왜 나를 쳐다보지? "멍멍아, 왜 그래? 어서 물 마셔" 내 말에 멍멍이는 다시 물그릇으로 입을 가져간다. 그러나 입은 물그릇에 있지만 눈은 계속해서 나를 쳐다본다. 저 녀석이 왜 저래? 응? 어? 갑자기 기분이 이상하다. 뭔가 으슬으슬해지는 듯하고... 왠지 갑자기 등 이 오싹해지면서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고, 갑자기 온 몸을 소름이 쫘악 훑 고 지나가기도 하고. 손가락 끝부터 발가락 끝까지 전율이 온 몸을 지리릿! 하고 통과하기도 한다.왜, 왜 이러지? 그냥 기분 탓인가? "요, 요령아. 갑자기 기분이 이상하다. 왠지 오싹하고 무서운게... 왜 이 러지...? ...어?" 나는 약간씩 떠는 목소리로 요령이를 바라보았고 순간 흠칫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녀석이 나를 마치 죽여버리겠다는 듯한 시선으로 날카롭게 노려보 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왜 이래? "응? 어, 어어? 너... 너 왜 나를 그렇게 노려보고 있어?" 나는 영문을 몰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는 다시금 깜짝 놀랐다. 이 번에는 조용히 물을 마시던 개가 벌떡 일어나서 요령이를 쏘아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 도대체 지금 상황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거야? 요령이는 나를 정말로 죽일 듯이 쏘아보고 있었고 그 눈빛을 본 나는 점점 무서워지고, 또 슬퍼졌다. 뭐...야? 내가 뭘 잘못했길래 그렇게 쳐다보는거 야? 갑자기 나를 그런 식으로 쳐다보는 이유가 뭐야? 날 그렇게 보지 마. 나는 너에게 그렇게 네가 죽이고 싶어할만큼 미움받을 일을 하지 않았단 말 이야. 내가 뭘 잘못했어? 말해봐. 사과할게. 너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아.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은 계속해서 나를 노려보고, 그 이상한 기 분도 점점 심해진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왜 나를 그렇게 쳐다봐? 나는 무언의 눈빛으로 녀석에게 물어봤지만 녀석은 그냥 그렇게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볼 뿐이었다. 그리고 점점 더 그 소름끼치는 기분은 강해져서 이 제 마치 무언가 거대한, 차가운 돌덩이 같은 것이 나를 짓누르는 듯한 기분 이 들었다. 괴롭다. 괴롭고 무서워서 참을 수가 없다! 이, 이 기분은... 이 기분은... 난... 가만히 있다간 죽어버릴 것만 같다! 누군가, 누군가 나를 죽일 것만 같아 서 불안해서 견딜수가 없다! 왜, 왜 이러지? 나는 요령이를 계속해서 슬프게 바라보며 말했다. "야, 나 저...정말 이상해... 몸이... 갑자기... 머리도, 막 아프고... 무 언가가 나를 누르는 것 같고... 왠지... 죽을 것 같다는 기분이 막 들고... 으윽... 이상해..." 그런데 나를 말없이 계속해서 노려보던 요령이가 입을 열었다. 말은 나오 지 않았다. 그냥 입만 벙긋거린 것이다. '이. 아. 애' 이...아애? 이아애? 미안...해? 그리고, 녀석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갑자기 그르르릉거리던 개가 나를 향해 마구 짖어대기 시작했다. "웡! 웡! 웡웡웡웡!" 그런데, 참 이상했다. 개가 짖어댈 때마다 내 몸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드 는 것이다. 도대체 너희들, 내 몸을 가지고 무슨 장난을 치는거지? 갑자기 짓눌리는듯 한 느낌이 들었다가, 이제는 다시 시원해지고. 도대체 뭐야? 그렇게 요령이는 나를 계속해서 노려보고, 개는 나를 향해 짖어대는 가운 데, 나는 점점 더 나를 짓누르던 그 무엇인가가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휴우. 이제야 좀 편해졌네. 그런데, 방금전에 그 이상한, 괜히 아무일 없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한 그 '무엇인가'는 도대체 뭐지? 개는 계속 나를 보고 짖다가 잠시 그르릉거리더니 내가 한결 편해진 안색 을 하자 이번에는 요령이를 보고 마구 짖어대기 시작했다. "워웡! 웡웡웡! 웡웡웡!" 그리고 벌어진 일은 아까 벌어진 일들보다 훨씬 더 이상한 일이었다. 개가 요령이를 보고 짖을 때마다 요령이가 조금씩 비틀댔던 것이다. 뭔지는... 뭔지는 모르지만 요령이에게 그런 짓을 하지 마! "멍멍아! 그만 해!" 그 녀석은 내 말에 짖는 것을 멈췄다. 내 말을 잘 들어주는 것은 고마운 데,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거야? 나는 요령이를 쳐다보았다. 그런 데, 놀랍게도 요령이의 손에서는 푸른 빛이 일어나고 있었다! 녀석은 중얼거렸다. "확실하군" 그 말과 함께 갑자기 나를 향해 뛰어든 요령이. 으아아악! "하지 마!" 순식간에 나와의 거리를 좁혀들며 달려드는 요령이. 뭐야, 갑자기! 결국 이렇게 이유도 알지 못하고 죽는건가? 이런 젠장!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젠장. 나는 결국 눈을 번쩍 떠 버리고야 말았다. "에라이 씨, 설마, 설마 요령이가 나한테 해코지하겠냐! 제기랄! 어디 보 자! 믿는다 요령아!" 믿길 잘했군. 녀석은 나를 어떻게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녀석은 나를 그대로 지나쳐버리고는 개에게로 다가가서는 목을 잡 고 그대로 벽에 찍어버렸다. 콰아앙! "끄으으응!"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도...도대체... 뭐야. 상황이 어떻게 돌 아가는 거지? 나는 요령이를 쳐다보았다. 요령이는 마치 멱살을 잡아 올리 듯이 개의 목을 잡고는 벽에다 대고 짓눌러 고정시키며 개를 노려보고 있었 다. 뭐야? 야! 무슨 짓이야! 나는 멍멍이를 쳐다보았다. 그 녀석은 불쌍하 게도 벽에 딱 붙은채로 요령이의 손에 목이 걸려서는 컥컥대고 있었고, 요 령이는 그 불쌍한 멍멍이가 컥컥대던 낑낑대던 상관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잠시 그 녀석을 노려보다가 억눌린 듯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는 정말 싸늘했다. "넌 누구야?" "컥, 컥, 끼...끼낑..." "말할 줄 아는 것 아니까 말해. 넌 누구야? 입을 놀릴 정도의 호흡은 될 테니까 말해. 말하지 않으면..." 요령이는 말을 끝내지 않고는 뭐라고 중얼거렸고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커 질수록 그녀의 손의 빛도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야, 뭔지는 모르지만 그 개가 불쌍하지도 않아! "말해! 말 하란 말이야! 넌 누구야?"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나는 외쳤다. "요령아! 하지 마! 그만해! 고통스러워 하잖아! 멍멍아! 어서 빠져 나와! 빠져 나오라구!" 그 순간. 멍멍이의 몸에서 갑자기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이야! 콰앙! "끼야아아악!" 이건? 요령이의 비명소리! 요령이는 멍멍이의 목을 조르며 너는 누구냐고 추궁하다가 갑자기 멍멍이의 몸에서 뿜어져나온 빛에 튕겨져 날아가버렸다. 그녀는 바닥에서 두바퀴정도 굴러가더니 그대로 재빠르게 몸을 일으켜서 빛 나는 손을 방어하듯 들어올리더니 외쳤다. "이...이이익! 너...! 도대체 누구야!" 뭐야. 요령이가 저렇게 되어 있으면 멍멍이는 어떻게 된 거지? 나는 주위 를 둘러보았고, 점차 사라져가던 눈가를 어지럽히는 빛 속에서 당당하게 서 서 요령이를 보고 그르렁거리는 멍멍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정말 빠져 나 왔구나. 하지만 너무 난폭했어. 그건 그렇고 내가 말하자마자 빠져나온건, 내 말이라면 모조리 듣는다는 거야? 어쨌든 그렇게 당당하게 서 있던 멍멍 이는 잠시 나를 큰 눈망울로 바라보더니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요물스러운 계집. 너야말로 누구냐. 우리 주인님께 지독한 살기를 뿜었 지. 너야말로 누구냔 말이다. 누군데 우리 주인님을 죽이려 했는가" ......이거 일이 점점 복잡하게 되는듯한 느낌인데. 아, 젠장. 난 복잡한 상황이 싫어. 머리가 아프단 말야. 이젠 마녀도 나오고 변신하는 고양이도 나오더니, 말하는 개까지 나와버린거야? 그리고 뭐, 요령이가 나에게 살기 를 뿜어? 그럼 아까의 그 마치 내가 죽어버릴 듯한 느낌이 요령이가 노려본 것 때문이었나? 어, 이것 참 젠장이로세. 방 안은 엉망이었다. 뭔지 몰라서 뒤로 물러나 있는채로 사태를 관망하고 있는 나. 그리고 대치하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과 개. 하지만 그 여인도 결 국은 고양이. 그리고 그 둘에게서 뿜어져나오는 이상한 기운에 흩어져버린 방 안의 온갖 사물들과 바람에 날리듯 날려 다니는 옷가지들. 요령이는 일렁이는 푸른 기운을 담은 손을 들어올려서 개를 똑바로 가리키 며 키득댔다. "어쩐지, 머저리같은 개 치고는 사람의 말을 잘 알아듣고 너무 주인을 잘 알아본다 싶었다. 어제는 의식이 없었을테니 영준의 냄새를 기억할 시간이 없었고, 오늘 아침 역시 쿨쿨 쳐자느라 영준이를 볼 시간도 없었을테고. 오 직 어젯 밤, 네 정신이 비몽사몽할때의 희미한 '이미지' 만이 남아있겠지. 그런데, 넌 그 이미지만 가지고도 사람을 구별해 내었어. 지성이 없이는 불 가능하지. 비록, 개가 동물들 중에서는 머리가 돌아간다지만, 그 머리로 이 정도나 해내기는 어림도 없어. 더군다나 이 영기. 일이백년 쌓아서 되는 것 이 아니군. 넌 누구냐" 그 개는 그르렁거리더니 말했다. "내가 너따위 요사한 계집에게 일일이 대답해야 하는가. 너야말로 대답하 라. 넌 누구인가. 왜 평범하고 아무 힘도 없어 보이는 우리 주인을 죽이려 했는가" "호호호, 호호호호호! 단지 살기가 뿜어져 나오면 모두 죽이려는 생각이 있는 것이라 착각하나본데? 바보자식. 난 널 떠본거다. 모르겠나? 떠 본 거 라구. 영준이를 공격하는 척하면 네녀석이 본색을 드러낼거라 생각했다. 너 는 그대로 속아넘어가 주었고. 역시 개들이란, 둔해. 호호호! 그건 그렇고 아까 너의 술법, 괜찮았다. 영기를 실어서 짖음으로서 나에게는 충격을 주 고 내가 잠시 영준의 몸에 쏟아부은 요기는 모조리 씻어낸다라. 아이디어는 칭찬해주지. 별 위력은 없었지만 말야. 호호호!" 요령이는 이제 배를 잡고 웃어댔다. 깔깔깔깔깔! 도대체 뭐야? 뭐가 그렇 게 웃겨? "그르르르... 어차피 그건 요기를 씻어내기 위한 기를 전달할 수단이 필요 했기에 음파를 이용한 것 뿐이다. 그리고 너를 향해 짖은 것은 견제였고. 어차피 너따위야 말해봤자 이해도 못 하겠지" 멍멍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도 살벌하게 보이는, 밝은 빛의 일렁임을 온 몸에서 뿜어내고 있는 그 녀석은 요령이의 날카로운 웃음소리에 기분이 나 쁘다는 듯 울음소리를 입 속에서 굴리면서 잠시 꼬리를 빳빳이 세운 후 요 령이의 질문에 하나 하나 대답하더니 나를 바라보고는 말했다. "주인님, 죄송합니다. 지성이 있다는 것을 숨겨서" "아...어...그래...그래. 그냥, 어, 괜찮아. 뭘 그런 걸 가지고. 숨길 수 도 있는거지. 하지만 왠만하면 나중에 왜 숨겼는지 정도는 말해 주겠니? 그 건 그렇고 누가 누구 마음대로 누구의 주인이냐? 아, 음. 이런 분위기에서 는 이런 복잡무쌍해서 기기묘묘한 대답에 대한 질문을 하기 힘들겠지. 이따 가 해도 좋아" 나는 약간 더듬거리며 말했고, 그런데 갑자기 개의 눈빛이 이채롭게 변했 다. 신기한 것을 본다는 양.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예. 놀라지 않으셨습니다. 대단하시군요. 역시 저를 구해 주신 분..." "아, 아. 뭘 그런 걸 가지고. 사실은 이런 경험이 한 번이 아니라서" 뭐 신기한 걸 한두 번 봐야지. 이제 말 안하는 동물을 보면 이상하다니까. 어쨌든 내 말에 멍멍이는 약간은 황당한 표정이 되어서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너같은 녀석이 지금 내 눈앞에 있거든" "박영준! 너..." "저 녀석은 고양이야" 나는 내 앞을 가리키며 멋적게 어깨를 한 번 으쓱한 뒤 씨익 웃었고 요령 이는 나를 무섭게 노려보며 뭐라고 궁시렁거렸으며 갑자기 개는 뒤로 좌아 악! 물러나더니 무섭게 으르릉거렸다. 마치 늑대처럼. "그르르르... 너 이 요사한 계집. 어쩐지 몸 주위에서 흐르는 건 요기밖에 없다고 생각했었다. 이 요물. 요물 중에서도 고양이라니. 끔찍하군. 주인님 옆에 이런 요물이 있다니. 너, 도대체 왜 주인님 옆에 있는 것이냐. 아까 대화를 잠시 들어보니 주인님을 가지고 놀더군. 도대체 뭐냐? 왜 주인님 옆 에 있는 것이냐? 간이라도 빼먹으려고 하나?" 그리고 멍멍이의 말에 요령이는 이죽거리며 대답했다. "멍청한 것. 내가 여우냐? 사람의 간을 빼먹게. 사람을 물어 죽이는 개는 있어도 사람을 할퀴어 죽이는 고양이는 없다. 바보녀석아. 나는 단지, 갈 데가 없어서 여기 있는 것 뿐이야. 그리고 너처럼 저녀석이 나도 구해 주었 기에 여기에 살면서 녀석을 도와주는 것이고. 네가 저 녀석을 주인으로 선 택했듯이 나도 저 녀석을 주인으로 선택했다. 그리고 나는 저 녀석이 주인 으로서 마음에 들었고" 마음에 들었다구? 나는 이 상황에서도 가슴이 약간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 다. 그러나 곧 그 두근거림은 멈췄다. 왜냐구? "거짓마아알!" 이것 때문에 깜짝 놀라서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었거든. 멍멍이는 마치 사자나 호랑이가 울부짖듯이 엄청난 소리로 울부짖었고 나는 비명을 지르며 귀를 틀어막았다. 으아악! 귀 떨어져! 내가 비명을 지르는 것을 보고는 멍 멍이는 나를 황급히 돌아보더니 고개를 푹! 숙이며 사과했다. "주인님. 죄송합니다" 데에에엥...귀 울리는 소리. 우와, 멍멍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개를 상대 로 뭐라고 타박할 수도 없고. 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저어주며 괜찮다는 제스츄어를 취해 주었고 나를 계속 미안해 죽겠다는 눈빛으로 쳐 다보던 멍멍이는 내 괜찮다는 뜻의 행동에 고개를 돌려 다시 고양이를 노려 보며 말했다. "거짓말 하지 말아라. 요물" "자꾸 요물요물 하지 말아줄래? 나 요물이란 걸 무척 싫어하거든?" "요물이 요물을 싫어한다라. 역시 거짓말만 늘어놓는군. 이 말도 네가 거 짓말쟁이라는 것을 뒷받침해 주지만 넘어가고, 일단 너의 아까전의 말부터 따져보자. 뭐라고 했지?저 분께서 너를 구해줘서 네가 저 분을 주인으로 모 신다고?" "그래. 그렇다. 문제 있어?" 멍멍이는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그르르르르... 거짓말 하지 마라. 저 분을 주인으로 모신다고? 너의 태도 가 주인을 모시는 태도인가" 동감이야! 옳소! 요령아, 들었냐? 너는 나한테 조금이라도 존경심을 가져 야 한다구. 하지만 요령이는 멍멍이의 말에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흥. "흥. 웃겨 주시는군, 정말. 우리가 너, 머저리 개처럼 주인을 평생 받들어 '모시는' 줄 아나? 너의 주인의 개념과 나의 주인의 개념은 다를텐데. 그리 고 저 멍청이도 불만은 없어 한다고" "주인님을... 네 멋대로 말하지 마라. 그 가느다란 목을 부러뜨리기 전에" "해 보시지? 나는 가만히 있을줄 아나? 어디 한 번 해 보라구. 동기를 부 여해줄까? 박영준 멍청이, 멍청이, 멍청이. 호호호!" 아이 씨, 왜 또 나는 걸고 넘어져! 만만한 게 나냐? 어쨌든 요령이 녀석이 그렇게 지껄이자 개는 정말로 머리 끝까지 화가 났다는 표정으로 온 몸에서 흰 색 기운을 폭포수처럼 뿜어내면서 중얼거렸다. "계집... 얼마나 영력을 쌓았는지는 모르지만. 영물을 이길 수 있을 것 같 은가" "글쎄? 나도 하루 이틀 살아온 몸이 아니라서. 모르겠는걸? 그리 만만하지 는 않을텐데?" "그르르... 건방짐이 하늘에 다다랐군. 주인님을 업신여긴 대가가 무엇인 지 보여주지" "좋아. 어디 한 번 보자구" 아, 이거 이러다가 둘이 진짜로 싸우는 거 아냐? 분위기가 험악치 않은데! 뭐야, 도대체! 어쩌다가 이런 분위기까지 오게 된거야! 요령이는 전신에서 검은빛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고 멍멍이는 온 몸에서 흰 빛 기운을 쏟아내고 있었다. 이런 젠장, 진짜 한다! 말려야 해! "모두 그만들 해! 제기랄!" 말해 버렸다. 에구. 분위기 험악한데, 설마 나를 주인으로 모시는 동물 두 마리한테 동시에 맞는 건 아니겠지. 다행히도 그 둘이 동시에 나에게 '왜 끼고 난리냐-!'라면서 공격을 가하 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휴우. 일단 한 숨 놨군. 그 대신 그 둘은 모두 나를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 요령이의 눈빛. "......예, 알겠습니다" 멍멍이의 눈빛과 순종하는듯한 대답. 역시 착한 녀석이다. 그러나, 녀석은 그 대답을 마치고는 계속해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아서 나를 당혹케 했다. 눈치는 좀 없군. 하긴, 개들을 보고 있노라면 꼭 눈치없게 무조건 아무때나 주인에게 달라붙다가 얻어맞는 경우가 종종 있긴 하지. 그게 사람들이 개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말야. 어쨌든 그렇게 멍멍이가 계속 나를 바라보고, 요령이도 아까 내가 고함을 질렀을 때부터 계속해서 날 쳐다보고 있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아, 무 안해라! "......아이 씨, 무안하게 왜 쳐다보고 그래" 나는 그 둘의 시선에 처음에는 당당히 그 둘을 번갈아 노려보다가, 곧 얼 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푹 숙이고야 말았다. 무슨 의미가 담긴 시선이건간 에, 요령이 같은 미인의 시선을 계속 똑바로 받고 있자니 부끄러워졌던 것 이다. 아, 나도 진짜 나를 못 말리겠네. 정말. 왜 이리 주책이냐 진짜. 나 는 손가락들을 비비 꼬며 말했다. "어, 그러니까, 내 말은, 어, 그러니까, 너희들끼리의 대화에 갑자기 끼어 들어서 미안한데, 어, 그러니까, 내 말은..." "저런 자신의 말도 똑바로 못하는 바보자식 신경쓰지 말고 하던거나 계속 하자" 요령이는 날 잠시 쳐다보더니 다시 멍멍이를 바라보면서 차갑게 내뱉었고, 그 말에 멍멍이는 백색 기운을 다시 폭포수처럼 뿜어내면서 미친 듯이 화를 냈다. "우리 주인님을 무시한 것인가! 그 분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빌어먹 을 고양이들은 주인님의 말을 경청하는 예의 따위는 눈꼽만큼도 없단 말인 가!" 그 녀석은 금방이라도 요령이의 목을 물어 뜯어버리기라도 할 듯이 불같이 화를 내며 그녀를 노려보았고, 그래서 요령이는 더욱 멍멍이를 무섭게 노려 봐주었다. "웃기고 있네. 야, 나도 쟤가 다 이해하니까 그러는거야. 쟤 속이 너처럼 밴댕이 속인 줄 아냐? 그리고, 말한 영준이는 자기 말 끊었다고 뭐라고 안 그러는데, 왜 네가 쌍지팡이를 짚고 나서냐? 어이구, 눈빛 봐라. 옷 뚫어지 겠다. 그만 노려봐라" "네 말, 한마디 한마디를 자근자근 씹어주고 싶을 정도로 귀에 거슬리는 군. 남에게의 예의는 한강수에 쳐박았는가" "너따위에게 예의를 차려야 하나? 그것도 참 괴로울 것 같지 싶군. 그리고 너는 예의를 지켰니? 남에게 하기 전에 너를 돌아보시지? 호호!" "나는 당하는대로, 그대로 돌려준다! 내 주인님에게 살기를 퍼부은것은 누 구인가!" "그리고 자신이 '힘'이 있다는 걸 숨겨서 의심살 짓을 한 것은 누구지. 아, 그러고보니 넌 아직도 네 녀석에 대해 아무것도 밝히질 않았군?" "허, 그러는 너는 내게 너의 무엇을 밝혔는가! 그리고, 의심이 간다고 무 조건 멱살을 잡고 벽에 찍어버리는 그 태도는 무엇인가? 너같은 요물에게도 계속 말을 하는 내 자신이 한심하군!" "호, 좋아. 결국 말이 필요없다는 말인데, 말이 필요없다면 바로 치고박기 네. 네 취향이야 어떤지 모르겠지만, 난 그거 좋아해. 한 번 해 볼까?" 요령이의 말이 끝나자 요령이의 몸 주위에서 흐르던 흑빛, 혹은 자색의 기 운들이 마치 그녀의 몸을 살라먹으며 타오르는 횃불인양 심하게 일렁이기 시작했고 그 검은 기운 속에서 요령이는 날카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멍멍이는 요령이의 그 모습을 보고는 경련하듯 몸을 떨더니 심하게 일그러 진 얼굴로 억눌린 듯 성대 속에서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굴리다가 천천히, 정말 하기 싫은 말을 한다는 듯 입을 열었다. "싫다" 어? 이런 대답은 의외인데? 정말? 뭐, 나야 좋지만, 갑자기 왜? 겁이라도 먹은거야? 요령이는 잠시 생각도 못했던 대답을 들어서인지 눈이 동그래지 더니 곧 배를 잡고 웃어대기 시작했다. 깔깔깔깔깔! "깔깔깔깔깔! 그래? '싫단' 말이지? 고양이가 개한테 싸움을 걸었는데 개 가 싫다고 했단 말이지? 이거야말로 코메디군. 깔깔깔! 고양이한테 겁먹어 버린 불쌍하고 가련한 개라니! 깔깔깔깔! 아까는 그렇게 자신감 있게 말하 더니, 정작 해 보자니까 꽁무니를 빼는군. 내 알기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이 이 나라에서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던데, 너는 고양이 무서운줄은 아는걸 보니 하룻강아지는 아닌가 보군? 깔깔깔! 아, 미안해. 겁쟁이씨. 아픈곳을 찔러서. 깔깔깔!" 하. 정말 요령이도 참. 멍멍이가 싸움을 안 하겠다고 한 발 뒤로 물러서면 그냥 그러려니하고 넘어갈 것이지. 저렇게 비웃어댈 것은 또 뭐람. 요령이 가 저렇게 계속해서 멍멍이를 보고 '겁쟁이'라고 놀려댈수록 멍멍이의 털은 한올 한올 솟아올랐고 입술을 들어 올려서 드러나는 이빨도 하나 둘 늘어갔 다. 그렇다. 요령이의 조롱에 점점 화가 나고 있는 것이다. "나를 자극하지 마라. 난 분명히 너와 싸우고 싶지 않다고 했다" "싸우고 싶지 않은게 아니라 싸우기가 겁이 나는 것이겠지. 오호호호!" "그만하라고 했을텐데, 분명히" "싫다면, 이 겁쟁이 개 녀석아. 오호호호!" 그 말을 들은 멍멍이는 이를 드러내더니, 갑자기 땅을 박차고 옆으로 움직 였다. 부드러웠지만, 그 움직임은 엄청나게 빨랐다. 뱀이나 도마뱀에게서나 볼 수 있을 듯한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고 정확한 움직임. 쉬리릭! 그리고 눈물까지 좍좍 흘리며 웃어대다가 멍멍이의 움직임을 느낀 요령이 는 갑작스레 시작한 것처럼 갑작스레 웃음을 멈추고는 순식간에 튕겨나가듯 앞으로 튀어간다음 재빨리 땅에서 구르면서 솜씨좋게 뒤로 돌아서 일어났 다. 모두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고, 그래서 아직 상황판단이 잘 되지 않 은, 의문으로 가득찬 내 눈에 아까와 전혀 다름없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그러나 자리를 바꾸어 서 있는 요령이와 멍멍이가 들어왔다. 그 장면을 보 고 있자니 약간 혼란스러웠다. 아니, 어쩌다 자리를 바꾼거지? 그리고 이렇 게 순식간에 이렇게 둘이 빠르게 움직이다니? 요령이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그 녀석은 양 팔을 엑스자로 교차시키고는 마치 방패처럼 가슴 위로 들어올리며 신음하듯이 말했다. "겁이 나서라는 말은 취소해야겠군. 나를 겁내는 척 하면서 순식간에 내 뒤를 잡으려 하다니. 개치고는 머리가 제법 돌아가는걸... 하지만 실패야, 미안하게도. 좋아. 너의 그 방금전의 행동은 나에 대한 기습으로 생각해도 되겠나?" "멍청이. 그건 위협이었을 뿐이다. 계속 나를 자극하면 진짜로 너를 공격 할지도 모른다는 위협. 네 뒤를 잡는 것으로 내가 네게 겁먹어서 가만히 있 는게 아니라는 걸 확실히 보여주려 했지" 멍멍이는 귀를 바짝 세우고는 송곳니를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네 말대로 실패했다...역시 고양이답게 제법 빠르군. 위협 정도의 수준으로는 아무것도 안 된다는 건가" 요령이는 멍멍이의 말에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머리 옆으로 한 손을 들 어서 마구 흔들더니 말했다. 한마디로 황당해서 말도 안 나온다는 제스춰를 취한 것이다. "하! 충분히 싸울 수 있는데도 참는다고? 방금전 건 그저 위협이었을 따름 이라고? 기습이 실패하니까 별소릴 다하네? 설마 지금 네 말을 나보고 믿으 라고 지껄이는거야? 그럼 지금은 왜 또 안 덤비는데? 어디 한 번 능력 있으 면 덤벼 봐! 덤벼 보라고!" 멍멍이는 이 말에 씁쓸히 미소짓더니 (물론 그런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는 것 뿐, 실제로는 그저 잔뜩 찌푸린 얼굴이었을 뿐이다. 개는 표정을 못 만 드니까) "주인님의 명이시다. 너와 싸우지 말라는" "뭐? 지금 그걸 이유라고 대는거야앗! 나를 무시하는 거야 지금?!" 요령이는 마치 크리스털 잔을 깨는듯한, 아름답고 매력적이면서도 소름끼 치는 마치 비명같은 고함을 질렀다. 으으! 온 몸에 소름이 쫘악! 끼치네.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 너의 몸에서 흐르는 요기는 예사로운 수준 이 아니니" "그래. 하지만 방금전의 네 말은 분명히 나에 대한 무시였어! 개 따위에게 이런 모욕을 받고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덤벼! 덤벼엇!" 요령이는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는 앙칼지게 소리쳤고 개는 그저 그런 요 령이를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 "주인님. 어떻게 할까요. 저 고양이는 제가 덤비길 원합니다" 멍청아. 저건 허세야! 자기의 자존심이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한 요령이가 그냥 괜히, 마치 어린애가 떼를 쓰듯이 억지를 부리는 거라구! 뭐, 저렇게 혼자 화나서 분에 못 이겨 씩씩대는 모습을 보자면 조금 안쓰럽고 측은하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는 짓이 귀엽고(...는 아닌가?)...등등의 기분이 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저럴 때 덤볐다간 아마 너희 둘이 싸워대는 통에 집 무너질걸. 그래서 나는 되도록 부드럽게 요령이와 멍멍이를 번갈아 바라보 며 말했다. 그리고 나는 내 말이 늘어질수록 점점 더 화난표정에서 어처구 니 없는 표정으로 변해가는 요령이의 표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멍멍아, 네가 덤비기를 요령이가 원한다고? 아니야, 아니야. 쟤 얼굴은 그렇게 안 생겼어도 무지 착해. 그냥 해 본 소리일거야. 쟤가 원래 내숭같 은 걸 잘 떨거든. 그러니까 맘 넓은 멍멍이 네가 참아. 그리고 이것들아. 한식구가 될 것들이 싸우면 어떻게 하냐. 내가 보아하니, 방금 전에 멍멍이 가 '저 고양이'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둘은 아직 서로의 이름도 모르나보군. 맞지? 너희 이름 알아? 아, 모른다고. (요령이는 '내가 언제?' 라고 외쳤지만 나는 물론 무시해버렸다) 자자, 그럼 둘 다 일단 자기 소개 부터 하고, 악수하고 잊으라고. 자, 자기 소개! 자기 소개! 요령이부터! 이 름 말하고 손 내밀기! 주인의 부탁이니까 거절하기 없기!" 요령이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야, 자꾸 그렇게 노려 보지 마. 계속 그런 식으로 네가 노려보면 네 얼굴을 마주 바라볼 수 있어 서 좋아 죽겠어...가 아니라, 가 아니라, 가 아니라! 젠장! 도대체 나 요즘 왜 이러는거야! 어쨌든 그렇게 요령이는 계속 나를 노려보았고, 한참을 여유롭게 그 눈빛 을 받아주던 나는 씨익- 하고 멋적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 '멋 적은 웃음' 이라는 건 정말로 양면성을 띄는 것 같단 말이야. 어찌 보면 다 시없시 여유로운 생각이 들게 하는 푸근한 모습이기도 하고. 어찌 보면 전 형적인 바보의 웃음이고. 저 녀석은 둘 중 뭘로 받아들일까. 어쨌든 나는 저 녀석을 향해 웃어주었어. 저 녀석은 머리 끝까지 화가 나 있는 상태고. 자, 과연 녀석의 반응은 무엇일까? 이것, 나름대로 궁금해지는데. 녀석은 계속해서 멋적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나의 모습을 노려보다가... 결국 '풋'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와아! 됐다! 녀석은 그렇게 억 지로 웃음을 참다가 결국 새어나오는 듯이 웃어버렸고, 그 뒤로는 이왕 웃 은 것, 더 참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는 듯이 결국 뒤집어졌다. "꺄하하하! 너, 뭐야! 너무 바보같잖아! 웃겨, 웃겨 죽겠어! 너, 정말 웃 긴다!" ......바보 같다구? 에이, 넘어가 넘어가. 뭐 어때. 저 녀석이 저렇게 즐 거워하는데. 어쨌든 천만다행으로 방금 전의 팽팽한 긴장감을 이루고 있던 두 축중 하나가 이로서 완전히 무너져 버렸군. 요령이는 지금 마치 누가 옆 에서 간지럽히기라도 하는 듯이 배까지 잡고는 웃어대고 있거든. "꺄하하하! 꺄하하하하! 콜록, 콜록콜록콜록! 켁, 케엑...헉, 헉! 꺄하하 하하!" 저렇게 웃다가 사레까지 들리고 말야. 그런 녀석을 바라보는 내 입가에서 기분좋은 미소가 지어졌음은 물론이다. 참 귀여운 짓을 하는군, 그래. 녀석 은 허리가 꺾이도록 웃다가 사례가 걸려서 가슴을 두드려대고, 어찌어찌 넘 어가면 다시 미친 듯이 웃는 짓을 반복하고 있었다. 저렇게 기분 좋을때가 기회겠지. "야, 그만 좀 웃어라. 머리에 꽃 한송이만 꽂으면 완전히 무슨 미친 여자 같겠다. 그만 좀 웃고, 이제 아까 내가 말한 걸 해 줘야지?" "미치이인여자아아?" 그 녀석은 웃음을 딱! 멈추고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내 말을 반문했다. "아니, 미친 여자가 아니고 미인 여자. (그말에 요령이는 '그렇지?'라고 말하며 혼자 좋아서 입을 가리고 키득댔다) 어쨌든, 너, 내 덕분에 실컷 웃 었으니까 이제 내 부탁을 들어줄래?" "무슨 부탁?" 아까 내가 중언부언 떠들었던 말은 전혀 안 들었군. 젠장. 하긴, 내가 쟤 라도 내가 지껄였던 말들은 하나도 못 알아 들었겠다. 그 때는 싸움을 말려 야겠다는 절박한 생각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아, 그러니까, 저 녀석에게 손 내밀고 화해하라는 말. 어차피 같은 식구 가 될 건데, 시작부터 이렇게 얼굴 붉히고 싸우면 어떻게 해" 요령이는 그 말에 화를 내기보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누구랑 누가, 한가족인데?" "너랑 쟤" 나는 손가락으로 요령이와 멍멍이를 가리키며 말했고, 그 녀석은 그 말에 얼굴을 화악! 붉히더니 (물론 부끄러워서 그런 건 절대 아니다) 더듬거리면 서 말했다. "누누누, 누, 누가 누구랑 같이 살아?" "너랑 쟤" "마, 말도 안 돼! 난... 그러니까 난..." "군소리하지 말고. 그럼 쫓아낼거야? 어차피 지금 내보내봤자 결국 또 떠 돌아다니다 어제 우리가 봤던 것처럼 쓰러져버릴걸. 그걸 뻔히 알면서 불쌍 해서 어떻게 내보내냐. 그리고 저렇게 주인 주인 하면서 따르는데" "하지만..." "쟤도 좋다고 할 걸. 멍멍아, 너 나랑 같이 살고 싶니?" "저는 주인님이 남기를 바라면 남고 가기를 바라면 떠나갑니다" 이렇게 대답하면 또 내가 황당해지지. "아아, 그러니까, 네 생각을 확실히 말해 보라구" "전 주인님을 따르고 싶습니다. 일단 주인님을 제 주인으로 선택했으니, 가까이에서 모실수록 전 좋습니다" "그래, 그렇지? 그것 봐. 얘도 좋다잖아. 요령아. 어차피 너도 받아들였는 데 이녀석 하나 더 못 기르겠냐" 솔직히,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멍멍이를 기르고 싶은 생각 따위 별로 없 다. 뭐, 우리가 확실한 돈벌이가 있어서 저 녀석을 안 굶길 수 있는것도 아 니고, 또 좁디좁은 이 방에 불청객이 하나 더 끼어들면 무지하게 불편해질 게 뻔하잖아. 하지만, 저렇게 날 보고 '주인님, 주인님' 하면서 맹목적으로 따르는 녀석을 저렇게 찬바람 쌩쌩 부는 곳으로 내쫓아 보내기도 또 좀 그 래. 그랬다가는 밤에 잠자리가 무지 불편할 것 같거든. 후우, 할 수 없잖 아. 하여튼, 난 마음이 약해서 탈이라니깐. 어쨌든 나의 말에 요령이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저 멍멍이자식, 정말 염치없다. 참, 나 원. 살려줬더니 빈대붙으려고 하 네!" 그 말에 나는 요령이를 계속해서 쳐다보았다. 계속해서. 아무 말 없이. 그 리고 그런 나의 눈빛을 이리저리 피하던 요령이는 마침내 부끄럽다는 표정 으로 얼굴을 확! 붉히고는 화끈거리는지 계속해서 만지작거리며 모기소리만 하게 말했다. "체...쳇. 젠장. 그, 그래. 나도 네가 구해준 뒤로 빈대붙었다, 뭐. 그래 서 부,불만 있어?" 하핫! 저 녀석이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히다니! 저런 모습을 보는 건 또 처 음이네! 진짜 귀여워 미치겠다!...가 아니라!...가 아니라 귀여운 건 귀여 운거야! 계속해서 부끄럽다는 듯이 얼굴을 붉히고 나를 외면하면 뭐라고 뭐 라고 들리지도 않을 정도의 크기로 무엇인가를 작게 중얼거리는 저 녀석은 정말이지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하아. 쩝. 어쨌든 그렇게 자기 스스로 멍멍이나 자기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말하게 한 나는 요령이를 계속 바라보며 말했다. "자, 저 녀석이나 너나 마찬가지야. 처음에 내가 구해준 것도, 결국 나와 같이 살게 된 것도. 그러니까 네가 이해해. 그리고 이제 악수만 하면 되는 거야. 악수하고 화해하라구" "악...수? 내가? 개에게? 먼저 손을 내밀라고?" "그래. 뭐 문제 있어?" "물론 문제 있어! 난 절대 못해! 그런 짓 따위!" "하아. 뭐, 존심상 그렇다면야 할 수 없지. 야, 멍멍아" "주인님. 부르셨습니까" "그래. 요령이가 먼저 손내미기 싫으시단다. 너도 그러니?" 멍멍이는 이번에는 '주인이 원하신다면...' 따위의 말을 붙이지 않고 그냥 앞발을 내밀었다. "아까는 미안했다. 잠시 네가 주인에게 살의를 보여서 그랬을 뿐이다. 이 제부터 잘 지내보자. 나는... 주인님은 내게 멍멍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 으므로 내 이름은 이제부터 멍멍이다. 멍멍이라고 불러다오" 자식, 통이 크구나! 좋-다! 멋지다!넌 사나이중의 사나이, 남자중의 남자 다 임마! 우하하하! 나는 혼자 좋아서 싱글벙글거렸고 멍멍이가 내민 조그 만 앞발을 잠시 바라보던 요령이는 멍멍이를 바라보고 다시 나를 바라보다 가 말했다. "아, 저, 꼭 해야 되는거니? 안 하면 안 되는거야?" "꼭 하지" "내가 왜 네 말에 따라야 하는데?" "따지지 말고 그냥 좀 들어줘라. 응? 그럼 어차피 같이 살 거면서 언제까 지 이렇게 서먹서먹하게 하고 살 거야?" 내 말에 한숨을 폭 쉰 요령이는 결국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쳇. 나는 손이고 저 녀석은 앞발이라면 너무 불공평한 거 아냐?" 하하하하! 귀여운 자식. 결국 난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요령이는 왜 웃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하다 나를 바라보았고. 그 모습을 본 나는 계속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나 미쳤나봐. 왜 이리 웃음이 나오나, 그래. 어쨌든 요령아. 앞 발이라도 상관 없잖아. 어차피 너도 모습만 손이고 앞발이니까" "그건 그렇지만..." "그냥 잡고 흔들어. 그러면 되는거야" "쳇!" 요령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고는 두 손가락으로 멍멍이의 앞발을 살짝 잡아서 티도 안나게 흔들고는 마치 불에 덴 듯 손가락을 급하 게 떼어 버렸다. 그리고 나는 박수를 쳤다. "와아-! 휘이익! 휘익!" 요령이 녀석이 내 혼자만의 환호에 못마땅해하며 가시를 던졌음은 물론이 다. "혼자 쇼를 해라 쇼를 해. 그리 신나냐?" "응. 무지 신나" "흥, 신나는 것 많아 좋기도 하겠네" "응, 무지 좋아!" "좋아 좋겠다. 바보야" 그 때 멍멍이가 끼어들었다. "주인님을 그런 식으로..." 그리고 요령이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려서 최대한 험악하게 만들고는 멍 멍이의 목소리를 굵직하고 과장되게 흉내내기 시작했다. 깜찍한 것 같으니 라고. "'주인님을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라', 얼씨구, 잘 났어, 정말" 그리고 멍멍이는 다시 으르렁거렸다. "너 정말 자꾸..." 아악! 화제를 돌릴 거리가 필요해! 화제를 돌릴 거리가! 이대로 가다가는 또 아까의 반복이다! 젠장... 나는 계속해서 머리를 부여잡고 악수를 나눈 지 일분도 되지 않아서 거칠고 굵은 목소리가 오고가는 두 녀석 사이의 대 화를 종식시킬 방법을 생각해대기 시작했다. 뭐가 있지...? 뭐가... 뭐가... 아, 젠장! 이러는 동안에도 요령이와 멍멍이는 계속 험악한 대화를 나누고 있을텐데! 잠깐. 대화...? 요령이는 그렇다치고, 멍멍이는 어떻게 말을 할 수 있는거 지? 하! 갑자기 무지무지 궁금해진다! 좋았어! 이 정도의 이야기라면 요령이도 궁금해서 입을 다물겠지! 녀석도 호기심은 무지무지 많으니까! 나는 곧 다 시 요기와 영기를 뿜어내려고 하는 요령이와 멍멍이 사이로 몸을 던져서 끼 어들며 물었다. "왜 싸워! 왜! 왜 또 싸워! 방금 전에 악수 했잖아! 응? 에라이 이것들아 !" "야! 나는 하고 싶은 말도 못 하냐! 그리고 저 자식이 먼저..." 에이. 솔직히 네가 먼저 시비를 걸었어. "주인님, 죄송합니다. 분명 사이좋게 지내라고 하셨는데..." 멍멍이는 고개를 푹 떨구며 정말로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고, 그래서 나는 더 추궁하려던 것을 관두고는 물었다. 흐음. 그건 그렇고 이렇게 매일도 아 니고 매시간도 아니고 분단위로 싸움이 붙어서야, 앞으로 정말 걱정되는군. "아, 괜찮아, 괜찮아. 뭐, 안 되는 걸 억지로 부탁하는 것도 잘못이지. 그 건 그렇고 멍멍아. 난 정말 너만 보다 보면 궁금한 게 있는데" "하! 지가 멍멍이를 보면 얼마나 봤다구. 하루 딱 봐 놓고서는" "요령이 너, 비꼬지 좀 말고 조용히 해! 으음. 에이 씨, 요령이 너 때문에 말이 이상해져 버렸잖아. 다시! 멍멍아, 궁금한 게 있는데" "무엇입니까?" "응. 좀 말 해줄래?" "무엇이든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주인님" "멍멍아. 너 어떻게 해서 그렇게 신기한 녀석이 되어 버렸니?" "제가 신기합니까, 주인" "응. 무지" 나는 요령이의 이마를 콕콕 찍고는 말을 이었다. 손가락이 폭폭 들어가는 게, 꽤 느낌이 좋았다. 물론 녀석은 무지 기분나쁜 표정이 되어서 나를 새 초롬하게 노려봤지만, 뭐 상관없어. "이 녀석은 마녀의 고양이라서 말을 할 수 있게 된 거래. 얘는 자신이 어 떻게 지금까지 오게 되었는지 다 말해 줬는데. 너는 어떻게 말을 하게 됐 니...? 그냥, 너에 대해서 좀 알고 싶어. 아,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않아도 돼" "주인님이 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드리는 게 제 의무입니다. 궁금하시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주인님의 기대만큼 그리 듣기 즐겁다거나 재미있 는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아, 아. 상관없어. 중세 마녀의 이야기보다는 밝은 분위기겠지" "너..." 요령이는 내 옆구리를 꼬집었고 나는 그냥 웃어넘겼다. 물론, 무지 아팠 다. 밝은 분위기를 위해서 내가 정말 엄청나게 희생하는군. "우헤헤. 어쨌든, 해 줄래" "예. 좋습니다. 무슨 이야기부터 해 드릴까요" 그렇게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할 수 있는 한 옛날부터" "알겠습니다" 멍멍이는 서 있던 자리에서 입을 열었고 그래서 나는 말했다. "긴 이야기라 서 있기 힘들다면, 앉아서 하렴" "감사합니다" 녀석은 고개를 꾸벅이고는 바닥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는 그르렁거리며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혀를 길게 빼물고는 잠시 하품을 좌악 하더니 입을 열었다. 흐음. 주인이 구속하지 않는 선에서는 자신의 자유대로 한다는 건 가. 역시 개랑 같군. 하긴, 그렇지 않으면 용변이나 식사까지 모조리 주인 의 허락을 받아야겠지. 나는 이렇게 잡생각에 빠져 있다가 요령이는 어쩌고 있나 궁금해져서 녀석을 힐끗 바라보았고, 정신없이 호기심에 취해있는 녀 석의 얼굴을 보며 킥 웃고 말았다. 단순하긴. 방금 전까지의 험악했던 분위 기는 어디 갔니! 하하하! 내가 이런 잡생각에서 벗어날때까지 기다렸는지 멍멍이는 입을 열지 않았 다. 으음. 그것보다는 녀석이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게 맞겠군. 왜냐하면 내가 생각을 멈추고 멍멍이를 바라본 뒤에도 멍멍이는 생 각에 잠긴 표정으로 입을 열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한참동안 이야기를 정리하는지 생각에 빠져있던 멍멍이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우리 옛 주인님은... 평범한 인생을 원했습니다" 때는 조선시대. 연도로 따지자면 약 300년 전. 멍멍이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최초의 주인 이상환은 '하늘이 내린 천재'라는 세간의 속칭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평범 한 인생이라는 소박하디 소박한 꿈을. ...이상환은 사대부들의 도시 한양에서도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 그분' 하고 알아 볼 수 있는 집안의 장자로 태어났다. 세 살 때 이미 사서삼경을 읽어나가기 시작했으며, 일곱 살 때 이미 종일품이자 성리학의 대가로 불리 웠던 자신의 아버지와 성리학의 여러가지 화두들을 놓고 논하기 시작했다. 그 정도로 뛰어난 학문적 소양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몸이 남보다 훨씬 약했다. ...이상환이 10세 때. 그는 언제나 몸이 약해 아무와도 놀지 못하고 외로 워했고, 그런 그를 불쌍히 여긴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강아지 한 마리를 선 물했다. 친구가 생겼다는 기쁨에 들뜬 상환은 아버지에게 수십 번의 절을 하며 그 강아지의 이름을 자신이 언제나 추구하던 모습, 즉 바보같이 약해 빠진 자신의 몸과는 전혀 다르게 천년 만년 언제나 굳건하고 강하게 서 있 는 산의 이름을 따서 '한뫼', 즉 큰산이라고 지었다. 그리고 그 강아지는 주인을 아주 잘 따랐다. ...그가 주역을 읽기 시작한 것은 12세 때였다. 그는 언제나 더욱 큰 깊이 의 학문을 원했고, 그런 그에게 주역은 충분할 정도의 연구과제를 가져다주 었다. 그는 곧 주역에 빠져들었고, 얼마 안가서 그것을 거의 이해할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그 때쯤 주역의 연구는 그에게 아주 큰 '놀이거리'가 되어 있었다. 상환은 주역을 보고 여러가지를 생각하는 것이 즐거웠던 것이다.우 주의 원리, 기의 운행술, 그것에서 솟아나오는 부가적 지식들을 이용한 미 래로의 예지와 과거로의 사색과 탐구 등등 주역이 던져주는 화제를 곱씹으 며 그는 언제나 만족해했고, 유가의 책들과 가끔씩 비교해보기도 하고 스스 로 도가와 유가의 양쪽에 입장에 번갈아 서 가면서 우주만물과 사람의 마음 에 대해 토론을 하기도 하는 등등 주역을 통해 그는 자신만의 놀이를 상당 히 많이 만들어내었으며, 그것에 언제나 심취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이단이라고 믿으면서도 (성리학자에게 도가의 술 법을 이용한 '예언'은 이단이다) 말 그대로 장난삼아 자신의 괘를 뽑아보았 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몇 번 더 반복한 뒤에 계속해서 같은 괘가 나 오는 것을 보고는 사색이 되어서 한뫼를 데리고 홀로 강원도의 심심산골로 들어가 버린다. 그 괘의 내용을 해석하면 이랬다. '이 운명의 소지자는 30세가 되기 전에 병으로서 죽을 것이며 그것은 운명 이기에 누구도 바꿀 수 없다' ...이상환은 천재였다. 그러나 하늘은 그에게 명석한 두뇌 대신 그의 건강 을 빼앗아 버렸다. 그는 언제나 이유모를 몸 속의 질병에 시달렸으며, 그의 근육은 어느 부위나 간신히 그의 주인을 지탱할 정도이상의 힘을 내지 못할 정도로 약했다. 그는 그런 자신을 저주했다. 그는 심지어 마음마저 약했다. 그래서 죽음이 두려웠다. 언제나 고통에 시달리는 그. 그는 시도때도 없이 각혈했으며 앓아 눕는날도 많았다. 그럼에도 삶의 의지는 더욱 뜨거웠다. "죽음이 두렵다, 죽음이 두렵다! 나는 죽음이 두렵다! 한뫼야, 이런 나를 너는 이해할 수 있겠느냐?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을 맥없이 기다려야만 하는 이 고통을 이해할 수 있겠느냐? 많은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저자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 누구나 당연한 것처 럼 받아들이는 것, 누구 하나 고마워하지 않는 것, 그러나 이곳의 한 불쌍 한 인간은 피를 토하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갈구하는 것, 내겐 나를 제외한 사람들이 노년을 맞을 수 있다는 권리를 가졌다는 것이 너무나도 부 럽구나! 흐흑! 나는 살고 싶다, 그러나 나에게는 환갑을 넘기는 것조차 주 어지지 않는다! 아니! 내 인생은 길어야 삼십이다! 이런 빌어먹을 운명이 어디 있단 말이냐... 한뫼야! 차라리 평범하게 태어났더라면, 그렇다면 이 렇게 매일같이 피를 토하는 고통과 불안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 많은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저 보통 사람처럼, 보통 사람처럼... 한뫼야, 나의 꿈이 너무도 큰 것이냐?" 그는 언제나 슬픈 목소리로 한뫼에게 자신의 한을 털어놓았고, 지성이 없 지만 자신의 주인이 고통스러워 한다는 것쯤은 느낌으로 알 수 있었던 한뫼 는 끙끙거리고 자신의 몸을 부비면서 주인을 달래려고 애썼다. ......마침내 그는 선택했다. 기공술로 조금이라도 생명을 연장시키기로. 그리고 그 날부터 주역과 그 밖의 기공술에 관련된 책을 닥치는대로 사서 모아서는 파고들기 시작했다. 수십가지의 유파들의 수십가지의 기의 운용 술. 모두 같을수는 없었고, 게다가 모두들 하루이틀에 완성되는 경지도 아 니다. 그러나 그는 소화해내었다. 단 3일의 연구 끝에 모든 문파의 기공술 을 안정적으로 가질 수 있는, 그만의 독보적인 기공술을 개발해 낸 것이 다. 그리고 개발이 끝나자마자, 그는 그 술법을 이용해 매일같이 약해빠진 자신의 몸을 혹사시켜가며 수련에 임했다. ......그는 매일같이 성장해 나갔고, 결국 지풍만으로도 아름드리 나무를 쪼갤 수 있을 정도의 수준까지 도달했다. 고수가 된 것이다. 그의 내공의 깊이는 파악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깊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그의 몸은 조금도 건강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하루하루 약해지기만 했다. 그는 여전히 매일같이 각혈했고, 그럴 때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하아...하아...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바랬던 것인가... 그저 평범한 소원이거늘..." 신선이 되는 것따위는 바라지도 않았다. 영원한 삶이나 막강한 권력, 무한 한 부 따위는 관심도 없었다. 그저 평범한 삶. 평범한 삶을 원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이루지 못했다. 멍멍이, 그러니까 한뫼는 매일 그의 옆 에서 그가 뿜어내는 정순한 기운을 받았다. 싸우기 위해 기공을 연마한 게 아닌, 목숨을 위해 기공을 연마하고 게다가 깊은 산 속에서 혼자 살아가는 그는 그의 기운을 숨길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는 특별히 그의 양기를 잘 갈무리해두거나 혹은 숨기거나 혹은 단속하거나 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가 마치 태양이 빛을 뿜어내듯 그의 몸에서 뿜어대는 양기는 언제나 상환의 옆 에 붙어다니던 한뫼에게 흘러들었다. 결국, 한뫼는 매일같이 그가 도가의 술법으로 얻은 정순한 양기를 자신도 모르게 받은 것이다. 그리고 어느날. 한뫼는 자신이 지성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을 깨달았다...... "호오. 나랑 비슷하군" 요령이가 중얼거렸다. 이익! 한참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는데 매너없게끔! 나는 요령이의 옆구리를 마구 찔렀고 녀석은 움찔하더니 말했다. "아...음. 한창 이야기하는데 끼어들어서 미안해. 계속 해, 계속" 요령이는 순순히 사과했고 그 모습을 이채롭게 바라보던 멍멍이는 궁금하 다는 듯, 그러나 지나가는듯한 말로 물었다. "너는 어떤 기연을 만나서 입을 열게 되었나?" "난, 마녀의 고양이었어. 그녀의 몸에서 얻은 음기가 나의 지성을 여는 원 천이 되었지. 그녀는, 네 옛 주인처럼 머리만 잘 돌아가는 녀석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말 그대로 모든 면에서 독보적인 주술사야. 현 마녀협회의 리더인 자가 옛날의 내 주인이지" 그녀석은 상당히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너, 퀴에르 무지 싫다며. 자랑을 하려니까 별게 다 자랑스럽다, 임마. 어쨌든 그런 녀석을 잠시 바라보던 멍멍이는 중얼거렸다. "나의 주인은 기공술을 연구하기로 마음먹은 지 5년만에 단 한 번의 내공 을 발산하는 공격만으로 바위를 부술 수 있는 정도의 힘을 얻었다. 너희 주 인이라면 5년만에 그 정도의 일이 가능했겠는가. 나는 300년을 살았지만 옛 주인의 힘의 근처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그건... 그게 인간이야? 하아. 그게 사실이라면 그 자질만큼 은 놀라운데. 하지만 퀴에르도 영적인 힘에 천부적인 자질이 있었고, 게다 가 지금은 300년을 넘게 살았으니 네 주인을 뛰어 넘었을걸" "흐음. 300년을 넘게 살아온 인간이라면 분명 강하긴 하겠지. 하지만 인간 의 능력은 그들의 수명과 크게 연관이 있지는 않을텐데" "어쨌든! 마녀협회 회장이라니까? 장 자리는 아무한테나 막 주는건 줄 알 아?" 녀석들의 말다툼을 보고 있던 나는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이제 별걸 가지 고 다 싸우네, 정말. 난 뒷이야기가 궁금하단 말이야. "흠, 흠! 저기, 멍멍아. 아까 하던 이야기..."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멍멍이는 목에 핏대까지 세워가며 주고받던 요령 이와의 대화를 훚같이 중단하고는 말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어, 그래. 무지하게 궁금하다. 계속 해 봐" 멍멍이는 내 말에 대답없이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야기를 다시 이어나 가기 시작했고, 멍멍이가 이야기를 시작하자 멍멍이와의 대화가 끊어진 뒤 에도 계속해서 뭐라고 궁시렁거리던 요령이도 곧 입을 닫고는 멍멍이의 말 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어느 날 이었다. "쿨럭! 쿨럭! 커어어억! 헉! 헉!" 그 날도 상환은 역시 한 손으로는 벽을 부여잡고 다른 손으로는 수건으로 입을 가리고는 격렬한 기침을 하고 있었다. "크억! 크르륵..." 언제나 그렇듯이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피거품. 그는 피가 폐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더욱 격렬하게 기침을 해댔고, 그가 그렇게 폐를 뒤집을듯 이 기침을 해대며 온 몸으로 경련할때마다 그의 입에서 흐르는 핏방울은 어 느새 그의 입을 가린 희디 흰 수건과 옷에 붉은 무늬를 그리고 있었다. 그 렇게 한참동안 격한 고통에 시달리던 그는 호흡이 조금 편해지자 피를 닦으 며 중얼거렸다. "한뫼야. 옆에 한뫼 있느냐" "......" "대답하거라. 한뫼야" "......예" "역시 대답하는구나. 역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구나. 그것은 나의 영기를 받아서이냐" "그렇다고 생각됩니다" 가장 절친한 친구끼리의 첫 대화치고는 너무나도 평범한 대화였다. 그러나 오랜 친구였던 그들은 이미 옛날부터, 아니 어쩌면 그들이 처음 만났던 날 부터 마음으로 많은 대화를 나누고 서로를 의지해 왔기에 말로서 하는 대화 라고 특별한 의미를 두거나 하지는 않는 듯했다. "한뫼야" "예. 주인님" "나는 언제나 너를 아꼈다. 알고 있느냐" "저는 주인님이 저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셨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리고 너 또한 나를 끔찍이도 위해줬지. 내 인생의 대부분의 나날 동안 내 곁에는 오직 너밖에 없었다. 내 유일한 벗이며 내 인생의 버팀목이 되 준건 오직 너 뿐이었다" "......" "한뫼야" "예" "너는 나같은 자신의 몸조차 주체하지 못하는 병신을 주인으로 둔 것을 후 회하느냐" 한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인님을 만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고맙구나...나 또한 하늘이 내게 너를 보내 준 것을 하늘이 나에게 준 수 많은 운명 중 유일하게 감사하고 있다" "주인님" "왜 그러느냐?" "자학하지 마십시오. 주인님은 남보다..." "남보다 뛰어난 재능이 있다고 하려 하느냐? 하하하하하! 쿨럭, 쿨럭... 하하하...!" 그는 웃었다. 격한 웃음으로 인해 호흡이 흐트러져 다시 각혈이 시작되었 고, 그래서 피가 그의 옷과 온 벽을 붉게 물들였지만 그는 별로 개의치 않 는 듯 했다. 그는 중얼거렸다. "이까짓 재능...개나 줘 버리라지. 가장 천대받는 백정도 나보다는 보람찬 인생을 살 것이다. 제기랄, 천능이 있으면 뭘 하느냐! 쿨럭, 쿨럭..." "무리하지 마십시오. 주인님. 몸을 아끼셔야..." "아낀다고 뭐가 나아지느냐. 쿨럭. 으음. 이깟 피야 닦으면 그만이지. 어 쨌든, 나는 지금 무척 후회하고 있다. 제기랄. 내 인생은 왜 이다지도 허무 하단 말이냐. 난 내 운명을 알았을 때 조정으로 나아가야 했다" "......뭐라고...하셨습니까?" "빌어먹을. 오늘에야... 깨달은 것이다" "무엇입니까...?" "하아. 인생은 왜 이다지도 허무하냔 말이다. 제기랄. 그리고 인간은 왜 이리 아둔하단 말이냐! 특히 나란 인간은, 저 높은 하늘 아래 홀로 잔머리 가 돌아가는 줄 알고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그러나 사실은 그들보다 훨씬 못난 바보같은 존재였느니라! 제기랄! 하늘 아래 고작 몸이 좀 약하다고, 고작 각혈 조금 한다고, 수명이 좀 짧다고 세상의 모든 비극은 나 혼자 모 두 짊어진듯이 매일같이 고뇌했었지! 사실 나는 행운아였음에도 말이다! 사 대부의 집안에 태어나서 먹을 것, 입을 것 모두 부족한 것 없이 원하는 것 은 모두 손에 쥘 수 있는 풍족한 집안에 태어나서, 고작 한다는 짓이 산 속 에 쳐박혀 매일매일 삶이라는 하늘같은 고통조차 묵묵히 견뎌내고 미소짓는 사람들을 질투하며 내 인생의 쌀알만한 비극을 고뇌한 것 뿐 아니었는가! 도대체 고뇌해서 뭐가 달라졌단 말인가, 이 머저리같은 녀석아! 상환아! 살 려고 아둥바둥해서 나아지는 게 뭐였단 말이냐! 상환아, 상환아! 결국 하늘 에서 내려준 천능을 받고도 네가 이룬 것은 무엇이란 말이냐아-! 이 멍청한 인, 인간... 쿨럭, 쿨럭-!" 그는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는 입에서 다시 피거품을 끓여올렸다. 그르르 륵... 한뫼는 깜짝 놀라서 급히 그에게 다가갔고, 피로 인해 붉게 물든 소 맷자락으로 다시 피를 스윽 닦은 상환은 손을 내저어 괜찮다는 표시를 한 뒤 휘청이며 말했다. "으음. 괜찮느니라. 그냥 거기 있거라. 걱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정말 이 제 조금 낫구나. 쿨럭, 쿨럭...헉, 헉. 어쨌든, 내가 가진 건 이제 이 쓰잘 데기 없는 능력 뿐이지" 이상환은 장을 쭉 뻗었다. 그리고 잠시 후 멀찌감치 있던 바위가 쩡 하는 소리와 함께 부서져 버렸다. 이상환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기공을 연마한 덕분에 네 말문이 트인 것 하나는 맘에 드는구나. 하지만 그것뿐이지. 쿨럭, 쿨럭. 아까 내가 '난 내 운명을 알았을 때 조정으로 가 야 했었다' 고 했었지?" 한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하아. 말하다가 격한 감정을 못 이기고 내 넋두리만 늘어놓았구나. 허허. 미안하게 됐구나" "아닙니다" 한뫼는 조금 고개를 숙여 괜찮다는 표시를 해 보였고 그런 그의 모습에 상 환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조정에 나갔어야 한다는 이유는 지극히 단순하다. 천능을 받았다면, 그리고 그 운명의 시한까지도 알았다면, 그것을 비극으로 생각하지 말고 하 늘에서 나에게 천능을 알려주고 게다가 그 능력을 적절히 사용할 수 있는 때까지 알려준 것이라고 좋게 생각해서 나의 조그마한 능력, 즉 머리를 조 선의 만민들을 위해 사용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능력을 주고 수명은 주지 않은 하늘을 그저 원망하고 하늘의 이치에 역행하려고만 했었다. 멍청한 짓이었지. 무엇인가를 하나 준다면 당연히 무엇인가를 하나 빼앗아야 하고, 그래서 하늘은 나에게 지혜를 주고 대신 수명을 가져간 것 이다. 물론 비록 내가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건 당연한 것이고 내가 가 장 잘 아는 이치 아니었던가. 차라리 수명을 늘리려는 것을 포기하고, 이 런 쓸모도 없고 파괴만 해대는 힘따위 기를 생각은 포기하고 조정으로 나갔 으면, 그랬다면 조선을 청나라조차 부러워할 나라로 뒤바꿔놓을 수 있었을 텐데... 허억, 허억. 결국 선택의 실수는 이렇게 나에게 아무런 인생의 결 실을 주지 않고 이제 허무하게 나의 능력을 거두어가려고 하는구나...... 결실있는 삶을 살았더라면, 최선을 다하며 살았더라면..." "주인님은 최선을 다 하셨습니다. 주인님의 권능은 그 결실입니다. 후회하 지 마십시오. 주인님은, 정말로 다른 사람은 비교도 되지 않는 노력으로 최 선을 다하며 사셧습니다. 만약 주인님이 조정으로 가려는 길을 선택했다 하 더라도 주인님은 여전히 목숨을 연장하려는 시도를 하지도 않고 포기해 버 린 것에 대한 미련을 가지실 겁니다. 모든 삶을 다 살 수는 없고, 주인님은 주인님에 선택에 대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셨습니다" "하하! 역시 내 개로구나. 어떻게든 나를 위로하려고 노력하는구나. 그래, 네 말이 맞다. 나는 최선을 다 했지. 단지, 헛된 노력이었다는 점이 씁쓸하 지만 말이다. 조정에 나갔다면, 최소한 내가 하는 행동이 아무런 결과도 가 져다주지 않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니, 조정에 나가는 것처럼 큰 일을 할 필요도 없이, 집에만 남아있었어도 매일같이 조선을 일으키고자 밤을 새 시며 고민하시는 아버님를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었겠지. 그것은 인생의 보 람이 될 수 있었을 것이야" "주인님..." 한뫼는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후회하는 주인을 위로하기 위해 무언가를 말 하려 했지만 이상환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고 그래서 한뫼는 자신의 말을 끊었다. "한뫼야. 나의 개고, 나와 마음을 나누니 알 수 있겠지. 맞춰보아라. 나는 갑자기 오늘 인생에 대한 후회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밀려오는 것을 느 꼈다. 내가 왜 갑자기 후회하는지는 알겠느냐?" 한뫼는, "......" 짐작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애써 입을 다무는 한뫼의 모습을 보 며 주인은 슬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답이 없지만 눈빛을 보니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는가 보구나. 동물은 사 람보다 눈빛이 맑아. 마음을 숨길 수가 없지. 그렇다, 네 짐작이 맞다" "......" "이제 곧 나는 죽는다" 한뫼는 고개를 들어 주인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주인님. 그렇게 좌절하지 마십시오. 주인님의 수명은 아직 남아 있을 것 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습니다. 주인님은 지성을 다 했으니 하늘이 주인님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을 리 없습니다" "그래? 하하하하하..." 상환은 맑게 웃더니 한뫼의 말에 대답했다. "하늘은 소원을 들어주었을 때 모두가 이로워지는 소원만을 들어준다. 나 같이 수명을 몇 년 더 늘여줘봤자 무기력하게 다가오지도 않은 죽음만을 보 고 발버둥칠,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을 살려줄리가 없지 않느냐" "하지만..." "그만. 나는 이미 죽음을 느꼈다. 내 너에게 마지막으로 유언을 남기고 싶 구나" "무엇입니까" "내가 죽는 순간, 나를 버려라"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둔한 저로서는 주인님의 명령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이다. 하하. 죽을 때가 되니까 호흡도 편해지는구나. 웃어도 아 무렇지 않은 걸 보니. 어쨌든, 나는 내가 죽은 뒤 나를 버리라고 했다" "그게 무슨..." "나를 버리란 말이다! 내가 죽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네 주인이 아니니 네 가 갈 길을 찾아서 떠나란 말이다!" "......" 내가 어떤 마음을 먹고 있는지 알고 계셨군. 한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죽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너의 주인이 아니다" "하지만 주인님, 제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주인님의 곁에 있는 것이 제 임 무이고, 저는 그것에서 무한한 기쁨을 느낍니다. 그러니 제가 주인님의 곁 에 있는 걸 허락해 주십시오. 주인님께서 그런 부탁을 하신다 하더라도..." "이것이 친구로서의 부탁인 줄 아는가? 이것은 너의 주인의 절대명령이다" "......" "알겠느냐?" "......예, 알겠습니다..." "너에게 나의 임종을 지켜볼 권리는 네 자유로서 할 수 있도록 주겠다. 그 러나, 내가 죽는 순간부터는 네가 나의 곁에 있으려는 그 어떤 행위도 허락 할 수 없다. 내가 죽는 순간, 너에게 더 이상 주인은 없으며 이 곳을 떠나 라는 나의 마지막 명령만이 너에 대한 구속으로 남는다. 이해했느냐?" "......예, 이해했습니다..." "그렇다면 좋다. 묻노니, 명령에 따르겠느냐?" 한뫼는 대답이 없었고, 상환은 그런 한뫼에게 대답을 재촉하듯 다시 물었 다. "나의 명령에 따르겠느냐?" 한뫼는 슬픈 눈으로 잠시 그의 주인이자 오랜 벗이며 그에게 '깨인 세상' 을 준 은인이었던 상환을 바라보다가, 다시 그의 어깨너머의 먼 산을 바라 보고는 마침내 마음을 가다듬고는 조용히 대답했다. "주인님의 명령을 거절할 권리 따윈 제게 없습니다. 주인님의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한뫼는 애써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고 그런 그를 바라보던 상환은 통쾌하 게 웃더니 말했다. "으하하하! 그래야지. 주인 말을 잘 들어야 착한 개지. 내가 이 명령을 내 리지 않았으면 너는 틀림없이 굶어 죽을 때까지 여기에 앉아서 밤낮으로 울 부짖기만 했을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되지. 그것은 내 유일한 벗을 내 손으 로 죽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니. 죽을 병신은 죽고 살 개는 살아야지. 내가 죽으면, 너는 당장 이곳을 떠나라. 그리고, 선택받지 말고 네 손으로 직접 주인을 선택하거라. 너를 잘 보살펴 주고 너를 위할것 같은 주인을. 알았느냐?" "예" "하하하하하! 좋아, 아주 좋아! 그래도 죽는 순간에 가장 큰 짐을 덜었으 니 마음 편하게 갈 수는 있겠구나, 하하하!" 한참을 박장대소를 하고 웃던 그는 그렇게 배를 잡고 뒹굴다가 양 다리를 꼬은채로, 즉 속칭 '양반다리'혹은 '가부좌'라고 하는 자세로 주저앉았다. 그의 입은 계속해서 싱글벙글 대고 있었다. "하하하하. 하아. 하아. 정말 이렇게 유쾌하게 웃을 수 있는 날이 내 인생 에 올 줄은 몰랐다. 사람이 죽기 직전이 되면 심신이 편해진다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인가 보구나. 숨을 쉬는 것이 이렇게 즐거운 것이었다니. 이렇게 편하게 공기를 들이킬 수 있다니... 후으읍, 하아아! 정말 공기는 달구나. 숨을 쉰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죽기 직전에야 깨닫 다니, 나는 정말 멍청하군. 정말 멍청해... 주위를 둘러봐도 온통 아름다운 것들 뿐이로구나. 저 산, 저 나무, 저 푸른 잎새와 지저귀는 새들, 저 굳건 한 바위와 상쾌한 바람... 이제야 깨닫다니, 나는 아둔했구나. 한뫼야, 세 상은 정말 아름답다..." 상환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눈으로 눈물을 흘리며. "세상은... 아름다운데... 이제야 알겠는데... 이제야... 이제야 벗과 이 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는데... 이제야... 이제야... 내가 했어야 할 일 을 깨달았는데......" 그는 슬픔과 절망을 주체하지 못하고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의 입은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흐윽, 흐윽,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아! 이미 모든 것을 정리하고, 내 벗에게 가장 좋은, 흐으윽, 가장 좋은 길을 정해 주었는데, 더 이상 남 길 것 따위는 없는데, 흐으윽, 흐으윽! 하지만, 하지만! 이제 겨우 한뫼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는데! 흐으으윽! 죽고, 죽고 싶지 않아! 이제야 겨우 내가 할 일을 찾았는데, 흑! 이제야 겨우, 세상이, 흑! 세상이 아름답 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세상은 이토록 아름다운데... 나는, 나는... 흐으 으윽, 난, 난, 죽고 싶지 않아! 결국 좌절과 후회만을 남기고 떠나야 한다 는 게, 나라는 인간이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져 버린다는 게, 끄윽, 끄으윽, 흐으윽! 너무, 너무 두렵단 말이다! 한뫼야!" "예, 주인님..." "죽고 싶지 않다...죽고 싶지 않아!" "......" "대답을 해라! 너의 주인은 더 살 수 있다고, 아까처럼 나를 위로해 달란 말이다! 한뫼야! 나는 죽고 싶지 않다! 죽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더 살 수 있다고, 아직 주인은 후회를 덮어버릴 수 있는 인생이 많이 남아 있다고, 희망을 잃지 말라고 말 해! 어서 나를 위로하란 말이다! 말 하지 못하겠느 냐! 더 살 수 있다고 말 하란 말이다! 어서! 흑흑흑..." 상환은 결국 울부짖었고. 한뫼는 고개를 떨구었다. 다음날, 상환은 목욕재개하고 백색 도포와 갓으로 의복제례한 뒤 조용히 책을 낭독하며 죽음을 기다렸고 결국 책을 다 읽지 못한 채 눈을 감고야 말 았다. 최후까지 그를 괴롭히던 고통은 죽음 직전에 사라졌다. 그리고 한뫼는, 그의 낭독소리가 점차 작아지다가 사라지는 순간 온 산이 울리도록 크고 구슬프게 한 번 울부짖고는 주인에게 절을 한 뒤 그 곳을 떠 났다. 이야기에 취해서 한참동안 입조차 열지 못했던 나는 이윽고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끝이냐?" "예. 전 그 날로 옛 주인이 계신, 아니 계셨던 산을 떠났고 그 뒤로 조선 8도를 이곳저곳 떠돌아니며 몇 명의 주인들을 더 만났지요. 하지만 결국 인 연이 아니었는지 어찌어찌하다가 이 곳 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인가부터 제가 살던 산이 신도시로 개발되는 바람에 사라져서 도심으로 내려와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다가 죽기 직전이 되어버린 것을 주인님 이 구해 주신 것입니다..." 나는 감동해버린 얼굴로 말했다. "아아, 누구누구의 음침하고 어두운 탈출기와는 너무도 다른 감동적이고 슬픈 이야기야! 멍멍아, 진짜 눈물이 다 나려고 한다!" "그 누구누구가 누군데?" 요령이는 앙칼진 목소리로 나를 노려보며 물었고, 나는 그 물음에 괜히 주 위를 둘러보며 딴청을 부렸다. 그럼, 여기에 나와 멍멍이 빼면 또 누가 있 냐? 설마 내가 음침하고 어두운 탈출의 기억을 가지고 있겠냐? 녀석도 내가 자신을 가리켰다는 것을 알면서 자기가 '왜 가만히 있는 나는 걸고 넘어지 고 그래?'라고 말하면 내가 '어? 너 아닌데, 찔리냐?'라고 대답해버릴까 봐 '그 누구누구가 누군데?'라고 우회적으로 물어본 것이다. 약삭빠르긴. 하지 만 내가 이런 질문에 '어, 너야'하고 대답하겠냐. 그렇게 말하면 그 결과가 어떻게 돌아올지는 뻔한데. 이런 질문은 그냥 은근슬쩍 넘어가 버리는 게 제일이지. "야, 그래서 네 옛 주인은 결국 죽은거야?" "......그렇습니다" 에구. 아, 참. 말을 돌리자고 이런 질문이나 하다니. 나도 주책이지. 그 녀석에게 옛 주인에 대한 걸 물어보다니...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녀석 은 무지 슬플텐데 말야. "그래, 그렇구나. 그럼... 흐음" 물어볼 것은 많은데 할 말이 없다. 난 아직 인생경험이 짧고, 그래서 아직 내 인생에서는 저 녀석이 겪은 것처럼 가장 좋은 친구를 잃는 비극따위는 없었다고. 이런 분위기에는 뭐라고 말해야 하나? 분위기는 어느새 죽음이라 는 주제 때문에 무거워져 있는데 말야. 위로를 하라고? 아무것도 모르는 내 가 뭘 위로를 할 수 있지? 그래서 나는 그저 묵묵히 그 녀석을 바라보아 주 기만 했다. 그리고 멍멍이는 나의 눈빛에 슬픈 표정을 하며 고개를 약간 숙 였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요령이는 말했다. "누구냐니까앗!" "어이구, 나다 나! 됐냐? 됐어? 넌 분위기 파악도 못 하냐? 젠장, 하여튼 꼬투리를 한 번 잡았다 하면..." 나는 짜증을 팍팍 내면서 중얼거렸고 그래서 녀석은 이겼다는 마음에 좋아 서 웃으면서도 약간은 나에게 미안했는지 얼굴에 억지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헤헤거렸다. 자식. 또 그렇게 웃으면 너무 귀여워서 내가 짜증을 못 내겠잖 아. 웃지 마, 임마. 정들어. ......흐음, 생각해보니. 방금 전까지 실컷 시달림 당해놓고 뭐가 귀여워? 나도 참. 어쨌든 그렇게 멍멍이의 이야기가 끝나고 잠시 대화를 나눈 우리는 마땅한 화두가 없어서인지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고, 나 또한 내 생각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흐음. 저 녀석의 이야기, 정말 놀라운데. 그런 기인이 살고 있었 다니. 그것도 우리나라에 말야. 손바람으로 바위를 깨어버리는 사람이라. 참, 우스워. 이름이... 상환이라고 했던가. 멍멍이를 보고 한뫼라고 불렀다 지. 으응? 그러고보니, 저 녀석은 사실 이름이 있는 거잖아? 그런데 내가 왜 멍멍이라고 불렀지? 저 녀석은 엄연히 이름이 있는데. 그거야 처음에 멍멍이가 자신이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숨겼으니까 그렇 지. 그건 그렇고 그럼 이제부터는 한뫼라고 불러야하나? 음... 역시 모르겠 다! 아무래도 멍멍이와 이야기를 좀 더 해 봐야겠는걸... "저, 멍멍아..." "맞아! 멍멍이 너!" 내가 조심스레 나처럼 무엇인지 모를 생각에 깊이 빠져있던 멍멍이를 불렀 을 때 요령이가 갑자기 뭔가 번뜩 생각이 난 듯 외쳤다. 쳇, 하필이면 내가 말할 때... 하지만 뭐, 녀석이 뭐라고 말할지 궁금하기도 하니 일단 녀석이 하는 말을 일단 물어볼까. 내가 하려는 말이야 천천히 말해도 되니까. "왜 날 부르는가, 요사한 고양이여" "일단, 내 이름은 아까도 말했듯이 요령이야" "네 이름을 불러줄 의무따위는 없다" "네 주인이 인정한 이름인데도?" "왜 불렀는가, 요령이" 하, 저렇게 아무 망설임 없이 태도가 바로 바뀌어 버리네. 참, 어떻게 보 면 정말로 충성심이 넘쳐보여서 기분이 좋긴한데 어떻게 보면 바보같고... "호호, 좋아. 멍청이 멍멍이씨. 묻겠어" "물어라" "꽉! 물었다, 야옹. 호호! 농담이고. 개를 물면 고양이는 바로 되물려 죽 겠지? 어쨋든. 아까 우리가 왜 싸웠지?" 요령이는 드러누워서 두 손으로 턱을 괴고는 양 쪽 다리를 번갈아 까닥거 리면서 얼굴애는 편안한 미소를 지은 채 멍멍이의 턱 밑쪽을 올려다보며 물 었다. 저렇게 누우니까 길고 늘씬해서 보기는 좋은데, 진짜 방이 너무 좁아 진다. 쳇. 잘 때도 아닌데 왜 눕고 난리야. 그것도 멍멍이를 그렇게 싫어하 면서 멍멍이의 턱을 올려다보는 각도로 말야. 뭐, 나야 요령이의 옆쪽에 있 어서 요령이가 눕는다고 뭐 갑자기 실제로 비좁아진다거나 하는 것은 없지 만, 그래도 보이기에 좁아 보이면 답답하거든. 어쨌든 멍멍이는 요령이의 질문에 정말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가 나의 정체를 의심해서이다" "그래? 그렇지? 내가 네 정체를 의심해서 네 목을 잡고 그대로 벽에 찍어 버렸지. 그리고 너는 그런 나를 기를 운용해서 튕긴 다음 너를 의심하는 나 와 영준이 녀석의 불안을 해소시켜 주기 위해 너의 과거를 말해 주었고. 내 말이 맞지?" "아니다. 주인이 나보고 나의 과거가 궁금하다고 했기에 그 이야기를 들려 드린 것일 뿐이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그 순간. 요령이는 눈 깜짝할 사이에 턱을 괴었던 손으로 땅을 박차고 벌 떡 일어서면서 손을 칼날처럼 날카롭게 펴서 멍멍이의 턱 아래에 갖다댔다. 정말 전광석화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의 속도였고, 그래서 멍멍이는 그 순간적인 기습에 어떠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몸이 굳어버렸다. 그리고 나는 이제야 왜 요령이가 멍멍이의 턱을 바라보며 누워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수틀리면 치고 들어가겠다는 생각으로 그녀 의 목표가 될 멍멍이의 목만을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요령이가 이렇게 갑자기 기습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게 분명한 멍멍이 는 마음을 놓은 채 어떠한 주의도 기울이지 않았고, 그래서 요령이의 기습 적인 공격을 피하지 못한 것이다. 정말 약삭빠르군. 계속해서 입으로는 평 화롭게 미소짓고 가끔씩 시덥잖은 농담까지 중얼거리면서도 눈으로는 자신 의 손의 목표가 될 목만을 노려보고 있었다니. 나는 요령이를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술은 여전히 미소를 그리고 있었지만, 그리고 그 눈 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그 느낌은 더이상 평화로움이 아니었다. '차가 움'이었다. 요령이는 멍멍이의 목에 손을 들이대자마자 재빠르게 뭐라고 중얼거렸고, 그러자 그녀가 멍멍이의 목에 가져다 댄 손에서 날카로워 보이는 푸른 빛이 일렁였다. 그리고, 요령이는 그렇게 손끝으로 멍멍이를 위협하며 자신의 눈 빛과 미소처럼 차갑게 말했다. "문제가 있냐고? 문제가 많아. 아주 많다고. 호호" "이 손 치워라" 멍멍이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고, 멍멍이의 말에 요령이는 깔깔대며 웃 었다. "'이 손 치워라', 치우라고! 호호호호! 그렇게는 못 하겠는걸? 이게 어떻 게 잡은 네 목인데, 순순히 도로 손을 치워줄 수 있겠니? 호호. 설마 네 녀 석도 네가 한 말을 내가 들어주리라고 순진하게 생각한 건 아니겠지? 그렇 다면 미안하게도, 못 치우겠어. 세상은 그리 만만한 게 아니거든? 그 대신 손을 치우라는 네 말에 대한 대답은 할 수 있지. 내 대답은 이거야" "뭔가" "조금이라도 움직이거나 기를 운용하면 그대로 찔러버린다" 요령이는 손을 치우라는 지극히 당연한 멍멍이의 말에 싸늘한 목소리로 무 시무시한 대답을 했고, 그래서 나는 그 말을 들은 멍멍이의 몸이 움찔 하고 굳어버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손 안 치울텐가" "안 치워. 내가 원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원할 때까진. 아 참, 아까처럼 영기로 튕겨 버리려고 하지는 않는 게 좋을거야. 네 몸의 어떤 곳에서든 기 가 뭉치기 시작하는게 느껴지면 난 곧장 찌를테니. 그래도 하고 싶다면 어 디 해 봐. 나는 네 몸에 온 주의를 기울이고 있으니까. 내 감각을 피해서 기를 모을 자신이 있으면 해 보라구. 경고 할 생각은 있지만 바보짓 하는 것까지 말릴 생각은 없으니, 네가 기를 모으려고 한다면 난 말리지 않고 찌 르겠어. 그러니, 자신 있으면 마음대로 해 봐" "......주인님이 시키시지 않는다면 굳이 쓸데 없는 일에 목숨을 걸거나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 않는다" "좋아. 아주 똑똑하군? 호호. 최소한 무모하지는 않네. 어쨌든, 그럼 이제 넌 내가 묻는 말에 대답만 하면 되는거야. 알았어? 참고로, 조금이라도 거 짓이라고 생각되면 찔러버리겠어" "......날카롭군. 질문이 무엇인가?" 아니 도대체 저 녀석들이 뭐 하는거야? 특히, 요령이 너, 지금 멍멍이한테 뭐하는 짓이야? 아까는 벽에다 찍어버리더니, 이제는 손칼을 목에 들이대네 ? "야! 요령아! 뭐 하는 짓이야! 손 치워!" 물론 이번에는 멍멍이가 진짜로 빠져나가려 할까봐 '멍멍아! 빠져나가!'등 등의 말은 하지 않았다. "이 멍청아! 조용히 하고 넌 옆에서 내가 뭘 하는지 지켜보기나 해!" 요령이는 화를 버럭 냈고 그래서 나는 가부좌를 하고는 털썩 주저앉아서 한 손으로 턱을 괴고는 다른 손으로는 손가락 마디로 방바닥을 두들기며 요 령이가 뭘 하는지 지켜보기로 했다. 설마, 그래도 요령이도 착한 앤데, 멍 멍이를 해치려고 저러는 건 아니겠지. 그러려면 그냥 말이 필요없이 찔렀을 테니. 뭔가 생각이 있어서 저러는 걸 거야. 그냥 지켜보자. 내가 결심하고 입을 다물자 요령이도 내 생각을 눈치챘는지 차가운 표정을 짓는 와중에서도 나를 향해 슬쩍 웃어주었다. 물론 곧 다시 차가운 얼굴로 표정을 싸악 바꾸고는 멍멍이를 노려봤지만. 자식, 자꾸 웃지 말라니까 그 러네. 정든대도. 차가운 표정의 요령이는 옆무릎을 하고 앉아서 멍멍이의 턱 밑에 마치 칼 처럼 날카롭게 빛나는 칼을 드리워놓고 멍멍이를 마주 보는 채로 물었다. "너, 뭐야?" "뭐 말인가" "그런 신파극스러운 이야기를 하면 누가 울고 짜면서 넘어가 줄 줄 알았나 보지? 하, 미안하지만 그 이야기에 넘어가 모든 걸 잊어버린 상대의 목록에 서 난 좀 빼줘" "무슨 소리인가. 내 이야기는 모두 사실이다. 그리고 뭘 잊어버린단 말인 가" "하, 자꾸 모르는 척 할래?" "뭘 말인가!" 마침내는 멍멍이가 답답했는지 언성을 높였고 그 모습에 요령이도 목소리 를 날카롭게 올렸다.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거야 몰라서 모르는거야? 너, 질문이랑 대답이 잘 못되었잖아? 아니지, 너 이 자식, 네 말대로 영준이가 너의 과거를 궁금해 해서 네 이야기를 한 것이라면, 너는 아예 내 질문에는 대답조차 하지 않은 거야!" "무슨 질문을 했다는건가" "너의 정체를 묻는 질문을 말하는거다 이 멍청한 자식아!" 요령이는 마침내 분을 이기지 못하고 빼액 소리질렀다. 그리고 요령이의 말에 멍멍이는 황당하다는 듯이 고개까지 까닥거리며 대답했다. "정체라, 정체라. 도대체 그 따위로 물으면 내가 뭐라고 대답하라는 건가. 내 정체를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란 말인가? 내 300년 인생을 구구절절히 톖 어야 하는가?" 그리고 멍멍이의 질문에 요령이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마구 웃더니 중얼거 렸다. "호호호호호! 뚫린 입이라고 잘도 말하는군. 그리고 목에 아직 칼 들어가 있으니까 그 고개 좀 까닥이지 말아줄래? 잘못 목 돌렸다가 괜히 베어서 나 에게 불평하지 말고 말야. 어쨌든, 네가 그따위로 나온다면 질문을 바꾸지. 새 질문을 할테니, 대답해" "새 질문은 무엇인가?" "네 녀석은 왜 구태여 너의 능력을 숨겼지?" 잠시 침묵. 어, 그러고보니 이상하네. 멍멍이는 왜 자신이 말을 할 수 있 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지? 나는 멍멍이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녀석은 무 언가가 심히 의문스럽다는 눈빛이었다. 그 녀석은 그런 눈빛으로 요령이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도대체 뭘 두려워 하는 것인가? 왜 아무것도 아닌 일로 나를 몰아 붙이는가?" "자꾸 말 돌리지 말고, 묻는 말에나 답해. 왜 네 능력을 숨겼어?" 요령이는 날카롭게 쏘아붙였고 멍멍이는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계속해서 의문스럽다는 내용의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었다. "아까전에도 그렇다. 너는 내가 영력을 가졌다는 것을 알아차리자마자 다 짜고짜 나를 공격했지. 그렇다, 나는 힘을 숨겼다. 하지만 그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자신이 영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떠벌리고 다니는 자가 어디 있는가? 그것이 사람이든, 동물이든" "난 떠벌리고 다녔어. 그러니 말해! 왜 네가 능력이 있다는 것을 숨겼어?" 어, 그러고보니 요령이는 자신이 능력이 있다는 것을 숨기지 않고 나에게 말했었지. 하지만 그건 저 녀석의 성격이 워낙 특이하니까 그런거지. 보통 이라면 숨기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고작 그것때문에 나를 의심하는 건가? 내가 힘을 숨기고 들어왔다는 것 때문에? 그것 때문에 내가 너나 주인님을 해코지하려 왔다고 의심하는 것이 냔 말이다. 한 마디로 내가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힘을 숨겼다고 생각하는 것 아닌가" "나름대로 정확한 분석 칭찬해줄께. 틀린 점이 있다면, 네 녀석이 해칠지 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상대는 네가 언급한 둘 중 '나' 뿐이지. 네가 나를 해코지하거나 감시하려고 온 게 아닌가하고 의심하고 있는거야. 나 친절하 지? 이런 것 까지 설명해주고. 호호호! 그러니 말해, 이제! 슬슬 너와의 말 장난이 지겨워지려고 하니까. 손에 힘 주고 있는 것도 이제 지겨워. 베어버 리고 끝내고 싶지만 내 성인군자같은 자제심으로 참는 거니까, 말 해. 네 힘을 왜 숨겼지? 도대체 네 정체가 뭐야?" "무엇을 두려워 하는가. 왜 이리 초조한듯이 구는가" 멍멍이는 의문이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 나도 그게 궁금해! 정말, 가만히 둘이 하는 짓을 구경이나 하자는 심산으로 한발짝 뒤로 물러나긴 했 지만, 요령이의 저 불안하고 초조한 태도를 보자면 도저히 끼어들지 않을 수가 없단 말야. 난 말했다. "요령아! 야!" "짜증나게 왜 부르는거야!" 요령이는 소리를 빼액 질렀다. 아니, 이게 짜증날 일인가? 나는 순간 발끈 했으나 저녀석의 심리상태가 이상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 생각하고 치밀어 오르는 화를 가라앉힌 뒤 다시 요령이에게 달래듯 말했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요령이는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듯했다. 온 몸을 작게 떨고 있었으니 까. 아까의 요령이의 모습은 이렇지 않았는데, 아까는 당당한 모습이었는 데. 역시 무슨 생각을 하면서 점점 두려움에 빠져들고 있는게 분명했다. "요령아! ......나한테는 말해도 되잖아. 도대체 뭘 무서워 하는거야? 뭐 가 두려운거야? 지금의 네 모습... 평소와는 달라. 정말 이상해. 뭐가 두려 운거니? 무엇 때문에 초조해 하는거니?" "퀴에르..." 바들바들 떨리고 있는 그녀의 입술에서 신음처럼 한 단어가 흘러나왔다. 뭐? 퀴에르? 퀴에르가 무섭다니? 프랑스에 있는 퀴에르가 뭐가 무서워? "나를 찾으러 곧 사람을 보낸다고 했었지... 퀴에르가... 그리고 퀴에르 가 그 말을 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 자식이 나타났어... 의심이 가지 않을수가 없지"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떨리는 목소리를 다잡아 말했다. 퀴에르. 퀴에르라. 딱 한 번 보긴 했지만 그렇게 무서워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그 때의 분위 기는 거의 요령이가 주도하고 있었지. 아, 그건 퀴에르의 분신이라 약하다 고 했었나? 어쨌든. "퀴에르가 누구인가" "......모르는 척 하지마..." 요령이는 애처로운 목소리로 말했고 멍멍이는 아래, 즉 자신의 목에 드리 워진 요령이의 손칼을 노려보며 말했다. "쫓기나보군. 그 퀴에르인지 뭔지에게. 사람인가? 아니면 동물인가?" "후후후... 연기 잘 하는데. 닥치고 네 힘을 숨긴 이유나 말해. 말하지 않 으면 베어버린다" 후후후라? 그렇게 웃은 적도 있었나? 정말 나름대로 저 녀석에게는 무지무 지하게 심각한 문제인가 보군. 어쨌든 요령이는 나직히 웃으며 멍멍이의 목 에 있는 손칼을 위협하듯, 하지만 힘없이 흔들었고 멍멍이는 그런 요령이를 측은한 듯이 바라보더니 말했다. "벨 수 있는가" "뭐?" 요령이의 놀란듯한 목소리. 나도 놀랐다! 멍멍아, 겁대가리를 상실했냐? 그 따위로 말하면 죽어 임마! 나는 마구 손을 휘저으며 멍멍이에게 하지 말 라고 말하려 했으나 너무 놀라서 말이 안 나왔고, 그래서 내 뜻을 알지 못 한 멍멍이는 다시 말했다. "내 목을 벨 수 있느냐고 물었다" "못 할 것 같냐? 하, 참. 지금이라도 할 수 있지. 단지 안하는 것 뿐이야" "지금 알았다. 넌 할 수 없다" "해!" "못 해" "해!" "못 해" "해. 그러니까 말 해. 왜 정체를 숨겼지? 내가 널 벨 수 있는지 못 베는지 알고 싶다면 대답을 안 하면 될 꺼야. 아니, 보고 싶다면 대답을 안 하는것 보다 차라리 '못 해'라고 대답하는 것이 좋겠지. 그럼 난 곧바로 할 수 있 을지 없을지 보여 줄테니" 그 말에 멍멍이는 마치 비웃는듯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말했다. "못 해" "이이익!" 요령이는 열 받은 얼굴로 손칼을 뒤로 빼더니 앞으로 찔러나갔다. 안 돼! 나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요령이의 손의 속도는 너무도 빨 랐던 것이다. 제기랄! 멍멍아!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이제 곧 불쌍한 떠돌 이 개의 비명소리가 들리겠지. 미안하다, 멍멍아! 네 주인인데도 너를 못 지켜줬구나! 음, 그러고보니 아직 나는 저 녀석의 주인이 되겠다고 한 적이 없지. 어쨌든, 비명이 들리고 그 소리에 눈을 뜨고 앞을 보면 피투성이가 되어 환하게 웃고 있을 요령이가 눈 앞에 보이겠지. 마치 죽음의 천사처럼 말야. 젠장! 난 그런 모습따위는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아! ...응? 그런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네? 궁금해진 나는 눈을 살짝 떠 보았다. 그리고 멀쩡한 멍멍이와 가엾게도 풀이 죽어버린 요령이를 볼 수 있었다. "못 한다고 했지" "제길, 네 녀석의 인생이 불쌍해서 한 번 봐 준 것 뿐이야, 쳇!" "정말인가" ".......젠장! 아이 씨, 뭐 이래! 짜증나!" 하하하! 찌르지 못 했구나!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착한 녀석이라니깐! 하하! 그 녀석은 내가 평소에 습관처럼 달고 다니던 말들을 하나 하나 다 톖어대 며 짜증을 부리고 있었다. 하, 말습관이 점점 나를 닮아가는군, 그래. 같이 살아서 그런가. 어쨌든 그렇게 분을 참지 못하고 씩씩대면서 손을 마구 하 늘로 휘두르는 요령이의 모습은 왠지... 뭐, 언제나 그렇듯이 귀여워 보였 다. 왠지 저렇게 짜증을 부리는 녀석을 보자면 입에 미소가 지어지면서 저 녀석에게 한 대 정도 툭 하고 맞아주고 싶다. ......물론, 맞으면 죽겠지... 툭이 아니라 퍽일테고... 다른 여자가 아니 고 요령이니까. 으윽. 어? 그러고보니 잠깐. 내가 왜 저 녀석에게 맞아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거지? 내가? 저 녀석에게? 괜히 맞아준다고? 하 참, 잠시 나마 내가 미친 생각을 하다니. 아르바이트 하느라 밥을 제대로 못 먹어서 그런가? ......요령이는 그렇게 한참동안 허공에 화풀이를 하더니, 결국 자신의 손 에 아직도 파르스름하게 맺혀 있는 기운을 씁쓸히 바라보다가 손을 휘두르 며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리고 짧은 바람소리 비슷한 울림이 들리면서 그녀 의 손에 있던 기운이 사라져 버렸다. 휘우웅. "좋아, 찌르지 못했어. 인정해. 하지만 나한테도 자존심이 있다고. 그렇게 상대를 몰아세우는 것, 그렇게 좋은 태도는 아니라고 충고해둘까? 방금 전 같은 경우에도 더 몰아세웠으면 어떻게 했을지 몰라" "나름대로 천성은 나쁘지 않군. 아니, 천성은 좋군" "......뭐?" 멍멍이의 엉뚱한 대답에 요령이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멍멍이는 요령이가 그러던 말던 신경쓰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네 녀석은 요물인데, 상대방을 찌르지 못했군. 아까 넌 비록 요물이긴 하 지만 요물을 싫어한다고 했지" "그래. 난 천성적으로 음기가 싫어. 이상하지? 나도 이상해. 하지만 싫어. 그런데 뜬금없이 그건 왜 물어보냐, 갑자기?" "그래. 착한 녀석이군. 믿을만 해. 비록 버릇은 없지만, 주인님 곁에 있다 고 해서 네 녀석이 언제 주인님을 공격할지 모른다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어" 그 말에 요령이는 약간 쑥쓰러운 듯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난 원래 착해. 나야 뭐 완벽하지 뭐. 그건 그렇고, 지금의 네 말투로 보 아하니 방금전에 네 녀석이 나에게 너를 찔러보라고 한 건...?" "시험이었다" "이이이익!" "네 녀석이 나를 찌른다면, 넌 언제고 주인을 찌를 수 있겠지. 살인이란 한번 하기는 힘들지만 두번부터는 쉬우니까. 하지만 나를 찌르지 못한다면, 주인도 찌르지 못하겠지. 잘 알지도 못하는데다 약간의 미움조차 가지고 있 는 나를 찌르지 못하는데 너와 친구사이처럼 보이는 주인님을 어떻게 찌르 겠나. 방금전의 그것은 네 일종의 본성, 그리고 신뢰도에 대한 시험이었다 고 해 두지" "살인이란 단어가 너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하니?" "내가 말하려는 뜻과 비슷하니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성을 가진 존재'를 살생하는 것이었다" "그래, 이해했어. 그런데 갑자기 궁금해지는 게 있는데" "뭐지" "만약에 내가 그대로 손을 멈추지 않고 뻗어서 네 목을 찔러버렸으면 어떻 게 하려고 했지?" "눈빛을 보면 알 수 있다. 내 목을 겨누고 있는 동안의 네 눈빛은 내내 선 한, 그리고 망설이는 눈빛이었지. 찌르지 못할 것 같았다" 그 말에 요령이는 호기심어린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만약에, 찔렀다면?" "찌르지 못했다" "그러니까 만약이지. 만약에 찔렀다면?" "피할 수 있었겠지. 네 녀석의 공격쯤은" "으아아아악! 이 빌어먹을 자식이! 다시 목 대! 다시 해 보자! 뭐? 피해? 좋아! 피해봐! 쥐도 새도 모르게 살기없이 그어줄게! 해 보자구! 이 멍청한 개녀석이 누구 앞에서 으스대는거야 지금! 목 대! 대라고! 바보같이 목이나 잡힌 주제에 뭐? 피해? 내가 아까 네 목을 처음으로 잡을 때, 손을 안 멈추 고 뻗었으면 넌 그냥 죽는거였어!" 요령이는 무시당했다고 생각했는지 어쩌구 저쩌구 마구 버럭버럭 소리질러 대며 화를 냈고 멍멍이는 그런 요령이의 행동 하나하나를 철저히 무시하다 가 요령이가 제풀에 지쳐서 조용해지자 입을 열었다. "질문1. 여기서 내가 네 궁금증을 풀어주지 못하면 너는 언제까지고 방금 전의 모습처럼 나를 의심하겠지?" "물론이야" "......전혀 망설임없이 대답하는군" "당연하지. 그런데 질문2는 뭐지?" "좀 있다가 물어보도록 하지. 어쨌든, 네 궁금증은 내가 왜 처음부터 너와 주인님께 내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겠지 ?" "그래" "좋아. 답해주지" "해 봐" "정말 별거 아닌 이야기이니 기대는 하지 말도록" "나 별거 아닌 이야기 무지 좋아해. 해 봐" "네 녀석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까 말했듯이 몇 명의 주인들을 섬 겼었다" "그리고?" "우연히 내가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주인들도 있었지"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냐. 여기까지 말했는데도 결과가 예측되지 않는가? 당연한 소리지만, 그 분들은 모두들 두려워하며 나를 버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그리고 나는 그 뒤로 다시는 내 힘을 주인 될 분에 게 드러내지 않으리라 마음먹었지. 버림받는게 두려워서. 이게 내 답이다. 이제 답변이 되었나?" 그리고 요령이는 멍멍이의 대답에 정말로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 되어서 물 었다. "야, 영준아. 방금 한 말이 사실이냐고 물어봐" "멍멍아. 방금 한 말이 사실이니?" "예, 주인님. 제가 능력을 지녔다는 것을 숨겨서 주인님께는 정말로 죄송 합니다. 저는 단지... 주인님이 다른 사람들처럼 저를 두려워하며 버리실까 봐, 그게 두려워서...제가 처음에 주인님께 제가 힘이 있다는 것을 언급하 지 않았다고 주인님께서 저를 원망하며 내치셔도 저는 절대로 주인님을 원 망하지..." "아아, 됐어, 됐어. 뭐, 내가 너라도 숨겼을거야. 네가 당연한 거지. 그런 거를 가지고 의심을 한 누구누구가 성격이 이상한 거고" 요령이는 내 말에 눈썹을 치켜올렸다. "...너 아까부터 자꾸 '누구누구'라는 사람을 자주 입에 올리는데, 그 누 씨 집안의 구누구씨가 도대체 누구를 지칭하는 거냐?" "아까 나라고 그랬잖아? 왜 이리 과민반응이야? 내가 나보고 욕하는 게 그 렇게 듣기 싫어?" "캬아아악!" 네가 아무리 꼬투리를 걸고 넘어지려고 해도 내 손바닥 안이지 뭐. 요령이 는 짜증이 난다는 듯 마구 자신의 머리칼를 헤집더니 나에게 물었다. "으으으, 야, 내가 성격이 이상한 거냐?" "뭐가?" "어, 나는 지금까지 특별한 이유라고나 할까, 뭐 그런걸로,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너처럼 나를 구해줬다거나 하는 건 감사의 인사를 하기 위해서 부득 이하게 말을 해야 할 특별한 이유가 되잖아? 어쨌든 그런 특별한 이유로 접 촉하는 사람들한테는 다 일단 말을 걸었거든" "왜 그랬는데? 자신이 남과 다른점이 있다면 보통의 경우엔 숨기곤 하잖아 ?" "그냥... 솔직하면 좋잖아. 쩝. 그냥,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지 않고 이해해 주었으면 하는 심정이었어.... 별로, 그런 걸 숨기고 싶지 않 았다고. 모르겠어. 잘 설명은 못 하겠지만, 사람에게 말을 걸 때의 마음은 '과연 이 사람도 나를 무서워할까? 나와 친구가 될 수는 없는걸까?'를 검사 하는 일종의 시험을 내는 심정이었고나 할까... 에이, 모르겠다. 내 마음을 내가 어떻게 설명하겠냐. 그리고 내가 그렇게 말을 잘 하는 것도 아니고. 몰라, 모르겠어. 그냥 그래" "......그래서 네가 말을 걸었을때의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는데? 너를 붙 잡고 말동무라도 해 주더냐? 주인 해 주겠다고 그래?" "뭐, 지금에야 하는 말이지만 그 중에서 네가 그래도 제일 덜 놀라더라" 솔직히 말하자면 덜 놀란게 아니라 너무 놀라서 정신이 잠깐 나가버린 상 태였지. 어쨌든 나는 알아들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흠. 네 심정, 이해해. 자신이 이상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생각되겠지. 충 분히 이해가 된다. 이해하고, 게다가 네 질문에 대한 대답도 해 줄 수 있 어. 질문이 네 성격이 이상한 거냐고 물었지?" "응응. 대답이 뭔데?" 그 녀석은 잔뜩 호기심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그 녀석의 반짝 거리는 눈빛을 피하며 말했다. "네가 이상한 고양이야" "캬앗!" 언제나 짜증이 날 때면 그러듯 마치 물벼락맞은 고양이 같은 비명소리를 내뱉은 요령이는 곧 무언가를 생각하는 표정이 되어 중얼거렸다. "하, 그래. 생각해보니 참 간단한 거였어. 자신이 남과는 다르다고 자랑하 고 다니는게 더 이상하긴 하지. 쩝. 마음이 불안하긴 한가보군. 분명 방금 전의 행동들은 내가 생각해도 너무 성급한, 나답지 않은 행동이었어..." "질문2. 넌 무엇에 그렇게 심리적으로 압박을 받는 것인가" 혼잣말을 되뇌이던 요령이를 지켜보다 갑작스레 꺼낸 멍멍이의 질문이었 다. 그게 뭐가 궁금해? 아까 퀴에르가 사람을 보내서 자신을 잡아갈까봐 두 렵다고 했잖아. 요령이도 멍멍이의 대답에 눈을 가늘게 뜨며 이상하다는듯 이 되물었다. "이상하네? 난 아까 분명히 너에게 내가 지금 이렇게 불안한 것은 퀴에르 때문이라고 말했는데? 내 말을 무시한거냐?" "그리고 나는 네 말에 퀴에르가 누구냐고 물었었지. 너야말로 내 말을 무 시했나" 어, 맞어. 그러고보니 멍멍이가 퀴에르를 알 리가 없지. 나도 참. 당연히 알 거라고 생각하다니. "아, 맞아, 맞아. 그랬었지. 미안. 퀴에르가 누구냐 하면 말이야, 내가 아 까 말한 나의 원주인인데..." 그 녀석은 그렇게 자신의 과거와 퀴에르에 대해, 그리고 며칠 전 김회장 님의 집에서 퀴에르를 다시 만났던 일에 대해 멍멍이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 "뭐, 그래서 그 영체는 내가 소멸을 시킨거지" "그리고 네가 귀신의 힘을 빌어서 그 마녀를 태워버리기 직전에 그녀가 자 신의 휘하에 있는 사람을 보내서 너를 다시 잡아가겠다고 했고" "그래......" 고개를 끄덕이는 요령이의 눈빛은 다시금 그때가 생각났는지 불안으로 가 득 찼다. 흐음. 지금까지 내색은 안 했지만 그 일을 마음에 상당히 두고 있 었나봐. 참, 저 녀석이 불안해하는 모습을 다 보게 되고. 참, 오래살고 볼 일이야. 어쨌든 이제 이야기는 대충 끝난거지? 나는 박수를 짝짝! 하고 치 며 말했다. "자, 자, 이야기 끝났지? 그럼 된거지? 화해 한거다?" "주인님께서 원하신다면" 멍멍이는 고개를 숙였고 그런 그녀석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고양이는 코웃 음을 픽! 하고 쳤다. "누가? 누구랑? 무슨 화해를 해? 개와 고양이 사이라는 말도 못 들어봤냐 ?" "아이 씨, 그러지 말고... 아까는 악수까지 했잖아!" 나는 부탁하듯 말했고 그 말에 요령이는 깔깔 웃더니 말했다. "야, 그게 화해하겠다는 악수였냐? 멍멍이가 나와 한지붕을 쓰는 것을 용 인하겠다는 뜻의 악수였지" "그럼 같이 살면서 그렇게 사이가 안 좋은채로 살거야?" "흐흥, 또 모르지. 저 멍멍이 녀석이 나에게 고개를 숙이며 '아름다운 요 령이님, 제가 모두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하면 화해를 해 줄지도. 어억? 뭐? '아름다운 요령이님, 제가 모두 잘못했습니다'라고? 내 참, 기 가 막혀서! 그게 말이 되냐? 장난을 쳐도 꼬옥 자기 성격같은 걸로만 골라 서 쳐요, 참. 그런데 멍멍이는 요령이가 말하자마자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아름다운 요령이님, 제가 모두 잘못했습니다. 이제 됐나" 우아악! 저럴수가! 저렇게 간단하게! 저렇게 고민조차 하지 않고 자신의 자존심을 꺾어버리다니!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고 요령이는 눈을 동그 랗게 뜬 채 입을 조그맣게 벌리고는 헛바람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어, 어어...? 장난으로 해 본 말이었는데...?" "네가 장난이었던 아니던간에, 너의 요구조건은 모두 들어주었다. 자, 이 제 화해를 하겠는가" "어..에에?응, 어, 어" 요령이는 넋이 나간채로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고 멍멍이는 나를 바라보았 으며 나는 그런 녀석에게 힘없이 중얼거렸다. "멍멍아, 너, 넌 자존심도 없냐... 그럴때는 장난이려니 하고 넘어가야지, 진짜로 그냥 고개를 숙여버리면 어떻게 해...?" "주인님께서 화해하라고 명령하셨기에 가장 쉬운 방법을 택한 것 뿐입니 다. 제가 고개만 숙이면, 주인님의 명령은 이루어집니다" "그, 그렇긴, 물론 그렇긴 하지만..." 으으! 저렇게 강하고 줏대있고 올곧아 보이는 녀석이, 내 한마디 때문에 무릎을 꿇다니! 경악이다, 경악이다! ......결국 이렇게 나와 요령이는 새로운 식구를 하나 더 맞이하게 되었으 며, 놀라움으로 시작했던 이 날밤은 요령이의 중얼거림과 함께 놀라움으로 끝나 버렸다. "하...앞으로 저녀석에게 뭘 시키려거든 영준이에게 부탁하면 되겠군. 저 건 뭐 죽으라그래도 죽겠는데...?" "이 봐! 일어나! 해가 이미 중천을 넘어갔어!" 눈부신 햇살 속에서 스스로에게 중얼거리며 눈을 떴다. 12시. 좀 많이 잤 군.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이미 아침의 밝고 활기찬 분위기가 아닌 오 후의 조용하고 따뜻한 분위기였다. 아, 젠장.너무 많이 잤더니 머리가 다 아프군. 그건 그렇고 역시 너무 많이 잤기 때문인지 목이 너무너무 마른데? "요령아...으윽...물 한잔만 줘. 자고 일어났더니 목타" "쿨...쿨..." ......여하튼, 깨우지 않으면 일어나질 않는군. 나는 잠시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기고는, 발끝에 힘을 꽈악 주고는 언제나처럼 발로 녀석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녀석을 깨웠다. "아이 씨... 누구야...씽... 건드리지 마..." "좀 일어나시지, 게으름뱅이 고양이 아가씨" "하아암... 씨. 깨우고 난리야. 잠 깼으니까 그만 차" "잘 잤냐?" "으응... 좀 졸리다, 야. 어젯밤에 잠을 좀 못 잤더니" "지금이 몇 신데? 12시인데? 우리 어제 밤 12시쯤에 불 껐잖아? 12시간을 자도 졸려? 네가 인간이냐?" "물론 고양이야" "......이런 젠장. 어쨌든, 일어났으면 밥이나 차려. 자느라 아침을 굶었 더니 배고파" "......" 내 말에 그 녀석은 나를 묵묵히 바라보았고 그래서 나는 부스스한 그녀석 의 머리칼과 눈곱이 조금 낀 맑은 눈을 바라보다가 참을 수 없는 몰골의 추 레함과 이상하게 그 모습이 예뻐 보인다는 내 미의 기준에 대한 새로운 발 견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 추잡해서 못 견디겠으니까 그만 좀 쳐다봐. 내가 차리면 될 거 아냐. 젠장" "어, 땡큐! 생선 한마리 놓는 거 잊지 말고" "야..." "알았어, 알았어. 베리 머취" "......그게 아니라, 너 얼굴 지금 진짜 부스스하니까 밥 차릴동안 세수나 해" "너나 해 임마. 밥에 눈곱 떨어져" "네가 차려라..." "뭐? 방금 네가 말했어 영준아?" 물론 내가 말한 건 아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고, 방 구석에서 다시 그 목 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이 하기 싫으시다잖나! 네가 해라!" 그리고 그 말에 요령이는 참으로 같잖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넌 누구야?" "......어제부터 주인님을 모시고 살게 된 멍멍이라고 한다. 다시 한 번 만나서 반갑다는 인사를 해야 하는가" "......아, 맞어. 아까 일어나자마자 그 이야기를 해 놓고도 까먹었네. 나 도 참" 그 녀석은 혀를 쏙 빼물며 자기 머리를 콩 하고 치다가 갑자기 뭔가 생각 난 듯 소리를 빽 질렀다. 신났다, 아주. 혼자 애교떨고 성질내고 다 해먹어 라 임마. "...가 아니라! 나도 참이고 뭐고간에 그렇게 네 주인이 귀찮아하는 모습 이 안타까우면 네가 해 임마!" 멍멍이는 절대로 자신도 귀찮아서 안 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실제로도 귀찮아서 그러는 건 아니겠지만. "주인님이 나에게 명령했나. 너에게 명령했지" "얼씨구, 핑계는 좋아요. 그리고 누가 누구에게 명령을 했다는거야, 기분 나쁘게. 어쨌든 난 요리 못 해. 생쌀에 생물고기에 생나물로 아침을 때우고 싶다면 뭐, 내가 하고. 나야 별 상관 없어" "으으음..." "아, 됐어. 멍멍아. 내가 할께" "주인님...차라리 제가..." "그 꼴로 네가 뭘 해. 앞발로 요리하려고? 그냥 내가 하지 뭐" 나는 화장실로 들어가서 수돗물을 틀고 쏟아지는 물줄기에 얼굴을 갖다 대 는 것으로 대강의 세수를 끝낸 뒤 부엌으로 들어갔다. 으음, 귀찮은데... 식구가 셋이니까 반찬까지 세 명분을 차려야 하나? 에이, 밥만 세 그릇 놓 으면 되지. 아니지, 잠깐. 멍멍이는 개잖아? 그럼 먹다 남긴 걸 줘야 하나? 아무리 저 녀석이 나를 잘 모셔 주어서 고맙기는 해도 (뭐, 그래봤자 어제 하루였지만) 개랑 한 밥상 쓰기는 싫은데... 요령이는 고양이지만 외모는 사람이잖아. 에이, 일단 반찬부터 차리자. 김치를 접시에 덜어서 상 위에 올리고, 달걀을 톡하고 까서 프라이를 하면 서 동시에 달걀 프라이 옆에다 생선을 굽기 시작한다. 혼자 사느라 프라이 팬을 하나밖에 장만하지 못한 나의 궁여지책이지. 흐음. 그러고보니 반찬이 세 개 밖에 안 되는군. 그래도 그나마 저녀석이 들어와서 생선이라도 놓고 먹지, 나 혼자 살 때는 언제나 집에서 가져온 김치였다. 흐음. 그러고보니 반찬이 좋아졌다는 것도 저 녀석이 우리집에 들어와서 나아진 점 중에 하나 인가? 모르겠다. 밥이나 먹자. 으악! 계란 탄다! 나는 재빠르게 계란을 접 시에 덜며 생선을 뒤집었다. 요령이는 고양이이기 때문에 약간 덜 익힌 생 선을 좋아한다. 아무래도 익힌 음식은 익숙치 않을 테니까. 그래서 나는 생 선을 언제나 약간씩 덜 익혀서 내어주고. 그렇기에 지금 뒤집어야 하는 것 이다. 뭐, 나는 덜 익힌 걸 못 느끼고 녀석은 약간 덜 익었다는 것을 느낄 정도로 익히니 둘 다 별로 불만은 없다. 이렇게 미묘하게 익히는 타이밍을 익히느라 힘들었지. 흠. 밖에서 요령이와 멍멍이의 대화 소리가 들린다. 무슨 이야기 하지? "그러니까, 너는 먹고 남은 걸 먹어야 되는거야" "알고 있다. 원래 개는 그러는 것이지. " 그런 법도를 누가 정해놨어! 아, 원래는 요령이의 말처럼 멍멍이에게느 밥 상 아래에 개밥처럼 섞어서 밥을 주려고 했지만, 요령이가 멍멍이와 한상 쓰기 싫어서 저렇게 멍멍이에게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되는 사실을 계속 환 기시켜 주는 걸 보면 요령이가 얄미워서라도 멍멍이와 한 상을 쓰고 싶어진 다. 으음. "개털 날리지 않게 조심하고" "알고 있으니 일일히 말하지 마라" ......갑자기 한 상을 쓰고 싶은 생각이 뚝 떨어져 버렸다. 개털... 개털 이라... 그런 문제가 있었군... 쩝. 할 수 없지. 멍멍아, 미안. 개털 들어 간 밥은 정말로 먹고 싶지 않구나. 나는 대접을 하나 꺼내어서 밥과 달걀프 라이 절반, 김치, 생선 1/3 정도를 넣고 마구 섞은 뒤 남은 반찬을 상 위에 차리고는 들고 들어갔다. "밥 먹어라-!" "우와-! 밥이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요령이는 언제나 밥만 보면 그러듯이 무료한 듯이 드러누워 있다가 환호하 며 벌떡 일어섰고 멍멍이는 고개를 약간 끄덕이며 나에게 감사의 말을 건네 더니 상으로 다가왔다. 에이, 저렇게 나를 따르는 녀석을 보면서 막상 너만 따로 먹으라고 하기가 정말 미안해지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어, 저기, 멍멍아, 미안... 그러니까, 요령이는 왜 한 상을 쓰면서 너는 왜 안 쓰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지만..." "괜찮습니다, 주인님. 어차피 제 머리높이에는 상 위의 그릇들이 너무 높 아서 먹기가 힘듭니다. 주인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에? 그렇게 받아들이냐? 흠. 착한 녀석. "어, 그래... 그렇담 자, 여기. 먹어" "야! 왜 생선이 요것밖에 없어어-?" 요령이는 찡그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세수 했냐?" "했어!" "어, 그래. 잘 했다. 그럼 먹자" "응, 그래...... 가 아니라! 왜 생선이 이것밖에 없어? 허리 아래는 어디 로 갔어?" 나는 손가락으로 멍멍이의 밥그릇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우우우! 이럴수가! 이건 불공평해! 나는 너랑 같이 먹는데 저 녀석은..." "짜증 내지 말고 그냥 먹어" "쳇!" 그 녀석은 콧방귀를 한 번 뀌더니 수저를 들었고 그 녀석이 말없이 밥을 입으로 가져가는 모습을 보다가 나도 밥을 먹기 시작했다. "우움. 우물우물, 야, 우물, 빨리 먹어, 우걱, 우걱, 우리 아르바이트 시 간 얼마 안 남았어" "알어, 아니까, 쩝, 밥 먹을때, 우음, 말 걸지 마. 밥 먹을, 우우움, 밥 먹을 때에는 저 녀석도 안 건드린다는데, 쩝쩝, 뭐 하는 짓이야" 요령이는 젓가락으로 멍멍이를 가리키며 말했고 그래서 나는 고개를 끄덕 였다. 그런데 그 때 멍멍이가 물었다. "주인님. 식후에 어디에 가십니까?" "으응. 카페" "카...페라면... 찻집을 말하시는..." "그래. 나와 요령이는 주로 그 곳에서 손님들의 주문을 받는 일을 하지" "일...이라면..." "응, 그걸 해주고 돈을 받으니 일이지" 멍멍이는 그 말에 밥을 먹는 것을 멈추고는 잠시 생각에 빠지는 듯했다. 무슨 생각을 하지? 궁금증이 일었으나 뭐, 그런 것까지 물어볼 수는 없잖 아. 그 때 멍멍이가 입을 열었다. "주인님" "응?" "저도 데려가 주십시오" 그리고 나는 그 말에 숟가락으로 떠서 입에 넣었던 김치국물을 뿜었다. 그 리고 요령이는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던 생선의 살점을 기어코 떨어뜨리고야 말았다. "푸우웃! 뭐?" "우와앙! 아까워! 제일 맛있는 부분인데!" 그 녀석은 울상을 지으며 방바닥에 떨어진 살점을 주워 먹으려 했고 나는 재빠르게 주워 먹으려고 움직이는 요령이의 손을 탁! 하고 쳐서 녀석이 추 잡의 나락으로 떨어져 버리는 것을 간신히 말린 뒤 멍멍이에게 다시 물었 다. "어, 그러니까, 너도 우리를 따라서 일을 하고 싶다는 말이지?" "예. 그렇습니다" 내가 왜? 라고 묻기도 전에 이미 요령이의 입은 실실 웃고 있었다. 또 무 슨 말을 하려고 그러냐? 그 녀석은 그렇게 입가에 실없는 미소를 띄며 말했 다. "그래! 우리와 같이 가는거야!" "뭐?" 나는 갑자기 평소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을 보이는 요령이를 보면서 '김치 가 쉬었나? 달걀이 상했나? 밥이 찬가? 생선을 너무 덜 익혔었나?'등등을 걱정할 수 밖에 없었다. 한 마디로 내가 이 녀석한테 뭘 잘못 먹였던가 하 는 생각이 든 것이다. "넌 우리와 같이 가겠지! 그리고 카페의 주인 아저씨에게 말하겠지! '아 저씨. 나도 우리 주인님과 함께 일하고 싶다. 나에게도 일을 달라' 그리고 주인 아저씨는 잠시 어안이 벙벙해져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는 외치겠지?'어 디다 대고 반말이야? 이 싸가지 없는 개... 개?개? 개,개가 말을 한다! 우와 아악!' 코미디다! 코미디! 깔깔깔!" 그 녀석은 얼굴을 우스꽝스럽게 만들어가며 실감나게 멍멍이와 아저씨의 목소리를 흉내내었고 그래서 나는 멍멍이에게 미안했지만 큭큭거릴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찌어찌해서 일을 같이 하게 되었다고 쳐. 아마 영준이가 협박하 겠지. '아저씨, 요령이랑 같이 일하기 싫어요? 나 그냥 요령이 데리고 집에 가?' 뭐 이렇게 말이야. 그러면 아저씨는 할 수 없이 멍멍이를 웨이터로 쓸 테고. 그런데 주인 아저씨의 예에서 보듯이 개가 사람한테 말을 걸면 사람 들이 기절할 듯이 놀라니까 절대로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서는 안 되잖아? 그래서 주문이 들어오면, 나비넥타이를 한 멍멍이가 메뉴판을 물고 손님에 게 가서 이마에 써붙인 것을 보여 주는거야. '전 친절한 웨이터 멍멍이 입 니다. 무엇을 주문할지 말해 주세요' 그러면 손님들은 배꼽을 잡고 웃어대 겠지! '이 집은 개가 주문을 받네!'하고 말야! 큭큭큭! 어쩌면 tv프로에도 출연할 지 모르지! '이 가게엔 특별한 웨이터가 있다' 하고 말야! 호호호호 호!" 녀석은 계속 실감나게 혼자서 손짓 발짓 다해가며 주문하는 손님, 이마에 '무엇을 주문할지 말해주세요' 라고 써붙인 개, tv프로의 사회자 등등을 흉 내내었고 그래서 나는 결국 숟가락을 집어던지며 배를 잡고 웃어대고야 말 았다. 으하하, 으하하하하! 요령이도 자기가 말해놓고 자기가 생각해도 웃 겼는지 눈물을 좍좍 흘려대며 웃고 있었고. 그 와중에서 오직 멍멍이만이 웃고 있지 않았다. 나는 낄낄대며 말했다. "오, 멍멍아, 미안해, 너, 너무 웃겨서! 으하하하!" "괜찮습니다" "그건, 그건 그렇고, 왜, 우흐흐흐흐! 왜 우리와 같이 일을 하겠다는건데? 크흐흐흐!" "앞으로 모든것을 주인님에게 의지해서 살텐데, 그렇게 살면서 아무런 도 움도 주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도 죄송스럽습니다. 그래서, 저도 주인님과 같이 일하면 주인님도 도울 수 있을테고 돈도 받을 수 있을테니 그 돈을 주 인님을 드리면..." 나는 잦아드는 웃음끝에 찾아오는 호흡곤란으로 인해 숨을 격하게 몰아쉬 며 물었다. "그래서, 으흐흐, 콜록콜록, 헉! 헉! 그래서, 나를 조금이나마 도와 보겠 단 말이지?" "예... 그리고 주인님의 곁에서 지켜 드릴수도 있을테고..." "으헉, 오, 미안. 젠장스럽게도, 개를, 개를 웨이터로, 아니, 하다못해 개 를 청소부로라도 쓰는, 쓰는 곳은 아무 곳에도 없어! 으하하하!" 멍멍이이게 이야기하며 나는 다시금 나비넥타이를 매고 입에 메뉴판을 문, 이마에 '주문하세요'라고 써붙인 멍멍이를 떠올리고는 미친듯이 웃어댔다. 으하하하! 그렇게 바닥을 굴러대며 요령이를 바라보니 요령이는 너무 웃다 가 배가 아픈지 부들부들 몸을 떨고 있었다. 물론 격렬한 웃음소리와 함께. "아니오. 할 수 있습니다" 멍멍이 녀석은 우리가 웃던 말던 별로 상관하지 않는 듯했다. 나같으면 기 분이 나쁠텐데. 이제 그만 웃어야지. 나는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들었고, 그 녀석과 눈이 마주치자 아까 상상했던 모습이 다시 떠올라서 다시금 데굴 데굴 구를 수 밖에 없었다. 푸하하하! "어, 어떻게? 어떻게 할 수 있는데? 푸하하하!" "요령과 같은 방법으로 하면 됩니다" "뭐? 요령이처럼? 어떻게?" 강한 호기심이 내 얼굴에서 떠나갈 줄 모르던 웃음기를 순식간에 없애주고 는 그 대신 의문 가득한 표정을 내 얼굴에 불어넣어 주었다. 요령이와 같은 방법이라고? 무슨 방법인데? 나는 멍멍이에게 내 의문에 대한 답변으로 지목된 요령이를 바라보았다. 넌 답을 알고 있니? ......그리고 마치 미친 여자처럼 머리를 헝클어트린 채 바닥을 박박 긁으 며 데굴데굴 구르며 웃어대는 요령이를 보며 절망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돌 려야 했다. 너 도대체 왜 이렇게 막나가니! 네 이야기가 나왔는데 넌 신경 도 안 쓰이냐! "요령이처럼 사람으로 변하면 간단한 것이지요. 단, 여기서 걸리는 문제점 은 제 의복의 부재와..." "어? 잠깐, 잠깐. 지금 뭐라고 했어?" "사람으로 변한다고 했습니다만..." "응? 다시 한 번만!" "사람으로 변한다고 했습니다만... 변하면 안 되는 것입니까...?" "아냐! 아냐! 네 맘껏 변해! 근데, 너도 변할 줄 알아?" 어느 새 웃음을 멈춘 요령이가 톡 끼어들었다. "당연하겠지. 저 녀석도 영기가 나와 맞먹는 수준이니. 나보다 조금 모자 르긴 하지만" 엑? 알고 있었어? 그럼 알면서도 그렇게 비꼬아댄거야? "그럼 넌 알면서 비웃은거네?" "물론이지. 어, 그러니까, 그냥. 상상하면 웃기잖아?" "그렇구나... 그런데 저 멍멍이가 너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약간 모자르다니까. 난 삼백 오십살, 쟤는 삼백살. 내가 오십살 더 많잖 아." 멍멍이는 그 말에 이를 드러내며 중얼거렸다. "너보다야 내가 낫겠지. 영물이 요물보다 기가 흩어지지 않고 잘 모인다는 것은 상식일텐데" "그렇지만 기가 모이기 시작한 처음엔 요물들이 영물들보다 영기를 훨씬 빠르게 모으지. 그리고 오십 년의 차라는게 그렇게 적은 것은 아니고 말야"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설마 내가 너보다 못할까" "뭐? 넌 아무리 해도 나한테 안 돼! 내가 그 때 찔렀으면 넌..." "피했겠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이익!" 왜 또 이야기가 이런 방향으로 흘러가냐? 나는 두 사람 사이에 재빨리 끼 어들어서 팔로 둘을 밀어서 떨어지게 한 다음 재빨리 요령이의 어깨를 민 손으로 요령이의 입을 막으면서 멍멍이에게 질문했다. "그래,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단 말이지?" "예" "좋아, 그런데 왜 말하지 않았니. 또 뭐라고 할까봐서?" "아뇨. 말할 기회가 없어서..." "그렇구나... 그래서, 사람으로 변해서 나를 따라 내가 일하는 곳으로 가 겠다는 말이지?" "예. 그리고 같이 일하고 싶습니다" "흐음... 좋아. 뭐, 그럼 우리 나가 있을게, 지금 변해볼래?" "지금...말씀이십니까?" "그래. 조금 있다가 아르바이트 시간 되니까 너도 우리를 따라오려면 빨리 준비해야지. 야, 요령아!" "......" "요령아?" "......" "요령아? 왜 대답이 없니?" "......" "요령아! 으아아아아악! 꼬집지 말란 말이야아아악!" 나는 내 온 몸을 뒤틀며 비명을 질렀고 요령이는 나를 한심해서 보는 사람 이 미쳐버리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입을 막은 손을 떼야 말을 할 거 아냐" "......너 일부러 나 세게 꼬집으려고 네 입을 막은 손에는 힘도 안 줬다 는 거 알면서 내 손 안 치웠지?" "응" "으아악!" 미쳐버리겠다! 정말! 나는 터져오르는 짜증을 주체하지 못하고 온 몸을 뒤 틀어대었고, 그런 나를 바라보던 요령이는 약간 치켜올라간 큰 눈을 깜박이 며 순진무구한 얼굴로 물었다. "...화...났어? 난 그냥 장난인데..." 새카맣고 윤기있는 흑발. 시원하고 균형잡힌 이마. 짙고 곧은 눈썹. 긴 속 눈썹과 큰 눈. 오똑한 코. 작고 붉은 입술. 희고 고른 치아. 갸름한 얼굴. 새하얀 피부. 우아아! 예쁘다! 예뻐 미치겠다! 이러면 안 되는데! 왜 이리 저 녀석이 예뻐 보이냐! 미안하다는듯이 어색하게 미소짓는다. 웃지마! 화 풀려! 정들어! 웃지 말라니까? 에이, 씨! 웃고 난리야... "제에에엔자아앙! 나 왜 이러냐, 자꾸! 됐다, 나가기나 하자. 멍멍이 기다 리고 있잖아" "풀렸냐?" 요령이는 실실 웃으며 내게 물었고 그래서 나는 음침한 얼굴과 표정으로 대답해 주었다. "내 화를 이렇게 빨리 풀어낸 자는 4살때 넘어지고 돌멩이에 잔뜩 화난 내 게 사탕을 사줘서 바로 화를 풀리게 했던 동네 형 이후로 네가 처음이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내 화를 풀어내다니 과연 요물이군. 으으음..." 나는 장난스럽게 연극 대사를 읊조리듯 말했고 그래서 그 녀석은 깔깔대며 내 등을 후려쳤다. 퍽! 으윽! 아프잖아! 젠장! "추추추추추춥, 춥, 춥, 제기랄, 왜 말이 안 나와! 젠장! 춥지?" "어째 나보다 네가 제기랄, 젠장 등등을 훨씬 더 많이 쓰는 것 같다?" "청출어람... 네 은공이다... 추워..." "얼씨구, 어디서 주워 들은 말은 있어가지고... 근데 진짜 춥기는 춥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점퍼라도 하나 걸치고 나올걸..." 우리는 지금 바람이 쌩쌩 부는 하숙집 위에서 2층에서 바라보는 도시의 전 경 (이래봤자 집앞이다)을 바라보며 여유롭고 아늑하고 따뜻한 대화는 절대 나누지 않고 이빨소리와 덜덜 떠는 소리만 주고 받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 었다. 젠장! 추워! "야, 근데 왜 우리가 이렇게 추운데 나와서 기다리고 있어야 되는거야?" 요령이의 질문에 나는 추위에 이를 딱딱 부딪히며 대답해주었다. "왜냐고 물으신다면 멍멍이가 다 벗은 모습이 그렇게 보고 싶냐고 대답해 드리지" "아, 맞다. 변할때는 다 벗지. 처음부터 옷을 입고 있지야 않으니까.호호 호호!" "그런데 왜 웃냐? 멍멍이의 벗은 몸을 상상하니까 괜히 즐겁냐?" "아니, 아냐아냐, 호호호호!" "그럼 왜 웃는데?" "너 처음 본 날이 떠올라서. 호호호호! 너 그때 알몸인 나를 보고 무지하 게 당황했었잖아! 얼굴은 꼭 불에 달군 숯덩이처럼 빠알개져 가지고, 호호 호호!" 그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때의 일을 떠올리며 웃어댔다. 참 나! 임마 ! 나도 남자라고! 아무리 네가 사람이 아니라지만 겉모습은 여자인데, 남자 인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꺼내면 어떻게 해! 듣는 사람보고 당 황하라고 강요하는 거냐! "그, 그 때 다 벗었던 건 너였어, 너! 내가 아니라! 물론 결국 봐야할 건 하나도 못 봤지만 말야, 응?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래도 여자잖아! 창피 라는 걸 모르냐?" 그 말에 그 녀석은 내게 얼굴을 바싹 붙이고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묻는 다. "안 보였으면 됐지 뭘 흥분하고 그래?" "아니, 그게 아니라, 내 말은..." "네 말은 뭐?" 똑바로 쳐다보지 마... 네 얼굴이 그렇게 가깝게 보이니까 자꾸 처음 본 그 날이 떠오르잖아. 그 날도 얼굴이 이렇게 가까웠었지. 그래서 아무것도 못 봤지만 말야. 내가 그때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알아? 어휴, 그 때를 생각 하려고 하니 다시 얼굴이 화끈거리려고 한다. 생각하지 말아야지. 사라락... 으응? 내 목 주변에서 어리는 이 부드러운 느낌은 뭐지? 설마... 요령이의 숨결인가? 사라라락... 계속해서 부드러운 간질거림은 계속되었고, 아무것도 아닌데, 언제나 있는 느낌인데, 그냥 간지러운 것 일수도 있는데 괜히 지금 이 느낌이 요령이의 숨결이라는 생각을 하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우욱! 참아야 해! 얼굴이 벌개진게 들킨다면 그게 왠 개망신이냐! 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정면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어떻게든 변하려는 얼굴색을 흰 색으로 붙잡아 놓기 위해 정면으로 부릅뜬 눈으로 들어오는 요령이의 얼굴. 귀엽다...... 분명 미인형이라도 귀여운 스타일은 아닌데 귀엽게 느껴진다. 녀석과 눈이 마주쳐버린 지금, 눈을 돌려버리자니 왠지 어색하게 보일것 같아서 할 수없 이 계속 녀석을 바라보았고 그렇게 마주보고 있다보니 점점 이상한 기분에 휩싸이는 나를 느낄 수 있었다. 녀석을 보고 있으면 있을수록...왠지 두근거린다... 약간 떨리고... 긴장 되고... 뭐? 아냐! 두근거림은 얼어죽을! 왜 이래? 정신차려! 귀여워? 지금 귀엽고 나발이고 따질때야? 정신차려! 정신! 으으으! 설마 얼굴이 빨개졌을까? 그 럼 안 되는데! "얼씨구? 얼굴 탄다, 얼굴 타! 얼굴이 왜 갑자기 빨개지는데? 또 무슨 생 각을 하는거냐?" 제기랄! 빨개졌구나! 왜 갑자기 부끄럼은 타고 난리야 그러니까! 멍청이! 바보자식아! 어쨌든 뭐라고 핑계라도 좀 대 봐라, 입아! "아...저...그, 그게... " ......그게 핑계냐? 차라리 조용히 있는게 낫겠다. 입, 일자로 닫혀라. 합. "어휴, 하여튼... 왜 이리 애가 생기다 말았니, 응? 머리카락 좀 닿은게 그렇게 참기가 힘들어? 간지러우면 그냥 긁지 뭘 또 참느라고 얼굴까지 벌 개지고 그래!" 머리카락이었구나... 어쨌든 녀석은 내가 자기 머리카락이 스친 것 때문에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불쾌감으로 얼굴이 붉어졌다고 생각하나보다. 휴우 우우... 다행이다... 난 문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푸욱 쉬었고 그 때 방 안에서 내 한숨소리를 타고 멍멍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 끝났습니다" "어, 그래. 지금 들어가" 나는 문을 열고 아무 생각없이 방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눈을 들었고, 굉장한 미남을 보고 아연실색할 수 밖에 없었다. 난 숨막히는 목소리로 물 었다. "넌, 넌 누구냐...?" "접니다. 주인님" "저라 그러면 누구인줄 알아! 신상명세를 대!" 그 잘생긴 녀석은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고 나는 겁먹은 표정을 짓다가 슬 쩍 미소지으며 말했다. "장-난-이-지히히히히! 야, 축하한다. 너, 출세했다. 야- 멋지다. 잘생겼 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짙은 선의 미남. 녀석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분명히 꽃미남이나 미소년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과는 거리가 멀게, 그러니까... 강인하게 생겼 다. 음. 맞아. 강인하게. 그러니까... 탤런트로 비교하자면, 장동건이나 차 승원, 차인표나 혹은 이병헌같은 사람들을 보고 '참 잘생겼다' 고 하지 '곱 상하게 생겼다'고는 하지 않잖은가? 녀석도 그런 스타일이다. 굵은 눈썹, 날카로운 눈매, 잘 선 콧날, 꾹 다문 입술. 강하면서도 우수에 잠긴듯한 얼 굴. 멋있게 생겼다, 임마! 부럽다, 야! 나는 팔베게를 하고 드러누으며 중 얼거렸다. "하아, 내 주위에는 미남에다가 미녀..." "나? 나? 나 미녀야? 야호! 나 미녀다!" 야호는 얼어죽을... 하여튼 말 한마디를 제대로 못 한다니깐... "......는 아니고. 어쨌든 미남 추녀 다 있는데 왜 나만 이리도 평범하냐. .." "추우녀어어?" "주인님" "응?" "주인님은 저같은 거짓된 가식의 얼굴보다 백배는 멋진 진짜 인간의 얼굴 을 가지고 계십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고마워... 위로해줘서. 자식. 근데 빈말이 아니고, 너 진짜 잘생겼어" "감사합니다..." 녀석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표정은 결코 그렇게 좋아하는 표정이 아니었 다. "야, 왜? 싫어? 잘생기면 좋은거야, 임마!"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제 모습이 제 옛 주인님의 완전한 반대의 모습이기 때문에... 제가 잘생 겼다는 말은 곧 옛 주인님이... 그러니까..." 못생겼다는 말이 된단 말이지? 흠.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군. 그런데 저 얼굴의 완전한 반대의 얼굴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생겼었기에? "네 주인이 어떻게 생겼었는데?" "제 옛 주인님은... 가냘픈 여자처럼 생겼었지요. 그래서 그 분의 어렸을 때 별명이 기생오라비였다고 하더군요... 그 분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몹시 도 싫어했지요... '몸도 계집같이 약한데 외모까지 계집같으니... 내가 계 집들과 다른 점이 뭐냐? 나도 얼굴만이라도 강하게 생기고 싶다...' 라고 언제나 중얼거리셨지요" 뭐? 가냘픈 여자처럼 생겨? 그럼 미소년 아냐 젠장! 그 전주인 인가 뭔가 하는 놈 참 불평도 많다! 얼굴이 잘생겼는데도 불평이야? 하긴, 시대가 시 대이고, 또 '약한 것'을 극도로 싫어했었다고 하니까. 좋아, 특별히 이해해 주지. "그거 좋은 거야. 못 생긴 거 아냐. 그러니 안심해" "그렇...습니까?" "그래. 그런데 왜 하필이면 넌 네 옛 주인의 반대되는 얼굴을 택했냐" "그 분이 저보고 언제나 강해지라고 하셨고, 또 절대 자기처럼은 되지 말 라고 하셔서... " 간단한 이유로군. 어쨌든, 이제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야지? 아참참! 그 전 에 일단 몇가지 해놓을 게 있다. 이 녀석의 나이와, 새로운 이름(다른 사람 들 앞에서도 멍멍이라고 부를 수는 없으니까)을 정해놓고 이 녀석과 몇가지 약속을 해야 한다. "멍멍아?" "예" "일단 너라는 '인간'의 설정을 좀 해야겠다. 요령아? 그 때 네가 다른 사 람들한테 널 몇 살이라고 소개했지?" "간단하게 스무살" "그렇구나. 그럼 너도 스무살이야. 누가 물어보면 스무살이라 그래. 알았 지?" "예" "그리고 이름 말인데... 멍멍이라는 이름은 안 돼.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 각하거든. 그러니 새로운 이름을 정해야 되는데... 옛날처럼 한뫼라고 불러 줄까?" "......주인님이 정하신다면 따르겠습니다..." "네 생각을 말해봐. 물어본 거니까 "전 솔직히... 그 이름은 단지 옛 추억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 하기에... 과거에 묻혀버린 이름을 다시 현재로 가져오고 싶지는 않습니다. .." 옛 추억의 그림자가 과거에 이름을 묻었다고? 왜? 옛 추억의 그림자랑 이 름이 서로 싸우기라도 했냐? 도대체 무슨 소리야? 말을 왜 그리 어렵게 해 ! ......좋아, 어쨌든 싫다는 소리겠지. 싫다는데야 할 수 있나. "......싫다는 소리 맞지?" "예" "그래, 좋아. 그럼 이름을 정하자. 요령아, 너도 이리로 와서 좋은 생각 있으면 말해봐" 나는 요령이에게 그렇게 말해주고는 나만의 생각으로 빠져들었다. 멍멍이 는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고. 그리고 요령이는? 싱글벙글대고 있었다. 왜? 요령이가 왜 웃었는지, 그 이유는 곧 알 수 있었다. 요령이가 실실 웃으며 멍멍이를 대신할 이름을 하나씩 톖조리기 시작한 것이다. "바둑이" "발바리" "삽사리" "왈왈이" "킁킁이" "해피" "뽀삐" 뽀삐까지 나오자 마침내 멍멍이는 고개를 돌려버렸고, 요령이는 싱글벙글 대면서 더 말할듯이 계속 입을 움찔거렸다. 지금이 장난할때냐? "야! 그만해. 지금 장난이나 치고 있을때냐? 이러다 알바 늦는다고! 좋아, 멍멍아. 한글이 좋으냐 한자가 좋으냐?" "둘 다 좋습니다" "그래? 난 한글이 좋더라. 좋다기보다는, 사실 한자이름이 보편적이긴 한 데, 한자로 이름 지으려면 정말 머리 깨져. 옥편 뒤지기도 힘들고. 그냥 한 글로 하자. 불만 있니?" "아니오" "그래. 없다니 다행이다. 저번에 이름이 한뫼였지? 좋아. 그럼 네 성은 한 이야. 그리고 이름은... 뫼. 뫼. 산이지? 산, 안 움직여서 산이니까... 이 번엔 잘 움직이는 바람이다!" 요령이가 톡 끼어든다. "바람둥이?" "......이건 안 되겠군. 걱정마. 곧 찾아줄게. 좋아, 바람하니까 생각났 어. 바람을 마음대로 부리는 용! 난 용이 멋지더라. 미르 어떠냐?" "......몰라? 근데 좀 별로인데?" "괜찮다는 뜻이구나. 좋아, 한미르. 한미르. 에잇 젠장! 검색 사이트 이름 이잖아! 이건 안돼. 다른거! 생각하자. 생각하자... 산이니까... 강, 바다. 좋아, 가람 아니면 바다다! 아 참, 바다라는 이름은 이미 유명하지. 그것도 여자 이름으로. 좋아. 가람이다. 좋았어! 넌 한가람이다!" "......왠지 애들 이름같지 않냐?" "원래 애들이 크면 애들이름이 다 어른이름이 되는거야! 토 달지 마! 한가 람! 좋았어!" "야... 어감 진짜 이상하다니까? 한가람이 뭐야, 한가람이..." "원래 이름은 그 이름이 지칭하는 이름의 주인을 다른 사람들에게 인식시 켜주는 역할을 할 뿐 그 이상의 어떠한 확대해석도 있을 수 없다는 내 생각 에 동의하지 않는거냐, 요령아?" "......가람, 야, 멋지다!" 자식, 못 알아듣는군. 사실 나도 내 말이 무슨 말이었는지 내가 해놓고도 모르겠어. 헤헷. 좋아, 이제 설정은 대강 끝났지. 이름 한가람. 성별 남. 나이 20세. 거주지역 우리 하숙방. 이제 몇가지 약속만 하면 돼. "멍멍아?" "예. 말씀하십시오" "명령이다. 이제부터 반말 써" "좋아" ......또 이렇게 나오면 내가 당.황.하.지! 반말을 쓰란다고 진짜로 반말 로 대답하냐! 내가 말한 거긴 하지만 네가 그렇게 갑작스레 반말로 말하니 까 받아들이질 못하겠잖아! "어...반말 쓰란다고 진짜 쓰는거야?" "그래. 명령이었으니까" "흐음. 좋아. 어쨌든, 너는 외형이나 설정상으로는 나와 비슷한 나이야. 그런데, 그런 네가 나한테 마구 존댓말쓰면서 '주인님, 주인님'하고 부르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보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말을 수군댈 충분한 소재거리 가 되지. 그래서 반말을 쓰라고 한 거야. 알았지?" "그래. 알았어" 근데 이 녀석에게 반말을 들으니까 진짜 기분이 이상하다... 쩝. 왠지 아 쉽기도 하고. 어떤 사람이 존댓말 딱딱 해주다 갑자기 반말 쓴다고 하면 아 마 누구라도 나처럼 아쉬울걸. 지금이라도 물러버릴까? 에이, 됐어. "그리고 하나 더 약속할 게 있어" "무엇을...?" "이제부터 나를 주인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영준이라고 불러줘. 물론 명령 이야" "그건... 안 돼" "뭐? 왜?" "너는 나의 주인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대전제이고 나는 너를 주인이라는 호칭으로 부름으로서 언제나 그것을 확인한다. 내가 너를 주인 이라고 부르지 못하게 되면, 그 순간 너는 내 주인이 아니게 된다. 주인이 라고 부를 수 없는 자는 주인이 아니니까. 나는 그런 상황을 원하지 않는 다" 무슨...소리야? 도대체? 그런 호칭 따위가 뭐가 중요하다고? 영준이라고 부르면서 속으로만 주인님이라고 부르면 되잖아? 난 물었다. "괜찮아, 나는 괜찮으니까 그냥 이름 부르고 속으로만 주인이라고 생각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까..." "왜? 요령이도 나보고 그냥 이름을 부르잖아?" 그 때 또 요령이가 끼어들었다. 녀석, 계속 톡톡 끼어드네... "어, 내 이름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전에도 말했듯이 개와 고양이는 틀 려. 고양이에게 주인은... 뭐라고 해야 하나? 그래. 친구를 부를때는 일일 히 '야, 친구!' 라고 할 필요가 없잖아? 으음. 친구와는 좀 많이 다르지만. .. 어쨌든. 내가 그런 개념이라서 별로 너에게 주인님이라고 부를 필요성을 못 느끼는 반면, 저 녀석은 그러니까... 흐음. 조악한 비유이긴 하지만, 너 는 네 아버지에게 '야, 야!' 하면서 이름을 부를 수 있니? 그러면서 존경심 을 가질 수 있어? 없지?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네가 저 녀석 아버지라는 소리가 아니라, 저 녀석에게는 네가 절대적으로 존경해야 하는 존재이고, 그렇기 때문에 네 녀석에 대한 호칭만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거지. 네 아버 지가 '이제부터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고 내 이름을 부르렴' 한다고 네가 쉽 게 이름을 부를 수 없듯이 말야. 이해 가?" "으응... 이해가 조금 가려고도 하는데... 멍멍아, 쟤 말이 맞니?" "사실과는 틀리지만 나도 저보다 쉽게 설명할 수는 없다, 주인" "그래...? 하아. 그럼 어쩌지...? 나보다 더 큰놈이 나를 보고 주인, 주인 하는 모습은 분명 보기 안 좋을텐데... 젠장. 하는 수 없군. 멍멍아, 요령 아!" "왜?" "말해" "이제부터 내 별명은 주인이다. 누가 물어보면 그렇게 대답해. 알았지? 응, 그래. 알았다니 됐다. 좋아. 정리 한 번 하고 곧장 아르바이트하러 나 가자. 멍멍이의 이름은 이제부터 한가람. 나이는 20세, 성별은 남자고, 나 와는 친구사이이고, 나를 보고 주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게 내 별명이라 서. 좋아! 가자!" 나는 마지막으로 정리를 끝내고는 기세좋게 일어섰다. 가자! "주인 아저씨,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아저씨-" 주인 아저씨는 무지 바쁜지 우리쪽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이곳 저곳을 왔 다갔다거리며 연신 테이블을 훔치고 컵을 나르고 바닥을 닦으며 말했다. "빨리! 빨리! 다들 이렇게 늦게 오면 어떡하나! 어서 옷 갈아입고 나오게! 요령양 때문에 손님이 늘어서 좋지만, 이렇게 바빠서야 원..." 으으. 지각인가보군. 이럴 줄 알았다면 뛰어올 걸. 나는 미안한 마음에 쭈 뼛거리며 대답했다. "저... 아저씨. 제 친구가 아르바이트를 같이 하고 싶다 그래서 데리고... 왔거든요? 좀... 봐 주실래요?" 아저씨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남자야 여자야? 남자면 너 하나로 충분하고 여자면 요령이 하나로 충분 해. 끝" "아... 하지만... 그래도 왔는데 일단 얼굴이라도 보세요...." "으음, 바빠 죽겠구만..." 아저씨는 약간 짜증실린 목소리로 고개를 들어서 멍멍이, 아니 가람이의 얼굴을 보았고, 그리고... 총알처럼 달려와서 가람이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에구, 인간이 참 간사해 요. "일하고 싶다고? 왜 이제 왔나? 그래! 당연히 일해야지! 자! 옷이 어디에 있는지는 영준이가 알려줄걸세! 하하하! 어디서 이렇게 잘생긴 놈이 나타났 을까? 이제 요령양이 남자 손님들을 맡고, 자네가 여자 손님들을 맡으면 되 겠군! 으하하하! 자네, 이름이 뭔가?" "한가람입니다" "오! 가람! 이름 좋구만! 나이는?" "스무 살 입니다" "좋아! 어서 옷 갈아입고 나와서 영준이가 알려주는데로 하면 돼! 영준이 자네, 확실히 알려줘야 하네! 하하! 자, 어서! 어서!" 아저씨는 싱글벙글거리며 가람이에게 계속해서 옷을 갈아입고 오라고 손짓 한다. 어이, 어이! 아저씨! 이러면 곤란하지! 계산은 확실히 해야 할 것 아 냐? "아저씨, 저 녀석 일당은 얼마 쳐 주실 거에요?" "응? 으응...? 아, 일당? 잘 쳐줘야지!" "요령이와 같은 수준은 되어야 해요" "뭐? 우리가 무슨 초거대카페인줄 아냐? 우리는 그냥 시내에 있는 분위기 좋고 조용한 카페일 뿐이야! 요령이에게 주는 만큼은 줘야 한다니! 우리가 돈이 어디 있나! 응?" "......아저씨, 아저씨 전에 요령이 들어올때도 그렇게 말하셨죠? 그리고 결국은 그냥 받아들이셨구요. 그리고 지금, 보세요. 요령이가 있었을 때와 없었을 때의 매출의 차이를. 아저씨가 더 잘 알다시피, 요령이에게 주는 돈 을 빼고도 아저씨는 옛날보다 이익이 엄청나게 늘었을텐데요?" "아, 물론 그렇긴 하지만..." "가람이도 마찬가지에요. 저 녀석 얼굴을 보세요. 저게 사람의 얼굴이 맞 는지. TV에서도 저런 얼굴 보기 힘들어요. 고작 시간당 6000원 아끼려고 아 저씨 가게에 굴러들어온 대박을 버리실 거에요?" "흐음... 할 수 없지. 좋네. 일단 일이나 시켜보세. 영준이 자네가 무엇을 해야 할 지 잘 가르쳐 줘" "알았어요. 그럼 제가 다 알아서 할테니까 아저씨는 좀 쉬세요. 늦어서 죄 송합니다" "시급에서 빼면 되는데 뭐가 죄송하니. 그래, 난 좀 들어가서 쉬련다. 그 런데 뭐 물어볼 게 있는데" "예? 뭔데요?" "너 혹시 무슨 기획사 같은곳에서 일하냐?" "예에? 무슨 소리세요? 그런데서 일하면 제가 여기서 아르바이트나 하고 있겠어요?" "흐음. 네 말이 맞다. 그런데 넌 어쩜 그렇게 주위에 사람 놀라게 하게 생 긴 사람들밖에 없냐? 도대체 쟤네들이랑 넌 무슨 관계냐?" 그 말에 난 씨익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제가 인간관계가 워낙 좋잖아요. 다들 제 친구에요" "......인간관계가 좋다고 한 방금전의 네 말은 못들은 걸로 하겠다. 그건 그렇고, 너, 저런 친구들 또 없냐?" "아직은요" "흠. 그래? 좋아! 생기면 무조건 또 데려와. 알았지?" "알았으니까 쉬세요. 안 힘드세요?" "아 참. 쉬려고 했었지? 내 정신좀 봐" 아저씨는 머리를 멋적게 벅벅 긁으며 바 안쪽에 작게 설치되어있는 아저씨 의 휴게실로 들어가 버렸다. 으음. 정말 계산이 철저하군. 몇 분이나 지났 다고 그걸 시급에서 빼?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가람이를 데리고 휴 게실로 들어가서 캐비냇의 옷을 꺼내 주었다. 그리고 나는 옷걸이가 좋으니까 옷까지 좋아보인다는 말이 왜 나왔는지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에이, 부러워. "우와-! 오빠, 진짜 잘생겼다-!" "감사합니다. 주문은?" "에스, 에스프레소! 그런데 오빠 진짜 잘생겼다! 핸폰 번호 좀 적어줘요!" "......예?" "핸폰! 핸드폰 번호 좀 적어달라고요!" 그 말에 가람이는 고개를 숙여 메모지에 주문을 적으며 말한다. "주, 문, 에스프레소. 전 핸드폰 없습니다. 반대쪽 분께선?" 그리고 반대쪽의 여자는 자기가 지목당했다는 사실에 얼굴이 빨개져서는 모기소리만하게 중얼거린다. "저...도...같...은...걸...로...요..." 우헤헤! 보는 내가 다 웃긴다! 나는 메모지를 급히 넘겨서 맨 뒷페이지를 펴서는 오늘의 체크: 요령이 vs 가람이라고 써놓은 글 아래쪽에 가람:14라 고 써있는 것을 가람:15라고 바꾸며 낄낄댔다. 요령이는 아직 10명인데! 확 실히 요즘은 여자애들이 더 당당하다니까. 한 번에 14에서 16으로 바꿀 수 있었는데, 전화번호 알려달라던 여자의 반대쪽에 앉아 있던 여자가 너무 부 끄럼을 많이 타서 가람이에게 '저도요' 라는 말을 못했지. 아쉽네, 확실히 제칠 수 있었는데. 가람이가 이곳에서 일한지 3일이 지났다. 그리고, 가람이가 등장한뒤로 이 곳은 완전히 여자들의 집회장소처럼 되어 버렸다. 한 번 왔던 여자는 반드 시 또 오고, 게다가 혼자 오는 것도 아니라 친구까지 끌고 오고, 심지어는 인터넷에 '종업원 진짜 끝내주는 카페!' 뭐 이런 글까지 돈다고 한다. 남자 들이 요령이를 보러 올 때는 그냥 개인적으로 좋아서 오는 수준이었는데. 이건 뭐, 무슨 아이돌 스타의 열성팬들 같잖아? "오빠, 제 핸드폰 주소에요. 연락 주세요-!" 나는 한숨을 쉬며 가람이의 팬숫자를 15에서 16으로 바꾸다가 피싯 웃었 다. 젠장. 뭐 요령이때처럼 괜히 화가 나고 질투가 난다거나 하는 건 아니 다. 그냥, 지금 난 뭘하고 있는거지? 이런 거나 세면서 재밌어 하다니... 하는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갈 뿐. 으으. 나는 지금 뭘하고 있는 거지? 으으! 끼이익... 유리문이 조용히 열리면서 또 다시 한명의 손님이 들어온다. 호오? 상당히 예쁜데...? 날카롭게 생긴 미인인 이번 손님은 패션 컨셉이 '파이어 레드'인가보다. 불꽃의 색을 연상케 하는 짙고 환한 홍적색의 여인. 붉은 재킷과 붉은 스커 트, 붉은 부츠와 짙게 바른 붉은색 루즈. 머리색도 빨갛게 염색했네? 그나 마 눈썹을 빨갛게 안 칠했군. 흠, 취향 참 독특하네. 아주 몸을 빨간 색으 로 도배를 했는데, 그래? 그녀는 조용해 보이는 구석의 탁자에 다리를 꼬고 앉더니 입술을 한 번 핥고는 웨이터가 오기를 기다리는 듯 턱을 괴고는 그 대로 우리들이 바쁘게 일하는 모습을 바라본다. 여자 담당은 가람이였지. 가람이는 재빠르게 뛰어가더니 고개를 숙이며 말한다. "주문하시겠습니까?" "뭐가 제일 맛있지?" "사람에 따라 다르지요" "호오. 넌 특이하군. 보통 이렇게 물으면 가장 비싼 걸 추천하곤 하는데" "전 손님께서 제게 물으신 질문에 가장 적절하게 대답한 것일 뿐입니다" 그 말에 그 여자는 미소짓더니 붉은 입술을 달싹거리며 칼날처럼 말했다. "꺼져. 재수없는 자식. 네 옆에 있으면 숨이 막혀버릴 것 같아. 다른 웨이 터 불러와" "......알았습니다" 가람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잠시 속으로 가르릉거리는 듯 몸을 떨었지만 아무런 불평을 내뱉지 않고 나에게 다가왔다. 저 여자 왜 저래? 얼굴만 예 쁘게 생겼지 성격은 완전히 개떡이네? "주인. 아무래도 주인이 직접 가야 할 것 같아. 저 여자는 나를 싫어한다" "하지만 나는 지금 무지하게 바쁜걸. 바닥 걸레질 끝나면 주방으로 들어가 서 엄청나게 쌓여 있을것이 뻔한 설거지도 해야 한다고" "하지만 주인..." "요령이에게 말해. 나 지금 정말로 바쁘단 말야. 내가 말해줄까?" "요령이가 있었지, 참. 물론 그녀도 바쁘긴 할 테지만 주문받을 상대가 한 명 더 늘어난다고 짜증을 부리거나 하지는 않겠지... 알려줘서 고맙다, 주 인" 그 녀석은 고개를 까닥인 뒤 요령이에게 다가가서 무엇인가를 말했고 요령 이는 잠시 짜증을 내며 나를 바라보다가 언짢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빨간 옷을 입은 여자에게로 가서 물었다. "뭐 드시겠어요?" "예쁘게 생겼네? 재수없어. 난 예쁜 것들은 다 재수없더라" "......뭐 드실거에요?" "아침에 송곳을 먹었니? 목소리가 왜 그렇게 날카로워? 나한테 무슨 불만 있어?" 요령이는 이 질문에 잠시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푹 쉬더니 궁시 렁거리며 말했다. "없어요! 바빠서 그래요. 주문이나 빨리 말해요!" "짜증나는 계집이군" 빨간 옷의 여자는 그녀의 앞이마를 가리고 있던 붉은 머리칼을 쓸어올리 며 중얼거렸고 그 말에 요령이는 마침내 폭발하고야 말았다. "뭐? 계집? 누구보고 계집이래! 그러는 넌 계집 아냐?" "물론 나도 계집이야. 누가 뭐래?" "뭐?" 요령이는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누가 건드리기라도 하면 욕설을 한바가 지는 쏟아부을 것 같은 얼굴로 계속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런 젠장. 안 되겠다. 나는 재빨리 요령이의 블라우스의 목 뒷부분을 잡아채서 끌어당 긴 후 빨간 옷의 손님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이봐요, 손님. 소란을 피우시면 안 되죠. 자, 제가 커피 한 잔 그냥 드릴 게 기분 푸세요. 뭐가 드시고 싶으세요?" "넌 또 뭐야? 호, 귀엽게 생겼는데?" 나보고 귀엽게 생겼데! 드디어 내가 잘생겼다는 것을 알아보는 사람이 생 겼구나! "아하하, 감사합니다. 주문은 뭘로... 물론 공짜입니다" "그럼 가장 비싼 걸로 가져와" 이런 젠장. 이거 다 내 돈에서 나가는 거란 말이야! 뭐, 나중에 요령이에 게 싸움 말려준 댓가라고 하고 이자쳐서 받으면 될테니 상관없지만. 나는 그녀가 원하는대로 우리집에서 가장 비싼, 이름도 외우기 힘든 커피를 가져 다줬고 그걸 받아든 빨간 옷의 손님은 차갑게 미소짓더니 커피잔을 들어올 리며 물었다. "야, 너. 너 저기 둘이랑 친하냐?" "예? 저요?" "그래. 너. 그럼 이 주위에 또 누가 있냐?" "아, 예... 아하하하... 생각해보니 그렇군요. 그런데 뭘 물어보셨죠?" 내 질문에 그녀는 잠시 나를 싸늘하게 노려보다가 대답했다. "너, 저기서 서빙하는 저기 잘생긴 녀석과 저기 재수없게 생긴 계집이랑 친하냐고" "예? 아, 조금... 왜요?" "그럼 너 혹시, 뭐 이상한 점 못 느꼈어?" ......뭔가 아나? 어쨌든 이런 질문엔 잡아떼는 것이 제일이겠지... "아뇨... 전혀요. 왜 그러시는지...?" 내 말에 그녀는 피식 웃더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긴, 아무런 능력도 가지지 못한 놈이 뭘 느낄 수 있겠어. 물어본 내가 바보였군... 저 남자녀석과 저 계집, 분명히 이상한데... 설마..." "저, 손님? 저 가도 돼요?" "생각하는데 방해되니까 말 걸지 말고 꺼지던지 말던지 네 마음대로 해. 뭐지...? 분명히 뭔가 있어... 하지만 내가 들은 정보와는 다른데... " 나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다시 내가 하던 일, 즉 바닥 걸레질을 마무리하 기 위해 돌아갔고, 빨간 옷을 입었던 성격이 상당히 히스테리칼하던 아름다 운 손님은 계속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커피잔을 비우더니 어느샌가 카페 밖 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상한 손님이야. 어두운 거리. 1시를 향해 치달아가는 시계바늘과 살을 에는듯한 칼바람은 거리에 사람이 왜 없는지 이유를 잘 설명해주는 듯 하다. 그렇게 아무도 없 는 거리에서, 나와 요령이, 그리고 가람이는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둘의 눈치를 보고, 요령이는 씩씩대고, 가람이는 조용히 앞을 주시하면서. 아무런 오가는 대화 없이, 말 그대로 조용히. 으으, 너무 조용하니 분위기가 이상하잖아. 더 추운것 같아. 분위기를 바 꿔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애써 웃으며 말을 꺼냈다. 무슨 이야기냐고? 화제 가 없을 때 꺼내기 가장 쉬운 이야기가 뭐겠어? 당연히 날씨 이야기이지. "으으으, 춥다. 그렇지? 겨울이 쉽게 안 물러가려고 하네..." "몰라! 말시키지 마!" 요령이는 뾰루퉁하게 대답했다. 자식. 아직도 아까 그 이상한 손님 때문에 화가 안 풀렸군? 그래, 그렇다면 화를 내야지... ...가 아니라 왜 나한테 화를 내? "야! 왜 나한테 화를 내?" "그걸 몰라서 물어?" 날카로운 요령이의 반문. "그럼 아는데 내가 미쳤다고 물어보냐?" "그것도 모르냐? 바보냐?" "뭐? 바보? 너 자꾸..." "왜 화났는지 정말 몰라? 그 싸가지없는 계집애 뺨이라도 한 대 속 시원하 게 후려쳐 버리려고 했는데, 네가 날 뒤로 잡아당기는 바람에 그 계집애에 게 욕만 실컷 얻어먹고 아무 것도 못 했잖아!" "그럼 그 때 안 말렸으면? 종업원이 손님의 뺨을 쳤다고 하면 그 가게 평 판이 어떻게 될지 생각해봤냐?" "그래도! 너무 분하잖아! 젠장!" 요령이는 달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지르면 발끝에 걸리는 자갈을 그대로 발 로 걷어차 버렸다. 따악! "괜히 죄 없는 돌한테 화풀이하지 말고 어디 네 말대로 뺨이라도 한 대 후 려쳐 보시지? 능력이 있다면 말야. 오호호!" 갑자기 어디선가 날카로운, 그리고 비꼬는 듯한 말투가 분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뭐야? 어디에서 들리는 소리지? "옆이야, 옆! 호호!" "저 쪽, 도로 건너편의 여자!" 가람이는 쉰 듯한 목소리로 나직하게 외쳤고 우리는 그 말에 동시에 도로 반대쪽의 거리를 바라보았다. 그 곳에는, 달빛으로 더욱 환해보이는, 붉은 여인이 서 있었다. 마치 타오르는 불꽃같은 아름다운 여인이. "뭐야? 아까 그 손님이잖아?" 나는 당황해서 말했고 그 말에 그녀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호호호호! 그렇게 말하는 넌 귀여운 웨이터가 아니니?" "......넌 누구냐?" 가람이는 으르렁거리며 물었고, 그 말에 불꽃같은 여인은 쇳소리를 내었 다. "닥쳐. 재수없는 자식아. 너같이 영물같은 인간만 보면 짜증이 나. 넌 좀 끼지 말아줄래? 내가 관심있는 건 저기 귀여운 신사 옆에 있는 멍청한 계집 이야" 날 보고 신사라고? 헷, 기분이 나쁘지는 않군. 그건 그렇고 저 여자, 요령 이의 성질을 저렇게 긁어버리네? "누가 멍청한 계집이야아아!" "너" "뭐? 좋아, 여기는 가게 안도 아니겠다,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아무도 없겠 다. 이리 와! 뺨 한대만 때리고 모든 것을 잊어줄께" "미안하게도 난 너한테 뺨이나 얻어맞자고 온 게 아니라서 말야" "뭐? 그...럼?" "퀴에르가 시켰지" "......뭐? 퀴, 퀴에르가 누구... 야?" 자식, 연기를 하려면 좀 똑바로 해야지. 그렇게 온 몸을 바들바들 떨어가 며 얼굴은 잔뜩 찌푸리고 말까지 더듬어대면 바보가 아닌 이상 누가 네가 진짜로 퀴에르를 모른다고 생각하겠냐. 그리고 그녀는 바보가 아님에 분명했다. "연극을 하려면 똑바로 하시지? 그런 식으로 부인해봤자 내 눈에는 '내가 퀴에르를 알고 있어!' 라고 말하는 것으로밖에 안 보여. 멍청한 계집아" 으드득. 요령이의 이빨가는 소리. 그녀는 계속되는 모욕에 이를 악물며 자신의 정 면을, 그러니까 붉은색 옷을 입은 여인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요령 이가 분을 참던 말던 신경쓰지 않는다는 투로 계속해서 지껄여댔다. "너, 카르텔 맞지?" "누가 카르텔이야... 내 이름은..." 요령이는 억눌린 목소리로 천천히 대답하다가 갑자기 주춤했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붉은 여인은 씨익 웃었다. "그래. 네 이름은? 말을 못하는군. 뻔해. 지어내고 있겠지. 요령이라는 이 름은 전에 한 번 사용했었으니 다시 쓰면 들통날게 뻔하다는 생각에 새 이 름을 지어내고 있는 것이겠지? 걱정마, 네 짐을 덜어주지. 그렇게 힘들여서 지어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돼. 난 네가 카르텔이라고 확신하고 있으니까" "무슨 확신이야... 난... 그딴 계집이 아냐..."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상태에서도 어떻게든 자신은 카르텔, 그러니까 요령 이가 아니라고 자기 자신까지 비하해가며 부인하는 요령이. 왠지 불쌍해 보 인다... "아니라고? 호호호! 아니, 넌 카르텔이 맞아. 10가지 이상의 이유를 말할 수 있지만, 한가지만 말하자면..." "말하자면?" "난 그 카페에서 손님들이 네게 요령씨라고 하는 걸 들었어" 그녀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고 요령은 이를 드러내며 가르릉거렸다. "동명이인일수도... 있잖아" "네가 카르텔이라는 이유는 그 밖에도 얼마든지 더 댈 수 있지. 퀴에르라 는 이름을 말했을 때의 네 반응이라던지, 네가 흥분할때마다 새어 나오는 새카만 암흑의 기운이라던지, 지금처럼 화났을 때 사람이 아닌 고양이처럼 가르랑거린다던지. 얼마든지 있어" "그래...서? 좋아. 내가 요령이다. 카르텔이라는 재수없는 이름으로는 부 르지 말아줘. 내가 요령이다. 어쩔래?" "퀴에르의 전언이다. 들어라" 갑자기 붉은 여인은 자세를 바로 하더니 소름끼치도록 낮은 목소리로 말했 다. "퀴에르, 돌아 오렴. 이 언니는 너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단다. 네가 필요 해" "싫다면?" "퀴에르는 나에게 명령했지. '그 깜찍한 것이 싫다고 하면 목에 개목걸이 를 걸어서라도 끌고 와. 죽지 않을때까지 두들겨 패는 것까지 허락하겠어' 라고 말야" "......그래, 그럼 내가 싫다고 한다면 너는 나를 죽지 않을 정도로 두들 겨패서 데려가겠군?" "저항한다면 그러겠지" "그래? 그럼 내 대답은 이거야. '싫. 어'" "그래? 그럼 죽지 않을 정도로만 두들겨 패서 끌고 가는 수밖에. 아, 참. 내 이름은 김혜진이야. 마녀협회 한국지부 소속이지. 어느 정도 위치인지까 지는 알 것 없고. 호호호! 지금부터 너를 초죽음으로 만들 사람의 이름이니 까 기억해 둬" "......마녀협회가 여기까지 퍼져있나?" "자세한 건 비밀이니 꼬치꼬치 캐묻지 말아요-" 붉은색의 마녀, 김혜진은 그렇게 말하더니 손을 뻗고는 주문처럼 들리는 이상한 말을 외워대기 시작했다. "Σκφσζοηγξ..." "흥, 느려서 어떻게 써먹냐!" 마녀의 주문외움을 비아냥거리던 요령이는 아무런 주문없이 손을 하늘로 들었고 그러자 손 끝으로 푸른 빛의 광구가 맺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광 구가 핸드볼공만한 크기로 뭉치자 요령이는 손을 휘둘러서 빛덩이를 집어던 져 버렸다. "이거나 먹고 꺼져버렷!" "σπζΔΨ! σπζΔΨ! σπζΔΨ! 지옥의 불꽃!" 갑작스레 커다랗게 세 번의 반복적인 영창소리가 낭랑하게 울려퍼졌고, 그 주문이 끝나자마자 그녀의 주위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아앙! "뭐, 뭐야 이거!" "꺄아아악!" 나와 요령이, 그리고 가람이는 모두 순간적으로 얼굴을 가렸고, 그 극렬한 폭발이 잦아드는 듯한 느낌에 고개를 살짝 들어서 아까 그 곳을 바라본 나 는 숨이 막히도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허공에 거대한 홍적색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꽃의 중심에서 김혜진이 웃고 있었다. 저게 말이 돼? 기가 막히도록 놀라버린 나는 더듬거리며 외쳤다. "뭐, 뭐야! 사람이 어떻게 불꽃 속에 있지? 저게 말이 돼?" 그리고 들려오는 요령이의 긴장한듯한 대답. "말이 돼. 저건 저 계집이 불러낸 불꽃이니까. 꽤 하는가보군, 지옥의 불 꽃을 불러내다니" 그리고 가람이도 억눌린 목소리로 나에게 물어왔다. "주인" "왜?" "요령을 돕겠다. 어떻게 생각하나" "아, 그럼 안 도우려고 했어?" "주인의 허락이 필요했을 뿐이다. 도우라는 소리로 받아들이겠다" 김혜진은 불꽃 속에서 울림으로 말했다. -너너희희들들. 다다시시소소개개하하지지. 나나는는 불불꽃꽃의의 마마녀 녀. 영영혼혼의 댓댓가가로 영영원원히히 타타오오르르는는 불불꽃꽃을을 얻얻은은자자. 김김혜혜린린이이라라고고 한한다다. "저건 무엇인가" "저거라니?" "저 요사한 계집의 몸 주위에서 낼름거리는 지독하게 더럽고 숨막히도록 어두운, 요기의 결정체같은 불꽃을 말하는 것이다" 가람이는 억눌린 목소리로 요령이에게 말했다, 요령이는 약간 골치가 아프 다는듯이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저거? 아까도 말했듯이 지옥의 불꽃이야. 불의 왕 플뤼톤과 계약이라도 맺었나? 아니지, 불을 다루는 악마야 발에 채이도록 널렸지. 누구와 계약을 맺었지?" -사사업업상상 비비밀밀이이라라고고 해해두두지지. 후후훗훗. "빌어먹을. 하여튼, 마녀들은 다들 머저리들이라니까. 도대체 영혼을 팔아 서 지옥의 불꽃같은 파괴의 힘 따위나 얻어서 뭐하지? 이제 너에게는 영혼 의 구원 같은 소리는 시쳇말에 불과하겠지! 미래의 희망을 팔아서 얻었다는 힘따위가 고작 지금 그렇게 네 몸을 살라먹고 있는 불덩어리냐?" 요령이의 말에 불 속에서 일렁이던 불꽃의 마녀 김혜진은 미간을 살짝 찌 푸리더니 억눌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불꽃이 일렁여서 찡그린 것으로 보였나? -네네 앞앞가가림림이이나나 잘잘하하시시지지. 그그래래, 넌넌 그그렇렇 게게 영영혼혼의의 구구원원에에 대대한한 꿈꿈을을 품품고고 살살아아간간 단단 말말이이지지. 하하찮찮은은 버버러러지지 동동물물 주주제제에에 말 말야야. 동동물물에에게게 구구원원이이 있있을을줄줄 아아느느냐냐? "그래서 우린 인간을 희구하지. 하지만 나에게는 가능성이라도 있어. 인간 이 될 가능성. 넌 뭐야? 넌 지금 겉모습만 인간이지 영혼이 텅 비어버린 빈 껍데기 아냐? 사람들이 만드는 마네킹이나 로봇과 네 영적 차이점이 뭐지? 지옥행 티켓을 끊어놨다는 차이인가? 난 말야, 최소한 너처럼 이미 악마에 게 영혼을 팔아치워서 지옥으로 갈 타이머나 째깍째깍 돌려대는 한심한 처 지는 아니야!" 무슨 소리인지 도저히 이해는 안가지만 하나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요령 이는 지금 저 마녀를 불쌍하게, 혹은 멍청하게 보고 있다는 것. 그건 그렇 고 불덩어리를 계속 보고 있자니 계속해서 뿜어지는 빛과 열때문에 눈이 무 지 아픈걸. -웃웃기기시시네네. 지지옥옥은은 나나의의 천천국국이이다다. 뜨뜨거거운 운 지지옥옥불불이이 이이렇렇게게 따따사사로로운운걸걸? "그럼 그 속에서 장작처럼 타오르다 죽어서 지옥으로 떨어져버려라!" -너너를를 퀴퀴에에르르에에게게 데데려려간간 후후 한한 백백년년쯤쯤 더 더 살살다다가가 세세상상이이 지지긋긋지지긋긋해해지지면면 고고려려해해 보보지지. 요령이는 그 말에 대답없이 입술을 지긋이 깨물고는 주문을 외기 시작했 다.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 어둠을 살라먹고, 빛으로서 태어나는 태양의 적자이자 불꽃의 도마뱀, 샐러맨더여! 너의 주인이 지금 너의 조력을 구한 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요령이의 주위로 맺혀드는 불꽃. 그 불꽃은 잠시 요 동치다가 곧 혀를 낼름거리는 도마뱀의 형상으로 맺히기 시작했고, 요령이 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뻗었다. "가라!" -웃웃기기시시네네. 천천사사의의 횃횃불불조조차차 이이 지지옥옥의의 불 불꽃꽃을을 맞맞불불로로 끌끌 수수 없없다다는는 것것은은 잘잘 알알텐텐 데데. 용용암암을을 들들이이부부어어 봐봐라라. 이이게게 꺼꺼지지나나. 김혜진은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들어올렸고, 그러자 그녀의 몸을 휘감으며 용트림치던 불꽃에서 한 갈래의 불줄기가 찢어져 나오더니 혜진에게 쇄도하 는 샐러맨더에게 꽂혀 들었다. -콰앙! "우아악!" 엄청난 충격파다! 젠장! 난 이런거엔 익숙하지 않다고! 나는 나도 모르게 팔로 눈 앞을 가려버렸다. 으으, 저렇게 쉽게 요령이의 공격을 막아내다니! 아 참, 그건 그렇고 요령이는 뭘 하고 있지? "좋아! 그럴 줄 알았어! 그 따위로 막을 줄 알고 있었다고! 그럼 이건 어 때?" 요령이는 앙칼지게 소리치며 팔을 위로 올렸다가 교차시켜서 아래로 끌어 내리며 장문의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별의 힘을 받는것은 오망성, 오망성을 이루는 것은 나의 힘, 나의 힘의 원천은 어둠, 어둠의 근원은 빛, 빛이 원을 그릴 때 태양은 미소짓는다. 태 양이 미소지을 때 달은 눈물짓는다. 달이 눈물지으면 별은 빛을 흩뿌린다. 별의 빛에 실린 힘을 받을때 오망성이 이루어진다. 오망성이 이루어지면 나 의 힘이 구현된다..." -아아까까 네네말말, 그그대대로로 돌돌려려주주지지. 그그 따따위위로로 느느려려서서 어어디디다다 써써먹먹냐냐. 혜진은 말이 끝남과 동시에 팔을 뻗으며 네 줄기의 불꽃을 요령이에게 날 렸고, 요령이는 자신에게 날아오는 불꽃의 채찍들을 보면서도 눈 하나 깜빡 하지 않고 점점 큰 소리로 주문을 외워갔다. "나의 힘이 구현되면 어둠은 커진다! 어둠이 커지면 빛은 원을 그린다! 빛 이 원을 그리면 태양은 미소짓는다! 태양의 오망성-!!!" 갑자기 요령이의 발 아래에서 그려지는 빛나는 오망성. 그리고 그 발 아 래에서 엄청난 빛이 쏟아져 나온다. 파아아아앗! 그러나 그 때 이미 불꽃은 요령이의 코 앞까지 와 있었다. 젠장! 너무 위험해! 저 지옥의 붉은 뱀들은 요령이를 태워버릴 거라고! 요령이는 빛 속에서 눈을 번쩍 뜨더니 날카롭게 외쳤다. "젠장! 막을 수 없어! 이러단 주문이 취소된다-!" "허기영결탄!" 갑자기 가람이가 내지르는 고함소리. 난 재빠르게 가람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가람이의 몸 주위의 허공에서 순식간에 다섯 개의 테니스공 정도의 크기의 푸른 빛덩이가 뭉치더니 그 중 네 개가 빠른 속도로 요령이에게 다 가오는 불꽃을 향해 쏘아져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타타타탕! -쾅! 쾅! 쾅! 쾅! 네 개의 불줄기들은 모조리 총알처럼 쏘아져 온 푸른 빛의 공과 부딪혀서 공중에서 폭발해 버렸다. 나머지 한 발은 어디로 갔지? -쐐애애액! -깜깜찍찍하하군군! 나머지 한발은 공기를 휘감으며 혜진에게 돌진하고 있었고, 혜진은 코웃음 을 치더니 팔을 쭈욱 내밀고는 한 번 튕겼다. 투웅-! 이상한 공기의 부조화 스러운 타격음. 허기영결탄은 불덩이에 부딪히기도 전에 스스로 공중에서 소멸해 버렸다. 가람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별로 실망한 표정도 짓지 않 더니 말했다. "주문은 취소됐는가" "아니. 다행히도" "그럼 써" 가람이는 약간 다급한듯이 재촉했고, 요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좋아! 태양의 오망성! 지옥의 불꽃 아래에서 빛나라!" -그그 주주문문은은 흑흑마마술술인인가가? 아아니니면면 백백마마술술인 인가가? 정정령령술술? 상상관관없없어어. 네네 쓰쓰레레기기같같은은 주주 술술로로 나나의의 흑흑마마술술을을 짓짓누누르르려려 하하는는가가? 비비 웃웃어어주주지지. 네네가가 네네 힘힘으으로로 구구현현하하는는 주주술술 과과 판판데데모모니니엄엄에에서서 직직접접 보보내내주주는는 주주술술의 의 차차이이를를 느느껴껴봐봐라라! 요령이는 혜진이 뭐라고 지껄이던 신경쓰지 않겠다는 얼굴로 손을 뻗어 혜 진을 가리켰고, 곧 그녀의 발 밑으로 요령이의 발 밑에 생긴것과 똑같이 생 긴 오망성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바즈즉... -호호오오. 꽤꽤 강강한한힘힘이이 올올라라오오려려 하하는데데? 혜진은 비웃는듯한 어투로 그렇게 말하더니 미소짓고는 손을 하늘로 들어 올렸다 땅으로 찍어내렸고, 그러자 허공에 요령이에게 쏘았던 것보다 훨씬 큰 불덩어리 다섯개가 맺히다가 오망성의 꼭지점 하나하나를 찍어누르며 폭 발해 버렸다. -하하지지만만 이이렇렇게게 막막아아버버리리면면 소소용용없없지지. 콰콰콰콰쾅! 오망성은 다섯 꼭지점이 모두 마치 깨진듯이 끊어져 버렸다. 그리고 요령이는 신음을 흘렸다. "헉... 제, 젠장! 저런 방법을...! 오망성을 부숴버리다니! 젠장! 이건 비 겁하잖아! 이걸 쓰느라 난 지옥의 불꽃에 얻어 맞을 뻔했는데! 이렇게 허무 하게 깨지다니...!" -호호호호호호. 역역량량의의 차차이이다다. 마마법법진진을을 이이용용한 한 주주술술의의 최최대대의의 약약점점이이 이이거거지지. 마마법진진을을 파파괴괴하하면면 주주문문은은 이이어어지지지지 않않는는다다는는 점점. 그그걸걸 생생각각하하지지 못못한한 네네녀녀석석이이 바바보보인인 셈셈 이이지지. "하지만... 그래도... 이건... 이런 실패는..." 요령이는 눈물까지 글썽일듯한 표정을 지며 낙담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잘 모르겠지만 위로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요령이에게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요...령아, 너무..." "......라고 할 줄 알았냐? 아하하하!" -......뭐뭐? "태양의 오망성! 빛나라!" -콰아아아앙! 드드드드드득... 요령이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올렸고, 그러자 갑자기 부서 진 오망성이 빛나면서 원래의 모양을 회복하더니 거대한 빛의 기둥이 솟아 올랐다. 우아아아! 이, 이건 장난이 아닌데? 이 주위가 온통 울리잖아! 그 리고 그 엄청난 빛의 물결속에서 불꽃의 마녀는 귀를 찢는듯한 날카로운 비 명을 질렀다. -꺄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악! "진짜 마법진은 내 발밑에 있었다, 이 멍청한 계집아! 네 발밑에 있던 것 은 단지 연결통로일 뿐이었다고! 깔깔깔! 바보같이, 감히 나를 바보취급해? 내가 너보다 살아도 수 백년은 더 살았어, 이것아! 설마 아무 생각도 없이 불꽃을 자기 손처럼 다루는 네녀석에게 마법진을 썼겠냐? 참, 누구를 바보 로 알아도 유분수지! 지옥불이 따뜻하면 그 천국의 빛속은 어떠냐! 안락하 지? 호호호호!" 빛 속에서 보이는 검은 실루엣. 더 이상 그녀의 몸 주위에는 불꽃의 그림 자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단지 고통에 몸부림치는 한 여자가 보였을 뿐이 다. 불쌍하다... "야...저러다 죽으면 어쩌지?" "저딴 마녀따위 죽던지 말던지!" 내 말에 요령이는 눈도 깜박하지 않고 날카롭게 대답했다. "진짜...?" "......" 으드득. 요령이는 이를 갈았다. 내 눈에는 보였다. 사실 녀석도 빛 속에서 몸부림치는 저 여자가 죽을까봐 불안해 하고 있다고 말하는듯한 녀석의 어 두운 표정이. 착한 녀석 이라니까. 요령이는 잠시 손가락을 잘근거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팔 을 들어올렸다. 천천히 내렸다. 아니, 내리려고 했다. "하지 마라" 가람이의 차가운 목소리. "뭐?" "아직 전투능력이 남아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죽기 직전까지 저렇게 나둬야 한다고?" "주인이 위험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죽던말던 내버려 두란 말야? 넌 누가 죽는게 보 고싶니?" "......이 일은 내 취향과는 별개의 문제다. 주인의 안전은 모든것에 앞선 다." "안 되겠군. 영준아!" "왜?" "명령해라. '넌 나서지 마라' 하고. 안 그러면 쟤 죽겠다" 요령이는 말하며 턱짓으로 이제 힘이 빠졌는지 약간씩 선채로 비틀거리기 만 하는 마녀의 실루엣을 가리켰고, 그래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가람아... 들었지? 명령이야" "그래... 주인. 난 찬성하지 않지만, 명령을 따르는데는 찬성이나 반대따 위는 성립할 수 없지. 참견하지 않겠다. 요령. 네 하고 싶은대로 해라" "바라던 대답이군" 요령이는 손을 천천히 내리며 주먹을 쥐었고, 그러자 승천하는 용처럼 꿈 틀거리며 마치 천국을 괴고 있는 기둥처럼 성스럽게 하늘까지 이어져있던 거대한 빛기둥이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슈우우우... 그리고 오망성이 빛나던 자리에는 땅이 움푹 패여버린 한가운데에서 비틀 거리며 불타오르는 눈빛으로 정면을 노려보는 마녀가 서 있었다. "꼴이 말이 아니군. 안 그래? 불꽃의 마녀씨" "닥쳐..." 김혜진의 몰골은... 정말 눈뜨고는 못 봐줄 정도로 참담했다. 백옥같던 피 부는 군데군데 검게 그슬려서 피가 흐르고 있었고, 옷은 마치 누더기처럼 이곳저곳이 찢어져 있었으며, 잘 정돈된 진한 불꽃의 물결같던 머리는 하늘 로 솟구친 채 이곳저곳으로 마구 헝클어져 있어서 마치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머리를 꼿꼿이 세운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를 보는 것 같았다. 그녀의 몸 주위를 감으며 유유하게 휘돌던 지옥의 불꽃은 빛의 힘에 소멸했는지 그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살아있다니 다행이군. 저런 몰골로 우리에 게 덤비지는 못하겠지. 그녀는 비틀거리며 흐느끼는듯한 목소리로 계속 같 은 말을 중얼거렸다. "죽여버리겠어... 죽여버리겠어... 으흑!" 에구, 불쌍해라. 저런 몰골이 되어서... 요령이는 핏하고 조소처럼 웃음을 흘리더니 중얼거렸다. "보내주겠어. 가라. 다시는 날 잡아가겠다느니 하지 말고. 퀴에르에게도 전해. 나는 자유가 더 좋고 절대 돌아갈 생각따위는 없으니 날 내버려 두라 고 말야" "죽여버리겠어... 죽여버리...흑...겠다고... 내 말이 거짓같아?" "퀴에르가 난 죽이지 말라고 했다며. 그러니 난 빼줘" "너에겐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으흑, 고통을 주겠어... 퀴에르의 명...령... 어길 수는 없...흑, 없으니까... 그럴 수는... 두려우니까... 그러나 너의 친구들은... 모두... 죽여버리겠어... 퀴에르는 네 친구들을 죽이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았어..." "얼씨구, 그런 모습으로? 어떻게 하려고?" "나... 흑... 난... 난..." "넌 뭐?" 혜진은 계속 어깨를 떨고 작게 흐느끼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이런... 모욕을... 내게..." 그녀는 울먹이다가 갑자기 몸을 움츠렸다. 투우웅! 잠시 공기를 흔드는 진 동음. 그리고 갑자기 땅 속에서 거대한 불꽃이 솟아오르더니 그녀를 감싸버 렸다. 휘리리릭! 콰앙! "뭐얏!" 요령이의 날카로운 고함소리. 그녀는 재빨리 다시 태양의 오망성을 쓰려는 듯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빛줄기는 다시 솟아오르지 않았다. -내내... 말말이이... 거거짓짓이이 아아니니었었다다고고... 말말해해주 주겠겠어어... 죽죽여여버버리리겠겠다다고고... 흐흐흑흑... 했했어어... "젠장! 연결통로가 끊어졌어! 방금전에 땅 속에서 불길이 솟아오르면서 부 숴 버렸나 봐! 주문 해제! 빛이여 나에게로 돌아오라!" 요령은 급하게 몇 번 허공에 문양을 그리다가 절망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 젓고는 주먹을 움켜쥐었고, 그러자 요령의 발밑에서 밝게 빛나던 오망성이 사라지며 그 오망성을 빛내던 빛이 요령을 감싸며 그녀의 몸 안으로 흡수되 듯 스며들었다. -한한 번번 시시전전한한 지지옥옥의의 불불꽃꽃은은... 언언제제라라도도 부부를를 수수 있있지지... 흐흑... 죽죽여여버버리리겠겠어어... "젠장! 모두들 나에게서 떨어져! 나를 노릴게 분명해!" 요령이는 그렇게 말하며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파파파팟! 어어? 그럼 넌 어쩌려고? "요령아!" "난 괜찮으니 나에게서 떨어져! 어서!" -죽죽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혜진의 찢어지는듯한 고함소리. 그리고 용트림치다가 갈래갈래 찢어져 춤 추는 수십 가닥의 불꽃. 마치 불꽃놀이를 보는듯한, 어떻게 보면 장엄한, 그러나 하나 하나가 살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끔찍한 광경이다. 그녀 는 비틀거리며 울먹거리더니 손을 뻗었다. -죽죽여여... 그리고 그 수십가닥의 불꽃들은 죽음의 혀를 낼름거리며 나에게 쏘아졌다. ......이...게...뭐야? 이건 뭔가 잘못됐어... 왜.... 내게...? 떨리는 요령이의 목소리. "내가...아냐...?" 먼거리에 있는데도 똑똑히 들리네... 곧 그녀는 허공을 찢어버릴듯이 목이 터져라 외친다. "영준아아아! 피해애애액!" "어떻게...?" 참, 나도 한심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피하냐는 질문이나 하다니. 죽을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말야. 나는 피식 웃으며 눈앞을 바라보았다. 느리게, 정말 느리게, 꿈틀대는 불꽃의 여운의 순간순간을 다 볼수 있을 정도로 느 리게 불꽃들이 나에게 날아오고 있었다. "주인-! 피해라!" 하아. 너라도 이건 불가능할걸. 수십가닥의 불꽃들을 모조리 피하라니. 어 디로? 어떻게? 사방팔방에서 죽여버리겠다고 소리치며 내 주위를 온통 포위 한채로 날아오는 이 불꽃을 어떻게 피하지? 하늘로 날아갈까? 땅으로 꺼질 까? 늦었어. 젠장. 어쩌면 좋지...? 엎드려볼까...? 하지만 낮게 날아오는 불꽃도 있는데... 뛰어볼까...? 하늘을 뒤덮는 불꽃은 어쩌고...? 어떻게 하질 못하겠군... 나는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팔을 가슴 위에서 엑 스자로 교차시키고 방어자세를 취했다. 이러면 조금이나마 덜 아플까...? 젠장... 이렇게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인간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스타일 인데... 이제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의 목록에는 내 이름이 올라가겠군.. .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젠장!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붕천공!" 가람이가 마치 울부짖듯이 외쳤다. 그리고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는듯한 소 리가 들리며 무언가가 나를 엄청난 힘으로 짓눌렀다. -꽈아앙! "끄으윽!" 그리고 나는 그 엄청난 압력에서 오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 렸다. 우드득. 강제로 꿇어앉혀져서 그런지 무릎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 는 것 같았다. 그냥 내 느낌인가? 하지만 분명히 무언가가 나를 짓누르고 있긴 하다. "젠...장! 이... 이익! 이게 뭐야?" 엄청난 압력때문에 앉아 있기도 힘들다. 나는 간신히 고개를 들어서 주위 를 바라보았다. 엄청난 폭음과 함께 불꽃들이 하나 하나 궤도를 바꾸며 땅 으로 쳐박이거나 휘청휘청 날아오다가 공중에서 폭발하고 있었다. 온 세상 이 쾅쾅거리는 굉음으로 가득찼다. 내 주위에 있는것은 오직 불꽃과 폭발 뿐. 불지옥이다, 젠장! 사방이 온통 불티와 연기뿐이잖아! 젠장! 귀가 윙윙 거리는군. 이러다 귀가 먹어버리면 어쩌지? 그건 그렇고 어쨌든 이제 난 살았나...? 다행이다, 젠장! 정말 죽어버리는 줄 알았네! 제기랄, 손자 손녀 낳고 하 도 오래 살아서 살다 살다 지겨워서 벽을 긁으며 하루하루를 보낼 때까지는 절대 죽을 수 없다고! ...그건 그렇고 나를 구해준 것은 가람이인가...? 나 는 가람이를 보고 싶었지만,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압력은 아직도 나를 짓 누르고 있었고 그래서인지 난 고개를 들고 버티는것조차 버거웠다. 우득, 빠드득. 젠장, 목이 꺾이는 것 같군. 결국 난 고개를 늘어뜨리고야 말았다. "영...준아, 미안해... 미안... 난... 정말... 나를 공격할 줄 알고..." 요령이의 떨리는 목소리. 젠장! 미안하다면 다냐? 난 너때문에 죽을 뻔 했 다고! 네가 뒤로 피해서 날 구해주지 못한 걸 탓하는 것은 아냐. 좋아, 그 것도 사실 탓하고 싶지만, 네 녀석이 나를 구해줄 의무 따위는 없는데다 착 각이란 누구나 할 수 있는거니까. 그럼 내가 왜 너를 비난하냐고? 정말 그 이유를 몰라? 애초부터 너를 구해줬기에 이런 일이 생기는거라고! 젠장! 너 때문이야! 너 때문이라고! 난 너 때문에 죽을 뻔했어! "미안하다면...으으윽, 젠장. 엄청나게 눌러대는군. 후우. 미안하다면 다 냐? 난 정말로 죽어버리는 줄 알았다. 응? 잠시나마 무기력하게 웃을 수 밖 에 없는 기분을 느껴야 했던 내 심정을 알아?" "미안...미안해... 나도 당황해서... 막아주지 못하고..." 녀석은 계속 물기있는 목소리로 미안하다는 말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 지금 극도로 흥분했다고. 누구를 동정하거나 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란 말야 ! 지금은 내가 동정받아야 한다고! 나는 그냥 평범한 자취생이란 말이다! 왜 내가 불을 맞고 죽을 뻔한 위기 에 처해야 해? 젠장! 요령이, 너란 녀석에게는 질려버렸어 아주! 주인주인 하면서도 매일같이 기어오르기만 하고 말야! 들러붙어 사는 주제에 매일같 이 바락바락 대들기나 하고! 지금 방금 알았어! 난 네 녀석이 싫어! ......너무 심한 생각인가......? 아냐! 젠장! 이걸로도 부족해! "주인. 괜찮은가?" "짓눌려서 납작하게 된 채 죽어버릴 것 같지만 괜찮아. 젠장. 이건 네가 한 것인가?" "그렇다. 붕천공이라고 하지. 주인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이해해 다오" "좋아. 이해해주지. 그건 그렇고 언제쯤 나는 내 힘으로 대지를 밟을 수 있게 되지?" "뭐?" "지금처럼 이렇게 뭐가 위에서 짓눌러대면 대지를 밟을 수 없잖아?" "아, 이제 곧 풀어주겠다" "제발 그 곧이라는 시간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으윽" "크아아앗!" -콰앙! -끄끄아아아아악악! 가람이는 허공에 대고 목이 터져라 외쳤고, 갑자기 엄청난 크기의 신음소 리가 허공에 메아리쳤으며, 내 주위를 계속해서 짓누르던 압력은 갑작스레 왔던 것처럼 갑작스레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나는 덕분에 공중에 부웅 뜨 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멀미감에 구역질을 해야 했다. "우우웨에엑, 젠장. 뭐야, 도대체. 헉, 헉. 아직도, 땅이 흔들리나?"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 주위에 깔려 있는 보도블록들이 모조리 박살 이 나 있었다. 엄청난 힘으로 짓눌러대서인가? 아니면 불꽃들의 폭발 때문 인가. 젠장, 머리는 띵하고, 귀는 마치 벌레라도 들어간듯이 울부짖어대고, 이거 내 꼴이 말이 아닌데, 그래. -끄끄으으으으윽윽... 이이거거치치워워... "대단한데...?" 요령이의 숨막히는 듯한 목소리와 혜진의 고통스러운 비명. 뭐지? 아까 가 람이가 고함을 지르고 나서 저 여자가 비명을 질렀으니. 역시 가람이가 한 짓인가? "그르르르..." 가람이는 이를 드러내며 계속해서 목울림으로 나직하게, 마치 화가 머리 끝까지 난 개처럼 짖고 있었고, 그 녀석의 몸은 작게 진동하고 있었다. 그 리고 그 녀석이 뚫어져라 노려보는 김혜진은 무릎을 꿇지 않기 위해 필사적 으로 비틀거리다 땅을 짚으며 계속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 녀의 몸 주위에서 꿈틀거리는 불꽃은 마치 바람앞의 촛불처럼 미친듯이 펄 럭이며 땅에 바짝 깔려버렸다. 꼴 좋군. 제기랄 계집. 나를 죽이려 했겠다. 난 너를 동정했었는데 말야. 넌 당해도 싸. -끄끄으으으으... 치치우우란란 말말이이다다... 이이거거... 그녀의 숨막히는듯한 목소리. 혜진이 지금 당하는 기술, 가람이가 아까 내 게 걸었던 주술인가보다. 넓은 지역을 엄청난 힘의 공간으로 만들어서 마치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압력으로 상대방과 그 주위를 짓눌러버리지. 아, 물론 내 추측이다. 맞는지 틀리는지는 모르겠어. "중력장 계열의 기술인가...? 하지만 저 정도로 강하다니... 멍멍이, 아니 가람이 녀석도 꽤 하나본데...?" 요령이는 계속해서 놀란듯이 중얼거렸다. 듣기 싫어. 네 목소리 따위. 그 러니 말하지 말아라. 젠장. 사람이 미워지려면 한 순간이라더니, 정말인가 보다. 방금전에 죽을 뻔했다는 이유 하나로 사람이 저렇게 보기 싫어지다 니. 물론, 저 녀석은 저 녀석의 말따라 사람이 아니라 빌어먹을 고양이이긴 하지만. -끄끄으으으으... 치치워워... 나나를를 구구속속하하지지마마... 누누르 르지지마마... 누누구구도도 나나를를 무무릎릎꿇꿇릴릴수수느느 없없어어. .. 그녀는 부들거리며 절망한듯이 얼굴을 감쌌고, 요령이는 숨을 격하게 들이 쉬었으며, 가람이는 단지 차갑게 노려보며 더욱 기합을 주는 듯 몸을 바짝 경직시켰다. 그 때. -치치우우라라고고 말말했했어어! 콰아앙! 아무 힘도 없이 바닥에서 힘없이 펄럭이던 지옥의 불꽃이 갑자기 석유를 들이부은듯이 무서운 기세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퍼엉! 화르르륵! "젠장! 발악을 하는군!" 가람이는 이를 아드득 악물더니 더욱 힘을 주는 듯 팔을 쭉 펴서 아래로 짓누르듯 내렸다. 아니, 내리려 했다. 그러나 팔은 내려가지 않았다. -치치우우라라고고 말말했했어어! 치치우우라라고고 말말했했다다고고! 내 내 말말을을 무무시시할할 권권리리따따위위는는 너너희희들들에에겐겐 없 없어어! 불꽃은 점점 더 크게 타올랐다. 그리고 가람이의 손도 점점 더 위로 들려 올려지고 있었다. 가람이는 얼굴을 찌푸리며 어떻게든 손을 아래로 내리려 허공을 짓눌렀으나 소용없었다. -치치워워. 치치워워. 치치워워! 치치우우라라고고! 불꽃은 이제 점차 회전하더니 그녀의 몸을 중심으로 한 반구를 그리기 시 작했다. 마치 작은 태양을 보는듯하군. 그러나 저렇게 어두운 빛을 뿜어내 는 태양은 없지. -치치워워! -콰아아앙! 불꽃의 반구는 잠시 가람이의 주술에 억눌린 듯 꿈틀거리면서 허공에 그대 로 맺혀 있었으나, 곧 폭발하듯 불어나면서 엄청난 속도로 사방으로 퍼져나 갔다. 난 느낄 수 있었다. 저것은 무엇을 밀어내는 행위이다. 아마도 가람 이가 그들에게 가하는 힘이겠지. "젠장! 밀려났다!" 타악! 정말로 그런 소리가 난 것은 아니지만 마치 무언가가 튕기는듯한 소 리가 나는 느낌이 들었다. 가람이의 팔이 무언가에 튕긴듯이 하늘로 솟아올 랐던 것이다. 그리고 혜진은 불꽃의 반구에 휩싸인채로 그렇게 잠시 우리를 바라보았다. -나나를를 고고작작 그그런런 주주술술따따위위로로 억억압압하하려려... "우아아악! 이렇게 된 이상 불꽃과 함께 폭발해라! 하늘이여! 다시 한번 무너져라!" 그 녀석은 갑자기 튕겨올라서 하늘을 향해 치켜들려 있던 팔을 아래로 눌 러버렸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엄청난 질량감이 느껴지며 급작 스럽게 엄청난 진동이 땅을 향해 나에게 울려퍼졌다. 젠장! 지진인가? 이건 또 뭐야! -꾸웅! 드드드득... 콘크리트가 원을 그리며 굉음과 함께 바닥으로 움푹 꺼져 버렸다. 그리고 그 원의 중심에는 혜진이 있었다. 그녀의 주위를 둘러싼 작은 지옥의 태양 과 함께. 그 지옥의 불꽃이 마치 보호막처럼 이루고 있는 반원형의 모양은 지금 심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아까와는 정반대이군. 아까는 불꽃이 가람 이의 힘을 밀어내더니, 이제 가람이의 힘이 불꽃을 역으로 짓누르고 있네. -하하지지마마! 불불꽃꽃이이 폭폭발발... -콰아아아앙! 혜진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불꽃은 엄청난 소리를 내며 폭발해 버렸 고, 그래서 콘크리트는 이제 지글거리며 녹아 흐르기 시작했다. 엄청난데! 도대체 저 불꽃이 어느 정도의 열기를 가지고 있었던거야? 혜진은 폭발의 충격파에 휩쓸렸는지 쓰러질듯이 비틀거리고 있었다. -크크아아악악! 이이딴딴 불불꽃꽃 따따위위 몇몇번번이이라라도도... "하압!" 가람이의 짧은 기합소리. 그녀석의 손에는 푸른 기운이 엉겨 있었다. 그 녀석은 그렇게 손에 마치 권투글러브처럼 푸른 빛을 뭉치더니 그대로 총알 처럼 혜진에게 튀어나갔다. 뭐하려고 그러는 거야? "제기랄! 불덩어리를 육탄전을 하려 하다니! 그만둬 머저리자식아!" 요령이의 고함소리. 누가 누구를 보고 멍청하다고...? 쳇, 관두자, 관둬. 하아. 이렇게 마음을 나쁘게 먹으면 안되는데. 하지만 아까 너무 충격을 크 게 받아서 그런지 몰라도 요령이의 모습, 요령이의 목소리, 모든것이 내게 짜증으로만 다가온다. 제기랄. 이제 더 이상 네녀석이 예쁘게 보이지 않는 다는 소리다, 요령아. 이해가 가냐? -하하! 나나에에게게 덤덤비비시시겠겠다다? 주주먹먹으으로로? 좋좋아아! 해해보보자자! 그녀는 말을 마치고 곧장 다시 한 번 주먹을 불끈 쥐고 손을 하늘로 치켜 올렸다. 곧 다시금 땅 속에서 불줄기들이 치솟아올랐다. 쾅! 쾅! 쾅! 그 불 꽃들이 아까처럼 그녀를 감싸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핫!" 가람이의 기합소리. 젠장! 넌 개잖아! 사람의 몸이 익숙하지조차 않을텐 데, 고작 이상한 기운으로 둘러싸인 주먹 두개로 이 상황을 헤쳐 나가겠다 고? 무모해! 너무 무모하다고! -받받아아라라! 가람이의 오른쪽으로 빙 돌아서 치고 들어오는 불꽃. 그 녀석은 그대로 주 먹을 빠르게 휘둘러서는 그대로 불꽃을 쳐냈고, 불꽃은 순식간에 굉음과 함 께 사라졌다. -호호오오...? 대대단단하하군군... 하하지지만만 네네녀녀석석이이 내내 앞앞에에 오오기기전전에에 넌넌 죽죽는는다다... 혜진이 이 말을 마쳤을때. 가람이는 이미 혜진의 앞에 서 있었다. -허허억억! 당황한 혜진은 짧은 비명소리와 함께 손을 휘둘렀다. 한 줄기 불꽃이 다시 금 가람이의 오른쪽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 녀석은 오른팔로 빠르 게 그 불꽃을 막으며 왼주먹을 뻗었다. -젠젠장장! "핫!" 퍼엉! 무엇인가 부딪히는 느낌, 그리고 폭음. 혜진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 러섰고, 가람은 담담하게 계속해서 주먹을 교차시키며 휘둘렀다. -으으윽윽! 주주먹먹 한한발발 따따위위야야 지지옥옥의의 불불꽃꽃으으로 로... "한 발이라면 그렇겠지" 대단하다! 주먹을 뻗으며 동시에 오른쪽을 막는다. 그리고 뒤로 돌며 발을 뻗어서 찌른다. 퍼엉! 이걸 얻어맞고 또다시 뒤로 물러서는 혜진에게 다시 세 번 연속해서 주먹을 날린다. 콰콰쾅! 그리고 계속해서 회전하며 주먹, 발. 화려한 무예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오직 들리는 것은 가람이의 주 먹과 발에 맞아 소멸되고 폭발하는 지옥의 불꽃의 소리였다. 가람아, 권법 은 언제 배운거야 도대체? 저건... 정말 대단하군! -콰앙! 쾅! 쾅! 쾅! -제제기기랄랄! 비틀거리던 혜진의 고함소리. 갑자기 그녀가 입술을 악물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요령이가 손을 들어올리며 외쳤다. 그녀의 손바닥 위에서 푸른 기운이 뭉치기 시작했다. "피해! 불꽃을 폭파시킨다! 일단 피해!" 뭐야? 쏘려면 지금 쏘지 왜 가람이에게 피하라고 하는거야? 지금 쏘라고! 지금! 네 쓸모없는 힘이나마 조금이라도 도움되게 할 수 있는 순간이 지금 이야! 그걸 쏴서 정신을 흐트리란 말이야! -하하압압! 짧은 기합소리. 그리고 엄청난 폭발. 꽈웅! 아까전의 가람이의 힘과 혜진 의 힘이 정면으로부딪혀서 일어난 폭발보다는 덜하지만 역시 굉장한 폭발이 다. 젠장! 저런 걸 피하라고? 어떻게! 가람아! "가람아!" "받아랏!" 요령이는 고함을 지르며 손 위에 뭉친 구체를 집어던졌다. 이제 와서? 제 기랄! 가람이가 당한 다음에? 그리고 저 여자의 몸 주위는 불꽃이 언제나 감싸고 있다고! 네녀석의 그 잡스러운 공격 따위에 꿈적이나 할 것 같아? -꽈우우웅! "끼약!" 엇? 뭐야? 저 비명은? 설마 저런 잡스러운 공격을 맞은거야? 곧 폭음의 진 동과 연기가 사라지고, 입에서 피를 토하는 혜진의 모습이 드러났다. 맞았 나본데? 하지만 불꽃이 몸을 감싸고 있을텐데? "앙큼한...것! 쿨럭! 불꽃을 폭발시킨 틈을 이용해서 공격하다니... 젠장! 지옥의 불..." 아, 그렇구나! 불꽃은 방금 터뜨렸으니 불꽃이 있을리가 없지! 요령이는 그 틈을 이용한 것이군! 그녀는 비틀거리며 지옥운운하더니 다시 손을 들어 올렸다. 또 불꽃을 부르려고? 지긋지긋하다! 하지만 막을 수 없잖아! 그 때 갑자기 가람이가 팟! 하고 그녀의 눈앞에서 나타났다. 마치 하늘에 서 떨어진듯이. 그는 빠르게 나타난 것처럼 빠르게 다리로 땅을 좌악! 하고 훑으며 그녀의 다리를 걸어버렸다. 휘익! 탁! 그리고 그녀는 볼품없이 땅에 굴러버렸다. -콰당! "아아악! 콜록콜록!" 혜진은 넘어질 때의 충격 때문인지 격렬한 기침을 해대며 바닥에서 뒹굴었 다. 처참하군. 온 몸은 흙투성이에, 군데군데 피가 흐르고, 옷은 검게 그슬 린 몰골로 바닥에 쓰러져서 버느적거리는 모습이라니. 그녀는 히스테리컬하 게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꺄아아아악! 나를 쓰러뜨렸어! 감히! 이 나를! 너희들이! 감히! 나를!꺄 아악! 죽여버리겠어! 죽여버리겠어어!" 그녀는 팔을 짚고 부들거리며 일어서려 했다. 그러나, 가람이는 절대로 그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다시 팔을 탁! 하고 걸어서 다시 쓰러뜨리고 는 그녀의 머리 위쪽에 손바닥을 들어올렸다. 우우웅... 그의 손바닥에 푸 른 기운이 점차 뭉치기 시작했고, 그 기운은 금방이라도 혜진에게로 쏘아져 나갈듯이 거칠게 일렁거렸다. 그는 그 상태로 무색의 음성으로 혜진에게 경 고했다. "허락 없이 일어나면 넌 죽는다" 멈칫, 가람이의 폭언에 그녀는 순간적으로 눈을 크게 뜨며 다시금 팔을 땅 에 짚으며 일어서려던 동작을 급히 멈췄다. "날... 죽여? 하! 네 놈 따위가? 젠장, 이거 빌어먹을 정도로 짜증나는데? 네깟놈이 뭔데 감히 내 옷에 흙을 묻게 하더니 이젠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야?" "지금 넌 그런 말을 할 처지가 아닐텐데" 강압적인 가람이의 태도. 결국 그녀는 고개를 가로젓더니 물었다. "좋아. 일어나지만 않으면 죽지 않는건가?" "물론 네가 그 지옥의 불꽃인가 하는 것을 땅에서 이끌어내도 네 머리에는 내 영기포가 꽂힌다. 이 기의 덩어리가 내 손에서 네 머리까지 가는 시간보 다 네가 지옥에서 여기까지 더욱 빨리 불꽃을 끌어올 자신이 있다면 해 봐" "차가우시군..." 그녀는 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왼쪽 볼을 어깨에 대고 누워있는 모습 그대 로 어깨를 으쓱하고 들어올렸다. 그녀의 입에서는 한 줄기 선혈이 흐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신경쓰지 않는다는 투였다. 감정기복이 정말 심하군. 방금 전까지는 마치 미쳐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기성을 질러대더니 그 때부터 시 간이 지나봐야 얼마나 지났다고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어버리나...? "이제 날 어쩔 거야?" "어떻게 할까" "하? 일단 잡아놓고 나서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보겠다는 거군, 그래? 좋아, 하지만 난 바쁜 사람이야. 빨리 결정해야 할 걸" 으음, 대화가 전개되는 상황을 보고 있자니 별로 내가 끼어들만한 구석은 없는걸, 하지만 난 당사자야. 죽을 뻔 했다고. 끼어들을 구석이 없으면 내 가 만들어서라도 끼어들어야겠다.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혜진과 가람이 의 사이로 비척비척 걸어갔고 그런 나를 보던 요령이도 내 뒤를 졸졸 따라 왔다. 따라오지 마, 짜증나니까. 어쨌든 그렇게 뜨거운 열기로 녹다가 굳어 버리고 폭발에 이곳 저곳이 패이고 깨져버린 어두운 밤의 검은 도로를 건너 서 반대쪽 도로의 볼품없이 쓰러져있는 혜진에게로 다가간 나는 나를 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짓는 그녀의 얼굴 앞쪽에 쪼그리고 앉아서 말했다. "이봐요, 아가씨?" "왜 부르니, 청년? 그건 그렇고 너 참 대단한 친구들을 두고 있더구나. 사 람으로 변신한 고양이에, 재수없는 도사 녀석에... 설마 너도 이 재수없는 녀석들처럼 뭔가 능력이 있니? 아참참참, 미안, 너에게 그런 능력 따위가 있을리가 없지. 생걱해보니 너는 아까 내가 불꽃을 쏘자 얼이 빠져가지고서 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어. 호호! 미안, 아픈데를 찔러서. 하지만 궁금한 게 있는데, 그렇게 해서 네 한 목숨 제대로..." 쫘아악! 그녀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내가 뺨을 짜악!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되게 후려쳐 버린 것이다. 네 성격으로 보아하니 태어나서 뺨 맞아본 건 처 음일걸? 아우, 시원해. 그녀는 잠시 눈에 불이 번쩍하는 표정을 짓더니 날 보며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이게..." "날 죽이려던 사람에게 이 정도 복수는 싼 거죠. 그렇죠?" "감...감히... 내 뺨을 쳐...?" 쫘아아악! 그녀는 반대쪽 뺨을 얻어맞고 다시금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이번에는 증오의 눈빛으로 우리 둘을 노려보았다. 하, 노려보면 어쩔 건데? 양쪽 뺨이 벌개서 나를 죽일듯이 노려보는 먼지와 피투성이의 그녀의 얼굴 은 약간 우스꽝스러웠고, 그래서 나는 실실 웃으며 되물었다. "생각해보니 역시 목숨을 잃을 뻔했던 죽음의 공포에 대한 값으로 뺨 한대 는 너무 싸죠?" "이 자식이 감히 내 뺨을 쳐! 그것도 두 대 씩이나! 이 빌어먹을 놈! 죽여 버리겠어!" 혜진은 당장이라도 일어나서 내 목을 조를듯이 팔을 버느적거렸지만 곧 그 행동을 그만둬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증오에 찬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가람이가 머리 위에서 기의 덩어리를 진동시킨 것이다. 곧 부드러운, 그러 나 공격적 의지가 뚜렷한 소리가 이 주위를 온통 뒤덮었다. 우우우웅... "빌어먹을. 알았으니 그 소리 좀 집어치워. 콜록콜록!" 그녀는 다시 입에서 선혈을 뿌리며 독하게 중얼거렸고, 나는 그녀의 입에 서 튀어나오는 핏방울을 맞지 않기 위해서 쪼그린 채로 폴짝 뛰어서 뒤로 물러났다. 그 때 뒤에서 요령이가 조용하게 물었다. "여기서 놓아준다면 어떻게 할 거지? 또 나를 따라올 거야?" "당연하지, 머저리같은 계집아" "나를 그딴 식으로 한 번만 더 불러 보시지? 입을 뭉게 놓을테니. 왜? 또 불러 봐?" "......제길......" 혜진은 잠시 침묵하더니 풀이 죽은 얼굴로 고개를 푸욱 숙였다. 쩝, 저렇 게 풀이 죽어 있는 모습을 보니 괜히 또 뺨을 때린 게 미안해지네. 그녀는 그렇게 잠시 땅을 묵묵히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아까 뺨을 맞을 때 입술이 터졌나? 아니면 이 녀석들이랑 싸우면서 속에 상처를 입었나...? 헤에. 입에서 피가 줄줄줄... 흐르네... 줄줄줄... 줄줄 줄" "......이봐, 괜찮은거야? 뺨 때린 건 미안하게 됐어. 하지만..." "아아, 상관없어. 어차피 내가 먼저 공격했는걸. 그보다, 너, 내 피가 보 이지...?" "아, 으응" "차암...붉구나. 그치? 너... 피가 왜 붉은지 아니...?" "피가 왜 붉냐구?" 피가 왜 붉냐고? 으음... 과학시간마다 자서 잘 모르겠지만 피가 붉은 이 유는... 음... 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적혈구의 색이 붉으니까... 으음, 아닌가? 아니면... 혈소판 때문...? 으음, 헤모글로빈 때문인것도 같았는데 헤모글로빈이 적혈구 속에 있으니까... 으아악! 모르겠다! 나는 머리를 벅 벅 긁으며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휘저었고 그런 나를 보던 그녀 는 왼쪽 검지손가락을 들어올리더니 천천히 자신이 그린 피로 꼼지락 꼼지 락 낙서를 하면서 중얼거렸다. "모르는구나... 피가 붉은 이유는 말야... 피는 영혼의 노래... 영혼의 정 열... 사랑... 꿈... 희망... 절망... 고통... 슬픔... 모든 것은 피 속에. .. 피는 사람의 영혼의 대리자... 피는 인간의 의지의 증명자... 인간의 피 는 지옥의 악마조차 눈물 맺게 한다... " 으응? 어쩌다 이야기가 이렇게 흐르지? 원래 시작은 '피가 왜 붉은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 아니었나? 나는 제지하려 했으나 그녀의 중얼거림은 마치 노래처럼 끊길듯이 끊길듯이 이어지며 나에게 끝없는 애처로움과 슬픔, 그 리고 나른한 기분을 느끼게 했고 그래서 난 그녀의 말을 맺게 한다는 데 약 간의 거부감을 느끼며 그녀의 노래같은, 흐느낌같은 중얼거림을 끊으려는 것을 그만두어야 했다. "...그렇기에... 피는 악마를 부른다...악마는... 피를 매개로 지상에 힘 을 보낸다... 그렇기에... 나 지금 피로써..." 그런데 점점 말의 내용이 정말 이상해지네... 악마가 피를 매개로 지상에 힘을 보내는것이 피가 붉은 이유와 무슨 상관이지? 서...설마? 지금 중얼거리는 게 나에게 해주는 말이 아니라...에이, 설마! "나 지금 피로써 그대의 힘을 부르노니... 내게 힘을 다오..." 그 때 갑자기 요령이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어? 지금 그건...?" 그 때 터져나온 혜진의 날카로운 외침. "블러디 랩소디!" 피의 광시곡이라는 외침은 허공을 울렸고 동시에 화르륵! 하는 소리가 나 며 허공에서 거대한 불꽃의 구가 맺히더니 그대로 허공을 살라먹으며 가람 이에게로 꽂혔다. -콰앙! "크으윽!" 가람이의 짧은 비명소리와 그 비명소리를 순식간에 묻어버린 폭음. 허공에 서 맺힌 그 불꽃의 그 충격파는 가람이 주위의 모두를 튕겨나게 하기에 충 분했고, 그래서 나는 볼품없이 한참을 데굴데굴 굴러야 했다. 제기랄! 방금 전의 그 이상한 톖조림은 역시 피가 붉은 이유에 대한 멍청하고 이유없는 중얼거림이 아니라 불꽃을 불러내는 주술이였어! 제길! 그럼 처음에 손가락 으로 피를 잉크삼아 끄적이던 낙서도 사실은 마법진이나 주문같은 것이었겠 군! 멍청하게, 그런 초보적인 속임수에 속아 넘어가다니! 하긴, 나야 주문 을 들어도 그게 주문인지, 마법진을 보아도 그게 마법진인지 알 수 있을리 가 없지만 말야. 그럼 가람이나 요령이, 너희들이라도 눈치 챘어야 하는 거 아냐? "쿨럭 쿨럭! 쿠웨엑! 제기랄! 어지러워 뒈지겠군! 허억, 허어억!" 나는 미친듯이 쿨럭거리며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 시선의 정 면에는 역시 폭발의 풍압으로 저 멀리까지 튕겨나가버린 혜진이 있었고, 내 왼쪽에는 폭발에서 쏟아지는 압력을 견뎌 내었는지 두 팔을 엑스자로 교차 시키고 다리를 휘청이며 서 있는 요령이가 보였다. 그리고 내 오른쪽엔 저 멀리에서 나처럼 볼품없이 뒹굴고 있는 가람이가 보였다. 이런 젠장! "우앗! 가람이가! 젠장! 가람아! 괜찮냐!" "괜찮...습니다, 주인... 허억, 후우우..." "야, 임마! 괜찮다는 녀석이 그렇게 말도 못 하면서 헛숨만 쉬어대냐!" "정말... 괜찮... 습니다. 후우. 하아아. 저 요사한 마녀가 불러들인 불꽃 에 얻어맞기 직전에 손에 뭉쳐 놓았던 영기와 혹시 몰라 단전에 뭉쳐두었던 영기를 모조리 뿌려서 기의 방어막을 쳤습니다. 그래도 역시 저 공격이 너 무 강한지라 충격을 아주 상쇄시킬 수는 없더군요. 그래서 저 폭발의 충격 으로 튕겨나기는 했지만 역시 제 기의 막과 한 번 부딪힌 공격이라 생각보 다는 충격이 크지 않더군요..." 그 녀석은 땅을 짚으며 천천히 일어서더니 그렇게 나에게 자신이 괜찮다 는 것을 알아듣지 못할 말들로 힘겹게 설명한 후 혜진을 바라보았다. 혜진 은 아직도 땅에 넘어져 있었다. 지금까지 계속해서 격심한 대결로 인해 몸 에 심한 상처를 많이 받은데다 방금전의 폭발의 충격까지 가까이에서 받았 기 때문인지 그녀는 쉽게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 듯했다. 그녀는 차갑게 낄 낄대더니 누워 있는 상태 그대로 중얼거렸다. "크으윽, 하아, 하아. 내가 지옥의 불...꽃만 사용할 줄 아는 멍청이인줄 로 알았나? 마녀라면 최소한 흑마술 몇 개 정도는 할 줄 알아야지... 콜록, 그건 그렇고 몸 상태가 엉망이군. 제기랄. 이런 상태로는 카르텔 저 싸가지 없는 계집을 데려가지 못하겠는데? 쳇, 저 계집을 조금 괴롭혀준 뒤 퀴에르 에게 보내서 점수 좀 딸까 했더니, 최소한 이번에는 틀린 것 같군. 운 좋은 줄 알아, 이 계집아" 그녀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가람이도 이제는 힘이 다 빠졌는지 그 모습 을 뻔히 보면서도 단전 부근에 양 손을 올리고 힘을 모으는듯한 자세를 취 할 뿐 혜진이 일어서는 것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하긴, 아무리 자기 입으로 는 괜찮다고 하지만 그 큰 불덩이를 얻어맞았는데 괜찮을 리가 있나. 결국 우리는 혜진이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기만 했고 그녀는 결국 휘청 휘청하면서도 용케 똑바로 선 뒤 만면에 힘이 모두 소진된 자신이 일 어나는 것조차 말리지 못한 우리들을 비웃는듯한 냉랭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난 가야겠어... 휴우. 나중에, 다시 올 테니 기다리라고..." 순간. -피잉! 주르륵. 혜진의 왼쪽 귀의 끝부분이 예리하게 베어지며 아주 작게 피 한방 울이 흘렀다. 요령이었다. 요령이는 마치 권총처럼 손가락을 하나 들어 올 려서 혜진을 겨누며 말했다. "어딜 가시려고 그러나...?" 혜진은 갑작스러운 요령의 도발에 굳어버린 얼굴로 입을 약간 벌리고 숨을 작게 내쉬며 정면의 요령이를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다가 간신히 손가락을 들어서 왼쪽의 귀를 살짝 쓰다듬고는 손을 바라보았다. 귀를 쓰다듬은 손가 락에는 몇 방울의 피가 붉게 묻어나왔다. 그녀는 잠시 자신의 손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마침내 힘겹게 말을 꺼내었다. "이...이게 무슨 짓이야...? 정말 끝, 끝까지 해보자는 거야?" "아아니. 전혀. 그럴 생각따위는 조금도 없으니까 걱정 말아" "그럼 왜 갑자기..." "공격을 했느냔 말이지?" 요령의 지레짐작에 혜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제는 평정을 되찾았는지 날 카롭게 되물었다. "그래. 난 이번엔 더 이상 너희를 공격하지 않고 내가 갈 곳으로 다시 돌 아간다고 말했어. 그런데 넌 돌아가겠다고 한 나를 공격해서 자극했지. 무 엇 때문이지? 설마 나를 믿지 못해서 그런거야? 그렇다면 그건 실수야. 마 녀는 한 번 한 말은 꼭 지켜. 그러고보니 넌 퀴에르의 고양이었지. 마녀가 약속을 잘 지킨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을텐데? 그렇다면 내가 약속을 안 지 킬까봐 두려워서 무의식중에 공격했다거나 한 것은 결코 아니겠군. 하긴, 나를 공격한다음에 태연히 나를 보고 '어딜 가시려고 그러나...?' 하고 싸 가지없게 말한 걸로 봐서도 네가 한 짓은 우발적인 공격이 절대 아냐. 그럼 뭐지? 왜 나를 공격한거지? 하, 이유가 갑자기 궁금해지는데. 왜 공격한거 야? 싸우다 그만두니까 찝찝해서 끝장을 보자는거야? 그런 거냐고? 나에게 도발한거냐고!" "도발이 아냐. 위.협. 이지" 요령이는 혜진의 질문에 코웃음을 픽 치며 '위협'이라는 단어를 강조해서 대답해 주었으며 그래서 혜진은 놀라서 헛숨을 들이켰다. 허억! 하고. "뭐? 위협? 나를?" "그래, 너를. 위협이라고 해야 하나? 협박이라고 해야 하나? 뭐 그런거야. 왜 이리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야? 위협이 뭔지 못 알아들어? 그렇다면 뭐 대충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너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하는 행위라고 풀어 주도록 하지. 어우야 어쩌면 좋아? 나 너무 친절한 것 같아, 말 뜻 하 나하나까지 다 풀어주고!" "아...아...좋아, 좋아. 다 좋아. 나를 협박한다 이거지, 뭔가를 원해서. 그런데 뭐 하나 묻자. 나를 왜 협박하는데?" 혜진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이제는 오히려 약간 여유로워진듯이 빈정대는 어투까지 섞어대며 질문했고 그런 그의 말투에 요령이 역시 약간 여유로운 말투로 대답했다. 마치 친한 친구 두 명이 오랜만에 만나서 여유롭게 날씨 이야기를 나누듯이. "아, 별 건 아니고. 너 돌아가기 전에 나와 작은 약속 하나만 해 줘" "뭔데?" "사소한 건데, 다시는 나를 잡으러 오지 않겠다는 약속만 해 주면 돼" "내가 미쳤냐?" 혜진의 대답은 빨랐고 그래서 요령이는 잠시 혜진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인식하지 못하는 듯 계속해서 미소를 짓다가 갑자기 혜진의 대답을 깨달았 는지 얼굴을 굳히며 중얼거렸다. "싫다고...?" "당연하지. 너만 잡아가면 난 퀴에르에게 인정받는다고. 넌 나에게 복덩어 리나 마찬가지야. 그런데 내가 미쳤다고 널 그냥 놔두고 안 데려가냐?" "제길..." 요령이는 이를 갈았다. 우드득. 그리고 그녀는 무서운 고민에 빠져드는 듯 고개를 잠시 떨구었다. 무슨 고민을 하고 있을까? 이대로 보내주면 나중에 다시 덤벼들 혜진을 어떻게 말릴 수 있을까하는 고민? 아니면 어떻게 하면 퀴에르의 손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하는 고민? 무슨 고민일까...? 아, 젠장. 내가 왜 이딴 것이나 생각하고 있지. 저 자식이 뭘 고민하던 말 던. 그건 그렇고 혜진이 저대로 돌아가버리면 앞으로도 요령이때문에 목숨 걸어야 하는 일이 많이 벌어질텐데... 아니, 혜진이 다시는 안 온다고 약속 한다고 해도 분명히 혜진의 뒤를 이은 다른 사람들이 요령이뿐만 아니라 나 와 가람이까지 위험에 빠뜨릴 거라고. 젠장, 이걸 어쩌지? ......역시 그래야 되는 걸까? 나는 조금 전부터 고민해 왔던 것을 떠올리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이 방법밖에 없는걸까? ......난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난 언제 어느 칼, 아니. 언제 어느 불에 맞아 죽을 지 모르는데... 하지만...하지만... 비록 저 녀석이 갑작스레 미워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좋아" 요령이가 마침내 결심을 끝냈는지 입술을 깨물며 각오에 찬 얼굴로 잠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너는 네가 비록 힘이 다 빠진데다 온 몸이 상처투성이에 피투성이가 됐지 만 그것은 우리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말야, 사실 앞 장서서 나서서 싸웠던것은 멍... 가람이야. 미안, 가람아. 옛 이름으로 부 르던게 습관이 되어서. 아, 괜찮다고? 그래. 어쨌든, 그래. 나는 가끔씩 뒤 에서 견제타나 던져주는 정도였지. 몇 번이나 지옥에서 불꽃을 끌어다쓰며 모든 주술력을 바닥내 버린 너와는 다르다고" 요령이는 여기까지 말하고는 잠시 입을 다물더니 손을 들어올렸다. 갑자기 요령이 주위의 공기가 미친듯이 회전하더니 기류가 푸른 기운과 함께 회오 리치며 마치 털실이 둥그렇게 뭉치듯이 한 점을 향해 빠르게 뭉치고 있었 다. 요령이는 그렇게 잠시 손을 들어올려 영기(혹은 요기... 요물이니까 요 기가 맞을 것이다)를 모았고 곧 그녀의 손에는 수박만한 큰 기의 덩어리가 꿈틀거리며 빛났다. 그녀는 위협하듯 그것을 든 손을 움찔거리며 혜진을 노 려보다가 말을 이었다. "봤지? 잠시동안의 집중만으로도 이 정도는 쉽게 만들어 낼 수 있어" 그리고 혜진은 방금 전의 여유로운 모습에 비해서 확실히 어두워진 표정으 로 주춤거리며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어쩌란 말야?" "약속해. 다시는 나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안 그러면 이걸 던진다" "......헛소리 하지 마. 지금의 내 몸상태가 어떤지는 눈으로 나를 직접 보는 네가 더 잘 알텐데. 솔직히 말하면 내 흑마력은 몸에 가해진 몇 번의 강한 영적 충격과 무리한 운용 때문에 마치 마녀의 냄비처럼 부글부글 들끓 고 있어. 알아? 이 상태를 유지하는 것도 힘들단 말야. 지금 그걸 맞으면 내 몸속의 흑마력은 바로 역회전할걸. 그러면 난 죽어. 네가 살인을 할 수 있어?" 혜진은 '절대 안 될걸'이라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요령은 눈썹하나 까 닥하지 않고 대답했다. "상대방을 궁지에 몰아넣고 이제와서 그런 식으로 동정을 구해봤자 씨알도 안 먹혀. 내 눈빛을 보고 말해 봐. 거짓인지 아닌지. 그래도 네 동정심에 기대고 싶으면 그렇게 하고. 나 같으면 내 변덕스러운 동정심 따위는 절대 안 믿겠지만, 뭐 네 생각과 내 생각이 같을 수야 없으니까, 네 마음대로 해 봐. 물론 결과는 네가 책임을 져야지. 그게 죽음이라도. 뭐, 상관 없잖아? 네 말만따라 죽으면 따쓰하고 안락한 지옥불이 널 감싸 줄 테니까" "으으으..." 혜진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니, 가만. 요령이가 언제 저렇게 싸늘해졌 지? 지금 요령이의 눈에는 다른 때 상대방을 공격할 때 가지던 망설임 따위 가 전혀 없었다. 오직 차가운 결심뿐. 수 틀리면 죽던 말던 자신의 손에 있 는 기의 덩어리를 던져 버리겠다는 결심. 나쁜 것! 언제부터 그렇게 성격이 차가워졌지? 아무리 궁지에 몰렸어도, 사람이란 남의 생각을 해 줘야 한다 고! 도대체 상대방이 '네가 날 공격하면 난 죽을지도 모른다'고 경고했음에 도 눈썹 하나 까딱 안하는 그 태도는 뭐야! 아까 전까지만 해도 이러지는 않았잖아! "하... 네 손의 무지막지한... 그걸 맞으면 죽을 수도... 있다니까?" "그래서? 어쩌라고?" 상대방이 아예 변명의 말이나 다른 화제를 꺼내지 못하도록 못박아 버리는 말, 그래서. 상대방을 아무리 설득하려고 나와도 상대방이 '그래서?'라고 대답한다면 할 말이 없어진다. 즉, '그래서'란 말에는 '네가 아무리 날 설 득하려고 어떤 말을 해도 난 네 말을 개소리로 들어버리겠다'는 뜻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방금 요령이는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고 호소한 혜진 에게 '그래서? 어쩌라고?'라고 대답했다. 결국 이 말로서 요령이는 완전히 혜진은 구석에 몰아버린 것이다. 선택하라. 죽던지, 아니면 더 이상 자신의 일에 관여하지 말던지. 혜진은 압박감을 느끼는지 얼굴을 심하게 찡그리며 다시 한 번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그걸 맞으면 죽을 지도 모른다고 말했어" "알았으니 결정이나 해" "......젠장......" 혜진의 마지막 시도마저도 실패로 끝나고, 그녀는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잠 시 머리를 짚으며 생각에 잠겨드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요령이는 그 잠시의 생각조차 용납하지 않으려는 듯 혜진을 재촉했다. 하긴, 압박하 는 쪽은 상대방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면 줄 수록 불리해지지. "얼른 대답해. 기덩어리 계속 들고 있으려니까 팔 아파 죽겠어. 힘 빠지면 바로 약속이고 나발이고 던져 버릴테니까 얼른 대답하는 게 좋을걸. 그래, 이런 식으로 말하면 네가 언제 불시에 기덩어리가 날아올 지 몰라서 불안해 할테니 내가 여기서 친절하게 내가 기덩어리를 던질 카운트까지 세어주지. 정말 나 너무 친절한 것 같지 않니? 호호호. 자, 10초야. 더 이상은 못 버 텨. 10... 9... 8... 7..." "이... 이 싸가지 없는..." "...6...5...4..." "잠깐! 잠깐만!" "대답할 생각이 들었나 보군" "그래, 대답할게! 알았으니 그 카운트 좀 그만 세!" "알았으니 말이나 해. 어떻게 할 거야? 다시는 나에 대한 일에 관여하지 않을거야? 아니면 그냥 이거 맞고 지옥불에 뛰어 들거야?" 혜진은 그 말에 한숨을 푸욱 쉬더니 갑자기 고개를 번쩍 치켜들고 밝게 웃 으며 윙크를 찡긋 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이 재미있는 이유를 아니?" "...뭐?" 저게 또 왠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야? 난 요령과 혜진의 대화를 구경 하다 말고 멍청하게 혜진을 바라보았다. 요령이의 기분도 나의 기분과 과히 다르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잠시 혜진을 바라 보더니 말했다. "......계속 충격받아서 미쳤어?" ".....물론 내 정신은 멀쩡해. 그러니 내 질문에 대답이나 해 줘. 세상이 재미있는 이유를 알아?" "......너야말로 내 질문에 대답할 생각이 없어졌나 본데? 자꾸 말 돌리려 고 하지 말고 빨리 내가 물어본 말에나 대답..." 요령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혜진이 갑자기 날카롭게 휘파람을 한 번 불더 니 말했기 때문이다. "세상이 재미있는 이유를 모르거나 대답하기 싫은가보군. 세상이 재미있는 이유는 반드시 이것 아니면 저것만을 반드시 골라야 할 것 같은 상황에서도 제3의 변수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야" ".....뭐?" 쐐애애애액! 갑자기 허공을 찢는듯한 파공음과 함께 무엇인가가 내 눈 앞 을 스치며 지나갔다. 갈색의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나는 그 무엇인가가 지 나간다음에 생긴 후기류로 인해 미친듯이 펄럭거리는 내 옷과 머리칼들을 붙잡으며 허공에 그려진 갈색의 선을 따라잡으려 빠르게 눈을 돌렸다. 저게 뭐지 도대체? 허공에 그어진 선은 똑바로 요령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 고 요령은 깜짝 놀랐는지 기덩어리를 맺어 놓은 손을 정면으로 내밀었다. -퍼어엉! "꺄아악!" 요령이는 바로 눈 앞에서 일어난 폭발에 얼굴을 가리며 비명을 질렀다. 젠 장! 상황이 이해가 안 돼! 이해가! 너무 빠르게 돌아간다고! 이 상황을 정 리할 수 있는 방법은 방금 전에 내 앞의 공기를 온통 휩쓸며 지나간 그것은 무엇인가? 난 곧 그 의문을 풀었다. 방금 전에 내 눈 앞으로 빠르게 지나간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말이다. 혜진의 말에 반사적으로 혜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 을때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말했다. "상황 역전이군. 깔깔깔깔깔!" 그녀의 앞에 떠 있는 것 - 그것은 빗자루였다. 갈색의 다 낡아빠진, 홀 로 공중에 떠 있는 빗자루. 그 빗자루의 주위에서는 마치 사금이 빗자루 주 위에서 뿌려져 버린 듯 빛의 입자들이 계속해서 반짝거리며 흩날리고 있었 다. 그렇다. 나의 앞을 휩쓸고 지나가서 혜진을 위협하고 있던 요령이를 공 격했던 것은 빗자루였던 것이다. 그것은 요령이가 모아놓은 기의 덩어리와 정면으로 충돌했는데도 부서지거나 빗자루털이 타 버리거나 하는 등의 손상 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정말 대단한 빗자루이군... 혜진은 얌전히 자신의 앞으로 날아와서 멈춰 선 빗자루를 잡고 화려하게 빙글빙글 돌리더니 이윽고 요령이를 향해 쭈욱 뻗고는 입술에 엷은 미소를 띄우더니 말했다. "하, 역시 세상이란 변수가 있어서 재밌다니까. 그렇지? 맞아, 네 말대로 이제 내 힘만으로는 도저히 너희들을 상대할 수가 없어. 요기란 요기는 거 의 다 써버렸고, 그나마 조금 남아있는 힘도 내가 받은 충격으로 인해서 길 을 잃고 서로 부딪혀대는 데 쓰이거나, 혹은 그 혼란을 의식적으로 제어하 는데 쓰이는 것이 대부분라서 너희들과 싸우는 데는 전혀 쓸 수가 없어. 하 지만 말야, 너희들, 특히 너 요령이는 명색이 마녀의 고양이라는 계집애가 마녀의 가장 큰 무기를 간과하고 있었어. 네가 간과하고 있었던 그것이 뭔 지 알아?" "......" 요령이는 말이 없었다. 당연하지.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자신이 간과한 사실'이 자신을 노리고 있으니까. "대답이 없군. 내가 대답하지. 그 무기는 바로 내 빗자루야. 그런데 너는 왜 내가 최후의 순간에 빗자루를 소환할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지? 나는 마녀같지도 않았나? 너무 같잖아서 지팡이조차 없을 줄 알았어? 호호! 하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이렇게 멋진 갈색 빗자루를 가지고 있지. 내가 말 한마디만 하면 바로 자루의 끝에 마치 창처럼 날카로운 영기의 날을 세우고 돌진할 빗자루가 말야" "제기랄..." 요령이는 앞을 노려보며 다시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혜진이 재빠르게 제지했다. "손 내려" 요령은 눈도 깜박하지 않고 기를 계속해서 모으며 혜진의 위협에 한쪽 입 술을 올려 웃는 비웃음으로 대답했다. "흥, 나를 공격해서 내가 죽기라도 한다면 그것처럼 네게 황당한 일도 없 을걸. 퀴에르는 날 죽이지 말라고 했다면서? 명령을 어기면 과연 어떤 결과 가 초래될까? 결코 네게 긍정적인 결과는 아닐텐데" "괜찮아, 빗자루에 한 대 맞았다고 죽을 리는 없으니까. 뭐 몸이 약해빠져 서 이거 한 방에 뒈진다면 하는 수 없고. 퀴에르에게 야단 조금 맞으면 되 겠지. 해 볼까? 나야 상관없어. 내 몸이 다치는 것도 아니니까" "제길!" 팍! 요령은 주먹을 쥐어서 그 때까지 손바닥 위로 모으던 기체를 흩어버리 고는 양 손을 들었다. "......이제 됐냐?" 혜진은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래. 그 상태로 고분고분 나를 따라와. 이제 퀴에르에게로 가자고" "......" "싫은가? 뭐 정 싫다면 한 대 후려쳐서 기절시킨 다음 데려가도 상관없고" 혜진은 빗자루를 허공에 던졌고 그 빗자루는 허공에서 잠시 휘리릭하고 빠 르게 돌더니 공중에 멈춰서서 정확히 요령을 가리켰다. "어떻게 할래?" "......" 요령이는 사색이 되어서 조금씩 뒤로 물러섰고 혜진은 그런 요령은 보며 이를 드러내고 말했다. "얼른 대답해. 빗자루가 허공에 떠 있기 힘들다고 하잖아. 나는 말리고 싶 은데, 빗자루가 자꾸 너같이 재수없는 녀석을 되도록이면 빨리 후려쳐 버리 고 싶다는군. 아이, 자꾸 손에서 움찔거리지 마. 안 돼, 빗자루야. 그래도 나는 친절한 레이디고 너는 친절한 레이디인 나의 젠틀한 빗자루니까 상대 방에게 어느정도 생각할 시간은 줘야 하잖아. 자, 아까 네가 나에게 10초 주었었지? 난 이자쳐서 너에게 5초 주지. 호호호! 아이러니컬하군! 방금 전 까지 네가 꼽아대는 손가락을 죽을 맛으로 바라보던 내가 이제는 죽을 맛으 로 나를 바라보는 너를 향해 손가락을 꼽아댈 줄이야! 어쨌든 내 친절에 감 사해도 좋아. 잡담을 하느라고 너에게 생각할 시간을 더 많이 주었잖아? 호 호호! 자, 이제 시간을 센다. 아까 내가 느끼던 기분을 한 번 경험해 보도 록 해. 그럼 시작한다... 5... " 갑자기 가람이가 크게 소리쳤다. "주인-!" "...4..." "어...어? 왜?" "주인은 분명히 아까 내가 요령이를 도와야 한다고 명령했었다-!" "...3..." "아, 그, 그렇긴..." -휘릭! 내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가람이는 거의 땅에 붙듯이 낮게 바닥을 타고 총알이 총에서 튀어 나가듯이 빠르게 앞으로 달려가더니 순식간에 빗자루의 아래쪽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반 보를 내딛으며 곧바로 왼팔을 구부려 서 옆으로 뿌리듯 세우고 오른팔로 주먹을 똑바로 내질렀다. -타악! 쉬이익! 부웅! 우와! 대단하다! 왼팔로는 강하게 빗자루를 쳐내어서 옆으로 튕겨 버리고 오른주먹으로는 곧바로 혜진의 배를 노린다. 주먹에서 나는 바람소리는 주 먹이 실제로 공기를 찢어버리나 하는 착각을 할 정도로 날카롭고 컸다. 그 정도로 공격에 힘이 실려 있었다는 소리이다. 혜진은 재빨리 재주를 넘으며 뒤로 물러섰지만 가람이가 다시 한 보를 내딛으며 다시금 명치를 발로 지르 며 목으로 주먹을 뻗는 복합공격을 하자 엉거주춤 피하다 다리가 얽혀 결국 넘어져 버렸다. -콰당! "이, 이 빌어먹을 자식이 감히 주제에 고귀한 나를 두 번이나 넘어뜨려... ?" 그녀의 얼굴은 분노를 넘어선 증오로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녀가 얼굴을 증오로 일그러뜨리던 사랑으로 일그러뜨리던 상관하지 않는다는 투로 가람 이는 무너지듯이 한 쪽 무릎을 꿇어서 넘어진 혜진과 높이를 비슷하게 하며 그대로 손을 혜진의 목으로 뻗었다. 쉬이익! "크, 크으윽..." "입 다물어" 가람이는 차갑게 말했다. 또 헛소리를 하는 것처럼 위장하고서 주문을 외 울까 봐 두려운가보군. 혜진은 가람의 경고에 잠시 거친 숨소리만을 내더니 천천히 입을 떼었다. "......나를 찌르면 저 뒤의 계집의 몸에는 바로 저 빗자루가 박힌다" "빗자루는 이미 내가 쳐서 각도를 꺾어 버렸다. 요령에게도 힘이 많이 남 았으니 네 빗자루가 다시 제 각을 잡기 전에 이미 요령이도 빗자루를 막아 낼 준비를 끝냈겠지" "하! 각도가 꺾여? 뒤를 보고나 말하시지?" 그러나 가람이는 그 말에 뒤를 돌아보는 대신 나에게 물었다. "주인. 빗자루는 어떻게 되었는가" 빗자루? 빗자루야... 아까 네가 쳐 낸 그대로이지 뭐. 뒷 쪽은 네가 치는 바람에 방향이 돌아가 버렸지만 자루의 끝 쪽은 네 공격의 영향을 받지 않 아서 요령이를 목표로 한 채 그대로 굳어 있듯이 공중에 떠 있어. "비록 각도가 약간 바뀐 것 같긴 하지만 목표는 그대로인데...?" "제길... 주인,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에게 물어봤자 대답할 수 있을리가 없잖아?" 잠시 침묵의 대치상태가 이어졌다. 양 쪽 모두 서로에게 칼을 겨눈 형상이 다. 제길,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지...? 생각하자, 생각... 흐음. 일단 양쪽 다, 혹은 둘 중 하나가 상대에게 원하는 게 있으니까 상 대방을 압박하는 것일텐데. 우리 쪽은 혜진에게 달리 바라는 특별한 요구가 없다. 아, 요령이의 요구조건이 있었지, 다시는 자신을 쫓아오지 말라는 요 구. 하지만 녀석의 의견이야 어떻든 나와는 상관없지. 내가 일일히 녀석의 의견을 다 들어줄 의무 따위는 전혀 없으니까 말야. 솔직히 들어주고 싶다 고 해도 이 상황은 어느 한쪽만의 의견을 들어주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 는다. 어쨌든, 대충 이쪽은 이렇다고 치고 혜진쪽의 요구는 뭐였지...? 아, 요령이를 데려가겠다는 요구. 역시 그 쪽의 의견도 들어줄 수가 없지. 그럼 어쩌지? 일단 이 상황만이라도 벗어났으면 좋겠는데... 언제까지 지 리하게 이러고 있어야 하지...? "일단... 그냥 이 여자를 보내는 게 어떤가" 가람이의 의견이었다. 뜬금없이 그렇게 말하니까 무슨 의미로 그렇게 말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말이지?" "요령이는 혜진이 다시는 자신을 쫓아오지 않기를 원한다. 그러나 혜진은 절대로 그런 약속은 할 수 없다고 한다. 혜진은 요령이 지금 자신을 따라가 기를 원한다. 그러나 요령이는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니 그 절충안으로, 일단 오늘은 혜진이 그냥 돌아가는 것이다" "말도 안 돼! 그렇게 보내줄거면 아까 스스로 돌아가려 할 때 보내 주었다 고!" 요령이의 외침이었다. 그러나 그 의견은 묵살되었다. 가람이와 내가 한 마 음으로 무시해 버렸으니까. 녀석은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입술을 깨물었지만 나는 그 쪽을 흘끗 바라보았을 뿐 다시 가람이를 바라보며 지금 상황의 타 개에 대한 토론을 계속했다. 으음, 약간은 미안해지려고 하네. 하지만 난 녀석 때문에 죽을 뻔 했어. 이 정도쯤으로 미안해하면 그게 내가 마음이 약 하다는 반증이라고. 난 결코! 저 녀석에게 미안해할 것 따위 하나도 없어. "그러니까, 일단 오늘은 그렇게 흐지부지 넘어가자고? 괜찮겠어? 피 터지 게 싸우고 아무 변화도 없이 그냥 넘어간다면 허무하지 않겠어?" "싸움에는 허무라는 것이 없다. 살아남으면 그 자체로서 이미 기쁨이다" "......좋아, 알았어. 그럼 그냥 보내기로 하지. 그럼 이제 남은 것은 요 령이와 혜진의 의견인데... 이 봐, 혜진이" "......아, 내게 번거롭게 방금 나누었던 이야기를 다시금 들려줄 필요는 없어. 방금전에 너희 아래쪽에서 내 목에 드리워진 손칼 때문에 생명의 위 협을 느끼며 모두 들었으니까. 그리고 내 생각을 말하라면, 난 찬성이야. 어차피 너희들이야 나중에 다시 돌아와서 공격해도 되니까. 솔직히, 아까 내가 돌아가려 했을때 저 계집애가 가당치도 않은 욕심만 부리지 않았어도 이런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을거야" 좋아! 점차 이번 사태에 대한 모든 관련인들의 의견이 하나로 모이고 있 군. 그럼 이제 남은것은 요령이인데... "야, 요령아. 이제 너도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게 어샔?" "......제기랄......" 그녀는 고개를 떨구며 외쳤다. "마음대로 해! 젠장!" "들었지? 가람아. 마음대로 하란다" 가람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혜진에게 물었다. "내가 네 목에 드리운 손을 떼도 나를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해라" 혜진은 순순히 팔을 하늘로 들어올리며 응낙했다. "좋아, 승락하지" "빗자루도 치워라" "네가 목에서 손을 뗀 다음에 치우도록 하지. 약속해" "좋다" 가람이는 혜진의 목젖 바로 앞부분에 갖다대었던 손을 천천히 들어올렸고, 그러자마자 혜진은 바로 손을 하늘로 들어올리며 외쳤다. "돌아와, 빗자루" 하늘에 수많은 갈색빛 원을 그리며 빗자루가 빨려들어가듯 혜진의 손으로 날아가 그녀의 손에 달라붙듯이 잡혔다. 혜진은 그렇게 빗자루를 부여잡고 는 잠시 누운채로 숨을 고르더니 빗자루로 비틀거리는 몸을 지탱하며 일어 나서는 다시 빗자루를 공중에 띄우고 끙끙대며 옆안장으로 빗자루에 올라탔 다. 하, 빗자루를 옆안장으로 타? 그 자세 한 번 엄청 불안하네. 저러면 조 금만 균형을 잃어도 바로 떨어져버리겠는걸? 그녀는 그렇게 빗자루에 올라 잠시 몸을 보는 사람이 불안할 정도로 앞뒤로 휘청대며 균형을 잡더니 우리 를 향해 말했다. "휴우. 오늘 밤은 참 재수 더럽군. 별 시덥잖은 녀석들 셋 때문에 이렇게 고생하게 될 줄이야. 아니, 둘인가? 한 녀석은 허수아비였으니 말야. 어쨌 든, 이제 갈 시간인가? 모두 안녕. 다시 볼테니 너무 슬퍼하지는 말라고" 절대 다시 보고 싶지 않다! 나는 그녀의 말에 치를 떨었고 그런 나를 비웃 듯 바라보던 혜진은 빗자루를 하늘로 띄우다가 갑자기 무엇인가 생각난 듯 이 요령이를 불렀다. 요령이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멍한 얼굴로 자신이 서 있던 자리에 주저앉아서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야, 거기, 너. 가기 전에 뭐 좀 물어보자" "......뭐지?" "아까 네가 나를 협박할 때 말야. 만약 내가 끝까지 대답을 안 했다면 너 는 정말로 그 요기덩어리를 던지려고 했었나?" 요령이는 잠시 입을 다물더니 이윽고 고개를 작게 위아래로 끄덕였다. "그래......" 그리고 혜진은 깔깔대며 웃더니 말했다. "앞으로 거짓말을 할 때에는 눈빛부터 조절하도록 해. 이 거짓말쟁이 아가 씨야" 요령이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헛소리......" ......으음? 무슨 말이지? 설마 아까 요령이가 혜진을 위협할 때 만약에 혜진이 요령의 요구를 거부했어도 요령은 결코 기의 덩어리를 던지지 못했 을 거라는 그런... 이야기인가? 하, 설마! 저렇게 나쁜 녀석이? ......하긴, 나도 바로 몇시간 전까진 저 녀석이 좋은 녀석이라고 생각하 고 있었으니...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이지만 그럴 수도 있겠군... 어쩌면 말이야... 그녀는 시동어를 중얼거렸다. "떠올라라" 둥실... 빗자루가 부드럽게 흔들거리며 혜진을 태우고 천천히 하늘로 솟아 올랐다. 떠올라라는 말 한마디에 떠오르다니, 그것 참 편리한데. 나도 저런 탈 것 하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계속해서 떠올라 꽤 높이 올라 갔다고 생각될 무렵, 그녀는 다시금 손을 흔들며 높아서인지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다시 말했다. "가자" 스르르...빗자루는 천천히 달빛을 받으며 앞으로 나아가다 점점 더 빠르게 속력을 내며 별하나 없는 밤하늘을 가르고 빠른 속도로 서쪽 하늘로 멀어져 갔다. 그리고 나는 주저앉아 버렸다. 털썩. "하아, 정말 긴 밤이었어..." 그 때 가람이가 내 몸을 이곳저곳 더듬듯이 빠르게 탁탁탁 쳐내기 시작했 다. 타타타탁! 어, 뭐... 뭐하는 짓이야? 난 약간은 얼이 빠져서 물어보았 다. "가람아? ......뭐 하는 거야?" "몸에 주인이 알지 못하는 상처가 있거나 싸움중에 공기 속에서 떠돌던 음 기가 주인의 몸 속에서 뭉친 곳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찾고 있는 중이 다" "아아...됐어, 괜찮아. 다친 곳은 없어" "잠시만 참아라, 주인. 곧 끝날테니" "그럼 마음대로 하던지..." 가람이는 그렇게 내 몸을 구석구석 쳐 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뒷쪽 등에서 퍼엉! 하는 소리가 들려오며 내 몸이 부르르 떨렸다. 뭐, 뭐야? "역시... 음기가 뭉쳐 있었군" "으...응?" "방금 전에 몸에 진동 같은 것이 오지 않았나" "그래. 그랬는데...?" "주인의 등쪽에 마녀와의 싸움 도중에 흩어졌다가 인간의 몸을 보고 모여 든 것 같은 음기의 덩어리가 뭉쳐 있었다. 그것을 방금 전에 쳐서 흩어 버 렸지. 이제 됐다. 몸에 상처는 타박상이나 긁힌 상처를 제외하면 없는 것 같군. 피곤하긴 하겠지만 그건 푸욱 쉬면 될 테고. 이 곳에 더 이상 볼일이 없다면 돌아가자" "돌아가자고?" "그렇다. 왜, 더 볼 일이 있는가...?" "아니, 그건 아니지만..." 왠지 이대로 가려니까 너무 허무한 생각이 든다. 밤새도록 우리는 뭘 위해 서 싸웠던 거지...? "지금이 몇 시냐, 가람아...?" "나에게는 시계가 없다, 주인. 그래도 원한다면 어떻게든 시간을..." "2시가 조금 넘었네" 요령이가 가람이 대신 대답해 주었다. 허? 시간을 어떻게 알았지? "너, 시계도 있었어?" "방바닥에서 굴러 다니던 거 차고 왔는데, 왜?" "뭐? 어디 한 번 봐!" 나는 녀석의 팔을 거칠게 들어서 팔목을 걷어 올렸다. 그렇게 드러난 녀석 의 흰 팔목에는 내가 졸업선물로 부모님께 받은 은색 손목시계가 달빛을 반 사하며 빛나고 있었다. "뭐야! 이거 내 시계잖아!" 그러자 요령이는 기운빠지게 '후-'하고 웃으며 어깨를 으쓱이더니 대답했 다. "아, 물론 당연히 이건 네 시계이지. 개나 고양이가 시계를 사서 차고 다 닐 리는 없잖아? 뭐 어찌보면 너무 당연해서 간과해 버릴 수 있는 이야기 고. 그런것도 생각 못 한다면 네가..." "조용히 해!" 옛날처럼 네가 나한테 어떻게 하던 내가 허허거리고 웃을 줄 아냐? 내가 바보냐? 나는 너 때문에 죽을 뻔 했다고. 알아? 나는 그 녀석의 손에서 빼 앗듯이 시계를 잡고 당기며 말했다. "돌려줘!" "아, 아. 정 뭐 네 시계가 좋다면야 가져가도록 하라고. 뭐, 동네의 네가 짝사랑하는 아가씨가 준 선물이라거나 초중고를 거치는동안 평생에 길이 남 을 은사가 주신 시계이거나 그런 건가보지?" 그 자식, 시계 하나 끌러주는데에도 되게 말 많네. 어쨌든, 아직까지도 네 녀석이 별것도 아닌 일로 밉살맞게 보이는 걸 보니 역시 아까 고민했던 생 각을 굳혀도 될 것같군.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가람이와 요령이에게 말했 다. "돌아가자. 집으로" -쾅! "으으으!" 나는 온 힘을 다해 자취방의 문을 열어제끼고 그대로 기절하듯이 빙바닥에 엎드리듯이 쓰러졌다. 몇 시간 나가있지도 않았는데 피곤해서 쓰러질 지경 이다. 후아아! 내 뒤로 가람이가 조용히 들어와서 방 구석에 편한 자세로 주저앉았으며 요령이가 비틀거리듯 들어와서는 내 옆에 쓰러지듯 드러누우 며 말했다. "하아암, 졸려. 피곤해 죽겠네... 얼른 얼른 이불깔고 잠이나 푹 자자. 야, 이불 깔어" 그 녀석은 발가락으로 내 허벅지를 쿡쿡 찌르면서 명령하듯이 말했고 그래 서 가람이는 이를 드러내었다. 하아. 가람아. 네가 이를 드러낼 필요는 없 어. 왜냐하면 내가 화가 나거든. 이로서 난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아까 고 민했던 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가 있어. 최소한, 지금의 나로서는 요령이 네 가 좋아 보이는 구석이 하나도! 없다고. 나는 마음을 굳히고는 결심한 것을 실천에 옮기기로 했다. 요령이에게 나가라고 하는 것을. 뭐, 처음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가장 큰 이유라면 역시 생명의 위협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추적자들이 요령이의 뒤를 쫓아다닐 지 모르고, 녀 석의 옆에 있다보면 나도 덩달아서 언제 죽을 지 모르는 공포에 휩싸일 테 니까 말야. 아까 혜진이라는 마녀에게 죽을 뻔 하면서 생각했던 거지. "요령아...?" "아, 왜...? 피곤해 죽겠는데 왜 자꾸 말을 거니? 빨리 이불이나 좀 깔아 줘. 푹 자고 싶어" 그리고 녀석을 내보내겠다는 내 생각을 굳히게 한 것은 녀석의 시건방진 태도 하나 하나이고. 얹혀사는 주제에 좀 고분고분하면 어디가 덧나냐? "요령아? 미안하게도... 넌 이제 여기서 더 이상 못 자" "어? 그게 무슨 소리야?" 녀석은 또 무슨 농담따먹기를 하냐는 양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목소리로 심드렁하게 되물었고 그래서 나는 그 녀석의 평범하디 평범한 태도 때문에 오히려 더 괴로워해야 했다. 이렇게 아무런 의심이나 걱정 없이 나를 바라 보는 녀석에게, 어떻게 나가라는 말을 쉽게 꺼낼 수 있겠는가. "요령아...?" "아우 씨, 왜 자꾸 불러, 왜! 귀찮게!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응? 어서 말 해! 어서 말하지 않겠다면..." 궁금하다면 말해 줘야지 뭐. "나가" "......응?" 그 녀석은 잠시 멍한 눈이 되더니 곧 픽!하고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야, 농담도 정도껏 해야 재미가 있지. 헛소리의 수준까지 가면 그건 더 이상..." "진담이야. 나가줘" "......계속 하면 나 기분 나빠질지도 몰라" 녀석은 왠지 불안해졌는지 약간은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고, 그래서 나는 안쓰러움을 느꼈지만 한 번 꺼낸 말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제길. 지금 눈 딱 감고 녀석을 내보내지 않으면 나는 언제까지나 목숨의 위협을 받으며 살 아가야 한단 말이다! "나가줘. 부탁이야. 진심으로 하는 말이니까 더 이상 나를 괴롭게 하지 말 고 나가줘..." "......정말이야?" 이제 녀석의 목소리는 조금씩 떨리고 있었고 그래서 내 마음은 무척 울적 해졌다. "그래......" "이유나 묻자. 도대체 왜?" "그냥... 너를 옆에 두고 있자니 한없이 내 인생이 불안해져서 그래. 다른 건... 없어" 내 말에 요령이는 한심하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젓더니 말했다. "고작 그거냐?" 뭐? 고작...? 나는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다. "고작? 고작 그거냐고?" "그래. 고작 그거냐고 물었어" "어떻게 고작 그것이지?" "남자자식이 아직 닥치지도 않은 위기에 지레 겁을 먹어? 어떻게 된 녀석 이 그래도 남자라는게 용기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냐?" 하, 보자 보자 하니까 점점! "야, 그게 무슨 소리야? 너야 네 한 목숨 지킬 능력이 있으니까 상관 없지 만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다고! 내가 손에서 번개가 나가 소리를 지르면 불 꽃이 올라와? 너를 공격하려고 온 사람이 나를 공격하기라도 한다면 나는 바로 죽는다고! 아까 같은 경우에도 가람이가 지켜주지 않았으면 분명히 죽 었을거야!" "......" 녀석은 수긍하는지 아무 말이 없었고 그래서 나는 기세가 올라 마음속에 품고 있던 모든 말을 모조리 뱉어 버렸다. "그래, 다 좋아. 다 제쳐 놓고, 왜 내가 너 때문에 목숨을 걸 정도의 용기 를 내야 하지? 네가 나의 무엇이길래? 내가 너의 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것도 맘대로 네가 정한 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네가 당하는 모든 위험들 을 나도 같이 감수해야 하는거야? 그런거라면, 그 따위 주인은 때려 치우겠 어! 솔직히 말해서 나는 네 녀석의 불행 때문에 나까지 위험해지는 그 상황 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네 녀석의 불행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지? 내가 왜 너 때문에... -짜아악! 마치 채찍으로 무엇을 후려치는 소리와 함께 내 뺨이 무엇에 데인 듯 화끈 해지며 얼굴이 왼쪽으로 돌아버렸다. 요령이가 내 뺨을 세게 후려쳐 버린 것이다. 나는 황당해서 손자국이 나 버렸을것이 분명한 내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익! 야! 이게 도대체 무슨..." 그러나 녀석의 얼굴을 보고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분노 때문인 지 슬픔 때문인지 빨갛게 달아오른 요령이의 얼굴. 녀석의 눈빛에서는 온갖 감정들이 느껴졌다. 분노, 슬픔, 배신감, 외로움, 괴로움... 녀석은 그렇게 내 뺨을 친 채로 부들부들 떨면서 말을 도중에 흐려버린 나에게 말했다. "나가면... 될 거 아니야? 응? 나가면 될 거 아니냐고. 내가 나가주면 될 거 아니야...? 내 불행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그렇게까지 말할 건 없잖아...? 그래도... 주인으로 생각했었는데 말야..." 역시... 못 하겠다... 녀석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도저히 내 보낼 수 없어... 나는 순간적으로 흔들리는 복잡한 녀석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생각 을 고쳐 먹고는 녀석을 불렀다. "아... 그게... 요령아..." "닥쳐" 그러나 녀석은 내 부름을 짧게 잘라 버리고는 다시는 나를 돌아보지 않은 채 벌떡 일어서서 성큼성큼 문을 향해 걸어가다가 문득 생각난 듯 뒤도 돌 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옷은 내가 가져가겠어. 뭐 정 벗어달라면 할 수 없지만" "아... 그게 아니라..." "가져가도 괜찮다는 줄 알겠어" 녀석은 싸늘하게 말하고는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바깥에서는 차가운 겨울비소리가 우울하게 겨울의 딱딱한 리듬을 한 올 한 올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겨울의 음울한 음악의 향연 속에서, 세상은 온통 두개로 보이고 바닥은 죽어라고 나에게 덤벼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미친듯이 뱃속에서 올라오는 열기를 참지 못하고 숨을 크게 내뱉으며 가람 이에게 말했다. "아, 제기랄! 도저히 못, 으으윽, 모오옷 견디겠다아아! 가람아! 술이 다 떨어졌다. 내가 사 올까아아, 네가 사 올래애애?" "주인. 이제 그만 마셔라. 취해 보인다" "취이해애애? 헤헤, 난 아아안 취했어어어. 나는 술을 마시지도, 후우우, 마시지도 않았다고. 술이 나를 마시고 슬픔에 취했겠지. 아아, 왜 술은 나 를 마셔서 내 속의 스으을픔에 취했단 말이냐! 머저리 같은 수우울! 이 멍 청한 술들을 다아아 마셔어어 버리이겠어어어. 야, 술 사와! 내가 사 올까? 이 모오옴의 주우인을 보오낸다면야, 뭐, 나아가 주우지이이... 끄윽" "주인, 정말 이렇게 마시면 몸에 좋지 않다. 벌써 세 병째를 다 비워 버렸 다는 것을 주인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소주는 맥주가 아니다. 마시면 마 실수록 몸을 깎아먹을 뿐더러 그런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더라도 너무 독하 기 때문에 한 병 이상 마시는 것은 독을 마시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만 마시는게 좋을 것 같다" 요령이가 떠난 날, 나는 왠지 모를 슬픔에 우울해하며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겼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꿈 속에서는 요령이가 나와서 언제나 그렇듯 이 나를 괴롭혀대며 즐겁고 유쾌하게 웃어대었고, 그래서 나는 꿈에서 깬 뒤에 더 이상 녀석의 밝은 웃음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이 적이 울적해졌 다. 결국 그런 연유로 해서 아르바이트고 뭐고 오늘은 다 때려치우고 술잔 이나 기울이기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것이다. 형편없이 취해 버린 것. "아아, 아알고오오 이이있어어어. 그으러어언데, 견딜, 견딜 수가... 크흐 흑!" 술에 취해서인지 감정이 제멋대로 논다. 난 정말로 평소 같았다면 지금 같 은때에 절대로 울지 않았다고. 하지만 술에 취해서인지 자꾸 마지막에 나의 뺨을 후려치던 때의 그 왠지모를 슬픔에 잠겨 있던 녀석의 표정이, 나를 돌 아보지 않고 쓸쓸하고 차갑게 내 방을 나서던 녀석의 처연한 뒷모습이, 녀 석의 떨리던 목소리가, 자꾸 내 눈에서 아른거리고 내 귀를 울려대었다. 바 깥은 겨울인데 춥지는 않을까? 비가 이렇게 내리는데 비를 맞지는 않을까.. .? 으으, 괴롭다, 괴롭다! 나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한편으로는 빈 술병을 흔들어대었고 그런 나의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가람이는 천천히 입을 떼고 우울하게 물었다. "요물이 떠난 것일 뿐이다. 그것도 주인에게 충성심이라고는 전혀 없었던. 그렇게 오열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은가...?" "요령이를, 요물이라아아고, 부르지 마아. 그 녀석은 그렇게, 흑, 그렇게 부르는 거어얼, 싫어어어 했다고오오, 하아, 흐윽..." 가람이는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는 내 모습을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더 니 참으로 묻기 힘든 것을 묻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를... 좋아했는가?" "뭐?" 요령이를 좋아했냐고?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잠시 당황해서 몸을 움찔하 며 굳혔다가 결국 질문이 머릿속으로 들어오지 않아 다시 물어야만 했다. "뭐...라고?" "요령이의 인간일 때의 모습을 연모했다고 물었다. 물론 이런 질문은 주제 넘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녀를 보내놓고 너무도 슬퍼하는 주인의 모습에서 상실감을 읽을 수 있 었다" 하아. 그러니까, 내가 요령이를 짝사랑이나... 뭐 이런 거라도 했냐는 말 이지. 내가. 요령이를. 크하하하하! 이거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겠는걸. 좋아, 취한 김에 확실히 해 두자고. "가람아, 대답해 주지. 귀를 쪼오오오옹긋 세우고 자아알 들으라고. 취중 진담이라는 말은 너도 들어 보았겠지?" "그렇다" "그으러어엄 지이금의 내애마아알을 미이랬겠지. 절대 아냐. 하하하! 어떻 게 그런 생각을 하아아알, 후우우, 수가 있지? 크하하!" 나는 딱 잘라서 말했다. 요령이를 좋아하냐고? 아예 그런 생각을 해 본 적 조차 없었다. 하하하! 살다보니 별 질문을 다 듣는군. 그건 그렇고 술에 취 해서인지 정말로 감정이 주체가 안 되는데. 방금 전까지는 오열하다가 이제 는 광소인가. 나는 배를 잡고 웃어대며 방을 뒹굴었고, 가람이는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잘못 생각했어나. 하지만 그렇다면 주인의 방금전의 그 모습은 어떻 게 이해해야 하나. 자신이 쫓아내고도 그 선택을 후회하며 오열하던 그 모 습을" "술기운" "말이 되지 않는다. 술기운은 감정을 증폭시키는 역할만을 할 뿐 없던 감 정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그래? 그럼 마음 속으로 나도 모르게 요령이를 손톱만큼이라도 짝사랑했 다가 술을 마시니까 그 마음이 커져서 밖으로 튀어 나왔나보지. 하하하하!" "주인..." "노오옹다아암이야. 하하하!" "솔직히 말해도 된다. 주인을 비난할 사람은 없으니까" 나는 아마도 그러리라고 추측되는 내 마음을 말했다. "연민이지. 솔직히 말하자면" "......연민?" 가람이는 약간은 의아한 듯 물었고 나는 술기운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 다. "그으으래. 여어어언미이인. 제기랄. 인류 수백만년의 역사에서 언제나 도 덕의 중심이 되어왔던 연민. 매애앵자가 성선설의 가아장 큰 근거로 내새웠 던 연민. 모오든 선하안 마아음의으으 시이발점이 되애는 연민. 제기랄, 빌 어먹을 싸구려 동정심 말야. 응? 알 수 있어?세상 모든 이를 불쌍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이 인간들에게는 누구나 있다고. 그게 지하철의 노숙자이던 아 니면 뛰어놀다 다리를 다쳐서 엄마를 부르며 우는 어린아이이던. 혹은 운나 쁘게 잠을 자다 쓰레기더미에 깔려버린 동네의 도둑고양이이던 간에 말야. 나도 그런 마음으로 요령이를 불쌍히 여기는 것일 뿐이야. 뭐 문제라도 있 어? 제기랄, 밖에는 지금도 비가 퍼붓고 있어. 겨울에 왠 비가 내리고 난리 야, 빌어먹을! 요령이가 비를 맞지는 않았을까...? 으으, 나는 이렇게 따뜻 한 곳에서 술병이나 기울이고 있는데 요령이는 비내리는 차가운 밤거리를 주린 배를 움켜쥐고 헤메고 있을 거라고. 불쌍하지 않아? 불쌍하지 않냐고! 불쌍하지 않다면 지금부터 불쌍히 여기도록 해, 이 자식아! 하아, 하아. 소 오리 지일러서 미이안. 그런 의미에서, 가람아, 술 좀 사와 줘" "......그만 마시라고 권하고 싶다" "명령이야. 사 와" ".......받들어 모시도록 하지. 하지만..." "군소리는 하지 말고" ".......알았다" 그 녀석은 말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서서는 내 지갑에서 천얼마를 쥐고 쏟 아지는 비 속으로 나가더니 잠시 후 털레털레 소주 한 병을 비닐에 담아서 가지고 방으로 들어왔다. "사 왔다" 으음... 그래... 잘... 했다... 그런데... 네 얼굴... 얼굴이... 왜.... 이렇게... 자꾸... 흐려... 보이...지? "으음... 그래... 잘 했어... 잘 했는데... 사 왔으면... 따라... 음냐... 줘야... 할 거... 아... 냐? 따라... 줘어어" "알았다" 녀석은 내가 휘청거리며 비틀거리는 팔로 컵을 (우리 집에는 술잔이 없다) 내밀자 말없이 컵의 밑바닥에 약간의 술을 따라 주었다. "이...게 뭐야? 술잔은... 채워야... 마아앗이지... 얼른! 가득 채워...." "그렇게 할 수는 없다..." "내... 입에서 다시금... 명... 히꾹! 명령이란... 말이... 나와야..." "주인. 정말 충심으로 하는 말이다. 그만 마셔라. 주인은 이미 충분히 취 했으며 충분히 슬픔을 느꼈다. 이제 자책감은 그만 느껴도 되지 않은가. 어 차피 요령이와 언제까지 같이 있을수는 없었다. 주인의 말만따라 요령이 때 문에 얼마나 더 많은 사건에 휘말릴 지 모르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으아아아... 거... 제에기이라아알... 노오옴... 더어럽게... 말... 안.. . 듣..." 콰아앙! 내 귀에 들린 소리였다. 술기운에 쓰러져버렸나? 아, 제기랄. 하 나도 안 아픈데 설마. 물론 술 취하면 아프지가 않긴 하지만... 세상이 수 직으로 서 있는 것을 보니 확실히 술기운에 쓰러져 버렸나 보다. 으윽, 몸 아, 제발 일어나 봐라. 한 잔만 더 먹고 잘게, 응? "주인? 괜찮은가? 주인?" "괜...찮으니까... 흔들지..." 스르르... 내 눈은 점차 다시 한 번 세상을 보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으으... 젠장... 최소한 사온... 건... 다... 마시고... 으음... -짹짹짹짹짹... 참새의 소리가 귀를 파고들고 있었다. -끄르르륵... 그리고 위 속에서 올라오는 신물. 웨엑! 이게 뭐야! 나는 몸을 일으켜서 비틀거리며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고 침을 뱉었다. 퇘! 미끈한 위액인지 담즙인지 모를 물이 창문 밖의 빗줄기를 뚫고 튀어나갔다. 갑자기 찬 공기 가 몸을 파고 드니까 소름이 쫘악 끼치는군. 그래도 술 깨기에는 그만인 듯 한데. 나는 잠시 빗방울들을 바라보며 습기찬 찬 공기를 두 어번 들어마시 다 머리를 감싸고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머리가 깨져나갈듯이 아팠다. "제기랄 비, 끝내주게 오는군. 저 참새들은 몽땅 미쳤나? 왜 비가 오는데 울부짖고 난리야" "깨어났나, 주인" 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자 가람이가 초췌한 얼굴로 벽 구석에 기대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으음... 그럭 저럭 잠은 깼으니 깨어난 것이겠지. 그건 그렇고 지금이 몇 시냐?" "아침 8시 쯤 되는군" "그래... 그건 그렇고 너 얼굴이 왜 그러냐. 눈 아래는 푹 들어가고, 얼굴 은 까칠하고, 머리는 부스스하고... 밤이라도 샜냐?" "아는군" "뭐? 진짜로 밤을 샜어? 왜?" "......어젯 일이 기억이 나지 않는가?" "내가 어제 뭐?" "주인... 어젯밤에 계속 드러누운 채로 입만 벌려서 먹은 것을 토해내고 비틀거리면서 다시 일어나서 술을 마시고 토해내고 다시 술을 마시고..." 으윽... 뭐? 내가? "야, 야, 잠깐만. 아냐, 난 어제 4병인가 정도 마시고 의식을 잃었는데... ? 그 때 쓰러져서 잠든 게 아니란 말야?" "쓰러지긴 했었지. 곧바로 다시 벌떡 일어나서 문제였지만" "뭐...? 우우. 필름이 끊겼었나 보군... 제기랄. 집에서는 효자요 학교에 서는 모범생이었던 내가 필름이 끊길 정도로 술을 마실 줄이야... 우욱... 또 올라오려 하나...?" "주인..." "왜?" "정말 집에서는 효자요 학교에서는 모범생이었나?" "미친 소리였어. 미안하다, 젠장. 내가 집에서는 효자요 학교에서는 모범 생이면 여기에 죽치고 앉아서 이러고 있냐? 서울대 갔지" "그런가..."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속이 요동을 친다. 소주가 뒤끝이 깨끗하다지만 그 것도 어느 정도 자제해가며 마셨을 때의 이야기이지. 가람이의 말에 따르면 나는 완전히 술을 들이 부어 버리듯이 마셔버렸다니까, 몸 상태가 좋을리가 있나. 제기랄, 아무래도 안 되겠군. "가람아!" "왜 부르는가, 주인" "속이 요동을 친다" "해장국이라도 끓여줄까" "아니, 해장술이나 한 잔 하자" "절대 반대한다. 주인이 지금 술을 한 방울이라도 마신다면 주인은 어제 주인이 무엇을 먹었는지 확인하게 될 것이다. 다 게워내어 버릴 것이란 소 리이다" "농담이었어. 하아, 잠이나 좀 더 잘까...?" 중얼거리며 누웠지만 깨지려는 머리와 열이 올라오는 몸은 내가 절대 누울 수 없게 만든다. 휴우. 나는 다시 벌떡 일어나면서 가람이에게 말했다. "요령이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그렇게 궁금하면 찾아 나서라. 도와 주겠다" "......찾아 나서라고...?" "그렇다. 어차피 진심으로 요령이를 쫓아 내려던 것이 아니었던 것 같은 데, 그것이 자신의 선택의 실수라면 되돌려야 하겠지. 어떻게 할 건가...?" 찾아 나서라고. 찾아 나선다라. 찾아 나서... 말은 쉽지만... 내가 녀석을 내보낼 때는 무언가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야. 이제 와서 되돌 릴 수는 없다고. 난 힘이 없어. 그리고 힘이 있다고 해도 쓸데없는 싸움엔 절대 끼고 싶지 도 않고. "뭘 찾으러 나가냐. 그냥 있자..." "그럴텐가..." "으음..." 나는 고개를 끄덕였으며 가람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의미없는 행동들. 그 렇게 잠시 묵묵히 앉아서 이것 저것을 생각하던 나는 곧 내가 지금 가장 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가람이에게 말했다. "배고파" 가람이는 피식 웃었다. "방금 전까지는 죽을 상을 하더니 배가 고프니 사람이 순식간에 달라지는 군"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니까" "차려 바칠까" "자식, 정말 생각이 온통 밝고 옳은 생각 뿐이로군. 교육 잘 받았구나? 물 론 차려 바쳐주면 나야 좋지" "알았다" 녀석은 부엌으로 들어가서 몇 번 달각거리더니 상을 대강 차려왔다. 에휴, 정말 성의 없게도 차린다. 어쨌든 주는 거니 먹어야지. 나는 몸을 두어번 굴려서 상 앞까지 간 후 수저를 들었다. "잘 먹을께" "나도 잘 먹겠다" 달각달각... 으윽... 정말로 수저와 젓가락 소리밖에 안 나잖아? 이거 방 분위기가 너무 조용하다... 요령이와 같이 식사할때는 요령이가 밥을 먹으 면서도 쉬지 않고 입을 놀려서 정신이 하나도 없더니 또 갑자기 녀석이 없 으니 너무 허전하네... 그런 생각을 하자 약간은 쓸쓸한 생각이 들었다. 그 리고 쓸쓸한 생각이 들자 밥에 신경을 못 썼다. 그리고 밥에 신경을 쓰지 못하자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에도 신경을 쓰지 못했다. 각설하고, 결국은 사레가 들어버렸다. "콜록! 콜록콜록콜록! 콜록콜록! 가람아! 물! 물! 콜록콜록!" "아, 아! 주인! 잠깐만 기다려라!" 녀석은 재빠르게 부엌으로 뛰어갔고 나는 가슴을 쳐댔다. 쾅쾅쾅! 그 때 였다. -쾅쾅쾅! 내 가슴에서 이렇게 큰 소리가 난 것은 물론 아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 "뉘기쉐요? 쿠울-렉!" 나는 사레에 걸려서 비틀대며 바람이 빠지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 나 문 밖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이런 젠장, 불러놓고 대답을 안 하는 건 또 뭐야? 나는 가람이에게 받아든 물병을 아예 입에 꽂아서 들이키면서 문을 열었다. "누구세요?" "안녕..." 요령이가 그곳에 서 있었다. 쏴아아아... 요령이는 조용히 나를 바라보며 힘없이 서 있었다. 그리고 요령이의 뒤에서 는 검은 하늘 아래로 굵은 빗줄기가 하늘에 수백, 수천줄기의 푸른 선을 긋 고 있었다. 차가운 공기가 녀석을 휘감고는 나에게로 전해져 왔다. 그리고 나는 어정쩡하게 대답했다. "어...안녕..." ......이라고 말하면 물론 안 되겠지만 난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마주 인사 를 하고 말았고, 녀석은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힘없이 살짝 웃었다. "오랜만이야" "......" 약간 마음을 가다듬은 나는 이번에는 녀석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은 채로 팔짱을 척하니 끼고 녀석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흠......" "...왜 그렇게 쳐다보지...?" 녀석은 내가 자신을 계속 쳐다보자 약간은 어색한 듯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 다. "......아냐, 아무것도" 녀석의 모습은 애처로울 정도로 남루했다. 옷과 얼굴은 더러워질 대로 더러 워진데다, 어제부터 세차게 내린 비를 맞아서 녀석의 옷은 심하게 젖어 있었 고, 그래서인지 녀석은 팔로 몸을 감싼 채 추운지 몸을 떨고 있었다. 고작 며칠동안 나가 있었다고 이렇게 되다니... 정말로 불쌍해 보이는군... "들어가도... 되겠...니?" "아니" 나는 딱 잘라서 말했다. 아무리 불쌍해 보인다고 해도 녀석을 집에 들여놓 을 수는 없다. 내가 고작 이틀동안 녀석을 멀리 떨어뜨려 놓겠다거나 버릇을 고쳐놓기 위해 녀석을 집에서 내쫓은 것은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말에 녀석은 애타게 나를 바라보던 눈빛 그대로 고개를 아래로 떨구더니 힘없이, 약간은 떨리던 목소리 그대로 나에게 물었다. "정말... 안 되겠니?" "......그래, 미안하게도" 물론 지금 녀석의 꼬락서니를 보면 요령이가 불쌍하다. 진짜 불쌍하다고. 하지만, 비록 불쌍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녀석을 덥썩 받아들이기에는 현 실적인 문제가 너무 많다. 흐음... 솔직히 생각하면 하나밖에 없군. 녀석을 받아들이면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거. 하지만, 그건 동시에 가장 큰 문제이기는 하지. 어쨌든 내 말에 요령이는 안절부절하더니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발..." "제발 다시 돌아올 수 있게 해달라고? 그러게 진작 좀 잘하지 그랬냐. 안 돼. 미안" 아아, 이렇게나 칼같이 냉정하게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내 자신이 싫다! 어 쩌다 내 성격이 이렇게 각박해졌을까! 역시 나도 목숨 앞에서는 차가워질 수 밖에 없는 비굴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단 말인가! "......" 녀석은 다시 고개를 숙이며 입을 다물었고, 그런 요령이에게 나는 다시금 물어보았다. "그건 그렇고, 이거나 묻자. 왜 다시 돌아왔지?" "......" "대답해 주지 않을 셈이야? 정 대답해주지 않겠다면 뭐 할 수 없지만..." 그 때 복잡한, 약간은 토라진 듯하고 슬픈 듯 하면서도 체념한 듯하고 또.. . 에이, 모르겠다. 어쨌든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연한... 거... 아냐?" "...뭐? 뭐가 당연하지?" "갈 데가 없었어..." 요령이는 고개를 들어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녀석은 몸을 다시 떨고 있 었지만 추위 때문은 아닌 듯 했다. 북받치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들썩이는 것이다. "응? 뭐라고...?" "갈 데가... 없었다고..." "...야, 아무리 갈 데가 없었다고 해도, 한 번 쫓겨났던 집을 다시 찾아오 는..." 나는 말을 더 이상 이을수가 없었다. 요령이의 뺨을 타고 흐르는 두 줄기의 눈물을 봤기 때문이었다. "야... 우는거야...? 으으윽! 뭐야!" 갑자기 내 몸에 생각지 못한 묵직한 기운이 느껴졌다. 요령이가 내 말에 대 답을 하는 대신 비틀거리며 나에게 다가와서는 내게 그대로 안겨버린 것이 다. 으아악! 야! 뭐하는 짓이야!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녀석의 행동에 당황 해서 휘청이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며 녀석을 떼어 놓으려고 했지만 녀석은 완강히 내게 안겨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내 가슴에 느껴지는 뜨거운 기 운. 요령이의 눈물이 턱을 타고 흘러서 내 가슴을 적시고 있는 것이었다. 야 ! 하지 마! 이러면... 진짜 불쌍해져서 못 참겠잖아! 그리고... 이렇게 안기면... 안기면... 가슴이 떨려서 못 참겠단 말야... "아... 저... 이게... 뭐 하는 짓..." 녀석은 내가 말할 틈을 주지 않고 훌쩍이며 말했다. "흑! 흑! 갈 데가 없었어! 그래서, 돌아오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네 가 싫어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내 자존심이 상처를 입는 걸 알면서도, 흐윽! 하지만, 밖은 비가 계속해서 주륵주륵, 흐으윽, 주륵주륵 내리는데, 갈 곳은 없다는 게, 너무 슬프고, 추워서, 춥고, 배고프고, 몸은 젖어오고, 사람들은 다들 비 내리는 거리를 하염없이 걸어가는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 고, 고양이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래도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게 너 무 외로워서, 내가 다시 혼자가 되었다는 걸 생각하니까 내 신세가 너무, 처 량하고, 으흑! 이틀동안 먹지도 못하고, 너무 추워서 잠도 자지 못하고... 옛날처럼 언제까지고 떠돌아다니는 신세였다면 슬프지 않았겠지만, 이미 너 와 가람이와 함께 행복하게 살다가 그 생활이 갑자기 사라지니까 너무 슬퍼 져서, 그래서... 흐흑! 미안해, 돌아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 하지만, 하지만! 너희들은 나를 너무 따뜻하게 대해 줬는데, 그랬는데... 밖은... 으 흐흐흑... 춥고... 배고프고..." 녀석은 계속 내 품에 안겨서 훌쩍거리며 눈물을 흘렸고 그래서 나는 녀석이 너무도 불쌍해졌다. 으윽... 제길... 자꾸 이렇게 마음이 흔들리면 안 되는 데... 그건 그렇고 비에 젖어서 그런지 요령이의 몸은 너무 차가웠다. 으윽, 미안하게 됐다... "흐흑... 제발... 같이 살 수 있게 해줘... 비록 이틀동안 이지만...너희들 이 너무... 그리웠어... 제발..." 녀석의 몸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고, 제기랄, 녀석의 눈에서는 계속해서 눈 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으으... 그냥 같이 살아도 된다고 해 버릴까? 자꾸 이렇게 나오는데... 눈물까지 흘리는데... 설마 거짓 눈물은 아닐 테지...? 으으, 머리 아프네! 도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말이야!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일단 조금씩 손을 움직여서 녀석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으음, 머리결이 좋네. 아,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지. 일단 이렇게라도 달래어서.. . 그런데 달랜 다음에는 뭘 어쩌지? 그 때 누군가 복잡하게 핑핑 돌아가는 생각과 내 가슴을 적시는 요령이의 눈물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는 내 마음을 다잡아주려는 듯이 내 어깨에 손 을 얹었다. 가람이였다. 녀석은 나를 바라보지 않고 앞을 보면서 혼잣말을 하듯이, 그러나 나에게 말하려는 의도가 확실한 태도로 말했다. "내 생각이지만... 연극같다" "으응?" "요령이라는 녀석... 아무리 자신이 요물이 싫다고, 자신과 음의 성격은 거 리가 멀다고 말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역시 녀석은 천성이 요물이요 음기의 동물이다. 눈물을 흘리는 것쯤은 쉽게 할 수 있겠지. 내 사견이기는 하지만, 지금 흘리는 요령이의 눈물은 아마도... 연극같다. 게다가 주인의 지금의 상 황을 냉정하게 주인 스스로 평가해 보기를 바란다. 주인은 요령이와 함께 있 다가는 언제 목숨을 잃거나 다칠지 모른다" 흐음? 가람이의 말에 꽤 일리가 있는데! 나는 요령이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 듬던 손을 멈추고 내 품에서 눈물은 멈췄지만 계속해서 끅끅대고 있는 -그러 나 연극일지도 모르는- 요령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요령이는 가람이의 말 에 얼굴을 들어서 입술을 깨물고 가람이를 새초롬하게 노려보았다. 얼굴이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서인지 그런 요령이의 모습은 표독스럽다기보다는 오히려 순해 보였다. "너...내가 그렇게 싫어?" "응...뭐?" 아무리 차분한 가람이라도 갑작스러운 요령이의 이 말에는 상당히 당황했나 보다. 녀석은 움찔하며 얼굴을 굳혔고, 그런 녀석을 향해 계속해서 요령이는 내 품속에서 어느 정도 멈추었던 눈물을 주르륵하고 흘리며 말했다. "내가...그렇게...싫어? 꼴도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어떻게든 영준이를 부추겨서 쫓아내고 싶을 정도로 내가 보기 싫은거야...?" "아...그게...그게 아니라..." 가람이는 눈물까지 흘리며 자신을 애처롭게 바라보는 요령이의 말에 뭐라고 대답할 말을 잃은 듯 하다. 게다가 녀석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자신이 그렇게 싫으냐'고 물어보는 요령이를 보면서 나에게 '주인, 요령이를 다시 쫓아내'라고 말할 정도로 차가운 마음의 소유자가 절대 아니니까. 결국 녀석 은 뒤로 물러서며 나에게 말했다. "결국 결정은 주인이 하는 것이다. 나는 뭐라고... 충고할 수는 없을 듯 하 다" 아, 그렇지. 결정은 물론 내가 하는 것이지. 하지만 나는 워낙 좀 성격이 뭐랄까... 우유부단하다고 할까? 아냐! 나처럼 결단력이 강한 사람은 없지! 젠장, 내가 제살 깎아먹는 이야기를 했군. 어쨌든, 이번 상황은 내 너무 복 잡하고... (내 성격탓은 절대 아니다!) 어떻게 결정해야 할 지 정말 모르겠 는걸. 이렇게 나에게 매달리는 요령이를 다시 내쫓자니 내가 너무 매정한 놈 이 되는 것 같은데다 요령이가 너무 불쌍하고. 그렇다고 요령이를 계속해서 데리고 있자니 내 목숨이 위협받을 것 같아서 또 왠지 좀 두렵고. 그런데, 또 다시 생각하면 실체화되지도 않은 두려움에 내가 지레 겁먹는 것은 아닌 가 하는, 내가 겁쟁이라서 괜히 있지도 않은 위협에 불쌍한 요령이를 쫓아내 려는 것은 아닌가하고 생각되는 마음도 들고. 아, 제기랄. 이거 상황 더럽게 되었네... "제발... 날... 내쫓지 말아줘... 부탁이야..." 요령이는 다시 눈물을 글썽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더욱 더 깊숙히 안겨 들었고, 그래서 나는 요령이의 향기에 아찔해졌으며 내 가슴은 방망이질쳤 다. 두근두근. 제기랄, 가슴이 왜 두근거려? 단지 고양이 한 마리가 품에 안 기는 것인데 말야! 제기랄! 두근거리지 말라고! 으으, 나는 어색하게 하늘을 바라보았고, 그런 나를 바라보며 가람이는 걱정이 되었는지 내게 말했다. "주인, 현명하게 선택해라. 주인의 안전이 걸려 있는 일이다" "......어...저...그러니까... 내 생각은 말이지..." 아아, 이것 참 곤란하게 되었다! 제기랄, 나가라고 해야 하나, 들어오라고 해야 하나? 요령이는 계속해서 눈물이 글썽한 처연한 얼굴로 나를 올려보고 있었고 가람이는 지켜보겠다는 듯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약간은 경계하 는 듯한 눈빛으로 나와 요령이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어... 어흠, 그러니까..." 하지만 역시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겠지? 뭐? 실체화되지 않은 위험? 개나 줘버려라! 옛 선조 말씀에 이런 말이 있지! '돌다리도 두드려서 건너 라!' "미안. 역시 나가줘야..." "제발..." 다시 한 번 애처롭게 웅얼거리며 힘주어 내게 안겨드는 요령이. 제기랄! 에라 모르겠다, 그냥 돌아와라! 어떻게 이렇게 내게 매달려오는 널 매정하 게 비오는 거리로 다시 내쫓겠냐! "젠장, 에라 모르겠다. 그래, 잘 돌아왔..." "주인, 마지막으로 조언하나 하겠다. 지금의 결정이 미래에 후회는 되지 않을지 잘 생각해서 선택해라" 우왕좌왕하던 내 모습을 보다 못한 가람이가 툭 내뱉듯이 말한 조언이다. 음, 또 듣고보니 저 녀석의 말도 맞긴 하네! 그래, 지금 괜히 감정에 이리 저리 휩쓸려서 섣불리 결론을 내렸다가 괜히 미래에 피보고 지금의 선택을 후회한다면 그건 결코 훌륭한 결정이라고 할 수 없지! 좋아! 결정했다! 요 령아, 미안하지만 역시 나가줘야... 잠깐, 내가 여기서 요령이를 내쫓는다면 내가 미래에 과연 지금을 회상하 며 '난 그때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단지 녀석을 하루동안 거리로 내몰고는 터질듯한 후회 속에서 술에 절어 지냈었지... 하지만 혜진과의 싸움 중에서 죽을 뻔 했을때에는 반대로 녀석을 구해주었다는 내 선택에 광분하며 후회했었고 말야... 제기랄, 어떻게 하란 말이냐!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어! 에라이, 될 대로 되라! 결심했다! "야, 이요령! 그렇게 징징 울고 있지만 말고 일단 들어와!" "...뭐?" "그렇게 눈물만 줄줄 흘리지 말고 얼른 들어오라고! 마음 바뀌기 전에!" "......그럼......날......받아주는 거야......?" "일단 들어와! 설명해 줄테니!" 요령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는 표시를 한 뒤 나를 안은 팔을 풀고 (왠지모르게 아쉬웠다)훌쩍이며 방 안으로 들어온 후 가람이를 지나쳐 방구석에 무릎을 꿇고 주저 앉은 뒤 고개를 숙이며 어깨를 들썩이며 다시 훌쩍였고 그 모습에 나는 다시금 웬지 모를 안타까움을 느껴야만 했다. 제 기랄, 역시 여자가 운다는 걸 지켜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게 쉬운 일만은 아 니군... 나는 물끄러미 훌쩍이는 요령이를 바라보았다. 어휴, 괜히 나까지 슬퍼지네... 그렇게 하염없이 요령이를 바라보다 문득 내가 왜 계속 따라서 앉지 않고, 요령이에게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 밥은 굶지 않았냐'등의 안녕을 묻지 않 고 멀뚱히 서 있었는지가 떠올랐다. 아차차!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야! 기 다리고 있었으면 계속 기다리지 말고 어서 할 말을 해야지! 나는 목을 가다 듬으며 사람들, 아니 정확히 말해서 개와 고양이의 시선을 내게 끌었다. "흠, 흠. 일단 여기서 분명히 해 둘게 있어. 나는 요령이를 결코 우리집의 완전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인 게 아니라는 말이야" "......뭐?" 방 안으로 들어온 뒤에도, 즉 자신이 원하던 대로 된 뒤에도 뭐가 그렇게 서러웠는지 계속해서 훌쩍훌쩍 울던 요령이는 나의 말에 푹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고는 놀란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바라보았다. 눈물과 콧 물로 얼굴이 범벅이 되어서 상당히 얼굴이 우스워 보였지만 그런 얼굴도 나 름대로 귀여웠다. ......에엑? 귀엽긴 뭐가 귀여워, 저 녀석이? ......흐음, 이 버릇, 또 나와 버렸군. 쳇. 역시 난 어쩔 수 없다니까. "뭐라니, 뭐긴 뭐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아직 너를 완전한 우리집 의 구성원으로 인정할 마음이 없어" "그, 그럼... 역시 나를 다시 거리로 내보내겠다는... 흐윽!" 그 녀석은 다시금 고개를 푸욱 숙였고 그래서 나는 다시금 씁쓸해졌다. 가 람이도 약간의 동정심이 섞인 눈으로 그렇게 어깨를 들썩이는 요령이를 바 라보았고. 그래도, 할 말은 해야지. 쩝. 나는 잠시 입맛을 다시고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요령이를 이 집에서 내쫓겠다는 것도 아냐" 이번의 내 말에는 가람이까지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주인...? 받아들이지도 않고 내쫓지도 않겠다니... ?" "그, 그래... 그게 무슨 소리야, 영준아...? 나도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요령이는 다시 고개를 들어서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고, 그래서 나는 주위를 천천히 한 번 둘러보는 것으로 뜸을 들여서 청중(그래봐야 두 명이지만)의 관심을 증폭시킨 뒤 입을 열었다. "선택은... 유보다" "어? 뭐라고?" 요령이는 다시 나를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라보고는 약간 부정확한 발음으 로 짧게 물어왔다. 선택은 유보라니까 뭐 그리 궁금한게 많아?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선택은 유보라고. 솔직히, 네 안전을 위해서라면 너를 가람이를 시켜서라도 이 집에서 쫓아내야 하는 게 당연한 이치겠지만, 또 너를 내보내자니 너를 저 비오는 거리로 내쫓고 나서 내가 후회하지 않 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기가 어려워. 그렇다고 너를 다시 받아주자니 너 때 문에 다시 내가 위험해질까봐 두렵기도 하고. 그래서, 결국..." "결...국?" "지금은 도저히 결론을 못 내리겠어. 하아. 할 수 없잖아? 이건 내 인생에 있어서 몇 번 만난 적이 없는, 너무나도 어려운 문제라고. 그러니 할 수 없 잖아?" 요령이는 도리질을 치며 말했다. 하, 자식. 별 걸 다 하네? "말도 안 돼! 할 수 없다니? 결론을 못 내리겠다니? 그럼 결국 결론을 내 리지 못하고 원래대로 나를 내쫓겠다는... 그런..." 녀석은 다시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듯 말꼬리를 흐렸고 그래서 나는 급히 손사레질을 치며 울려는 녀석을 말렸다. "이봐요, 아가씨. 아니, 고양이씨. 남이 말을 하면 끝까지 들어야 예의바 른 숙녀지. 끝까지 듣고 나서 울던지 아니면 환호성을 지르던지 하라고. 어 쨌든, 나는 도저히 선택할 수가 없었어. 그래서 결정했지. 선택을 유보하는 걸로. 그러니 내가 너를 내보낼 것인가 받아들일 것인가를 선택할 때까지 요령이는 우리 집에 남아" "으...응?" 내 말에 요령이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내게 되묻는 듯한 소리를 냈고, 게다가 가람이도 말은 안 하지만 무언가 복잡한 표정을 얼굴에 담고 있어서 나는 다시금 정리해주듯이 녀석들에게 내 생각을 설명을 해 주어야 했다. "으음, 그러니까, 나는 요령이 녀석을 쫓아내는 짓은 인정상 차마 못 할것 같고, 그렇다고 요령이 녀석을 계속해서 데리고 같이 살다니 왠지 모르게 미래가 불안하고 찝찝해서 견딜 수가 없고. 그러니까, 요령이를 내쫓을지 아니면 요령이와 계속 같이 살 지를 결정할 때까지 요령이 너는 이 곳에서 머무르도록 해" "머무르...라고?" "그래. 네 녀석을 받아들이려고 해도 네가 말해야 말할 수 있고 너를 내보 내려고 해도 네가 옆에 있어야 나가라는 말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난 친절하게 내 생각을 하나 하나 설명해 주었고 그런 내 말에 요령이는 불안한 기색을 얼굴에 드리우며 물었다. "그럼... 네가 의견을 결정하는 그 때는 언제인데..." 그리고 녀석의 질문에 나는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모르지, 한 달일지 평생일지" 아아, 내가 생각해도 너무나 멋진 말이다! 후하하, 이 정도면 나도 꽤 말 솜씨가 멋지단 말이야... 그런데 왜 아무말이 없지? "요령아...?" 요령이는 너무나 감격했나 보다. 그 녀석은 갑자기 나에게 펄쩍 뛰어서 안 겨들었다. "우와악! 왜 그래!" 크어억! 허리 꺾이고 목 나가는 줄 알았다! 갑자기 목에 팔을 감고 매달려 버리면 내가 어떻게 견디란 말이냐! 내 팔이 무쇠팔도 아니요 내 목이 강철 목인것도 아니며 내 허리도 돌허리가 아닌 것을! "영준아! 아니지, 주인님아! 고마워! 고마워!" "아, 알았으니까..." "고마워! 고마워!" 녀석은 이제는 내 목을 감은 팔을 으스러지도록 조여댔고 그래서 나는 일 차의 '뼈에 오는 물리적 충격으로 인한 고통'에 이은 '기도 확보 부족으로 인한 호흡곤란'이라는 이차의 고통을 맞게 되었다. "우욱! 알았으니까 이거 놓고 말해... 숨막혀! 콜록! 콜록!" "응! 응응! 놓고 말할게! 자! 이제 시원해?" "콜록, 콜록콜록! 조, 좀 나은 것 같긴 하다, 콜록!" "어쨌든, 그럼 이제 나는 여기서 살아도 되는 거지?" "아아, 확정된 것은 아니라니까..." "어쨌든 네가 마음이 변할 때까지는 여기서 지내도 된다는 거잖아?" "그, 그렇긴 하지..." 갑자기 쾌활해진 녀석의 모습에 내가 갈피를 못 잡고 있을때, 갑자기 녀석 이 바지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무언가를 꺼내어서 내게 던져준다. "자, 가져" 탁! 나는 가볍게 그것을 낚아... 채려다 실패해서 바닥에 떨어뜨리고는 약 간 창피한 마음에 붉어진 얼굴을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효과적으로 가리면 서 바닥에 떨어진 무엇인지 모를 물건을 주워서 그것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 았다. 작은 병처럼 생긴 그것에는 글씨가 병의 크기에 비해 크게 쓰여 있었 다. 뭐라고 써 있는거지? '안약' 이런 젠장! 이런 젠장! 이런 젠장! 나는 요령이를 날카롭게 바라보았고 녀 석은 그런 날카로운 내 시선을 멋적게 받아 넘기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 난 그런 녀석을 밉살스럽게 바라보며 물었다. "너 설마, 아까 그 눈물이랑, 울던게..." 그러자 녀석은 애교스럽게(으윽! 애교스럽다니? 하지만 내 눈에 잠깐이나 마 그렇게 보였던 걸 어떻게 하라고!)웃더니 갑자기 얼굴을 찡그리고 흑흑 거렸다. "흑흑! 호호, 이렇게 울던거 말이니?" 요령이의 그 시원스러운 맑고 큰, 하지만 옆으로 약간 날카롭게 올라가서 요사해 보이기도 하는 눈에는 분명히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흐르고 있지 '않 았다'. 이런 망할! "뭐, 뭐야! 그게 그러면 다 가짜였단 말이야? 다 지어내서 흘린 눈물이었 단 말이야? 우이씨! 뭐 세상이 이러냐! 야! 나가! 얼른!" "나가라니? 들여보낼 땐 네 마음대로 들여보내도 내 보낼때는 네 맘대로 못 나가지-" 우아아악! 나는 하늘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었다. 나가! 나가! 나가란 말야- ! 하고. 그런데,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던 요령이의 얼굴이 갑자기 이상하게 조금 씩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으음? 조금씩 찡그리는 얼굴이...약간... 슬퍼... 보인다? "정말... 내가 그렇게... 싫어? 지금이라도... 나갈까?" "아... 응?" "정... 원한다면...할 수 없지만... 하지만..." 그 녀석은 고개를 아래로 떨구며 바닥을 움켜쥐듯이 자신의 두 손을 꼬옥 말아 쥐었다. 녀석의 어깨는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제기랄, 내가 무슨 소리를 한 거지? 벌써 며칠 전의 그 일을 잊어버린 거야? 저 녀석, 자존심 이 강해서 입으로는 웃지만 분명히 마음으로는 아직까지 그 때의 상처가 많 이 남아있을 거라고! 어휴, 바보! 멍청이! 나는 갑작스레 변해버린 요령이 의 태도에 당황해서 녀석의 어깨에 천천히 손을 올리며 조심스럽게 달래듯 말했다. "아, 내, 내말은 그런 게 아니라..." "흐흑... 어차피 결론은 같잖아! 내가 싫다고 그러는 거잖아!" "그, 그런게 아냐..." "아니긴 뭐가 아냐! 흑! 나가라니, 나가라니... 어떻게 그런 말을 그렇게 쉽게 할 수 있지...? 기껏, 기껏 돌아왔는데... 흑!" "아니, 나가라는 게 아니라..." "나가라는 게 아니야? 흐흑..." "그, 그럼! 물론이지!" "한 입가지고 두 말하기 없기다! 흑!" 어? 어째 이야기가 좀 이상하게 흘러간다? "그, 그러기로 하자..." 내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얼굴을 푹 숙이고 있던 녀석은 혀를 쏙 내밀며 얼굴을 들어올렸다. 물론 눈물을 흘린 흔적 따위는 없었다. 이런 젠장! 또 속았어! "너, 너, 자꾸..." "우헤헤, 주인님, 어째서 그렇게 진노하셨죠?" "주인이고 나발이고, 이 자식을..." "이 자식을 뭐, 곱게 잘 먹이고 잘 재워서 예쁘게 길러줘야겠다구?" "야아아아!" 아아,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오늘 속 미친듯이 뒤집어 지는구나! 나는 머 리를 벅벅 긁으며 짜증을 냈다. 그런데 그 때, 뒤에서 픽! 하고 웃는 소리 가 들린다. 뭐야, 누가 이렇게 기분 나쁘게 웃어? 내 뒤에는 가람이밖에 없 는데, 설마 가람이가? "가람이, 너냐?" "아... 으음. 약간 상황이 재미있어서" "에엑?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감히 네가 주인을 비웃어?" "어, 저... 미안. 비웃은 것은 아니지만 기분이 나빴다면 정말 미안하다" 얼굴을 굳히고 한 말에 가람이는 놀라서 손을 내저으며 황급히 사과했다. 허헛, 이 녀석 놀려먹는 것도 꽤 재밌군. 나는 씩 웃으며 놀라버린 녀석을 안심시켜 주었다. "아, 아. 됐어. 화 안 났어. 장난 친거야. 그건 그렇고 너도 그렇게 웃을 때가 있다는 건 상당히 의외인걸 그래?" 그 말에 가람이는 멋적게 웃으며 대답했다. 으음, 저러니 진짜 사람같군. 하긴, 외형은 완전히 사람이기는 하지만 말야. "서로 속마음을 감추고 겉말로만 상대방과 이야기하는 모습이 상당히 재미 있어서... 나도 모르게 그런 헛웃음을 내뱉게 되었다" 으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서로 속마음을 감추고 상대방과 이야기를 나 누다니? "어, 그러니까, 네 말은... 요령이가 지금 자신의 마음을 숨기고 나와 이 야기를 한다는 그런 말이지?" "아니. 요령이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그녀는 요물이라 마음 속을 파악하기 어렵지" "그럼?" "주인을 말하는 것이다" "뭐? ......내가? 그러니까, 내가 속마음을 숨기고 있다는 거야?" 그리고 가람이는 내 말에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 어? 그게 무슨 소리야! "야! 말도 안 돼! 무슨 소리야! 나같이 솔직한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다고 그런 말을 하냐! 방금 전만 해도 난 분명히 진실만을..." "정말 요령이를 다시 밖으로 내쫓으려고 했다고...?" "어어? 그, 그럼! 물론...이지! 내가 얼마나 차갑고 냉철한 놈인데! 아직 어떻게 할 지 확실히 마음을 정하지 못 해서 그렇지, 만약 요령이를 내쫓자 는 결론을 선택한다면 그 때는 가차없이..." "주인, 스스로를 속이려 하지 마라" "뭐어...?" 녀석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러나 왠지 내가 보기에는 빙글빙글 웃는다는 느낌을 주는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아직까지 웃음을 그렇게 잘 짓지는 못하 나보군. "주인의 태도를 보면, 주인은 요령이를 쫓아낼 마음이 전혀 없다. 주인은 마음이 그렇게 어둡지가 못해. 그래서 속마음이 훤히 드러나 보이지" "아... 아냐 임마! 내가 저런 밥만 축내는 식충이같은 녀석을 뭐가 좋다고 들여 보내겠어! 만약 내가 위험하다고 생각하면..." 그리고 내가 말을 이어 나갈수록 녀석의 약간은 무표정하던 얼굴은 조금씩 '어설픈, 하지만 상당히 무엇인가를 재미있어 하는 미소'로 바뀌어 나갔고, 그러다 녀석은 내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말 했다. "그런데 얼굴은 왜 벌개지나" 어, 어어? 내가 얼굴이 빨개졌다고? 그러고보니 내 얼굴이 약간 화끈거리 는 것 같기도 하고... "아, 아냐! 나 얼굴 안 빨개졌어! 그냥, 이건..." 그리고 가람이는 결국 참지 못했는지 아까처럼 다시 헛웃음을 흘렸다. "큭! 아, 아니다. 주인이 쑥스럽다면 할 수 없지. 그만하도록 하겠다" "이게 점점... 야,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자꾸!" "하하. 왜 화를 내고 그러나?" 어억? 저 인자한 웃음은, 그리고 저 부드러운 태도는 설마! '투정부리는 어린아이를 달래는 어른'의 모습! 으윽... 더 망가지기 전에 말을 말아야겠 군. 젠장... 난 그렇게 한숨을 쉬며 요령이를 바라보았다. 단 5분, 아니다. 단 5분은 커녕 3분 정도만 고개를 돌리고 있었는데도, "푸우... 쌔액... 푸우..." 언제인지 모르게 녀석은 세상 모르게 깊이 잠들어 있었다. 에에... 흠, 거 참. 머리가 다 헝클어졌잖아. 머리를 약간 가다듬어 줘야겠는걸. 아, 절대 녀석이 예뻐 보여서가 아냐. 단지 머리가 조금 헝클어져서... 나는 손을 천 천히 뻗어서 뻣뻣하게나마 녀석의 앞머리를 살짝 쓰다듬어 주었다. "으음... 푸우..." 요령이는 잠시 뒤척이다 그대로 다시 깊이 잠에 빠져드는 듯 움직이지 않 았고 나는 그런 녀석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미소지었다. 에휴, 어쨌든 며칠 동안 고생했다, 임마. 미안해, 쩝. 미안하다고. "요령아, 미안했다" 깰 때 이런 말 하면 당연히 내가 기싸움에서 밀리게 되니까 안 되고. 잘 때라도 사과를 해 놓아야지. "푸우... 알면... 됐어... 쌕... 푸우..." 하하! 잘 때도 잠꼬대로 할 건 다 하는군! 나는 재미있어 하며 계속 요령 이를 바라 보았다. 휴, 솔직히, 내게 사실은 내쫓을 마음이 없었다는 가람 이 말이 맞을지도 몰라. 비록 성격이 나긋나긋하고 얌전하진 않아도 속마음 은 착한 녀석인걸. 이런 녀석을 어떻게 쫓아내? "바라보고만 있어도 즐겁나. 역시..." "어, 아냐! 그냥 고생했을 거란 생각에 안쓰러워서 바라본거야" 나는 황급히 손을 흔들어 부인하며 재빠르게 고개를 요령이에게서 벽 쪽으 로 돌려 버렸다. 그런데 가람이 이 녀석, 생각해보니까 이제 조금씩 주인을 놀려 먹으려고 하는 것 같아? 하긴, 아직은 그냥 장난스러운 말 한 두 마디 수준이기는 하지만서도. 많이 친해진 증거라고 생각하고 기뻐해야 하나? "아하아아암, 잘 잤다!" "아아, 일어났냐?" 녀석은 눈을 비비며 주위를 바라보았고, 여기가 자취방이라는 것에 안심했 는지 안도의 한숨을 한 번 쉰 후에, 나를 불렀다. "야! 이리 와 봐" "어? 왜?" 따악! 내 머리에 떨어지는 꿀밤. 뭐야! "이 씨! 왜 때려!" "왜 자는 사람을 괴롭히고 난리야!" 어억? 머리 쓰다듬은 걸 눈치 챘나? "아, 그, 그게... 내가 뭘 어쨌다고..." "자는데 네가 꿈에서 나와서 '미안해- 미안해- 이러면서 머리를 계속 쾅! 쾅! 때리는데, 어휴! 정말 시달려서 죽는 줄 알았잖아!" 으윽. 이거... 나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이렇게 시끌벅적 하니까 확실히 며칠 전으로 돌아온 것 같아서 기 분이 좋다. 하하! 이제 바라는 건. ...제발 요령이가 며칠동안 나 때문에 입었던 마음의 상처를 빨리 잊어 버 리길... 늦은 오후. 시간이 하오로 접어들면서 햇빛은 비스듬히 옆으로 누워 창을 통해 스며들어 내 얼굴과 방의 분위기를 금잔디같은 따뜻한 황금색으로 물 들였고, 나는 그런 따스함을 즐기며 천장을 바라보며 팔베게를 하고 누워 있었다. 조용했다. 지극히 평화로웠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구석에서는 요령이가 심심했는지 괜히 가만히 벽을 보며 명상을 하고 있는 가람이를 집적대며 괴롭히고 있었고 가 람이는 자꾸 자신을 괴롭히는 요령이를 귀찮아하며 파리 쫓듯이 팔을 휘적 거린 뒤 낮잠을 청하려는 듯 방 구석에서 웅크리고 드러 누웠다. 요령이는 자신의 장난감이 사라지자 잠시 시무룩해 하며 주위를 둘러보다 나와 눈이 마주치고 한결 밝아진 얼굴로 내게 팔꿈치와 무릎을 교묘하게 놀 려서 엉금엉금 기어 왔고, 녀석의 의도를 알아챈 나는 손을 휘저어 장난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렸다. 그래서 요령이의 얼굴은 아까보다 더욱 울상이 되어 버렸고, 녀석은 그렇게 잔뜩 찌푸린 얼굴로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나 의 무엇인가 흥미로워 보였는지 아예 가부좌를 하고 앉아서 한쪽 팔로 자신 의 턱을 괸 채 본격적으로 지긋이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녀석의 시선에 왠지 모르게 머쓱해졌음은 물론이다. 나는 약간 신경 질적으로, 그러나 조금 기대감을 섞어서 물었다. 아, 기대감을 왜 섞었는지 는 묻지 말기로 하자. "야, 뭐야? 왜 그렇게 쳐다봐?" "심심해서. 헤헤, 역시 가람이와는 다르게 반응이 한 번에 오네. 진짜로, 넌 단순해서 데리고 놀면 너무너무 재밌다니까" "이익! 내가 장난감이냐!" 내 말에 요령이는 고민하는 표정이 되었다. "꼭 그렇지만은 않지만 아니라고 보기도 힘들지만 그렇게 단정지어 말하기 도 조금 그렇지만 또..." "에휴... 됐다, 됐어" 나는 손을 내저어 지쳤다는 몸짓을 취하며 잠시 요령이의 얼굴을 바라보다 다시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한없이 평범한 일상. 옛날과 전혀 변 한 게 없는 것 같은 일상이다. 그러나, 왜 한숨이 이렇게 나올까? ......더 이상 내가 평범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후우..." 손에 힘을 주며 지금 내 손으로 기운이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계속 손에 힘을 가했다. 그러자 곧 무엇인가 온 몸을 부드럽게 휘감으며 손 끝에 차가운 기운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휘이잉... 소맷자락에서 한 줄기 맑은 바람이 뿜어져 나와서 내 머리카락을 날리며 내 눈을 순간적으로 감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에휴...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요즘들어 이상하게 평범과는 거리 가 먼 생활이 계속해서 반복된단 말이야..." 다시 손을 뻗어서 내 오른편의 벽에 걸려 있는 달력을 가리키고 정신을 집 중했다. -쉬익! 다시 손에서 찬바람 한 줄기가 나와서 달력을 마치 폭풍우속의 배의 돛처 럼 요동치게 만들었다. "방 청소 할 때에는 쓸만하겠네...에휴" 왠지 모르게 내가 이상한 녀석이 된 것 같고 마음이 울적해진다. 손에서 바람이 나온다니. 으으으! 젠장. 이게 뭐야, 도대체. 내가 선풍기냐? "그렇게 귀한 힘을 고작 방 청소하는데에나 쓰려고 하고... 여하튼..." 요령이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한심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고 그래서 나는 대답하는 대신 손에 기운을 한껏 모아서 요령이의 얼굴에 뿜어 주었다. -휘이이이잉! "어푸! 어푸푸!" 꽤 센 크기의, 맞받아 쐬면 최소한 정신은 하나도 없을 것 같은 정도의 세 기의 바람이 내 손에서 뿜어져 나갔고 요령이는 내 손에서 나가는 바람 때 문에 자신의 흑단같은 검고 긴 머리칼을 마구 흩날리면서 바람을 걷어내기 위해서 손을 마구잡이로 휘저으며 어푸거리다 마침내 뒤로 넘어져 버렸다. 콰당! "아야야!" "으헤헤, 그거 참 쌤통이다" "쌤통? 지금 쌤통이라고 했냐? 에어리얼 서번트!" 갑자기 내 몸 주위에서 내 손에서 나간 것과는 차원이 다른 강맹한 바람이 불어제치더니 나의 몸을 잡고 하늘로 둥실 들어올렸다. 어, 어어? 으아악! 이게 뭐야! "우아아! 무슨 짓이야! 어서 내려줘!" 물론, 내려달라고 내려줄 요령이면 내가 매일같이 마음고생을 하지는 않을 거다. "너도 오늘 쌤통 한 번 당해봐라!" 보자보자 하니까 이게...? 나는 하늘을 향해 근엄하게 소리쳤다. "이 천한 바람의 몸종아! 몸종 주제에 네가 지금 감히 누구를 구속하고 있 는 줄이나 아느냐!" 에어리얼 서번트의 힘에서 강압적인 기운이 사라졌다. "놓아라!" 슈우우... 풍선의 바람이 빠지거나 맥주의 김이 새어 버리는 그런 소리가 났다는 착가과 함께 갑자기 나를 허공에 매어 두던 힘이 사라졌다. 그리고 허공에 떠 있던 나는 황당한 마음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중얼거렸다. "야! 사라지라고 진짜 사라지면 난 떨..." -꽝! "...어지잖아. 으윽, 엉덩이 아파" 그리고 요령이는 깔깔대었다. "호호! 그것 참 쌤통이다!" "뭐? 쌤통? 이게... 내가 누구인지 알..." 따악! 아이고, 이마야. 요령이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가락을 튕겨서 무엇인가를 내 이마로 쏘았다. 기의 덩어리인가? 어쨌든 그거 생각보다 무 지 아프네. "누구는 누구야, 얼빵한 주인이지. 그것도 어린애 장난이나 치고 있는" "으윽...쳇" 솔직히 별로 부인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쳇. 하긴, 저 녀석에게는 내가 바람을 약간 다룰 수 있게 된 것이 어린애 장난으로 보이겠지. 내가 삼사의 후계자가 되었든, 세발 까마귀의 패를 가지게 되었든 말야. 쳇. 영적 계급 으로 따져 볼까, 누가 더 높은지? 내가 누구의 후계자가 되었는지 알아? 하 긴, 그런 쓰잘데기없는 계급이 무슨 필요가 있겠냐마는... 아아, 이게 어떻게 된 것인지 궁금할 것이다. 사실 나도 아직까지 이 일이 잘 파악이 안 되긴 하지만 말이다.(하긴, 그러고 보니 내가 내 주위에서 일 어나는 일들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적이 내 인생을 통틀어 몇 번이나 있었던가? 특히, 요즘은 정신이 하나도 없다...)어쨌든 지금 내게 일어난 신비로운 변화가 언제 시작되었느냐고 묻는다면 난 모든 일은 일주일 전, 설을 맞아서 고향에 내려가려 하면서 시작되었다고 대답해주겠다... 일주일 전. "뭐라고?" "그래, 집에 좀 다녀와야겠다고. 가는 김에 푹 쉬고 다시 올라 오련다" "집? 너한테도 집이 있었니?" 요령이는 이죽대었고 나는 잠시 이를 드러낸 뒤 대답했다. "물론 누구처럼 집도 절도 없이 부평초처럼 떠돌아다니는 처량한 신세는 아니지" 그리고 이번에는 요령이가 이를 드러내었다. 자식, 귀엽게 노네. "어쨌든, 난 고향에 좀 다녀와야겠어. 설날이잖아. 이번에 못 가면 언제 내려갈지도 모르는데. 그리고 설인데 차롓상에 절 한 번 안 하면 집에서 내 게 어떤 후레자식 소리를 해 댈지도 모르는 일이고 말야. 무엇보다 오랜만 에 부모님과 고향 친구들의 얼굴이나 좀 보자" "언제쯤 출발할 건데?" "며칠 안으로 출발할까 생각해. 아마 내일이나 모레쯤? 그러니 너희들은 집 잘 지키고 있어. 올 때 설음식 잔뜩 얻어올테니까 두근대는 마음으로 기 다려도 좋아" 내 말에 요령이는 갑자기 이상한 목소리를 내었다. "에에엑?" 그리고 나는 그 목소리를 익살맞게 흉내내어 주었다. "'에에엑?'이라니? 점심에 먹은 생선가시가 목에 걸리기라도 했냐?" "아, 그게 아니라... 우리보고 집이나 지키고 있으라니?" "그럼 너희가 집이나 지켜야지 뭘 해? 아르바이트도 때려 치웠잖아? 왜, 또 집 나가려고?" 아르바이트는 얼마 전에 그만두었다. 요령이가 가출했던 동안 출근하지 않 았다고 카페의 주인 아저씨가 화가 머리 끝까지 나셨던 까닭이다. 결국 주 인 아저씨는 손님도 많은 데에서 내게 앞치마를 집어던지며 이렇게 나태하 게 다닐거면 차라리 그만 두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결국 기분 더러 워진 나는 '예, 이따위 곳 때려치우면 그만이죠!'하고 맞받아 외치고는 그 대로 요령이와 가람이를 데리고 가게를 나와 버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쭈욱 옛날처럼 백수생활. 생각해보면 그게 꽤 돈벌이가 되는 아르바이트이긴 했 지만 또 생각해보면 우리가 올려준 매상에 비해서 우리는 너무 대우를 못 받았다. 어쩌면 이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후회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의 생각을 미리 합리화 시켜놓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만둔 것을 후 회하지는 않는다. 어차피 너무 힘들어서 빠른 시일내에 걸레를 던져 버리려 했으니까. "끄으응..." 요령이가 나갔다 돌아왔을 때의 일은 이미 농담거리에나 주고받을 정도로 가벼운 옛일 정도가 되어 버렸다. 뭐, 속마음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겉으로나마 그렇다는 것도 나에게는 정말이지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 다. 이런 식으로 천천히 마음 속에 묻어 가는거지, 뭐. "왜? 뭐가 불만인데?" 내 말에 요령이는 치를 떨며 되물었다. "으으으! 정말 몰라서 물어?" "그럼 내가 비싼 밥 먹고 할 일 없어서 아는 거나 물어보고 있어야겠냐?" "......에휴, 도대체 너, 눈이 왜 있는지는 아냐?" "왜 있는데?" "눈이 있는 이유는 눈치 좀 채라고 있는 거야. 넌 눈을 폼으로 달았냐?" "눈이 그런 일을 위해서 달려 있었던 거라면 내 눈은 폼으로 단 것일지도 모르겠고" "아, 그러니" 요령이는 한숨을 푸욱 쉬더니 내 어깨를 툭툭 치고, 볼을 어루만진다. 어, 어어? 또 이러면... 몸이 굳어 버리잖아? "영준아" "으...으윽. 왜...애?" 으윽... 얘가 또 왜이래? 녀석은 부드러운 손길로 볼을 몇 번 쓰다듬다가, 그대로 꽉 잡고 주욱 잡아당겼다. "아아아악!" "눈치가 어쩜 그렇게도 없냐. 야, 너는 네 집에 가서 신나게 놀고, 우리보 고는 집이나 지키고 있으라고? 지금 그게 동물을 기르는 주인의 태도라고 생각해? 응? 입이 있으면 말을 해 봐! 이렇게 버리고 가는 주인들 때문에 굶어죽는 애완동물이 한 해 얼마나 되는 줄이나 알아?" 무어라 대답하고 싶지만 볼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입이 벌어져서 말이 안 나온다. "어 오이 어야 아이 어야! 이아 아여 어어!"(넌 손이 없냐 발이 없냐! 네 가 차려 먹어!) "뭐? '넌 손이 없냐 발이 없냐' 고? '네가 차려 먹어' 라고?" "으!"(응!) "내가 지금 밥 굶어서 이러는 걸로 보이니? 집에 가람이 저 녀석과 단 둘 만 있을 거라 상상하니까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끔찍할 것 같아서 그러지! 데려갈 거야 안 데려갈 거야?" "이아 오이아 와!"(일단 손이나 놔!) "뭐라고?" "이아 오으 오으아오! 이이 어어여어 아으 오아에아아!"(일단 손을 놓으라 고! 입이 벌어져서 말을 못하겠잖아!) "아, 일단 손을 놓으라고? 입이 벌어져서 말을 못 하겠다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으!아 아 아아으에?"(응! 말 잘 알아듣네?) "과찬의 말씀을, 그리고 이 손은 데려간다고 말하면 놓아줄게" "어이에?"(어디에?) "너희 집에" "이어야?"(미쳤냐?) 그리고 요령이는 내 말에 재밌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 난 저어엉사아앙이이야아아" '저어엉사아앙이이야아아'라고 말하면서 내 볼은 점점 더 늘어났음은 물론 이다. 이익! 젠장! 내 얼굴이 장난감이라도 되냐? 왜 죽죽 당기고 난리야! "아이아!"(하지마!) "데려 갈 거야, 안 데려 갈 거야?" 자, 이 잠시간의 -어쩌면 잠시라는 표현 보다는 조금, 아니 훨씬 더 긴 시 간일지도 모르지만- 고통을 참아내고 설연휴 + α라는 짧은 기간이나마 나 를 들볶아대는 요령이와 비록 들볶지는 않지만 너무 충성스러워서 약간 부 담을 느끼게 하는 가람이라는 심 두 개의 심리적 압박요소에서 해방 될 것 인가, 아니면 지금의 얼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굴복하여 '알았어, 알았 어, 데려갈게!' 라고 마음에 없는 말을 내뱉고는 고향으로 내려가서까지 두 심리적 압박요소에 약간의 스트레스를 받으며 지낼 것인가? 결론은 간단했다. 난 사나이다! "아아어, 아아어, 에여아에!" (알았어, 알았어, 데려갈게!) ......그리고 사나이는 가끔씩 상황에 무릎을 꿇어야 하는 때도 있는 법이 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아 씨, 요 따위로 마음을 위로하려 해도 하나도 위안이 안 돼! 요령이가 입에 달고 사는 말만 따라, '남자자식이' 고작 얼굴 잡아당기는 걸 못 참고 협박에 굴복을 하냐! 쳇! 정말이지 나란 녀석은 어쩔 수 없다니까! "자식, 진작 그럴 것이지. 그러니까 왜 데려가고 싶으면서 싫은 척을 해" 난 비웃어 주었다. "누가, 누굴, 데려가고 싶다고?" "물론 네가 나를" "피싯" "......그 '하하' 도 아니고 '껄껄' 도 아닌 '피싯' 이 의미하는 건 뭐야 ?" "아, 아냐, 아무것도" "아, 아냐, 아무것도. 아무려면 '설마' 내가 널 비웃으려는 의미로 '피싯' 이라는 잘못 들으면 '어이없음'처럼 들리는 소리를 사용했을려고" 나는 이죽거리며 설마, 피싯, 어이없음이라는 단어를 강조해가며 사용했고 요령이는 팔짱을 끼고 그런 나를 잠시 바라보다 다시금 재빠르게, 마치 뱀 이 개구리를 물려고 하듯이 총알처럼 팔을 뻗었다. "어딜!" 훗, 아무리 네 공격이 빠르다고 해도 이미 난 네가 그렇게 나올 줄 알고 있었다고! 난 당연히 고개를 틀며 왼쪽으로 몸을 재빠르게 틀었다. 빙글! 그런데 그 때 왼쪽과 오른쪽이 도는 속도가 달랐던지 왼발과 오른발이 서로 얽혀 버리는 사태가 벌어지고야 말았다. 크어억! 안돼! -털썩! 으아악! 엉덩이 깨진다! ......라며 비명을 지르려고 했는데 이상하게 푹 신하는 느낌이 들었다. 가람이가 날 받아준 것이었다. "휴우, 십년 감수했네. 가람아, 고마워!" "아. 별말씀을" 나는 잠시 가람이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 요령이를 바라보았다. 녀석 은 당연히 배를 잡고 깔깔대며 웃고 있었다. "아하하하, 바보냐! 자기 발에 자기가 걸려서 넘어져! 아하하하!" 으음... 쳇. 요령이는 계속 방바닥을 탁탁 쳐가며 배를 잡고 뒹굴었고 나 는 그렇게 녀석을 탐탁치않게 바라보았다. 녀석을 제지할 다른 수가 없었으 니까. 솔직히, 말린다고 저 녀석이 그만 둘 놈인가? 더 할 놈이지. 그렇게 해서 결국 내 오랜만의 고향행 방문단의 명단에는 요령이와 가람이 (가람이는 특별히 따라가고 싶다는 말을 하거나 한 건 아니지만 어떻게 가 람이만 혼자 집에 놓아두고 요령이와 나만 희희낙락 고향으로 내려갈 수 있 겠는가. 가람이도 데리고 가야지)라는 불청객이 추가되었다. 아, 물론 그 둘이 없었다면 고향 방문객의 명단은 나 혼자였겠지. "아, 정말 같이 다니자니 창피해서! 도대체 예의범절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냐!" "뭐? 예의범절? 그러는 너는 뭐가 잘났어? 응?" "야, 도대체 뭐야! 모습이 다른 사람 보기에 불쾌하면 행동이라도 똑바로 해야 될 거 아냐! 버스 안에서 창피해서... 도대체 네 코 속에는 뭐가 들었 냐? 그리고 이는 또 왜 갈아? 원수졌어? 꿈에 퀴에르라도 나오던?" "야! 내 외모가 뭐가 어쩌고 저째? 다른 사람 보기 불쾌해? 지금이라도 길 거리 나가면 남자가 줄을 서, 임마! 왜 이래! 그리고 피곤하면 이 좀 갈 수 도 있고 코 좀 골 수도 있는 거지, 뭘 그걸 가지고 어휴, 남자가 정말 속은 밴댕이..." "뭐 밴댕이? 야! 그러는 넌! 최소한 나는 너처럼 힘으로 억압하지는 않는 다! 너 때문에 내 정의가 폭력 앞에 무릎 꿇었던 적이 몇 번인 줄이나 알아 ?" "얼씨구, 말은 거창해! 폭력 앞에 무릎을 꿇은 정의? 네가 언제 무릎 꿇었 냐! 얍삽하게 빠져나갔지!" "뭐 얍삽? 말 다 했냐?" "다 하긴 개뿔을 다 해! 다 하려면 동해물과 백두산이 닳도록 해도 모자라 ! 도대체 코 좀 골았다고 버스 안에서부터 계속 들볶기 시작하는데 이건 완 전히 사람을..." "네가 무슨 사람이야! 고양이지! 그것도 아주 매일같이 울었다 웃었다 사 람 마음을 가지고 노는 요물중의 요물..." "야! 요물이라고 부르지 말라 그랬지!" "요물보고 요물이라 그러는데 왜 화를 내고 그래!" "자꾸 요물 요물하지 말라니까?" "내 맘이다 이 요물아!" "이...이 씨!" 녀석은 주먹을 움켜쥐고 부르르 떨었지만 뭐 지가 어쩌겠어, 주인한테. 나 는 녀석을 보고 웃어 보이며 입모양으로 '요물, 요물' 하며 이죽거렸고 녀 석은 그런 나를 보며 분한지 눈가가 빨개져서는 씩씩거리며 가쁜 숨을 내쉬 다 입술을 꼭 깨물었다......쳇, 너무 분해서 눈물이 나려 하나 보다. 하여 튼 완전 버릇 잘못 들었어. 성격이 완전히 어린애라니까, 어린애. 분하다고 눈물이나 흘리려고 하고 말야. 진짜 요령이를 보고 있자면 어린애를 보고 있는 것 같다. 자기 멋대로 하려는 것도 그렇고, 자주 토라지는 것도 그렇 고, 속마음은 착한 것도 그렇고...-마지막 건 아닐수도 있겠다- 어쨌든... 제...에기랄. 자꾸 그렇게 눈이 빨개져가지고 쳐다보지 마. 또 미안해 지잖 아. 처음엔 장난스럽게 요령이를 바라보던 난 계속 붉게 충혈된 물기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요령이를 바라보다 결국 마음이 무거워져서 고개를 돌리고야 말았다. 뭐, 나도 이렇게 마을 입구를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가며 들어서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어쩌다보니 시비가 붙어 버린거지. "으으, 정말... 앞으로 저 녀석과 같이 버스를 타면 사람이 아니다, 사람 이..." 나는 아직도 씩씩거리는 요령이를 힐끔 바라보곤 우리집을 찾아 걸었다. 아, 아직 어떻게 싸움이 났는지 이야기 안 했지. 뭐,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별 일도 아니었다. 단지 쪽팔림을 조금 -조금 많이 일수도...- 감수해야 했 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러니까 결국 버스를 탄 후부터 시비가 붙기 시작 했다... ...우리 일행이 고향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을 때,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우리에게 집중되었었다. 나에게 집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 느냐마는 불행히도 남자는 모두 요령이를 바라보았고 여자는 모두 가람이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여기까지는 좋았다. 이런 녀석들과 같이 다닌다는 것만 으로도 왠지 나까지 어깨가 으쓱거렸으니까. 문제는 버스가 출발한 후 한시 간 쯤 뒤에 일어났다. "드르릉- 푸우. 빠드득, 크으윽! 컥, 컥! 푸우우... 드르릉..." "어디서 도로공사하나?" 어디선가 들려오는 굉음소리에 사람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해져 주위를 둘 러보았고 같이 어리둥절해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나는 곧 그게 요령이의 코와 입에서 나는 소리인 것을 알고는 정말 당황해 버렸다. 집에서는 조용 히 자던 애가 갑자기 차가 흔들려서인지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 버스 안에 서 꼭 기관차 지나가는 것처럼 코를 골아대고 맷돌 갈듯이 이를 갈아대니 이건 대책도 없고 수단도 없고, 뭘 어쩌란 말인가? 난 얼굴이 벌개져서 미 친듯이 요령이를 흔들었지만 요령이는 요지부동, 오직 꿋꿋이 잘 뿐이었다. 아아! 아까 사람들이 내게 보내었던 동경의 눈빛은 이제 동정의 눈빛으로 변해 있었다! 나는 계속 녀석을 깨우기 위해 흔들었지만 소용없었고 마침내 보다 못한 가람이가 요령이의 귀에 대고 무어라고 속삭였다. "으아아아악! 깜짝이야아아아!" 녀석은 벌떡 일어나면서 외마디 비명을 질렀고 그래서 코고는 소리와 이가 는 소리에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기로 결심하고 귀를 틀어막고 차창 밖 먼 산만을 바라보던 승객들은 모조리 우리를 향해 시선을 집중했다. 그리고 요 령이 녀석은 자다 깨서 정신이 없는지 40여 명의 사람들이 쳐다보던 말던 귀를 마구 파 대며 횡설수설했다. "무엇인가가 폭발했나봐! 당장 도망쳐야 해! 기사 아저씨! 차 돌려요! 으 아악! 지진인가? 아니면 뭔가 다른 무언가? 분명히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어! 도망쳐야 해! 어서! 뭐 해? 야! 영준아! 너도 어서 도망쳐야 해! 시간이 없다니까? 으응? 그런데 여긴 어디지?" ......이러니 그때 요령이의 옆에 앉아 있었던 내 기분이 어땠겠는가. 나 는 얼굴을 감싸쥐며 가람이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야, 도대체 요령이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아, 별 건 아니고..." 가람이는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요령이의 귀에 사자후를 응용해서 극히 짧은 거리에만 소리가 퍼지 게 한 후 일어나라고 살짝 속삭여줬지" "...그래서?" "내가 한 말의 음파는 고막까지 가기도 전에 소멸되었겠지만 그 전에 귀를 살짝 울렸을걸" 글쎄, 귀를 살짝 울린 정도로 저렇게 되었을까? 어쨌든 요령이의 얼빠진 행동때문에 나는 버스에서 오는 내내 고개를 푹 숙이고 가야만 했다. 으으. 이렇게 입구부터 기운 빠져버리는 귀성길이라니. 쳇! 그러니까 애초 에 저 녀석을 데려오는 게 아니었는데...요령이는 마을 입구에서 대판 싸운 뒤로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그 말 많던 녀석이 계속 입을 꾹 다물고 내 뒤 만 묵묵히 따라오고 있었다. 결국 집까지 어색한 분위기 속을 걸어간 것이 었다. 명절연휴에, 그것도 새해 이후 첫 귀성길에 이게 뭐람? 난 나뭇가지로 얼기설기 엮어 놓은 참 고풍스럽게 생긴, 즉 다시 말하면 썩어서 삐걱거릴 정도로 오래된 정감가는 느낌의 사립문을 손으로 밀며 한 숨을 내쉬었다. 박영준, 참 너도 잘하는 짓이다. 오랜만에 집에 들어오면서 한숨이나 푹푹 쉬어대고. 오랜만에 손을 대는 사립문의 나뭇가지들은 언제 나 그렇듯이 따뜻했다. "휴우, 엄마- 나 왔어요-" 난 추욱 늘어진 어깨로 다 죽어가듯이 내뱉듯이 말하며 마당에 발을 딛었 다. 마른 흙과 지푸라기의 향기가 부드럽게 코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내 눈 에 덩그런 초가집의 모습이 비췄다. 참고로 우리집은 초가집이다. 아아, 물론 초가집에서 살 정도로 집이 가난 한 것은 절대 아니다. 우리 아버지께서 워낙 청빈한 삶을 좋아하시고 연구 를 좋아하셔서 언제나 발굴하러 다니신다고 대학 지원비에다 집의 돈까지 보태서 쓰고 다니시는 바람에 우리집 삶은 그렇게 풍족하지는 못하지만, 그 렇다고 수십 년간 저축했다면 초가집에 기와 한 장 못 올렸겠냐, 명색이 대 학 교수집인데? 이건 그냥 역사학자이자 고고학자이신 우리 아버지의 취향 이시다. 우리 가족이야 초가집에서 산다고 특별히 불편한 것도 없고 해서 그러려니 하며 살고 있고. "아아- 너 왔니?" 부엌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난 당연히 엄마가 버선발로 - 비유적인 표현이지 실제로 버선을 신고 있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초가집에 서 산다고 치마 저고리 차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버리길 바란다- 뛰어 나 오길 바라며 마당에서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화가 덜 풀렸는지 입술이 뾰족하게 튀어나온 요 령이와 무표정한 가람이를 보고 무안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고 씨익 웃으며 마루에 발을 디뎌야 했다. 으으, 엄마도 참. 아들이 오랜만에 왔는데 내다 보지도 않나? 하여튼 우리 가족이란. 사는 곳이 시골이라서 그런지 애정 표 현에 약하다니까. 아, 물론 나는 거기서 제외된다. 방에 잠시 앉아 있자니 부엌으로 연결된 쪽문이 열리며 엄마가 고개를 내 밀어 보이셨다. 오랜만에 봤지만 엄마의 얼굴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 "오, 영준아. 우리 아들. 오랜만이네?" "예, 엄마. 저 왔어요" "그런데 왜 집에 들어서면서 그렇게 한숨을 푹푹 내쉬었니? 집에 오는 게 그렇게도 싫더니?" 어억? 한숨소리가 부엌에까지 들릴 정도로 컸었나? 난 재빨리 고개를 흔들 며 부인했다. "아... 아뇨" "그럼 왜 한숨을 쉬고 그러니?" "그런게 있어요" 나는 고개를 돌려 엄마를 외면하며 요령이를 쏘아 보았다. 그리고 요령이 는 당연한 소리지만 똑바로 마주 쏘아 보았고. 으이구, 아직도 화가 안 풀 렸군. 사실 화가 풀렸다면 이렇게 내가 쏘아 보았을때 뭔가 장난스러운 반 응이 왔어야 한다. 나는 잠시 고개를 휘휘 젓고는 다시 엄마를 바라 보았 다. "엄마, 일단 방으로 들어 오세요" "응, 그러자꾸나. 일단 차라도 한 잔 끓여 갈테니 조금만 기다리렴" 쪽문이 닫히고, 가람이는 내게 고개를 돌려 느릿하게, 그러나 궁금증을 실 어 물었다. "왜 존댓말을 쓰면서 어머니라는 말은 안 쓰나?" "그냥, 어머니라고 부르면 다 커 버린 느낌이고, 또 어색하고... 에이, 몰 라" 이 말에 가람이는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그럼 주인이 다 큰 장정이지 어린애인가. 물론 장정이라고 부르기에는 몸 이 좀 마르긴 했지만..." "그냥 주인이 그렇다면 그러려니 해. 뭘 따져, 임마" "주인이 원한다면 그만 두도록 하지" 으윽, 이런 반어법적 말을 사용하다니! 게다가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나 는 순간 당황해서 주춤거렸으나 내가 황당한 눈빛으로 가람이를 바라보자 역으로 가람이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가득 의문점을 실어 되돌려주는 것 을 보고는 '저 녀석은 원래 태도가 저렇지...'라는 사실을 상기해 내었다. 사실 가람이가 방금 한 말은, 보통 사람이 똑같이 말했다면 완전히 '자식, 더럽게 짜증내고 그러네. 관 둬! 관 둬! 말하기 싫으면 때려쳐!' 등등의 생 각을 바로 연상시키게 하는 투의 말이다. 그러나 가람이는 개이고 개의 특 징탓인지 직설적으로 말하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말 그대로 '까라면 까는' 스타일이고. 한 마디로 지금 가람이가 '원한다면 그만 두도록 하지'라고 한 말은 말 그대로 그만 둔다는 소리이다. 뭐, 솔직하고 돌려 말하지 않고 당 당한데 말까지 잘 들으니 분명 멋있고 마음에 든다. 그러나 사람의 말투란 저렇지 않잖아? 저 녀석의 말투에 평소에도 흠칫흠칫 놀라곤 한다. 언제나 되야 적응이 되려나? "영준아- 문 좀 열어다오. 차 들이게" "예, 엄마" 나는 재빨리 쪽문을 열었고 엄마는 다과상을 가지고 들어오셨다. 다과상에 는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유자차 네 잔과 사과 한 접시가 올려져 있었다. "잘 먹을게요" 나는 고개를 살짝 숙여서 인사하고는 곧 찻잔을 들어 입에 가져다대었다. 그리고 내 뒤의 녀석들도 나를 따라 엄마에게 인사를 하고는 찻잔을 들어 올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에구... 요령아, 왜 그리 목소리가 풀이 죽었냐... 아직도 화가 안 풀렸냐 ? 먹을걸 줘도 안 좋아하네? "그래. 맛있게 먹으렴. 그런데..." "예, 말씀하세요" "...너흰 누구니?" 아차차. 엄마한테 이 녀석들의 소개를 해 주는 것을 깜빡 잊었다! 먹는데 혹해서... 녀석들도 깜빡 했다는 표정을 짓더니 곧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서 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전 이요령이라고 해요" "안녕하십니까, 한가람이라고 합니다" 인사가 상당히 늦었지만 엄마는 별로 신경쓰시지 않으시는 듯했다. 엄마는 웃으며 "아아, 그래, 이요령, 한가람. 이름들이 다 좋네. 어휴, 얼굴들도 다 예쁘 고 잘생겼어, 그래. 특히 처녀는 꼭 선녀가 내려온 것 같아. 어쩜 그렇게 예쁘게 생겼어?" 아아, 엄마, 너무 띄워주지 마요! 나는 눈에 안 띄게 무릎을 움켜쥐었다. 눈 앞이 캄캄해져서. 저렇게 엄마가 띄워주면 당장의 요령이의 화는 풀릴테 니 어떻게 보면 다행이지만, 그 대신 기고만장해질 앞으로의 요령이를 어떻 게 감당해야 하나? 나중에 나와 혹시라도 싸움이 나면 아마 저 녀석은 '아 무리 그렇게 말해도 네 어머니께선 나보고 선녀라고 했네-!' 이렇게 말이 다. "어머, 어머님, 정말 안목 좋으시다, 호호호!" 어이구, 방금 전까지만 해도 씩씩거리다 이제 호호거리네? 하여튼 어떻게 보면 완전히 단세포라니까. "그건 그렇고... 혹시..." "예, 어머니!" "너 영준이 애인이니?" "예에에에?" 나와 요령이는 경악해서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을 마구 휘젓고 고개를 마 구 가로젓고 얼굴을 마구 찡그리는 등 마구 부정의 뜻을 표시했다. "엄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요! 내가 어떻게 고작 저 따위 짐승... 은 아니고 여하튼 그 비스므레한 녀석과 사귄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거죠?" (너무 놀라서 짐승이라고 할 뻔 했다...) 내 말에 엄마는 나를 조용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니니?" "무, 물론 아니에요, 어머니. 호호호! 우린 그냥 '친구'랍니다! 호호호호 !" 억지웃음으로 애써서 황당하지 않은 척 넘어가려는 요령이. 거기에 덧붙여 서 나는 못박듯이 말했다. "맞죠? 알겠죠? 쟤도 아니라고 그러죠? 이제 알겠죠?" 그리고 엄마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에휴- 그럼 그렇지. 네 주제에 무슨 저런 애인이 있겠누. 쯧쯧...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그럼... 저 뒤에 있는 잘생긴 청년이 처자 남자친구인가? 하긴, 처자 수준에는 저 정도 남자는 되어야지. 아주 잘 어울리네, 천상 배 필이야, 배필" 또 다시 엄마의 넘겨짚기의 표적이 되어버린 요령이는 이번에는 더욱 당황 했던지 얼굴색까지 하얗게 변해서 고개를 마구 저어대었다. "아, 아니에요, 어머니! 우리 셋은 모두 그냥 '평범한 친구'일 뿐이랍니 다, 호호! 그, 그렇지 가람아?" 사실 요령이로서는 가람이와 연인 취급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상 당히 기분이 나쁜 일일 것이다. 그건 가람이도 마찬가지일테고. 단지 어른 을 앞에 세워놨기에 당황한 상태에서도 말을 가려가며 하는 것일테고... 이 제 곧 가람이가 '그렇습니다, 어머니. 요령이의 말대로 우린 단지 친구일 뿐입니다'라고 말하겠지. ...으음? 그런데 가람이의 대답이 늦다? 나는 가람이를 바라보았다. 가람 이는 요령이의 '우린 평범한 친구일 뿐이지?'라는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저 표정은... 무언가를 말할까 말까 망설이는 표정이잖아? 이윽고 가람이는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사실... 저와 요령이 같은 경우는 평범한 친구사이라고 하긴... 힘듭니 다... 어쩌면 단지 저 혼자만의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가람아? 너 설마... 설마... "요령이와 저의 관계는..." 야... 야! 너 임마, 그렇게 안 봤는데...! 안 돼, 임마! "...상당히 사이가 안 좋은 친구에 속하죠... 주인과 요령이가 그러하듯 이... 사실 이건 요령이의 입장을 생각해서 말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역 시 사실은 사실이니만큼..." "에라이 자식아! 깜짝 놀랐잖아!" 나는 소리를 꽥 지를 수밖에 없었다. 어휴, 십년 감수했네... 천만다행이 다. 으응? 그런데, 가람이가 요령이한테 좋아한다고 하지 않은게 왜 나한테 다 행이지? 매일 치고박고 싸우는 두 녀석이 좋아하는 상황이 생긴다면 내 쪽 에서는 축하를 해 줘야 마땅한 것 아냐? 어쩌면... ...에이, 갑작스러운 일이라 당황해서 그런 것이었겠지. 고향에 내려온지 벌써 일주일이 지나가고 있었다. "아... 지겨워..." 간간히 들려오는 요령이의 하품과 투정소리. -사락... 그리고 또 간간히 들려오는 가람이의 책장 넘기는 소리. "으음... 심심해. 뭐 재미있는 놀이 없을까..." TV를 켜도 낮시간이라 그런지 온통 흑백의 점들만 쏟아져 나와 알 수 없는 문양을 흩뿌리며 지직거리고 제대로 된 방송은 나오질 않았다. 나는 다시 T V를 끄며 한숨을 쉬었다. "푸우... 정말 이런 산골에 있자니 좋게 말하면 생활이 조용하고..." "나쁘게 말하면 지루하고" 요령이가 내 말을 냉큼 받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거다. 이건 뭐 집 주위에서 만화책을 빌릴수가 있나 비디오를 빌릴수가 있나 오락실이 있나 게임방이 있나... 나가서 놀려고 해도 오늘따라 왜 이렇게 추운지 이 거 집 안에서 꼼짝도 하기 싫고...... 그렇다고 집 안에만 있자니 너무 심 심하고... 하아. 거의 20년이라는 세월동안 여기서 아무 탈 없이 잘 살아오 다가 집 밖으로 나가서 살기 시작한지 얼마나 되었는데 벌써 옛날과 변한 게 하나도 없는 시골 생활에 적응을 못하고 권태로움을 느끼냐고 누군가 비 웃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 그렇게 말한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 해 주겠다. '지겨운 걸 그럼 어떻게 하냐? 억지로 웃으리?' "산에라도 갈래?" "이 날씨에? 미쳤냐?" 그 때 방문이 열리며 어머니께서 다과를 들고 들어오셨다. "어이구... 팔자 좋다. 아주 봄날 햇살 맞은 개처럼 축 늘어졌구먼. 왜 그 러니?" "아... 엄마. 너무 지겨워서 그래요..." "잘났다, 잘났어. 타향살이 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지겹다고 그래?" ......설마 '지겨운 걸 그럼 어떻게 하냐? 어떻게 웃으리?'라고 대답해야 할 상대가 엄마일줄은 몰랐다. 엄마한테 이렇게 말해줘야 하나? 으윽. 차마 그렇게는 못하겠군. 그래서 나는 그냥 못 들은척 하며 딴청을 부렸다. "뭐 재미있게 할 만한거나 시간 때울만한 거 없어요? 정 시킬 거 없으면 일이라도 괜찮은데" "어이구, 없다, 없어. 그리고 있어도 손님들 계신데서 일 시킬까? 정 지겨 우면 창고에라도 가 보렴. 네 아버지가 잡동사니들을 새로 채워놓아서 볼 게 좀 늘었으니 말이다. 정말 뒹굴뒹굴하고 있는 꼴이... 도저히 못 봐주겠 으니까 말야. 너도 저 청년처럼 책이라도 좀 읽으면 얼마나 좋으냐? 어휴, 자식이라고 하나 있는게 죽어라고 책은 안 읽고, 그리고 할 일이 아무리 없 어도 그렇지, 좀 단정히 앉아 있으면 안 되니? 요령이 좀 보렴. 얼마나 단 정하게 앉아 있니?" 에엑? 가람이야 아까부터 내 책상에 앉아서 조용히 책을 보고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쳐도 요령이가 단정히 앉아 있어? 요령이는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 옆에서 뒹굴거리고 있었는데...! 나는 고개를 재빠르게 옆으로 돌 려 요령이를 찾았다. 요령이는 내 옆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으윽, 재빠른 녀석 같으니라구! 약삭빠른 녀석 같으니라구! 엄마가 오는 것 같은 눈치를 챘으면 나한테도 경고를 했어야지, 혼자서만 그렇게 다소곳이 앉아 있으면 다냐? "하여튼 내가 정말 너를 보고 있자면 나오느니 한숨이요 무너지느니 하늘 이다. 정말 누구를 닮아서 그렇게 게으른지..." 으윽, 시작이다, 엄마의 잔소리! "아, 아, 알았어요, 엄마. 알았어. 알았으니까 1절만 해요, 네? 얘네들 데 리고 창고 구경 좀 시켜주고 올게요, 야, 가자!" "그래, 가자" "나도 가도 되는건가" "그럼 안 가려고 했어?" 가람이는 내 말에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책을 덮고 일어섰다. "글은 언제 배웠냐?" "그냥 이럭저럭 굴러다니다 보니...그건 그렇고 지금 어디로 가는 건가" "창고" "아니, 창고에 뭐 볼게 있다고 창고로 가는데?" 요령이가 얼른 끼어들었다. 잠시를 못 참는군 그래. "가서 보면 될 거 아냐, 가서 보면! 거기까지 가는데 5분이 걸리냐 10분이 걸리냐! 봐! 벌써 다 왔잖아!" 어느새 우리의 눈 앞에 꽤 큼지막하고 허름한 창고 하나가 서 있었다. "...여기야?" "응" "쳇, 보아하니 별로 볼 것도 없을것 같은데 뭐" "그거야 들어가 보면 아는 일이고" 나는 대충대충 요령이의 말에 대답하며 내 키보다도 큰, 창고의 녹슨 철문 을 열어제꼈다. 끼이익... 귀에 거슬리는 소리와 함께 철문이 천천히 열렸 다. 안은 낮임에도 불구하고 캄캄했다. "에엑? 뭐야, 아무것도 안 보이잖아? 이렇게 깜깜한데 뭘 어떻게 본다는 거야?" "너 전구라는게 발명된 줄 아직 몰랐구나?" 사사건건 토를 다는 요령이에게 한 번 쏘아주며 손으로 더듬더듬 문 옆의 스위치를 찾아서 올린다. 달깍! 작은 소리와 함께 잠시 세상이 깜박거리고 는 곧 희푸른 빛이 어둠을 몰아내며 우리 주위를 환하게 비추었다. 그리고 요령이는 탄성을 질렀다. "와아-! 이게 다 뭐야?" 나는 녀석의 탄성에 조금 우쭐해져서 씨익 웃어주었다. 저 녀석이 저렇게 놀랄때도 있다니. 비록 내가 모은 건 아니지만 자랑스러워지는걸? "이게 뭐냐고? 우리 아버지가 우리나라, 일본, 중국등등을 돌다가 진귀한 것들을 사서 수집한 수집품들이지. 어때? 볼만하지?" "으...으응" 요령이는 듣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끄덕이고 진열대로 달려갔다. 창고안은 언뜻 보면 마치 작은 박물관처럼 생겼다. 박물관과 다른 점이 있다면 훨씬 허름하고 지저분하다는 것, 그리고 훨씬 난잡하다는 정도? 창고 안에는 긴 탁자가 마치 진열대처럼 벽에 바짝 붙어서 주욱 늘어서 있었고, 탁자 위쪽 으로는 여러가지 신기하게 생긴 물건들이 크기에 따라 여러 줄로 주욱 늘어 서 있었으며 탁자 아래쪽에는 미처 진열하지 못한 것들이 종이상자에 담겨 있었다. 요령이는 이미 탁자 앞에 바싹 붙어서 눈을 뗄 줄 몰랐고 가람이도 이채로운 눈빛을 띄며 탁자위에 진열된 것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햐, 정말 신기하네!" 진열대라고 부르는 것이 더 나을 탁자 위에는 여러 가지 물건들이 놓여 있 었다. 작은 토기, 신기한 문양이 새겨진 그릇, 이상하게 생긴 동검, 조잡하 면서도 한 편으로는 화려한 녹슨 방울, 세밀한 문양이 새겨진 거울 등... 아버지께서 개인적인 여행으로, 혹은 연구목적으로, 혹은 발굴목적으로 가 셨다가 발굴한, 하지만 박물관에 이미 흔해 값어치가 별로 없는 물건들이나 혹은 연구를 하기 위해 가져온 물건들이나 또는 그 지방의 골동품상에서 구 입한 신기한 물건 등 여러가지 사연을 안고 온 물건들을 하나 하나 모으다 보니까 어느덧 창고를 필요로 할 정도로 물건들의 양이 잔뜩 늘어버린 것인 데, 정말 작은 바늘부터 엄청나게 큰 향로까지 모양과 크기, 종류가 모두 가지각색이다. 흐음, 그건 그렇고 내가 집을 비운 동안 물건이 여럿 바뀌어 있군. 예를 들면 저기 신기한 문양이 새겨져 있는 은가락지나 용의 형상이 새겨진 둥근 원판... 저 작은 방울도 예전에는 못 본 물건이고... 토기그릇 도 여럿 바뀌어 있고. 요령이는 신기하다는 듯 이것 저것을 둘러보다 은가락지를 보고 눈을 빛내 며 말했다. "와- 이쁘다. 나 한 번만 손가락에 끼어봐도 돼?" "마음대로..." "고마워! 와!" "내...내 말 안 끝났는데" 요령이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좋아라 팔짝팔짝 뛰며 반지를 들어올려 오른손에 끼웠다. 그리고는 갑자기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이익! 이게 뭐야!" "어? 왜 소리를 질러! 무슨 일이야?" "요기다!" 나와 가람이는 동시에 요령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요령이는 왼손으로 자신의 손목을 움켜쥐고는 오만상을 찡그리며 무엇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 다. "......하아앗!" -퍼엉! 갑자기 들려온 나지막한 폭음소리. 그리고 반지에서 갑자기 무색의 기운이 피어올랐다. 무색인데 어떻게 알았느냐고?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싸늘한 무언가가 분명히 느껴졌거든. 요령이는 왼손을 뒤로 돌려서 잠시 주먹을 쥐 고는 앞으로 쭈욱 뻗었다. "이거나 먹고 꺼졌!" -흐르르르... 요령이의 주먹에서 무엇인가가 뿜어져 나오는 느낌과 함게 갑자기 공중에 서 서글픈 진동이 울려퍼지다 이윽고 허공을 작게 울리며 사라져갔다. 그리 고 요령이는 손으로 무릎을 받히며 고개를 푹 숙이고는 가쁜 숨을 쉬어대었 다. "헉! 헉! 깜짝 놀랐네! 야!" "......방금... 뭐야? 도대체 무슨 일이..." "뭐야? 여기 귀신붙은 물건들도 있잖아!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네!" "......귀신붙은 물건...?" "그래! 어휴, 정말. 십년 감수했네! 야, 너희 아버지한테 앞으로 모르는 물건 가져올때는 조심해서 가져오라고 말씀드려! 알았냐!" "으...으응. 그런데 귀신 붙은 물건...이라니?" 내 말에 요령이는 자신의 오른손에서 거칠게 반지를 뽑아서 내 눈앞에 바 싹 들이대며 말했다. "이 반지! 잡귀가 씌여 있었단 말야! 반지를 끼는데 갑자기 손가락의 감각 이 사라지고 요기가 손가락으로 파고드는데...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윽! 그...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이 안 되긴 뭐가 안 되니? 그럼 내가 지금 장난치는 것 같니?" "요령이의 말이 사실인 것 같다" 가람이도 거들었다. "요령이가 반지를 꼈을때... 별 것 아니긴 했지만 분명 요사스러운 기운이 반지에서 요령이의 손가락으로 빨려들어갔다. 아무래도 잡귀인 것 같다" "끄으응..." 할 말이 없군. 가람이가 편을 들어주자 요령이는 더욱 기세가 등등해져서 나를 몰아세우려고 했다. "어디서 귀신붙은 물건만 잔뜩 있는 이런데로 데려와서..." "너도 그만 좀 해 둬!" 버럭 소리를 지르는 가람이. 잘 한다! 더 몰아 붙여라! 더! "너! 주인에 대한 태도가 되어먹지가 않았어! 되어먹지가! 도대체 주인이 얼마나 더 고개를 조아려야 넘어가겠나! 주인이 무릎꿇고 빌기라도 하길 바 라는건가!" "너, 뭐야? 도대체, 이 쪽에 붙었다 저 쪽에 붙었다... 박쥐냐?" "지금 내가 누구 편 들자고 이러는건가! 주인이 널보고 반지 한 번 껴 보 라고 꼬이기라도 하였는가! 네가 좋다고 낀 반지에 붙어있던 귀신을 만난 걸 누굴 탓하는가! 네가 조금만 더 주의했으면, 아니, 그렇게 경망스럽게 굴지만 않았어도 귀신이 있고 없고쯤은 충분히 알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도대체 잡귀 한 마리에 그렇게 놀라는..."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해! 기차화통을 통째로 삶아먹었나, 목소리하고 는..." 요령이는 귀를 틀어막으며 가람이에게 험상궂은 표정을 지어주더니 다시 종종걸음으로 진열대를 향해 걸었다. "더 말해봐야 내 목만 아프겠지, 뭐. 그나저나 더 볼만한 게 뭐가 있나... " 요령이의 절대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저 깜찍한 대사. 아, 깜찍은 아니고 끔찍한. 가람아, 이겼구나! 잘했다! 그건 그렇고 요령이는 방금 전까지도 별 난리를 다 부릴만큼 깜짝 놀랐다더니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호기 심 가득한 얼굴로 진열대로 걸어간다. 하여튼 호기심하고는... 어쩌면 일부 러 모르는 척 하려고 그러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말야. 가람이도 잠시 후 다 시 진열품들을 구경하러 진열대로 돌아갔고, 나도 다시 진열대 앞으로 가서 녀석들과 함께 천천히 여러가지 물건들의 모양을 감상했다.. "이건..." 무심코 이것저것을 훑어보며 천천히 걷던 나는 이번에는 가람이의 목소리 에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 "......이거... 범상찮은데...이 주위가... 음!" 지금까지 구경을 열심히 하던 가람이가 갑자기 무엇인가를 발견한 듯 우뚝 멈춰서서 어딘가에 신경을 집중하기 시작한다. 갑자기 뭐지? "뭐야, 이번에는? 또 귀신인거야?" 귀신을 가지고 '뭐야, 또 귀신이야?'라는 식으로 말할 수 있다니 나도 분 명히 간이 커지긴 커졌다. 하아, 도대체 어쩌다가 내가 이렇게 되어 버린걸 까! 가람이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고는 그저 마치 무엇인가를 찾는 듯 계속 고개를 휘휘 저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냐. 이건 한낱 귀신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건데... 도대체 뭔지 모르겠군" 요령이는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더니 가람이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 리고 곧 요령이도 경악한 표정이 되어서 눈을 동그랗게 뜨며 숨을 들이켰 다. "히이익! 이게 뭐야?" "왜, 왜 그래! 궁금해 죽겠어!" 나는 급히 요령이와 가람이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섰다. 하지만 나는 아무 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아, 궁금해! 도대체 뭘 가지고 저렇게들 놀라는거 지? "뭐야, 도대체? 귀신도 아니면 뭐야?" 요령이는 놀란 얼굴을 그대로 유지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귀신...? 귀신은 감히 범접도 못할... 엄청난... 엄청난 영기가 느껴져.. . 분명 이 주위에... 무언가가 있어!" 요령이는 말을 마치더니 황급히 진열대의 물건 하나하나에 손을 대 보기 시작했다. 빠르게, 스치듯이. 슥, 슥, 슥. 아, 뭐야! 도대체 상황이 이해가 안 되잖아! "야! 뭐야? 혹시 너희들 서로 짜고 장난치는 거 아냐? 나는 아무것도 못 느끼겠는데! 요령이는 또 지금 뭘 하고 있는거야?"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주인. 왜냐면 인간의 몸은 영기 속에서는 미약한 평온한 외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반면 요기 주위에 서는 그것이 비록 미약한 양의 요기라도 극도의 이질감을 느끼기 때문이지. 그건 그렇고 분명히 이 주위에 '그것'이 있을텐데..." "그것이이라니? 그리고 영기라니? 좀 알아듣기 쉽게, 차분히, 설명을 좀 해 줘!" "설명이라. 하긴, 주인은 지금 갑자기 돌아가는 상황이 매우 궁금하겠지. 설명해주지.일단, 나와 주인이 서 있는 곳에는 지금 엄청난 농도의 영기가 뒤덮여 있다" "어? 난 정말 아무것도 못 느끼겠는데... 그러니까 네가 서 있는 곳과... 내가 서 있는 곳, 그리고 이 주위가 온통 영기로 뒤덮여 있단 말이지?" "맞아. 그리고 그 영기들은 마치 아지랑이처럼 보이지만 대강 모양을 가늠 해보자면 반구의 형태를 띄고 있다. 중심점은 지금 내가 서 있는 곳 주변이 지. 한 마디로, 지금 어떤 물체에서 영기가 뿜어져 나와서 그 영기가 우리 주위를 반구를 그리며 둘러싸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영기를 뿜는 물 체는 분명히 이 주위에 있을 것이다. 방금 전에 말했지만 중심점이 여기니 까. 대충 이해가 가는가?" "...어, 말 그대로 대충이지만 이해가 갈 것 같아" 지금 창고 안의 어느 물체가 엄청난 물건이라서 거대한 반구의 영기로 뒤 덮인 공간을 만들만한 영기를 뿜어낸다는 말이다. 하, 신기하네. 정말 내가 평생동안 바로 옆에 두고 살아왔던 창고 안에 별 물건이 다 있었군. 귀신 붙은 반지, 영기를 뿜어대는 물건... 그런데 문득 궁금해진 것이 하나 있 다. "어, 그 영기라는 건 행동반경같은 게 있는거냐? 힘을 내뿜는 곳에서 어느 정도 이상 멀어지면 기가 소멸된다던지 하는..." "아니, 그런 건 없다. 기를 운용할 때 인위적으로 응결시키거나 할 수는 있지만 보통의 경우 영기는 자유롭게 흐르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그 건 왜 묻는가?" "으음? 그렇다면 이상하잖아. 왜 여기에는 영기들이 뭉쳐 있는거지?" 분명히 아까 처음에 창고에 들어올 때 가람이는 '창고 안에 영기의 덩어리 가 있는 것 같다'따위의 말을 하지 않았다. 들어와서도 이 주위에 접근하기 전까지는 영기에 대해 특별히 언급을 하지 않았고. 그 말은 가람이도 지금 우리 주위에 펼쳐졌다는 영기의 공간 안에 들어오기 전에는 이런 게 있었는 지도 몰랐다는 소리가 된다. 그렇다면 이 영기는 가람이가 말한 반구모양으 로 모두 뭉쳐있고 반구형의 공간 바깥쪽으로는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는 소 리인데, 이상하잖아? 방금전에 가람이가 분명히 영기는 자유롭게 흐른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왜 영기들이 자유롭게 흐르지 않지? 나는 내가 방금 떠올 린 의문을 가람이에게 말했고, 가람이는 명쾌하게 대답해 주었다. "나도 잘 모르겠다" "......그래? 좋아, 그건 그렇다고 치고 넘어가자. 그건 그렇고 말야. 요 령이는 왜 계속 저렇게 골동품을 툭툭 치면서 걷고 있는거냐?" "요령이가 지금 여기 놓여있는 물건들을 하나 하나 만져보는 것은 물건속 에 배어 있는 영기를 확실히 느끼기 위해서이지. 지금 이 안은 온통 영기로 뒤덮여 있기 때문에 영기가 뿜어져 나오는곳을 찾기가 힘들다. 비유를 들자 면... 요동치는 호수 속에 수백개의 구멍이 있다고 치자. 그리고 그 중에 한 곳에서만 물이 나온다고 가정하자. 그 속에서 물이 뿜어져나오는 구멍을 느낌으로만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럴때 물이 솟는 구멍을 찾는 가장 쉬운 방법은 구멍에 일일히 손을 대어보는 것이지. 요령이는 지금 그것과 비슷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뭐 어설픈 비유지만 대강 이해는 되었으 리라 생각한다" 내가 이해를 못한다고 할까봐 친절하게 비유까지 들어서 설명해주는군. 어 쨌든 그렇다면 이제 곧 요령이가 '와! 찾았다!'를 외치며... "어? 이상한데? 없잖아!" 내가 속으로 기대하고 있었던 '와! 찾았다!'와는 전혀 반대되는 뜻이 담 긴, 그래서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어버린 요령이의 낭패어린 목소리가 들렸 다. 가람이도 이번에는 약간 놀랐는지 눈을 조금 치켜뜨며 외쳤다. "없다니? 그럴리 없다! 네가 실수한 것이겠지! 이 주위에서 나오는 힘이 그럼 무슨 풍수지리로 인해서 솟아나는 힘이라도 된다더냐!" "아, 그 자식 없는 듯 없는 듯 하면서도 진짜 말 많네! 말로만 나불거리지 말고 네가 직접 찾아봐!" 가람이가 말이 많다라. 음. 그것 참으로 독창성이라는 면에서는 박수를 쳐 주고 싶은 독특한 의견일세그려. 요령이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마구마구 떠 올라서 미치겠다. '남의 눈의 가시는 보이고 자기 눈의 들보는 안 보인다'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나무란다'등등... 가람이는 요령이의 말에 바로 충격을 받았나보다. 왜냐고? 아무말도 못 하고 입을 꾸욱 다문 채 자신이 직접 진열된 물건들에 손을 대며 뛰기 시작했거든. 빠르게 뛰며 진열대의 물건에 하나 하나 손을 대어보던 가람이도 곧 낭패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돌아왔다. "이상하군. 정말 없잖아!" "내가 뭐랬니? 없다고 그랬지. 사람이 말을 하면 믿지그래?" "사람이 한 말이라면 혹시 믿었을지도 모르겠군" "뭐 임마!" "아아아, 그만, 그만! 그럼 이 영기는 도대체 뭐지?" 가람이와 요령이는 두리번거리며 이상하다는 듯 계속해서 고개를 갸웃거렸 다. 나도 괜히 혼자 가만히 있기 어색해서 같이 고개를 흔들며 누구보다도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고 .흐음, 진한 흘러나오는 것이라... 도 대체 어느 정도의 힘이길래 그러지? "야, 그게 그렇게 대단한 거야? 왜 못 찾아서 안달들이야?" "대단한 정도가 아니다. 추측이지만, 영기가 이 주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걸로 봐서 어마어마한 어떤 것이 봉인되어 있는 모양인데, 봉인의 틈에서 새어나오는 영기가 이 정도라면 봉인된 무언가의 영기는 어느 정도인지..." "아, 잠깐! 너 아까 내가 왜 이 주위에서 영기가 달아나지 않느냐고 물었 을때는 분명히 잘 모르겠다고 그랬잖아!" "아, 그냥 추측일 뿐이고 이유를 확실히 아는 건 아니라서 그렇게 대답했 다. 그냥 그럴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앞으로는 그냥 추측되는 거라도 말해도 돼" "새겨듣도록 하지" 지금같은 경우에도 보통 사람이 눈 똑바로 뜨고 방금전에 가람이가 말한 것처럼 말했다면 아마 나와 주먹다짐을 할 각오를 -물론 상대가 나와 주먹 다짐을 할 수준이 되는지를 먼저 파악한 뒤여야겠지만- 해야 할 것이다. 하 지만 가람이는 방금 전 '새겨듣도록 하지'라는 말에 '미안해, 앞으로는 잘 할게'라는 의미를 담아서 말했다. 아, 이거 미치겠군. 가람이에게 다시 '그 럴때는 '새겨 듣도록 하지'라는 말 대신 '앞으로 주의할게'같은 말을 써야 되는거야!'라고 말해줘야 하나? 에이, 관두자. 이런 일이 한두번 있는 것도 아니고 가람이의 저런 말투도 차차 나아지겠지. 저게 뭐 명령으로 고쳐지라 고 해서 고쳐질 성격의 것도 아니고 그런 걸로 일일히 훈계나 명령하기도 싫으니까 말이다. "그건 그렇고 그게 그렇게 대단해?" "어휴, 너는 정말 이 정도의 기운도 못 느끼겠단 말야?" "...어" "텃다, 텃어. 그래도 조금이나마 자질이 있다면 마음먹고 내가 기초적인 거라도 가르쳐 주려고 했는데... 이건 평범의 극을 달리니 원..." 요령이는 자신의 이마를 탁! 치며 말했다. 쳇, 그래, 유별나서 좋겠다. 뭐, 네가 불이나 바람을 마음대로 다루고 만화책이나 게임에서나 나올법한 마법을 펑펑 써대는 게 조금이라도 부러울 줄 아냐? 하나도 안 부럽다! ...사실은 약간, 아주 약간 부럽긴 하다... 뭐 그래도 그거 없다고 죽냐? ...죽을 뻔 했었지... 자꾸 왜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가냐? 죽을 뻔 한 것도 요령이 때문이었 다. 요령이를 안 만났다면 아예 저런 이상한 힘 따위는 쓸모가 없었다는 이 야기가 되겠지! 어쨌든 없다고 삶에 큰 지장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있으면 좋은거고 없으면 없는거지 뭐. 결국 네가 이상한 거라고! 눈 두개 달린 사 람들 사이에서는 눈 세개 달린 건 좋은게 아니라 이상한 거야! ......라고는 말해도 역시 부럽다... 하아. 어쨌든 이 주위에 있는 힘이 요령이가 그렇게 단지 모른다는 이유로 타박을 줄 정도로 엄청난 힘인가? 나야 느낌도 없지만 뭐 엄청나다니 믿어야지. 그건 그렇고 그 정도로 대단 한 힘을 뿜어내는 것이라면 나도 한 번 보고 싶어지는데. 하지만 진열대를 모두 뒤져도 안 나왔다고 했잖아. 그럼 없는거지, 뭐. 진열대 말고 다른곳 에도 무엇인가 있다면 몰라도... ...잠깐! 진열대에 있는 게 이 창고안에 있는 물품의 전부가 아니잖아? 진 열대 아래의 상자! 나는 재빨리 아까 가람이가 힘의 중심이라고 말한 곳, 즉 아까 가람이가 서 있던 곳의 바로 옆쪽 진열대로 달려가 진열대 아래에 놓여진 종이상자를 꺼내었다. "혹시 여기 있는거 아냐?" "아차! 그곳을 빼 놓았었군!" "맞다! 거기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꺼낸 상자는 그저 평범한, 슈퍼마켓 한 구석에 애물단지처럼 쌓여 있 는 걸 자주 몰 수 있는 골판지상자였고 상자의 전면에는 A4용지로 대강 휘 갈긴 듯한 '중국- 북경 4'라는 글자가 씌여 있었다. 아무래도 북경에서 나 온 물건들을 모아 놓은 상자 중 하나인가보다. 내가 상자 둘레를 대강 감아 놓은 청테이프를 뜯어내자 가람이와 요령이는 재빠르게 상자 주위로 붙더니 물건을 하나씩 꺼내 보기 시작했다. "분명히 영기의 농도가 갑자기 엄청나게 짙어졌어... 이 주위에 있는게 확 실해...!" 가람이와 요령이의 물건을 헤집는 손이 좀 더 빨라졌다. 하지만 상자가 바 닥을 드러낼 때까지 요령이나 가람이 중 무언가를 발견한 듯 표정이 변한 사람은 없었다. 내가 잘못 생각했나? 저 상자가 아닌가? 나한테 해가 오는 것은 하나도 없음에도 난 괜히 불안해졌다. 저러다 못 찾으면 어쩌지? 내가 까닭없이 전전긍긍하고 있을때, 마침내 요령이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찾았다!" 요령이가 꺼내어든 것- 그것은 이상한 문양이 새겨진 검붉게 녹이 슬어있는 둥근 패였다. 신비롭게 빛난다면 그나마 기대를 충족시켜주었을지도 모르지만 저 패는 안타깝게도 볼품없이 생긴데다 거무죽죽하게 녹까지 슬었고 게다가 군데군 데 약간씩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이그러진 곳까지 있어서 아마도 분명 외 관상으로 보기에도 눈에 확 들어올 것이라는 모두의 -혹은 나만의- 기대를 저버리고야 말았다. 저게 무슨 대단한 물건이라는 거야? 아무리 겉만 보고 는 모르는 법이라지만 저건 좀 심한걸. 인디아나 존스의 성배처럼 볼품없는 것이 사실은 진짜라는 말인가? 그런데, 가람이가 심상찮다. "저...저것은...혹시..." "야, 왜 그래?" "세발...까마귀의...패...?" 세 발 까마귀의 패? 그게 도대체 뭐야? "세 발 까마귀의 패라니?" "......으음......" 가람이는 별다른 말 없이 그저 놀란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으로 얼 굴을 감쌌다. "오, 맙소사. 저런 물건이 어떻게 여기에 있을수가 있지... 저런 신물이.. ." 뭐지? 도대체 뭐지? 가람이가 저렇게 놀란 표정을 짓는 일은 참으로 드물 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저러는 걸까? 저게 그토록 대단한 물건인가? "도대체 이게 뭐길래 그렇게 놀라는 거야!" "이건..." 차창 밖으로 흰 김이 엉겨 있다. 그리고 그 뿌연 유리창 너머로 희게 변한 산들이 흐릿하게 스쳐 지나간다. 난 서늘한 차창에 이마를 기대고 곁눈질로 창밖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다시 눈을 돌려 가람이가 '세 발 까마귀의 패'라고 일컬었던 패를 만지작거리는 요령이의 모습을 계속 응시하였다. "뭘 봐? 물건 관찰하는 사람 처음 봐?" 어이구, 한 번만이라도 곱게 대답해주면 입이 비뚤어지기라도 하냐? 나는 눈을 슬쩍 내리감으며 약간은 퉁명스럽게 쏘아주었다. "물건 관찰하는 고양이는 처음 보는 듯도 하다, 그러고 보니" "또 그 소리다, 또 그 소리" 요령이는 넌덜머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휘휘 내저으며 다시 세발 까마귀의 패를 햇볕에 비추어 보았다가, 다시 내려서 빙글 돌려 보았다가 하며 고개 를 갸우뚱거리다 다시 왼 손으로 툭툭 던졌다 받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 안에 그것이 봉인되어 있다는 말이지... 흠. 나야 뭐 알지도 못하는 것이니 넘어간다 쳐도 여기에서 느껴지는 힘은 확실히 내 호기심을 자극하 기에 충분하단 말야..." "괜히 함부로 건드리다 혼줄나지 말고 그냥 고이 모셔 놓으시지" 가람이가 충고했지만 요령이는 물론 언제나 그랬듯이 깔끔하게 가람이의 말을 무시했고 가람이도 언제나 그렇듯이 요령이가 자신의 말을 무시하든 무시하지 않든 신경 안 쓴다는 투로 별 표정의 변화없이 기차의 흐름에 부 드럽게 몸을 맡긴 채 편하게 앉아 있었다. "흐음...저런 게 어떻게 우리 집에 있었을까..." 내 고민에 가람이는 명쾌하게 답을 내렸다. "질문이라면 모르겠다고 답하지" "혼잣말이었어" "그런가... 내 생각이지만 주인은 너무 혼잣말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런가? 내가 혼잣말을 좋아한다고? ...으음. 내가 미친 사람도 아니고 벽 붙잡고 궁시렁거리는 것을 좋아한다는 말인가, 아니면 허공을 친구삼아 지 껄이는 것을 좋아한다는 말인가? 양자 모두 그렇게 마음에 들지는 않는데.. . 그냥 워낙 생각이 많아서 뇌로만 생각하기 힘들어 바깥에 생각을 풀어놓 는다고 좋게 생각하자. "난 내가 혼잣말이 많은지 잘 모르겠는데. 하긴 내가 나를 판단하는 것 만 큼 힘든일 도 없긴 하지. 네가 그렇다니 그런가보지, 뭐" 난 고개를 휘휘 저으며 다시 요령이가 만지작거리고 있는 세 발 까마귀의 패를 바라보았다. 오랜 풍파에 녹이 슬어서 검푸르게 변해버린 색. 작고 볼 품없는 생김새. 패 안에 조각되어 있는 세공 자체는 그 당시에는 참으로 정 교하고 아름다웠을테지만 이미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버려서 그 세공이 무 디어지는 바람에 지금은 겨우 새와 비슷한 어떤 형상임을 알아볼 수 있을 뿐이다. 저런 것이 그렇게 대단한 물건임이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다. 세발 까마귀의 패. 가람이의 말에 따르자면, 저건 옛날 하고도 아주 먼 옛 날, 그러니까 고조선시대에 환웅과 함께 이 땅에 내려왔다고 전해지는 삼 사, 즉 풍사, 우사, 운사들의 상징이었다고 한다. 셋 모두를 상징하는지, 아니면 셋 중 하나를 상징하는지, 셋 중 하나를 상징한다면 셋 중 누구를 상징하는지는 가람이도 모른다고 한다. 어쨌든 그 패에는 세 발 까마귀가 조각되어 있고 조각처럼 정말로 그 패 속에는 세 발 까마귀가 봉인되어 있 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난 문득 궁금해져서 이렇게 물어 보았었다. "세 발 까마귀가 뭐야?" "세 발 까마귀... 음. 뭐 봉황이라고 생각해도 좋고 주작이라고 생각해도 좋고 뭐라고 생각해도 좋아.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보였다고 하니까. 어 쨌든 전설의 새... 정도로 생각하는게 가장 무난하겠군" "그 이상의 설명은?" "내가 보지 않았으니 그 이상의 설명은 힘들지. 그냥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정도...일까" "엄청난 힘?" "음. 아무래도 신수니까" "신수라...신의 동물? 신같은 동물? 아니면..." "후자이지 싶다, 아무래도" "그래? 그런데 왜 그 세 발 까마귀라는게 이 조그만 패 안에 들어 있는거 냐?" "세 발 까마귀는 예전부터 조선의 조력자였다고 전해진다. 아마도 항시적 으로 조선을 돕기 위해 필요하면 언제든지 빠르게 나타날 수 있기 위해 일 부러 그 속에 들어가 있지 않았나 싶다. 아니면 힘의 상징으로서 들어가 있 었던지...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그런가... 그런데 너는 왜 이리 그런 이야기들을 잘 아냐?" "......우리 옛 주인이...... 한 때 세 발 까마귀의 패에 대해 연구한 적 이 있어서......" 옛 주인? 옛 주인이 누구더라... 하도 오랜만에 듣는 이야기라서 잘 모르 겠는데? 아! 요절했다던 그... "이상환...이었나, 이름이?" "맞아. 그 분은 어떻게든 자신의 수명을 연장해 보겠다며 여러가지 자료를 찾아 보다 우연히 세 발 까마귀의 패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한참을 고민하다 전국을 유람하며 패를 찾아볼 생각까지 하게 되지" "왜?" "세 발 까마귀의 어마어마한 기운이면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거나 몸을 건 강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하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결국 찾아내?" "아니. 시도조차 하지 않고 그만두셨다" "아니, 왜?" "...남의 힘이나 빌려서 목숨을 연장하려고 하는 짓이 너무 역겹게 느껴졌 다고 ...하시더군" 으음. 참. 가람이의 주인이었다는 그 사람도 성격이 똑바로 박히긴 진짜 똑바로 박혔었나보다. 하지만 옛 선비들이 다 그랬듯이 융통성은 없었지 않 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뭐 지금의 기준으로 생각하면 솔직히 상환이 한 짓 이란 바보같은 짓이다. 자신의 목숨을 늘릴 수 있다는데, 그렇게 평생의 소 원이 수명연장이었다면 그냥 눈 딱 감고 지금 저 요령이의 손에 쥐어져있는 저 패를 찾아보기라도 하는게 합리적인 선택 아니었을까? 결국 자신의 힘으 로는 아무것도 못 하고 죽었잖아. 하긴, 다르게 생각하면 그건 일종의 자신 에 대한 믿음, 혹은 자주적 인생관일지도 모르지만. 상환의 생각은 남의 힘 으로 자신의 평생을 구원받느니 그냥 죽더라도 자기가 끝까지 노력한다는, 뭐 그런 것 아니었을까. 그 사람을 만나본 적도 없는 나로서야 뭐 알 수 있 겠느냐마는 왠지 그런 생각이 든다. "흐음, 그래서 네가 그렇게 잘 아는거였구나. 그건 그렇다치고... 그럼 그 세 발 까마귀인지 네 발 까마귀인지 뭔지는 어떻게 보지? 봉인되어 있다며 ?" 내 말에 반응을 보인것은 가람이가 아니라 요령이었다. "맞아. 정말 어떻게 해야 세 발 까마귀를 볼 수 있는거지? 아니, 볼 수 있 는건 둘째치고 어떻게 교감이라도 할 수 없을까?" "힘을 가하면 무슨 반응이 일어나지 않을까..." 요령이는 가람이의 말에 가람이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확실한거야?" "확실하면 말꼬리를 흐렸을까" "흐음. 하지만 일리가 있는 말이네. 이 정도의 기덩어리라면 분명 힘을 가 하면 무슨 반응이 일어날거야. 에잇! 좋아. 한 번 해보지 뭐!" 난 기겁할 수 밖에 없었다. 달리는 기차의, 여러 사람이 앉아 있는 실내에 서 그런 짓을 하겠다고? "야! 너 설마 여기서 세 발 까마귀의 패에다 힘을 가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왜 아니겠어?" "으아악! 정말 너!" 요령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어휴, 농담이야, 농담. 난 장난도 못 하니? 내려서 집에 돌아가기 전에 학교가 하나 있잖아. 거기 운동장에서 뭘 하든 해보자" 하여튼 농담만 해도 사람 가슴 철렁하게하는 농담만 해요... 으으으. 나는 약간 골을 내며 요령이를 바라보았고 요령이는 생긋 웃었다. ...예뻐서 봐 줬다. 아무도 없는 초등학교 운동장에는 스산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지금이 낮 이었다면 이곳은 많은 아이들이 즐겁게 뛰어 노는 밝은 모습을 우리에게 보 여 주었겠지만, 지금은 한 밤중이고 그래서 학교의 모습은 심히 을씨년스러 웠다. 더군다나 이 학교는 얼마나 오랜 기간동안 손을 대지 않았는지 궁금 해질 정도로 낡아 있어서 그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더해준다. 창틀에는 곳 곳에 녹이 슬어있고 벽면에는 군데군데에 금이 가 있는 모습을 보자니 한숨 밖에 나오질 않는다. 도대체 학교측에서는, 아니 나라에서는 이런 환경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의 안전에는 신경이나 쓰는 걸까? 그러고보니 내 초등학교 도 이런 곳이었군. 여기 있는 아이들도 나처럼 밝게 자라주길. 아, 낯 간지 러워. "으, 추워" 요령이는 몸을 움츠리며 나지막하게 투덜대었고 그 때마다 입에서 하얀 김 이 새어나왔다. 쌓여 있는 눈과 비슷한 하얀 색. 그러고보면 겨울은 하얀 색의 계절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령이는 계속 종종 뛰며 손을 비비더니 나 를 보챈다. "빨리 빨리 뭐든 해보고 안 되면 가자. 추워 죽겠다" "음...어, 알았어" 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를 뒤적여서 세 발 까마귀의 패를 꺼내었다. "그런데 이걸 가지고 뭘 어쩌라는 거야?" "흐음...정말 뭘 어쩌지?" 요령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되물었다. 이런! 네가 모르면 나보고 어 쩌라는 거야! 나는 당황해서 무언가 되물으려 했지만 가람이가 먼저 입을 열어서 그만두었다. "아까 기차 안에서 한 말이 있지 않나" "기차 안에서? 뭐?" "힘를 가하면 무언가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까라고 말했었잖나, 네가. 네 가 그 말을 한 지 몇시간이나 되었다고 벌써 잊어버리나" "아차, 그랬지. 흐음...그건 그렇고 이 나라 말은 주어가 앞에 나와야 해. 도대체 네 문법은 왜 그렇게 어긋났냐?" "개성이려니 해 주길. 그건 그렇고 주인 춥겠다. 얼른 서둘러라" 가람이는 저런 말투를 자신의 특성이라서 어쩔 수 없이 쓰는 게 아니라 멋 있다고 생각해서 쓰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대화내용이었다. 그건 그렇고 요령이가 주어의 차례같은 어려운 것은 어디서 주워 들었을까? 요령이는 가람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무엇을 특별히 하지 않고 별 말 없이 계속 세 발 까마귀의 패를 바라보기만 한다. "무슨 문제있어?" "아니, 뭐 별로..." "그런데 왜 멍하니 서 있기만 해? 뭐든지 해 보아야 할 거 아냐" "어, 그냥 좀 불안해서..." "뭐가?" "이게 말이지... 힘을 가했다가 혹시나..." 요령이는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듯 나직하게 목소리를 내리깔고 눈빛을 이상 하게 바꾸고는 가만가만 말하다 갑자기 세발 까마귀의 패를 나에게 들이대 며 외쳤다. "펑!" "으아아악!" 깜짝 놀랐다! 나는 뒤로 휘청거리고 물러섰고 요령이는 그런 나를 한심하 다는 듯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나 무슨 '장난'이 걸려 있어서 괜히 힘을 가했다가 나쁜 일이라도 생길까봐 그런다. 그런데 너 너무 오버하는 거 아냐?" "으윽...너, 이...깜짝 놀랐잖아!" "어휴, 남자라는 녀석이 저렇게 소심해서야. 속이 터져 나갈듯이 답답하 다. 정말 너를 보고 있자면 한 마리 밴댕이를 보는 듯해서 내가 다 가슴이 아플 정도야. 그런 마음 가짐으로 세상을 어떻게..." "그 입 다물어!"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나...나, 난 아무 말 안 했는데" 물론 가람이가 한 말이다. 그리고 요령이는 잠시 가람이와 눈싸움을 하다 가 고개를 돌리며 한숨을 푹 쉬었다. "젠장, 저 녀석이야 원래 저런 녀석이니 내가 이해해야지. 하여튼 개란 종 족이란..." 그리고는 패를 고쳐잡으며 눈을 감는다. "이 추위에 벌벌 떠느니 뭐라도 해 봐야겠지. 자, 잠시만 모두들 물러서 있어" 곧 눈을 감으며 무엇인가를 중얼거리는 요령이. 그렇게 잠시 입술을 달싹 거리자 요령이의 전신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배어나오더니 조금씩 꿈틀대며 세 발 까마귀의 패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한다. 흰 눈에 가득 반사되는 달빛 과 어우러진 푸른 기운의 흐름. 꽤 몽환적인 모습이다. 그렇게 달빛과 때로 는 섞이며, 때로는 흩어지며 요령이의 몸을 감싸던 빛은 요령이의 손 끝으 로 점점 모인다... 점점... 점점... 그리고... -펑! "꺄악!" "뭐야!" 갑자기 요령이의 손에서 나지막한 폭발음이 나더니 요령이가 손을 감싸며 뒤로 펄쩍 뛰었다. 그리고 세 발 까마귀의 패는 허공으로 날아가더니 바닥 에 힘없이 떨어져 버렸다. 요령이는 손을 재빨리 눈 속에 파묻으며 이를 악 물었다. "아야! 뜨거워! 도대체 뭐야!" "괘...괜찮아?" "괜찮냐고? 왜 그렇게 쓸데없는 질문을 하니? 넌 지금 내가 괜찮은데 연기 하는 걸로 보이니? 젠장! 저거 도대체 뭐야!" 흠, 간단한 이야기지만 역시 요령이의 행동이 저 세 발 까마귀의 패의 일 종의 안전장치같은 것을 자극한 것이 아닐까. 뭐, 얘들이랑 같이 있다 보니 까 이제 이 정도는 대충 예측할 수 있다고. 요령이는 계속 손을 주무르며 비틀비틀 자세를 바로 잡더니 세 발 까마귀의 패를 노려보며 천천히 말했 다. "지...저분한..." "뭐?" "지...저분한 손 치워라..." "뭐라고 하는거야?" 요령이는 손을 계속 주무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지저분한 손 치워라'라는 말이 들리더라...힘을 가했을때. 으, 손이야. 데지는 않았겠지?" "윽...? 지저분한 손 치우라고...?" 하, 거 참 말 한 번 살벌하게 하네. 지저분한 손 치우라니. ...가 아니라. 목소리가 들렸다고? 어, 뭔가 이상하다...? 가람이도 요령이의 말에 의문점을 품었나보다. "지저분한 손을 치우라는 목소리가 들렸단 말이지. 흐음. 흥미...롭다고 해야 하나..." "흥미롭다라고 굳이 말한다면 그렇게 말할수도 있겠고" "결론은 둘 중 하나다. 무조건 어떤 자극이 오면 기계적으로 저런 반응이 흘러나온다거나" 요령이가 말을 이었다. "아니면... 어떤 자아를 지닌 주체가 내 행동에 대해 경고했다거나. 역시 흥미로워. 이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한 물건일수도 있겠는데!" "그래서? 대단하면 어쩔건데?" 내 물음에 요령이는 꽤나 활기차게 대답한다. "물론! 끝장을 볼 때 까지 계속 대화를 시도해 봐야지!" 도대체 뭘 끝장을 본다는 건지, 왜 대화를 시도한다는 건지 내 정신세계로 는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는다. 왜 건드리지 말라는데 계속 건드리고 그래? ...그 대답은 잠시 후에 나왔다. "무엇보다 이 진주같이 희고 아름다운 손을 지저분한 손이라고 표현한 것 은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어!" ...고작 그 이유 때문에, 설마 고작 그 이유 때문에 한 번 호되게 당해서 벌겋게 되어버린 손을 가지고 다시금 대화를 시도하겠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내가 데리고 사는 애완동물이 받들어 모셔야하는 공주 병의 소유자이기를 절대 원치 않는다. 그것도 진심으로. "미의 기준을 다시 세워줘야지! 흐으읍!" 계속해서 궁시렁거리며 힘을 모으는 요령이를 보면서 난 생각했다. '어쩌면... 내 가설이 맞는 걸지도 몰라...' "만약 대답을 한 것이 자아를 가진 주체라면 역시 아까 기차 안에서 네가 말했던 세 발 까마귀인지 네 발 까마귀인지하는 그것이겠지?" 요령이는 멀찌감치 튕겨나갔던 세 발 까마귀의 패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며 물었다. 세 발 까마귀에서 어떤 열기, 혹은 다른 기운이 뿜어져 나왔던 건 지는 도저히 나로서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어쨌든 세 발 까마귀가 떨어진 곳 아래쪽에 쌓여 있던 눈은 어느 새인가 녹아서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요령이의 손에서 벗어나서도 눈을 녹일 정도의 열을 가지고 있었다면 비록 잠시동안이기는 했지만 요령이의 손 안에서 기운을 뿜은 동안에는 얼마나 뜨거웠다는 소리일까? 가람이는 요령이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아마도" "좋아, 그럼 그냥 '야, 세 발 까마귀!' 라고 불러도 되겠네" ...상상도 못할 정도로 강하다며? 엄청나게 신성한 것이라며? 아까 너희들 이 나눈 신성하네 강하네 무섭네 어쩌네 저쩌네 등의 말들은 사실은 내가 잘못 들은 말이었던 거냐? 진정 그런 거였단 말이냐? 내가 내 귀의 성능을 상당히 의심하고 있는 동안 요령이는 세 발 까마귀의 패를 다시금 주워들고는 눈을 감았다. 곧 다시금 푸른 빛이 요령이의 몸을 잠시 휘감다 요령이의 손으로 조금씩 엉겨들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듯이 다시금 세 발 까마귀의 패에서는 바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열기와 빛이 뿜 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세 발 까마귀의 패는 아까처럼 폭발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내 생각이지만, 요령이가 어떤 힘으로 폭발을 잡아두고 있는 듯 했다. 그렇게 손 안에 빛과 열을 가둔채로 요령이 는 입을 열었다. "야, 세 발 까마귀- 듣고 있냐?" ...말하는 싸가지 봐라. 펑! 잠시 세 발 까마귀의 패는 웅웅거리며 떨기 시작했고, 마침내 요령이의 손에서 다시 세 발 까마귀의 패가 폭발했다. "으랏차차!" 폭발이 일어나자마자 요령이는 이상한 기합소리와 함께 재빠르게 뒤로 펄 쩍 물러나며 손을 눈 속에 파묻었다. 아무래도 뜨겁겠지. "괜찮냐?" "응, 손에 미리 대비를 해 두었더니 아까보다는 좀 낫네. 아, 젠장. 그건 그렇고 저 까마귀인지 뭔지, 성질 한 번 더럽네. 잠깐 말 좀 하자는데 그 새를 못 참고 난리를 치나. 아마 내가 손에 힘을 가해서 조금이라도 폭발을 잡아두고 있지 않았다면 아까처럼 손에 쥐자마자 터졌을걸. 사교성 있는 친 구라는 소리는 듣기 어렵겠는데? 조류계의 왕따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네" ...조류계라... 하긴... 새는 새니까... 그런데 그런 논리로 맞추자면 용 은 파충류계의 신인가...? 내가 잠시 아주 쓸데없는 고민에 막 빠져들려 할 때, 요령이가 다시금 손을 털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저런 친구가 사귀면 또 깊게 사귈 수 있어서 좋아요. 깔깔!" 비꼬긴. "그건 그렇고 세 발 까마귀가 뭐래? 아니, 저게 세 발 까마귀는 맞대?" "귀찮게 자꾸 부르지 말고 기분나쁘니까 그 더러운 손 좀 제발 치우라던 데. 결국 자기가 어떤 기계적인 음성이 아닌 세 발 까마귀임을 자기 스스로 인정한거지" 요령이는 다시 세 발 까마귀의 패를 주워들고는 힘을 모았고 아까와 비슷 한 광경이 내 눈에 들어왔다. 푸른 빛, 요령이의 손에서 빛나는 패. 요령이 는 다시금 말했다. "야, 잠깐 이야기 좀 하자-" 펑! 다시금 폭발이 일어났지만 요령이는 태연하게 잠시 손을 휙휙 휘두르 고는 이번에는 손을 눈에 파묻지도 않은채로 다시 패를 주워들었다. "뭐래?" "싫대" 짧은 대답과 함께 다시금 힘을 모으는 요령이. 잠시간의 섬광과 함께 다시 재빠르게 질문을 던진다. "도대체 나랑은 왜 이야기하면 안 되는건데?" 펑! "뭐래?" "더럽대" 다시 질문. "내가 왜 더러운데? 사람이 아니라서?" 펑! "뭐래?" "비슷하게 맞췄대" "비슷하다니? 사람이 아니라서 더러운게 아니야?" 펑! "뭐라냐?"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건 당연한 거고, 사람 중에서도 자 신의 수호민족의 피를 이어받은 자가 아니면 말 안 하겠다는데? 별 웃기는. .." 자신의 수호민족이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내가 막 얼굴에 의문부호를 하나 둘 빚어가고 있을 때 내 궁금증을 눈치챘는지 가람이가 날 보며 말했 다. "세 발 까마귀는 조선의 조력자였지. 물론 옛 조선을 말하는 것이다. 어쨌 든 그러니 그가 찾는 것은 옛 조선 사람의 피를 이어받은 자 쯤으로 해석하 면 되겠지..." "옛 조선 사람의 피를 이어받은 자...?" 참고로 우리나라 사람은 자신이 단일민족이라는 데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 고 그것은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말했다. "나도 되네?" 아차, 그러고보니 그렇군! 하면서 모두들 놀라주는 상황 따위는 애초부터 기대도 안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요령이의 저 한심하다는 눈빛은 정말이지 못 견디겠다. 그냥 콕 집어서 바보같다고 말을 해라. "에휴. 바보같으니..." ......그래, 아주 가슴에 비수를 꽂아라, 꽂아. "저기 저 패 안에 갖혀 있는 닭인지 까마귀인지가 잘 나가던 시절과 지금 이 얼마나 시간적 간격을 두고 있는지나 알아? 그 때는 저런게 하늘에 날아 다녀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던 시절이었지만 지금은 저런게 하늘에 날아다 닌다면 뉴스에 나올거야. 피를 이어받아? 웃기고 있네. 그 당시에는 민족이 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고, 있었다고 쳐도 지금 네 몸에 흐르는 피는 저 이 상한 새가 노닐던 하늘 아래 살던 사람들의 피가 수백번 뒤섞인 피라고. 알 아들어? 또 괜히 나서서 '내가 조선의 후예에요' 어쩌고 하지 말란 말이지" "아, 알았어...근데 너 디게 똑똑하다" "나이는 헛먹은게 아니거든" 요령이는 내 말에 씨익 웃으며 다시 패를 잡았다. "수호민족이라, 이미 당신이 지키던 나라는 멸망했고 그 후예를 자처하는 자들은 수천만이나 남아있지만 그들의 피는 그 때 당신이 지켜주던 자들의 몸을 흐르는 피가 아니에요. 알아들어요? 도대체 그 수호민족의 기준이 뭐 에요?" 펑! "이번엔 뭐라고 하니?" "나보고 멍청하대" "...왜?" "아버지는 자신의 피가 반만 섞인 아들을 자신의 자손으로 아무 거리낌없 이 생각하고 할아버지는 자신의 피가 반의 반만 섞인 손자를 당연히 자손으 로 받아들인다나? 비유도 이상하게 드네" 나는 요령이의 비유를 듣고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가 물었다. "...결국 아주 조금의 피라도 섞여있으면 된다는 거 아냐" 요령이는 고개를 젓더니 세 발 까마귀의 패를 쥐고는 대답했다. "그런가보지, 뭐. 으, 내가 잘못 생각했나? 어이, 이봐요. 피만 섞여 있으 면 되는 거에요?" 요령이는 힘을 가하며 대충 질문을 던졌고 곧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세 발 까마귀의 패는 다시 허공으로 튕겨져 날았다. "대답은?" "양자도 자손이래" 난 고개를 끄덕였다. 가문이 아래쪽으로 내려갈수록 시조의 피는 옅어지지 만 가문이 옅어지지는 않으며, 양자는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자신이 누구의 후손이라는 것을 확실히 인정한다면 자손으로 인정된다. 한 마디로... "......그냥 후계자면 다 된다는 거군" "그런 것 같아" 난 이번에도 아무 생각없이, 정말로 아무 생각없이 중얼거렸다. "나도 이야기 되겠네, 그럼" "응" 요령이는 내 말에 아무 생각없이 대답하는 듯 고개를 대강 끄덕이며 세 발 까마귀의 패를 나에게 건네었다. "...뭐 어쩌라고?" "말 걸라고" "...뭐?" 정말이지 나는 아주 가끔, '인생이란 참으로 황당한 요구에 화답할 것을 원한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그리고 누군가 내게 '그 경우가 어떤 경우입 니까?'라고 물으면 '아, 예. 잘은 모르겠지만 예를 들자면 어느 추운 겨울 날 한 고양이가 제 손에 말을 걸면 터지는 폭탄을 건네며 말을 걸어보라고 할 때쯤 되겠지요' 라고 대답할테다. 물론 그 누군가는 내 대답에 이런 반 응을 보이겠지. '미쳤군'. 그리고 그 말은 내가 요령이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완전히 미쳐 버렸어! 이건 도대체가 손도 댈 수 없을 정도야! 어떻게 저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만 늘어놓을 수 있지?" 요령이는 내 반응에 눈을 낮추고 입술은 좀 삐죽 내밀고 얼굴 근육을 좀 팽팽하게 잡아 당기는, 즉 쉽게 말해서 '이죽대는' 표정을 지으며, 약간은 부정확하고 뒤틀린, 즉 쉽게 말해서 '비꼬는' 발음으로 말했다. "에에엑-. '미쳤어, 미쳤어. 완전히 미쳐 버렸어...' 좋아하네. 내가 뭐 못할 짓 시켰냐? 방금 전에 네가 네 입으로 말했잖아. 너는 이 패를 쥐고 세 발 까마귀인지 뭔지 하는 속 좁은 새한테 말을 걸 수 있는 자격이 있다 고 말야. 그리고 그런 네 생각은 비록 황당하긴 하지만, 세 발 까마귀의 반 응으로 봐서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 한 마디로 네가 세 발 까마귀에게 말 을 건다 해도 이 세 발 까마귀가 나에게 한 것처럼 힘을 폭발시킨다거나 하 는 등의 히스테릭한 반응은 보이지 않을거란 이야기지. 그런데 도대체 뭐가 마음에 걸려서 말도 안 된다는 둥, 미쳤다는 둥, 과민반응을 하고 그러냐?" 아무리 그런 식으로 나와도 내게도 이번에는 할 말이 있고 논리적인 근거 가 있다! 안 되는 건 안 되는거야! 하긴, 언제는 내가 할 말이 없고 논리적 인 근거가 밀려서 요령이에게 언제나 졌냐고 물어보면 할 말이 없긴 하지 만...그래도 이번에는 절대 그냥 물러서 줄 수가 없다고! 나는 약간 흥분해 서 목소리를 높이며 대답했다. "야, 너 같은 경우는 손에서 불이 확 나더라도 네 이상한 힘으로 찍어누를 수가 있지. 상처 하나 안 입는다고. 하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어떨까? 아마 내 손에서 아까 네 손에서 일어난 것 같은 폭발이 일어난다면 내 손은 누더 기처럼 너덜너덜해지거나 숯덩이처럼 까맣게 타 버릴거야. 만약에 내가 그 패를 쥐고 말을 걸었는데 '그 더러운 손 치워라'는 말을 듣는다면? 경고를 듣고 나서 '아차차!'라고 생각해봤자 내 손에서는 이미 폭발이 일어난 후일 테고 나는 새까맣게 타서 부서져버린 손으로 머리나 벅벅 긁으면서 '안 되 나보네'라고 말하면서 바보처럼 '헤~'하고 웃는 수밖에는 별 수가 없겠지. 싫어, 싫어, 싫어, 싫어, 그런 건 절대 싫어! 내 경고해 두는데..." "으이그!" 요령이는 내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내 손을 덥썩 잡는 것으로 내 입을 막았다. 앗!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는 아니구나. 어쨌든 갑자기 왜 손은 잡고 그러지? 내 의구심은 잠시 후에 풀렸다. 요령이의 손에서 푸른 빛이 뿜어져나오기 시작했고 요령이는 그 손으로 내 손과 팔을 스윽 훑었다. 그리고 곧 이상하 게도 차가운 느낌과 함께 내 손과 팔에서 빛이 뿜어져나오기 시작했다. "어어? 이거 뭐야?" 이게 뭐냐고 반문하기는 했지만, 대충 무엇인지 알 것 같긴 하다. 보나마 나 혹시 모를 폭발로부터 내 손을 보호해 줄 보호막 같은 것이겠지. "힘으로 살짝 감싸 놓았어. 보호막 같은 거니까..." 음. 역시 나의 통찰력이란 대단해. "...이제 '이게 손에서 터지면 어쩌나'하는 눈으로 멀뚱 멀뚱 세 발 까마 귀의 패만 보고 있지 말고 어서 그 속에 틀어박혀 있는 세 발 까마귀에게 말을 걸어 보라고" 요령이의 말을 들은 후에도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지만, 뭐 할 수 있나. 요령이가 이렇게 손에 술법까지 걸어 주었는데, 해 봐야지. "좋아! 그럼 어디 한 번... 이 아니라 말을 걸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 "그냥 눈을 딱 감고 손에 힘을 꽉 줘. 그리고 네 몸의 힘이 손에 집중된다 고 생각해" "그거면 돼?" "아마도" 생각보다 쉽군 그래. 난 눈을 감고 힘을 주어 세 발 까마귀의 패를 꽈악 쥐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생각해보니 내가 지금 이 짓거리를 왜 하고 있나. 왜 하고 있었지? 음, 단지 호기심 때문이었군. 뭔가 신기한 물건에 대한 호기심. 그런데 난 별로 안 궁금한데, 그냥 지금이라도 그만두면 안 될까. 에이, 이제와서 그게 무 슨 소리야. 그런데 이 안에는 정말 뭐가 있을까. 아니, 무엇인가가 있긴 있 을까. 만약 무엇인가가 말을 건다면 난 무엇을 해야 할까?설마 얼빠지게 ' 안녕하세요?'따위로 대답하진 않겠지' -무슨 생각을 그렇게 많이 하는가. 우왓! 정말로 무엇인가가 말을 걸잖아! 자, 잠깐, 이럴때일수록 침착하게 대응하자! "아, 저... 안녕하세요?" ...음, 자주 떠오르던 '내가 얼빠졌던가?'라는 질문은 이로써 해결된 셈이 로군. 난 얼빠진 놈이었어. 젠장. -나름대로 안녕한 편이지. 아까 누군가가 계속해서 말을 걸어 조금 귀찮긴 했지만... 그러고보니 방금전의 그 대화도 참으로 오래간만의 대화였군. 그 대화의 주체가 더럽지만 않았더라면 꽤 즐거운 대화가 될 수도 있었을 듯 했지만. 그건 그렇고 자네의 손은 더럽지 않군. 잘 되었어. 이야기가 되겠 는걸. "아...이야기가 되겠다니 감사한데...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먼저 해야할 지...음..." 나는 참으로 내가 생각하게도 불쌍해 보일 정도로 당황해 버렸다. 요령이 는 만약 이야기가 되면 뭘 어떻게 하라는 대화 지침을 전혀 알려주지 않았 던 것이다! 한 마디로, '제기랄, 나보고 뭘 어쩌라고?' 내가 당황해서 '에...어...저기...그게...'만 반복하고 있을 때였다. -이런, 이런. 안 되겠군... 할 말이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아, 아닙니다. 할 말은 많은데... 저...일단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할지. .." 요령이가 내 어깨를 짚으며 나직하게, 그러나 단어마다 힘을 주어 말했다. "일단 세 발 까마귀가 맞냐고 물어봐. 그리고 좀! 제발, 당황하지 좀 마!" 난 고개를 끄덕이고는 세 발 까마귀의 패를 쥔 손에 반사적으로 힘을 꽉 주며 물었다. "저기... 당신이... 그... 뭐라고 해야 하나... 거 참... 저기... 당신이. .." 으, 미치겠다! 왜 이런 쉬운 질문조차 못 하는 거야! 나는 잠시 내 자신을 질책한 다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당신이 세 발 까마귀가 맞습니까?" 대답은 빨랐다. -잘 아는군. 내가 바로 세 발 까마귀일세. 어떤 식으로 놀라야 효과적일까? "아, 예. 그러셨군요. 하하..." 가장 효과적으로 보였을런지는 미지수이지만, 가장 바보스럽게 보였을 가 능성은 많다는 사실이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무엇이 그리 재미있어 그리 웃는가. "아, 예... 그게..." 아니, 세 발 까마귀님(왠지 '님'자를 붙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 이 들어버렸다... 그렇다, 무의식중으로 난 이 알지 못할것에 위압감을 느 껴버린 것 같다).무안해서 웃어넘기려고 짓는 억지웃음에 그런 식으로 반응 하시면 제가 또 당황해 버리지요.어쨌든 나는 그런 세 발 까마귀의 반응에 순간 당황하여 다시금 웃음으로 넘기려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별로 딱히 재미있는 건 아닌데요, 하하..." -우스운 청년이군.이보게, 젊은이. 웃음이 많은 것은 좋지만 너무 웃음이 헤프면 실없다는 소리를 듣는다네.이것은 내가 자네에게 충심으로 하는 충 고라네. "예...충고 감사합니다. 하하하..." 내 세번째의 바보같은 행동에 그만 세 발 까마귀의 패마저도 허허 웃어버 리고 말았다. -허허... 이거 내가 아무래도 패의 주인 될 자를 완전히 잘못 만난 것 같 군. 그리고, 정말 당연한 소리지만, 난 경악해 버렸다. 무슨 소리야? 패의 주인 될 자라니? 난 방금 전에 혹시 나 내가 잘못 들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를 담고 다시금 패를 향해 물어봤다. "...실례지만 지금 뭐라고 하셨는지 한 번만 더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패의 주인 될 자를 잘못 만났다고 했네. 왜, 내가 한 말이 너무 심했는가 ? 그렇다면 사과하지. 하지만 나는 지금껏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는데에는 익숙치가 않다네. 나는 고개까지 크게 가로저으며 급히 물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방금 패의 주인 될 자라고 하셨습니까?" 그리고 패 반대쪽에서 약간은 의아한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그렇다네. 그런데 왜? 뭐가 잘못되었는가? 오히려 저쪽에서 뭐가 잘못되었냐고 물어보는데야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 다. 나는 잠시금 어안히 벙벙한 채로 머리를 짚고 있다가 조용히 말했다. 속으로는 '그럼! 당연하지! 완전히 잘못됐지! 주인은 무슨 주인이야! 이젠 주인의 주자만 들어도 지긋지긋하다고!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거냐! 밑도 끝도 없이 패의 주인이라니,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을 하는 최소한의 노력 은 있어야 할 것 아니냐! 갑작스럽게 그렇게 말해버리면 내가 당신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란 말이야, 도대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버려주고 싶 었지만 나는 세 발 까마귀라는 존재에게 약간의 위엄과 심리적 위압감을 느 끼고 있었기에 차마 그렇게 말하지는 못하고 그저 최대한 조용하고 정중하 게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조금요. 아주 조금...잘못된 게 있는 것 같습니다만"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차분히...차분히. 의아한 것들을 차분히 하나씩 물어봐 주자. 어차피 시간 은 많지 않은가. "제가 왜 패의 주인입니까?" -이 패를 지금 누가 가지고 있는가? 이런 바보같은 반문이 있나. 하지만 이런 당연하고도 짧은 질문이 상대방 의 허를 찌르는데는 가장 무서운 법이다. 의도적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모 르겠지만, 세 발 까마귀의 질문은 그대로 나의 허를 찔러버렸다. 나는 약간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저...입니다만" -그러니 자네가 주인이지. 나로 하여금 너무도 당연해서 아이들의 농담같 은 소리를 더 이상 주워담지 않게 하게. 말할 뻔했다. 순간적으로 세 발 까마귀의 말에 수긍하고 '아, 예.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라고 말해버릴 뻔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말해버리 기 직전에 간신히 다시 한 번 바보가 되어버리려는 자신을 제어할 수 있었 다. 후우, 다행이야. 난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고는 세 발 까마귀의 논리 의 허점을 찾으려 노력했다. "그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무엇이 말이 되지 않는다는 말인가? "제 손에 쥐어져 있다고 제가 주인이라니오. 그렇다면 제가 친구의 금덩이 를 손에 쥐었다면 그것이 제 것이라는 말입니까? 세 발 까마귀님의 말씀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현 위치와 소유권은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아아, 논리적이야, 난 너무도 논리적이야! 정말 나의 논리성은 가끔가다 문득문득 소름이 끼칠 정도로 대단해! 나는 약간의 자아도취를 느끼며, 그 러나 차분히 세 발 까마귀에게 내가 생각해도 괜찮다 싶을 정도로 날카롭게 질문했다. 그러나 세 발 까마귀라는 목소리는 여유롭게 내 질문을 받아 넘 겼다. -자네가 든 예야말로 이치에 맞지 앉는 예일세. 자네가 방금 든 예에서 그 금덩이는 소유주가 누구인지 분명히 정해져 있었지. 그러나 나의 경우, 아 니, 정확히 말하면 내가 깃들여 있는 이 패의 경우, 현재 주인이 없다네. 자네가 길에서 주운 주인 없는 금덩이를 자네가 가진다고 해서 자네를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아니, 길에서 주운 금덩이는 주인이 있을지도 모르지 만 현재 자네의 경우에서는 내가 단정할 수 있다네. 내가 깃들어 있는 이 패에는 현재 '주인이 없다네'. 노, 논리 정연하다... 무섭도록... 젠장. 하지만 난 조금의 헛점이라도 잡 기 위해 발버둥을 치며 힘들게 말을 꺼냈다. 젠장! 젠장! 젠장! 이제 무엇 인가의 주인을 한다는 것은 지겹단 말이다! 게다가 그게 지금까지와는 다르 게 나를 완전히 압도해 버리는 당신 같은 경우라면 더더욱 안 돼! 안 할거 야! 못 해! 둘로도 벅차다고! 더구나 나는 아직 내가 왜 주인이 되어야 하 는지, 주인이 되면 뭐가 어떻게 되는지, 그런 것들에 대한 설명을 듣지 못 했단 말야! 이해할 수 있게 설명을 해 보라고, 설명을! "하, 하지만... 그런 경우 그 금덩이를 가질지 말지는 주인의 마음 아닙니 까? 소유를 강요받지는 않지 않습니까..." 내 말에 세 발 까마귀는 다시금 너무도 간단하게 대답해버렸다. -누가 뭐라고 했나? 자네 말이 맞네. 자네가 이 패의 주인이 하기 싫다면 안 해 버리면 그만이야. 당연한 거 아닌가? 덕분에 나는 다시 한 번 크게 당황해버리고야 말았다. "하, 하지만 아까 분명히 패의 주인될 자라고..." 그리고 세 발 까마귀의 패는 웃어버렸다. -허허, 내가 그렇게 말했던가? 실수했군. 알겠네, 정확히 정정해주지. '패 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자' 라고 말야. 이제 되었는가? 나는 자네가 이 패를 쥐고 있길래 당연히 이 패를 가지려고 하는 줄 알았다네. 내가 넘겨짚어 버 린 셈이군. 너무도 쉽게 내 말에 대해 긍정해버리는 모습에 난 도대체 몇 번째인지도 모를 당황을 또 해버리고야 말았다. "아... 예... 그렇습니다만..." -그런데... 마치 내게는 자네가 세 발 까마귀의 패의 주인이 되기를 싫어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구먼... 내가 잘못 느꼈는가?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어...저... 아, 뭐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역시 불안한 마음이 강한 것 도 사실입니다..." -그런가. 내가 깃들여 있는 이 패를 가지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은 그렇게 흔치 않았는데, 자네는 조금 특이한 경우로군. 그래, 무엇이 그리 불안한가 ?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 불안합니다" -아무것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다라? 난 세 발 까마귀가 볼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고개를 끄덕여 긍정의 뜻 을 표시하며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저는 왜 제가 세 발 까마귀의 패를 가질 수 있는지, 이 패의 주인이 되면 제게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그리고 갑작스레 아무런 요 구도 없이 왜 당신이 제게 주인이 되어달라고 하는지, 그 모든 것이 너무도 혼란스럽습니다. 무엇보다 지금의 상황 자체가 너무 당황스러운 상황 아닙 니까?" 이 정도면 차분하게 말한 거 맞지? 이제 세 발 까마귀가 대답할 차례다. -그래. 내가 너무 성급했군. 인정하네. 그럼 일단 자네의 의문점을 하나씩 답해줄테니 그 후에 마음을 정하도록 하시게. 일단 첫 번째 질문이 왜 자네 가 세 발 까마귀의 패를 가질 수 있는가하는 것이었지. 그 이유는 아주 쉽 다네. 나와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자는 누구든지 패를 가질 수 있는 자 격 또한 가지고 있는 것이 된다네. 그런건가. 이 패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땅에 사는 사람... 이지. 그렇군. 그럼 나는 주인될 자격이 있는 거로군. 하지만 아직 궁금한 것은 너무도 많다. "그럼 두 번째 질문입니다. 왜 당신은 갑작스레 제게 주인이 되어 달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리고 세 발 까마귀는 그 말에 크게 웃었다. -하하하! 내가 언제 그랬는가? 난 자네에게 주인이 되어 달라고 한 적이 없네. "하, 하지만 아까 분명히..." -말했잖은가. 그것은 말의 실수였다고. 난 자네에게 내가 깃들인 패의 주 인이 되어 달라고 한 적이 없네. 단지 자네에게 그럴 수 있는 자격이 있다 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지. 난 주인을 선택할 권리가 없거든. 주인은 나를 선택할 권리가 있지만. 나는 단지 자네에게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알려준 것이지 '소유를 강요한 것'은 아니라네. 이와 비슷한 대화를 방금전 에도 하지 않았었나? 난 특별히 자네가 이 패의 주인이 되길 바라지 않는다 네. 자네 맘대로 하게. 갖고 싶으면 갖고,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두게. 그러니까 세 발 까마귀도 내가 자신의 주인이 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는 말이지. 아니, 정확히 말하면 무관심하다는 쪽이 더 맞는 표현인가? "그럼 당신의 주인이 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제겐 어떠한 변화가 생기 는 겁니까?" 그런데 세 발 까마귀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딱딱하고 엄했다. -내 주인이라니? 감히 누가 내 주인이 되는가? 갑자기 왜 이런 반응이? 나는 할아버지에게 야단맞는 손자처럼 약간 목소 리를 떨며 불안하게 대답했다. "하, 하지만 지금껏 계속 주인이 되라고..." 내가 더듬더듬 말을 이어나가자 듣기 답답했는지 세 발 까마귀는 내 말을 자르며 말했다. -패의 주인이라고 했지 나의 주인이라고 한 적 없네. 이 패를 가지게 되는 것이지 나를 가지게 되는 것이네. 누구라도 나를 가질 수는 없네! "그, 그렇군요...알겠습니다" 당황해버린 나는 급히 대답한 후, 갑자기 떠오른 의문점을 다시 질문했다. "그렇다면, 패를 가지는 것이 당신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면, 이 패의 주인이 되면 제게 있어 무엇이 달라지는 것입니까?" -흠...달라진다라. 무엇이 달라지느냔 말이지. 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군. "......" -내가 그대의 수호신이 된다네. "예?" -내가 그대의 조력자가 된다는 뜻일세. 내 힘 닿는데까지 자네를 보호하겠 다는 의미이지. "그...그런...왜..." -내 사명이니까. "사명...이오?" -그렇네. 사명이지. 내가 처음 자아를 가지고 이 패 안의 자신을 발견한 것은 수 천 년 전일세.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는 나도 정확히 알 수 없지. 나 를 만든 것은 삼사, 즉 풍사, 우사, 운사들이었네. 그게 몇 대째의 단군에 의 일이었는지, 어느 정도때의 일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네. 나는 바깥세상 의 일을 잘 알지 못하거든. 하지만, 확실한 것은 내가 처음에 삼사의 종으 로 쓰이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일세. 삼사의 종이라고? 방금 전에는 누구도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없다고 했잖아 ? -하지만 나를 만든 후 삼사들은 깨달았다네. 내가 그들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크고 강한 존재임을 말일세. 나는 너무도 강렬한 자아를 지니고 있었 고, 그랬기에 그들은 자신들을 나의 주인으로 인식시키지 못했네. 그러나 창조자의 권위와 강한 주술력을 동원하여, 나에게 숙명을 씌우는데에는 성 공했지. 그것이 '도우라'는 숙명일세. "도우...라구요?" -그렇다네. 조력. 정확히 말하자면 '그대는 절대적으로 패의 주인을 도우 라' "......"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자신들을 돕기 위해 만들었다면 처음부터 '삼사를 도우라'고 했으면 되었을 것을 왜 굳이 '패의 주인을 도우라'고 했을까? 내 가 의문 가득한 얼굴이 되어 아무 말이 없자, 패에서 싱긋 웃는것과 비슷한 소리가 나더니 곧 내 마음속에서 세 발 까마귀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세 발 까마귀의 패는 삼사를 상징하지. 삼사가 세 발 까마귀의 패를 가지 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 발 까마귀의 패의 주인이 삼사의 지위를 가지게 되는 것이라네. 즉, '패의 주인을 도우라'는 '삼사의 주인을 도우라'는 말 과 정확히 같은 말인 셈이지. 오늘 정말 많이 놀라는데. 하나, 둘, 셋하고 소리질러야지. 하나, "에에엑?" 좀 많이 놀랐었나보군. -왜 그리 이상한 소리를 내고 그러는가. "그런 말... 안 하셨잖습니까? 세 발 까마귀의 패를 가지게 되는 자가 삼 사가 된다니오?" -천천히 말하려고 했다네. 성격이 느긋한 편은 못 되는군. 세 발 까마귀는 내가 놀라서 펄쩍 뛰던 말던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여유롭 게 대답했다. 하지만 나한테는 그리 여유로운 대답을 들을만한 마음이 들지 않는걸. 자꾸 아까부터 세 발 까마귀의 패가 나를 기만하려 한다는 느낌이 드는것은 왜일까? 아니, 기만한다기보다는 약간 가지고 노는듯하다는 느낌 이다. 단지 세 발 까마귀가 사람을 다루는데 능숙해서 그런 것일 뿐일까? 나는 다시 물었다. "...다음부터는 그런 중요한 사실은 빨리 말해주시길 바래도 되겠죠" -알았네. <고양이> "그럼... 정리하자면, 내가 세 발 까마귀의 패를 가지면, 당신은 나를 무 조건적으로 돕고,그 대신 나는 자동적으로 삼사중의 한 명이 된다, 뭐 그런 이이야기입니까?" -비슷하네. 나는 자네가 꼭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될때만 돕네. 하지만 자네가 마음속으로 도움을 요청하면 대부분의 경우에는 도와주지. 그리고 자네는 풍사의 후계자가 된다네. "아, 삼사중의 풍사라... 당신이 풍사를 상징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운 사나 우사를 상징하는 패도 세상에 존재하겠군요?" -그렇다네. 원래는 세상에 풍사, 우사, 운사의 패 이렇게 세 개의 패가 존 재했었지.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우사와 운사의 패와의 교감이 끊어졌다네. 패가 파괴되었거나 숙명이 끊어졌거나 사라졌거나, 여러가지 가능성이 있겠 지만 어쨌든 그래서 이제 내 생각엔 남은 것은 나 하나 뿐인것 같다네. 그런가. 세상에는 풍사 하나만이 남았다는 거로군. 그런데 이거 왠지 흐름 이 뻔한데. 이제 내가 '제가 풍사가 되면 무엇이 달라집니까?'라고 물으면 '자네는 이제 풍사가 되면 바람의 힘을 다룰 수 있게 된다네. 그 대신 숙명 을 짊어지게 된다네' 따위의 뻔한 이야기가 오고 가겠지. 안 해. 그런 것 따위. "풍사가 되면 제게 생기는 변화가 있나요? 설마 이름뿐인, 혹은 상징뿐인 그 무엇인가요?" -그렇지 않네. 풍사는 말 그대로 바람의 주관자이지. 자네는 바람을 자유 롭게 다룰 수 있다네. 물론, 자네의 영적 능력의 그릇의 크기만큼만 다룰 수 있긴 하지만 말일세. 내 보아하니 자네도 상당하군. 난 상당하다는 그 말의 의미에 약간 놀라 되물었다. 요령이나 가람이는 내 가 영적 자질이 거의 없는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는데? "상당하다니오?" -상당히 영적으로 둔하군. 자질이 거의 없다시피한데. 이런 상태로는 풍사 가 되어봤자 큰 힘은 못 쓰겠군. "으윽...그, 그렇군요. 어쨌든 풍사가 되면 바람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게 된다는 겁니까? 그럼 그 댓가는요? 그 댓가로 나는 무엇인가를 해야 되는 거겠지요?" 그런데 세 발 까마귀의 대답이 의외였다. -전혀. "전혀...라구요?" -그래. 자네는 그냥 힘만 얻을 뿐, 뭐 자네가 무엇인가를 해결해야 한다거 나 무엇을 해야 한다거나 할 필요는 없네. 원래 삼사는 조선을 위해 일하지 만 조선은 이미 까마득한 옛날에 멸망해 버렸으니. 사실은 그 때 삼사라는 것도 사라져 버렸어야 했지만 상징이 남아 버렸으니... 어쨌든, 자네보고 이미 망해버린 나라를 위해 일하라고 할 생각은 전혀 없네. 말 그대로 이름 뿐인, 일이 없는 직책이라고 할 수 있지. 그...그런, 그렇게 되어버리나? 하긴, 세 발 까마귀의 말도 일리는 있긴 하지. 조선시대(세 발 까마귀가 있던 고조선이 아닌 조선시대)의 양반들 중 아직도 살아있는 사람이 많지만 그 사람들은 현재의 사회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못하잖아. 결국 옛날의 상징이 그대로 남아서 생겨버린 모순이란 말 인가. 일견 수긍이 가는 말이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거 괜찮 은데. 지금 내 손에 쥔 이 패의 주인이 되면, 세 발 까마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뿐더러 바람까지 부릴 수 있다는 말이잖아. 어휴, 이거 갈등이 마 구 생기네. 나는 잠시 머리를 숙이며 고민했다. 그렇게 머리를 숙여 고민하 다보니 내가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지 않았다는 것이 생각났다. 나는 고개를 번적 들었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물어보게. "당신은 무엇입니까?" -세 발 까마귀라네. ...왠지 사람이 바보가 되어버리는 것 같은 느낌인데. 으윽. 난 잠시 입 속에 마구 맴도는 수십 가지의 다른 뜻을 가진 말들을 수습하고 그 중의 하 나를 꺼내어 물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주십시오" -세 발 까마귀. 아까도 말했듯이 삼사의 조력자이며 정확히 말하면 까마귀 는 아니니 '새의 형상을 한 영적 존재'쯤으로 생각하게. 주인이 없을 경우 에는 난 봉인된 채로 내 힘을 자유롭게 쓸 수 있기에 가끔씩 누군가를 지켜 주며 소일을 보내곤 했고, 그것들은 하나 둘 씩 전설에 남게 되었다네. 그 래서 지금은 나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지. 자네가 알고 있는, 모든 새와 관 련된 전설속의 동물을 생각하게. 그 모두가 나이니. 조선의 상징 세 발 까 마귀, 중국에서 말하는 대붕, 왕가의 수호새였던 봉황, 마을 사람들을 역병 과 재앙에서 지켰던 세머리독수리, 황해도 하늘을 휘감으며 곰의 간을 쪼아 먹는다는 장산곶매, 그 모두가 나일세. 어느정도는 대답이 되었는가? 으음, 들어본 것도 있고 못 들어본 것도 있는데. -뭐 더 궁금한 것은 있는가. "아...됐습니다. 이제 이 정도면 별로 궁금한 것은 없습니다. 앞으로 궁금 증이 생긴다면 몰라도 일단 가지고 있는 궁금증은 거의 모두 해결된 것 같 군요. 그럼 선택할 시간인가요" 선택. 이 패를 가지고 삼사가 되어 바람을 부릴 수 있는 힘과 강력한 영적 능력 을 지닌 조력자를 얻을 것인가. 아니면, 안 그래도 약간은 어긋난 버린 인 생, 괜히 엇나가는 짓 하지 말고 조용히 살 것인가. 생각할 것도 없잖아. 그냥 평범하게 살아버려! 젠장. 매일 투덜거렸잖아. 요령이와 가람이를 만난 후로 조금은 어긋나 버린 내 운명에 대해 얼마나 불평했었어? 지금은 그때와는 달리 선택의 기회가 있잖아. 거절해버려. 하지만... 내가 평생 다시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는 기회. 언제나 요령이와 가람이 를 부러워하면서 정작 기회가 왔을때는 그 기회를 날리겠다는 거야? 무엇보 다, 바람의 힘을 부린다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하지도 않아? 어느 쪽으로 할까. 어느 쪽으로... 사실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나는 잠시 관자놀이 주위를 살짝 짓눌러 약간 씩 무거워지는 머리에 자극을 준 후 입을 열었다. "선택했습니다" -그래? 어느 쪽인가? 머뭇거릴 것 없어. 확실하게 대답하자. "세 발 까마귀의 패를 갖겠습니다" 그래. 손해볼 것은 없다잖아. 나도 바람의 힘을 부리고 싶다고. 삼사인지 무엇인지가 되고 싶다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현재까지 어떠한 조짐도 보이진 않지만, 요령이는 분명히 쫓기고 있다. 세 발 까마귀는 분명히 내가 패의 주인이 되면 나를 도와준다고, 그리고 지켜준다고 했다. 만약 요령이가 퀴에르가 보낸 이들에게 습격이라도 당한 다면, 그렇다면 요령이와 언제나 함께 다니는 나도 공격받을 것이다. 세 발 까마귀는 분명 나를 지켜준다고 했으니 어쩔 수 없이 요령이를 데려가러 온 그들과 싸워야겠지. 그렇다면 저번의 혜진과 같은 상황에서 분명히 든든한 우군이 되어줄 수 있겠지. 오히려 감사하고 싶을 정도인데, 이런 기회가 온 것에 대해. 요령이와 가 람이는 분명히 세 발 까마귀의 존재감에 거의 경악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놀 랐었다고. 그렇다면 세 발 까마귀가 그 정도로 강하다는 뜻이잖아? 이런 존 재가 우리를 보호해준다면 마음을 좀 놓아도 될 것이다. -좋아...분명히 가지겠다고 했다. "그렇습니다" 갑자기 세 발 까마귀의 패에서 진한 자주색의 빛이 뿜어져나왔다. 강렬한, 너무나도 강렬한 빛. 그러나 그 빛은 신기하게도 눈부시진 않았고 덕분에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로 그 빛을 바라볼 수 있었다. -파아앗! 빛줄기들과 함께 진한 자주색의 기운이 이 주위를 온통 뒤덮고 소용돌이치 며 한 덩어리로 뭉치더니 어떠한 형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이건 대체..." 내가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요령이가 숨막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엄청난...엄청난 기운이다..." "파악조차 하기 힘들 정도의 크기... 정말 어마어마하군..." "그런데...저게...갑자기 왜 패 속에서 튀어 나온거지...?" 가람이의 주먹이 불끈 쥐어져 있었다. 긴장하고 있다는 소리이다. 뭐지? 내가 위축되어버린 듯 긴장하는 둘을 바라보면서 식은땀을 한 두 방울정도 흘릴 때, 어디에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바라보게. 목소리가 나는 쪽에는 어떠한 커다란 형상이 진홍빛 속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세 발 까마귀로군. 나는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정중히 물었다. "세 발 까마귀입니까" -그렇다네. 대답과 함께 '그것'은 날개를 크게 펼쳐서 몇 번 펄럭였다. 그러자 다시 한 번 광휘가 우리에게로 뿜어져 나왔다. 날개? 날개가 맞나? 형상 전체가 흐릿하게 보여서 무엇인지 정확히는 알아보기 힘든데. 하지만 저 얇고 넓은 두 장의 무엇을 날개라는 단어가 아닌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러고 보면 확실히 까마귀는 아니다. 일단 크기가 훨씬 차이가 난다. 저건 거의 사람과 같은 크기이다. 일렁이는 자주색 기운들은 마치 깃털처럼 보였다. 그것도 억세고 거친 깃털. 가슴은 독수리처럼 당당하게 쫘악 펴져 있다. 날 개는 위엄있게 펄럭있다. 가슴에서 이어지는 부드럽게 휜 긴 목의 끝에는 작은 머리와 뾰족한 부리가 있었다. 정말 세 발일까? 발을 보았으나 발이 있어야 할 곳에는 붉은색 기운들이 구름처럼 소용돌이치고 있었을 뿐이었 다. 발은 아예 없군. 그것은 다시 한 번 날개를 펄럭이더니 물었다. -그대는 세 발 까마귀의 패의 주인이 되어 삼사의 숙명을 가질 것인가. "그렇습니다" -그럼 좋네. 가만히 있게. 가만히 있으라니 무슨 말이야? 말을 마친 세 발 까마귀는 날개를 크게 쳤 다. 그리고 갑자기 나에게로 쇄도해왔다. 슈우웃! "우읏! 뭐야!" 나는 순간적으로 팔로 얼굴을 가리며 눈을 질끈 감았고, 갑자기 무언가가 나를 휘감고 지나가는 느낌과 함께 감은 눈꺼풀속의 검은 세상이 붉고 환한 색으로 변했다. 뭐지? 궁금함을 참을 수 없어진 나는 눈을 작게 떴다. 빛줄 기 한 자락이 내 몸을 감으며 지나가고 있었다. 뭐야? 뒤를 돌아보았다. 세 발 까마귀가 내 뒤 쪽으로 날고 있었고 그 꼬리가 길게 늘어져 내 몸을 스 치고 있었다. 흠. 지금 세 발 까마귀가 내 옆을 지났던지 날 통과했다던지 하는 식으로 나를 지나쳤나보군. 나는 순간적으로 내 몸을 훑어보았다. 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손을 바라보았다. 역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 다. 뭐지? 난 의아해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세 발 까마귀는 우아하게 운동 장을 낮고 크게 선회하여 내 쪽으로 돌고 있었다. 곧 세 발 까마귀는 허공 에서 퍼드덕거리며 멈추더니 내게 말했다. -의식은 끝났네. 풍사여. "에에엑?" 아니, 그럼 지금 한게 어떤 의식이었단 말야? 이런 말도 안 되는! 변한 것 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잖아! 나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세 발 까마귀를 바라 보았고 세 발 까마귀는 그런 나의 눈빛을 능숙하게 받아넘기며 말했다. -자네 눈빛속에 의심이 있네. 알면 의심을 풀어주시지? 나는 두 팔을 들어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몸짓을 취하며 말했다. "저...방금 의식이 끝났다고 하셨죠?" -그렇다네. "그럼 방금 한 게... 뭐죠?" -의식. ...이런 순환논증의 오류적 대화위는 그만두자. 아무래도 세 발 까마귀는 대화에서 상대방이 원하는 대답이 무엇인지 파악하여 대답하는 것보다 그저 단순한 대답을 단답형으로 짧게 말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듯 싶다. 세상에 대화하기 편한 스타일과 대화하면 속터지는 스타일의 두 가지 스타일의 대 화상대만 있다면 나는 망설임없이 말하겠다. 세 발 까마귀는 후자라고. 나 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의식이 왜 이리 짧죠?" -의식이 꼭 길어야 돼나? ...젠장. "하지만...전 변한 게 전혀 없는 것 같은데요" -허어. 그럼 풍사가 된다고 해서 갑자기 의관복식이라도 입혀질 줄 알았는 가? 외형적인 변화는 전혀 없다네. 하지만 이제 자네의 내면적인 지위는 지 극히 올라갔어. 이 세상에서 바람에 대한 권위를 자네보다 크게 가지고 있 는 사람은 없다고 봐도 그리 과언은 아닐걸세. 그리고 자네는 이제 자네의 영적 능력만큼 바람을 부릴 수 있게 되었어. 물론, 자네의 힘이라는 것 자 체가 미미한 수준이니 그렇게 큰 바람은 부릴 수 없을거야. 오히려 실망할 수준에 가깝지. 하지만 어쨌든 자네는 이제 풍사가 되었고, 바람을 부릴 수 있게 되었으며, 나의 조력을 언제라도 구할 수 있게 되었네. 이제부터 자네 는... 잠시 말을 끊던 세 발 까마귀는 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세 발 까마귀의 패의 주인일세. 아직 상황파악을 못하는 요령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리 며 어떻게 된 일인지를 파악하려 노력하고 가람이가 묵묵히 나와 세 발 까 마귀 모두를 시야에 넣고 바라보며 서 있는, 세 발 까마귀의 선언으로 인해 엄숙해진 분위기 속에서 나는 입을 열었다. "저...바람의 힘은 어떻게 쓰는 건가요?" 내 어투는 내가 들어도 상당히 어눌했고 그래서 방금 전까지의 엄숙했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꽤나 바보같은 분위기로 돌변해 버렸다. 세 발 까마귀는 그 상황에서도 위엄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듯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말하지 않아도 천천히 알려줄것을. 꽤나 급한 모양이군, 풍사여. "아, 예... 그런데 제 이름은 영준이라고 합니다.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풍사라는 말은 아무래도 좀..." 풍사라는 말은 아무래도 어감도 이상하고, 무엇보다 사람을 이름이 아닌 직위로 부른다는 것 자체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세 발 까마귀는 별 반응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그럼 이제 바람을 부리는 방법을 알려주시죠" -그러겠네. 간단허이. 속으로 단전에 기운을 모으게. "...단전...이오?" -그렇네. 단전. "기운은 어떻게 모으죠?" 그리고 세 발 까마귀의 패는 당황스럽다는 듯 약간 주춤거리며 말했다. -이런, 이런... 이거 설마 완전히 백지상태인가... 하긴, 뭐 상관없겠지. 모르면 가르치면 그만이니. 하지만 이로서 확실해졌네. "...뭐가 확실하죠?" -자네는 풍사중에 역대 최약일세. ......하긴, 당연하지. 현대인들 중 누가 기운을 다루는 방법 따위를 알겠 느냔 말야. "...뭐 어차피 힘 쓸 일도 없으니 상관없지 않습니까. 어서 방법이나 알려 주세요" -평소대로면 자네는 워낙 둔하기 때문에 기감을 느끼는데에만 엄청난 시간 을 투자해서 수련해야 하겠지만... 기감은 아마 내가 자네에게 한 의식중에 틔였을걸세. 그러니 마음으로 기운을 조종하게. 그 뿐이네. "그게 무슨..." -단전으로 기운이 모이라고 생각하게. 그리고 머릿속에 자네의 몸 속을 돌 고 있는 기운을 그려보게. 세 발 까마귀의 말에 나는 머릿속으로 내 몸 주위를 소용돌이치는 어떤 기 운을 계속 상상했다. 내 몸 속을 흐르는 무엇... 무엇... 조금씩 몸을 도는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주 미약하긴 했지만 분명히 느껴지고 있었다. 이 느낌인가? 나는 그 흐름에 더욱 집중하였다. 그러자 그 흐름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이거다! 이것들을 단전으로 모으라는 말이지? 나는 그 흐름을 제 어하려고 노력하며 정신을 계속 집중했다. '단전으로... 단전으로...' 조금씩, 아주 조금씩 계속 몸 주위를 순환하기만 하던 흐름들이 방향을 틀 어 단전으로 흘러들어가서 뭉치기 시작했다. 나는 그렇게 기운을 계속 집중 시키며 세 발 까마귀에게 물었다. "기운이 단전으로 뭉치고 있어요. 이제 어쩌죠?" -그 기운들을 다시 손으로 보내게. 단전에 작긴 하지만 기의 덩어리가 뭉쳐져 있는것이 느껴졌다. 나는 기운 을 손으로 끌어올렸다. 곧 손쪽에 무엇인가 저릿한 느낌이 오기 시작했다. "손으로 보냈어요" -그럼 쏘아내게. 손끝에 모인 기운을 손바닥으로 보내서 바깥으로 뿜어낸다. -휘이잉! 손끝이 시원해졌다. 그리고 작은 소리와 함께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가냘픈 크기의 바람이 뿜어져 나왔다. -잘했네. "에엑? 이게 다에요?" -그래. 말했잖은가. 실망할지도 모른다고. 이이익! 날 속였어! 이럴수가 있나! 계속해서 쌓인 것이 많았던 나는 벌컥 화를 내었다. "이, 이게 무슨 바람을 부리는 거에요! 부채바람 정도밖에 안 되잖아!" 그러나 오히려 역으로 받은 것은 세 발 까마귀 쪽이었다. -그럼 자네의 기운이 그것밖에 안 되는걸 어쩌란 말인가! "...예?" -자네, 생각해보게. 아무리 높은 벼랑이 있어도 떨어지는 물이 고작 한 바 가지라면 그게 폭포가 되겠는가? 내가 바람을 부린다니까 자네가 뭘 상상했 을지 모르겠지만,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것이 어떤 것이든 바람과 관계된것 은 자네의 공력만 깊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네. 하지만 자네의 힘이 그리도 미약한 것을 어쩌란 말인가? 그러니까 한 마디로 내가 애초에 가진 힘이 한 바가지의 물 정도밖에 안 되기 때문에 세 발 까마귀가 아무리 폭포만큼의 높이의 벼랑, 즉 능력을 줘 도 그걸 쓰지 못한다는 소리이군. 하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하...하지만...이건 너무 약해요..." -자네가 전력을 다한다면 그것보다는 훨씬 큰 힘이 나올지도 모르지. "그런...가요?" -그렇다네. 그리고 큰 걱정은 하지 말게. 힘이 필요할때는 내가 공력을 보 태줄테니. "알겠습니다" -바람을 이용한 기교는 자네 스스로 천천히 배워나가도록 하게. 그럼 난 이제 그만 자네의 패 속으로 들어가겠네. 패로 들어가겠다고? 저 큰 몸이 이 작은 패 속에서 답답하지는 않을까? 아 라비안 나이트의 어느 이야기에서 항아리속에 갇힌 마신은 너무도 답답했던 나머지 살아나간다면 누구든 자신을 구해준 사람을 죽이겠노라고 맹세한다. 그 이야기는 물론 지어낸 것이겠지만 그래도 그 이야기로 미루어볼때 마신 의 정도는 아니더라도 세 발 까마귀에게 저 안은 답답한 곳이 아닐까? "저..." -무엇인가. 더 필요한 용무라도? 대화라면 저 안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 다네. "저...그게..." 난 얼굴을 긁적이며 말했다. "쓸데없는 걱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패 안이 답답하시다면... 굳이 들어 가 계시지는 않아도..." -하하하하! 세 발 까마귀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크게 웃었다. 뭐야! 무례하잖아! 세 발 까마귀는 그렇게 크게 웃더니 짖궂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저 안에 들어가지 않으면? 나는 언제나 자네 곁에 있어야 하는데, 그럼 자네를 따라 한낮의 대로를 활보하기라도 하란 말인가? "......저, 그것은......" 생각해보니 그건 문제이긴 하군. 분명 저런 것이 길거리를 돌아다닌다면 사람들이 조금은 놀라겠지. 아니, 조금 놀라는 수준이 아닐거야. 어쩌면 경 찰을 부를지도. -걱정말게. 저 안은 나에겐 오히려 안락한 쉼터이니. 새로 치면 둥지쯤 될 까. "아, 그러십니까..." 말 그대로 쓸데없는 걱정이었구나. 나는 속으로 세 발 까마귀가 '할 수 없 군. 마침 답답하던 차에 잘되었네. 오랜만에 바깥세상의 하늘을 날며 살아 볼까'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 었다. 휴우. 일렁이는 밝은 빛 속에서 세 발 까마귀는 여운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나중에 보도록 하세" 말을 마친 세 발 까마귀는 퍼드덕거리며 자색의 날개를 하늘로 길게 펴올 렸다. 강렬한 빛이 세 발 까마귀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며 시야를 휘감았 다. 파아앗! 너무 눈부신걸. 손을 들어 눈을 가렸지만 빛은 손가락 사이로 스며들어왔 고 그래서 결국 눈을 감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잠시 정적. 눈을 떴을 때, 세 발 까마귀는 없었다. 그리고 패 속에서 이제 조금은 익숙해졌다고 생각되는 목소리가 다시금 마 음에서 들려왔다. -앞으로 잘 지내 보세. "예...뭐 그러도록 하죠" 대답하며 늘 그랬듯이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궁금해져 세 발 까마귀에게 질문을 던졌다. 과연 세 발 까마귀는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설마 내가 하는 행동이 전화상으로 인사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은 바보짓은 아니겠지? "궁금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인가. "세 발 까마귀님은 그 안에서 바깥을 보실 수 있습니까? -내가 원한다면. 평소에는 잘 보지 않는 편이네. 바깥세상이 별로 궁금한 것도 아니니. "그러시군요" 그렇구나. 그럼 결국 내가 한 짓은 바보짓에 가까웠군. 그런데 왜 세 발 까마귀는 바깥세상이 별로 궁금하지 않을까. 원할때는 언제든지 바깥으로 나올 수 있어서? 원하면 언제라도 바깥의 세상을 볼 수 있어서? 하지만 바 깥세상이 궁금하지 않다는 것은 바깥세상의 모습이 궁금하지 않다는 말과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이 없다는 말, 이렇게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세 발 까마귀의 심드렁한 말투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은 후 자에 가까웠다. 단정짓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세 발 까마귀는 아예 바깥 세상에 흥미가 별로 없는 듯한데. 너무 오랜 기간을 살아서 세상사는 이미 초탈해 버린건가? 하긴. 그가 바깥세상에 관심을 가지던 말던 나와는 상관 없지. 어느새 내 옆에 다가온 요령이가 내 옆구리를 쿡 찌른다. 으윽! 소름끼쳐! 그러고 보니 잠시동안 세 발 까마귀와의 대화에 정신이 팔려 이 녀석과 가 람이를 까맣게 잊고 있었군. "찌르지 마!" 물론 요령이가 내 말에 아랑곳하는 그런 착한 녀석은 아니다. 그 녀석은 다시 가늘고 긴 손가락을 보란 듯 곧게 세우더니 내 옆구리를 세게 찔렀다. 쿠우욱. 이런 젠장! 나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야!" "뭐야, 뭐야!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나한테는 하나도 설명도 안 해주고 말야! 갑자기 세 발 까마귀가 나오더니! 서로 알지 못할 대화만 주 고받더니 들어가버리고...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야, 설명 정도는 해 주는게 예의 아냐?" 그럼 내가 아까의 상황에서 '요령아. 지금 세 발 까마귀가 나한테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난 이렇게 대답할거고'라는 식으로 일일히 설명하고 있어야 겠냐? 하긴 요령이의 기분도 이해를 못하는 바는 아니다. 내가 계속 세 발 까마귀와 알지 못할 대화만 나누고 이해 못할 일들만 일어나고 -예를 들면 세 발 까마귀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나를 덮친다던지 하는 등의- 그러다보니 까 약간의 소외감 같은 것을 느꼈겠지.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말이 지, "대답을 들을 때까지 계속 찌를 셈이라면 그만 둬! 지금 말해줄 테니까" 그렇게 계속 쉴새없이 찔러댈 것까지는 없잖아! 나는 한숨을 살짝 쉬고 가 람이를 불러서 지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설명해 주었다. 이 추운 겨울날 밖에 서서 한가하게 이야기나 주고 받고 싶지는 않았지만, 집에 들어가기 전에 해보고 싶은 게 있거든. "...조금 어려워"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요령이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래. 나한테도 어 려워. 나는 동의한다는 뜻으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고 요령이는 그런 나를 잠시 주시하더니 말했다. "그럼...너, 이제 바람을 다룰 수 있다는 거니?" "으응. 뭐 약하긴 하지만" 요령이는 팔짱을 끼고 이채롭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에이, 뭐 그렇 게 쳐다봐도 달라진 건 거의 없다구. 나는 어깨를 으쓱했고 그런 내 얼굴을 바라보던 요령이는 살풋 웃었다. "바보같은 표정은 여전하네?" 아아. 살풋 웃으며 잔인한 소리를 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란 말인 가. 그런 면에서 요령이는 대단해. 그런 어려운 일을 척척 해내니 말야. "어쩐지...네 몸에서 흘러나오는 분위기가 이전과는 다르게 약간 독특해졌 다 싶더니... 흐음. 잠깐 볼 수 있을까?" "뭘?" "바람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며? 한 번 바람을 뿜어 보라구" 흠. 뭐 못 보여줄 것도 없지만. 이건 생각보다 실망스러운 수준이란 말야. 보여주기 부끄러울 정도라고. "별 것도 아닌데, 꼭 보고 싶어?" "말은 그렇게 해도 자랑하고 싶어 몸이 근질거리는 거 다 아니까, 어서 해 봐" 그래, 그래. 어차피 언젠가는 보게 될 텐데. 지금 보여주나 나중에 보여주 나 상관 없겠지? 나는 아까의 기억을 되살리며 기운을 느끼려 노력했다. 처 음 할 때보다 훨씬 간단히 어떤 흐름이 느껴졌다. 단전에 모으고, 손으로 올려서, 내뿜는다! -휘잉. 별로 집중하지 않아서 그런지 아까보다도 더 미약한 바람이 손에서 뿜어졌 고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던 요령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 비웃지 않잖 아? "흐음. 놀라운데? 대단해" "뭐? 대단하다고? 뭐가 대단해?" 요령이는 내 말에 대답하는 대신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어떻게 기운을 다룰 수 있게 된거야? 넌 기감 자체가 아예 없었잖아. 어 떻게 기의 흐름을 조절할 수 있게 된 거지? 신기하네" 어떻게라니? 그냥 세 발 까마귀가 하라는 대로 따라하니까 저절로 되던걸. 아차, 그러고보니 아까 세 발 까마귀가 나를 통과하면서 말했었지. 의식을 통해 이제 내가 기운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고. "세 발 까마귀가 그랬어. 자신이 내게 '풍사의 의식'을 행하면서 기를 다 룰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고" "그래? 의식을 통해 기운을 느끼고 다룰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텐데. 고대의 의식이란 건 대단하구나. 단지 한 번 스쳐지나갔을 뿐인 데도 사람을 완전히 바꾸어 놓다니..." 요령이는 약간 놀랐다는 얼굴로 말했다. 흠. 세 발 까마귀가 했다는 그 의 식이란 게 사실은 대단한 거구나. 나는 또 그냥 내 몸을 휙 훑고 지나가길 래 별 거 아닌 줄 알았지. 요령이는 계속 놀랍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 고 그래서 나는 조금 멋적게 말했다. "바람이래봤자 미풍이잖아. 그렇게 센 거 아니니까 놀란 표정 짓지 말라 고" "......그거야 네가 워낙 자질이 없으니까 그런거고" 으윽. 눈치 챘나? 마음속으로 바람을 다루는 능력 자체가 그런 거라고 믿 어주길 얼마나 바랬는데. 쳇. "무엇보다도 대단한 건 역시 둔재중의 둔재였던 네가 기를 다룰 수 있게 되었다는 거야. 그거 하나는 정말 놀랍네. 바람을 다루는 능력은... 내 생 각이지만 그건 네가 다루기 나름일 것 같은데, 잘 해 봐. 뭐, 네가 워낙 애 초에 가지고 있던 힘이 적어서 얼마나 잘 이용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말야. 잘만 써 먹으면 그것도 그럭저럭 쓸 만은 할 거 같네" 왠 일이냐, 좋은 소리만 해주고? 나는 놀란 눈으로 요령이를 바라보았다. "뭐야, 그 눈은?" "아, 아냐. 아무것도" 요령이는 별 이상한 녀석 다 보겠다는 듯 잠시 갸우뚱거리다 갑자기 생각 난 듯이 내게 다가오며 말했다. "야! 너 말야... 있잖아..." "또, 또 뭐야?" 너한테 얼마나 당했으면 이제 네가 다가오면 겁부터 더럭 난다. 이번엔 또 뭐야? 나는 주춤주춤 물러서면서 요령이에게 손을 들어 멈추라는 몸짓을 하 며 말했다. "야, 꼭 다가와서 말할 건 없잖아?그냥 거기서 말하라고!" 난 약간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고 그 말을 들은 요령이는 씨익 웃더니 갑 자기 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휘익! 섬뜩한 느낌에 난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고 방금 전까지 내 얼굴이 있던 자리를 요령이의 손이 훑고 지나갔다. 허억! 큰일날 뻔했다! "야! 뭐야!" "쳇. 꽤 재빠른데? 볼이라도 되게 꼬집어주려고 했는데" 요령이는 엄지손가락과 검지, 중지손가락을 모았다 뗐다 하면서 장난스럽 게 웃었고 나는 뒤로 재빨리 물러나서 볼을 어루만지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 다. 추운 날씨에 내 얼굴은 벌겋게 얼어 있었다. 만약 꼬집히기라도 했으면 그 고통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을 것이다. 상상만 해도 식은땀이 나는데. "야! 이번에는 또 내가 뭘 잘못했는데?" 그리고 요령이는 내 말에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직도 잘못을 모르네? 너 말야, 지금까지 네가 늘어놓은 이야기는 집으 로 돌아가서 해도 되는 이야기 아니었니? 이 귀한 몸이 이 추운데서 바들바 들 떨어야 속이 시원하겠어? 봐, 얼마나 추운지 몸에 두드러기가 다 돋았잖 아" 요령이는 팔까지 걷어서 보여주며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아니, 그렇게 춥 다면서 팔은 왜 걷어? 확실히 요령이의 팔에 무엇인가 작게 일어나긴 했지 만 말야. "해 보고 싶은 게 있어서" "뭔데?" 저 약간 일그러진 요령이의 표정은 분명히 궁금증은 아니다. 요령이는 내 게 '도대체 이 추운 날 어서 집에 들어가기나 하지 뭔진 몰라도 뭐 대단한 거라고 그걸 구태여 지금 하려고 하느냐' 라는 뜻을 말 대신 약간 치켜뜬 눈과 찡그린 눈썹,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와 찌푸린 미간으로 전달하고 있었 다. 하지만 나는 그런 요령이의 표정에 개의치 않고 물었다. "비록 나에게 있는 힘이 얼마 안된다고는 하지만, 세 발 까마귀는 내가 전 력을 다하면 분명히 내가 방금 뿜어낸 바람보다는 훨씬 큰 힘이 나온다고 했어. 그게 어느 정도일까? 내가 전력을 다 끌어내면 어느 정도의 바람을 일으킬 수 있을까? 궁금하지 않아, 요령아?" 요령이는 참으로 흥미가 돋는다는 얼굴로 말했다. "별로 안 궁금해. 나중에 하면 안 돼?" ......이런 젠장. 안 궁금해도 좀 궁금한 척 하면 지난밤에 먹은 생선가시 가 목에 걸리기라도 하냐? 그래도 명색이 주인이면 대접을 좀 해 달란 말이 다! "안 돼! 이왕 밖에 나온 거, 번거롭게 할 것 없이 지금 얼른 시험해보고 들어가자고. 정 마음에 안 들면 다수결로 하고. 가람아, 너도 내 모든 힘을 끌어온 바람이 어느 정도인지 보고 싶지?" 가람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투표결과 2 대 1이다. 이로서 결정된거야!" "쳇! 이건 불공평해! 가람이는 네가 뭐라고 해봤자 무조건 네 말에 찬성한 다고 할 게 뻔하잖아!" "열받으면 너도 네 편 만들어라? 그러게 평소에 마음이 예뻐야지, 안 그래 ?" 나는 이죽거리며 대답했고 그것은 상당히 요령이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 나보다. 요령이는 뭐씹은 표정으로 계속 궁시렁거리며 팔짱을 끼었다. 하지 만 겉으로는 그렇게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호기심이 더 많았는지 단지 그렇게 팔짱을 끼고 방관할 뿐 끝까지 나를 말 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런 요령이의 모습에 약간의 안도감을 느꼈 다. 그럼 어디 한 번 시험해 볼까. 내가 어느 정도의 바람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 노도와 같은 바람, 폭풍처럼 운동장 전체를 뒤덮을 수 있는 자연재해급의 거대한 바람따위는 바라지도 않는다. 하지만 최소한 써 먹을 수 있을 정도 는 되어줬으면 좋겠다. 능력씩이나 얻어서 생겼다는 바람이 손바람과 별 차 이도 없다면 그건 능력을 얻지 않은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나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방금 전의 두 번 처럼 약간의 힘만 모이면 바로 뿜 어내선 안 돼. 내 몸속을 흐르는 모든 기운을 집중해서 한 번에 뿜어내야 지. 나는 눈을 감고 호흡을 고르게 바꾸기 위해 깊숙히 심호흡을 하였다. 후우, 후우. 호흡을 고르게 하려는 까닭은 그래야 마음이 가라앉고 상념이 없어지기 때무이다. 뭐, 나는 기에 대해 잘 모르지만 기공수련이나 단전호 흡법등의 많은 기공술에서 꼭 일단 마음을 가라앉히고 상념을 없애라고 하 잖아. 내 생각에도 잡생각이 들끓으면 아무것도 안 될것 같다. 일단 기운을 느끼려면 집중을 해야 하는데 그 집중이 잘 안 되기 때문이다. 물론 방금 전 두번째로 바람을 느낄 때에서 알았지만 조금의 집중만으로도 기운의 흐 름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지금 몸 안에 있는 작은 기운까 지 모두 한 점에 끌어 모아보려 한다. 그렇기에 마음을 차분하게 하려는 것 이고. "후우- 하아, 후우- 하아, 후우- 하아..." 조금씩 운율감있는 숨소리에 내가 묻혀들어가는 기분이 들며 마음이 차분 해졌다. 차가운 밤공기가 폐 깊숙히까지 스며들면서 몸 전체를 정화시켜주 고 머리를 시원하게 해 주었다. 이 정도라면 충분히 몸에서 흐르는 작은 기 운의 흐름까지도 느낄 수 있겠지. 나는 호흡소리를 천천히 작게 만들며 차 분히 내 몸에 흐르는 기운을 느끼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였다. 이윽고 어느 정도 익숙해진 느낌의 따뜻한 흐름이 느껴졌다. 이게 기의 주류이군. 가장 큰 흐름이야. 이 정도로는 부족했다. 나는 '기운을 느낀다'는 한가지 생각 만을 반복해서 하며 훑듯이 내 몸속의 이곳저곳의 흐름을 상상했다. 갑자기 머릿속이 환해지며 내 몸 전체의 흐름이 파노라마치듯 지나쳐갔다. 놀라운 장면들. 기운들이 내 몸 속 전체를 흐르며 서로 엉키고, 흩어지고, 소용돌 이치고, 부딪히고 있었다. 그런 흐름들이 내 손가락 끝, 발가락 끝까지 모 두 뒤덮고 있었다. 마치 내 몸 속이 협곡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내 몸을 흐르는 기운은 격류이고. 어쨌든 이 정도면 내 몸속의 흐름은 모두 파악했 다.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겠지. "하아-" 숨을 크게 내뱉으며 정신을 집중시켜 몸 안의 모든 흐름을 천천히 단전으로 끌어모았다. 큰 흐름이 먼저 그 흐름을 트는 것이 느껴졌다. 가장 큰 흐름 이 단전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단전이 따뜻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작고 혼 란스럽게, 방향 없이 끓는 물처럼 마구 소용돌이치던 작은 기운들이 고개를 틀어 단전을 향해 흘러들어왔다. '잘 되어가고 있어' 이윽고 단전에 단단한 무형의 덩어리가 느껴졌다. 내 몸의 모든 기운들은 단전을 중심으로 거대한 소용돌이를 그리며 흐르고 있었다. 난 눈을 떴다. 그리고 모든 기운을 양 손으로 나누어 끌어올렸다. 단전에서는 따뜻한 느낌 이었던 기운이 양 손바닥에 엉기면서 싸늘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기운들이 바람으로 변하려 하는 것이다. 이제 뿜어내도 되겠군. 나는 기합과 함께 모 든 기운을 내 앞으로 뿜어내었다. "하아아압!" 퍼어엉! 소매자락이 무시무시하게 불어나는 것과 동시에 내 앞의 풍경들이 갑자기 엄청난 속도로 내 뒤로, 그리고 내 아래로 물러나버렸다. 난 순간적 으로 주위의 세상들이 나에게서 멀어지는 것에 놀라 멍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놀라 고함을 질렀다. "이, 이런 제기랄! 이게 뭐야!" 그렇다. 바람이 내 생각보다 훨씬 세게 뿜어져 나와서 내 몸을 뒤로 날려 버린 것이다. 내 손에서 뿜어진 바람은 어마어마한 힘으로 내 앞의 운동장 의 모래를 마구잡이로 흩어버리다 운동장을 완전히 가로질러 운동장 가장자 리에 심긴 나뭇잎이 모두 떨어져버린 앙상한 단풍나무를 꺾어버릴 듯 크게 휘어버리고 사라졌다. 하늘에서 봐서 그런지 내 손에서 뿜어져간 바람이 운 동장을 어떻게 할퀴고 사라지는지가 똑똑히 보였다. "호오- 생각보다 대단한데?" 요령이의 감탄섞인 목소리가 아래쪽에서 들려왔다. 가뿐한 느낌이 내 몸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계속 하늘로 솟구치고 있었다. 하늘을 날 수 있게 된 것일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방금 전 뿜어낸 바람에 의해 하늘로 '튕겨난' 것에 불과하다. 물리학법칙에 따르면 운동에너지로 인해 어떤 물체가 높이 올라가게 되면 운동에너지는 점차 위치에너지로 변하게 되고 그 운동에너지가 모두 위치에 너지로 변하는 순간 정점에 도달하게 된다고 한다. 요령이와 가람이가 엄지 손가락만하게 보일 정도로 높이 올라간 순간 난 엉뚱하게도 물리법칙을 떠 올렸다. 운동에너지가 모두 위치에너지로 변화하면 물체는 순간 0의 속도를 가지게 되고 곧 위치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바꾸며 음의 속도를 가지게 된다. 뒤로 끝없이 물러나기만 할 것 같은 풍경이 덜컥 멈췄다. 그리고 나는 침 을 꿀꺽 삼켰다. 꿀꺽. 영원한 것 같은, 그러나 찰나인 정지의 순간이 끝나 버리고. 바닥이 순식간에 나에게로 다가오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땅으로 떨어졌다. 엄청난 소음과 함께. 슈우우우욱! "으아아악!" 마구 팔을 휘저으며 비명섞인 고함을 질렀다. 요령아! 가람아!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까 나를 잡아줘!" "에어리얼 서번트! 받아! 지금 당장!" 요령이의 다급한 외침과 동시에 마치 내 아래쪽에 푹신한 쿠션이 생긴듯한 느낌이 들며 무엇인가 나를 받아주었다. 아래를 바라보자 여전히 저 아래쪽 에 어두운 운동장이 보였다. 그렇다. 나는 지금 허공에 떠 있는 것이다. "으아아악... 어라?" 신기하면서도 두려운 느낌이 들었다. 나를 받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손 을 아래쪽으로 눌러보았다. 무엇인가가 손을 부드럽게 휘감았다. 이건... 마치 바람같은데? 흠, 그러고보니 요령이가 전에도 에어리얼 서번트라는 것 을 부린 적이 있었지. 그건... 바람의 하인이라는 뜻이었지? 바람의 하인의 위에 떠받들려 있는 것인가. 그렇게 나쁜 기분은 아닌걸? '꼭 구름 위에 있는 것 같아' 구름 위에 있어보기는 커녕 비행기도 못 타 봤으니 뭐 실제로 구름 위에 타는 기분이 어떨지야 모르겠지만. 나는 한가하게 그런 생각이나 하며 아래 를 내려보았다. 요령이와 가람이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을 바라보자 몇 개 안 되는 별들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이렇게 공중에 떠서 가을 하늘을 바라보는 것도 괜찮은데? 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에에엣취!" 미소는 곧 사라졌다. 제기랄, 너무 추운데. 나는 몸을 최대한 옹송그리며 아래쪽을 향해 소리쳤다. "요령아! 추워! 이제 밤하늘 구경은 실컷 했으니까 내려줘!" 그런데 요령이의 표정이 심상찮다. 저 생글생글 웃는 표정은... 젠장. 저건 장난칠 때 자주 짓는 표정이 아닌가! "내려달라고?" "그래!" 나는 다급하게 대답했지만 요령이의 목소리는 더할 나위없이 한가했다. "흐흥. 그래, 내려줘야지. 때되면. 내려줘야겠지? 내려줄까말까..." 참지 못한 나는 가람이에게 외쳤다. "가람아! 저 녀석 때려서라도 나 좀 내리게 해라!" 가람이는 내 말을 듣자마자 요령이에게로 쇄도해 들어갔고 요령이는 정색 을 하며 옆으로 폴짝 뛰더니 말했다. "어어? 너 지금 나 공격하면 네 공격 피하느라 정신집중 풀릴지도 몰라?" 멈칫. 가람이는 발을 밟아나가던 것을 멈추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주인.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긴 뭐 어떻게 해! 제발 나 좀 내려줘! 어떻게든 내려달라고! 추 워 죽겠어! 거기에다 높은 곳에 하도 오래 있었더니 추울 뿐만 아니라 겁도 조금 난다.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잠시 고민을 해 보았지만 이건 어떻게 해결될 도리가 없다. 바람을 또 다뤄 봐? 아니, 그렇게는 할 수 없다. 일단 아까 바람을 끌어내면서 모든 몸의 기운을 끌어낸 것은 둘째치고, 내가 바 람을 써서 하늘로 다시 날아간다고 해도 결국은 다시 떨어지게 된다. 천천 히 바닥으로 안전하게 착지할 방법을 찾아야 해. "어쩌면 좋지...?" 계속 추위에 떨면서 고심하다 갑자기 번개처럼 어떤 생각이 내 머릿속을 번뜩이며 지나쳤다. 나는 풍사다. 바람을 다루는 사람이다. 그리고 에어리 얼 서번트는 바람의 하인에 불과하다. 물론 요령이의 말을 듣긴 하지만, 분 명히 아까 세 발 까마귀는 그렇게 말했다. 나의 내면적인 지위는 이제 크게 올라갔고 바람에 대한 귄위가 나보다 높은 존재는 아마 이 세상에 없을 거 라고. 그렇다면 내가 요령이보다도 바람에 대한 권위가 높다는 소리 아닌 가. 에어리얼 서번트에게 명령을 내린다면 에어리얼 서번트는 과연 나의 명 령에 따를까, 요령이의 명령에 따를까?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다. 나는 목소 리를 가다듬고 천천히 말했다. "에어리얼 서번트" 분명 아래쪽에서 조금 움찔하는듯한 반응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제 확신이 생겼다. "천천히 나를 지상으로 내려놔" 내 몸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설마 정말로 될 줄이야! 나는 눈을 크 게 떴지만 나보다 더 눈을 크게 뜬 것은 요령이였다. 요령이는 갑자기 에어 리얼 서번트가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기 멋대로 나를 내려놓자 크게 당 황한 듯 했다. "뭐, 뭐야? 야! 야! 에어리얼 서번트! 거기 가만히 있어! 어? 어? 야, 안 멈춰?" 요령이의 황급한 외침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에어리얼 서번트는 천천히 나를 지상에 내려놓았고 나는 에어리얼 서번트의 위에서 땅으로 펄쩍 뛰어 내리며 요령이를 향해 웃어주었다. "어, 어떻게 된거야?" 요령이의 놀란 목소리. 나는 요령이의 말에 거만하게 대답했다. "나는 풍사야" "...뭐?" "나는 풍사야. 바람을 다룰 수 있다고. 세상에서 바람에 대한 권위를 나보 다 더 크게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어" "그, 그래서..." "그래. 에어리얼 서번트는 그래서 나의 말을 너보다 우선해서 들은거지. 간단한거야. 내가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니까 내 말을 들은거지. 그냥 추측 한 것일 뿐인데 다행히 들어맞았네" 나의 말에 요령이는 납득이 간다는 표정으로, 그러나 자존심이 상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랬구나... 흠. 하지만 내가 소환한 에어리얼 서번트가 나의 통제를 벗 어나다니... 어쩌면 나의 능력이 모자랄지도... 아니겠지?" 요령이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생각에 빠져드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런 요령이의 모습을 바라보다 말했다. "춥다. 생각은 집에 가서 하라구" "...네 말이 맞아. 일단 집에 돌아가자. 얼굴이 얼어붙는 느낌이야" 요령이는 내 말에 동의하며 먼저 휘적휘적 앞서나갔다. 어? 이 봐, 좀 같 이 걷자구! "같이 가!" 숨을 쉴 때마다 입김이 하얗게 얼어붙는 겨울밤, 행인이라고는 우리 셋 뿐 인 거리를 가로등만이 조용히 비추고 있었다. 요령이는 추위에 몸을 잔뜩 웅크리고 벌벌 떨며 걷고 있었고 그런 요령이를 보며 나는 내 겉옷이라도 벗어줄까 하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어차피 저 녀석이 입고 있는 옷은 내 하 나뿐인 파카이다. 내 제일 따뜻한 옷을 뺏어입은 주제에 추운 척 하기는. 그러고보니 주위의 공기가 차갑기는 하군. 아까 하늘에 꼼짝없이 잡혀 하염 없이 떠 있을 때보다는 덜 춥게 느껴지지만 말야. ...그러고보니 나, 아까 요령이한테 참으로 지독하게 당했었군. "그건 그렇고 너!" 갑자기 내가 소리를 지르자 요령이는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 다. "왜 소리는 지르고 난리야!" "너, 아까 장난이 너무 심한 거 아니었어?" "아, 그거? 어차피 조금 있다 내려줄려고 했는데 뭐. 신경 꺼, 신경 꺼. 설마 남자녀석이 그런 걸로 속좁게 삐지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저렇게 말해버리니 또 내가 뭐라고 화를 낼 수가 없어진다. 남자녀석이 속 좁게 삐지냐는데 '물론!'이라고 대답하며 왜 그러냐고 따질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결국 나는 그저 입을 다무는 것으로 참을 수 밖에 없었고 요령이는 그런 나를 보며 살짝 웃어주었다. "왜 웃어?" "아, 아냐" 어? 말 안 해주잖아? 사람의 심리라는 것이 말을 안 해주면 더욱 궁금해진 다고. 나는 요령이를 추궁했다. "왜 웃었어? 말 안해줄거야?" 그러자 요령이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도 멍청해서 웃었다. 이 대답이 그렇게 듣고 싶었던 거야? 이제 어느 정도 '척하면 딱'하는 느낌이란게 생길 때도 되지 않았어?" ......어이구. 또 당했어! 나는 치를 떨며 요령이를 바라보았고 언제나 그 렇듯 요령이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혀를 낼름 내밀었다. 저 모습, 그렇게 밉살맞지만은 않단 말야. ...이런, 이거 내가 무슨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한 거지? 그런데,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는 때가 잦아지는 것 같다는 느낌, .. .내 착각일 뿐이겠지? 하아, 하아...가쁜 숨을 내뿜을 때마다 하얀 김이 어리었다. "하아! 하아! 젠장! 더럽게 힘드네!" "그러니까 일찍 좀 일어나지 이 게으름뱅이야!" 요령이가 내 뒤에서 나를 쫓아오며 투덜거렸다. 저 녀석, 그렇게 힘들게 뛰었으면서도 숨결 하나 안 거칠어지네. 정말 대단한데? "젠장! 하아! 하아! 누가 늦게 일어나고 싶어서 늦게 일어났냐? 헉! 헉!" 계속 격렬히 뛰었다. 지각이다, 지각이야! 하늘에서는 눈발이 흩날리고 있 었고 그래서 평소같았으면 마땅히 유쾌한 기분이 되어 마땅했지만 지금은 눈이 내리던 비가 내리던 제발 달리는 데 방해만 안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 각뿐이었다. 나는 머리칼에 쌓이는 눈을 미처 털어내지도 못한 채 계속 앞 만 보고 뛰었다. 푸스석, 푸석. 발을 디딜 때마다 눈들에 내 구두의 발자욱이 찍히며 디딤발이 위태롭게 흔들거렸다. 제기랄, 눈이 오니까 길이 너무 미끄럽잖아! 이러다가 혹시 미 끄러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지? 푸스석. 미끈! "이런 젠자앙-!" 비명을 내지르며 나는 그대로 공중에서 반바퀴 돌아 바닥에 쳐박혀버렸다. 풀썩! 발목 높이까지 쌓인 눈 덕분에 내가 넘어질 때 들린 충격음은 '콰당 !'이 아닌 '풀썩!' 이었다. 휴, 다행히 그리 아프지는 않군. 나는 그대로 드러누워 호흡을 골랐다. 먹구름이 잔뜩 낀, 솜알같은 눈이 계속해서 하늘 하늘 떨어져내리는 하늘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방금 전까지의 다급했던 마 음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마음은 점점 여유로워져 왔다. "하아, 하아" "야, 늦었다며?" 시야 가득 들어오는 하늘을 가리우며 요령이가 무릎에 손을 얹고 허리를 살짝 굽히어 길고 탐스러운 머리칼을 늘어뜨리며 내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약간 치켜올라간 눈이 매력 포인트군, 아가씨. 아, 그렇다고 오똑한 코나 작고 붉은 입술이 예쁘지 않다는 건 아냐. 성격만 예뻤다면 완벽했을 텐데. 그런데 왜 그렇게 바라보시나? "...얼굴 치워, 하늘 안 보여" "학교 안 갈거야? 지각이라고 했잖아" "아, 몰라. 어차피 늦었어. 뛰어가나, 천천히 걸어가나 지각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단 말야.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천천히 걸어갈래" 요령이는 의외라는 듯 눈을 약간 치켜 뜨더니 말했다. "...그래? 흠...뭐 나와는 상관없지. 내가 지각하는 것도 아니니까. 그런 데 그렇게 계속 눈 위에 쓰러져 있으면 곧 등이 시려오지 않을까? 아, 안 시려온다고 해도 그렇게 길 한가운데 덩그러니 자빠져 있는 거 보기 안 좋 으니까 일어나는 게 어때?" "...어차피 이런 한길, 다니는 사람도 없는걸" 확실히 한길은 한길이다. 우리 마을이 이렇게 돌아다니는 사람도 하나 없 는, 조용한 마을이었나? 우리집이 시골이긴 하지만 말야. -우우우우! 어디선가 이름모를 새가 우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확실히, 사람이 다니는 길에서 저런 새의 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으로 볼 때 우리 마을이 사람이 많 이 사는 곳은 아니야. 하지만 여긴 학교에서 그렇게 많이 떨어진 거리도 아 니잖아. 길에 드러누워 있어도 누가 볼까봐 겁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너 무한 거 아냐? 나는 투덜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확실히 정부의 도시중심개발 시책은 문제 가 있는 정책이야. 시골은 사람 사는 동네도 아닌가. 젠장. 나는 신경질적 으로 옷에 묻은 눈을 털어내었다. 팡, 팡. "야, 등에도 잔뜩 묻었어" "말로만 그러지 말고 좀 털어주는 건 어때?" "그러길래 내가 장갑 좀 사달라고 그렇게 부탁을 할 때 하나 사줬으면 얼 마나 좋았겠니. 싫어. 손에 눈 묻는단 말야" "...쳇" 나는 뭐씹은 표정으로 요령이를 노려보았지만 요령이는 밉살맞게 혀를 낼 름거릴 뿐이었다. 자식, 정말 속 되게 좁다니까. 분명히 요령이가 내게 장 갑을 사달라고 부탁을 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나도 장갑 같은 거 없단 말야. 내 자취생활이 얼마나 빈궁한지는 자기가 나보다 더 잘 알면서 매일 무언가를 사달라고 졸라대기나 하고, 쳇. 가람이가 내게 다가와 자기가 털어주마했지만 나는 손을 저었다. "아, 괜찮아. 이런 것쯤. 내가 털 수 있으니까" "...주인, 인간은 혼자서 자신의 등을 털 수 없다고 알고 있는데" 난 말없이 가람이를 향해 씨익 웃어주며 기합을 주었다. "합!" -펑! 기합과 함께 내 옷자락과 소맷자락 사이사이에서 바람이 쏟아져 나와서 내 몸을 휘감으며 내 몸 주위에 잔뜩 묻은 눈을 휘감아 털어 내었다. 바람의 힘을 얻은 뒤로 매일같이 바람을 다루는 연습을 많이 한 결과였다. 바람의 위력이 늘어난 것은 아니지만 연습의 결과 난 이제 바람을 상당히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되었고 덕분에 지금 한 것처럼 바람을 실생활에 꽤나 유용하 게 써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봤자 사람들이 놀랄까봐 이녀석들과 있을 때만 바람의 힘을 쓰기 때문에 그렇게 바람의 힘을 많이 이용하는 것도 아 니지만. 나는 그렇게 바람을 이용해 내 몸에 묻은 눈들을 모조리 털어낸 후 내 몸 주위에 은은한 바람의 막을 둘렀다. 눈이 기껏 털어낸 옷에 다시 묻 으면 곤란하거든. 눈은 워낙 가볍기 때문에 바람을 몸 주위에 조금만 감아 놔도 금방 날아가버리므로 큰 힘이 필요하다거나 한 것도 아니다. "역시, 역시. 사람은 변화발전해서 만물의 영장이라더니" "...무슨 뜻으로 하는 소리야?" "옛날에는 하나를 가르쳐주면 둘을 묻더니 이젠 하나를 배우면 하나는 제 대로 하네. 호호!" "...관 둬, 관 둬" 나는 손사래를 치며 계속 눈 쌓인 길을 걸었다. 하늘에서 천천히 나를 향 해 내려오는 눈송이들은 내 머리칼, 혹은 어깨, 혹은 팔의 근처까지 왔다 바람의 막에 부딪혀 팔랑거리며 내 몸에서 멀어져가곤 했다. 눈 쌓이는 소 리가 들려올 것처럼 조용한 온통 하얀 시골길을 걸어가는 기분은 그렇게 나 쁘지 않았다. 문득 시간이 궁금해져서 휴대폰을 꺼내어 폴더를 열어보았다. 9시 12분. 쳇. 평생에 하루뿐인 날에 지각해버렸네. 정말 오늘같은 날은 처 음부터 자리를 지키고 싶었는데. 전교생도 몇 안 되는 학교, 내가 없다면 그 빈자리가 얼마나 더 커 보일까. 오늘은 2월 15일. 내 졸업식이 있는 날이다. 삐걱- 낡은 체육관의 문이 아무 소리없이 열리기를 마음 속으로 간절히 빌었지만 벨벳이 누더기처럼 너덜대고 곰팡이도 군데군데 핀 이 문이 아무런 소리가 없이 열리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어쩌면 사치일지도 모른다. 나는 잔뜩 고 개를 숙이며 눈만 힐끔 들어 체육관을 슬쩍 훑어보았다. 당연한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모두들 나에게로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축사를 읽 던 교장 선생님까지도! 어휴, 부끄러워라. 그나마 키득대는 사람이 없었다 는 것이 다행일런지 모른다. 사실 고등학교에서 지각이라는 것이 비웃음을 살만큼 흔하지 않은 일은 아니니까. 단지 오늘은 졸업식 날이니까 문제지. 나는 재빨리 우리 반으로 뛰어가 비어있는 나의 자리에 앉았다. 잠시 눈살 을 찌푸리던 교장 선생님이 졸업축사를 다시 읊조리기 시작했다. 쩌렁쩌렁 한 목소리가 좁은 체육관을 울리며 퍼져 나갔다. 저 인간은 늙지도 않나. 나는 하품을 한 번 하고 졸린 눈으로 단상을 바라보았다. 짝짝짝... 졸업생들의 자리와 그 뒤쪽의 졸업생들의 가족, 친지들의 자리 에서 나직한 박수소리가 울려퍼졌다. 졸업생들의 박수는 약 45분이라는 경 악할만한 시간의 연설이 드디어 끝났음을 축하하는 박수였고, 그 외의 사람 들의 박수는 행사가 다음으로 넘어감에 따른 관례적인 박수였다. 나 역시 교장 선생님이 연설이 끝난 것을 기뻐하는 사람중의 하나였기에 열성적으로 박수를 쳤다. 곧 지직거리는 스피커에서 흔한 멜로디의 교가가 흘러나왔고, 우리는 모두 일어나 교가를 따라 불렀다. 교가 제창, 행사의 마지막 순서이다. 이제 이 노래가 끝나면 우리는 더 이상 고등학생이 아니다. 대학으로, 혹은 사회로 자신의 가능성의 날개를 펼치는 성인인 것이다. 왠지 가슴이 뛴다. 나는 떨 리는 목소리로 마지막 교가를 부르며 눈을 깜박였다. 감격의 눈물 따위는 흐르지 않았지만 분명히 눈에 힘이 들어갔던 것은 사실이다. 눈이 뜨거워진 걸로 보아 내 감성이 메마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눈물을 흘린 것도 아니 니 아무래도 내 감성은 졸업식 날 눈물을 흘릴 정도로 풍부하지는 않은 모 양이다. 곧 교가제창이 끝나고 모두들 박수와 환호로 졸업식을 끝마쳤다. 아까 교 장 선생님의 일장 연설이 끝났을때의 야유같은 박수와는 전혀 다른, 졸업생 들은 졸업에 대한 기쁨을 환호하는, 그리고 졸업생의 가족과 친지들은 이제 막 날개를 펴려 하는 졸업생들을 진심으로 축복하는 박수이다. 나는 뒤쪽을 돌아보았다. 늦게 오신 엄마가 눈물을 글썽이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리 고 가람이도 흐뭇한 얼굴을 하며 박수를 치고 있었고. ......의례적인 박수를 치고 있는 것은 오직 요령이뿐이었다. 모든 졸업생 관계자들 중에서 오직 요령이만이 심드렁한 얼굴로 '짝, 짝, 짝'하며 치는 둥 마는 둥 박수를 치고 있었다. 에에잇! 이 나쁜 놈! 나는 그대로 요령이 를 향해 뛰어가며 외쳤다. 아니, 정확히 뛰어가려고 하면서 외쳤다. "에라이...!" "아무리 급해도 졸업장은 받고 가라, 영준아" 등 뒤에서 들려오는 따뜻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담임선생님이 장난 스러운 표정으로 서 계셨다.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을 다녔으면서도 행사 후에는 항상 반별 모임이 있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다니, 확실히 머리가 좋은 편은 아냐" "아, 그게..." 나는 그저 멋적게 웃어버렸고 친구들을 킬킬거리며 나를 비웃었다. 이제 더 이상 저 비웃음소리를 듣기도 힘들겠지. 친구들도 그걸 아는지 녀석들의 비웃음에는 다분히 섭섭함이 섞여 있었다. 그렇게 선생님의 진심어린 축복 을 들은 후, 친구들과 환호성을 나누며, 선생님께 감사를 드리며. 나는 졸업장을 받았다. 둥근 원통형의 졸업장통과 3년 개근상 메달, 그리고 그 밖의 잡다한 상-우 리학교는 인원수가 적어서 거의 전교생이 상 하나씩은 다 받다시피 했다-을 목에 걸고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엄마와, 요령이와, 가람이와, 그리고 친 구들과. 사진의 배경과 같이 사진을 찍은 사람들은 모두 달랐지만, 그 속의 내 표정은 한결같았다. 어색한 미소들. 섭섭한 마음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 뒤섞인 재미있는 표정이었다. 오늘, 나는 졸업했다. 인생의 하나, 학창시절을 오늘 맺었다. 지루한 표정으로 휴대폰의 폴더를 계속 열었다 닫았다. 한 번 닫힐 때마다 휴대폰의 바깥쪽 폴더가 푸르스름한 빛을 내며 나의 눈에 지금이 몇 시인지 를 비추어주었다. 나는 그렇게 나른하게 계속 탁, 탁 하는 소리를 내며 휴 대폰을 열었다 닫는 짓을 반복하며 하품을 했다. 정말이지 견딜 수 없을 정 도로 지루했다. "정말 미치겠네, 이거. 소위 신입생들이라는 사람에 대한 대접이 겨우 이 따위야?" "정신 사나워, 좀 가만히 있어!" 요령이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내게 말했고 그래서 난 탁! 하는 소리와 함 께 휴대폰의 폴더를 신경질적으로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요령이는 불만족 스러운 얼굴로 다시 강당을 바라보며 양 손가락을 끊임없이 만지작거렸다. 요령이도 꽤나 지겨운가보지. 어쨌든 이제 복수의 시간이군. "정신 사나워, 좀 가만히 있어!" "신경 꺼!" 아, 저렇게 대답하면 되는 거였구나. 그런데 난 저 따위로 반응하지 않았 단 말야. 나는 볼이 부은 채로 팔짱을 끼고 말없이 앞을 주시하였다. 그런 데 이건 정말 너무하잖아! 도대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거야! 나는 마치 오래된 버릇처럼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주머니에서 꺼내 들고 다시금 열어 보았다. 누군가의 창작인지 알 수 없는 귀여운 남녀 캐릭터가 뛰어 다니는 바탕화면 아래에 '요령아, 폰은 장난감이 아니다' 라는 글이 띄어쓰기 없이 씌여져 있었고 그 아래쪽에 시간이 떠 있었다. 10시 14분. 제기랄! 나는 다 시 휴대폰을 세게 접으며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어차피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왔지만 그래도 이 대학교라는 곳이 등교 첫 날부터 내 환상을 너 무나도 깨뜨리고 있었다. 아니, 그 뿐만이 아니라 나를 짜증의 나락으로 밀 어넣고 있었다. 세상에, 10시 14분이라니! 나는 8시부터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단 말이다! 한숨을 쉬며 휴대폰을 그대로 손에 든 채로 앞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분 주하게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도 그들의 행사에 차질이 생겨서 적 지않게 당황한 듯 했다. 뭘 당황하시고 그러시나. 내가 아침 여덟 시부터 쭉 지켜봤는데, 당신들은 30분 전에서야 느릿느릿 준비를 시작하던데 뭐. 하긴, 소위 공적인 기관이라는 곳에서 하는 행사가 다 그렇지.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주위의 신입생들을 위해 마련된 자리들을 힐끗 바라보았다. 드 문드문 차 있었지만 결코 이게 신입생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절반도 오지 않은게 아닐까? 거의 그럴 것 같았다. 흠, 이건 그저 행사일 뿐 그 녀석들 에겐 -같은 신입생들이니 녀석이라는 표현을 써도 될 것이라 믿는다- 별 의 미는 없다는 건가. 나는 턱을 괸 왼 손의 손가락으로 미간을 톡톡 치며 생 각했다. 어쨌든 이 날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학점에 영향이 있거나 출석에 영향이 있는 건 아니니까, 꼭 참여하지 않는다고 해도 사실 별 상관은 없 다. 하지만 그러면 아무것도 모르고 며칠 전부터 집에서 올라올 때 가져온 입학선물로 받은 정장을 세탁하고 다려가며 정성껏 준비해서 -사실 세탁소 에서 다 해주고 난 돈밖에 내지 않았지만- 입고 온 내 꼴이 얼마나 우스워 지냔 말야. 하긴, 나도 이 행사가 이렇게 지겨울 줄 알았다면 절대로 안 왔 을 것이다. 음, 그러고보니 정장을 입고 온 사람이 많을까? 나는 주위를 둘 러보았다. 다행히도 드문드문 나와 비슷한 녀석들이 보였다. 저 녀석들도 지금 자기가 멍청했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요령이가 양 팔을 좌우로 주욱 펴며 기지개를 켰다. 요령이의 뼈마디에서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렸다. 우두둑, 우두둑! 문득 나도 몸이 뻐근해지는 것 같아 팔을 앞뒤로 빙글빙글 돌렸다. 내 어깨라고 뭐 요령이의 어깨와 많이 다르랴. 내 어깨에서도 마치 뼈가 박살나는 듯한 과격한 소리가 들려왔다. 가람이는 내가 걱정되는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괘념치 않고 관절을 하나씩 꺾어 나갔다. "도대체 빌어먹을 입학식인지 나발식인지는 언제나 시작하는거야?" 요령이가 화가 많이 났는지 인상을 팍 구기며 내게 물어왔다. 내가 그걸 알면 이러고 있겠냐. 나는 맥없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고 그러자 요령이는 인상을 더욱 찌푸렸다. "사람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것도 아니고 말야...도대체!" 요령이는 분을 못 이기겠는지 씩씩대더니 내게 말했다. "그러니까 그렇게 아침부터 수선 떨 필요 없다고 했잖아!" 안 그래도 화가 나려고 하는데 요령이가 괜히 나에게 얼토당토않은 짜증을 부리자 자연스레 나 또한 언성이 높아지려 했다. '아니 또 왜 나한테 괜히 성질은 부리고 난리야?' ...라고 되받아서 고함이라도 쳐주고 싶었지만, 나는 지성인이고 게다가 오늘은 나와 같은 신입생들을 처음으로 만나는 날 아닌가. 나는 분을 속으 로 꾹꾹 삭이며 말했다. "...관 두자, 관 둬. 내가 잘못했다, 그래" "어머, 왠 일로 순순하네?" 요령이는 내 반응이 생각보다 조용하자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 지만 곧 놀란 얼굴이던 요령이의 얼굴은 한없이 지루하던 아까의 표정으로 돌아갔다. 내가 맞상대를 해주지 않자 심심해진 모양이었다. 오늘은 내 입학식이다. 그리고 근 한 달동안 가장 짜증나는 날이기도 하다. 내가 입학식을 위해 아침에 일어난 시간은 새벽 5시 반이었다. 모름지기 어떤 일이던, 새로 시작된다는 것은 두근거리기 마련이다. 심지어는 '입시 지옥의 시작'이라고 불리우는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에조차 가슴이 설레었는 데, 모든 매스미디어에서 '천국'으로 그려지는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니 기 분이 어떠했겠는가. 말할 나위도 없이 가슴이 터질 지경이었다. 나는 꼭두 새벽부터 씻는다, 밥을 차린다, 정장을 꺼낸다, 머리를 다듬는다하며 부산 을 떨어대었고 그 통에 요령이와 가람이가 잠을 깨 버렸다. 사실 우리 자취 방처럼 비좁은 방, 한 명만 시끄럽게 굴면 나머지 두 명은 잠을 다 잔 것이 나 마찬가지다. 요령이는 베개까지 집어던지며 제발 잠 좀 자자고 짜증을 부려댔지만, 나는 베개에 얻어 맞으면서도 벙긋 웃었다. 그만큼 기분이 좋 았던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베개에 이불까지 보태어서 요령이에게 도로 집어던졌어 야 했는데. 새삼스레 후회가 되는군. 그렇게 수선을 떤 끝에 마침내 모든 준비를 마치고 시계를 보자 알람시계 의 시침이 6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무려 한 시간동안이나 학교에 갈 준비를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나는 아침밥을 지어서 잠이 다 깨었다며 나를 바라보고 몸서리를 치는 요령이와 도저히 더 잠을 청하지 못 하겠는지 좌선에 빠져들었던 가람이와 함께 여유롭게 식사를 마쳤다. 워낙 여유를 부렸는지 식사를 마쳤을 때는 수저를 든 때로부터 한 시간이나 지난 후였고 나는 요령이와 가람이를 데리고 집을 나와 학교로 향했다. 입학식의 시작 시간은 9시였지만 미리 가서 기다리는 게 좋을 듯 싶었기 때문이다. 졸업식 때처럼 지각해서 행사 도중에 식장으로 들어가는 것은 정말 싫었다. 물론 너무 이른 감이 있긴 했지만 입학식이라 주위의 교통 사정이 안 좋을 수도 있었기에 일찍 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았고 그래서 결국 7시 30분에 집 을 떠났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것이다. 나는 무려 두 시간 이상을 아무것도 하지 못 한채 무료하게 앉아 있기만 해야 했다. 단지 '새내기의 두근거림'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젠장! 오늘 학교에 오지도 않은 녀석들은 집에서 편히 쉬고 있을텐데! 이건 불공평해! 불공평하다고! 나만 이러한 생각을 하는것은 아닌 듯 신입생들이 앉아 있는 자리의 웅성 거림이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암, 진작 웅성거렸어야지. 게다가 집에 가려 는 듯 일어서는 사람도 한 두명씩 눈에 띄었다. 안 그래도 자리가 다 차지 못했는데 그나마 채워져 있는 자리까지 하나 둘 비어간다면 학교측에서는 얼마나 당황할까? 나는 고소를 띄우며 단상을 바라보았다. 다행히도 준비가 거의 끝나가는지 사람들이 하나 둘 단상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휴, 이제서 야? 나는 의자에 편히 앉으며 단상을 주시했다. 물론, 모든 공적인 행사가 그렇듯이, 입학식은 고문에 가까웠다. 소개받아 야 할 사람은 왜 그리 많은지, 총장이라는 사람은 한자 못 쓰다 죽은 유생 귀신이 붙기라도 했는지, 거기에다 왜 한 말을 또 하는지, 도대체 대학교 입학식에 이 지역구 국회의원은 왜 찾아와야 하는지, 왔으면 인사만 하고 갈 일이지 연설은 왜 하는지... 국회의원의 연설이 끝나고 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박수를 쳐 주었다. 짝, 짝. "이럴거면 오지 말 걸 그랬나봐"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지만 불행히도 요령이가 그 소리를 들어버렸다. "에휴, 바로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좋아서 미쳐버리려고 하더니...너뿐만 아니라 옆에 있는 사람까지 미쳐버리게 만들어서 문제였지만, 어쨌든 이러 려고 그렇게 좋아했었냐?" "뭐 이럴 줄 알았나!" "하여튼 네 어머님 말씀이 딱 맞아. 어렸을 때부터 나..." "그 이야기 하지 마!" 이런 젠장!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러 버렸다! 재빨리 손으로 입을 틀어막 긴 했지만 주위의 대부분은 들었을 것이 뻔했다. 나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내게로 쏟아지는 주위 사람들의 호기심어린, 혹은 당혹스러운 시선을 애써 외면했다. 혹시 단상까지 들린 것은 아니겠지? 나는 슬쩍 단상 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단상까지 내 목소리가 들리지는 않은 듯 했다. "주인님, 왜 이렇게 화가 나셨습니까? 제가 없는 말이라도 지어내서 한 건 가요? 아니잖아요? 전 단지 밤하늘의 샛별처럼 고귀하신 주인님의 모친께서 제게 하신 보석같은 충고를 다시 상기했을 뿐인걸요. '애가 어렸을 때부터 나...'" "하지 말랬지!" 요령이의 이죽거림에 이번에는 나직하게 소리질렀다. 하지만 목청이 터져 라 소리질렀을 때에도 내 말을 듣지 않았는데 이렇게 작게 말한다고 들어줄 까.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은 내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 "'...사가 하나 빠져 있으니 친구분들이 잘 보살펴 주어요'라고 기억해요, 주인님. 틀리나요?" 말을 마치고 요령이는 입에 손을 대고 키득거렸으며 나는 끔찍한 표정과 함께 눈을 감아버렸다. 젠장. 분명히 저 말이 우리 엄마가 한 말은 맞다. 졸업식이 끝나고 가족끼리 모여서 작은 자축연을 벌이는 자리 -래봤자 흔한 외식과 다를 것도 없었지만- 에서 엄마는 분명히 나를 옆에 앉히고 요령이 와 가람이를 보며 진지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었다. '얘가 착하고 좋긴 한데 어렸을 때부터 나사가 하나 빠져 있으니 친구분들 이 잘 보살펴 주길 바래요. 요령양, 그리고 가람군, 알았지?' 도대체 남들 앞에서 자기 자식을 그렇게 깎아 내리는 부모가 어디 있단 말 인가! 물론 '나사 하나 빠졌다'는 말은 사실 요령이와 내가 매일 주고받는 험한 악담에 비하면 장미꽃의 가시 정도밖에 되지 못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 장미의 가시를 만든 사람이 누구냐는 데에 있다. 그 말을 한 사람은 분 명히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고 자부하실 게 분명한 나의 엄 마이다. 덕분에 그 별것도 아닌 말은 엄청난 공신력을 가지게 되었으며 요 령이는 나를 제압하는 데 자주 그 말을 사용하게 되었다. 내가 아무리 아니 라고 해봐야 '하지만 너희 어머니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는걸?'이라고 말해 버리면 끝인 것이다. 제기랄. 나는 한숨을 쉬며 양 손에 얼굴을 묻었다. "교가 제창이 있겠습니다. 모두 일어나 주십시오" 잠시 의자가 뒤로 밀리는 소리들이 이곳 저곳에서 소란스럽게 들리다가 조 용해지고, 곧이어 이 학교의 성악부와 밴드부로 보이는 사람들이 단상 위에 서 행진곡풍의 노래와 연주를 시작했다. 평소라면 어떻게 들렸을지 모르겠 지만, 잔뜩 뒤틀어진 내게는 단지 싸구려 곡조로 들릴 뿐이었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내 동기들이나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그런데 문득 내 눈이 누군가에게서 멈췄다. 그의 특이한 복장 때문이었다. '완전히 중국풍이군' 한 마디로 정리하면 이랬다. 마치 황비홍의 손자가 우리 학교에 유학이라 도 온 것 같았다. 나의 동기로 보기에는 조금 동안인 녀석이었는데, 머리는 앞머리를 바싹 밀고 뒷머리를 땋아서 뒤로 넘겼으며 -즉, 변발을 했단 소리 이다. 맙소사, 변발이라니!- 비단으로 보이는 황금색에 가까운 황색 천을 재단해서 만든 듯한 긴 도포를 입고 있었으며 등에는 무엇이 들었는지 모를 긴 가방을 옆에 세워두고 있었다. 얼굴 선이 가늘고 내 동기라기에는 조금 어려 보였으며 의자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팔짱을 끼고 묵묵히 정면을 주 시하고 있었다. "야, 야, 저 녀석 좀 봐" 나는 나처럼 심드렁한 얼굴로 서 있는 요령이를 쿡쿡 찔러 마치 중국 무협 영화에서 방금 전에 뛰쳐나온듯한 녀석을 보게 했다. 곧 요령이의 눈이 호 기심으로 가득 찼다. "뭐지? 도대체 저 녀석은?" "나도 잘 모르겠지만 베짱 하나는 대단한 걸. 저렇게 입고 다녀도 주위 사 람들의 눈이 신경쓰이지 않나 보지?" 요령이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내 말에 대답했다. "너도 안 어울리게 정장 입고 다니지만 주위 사람들의 눈에 신경 안 쓰잖 아?" 캇! ...이라고는 말해도 사실 입고 있는 나도 무지 불편하기는 하다. 되도 록이면 입지 말아야겠다. 내가 다시 요령이에게 저 중국풍의 신입생에 대해 물어보려는 찰나, 박수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일제히 자리에 앉았다. 음, 교 가가 끝났군. 그럼 이제 다음 순서는 뭐야? 사회자의 목소리가 강당에 낭랑히 울려퍼졌다. "올해 입학하신 신입생 여러분, 우리 대학교에 입학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 하드립니다. 그럼 이만 입학식을 마치겠습니다" 에엑? 뭐야? 끝났어? 30분도 채 안 지났잖아? 나는 황당해서 순간 말조차 잊어버렸다. 아니, 두 시간이 훨씬 넘게 기다려서 진행한 입학식이 30분도 채 진행하지 않고 끝난단 말야? ...하긴, 더 길어져봤자 지루하기만 할 뿐 좋을 것도 없다. 사실 입학식 내내 짜증을 내잖았는가? 나는 그렇게 자신을 위로하며 일어났다. 문득 중 국풍의 그 소년이 생각났다. 그 녀석과 말이라도 한 마디 나누어볼까? 나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그 소년은 어디에도 없었다. "으응? 어느 새 사라졌네? 어디로 갔지?" 요령이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놀란 목소리로 말 했다. 확실히 사라졌는지, 두어 번 목을 길게 빼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그 소년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만약 이 주위에 있다면 워낙 복장이 특이 해서 눈에 쉽게 띌 텐데. "재빠르기도 하네" 요령이가 혀를 찼다. 뭐, 만약 그 녀석이 우리학교의 새내기라면, 비록 그 럴 거라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그리고 그런 옷차림으로 학교를 다닌다면, 비록 그럴 거라고는 더욱 생각되지 않지만, 분명히 다시 한 번 보게 되겠 지. 그런 옷차림을 못알아 볼 수 없으니 말야. 만약 다음에 다시 본다면 말 이라도 한 마디 걸어 봐야지. "하늘을 나는 우리들의 꿈! 패러글라이딩 동아리 이카루스에서 새내기를 받고 있습니다!" 안경을 껴고 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캐주얼한 체크무늬 셔츠의 청년이 책상 을 앞에 두고 앉은 채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싱글벙글 웃으며 소리를 치 고 있다. 아마도 파릇파릇한 새내기들을 보기만 해도 즐거워서 웃는 거겠 지. 옆 책상의 사람들도 질 수 없다는 듯 목청껏 소리를 지른다. "민족의 앞길을 이끌어 나가는 청년의 노래! 중앙노래패 나팔수에서 새내 기를 받고 있습니다!" "컴퓨터에 관심 많으신 분! 전자공학부 소학회 일렉트로닉 웨이브에서 신 입생을 받고 있어요!" 난 앳되어 보이는 한 아가씨가 수줍게 머뭇머뭇 외치는 모습을 보며 미소 를 지었다가 곧 아무리 어려 보여도 그 아가씨는 내 선배라는 사실을 상기 해 내고는 곧 미소를 거두었다. 흐음. 그러고보니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 들은 모조리 내 선배겠지. 괜히 잘못 보였다가 좋을 것은 없겠는걸. 오늘은 3월 2일, 이 학교의 신입생들이 처음으로 학교에 '수업을 듣기 위 해' 등교하는 날이다. 즉, 오늘부로 나를 포함한 모든 신입생들이 정식 학 생이 되는 것이다. 교문에서 조금 떨어진 등용관이라고 불리우는 건물 입구 에서부터 학교의 가장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승학관까지 넓게 나 있는 길에 는 책상들이 가로수를 가리며 쭈욱 놓여져 있고 책상 앞에 사람들이 앉아 서, 혹은 일어서서 새내기를 모집하고 있었다. 색상지로 예쁘게 만든 특색 있는 홍보용 전단이나 큼지막하게 써 붙인 재미있는 아이디어들이 넘치는 대자보들이 여기저기 다채롭게 붙어 있는 모습들이 무척 특색있어 보인다. 참, 그러고보니 나도 동아리 하나 쯤 드는 것도 괜찮을텐데. 지금은 수업 시간에 맞추어 가기에 빠듯하니 할 수 없고, 이따 쉬는 시간이나 수업이 비 는 공강시간 때 천천히 어떤 동아리가 있는지 둘러 봐야겠다. 내 옆에서 요령이가 가람이에게 뭐라고 묻는 듯 하더니 가람이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요령이는 그 얼굴에 잠시 실망한 듯 하더 니 곧 나에게 물었다. "야, 지금 이 사람들이 뭐 하는거야?" 아, 요령이는 가람이에게 지금 이 사람들이 뭘 하는지를 물었던 거구나. 하긴 네가 대학에 들어와 봤을리도 없을테고, 그렇다고 네가 매스미디어로 대학의 모습을 접해 보았을리도 만무하니 지금 이 모습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리가 없지. "이건 동아리 새내기들을 모으는 거야" "동아리?" "응. 동아리. 취미나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특색있는 활동을 하는거지. 예를 들면 만화동아리라면..." "모여서 만화를 읽니?" 아, 제발, 요령아.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잖겠니.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만화를 그리겠지. 설명에 덧붙일게. 특색있고 '창조적인' 활동을 하는 걸로 말야. 어쨌든, 나도 동아리를 딱히 들어가 본 적은 없어서 길게 설명 하지는 못하겠다" 요령이는 고개를 끄덕이다 갑자기 무엇인가 궁금하다는 듯 내게 물었다. "그런 거구나. 잘은 모르겠지만 대강은 이해했어. 그런데, 그럼 나도 그 동아리라는 걸 할 수 있는거야?" 나는 요령이의 질문에 잠시 생각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잘 모르겠는데. 무엇보다 너와 가람이는 이 학교 학생이 아니잖아. 과연 이 사람들이 같은 학교 사람이 아닌 사람을 받아들여줄지... 확실히 뭐라고 대답하기가 그렇네. 우리가 들어가려는 동아리 사람들의 생각에 따라 달라 질 것 같아, 내 생각엔" 대답하고 나자 괜스레 근심스러워졌다. 혹시 이 녀석들 때문에 나도 동아 리 생활이라는 것을 경험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앗, 그러면 안 되는데! 대 학에 들어오면 동아리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들 한다. TV나 인터넷에서 비 추어주는 대학생들의 모습에서도 동아리는 꽤 큰 비중을 차지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안 돼, 대학생활을 하면서 동아리 하나 가지지 못할 수는 없지! 나는 속마음으로 결의를 굳게 다졌다. 그렇게 첫 수업이 있는 건물인 승학관까지 걸음을 옮기고 있자니 어디선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봐, 거기 새내기들, 칼 한 번 안 배워 보겠어?" 우리를 부른건지 아니면 지나가는 다른 사람들을 부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신입생을 부르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힐끗 돌려 칼을 한 번 배 워 보라던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책상 앞에 혼자 앉아 새내기를 모집하는 청년이었는데, 그는 햇볕에 반사되어서 그렇게 보이는 건지 아니면 염색을 해서 그런건지 분간이 잘 가지 않는 갈색 빛이 도는 머리를 양옆으로 아무 렇게나 넘기고 있었으며 회색 티셔츠 위에 청색 반소매셔츠를 걸쳐 입고 있 었다. 딱히 남보다 빼어나게 잘생긴 구석은 없었지만 입과 눈에 싱글벙글 달려있는 미소가 왠지 호감이 가는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고개를 돌려 자 신을 바라보자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왠지 새내기같아 보이더라니만 내가 바로 맞추었네? 어이, 동아리는 선택했어?" "아, 아뇨..." 갑작스레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친한 척 말을 걸어오자 나는 당황해 버렸 다. 그는 내가 대답하자 잘 되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게 말했다. "그럼 우리 동아리에 들어오는 건 어떠냐? 뭐, 정식 동아리는 아니지만... " 으윽, 왠지 저 사람의 페이스에 말려드는 것 같은 기분이다! 일단 이 상황 을 벗어나야겠다. 뭐, 나도 꼭 이 사람과 이야기를 길게 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만은 아니지만 무엇보다 난 지금 수업을 들으러 가야 된단 말야. 나 는 난감한 표정으로 웃으며 사과했다. "어, 저, 죄송합니다. 저 지금 수업에 들어가야 하거든요..." 그리고 그 사람은 실망의 눈빛을 띄며 말했다. "그래? 그럼 수업 끝나고 나서라도 한 번 생각해 봐. 알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며 휴대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이크, 이 대로 가다간 지각이겠다! 그런데 냅다 뛰는 나의 등뒤로 들려오는 그 청년 의 목소리가 나를 꽤나 당황스러운 기분 속으로 만들었다. "이봐! 그리고 나도 새내기야! 다음에 보면 말 놓으라고!" ...뭐야 저 녀석은? 같은 새내기면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말을 놓았단 말이야? 이상한 녀석이네... 승학관 건물은 셋으로 나뉘어져 있다. 홀이 위치한 건물의 중심은 부드러 운 곡선을 그리며 앞으로 약간 돌출되어 있고 위로는 마치 백조의 목처럼 흰 탑이 우아하게 솟아 있으며 좌우로 건물이 백색으로 도색되어 마치 희게 빛나는 날개처럼 서 있다. 언뜻 보면 하늘을 향해 막 비상하려는 학이 떠오 르게 하는 형상이다. 그래서 나는 승학관이 승학(乘鶴), 즉 하늘을 오르는 학의 건물이라는 의미인줄 알았다. 그러나 나중에 알았지만 승학은 사실 학 문이 올라간다는 뜻이었다. 내가 수업을 들을 승학관 317호는 학의 왼쪽 날개의 가운데쯤에 위치하고 있었다. 나는 3층의 층계를 올라 길게 뻗은 승학관의 복도를 걸었다. 강의 실마다 새내기들의 것으로 보이는 웅성거림이 복도까지 새어나오고 있었으 며 그래서인지 복도는 상당히 소란스러웠다. 곧 내 앞에 '317'이라고 씌여 있는 문이 나타났다. 이 강의실인가 보군. 나는 문을 살짝 열고 안으로 들 어섰다. 아직까지 교수님은 도착하지 않은 듯 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 며 뒤쪽의 빈자리에 앉았다. 요령이와 가람이가 각각 내 왼쪽과 오른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호기심 때문인지 아니면 요령이와 가람이에 대한 관심 때문인지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들의 시선에 꽤나 오래 꽂혀 있었다. 곧 앞 문이 열리며 교수님이 들어왔다. 두꺼운 뿔테와 검은색 양복, 그리고 날이 날카롭게 선 바지와 빳빳한 칼라, 정확히 7:3으로 착 감아 넘긴 머리모양까 지, 전형적인 '위엄적인 교수형'이 무엇인지를 온 몸으로 말해주는 듯한 교 수님이었다. 그는 잠시 날카로운 눈빛으로 강의실을 스윽 훑어보더니 이윽 고 입을 열었다. "지각이나 결석은 정확히 강의수칙대로 처리합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학생 들에게 별로 사랑받는 교수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맘에 들지 않는다면 수 강신청 정정기간에 바꾸시도록 하세요. 오늘의 출석은 부르지 않겠습니다. 어차피 수강신청 정정기간이 끝나면 새로운 출석부로 교체해야 될 테니까 말이죠" 강의실의 이곳저곳에서 작은 한숨과 야유소리가 흘러나오고 교수님은 그 작은 소란에 깊게 골이 패인 이마의 주름을 더욱 깊게 패며 얼굴을 찌푸렸 다. 순간 강의실의 앞문이 벌컥 열리며 왠 청년 한 명이 싱글벙글 웃으며 강의실로 불쑥 들어섰다. 웅성대던 강의실의 분위기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 다. 그는 그런 강의실의 분위기에 놀란 듯 했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자신의 정면에서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 교수님과 눈이 마주쳤고, 그제서야 상황을 파악한 듯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히익! 죄, 죄송합니다!" 그리고 침 삼키는 소리까지 들릴 것처럼 조용하던 강의실이 그제야 기다렸 다는 듯 폭발적인 웃음소리에 휩싸였다. 나 역시 배를 잡고 웃었음은 물론 이다. 묵묵히 안경 너머로 그를 노려보던 교수님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몇 호 실 수업이지" "사, 삼백 십 칠호..." 불쌍하게도 그 청년은 빨갛게 변한 얼굴로 말까지 더듬고 있었다. 교수님 은 묵묵히 다시 한참을 바라보았고, 그러다 탐탁치 않은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강의실은 제대로 찾아왔군. 앞으로는 문도 제대로 찾아보게. 들어 가 앉게" "예, 죄, 죄송합니다!" 다시 한 번 고개를 꾸벅 숙여 사과한 그 청년은 황급히 맨 뒤쪽으로 향하 다 우리를 보고 잠시 멈칫하고는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응? 갑자기 왜 우리 쪽으로 오는건지? 그런데 저 사람 얼굴이 왠지 어디에서 많이 본 듯하다? 요령이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야, 저 사람 아까 자기네 동아리 들라고 우리 부른 사람 아냐? 초장부터 반말 틱틱 해대던 그..." 나는 고개를 들어서 그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러고보니 정말 아까 그 녀석이네? 그 녀석은 내 뒤의 빈 자리에 앉아서 내 등허리를 쿡 찌르며 말 했다. "안녕? 너도 이 수업 듣네? 아까 봤지?" "아, 예...예" 당황한 나는 나도 모르게 반말로 대답했고 그러자 그 녀석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야, 나도 새내기라니깐? 그냥 말 놔. 어쨌든 한 번이라도 본 얼굴을 여기 서 만나니까 무척 반갑네. 내 이름은 청도라고 해. 강청도" 아까 교수님 앞에서 당황하거나 하는 모습을 보면 나쁜 녀석 같지는 않았 는데. 버릇이 없는건지 아니면 스스럼이 없는건지 모르겠지만, 대학에 들어 와서 이렇게 아는 사람이 생기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난 박영준이라고 해. 만나서 반가워" 약 30분 간 주저리주저리 현대의 교육이 어떠니, 요즘 대학생들의 학력이 어떠니, 수업에 대한 의지가 어떠니 분위기가 어떠니 떠들어대던 교수님이 결국 지쳤는지 불필요한 확인의 말을 공허하게 남기며 드디어 수업을 마치 고 강의실을 떠났다. 강의실은 순식간에 시끌벅적한 소음에 휩싸였다. "아, 정말 지루했어. 짜증나 죽는 줄 알았다고" 청도라고 했던가? 이 녀석, 녀석의 입 끝에 언제나 걸린 미소를 봐서는 그 냥 조용히 씩 웃고만 있을 거 같은 분위기인데, 옆에-정확히 말하면 뒤에- 앉혀놓고 보니 좋게 말하면 쾌활하고 나쁘게 말하면 조금 시끄러운 그런 녀 석이다. 뭐, 나도 유쾌한 분위기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니 쾌활한 게 꼭 나 쁘다는 것은 아니다. "다음 강의실은 어디야?" 약간 과하다 싶을 정도로 밝은 백색 형광불빛으로 뒤덮인 채 길게 뻗은 승 학관의 복도를 걸으며 아무 생각없이 화두를 꺼냈다. 그런데 내 질문에 돌 아온 대답이 조금 의외였다. "승학관 116호" "응? 나도 거긴데. 몇 교시야?" "5교시" "그래? 나도 5교시... 어? 같은 수업이잖아?" 난 순간적으로 당황하여 놀란 목소리로 물었는데 녀석의 목소리가 생각 외 로 평온하다. 청도는 설명하듯 내게 말했다. "정말 그러네?...가 아니라 방금 전에 들은 건 역사학과 새내기들의 수업 으로 수강표에 분류된 수업이라고. 너 역사학과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어" "것 봐. 그렇다면 아마 너와 내 수업이 꽤 많이 겹칠걸? 아쉽게도 이 학교 는 역사학도를 위해서 많은 강의를 배정해 놓고 있지 않으니까. 과의 규모 자체도 작고" "그렇구나..." 실제로 시간표를 대조해보자 상당히 많은 수업이 겹치고 있었다. 뭐, 모든 수업이 겹치는 것은 아니었지만 거의 매일 한 두번은 수업을 같이 듣도록 시간표가 짜여 있었던 것이다. 시간표를 대조해 본 청도는 피식 웃었다. "이건 보기 싫어도 자주 보겠네. 친해지기 싫어도 친해질 수밖에 없겠는걸 ?" 시간표를 내게 돌려주던 청도는 갑자기 깜빡 했다는 듯 급히 나를 돌아보 더니 말했다. "참, 밥이나 먹으러 가자!" "그런데 너, 집은 어디냐?" 구내식당의 반찬으로 나온, 맛이 썩 좋지는 않은 생선튀김을 한 점 집어다 밥그릇에 올려놓던 청도가 문득 궁금하다는 듯이 내게 물었다. "그냥, 전라도 구석의 산골마을이야. 동네 이름은 말해도 잘 모를거야" "아, 그래...별로 사투리를 쓰는 것 같진 않았는데" "그럼 너 설마 내가 '사투리 안 쓰니까 쪼까 이상하지라...사실 나으 본디 모습은 이런게 아니랑께, 표준어 쓰느라 짠해 죽갔구마이'같은 식으로 말해 야된다고 생각하냐?" "하하하!" 나는 실감나게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해냈고 그래서 청도는 내 농담에 크게 웃었다. 난 청도가 웃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내가 왜 사투리를 쓰지 않는지를 설명했다. "비록 내 고향은 전라도지만 우리 부모님은 모두 서울 태생이셔. 그리고 나는 그런 부모님 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서울말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거지. 하지만 뭐 그렇다고 내가 전라도 쪽 사투리를 못 쓴다는 소리는 아냐. 안 쓰는 것일 뿐이지. 서울에서는 서울말을 쓰는 게 가장 편하거든. 뭐 나야 태어난 곳이 태어난 곳이니만큼 사투리를 쓰는 게 서울말을 쓰는 것 보다 조금 더 편하지만, 사투리를 쓰면 사람들이 내 말을 잘 못 알아듣더라고" 내 설명에 청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아, 그런데 궁금한 게 하나 있었어. 넌 새내기잖아. 그런데 새내기가 왜 동아리 신입생들을 받고 있었어? 그런건 2,3학년 선배들이 하는 거 아냐?" 갑작스레 던진 질문에 청도는 멋적게 씨익 웃더니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대답했다. "어, 그거. 별 건 아니고, 그냥 선배가 없어서" 엑? 동아리에 선배가 없다고? 그건 별 게 아닌게 아니잖아?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선배가 없다고? 왜? 설마 몽땅 군대라도 간거야? 하지만 여자 선배들은?" 내 속사포같은 질문공세에 대한 청도의 대답은 너무나도 간단했다. 청도는 물을 한 입 삼키면서 태연히 대답했다. "...내가 올해 만든거니까" "뭐?"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청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뭐야, 네가 올해 만 들었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청도는 내가 그렇게 바라보자 멋적어졌는지 고 개를 숙이고 뒷머리를 긁으며 들릴락말락하게 중얼거렸다. "어, 그러니까 말야...그게...동아리라는 걸 봤는데 딱히 들 곳도 없고... 그냥 내가 만들어보고 싶은 마음도 들고...해서...그냥 그렇게 됐다" 아니, 계속 그냥 그렇게 됐다만 말하면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참, 배짱도 좋네. 혼자서 동아리를 만들 생각을 다 하다니. ...잠깐, 그럼 아까 이 녀석이 우리보고 가입하라고 했던 곳이 설마... "너, 설마 선배 한 명도 없는 그런 동아리에 우리를 끌어들이려 한 거냐?" 나는 기가 막혀서 김이 팍 새는 목소리로 물었고 청도는 내 말에 몸둘 바 를 모르겠다는 듯 우물쭈물 대답했다. "어, 어어... 그렇게 됐어..." "......" 으윽. 이거 정말 대책 없는 녀석이로세. 내가 한참을 아무 말도 안하고 바 라보고만 있자 청도는 계속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며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에라 이렇게 된 거, 너, 나와 같이 우리 동아리 창립멤버 한 번 안 해볼 래?" 내가 입에 들이켠 물을 내뿜은 것은 정확히 녀석의 말이 끝나고 삼 초 후 였다. 반응이 그렇게 늦었던 것은 청도의 말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무슨 말 을 하는지 잘 이해를 하지 못했던 까닭이다. "푸우웃!" "우욱!" 재빠르게 의자에 앉은 채 뒤로 촤악 물러나는 청도. 다행히 녀석의 몸놀림 은 상당히 빨랐고 그래서 본 지 몇 시간 되지도 않는 녀석의 얼굴에 입 속 에 있던 물을 뿜어버리는 불상사는 없었다. 휴우, 다행. 난 입 주위에 있는 물을 재빨리 손등으로 슥슥 닦았다. 청도는 날 멍하니 바라보다 볼을 긁적 이며 말했다. "어, 그렇게 당황스러운 요구였나?" "아, 네 말 자체가 별로 당황스럽거나 한 건 아닌데, 저...그러니까, 너 나 오늘 처음 봤잖아?" "어...뭐 그렇지" "...방금 네가 한 것 같은 부탁은 좀 많이 친한 사람한테 하는 말 아냐?" 그리고 청도는 전혀 몰랐다는 듯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 그, 그런건가? 뭐...앞으로 친해지면 되니까...하고 생각했는데. 사 실, 나 이 대학에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거든...처음 만난 친구들이 너 희들이야...그래서 이런 부탁을 하게 됐는데..." 허, 이거 보면 볼 수록 대책없는 친구일세. "...그래, 뭘 하려고 하는데?" "어, 아까도 말했지만 칼이나 같이 배워볼까 하고..." "그래? 검도?" 청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냐아냐. 내가 가르치려는 건 우리 가문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검 술인데..." 맙소사. 점입가경이네. 처음 보는 사람을 붙잡고 동아리나 같이 만들자고 하는 것도 당황스러운데, 그 동아리에서 가르치는 건 가문에서 전해져 내려 오는 비전의 검법이라고? 청도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원래 이건 우리 가문의 장자에게만 전달되는거야. 그런데, 뭐 남한테 좀 가르쳐주면 어때. 그렇지? 사실 장자에게만 전달하라는 규칙이 명시되어 있 는 것도 아니거든. 그래서 같이 가르치고 배우면서 뭐, 잘 해보자는 거지. 혹시...생각 없어?" 당연하지. 그런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법한 검술따위, 관심 없다고. 나는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려다 혹시나 하고 가람이와 요령이를 흘낏 바라보았다. 보나마나 이 두 녀석도 별로 관심이 없긴 마찬가지겠지. 그런 데, 가람이의 눈길이 예상 외로 상당히 흥미가 동한다는 눈빛이다. 억, 뭐 야! 나는 가람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가람아, 관심있냐?" "아, 별 건 아니고, 옛날부터 내려오는 무예라길래. 조금 흥미가 끌려서" 그리고 청도는 환한 얼굴이 되어서 빠르게 말했다. "그렇지? 흥미가 끌리지?" 가람이는 청도의 말엔 대답하지 않고 대신 나를 보며 말했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보나마나 큰 실력은 없겠지만, 그래도 저 가문의 비 전 무예라는 걸 한 번 보고 싶은데..." 흐음, 네가 정 그렇다면야...뭐 지금 당장 청도의 말을 승낙하는 것도 아 니고 단지 구경만 하는 건데, 그 정도야 괜찮겠지. 나는 가람이의 말에 고 개를 끄덕이고 청도에게 말했다. "흠...그렇다면 이따 네가 말하는 그 검술이 어떤건지 좀 볼 수 있을까?" 그리고 청도의 얼굴은 더할 나위없이 밝아졌다. 청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이지! 그럼 수업이 다 끝난 뒤에 우리 동아리방에 가 보자고! 거기 목검들이 많이 있으니까 말야" "...아니, 신생 동아리라면서 동아리방이 다 있어?" 내 말에 청도는 멋적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동아리방이라고 해도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고 그저 컨테이너를 하나 가져다놓은 정도이지만 말야, 그래도 한 번 가 보자고" 청도의 말에 나는 더욱 더 놀랐다. 아니, 학교에 그런 걸 막 갖다놓는단 말야? "아니, 학교 내에 가건물을 그렇게 막 세워도 되는거야?" "응...그냥, 이 학교 이사장이 우리 아버지 친구라서...허락해 주시더라 고. 집도 멀고 해서, 여러 용도로 쓰려고 하나 가져다 놓았어" 청도의 말에 나는 입을 딱 벌리고 멍하니 청도를 바라보았다. 식사를 마치고 남는 시간동안 우리는 교정을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럼 넌 자취하고 있는거야?" 청도의 질문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요령이와 가람이는? 학교에 들어오기 전부터 친한 걸 보니까 고등학교를 같이 나왔나보네?" 뭐라고 대답해야하나...이 대답은 그냥 얼버무리는 게 좋을 것 같다. "응, 그냥 그런 건 아니고...우연히 알게 됐어" 청도는 조금 궁금한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내가 입을 다물자 더 이상 요 령이나 가람이에 대해 묻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고, 대화의 물꼬를 다시 트기 위해 이번엔 내가 청도에게 물었다. "그럼 너는? 넌 혼자 사니?" "응, 지금 그 컨테이너를 내 방으로도 쓰고 있거든. 거기에서 살고 있어" "그래? 그렇다면 네 방에 동아리방 같은 걸 꾸리면 너한테 피해가 가지 않을까?"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뭐" 그 때 요령이가 손가락으로 나를 찌르며 말했다. "야, 야" "어?" "쟤 좀 봐. 그 때의..." 요령이는 손을 들어 내 왼쪽을 슬쩍 가리켰고 나는 고개를 돌렸다. 등나 무들이 친친 얽혀서 하늘을 덮고 있는 벤치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입학식 때 언뜻 보았던, 중국풍의 옷차림을 한 소년이다. 아니, 소년일까? 청년이 라고 하기엔 조금 어려보이고 소년이라고 하기엔 나이가 조금 어려보이는, 그런 어중간한 생김이다. 하지만 입학식날 모습을 보였고, 또 이렇게 교정 에서 다시 본 것으로 봐서 대학생일테니 청년이라고 하는 것이 맞겠지. 그 의 옆에는 긴머리를 뒤로 땋아서 늘여뜨린 여자와 마치 밤하늘처럼 진한 흑발을 코 부근까지 어른거릴 정도로 기른 남자가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눈에 확 띄는 옷을 입은 중국풍 청년과는 대조적으로 둘의 옷차림 은 평범했다. 여자는 아직까지 추운 날씨 때문인지 흰 색 파카와 긴 갈색 치마를 입고 있었으며 남자는 검은색 자켓에 검은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이 학교 학생인가봐" 요령이가 말했고 나는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청도가 말했다. "특이한 차림인데" "입학식 때 왔었는데. 보지 못했어?" "응, 난 입학식에 가지 않았거든" "그렇구나" 난 그들을 다시 한 번 힐끗 쳐다보았다. 그들은 계속 자기들끼리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남자가 주위에 아무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더니 중국풍 청년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더니 무엇인가를 속삭였다. 그러자 청년은 지금껏 약간 떨구고 있던 고개 를 번쩍 들어서 정확히 나를 쳐다보았다. 그와 나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 다. "뭐, 뭐야?" 갑자기 청년이 바라보는 바람에 놀란 나는 움찔하며 뒤로 한 발 물러섰 다. 그런 나의 모습에 청년은 의심스럽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남 자에게 무어라 속삭였고 남자는 연신 고개를 저으며 손으로 나를 가리켰 다. 곧 여자도 나를 슬쩍 바라보더니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런, 무슨 이야 기를 하는거지? "주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가람이가 내게 말했다. "응, 나도 그런 것 같아. 그런데 저것들이 왜 기분 나쁘게 사람을 슬쩍슬 쩍 보면서 떠들어대는 거지? 내 욕이라도 하나?" 가람이가 내게 말한 걸로 미루어 다른 사람들도 저들이 내 이야기를 한다 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거 아무래도 한 번 저들에게 가봐야겠는걸. 나는 손짓까지 해대며 격렬하게 난상토론을 벌이는 그들에게로 걸음을 떼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단지 계속해서 이야기만 나 눌 뿐이었다. 얼마나 대화에 몰입했는지, 그들은 내가 가까이 다가갈 때까 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한 세 발짝쯤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대화 내용을 들어보고 싶었지만 중국어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역시 중국에서 온 사람들인가? 나는 천천히 그들을 불렀다. "야" 그들은 내 부름에 대화를 멈추고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중국풍 청년이 화난 얼굴로 내게 무어라 말을 했다. 하지만 그 렇게 말해봤자 난 알아들을수가 없는걸. 나는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고 내가 아무 대답이 없자 청년은 더욱 화가 난 듯 손짓까지 해대며 내게 무 어라 말했다. 아마 항의하는 듯 한데. 옆에서 긴 흑발의 청년이 내게 말했 다. "왜 남의 대화를 엿듣는 거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우리말을 할 줄 아네? 그런데 존댓말은 약간 서투르군. '물어보셨습니다' 가 아니라 '물어봤습니다'겠지. 명사, 동사, 부사, 목적어 안 가리고 문장의 구성요소에 몽땅 존댓말을 붙여버리는 것은 존댓말을 구사하는데 능숙하지 못한 사람들이 주로 저지르는 실수다. 확실히 외국인인가보다. 나는 대답했 다. "엿듣지 않았어요. 전 당신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거든요. 엿듣고 싶 어도 그럴수가 없죠. 그런데 당신들의 대화내용이 궁금하긴 하던데요. 제가 주된 대화소재 같던데, 저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죠?" 흑발의 청년은 중국풍 청년에게 내 말을 전하는 듯 무어라 속삭였고 중국 풍 청년은 그 말을 듣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다. 갑자기 그가 벌떡 일어나더니 자신의 무리를 향해 무어라 볼멘 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여자와 청년은 그를 따라 부스스 일어서더니 그대로 등을 돌려 우리에게서 떠나려는 듯 걸음을 옮겼다. 어억? 이거 내 말을 무시하고 그냥 가버리겠다는 거 아냐? 난 기분이 나빠져서 좀 높아진 언성으로 말했다. "이보쇼! 사람이 물어봤으면 대답을..." "안녕히" 상대편을 완전히 무시해버리는 흑발의 남자의 인사는 내 말을 콱 틀어막 았다. 젠장. 난 멀어지는 셋을 기가 막혀 헛웃음만 지으며 바라보았다. 왠 지 기분나쁜 녀석들인데? 가람이는 내가 무시당했다는 것에 화가 나는지 목울대를 조금 울리며 낮게 그르릉거리고 있었다. 개일때의 습성을 드러내 는 것이다. 요령이도 화가 나는지 말했다. "아니 뭐 저런 싸가지없는 것들이 다 있어? 저것들을 그냥 성질대로라면 콱...개구리로 만들어버릴까?" 청도가 놀란 눈으로 요령이를 바라보았다. "예? 개구리라니요? 그게 무슨...?" 그리고 요령이는 일순간 당황한 표정이 되더니 곳 억지로 만든 것이 역력 히 드러나는 다소곳한 표정을 지으며 호호 웃었다. "말이 그렇다는 거죠, 호호..." 에구, 청도야. 너도 곧 알게 될거다. 요령이가 어떤 성격의 소유자인지. 그 런데 정말 사람을 개구리로 만드는 게 되나? 다시 승학관으로 돌아가면서 난 요령이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야, 정말 사람을 개구리로 만드는 게 되?"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봐라, 이 바보야! 사람이 개구리가 되겠냐? 어깨 위에 있는 그건 모자냐?" 요령이는 한심하다는 듯 대답했다. 상식? 아니 그럼, 고양이가 사람으로 둔갑해서 돌아다니는 건 상식에 맞는 이야기냐? 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 다. 물어본 내가 바보지. 오늘의 마지막 수업이 끝났다. 뭐, 여느 수업처럼 교수 소개와 사야하는 교재와 과목에 대한 짧은 설명으로 끝난 수업이었다. 시각은 4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 5분만에 끝난 셈인가? "자, 그럼 우리 방으로 가야지. 뭐, 아직까지는 내 방인가? 하하" 청도는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 웃으며 우리들을 재촉했다. 그렇 게 서두르지 않아도 될텐데, 어지간히 마음이 달아올랐나보다. 승학관을 가 로질러 그 뒤의 청심관을 돌아지나서 학교 뒷산길을 조금 오르자, 약간은 으슥한 곳에 잔디가 듬성듬성 난 평지가 넓게 펼쳐져 있었고 과연 흰색 컨 테이너가 하나 있었다. "여기야?" "응. 여기서 살고 있고, 수련도 이곳 주위의 잔디밭에서 해. 지나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좋아" 고개를 돌려 주위를 휘 둘러보았다. 과연 평지가 꽤 넓어 수련하기에 적 당할 것 같다. 산 속에 이런곳이 있다니, 놀라운데. 청도는 이런곳을 용케 도 찾아내었군. 가람이가 지나가는 말로 물어보았다. "자기 실력에 대한 어느정도의 파악은 하고 있겠지?" "그럼" 청도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를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나?" "세계 최강" 청도는 태연한 얼굴로 얼굴이 화끈거려야 마땅한 대답을 했다. 기껏해야 '검도 몇단 정도?' 수준의 대답을 기대하고 있던 나는 잠시 무슨 말인지 이 해하지조차 못했다. 심지가 곧은 가람이마저도 순간 굳어버렸다. (심지가 곧은것이 굳어버리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가람이는 잠시 입을 벌리더니 곧 '허'하고 웃으며 말했다. "돌아가고 싶은데, 주인. 우리가 괜히 시간낭비만 했나보군" "응?" "이런 허풍쟁이의 실력이야 뻔하지. 내가 괜한 걸 기대했었나보군" 가람이는 말을 잘 하지 않을뿐더러 말을 해도 막하는 성격이 아니다. 그 런 가람이가 이런 말을 하다니 정말 기분이 나쁜가보다. 하긴, 나 같아도 기분이 나쁘겠다. 저 정도의 과장이라니! 정도껏 해야 그러려니 하지, 세계 최강이 뭐야, 세계 최강이? 그런데 기분이 나쁜 사람이 한 명 더 있는 것 같다. "어어, 뭐야, 그 태도는? 지금 날 무시하는거야?" 청도가 잔뜩 볼멘소리로 말했다. 설마...그게 진심으로 한 소리였나? 가람 이는 기가 막혀 말도 잘 나오지 않는다는 듯 청도에게 말했다. "그럼 자기를 가리켜 세계 최고라고 하는 사람에게 더 이상 어떤 태도를 바라는가?" "나 정말 세계최고야!" 청도의 대답에 가람이는 더 이상 대답도 하기 싫다는 듯 아예 입을 다물 어 버렸다. 그런 가람이의 태도에 화가 났는지 청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때 요령이가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한 발 앞으로 나와서 가람이 와 청도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확인해 보면 되겠네" 요령이의 말에 대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모두의 시선은 요령이를 향하고 있었다. 모두 자신에게 주목한다는 것을 확인한 요령이는 만족스러 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청도는 자기 실력을 안 믿어주는 가람이에게 화가 난 거고, 가람이는 청 도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서 기가 막히다는 거잖아. 그러면 둘이 대련 을 해보는게 어때?" "뭐? 대련?" 난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아니 저게 누굴 잡으려고...가람이와 청도를 대 련을 시키겠다고? 청도가 병원으로 실려가는 꼴을 보고 싶은거냐! "안 돼! 사람이 다친다고!" "뭐 어때. 가람이도 칼에 관심을 보이는 걸 보면 검술 실력이 아예 없는 것 같지는 않으니, 청도가 만약에 정말로 자기를 세계 최강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실력이 된다손 치더라도 어느 정도는 막아낼 수 있을 것 아냐? 그리 고 만약 청도의 검술실력이 허풍이라면..." 요령이는 청도를 향해 한 번 빙긋 웃어주더니 말했다. "...뭐 그럴 경우에는 맞아도 싼 거지" 하지만 이런 결과가 뻔히 보이는 싸움을...가람이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허풍쟁이와 대련하고 싶은 생각 따위 별로 없다" 요령이는 가람이의 말에 적잖게 실망한 표정이 되었다. 아마 요령이는 싸 움구경이 하고 싶었나보다. 그렇지 않다면 왜 저렇게 실망하겠는가. 청도도 근심어린 표정으로 대답했다. "대련...못해" 청도까지 그렇게 말하자 요령이는 이제 실망감을 넘어선 짜증을 얼굴에 드리우며 청도를 바라보았다. 요령이는 날카롭게 대답했다. "왜? 역시 겁먹었니? 네가 한 말은 역시 허풍이었던거니?" 청도는 요령이의 말에 강하게 부인하는듯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냐!" "그럼 뭔데?" "나랑 대련하면 가람이가 다칠지도 모른단 말야" 그리고 난 가람이의 입매가 미세하게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았다. 가람이 는 으르렁거리며 청도에게 말했다. "칼을 가져와!" "정말 괜찮겠어? 나 진짜 세단 말야. 너 다쳐도 내 책임 아냐!" "알았으니 어서 가져오기나 해..." 가람이는 솟아오르는 짜증으로 인해 소리를 벌컥 지르려다 참는 듯 말을 채 맺지 못하고 긴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청도는 그런 가람이를 보다 고개 를 설레설레 저으며 컨테이너로 들어가 목검 두 개를 가지고 나왔다. "목검?" "진검으로 싸우면 정말 다칠지도 모르잖아. 목검으로 맞는다고 안 아픈건 아니지만, 최소한 목검으로 싸우면 어디 한 군데 잘리는 일은 없잖아? 그리 고 난 진검을 쓰지 않아서 말야" 청도는 가람이에게 목검을 하나 넘기며 물었다. "장소는?" 가람이의 말에 청도는 엄지손가락을 들어 어깨 뒤를 슬쩍 가리켰다. "여기. 잔디밭. 넓고, 넘어져도 다칠 염려도 적으니깐...괜찮지?" 가람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잔디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청도가 그 뒤를 따라 잔디밭으로 향했고, 청도와 가람이는 잔디밭에서 서로를 마주보고 목 검을 든 채 섰다. "어떻게 시작할까?" 청도의 말에 가람이는 짧게 대답했다. "교전을 혹시 아는가?" "응. 그것처럼 시작할까?" "시작만" 가람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교전? 그게 뭐지? 난 요령이에게 물 었다. "야, 교전처럼 시작하는게 뭐야?" 요령이는 내 말에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지켜보면 알지 않을까 하고 말하고 싶어라, 아, 지켜보면 알지 않을까 하 고 말하고 싶네, 지켜보면 알지 않을까 하고 말하면 상처받을까? 그래도 지 켜보면 알지 않을까 하고 대답하고 싶은데..." ...면박주긴. 나는 요령이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려 청도와 가람이를 바라 보았다. 두 사람의 자세가 처음의 마주보고 똑바로 서 있던 자세에서 바뀌 어 있었다. 두 사람은 왼손에 쥔 검을 어깨에 걸친 채 우리를 향해 서서 고 개만을 돌려서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저게 교전처럼 시작하는 건가? 둘 은 그렇게 서로를 노려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갑자기 둘이 동시에 고함을 질렀다. "하얏!" 고함과 함께 둘은 양손으로 검을 쥐고 오른다리를 구르며 몸을 거세게 뒤 틀어 서로를 향해 목검을 휘둘렀다. 따악! 잔디밭을 울리는 목검의 충돌음 과 함께 둘의 검이 서로 부딪혔다. 두 사람의 대련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 이다. "합!" 처음에 몰아붙이기 시작한 것은 가람이 쪽이었다. 가람이는 검이 부딪히자 마자 검을 다시 머리 위로 들어올려 그대로 청도의 머리를 향해 휘둘렀다. 청도는 재빨리 머리 위로 비스듬히 검을 들어올려 가람이의 검을 막았지만, 가람이는 재빨리 검을 회수해서 다시 청도의 허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청도가 검을 옆으로 세워 막아내자, 가람이는 이번엔 청도를 향해 검을 빠 르게 찔러댔다. 하지만 청도는 교묘히 좌우로 발을 움직이며 가람이가 찔러 대는 검을 모조리 피해냈다. 청도가 가람이의 공격을 모두 피하자, 가람이 의 표정이 조금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핫!" 짧은 기합과 함께 가람이가 검을 비스듬하게 휘둘렀다. 부웅! 놀랍게도 목 검에서 나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멀찍이 떨어진 내 귀에까지 들려왔다. 정말 엄청난 힘이군! 그러나 가람이는 이번에도 청도를 맞추지 못했다. 청 도가 뒤로 멀찍이 뛰어서 피한 것이다. 이제 청도가 공격을 준비하는지 검 을 옆으로 들어 왼쪽 귀 옆에 붙이며 앞으로 한 발 나아갔다. "좌협장검! 위협을 할 정도로 여유가 있는거냐?" 가람이는 머리 위로 계속 들어올리고 있던 검을 명치께로 내리며 외쳤다. 청도는 가람이의 말에 아무 대답없이 앞으로 성큼성큼 나아가며 검을 내려 허벅지께에 붙이더니 그대로 위로 긁어올렸다. 북! 가람이는 빙글 돌아 피 하면서 청도가 있던 자리로 검을 뻗었다. -휙! 바람소리가 났다. 가람이의 검에서 난 소리는 아니었다. 가람이가 검을 휘 두른 방향에는 풀자락만이 푸스석거리며 날리고 있었다. 가람이는 주위를 돌아보지도 않고 죽기살기로 몸을 옆으로 틀었다. 부웅-! 가람이가 있던 자 리로 청도의 검이 날아들었다. 가람이는 재빨리 검을 세우고 몸을 빙글빙글 돌려 자신을 방어하면서 물러나더니 청도를 마주보고 섰다. "너, 꽤 대단하구나!" 청도가 감탄한 듯 말했다. 하지만 가람이의 얼굴은 딱딱했다. 아니, 약간 일그러져 있기까지 했다. 가람이는 입을 열었다. "...허풍쟁이라는 것은 취소하지. 세계 최고라는 것은 헛소리지만, 자신의 검술에 자신만만할 정도의 실력은 가지고 있군" "나, 정말 세계 최고라니까?" 가람이는 청도의 말을 무시하며 말했다. "너의 실력을 전부 보여라. 그 정도로는 나를 이길 수 없어" "하지만 너도 실력을 숨기고 있잖아?" 그럼 둘 다 자신의 실력을 전부 발휘하지 않았다는 소리인가? 방금 전에 보인 것만 해도 정신이 없을 정도로 빨랐는데? 가람이는 이를 드러내며 말 했다. "이제부터 내 검술을 모조리 펼치겠다. 그러니 너도 너의 모든 실력을 보 여라!" 가람이의 살벌한 말에도 청도는 전혀 겁먹지 않은 듯 했다. 청도는 유유히 대답했다. "글쎄, 봐서" 청도의 대답에 가람이의 안광이 번쩍였다. 가람이는 노호성을 지르며 청도 에게 달려들었다. "보여줄 수밖에 없게 해주지!" 가람이는 청도에게 쇄도해 들어가면서 보법을 교묘하게 틀었다. 가람이의 몸이 사방으로 흔들렸다. 너무도 빨리 마구잡이로 흔들려서 잔상이 보일 정 도였다. 가람이는 그렇게 현란하게 몸을 움직이며 청도에게 접근했다. 하지 만 청도의 얼굴은 너무나도 태연자약했다. "합!" 가람이의 잔상들이 동시에 청도에게 검을 내뻗는 순간, 청도는 몸을 흔들 었다. 퍼퍼퍽! 땅을 차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사방으로 흙과 풀뿌리 가 튀기며 청도의 발이 수십 개로 보인다고 생각한 순간, 청도는 가람이와 똑같이 움직여서 가람이의 잔상들이 뿌린 검을 모조리 막아내고 있었다. 딱 -! 수십 개의 검이 허공에서 춤추며 부딪혔다. 하지만 충돌음은 하나였다. 나머지는 모두 검이 너무 빠르게 움직여서 생긴 잔상인 것이다. 가람이의 얼굴이 당황으로 하얗게 물들었다. 아마 청도가 자신의 공격을 그리도 쉽게 막아내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으리라. 이번엔 청도가 가람이가 방금 했던 것처럼 수십 개의 칼날을 뿌려대며 가람이를 몰아붙였다. 이미 심지가 흐트러져버린 가람이는 청도처럼 공격을 되받아치지 못했다. 그저 막는 데 에만 급급했을 뿐이다. 점점 가람이의 방어가 늦어지고 청도의 공격은 점점 거세어져갔다. 결국 저렇게 가람이가 지고 마는 것일까? 그런데, 갑자기 가람이의 눈이 번쩍 빛났다. "우와앗!" 가람이는 세상이 떠나가라 고함을 지르더니 계속해서 물리던 발을 땅에 콱 짚고 칼을 교차시키듯 휘둘렀다. 바우우웅! 목검에서 엄청난 소리가 났다. 청도는 갑작스런 가람이의 반격에 당황했는지 몰아붙이던 공격을 멈추고, 그대로 허공으로 뛰어 가람이의 공격을 피했다. 가람이는 그대로 몸을 빙글 빙글 돌리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회전하는 가람이의 주위에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목검들이 어지러이 춤추었다. 마치 가람이가 수십 개의 칼날이 달린 폭풍이 된 것 같았다. 가람이는 그렇게 몰아치듯 검을 뿌리며 크게 외쳤다. "이건 어떻게 막아내나 볼까!" 청도는 아무 대답없이 검을 들어올려 눈가에 들고 땅에 수평으로 세우더니 그대로 앞으로 달려나갔다. "합!" 청도의 일갈과 함께 갑자기 청도의 앞에 황갈색 막이 펼쳐졌다. 검막. 엄 청나게 빠른 속도로 청도가 검을 휘둘러대기 시작한 것이다. 파파파파팍! 가람이의 폭풍처럼 몰아치는 검들과 청도가 만든 검의 벽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주위의 풀들이 광풍에 휩쓸린 것처럼 마구잡이로 뜯겨서 흩 날렸다. 청도와 가람이 둘 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청도와 가람 이의 사이에서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검들이 부딪혀대었다. 그 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을까. 주춤. 가람이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저런!" 요령이가 작게 놀란 소리를 내었다. "균형이 깨졌네!" 요령이의 말처럼 가람이와 청도 사이에 생겼던 팽팽한 검의 균형이 깨어지 고 있었다. 한 발이 밀린 것을 시작으로 가람이가 수세에 빠지기 시작한 것 이다. 점점 검막과 검풍이 부딪히는 장소가 가람이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 다. 가람이는 천천히 회전하며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 자세는 상당히 안정적이었지만 아까 같은 공격적인 풍모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청도가 기합을 내뱉으며 점점 더 앞으로 발을 딛었다. 청도의 검이 더욱 더 빠르게 가람이를 몰아붙였다. 이제 가람이가 뿌리는 검들은 모두 방어로 만 집중되고 있었다. 결국 가람이는 다시금 고함을 지르며 검을 크게 휘두 른 뒤 뒤로 미끄러지듯 물러나야만 했다. 청도는 가람이가 물러서자 그대로 보법을 멈춘 채 검을 들어 가람이를 견제했다. "헉, 헉! 제독연무검조차 막아내다니, 대단하군!" 가람이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청도가 물었다. "방금 전 보여준 검법의 이름이 제독연무검이었나?" "정확한 이름은 '북방철기보단무법 실전응용세 제7식 제독연무검'이다. 그 냥 제독연무검이라고 부르지" "북방철기보단무법이라...처음 들어보는 이름이군" "조선시대에 보통의 군인들이나 무인들이 수련하던 검법을 북방철기보단에 서 개량한 것이지. 일반인들한테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검술이다. 그런데 이걸 막아내다니...놀라운데. 여진족같은 강맹한 자들에게나 사용하던 검술 인데..." 가람이는 감탄 어린 눈으로 청도를 바라보았고 청도는 피식 웃었다. "강한 상대를 설정하지 않고 만든 무술이 어디 있어? 그보다, 공격하지 않 을거야? 안 오면 내가 가도록 하지" 청도가 말하는 동안 가람이는 '스으읍-'하는 소리와 함게 숨을 가늘게 들 이쉬고 있었다. 이윽고 가람이는 호흡의 평정을 되찾았는지 검을 다시 움켜 쥐고 그대로 청도에게 돌진했다. "이번에는...!" 가람이는 빠르게 발을 옮기며 그대로 검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팟! 갑 자기 가람이의 모습이 사라졌다. 깜짝 놀란 나는 두리번거리며 가람이의 모 습을 찾았다. 놀랍게도 가람이는 어느새 청도의 바로 앞에 도달해 있었다. 청도의 머리에 빨려들어가듯 검이 떨어지는 모습이 내 눈에 느리게 들어왔 다. 그만큼 눈에 꽂히는 장면이었던 것이다. 청도의 표정은 당황한 듯...이 어야 하는데...아니잖아? 청도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쉬릭! 청도는 어느샌가 사라져 있었다. 가람이의 검은 허공을 갈랐고, 이번엔 청 도가 막더라도 청도의 검을 부러뜨려 치겠다는 심산으로 후려쳤는지 자신의 모든 무게를 실어서 검을 휘둘렀던 가람이는 허공을 헛치자 몸을 크게 휘청 거렸다. "젠장!" 가람이는 이를 악물며 몸을 뒤틀어 뒤로 돌며 자신의 뒤를 후렸다. 청도가 가람이의 뒤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부웅! 그러나 이번에도 가람이의 검은 허공을 쳤다. 청도는 다시 발을 움직여 가람이의 뒤쪽으로 돌아서 들어갔 다. "무지 빠르네!" 요령이가 탄성을 내뱉었다. 가람이는 이를 악물며 다시 뒤쪽으로 칼을 뿌 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청도는 발자국 소리 하나 없이 가람이의 뒤를 잡았 다. 다시, 또 다시. 가람이가 뒤쪽으로 몸을 과격하게 돌리면서 칼을 뿌리 면 청도가 가볍게 피하면서 가람이의 뒤로 돌아들어가는 모습이 반복되고 있었다. 가람이는 아마 죽을 맛일 것이다. 조금이라도 뒤를 치는 것이 늦으 면 청도는 피하는 대신 가람이의 등을 목검으로 후려칠 것이기 때문이다. 가람이의 동작이 점점 커지고 몸의 안정감도 보기 아슬아슬할 정도로 깨지 고 있었다. 애초부터 비틀대면서 뒤를 친다는 것 자체가 무리한 동작이었는 데, 거기에 계속해서 뒤를 베는 동작을 반복하면서 그나마 운동신경으로 잡 아나가던 몸의 균형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저대로 가다간 가람이는 곧 넘어져 버릴 것 같았다. "으라차아앗!" 가람이는 격한 함성을 지르며 그림자처럼 자신의 뒤를 잡는 청도를 어떻게 든 떼어내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갑자기 가람이의 몸 주위로 폭발하듯 검 들의 그림자가 뿜어져 나왔다. 가람이의 주위를 뒤덮은 검의 잔상들로 가람 이의 모습은 꼭 고슴도치 같았다. 청도는 갑자기 가람이의 몸에서 수백 개 의 검들이 뿌려져도 전혀 당황하지 않는 듯 자신의 앞으로 찔러들어오는 몇 개의 검들만 빠르게 쳐내고 가람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영차!" 고전적인 기합의 연속이로군. 가람이는 다시금 용을 쓰는 소리를 지르며 검을 크게 휘둘렀다. 바우우웅! 도끼를 휘둘러도 저런 소리는 안 나겠다! 목검에서 마치 풍차가 돌아가는 듯한 소리가 나며 검선으로 이루어진 두 개 의 거대한 타원이 행성의 고리처럼 크게 그려졌다. 이번에는 청도도 그 기 세에 놀란 듯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이번엔 가람이가 다시 한 번 청도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크아아앗!" 엄청난 속도였다. 가람이는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보법을 내딛으며 머 리, 어깨, 허리를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청도를 향해 검을 휘둘러댔다. 딱! 딱! 딱! 청도는 빠르게 검을 움직여 가람이의 공격을 모두 흘려내거나 쳐내었지만 기세에서 밀리는 듯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나는 마음 속으로 응원하던 가람이가 승세를 타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는 기뻐서 외쳤다. "저것 봐, 요령아! 가람이가 이기고 있어!" 그런데 요령이는 내 말에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바보야. 저게 이기는 걸로 보이냐? 대련 끝났어. 가람이가 졌네" 난 요령이의 전혀 얼토당토않은 소리에 그만 놀라서 요령이를 바라보았다. 뭐? 가람이가 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가람이가 졌다고? 말도 안되는 소릴! 그럼 지금 내 눈 앞에 벌어지고 있는 저 광경은 뭐냐? "웃기지 마! 저것 봐! 가람이가 밀어 붙이고 있잖아?" "바보야. 눈이 있으면 똑바로 봐라. 저런 마구잡이 공격이 한 대라도 맞을 것 같냐? 거기다가 저런 공격으로 체력을 낭비하면 금방 지쳐 버린단 말야. 청도가 가람이의 뒤를 잡을 때 이미 청도가 가람이보다 칼솜씨가 뛰어나다 는 것은 입증된 거나 마찬가지야" "뭐?" "청도는 그 때 가람이의 등을 칠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어. 하지만 그냥 넘 어갔지. 한 마디로, 봐 준거야" 나는 놀라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청도가 가람이를 봐 줄 정도로, 그렇 게 둘의 실력차이가 크단 말야? 가람이는 이를 악물며 검을 계속 휘두르고 있었다. 가람이의 이마에 선 핏 줄이 지금 얼마나 가람이가 용을 쓰고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청도는 뒤로 계속 물러나면서도 얼굴에 여유가 있었다. 청도는 가람이가 휘 몰아치듯 쳐대는 공격들을 차분히 막아내었다. "이제 끝날 때가 다 되어가는군" "젠장-!" 턱. 칼을 허공에서 멈춘 채로 가람이가 공격을 멈추었다. "뭐지? 포기하는 거야?" 청도가 가람이의 행동에 멈칫하며 의아해할 때, 갑자기 가람이가 엄청난 속도로 칼을 현란하게 돌리며 아까보다 더욱 빠르게 청도를 몰아대기 시작 했다. 휘리리릭! 빙글빙글 돌아가는 검에서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들렸 다. "윽! 아직까지 이 정도 여력이 남아 있었어?" 가람이의 이번 공격에는 청도도 꽤나 당황했는지 청도의 몸의 균형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칼의 연속적인 충돌음이 어지러이 들려왔다. 탁! 탁! 탁-! 요령이는 손으로 턱을 괴며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흠, 마지막으로 보여줄 건 다 보여주자는 건가? 아까 그 제독연무검인가 하는 것보다도 훨씬 낫네" 가람이는 계속해서 검을 위아래로 돌려대며 청도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핫!" 갑자기 가람이가 엄청난 기세로 소리를 지르며 왼 손을 청도의 오른쪽으로 휘둘렀고 청도는 반사적으로 가람이의 공격을 막기 위해 검을 옆으로 세웠 다. 그러나 가람이의 손은 비어 있었다. 허수. -퍽! 그 때를 놓치지 않고 가람이는 청도의 가슴을 걷어찼다. 청도는 몸을 비틀 어 피하려 했지만 가람이의 발에 스쳤고, 휘청대며 뒤로 밀려났다. "차!" 가람이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검으로 베어들어갔다. "으읏!" 간신히 왼쪽으로 돌아서 피한 청도. 하지만 몸의 균형이 깨져 있었다. 가 람이는 다시 한 번 검을 현란하게 돌리며 청도를 몰아붙였다. 수십 개의 빈 손들과 헛공격들이 살기를 품은 공격과 함께 청도의 주위에서 펼쳐졌다. 청 도는 완전히 당황해 버린 듯 했다. 요령이는 혀를 찼다. "쯧, 봐주다가 피보네. 이번에 잘 밀어붙이면 가람이가 이길 수도 있겠는 걸?" 청도는 목을 향해 날아드는 칼을 간신히 고개를 숙이며 피하고 곧바로 다 시 비스듬히 날아오는 칼을 막았다. 하지만 가람이는 청도가 막자마자 검을 회수하지도 않고 그대로 머리 위에서 한바퀴 돌려 반대편 어깨로 칼을 휘둘 렀다. 어쩔 수 없이 청도가 뒤로 물러나는 순간, 가람이는 칼을 그대로 청 도의 가슴으로 찔렀다. 딱! 청도가 힘겹게 쳐내었지만 가람이는 쳐낸 위치 에서 그대로 검을 다시 휘둘렀다. 가람이는 청도가 자신을 수습할 시간을 전혀 주지 않기 위해 쉴 새없이 청도를 몰아붙였다. 다시 한 번 뒤로 뛰어 서 가람이의 공격을 흘린 청도. 하지만 다시 자신의 가슴으로 검이 짓쳐들 어오자 무언가 결심을 했는지 이를 악물며 오히려 앞으로 뛰었다. "젠장!" 딱! 앞으로 뛰면서 청도는 자신의 가슴을 향해 빨려들어오는 검을 간발의 차이로 피해내었다. 이제 오히려 빈틈이 생긴 것은 가람이 쪽이다. 청도는 방금 전 가람이보다 훨씬 더 현란하게 검을 휘둘렀다. 휘리리릭! 검에서 공 기를 휘감는 소리가 났다. 따다다닥! 검의 충돌음들이 하나의 소리로 엉켜 서 들렸다. 그 정도로 검들이 빠르게 부딪히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가람이 를 바람처럼 몰아붙이던 청도. 갑자기 가람이의 앞에서 사라졌다. 휘릭! "이런...!" 가람이는 경악으로 인해 눈을 크게 뜨며 재빨리 뒤로 검을 휘둘렀다. 부웅 ! 하지만 청도는 가람이의 뒤에 없었다. "뭐, 뭐야!" 턱. 가람이의 왼쪽 어깨 위에 청도의 검이 얹혔다. 청도는 처음부터 가람 이의 뒤가 아닌 옆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내가 이겼다, 가람아" "......젠장!" 가람이는 항복의 표시로 검을 떨구었다. 그리고 청도는 가람이가 검을 떨 구자 자신의 검을 몇 번 휙휙 돌려서 허리께에 잡았다. 아마 검을 회수하 는 동작인가보다. "너 정말 대단하던데? 이 정도의 실력자는 정말 오랜만이었어" 청도가 언제 칼을 주고받았냐는 듯 씩 웃으며 가람이에게 다가가며 말을 건넨다. 가람이도 속이 좁은 녀석이 아니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대답 한다. "너야말로 정말 대단했다. 너정도의 녀석은 내 평생을 걸쳐서도 몇 번 못 본 것 같군" 가람이의 말에 청도는 갑작스레 폭소를 터뜨렸다. "아하하핫! 너, 완전 말하는건 애늙은이네? 평생? 너의 평생이래 봤자 고 작 20년이잖아! 너 말투 진짜 웃긴다!" 청도에게 '가람이는 사실 300살이야...'라고 말해주면 청도는 무슨 표정을 지을까. 나는 청도가 웃는 모습을 씁쓸한 기분으로 바라보며 생각했다. 가 람이의 표정도 나와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가람이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애써 멋적은 척 말했다. "아...미안. 그냥 나 살아오면서 그랬다는 거지" "그래? 어쨌든 너 재밌는 놈이구나! 그런데, 네 평생 나 정도의 기량을 가 진 사람을 몇 번 보긴 했다는 거야? 정말로? 이상하네, 난 지금까지 내가 당연히 세계 최고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내 생각이지만, 가람이가 청도의 실력에 저렇게 놀라는 것으로 봐서 정말 청도는 몇십년, 혹은 백년, 이백년? 그 정도만에 만난 실력자인 것 같 은데, 그렇다면 가람이가 언급한 사람들은 지금쯤 하얗게 표백된 뼈가 되 어서 오동나무 관 속에서 편안히 썩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람이는 무 어라고 대답해야 하나? '응, 내가 120년 전쯤 함흥의 어느 산골에서 너 와 비슷한 실력을 가진 사람을 만난 적이 있어! 산 속에서 생식만 하면서 도 닦는 사람이었지'라고 대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가람이는 당황한 표 정으로 우물쭈물하더니 간신히 청도의 말에 대답했다. "아, 그건, 그냥, 말이, 그러니까 그냥 말이 그렇다는 이야기지. 하하!" 억지웃음까지 지으며 애쓰는 가람이. 나이를 속인다는 것,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그것도 무려 330년을 속이는 일이니 오죽하랴. 청도는 잠시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갸웃했지만 다행히도 다시 토를 달거나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 "그런데, 정말 생각할수록 대단하군. 어리다면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런 기량을 얻은거지?" 가람이의 말에 청도는 얼굴까지 벌개져서 대답한다. 얼씨구, 지 입으로 세 계 최고니 난 강하니 할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부끄럼은 타고 그러시나? 남이 말하는 건 아무래도 느낌이 다르다 그건가? "하하, 너 진짜 아까부터 왜 그러냐? 어린 나이라니, 너랑 나랑은 동갑이 야, 동갑! 그리고 너도 스물치고는 굉장한 실력이던데 뭐. 감탄했어" "그런 나를 이긴 너의 실력은 어떻고. 정말 놀라워" "자식, 띄워주긴. 근데 진짜, 너도 대단해" 흠, 둘 모두 실력이 뛰어난 건 맞지만, 저런 대화라니. 슬슬 둘의 '서로 칭 찬해주기 놀이'가 보기 지루해진다. 어휴. 그 때, 멋진 타이밍으로 요령이가 입을 열었다. "'아니 청도야, 너 왜 이리 강하니? 아나아냐 가람아. 너도 강해. 아냐, 너 에 비하면 난 새 발의 피라고. 하지만 넌 정말 강한걸. 아하하, 녀석, 겸손 하기까지 하구나!' 얼씨구. 잘들 한다. 왜? 아주 사돈 맺지. '사돈, 정말 강 하십니다. 어이쿠, 그 쪽은 한 수 더 하시는군요. 늙어서도 강하시니 사돈 때문에 아주 죽겠습니다. 그러는 저야말로 사돈만 보면 아주 환장하겠습니 다' 아주 멍석 깔아줄까?" 역시 요령이가 정곡을 찌르면서 동시에 분위기 싸하게 만드는 데에는 황 금의 솜씨를 지니고 있다. 모두가 자신에게 주목하고, 분위기까지 차가워지 자 요령이는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아이잉- 나 배고파잉" 윙크까지 하면서 애교를 떠는 요령이. 그리고 잠시 죽음처럼 흐르는 정적. "푸하하하!" 나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아, 왠만하면 안 웃으려고 했는데! 하지만 방금 전 건 정말로 깼다고! "웃냐? 웃기냐? 나같은 외모의 소유자가 오랜만에 눈 딱 감고 미친짓 한 번 했으면 혹해야 정상 아냐? 니가 그러고도 남자냐?" 요령이는 내가 의외의 반응을 보이자 조금 화가 났는지 눈썹을 치켜뜨며 나를 꽁하니 노려보았다. 하지만 요령이의 반응은 곧 당황으로 바뀌어 버 렸다. "으하하하하하!" 뒤에서 청도가 웃어제껴버린 것이다. "아, 요령아, 이제 보니까 니가 사실 뭔가 웃길 줄 아는 애였구나! 영준아, 네 친구들은 다들 재미있는 애들 뿐이냐? 하하하!" "사실 쟤네 둘만 상태가 좋아서 저래" 난 대강 시시껄렁한 농담으로 대답하고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다 청도가 웃자 이제 청도와 나를 번갈아 쏘아보는 요령이한테 물었다. "아 뭐? 왜 노려보는데?" "으으..." 그 때 가람이마저 거든다. 물론, 가람이는 절대! 웃지는 않았다. 가람이는 싸늘하게 내뱉듯 말했다. "제기랄. 봐선 안될 걸 봐 버렸군" 계속 우리를 쏘아보던 요령이는 가람이가 결정타타를 날리자 이윽고 한숨 을 쉬며 하늘을 쳐다본다. 허, 점점. "에휴, 가람이는 그렇다고 쳐. 저 자식한테야 뭐 나도 기대도 안 했다고. 그런데, 나머지 둘은 뭐야? 둘이나, 둘이나 내 귀여움을 몰라주다니. 아, 내 가 미쳤지. 왜 그런 짓을 했을까. 돌부처 앞에서 주기도문 외우기였지. 왜 내 주위에는 이런 남자들만..." 그러더니 정색을 하고 날 새침하게 노려보며 외친다. "밥 줘! 안 줄꺼야? 배고파!" 쳇. 방금 전의 애교떨던 요령이가 훨씬 예뻤어. 훠어어어-얼씬. 하지만, 지 금같은 요령이가 진짜 요령이지. 난 슬쩍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내가 밥을 찍어내는 기계냐, 밥통이냐? 왜 맨날 나한테 밥타령이야? 내 얼굴이 밥으로 보여?" 물론 입으로는 웃었지만 말에는 칼을 실었다. 하지만 요령이는 내 말을 지극히 태연히 받아쳤다. "밥통은 아니지만 지갑은 맞잖아" "뭐! 이, 이..." 요령이는 너무나 당연하게, 뭘 그런 것까지 일일히 말해야 하냐는 듯 전 혀 표정의 변화 없이 대답했고 그래서 나는 더욱 돌아버릴 것 같은 기분에 빠져 버렸다. 아니, 같은 말을 해도 저렇게 싸가지 없게 할 수가 있나? 내 생각이 틀렸다. 지금이고 나발이고 아까처럼 애교떨던 요령이가 필요하다. 매일 이렇게 당할 수는 없단 말야! 여자들이 남자에게 빌붙는 소설을 보면 찾아오는 여주인공들은 다들 남자주인공한테 비할 데 없이 상냥하고 싹싹 하더니만, 왜 나는 이런! 왜! 왜! 내가 간신히 흥분을 가라앉히고 앞을 바라볼 때쯤에는 이미 요령이는 저 멀리에서 헐렁한 바지주머니에 손을 아무렇게나 끼워 넣고 식당으로 가는 지 털레털레 산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뭐해? 안 와?" 저렇게 무슨 일 있냐는 듯 쳐다볼 수가 있다니.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아 직 나로서는 도저히 요령이를 이길 수 없다. 수준이 다른 걸. 도대체 350년 동안 음기는 안 쌓고 버르장머리만 차곡차곡 쌓았는지. 요령이가 가진 영 능력보다도 놀라운 요령이의 저 행동거지들은 도대체 어떻게 형성된 걸까? "으아악! 먼저 가냐-!" 뭐, 어쩌겠어. 한동안 이렇게 끌려 다니는 수밖에. 애교를 부리는 요령이 보다 오히려 저렇게 딱딱거리는 요령이가 가끔씩은 더 귀여워 보이는 것으 로 보아서는 아직 요령이의 손에서 휘둘리지 않을 때는 까마득히 먼 것 같 으니. 나는 요령이의 등 뒤로 바락바락 소리를 치며 발길을 돌려 뛰었고 청도는 뭐가 재밌는지 그런 내 모습을 보고 히죽히죽 웃었다. 왜 웃는거야? 그런데, 뛰다가 생각해보니, 요령이는 어차피 수중에 돈이 없잖아? 하여튼 어쩔 수 없는 녀석이라니까. 학교에 다닌 지도 벌써 보름이 지났다. 그리고 이제 난 어느 정도 대학이 라는 공간의 생활에 익숙해졌다. 청도라는 새로 사귄 친구와도 매일매일 어울려 다니게 되었고. 그리고 한가지 깨달았다. 그것은 고등학교보다 대학 은 잠자기가 훨씬 만만하다는 사실이다. 또 한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학교의 식당의 밥값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것이다. "안 돼! 1000원짜리 먹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오늘의 '특별메뉴'는 '참치회덮밥'이란 말 야!" "어차피 냉동에 푸석푸석한, 맛대가리도 없는 살 몇 점 얹은 거 너도 뻔 히 알잖아! 돈 없다니깐?" 여기는 승학관 내 식당 앞의 식권 판매소. 요령이는 언제나 그랬듯이 오 늘도 1500원짜리 '특별메뉴'를 먹겠다며 내게 떼를 쓰고 있다. 그리고, 언제 나 그랬듯이, 나는 절대 안 된다며 '거부권'을 행사하는 중이다. "냉동이 아니라 썩어 문드러져도 상관없어! 먹을래, 먹을래, 먹을래, 먹을 꺼야!" "그렇게 생선이 먹고 싶으면 천원짜리 메뉴 중에서 한식 먹으면 되잖아! 오늘은 고등어튀김이야, 똑같은 생선이라고!" "저건 냉동에 푸석푸석한 것을 튀겨서 맛도 없단 말야!" 기가 막히는군. 나는 요령이를 한참 바라보다가 천천히 물었다. "1500원짜리는 냉동에 푸석푸석, 아니 썩어 문드러져도 먹는다며?" "아, 진짜 500원 가지고 되게 따져대네!" 보다 못한 청도가 뒤에서 황급히 말했다. "야, 야, 야, 내가 오늘 요령이 꺼 밥 살게! 그만 좀 해들!" 청도는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는지 얼굴이 벌개져서 주위를 계속 두리번거 리고 있었다. 뭘 그렇게 창피해 하는 거야? 걱정 마, 걱정 마. 모두 자기 할 일에 바쁜 사람들뿐이라고. 누가 우리를 신경 써? "다들 우리만 쳐다보잖아! 창피하게..." 청도의 말에 난 주위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리고 무언가 화끈거리는 것이 목을 타고 올라와 얼굴을 뒤덮는 것이 느껴졌다. 식권을 사려고 줄을 산 사람들과 그 밖의 행인들이 모두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고 개를 푹 숙이며 요령이에게 속삭였다. "고맙다, 야" "뭐가?" 요령이는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나의 말에 눈을 살짝 올려 뜨며 뭐 가 고마운지에 대해 물었고 난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평생 당할 쪽을 오늘 다 당하게 해줘서 정말 고마워" "괜찮아, 괜찮아. 니 인생이야 원래 수난기록서잖아. 이 정도야 이제 태연 히 웃어넘길 수 있지 않아?" 뭐? 이 정도야 태연히 웃어넘길 수 있지 않냐고? 좋아, 네가 그렇게 웃어 넘기는 것을 바란다면야 원하는대로 해 주지. "하. 하. 하. 참. 우. 습. 구. 나. 웃. 어. 넘. 길. 수. 있. 어. 서. 참. 좋. 구. 나" 난 요령이를 바라보며 왼쪽 입술을 일그러뜨리고 '아하하'하고 무음색으로 웃어주었다. 그리고 요령이는 '흥'하면서 별 것도 아니라는 듯 역시 한 쪽 입술을 치켜올리며 비웃음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얼씨구. 고양이가 도대체 표정연기는 어디에서 배웠을까. 그 때 등뒤에서 청도가 나를 툭툭 치며 뭔 가를 쑥 내민다. 받아들고 보니 두 장의 분홍색 '특별메뉴'식권이다. "자, 니 꺼까지 샀어. 한 장은 요령이 주고" "아, 아냐. 내 껀 됐어" "벌써 샀어 임마" 내게 억지로 식권을 쥐어주며 씩 웃는 청도. 안 그래도 요즘 들어서 매번 방-이라고 이름붙인 청도의 컨테이너-에서 니가 지어주는 저녁을 얻어먹 어 미안한데, 이렇게 점심까지 너한테서 얻어먹으려니 내가 꼭 빈대 같잖 아. 청도는 낚아채듯 내 손에서 식권을 탁! 하고 빼앗아 배식대로 총총히 걸어가는 요령이를 재밌다는 듯 바라보더니 이내 내 머리를 쓱쓱 헤집으며 말했다. "자식. 왜 그렇게 요령이랑 맨날 싸우고 그러냐? 저렇게 이쁜 애한테 잘 해줘야지. 사랑싸움도 작작해야 보기 좋은 거야, 임마" ......청도에게 가졌던 고마운 마음이 싹 달아나 버렸다. 이런 젠장. 나는 미 친듯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청도의 말을 부인했다. "아냐, 아냐. 그런 거 아냐아아, 임마" "아니긴 뭐가 아냐. 척하면 딱이구만. 사실 너한테 요령이가 좀 과분하긴 하지만, 그러니까 오히려 니가 잘 해야지" "아니래도 자꾸 그러네?" "밥이나 타 오셔" 청도는 그렇게 말하며 배식대로 사라졌다. 아, 젠장! 내가 어딜 봐서 요령 이와 그렇고 그런 사이로 보인단 말야? 내가 원하는 이상형상의 기본 중의 기본은 그 여자가 '사람 여자'여야 한다는 거다. -물론, 이 조항은 요령이를 만나기 전까진 있지도 않았다- 하긴, 요령이가 얼마나 나한테 만만하게 굴었으면 남들 눈에 사랑싸움으 로 비칠까. 나는 지끈지끈 아파오는 머리를 꽉꽉 누르며 청도를 따라 배식 대로 향했다. 휴우. 모든 게 엉망진창이군. 바삐 수저를 놀려 버석버석거리는 냉동참치와 초고추장을 뒤섞던 청도가 문득 생각났는지 말했다. "야, 가람이" "응" "너, 내가 어떻게 이렇게 칼을 잘 쓰는지 궁금하다고 했지?" "그랬었지" "그럼 오늘 저녁 먹고 내 방에 계속 있어봐라" 청도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가람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청도를 바라보 며 물었다. "아니, 수련을 밤에 하기라도 하나?" "글쎄, 수련이라면 수련이고...여하튼 보면 알아" 보면 뭘 알게 된다는 걸까? 하지만 청도는 우리들의 궁금한 시선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대화가 끝나자 다시 바쁘게 밥을 섞기 시작했다. "그런데 말야..." 밥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 섞는 둥 마는 둥 수저를 움직이던 가람이가 청도를 향해 입을 열었다. "왜 하필 오늘 보여준다는 거지? 지금까지는 너의 수련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잖아" "아, 별로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라서...보여줄까 말까 했는데, 오늘이 아 니면 이제 보여줄 수가 없거든" "왜?" 청도는 씩 웃었다. "내일부터는 수련 안 해도 되거든" 청도의 말에 가람이는 더욱 더 이해가 안 되는 듯한 표정으로 이제 아예 밥을 비비던 숟가락을 놓고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식사도 잊고 무언 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청도는 애타는 얼굴로 고개를 들어 청도에게 물었 다. "혹시 네가 말하는 그 '수련'이 지금까지 내가 대련을 부탁해도 거절했던 이유인가?" 지금까지 가람이는 청도의 방에 찾아갈 때마다 대련 한 번 해달라고 부탁 했지만 청도는 얼버무리는 대답과 좋은 말로 청도의 부탁을 거절했었다. 사실 그 이유는 나도 궁금했지만, 지금까지 청도는 그 이유를 알려주지 않 았다. "어,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청도는 밥 먹는데 열중해서 고개를 푹 숙이고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꼭 가람이한테 대답하는 게 아니라 밥그릇에 대답하는 것 같군. 가람이는 뭐 가 그리 궁금한지 이젠 아예 턱까지 괴고는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가람이 의 앞쪽에 앉아 있던 요령이는 눈을 빛내며 가람이의 채 비비지 않은 밥그 릇에서 참치살들을 손으로 한주먹 덥썩 집어와서 자기 밥 위에 올려놓고 마구 섞어버렸다. 그 과정에서 요령이의 손에 초고추장이 묻었지만 요령이 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문득 자신의 밥에 있던 참치들이 몽땅 없어졌다는 것을 깨달은 가람이는 이를 드러내며 요령이를 노려보다 소리 질렀다. "야! 너..." "밥그릇 앞에 두고 뭐 하는 짓이니? 먹기 싫은 줄 알았지롱-" 요령이는 역시 빨랐다. 게다가 '먹기 싫은 줄 알았지'면 '먹기 싫은 줄 알 았지'인 거지, 끝의 '롱-'은 뭐란 말인가. 가람이의 관자놀이에서 핏줄이 툭 불거졌다. 가람이는 결국 해선 안 될 말을 해 버리고 말았다. "도로 내놔!" 아아. 저 이미지 망가지는 소리. 도대체 우리보다 수준이 세 차원은 위였 던 가람이가 어쩌다 이렇게 추락해 버렸단 말인가! 우리는 동시에-심지어 요령이마저도-참으로 안타깝다는 얼굴로 가람이를 바라보았다. "......그냥 먹어......" 우리의 눈빛에 결국 가람이는 부끄러워졌는지 고개를 푹 숙이며 웅얼거리 듯 말했다. 그래, 이해한다, 이해해. 가람이 너로서는 방금 전에 던진 그 '도로 내놔'라는 대사가 요령이에게 그나마 최선을 다해 맞선 거겠지. 측은 하게 가람이를 바라보던 나에게 요령이가 작게 속삭인다. "너, 참치 먹기 싫으면 나 쫌만..." "이익!" 시간은 어느 덧 12시를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청도의 방에서 청 도가 뭘 보여줄지를 기대하며 앉아있던 우리는 조금씩 지루함을 느끼며 몸 을 비틀었다. 결국 요령이는 뒤로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요령이가 뒤로 넘 어가자 요령이의 길고 탐스러운 검은머리가 아무렇게나 헝클어져서 방에 펼쳐졌다. 요령이는 그렇게 드러누워서 뒹굴 뒹굴 구르더니 중얼거렸다. "아, 몰라, 뭘 보여 주던지 말던지, 나 졸려어..." "야, 그래도 일어나서 조금만 기다려봐" 내 말에 가람이도 동의했다. "버르장머리 없이 무슨 짓인가" "버르장머리는 얼어죽을 버르장머리. 여기서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 있 어?" 요령이의 말에 화들짝 놀라 버린 나는 요령이의 실수를 무마하기 위해 재 빨리 말했다. "하지만 너보다 나이 적은 사람도 없잖아?" 다행히도 요령이는 내가 무슨 의도로 요령이의 말에 토를 달았는지 눈치 채고 내 말을 긍정해주었다. 다행이군. "그래그래. 그러니까 우리끼리는 체면치레 같은 거 딱히 차리지 않아도 되잖아. 안 그래?" 그런데 의외로 우리에게 좋은 소리만 하는 청도가 이번에는 요령이의 말 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체면치레 같은 건 상관없는데, 요령아, 좀 일어나는 게 좋을 거 같다" "왜?" 청도가 요령이의 말에 토를 다는 것은 요령이에게도 조금 의외였나 보다. 요령이는 상반신만을 부스스 일으키더니 팔꿈치를 바닥에 기대고 큰 눈을 더욱 크게 뜨며 청도를 바라보았다. 청도는 생각 외로 심각한 얼굴로 대답 했다. "이제 곧 시작되거든. 이제 12시가 되면..." 비록 청도의 얼굴은 태연했지만 마음속으로 초조해하는지 청도의 눈가가 조금 떨리고 있었다. 약간 초조해하는 청도를 바라보던 요령이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그냥 청도의 말에 따르기로 한 듯 다리를 구르며 몸을 확 일으 켜서 털썩 주저앉았다. 요란하게도 일어나네. 그리고 청도는 그 모습에 씩 웃더니 곧 다시 휴대폰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12시 1분 전. 갑자기 청도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칼걸이에 걸려 있는 몇 개의 목 검 중에서 정확한 손놀림으로 자신의 목검을 골라들고는 방밖으로 뛰쳐나 갔다. 뭐지? "으하앗-!" 액정의 시계가 11시 59분에서 00시 00분으로 바뀌는 순간, 청도의 기합소 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퉁겨지듯 벌떡 일어나서 문으로 달려갔다. 문 밖으 로 나서자, 상당히 이상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흡......!" 청도가 허공에 미친 듯이 칼을 휘두르는 장면이 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청도는 가람이와 싸울 때보다도 훨씬 현란하고 빠른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 었다. 분명 청도의 움직임 하나 하나가 멋지긴 하지만 저 모습은 좀 우습 게 보인다. 고작 이걸 보여주려고 밤 12시까지 우리를 기다리게 한 건가? 혼자서 칼을 휘두르며 수련하는 것이라면 아무 때나 해도 되잖아? 거기다 이것 때문에 가람이와 대련을 못 한다는 건 또 무슨 소리야? 나는 청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청도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대한 의문이 몇 배 로 증폭되었다. 청도의 얼굴에는 가람이와의 싸움 때 보였던 예의 그 씨익 웃는 여유로운 미소대신 긴장감이 팽팽히 자리잡고 있었다. 청도의 이마는 방에서 비추는 불빛이 식은땀에 반사되어 번들거렸다. "으으윽!" 갑자기 청도가 비틀대면서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움직임이 상당히 현 실적인데. 꼭 정말로 청도의 칼에 무언가가 부딪히는 듯 청도가 뒤로 물러 설 때마다 청도의 팔이 움찔거렸다. 나는 견디지 못하고 가람이에게 물었 다. "정말 현실적으로 싸우는데, 도대체 저게 허공에 뭐하는 짓이냐?" "내가 보기에는 허공에 헛손질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래, 나도 생각은 그래. 하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내 눈에는 저 모습이 허공에 헛손질하는 걸로 보이는데..." 가람이는 고개를 가로젓더니 내게 말했다. "저건 아무래도 '그림자'같다" "그림자라고?" 요령이가 끼여들었다. "주술로 만들어 내는 가짜 상대를 통틀어 '그림자'라고 해. 주로 환상이라 서 남의 눈에는 안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주술의 대상자에게는 그 환상이 진짜로 느껴지지. 눈을 크게 뜨고 자세히 봐. 뭔가 흐릿한 게 보일 테니까" 나는 요령이의 말에 눈을 부릅뜨고 허공에 연속적으로 검의 선으로 원을 그리며 앞으로 뛰어나가는 청도의 앞쪽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난 도저히 분간할 수 없겠는데. "야, 잘 안 보이는데?" 그런데 내가 눈을 크게 뜨고 있는 그 모습이 요령이에게는 꽤 우습게 비 쳤나보다. 요령이는 깔깔대며 말했다. "깔깔깔! 야, 그게 뭐야? 눈에 힘준다고 주술이 보이면, 세상 무당들은 몽 땅 돗자리 접어야되게? 너 말야, 미숙하진 하지만 기를 돌릴 줄 알잖아. 기 다루는 능력은 라면 끓이려고 얻은 거야?" 요령이의 말에 나는 안 그래도 깜박이지 않아서 따끔따끔한 눈을 황급히 감았다. 아, 따가워, 눈물이 고이는지 눈이 뜨거워진다. 으윽. 바보짓 했나 봐. 난 눈을 부릅떠서 그림자인지 뭔지를 보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눈을 감은 채 단전을 중심으로 흐르는 기를 한 줄기 돌려 눈으로 보냈다. 곧 눈 이 눈물 고이는 것과는 다른, 화끈한 느낌으로 싸였다. 눈이 기를 잘 받았 나보군. 나는 눈을 뜨고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청도를 찾았다. 앗! 기가 도 로 단전으로 내려간다! 젠장. 정신을 잠깐만 딴 곳에 파니까 기가 금세 내 제어를 벗어난다. 나는 다시금 빠르게 단전쪽으로 내려가는 눈 주위의 기 를 붙들어 간신히 다시 눈으로 끌어올렸다. 휴우. 나는 기를 다루는 데 있 어서 아직 초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깜박 잊었군. 눈에 기를 불어넣자 주위의 사물이 평소보다 또렷하게 보였다. 귀신을 본 다던지 하는 것은 모르겠지만, 시력은 확실히 좋아지는 모양이다. 이거 괜 찮은걸? 나는 기가 다시 단전으로 흐르지 않게 주의를 기울이며 청도를 찾 았다. 청도는 도대체 무슨 난리를 쳤는지 어느새 멀찍이, 방에서 새어나오 는 불빛으로는 똑똑히 볼 수 없을 정도로 우리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 다. 그런데, 투명한 무언가가 청도의 주위에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주위의 사물이 마치 영화 속의 투명한 물체를 표현할 때의 효과처럼 굴절되어 보 였던 것이다. 나는 눈에 기를 좀 더 불어넣어 보았다. 그러자 사람 형상의 투명한 윤곽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내 숨소리에 나를 돌아본 요령이는 다시 청도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제 '그림자'가 보이니?" "으, 으응..." 그것은 확실히 칼을 들고 있는 사람의 형상이었다. 그것은 청도만큼 빨랐 고 청도처럼 현란한 검법을 사용했다. 청도는 상당히 고전하는 것 같았다. 목검과 투명한 검이 허공을 화려하게 수놓으며 부딪히고 있었다. 가람이는 감탄한 듯 그 장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요령이는 계속 싸움장면 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대단해. 환상이라도 저렇게 강력한 것을 만들어내다니.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아?" "뭐가?" "청도는 외공은 몰라도, 내공은 전혀 쌓이지 않았다고. 검을 운용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내공은 고강한 외공이 쌓이면서 자연적으로 터득했지만, 그것을 외공과 나누어서 다루는 법은 전혀 모를거야. 그런데 저렇게 강한 환상을 만들어내다니..." "그래? 청도는 저걸 만들 수 없을거란 말이지?" 내 물음에 요령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청도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채 로. "응. 분명해. 저건 다른 사람이 청도에게 건 주술이야. 그런데 어떻게 저 정도로 자세하게 상상해 냈을까? 보통 환상으로 만들어내는 그림자는 그냥 막연한 괴물, 무서운 형상 정도야. 하지만 저건 체계적인 검술을 휘두르고 아주 섬세하게 움직이고 있어. 볼수록 흥미로운데" "그래...?" "응. 게다가, 저 그림자는 청도와 거의 실력이 대등한 것 같은데. 어떻게 더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청도와 실력이 같은 그림자를 만들어 낼 수가 있었을까? 볼수록 저 그림자 꽤 재밌네" 주술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요령이로서는 청도가 맞서고 있는 그림자가 상 당히 흥미로운 모양이다. 요령이는 감탄 섞인 눈으로 청도를, 아니, 정확히 는 청도와 맞서 싸우는 그림자를 관찰했다. 아직 내겐 궁금한 것이 몇 개 있었지만 그렇게 중요한 질문도 아니고, 또 흥밋거리를 발견한 요령이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에 나도 그냥 계속 청도와 그림자와의 싸움을 관찰하 기로 했다. 맞싸움은 우리가 입을 다문 뒤에도 한참을 계속되었다. 청도와 그림자는 거의 실력차이가 없는 듯했다. 서로 밀지도 밀리지도 않는 그런 부딪힘이 계속 이어졌다. 순간. "핫!" 청도는 검을 위로 쳐내듯 휘둘렀고 실제로 그림자의 투명한 검이 위로 튕 겨져 올라갔다. 청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대로 검을 쭉 뻗어 그림자 의 가슴 복판으로 찔러 넣었다. 푸욱! 아무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그림자가 청도를 벨 듯 흉흉하게 치켜올린 검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청도 역시 멈 추었지만 청도의 얼굴은 마치 유령처럼 음산한 그림자의 어두운 분위기와 는 다르게 생기가 돌았다. 청도는 씩 웃었다. 이윽고 청도가 검을 뽑자 한 줄기 바람과 함께 그림자는 그대로 부스러져 버렸다. 청도는 '휴-'하고 한 숨을 쉬며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이겼군, 오늘도" ......오늘도 이겼다고? 그렇다면 이런 싸움을 한 것이 오늘이 처음이 아니 라는 말인가? 우리는 재빨리 청도를 향해 뛰어갔다. 청도는 이제 아예 벌 렁 드러누워서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휴우...아, 너희들 왔냐?" "정말 대단하던데!" 나는 진심 어린 감탄으로 녀석을 칭찬했다. 방금 전의 그것은 한 편의 영 화를 보는 것처럼, 아니 영화보다 더욱 멋진 모습이었다. "그런데, 방금 전의 그건 뭐였어?" 요령이가 호기심이 가득 담긴 눈으로 물었다. 그리고 청도는 예의 그랬듯 이 씩 웃으며 말했다. "어제의 나" 그리고 요령이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에에엑?" 황당한 표정에 참으로 어울리는 황당함 가득한 비명이로군. 청도는 다시 한 번 씩 웃더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밤공기가 차네" 청도는 세면실에서 샤워를 끝마치고 헐렁한 티셔츠에 반바지차림으로 갈 아입고 나와선 방바닥에 미리 둥그러니 앉아 있는 우리 사이에 끼어 앉았 다. "자, 아까 그거에 대해 궁금한 게 꽤 많이 있으리라고 생각해. 아니, 아마 무지무지 궁금할 꺼야. 일단 방금 전의 상황에 대해 내가 설명해 줄까, 아 니면 너희들이 궁금한 걸 물어보고 내가 대답하는 식으로 할까?" 요령이가 머리를 벅벅 긁더니 말했다. "궁금한 게 무지 많긴 하지만, 일단 너의 이야기를 다 들어보고 그래도 궁금한게 남으면 물어보는 걸로 하자" "내 생각에도 그게 옳은 꼴인 것 같다" 가람이도 요령이의 말에 동의했다. 나야 뭐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 나까지 고개를 끄덕이자 청도는 '큼, 흠!'하고 목소리를 가다듬고 이야기를 시작했 다. "일단 내가 어떻게 그림자와 싸우게 되었는지, 그것부터 말해줄게. 우리 아버지는...어, 저기, 이런 말하면 우습겠지만, 그러니까...도사라고 할까? 나 도 잘 이해는 못하겠지만, 어쨌든 그런 거였어" 예상외로 아무도 놀라지 않자 청도는 조금 의외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 이더니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안 놀라네? ...흠. 뭐, 어떻든 나와는 상관없지만... 그래, 이야기 계속하자. 여하튼 내가 다섯 살 때였지. 그 날은 생일이었어"...... ......"허허, 아버지가 해 줄건 없고, 뭘 해줄까...그래! 청도가 이다음에 커서 뭐가 될지 한 번 봐 줄까?" 약간은 마른 얼굴에 조금은 날카롭게 생긴, 그러나 길게 난 탐스러운 수 염이 날카로운 이미지를 상쇄시켜주는 생김을 하고 흰색 도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청도의 아버지는 환하게 미소지으며 청도에게 말했다. 하지만 청 도는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싫어! 아빠, 2단 변신 번개매- 2단 변신 번개매 사줘- 사줘-" 하지만 청도의 아버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청도야. 그건 나중에 사 주면 안될까? 2단 변신 번개매는 언제라도 사 줄 수 있지만, 너의 미래를 또렷이 볼 수 있는 때는 너의 다섯 수 돌림 생 일이 아니면 힘들단다" "...치...아빠는...미워!" "하하하. 이거 어쩌지? 하나밖에 없는 우리 아들에게 미움을 사 버렸으니. 자, 그럼 이렇게 하자. 내일 내가 번개매에 과자까지 하나 사 줄게. 오늘은 아빠가 하자는 거 하자. 그럼 됐지?" 어린 청도의 마음에도 결코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청도는 고개를 끄덕였 다. 그러자 청도의 아버지는 보통 큰 보수가 걸린 일, 혹은 청도가 보기에 도 무척 공을 들이는 것 같은 일이 있을 때에만 가끔씩 들어가는 별채의 도방으로 청도를 데려갔다. 청도는 아직까지 그 방에 한번도 들어가 본 적 이 없었다. 청도의 아버지는 차분히 작은 자물쇠를 풀고 창호지를 곱게 붙 여 만든 여닫이문을 천천히 열었다. 아침햇살이 방으로 스며들어 청도의 눈에 방의 윤곽을 조금씩 던져주었다. 방바닥은 온통 이상한 문양으로 뒤 덮여 있었으며 그 중심에 팔각의 괘로 둘러싸인 흑백의 태극문양이 있었 다. 청도가 들어가자 청도의 아버지는 팔각의 괘마다 각각 초가 담긴 작은 놋잔을 놓고 불을 붙인 뒤 방문을 닫았다. 초에서 나오는 주황색 빛이 작 은 방을 따스하게 채웠다. 아버지는 청도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저 백색 점 위에 앉으렴" 청도는 태극의 반쪽, 음극의 둥그런 돌출부의 중심에 있는 백색 점 위에 가부좌세로 앉았다. 왠지 청도는 몸가짐을 조심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도가 가부좌세로 앉자 아버지는 청도와 마주앉아 양손을 천천히 가슴께로 모으고 눈을 감고 이상한 주문을 외웠다. "......!" 청도의 아버지가 정확히 무엇이라고 말했는지, 청도는 그 때에도 알아듣 지 못했고 지금 다시 생각해도 알아듣기는커녕 이제 그 발음조차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청도의 아버지는 눈을 감고 손의 모양을 계속 바 꾸어가며 주문을 읊어대었다. 그리고 검지와 중지만을 펼쳐서 관자놀이에 댄 자세로 크게 고함을 질렀다. "보여라!" 그리고 청도의 아버지는 앉은 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 을까. 청도는 점점 지루해져왔다. 청도는 핑계를 대서라도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빠, 나 배고파" "가만히 있거라!" 청도의 아버지는 엄한 목소리로 일어나려는 청도를 다시 눌러 앉혔다. 청 도는 몸이 근질근질해졌지만 아버지의 목소리에서 이때껏 몇 번 느끼지 못 한 위엄을 느끼고 앉아 있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청도의 아버지는 눈을 떴다. 그의 도포는 온통 땀에 젖어 있었다. 청도의 아버지는 소맷자락으로 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허어...이 일을 어찌할꼬...이 일을..." "아빠, 왜 그래?" 청도는 무언가 아버지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느꼈지만 청도의 아버지는 청 도의 물음에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아, 아니다. 청도야, 너 커서 훌륭한 사람 되더구나?" "정말? 진짜야?" 청도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물었고 아버지는 환히 웃으며 대답했다. "아암. 그런데, 청도야. 아빠가 더 훌륭한 사람 만들어줄까?" "응? 어떻게?" 청도의 아버지는 한참동안 고민하는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곧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 "안 돼...역시 아직 그 주술은 이 아이에게는 너무 잔인하다..." "아빠, 나 훌륭한 사람 만들어줘!" "으, 으응? 그럼, 청도 열 살 먹으면 아빠가 훌륭한 사람 되게 해줄게" "에이, 왜 열 살이야? 지금 해 줘!" "애들은 아직 그런 거 안해도 된단다" "싫어! 오늘 해 줘! 오늘!" 청도는 떼를 썼지만 아버지는 눈을 엄하게 뜨며 말했다. "청도야, 자꾸 그러면 아빠가 번개매 안 사준다!" "...아빠 미워, 씨..." 그리고 시간은 흘러 청도의 열번째 생일. 청도의 아버지는 청도가 커갈수 록 조금씩 청도를 엄하게 가르쳤고, 그래서 이제 청도는 아버지를 조금씩 어렵게 여기고 있었다. 청도는 생일날 아침 세수를 마치자마자 자신을 부 르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부리나케 아버지의 방으로 달려갔다. 청도의 아버 지는 정좌하고 앉아 청도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 안녕히 주무셨어요?" "오냐, 잘 잤느냐?" "예" "청도야. 오늘 생일이지? 생일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청도가 고개를 숙여 축하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하자 아버지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문을 꺼냈다. "그런데, 청도야. 혹시 넌 네 다섯 살 때의 생일을 기억하느냐?" 아버지의 말에 청도는 히죽 웃었다. "물론이죠. 그 날이 얼마나 신기했다고요! 특히 아버지께 훌륭한 사람 만 들어 달라고 떼쓰던 기억이 생생하게 나네요...히히" 청도는 그 때 생각에 즐거운 듯 작게 웃었지만 아버지의 표정은 사뭇 심 각했다. 아버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청도야. 너도 이제 열 살이다. 열 살이면 아직 어린 나이지만, 이제 시간 이 없으니 어쩔 수 없구나. 잘 들어라" "무슨 말인데요?" "내가 너에게 다섯 살 때부터 우리 가문의 검술을 가르쳤었지?" 청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랬죠" "내 너에게 5년동안 우리 가문의 검술의 요체들은 모두 가르쳤다. 물론 청도, 네가 아직 어리고 힘이 부족하여 검술을 모두 펼쳐낼 수는 없지만 검술의 중요한 기본은 이제 모두 너의 머릿속에 들어 있다고 봐도 큰 무리 는 없을 것이다" 청도는 아버지가 왜 이런말을 갑작스레 하는지 통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네네거릴 수밖에 없었다. "예, 아버지" "그러므로, 이제 너에게 필요한 것은 검술의 습득보다는 자기수련을 통한 자기발전이다. 하지만, 자기수련이라는 것이 사실 혼자서 하기 얼마나 어려 우냐? 언제 나태해져서 게을리 할 지 모르는 것이 자기수련이다. 그러므로, 너에게는 안 되었지만, 내 이제 너를 강제로 매일 훈련시키려 한다" 청도의 아버지는 청도의 반응을 살피려는지 잠시 말을 멈추고 청도를 지 긋이 응시했다. 조금은 뜻밖인 아버지의 말에 청도는 놀랐다. 아니, 놀라기 에 앞서 근심이 앞섰다. '어휴, 귀찮게 무슨!" 물론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았다. 다행히 청도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했는 지 청도의 아버지는 청도를 나무라는 대신 멈추었던 말을 다시 이어나갔 다. "물론, 검술실력이 일천한 이 애비의 실력으로 일취월장하는 너를 언제까 지 상대해 줄 수는 없는 노릇. 그렇다고 특별한 재능이 없는 너에게 주술 을 가르쳐 줄 수도 없고, 그래서 내 너를 강한 검사로 만들려 하는데...그러 기 위해 내 너에게 주술을 하나 걸려한다" "주술이요?" "그래, 주술. 우리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검사를 기르는 주술이다" "무슨 주술입니까?" "내가 너에게 이 주술을 걸면, 넌 스무 살의 생일날까지 매일 자정마다 '어제의 너'와 싸워야 할 것이니라. 그 싸움은 둘 중 하나가 쓰러질 때까지 계속되며, '어제의 너'는 너를 결코 죽이거나 상처 입히지는 못할 것이지만, '어제의 너'에게 당하는 순간의 고통은 생생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루 하루 검술을 갈고 닦아 어제의 너보다 강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기량을 늘 려나가라. 그리고 너와 같은 실력의 상대도 정신력으로 꺾을 수 있도록 정 신력 또한 강하게 키워나가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넌 매일 끔찍한 고통 을 겪게 될 것이다. 또한 이 주술은 매일 실전경험을 쌓게 해 줄터이니 너 는 실전경험 또한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쌓이게 될 것이다" 청도는 당황했다. 아니, 자식에게 주술이라니! 더군다나 축복의 주술도 아 닌, 매일 밤 죽도록 싸워야 하는 주문이라니! 도대체 이게 말이 되는가? 거 기다 자신은 고작 열 살이다! 청도는 아버지에게 항의했다. 청도가 커가면 서 아버지가 점점 그를 엄하게 대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청도가 자율적 인 의사표시조차 강압적으로 눌리며 큰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청도 의 아버지는 청도가 아버지와 반대되는 뜻을 당당히 말하는 것을 흐뭇하게 여기곤 했다. 그 의견이 논리에 맞는다는 전제하에. 아들의 자율적인 사고 를 막지 않기 위함이었으리라. "아버지! 말이 됩니까? 이게 뭡니까! 제 뜻도 물어보지 않고, 마음대 로......!" 청도의 말은 도중에 끊겼다. 아버지가 슬쩍 손을 들어 청도의 말을 멈춘 것이다. 청도는 강한 불만감에 휩싸였다. 지금껏 아버지가 내 말을 끊었던 적은 없었어! 청도의 아버지는 입을 열었다. "난 네가 다섯 살 때 너의 미래를 보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보지는 못했다. 너의 미래는 왜인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내 머릿속을 스치 고 지나간 그 많은 '소리'들..." 청도의 아버지는 조용히 말했다. "이번만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라" "하지만..." "부탁이다" 아버지는 청도에게 지금껏 부탁이라는 말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청 도는 눈을 크게 떴다. 청도의 아버지는 다시 한 번 간절히 청도에게 말했 다. "나는 너의 미래를 들었다. 물론 평범하게 사는 길도 있다. 하지만......" "하지만...뭐죠?" 아버지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한참 후 말했다. "너는 검을 배워야 한다.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 대비해야 해. 누군가 대 비하지 않으면 모두가 비참해질 것이야. 그래서 나는 너로 하여금 미래를 대비하려 한다. 나는 소리를 들었다... 보지는 못했지만 너의 미래를 통해 세상의 미래를 들었다. 미래를 들은 이는 어쩌면 나 하나일지도 모른다. 그 러므로 나라도 대비를 해야만 하겠다. 만약, 아무도 대비하지 않는다면 결 국 모두 비참해질 것이다. 너를 포함한 모두가" 청도의 마음이 점점 흔들리고 있었다. 청도의 아버지는 다시 한 번 청도 를 향해 간절함을 담아 말했다. "깨어있는 자마저 외면하는 것은 옳지 않다. 아버지의 부탁을 들어다오" 청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문도 잘 모르는 채, 반쯤은 아버지에게 억지로 끌려가는 기분으로. 청도의 허락이 떨어지자 청도의 아버지의 얼굴이 기쁨으로 환해졌다. 그 는 청도를 재촉하여 5년 전 청도의 미래를 보았던 도방으로 데리고 갔다. 다시 여덟 괘에 촛불이 켜지고, 청도는 아버지에게 이끌려 5년 전처럼 음 태극의 중심에 앉았다. 청도의 아버지는 도방을 나가더니 어디선가 살아있 는 닭을 가지고 돌아왔다. 청도의 아버지가 파르스름하게 빛나는 주술용 칼을 꺼내며 말했다. "너로서는 보기에 좀 그렇겠지. 눈을 돌려도 괜찮으니 웬만하면 보지 말 거라" 아버지가 닭을 가지고 도대체 무엇을 할 지 무척 궁금했던 청도는 아버지 의 경고를 무시하고 닭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청도의 아버지는 할 수 없 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 후 닭의 목에 칼을 대고 그대로 그었다. 쭈우욱! 더 운 피가 하늘로 솟았다. 청도는 괜히 봤다고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닭은 목이 잘린 채로 잠시 발버둥을 쳤지만 축 늘어졌다. 닭의 잠깐동안의 퍼득거림이 멈추자 청도의 아버지는 닭의 피를 젯그릇에 받아서 태극과 여 덟 괘에 뿌리며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웠다. 닭의 목을 벨 때 튄 피가 청도 의 아버지의 옷에 잔뜩 묻어 있었다. 촛불의 일렁이는 불빛의 명암 때문인 지 청도의 눈에는 피투성이인 아버지의 모습이 귀신처럼 보였다. 한참 주문을 외우던 청도의 아버지는 그릇에 담긴 피의 절반 정도를 바닥 에 뿌리자 청도에게로 다가왔다. "좀 기분나쁘더라도 참거라" 주루룩. 청도의 아버지는 말을 마치고 그릇에 남아 있던 닭의 피를 모조 리 청도의 머리 위로 부었다. 끈적끈적하고 미지근한 닭의 피가 청도의 얼 굴선을 타고 흘렀다. 청도는 기겁을 하고 반사적으로 퉁겨 일어나려고 했 다. 하지만 그 순간 아버지의 손이 청도의 머리를 눌렀다. "가만히 있어라!" 아버지는 청도의 머리 위에 손을 얹은 상태로 주문을 외웠다. 아버지가 무슨 주문을 외우는지 이제는 아예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역한 피비린 내가 계속해서 코를 향해 파고들어 위를 뒤집었다. 뱃속을 몽땅 게워내고 싶다는 청도의 욕구를 자제한 것은 의식에서 풍기는 왠지 모를 엄숙함이었 다. 아버지의 주문이 계속되었다. 문득 주문이 멈추고 아버지가 말했다. "뜨거워도 참거라" 무슨 말일까? 청도는 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때 따스한 무 언가가 흐르는 느낌이 났다. 뭐지? 청도는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땀인가? 하지만 이 계절에 땀이라고? 덥지도 않은데? 그럼 닭의 피가 아 직 덜 굳었나? 아냐. 닭피는 이미 한참 전에 다 굳어 버렸어. 그럼 뭐지? 착각? 그래, 어쩌면 너무 오랫동안 멍하니 앉아 있어서 생긴 착각일지도 몰라' 착각이라 결론을 내린 청도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데 투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몇 방울의 피가 떨어졌다. 청도는 눈 을 크게 뜨며 손으로 얼굴을 문질러 보았다. 손 끝에서 피가 묻어났다. 믿 을 수 없게도 이미 굳었던 닭의 피가 다시 녹은 것이다. 청도는 피가 묻은 손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약간 무서운 기분마저 들었다. 아버지의 주문이 계속되면서 청도의 얼굴을 흐르는 피가 점점 뜨거워졌 다. 무언가에 데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이래서 아파도 참으라고 하신 것일까?' 청도는 아픔을 참기 위해 몸을 이리저리 뒤틀었다. 청도의 얼굴을 타고 흐르던 닭피에서 이젠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아버지의 주문소리가 점점 커졌다. 치이익- 끓는 물이 말라붙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청도의 머리와 바닥에 뿌려진 닭 의 피가 모조리 증기로 화해 버렸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차가운 기운이 청 도의 등골을 훑고 지나갔다. 청도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도 청도는 얼굴의 화상이 걱정되었다. 청도는 얼굴을 만져 보았다. 놀랍게도 얼굴에는 아무런 화상도 없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어 가는 거지?' 부르르. 이번엔 이유없이 청도의 몸이 갑자기 떨렸다. 청도의 아버지의 주 문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리가 커지면서 청도의 몸이 조금씩 진동하기 시작했다. 따다닥, 딱, 딱. 격렬한 진동에 청도의 이가 저절로 부 딪혔다. "아, 아, 버지, 몸이, 이, 이상해, 요! 이, 상하게, 떨려, 요...!" 진동으로 인해 말을 잇기가 쉽지 않았다. 청도는 간신히 이를 악물고 말 을 끝마쳤다. 하지만 청도의 아버지는 청도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 고 대신 주문을 외우는 목소리를 더 높였다. 드드드드...주문을 외는 소리가 커지자 이제 청도의 몸뿐만이 아니라 도방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듯이 저 르릉거리며 떨기 시작했다. 청도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이러다 뭐가 잘못되 어 버리는 것이 아닐까? 계속되는 진동 때문에 뼈마디가 뻐근해져왔다. 계 속되는 이상한 일 들을 더 이상 참을수가 없던 청도는 마침내 소리쳤다. "그, 그만, 두세, 요! 이, 이젠 견딜, 수, 가...!" 번쩍! 갑자기 팔괘와 태극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도방 전체를 뒤덮었다. 그리고 잠시 후 거짓말처럼 도방의 진동이 멎었다. 청도의 아버지는 긴 한 숨을 내쉬었다. "후우우우- 끝났다!" 청도는 아버지의 말과 동시에 그만 자리에 풀썩 넘어져 버렸다. 아버지가 주문을 외는 동안 청도가 한 것이라고는 음태극에 가만히 앉아 있었던 것 뿐이지만 방에서 워낙 요란한 일들이 벌어진지라 몸의 기력이 모두 빠져버 린 것이다. 아버지는 비척거리며 청도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대로 자 신의 품에 껴안았다. "수고했다...! 수고했어!" "아, 아버지...?" 겁을 잔뜩 먹고 있던 청도는 갑작스럽게 아버지가 덮쳐오자 깜짝 놀라 몸 을 움츠렸다. 하지만 청도의 아버지는 청도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신경 쓰 지 않고 청도를 세게 안은 채 그대로 청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수고했다...수고했어...!" 청도의 아버지는 땀으로 인해 새끼줄처럼 엉켜버린 청도의 머리를 쓰다듬 으며 수고했다는 말을 되뇌었다. 청도는 아버지가 너무 꽉 껴안아서 숨이 막혔지만 아버지에게 안겨본지 참으로 오랜만이라 꾹 참기로 했다. 청도의 아버지는 청도를 안은 채 계속 말했다. "수고했다...수고했어...정말 수고했다...!" 그런데 아버지의 목소리가 점점 불분명하게 웅얼거리는 소리로 바뀌었다. 문득 아버지의 턱에서 무엇인가가 청도의 귀로 툭, 떨어졌다. 청도는 아버 지를 보았다.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아버지가 울고 있었던 것이다. 눈물 과 콧물, 침과 닭의 피가 범벅이 되어 아버지의 얼굴은 봐 줄 수 없을 정 도로 지저분해 보였다. 아버지는 청도가 자신을 보고 있는 것조차 눈치채 지 못하는 듯 일그러진 얼굴로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수고했다, 수고...수고라고...?맙소사...수고라니...으어...흐헉...미안하다...미안 해...정말...애비라는 자가...애비라는 자가...네게 몹쓸 짓을 했구나...미안해... 정말로 미안하다...10년...자식의 인생의...10년을...애비라는 자가...10년 동안 을...애비가 자식 놈의 인생을...10년 씩이나 고통 속에 쳐 넣다니...! 크흐흑, 미안하다...미안해...으흐흑..." 잘은 모르겠지만 청도는 아버지가 울자 괜히 감정이 북받쳤다. 결국 청도 도 아버지처럼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그림자에 대한 이야기를 마친 청도는 말했다. "그 날의 아버지의 얼굴은 지금까지도 가장 지저분하고 더러운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지. 피랑 눈물, 콧물, 땀...이런 것들을 얼굴에 칠갑을 해 놓고 우는 그 모습이 얼마나 추해 보였겠어" 청도는 그 날의 부둥켜안고 우는 부자의 모습을 떠올리는지 씩 웃었다. "하지만 그 날처럼 내 마음을 울리는 아버지의 모습도 없었어" 활기찬 종류의 이야기는 아닌지라 분위기가 좀 가라앉았다. 청도는 머리 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음...말들이 없네? 지금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지? 어, 사실 그래. 나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거든" "아냐, 믿어" 물론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라 진담이다. 아, 이제 와서 뭘 못 믿는단 말 인가? 청도는 자기가 해 놓고도 우스운 이야기라는 듯 계속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사실이야. 다음 날 아버지가 건 주술에 대해 반신반의하면서 잠 을 자는데,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면서 눈이 번쩍 떠지는 거야. 그런데 뭐 시커먼 게 내 앞에서 칼을 들고 서 있는 거야. 데굴데굴 굴러서 어찌어찌 피하고 칼을 집어들었지. 간신히 밤새도록 싸웠고, 해가 뜨니까 그건 사라 지더군. 하지만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 시커먼 것은 계속해서 나왔어. 정말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었지. 아버지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던 거야. 그 시커먼 것이 '어제의 나'였던 것이지" 흠. 시커먼 것이라. 나한테는 그게 아예 보이지도 않았었는데. 눈에 기를 불어넣고 나서야 '사람 형상으로 굴절된 윤곽' 정도로 눈에 들어왔었지. 청 도의 눈에는 '그림자'라는 이름답게 '새까만 것'으로 보인 모양이지? "그렇게 매일같이 '어제의 나'를 상대로 싸웠지. 질 때도 있었고 이길 때 도 있었지. 이겨도 매일같이 겪는 일이라 그렇게 기쁘진 않았어. 단지 지지 않으려고 계속 악으로 싸웠지. 싸우는 것은 둘째치고, 남한테 보이지 않는 다는 게 더 힘들었어. 혹시 '어제의 나'가 남을 공격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 도 있었고, 또 왠지 이런 모습을 보이면 남들이 날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 기도 하고..." "그럼 우리가 그 '어제의 너'라는 거와 네가 싸우는 모습을 처음으로 본 사람들이냐?" 청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처음이자 마지막 사람들이야. 사실 너희한테도 보여줄지 말지 고민은 많이 됐는데, 너희들이 내가 어떻게 이렇게 칼을 잘 쓰나 궁금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가람이가 매일같이 하는 대련해달라는 부탁을 왜 거절했는지 해명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무엇보다..." "무엇보다?" "그냥 누구한테든 내 비밀을 탁 털어놓고 싶었어. 사람 마음이 원래 그렇 잖아. 혼자 신기한 걸 알고 있으면 왠지 못 참는 그런 거...주술이 풀리기 전에 누구한테 보여주고 싶었어. 너희들, 뭔가 시커먼 게 갑자기 나한테 달 려들어서 깜짝 놀랐었지?" 청도는 다른 사람들도 그림자를 자신처럼 볼 수 있다고 생각하나보다. 하 긴, 그러니까 아까 우리가 '그게 뭐냐'며 물어도 '어? 그게 보여?'하고 놀라 거나 하지 않았겠지. 그러고 보면 청도가 지금까지 남한테 '그림자'의 비밀 을 보여주지 않은 것은 결과적으로 꽤 잘한 일이군. 청도와 '그림자'가 싸 우는 모습을 보통 사람이 봤다면 미쳤다고 했을 게 뻔하잖아? "대충 설명은 끝났어. 뭐 궁금한 거 없어? 아, 그리고 아버지가 왜 나한테 이 주술을 걸었는지, 강해지라고는 했지만 그 정확한 이유가 뭔지는 나도 모르니까 그건 묻지 말고 말야" "왜 그림자에게 기를 쓰고 지지 않으려고 했지?" 가람이의 물음에 청도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몸서리치며 대답했 다. "지면 진짜 고통스러웠거든. 몸에 상처는 없었지만, '어제의 나'의 칼에 맞 으면 너무 아팠어. 아픈 정도가 아니라 '이게 죽는 거구나'하는 느낌이 들 었지. 말 그대로 죽도록 아팠던 거야. 그래서 지지 않으려고 매일같이 '어 제의 나'에게 미친 듯이 덤벼들었지" "그렇군" 가람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청도는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뭐 더 궁금한 건 없어?" "있어. 아까전의 그게 마지막으로 나타난 '어제의 너'였니?" 이번에는 요령이가 손을 들고 입을 열었다. "응. 그렇지" 청도의 대답에 요령이는 피싯 웃더니 청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제 생일이었던 거 축하해" "고마워" 요령이는 갑작스럽게 청도에게 어제 생일이었던 걸 축하한다고 말했고 청 도도 그런 요령이의 말에 '무슨 헛소리야?'라는 대답 대신 담담하게 감사를 표했다. 도대체 주술이 풀리는 것이 생일과 무슨 연관이 있는 거지? 가만 있자...그러고 보니 청도가 걸렸던 주문은 스무 살이 되는 해의 생일날까지 계속된다고 했지? 나는 놀란 얼굴로 청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야, 너 어제 생일이었구나? 그럼 진작 말을 하지 그랬어!" 청도는 별 것도 아니라는 듯 씩 웃었다. "됐어. 뭘 또 그런 걸 말하고 그러냐. 이제 알았으니까 내년부터 확실히 챙겨주면 되지 뭐" "아...자식. 진작 말을 하지. 오늘이라도 챙겨 줄까?" "됐어, 임마. 내가 선물 받아먹자고 밤새도록 싸우는 거 보여준 줄 아냐. 뭐, 어쨌든 더 궁금한 건 없어?" 청도의 말에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더 이상 손을 들거나 입 을 여는 사람은 나오질 않았다. 청도는 약간 실망했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에이. 생각보다 반응이 별로네. 난 '어제의 나'랑 내가 싸우는 모습을 보 여주면서 너희들이 경악을 하는 모습을 기대했는데. 생각보다 놀라지도 않 고, 신기해하지도 않고, 궁금해하는 것도 별로 없고..." "아냐. 신기했어" 사실 이미 산전수전 다 겪은 나로서는 신기할 것도 없었지만, 그저 예의 상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난 오히려 아무리 매일같이 자신과 똑같은 상대 와 싸움질을 했다고 해도 사람이 저렇게까지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이 더 믿 어지지가 않는다. 청도가 칼을 잡았을 때의 그 몸놀림, 그것은 사람이 보여 줄 수 있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하지만 표정은 영 담담한데? 하하. 벌써 네 시가 다 되어가네? 너희들, 그냥 여기에서 자고 가라" 네 시라고? 그 말을 들으니까 갑자기 잠이 쏟아진다. 하지만 어떻게 청도 한테 미안하게 자고 갈 수가 있어. 좀 늦었어도 우리 방으로 돌아가서 자 야지. "아냐, 됐어. 우리 자취방 여기에서 가까워. 걱정하지 마" "됐긴, 지금 시간이 몇 신데. 그냥 자고 가. 왜, 내가 속으로 궁시렁대기라 도 할까봐?" 눈치 총알이네. 청도는 내 속을 꿰뚫어보듯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뭘 이런 걸로 서로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그러냐. 친구끼 리. 그리고 여긴 내 방이기에 앞서 동아리방이잖아. 동아리 회원들이 동아 리 방에서 자는데 뭘 부담스러워 해? 안 그래?" 그러고 안 그러고를 떠나서 사실 새벽 네시에 졸린 몸을 이끌고 자취방으 로 돌아가야된다고 생각하니 참 끔찍하긴 하다. 나는 못 이긴 척 청도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그래...네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해. 그럼 오늘만 폐 좀 끼칠게" "폐라니, 무슨 소리야. 당연한 거라니까. 언제든지 자고 가도 돼" 청도는 손사래를 치며 일어서더니 손수 이부자리를 들고 와서 깔아주기까 지 했다. 윽, 이런. 미안해라. 나는 청도의 친절함에 고마움과 미안함을 동 시에 느끼며 눈을 감았다. 한숨처럼 가람이의 중얼거림이 귀를 스쳤다. "십년동안 매일 생사의 갈림길에 섰었단 말이지..." 청도의 방에서 그림자와의 싸움을 본 그 날 이후로, 청도의 방에 들르거 나 혹은 아예 자고 가는 날이 잦아졌다. 가람이가 매일같이 청도한테 대련 을 부탁했기 때문이다. 예전처럼 특별히 밤까지 체력을 최상으로 유지할 필요가 없는 청도는 이제 거절하지 않고 흔쾌히 가람이의 부탁에 응한다. 그리고 당연한 소리이지만 가람이가 청도의 방에 가는데 우리만 집에 갈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게 청도의 방에 자주 찾아오다 보니 이제 정말로 청도의 방이 '남의 방'이라는 느낌보다 '동아리 방', 즉 공동의 방이라는 느낌마저 난다. 익숙 해진 건지 염치가 그만큼 없어진건지. 오늘도 수업이 끝나자마자 구내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청도의 방 앞에서 청도와 가람이의 대련을 구경했다. 지금까지 전적은 도의 12전 12승. 개인 적으로 가람이가 기공술을 사용하면 가람이가 이길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한 번은 가람이에게 기공술을 사용하면 이길 수 있지 않느냐고 물어본 적도 있었다. 대답? 잘 모르겠단다. 청도가 자신과 대련을 하면서 모든 실력을 보여준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청도의 실력을 짐작할 수조차 없 다는 것이다. "휴우-!" 끼익. 동아리방의 문이 열리며 긴 숨돌리는 소리와 함께 청도가 들어왔다. 가람이가 피곤한 눈으로 그 뒤를 따랐다. 테이블에 지루한 듯 앉아 있던 요령이가 둘을 힐끔 보며 물었다. "재밌었냐?" "그럭저럭" 청도는 씩 웃으며 목검을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 그리고 요령이는 한심하 다는 듯 가람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창으로 다 봤는데, 너 정말 못하더라. 전혀 실력이 늘질 않더라? 도대체 그 나이 먹도록 뭘 배웠냐? 나이가 아깝다, 나이가" 그리고 가람이는 한쪽 입술을 슬쩍 대답했다. "그래도 난 나이 스물 먹도록 칼잡는 법은 배웠지" '넌 할 줄 아는 것도 없잖아?'라는 노골적인 비웃음이다. 물론 가람이의 말에 요령이는 발끈했다. "뭐? 너 그러다 죽는다!" "야, 야. 왜들 그래 또. 예쁘고 잘생긴 얼굴들 구기지 말라고. 난 좀 씻고 올테니 앉아 있어. 어? 그런데 영준아, 넌 거기서 뭐하냐?" 나? 발칙한 빈대녀석이 감히 주인한테 배고프니 라면 끓이라고 명령해서 계속 투덜거리면서 알아모시는 중이지 뭐. 그런데 도대체 요령이 저 녀석 은 밥 먹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라면을 먹나? 저렇게 먹어대도 살이 찌 지 않는 것이 신기하다. 둔갑한 모습이라서 그런가, 원래 체질이 그런 걸 까? "응, 그냥 요령이가 출출하다고 해서 라면이나 몇 개 끓이려고. 지금 막 물 올렸는데, 너도 먹을래?" "준다면야 고맙지. 그럼 난 세수 좀 하고 나올께" "가람이, 너도 먹을꺼지?" 가람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청도에 이어서 가람이까지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는 것으로 대강 땀을 씻 고 나오자 라면이 다 익었다. 테이블에는 이미 청도와 가람이가 덜어먹을 대접과 젓가락을 가져다 놓은 상태였다. 난 다 익은 라면을 테이블에 올려 놓고 조심스레 뚜껑을 열었다. 후욱- 먹음직스럽게 김이 무럭무럭 올라왔 다. "맛있겠다- 라면 너무 좋아! 잘 먹을게 영준아!" 요령이가 작은 감탄사와 함께 재빨리 라면을 한 대접 덜어가서 고개를 대 접에 푹 박고 급하게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후루룩, 후루룩. 그렇게 배가 고팠나? 난 요령이의 모습에 잠시 미소짓다가 문득 라면은 불면 맛이 없다 는 것을 떠올리고 급히 라면에 젓가락을 대었다. 내가 막 라면을 한 젓가락 집어 입에 넣으려는 순간. -파창! 요란한 소리와 함께 컨테이너의 유리창이 깨졌다. 그리고 갑자기 요령이 가 몸을 낮게 돌리면서 바닥에 바싹 엎드렸다. -따앙! 저르르릉... 유리창이 깨진 것과 거의 동시에 유리창 반대편의 컨테이너 벽에 마치 쇠 망치가 부딪히는 것 같은 소리가 나며 단열재가 둥그렇게 깨졌다. 단열재 를 깨고 컨테이너의 쇠벽까지 그대로 도달한 알 수 없는 충격은 컨테이너 전체를 작게 울렸다. "뭐야!" 청도가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서려는 순간, 갑자기 가람이가 일어서려는 청도를 짓누르며 엎드리더니 그대로 데굴데굴 굴러 나를 의자 채로 넘어뜨 렸다. 으아악! 유리창이 박살나는 소리와 함께, 비명을 지르려는 나의 코 앞으로 무언가가 휙 스치고 지나가 역시 유리창 반대편의 벽에 부딪혔다. 따앙! 난 질려서 소리도 지르지 못했다. 다행히 바닥에 부딪히기 전에 가람 이가 나를 옆으로 잡아채서 받았기 때문에 상처는 입지 않았다. 나는 떨리 는 목소리로 물었다. "뭐야, 저게? 도대체 저게 뭐냐고!" "몰라!" 요령이가 나의 반대쪽에서 납작 엎드린 채 소리질렀다. 청도가 말했다. "누가 밖에서 총을 쏴대는 게 아닐까?" "그럴지도..." 생각해보니 정말 총같다. 유리창이 부서지는 것하며, 직선으로 날아가서 반대편 컨테이너에 부딪히는 것 하며... 하지만 가람이가 청도의 말에 손가 락으로 방에 날아온 무언가가 부딪혔던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총알이 날아왔다면 저 쪽 컨테이너에 총알이 박혀 있거나 떨어 져 있어야 해. 하지만 저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잖아? 게다가 총성도 울리 지 않았다" "총알이 어디로 튕겨 나갔을지도 모르잖아? 총성이야 소음기라는 걸 쓰면 되고" 청도가 다시 말했지만 가람이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총이라고 보기엔 역시 좀 약해. 유리창도 관통한 게 아니라 박살을 내면서 날아왔고, 벽에 부딪혀서도 단열재만 부수었지 쇠로 만든 컨테이너 벽 자체를 어쩌진 못했지. 저건 총이 아닌 것 같다" 가람이의 말에 청도는 머리를 벅벅 긁더니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 정으로 물었다. "좋아, 다 좋아. 다 좋은데, 그럼 우리 동아리방의 유리창을 박살낸 것은 도대체 뭐지? 아니, 도대체 저런 이상한 걸 누가 왜 날린거야?" 가람이는 청도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내 앞쪽에서 엎드려 있던 요령이가 갑자기 눈을 가늘게 뜨며 입술을 깨문다. 무언가 짐작 가는 것이라도 있나? 나는 요령이가 짐작할 만한 우리를 공격 한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해보았다. 답은 생각 외로 금방 떠올랐다. 나는 작 게 중얼거렸다. "퀴에르? 아님, 퀴에르가 보낸..." 청도는 내 말을 듣지 못했지만 가람이는 내 말을 듣고 험상궂은 표정으로 송곳니를 드러내었다. 그리고 요령이는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설마..." 그 때였다. -와그라창창창! 따다다다다당! 갑자기 엄청난 소음과 함께 유리창이 마구잡이로 부서지며 동아리벽의 단 열재가 엉망진창으로 박살나 버렸다. 우리는 고개를 더욱 더 푹 숙였다. 마 치 기관총을 마구잡이로 쏘아대는 것 같군. 창문으로 계속해서 엄청난 속 도로 알지 못할 것들이 쏟아져 들어와서 컨테이너를 미친듯이 울려대었다. 드르르르르르르릉! "이런 제, 젠장...!" 배가 진동하는 컨테이너의 바닥에 닿아서 말도 제대로 못하겠다. 도대체 어쩌면 좋지? 세 발 까마귀의 패라도 내 손에 있다면 도움을 요청해 볼 수 라도 있겠지만, 지금 세 발 까마귀의 패는 가방 속에 있다. 갑자기 충돌음이 그쳤다. "끝났나...?" 난 작게 중얼거렸다. 컨테이너의 울림은 계속되고 있었지만 바깥쪽에서의 공격은 이제 멈춘 듯 했다. 하지만 고개를 들지는 못했다. 혹시 밖에서 다 시 공격을 할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우리는 계속 바닥에 엎드린 채로 신경 을 곤두세웠다. 나도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단전으로 기를 모았다. 주위의 낌새를 살짝 느껴보니 요령이와 가람이도 힘을 끌어내는 듯 했다. 그렇게 긴장된 시간이 흘러갔다. 갑자기 요령이가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누군가 온다! 일어서!" 투웅! 갑자기 요란한 소리와 함께 컨테이너의 문이 벌컥 열리며 봉을 들고 있는 남자가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요령이는 양 손을 파랗게 빛내며 날카롭게 외쳤다. "넌 누구야!" 그러나 그 사내는 묵묵부답으로 봉을 등 뒤로 돌려 팔에 끼운 채 요령이 를 향해 들고 한 번 퉁겼다. 퉁! 작은 진동음과 함께 무언가가 요령이를 향 해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요령이는 재빨리 고개를 약간 꺾어 피했다. 따앙 -! 충돌음과 함께 컨테이너가 다시 한 번 진동했다. 순간 난 깨달았다. 저 거였구나! 저게 컨테이너를 공격한 거였어! 요령이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가람이도 어느 새인지 일어서 있었다. 남자는 개의치 않고 다시 한 번 봉을 튕겼다. 투웅! 그러나 요령이는 이번에는 피 하지 않고 손으로 남자가 쏘아낸 것을 후려쳤다. 펑! 요란한 폭발음이 들렸 다. 요령이는 날카롭게 남자를 노려보며 다시 한 번 물었다. "넌 누구야? 우리 말 몰라? 후 아 유?" 남자는 봉을 요령이에게 고정시킨 채 장난스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 니, 열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입술은 고정되어 있었다. 남자는 그저 계속 장난스럽게 웃고만 있었지만 말소리는 분명히 어디론가 들려오고 있었다. -제임스, 제임스 라이플맨. 제임스라고 합니다. 그랬다. 마음으로 제이슨의 말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마치 퀴에르를 만났던 때처럼. 나는 청도가 천천히 일어서는 것을 보고 청도를 따라 천천히 일어선 뒤 자신을 제임스 라이플맨이라고 밝힌 남자를 바라보았다. 제임스는 백인이 었으며 흰색의 티셔츠와 검은색의 가죽 재킷, 가죽바지를 입고 있었고 역 시 검은 색인 구두를 신고 있었다. 목에는 은십자가 목걸이가 걸려 있었고, 검은 색의 머리를 짧게 잘라 위로 세우고 있었다. 라틴 계열인가? 제임스 는 단단해보이는 검은 색의 봉을 요령이를 겨냥한 채 등 뒤로 걸치듯 들고 있었는데 그 봉에는 알 수 없는 문자 같은 것들이 잔뜩 새겨져 있었다. 제임스는 물었다. -누가 카르텔입니까? 가람이는 요령이를 못마땅한 듯 힐끔 바라보았으며 요령이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제임스는 요령이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 다시 한 번 예의 그 개구장이같은 미소를 띄며 말했다. -아, 물론 누구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단지 예의상, 그리고 확인 차원에서 물어본 것이죠. 제 사전정보에는 카르텔 씨는 여성으로 둔갑하고 있다고 되어 있는데, 여러분들 중 여성은 지금 제 눈앞에 있는 화나 보이시는 숙 녀님, 당신밖에 없군요. "아니 그래, 이 넓은 서울바닥에서 우리는 어떻게 찾았대그래...?" 요령이는 마치 푸념처럼 중얼거렸다. 그리고 제임스를 향해 소리쳤다. 그 눈에 짜증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래, 내가 요령이다. 어쩔건데? 끌고 가시려고? 그래, 어디 니 멋대로 놀아봐라. 하지만 호락호락은 안 될걸?" -저, 한글 못 알아듣습니다. 마음으로 말하세요. 그 정도는 할 줄 알겠죠? 물론 난 못한다. 그리고 제임스도 요령이를 쳐다보면서 말했고. 요령이는 다시금 한숨을 푹 쉬었다. "바라는 것도 많으셔... 휴..." 그리고 마음 속으로 이번엔 요령이의 말이 울려퍼졌다. -그래, 내가 요령이다. 어쩔라고? 퀴에르가 보내서 왔지? 왜? 걔가 또 나 끌고 오래? 그래, 그래. 맘-대로 해. 니 마음대로 날고 뛰고 다 때려 부숴 보라고. 하지만 말야,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끌려가 주진 않을 걸? 제임스는 요령이의 말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황급히 손을 설레설레 젓더니 손으로 성호를 그렸다. 제스쳐가 풍부하군. -오우, 퀴에르라니요! 그 지독한, 악마같은 마녀의 이름은 담지 마세요! 듣기만 해도 불경합니다. 전 퀴에르가 보내서 오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끌 고 가려고 온 것은 더욱 아니고요. 의외인데? 나는 제임스와 요령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요령이 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고 있었다. 요령이는 황당한 듯 머리까지 짚으 며 물었다. -아니, 나를 잡으러 온 게 아니면 도대체 왜 온거야? 제임스는 살짝 웃었다. 제임스의 웃음과 동시에 그의 말이 내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더 이상 제임스의 미소는 나에게 그저 장난스러운 미 소로만 보이지 않았다. 나의 머리를 후려치는 제임스의 말을 들으며 본 제 임스의 웃음에서 내가 느낀 것- 그것은 공포였다. -당신을 죽이러 왔습니다. 컨테이너 안은 냉랭하게 가라앉았다. 요령이는 골치가 아픈 듯 미간을 살 짝 찌푸리며 머리를 짚었다. -잠깐, 잠깐. 정리하자고. 지금 방금 나보고 뭐라고 그랬지? 제임스는 입술 끝을 올렸다. -당신을 죽이러 왔다고 했죠. 청도가 뒤에서 내 어깨를 짚었다. 녀석은 참으로 지금의 딱딱한 분위기와 는 상당히 안 어울리게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눈을 큼지막하게 뜨고 있었 다. 청도는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지금 내 마음속에서 계속 이상한 말이 들려와. 아무래도 내가 미쳤나 봐. 그런데 도대체 저 녀석은 누구래? 왜 온 거래?" "만약 네가 미쳐서 들리는 소리라면 나도 미친 거겠지. 환청 아냐. 둘은 지금 마음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거야. 궁금증은 대강 풀렸지? 너도 들었다 시피, 저 녀석은 요령이를 죽이러 왔대" 청도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너까지 미쳐버렸구나. 이런 젠장! 그게 말이 돼?" "봉에서 총알을 쏘아내는 건 참 말이 되겠다. 아니, 10년 동안 그림자가 쫓아다니는 건 말이 되나?" "...쳇!" 청도는 도저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마구 휘저었다. 그 래도 내가 요령이를 처음 봤을 때만큼 놀라진 않는군. 10년간을 주술과 함 께 살아와서 그런가? 게다가 청도의 오른손은 어느새 천천히 목검으로 향 하고 있었다. 현실판단이 빠른 녀석이네. 요령이는 이해가 안 되는지 제임스에게 물었다. -아니, 도대체 왜 나를 죽이려고 하시나 그래? 이유나 묻자. -...흠, 말해 줘야 되는지 말아야 되는지... 제임스는 고민이라는 듯 한 손으로 턱을 짚었다. 잠시 후 그는 답이 나왔 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존은 그런 이야기를 해도 된단 말을 안 했습니다. 역시 가르쳐주지 못하 겠군요. 존? 그건 또 누구야? 점점 궁금증은 커져만 갔다. 요령이 역시 마찬가지 인가보다. 요령이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이윽고 팔짱을 끼며 물었다. -그럼 어디서 왔냐? 아, 사는 데 말고. 혼자 온 거야? 아니면 어떤 단체에 서 파견한거야? 그거라도 알자. 죽인다며? 신사라면 최소한의 립 서비스는 해달라고. 제임스는 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네요. 신사까지 운운하시니까. 어차피 우리가 누구인지는 이번 에 저승에 가서 아실 테고, 혹 운이 좋아서 죽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알아 내겠죠. 그러니 지금 알려주나 나중에 아나 상관없겠죠. 우린 스콥입니다. -스콥? 요령이가 처음 들어본다는 듯 되물었다. -스콥. 에스, 케이, 오, 피. 쉐도우 나이츠 오브 펜타그램. 모릅니까? 제임스의 설명이 끝나자 요령이의 표정이 끔찍하게 변했다. 요령이는 고 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맙소사. 스콥! 파문당한 기사들! 젠장! 너희들이 왜 나를? -비밀이라니까요. 제임스는 싱긋 웃었다. 스콥? 오망성의 그림자 기사들이라고? 그게 뭐지? 난 요령이에게 물었다. "요령아, 스콥이 뭐야?" 요령이는 내 질문에 나를 힐끔 바라보더니 말했다. -내 친구들이 너희가 뭐하는 모임이냐고 묻는데. 설명할 시간을 주겠어? -그러죠. 제임스는 대답과 함께 봉을 땅에 짚고 방만하게 기댔다. 하지만 요령이는 경계를 풀지 않으려는 듯 제임스에게 눈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저 놈들은 쉐도우 나이츠 오브 펜타그램이야. 줄여서 스콥. 오망성의 그 림자 기사들. 파문 당한 기사들. 광신도의 선봉장. 끔찍한 놈들이지" "뭐하는 녀석들인데?" "지들 입으로는 세상을 지키는 녀석들이래" "뭐?" 푸흡! 난 그만 실소해 버렸다. 유치해! 아니, 맙소사! 그게 뭐야? 나는 믿 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요령이를 바라보았고 요령이는 말을 이었다. "옛날, 중세시대에, 흑마술이 만연했던 적이 있었어. 여러 가지의 신비주 의들이 세가 커져서, 일부 지역에서는 가톨릭의 위치를 위협할 정도가 되 었지. 보다 못한 교황은 비밀리에 가장 신앙심이 깊고 뛰어난 다섯 명의 기사를 모아서 암살자로 만들었어. 그리고 '쉐도우 나이츠 오브 라운드'라 고 불렀지. 원탁의 기사처럼 정의를 수호하는 원탁의 그림자 기사들이라는 뜻이야. 그들은 교황의 칼이 되어서 교황의 목적을 충실히 따랐지. 음지에 서 수많은 흑마술사들이 그들에게 암살 당했어. 그런데, 여기서 교황의 생 각과 어긋나는 일이 벌어졌지. 계속적으로 신비주의와 흑마술과 상대하는 동안 오히려 기사들이 조금씩 신비주의에 물들게 된거야. 물론 그들의 신 앙은 굳건했지. 그건 의심할 바가 없었어. 그래서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지 고 말았어. '백마술이 아닌 주술도 거리낌없이 사용하는 신앙심 깊은 크리 스찬 기사들'이라는 상당히 부조리한 집단이 탄생한 거야. 그뿐이 아니라 이들은 이제 교황의 통제조차 벗어나고 있었지. 가톨릭의 권위에 도전한다 싶은 것들은 교황이 허락을 하던 말던 개의치 않고 쓸어버린 거야. 이건 큰 문제였어. 교황청의 아래에 신성하지 않은 주술을 맘대로 사용하면서 지저분한 암살을 행하고 다닌다는 단체가 있다는 게 드러나면 교황청의 이 름이 땅에 떨어져 버릴 것은 뻔했거든. 교황은 고심끝에 결국 그들을 파문 해 버렸지"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 "하지만 그들은 파문을 당하던 말던 개의치 않았어. 오히려 세상에 뭐 걱 정할 게 그리도 많은지, 스케일도 크게 세계평화까지 걱정하게 되어 버렸 지. 그래서 그들은 음지에서 계속 후계자들에게 대를 물려주면서 '자신들의 정의'에 어긋나는 것들은 닥치는 대로 쓸어버렸지. 흑마술이고 뭐고 가리지 않고 사용하면서 말야. 이름도 바꿨지. '쉐도우 나이츠 오브 펜타그램'으로. 펜타그램은 주술의 상징이야. 그런 펜타그램을 성스러운 원탁 대신 이름에 넣은 것은 이제 자신들은 교황청과는 독립된 주술단체라는 걸 밝히기 위해 서였지. 하지만 녀석들은 벌써 몇 백년 간 활동이 없었어. 그래서 대가 끊 겨버린 줄 알았는데..." 흠. 알려지지 않은 역사의 비밀인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요령이의 말 을 들었다. 물론 청도는 뭐가 뭔지 도저히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었다. 흠, 그런데 세계평화를 걱정한다고? 그럼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닌 것 아닌가? "야, 근데 세계평화를 걱정한다면서? 그럼 그렇게 나쁜 녀석들은 아닌 거 아냐?" 요령이는 내 말에 답답한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멍청아! 내 말은 코로 들었냐! '자신들의 정의'에 어긋난다 싶으면 살인도 서슴없이 한다고! '약간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는게 녀석들의 생각이지. 저 놈들은 악당보다 더 나쁜 놈들이야. 악당이라도 사람을 죽이면서 저 녀석 들처럼 아무런 죄책감이 없지는 않을 거야..." 섬뜩했다. 사람을 아무 거리낌없이 죽인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나 는 제임스를 다시 쳐다보았다. 제임스는 변함없이 허술하게 봉에 기대어 대화를 나누는 우리를 지루한 듯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왠지 제 임스의 몸에서 피비린내가 풍겨 오는 것 같은데. 요령이는 다시 마음으로 말했다. -너희들은 이미 몇 백년 전에 활동을 멈추지 않았나? -오, 이제야 이야기가 끝났습니까? 꽤 지루...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요령이는 짜증난다는 듯 빽 소리질렀고 제임스는 당황한 듯 손을 설레설 레 저으며 말했다. -어휴, 화 나셨군요. 죄송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몇 백년 전에 활동을 멈추 었다니요? 우리는 계속해서 대를 이어오고 있었어요. 단지 우리가 나설 일 이 없었을 뿐이죠. 요령이는 제임스의 말에 우습다는 듯 코웃음쳤다. -흥! 그래? 그럼 제 1,2 차 세계대전은 뭐지? 원자폭탄의 개발은 어때? 그 수많은 기아와 전쟁은 왜 해결하지 못했지? 그건 정의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었나? 요령이의 말에 제임스는 조용히 검지 손가락을 슬쩍 흔들었다. -우리는 주술적인 일에만 관여합니다. 우리가 처음에 어떻게 만들어졌는 지, 그리고 우리의 이름이 무언지 벌써 잊으셨습니까? -흥! 그래. 그럼 나는 너희들의 정의에 어긋나는 존재라는 말인가? 그래 서 죽여야 한다는 말이야? 왜? 나라는 존재가 너희 신앙의 신성성에 방해 가 되나? 파문된 후에도 신앙에 어긋나는 것들은 닥치는 대로 쓸어버린다 며? 그래서 나를 죽이려고 하는 거니? 아니면 나로 인해 세상에 무슨 큰 일이라도 생기는 거야? 제임스는 빙긋 웃으며 봉을 고쳐 잡았다. -후자입니다. 저흰 비록 가톨릭 신자이지만 파문 당한 이후로는 교단의 명예에는 신경쓰지 않죠. 이제 이야기는 끝냅시다. 지루하군요. 요령이는 이를 드러내었고 가람이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도와야되나"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고 가람이는 대답했다. "알았다" "네 도움 따위는 필요없어" 요령이는 차갑게 말했지만 가람이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네 생각도 내 조력에 전혀 필요없다. 주인이 도우라고 했으면 돕는 것" "웃기는군" 요령이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이쪽의 낌새를 눈치챘는지 제임스는 표정 을 굳히며 말했다. -관련 없는 사람들은 끼지 마십시오. 걱정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은 손대 지 않습니다. 제 목표는 카르텔 씨 하나입니다. 굳이 다른 사람들까지 다치 게 하고 싶지는 않군요. "하지만 우린 친구라고!" 나는 기세 좋게 외치며 -물론 제임스가 내 말을 알아듣지는 못하겠지만- 세 발 까마귀의 패가 들어있는 가방을 향해 손을 뻗었다. 위험할 때 도움 을 요청하면 도와주겠다고 했지? 그런데 그 때였다. 제임스가 봉을 가방을 향해 겨누더니 한 번 튕겼다. 투웅! 이윽고 가방에 작은 오망성이 새겨지더 니 가방에서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제임스는 유쾌한 듯 웃었다. -가방 안에 대단한 물건이 들어 있더군요. 하지만 신물에 손대게 둘 것 같습니까? 저 진은, 저 둘은 몰라도 당신은 절대로 뚫을 수 없을 겁니다. 그 때였다. -파앗! 강렬한 자주빛 기운과 함께 가방의 첫번째 주머니가 투툭! 하고 강제로 찢어지며 안에 있던 세 발 까마귀의 패가 내 손으로 빨려 들어오듯 잡혔 다. 대단해! 나는 놀란 눈으로 세 발 까마귀의 패를 바라보았다. 놀라기는 제임스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제임스는 주춤 물러서며 봉을 가슴께로 치 켜들었다. 뒤에서 청도의 멍한 목소리가 들렸다. "맙소사...혼자 날아다닌다니...저게 도대체 뭐야..." 그리고 마음속으로 세 발 까마귀의 패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주위에 이상한 마력장이 쳐지기에 해제하고 너에게로 와 보았다. 도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패 바깥을 안 보고 있었어요?" -전혀 안 보고 있었는데. 급하면 네가 부를텐데 왜 그러고 있어야 되지? 어휴. 다음부터는 아예 몸에 지니고 다녀야겠군. 나는 다급하게 말했다. "저 녀석이 요령이를 죽이겠대요! 도와줘요!" -그래? 넌? "녀석이 노리는 건 요령이 뿐이지만 저도 요령이를 도와서 싸울 거예요! 그러니 도와줘요!" 하지만 세 발 까마귀는 별 관심이 없다는 듯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래? 그럼 너와는 상관없군. 바깥상황을 지켜보다 네가 위험해지면 도 와주지. 나는 황당해서 세 발 까마귀의 패를 꽉 움켜쥐며 말했다. "이봐요! 나를 도와줘요! 내가 도움을 요청하면 도와준다면서요!" -네게 도움이 필요해 보이면 내가 돕는 것이지 내 도움이 필요치도 않은 데 너를 돕는 것은 아니다. 나는 너의 수호신이지만 너의 무기는 아닐 뿐 더러 네 시종은 더욱 더 아니다. 내게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을 도울 의무는 없다. "젠장!" 그럼 이런 패 따위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잖아! 나는 신경질을 내며 패 를 방구석으로 집어던져 버렸다. 땡그랑! 요란한 소리와 함께 패가 바닥에 떨어졌다. 요령이는 세 발 까마귀에게 내가 한 말만으로도 나와 세 발 까 마귀가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눈치챘나보다. 요령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어차피 그따위 잡새의 도움이 없어도 저런 자식은 충분히 쓰러뜨릴 수 있어" 그리고 다시 마음 속으로 제임스에게 말했다. -덤벼. 제임스는 봉을 화려하게 휘두르더니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가며 말했다. -밤은 짧은데 워밍업이 너무 길었으니 어서 승부를 내야겠군요. 따라오세 요. 안은 너무 좁습니다. -멍청이. 누가 봉을 상대로 넓은 곳으로 나갈 것 같으냐? -이왕 싸울 거 넓은 곳에서 화끈하게 붙어보고 싶지 않습니까? 뭐 겁난다 면 할 수 없지만. 요령이는 뭐가 웃긴지 싱긋 웃었다. -깔깔! 지금 나를 자극하는 건가? 하지만 곧 그 미소는 차갑게 바뀌었다. -받아주지. "뭔진 모르지만 좋아, 나도 돕지!" 청도가 재밌다는 듯 목검을 잡으며 내 앞으로 나섰다. 그런데 그 때 제임 스가 손을 내밀었다. 팟! 암흑의 기운이 빠르게 청도에게 쏘아져 나갔다. "핫!" 청도는 우습지도 않다는 듯 가볍게 목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 암흑의 기운은 청도의 공격을 그대로 통과해서 청도를 밀어붙였다. 그리고 청도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벽에 처박혔다. 쿠당! 청도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몸 을 꿈틀거렸지만 암흑의 기운이 청도를 꼼짝 못하게 벽에 매달아놓고 있었 다. "분명히 맞췄는데! 이, 이게 뭐..." -주술력이라고는 하나도 없으면서 어디에 끼여들겠다는 겁니까. 당신은 거기 처박혀서 구경이나 하시죠. 제임스는 나를 힐끔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정도의 힘으로 끼어보겠다는 것은 아니겠죠? 제임스는 밖으로 사라졌다. 요령이와 가람이가 재빨리 그 뒤를 따랐다. "젠장! 풀어줘!" 청도가 소리쳤지만 물론 제임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재빨리 청도에 게로 달려갔다. 청도의 몸 주위에는 얇은 기가 엉겨붙어 있었다. 내가 어떻 게든 풀어보려고 할 때 밖에서 기합소리가 들렸다. "합!" 제임스의 것이었다. 그리고 무언가가 바람을 찢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 다. 곧 풀숲을 밟는 푸석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싸움이 시작되었나보군. 나는 다급한 마음에 청도를 이리저리 당겨 보았지만 청도의 몸은 꼭 거미 줄에 붙은 벌레처럼 기에 엉겨서 단단히 벽에 달라붙어 있었다. "젠장! 어쩌면 좋지?" 펑!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음이 점점 다급해져 왔다. 생각 끝에 나는 손으로 기를 모았다. 청도의 몸을 감싸고 있는 검은색 기가 워 낙 미약해 내 힘으로도 충분히 헤쳐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윽 고 손에 투명하게 기가 모였고 나는 재빨리 청도의 몸을 감싼 기를 훑었 다. 다행히도 검은색 기운은 내 손길에 마치 얇은 비닐막이 찢어지듯 좍좍 찢어져 허공으로 흩어졌다. 어느 정도 기를 뜯어내자 청도가 바닥으로 떨 어졌다. 콰당! "아우욱!" 등허리를 바닥에 세게 부딪힌 청도가 허리를 움켜쥐며 얼굴을 찌푸렸다. "괜찮아?" "그래. 그런데 방금 전 그것은 도대체 뭐였지? 그리고 넌 어떻게 날 풀어 낸거야?" "기로 뜯어냈어. 자세한 건 나중에 설명하지. 지금 급하다고. 지금 밖에서 애들이 제임스인가 하는 녀석과 싸우고 있나봐" 청도는 목검을 움켜쥐며 일어섰다. "젠장, 너희들 이제 보니 나랑은 다른 세상에 사는 놈들이었구나. 내가 사 는 초록별 지구엔 이런 놈들이 살 리가 없어. 아니면 너희들, 우리 아버지 랑 같은 부류냐? 여하튼 나가보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요령이와 가람이 를 도울수 있겠지" 청도는 후다닥 컨테이너 밖으로 뛰어갔고 나도 재빨리 청도를 따라 밖으 로 나가 보았다. 컨테이너 밖에는 가람이와 요령이, 그리고 제임스가 멋지 게 어우러지고 있었다. -붕! 붕! 제임스가 빠르게 봉을 돌리며 요령이와 가람이를 몰아붙이고 있었고 요령 이와 가람이는 교묘한 몸놀림으로 제임스의 공격을 피해내고 있었다. 제임 스가 갑자기 뒤로 빠르게 굴러서 물러나더니 봉을 치켜들고 외쳤다. "샷건!" 투투투투퉁! 봉이 격렬히 진동하며 수십 개의 뿌연 기의 줄기들이 요령이 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치잇! 이런 잡기술로! 타앗!" 요령이는 연기선들이 자신의 주위를 뒤덮는 순간 자신의 주위로 기운을 뿜었다. 퍼퍼펑! 힘들이 충돌하는 소리와 함께 제임스가 쏘아낸 공격들이 모조리 공기 중에서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제임스는 요령이가 잠시 틈을 보이자 재빨리 요령이를 향해 쇄도했다. "합!" 갑자기 제임스의 다리를 노리고 땅을 훑으며 낮은 발차기가 들어갔다. 제 임스는 재빨리 뛰며 뒤로 피했다. 가람이가 어느새 제임스를 막아서고 공 격하고 있었다. 가람이는 낮은 발차기의 회전력을 이용하여 그대로 다시 뛰어오르는 제임스를 걷어찼고 제임스는 봉을 짧게 잡아 막아냈다. 딱! 가 람이의 발차기가 봉에 부딪히자 딱딱한 물체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낮다. 제임스는 그대로 뒤로 물러서며 거리를 벌리려 했지만 가람이는 한 번 잡 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계속해서 권각을 이용하여 제임스를 몰아쳤다. "타! 합! 타아-!" 팟!팟! 바람을 찢는 소리와 함께 가람이가 뻗는 주먹들이 제임스를 아슬 아슬하게 피해갔다. 제임스는 당황한 듯 휘청대고 있었다. "핫!" 가람이가 제임스의 턱을 노리고 발을 뻗었다. 흠칫한 제임스가 뒤로 재빨 리 턱을 뺏지만 어느 새 요령이가 제임스의 뒤로 다가와 있었다. 요령이는 재빨리 제임스의 뒷무릎을 걷어차 버렸다. 뻐억! 제임스가 크게 휘청였다. 요령이와 가람이가 동시에 제임스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순간, "이익!" 부웅! 부웅! 제임스가 급히 몸을 회전시키며 봉을 두 번 돌렸고 가람이와 요령이는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가람이가 말했다. 물론 역시 마음 속으로 이다. -봉을 다루는 솜씨 하나는 칭찬해 줄 만하군. -고맙군요. 제임스가 고개를 까딱였다. 그 때 요령이가 말했다. -하지만 수적 열세는 어쩔 수 없나봐? 흥, 하긴 실력도 나보다도 떨어지 는 것 같은데. 뭘 믿고 혼자서 덤볐지? -지금은 전초전 아닙니까? 좀 더 치고 받아봐야 실력이 어떤지 논할 수 있죠. 지금은 너무 이릅니다. 그럼, 갑니다. 제임스가 견제하던 자세로 낮게 잡았던 봉을 화려하게 돌리며 땅과 평행 하게 잡더니 그대로 요령이에게 튕겼다. 퉁! 퉁! 쉬익! 백색 빛줄기 두 개 가 빠르게 밤하늘을 가르며 요령이에게 날아갔다. 요령이는 재빨리 몸을 돌려 피하며 외쳤다. "샐러맨더!" 화르르륵! 요령이의 머리 위 하늘에서 불덩어리가 맺히더니 그대로 제임 스에게로 쏘아져 나갔다. 하지만 제임스는 다시 한 번 봉을 들더니 불덩이 를 겨냥했다. 봉 끝에서 빛덩이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주먹만하게 엉기더 니 불덩어리를 향해 날아갔다. -꽈웅! 두 힘이 충돌하며 강렬한 폭음과 함께 땅이 패이며 연기가 무럭무럭 치솟 아 올랐다. 요령이는 재빨리 자신을 감싼 연기 밖으로 뛰어 나왔다. 요령이 의 주위에 푸른 빛덩이 몇 개가 둥실둥실 떠 있었다. "받아랏!" 흩어지는 연기 속에서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제임스를 발견한 요령이는 손을 제임스를 향해 휘둘렀다. 그리고 요령이의 주위에 떠 있던 빛덩이들 이 일제히 제임스를 향해 날았다. 쉬리리릭! 하지만 제임스는 재빨리 봉을 휘둘러 그것들을 모조리 터뜨려버렸다. 퍼퍼펑! 요령이가 다시 외쳤다. "에어리얼 서번트! 날려버려!" 그녀의 등뒤로 뭉클거리며 흰 바람이 사람 형상으로 뭉치는 것이 내 눈에 똑똑히 보였다. 저런 게 보이다니, 역시 난 풍사인가 보군. 에어리얼 서번 트는 그대로 바람의 기운을 잔뜩 이끌고 제임스에게로 뿜어져 나갔다. 갑 작스레 바람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자 제임스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 지 당 황한 듯 잠시 멈칫하더니 곧 자세를 바로잡고 봉을 휘둘렀다. 하지만 에어 리얼 서번트는 부드럽게 제임스의 봉을 피하며 그대로 제임스를 잡고 낮게 날았다. 점점 에어리얼 서번트의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무서운 속도로 날던 제임스는 괴성을 지르며 꼭 쥐고 있던 봉에서 왼손을 떼더니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손에 검은 기운이 잔뜩 엉겨 있었다. 제임스 는 그대로 에어리얼 서번트의 머리를 후려쳤다. 퍼엉! 에어리얼 서번트의 머리가 끔찍하게 뭉개졌다. 에어리얼 서번트는 힘을 잃은 듯 멈춰 서더니 우엉-하는 한줄기 한맺힌 고함과 함께 허공에 흩어져 버렸다. 하지만 제임 스는 관성으로 인해 잔디밭의 거의 끝 쪽까지 날아가서 바닥에 처박혀 버 렸다. 콰당! "으악!" 제임스의 비명이 허공을 울렸다. 그리고 요령이보다 제임스쪽에 훨씬 가 까이 있었던 가람이가 몸을 돌려 그대로 쓰러진 제임스에게로 뛰었다. 제 임스는 봉도 놓친 채 비틀거리면서 일어섰지만 그 땐 이미 가람이는 제임 스에게서 채 10m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까지 다가와 있었다. 가람이는 그 대로 제임스를 향해 뛰어올랐다. 마치 매트릭스의 한 장면 같군. 그런데 그 때 요령이가 가람이와 제임스를 향해 미친듯이 달리며 외쳤다. "멍청아! 봉이 없다고 방심하지 마!" 하지만 이미 늦었다! 제임스는 끔찍해 보이는 표정으로 이를 잔뜩 드러내 며 웃었다. 가람이는 흠칫하며 재빨리 제임스를 걷어차려 했지만 이미 늦 었다. 제임스가 걷어차이기 직전에 엄청나게 큰 동작으로 날아오던 가람이 의 턱에 어퍼컷을 꽂아버린 것이다. 뻐어억! 가람이는 입에서 피를 뿜으며 그대로 허공으로 솟아 올랐다. "큭!" 가람이는 숨막히는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제임스는 잔인하게 웃으며 손 을 뒤로 뻗었다. 제임스의 양손에는 그냥 보기에도 어마어마해 보이는 기 가 뭉치고 있었다. 가람이는 방금 전 너무 세게 얻어맞았는지, 저항할 기운 이 빠져 버린 듯 그대로 힘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제임스는 그대로 쌍수장 을 가람이에게 뻗었다. "멈춰!" 나는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녀석은 멈추지 않았다. 맙소사! -투학! 가람이는 추락하면서 간신히 몸을 비틀며 자신의 양팔을 교차시켰고 곧바 로 엄청난 소리와 함께 제임스의 양손에 뭉쳤던 검은 기운이 그대로 가람 이를 후려쳤다. -쩌어어어엉! 잔디밭 전체를 울리는 강렬한 기의 충돌음과 함께 가람이는 비명조차 지 르지 못하고 잔디밭 쪽으로 퉁겨져 한참을 날았다. 요령이가 재빨리 몸을 날려 날아오는 가람이를 받았다. 턱! 가람이는 그대로 축 늘어져 버렸다. 요령이가 가람이의 양 뺨을 툭툭 치며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야, 괜찮아?" 나와 청도도 재빨리 가람이에게 뛰어갔다. 가람이는 입에서 피를 토하고 있었고 양 어깨가 이상한 모양으로 뒤틀려 있었다. "쿨럭! 쿨럭! 괜찮..." 요령이는 가람이를 잠시 바라보더니 손으로 가람이의 어깨부터 허리까지 를 슥 훑었다. 나는 다급히 물었다. "괜찮어?" "아까의 공격을 막으면서 다행히 팔은 부러지지 않았지만 충격을 통과시 키면서 어깨가 빠졌어. 그리고 통과시키지 못한 충격이 그대로 가슴으로 전달되면서 내상을 좀 입었군. 생명에는 별 지장이 없겠지만 꽤 아프겠는 걸" 요령이는 대답을 마치고 가람이의 양 쪽 어깨를 쥐며 가람이에게 말했다. "참아" 우두두둑!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요령이는 가람이의 뼈를 맞추었다. 가 람이는 비명을 질렀다. "끄윽!" "엄살 부리지 마" 요령이는 싸늘하게 말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제임스가 피투성이가 된 잔 뜩 일그러진 얼굴로 웃으며 봉을 잡고 천천히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 다. -낄데 안 낄데 못 가리고 아무데나 참견하니까 그런 꼴을 당하는 겁니다. 크크크... 처음의 어린애처럼 보이던 모습은 다 어디로 갔는지, 지금의 제임스는 꼭 악귀 같은 모습이다. 요령이는 미소지었다. 얼음장같은 미소였다. 왠지 보 는 나까지 가슴이 서늘해지는데. -차라리 잘됐어. 둘이서 한 명을 상대하면 옆의 사람이 맞을까봐 제 기량 을 못 내거든? 이 멍청이가 방심하다 이렇게 당해버렸으니 최소한 가람이 가 맞을까봐 힘을 아끼는 일은 없겠군. -그렇다면 지금까지는 기량을 아꼈다는 겁니까? 크크...재밌군요. -못 믿겠으면 보여주지. 요령이는 꼭 고양이가 먹이를 노리는 것 같은 자세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자세를 낮추더니 그대로 스프링처럼 제임스를 향해 튕겨 나갔다. 엄청난 속도다! 제임스는 봉을 휘두르며 자세를 낮추었다. 요령이의 양손에서 푸른 색 기운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그리고 요령이의 주위로 구슬만한 작은 푸른색 구체가 하나씩 떠올랐다. 스팟! 스팟! 스팟! 그렇게 계속해서 구체 가 떠올라서 제임스의 근처까지 갔을 때 요령이는 수십 개의 푸른 구체로 뒤덮여 있었다. 제임스는 코웃음을 치며 봉을 겨누었다. -하! 못 막아낼 것 같습니까? 쉬릭! 순간 요령이가 앞으로 구체들을 모조리 쏘아내며 낮게 뛰어들었다. 투웅! 제임스는 재빠르게 샷건이라고 했던 그 기술을 다시 사용했다. 수십 개의 작은 구체들이 서로 충돌하며 폭죽처럼 폭음과 함께 수십 번 폭발했 다. 따다다다닥! 제임스는 봉을 회수해서 어느새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온 요령이를 향해 찔렀다. 팟! "흥!" 요령이는 재빨리 몸을 빙글 돌려 옆으로 피하며 순식간에 제임스의 앞으 로 다가섰다. 순식간의 동작이었다. 요령이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하이-" 제임스는 경악에 휩싸여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요령이는 제임스의 배를 온 힘을 다해 후려쳤다. 뻐어억-! 푸른 빛이 꼬리를 끌며 허공을 가르더니 제임스의 배에 박혔다. 제임스는 봉을 떨구고 배를 감싸쥐며 천천히 주저 앉았다. 다음 순간, -퍼퍼퍼퍼퍼퍼퍼펑-! 요령이의 주위가 밤하늘이 된 것 같았다. 요령이의 주위로 수십개의 푸른 빛 주먹이 깜박거리며 빛난 것이다. 엄청난 속도다! 요령이는 보이지도 않 을 정도로 빠르게 제임스를 후려치고 있었다. 요령이의 앞으로 수십 개의 주먹이 제임스의 복부에 꽂혔다 사라졌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제임스는 주저앉지도 못한 채 비틀거리며 피를 토했다. "쿨럭! 쿠억! 스톱...스톱! 크악!" 하지만 요령이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이제 요령이의 주위로 푸른 빛 구 체까지 하나 둘 엉겨서 제임스의 복부로 꽂히고 있었다. 펑-! 펑-! "스톱....플리즈! 끄으으!" 제임스는 비틀거리며 애원했지만 요령이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너같은 자식은 죽지 않을 정도로 맞아봐야 돼. 뭐, 누굴 죽이겠다고?" 제임스는 이제 눈이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쓰러지고 싶지만 계속 꽂히는 요령이의 주먹이 그러질 못하게 하고 있었다. 펑펑펑펑펑! 미친듯이 주먹의 폭풍이 제임스를 후려치자 제임스는 이제 견딜 수 없다는 듯 고함을 질렀 다. "우아아아악-!" 제임스는 피를 뱉으며 고함을 질렀고, 이상한 낌새를 챈 요령이는 재빠르 게 뒤로 뛰며 기의 막을 펼쳤다. 다음 순간, 제임스의 몸에서 엄청난 빛이 뿜어졌다. -파아아아앗-! "우웃!" 치칙, 치칙, 강한 기의 바람이 주위의 잔디밭을 휩쓸었고 요령이는 기의 막을 쳤음에도 뒤로 조금씩 밀려났다. 요령이는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아주 발악을 하는군, 발악을 해" 제임스는 놓쳤던 봉을 잡으며 뒤로 물러서며 소리쳤다. -빌어먹을, 젠장! 한 번 방심했다가 저 쓸데없이 끼여들던 자식과 똑같은 꼴을 당해버렸군요. 기다리세요. 전 다시 돌아올 테니... -어딜 도망가시게? 어느새 요령이가 손을 허리 근처에 세워 요기를 모으고 있었다. 하지만 제임스는 피투성이가 된 입으로 미소지으며 품속에서 부적 같은 종이를 꺼 냈다. -이 귀한 걸 쓰게 하시다니...이 빚은 반드시 갚겠습니다. 제임스는 비틀거리며 봉에 몸을 기대더니 왼손과 이빨로 부적을 찢었다. 찌이익- 그리고 눈부신 섬광이 주위를 뒤덮었다. 팟! "뭐얏!" 우리는 모두 방어자세를 취하며 고개를 돌렸다. 섬광은 곧 사라졌고, 우린 재빨리 제임스가 있던 자리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제임스의 모습은 온 데간데 없었다. 요령이는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이런 젠장..." "으으윽...쿨럭...쿨럭...주인...미안하다..." "미안하, 으윽, 긴, 임마. 지금 사람이 아파 죽겠다는데 미안하고 자시고 따지겠냐?" 콱, 나는 앞발을 콱 내딛어 휘청거리던 몸을 간신히 지탱했다. 지금 내 등 에는 가람이가 업혀 있다. 나는 비틀거리며 컨테이너 침실 문을 열었다. 그 곳에는 청도가 미리 이부자리를 깔아 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살짝 무릎을 굽히며 천천히 자세를 낮추어 가람이를 눕혔다. 가람이는 핏기 없 는 얼굴로 계속 중얼거렸다. "주인한테 업히다니...이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미안...으..." "입 주위에 피 닦고, 어서 입에 재갈부터 물려" 요령이가 잔뜩 찌푸린 얼굴로 재촉했다. 재갈을 물리라고? 나는 당황해서 요령이에게 물었다. "왜? 너무 아파서 혀라도 깨물까봐? 그 정도로 심각하니?" "아니. 끙끙대는 게 시끄러워서" 나는 요령이를 황당한 얼굴로 바라보았고 요령이는 표정 하나 안 바뀌고 나를 마주보았다. "농담이야" "......지금 이런 상황에서 농담이 나오냐?" "별로 심각한 상황도 아닌데 뭘" 요령이는 허리를 굽혀 가람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깨 쪽을 두 손가락 으로 살짝 짚더니 다시 가슴 언저리를 몇 번 툭툭 쳐보고 말했다. "일단 어깨는 비록 좀 쑤시기는 하겠지만 아까 내가 제 때 뼈를 맞추어 놓았기 때문에 곧 정상으로 돌아올 거야. 문제는 가슴이야. 꽤 심하게 내상 을 입었어. 기의 흐름이 흐트러져있어. 좀 바로잡아 놔야겠는데" 요령이는 손바닥이 천장을 향하게 들더니 손 위로 푸른빛 기운을 끌어냈 다. 그 기운은 천천히 일렁이며 요령이의 손바닥 위에서 흔들대다가 이윽 고 천천히 원을 그리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기운은 복잡한 문양을 그리며 빠르게 소용돌이쳤고, 잠시 지켜보던 요령이는 그대로 손바닥을 뒤 집더니 가람이을 가슴에 내려찍었다. 펑! 요령이의 손이 가람이의 가슴에 떨어지자 가람이의 몸이 크게 튕기며 가람이가 피를 토했다. "카악!" 그리고 나는 깜짝 놀라 요령이를 바라보며 외쳤다. "무슨 짓이야!" "가만히 지켜보기나 해" 가람이의 가슴에는 아까 요령이의 손에 그려졌던 문양이 똑같이 그려져서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계속적으로 작은 충돌음이 들려왔다. 펑! 펑! 충돌음이 작게 들릴 때마다 가람이는 몸을 작게 들썩거렸다. "올바른 회전으로 기를 강제로 틀어주고 있는거야" 요령이가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안심하라는 투로 차분히 말했다. "양기에 맞는 기의 흐름을 가람이의 기들이 마구잡이로 소용돌이치는 곳 에 억지로 새겨 넣었어. 이제 가람이의 기들이 그 줄기의 강제적인 흐름에 휩쓸려서 어쩔 수 없이 올바로 흐르게 될거야" 그런 거였나? 확실히 점차 가슴에서 들려오는 작은 충돌음은 점차 잦아들 었고 그에 따라 계속 격하게 내뱉던 가람이의 호흡도 천천히 안정을 되찾 아갔다. 휴, 어쨌든 한 숨 돌렸군. 나는 가람이에게서 시선을 떼며 요령이 에게 물었다. "그럼 가람이는 저대로 놔둬도 괜찮은 거야? 병원이라도 데리고 가야 하 지 않을까?" "아마 며칠만 쉬면 다 나아서 펄펄 뛰어다닐걸? 뭐, 더 빨리 낫게 하려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지만...사람의 모습에서 나오 는 기의 흐름이 워낙 완벽에 가까운 모습이라서 잘은 모르겠네. 게다가..." 요령이는 가람이의 어깨에 파스를 붙이고 있는 청도를 힐끔 바라보며 낮 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도 알다시피 본모습으로 돌아가는 건 좀 곤란하잖아"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여 요령이의 말에 동의했다. 가람이는 어느새 잠들 었는지 고개를 옆으로 떨구고 규칙적으로 작게 숨을 들이쉬고 있었다. 요 령이는 그런 가람이를 잠시 바라보더니 흘러가는 말처럼 중얼거렸다. "......이제 어쩔거야?" "뭘?" "이렇게 된 이상, 다시 쫓아내지 않을 거냐고 묻는 거야. ...넌 그 때 분명 히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고 말했잖아" 청도는 우리의 말에 귀를 쫑긋였지만 요령이는 이번엔 청도가 우리의 말 을 듣던 말던 별로 신경쓰지 않는 듯 했다. 뭐, 끼여들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쯤은 청도도 알겠지.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 "당연한 거 아냐? 이번엔 마녀협회도 아니었어. 오히려 마녀협회와는 반 대쪽에 있는 단체에서 날 쫓아왔지. 물론 왜인지는 나도 몰라. 하여튼 우리 가 나 때문에 습격 받은 건 사실이잖아? 너의 마음이 나를 쫓아내는 쪽으 로 쏠렸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잖아" "글쎄...그런가?" "쫓아내려면 확실히 말해. 뭐 네가 쫓아내봤자 어차피 갈 데도 없어서 너 한테 다시 올 게 뻔하지만" "염치도 없다, 정말" "체, 염치가 밥 먹여주나" 요령이는 볼멘 소리로 중얼거렸고 나는 피식 웃어버렸다. 요령이는 그런 나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더니 재촉했다. "어서 말해. 쫓아내고 싶어? 아니면 그냥 넘어가겠어? 빈대를 붙어서 살 더라도 최소한 나를 계속 데리고 있어야 할 네 기분은 확실히 알아두고 싶 어. 그래야 꺼림칙하지 않을 거 같다고" "쫓아내고 싶다면 어쩔건데?" "...글쎄...일단은 나가는 척이라도 해줄까...안약에 두 번 속지는 않을 거 아냐?" 요령이는 고민이라는 듯 턱을 괴며 생각에 잠겼고 나는 다시 웃어버렸다. 뭐가 저리 심각할까. 아직도 내가 자기를 버릴 생각이 없다는 걸 모르고 있을까? 아니면 그냥 나를 떠보는 건가? 나는 일부러 별 거 아니라는 듯 무뚝뚝하게 대답해 주었다. "아직 결정 못했어. 뭐, 나한테는 별 피해가 오지 않았지만 대신 가람이가 크게 다쳤잖아?" "그래서?" "뭐 그래서야. 나중에 좀 더 생각해보고 대답해줄게" "나중에 언제?" "몰라" "나중에 언제?" "모른대두?" 하지만 내가 대답하지 않자 요령이는 짓궂게 웃더니 반드시 대답을 들어 야겠다는 듯 내 팔을 꽉 잡고 달라붙어 날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나중에 언제언제언제언제?" "우와악! 하지마! 아 글쎄 몰라!" 나는 요령이를 떨쳐내기 위해 마구 팔을 흔들었다. 그리고 가람이의 얼굴 과 목에 튄 피를 닦아내던 청도는 우리를 힐끔 보더니 한숨을 푹 쉬면서 물수건을 가람이의 가슴에 던져 버렸다. 철푸덕. "아, 저 놈의 사랑싸움은 도대체 언제까지 봐야 하나. 지겨워 죽겠네, 정 말. 주위 사람이 미소지어 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아니, 도대체 환자를 앞 에 두고도 저러고 싶을까?" "야! 뭐라고!" "뭐, 봄 모꼬지?" 탁, 치익. 콜라의 캔을 뜯자 탄산이 빠져나가는 상쾌한 소리가 들려왔다. 난 콜라를 입으로 가져가며 청도에게 물었다. 모꼬지라고? "응. 이번에 우리 과에서 모꼬지를 간대. 우리도 가야지?" 나와 청도는 지금 승학관 1층의 홀에 있다. 수업이 방금 모두 끝나서 음 료수나 한 잔 마시고 동아리방, 즉 컨테이너로 돌아갈 생각이다. 탁 트인 넓은 홀의 주위에는 쉬는 시간이라서 그런지 수많은 사람들이 가지각색의 옷차림을 자랑하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하여튼, 대학이라는 공간은, 개성이 넘친다니까. 그건 그렇고 모꼬지라. 나는 흥미가 당긴다는 얼굴로 물었다. "모꼬지? 그거 괜찮은데. 그런데 모꼬지가 뭐야?" 청도는 이마를 탁! 치며 어이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모꼬지가 뭔지도 몰라?" "응" "그래? 그러면 엠티라고 하면 알아들으려나?" 아- 엠티! 진작 그렇게 말을 하지 그랬어! 나는 청도의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자식, 진작 그렇게 말을 하지! 엠티! 아, 엠티 좋지! 근데, 모꼬지가 엠티 야?" "어휴, 그것도 몰랐냐 임마. 원래 대학에서는 다 모꼬지라고 그래. 한글 표현이 예쁘다고 즐겨쓴다고. 서클은 동아리, 오티는 새터, 엠티는 모꼬지!" "여하튼, 좋아, 좋아. 그래, 어디로 며칠동안 간다는데?" 청도는 손에 쥐고 있던 스포츠음료를 모조리 쭉 들이키고 캔을 쓰레기통 으로 휙 던졌다. 참으로 무안하게도, 캔은 쓰레기통 근처도 가지 못해버렸 다. '땡그랑'하는 새된 소리와 함께 지나가던 사람 몇이 실없이 '픽'하고 웃 는 것이 우리의 눈에 들어왔다. 쳇. 못 넣을수도 있는거지. 청도는 뭐씹은 얼굴로 캔을 다시 주워서 쓰레기통에 넣고 돌아오며 말했다. "쳇. 내가 고딩때만 해도 별명이 3점 슛 제조기였는데. 어쩌다 이런 비극 이. 여하튼 가는 건 강원도의 작은 호수 옆으로 간다고 하고, 기간은 2박 3 일이라더라" 그래? 왠지 재미있을 것 같은데. 하긴, 1학년 때 엠티같은 것도 한 번쯤 다녀와야지. 3, 4학년 다 되어서 취업전선에 뛰어들면서 그런 데까지 일일 히 쫓아다닐 수야 없는 노릇이잖아. 흠, 왠지 구미에 당기긴 하는데. 하지 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 쉽사리 '그러자'고 대답하지는 못하겠다. 뭐가 마음에 걸리냐고? 물론 요령이와 가람이지. 동아리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우윽, 이게 무슨 냄새야?" 흠, 아까 요령이와 가람이가 뭔가 할 게 있다고 우리의 수업에도 안 따라 왔었는데. 도대체 뭘 하길래 뭐가 타는 냄새가 나는거지? 청도도 내 옆에 서 코 주위로 손바람을 일으키며 눈살을 찌푸렸다. "야, 뭐하냐? 아무리 남자 여자 둘만 있으면 하는 짓이 불장난밖에 없다 지만 이건 너무 뜨겁잖아?" "푸하하하!" 청도의 농담에 나는 실소를 터뜨렸다. 그 때였다.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방안에서 빛이 번쩍 뿜어져 나오더니 쾅! 하는 폭발음이 들렸다. 쾅! 그리 고 요령이가 튀어나와 벽에 부딪혔다. 터엉! 같이 낄낄대며 웃던 청도와 나 는 너무도 갑작스러운 일에 눈이 휘둥그래져 요령이에게로 뛰어갔다. "요령아!" 요령이에게로 뛰어간 우리는 곧 피식 웃어버렸다. 요령이의 얼굴에는 마 치 들불에 콩깍지 구워먹은 것처럼 새카만 검댕이 잔뜩 묻어 있었던 것이 다. 요령이는 우리보다 더 놀란 듯 멍하니 허공만을 바라보다 이윽고 성질 을 벌컥 내며 벌떡 일어서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야! 부적 똑바로 못쓰냐!" 우리도 요령이를 따라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새카만 연기로 뒤 덮여 있었다. 는 재빨리 얼굴을 가리며 몸으로 바람을 뿜어냈다. 쉬리리릭- 공기를 휘감는 소리와 함께 연기들이 빠르게 창 밖으로 걷혀나갔다. 아, 청 도가 놀라지 않을까라는 걱정은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제임스가 나 타난 이후 청도에게 우리에 대해서 대강 설명을 했으니까. 물론 요령이와 가람이가 고양이와 개라는 것은 나중에 따로 설명하기로하고 그저 도술을 좀 익혔다는 식으로 넘어갔다. "쿨럭, 쿨럭, 젠장, 어쨌든 성공했군, 쿨럭!" 가람이의 기침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람이는 요령이처 럼 얼굴에 검댕이 잔뜩 묻은 채 청도의 목검을 세워잡고 연신 마른 기침을 내뱉고 있었다.매운 연기를 그대로 들이마셔서 그런가보다. "우웃! 가람아, 너 얼굴이 새카맣다. 괜찮냐?" "쿨럭, 쿨럭! 난 괜찮, 우...쿨럭쿨럭쿨럭!" 가람이는 격하게 기침을 내뱉더니 심호흡을 몇 번 하면서 간신히 숨을 골 랐다. 청도가 앞으로 한 발 나서서 물었다. "그런데, 내 칼을 가지고 뭘 했었나봐?" 검객은 자신의 칼을 생명처럼 아낀다고 한다. 비록 청도에게 목검이 여럿 있긴 하지만 지금 가람이가 가지고 있는 목검은 그 중에서도 청도가 가장 아끼는 목검이다. 청도는 예의 그 싱긋 웃는 얼굴 속에서도 눈살을 약간 찌푸리고 있었다. 가람이는 청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목검을 몇 번 휘 둘러 추스르더니 칼자루를 청도에게 내밀었다. 그런데, 칼자루에 까만 색으 로 써진 알아보지 못할 문양이 잔뜩 새겨져 있었다. 청도는 칼을 받아서 수직으로 들고 쓱 훑어보더니 물었다. "윽, 이게 뭐야? 칼에 이상한 글자가 잔뜩 새겨져 있잖아" "그래. 아까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말했을텐데, 칼을 좀 손 봐 주겠다고" "그렇긴 하지만..." 청도는 한숨을 푹 쉬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이건 너무 무늬가 요란해. 멋이 없잖아..." 가람이는 작게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물론 네가 아끼던 칼이 지저분해져서 기분이 좀 나쁘겠지만, 너무 마음 상해하진 마라. 그 칼은 이제 강철처럼 단단해졌어. 게다가 칼 자체에 영기 도 상당히 심어 놓아서 이제 어느 정도의 영적 공격은 벨 수 있을 거야. 전처럼 종이장만큼 얇은 기막에 잡혀 있지 않아도 된다는 거지. 그리고..." 요령이가 팔을 쫙- 벌려서 원을 크게 그리며 갑자기 끼어들었다. "이마-안큼 좋아졌어, 이마-안큼! 가람이가 말한 게 다가 아냐, 집중만 하 면 뭐 별로 두껍진 않지만 호신막도 칠 수 있고, '반짝반짝'이라고 말하면 칼에서 빛도 나! 정말 대단한지 않니?" 가람이와 요령이의 말에 청도는 미심쩍은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요 령이의 마지막 말엔 인상까지 조금 썼다. "반짝반짝-?" "못 믿겠으면 칼에 정신을 집중하면서 '반짝반짝'이라고 말해봐. 깜찍하게, 나처럼. 자, 반짝반짝-" "....반짝반짝" 청도는 주먹까지 살짝 뻗으며 귀엽게 '반짝반짝!'을 외치는 요령이를 애써 외면하며 조용히 주문을 말했다. 그러자 청도의 칼에서 너무 환하지 않은, 하지만 주위를 밝히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왔 다. 그리고 청도의 얼굴이 웃음으로 가득해졌다. 청도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와! 이거 정말 신기한데! 정말 고마워!" "이제서야 웃는구나" 가람이도 청도의 웃는 모습에 기분이 좋은지 슬쩍 웃었다. "응, 이제 해가 져도 불빛 없는 곳에서 수련을 할 수 있겠어" "겨우 그게 고마운거야? 그건 아주 작은 기능에 불과하다고! 이건 최첨단 영적 주술의..." "아냐. 다른 것도 너무 고마워. 요령아. 그런 의미로 오늘은 내가 한방 크 게 쏠게" 청도는 엄지 손가락을 어깨 뒤로 넘겨 바깥쪽을 가리키며 씩 웃었다. "와! 맛있는 걸로 사 줘! 얼른 가자!" 요령이는 환성을 지르며 바깥으로 당장이라도 뛰어 나갈듯한 기세였다. 물론 그걸 말리는 것은 내 몫이다. 난 요령이의 뒷덜미를 잡아채서 끌어당 기며 말했다. "내 생각엔, 밖에 나가서 험한 꼴 안 보려면 세수는 하는 게 좋을 거 같 애" "왜? 나 아까 세수 했어! 내 백옥같은 피부에 뭘 세수를 몇 번씩 하니?" "그래? 그럼 세면대로 가서 거울 보고, 백옥이 무슨 뜻이었나를 다시 생 각해봐. 얼른! 가람아, 너도 세수 좀 하는게 좋겠다" "쳇, 배고파 죽겠는데" 요령이는 툴툴거리며 세면대로 향했고, 곧 요령이의 목소리가 컨테이너를 흔들었다. "꺅! 이게 뭐야?" 한참 동안의 수선이 있은 뒤, 요령이는 수건으로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 아내며 화장실에서 세면실에서 나왔다. 얼마나 얼굴을 빡빡 문질러 대었으 면 얼굴을 닦고 있는 요령이의 팔이 작게 떨리고 있다. 요령이는 지긋지긋 하다는 듯 말했다. ?우우, 도대체 얼굴에 묻은게 뭐길래 이 정도로 안 지워지는 거야, 짜증 나게. 힘들어 죽는 줄 알았네? 요령이의 목소리는 수건에 가로막혀 웅얼거림으로 바뀌었지만 무슨 말인 지 대강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그러고 보면 요령이도 아닌 척 하면서 얼 굴에 알게 모르게 꽤나 신경을 쓴단 말이야. 요령이가 화장실에서 나오는 것을 본 가람이는 세수를 하기 위해 몸을 부스스 일으켰다. 곧 촤악- 하고 가슴을 치는 경쾌한 물줄기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가람이도 요령이마냥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화장실에서 나왔 다. 그리고 나는 가람이를 바라보며 눈짓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할 이야기 가 있으니 어서 와서 앉으라는 뜻이다. 가람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잡고 앉았고, 난 가람이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이윽고 입을 열 었다. ?자, 들어봐. 모두에게 할 이야기가 있어? 가람이와 요령이는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주위를 휙 둘러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 과에서 엠티를 가기로 했대? ?우와! 정말?? 요령이는 내 말과 동시에 감탄사를 내뱉으며 흥미진진한 목소리로 물었 다. ?근데 그게 뭐야?? ...아까 내가 ?모꼬지가 뭔데??라고 물었을 때의 청도의 기분이 대강 짐 작이 간다. 나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요령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뭔지도 모르면서 뭘 그리 좋아해?? ?그냥. 재밌잖아. 그런데 그 엠티라는 게 뭔데?? 청도가 나 대신 짧게 설명했다. ?응, 과나 동아리같은 어떤 특정 단체 안의 사람들이 서로 친해지고 또 서로에 대해 많이 알기 위해서 2박 3일동안 어우러지는 자리를 엠티라고 불러. 뭐, 쉽게 말하면, 그냥 놀러가는 자리라고 생각하면 될거야? ?그렇구나? 청도의 설명에 요령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청도는 요령이의 그 모 습을 바라보다가 난처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런데...문제가 좀 있을 거 같아? ?문제라니?? 요령이는 의아함이 담긴 듯한 눈빛으로 청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청도 는 요령이에게 꽤나 미안한 듯 머리를 벅벅 긁으며 대답했다. ?내가 방금 말했잖아, 어느 단체 안의 사람들끼리 친목을 도모해서 가는 거라고. 그러니까 너와 가람이는 못 가겠는데...? 내가 엠티, 즉 모꼬지 이야길를 처음 듣자마자 마음에 걸렸던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요령이와 가람이가 과연 우리와 함께 모꼬지를 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 타 과나 타 학교의 학생들도 함께 갈 수 있냐고 주위 사람들에게 은근슬쩍 물어보았지만 대부분 된다, 혹은 안 된다라고 확실히 대답을 해 주지 못했고, 결국 할 수 없이 나와 청도는 이 문제의 답을 듣 기 위해 과학생회까지 직접 찾아가서 가부의 여부를 물어보았다. ?죄송합니다. 안 되겠는데요. 이게 과 사람들끼리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 해서 가자는 거지 그냥 원칙도 없이 마구잡이로 놀러가자는 게 아니잖습니 까. 만약 따라가고 싶어하는 사람을 누구든지 끼워준다면 여행사에서 모집 하는 여행 패키지와 다른 점이 뭐겠습니까?? 과학생회의 대답이었다. ?그래? 흠...? 요령이는 조금 실망했다는 듯 눈을 내리깔며 생각에 잠겼다. 뭐 가람이야 애초에 별로 관심이 없었는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그런데 문득 요령 이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더니 나를 쳐다보았다. 그 눈에 경악이 흐르고 있었다. ?그, 그럼 나랑 가람이랑 둘만 남는거 아냐?? 가람이는 요령이의 말을 듣자 미처 그걸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한 쪽 눈 썹을 일그러뜨리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나는 요령이의 말에 천천 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게 되었지...어쩌겠냐? ?으으윽!? 요령이는 벌레 씹은 표정을 하며 가람이를 힐끗 바라보았다. 가람이는 요 령이가 자신을 쳐다보자 송곳니를 드러내며 요령이를 노려보았고, 그에 따 라 요령이의 벌레 씹은 표정은 순식간에 죽사발 뒤집어 쓴 표정으로 바뀌 었다. 요령이는 나를 바라보며 사정하듯 말했다. ?안돼! 나도 데려가! 2박 3일동안 싸움질할 걸 생각하면 벌써부터 힘들 어서 죽어버릴 것 같아. 제발! 저런 악마같은 녀석의 손아귀에 나를 혼자 놔두면 안 돼! 저 녀석은 아마 너희 둘이 엠티를 떠나자마자 나를 기습적 으로 공격해서 죽이려고 들거야! 나는 격렬히 저항하지만 기습으로 인한 충격이 너무나 커서 결국 원통하게도 가람이를 이겨내지 못한 채 가람이의 영기에 까맣게 타서 죽어버릴거야, 그러면 너는 아마 돌아온 뒤 까맣게 타 버린 나의 시체를 안고 통곡을 하겠지? 그리고 좋은 명당 자리를 구해서. ..? 어절씨구리. 아주 소설을 써라. 소설을 써. 나는 한숨을 푹 쉬며 요령이의 입을 손바닥으로 턱 막으며 말했다. ?가람아, 옆에서 이야기 다 들었지? 못 데려가게 됐어. 미안? ?뭐, 괜찮다. 그 동안 어디 가까운 산 속에 들어가서 수련이라도 하지 뭐? 가람이는 별로 괘념치 않는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고 어느 새 내 손을 치 워버린 요령이가 기쁜 듯 가람이에게 말했다. ?그래? 2박 3일동안 산 속에 들어가 있겠다고?? ?그렇다? ?휴, 십년 감수했네! 정말 잘 생각했어! 아마 2박 3일 동안 여기 있는다 면 너나 나나 72시간동안 죽도록 실전감각만 익혀야 할거야. 그런 건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했는데! 그럼 이제 난 혼자서 뭘 하고 놀지나 천천히 고 민해 볼까...?? 요령이는 혼자 남는 것이 뭐가 좋은지 턱을 양손으로 괸 채 히죽히죽 웃 으며 상상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나는 어이없이 그런 요령이를 바 라보았다. 이런, 혹시 모꼬지에 데려가지 못해서 요령이가 삐치거나 화를 내거나하면 어쩌나하는 생각은 완전히 기우였군. 그 때 요령이가 문득 무 언가가 생각났는지 갑자기 고개를 들어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밥값 꼭 놓고 가!? ?......알았어? 나는 한숨을 푹 쉬며 대답했다. 요령이는 내 대답을 듣자마자 다시 생글 생글 웃으며 ?즐겁고 유일한 2박 3일 보내는 방법?에 대한 즐거운 고민 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청도는 나를 향해 머쓱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둥근 잔디밭을 방형으로 가르는 길들의 한가운데에 비학상은 놓여 있다. 날아오르는 학의 모습을 청동으로 빚어 놓은 그 커다랗고도 멋진 조형물은 외부에 사진홍보라도 할라치면 꼭 그 모습이 비치는 우리 학교의 상징물이 였고 동시에 학생들 사이에서 통하는 가장 보편적인 약속장소였다. 사람들 은 모임이나 만남 약속 같은 것을 잡아야 할 때 약속장소를 고민하지 않고 의례 ?비학상 앞으로 몇 시까지?라는 말을 꺼냈다. 비학상은 그만큼 교 내에서 유명한 조형물이었던 것이다. 우아한 목을 하늘을 향해 길게 뻗은 채 커다란 두 날개를 부드럽게 치는 형상 그대로 쇳물을 뒤집어쓰고 굳어버린 초록빛 학 아래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들 역사학과 모꼬지를 떠나려고 모인 사람들일 것이다. 사람들의 모습은 가지각색이었다. 큰 배낭을 바리바리 이고 지고 멘 사람, 묵직해 보이는 망치가방을 내려놓은 채 그 위에 주저앉아서 잠시 어깨와 다리를 쉬고 있는 사람, 위아래로 구멍 뚫리고 소매 달린 자루를 뒤집어 쓴 것같은 헐렁한 힙합차림을 한 채 구부정하게 서 있는 사람, 간 부인지 양복을 깔끔하게 빼 입은채로 담배를 물고 있는 사람, 그리고 영화 속이 아니면 절대로 볼 수 없을 것 같은 중국옷을 입고 있는 소년까지... 응? 저 녀석은? 난 청도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왜 그러는데? 할 말 있으면 그냥 말로 해!? ?야, 저 녀석, 우리 과였어?? 나는 손가락으로 어리게 생긴 중국풍 청년을 가리키며 속삭였고 청도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모르겠는데? 그런가 보지. 그런데 왜 우리는 한 번도 못 봤지?? ??평범한 대학생의 어두운 그림자?쪽으로 유난히 기울어버린 거 아닐 까?? 청도에게 농담처럼 말한 뒤 스스로도 우스워서 피식 웃었다. 전형적인 대 학생은 자유롭다. 무엇이든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고 시간도 자유롭게 쓸 수 있다. 이것이 평범한 대학생의 밝은 모습이다. 반면 그렇기에 전형적 인 대학생은 술을 밤새도록 퍼마신 뒤 술취한 개가 되서 거리를 비틀거릴 수도, 다음날 술병이 나서 드러누워버리는 바람에 수업을 못 들어갈 수도, 그런 식으로 한 수업 두 수업씩 차곡차곡 빠져나가다 보면 반에서 진행하 는 진도를 따라잡지 못할 수도, 진도가 떨어지니까 수업 내용을 전혀 이해 하지 못하게 될 수도, 교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으니까 짜증이 나서 아예 수업을 안 들어가 버릴 수도, 수업을 안 들어가다 보니까 F를 맞을수 도, F를 맞고 학사경고를 맞을 수, 그렇게 학사경고 한 두 번 맞고 제적 피해서 군대로 날아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평범한 대학생의 어 두운 그림자?이다. ?하하!? 청도는 내 농담에 짧게 웃더니 정색을 하고는 말했다. ?하지만 저 녀석은 도저히 그런 녀석으로는 보이지 않는걸. 오히려 저 녀석은, 그렇게 풀려버린 삶을 경멸하는 완벽주의자 쪽에 더 가까운 것 같 은데? 분명히 저 중국풍 청년의 생김새나 태도를 보면 그런 이미지가 보이긴 한 다. 굵고 곧게 뻗은 눈썹에 크지만 날카로운 눈, 그리고 역시 곧은 선의 콧 날과 꾹 다문 한일자의 입술까지. 턱선은 갸름하면서도 가늘고 날카롭게 빠져있다. 굳게 다물고 있는 녀석의 입이 웃음기를 띄는 모습은 단 한 번 도 본 적이 없다. 만약 주위 사람들이 첫눈에 느낄 수 있고 어떤 느낌이라 고 정의를 내릴 수 있는 분위기가 사람마다 몸 주위에 감돈다면, 난 저 녀 석의 주위에는 냉기가 흐른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난 저 녀석을 조 금 더 관찰해 보았다. 녀석은 무얼 그리 생각하는지 하늘에 느릿하게 떠가 는 구름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청도는 낮게 중얼거렸다. ?옆에 있던 두 녀석은 어디 갔을까?? ?응?? 그러고 보니 저 녀석과 함께 다니던 앞머리칼이 살짝 눈을 덮을 정도로 길던 흑발의 남자와 역시 새까맣고 윤기 흐르는 머리칼을 허리까지 늘어뜨 린 흑발의 여자가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간 거지? 혹시 요령이와 가람이 처럼 그 녀석들도 우리학교 학생이 아니라서 모꼬지를 못 따라가는 걸까? 그렇다면 함께 다니던 동료들까지도 떼어놓고 저 녀석이 모꼬지를 가는 이 유는 뭘까? 설마 나와 청도처럼 단순히 친목도모를 쌓기 위해? 저 녀석이 친목도모를 쌓기 위해 모꼬지를 간다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설마 그럴리 가. 하지만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의문점은 끊임없이 뭉게뭉게 피어났지만 어느 것에도 확실한 대답을 할 수는 없었다. ?모르겠는걸? 생각은 많았지만 결국 나는 청도의 물음에 모르겠노라고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난 슬쩍 청도의 등을 보았다. 청도는 등에 이번에 요령이와 가람이 가 영적 무기로 개조해 놓았다는 날렵하게 생긴 목검을 천으로 된 칼집에 넣어서 메고 있었다. ?그 목검도 가지고 가려고? 아서라, 다른 사람들한테 위화감 조성한다? ?응, 그럴 것 같긴 한데, 10년 동안이나 그림자한테 시달리다 보니까 이 제 잘 때 목검이 주위에 없으면 왠지 허전해. 뭐, 특별히 칼집에서 칼을 꺼 낼 일은 없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 나는 청도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왠지는 잘 모르겠지만 중국풍 청년의 얼 굴을 보는 순간 청도가 목검을 가져온 것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내 자신에게 되물었다.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이상하게 신 경이 날카로워진 것 같아. 난 비학상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우리를 태 우고 갈 스쿨버스가 잔디밭 주위를 천천히 돌며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잡은 숙소는 평범한 엠티촌의 민박집이었다. 우리는 안에 들어가 자마자 짐을 내려 한구석에 몰아넣은 뒤 방을 청소했다. 저번 사람들이 묵 기 전에 치워서인지 먼지는 그렇게 많지 않았고, 그래서 청소는 수월했다. 청소가 끝나자 배가 고파졌고 우리는 재빨리 가져온 버너와 휴대용 가스레 인지 등을 이용해 밥을 짓기 시작했다. 물론 밥을 짓는 것은 새내기들의 담당이다. 새내기들은 쌀을 씻는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른다, 물을 끓인 다, 야채를 자른다, 계란을 푼다하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곳 저곳에서 깔 깔거리는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함께 밥을 지으며 버스 안에서 조금씩 걷혀간 서먹서먹함이 더욱 빠르게 사라지는 것이다. 문득 중국풍 청년이 생각난 나는 방을 두리번거리며 녀석을 찾아보았다. 녀석은 어느새 어디로 나가 있는지 보이질 않았다. 우리와 어울리기가 싫은 건가, 아니면 밥을 짓 기가 귀찮은 건가? 비록 밥은 질고 탄 삼층밥에 찌개는 매웠고 계란말이는 싱거웠지만 식사는 유쾌했다. 선배들은 분위기를 잡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 는 듯 계속 농담이나 말장난으로 우리를 웃기곤 했다. 이윽고 식사가 끝나 자, 스무 명 남짓의 사람들은 안줏거리와 소주병을 돌리며 앞에 잔을 하나 씩 잡고 둥그렇게 모여 앉았다. 조금씩 술잔이 돌면서 분위기는 점점 달뜨 기 시작했고, 버스 안에서부터 말을 조금씩 나누던 사람들은 함께 식사를 준비하며 서로 웃는 사이가 되었고 이젠 거리낌없이 낄낄대며 서로 툭툭 쳐댈 정도로 스스럼이 없어졌다. 그리고 이윽고 시작된 자기소개시간. ?자, 다음은 새내기 새로 배움터에서부터 시작해서 해맞이까지, 단 한 번 도 안 나타나다가 이제서야 느릿느릿 나타난 뉴 페이스! 박영준-? ?와-와!? 사람들의 작은 환호와 박수소리. ?안녕하세요, 역사학과 새내기 박영준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을 처음 만나 게 되서 반갑습니다. 앞으로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 다? 나는 고개를 작게 숙이며 짧게 인사를 마쳤다. 아, 부끄럽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나를 주목하고 있는 이 느낌. 내게 꽂히는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등이 근질근질해졌다. 참 무지하게 쑥스럽다. 얼른 앉아버리고 싶다. 하지 만 사람들이 나를 그냥 앉힐 리 없다. 모두가 거쳐간 인사 뒤에는 모두가 거쳐간 개인기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아, 죽겠구만! ?노래 해, 춤도 춰, 웃겨 봐, 노래해, 춤도 춰, 웃겨 봐, 노래 해, 춤도...? 곧 사람들의 독촉의 노래가 시작되기 시작했다. 아, 하지만 도대체 뭘 하 란 말이냐! 뭐, 가장 보편적인 건 노래지만, 평소에는 그렇게 잘 흥얼거리 던 노래들이 갑작스레 떠올리려고 해서 그런지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머릿속을 더듬거리며 노래를 떠올리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한박자 쉬고, 두박자 쉬고, 세박자 마저 쉬고 하나 둘 셋 넷!? 허억! 안 돼! 나는 당황해서 컥컥거렸다. 노래는 미처 꺼내지 못했을 뿐더 러 아예 떠올리지조차 못했다! 게다가 그나마 실마리가 잡히려던 머릿속이 방금 전의 독촉으로 인해 하얗게 표백되어 버렸다. 젠장! 내 타는 속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지, 첫번째 독촉이 끝나자마자 잠시도 쉬지 않고 두번째 독 촉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어쩌면 당황해서 노래를 못 부르게 하려고 일부 러 저렇게 몰아치려는 것일지도 모르지. 아악, 이렇게 딴 생각을 할 시간이 있으면 어서 노래나 생각하자고! 분명 두번째 독촉의 노래는... ?에이- 뭐야!? ?노래 해! 노래 해!? ?빼지 말고 얼른!? ?자, 다같이, 이번- 판은- 나가립니다- 다음판을 기대하세요- 다음 판도 나가리면- 소주 한 병 원샷입니다! 아아아아아앗싸! 한박자...? 이, 이런 젠장...사람의 보상심리라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가. 내 앞 차례에 서, 나와 똑같이 당황해서 노래를 못 부르고 결국 물잔용 종이컵으로 소주 한 컵(재미있게 즐기려고 하는 거지 술고문을 하려고 하는게 아니기 때문 에 실제로 소주 한 병을 먹이지는 않았다)을 원샷해버린 녀석들은 이제 주 동자로 나서서 나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으윽...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 다. ?세 박자, 마저 쉬고, 하나, 둘...? ?부, 부를게요! 부를게요! 윤도현 밴드의 ?너를 보내고!?? 마지막 순간에 간신히 노래 이름을 꺼냈다. 정말 다행이었다. 그런데, 노 래 이름을 말하고 보니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졌다. 빌어먹게도 난 이 노래 의 가사를 모르는 것이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래 제목을 들은 사람들은 작게 환호성을 질렀다. 분위기를 띄울 수 있는 노래이기에 그럴 것이리라. ?하나둘 셋넷셋넷 둘둘 셋넷셋넷 한둘셋넷- 둘둘셋넷- 하나, 둘, 셋, 넷!? ?어, 저, 그러니까...? ?에라 안되겠다. 술이 안 들어가서 그래. 일단 마시고 보자. 마셔라! 마셔 라!? 선배는 결국 단정짓듯 내뱉었다. 에휴. 뭐, 이렇게 된 이상 할 수 없다. 이 왕지사 재밌게 놀자고 한 거, 그냥 한 컵 쭉 들이키고 다시 제대로 해 주 지! 뭐 나도 어차피 술이라면 남들보다 잘 마시지는 못해도 최소한 못 마 시지는 않는다고 자부하는 녀석이니까! 한 병도 원샷할 수 있는데 한 컵쯤 이야! 나는 컵을 척 들어서 술을 마시라고 한 선배에게 들이밀었고, 선배는 웃으며 잔에 소주를 꾹꾹 눌러 채웠다. ?쭉 마시고 제대로 하겠습니다!? 컵을 입에 들이대고 그대로 하늘로 치켜들었다. 차가운 소주가 그대로 입 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벌컥벌컥- 크아아! 숨도 안 쉬고 한 컵을 몽땅 다 들이킨 나는 긴 숨을 푹 뿜었다. 사실 소주가 그렇게 만만한 술은 아닌 것 이다. 나는 후우, 후우 하는 심호흡으로 열기를 내뿜으며 안줏거리로 푸짐 하게 담아 놓은 불고기를 한 점 입에 넣었다. 취기가 조금씩 솟고 있었다. ?다시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제대로! 크라잉 넛의 ?밤이 깊었네? 부르 겠습니다!? ?하나둘 셋넷셋넷 둘둘 셋넷셋넷 한둘셋넷- 둘둘셋넷- 하나, 둘, 셋, 넷!? ?밤이 깊었네- 방황하며 춤을 추는 불빛들- 이 밤에 취해 흔들리고 있 네요...? 나는 노래를 부르고 사람들의 박수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 청도가 내게 술병 주둥이를 들이밀었다. ?자, 한 잔 받어? ?그래? 술잔을 기울이며 청도가 중얼거렸다. ?노래 잘 하던데?? ?잘하긴 개뿔을? ?아냐. 돼지들이 멱 따는 것보다 훨씬 잘하던 걸? 청도는 말을 마치고 짖궂은 미소를 띄었고 정말로 내 노래솜씨를 칭찬해 주는 것으로 착각했던 나는 장난스럽게 주먹을 쥐어서 녀석의 눈 앞에 흔 들어 보였다. ?그건 그렇고 저 녀석은 도대체 무슨 노래를 부를까? 난 그게 제일 궁금 해? 청도는 구석자리에서 지루한 듯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떨군 중국풍 청년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러고보니 다른 새내기들과는 이미 버스 안에서 비 공식적으로 통성명을 했고 버스 안에서 서로를 소개할 기회가 없었더라도 방에 들어온 이후에 다시 이름을 주고받았는데 유독 저 녀석만 아직 이름 을 가르쳐주지 않고 있다. ?아니, 무슨 노래를 부를지 고민하는 것보다, 노래를 하라고 시키면 부르 기는 할까?? 나는 별로 자신없는 목소리로 말햇고 청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흠, 듣고 보니 네 말이 맞군. 안 부를거야. 하지만 또 혹시 알아? 저 녀 석이 의외로 망가지는 모습을 보게 될지. 난 꼭 저 녀석의 노래를 한 번 들어봤으면 하는, 그런 간절한 소망이 있는데 말야? 청도는 새우깡을 하나 씹어넘겼다. 그 눈빛에 약간의 기대감이 배어 나오 고 있었다. 아쉽게도 청도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중국풍 청년은 노래는 커녕 자기소개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단지 입을 꾹 다문 채로 자신의 입을 가리켰다가 손을 저으며 중국말로 짧게 뭐라고 말하기를 반복했다. 아마 우리말을 못 한다는 뜻인 것 같았다. 한 선배의 불평이 들렸다. ?아니, 어울리려고 왔으면 같이 재밌게 놀던지, 아니면 따라오질 말던지. 술도 안 마시겠다, 노래도 못 하겠다. 도대체 뭐야? 아니, 저럴 거면서 왜 따라오겠다고 한 거야?? 선배, 저도 그게 의문입니다. 캄캄한 어둠 속으로 이리저리 아무렇게나 엎어져 있는 사람들의 윤곽이 파르스름하게 눈에 들어왔다. 나는 무거운 눈을 비비며 몸을 부스스 일으 켰다. 젠장, 한창 잘 자고 있었는데 도대체 왜 잠을 깬 건지. 나는 무의식 중으로 목을 쓰다듬다가 그제서야 내가 목이 말라서 잠에서 깼음을 떠올렸 다. 젠장, 술 좀 작작 마실걸. 나는 마실 것을 찾아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힘이 풀려버린 다리가 휘청이거리며 꺾였다. 나는 재빨리 다리를 추스렸지 만 그 과정에서 누군가의 발을 밟고 말았다. ?크아악!? 발바닥은 입이 달렸는지 청도의 목소리를 흉내내서 고함쳤고 덕분에 나는 꼭 청도를 밟은 것처럼 미안해졌다. 나는 얼른 발을 떼며 밖으로 나갔다. 벌써 이틀째 날의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어제 가볍게 술을 마시고 재미있 게 놀았던 우리는 둘째 날 밤이 되자 중국풍 청년을 제외한 전원이 어제와 는 다른, 그야말로 ?먹고 죽어버리자?는 각오로 술을 마셔대었다. 그리고 결국 전원이 뻗어 버렸다. 아니, 사실을 말하자면 전원이 뻗어 버렸는지 어쨌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도 술자리 중간에 그대로 옆으로 자빠져 잠들 어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천천히 문 밖의 수돗가를 향해 힘없이 비틀거리 는 걸음을 내딛었다. 비록 몸에 힘은 잘 들어가지 않았지만 의외로 머리는 그렇게 아프지 않았다. 나의 숙취가 그렇게 심하지 않은 까닭은 아마도 첫 째, 그 와중에서도 술을 자제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일 것 이고, 둘째, 술자리의 끝까지 가지 않고 잠을 잤기 때문일 것이며, 셋째, 술 에 취한 채로 사지를 붙들린 채 호수에 한 번 던져지는 바람에 술이 한번 확 깼었기 때문일 것이다. 젠장. 그 생각이 떠오르자 왠지 모르게 입 안에 미소가 슬며시 지어졌다. 나를 호수에 처박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던 청도 는 곧바로 내 손에 붙들려서 나와 똑같은 꼴로 호수에 처박혔다. 하하. 나 는 물을 찾아들고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손에 느껴지는 물통의 온도는 미 지근했지만 목이 말라서인지, 아니면 몸에 남은 술기운 때문인지 물은 마 치 내 몸을 씻어 내리듯 시원하게 몸 속 구석구석을 훑었다. 후아- 시원하 다! 이제 다시 들어가서 잠을 자 볼까. 나는 방으로 다시 들어가기 위해 발 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비록 오래 잠을 자지는 못했지만 술기운 때문에 평 소보다 잠이 깊이 들었던 탓인지 머릿 속은 깨끗했고 졸리지도 않았다. 결 국 나는 잠이나 자러 가야겠다는 생각을 고쳐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 곳의 야경이나 구경해볼까? 나는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펼쳐진 호수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깊은 산중의 조용한 밤 속에 서 백색으로 파리하게 빛나는 달과 유리알처럼 반짝이는 수만개의 별조각 을 품은 호수는 병풍처럼 펼쳐진 산에 둘러싸여 작게 출렁이고 있었다. 가 끔씩 바람소리와 함께 주위의 아카시아 잎들이 ?우수수-? 하고 파도소리 를 내었다. 어디선가 아련히 알지 못할 새소리가 쥐어짜는 듯 구슬프게 울 었다. 가끔식 개구리소리도 가까이 다가왔다 멀어지곤 했다. 뇌리에 가득 담기는 참으로 몽환적이고도 환상적인 광경이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 다 내뱉었다. 후-우, 하-아. 차가운 밤 공기가 머릿속까지 파고들어 시원한 기분을 만들어주었다. 나는 천천히 호수 쪽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산길을 타고 내려가서 이윽고 호숫가에 도착한 나는 잠시 호숫가를 걸으며 호수를 바라보았다. 달그락거리는 자갈들의 부딪히는 소리가 기분좋게 호숫가를 울렸다. 쪼그려 앉아서 호수에 손을 담그었다. 물은 시원했다. 손을 한참 담그고 있다보니 문득 얼굴이 씻고 싶어졌다. 나는 손과 얼굴을 호숫물로 천천히 씻었다. 물의 깨끗한 느낌이 기분을 점점 상쾌하게 만들어주고 있 었다. 뒤에서 천천히 자갈이 달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무의식중에 고 개를 돌렸다. 중국풍 청년이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경계 의 눈빛을 띄며 몸을 일으켰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저 녀석이 내게 무슨 해코지를 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저 녀석만 보면 긴장되곤 한다. 그것은 아마도, 학교에서 가끔씩 마주치기라도 하면 이상스럽게 나를 훑어 보며 자신과 함께 다니는 두 사람에게 무어라 속삭이는 수상쩍은 그의 태 도가 내 무의식중에 남아 있기 때문이리라. 아니, 어쩌면 단지 저 차가운 녀석의 분위기에 위압감을 느끼는 걸지도. 녀석은 천천히 자갈밭을 가로질 러 호수를 바라보며 내 옆에 섰다. 나는 짧고 딱딱하게 인사했다. ?안녕? 녀석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까닥이더니 문득 주위를 돌아보았다. 나도 녀석을 따라 주위를 돌아보았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녀석은 이윽고 안심한 듯 미소지었다. -이 빌어먹을 바보놀음을 따라온 것도 다 이런 기회가 있을까봐 따라온 것이었지. 지겨워 죽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실패하지는 않았으니 이틀 밤 을 꼬박 새우며 기다린 보람이 있군. 잘됐군, 아주 잘 됐어. ?뭐?? -반갑다. 나는 유천이라고 한다. 황제 헌원의 직계손이지. 나는 유천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중국풍 청년의 말을 들으며 경악에 휩싸 여 버렸다. 이 녀석이 누구의 후손인지, 황제의 후손인지, 나랏님의 후손인 지, 아니면 머슴의 후손인지는 나로서는 알고 싶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나 와 상관도 없다. 내가 경악에 휩싸인 까닭은 이 녀석이 나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는 것, 그리고...이 녀석이 지금 마음 속으로 말을 하고 있다는 것 때 문이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서, 설마 너도 능력자냐?? -예의 없는 것. 역시 천한 것들은 어쩔 수 없다니까. 네가 나한테 뭐라고 지껄이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너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그러니 마음으 로 말하도록. 하지만 나는 마음으로 말할 줄 모르는걸. 나는 멀뚱하게 녀석을 바라보았 고, 유천이라는 그 청년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너, 지금 나를 무시하는 거냐...! 이, 이런 제길.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저 녀석은 내 태도를 넘겨짚으며 표정을 점점 험상궂게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위협감을 느낀 나는 잠시 생 각한 뒤 재빨리 입을 가리키고 가슴을 가리킨 뒤 손가락으로 가위표를 그 리고 가슴을 탕탕 쳤다. 마음으로 말을 할 수 없어서 나도 답답하다는 뜻 이었다. 유천은 멀뚱히 내가 하는 짓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의 험악한 표 정은 어느 사이에 풀려 있었다. 이윽고 몇 번을 반복하자 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서야 이해했나보군. 나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내 입에 가득 돌았던 만족스러운 웃음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유천이 나를 경멸적인 눈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흠. 그런 기본적인 것도 할 수 없다니. 너같은 놈에게 주어진 풍사라는 자리가 아깝다. ?이런 거 할 줄 알면 누가 상주냐?? 어차피 알아듣지도 못할 테지만 그래도 나는 토를 달고야 말았다. 저 녀 석의 몸 주위에서 흐르는 사람을 무시하는 저 태도, 정말이지 마음에 안 든다. -무어라고 중얼거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시끄러우니 입은 다물도록 하지? 어쨌든 마음으로 말을 못한다니, 그렇다면 어차피 의사소통도 힘들 테니 본론만 말하지. 나를 세 발 까마귀의 패로 안내해라. ?왜??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이렇게 되묻고 말았다. 아니, 유 천 이 녀석은 도대체 어떤 녀석인데 세 발 까마귀의 패가 무엇인지, 그리 고 내가 풍사인지를 알고 있는거지? 그리고 세 발 까마귀의 패로 안내하라 고 하는 이유는 또 뭐야? 내가 우리말로 ?왜??라고 묻자 유천은 잠시 나 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했다. -세 발 까마귀의 패로 안내하라고 했다. 아마 녀석은 내가 ?뭐??라고 되물은 줄 알고 있는 모양이다. 휴. 유학생 이면 기본적인 의사소통은 되야 될 거 아냐? 도대체 답답해서 학교는 어떻 게 다니는거고 수업은 또 어떻게 알아듣는 거지? 아 참,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이 항상 같이 다니는 흑발의 청년이 우리말을 능숙하게 할 줄 알지? 하지만 그렇게 일일히 통역을 거치면 불편하지 않을까? 나는 이런저런 생 각을 접어두며 다시 유천에게 짧게 물었다. ?와이?? 아무리 비록 우리나라의 대학으로 온 것이라고 해도 명색이 유학까지 온 놈이라면 이런 유치원생도 알 영어 정도는 알아듣겠지. 내 말에 황자는 슬 쩍 웃음 짓더니 대답했다. -내가 가지려고. 이번에는 질문을 살짝 바꾸었다. "왓?" -좋아. 이럴 시간은 없지만 어차피 너 같은 놈 상대하면서 우리의 정체를 숨길 생각도 없고, 또 너같은 하찮은 녀석에게 우리의 정체를 숨겨야 할 필요도 못 느끼니 지금부터 내 정당성을 설명해서 정정당당히 너에게서 세 발 까마귀의 패를 접수하도록 하지. 나는 황제교의 소교주이자 황제 헌원 의 직계자손인 후황자 유천라고 한다. 우리 황제교는 황제 헌원을 숭배하 고, 황제가 이끄는 영광된 유교질서로 기틀이 잡힌 새 나라를 세우려고 하 지. 이미 황제의 권위를 따르는 신도들은 열성적인 자들만 백만 이상이다. 우리의 교세는 날이 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고 있고 그에 따라 우리 교단의 힘 역시 점점 더 막강해지고 있지. 우리의 교세가 커진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 줄 아느냐? 그것은 바로 우리가 황제의 깃발아래 뭉친 새 나 라를 세울 수 있는 날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제 대비의 때가 왔고, 우리 황제교는 교세를 확장시켜 나가는 것에 아울러 황제의 나 라를 천천히 준비해 나가야 한다. 우리 교단에서는 비록 황제의 나라가 훨 씬 후의 미래에 세워진다고 해도, 그 날이 조금이라도 더 빨라질 수 있게 교세가 상당히 커진 이제부터 조금씩 행동으로 들어가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황제의 나라를 대비하는 데에는 여러가지 일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이 바로 황제에게 대항한 나라인 조 선에 대해 정통성 을 확립하는 일이다. 옛날 헌원 황제가 치우와 맞상대했 을때, 우리는 치우를 완전히 쓰러뜨리지 못했다. 아니, 일각에서는 헌원 황 제가 패배했다는 소리마저 나오고 있지. 만약 헌원 황제가 이기지 못했거 나 아예 졌다면, 그것은 황제의 정통성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세상의 왕 이요 하늘의 아들인 황제가 이기지 못하는 상대가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되 는 것이다. 그래서 황제교는 정통성을 위해 삼사의 패를 모으고 있다. 삼사 의 패는 황제의 후손이 치우제의 후손을 꺾었다는 증거가 될 것이며 수 천 년을 이어져 내려온 싸움이 결국 어느 쪽으로 결판이 났는지를 증언해 줄 증인이 될 것이다. 물론 치우의 상징을 찾는다면 더욱 좋겠지. 하지만 현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조선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물건은 우리가 파악하기 로는 오직 삼사의 패뿐이다. 그러니 우리가 삼사의 패를 가져야 할 수 밖 에. 뿐만 아니라, 우리 황제교를 창립하시고 강화발전 시켜오신 위대한 우 리의 교주님은 말씀하셨다. 우리가 정통성을 확실히 세우는 순간, 헌원 황 제는 우리가 자신의 후계자임을 인정하고 자신의 힘과 이미 혼백이 된 자 신의 군대로 우리를 도우실 거라고...!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냐! 덧붙이자 면, 현무와 뇌룡이 깃들어 있던 우사와 운사의 패는 이미 우리가 접수했지. 하지만 그 안에 깃들어있던 현무와 뇌룡은 조선의 상징이라기엔 부족해서 백태청과 백화련이 이미 합신하여 사용하고 있지. 백태청과 백화련은 본 적이 있지...? 그래. 나와 같이 다니는 그 둘이다. 어쨌든 마지막으로 정리 하지. 이제 조선의 상징인 세 발 까마귀가 깃들어 있는 너의 그 ?풍사의 패?만 얻으면 조선의 상징을 모조리 우리가 접수하게 되고, 우린 정통성 을 획득하게 된다. 이제 우리의 옳음을 알겠지? 그렇다면 순순히 내 놓아 라. 너한테 해를 입히지 않을 테니까. 유천은 말하면서 스스로 자기최면에 걸리는지 말을 마칠 때 쯤에는 꿈꾸 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기가 막혀서 코웃음을 쳐 버렸 다. 그러니까, 유천 너의 말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결국 자신의 사정 때 문에 내 물건을 뺏겠다는 말 아냐? 그게 말이 되냐? 무엇보다, 남의 물건 을 달라고 하면서 어떻게 저렇게 당당할 수가 있는거지? 저건 완전히 도둑 놈 심보잖아! 황제교라는 교단을 위한 것이라면서 내세운 이유들도 여러 가지로 마음 에 들지 않는다. 일단 가장 마음에 안 드는 것은 황제의 나라를 새로 세우 겠다는 것이다. 그래, 절대군주국가를 다시 세우고, 다시 백성들을 착취하 는 나라를 세우겠다는 말이지? 웃기지 마라, 그런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나라 따위! 그런 건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해도 도시락 싸고 쫓아다 니며 말릴텐데, 뭐? 그걸 이루려면 내 패가 있어야 하니까 순순히 내놓으 라고? 너한테 나라를 세우라고 세 발 까마귀의 패를 넘겨주고, 그리고 나 면? 자기네들 멋대로 억압의 나라를 세우겠지! 그리고 나는 그 나라를 세 우는 데 암묵적 동조자가 되어버리는 거고 말야! 뿐만 아니라, 황제교에 서 황제의 정통성을 세우겠다는 그 방법도 나로서는 납득이 가지 않는 아 주 우스운 것이다. 그건 결국 옛 조선을 깔아뭉개서 세우겠다는 거 아냐! 나도 단군 할아버지의 후손이라고! 이거 왜 이래! 뿐만 아니라 난 지금 엄 연히 풍사고! 거기다, 정통성이라는 건 보통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 아닌 가? 황제교라는 곳은, 나라를 세우겠다면서 수 천년 전에 이미 전설이 되 어 버린 이야기로 정통성을 얻겠다는 그 발상 자체가 벌써 틀려먹었다. 유천이 한 마지막 말 역시 마음에 걸린다. 황제가 힘을 더해주고 거기다 혼백의 군대가 도와준다고? 터무니없는 소리지만 만약에, 만의 하나 그 말 이 사실이라면 세상이 얼마나 혼란스러워 질 것인가. 물론 내가 세상을 크 게 걱정하는 건 아니지만, 아마 내가 세 발 까마귀의 패를 순순히 넘겨준 뒤, 혼백의 군대가 세상을 어지럽힌다거나, 혹은 황제의 주술이 세상에 뻗 쳐서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 죽고 상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그 때 내 마 음이 어떨 것인가. 양심이 무지 찔리겠지. 난 세상 마음 편하게 살고 싶다. 수백 가지의 불만들이 순식간에 머리에 떠올랐다. 그리고 난 당당히 거절 했다. 아니, 거절하려고 했다. -거절하면 죽는다. 유천의 싸늘한 말은 내 마음속을 울리며 내 입을 틀어막았다. 유천의 말 에 처음으로 반응한 심리는 불안함이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은 불안감이 내 마음 속을 엄습하면서 나를 위축되게 한 것이었다. 이 기분은, 마치 어렸을 적에 동네 깡패에게 붙들렸을 때, 혹은 숙제를 안 해 온날 마 침 선생님이 1번부터 차례로 숙제를 훑어보는 것을 보며 느끼는 그런 기 분... 두 번째로 반응한 심리는 반발심이었다. ?이런, 싸가지 없는...? 불안감 과 반발심이 뒤섞여 마음 속을 이러저리 휘젓고 있었다. 유천은 다시 말했 다. -내 놔. 어차피 너같은 녀석에게는 아까운 물건이다, 풍사. 나는 눈에 불똥이 튀는 걸 느끼며 입술을 악물었다. 고맙군, 유천. 내 마 음 속에서 불안감을 모조리 몰아내어 주다니. 하, 이거 생각할수록 열받네. 좋다, 죽기 아니면 살기다! 어디 한 번 해보자!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유천에게 또박또박 말해 주었다. ?싫. 어? -뭐라고? ?노? -거부의사인가? 그래, 그럼 억지로라도 내놓게 만들어주지! 유천이 갑자기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몸을 빠르게 틀어서 나를 향해 뛰어들었다. 으, 으윽!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갑작스럽잖아! 선전포고는 해야 될 거 아냐 이 자식아! 나는 당황한 채로 굳어버렸다. 그런데, 갑자기 내 품 속에서 붉은 기운이 무서운 기세로 뿜어져 나오며 내 앞에 기의 막 을 둘러쳤다. 세 발 까마귀의 패에서 힘이 뿜어져 나와서 나를 방어해 것 이다. 쩌-엉! 유천은 나를 향해 달려오던 그대로 붉은 기운에 부딪혀서 튕 겨져 날아가 버렸다. 유천은 몇 바퀴 구르더니 벌떡 일어서서 앞을 노려보 았다. 유천은 입술을 살짝 매만졌다. 그의 입술이 터져서 피가 흐르고 있었 다. 자기 혼자 미친듯이 달려오다가 자기 혼자 벽에 부딪혀서 자기 혼자 튕겨져 날아가 버리다니, 정말이지 헐리우드 오버액션도 저 정도면 수준급 이군. 사실 내 생각이지만, 유천은 지금 굴러서 아프기보다 혼자 한 짓에 무안하고 쪽팔리지 않을까. 이 상황에서 이런 생각이나 하다니, 나도 참. 나는 이 와중에서도 헛웃음을 흘렸다. ?크윽!? 유천은 내가 웃는 모습을 보고 갑자기 신음을 씹더니 이를 드러내며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그제서야 나는 나의 실수를 깨달았다. 어이구, 이런. 내가 방금 불난 집에 기름을 들이부었구나! 그런데 갑자기 유천의 부릅뜬 눈이 조금씩 풀리며 유천의 입에 잔인한 미소가 슬쩍 걸렸다. 유천은 낮고 잔인 하게, 쉭쉭거리듯 속삭였다.. -고맙군. 이제 세 발 까마귀의 패가 어디 있는지 알 것 같다. 유천은 말을 맺더니 스스로 승리감에 도취된 듯 갑자기 마구 웃기 시작했 다. ?으하하하하...!? 나는 갑작스레 광소를 터뜨리는 유천의 모습을 보며, 목구멍까지 튀어나 오려던 ?미친놈...?이라는 말을 간신히 삭힌 뒤 속으로 삼켰다. 저 여유만 만한 유천의 얼굴에 대고 ?허공에 대고 갑자기 껄껄대며 웃다니, 저게 미 친놈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라고 확 쏘아주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결국 하지 못한 채 속으로 삭힐 수밖에 없었던 것은 순전히 괜히 아까 웃은 것처럼 입 잘못 놀리다가는 불에 기름 들이부어서 결국 한 대 맞을 것 두 대로 늘어나게 될 게 뻔하다라는 단순한 계산 때문 이었다. 물론 쉽게쉽게 이야기하자면 ?안 맞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분명 히 저 녀석의 실력은 나보다 훨씬 위인데, 그게 될까? 결국 난 유천의 여 유만만한 웃음을 분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천천히 웃 음을 삼키며 유천이 몸을 내 쪽으로 돌렸다. 유천의 날카로운 선을 띈 눈 이 나를 이리저리 훑으며 빛나고 있었다. 나는 잔뜩 긴장해서 무의식적으 로 몸을 낮게 웅크렸다. 힘이 잔뜩 들어간 어깨가 묵직하게 저려왔다. 하지 만 불안해서 힘을 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 몸 전체에서 자주빛 기운들이 서로 헝클어지고 엉키면 서 뿜어져 나와 내 몸을 휩쓸며 하늘로 솟아올랐다. 슈와아악-! 나는 돌풍 에 휘감긴 듯한 기분을 느끼며 내 몸을 구석구석 둘러보았다. 옷자락 틈새 로, 소매 사이로, 허리띠 틈으로, 발목자락으로, 그리고 신발 틈으로 자주빛 기운들이 무서운 기세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윽고 기운들의 뿜어져 나오던 기세가 시나브로 잦아들었다.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내 몸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의 가닥들이 하나로 뭉쳐 휘돌며 어떤 형상을 이루고 있 었다. 저 형상이 완성되면 결국 어떤 모습을 띄게 될지, 난 보지 않아도 짐 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저 짙은 내 품 속에서 뿜어져 나온 측정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자줏빛 기운. 분명히 이건...세 발 까마귀 출두다! 기운들은 서로 엉키고 서로를 휩쓸며 천천히 완연한 붉은 빛 새의 형상을 이루었다. 역시 세 발 까마귀였다. 세 발 까마귀는 당당하게 가슴을 쑥 내 밀고 붉은 빛 깃털을 화려하게 휘날리며 커다란 날개를 쭉 펴고 긴 목을 휘이 구부린 채 허공에 멈추어 도도하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세 발 까마 귀의 다리는 마치 뭉클뭉클 일어나면 적빛 연기, 혹은 적빛 구름덩어리처 럼 생겼고, 때문에 세 발 까마귀가 허공에서 우리를 내려볼 때면 우리의 눈에 세 발 까마귀는 마치 구름 위에서 우리를 굽어보는 듯한 모습으로 보 이게 된다. 어쩌면 나는 그래서 세 발 까마귀의 모습에서 위압감을 느끼는 걸지도 모른다. 구름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라니, 얼마나 신성한가! 뿐만 아니라 세 발 까마귀의 위풍당당한 모습에는 언제 보아도 위엄과 기백, 그 리고 긍지가 가득 느껴진다. 곧고 크고 시원하게 생긴 세 발 까마귀의 몸 은 전체적으로 마치 맹금류처럼 우아하게 뻗은 유선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곡선은 세 발 까마귀에게 박력을 더해주었다. 하지만 단지 생김새와 구 름처럼 뭉클거리는 다리만이 세 발 까마귀가 위엄이 있는 이유는 절대로 아니다. 세 발 까마귀의 몸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기 정도로도 나와 같이 기본이 약한 사람들은 압박감을 느꼈다. 세 발 까마귀는 느낌만으로 가 아니라 실제로도 힘이 넘쳐흘렀던 것이다. 세 발 까마귀는 잠시 밤하늘 이 담긴 호수와 호수 주위에 둘러친 산을 바라보던 눈을 들어 천천히 자신 의 발밑을 둘러보았다. 아마도 나를 찾나보군. 나는 세 발 까마귀를 소리쳐 서 불렀고, 그제야 날 찾은 세 발 까마귀는 천천히 말했다. -비록 풍사의 조력요청이 없었지만 풍사가 위험에 닥쳤다고 판단하고 풍 사를 돕기 위해 자진 출두했다. ?고마워요? 나는 세 발 까마귀에게 손을 흔들어 감사를 표했다. 저번에 제임스의 습격 때, 세 발 까마귀의 패를 바로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는 곳에 두고도 제임스의 방해에 속수무책으로 세 발 까마귀를 봉인 당할 뻔했던 일이 있었던 이후로 이제 난 아예 세 발 까마귀의 패를 몸에 지니고 다닌다. 덕분에 지금 같이 누군가에게 갑작스럽게 습격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세 발 까마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세 발 까마귀가 내 품속에서 온갖 화려한 짓을 다 하며 나타나 버린 이 상 황은 결국 유천 저 녀석에게 세 발 까마귀의 패가 내 품속에 있다고 요란 하게 광고를 한 꼴이 되는 건가? 뭐, 하지만 어쩔 수 없었지. 세 발 까마귀 가 이런 식으로라도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내가 어떤 꼴을 당했을지 알게 뭔가. 세 발 까마귀는 천천히 날개를 치며 하늘에 머물러 있었다. 기감이 그리 강하지 않은 나에게도 세 발 까마귀의 어마어마한 기운은 나를 압도 하기에 충분하다. 세 발 까마귀의 몸에 흐르는 나에 대한 친화력이 아니었 다면 아마 난 겁을 먹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유천은? 유천은 과연 세 발 까마귀의 어마어마한 힘에 위축되었을까? 아쉽게도, 유천은 세 발 까마귀의 출현에 별로 겁먹지 않은 듯 했다. 유천 은 대신 세 발 까마귀의 등장이 상당히 귀찮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 다. -젠장, 세 발 까마귀가 직접 나서다니. 이러면 우리 쪽에서도 응룡을 풀어 야 하잖아. 이 자식, 자제 좀 하지 뭘 세 발 까마귀까지 불러냈어? 어차피 뺏길 것... ?뭐?? 유천은 내 반문에 대한 대답 대신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고래고래 큰 소리로 주문을 외치더니 이윽고 세상이 떠나가라 고함을 질렀다. 으윽, 귀 청 떨어지겠다! ?오오오오오-!? 유천의 고함이 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흘러가면서 갑자기 몇 조각 먹구름 들이 하늘의 이곳저곳에서 바람에 휘몰리듯 빠르게 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모두 모인 조각구름들은 서로 엉겨붙으며 점차 하나의 커다란 먹구름으로 변했다. 뭉클거리며 커진 시커멓고 불길한 먹구름은 이윽고 흘러오듯 천천 히 이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구름 속에서 번개가 번쩍이고 있었다. 우 르릉! 강렬한 천둥소리가 문득문득 귀를 찢었다. 맙소사, 나는 점차 괴상망 측한 기분에 젖어들었다. 하늘의 다른 모든 부분이 맑은데 오직 한 조각 두꺼운 먹구름 속에서만 비가 뿌리고 천둥이 하늘을 찢고 있었다. 불길한 먹구름은 점점 무서운 속도로 가속도가 붙어 하늘을 점차 잡아먹으면서 이 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꽈등! 우르릉! 쏴아- 구름이 다가옴에 따라 그 속 에서 우르릉거리며 포효하는 천둥자락과 무서운 기세로 쏟아져 내리는 소 나기가 점점 똑똑히 보였다. 그런데 착각일까, 번개가 번쩍거릴 때마다 구 름 속에서 언뜻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제 우리의 거의 바로 앞까지 다다른 구름줄기는 잠시 상공에 머물며 벼 락과 비를 땅을 향해 쏟아 부었다. 이제 구름의 모습은 내 눈에 확실히 들 어왔다. 그리고 나는 내가 본 것이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구름 속에서 분명히 시커먼 무엇인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촤아아악! 갑자기 구름이 갈가리 찢어지며 흉악하게 생긴 한 마리 새카만 용이 마치 호수를 노니는 물고기처럼 이리저리 꿈틀대며 밤하늘을 휘저었다. 맙소사, 용이라니! 나는 눈을 크게 뜨며 입을 가렸다. 살다살다 드디어 이제 내가 드디어 용까지 보는구나! 하지만 참으로 이상한 게 사람의 마음이라던가. 분명히 기절을 해야 할 만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어쩌면 먹구름과 천둥번개, 그리고 비바람의 출현으로 용이 나타날지도 모 른다고 무의식중에서 이미 예측해 버렸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이미 어느 정도 신기한 일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정도의 내성이 생겨버려서 그런걸 수도 있다. 나는 눈을 들어 하늘에 이리저리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 며 날고 있는 용을 바라보았다. 횃불처럼 번쩍이는 두 개의 눈이 주위의 검은 밤하늘과 검은 몸 색깔 사이에서 도드라졌다. 머리에는 두 개의 사슴 의 것처럼 생긴 뿔이 나 있었고 사자의 것과 비슷한 갈기로 둘러싸인 얼굴 은 악어처럼 생겼으며 돼지처럼 하늘로 코가 치솟아 있었고 메기의 것처럼 가늘고 긴 두 가닥 수염이 길게 뻗어 있었고 무지막지할 정도로 큰 입에는 군데군데 이빨이 삐쳐 나와 있었다. 몸은 정말이지 거대한 한 마리의 뱀 그 자체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등에 세모꼴의 작은 두 줄기의 등판이 하 늘을 향해 솟아 있다는 것 정도? 길고 미끈한 몸은 비늘로 덮여 있었다. 그 몸빛은 너무도 새카맣기 때문에 아마 비늘이 달빛을 반사하지 않았다면 밤하늘과 구별하기가 꽤나 어려웠을 것이다. ?사자의 갈기, 악어의 얼굴, 돼지의 코, 메기의 수염...?하니까 되게 못생긴 것 같지만 이건 전적으로 내 묘사 능력이 모자라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 뿐, 실제로는 용의 모습은 나같은 사람은 한 입에 삼켜버릴 것처럼 무시무시하게 생겼다. 유유히 하늘의 이곳저곳으로 날던 용은 이윽고 몸을 틀어 유천의 앞으로 미끄러지듯 날았다. 마치 물뱀이 수면을 가로지르는 것 같은 너무도 부드 럽고 자연스러운 비행이다. 달빛이 용의 몸에 떨어지면서 수 만 개의 조각 으로 부서져 수정처럼 반짝였다. 용은 유천 앞에서 멈추더니 고개를 숙였 다. 용의 목소리가 마음을 울렸다. -부르셨습니까, 황자시여. 하늘의 아들이 되실 분이여. -그래, 응룡, 수 천년 전에도 황가의 종이었고 지금도 황가의 종이며 앞으 로 영원히 황가의 종일 충성스러운 용아. 내가 너를 불렀다. 명령하나니, 다른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 저 세 발 까마귀를 막아라. 응룡이라 불린 용은 유천의 말에 고개를 힐끗 틀어 세 발 까마귀를 바라 보았다. 사실 어디까지나 응룡의 기준으로 ?힐끗?일 것이다. 응룡이 고개 를 트는 행동이 나에게는 왠 바위가 허공에서 휘적거리는 것처럼 느껴졌 다. 응룡은 이윽고 다시 유천을 주시하며 느릿하게 물었다. -공격해도 좋습니까. -물론이지. 황자는 고개를 끄덕였고 응룡은 몸을 휘 틀어서 허공을 한 바퀴 선회하더 니 그대로 멈추어 서서 세 발 까마귀를 주시했다. 세 발 까마귀의 힘도 대 단했지만 응룡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도 무시하지 못할 만큼 강대했 다. 어느 쪽이 더 강한 것일까. 나로서는 선뜻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질 못 하겠다. 두 신수는 단 한 마디의 대화도 나누지 않은 채 한참동안 서로를 노려보았다. 팽팽한 긴장감. -꾸와아아아아아앙! 갑자기 응룡이 크게 울었다. 그 울음소리는 가히 산을 떨게 할 만 했다. 단지 울부짖을 뿐이었는데도 강력한 영기가 울음소리에 섞여서 응룡 주위 의 산천초목을 압박하며 퍼져나갔다. 응룡이 내뱉은 음파가 지나가며 호수 의 수면이 미친 듯이 진동했다. -꺄아아아아아악! 세 발 까마귀는 홰를 크게 치며 응룡의 고함에 찢어지는 듯한 울음소리로 화답하며 그대로 응룡을 향해 쏘아져 날아갔다. 쐐애애애액! 허공을 찢는 소리와 함께 세 발 까마귀는 순식간에 응룡의 위를 날며 구름같은 다리에 서 기운을 뻗어 응룡의 몸을 휘감은 채 산까지 붉은 선을 그리며 날아가더 니 뻗은 기운을 도로 회수하며 응룡을 산에 쳐박아 버렸다. 쩌어엉! 저르릉 하는 강렬한 소리와 함께 산이 몸을 떨며 울부짖었다. 응룡은 괴로운 듯 몸을 비틀다가 그대로 하늘로 솟아올랐다. 세 발 까마귀는 하늘을 크게 선 회하며 먹이를 노리는 독수리처럼 응룡을 주시하고 있었다. -꾸와아아! 다시 한 번 응룡이 크게 울부짖으면서 용트림을 하자 갑자기 응룡의 사방 으로 강렬한 벼락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쩡, 쩌엉, 쩡! 땅에 벼락들이 떨어 지면서 바위가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맙소사! 응룡의 주위 의 넓은 공간이 그대로 모두 벼락의 밭이 되어 있었다. 응룡은 그대로 세 발 까마귀를 향해 전속력으로 날았고, 벼락들은 응룡의 주위를 빠르게 쫓 으며 응룡의 주위를 초토화시켰다. 세 발 까마귀는 응룡이 갑자기 벼락을 휘몰며 자신을 향해 날아오자 당황했는지 잠시 허공에서 허둥대다가 재빨 리 몸을 틀어 응룡의 반대쪽으로 날았다. 하지만 응룡은 전속력으로 세 발 까마귀를 따라잡았고 한 줄기 벼락이 그대로 세 발 까마귀를 덮쳤다. 꽈르 르릉! 지금까지 벼락이 바위에 부딪히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세 발 까마귀는 방금전의 공격이 꽤나 충격이 컸는지 허공에서 몇 번 힘없이 날갯짓을 하며 비틀거리다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 안 돼!? 나는 작게 비명을 질렀다. 다행히 세 발 까마귀는 땅에 닿기 직전 기운을 내어 몸을 틀며 하늘로 솟았다. 세 발 까마귀를 향해 다시 벼락 한 가닥이 꽂혔지만 이번엔 세 발 까마귀가 날개를 교묘히 움직여 비스듬히 날며 번 개줄기를 피했다. 마침내 벼락의 땅을 벗어난 세 발 까마귀는 허공에서 유 려하게 선회하며 응룡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부우욱- 허공을 울리는 진동 음과 함께 커다란 자주빛 기운이 세 발 까마귀의 몸 주위를 구형으로 둘러 쌌다. 응룡의 몸 주위에서도 연기처럼 흐늘대는 검은 기운이 무럭무럭 솟 아오르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본격적인 싸움이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어디다 신경을 쓰시나? 이제 세 발 까마귀도 없으니 너는 허수아비나 마찬가지야! 비겁하게 공격하고 싶지는 않다. 어서 나를 봐! 마음속을 울리는 유천의 외침에 나는 화들짝 놀라 앞을 바라보았다. 어느 새 황자가 내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런 젠장, 비겁하게 공격하고 싶지 않다는 놈이 쥐새끼처럼 살금살금 다가와서 기습이나 하고 있냐! 나 는 재빨리 대응하려 했지만 유천의 팔은 이미 빠르게 움직여서 팔꿈치 안 쪽으로 갈고리처럼 내 목을 걸었다. 크억! 순간적으로 숨이 막히는 게 느껴 졌다. 녀석은 그대로 땅을 박차며 빠르게 앞을 향해 달려나갔다. 유천의 달 리기는 꽤 특이했다. 다른 사람들보다 걸음을 내딛는 시간이 월등히 길었 던 것이다. 유천은 마치 사슴처럼 휘적휘적 발을 내딛으며 나는 듯 앞으로 나아갔는데 그 속도는 이게 정말로 사람의 속도인가 싶을 정도로 빨랐다. 이게 경공술이라는 걸까? 아니면 그저 남들보다 좀 더 날렵하게 뛰는 것에 불과한 걸까? 나는 내 목을 걸고 있는 유천의 팔을 어떻게든 밀어내기 위 해 안간힘을 쓰며 버둥거렸다. 하지만 유천의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으윽...젠장! 놓으라니깐!? 나는 악을 쓰며 녀석의 팔을 밀어내려 했다. 그 때, 내리 깔린 나의 눈에 문득 땅에 놓여진 자갈들이 엄청난 속도로 뒤로 물러서는 것이 들어왔다. 그리고 난 그제서야 내가 어느 정도의 속도로 달리고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맙소사! 어떻게 나를 한 팔에 걸고도 이렇게 빨리 달릴 수가 있지? 휙! 휙! 새삼스럽게 바람이 내 귀에서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오며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난 바닥을 보지 않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곧 호수다, 지금이라도 세 발 까마귀의 패를 내 놔! ?싫어!? 나는 고개를 도리질 치며 강하게 거부했다. 그러자 녀석은 그대로 호수 바로 앞에서 우뚝 멈춰서면서 귀찮은 것을 떼어내듯이 팔을 휘둘러 나를 집어던졌다. -어디 한 번 물맛이나 실컷 봐라! 휘리리릭! 나는 순식간에 하늘을 날았다. 여기까지 끌려온 속도에다가 유 천이 나를 집어던진 힘이 더해져서 내가 허공을 가르는 속도는 정말 무시 무시하도록 빨랐다. 호수 앞에 서서 잔인하게 웃고 있는 유천의 모습이 총 알처럼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나는 기분나쁜 무중력 상태를 느끼며 왜 나 를 제압하지 않고 물로 던졌는지를 생각했다. 왜 충분히 나를 쓰러뜨릴 수 있었는데 그냥 목만 걸고 말았을까? 흠, 혹시 그렇게 몰래 공격하는 건 황 자의 체면에 너무 비겁하다고 생각해서 그런걸까? 어쩌면 세 발 까마귀의 패를 내놓으라고 마지막으로 한번 더 회유하려고 그런 걸지도 모르지. 아 니면 자기 손을 더럽히면서 사람을 죽이기 싫어서 처음부터 물에 빠뜨려 죽이려고 치지 않고 목을 걸었는지도 모르고. 어쨌든 한 가지 확실한 건, 유천이 내게 한 이 행동은 충분히 여유를 부린 행동이라는 것이다. 좋아, 나를 얕본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주지! 여러 생각을 하는동안 어느새 내 몸은 호숫가에서 상당히 먼 거리까지 날 아와 있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몸이 허공에서 멈추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 포물선의 하강궤도로 진입한 것이다. 나는 눈을 아래로 내렸다. 호수 의 수면이 잔물결을 출렁이며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밤이라 수면은 칠흑 같이 새카맣게 보였다. 왠지 불길한데. 수면이 서서히 나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확실히, 추락하고 있나보군. 수면이 나에게 다가오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바람이 스치는 소리가 언뜻 귀에 들렸다. -쉬리릭! 수면에 떠 있는 수많은 별들이 내 시야를 가득 뒤덮음과 동시에 난 물 속 으로 곤두박질쳤다. 풍덩-! 부그르르... 무엇이 끓는듯한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공기방울들이 새하얗게 주위를 감싸며 일제히 수면으로 솟았다. 난 몸이 어느 정도 충격에서 벗어나 안정을 찾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심스레 내 몸을 둥글게 감쌀 바람을 뿜었다. 펑! 물을 밀어내는 소리와 함께 몸에 서 뿜어낸 바람이 커다란 공기막이 되어 나를 둘러쌌다. 됐어! 공기방울이 위로 떠오르지 않도록 바람의 방향을 조절하며 유천을 이길 방도를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몸에서 느껴는 기운으로 보나, 몸놀림으로 보나 유천은 나보다 한 수, 아 니 몇 수는 먹고 들어간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하지만 싸움은 힘이 전부 가 아니다. 아무리 내가 상대보다 힘이 떨어진다고 해도, 기회가 왔을 때 온 힘을 쏟은 한 방을 적에게 먹인다면 그때까지 불리했던 대세를 충분히 돌려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좋아. 기회는 왔으니 이제 ?온 힘을 다한 한 방?을 먹여줄 차례다! 나는 천천히 유천이 서 있는 호숫가를 향해 바람을 내뿜었다. 스르륵...바 람이 물을 헤치며 내가 들어있는 공기방울을 서서히 유천이 있는 곳의 반 대방향으로 밀었다. 가끔씩 수면이 진동하며 ?쿵...쿵...?하는 소리가 들렸 다. 바깥쪽에서 응룡과 세 발 까마귀가 싸우는 소리가 물 속까지 전해지는 것이다. 정말 어마어마한 싸움이군. 이윽고 호수의 거의 반대편까지 도착한 나는 공기방울을 계속 유지할 최 소한의 힘을 제외한 모든 힘을 단전으로 모았다. 곧 단전이 기로 인해 단 단해졌다. 힘이 모인 것이다. 난 다시 공기방울을 이루고 있던 바람의 힘을 몸 속으로 갈무리해서 단전으로 돌렸다. 왈칵! 호수 속의 물들이 갑자기 나 를 덮쳤지만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이라 별로 당황하지는 않았다. 눈알에 물살의 어른거림이 느껴졌다. 쳇, 물 속이라 눈을 뜨고 있기가 힘들군. 나 는 일단 하반신을 얇은 바람의 막으로 감싸 물 속에서 몸을 가누기 쉽도 록 조처한 다음 머리를 천천히 수면 위로 띄웠다. 저 멀리 유천의 모습이 보였다. 유천의 모습은 손톱만큼 작아 보였다. 그 정도로 유천과 나 사이의 거리가 먼 것이다. 이 정도도 먼 거리라면, 유천은 아마 나를 절대 보지 못 할 것이다. 됐어!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난 지금껏 단전에 꾹꾹 눌러 담았던 힘을 일시에 개방해서 내 주위에서 일렁이는 크고 작은 바람과 공기의 흐름들의 방향을 모조리 틀어 내 주위 로 모았다. 전에 세 발 까마귀가 말했듯이, 나의 능력 중에는 바람을 만들 어내는 능력뿐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는 공기의 흐름을 제어하는 능력 또한 있는 것이다. 마침 호수의 온도는 따뜻하고 지면의 온도는 식어버려 형성된 호수의 고기압이 호수 상공에 난기류를 꽤 많이 가두어놓고 있었 다. 으랏차! 나는 용을 쓰며 죽어라고 위쪽에 자리잡은 공기의 흐름을 몽땅 틀어서 내 쪽으로 끌어내렸다. 하지만 공기를 조절하는 것이 그렇게 쉬울 리는 없다. 난기류들은 내 강제력에 저항하고 버티며 마구 소용돌이쳤다. 하지만 이 자식들아! 내가, 이래봬도, 풍사야! 너희들의 주인에게 이렇게 나오면 곤란하지! 이이이익! 나는 이를 악물며 호수 위의 하늘에서 혼란스 럽게 방향성없이 떠돌던 기류들을 모조리 끌어내리는 데 성공했다. 휴우! 힘들어 죽는 줄 알았네! 나는 땀을 씻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내 주위는 너무 많아서 숨이 찰 정도로 두껍고 밀도 높은 공기들이 나를 둘러 싸는 벽을 이루어 느릿느릿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후우우웅! 공기의 벽은 지금이라도 허물어져 주위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리겠다는 듯 우쭐거렸고 그 때마다 범상치 않은 소리가 내 귀를 스치며 호숫가로 울려퍼졌다. 과연 유 천 저 놈은 지금쯤 이상한 낌새를 채고 있으려나? 에라 자식아, 네 녀석이 낌새를 채고 있다고 해봤자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눈 똑똑히 뜨고 잘 봐, 내가 여기서 작은 천재지변을 하나 일으켜줄테니! 받아라, 내 ?온 힘을 다한 한 방?이다-! ?에라, 미니 해일이다아아앗!? 나는 일시에 유천이 서 있는 방향을 향해 바람의 벽을 지탱하고 있던 힘 을 개방했고 바람의 벽은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일시에 힘을 개방한 방 향으로 무너져 내렸다. 우르르릉-! 맙소사, 이게 바람의 소리라니! 바람은 무너져 내리면서 수면을 거세게 짓눌렀다. 쿠릉! 수면은 바람의 힘을 견디 지 못하고 수 미터나 움푹 파여버렸고 움푹 패인 곳의 바로 앞에는 밀려난 물이 커다란 물언덕을 이루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꽈르르르르릉! 굉음과 함께 물언덕이 터지며 어마어마한 파도가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나는 입을 크게 벌렸다. 내 눈앞에서 솟아오르는 물의 봉우리가 내가 생각 했던 것보다 훨씬 컸기 때문이다. 광폭하게 무너져 내렸던 바람은 수면에 부딪혀 헝클어지다 관성에 의해 수면을 잔뜩 밀어붙이며 방향을 앞으로 틀 었고, 결과적으로 파도와 바람은 한덩어리가 되어 유천이 서 있는 곳을 향 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됐어! 성공이야! 나는 물 속에서 솟구치며 재빠릴 발 아래에 서핑보드처럼 납작한 바람의 판을 만들어 그 위에 섰다. 기운이 완전히 빠져버리기 전에 조금이라도 호숫가에 가까이 가야 한다. 난 바람의 판은 물살에도 흔들리지 않고 평행을 유지하며 수면 을 밀어 앞으로 나아갔다. 바람과 엉켜서 그런지 파도는 나아갈수록 주위의 덩달아 널뛰는 잔물결들 을 잡아먹으며 급속도로 커지고 있었다. 유천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공포에 찬 얼굴로 입을 벌리고 있을까? 아니면 도망치려고 몸을 돌리고 있 을까? 어차피 도망쳐봤자 이 파도의 파고로 미루어볼 때 절대 충격파 밖으 로 벗어나지는 못한다. 하지만 도망이 성공하고 성공하지 못하고를 떠나서 유천은 등을 돌리고 도망치는 짓은 하지 않을 것 같다. 유천은 자존심을 넘칠 정도로 마음에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도하 게 파도를 바라보며 꼿꼿이 서 있을까? 하지만 아까 내 목을 낚아채면서 보였던 비열함에 미루어 볼 때 그럴 것 같지도 않다. 어쨌든 파도 뒤에서 파도의 꽁무니만 쫓아가고 있는 나로서는 유천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도저히 알 방법이 없다. 파도 뒤로 보이는 산의 크기로 미루어 볼 때, 이제 거의 호숫가에 다다른 것 같다. 파도는 지상이 가까워올수록 점점 더 크게 솟아오르고 크게 뒤집 혔다. 정말 장관이군. 그런데 잠깐, 뒤집힌다고...? 언뜻 나의 머릿속에 내가 간과해버린 어떤 사실이 떠올랐다. 이런 젠장, 깜박했다! 나는 황급히 바람발판을 허공에 흩어버렸다. 지탱할 곳이 없는 나의 몸은 발판을 흩어버림과 동시에 물 속에 빠져버렸다. 물이 온 몸을 휘감은 뒤 나는 재빨리 바람의 막을 쳤다. 무리하게 끌어낸 힘이 드디어 바닥을 드러내는지 바람의 막은 위태위태해 보이도록 얇았다.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바람의 막을 바라보며 나를 황급히 물 속으로 피하게 만들었던 그 사실을 떠올렸다. 파도가 호숫가에 부딪혀 유천을 공격한 다음엔 역으 로 후충격파로 변해 나를 후려친다는 사실 말이다. 뭐, 물 속에 들어와 있 으면 수면 위에서 생겨날 역파도를 정면으로 얻어맞을 걱정 따위야 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물 속에도 틀림없이 역파도와 함께 나아갈 급류 정도는 생길 것이고 그건 힘이 다해버린 나에게는 분명히 위협적인 존재다. 혹시 바람의 막이 급류에 휘말려서 갈가리 찢어져 버린다면? 난 꼼짝없이 숨도 못 쉬고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채 휩쓸려 버리게 된다. 아무래도 바람의 막을 조금이라도 더 강화해야지 이거 도저히 불안해서 못 견디겠다. 나는 눈을 감고 단전으로 전신의 기운을 억지로 끌어들였다. 몸 이곳 저곳에서 조여드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근육들이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그러 나, 그렇게 무리하며 기운을 모으기 위해 온갖 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기 는 전혀 모이지 않았다. 젠장! 기운이 완전히 고갈되어 버렸나보다. 나는 한숨을 쉰 뒤 호숫바닥에 엎드려 자세를 바싹 낮추고 전신에 힘을 단단히 주며 마음을 굳게 먹었다. 여기서 버티지 못하고 휩쓸려 버리면 최소한 호 수의 중심 정도까지는 딸려가야 할 것이다. 이미 기운을 모조리 써버린 내 가 호수의 바깥까지 바람을 부려서 나올 수 있을까? 불행히도 대답은 부정 적이다. 그러므로 나는 반드시 여기서 버텨야 한다. 젠장! 왜 진작 후충격 파를 생각하지 못했을까! 나는 잠시 자신을 자책했다. 호숫바닥의 자갈 때 문에 무릎이 조금씩 아파왔다. -꾸웅... 파도가 드디어 호숫가와 충돌했는지 묵직한 소리가 물을 타고 아련히 들 려오며 내 뒤 쪽에서 순간적으로 물살이 앞을 향해 쭉 빨려나갔다. 성공이 다! 나는 환호성을 지르고 싶었지만 지금은 바닥에 붙어있기에도 급급하다. 나는 혹시 바람의 막이 흩어져 버릴 경우를 대비해서 크게 심호흡을 하였 다. 잠시 호수 속은 불길한 침묵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나는 배에 힘을 단 단히 주며 자세를 더욱 낮추었다. 이윽고 후충격에 의해 형성된 급류가 나 를 덮쳐왔다. -콰르르르-! 크윽! 나는 예상보다 훨씬 거센 충격에 당황하며 온 몸에 힘을 꽉 주었다. 드득, 드드득. 몸이 조금씩 들썩거리며 뒤로 밀리고 있었다. 손과 무릎이 억지로 뒤로 밀리며 호숫바닥을 마구 파헤쳤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죽음 에 대한 불안감이 날 절박하게 몰아 붙이고 있었다. 여기서 죽을 순 없어, 여기서 죽을 순 없어! 나는 스스로를 향해 소리쳤다. 고개를 들었다. 바람 의 막이 파르르 떨면서도 용케 찢어지지 않은 채 버티고 있었다. 온갖 것 들이 빠른 속도로 물살에 휩쓸려왔다가 순식간에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 런데, 그 중에 내 눈에 낯익은 것이 하나 보였다. 유천이었다. 유천은 파도 를 정면으로 얻어맞았는지 무기력하게 나를 향해 떠내려오고 있었다. 잠깐, 나를 향해 떠내려온다고? 안돼!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치잇! 작지만 귀를 자극하는 소리와 함께 유천이 아슬아슬하게 내 위쪽으로 휩 쓸려 지나갔다. 하지만, 오, 젠장! 녀석은 나를 치고 지나가지 못한 대신 바 람의 막을 할퀴고 지나가 버렸다. 내 귀에 나직하게 들린 소리는 바람의 막이 찢어지는 소리였다. 물 흐르는 소리가 갑자기 크게 들리며 물살이 정 면으로 내게 부딪혀왔다. 바람의 막이 있어서 단지 물살에 ?밀려나기만 하는 것?과 바람의 막이 사라져 물살에 ?정면으로 부딪히는 것?의 차이 는 컸다. 손 끝에 너무 힘을 준 탓인지, 아니면 손바닥이 까져 버렸는지 손 에서 핏방울들이 점점히 올라왔다가 물살에 쓸려 빠르게 흩어졌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마치 괴물이 나직하게 울부짖는 것 같은 물 흐르는 소 리가 귀를 휘감았다. 오만가지 잡동사니들이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온몸에서 힘이 빠지고 있었다. 점점 숨이 차올랐다. 나는 이를 악물며 숨을 참았다. 폐가 찢어지는 듯 아팠다. 뒷골이 뻐근하게 당겼다. 언제까지 참아야 되는걸까? 결국 난 그나마 입 속에 품고 있던 날숨을 모 조리 물 속에 내뱉고야 말았다. 흰 기포들이 부글거리며 위로 솟다가 물살 에 휩쓸려 뒤쪽으로 사라졌다. 이제 곧 죽겠구나. 나는 절망감에 휩싸여 눈 을 부릅떴다. 순간, 거짓말처럼 주위가 조용해지며 물살이 잦아들었다. 난 물살이 멈췄다는 것을 느낀 그 순간 수면을 향해 미친 듯이 팔을 저었 다. 숨을 쉬어야 했다. 수면 위로 뿌려지는 푸른 달빛이 일렁이며 점차 내 게로 다가왔다. ?푸화아악!? 나는 물위로 치솟으며 하늘이 무너져라 숨을 내뱉었다. 폐에서 피냄새가 왈칵 풍겨왔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계속 숨을 들이쉬었다. 공기가 이렇게 달 수 있다니! 사지에서 빠져나온 뒤 느끼는 쾌감은 무엇과도 비교하기 어 려웠다. 난 주위를 둘러보며 호숫가를 찾았다. 호숫가는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었다. 나는 천천히 손을 저어 호숫가를 향해 나아갔다. 첨벙, 첨벙! 물을 튀기며 나는 간신히 호숫가로 걸어나왔다. 물에 흠뻑 젖 은 온 몸이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었다. 나는 휘청거리다 결국 바닥에 쓰 러져 버렸다. 철퍽! 온 몸에서 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새삼스럽게 손바 닥과 무릎이 쓰라려왔다. 혹시 너덜너덜해진 건 아닐까, 나는 덜컥 겁을 내 며 손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다행히 손바닥에 난 상처는 살짝 피부가 벗겨 진 정도에 불과했다. 나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조금이라도 호숫가에서 벗 어나기 위해 바닥을 기었다. 이제 호수라면, 아니 물이라면 지긋지긋하다. 어느 정도를 걸었을까. 나는 기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바닥에 떨구었다. 도 저히 힘들어서 더는 못 움직이겠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몸을 돌려 대자로 드러누웠다. 호수는 언제 파도가 일어났었냐는 듯 잔잔했다. 그대로 잠시 호흡을 고른 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몸이 말을 전혀 듣지를 않 았다. 지금의 내겐 몸을 일으킬 힘조차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에라, 뭐 이 대로 잠깐 드러누워 있는 것도 그렇게 나쁘진 않겠지. 휴우. 정말이지 내가 내 힘으로만 유천같이 강해 보이는 녀석을 이기다니! 나는 뿌듯한 마음에 주먹을 불끈 쥐며 미소지었다. 잠깐, 그런데 유천 그 녀석이 그대로 빠져 죽어버리면 어떻게 하지? 나는 갑자기 든 불길한 생각에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이런 젠장, 그 생각을 못 했어! 그 녀석, 아무리 나를 죽이려던 녀석이라고는 하지만....혹시 물에 빠 져서 만약 죽어버리기라도 한다면...? 뭐, 나를 죽이려던 녀석이다. 그런 녀석이야 죽어버리던 말던 자업자득이 다! 젠장, 나는 갑자기 기분이 더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분명히 내가 의도 한 것도 아니고 죄책감을 느낄 일도 전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고 향에서 하듯이 ?어따 씨언쿠 잘되았다?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내 마음의 찝찝한 건 그렇다고 치자. 대학생들이 엠티를 왔는데 그 중의 한명이 실종되었다면 이건 이만저만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보나마나 유천과 같은 시각에 숙소에서 사라진 내가 될 게 뻔하고. 거기다 유천은 외국인이니 자칫하면 외교문제까지 벌어질 수도 있겠지. 젠장, 생각할수록 골치 아픈 일이 한두 개가 아니잖아! 아무 래도 안 되겠군, 찾아봐야지.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이를 악물고 참으며 몸 을 일으켰다. 그런데 멀찍이 이상한 모습이 띄었다. 호수의 가운데쯤에 이 상한 그림자가 비틀거리며 허공에 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나 는 눈을 크게 뜨며 신음을 흘렸다.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다던가? -너 이 새끼, 죽는 줄 알았다...나를 물에 빠진 쥐새끼 꼴로 만들다니...그 래 좋다, 피 한 번 보자...! 그래, 오늘 한 번 뒈져봐라. 나도 오늘 앗싸리하 고 시체 한 번 치워보자! 내 마음속으로 스멀스멀 스며들어온, 듣기에 따라선 상당히 우스울 수도 있는 대사를 너무나도 무섭게 말하는 그건 분명히 유천의 목소리였다. 유 천, 화나니까 자연스럽게 어렸을 때 좀 논 티가 나오는데? 어쨌든, 그렇다 면 역시 호수 위에 떠 있는 저 그림자는 유천인가! 정말 저 놈도 지독스러 운 놈이군, 그 해일을 얻어맞고도 살아나다니 말야. 어쨌든 이로서 유천이 죽었으면 어쩌나하는 고민 하나는 덜어버리게 되었으니 다행이다. ...다행? 지금 내가 다행이라고 했나? 오, 맙소사! 내가 죽게 생겼는데 다행은 무슨 얼어죽을 다행!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유천은 머릿속에서는 계속 어떻게 해서든 대비를 하라고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서 대 비는 커녕 도망도 못 치겠다. 젠장, 차라리 주저앉아 버리고 싶다! 잠시 흐느적거리며 물위에 조용히 떠 있던 유천은 이윽고 천천히 나를 향 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유천이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 다 유천의 몸이 조금씩 아래로 가라앉았다. 아마도 떠 있는 상태로 걷기까 지 하는 건 꽤 벅찬 일인가보다. 천천히 아래로 내려앉던 유천의 발끝이 수면에 닿았다. 하지만 유천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물을 질벅거리며 계속해서 호수를 건넜다. 유천의 몸은 걷는 거리에 비례해서 천천히 더욱 깊이 물 속으로 잠겨들었다. 발목, 무릎, 허벅지, 허리, 명치, 그리고 가슴까 지. 나는 질려버린 눈으로 유천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몸도 엉망인 데다 계속 물 속에 삼켜지면서 어떻게 저 녀석은 잠깐 머뭇거리지도 않고 계속 걸을 수 있는 걸까.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할까? 하지만 지금은 힘이 하나도 없어서 똑바로 서서 버티기도 힘든 상황일 뿐더러, 설령 도망친다 손 치더라도 내 주력으로는 어차피 얼마 도망치지 못해 잡힐 게 뻔하다. 이제 유천의 목까지 물에 차 있었다. 하지만 유천은 수심이 자신의 키를 넘어가도 멈추지 않겠다는 듯 나를 향해 똑바로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굳 은 채로 유천의 눈을 바라보았다. 유천의 눈은 증오로 불타고 있었다. 저것 이 누구를 향한 분노일까. 나는 싸늘한 한기를 느꼈다. 물이 유천의 코 위로 올라가기 직전에 유천의 몸은 조금씩 다시 수면 위 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드디어 유천의 발이 호숫바닥에 닿은 것이다. 순식 간에 물의 높이는 유천의 목에서 어깨로, 어깨에서 다시 허리로, 허리에서 다시 무릎으로 낮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유천의 발목까지 물이 왔을 때, 황 자는 손에 누런 기운을 잔뜩 뭉치더니 기묘한 고함을 지르며 나를 나를 향 해 펄쩍 뛰어올랐다. 이런 젠장, 꼼짝도 할 수 없다! 나는 절망감에 휩싸였 다. 차가움이 뚝뚝 떨어지는 미소를 띈 유천의 얼굴이 나의 시야를 가득 덮었다. -쩌엉! 강렬한 충격음이 주위를 덮었다. 맞았나? 하지만 전혀 아프지 않은데? 이 런, 설마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즉사해버린 건가? 그, 그럼 난 영혼인거 야...? 그렇다면 내 시체는 어디에 있지? 그리고 유천은? 나는 뭐가 뭔지 알 수 없어 어리벙벙한 채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유천이 빙글빙글 돌면서 호수로 날아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물 속에 처박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 다. 어,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유천이 왜 호수에 처박히는 거지? 그리고 유천이 저렇게 날아가고 있다면 난 멀쩡한 건가? 난 재빨리 내 몸을 훑어 보았다. 상처가 난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혹시나 해서 머리를 더듬었다. 역시 머리에도 상처는 없었다. ?휴우...? 순간적으로 긴장이 풀리자 다리에 힘이 빠졌고 나는 아직 싸움 중임을 떠 올릴 겨를도 없이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응룡과 세 발 까마귀가 아직도 대판 뜯고 싸우는지 호수를 둘러싼 산들의 뒷쪽에서 찢어지는 새의 울음소리와 묵직한 용의 고함소리가 엇갈리며 허공을 울렸다. 난 뒤를 돌 아보았다. 청도가 왼손에 목검을 든 채 서 있었다.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고마워? ?뭘, 별 말씀을. 고마우면 나중에 밥 사면 되는거지. 안 그래?? 청도는 언제나처럼 씩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아까 ?어떤 싸가지 없는 놈?이 내 다리를 밟는 바람에 잠이 깨 버렸 지. 어떻게든 다시 잠을 자려고 눈을 감고 한참을 누워 있는데, 그 ?싸가 지 없는 놈?이 도대체 발을 얼마나 세게 밟았는지 잠이 몽땅 달아나 버렸 더라고. 뭐 죽어도 잠이 안 오니 별 수 있나. 일어나야지? ?그래서??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야. 바람이나 쐴 겸해서 밖으로 나왔는데, 어디서 이상한 소리들이 작게 들리더라고. 혹시나 해서 칼을 들고 뛰어온 거지. 뛰 어왔더니 왠 미친 놈 하나가 너한테 뛰어드는 게 보이기에, 볼 것도 없이 칼에서 힘을 끌어낸 뒤 탄복세로 찔러버렸고. 그런데 방금 전에 그 녀석은 누구냐? 혹시, 설마 그 중국옷 입은...? 청도는 마치 강조하듯이 ?싸가지 없는?이라는 말의 한 자 한 자에 힘을 주어서 말했고 나는 그만 슬쩍 웃고 말았다. ?응, 그 설마야. 스스로를 가리켜 황자 유천이라고 하더라? "그래? 그런데 왜 너를 공격한 거래?? ?그게...? 그런데 청도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뜨며 내 어깨를 툭툭 치더니 손가락으로 호수를 가리켰다. 왜 그러지? 난 고개를 갸웃하며 호수를 바라본 뒤 곧바 로 ?어이구?하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었다. 유천이 다시 비틀거리며 수면 위로 천천히 떠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유천은 호수 위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갑자기 세상이 떠나가라는 듯 크게 고함을 질렀다. ?끄아아아아악!? 저르르르릉-! 호수가 잔물결을 일으키며 떨었다. 그리고 유천은 우리를 향해 미친 듯이 돌진하기 시작했다. 물론 다시 물 속으로 빠르게 잠겨가면 서. 유천은 앞으로 나오면서 품속을 뒤져 짧은 단봉 두 개를 꺼내더니 그 걸 양손에 거꾸로 쥐었다. 청도는 유천이 천천히 물에 잠기면서도 맹목적 으로 앞으로만 나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야, 쟤 좀 무섭다? ?동감이야? ?뒤로 물러서? 청도는 바짝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고, 나는 휘청거리며 청도의 뒤로 물러 섰다. 유천의 눈에는 이제 광기마저 번들거렸다. 그 모습을 본 청도는 흠칫 하더니 다시 속삭였다. ?안 되겠다. 넌 그냥 우리 숙소로 뛰어라? ?하지만 다리에 하나도 힘이 하나도 없어, 그리고 어떻게 너 혼자 두고... 이건 내 일이라고!? ?내 일이던 니 일이던 옆집 아저씨 일이던 간에 숙소로 뛰라면 숙소로 뛰어라, 응? 저거 완전히 미친놈이잖아. 나 저런 거 상대할 자신 없단 말 야. 저런 거 잘못 상대하다간 이기더라도 살인난다고. 그러니까 내 말 들 어. 내가 시간을 벌 동안 도망치란 말야. 네가 숙소로 도망친 후에 나도 너 의 뒤를 따라갈 테니까. 알았지?? 청도는 다급한 듯 빠르게 말했다. 분명히 청도의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 었다. 그래서 나는 짧게 대답했다. ?싫어? 물론 자신이 시간을 벌 동안 도망치라는 청도의 말은 합리적이고 또 청도 가 원하는 바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떻게 나를 돕자고 온 놈을 버려놓고 도망을 치냐!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너무나 비겁한 짓이다. 나는 고개를 저 으며 조금이라도 힘을 모으기 위해 긴 호흡을 시작했다. 하지만 단전은 완 전히 텅 비어 있었다. 이런 젠장. 내가 계속 미적대자 청도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얼른 도망가라니까! 혹시 몰라서 하는 소리야, 혹시 몰라서! 내가 이길 수 있으니까 걱정 말고 도망치라니까!? ?니가 이길 수 있는데 내가 왜 도망을 치냐. 니가 이긴다면 내가 도망 칠 필요 따위는 전혀 없지. 안 그래?? 나는 청도를 향해 웃어 보였다. 하지만 내 웃음을 본 청도는 오히려 신경 질을 부렸다. ?니 멋대로 해라 임마!? 휘익- 마침내 호숫가에 다다른 유천은 다시 나를 치려고 했을 때처럼 도 약을 하며 머리 위로 오른손의 단봉을 치켜들었다. 봉 끝에 싯누런 기운이 잔뜩 뭉쳐 있었다. 유천의 왼손의 봉은 뒤로 틀린 채 허리에 감겨 있었다. 아마 머리와 허리를 동시에 칠 생각일거다. 아니면 오른손과 왼손을 번갈 아 휘두르며 정신없이 몰아붙이던지. 유천은 그대로 오른손의 봉을 청도의 머리를 향해 휘둘렀다. 부웅! 붕! 유천은 오른손과 동시에 허리에 감아서 잡고 있었던 왼손의 봉 역시 세게 휘둘러 청도의 갈비뼈를 노렸다. 따닥! 청도는 칼을 재빨리 좌우로 당겨서 양쪽의 공격을 모두 쳐내고 그 대로 발을 뻗어 유천의 가슴을 걷어찼다. 하지만 유천은 몸을 비틀어 피하 며 역으로 청도의 턱을 향해 왼손의 봉을 뻗었다. 청도는 몸을 살짝 왼쪽 으로 돌리는 것으로 그 공격을 가볍게 피하면서 칼을 들어 유천의 무릎을 향해 휘둘렀다. 부웅! 청도의 칼은 마치 농부의 풀을 베는 낫처럼 땅에 바 짝 붙은 채로 둥근 검선을 그렸다. 황자는 위로 뛰어서 피하며 그대로 양 손의 봉을 양쪽 어깨 뒤로 올렸다가 내리쳤다. 딱! 딱! 청도는 뒤로 튕기듯 물러서며 머리 위로 칼을 치켜들어 유천이 뿌린 양손의 봉의 공격을 막은 후 곧바로 칼을 빠르게 갈무리해와서 다시 유천을 겨누었다. 잠시 둘 다 숨을 고르는지 침묵이 이어졌다. ?핫!? 청도는 짧은 고함과 함께 빙글빙글 돌면서 유천을 연속적으로 베어나갔 다. 힘있고 빠른 공격. 유천은 청도의 매서운 공격에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 섰다. 청도는 그대로 튀어나가듯 한 발을 앞으로 뻗으며 칼을 비틀어 찔렀 다. 하지만 유천은 이번에도 다시 뒤로 펄쩍펄쩍 뛰어서 청도의 공격을 피 했다. 청도는 분하다는 듯 혀를 찼고 유천은 무표정한 표정으로 치븒;호흡 을 골랐다. ?꽤 하는데? 청도는 말을 마친 뒤 목검으로 유천의 목을 정확히 겨냥하며 곧게 섰다. 전혀 빈틈을 찾을 수 없는 자세. 하지만 유천에게는 어딘가 빈틈이 보였나 보다. 유천은 다시 양쪽 봉을 튼실하게 감아쥐더니 무어라 외치며 갑작스 레 청도를 향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의 주위에 마치 꽃이 만개 하듯, 눈발이 흩날리듯 수십개의 단봉의 잔영들이 맺혔다. 하지만 청도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유천이 접근함에 따라 칼을 무릎 옆으로 늘어뜨렸다. 이윽고 유천이 청도의 바로 앞까지 도착하자, 청도는 재빠르게 한 발을 내 딛으며 칼을 위로 끌어올렸다. 부욱! 세상에! 분명히 한 동작이었는데! 청 도는 단지 칼을 그어올리는 단순한 동작을 했을 뿐인데도 청도의 목검에서 순간적으로 수십 가닥의 칼날들이 불꽃처럼 터져 나오더니 유천의 단봉의 잔상들을 모조리 쳐내었다. 따다다다다닥-! 화려하게 뿌려졌던 유천의 봉 들은 모두 허공에서 허무하게 스러져 버렸다. 유천의 광기어린 얼굴에 한 가닥 당혹의 빛이 파고들었다. 청도는 칼을 멈추지 않고 계속 끌어올려 유 천의 턱을 후려쳤다. 뻐어억-! ?크으아아악!? 참으로 무지막지한 소리와 함께 유천은 허공에서 한 바퀴를 돌더니 땅에 처박혀 버렸다. 나는 재빨리 유천의 얼굴을 보았다. 유천은 입에 게거품을 물며 쓰러져 있었다. ?......괜찮겠지?? 나의 질문에 청도는 귀찮다는 듯 두 손을 마구 내저으며 대답했다. ?아 몰라몰라몰라몰라, 미친 개한테는 몽둥이가 약이라고 하니까 아마 상관없을 거야. 휴, 젠장! 십년 감수했네. 이 녀석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섬 뜩해서 죽는 줄 알았어! 누구든지 건들면 죽여버리겠다고 하는 듯한 그 눈 빛... 으, 끔찍해라. 어쨌든 그나마 유천이라는 녀석의 턱에 꽂히기 전에 분 명히 칼을 멈추었으니까 그렇게 심하게 다치지는 않았을 거야. 아깐 명치 를 제대로 찔리고 호수까지 날아가서 물 속에 처박혀 버렸다가 나왔는데도 멀쩡했잖아? 그런 걱정 말고 얼른 숙소로 돌아가기나 하자? 하긴, 해일을 정통으로 맞고도 멀쩡히 호수에서 기어 나오기도 했었지. 난 안쓰럽게 유천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천은 여전히 눈을 뒤집은 채로 기절해 있었다. 그런데 이거 그냥 이렇게 놔둬도 되는걸까? ?이거 뭐 깨워주던지 해야 되는 것 아냐?? 하지만 내 말에 청도는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크게 뜨며 대답했다. ?야, 너 지금 정신이 있는거냐,. 없는거냐? 저 놈이 깨어나서 뭘 하겠냐. 응? 보나마나 또 우리한테 죽기살기로 덤벼들걸?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 이제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저 녀석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어서 이 곳 을 뜨는 거야. 알겠어?? 청도는 나를 재촉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그런데 불현듯 어떤 사실이 내 발을 붙들어놓았다. 나는 한 걸음을 채 떼지 못한 채 발걸 음을 멈추고 흐릿하게 보이는 산너머를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세 발 까마귀는 어떻게 된 거지? 산 너머에서 갑자기 하늘을 찢는 듯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쿠롸라라아아아-!? ?삐이이이이이익!? 그건 세 발 까마귀와 응룡이 동시에 외치는 비명소리였다. 호통이나 기합 이 아닌 처절한 비명소리. 그리고 그 때까지 꾸준히 들려오던 세 발 까마 귀와 응룡이 맞부딪히며 나던 소리가 갑자기 뚝 그쳤다. 불현듯 주위는 불 안한 침묵으로 휩싸였다. 갑자기 세 발 까마귀와 응룡이 싸우던 곳의 하늘이 환하게 밝아지더니 홀 연히 적빛과 흑빛을 띈 두 줄기 기운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 두 기운은 평행선을 그리며 하늘로 솟다가 어느 순간 방향을 틀어서 나를 향해 빠르 게 날아왔다. 그 중에서 적빛 기운은 내가 미처 피하고 자시고 할 틈도 없 이 그대로 내 품에 꽂혀 버렸다. 파아아앗! 내 몸은 잠시동안 온통 자주빛 으로 물들었다. 세 발 까마귀의 패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는 기운의 흐름 을 느끼면서, 나는 직감적으로 세 발 까마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나를 빠르게 스쳐지나간 검은 빛 기운은 적빛 기운이 내게로 파고든 것처럼 빠르게 천류의 품속으로 빨 려 들어갔다. 나는 황급히 세 발 까마귀의 패를 꺼내 보았다. 세 발 까마귀 의 패는 저르렁거리며 떨고 있었다. 나는 세 발 까마귀의 패를 꽉 쥐었다. 지속적으로 들리는 진동음이 나로 하여금 불안감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분 명히 보통 일은 아니다! 나는 세 발 까마귀의 패를 잡고 조용히 물었다. ?저, 세 발 까마귀 님?? -...... 세 발 까마귀의 패는 묵묵부답이었다. 하지만 나는 다시 한 번 조심스레 세 발 까마귀를 불렀다. ?세 발 까마귀 님...?? -...... 내 부름에는 오직 침묵만이 대답하고 있었다. 난 일단 숙소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너무도 힘들었다. 지금 당장 숙소로 돌아가 이불 속에 푹 파묻 혀 쉬고 싶었다.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끌어 모으며 앞으로 한 발짝씩 나아갔다. 청도가 어느새 내 곁에 다가와 어깨를 빌려주었다.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숙소까지 갈 자신이 없었다. 나는 고마운 마음으로 청도 의 호의를 받았다. 아직 채 마르지 않은 옷들 사이로 바람이 스칠 때마다 온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어느새 주위의 하늘은 뿌옇게 밝아 있었다. 새벽 이었다. 호수에서 부서지던 별빛이 천천히 하늘로 돌아가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린 나와 청도는 잠에 취해 비틀거리며 동아리방의 문을 열었 다. ?요령아, 우리 왔다-? 동아리방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흠, 동아리방에는 아무 도 없는 것 같은데. 요령이는 도대체 어디로 간 거지? 자취방에 있나? 에 라, 너야 어딘가에 잘 있겠지. 얼마나 피곤한지 아무런 생각도 하기 귀찮았 다. 어서 잠을 자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 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나는 힘이 없어 휘청거리며 침실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그런데 발을 디딜 때마다 바삭거리는 소리와 함께 무엇인가 발에 밟힌다. 응? 이게 뭐지? 나는 바닥 을 바라보았다. 아무렇게나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빈 과자봉지가 내 발에 밟혀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바닥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빈 과자봉지가 한 두개가 아니었다. 나는 한숨을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발이 땅에 닿을 때마 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들이 내 귀에 거슬리게 울려 퍼졌다. ?젠장, 이게 다 뭐야...어휴...?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요령이 이 녀석, 내가 두고 간 돈으로 2 박 3일동안 뭐 거창한 거라도 하는가보다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신나 게 먹을 것 속에 파묻혀 살았나보군.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보니 책 상 위에도 온갖 종류의 과자봉지와 초콜릿 껍질 등이 이리저리 널려 있었 다. 어휴, 고양이가 깔끔하다는 것도 다 거짓말인가 보다. 여기가 사람 사 는 곳인지, 돼지우리인지...난 침실의 문을 열어 제꼈다. 침실 안에는 요령 이가 등을 하늘로 향한 채 얼굴을 베개에 파묻고 대자로 뒤집혀서 자고 있 었다. 맙소사. 저렇게 자면 불편하지도 않은가? 나는 요령이를 발로 툭툭 쳤다. 하지만 요령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요령이를 흔들어 깨 웠다. ?이봐, 아가씨, 일어나 봐. 자는 것도 좋지만...푸하하!? 요령이는 ?우음...'하는 짧은 잠꼬대와 함께 고개를 돌렸고 그 모습에 나 는 채 말을 잇지 못한 채 실소를 터뜨려야 했다. 요령이의 얼굴이 꽤 볼만 했던 것이다. 요령이는 입 주위에 초콜릿을 덕지덕지 묻힌 채 잠이 들어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엄마를 따라한답시고 마구잡이로 입술에 립스틱 을 발라서 결국 삐에로 입술이 되어 버린 꼬마를 보는 것 같았다. 도대체 얼마나 초콜릿을 먹으면 입술이 저렇게 되는거지?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요령이를 흔들었다. ?야, 일어나. 나 왔어. 그리고 좀 똑바로 자라. 불편하지도 않냐?? 요령이는 내가 계속 흔들어 깨우자 몸을 돌리며 부스스한 얼굴로 눈을 작 게 떴다. ?왔냐?? 그 말을 끝으로 요령이는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그래, 2박 3일만에 봐놓 고 하는 말이 고작 ?왔냐?냐? 나는 잠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긴, 잠에 취해 있는데 뭐가 보이겠어. 어쨌든 내가 깨우는 바람에 뒤집혀서 똑바로 누웠으니 목적달성은 한 셈이다. 나는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쭉 폈다. 요령 이의 세상모르고 자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안 그래도 쏟아지던 잠이 아예 무너져 내리며 눈꺼풀에 달라붙어 눈꺼풀을 아래로 잡아당기는 것 같 았다. 청도는 얼굴을 대충 헹구었는지 비틀대며 침실로 들어오더니 아무렇게나 담요를 하나 깔고 그대로 요령이 옆에 쓰러져 버렸다. 쿠당! 청도가 쓰러지 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며 나를 움찔하게 만들었지만 정작 청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청도에게도 분명히 어제의 싸움이 꽤나 힘들었을 것이다. 물 론, 청도가 나처럼 젖먹던 힘까지 다 내서 싸우거나한 것은 아니다. 내 말 은, 광기어린 상대와 싸우면서 생긴 정신적 압박감이 힘들었을 거라는 소 리다. 나도 담요를 하나 가져와 청도의 옆에 깔았다. 담요의 무게가 새삼스럽게 무겁게 느껴졌다. 담요 한 귀퉁이를 펴는 데 갖은 힘을 다해야 했다. 간신 히 담요를 폈다. 나는 천천히 앉은 뒤 청도 옆에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하지만 너무 피곤하면 오히려 잠이 들지 않는다고 했던가? 감은 눈꺼풀 아래에서는 초록빛 별들만이 쉴새없이 깜박거릴 뿐 잠은 쉽사리 오지 않았 다. 도대체 눈꺼풀 아래에 매달려 있던 잠들은 다 어디로 달아난거지? 하 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해서 일어나고 싶지는 않다. 피곤해서 몸을 일으 키는 것조차 죽도록 귀찮은 것이다. 그래. 눈을 감고 이것저것 생각하다보 면 금방 잠이 들 테지. 나는 천천히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세 발 까마귀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얼마나 많이 다쳤을까?? 나는 심드렁한 얼굴로 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내 옆에 앉아있는 청도에 게 물었다. 차창 밖에는 도로공사로 인해 파헤쳐진 산들의 풍경이 뒤쪽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잘 모르겠어. 최소한 턱뼈에 금 정도는 갔을 것 같은데...? 청도는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다 이윽고 조심스레 추측했다. 아 니, 뼈가 부서져라 친 녀석은 넌데 니가 얼마나 다쳤을지 추측을 못하면 누가 그걸 추측 할 수 있겠냐? 나는 어이가 없어서 청도를 바라보았지만 청도는 오히려 그런 걸 알기를 바라는 내가 더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향 해 짧게 말했다. ?니가 한 번 쳐봐라. 그게 되나. 너는 펀치머신 치면서 몇 백점 나올지 알고 치냐?? 으음, 할 말 없군. 청도의 타박에 나는 다시 차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 득 유천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유천은 우리가 떠난 뒤 세 시간 쯤 지난뒤에 비척거리며 자기 발로 걸어 서 숙소로 돌아왔다. 나와 청도는 유천이 길길이 날뛰며 우리를 죽이려고 하지 않을까하는 불안감에 휩싸여 몸을 떨었다. 하지만 유천은 예상 외로 조용했으며 나와 청도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가끔씩 몇 명이 유천 에게 어디에 갔다왔느냐고 타박하듯, 혹은 걱정하듯 물었지만 유천은 입을 한 일자로 다문 채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얌전한 유천의 모 습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버스에 올라탈 때였다. -마음 단단히 먹어라. 언젠가는 내가 너희들을 죽여버릴테니. 뱀이 쉭쉭거리듯 차갑고 나직하게 속삭이는 유천의 목소리가 마음 속으로 들려왔고 나와 청도는 엄습해오는 섬뜩함에 몸을 떨어야 했다. 유천의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창 쪽으로 앉았기 때문에 우리보다 약간 뒤 쪽에 앉은 유천의 얼굴을 보기란 불가능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청도에게 물었다. ?야, 유천이 지금 뭐하냐?? ?그냥 창문에 이마를 기대고 멍하니 밖을 보고 있는데? 잠은 자지 않는군. 우리가 혹시 습격이라도 할까봐 불안한걸까, 아니면 얻 어맞은 턱이 아파서 잠이 들지 못하는걸까? 하지만 얼굴에 아픈 내색은 전 혀 없었다. 하다못해 고통을 참는 표정이라도 지어야 할 텐데 말이다. 뭐, 잠을 자던 말던 그건 저 녀석이 해야 할 일이게지. 나는 다시 차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문득 세 발 까마귀에게 생각이 미쳤다. 세 발 까마귀는 도대체 어젯밤에 무슨 일을 당한 것일까. 불러도 아무런 대답이 없는 것으로 봐서는 분명히 무슨 일이 생기긴 생긴 것 같은데말야. 혹시 크게 다치기라도 한 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나는 차창에서 고개를 돌려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 때였다. 갑자기 세 발 까마귀 의 패에서 나직하게 진동음이 울려 퍼졌다. 나는 순간적으로 윗몸을 번쩍 일으켰다. 세 발 까마귀가 나를 부르고 있다! 나는 급히 손을 품속에 넣고 더듬었다. 이윽고 부드럽게 진동하는 세 발 까마귀의 패가 나의 손에 잡혔 다. 그리고 나의 마음 속으로 이제는 친숙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오랜만이군. ?안녕하세요? -그래. 이렇게 인사를 다시 할 수 있는 걸 보니 다행히도 어제는 어떻게 잘 버텨내었나 보군. ?예, 친구의 도움으로...? -다행이야. 자네나 나나 어제는 정말 큰일날 뻔 했네. 설마 응룡을 부릴 수 있는 사람이 아직도 있을 줄이야... 세 발 까마귀는 응룡이 나타났던 그 때를 생각하는지 말 끝을 흐렸다. ?세 발 까마귀님은 괜찮으십니까? -...사실 별로 괜찮지 않다. 응룡이 그렇게 만만한 상대는 아니라서...거기 에 지긋지긋할 정도로 끈질기기까지 하더군. 자부심 강한 세 발 까마귀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정말로 힘들었다는 소리 다. 나는 새삼스레 걱정이 되었다. 도대체 얼마나 지독하게 덤벼들었으면 지긋지긋할 정도로 끈질기다고 하는 것일까. ?그래서 많이 다치신 건가요?? -다쳤다라...다쳤지. 하지만 사실 다친 것은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는 않 아. 상처는 몸의 기를 가다듬으면 금방 나으니까 말이다. 문제는 말야... 세 발 까마귀는 잠시 말을 끊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내가 이 패 안에 봉인되어 버렸다는 거다. ?예?? 나는 잠시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를 못했다. 아니, 패 안에 봉인되어 버렸 다니? 세 발 까마귀 당신은 원래부터 패 안에 봉인되어 있었잖아! 이제 와 서 새삼스럽게 그게 무슨 소리야? ?그게 무슨...잘 이해가 안 되는데요? -말뜻 그대로다. 세 발 까마귀 안에 완벽하게 갇혀버렸어. 이제 더 이상 나를 필요로 할 때 너를 도와줄 수 없을 것 같다. ?예? 그, 그게 무슨...어째서...? 나는 당황한 목소리로 더듬거리며 말했고 세 발 까마귀는 천천히 설명했 다. -싸움이 힘들긴 했지만, 어쨌든 난 간신히 응룡에게서 싸움의 우세를 점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싸움이라는 게 다 그렇듯이, 한 번 밀어붙이기 시작 하니까 빠른 속도로 내 쪽으로 유리해졌지. 그런데, 응룡은 나한테 질 것 같으니까 독한 방법을 쓰더군. 자신을 스스로 ?응룡의 문장?안에 봉인하 면서 나까지 ?세 발 까마귀의 패?안에 봉인해버리는 독한 주술을 쓴 것 이지. ?그럼 이제 밖으로는 절대 나오지 못하는 건가요?? -...그렇다.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자기를 희생해서 건 주문이라서 그런지 도저히 풀리지 않는군. 감옥의 주문을 건 것 같은데...파옥의 방법을 도저히 모르겠으니. 별 도리 없이 이 안에 계속 갇혀 있을 수밖에.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하나다. 난 이제 더 이상 세상에 현신할 수가 없다. ?......그럼 언제까지 갇혀 있어야 하는거죠?? -잘은 모르겠지만...이대로라면 영원에 가까운 세월이겠지. 이럴수가...억겁의 세월 동안 계속 패 안에 갇혀서 지내야 한다니! 괜히 세 발 까마귀에게 미안해졌다. 따지고 보면 나를 지키기 위해 패 속에서 나왔 다가 이런 봉변을 당해 버린 것 아닌가. ?어쩌죠? 나 때문에...그 안에 갇혀서...? -상관없다. 어차피 수 천 년 동안 이 안에서 살았으니 적응도 되었고. 게 다가 이 안은 좁은 공간이 아니라 또 다른 차원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 그 러니 내가 갇혀서 답답하면 어쩌나하는 걱정은 하지 말도록. 나는 오히려 네가 걱정이다. 가뜩이나 힘도 없는 녀석인데 내가 보호조차 해주지 못한 다니...더구나 이제 너를 직접 노리는 사람도 나타났고...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세 발 까마귀는 수심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고 나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세 발 까마귀는 이 상황에서도 나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세 발 까마귀는 내게 충고하듯 조용히 말했다. -마음을 굳게 먹어라. 그리고, 내가 나가지 못해도 너를 도울 방법은 아직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예? 그게 무슨...? 세 발 까마귀의 말에 나는 의아해져 되물었고 세 발 까마귀는 천천히 자 신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설명했다. -일단 봉인이 되어 있다고는 해도 내 힘을 전도체를 통해 전달하는 데에 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내공이 낮은 너를 위해 내가 나의 힘을 개방해 서 너에게 빌려주지. 그리고 하늘에 너를 도와주십사 기원해 보겠다. 나도 그래도 신수의 위치에 올라있으니, 하늘도 내 기원을 아주 무시하지는 못 할 것이다. ?네? 세 발 까마귀님이 나의 내공이 된다고요?? -그래. 더욱 쉽게 말하자면 내가 너의 연료통이나 총알상자쯤이 되어주겠 다는 거지. 물론 그래봤자 어차피 너의 몸의 한계가 워낙 낮아서 네가 감 당할 수 있는 기운의 크기는 얼마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이제 힘을 쓰다가 지치는 일은 없을 테지. ?잘 이해가 안 되는데요...? -쉽게 말하지. 수도관이 있고 수도가 있다. 옛날의 너는 가는 수도관이고 너의 힘은 물 한 양동이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니 물도 가늘게 흐르 는데다가 지속적으로 흐르지도 못했지. 하지만 이제 내가 너를 위해 호수, 아니 바다가 되어 주겠다. 흐르는 물의 크기는 여전히 가늘지만, 더 이상 물이 고갈되어 버리는 없을 것이다. 대충 이해가 되는가? ?조금...요. 음...한 마디로 강력하게 힘을 쓸 수는 없지만 꾸준히 힘을 쓸 수는 있다는 것인가요?? -그래. 이해했군. 이게 내가 도울 수 있는 최선이다. 그러니까 너는 무한 에 가까운 나의 힘을 어떻게 하면 잘 이용할 수 있을지 그것이나 고민해 보도록. ?예...? 뭐, 이번처럼 힘이 쭉 빠져서 텅 빈 보릿자루처럼 축 늘어져 버리는 일은 없을 거라는 이야기로군. 그게 어디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생각해보 면 어차피 세 발 까마귀가 나를 돕겠다고 현신한 적은 어제가 처음 아니었 던가. 오히려 이제 끊임없는 힘을 얻었으니 그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힘을 끌어다 쓰려면 어떻게 하면 되죠?? -간단하다. 손으로 패를 잡고, 패에서 느껴지는 힘을 쭉 끌어다 단전에 갈 무리하면 된다. ?예? 그러면 힘을 채울 동안은 한 손을 쓰지 못하는 건가요??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 하지만 그 정도는 감수하도록. 어쩔 수가 없지 않나. ?예에...? 물론이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옆에서 청도가 나 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무리도 아닐 테지. 청도가 보기에는 내 가 지금까지 혼자서 허공에 중얼거린 것으로 보였을 테니. 나는 ?지금까 지 세 발 까마귀와 이야기했어?라고 청도에게 말해 주려다가 청도가 묻지 도 않았는데 대답하면 왠지 더 이상한 놈으로 보일것 같아서 대답 대신 눈 을 감고 잠을 청했다. 달리는 버스의 소리가 부드럽게 내 귀를 달랬다. 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뜨으으아아아아-? 천천히 눈을 떴다. 버스 안에서의 세 발 까마귀와의 대화를 떠올리다 어 느 새 잠이 들었나보다. 기지개를 쭉 펴며 몸을 일으켰다. 내 옆에는 청도 가 몸을 잔뜩 옹송그린 채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그 옆에는 요령이가 여 전히 대자로 퍼질러져 있었다. 킥. 나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초콜릿으로 칠갑을 해 놓은 입술이 아무리 봐도 우스웠던 것이다. 나는 부스스 일어서 서 화장실로 향했다. 대충 찬물로 얼굴을 헹구고 나오는데 문 열리는 소리 와 함께 가람이가 동아리방으로 들어왔다. ?잘 다녀왔냐?? 나는 가람이에게 눈짓하며 인사했고 가람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 했다. ?응. 그럭저럭. 주인은? 재미있었나?? ?재미있긴 개뿔. 죽는 줄 알았지? ?뭐?? 가람이는 내 대답이 예상 외였는지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바라보았고 나 는 가람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별 것 아닌 척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런 게 있어. 이따가 말해줄게. 그런데 실력은 많이 늘었어?? ?뭐, 2박 3일동안 해봤자...? 가람이는 수련 결과가 별로 신통치 않은지 말끝을 흐리며 화장실로 들어 갔다. 나는 다시 한 번 기지개를 켜서 찌뿌둥한 사지를 풀어주며 책상에 주저앉았다. 눈앞에 뜯겨진 과자봉지가 내용물을 절반 정도 채워 놓은 채 로 놓여 있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과자에 손을 뻗으며 버스 안에서의 대 화를 다시 떠올렸다. -너를 위해 기원하지. -일단 나의 힘을 끌어다 쓰도록. 세 발 까마귀의 마음씀이 참으로 고마웠다. 그런데 나를 위해 기원하겠다 고? 도대체 뭘 어떻게 해달라고 누구에게 기원하겠다는 걸까? 세 발 까마 귀는 추상적으로 ?너를 위해 하늘에 기원하마? 정도로만 설명했었다. 창 밖을 바라보았다. 이미 주위는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문득 배에서 꼬르륵거 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나는 쓴웃음과 함께 손에 한 움큼 쥐어 입으로 가져가던 과자들을 다시 과자봉지 안으로 넣고 하나만 집어서 입으로 가져 갔다. 배가 고파서였는지 지금까지 나도 모르게 과자를 입으로 쓸어 넣다 시피 하고 있었다. 하긴, 도착하자마자 드러누워서 지금까지 계속 밥도 굶 고 잠만 잤으니 배가 고프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과자를 한 개 더 집어 입으로 가져가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요령이 저 녀석은 배도 안 고픈가?? 분명히 요령이는 나보다도 먼저 잠을 자고 있었는데. 혹시 저 녀석도 나 처럼 점심도 굶고 자는 것이 아닐까? 아냐. 생각해보니 요령이가 밥때를 그냥 지나보낼 위인인가? 아니지, 암. 아니고 말고. 요령이의 끼니를 걱정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겠지. 나는 다시 과자를 집어들었다. 입 속에 서 과자가 바스락거리며 부서졌다. 갑자기 품 속에서 나직한 웅얼거림이 들려왔다. 세 발 까마귀가 나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의아해하며 품속 으로 손을 넣어서 세 발 까마귀의 패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무슨 일이죠?? -준비하라. 온다. 밖으로 나가라. ?예?? -어서! 세 발 까마귀는 갑자기 왜 불렀는지, 뭘 준비하라는 건지, 뭐가 온다는 건 지, 왜 나가라는 건지 등등의 이유를 전혀 설명하지 않은 채 나를 몰아붙 였다. 아니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세 발 까마귀의 강압적인 태도가 조금 불만스러웠지만 일단 무슨 이유가 있어서 한 말이리라 생각하고 품속에 손 을 넣은 채 몸을 일으켜 동아리방 밖으로 나갔다. -잔디밭의 가운데까지 가자. 세 발 까마귀는 나를 재촉하여 잔디밭의 가운데에 서게 했다. -이제 하늘을 봐라. 나는 세 발 까마귀의 말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머리 위에 서 펼쳐지는 놀라운 광경에 숨가쁜 탄성을 내뱉었다. ?맙소사...? 눈에 띌 정도로 두껍고 커다란 기류가 하늘을 온통 뒤덮은 채 펼쳐져 내 머리 바로 위에 있는 하나의 점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내 기원이 치우제에게 닿았다. 세 발 까마귀는 이렇게만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이봐요! 세 발 까마귀님! 이렇게 갑작스럽게...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죠? 예?? 그런데 세 발 까마귀는 내 질문에 대답 대신 자주빛 기운을 바깥으로 내 뿜었다. 아마도 세 발 까마귀가 힘을 쓰려는 것인가 보다. 세 발 까마귀의 자줏빛 기운이 퍼져 나가는 모습은 이제 나에겐 상당히 익숙해진 광경이지 만, 또한 언제 봐도 환상적인 광경이기도 하다. 내 몸의 이곳저곳에서 붉게 스며 나오는 자주빛 기운은 천천히 일렁이며 내 몸 주위를 휘감다가 갑작 스레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파아앗! 나에게서 하늘에 펼쳐진 기류의 중심 점까지 자주빛 선이 그어졌다. 곧이어 묵직한 떨림과 함께 갑자기 기류들 이 하늘을 울리기 시작했다. 자주빛 선이 뻗어나갔던 것과 반대의 순서로 다시 내 품 속으로 들어와 갈무리되었다. -뒤로 물러서라. 세 발 까마귀의 말에 난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불현듯 파아앗! 하는 소리 가 들리며 하늘에서 순백의 빛이 방금 내가 서 있던 장소로 떨어졌다. 난 눈부신 빛의 기둥에 눈살을 찌푸리며 손으로 차양을 만들었다. ?저게 도대체 뭐죠...?? 백색 기둥의 한가운데에서 무언가 쉬이이익! 하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빠른 속도로 땅을 향해 쇄도했다. 휘리리릭! 공기를 감는 소리와 함께 떨어진 그것은 이윽고 무서운 기세로 잔디밭에 꽂혔다. 푸우욱! 흙을 파고 드는 묵직한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백색 기둥은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땅에 꽂히자마자 지금까지의 몇 배의 빛을 붐어내며 그대로 허공에서 부서 져 버렸다. 파아아앗-! 수 만 개의 빛가루들이 하늘로 흩어졌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알 수 없이 일렁이던 기류는 어느 새 사라져 있었다. 방금 전에 하늘에서 떨어진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하늘에서 떨어진 무언가?를 보기 위해 천천히 다가갔다. ?뭐야, 그냥 막대기잖아?? 어느새 내 뒤에 서 있던 가람이가 묘한 실망감이 섞여 있는 목소리로 중 얼거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가람이의 막대기라는 말에 동의하며 그것을 뽑았다. 음, 막대기인 줄 알았던 그것은 뽑아놓고 보니 목검이었다. 칼자루가 하늘 로 솟아 있어서 막대기인 줄 알았지, 뭐. 내 손에 들린 목검은 일반 목검보 다 조금 짧았으며 특이하게도 날이 양날이었고 상당히 가벼웠다. 나는 하 늘에서 떨어진 그 목검을 두 손에 올려놓고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칼자루 의 끝에 무어라고 씌여 있었다. 이건 한글 같기는 한데 한글도 아니고...문 자가 아니라 그저 단순히 보기 좋으라고 새겨놓은 문양인가? ?치우한님의 칼...이라고 씌여 있군? 가람이가 뒤에서 어깨너머로 칼자루에 쓰여진 단어를 읽은 모양이었다. 그래? 치우한님의 칼이라고? 아니, 그것보다 너 이걸 읽을 수 있어? ?너 이걸 읽을 수 있는거야? 이게 글자는 글자인가 보네?? ?그렇다. 이건 까마득한 옛날 이 땅에서 쓰던 글자이지. 내 옛 주인 상환 이 고대의 책을 공부하느라 그 문자를 익힐 때 옆에서 어깨너머로 같히 익 혔지. ?그래...?? 한 마디로 옛날의 글이란 말이지. 그렇다면 최소한 이 물건은 이 글이 쓰 일만큼 오래 전에 만들어졌다는 말이 되는군. -흠, 치우한님이 대단한 물건을 보냈군. 목검과 겹쳐 잡은 세 발 까마귀의 패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흠, 그래? 이게 그렇게 대단한 물건이라고? 내 눈에는 그저 평범한 목검으 로 보이는데. 나는 검을 다시 한 번 훑어보았다. 분명히 생김새는 그렇게 특별할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혹시 어마어마한 기가 담겨져 있나? 그래, 아마 그럴거야! 나는 기대감에 부풀어 기감을 느끼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 다. 하지만 ?치우한님의 칼?이라는 이 목검에서 특별한 기운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실망감을 느끼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뭐야, 기운조 차 깃들어 있지 않다면 도대체 이게 여느 목검과 다른 점이 뭐야! ?이걸 누가 준 거죠?? -치우한님이. 아무리 해도 하늘까지는 내 기원이 닿질 않더군. 내가 봉인 이 되어서인지, 아니면 아무리 나의 부탁이라도 사사로운 기원은 듣지 않 겠다는 건지...그래서 세 발 까마귀의 패 속에 펼쳐진 차원의 일부를 꺾어 만든 ?처음의 삼사의 세상?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서 너의 사정을 이야 기하고 당신들의 후계자를 지켜달라고 부탁을 하니 삼사들이 치우를 설득 해서 최대한 너를 돕게 만들겠다고 자신만만하게 대답 하더군. 하지만 설 마 치우한님이 자신의 칼을 직접 내 줄 줄이야. 삼사의 언변이 대단한 건 가, 아니면 치우한님이 너를 지켜야되겠다는 생각이 그렇게 큰 건가? 아니 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세 발 까마귀의 설명이었다. 세 발 까마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얻느라 세 발 까마귀도 꽤나 고생하셨나 보군.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 하고 이게 내게 큰 도움이 될 거라는 세 발 까마귀의 말에 쉽게 수긍하기 는 힘들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이건 그냥 평범한 목검일 뿐이라고! 나는 목검을 이리저리 휘둘러보았다. 역시 여느 목검보다 가볍다는 것 말고는 특별한 점이 없었다. -그건 그 자체로서 무기가 되지는 않는다. 오직 주인이 어떻게 그 칼을 이용하는가, 그리고 주인이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서 최강의 무기가 될 수도, 단지 막대기가 될 수도 있지. 사실 그건 칼이라고 할 수도 없다. 단지 이름이 그렇게 붙은 것일 뿐. 사용법을 알려주지. 칼에 힘을 가해라. ?예?? -칼에 힘을 가하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칼에 힘을 가했다. 부우욱- 귀를 자극하는 소리와 함께 ?치우한님의 칼?로 힘이 스며들어갔다. 다음 순간, 칼이 빛을 뿜었 다. 가람이가 작은 감탄사를 냈다. ?음?? -그 칼은 칼이라기보다는 기를 담는 그릇에 가깝지. 그 칼에 담은 힘은 그대로 상대방을 치는 무기가 될 수 있다. 따라서, 무한대의 힘을 담을 수 있다면 무한대의 위력으로 상대방을 칠 수 있는 거지. ?예?? 세 발 까마귀의 설명을 들으며 점점 내 손에 들린 목검을 바라보는 나의 눈빛이 실망에서 감탄으로 바뀌어 갔다. 만약 세 발 까마귀의 말이 사실이 라면 이건 정말 대단하다! 세 발 까마귀의 힘을 고스란히 들어와서 모조리 칼에 담는다면? 그 위력은 정말 대단할 것 아닌가! 나는 ?화-?하는 탄성 과 함께 그 칼을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칼은 계속해서 영롱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너무 좋아하지 마라. 네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다. 아마도 나의 힘을 그대로 들어다가 칼에 담으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겠 지. 하지만 나의 힘은 전적으로 너의 몸을 통해서만 저 칼로 담길 수 있고, 따라서 실제로 칼에 빠르게 담을 수 있는 힘의 양은 너가 평소에 내는 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전에도 말했지만, 아무리 바다로 수도관이 연결되어 있고 물그릇이 어마어마하게 크면 뭘 하는가. 수도관이 가늘다면 아무런 쓸모가 없는거지. 아마 네가 저 칼로 큰 위력을 가진 공격을 하려면 한참 은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붕 뜨는 나의 기분에 찬물을 끼얹는 세 발 까마귀의 말에 나는 다시 어깨 를 축 늘어뜨리며 실망해 버렸다. 어휴, 뭐든지 쉬운것이 없군. 세 발 까마 귀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제 그 칼에 다시 기를 가한 뒤 칼을 양쪽으로 잡아당기면서 네가 사용 하고 싶은 무기를 상상해 보아라. 창이면 창, 봉이면 봉, 활이면 활... 나는 세 발 까마귀의 패를 잡은 손으로 칼끝을 겹쳐 잡고 기를 가해 쭉 잡아당기며 세 발 까마귀가 말하는 대로 마음속에서 창의 모습을 그렸다. 창이 되어라! 그러자 갑자기 칼이 둥근 빛덩어리로 변하더니 쭉 늘어났다. 윽? 나는 놀란 눈으로 내 손에서 일어나는 치우한님의 칼의 변화를 지켜보 았다. 긴 빛덩어리에서 천천히 빛이 옅어져갔다. 그리고 나는 헛숨을 삼켰 다. 방금 전까지 분명히 목검이었던 치우한님의 칼이 어느 새 긴 목창으로 변해 있었다. 나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맙소사...? ?정말 대단하군...? 이건 가람이의 중얼거림이었다. -아까도 말했듯이, 치우한님의 칼은 무기가 아니라 기를 담는 그릇이다. 그 그릇에 담긴 기운의 효율적인 사용을 위해, 치우한님의 칼은 자신의 모 양과 쓰임새를 얼마든지 바꿀 수 있지. 어때, 이 정도면 좋은 무기인가? 이 제 이것을 얼마나 잘 사용할 수 있는지는 네가 알아서 할 일이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조력은 여기까지이다. 무기를 얻어 주었고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힘을 줄 테니, 앞으로는 너 자신을 알아서 보호하도록.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치우한님의 칼, 아니 창을 정신없이 훑어보았다. 무 엇으로든지 변할 수 있다고? 그럼 이건 어때? 나는 기를 가해 잡아당기면 서 외쳤다. ?총!? 내 손 안에서 뭉친 치우한님의 칼은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길쭉한 빛덩어리로 변하더니 점차 줄어들어서 이윽고 미끈한 총의 형상을 갖췄 다...라고 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으랴마는 참으로 빌어먹게도 이 칼은 총같이 복잡한 물건으로는 변할 수 없는 모양이다. 에이, 좋다 말았네. 그 렇다면 이건 나한테 그렇게 큰 쓸모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어떤 병 장기의 사용법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 때 갑자기 내 머릿속에 떠오른 어떤 생각이 있었다. 이건 기를 담는 그릇이랬지? 그리고 분명히 어떤 무기로도 변할 수 있댔지? 그럼 이건 어때? 나는 두근대는 가슴으로 마음속으로 어 떤 것을 그리며 외쳤다. ?기를 쏘아낼 수 있는 봉!? 치우한님의 칼, 아니 창은 빛을 뿜더니 잠시 후 봉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나는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봉을 들어올려 힘을 가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봉의 끝에서 기의 덩어리가 엉기더니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피융- 텅! 기 의 덩어리는 저 멀리 나무에 부딪혀서 나무를 부르르 떨게 하며 사라졌다. 우와! 이런 건 되는구나! 문득 제임스의 봉이 떠올라 그냥 밑져야 본전이 라는 생각으로 해 본 것인데, 예상 외의 수확을 거둔 것이다. 나는 벅찬 가 슴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다시 한 번 무언가를 상상했다. ?힘을 가하면 방어막이 쳐지는, 반짝반짝이라고 말하면 빛을 내는 단단 한 목검!? 입까지 작게 벌리며 내 무기를 멍하니 보고 있던 가람이가 내 말에 피식 웃었다. 난 가람이와 요령이가 개조해준 청도의 목검을 만들어보려 한 것 이다. 곧 봉이 빛을 내뿜으며 줄어들어 치우한님의 칼의 본 모습보다 조금 긴, 보통의 목검의 형태로 변했다. 나는 천천히 입을 떼었다. ?반짝반짝...? 파아앗! 검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며 나는 쾌재를 불렀 다. 이거, 정말로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물건이구나! 쓰임새가 정말 무궁무 진하겠어! 가람이가 내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정말 놀라운데. 그런 강한 무기를 갖게 된 걸 축하해, 주인? ?응, 고마워. 이거 정말 대단하지? 너도 한 번 해볼래?? 나는 기쁨을 감추지 않고 활짝 웃으며 가람이에게 칼을 건네었다. 하지만 가람이는 손을 흔들며 사양했다. ?아, 아니다. 주인의 물건에 어떻게 감히...? ?아냐, 해 봐? 나는 목검을 가람이에게 억지로 떠넘겼다. 아까 가람이가 치우한님의 검 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본 까닭이었다. 가람이는 두 번 세 번 사양했지만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내게서 칼을 받아들었다. 자식, 관 심을 보인 것 뻔히 아는데 빼기는. 가람이는 방금 전까지 짓던 난처한 표 정은 다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어느새 호기심 어린 눈으로 칼을 바라보고 있었다. ?힘을 가하면서 네가 원하는 무기를 마음 속으로 상상하고 말해봐? ?......환두대도!? 그러나 검은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가람이는 쓰게 웃으며 내게 칼을 넘겼다. 나는 가람이에게서 칼을 받아들으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환두대도? 그게 뭐야? 너무 어려워서 못 변하는 거 아냐?? ?아냐. 환두대도는 옛날 이 땅에서 보편적으로 쓰던 검이야. 치우한님의 칼의 맨 처음의 모습 있지? 약간 짧은 양날검 말야. 그게 환두대도의 모습 이지. 내가 하니까 본 모습으로 조차 변하지 않는걸 보니, 이건 아마도 주 인에게만 반응하는 모양이다? 가람이는 아쉽다는 듯 대답했다. 그런가...그러니까, 한 마디로 이건 내 칼 이란 말이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갑자기 기분이 마구 좋아졌다. 이런 멋진 칼이 내 거라니! 세 발 까마귀님, 이런 걸 얻어다 줘서 고마워요! 치우한님 이라고 해야 할 지 치우님이라고 해야 할 지 헷갈리지만 어쨌든 이런 걸 내게 선뜻 넘겨 준 그 분도 고마워요! 아하하! 기분 끝내준다! 어두컴컴한 벌판. 주위에는 자욱한 안개가 껴 있었다. 안개는 마치 질감을 가진 듯 뭉클대면서 천천히 이리저리 흐르고 있었다. 눈 앞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둡지도 않고 밝지도 않은 이상한 세상. 끈적끈적한 안개 의 느낌에 왠지 숨을 쉬는 것이 답답하고 불편하게 느껴졌다.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불현듯 안개 너머로 흐릿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대비하라... ?예?? 나는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안개에 이리저리 흡수되고 굴절되어서인지 탁하고 억눌린 듯 변해서 내 귀로 스며들었다. -대비하라... ?아니, 그게 무슨...??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물었다. 대비하라니,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언제, 왜 대비하라는 것인가? 그림자의 말은 끊어질 듯 끊어질 듯 끊어지 지 않고 아련하게 이어졌다. -내가 너에게 나의 칼을 준 것은 너를 어여삐 여겨서도 아니오, 이미 망 해버린 나라의 정통성 따위를 지키기 위해서도 아님이니...내가 너에게 나 의 칼을 준 것은 오직 너의 앞길에 펼쳐질 길...그 길을 헤쳐 나가는데 조 금이라도 도움을 주기 위함이다...대비하라. ?예?? -대비하라. 항상 마음을 곧게 먹어라. ?그게 무슨...? 잠깐, 나는 방금 전 그림자가 길고 느릿하게, 하지만 위엄있게 내게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그림자는 분명히 ?내가 너에게 나의 칼을 준 것은…? 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 그림자의 정체는 혹시… ?당신은 치우한님이십니까?? 그림자는 나의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어하는 말만 늘어놓 았다. -대비하라. 항상 마음을 곧게 먹어라. 무엇이든 헤쳐 나갈 수 있다는 믿음 을 가져라. 너는 강하다는 신념을 품어라. 이제 곧 너는 세상의 운명이 걸 린 소용돌이의 한 가운데 팽개쳐질 것이다. 하지만 걱정 마라. 옳다면, 이 긴다. 이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진리이다. 이 진리를 믿어라. 아 무리 힘들더라도 세상에 정해진 운명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믿어라. 그 리고 네게 펼쳐질 고통을 견뎌라. 도대체 무슨 소리야! 나는 안타까워하며 치우한님을 향해 소리쳤다. ?무슨 말씀인지 설명을 해주세요! 답답해 죽겠네요, 정말!? -견뎌라. 견디고, 헤쳐 나가라... 이 말을 끝으로 벌판도, 안개도, 그리고 안개 뒤의 그 그림자도 천천히 스 러져갔다. ?이, 이봐요! 이봐요! 잠깐만요! 도대체 저보고 뭘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 세요? 작은 실마리라도 -세상의 운명…열쇠를 보호하라…세상이 파멸로 흐르는 것을 막아야 한 다…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림자는 완전히 사라지고 단지 목소리이 아스라이 남아 나의 귀를 맴돌 았다. 세상의 운명…열쇠라…파멸로 흐르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반사적으로 시계를 보았다. 5시. 아직 시간은 신새벽이다. 나는 숨을 몰아 쉬며 무의식적으로 이마를 훔쳤다. 손등에 땀 이 묻어났다. 땀으로 흠뻑 젖은 등이 기분 나쁠 정도로 축축했다. 나는 꿈을 떠올렸다. 현실처럼 너무나 생생했던 그 꿈. 내 머리맡에는 치 우한님의 칼이 놓여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꿈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아니 면 치우한님이 꿈을 통해서 내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했던 것일까? 도대체 뭘 대비하라는 걸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내 앞에 펼쳐질 길? 소 용돌이의 한가운데에 던져진다고? 그림자의 말에 따르면 분명히 그 그림자 는 치우한님이 맞는데…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꿈을 다시 한 번 떠 올렸다. ?-세상의 운명…열쇠를 보호하라…세상이 파멸로 흐르는 것을 막아야 한 다…무슨 일이 있더라도…? 세상의 운명? 열쇠를 보호하라? 세상이 파멸로 흐르는 것을 막아야 한다 고? 누가? 내가? 나는 어둠에 가리워져 흐릿하게 윤곽만이 보이는 손바닥 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손바닥에서 한줄기 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문득 청도의 아버지가 청도에게 했다던 말이 꿈에서 그림자가 내게 한 말과 함께 뒤죽박주으로 뒤섞여 머릿 속을 맴돌았다. ?난 네가 다섯 살 때 너의 미래를 보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보지는 못했다. 왜인지는 도저히 모르겠지만, 너의 미래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 지만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그 많은 '소리'들...? ?너는 검을 배워야 한다.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 대비해야 해. 누군가 대 비하지 않으면 모두가 비참해질 것이야. 그래서 나는 너로 하여금 미래를 대비하려 한다. 나는 소리를 들었다...보지는 못했지만 너의 미래를 통해 세 상의 미래를 들었다. 미래를 들은 이는 어쩌면 나 하나일지도 모른다. 그러 므로 나라도 대비를 해야만 하겠다. 만약, 아무도 대비하지 않는다면 결국 모두 비참해질 것이다. 너를 포함한 모두가? 오늘도 땅에 굳게 붙박혀 있으려고 하는 발걸음을 억지로 돌려 강의실로 향하는 지리한 일상이 반복되고 있다. 점심시간을 겸한 공강시간동안 따뜻 한 4월의 햇살을 잔뜩 받으며 잔디밭에 드러누워 늘어지게 낮잠을 잔 나와 청도는 수업시간이 되자 하는 수 없이 연체동물처럼 흐느적 흐느적거리는 팔다리를 간신히 추스려가며 강의실 안으로 들어섰다. 잠시 후 강의실 안의 커다란 바늘시계의 분침이 정확히 숫자 12를 가리켰 고, 그와 동시에 예의 그 날카로운 이미지의 교수님이 안경을 고쳐 쓰며 들어와 교탁에 자리를 잡고 섰다. 이윽고 딱딱하고 절도있는 출석을 부르 는 소리가 강의실에 울려퍼졌다. 나는 지겨운 한숨을 내쉬며 가방에서 책 을 꺼냈다. 도대체 수업이 어떻게 끝난걸까. 왜 내 머릿 속에는 수업에 대한 내용이 전혀 남아있지 않은 걸까. 설마 내가 졸은 걸까? 그건 아닌데. 강의실 안에 서 얼어버린 듯 한 시간도 결국은 흐를 수 밖에 없었는지 교수님은 마침내 손목시계를 힐끔 들여다보고는 책을 덮었다. 내 옆에서 청도가 힘없이 늘 어진 채 중어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앗싸? …정말이지 청도의 말에 이토록 동감을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음 강의실로, 혹은 공강시간동안 휴식을 취할 곳으로 이동하기 위해서 부산하게 다시 책과 필기도구를 가방에 넣는 학생들 사이로 강의실을 빠져 나가려던 교수님은 문득 무엇인가 생각났는지 발걸음을 멈추고 우리를 향 해 한 마디를 던졌다. ?다음 시간 퀴즈 준비는 잘 하고 있겠죠?? 바쁘게 책과 노트를 가방 속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던 나의 손은 교수님의 말과 함께 얼어버렸다. 아니, 퀴즈라니?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네-? 아니, 네라니? 무슨 반응이 이래? 당연히 ?교수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 까??라는 대답이 나와야 되는 것 아니야? 그런데 네라니? 나는 눈을 휘둥 그레 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를 제외한 모든 학생들이 ?그런 당연한 소리를 왜 하느냐?는 듯 무성의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 이게 뭐야! 나는 재빨리 내 옆을 무심히 지나가던 사람을 붙잡은 뒤 다 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 죄송하지만, 교수님이 언제 저희한테 퀴즈를 보겠노라고 말씀하셨던 적이 있었나요?? ?바로 저번 주에 그러셨잖아요?? 그 사람은 별 이상한 놈 다 보겠다는 듯 대답과 함께 나를 남겨두고 총총 히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당황해서 청도를 찾았다. 청도! 청도 이 자식 어 딨어! 어떻게 나한테 이런 중요한 사실을 한 마디도 말하지 않을 수가 있 는거야? 이 자식, 잡히기만 해 봐라! 다리 몽둥이를 그대로 콱…! 이리저리 고개를 돌린 끝에 마침내 강의실 문 쪽에 서 있는 청도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청도를 본 후 나의 머릿 속에서 나를 부추기던 ?다리 몽 둥이를 그냥 콱…?이 눈 녹듯 사라져 버림과 동시에 다른 말이 내 머릿 속에 들어앉아서 나를 한숨짓게 만들었다. ?니나 나나…? 청도 역시 지나가는 누군가를 잡고 당황한 표정으로 ?퀴즈라니요? 아니, 그게 무슨 소리죠??라고 묻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심각한 눈빛으로 청도를 바라보았다. 청도의 눈빛은 나 못지 않게 심각했다. 굳게 다문 청도의 입술이 청도가 지금 얼마나 결연한 의지를 불 태우고 있나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이윽고 청도는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목검을 천천히 들어올리더니 그대로 칼걸이에 내려놓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책상 앞으로 돌아와 앉았다. 나도 그 뒤를 따라 치우한님의 칼을 작은 막대기로 변화 시켜서 세 발 까마귀의 패와 함께 동아리방 구석의 서 랍 속에 넣은 뒤 아예 열쇠로 서랍을 잠가 버렸다. 이윽고 나는 자리로 돌 아와 앉았고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청도는 장하다는 듯 고개를 묵직하게 끄덕이며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잠시 칼은 내려놓고? 나 역시 엄숙하게 말했다. ?바람을 다루는 기술이던 치우한님의 칼이던 일단 접어두고? 청도가 화답했다. ?밥도 먹지 말고? 다시 내가 대꾸했다. ?잠도 자지 말고? 그리고 우리 둘은 약속이나 한 듯 눈빛을 교환한 뒤 주먹을 불끈 쥐어 하 늘로 뻗으며 동시에 외쳤다. ?공부하자!? 청도는 급하게 책상 위에 두꺼운 파일뭉치를 집어던지듯 놓았다. 탕! 무거 운 서류더미가 책상과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소스야?? 소스란 고등학교로 치자면 일종의 ?시험족보?같은 것이다. 덧붙여 퀴즈 는 ?쪽지시험?이나 마찬가지고. 단지 차이점이 있다면 퀴즈는 성적에 반 영이 된다는 점일까. ?그래? 청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하느라 죽는 줄 알았다? 이윽고 청도는 파일 속에서 a4용지 뭉치들을 꺼냈다. 그 양은 가히 어마 어마하다고 할 만했다. 나는 사색이 되어서 소리쳤다. ?맙소사!? ?왜 그래?? 청도의 의아한 눈빛에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 이걸 다 보란 말이야?? ?아냐! 젠장. 우리가 이번에 퀴즈를 보는 과목과는 별로 관련이 없는 것 들까지 몽땅 구해 왔으니까, 이제부터 우리가 봐야 할 소스를 골라내기 시 작해야 해? 아니! 이제부터 소스를 골라내야 한다고? ?뭐? 으악! 이걸 언제 다 골라내? 앞으로 이틀도 채 안 남았는데 우리는 아직 책 한 페이지 안 읽었단 말야! ?그렇다고 소스를 보는 걸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 아냐! 전통적으로 소 스에서 퀴즈문제들이 거의 다 나온다는 것은 상식중의 상식이라고!? 청도는 신경질저으로 소리치며 a4용지를 ?우리가 지금 당장, 무슨 일이 있어도 봐야 할 것?과 ?우리가 보면 혹시 이다음에 도움될지도 모르는 것?의 두 종류로 분류해 나갔다. 그리고 나는 처참한 기분으로 청도 앞에 수북히 쌓여 있는, 청도가 아직 손도 대지 않은 a4용지를 한 뭉치 가져와 서 대강 훑어본 뒤 둘로 분류해 나갔다. 나는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중 얼거렸다. ?난 괜찮다. 어차피 이 소스들 중간고사 때 되면 고스란히 다시 본다. 미 리 정리하는 셈 치자. 난 괜찮다. 어차피 이 소스들 중간고사 때 되면 고스 란히 다시 본다. 미리 정리하는 셈 치자. 난 괜찮다. 어차피 이 소스들 중 간고사 때 되면 고스란히 다시 본다. 미리 정리하는 셈 치자. 난 괜찮 다…? 으악! 괜찮긴 개뿔이 괜찮아! 마음은 전혀 위로되지 않았다. 청도의 자책 이 한숨처럼 내 귀를 훑었다. ?젠장! 왜 내일 모레가 퀴즈를 보는 날이라는 걸 우리만 몰랐던거지?? 그리고 나는 고개를 떨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맨날 자빠져 잤는데 알 리가 있냐…? 오, 주여! 이럴 수가 있나이까! 이건 더 이상 수업 시간에 졸지 말라는 무 언의 경고입니까? 아니면 다음부터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수업에 임하라는 신의 계시입니까! ?중얼거리지 말고 공부하자? 청도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애써 엄숙한 목소리로 타박하듯 말했다. 허, 참. 중얼거리지 말고 공부하자고오? 웃기네. 먼저 자기 자신이나 똑바로 하 시지. ?어이고, 어이고! 아들 대학 한 번 보내서 사람 한 번 만들어 보겠 다고 아버지가 몇 푼 벌리지도 않는 도사일 뼈가 빠져라 해서 돈 모아가지 고 대학 보내놨더니- 놨더니, 아들 놈은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하루종일 칼질에 술질에, 아주 난봉꾼 짓만 골라서 해대면서 싸돌아 다니는구나! 어 이구…퀴즈 날짜도 모르니 이번 학기 성적은 보나마나로구나…1학년 1학기 부터 벌써 때려 망쳐 버렸으니 앞으로 4년 8학기를 어찌하면 좋을고…어머 님 죄송합니다, 어머니 자식 이청도는 사실 이번에 퀴즈 날짜도 모르는 불 효막심한 망나니입니다! 어이고…어이고…?하고 혼자 손짓 발짓 다 해가 면서 30분이 넘도록 아예 3류 신파극을 찍어대던 놈이 누군데 지금 나한테 조용히 하라고 하는거야? 참 나, 기가 막혀서. 나는 코웃음을 치며 핸드폰 의 폴더를 열었다. 액정에 뜬 시계의 숫자는 우연찮게도 정확히 04:00을 가 리키고 있었다. 결국 오늘 밤은 이렇게 새고 마는구나! 나는 눈을 부비며 청도에게 물었다. ?안 졸리냐?? ?전혀? 청도는 날이 선 목소리로 딱딱하게 대답하며 절도있는 동작으로 귀밑머리 를 쓸어넘겼다.얼씨구, 가지가지 한다, 참. 뭐, 안 졸린다고? 아까 꾸벅 꾸 벅 졸다가 책상에 정면으로 머리를 찧고 펄쩍 뛴 게 누구더라? 나는 그 때 의 청도의 우스웠던 꼴을 생각하며 히죽히죽 웃었다. ?웃지 말자? 청도가 다시 감정이 철저히 배제된 무색의 음성으로 말했다. 저 녀석이 태도를 저렇게 바꾼 것도 사실은 책상에 머리를 박은 뒤 부터이다. 청도는 지금 괜히 무안해서 저렇게 절제 된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마 음 속으로만 배를 잡고 뒤집어지는 듯 웃으며 짐짓 목소리를 착 내리깔고 말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공부하자? 아아, 밤을 새고 보는 일출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밤을 샌 다음 날 아침에 어깨 위로 뿌려지는 햇살은 또 얼마나 따사로운가! 그리고 밤을 샌 다음 날에 들이마시는 공기는 또 얼마나 상쾌한가!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하며 잔 디밭을 가로질러 수업이 있는 승학관을 향해 걸었다. 청량한 아침 공기가 나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청도가 옆에서 톡톡 튀듯 유쾌하게 말했다. ?너- 눈- 밑이- 새까맣- 다. 그렇게- 억지로- 안- 괴로운- 척- 하면- 오히려- 괴로운- 티- 확- 나니까- 차라리- 그냥- 마음- 속으로- 하고- 싶은대로- 해-? ?그…래?? 청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난 ?내일 세상이 끝나는 것을 알아버린 사 람?마냥 퀭한 눈으로 축 늘어졌다. 갑자기 내 어깨 위에 공기와 함께 밤 을 샌 피로의 무게와 아직 하루가 더 남았다는 고민의 무게, 그리고 왜 얹 어졌는지 도저히 모를 인생의 무게가 한꺼번에 올라앉아 나를 짓눌러 대었 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미 청도도 양 발에 천근짜리 납주머니를 단 양 흐 느적거리며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떼며 간신히 앞을 향해 걸어나가고 있었다. 아마 누군가 청도와 나를 본다면 왠 좀비가 교내에 있느냐며 의아 해 할런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피곤해서야 사람이 견딜 수가 있나…이거 이러다 우리 수업시간 에 꾸벅꾸벅 졸아버리면 어쩌지?? 청도는 그 쉬운 걸 왜 굳이 묻느냐는 듯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며 중얼거 렸다. ?마치 언제는 안 졸았던 것처럼 새삼스럽게 왜 그러냐? 담소(?)를 나누는 동안 어느새 강의실 바로 앞까지 도착해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맨 뒷자리를 향해 흐느적 흐느적 걸어가 앉은 우리는 서 로를 향해 손을 흔들며 나지막하게 인사했다. ?잘 자라? ?너도 좋은 꿈 꿔라? 곧 출석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청도? ?네? 털썩. 청도는 대답과 동시에 기절하듯 자리에 쓰러져 버렸고 나는 속으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한 명 사망. ?박영준? ?예? 털썩. 사망자 한 명 추가. ……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릿하게 주위의 사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머릿속이 너 무나도 맑고 개운했다. 이렇게 푹 자 본 것도 정말이지 오래간만인 것 같 군. 나는 허리를 일으키며 기지개를 쭉 폈다. 그리고 곧바로 비명을 질렀 다. ?으아아악!? 조금 움직였을 뿐인데도 허리에서 우두둑하며 뼈마디가 갈려버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온 몸의 근육들이 일제히 아우성을 질러대며 몸을 이곳 저곳에서 꼬집었다. 나는 몸을 펴던 자세에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으 으윽. 이를 어쩐다. 잠시 굳어 있다가 이윽고 천천히 손에 힘을 주며 조금씩 몸을 펴 나갔다. 온 몸이 서서히 원래대로 곧게 펴 지고 있었다. 난 조금 더 힘을 주기 위 해 다리를 땅에 딛었다. -지이이이잉…! ?우우우욱!? 땅에 닿은 다리가 빌어먹을 정도로 저려왔다. 하긴, 몇 시간동안이나 앉아 서 잠을 잤는데 저리지 않은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하겠지. 나는 다리를 감 싸며 그대로 펄쩍 뛰었다가 다시 손을 짚는 바람에 생긴 갑작스레 다리에 서 쏟아지는 자극에 화들짝 놀라 급히 다리에서 손을 떼며 반사적으로 몸 을 뒤틀었다. 우두두두둑! 몇 시간 동안이나 굳어 있던 몸이 갑자기 한꺼번 에 펴 지면서 사람의 몸에서 나는 소리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커다란 소리가 귀를 때렸다. ?어어어억!? 몸이 시원해지는 동시에 무지막지하게 아프고 결려왔다. 어쨌든 의도하지 는 않았지만 이로서 몸은 대강 푼 셈이다. 나는 의자에 주저앉아 천천히 발을 꼼지락거렸다. 발을 움직임에 따라 다리에서 저릿저릿한 느낌이 척추 를 타고 올라와 계속 내 대뇌를 때렸다. 자극은 내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 다. ?하지마 이 자식아! 하지 마! 하지 말라면 좀 하지 마!? 다리의 저림은 한참이 지나서야 서서히 풀렸다. 휴- 간신히 한 숨 돌렸군. 나는 식은 땀을 닦으며 주위를 휘 둘러보았다. 강의실 안은 캄캄했으며 안 에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아니 청도 이 자식! 어떻게 나만 쏙 빼놓고 혼자 사라질 수가 있는거 지? 네 녀석이 어떻게 나에게 이럴수가!? 하지만 나의 분노는 곧 바닷물에 모래성 무너지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 디선가 아주 평화로운, 듣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숨소리가 규칙적으 로 들려온 까닭이었다. 나는 숨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럈다. 등잔 밑 이 어둡다던가. 청도는 바로 내 옆에서 새근거리며 고이 잠자고 있었다. 하 긴, 그러고 보니 분명히 아까 우리가 잠들기 직전에 들었던 수업에서 청도 는 내 옆에 앉아 있었지. 나는 괜히 청도를 의심한 데 대해 약간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내 마음을 뒤덮는 또 다른 마음이 있었다. 그것은 한심함이었다. 이런…나보다도 더 한심한 놈 같으니라고. 나는 목소 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청도야, 일어나!? 물론 청도가 이 정도로 일어날 놈은 절대 아니다. 나는 청도의 귀에 대고 온 힘을 다해 빽 소리쳤다. ?야, 일어나!? ?쿨…? ?청도야, 애비다. 해가 중천에 떴느니. 일어나거라? ?쿨…? ?이놈아, 니 에미다. 이 눔이 뼈빠져라 일해서 대학 보내 놨더니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자빠져 자고 있네? 얼른 일어나 이 눔아!? ?쿨…? ?자기, 나야. 일어나. 나 책임져야지!? ?쿨…? 안 되겠다. 도저히 이 놈은 말로 깨울 수 있는 놈이 아니다. 나는 체념하 며 몸을 일으켰다.물론 이 녀석을 깨우는 것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입이 전부는 아니지 않는가. 난 문득 고등학교 체육 시절 함께 축구를 즐기던 체육 선생님이 우리에게 해 주신 말씀을 떠 올렸다. ?손은 사람 때리라고 있는거야! 앞에 드리블 하는 놈 있으면 그냥 후려 쳐버려!? 예, 선생님. 선생님의 말씀은 틀림이 없었습니다. 앞에 조는 놈이 하나 있 습니다. 그냥 후려쳐 버리겠습니다. 나는 손을 어깨 뒤로 넘겼다가 그대로 청도의 등에 대고 후려쳤다. 철썩! 으, 끔찍해! ?끄아아아악-!? 청도의 비명이 길게 꼬리를 끌며 텅 빈 강의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청도 는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나는 이후에 청도의 몸에서 일 어날 끔찍한 결과를 예측하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우드드드드득! ?커허헉!? 청도도 나와 같이 엎드려서 몇 시간동안이나 잠을 잤는데 나만 몸이 굳어 있고 청도의 몸은 흐늘흐늘 풀려 있을리는 없고, 따라서 청도의 몸은 일순 간에 시원하게 똑바로 펴진 대신 그 주인에게 극악의 고통을 가져다 주었 다. 뿐만 아니라 청도는 지금 고통을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면서 아예 발로 땅을 굴러 버렸다. 따라서, ?으크으윽! 다리야!? 다리가 사람 환장하게 만들 정도로 저릴 것 역시 정해진 이치였다. 어이 구, 불쌍한 자식. 순리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는 구나. 어쩌면 나의 전철 을 그렇게 똑같이 밟을 수가 있냐! 나는 청도가 듣지 못할 정도로 작게 키 득거렸고 청도는 다리의 저릿거림을 도저히 주체하기가 힘든지 어쩔 줄 몰 라 하며 앉았다가 일어났다가 다리를 주물렀다가를 한참동안이나 반복했 다. 우하하! ?헉, 헉. 그런데 여기는 도대체…?? 한참동안 난리 법석을 떨던 청도는 이제야 다리의 저릿거림이 좀 수그러 드는지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청도의 표정은…말 로 형언하기가 힘들었다. 지옥의 입구를 보고 온 사람의 표정이 저럴까? 나는 웃음을 억지로 참느라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대답했다. ?설마 바보같이 어디냐고 묻는 것은 아니겠지? 보다시피 강의실이야? 청도는 내 말에 당황하며 말했다. ?아니, 내 말은, 도대체 내가…? ?설마 바보같이 왜 지금까지 여기 있느냐고 묻지는 않겠지? 보다시피 엎 어져 자느라 바빠서 못 나갔지?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지금이 도대체…? ?설마 바보같이 몇 시냐고 묻지는 않겠지? 휴대폰을 보면 알겠지만 지금 은 정확히 열 시야? 이런 말장난도 꽤 재밌네! ?아니, 그러니까,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은, 그런데 왜…? ?설마 바보같이 왜 아직까지 안 나가고 이런 곳에 있느냐고 묻는 건 아 니겠지? 당연히 이제야 일어났으니…? 텁! 더 이상 참기 힘들었는지 청도가 내 입을 틀어막으며 말했다. ?그만하시지? ?어 우어?(어 그래) 청도는 내 입에서 손을 떼며 창 밖을 바라보았다. 청도의 한숨으로 인해 잠시 하얗게 김이 서렸던 창문의 바깥 쪽에는 별 하나 없는 어두운 밤하늘 이 펼쳐져 있었다. 밤하늘 저편에 기우뚱하게 한 쪽으로 기운 달이 처량하 게 홀로 주위의 어둠을 밝히려 안간힘을 쓰며 떠 있었다. 청도는 다시 한 번 한숨을 푹 내었다. ?도대체 내가 얼마나 자 버린거지…휴우…? ?설마 바보같이…? ?그만 하라니깐?? 청도는 쏘듯이 말하며 일어서더니 이윽고 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아, 젠장. 얼른 나가기나 하자. 할 일은 많고 바쁜데 시간은 별로 없 다? ?그래? ?휴. 결국 오늘 하루를 몽땅 잃어버린 것인가? 젠장! 결국 출석도 하나도 못 불러 버렸잖아!? 청도는 씹어뱉듯 말하며 문고리를 잡아서 거칠게 돌리며 문을 잡아당겼 다. 덜컥, 덜컥! 문에서는 기대했던 ?삐걱-?하는 소리 대신 흔들리는 소 리만이 들려왔다. 청도의 얼굴이 당황으로 일그러졌다. 청도는 문고리를 세 게 비틀며 문을 마구 흔들었다. 덜컹, 덜컹, 덜컹! 문은 이리저리로 흔들리 기만 할 뿐 꿈쩍을 하지 않았다. 나와 청도는 사색이 되어 서로를 마주 본 뒤 뒷문을 향해 뛰었다. 설마, 설마 뒷 문은 열려 있겠지? 그래, 뒷 문은 열려 있을거야! 뒷 문까지 잠겨 있을리가 없어…! 덜컹! 문고리를 거칠게 잡아당기며 문을 흔들었지만 뒷문 역시 시끄러운 비명을 지르며 흔들릴 뿐 절대 열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으악-! 이젠 어쩌면 좋아! 청도는 절망적인 얼굴로 소리쳤다. ?문이 몽땅 잠겨 버렸잖아! 아무래도 바깥쪽 자물쇠로 문을 잠가버렸는 가 본데?? 나 역시 허둥지둥하며 외쳤다. ?어쩌지? 이제 어쩌면 좋지?? 청도가 황급히 소리쳤다. ?걷어 차! 얼른!? 쾅! 쾅! 나와 청도는 지체없이 문을 거세게 걷어찼다. 문이 저르릉거리며 울었다. 하지만 그 뿐, 문은 열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나와 청도는 다시 호흡을 맞추어 동시에 문을 걷어찼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런 젠장! 문에 몸을 들이 받아!? ?온 힘을 다해서 부딪혀!? ?어깨가 부서져라 갖다 박아! ? ?아예 문을 밀어버리자!? 나와 청도는 악다구니를 지르며 문을 향해 온 몸을 던졌다. 쾅! 콰앙! 문 은 더욱 더 격렬히 요동쳤다. 하지만 몸이 문에 부딪히는 횟수가 늘어날수 록 내 마음 속에서는 절망감만이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이렇게 해서는 절대 문을 못 열겠군? 청도도 역시 같은 생각을 했나보다. 청도는 허망한 얼굴로 문에 몸을 던 지는 것을 멈추고 내 어깨를 잡았다. ?야, 됐어, 됐어! 글렀어! 이런 식으로 해서는 천만 년이 걸려도 이 문을 도저히 열 수가 없어!? ?하지만 그럼 어떻게 하냐?? ?몰라! 너 풍산가 뭐시긴가 그거라며! 바람으로 저런 문 하나 못 밀어붙 여?? 청도가 억지를 쓰기 시작했다. ?내가 무슨 태풍 제조기냐! 그러는 너야말로 칼을 그렇게 잘 쓴다는 놈 이 문 하나 못 잘라내고 이렇게 쩔쩔 매고 있어?? ?젠장! 칼 있으면 가져다 줘 봐라! 지금 당장이라도 잘라 보일 테니!? ?그러는 나야말로 세 발 까마귀의 패랑 치우한님의 칼만 가져다 주면 이 까짓 문쯤 아예 날려버릴 수 있다고!? …그래, 사실 이까짓 문이 아니지만 허풍 한 번 쳐 봤다. 어쨌든, 청도는 말싸움에 지쳤는지 그대로 주저 앉으며 소리쳤다. ?제기랄!? 젠장, 정말이지 제기랄이다! 내일이 퀴즈인데! 공부할 게 아직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어젯 밤에는 소스들을 일일히 골라내느라 실제 공부에는 시 간을 많이 쓰지 못했다. 어젯 밤에 골라낸 소스로 오늘 밤에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해 보려고 했는데…! 뿐만 아니다. 밥도 못 먹게 되어 버렸다! 나는 허기진 배를 움켜쥐었다. 젠장! 어젯 밤부터 무려 네 끼를 걸렀는 데…! 밥을 굶었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입 안에서 신침이 줄줄 흐르며 위장이 ?밥 넣어 이 자식아!?하고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며 나를 재촉해대었다. 젠장!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그대로 떴다. 사람 심리라는 게 참 이상해 서, 어떤 일을 그렇다고 생각하면 정말 그렇다고 느끼게 되어 버린다. 지금 같은 경우를 봐도 그것은 확실했다. 네 끼를 굶었다는 것을 앎과 동시에 네 끼를 굶으면 몸이 힘들지라고 생각하니까 갑자기 눈 앞에 별이 오락가 락 하면서 천장이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아, 배고파!? 나는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나의 중얼거림을 들은 청도는 그제서야 지금 까지 밥을 굶었다는 것이 떠올랐는지 내 옆에 털썩 주저 앉아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야, 벌써 몇 끼나 굶었냐?? ?설마 바보같이 몇 끼를 굶었냐고 물어보는 거라면 아직 네 끼밖에 안 굶었다고 대답해 주겠어? ?…그거 하지 말라니까? ?내 맘이지? 청도는 힘없이 중얼거렸고 나는 혀를 낼름거리며 대답했다. 청도는 관두 자는 듯 고개를 도리며 얼굴을 벽에 기댔다. ?설마 밤새도록 이 안에 갇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 청도가 중얼거렸다. ?그럼 어쩌겠어. 문이란 문은 몽땅 잠겨 버렸는데? 나는 왜 당연한 걸 묻느냐고 타박하며 청도의 말에 대답해 주었다. ?우리 휴대폰 있잖아. 혹시 전화로 어떻게 안 될까?? ?비록 우리한테 휴대폰이 있긴 하지만 누구한테 전화를 하지? 요령이나 가람이는 휴대폰이 없고, 그렇다고 119에 전화하자니 자다가 갇혔다는 말 하기가 좀 그렇지 않나?? 청도는 나의 말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갑자기 뭔가 결심한 듯 두 눈을 빛내며 벌떡 일어섰다. ?안 되겠다!? ?안 되긴 뭐가 안 되는데…? 내가 힘없이 한 대답이 자신의 말을 비꼬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청도 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청도는 나를 바라보며 심각하게 말했다. ?뛰어 내리자? ?…뭐?? 어이구, 이 놈이 굶주림과 좁은 곳에 갇혀 버렸다는 강박증을 이기지 못 하고 결국은 미쳤구나. 나는 머리를 감싸며 외쳤다. ?이 놈아, 여기는 4층이야, 4층!? ?상관없어? 청도는 미간에 힘을 꾹 주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이대로 갇혀 있다간 밤새도록 배가 고파서 괴로움에 몸부림칠 건 뻔해. 거기에다가 오늘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 잤으니 잠도 안 올게 뻔 하지. 이건 뭐 불을 켜는 스위치도 몽땅 바깥에 있으니 불을 켤 수가 있나, 그렇다고 공부할 게 여기 있어서 퀴즈 준비를 할 수가 있나. 에라! 남자라 면, 나가자!? 그리고 나는 기가 막혀서 목소리를 비비 꼬며 대답했다. ?남자고 나발이고 난 살고 싶거든?? ?살고 싶다니? 설마 겨우 4층에서 떨어져서 죽을까봐 그러는거냐?? ?물론 4층에서 떨어져서 죽을까봐 그러는 건 아냐. 단지 팔 다리 중 어 느 것 하나가 부러져 버릴까봐 불안해서 그러는거지? 그리고 청도는 괜한 걱정을 한다는 듯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하하하! 야, 그런 걱정은 하지 마. 넌 풍사라며?? 그리고 난 머릿속이 환해지는 느낌에 벌떡 일어났다. ?맞다! 난 풍사지! 근데 뭐 어쩌라고?? ?…하? 청도는 기가 막힌지 한숨을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야, 생각을 해 봐라. 넌 풍사잖아!? ?그런데?? ?그런데는 뭐가 그런데야! 바람을 끌어와서 뭐 바람쿠션이나 그런 비슷 한 거 못 만들어?? 그리고 나는 이번엔 정말로 머릿속에 환해지는 느낌과 함께 창문으로 뛰 어갔다. 드르륵! 창문을 열자 시원한 밤바람이 강의실 내로 가득 쏟아져 들 어왔다. 높아서 그런지, 아니면 오늘 밤의 날씨가 이런건지 주위를 뒤덮은 공기의 흐름이 꽤 많이 느껴졌다. 이것들을 모조리 틀어서 한 곳에 모은다 면…?좋았어! 나는 쾌재를 지르며 외쳤다. ?좋아! 이 정도면 충분해! 으하하! 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 냈냐? 청 도, 넌 천재야 임마!? ?그래? 으하하! 자식! 맞아! 난 천재야!? 청도는 조금 띄워주자 좋아서 벙긋거리며 웃었다. 저런 단순한 놈 같으니 라고. 어쨌든 이제 시작하자! 나는 창문 밖으로 상반신을 내밀고 양 손을 쭉 뻗었다. 이리저리 오가는 바람의 흐름이 손에 잡히는 것 처럼 느껴졌다. 단전에 천천히 힘을 모았다. 점점 단전이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진다. 이윽고 힘이 꽤 많이 갈무리되었 음을 느낀 나는 손끝으로 힘을 분산시키며 팔을 이리저리 휘저었다. 휘이 잉! 바람의 기운들이 이리저리 휩쓸려 내게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손 을 계속 휘저으며 팔을 아래쪽으로 뻗었다. 그리고 바람이 모여야 할 곳에 정신을 집중했다. 이윽고 나와 비슷한 높이에서 날고 있던 바람들과 그 아 래쪽에서 날고 있던 바람, 그리고 땅을 휘저으며 불고 있던 바람들이 점차 한 점을 중심으로 모여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대충 바람이 모였다고 생각한 나는 손을 마구잡이로 휘저었다. 바람들이 이리저리 뒤섞이며 둥근 구 모양의 기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저 정도면 사람을 충분히 받아낼 수 있겠지? 나는 미소를 띄며 청도를 불렀다. ?청도야!? ?왜?? ?뛰어내려? 내 밝은 얼굴을 보며 즐거워하는 청도. 청도는 기쁜 듯 말했다. ?네 녀석이 먼저 뛰어 내렸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내가 바람의 쿠션을 만들었으니까 네가 먼저 뛰어내려야 하는 게 맞는 거 아냐?? 내 말에 청도는 대답할 말이 없는지 입을 다물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청 도는 이윽고 책상의자-이 강의실의 의자들은 모두 책상과 붙어 있다-를 하나 가져오더니 창 밖으로 내밀었다. ?좋아, 네가 만든 쿠션이 이 책상의 무게를 버티면 뛰어내릴게? ?그래, 난 자신 있으니까 어디 마음대로 해 봐? 나는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청도는 미덥지 않다는 듯 고 개를 갸웃거리며 책상의자를 놓았다. 슈우욱- 이제 곧 책상의자가 바람덩 이에 묻히며 푹신하게 멈추어 서겠지? -텅! 빠작! ?맙소사!? …참으로 안타깝게도, 책상의자는 내가 만든 바람덩이를 그대로 짓눌러버 리며 바닥에 부딪혔다. 그리고 청도는 나를 험악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뭐? 믿을 만 하다고? 자신 있다고? 먼저 뛰어 내리라고? 아니 진짜로 먼저 뛰어내렸으면 어쩔려고 그랬어 그래?? 청도는 뒤로 돌아서며 고개를 마구 도리질쳤다. ?아, 안해안해안해안해? ?처, 청도야, 아하하, 방금 것은 장난, 그저 장난이었어? 내가 말하면서도 스스로도 한숨을 쉴 만큼 참으로 허술한 핑계였다. 청도 는 나를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쥐구멍에라도 숨 고 싶은 심정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 ?아 미안하대두? ?……? ?아 미안하다니까?? 아, 슬슬 짜증이 나려고 하네. 에라, 이왕 엎어진 물 배짱 한 번 부려봐? ?……? 에라 모르겠다! 나는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그래! 좋아! 내 잘못이다! 어쩔래! 다시 만들면 될거 아냐, 다시 만들면! 이거 왜 이래?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하지!? 사실 청도가 곤란할 게 뭐 있겠냐. 그냥 TV뉴스에서 사람들이 싸우는 모 습 보고 배운 거 써 먹어 본거지. 청도는 이전보다 더욱 싸늘한 눈으로 나 를 바라보았고 나는 잠시 당당하게 청도를 맞노려 보다가 결국 고개를 더 욱 숙이고 말았다. ?…아 미안하다니깐 자꾸 그러네…? 이윽고 청도는 긴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이왕 실수한 거니까 어쩔 수 없지. 다시 만들어 봐라. 뭐 ?죽을 수 도 있었지만? 친구사이에 그런 것 한 번쯤이야? ?그래! 그래! 맞어! 네 말이 다 맞어! 친구 사이에 한 번 죽일 뻔할 수도 있는 거고 한 번쯤 죽을 뻔해 줄 수도 있는…? 나는 말을 잇다가 순간 내가 무슨 말을 주워담고 있는 것인지 깨닫고 입 을 콱 다물었다. 청도가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영준아?? ?…응?? ?…똑바로 하자? ?…그래? 젠장! 나 때문에 이 곳에서 나갈 수 있는 거니까, 원래대로라면 내가 떵떵 거리고 청도가 나한테 굽신거려야 하는데! 왜 이런 구도가 되어 버린 거 지? 방금 전에 실수만 안 했어도!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으며 정신을 집중 했다. 얼마나 신경이 날카로워졌는지 학교 건물 근처의 땅부터 상공까지의 모든 바람의 움직임이 손 끝에 잡힐 듯이 느껴졌다. 나는 손에 기운을 실 은 뒤 들어올려 신중하게 휘감았다. 느릿하게 학교 주위의 공기들이 천천 히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힘을 몽땅 써 버리더라도, 그까짓 사람 쯤이야 열 명이라도 받을 수 있는 바람의 벽을 만들어주지!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마에서 비지땀이 흐르고 있었다. -후우우웅… 공기의 흐름이 들려왔다. 점차 공기를 모으는 것이 힘들어지고 있었다. 그 것은 곧 내가 바람을 모으고 있는 곳이 공기의 포화상태에 점점 가까이 다 가가고 있다는 뜻이 된다. 나는 아래를 바라보았다. 공기가 커다랗게 한 덩 어리로 뭉쳐있고 그 바깥쪽을 두꺼운 바람층이 느릿느릿 돌고 있었다. 이 번에는 정말로, 진짜로, 확실히 성공이다! 나는 기세등등하게 청도를 불렀 다. ?야! 이청도! 책상의자 가져와!; ?오? 자신만만한 걸? 이번에는 제대로 만들었나보지?? ?물론이지!? 나는 자신있게 대답했고 청도는 그런 나를 믿음직스럽게 바라보며 책상의 자를 내가 가리키는 곳, 즉 공기주머니가 있는 곳을 향해 떨어뜨렸다. -터엉! …너무 둥근 모양새 때문이었을까. 책상의자는 공기주머니에 부드럽게 튕 겨서 위로 다시 떠오르더니 한참을 날아서 멀찍이 처박혔다. 콰당! 그리고 청도는 조금 전보다 더욱 더 못 믿겠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잠깐, 잠깐!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최소한 이제 뚫리지는 않잖아! 모양 만 조금 바꾸면 돼! 모양만!? 나는 힘을 주어 공기주머니를 넓게 폈다. 쿠션의 모양처럼 만들기 위함이 었다. 바람으로 감싸인 공기주머니는 둥실거리며 천천히 펴졌다. 나는 목청 껏 외쳤다.. ?청도야! 다시 던져봐, 다시!? 청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책상의자를 가져와서 내가 만든 바람의 쿠 션 위로 떨구었다. 책상의자는 빠른 속도로 쿠션 위로 떨어졌다. 과연? 과 연? ?앗싸!? 나는 환성을 지르며 두 주먹을 하늘로 뻗었다. 책상의자가 푹신하게 바람 의 쿠션에 파묻혀서 공중에 멈춘 것이다. 나는 의기양양해져서 소리쳤다. ?어때! 청도야, 이제 됐지?? ?흠…정말 대단한데? 진짜 해냈잖아? 청도는 놀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새삼스럽게 나를 바라보았다. 암, 나를 다시 봐야지! 다시 봐야하고 말고! 내가 얼마나 잘났는지를 깨닫도록! 으하하! ?정말 잘 만들었네. 그럼 이제 안심하고 뛰어도 되겠다, 야? ?뭐?? 이게 무슨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냐! 안심하고 뛰어도 되겠다고? 아차차, 나는 내 머리를 톡톡 쳤다. 내가 너무 성급했군. 방금 청도가 말한 말은 비록 나에게 한 말이기는 했지만 주어가 없었다. 그래, 너가 안심하고 뛰어도 된다는 말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암, 안심하고 뛰어내려도 되지. 암? ?그럼 어서 뛰어 내려야지?? 청도는 나를 향해 말했다. 그리고 나는 잠시 어안이 벙벙해져 멍하니 청 도를 바라보았다. 얘가 지금 뭐라고 하는거야? ?뭐?? ?뭐는 뭐가 뭐야. 뛰어내리라는 거지? ?도대체 무슨 소리야! 내가 왜 뛰어 내려! 야! 내가 애써서 만들었으면 당연히 네가 먼저 뛰어내려야 하는 거 아냐?? 나의 말에 청도는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아니지. 너랑 나랑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고 네가 먼저 뛰어 내 려야 할 명백한 이유 역시 있어? ?그래? 그게 뭔데! 말해봐!? 청도는 손가락을 꼽으며 말했다. ?일단 너와 나와의 근본적인 차이는? 물론 당연히 너는 바람을 다룰 줄 알고 나는 다룰 줄 모른다는 거지. 그리고 네가 먼저 뛰어 내려야만 하는 명백한 이유는? 그것 역시 너는 바람을 다룰 줄 알고 나는 바람을 다룰 줄 모른다는 거야. 막말로, 떨어졌다, 떨어졌는데 저 쿠션이 펑 터졌다! 그러면 넌 어떻게 할래??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젖먹던 힘까지 다 끌어내서 바람을 뿜어서 일단 도로 떠 올라야지? 청도는 바로 그거라는 듯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 네가 아주 간단하게 말하는 것. 난 그걸 못 해! 뿐만 아니야. 네 가 먼저 아래쪽에서 날 기다리고 있으면, 내가 떨어지다가 무슨 돌발상황 이 생기더라도 네가 바람을 뿜어서 나를 받아줄 수 있잖아? 안 그래? 자, 알았으면 어서 뛰어내려!? 청도의 말은 분명히 일리가 있었다. 그래, 사실 바람을 다룬다는 것, 이제 나는 별 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해 버리게 된 그것을 청도는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물론 마음 한 구석에서는 ?청도 저 자식 단순히 먼 저 뛰기 싫어서 되지도 않는 핑계 끌어다 대며 생떼 쓰고 있는 것은 아닐 까??하는 의문이 피어 올랐음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나는 내 친구 청도를 믿는다. 내 친구 청도는 겁쟁이가 아닌 것이다. 그래, 청도는 내가 먼저 뛰어야 할 합리적인 이유를 말해 주었다. 거기에 따르자! 나는 청도보 다 먼저 뛰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래, 좋아. 내가 먼저 뛸게? ?정말? 잘 생각했어 임마!? 청도는 얼굴을 환하게 빛내며 내 등을 철썩 쳤다. 우욱! 아프다! 그래, 하 지만, 비록 몸은 아프지만, 이 얼마나 멋진 우정의 표현이냐. 내 등이 아픈 만큼 청도의 우정은 크다! 물론, 마음 한 구석에서 ?청도 저 자식 단순히 내가 아까 자길 깨우느라 등을 세게 후려친 것에 대한 복수로 은근슬쩍 내 등을 후려친거야?라는 생각이 조금, 아주 조금 들려왔음을 부인하지는 않 겠다. 하지만 나는 내 친구 청도를 믿는다. 내 친구 청도는 그 정도로 속이 좁은 놈이 아니다! 나는 창가를 향해 다가갔다. 깊은 밤의 차가운 바람이 내 볼을 스치고 있 었다. 나는 아래를 내려보았다. 4층이란, 분명히 낮다고 생각하면 낮지만 뛰어내리려고 생각하고 보면 결코 만만치 않은 높이다. 나는 심호흡을 했 다. ?나 먼저 갈게? ?그래, 화이팅!? 청도의 응원을 뒤로 하며 나는 눈을 똑바로 뜨고 몸을 기울였다. 찰나의 시간 동안 몸이 무중력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주 잠 시동안 나는 하늘을 나는듯한 착각을 느꼈다. 그리고 그 착각은 곧 끝났다. 지상이 빠르게 커져가며 눈 속으로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어억, 설마 부 딪히나? -털썩! 성공이다! 나는 쿠션위에 안전하게 착지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됐어! 뛰어 내렸다고! 위에서 청도가 감탄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쿠 션 위에서 몸을 데굴데굴 굴려 땅으로 내려온 뒤 청도에게 손짓했다. ?야! 괜찮아, 안전해! 내려와!? 그런데 청도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야- 이왕 내려간 김에 그냥 수위 아저씨한테 열쇠 받아서 문 좀 따주라 -? ?뭐?? ?에이, 좋은 게 좋은거지 뭐. 문 좀 따줘- 난 걸어 나가고 싶어? ?우아악!? 내 머릿속으로 주마등처럼 아까의 일이 스쳐지나갔다. ?청도 저 자식 단순히 먼저 뛰기 싫어서 되지도 않는 핑계 끌어다 대며 생떼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청도 저 자식 단순히 내가 아까 자길 깨우느라 등을 세게 후려친 것에 대한 복수로 은근슬쩍 내 등을 후려친거야? 결국 나는 폭발해 버렸다. ?으아아악! 이, 이 싸가지 없는 놈! 몰라! 내려오던지 말던지 네 멋대로 해! 바람 흩어버릴 테니까 네 녀석이 알아서 뛰어 내리던 바닥으로 구르던 네 멋대로 해!? ?어, 어어어? 야, 야, 잠깐, 잠깐만! 지금 뛰어 내릴거야, 뛰어 내릴거라 고! 잠깐만 기다려!? 결국 한바탕의 소동 끝에 청도까지 안전하게 뛰어 내렸다. 나는 청도가 내려오자마자 청도를 타박했다. ?인간이 어쩌면 그러냐? 애초에 먼저 뛰자고 한 것도 너 아니었냐?? ?그게 말이지, 내가 약간, 아주 약간의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말야…? 청도는 멋적은 듯 씩 웃더니 내 표정을 살피고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아 젠장, 그래, 내가 밥 사면 될 거 아냐, 밥! 됐냐?? ?…진작 그럴 일이지?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나가자, 밥 먹으러!? 청도가 기분전환이라도 하고 싶었는지 괜히 크게 소리쳤다. 청도가 나와 요령이, 그리고 가람이를 데리고 데려온 곳은 닭갈비집이었 다. 요령이는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않았지만 가람이는 걱정된다는 듯 나 를 바라보며 물었다. ?주인, 공부해야지? ?공부는 무슨 공부야! 학생이 놀아야지!? 요령이는 가람이의 말에 배포있게 대꾸했다. 하지만 사실 학생은 공부를 해야 한다. 어쨌든 요령이의 말에 청도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종일을 굶고 한 끼를 더 굶었어. 배고파 죽어버릴 것 같은데 지금 공부가 문제냐? 자, 자, 괜찮아, 괜찮아! 일단 먹고 보자! 아줌마, 여기 닭 갈비 4인분이요!? 1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라 그런지 식당에는 손님이 거의 없다시피 했 다. 그래서인지 닭갈비는 주문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나왔다. 치이이- 기 름이 끓는 소리가 지글지글 나며 닭갈비가 맛있게 익어가기 시작했다. 그 런데 문득 청도가 깜박 잊었다는 듯 말했다. ?야, 영준아. 오늘 하루 종일 꼬인것도 짜증나 죽겠는데 우리 술이나 한 잔 하자!? ?…뭐? 야,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내일이 퀴즈인데 우린 공부 하나도 안 했어! 알아?? ?아니까 딱 한잔만 하자는 거지. 아줌마, 여기 소주 한 병이랑 잔 두개 가져다 주세요!? 청도는 막무가내였고 결국 나와 청도의 앞에서는 술잔이 하나씩 놓여졌 다. 청도가 잔을 두개만 달라고 한 까닭은 요령이와 가람이는 술을 먹지 않기 때문이다. 청도는 내 잔에 술을 가득 부어주었다. 하는 수 없이 나도 청도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일단 마시고 보자. 건배? 술을 한 잔 쭈욱 들이켰다. 벌써 24시간 이상 비어 있던 속이라서 그런지 술은 배를 화끈하게 덥히며 뱃 속으로 스며들었다. 휴, 이거 나쁘진 않은 데? ?하아- 시원하다. 어어, 닭고기 타겠다. 얼른…? ?뭐 타?? 요령이는 청도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황급히 주걱을 집어들고 거세게 휘젓기 시작했다. 그리고 청도는 그런 요령이의 모습이 재미있는지 피식 웃다가 다시 나를 보며 술병을 디밀었다. ?자, 한 잔 더 받아? ?어, 그래? 일단 한 잔을 받고 나니 두 번째 잔 부터는 별로 거절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청도에게서 다시 한 잔을 가득 받고 청도에게 술병을 기울여 주었다. ?쭉 마셔, 쭉. 에이 씨, 술 조금 먹는다고 공부 못하겠냐?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서너 잔이 돌았을 때 요령이가 말했다. ?고기 다 익었다, 먹자!" "그러자!" 머릿속으로 술기운이 퍼지면서 조금씩 퀴즈에 대한 생각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으하아암..." 나는 기지개를 쭈욱 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솜처럼 폭신하고 포근한 4월의 햇살이 창문을 타고 들어와 내 코를 간질였다. 나는 햇살로 부신 눈 살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 옆에는 요령이와 청도가 아무렇게나 엎드려서 세상 좋게 잠자고 있었다. 가람이는 아침부터 수련에 열중인지 동아리방 바깥의 잔디밭 쪽에서 상쾌한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흠. 별로 특 이할 것도 없는 동아리방의 풍경이군. 또 이렇게 쳇바퀴같은 하루가 시작 되는구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온 몸의 피가 머리로 쏠리는 듯한 느낌 이 나며 고개가 떨구어졌다. 입에서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우우욱..." 나는 뻣뻣하게 굳은 목을 두드리며 천천히 내가 깔고 잤던 담요를 접었 다. 숙취가 온 몸을 끈적하니 감싸고 있었다. 젠장, 청도 저 자식. 괜히 술 마시자는 이야기는 꺼내가지고 사람 취하게 만들고 있어. 나는 청도를 힐 끗 바라보았다. 청도는 입을 헤벌린 채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곤히 잠들어 있었다. 나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11시 20분. 젠장, 아침 수업은 공쳐버렸 군. 점심 먹고 1시 수업이나 제대로 들어야겠다. 나는 졸음이 잔뜩 묻은 눈 을 비벼대며 침실 밖으로 나갔다. 볼일을 보고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은 뒤 얼굴을 닦으며 화장실에서 나왔 다. 찬물로 한 세수는 내 몸에 덕지덕지 묻어 있던 술기운을 개운하게 씻 어내려 주었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 내는 도중 문득 나의 눈에 어질러진 책상이 들어왔다. 책상 위는 필기도구와 a4용지 유인물과 교재책이 아무렇 게나 흩어져서 상당히 지저분해 보였다. 나는 손가락을 꺾으며 책상으로 다가가 이곳 저곳에 흐트러진 유인물부터 천천히 모으며 흥얼거리듯 음조 를 넣어 중얼거렸다. "어디- 보자- 이것이- 무슨- 유인물이냐- 왠 놈의- 유인-무우우울이 왜- 이다지도 많-을까. 왜 많을-까, 왜애 많을-까아아아아, 당연히 오늘이 퀴즈 날이-니이이이까아..." ...잠깐, 방금 내가 뭐라고 지껄인거지? "당연히 오늘이 퀴즈날이-니까아아아아..." 으, 으, 으악! 나는 모으던 유인물을 책상으로 던지며 청도를 깨웠다. "야, 야, 일어나!" "우웅...왜 그래...귀찮게..." "오늘 퀴즈, 오늘 퀴즈!" "뭐?" 청도는 눈을 번쩍 뜨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이 윽고 동아리방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맞다!" 청도는 등에 불이라도 붙은 사람처럼 몸을 데굴데굴 굴리며 벌떡 일어서 더니 책상을 향해 뛰어나갔다. 책상 위에 펼쳐진 유인물을 붙잡은 청도는 절망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으아악! 누, 누가 도로 섞어놨어! 휴, 다, 다행이다! 아직 두 세 개밖에 섞이지 않았었구나!" 청도는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려가며 소스를 도로 나누어서 각자의 자리로 집어 던지고 세수도 하지 않은 채 자리에 앉아서 소스 중 하나를 집어들었 다. 청도의 눈빛은 극도의 불안감으로 초조해하고 있었다. 아마 나의 표정 도 청도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나 역시 청도의 앞에 앉아서 소스를 집 어 들며 말했다. "어휴, 너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냐! 네가 어제 술만 안 권했어도..." "준다고 넙죽 넙죽 받아 마실 때는 언제고...그런데 영준아, 지금 몇 시 냐?" "11시 반이 다 되어간다 임마. 왜?" "뭐?" 청도는 토끼눈을 뜨며 소리쳤다. 아, 깜짝이야! "왜 아까부터 소리는 자꾸 지르고 그래? 간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아, 미안. 그런데 지금이 뭐, 몇 시라고? 11시 반?" "그래! 너도 시계 있고 동아리 방에도 시계 있으니까 내 말을 못 믿겠으 면 그냥 시계 보면 될 거 아냐. 응?" 청도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듯 고개를 뒤로 돌려 청도가 앉아있는 곳의 뒤쪽 벽에 걸려있는 작은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일부러 5분 빨리 가 도록 맞추어 놓은 그 시계의 바늘은 째깍거리며 11시 33분을 지나가고 있 었다. 그리고 청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청도의 얼굴은 절망에 휩싸인 채 일그러져 있었다. 청도는 잠시 그대로 굳어 있었다. 아마도 무언가를 생 각하는 듯 했다. 이윽고 청도는 무언가 결심한 듯 입술을 깨물며 소스들을 책상에 탁! 소리나게 집어던지고 말했다. "안 해!" "뭐?" "안해안해안해안해-안해안해안해안해-" 청도는 도리질치며 '안해'만을 반복해서 말했다. 나는 기가 막혀서 말했다. "야, 임마, 퀴즈가 이제 채 1시간도 안 남았는데 안 하겠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안해. 해봤자 소용 없어. 이미 글러 버렸어. 어차피 망친 퀴즈. 억울하게 한 글자라도 더 보고 망하느니, 차라리 그냥 맘 편하게 1분이라도 더 놀다 가 망칠래" 청도는 너무나도 태연하게 '퀴즈 때려 망쳤어. 난 포기!'라고 말했다. 아니, 도대체 어쩌면 저렇게 속이 편할 수가 있지? 하지만 청도의 말은 내게 꽤 설득력 있게 들렸다. 젠장! 안 돼! 나까지 퀴즈를 망칠 수는 없다고! 한 글 자라도 더 봐야 1점이라도 더 딸 수 있단 말야! 나는 애써 청도의 말을 외 면하려 고개를 돌렸지만 청도가 내뱉은 완벽한 논리의 말들은 계속해서 허 공을 맴돌며 나의 귓가로 스며들고 있었다. '해봤자 소용 없어...' '어차피 글러 버렸어...' '어차피 망친 퀴즈...' '억울하게 한 글자라도...' '맘 편하게 1분이라도 더 놀다가...' 나는 어느새 최면에 걸린 듯 느릿느릿 소스를 들고 있던 손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나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소스를 책상에 집어 던졌다. 탁! 나 는 청도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나도 안 해" "동행을 환영한다" 청도는 감격이라는 듯 내 손을 덥썩 잡았다. 끼이익- 서글픈 얼굴로 강의실의 문을 열었다. 수업이 끝나면서 사람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키는 요란한 소리가 아련히 귓가를 맴돌았다. 세상이 휘 청거리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휘청거리는 것일까. 나는 애써 웃으며 허리 를 폈다. 하지만 입가의 미소는 어느새 희미해졌고 힘주어 편 허리는 다시 축 늘어졌다. 어깨가 낮아지자 옆으로 매고 있던 가방이 흘러내렸다. 나는 짜증스럽게 가방을 고쳐매며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옆에서 청도가 땅이 무너져라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많이...풀었냐?" "...많이 풀었게 조금 풀었...게?" "...하나도 못 풀었을 것 같은-데..." "맞았-다...아하하하하...아하하...아하..." 나는 전혀 아무런 감흥도 없이 무표정인 채로 한 쪽 입술만 치켜올려 '아 하하...'하고 억지로 웃었다. 청도도 나와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시 동안 그렇게 눈물이라도 흐를 것처럼 서글프게 억지웃음을 짓던 우리는 약 속이라도 한 듯 곧 웃음을 동시에 그쳤다. 나는 세상에 대한 비애가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는...많이...풀었냐?" "...니나...나나..." 청도는 슬쩍 웃었다. 그래, 같이 수업 들어가서 같이 자빠져 잤는데 누군 문제를 풀고 누군 못 푸는 그런 일이 있을리가 없지. 아니, 있어서는 안 되 지. 있으면 억울하지. "시험지가...백지로 보였어..."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는...새까맣게 보였어...휴" 어느새 승학관 현관까지 나와 있었다. 밖으로 발을 내딛자 시리도록 밝은 햇살이 우리를 맞았다. "햇살 쏟아지고...날은 좋은데...내 청춘은 왜 이리 꼬이나..." 청도는 다시금 한숨을 쉬더니 내게 물었다. "기분도 꿀꿀한데 술이나 한 잔 할래?" "아니...오늘은 그냥 자취방에 들어가서 잠이나 잘래" "그래? 그래도 동아리방에 잠깐 들렀다가 가는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오늘은 그냥 조용히 쉬고 싶다. 그냥 가서 잠이나 잘래" "그래. 그럼 힘내고. 내일 보자" 힘 내라고? 나는 청도의 모습을 다시 바라보았다. 청도는 쓰러질 듯 쓰러 질 듯 용케 쓰러지지 않으며 비틀비틀 동아리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모 습이 마치 술에 잔뜩 취한 망나니 같았다. 나는 청도의 등 뒤에다 대고 소 리쳤다. "혹시 요령이나 가람이가 나 찾으면 집에 갔다고 전해줘!" "어, 그래!" 청도는 뒤쪽을 향해 손을 흔들며 대답했다. 그리고 나는 몸을 뒤로 돌려 자취방으로 향했다. 힘없이 집으로 가는 길을 걸었다. 휴, 퀴즈도 결국은 시험이니까, 오늘 본 시험은 이 학교에 입학한 뒤 처음으로 치른 시험인 것이다. 시작이 좋아야 모든 것이 좋다던가. 나는 한숨을 쉬며 애써 자신을 위로했다. "그래, 다음에 잘 하면 되지 뭐. 한 번 쯤 망칠수도 있는거야" 사실 이런 건 얼른 체념해 버릴 수록 빠르다. 사실 이렇게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어 봤자 이미 치른 퀴즈의 결과를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닌 가. 하지만 첫 시험이라는 의미에 신경을 써서일까? 이상하게 마음 한 구 석이 계속 무거웠다. 아예 백지로 내 버리다니, 그건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공부를 멀리 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예이다. 이런저런 생각과 뒤숭숭한 기분을 품고 집 앞까지 도착했다. 그런데 집 주위가 이상하게 분주했다. 오가는 사람들도 왠지 많아 보였고, 길가에는 이것저것 잡다한 것들이 늘어서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방이 있는 집의 대문 앞 에 파란 색 트럭이 짐을 잔뜩 싣고 서 있었다. 아마도 누군가 이사를 오는 모양이다. 나는 잠시 서서 짐들이 어디로 들어가는지를 지켜보았다. 짐은 우리집의 대문을 거쳐 내가 사는 곳의 왼쪽 자취방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어? 아무래도 옆방의 방주인이 바뀐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방으 로 올라가다 문득 이사하느라 시끄러울 게 뻔하니 잠자기는 다 틀린 노릇 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씁쓰레한 기분을 느꼈다. 쩝. 되는 일이 하나도 없 냐, 그래. 잠시 동안의 침묵을 깨고 차 떠나는 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그리고 나는 편하게 드러누웠다. 방금 전의 것은 틀림없이 이삿짐 트럭이 떠나는 소리 이다. 드디어 옆 방의 이사가 끝났나보군. 조금 도와줄 걸 그랬나? 같은 이 웃끼리 말야. 하지만 최소한 방주인 얼굴은 봐야 이삿짐 나르는 걸 도와주 겠다는 소리를 하던지 짐정리를 도와주겠다는 소리를 하던지 할 거 아냐? 방주인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그냥 떡하니 가서 힘만 펄펄 쓰다 오면 그건 이삿짐 나르는 일꾼이랑 다른 점이 없다. 기본적으로 새로 이사오는 이웃 의 이삿짐을 들어주는 것은 서로간에 안면을 나누고 친분을 쌓기 위해 하 는 것이다. 난 이사 올 사람의 인사도 받지 않은 채로 비지땀을 뻘뻘 흘리 며 그 집의 짐을 들어주고 싶은 생각 따위는 전혀 없다. 그런데 옆방에 새 로 온 사람,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기왕이면 미녀이면 좋을텐데. 히히. 나 는 택도 없는 상상을 하며 히죽거렸다. -똑똑. 그 때 나직하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나는 뒹굴뒹굴 굴러간 뒤 문 앞에서 일어서며 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 밖 에는 아무도 없었다. 뭐야? 어떤 놈이 장난치고 도망갔나? 그 때 턱 아래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아래로 내렸다. 내 앞에는 왠 사내아이 하나가 손 에 시루떡을 한 접시 들고 방긋 웃으며 서 있었다. 아, 누군가 도망친 게 아니라 이 녀석이 문을 두드려서 못 본 것이었구나. 나는 꼬마를 향해 마 주 웃어주었다. 허, 자식. 귀엽게도 생겼네. 꼬마는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눈이 나쁜지 꽤 큼지막하고 둥그런 무테 안경을 쓰고 있었으며 깔끔한 아 동정장 차림에 신발까지 구두 차림으로 갖춰 입고 있었다. 허, 녀석. 아주 빼 입었구만, 빼 입었어. 꼬마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옆집에 새로 이사온 김,한,수,라고 합니다. 떡 좀 드셔 보시라고 가지고 왔어요" "그래, 맛있게 먹으마. 녀석, 똑똑하구나?" "그런 말 자주 들어요. 헤헷" '모범적인 유치원생의 자기소개법'을 철저히 지켜가며 인사한 꼬마는 내 칭찬에 깜찍하게도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을 했고 나는 핏 웃고야 말 았다. 자기를 가리켜 한수라고 말한 그 꼬마는 이윽고 내게 떡을 들이밀었 다. 나는 한 손으로 일회용 은박접시를 받아들면서 한 손으로 한수의 머리 를 쓰다듬어 주었다. 검은 색 팥고물을 잔뜩 얹은 시루떡은 아직까지 따뜻 했다. "고맙다. 그런데 그 옷은 오늘 이사온다고 입은거니?" "네. 옷 이쁘죠?" "그래, 이쁘다"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헤헷" 한수는 고개를 숙이며 헤헤거렸고 나는 다시 미소지었다. 얼굴 귀엽고 똘 망똘망하게 생겼겠다, 성격 싹싹하고 착하겠다. 앞으로 자취생활 동안 저 녀석 덕분에 자주 웃을 수 있겠군. "그래, 너희 어머니한테 떡 잘 먹겠다고 말씀드려라" 나는 한수에게 인사하며 몸을 돌렸다. 한수를 만나서 기분이 좋기는 했지 만 완전히 기분전한이 된 것은 아니었고 무엇보다 난 쉬고 싶었기 때문에 한수와의 상견례는 이 정도로 끝내기로 했다. "어어? 우리 엄마 안 계신데요?" 한수의 의외의 대답은 내 발을 붙잡았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보았다. 꼬마는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 안 계신데 누구한테 잘 먹겠다고 전해야 되요?" "...그래? 엄마 안 계시니?" "네. 돌아가셨어요" 너무도 태연하게 자신의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말하는 꼬마. 갑자기 가슴 한 구석이 싸하고 아려왔다. 나는 잠시 입을 떼지 못했다. "혀어엉, 누구한테 전해요!" 자기 엄마가 죽었다는 말을 하면서 어떻게 저렇게 태연할 수 있는 걸까? 혹시 저 녀석의 기억에는 엄마라는 존재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닐까? "너희 어머님은 언제쯤 돌아가셨니?" "저 낳고 바로 돌아가셨어요" 역시 그렇구나. 그래, 아예 '어머니'라는 존재와 접해 본 적이 없으니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별 감흥이 없을 수 있겠구나. 그래도 엄마 없이 이렇게 씩씩하게 자란 한수라는 이 꼬마가 갑자기 너무나도 대견스러워 보였다. 나는 한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착하구나. 그럼 너희 아버지에게 떡 잘 먹었다고 말씀드리렴" "...저 아빠도 없는데요" 한수는 계속 이런 말을 하기가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나는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한 충격과 함께 한수를 바라보았다. '아빠도 없 는데요'. 한수의 힘없는 목소리가 내 귀를 울리고 있었다. 어떻게 이럴수가! "...왜? 아버지도 돌아가셨니?" "아뇨..." "그럼?" "엄마가 돌아가신 다음에 바로 집을 나가셨대요" 한수는 이번에도 역시 덤덤하게, 그러나 아까보다는 힘이 빠진듯한 목소 리로 대답했다. 내 머릿속에서 왠지 시나리오가 그려졌다. 한수의 어머니의 죽음, 한수의 아버지에게 남겨진 자식들, 그리고 힘들어하다 마침내 핏덩이 같은 어린 아이들을 남겨두고 사라지는 한수의 아버지. 휴, 관두자. 생각하 면 속 상한다. 나는 가슴이 아파서 한숨을 쉬었다. "휴- 그럼 지금은 누구하고 함께 살고 있니?" "누나요" "그래? 누나가 몇 살인데?" 한수는 손가락 열 개를 모두 펴서 내 앞에 내밀었다가 다시 두 개를 접으 며 대답했다. "이제 열 여덟살이에요" "그래? 그럼 누나랑 둘이 사는거야?" "예" 나의 질문에 한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나는 불현듯 걱정이 되었 다. "그런데 돈은 누가 벌어오니? 너희 누나가?" "아니요" 한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우리 외할머니네 부자에요. 우리 외할머니네에서 우리한테 돈 많이 줘 요" 돈이 많은데 이런 단칸방에서 산단 말이지? 하긴, 꼬마에게 있어서 어느 정도 이상 큰 돈은 다 '많은 돈'이겠지. "너희 외할머니가 그렇게 잘 사시니?" 한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팔을 쫙 펴서 크게 동그라미를 그리며 말했다. "우리 외할머니 지-인짜 부자에요. 집도 이-따만하구요, 방도 한 개, 두 개, 세 개, 네 개, 다섯 개, 여섯 개, 일곱 개, 여덟 개, 아홉 개, 열 개! 열 개나 있구요, 개도 있구요, 차도 두 개나 있구요, 정원도 있구요, 연못도 있 구요, 파출부 아줌마도 있구요, 계단도 있구요, 테레비도 이-따만하게 크구 요, 어...또 뭐가 있드라? 헤헤, 생각이 더 안 나네요" 한수의 말을 들으며 나는 점차 질려가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한수의 말이 사실이라면 한수의 외할머니는 한수의 말처럼 '부자'인 것이다. 집에 계단이 있다니 2층집이라는 소리고, 거기에다 차가 두 대에 방이 열 개고 정원에 연못까지 있다니. 맙소사. 질려 버리겠군. 그런데, 그렇게 잘 산다는 외할머니집에서 기껏 외손주, 외손녀들을 이런 단칸방에서나 살게 해? 방 이 열 개라며, 한 두개쯤은 내줘도 상관없잖아! 도대체 한수와 한수의 누나 가 그 집에서 같이 살면 몇 년이나 같이 살고 그 집에 가족이 있으면 몇이 나 있다고! 생각하니까 화나네! 나는 화를 꾹꾹 눌러 참으며 한수에게 물 었다. "그런데 한수야, 너 그렇게 외할머니집이 부자면 그 집에서 같이 살아도 되잖아?" 하지만 한수는 슬픈 눈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외할머니는 우리가 밉대요" "왜?" "몰라요. 우리 밉대요. 우린 외할머니 좋은데, 외할머니는 우리 밉대요. 외 할머니는 우리만 보면 막 쫓아내고 그래요" 왜 그럴까?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흠...한수의 집안만의 어떤 사정이 있 겠지. 나는 한숨을 쉬었다. 한수와 한수의 누나라는 아이가 너무 안쓰러웠 던 것이다. 그래, 그나마 한수의 누나는 별로 걱정이 되지 않는다. 열여덟 이면 사실 먹을만큼 먹을 나이 아닌가. 하지만 한수는, 이제 겨우, 이제 겨 우... "한수야, 너 몇 살이니?" "일곱 살이요" 그래. 이제 겨우 일곱 살이다. 그런데도 주위에 돌봐 줄 사람이라고는 자 기 누나 하나인 것이다. 아, 가엾어라! 나는 다시 한 번 동정의 눈으로 한 수를 쓰다듬었다. "그래, 잘 가고, 누나한테 떡 잘 먹었다고 전해 주렴" "잠깐만요. 형은 이름이 뭐에요?" 나는 한수의 반짝반짝 빛나는 눈을 바라보며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내 이름을 정확히 가르쳐 주었다. "으응, 내 이름은 '박,영,준'이라고 해" "예. 그럼 다음부터는 영준이형이라고 부르면 되죠?" "응, 그래" "알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떡 맛있게 드세요!" "그래. 잘 가라" 한수는 손을 흔들며 뒤돌아서 타박타박 걸어갔고 나는 한수가 자신의 방 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다 천천히 내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고 바닥 에 드러누웠다. 가슴이 여전히 답답했다. 하지만 망쳐버린 퀴즈 때문에 그 러는 것은 아니다. 나의 마음 속을 새로이 짓누르는 것-그것은 티없이 맑 은 한수의 웃음이었다. "옆 집에 왠 꼬마 녀석 하나 이사왔더라?" "응, 나도 봤어" 요령이가 TV를 보다말고 문득 생각이 났는지 말했다.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래? 언제 봤어?" "이사왔다고 떡 가져 왔을 때" "떡? 떡이 어디 있는데?" 내 말이 끝나자마자 요령이는 두 눈을 빛내며 고개를 이리저리 휘저었다. 그리고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바로 네 앞에 있잖아" "어? 내 앞? 내 앞 어디?" "안 보여? 네 바로 앞에 있잖아" "내 앞에 어딨다는거야 도대체?" 요령이가 신경질을 냈다. 그리고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아 글쎄 네 앞에 있대도 그러네. 네 앞에 앉아 있는 내 뱃속에 있잖아" "뭐?" 요령이는 내 말에 깜짝 놀란 듯 소리쳤다. "아 씨, 귀청 떨어지겠다!" "그런 법이 어딨어? 혼자서 먹으면 어떻게 해!" "아 농담이야 농담! 손 끝 하나 안 갖다대고 찬장안에 고이 넣어 놓았으 니까 꺼내다 데워 먹어! 요령이는 내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찬장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나 는 가람이에게 물었다. "청도는?" "뭐 그냥. 처음에는 좀 우울해하더니 나중에는 '아 뭐 그럴수도 있는거지' 하는 식으로 평소랑 다름없이 굴던데. 같이 저녁 먹고 나와 요령이는 그냥 집으로 왔다" 역시...역시 청도는 나보다 한 수 위다. 그 충격을 그렇게 쉽게 잊어버리다 니. "아 참, 세 발 까마귀의 패랑 치우한님의 칼은? 가져 왔어?" 내 질문에 가람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 속에서 작은 막대기와 둥근 패 를 꺼내어 내게 건네주었다. 작게 줄여놓은 치우한님의 칼과 세 발 까마귀 의 패다. 나는 그것들을 받아 품 속에 갈무리하며 말했다. "요즘은 언제 어디에서 누가 나를 칠 지 모르겠어. 죽겠어, 아주" "오늘도 그 유천인가 하는 녀석이 눈에 띄더군. 언제나 그렇듯이 두 사람 과 함께 다니던데" "그래? 흠...너랑 눈 마주쳤냐?" 가람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천이라는 그 녀석, 한참동안을 아예 대놓고 나를 노려보며 경계하더 군" "그래? 흠..." 엠티에서 돌아온 이후로 아직까지는 유천 쪽에서의 특별한 움직임은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유천 녀석은 언제나 경계, 또 경계해야만 한다. 난 아 직도 물 속에 잠겨가며 호수를 건너와 이윽고 나에게 뛰어들 때의 유천의 광기어린 눈동자를 잊지 못하고 있다. "자, 떡 다 데웠어-!" 요령이가 떡을 가지고 들어오며 외쳤다. 나는 눈길을 떡에 고정시키며 군 침을 삼켰다. 떡은 김을 모락모락 내며 접시 위에 먹음직스럽게 놓여 있었 다. 우리는 재빨리 떡을 중심으로 둘러앉았다. "먹자!" 나와 요령이, 그리고 가람이는 느지막한 아침에 집을 나섰다. 오늘의 오전 수업이 교수님의 출장으로 인해 휴강이기 때문이다. 자취방의 현관을 나서 자 쾌활한 목소리가 나를 향해 인사했다. 한수였다. "안녕하세요?" "그래, 너도 안녕?" 나는 가볍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한수는 누군가와 함께 담에 기대어 서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누구지? 나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 한수의 옆에 는 왠 소녀 한 명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었다. 소녀 는 큰 눈 속의 맑고 까만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배시시 웃었다. 양쪽으 로 딴 갈래머리와 헐렁한 멜빵바지를 입은 소녀의 독특한 옷차림이 우선 눈에 띄었다. 그 다음으로 들어온 것은 소녀의 맑고 순수하게 생긴 얼굴이 었다. "우리 누나예요. 누나, 인사드려. 옆집에 사는 영준이 형이야" "안녕하세요-" 한수의 말에 소녀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나는 어쩔 줄 몰 라하며 소녀의 인사를 받았다. 한수는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형, 우리 누나 이쁘죠?" "어, 그, 그래" 물론 내가 당황한 것은 한수의 누나가 너무 예뻐서가 아니라 그 인사가 좀 과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수가 누나라고 소개한 그 소녀는 정말로 그 얼굴을 본 사람이 '너무 예뻐서 당황했다'고 말해도 믿을 정도로 예뻤 다. "누나, 이름 말씀드려야지" "응! 안녕하세요, 김, 주, 희, 라고 합니다!" 한수의 말에 소녀, 즉 주희는 깜박 잊었다는 듯 자신의 머리를 주먹으로 콩 때리며 또박또박 자기 이름을 말했다. 그런데 그 이름 소개법이 독특했 다. 주희는 마치 어린애들이 자기를 소개할 때나 그러는 것 처럼 자기의 이름을 똑똑 끊어서 말한 것이었다. 주희는 자기를 소개한 뒤 배시시 웃었 다. 그 웃음이 한수보다도 더 깨끗하고 맑아 보였다. "얼씨구. 아주 넋이 빠졌구만, 넋이 빠졌어. 야, 침 떨어진다" 요령이가 뒤에서 빈정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저 녀 석이 저러는 적이 한 두번인가 뭐. 나는 다시 한 번 주희의 얼굴을 바라보 았다. 요령이와는 전혀 느낌이 다른 얼굴의 미인이다. 요령이가 전형적인 고양이의 성격, 그러니까 한 편으로는 요염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톡톡 튀 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약간 사나운 성격을 그대로 들어다 고스란히 얼굴 에 들어 놓은 것 처럼 생겼다면 주희는 하얀 도화지처럼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하고 순수하게 생긴 것이다. 특히 눈이 그랬다. 크고 동그란, 긴 속눈 썹의 예쁜 눈. 요령이의 눈도 역시 예쁘게 생겼지만 그 생김은 전혀 다르 다. 요령이의 약간 치켜올라간 눈과 주희의 동그랗게 생긴 눈은 둘의 외모 가 각각 어떻게 다른지를 고스란히 말해주고 있었다. 내가 주희에게서 눈 을 떼지 못하자 주희는 방긋 웃더니 갑자기 엉뚱한 질문을 했다. "저 예쁘죠?" "예?"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얼굴이 벌개졌다. 저, 저 애가 지금 무슨 소리 를 하는 거야...? "안 예뻐요? 치, 예쁘다고 해 주지..." "아, 예, 예뻐요" 난 얼굴이 벌개진 채 당황으로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아니, 쟤가 지금 그 만 좀 쳐다보라고 타박하는 건가? 하지만 저 얼굴의 미소는 비웃음이 아니 라 정말로 천진난만한 웃음인데? 주희는 내 말을 듣자 더욱 환하게 웃으며 한수를 향해 말했다. "들었지? 헤헤. 나 예쁘대" "어, 어, 그래, 누나..." 한수는 주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눈에 띄도록 당황하며 나와 주희를 번 갈아 바라보더니 이윽고 주희를 잡아끌었다. "누나, 들어가자" "왜 그래애, 나 아이스크림 더 먹고 들어갈거야아아아아-" 저 말투는 영락없이 네댓 살짜리 아이가 자기 엄마한테 뭐 해달라, 뭐 해 달라 하면서 떼를 쓸 때 쓰는 말투이다. 맙소사. "누나 내 말 안 들을거야?" "......" 주희는 한수가 갑자기 강하게 나오자 아무 말 없이 입을 다물고 고개를 떨군 채 바닥을 바라보다 이윽고 몸을 홱 돌렸다. "치!" "누나, 얼른 가자. 형 안녕히 가세요" 한수는 황급히 인사하며 주희를 잡아끌었다. 나와 요령이, 그리고 가람이 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윽고 요령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째 누나 동생이 위치가 뒤바뀐 것 같다?" "...그러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요령이는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역시 네가 보기에도 이상했지?"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휴, 내가 보기에 주희는 마치 정신연령이 네댓 살밖에 안 되는 것처럼 굴었다. 혹시 설마 정말로 주희의 정신연령이 비정상적으로 어린 것이라면... 그렇다면 주희는 정말로 얼마나 안 되었단 말인가! "안녕하세요, 헤헤" 자취방의 계단을 올려가려는데 주희가 이층에서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했 다. "으응, 그래" 나는 손은 흔들어 인사하며 계단을 올랐다. 그런데 요령이와 가람이가 방 으로 들어가고 나까지 계단을 올라가려는데 갑자기 주희가 급하게 달려오 더니 내 앞을 막아서며 물었다. "저 예쁘죠?" "으, 으응..." 분명히 사실을 말하는 것임에도 왠지모르게 꺼림칙한 기분이 든다. 나는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주희는 해맑게 웃으며 길을 비켜주었다. "아저씨는 몇 살이세요?" "응, 스무 살" "에이- 나보다 두 살밖에 안 많네요? 아저씨 아니네, 뭐" 주희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아무래도 지금까지 아저씨라고 불렀던 게 억 울했다는 투다. 그래, 나도 내가 아저씨라고 불리는 게 싫었는데, 잘 됐다. 나는 빙긋 웃으며 주희에게 말했다. "그럼 오빠라고 부르렴. 말도 반말로 하고" "응, 오빠" 주희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모아 대답하고는 뭐가 좋은지 손뼉을 쳤다. 귀엽기도 해라. 얼굴도 어리게 생겼는데 하는 태도까지 완전히 어린아이라 서 키가 작은 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린애를 상대하는 듯한 착각이 든 다. 나는 주희에게 손을 흔들어 준 뒤 방을 향해 올라갔다. 갑자기 문득 궁 금해지는 사실이 있었다. 설마 쟤... "너 학교는 안 가니?" "응" 주희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모든 것이 분명 해져가며 안쓰러운 마음이 내 가슴 속을 천천히 채웠다. 불쌍하다, 한수도 불쌍하고 주희도 불쌍하다...나는 애써 슬픈 표정이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표정을 조절한 뒤 웃으며 주희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잘가-" "응, 오빠도 안녕-" 문을 열고 들어서자니 요령이가 혀를 차며 주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 너보다 예쁘니까 질투나?" 나는 은근히 평소부터 그렇지 않을까하고 의심하던 것을 떠보듯 질문했고 요령이는 무슨 당치도 않은 소리냐는 듯 기막힌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내 머리를 쥐어박았다. "으이구! 이 멍청아. 너는 지금 내가 주희를 질투하면서 쳐다보는 걸로 보 이더냐? 너가 그러니까 시험은 때려 망치고 친구는 없는거야. 응?" "아 씨, 왜 때려!" "이 멍청아. 어휴..." 요령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더 말하기도 싫다는 투다. "그럼 왜 그렇게 주희를 바라보고 있었어?" "안쓰럽고 불쌍해서 그랬다, 왜?" "허, 그러셔? 너한테도 그런 감정이 있었냐?" "무슨 뜻이야?" 요령이는 새침하게 나를 쏘아보았다. "아, 아무것도 아냐. 크, 크흠!" 그리고 요령이는 주먹을 들어올리며 나를 얼렀다. "이걸 확 그냥! 어휴, 성질대로라면..." "성질대로라면 확 뭐? 확 껴안아 버리겠다고?" "에라 씨!" 나는 이죽거리면서 말로 새끼를 꼬았고 결국 요령이는 참지 못하고 내 정 강이뼈를 걷어찼다. 따악! "끄아아악-!" 나는 다리를 감싸잡으며 주저앉아버렸고 요령이는 숨을 몰아쉬며 버럭 소 리쳤다. "자꾸 까불면 죽는 수가 있어!" 끄으윽...나는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이를 악문 채 데굴데굴 굴렀다. 아으으윽...농담 한 마디 가지고 왜 이렇게 과민반응인거야! 그 때 작게 '삐 걱-'하는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구르는 와중에서도 눈을 돌려 문 을 바라보았다. 주희가 문틈으로 고개를 빠꼼히 내밀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아퍼?" "아, 끄윽, 괜찮아..." "괜찮아?" "으, 으응..." "알았어. 안녕-" ......차라리 오질 말던가. 주희는 내가 괜찮다고 하자 안도한 듯 가슴을 쓸 어 내리더니 손을 흔들며 다시 문 밖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요령이는 기가 막힌 듯 픽, 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물론 나도 어이가 없어 웃어버리고 말 았다. 요령이는 이윽고 손을 내밀어 나를 일으켜 주었다. "쳇, 병 주고 약 주고, 잘 한다, 잘 해" "남자자식이 궁시렁거리기는..." 요령이는 내가 일어나자 잠시 주희가 고개를 내밀었던 문으로 눈길을 보 내더니 말했다. "주희 쟤, 정말 안 됐어...보아하니 가족도 없이 단 둘인 것 같은데...동생 이 고생이지 뭐. 나이는 7살인데 하는 행동거지는 완전히 어른이더라" 나는 요령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보면 볼수록 안타깝지" 분위기가 좀 숙연해졌다. 요령이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짐짓 유쾌하게 말했다. "왜, 보면 볼수록 예쁜 거겠지" 그리고 나는 요령이를 멀뚱히 바라보며 말했다. "너, 설마 진짜로 주희 질투하냐?" 그리고 요령이는 발 끝으로 바닥을 톡톡 차면서 내 정강이를 바라보았다. "난 또, 한 대 맞으면 성격이 개조될 줄 알았지. 내가 너무 순진했나봐" 그런데 옆에서 가람이가 착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주인을 한 대만 더 걷어차 보시지. 네 다리는 걷어차이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걸" "그럼 어떻게 되는데?" 요령이는 빈정댔지만 가람이는 무표정했다. "어떻게 되긴, 부러지지" "그래? 어디 한 번 부러져 볼까?" 헉! 분위기 험악해진다! 나는 재빨리 요령이와 가람이 사이에 끼어들었다. "관 둬, 관 둬! 그만들 두라고! 이 옆집 애들보다도 못한 것들아!" 토요일. 학교를 쉬는 날이다. 하지만 학교에 혼자 있을 청도가 심심해할 것 같기도 하고, 또 가람이가 청도와 대련을 하고 싶어하는 듯한 눈치인데 다가 나도 바람을 다루는 연습을 하기엔 동아리방 옆의 잔디밭보다 좋은 곳이 없기 때문에 동아리방을 찾아가기로 했다. 현관을 나서자 한수와 주희가 무슨 놀이를 하는지 서로 폴짝폴짝 뛰어다 니며 깔깔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따뜻한 햇살 아래에서 한수와 주 희는 눈부시도록 밝게 웃고 있었다. 저 두 사람의 모습은 언제 봐도 마음 을 참 편안하게 만들어줘서 좋다. 나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띄었다. "어, 영준이 오빠다! 오빠 안녕!" 주희가 방긋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응, 그래" 나는 손을 까닥여 인사했다. "요령이 언니랑 가람이 오빠도 안녕!" 주희가 다시 내 뒤의 가람이와 요령이를 향해 인사했다. 요령이와 가람이 역시 손을 살짝 흔들어 주희의 인사에 화답했다. 뒤이에 한수가 우리를 향 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학교 가세요?" "그래, 너희는? 아침은 먹었니?" "예" 한수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대답했고 주희는 뭐가 불만인지 입을 삐죽거 렸다. "치...맛 없었어" "응? 주희야, 뭐가 맛없었어? 내가 의아해서 묻자 주희는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말했다. "있잖아! 내가 당근이랑 버섯이랑 싫다고 넣지 말라 그랬는데도 한수가 아침밥 주면서 그런거 만들어서 억지로 나 먹으라 그랬다? 한수 나빴지? 응?" 참 당황스러운 질문이 아닐 수 없다. 한수는 편식하지 말고 골고루 먹으 라고 반찬을 만들었는데 주희는 자기가 싫어하는 반찬 때문에 밥이 맛이 없었다면, 이건 한수가 잘못한 것일까, 아니면 주희가 잘못한 것일까? 한수 는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하지만 누나! 골고루 먹어야 된단 말이야! 좋아하는 것만 먹으면 몸에 안 좋다고!" "몰라, 다음부터는 당근이랑 버섯 진짜 안 먹을거야!" 한수는 할 말이 없다는 듯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주 희는 그런 한수를 흘겨보았다. "그런데 너희들 지금까지 뭘 하고 있었던 거니?" 요령이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예, 그냥 잡기 놀이요. 술래가 쫓아다니고 도망가는 사람은 안 잡히면 되 는 놀이죠. 제가 술래인데, 누나가 너무 빨라서 힘들어요. 그래도 재미있는 데, 같이 하시겠어요?" "아니...난 사양하겠어" 요령이는 고개를 저으며 뒤로 한 발 눌러나는 것으로써 거절의 뜻을 분명 히 비추었다. 한수는 아쉽다는 듯 코 아래를 쓱 문지르며 말했다. "뭐, 하는 수 없죠. 그럼 누나, 얼른 다시 도망가! 나 잡는다!" "응!" 주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굴 가득 짓고 있던 주희의 웃음이 갑작스레 사라지며 주희가 가슴을 움켜잡고 주저 앉았다. 주희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아아악!" 주희는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웅크렸다. 그 얼굴이 심하게 찡그 려져 있었다. "아아얏! 한수야! 나 또 아파!" 뭐? 또 아프다고? "영준이 오빠! 가람이 오빠! 요령이 언니! 나 또 아빠요! 으아아앙-!" 주희는 입술을 깨물며 외마디 비명을 지르더니 결국 눈물을 흘리며 울음 을 터뜨렸다. "으아아앙-으아아앙-아파-!" 그리고 한수는 얼굴빛이 새파랗게 질린 채 황급히 눈물을 흘리며 비명을 질러대는 주희를 향해 달려갔다. "누나, 누나! 또 아파? 응? 또 아프냐고!" "응! 누나 많이많이 아파! 으아아앙- 아파- 죽을 거 같애-" 주희는 이제 아예 목놓아 엉엉 울고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아프길래? 주 희는 온 몸을 파르르 떨면서 비명과 신음, 그리고 울음을 한꺼번에 내뱉고 있었다. 나는 주희에게로 달려갔다. 갑작스러운 가슴의 통증, 내가 알기로 는 그건 심장마비다. 아무래도 병원에 데리고 가야 할 것 같다. "주희야, 괜찮니? 주희야...?" "으앙! 영준이 오빠! 아파 죽겠어요! 엉엉엉..." 나는 주희의 등을 토닥여 주희를 달래며 등을 내밀었다. "얼른 병원에 가야겠다. 얼른 나한테 업혀! 얼른!" 하지만 주희는 주저앉은 채 그저 울기만 했다. 나는 답답해서 외쳤다. "주희야! 어서 오빠 말 들어! 얼른 업혀!" "으아아앙- 아파-" 주흰는 아예 내게 업힐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답답해진 나는 한수를 재 촉했다. "야, 내가 말해서는 네 누나가 도저히 듣지를 않는다. 네가 한 번 나한테 업히라고 말해봐라. 얼른, 급해!" 하지만 한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병원은 소용 없어요. 병원에서도 왜 이런지 모르겠다고 했단 말이에요"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 큰 소리로 외쳤다. "뭐? 병원에서도 왜 이런지 모른다고 그랬다고? 그럼 어떻게 해? 이렇게 아파하는데!" "방법이 없어요. 그저 놔두는 수 밖에...조금 있으면 진정될 거에요" "으흑, 아파, 으앙..." 주희는 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어깨를 들먹거렸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불쌍해 보였다. 하지만 단지 주희의 등을 두드려 주는 것 외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없었다. "언제부터 이랬니?" "몰라요" 한수는 짧게 대답하며 주희를 계속 얼렀다. "누나, 괜찮아? 이제 안 아프지? 응?" "으흑, 으, 으응...이제 안 아파, 그런데, 아까, 많이, 정말 많이 아팠단 말 야, 으흑흑..." 이제 주희는 목놓아 우는 대신 흐느끼고 있었다. 다행이다. 이제 고통이 없어졌다니! 그리고 한수는 주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누나, 이제 안 아파. 괜찮아. 안 아파. 누나 뚝, 그만 울어, 뚝..." "흑, 크흑, 알았어, 억, 끄윽, 흑. 뚝" 주희는 울음을 그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이윽고 한수는 몸을 일 으키며 주희를 부축했다. "자, 누나, 방에 들어가서 좀 쉬자. 그럼 괜찮아질 거야. 이따가 내가 아이 스크림 사줄게" "흑, 진짜? 약속했어?" "응, 알았어. 알았으니까 들어가자" 주희는 아이스크림이라는 한수의 말에 울먹이면서도 순순히 일어나서 한 수의 어깨의 손을 짚었다. 저런, 불안해서 못 봐 주겠군. "내가 부축해 줄까?" 하지만 한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제가 할게요. 바쁘신데 시간 빼앗아서 죄송합니다" 한수와 주희는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서 이윽고 자신들의 방으로 사라졌 다. 그리고 나는 착찹한 심정으로 주희와 한수를 바라보았다. 아래에서 요령이가 작게 말했다. "우리도 그만 가자" "으, 응" 왠지 가슴이 휑하니 뚫려 버린 듯 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시가지를 가로질러 한참을 지나가면 시장이 나온다. 집에서 시장까지 가는 길에는 일종의 상가같은 것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 상가는 4차선의 차도를 가운데에 두고 양쪽의 인도를 따라 형성되어 있다. 번화가와 시장의 중간 정도의 이미지인데, 시장 안이 주로 식료품을 다루는 가게들로 이루어져 있다면 상가는 분식점같은 먹거리나 냄비, 그릇같은 공산품을 다루는 가게들, 그리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옷가게와 액세서리 가게 등으로 형성되어 있다. 상가는 시장 못지 않게 북적대서, 차도의 1차선과 4차선은 마치 주차장처럼 불법주차된 차들로 가득하고 사람들 역시 시장처럼 발디딜 틈도 없을 정도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많은 편이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까지 복잡하다는 느낌을 받지 않는것은 시장보다 통행공간이 넓기 때문이리라. 단지 하나의 길로 이루어져 있는 시장과, 4차선의 차도와 2개의 인도로 이루어진 상가가 아무래도 똑같이 복잡하지는 않을 테니까. "어디 가서 뭐 좀 먹지?" 요령이는 계속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요령이가 저렇게 두리번거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어느 음식점을 가야 밥 잘먹었다는 소리가 나올까?'하고 고민하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지금 새삼스럽게 느낀 거지만... "어떻게 입에 닭꼬치를 물고 있는 채로 뭐 좀 먹자는 소리가 그렇게 자연스럽게 나올 수가 있냐?" ...요령이는 정말이지 대단하다. 어떻게, 닭꼬치를 사준 게 5분 전인데 아직 다 먹지도 않았으면서 또 뭘 사달라고 하냐? 내 질렸다는 듯한 태도에 요령이는 오히려 내가 이상해 보이는지 어깨까지 으쓱해보이며 대답했다. "간식이랑 밥이랑 같냐?" "그래, 그렇다고 치자..." 그 때 옆에서 한수도 거든다. "형, 저도 배고파요" "그래, 그러면 어디 들어가서 일단 뭐라도 좀 먹을까...너희 점심은 내가 사줄게" "그럼 안 사주실라 그랬어요?" 한수는 깜찍한 대답을 하며 천연덕스럽게 웃었고 그래서 나는 실소를 터뜨렸다. 귀엽게 구는군, 그래. "하하, 자식, 까불긴. 그래, 일단 먹던 건 마저 다 먹고 나서 밥을 먹자고" "에엑-" "어, 누나 왜 그래?" "이거 흘렸어, 손에 묻었어-" 이상한 소리에 옆을 힐끔 바라보니 닭꼬치에서 주희의 손으로 양념이 잔뜩 흘러내려 주희의 손이 지저분하게 더럽혀져 있었다. 휴, 한수도 저런 주희를 돌보느라 힘들겠군. "어, 누나 손에 양념 흘렸구나?" "응, 닦아줘" 한수는 이미 익숙한지 아무 말 없이 품을 뒤져 손수건을 꺼내어 주희의 손을 꼼꼼히 닦아주었다. "누나, 이런 거 먹을 땐 조심해야지" "응, 알았어. 조심할게, 헤헤" 주희는 무안한지 괜히 헤헤거리며 웃고 한수는 그런 주희의 모습에 아무 말없이 미소지으며 주희의 손을 닦아나갔다. 정말이지 비현실적인 모습이다. 7살짜리가 18살짜리를 돌보는 모습이라니! 외양만 아니라면 누구라도 오빠가 여동생을 돌보는 모습이라고 착각할 법한 모습이다. 그런데 갑자기 주희가 손에 들고 있던 닭꼬치를 떨어뜨렸다. 툭. "어, 누나, 왜 그래? 누나 이거 좋아하잖아? 아깝게 왜 땅에 떨어뜨리고 그래. 에이-" 한수는 또 주희가 실수를 한 것으로 받아들였는지 예사로운 표정으로 허리를 숙여 닭꼬치를 바라보더니 아쉬운 듯 말했다. 그런데 주희의 표정은 전혀 예사롭지 않았다. 주희의 얼굴이 고통으로 하얗게 질려 있었던 것이다. "으...으윽...한수야...나...또...아프려고 해..." 잠시 굳어있던 주희는 이윽고 입을 작게 벌리고 힘겹게 신음인지 말인지 구별하기 힘든 소리를 뱉었다. 그리고 한수는 무언가에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한 듯 눈을 크게 뜨더니 황급히 주희를 바라보았다. 주희는 서있기도 힘든 듯 가슴을 움켜쥐고 휘청이고 있었다. "누, 누나, 괜찮아?" "아...아파...안 괜찮..." 주희는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털썩. 한수는 당황한 듯 주희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누나! 괜찮아? 괜찮아? 대답 좀 해 봐! 누나!" "아...아파...으흑..." 주희의 눈가에 천천히 눈물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주희는 울음을 터뜨려 버렸다. "으아앙-! 한수야, 나 또 아파-! 아파, 아파-! 우아아앙-!" 주희는 가슴을 쥐어뜯듯 움켜잡으며 바닥에서 뒹굴고 있었다. 나와 요령이, 그리고 가람이는 깜짝 놀라 황급히 주희에게로 달려갔다. 주희는 몸을 바들바들 떨며 계속해서 눈물을 펑펑 흘렸다. "주희야, 괜찮아? 괜찮냐고!" "아파-! 영준이 오빠, 나 너무너무 아파-! 아아아악! 요령이 언니, 나 너무 아파-! 아악!" 우리 주위는 어느새 몰려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렇게 있어서는 안될 것 같다. 비록 한수가 소용없다고 하긴 했지만, 주희를 업고 뛰어서라도 병원에 가봐야겠다. 나는 다급한 목소리로 한수를 불렀다. "야, 한수야! 아무래도 안 되겠다, 너희 누나 병원에 데려가야지 이대로 가다간 정말 큰일나겠다!" 그런데 한수에게선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런, 도대체 한수는 뭘 하는거야! 너무 놀라서 질려버렸나? 하여튼, 이래서 어린 것들이란...! 나는 한수를 다시 한 번 부르며 주희를 들쳐 업기 위해 주희의 한쪽 팔을 잡아 끌었다. "한수야! 임마! 형이 부르면 대답을 해야지!" 하지만 한수는 묵묵부답이다. 도대체 뭐야? 갑자기 왜 아무런 말이 없는거야! 나는 주희에게서 눈 을 돌려 한수를 부르며 소리쳤다. "야, 한수야!" 그런데 내 눈에 들어온 한수의 모습이 상당히 이상했다. 한수는 당황해하거나 허둥대는 대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야, 한수야! 뭐하는거야 지금!" "...아, 하지만...그래도...어쩔 수 없습니까?...알았습니다..." "야, 임마!" "...그럼...알겠습니다...알겠으니 어서..." 나는 당황한 얼굴로 한수를 바라보다 문득 이러고 있을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주희를 들쳐 업고 몇 번 손을 쳐올려 주희를 안정되게 받혔다. 등에서 주희의 고통에 찬 몸부림이 적나라하게 느껴진다. 옷의 등 부분이 주희의 눈물과 콧물, 침 등으로 미지근하게 적셔졌다. 정말 많이 아픈가보군. 나는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한수 녀석은 도대체 지금 무슨 헛짓거리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자기 누나를 데려가면 알아서 따라오겠지. 그런데 그 때였다. "우리 누나를 내려놔요!" 한수가 불타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며 소리질렀다. 아니, 저 녀석이 아까부터 조금 이상하더니만 갑자기 왜 저래? 나는 걸음을 멈추고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한수를 바라보았다. "야, 왜 그래?" "우리 누나 병원 안 가도 되니까 내려놓으라고요! 이미 정신을 잃었으니깐!" "뭐?" 그러고보니 확실히 등에 업힌 주희가 축 늘어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는 살짝 주희를 등 옆으로 기울인 뒤 어깨너머로 주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수의 말대로 주희의 눈은 감겨 있었다. 다행히도 이제 더 이상 아프지는 않은지, 눈물로 범벅이 된 채 몇 올의 머리카락이 얼굴에 달라붙은 주희의 표정은 평온해 보였다. 하지만 기절했던 어쨌던 일단 주희는 환자다. 집에 데리고 가서 쉬게 해야지, 내려놓으라니? "야, 한수야!" "얼른요!" 한수의 뜻이 워낙 완강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주희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눕혔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도대체가, 아까부터 이상하게 돌변한 그 태도하며, 너무 아파서 기절까지 한 사람에게 보이는 반응하며...나는 한수에게 물었다. "한수야, 너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조용히 하고 내 말이나 들어요!" 한수가 내 말을 자르며 외쳤다. 그리고 나는 한수의 그런 무례한 행동에 기분이 조금 나빠졌다. 아무래도 이 자식이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가정교육이 조금 덜 된 놈인 것 같군. "뭐? 야, 임마, 그게 무슨 말버..." "내 말 안 끝났어!" 한수는 눈을 부릅뜨며 버럭 소리쳤다. 그것도 반말로! 아니, 이게 정말 보자보자하니까 사람이 보자기로 보이나! "야, 임마! 너 말하는 버르장머리가 뭐 그따위야!" "버르장머리고 나발이고 말 안 끝났다고! 내 말 들어!" 한수는 씩씩대며 나를 노려보았고 나는 움찔해서 입을 다물고 한수를 바라보았다. 어린애의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 한수의 고함은 나를 위축시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리고 저렇게까지 막말을 해가면서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듣고 싶기도 했다. "좋아. 이제야 입을 다무는군. 잘 들어. 나도 이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너무 급하니 할 수 없지" 잠시 입을 다물고 뜸을 들인 한수는 나와 요령이, 가람이와 우리 주위를 빙 둘러싼 행인들을 한바퀴 죽 둘러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 발 까마귀의 패를 내 놔" "뭐?" 한수의 갑작스러운 말에 나는 입을 딱 벌렸다. 솔직히, 깜짝 놀랐다! 도대체 넌 또 뭐야? 넌 뭔데 세 발 까마귀의 패를 알아? 나는 더듬거리며 무언가를 물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너무 놀라서인지 입 속에서 떠돌아다니는 단어들은 좀체로 엮이질 않았다. 그리고 한수는 그런 나의 당황한 모습을 경멸섞인 눈초리로 바라보다 이윽고 싸늘하게 말했다. "세 발 까마귀를 어떻게 알았냐고 묻지 마. 내가 세 발 까마귀를 왜 찾는지도 묻지 마. 그 밖에 세 발 까마귀와 관련된, 궁금한 어떤 것도 묻지 마. 그냥 내 놔. 형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단 두 가지 뿐이야. 말로 할 때 곱게 내놓던지, 뼈마디 한 두 개쯤 부러지고 울면서 내놓던지. 선택은 자유야. 어떻게 하겠어? 급하니까 빨리 결정해 줬으면 좋겠어" 으드득. 나도 모르게 이가 갈렸다. 이 자식 말하는 싸가지 좀 보게나? 아무것도 묻지 말고 그냥 내놓으라고? 고맙군. 질문 만들기 힘들었는데 말야. 조금씩 한수의 태도돌변에 대한 당황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한수의 태도에 대한 분노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나는 한수를 노려보며 천천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두개 다 싫다면?" "미안하지만 보기는 두 개 뿐이야. 쉽게 다시 정리해주자면, 곱게 내놓던지, 몇 대 맞고 내놓던지. 어쨌든 내놓는 것은 똑같으니까, 현명한 선택을 바라겠어" 한수의 대답은 조금씩 솟구치던 나의 분노를 폭발시키기에 충분했다. 나는 이를 드러내고 목을 쭉 뽑아서 목청껏 소리쳤다. "야, 이 싸가지없는 자식아! 지금 그게 형한테 할 말버릇이냐! 그래, 어디 한 번 해 보자, 난 절대 못 줘! 전후사정 설명하고 날 납득시킨 다음에 달라고 사정해도 줄까말깐데, 뭐? 맞고 줄래 그냥 줄래? 어디 한 번 능력 있으면 빼앗아봐라, 이자식아! 헉! 헉!" 하지만 나의 감정이 잔뜩 실린 태도에도 불구하고 한수는 한 치의 동요조차 없었다. 한수는 내 말에 인상을 살짝 찌푸리더니 나직하게 웅얼거렸다. "그래, 최소한 보기 1번은 아니라는 거지...? 흠, 실망인데. 형, 역시 팔 하나 정도는 부러뜨려야 생각이 바뀔 건가봐?" "...뭐?" 나는 너무도 기가 막혀 할 말조차 잊고 멍하니 한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한수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며, 알 수 없는 힘이 내 왼쪽 팔을 뒤로 꺾기 시작했다! "뭐, 뭐야! 이건...끄아아악!" 드드드득. 뼈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조금씩 뒤로 뒤틀리고 있었다. 분명히 내 뒤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나는 팔을 꺾이지 않기 위해 몸부림을 치며 저항했지만, 내 팔을 뒤트는 힘은 나보다 몇 배는 강한 것 같았다. 결국 나는 별 저항도 하지 못한 채 팔을 뒤로 비틀려 버렸다. 나는 고통으로 이를 악물며 한수를 바라보았고, 한수는 잔인하게도 살짝 미소지으며 나를 마주보았다. "너, 이, 이 자식..." "형, 다시 한 번 묻겠어. 대답 잘못 하면 이번엔 진짜로 형의 왼팔은 부러지는거야. 세 발 까마귀의 패를 내놓겠어?" '힘'이 다시 팔을 조금씩 뒤로 꺾었다. 삐드드득...뼈에서 미세하게 어긋나는 소리가 들려오며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끄아아아악!" "그만 둬!" 묵직한 고함을 지르며 가람이가 손에 기덩어리를 뭉쳐 그대로 한수를 향해 집어던졌다. 쐐애애액!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푸른 빛줄기가 한수를 향해 똑바로 날았다. 하지만 한수는 재빨리 몸을 빙그르르 돌려 피했다. 민첩하다! 한수가 몸을 움직임과 동시에 내 팡을 잡고 있던 물리력도 사라져 버렸다. 나는 팔을 재빨리 원래대로 돌렸다. 어깨에서 삐그덕-하고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작게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우우윽..." 다행히 어깨가 고장이 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아프기는 했지만 단지 비틀려 잡혀 있었을 뿐이니까. 나는 왼쪽 팔과 어깨를 조심스럽게 주물러서 풀어주며 입술을 깨물었다. 한수, 저 자식! 뭔가 있어! 가람이가 던진 기탄은 가람이의 조절 덕분인지, 다행히 우리 주위를 둘러싼 행인들을 맞추지 않고 대신 그들의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구경하던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엔 그걸로도 충분했다. 행인들은 자신들이 구경하던 사람의 손에서 이상한 것이 쏘아져 나오자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비명을 지르며 순식간에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차라리 잘되었군. 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가람이와 요령이를 찾았다. 빠르게 뛰고 있는 가람이가 눈에 들어왔다. 가람이는 한수를 향해 기덩어리를 던지자마자 바로 한수를 향해 돌진했다. 두두두-! 가람이의 발자국 소리가 어지럽게 엉켰다. 그런데 순간, "어억!" 가람이가 달리던 그대로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콰당! "뭐, 뭐..." 가람이는 채 말을 잇지 못했다. 허공으로 들려졌기 때문이다. 가람이는 허공에서 몇 번 빙글빙글 돌려진 후 그대로 땅으로 던져졌다. 휘익! 맙소사! "으악! 가람아!" 하지만 가람이는 허공에서 몇 번 빙글빙글 돌더니 안전하게 땅으로 착지해서 땅을 박차며 다시 총알처럼 앞으로 뛰어나갔다. "가람이형 대단한데? 다시 봤어!" 멀찍이 떨어진 한수의 비웃는듯한 말투. 그리고 한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가람이의 진로에 있던 돌덩이 몇 개가 허공으로 떠올라 가람이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핫!" 쉬리릭! 가람이는 빠르게 몸을 돌려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로 그 돌덩이들을 모조리 피했다. 하지만 그 돌들은 허공에서 멈추더니 다시 한 번 가람이를 향해 날아갔다. "젠장!" 가람이는 다시 한 번 몸을 신묘하게 돌리며 돌들을 피했다. 그런데, 갑자기 가람이의 발 밑에 있던 보도블럭이 벌떡 일어서더니 가람이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휘리리릭! "우앗!" 기습적인 공격에 가람이는 깜짝 놀라며 반사적으로 보도블럭을 쳐냈다. 퍼억! 보도블럭이 깨지며 조각조각 흩어졌다. 그런데, 그 보도블럭의 조각들은 땅으로 떨어지는 대신 허공에서 우뚝 멈추어 서서 가람이를 향해 쏟아져 들어갔다. "치잇! 귀찮게 구는군!" "이 건방진 꼬마녀석이!" 가람이의 짜증섞인 투덜거림과 동시에 한수의 왼쪽에서 앙칼진 고함소리가 들렸다. 요령이었다. 요령이가 어느새 한수의 옆까지 뛰어간 것이다. 요령이는 손을 매의 발톱처럼 웅크린 채 땅을 박차고 올라 한수와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혀들어갔다. "어엇!" 한수는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고 요령이는 회심의 눈빛을 지으며 팔을 휘둘렀다. 쐐액! 하지만 날카로운 파공음을 낸 요령이의 공격은 허공만을 찢었다. 한수가 어느 새 뒤로 미끄러지듯 물러선 것이다. 맙소사, 한수의 발은 꿈쩍도 하지 않았는데! 세상에 저게 말이 되나? 나는 한수의 발을 주의깊게 바라보았다. 한수의 발은 놀랍게도 허공에 약간 떠 있었다. 한수가 몸을 뒤로 물림과 동시에 가람이를 향해 쏘아지던 돌들이 갑자기 힘을 잃으며 흐느적흐느적 허공을 가르다 땅에 떨어졌다. 그리고 가람이는 재빨리 다시 한수를 향해 달려갔다. 첫번째 공격을 실패한 요령이 역시 착지하자마자 다시 땅을 박차고 한수를 향해 뛰었다. 이제 2:1의 상황이군! 먼저 한수를 사정권 안으로 넣은 것은 요령이었다. 요령이는 한수가 자신의 범위 안에 들어오자마자 다시 한 번 손을 휘둘렀다. 쉭! 순간, 한수는 사라졌다. 스팟! "뭐, 뭐야! 설마 순간이동?" 요령이는 당황한 듯 재빨리 멈추어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갑자기 가람이가 소리쳤다. "뒤!" 그리고 요령이는 뒤를 돌아보는 대신 반사적으로 앞으로 뛰며 몸을 빙글 돌렸다. 한수가 요령이의 뒤에서 몸을 날리며 요령이를 걷어찬 것이다. 세상에, 저런 어린애가? 하지만 요령이를 걷어차는 한수의 동작은 상당히 체계가 있어 보였다. 한수는 몸을 날리면서 시도했던 발차기가 실패하자, 재빨리 손으로 땅을 짚으며 두번째로 땅을 훑어찼다. 하지만 요령이는 이번에도 허공으로 뛰어 한수의 발차기를 가볍게 피했다. 한수는 다시 한 번 훑어차던 탄력을 이용해서 그대로 허공으로 튀어올라 요령이를 걷어찼다. 다행히 이번에도 요령이는 허리를 숙여 한수의 발차기를 피했다. 그리고 세 번의 발차기를 실패한 한수는 다시 한 번 재빨리 미끄러지듯 몸을 뒤로 물렸다. 스르륵- 이번에는 요령이가 역으로 총알처럼 뒤로 물러나는 한수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요령이가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어멋!" 요령이는 가람이처럼 던져지는 대신 끝없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어, 어엇! 저런데서 떨어지면 죽을텐데! 나는 당황한 눈빛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요령이는 이미 10미터 이상을 솟구쳐 올라간 것이다. "이 자식!" 가람이가 어느새 다시 한수에게로 달려갔다. 하지만 이미 가람이의 접근을 눈치챘던 듯, 한수는 가람이의 사정권에 접근하자 공중으로 펄쩍 뛰어 올랐다. 그리고 가람이는 비웃듯 외쳤다. "허! 어차피 다시 떨어질 것을!" 하지만 가람이의 예상은 무참하게 깨어졌다. 한수는 땅으로 떨어지는 대신, 반대로 하늘로 날아올랐던 것이다. 가람이는 눈을 크게 뜨고 위로 솟구치는 한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맙소사...!" 그리고, 참으로 당황스럽게도, 한수가 위로 날아오르자 요령이는 상승속도가 천천히 줄어들더니 이윽고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물론, 당연하지만, 난 비명을 질러버렸다. "우아아악!" 하지만 요령이는 그리 당황하지 않았다. 요령이는 떨어지면서 침착하게 외쳤다. "에어리얼 서번트! 붙잡아!" 하지만 기대하던 광풍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요령이는 당황한 듯 소리쳤다. "뭐, 뭐야?...아차!" 맞다, 그러고보니 제임스가 에어리얼 서번트를 소멸시켰었지! 그럼 저걸 어쩐다? 내 바람을 이끌어내는 힘으로는 저 녀석을 도저히 받을 자신이 없다. 저 녀석을 받을 정도의 바람을 만들려면 예전에 청도와 강의실에서 갇혔을 때 썼던 방법, 즉 대기의 방향을 틀어서 한 데 모으는 방법을 써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린다! 어쩌지? 어쩌면 좋지? "젠장! 되던 안 되던 해보자!" 나는 품 속에서 '치우한님의 칼'을 축소시켜놓은 작은 막대기를 꺼내면서 외쳤다. 쳇, 최소한 덜 아프게 떨어지게 할 수는 있겠지! 세 발 까마귀의 패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이건 어차피 힘을 모을 시간이 없는, 단판승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요령이가 떨어지면서 몸을 뒤틀어 돌리더니 빠르게 수인을 맺으며 외쳤다. "내 밑에 다 비켜어엇-!" 요령이의 예상외의 말에 나는 우뚝 서 버렸다. '도와줘!'가 아니라 '다 비켜!'라고? 저 녀석이 지금 무언가를 해보려고 저러는 건가? 그런데 갑자기 요령이의 주위를 붉은 색의 빛이 둥글게 에워쌌다. 그리고 요령이는 빙글빙글 돌면서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쉬리리리릭- 꽈아앙! 요령이는 붉은 빛을 꼬리처럼 길게 끌며 어느 승용차의 앞부분에 떨어졌다. 그리고 요령이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붉은 빛이 굉음과 함게 폭발했다. 잠시 뿌연 회색빛 먼지구름이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요, 요령앗!" 나는 다급하게 요령이를 부르며 추락현장으로 달려갔다. 추락현장은 마치 운석이라도 떨어진 듯이 보일 정도로 굉장한 모습이었다. 요령이가 떨어진 차의 앞부분은 무참하게 일그러진 채 차체에서 찢어져 있었고, 그 아랫부분 의 도로면 역시 충격이 컸는지 자잘한 잔금이 간 채 부서져 있었다. 이 정 도로 어마어마한 추락인데, 요령이는 정말 괜찮은걸까? 나는 다시 한 번 목 청껏 요령이를 불렀다. "요령아!" "으...나 멀쩡하니까 그만 불러대!" 뿌연 먼지구름 뒤편에서 흐릿한 실루엣이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것이 보였 다. 요령이었다. "젠장...팔 아파 죽겠네" "괘, 괜찮아?"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고 요령이는 몸에 잔뜩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면 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그냥 좀 뻐근할 뿐이야. 빌어먹을...우리가 한수 저 자식을 너무 얕봤었 나봐. 저 자식, 단순한 꼬맹이가 아니었어" "아니, 도대체, 어, 어떻게 그 높이에서 떨어지고도 멀쩡할 수가 있어?" 그리고 요령이는 나를 바라보다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난 고양이니까. 고양이는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다치지 않는 법을 알고 있거든. 몸에 방어막만 한 겹 두르면 그 정도쯤이야 가뿐하지" "그렇구나..." 그 때 하늘에서 경악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멀쩡하네?" 한수였다. 한수는 허공에 둥둥 뜬 채 우리를 내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높 은 곳에 있어서 얼굴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음색으로 봐서 한수는 요 령이가 멀쩡하게 일어나는 모습에 당황한 듯 했다. 그리고 요령이는 송곳니 를 드러내는 날카로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들어 한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오냐, 멀쩡하시다. 왜, 아쉽냐? 그 높이까지 올려놓은 고생이 허사가 되 서 너무 억울하냐?" 요령이의 말에 한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대답했다. "당신들 정말 대단하군...! 내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는데! 나는 '세 발 까 마귀의 패'의 주인인 영준이 형만 영력자이고 나머지 둘은 별 것 아닐 거라 고 생각했는데...이건 예상과는 완전히 반대잖아. 영준이 형은 아무것도 하 지 못하고 오히려 가람이 형과 요령이 누나가 탄성이 나올 정도로 잘 싸우 고 있네! 어떻게 그 높이에서 떨어졌는데도 멀쩡할 수가 있지?" "난 잘났으니까" 요령이는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당차게 대답했다. "그런데 저 녀석, 도대체 어떻게 된 녀석이지" 가람이가 슬쩍 손짓으로 한수를 가리키며 요령이에게 물었다. "뭐가?" "우리를 가지고 놀 정도로 빨라. 영기의 크기는 사람까지 가볍게 집어던질 정도야. 저 정도의 속도와 능력이라면 우리를 간단하게 제압할 수 있을 텐 데, 우리의 조그만 공격조차 소멸시키지 못하고 쩔쩔대. 뭐지, 도대체" "뭐긴 뭐야, 저 녀석이 초능력자라서 그런거지" 가람이의 질문에 요령이는 간단히 대답했다. "초능력자?" "척 보면 모르겠어? 한수, 저 녀석은 정신력으로 물리력을 구현할 수 있 는, 즉 염력을 사용하는 초능력자라고. 우리를 가지고 놀 정도로 빨랐던 것 은 녀석이 염력을 이용한 순간이동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고, 사람을 집 어던질 정도로 강한 물리력도 영력이 아닌 순수한 초능력이기 때문에 가능 한 거야" "...초능력자라고..." "그래. 초능력자. 그것도 어마어마한 능력을 가진. 하지만 저 녀석은 초능 력자기 때문에 영적 능력은 전혀 없지.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공격하면 허 겁지겁 피할 수밖에 없는 거고. 저 녀석이 엄청난 속도를 가지고 있으면서 도 속도로 우리를 제압하지 못하는 것도 저 녀석이 초능력자라고 가정하면 간단히 설명할 수 있어. 초능력을 통한 순간이동에는 정신집중에 따른 일종 의 시간차가 있을테니까. 원래 초능력이 정신력으로 구현되는 능력이라서, 영력보다 훨씬 더 많은 집중력을 필요로 하거든" "...그렇군" 가람이는 이해가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다행이군, 나는 이해 가 잘 안 되는데. 초능력자라고? 흠, 요령이와 가람이같은 영능력자와는 조 금 다른 개념인가보지? 어쨌든 한수 저 녀석, 정말 대단하다. 어떻게 가람 이와 요령이, 저 둘을 상대로 조금도 밀리지 않을 수가 있는 걸까? 요령이는 추락지점에서 천천히 걸어나오며 말했다. "자, 그럼 이제 2라운드를 시작해야지? 1라운드는 무승부였으니 말야" 화아악! 요령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요령이의 양 손에서 검은색 불꽃이 너울너울 피어올랐다. 그리고 요령이의 모습을 바라보던 가람이는 중얼거렸다. "흠, 이제 진짜 실력을 보여야 될 때란 말이지" 이윽고 가람이의 전신에서 새하얀 빛이 눈이 부실 정도로 강렬하게 뿜어져 나왔다. 파아앗! 잠시 후 빛은 천천히 사라지고, 대신 가람이의 전신에서 푸른색의 기의 줄기가 일렁거리며 피어올랐다. "잠깐! 기다려! 먼저 우리 누나를 안전한 곳에 옮기고 나서 시작하자" 한수는 말과 함께 고개를 이리저리 젓더니 이윽고 기절해 있는 주희의 위 치를 찾았다. 주희는 인도 한 쪽 구석에서 세상 모르고 기절해 있었다. 이 윽고 주희의 몸이 천천히 떠오르더니 이 주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쇼핑몰 의 옥상으로 천천히 떠올랐다. 느릿느릿 허공을 날던 주희의 몸은 이윽고 쇼핑몰의 옥상 난간 너머로 사라졌다. 그리고 한수는 안도감과 자신감이 뒤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나도 전력을 낼 수 있겠군" "역시 아직까지는 온 힘을 다하지 않았단 이야기지?" "물론이야. 누나를 다치게 할 수는 없잖아?" 한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우리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손을 양쪽으로 쫙 펼치며 외쳤다. "2라운드를 시작하자!" 와장창창! 한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주위 모든 건물의 쇼윈도가 부풀듯 바깥쪽으 로 휘다가 격렬한 소음과 함께 폭발하듯 깨져버렸다. 쇼윈도에서 깨져나온 유리조각들은 허공을 온통 금빛으로 수놓으며 잠시 갈 곳 모르고 이리저리 흩뿌려지다가 이윽고 빙글 돌아 모조리 우리를 향해 날아왔다. 쐐애애액! "이런 젠장!" 나는 고함을 지르며 재빨리 치우한님의 칼을 들고 힘을 가하며 외쳤다. "연습의 성과를 보여주지! 나의 부채!" 곧 작은 막대기의 형상이던 치우한님의 칼이 넓게 펼쳐지며 부채의 모습을 그렸다. 시간이 없다! 유리조각들이 빛으로 파도치며 나와 요령이, 그리고 가람이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재빨리 부채의 가운뎃살을 누 르며 내 모든 힘을 부채로 쓸어 넣고 외쳤다. "'풍사님의 모범적 연습의 성과' 1번이다! 살풀이!" 촤아앗-! 내 기합소리와 함께 내가 보기에도 꽤 장관이 펼쳐졌다. 부채의 모든 살의 끝에서 수백, 수천가닥의 빛의 줄기들이 뿜어져 우리 주위를 뒤 덮었던 것이다. 휘리리리리릿-! 곧이어 우리를 향해 날아오던 유리조각들이 내가 내뿜은 빛의 가닥들과 부딪혀 소멸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무언가 준비를 했던 듯 손의 검은 불꽃이 커진 요령이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 줄기가 눈에 띄게 진해진 가람이는 괜히 헛힘 준 것이 허탈한 듯 나를 바라 보며 말했다. "놀라운데?" "주인, 대단하군!" "후아아아!" 어쨌든 두번째 게임의 한수의 첫 공격을 어떻게 막아내긴 했군. 대답 대신 나는 한줄기 큰 한숨과 함께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털썩. "왜, 왜 그러는가, 주인!" 가람이의 황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대답할 기운도 없다. 나는 느 릿느릿 품 속을 더듬어 세 발 까마귀의 패를 더듬으며 가람이를 향해 힘겹 게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다행히도 요령이가 대신 해 주었다. "힘이 빠져서 그래" "뭐, 힘이 빠졌다고?" "그래. 저 녀석이 방금 펼친 기술, 우리한테는 별 것 아니겠지만 영준이한 테는 온 힘을 다한 공격이란 말야. 그러니 당연히 힘이 빠질 수 밖에" 요령이의 말에 가람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걱정되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괜찮은가, 주인?" "그...래, 나한테는 세...발 까마귀의 패가 있으...니까...얼른 싸움에나 집...중해" 쳇, 온 몸의 힘이 모조리 빠지긴 빠졌나보다,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 걸 보니. 얼른 기운을 차리려면 세 발 까마귀의 패를 빨리 손에 쥐어야 되 는데...그게 도대체 어디로 갔지...빨리 잡혀라...빨리...빨리... 이윽고 따뜻한 기운이 손가락 끝에 느껴졌다. 찾았다! 나는 손을 급하게 움직여 세 발 까마귀의 패를 꽉 움켜쥐었다. 세 발 까마귀의 패의 기운이 내 몸으로 왈칵 쏟아져 들어왔다. 휴- 이제야 좀 살 것 같군. 나는 비틀거 리며 몸을 일으켰다. 전쟁터 한복판에서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 닌가. 비록 아직 후들거리기는 했지만 어찌어찌 다리에 힘을 줘 선 채로 버 티고 있을 수는 있었다. "하, 영준이 형, 고작 그거 가지고 주저앉아버리면 안되지. 아직 본게임은 시작도 안 했는데!" 덜그럭, 덜그럭! 한수가 이죽대며 말을 마치자마자 갑자기 내 옆 부엌용품점에서 이상한 소 음이 내 귀를 자극했다. 뭐지? 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는 소 름끼치는 기분에 이를 악물어야 했다. "이런 젠장! 식칼이잖아!" 벽에 걸려 있던 수십 개의 번쩍거리는 식칼들이 일제히 땅과 수평으로 서 서 덜걱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주춤주춤 물러서며 손에 다시 힘을 모 았다. .. "가라!" 한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수십 개의 식칼들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빙글 회전하며 칼걸이에서 떨어져 튀어나왔다. 그리고 요령이와 가람이 모두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휘리리릭! 늦다! 어느새 식칼들은 나를 향해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젠장! 왜 나냐!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냐? 그렇다면 실수한거야! 나는 '나의 부채'에 힘을 불어넣으며 죽 잡아당겼다. "에라 이것들아! 감히 칼 주제에 누굴 어떻게 하려고 이리로 날아오는 거냐? 받아라! '풍사님의 모범적 연습성과' 2번이다! '전신방패'!" 부욱- 빛줄기로 변한 나의 부채가 나를 둘둘 휘감더니 기가 담겨 빛나는 나무판으로 변했다. 그리고 나는 아예 세 발 까마귀를 그 판에 붙여 버렸다. 나무판에 힘을 계속 주입하기 위해서다. 따다다다닥-! 이윽고 방패 바깥쪽에서 주방에서나 들을 수 있을 법한, 칼과 도마 부딪히는 소리가 연속적으로 들려왔다. "눈구멍!" 스릇- 내 몸 주위를 마치 관처럼 둘러싼 나무판에서 내 눈 높이 부분이 스르르 사라졌다. 칼들은 이미 나를 한 번 몰아친 후 포기했는지 요령이와 가람이를 향해 갈라져서 날고 있었다. 난 재빨리 손을 들어 방패를 걷었다. "나의 부채!" 휘릭- 내 온 몸을 둘러싸고 있던 나무판들이 일제히 접히며 다시 내가 '나의 부채'라고 이름 붙인 부채로 돌아왔다. 내가 이렇게 '치우한님의 칼'이 변한 모습들에 일일히 이름을 붙인 이유는, 이름을 부르면서 내가 상상하는 무기의 이미지를 떠올리기 쉽기 때문이다. 기를 사용한 술법도 마찬가지다. 난 몇 가지의 기의 응용술을 정형화시켜놓고 그것들에 각각의 이름을 붙여놨다. 예를 들면 방금 전에 사용한 살풀이처럼 말이다. 나는 오른손에 부채를 펴쥐고 왼손에 세 발 까마귀의 패를 쥐고 계속 세 발 까마귀의 패에서 힘을 보충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따다닥! 벽에 식칼들이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소리가 난 쪽으로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식칼들이 요령이의 바로 뒤를 바싹 쫓으며 날아와 하나씩 요령이의 뒤에 꽂히고 있었다. 그리고 요령이는 아슬아슬하게 그것들을 몽땅 피해내고 있었다. 벽에 꽂힌 식칼들은 벽에서 뽑힌 뒤 한 번 빙글 돌고 다시 요령이를 뒤쫓았다. "한수 이 자식, 별 것도 아닌걸로 정말 짜증나게..." 요령이가 달리면서 시커먼 기의 구름으로 뒤덮인 손을 들어 화려하게 교차시켜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우우웅- 나직한 진동음과 함께 손에 맺힌 기운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주문이 완성되었는지 죽자고 달리던 요령이가 갑자기 펄쩍 뛰면서 뒤로 돌아 양 손을 쫙 펼쳤다. "하네! 블랙 커튼!" 휘릭! 요령이의 손에서 갑자기 넓은 기의 막이 펼쳐지더니 날아오던 식칼들을 모조리 휘감아 땅에 누른 채 폭발해 버렸다. 꽈웅! 폭발이 어느 정도 걷힌 후 보자, 블랙 커튼이 폭발한 자리에는 식칼들의 흔적으로 보이는 쇳물들만이 녹아서 흐르고 있었다. 요령이는 기세등등하게 웃으며 한수를 바라보았다. "한수야, 이 언니는 이 정도로는 어떻게 못하거든? 호홋!" 가람이는? 요령이 쪽의 상황이 끝난 것을 확인한 나는 고개를 돌려 가람이를 찾았다. 가람이는 이미 똑바로 선 채 고개를 들어 한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가람이의 주위에는 식칼들이 모조리 찌그러진 채 흰 연기를 한 줄기씩의 뿜으며 땅에 떨어져 있었다. 가람이는 이윽고 무겁게 말했다. "...저 자식, 장난질이나 하고 있군..." 그리고 한수는 유쾌한 듯 웃었다. "아하하하! 이거 생각보다 더 놀라운데! 정말 대단한 이웃인걸?" 하지만 다음에 이어진 한수의 목소리는 딱딱하게 굳었다. "이제 사정 안 봐줘" 콰드득! 한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갑자기 요령이 주위의 보도블럭들이 모조리 벌떡 일어나며 요령이에게 덤벼들었다. 한 두장이 아니었다. 수 십장의 보도블럭들이 일제히 요령이에게 날아든 것이다. 아까 가람이에게 몇 개의 돌덩이가 덤벼든 정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공격이다! 하지만 요령이의 표정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짜증까지 약간 난 듯 했다. "이딴 걸로 장난치지...말라니깟!" 번쩍! 요령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요령이의 주위를 뒤덮는 검은 반구가 뿜어져 나오며 보도블럭들이 모조리 박살이 나서 날아가버렸다. 그런데 그 때였다. 따앙! 갑자기 인도의 소화전들이 일제히 터지면서 엄청난 양의 물을 내뿜었다. 그리고 한수는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진짜는 이거라구!" "뭐,뭐...!크웃!" 푸화악! 하늘을 향해 기세등등하게 뿜어지던 물줄기들이 일제히 방향을 틀어 요령이를 향해 뿜어졌다. 그리고 요령이는 갑작스레 일어난 생각 외의 공격에 허둥대다 결국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엄청난 규모의 물줄기를 정통으로 얻어맞았다. 쿠르르! 물줄기는 요령이를 공중으로 붕 띄우며 휩쓸고 가더니 상가 한쪽 벽을 후려쳤다. 쩌어엉! 나는 눈을 크게 뜨며 외쳤다. "요령아!" "형 걱정이나 하라고" "주인!" 한수의 목소리와 가람이의 외침이 동시에 허공에 울려 퍼졌다. 뭐, 뭐야? 나는 고개를 돌렸다. 마, 맙소사...! "나도 이제 돌조각으로 장난치는 건 지겨워. 형들도 원한다니 마침 잘 됐지 뭐. 이쯤에서 끝내자구" 차가, 차가 내게로 날아오고 있었다! 중형차 한 대가 육중한 몸체를 느리게 회전시키며 내게로 날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이게 뭐얏-! "제, 젠장! 전신방...!" "하압-!" 갑자기 가람이가 차천장 쪽으로 뛰어오르며 양손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그런데 그 손에서 무언가 푸른 것이 빛나고 있었다. 거대한 기의 덩어리였다. 전에 제임스가 가람이를 향해 썼던 것에 결코 뒤지지 않는 기의 덩어리! 가람이는 크게 외치며 들어올린 양손을 차를 향해 내리찍었다. "붕산장!" 쩌-어엉! 쇠망치로 쇳덩어리를 내려치는 것 같은 강렬한 소리와 함께, 나를 향해 날아오던 차가 육중한 소음과 함께 땅으로 주저앉았다. 꽈앙! 다, 다행이다! 사실 전신방패로 막을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는데! 가람이는 차를 처리한 뒤 공중에서 빙글 돌며 자신이 처리한 차 위로 손을 짚고 내려앉았다. 텅! "고, 고마워 가람아!" "뭘, 주인. 어쨌건 다행이다" 그런데, 우지지직- 차가 찌그러지는 소리와 함께 차체가 반으로 접히며 가람이를 덮쳤다! "우악!" 가람이는 외마디 고함과 함께 재빨리 하늘로 솟았다. 텅! 그리고 간발의 차로 차가 반으로 접혔다. "아직 끝났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한수의 말이 끝나자 이윽고 반으로 접힌 차체가 쿵, 쿵 뛰며 가람이를 덮쳤다. "젠장! 끝나지 않았다는 네 생각이야말로 오산임을 확실히 보여주지!" 한수의 집요한 공격에 화가 난 가람이는 양 손의 수인을 모으더니 이윽고 허공에 복잡한 문자를 그리며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깔려 죽어버렷!" 한수의 외마디 외침과 함께 지축을 울리며 쿵, 쿵거리던 차가 가람이를 향해 똑바로 날아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가람이는 수인을 앞으로 내뻗으며 목청껏 외쳤다. "염옥문, 현세강림!" 퐁- 가람이의 손끝에서 엄지손톱 만한, 눈을 크게 뜨지 않으면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작은 불덩어리가 쏘아져 나갔다. "저게 무슨 염옥문 현세강림이냐!" 나는 황당해서 외쳤다. 하지만 가람이는 내 말에 그저 씩 웃을 뿐이었다. 이윽고 무서운 기세로 날아들던 차체에 가람이가 쏜 조그마한 불덩어리가 부딪혔다. 그리고- 번쩍. 단 1초간, 염옥이 지상에 펼쳐졌다. 검은 색 문이 차의 주위로 열리면서 온 세상을 홍적색빛이 삼켜버린 것이다. "우윽!" 난 눈부심에 그만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내 귀로 괴상한 소리들이 들려왔다. '키익- 깨엑- 푸히힉-'. 염옥에 사는 귀신들이 낸 소리였을까? 그럼 정말 잠깐동안 염옥문이 열렸단 말인가? 어쨌든, 내가 눈을 조심스레 떴을 땐 차체가 고스란히 녹아 그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차체가 날아오던 위치의 아스팔트까지 모조리 녹아서 줄줄 흐르고 있었다. "끝내주는군..." 난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주술이 구현되는 걸 제대로 보지 못한게 아쉬울 지경인데? 내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감탄을 표시하고 있을 때, 내 등 뒤에서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난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요령이었다. "젠장..." 요령이를 짓누르던 물줄기가 어느 새 멀찍이 밀려나 있었다. 그리고 요령이는 거무스름한 기운에 휩싸인 손을 쭉 뻗은 채 무형의 기운을 뿜어 물줄기를 밀어붙이며 천천히 그 아수라장에서 걸어나왔다. 요령이가 처박혔던 벽은 강한 수압 때문인지, 아니면 요령이와의 충돌로 인해서인지 움푹 패여 있었다. 이건 꼭 물에 빠진 생쥐꼴이군. "기분 더러운데? 빌어먹을, 이거 생각보다 아프잖아" 요령이의 나직한 중얼거림이 들렸다. 요령이는 천천히 걸어나오며 손을 팍 튕겼다. 퍼엉! 물줄기들이 산산히 흩어지며 요령이의 길을 열었다. "기분 더러우면 어쩔건데?" 한수가 외쳤다. 그와 동시에 허공으로 뿌려지던 물줄기들이 일제히 엉키며 큼직한 손바닥을 만들었다. 맙소사, 아무리 초능력이라지만! 저런 것까지 할 수 있어? "받아랏!" 한수는 마치 자신이 직접 내려치듯 자신의 손바닥을 휘둘렀다. 하지만 요령이는 그저 커다란 물손을 노려볼 뿐이었다. 요령이는 앙칼지게 고함을 내질러다. "터져버렷!" 펑! 요령이의 몸 주위에서 시커먼 기운들이 일제히 솟구침과 동시에 물로 이루어진 거대한 손바닥이 허무하게도 맥없이 폭발해 버렸다. 마치 파편처럼 후둑거리며 떨어지는 물줄기 속에서 요령이는 한수를 노려보았다. "흠...일단 네놈을 거기서 끌어내려야겠군" "그래, 능력 있으면 끌어내려 봐" 요령이의 말에 한수는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요령이는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빗줄기처럼 떨어지는 물줄기들 사이에서 양 손을 쫙 펼치며 싱긋 웃었다. "마침 물도 많겠다...잘 됐군. 물은 최고의 매개물 중 하나이니까. 워터 스피어" 요령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땅으로 떨어지던 물들이 일제히 휘감기며 수십 줄기로 뭉쳤다. "가랏!" 요령이의 명령에 따라 물로 이루어진 수십 줄기의 투창들이 일제히 한수를 향해 쏘아져 날 쉬이익! 요령이는 멋들어진 고함과 함께 마치 정말로 창을 던지듯 팔을 하늘을 향해 휘둘렀다. "고작 이거야? 하하..." 기세등등하게 날아오는 날카로운 창날들을 보면서도 한수는 별로 겁나지 않는가보다. 한수는 작게 웃더니 다섯 손가락을 쫙 펼쳤다. "지금 장난해?" 한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요령이가 던진 수창은 모조리 방향을 틀어 한 곳으로 뭉쳐 거대한 물덩어리를 이루더니 허공에서 터져 버렸다. 파파팡! "누나가 기를 이용해서 물을 엮을 수 있다면 나 역시 염력으로 물을 흩어버릴 수 있다는 걸 잊으면 안 되지...애초에 먼저 물을 이용해 공격한 건 나거든" 허공에서 수백만 개의 작은 물방울들이 반짝거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요령이는 즐거운 듯 웃었다. "그래? 그럼 이건 어때? 워터 스피어" 요령이는 다시 한 번 쏟아져 내리는 물방울을 이용해서 수십 개의 물의 창을 엮었다. 터져나간 소화전에서 물은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었으므로 수창을 엮는 것은 쉬웠을 것이다. 요령이는 그렇게 엮은 워터 스피어를 머리 위로 똑바로 날렸다. 쐐애액-! 수창들이 쏜살같이 하늘로 날아올라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무슨 속셈이지...?" "이럴 속셈이다, 이 머리에 피도 안마른 자식아!" 요령이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찍어누르듯 손을 아래로 내렸다. 그러자 갑자기 한수의 머리 바로 위에서 수창들이 쏟아져 내려왔다! "하! 소용 없다니까?" 펑! 수창들이 한수의 머리 위에서 다시 한 번 폭발했다. 쏴아아- 물방울들이 마치 안개처럼 뿌옇게 한수의 몸을 뒤덮었다. "됐다! 걸렸어! 썬더 비드!" 탕! 요령이의 손가락에서 썬더 비드, 즉 번개구슬이 쏘아져 나갔다. 쏜살같이 한수와 요령이 사이의 간격을 자르며 날아간 그것은 이윽고 한수의 몸 주위를 뒤덮은 안개구름에 부딪혔다. 빠지지직! "크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한수가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요령이가 쏘아낸 번개의 구슬이 물방울구름 전체로 전기를 퍼뜨렸고, 거기에 한수가 감전된 것이다. 결국 애초에 수창은 한수를 감전시키기 위한 매개체, 즉 물방울을 한수 주위에 뿌리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던 것이다. 요령이, 머리 잘 썼는데...! 한수는 머리를 아래로 한 채 곧바로 떨어지다 간신히 정신을 추스렸는지 건물 3층 높이에서 추락을 멈추고 몸을 세웠다. 그리고 증오 섞인 눈길로 우리를 바라보다 외쳤다. "이...씨! 아프잖아!" "아직 안 내려왔네? 그럼 거기 똑바로 있어라!" 요령이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시큰둥하게 대답하며 한수를 향해 달려가더니 이윽고 펄쩍 몸을 날렸다. 맙소사, 뛰어서 어쩌려고? 한수가 있는 곳은 건물 3층 높이라고! 그런데 요령이와 한수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져 들어갔다. "맙소사, 인간도 아냐!" ...흠, 생각해보니 고양이었군. 어쨌든 요령이는 자신이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하며 순식간에 한수의 앞으로 날아들었다. 그리고 재빨리 손을 들어 후려쳤다. 그 손은 검은색 기가 잔뜩 엉겨 있었다. 쌔액! 요령이의 손이 자신의 앞을 갈랐다. 핏! 하지만 한수는 순식간에 다시 사라졌다. "젠장! 이번에도 순간이동이냐!" 요령이는 이번에도 허공을 후려치고는 땅으로 떨어졌다. 텅! 물론 요령이는 3층 높이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허공에서 빙그르르 몸을 돌려 사뿐하게 착지하며 뒤로 돌았다. "하, 저거 사람 정말 귀찮게 하네" 한수는 우리와 멀찍이 떨어진 곳의 땅에 내려서 있었다. 한수의 눈꼬리에 계속 매달려 있던 우리를 비웃는 듯한 표정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그 녀석은 고개를 숙인 채 눈만을 들어 우리를 뚫어지듯 바라보며 말했다. "인간 같지 않은 것들..." "인간 같지 않은 건 너겠지" 나는 기가 막혀서 대답했다. 내 말에 한수는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코웃음치며 말했다. "너희가 생각보다 강한 건 인정하겠어. 하지만 난 절대 못 이길 걸!" "그건 네 착각이고!" 요령이는 대답과 함께 몸을 날려 한수에게로 뛰어 들어갔다. "바보같은! 받아랏!" 뻐억-! 한수의 외침과 함께 기세등등하게 앞으로 달려가던 요령이는 무언가에 얻어맞고 뒤로 날아갔다. "우욱!" 뻐억! 뻐억! 뻐억! 다시 몇 번의 타격음이 들리며 요령이는 뒤로 날아와서 벽에 곤두박질쳤다. "쿠윽! 콜록콜록...!" "요령앗!" 충격이 컸는지, 요령이는 비틀거리며 격렬한 기침을 토해냈다. 그런데 요령이의 입가에서 한줄기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야! 너 괜찮아? 입에서 피 나!" "걱정 마...입술 터진 거니깐. 콜록, 콜록...!" 그 때 한수가 다시 손을 뻗었다. 쉬리릭! 한수의 주위에서 무형의 무엇인가가 흰색으로 단단하게 엉키더니 다시 한 번 요령이에게로 쏘아졌다. 쐐애액! "합!" 쩌어어엉-!요령이게 날아가던 흰색의 기운을 막아낸 것은 가람이었다. 가람이는 주먹으로 한수의 공격을 쳐낸 것이다. "뭔가 했더니 공기를 압축시킨 거군" "빨리 알아맞히는데. 염력으로 공기를 뭉친거다" 가람이의 말에 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 뒤에서 요령이가 얻어맞은 배를 감싸쥐고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한수를 향해 물었다. "콜록, 콜록, 죽겠구만...콜록, 휴우. 배아퍼. 젠장. 야, 하나만 묻자. 너...내가 알던 그 한수가 진짜 맞는거냐?" "물론이지" 한수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대답했다. 그리고 요령이는 골이 아픈지 머리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콜록, 크음...콜록. 이거 정말 대책없는 일일세..." 휘릭- 콰앙! 머리를 감싸쥐며 골 아픈 표정을 짓던 요령이는 그대로 빙글 돌아 땅으로 쳐박혔다. 그리고 한수는 이를 드러내고 낄낄거리며 중얼거렸다. "대책없긴 뭐가 대책없어" "이런 빌어먹을 놈이...! 콜록, 콜록, 이거, 완전히 글러먹은 놈일세!" 요령이는 앙칼지게 소리치며 다시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런데, 요령이는 끙끙대며 힘만 써댈 뿐 일어나지를 못했다. 요령이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이런...썩을...놈이...!" 요령이는 이를 악물며 땅을 미는 팔에 힘을 잔뜩 주었다. 하지만 팔에 핏줄만 불거질 뿐, 요령이는 일어나지를 못했다. 한수는 입가에 조롱하는 듯한 미소를 띄고 그런 요령이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대로 힘을 주면 누나를 아예 납작하게 만들어버릴 수도 있어. 아까 내가 염력으로 차를 집어던지는 것 봤지? 자, 어떻게 할거야?" "할말은 끝났냐?" "뭐?" "대답이다!" 요령이는 한수의 당황한 얼굴에 대고 소리치며 땅을 쾅! 하고 후려쳤다. 순간, 요령이 주위주위가 진동했다. 그리고 요령이는 그대로 한수의 힘의 공간에서 뛰쳐나와서 한수를 향해 달려갔다. "너는 잡히면 죽는거야!" "웃기지 마, 누나랑 형들은 날 절대 못 이겨!" "이거나 먹어랏!" 요령이는 달리면서 그대로 두 손을 절할 때 겹치는 모양으로 겹치더니 손바닥에 기를 뭉쳐서 마구 퉁겨대었다. 콰콰콰쾅!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며 깨진 보도블럭이 이리저리 튕겨올랐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한숨을 쉬었다. "아주 시내를 박살을 내는구나..." 이거 설마 뉴스에 나오는 건 아니겠지? 으윽, 그러면 큰일인데...! 나는 순간적으로 '도시를 마구잡이로 파괴한 4명의 범죄자'라는 제목의 신문기사를 떠올리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생각해보니 이거 정말로 뒤처리가 큰 문제겠군.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차까지 박살을 내버렸으니! "합!" 한수의 날카로운 고함소리가 들렸다. 순간이동을 했는지, 한수가 어느새 다시 요령이의 뒤에 뜬 채 발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요령이는 기다렸다는 듯 팔꿈치를 들어 뒤로 찍었다. 쩌억! 요령이는 팔꿈치를 한수의 배에 박은 채 그대로 주먹을 올려 한수의 이마를 후려쳤다. 따악! "크으윽!" "이 자식아, 엄살 피지 마! 힘 빼서 때렸어!" 요령이는 다시 멱살을 잡아 한수를 몇바퀴 빙글빙글 돌리다 땅에 메다꽂았다. 콰직! "그런 같잖은 무술실력으로 누구를 걷어차겠다는 거야? 엉?" "아야...큭...!" 한수는 대답 대신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고보니 한수와의 싸움을 시작하고 나서 한수가 이렇게 크게 당한 것은 처음이다. 요령이는 그대로 손바닥을 한수의 몸에 들이대며 외쳤다. "홀드 퍼슨!" 우웅- 작은 진동음과 함께 한수의 주위로 파란색의 기의 막이 둘러쳐졌다. 그리고 요령이는 한 손을 뻗어 한수를 향해 치켜든 채 득의양양한 미소를 띄었다. "어때? 못 움직이겠지?" "...우우..." 한수는 대답 대신 괴성을 흘렸다. 이상해서 한수를 자세히 살펴보니, 한수는 몸을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굳어 있었다. 아마 요령이가 건 주술이 한수를 마비시키는 종류의 것인가 보다. "자, 이제 이 누님과 진심을 나눌 생각이 좀 드냐? 응?" 한수는 눈만 희번덕거릴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파아앗! 요령이의 주위로 아까 한수가 보여줬던, 수십 개의 반투명한 공기의 덩어리들이 뭉치더니 쏜살같이 요령이에게로 쏟아졌다. "우왁!" 퍼퍼퍼퍽! 너무 갑작스럽게 당하는 일이라, 요령이는 대처할 틈도 없이 간신히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자신에게로 날아오는 덩어리들을 고스란히 얻어맞고 비틀거렸다. 그리고 한수는 마비가 풀렸는지 벌떡 일어나서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흥! 뇌까지 마비시키진 못했나보지? 하하하! 어디 한 번..." 그런데 갑자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한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잠시 크게 부릅뜨더니, 천천히 허물어지듯 쓰러져버린 것이다. 털썩! 흙먼지가 풀썩 일었다. "뭐, 뭐야?" 갑작스러운 일에 요령이가 놀랐는지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누군가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시끄러운 꼬맹이 같으니라고" 가람이였다. 가람이가 손을 탁탁 털며 쓰러진 한수의 뒤에 서 있었던 것이다. "네가 쓰러뜨렸어, 가람아?" "그래. 뒤통수를 한 대 살짝 쳤더니 그대로 쓰러지더군" "......진작 그렇게 하지 그랬냐" "아까는 틈이 없었거든. 방금 전 같은 경우는 완전히 기세 등등해서 자신이 빈틈 투성이인지도 모르던걸. 덕분에 쉽게 쓰러뜨렸지" "그럼 이겼나보네..." 요령이가 허무한 듯 중얼거렸다. 그래, 이겼나보다. 솔직히 이렇게 쉽게 끝날 줄은 몰랐다. 긴장이 풀리자 다리의 힘이 한꺼번에 빠져 버렸다. 나는 한숨을 쉬며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털썩. "...그런데 이걸 어쩐다냐?" 나는 주저앉은 채 주위를 둘러보며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주위는 시가전이 막 끝난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모습이었다. 땅은 이리저리 패여 있었고, 보도블럭은 마구잡이로 깨어지고 금이 간 채 이리저리 뒤집혀 흩어져 있었으며, 시커멓게 그슬린 채 땅이 녹아 내린 흔적에, 소화전은 터져서 아직도 거세게 물줄기를 내뿜고 있었고, 벽은 이리저리 금이 가고 그슬려 있었다. 가람이 역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관자놀이 부근을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어쩌면 좋지?"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요령이가 간단하게 해결책을 내놓았다. "고민하고 말고 할 것도 없잖아? 튀자!" "찬성" 요령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람이가 대답했다. "그런데 주희는 어떻게 하지?" 나는 손가락으로 주희가 기절한 채 올려진 건물 꼭대기를 가리켰다. 그리고 요령이와 가람이는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흠..." "내가 금방 가서 데리고 올게" 가람이는 시원스레 대답하고 주희가 있는 건물을 향해 달렸다. 잠시 후 가람이는 주희를 품에 안고 건물을 나왔다. 엄청 빠르네. 마음 속으로 무지하게 조급했었나보군. 어쨌든 이제 다들 챙긴거지? 나는 기절한 한수를 들쳐업고 외쳤다. "가자!" .. "...일어난 이 참사는 아직 그 원인이 파악되지 않았으나 경찰에서는 우선 가스누출에 의한 폭파사고로 단정하고 있습니다. 한 편..."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뻐근한 어깨를 주물렀다. 으윽. 아까 너무 긴장했었나봐. 어깨가 완전히 돌덩이 같은 걸? 아무리 목을 빙글빙글 돌리고 주먹으로 두들겨대도 팽팽하게 당겨진 어깨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으윽, 젠장. 이럴때 부드럽게 안마해 줄 수 있는 여자나 한 명 옆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흠, 생각해보니 비슷한 건 한마리 있군. "야, 요령아!" "왜?" 요령이가 언제나 그렇듯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와서 내 어깨 좀 주물러봐라. 주인님 어깨 아프시다" "흐흥, 그러셔?" 그런데 요령이가 군말없이 내 어깨에 손을 얹고 주무르기 시작한다. ...혹시 얘가 뭐라도 잘못 먹어나? "어, 시원타! 웬일이냐? 투덜거리지도 않고? 하여튼 사람이란 역시 오래 살고 볼일이라니까" "몇 살이나 처먹었다고 벌써부터 나이 타령이냐?" "이제 성격은 고쳤으니까 그놈의 혓바닥만 좀 어떻게 바꾸면 좋을 텐데. 어떻게 안되냐?" "닥치고 어깨나 똑바로 펴셔" "...아, 그래" 아, 시원타! 그런데 요령이의 손의 느낌이 왠지 좀 이상하다. 눈으로 볼 때와는 달리 두껍고 둔탁한데다 거칠거칠한 게, 사람 손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자꾸 드는 것이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다 물었다. "야, 너 손이 뭐 그러냐?" "뭐가?" "너 손 무지 거칠구나? 겉모습은 여잔데, 손은 뭐 그래? 손이 완전 꽝이구만!" "내 손이 뭐 어때서?" "뭐 어떻긴? 이상하구만. 꼭 사람 손이 아니라 곰발바닥 같은데?" 내 말에 요령이는 기분이 상했는지 언성을 높이며 내 눈 앞에 자신의 두 손을 불쑥 내민다. "뭐가 어떻게 이상하다는 거야?" "어...?멀쩡하네" 이상하다. 내 눈 앞에 있는 요령이의 두 손은 모두 이쁘기만 한데...가 아니라, 어억! 여기 양 손이 다 있으면, 내 어깨를 주무르고 있는 이건 뭐냐! 나는 경악과 두려움에 차서 천천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리고 결국, 어느 정도는 예측하고 있었지만, 난 봐서는 안 될 것을 봐버리고야 말았다. 내 어깨 위에 살포시 얹어진 채 꼬물락거리고 있는, 요령이의 엄지발가락을. "이런 추잡한 것아-!" 미리 핑계를 대자면, 절대 노리고 한 짓이 아니었다. 반사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어쨌든 내 어깨 위에서 꿈틀거리는 추잡한 것에 소스라치게 놀라버린 나는 나도 모르게 요령이의 발목을 잡고, 허리를 크게 뒤틀면서, 그대로 요령이를 벽으로 던져 버렸다. "우악- 뭐 하는 짓이야!" 빙글- 요령이는 반사적으로 몸을 틀면서 벽을 차고 멋지게 착지했다. 척. 오호. 10점 만점에 9.8점 드리지...가 아니라! "...뭐 하는 짓이었지? 방금..." "...그러는 너야말로 뭐하는 짓이었지?" 요령이는 한쪽 무릎을 꿇은 착지자세 그대로 고개만 들어올려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요령이의 목소리에서는 뱀이 쉭쉭거리는 것 같은 위협이 넘쳐난다. 상대방을 반드시 제압하겠다는 저 강렬한 눈빛. 난 요령이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목소리를 낮게 착 깔고 요령이를 날카롭게 노려보면서 말했다. "그 더러운 발을 누구 어깨에 갖다대는 거야" "어깨에 댔다고 벽에 메다꽂으면 얼굴에 갖다댔으면 아주 죽였겠다?"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올래? 사과해" "너나 사과하시지?" "끝까지 이런 식으로 나올거야? 어서 사과해" "너나 사과햇!" 요령이의 표정이 점점 더 험상궂어지고 있었다. 허, 사과? 웃기지 말라그래! 내가 왜 사과를 해! 나는 코웃음을 치면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한번만 봐주세요!" ...요령이 표정이 약간 무섭더라고...쳇. 나는 풀이 죽어서 고개를 떨구었고, 나를 이긴 요령이는 득의양양하게 씩 웃으며 승리의 브이자를 그렸다. "까불고 있어" 씨...결국 또 이번에도 내가 지고 말았군. 흑, 하늘이여!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핍박받으며 살아야 한단 말입니까? 쳇, 언젠가는 너의 미래에 나의 지금의 음험함을 복수를 실은 저주의 그림자로 드리워 주지! 내가 해놓고도 무슨 소린지는 잘 모르겠다만, 여하튼 두고보라는 의미라는 것만 기억해둬! 으흐흐흐...! "으흐흐흐는 뭐가 으흐흐흐야. 뭐가 좋다고 실실 웃고있냐?" 아차차...이런. 내가 그만 너무 생각에 빠져서 그만 실수를 해버리고 말았군. 무안해진 나는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어물어물 넘어가며 말을 돌렸다. "야, 근데 어쨌든 TV나 신문에서 별 말 안하니까 다행은 다행이다. 그치?" "그건 그래. 시내 한복판에서 그렇게 들고 싸웠다니...지금 생각하니까 만약 사진이라도 찍혔으면 어쩔 뻔 했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서 좀 오싹해진다. 히힛" 요령이는 괴상하게 웃으며 내 말에 대답했다. 그리고 나는 여유 만만하게 웃으며 요령이의 말에 대답했다. "오싹은 무슨 놈의 오싹? 들키지만 않으면 그만이지. 어차피 주위에 사람들도 다 도망가고 하나도 없었잖아?" 그런데 벽에 기대어 앉아 조용히 티비를 보고 있던 가람이가 한마디 꺼냈다.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주인" "뭐?" "텔레비젼에 나오는 기사를 잘 들어 봐" 도대체 무슨 기사가 나오길래? 나는 텔레비젼에 귀를 기울였다. "...현장을 보았다고 증언하는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서로 뒤엉켜서 폭발물을 이용한 격렬한 싸움을 벌였다고 합니다. 경찰에서는 일단 허황된 사실이라고 판단하고 있으나 목격자들의 진술이 서로간에 상당 부분 일치하여..." 오싹... 등에 소름이 쫙 끼쳤다. 이거 경찰서에 잡혀가는 거 아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미치겠군. 도대체 누가 본 거지? 아까 사람들은 모조리 도망갔었잖아" "상가에 있는 상점의 주인들 아닐까? 그 사람들은 행인들이 아니라서 실내에 그대로 있었을 것 아냐" "그런가? 어휴...어쨌든 이것 참 골치네. 이거 갑자기 어디서 검은 선글라스 쓰고 검은 코트 입은 사람들이라도 와서 우리를 잡아가거나 하는 거 아냐?" "형사들 말이지?" "뭐 경찰일 수도 있고. 또 알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숨겨진 기관라도 있을지. 왜 그런 거 있잖아. 정부에서 만든 특수집단. 만약 실제로 있다면, 영화에서처럼 저 현관을 벌컥 열리도록 쾅! 하고 걷어차면서-" 쾅! "으악! 잘못했어요! 한 번만 봐주세요!" "오빠! 언니! 큰일났어요! 어? 영준이 오빠? 왜 그러고 있어요?" "아, 아무것도 아니다...신경 쓰지 마" 문을 벌컥 연 것은 내 상상과는 다르게 잔뜩 당황한 표정의 주희였다. 나는 머쓱해하면 두 무릎을 꿇은 채 양 손을 맞비비던 자세를 편하게 풀었다.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으윽, 젠장. 나는 요령이를 곁눈질로 슬쩍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요령이의 얼굴 전체로 짓궂은 웃음이 퍼져 있었다. 이, 이런...또 약점 잡혔네! "아니, 저, 그게, 요령아, 말이지..." "어머? 왜 그렇게 말을 더듬고 그러시나? 뭐 죄졌어?" "아니, 뭐, 꼭 죄를 지었다기보단, 거시기, 그 뭐냐...그러니깐..." 요령이는 키득거리더니 곧 남자 목소리처럼 목소리를 굵게 깔며 양손을 겹치고 사정하듯이 말했다. "왜 당황하고 그러세요. 저 때문인가요? 죄송해요! 한 번만 봐주세요!" "야! 하지마!" "아이 참, 언니랑 오빠! 제 말 좀 들어봐요! 글쎄...!" 주희는 급한 일인지 내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어떻게든 자신을 한 번 보게 하기 위해서 열심히 애쓰고 있었다. "하지 말래도! 주희가 할 말 있다고 하잖아!" 하지만 요령이가 먹을 것만큼이나 좋아하는 게 장난이다. 그렇게 쉽게 그만둘 리 없다. "아차차...말 가로막아서, 죄송해요! 한 번만 봐주세요!" "에이 씨, 하지 말라니깐!" "왜 왔나" 허둥대는 나와 그런 나의 모습을 즐기는 요령이의 뒤쪽에서 가람이의 질문이 낮게 들려왔다. 그리고 주희는 가람이의 말에 이제야 말을 할만한 상대를 찾았다고 생각했는지 얼굴을 환하게 빛내며 급하게 말을 쏟아내었다. "가람이 오빠, 가람이 오빠! 글쎄 한수가, 한수가...!" "없어지기라도 했나?" "예?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주희는 놀란 듯 큰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뜨며 가람이에게 물었다. "어떻게 알긴, 알 만하니까 알지" 가람이는 대답과 함께 피식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주희를 향해 어색하게 웃어 주었다. "주희야" "네?" "한수 말이지, 우리집에 있어" "그래요? 휴- 다행이다!" 주희는 한수가 우리집에 있어서 천만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 내리곤 내게 말했다. "한수는 너무 어려서요, 아마 나쁜 사람들이라도 만나면요, 큰-일 날거 에요. 우리 엄마도 저 어렸을 때 그랬어요. 나쁜 사람들 보면 큰일난다고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네?" 나는 주희의 반문에 대답 대신 쓴웃음을 지었다. 한수가 '나쁜 사람들'을 만나면 큰일 난다고? 그 말엔 별로 동의할 수가 없는걸. '나쁜 사람들'과 한수가 만나면 아마 큰일 나는 건 한수가 아니라 '나쁜 사람들'쪽일 것이다. 아니, '나쁜 사람들'수준은 너무 약하다. 한수 정도라면 어지간한 폭력조직 정도라도 가볍게 박살낼 수 있지 않을까? 하하... "어쨌든 한수가 오빠네 집에 있다니까 정말 다행이에요. 제가요, 아까 가슴이 너무 아파서 잠깐 잤거든요, 그런데 눈을 떠보니까 집이고요, 한수가 없더라고요, 너무 깜짝 놀라서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어요" 아...눈알이 튀어나올 뻔했었냐?...것 참...어디서 그런 바르고 고운 말을 배워와서 사람 당황스럽게 만들고 그러냐. "그래? 그런데 아파서 잤을 때는 잤다고 하는 게 아니라 기절했다고 하는 거야. 그건 그렇고 도대체 기절이라는 단어도 모르는 애가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다'같은 말은 도대체 어디서 배운 거니?" "네? 전에 요령이 언니가 오빠 뒤에서 등치면서 '왁!'하고 소리 질렀을 때, 오빠가 요령이 언니한테 소리 막 지르면서 눈알 튀어나올 뻔했다고..." "...내가 그랬던가?" 나는 머쓱해져서 머리를 벅벅 긁었고 요령이는 그런 내가 한심하다는 듯 나를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안 봐도 뻔하지, 주희가 너 때문에 얼마나 교육상 안 좋은 일을 많이 봤는지. 뭐 너란 인간이 언제 인류에 도움되는 짓 한 적 있냐" "뭐라고?" "그럼 한수는 지금 뭐해요?" 잠시 요령이와 나 사이에 흐르는 냉기류를 뚫고, 주희가 다시 한 번 나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면서 한수가 어디 있는지 물었다. 이거 대답을 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나는 대답할 말이 없어 그저 히죽 웃으며 주희의 질문을 외면했다. 하지만 주희는 뭐가 그렇게 궁금한지 계속해서 나를 보챘다. "아이 참, 한수 뭐 하냐고 묻잖아요! 한수 자요?" "자, 자냐구? 응, 뭐 잔다면 잘 수도 볼 수도 있고. 하핫!" 나는 다시 한 번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런데 이런 나의 모습을 보고 주희가 뭔가 의심스러운 생각이 들었나보다. 갑자기 주희가 내 옷자락을 놓더니 무작정 우리 자취방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려 했다. "주, 주희야! 아직 들어오면 안 돼!" 하지만 주희는 막무가내로 고개를 들이밀면서 이 말만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한수 어디에 있어요? 한수 오빠네 방에 없잖아요! 한수 어디에 있어요?" 당연히 한수가 방에 있을 리가 없지. 애타는 내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희는 어떻게든 방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낑낑거리며 안간힘을 썼다. "한수 어디 갔어요? 한수 없잖아요! 한수 어디에 있어요? 네? 한수 없잖아요! 네? 한수 어딨어요?" "한수 자! 잔다니까!" "거짓말! 거짓말쟁이! 한수 내놔요! 한수 내 놔!" "아 글쎄 한수 지금 잔다니깐!" 난 나도 모르게 짜증이 솟아올라서 주희에게 소리를 벌컥 지르고 말았다. 그리고 갑자기 내가 소리를 버럭 지르며 무섭게 굴자 주희는 놀랐는지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다가 결국 자기 발에 걸려서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고야 말았다. "우, 우흑, 우흑..." "아, 저, 저기 말이지..." "우아아앙- 한수 내놔- 이 나쁜 놈아-!" 내가 채 뭐라고 변명을 늘어놓기도 전에 주희는 주저앉은 채 눈물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이, 이런! 나는 당황해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멍하니 주저앉아 어린애처럼 펑펑 울고 있는 주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요령이는 옆에서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남이 보면 꼭 니가 무슨 큰 죄라도 진 줄 알겠다, 야" "...뭐?" 그, 그러고보니 이런 모습을 남들이 보기라도 한다면...! 나는 시퍼렇게 질린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아직 여기를 보는 사람들은 없었지만 이렇게 좁아 터진 동네, 주희가 저렇게 동네가 떨어저라 울어젖히는 소리가 남의 귀에 안 들어갈리가 없다. 이, 이런 젠장! "어떻게 할거야? 이렇게 울게 놔둘거야?" "놔두긴 뭘 놔둬! 일단 들어가야지!" 나는 툴툴대면서 주희의 손목을 잡고 주희를 일으켜 세웠다. "주희야!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일단 방으로 들어가자, 응?" "어어엉-! 이거 놔, 이 나쁜 놈아! 한수 내놔! 엉엉-!" 주희는 계속해서 펑펑 눈물을 쏟으면서 나에게 끌려가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쳐댔다. 뭐야! 아까는 방에 안 들여보내준다고 울더니 이제 방에 들어가자는데 왜 또 이래! 나는 당황해서 주희의 손을 잡은 팔에 더욱 힘을 주어서 주희를 질질 끌다시피 잡아당겼다. 하지만 주희 역시 필사적이었다. "어엉-! 한수 내 놔, 한수 내 놔! 이 나쁜 놈아! 한수 돌려줘!" 퍽! 퍽! 마치 어린애들이 울면서 아이스크림 안 사준 엄마에게 토닥거리듯이 주희가 어설프게 주먹을 움켜쥐고 내 등을 투덕거렸다. 물론 하나도 안 아프...긴 뭐가 하나도 안 아파! 주희가 비록 정신연령은 저래도 나이가 18살. 말만한 처녀다. 최소한의 근력은 된다는 소리다. "아! 아파! 그만 좀 때려!" "한수 내 놔! 이 나쁜 놈아! 엉엉엉-! 우리 한수 돌려줘! 이 씨! 이 씨! 엉엉- 콜록콜록, 켁켁! 엉엉-!" '이 씨!'를 외칠 때마다 주희의 타격력 높은 주먹이 퍽, 퍽 거리며 내 몸 이곳저곳을 후려쳤다. 미치겠네, 이거! 주희는 이제 울다가 사레가 들려서 콜록대고 있었다. 나는 아둥바둥대는 주희를 마치 억지로 말 물 먹이러 시냇가에 끌고 가듯 질질 끌어가면서 기가 막혀 중얼거렸다. "어이구, 정말 '어린아이 우는 법 교본' 3장에 나온것과 똑같이 하고 있군 그래!" 그리고 옆에서 나와 주희의 실랑이를 바라보던 요령이가 내 말을 듣고 황당한지 눈을 크게 뜨며 내게 물었다. "진짜 그런 책이 있어?" "너 같으면 따뜻한 밥 먹고 그딴 책 쓰고 싶겠냐! 그런 쓸데없는 거 물어볼 시간 있으면 와서 이거나 좀 거들어!" "우왕-! 이거 놔! 한수 내 놔!" 잠시 투닥거리는 실랑이 끝에 간신히 주희를 방안까지 끌고 올 수 있었다. "가람아! 현관 닫아라!" "알았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내 입에서는 수천 년은 묵은 듯한 한숨이 푹 퍼져나왔다. "휴우우우-! 죽는 줄 알았네!" 나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진땀을 닦았다.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 젠장! 주희 쟤는 호리호리하게 생긴 게 무슨 놈의 힘이 그렇게 세담? 나는 새삼 화가 치솟아 주희를 바라보았다. 주희는 여전히 펑펑 눈물을 쏟고 있었다. "야! 너 아깐 한수 보고 싶다며! 한수 보여준다는데 왜 그래!" "어흑, 어억, 끅, 끄윽, 한수, 한수 내놔, 이 나쁜 놈아....크응" 내가 소리를 지르던 말던 신경도 안 쓰는지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주희. 이제 주희도 울다 지쳤는지 콧물을 들이키며 끅끅거릴 뿐 아까처럼 통곡을 하고 울지는 않는다. 그리고 주희의 우는 모습에 왠지 마음이 측은해진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이런 젠장. 그런데 가람이가 내게 말을 걸어 왔다. "어쩔 건가, 주인" "뭘?" "한수를 보여달라지 않나" "뭘 어떻게 해, 어떻게 하긴. 보여달라는데 보여 줘야지" 나는 툴툴거리며 대답했다. 저렇게까지 주희가 엉엉거리는데 안 보여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주희의 지금의 반응으로 봐서, 한수의 모습을 보면 주희가 어떤 태도를 보일지는 뻔하다. 그래서 나는 주희에게 한수를 보여주는 것이 심히 걱정되었다. "걱정말고 보여줘. 정 안되면 내가 뒤에서 한 대 후려쳐서 기절시켜 버릴테니까" 아아, 요령아, 너는 세상 단순하게 살아서 좋겠다. 하지만 뭐, 이러니 저러니 걱정해봤자 이미 우리는 주희를 방안까지 데리고 들어와 버렸다. 할 수 없지, 뭐. "주희야, 울지 말고 뚝! 내가 한수 데리고 올게" "흑, 흑, 얼른 데리고 와, 이 나쁜 놈아... 흑" "울음 안 그치면 안 데리고 올거야, 뚝!" "흑, 큭, 뚝! 흑..." "그래, 말 잘 듣는구나. 그럼 한수 보여줄게. 기다려" 대충 주희를 달랜 나는 과연 주희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약간은 기대감을 가지고 옷장의 문을 열었다. 끼이익- 어떤 낡은 물건에서나 쉽게 들을 수 있는 기분 나쁜 마찰음과 함께 옷장이 천천히 열리고, 주희는 내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눈을 크게 뜨며 잠시 잦아들었던 울음을 다시 한 번 터뜨렸다. "우, 우흑! 한수야!" "주희야! 울지 말고, 잠시만...!" "한수야! 우와앙-! 한수 풀어줘! 이 나쁜 놈아!" 이거 미치겠군.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탁, 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우리가 기절시킨 한수를 떠메고 자취방으로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한 짓은 한수를 비닐끈으로 칭칭 묶는 것이었다. 다행히 한수는 꽤 오랫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고, 그래서 작업은 수월했다. 어쨌든 그렇게 묶은 한수를 옷장 안에 넣어놓은 뒤, 요령이와 가람이는 신호만 하면 온갖 주문이 쏟아져 나올 수 있도록 옷장 안에 주술을 잔뜩 걸어 놓았다. 혹시 청도가 깨어난 뒤 반항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방비를 철저히 한 것이다. 덕분에 지금 한수는 마치 미라처럼 비닐끈에 칭칭 감긴 채 옷장 한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물론, 자기 동생이 묶여서 갇혀 있는 것을 보면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누나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나쁜 놈아! 젠장할 놈아! 썩을 놈아! 멍청아! 싸가지 없는 놈아! 한수 풀어줘! 엉엉!" "...다음부터는 제발 애들 앞에서는 말을 가려서 해라..." 가람이의 어쩔 줄 몰라하는 난처한 웃음소리와 요령이의 힘빠진 목소리가 내 귀에 들려왔다. 이익! 저게 다 나한테 배운 거라는 증거 있어? 증거 있냐고! 발끈한 내가 막 무어라고 요령이에게 퍼부으려 할 때였다. "으음..." 옷장 속에서 신음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한수가 깨어나나 보다! 일순 울던 주희도 울음을 뚝 그치고, 계속 무어라무어라 중얼거리며 내 성질을 긁어대던 요령이도 입을 다물었다. 방안은 순식간에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뭐야...누나...왜 이렇게 시끄러워...? 나 배고파...밥 좀..." 자기 집에서 지금껏 푹 자다 일어난 것으로 착각했는지, 한수는 잠이 듬뿍 묻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부스스한 눈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으음...누나? 어딨어...? "어딨긴 어딨냐 니 눈 앞에 있지" 싸늘한 요령이의 말을 들은 한수는 순간적으로 눈을 번쩍 떠서 우리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뭐, 뭐야! 너희들은!" 깨어나자마자 반말을 내뱉는 한수의 태도에 감정이 격양된 나는 한수를 향해 한마디를 내뱉었다. "저 놈의 말버릇은 아직도 못 고쳤나. 임마, 내가 장가만 빨리 갔으면 너같은 아들이 있었을 나이야 임마!" "...그건 좀 오버다..." 요령이가 옆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난 전혀 개의치 않았다. 지금 오버고 아니고가 중요하냐! 한수는 일어나려는 듯 몸을 이리저리 꿈지럭거리다 몸이 잘 움직이지 않는 것을 깨달았는지 급히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이런...! 너희들이 묶어 놓은 거냐?" "물론이지" 우리 셋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합창하듯 대답했다. 그리고 한수는 멍청히 우리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눈을 부릅뜨며 입술을 악물었다. "누, 누나..." "한수야! 우왕-!" 주희는 한수가 부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한수는 증오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우리를 노려보며 물었다. "...너희들 짓이냐?" "뭐?" "너희가 우리 누나를 울렸냐고!" 한수는 소리를 버럭 지르며 눈을 부릅떴다. 그 눈이 꼭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보는 듯 했다. 체, 쳇. 순간적으로 겁먹어 버렸다... 하지만 요령이는 전혀 겁이 나지 않는가 보다. 요령이는 흥흥대고 코웃음을 치며 한수를 바라보고 물었다. "흐흥, 겁나라. 만약 우리가 그랬다면 어떻게 할건데?" "......뭐?" "어떻게 할거냐고 묻잖아!" 요령이의 목소리가 순간 날카롭게 변했다. 요령이는 외침과 동시에 한수의 눈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살기가 가득 담긴 눈빛. 눈에서 안광이 번뜩이는 것 같다. 하지만 한수는 그런 요령이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으면서도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 "만약 우리 누나를 울렸으면...죽여버릴거야..." "흥, 니가? 나를? 내가 손가락 하나만 까닥하면 넌 지금 바로 죽어" 요령이는 조롱하듯 말했고 한수는 대답 대신 그저 요령이를 노려보기만 했다. 그리고 요령이는 코웃음 치며 한수에게 말했다. "하, 좀 웃기지 좀 마, 이 조숙한 꼬마자식아. 아무리 니가 그래봤자 넌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맹이일 뿐이야. 분해서 씩씩거리는 거 보니까 귀엽기까지 하구나. 깔깔! 그리고 니 누나는 너 찾겠다고 와서 자기 혼자서 펑펑 운거니까 혹시 곱디고운 네 누나를 한 대 후려패서 너희 철 덜든 누나가 저렇게 세상이 무너져라 우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은 집어치우라고. 알겠어?" 한수는 요령이의 다른 말에는 신경을 쓰는지 안 쓰는지, 그저 저희 누나가 별 일 없다는 말에만 안심이 되는 듯 얼굴 표정을 조금 풀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한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염력을 쓸 생각은 안 하는게 좋아. 아까 요령이가 말했듯이, 지금 네가 들어있는 그 옷장에는 가람이나 요령이 둘 중 한명이 손가락만 까닥해도 너를 가루로 만들 수 있는 주술들이 잔뜩 걸려 있으니까" "...그런 것쯤은 준비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똑똑하니 다행이군" 요령이의 비꼬는 말에 한수는 피식 웃더니 이윽고 허탈한 듯 중얼거렸다. "지금 이 꼴은...아무래도 내가 졌나보군..." "그래" 요령이가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한수는 고개를 들어 느릿하게 물었다. "이제 날 어쩔 생각이지" "먼저 좀 묻자.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한 거야?" "너희들을 공격한 이유? 벌써 잊다니 기억력이 그리 좋지는 않군. 세 발 까마귀의 패를 뺏기 위해서라고 싸우기 전에 분명히 말했을 텐데" "내가 설마 그게 궁금해서 묻겠냐? 세 발 까마귀를 가져가려고 한 이유가 뭐냐고 묻는 거 아냐!" "내가 왜 그걸 대답해야 하지?" 한수의 너무도 태연한 대답에 요령이는 흥분해서 팔을 걷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 왜 대답해야 되냐고? 흐흠, 왜 대답해야 될까? 나도 궁금한데? 우리, 왜 대답해야 되는지 일단 몇 대 맞으면서 천천히 생각해 보자. 생각나게 만들어줄게!" "아, 저기, 요령아, 참어" 나는 뒤에서 요령이의 어깨를 잡으며 어떻게든 요령이를 말리려 했지만 요령이는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 그리고 한수의 냉소적인 태도는 요령이의 그런 태도에 불을 질렀다. "그래, 꼭 무식한 것들이 주먹질이지" "뭐? 무식? 그래! 유식한 너 오늘 한 번 무식하게 맞는 게 뭔지 한번 느껴봐라!" "누나 멋대로 해. 죽이던지 살리던지..." 한수는 계속 피식거리며 웃기만 할뿐이었다. 그리고 요령이는 한수의 그런 태도에 길길이 화를 내며 분을 참지 못하고 가슴을 두드려 대었다. "어휴, 저걸 그냥-!" "...만약 네가 나였다면 어떻게 했겠는가" 요령이가 만든 소란 속을 헤치고 들려온 가람이의 침착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가람이가 입을 열자, 요령이는 씩씩대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아마도 가람이가 과연 한수를 어떻게 대하는지 보고 싶어서일 게다. "나 말이야, 가람이 형?" "그래" "뭐가 네가 나였다면 어떻게 해?" "만약 네가 너를 죽이려고 한 새파랗게 어린 꼬마 한 명을 옷장 안에 가두어놓고 있는 녀석이라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냔 말이다" 가람이는 마치 벽을 보고 이야기하듯, 한수 쪽은 바라보지도 않고 온화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로 달래듯 이야기했고, 한수는 씩 웃으며 여유롭게 가람이의 말에 대답했다. "당연히 일단 반 죽여놓지" "알면 그렇게 안 하는 걸 고맙게 여기고 똑바로 해, 이 빌어먹을 자식아!" 번뜩-! 가람이가 이를 드러냄과 동시에 순간적으로 가람이의 몸에서 좌중을 압도하는 살기가 쏟아졌다. 이번에는 한수도 순간적으로 움찔하며 뒤로 약간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그리고 가람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처음부터 이야기해보자. 우선..." "우와앙- 가람이 오빠 무서워-!" 기껏 분위기를 잡아놓은 가람이의 말은 주희에 의해서 끊겨버리고 말았다. 주희가 가람이의 살기 때문에 겁을 먹었는지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만 것이다. 이런... 정말 미치겠군! 나는 한수를 향해 불쌍하다는 듯 말했다. "너도 참...고생하겠다" "...뭐?" "아무것도 아니다 임마...후..." 나는 가람이를 바라보았다. 가람이는 어색하게 주희의 등을 토닥이며 주희를 달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어, 저기, 내가 잘못했다. 그만 울어라" "으흑, 으흑! 오빠 무서워! 저리 가!" "저, 그러니까, 내가 잘못했다..." "으흑! 흑! 크흥...!" "내가 나중에 맛있는 것 사줄게 그, 그만 울어라" "흑, 진짜?" 주희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가람이를 향해 다시 한 번 확인하듯 물었고 가람이는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 잡는듯한 심정으로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다. 그러니까 그만 울어라" "...알았어, 안 울게, 흑" 그리고 가람이는 뒤돌아서서 한수를 바라보며 끙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죽겠군...으음...어쨌든 이야기를 계속해 보자" "...무슨 이야기. 댁들과는 별로 할 말 없어" 한수는 이번에도 우리들을 자극하듯 건방진 말을 툭 내뱉었지만 가람이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화를 이끌어나갔다. 정말 감정 절제를 잘 한다, 가람이는. 좀 멋있는 녀석 같으니라구. "이 봐. 한수. 그런 식으로 너무 딱딱거리지 않는 게 좋을걸. 난 아까 네가 왜 우리에게 갑자기 공격을 했는지 대충 짐작이 가는데" "...뭐? 무슨 소리지?" 한수는 가람이의 말에 뜻밖이라는 듯 고개를 들어 가람이를 바라보았다. "아까 네 녀석, 얌전히 있다가 너희 누나가 쓰러지니까 갑자기 허공에 대고 무어라 무어라 중얼거리더군. 그리고 나서 갑자기 세 발 까마귀를 내놓으라고 우리를 협박해왔지. 결국 대충 상황을 보아하니, 네가 우리에게 덤벼든 것은 너희 누나 때문이야. 그렇지 않나" "...그건..." 한수는 가람이의 말에 정곡을 찔렸는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가람이는 한수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차분히, 마치 달래듯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지만 자세히 설명해 보는게 좋지 않을까. 우리들은 나름대로 기를 운용할 줄 알고 주술에 대한 지식이 있다. 혹시 우리가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가람이의 말에 한수는 고민하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잠시 가람이를 노려보았다. 아마도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할까, 말까 고민하는 것이겠지. 그리고 그런 한수의 마음을 다 털어놓는 쪽으로 기울게 하려는 듯 가람이는 계속해서 한수를 설득했다. "어차피 네가 말을 하던 안 하던, 우리와는 별로 상관없다. 하지만 너의 경우는 다르지 않을까. 만약 네가 모든 것을 털어놓는다면, 우리는 너를 도울 수도 있다. 어떻게 생각하나" 한수는 더욱 심각하게 고민하는지 고개를 푹 숙이며 자신의 생각 속으로 빠져들었다. 잠시 방안에 침묵이 천천히 쌓였다. 잠시 후, 한수는 고개를 들었다. "...어차피...진 것부터가 잘못된 거야" "결심은?"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니 알려주지" 한수는 마음을 굳힌 듯 이를 악물고 잠시 우리를 바라보았다. "말해줄게. 왜 내가 형에게 세 발 까마귀의 패를 내놓으라고 하고 덤벼 댔는지. 그 전에 먼저 물 한잔 주겠어?" "어...알았어" 나는 얼른 부엌으로 달려가 물 한잔을 가져다 한수의 입에 대어 주었다. 꿀걱거리며 물 한잔을 순식간에 마셔버린 한수는 크게 숨을 한 번 쉬며 말했다. "휴- 시원하군. 사실, 뭐 아까 가람이 형의 말이 맞아. 형의 세 발 까마귀가 필요한 이유는 누나 때문이었어" "역시..." 가람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한수는 그런 가람이를 힐끔 쳐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나는 어느 단체에 가입되어 있지. 뭐,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건 아니야. 거의 반 강제였지. 그것들이 누나를 잡고 협박했거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가입할 수 밖에 없었지" "...무슨 단체인데?" 요령이의 질문에 한수는 잠깐 고민하는 듯한 눈빛을 내비치더니 이윽고 대답했다. "국제 초능력자 협회라고 불리는데, 일종의 지하단체야. 하지만 능력자들은 꽤 많이 가입되어 있지. 자의로 가입한 사람도 있고, 타의로 가입한 사람도 있는, 뭐 그런 단체야" "이런...또 새로운 세력의 등장이군!" 한수의 말에 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젠장, 국제초능력...뭐시기는 또 뭐 하는 데냐. 내가 탄식과 같은 말을 내뱉자 한수는 의아하다는 듯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뜻이야?" 나는 황급히 한수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아...아무 것도 아냐. 이야기 계속해" 잠깐 입을 다물고 의심스럽게 나를 바라보던 한수는 곧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어쨌든 나는 그 단체에서도 나름대로 높은 위치의 단원이었지. 비록 타의로 가입된 것이긴 했지만, 내 능력은 협회에서도 최상위급이었거든. 물론 나는 협회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어.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었지. 사실 우리 협회가 그렇게 착한 놈들이 모여 있는 곳은 아니라서 말야"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요령이가 싸늘한 목소리로 한수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요령이의 갑작스러운 말에 한수는 잠깐 요령이를 노려보다가 또박또박 대답했다. "...내가 형이랑 요령이 누나를 공격한 건 주희 누나 때문이라고 했잖아. 나도 형들을 공격한 것, 하고 싶어서 한 짓은 아니었단 말야. 어쨌든 말을 끊지 않아줬으면 하는데. 이야기 하는데 방해되거든" "쳇. 뭐 별 것도 아닌 이야기 가지고" "그럼 하지 말까?" 한수의 반문에 요령이는 황급히 손을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아냐. 계속해 봐. 별 거 아니기만 끝까지 들어 봐주지, 뭐" 역시 요령이. 아닌 척 해도 꽤 흥미로운 이야기였나보군. 더구나 요령이는 호기심 나는 일은 참지 못하니까. 요령이는 투덜거리면서도 입을 다물었고, 한수는 조용해지길 기다렸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야기 계속할게. 어디까지 했더라...아, 그래. 나는 이 협회를 당장이라도 때려치고 싶었어. 하지만 그러지 못했지. 그 녀석들이 우리 누나를 인질로 잡아놓고 있었기 때문이었지" "주희를 인질로 잡아놨었다라..." 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차라리 어딘가에 가두어 놓는 것이었다면 협회를 뒤집어 엎어서라도 누나를 구해서 어디론가 도망쳐 버렸을거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녀석들이 누나를 인질로 잡아놓는 방법은 내가 전혀 손을 쓰지 못할 방법이더군. 누나의 몸에 저주를 걸어버린 것이었지" "저주?" "응, 저주. 주술적 저주. 가끔 봤잖아? 우리 누나가 갑자기 심장발작을 일으키는 모습을 말야. 그건 병이 아니야. 일정시간이 되면 누나가 가슴을 쥐어뜯는 듯한 통증을 느끼도록 그 놈들이 누나에게 저주를 걸어놓았던 거지. 또한 녀석들은 마음만 먹으면 자신들이 원하는 때에 누나에게 고통을 줄 수 있게도 해놓았어. 결국 언제든지 자신들이 마음만 먹으면 내 가 보는 앞에서 누나가 고통받을 수 있도록 해놓은 거지" "...너희들은 국제 초능력자 협회라며? 초능력자들이 무슨 안 어울리게 주술적 저주를 걸 수 있다는거지?" 내 질문에 한수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스터는 할 수 있어" "마스터?" 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 협회의 마스터. 그 사람은 어느 정도 주술적 능력을 가지고 있어. 그 사람이라면 주술적 저주를 걸 수도 있지" "...어떤 사람이길래?" "그 사람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사람은 없어. 이름조차 몰라서 그냥 호칭으로 마스터라고 부를 정도니까. 알 수 있는 거라고는 강한 힘을 가진 염력자라는 것과 생김새가 말쑥한 백인 신사라는 것 정도지. 내가 듣기로는 어렸을 때부터 상당한 염력자였다더군. 천성적으로 강한 힘을 타고 태어난 거지. 게다가,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그의 힘은 강해졌어. 결국 마침내 마스터는 초능력으로는 대적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강해져 버렸지. 그런데, 그 사람은 초능력의 영역에서 정점에 오르자 딴 마음을 먹기 시작했어. 주술의 세계에서도 최강의 힘을 손에 넣어서, 세계에서 가장 강한 자가 되고 싶다는 소망 말야. 결국 그 사람은 주술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원래 자질도 있던 사람인데다 피나는 노력까지 겹쳐서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올라설 수 있었지. 그래도 초능력의 세계에서 그런 것처럼 독보적인 힘은 얻을 수 없었지만 말야. 우리 누나에게 저주를 건 사람도 마스터야" 가람이는 한수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다말고 무언가 의심스러운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랬군. 그런데 넌 왜 너희 누나에게 주술을 걸 때 저항하지 않았지. 그 정도면 너의 힘도 상당한 수준인데 말야. 마스터가 너를 꼼짝 못하게 할 정도로 강했나" 가람이의 말에 한수는 대답대신 재밌다는 듯 웃었다. "하하. 가람이 형도 멍청한 생각을 할 때가 있군!" "...뭐?" "난 지금 일곱 살이야. 우리 누나에게 놈들이 저주를 건 것은 5년 전이고. 2살 때의 내가 뭘 할 수 있었겠어? 안 그래? 그리고 이미 저주가 걸린 뒤에는, 녀석들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주희 누나에게 고통을 줄 수 있으니까 도저히 녀석들에게 반항할 수가 없었지" "그렇군" 가람이는 한수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하튼, 우리 마스터는 그렇게 우리 누나에게 주술을 건 뒤 나를 조종했지. 하지만 나에게 임무를 준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어. 아마도 나를 꽤 좋은 패라고 생각해서 아무 곳에나 내놓지 않고 아낀 모양이야. 그래서 나는 계속 국제 초능력자 협회의 손 안에서 감시되다가 마침내 이번에 첫번째 임무를 받은거지" "세 발 까마귀의 패를 빼앗아 오라는?" "응. 아까도 말했지만 마스터는 초능력과는 달리 주술적 영역에서는 어느 정도 수준에 올라가는 것 이상을 달성할 수 없었어. 그래서 어느정도 체념하게 되었을 때, 우연히 세 발 까마귀의 패라는 것의 존재를 알게 된 거지. 마스터에게 들은 바로는 그것은 대단한 영적인 물건이라더군?" "뭐...그렇다고 볼 수도 있고..." 나는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흐렸다. 왠지 세 발 까마귀의 패를 노렸던 녀석 앞에서 '그럼! 그건 끝내주는 물건이라고! 정말 대단해!'따위로 대답하기가 꺼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수는 처음부터 내 대답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는지, 내 대답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마스터는 세 발 까마귀의 패를 무척 손에 넣고 싶어했지. 언제나 입버릇처럼 '그것은 내가 벽을 뛰어넘을 수 있게 만들어줄거야'라고 되뇌이곤 했으니까. 마스터는 국제 초능력자 협회의 정보망을 총동원했어. 국제 초능력자 협회가 여러 질 나쁜 놈들의 이익이 뒤엉킨 단체이긴 하지만, 동시에 크게 보면 마스터의 사조직같은 단체이기도 때문에 그것은 아주 쉬웠어. 정보망은 참 우연히도 우리 나라를 주목하더군. 영적인 큰 싸움이 몇 번 한국에서 발견되었다는 정보가 들어온거야. 세 발 까마귀에 대한 마스터의 추측에 따르면 세 발 까마귀의 패는 동아시아, 그것도 한국에서 발견될 가능성이 아주 높았고 말야. 그렇게 한국에서 일어난 몇 번의 큰 싸움을 토대로 세 발 까마귀의 패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 대한 가능성을 점차적으로 좁혀가던 중에 영준이 형이 세 발 까마귀의 패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으로 떠올랐어. 그리고 며칠 후 나는 이곳의 옆방으로 이사를 오게 됐지" "...그렇게 된 것이었군. 이야기 끝났어?" "그래" 한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요령이는 무언가 망설이듯 주춤주춤하더니 이윽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럼 너희 누나가 저렇게 저...그러니까...나이에 비해 마음이 어린 것...무슨 뜻인지 알겠지? 음...그러니까, 어린 것도 그 저주 때문이니?" 흠. 요령이는 단어 선택을 하느라 말을 망설였던 것이군. 전혀 안 어울리게 머뭇거리는 요령이의 질문에 한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그렇지는 않아" "그렇다면?" "그건 이 일과는 별로 상관이 없어...말하고 싶지 않은데" 한수의 거부에 요령이는 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잠시 침묵이 흐르고, 나와 가람이, 그리고 한수는 어색하게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으흠...한수 이 녀석도 그러니까 결국은 이용당하고 있었던 것이군. 쩝. 결과적으로 한수도 피해자 중 한명이 되는건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조금은 불쌍한데. "...이제 내가 할 말은 다 했어..." 한수의 조금은 가라앉은 듯한 목소리가 자취방을 조용히 울렸다. "...그래. 이야기는 잘 들었어. 어쩔 수 없었다는 것도 알겠어" 나는 한수에게 대답해 주었다. 그리고 한수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냐..." "그럼?" 내 반문에 한수는 한참동안이나 입을 닫고 있다가 마침내 천천히 말했다. "도와줘...제발...우리 누나를..." "뭐?" "내가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한 것도...혹시 당신들처럼 강한 사람이라면 우리 마스터가 건 저주를 깰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야...그러니...부탁해..." 우리는 모두 말없이 한수의 말을 들었다. 한수의 목소리는 이제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부탁해...당신들이 이렇게 강한 줄 알았으면...처음부터 부탁했을 거야...도와줘..." 한수는 점점 갈라지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려 애쓰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제발...부탁이야..." 한수는 울고 있었다. 이거, 왠지 마음이 아픈데. 가람이도 안쓰러운 눈으로 한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요령이도... 요령아? "이 염치도 없는 녀석아! 우리를 죽어라 몰아붙여놓고, 이제와서 뭐? 도와달라고? 그게 지금 말이 되는 소리냐! 거기다 도와 달라는 녀석이 끝까지 반말이냐? 그 태도는 또 뭐얏!" 으윽! 왜 이래 갑자기! 요령이가 지금 분위기가 어떤 분위기인지를 파악 못하는건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한수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소리를 빽빽 질러대었다. 그리고 한수는 할 말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고 힘없이 요령이의 비난을 듣고만 있었다. 이, 이런! 일단 요령이부터 좀 말려야겠다! 내가 막 요령이를 향해 손을 뻗을 때였다. "...라고 실컷 떠들어주고 싶지만, 동생 잘못 만난게 죄는 아니지...할 수 없지. 쳇" "...그럼?" 한수가 놀란 얼굴로 반문하고, 요령이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뭘 그럼이야 그럼은. 뻔히 알면서 능청이야. 도와주면 될 거 아냐, 까짓거. 쳇, 신파극 찍는 것도 아니고, 질질 짜고 그래. 사람 짜증나게" 짜증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저 목소리를 들어보라! 하지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한수의 말을 들어주고야 마는군. 역시 아무리 이러쿵 저러쿵해도 요령이는 요령이야. 나는 흐뭇한 마음으로 요령이를 바라보았다. "아 뭘 봐? 사람 처음 봐? 얼굴에 밥풀이라도 묻었어?" "...알면 떼" "...진짜 묻었냐?" 황급히 얼굴 이쪽 저쪽을 더듬는 요령이. 그 모습이 우스워서 나도 모르게 실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킥" "왜 웃어?" "장난이었거든. 사실 네 얼굴에 아무 것도 안 묻었어. 흐흣..." 뻐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뒤통수에서 불이 확! 튀는 느낌이 들면서 눈앞이 갑자기 캄캄해졌다. 그리고 요령이의 목소리가 내 귀로 아른아른 들려왔다. "우주가 어떻게 생겼나 궁금하면 또 한 번 장난쳐봐. 자주자주 보여줄게" 눈을 뜨니 확실히 눈 앞에서 별들이 가득 깔린 우주가 펼쳐지긴 하는군...우욱. 나는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애썼다. "우우...머리 아파" "그러게 왜 쓰잘데기없는 짓을 하고 그래" 요령이의 중얼거림이 내 귀로 들어왔다. 으음...할 말 없군. 나는 뒷통수를 쓰다듬으며 요령이를 한 번 쏘아보다가 관뒀다. 쳇. 내가 쏘아본다고 신경 쓸 녀석이면 이렇게 고생도 안 하겠지. "가람아, 시작하자" 요령이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가람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희의 뒤통수를 손날로 가볍게 후려쳤다. 퍽. 그리고 주희는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단 채,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를 파악해보려고 이리저리 불안한 듯 주위를 둘러보다 가람이의 솜씨에 의해 깔끔하게 기절해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무슨 짓이야!" 자신의 누나가 쓰러지는 것을 본 한수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막 가람이가 무어라 대답하려 할 때 요령이가 나섰다. "아, 주술을 풀 때 괜히 너희 누나가 또 아둥바둥거리면 힘들 거 같으니까 그렇지! 좀 끼지 좀 마라, 응? 전문가님께서 이렇게 하시면, '아, 저렇게 하는게 맞는가보다'하고 그냥 입다물고 있으면 될 거 아냐!" 한수에게 마구 쏘아 붙이던 요령이는 한수의 입에 대못을 박아버리는 말과 함께 기절한 주희에게 신경을 돌렸다. "비전문가는 좀 찌그러져 있었으면 좋겠어" 왠지 한수의 한숨소리가 내 귀에 들리는 듯 했다. 잠시 주희를 이모저모로 살펴보는 요령이와 가람이. 손에 기를 실어서 이마에 대보기도 하고, 손바닥이나 발바닥을 살펴보기도 하고, 눈을 뒤집어서 동공을 보기도 하는 등 구석구석을 조사하다가 서로 한 번 마주보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래도 대강 주희가 걸린 주술이 무엇인지 파악한 것 같다. "야, 뭐야? 어느 정도의 주술이야?" 요령이는 한심하다는 듯 코웃음치며 말했다. "주술? 하긴 이런 것도 주술은 주술이겠지...으으. 이건 정말 별 것도 아닌 저주에 불과하잖아. 이런걸로 정말 몇 년씩이나 고생했단 말야?" "...뭐?" 한수의 반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요령이는 손에 기를 잔뜩 모으더니 그대로 주희의 머리를 후려쳤다. 퍼-엉! "무슨 짓...!" "'무슨 짓이야!'라고 외치려고 했지 이 패턴 뻔한 녀석아. 뭐긴 뭐냐. 너희 누나 저주 풀어준거지" 요령이의 말에 한수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떠졌다. "뭐, 뭐...? 서, 설마 그게 끝이야...?" "그래. 뭐 별 것도 아니더구만. 너희 누나 심장 주위에 조그만 기덩어리가 하나 달랑달랑 매달려서 귀찮게 굴고 있더라고. 그래서 떼어줬지. 이제 됐어. 저주고 나발이고 다 풀렸다고" 요령이의 말에 한수는 잠시 믿기지 않는다는 듯 멍하니 우리를 바라보며 굳어 있다기 이욱고 허무한 듯 느릿하게 웃었다. "하...하하...하...이게...끝이라고? 그렇게...몇 년 동안이나 우리 남매를 괴롭혀온...그 저주가...겨우...이 정도밖에 안되는 거였단...말이지?하하...하하하하...!" 한수는 갑자기 격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그 눈은 눈물을 쏟고 있었다. "아하하하하-! 이거 정말 미치겠군, 미치도록 재밌어! 겨우, 겨우 이거라니! 으하하하! 배가 아플 지경이야, 하하하!" "미...미쳤나?" 울다가 웃었다하는 갑작스러운 한수의 감정의 변화에 깜짝 놀란 나는 어떻게 해서든 한수를 진정하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몸을 돌렸다. 그런데 요령이가 내 어깨를 짚으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야, 왜 그래?" "놔 둬. 저 녀석, 지금 한꺼번에 억눌렸던 감정이 터져버린거야. 이런 때 건드리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버려. 그러니 그냥 저러도록 놔 둬" "하지만..." "하하하하! 아하하하! 아- 하하하하하하!" 한수는 눈물을 뿌리며 웃음을 계속해서 토해냈다. 울음이 가득 섞인 슬픈 웃음을. 화창한 월요일 아침이다. 햇살이 커튼처럼 이리저리 뿌리워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기지개를 쭉 폈다. 오늘도 평화로운 하루의 시작이군. 나는 조용한 하루를 열기 위해 고개를 돌리고 소리를 한번 빽 질러줬다. "야! 얼른 나와!" "잠깐만!" "니가 화장을 하냐, 꾸미기를 하냐! 왜 이리 늦어!" "한 숟갈만 더 먹고 나갈게-" 느릿한 요령이의 목소리. 아, 복장 터져버리겠네! 나는 신경질을 버럭버럭 내며 "...이것아! 지각이라니깐!" "아 씨, 먼저 가던지!" "야, 가람아! 목잡고 끌고 나와!" "진짜" 하여튼 얘는 아직도 사회물을 덜 먹었다니까... "...농담이지..." 잠시 후 우당탕탕! 하는 급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요령이가 허겁지겁 방에서 뛰어나왔다. "가자!" 그리고 나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요령이에게 말했다. "...입가에 묻은 고추장 닦으면 말 안 해도 갈게" "...진짜 가자!" 요령이의 외침과 함께 우리는 후닥닥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그런데 아래층에서 뭘하고 노는지 깔깔대며 펄쩍펄쩍 뛰어대던 한수와 주희가 우리를 보고 외친다. "오빠랑 언니, 안녕!" "어이, 형! 어디가?" "내가 니 친구냐! 어이가 뭐냐, 어이가!" "어디 가냐니깐?" "학교!" "그래?" 한수는 짓궂게 웃더니 한쪽 손을 들어서 슬쩍 흔들었다. 뭐지? 그런데 갑자기 내 왼쪽 다리가 지멋대로 움직여 나를 바닥에 쓰러뜨려 버렸다. 콰당! "이런 썩을 놈의 꼬맹이가!" "으히힛!" 저 악마같은 꼬마놈, 이제보니 지금까지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헤헷'하던 웃음소리까지 거짓이었군. 젠장. 옷에 흙이 잔뜩 묻었잖아. 일어서서 몸에 잔뜩 묻은 흙을 툭툭 털어냈다. "...어젠 고마웠어. 당신들" 등뒤로 한수의 쑥쓰러운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면 갚아, 자식아" "...무슨 말을 못하게 하는군" 한수의 볼멘 소리를 들으며 나는 다시 학교 쪽으로 발을 옮겼다. 시계를 보니까 어차피 지각이다. 이왕 늦은거, 5분 늦으나 15분 늦으나. 그냥 뛰지 않고 천천히 걷기로 했다. 다시 한수의 외침소리가 들려온다. "형, 세 발 까마귀는 포기할게!" "...당연하지, 자식아!" 나는 뒤돌아보는 대신 손을 흔들며 대답해 주었다. 그러자 주희 역시 자기 동생을 따라해보고 싶었는지 우리를 향해 외쳤다. "어...저...! 그러니까...! 맞다, 맛있는 거 사줘-!" ...설마 그 말이 지금까지와의 대화 내용과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어머님께. 어머님. 어느새 싱그러운 4월입니다. 몸은 건강하시겠지요? 아버님께서도 몸 평안하신지요. 저는 이곳에서 잘 있습니다.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으며 친구들도 많은 즐거운 학교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성적이 잘 나와서 아이들이 아주 부러워하고 있어요. 너는 누구를 닮아서 공부를 그렇게 잘하냐고 하면서 시샘어린 농담을 할 때도 있구요. 그럴 때마다 아버지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어머니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난처하곤 합니 다. 하하. 모두 어머님께서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서울로 학교를 보내주신 덕택입니다. 꼭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할게요. 한 번 집에 찾아가야 하는데 시간이 나지 않아서 저도 참 마음이 아픕니다. 보고 싶어요, 어머니. 오랫동안 내려가지 못해서 편지로 대신합니다. 갑자기 편지가 쓰고 싶어져서 씁니다. 그럼 나중에 내려가서 뵐게요. 어머니를 사랑하는 청도 올림. 」 "이런 가식에 대한 열정의 결정체같은 놈" 청도의 편지를 청도의 어깨너머에서 슬쩍 읽어본 난 청도에게 짧게 감상해 주었다. "고향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흐뭇해하실 어머님을 생각해보도록. 가슴도 안 아픈가" 그리고 이건 역시 뒤에서 청도의 편지를 함께 읽은 가람이의 감상평이다. "...너는 쓰레기야" 마지막으로 청도의 가슴에 대못을 박아버리는 날카로운 이 비평은 역시 우리와 함께 편지를 읽은 요령이의 감상평이다. "우윽!" 그리고 청도는 우리들의 날카로운 비판 한마디 한마디에 진짜로 가슴을 칼로 쑤시기라도 하는 양 눈을 흡뜨면서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이런...너무한 녀석들 같으니라고...으윽...가슴아파...젠장" 청도의 말이 끝나자마자 셋의 가차없는 비판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부모님께 이 정도로 큰 거짓말을 하다니...이 한 점 부끄럼 있는 청춘아...으이구" "크윽!" "에라 그냥 나가 죽어라" "으흑!" "실망이군. 청도" "크윽!" 우리들의 말에 청도는 인생 막장에 몰린 사람의 표정을 지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그렇게 이 편지가 가식적이야?" "그럼, 물론이지" 요령이는 다시 한 번 청도의 가슴에 대못을 날리더니 편지를 천천히 읽으며 이곳 저곳에 딴지를 걸어 나갔다.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으며, 니가 언제 공부를 열심히 해? 니가 공부를 열심히 한 적이 있으면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칵 쓰러져 버린다. 친구들이 많어? 너 우리 빼면 친구 몇이나 있냐? 열 명이나 되냐? 그리고 뭐, 성적이 잘 나와서 애들이 모두 부러워해? 밤새도록 공부하고 저번 퀴즈 8점 맞은 놈이 그런 말이 나오냐?" "사...사실 저번 퀴즈때는 공부 안 했지! 무슨 밤새도록 공부를 해, 공부를!" 요령이는 기가 막히다는 듯 멍하니 청도를 말하더니 이윽고 한 마디를 쏘아붙였다. "자랑이다!" "...우윽" 요령이가 계속해서 청도를 몰아붙이는 모습이 왠지 재미있어 보인다. 나도 한 번 끼어들어볼까? "사실 니가 좀 양심이 없긴..." "너도 똑같은 놈이잖아 임마!" 웃! 이것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한 청도의 답변! 나는 움찔하며 나도 모르게 주춤 물러섰다. 그리고 청도는 회심의 눈빛으로 나를 쉴새없이 몰아붙였다. "그러는 너는 공부 똑바로 하냐? 내가 공부하라고 유일하게 잔소리 할 수 있는 대상이 누군데 임마! 그리고, 친구로 따져볼까? 나는 친구 그래도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는 나오지? 너는 뭐냐? 있기는 있냐? 그리고 성적 이야기에서도 너는 할 말 없지 않냐? 나 8점 맞을 때 3점 맞은 놈이 누구였더라? 엉?" "이, 이익..." 하, 할 말 없다! 내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자 청도는 최후의 결정타를 날렸다. "왜 주제넘게 너까지 끼어들고 그래! 자식아! 사람이 자기 분수를 알아야지!" "그, 그래도 나는 집에 그따위 내용으로 편지는 안 쓴다 임마!" "쪽팔리니까 못 쓰는 거겠지" 내가 간신히 한 변명을 한 방에 엎어버리는 요령이의 정확한 지적. 쳇. 나는 무어라고 반론도 펴지 못한 채 입을 다물어야 했다. 나와 청도가 모두 꿀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요령이는 한심해 죽겠는지 한숨을 푹푹 쉬면서 물었다. "어이구, 이 쓰레기 형제들아. 뭐 지나간 일이니까 지금까지 말한 것들은 그렇다고 치고, 다른 궁금한 게 있는데. 너희들 시험 공부는 안 해도 되는 거냐?" "뭐 쓰레기형제? 지금 얘랑 형제라고 했냐?"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잠깐 발끈했던 나는 그러나 곧 이성을 찾았다. 지금 아주 중요한 소리를 들은 것 같단 말야. 이런 쓸데없는 소리에 흥분하면 안되지. 청도도 마찬가지의 생각을 했나보다. 요령이의 난데없는 질문에 나와 청도가 동시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요령이를 바라봤거든. "아니 요령아, 그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 시험이라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는데? 시험이라니?" 요령이는 우리의 반응에 오히려 자기가 당황스럽다는 표정이다. 요령이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우리에게 되물었다. "그래? 시험이 없단 말이냐? 진짜?" "응, 내가 알기로는 진짜 없는데" 청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내 말이 그 말이다. 시험은 왠 시험? 그리고 요령이는 우리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그것 참 이상하네..."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왜? 누가 시험 본대?" "아니, 꼭 그런 것은 아니고..." 우리의 말에 요령이는 자신이 없는지 대답을 흐리며 한 발 물러섰다. 아무렴, 요령이가 잘못 알았겠지. 설마 재학생인 우리보다 요령이가 학교 일에 대해서 잘 알 수야 없잖겠어? 요령이가 약한 모습을 보이자 나는 요령이를 거세게 밀어붙였다. "뭐야, 뭐야, 지금 설마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마구 말한 거야? 아니, 왜 확실하지도 않은 사실로 사람 놀래키고 그래? 우리가 시험 이야기에 얼마나 민감한지는 네가 더 잘 알잖아? 어휴, 너 때문에 십년 감수했잖아...!" "아니, 잘못 알 수도 있는 거지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래?" 요령이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대답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청도가 나의 공격을 이어받아서 요령이를 몰아붙였다. "잘못 알 수도 있는 거라니. 잘못 알 수도 있는 거라니! 너는 초상집에 '축하해요'라고 쓰고 장미꽃 100송이 보낸 다음에 '잘못 알 수도 있는 거지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러세요'라고 그러면 끝이냐?" 아, 저 실감나게 표현한 어이없다는 표정! 정말이지 청도 넌 대단한 놈이로구나! 그리고 요령이는 계속 구석으로 몰리자 결국 오만상을 찌푸리며 짜증을 터뜨렸다. "아, 진짜! 실수 한 번 할 수도 있는 거지 뭘 그런 걸 가지고 눈에 쌍심지를 켜고 그래! 난 단지 요즘 학교를 거닐다 보면 애들이 온통 시험 이야기만 하길래 너희들도 보는 줄 알았지!" ...이게 무슨 말이냐? 나와 청도는 당황으로 눈을 크게 떴다. "...뭐?" ...애들이 온통 시험 이야기만 하고 걷는다고? "진짜냐?" "내가 따뜻한 밥먹고 할 일 없어서 너한테 거짓말이나 하고 앉아 있겠냐?" "너 따뜻한 밥 매일 먹고도 거짓말 잘 하잖아" 내 정확한 지적. 요령이는 내 날카로운 지적에 할 말이 없는지 잠시 우물쭈물 거리다 괜히 성질을 냈다. "하여튼 거짓말 아냐! 진짜라고. 애들이 둘 이상만 모여 있으면 대부분 중간고사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시무룩해 한단 말야. 너희들이랑은 별 상관 없는 시험인가보지 뭐" "뭐? 중간고사?" 맙소사! 중간고사라고? 설마 벌써 중간고사 기간인가? 말도 안 돼! 퀴즈 본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중간고사야! 순간적으로 정신적 충격이 너무 커서 말도 안 나온다. 청도 역시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버벅거리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정신적 충격이 꽤 큰 듯 하다. "어, 어, 중, 중간...이런 젠장" 청도는 말을 채 맺지 못하고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컨테이너 밖으로 뛰어 나갔다. "야! 어디가!" "기다리고 있어! 학생센터에 가서 확인 좀 하고 시험 예정표 좀 뽑아올게!" "야! 잠깐!" "아 왜 불러!" 청도는 짜증을 벌컥 내면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내 것도 좀..." "어, 그래" "학번 알지?" "그래!" 아,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나와 청도는 어차피 듣는 수업이 모조리 똑같구나. 내가 청도를 불러세운 게 바보같은 짓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괜히 머쓱해서 혼자 씨익 웃는데 잠깐 동안의 소란을 감상한 요령이가 멍한 얼굴로 나와 멀어져가는 청도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무어라 뇌까린다. "...설마 까먹고 있었단 말이냐...?" "아니, 그게, 저...야! 학교에서 애들이 맨날 중간고사 말만 하고 다니더라 같은, 그런 중요한 건 진작진작 좀 말해줘야 될 거 아냐!" 내가 생각해도 말이 좀 안되는 소리에 요령이는 기가 막힌지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아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어휴...너 때문에 미치겠다 정말" 잠시 후, 문이 방금 전 그랬던 것처럼 벌컥 열리며 청도가 손에 두 장의 인쇄물을 들고 헐레벌떡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왔다. "야! 큰일났어!" "아 큰일나긴 뭐가 큰일나" "너랑 나랑 내일부터 시험 시작이야!" "뭐-엇?" 분명히 장담하는데, 방금의 내 눈 크기는 최소한 10원짜리 동전보다는 더 컸을 것이다. 그리고 눈알은 적어도 5밀리미터 이상은 튀어나왔을 것이다. 나는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다행인 것은 너와 나와의 수업이 같다는 것" "그래서 상부상조가 가능하다는 것" 나의 말을 청도가 받았다. "그리고 시험을 보는 과목이 하루에 한과목 뿐이라는 것" 내가 다시 말했고, "운이 지독히도 좋았지" 청도가 다시 고개를 끄덕여 내 말에 동의했다. "첫 과목은?" 청도의 질문에 나는 차분히 대답했다. "세계의 근대사" "만만치 않은 과목이야" "물론이지" "교과서는?" "물론 여기 있지. 책이 무거워서 이곳에 놓고 다니니까. 필기노트는?" "구하느라 힘들었다" 내 말에 청도는 대답과 함께 가방에서 얄팍한 복사물을 꺼내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럼 어디 공부해 볼까" "한수 학우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우리는 묵묵하게 침묵 속에서 각자의 책을 꺼내어 들고 청도가 복사해 온 두 부의 복사물을 나누어 가진 후 펜을 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우리의 진지한 모습을 지켜보던 요령이의 조용한 감탄사가 컨테이너에 작게 울려 퍼졌다. "아주 쇼를 하는구먼 쇼를 해..." "밥 먹으러 가자!" 요령이가 조금씩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저 놈의 배에는 거지가 들어앉았나! 나는 복습도 할 겸 차분히 말했다. "자꾸 밥, 밥거리면 너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이 된 오스트리아의 황태자처럼 만들어버린다" "뭐?" 당황해하는 요령이. 얼굴 표정이 마치 '너 아침에 뭐 먹었냐?'를 말하는 것 같다. 어쨌든 말하던지 말던지 나와는 상관 없지. 나는 입을 다물고 다시 책과 필기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궁금증을 견디지 못한 요령이는 결국 우리에게 묻고 말았다.. "...오스트리아의 그 황태자가 어떻게 됐는데?" "총 맞아 죽었어" "뭐얏!" "아 시끄러워요, 공부 좀 합시다! 여기가 무슨 당신네들 안방인줄 알아!" 청도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오, 저 핏발 선 눈이라니! 저 형형히 빛나는 눈빛은 '삼천년 전 공부를 위해 지상에 내려왔다는 삼천문제 공부삭'의 눈빛이 아닌가? ...물론 당연히 그런 인물이 있을 리 없다. 그냥 해본 소리다. 어쨌든 청도는 그냥 거기서 끝내도 될 걸 몸이 근질근질한지 괜히 한마디를 덧붙인 후 다시 고개를 숙여 공부에 집중했다. "제발 매일같이 부탁하는 거지만 사랑싸움은 집에 가서 해라. 사랑싸움을 하려거든 남에게 피해는 주지 말아야지, 이 양심도 없는 인간들아" 따악! 청도는 요령이가 말없이 온 힘을 실어서 집어던진 볼펜에 얼굴을 정통으로 얻어맞았다. 넌 맞아도 싸다 자식아. 하지만 청도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딱! 곧이어 청도는 요령이가 말없이 온 힘을 실어서 집어던진 지우개에 얼굴을 정통으로 얻어맞았다. 좀 아프지? 쌤통이다 자식아. 하지만 청도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퍼억! 이어서 청도는 요령이가 말없이 온 힘을 실어서 집어던진 필통에 얼굴을 정통으로 얻어맞았다. 그...그만하지 요령아? 하지만 청도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또한 청도는 요령이가 말없이 온 힘을 실어서 집어던지기 위해 주워든 책에... "그만해! 애 잡겠다!" "놔! 싸가지 없는 아이들은 매로 가르쳐야 바르게 큰단 말야!" "아 글쎄 좀 참어!" 결국 잠시 동안의 실랑이 끝에 요령이는 책을 도로 내려놓고 그냥 끝내기 아쉬운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쯧, 까불고 있어!" 그런데 청도는 정말 공부만 하기로 했는지 그 소란의 와중에서도 조용하다. 쟤가 진짜 누구한테 머리를 맞기라도 했나...? 요령이는 청도를 향해 이를 쉭 드러내더니 나를 보며 투덜거린다. "뭐야? 반응이 전혀 없잖아? 너무 재미없어! 이게 뭐야!" "...내가 반응 없었냐? 왜 나한테 성질을 내?" 옆에서 가람이가 우리의 대화 내용에 끼어들었다. "좀 이상하군. 평소의 청도라면 저렇게 열심히 공부할 리가 없는데" 그러고보니 좀 이상하긴 하다. 평소의 청도라면 '뭐야! 부부싸움 말려줬더니 옆집 착한 이웃한테 성질내고 난리야! 경찰에 고소하겠어!'따위의 말로 능청을 떨면서 요령이가 던지는 물건들을 도저히 인간의 것이라고 볼 수 없는 반사신경으로 모조리 피해버려야 정상인데. 오늘은 뭘 던져도 그냥 맞고, 옆에서 아무리 뭐라 그래도 입도 꾹 다물고 있고! "...드디어 청도가 마음 고쳐 먹었나보다" 한참 청도를 지켜보던 가람이가 마침내 묵직하게 내뱉었다. 뭐? 마음을 고쳐 먹었다니? "설마-?" 가람이의 말에 요령이는 말도 안 된다며 손까지 휘휘 내저었다. 하지만 나는 가람이에 대한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냐...청도의 저런 모습, 처음 봐. 저것 봐. 요령이 네가 던진 곳에 얻어 맞은 곳이 벌겋게 변했는데, 신경도 쓰지 않고 책만 열심히 파고 있잖아. 왠지 청도가 대단해 보이기까지 하는데" 가람이도 고개를 끄덕여 우리의 말에 동의했다. "찬성. 저건 평소의 청도가 아니다. 저런 집중력이라니. 청도가 멋져 보이는군" "...흠, 그런가?" 한참을 갸우뚱하던 요령이. 하지만 결국 요령이조차 우리의 말에 동의하고 만다. "...그러고보니 평소와 조금은 달라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냐. 달라보이는 정도가 아니야. 멋있어" "감탄이 날 정도군" 컨테이너 안은 순식간에 청도에 대한 경탄과 찬사로 웅성거렸다. 흠, 그런데, 이건 비록 청도에 대한 칭찬이긴 하지만 그래도 공부 열심히 하는 청도에게 조금 시끄럽지 않을까...? 내가 막 그런 생각을 하면서 불안해 했을 때였다. 아니나 다를까, 청도가 고개를 들어서 심각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짜식들, 멋있는 건 알아가지고..." 순간적으로 머릿 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너는 백만 년이 지나도 글렀어...' 나는 성질을 벌컥 내며 외쳤다. "누가 청도 보고 멋있다 그랬어? 엉?" "나, 나는 아냐!" "난 그런 말 한 기억이 전혀 없다" 나의 추궁에 당황해하는 요령이와 가람이. 그 때 청도가 다시 한 번 딱딱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서 조용히 말했다. "짜식들...괜히 부끄러워하긴..." 헤벌쭉 웃으며 고개를 다시 숙이는 청도의 말을 듣고, 나와 요령이, 그리고 가람이는 동시에 어떤 사실에 동의했다. '그냥 입을 다무는 게 좋겠다' 시험 첫날 째. 벌컥. 어제 밤새도록 공부해서인지 컨디션이 말이 아니다. 어쨌든 그래도 그 덕분에 중간고사 문제를 어느 정도까지는 적어서 낼 수 있었다. 내가 말하는 '어느 정도'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이냐고? 궁금하다면 시무룩한 얼굴로 내 옆에서 터벅터벅 걷고 있는 청도가 무어라고 중얼거리는지 들어보라. "F는 안 맞겠지..." 내 '어느 정도'는 '청도와 같은'이라는 뜻이다. 강의실 문을 열면서 나오는데 시험시간에 먼저 답안지를 다 쓰고 나간, 친구를 기다리는지 문 앞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척 보기에도 얼굴에 '저는 무척 공부를 잘 합니다'라고 얼굴에 쓰고 있는 듯한 녀석들이었다. "야! 오늘 시험 어땠냐?" "그럭저럭 B는 넘게 맞을 수 있겠지 뭐" "자식! 겸손은..." ...으악! 순식간에 히스테리에 열이 받아 버린 나와 청도. 마침 나의 눈에 어느 학생회에서 붙인 것인지 모를 대자보의 제목이 들어왔다. -공동선언 이행하여 조국통일 완수하자!- "...저런 것들 때문에 내 조국이 통일이 안 돼" 그리고 청도도 뭘 보았는지 내 말을 그대로 받았다. "저런 것들 때문에 신자유주의...아이 씨, 저게 도대체 뭐라고 쓴 거야! 이러니까 요즘 애들이 운동권에 관심이 없지!" ...이제 한글도 못 읽냐? 아, 아니지. 지금 청도와 나는 동지였지. 흔들리는 동지애를 다잡기 위해 나는 한자 한자에 힘을 주어서 말했다. "하,여,튼! 쟤들이 나쁜 놈들이야" "찬성. 인류의 적같은 놈들" 그 때 뒤에서 한심함을 듬뿍 담은 목소리가 들리며 누군가가 우리 둘의 어깨를 잡았다. 요령이었다. "으이구, 인간들아! 공부 잘하는 사람들 뒤에서 욕하면서 궁시렁거릴 시간 있거들랑 그 시간에 책을 한 자 더 봐라!" "어엇? 니가 여기엔 어쩐 일이냐?" 우리는 마치 불장난하다 어른에게 들킨 아이들처럼 화들짝 놀라버렸다. "어쩐 일이긴. 점심 때 되서 밥 먹으려고 강의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지. 배 고프다, 얼른 밥이나 먹으러 가자" 점심시간이라서 식당은 사람들로 인해 꽤나 북적거렸다. 잠시 줄을 서서 식권을 산 우리는 각자의 식사를 받아들고 자리를 잡고 앉아서 식사를 시작했다. "...젠장, 그래도 이번 시험은 나름대로 공부 좀 했는데" 청도가 짜증난다는 듯 머리를 마구 헤집으며 말했다. 나도 청도의 말에 동조했다. "맞아. 열심히 했는데" "그치? 니가 보기에도 나 열심히 공부한 거 같지?" "...너 말고, 내가 공부 열심히 했다고" 내 말을 듣는지 마는지, 내 비아냥거림에도 별 반응조차 없이 침울한 표정으로 숟가락을 뜨던 청도는 마침내 고민을 털어 버리듯 말했다. "우리만 이번 시험이 어려웠던 것은 아니었을 거야. 그렇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험에 관련된 말 중에 이런 명언이 있잖아. '내가 어려우면 남도 어려운 거다'. 좋은 말이지" 그 때 우리 뒤쪽 테이블에서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오늘 시험 다 봤냐?" "아니. 한 과목 봤고, 이제 한 과목 남았어" "무슨 과목인데?" "세계의 근대사" "잘 봤냐?" "응, 그럭저럭 답은 다 썼는데, 다 맞았을라나 모르겠네. 문제가 쉽긴 쉬운데 너무 많아서 급하게 쓰느라고..." 젠장. 나는 고개를 떨구며 한숨을 푹 쉬었다. 첫 시험은 망쳤나보구나. 내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옆에서 가람이가 나를 위로했다. "괜찮다. 주인. 아직 세 과목이나 남았잖은가" 내가 듣는 과목은 총 여섯 과목이지만, 한 과목은 의무과목인 대신 출석만 하면 되는, 시험이 없는 과목이고 또 다른 한 과목은 중간고사를 보지 않고 기말고사만 보는 과목이다. "...그래. 위로해줘서 고마워. 다음 시험은 잘 볼 수 있겠지?" "물론이지" 시험 이틀째. 이 곳은 컨테이너 안. 싸늘한 침묵이 컨테이너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뭔가 대책이 필요하다고 봐" "맞아" 청도의 심각한 말에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대책? 아 맞다, 너희 두번째 시험도 또 때려망쳤지? 우헤헤헤!" 옆에서 요령이가 괴상망측한 웃음소리로 우리를 비웃어댔지만 우리는 깔끔히 무시하고 우리의 대화를 이어나갔다. "솔직히 인정하자" "뭘?" "하루 공부하고 중간고사를 본다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미친 짓이야. 이 명제는 두번째 시험 역시 그렇게 좋은 성적을 얻지 못한 것으로 확실히 증명되었지" 그렇다. 우리는 오늘 본 두번째 시험마저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맞아.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중간고사기간인지도 몰랐던 우리가 등신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침울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청도는 내 말이 끝나자 야릇한 미소를 띄었다. "...등신이라고 꼭 죽으라는 법은 없지 않을까...?" "뭐?" 나는 청도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하며 청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청도는 내 말에 사악한 미소를 띄우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이를테면 이런거야. 고등학교 시절, 나는 바로 시험 전 날 집에다가는 학교에서 공부한다고 전화해놓은 뒤 밤새도록 게임방에 가서 게임하고 새벽 보충수업시간 때 게임방을 한번 더 다녀온 후 시험을 쳤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성적표를 받아들고 기쁨에 미소지을 수 있었지" 오싹...청도가 하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눈치챈 나는 순간적으로 끼쳐오는 오한에 몸을 떨어야 했다. "...너, 설마...그 때의 기술들을..." 청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녀석은 지금 컨닝을 할 생각이란 말인가!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너는 나쁜 놈이야 임마..." 청도는 상관 없다는 듯 낄낄거렸다. "그래서, 동참하지 않겠다는 건가?" 이런 양심도 없...긴 뭐가 양심이 없어! 이 정도야 누구나 할 수 있는거지! 후헤헤헤...! 덥썩. 나는 청도의 손을 잡으며 엄숙하게 말했다. "나의 미래를 위해, 내 가정의 행복을 위해, 성적표로만 인간을 판단하는 이 사회에 대한 복수를 위해! 그대와 동행하겠네" "환영하네, 친구여" 청도가 환한 미소로 나를 맞이했다. "그런데, 무슨 방법을 쓸 생각이지?" 내 질문에 청도는 잠깐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가 말했다. "시계를 맞출까?" 시계 맞추기란 고전적이면서도 완벽에 가까운 컨닝법이다. 일단 문제를 부르는 사람과 답을 받아적는 사람이 한 명씩 필요하다. 시험이 시작되면, 문제를 부르는 사람은 초침이 부르려고 하는 문제를 지나치는 순간 '따닥'하고 볼펜을 연속음으로 짤각거려서 '내가 지금 이 문제를 부르려고 하고 있다'고 알린 뒤, 초침이 10초로 갈 때 볼펜으로 책상을 치면 1번, 20초로 갈 때 책상을 치면 2번...하는 식으로 답을 시간으로 암호화하여 상대편에게 불러준다. 이것은 실로 대단한 초장거리 무선통신 커뮤니케이션인 것이다! "그런데 너무 어렵지 않나?" 내가 이의를 제기했다. "그래도 이만큼 완벽한 방법이 어디 있어" 하긴 청도의 말이 맞긴 맞다. 쪽지처럼 구질구질하게 증거도 남지 않고, 들킬 위험도 적고. 하지만 역시 난이도 있는 컨닝 방법이라는 게 좀 문제인데... 내가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자 청도는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한 번 쉬고 물었다. "발치기는 어떠냐?" "발치기?" "그래, 발치기. 발치기는 쉽고 걸릴 위험도 시계 맞추기보다 더 적잖아" "흠...하지만" 발치기란 시계 맞추기보다 더욱 증거가 남지 않는, 가히 완전범죄에 가까운 컨닝법이다. 방법은 극도로 간단한데, 일단 서로 짠 사람들끼리 앞뒤로 앉는다. 그리고 앞사람은 발을 의자 뒤쪽에 놓고, 뒷사람은 발을 책상 앞쪽에 걸친다. 그리고 답이 궁금한 사람이 상대편의 발을 문제 수만큼 툭툭 치면 답을 알려주는 사람은 답 수만큼 상대편의 발을 툭툭 친다. 쉽고도 간편해서 많은 컨닝 이용자들이 애용하고 있다. "분명 발치기는 괜찮은 방법이긴 해. 그렇지만..." "그렇지만 뭐?" 청도가 의아한 듯 물었고 나는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청도에게 말했다. "옛날 어느 고교에서 들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누군가가 발치기 도중 37번의 답을 물어보다가 불현듯 치솟아오른 울화통 때문에 시험지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교실을 뛰쳐나갔었다던데..." "...으윽. 날카로운 지적이다" 내 지적에 청도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음을 인정하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고민에 빠졌다. 이런... "아! 이러면 되겠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청도가 이윽고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소리가 나게 치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떤 방법인데?" "문제는 시계 맞추기로 하고 답은 발치기로 말해주면 되잖아!" "이런...똑똑한 놈을 봤나!" 나와 청도는 '짝!'하고 하이파이브를 한 뒤 서로 얼싸안았다. 이제 우리에게 다음 시험부터는 빛나는 꽃길만이 찬란하게 열릴 거야! 그런데, 청도가 문득 나를 떼어놓더니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컨닝 페이퍼는 누가 보지...?" "...뭐?" "원래 발치기나 시계 맞추기 같은 것은 다 멤버 중 한 명이 공부를 잘 한다는 전제 하에서 하는거잖아. 그런데 우리는 그런 거랑은 상관 없잖아? 그러니 한 명이 컨닝 페이퍼를 보면서 문제를 불러주는 역할을 해야 할텐데... 음. 그러고보니 미처 그 문제를 생각하지 못했었군. 컨닝 페이퍼를 잡는 자는 부정행위 발각의 위험을 각오해야 하는데... ...과연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나는 고민 끝에 가장 공정하다고 생각되는 방법을 선택했다. "어쩔 수 없지...가위 바위 보로 정하자. 진 사람이 잡자구" 끄덕. 청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가위, 바위...보!" 나는 가위! 저 녀석은? "하하하! 난 주먹이야! 내가 이겼어!" 청도는 예의 그러듯 씩- 하고 만면에 띄우는 미소를 지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빌어먹을! 내가 걸렸잖아-! "안됐군. 하지만 운명이려니 생각하고, 이제부터 각자 역할을 분담해서 컨닝 페이퍼나 만들자!" "뭐 할 수 없지. 이왕 이렇게 된 거, 잘 해 보자고" 시험 3일째. "우아아아악! 빌어먹을! 젠장! 제기랄! 세상 뭣같네 진짜!" 청도의 처절한 절규가 컨테이너를 뒤흔들었다. "아! 시끄러워! 그만 좀 징징대!" 요령이가 귀를 막고 투덜거렸지만 청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우악-! 짜증나! 짜증나! 짜증나 죽어버릴 거 같아-!" 발을 동동 굴러대는 청도. 옆에서 가람이가 측은한지 한마디를 던진다. "그러게 평소에 공부 좀 열심히 하지 그랬나" "아- 열받아! 빌어먹을! 젠장! 우아아악-!" 청도는 다시 한 번 울부짖었다. 녀석의 얼굴에서는 평소에 감돌던, 나로 하여금 가끔씩 '저 놈 얼굴의 유일한 장점'라고 생각하게 만들던 여유로운 미소를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왜 시험이 서술형이냐고-!" ...그렇다. 발치기와 시계 맞추기는 모두 객관식을 위한 컨닝법. 오늘 우리가 본 시험은 서술형이었던 것이다. ...상황 돌아가는 것도 이쯤 되면 코메디다. "큭!" "웃냐? 웃어? 그래, 너는 어젯밤에 우리 둘이서 함께 만든 컨닝페이퍼 혼자 봐서 시험 잘 봤다 이거지! 그래서 기분 좋다 이거지! 아- 좋겠다, 어떤 자식은 밤새도록 뼈빠지게 함께 만든 컨닝 페이퍼 혼자 봐서 시험 잘보고, 아- 어떤 자식은 객관식일줄 알고 피나게 준비했더니 서술형이라 시험 완전 망쳐 버리고, 세상 왜 이러냐-" 청도는 그렇게 한참동안 책상을 탕! 탕! 쳐대며 분노했다. 젠장, 벌써 몇 분 째 짜증이야! 이번 시험을 혼자 컨닝 페이퍼 보고 친 것이 미안해서 가만히 있었더니 더 이상 못 봐주겠군. "야! 나도 걸릴까봐 몇 문제 못 봤어!" "한 문제도 제대로 못 쓴 나보다야 낫겠지. 아, 세상...!" 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어이구! 저 인간은 속에 밴댕이가 들어앉았나... 나는 청도를 일깨우기 위해 청도의 어깨를 흔들며 말했다. "야! 어쨌든 망친 시험은 망친 시험이고, 다음 시험을 준비해야 할 것 아냐?" "...뭐?" "다음 시험을 준비해야 된다고! 아직 우리에게 시험이 한 개 남아 있는 것, 잊었어?" 내 말에 청도는 그제서야 생각났는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러고보니 아직 시험은 끝나지 않았군...잊고 있었어...너무 감정에 휩쓸리는 바람에...맞아, 다음 시험을 이제 천천히 준비해야지" "그래, 지금이라도 깨달았다니 다행이다. 그런데 다음 시험에 대한 계획은 짜놓았나?" "물론이지. 이번 건 정말 완벽하다고" 내 질문에 청도는 자신있다는 듯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만면에 여유 가득한 미소를 띄웠다. 그리고 나는 귀가 솔깃해져 물었다. "그래? 그 완벽한 작전이 도대체 뭔데?" 청도는 엄지를 접더니 다시 검지와 중지로 브이자를 그렸다. "참 액션도 화려하기도 하다, 자식아. 그럴 시간 있으면 빨리 본론이나 말해봐" "책상에 쓰기야" "...뭐?" 내 당황한 얼굴을 보며 청도는 재밌다는 듯 씩 웃으며 말했다. 다시 입가에 미소가 돌아오셨군, 그래. "책상에 쓸 거야. 써버릴 거야. 더불어 손바닥, 팔 안쪽, 손가락 사이, 안 걸리는 곳에는 모조리 써버릴 거야..." "야...그러다 만약에 시험시간에 자리를 바꾸면 어떻게 해?" 청도는 고개를 들며 나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도박이지. 우리 둘이 가로로 같은 줄에 나란히 앉는다. 책상을 바꾸면 한 명은 운수 더럽게 없는 거고, 다른 한 명은 운수 트이는거야" "그럼 책상에 써놓은 것이 들킬 경우에는?" "그 때야 그냥 시험 때려치워야지 뭐" "...넌 남자다..." 나는 청도의 시원시원한 대답에 감탄 섞인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요령이는 인간이 두렵다는 듯 한 쪽 입술을 바르르 떨며 중얼거렸다. "너는 여자였으면 패인 옷 입고 와서 앙가슴에 쓰고 봤을거야...허벅지에도 쓰고 치마로 가렸을거야...이 인간아..." 요령이의 말에 청도는 느끼하게 요령이를 훑듯이 쳐다보더니 느물느물 대답했다. "아! 여자였으면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여자가 아닌데 아쉬운데? 으흐흐...!" "그 으흐흐...는 도대체 뭐야! 무슨 웃음이 그래! 너 지금 뭘 상상하는 거야!" "장난이야, 장난! 난 너같은 드센 여자를 제일 싫어하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아니 내가 어딜 봐서 드세다는 거야, 엉? 죽고 싶냐? 뼈와 살을 분리해 드릴까?" ...내가 보기에는 드세다는 표현은 딱 지금의 요령이를 두고 하는 말 같은데... 시험 넷째 날. 이곳은 강의실. "자, 자! 정숙하세요. 이제부터 시험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간깐하게 생긴, 노처녀 히스테리라는 단어가 잘 어울릴 것 같이 생긴 조교가 시험지를 교탁에 탕, 탕 내려치며 시험의 시작을 알린다. 으으, 떨려. 나는 책상을 슬쩍 바라보았다. 책상은 마치 교과서를 몽땅 축소복사한 뒤 그대로 발라버린 듯 작은 글씨로 빽빽하게 뒤덮여 있다. 청도는 지금 어떤 기분일까? 나는 태연히 내 오른쪽을 바라보았다. 내 오른쪽에 청도가 앉아 있기 때문이다. 청도는 태연히 칠판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별 감정의 동요가 없는걸까? 아니면 할 때까지 했으니 이제 나머지는 하늘에 맡긴다는 것인가? 으, 신이시여! 제발 책상을 바꾸지 말고 그냥 넘어갔으면...! 그러나 신은 둘 중 한 명만이 마음에 들었나보다. "자, 이제부터 책상을 바꾸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순간 청도와 나의 눈이 동요로 인해 흔들렸다. 과연 신이시여, 그대가 선택하는 것은 청도 입니까, 저 입니까...? "책상에서..." 청도입니까? "일어나서..." 저입니까?" "......오른쪽으로 한 칸씩 옮겨주세요" 저를 선택하셨군요! 앗싸!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하하하! 그런데, 빌어먹을 조교가 한마디를 덧붙인다. "물론 저를 기준으로입니다" ...신은 죽었다. "몇 점일까?" 컴퓨터실. 흰색의 컴퓨터와 온통 흰색의 도색들, 흰색의 커튼과 흰색의 화이트보드등 모조리 흰색으로 이루어진 컴퓨터실은 그 강박증 적인 색깔 때문인지 사용자를 약간 답답하게 만든다. 하지만 나와 청도의 마음이 답답한 까닭은 컴퓨터실의 색깔 따위와는 하등의 상관이 없었다. 단지 이제 몇 분 후면 우리의 성적이 밝혀진다는 사실이 두려웠을 뿐. 나와 청도는 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서로의 앞에 놓인 모니터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익스플로러의 아래쪽 푸른 색 게이지바가 조금씩 차들어가면서 로그인 화면이 떠올랐다. '학번과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세요' 따다다닥. 빠른 속도로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움직이고, 곧 이어 나와 청도는 우리 학교의 재학생임이 인증되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성적 확인'메뉴로 들어갔다. 흠, 어디 보자... ...잠시 후 나는 마우스를 잡고 손을 부르르 떨다가 익스플로러를 닫고 거칠게 일어섰다. 옆자리에선 청도가 오만상을 찌푸린 채 주머니에 손을 꽂아넣으며 나와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우우- 젠장" "대충 어느 정도나 나왔냐?" "기말고사때는 잘봐야 겠다는 생각 들 정도로 나왔어. 너는?" "마찬가지" 우리는 어깨동무를 하고 컴퓨터실을 나오며 동시에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아이구-" 화창한 햇볕이 내리쬐는 오월 초의 한가로운 오후. 수업도 모두 끝나고, 딱히 할 일도 없는 나는 요령이와 핫도그 사주기 내기 장기를 두며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딱! "장 받아라" "...이, 이런..." 요령이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마를 들어다 내 상을 먹으며 장을 부르고 또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양수겸장이야" "이, 이런!" 정말로 위쪽에서 포장이 기세 등등하게 우리편 장을 가두어 놓고 있었다. 이, 이런! 나는 한참동안 팔짱을 끼고 장기판을 노려보았다. 으음...제, 젠 장. 수가 없잖아... "흐흥- 장기 두는 사람 어디 갔나-?" "...한 수만 무르자" "싫어. 둘 거 없으면 졌지?" 요령이는 냉정하게 말했다. 그렇다. 이 판은 핫도그 내기인 것이다. "한 수만" "아 싫어. 너 같으면 물러 주겠냐? 빨리 장을 받던지 핫도그를 사 내던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 아, 이 판 내가 두 수면 이길 수 있는데! 나는 안 되는 걸 뻔히 알면서도 조금만 더 사정해 보기로 하고 요령이에게 졸랐다. "한 수만 무르자니까?" "아 싫어" 아 이거 장기 한 판 가지고 더럽게 치사하게 구네! 어떻게 하면 요령이에 게 한 방 먹일 수가 있을까? 흠... 그렇지! "음, 크흠! 아니, 갑자기 기침이, 쿨럭, 쿨럭!" 나는 갑자기 발작하듯 몸을 떨며 기침을 해댔다. 물론 일부러. "으억, 쿨럭! 쿨럭! 왜, 왜 이러지? 쿨럭! 쿨럭!" "유치하게 쇼하지 말고 빨리 다음 수나 두던지 핫도그 사와" 요령이의 태도는 싸늘했지만 나는 굽히지 않고 기침을 하면서 그대로 손을 휘둘러 장기판을 엎어버렸다. 우당탕! "야! 뭐야! 지금 뭐하는 짓이야!" "어이, 쿨럭! 어이쿠! 이런 실수, 쿨럭! 실수를! 쿨럭쿨럭! 미안! 쿨럭!" "이럴수가...내 장기...내 핫도그..." 요령이는 힘이 빠지는지 몸을 축 늘어뜨리며 이리저리 엉망으로 망가져버 린 장기판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쿨럭...미,미안...어,어쨌든 이렇게...쿨럭! 됐으니 판은 무...응?" 요령이는 여전히 안타까운 눈으로 장기판을 바라보면서 손을 억지로 놀려 장기알을 하나 하나 쓸어모아 자신의 옆에 쌓은 후 힘없이 뒤집힌 장기판을 도로 원래대로 해놓더니 슬픈 눈빛으로 장기알을 하나 하나 장기판 위에 올 려놓았다. "쿨럭...뭐...쿨럭...하냐?" 콱! 요령이의 손이 내 목을 움켜쥐었다. 요령이는 그렇게 내 목을 조르면 서 가르랑거렸다. "어디 한 번 그 놈의 기침이 어디까지 나오나 볼까?" "미안해 한번만 봐줘" ...물론 내 기침은 곧바로 멈추었다. 그리고 요령이는 책상에 손을 기세등 등하게 올리며 내게 말했다. "여기. 아까 두던 그대로 장기판 다시 배치해 놨으니까 빨리 둬" 요령이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휘저었다. "...이런 깜찍한 것 같으니라고..." "그거 칭찬이지? 고마워. 어서 둬" 그 때 갑자기 누군가 문을 벌컥 열면서 뛰어들어와서 책상을 쾅! 하고 후 려쳤다. "야! 이 한량들아! 지금 장기나 두고 있냐!" 와르르- 물론 장기 알들의 배치가 또다시 엉망이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이런..." 요령이는 절망적인 얼굴로 결국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핫도그 하나 얻어먹기가 뭐 이리 힘들어...젠장...!" 청도는 요령이가 갑자기 망연자실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청도의 왼손에 웬 종이가 둘둘 말려서 들려 있다. 저게 뭘까? "야, 도대체 그렇게 헐레벌떡 뛰어온 이유가 뭐야? 그리고 그건 또 뭐냐?" "아!" 청도는 깜박 했다는 듯 자신의 이마를 톡 치더니 손에 들고 있던 종이두루 말이를 죽 펼쳤다. "포스터네?" "응" 그것은 포스터였다. '5월 15일 - 5월 17일, 대동제가 시작됩니다!' 라는 문구가 깔끔한 명조체로 써 있는, 푸른 하늘이 찍혀 있는 깨끗한 디 자인의 포스터. 그런데 이게 뭐 어쨌다는 거야? 별로 중요한 내용도 없잖아 ? "...어쩌라고?" 내 대답에 청도는 예상 외였는지 당황하면서 되물었다. "뭐?" "아니 뭐 어쩌라고 축제하는데? 아직 날짜도 무지하게 남았는데. 왜, 축제 를 생각하니까 벌써 놀 생각에 가슴이 두근대기라도 하는 거냐?" "그게 아니라!" 도대체 얘가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꺼내는 걸까? 내 물음에 청도는 우리 때문에 답답해 죽겠다는 듯 가슴까지 두드려대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뭔데?" "축제인데, 우리는 명색이 동아리잖아" "...일단 동아리인지 아닌지는 논외로 하고.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데?" 내 말에 청도는 검지 손가락으로 포스터의 중간부분을 탁, 탁 치며 말했 다. 그 부분에는 이런 글귀가 씌여 있었다. '여러분의 많은 참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많은 참여를 바란다잖아! 임마, 축제기간인데, 기본적으로 동아 리라면 뭔가 해야 되는 거 아냐?" "뭐? 축제기간에는 기본적으로 동아리라면 뭔가 해야 되는 거냐? 하긴 뭘 해?" "아니, 꼭 뭘 해야 되는 건 아니지만..." 내 물음에 청도는 말끝을 흐렸다. "게다가 우리는 등록도 되지 않은데다가 사람들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지멋대로 신생 동아리'잖아. 거기다 재학생으로만 따지면 회원수는 너와 나, 이렇게 딱 둘. 이런게 무슨 동아리야, 동아리는" 계속되는 나의 날카로운 지적. 하지만 청도는 내 반박에 예의 그 씩- 하는 미소를 짓더니 대답했다. "그러니까 오히려 이번 축제를 우리의 지명도를 알릴 수 있는 발판으로 삼 아야 하지 않을까? 최소한 내년에는 새내기들을 받아야 할 거 아냐? 그러려 면 어느 정도는 우리의 이름이 알려져 있어야지. 안 그래?" 청도의 말에도 일리가 있긴 하다. 하지만... "야, 근데 내년에 새내기 그거...꼭 받아야 되는거냐?" "당연하지!" 청도는 흥분했는지 책상을 쾅! 하고 후려치더니 우리를 향해 외쳤다. "물론 내가 축제 기간중에 우수한 모습을 보여준 단체에게 상을 준다는 것 때문에 이러는 것은 절대 아냐. 그 동아리에게 주는 상금이 오십 만원이라 서 그러는 것도 절대 아냐!" "엇? 축제동안 뭐 잘 하면 상주냐? 그것도 오십 만원이나?" 나는 청도의 말에 놀라서 되물었고 청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흠...오심 만원이라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겠는데..." 오십 만원이라. 이거 고민하게 만드는군. 하지만 도대체 뭘 하겠다는 거냐 ? 우리 대화를 옆에서 진지하게 듣고 있던 요령이가 갑자기 괜히 열을 올리 며 청도와 나와의 끼어들었다. "아니 그런 게 있으면 진작 말을 해야 될 거 아냐! 축제 때 공연을 한다니 !" "아, 아니, 왜 니가 더 열을 올리고 그러냐?" 나는 요령이의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에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으며 물었 다. 그리고 요령이는 내 말에 움찔하더니 쏘아붙이듯 대답했다. "내가 돈 때문에 이러는 줄 알아? 돈 때문에 이러는 줄 아냐고! 응? 어디 말해 봐! 내가 그깟 상금 오십 만원, 생각해보니까 좀 많긴 하네! 어쨌든 그것때문에 이러는 줄 알아?" "누...누가 뭐래?" 이제 완전히 자기 감정에 도취되서 책상을 쾅쾅 후려치는 요령이. 요령이 가 책상을 후려칠 때마다 장기알들이 위로 튀어오른다. 이제 핫도그 내기 장기 따위는 안중에도 없나보다. 어쨌든 나로서는 다행이지 뭐. "청도가 '영준아, 도와 줘'라고 말하면, 친구된 도리로서 고민할 필요도 없이 '어, 그래'라고 말하고 도와줘야 되는게 예의 아냐? 응? 너는 그래서 안 돼. 그러니까 니가 친구가 없는거야!" "야! 내가 친구가 없는 건 맨날 갈 데 없는 너희들이랑 다니니까 없는거지 !" 요령이의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쏘아붙이자 요령 이는 '니가 지금 그래서 잘했다는 거야?'라고 외치는 듯 책상을 다시 한 번 마구 후려쳤다. "지금 내가 '친구가 있네 없네'따위의 시시한 이야기하자고 하는 거야? 응 ? 그래서 지금 청도의 부탁을 거절하겠다는 거야, 뭐야!" 씨...친구 이야기는 지가 먼저 꺼냈으면서...나는 점점 내가 구석으로 몰 리고 있음을 느끼며 웅얼거렸다. "아니, 뭐, 꼭, 거절이라기보다는..." "하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요령이의 말에 청도도 거들었다. "그래! 하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하, 할게! 하면 되잖아!" 어떻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생각할 틈도 없이 결국 요령이의 페이스 에 밀려 버렸다...젠장. "잘 됐다, 청도야, 그치?" 청도의 일에 진심으로 기뻐하는 요령이. 우정 때문일까, 아니면 '단체'가 받는다는 '상금' 때문일까?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 나를 상당히 씁 쓸하게 한다. 하여튼, 요령이가 기뻐하는 모습을 계면쩍게 바라보던 청도는 참으로 미안하다는 듯, 우물쭈물 말을 꺼냈다. "그, 그런데 요령아, 그리고 가람아..." "응? 왜?" "너희들도 좀 도와줘야 하겠는데..." "뭐엇?" 전혀 예상치 못한 청도의 말에 경악하는 요령이. 쌤통이다 임마. "그러니까 우리가 구체적으로 뭘 하면 되는거냐?" "맞아. 우선 뭘 할 생각인지부터 말해봐" 요령이의 말에 내가 거들었다. "축제 때 무언가를 보여주겠다면 어설픈 걸로는 안 된다" 가람이 또한 우리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걱정하지 말라고. 이번 축제의 상금 오십 만원은 우리가 따 놓은 당상이 니까!" 청도는 자신 만만하게 씩 웃었지만 그런 모습이 오히려 우리를 더 불안하 게 만든다. "아, 글쎄 뭔지나 말해 보라니까?" "연극이야" "아, 연극...그거 좋지. ...가 아니라, 그게 뭐얏!" 요령이는 너무 당황스러운 이야기에 처음에는 그냥 '아, 그러려니' 쯤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잠시 후, 청도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요령이는 눈 을 크게 뜨며 빽 소리쳤다. "연극이라니, 그게 말이 되 ! 무슨 놈의 듣도 보도 못한 연극이야, 연극 은! 얼어죽을!" 가람이도 청도의 말이 탐탁치 않다는 얼굴로 말했다. "요령이 말에 동의. 기본적으로 축제 때 동아리 공연이라 함은, 그 동아리 의 특색을 잘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곳은 연극 동아리가 아 니라 청도 네가 칼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만든 동아리 아니었던가" "내 생각도 그래. 그리고 더군다나 나는 칼이라고는 전혀 할 줄 모른단 말 야!" 요령이와 청도, 그리고 내가 몰아붙이자 청도는 우물쭈물거리며 기어들어 가듯 대답했다. "아니, 난, 그냥... 상금 오십 만원은 꼭 받아야 겠다는 생각에..." "...이라잖아! 어? 연극이면 어떻고 뭐면 어때! 엉?" 청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요령이가 들고 일어서며 우리를 향해 따지 고 들었다. 어휴, 저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박쥐 같으니라고! 가 람이도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지 눈을 가늘게 뜨고 요령이를 노려보았 다. "그런데, 왜 하필 연극이야?" 내가 다시 묻자 청도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우리의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지" "우리의 모든 것이라니?" 내가 의아한 목소리로 묻자 청도는 다시 한 번 씩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냐. 손에서 번쩍번쩍 빛이나 내고, 뭐 쏘면 날아가게나 하고, 손에서 바람이나 나오게 하고. 근데 이게 사실 아무 나 할 수 없는 거거든. 그래서 보는 사람은 다 신기해 할 거란 말야. 그러 니까, 우리가 한 번 특수효과가 무한대로 들어간 블록버스터 연극을 만들어 보자. 어때?" "...무대 다 때려 부수고 관객들 다 죽일 일 있냐?" 나는 어이가 없어서 청도에게 쏘아붙였지만 청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 했다. "힘을 빼면 되잖아, 힘을 빼면! 뭐가 그리 어려워?" "맞아! 뭐가 어려워? 왜 이렇게 불만이 많은거야 도대체? 하라면 하면 되 는거지!" 요령이가 뒤에서 거들고 나선다. 쳇.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한 발 물러 서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네가 하려고 하는 연극의 내용은 어떤 내용인가" 아! 그러고보니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군? 나는 손가락을 딱 튕기며 청도 를 바라보았다. "맞아! 나도 연극 내용이 궁금해. 그 연극 내용이 뭐야?" "잠깐만 기다려 봐" 청도는 대답과 함께 잠시 책상 위에 올려놓은 자신의 가방을 뒤적뒤적거렸 다. 잠시 후, 청도는 얄팍한 A4용지 인쇄뭉치를 몇 권 꺼냈다. "이게 뭐냐?" 내 질문에 청도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대본! 우리가 연습해서 이번 무대에 올릴 연극의 대본이야. 너희들이 내 용을 물어볼 것 같아서 미리 써 왔지. 내용은 무협이고, 연극의 중점은 얼 마나 더 많은 것을 얼마나 더 재밌고 화려하고 빠르게 보여주느냐이지. 어 때? 괜찮을 것 같은 생각이 마구마구 팍팍! 들지 않아? 만약 이걸 대본 그 대로 완벽히 소화해 낸다면 진짜 어마어마한 연극을 만들어 낼 수 있을거야 ! 관객들은 모두 까무러칠지도 모르고 말야!" 청도의 말에 가람이는 별로 탐탁치 않은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어디 보자...제목은...혈풍무림...이라. 제목은 약간 수준 미달이군" 혈. 풍. 무. 림이라고...? 나는 너무도 유치찬란하여 보는 사람의 맥을 쭉 빠지게 만들어버리는 그 제목에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우리의 반응 을 본 청도는 마치 이미 그럴 줄 알고 있었다는 듯 차분히 제목과 연극의 내용의 관련성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제목 따위야 아무려면 어때? 내가 말했잖아. 우리가 하려는 건 연극이지 만 동시에 일종의 '쇼'라고. 이 연극은 본 사람들의 입에서 사람들이 '아! 참으로 감동적인 내용이다! 울어버릴 것 같아!' 라던지 '주인공의 아름다운 사랑에 그만 저도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져버렸어요'라거나 '연극 '혈풍무림 '을 보면서 세상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과 자아에 대한 재성찰의 시간을 가 지게 되었다. 고맙다'라던가, '작품 전반에 작가의 주제의식이 잘 녹아있는 작품' 등등의 반응이 나올 필요가 전혀 없단 말야! 호쾌한 액션과 화려한 결투신, 멋들어진 무술과 강렬한 특수효과같은, 전혀 연극과는 어울리지 않 는 것 같은 것들이 우리 연극의 중심이 되야 한다고! 보는 관객들의 입에서 절로 '앗싸! 신나는구나!' 따위의 반응이 나와야 한단 말야!" "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진정해...왜 열을 펄펄 내고 그래?" 청도의 기세등등한 태도에 기가 팍 죽은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 했다. 흠...생각해보니 청도의 말대로 연극을 만들면 보는 사람들의 반응은 확실히 좋을지도 모르겠는데? 일단 이 '혈풍무림'이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먼저 대본부터 한 번 읽어보자. 나는 손가락 끝에 침을 묻혀 청도가 우리에 게 나누어준, 전면에 큰 글자로 '혈풍무림'이라고 인쇄된 A4 용지 인쇄물의 첫번째 장을 넘겼다. 「 혈 풍 무 림 대본: 이청도 기획: 이청도 연출: 이청도 배우: 이청도. 박영준. 한가람. 이요령. 배역: 박영준 - 흑풍존자 백낙섭. 진씨가문의 전령. 복면인 1. etc. 한가람 - 오대신성 중 일인 소패룡 진영무. 복면인 2. etc. 이요령 - 오대신성 중 일인 자운녀 초매향. 복면인 3. etc. 이청도 - 해설. 암영흑귀. 아미파의 전령. 복면인 4. etc. 소품: 검 3개. 부채. 옛 복식의 의상. 」 호...꽤나 그럴듯한데? 내가 흑풍존자 백낙섭이란 말이지? 이름으로 보아 그리 좋은 놈 같진 않은데...? 나는 흥미를 느끼며 페이지를 뒤로 넘겼다. 「 때는 명나라 초기. 강호는 15년 전 휘하의 암흑의 세력을 이끌고 무림 을 어지럽히던 암영흑귀를 물리친 뒤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 던 어느 날... 」 내용을 대충 정리하자면 이렇다. 옛날, 암영흑귀라는 마인이 있어서 휘하 의 세력을 이끌고 무림을 어지럽히다 힘을 모은 정파와 사파의 무림인들에 의해 쓰러졌다. 그런데 그가 쓰러진 지 15년 후, 죽은 줄로 알았던 그가 세 외에서 세력을 모으고 더욱 고강한 무공과 함께 강호에 다시 등장하게 된 다. 암영흑귀는 자신이 아무리 강해도 혼자의 힘으로는 무림을 자신의 손 아귀에 넣을 수 없다는 사실을 15년 전 자신의 실패로 인해 뼈저리게 깨닫 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함께 손을 잡고 무림을 지배할 자를 찾다가 마침내 약관의 나이에 자신만의 무예 '유풍술'을 극강까지 끌어올린 고강한 무공의 소유자 '흑풍존자 백낙섭'과 손을 잡게 된다. 결국 이 둘은 함께 무 림의 유수한 가문과 문파들을 하나 하나 부수어 나가며 무림에 혈풍을 일으 키며 차근차근 무림을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게 된다. 한편, 아직까지 암영흑귀와 흑풍존자에게 공격을 받지 않은 문파와 가문들 에서는 다시 한 번 15년 전처럼 연합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무림맹에 자신들의 대표를 보내 1차 회동을 갖는다. 그런데, 무림맹의 회동을 위해 각 파의 고수들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암영흑귀와 흑풍존자가 아미파와 팔 북 진가를 급습해서 절멸시켜 버린다. 회동을 위해 문파를 떠나 있는 사이 에 자신의 문파를 잃은 아미파의 자운녀 초매향과 팔북 진가의 소패룡 진영 무는 암영흑귀와 흑풍존자에 대한 복수를 맹세하고 함께 암영흑귀의 본거지 '흑사미궁'으로 떠나게 된다. 온갖 고난의 여행 끝에 결국 암영흑귀와 만나게 된 자운녀 초매향과 소패 룡 진영무. 오대신성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고강한 무공을 펼쳐 결국 협공으 로 암영흑귀를 쓰러뜨리게 된다. 큰 상처를 입은 암영흑귀는 도망가기 위해 순간적으로 몸을 날리지만, 그 때 나타난 흑풍존자가 암영흑귀를 공격하여 쓰러뜨린다. 처음부터 흑풍존자는 암영흑귀를 처치할 목적으로 암영흑귀를 돕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초매향, 진영무와 흑풍존자 백낙섭과의 혈전. 길고 고통스러운 싸움 끝에 결국 흑풍존자는 쓰러지고 초매향, 진영 무는 무림을 구하게 된다. "...꽤 재밌는데?" 나는 솔직한 소감을 말해 주었다. "그렇지? 재밌지?" "응. 이거 니가 만든거냐?" "어. 만드느라 무지 고생했어. 내용을 짜내느라 머리가 터지는 줄 알았다 고. 그래도 재밌다니까 힘이 난다, 야" 청도는 내 칭찬에 기쁘다는 듯 씩 웃으며 물었다. "그러면 연극, 하기로 결정한 거지?" "아니. 일단 가람이의 의견도 물어봐야지"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가람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청도는 간절한 눈빛 으로 가람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가람아, 어떻게 할거야? 할 거지? 응?" "...주인이 하라면 하고 하지 않으라면 하지 않겠다" 가람이는 언제나 같은 대답을 하는군. 가람이의 말에 청도는 다시 나를 바 라보았다. "가람이는 너만 좋으면 하겠대잖아" "아, 저,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닌데..." 청도의 말에 가람이가 움찔해서 청도를 불렀지만 청도는 듣지 못한 듯 간 절한 말투로 내게 말했다. "하자. 해보자. 재미있을 것 같지 않냐?" "흠..." 잠깐 고민에 잠겼다. 확실히 이거, 연습을 하다 보면 재미있을 것 같기는 하다. 그런데...연습이 힘들지는 않을까? 무대에 올라가면 사람들의 시선이 창피하지는 않을까? "하자, 좀!" 청도가 다시 한 번 나를 재촉했다. 그리고 나는 고민 끝에 결국 천천히 고 개를 끄덕였다. "좋아" "야호!" 환호성을 내지른 건 청도가 아니라 요령이었다. 도대체 오십 만원으로 뭘 하고 싶어서 저렇게 좋아하는 거지? 내 궁금증은 요령이의 이어지는 외침으 로 인해 풀렸다. "얼른 상 받아서 맛있는 거 많이 사먹자! 열심히 하자! 아자!" ......어쩐지 너무 열성으로 나서더라. "먼저, 소품을 준비해야 해" 청도가 말했다. "우선 이 연극은 우리의 자본과 시간 부족, 그리고 능력 부족 때문에 부실 한 배경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어. 그래도 최소한 대본에 써 있는 암영흑귀 와 초매향, 그리고 진영무가 사용할 칼 세 자루와 백낙섭이 사용할 부채, 그리고 옛 복식의 의상 정도는 있어야 해" "...머리 아프네. 그것들을 어떻게 구하지?" 요령이의 말에 청도는 그렇지 않다는 뜻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몇 가지는 구하기가 쉬워. 일단 칼 세 자루는 동아리방에 내 목검이 다섯 개 정도 있으니까 그 중에서 골라서 사용하면 되고, 백낙섭이 사용할 부채 는 뭐 아무데서나 천 원이면..." "나 부채 있어. 내 부채를 쓸게" 어차피 연극 도중 바람의 힘을 사용해야 된다면 치우한님의 칼을 '나의 부 채'로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내 말에 청도는 잘됐다며 얼굴을 밝혔 다. "그래? 단 100원이라도 아껴야 하는데 잘 됐네. 그러면 이제 필요한 것은 옛 복식의 의상 정도인데...일단 내가 집에서 가지고 올라온 도복이 두 벌 있어. 이걸로 진영무와 초매향의 의상은 어떻게 될 것 같고, 나머지는 연극 부에서 빌려야 할 것 같아. 뭐 정 안되면 종이로 만들던지 해도 되겠고" "그 정도면 되는거야?" "응. 그리고 아무리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고 해도 배경 몇 개 정도는 그림으로라도 만들어야 하는데...어떻게 하지? 그냥 글씨로라도 쓸까?" "예를 들면 장소가 '무림맹'이면 그냥 글씨로 '무림맹'이라고 써서 뒤에 세워 놓자는 거지? 그거 생각해보니까 딱 비웃음거리인걸?" "...뭐 할 수 없잖아. 어차피 본 내용에서 사람들의 입을 벌어지게 할 자 신이 충분히 있으니까" 그건 나도 자신 있다.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영화도 기술의 한계를 뛰어넘 은 영화들의 관객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데, 이건 관객의 눈 앞에서 실 제로 펼쳐지는 연극 아닌가. 아마 우리의 연극을 본 축제무대의 관객들은 경악을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어느 정도 이상은 질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너무 그러면 창피하다고" "그래? 그러면 뭐 전지라도 사가지고 뒷 배경을 그리는, 그런 식으로 하던 지 해야지...뭐" 내 문제제기에 청도는 고민할 것 없다는 듯이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그 리고 그런 자신감 있는 청도의 모습에 오히려 나는 이상하게 어떤 불안감 같은 것이 조금씩 생겨났다. "그럼 먼저 옷부터 빌리자. 요령아, 니가 좀 갖다 올래?" "응?" "학생회관 3층에 가보면 '세실'이라는 곳이 있거든? 그곳이 연극 동아리인 데. 그곳에 가서 의상을 좀 빌려와 줘. 대본을 읽었으니까 대강 어느 정도 의 의상이 필요한지쯤은 알고 있지?" "...왜 하필 나야? 귀찮어" 요령이의 물음에 청도는 씩 웃더니 대답했다. "미인이 가야 잘 빌려주지 않을까?" 그리고 미인이라는 청도의 말에 요령이는 금방 얼굴에 함지박만한 웃음을 짓더니 '금방 다녀올게'라는 말을 남기고 컨테이너에서 나갔다. "그럼 나는 매점에 가서 전지랑 매직, 물감같은 것들을 사올게" "배경 그릴 것들?" 내 물음에 청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같이 가자. 같이 들어줄게" "그래주면 고맙고" 내 말에 청도는 반갑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같이 가지" 우리가 컨테이너에서 나가는 것을 지켜보던 가람이도 혼자 있기가 심심했 는지 일어섰다. 이것저것 필요한 것을 산 후 컨테이너로 돌아오자 이미 요령이가 먼저 돌 아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요령이의 표정이 과히 밝지 않았다. "표정이 왜 그래? 옷 못 빌렸나봐?" 내 말에 요령이는 고개를 가로젓더니 힘없이 대답했다. "아니- 못 빌린 건 아닌데..." "그럼? 뭔데? 빨리 말해봐. 답답해" 청도의 말에 요령이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빌리러 갔는데...그 인간들도 축제 때 연극을 한다잖아. 그런데 자기네 대본 상 고대풍의 의상들이 필요해서 옛날 옷들은 못 빌려주겠다고 하잖아. 결국 어떻게 해. 헛걸음 하긴 싫어서 할 수 없이 그냥 분위기에 맞는 옷들 로 대강 빌려오긴 했는데, 역시 대본이랑은 별로 안 어울려..." "어떤 옷 들인지 어디 한 번 보자" 요령이는 풀죽은 얼굴로 책상 밑에 아무렇게나 팽개쳐 두었던 옷들을 들어 서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갈색의 롱코트, 그리고 여러가지 색의 천으로 이 루어진 옛 그리스 인의 복장이 몇 벌. 휴, 이걸로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하지만 청도는 이 정도면 되었다는 듯 말했다. "괜찮아. 이걸로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일단 갈색의 롱코트는 분 위기 잡아야 되는 흑풍존자 백낙섭이 입는 걸로 하고, 이 검은 색 천옷은 암영흑귀인 내가 둘둘 감으면 되겠네. 흠, 그리고 복면인들의 의상은...그 냥 검은 색 바지에 흰 티셔츠를 입는 걸로 하자. 내게 흰 티셔츠가 두 벌 있고 검은 바지가 한 벌 있어. 전체 필요한 게 최소한 3, 4벌은 되어야 하 니까..." "나한테 검은 색 바지가 한 벌 있어. 흰 티셔츠가 두 개 있고" "그래? 바지가 모자라네. 흠..." 청도는 잠깐 고민하더니 곧 상관 없다는 듯 씩 웃으며 말했다. "정 안되면 그냥 복면인들 같은 엑스트라는 그냥 아무렇게나 걸치는 걸로 하지 뭐. 복면만 쓰면 되니까" "야, 그런데 복면은 어떻게 만들려고" "아, 그건 학교 앞 플랜카드 가게에서 플랜카드용 천을 한 반 폭 정도 사 서 오려서 복면을 만들면 돼. 아, 그러고보니 복면인용 복장도 그걸 몸에 망토처럼 두르는 걸로 하면 되겠다!" 정말, 궁하면 통한다고 생각을 하니까 어떻게든 방법이 나오는구나. 나는 청도의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아이디어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청도는 우리의 시선을 끌기 위해 책상을 탕, 탕 치며 외쳤다. "됐어, 그럼 이제부터 준비를 시작하자!" "흐흠- 흠흠흠-" 요령이는 콧노래까지 그리며 배경을 그리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러고보니 요령이가 그림을 그리는 것은 한번도 못 본 것 같은데. 그림 그리는게 재미 있나보지? 나는 요령이의 어깨너머로 요령이가 무엇을 그리는지 슬쩍 바라 보았다. 그리고 나는 왼입술을 치켜올리며 요령이의 어깨를 툭툭 쳐서 물었다. "...그게 뭐냐?" "무림맹" "...무림맹이 아무리 재정난이 심각해도 초가집을 세우지는 않을 걸? 무림 맹의 위신이 있지..." 요령이의 대답에 나는 황당함을 가득 실어 반문했다. 그리고 요령이는 기 분이 상했다는 듯 양 손을 자신의 허리에 걸치며 말했다. "이거 초가집 아냐!" "그럼 판잣집이냐?" "죽을래?" "...잘 생각해보니 위풍당당한 무림맹 같기도 하다..." 나는 맥빠진 목소리로 대답하고 다시 요령이의 그림을 바라보았다. 어이 구. 이게 어떻게 무림맹이냐. 아무리 봐도 초가집이구만. 요령이가 '무림 맹'이라고 주장하는 그 건물은 지붕이 누런 색에다 네모반듯한 벽에 십(十) 자 모양의 창문을 가지고 있는, 누가 보아도 '참 바람불면 쓰러질 것처럼 생긴 허술한 초가집이군'이라고 말할 듯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다. "...지붕 색깔은 왜 누런 색이냐?" 내 질문에 요령이는 한심한 질문을 한다는 듯 혀를 쯧쯧 찼다. "적어도 무림맹이라면 지붕이 '찬란한 황금색'으로 빛나지 않을까?" "아...찬란한 황금색..." 나는 망연자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고 요령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찬란한 황금색. 히힛" "자, 자. 지금까지 그리던 거만 다 그리고 나서 대본 연습을 시작하자! 배 경은 언제라도 그릴 수 있지만 대본 연습은 꾸준히 하지 않으면 안 돼!" 자신이 맡은 배경그림의 작업을 마쳤는지 청도가 허리를 펴며 말했다. 청 도가 그린 그림은 '숲속'이다. 뭐, 나무 몇 그루만 그리고 초록색과 갈색만 칠하면 되는 단순작업이니까 빨리 끝낼 수 있었겠지. 나는 청도의 그림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저 무난하게 그린 수준이었다. 멀리 관객석 보면 그림 주위에 북북 그려져 있는 조잡한 연필선따위는 제대로 보이지 않겠지. "야, 그런데 너는 네가 그릴 그림은 안 그리고 뭐 하는 거냐? 왜 계속 남 의 그림만 구경해?" 청도가 질책하듯 물었다. "아, 알았어. 그릴게" 쳇. 계속 꿇어앉아서 그림만 그리는 게 지루해서 잠깐 한눈 좀 팔았다. 미 안하다, 미안해. 나는 다시 붓을 잡고 그림을 칠해나갔다. 내가 맡은 배경 그림은 '아미파'였다. 흠, 내 나름대로 잘 그리겠다고 마음먹고 그렸지만 그림 그리는 건 역시 생각보다 어렵군. 곧 나의 그림이 끝나고 요령이의 '빈궁한 무림맹'의 그림 역시 끝났다. 그 리고 가람이의 '계곡'의 그림 역시 끝났다. 그런데, 가람이의 그림이 나머 지 셋의 입에서 탄성을 불러 일으켰다. "우-와! 정말 잘 그렸다!" "잘 그렸는데! 진짜같지는 않지만 정말 시원하게 그렸는걸?" "...나보다 조금 못 그리긴 하지만 잘 그렸네" 우리의 말에 가람이는 쑥스럽게 머리를 긁으며 대답했다. "옛날 내가 아는 사람이 풍수화에 조예가 깊어서... 그리는 것을 어깨너머 로 몇 번 보다보니까 어느 정도 흉내는 낼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유치한 수준이지, 뭐" "아니야, 이 정도면 엄청 잘 그렸는걸!" "맞아. 우리들 중에 니 그림이 제일 낫다!" 청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동의했다. 그리고 가람이는 우리가 계속 비행기를 태우자 멋쩍은지 머리를 긁적였다. "어쨌든 이제 대본 연습을 시작해야지?" 계속 사람들이 칭찬해서 무안한지 가람이가 말을 돌렸다. "그래, 가람이 말이 맞아. 어서 연습을 시작하자고. 시간이 얼마 없어. 자, 다들 나와. 동아리방 밖에서 연습을 시작하자고" 청도가 가람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본을 들고 일어섰다. 벌써 대본연습을 시작한지도 며칠이 지났다. 연극 준비라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싸움장면 같은 경우는 그냥 누가 이긴다만 정해놓고 실시 간으로 맞붙으면 되기 때문에 별 상관이 없었지만, 대본이 잘 외워지지 않 는다는 것은 무척 고역이었다. 벌써 몇 번을 반복해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잘 되지 않는 우리를 보며 청도는 가슴을 치며 답답해했다. "자, 자! 다시! 다시 한 번 해 보자고! 일단 복면인들을 다 쓰러뜨렸다! 그 다음부터! 시작!" 청도의 주문이 떨어지자 요령이는 천천히, 떠듬 떠듬 대사를 톖어 나갔다. "어...저...그러니까, 저, 역시, 소패룡 진영무의 솜씨는 명불허전이군요, 역시 산을...산을..." "무너뜨린다는" "아! 맞다. 산을 무너뜨리는 기세를 가지고 있다는 팔북 진가의 진가청룡 권입니다" 마치 책을 읽는 듯한 저 대사들. 아아, 저 녀석들은 왜 아무리 연습을 해 도 전혀 늘지를 않는 것일까? 나는 수심에 찬 눈빛으로 요령이와 가람이를 바라보았다. "아, 아닙, 아닙니다. 초매향 양의 아미파 검술이야말로 자운무라는 이름 에 걸맞게 깊이 있고도 그, 그윽한 검술이었습니다. 과연 아미파의 검술은 하늘 아래 적수를 두지 않는다는 말이 사실이로군요" 가람이는 떠듬거리면서도 두 손을 겹쳐 포권을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겸, 겸손의, 겸손의 말씀이십니다. 소패룡 협객의 웅후한 권법에 비하면 제 검술은 아직 어린애의 장, 장난에 불과하지요" "과찬의 말, 말씀이십니다. 어쨌든 이제 흑사미궁이 눈 앞이군요"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의...음..." "우리의 목적인 아미파와 팔북 진가의 복수를 이룰 수 있는 순간이 눈 앞 에 왔습니다" 청도는 답답하다는 듯 다시 한 번 천천히 대사를 톖어 주었다. "아, 맞다. 우리의 목적인 아미파와 팔북 진가의 복수를 이룰 수 있는 순 간이 눈 앞에 왔습니다, 휴!" 요령이는 청도가 불러준 대사를 잊지 않기 위해서인 듯 빠르게 대사를 톖 어나갔다. "암영흑귀와 흑풍존자를 쓰러뜨리면 우리의 여행도 끝이겠지요" 가람이의 대사. 분명히 대본에는 "안타깝다는 듯 슬픈 눈으로 초매향을 바 라보며 말한다"라고 써 있지만 가람이는 단지 허공을 보며 떠듬떠듬 책을 읽듯이, 독백 대사처럼 처리해 버렸다. 아, 어떻게 해야 연기력이 늘 수 있 을까! 청도도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외쳤다. "아, 안 돼, 안 돼! 좀 더 감정을 실으란 말야! 대본에 있는 것처럼, 요령 이를 바라보면서! 슬픈 눈빛으로! 자, 상상해 보자! 상상해 보자! 니가 요 령이를 진짜 무지하게 좋아해, 무지하게 좋아하는데, 이제 며칠 있으면 못 봐! 슬프지? 슬플거야! 슬퍼야 돼! 와- 슬프다! 무지하게 슬퍼! 자, 이제 연기해 봐!" "...도저히 상상이 안 된다" 가람이는 요령이의 얼굴을 잠깐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이윽고 머리를 감싸 쥐고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해 봐! 해야 돼! 하면 다 되게 되어 있어! 자, 다시! 가람이부터, 시작!" 청도는 쌍팔년도 이후로 한국 사회에서 자취를 감추어 가던 박통 시절의 '하면 된다'까지 들먹이며 가람이를 재촉했다. 잠시 후, 다시 청도의 사인 이 떨어졌다. "암영흑귀와 흑풍존자를 쓰러뜨리면 우리의 여행도 끝이겠지요?" 으흠- 청도의 재촉이 효과가 있었나? 가람이의 연기는 아직 많이 어색하기 는 했지만 아까 전처럼 도저히 못봐 줄 정도는 아니었다. "아마도 볼, 볼 수 있을 거에요" 어이구. 가람이의 연기력이 어떻게 어떻게 나아지는 기색이 보이니까 이제 요령이가 문제로 떠오르는군. 청도는 한숨을 쉬더니 대본을 펼쳐 뒤적이며 말했다. "안 되겠다. 너희들끼리 봐, 나와 영준이가 어떻게 하는지. 자, 영준아. 2 막 2장부터 해보자. 흑풍존자와 암영흑귀와의 대화야. 자, 나부터, 시작!' 청도는 연기가 시작되자마자 방금 전까지의 설명적, 훈계적 목소리를 완전 히 버리고 한 명의 음울한 무림인의 목소리를 완벽하게 연기해 내었다. "으흐흐흐...흑풍존자. 이제 화산파까지 무너져 내렸소. 남방삼성연환권의 지산 이가도 무너졌소. 조금씩 무림이 우리의 손에 들어오는 것 같소" 청도의 멋진 연기. 하지만 나의 연기 역시 청도의 그것에 뒤지지는 않는 다. "그렇소. 암영흑귀. 다 당신의 복면귀들 덕분이도. 도대체 15년 만에 어떻 게 대문파 정도의 세력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이오?" "크흐흐...세외에서 불가능한 일이란 없소. 조금 고생하기는 했지만. 그 곳에서는 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세계이거든. 흐흐흐..." "그런데 그 소식은 들으셨소, 암영흑귀?" "무슨 소식 말이오? 아, 혹시 무림맹으로 무림인들의 회동이 있을 거라는 소식 말이오?" "그렇소.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들이 힘을 모으면 꽤 위협적일 수도 있소. 15년 전 당신이 무림을 손에 넣지 못하고 쓰러진 이유도 결국 그들이 힘을 모아서 당신에게 대항했기 때문 아니었소?" "크흐흐..." 으으, 청도의 저 소름끼칠 정도로 음울한 웃음소리! 연기 정말 리얼하군. "걱정하지 마시오. 나는 이제 더 이상 15년 전의 그 바보같던 암영흑귀가 아니니. 이것은 오히려 우리에게 기회요. 놈들을 쓰러뜨릴 수 있는 기회" "기회...라고 하셨소, 암영흑귀?" "그렇소. 놈들은 무림맹의 회의를 위해 무림맹으로 자신의 문파의 최고수 급 인물을 보낸다고 하오. 예를 들자면 아미파의 오대신성, 자운녀 초매향 처럼 말이오. 그러니 그 기회에..." "...저항할 힘이 약해진 문파와 가문들을 한꺼번에 쓸어버리자는 말이오?" 청도는 다시 한 번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다. "으흐흐흐...이해가 빠르시구려" 하지만 나의 연기도 지진 않는다! 나는 대본에 나온 '통쾌한 웃음 소리'를 만들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한꺼번에 내뱉었다. "하하하, 정말 좋은 생각이오! 아마 우리에게 공격받는 문파들은 뒷통수를 맞은 기분이겠지. 아무리 방비를 철저히 한다고 하더라도 고수 한 명이 있 고 없고의 차이는 실로 엄청난 것! 강호를 손에 넣는 꿈이 한발짝 더 가까 이 온 것 같소!" "으흐흐...이게 다 당신과 내가 손을 잡은 덕분에 이루어질 수 있었던 일 이오. 오대신성 중 최강이라고 평가받는 당신의 무공과 내가 키워온 세력이 손을 잡아서 이 정도의 효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이오. 이제 우리가 함께 강 호를 다스릴 날도 멀지 않았소..." "자, 이때 요령이 무대 밖에서 대사!" 요령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사를 멀리서 외쳤다. "암영흑귀님, 정보 확보를 위해 나갔던 복면자가 돌아왔습니다" ...여전히 책을 읽는 듯 딱딱한 목소리. 더군다나 공손하게 말하는 게 아 니라 소리를 빽빽 질러대서, 요령이의 외침은 시녀가 방 밖에서 자신이 모 시는 주인에게 외치는 게 아니라 꼭 양반 주인마님이 마당쇠에게 '마당 더 깨끗이 쓸어라 이 놈아! 절구질은 그렇게 하는게 아니야 이 밥버러지야!"따 위 소리를 꽥꽥 지르는 것처럼 들린다. "...요령이의 연기는 나중에 손보기로 하고, 어쨌든, 으흐흐흐...그래, 알 았다. 기다리거라. 내 곧 나가마. 그럼 흑풍존자. 이만 실례하겠소" "어서 가보시오" 내 대사를 들은 청도는 천천히 왼쪽으로 걸어갔다. 방 밖으로 나가는 연기 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 독백이 이어졌다. "흐흐...암영흑귀. 강호를 손에 넣는 날 너는 내 손에 가장 먼저 죽을 것 이다. 용의 머리는 두개가 될 수 없음이야" "됐어! 여기까지! 정말 잘 했어!" 청도가 손을 들어올리며 가람이와 청도에게 말했다. "봐! 우리 연기 어때? 괜찮지 않아?" 그리고 요령이는 무안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솔직히...좀 잘하긴 하네" "주인, 정말 연기 잘 하는군. 그리고 청도도 연기를 잘하는데. 어떻게 하 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지" 가람이의 감탄한 목소리가 연이어서 들려왔다. 그리고 기분이 좋아진 나는 헤헤 웃으며 말했다. "뭐, 그냥 하다 보니까 되던걸, 그렇게 감탄할 것 까지는 없어" "...너 좀 재수없다...'그렇게 감탄할 것 까지는 없어'" 내 어투와 목소리를 과장해서 흉내내는 요령이의 웅얼거림에 나는 그만 '킥'하고 웃어버렸다. 평소에는 그런 것들 잘하면서 왜 연기를 시키니까 그 렇게 못하냐 그래. "이거 한 번 드시고 가보세요-!" "자! 커플끼리 예쁜 배경으로 즉석사진 찍어드려요! 고작 천 원! 한 번 찍 고 가세요!" "물풍선 던지기에요, 물풍선 던지기!" "거기 커플! 궁합 한 번 보고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소리들. 나는 처음 보는 신기한 모습들에 학교 이곳 저곳을 정신없이 두리번거렸다. 교문에서 승학관까지 이어지는 길이 온통 가판들로 뒤덮이고 교내를 오가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눈에 띄게 화사해졌으며 어디서 숨어 있다가 나왔는지 주위 사람들에게 큰 민폐를 끼 치는 커플들의 수도 갑자기 부쩍 늘어난 것 같았다.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 여 있는 곳도 군데군데 눈에 띄었고, 드디어 대학 문화의 꽃인, '대동제' 라고 불리우는 축제가 시작된 것이다. "아- 진짜 볼거리 많다" "많으면 뭐하냐...몽땅 다 돈이구만..." 나는 한숨을 쉬며 요령이에게 말했다. 만화동아리에서 만든 작은 캐릭터 악세서리부터 점심식사까지, 돈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 다. 우리가 주위를 둘러보며 한숨을 쉬고 있는데 '드드드드-!'하는 소리와 함 께 멀리서 흰 페인트로 채색된 합판 천장을 단, 온갖 꽃으로 장식된 리어카 를 두 명이서 질질 끌면서 전력을 다해서 달려오고 있었다. 리어카 위에는 서너 명의 여자들이 꺅- 꺅- 소리지르면서 리어카의 속도감을 즐기고 있었 다. "저...저건 뭐냐?" 그리고 우리 앞을 지나가는 리어카의 옆에 쓰인 글씨를 보면서 나는 비로 소 저게 뭘 하는 건지 알고 쓴웃음을 지었다. 리어카의 뒷부분에 이런 글이 씌여 있었기 때문이다. 「 꽃마차 초고속 택시 서비스 - 학교 한 바퀴에 3000원 」 꽃마차 초고속 택시 서비스라...아이디어는 진짜 좋네. 하하. "야, 우리도 저거 타고 컨테이너까지 가자" "돈 많냐? 빨리 가기나 하자. 청도 기다리겠다" 부러워하는듯한 요령이의 말을 단숨에 잘라버린 나는 계속 이리저리 두리 번거리며 컨테이너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우우우우웅- 우우우우웅. "야, 전화 왔다" "알어" 핸드폰이 주머니 안에서 나직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요령이는 주머 니 안에 있는 핸드폰의 진동 소리를 어떻게 들었을까. 고양이라서 청력이 좋은건가? 나는 전화기를 꺼내 폴더를 열었다. "여보세요" -어. 나 청도다. "아, 그래. 지금 가고 있다. -야, 됐어. 오긴 뭘 와. 대학에 들어온 뒤 처음으로 맞이하는 축제 기간인 데 놀아야지. 연습은 밤에 해도 돼! 나 지금 승학관 매점 앞에 있으니까 그 리로 와. 같이 다니자. "그래? 연습 안 하고 놀자고?" -안 하자는 게 아니라 밤에 하자는 거지, 밤에. "그거나 그거나. 뭐 어쨌든 나도 구경하고 싶었는데. 잘 됐다. 그럼 승학 관 매점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라, 지금 갈게" -그래. 잠시 후 승학관 매점 앞에서 우리는 하품을 하면서 지루한 표정으로 의자 에 앉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청도를 만날 수 있었다. "왔냐?" "응. 요령이랑 가람이도 안녕하지?" "니가 아이스크림만 하나 사주면 안녕할지도 모르겠어" 익숙하게 나오는 요령이의 농담. 청도는 요령이의 농담을 웃어넘기며 바깥 의 모습이 궁금한지 내게 물었다. "뭐 구경할 거 많더냐?" "그럭저럭 볼만한 거 많던데?" "그래? 뭐뭐 있는데?" "그냥 니가 나가서 봐" 이것저것 설명하기 귀찮아진 나는 아무렇게나 말해 버렸다. 그리고 청도는 몸을 일으켰다. "그래, 네 말대로 일단 밖으로 나가자" 밖으로 나가려는데 갑자기 망토를 두르고 허리에 문방구에서 파는 500원짜 리 플라스틱 칼을 찬, 우스운 기사 복장을 한 다섯 명이 우리에게로 뛰어온 다. "쟤, 쟤들은 뭐냐?" "모, 모르겠는데?" 우리를 향해 뛰어오던 다섯 명은 그러나 우리를 지나쳐서 그대로 매점으로 들어갔다. "뭐, 뭐지?" "따라가보자!" 매점 안으로 들어간 우리의 눈에 들어온 것은 누군가를 찾는지 이리저리 두리번 거리는 다섯 명이었다. 이윽고 한 명이 찾던 사람을 발견했는지 손 을 들어 매점 구석에 앉아서 과자를 사들고 커피를 마시고 있는 한 여자를 가리켰다. "저기다! 레이디가 저기 계신다!" 펄럭-! 망토를 휘날리며 여자에게로 뛰어가는 다섯 명의 기사들. 여자를 둘러싼 다섯 명은 한 쪽 무릎을 꿇으며 외친다. "레이디!" "왜, 왜 이러세요! 누구세요?" "혹시 성함이 한수미 양 맞습니까?" "마...맞으면 어쩔 거에요?" 한가롭게 오후의 여유를 즐기던 여자는 갑작스럽게 맞은 마른하늘의 날벼 락 같은 일에 얼굴이 새빨개져서 말했다. 그런데 다섯 명 중 리더로 보이는 남자가 망토 속에서 꽃 한 다발과 편지를 꺼내며 말했다. "오, 레이디 한수미여, 여기 강진수라는 그대를 사모하는 한 기사가 있어 애타게 그대를 그리다가 결국 우리에게 자신의 불타는 마음을 전해달라 부 탁했소. 오, 우리는 사랑의 메신저. 레이디 수미, 이 편지와 꽃을 받아주십 시오" 얼굴이 빨개진 한수미라는 여자. 이미 주위에는 사람들이 빙 둘러싸고 있 다. 그런데 그 여자, 그래도 남자가 그런 식으로 고백을 하자 좋은가본지 고개를 숙이고 부끄러워 하면서도 조심스레 꽃과 편지를 받는다. "감사합니다, 레이디! 우리도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한 강진수 기사에게 기 쁜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되어서 한없이 기쁩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일어서서 한쪽 팔을 굽히고 고개 숙여 인사하는 다섯 명. 곧 망토를 펄럭 이며 돌아서서 매점 밖으로 뛰어간다. "가자! 메신저들이여! 아직 전달해야 할 편지가 많다!" 우리를 포함한 구경꾼들은 모두 황당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확실히 축제날은 축제날인가보다. "아, 아까웠어. 많이 터질 수 있었는데" 청도가 아쉽다는 얼굴로 말했다. "솔직히 좀 아쉽긴 아쉽다" 나 역시 입맛을 다시며 씁쓸하게 말했다. "'텍사스 전기톱 살인마'가 마지막에 치고 나오지만 않았어도 따는 거였는 데" "그러길래 내가 전기톱에게 걸라고 그랬었잖아" 요령이도 아쉽다는 듯 뇌까렸다. "됐다, 주인. 잊어버려라. 원래 도박이라는 게 잃는 사람은 많아도 따는 사람은 없다고 하지 않는가. 잃은 돈도 이, 삼천 원 정도이니 그냥 재미있 는 놀이를 했다고 생각해라" "그래, 니 말이 맞다, 가람아"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지.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은 오늘 축제 구경 중 가장 재미있었던 '병아리 달리 기'이다. 병아리를 가지고 하는 일종의 레이스였는데, 그 아이디어나 재치 등이 보는 사람들에게서 절로 웃음을 자아냈다. 주최측의 재치가 가장 빛난 부분은 병아리들의 경주명이었다. 그 작고 귀여운 병아리들에게 붙인 '양아 치', '외팔이', '좀 노는 애', '텍사스 전기톱 살인마' 등 실로 어울리지 않는 이름만 골라서 붙여놓은 것이었다. '양아치 파닥 거리는 거 봐, 무지 귀엽다- '등등의 말이 나올 때마다 사람들은 폭소를 터뜨리곤 했다. 어쨌든 우리는 그 경주에서 7번 병아리였던 '피바다'에게 걸었었고, 마지막까지 우 세를 점하던 피바다는 사람들의 박수소리에 깜짝 놀란 텍사스 전기톱 살인 마의 질주에 의해 결국 역전패를 당하고 말았다. 사실 건 돈 자체가 천 원 으로 소액이었고, 게임도 재미있게 즐겼기 때문에 돈을 잃은 것은 별로 아 쉽지 않다. 다만 돈을 딸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 아쉬웠을 뿐. "어쨌든, 낮에 재밌게 놀았으니 이제는 우리가 할 일을 해야지. 자, 다들 밖으로 나가자" 우리가 밖으로 나가서 서자 청도는 요령이와 가람이에게 목검을 나누어주 며 말했다. "자, 내일 모레가 공연이잖아? 그러니까 우선 최종 정리는 내일 하는 것으 로 하고, 오늘은 우리 연극의 하이라이트인 '최후 결투신'을 연습해보자. 그럼 우선, 진영무와 초매향이 암영흑귀의 방으로 들어서는 장면부터. 시작 ! "암영흑귀! 어디 있느냐! 소패룡 진영무가 왔다!" "자운무 초매향도 왔다! 그 흉안을 어서 드러내라!"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는 듯하는 연기를 펼치는 가람이와 요령이. 확실 히 연습을 많이 하더니 연기 실력이 많이 늘었군. 청도는 대본을 잡고 칼을 내려 놓더니 보법을 신기하게 놀려서 마치 미끄러지듯 가람이와 요령이 앞 으로 갔다. "흐흐흐...어린 애송이들이 잘도 여기까지 왔구나. 역시 오대신성 중의 두 명이 뭉쳤다 이건가? 하지만 여기까지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젖비린내나 는 꼬맹이들아. 이 흑사미궁의 중심부까지 온 것은 칭찬해주지. 하지만, 이 곳을 너희들의 무덤으로 만들어주마. 흐흐흐..." 청도는 한 손으로 화려하게 목검을 돌리더니 자신의 앞에 똑바로 들었다. "흑풍존자는 어디에 있느냐!" "너희들을 상대하는데 흑풍존자까지 나설 필요가 있을까? 으흐흐흐..." 청도는 실감나게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흥! 지껄일 수 있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앙칼지게 말하라'는 대본에 맞게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는 요령이. 역시 화려하게 손을 놀려 빙글빙글 돌리며 목검을 뽑아든다. 그리고 말없이 양 손을 들어 겨누는 가람이. 가람이는 권법가이므로 양 손을 들어올리는 것이 다. "흐흐흐...실컷 발악해 봐라. 어차피 너희들은 끝장이니까. 자, 어디 한 번 본좌의 암영검술을 받아봐라!" 미끄러지듯 앞으로 내달리며 양 손으로 검을 고쳐쥐는 청도. 그런데, 청도 가 발목을 한 번 트는 것과 동시에 청도의 몸이 수십 개로 변한다. 핏! 핏! 우와! 멋지다! "암영난무술!" 원래는 이름이 없이 청도가 즉석에서 그저 빨리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으로 잔상을 만들어내는 것이지만, 내용이 무협이므로 일부러 이름을 만 들어 붙였다. 어쨌든, 수십 명의 청도가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는 것을 보고 도 가람이와 요령이는 차분하게 자세를 갖춘다. "청룡쾌비!" 가람이가 권을 호쾌하게 뻗으며 먼저 청도의 잔상들을 헤치고 나갔다. 휙! 휙! 저것도 역시 청도의 잔상들의 공격에 가람이가 즉석으로 대항하는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연습을 할 때마다 '초식'의 모습이 바뀌니까. 어쨌든 그렇게 청도와 가람이는 멋들어지게 한참을 어우러졌다. 자, 이제 요령이가 들어갈 차례지! "백화만개검!" 휘리리릭! 요령이가 몸을 회전시키며 검을 이리저리 뿌렸다. 화려하게 퍼 지는 칼날들은 정말로 흐드러지게 핀 꽃을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실 요 령이는 검술의 기역자도 모른다. 저건 그저 몸을 막 회전시키면서 검을 마 구잡이로 휘두르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빠른지라 나같이 모르는 사람은 입을 벌리고 감탄할 정도로 멋지다. 마구잡 이로 떨어지는 요령이의 칼날들. 청도와 가람이는 이리저리 피하면서 어우 러지던 것을 멈추고 떨어졌다. "흐흐흐. 과연 오대신성은 명불허전이군. 만만치 않은 걸. 하지만 본좌 역 시 수십 년을 무예에만 바친 몸!" "닥치고 내 권이나 받아봐라! 핫! 청룡출운!" 콱! 가람이가 발을 강하게 구르며 앞으로 치고 나왔다. 그러나 청도는 가 볍게 빠져나가며 외쳤다. "암영흑수류!" 스르륵, 마치 물이 빠져나가듯 부드럽게 가람이의 뒤를 잡은 청도. 막 칼 을 들어 가람이를 공격하려 하지만 가람이는 재빨리 대응한다. "청룡후미타!" 하지만 역시 다시금 가볍게 피한 청도. 가람이는 포기할 수 없다는 듯 빙 글 돌아서 자신의 권을 펼쳐 나갔다. "청룡쾌비! 청룡광후! 청룡전각! 청룡두미쌍타! 청룡구일자! 청룡회륜격! 청룡강림일격!" 마구잡이로 지어내는 기술 치고는 정말 멋진 걸. 가람이는 계속해서 청도 를 향해 몰아치듯 공격을 퍼부어대다가 한 번 날쌔게 걷어차고 하늘로 뛰어 오르더니 손을 겨누어 청도를 향했다. "하앗! 꽤 재빠르군! 하지만 진가청룡권의 술법도 그렇게 잘 피하나 볼까? 받아라! 청룡운무소뇌격!" 번쩍! 가람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가람이의 손에서 푸르게 빛나는 수십 가닥의 빛줄기들이 쏟아져 내렸다. 그것들은 땅과 충돌할 때마다 '펑!''펑 !'하는 소리를 내며 조명탄처럼 주위를 온통 푸른 빛으로 뒤덮었다. 멋지다 ! 그 때 대본대로 한창 공격에 열을 올리고 있는 가람이의 뒤에서 청도가 나 타났다. 물론 가람이의 공격은 모조리 피한 것이다. 무서운 놈. 그리고 요 령이의 약속된 외침. "공자! 조심하세요!" "흐흐, 이 놈! 맛 좀 봐라! 암영일자!" 청도는 화려하게 검을 감은 뒤 거꾸로 쥐고 그대로 가람이에게 찔러 넣었 다. "청룡급선회!" 가람이는 몸을 뒤틀어 청도의 공격을 피하면서 역으로 팔꿈치로 치고 들어 갔다. "청룡회주격!" "웃!" '아슬아슬하게 피한다'는 대본을 충실히 구현하는 청도. 가람이는 그대로 여세를 몰아 다시 땅을 훑은 후 이단 앞차기를 들어갔다가 다시 폭풍처럼 치고 들어가다가 잠시 쉰 후, 땅을 강하게 밟으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푸 학! 흙이 뽑힐 정도로 강한 발동작이군. "받아라! 청룡천노격!" "암영폭장!" 콰-앙! 청도의 주위에서 둥근 빛이 뿜어져 나와서 가람이를 후려쳤다. 퍽! 가람이는 몸을 날리던 기세 그대로 청도의 기운에 얻어맞더니 빙글빙글 돌 면서 멀찍이 나가떨어져 버렸다. 가람이는 실감나게 비명을 질렀다. "크으윽!" "진영무 공자!" 청도는 기를 다룰 지 모르지 않냐고? 저게 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물론 청도는 기를 다룰 줄 모른다. 하지만 청도의 목검에는 요령이와 가람이가 전에 힘을 주면 기의 방어막을 칠 수 있도록 손을 써 놓았었다. 청도는 그 걸 방금 이용한 것이다. 물론 방어막인데다 가람이도 진짜로 세게 뛰어든 것은 아니기 때문에 실제로는 별 충격은 없다. 어쨌든 청도는 검을 다시 단단히 잡으며 말했다. "흐흐...엄살 피우지 마라, 애송이. 맞으려는 순간 공격에 쓰려던 기를 방 어로 돌려서 충격을 최대한으로 돌린 것, 이미 알고 있다" "크윽...그, 그래도 상당한 공력이었다...역시 암영흑귀. 만만히 볼 상대 는 아니었어..." "어쨌든 이제 슬슬 끝내야 될 때가 온 것 같군. 흐흐...소패룡 자네도 고 작 한 번의 공격을 얻어맞고 비틀거리는 모습이, 아무래도 오대신성이라는 이름은 허언이었군. 어쨌든, 이 암영흑귀님의 손에 죽는 것을 영광으로 알 도록 해라" 자, 이제 요령이가 등장할 차례! "잠깐, 아직 내가 남아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매화하사검!" 휘리리릭! 경쾌하게 회전하며 요령이의 검이 청도에게로 날아들었다. "흥!" 챙! 간단히 쳐내는 암영흑귀. 그러나 요령이의 검이 튕겨진 위치에서 그대 로 꺾여서 다시 청도에게로 들어간다. "받아보시지! 낙화난무검!" 파바바바밧! 요령이는 다시 한 번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며 청도를 향해 돌진했다. 따다다닥! 쉴새없는 목검의 충돌소리와 함께 청도는 뒤로 주춤주 춤 물러서며 요령이의 검을 아슬아슬하게 막아내었다. 물론 사실 아슬아슬 하게 막아내면서 뒤로 주춤주춤 물러선다는 것 자체가 연출이다. 체계있는 검술을 배운 가람이가 저 정도의 속도로 휘두르는 검들도 여유 있게 막아내 고 되받아치기까지 하는 청도이다. 요령이의 공격을 받아내지 못할 리가 없 는 것이다. 단지 대본 상, 대본에 '암영흑귀는 당황하며 비틀비틀 뒤로 물 러서며 간신히 초매향의 공격을 받아낸다'라고 자기가 썼기 때문에 그대로 하는 것일 뿐이다. 어쨌든, 이제 청도의 비명소리가 들려야지? "크, 크윽! 암영폭장!" 부욱-! 다시 한 번 청도의 몸 주위로 둥글게 기의 막이 펼쳐지고, 요령이 는 몸을 빙글빙글 돌리며 뒤로 물러섰다. "계집, 꽤 하는구나. 나를 이렇게 몰아붙일 줄이야...깜찍하군. 좋다, 상 으로 특별히 극한까지 끌어올린 본좌의 '암영흑귀검'을 보여주도록 하지. 자, 보아라. 이것이 바로 네가 평생을 가도 보기 힘든 '검기'다! 하앗!" 청도의 음울한 외침소리와 함께 부욱- 하고 검이 번쩍번쩍 빛나기 시작했 다. 물론 저것도 실제로는 청도의 검의 기능 중 하나인 '반짝반짝'을 이용 한 것에 불과하다. 어쨌든 요령이는 크게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암영흑귀, 그대가 검기를 사용할 수 있다니! 정말 놀랍군!" "흐흐흐..." "하지만 나 역시도 자운녀라는 이름이 그저 얻은 이름은 아니얏!" 요령이는 외침과 함께 손바닥으로 검신을 쓸었다. 그러자 요령이의 손을 따라서 검에서 빛이 솟구쳤다. 요령이가 손으로 검신을 쓸어내리면서 빛의 주문을 건 것이다. "흐흐...역시, 역시. 재밌군. 아주 재밌어. 너 역시도 검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거냐? 크흐흣...갈수록 귀엽게 노는군" "닥치고 내 검이나 받아 봐라! 이제 봐주지 않겠어! 하앗! 술법이다, 염화 검풍!" 퍼엉! 요령이가 칼을 휘두르자 갑자기 요령이의 주위에서 불꽃이 확! 하고 일더니 불덩어리가 맺혀서 뛰놀다가 청도를 향해 기세등등하게 날아가기 시 작했다. 사실 검으로 일으킨 불꽃이 아니라 샐러맨더다. "크하하! 재미있구나! 암영원참!" 청도가 검을 두 번 쉭, 쉭! 휘두르자 멀리 떨어져 있던 불꽃들이 '펑!'하 고 굉음을 일으키며 폭발해서 사라졌다. 요령이가 샐러맨더를 폭발시켜버린 것이다. 여담이지만, 청도가 검을 휘두르는 순간에 샐러맨더를 흩어버리는, 이 타이밍을 맞추느라 요령이와 청도는 무지하게 연습을 많이 해야 했다. "받아랏! 천녀쾌무검!" 빙글빙글 돌면서 연속적으로 검을 후려치는 요령이. 딱! 딱! 딱! 일정한 리듬감으로 청도의 검과 부딪힌다. "으흐흐-! 암영쌍신술!" 팟-! 요령이의 검을 받던 청도가 초식을 외치자 갑자기 청도의 몸이 요령 이의 앞과 뒤에서 동시에 나타났다. 청도가 다시 한 번 잔상술을 쓴 것이 다. 하지만 요령이는 당황하지 않고 그대로 검을 거꾸로 쥐고 앞을 향해 뛰 쳐나가면서 외쳤다. "천녀출운검!" 팟! 요령이는 재빨리 착지한 뒤 몸을 뒤로 돌리며 주위를 경계했다. 그리 고 청도는 잔상을 하나 지우면서 그대로 주저앉았다. "크윽! 이럴수가! 본좌를 베다니...!" 청도의 목소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요령이는 여유 만만하게 웃으며 청도를 바라보았다. "흥! 이제 아미검법의 무서움을 알겠느냐? 자, 이제 목을 내놓아라! 핫!" 그런데 자신만만한 요령이의 말을 들은 청도, 오히려 웃는다. "크흐흐...운 좋게 한 번의 공격을 성공시켰다고 너무 기고만장하는 것 아 니냐? 자신감 넘치는 소리는 이 공격을 받아보고 나서 지껄이도록 해라. 받 아라, 암영천라지망참!" 팟! 갑자기 청도는 하늘로 몸을 날리더니 그대로 망토를 펄럭이며 머리 위 로 검을 들어올린 후 기합을 질렀다. "하앗!" 파아아앗! 수십 개로 늘어난 청도의 몸. 휘리리릭! 어지러이 깜박거리는 수십 개의 청도의 몸이 동시에 칼을 휘감아 허리께에 붙이며 공격을 예고하 고 있었다. 자, 이제 가람이, '가소롭군!'이라고 외치면서... "흥! 가소롭군! 청룡천군출두령!" 스스슥! 어느 새 벌떡 일어난 가람이가 고함과 함께 몸을 날리는 순간, 수 십 명의 청도의 앞에 모조리 가람이가 붙어서 일권을 질렀다. 퓨퓨퓻! 잔상 들이 하나 둘 꺼져나갔다. 그리고, 퍽! "크으윽! 이 애송이 놈이!" "이 놈! 여기 있었군! 받아라! 청룡격황포!" 가람이는 다시 한 번 양 주먹을 감더니 앞으로 뻗어서 청도의 양 어깨를 세게 때리는 척 했다. 사실은 가람이은 자신의 양 주먹을 모조리 청도의 어 깨 바로 앞에서 끊었다. 어쨌든, 가람이의 주먹을 얻어맞은 청도는 고통스 러운 비명과 함께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공자, 괜찮으세요?" "난 괜찮소, 초 소저. 초 소저는 어디 다친 곳은 없소?" "예, 저는 괜찮아요" 이어지는 청도의 독백. "크, 크윽...! 빌어먹을...! 이, 이럴수가...! 저 따위 애송이에게 나의 암영천라지망이 깨지다니...이건 말도 안 돼! 이럴수는...이럴수는 없어... ! 내가 이렇게 허무하게 당할 수는 없어!" 청도는 벌떡 일어서며 뇌까렸다. "애송이들...아무래도 너희들을 더 이상 상대할 수 없을 것 같다. 본좌에 게는 너희들의 하찮은 복수극 따위에 놀아줄 시간이 없거든...으흐흐. 그럼 이만 실례...하겠다" "흥!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으냐!" "물론이지. 나는 신법 하나만큼은 무림 최고라는 인정을 받고 있거든...흐 흐흐" "웃기지 말고 내 권이나 받으시지! 청룡출운!" "흐흐...암영흑수류" 콱! 가람이가 앞으로 튀어 나오며 다시 한 번 강맹하게 공격했지만 청도는 교묘하게 발을 놀려서 가람이의 공격을 물이 흐르듯 아무렇지도 않게 흘리 며 문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요령이의 공격이 이어졌다. "화엽선풍검!" "암영흑수류" 스르륵. 다시 한 번 요령이의 공격까지 가뿐하게 피한 청도. 문으로 향한 다. 자, 이제 내가 등장할 차례군. 나는 '나의 부채'로 미리 바꾸어 놓은 치우한님의 칼을 들고 한 번 크게 휘둘렀다. "네 맘대로 될까?" "크윽!" 후-웅. 내 부채에서 바람이 쏟아져 나와서 청도와 가람이, 그리고 요령이 의 옷깃과 머리카락을 거세게 날렸다. 그리고 청도는 마치 무언가에 얻어맞 기라도 한 양 뒤로 몸을 날려서 몸을 데굴데굴 굴렸다. "너...넌!" "흑풍존자 백낙섭!" 요령이와 가람이의 놀란 목소리. 후훗. 그렇다. 내 역할은 바로 흑풍존자 백낙섭. 강호의 신진고수를 가리키는 말인 '오대신성' 중에서도 최강으로 불리우는 자. 이제 청도는 믿겨지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대사를 한 번 톖고 무대 뒤로 사라질 차례이다. "으...으으...백...낙섭...네가...왜...?" "후후후...나보다 무공 수위도 한참은 낮은 것과 손을 잡았을 때는 무슨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그...그럼...너...처음부터...설마..." "그래. 너와 손을 잡을 때부터 너를 처치하고 나 혼자 강호를 손에 넣을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하하! 다행히도 그 기회가 이렇게도 빨리 오는군 !" "이...럴수...이럴수가...!" "내 손으로 직접 너를 죽이면 너의 부하들이 나를 따르지 않을 것 같아서 나보다 무공 수위도 한참 낮은 너를 죽이지 않고 살려두었다. 하지만 다행 히도 이렇게 진영무와 초매향이 찾아와서 나에게 도움을 주는군! 네가 진영 무와 초매향에게 죽었다고 하면 모든 일이 간단하게 풀리겠는걸. 그러니... 죽어라. 시끄러운 늙은이" "아, 안 돼...!" 나는 싸늘한 얼굴로 기를 실어서 부채를 한 번 튕겼다. 부채에 실린 기는 청도의 오른쪽, 즉 실제 무대에서 관객석이 될 부분에 맞았다. 투웅! 그리 고 청도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축 늘어졌다. 그리고 청도가 늘어진 것을 나 는 얼굴을 환하게 펴며 몸을 돌려 가람이와 요령이를 바라보았다. "하하하. 강호의 오대신성 중 셋이 모였군? 나머지 둘 중 하나는 소림사에 틀어박혀서 나올 생각도 하지 않고 있고, 나머지 하나는 우리가 죽여 버렸 으니 우리가 실질적으로 무림에 영향을 끼치는 신진고수인 셈이야. 그렇지 ?" "...흑풍존자 백낙섭...설마 너와 같은 편인 자까지 죽일 정도로 잔인할 줄은..." 가람이는 내 말을 무시하고 질렸다는 듯 말했다. 물론 대본에 있는 대로 다. 나는 껄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하! 그까짓 퇴물 하나 죽였기로소니 뭐 그리 놀라나! 어차피..." 싸늘한 미소 후 대사! "너희들도 곧 죽을텐데 말야" "그리 쉽게 되지는 않을걸! 핫! 낙화난무검!" "흑풍" 요령이는 몸을 빙글빙글 돌리며 나를 향해 날아왔다. 하지만 나는 부채를 펄럭여서 바람을 일으키는 것으로 요령이를 날려 버렸다. 펄럭! 물론 요령 이가 날아간 것이지 내가 날린 것은 아니다. "캬앗!" "소저! 괜찮소?" 털썩! 요령이는 잔디밭에 넘어지더니 중얼거렸다. "역시...오대신성 중 최강이라는 흑풍존자 백낙섭...단지 부채를 펄럭거리 는 것 만으로 나의 공격을 무위로 돌리다니..." 사실 내가 이 정도까지 강한 캐릭터로 설정된 데에는 세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최종보스는 암영흑귀처럼 쉽게 쓰러지면 재미가 없기 때문이고, 둘 째는 지금까지 못 보여줬던 모든 것들을 모조리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며, 세 번째는 내가 몸 쓰는 데에는 완전히 젬병이라서 접근전을 도저히 연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이 싸움은 이런 이유로 해서 '내공싸움'으로 설정이 된 것이다. "지금 항복한다면 고통 없이 죽여주지. 진심이다" 나는 악당들이 자주 쓰는 대사를 말하며 부채로 내 얼굴을 슬슬 부쳤다. 그리고 요령이를 일으켜 세운 가람이는 양 주먹을 천천히 앞으로 뻗어서 자 세를 취하며 말했다. "웃기지 말고, 덤벼!" "정 고통스럽게 죽는 게 소원이라면 들어주마. 핫! 흑풍노도!" 나는 부채를 다시 한 번 힘있게 부쳤다. 펄- 럭! 부채에서는 강풍이 일어 나며 가람이와 요령이에게로 시원스럽게 쏟아져 들어갔다. "소저! 내 등 뒤로 숨으시오! 청룡은무!" 파앗! 가람이의 손에서 푸른 빛 기운이 뿜어지더니 가람이의 앞에 막을 형 성했다. 그리고 내가 일으킨 바람은 가람이가 친 막에 막혀서 양쪽으로 갈 라졌다. "이제 나의 공격을 받아 봐라! 청룡쌍장!" 펑! 가람이가 양 손을 뻗으며 무형의 장을 날리는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사실은 양 손을 공중에서 세게 끊어서 파공음을 낸 것에 불과하다. 실제로 는 기 같은 것은 날아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나는 부채를 부쳐서 막아내는 자세를 취했다. "어린애 장난은 이제 그만두고 이걸 막아봐라! 흑사운풍!" 휘리리릭- 나는 살풀이를 사용했다. 물론 약하게. 전에 한수와 싸울 때처 럼 온 힘을 다 해서 사용했다가는 연극이고 나발이고 무대에 주저앉아서 한 참동안 일어나지도 못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내 부채에서 나간 대략 열 가닥 정도 되는 기의 줄기들은 빠르게 가람이에게로 날아갔다. "우습군! 핫!" 퍼퍼펑! 손쉽게 주먹으로 내 공격을 쳐서 터뜨리는 청도. 힘을 모으더니 아까 썼던 기술을 다시 한 번 사용한다. "청룡운무소뇌격!" 번쩍- 가람이의 손에서 수십 가닥의 빛이 뿜어져 나온다. 사실 저건 맞아 봤자 별로 안 아프다는 걸 알면서도, 왠지 난 저것만 보면 맞을까봐 떨인 다. 어쨌든 나는 다른 공격들보다 먼저 출발한 첫 타가 번쩍하고 빛나는 틈 을 타서 '나의 부채'를 쫙 펼쳤다. "벽!" 곧 '나의 부채'였던 치우한님의 칼이 활짝 펼쳐져서 내 앞을 가로막는 든 든한 벽이 되었다. 터엉- 터엉- 나무판자에 가람이의 기술이 부딪히는 소리 가 요란하게 들렸다. 아아, 이걸 연습하느라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던가? 가람이의 저 공격을 실수로 얻어맞아서 가슴팍에 멍이 시퍼렇게 든 적도 있 었다. 하지만 덕분에 이젠 완벽해! "이 정도면 너도 무사하지 못하겠지! 합!" 이건 '이제 마지막 공격이 들어가니 '벽'을 다시 '나의 부채'로 바꿔'라는 약속어이다. 나는 벽에 힘을 가해서 다시 마지막 부채로 바꿨다. 그리고 곧 나의 발 앞으로 마지막 한 발의 공격이 떨어졌다. 번쩍- 빛이 사라지고 가람이와 요령이는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이럴수가!" "멀쩡하잖아!" "흐흐...그럼 그 정도의 공격으로 내가 상처라도 입을 줄 알았더냐? 이거 섭섭한 걸. 나를 너희들과 같은 부류로 취급하면 안 되지. 오대신성도 같은 오대신성이 아니라고. 하압! 광풍타선!" 퍼엉-! 내 부채에서 바람이 터져 나오며 요령이와 가람이에게로 몰려갔다. "합! 아미술법 자운!" 그리고 요령이의 몸 주위에서 짙은 주황색 빛이 번쩍거렸다. 바람을 접어 야겠군. 나는 부채에서 힘을 빼며 말했다. "호오...내 공격을 무력화시키다니?" "흥! 이거나 받아보시지! 아미구화장! 제 1장! 매화장!" 곧 매화장을 필두로 하는 아홉 개의 장력들이 나를 향해 날아왔다. 그리고 나는 부채를 들어 이리저리 휘둘렀다. 펑! 펑! 맞던, 맞지 않던 요령이가 쏘아보낸 기 덩어리들은 모조리 내 눈 앞에서 폭발했다. 물론 요령이가 적 절한 조종으로 터뜨린 것이다. "제, 젠장!" 나의 여유만만한 웃음을 보며 요령이와 가람이가 신음을 흘렸다. "이제 재롱들은 끝나셨나?" 내 말에 가람이는 이를 악물며 외쳤다. "소저! 이대로는 안 되겠소! 협공을 해야겠소! 힘을 합쳐야 하오!" "예! 알겠어요! 공자!" 요령이도 가람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는 이죽대며 말했다. "쥐새끼 백 마리가 힘을 합쳐봤자 호랑이를 이길 수 있을꼬...쯧쯧..." "갑시다! 소저! 청룡출운!" "아미검법 개출! 화엽선풍검!" 순식간에 가람이와 요령이가 나에게로 거리를 좁혀왔다. "흥, 질풍살격술" 이름은 계속 바꾸지만 사실 다 똑같은 바람이다. 펑! 내 부채에서 다시 한 번 바람이 거세게 일며 가람이와 요령이에게로 날아갔다. "큭! 두 번 당할 줄 아느냐!" 양 쪽으로 갈라지며 피하는 두 사람. 그리고 나는 양 손을 좌우로 뻗으며 외쳤다. "흥! 태풍쌍장!" 쉬익- 소맷자락에서 바람이 뿜어져 나와서 요령이와 가람이의 머리칼을 날 렸다. 그리고 요령이는 다시 한 번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로 날렸다. "으악!" "마, 막아냈다! 받아라! 청룡격황포!" "우웃!" 대본 상으로는 내가 청도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는 것으로 나와 있지 만 실제로는 나는 도저히 청도의 공격을 피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내가 허 리를 숙이면 청도가 조금 늦게 내 머리가 있던 부분을 치는, 그런 식으로 연기를 맞추었다. 어쨌든 내 머리 위로 청도의 두 주먹이 스치고 지나갔다. "피하다니! 젠장! 하지만 넌 이제 끝났어! 접근전에서 진가청룡권의 상대 가 될 수 있는것은 없다! 청룡승천이연격!" 파팟! 가람이가 뛰어오르며 그대로 두 번의 앞차기를 구사했다. 그리고 나 는 손을 들어 가슴에 방어세를 취하면서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가람이는 두 번의 앞차기를 끝마치자마자 공중에서 빙글 돌아서 내 가슴팍을 걷어찼 다. "청룡회미타!" "우, 우욱!" 나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가람이는 최대한 힘을 뺀 거라고 생 각하고 나를 걷어 찬 것이지만, 가람이의 발에 얻어맞은 나는 손으로 가슴 위를 방어했음에도 불구하고 멀찍이 밀려나 버린 것이었다. 비틀비틀 물러 나는 나를 가람이가 재빨리 쫓으면서 작게 말했다. "괜찮나, 주인?" "으, 응. 난 괜찮으니까 어서 다음 동작이나 해" "청룡출운! 하압!" 콱! 다시 한 번 잔디밭을 걷어차며 앞으로 튀어나가는 가람이. 그러나 이 번엔 내가 맞기 직전에, 미세한 차이로 아예 주먹을 멈추어 버렸다. "크윽!" 나는 다시 비명을 지르며 주춤주춤 물러서다 부채를 하늘로 치켜들며 외쳤 다. "이 놈! 받아라! 회선풍!" "우악!" 휘이잉! 내 몸 주위에서 바람이 회오리처럼 솟구쳤다. 물론 위력은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어쨌든 가람이는 내 바람을 얻어맞고 멀치감치 튕기듯 날아 가 버렸다. "여기 아미검법도 있다! 낙화난무검!" 촤르르륵! 다시 한 번 요령이의 검이 마구잡이로 뿌려졌다. 물론 일부러 요령이는 내가 없는 곳만 집중적으로 찌르고 있다. 그렇게 잠깐 혼자서 허 공에 칼질을 하던 요령이는 이윽고 내 부채를 맞추고는 외쳤다. "...내 공격을 막다니...대단하군" ...요령이의 대사를 들으니 좀 무안하다. 완전히 요령이 혼자서 북치고 장 구치고 다 하는 것 아닌가? 이런 걸 무대에서 어떻게 연기하지? 그런데 요 령이는 별로 그런 생각도 안 드는지 다시 한 번 검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나는 잡념을 지우고 대본대로 회심의 미소와 함께 다시 한 번 부채를 하늘 로 치켜들고 외쳤다. "하! 기회로군! 회선풍!" "이럴 줄 알았다! 합! 자운무!" 번쩍! 요령이의 몸 주위로 다시 한 번 자줏빛 기운이 뿌려졌다. 그리고 나 는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 이런! 상쇄시키다니!" "놀라기엔 아직 일러! 받아랏! 아미유성검!" "우악!" 나는 '나의 부채'를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딱! 곧 충돌음과 함께 부채가 부르르 떨었다. 요령이가 다시 한 번 내 부채를 맞춘 것이다. "이런! 또 막아내다니! "흥, 귀찮은 계집! 저리 꺼져버렷! 광풍질주!" 펑! 나는 다시 한 번 부채를 휘둘렀고 요령이는 손으로 막는 자세를 취하 면서 뒤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다시 한 번 가람이가 땅을 박 차고 들어왔다. "다시 한 번! 청룡출운!" "제기랄!" "이렇게 된 이상, 내 젖먹던 힘까지 내서 반드시 너를 쓰러뜨리겠다! 받아 라! 팔북 진씨가문의 비전, 청룡광폭난천계다!" 퓻! 퓻! 퓻! 퓻!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른 주먹들이 내 머리 주위 에서 왔다갔다하는 것이 내 귀에 들렸다. 나는 뒷걸음질치면서 가만히만 있 으면 된다. 곧 이어 내 어깨에 '툭'하고 주먹이 살짝 닿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바람의 힘을 땅에다 쏟아서 몸을 하늘로 날리며 외쳤다. "컥! 이...이런! 맞고 말았다!" "흥! 아직 끝나려면 멀었어! 청룡승천이연격!" 팟! 팟! 내 몸 바로 앞에서 발이 왔다갔다했다 "우어억!" "청룡쌍장!" 터-엉! 가람이가 허공에서 공격을 끊자 강렬한 파공음이 공기를 울렸다. 그리고 나는 넘어지면서 외마디 고함소리와 함께 부채를 펄럭여서 내 앞쪽 으로 강풍을 뿜었다. "이 놈! 광풍질주 12성 공력이다! 받아봐라!" "흥! 맞받아주마! 청룡진 12성 공력이다!" 쩌-엉! 가람이가 몸 전체에서 뿜어낸 거대한 푸른 기의 덩어리가 내 쪽으 로 날아오다 허공에서 터지며 주위를 진동시켰다. 그리고 가람이는 뒤로 몸 을 던졌다. "으...으윽! 이럴수가! 내 청룡진이 밀리다니!" "이제 다시 내 차례이군! 하압! 천녀지시선!" 파파팍! 요령이가 검을 휘두르자 내 주위의 땅들이 움푹 패였다. 천녀의 시선이라. 천녀가 바라보기만 해도 죽어버릴지도 모르겠는데? "이야아아- 천녀출운검!" 다시 한 번 요령이가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우, 우윽! 당했다!" 그리고 나는 옆구리를 움켜쥐며 비틀거렸다. "이어서 천녀쾌무검이다!" "젠장! 광풍질주!" "세 번은 당하지 않아! 합!" 요령이는 몸을 하늘로 틀어서 내 바람을 피한 뒤 내 뒤를 잡고 검을 감아 서 내 가슴 옆의 허공을 찔렀다. 관중석에서 보면 마치 검이 내 가슴을 관 통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받아라! 천녀일자!" "크아악! 안 돼!" 나는 눈을 부릅뜨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 때까지 엎드려 있던 청 도가 벌떡 일어서서 박수를 쳤다. "잘 했어! 완벽해! 진짜 멋있어!" 그리고 지쳐버린 나는 털썩 주저앉아서 땀을 닦았다. "휴, 힘들어 죽는 줄 알았네" "야, 니가 뭐가 힘들어? 너야 그냥 가만히만 있으면 되지만, 나는 니가 한 대만 잘못 맞아도 최하 사망이라서 안 맞추려고 얼마나 진땀을 흘리는 줄 알아? 이건 속 시원하게 마구잡이로 힘을 쓸 수 있는것도 아니고...으으, 힘들고 답답하고. 힘조절하기가 너무 어려워" 가람이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힘조절하기가 확실히 어렵다. 그나마 매일같이 연습을 해대었으니 이 정 도까지라도 될 수 있었겠지만" "됐어. 됐어. 그만해. 그렇게 치면 여기서 안 힘든 사람이 어디에 있겠어? 나도 칼싸움 할 때 너희들보다 못하는 척 하려고 얼마나 땀 빼는데. 그리고 영준이도 혹시 너희들이 실수라도 해서 맞을까봐 얼마나 노심초사하겠냐, 안 그래? 어쨌든 모두들 늦게까지 수고했어. 얼른 씻고 집에 가던지, 아니 면 늦었으니까 여기서 자라" 그러고보니 옷이 흠뻑 젖긴 했군. 집에 가던지 여기에서 자던지간에 우선 씻기는 해야겠는걸. 드디어 축제의 마지막 날, 우리가 무대에 서는 그 날이 밝았다! 나는 두근 대는 가슴으로 평소보다 훨씬 정성을 들여서 얼굴을 씻고 면도까지 깔끔하 게 끝냈다. 그래도 무대에 서는 날인데, 깔끔하게 하고 올라가야지. 요령이와 가람이와 함께 집을 나서는데 예의 그렇듯이 골목길에서 주희와 한수가 놀고 있다. "야, 한수야!" "어, 형, 누나. 안녕" 한수는 우리쪽을 힐끔 돌아보더니 손을 들어 아는 척을 하고는 다시 주희 와의 놀이에 열중한다. "뭐하냐?" "하나빼기" 하나빼기. 양 손으로 가위, 바위, 보 중 두 개를 낸 다음에 상대방에게 이 길 수 있는 손을 놓아두고 재빨리 다른 손을 안쪽으로 집어 넣는, 그래서 내민 손 중에서 누구의 손의 패가 이겼는지로 승패를 결정하는 순간적인 두 뇌 회전력과 판단력, 순발력이 승패를 좌우하는 긴장감 넘치는 놀이...라고 해봤자 결국 손 두개로 하는 가위바위보에 불과하다. "...할 일도 참 없다" "할 일 없는데 형이 보태줬어?" 아아, 저 건방진 말투!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제발 날 좀 때려주세요!'로 잘못 들을 수도 있는 저 말투! 나는 주먹을 부르르 떨다가 '아니지, 한수와 나와는 나이 차이가 띠동갑이 넘어가지'를 계속 되뇌이며 억지로 웃음을 지 었다. 사실 조금 한수가 무섭기도 했다. 그런데 한수의 '별로 할 일이 없다'는 말을 들은 요령이가 얼굴을 빛내며 한수를 불렀다. "야, 야! 한수야?" "응?" 평범한 목소리로, 뭐 극도로 올려서 이죽댄다던지, 극도로 내려서 별로 관 심이 없음을 표현하지 않고 그저 평범하게 대답하는 한수. 참으로 건방진 한수이지만 이상하게 요령이에게는 별로 건방지지가 않다. 자기네 누나를 구해줘서 그런가? "너 오늘 우리 학교에 안 갈래?" "왜?" 한수는 의아하다는 듯 요령이를 쳐다보았고 요령이는 싱긋 웃더니 말했다. "이 누님이 오늘 학교에서 연극을 하거든...?" "진짜?" "그래" "무슨 연극인데?" 한수의 물음에 요령이는 손가락을 까닥거리면서 말했다. "와서 보면 알어. 같이 갈래?" "흐음...주희 누나한테 물어보고. 주희 누나, 요령이 누나가..." "갈래! 갈꺼야!" 주희는 한수가 채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급히 대답했다. "학교 갈꺼야! 가보고 싶어! 나도 데리고 가! 연극도 보고 싶어! 갈래! 갈 꺼야!" "...이렇대" 한수는 주희를 엄지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쓰게 웃었다. 그리고 요령이는 고 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가자" 교문에서 컨테이너까지 가는 길은 한수와 주희의 입을 벌어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도 그럴것이, 한수와 주희가 대학의 축제를 본 적이 있을리가 없잖은가. 어쨌든 그렇게 축제가 한창인 거리를 지나서 컨테이너에 도착하 니 한수가 아직 잠을 곤히 자고 있었다. 어제 늦게까지 최종연습을 해서 그 런가, 완전히 꿈 속이네. 나는 팔짱을 끼며 한수를 불렀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맞춰보게 이 시간에 오라고 한 게 누군데 아직까지 잠을 자고 그래 ? "야, 한수야, 우리 왔다. 일어나" 하지만 한수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계속 잠 속에 빠져 있었다. "야! 일어나!" "깊이 잠들었는데. 그냥 자게 놔두는 것은 어떤가" 가람이가 내게 말했다. 흠, 그냥 그럴까? 연극 준비하느라 많이 피곤했을 텐데. 하지만 요령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 상금 타려면 단 일 분이라도 더 연습해야 해. 야! 청도야! 일어나 ! 야! 청도야!" 하지만 청도는 들은 척 만 척, 계속 꿈 속에 헤메고 있었다. "이거 큰일이네..." 요령이는 눈살을 찌푸리며 팔짱을 끼었다. 그런데, 한수가 빙글빙글 웃더 니 말한다. "요령이 누나" "왜?" "내가 저 형 깨워줄까?" "뭐?" 요령이가 반문했지만 청도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청도를 바라보았다. 그리 고, 갑자기 청도가 허공으로 약 2-30cm 정도 붕 떠올랐다. "뭐, 뭐야!" 화들짝 놀란 나와 가람이, 그리고 요령이는 눈을 크게 뜨고 청도를 바라보 았다. 그런데, 그 인간은 허공에 떠서도 세상 모르고 쿨쿨 자고 있었다. 어 이구, 인간아! 그리고 청도는 땅으로 떨어졌다. 콰당! "우아악! 뭐야!" 벌떡 일어나는 청도.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실소를 터뜨렸다. "푸하하!" "누구야!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깜짝 놀랐잖아!" 청도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듯 잠에서 막 깬 부시시한 눈을 비벼가며 마 구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대었다. "이 인간아, 정신 차려! 푸하하!" "...뭐야 임마! 깜짝 놀랐잖아! 방금 전에 니가 한 거냐?" "아니, 내가 한 건 아니고..." "아, 됐어. 어차피 너희 셋 중 하나가 한 짓이겠지. 이윽고 정신을 차린 청도. 새집을 지은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일어나다가 청도와 주희를 발견했다.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한수, 김.한.수.입니다. 일곱 살이에요. 잘 부탁 드립니다" 한수는 예의 그 '착한 어린이 버전'으로 똘망똘망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 다. 물론 나와 요령이, 그리고 가람이는 뒤에서 경악 어린 눈으로 그런 한 수를 바라보았다. 저 놈이 지금 저게 도대체 뭐하자는 짓거리야! "응, 그래, 아주 착하고 예의가 바르구나" 청도는 한수의 모습에 기분이 좋은지 씩 웃으며 한수의 머리를 슬쩍 쓰다 듬어 주었다. 그리고 한수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눈곱 묻은 손으로 어딜 쓰다듬어. 더러운 손 치워" "...뭐?" 완전히 한 방 맞았다는 듯한 청도의 경악어린 얼굴. 그리고 우리는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우하하하!" "너 지금 뭐라 그랬냐?" "귓구멍은 단백질이 부족해서 뚫어놨냐? 머리를 쓰다듬으려면 허락을 받아 야 될 거 아냐!" "어, 어억...!" 청도는 혈압이 오르는지 벌겋게 변한 얼굴로 한수를 가리키며 억, 억 거렸 다. 이런, 아무래도 내가 나서야 될 것 같군. "야, 참아, 참아. 저 놈이 원래 막 자라고 못 배워서 싸가지가 없어. 가방 끈 길고 공부 열심히 한 니가 참어" "어...억...뭐? 가방끈 긴 니가 참어? 그럼 내가 나이가 몇 개인데 쟤보다 가방끈이 짧냐! 지금 일곱 살 짜리가 나한테 뭐라고 그러는지 들었냐? 응? 아, 나 미쳐버릴 거 같아!" 광분하는 청도. 그 손이 금방이라도 칼을 쥘 듯이 부르르 떨린다. 그런데 한수가 불난 집에 기름을 들이부었다. "짜식. 열받아하긴. 농담이야, 임마. 화 풀어. 근데 넌 이름이 뭐냐?" "우와아아악! 이 버르장머리 없는 꼬마놈이! 야! 칼 가져와!" "야! 참어! 니가 참어! 머리 좋고 머리에 든 거 많은 니가 참어!" "얼굴이고 나발이고...가 아니라! 야! 나 놀리냐! 일곱 살 짜리보다 머리 좋고 든 게 많다는 게 대체 무슨 의미야!" 청도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분을 못 이기고 허공에 헛손질을 해대었 다. 그리고 한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일곱 살 짜리 시비에 열받아가지고 날뛰는 모습이라니...저러니까 요즘 어른들이 욕을 먹지" "으아아악!" 한참 후, 간신히 진땀을 빼면서 청도를 진정시킨 우리는 싫다고 입을 꾹 다물어버린 청도를 억지로 한수와 소개시켜 줬다. 그리고 나서 다음은 주희 를 소개시켜 줬는데, "안녕하세요! 김, 주, 희, 라고 합니다!" "아, 예! 아, 안녕하세요? 저는 이청, 청도, 청도라고 해요. 푸른 칼이라 는 뜻이죠. 하하!" 하하! 아무래도 청도가 주희의 외모만 보고 저렇게 부끄러움을 타는 모양 이다. "아, 파란 칼이요! 이름 예쁘다, 헤헤" 이름이 괜찮다는 말에 괜히 실실 웃는 청도. "저...그런데 주희 씨는 몇 살이세요?" "주희 씨요? 헤헤헤, 주희 씨래!" 푸흡! 우리는 모두 터져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고개를 돌려야 했다. 주희 씨라니! 맙소사! '씨'라는 호칭이 도대체 주희에게 어울린다는 말인가 ! 어쨌든 주희는 '씨'라는 호칭이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싱글싱글 미소지으 며 대답했다. "저는, 열 여덟 살, 입니다" 또박또박 한 단어 한 단어 끊어서 말하는 주희. 이쯤 되면 대충 주희가 조 금 이상하다고 눈치를 챌 때도 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외모에 혹해 버렸는 지 청도는 '네...'하고 고개를 끄덕일 뿐 별 눈치를 채지 못한 듯 했다. "저, 그럼 제가 오빠네요? 저는 스무 살이거든요" "스무 살이에요? 와! 그러면 영준이 오빠랑 동갑이네요?" "네, 그렇군요. 하하!" 도대체 뭐가 좋다고 웃는거냐. 나는 멍한 눈으로 주희를 바라보고 있는 한 수를 한심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야, 너 그냥 말 놔. 나도 주희한테 말 놓는단 말야" "아...어, 그래. 주희 씨, 말 놓아도 되나요?" "놓으세요, 헤헤헤" 주희는 다시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그 미소는 아마도 청도를 녹여 버렸나보다. 청도는 얼굴이 벌개져서 나를 잡아끌고 속삭였다. "야, 잠깐만 따라나와 봐" 그리고 청도는 나를 잡아끌고 컨테이너 밖으로 나가면서 말했다. "기다려, 손님들도 왔으니까 과자라도 좀 사올게. 하하-! 영준아, 혼자가 기 심심하니까 너도 같이 가자" "어, 그, 그래" 얼떨결에 따라나온 나. 청도와 함께 매점까지 걷는데 청도가 투덜거리며 말한다. "야!" "왜?" "이 양심도 없는 인간아" "...뭐?" "너한테는 요령이가 있잖아!" 아니 이 인간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갑작스러운 청도의 말에 나는 그만 당황해서 청도를 황급히 바라보았다. "야! 너 지금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요령이같은 미인이 옆에서 계속 같이 다녀주면 됐지, 그것도 모자라서 저 런 미인을 숨겨두고 나한테 아직껏 소개도 안 시켜줘? 이 양심도 없는 것아 !" 청도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어이구. 어이구! 정말 미쳐 버리겠 구만. "이 인간아, 그래, 주희한테 반하기라도 했냐?" "...어" ...뭐? "딱 내가 꿈꾸던 이상형이야. 얼굴도 예쁘고, 잠깐 이야기 해 봤더니 마음 씨도 비단결같이 고운 거 같고..." 그래, 얼굴도 이쁘고 마음씨도 비단결같이 곱기는 하지. 단지... "야! 너 정말 눈치 못 채겠더냐?" "응?" "진짜 눈치 못 채겠어?" "뭘?" 잠깐 내 말에 의아한 듯 나를 바라보던 청도는 손가락을 딱 튕기며 말했 다. "아, 아, 알아, 알아. 그 한수인지 뭔지하는 버르장머리 동네 고철장수한 테 엿바꿔 먹은 것 같은 놈이 주희 동생이라는 거 나도 안다고. 하지만 인 간개조가 내 특기잖냐. 그런 싸가지 없는 꼬마 한 명이 내 사랑을 가로막을 수는 없다고" 얼씨구, 점입가경이라더니. 이제 사랑이라는 단어까지 나오는구만! 나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야! 정말 모르겠어? 주희가 어떤 앤지?" "아 글쎄 뭘 몰라?" 내가 계속 같은 말만 되풀이하자 청도는 짜증난다는 듯 나를 바라보며 되 물었다. 쳇. 내 입으로 이런 말은 별로 하고 싶지 않은데. 하지만 그래도 친구 된 도리로서 해 줄 말은 해 줘야지. "쟤 정신지체아야. 모자란 애라고. 딱 보면 모르겠냐? 정신연령이 일곱 살 정도에서 멈춰 버렸다고. 알아?" "...뭐?" 청도는 내 말에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 "...진짜야?" "그래, 임마. 딱 보면 모르겠냐...?" 청도의 얼굴에 수심이 드리워졌다. 아마 충격이 컸나보군. 한참동안 청도 는 말이 없이 고개를 숙인 채 걷기만 했다. ...이거 아무래도 위로라도 좀 해줘야 할 것 같은데. "...야, 있잖아..." "상관없어" 갑자기 청도가 고개를 들었다. 그 얼굴이 어떤 결의에 차서 빛나고 있었 다. "뭐?" "상관 없다고" "야, 너..." 청도는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태어나서 내가 첫눈에 반한 사람은 주희가 처음이었어. 분명히, 운명적인 뭔가가 있어서 하늘이 나를 주희에게 반하게 한 걸꺼야. 상관없어! 그런 것 쯤은" 이 인간, 중증이구만...나는 창백한 얼굴로 청도를 바라보았다. 설마 청도 가 사랑의 운명 따위를 믿을 줄이야...인간아, 그런 건 너와는 전혀 안 어 울리잖아! 청도는 나를 바라보며 다부진 목소리로 말했다. "영준아" "...왜" "다리 좀 놓아다오" "...저리 꺼져" "제발" 으아- 정말 미치겠다! 나는 손을 들어서 눈을 탁! 하고 가리며 한숨을 쉬 었다. 어쩌다가 이런 일이! ...나는 차마 사랑에 빠진 청도에게 '사실 주희의 동생 한수는 나와 요령 이, 그리고 가람이 이렇게 셋과 삼 대 일로 대등하게 싸운 괴물이야'라고 말해줄 수는 없었다. 너무 잔인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학교 운동장에 거대한 특설무대가 설치되었고 10층은 되어 보이는 조명대 가 높이 올라갔다. 뒤쪽의 사람들을 배려해서 대형 스크린도 몇 개 설치되 었다. 이미 시작된 대동제 폐막제에는 수천 명은 족히 되보이는 사람들이 무대 앞에 모여서 축제의 끝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멋진 공연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번쩍거리는 조명 앞에서 춤추는 사람들. 우리가 마지막 리허설을 끝내고 무대 뒤로 도착했을 때에는 힙합댄스 동아리가 멋들어진 춤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을 줄이야..." 요령이는 새삼 놀랐다는 듯 중얼거렸다. 사실 나도 놀랐다! 이 정도로 많 은 사람들이라니, 이렇게 큰 무대라니! "으, 떨려" 요령이가 많이 긴장되는지 왼쪽 가슴 위에 손을 얹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됐어, 됐어. 떨지 마. 잘 할 수 있을거야. 그런데 청도는?" "저 뒤에서 주희랑 농담 따먹기 하고 있어" ...어휴. 나는 뒤를 바라보았다. 과연 청도와 주희가 뭐가 그렇게 좋은지 마주보고 앉아서 헤헤호호 거리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고함을 질렀다. "야! 이청도!" "그래서 내가..." 대화에 푹 빠져서 아예 듣지를 못했는지 주희와의 대화에만 열중하는 청 도. 나는 다시 한 번 고함을 빽 질렀다. "야! 청도야! 연극 준비 안 하냐!" "어? 어...어. 해야지" 청도는 아쉽다는 듯 주희에게 무어라 말하고 우리에게로 왔다. "너 좀 이상하다? 너 주희한테 반했냐?" 요령이는 심상찮다는 눈빛으로 청도를 바라보며 물었고 청도는 당황했는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 아냐. 무슨 소리야" 나한테는 그렇게 쉽게 말하더니. 그래도 남한테 마구 떠벌리고 다니기는 싫다는 건가? "그런데 언제 시작이지, 우리는" 가람이가 청도에게 물었고 청도는 폐막제 일정표를 펴들고 하나 하나 짚으 면서 말했다. "이제 다음 다음이 우리야. 마음 편하게 먹고, 잘 하자고" "그래. 그런데 정말 사람 많다...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멋있게 하는 사람 들이 너무 많고 말야. 이거 혹시 상금 못 타면 어쩌지?" 요령이가 근심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청도는 우리의 긴장을 풀어주 려는 듯 여유있게 씩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정 안되면 허접한 모습으로 웃기기라도 하면 웃겼다고 상주겠지 !"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냐? "예, 이번 순서는 검을 수련한다는 동아리 '세 발 까마귀'인데요, 자신들 의 검술 실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연극으로 한 번 만들어봤다고 합니다. 협 객활극무협물! '혈풍무림'입니다!" 으으, 떨린다! 아, 참고로 동아리 이름은 적당한 이름이 없어서 그냥 아무 거나 붙여 넣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어쨌든, 우리는 무대 뒤에서 청도의 해 설을 천천히 기다렸다. "때는 명나라 초기. 강호는 15년 전 휘하의 암흑의 세력을 이끌고 무림을 어지럽히던 암영흑귀를 물리친 뒤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평화롭던 무림에 암영흑귀가 세외에서 세력을 모아 다시 강호로 돌아오게 되고, 오대신성 중 최강이라 불리우는 흑풍존자 백낙섭과 손을 잡 으면서 강호에는 다시 한 번 피바람이 몰아치게 되는데..." 자, 우리 차례다! 어서 나가자! 나와 가람이, 그리고 요령이는 배경그림을 붙인 나무판, 즉 배경판을 들고 무대를 향해 나갔다. 화악-! 밝은 빛이 순 간적으로 우리의 눈을 부시게 했다. 그리고 눈에 빛이 익숙해지자 들어온 것은, 우리를 주시하는 수천 명의 시선! 우아악! 떨려! 나는 애써 차분하게 마음을 먹고 배경판을 무대에 놓았다. 순간 이곳 저곳에서 웃음이 터져나왔 다. "하하! 저게 뭐야! 집이야?" "다 쓰러져 가잖아! 푸하하!" 체...쳇. 신경쓰지 말자! 우리는 배경판을 놓은 뒤 재빨리 배경판 앞으로 뛰어가서 각자의 칼을 쥐고 주위를 경계하는 태세를 취했다. 곧 무대 밖에 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컥!" "크윽!" "우악!" ...물론 청도가 내는 소리다. 실감있는 성대모사로 여러 명의 죽음을 멋지 게 처리한 청도는 연극부에서 빌렸던 긴 천으로 온 몸을 칭칭 두른 채 눈만 을 내놓고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뭐야!" "허접하잖아! 하하!" 아까보다 조금 더 큰 웃음소리가 무대 밖에서 들려왔다. 신경쓰지 말자, 신경쓰지 말자. "...넌 누구냐!" 가람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엄청난 속도로 청도가 검을 휘감으며 우리 옆을 지나쳤다. 빠르다! 연습 때보다도 훨씬 더 빨라! 우리는 잠깐동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연기를 위해 눈을 크게 뜨고 서 있다가 풀썩거리며 하나 둘 씩 쓰러졌다. 그리고 잠시 동안 관객석에는 적막이 흘렀다. "우-와!" 처음에 터져 나온 것은 탄성이었다. "대단해!" "보이지도 않았어!" 됐어! 성공이야! 우리의 연극에 대한 관객들의 호응은 실로 엄청났다. 특히 전투나 격투 장 면에 있어서는 사람들의 환호성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그도 그렇겠지. 평범한 인간이 평생 가야 이런 장면을 한 번이나 볼 수 있겠냐. "진짜 무협영화같다!" "대단해! 도대체 어떻게 한 거지?" 관객들의 멋진 반응 속에서 순조롭게 연극을 진행해 온 우리. 마침내 마지 막 장면, 최후의 결투신까지 왔다. 암영흑귀와 초매향, 그리고 진영무가 싸 우는 장면에서는 사람들은 숨소리까지 죽이고 우리들의 연극을 지켜보았다. "...정말 장난 아니다..." "저, 저것 봐! 방금 손에서 불이 나갔어!" "저 잔상술! 저건 어떻게 한 거지?" "...그런데 우리 학교에 저렇게 예쁜 애가 있었나?" "몰라, 진짜 예쁘다..." ...이것들아! 연극에나 신경 써! 연극에나! "암영천라지망참!" 마침내 암영흑귀와의 전투의 하이라이트 신이 펼쳐졌다. 암영흑귀의 암영 천라지망참을 진영무의 청룡천군출두령으로 막아내는 장면! 순식간에 수십 명의 가람이와 청도가 무대를 뒤덮는 모습을 보면서 관객들은 모조리 넋을 잃어버렸다. "...맙소사...저건 말도 안 돼..." "...무슨 홀로그램 장비라도 산 건가...?" 하하, 그런 장비 살 돈 있으면 우리가 이런 무대에 왜 올라 오겠나. 어쨌 든 잠시 후, 나는 흑풍존자의 옷으로 준비 된 흑색 롱코트를 걸치고 무대로 걸어 나갔다. 잠깐 청도와 대사를 주고받은 나. 다행히도 연기는 연습했던 것 만큼 되어 주었다. "...내 손으로 직접 너를 죽이면 너의 부하들이 나를 따르지 않을 것 같아 서 나보다 무공 수위도 한참 낮은 너를 죽이지 않고 살려두었다. 하지만 다 행히도 이렇게 진영무와 초매향이 찾아와서 나에게 도움을 주는군! 네가 진 영무와 초매향에게 죽었다고 하면 모든 일이 간단하게 풀리겠는걸. 그러니. ..죽어라. 시끄러운 늙은이" "아, 안 돼...!" 자, 부채를 한 번 튕겨 줘야지. 투웅! 역시, 대본대로 외마디 비명과 함께 쓰러지는 청도. 그리고 나는 여유있게 웃으며 대사대로 말했다. "하하하. 강호의 오대신성 중 셋이 모였군? 나머지 둘 중 하나는 소림사에 틀어박혀서 나올 생각도 하지 않고 있고, 나머지 하나는 우리가 죽여 버렸 으니 우리가 실질적으로 무림에 영향을 끼치는 신진고수인 셈이야. 그렇지 ?" 그런데 갑자기, 무대 바깥쪽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기다려! 우리를 빼놓고 강호를 논하려 하는 것이냐!" 갑작스러운 돌발상황에 우리는 당황해서 황급히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 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미 극에 몰입되어 있던 관객들 역시 자연스레 목소 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오, 젠장! 맙소사! 그 곳에는, 유천이 우리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야, 저...저건 또 뭐야?" 나는 마이크를 손으로 가려서 목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한 뒤, 눈을 크 게 뜨며 우리를 향해 웃고 있는 유천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분명해. 저 얼굴과 저 중국풍 옷. 틀림없는 유천이다! 요령이는 짜증이 나는지 머리를 마구 헤집으며 말했다. "내...낸들 아냐? 저게 도대체 무슨 민폐를 끼치려고 여기까지 납신 거야 그래? 미치겠네...! 세 발 까마귀를 가져가려거든 남에게 피해는 주지 말아 야지, 저 양심도 없는 인간이! 아니 이제 공공장소에까지 나타나서 행패네 !" 요령이는 잔뜩 흥분해서 마이크를 막고 마구 소리를 질러대었다. 가람이는 ? 가람이는 그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유천을 주시했다. 그리고 청도는... 죽은 척 하느라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눈만 감고 있어야 했다. 불쌍한 것. 쯧쯧. 주위에서 이상한 소리들은 들려오는데, 보지는 못하고. 어이구, 얼마 나 답답할까. 아마 궁금해서 미쳐버릴 것 같은 기분이겠지? 유천은 멀리서 우리를 바라보며 빙글빙글 웃다가, 이윽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무대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까는 미처 보지 못했었는 데, 지금 보니 학교 내에서 유천과 함께 다니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는, 하 지만 저번의 싸움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던 남녀가 유천의 옆에서 함께 걸어 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요령이가 다시 한 번 투덜거렸다. "드디어 친구까지 데리고 오는구먼...미치겠네" 관객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천천히 무대 위로 올라온 유천. 한참을 빙글빙글 웃더니 나를 보고 한마디한다. 물론, 마음속으로. 도대체 우리말 을 모르면서 유학생활은 어떻게 할 수 있는걸까? 옆의 남자가 모두 통역해 주나? 참으로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반갑군. 몇 달 만이지? 너의 그 싸구려 연극은 잘 보았다. "...무슨 일로 나타난 거지? 그것도 수천 명을 무대 앞에 두고. 왜, 수천 명 앞에서 공개적으로 세 발 까마귀의 패를 빼앗아 가기라도 하려는 거냐?" 물론 유천이 알아들을 리는 없지만 혹시 옆에 서 있는, 일관성 있게 검은 옷만 입고 다니는 남자가 -오늘은 검은 반팔 티셔츠와 검은색 청바지를 입 고 있다- 해석을 해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나는 유천에게 왜 이 곳에 나 타났는지를 물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검은 옷의 남자는 유천에게 내 말을 번역해주지도 않았고, 유천 역시 내 말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쳇. 대답이 궁금하지 않으면 말을 걸지 말던가. 하여튼 사교성이 별로 없는 친 구들이라니깐 유천은 싸늘하게 웃으며 우리를 지나쳐 조명과 기계, 음향 등을 제어하는 곳으로 가더니, 이윽고 마이크를 세 개 얻어와서 각자의 얼굴에 끼운 후 마 이크를 켰다.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그리고 유천의 뒤에 서 있던, 검은 옷의 남자가 천천히 우리들 앞으로 걸 어 나와서 마이크를 켜더니 이윽고 유창한 한국말로 외쳤다. "하하하! 네 놈이 흑풍존자인가 하는 애송이인가? 지금까지 지켜봤는데 참 말투가 버릇이 없더군. 감히 우리 황교삼협을 제외하고 강호의 패권을 논하 려 하다니!" ...지금 뭐라고 그런거냐? "...쟤가 지금 뭐라고 하는거냐?" "...미쳤나봐" "우리가 연극하는 게 재밌어 보여서 끼고 싶어했나?" "얼굴은 멀쩡하게 생긴 게..." 유천의 친구로 보이는 남자의 갑작스러운 대사에 당황한 우리들은 채 마이 크도 가리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우리가 당황을 한 걸 눈치채지 못 하는 건지, 아니면 우리의 생각 따위에는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 건지 검은 옷의 남자는 계속해서 대사인지 실제인지 구분하기 헷갈리는 말을 이어나갔 다. "그리고 너희들, 소패룡 진영무와 자운녀 초매향! 너희들도 마찬가지다. 건방진 것들. 감히 우리를 빼고 오대신성이니 뭐니 하면서 논한단 말이냐? 건방진 것들!" ...그래서 도대체 날보고 뭘 어쩌라고? 뭘 바라는 거야? 어쩌라고! 내가 막 공황상태의 정신으로 빠져들려 할 때였다. 갑자기 우리의 마음속 으로 요령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아무리 작게 말해도 마이크로 울 린다고 생각하고 결국 전음술을 쓰기로 결정한 모양이다. -아, 아. 마이크 테스트. 마이크 테스트. "...잘 들리니까 그런 거 안 해도 돼" 내 씁쓸한 중얼거림에 요령이는 손가락으로 'ok'사인을 그리면서 다시 마 음속으로 말을 이었다. -흠. 난 저 녀석들이 왜 갑자기 저런 웃기지도 않는 짓을 하는지, 그 목적 을 알 것 같아. "그, 그래? 그 목적이 뭐, 뭔데?" 내 말에 요령이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야, 아무리 작게 말해도 마이크 때문에 관객석까지 다 들리니까 그냥 조 용히 듣기만 해! 봐, 관객석에서 지금 웅성웅성대잖아! "으...으응" 갑작스레 요령이가 소리를 쳐서이지 귀가 찡하고 울린다. 쳇, 마음 속으로 소리치는 데 왜 귀가 아프지? 신경성인가? 그건 그렇고, 요령이의 말대로 관객석의 분위기가 술렁거리고 있다. 아마 도 무대 위의 묘하게 변한 분위기와 허둥지둥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 동 요하고 있는 건가 보다. 나는 입을 다물고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요령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저 녀석들, 꽤 재치 있어. 아무래도 이번 연극을 우리들을 합법적으로 공 격해서 세 발 까마귀의 패를 빼앗아 갈 수 있는 기회쯤으로 생각하는 모양 이야. 우리가 이번 연극에서 워낙 신기한 주술을 많이 보여줬잖아? 그래서 아마 유천 쪽에서는 '우리들이 영준이를 공격하고 세 발 까마귀의 패를 빼 앗아가도 잘만 하면 연극인 것처럼 위장을 할 수 있겠다. 마침 싸움을 걸 기회도 없어서 전전긍긍하고 있었는데 잘 됐다'쯤으로 계산하고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낸 것 같아. 그리고 그 쪽에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우리에게 접 근했다면 우리도... 요령이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싱긋 웃으며 우리들에게 손가락으로 브 이자를 그리더니 말을 이었다. -까짓, 놀아주자. "뭐?" 너무 놀란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요령이를 바라보며 소리쳤다가 깜짝 놀라 황급히 마이크를 손으로 덮었다. 내 실수에 눈살을 찌푸린 요령이는 하지만 곧 여유 만만하게 웃으며 내게 부연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놀아주자고. 우리 쪽에서도 오히려 잘 된 걸지도 몰라. 저 놈들이 이 연 극판을 깨지나 않을까 걱정해야 하는 판에 오히려 저 쪽에서 저렇게 협조적 으로 나와주니, 이게 잘 된거지 뭐겠어? 우리도 연극인 척 하면서 한 판 놀 아 보자. 저런 놈들은 힘으로 눌러 줘야지, 안 그러면 어쩔 수가 없어. 다 들 연극인 줄 아니깐 정체도 들킬 염려 없고, 잘 됐어. 정말 잘 됐어! 뭐, 아쉬운 점이 있다면, 무대 위에서 싸우긴 힘들테니 상금 받기는 어렵겠다는 거지. 뭐, 하지만, 이것도 나름대로 좋은 경험이었으니까! 그 때 가람이의 목소리도 내 마음속으로 들려왔다. -그래. 요령이의 말이 맞다. 어쩌면 차라리 잘 된 일일지도 모르겠다. 어 차피 저 쪽과는 한 번 부딪혔어야 했어. 신중한 가람이까지 그렇게 생각한다니, 내 마음도 조금씩 유천 쪽과 한 판 붙어서 결판을 내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고 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어! 아 참, 한마디 덧붙이자면,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저기 자 빠져 있는 청도는 꼭 살려내. 이미 지금의 상황은 내가 마음속으로 다 설명 했으니까. 요령이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마음속으로의 말을 마친 요령이는 정색을 하고 유천 무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들은 도대체 누구냐? 황교삼협이라고? 그런 집단 따위는 들어본 적도 없어!" 우리의 말에 남자는 씩 웃더니 말했다. "정식으로..." -재치가 넘치는 아가씨로군요. 헉! 이 녀석 보게! 입과 마음 속, 양 쪽으로 동시에 말을 하고 있잖아! 나 는 귀와 동시에 마음속으로도 신경을 집중했다. "소개하지. 우리는 세외에서 온 황교삼협이라고 한다. 모두 너희들 같은 애송이와는 상대도 되지 않는 고수로 이루어져 있지. 나의 이름은..." -소개하겠습니다. 뇌신자 백태청이라고 합니다. "합신운사 뇌신자이다. 그리고 내 뒤에 계신 분의 이름은..." 백태청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손으로 유천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 순 간, 마음속으로 유천의 건방이 철철 넘쳐 흐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알고 있겠지? 유천이다. "...부활제 후황자이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기 소저의 이름은..." -처음 뵙습니다. 수신녀 백화련입니다. 이번에는 맑은 여자의 공손한 목소리가 우리의 마음속으로 울려 퍼졌다. 아 무래도 저 여자의 목소리 같은데. 어쨌든 백태청은 이미 여자가 스스로 마 음 속으로 소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극중의 대사를 끝마쳐야 하기 때문인 지 소개를 계속 이어나갔다. "...합신운사 수신녀라고 한다" "너희들같은 무명, 떠돌이 패거리들의 이름 따위는 전혀 궁금하지 않아! 너희들의 목적이나 말해 봐라! 너희들은 무슨 목적으로 우리의 정당한 복수 를 방해하려는 거지?" 요령이의 통쾌한 공격! 요령이는 순식간에 유천쪽 사람들을 '무명, 떠돌이 패거리'따위로 깎아내리면서 동시에 유천네 패거리의 목적까지 물어보는 두 가지 작업을 훌륭하게 해 내었다. 근데 사실 목적은 안 물어봐도 되는데. 어차피 뻔하지, 뭐. -세 발 까마귀의 패를 내 놔. 유천의 광기 어린 목소리가 섬뜩하게 우리의 마음속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백태청은 갑자기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외쳤다. "우리의 목적은 하나, 흑풍존자가 가지고 있는 영패다!" ...역시 그랬었군. 나는 연극 중인 것처럼, 싸늘하게 웃으며 태연하게 대 답해 주었다. "미친 소리" 물론 극중에서 흑풍존자 백낙섭이 차갑고 잔인하고 냉정한 성격으로 나오 기 때문에 나도 최대한 목소리를 차갑고 냉정하고 잔인하게, 즉 싸가지 없 게 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백태청은 내 '미친 소리'라는 말에 기분이 상했는지, 아니면 연기를 하는 건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꼭 피를 봐야겠다는 것이냐...?" 그 때 요령이가 우리의 대화에 끼여들었다. "잠깐! 기다려!" "무슨 일이지? 너희들에게 용건은 없다. 그러니 끼여들지 말도록. 내가 용 건이 있는 사람은 오직 오대신성 중 제 일성이라고 불리는 흑풍존자 백낙섭 이다. 흑풍존자 백낙섭, 어디 그 고명의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언인지 한 번 볼까? 물론, 네가 영패를 포기한다면 우리도 고이 물러나 드리지" 백태청은 천연덕스럽게, 마치 실제로도 내가 요령이, 그리고 가람이와 별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도 되는 듯 말했다. 으으, 과연 요령이와 가람이는 무 슨 핑계를 대고 나를 도와 줄 거지? 원래 죽이려던 상대를 도와줘야 하는 이유...으, 아무리 생각해봐도 머리만 아프다. 설, 설마 핑계가 없다고 도 와주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 그 때 요령이가 끼어들었다. "잠깐! 합신운사, 우리가 상관 있는 일일수도 있다. 너희가 흑풍존자의 영 패를 가져가려 하는 이유는 무엇이지?" "뭐?" 백태청은 그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요 령이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영패를 가져가려는 이유 따위는 전혀 생각해 놓 지 않은 듯 하다. 그리고, 요령이는 기세 등등하게 말을 이었다. "혹시 너희들, 영패로 검마를 부활시키겠다거나 하는 생각은 아니겠지?" 이런 식으로 몰아붙이면 상대 쪽에서는 어쩔 수 없이 '어떻게 알았지?'따 위로 대답해야 한다. 극의 전개상, 여기서 '아닌데? 사실 우리 어머니께서 요즘 몸이 허하셔서, 영패 팔아서 보약 좀 사 드릴려고 하는거야'따위로 대 답할 수야 없는 노릇 아닌가. 과연 백태청은 기다렸다는 듯 요령이가 던진 미끼를 덥썩 물었다. "흐...흥! 영패에 대해서 아는지는 모르지만 칭찬해주지. 그렇다! 우리는 영패로 검마를 부활시키려고 한다. 그래서 강호에 피바람을 몰고 올 것이다 !" "그렇다면 너희들의 행동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백태청의 말에 요령이가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양 빠르게 대답했다. "...뭐?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고?" "그래! 검마를 부활시켜서 강호에 피바람을 몰고 올 것이라니, 그런 극악 무도한 짓을 이루게 우리가 보고만 있을 것 같으냐!" 훗, 저런 식으로 나를 도와주려고 하는 것이군. 암, 강호의 평화, 그거 무 지하게 중요하지. 강호에 파바람이 불면 안되지. 암, 안되고 말고. 피바람, 그거 무서운 거지. 하지만 백태청도 나를 도우려는 가람이의 의도를 눈치챘는지, 어떻게 해서 든 요령이와 가람이가 나를 돕지 못하는 방향으로 내용을 이끌어가기 위해 애쓴다, "하하, 눈물겨운 정의감이로군! 그래서, 너는 너의 사제와 동문, 너의 선 배와 너의 스승을 모조리 죽여버린 저 흑풍존자 백낙섭을 돕기라도 하겠다 는 것이냐?" "물론! 강호의 대의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복수는 나중으로 미룰 수 있다 !" 대의! 그거 좋은 거지. 암! 대의! 그거 지켜야 하는거지! "하! 미친 소리!" "미친 소리가 아냐!" 갑자기 가람이도 뛰어들었다. 어떻게든 극중 전개를 우리 쪽에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미친 소리가 아니다. 이 강호의 정의도 모르는 것들! 정의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 따위는 묻어버려야 하는 것! 그것이 강호의 정의이 고, 그것이 협객의 마음가짐이다!" 가람이의 목소리는 격정에 넘쳐 있었다. 연기솜씨가 늘어났는지, 정말 멋 들어지게 잘 하는군. "흑풍존자 백낙섭!" 열변을 토하던 가람이가 갑작스럽게 나를 부른다. 그리고 나는 화들짝 놀 라서 대답했다. "왜, 왜?" "너는 영패를 가지고 있었지? 너는 그 영패로 검마를 소환해서 강호를 피 바다로 만들 생각이 있었는가?" 그리고 나는 방금 전 잠깐 놀라서 흐트러져버린 이미지를 추스르기 위해서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기고 차갑게 웃었다. "웃기지 마라. 곧 내 것이 될 강호를 왜 피바다로 만드는가" "그럼 되었다, 너를 돕겠다! 저 악마같은 놈의 손에 영패가 들어가게 할 수는 없다" "마음대로" 요령이도 함께 외쳤다. "공자! 저도 공자와 뜻을 함께 하겠습니다!" "고맙소, 소저!" 결국 연극은 이렇게 해서 완전히 우리 쪽으로 기울어 버렸다. 그리고 백태 청은 입술을 깨물더니 나지막하게 뇌까렸다. "흥, 결국 셋 다 개죽음을 당하고 싶다는 것인가? 좋아. 마음대로 해 보시 지. 너희 같은 떨거지들 따위야 백이 와도 상관없으니까" 자, 이제 청도를 살려야 할 차례인가?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백태청의 말 을 끊었다. "셋이 아냐" "뭐?" "우리 쪽에는 한 명이 더 있다" 백태청은 내 말에 당황했는지 얼굴빛이 변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아까 영패를 가져다가 어디에다 쓰겠다고 했지? 검마의 부활에 쓰겠다고 했나?" 내 질문에 백태청은 '갑자기 왠 뜬금 없는 소리냐'는 듯 멍하니 나를 바라 보다 결국 내키지 않는지 쓰게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리고 나는 마음 속으로 준비했던 대사를 말했다. 최대한 '흑풍존자'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나는 세 발 까마귀의 패를 꺼내들고 천 천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런 고귀한 물건을 고작 어떤 미친 놈의 부활에 쓴다는 것은 너무 아까 운 일이지..." -그, 그것은 세 발 까마귀의 패! 어서 내 놔! 마음 속으로 흥분한 유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나는 유천의 목소리 따위에는 일말의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이것으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거든...검마 따위 미치광이나 살리기에는 너무나 아까워. 너무나...너희들에게 보여주마. 영패가 얼마나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는지! 영패여! 저 자의 혼을 다시 일깨우라! 깨어나라! 암영흑귀 여! 나의 충실한 종으로 다시 살아나라!" 나는 영패로 청도를 가리키며 외쳤다. 그리고 동시에 마음속으로 세 발 까 마귀를 애타게 불렀다. -이 봐요, 세 발 까마귀 님, 세 발 까마귀 님! -오, 영준 아닌가? 오래간만이군. 잘 지냈나? -덕분예요. 인사는 나중으로 미루기로 하고, 세 발 까마귀 님, 죄송하지만 잠깐만 세 발 까마귀의 패로 빛을 좀 뿜어주실 수 있으세요? -아니,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빛이라니... -지금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빨리요! 부탁드려요! 죄송해요, 세 발 까마귀 님! 나중에 꼭 자세히 설명해 드릴게요! 나는 마 음속으로 잔뜩 미안함을 느끼면서 세 발 까마귀에게 간절히, 그리고 급하게 부탁했다. -뭐 어렵지도 않은 일이니 들어주긴 들어주겠다만...이것 참...당황스럽 군. 세 발 까마귀는 당혹스러움이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세 발 까마 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번쩍! 자주빛 빛이 온 무대 전체를 뒤덮었다. 그리고 마치 태양이 무대 위에 떠 오른 것처럼 무대 가 눈부시게 빛났다. "우, 우왓! 눈부셔!" "장난 아니다! 진짜 멋있어!" 세 발 까마귀의 패에서 빛이 터져나오면서 관객석에서 잇따라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럴 수밖에. 나도 처음에 세 발 까마귀의 빛인 홍적색의 빛을 보 고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다고 생각했으니까. -이 정도면 되었나? 세 발 까마귀의 말이 마음속으로 들려왔다. -예, 정말 감사합니다! -그래. 나중에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 주리라 믿네. 세 발 까마귀는 그 말을 남기고 조용해졌다. 동시에 무대 위를 찬란하게 비추던 자주빛 광채도 천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 번 마음 속으로 미리 준비해놓은 대사를 읊었다. "이제 암영흑귀는 내 충실한 종으로 다시 부활할 것이다!" 스윽.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청도는 비척비척 일어섰다. "암영흑귀" "예. 주인님" "오-" 생각지도 못했던 극의 흐름에 관객석에서 감탄사가 일어났다. "너는 이제부터 나의 충실한 종이다. 알고 있느냐?"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만족한 미소와 함께 다시 물었다. "영패의 힘은 너를 부활시키면서 동시에 너의 힘을 극상까지 끌어올려 놓 았다. 느낄 수 있느냐?" 내가 이 대사에 숨긴 속뜻은, 우리에게 했던 것처럼 연극하듯이 사정 보지 말고, 저 놈들에게는 전력을 다해서 두들겨 패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청 도는 내 말뜻을 알아들었을까? 청도는 음울하게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으흐흐흐...과연 그렇군요. 제 앞을 가로막는 것은 그 누구라도 쓰러뜨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인님의 명령만 있다면 아주 박살을 내도록 하지요" "잘 되었군" 내 말을 알아들었군. 나는 왼쪽 입술을 들어서 뒤틀린 웃음을 지은 후 백 태청에게 말했다. "자, 이제 어디 한 번 싸움을 시작해 볼까? 황교삼협이라고 했지?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패거리들과 내가 겨루어 주는 것만 해도 고맙게 여겨라" 마침 때맞춰 유천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우리의 마음속으로 들려왔다. -도대체 뭘 하자는 거지! 너희들의 연극놀음에 맞추어 주는 것도 이젠 지 겹다! 어서 덤비던지 세 발 까마귀의 패를 내놓고 썩 꺼져버려! 그리고 백태청의 목소리도 마음속으로 들려왔다. -후황자 님께서 어지간히 지겨우신가 보군요. 이제 공격을 시작하겠습니 다. 마음 속으로 들려오는 백태청의 목소리는 대사를 읊을 때의 약간은 어눌한 모습과는 거리가 먼, 차분하면서도 무게감이 실린 목소리였다. 그리고 말투 도 확 바뀌어서 우리에게 꼬박꼬박 존대를 해 주고 있었고. 역시 아까는 '극중 모습' 이었던 걸까? 그런 그렇고 백태청이라는 저 녀석, 유천을 존대해서 부르네? 원래 친구가 아니었나? 문득 나는 유천과 백태청, 그리고 백화련을 처음 봤을 때가 떠올 랐다. 그 때 백태청은 유천의 말을 '왜 남의 대화를 엿듣는 거냐고 물어보 셨습니다'라고 존대해서 번역했었지. 그 때는 백태청이 우리말이 서툴러서 존댓말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보니 존댓말 을 잘못 사용했던 것이 아니라 진짜로 유천의 밑에 있었던 거였군. 친구가 아니었어. 무대 위는 곧 터져버릴 것 같은 폭탄처럼 팽팽한 긴장감 속에 휩싸여 있었 다. 우리는 서로를 노려보면서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듯 양 팔과 다리의 근 육에 힘을 잔뜩 주었다. "잠깐" 그런데 요령이가 손을 들며 우리와 유천 쪽을 동시에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일인가" "이 흑사미궁은 장소도 너무 협소하고 건물도 너무 약하다. 우리가 상승무 공을 쓴다면 건물이 박살날 우려가 있으니..." 요령이는 엄지손가락을 어깨 너머로 옮기며 말했다. "흑사미궁 밖 연무장으로 자리를 옮기자" "그거 좋은 생각이군" 백태청도 고개를 끄덕여 요령이의 생각에 동의했다. 흑사미궁이란 무대에 대한 은유이다. 즉, 요령이는 무대 밖으로 내려가서 싸우자고 제안한 것이 다. 백태청은 그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고. 역시 백태청도 무대가 부서질까 봐 불안했던 모양이군. 암, 그럼, 그렇고 말고. 저 무대가 얼마짜리인데. 뭐, 얼마짜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상당히 비싸지 않을까? 우리가 부수면 물어줘야 될 것 아냐? 서로 합의를 본 우리는 그 때까지 얼굴에 쓰고 있던 핸즈프리 마이크를 벗어서 바닥에 내려놓고 빠르게 무대 뒤로 돌아서 운동 장 한가운데를 향해 뛰었다. 물론 몸을 날려서 조명대 위를 뛰어넘어 가는 것이 몇 배는 더 멋있겠지만, 우리가 진짜 강호인인 것도 아닌데 그럴 능력 이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유천은 그 10단짜리 조명대를 수직으로 밟으며 타고 올라 넘었다! 꼭 TV에서 보는, 영양이 수직의 절벽을 타고 올라가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았 다. 관객들은 눈이 휘둥그레져 환성을 질렀다. "대단하다!" 나 역시 그 모습에 신음을 흘렸다. "마, 맙소사..." "경공 하나는 정말 뛰어나군" 가람이도 유천의 경공에 감탄한 듯, 유천의 경공을 칭찬하며 고개를 끄덕 였다. 이윽고 주위에 거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운동장까지 도착한 우리. 저 멀리에 이미 먼저 도착해 있던 유천이 양손에 자신의 무기인 단봉을 붕 붕 휘두르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상황 파악을 못한 관객들은 웅 성거리며 무대 주위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군. 이윽고 백태 청과 백화련, 그리고 우리 넷이 운동장에 도착했다. 물론 가장 늦게 도착한 것은 나였다. 내가 뭐 달리기라고 잘 하겠냐? 어휴, 숨차. 그냥 천천히 걸 어가도 될 것을 왜 뛰고 그래? 그래도 죽을 힘을 다해서 뛰어서 운동장에 간신히 다른 사람들에게 뒤쳐지지 않고 도착한 나는 무릎을 잡고 허리를 푹 숙인 채 숨을 헐떡였다. 허억! 헉! 헉! "다 왔습니까?" 운동장의 한복판, 유천의 옆에서 그를 호위하듯이 선 백태청은 주위를 둘 러보며 사람이 모두 왔는지를 확인했다. 이윽고 모두 왔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양 주먹 끝에서 폭발시키듯 누런 힘을 분출시키며 외쳤다. "시작합니다!" 쐐액! 말을 마치자마자 백태청은 무서운 속도로 나를 향해서 돌진해왔다. "당신이 세 발 까마귀의 패의 주인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세 발 까마귀의 패를 내놓으십시오!" 우, 우왓! 위험해! 나는 허리를 번쩍 들면서 엉겁결에 부채를 펴 들었다. 하, 하지만 저 놈은 너무 빠르다! 어느새 내 눈앞까지 와 있잖아! 나는 당 황하며 반사적으로 부채로 얼굴을 가렸다. 순간, "이 놈!" 팟! 어느 새 내 앞을 가로막은 가람이가 백태청을 향해 멋들어지게 일권을 날렸다. 그러나 백태청은 그 권을 가볍게 피하며 옆으로 물러서더니 가람이 를 향해 달려들며 외친다. "아무래도 내 상대는 당신이 될 것 같군요" 휴! 일단 이것으로 한숨 돌렸다. 그런데, 백태청의 뒤를 바싹 따라오고 있 었는지 어느새 유천이 내 눈앞에서 하늘로 떠오르며 내 머리를 겨냥한 채 단봉을 후려칠 듯 높이 들어올렸다. 우악! 어쩌면 좋지? 에라! 되던 안 되 던 해보자! 나는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심정으로, 온 힘을 모조리 부 채로 몰아 부으며 부채를 위로 치켜올렸다. 연극 때 흑풍존자가 마지막 결 전에서 자주 쓰던 기술, 회선풍이다! "회선풍!" 바우우웅! 내 생각보다도 훨씬 큰 광풍이 내 주위를 휘감으며 하늘로 솟구 쳤다. 우와! 이게 정말 되잖아! 생각지도 못했던 기습이었는지 유천은 당황 하며 그대로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하늘로 솟구쳐 올라가 버렸다. 이거 멋진 걸! "어떠냐! 임마! 이제 내 힘을 똑똑히 봤지? 와하하!" 나는 기고만장해져 호쾌하게 웃었다. 지긋지긋한 유천이 놈을 단 한 방에 저 하늘의 별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청도의 고함 소리가 들 려온다. "야! 조심해 임마!" "뭐?" 나는 반사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미 회오리바람이 걷혀버린 하늘 에서는 유천이 일그러진 미소를 띄고 봉을 나를 향해 똑바로 세운 채 일직 선으로 낙하해 오고 있었다. 이, 이런! 나는 옆으로 피하기 위해 몸을 재빨 리 틀었다. 그런데, 그런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제, 젠장!" 방금 전의 공격으로 힘을 다 써 버려서인지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를 어쩌면 좋지? 빌어먹을, 젠장! 다리야, 제발 움직여라! 이러는 동안에도 시시각각 유천은 나에게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우왓! 이러다 맞겠다! 그런데 갑자기 무엇인가 비호같이 내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면서 유천의 봉을 후려쳐서 틀었다. 딱! 나무와 나무가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유천은 핑 그르르 돌더니 그대로 땅에 깔끔하게 착지했다. 경공술에 능숙해서 그런지 내가 분명히 최소한 5 - 10m 정도는 하늘로 올려 버렸음에도 땅에 착지한 유천은 다친 곳 하나 없어 보였다. 그건 그렇고 나를 구해준 녀석은 누구지 ?" "이 자식아! 몸을 움직여야 될 거 아냐, 몸을! 바로 위에서 저 놈이 너를 죽이겠다고 실실 쪼개면서 날아오는데 넌 멀뚱멀뚱 보고만 있냐!" 청도였다. 청도의 타박을 들으면서, 긴장이 풀려버린 나는 다리에 힘이 빠 지는 것을 느끼면서 주저 앉아버리고 말았다. 털썩. 내 귀로 청도의 기막혀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앉냐? 앉어? 지금 앉아 지냐? 이제 아예 포기했다 이거냐?" "힘이 없어..." 나는 느릿하게 중얼거리며 세 발 까마귀의 패를 쥐었다. 따스한 기운이 내 몸으로 천천히 스며드는 것이 느껴졌다. 휴. 갑자기 몸 이곳 저곳이 마구 쑤시고 저려왔다. 힘을 급하게 뿜어내느라 몸에 무리가 많이 갔나보다. 청 도는 다시 투덜거렸다. "쳇. 어이구. 그러기에 평소에 힘 좀 기르지" 그리고 곧 유천을 돌아보며 말했다. "할 수 없지. 네 상대는 나다" ...휴. 다행이네. 그런데, 그건 그렇고 요령이는 어디에 있지? 나는 주저 앉은 채 고개를 느릿하게 돌려 요령이를 찾았다. "우와앗!" 타이밍도 좋게 목소리가 들리는군. 나는 고개를 돌려 요령이의 목소리가 들린 곳을 보았다. 백화련과 요령이가 어우러져 있었다. 요령이가 아무래도 백화련의 공세에 밀리는 것 같은데? "하압!" 지지직! 백화련의 포개진 양손에서 치직하는 소리와 함께 푸른 스파크가 일어나더니 이윽고 무서운 기세로 요령이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퍼엉! 요 령이는 왼쪽으로 몸을 날려서 백화련의 번개공격을 간신히 피해내었다. 백 화련의 번개가 떨어진 땅은 시커멓게 그을린 채 움푹 패여 있었다. "젠장! 저런 건 스치기만 해도 중상이겠는데! 얌전하게 생긴 아가씨가 뭐 저리 드세? 우와앗!" "합!" 파직! 다시 한 번 백화련의 손끝에서 번개가 쏟아져 나갔다. 물론 요령이 는 궁시렁거리면서도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그런데 정말, 요령이의 말처럼 얌전하게 생긴 아가씨가 무슨 능력은 저렇 게 세냐? 나는 백화련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가는 선의 생김새라던지, 가냘픈 몸매라던지, 길고 검은 생머리를 얌전하게 빗어넘긴 모습이라던지, 수수해 보이는 흰색의 블라우스라던지 갈색 체크무늬 치마 따위가 도대체 번개랑 무슨 관련이 있는 거지? 모두 번개 따위와는 전혀 안 어울리는 모습 이잖아! "이얍!" 목소리조차도 저렇게 가냘픈데 말야. 어쨌든 요령이는 잘 피하다가 갑자기 몸을 틀면서 손끝으로 검은색 기의 구체를 쏘았다. 투웅! "맞았어!" 똑바로 백화련을 향해 날아가는 구체. 요령이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주 먹을 팍! 움켜쥐었다. 맞아, 요령이의 말대로 저건 틀림없는 명중이다! 완 전히 빈틈이야! 백화련은 요령이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허둥지둥 대다가 결 국 주저앉으며 비명을 질러버렸다. "꺄아-악!" 번-쩍! 콰드드드득! "뭐, 뭐야!" 놀랍게도, 백화련이 비명을 지르자 갑자기 백화련의 주위로, 어마어마한 두께의 새파란 뇌전의 벽이 나타나더니 순식간에 백화련 주위의 것을 모조 리 초토화시켜 버렸다. 퍼버버벅! 뇌전은 푸른 색 불꽃과 함께 주위의 땅을 무서운 기세로 헤집더니 잠시 후 사라졌다. "흐흑...흑...흑, 훌쩍..." 방금 전의 요령이의 '상대적으로 별 것 아닌 것이 되어버린' 공격으로 인 해 너무도 놀라버렸는지, 아니면 자기가 한 짓에 자기 스스로 놀라 버렸는 지 백화련은 주저앉은 채로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아니, 하염없이 눈물 을 쏟으려면 좀 어울리는 짓을 하고 눈물을 쏟던가!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 서 멍하니 백화련을 바라보았다. 분명 눈물을 흘리는 저 백화련의 애처롭고 가냘픈 모습은 많은 남자들의 심금을 충분히 울릴 수 있으리라. 하지만, 백 화련의 주위는 지금 땅이 온통 시커멓게 그슬리고, 백화련의 반경 약 2m 가 량은 마치 폭격이라도 맞은 듯이 움푹 패였으며, 아직도 그 엄청난 에너지 가 땅에서 흐르고 있는지 가끔씩 지직대면서 스파크가 튀어 오르고 있었다. "거 대책 없이 터프한 아가씨네..." 요령이는 질려버렸는지 일그러진 미소를 띄며 중얼거렸다. 정말 무지하게 강한데! 요령이는 어떻게 대처해야 될까? 제임스를 쓰러뜨렸던, 어마어마한 속도의 펀치도 사용할 수 없다. 가까이 붙었을때 백화련이 또 방금 전처럼 울면서 주저앉으면 아마도 십중팔구 죽어버릴 것이 분명하니까. 참으로 우 스운 사실이지만 또한 섬뜩한 사실인 것이다. 그렇다고 멀리서 있자니 백화 련이 계속해서 손에서 번개를 쏘아대서 요령이를 공격할 것이 틀림없고. 요 령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백화련은 주저앉은 채 계속 울고만 있었 다. "훌쩍, 훌쩍...흑...흑..." 그리고 요령이는 이런 상황이 상당히 당황스러운 지 계속 입술을 치켜올린 일그러진 미소를 띄면서 과연 백화련이 어떻게 나오나 기다리기로 한 듯 팔 짱을 끼고 계속 백화련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앞으로 한동안은 저러고만 있을 것 같군. 가람이는? 가람이는 어쩌고 있지? 꽝! 꽝! 가람이를 떠올리는데 땅을 울리는 굉음이 갑자기 귀에 들려왔다. 아마 요 령이와 백화련과의 싸움을 지켜보는데 신경을 쓰느라고 가람이 쪽에서 들려 오는 굉음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었나 보다. 나는 고개를 돌려 가람이와 백 태청의 싸움을 바라보았다. 그건 그렇고 내 힘은 언제쯤이나 다시 차게 되 는 거지? 조금씩 몸이 편해지는 걸로 봐선 분명히 어느 정도는 힘이 찬 것 같은데 말야. "하압!" 백태청은 기합과 함께 땅을 한 번 후려쳤다. 순간, 가람이가 서 있던 땅에 서 송곳처럼 돌덩이가 뾰족하게 솟아 올랐다. 뭐, 뭐야, 저건! 가람이는 몸 을 날쌔게 날려 백태청의 공격을 피했다. 아까의 굉음은 저 공격을 인해 흙 이 파이면서 생긴 것이군! "하압!" 다시 한 번 백태청이 땅을 후려쳤다. 꽈앙! 다시 한 번 땅에서 뾰족한 돌 덩어리가 하늘을 향해 날카로운 첨탑처럼 솟아올랐다. 그리고 이번에도 가 람이는 옆으로 재빨리 몸을 날리면서 피했다. 하지만, 곧 이어 다시 백태청 이 땅을 후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꽈앙! 꽈앙! 꽈앙! "칫! 젠장!" 가람이는 빙글빙글 돌면서 옆으로 피하다가 마지막 공격은 하늘로 뛰어올 라 피하면서 백태청을 향해 손을 뻗었다. "허기영결탄!" 부우욱- 가람이의 주위로 수 십개의 영기의 공들이 맺히더니 쐐애액! 하는 파공음과 함께 백태청의 주위로 쏟아져 들어갔다. 그리고 백태청은 여유롭 게 웃으며 손을 하늘로 치켜들었다. "하! 쓸데없는 짓입니다!" 쾅! 땅이 울리면서 백태청의 주위로 흙의 벽이 둘러쳐졌다. 흠, 아까부터 생각한 건데, 저 녀석은 땅의 힘을 사용하는 녀석인가? 계속해서 땅을 이용 한 공격과 방어만을 펼치는군 그래. 콰광! 가람이가 쏜 허기영결탄은 모조리 백태청의 주위에 둘러쳐진 흙의 벽과 부딪혀 폭발해 버렸다. 이윽고 허기영결탄의 공격이 모조리 끝나자, 백태청은 재빨리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흙의 벽의 잔해가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다. "그런 것 말고 좀 더 제대로 된 걸 써 보시죠!" "내가 진짜 제대로 된 걸 쓰면 너는 죽는다" 가람이는 분하다는 듯 외치면서 하늘로 다시 한 번 치솟아 올랐다. 하긴, 전에 한수와의 싸움 때 보여줬던 염옥지상강림술 따위를 쓴다면 상대방을 확실히 보내버릴 수야 있겠지. 그럼 지금 가람이는 어쩔 수 없이 힘을 조절 하고 있는건가? 하늘에서 빙글빙글 돌던 가람이는 이윽고 백태청을 바라보며 양 손을 나란 히 앞으로 뻗으며 외쳤다. "쌍황포!" 투훙! 이번에는 두꺼운 푸른 빛의 기둥이 앞으로 뻗어져 나갔다. 이번 것 은 꽤 큰데! 아마 흙의 벽으로 막았다간 흙의 벽이 뚫어져 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백태청은 여전히 별 것 아니라는 듯 오른손을 펴고 치켜들었다가 허 공에 귀찮다는 듯 휘둘렀다. 그리고, 쩌엉! 순식간에 땅 속에서 나온, 흙과 돌로 이루어진 거대한 손이 가람이의 쌍황포를 터뜨려 버렸다. "별 것 아니군요" 백태청은 손을 탁탁 털며 말했고 땅에 착지한 가람이는 분하다는 듯 이를 악물었다. 그런데 그 때, 백태청이 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가 마치 파리를 짓누르듯 아래쪽으로 휘둘러서 다른 손바닥에 마주쳤다. 응? 저게 무슨 짓 이지? "...뭐 하는 거냐?" "귀찮은 파리가 있어서 살짝 눌러 주었습니다" 가람이는 의심스럽다는 듯 백태청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가람이의 등 뒤에 서 무언가 이상한 것이 천천히, 소리없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저...저게 뭐 지? 이윽고 지상으로 솟아오른 그것은 쫙 편 사람의 손이었다. 그리고, 나 는 그제서야 백태청이 한 짓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나는 목청껏 외쳤다. "가람아! 피해!" "주인...?" 가람이는 갑자기 내가 비명을 지르자 의아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안 돼, 이 멍청아, 피해! 그러나 이미 늦었다. 백태청이 세운 손은 이미 가람 이를 후려치고 있었던 것이다. 달빛에 반사된 그림자가 컴컴하게 자신의 주 위로 드리우는 것을 보고서야 가람이는 손의 존재를 깨달았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우, 우와아앗!" 꾸웅-! 손은 가람이를 덮은 후 형체를 잃고 우수수- 하는 소리와 함께 흙더미로 변해서 가람이를 묻어 버렸다. 그리고 나는 벌떡 일어나서 입술을 깨물며 고함을 질렀다. "가람아아아앗!" 눈에서 불똥이 튀어 오르는 것 같았다. 백태청은 고통스러워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씩 웃더니 말했다. "그러길래 실력도 없으면서 남의 일에 끼어들면 이렇게 되는 겁니다. 영준 씨,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당신이 세 발 까마귀의 패를 진작 황자님 께 넘기셨다면..." "닥쳐" "네?" 나는 이를 악물며 천천히, 그리고 간신히 말이라는 것을 만들어 내서 내뱉 었다. 그리고 백태청은 잘 안 들린다는 듯 나를 보며 되물었다. "닥치라고" "...그런 말투, 기분 나쁘군요" "기분 나빠? 기분 나빠? 기분 나빠? 하하하하!" 이런, 분노로 인해 제정신이 아닌가보다. 나는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기분이 나쁘다고? 기분이 나빠? 그래! 나도 기분 나빠. 기분 나쁘면 사람 을 저렇게 만들어도 되는 거야? 엉? 사람을 저렇게 만들어도 되는 거냐고!" "싸움 중입니다. 어쩔 수 없었어요" 그래? 가람이는 너를 한 번에 죽여버릴 수 있었지만 참았어. 싸움 중이지 만 어쩔 수 없었어? 싸움 중이라서 어쩔 수 없었다고? 제임스와의 싸움 때 는 비록 가람이가 제임스에게 크게 얻어맞았었지만, 생사를 확실히 알 수 있었고 의식까지 남아 있을 정도로 부상이 크지 않았던 데다 요령이가 제임 스에게 가람이의 고통을 몇 배로 되갚아 주었기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나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얼마나 다쳤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알 수 없 잖아! 저 흙더미에 깔려서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다고! 제기랄! 그러고 보 니 게다가 저 안에 계속 깔려 있으면 살아 있더라도 숨이 막혀서 곧 죽을 거야! "어서 세 발 까마귀의 패를 내놓으시지요. 내놓으신다면, 지금이라도 공격 을 멈추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눈을 부릅뜨며 나직하게 말했다. "죽을지도 몰라. 조심해" "...예?" "죽을지도 모르니 조심하라고" 나는 치우한님의 칼에 힘을 가하며 말했다. 백태청은 내 말에 폭소를 터뜨 렸다. "하하하! 죽을지도 모르니 조심하라고요?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주제에! 지금 그 내력 가지고 저를 보고 조심하라고 하는 겁니까?" 이것만은 연습을 해 놓았지만 절대로 쓰기 싫었다. 이건 정말 무서운 놈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쓰지 않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나는 백태청의 비웃음 에 대답 대신 치우한님의 칼을 쭉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나의 활" ...결국 살인무기를 뽑아들었다. 잘못은 전적으로 너한테 있어. "빨리 너를 해치우고 가람이를 구해야겠어" '나의 활'은 시위가 없고 화살도 없는, 활대만 있는 활이다. 나는 왼손에 세 발 까마귀의 패를 쥔 뒤 활대를 겹쳐 잡았다. 이로서 '나의 활'에는 내 몸을 통해서 세 발 까마귀의 힘을 무한히 집어넣을 수 있다. "그것 신기한 무기로군요. 부메랑입니까? 하하하! 능력 있으면 어디 가람 군을 구해 보시죠!" 백태청은 입안 가득 비웃음을 흘리면서 천천히 나에게로 걸어왔다. "장난질은 그만하고 어서 내게 세 발 까마귀의 패나 내어 주세요. 영준 씨, 이렇게 자꾸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하다간 정말로 가람 군이 숨이 막혀 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잘 생각해 보시죠" "활시위" 지-잉. 내 명령과 함게 활대의 위쪽 끝과 아래쪽 끝이 얄팍한 기의 선으로 연결되었다. 나는 천천히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부우우욱- 이윽고 활대의 끝에 둥글게 황금빛 기가 뭉치는 것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음?" 백태청이 조금 긴장한 눈빛으로 나와 활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제서야 내가 무엇을 하려는지 조금 깨달았나보군. 하지만 이미 늦었어. 나는 이를 악물고, 내 몸이 터져라 기를 돌려가면서 활에 쉴새없이 세 발 까마귀의 힘 을 불어넣었다. 우우우웅- 활대가 조금씩 진동하면서 활에 맺힌 기의 덩어 리가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온 몸에서 열기가 솟구쳐 올랐다. 기가 무리 하게 몸을 통과하면서 계속해서 내 혈들을 후려치는 것이다. 나는 이를 악 물고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고통을 참았다. 이마의 관자놀이 혈이 불거 져 나왔다. "...이런! 위험한 무기로군요!" 위기감을 느낀 백태청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고, 나는 그 순간 손을 놓았 다. 터엉! 활 끝에 맺힌 기의 덩어리가 쏜살같이 쏘아져나가 백태청을 향해 날아들었다. "하! 이따위 것은 피하면 그만... 크억!" 번쩍! 백태청은 분명히 몸을 날렵하게 돌려서 자신을 향해 똑바로 날아오 는 황금빛 기의 덩어리를 피했다. 하지만, 그 순간 기의 덩어리는 몸을 틀 어 백태청과 부딪히면서 엄청난 빛을 뿜어내며 폭발했다. 그리고 나는 무표 정하게 백태청이 튕겨져 날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다시 활에 기를 모으 시 시작했다. "크으으윽!" 멀찌감치 날아가 땅에 처박혔던 백태청은 잠시 후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나를 바라보며 핏발 선 눈으로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분명히, 분명히 피했는데...!" 그리고 나는 킬킬거리고 웃으며 백태청에게 말했다. "이게 뭔지 알겠나?" "...활이라는 외형적인 모습을 둘러쓴 기 사출기로군요. 만약 힘을 오랫동 안 모은다면 어마어마한 위력이 담긴 공격을 할 수 있겠죠" "꽤나 똑똑하군" 내 말에 백태청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나를 노려보다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쿨럭!" 백태청의 입에서 순간 격한 기침과 함께 피가 쏟아져 나왔다. 내상이 심한 가보지? 나는 불현듯 가람이가 걱정되었다. 이제 조금만 더 기를 모아서 제 2타를 날리면 백태청 저 놈이 무쇠로 만들어졌어도 견딜 수 없겠지. 백태청은 입에 가득 묻은 피를 닦으며 증오 섞인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나는 분명히...피했습니다. 그 따위 느려빠 진 공격 쯤...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고 실제로 피했단 말입니다. 도대체 어 떻게 해서 나를 맞춘 겁니까?" "내가 왜 그걸 대답해 줘야 하지?" 나는 싸늘하게 백태청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활에 맺힌 기는 어느새 어마 어마한 규모로 커지고 있었다. 두두두-! 이제 잡고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드는군. 슬슬 활시위를 놓아야겠는데. "안 죽도록 조심하라고" 내 얼굴과 내 활에 맺힌 기의 덩어리를 번갈아 보던 백태청은 결국 얼굴을 감싸며 절망적인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 안 돼..." 그 때 갑자기, 콰-앙! 하는 굉음과 함께 가람이가 묻혀 있던 흙더미가 파 헤쳐지며 무언가 급히 뛰쳐나왔다. 우웃! 깜, 깜짝이야! 하마터면 활시위 놓칠 뻔했네! 나는 황급히 활시위를 다시 부여 잡고 과연 그 곳에서 뭐가 튀어나왔나를 바라보았다. 물론, 당연한 소리지만 그것은 가람이였다. 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가람이를 불렀다. "가, 가람아!" "헉! 헉! 죽는 줄 알았군! 헉!" 가람이는 큰 숨을 몰아쉬며 고통스럽게 헉헉거렸다. 괴로워 죽으려고 하는 모습. 숨이 막혀서 정말로 고통스러웠나보다. "가람아! 괜찮아? 응? 괜찮냐고!" 내 부름에 가람이는 머리를 흔들어 머리칼에 털은 흙은 털어내며 대답했 다. "머리가 좀 멍한 것과 숨쉬기 힘든 것 말고는 괜찮다. 맞기 직전에 잘 막 아서...충격 때문에 정신을 잃기만 하고 실제적인 내상이나 외상은 별로 안 입었지. 하지만 정신을 잃은 것 때문에 그 안에 파묻힌 채 죽을 뻔했어. 그 래도...응? 주인!" 갑자기 가람이가 놀란 듯 나를 불렀다. "어?" "그, 그건... 그건!" 가람이는 놀랐는지 나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뜨고 중얼거렸다. "아, 이거, 별 거 아냐" 나는 재빨리 활을 하늘로 들어 활시위를 당겼다. 투웅! 직경이 1m 50cm는 될 법한 거대한 황금빛 기의 구슬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하늘을 향해 날아가 다가 이윽고 사라졌다. 콰아아- 그리고 가람이는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 다 말했다. "그걸...쓰려고 했나?" "아아. 그게...빨리 너를 파내야 되는데 저 놈이 자꾸 걸리적거리잖아. 그 래서..." 내 말에 가람이는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마침 타이밍을 맞추어서 나왔기에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큰일날 뻔했군.. .주위를 봐" 가람이의 말에 나는 어리둥절해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경악했다. 어느새 무대의 관객들이 모조리 운동장 주위로 몰려와서 우리를 구경하고 있었던 것이다! "야, 정말 특수효과 끝내준다" "그러게. 장난 아니다" "싸우는 것도 실제 같아" "맞아. 정말 대단해" 젠장! 만약 아까 그걸 쏘았으면 살인 현행범으로 즉각 잡혀갈 뻔했군. 나 는 씁쓸한 미소와 함께 가람이에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거야? 다시 네가 백태청을 상대할 거야?" "그래야 하겠지" 가람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양 손을 들어올려 자세를 취했다. "자, 다시 시작할까?" 그런데 백태청이 조금 이상하다. 초점 없는 눈을 흐리게 뜨고 멍하니 허공 을 바라보며 몸을 떨고 있는 것이, 방금 전 죽음의 공포를 느껴서 충격을 많이 받았나보다. "...충격이 심한가본데" "지금 공격하기도 좀 그런데" 그런데 갑자기 청도 쪽에서 고통에 가득 차 있는 비명소리가 운동장에 있 는 모두의 귀를 때렸다. "크아아아악-!" 유천의 비명소리였다. "뭐얏!" 운동장에 있던 모두는 동시에 고개를 돌려 유천을 바라보았다. 유천은 막 청도에게 어깨를 얻어맞고 고통스러운 신음을 지른 것이다. 마침내 청도가 유천을 본격적으로 몰아붙이기 시작한 것이다. 청도는 다시 한 번 유천의 어깨를 후려쳤다. 유천은 비명을 지르면서 오른손에 들고 있던 단봉을 떨어 뜨렸다. "쿠윽!" "흥, 엄살은. 내가 진짜로 세게 쳤으면 네 어깨는 벌써 몸에서 찢어졌어! 목검으로도 충분히 가능하지!" ...새삼스럽게 청도의 무서움을 깨닫게 하는 말이군. 어쨌든, 청도는 태연 한 얼굴로 빠르게 검을 돌려서 정신 없이 유천을 몰아붙였다. 곧이어 제 3 타가 유천의 허벅다리에 떨어졌다. 퍼억! "우아아악!" "젠장, 안 아픈데만 골라 때리기도 힘들군" 그런데 갑자기 유천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함을 버럭 지른다. "크아아악-" 번쩍! 갑자기 유천의 몸에서 누런 빛의 기운이 주위로 폭사되었다. 그리고 청도는 당황한 표정으로 뒤로 스르륵 물러서며 검으로 방어막을 둘러쳤다. 하지만 유천은 이 기세를 몰아붙이겠다는 듯, 몸을 재빠르게 날려서 뒤로 물러서는 청도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때, 청도가 씩 웃더니 장난스럽게 외쳤다. "암영쌍신술!" 하! 저건 아까 연극 속에서 나온 암영흑귀의 기술이잖아! 암영흑귀, 아니 빙긋 웃는 청도는 순식간에 몸이 두 개로 바뀌더니 하나는 유천의 앞에, 그 리고 하나는 유천의 뒤에 나타났다. "임마! 너, 킹콩이 왜 멸종 위기인 줄 알아?" 정말, 진짜 뜬금없고 상황과 별 관련도 없는, 자다가 봉창 두드린다라는 표현이 딱 적당한 청도의 말. 하지만 유천은 앞뒤에서 청도가 알아듣지도 못하는 한국말로 지껄여대자 꽤나 당황한 듯 창백한 얼굴로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청도는 빙긋 웃으며 농담처럼 말했다. "기어오르다 죽었어, 기어오르지 마 자식아!" 푸핫! 그건 고교시절 아이들이 서로에게 시비걸때나 쓰는 '진짜 유치한 말'아닌가! 나는 실소를 터뜨렸다. 청도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칼을 쥔 손 을 슬쩍 움직였고 유천의 목으로 청도의 검이 떨어졌다. "윽!" 턱! 분명 살짝 치긴 했지만 목검에 맞은 유천. 유천은 눈을 흐릿하게 뜨더 니 이윽고 천천히 썩은 고목이 쓰러지듯 바닥에 넘어져 버렸다. "하, 자식. 별 것도 아니면서 까불고 있어" 손을 탁탁 털며 여유롭게 웃는 청도. 이 중에서 고전하지 않은 것은 청도 뿐이다. 그, 그런데 혹시 유천 쟤 죽은 거 아냐? 나는 덜컥 겁이 나서 청도 에게 물었다. "야, 쟤 혹시...죽은 거 아냐?" "뭐? 하하하!" 청도는 당황스럽다는 듯 웃더니 대답했다. "너 지금 앞날 창창하고 전도 유망한 청년 하나 살인자로 만들어 버릴 일 있냐? 안 죽였어, 임마. 저건 단지 기절한 것 뿐이라고" "그렇군..." 그런데 그 때 갑자기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요령이가 있는 쪽에서 들 려왔다. "유천 니이이임-! 아아아아악!" 백화련이다! 으윽! 귀 따가워! 그런데 저 여자, 우리 말을 할 줄 알잖아? 할 줄 알면서 왜 지금껏 우리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은거지? 어쨌든 백화련 은 소리를 빽 지르더니 조그마한 주먹을 꽉 쥐고 눈물을 계속 줄줄 흘리면 서 멍하니 앞만 보고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리고 깜짝 놀라버린 요령이는 당황한 듯 주춤주춤 물러서면서 말했다. "야...나 얘 막 무서울라 그래..." 하하, 옛날 봄 MT때 청도가 유천을 보면서 느낀 공포랑 비슷한 감정을 요 령이도 지금 느끼나보다. 이기고 지고를 떠나서, 그냥 상대하기 싫다는 순 수한 공포감 말이다. 그런데 눈물을 줄줄 쏟으며 한참동안을 작게 무어라 웅얼거리던 백화련이 마침내 주저앉으며 서러운 얼굴로 외쳤다. "유천님...어흑...엉엉...유천님...이 죽었어...!" 뭐? 어이, 어이! 이 봐, 잠깐만! 나는 당황한 얼굴로 백화련을 불러서 유 천은 아직 죽지 않았다고 설명해 주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설명하기 위 해서 백화련을 불렀다. "이봐요! 백화련 양! 이 봐요! 내 말 좀 들어봐요!" 하지만 백화련은 그저 멍한 눈으로 앞만 바라보며 백치처럼 '유천님이 죽 었어'라고 되뇌이기만 할 뿐, 누가 부르던 말던 전혀 신경쓰지 않는 듯 했 다. "이...이거 좀 무서운데...?" 조용히 백화련을 지켜보던 우리들. 마침내 청도까지도 억지웃음을 지으며 농담처럼 말했다. 사실 나도 무섭다. 아까 백화련이 울음을 터뜨렸을 때 낸 그 힘으로 보아서 저 여자가 마음 한 번 잘못 먹으면 어떤 참혹한 결과가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마치 시한폭탄을 보는 것 같은 두려운 마음으로 백 화련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를 빙 둘러싸서 바라보던 수많은 관객들의 속에서도 조금씩 동요가 일어나고 있었다. "야...저 여자 진짜 서럽게 운다..." "응...그래...얼굴도 예쁜데 저렇게 우니까 진짜 안 되어 보이네..." "꼭 연기가 아니라 진짜 같아. 그치?" "어...근데 왠지 좀 광기 같은 것도 있는 것 같고..." 이 사람들아, 그럼 저게 연기냐! 니가 해 봐라 저런 연기가 되는지! 갑자기 백화련이 머리를 감싸지며 다시 비명을 질렀다. "유천니이이이이임-!" 번쩍! 백화련의 비명이 끝남과 동시에, 갑자기 백화련의 주위로 엄청난 기운이 폭풍처럼 일어나더니 모조리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리고 갑자기, 청도의 주 위 하늘로 폭풍같은 기운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순식간이었다. 청도는 당황 스러워 하면서도 일단 먹구름의 중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뒤로 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꾸르릉! "벼락이다!" 하늘 전체가 와르르 떨리면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어마 어마한 크기의 번개줄기가 청도의 뒤를 쫓아 땅으로 꽂혔다. "으아아악! 뭐야! 이건 사기야!" "맞으면 죽는다! 무조건 피해야 해!" 요령이가 찢어지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하지만 번개가 고정된 자리에 떨어 지는 것이라면 또 모를까, 번개가 사람을 쫓아오는데 사람이 번개를 피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청도는 곧 절망적인 목소리로 고함쳤다. "우아아아악!" 그 때, 갑자기 검은 그림자가 가람이를 가로막으며 뛰어 들었다. 가람이었 다. 가람이가 온 몸의 기운을 극한까지 끌어올리고 청도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아, 안돼!" 누가 지른 비명이었을까? 요령이? 가람이? 청도? 아니면 극에 빠져버린 관 중들 중 누군가? 이윽고,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 어마 어마한 크기의 번개가 청도와 청도의 앞을 가로막은 가람이에게로 떨어졌 다. 번쩍! 꽈우우웅! 지상의 모든 숨쉬는 것들을 떨게 할만한 굉음이 은은하게 울려 퍼지면서, 세상이 온통 흰빛으로 타올랐다. "크으아아아아악!" 그리고 청도의 것인지 가람이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비명이 벼락 소리와 뒤 엉켜서 우리의 귀로 들어왔다. 도,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젠장! 눈 이 부시니 뭘 볼 수가 있어야지! 잠시 후, 잦아드는 섬광 속에서 나는 흐릿 하나마 두 개의 실루엣을 볼 수 있었다. 비틀거리며 서 있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는 사람이 하나. 누가 가람이고, 누가 청도지? 그리고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제발 둘 다 무사해야 할텐데...! 나는 가슴을 졸이며 두근대는 마음으로 조금이 라도 더 둘의 모습을 자세히 보기 위해 눈을 잔뜩 찌푸렸다. 이윽고, 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황폐화'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완전히 초토화 된 낙뢰점이었다. 맨 처음 에 구름에서 벼락이 떨어진 지점과 청도, 그리고 가람이가 벼락을 맞은 지 점은 꽤나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먹구름이 몰려들었던 지점에서 낙 뢰점까지는 땅이 온통 파헤쳐져 있었고 시커멓게 그슬려서 마치 운동장 한 가운데에 아스팔트길이 생긴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낙뢰점은 벼락이 비스 듬히 꽂혔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이라도 하듯 땅이 비스듬하게 패여 있었 는데, 그 모양이 꼭 거인이 숟가락으로 푹 퍼낸 듯한 모습이었다. 얼마나 강력한 번개였는지 그 주위에 수 십개의 작은 번개가 다시 떨어진 듯한 흔 적이 여기 저기 널려 있었다. 물론 주위가 온통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땅이 패인 곳은, 가장 깊게 패인 곳은 2m도 넘을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가장 깊게 패인 곳 안에 가람이와 청도가 있었다. "가...가람아! 청도야!" 나는 급히 둘의 이름을 부르며 낙뢰점으로 달렸다. 그리고 요령이도 싸움 이고 뭐고 다 잊어버린 듯 여전히 앉아서 청승맞게 울고 있는 백화련을 내 버려두고 가람이와 청도에게로 달려갔다. "청도야! 가람아! 괜찮아?" 주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 연극이 아닌가봐..." "정말...저게 연극이라니 저건 말도 안돼..." "으...끔찍해라..." 젠장! 너희들 눈에는 아직도 이게 연극으로 보이냐! 소리를 버럭 질러주고 싶었지만 억지로 꾹 삼켜 넘기고, 나는 가람이와 청도의 상태를 확인했다. 서 있는 사람의 실루엣이 가람이, 그리고 쓰러져 있는 사람의 실루엣이 청 도였다. "으...으윽...주, 주인..." 가람이는 불쌍하게도 시커멓게 그을린 채 온 몸 군데군데에서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모조리 지멋대로 뻗쳐 있었고, 옷은 시커멓게 타서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그리고 등판에 시커멓게 찍힌 큰 점 하나가 그 곳에 벼락을 떨어졌음을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가, 가람아! 괜찮아?" "괜찮...다, 다행히도 전력을 다해서...방어막을 친 덕분에...벼락이 우리 를 통과하지는 못했어...다행...벼락은...단지...방어막만을 터뜨리고...땅 속으로...난...괜...찮..." "야, 지금 이 꼴이 괜찮은 꼴이냐! 응!" 나는 침통한 얼굴로 가람이를 흔들었다. 물론 살아있다는 것만도 다행이긴 하지만, 지금 이 꼴을 앞에 두고 '참 다행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으리라. 그만큼 가람이의 상태는 눈으로 보기에도 심각해 보였다. "청도는...괜...찮나...?" 가람이는 고개를 천천히 돌려서 청도를 바라보았다. 가람이가 몸을 던져서 막은 덕분인지, 쇼크로 기절한 청도의 상태는 놀랍도록 깨끗했다. 그저 이 곳 저곳이 약간 시커멓게 그을린 정도랄까? "가람이가 막아준 덕분이야..." 내 옆에서 가람이와 청도의 상태를 바라보던 요령이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가람이가 막아준 덕분에...번개도 맞지 않았고...벼락이 떨어지면서 뿜어 져 나온 강렬한 열기와 섬광도...가람이가 가려준 덕분에 청도는 하나도 맞 지 않았어...정말...기적같은 일이지..." 우리가 옆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 때문일까, 아니면 참혹한 가람이의 모습을 본 사람들의 경악에 찬 술렁거림 때문일까? 쓰러져 있던 청도는 부 스스 눈을 떴다. "으음...도대체...어떻게 된 거지...? 요령아...그리고 영준아. 왜 내 주 위에 있는거야...? 싸움은...어떻게 되었지? 이겼어, 졌어?" 청도는 어리둥절하다는 듯 눈을 비비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는...분명히 벼락을 맞고...그리고...쓰러져서...가람이가 뛰어들었지. ..그리고..." 청도는 갑자기 무엇인가가 생각났다는 듯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가람이! 가람이는 어떻게 됐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마구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청도. 몸을 마음대로 가 눌 수 있는 걸 보면 확실히 멀쩡하긴 멀쩡한가보다. 이곳 저곳을 둘러봐도 가람이가 보이지 않자 더욱 더 불안한 표정을 짓는 청도. 마침내 청도는 뒤 를 돌아보다 시커멓게 그을린 가람이의 얼굴과 정면으로 마주쳐 버렸다. "가, 가람아!" 찢어지는 듯한 청도의 비명. 그리고 가람이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말했 다. "여...무사한가...본데..." "너...너...이게 어떻게 된 거얏!" "다행..." 가람이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천천히 무너지듯 주저앉더니 결국 앞으로 고 개를 처박고 쓰러지고 말았다. "가, 가람앗!" 저거 죽은 거 아냐? 죽은 거 아니냐구! 요령이가 황급히 가람이에게로 달 려가서 손을 코에 대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직 살아 있어!" "다, 다행이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큰 숨을 쉬었다. 하지만 가람이의 몸은 아무리 봐 도 한 시가 급해 보인다. "하지만 어서 병원으로 옮겨야겠지...? 자, 싸움이고 나발이고 저 쪽도 유 천이 쓰러진 마당에 더 싸우려는 생각을 먹지는 않을거야! 어서! 앰뷸런스 를!" 나는 재빨리 119에 전화를 걸었다. "예, 119구조대입니다" "여기 지금 대한대학교 운동장인데요, 사람이 크게 다쳤어요!" "왜, 어떻게 다쳤습니까?" 음...'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아서 감전을 당했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하나 ? 잠깐 고민한 나는 그냥 쉽게 대답했다. "감전이요!" 다행히도 구조대 측에서는 꼬치꼬치 캐묻지 않고 '알았습니다, 5분 내로 출동하겠습니다'라는 대답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휴우, 이제야 한숨 돌리 겠군! "앰뷸런스는 불렀어?" 요령이의 다급한 부름. "응!" "그럼 됐어! 어차피 지금 우리들로서는 이 상처에 손 못 써. 맘 편하게 기 다리자고" 그런데 한참동안 아무 말 없이 허공만 바라보던 청도가 갑자기 무언가를 결심했는지, 이를 으득, 하고 악물더니 자신이 쓰러져 있던 자리에 깔려 있 던 목검을 집어든다. "야! 지금 뭐 하는 거야! 여기에서 기다렸다가 앰뷸런스 오면 가람이 옮기 는 것 도와야지!" "미안하지만 가람이는 니가 좀 옮겨줄래. 내가 지금 할 일이 있거든" 조용조용히, 청도가 내게 속삭이듯 이야기했다. ...뭐지? 지금껏 청도가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은 한 번도 없는데...청도는 혼자서 우울하게 중얼거렸 다. "애초에 봐준 게 잘못이었어" 헉! 청도의 눈이 심상찮다! 나는 이렇게 심각한 청도의 얼굴은 맹세코 지 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일이 없다. 청도는 증오로 활활 불타는 눈으로 이를 다시 한 번 빠드득, 소리가 나도록 갈더니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누굴 찾는 건지 나는 짐작이 간다. 이윽고 청도의 눈이 어느 곳에서인가 멈추었 다. 유천이 쓰러져 있는 곳이었다. 유천이 쓰러져 있는 곳에는 우리가 가람 이와 청도 주위로 모여든 것처럼, 어느 새 백태청과 백화련이 모여서 기절 한 유천을 바라보면서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침 거기 모여 있군, 잘 됐어, 쫓아다니기도 귀찮은데 한꺼번에 몰아서 죽여주지" 결코 소리지르지 않는, 나직하게 웅얼거리는 청도의 목소리. 평소의 그 '씩-'하는 여유있는 웃음은 그 흔적조차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 다. 과연 이게 청도가 화가 난 모습일까? 이것이 그 유쾌하던 청도란 말인 가? 나는 청도에게서 지독한 살의를 느끼고 몸을 떨어야 했다. 무섭다...! 청도는 칼을 꼬나 쥐고 잠시 백화련과 백태청을 노려보더니, 이윽고 질풍 처럼 유천이 쓰러진 곳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얼굴이 창백해진 요령이가 그 뒤를 쫓아가면서 외쳤다. "말려야 햇-! 그대로 두면 누구 하난 죽게 될 지도 몰라!" 청도. 300년 전부터 살아왔다는, 지금보다 검술이 훨씬 발달했던 조선시대의, 그 것도 국지전이 끊임없이 일어난 만주지방에서 검술을 배운 가람이를 검으로 간단히 제압한 녀석. 사람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야성의 동물의 신체적 장점을 거의 그대 로 가지고 있는 요령이를 속도로 간단히 제압하는, 이미 인간의 한계를 멀 찌감치 뛰어넘어 버린 녀석. 자기 입으로 '내가 힘을 주면 사람 몸 따위는 목검으로도 간단히 찢을 수 있어'라고 말하는 녀석. 그런 녀석이 화가 났다고...? 지금 검을 들고, 상대방을 죽이겠다고 뛰어 가고 있다고...? 말릴 수 없어. 아무리 요령이가 노력해도 말릴 수 없을거야. 내가 보기에, 청도는 요령이보다 분명히 빠르거든. 나는 체념의 한숨을 쉬면서 어깨를 늘 어뜨리고, 미친듯이 뛰어가는 가람이와 어떻게 해서든 가람이를 말리기 위 해 필사적으로 그 뒤를 쫓는 요령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실제로, 요령이 는 죽을 힘을 다해 뛰는 것 같았지만 청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엇다. 끝났 어.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청도는 살인자가 되고 말거야. 수 천 명의 증인의 증언이 있겠지. "빌어먹을- 이게 다 너 때문이얏! 너의 욕심 때문이라고!" 나는 이미 기절해 있는 유천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새삼 증오심 이 마구 피어올랐다. '나의 활'이나 한 번 퉁겨줄까...? 아니다, 그래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 게다가 저들은 어차피 청도에게 죽을텐데. 나는 씁쓸 하게 미친듯이 달려가는 청도의 뒷모습을, 그리고 그 뒤를 필사적으로 따라 가는 요령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청도가 거의 백화련에게 도착했다. 붕 몸을 띄우는 청도. 보나마나 무표정한 얼굴이겠지. 이제 곧 청도의 목검이 백화련에게로 떨어지고, 주위 에는 피가 가득 튀면서 사람들은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질러대겠지... 그 순간, "어억?" 청도의 당황에 찬 비명소리가 들렸다. 청도의 몸이 저절로 허공으로 떠올 랐던 것이다. "뭐, 뭐야, 빌어먹을!" 잠시 허공에서 머물던 청도는, 이윽고 뒤로 엄청난 속도로 물러나더니 그 대로 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쐐애액- 콰앙! "크아악! 어떤 자식이야! 백태청이냐 백화련이냐! 그래, 누구든 상관 없 어, 둘 다 죽여 버릴 테니까!" 청도의 증오가 가득 찬 비명소리가 운동장을 울렸다. 곧 다시 벌떡 일어난 청도. 칼을 고쳐쥐고 다시 한 번 백태청과 백화련을 향해 달렸다. 그런데 순간, 다시 한 번 놀랄만한 일이 일어났다. 청도의 팔이 뒤로 꺾이며 청도 가 칼을 놓친 것이다. "우아아악!" 털썩, 칼이 힘없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운동장에 쓰러졌다. 그리고 청도는 자기가 당하면서도 믿지 못할 사실에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로 누군가 억지 로 꿇리는 무릎에 무릎을 꿇고, 아둥바둥 저항하면서도 땅에 엎드려서, 양 손을 뒤로 꺾인 채로 고개만을 쳐들어 외쳤다. "도대체 어떤 빌어먹을 자식이 이 따위 쓰레기 같은 짓을 하는 거야아앗!" 청도는 처절하게 고함을 질렀다. 너무 분해서인지 청도의 눈에서는 눈물까 지 맺히고 있었다. 내가 알기로는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 밖에 없다. "버르장머리없는 꼬맹이가 오랜만에 좋은 일 한 번 하는군" 요령이도 나와 같은 사람을 떠올렸나보군. 요령이는 씩 웃더니 청도를 향 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청도는 여전히 바닥에 눌린 채 버둥거리며 이를 악 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놔! 죽일 거야! 죽여버릴 거라고! 저놈들이 가람이를, 가람이를...!" 짜-악! 시원한 타격음과 함께 요령이가 청도의 뺨을 깔끔하게 올려붙였다. 청도는 기가 막혀서 말이 안나온다는 듯 헛웃음을 짓더니 요령이에게 더듬거리며 물었다. "왜...왜 때려?" "정신차려 임마. 지금 뭐 하는 거야? 어서 빨리 가람이를 옮겨야지 지금 뭐 하는 거냐고. 기껏 사람이나 죽이겠다고 날뛰고 말야. 사람 죽일 수 있 는 놈이 사람 죽이겠다고 날뛰면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 응? 그것도 사람 쫄게 진심으로 그러고 있어. 확! 어서 그만두고, 나와 같이 가람이를 병원 으로 옮기는 거나 도와줘" "하, 하지만..." 청도는 고개를 마구 휘저으며 요령이에게 뭐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퍼-억! 육중한 타격음과 함께 이번에는 요령이가 청도의 턱을 깔끔하게 올려붙였 다. 그리고 이번에 청도는 아파서 말이 안 나온다는 듯 입을 다물더니 한참 있다가 그제야 기가 막힌 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왜 때려!" "정신 차려 자식아! 응? 지금 너를 누르고 있는 게 누군지 알아? 니가 그 렇게 버르장머리 없고 배운 것 없다고 욕해 댔던, 그 7살 짜리 꼬마 한수라 고. 그 꼬마까지 너를 미친 놈 보듯이 보고 있단 말야! 이게 무슨 추태야, 응? 정신 차려, 정신 차리라고! 임마!" 요령이는 정말로 한심하다는 듯 청도의 뺨을 툭툭 치며 한수를 을러대었 다. 그리고 한수는 요령이의 말에 멍한 눈으로 잠시 요령이를 바라보더니 이윽고 천천히 입을 떼었다. "...진짜야?" "그럼 내가 비싼 밥 먹고 할일 없어서 너한테 거짓말이나 하고 있겠냐?" "...너 비싼 밥 먹고 거짓말 잘한다고 영준이가 그러던데?" 청도가 볼멘 목소리로 투덜거리듯 말했고 요령이는 그제야 히죽 웃으며 말 했다. "됐어. 그래야 청도 답지. 한수야! 이제 그만 풀어줘!" 이윽고 청도의 등뒤로 꺾여서 하늘로 약간 떠 있던 청도의 팔이 축 늘어졌 다. 그리고 청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정말로 한수가 잡고 있었던 거야...? 나를 진정시키려고 거짓말 한 게 아니라...?" 그리고 요령이는 청도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그럼 내가 진짜로 거짓말 한 줄 알았냐? 너, 나를 어떻게 보는 거야 ?"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당황해하는 청도를 보며 요령이는 고개를 슬슬 젓더니 청도에게 물었다. "나를 믿지 못하는가본데...응?...이러면 재미없어...?" "그, 그게 아니고...설마 그 꼬마가 어떻게 어른 한 명을 손도 안 대고 가 지고 놀 수가 있겠어...? 그래서..." 청도가 계속 말을 더듬더듬 거리면서 잘 믿지 못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자 요령이는 할 수 없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고 말했다. "쳇, 하는 수 없네. 야! 한수야! 거기 있냐! 있으면 이리 와 봐!" 그리고 잠시 후 인파 속에서 들려온 어린애의 대답 소리는 청도를 깜짝 놀 라게 하기에 충분했으리라. "응, 요령이 누나! 지금 갈게!" "지, 진짜였잖아..." 청도는 경악을 금치 못하며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꼬마아이 한 명과 소녀 한 명이 인파를 헤치며 천천히 걸어나왔다. 한수와 주희다. 요령이는 손가락 두개를 경례하듯이 살짝 이마에 댔다 떼면서 한수 에게 말했다. "여, 한수. 연극은 잘 봤어? 아까는 정말 고마웠어" 한수는 별 것 아니라는 듯 씩 웃으며 말했다. "뭘, 저 형이 하도 미친 들소처럼 날뛰기에 진짜 무슨 큰 일 하나 낼 것 같아서 잠깐 묶어 놓은 것 뿐이지. 그런데, 요령이 누나 정말 대단하던걸?" "뭐가? 연극 연기가?" 한수는 고개를 설레설레 짓더니 청도를 바라보며 웃었다. "어떻게 길길히 날뛰던 청도 형을 말 몇 마디로 원상복귀 시켜놨어?" "내가 원래 미친 놈 다루는 데는 선수거든" "야!" 청도가 더 못 참겠다는 듯 소리를 버럭 지르고 한수와 요령이는 낄낄거리 며 그런 청도를 비웃었다. "오빠..." "아, 주희도 왔니?" 주희가 청도를 보고 기어 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조그마하게 말하자 청도 도 주희를 보고 아는 체를 하며 얼굴에 미소를 띄었다. 그런데 주희가 아까 의 주희가 아니다. 아까는 청도와 깔깔거리면서 잘 어울리더니 지금은 어째 서인지 우물쭈물하면서 청도에게 잘 다가가지를 못한다. "오빠...화 많이 났어요?" "으, 응?" 당황한 듯 움찔하는 청도. 그러나 곧 태연한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 는다. "아니야, 나 이제 화 다 풀렸어" "아까는 화 많이 났었어요...?" 아니 뭘 저렇게 꼬치꼬치 캐묻고 싶을까. 하지만 청도는 짜증도 내지 않고 무어라 대답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듯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인 다. "으...응. 아까는 화 많이 났었어" "왜요?" 보고도 모르겠냐? 나는 답답한 마음에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이 인 간들아, 이럴 시간이 있으면 가람이를 빨리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고! 하지 만 청도는 끝까지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솔직히, 앰뷸런스가 올 때까지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청도의 대화 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아...가람이가 많이 다쳐서, 가람이를 다치게 한 사람들 때문에 화가 났 었어" "가람이 오빠가 다쳤어요?" 청도의 질문에 주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는다. "으, 으응" "왜요?" "벼락을 맞았거든" "어디에 있어요?" "저기" 주희는 계속해서 청도에게 이것저것을 꼬치꼬치 캐물었고 청도는 전혀 짜 증의 기색 없이 하나 하나 차근차근 주희에게 답을 말해 주었다. 진짜 청도 가 주희를 좋아하긴 좋아하나 보네. 그런데 요령이가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 렸다. "주희가 저 정도로 바보같은 애는 아닌데...?" "무슨 뜻이야, 요령이 누나?" 한수가 기분 나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그리고 요령이는 한수 가 기분을 나빠하던지 말던지 상관없다는 듯 한수의 태도에 신경 쓰지 않고 대답했다. "말 그대로야. 주희가 저런 애는 아닌데. 저게 무슨 바보 같은 질문들이야 ? 왜 화가 났냐니? 그리고 왜 가람이가 다쳤냐니? 주희도 눈이 있다면 일련 의 과정들을 다 봤을 것 아냐?" 그리고 그제서야 한수는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요령이 의 말에 대답했다. "아, 그거. 그거야 당연하지. 우리가 누나들을 구경하기 위해서 온 건 바 로 얼마 전이니까" "그래?" 요령이는 의외라는 듯 되물었고 가람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사실 애초에는 구경을 오고 싶은 생각도 없었어. 척 분위기를 보아 하니, 저기 중국옷 입은 패거리들이 요령이 누나 쪽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 더만. 혹시나 했는데 무대 부서질까봐 자리 옮기는 거 보고 확실히 '싸움 붙었나보다'했지" 요령이는 한수의 말에 감탄했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호, 대단한 걸. 멍청한 대학생들은 끝까지 연극 어쩌니 저쩌니 하면서 궁 시렁거리던데. 니가 나이를 헛먹은 대학생들보다 훨씬 낫군, 그래. 그런데 싸운다는 것을 눈치 챘다면 오히려 연극보다 더 흥미를 가지고 구경을 와야 정상 아닌가? 왜 싸움구경인 줄을 알면서 구경을 안 온거야? 싸움 구경은 별로 안 좋아하나 보지?" 요령이의 말에 한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난 단지 보나마나 누나와 가람이 형 쪽이 이길 거 같아서 안 간 것 뿐이야. 무엇보다 누나와 형들은 나를 이긴 사람이잖아. 그런 사람들이 그 렇게 쉽게 질 리가 없거든. 그런데 꽤 오랜 시간이 지나도 계속 빛이 번쩍 번쩍하고 승부가 안 나길래 좀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 지는 것을 보고 '좀 이상하네'라고 생각해서 누나를 끌고 느릿느릿 와 봤더 니 청도 형이 광분해서 사람 잡을 듯이 뛰는 게 눈에 들어오더라" "그래서 말렸고?" "응" "어이구, 장하다 김한수 어린이!" 요령이는 흐뭇하게 웃으며 한수의 볼을 쫙 잡아 당겼다. "우우우우! 화쥐마! 와퐈! 우우우! 화쥐 ℃롸뉘깐!" 한편 청도에게 가람이가 크게 다쳤다는 말을 들은 주희는 이리저리 두리번 거리며 청도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오다가 움푹 패인 구덩이 속에서 가람이 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믿지 못하겠다는 듯 주저앉아 버리더니 손으로 가람 이를 마구 흔들었다. "가람이 오빠! 가람이 오빠!" 우왓! 무슨 짓이야! 나는 기겁을 해서 주희에게로 달려갔다. "건드리지 마! 가람이는 많이 다쳤단 말야!" 하지만 주희는 내 말을 듣지도 않는 듯, 내 말에 꿈적도 하지 않고 가람이 를 흔들며 애타는 목소리로 외쳤다. "가람이 오빠! 일어나! 가람이 오빠! 눈 좀 떠 봐- 가람이 오빠! 많이 아 파? 가람이 오빠! 가람이 오빠!" 어휴, 이 고집덩어리! 너를 어떻게 말리겠냐! 젠장! 하지만 가람이는 환자 란 말이야! 어린애 같은 짓도 제발 작작 좀 하라고! 내가 자기 때문에 속이 얼마나 썩어 들어가는지 알 리가 없는 주희는 그대 로 주저 앉은 채 울음섞인 목소리로 계속 가람이를 흔들어대었다. "으흑...가람이 오빠...제발 눈 좀 떠 봐...응? 오빠! 제발 눈 좀 떠 봐.. .!" 쩝. 그렇게 울기까지 해대니 차마 나도 못 말리겠다. 에휴. 어차피 주희가 가람이를 세게 흔드는 것도 아니고, 그저 슬쩍슬쩍 미는 정도이니 별 탈은 없겠지. 계속 가람이를 흔들며 울먹이던 주희는 마침내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흐윽...! 흑...흑...!" 어느새 옆에 다가온 청도가 주희를 다독이며 달래었다. "우는 거야...주희야...?" "응...청도 오빠...! 가람이 오빠 너무 불쌍해...! 어떻게...! 많이 아프 겠지?" "괜찮아. 그만 울어. 이제 곧 병원차 와서 가람이 병원으로 실어갈 거야" "흑흑...아니야...병원에서는 나 아플 때도 못 고쳤단 말야...! 병원에서 병 고친다는 말 거짓말이야! 흐흑!..." 점차 눈물을 많이 쏟는 주희. 좀 측은해 보이기까지 한다. 확실히 생각이 어려서 그런지, 마음씨 하나는 비단결처럼 곱군. 청도는 주희가 우는 모습 이 안타까운지, 계속 주희를 달래기 위해 애썼다. "아니야. 고칠 수 있어. 그러니까 이제 그만 울어" "아니야! 못 고쳐! 우앙- 가람이 오빠, 어떻게 해-!" 드디어 주희는 흐느낌을 접고 눈물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청도는 이제 사색이 되어서 주희를 말리려고 애썼다. 어휴, 정말! 병자 앞에 두고 뭐 하는거냐! "괜찮아, 괜찮아. 뚝. 울지 마. 알았지?" "으앙- 가람이 오빠 불쌍해서 어떻게 해- 가람이 오빠- 많이 아플거야- 엉 엉엉!" 쩝, 저러다 그치겠지. 나는 입맛을 다시며 구슬피 우는 주희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앰뷸런스 차는 왜 이리 안 오나 그래. 나는 핸드폰 폴더를 열어서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 5분은 이미 예전에 지나 있었다. "뭐야! 5분은 이미 아까 지났잖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얏!" 나는 신경질적으로 폴더를 닫으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짜증난다! 모 든 것이 짜증나려고 해! 왜 앰뷸런스는 안 오는거야! 왜 요령이는 아무런 손도 안 쓰고 보고만 있는거지? 왜 한수는 그 좋은 염력으로 가람이를 병원 에 옮기지 않는거지? 그리고 왜 청도는 가만히 앉아서 주희를 달래고만 있 는거야! 왜 주희는 주저앉아서 펑펑 울고만 있는 거냐고 병자 앞에서 기분 나쁘게! ...하긴, 그렇게 치면 나도 지금 가만히 서서 아무것도 못하고 불평만 투 덜투덜 해대고 있는것은 마찬가지이지. 휴, 내가 지금 왜 이러는 걸까? 너 무 마음이 조급해서 불평만 늘어났나보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런데 그 때, 주희의 구성진 울음소리에 섞여 갑자기 청도의 기묘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 어?" "우아앙- 가람이 오빠 불쌍해-!" "야! 영준아 빨리 이리 와 봐!" 너무 급하게 부르는 바람에 청도의 목소리는 이상하게 굴절될 정도였다. 왜 그러는 거지? 호, 혹시 가람이의 상태가 갑자기 악화되기라도 했나? 나 는 청도의 급한 부름에 황급히 뒤로 돌아 가람이에게로 뛰었다. 그리고 본 광경은, 내 눈으로 보면서도 도저히 믿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거...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냐...?" "으...응. 좀 말이 안 되는 것 같긴 한데...!이건 대체..." 주희는 여전히 가람이를 흔들면서 눈물을 펑펑 쏟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 게도 주희의 손에서 빛이 나면서 가람이의 상처가 조금씩 아물고 있었다! "마...맙소사. 이런 건 처음 봐" "나도 처음 봐" "으앙- 가람이 오빠, 눈 좀 떠 봐-!" 나는 황급히 요령이와 한수를 불렀다. "요, 요령아! 한수야! 이리 와서 가람이 좀 봐!" "무슨 일이야! 상태가 더 안 좋아 지기라도 한 거야?" "글쎄 일단 와서 보기나 해!" 내 말에 투덜거리며 달려오는 요령이. 요령이 역시 눈을 크게 뜨면서 중얼 거렸다. "...350년 평생 이런 건 처음 봐..." 이제 가람이의 상태는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었다. 피를 줄줄 흘리던 피부 는 피의 흔적만 남기고 빠르게 아물어가고 있었고, 그을려서 물집이 생기고 물이 줄줄 흐르던 화상 역시 물집이 저절로 터지면서 상처가 깨끗하게 아물 어 가고 있었다. 놀라지 않은 것은 오직 한수 뿐, 이 광경을 지켜보던 나머 지 사람들 모두가 경악으로 입을 크게 벌렸다. 심지어 우리 주위에서 구경 하던 구경꾼 중에서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시작하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였 다. 하긴, 눈 앞에서 기적을 보았으니...! "이건 정말...기적이로군..." 요령이가 눈을 비비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이제 가람이의 몸의 상처는 거 의 다 아물었다. "주희는...역시 천사였어...어쩐지..." 청도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도 내 귀에 들어왔다. 뭐 지금으로선 별로 부 인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세상에! 손에서 빛이 나서 환자를 고치다니! 이 게 도대체 현대 과학으로 설명이 되는 이야기란 말인가! 아, 물론, 나를 포 함한 내 주위의 모든 신비한 현상들이 현대 과학으로 설명이 안 된다는 건 나도 알아. 인정해.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라고! 이건 솔직히 너무 말이 안 되잖아! 마침내 완전히 건강한 상태를 되찾은 가람이. 편안히 숨을 쉬면서 눈을 감 고 있다. 그리고 주희는 가람이가 나은 모습을 보더니 손으로 눈물을 쓱쓱 닦더니 이슬을 잔뜩 머금은 꽃처럼 화사하게 미소지었다. "어, 가람이 오빠...다 나았네? 에이, 그동안 나 놀래킨 거였구나? 헤헤" ...그리고 청도는 주희의 미소에 완전히 하늘나라를 구경하고 온 사람처럼 얼이 빠져서 멍하니 주희의 얼굴만 바라보며 실실거리고 웃었다. 그래, 청 도가 저러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방금 전 주희의 미소는 나조차도 혹해버릴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설마 주희는 자기가 가람이를 낫게 한 줄 모르나...? 하긴, 주희는 정신없이 펑펑 울기만 했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 네. "이거...확실히 다 나은 거 맞어?"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하는 나는 신앙이 없는 것입니까? 나는 가람이를 한 참동안 바라보다가 마침내 손을 들어 툭툭, 가람이를 쳤다. "야, 가람아. 가람아?" "으...응?" 맙소사! 주위에 둘러서 있던 사람들의 눈이 다시 한 번 커졌다. 가람이가 부스스 일어난 것이다! 우리는 주춤 뒤로 물러섰고, 가람이는 눈을 부비며 정신없이 자고 일어난 사람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이윽고 천천히 말했 다. "분명히 나는 좀 전에 벼락 맞고 기절했는데..." "...응, 나도 좀 전까지는 그런 줄 알았어, 임마!" 나는 가람이가 다 나았다는 기쁨에 낄낄거리며 가람이의 등을 철썩철썩 후 려치면서 대답했다. 그리고 가람이는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아까 난 분명히 어마어마한 벼락을 맞고 기절해 버렸어 끔찍한 순간은 아직도 내 머릿속에 생생한데 왜 난 지금 이렇게 멀 쩡한 모습으로 깨어 있는 거지. 주위의 초토화된 풍경들을 보면 내가 꿈을 꾼 거 같지는 않은데 말이야.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영문을 모르겠군" 그리고 가람이의 말에 요령이는 가람이의 마구잡이로 뻗친 벼락머리 -주희 의 놀라운 치유력으로도 이건 고쳐지지 않았다. 하하- 를 헤집으면서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자식아. 지금 그런 거 걱정할 때냐? 어쨌든, 너는 지금 멀쩡히 앉아서 여 기에서 헛소리나 지껄이면서 멍청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다고. 그러 니, 이제 일어낫! 집에 가자. 피곤하다. 아, 아니지. 오늘은 집에 가기도 귀찮아. 청도야?" "왜?" "오늘 너네 컨테이너에서 좀 자자" "남이 들으면 언제는 허락맞고 잔 줄 알겠다, 야. 말했잖아, 동아리 방이 니까 아무나 써도 된다고" "하하하! 알았어" 요령이는 듣는 사람이 상쾌한 기분을 느낄 정도로 맑게 웃으며 가람이의 손을 잡더니 가람이를 일으켜 세웠다. "자, 가자" 그런데 가람이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물었다. "흠, 상황은 이미 종료된 건가? 그 놈들은 어디로 갔지?" "...응? 아차, 생각해보니 백태청과 백화련을 잊고 있었네! 그런데 요령이가 걱정 할 것 없다는 듯 손가락을 들어서 까닥거리며 말한다. "괜찮아, 괜찮아. 걱정하지 말라고. 그 놈들은 이미 폐인상태야. 유천이 기절해 버린 게 충격이 꽤나 컸는지, 유천 옆에서 멍하니 하늘이나 보면서 주저앉아 있으니까 말야. 그 놈들은 유천이 깨어나기 전에는 우리가 가버린 줄도 모를걸?" 요령이의 말에 고개를 돌려 유천이 쓰러진 쪽을 바라보니 정말로 백태청과 백화련은 넋이 나가버린 얼굴로 하늘만 바라보고 있다. 정말이네...이대로 라면 우리가 가버려도 저 녀석들, 눈치채지 못하겠는걸? "그래, 그럼 그냥 몰래 슬쩍 가 버리자. 저 녀석들도 이번 일로 함부로 덤 비다간 호되게 당한다는 것을 알았을 테니까" 청도의 말에 우리는 전혀 미련 없이 모두들 뒤로 돌아섰다. 물론 내 솔직 한 중얼거림이 청도의 발걸음을 잠깐 멈칫거리게 만들긴 했지만. "근데 사실 함부로 덤비다간 호되게 당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우리 쪽 같은데...?" "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으면 하는 소망이 있네 좀?" 괜히 짜증을 벌컥 내는 청도. 그래, 비록 지리하도록 긴 밤, 많은 일이 있 기는 했지만 어쨌든 좋게 끝났으니까 서로서로 잘되고 좋은 거지 뭐. "거기 서십시오!" "...서로서로 잘되고 좋은 거지 뭐라고 끝낼라고 했는데 넌 또 뭐야!" 아, 짜증나네! 나는 성질을 벌컥 내며 뒤를 돌아보았다. 백태청이 우리를 바라보며 눈을 불태우고 있었다. "지금 우리 후황자 님의 정신을 잃게 하고 어디를 도망가려고 하는 것입니 까!" 소리를 버럭 지르는 백태청. 그리고 나는 어이가 없어서 땅이 꺼져라 한숨 을 한 번 쉬어 준 뒤 맥빠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이런, 이런. 야, 너 있잖냐" "왜 그러십니까" "너 솔직히 말해봐. 너 그 '뇌신자'라는 호칭 있잖아. 스스로도 무지하게 안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냐? 아니, 번개는 저 여자가 다 쓰는데 도대체 네 녀석이 어딜 봐서 '뇌신자'냐?" "...뇌신자라는 이름은 능력과 상관없이 후황자 님께서 '좌장'에 걸맞는 호칭이라고 붙여주신 것입니다! 더 이상 나의 그런 명예로운 호칭을 모욕하 지 마십시오!" 그리고 나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양 손을 주춤주춤 물렀다. "아, 그, 그래. 그러자고. 모욕 안 하면 될 거 아냐. 난 또 뇌신자라길래 당연히 니가 번개를 잘 쓰는 줄 알았지. 뭐 살다보면 그런 실수도 할 수 있 는거지, 그런 걸 가지고 열을 내고 그래, 사람 무안하게. 어쨌든!" "뭡니까!" 백태청은 눈을 번쩍이며 쏘아붙였다. "...우리 그냥 보내주면 안되냐? 이제 싸우기도 귀찮어..." "안 됩니다. 당신들은 후황자 유천 님을 쓰러뜨린 자! 당신들을 쓰러뜨리 지 않으면 그에 따른 처벌이 저에게 돌아오게 됩니다! 특히, 당신!" 백태청은 청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쓰러뜨려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청도는 눈을 크게 떳다. "뭐, 나?" "그렇습니다!" 백태청은 청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청도는 그 말에 머리가 아픈지 주먹으로 머리를 툭툭 치더니 갑자기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 키며 짜증난다는 듯 소리를 버럭 질렀다. "왜 또 나야! 야, 세 발 까마귀의 패를 가지고 있는 건 얘야, 얘! 역사학 부 02학번 박, 영, 준! 응? 좀 제발, 쓸데없는 사람 가지고 시비걸지 말란 말야!" "아뇨, 당신이 쓰러져야 합니다. 당신은 후황자 유천 님의 정신을 잃게 한 자...당신은 호위좌장인 나와 유천 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였으므로 당연히 그 죗값을 받아야 합니다. 다 같이 덤비시려면 다 같이 덤비시죠. 열이 되 었든 백이 되었든 나는 하나도 무섭지 않으니깐!" "야, 그런데 저기 백화련 양은 싸우지 않으시는 거야?" 나는 손가락 끝으로 여전히 유천의 옆에 주저앉은 채 눈물을 흘리며 어깨 를 들썩이고 있는 백화련을 가리켰다. 내 질문에 백태청은 고개를 가로저으 며 대답했다. "...그녀는 지금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저 혼자서도 충분히 당신 들쯤은 상대할 수 있습니다" 청도는 귀찮다는 듯 어깨를 한 번 으쓱 하더니 결국 우리를 돌아보며 말했 다. "야, 그냥 나 혼자서 후딱 다녀 올게" 그리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얼른 처리하고 와라. 귀찮다" 사실 아까 본 백태청 정도의 실력은, 청도라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만한 정도로 보였다. "아빠 빨리와, 맛있는 거 사와야 해- 아빠 빠빠이-" 요령이가 내 옆에서 귀엽게 손을 흔들며 깜찍하게 윙크했다. 그리고 청도 는 그런 요령이에게 볼을 내밀며 말했다. "자, 우리 요령이, 아빠한테 뽀뽀해야지?" 짝-! 청도의 볼에 닿은 건 요령이의 입술이 아닌 따귀였다. 청도는 벌겋게 손도 장이 찍힌 볼을 움켜잡고 팔짝팔짝 뛰며 벌컥 화를 내었다. "아, 씨, 제발 말로 하자 좀!" "꺄르르르! 아빠 잘 갔다와!" 마지막까지 아기의 웃음소리를 그대로 흉내내어 웃으며 장난정신을 잊지 않는 요령이. 정말이지 존경스럽다. 청도는 피식 웃더니 검을 방만하게 빙 글빙글 돌려 대강 잡으며 느릿느릿 걸어나갔다. "자, 나 혼자 나왔다. 어쩔 건데? 명예를 되찾아야 되겠지? 그럼 얼른 덤 벼. 빨리 끝내고 가서 1분이라도 자게. 나 피곤해" 상황이 끝난 줄 알고 느릿느릿 흩어지던 구경꾼들이 새로운 상황에 다시 몰려들고 있었다. 저 사람들이 아무리 둔해도, 이제 저 사람들도 이게 연극 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겠지? 저 중엔 과동기나 과선배 등등의 사람들도 있 을텐데, 이를 어쩌나. 나는 갑자기 생겨난 고민거리에 머리를 싸쥐고 고민 을 시작했다. 아아, 이제 나는 '이상한 놈'쯤으로 몰릴거야! 안 그래도 친 구도 없는데! 젠장! ...아냐. 흐흐흐, 어쩌면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르지. 만약 내가 레포트 좀 써달라고 협박하면 누가 거절할 수 있겠어! 으흐흐...으흐흐흐! "으흐흐...으흐흐흐!" 갑작스럽게 백태청이 내 목소리와 똑같이 웃어제끼는 바람에 나는 깜짝 놀 라 버리고 말았다. "흐흐흐...혼자라? 당신, 나를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청도는 백태청의 말에 기분이 상한 듯 눈살을 찌푸리고 대답했다. "너야말로 날 무시하는 거 아냐? 내가 아무렴 너 한 명 정도 어떻게 못 하 려고, 얼른 할 줄 아는거나 다 해봐" "내공수위는 보통 인간을 약간 넘는 정도군요. 특별히 외적으로 몸이 단련 되어 보이는 것도 아니고. 뭐...상관없습니다. 어쨌든 저는 후황자 유천 님 과 저의 명예만 되찾으면 되니까요. 후회만 하지 마십시오" "알았으니까 빨리 할 줄 아는거나 다 해 봐" 청도가 손사래를 치며 백태청을 재촉했다. 그리고 백태청은 입술을 꾹 깨 물더니 하늘로 떠오르며 외쳤다. 청도가 손사래를 치며 백태청을 재촉했다. 이제 청도도 완전히 지쳐 버렸 는가보다. 정말로 얼굴에 귀찮아하는 모습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거든. 하지 마 청도의 그런 모습이 백태청에게는 건방진 모습으로 비추었나보다. 백태 청은 입술을 꾹 깨물더니 청도를 노려보며 누런 기운을 극도로 끌어 올림과 동시에 하늘로 떠오르며 외쳤다. "현무신장!" 드드드! 갑자기 주위의 땅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갑작스러운 사태 에 청도는 당황해서 비틀거리며 주위를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뭐, 뭐지? 갑자기! 도대체 저 녀석이 지금 무슨 이상한 짓을 하려고 하는 거야!" "합!" 백태청이 짧게 기합을 지르자, 갑자기 흔들리는 운동장의 이곳 저곳이 우 지직, 우지직하고 갈라지면서 부서져 내린 돌덩어리들이 하늘로 솟구쳐 백 태청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백태청의 몸은 얼굴을 제외 한 모든 부분이 돌과 흙더미 속으로 파묻힌 형상이 되었다. "합!" 꾸웅! 연이어 백태청이 다시 한 번 소리지르자 갑자기 땅이 크게 흔들리며 땅 속에서 둥그스름한 타원형의 거대한 암석덩어리가 솟아올라서 백태청을 둘러싼 돌무더기의 아래쪽에 붙었다. 철썩! 백태청은 다시 한 번 고함을 질 렀다. "크앗!" 이번에는 백태청이 아까 가람이와 싸울 때 사용했던 거대한 손들이 땅 속에 서 쑥! 솟아 나오더니 공중으로 떠올라 백태청이 방금 전에 땅 속에서 끌어 올린 둥그스름한 흙더미에 붙었다. 철썩! "됐다!" ......청도는 너무 놀라 버렸는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수 미터는 족히 될 만한, 흙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괴물이 자신을 마 주보고 서 있는 것이다. 도대체 저건 뭔가? 하다하다 안되니까 이제 괴물까 지 나온단 말인가? 이건 정말 너무하잖아! 괴물 앞에 선 청도의 모습을 솔 직히 말해서 너무나도 작고 왜소해 보인다. 아무리 청도가 검을 잘 쓰고 빨 라도 그것은 인간을 상대로 할 때나 쓸모 있는 일. 저런 괴물은 청도가 상 대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상대다! 백태청은 통쾌하게 웃었다. "으하하하! 이것이 제 몸에 합신시킨 현무의 힘을 극도로 이용한 '현무신 장'입니다! 자, 청도 씨가 원하는대로 제가 보여드릴 수 있는 것은 모조리 보여 드렸으니, 이제 한 번 제대로 겨루어 보도록 합시다!" 그리고 청도는 당황한 표정으로 비척거리며 칼을 뽑아들며 말했다. "...이게 다야? 뭐야, 너무 시시하잖아" 뭐?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청도는 지금 분명히 백태청과 백 태청이 불러낸 괴물을 '별 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 나는 멍한 얼굴 로 청도와 거대한 암석괴물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그리고 백태청은 청 도의 그런 말에 언성을 높였다. "그런 말은 우선 저와 이 현무신장을 쓰러뜨린 뒤에 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 합!" 백태청은 거대한 현무신장의 왼손을 들어올리더니 청도를 향해 휙- 하고 내려쳤다. 쩌-엉! "우왁!" 청도는 깜짤 놀랐다는 듯 소리치며 간신히 몸을 옆으로 날려 피했다. 그러 나, 공기를 가르면서 현무신장의 오른손이 다시 한 번 청도를 향해 날아오 고 있었다. "으아아!" 후웅! 무서운 소리와 함께 허공을 가른 현무신장의 오른쪽 흙손! 하지만 이번에도 청도는 허공에서 몸을 뒤틀어서 현무신장의 공격을 피했다. 다시 한 번 백태청이 현무신장의 왼손을 휘둘렀지만, 청도는 이번에도 뒤쪽으로 몸을 날려 현무신장의 공격을 피했다. "우어엇! 한 대만 맞아도 죽어버리겠는걸?" 말은 저렇게 하지만 청도의 얼굴에서는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백태청은 다시 한 번 현무신장의 양손을 들어 올리더니 마치 허공에 서 앵앵대면서 사람을 귀찮게 하는 모기를 잡듯이 그대로 마주쳤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머리를 직접 후려치는 것 같은 소음에 귀를 막아야 했다. 쩌어 엉! 난 나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다. "우으으윽! 그 박수소리 한 번 더럽게 크네! "구경꾼들 사이에서 군데군데 비명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우윽!" "악! 귀야!" "윽! 귀청 떨어지겠네!" 어이구, 이 사람들아, 아직도 안 가고 어디 있었어? 참 할 일도 없는 사람 들이네...! 나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아직 천 명은 확실히 넘게 남아 있는 구경꾼들을 바라보았다. 청도는 백태청의 공격 자체는 피했지만, 그 폭발하는 듯한 굉음에 충격을 입었는지 꼭 술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고 있었다. "우으...얼얼해" 청도는 괴로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순간이었다. 백태청은 기회라는 듯 다시 한 번 현무신장의 손을 들어서 청도를 내리찍었다. "우악!" 꽝! 하지만 청도는 정신이 없는 가운데에서도 반사적으로 옆으로 뛰었다. 휴! 아슬아슬했네! "정신 차려야지, 큰일날 뻔했네!" 그런데 청도가 땅에 다시 착지하는 순간, 갑자기 백태청이 자신의 바로 아 래쪽 땅을 후려쳤다. 쩡! 청도는 다시 한 번 빠르게 옆으로 몸을 날렸다. 우지직, 쾅! 청도가 몸을 날림과 동시에 청도가 착지했던 자리에 아까 백태 청이 가람이와 싸우면서 땅을 쳤을 때 그랬던 것처럼 커다란 바위송곳이 삐 죽하게 솟아 있었다. 청도는 실망인지 현무신장 속의 백태청을 향해 목소리 를 높였다. "뭐야, 아까 보여 준 기술이잖아! 아까 네가 이걸 쓰는 걸 곁눈질로 슬쩍 봤다고. 이런 것 말고 딴 건 없어?" "아까 가람 군에게 썼던 것처럼 한, 두 개씩 솟아 나오는 작은 기술 따위 가 아닙니다! 그래도 현무신장의 덩치가 있는데 그런 기술을 쓸 수는 없지 요!" 백태청은 기세 등등하게 외치며 현무신장의 양손을 머리 위로 번쩍 들더니 한차례 기합과 함께 거세게 내려찍었다. "하앗!" 꾸-웅! 땅이 은은하게 진동하더니 잠시 후 수백 개의 뾰족한 바위들이 땅 속에서 일제히 솟아올랐다. 꽝! 꽈앙! 꽝! 꽝! 그리고 청도는 당연히 이래 야 한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소리 높여 외쳤다. "우웃! 멋진 걸? 그래, 덩치가 크면 최소한 스케일이 이 정도는 되야지!" 청도는 몸을 교묘하게 돌려서 도저히 찾기 힘들 것 같은, 빽빽한 돌바위의 틈새들을 찾아내더니 발을 딛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백태청의 손이 머리 위로 높이 솟았다가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꿍! 콰드드득! 이미 솟아있는 돌송곳 사이로 다시 한 번 수백 개의 돌송곳이 겹쳐 솟았다. 우와! 저래서 야 발을 딛을 공간조차 없겠어! 하지만 청도는 이번에도 별로 개의치 않는 다는 듯 씩 웃으며 송곳의 측면을 밟고 교묘하게 이곳 저곳으로 뛰었다. 그 리고 백태청은 짜증이 나는지 기계적으로 현무신장의 손날을 세워서 청도를 향해 후려쳤다. 후두두둑! 백태청이 손을 휘두르는 길에 있던 돌송곳들이 와르르- 하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한꺼번에 부서져 내렸다. "으랏차!" 청도는 힘찬 기합과 함께 고개를 숙여 다시 한 번 백태청이 휘두른 현무신 장의 손을 날쌔게 피했다. "이익! 쳇!" 드드득! 백태청은 현무신장의 손을 재빨리 하늘로 들었다가 주먹을 쥐며 끌어내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굉음과 함께 땅 위로 솟아올랐던 수백 개의 거대한 바위송곳들이 일제히 땅으로 도로 내려갔다. 원상복귀도 된단 말야, 그렇게 운동장을 다시 바위송곳들이 튀어나오지 않은 원래의 모습으로 바꾸 어놓은 백태청은, 자신의 공격이 청도에게 먹히지 않아서 짜증이 나는지, 마치 파리를 잡는 사람처럼 현무신장의 양손을 머리 위로 높이 들어서 마구 잡이로 땅에 후려쳐 댔다. 쾅! 쾅! 쾅! 쾅! 매캐한 흙먼지가 일어나면서 땅 이 요란하게 울렸다. 답답해진 나는 손나발을 만들어 입에 대고 목청껏 소 리쳤다. "야! 청도, 뭐야! 지금까지 한 대도 못 때리고 계속 밀리고 있잖아! 도대 체 어떻게 된 거야-! 우-" 물론 역시 청도도 몸놀림 하나만큼은 무지하게 재빨라서, 휙휙하고 몸을 전후좌우로 움직이며 마구 후려쳐대는 현무신장의 공격을 요리조리 잘도 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고 옛날에 누군가 그랬잖아? 아무런 공격도 하지 않고 저렇게 이리저리 피하기만 한다면 어떻게 이길 거 야? 청도야, 이제 졸린데 빨리 끝내고 좀 자러 가야지? "으으으! 이것도 피하는지 어디 봅시다!" 백태청은 화가 머리끝까지 난 목소리로 청도를 향해 소리친 후, 현무신장 의 양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쿠드드! 이윽고 땅 속에서 천천히 흙과 돌로 이루어진 거대한 구체가 솟아 나오더니, 백태청의 현무신장이 떠 있는 높이 까지 느릿느릿 떠올랐다. "저건 대체 또 뭐지...?" 청수가 기대감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눈을 들어 하늘에서 둥실둥실 떠 있 는 돌조각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폭발하면 서 수백 개의 날카로운 돌조각들로 바뀌어서 일제히 청도를 향해 쏟아져 날 아오기 시작했다. 이런! 청도의 사방의 진로를 모두 돌조각들이 덮어 버렸 잖아! 저건 피하지 못할텐데! 과연 청도는 어떻게 할 셈이지? 그런데 청도 는 재밌다는 듯 웃고 있었다. "에이, 이런 거 말고, 좀 더 재미있는 건 없어?" 청도는 생각보다 별로라는 듯 실망한 목소리로 말하며 칼을 휘둘렀다. 우 왓! 역시 현란한 청도의 칼솜씨! 청도의 목검이 갑자기 수십 개로 불어나 버린 듯 빠르게 움직이며 수십 개의 돌 조각들을 하나 하나 쳐서 주위로 날 려버렸다. 따라라라라락! 그리고 백태청은 청도의 그런 여유 만만한 모습을 이를 갈며 외쳤다. "좀 더 재미있는 걸 보여달라니, 말씀대로 보여 드리지요! 현무대붕격!" 휘이익!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백태청은 허공에 띄워 놓았던 현무신장을 땅 으로 착지시켰다. 그리고 청도는 멀뚱히 그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지금 뭐하는 거지? 도대체 뭘 보여주려고 땅으로 내려오는 거야? 하늘 에서 그냥 머물러 있는 것이 유리하다는 사실은 백태청 자신이 더 잘 알텐 데?" 그런데, 내가 보기에 현무신장은 그냥 곱게 땅으로 내려오는 것 같지가 않 았다. 현무신장의 주위에서 갑자기 일렁이는 황색 기운이라던지, 현무신장 이 땅으로 내려오는 속도가 비정상적이라던지 하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힘 을 잔뜩 실어서 땅을 내리찍으려 하려는 것처럼 보인 것이다. 꽈아아앙! 내 생각대로 현무신장은 땅으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땅을 내리찍는 것이 었다! 거대한 몸체의 현무신장이 땅을 직접 자신의 거대한 몸으로 후려쳤 다. 콰앙! 운동장 전체가 미친 듯이 흔들렸고 현무신장은 땅 속으로 몇 미 터를 푹, 박혔다. 그리고 현무신장이 추락한 주위의 땅은 굉음을 내면서 이 리저리 거미줄처럼 쩍쩍 갈라져 버렸다. "으윽!" 나는 땅이 갑자기 마구 흔들리는 바람에 균형을 잃고 주저앉고 말았다. 으윽, 엉덩이 아파라. 그런데, 현무신장이 땅에서 떨어짐과 동시에 쩍쩍 갈 라진 땅에서 사람 머리통만한 돌덩이들이 일제히 하늘로 솟아올라가다 어느 지점에서 누가 붙잡기라도 한 것처럼 멈추어 버렸다. "받으십시오! 이게 현무대붕격의 진짜 공격입니다!" 백태청은 기세 등등한 목소리로 외치며 현무신장의 손을 들어올렸다 땅을 향해 휘둘렀다. 그리고, 그 동작과 함께 허공에서 멈추었던 돌들이 일제히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우와아아앗!" 저건 정말 피하기가 힘들겠는걸! 돌들이 너무 커! 저런 건 한 대만 맞아도 최하 중상에다가 아까의 돌조각들처럼 쳐서 날려 버리기도 힘들텐데? 청도 역시 당황했는지 괴성을 질렀다. ...그런데, 청도를 자세히 관찰한 나는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청도의 목소리는 공포의 신음을 지르는 반명 청도의 입은 뭐가 좋은지 싱글싱글 웃 고 있었던 것이다! 뭐지? 저런 무시무시한 공격조차 쉽사리 받아낼 자신이 있다는 건가? 청도의 앞으로 첫번째 바윗돌이 떨어져 내렸다. "찻!" 청도는 가볍게 기합을 지르며 검을 한 번 휘둘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청 도의 앞으로 날아온 바윗돌은 가루처럼 부서져 버렸다. 콰릉! 그리고 나는 그 말도 안 되는 광경에 경악하며 외쳤다. "마...말도 안 돼! 한 번 밖에 안 베었는데 어떻게 저렇게 바위가 박살이 나 버릴 수가 있지? 서, 설마 눈에 안 보이는 속도로 순식간에 수백 번을 베어서 돌을 가루로 만들어 버린건가?" 그런데 내 외침을 들은 요령이가 한심하다는 듯 나를 바라본다. 이윽고 요 령이는 그것도 모르냐면서 내게 핀잔을 주었다. "으휴, 바보야! 힘을 집중해서 팍, 하고 끊어 쳤으니까 돌이 쉽게 부서진 거지! 청도가 검의 신이라도 되냐, 우리 모두의 눈을 피하고 수백 번을 베 게? 아니, 검의 신이라고 해도 그건 불가능하겠다!" "그, 그래? 내 말에 요령이 대신 가람이가 대답했다. "그렇다. 청도는 지금 끊어치기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바위들을 가볍게 박살내고 있어. 하지만 저 완벽하게 절제된 동작...적절한 순간 정확한 타 점을 정확히 끊어서 때림으로서 최소한의 힘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 정말이지 보면 볼 수록 감탄만이 나오는걸" "인정" 요령이도 청도가 지금 보여주는 모습이 대단한 거라는 가람이의 말에 고개 를 끄덕였다. 확실히, 수백 개의 돌덩이들을 모조리 박살 내버리는 청도의 솜씨는 예사 솜씨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다. "이...이럴 수가...!" 백태청은 현무대붕격을 자신의 승부수라고 생각했었나보다. 백태청은 현무 신장을 도로 하늘로 띄우더니 자포자기한 목소리로 외쳤다. "젠장! 잘도 피하시는군요! 하지만 당신이 저를 공격해서 강한 타격을 입 히지 못하는 한, 당신은 결코 저를 이길 수 없습니다! 저는 여기 떠 있을 테니 어디 한 번 마음대로 해 보십시오! 어떻게 공격하실 생각입니까?" 그리고 청도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그래? 그럴거냐?" 확실히 백태청의 말이 맞긴 하다. 확실히, 백태청은 지금 저 하늘에 떠 있 는데 어떻게 청도가 공격할 수 있겠어! 과연 청도는 어떤 회심의 공격을 보 여줄까? 청도는 어떻게 저 하늘에 떠 있는 백태청을 공격할 수가 있을까? 청도는 백태청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별로 어렵지도 않은 문제라는 듯 씩 웃으며 대답했다. "네가 이겼다. 네가 짱이야"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완전히 당황해버린 백태청의 목소리. 그리고 청도는 볼멘 소리로 투덜거리 며 대답했다. "거기 떠 있는데 내가 무슨 신선도 아니고, 거기까지 어떻게 날아가서 널 어떻게 이기냐. 그냥 명예고 나발이고 너 다 가져. 네가 나 이겼어. 세상 너 다 가져라" "...푸하하하!" 엄지손가락까지 치켜들며 승자에 대한 예의를 보여주는 청도. 청도의 말에 결국 나는 웃음을 터뜨리면서 박수를 치고야 말았다. "깨끗해! 아주 깨끗한 승부야! 깨끗했어! 청도 패! 백태청 승!" "이, 이건 말도 안 됩니다!" 백태청이 승부에 이의가 있다는 듯 외쳤다. 아니 저 자식은, 자기가 이겼 다는 데도 불만이야 그래?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가 불만인데?" 백태청은 내 말에 손가락을 들어올려 청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 목적은 저자를 쓰러뜨리는 것이지 하찮은 승부 따위를 가리자는 게 아 니란 말입니다!" 불만 가득한 백태청의 목소리. 그런데 백태청의 말에 결국 청도가 짜증을 벌컥 내며 소리쳤다. "아니 그럼 끝까지 쫓아와서 쓰러뜨리던가!" "...예? 그게 무슨...?" "나는 졌으니까, 나를 쓰러뜨리고 싶으면 쓰러질 때까지 그거 타고 둥실둥 실 떠다니면서 졸래졸래 쫓아다니던지 말던지 마음대로 하라고! 도대체 공 격도 안 하겠다, 방어만 하겠다, 승부는 인정 못 하겠다, 그게 뭐야! 인정 을 하던지 말던지, 너 혼자서 벽 잡고 평생을 싸우던지 네 멋대로 해라! 야 ! 가자!" 청도는 말을 마친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돌리더니 우리를 향해 다가 왔다. 그런데, 그 행동이 백태청에게는 상당한 모멸감을 주었나보다. 백태 청은 고함을 지르더니 그대로 현무신장의 주먹을 치켜들어 괴성과 함께 청 도를 향해 내리찍었다. "우아아아앗!" 하지만 청도는 몸을 빙글 돌려 백태청의 공격을 가볍게 피하더니 오히려 백태청의 주먹을 밟고 '현무신장'의 얼굴부분, 백태청이 조종을 하는 부분 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뛰어들어갔다. "어, 어어...?" 탁, 탁, 탁! 몇 번 발자국소리가 연이어서 들리고, 다음순간 청도는 어느 새 백태청의 미간에 목검의 끝을 겨누고 있었다. 백태청은 눈을 흡뜨며 신 음을 흘렸다. "이...이럴수가...!" 그리고 그 모습을 재밌다는 듯 바라보던 청도는 씩 웃더니, 백태청을 겨눈 칼끝으로 백태청의 미간을 툭, 툭 몇 번 쳐주고 도로 현무신장에서 내려왔 다. "마...말도 안 돼...이 정도라면...애초에 처음부터...봐준 것...?" 백태청의 중얼거림이 들려왔지만 청도는 듣지를 못한 것인지, 아니면 혼잣 말이니 무슨 말을 하든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것인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청도는 우리를 향해 손으로 브이자를 그리며 씩 웃었다. "가자. 내가 이겼어" "아빠 왔어? 아빠 까까 줘! 요령이가 무사 귀환한 청도를 반기며 농담을 걸었다. "어이구, 우리 딸, 아빠 왔는데 뽀뽀-" 청도는 다시 한 번 볼을 내밀며 시시껄렁한 농담으로 대답해 주었다. 그리 고 요령이는 전혀 망설임 없이 주먹을 날렸다. 퍼억! "아빠, 두 번째는 주먹 날아간다고 말했잖아?" "아, 그래? 우리 딸 주먹 맵기도 하지...아후후...너 남자 여럿 울렸겠구 나, 주먹으로?" 청도는 눈물까지 찔끔 흘리면서 맞은 부분을 정신없이 쓰다듬었다. 이제 정말로 끝난 것 같군. 나는 컨테이너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내 옆에서 요령이가 우리를 둘러싼 구경꾼들에게 쉿쉿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뭐해요! 비켜요! 비켜! 연극은 아-까전에 끝났다고! 이 눈치 없는 사 람들아!" 도대체 구경꾼들은 뭐가 궁금해서 아직도 가지 않는 것일까? 하긴, 저 사 람들도 오늘, 평생에 두 번 보기 힘들 좋-은 구경했지. 구경꾼들을 헤치며 지긋지긋한 운동장에서 걸어 나왔다. "무지하게 긴 밤이었는데 제대로 된 건 하나도 없는 것 같아" 컨테이너까지 가는 길을 조용히 걸어 올라가는데 문득 요령이가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다. 나는 요령이의 말에 맞장구를 쳤 다. "맞아. 유천네 패거리와도 관계를 확실히 하기는 커녕 오히려 사이가 더욱 나빠지기만 해 버렸고...거기다 따끔하게 혼을 내주겠다는 계획도 실패해서 오히려 우리가 유천네한테 많이 당해버리고...거기다가 개개인의 망가지는 모습도 많이 보이고...결국 마지막까지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었지" "거기다가 연극도 결국 제대로 끝맺지 못했잖아. 제길. 아주 지긋지긋해 죽어버릴 것 같은 밤이었어" 청도 역시 내 옆에서 동조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아차, 그러고 보니 우리 상금은 어떻게 되는 거지? "야, 이번 축제 상금은 결국 누가 탔을까?" 내 물음에 청도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대답했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우리 때문에 우리 뒤의 행사가 제대로 진행되긴 했 을까?" 청도의 말에 한수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끼여들었다. "아니. 내가 봤는데, 전혀 제대로 진행 안 됐어. 하나도. 일단 관객들이 있어야 폐막제 행사를 진행하던지 말던지 하지. 형들 싸움하는 거 구경하느 라고 관객들이 대부분 운동장으로 가버려서, 결국 정상진행 못 되었어" "그래? 그럼 우리가 상을 탈 수 있는 가능성도 있는 거네?" 청도가 화색이 완연할 얼굴로 외쳤다. 하지만 요령이가 그 말에 냉정하게 타박을 놓았다. "꿈 깨셔, 꿈 깨.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봐라. 만약 네가 주최측이면, 우 리처럼 행사를 망쳐놓은 사람들에게 상금 주고 싶겠냐? 우리는, 이미 글렀 어. 미운 털이 콱! 박혀 버렸거든" "...그런가? 하아...미안해서 어쩌지? 괜히 고생만 시키고...쓸데없이 연 극은 해서 큰 일만 만들어 버리고" 청도가 아쉽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됐어. 덕분에 좋은 경험했는데 뭐. 이번 연극 준비하는 거, 나름대로 재 미있었어.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리고 이번 싸움, 결국 끝마무리 는 청도 네가 했잖아?" 요령이가 좋은 말로 청도를 위로했지만 청도는 그래도 힘이 빠지는지 고개 를 푹 숙였다. 그렇게 한참을 힘없이 느릿느릿 걷던 청도.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휙! 들더니 주희를 부른다. "주희야, 주희야!" "응? 왜 불러, 오빠?" "아까 오빠 싸우는 거 봤어?" "어" 주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청도는 씩 웃더니 물었다. "멋있었어?" "아-니. 이상했어. 별로 멋 없었어. 오빠는 계속 도망만 다녔잖아. 청도오 빠는 도망쟁이. 헤헤헤! 그 대-따 큰 로보트가 훨씬 더 멋있었어!" 주희는 상상만 해도 신나는지 양손을 쫙- 펼치며 그 '대-따 큰 로보트'의 크기를 묘사하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청도는 주희의 '별로 멋없었어''청도 오빠는 도망쟁이'등등의 말에 더욱 기운을 잃고 축 늘어져서 속사정을 모르 는 사람들에게 의문을, 속사정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무한한 안타까움과 비 웃음(...나는 조금 나쁜 놈일지도 모르겠다...)을 선사해 주었다. "그런데, 우리 설마 학보사나 교지 같은데에 나오거나...그러진 않겠지?" 나는 문득 아까 갑자기 떠올랐던 고민이 생각나서 말을 꺼냈다. 그리고 내 말에 요령이가 귀를 쫑긋 세우더니 내게 물었다. "학보사? 학교 신문 말하는 거야?" "응. 학보사 기자들이 축제 때 사진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가져 왔을 것 아 냐? 만약에, 우리가 싸웠던 모습을 찍어서 신문에 싣거나 하면 어쩌지?" "그러고보니끼, 네 말대로 그럴 가능성도 충분히 있겠다" 나와 요령이의 대화를 옆에서 주의깊게 들은 청도는 안 그래도 무거운 마 음에 근심이 하나 더 붙어서 더욱 무거워졌는지, 다리를 추-욱 늘어뜨리며 이젠 아예 상체로 하체를 질질 끌어오는 것처럼 걸었다. 쳇. 친구 된 도리 로서 말해줘야겠군. "넌 다 좋은데 너무 오버를 해" 내 날카로운 지적에 청도는 씩 웃더니 똑바로 걸으며 말했다. "재밌으라고. 그런데 그건 그렇고 정말 신문에 우리 나오면 어떻게 하지? 에휴- 그런 문제는 상상도 못했어. 만약 정말로 신문에 우리 사진이 나온다 면...어휴. 이제 난 어쩌면 좋냐!" 그리고 요령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나와 청도에게 물었다. "왜? 학교 신문에 나오면 안 돼? 별 상관없지 않나?" 그래, 너나 가람이나 한수나 주희는 우리학교 학생이 아니니까 별 상관이 없겠지. 그리고 유천이나 백태청이나 백화련은 애들 성격 보아하니 절대 창 피함 같은 것을 모를 애들이고, 게다가 정 창피하면 자기 모국 중국으로 날 아가 버리면 되겠지. 하지만 나와 청도는 뭐냐? 나와 청도는 4년 내내 이 대학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고 졸업장까지 따서 나가야 된단 말이다! 그리고 졸업한 뒤에도 동문으로 따라다닐 거라고! 그런데 만약에 이번 일 때문에 과 선배나 동기, 아니면 미래에 입학할 내 후배들이 슬슬 피해다니거나 뒤 에서 수근대거나 하면 학교 생활이나 졸업한 후 동문회 생활을 고달퍼서 어 떻게 하겠냐! 내 이런 길고 긴 문장으로 표현되는, 요령이의 궁금증에 대한 대답을 청도 는 단 한 마디로 깔끔하게 정리해내었다. "쪽팔리잖아" "...아...그렇구나..." 잠시 모두들 입을 다물고 아무 말 없이 걸었다. 한 것은 하나도 없고 고생 만 죽도록 했다는 생각 때문인지 주위의 분위기는 침울하게 내려앉아 있었 다. "그래도 오늘이 달은 밝아서 좋군" 가람이가 모두의 축 늘어진 마음을 느꼈는지 짐짓 힘차게 말하며 뒤를 돌 아 휘영청 뜬 달을 바라보았다. 가람이의 말대로 오늘은 황금빛 만월이 높 이 떠오른 날이었다. "야- 볼만한데!" "맞아. 서울이 별은 없어도 달 하나는 볼만하단 말야" "가끔 보라색도 되더라고" 우리는 기분전환을 위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보름달을 바라보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주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청도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청도 오빠, 청도 오빠" "왜?" "저게 뭐야?" "응?" "저거" 주희는 가늘고 긴 손가락을 들어 달 아래에 둥둥 떠 있는 희끄무레한 그림 자를 가리켰고, 주희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긴 청도는 잠시 눈을 찡그 리며 자세히 주희가 가리킨 흐릿한 실루엣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곧 얼굴 을 팍- 찡그리며 내씹듯이 말했다. "현무신장이잖아-! 아, 백태청 저 놈은 왜 달 보는 사람 기분 나쁘게 달 아래에 저걸 띄워놓고 그래. 그건 그렇고 지금 돌아가는 건가? 저런 걸 타 고 집에 돌아가다니, 배짱도 좋아" "...저긴 아까 우리가 있던 운동장의 그 자리잖아" 조용히 내뱉는 가람이의 말. 그리고 가람이의 말에 모두들 움찔하면서 한 마디씩 꺼낸다. "...뭐?" "그럼 저거 저 놈 아까부터 지금까지 꼼짝도 안 하고 저기서 저러고 떠 있 는 거야?" "저거 독종일세..." 난 오싹한 기분을 느끼며 멍하니 달 아래에 뜬 현무신장을 바라보았다. 저 지독한 놈. 왜 계속 저기에 저렇게 가만히 있는 걸까? 너무 분해서? 아니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건가? 갑자기, 백태천의 분노 섞인 고함소리가 들리며 현무신장의 실루엣이 폭발 하듯 산산히 부서지더니 천천히 땅으로 쏟아져 내렸다. "으아아아아아악-!" 깜짝! 모두들 처절한 백태천의 비명소리에 오싹한 마음으로 몸을 부르르 떨며 서 로를 마주보았다. 문득 조용한 청도의 중얼거림이 이상하리 만치 내 맘속에 파고들었다. "오늘이 날은 날인가보네...그것 참...이젠 달도 못 보게 하냐...?" 우리가 유천 패거리와 혈투를 벌인 때로부터 벌써 보름 가까이 되는 시간이 흘렀다. 다행 히 유천은 자신의 패배 -사실 우리의 관점으로 봤을때의, 우리 멋대로 규정한 그 쪽의 패배 이지만 말이다- 에 충격을 받아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 더 이상 캠퍼스에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로서는 참으로 반길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한동안은 쓸데없는 일로 인해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일도, 뒤에서 누군가의 눈초리를 느끼곤 흠칫 흠칫 놀라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일도 없을 테니까 말이다. 게다가 쉬는 시간에는 이렇게 모두 모여서 자판기에서 차 한잔을 뽑아 마시는 여유도 즐길 수 있고 말야. 아, 물론 유천이 캠퍼스에 있었을 때도 우리가 차 한잔조차 마음놓고 마시지 못하고 유천의 눈치나 힐끔힐끔 봤다거나 한 것은 절대 아니다. 청도가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들면서 예의 그렇듯이 씩 웃는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아, 좋아, 좋아. 아주 좋아! 유천인지 뭔지 하는 패거리놈들이 사라져서 이젠 차 한잔을 마 시면서도 누가 노려보지나 않나 하고 눈치보는 일 따위는 완전히 없어져 버렸잖아? 아주- 좋아!" ...쳇. 이 놈이 꼭 남의 생각을 읽고 나서 맘먹고 딴지를 걸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하네...나 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청도에게 말했다. "야! 우리가 언제 유천이네 패거리의 눈치를 봤냐!" "에이- 솔직히 우리가 녀석들은 항상 의식했던 건 사실이지. 언제나 학교 내에 있을때면 주위에 유천네 패거리가 있나 없나 두리번거리고, 혹 유천네 패거리가 눈에 띄기라도 하면 힐끔힐끔 의식하면서 그네들을 쳐다보고 그랬잖아?" 청도가 내 말에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그건 눈치보는 게 아니라 단지 조심성 있게 행동한 거라고!" 나는 청도의 말에 반박했지만 요령이까지 청도의 편을 들고 나섰다. "원래 힐끔힐끔 쳐다보고 이러는 걸 그냥 쉽게 '눈치 본다'고 표현하지 않나...?" "아냐! 난 단지 주의했던 거라고! 신경이 조금 쓰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눈치를 봤 다고까진..." "알았어, 알았어. 그렇다고 '치고' 관두자, 관 둬. 요령아, 너도 그쯤 해 둬. 지가 아니라는데 어쩌겠냐" 청도는 귀찮은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아니, 관두자고 말하면서 '치고'에 강세 를 두는 이유는 도대체 뭔데? 나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청도를 바라보았지만 청도는 그저 씩 웃을 뿐이었다. 에라, 그래. 관두자. 솔직히, 내가 눈치를 조금 봤던 것은 사실이니까. ...라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옆에서 주희가 복장을 긁는다. "맞아. 영준이 오빠가 눈치 많이 많이 봤어" "도대체 니가 뭘 안다고 떠드는 거냐!" 아니 도대체 내가 눈치를 봤는지 가물치를 봤는지 시금치를 봤는지, 날 따라 학교에 나온 지 일주일도 채 안 된 주희 니가 어떻게 안다는 거냐! 나는 순간적으로 흥분해서 핏대를 세 우며 말했고 주희는 움찔하더니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우...우우..." 그리고 옆에서 요령이와 청도가 수근대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한테 계속 당해서 속으로 단단히 삐졌었나봐" "그래, 그렇겠지. 근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무 죄도 없는 주희한테 화풀이를 하고 그러 냐?" "그러게 말야. 어우, 소심해" 이것들이 오늘 누가 내 혈압을 올려 죽이는지 내기를 했나...! 나는 두근거리는 이마를 감 싸쥐며 눈을 부릅뜨고 청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청도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돌 렸다. "아악! 쳐다보지마! 우리 어머니께서 소심한 놈하고는 눈도 마주치지 말랬어!" "이것들이 근데...!" 그런데 안 그래도 회오리치는 내 마음속에 기름을 부으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었는지, 계속 들썩거리던 주희가, 내가 사과를 안하자 마침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씨이이이잉!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우아아아앙-!" "야! 넌 또 뭘 잘했다고 우냐!" "우아아앙! 오빠 나빠! 왜 소리를 질러! 우아앙!" "아, 저, 거시기, 그 뭐냐, 그게 말이다..." 나는 더듬더듬 되도 않는 말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나 이거 돌아버리겠네에에엑! 정신이 점차 제어불능의 세계로 빠져들려 하고 있다...이거 죽겠구만! 그렇다고 여기에서 더 욱 화를 냈다간 나는 정말이지 '사소한 걸로 돌아버리는 소심하고 위험한 녀석'으로 낙인이 찍혀 버릴 것이다. 그런 최악의 상황은 절대 바라지 않기 때문에 나는 이를 악물고 간신히 표류하려 하는 내 머릿속을 붙잡아 놓았다. 하지만, 세상은 참으로 나에게 비협조적이었다. 갑자기 세상이 뒤집히면서 내가 복도에 엎 어져 버린 것이다. -빙글! 콰당! "우아악! 아야! 이건 또 뭐야!" "이 싸가지 없는 형아! 왜 우리 누나를 울리고 그래!" ...한수의 짓이었다. 얼씨구, 이제 가지가지 하는구먼 그래! 나는 눈을 부릅뜨며 벌떡 일어 섰다. 주위에는 이미 수 십명의 학생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우리 주위를 빙 둘러싸서 우리 를 구경하고 있었다. "야, 저 여자애 봐. 아주 펑펑 우는데?" "응, 저 얼굴 벌겋게 변한 남자가 울렸나봐" "세상에, 맙소사, 지 주제를 알아야지" "저것 봐, 저 꼬마애를 노려보는데, 설마 저 애를 때리는 거 아냐?" "에이, 설마! ...아니지, 여자를 울린 녀석이 무슨 짓이든 못 하겠어? 그런데, 왠지 저 녀석 어디에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주위에서 요란하게 웅성대는 소리. 청도와 요령이의 과장된 수근거림. 펑펑 눈물을 쏟아대 는 주희와 알아듣지도 못할만큼 빠르게 내게 따져대는 한수. 땀을 뻘뻘 흘리며 어떻게 해서 든 사태를 수습해 보려는 가람이. 이, 이대로는... 이 난국을 타개할 방법이 필요해! 나는 잠깐 고개를 푹 숙였다가 번쩍 들면서 실실 웃었다. "에헤헤헤...이 싸가지 없는 것들..." 나는 실실 웃으며 주머니를 뒤져서 치우한님의 칼을 꺼냈다. 그리고 힘을 가해서 치우한님 의 칼을 나의 부채로 바꾸었다. "그래, 끝장을 보자 이것들아. 으헤헤헤...!" 그리고 나와 상황을 이해 못해서 어리둥절해하는 구경꾼들을 제외한 모두는 끔찍한 표정을 지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이런! 쟤 왜 저러냐?" "너무 궁지에 몰려서 이성을 잃었나봐!" "이런! 그게 말이 돼?" "여...영준이 오빠가 미쳤나봐! 우...흐욱...!" 이것들아, 이제 좀 놀랐냐? 나는 킬킬대면서 나의 부채를 활짝 펼쳐 들었다. 이제 상황은 완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었지만, 여기에서 부채를 접고 '쫄았냐 자식들아? 우헤헤헤!'라고 말하기엔 지금까지 내가 당했던 것들이 너무 아깝게 느껴진다. 나는 광기 어린 웃음을 흘리 며 중얼거렸다. "으헤헤헤...! 나-아쁜 자식들... 싹 쓸어버려 주지..." 그런데 내 말을 들은 청도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쓰게 웃으며 가람이에게 말한다. "이, 이런...! 설마 장난 좀 쳤다고 저렇게 이성을 잃어버릴 줄이야! 가람아, 기절시켜라!" "거절. 주인의 몸에 어떻게 손을 대나" "요령아. 기절시켜!" "...역시, 그래야겠지?" "무...무슨?" 요령이의 말에 깜짝 놀란 내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면서 주춤주춤 물러나려는데, -휘릭! 갑자기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이 내 온 몸을 휘감는 듯한 느낌이 나면서 내 사지가 허공에 꽉 붙들려 버렸다. "요령이 누나! 내가 잡아놨으니까 얼른 기절시켜!" 다급한 한수의 목소리. "오케이! 꽉 잡아놔!" 쉬릭! 청도의 옆에 서 있던 요령이가 손가락으로 한수에게 오케이 사인을 보내며 바람같이 사라지더니 다음 순간 내 눈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요령이는 내 눈을 똑바로 보면서 말했 다. "안 아프게 기절시킬 테니 걱정 마라- 하긴, 이성을 잃었으니 지금 상황따위는 기억도 못 하겠지?" "이, 이것아! 이건 연기..." -뻐억! 안타깝게도 내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내 배엔 요령이의 날카로운 끊어치기가 꽂혔고, 나는 눈을 부릅뜨며 숨 넘어가는 소리를 내뱉었다.. "쿠억!" "어라, 한 방으로는 기절도 안 하네? 너무 살살 때렸나? 하긴, 어차피 깨어나도 기억도 못 할 텐데 좀 더 세게 때려볼까?" 순간, 나는 보았다. 주먹을 뒤로 쭉 뻗으면서 나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던 요령이의 얼굴을. 요령이는, 분명히 웃고 있었다! "너, 너 지금 설마 내가 일부러 이러는 거 다 알면서도..." -뻐억! ...나쁜 것. 나는 배에 극심한 고통을 느끼면서 고개를 숙였다. 세상이 컴컴해지면서 정신이 점점 멀어져갔다. 얼마나 기절해 있었을까.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자 회색의 컨테이너 천 장과 파르스름하게 빛나는 길쭉한 형광등의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컨테이너 안이군. 흠. 나 는 지금 컨테이너의 생활방 안에 누워 있는건가? 나는 배를 슬쩍 문질러보았다. 요령이가 어떤 교묘한 방법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다행히 배에 멍이 들어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 행이군. "일어났나" 내 옆에 앉아있었던 가람이가 깨어난 나를 반기며 말했다. "그래, 요령이가 내 배를 때리는 걸 네 녀석이 안 말린 덕분에 이제서야 깨어났다, 임마" 물론 반 장난으로 한 소리이다. 하지만 내 말에 가람이는 정말로 미안한 듯 얼굴색을 달리 하며 대답했다. "아, 저, 그건, 미안하다. 하지만 난 그 당시의 상황에 미루어봤을 때 차라리 주인을 기절시 키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해서..." "됐어, 임마, 농담이야" 나는 웃음으로 가람이를 안심시키며 생활방 밖으로 나갔다. 컨테이너의 테이블을 가운데에 두고 요령이, 청도, 주희, 한수가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다. 나는 잠시 녀 석들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잠시 후, 요령이가 시계라도 보려 했는지 고개를 돌리다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반갑게 말했다. "어, 깼냐? 어때, 몸은 좀 괜찮냐?" "...너같으면 배 맞고 기절했는데 괜찮겠냐?"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해 주었다. "야, 말투가 왜 그러냐? 혹시 화났냐?" "났으면 어쩔거고 안 났으면 어쩔건데" "났으면 화 풀고 안 났으면 말어" 요령이는 태연하게 대답해고 그래서 나는 정말로 좀 화가 났다. 아니, 사람을 기절시키고도 어떻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안하냐? "야, 너 내 배 때릴 때 내가 제정신이었다는 거 알았지?" "어? 어" 요령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아아아악-! 역시 그럴 줄 알았어! "그러면 왜 내 배를 때린거냐?" "아, 그거. 그냥 장난 좀 친다는 게 이상하게 일이 꼬여서 커지더라고. 그래서 그냥 배 한 대 때리고 끝내려고 했지" "야! 니가 사람이냐?" "그럴 리가 없잖아" 요령이는 주위를 의식해서인지 평소처럼 '고양이잖아'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나는 화가 나 서 입을 꾹 다물고 요령이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요령이는 그제서야 조금 당황한 듯 물었다. "너 진짜로 화났냐?" "......" "아, 젠장, 속 좁은 놈. 진짜 화 났나보네? 화 났으면 풀어, 장난이야, 장난" 요령이는 손을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했지만 나는 여전히 요령이를 말없이 노려보았다. "아이-진짜, 화 풀으라니깐?" "......" "야, 화 안 풀래?" 요령이는 내가 계속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슬슬 짜증이 나는지 볼을 부풀리더니 이윽고 내 게로 다가와 내 멱살을 쥐고 흔들어댔다. "야! 얼른 입 열어! 어? 사람 짜증나게 할래? 말하라고! 어? 말 좀 해 보라고옷-! 하여튼 사내자식이 쪼잔하게 자꾸 이럴래앳?" 흔들흔들! 머리가 힘없이 덜렁덜렁 흔들리면서 세상이 위아래로 이리저리 오가고 숨이 턱턱 막힌다. 나는 숨을 몰아쉬면서 요령이에게 황급히 소리쳤다. "알았어! 알았어! 알았으니까 한 번만 살려줘 제발!" 툭, 요령이는 내 말이 끝나자 손을 툭, 툭 털면서 말했다. "쯧, 자식, 삼십 초도 못 버틸 거면서 뻗대긴 왜 뻗대?" "...이런 젠장...나 기절상태에서 깨어난 지 30분도 안 지났다고. 미안하다는 녀석이 멱살을 잡고 흔들어대냐?" 나는 목을 싸잡고 쿨럭거리면서 요령이를 흘겨보았다. 옆에서 청도가 다가오더니 내 어깨 를 툭툭 치면서 위로하듯 말한다. "야, 괜찮아, 괜찮아. 한 두 번 당해보는 것도 아니잖아? 그냥 '내 팔자가 더럽게 사나우려 니'하고 넘어가라고" 그래, 니 말만 따라 나도 그냥 넘어가고 싶다. 니가 그렇게 재밌다는 듯 싱글벙글 웃지만 않는다면 그냥 넘어가고 싶다 이놈아!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 임마. 왜 얌전히 있는 사람한테 시비를 걸고 그래?" "......" "왜 대답이 없어? 어디 말해봐! 왜 가만히 있는 사람한테 시비를 걸고 그랬어?" "...그냥 재밌으라고" 전혀 죄책감없이 씩 웃으며 대답하는 청도의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어째 청도 저 녀석은 장난기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늘어가는 것 같냐. 하긴 원래 조용한 녀석은 아니 었지만. 그런데 옆에서 주희가 또 다시 끼어들었다. "응, 맞아. 청도 오빠는 그냥 재밌으라고 그런거래" "알았어, 주희야. 나도 들었어" 나는 청도의 말을 친절하게 내게 전달해주는 주희에게 말했다. 아, 주희와 한수가 왜 여기 에 있냐고? 주희, 그리고 한수는 요즘 매일같이 우리를 따라 학교에 나온다. 집에서 단 둘이 있으면 심심해 할 것 같아서 우리가 학교에 데리고 오기도 하고, 우리가 같이 가자고 말을 하지 않아도 주희나 한수가 알아서 따라오기도 하고 뭐 그런 식으로 말이다. 하여튼 컨테이 너가 북적거리니까 좋긴 한데, 이렇게 사람들이 많으니까 이제 약간 좁은 듯한 느낌이 들기 도 한다. "그런데 누가 여기까지 나를 업고 온 거냐, 도대체?" 나는 궁금해서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기절한 나를 누가 컨테이너까지 업고 왔을까? 꽤 힘들었을텐데.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이 손을 들었다. "내가" 한수였다. "농담하지 말고" "진짜야" 그리고 나는 순간적으로 머리가 하얗게 변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뭐? 네 녀석이 들고 왔다고? 간신히 정신을 수습한 나는 천천히 물었다. "설마 너 염..." "응, 염력으로 허공에 띄워서 들고 왔어" 으어억! 나는 생각하기 싫었던 끔찍한 대답에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다 결국 소리를 빽 질렀다. "야, 이 멍청한 꼬맹이놈아! 니가 그렇게 염력으로 나를 들고 다니면 '우리는 특이한 인간 들이니까 우리한테 관심 좀 가져주세요'하고 광고를 하고 다니는거랑 뭐가 다르냐!" "어차피 학교 신문에 얼굴 다 나왔으면서 뭘 또 새삼스레..." "...그거랑 그거랑 같냐! 그나마 모르던 애들이라도..." "됐어. 이제 형들 모르는 사람들 우리 학교에 없어. 뭘 새삼스럽게 그래?" 한수는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나는 한수의 대답에 큰 충 격을 받고 멍하니 허공만을 바라보았다. 뭐? 이제 나를 모르는 사람이 학교에 없다고? 나는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고 청도에게 물었다. "...방금 전에 한수가 한 말이 사실이냐, 청도야?" "어" 청도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대답했고 그래서 나는 절망 섞인 눈으 로 한숨을 푹 쉬었다. "아아아- 이제 내 대학생활은 끝장이야! 어쩌면 좋단 말이냐- 에휴우우우우!" 내 낙담한 모습에 청도가 나를 위로하듯 내 머리를 헤집으며 말했다. "야, 괜찮아, 힘내, 힘내. 군대라도 갔다오고 나면 다들 잊어버릴거야 " "니가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아아아!" "알았어, 알았어. 내가 아까의 일도 사과할 겸 먹을 거라도 한 번 사면 될 거 아냐. 기분 풀어, 임마" 청도는 씩 웃으며 내게 말했다. 참, 저 녀석은 이해가 될 듯 하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인 간이다. 내가 전교에 얼굴이 알려졌다는 것은 저 녀석 역시 전교에 얼굴이 알려졌다는 뜻인 데, 뭐가 좋다고 저렇게 싱글벙글거릴까? 하여튼 청도 저 녀석은 정말 너무 낙천적이라서 탈인 것 같다. 어쨌든 청도는 그렇게 입가에 미소를 띄며 물었다. "마침 집에서 용돈 부친 것도 뽑아 왔으니까 맘껏 시켜라. 뭐 먹고 싶냐?" "오랜만에 회가 한 접시 먹고 싶어" 요령이의 말에 청도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대답했다. "안 돼, 요령아. 지금은 네가 먹고 싶은 걸 사는 게 아니라 영준이가 먹고 싶은 걸 사는 거 란 말야. 자, 영준아, 뭐가 먹고 싶냐?" 사실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입맛이 싹 떨어져서 먹고 싶은 것도 별로 없다...그냥 너 먹고 싶은 거나 먹어라. 나는 힘없이 대답했다. "나도 그냥 회나 사줘라" 그리고 청도의 얼굴은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당연한 소리지만, 회가 값이 얼만데 그걸 사 달라고 해서 막 사주겠냐. 나는 약간 청도의 태도를 즐기면서 물었다. "뭐해? 먹고 싶은 거 마음대로 다 시키라며?" 하지만 청도는 그렇게 만만찮은 녀석이 아니다. 청도는 회심의 미소를 짓더니 내게 말했다. "그래? 좋아, 요즘은 배달시켜주는 횟집도 있나보지? 아니, 배달시켜 주는 횟집은 있구나. 배달시켜 주는 횟집 전화번호가 이 동아리방안에 있었던가? 능력 있으면 찾아서 시켜, 찾아 서!" ...쳇. 믿는 구석이 있었군. 하지만 요령이는 청도의 말에 별 것 아니라는 듯이 컨테이너 구 석의 캐비닛을 뒤지더니 무언가를 들고 왔다. "...그게 뭐냐?" 그것은 작은 수첩이었는데, 꽤나 두꺼웠다. 요령이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 주위 음식점들 전화번호 스티커 모아놓은 스티커 모음 전화번호부.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사람들이 스티커를 나누어 주거나, 혹은 학생회관 앞을 지나치거나 할 때마다 이 수첩 에 스티커를 붙여서 모았지. 이건 그런 내 노력의 결정체야" 그리고 청도는 질렸다는 듯 쓰게 웃으며 말했다. "요령아" "왜?" "넌 정말 대단해" "칭찬이지? 고마워" 물론 당연한 소리지만 누가 들어도 칭찬은 아니다. 요령이도 그 사실쯤은 이미 알고 있을 터였다. 어쨌든 청도는 자기가 한 말을 뒤집을 수는 없기에 쓴 약을 먹는 표정을 지으며 수 첩을 뒤져서 전화번호를 찾았다. 전화번호는 금방 나왔고, 곧바로 전화를 걸어서 모듬회 한 접시를 시킨 요령이는 전화를 끊고 느긋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 기다렸다 먹기만 하면 되겠네. 근데 확실히 대학가가 싸긴 싸" "...괜히 뭐 사주겠다는 말은 꺼내가지고...젠장..." 그리고 얼굴이 퀭해진 청도는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한다는 듯한 얼굴로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아 버렸다.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었지만, 스티커에 씌여져 있던 회 한 접시의 값이 상 당히 비쌌던 것이다. "이런 젠장...이제 난 파산이야" 청도는 슬픈 눈으로 중얼거렸다. 그러기에 왜 되지도 않는 말을 꺼내고 그러냐. 쯧쯧. 그리 고 요령이는 그런 청도는 우습다는 듯 바라보더니 청도의 등을 후려쳤다. 철썩! "으아악!" "야, 자식아, 쫄지 마, 임마! 장난 한 번 쳐 본 것 뿐이니까. 방금 전에 횟집에 전화 한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라. 그냥 빈 전화기에 대고 말한 거니까. 양심이 있지, 어떻게 이런 걸 사먹겠냐. 안 그래?" "......" "흐흐, 녀석, 내 마음 씀씀이에 감동해서 말도 제대로 못 하는구나?" 내가 보기에 청도는 단지 고통에 몸부림치느라 입도 제대로 열지 못 하는 것 같은데? 요령 이는 청도가 말을 못하는 이유를 나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나보다. 뭐, 자기 받아들이기 나 름이지. 어쨌든 청도는 고통에 부들부들 떨면서도 요령이의 말을 듣고 얼굴에 잔뜩 둘렀던 먹구름을 걷었다. "그냥 자장면에 탕수육이나 먹자. 그 정도라면 부담할 수 있겠지?" "와! 나 탕수육 디게 좋아하는데!" 주희가 환하게 웃으며 팔짝 뛰었다. 그리고 청도는, '그의 본심을 모르는' 사람은 별 거 아 닌 말로, 하지만 '그의 본심을 아는' 사람은 닭살을 쫙 세울만한 말로 주희에게 말했다. "좋아? 니가 좋으면 나도 좋아. 그럼 그걸로 먹자" 잠시 후 요령이는 '이번엔 진짜야'라고 말하면서 중국집에 전화를 걸어서 자장면 네 그릇과 곱빼기 한 그릇, 그리고 탕수육 한 접시를 시켰다. "왜 하나는 곱빼기냐?" "내 거" 내 물음에 요령이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리고 너무도 태연한 요령이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남 생각은 안하냐?'는 타박 대신 결국 이렇게 대답했다. "...얼른 다시 전화해서 하나 더 곱빼기로 바꿔" "내것두!" "누나, 그렇게 많이 먹을 수 있어?" 주희의 말에 한수가 기가 막히다는 듯 물었지만 주희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 했다. "응응, 너랑 나눠먹으면 되지, 너 자장면 좋아해도 곱빼기로 시키면 잘 못 먹잖아" 어쨌든 그렇게 해서 배달을 마치고, 우리는 테이블 주위에 둘러앉아서 배달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너희들 부모님은 너희들이 그렇게 매일같이 집 밖으로 나가서 놀아도 걱정하시지 않니?" 청도가 할 이야기가 없었는지 한수를 바라보며 화제를 꺼냈다. 으윽! 저건 민감한 화제인 데! 물론 청도가 한수와 주희가 단 둘이서 사는지를 알 리가 없다. 아직까지 한수의 집안사 정에 대해서는 제대로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으니까 말이다. 물론 나도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주희는 청도를 향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부모님?" "응, 너희 아빠, 엄마. 주희야, 너 맨날 놀러 다니면 아빠, 엄마한테 안 혼나?" 청도는 주희를 향해 친절하게 풀어서 다시 설명해 주었고 주희는 그런 청도의 말에 알았다 는 듯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 아빠랑 엄마? 괜찮아, 한수랑 나는 아빠 엄마랑 같이 안 살아. 그래서 심심해. 그래서 맨날 여기 놀러오는 거구. 아빠 엄마 없어서 우리는 안 혼나. 헤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주희의 말에 청도는 꽤나 충격을 받았는지 입을 조금 벌 리며 다시 물었다. "아, 아빠 엄마가 안 계시다고?" "응. 왜?" 주희는 오히려 청도의 반응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되물었다. 그리고 청도는 주희가 자신의 반응을 이상하게 생각하자 황급하게 태연한 척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 답했다. "아, 아무것도...아니야" "왜, 고아들이라서 이상해? 소년 소녀 가장들이라서 불쌍해? 걱정하지 마, 형보다는 앞가림 잘 하면서 사니까" 한수가 청도의 반응에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청도는 여전히 당황스럽다는 얼굴 로 한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들, 정말로 부모님이 없냐?" "방금 전에 내가 한 말이 외국어는 분명히 아니었는데" 다시 한 번 한수가 차갑게 대답했다. 그리고 청도는 이제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수 와 주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런...괜한 것을 물어봤군. 미안" "아니, 됐어. 별로 슬플 것도, 아플 것도 없는 이야기니까. 내가 여타의 멍청이들처럼 감상 에 젖어서 쓸쓸한 표정이라도 지을 거라고 생각했나? 집어치워. 내 나이는 고작 일곱 살에 불과해. 그 사람들의 얼굴조차 기억이 날 리가 없다고. 누나는...가끔씩 그 사람들을 생각하 곤 하지만..." 한수는 잠깐동안, 비록 아주 잠깐동안이지만 주희를 바라보며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 만 한수는 곧 원래대로 차갑고 냉정한 얼굴로 돌아와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나한테는 부모님에 대한 감정이 전혀 없다고. 그러니 전혀 미안해 할 필요가 없지. 이제 주희누나도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슬퍼하지 않는 것 같고" "...그래?" 청도는 한수의 대답에 씁쓸하게 웃었다. 아마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마 녀석이 무지하게 심각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상당히 씁쓸했을 것이다. 잠 시 입을 다물고 있던 청도는 이윽고 입을 열어서 한수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기분 나쁘지 않다면 나도 궁금한 것들을 좀 더 물어볼까" 흠? 이 녀석이 왜 이러나? "야, 그만 하지? 아무리 기분 나쁜 이야기가 아니라고 해도..." 내가 옆에서 청도의 좀 도가 지나친 듯한 행동을 말리기 위해 속삭였지만 청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됐어. 괜찮다잖아. 난 한수 이 녀석과 주희가 단 둘이서만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하 다고. 나쁜 뜻을 가지고 묻는 것도 아닌데 뭐 어떠냐. 그리고 혹시 이야기들을 들어보고 도 와줄 점이 있다면 도와줄 수도 있겠지. ...물론 한수 이 녀석은 필요 없다고 하겠지만" "물론이야. 난 형한테 도움을 받을만한 일도, 도움을 받아야할 필요도 없어. 하지만 뭔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면 얼마든지 물어봐도 좋아. 물어보는 건 형의 자유니까" 한수의 말에 청도는 씩하고 웃더니 물었다. "너희 부모님은 아버님, 어머님 두 분 다 돌아가신거냐?" "아니. 어머니는 나를 낳다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도망가셨어" "...도망? 왜?" 청도가 의아한 듯이 묻자 한수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누나와 내가 무서워서" 118 청도는 생각지도 못했던 대답에 적잖이 놀란 모양인지 몸을 움찔거렸다. 나도 놀라기는 마찬가지다. 한수는 전에 '착한 어린이 연기'를 할 때 나에 게 자신의 아버지가 집을 나갔다는 것은 말했지만 그 때 자신의 아버지가 왜 한수와 주희를 버리고 도망쳤는지, 그 이유는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래서 나는 한수의 아버지가 집을 나간 이유가 단순히 아내가 죽은 후 정신 지체아인 딸과 아직 핏덩이인 아들을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어서...인 것쯤 으로 지레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수가 지금 한 말은 너무도 충격적이 었다. 뭐? 자기 자식들이 무서워서 도망쳤다고? 그게 말이 되나? 그리고 어떻게 한수는 그런 말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할 수 있는 거지? 청도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무엇이 이해가 안 되는 걸 까? 자식을 무서워한 아버지가? 아니면 그 말을 태연하게 하는 한수가? 어 쩌면 둘 다 일지도 모르지. "너희 부모님은 뭘 그렇게 무서워하셨던 거지? 특별히 너희 부모님이 너 만 보면 무서워할 그럴 일이라도 있었던 거냐?" "특별히 그런 건 아냐. 단지 내가 태어난 다음에 워낙 유별나게 초능력으 로 이것저것 때려부수면서 놀고, 게다가 국제 초능력자 협회에서 '네 자식 놈을 내놔'하는 식으로 나오고 하니까 우리 아버지도 더 이상 견디기 힘들 었던 거지. 뭐, 가장 큰 이유는 이런 게 아니었지만 말야" "...가장 큰 이유는 뭔데?" "몰라도 돼" 한수의 짧고 간단한 대답에 청도는 잠깐 당황해하다가 되물었다. "자유롭게 물어도 된다며?" "후후, 형이 무언가를 착각한 모양인데, 묻는 건 형 자유라고는 했지만 대 답을 다 해주겠다고 하지는 안 했어" 한수의 대답에 청도는 뭔가 불만족스러운 듯한 얼굴로 잠깐 생각에 잠겼 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은 너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거냐? 어떻게 생활을 꾸려 가는 거지? 한수 네가 돈을 벌기엔 넌 너무 어리고, 그렇다고 주희가 돈을 벌어올 리도 없고..." "우리 할머니가 돈이 꽤 많거든. 그래서..." 전에 한수가 '착한 어린이 연기'를 할 때 분명히 한수는 자신의 할머니가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서 도와준다고 했었다.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나보 군. "...그래서 우리가 적당히 할머니를 겁줘서 돈 몇 푼이나마 뜯어내서 살아 가고 있어" "아, 그렇구나...뭐?" 청도는 한수가 뭐라고 말했는지 처음에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 알았 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잠시 후 한수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를 깨 닫고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나 역시 한수의 말에 경악으로 입을 크게 벌 리며 한수를 다시 바라보았다. 도대체 저 꼬마 녀석, 자기가 하는 말이 무 슨 뜻인지 제대로 알고 하는 말일까? 요령이와 가람이도 한수의 말에 놀란 듯 표정이 굳어 버렸다. 그리고 한수는 자신이 기대했던 반응 -우리가 경악에 휩싸이는 것- 이 나오자 기분이 좋아졌는지 슬쩍 웃으며 내게 물었다. "뭘 놀라고 그래?" "너...너 전에는 분명히 너희 할머니가 단 둘만 사는 너희들을 불쌍히 여 겨서 너희의 생활을 도와준 거라고 했잖아...?" "도와주긴. 할머니가 미쳤어? 우리를 불쌍하게 여기게. 할머니는 어떻게 해서든 우리와 가까이 하고 싶지 않아 한다고. 그 때 내가 할머니가 우리 를 불쌍히 여긴다고 말했던 것은 그 때 내가 연기하던 거였으니까 거짓으 로 둘러대서 말한 거였지. 사실은 그냥 할머니한테 돈 몇 푼이나마 뜯어내 면서 살고 있어" 한수는 너무나도 태연한 얼굴로 지독한 말을 해댔다. 우리 모두가 한수의 말에 놀라서 입을 열지 못하자 한수는 한심하다는 듯 코웃음치며 말을 이 었다. "흥, 그래도 할머니는 우리가 같이 사는 것보다는 다만 얼마라도 가지고 집을 나가는 게 백 배는 마음이 편할 걸? 할머니는 아마 우리와 함께 살면 서 매일같이 벌벌 떠느니 껌 값도 아닌 돈 몇 푼 쥐어주고 집밖으로 내쫓 는 게 훨씬 나을 거라고 생각할거야" 한수의 말에 청도는 잠시 한수를 바라보다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너희 할머니도 너희를...?" "그래, 형 생각이 맞아. 우리 할머니도 우리를 끔찍이도 무서워해. 당연한 소리지. 자신을 무서워하지도 않는 상대에게 협박을 해봤자 먹힐 리가 없 잖아?" "...그건 역시 너 때문이고?" "내가 아까 우리 아버지가 나를 무서워했다고 했던가?" 청도의 말에 한수는 대답 대신 되물었다. 그러고 보니 한수는 아버지가 정말로 무서워했던 것은 따로 있었다고 했었다. "그럼, 너를 안 무서워하면, 뭘 무서워했다는 거냐? 설마 주희를 무서워했 다는 거냐?" "글쎄? 뭐 아까도 말했다시피 내가 말해줄 이유는 없지" 한수는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이죽거리더니 말했다. "그래도 나는 양심적인 거야. 사실 우리 할머니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부자라고. 내가 옛날에 영준이 형한테 우리 할머니가 어떻게 사 는지 설명했었지? 그게 대강 맞다고 보면 돼. 우리한테 주는 돈은 우리 할 머니에게 있어서는 껌값 중에서도 껌값에 불과하다고. 사실 내가 뜯어내려 면 평생 먹고 살 돈 정도는 간단하게 뜯어낼 수 있었어. 그나마 내가 마음 씨가 좋아서 이 정도만 하는 거지" "맞아. 우리 한수는 착해" 옆에서 주희가 한수의 말에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흠, 주희는 지금 한수가 우리와 무슨 내용의 대화를 나누었는지 알고 있기나 한 걸까? 주희는 좋겠다, 세상을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어서. 주희의 말을 마지막으로 컨테이너 안에서는 한참동안 침묵이 흘렀다. 아 무래도 우리가 너무 무거운 이야기만 주고 받았나보다. 흠. 이거 분위기가 이렇게 가라앉아 버리니깐 너무 답답한데. "그래서, 지금도 할머니는 가끔씩 보고 있냐?" "물론. 나도 먹고 살긴 해야 될 거 아냐?" 요령이의 물음에 한수는 마치 '너 아직도 그 일 하냐?''그럼, 나도 먹고살 긴 해야지'하는 식으로 대답했다. 할머니가 한수에 있어서는 금고나 통장 정도에 지나지 않는가 보군. 휴, 어쩌다가 애가 저렇게 성격이 비뚤어졌을 까? 옆에서 바라보고 있자면 속마음이 나쁜 녀석이 아니라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는데. 역시 어려서 너무 고생을 많이 한 것이 저 녀석에게 그림자 를 드리운 거겠지... 요령이의 짧은 질문과 한수의 짧은 대답이 끝나고,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아, 누가 이 분위기 좀 깨 줬으면 좋겠다-! 너무 답답하잖아! 누군가 이 분 위기를 깨 준다면 무지 고마울 텐데 말야! 청도는 책상에 엎드려 자신의 왼 팔을 벤 채 고개를 모로 돌려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고 요령이는 의자 에 몸을 기댄 채로 위태위태하게 뒤로 기울이고 있었다. 가장 시끌벅적한 둘이 저렇게 조용하니 원. 잠깐 침묵 속에서 각자 자신의 생각 속에 빠져들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똑똑 두드리며 외쳤다. "저기요- 주문하신 음식 왔는데요!" 음? 드디어 왔구나! 나는 문을 향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요령이는 이미 문을 향해 총알같이 달려나가고 있었다. 벌컥! 요령이가 문을 열어 젖 히자 과연 아르바이트생인지 젊어 보이는 배달원이 헬멧을 쓰고 철가방을 들고 선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요령이는 얼굴 가득 환하게 웃음을 띄며 배달원을 반겼다. "왜 이제야 오셨어요! 기다리고 오셨어요!" "아, 예...그러셨어요?" 호들갑스러운 요령이의 반응에 배달원은 당황했는지 주춤거리다 이윽고 서비스 정신을 발휘해서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정말 직업정신이 투철한 배달원이군. 요령이는 옆에서 배달원을 급하게 재촉했다. "어휴! 얼른 얼른 좀 놓으세요! 배고파 죽겠어요!" "아, 예, 예..." 배달원은 계속 재촉하는 요령이의 등쌀에 못 이겨 거의 보이지도 않을 정 도의 손놀림으로 음식을 하나씩 책상 위에 올려놓은 뒤 청도에게 돈을 받 고 재빨리 컨테이너를 떠났다. "맛있게 드시고 그릇은 문 앞에 놓으시면 이따가 찾으러 오겠습니다. 그 럼, 이만" "예, 안녕히 가세요! 뭐해? 맛있게 먹으라잖아. 얼른 먹자고. 배고파" 정말로 배가 고파서 저러는 걸까, 아니면 단지 무거워진 분위기를 조금이 라도 가볍게 만들기 위해서 저러는 걸까? 아무래도 요령이의 싱글벙글 거 리는 얼굴을 보면 전자인 것 같기는 한데. 하지만 또 혹시 모르지. 요령이 가 사실은 보기보다 속이 무지하게 깊어서 지금의 칙칙한 분위기를 조금이 라도 바꿔보기 위해서 저렇게 과장된 행동을 하는 건지 말야. 뭐,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요령이는 계속 멍하니 있는 사람들을 재촉하며 접시에 덮인 비닐랩을 찢 고 젓가락을 들었다. 뭐, 어찌 됐던 일단 배고픈데 먹기부터 하자. 나도 젓 가락을 들며 말했다. "그래, 어서 먹자. 배고프다" 내가 막 젓가락으로 탕수육을 한 점 집어먹으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무 언가를 생각하는 듯 멍하니 허공만을 바라보던 가람이가 이를 드러내며 말 했다. "지금 이런 거나 먹고 있을 때가 아니다, 주인" "뭐?" "무슨 소리야?" 요령이가 의아한 듯 가람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람이는 요령이를 바 라보며 말했다. "하여간 너는 너무 산만해서 탈이다. 조금만 집중해서 주의를 기울여 보 도록. 기감을 느껴 봐라" "...무슨 소린지 도대체..." 요령이는 도통 모르겠다는 듯 젓가락을 든 채로 잠시 눈을 감고 인상을 썼다. 그런데 그렇게 잠깐 주의를 기울이던 요령이는 갑자기 젓가락을 탁! 소리가 나도록 세게 책상에 내려놓았다. "나 이거 환장하겠네. 이번엔 또 어떤 빌어먹을 인간들인데 하필이면 뭣 좀 먹으려고 할 때 찾아와서 깽판을 놓냐?" 뭐, 뭐야? 갑자기 무슨 소리들을 주고받는 거야?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요령이가 먹을 것까지 미루고 이러는 거지? 나는 당황해서 젓가락을 내려 놓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영적인 기운을 가진 녀석들이 이리로 오고 있어. 잘은 모르겠지만 꽤 센 녀석들 같은데. 무슨 목적으로 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주의하는 것이 좋겠지" 요령이의 말에 나는 화들짝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뭐? 영 기를 지닌 것들이 이리로 찾아오고 있다고? 설마 또 유천 패거리인가? 설 마! 그렇게 당해 놓고 또 오려고! 아니면 다른 녀석들인가? 하긴, 우리를 찾아올 녀석들은 -상당히 비극적인 현실이지만- 쌓이고 쌓였으니까! 요령 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청도에게 말했다. "청도야, 목검을 챙겨 와" "그래, 잠깐만" 요령이의 말에 청도는 고개를 끄덕인 후 생활방에서 자신의 목검을 들고 왔다. 그리고 요령이는 '우두둑'하는 소리를 내며 손의 관절을 하나 하나 꺾더니 이윽고 문을 열고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나는 세 발 까마귀의 패 와 치우한님의 칼을 품 속에서 찾아서 각각 왼 손과 오른손에 쥐고 요령이 를 따라 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누구!" 요령이의 날카로운 외침이 잔디밭에 울려 퍼졌다. 컨테이너 밖으로 나온 나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해가 지지 않은 시간. 황금빛 찬란한 노을이 컨테이너 앞 잔디밭을 온통 불태우듯 물들이고 있었다. 그건 그렇 고 요령이가 말한 녀석들은 어디에 있는 거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느라 오히려 요령이가 말한 '영기를 지닌 녀석들'을 보 지 못했다. 그들은 바로 내 앞쪽 방향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컨테이 너의 반대편, 잔디밭 끝 쪽에 멀찍이 서 있었다. 지금 막 잔디밭에 들어섰 나 보다. "...이번에도 처음 보는 얼굴들이군" 그들의 얼굴을 주의 깊게 살펴본 나는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내 앞에 서 있는 녀석들은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들뿐이었던 것이다. 전부 세 명이었는데, 한 명은 여자였고 다른 두 명은 남자였다. 여자는 금발이었 는데, 나이는 잘 쳐줘야 십 대 후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며 계속 장 난스러운 미소를 입에 띄고 있었다. 흰색 티셔츠와 허리띠를 허리 왼쪽으 로 늘어뜨린, 약간 헐렁한 청바지를 걸치고 있었는데 팔에 이상한 끈 같은 것이 친친 감겨 있는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여자의 왼쪽에 서 있는 남자 는 흑인으로 머리를 깨끗이 밀고 단정한 검은 색 양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외모나 입은 옷차림과는 어울리지 않게 양쪽 귀에 귀걸이를 달고 손가 락마다 굵직한 보석이 박힌, 번쩍거리며 빛나는 반지를 끼고 있었다. 그리 고 여자와 남자의 뒤에 서 있는 남자는 무언가를 생각하는지 고개를 숙이 고 있었는데, 밝은 갈색의 머리를 어깨까지 길러서 아무렇게나 늘어뜨리고 있었으며 긴 검은색 가죽 롱코트를 입고 검은 색의 평범한 구두를 신고 있 었다. 어깨에 삐져 나온 화려한 문양의 손잡이로 봐서 등에는 검을 차고 있는 것 같았는데, 허벅지 옆 쪽으로 늘어져서 보이는 검집의 검신 부분의 너비가 손 한 뼘은 족히 되는 것 같았다. 설마 검이 저렇게 큰 건 아니겠 지? -반갑군. 요령이의 목소리가 마음속으로 들려왔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남 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머리칼 사이로 비치는 남자의 얼굴 생김 새는 꽤나 잘 생겼지만, 평소에 외모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지 수염이 아무렇게나 입 주변과 턱을 뒤덮고 있었다. 적어도 한 이, 삼 주일은 면도 를 안 한 얼굴이군. -반갑소. 우리가 올 줄은 어떻게 알고 환영을 해 주러 나온 거요? 약간은 우수에 젖은 것 같은 무색의 목소리가 우리의 마음속으로 울려 퍼 졌다. -당연한 것 아닌가? 당신들의 기감을 느꼈지. 아주 힘을 콸콸 흘리고 다 니면서 우리 왔으니까 신경 좀 쓰라고 자랑을 하고 다니던데? 설마 너희들 기를 갈무리하는 방법도 모르는 거냐? 요령이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갈색 머리의 남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 리고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군. -그렇소? 기감을 최대한 숨겼는데도 쉽사리 내 영기를 느꼈단 말이지. 흠...역시 아직 내겐 수행이 한참은 더 필요한 모양이군. "뭐, 뭣...!" 요령이가 당황한 표정으로 주춤 물러서면서 가람이를 바라보았다. "야, 들었냐?" 그리고 가람이도 결코 편치는 않아 보이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 했다. "...그래...설마 그게 기를 최대한 숨긴 거였다고...? 웃기지 말라고 해라... 허세일 거다" "하지만...저 놈 표정은 전혀 허세 같지가 않은데" "뭐, 뭐야? 지금 무슨 이야기들을 하는 거야? 저 놈이 강하다는 거야?" 내 물음은 아쉽게도 깨끗이 무시당했다. 가람이와 요령이는 너무 심각하 게 대화를 나누느라 내 말을 아예 듣지 못한 것이다. 쳇. "일단 진정하자.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도 모르지 않나" "그, 그래... 하지만 저 녀석의 말이 사실이라면..." -어쨌든 만났으니 인사를 하도록 하겠소. 내 이름은 존 캐슬. 오망성의 그 림자 기사단, 즉 스콥의 단장이지. 이렇게 만나서 반갑소. 그리고 요령이는 존 캐슬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의 말을 듣고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쉐도우 나이츠 오브 펜타그램의 단장! 마...맙소사!" 쉐도우 나이츠 오브 펜타그램...이라면 얼마 전에 요령이를 죽이겠다고 찾 아왔던, 봉을 가지고 기로 맺은 총을 쏘아대던 제임스 스나이퍼가 속해 있 는 그 단체다. 그 단체가 다시 찾아왔단 말이지, 그것도 이번엔 단장이 직 접 나서서 말야! 녀석들의 인사는 계속되었다. 이번에 들리는 굵직한 목소리는 아마 저기 서 있는, 검은색 양복의 흑인이겠지. -내 이름은 잭슨 블랙테일. 오망성의 그림자 기사단이다. -전 루나 골드리버라고 해. 오망성의 그림자 기사단이지. 이렇게 만나서 반가워! 그건 그렇고 그 쪽 꼬마 귀엽게 생겼네. 이름이 뭐니? 옆에 있는 사람은 네 누나니? 흠, 근데 거기 칼 들고 있는 사람 옆에 있는 오빠 꽤 잘 생겼는데? 후후! 악세서리를 한 흑인이 짧고 간결하게 자신의 이름만 말하고 소개를 마친 것과 반대로 금발의 여자는 계속 입에 띄고 있는 장난스러운 미소처럼 하 는 말도 장난스럽고 시끄러웠다. 요령이는 얼굴을 심각한 표정으로 굳히며 물었다. -이쪽도 우리 소개를 해야 하나? 그리고 긴 갈색머리의 남자는 고개를 들어 천천히 가로 저었다. -꼭 그럴 필요는 없소. 우리에게 필요한 '카르텔'이 누구인지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다른 사람들에게는 별로 관심 없소. "역시..." 나는 신음을 흘렸다. 역시 저 녀석들은 요령이를 죽이기 위해 이 곳까지 찾아 왔나보다! 저 녀석들이 카르텔이라는 요령이의 진짜 이름을 대는 걸 로 미루어 보아 확실해. 순간 내 마음 속에서 우리 앞에 서 있는 녀석들을 향한 적대감이 뭉클뭉클 솟아올랐다. -오망성의 그림자 기사단...스콥이라. 그래, 전에 우리에게 너희 동료 한 명을 보낸 적이 있었지? 이름이 제임스라던가 하는 그 멍청한 녀석 말야. 그 녀석은 왜 안 왔나? 요령이는 눈을 가늘게 뜨며 차갑게 물었고 갈색머리의 남자는 여전히 요 령이의 음색과 대비되는 무색의 음성으로 대답했다. -제임스, 친애하는 우리의 동지는 당신에게 당한 상처가 아직 다 낫지 않 아서 오지 못했소. 함께 오겠다고 했지만 부득불 떼어놓고 올 수밖에 없었 지. -그래? 아직도 못 일어날 정도로 그 때 입은 부상이 심했단 말이지? 그 것 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린데 그래. 그런데, 너희들은 동지가 그런 꼴이 된 모습을 보고도 나를 다시 찾아오고 싶던가? -'그런 꼴'이라니, 임무 수행중의 부상은 제임스에게 있어서 명예로운 거 야. 그리고 제임스가 당했다고 우리를 얕보지 말라구. 제임스는 혼자였고, 지금은 여기 우리 단장도 있으니깐. 아니, 단장이 나설 필요도 너쯤은 나 혼자서도 충분히 쓰러뜨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루나라고 불린 금발머리의 여자가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대화에 끼어들었 다. 하지만 요령이는 루나의 말은 깔끔하게 무시하고 긴 갈색머리의 남자, 존 캐슬을 바라보며 천천히 내가 궁금했던 것을, 그리고 요령이도 가장 궁 금해할 것 같은 질문을 던졌다. -당신들이 온 목적은 무엇이지? 이번에도 나를 죽이기 위해서인가? 그런데 존은 요령이의 말에 뜻밖에도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카르텔. 우리는 당신을 죽이기 위해 온 것이 아니오. 그리고 요령이는 의외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물었다. -호, 그래? 그거 내 예상과는 조금 다른 걸. 그러면 무슨 까닭으로 오셨 나? 존은 우리의 말에 천천히 앞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마음속으로 말을 전달 했다. 그가 눈을 쓸어넘기자 왠지 슬픔에 젖은 듯한 그의 갈색 눈이 보였 다. -우리는 당신을 데려가기 위해서 왔소. -...데려가? -그렇소. 우리는 당신을 데리고 가서, 얼마간 당신을 보호할 것이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존 캐슬의 말에 요령이 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하, 보호? 나를? -그렇소. 하지만 존의 표정은 너무도 진지하고 심각했다. 연기를 잘하는 걸까? 아 니면 정말로 심각한 걸까? -사실 원래 대로면 지금이라도 당신을 죽이는 것이 가장 옳은 길이오. 하 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역시 당신에게 너무나도 못할 짓이더군. 단지 고양이 하나라고 생각해버리면 그만이지만, 이미 당신은 인간과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잖소? 당신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당신에게 있어서나, 당신의 주변 사람들에게 있어서나 슬픈 일이겠지. 존 캐슬은 잠시 눈을 돌려 요령이 주위에 서 있는 우리를 둘러보고 말했 다. -그래서 당신을 죽이는 대신 일이 처리될 때까지 당신을 보호하기로 했 소. 그게 당신을 죽이는 것보다 더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되었거든. -...하! 지금 하는 말투는 당신이 마음만 먹으면 나를 죽이는 것 쯤은 간 단하지만 봐줬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그리고 존 캐슬은 재밌다는 듯 슬쩍 미소지었다. -물론이오. 나는 오망성의 그림자 기사단의 단장이라는 걸 잊지 마시오. "......" 요령이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저 존 캐슬이라는 녀석이 정말로 그렇게 강한 건가? 존 캐슬은 입을 다물어버린 요령이에게 재촉하듯 말했다. -자, 카르텔. 우리와 함께 갑시다. 우리가 당신을 보호해 주겠소. 그러니... -시끄럿. 요령이는 존의 말을 끊으며 존 캐슬을 노려보았다. -무슨 일 때문에 나를 데려가려 하는 건지 설명해 줘. -...그럴 수는 없소. 존은 고개를 천천히 가로 저었다. -세상에는 몰라야 더 좋은 일들이 많이 있소. 더군다나 이 일은 너무나도 큰 일이기 때문에 그 누구에게도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일이오. 그러니 그 냥 우리를 믿고 따라와 주길 바라오. 그러실 수 있소? ...아니, 그래야 하오. 그냥 아무것도 묻지 말고 우리를 따라와 주시오. 존 캐슬은 잔잔한 눈빛으로 요령이에게 호소하듯 말했다. 그리고 요령이 는 그런 존 캐슬의 정중한 태도에 조금 마음이 흔들렸는지 부드럽게 대답 했다. -내가 미쳤냐? 너같으면 믿고 따라가겠냐? -......음. 존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요령이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야. 생각을 해 봐라. 너 같은 얼마 전까지 너를 죽이겠다고 부하를 보낸 놈이 '날 믿고 따라와'라고 한다면 따라가겠냐? 대답해 봐. 따라가겠어? -...물론 내게 당신과 같은 상황이 도래한다면 나 역시 당신처럼 상대방의 제안을 거부할 것이오. 당연한 일이오. 나는 당신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어떠한 모습도 보여주지 않았으니.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기억해 두시오. 나는 마음만 먹으면 여기 서 있는 모두를 흔적도 남지 않게 죽인 후 아무 에게도 들키지 않고 떠날 수도 있다는 것을. 왜 내가 당신에게 이런 부탁 을 하겠소? 그것은 내가 당신을 존중하기 때문이오. -흥, 얼마 전까지 나를 죽이려고 하던 녀석이 이제 와서 나를 존중한다 고? 그 말을 지금 나보고 믿으라는 거야? -야! 단장님은 너 때문에 다쳐서 고통스러워 하는 스나이퍼의 모습을 보면 서 다른 사람에게 아픔을 준다는 의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됐다고. 그 래서 심사숙고 끝에 너를 살려두고 보호하기로 결정한 거고 말야. 그런 결 정에 대해 고마워하지는 못할 망정 왜 자꾸 틱틱거리는 거야? 루나가 항의하듯 요령이를 바라보며 외쳤다. 흠, 그런 사연이 있었나? 하 긴, 전에 요령이와 이야기했을 때도 저 '쉐도우 나이츠 오브 펜타그램'이라 는 단체가 수단이 워낙 더러워서 그렇지 목적이 나쁜 단체는 아니라고 했 었지. 그렇다면 그 조직에 속한 조직원들도 예상 외로 마음씨가 좋을지도 모르지. 또 알아? 저 녀석들이 요령이를 죽이려던 마음을 정말로 고쳐먹은 걸지. 하지만 요령이는 루나의 말 따위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는지 코방귀 조차 뀌지 않고 존만을 바라보며 단정짓듯 말했다. 루나라는 여자, 기분 나 쁘겠다. 아까부터 계속 자기 말이 무시당해서. -이봐, 단장 어르신. 난 너희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도저히 너희들 을 따라갈 수가 없을 것 같으니까, 너희들 그냥 돌아가라. 알아듣겠어? 난 할 말 끝났어. 그럼 이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오. 존 캐슬이 다시 한 번 간절한 눈빛으로 요령이를 바라보았지만 요령이는 막무가내였다. -싫어. 싫어. 싫으니까 그냥 가라. 응? 난 너희들을 따라가고 싶지가 않 아! -강제로 끌고 가긴 싫소. 존 캐슬의 목소리가 좀 더 낮고 나직해졌다. 조금씩 무언가 결심하는 듯 한 목소리. 요령이는 존 캐슬의 목소리에 쓰게 웃으며 말했다. -하! 이제서야 그 본색을 드러내는 군. 강제로 끌고 가긴 싫다고? 나도 자발적으로 너희들을 따라가긴 싫은데 이걸 어쩌지? 그리고 존 캐슬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슬픈 눈으로 요령이를 바라보다 이 윽고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할 수 없군. 물리력을 동원할 수밖에. 이럴 수밖에 없는 나를 용서하시 오. 이런! 드디어 싸움 개시인가? 우리는 모두 전투채비를 갖추고 앞을 뚫어 져라 노려보았다. 그렇게 터질듯한 긴장감이 잠깐동안 흘렀다. 일촉즉발의 상황! 누군가 건드리기만 하면 바로 '왁!' 소리지르면서 서로를 향해 달려 갈 것 같다. 존 캐슬을 뺀 모두가 말이다. 존 캐슬은 놀랍게도 이 상황에서 도 단지 안타까운 표정만을 지으며 우리를 바라보았다. -흥, 완전히 나를 끌고 가는데 성공했다고 단정짓듯이 말하는데, 과연 그 렇게 쉽게 끌고 갈 수 있을까? 난 네 녀석이 진짜 기사단장이 아니라고 보 는데 말야. "뭐?" 요령이의 자신감 섞인 목소리가 내 마음속으로 흘러들었다. 그리고 난 놀 라서 소리치며 요령이를 바라보았다. 요령이는 재밌다는 듯 한쪽 입술을 치켜올리면서 웃고 있었다. -무엇보다, 런던의 비밀저택 속에서 와인이나 마시고 계셔야 할 그런 거 물께서 고작 나 같은 둔갑한 고양이 한 마리나 잡으려고 이 먼 곳까지 행 차하실 리가 없어. 자기 부하나 보내면 그만이지. 그것도 기사단장이라는 사람이 후줄그레한 코트 하나 걸치고 면도와 이발조차 똑바로 하지 않고 말야. 그리고, 정말 기사단장이라면 간단하게 나를 잡아가거나 죽일 능력이 충분히 있는데도 이렇게 설득작업 따위를 하겠어? 그냥 간단하게 잡아가고 말지. 웃기지 마셔, 사기꾼 아저씨. 당신 누구야? 요령이의 말이 계속될수록 존 캐슬의 입가는 점차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요령이의 말이 끝나자, 존 캐슬은 재밌다는 듯 껄걸 웃으며 말했다. -하하! 재밌군요. 그러니까, 카르텔 당신은 믿는 구석이 있는 거였군요. -뭐? -내가 가짜일 것이다. 그리고 나, 그러니까 존 캐슬이 진짜가 아닌 가짜라 면 한 번 붙어봐도 승산이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뭐 이렇게 생각한 것 이구려. 하지만, 당신의 말은 논리도 빈약할뿐더러 모두 간단하게 반박이 가능하오. 먼저, 내가 '독일의 비밀저택 속에서 와인이나 마시고 계셔야 할 그런 거물'이라고 했소? 나를 높이 평가해 줘서 고맙소. 하지만, 난 우선 내가 거물인지도 잘 모르겠고, 당신이 나와 우리 조직에 대해서 무슨 소리 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내겐 비밀저택 따위는 있지도 않소. 그리고 내 옷 차림과 행색은 원래 이런 꼴이오. 그리고 내가 런던에서 부하를 대신 보내 지 않고 친히 이곳까지 날아온 이유는, 당연하지만, 당신이 그만큼 중요하 기 때문이오. 게다가 알다시피 오망성의 그림자 기사단의 성원은 다섯 명 아니오? 그 중 한 명은 다쳤고, 한 명은 능력이 싸움에 적합한 능력이 아 니고. 그렇다고 남은 두 명을 보내자니 둘로는 제임스 스나이퍼를 그 지경 으로 만든 상대를 절대로 쉽게 데리고 오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내 가 직접 왔소. 그리고 당신을 잡아가거나 죽일 능력이 있는데도 이렇게 설 득작업을 하는 이유는 아까도 말했지만 제임스 스나이퍼의 일을 겪으면서 역지사지, 즉 남의 입장에서 서보는 것에 대해서 조금씩 생각해 보게 되었 기 때문이오. -흥! 웃기는 소리로 둘러대지 마! 요령이는 존 캐슬의 말이 끝나자 이를 드러내며 그렇게 외쳤다. 하지만 솔직히, 내가 보기에는 요령이의 말대로 존 캐슬이 가짜라기보다는, 존 캐 슬의 말대로 요령이가 '존 캐슬이 가짜일 것이다'라는 희박한 가능성에 기 대고 있는 것 같다. 존은 요령이의 말이 끝나자 여전히 입가에 잔잔한 미 소를 띄운채로 말했다. -웃기는 소리인지 아닌지는...확인해 보면 알 수 있지 않겠소? 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콰아앙! 굉음이 울리면서 존의 주위의 잔디밭이 반경 5m 정도의 둥근 원을 그리 면서 움푹 꺼져 들어갔다. 이럴수가! 존은 아무런 기합조차 넣지 않았는데! 그는 단지 미소를 지은 채 그의 검은 색 롱 코트의 주머니에 손을 끼워 넣 고 있을 뿐이었다. 드드드...갑자기 주위의 대기에서 엄청난 압박감이 느껴 졌다. 요령이는 이를 악물면서 중얼거렸다. 기감이 약한 나에게도 존 캐슬 의 주위로 지금 엄청난 양의 기가 둘러싸여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 이런 젠장...진짜가 맞잖아...!" 요령이는 낭패감이 가득 섞인 목소리로 신음처럼 말했다. -콰앙! 다시 한 번 엄청난 진동이 허공을 울리면서 존의 주위의 땅이 다시 한 번 움푹 패였다. 주위의 대기들은 존을 중심으로 요동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존은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다. 이윽고 대기와 잔디밭의 요 동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하지만 대기를 뒤덮은 이상한 무게감은 그대로 느껴지고 있었다. 그리고 존 캐슬은 미소지었다. -당신들을 상대하는 데는 이 정도의 힘만 써도 충분하지... 당신들 정도는 내가 마음을 독하게 먹는다면 호흡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고도 충분히 제압 할 수 있소. 카르텔, 이제 내가 진짜인 것을 믿겠소? -충분히... 요령이는 끔찍한 표정을 지으며 간신히 존 캐슬의 말에 대답했다. 요령이 의 겁을 먹은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점점 불안감이 커져간다. 아니, 도대체 어느 정도로 강하기에 저 도도한 요령이가 저 정도로 겁을 먹은 티를 숨기 지 않고 내는 거지? 그런데 그 때 어느 새 내 옆에 바짝 붙은 가람이가 내 게 속삭였다. "주인. 지금이라도 요령이를 넘겨주라고 해 봤자 주인은 내 말을 듣지 않 을 테지?" "...뭐?" 이게 무슨 소리냐? 요령이를 넘겨주라고? "당연히 안 듣지,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 가람이는 내 말을 듣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주인,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위험하다고 생각되면 바로 도망쳐 라. 이건 그냥 경고하는 소리가 아니다" 가람이의 떨리는 목소리에 나는 더욱 더 불안해져서 가람이에게 황급히 되물었다. "야, 야, 저 존 캐슬인가 하는 녀석이 그렇게 강해?" 내 물음에 가람이는 끔찍하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며 대답했다. "...인간이 아니다" "뭐?"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을 이미 옛날에 뛰어 넘었다는 소리이다. 나 의 옛 주인처럼 천재가 아니면 무언가 다른 수단을 쓴 것이다. 인간이 저 럴 수는 없어..." "도대체 저 녀석이 어느 정도로 강하기에 그러는데?" "...방금 전에 존 캐슬이 낸 영력, 그것은 나와 요령이의 것에 주인의 것까 지 모두 합친 정도의 영기를 훌쩍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문제는... 그 정도 의 힘을 쓰면서도 저 존이라는 괴물은 숨소리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와 요령이도 나름대로 300년 간 쌓아온 힘인데...말이다" "......" 나는 놀란 눈으로 존을 다시 바라보았다. 아무리 바라보아도 평범한 인간 인데? 정말로 그 정도로 강하단 말야? 존은 옅게 띈 미소와 함께 요령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 이제 저항은 소용없는 짓이라는 걸 알았으리라 믿소. 나와 함께 갑시 다. 하지만 요령이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흥, 나를 데려가서 어떻게 하려는지, 죽이려는지 살리려는지 내가 알게 뭐야... 난 절대 못 가니까 날 죽이려거든 어디 한 번 해 봐. 너를 따라가느 니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고 말지... -...그렇다면 할 수 없구려. 내가 그 곳까지 걸어갈 동안 카르텔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생각할 시간을 주겠소. 내가 당신의 앞까지 도착했을 때, 그대 에게 좋은 대답을 듣기를 바라겠소. 그리고 그 곳까지 가서도 안타깝게 당 신이 부정적인 대답을 한다면... 그 때는 나를 원망하지 않기를 바라는 수 밖에 없소. 말을 마친 존은 주머니에 여전히 손을 꽂아놓은 채로 천천히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아무런 두려움이나 경계심 같은 것을 찾아볼 수가 없는 아주 편 안한 자세였다. 하지만 요령이는 그렇게 단지 천천히 걸어올 뿐인 존을 보 면서도 두려움을 느끼는지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사실 그럴 법도 하다. 저 존이라는 사람이 저렇게 방만하게 걸어오는 이유는 우리를 완전히 무시 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좋아, 어디 한 번 해보자-!" 하지만 위축되어 있던 요령이는 곧 마음을 굳게 다잡았는지 소리를 질러 두려움을 떨쳐 버리며 동시에 내게 외쳤다. "영준아! '그 활'을 꺼내서 한 방 쏴 버려!" 그리고 자신 역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별의 힘을 받는 것은 오망성, 오망성을 이루는 것은 나의 힘..." 나는 세 발 까마귀의 패를 손에 쥐고 치우한님의 칼에 힘을 가해서 '나의 활'로 만들면서 요령이의 주문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 저건 그 때 혜진 이라고 하는 마녀와 싸울 때 사용했던, 상당히 위력적이었던 그 주문이구 나! 요령이의 낭랑한 주문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나의 힘이 구현되면 어둠은 커진다! 어둠이 커지면 빛은 원을 그린다! 빛이 원을 그리면 태양은 미소짓는다! 태양의 오망성-!!!" 요령이의 주문이 끝남과 동시에 번쩍- 하고 주위를 환하게 빛내면서 요령 이의 발 아래로 백색 마법진이 그려졌다. 그리고 존 캐슬의 발 아래쪽에 부욱- 하는 굉음과 함께 둥근 반구가 맺히더니 하늘을 향해 빛의 기둥으로 솟구쳐 올랐다. 콰아앙! "성공이다!" 나는 환성과 함께 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저 쪽에서 팔짱을 끼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루나와 잭슨의 표정엔 전혀 변 화가 없다. 아니, 오히려 그들의 표정에는 약간의 흥미진진함까지 깃들어 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자신의 단장이 요령이의 저런 무시무시한 공격에 맞았는데 걱정도 되지 않나? -우우웅-! 갑자기 백색 빛의 기둥의 아랫부분이 이리저리 휘청거리더니 이윽고 격렬 히 부풀어 오르며 땅을 진동시키는 굉음과 함께 수백 가닥으로 갈라져 폭 발해 버렸다. -꽈르릉! 그리고 검은 색 실루엣이 빛기둥이 있던 자리의 뿌연 흙먼지를 천천히 헤 치면서 걸어 나왔다. 이...이럴수가? 존 캐슬은? 그는 도대체 어떻게 된 거 지? 설마 멀쩡한가? -역시 그냥 순순히 잡혀갈수는 없다는 거요? 흠, 하긴 얌전히 잡혀가면 당신도 분이 맺히겠지. 어디 당신이 하고 싶은대로 해 보시오. 연기가 걷히자 존 캐슬의 모습이 뚜렷이 눈에 들어왔다. 존 캐슬은 잔잔 한 미소와 함께 태연히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물론 손 역시 주머니에서 꽂은 그대로였다. 이럴수가! 그래도 한 가닥 하는 마녀였던 김혜진을 거의 패배 직전까지 몰고 갔던 기술인데...존 캐슬 저 녀석은 머리칼 하나 다치 지 않았잖아! 요령이는 자신의 기술이 그렇게 허무하게 소멸 당하자 패배감이 가득 담 긴 눈을 뜨고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조금은 믿었던 기술인가보 지? 나는 넋이 나간 요령이를 소리쳐 불렀다. "야! 정신차려! 지금 뭐하는 거야!" "으, 으...응?" "이대로 끌려가고 싶어? 어서 뭐라도 좀 해 보라고!" 요령이는 내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화들짝 놀라며 몸을 곧추 세웠 다. "그, 그래!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지...!" 나 역시 요령이를 깨우고 나서 나의 활을 잡아당겼다. 부르르... 익숙한 진 동음과 함께 내 왼손의 세 발 까마귀의 패에서 흘러나오는 기가 나의 몸을 통해 내 오른손의 '나의 활'로 흘러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천천히 화살 끝에 기의 덩어리가 맺히고 있었다. 그 때 내 옆에서 가람이가 빠르게 수인을 맺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 건...? 저것 역시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이윽고 가람이는 주문을 외우기 를 마쳤는지 손을 앞으로 쭉 뻗으며 외쳤다. "일반 주술로는 역시 도저히 먹히질 않겠군! 받아라, 염옥문 지상강림술이 다!" 맙소사! 중형차를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소멸시켜버렸던 그 기술, 염옥문 지상강림이다! 가람이의 고함소리와 함께 가람이의 손끝에서 엄지손가락 만한 불덩어리가 쏘아져 나갔다. 저 작은 불덩어리는 겉보기에는 우습지만 상대를 만나면 거대한 적빛 염옥문으로 변해서 상대를 집어삼켜 버리는 무 서운 불덩어리다. 저 무서운 기술을 사용하다니! 가람이도 마음을 독하게 먹었나보다. 가람이의 손끝에서 발사된 불덩어리는 빠른 속도로 가람이와 존 캐슬의 거리를 좁혀나갔다. -흠? 이번 것은 또 무엇이오? 보기엔 장난스러워 보이오만... 순식간에 존 캐슬의 앞에 다다른 염옥문. 지직, 하고 내가 있는 곳까지는 잘 들리지도 않는 소음을 내면서 잠시 멈춘다. 이제 불어나겠지- -번쩍-! 내가 기대했던 핏빛 붉은 적색의 구가 순식간에 존 캐슬을 집어삼켰다. 화르륵! 정말 무시무시한 기세다! 나는 화살 끝에 기를 모으면서도 중얼거 렸다. "설마 저기서도 멀쩡하게 나오지는 못하겠지..." 그런데, -뻐-어엉! 존 캐슬을 삼켰던 반구가 역시 부풀어오르다 터져 버렸다! 콰앙! 굉음과 함께 폭발한 반구는 존 캐슬이 서 있던 주위를 온통 불길과 홍적색 빛, 그 리고 유황냄새가 진동을 하는 연기로 뒤덮어 버렸다. 그리고 그와 함께 찢 어지는 듯한 괴성들이 들려왔다. "끼에에에엑-!" "케에에에에-!" 처절한 비명소리에 가까운 외침들. 잠시 후 시야를 뒤덮었던 홍적빛과 매 캐한 연기가 천천히 걷혔다. 존 캐슬은? 놀랍게도 여전히 그슬린 곳 하나 없이 멀쩡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존 캐슬의 주위의 잔디밭은 염옥문, 지 상강림술의 폭발과 함께 온통 불이 붙어서 이곳 저곳에서 불씨를 날리면서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내 눈에 너무나도 충격적인 장면이 들어왔다. 상당히 흐릿해져서 자세히 알아보기는 힘들었지만, 사람의 형체, 혹은 동물 의 형체와 비슷한 몇 개의 불덩어리들이 이리저리 불꽃을 뒤틀면서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서, 설마...! 지금 존 캐슬의 주머니에서는 한 손이 빠져있다. 그렇다면... 저 괴물같은 놈은 설마 염옥의 마귀들을 베어버 렸다는 말인가? 아니면 단지 내가 잘못 본 것인가? 존의 검집의 검은 아직 도 그대로 꽂혀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검을 뽑아서 베 고 다시 검집에 꽂아 넣은 걸까? 아니면 역시 착시에 불과한 걸까? 사실 존이 등에 메고 있는 저것이 검인지 아닌지도 확실치는 않지. 여하튼 나는 처음 그 몸을 뒤트는 이상한 형체의 불덩이들을 보고 너무 놀라서 하마터 면 활시위를 놓쳐 버릴 뻔했다. 물론 기겁을 하고 다시 바로 잡았지만. 존 캐슬은 여전히 우리를 향해 태연히 걸어오고 있었다. 방금 전과 달라 진 모습이라고는 단지 한 손을 주머니에서 빼고 있는 것뿐이었다. 존 캐슬 의 무색의 음성이 마음속에서 울려 퍼졌다. -내가 너무 방심을 했던 모양이구려. 설마 그 정도의 위력을 가진 공격이 그렇게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모습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소. 다음부터는 조금 더 조심을 해야... "그게 끝인줄 아느냐!" 가람이는 외마디 외침과 함께 다시 한 번 손에서 염옥문, 지상강림술을 던졌다. 아무래도 한 방으로는 안 될 거라고 예상을 하고 미리 손에다 맺 어 놓은 모양이었다. 쉬이익! 염옥문과 지상을 연결해주는 불로 이루어진 구슬이 빠른 속도로 다시 한 번 존 캐슬을 향해 날았다. 이윽고, 존 캐슬의 앞에 도착한 구슬은, 다시 한 번 부풀어오르면서... 덥썩! 하지만 염옥문, 지상강림술은 내 예상과는 다르게 부풀어오르지 못했다. 내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존 캐슬, 저 자가 손으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염옥문을 쥐어버린 것이 다! 존 캐슬은 손으로 염옥문을 받더니 이윽고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꽈릉! 나직하게, 공기를 울리면서 존 캐슬의 손에서 작은 울림소리가 공기 중으 로 퍼졌다. 울림이 사라지자, 존은 손을 펼쳤다. 그의 손에서 붉은 빛의 기 운이 힘없이 허공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가람이는 질려버렸다는 듯 입 술을 부들부들 떨면서 외쳤다. "맙소사...저걸 손으로 쥐다니! 염옥문의 지상강림을 단지 맨손으로 억눌렀 단 말인가!" 가람이는 주춤 주춤 뒤로 물러서며 외쳤다. 이번엔 다시 요령이의 차례. 요령이는 손을 크게 휘저어 커다랗게 원을 그리면서 외쳤다. "대지여 통곡하라, 암흑은 광명을 가리니, 지옥이 일그러질 때 울부짖으라 그대여, 울지 않는 자 검은 불꽃에 꿰여 불타리라! 아스타로트의 창!" 흑마술인가? 요령이는 악마와 계약을 맺지 않았다고 했으니 저것은 아마 자신의 힘을 쓰는 것 아니면 지옥에서 흘러 다니는 힘을 몰래 훔쳐 쓰는 것이리라. 어쨌든 요령이가 손으로 그린 커다란 원은 스파크와 함께 허공 에 실체화되어서 원의 안쪽에 검은 색 기운을 잔뜩 뭉치기 시작했다. "먹고 죽어버려!" 점차 거대하게 뭉쳐서 마침내 원의 테두리까지 모두 덮어버릴 정도가 된 거대한 검은 기운의 덩어리는 마침내 굉음과 함께 해일과도 같은 기세로 존 캐슬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쿠르르르릉! 이건 아까 요령이가 썼던 태양 의 오망성보다도 훨씬 기세가 무섭군! 하지만 이제 더 이상은 존이 당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는 무슨 짓을 해도 절대 다치지 않을 것 만 같았다. 이미 내 마음속에도 그에 대한 일종의 공포심 같은 것이 자리 잡아 버린 것이다. 요령이와 존의 사이에 거대한, 불길한 검은 색의 줄기가 연결되었다. 그리고 잠시 후, -...꿍! 묵직한 소음과 함께 아스타로트의 창이 그대로 허공에서 흩어지는 모습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존이 손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아스타로트의 창이 흩 어져 버린 것이다. 역시...! 나는 절망적인 얼굴로 존 캐슬을 바라보았다. 그 는 여전히 태연하게 웃고 있었다. 아스타로트의 창이 지나간 길을 따라 땅 이 깊고 길게 패여 있었다. 하지만 아스타로트의 창은 땅에 닿은 적이 없 이 오직 허공으로만 날았다. 그렇다. 아스타로트의 창은 단지 땅 위를 지나 가는 것만으로 아랫쪽의 땅에 패인 자국을 낼 정도로 강력한 주술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존 캐슬은 그 정도로 무서운 주술을 단지 한 손뿐으로 쳐냈고 말 이다! 마음속으로 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번 것은 정말 대단했소. 마음의 준비를 하고 막았는데도 손이 얼얼하 구려. 까딱 잘못하다가는 양손을 다 써야 할 뻔했소. 정말 감탄했소. 다른 주술은 없소? 아, 그리고 보아하니 악마와 계약을 맺은 것 같지는 않지만, 아무리 지옥에서 힘을 훔쳐오는 것이더라도 흑마법은 웬만하면 자제하시 오. 몸에 악영향을 끼치니 말이오. 존 캐슬이 한 대화 내용만으로 생각해보면 이 말을 완전히 요령이를 조롱 하는 듯한 내용이다. 하지만 존의 말투에는 비꼬는 듯한 음색이 전혀 없다. 한 마디로, 존은 지금 순수하게 자신이 두 손을 쓸 뻔한 정도로 위력적인 (?) 공격을 한 요령이에 대한 찬사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에 더욱 기가 막힌다. 단지 저 녀석이 두 손을 쓰게 할 뻔한 것이 칭찬거리가 된다니! 거기에다가 상대방에 대한 걱정스런 배려까지 잊지 않는다. 요령이 는 이제 기가 막히는지 헛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에라, 그냥 와서 날 끌고 가던지 말던지 네 멋대로 해봐라..." 요령이의 팔은 자연체로 서 있는 것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몸에 힘이 쭉 빠졌나보다. 이런...! 싸울 의지를 잃어버렸나? 큰일이다! 나는 '나의 활'을 존에게 들이대었다. '나의 활' 끝에 맺혀 있는 거대한 황금덩어리의 기운은 아까의 '아스타로트의 창' 정도의 두께로 커져 있었다. 단지 주술에서 나오 는 진동만으로도 온 몸이 덜덜 떨릴 정도다. "젠장...이거 제어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데!" 나는 이를 악물며 계속 힘을 모았다. 그리고 존은 내 활 끝에 달린 거대 한 기운을 바라보며 말했다. -호오...그것도 꽤나 대단하구려.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당신을 몸에 미 미할 정도의 영기밖에 축적되어 있지 않아서 무시했었소. 하지만 이제 보 니 내 생각과는 다르게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구려. 그런데 그거 안 쏠 거 요? 저...저 놈...저 자신감 넘치는 말투! 존은 내게 '쏘려면 쏴라, 그 까짓 것 겁날 거 같냐'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유천과의 대결에서 백태청 이라는 녀석이 이것보다 훨씬 작은 크기의 '활'에도 기가 죽었던 것과는 완 전히 반대되는 모습이다. 이런... 젠장할 놈! 그래, 이 정도는 우습단 말이 지! 제길! 나는 자존심이 상하는 기분을 느끼며 세 발 까마귀의 패에서 무 리하면서 힘을 끌어내어 나의 활에 쏟아 부었다. 점점 몸 이곳 저곳이 저 려왔다. 몸에서 경고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존은 주머니에서 빼고 있던 오른손을 다시 천천히 주머니에 꽂아 넣으며 의아한 듯 나를 바 라보았다. -그거 정말 안 쏠 거요? 나야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내가 조금 더 가까이 갔을 때 당신이 내게 그걸 쏜다면 폭발에 휘말려 당신들이 다칠 거요. 힘 을 더 모으는 것은 좋지만, 어차피 더 모아봤자 그게 그거요. ...나는 존의 말에 다시 한 번 울컥해서 활시위를 놓칠 뻔했다. 뭐? 힘을 더 모아봤자 그게 그거라고! ...하지만 존의 말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사실 내가 지금부터 존이 내 바 로 앞까지 올 때까지 힘을 더 모은 다음에 쏴 봤자 요령이가 방금 전에 존 에게 썼던 '아스타로트의 창' 정도의 힘이나 될 지 의문이다. 게다가 존이 내 앞까지 왔을 때 내가 이 활을 쏘면 폭발에 모두가 휩쓸려 버리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쏘면 저 녀석에게 실낱같은 충격조차 주지 못하는 것 역시 사실이고 말야. 이걸 어쩌면 좋담...?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외쳤다. "잠깐, 잠깐만 거기에서 기다려!" -뭐라고 하는 거요? 알아들을 수가 없소. "웨이트, 플리즈!" 나는 간절한 목소리로, 하지만 속으로는 들어줄 리가 없다고 반쯤 체념하 면서 존에게 외쳤다. 그런데, 내 말을 들은 존은 뜻밖의 대답을 했다. -...충고하지만, 그걸로는 절대로 나를 쓰러뜨릴 수 없을 거요. 당신 몸의 진동으로 봐서 이제 당신이 제어할 수 있는 영기의 양에도 한계에 이른 것 같으니. 어쨌든,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겠지만, 부탁이라면 잠시 기다려 드 리지. 맙소사! 나는 잠시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하고 내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방금 전의 말은 귀로 들은 게 아니라 마음 속으로 들은 것이니 잘못 들었 을 리가 없지. 세상에...적이 '너 때리게 잠깐만 기다려!'라고 했는데 기다리 겠다고...? 정말로 자신감이 너무나도 넘쳐서 주체를 못하는 건가, 아니면 말 그대로 아량이 넓어서 한 번 봐 주는 건가? 어쨌든 잘됐다. 나는 다시 한 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간절하게 외쳤다. "세 발 까마귀님, 세 발 까마귀님! 세 발 까마귀니이-임!" 세 발 까마귀는 내 애타는 부름에 바로 응답해왔다. -왜 부르는가, 영준? 아, 그건 그렇고 잘 지냈는가? "나름대로 잘 지냈어요. 그건 그렇고 어서 힘 좀 부어줘요, 힘 좀! 되는대 로 가득!" -...갑자기 뜬금 없이 그게 무슨...! 세 발 까마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느릿하게 물어왔지만 나는 세 발 까마귀의 말을 자르며 급하게 외쳤다. 이것저것 설명할 시간도 없을뿐더러, 설명하자면 너무 길어지고, 게다가 내가 아닌 요령이와 관련된 일이라는 것을 알면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도와주지 않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그 래서 나는 그냥 간단하게 외쳤다. "나한테 힘을 무한정 대 주겠다고 약속했잖아요! 얼른 힘 좀 대 주세요!" -...자네 지금... 내 마구잡이식의 말투에 기분이 상했는지, 세 발 까마귀의 탐탁지 않은 목소리가 내 마음 속으로 울려 퍼졌다. 그러고보니 조금 미안하긴 하네. 세 발 까마귀와 나의 나이차가 몇 살인데 말야. 하지만 난 지금 그런 시시콜 콜한 일에 일일이 신경 쓰고 있을 만큼 한가하지가 못하다. 사과는 나중에 하자! 나는 다시 한 번 세 발 까마귀에게 외쳤다. "자세한 일은 나중에 꼭 설명해 드릴게요, 제발! 제가 죽지 않을 정도로만 제 몸에 기를 불어넣어 주세요! 그러실 수 있겠어요?" -할 수는 있네만...꽤 고통스러울 텐데...게다가 위험하기도 하고... 계속해서 뜸을 들이는 세 발 까마귀를 보면서 나는 세 발 까마귀에게 약 간 겁을 줘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봐요, 세 발 까마귀, 내 앞쪽에 잠깐만, 아주 잠깐만 신경을 기울여봐 요! 그러면 내가 왜 이렇게 동동 발을 구르는 지 알 수 있을 테니!" 세 발 까마귀는 내 말에 호기심이 생겼는지 잠시 입을 다물더니 곧 지금 까지 전혀 다른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맙소사, 엄청날 정도로 거대한 존재감이로군. 도대체 뭐지? 인간은 아 닌 것 같은데... "인간이니까 말이 안 되는 거죠! 여하튼 이제 얼마나 급한지 알겠죠? 나 중에 자초지종은 꼭 설명해 드릴 테니 어서 힘을!" -그래...알았네. 대신 고통스러워도 꾹 참게. 자네가 자초한 일이니 절대로 나를 원망하지는 말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그럼 준비하게! 나는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양발에 힘을 꾹 주고 자세를 낮추어 안정되게 함과 동시에 몸을 서 있는 상태가 되도록 단단히 고정했다. 그리 고 활을 앞으로 똑바로 겨누었다. -이제 쏘려는 거요? 참 오래도 기다리게 하는구려. 기의 증가는 전혀 없 었던 것 같은데...고민하는 시간치고는 기다리는 사람에게 꽤 길었소. -이것만 가지고는 네 앞에 있는 녀석을 쓰러뜨리긴 힘들 것이다. 하지만 네가 바란 일이니 할 수 없지. 절대 저 녀석에게 죽지 말고, 저 녀석에게 이걸 쏜 다음에는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죽을힘을 다 해서 도망쳐라. 알았 지? 존의 느릿한 무색의 음성과 세 발 까마귀의 비장한 음성이 동시에 내 마 음속에 울려 퍼지고,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윽고 내 마음 속으로 세 발 까 마귀의 비장미 섞인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간다! "크흐아아악!" 순간적으로, 눈앞이 번쩍이면서 칼날이 훑고 지나가는 것 같은 끔찍한 고 통이 온 몸으로 동시에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내 활 앞에 맺혀 있던 황금 빛의 구가 순식간에 주위를 눈부시게 빛내며 부피가 대여섯 배는 될법하게 불어났다. -투웅! 당연한 소리지만, 나는 이 정도로 거대한 기를 절대 제어할 수가 없다. 더 구나 무시무시할 정도의 고통으로 인해서 온 몸의 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린 지금과 같은 상태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나는 활 끝에 맺힌 영기가 단 한 번 진동하는 것만으로 튕겨져 날아가 뒤쪽 컨테이너 벽에 부딪혀 버렸다. 쿵! 충격으로 인해 벽이 부르르 떨었지만 벽의 진동음은 내가 쏘아낸 영기 가 뿜어내는 엄청난 소음에 곧 묻혀 버렸다. 그리고 존 캐슬의 당황한 목소리가 내 마음 속으로 들려왔다. -이, 이건 생각지도 못한...! 쿠르르르릉! 내가 본 것은 오직 내 앞의 시야를 모조리 뒤덮어버린 황금 빛 빛뿐이다. 나는 그렇게 온 몸을 계속해서 아릿하게 자극하는 고통에 몸 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눈을 감지 않고 앞을 주시했다. 내가 쏘아낸 어마어 마한 공격이 가져올 결과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고통은 확실히 맨 처음 순 간적으로 내 몸을 휩쓸었을 때에 비하면 훨씬 약해졌지만 그래도 지속적으 로 내 몸 이곳 저곳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사실은, 최초의 고통은 너무 순간적이었고 너무 끔찍했지 때문인지 이제 기억조차 나지 않 는다는 사실이다. 우드드드- 황금색 구체가 지면을 깊숙이 깎아먹으며 존 캐슬에게로 향했다. 구체의 경로 바로 뒤에서 구체의 움직임을 보고 있는 나로서는 저게 언제쯤 존과 충돌할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렇게 오래 기다리진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잠시 후. -콰아아아앙!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들썩거리면서 주위의 모든 풍경이 황금색으로 뒤덮였다. 드디어 내가 쏘아낸 황금색 구체가 존과 부딪혔나보구나! 나는 좀 더 자세히 충돌광경을 보기 위해 몸을 앞으로 쭉 기울이다 그만 비틀거 리며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단지 몸을 일으키는 것만으로 온 몸이 극심 한 고통에 휩싸인 데다가, 방금 전의 공격으로 인해 몸에 힘이 하나도 남 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세 발 까마귀를 쥐고 조금씩 힘을 보충했다. 그 런데 세 발 까마귀에서 힘이 내게로 흘러 들어오는 길을 따라서 온 몸에 저릿한 고통이 느껴졌다. 온 몸 이곳저곳에 확실히 내상을 많이 입었나보 다. 나는 결국 세 발 까마귀로 내 영기를 충전하는 것을 포기하고, 앞쪽으 로 엎어진 채 고개만 들어서 '나의 활'과 존 캐슬의 힘의 충돌이 가져올 결 과에 주목했다. 정말이지 몸을 일으킬 힘조차 남지 않았을 뿐더러, 몸을 일 으킨다고 해도 이 상태라면 온 몸이 아파서 단 몇 초도 서 있기 힘들 것이 다. 잠시 후, 흙먼지가 사라지고, 나는 내 생각보다 더욱 참혹한 결과에 눈을 부릅뜨면서 헛숨을 삼켰다. "흐으읍! 맙소사!" 차라리 내 눈에 들어온 모습이 존의 팔이 하나가 날아갔다거나, 상반신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하반신만 멀쩡히 서 있다거나...하는 이런 종류의 참혹한 결과였으면 그나마 내가 상상했던 종류의 참혹함이니만큼 정신적 충격이 덜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 눈에 들어온 모습은 나의 상상, 혹은 기 대와는 전혀 어긋난 방향으로 벌어져 있었다. 존이 멀쩡했던 것이다! 제기랄! 나는 온 몸이 비명을 지르는 것을 느끼면서도 비틀거리면서 일어섰다. 도 저히 가만히 드러누워 있을 기분이 아니었다. 물론 곧바로 다시 쓰러졌지 만. 나는 그렇게 쓰러진 상태에서 눈을 부릅뜨고 존을 바라보았다. 나도 모 르게 입 속에서 분통어린 신음이 새어나왔다. "...크윽!" 존은 무엇인가를 밀어붙이듯 양손을 앞으로 내밀고 앞굽이 자세로 서 있 었다. 이윽고 존은 천천히 고개를 들면서 몸을 바로 세우더니 말했다. -솔직히, 정말로 놀랐소. 이 정도의 공격을 펼칠 줄이야! 주의를 기울이고 있지 않아서 하마터면 크게 다칠 뻔했소. 존은 잠시 발목을 빙빙 돌렸다. 아무래도 발목이 좀 아픈가보다. 그러고 보니 '나의 활'이 파놓은 거대한 웅덩이 앞쪽으로 두 개의 작은 웅덩이가 패여 있었다. 아무래도 존이 뒤로 밀리면서 발로 판 웅덩이인가보다. 그래 도 뒤로 조금 밀리긴 했나보군? 쳇! 존은 양손을 우두둑 꺾더니 털고 나를 바라보며 무색의 음성으로 말했다. -내게 이 정도의 공격을 펼친 사람은 정말이지 드물었소. 인정하오! 당신 은 정말로 대단하오. 하지만... 더 이상 버틸 수 있는 힘은 남지 않은 듯 하 구료. 내가 존을 공격하는 모습을 모두 지켜본 요령이는 이제 혀를 차며 중얼거 렸다. "정말...저건 사람이 아니라...괴물이다..." 존은 다시 만면에 미소를 띄며 천천히 다가왔다. 이제 더 이상 아무도 존 을 막지 못하겠지. 우리는 모두 멍하니 존이 점차 우리와의 거리를 좁혀나 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단 셋만 빼고. 주희는 불안한 얼굴로 이 사람 저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고, 청도와 한수는 심각한 얼굴로 무엇인가를 속삭이 고 있었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만 둬, 이 사람들아. 저 자는 도저히 인간이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냐...그건 그렇고 이제 거의 다 왔군! 존이 거의 우리 몇 걸음 앞까지 다가오자 가람이가 갑자기 결의에 찬 얼 굴로 양손에 기를 가득 머금으며 존에게로 달려들었다. 주술을 사용한 공 격이 통하지 않으니 육탄돌격을 할 셈인 것이다! "하아아앗-!" 파밧! 가람이는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순식간에 존의 바로 앞까지 도약해 서 주먹을 어깨 뒤로 뻗었다. 하지만... "우아아악!" 가람이는 존의 얼굴 바로 앞에서 주먹을 멈추며 그대로 비명과 함께 컨테 이너 벽으로 날아가 처박혀버렸다. 쩌어엉-! 컨테이너의 벽이 커다란 소음 을 내뱉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가람이는 벽에 매달린 채로 버둥거렸다. 아무래도 존이 벽에 매달아 놓은 것 같다. "크...크윽...제기랄...이거 내려!" -더 이상 나를 방해하지 마시오. 봐주는 것에도 한계가 있소. 존 캐슬은 가람이를 쓸쓸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무겁게 말했다. 그렇게 태 연하게 가람이를 컨테이너 벽에 '붙여' 버리고는 분위기에 눌렸는지, 아니 면 겁을 먹었는지 꿈쩍도 하지 못하는 한수를 지나쳐 요령이를 향해 걸음 을 옮겼다. 그리고 요령이는 사색이 되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오...오지 마!" -두려워하지 마시오. 해치지 않겠소. 그런데, 존이 역시 미동도 하지 않고 굳어 있는 청도의 앞을 지나가는 순 간이었다. 갑자기 한수가 고함을 질렀다. "하아앗!" 우두두둑! 그리고 갑자기 뼈가 꺾이는 소리가 나면서 존이 걸음을 멈추고 이를 악물었다. "크으윽!" 저 녀석도 인간은 인간이군, 고함을 지르는 걸 보니! 존의 팔은 뒤로 뒤틀 려 있었다. 한수가 염력으로 존의 팔을 뒤틀어 버린 것이다. 한수의 염력은 영기와는 전혀 다른 힘, 존도 염력으로 잡아 버린다면 어찌할 도리가 없지! 한수는 영적 능력에 있어서는 전혀 특별할 게 없으니 존도 한수는 전혀 경 계하지 않을 테고 말야! 한수는 기세 등등하게 외쳤다. "청도 형, 어서!" "그래!" 한수의 말과 동시에 청도는 자신의 목검을 빙글 돌려서 고쳐 잡고 존을 향해 휘둘렀다. 그대로 존의 배를 목검으로 후려칠 생각이겠지. 한수와 청 도가 아까 속삭이던 내용이 이것이었나 보다. 존 캐슬이 청도의 앞을 지나 가는 순간, 한수가 존을 묶어놓고 청도가 존을 공격하는 것! 정말 좋은 생 각인데! 꼬마와 바보에게서 나온 생각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을 정도 야! -이런 생각을 하려니 청도와 한수에게 조금 미안하군- 그런데 공격은 성공인가? 청도의 목검이 빛을 뿜었다. 요령이와 가람이가 목검 속에 심어 놓은 영 기가 빛을 뿜는 것이다. 쉭! "우아아아앗!" 존이 비명을 지르며 마구 몸을 뒤틀었다. 염력의 구속에서 어떻게 해서든 벗어나기 위해서인가보다. 하지만 한수의 염력이 그렇게 만만한 힘이 아니 지. 자동차마저도 마음대로 폈다 접었다 우그렸다 하는 힘인데! 과연 존은 갑작스러운 일에 대응하기가 힘들었던지 청도의 검에 복부를 정통으로 얻 어맞았다. 퍼억! 그리고 동시에 벽에 매달려 있던 가람이가 땅으로 떨어졌 다. 존의 집중이 풀린 것이다. "우윽!" "쿠억!" 가람이가 땅에 부딪혀 작은 고함을 지르는 것과 동시에, 존 역시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숙였다. 타격음은 경쾌할 정도로 깔끔했다. 제대로 맞았군! 하지만 청도는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검을 휘감아서 땅과 평행이 되 도록 세웠다. "뭐야, 기절 안 하잖아? 역시 어마어마한 놈이라 다르군. 다른 사람이면 죽기 직전까지 갈 정도의 힘인데 기절도 안 하다니. 좋아, 명치를 찔러도 기절하지 않는지 어디 보자!" 슛! 청도의 찌르기가 존에게로 날았다. 그런데, 존이 고함을 지르면서 몸 을 뒤로 날렸다. "크아아악!" "우윽! 벗어났다!" 한수가 튕기듯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뭐야 임마! 벗어났다니!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냐! -채챙! 금속끼리의 강렬한 충돌음이 들렸다. 존이 자신의 등에서 눈부시게 빠른 속도로 검을 뽑아서 몸 앞에 똑바로 박는 것으로 계속 자신을 쫓아 들어오 는 청도의 찌르기를 반사적으로 막은 것이다. 금속과 나무의 충돌음이 아 닌 금속과 금속의 충돌음이 들린 이유는 청도의 목검이 영기에 둘러쌓여 있기 때문이리라. 그건 그렇고 존이 등에 메고 있던 건 과연 검이었군. 존 캐슬이 뽑아든 검은 무지막지하게 컸던 검집이 딱 맞을 정도의, 무지막지한 크기를 자랑 하고 있었다. 맙소사. 저런 걸 그렇게 빠르게 휘둘렀단 말이지? 정말 대단 한 힘이군. 하긴, 그러니까 한수의 염력의 구속에서 순간적으로 벗어날 수 있었겠지. 존의 검은 양쪽 모두 날이 갈린 종류였으며 한 뼘 정도 되는 검 신에는 복잡한 문양들이 이리저리 새겨져 있었다. 분명히 주술적 힘을 가 진 문양이겠지? 검을 땅에 박는 것으로 청도의 명치 찌르기를 간신히 막아낸 존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검을 땅에서 뽑았다. 그런데, 청도는 이미 존이 검을 뽑아드는 순간 존의 뒤로 가 있었다. "여기다!" "웃!" 휘릭! 챙! 다시 한 번 금속과 금속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울려 퍼졌다. 존 캐슬의 입매가 약간 당황으로 인해 떨리고 있었다. -휙! 청도가 다시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존의 뒤쪽. 존은 경악에 가까운 눈빛 으로 칼을 재빨리 거두어서 감각적으로 뒤로 베었다. 정확히 청도가 '있던' 위치였다. 청도는 어느 새 다시 존의 검의 진행방향의 반대편으로 몸을 움 직인 것이었다. "......!" 존 캐슬은 고함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입을 작게 벌리며 신음을 흘렸 다. 청도는 다시 한 번 만면에 여유로운 웃음을 띄면서 검을 찔러 들어갔 다. 슈슈슉! 세 번의 빠른 찌르기. 하지만 존도 검을 겉멋으로 들고 다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더구나 아까의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빠른 출검은 존 캐슬 역시 검에 있어 어느 정도 이상의 경지에 오른 사람임을 충분히 증명한다. 존 캐슬은 검을 교묘하게 돌려서 간신히 세 번의 찌르기를 다 막아낸 후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존이 뒤로 물러서는 방향에는 이미 청도가 서 있었다. "에비!" 붕! 청도는 존을 장난스럽게 부르면서 재빨리 존 캐슬의 허리쪽을 빠르게 베었다. 하지만 꽤 큰 체구에도 불구하고 존 캐슬은 놀랍도록 가볍게 위로 뛰면서 재빨리 아래쪽을 향해 검을 드리웠다. 자신의 아래쪽에 있는 청도 가 위쪽을 향해 찔러도 막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존은 청도가 이미 자신의 위쪽에 와 있는 줄 알았다면 결코 칼을 아래로 드리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슛! 청도는 이번에는 말없이 존을 향해 자신의 검을 뿌렸다. 하지만 검사의 직감일까, 존은 이를 악물고 허공에서 몸을 뒤틀어서 청도의 칼을 피하고 땅에 착지했다. 물론, 그의 바로 앞에는 어느 새 청도가 파고들어 있었다. "우아악!" 존 캐슬은 경악어린 고함을 질렀다. 청도는 태평스러운 얼굴로 칼을 휘둘 렀고,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움직이는 칼날은 존이 이를 악물며 들어올린 검신에 막혔다. 하지만 청도는 재빨리 검을 거두어서 다시 이곳 저곳으로 쉴 틈 없이 뿌려대었다. 놀랍군. 마치 검이 아니라 채찍이나 회초리를 휘두 르는 것을 보는 것 같다. 그 정도로 빠르고 현란하다는 뜻이다. "아저씨, 이름이 존이라고 했나?" "......?" 청도는 그렇게 빠르게 검을 휘두르며 물었다. 청도의 말을 알아들을 리 없는 존 캐슬은 이를 악물고 청도의 검을 하나 하나 막아가면서도 그 눈빛 에는 의아함을 띄고 청도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아저씨라고 불리기엔 좀 젊은 것 같은데 아저씨라고 부르기에는 좀 그렇네. 그냥 편하게 존이라고 부르도록 할게" "......?" "존, 당신도 검술이 꽤 되는 걸? 생각 외야. 그렇게 무식하게 큰 칼을 자 유자재로 휘둘러대다니 말야. 하지만 그거 알아? 당신은 상대를 잘못 만났 어" "......?" "한글 못하는 거 알어. 그냥 잠깐 숨이라도 돌리라고 말해주는 거니까 그 냥 들어. 존, 당신 정말 무지막지하게 강하다면서? 당신이 나타나서 한 번 분위기 쓱 잡으니까 다들 아주 경악을 하던데 그래. 그런데 아저씨 그거 알어?" "......" "요령아, 마음속으로 전해라. '사정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힘들어서 그 렇지, 일단 날 검의 사정권 안에 들이면 그 때는 신이라고 해도 날 막지 못해'" 그리고 잠시 후 요령이의 별로 탐탁지 않은 것 같은 목소리가 모두의 마 음속으로 들려왔다. -사정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힘들어서 그렇지, 일단 내가 상대방을 검 의 사정권 안에 들이면 그 때는 신이라고 해도 날 막지 못해. "왜냐하면 난 검술 하나는 세계 최고라고 자부하거든" -왜냐하면 난 검술 하나만은 세계 최고라고 자부하거든. "그러니까 그냥 곱게 찔리...고 너희들은 저 루나인지 하는 여자랑 잭슨인 가 하는 아저씨 좀 막아! 넋을 도대체 어디다 빼고 다니는 거야!" -그러니까 그냥 곱게 찔리고 너희들은...뭐? 요령이는 청도의 말을 타성적으로 옮기다 그 전달하는 말의 내용과 어투 가 갑자기 이상하게 변한 것을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 역시 요령이를 따라서 고개를 돌렸다. 어느 새 잭슨이라던 흑인과 루나라 고 소개한 금발의 여자가 어느 새 우리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런, 분명 좀 전만 해도 멀찌감치에 서 있었는데 어느 새! "이런!" 요령이는 짧게 혀를 차며 루나라고 하던 여자를 향해 몸을 날렸다. -우리 단장을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다니, 정말 대단한 걸! 여자는 일견 유쾌해 보이지만 또 일견 잔인해 보이는, 복잡한 감정이 섞 여 있는 듯한 미소를 띄며 팔에 감겨 있는 끈을 쭉 잡아당겼다. 휘리리릭! 공기를 감는 소리와 함께 검은 색의 긴 끈이 여자의 위쪽 하늘에 늘어졌 다. 채찍인가? -쐐액! 루나가 휘두른 채찍이 요령이를 향해 꿈틀거리면서 날았다. 하지만 요령 이는 몸을 비틀면서 루나의 채찍을 간단히 피했다. -흥! 이 정도쯤이야! 이게 다라면 실망이야! 부우우욱- 요령이는 자신의 주위로 기의 덩어리들을 띄우면서 비아냥대듯 말했다. 하지만 루나는 왼쪽 입술을 살짝 올려 살풋 미소지으며 말했다. -세상이 그렇게 간단하다면 얼마나 세상이 즐겁겠니? 퍼퍼펑! 루나가 휘두른 채찍이 교묘하게 꿈틀거리며 허공을 갈라서 순식 간에 요령이가 띄워 놓은 기의 덩어리들을 모조리 터뜨려 버렸다. 그리고 요령이는 멍한 얼굴로 앞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너 방금 뭐했냐? -채찍질했잖아. 너 바보니? 채찍이 뭔지도 몰라? -...니가 지금 나보고 바보라고 그랬냐 설마? -물론. 루나는 장난스레 웃으며 채찍을 머리 위로 빙글빙글 돌렸다. 그러자, -퍼어엉! 갑자기 채찍에서 불길이 마치 샐러맨더의 혀처럼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루나는 채찍을 허공에 대고 두어 번 휘두르곤 말했다. -덤벼. 너만 잡으면 게임 끝이지? -...원하신다면. 근데 이 게임 끝내기가 그렇게 쉽지는 않을걸? 요령이의 양손에 기가 천천히 엉기고, 요령이는 짧은 기합소리와 함께 루 나를 향해 뛰어들었다. "하압!" 한편, 루나와 함께 도약했던 잭슨이라는 자는 우리의 앞에 그리 가벼워 보이지는 않는 모습으로 착지했다. 털썩. 그렇게 착지를 한 잭슨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양 손을 앞으로 내밀고 말했다. -너희들을 어서 쓰러뜨리고 단장을 도와야겠군. -글쎄...그렇게 쉽게 우리를 쓰러뜨릴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일텐데. 너는 존 캐슬이 아니다. 가람이는 자신 있다는 듯 입가에 조용한 미소까지 띄며 잭슨처럼 양 손을 앞으로 치켜들었다. "한수야, 너는 가서 청도를 도와라" "글쎄, 별로 도와줄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오히려 난 청도 형보다는 가 람이 형을 도와주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말야" 실제로 청도는 존을 완전히 밀어붙이고 있었다. 세 발 까마귀조차 '어마어 마한 존재감을 가진 자'라고 표했던 존 캐슬이지만, 주술을 쓸 찰나의 시간 조차 주지 않고 혼을 빼먹을 듯 밀붙이는 청도를 상대로는 아무리 존이라 해도 별 수 없는 듯 했다. 하지만 한수의 말에 가람이는 고개를 가로저었 다. "아니다. 청도는 영적 능력이 전혀 없다는 걸 기억해라. 만약 청도가 아주 조그마한, 아주 조그마한 실수라도 한다면 그 순간부터 전세는 역전이고 뭐고 할 것도 없이 한 방에 끝이다. 저 존 캐슬이라는 녀석은 반드시 저런 식으로 묶어 놓아야 한다. 지금으로서는 존을 상대할 수 있는 자는 청도 밖에 없고. 만약 존이 청도의 저 공격에서 풀려난다면, 그 때는 우리 모두 는 반격 한 번 해 보지 못하고 패배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그러니까, 네 가 청도를 돕도록" "하지만 저렇게 빠르게 뒤엉켜 싸우면 내가 염력으로 간섭하기가 힘들어. 내가 염력으로 간섭하려면 일단 목표물을 어렴풋이 나마 봐야 한단 말야" "그러니깐...청도가 틈을 보여서 밀릴 것 같으면 그 때 재빨리 네가 염력 으로 말리라는 말이다. 지금은 특별히 네가 간섭하지 않아도 돼" 가람이의 말에 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형 말대로 할게" 그리고 가람이는 양 주먹을 꺾으며 말했다. -잭슨이라고 했던가, 이름이. 당신 정도야 나 혼자서도 충분하지. -혼자라고? 당신 옆의 그 자는? 아까 단장을 향해 아주 인상적인 공격을 하던데. 그리고 가람이는 잠시 나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더니 이윽고 대답했다. -그는 아까의 공격으로 모든 힘을 다 소비해서 지금은 전혀 싸울 수 없는 상태이다. -흠...눈빛을 보니 거짓은 아닌 것 같군. 그렇다면, 정정당당한 일 대 일의 싸움인가? 내가 바라던 바다. 어서 빨리 너를 쓰러뜨리고 루나나 단장을 돕겠다. 잭슨의 말에 가람이는 다시 한 번 피식 웃었다. -아까도 말했지만...그게 과연 네 마음대로 될까? 네 몸에서는 그렇게 큰 영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몸에 영력이 임하지 않는다고 강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 잭슨은 나를 턱짓으로 가리키고는 말을 이었다. -...저 청년이 그 좋은 예가 아닌가. 그리고 잭슨의 말에 가람이는 그제야 경계하는 듯한 눈빛을 띄며 말했다. -당신의 말이 옳은지 아닌지는 나와의 싸움을 통해서 증명해 보도록. 덤 벼라. -좋아! 잭슨은 고함을 지르며 왼손바닥을 하늘을 향해 뒤집었다. "실프!" 휘리리릭! 잭슨의 팔찌에서 작은 바람이 일어나더니 이윽고 잭슨의 몸을 한 번 휘감고 가람이를 향해 날았다. "오는 건가!" 가람이는 기합과 함께 손에 기를 가득 담아서 앞으로 쭉 뻗었다. 쉬익! 그 러나 빙글빙글 도는 바람의 덩어리, 실프는 부드럽게 가람이의 공격을 피 한 후 가람이의 복부를 후려쳤다. 퍼억! "커억!" 가람이는 비틀거리면서 그대로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다가 뒤로 물러선 자 신을 향해 날아오는 실프에게 다시 한 번 손을 내뻗었다. "하압!" -펑! 휘리리릭... 가람이의 공격에 나직한 폭발음과 아련한 바람소리를 남기며 실프가 소멸 했다. 그런데 잭슨은 자신의 공격이 무위로 끝났음에도 별로 놀라지 않는 듯 했다. 뿐만 아니라 가람이 역시 그렇게 기뻐하는 것 같지 않았다. -흠, 예상외로 너무 쉽게 당하는군. 자네, 말은 이러니 저러니 해도 사실 나를 깔본 것 아닌가? -크윽...단지 예상치 못한 공격에 당황했을 뿐이다. 그건 그렇고 너도 그렇 게 작은 풍령 따위를 꺼내다니 나를 깔보는 것 아닌가. -단지 상대의 수준을 시험했을 뿐이다. 이번엔 좀 더 진지하게 상대해주 지. 잭슨은 그렇게 말하면서 반지를 끼운 왼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외쳤 다. "콘돌-인 더 선 셋 스카이" 파앗- 잭슨의 손이 환하게 빛나더니 이윽고 거대한, 날개길이가 잭슨의 키는 충분히 될 정도로 큰 콘돌이 날개를 펄럭이며 '끽-'하고 한 번 울부짖 으며 하늘로 날아올랐다가 빙글 빙글 돌면서 땅을 한 번 훑어보고는 곧바 로 가람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압!" "끼이이익-!" 하지만 가람이는 몸을 살짝 움직이는 것으로 콘돌의 날카로운 공격을 피 했다. 쐐액! 콘돌이 지나가면서 내는 날카로운 발톱의 파공음이 나에게까지 들려왔다. 그렇게 다시 하늘로 솟구칫 콘돌은 다시 한 번 땅을 내려보더니 날개를 펄럭였다. "끼이이익-!" 펄럭! 펄럭! 콘돌이 날개를 펄럭임에 따라 콘돌의 날개 아래쪽에 바람이 빙글빙글 돌면서 흰색으로 맺히더니 깃털과 함께 뭉쳐서 가람이를 향해 쏘 아졌다. "우웃!" 가람이는 순간적으로 돌풍이 자신을 휘감자 당황했는지 비틀거리다 바람 의 뒤를 따라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깃털들의 무리를 보고는 기겁을 하며 기의 막을 둘렀다. 퍼퍼퍼퍽! 기의 막에 부딪힌 콘돌의 주술의 깃털들이 부 르르 떨면서 허공으로 사라졌다. 깃털을 모조리 쏟아부은 콘돌은 허공에서 다시 한 번 크게 맴돌더니 이번에는 온 몸을 황금색으로 빛내며 빛에 휘감 긴 채로 가람이를 향해 쇄도했다. 슈우우우웃-! -이번 것은 좀 나은데, 하지만. 가람이는 양 주먹을 옆구리에 붙이고 기를 모으다가 앞으로 쭉 뻗으며 나 직하게 말했다. -아직은 애들 장난데 불과하다. 뻐억! 가람이가 쏜 두 개의 단단하게 뭉친 기의 덩어리는 가람이를 향해 쇄도하던 콘돌을 정통으로 맞췄다. 그리고 콘돌은 가람이의 공격에 충격을 입었는지, 날개를 펄럭거리며 비틀거리며 추락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가 람이는 그대로 도약해서 추락하는 콘돌을 잡고 옆구리에 자신이 모은 기탄 을 쑤셔 박았다. -콰직! "끼이이익-!!" 콘돌이 기성을 지르며 비틀비틀 하늘로 다시 날아올랐다. 그리고 가람이 는 휘청거리는 콘돌을 바라보면서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퍼엉! 가람이가 손가락을 튕김과 동시에, 콘돌의 옆구리에 박혀 있던 기의 덩어 리가 터지면서 콘돌이 주술의 깃털들과 함께 공기 중으로 소멸되어 버렸 다. -더욱 강한 것을 사용해라. 고작 이 정도로는 나를 어쩔 수 없다. -...쳇. 내가 너를 너무 과소평가 했었나보군... 잭슨은 잠깐 말을 흐리더니 말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잭슨은 이번에는 양손을 앞으로 내뻗으며 외쳤다. "소울 오브 더 윈딩고" 후우우우웅! 잭슨의 오른쪽 귀걸이, 왼손 둘째 손가락의 반지와 오른손 가 운데 손가락의 반지, 그리고 오른손 넷째 손가락의 반지가 빛을 내면서 잭 슨이 손을 들어올린 곳을 중심으로 갑작스레 차가운 기운이 휘몰아치기 시 작했다. 흠, 내가 착각한 것인가? 하지만 처음에는 단지 나의 느낌뿐이라고 생각했던 차가운 기운은, 점차적으로 구체화되어 눈보라로 변하기 시작했 다. 이럴수가? 지금은 초여름인데! 하지만 내 눈앞에서 흩날리는 저것은 분 명히 눈이 아닌가! 점점 잭슨의 손을 중심점으로 모여든 눈보라는 이제 '돌 개바람으로 이루어진 사람'의 형상을 띄고 휘청이며 가람이를 향해 양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잭슨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적어도 이 정도는 되야 너와 놀아 줄만 하겠지. 자, 가라, 윈딩고의 혼이여. 저 자의 혼을 얼려서 먹어치우라. 휘청거리면서 걸음을 옮기는 눈보라의 귀신, 윈딩고의 혼. 윈딩고의 혼은 서글프게 울부짖으며 그렇게 천천히 한걸음씩 걸음을 옮기다가, 갑자기 쐐 애액!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바람으로 변해서 순식간에 가람이의 바 로 앞으로 이동한 뒤 다시 빠르게 형체를 가진 모습으로 변했다. "이, 이건...?" 가람이는 순간적으로 적지 않게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고 윈딩고의 혼은 입가로 추정되는 곳에 많은 눈을 맺으며 -아마 웃는 것이리라- 양손을 뻗 었다. 가람이는 화들짝 놀라며 간신히 몸을 뒤틀었지만, 윈딩고의 혼이 뻗 은 손은 가람이의 티셔츠의 끝자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치이이-! 가람이의 티셔츠의 끝자락이 한 줄기 푸르스름한 수증기를 내뿜으면서 얼 어붙어 버렸다. 단지 윈딩고의 혼의 공격에 스치기만 했는데도 얼어버린 것이다. 가람이는 자신의 얼어붙어 버린 티셔츠의 자락을 바라보며 질렸다 는 표정과 함께 몸을 뒤로 날렸다. "맙소사...이건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되겠군" 그런데 어느새 윈딩고의 혼이 다시 한 번 '훙-'하고 슬피 우는 것 같은 바 람소리를 내면서 사라지더니 가람이의 뒤쪽으로 형체를 이루어 나타났다. 윈딩고의 혼은 바람의 모습일 때는 정말 빠르게 움직이는군! 비록 사람의 형체를 다시 갖추는 데에는 짧게 시간이 걸리지만 말이다. 가람이는 등뒤에서 들려오는 등골이 서늘한 바람 소리에 깜짝 놀라서 뒤 를 돌아보고는 움찔하며 몸을 뒤로 날렸다. "우왓!" 팟! 다시 한 번 윈딩고의 혼이 뻗은 가늘고 긴 바람의 주먹들이 가람이를 향해 쇄도해 들어왔다. 저건 다 피하기 힘들겠는데! 저걸 어쩌면 좋지? "하아압!" 가람이는 뒤로 크게 물러서면서 다시 한 번 푸른 색 기의 막을 둘렀다. 퍼퍼펑! 윈딩고의 혼이 날린 공격들이 기의 막에 부딪히면서 기의 막이 금 방이라도 찢어질 것처럼 크게 진동했다. 과연 아까 콘돌의 깃털 공격인지 뭔지 하는, 수백 발을 던져도 기의 막이 꿈쩍도 안 하던 그런 공격과는 수 준이 확실히 다르군. 기의 막을 두르고 위태위태하게 윈딩고의 혼이 끝나 기를 기다리던 가람이는 이윽고 기의 막을 걷음과 동시에 손을 앞으로 뻗 었다. "허기영결탄!" 가람이가 잘 쓰는, 요령이의 주술처럼 기를 수십 개 허공에 맺은 다음 상 대방을 향해 쏘아내는 주술이다. 쉬리리릭! 수십 개의 기의 덩어리들이 윈 딩고의 혼을 향해 뻗어나갔다. 하지만 윈딩고의 혼은 침착하게 -소환된 영 주제에 침착, 혹은 당황같은 감정이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아까는 분명히 웃는 것 비스므레한 표정도 지었지 않은가?- 자신의 손을 이리저리 휘둘러 가람이의 공격을 대부분 터뜨렸다. 요행히 터지지 못한 공격 두 세 개 정도는 윈딩고의 혼으로 날아가는데, -후우웅! 윈딩고의 혼이 울부짖음과 동시에 윈딩고의 혼에서 냉기가 쏟아져 나와서 가람이가 날린 허기영결탄의 생존탄을 모조리 터뜨려 버렸다. 맙소사, 저 거, 소환된 영 주제에 기합파도 쓸 줄 알잖아! 저거 나보다는 확실히 강하 겠는데! 가람이도 당황했는지 눈을 크게 뜨며 중얼거렸다. "저급 영인줄 알았더니 별 걸 다 하는군" 그리고 잭슨은 가람이의 황당한 표정을 바라보며 기분 좋은 듯 웃었다. -어떤가, 윈딩고의 혼이? 비록 내가 부리는 영들 중 중간 정도의 수준밖 에 되지 않는 영이지만 그래도 꽤 쓸만하지. 너는 윈딩고의 혼의 겉모습을 보고 아마도 윈딩고의 혼을 얕본 모양이지만, 윈딩고란 빙옥, 즉 얼음 지옥 에 사는 괴물들 중 가장 힘이 센 녀석 중에 하나다. 그런 녀석의 혼이니만 큼 그 녀석도 그렇게 호락호락한 녀석은 아니지. -그래, 확실히 네 말대로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은 것 같군... 가람이는 고개를 끄덕여 잭슨의 말에 동의했다. 그리고 잭슨은 자신의 '윈 딩고의 혼'을 흡족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가라, 윈딩고의 혼이여! 저 녀석을 얼려버려라! 쉬이익! 잭슨의 명에 따라 윈딩고의 혼이 다시 한 번 자신의 주먹을 꾹 움켜쥐더니 가람이를 향해 쭉 내뻗었다. "우웃!" 가람이는 다시금 몸을 뒤틀어 피하면서 멀찍이 떨어져 윈딩고의 혼을 공 격할 수 있는 기회를 노렸다. 내 생각에는 앞으로도 한참 동안은 저렇게 윈딩고의 혼이 공격하고 가람이는 피하는 모습을 반복할 것 같다. 가람이 는 윈딩고의 혼의 공격에 스치기만 해도 스친 곳이 얼어 붙어 버리니까 아 무래도 조심을 할 수밖에 없겠지. 과연 가람이는 어떻게 윈딩고의 혼을 제 압할 수 있을까? 가람이를 걱정하고 있는데, 문득 내 귀에 폭발음과 함께 요령이의 고함소 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지? 나는 재빨리 눈을 돌려 요령이와 루나 쪽을 바 라보았다. "우앗!" 꾸앙! 불덩어리가 폭발하면서 요령이가 몸을 뒤쪽으로 날리고 있었다. 그 리고 루나는 기세 등등한 표정으로, 불꽃에 휘감겨서 이글거리는 보기만 해도 무섭게 생긴 채찍을 머리 위로 힘껏 들어올리더니 멀리 떨어져 있는 요령이를 향해 휘둘렀다. 저...저 여자 바보 아냐? 도대체 저 여자는 요령이 와 자기의 거리가 얼마인지 보이지도 않나? 하지만 곧 '루나라는 여자는 바보일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채찍 끝 에서 불덩어리가 솟아나와 요령이를 향해 똑바로 날아갔기 때문이다. 방금 전에 요령이가 피한 불덩어리가 저것인가 보군. "치잇!" 요령이는 다시 한 번 몸을 날려 루나의 공격을 피하며 하늘로 솟아올랐 다. 하지만 루나는 재밌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왼 손에 붉은 기운을 맺더 니 그대로 요령이를 향해 집어 던졌다. 그 붉은 기운도 역시 이글이글 불 타오르는 불덩어리였다. 휘리리릭! 요령이는 갑작스럽게 자신을 향해 날아 오는 불덩어리에 기겁을 해서 손에 기를 가득 모으고는 불덩어리에 마주 던졌다. 쐐액! 쾅! 불덩어리와 기덩어리는 정면으로 충돌하며 상호 소멸해 버렸다. 그 틈을 타서 요령이는 재빨리 앞으로 뛰어 나갔다. -어딜! 하지만 루나라는 여자는 짧은 기합을 내지르면서 불의 채찍을 끌어오더니 머리 위에서부터 발끝까지 빙글빙글 돌려서 자신의 몸을 휘감았다. 불의 방패를 둘러친 셈이다. 그리고 요령이는 당황해서 발걸음을 멈추며 망연자 실하게 루나를 바라보았다. -또 이러기야? 자꾸 이러면 스스로가 비겁하다는 생각이 막 들지 않아? 응? 요령이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루나에게 말했다. -요령이의 말로 미루어봐 서 루나라는 여자가 이런 식으로 원거리에 있으면 불덩어리를 집어던져서 공격하고 근거리에 붙으면 채찍으로 방어를 하는 방식을 사용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닌가보다- 하지만 루나는 요령이의 말에 웃기지 말라는 듯 코웃음 까지 치며 말했다. -흥! 비겁? 비겁한 거 같으면 어디 한 번 정정당당하게 해서 이겨봐! 싸 움에 비겁한 게 어디 있냐? 메-롱이다. 루나는 마음 속으만 요령이를 놀린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눈 아랫꺼풀을 까뒤집으며 혀를 내밀었다. -너나 메롱이다. 요령이도 똑같이 혀를 내밀면서 마주 대답해 주었다. 그리고 그런 요령이 의 모습에 루나는 재밌다는 듯 미소지으며 왼손을 들어 허공에 대고 왼쪽 에서 오른쪽으로 쭉 그었다. 화르르르륵! 놀랍게도, 루나가 손을 움직인 길 을 그대로 따라오면서 불의 덩어리들이 허공에 맺혀서 스스로 타올랐다. 저 여자, 정말 불을 능숙하게 잘 쓰는데? -안 비겁한 카르텔 씨, 이 정도쯤은 쉽게 막을 수 있겠지? 루나는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퉁겼고 그러자 루나의 앞에서 타 오르던 불덩어리들은 요령이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흥! 이 정도쯤이야! 좋아, 멋들어지게 막아주지! 언딘! 나를 도와줘!" 요령이는 이를 꽉 깨물며 주문과 함께 불덩어리가 똑바로 쏘아져 날아오 는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주위에서 반짝거리는 것들이 요령이 를 둘러싸더니 두껍게 벽을 친 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질감 이 물같은데? 물의 방패를 두른건가...? 쉬리리릭! 이윽고 요령이의 바로 앞까지 날아온 불덩어리들. 요령이는 몸 을 이리저리 교묘하게 움직여서 그 많은 불덩어리들을 모조리 피해내고 있 었다. 정말 대단한데? 쾅! 쾅! 수십 개의 불덩어리들이 땅에 부딪히면서 이 곳 저곳에서 불꽃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지만 꽤 위험해보이는 그 불꽃들 은 요령이가 몸에 둘러놓은 물의 벽 덕에 감히 요령이에게 해를 끼치지 못 하고 그저 그 주위에서만 날름거리다 사그라들곤 했다. 그렇구나! 요령이가 자기 주위에 물의 벽을 둘러친 이유는 불덩어리에게서 자신의 몸을 보호하 기 위한 것보다는 불덩어리가 폭발하면서 뿜어지는 불꽃에 다칠까봐 둘러 친 것이었구나. 난 또, 요령이가 온 몸으로 불덩어리에 육탄돌격이라도 할 줄 알았지. 내 생각을 눈치챈다면 요령이는 아마 나한테 '그게 무슨 멍청한 소리냐?'라고 잔뜩 타박해 대겠지? 어쨌든 그렇게 요령이는 루나의 근처까지 다가갔고, 루나는 그런 요령이 에게 당황한 듯 채찍을 들어올리더니 이리 저리 후려쳐 댔다. 촤악! 화르 륵! 촤악! 화르륵! 루나가 휘두르는 채찍에서는 채찍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 와 불꽃이 바람에 감기는 소리가 뒤섞여서 묘한 울림을 만들고 있었다. 어 쨌든 요령이는,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꿈틀거리며 떨어지는 채찍 또한 이 리저리 피하면서 루나의 주위로 조금씩 접근해 들어갔다. -내가 거기까지 가면 너는 끝이야! 요령이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양손에 가득 기의 구를 맺었다. 제임스 스나이퍼를 쓰러뜨렸던 바로 그 기술이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기를 실은 주먹과 기의 덩어리를 동시에 이용한 마구잡이 후려치기로 상대방을 쓰러 뜨리는 그 기술. 실제로 저 기술에 걸리면 웬만한 고수가 아니고서는 막아 내기 힘들 거다. -짜악! 화르르륵! 짜악! 화르르륵! 요령이와 루나의 거리는 점점 더 가까워져 갔고 그에 따라 루나의 얼굴에 서도 점차 장난기가 사라져 갔다. 루나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이리 저리로 펄쩍 펄쩍 뛰어서 어떻게 해서든 요령이와의 간격을 넓히기 위해 노력했지 만 요령이는 루나보다 훨씬 능숙한 솜씨로 루나가 휘두르는 채찍을 이리 저리 피해가면서 루나를 향해 조금씩 다가갔다. 이제 한 두 발짝 차이로 요령이가 루나와의 거리를 좁혔다! 요령이는 마침내 기다렸다는 듯 몸을 낮게 숙이면서 양 주먹을 들어올렸다. 지지지잉- 요령이의 주위로 기의 덩 어리들이 이리저리 엉겼다. 요령이는 유쾌하게 웃었다. -넌 이제 끝났어-! 그러데 루나의 표정이 이상하게 그렇게 불안해 보이지가 않았다. 지금 요 령이가 하려는 짓이 별로 위력적으로 보이지가 않아서인가? 아니면 다른 꿍꿍이속이 있는 걸까? 루나는 미소까지 입에 가득 머금으면서 말했다. -끝난 건 너야, 몸만 약삭빠르고 머리는 둔한 멍청한 아가씨야. 설마 내가 이렇게 순순히 당할 거라고 생각했니? -뭐? 요령이의 약간은 당황이 섞인 물음. 그리고 루나는 대답 대신 묘한 미소 만을 띄우다 느닷없이 기합을 질렀다. "하아앗!" -퍼어엉! 그리고 루나의 기합과 함께 루나의 전신에서 폭풍이 휘몰아치듯 불꽃이 뿜어져 나와서 주위를 뒤덮었다. "우아악!" 요령이의 비명. 요령이는 루나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불꽃이 가진 순간적 인 폭발의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멀찍이 튕겨져 날아가고 있었다. 그래도 휩쓸리지 않고 용케 퉁겨나가기만 해서 다행이군. 그런데 요령이의 손을 자세히 보니, 요령이는 손에 무언가 투명한 것을 쥐고 있는 것 같았다. 뭐 지? -콰당! "우윽!" 요령이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면서 땅에 떨어지고 나서야 나는 요령이가 손에 쥐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물로 빚어진 방패 였다. 어떻게 알았냐고? 요령이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정신이 흐트러졌는지, 요령이가 손에 쥐고 있던 방패의 주술이 풀어져서 요령이가 물을 뒤집어 써 버렸거든. -촤악! "우앗! 차가! ...운 게 아니라 뜨거! ...운 것도 아니라 뜨뜻미지근하네...? 방패가 불에 닿아서 그런가?" 요령이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멍청하게 말했다. 그리고 루나는 요령이가 자신의 예상과 달리 멀쩡한 것을 보자 기분이 언짢아졌는지 인상을 찌푸리 며 말했다. -야! 너, 왜 멀쩡해? -네 몸에서 불이 쏟아져 나오길래 내 등 쪽에 있던 언딘들을 몽땅 앞으로 밀고 손에 쥐었지. 덕분에 불은 내 몸에는 손끝 하나 못 대었고. 왜, 기분 나빠? 요령이의 말에 루나는 신경질을 내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내가 나름대로 힘을 쓴 공격인데 멀쩡한데 너 같으면 기분 안 나쁘겠냐? 아까 너는 아스타로트의 창인지 포크인지 우리 단장한테 집어던 질 때 우리 단장이 손끝 하나 안 다치는 것을 보면서 기분 안 나빴어? -별로. 존 캐슬 그 자는 아무리 봐도 인간은 아니거든. 인간을 초월한 사 람에게 내 공격이 먹히지 않는다고 해서 별로 아쉬울 것은 없지. 요령이는 예상외로 순순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루나는 요령이의 말에 일 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그래, 나라도 우리 단장에게 한 공격 안 먹힌다면 그러려니 할 거야. 하지만 카르텔 너는 인간을 초월한 그런 수준이 아냐. 그래서 나는 너한테 내 공격이 먹히지 않은 게 무지무지하게 아쉽고 말야. 알겠어? -뭐, 대충 알겠어. 하지만 어쩌지? 앞으로도 계속 아쉽게 될 텐데 말야. -글쎄...과연 그럴까? 루나는 요령이의 말에 채찍을 맨 손으로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루나의 채찍에는 불꽃이 휘감겨 춤추고 있다- 잡아서 죽 당겼다 놓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요령이는 루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너, 불과 친하구나? -응. 어렸을때부터 불은 내 가장 친한 친구였지. -그렇구나... -아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직 내 힘을 별로 보여주지 않았어. 그리고 요령이는 재밌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그래? 이게 다라 그러면 울어버릴 뻔했는데 다행이네. -흥, 자신 만만하네. 어디 언제까지 자신 만만한지 보자. 먼저 올래? -그래볼까! 요령이는 말을 마치자마자 아까 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속력으로 루나를 향해 달렸다. 파아앗! 그 손에서 발톱처럼 생긴, 날카롭게 생긴 기의 칼날 이 솟아올랐다. -흥! 아까보다는 조금 더 빠르구나? 루나는 우습지도 않다는 듯 채찍을 머리 위로 감았다. 부우욱- 채찍의 끄 트머리에서 아까 와는 다르게 둥그스름한 불꽃의 덩어리가 뭉친 채 매달려 서 채찍과 함께 빙글빙글 돌았다. "탓!" 루나는 짧은 기합소리와 함께 요령이의 얼굴 정면으로 채찍을 뿌렸다. 쉬 익! 마치 채찍 끝에 달린 추같이 보이는, 불꽃의 채찍 끝에 달린 일렁이는 불꽃의 덩어리가 혀를 날름거리며 요령이의 얼굴을 향해 빠르게 꽂혔다. 이, 이런! 위험하다! 순간, 요령이는 기의 발톱을 세운 자신의 손과 발로 땅을 박차며 탄력 있 게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올랐다. 핑그르르르-! 빙글빙글 도는 요령이의 모 습은 마치 정말로 고양이가 뛰어 오른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꽈앙! 루나의 채찍이 묵직한 굉음을 내뱉으며 잔디밭에 박혔다가 폭발했다. 호오, 작은 크기에 비해서 상당한 위력이군! 나는 놀라서 나도 모르게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불꽃을 작게 압축한 것일까? 루나의 채찍 끝에 달린 추는 무엇 인가에 닿으면 강렬한 폭발을 일으키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하늘 높이 올라간 요령이는 몸을 빙글 돌려서 루나는 똑바로 바라보더니 수인을 맺으며 외쳤다. "먹어라! 더 팔름 오브 더 빅 핸드" -그 주술 이름 한 번 길기도 하다! 루나의 비아냥거림이 마음 속으로 들렸지만 요령이는 신경쓰지 않는 듯 손을 아래쪽을 향해 튕겼다. 그리고...! -투우우웅! 요령이의 손에서 집채만한, 기로 이루어진 손바닥이 뻗어져 나왔다! "맙소사...정말 그 이름 그대로의 주술인데! 정말 무식해 보이는군!" 쉬이이이-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손바닥은 루나를 향해 떨 어졌다. "웃!" 그리고 루나는 작은 신음소리를 흘리면서 채찍을 다시 한 번 머리 위로 휘감아 올려서 빙글빙글 돌렸다. 그에 따라서 붉은 빛의 기운이 채찍과 함 께 빙글빙글 회오리치듯 돌더니 불꽃의 추 끝에 점차 둥글게 맺혔다. 화르 르르...점점 크게 맺히던 불꽃은 이윽고 거의 사람의 머리만한 크기가 되었 다. -그런 것쯤이야 간단하게 막을 수 있지. 루나는 입가에 조소를 흘리며 채찍을 손바닥을 향해 쭉 뻗었다. 쉬이익! 그런데, 놀랍게도 '큰 손바닥'은 허공에서 번쩍 들리더니 그대로 자신을 향 해 날아오던 채찍 끝에 맺힌 불덩이를 배구선수가 스파이크를 후려치듯 후 려쳐 버렸다. 쾅! 채찍 끝에 달려 있던 불덩어리가 폭발하면서 채찍이 옆으 로 힘없이 튕겨나갔다. -후하하! 이게 모양만 손바닥인줄 알았나본데? 그렇다면 잘못 생각한거 야! 요령이는 회심의 미소와 함께 손을 아래로 찍어 내렸다. -눌려랏! 루나는 당황한 얼굴로 몸을 날리면서 신음을 흘렸다. -허억! 루나가 몸을 피하자마자, 루나가 있던 자리로 손바닥이 떨어졌다. 꾸웅! 손바닥은 굉음과 함께 바닥에 자신의 형상을 흐릿하게 찍고 다시 허공으로 올랐다. 루나는 이미 저 뒤쪽으로 멀찍이 물러나 있었다. -다시 한 번 간닷! "하앗!" 요령이는 다시 한 번 손을 앞으로 뻗었고, 손바닥은 다시 한 번 루나를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그리고 루나는, 채찍을 붕붕 휘두르다 다시 한 번 손바닥을 향해 뻗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불덩어리 같은 것도 맺혀 있지 않 은데? 루나는 앙칼지게 외쳤다. "플레임 블레이드!" 쐐액! 갑자기 채찍에서 예리한 소리가 나면서 채찍 주위에 휘감긴 불꽃이 더욱 매섭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뭐지? 채찍은 바람을 매섭게 가르며 손바 닥을 향해 날더니 교묘하게 움직여서 손바닥의 검지손가락을 감았다. 그런 데, 놀랍게도 루나가 채찍을 당기자 검지손가락이 날카로운 것에 베기라도 한 듯 깨끗하게 잘라졌다. 이럴수가? 채찍을 칼날처럼 바꿨나보구나! 떨어 져나간 손가락의 마디는 허공에서 산산히 흩어지며 사라졌다. 그리고 루나 는 기합과 함께 채찍을 빠르게 휘둘렀다. "하압! 합! 합! 하합! 합!" -쉬릭! 쉭! 쉭! 쉭! 쉭! 채찍이 공기를 휘감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면서 채찍이 손바닥을 향해 떨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채찍이 손바닥을 후려칠 때마다 손바닥은 맥없이 이리 저리로 찢어졌다. 결국 채찍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손바닥을 유린했고, 요령이가 만들어낸 손바닥은 산산히 조각 조각나서 허 공으로 흩어져 버렸다. -휴, 깜짝 놀랐네. -쳇! 루나는 채찍을 거두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요령이는 혀를 차며 아쉬 워했다. 거의 막상막하로군. 쳇, 나도 힘이 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난 지금 정말로 온 몸이 아프고 힘이 하나도 없어서 서 있기도 힘들다고. 그래서 이렇게 누워 있는 거고. 갑자기 가람이 쪽에서 적색 빛줄기가 내 쪽으로 쏟아졌다. 번쩍! "뭐얏!" 나는 손바닥으로 눈 위에 차양을 만들며 가람이를 바라보았다. 가람이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그런데...윈딩고의 혼은? 나는 고개를 이 리저리 돌리며 윈딩고의 혼을 찾아 보았다. 하지만 윈딩고의 혼은 어떤 곳 에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윈딩고의 혼은 어디로 가버린 거지? 그런데 가람이의 앞쪽 몇 미터 앞의 땅이 새카맣게 그슬린 채 움푹 패여 있었다. ...그렇구나! 염옥문 지상강림술을 사용한 거구나!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원래 염옥문 지상강림술이 어마어마하게 강한 기술인데다가, 특히 완전 얼 음 덩어리나 마찬가지인 저 윈딩고의 혼에게는 그 술법이 더욱 위력적으로 통했을 것이 틀림없다. 윈딩고의 혼은 염옥으로 끌려 들어가서 뜨거운 불 귀신들의 손길에 갈기갈기 찢겨 버렸겠지. 잭슨의 반들반들한 이마와 앞머리에 시퍼런 핏줄이 툭, 하고 불거졌다. 저 흑인 아저씨, 화 많이 나셨나보네. -제기랄...윈딩고의 혼마저 쓰러뜨리다니. 하지만 그걸 쓰러뜨렸다고 네가 이겼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내겐 아직 쓸 수 있는 혼이 많이 남아 있으 니까. 어디, 두 마리도 쉽사리 이길 수 있나 볼까? 잭슨은 말을 마치고 양팔을 자신의 옆으로 쭉 뻗으며 주술을 외웠다. 휘 우우웅- 다시 한 번 한이 서린 듯한 울림 소리가 허공을 울리면서 잭슨의 양쪽 팔을 향해 모여들었다. -휘우우우... -휘루루루... 그런데 소리가 단수가 아니라 복수다. 잭슨은 자신의 말대로 정말 두 마 리의 윈딩고의 혼을 소환할 생각인가 보다! 이윽고 소환이 끝나고 잭슨의 손을 중심으로 눈보라의 돌개바람 두 개가 휘청휘청 돌기 시작했다. 가람 이는 긴장한 얼굴로 양손을 옆구리에 붙였다. -처음은 어려워도, 두 번째는 쉽지. 가람이의 말에 잭슨은 '과연 그럴까?'하는 표정으로 한 쪽 입술을 치켜올 리며 양손을 휘둘렀다. 휘두두두! 아예 잔디밭 전체를 얼려버릴 것 같은 기 세로 두 개의 눈보라 섞인 돌풍이 가람이를 향해 휘몰아치더니 어느 새 가 람이의 주위를 휘감고 사람의 형상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두 마리의 윈딩 고는 가람이를 앞뒤로 둘러싸고 공격하려는 속셈인 것이다. 나는 불안한 표정으로 가람이를 바라보았다. 과연? 과연 피할 수 있을까? 도와줘야 되 는 것은 아닐까? -휘우우웅! -후워어어! 두 마리의 윈딩고의 혼이 한탄소리 비슷한 고함을 지르며 가람이를 향해 동시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가람이는 양다리를 옆으로 쫙 찢으면서 그대 로 바닥에 최대한 낮게 붙어버렸다. 헉, 정말 장난이 아니게 유연하군! 가 람이의 머리 위로 섬뜩한 소리들을 내며 윈딩고의 혼이 뻗은 공격들이 지 나가더니 마주 선 상대편을 향해 박혔다. 쉭! 쉬릭! 하하! 같은 편끼리 공 격한 꼴이군! 하지만 둘 모두 같은 윈딩고의 혼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들 을 소환한 사람이 같기 때문인지 윈딩고의 혼의 서로를 향한 공격은 상대 방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다. 아쉽군. 윈딩고의 혼들의 공격을 간단히 피한 가람이는 그대로 다리를 다시 끌어 모아 튕기듯 몸을 일으켜서 자신의 앞쪽의 윈딩고의 혼에게 바싹 붙더니 양손을 뒤로 뻗으며 외쳤다. "염옥사자신장!" 퍼엉! 가람이의 양 손이 타는 것처럼 붉게 달아오르더니 이윽고 불꽃이 가람이의 손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가람이는 그 손으로 그대로 윈딩 고의 혼을 향해 수 번의 장격을 가했다. 쩌저저정! 단지 돌개바람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윈딩고의 혼을 향한 가람이의 공격은 신기하게도 윈딩고의 혼 의 몸을 그냥 통과하지 않고 모조리 후려쳤다. 가람이의 손과 윈딩고의 혼 이 부딪힐 때마다 윈딩고의 혼은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후워어어어엉! 퍼엉! 마침내 폭발음과 함께 가람이의 불타오르는 손이 윈딩고의 혼의 복 부를 뚫었다. 그리고 윈딩고의 혼은 한줄기 서글픈 바람소리와 함께 순식 간에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다. 윈딩고의 혼의 소멸을 확인한 가람이는 재 빨리 몸을 돌려서 다음 윈딩고를 향해 다시 한 번 자신의 불타오르는 손을 뻗었다. "염옥사자신장!" 하지만 이번에는 쉽사리 당하지 않을 생각인지 윈딩고의 혼은 순식간에 자신을 수십 갈래의 바람으로 가르더니 가람이의 몸을 타고 흘러 가람이의 뒤쪽에 뭉쳤다. 가람이는 재빨리 뒤로 돌았다. 어느새 사람의 형상으로 바 뀐 윈딩고의 혼이 휘청휘청 거리며 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윈딩고의 혼의 손위에는 보기만 해도 섬뜩한 새하얀 색의 기운이 커다랗게 뭉쳐 있었다. 저걸 내려친다면 아무리 가람이라고 해도 크게 다치겠는걸! 윈딩고는 울부 짖으며 기운이 잔뜩 맺힌 자신의 손을 가람이를 향해 휘둘렀다. "후워어어엉!" 하지만 가람이는 몸을 피하는 대신 붉게 타오르는 양손으로 수인을 맺더 니 손바닥을 앞으로 가게하며 뻗었다. "염옥사자포효술!" -쿠왕! 가람이의 손이 투웅, 작게 진동하더니 마치 사자가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천지를 울리면서 커다란 불줄기가 폭발하듯 쏟아져 나왔다. 쏟아져 나온 불줄기는 순식간에, 정말 순식간에 윈딩고의 혼을 집어 삼켜버리고는 화르 륵, 하고 작은 불줄기만 남기면서 허공에서 사라져 버렸다. -끝이다. 가람이는 싱긋 웃으면서 잭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잭슨은 당황한 얼굴 로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더니 말했다. -젠장...정말 너, 생각 외로 강하군. 하긴 제임스 스나이퍼를 그 지경으로 만들 정도였으니... -...제임스 스나이퍼를 쓰러뜨린 건 내가 아니라 저 녀석이다. 나는 오히려 제임스 스나이퍼라는 그 녀석에게 흠씬 얻어맞았지. -어쨌든...아직 혼은 많이 남아 있으니. 이번에는 좀 더 수준이 높은 걸로 보내주지. 잭슨의 말에 가람이는 지루한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네가 할 수 있는 가장 강한 혼을 보내라. 이제 이 짓도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한다. -...네가 재밌어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주지. 지금까지는 나도 노는 정 도에 불과했으니. 잭슨은 입술을 악물면서 무엇인가를 준비하는 듯 양손으로 천천히 원을 그리고 세워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언가가 쉬익- 하고 빠른 소리를 내 면서 우리에게로 날아오더니 컨테이너 벽에 처박혔다. 꾸아앙! "크아아악!" 컨테이너의 벽에 처박힌 무엇인가는 사람의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도 대체 뭐지? 나와 청도, 그리고 잭슨은 멍청하게 순식간에 날아온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주희가 갑자기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를 내질렀다. "하, 한수야!" 한수라고? "으윽...저 빌어먹을 놈이!" 컨테이너의 벽에 처박혔던 그것은 비틀거리면서 일어서더니 입에서 피를 뿜으면서 다시 주저앉았다. "꺄아아악! 한수야! 왜 그래애앳!" "크윽!" 한수라고? 확실히 다시 주저앉은 '그것'을 자세히 보니 그것은 한수의 얼 굴을 하고 한수의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한수가 맞군. 아니 그런데 한수 가 왜 여기로 날아온 거지? 잠시 후 내 궁금증은 풀렸다. -쐐애애액! 꽈앙! 청도가 컨테이너로 날아와서 거세게 부딪힌 것이다. 청도가 졌구나, 으윽! "크으으윽!" 청도는 천천히 미끌어지듯 벽에서 떨어지더니 비틀거리면서 일어섰다. 그 순간까지도 청도의 왼손에는 목검이 쥐어져 있었다. "저 썩을 놈...좀 곱게 집어던지면 허리가 부러지기라도 하나...우윽!" 청도 역시 충격이 컸는지 휘청거리다 한쪽 무릎을 꿇어 버렸다. "도, 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빌어먹을, 방심했다 크게 당한거지 뭐가 어떻게 되긴 어떻게 되냐. 하 여튼 나는 너무 건방져서 탈이라니...어이구, 허리 아파 죽어버리겠구만..."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니깐?" 그리고 청도는 자기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간단해. 존이 잘 막다가 뒤로 갈수록 흔들리더라고. 그래서 정신 차리라 는 의미로 어깻죽지를 한 대 후려쳐 줬지. 근데 너무 살살 때렸는지 기절 은 안 하더라고. 덕분에, 저 놈은 맞으면서도 그걸 기회로 삼아서 기합으로 나를 튕겨내버렸고. 한수가 깜짝 놀라서 염력으로 자신을 묶으려고 하는 것을 보고 한수를 노려보면서 기합을 지르는 것만으로 이리로 날려 버렸 지. 그리고 당황한 내가 자신을 향해 뛰어드는 걸 보더니 나까지 날려버린 거고. 간단하지?" "그러니까, 한 마디로... 존 캐슬은 지금..." "그래. 다시 이리로 오고 있어" 나는 끔찍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존 캐슬이 한 손에 검을 거꾸 로 들어서 등뒤로 세우고 이 쪽을 향해 느릿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비록 입가에 미소는 사라졌다지만 그의 약간 우수에 찬 듯한, 무표정한 얼굴은 여전한 채였다. 그리고 나는 그래서 저 괴물 같은 인간이 더욱 무서워졌다. 아니, 그래도 나름대로 당한 녀석이 표정이 저래? 정말 치가 떨릴 정도의 감정 절제로군. 요령이와 맞서 싸우던 루나와, 가람이와 맞서 싸우던 잭슨은 존 캐슬이 청도를 날려버리고 이 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을 보자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 니 갑자기 뒤로 물러섰다. -뭐야? 요령이의 놀란 목소리가 마음속으로 들려왔다. -이제 단장이 다시 돌아왔으니 우리가 나설 필요가 없지. 이제 모든 건 단장이 알아서 할 거야. 루나는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잭슨 역시 루나의 말에 고 개를 끄덕였다. 정말 단장에 대한 믿음이 깊은가 보군. 하긴, 나라도 저 정 도로 강한 자가 대장이라면 무조건적인 신뢰감이 쌓일 것 같다. 어쨌든 루 나와 잭슨이 물러나자 요령이와 가람이도 우리에게로 다시 돌아왔다. 마음속으로 존 캐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사여,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오? 그리고 청도는 한쪽 무릎을 꿇고 주저 앉은 채로 눈살을 찌푸리다가 탐탁 지 않은 목소리로 내뱉듯 외쳤다. "...청도, 이청도" -이청도. 당신의 이름, 기억해 두겠소. 내 서른 평생을 살면서 검술에 있 어서는 내가 독보적인 존재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내 생각이 틀렸구려. 당신에게 비하면 나는 어린아이에 불과하오. 당신은 나보다 검술에 있어서 는 훨씬 강하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당신에게서 정식으로 검술을 배우 고 싶군. 당신이 오직 하나 잘못한 게 있다면, 상대를 앞에 두고 마음에 여 유를 두었다는 거요. 나 역시 마찬가지지만, 당신 역시 마음을 좀 더 가다 듬어야겠군. 우리 모두는 존 캐슬의 말에 경악해 버렸다. 물론 청도가 존 캐슬보다 검 술이 더 뛰어나다는 말에 놀랐다거나 청도에게 검술을 가르쳐 달라고 하는 존 캐슬의 열린 마음에 놀랐다거나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가 놀란 까닭은 존 캐슬이 밝힌 그의 나이 때문이었다. 서른 평생? 그러면 저 녀석 의 나이가 고작 서른에 불과하다는 거야? 서른, 나이 서른에 저 정도로 강 해졌다고? 말도 안 돼! 믿을 수 없어! 가람이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천재다... 천재... 옛 상환 주인을 뛰어넘는 천재..." 그러나 단지 요령이만은 별로 놀라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나이 서른이면 생긴 것보다는 나이가 덜 먹었군. 수염 좀 깎으면 더 젊 어 보일텐데. 왜 요령이는 놀라지 않는 거지? 나는 이 상황에서도 궁금증을 참지 못하 고 물었다. "야, 너는 놀라지도 않냐?" "...나는 네가 그렇게 엎어져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궁금해한다는 사실이 놀라워. 뭘 놀라지도 않아?" "저 녀석, 나이가 서른이래" "...그래. 그게 뭐?" 요령이의 '설마 그거 물어보려고 했냐'고 묻는 듯한 눈빛을 피하며 나는 다시 물었다. "나이 서른에 저 정도로 강해졌다고" "그래. 그게 뭐 어쨌다고?" "이상하지 않아?" "뭐가 이상해? 스콥의 단장들은 원래 다 그래" "뭐?" 내 질문에 요령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스콥의 단장들은, 자기가 죽을 때가 되면 차기 단장이 될 사람에게 자신 이 평생 모아두었던 자신의 모든 힘을 전해주지. 그리고 다음 단장 역시 다다음 단장을 임명할 때가 되면 자신이 물려받은 힘에다가 자신이 평생 동안 더욱 쌓아올린 힘을 더해서 다다음 단장에게 전해주고. 한 마디로 저 존 캐슬인가 하는 녀석의 힘은 순수하게 자신의 힘을 모은 것이 아냐. 수 백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는 힘을 '물려받은' 거지.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스콥은 그렇게 자신들의 힘을 후대에 전달했다고 하더라. 그래서 이런 이 야기가 있지. '오망성의 그림자 기사단이 만들어낸 최고의 유산은 기사단장 이다'라고 하는. 어쨌든 저 녀석은 수 백년 동안 쌓인 영기를 가지고 있어. 당연히 우리가 상상치도 못할 만큼 강할 수밖에 없지. 더구나 성기사단장 으로 선출되는 자들은 모두 영적 자질이 특출난 자들 뿐이야. 그래서 그들 이 물려주는 힘을 남들이 수 백년 동안 영기를 쌓은 것보다도 훨씬 더 높 은 경지까지 이르러 있지" "그렇구나..." 나는 요령이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온 존 캐슬. 발걸음을 멈추더니 말한다. -카르텔. 아까 난 내가 당신의 앞에 설 때까지 생각할 시간을 준다고 했 고, 지금 난 당신의 앞에 섰소. 마음의 정리는 끝났소? "......" 묵묵부답인 요령이. 존은 말을 이었다. -이제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끝났소. 당신과 당신 친구들은 내가 생각 했던 것 이상으로 강했고, 모두들 잘 싸웠소. 하지만 이제 끝났소. 우리와 함께 갑시다. 우리가 당신을 보호해 주겠소. -이... 존 캐슬의 우수에 찬 듯한, 그러면서도 여유가 섞여 있는 목소리. 그리고 요령이는 입술을 깨물다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도대체 보호는 무슨 얼어죽을 보호라는 거야! 필요 없다니깐! 요령이는 점차 소리를 크게 지르다 이윽고는 고함을 버럭 버럭 질렀다. -내가 필요 없다는데 보호는 무슨 얼어죽을 보호야! 필요 없어! 필요 없 다고! 꺼져! 꺼져버려! 지금 당장! 절대로 안 쫓아갈 거야! 절대로! 요령이는 소리를 버럭 버럭 지르면서 감정이 북받치는지 어깨까지 부들 부들 떨어댔다. 하긴, 나 같아도 불안하겠다. 자신을 잡아가겠다는 사람들 이 앞에 있는데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다니! 사실 지금 저 녀석들이 하려 는 짓은 납치나 다름없다. 비록 말로 좋게 말해서 데리고 가겠다지만, 말로 안 되면 결국 힘으로 끌고 가겠다고 하지 않는가. 납치다. 그것도 공개적인 납치. 존을 슬픈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어쩔 수 없구려... 다치게 하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마시오. 가람이가 소리쳤다. "온다! 모두 정신 똑바로 차려라!" 막 존이 한 걸음을 옮길 때였다. 갑자기 존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더니 옮 기던 걸음을 멈추고 칼을 바로 들면서 외쳤다. "오 갓...! 잭슨 앤 루나, 비 케어풀리!" 잭슨과 루나는 갑자기 '주의하라'는 존의 말에 어리둥절해서 이리 저리로 고개를 저으면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요령이는 존이 말을 잇자, 지금까지의 좌절 섞인 얼굴을 끔찍한 공포로 뒤덮인 얼굴로 바꾸면서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존 캐슬은 이를 으드득 갈면서 험악한 얼굴로 외쳤다. "퀴에르!" <고양이>CH 23. 퀴에르 오다 퀴에르? 퀴에르라고? 존 캐슬의 말을 들은 나는 우선 내가 잘못 들은 것 은 아닌 지부터 의심했다. 퀴에르라니? 말도 안 돼...! 그녀가 왜 이 곳에 온단 말인가? 그리고 아직까지 나타나지도 않았는데 존 캐슬은 어떻게 퀴 에르가 등장했는지 안단 말인가? 하지만 내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니었다. 그 증거로 요령이가 자리에 주저 앉은 채 눈이 풀려서 멍하니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요령이는 정 말로 큰 충격을 받은 듯 했다. 안쓰럽게 요령이를 바라보던 가람이가 혀를 차면서 요령이를 똑바로 일으켰다. 하지만 요령이는 다리가 풀렸는지 잠시 비틀거리다 결국 다시 주저앉아 버렸다. "설마 사실이라면... 정말 퀴에르가 오고 있는 거라면... 그렇다면... 끝이 야... 난 이제 끝이야... 끝났어..." 요령이는 부들부들 떨면서 이 말만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도대체 왜 그리 겁을 먹는 거야? 나는 불안해하는 요령이와 존 캐슬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존 캐슬도 이를 악물고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지금까지의 여유로 워 보이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존이 퀴에르를 경계하지? 퀴에르가 존이 경계할 정도로 강한 상대인가? 하지만, 단지 상대방이 강하다고 해서 경계를 해? 만나면 꼭 싸운다는 보장은 없잖아? 어쨌든 존 캐슬도 퀴에르 를 알고 있는 것으로 봐서 퀴에르가 유명하긴 유명한가보군. 존은 이를 악물면서 거꾸로 잡아서 방만하게 들었던 검을 바로 들어 양손 으로 잡았다. 잭과 루나 또한 얼굴을 찌푸리며 각자 경계하는 자세를 취했 다. 존이 잭과 루나에게 무언가 이러니 저러니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의 대화 내용은 너무 빨랐고, 그래서 영어가 능숙 치 않은 나로서는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청도 역시 주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것을 느꼈나보다. 청 도는 칼을 고쳐 잡고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런데, 청도는 비명을 지르며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크윽! 젠장!" "왜 그래?" 청도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발목을 쥐고 있었다. "빌어먹을...벽에 부딪혔다 떨어지면서 발목을...삐었나봐" ...이런! 다쳤다고? 큰일이다! "괜찮아? 서 있지도 못할 만큼 고통스러워?" "...아니...꾹 참으면 서 있을 수는 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 움직이기는 힘 들 것 같은데. 젠장..." 청도는 낭패라는 듯 어두운 표정으로 뒷말을 흐렸다. 제기랄! "별로 아프지는 않고?" "견딜 만은 해. 젠장... 하지만 칼을 들기는 힘들 것 같은데" "그래? ...할 수 없지. 일단은 상태를 지켜보자" 말은 듣기에 따라 태연하게까지 들릴 수 있도록 했지만, 실제로 내 마음 속은 말과는 반대로 까맣게 타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다. 청도는 우리 쪽에서 거의 최강의 전력에 가깝다. 하지만 청도는 영적 능력은 전혀 가지 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일단 청도의 움직임이 둔해진다면 청도는 보통 사 람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게 된다. 옆에서 가람이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히 무언가 이리로 오고 있긴 오고 있군. 그런데 내가 잘못 느끼는 것이 아니라면 하늘을 날아서 오고 있는데... 그리고 하나가 아니다" 하늘을 날아서 오고 있다고? 알겠다. 빗자루를 타고 오고 있구나! 그런데 하나가 아니라는 말은 무슨 뜻이지? 나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데... 어쨌든 나는 주위를 경계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켜 보았다. 몸의 이곳저곳이 아직 까지 삐거덕거리긴 했지만, 다행히 이제 그럭저럭 버티고 서 있을 만은 했다. 나는 그렇게 몸을 일으킨 채로 세 발 까마귀의 패를 쥐고 힘을 끌어 당겼다. 하지만, "우윽!" 기가 통하면서 온 몸이 감전되는 듯한 느낌에 나는 고통 섞인 신음소리를 흘려야만 했다. 절그렁- 세 발 까마귀의 패가 땅에 떨어지면서 쇳소리가 났다. 나는 얼굴을 찌푸린 채 손을 털고는 세 발 까마귀의 패를 주었다. 역 시, 너무 무리해서인지 아직까지 몸이 외부의 기를 받아들이지를 못하나보 다. 쳇. 나는 툴툴대면서 세 발 까마귀의 패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런데 불 현듯 불안감이 밀려들어왔다. 이거 혹시 무협지 같은 것을 보면 자주 나오 는 '주화입마'라는 것은 아닐까...? 주화입마라는 것에 빠지게 되면 내공을 전혀 사용할 수가 없게 된다고 한다. 거기다가 무협지를 보면 주화입마에 빠지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내공의 무리한 운용 때문이다! 설마...? 나는 불안감을 느끼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 몸 속의 기운을 움직여 보 았다. 만약에 기가 아예 내 통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끝장이다! 하지만,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기는 느리게 내 몸 속에서 나의 생각대로 흘렀다. 비록 기가 움직이는 경로를 따라서 고통이 느껴지긴 했지만 말이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마도 지금의 몸 상태는 아까 무리하게 기를 운용 했을 때의 충격으로 인해서 외부의 기를 잠시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에 불과한 것 같다. '다행이다!' 가람이가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요령이가 심상치 않다. 좀 정신을 차리게 해야겠는데" 나는 요령이를 바라보았다. 요령이는 아직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앉 아 있었다 오늘 요령이 약한 모습 많이 보이는군. 나는 요령이에게로 다가 갔다. "야, 일어나! 지금 가만히 주저앉아 있을 때가 아냐!" "......" 요령이는 묵묵부답인 채로 내 어깨 뒤의 허공만을 바라보았다. 아까 가람 이가 '퀴에르가 온다'고 말하며 바라보던 그 방향이었다. "야, 정신 차려! 정신! 지금 이렇게 가만히 앉아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나를 데리러 온다고 했어" 요령이가 간신히 입술을 달싹거려 기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퀴에르에게 잡혀가게 될 거야... 그건 저 오망성의 멍청이들에게 잡혀가 는 것보다 백 배는 더 끔찍할 거야" "무슨 그런 맥빠지는 소리야! 일단 일어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존 캐슬도 지금 퀴에르를 경계하고 있어. 어쩌면 존도 퀴에르를 싫어하는 걸지도 몰라!" "...당연하지..,멍청아. 저 스콥 녀석들은 원래 교황청의 성기사단으로 출발 했다고...했잖아" 요령이는 평소와는 달리 여기까지만 말하고 더 이상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말하기가 귀찮은 것이던지 아니면 말할 기력조차 없는 것이리라. 어쩔 수 없이 나는 요령이의 말을 토대로 존이 왜 퀴에르를 경계하고 있는 지를 추론해 내야 했다. '존 캐슬의 스콥은 원래 처음에 교황청 직속의 '원탁의 그림자 기사단'으 로 출발했었지... 그리고 요령이의 말에 따르면 비록 그 상징은 원탁에서 오망성으로 바꾸었지만 자신들 나름의 정의를 추구한다고 했고...' 그렇다면 대답은 간단하다. 퀴에르의 흑마녀협회가 존 캐슬의 정의와 배 치되는 단체인가보지 뭐. 어쨌든 지금은 존이 왜 퀴에르를 경계하는지, 그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요령이가 기운을 차리게 하는 것이다. 나는 요령이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야! 정신 차려! 일어나라고!" "아... 그만해. 어차피 글렀어. 존 캐슬 하나로도 벅찬데 이제 퀴에르까지 나타나 버렸으니. 이제 난 글렀어. 둘 중 하나가 나를 데려가겠지 뭐. 지금 도망가고 싶어도 존 저 녀석이 내 바로 앞에서 저렇게 딱 버티고 있으니 도망도 못 가겠고..." "야! 퀴에르가 꼭 너를 데려가려고 이 곳에 나타났다는 보장은 없잖아? 그리고 존 캐슬 저자도 너를 끌고 가겠다고는 하지만 호의적인 것 같고!" "멍청한 소리 그만하고 입 다물어... 상대하는 나만 피곤하니까. 그냥 이대 로 주저앉아 있게 놔 둬. 난 좀 쉬고 싶어" 요령이는 짜증난다는 듯 이렇게 말하고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돌려 버렸 다. 이거 답답해 죽겠네 정말! -일어나시오. 음? 이건? 존 캐슬의 목소리다! 나는 존 캐슬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존 캐슬은 우리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카르텔, 일어나시오. 지금 당신은 그렇게 주저앉아 있을 때가 아니오. 어 서 일어나시오. 존 캐슬의 갑작스러운 말에 요령이는 꽤나 놀란 듯 했다. 요령이는 잠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존을 바라보더니 곧 우습다는 듯 한 쪽 입술을 치켜올 리며 말했다. -네가 무슨 상관이지? -지금 말씨름이나 하고 있을 정도로 상황이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오. 일 단 어서 일어나시오. -일어나든 말든 그건... 요령이가 무어라고 말대꾸를 하려 했지만 존 캐슬은 고개를 저으면서 강 하게 다시 한 번 말했다. -부탁이오. 어서! 짧고 강한 목소리 존 캐슬의 목소리에는 누구도 거부할 수 없을 것 같은 설득력이 담겨 있었고, 요령이는 투덜거리면서도 존 캐슬의 말에 따라서 몸을 일으켰다. -이제 됐냐? -잘했소. 자, 이제부터 내 말을 반드시 따르시오. 존 캐슬은 심각한 얼굴로 요령이를 바라보았다.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면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이제 퀴에르가 거의 다 왔소. 퀴에르가 온다면, 나는 그녀를 막기 위해서 싸울 것이오. 우리는 서로 만나는 것은 처음이 아니지만 서로의 실력도 모 르기 때문에 싸운다면 누가 이길 거라고 장담은 못 하겠소. 하지만 내가 질 것 같다면, 존 캐슬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곳에서 도망치시오. -...그게 무슨 소리지? 당신은 나를 데리고 가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어? 그런데 이 곳에서 도망치라니? 요령이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되물었다. 그리고 존 캐슬은 요령이의 말 에 고개를 가로 저으며 대답했다. -당신을 데리고 가는 것은 내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오. -그렇다면...? 아...! 요령이는 존 캐슬의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잠시 어리둥절해 하다가 곧 무 언가를 깨달은 듯 얼굴 전체에 경악을 드리우며 말했다. -퀴에르가 나를 데리고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당신이 나를 데리고 가 겠다고 한 거야? 그러고 보니 당신은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데려간다고 했 었지. 나를 보호하는 이유 역시 퀴에르 때문이고...? -그렇소. 존 캐슬이 고개를 끄덕였고 요령이는 숨이 막히는 듯한 말투로 급하게 되 물었다. -왜? 왜 퀴에르가 나를 데리고 가면 안 되는 거지? -설명할 시간이 없소. 일단 지금은 도망치지 마시오. 퀴에르는 이미 당신 을 느끼고 있소. 만약 여기서 당신이 도망친다면, 당신을 쫓아갈 것이 뻔하 오. 그러니 일단은 기다리시오. 퀴에르가 이 곳에 도착하면, 그 순간부터 나는 퀴에르를 막겠소. 당신은 상황을 잘 살피시오. 그리고, 만약, 내가 수 세에 몰리게 된다면 당신은 앞 뒤 가리지 말고 무조건 도망가시오. 그리고, 만약 퀴에르에게 잡힐 것 같은 상황이 된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으시오. 존의 마지막 말에 요령이는 몸을 움찔 떨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니? 잡히느니 자살을 하라고? -...왜? 그 정도까지 나는 퀴에르에게 잡히면 안 되는 존재인 것인가? -그렇소. 존이 요령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는 가르쳐 줄 수 없고? -이미 여기까지 말했는데 뭘 못 가르쳐 주겠소.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 소. 존이 안타까운 듯 대답하더니 물었다. -카르텔,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것을 모두 지킬 수 있겠소? -도망을 가는 것쯤이야 얼마든지 약속할 수 있지. 하지만 자살을 약속하 라고? 그건 할 수 없어. -어차피 퀴에르에게 잡히면 당신은 죽소. 존의 말에 요령이는 싸늘하게 대답했다. -그거야 가봐야 아는 거고. 요령이의 말에 존은 얼굴 표정을 굳히더니 이윽고 무겁게 말했다. -차라리 당신을 죽였어야 했었다는 생각이 드오. -그래? 그래서 후회된다는 말인가? -지금이라도 당신을 죽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지도 모르지. 슥. 존이 검을 세워 요령이를 향해 겨누었다. 서, 설마...? 이 봐! 나는 황 망히 소리쳤다. "잠깐! 당신 지금..." 하지만 요령이는 존 캐슬을 똑바로 노려보며 날이 선 목소리로 대답했다. -흥. 죽이려면 죽여. 어차피 난 이제 포기한 몸이라고. 당신이 손만 까딱 해도 날 죽일 수 있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당신은 지금 잘못 생각하고 있어. 난 어차피 이제 모든 것을 포기했어. 모든 것을 체념했는데 그 정도의 협박이 먹힐 것 같아? 죽이려면 죽여. 당신이 나를 죽인다고 해도, 나는 자살하겠다는 약속 따위는 못 해겠어. 자살을 하더라도 그건 내 마음대로 결정하는 거야. 약속 같은 것으로 내 목숨의 종말처리를 결정할 생각 따위는 전혀 없다구. 죽이려면 죽여. 자, 마음대로 해. 요령이는 별로 저항할 생각도 없는지 양손도 허술하게 허리에 걸친 채로 '죽이려면 죽여'하는 식의 당돌한 말을 내뱉고 있었다. 요령이의 말이 끝나 자 존 캐슬의 칼끝이 파르르 떨렸다. 존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설마? 하지만 존은 칼끝을 떨구었다. -...한 번 망설인 자는 영원히 망설이게 되지... 존은 힘없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가 한 말을 반드시 기억하시오. 퀴에르는 당신을 잡아간 후 죽 일 것이오. 만약 죽을 것 같다면 친구들 앞에서 유언이라도 하고 죽는 편 이 당신에게도, 그리고 당신의 친구들에게도 훨씬 나을 거요. -반드시 명심하도록 하지. 요령이가 비아냥거리듯 대답했다. 정말 둘 다 죽이네 살리네 자살이네 마 네 하는 이야기들을 너무 쉽게 하는군, 그래. 옆에서 대화 내용을 듣던 나 는 질려 버리는 줄 알았는데 말야. 그 때 가람이가 너무 무거워서 약간은 억눌린 듯 들리는 목소리로 외쳤 다. "온다!" 모두 가람이가 바라보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늘 한 가운데 작은 점 두 개가 있었다. 빠른 속도로 커지고 있는 두 개의 작은 점. "하나는 퀴에르겠지... 다른 하나는 뭐지?" 요령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나도 그게 궁금해. "잘 느껴 봐라.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기운이다" 가람이가 대답했다. 그리고 요령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곧 고개를 끄 덕이면 대답했다. "그렇군. 네 말대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기운이야. 김혜진이다" "김혜진이라면... 아! 그 온통 새빨간 색의 그 불꽃의 마녀?" "그렇다" 가람이가 요령이 대신 대답했다. "저 둘만 오는 건가? 배짱도 좋군" 내 말에 요령이는 피식, 쓴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설마 존 캐슬처럼 이 바닥에서 괴물로 통하는 인간이 이 곳에 있으리라 고는 상상도 못 했겠지. 그리고 존 캐슬이 없다면, 우리 같은 것들은 한 트 럭이 덤벼도 퀴에르를 이길 수 없어. 아마 퀴에르도 자기 혼자 오려다가 그나마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한다고 대비한 것이 혜령일걸. "그런가?" 하긴, 퀴에르가 존 캐슬이 여기 오는지 안 오는지를 어떻게 알겠는가. 나 는 요령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화르르르...! 잠시 후, 하늘 저 편에서 작게 무언가가 타 들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리고 두 개의 점이 그 윤곽을 점차 뚜렷이 드러내었다. 그것은 빗자루를 탄 두 명의 여자였다. 한 명은 검은 후드를, 한 명은 새빨간 재킷을 걸치고 긴 붉은 머리를 뒤쪽으로 휘날리는 여자. 붉은 머리의 여자의 몸에는 시뻘 건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아마도 '화르륵'하는 소리는 저 붉은 여자 의 몸에서 타오르는 불꽃이 내는 소리이리라. 김혜진이다. 그리고 후드를 두른 여자는 김혜진과는 대조적으로 어떠한 특이한 모습도 보이지 않은 채 - 하긴, 빗자루를 타고 온다는 것 자체가 이미 충분히 특이한 일이긴 하지 만 - 날아오고 있었다. 아마도... "퀴에르" 요령이가 나직하게 되뇌었다. 그렇다. 저 여자는 퀴에르일 것이다. 김혜진이 빗자루의 속력을 높이더니 우리를 향해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콰라라라라-! 김혜진이 속도를 높이자 불꽃이 괴상한 신음을 내 질렀다. 김혜진은 허공에 붉은 색 선을 그리며 우리를 향해 무서운 속도를 내며 날아오더니, 순식간에 지면 바로 앞까지 날아와서 급정거했다. -콰콰콰콰쾅! 갑작스러운 혜진의 급정거에 혜진의 몸 주위에서 타오르던 불꽃들이 출렁 거리면서 폭발하듯 부풀어오르더니 이윽고 힘을 견디지 못하고 커다란 불 기둥과 함께 터져 버렸다. 그리고 혜진은 타탁, 하는 기분 나쁜 소리와 함 께 타 들어가는 잔디밭의 불길 사이에서 빗자루를 띄우고 천천히 걸어 나 왔다. 잠시 불꽃이 그녀의 몸을 휘감았지만 곧 허공에서 흩어져 버렸다. "오랜만이야" 혜진이 가늘게 눈을 뜨며 미소지었다. 그리고 요령이는 혜진을 차갑게 노 려보며 말했다. "영원히 네 얼굴 따위는 안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래? 이거 아쉬운데. 난 네가 너무나도 보고 싶어서 꿈에까지 나올 지 경이었는데" "......" 요령이는 대답 대신 입술 끝을 올려 이를 드러내었다. "어어? 뛰어내리나?" 갑자기 청도의 숨막히는 비명 소리가 들렸다. 누가? 어디서? 나는 머릿속 으로 여러 가지 의문을 떠올리면서도 눈으로는 반사적으로 퀴에르를 바라 보았다. 지금 사람들의 시선을 끌 만한 사람이 퀴에르밖에 더 있겠는가? 과연 내 생각대로 청도가 말한 '뛰어내리나?'의 대상은 퀴에르였다. 퀴에르 가 빗자루에서 뛰어내린 것이다. 나는 경악에 차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니, 갑자기 저렇게 뛰어내리다니...? 저 여자가 미쳤나? 퀴에르가 뛰어내린 빗자루가 갑자기 허공에서 쇠가 시뻘겋게 달구어지듯 점차적으로 시꺼먼 색으로 물들더니 이윽고 우리 쪽을 향해서 무시무시할 정도로 속도를 붙이며 날아왔다. 뭐지? 나는 당황해서 빗자루를 바라보았 다. 빗자루는, 시꺼먼 색 꼬리를 마치 유성처럼 길게 끌면서 순식간에 퀴에 르와 우리와의 거리를 좁히며 날아들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중 정확히 누 구에게로 가는 거지...? 요령이? 아니면... 존 캐슬? -쐐애애액! 빗자루는 존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역시 존이 가장 무서운 상대라는 건가? 하지만 존의 표정에는 예의 그랬듯 겁먹은 듯한 기색 따위는 전혀 없었다. 단지 어느 정도의 긴장감이 감돌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긴장 감조차 퀴에르라는 존재 자체 때문에 가지는 것이지, 퀴에르의 빗자루 공 격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이윽고 빗자루가 존의 바로 앞까지 날아들었다. -퍼엉! 갑자기 존의 온 몸에서 눈부신 빛이 폭사되며 빗자루를 날려 버렸다. 쩌 어엉! 굉장한 충돌음이다! 나는 손으로 눈 위를 가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퀴에르의 빗자루가 하늘로 튕겨오르더니 빙글빙글 돌다 이윽고 힘없이 땅 에 꽂혀 버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존 캐슬은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 은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잠시 후, 마음속으로 언젠가 한 번 들었던 기억이 있는, 요염한 목소리가 마음속으로 울려 퍼졌다. -역시 대단하군. "퀴에르!" 요령이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표정이나 기세와는 반대로, 주먹 을 꼭 움켜진 요령이의 손은 작게 떨리고 있었다. 존 캐슬은 대답 대신 묵묵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퀴에르가 천천히 땅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정말 놀랍군. 영력을 이용해서 하늘에 떠 있을 수도 있다 는 말인가? 하지만 그렇다면 왜 빗자루를 타고 온 거지? 아마도 그리 빨리 날지는 못하는 모양이군. 천천히 하늘에서 내려오는 퀴에르의 모습을 봤음에도 존은 그리 놀란 표 정은 아니었다. 이윽고 퀴에르는 사뿐히 땅에 착지했다. 그녀의 긴 후드자 락이 바람에 펄럭였다. 이윽고 퀴에르는 후드자락을 천천히 걷었다. 혜진의 것보다도 더욱 불타오르는 것 같은, 긴 붉은 색 머리가 찰랑거리며 목과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역시, 예상대로 후드자락 너머에는 내가 생각했 던 얼굴이 있었다. 요령이는,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이 흙빛 이 되어 다시 한 번 외쳤다. "퀴에르!" -맞아, 카르텔. 나야. 퀴에르는 아름다운, 하지만 얼음장같이 차가운 미소를 얼굴에 띄며 손가 락을 까닥여 인사했다. 그리고 요령이는 이를 부드득 갈며 외쳤다.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지? -물론 너를 데려가려고 왔지, 나의 귀여운 아기 고양이야. 퀴에르의 말에 요령이는 할 말을 잊은 듯 꿀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리고 퀴에르는 요령이의 굳어버린 모습을 보며 재밌다는 듯 피 싯 웃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무능력 청년, 너도 반가워. 흠, 조금은 강해졌나? 호호, 그래도 나름대로 애 좀 썼나 보군 그래? "......" 내가 대답을 못한 것은 내가 마음속으로 말을 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 기도 했지만, 갑자기 퀴에르가 말을 거는 바람에 너무 놀라 할 말을 잃었 기 때문이기도 했다. 잠시 우리를 바라보던 퀴에르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 했다. -왠 떨거지들이 이렇게 많아? 두어 놈을 빼 놓고는 모조리 쓸모 없는 녀 석들뿐이군. 특히 저기 주저앉은 녀석과 저기 꼬맹이, 그리고... 흠? 잠시 우리 쪽을 훑어보던 바라보던 퀴에르는 주희를 보고 갑자기 말을 멈 추더니 잠시 주희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왜, 왜 저 언니가 나를 바라보는 거야?" 퀴에르가 자신을 바라보자 가뜩이나 주위의 분위기 때문에 겁을 잔뜩 먹 고 있던 주희는 불안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며 딱히 누구라고 상대로 정 하지도 않은 질문을 던졌다. 물론 주희의 질문에는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 았다. -...이상한 아이군. 하지만 퀴에르는 별 관심이 없는지 고개를 돌리며 존 캐슬을 바라보았다. 펄럭. 퀴에르가 돌면서 후드자락이 작게 허공으로 떠올랐다. -반가워요. 존 캐슬. 참 오랜만이군요? -반갑다. 오랜만이군. 존 캐슬은 우리에게 했듯이 무색의 음성으로 대답했다. 우리와의 대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존은 우리에겐 친절했지만 퀴에르에게는 냉랭하게 들릴 리만치 차갑게 말한다는 것, 그리고 우리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과는 달리 퀴에르에게는 존댓말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얼마 만이죠? -1년은 확실히 넘었다. -이런 이런, 그렇게 차갑게 대하지 말아요. 초면도 아닌데 좀 더 사랑스럽 게 말해 보라고요. -웃기는 소리 말고 입 닥쳐. 존 캐슬의 말은 듣는 우리가 무서울 정도로 묵직하고 차가웠다. 듣는 대 부분이 무의식적으로 어깨를 움찔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퀴에르는 전혀 신 경 쓰지 않는 듯 했다. -여기에는 어쩐 일이죠? -너와 같은 목적이다. 퀴에르는 존의 말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예상은 했었지만. -예상을 했었으면 오질 말았어야지. -난 내가 당신보다 한 발 빠르게 올 줄 알았죠. -나도 너와 이렇게 마주칠 줄은 몰랐다. 존의 말에 퀴에르는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깔깔대며 웃었다. -호호호! 그 말은, 나와 마주칠 것을 알았다면 이 곳에 오지도 않았다는 말씀이신 가요? -조금 빨리 오려고 노력했겠지. -나 역시 당신이 이 곳에 이렇게 빨리 나타날 줄 알았다면 조금 더 빨리 오려고 노렸했을 거에요. 피차일반이군요. 퀴에르는 만면에 웃음을 가득 띄며 말했다. -어차피 내가 왜 왔는지 목적은 알고 있겠죠? -물론이지. 존은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퀴에르는 그 대답에 갑자기 인간의 것이라고 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귀기를 뚝뚝 흘리며 말했다. -알면 꺼져. 등에 소름이 쭉 끼쳤다. 마치 얼음물을 머리에 퍼붓는 것 같은 한기가 순 식간에 온 몸을 훑고 지나갔다. "...으..." 청도가 질렸다는 듯 신음을 흘렸다. 한수는 말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얼 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나 역시 다리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후들 거렸다. 어떻게 말 한 마디만으로 이렇게 모두를 겁먹게 할 수가 있지? 나 는 퀴에르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입을 다문 채 팔짱을 끼고 존 캐 슬을 노려보는 퀴에르의 모습은... 분명히 아름다운 모습이긴 했지만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할 것 같은 잔인함이 그녀의 주위에서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아까 존 캐슬의 말에 퀴에르가 겁먹지 않은 것처럼, 존 캐슬은 우 리 중 유일하게 퀴에르의 말에 대해 태연한 사람이었다. 어째 아까부터 계 속 당사자는 가만히 있는데 주위 사람들은 겁에 질리는 모습이 반복되는 것 같군. 존 캐슬은 나직하게 대답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쉐도우 나이츠 오브 펜타그램의 역사를 네 대에서 끝내고 싶다는 거냐? -흑마녀협회의 300년 동안의 역사가 오늘 끝날 수도 있지. 어느 쪽이 끝 날 거라고 너는 장담할 수 있나? 존은 여유 있게 되물었고 퀴에르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존은 천천히 다 시 말했다. -돌아가. -미친 소리. 퀴에르가 비아냥거렸다. -내가 왜? 너야말로 나를 방해하지 말고 돌아가. 네가 무슨 권리로 나를 방해하는 거야? -쉐도우 나이츠 오브 펜타그램의 정의. 존 캐슬이 엄숙하게 말했다. 그리고 퀴에르는 잠시 말을 잊고 멍청히 있 다가 곧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깔깔깔깔깔! 아, 쉐도우 나이츠 오브 펜타그램의 정의 말씀이신가? 너희 의 정의와 맞지 않는 것이라면 어린아이까지도 죽여버린다는 그 정의를 말 하는 것 맞지? 지금 너희의 칼에 죽은 여자와 노인과 갓난아이들의 이름으 로 나를 막겠다는 것인가? 그거야말로 정말이지 웃기는 소리이군, 깔깔깔 깔! -...오래 전 이야기다. 존은 침울하게 대답했다. -이제 나는, 아니 쉐도우 나이츠 오브 펜타그램은 정의의 이름을 내걸고 함부로 살인을 하지 않는다. 그런 실수를 할 뻔한 적은 있었지. 존은 잠깐 우리를 흘낏 바라보았다. 아마 제임스와 우리의 이야기를 말하 나보다. 그 때 제임스는 요령이를 죽이기 위해 찾아왔다고 했었지. 그걸 '실수'라고 표현하는 것인가? -나는 카르텔을 죽이지 않았어. 하지만... 너라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지. 네가 말하는, 갓난아기도 죽이는 차가운 정의의 칼날로 말이다. -깔깔깔! 설마, 정말로 나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설마 내가 그깟 협박에 겁이라도 먹을 어린아이라고 생각하나? 깔깔깔깔깔! 퀴에르는 정말로 우습다는 듯 다시 한 번 귀가 멍멍할 정도의 목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존은 여전히 퀴에르를 조용히 노려볼 뿐이었다. 이윽고 웃음소리가 점차 잦아들었고, -돌아가. 난 너희 쉐도우 나이츠 오브 펜타그램의 멤버들을 알고 있지. 저 쪽에 선 양복을 입은 흑인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금발머리 소녀, 맞지? 지금 돌아간다면 절대 해치지 않겠다. 약속하겠어. 하지만 만약 나를 방해 하겠다면... 퀴에르는 싸늘하게 미소지었다. -쉐도우 나이츠 오브 펜타그램의 가장 큰 파멸을 약속하지. -그 말, 그대로 돌려주지는 않겠다. 너희 조직원 전부를 파멸로 이끌고 갈 생각은 없으니까. 하지만 네가 돌아가지 않는다면 네 목숨을 접수받는 것 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고민할 의향이 충분히 있다. 어떻게 하겠나? -...말로는 도저히 안 되겠군. 얼굴만 번드르르하게 생긴 멍청이. 퀴에르는 한숨을 쉬더니 손을 까닥 움직였다. 그러자 갑자기 땅에 박혀 있던 그녀의 빗자루가 흙을 튀기며 하늘로 솟아오르더니 퀴에르를 향해 날 아왔다. 턱. 퀴에르는 자신의 빗자루를 잡으며 존 캐슬을 바라보았다. 그녀 의 눈에는 상대를 깔보고 조롱하는 듯한 건방진 눈빛이 가득 차 있었다. 물론 존의 눈빛은 한 점 흔들림도 없이 고요했다. 잠시 존 캐슬을 묵묵히 바라보던 퀴에르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군. 왜 내 고양이를 데려가겠다는 데 막는 거지? 카르텔은 내 거야. 내 거라구. 누구도 내가 내 고양이를 되찾는 것을 방해 할 수 없어. "난 네 것이 아냐!" 요령이가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요령이는 얼굴이 벌겋게 달 아올라 있었다. 무지하게 흥분했나보군. 마음속으로 말하지 않고 실제로 소 리치는 것을 보니. 얼마나 분했으면, 요령이의 눈에는 눈물까지 그렁그렁 고여 있었다. 요령이는 이를 드득 갈면서 마음속으로 말했다. -난 네 것이 아냐! 난 네 고양이가 아니라고! 너 따위는 내 주인이 아냐! -짜악! 갑자기 날카로운 따귀 올려붙이는 소리와 함께 요령이가 허공에서 빙글빙 글 돌다가 컨테이너 벽에 처박혔다. 뭐, 뭐야? 나는 놀라서 눈을 둥그렇게 뜨며 퀴에르와 요령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퀴에르는 저기에서 미동도 안 하고 서 있는데? 퀴에르는 가만히 있는데 요령이는 튕겨져 날아갈 정도로 세게 얻어맞았다는 거야? 잠시 후, 요령이는 비틀거리면서 일어섰다. 요령 이의 왼쪽 뺨에는 새빨갛게 얻어맞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입술이 터졌는지, 요령이의 입가에서 실낱같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퀴에르는 차갑게 말했다. -누가 너같은 애완용 고양이에게 주인에게 말대꾸할 권리를 줬지? 애완용 고양이는 주인이 주는 우유나 받아먹으면서 주인이 원할 때면 냥냥거리기 만 하면 되는 거야. 까불지 말고 거기 가만히 있어. 안 그러면 또 맞을 줄 알라고! 하지만 요령이는 완강했다. 요령이가 고집이 좀 센가? 게다가 모든 것을 포기해서 이제 무서운 것도 없다지 않은가. 한 마디로 지금의 요령이는 자 신의 입으로 말했듯이 겁을 상실한 상태이다. 요령이는 씩씩거리면서 퀴에 르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웃기지 마. 너 같은 게 어떻게 내 주인이야! 버려진 고양이는 주은 게 임자라고! 날 주은 건 저기 영준이고, 따라서 내 주인은 영준이야! 너 같은 성질 더러운 마녀 따위가 절대 아니라고! -짜아악! 다시 한 번 따귀를 후려치는 소리와 함께 요령이가 다시 한 번 휘청휘청 거리다 자리에 주저 앉아 버렸다. 역시 퀴에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 고 요령이는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는지 어깨를 들썩이더니 결국 눈물을 줄줄 흘리며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으...흑...!" 이런...! 이를 어쩌나? 나는 당황해서 요령이를 바라보았다. 혹시 저러다 아예 주저앉아서 펑펑 우는 거 아냐? 하지만 잠시 훌쩍이던 요령이는 다행 히도 입술을 꽉 깨물더니 벌떡 일어나서 퀴에르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요령이가 마음을 독하게 먹었나보다. 이런...하지만 그래도 가만히 있지. 어 차피 요령이가 퀴에르를 주인이라고 인정을 하던 안 하던 지금의 움직이는 상황에는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 같은데 말야, 괜히 요령이가 쓸데없 는 짓을 하는 것은 아닐까? 요령이는 다시 한 번 앙칼지게 외쳤다. -니가 아무리 그래봤자 너같은 건 절대 내 주인이 아니야! 내 주인이 아 니라고! 내 주인은 여기 있는 영준이야! 너같은 녀석이 아니라고! 절대 아 냐! 요령이가 계속 자신에게 그런 식으로 대들자 퀴에르는 눈을 가늘게 뜨더 니 나를 바라보았다. 퀴에르는 나를 위 아래로 천천히 훑어보았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그리고 퀴에르의 시선을 느끼며 나는 불안감에 빠졌다. 제... 젠장! 이거 무섭잖아! 이거 이러다가 아까 요령이처럼 괜히 따귀라도 한 대 맞는 거 아냐? (그것도 몸이 붕 뜰 정도로 세게 말이다) 하지만 퀴에르는 나의 따귀를 때리는 대신 나를 잠시 주시하다가 이윽고 내게 물었다. -이 봐. "...예, 예...?" 나는 깜짝 놀라서 주춤거리다가 결국 바보같은 대답을 해 버리고 말았다. 퀴에르가 알아듣지도 못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우리말로 말한 것이다. 그것도 더듬거리면서.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예'라는 말 이 영어의 'yes'와 비슷해서인지 퀴에르는 내 말을 알아들었다. -너, 정말 카르텔의 주인이냐...? 퀴에르는 목소리를 낮게 깔고 다분히 협박성 짙은 말투로 물어보았다. 분 명히 저건 사람을 협박하는 것이 맞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을 뚫어져라 노 려보는 것은 무엇이며 한 단어 한 단어 또박또박 끊어서 말하는 것은 무엇 이란 말인가? 나는 움찔 몸을 떨면서 퀴에르의 차가운 시선을 피했다. 도 대체 이 질문에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퀴에르가 원하는 대답은 분명했다. '아니오'라는 대답을 원하고 있겠지. 하지만... 나는 요령이를 흘낏 바라보았다. 요령이는 간절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 다. 젠장, 그렇게 바라보면 어쩌란 말이냐! 무서워 죽겠는데 고민하게 만드 네 저게! 나는 요령이의 간절함이 어린 시선 역시 외면해 버렸다. 으으, 어 쩌란 말이냐! ...에라, 될 대로 되라! 최소한 비겁한 놈은 되지 말자! 나는 옛날에 분명히 요령이의 주인이 되어 주겠다고 요령이와 약속을 했었잖아! 약속은 지켜야지!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예스, 아이 엠 쉬즈 마스터! 벗 쉬즈 네임 이즈 낱 카르텔! 쉬즈 네임 이 즈 요령!" 내 말에 요령이는 감격한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암, 많이 감격해 야 될 거다! 그리고 퀴에르는 내 말에 기가 막히는지 약간 삐딱하게 고개 를 기울이고 나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천천히 말했다. -안타깝군. 카르텔만 데리고 가고 나머지는 버러지 같은 목숨이나마 붙여 주려고 했는데... 그렇게 자기가 주인이라고 우기니, 할 수 없네. 불쌍하지 만 다 죽여 버려야지. 지가 주인이라는데 뺏어 오는 수밖에 더 있어? 으으... 퀴에르의 말이 이어질수록 내 얼굴은 점점 더 흙빛으로 변했다. 저 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 소름이 오싹 끼치면서 온 몸이 떨렸다. 뭐? 나를 죽이겠다고? 나는 퀴에르를 바라보았다. 퀴에르는 이미 내게는 관심이 없 어졌는지 내게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요령이가 저 쪽에서 나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이윽고 조용히 말했 다. "고마워. 그리고, 미안" "물론 무지하게 고맙고 산더미만큼 미안해야 될 거야... 젠장" 나는 볼멘 소리로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상황 정말 더러워졌다! 요령이는 내 말에 피식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웃냐? 웃기냐? 지금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냐? 존 캐슬은 퀴에르에게 충고하듯 말했다. -들었나. 카르텔 양은 네가 주인이 아니라는 군. 이제 네 마지막 남은 정 당성은 사라졌다. 그러니 떠나라. 하지만 퀴에르는 존 캐슬의 말에 우습지도 않다는 듯 킬킬댔다. -웃기는군, 정말! 너, 정말 쉐도우 나이츠 오브 펜타그램의 단장이 맞아? 순진한 거냐, 멍청한 거냐? 내가 언제는 정당성 따지고 여기 온 거냐? 말 로 해서 따라오면 좋고, 안 따라오면 그 땐 강제로 끌고 가겠다고 온 거지. -나도 예의상 해 본 소리였을 뿐이다. 존 캐슬의 딱딱한 대답에 퀴에르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고개를 젓더니 다 시 한 번 물었다. -마지막이야. 똑바로 대답하는 것이 좋을걸, 정말 나를 막을 거야? -나야말로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말이다. 정말로 카르텔을 데려가려 할 것인가. 퀴에르는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후, 정말. 바보 같애. 당신이랑은 붙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었는데... 하지 만 할 수 없지. 퀴에르는 말을 마치고 빗자루를 허공에 띄운 후 양손을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며 옆으로 펼쳤다. 그와 동시에 잔디밭이 나직하게 울기 시작했다. -드드드... 흠, 오늘 잔디밭 고생 많이 하는군. 이제 놀랍지도 않다. 퀴에르가 손을 양쪽으로 펼치면서 잔디밭이 작게 진동하고 있었다. 존 캐슬은 그럴 줄 알 았다는 듯 무표정한 표정으로 자신의 거대한 검을 고쳐 쥐었다. 이윽고 존이 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더니 무시무시한 기세로 퀴에르를 향 해 내리찍었다. 검이 아니라 마치 도끼를 내리꽂는 듯한 기세였다. 검에서 는 푸른색 불길이 시퍼렇게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퀴에르는 존 캐슬의 서슬 퍼런 공격에 대해서 전혀 겁먹지 않은 듯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휘 익! 존 캐슬의 검이 퀴에르의 머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런데, -까아앙! 귀를 울리는 쇳소리와 함께 존 캐슬의 검이 퀴에르에 머리에 닿지 못한 채 멈춰 버렸다. 빗자루가 빙글 돌아서 존 캐슬의 검을 막은 것이다. 퀴에 르는 눈을 새초롬히 뜨며 말했다. -우리, 서로간에 어차피 이런 거 안 먹히는 거 알잖아? 장난은 치지 말고 제대로 한 번 해 보자고. 응? 아니면 내가 너에 대해서 잘못 알았던 건가? 사실은 이게 다인, 허풍으로 부풀려진 그런 인간에 불과했던 거야? 퀴에르의 조롱 섞인 말에 존 캐슬은 입술을 슬쩍 올렸다. 아마도 퀴에르 의 수준 낮은 도발에 기가 막혀서일 것이다. -어차피 너도 사정 봐가면서 해볼 만한 상대는 아니니까. 파아앗! 말을 마침과 동시에 존 캐슬의 몸에서 무형의 기운이 무섭게 뿜 어져 나왔다. 내 생각과 달리 어떠한 진동도, 어떠한 폭발이나 충격도 느껴 지지 않았다. 단지 존 캐슬의 머리칼과 롱코트가 격렬히 펄럭일 뿐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존 캐슬이 그렇게 기합을 가하자 갑자기 퀴에르의 빗자 루가 드득,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조금씩 뒤쪽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존 캐슬이 공세를 취하자 퀴에르는 재밌다는 듯이 웃으면서 존 캐슬과 똑 같이 온 몸에서 기운을 내뿜어 내었다. 쏴아아! 하지만 존과는 다르게 퀴에 르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에는 미세할 정도이긴 하지만 어두운 색이 분명 히 섞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퀴에르가 힘을 뿜어내자 퀴에르의 주 위의 풍경이 순간적으로 검게 일렁였던 것이다. 드득, 천천히 퀴에르의 빗 자루를 밀어내던 존 캐슬의 검이 허공에서 멈췄다. -파아아앗! -쏴아아아! 양 쪽은 서로를 노려보면서 계속해서 뿜어내는 기운의 양을 늘려나갔다. 존의 머리칼과 코트가 더욱 거세게 펄럭였다. 퀴에르의 후드 역시 미친 듯 이 펄럭였다. 양 쪽 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접전이었다. -투툭! 귀를 자극하는 미세한 마찰음과 함께 퀴에르의 발이 조금 흙에 파묻혔다. 뒤로 밀린 것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환성을 질렀다. 하지만 퀴에르는 전혀 동요되지 않은 표정으로 단지 빗자루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존이 이기고 있구나!" 하지만 난 곧 시무룩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존의 발 역시 퀴에르와 똑 같이 뒤로 밀렸기 때문이다. 퀴에르는 재밌다는 듯 깔깔대며 웃었다. "깔깔깔깔!" -하늘 아래 이런 인간이 또 있네? 아마 퀴에르가 존 캐슬에게 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찬사이리라. 존은 퀴 에르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온 몸의 근육을 좀 더 팽팽하게 긴장시켰다. 콰아앙! 마침내 폭발음과 함께 존 주위의 흙이 움푹 파이며 하늘로 튀어 올랐다. 그리고 퀴에르와 그녀의 빗자루가 마치 튕겨겨 나가듯 급작스럽게 뒤로 밀렸다. -꽈앙! 퀴에르가 화가 난 듯 얼굴 표정을 굳히자 압력밥솥에서 증기가 솟구치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퀴에르의 주위에 있던 흙이 주위로 튀었다. 그리고 퀴에르는 더 이상 밀리지 않고 제 자리에 똑바로 섰다. -띄워 줬더니 오만 방자하게 구는군. 주제도 모르고 말야... 그런데 정말 저게 싸움의 다인가? 너무 조용하게 싸우는 것 아냐? 기껏 해봐야 흙이 튀기는 정도라니. 요령이와 가람이가 싸워도 저것보다는 더 격렬하게 싸우겠다! 나는 요령이에게 왜 저렇게 둘의 싸움이 조용하냐고 물어보았다. 그리고 요령이의 타박이 돌아왔다. "바보야! 저 둘은 지금 자신들의 힘이 정면으로 부딪히고 있는 곳, 그러니 까 존 캐슬의 검과 퀴에르의 빗자루가 맞닿은 점에 자신들의 모든 힘을 쏟 아 붓고 있는 것이라고. 몸 주위로 쓸데없는 힘이 새어나오지 않으니까 당 연히 조용할 수밖에. 지금 존과 퀴에르가 서로 충돌하고 있는 곳에 모인 힘은, 방출된다면 이 잔디밭 전체를 순식간에 가루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양이라고" "그렇구나..." 나는 요령이의 말에 놀라서 멍하니 존과 퀴에르가 힘을 부딪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빗자루와 검이 부딪힌 곳에 작은 회색 기의 구슬이 하나 꿈틀 거리며 맺혀 있었다. 저기가 둘의 힘이 정면으로 부딪히는 곳이란 말이지? 그리고 저 힘이 개방된다면 모두 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이지? 왠지 소름이 오싹 끼쳤다. 우리들의 목숨이 한없이 하찮은 것으로 느껴졌다. 우 리가 그렇게 쉽게 세상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 무섭게 다가왔다. 갑자기 요령이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우아앗!" 나는 요령이의 비명에 덩달아 깜짝 놀라 요령이를 바라보았다. 잭이 요령 이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얏! 깜짝 놀랐잖아! -내가 더 놀랐다. 왜 그리 놀랐나? 확실히 잭도 요령이가 소리를 꽥 지르자 많이 놀랐나보다. 잭은 자신의 머리를 쓸어 머리에 맺힌 식은땀을 닦으며 요령이에게 말했다. -여긴 우리에게 맡기고 너희 무리들과 함께 어서 여기에서 도망쳐라. -뭐? 요령이가 놀란 듯 물었다. -마음속으로 말은 전하는 것이 안 들릴 리가 있나? 어서 도망치라니까. -하지만 너희 단장이 저기서... -그러니까 지금 도망쳐야지! 잭이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도망치겠다는 건가? 퀴에르와 우리 단장의 힘은 지 금까지는 비등비등하다. 누가 강한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이미 어 마어마한 힘을 개방한 퀴에르는 이젠 힘을 뺄 수 없다는 것이다. 밀리는 순간 어마어마한 힘이 자신을 향해 쏟아질 테니까. 결국 존은 퀴에르를 아 무 짓도 하지 못하게 묶어놓은 셈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그러니 어서 도망쳐라. 요령이는 김혜진을 흘낏 바라보았다. 혜진은 존 캐슬과 퀴에르의 싸움에 완전히 취해 버렸는지 멍하니 둘의 싸움을 바라보고 있었다. "멋지다..." 혜진이 멍하니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요령이는 혜진에게서 고개를 돌려 존을 바라보았다. -쟤는? -우리가 막도록 하지. 너희와 싸우느라 힘은 좀 빠졌지만 우리도 전력을 다한 것 아니었으니까. 설마 둘이서 하나를 못 막겠는가. 그리고 요령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혜진은 우리의 대화 내용을 못 들었을까? 지금까지 본 바로는, 마음으로 하는 대화는 주위에 있는 모두의 마음속에서 똑같이 들린다.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과연, 혜진은 존 캐슬과 퀴에르의 힘대결을 정신없이 바라보는 것을 그만 두고 우리를 향해 몸을 돌리며 말했다. "야, 건방진 고양아. 도망가려고?" "흥, 어디를 가던 그건 네가 신경 쓸 바가 아니지" "그래? 어쩌지, 신경이 쓰이는데?" 화륵! 혜진의 왼 손을 감싸며 불꽃이 격렬하게 솟아올랐다. "너희 마음대로 도망치지는 못할 걸?" "글쎄... 그건 두고 봐야 알 일이고" 요령이는 잭을 바라보며 말했다. -부탁해! -알았다! 잭과 옆에서 우리의 대화 내용을 모두 듣고 있던 루나는 순식간에 몸을 날려 요령이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혜진은 잭과 루나를 바라보며 묘 하게 미소지었다. -너희들이 나를 막겠다고? -응, 살살 해 줄 거지? 루나가 귀엽게 한 쪽 눈을 찡그리며 혜진에게 윙크했다. 그리고 혜진은 역겹다는 듯 구토를 하는 표정을 짓더니 양손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지금이라도 비켜. 괜히 다치지 말고. 잭은 대답 대신 왼 손을 옆으로 쭉 펼쳤다. 곧 냉기가 모여들어 바싹 마 른 사람의 모습을 형성했다. 윈딩고의 혼이었다. 그리고 루나 역시 팔에 감 겨 있던 채찍을 불러 땅에 촥! 하는 소리와 함께 튕겼다. 펑! 하는 연소음 과 함께 채찍 주위에서 불꽃이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하지만 혜진은 그 모 습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오른손처럼 왼손 또한 이글거리는 불꽃에 휩싸였다. 그런데 혜진, 저 여자 왠지 불을 다루는 방식 이 바뀐 것 같다. 예전에는 온 몸에 불꽃을 휘감고 다녔는데, 이제 양팔에 만 불꽃을 일으키네? 요령이가 말했다. "예전보다 불꽃을 조절하는 능력이 훨씬 늘었군. 쓸데없는 힘의 낭비가 사라졌어. 확실히 강해졌군. 저 여유로움은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어서 가라! 잭슨이 재촉했다. 그리고 요령이는 내 어깨를 짚었다. "들었지? 가자!" "야! 어서 모여! 요령 님께서 여기를 뜨랍신다!" 가람이와 한수가 서둘러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청도는 어쩌지?" 청도의 발목은 이제 부어오를 대로 부어올라 보기 안쓰러울 정도였다. 청 도는 비틀거리며 일어서더니 곧 이를 악물고 다시 주저앉았다. 그리고 청 도는 낭패라는 듯 발목을 주무르며 우리에게 외쳤다. "크윽! 야, 난 안 되겠다. 그냥 놓고 가! 어차피 별 일 없을 거야! 저 녀석 들이 노리는 건 요령이지 내가 아니잖아? 그러니 어서 도망쳐!" "이런 젠장!" 나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진 채 고민 어린 탄식을 내뱉었다. 이를 어쩌 지? 청도를 데리고 가자니 청도는 다리가 삐어서 옴짝달싹 못 하는 지경이 고, 그렇다고 데리고 가지 말자니 왠지 기분이 찜찜하고...! 그 때 요령이의 말이 생각났다. '지금 존과 퀴에르가 서로 충돌하고 있는 곳에 모인 힘은, 방출된다면 이 잔디밭 전체를 순식간에 가루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양이라고' ...안 되겠다! 역시 이 곳은 위험해! "한수야! 부탁이지만 청도를 좀 들어주겠어? 계속 들고 있어야 하지만... 부탁해!" 한수는 지금 전개되는 상황에 대한 파악이 덜 되어서 어리둥절한 상태임 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최소한 지금의 상황이 얼마 나 급박하게 전개되는지는 한수도 충분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둥실... 청도의 몸이 천천히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이윽고 우리를 향해서 천천히 날아왔다. "가자!" "가긴 어딜 갓!" 혜진이 양손을 모으고 우리를 겨냥하며 소리쳤다. -퍼엉! 혜진의 손에서 사람의 머리 만한 불덩어리가 튕겨져 나갔다. "가드 댓!" 불덩어리가 우리를 향해 날아오는 것과 동시에 잭슨이 목청껏 외치자, 윈 딩고의 혼이 혜진과 똑같은 동작을 취했다. 후웅! 무서운 소리와 함께 얼음 의 폭풍우가 혜진이 날린 불덩어리에 충돌했다. 콰앙! 반짝이는 얼음의 가 루와 작게 부서진 불꽃들이 허공을 수놓으며 흩날렸다. -어서 가! 잭슨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고, 우리는 누구랄 것도 없이 몸을 돌려 잔 디밭 바깥쪽의 오솔길을 향해 뛰었다. 푸스석, 푸스석, 사람들이 급하게 움 직이면서 마구잡이로 잔디와 잡풀을 짓밟는 소리가 어지러이 울려 퍼졌다. 청도가 작게 신음을 흘렸다. "으음..." 허공에 띄워진 채로 실려오는 청도가 혹시 아프지나 않을지 걱정되었지 만, 지금 그런 것을 따지고 있을 시간이 없다. 우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속 뛰었다. 뒤쪽에서 연속적인 기합 소리와 폭발음, 날카롭게 대기를 가 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둘러! 모두들!" 가람이가 외치며 오솔길을 향해 접어들었다. 일단 오솔길로 들어가서 한 1분 정도만 뛰면 승학관 앞으로 가게 된다. 승학관 앞은 우리 학교에서 사 람들이 가장 많이 오가는, 사람들의 동선의 중심점이다. 설마 퀴에르던 김 혜진이던 존 캐슬이던 쉐도우 나이츠 오브 펜타그램이던, 그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난동을 피울 수야 없겠지. 김혜진은 우리가 도망치는 모습을 보며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이 짜증나는 것들! 어서 비켜! 아마도 잭과 루나를 향해 말하는 듯 했다. 혜진의 말과 동시에 연속적인 폭발음과 연소음이 어지러이 들려왔다. 혜진의 짜증을 내는 목소리에 퀴에르가 그제야 우리가 도망치는 것을 알 아차렸나 보다. 퀴에르는 황당함과 짜증, 그리고 분노를 섞어서 앙칼진 목 소리로 외쳤다. -거기 섯! "미쳤냐, 서란다고 서게!" 요령이가 퀴에르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빈정대듯 외쳤다. (물론 한글로 말했으니 퀴에르가 알아 듣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퀴에르를 향해 소 리친 후 다시 정면을 향해 고개를 돌린 요령이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가람이 너, 설마 네가 '서란다고 서는 미친 녀석'일 줄은 몰랐는데...?" 가람이가 갑자기 걸음을 멈춘 것이다. 뭐, 뭐야? 설마 정말로 퀴에르의 말 을 듣고 걸음을 멈춘 거야? 가람이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갑자기 나를 뒤쪽으로 밀쳐 내면서 외쳤 다. "젠장! 큰일이다!" 쐐액-!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가람이의 앞에서 무엇인가 강렬한 소 음을 내며 폭발했다. 가람이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지만 다행히 제대로 막았는지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뭐야, 도대체! "모두 물러나! 일단 내가 막을 테니 잔디밭으로 일단 다시 돌아가자!" 가람이가 외치며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저렇게 당 황하는 거지? 나는 가람이의 어깨 주위를 기웃거렸다. 혹시 가람이의 어깨 너머로 방금 전 우리를 공격했던 자들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을까 싶어 서였다. 하지만 가람이가 계속 뒷걸음질치는 바람에 나도 우리를 공격한 자들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뒤쪽으로 걸음을 옮겨야 했다. 가람이가 재촉 하듯 다시 말했다. "뒤쪽은 내가 확실히 맡을 테니 안심하고 뒤돌아서 뛰어라, 주인" 쳇, 알았어. 알았다고. 나는 가람이의 말대로 뒤로 돌아서 잔디밭으로 뛰 어 나갔다. 잔디밭에는 이미 요령이와 한수, 주희, 그리고 허공에 떠 있는 청도가 불안한 눈으로 오솔길과 오솔길을 막고 있는 가람이를 바라보고 있 었다. 이윽고 가람이도 천천히 뒷걸음질쳐서 잔디밭 밖으로 빠져 나왔다. 아마도 가람이의 앞에는 우리를 방금 공격했던 자들이 걸어오고 있겠지? 이윽고 오솔길 주위에 드리워진 수풀의 그림자 사이로 천천히 우리를 공격 한 자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얼굴을 보지 못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반갑군요" 이 목소리는...! 나는 화들짝 놀라 눈을 가늘게 떴다. 그들의 모습을 정확 히 보기 위해서였다. 그림자 사이로 드러나는 검은 바지, 흰색 티셔츠와 검 은 색 가죽재킷, 밤하늘처럼 새까만 흑발머리. "백태청!" "고맙게도 아직 제 이름을 기억해 주시는군요" 백태청은 슬쩍 웃으며 우리를 향해 걸음을 떼었다. 백태청의 뒤에는 언제 나 수심에 잠긴 듯한 표정을 하고 있는 백화련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엔, 긴 황색 도포자락을 펄럭이며 유천이 우리를 노려보며 걸어오고 있 었다. 척. 잔디밭에 들어선 백태청이 일정정도 우리와의 거리를 유지하며 걸음 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에 따라서 나머지 둘도 걸음을 멈추었다. "반갑습니다" 백태청이 먼저 고개를 숙여서 인사했다. 그 때 그렇게 당해놓고도 여전하 군, 저 녀석은. "별로 반갑지 않아. 한동안 사라져 있었잖아, 도대체 여긴 무슨 일이지?" 난 투덜거리듯 백태청에게 되물었다. 도대체 이런 시기에 이 곳에는 왜 온 거야! 요령이도 내 말에 거들었다. "그래, 도대체 여긴 무슨 일이야? 왜, 영준이의 '세 발 까마귀의 패'에 대 한 미련을 아직까지도 못 버린 거야? 아니, 뭐 뻔하겠지. 너희들이 우리를 찾아올 이유가 그것밖에 더 있겠니? 같이 라면이라도 끓여 먹자고 온 것은 아닐 것 아냐. 그리고 설령 진짜로 라면이나 같이 먹자고 온 것이라고 해 도, 너희들은 때를 잘못 잡았어. 너희들은 저 거대한 힘의 충돌이 느껴지지 도 않는 거야? 지금은 너희 같은 조무래기들이 나타날 때가 아니라고. 세 계에서 가장 강한 두 거물들이 바로 이 곳에서 부딪히고 있단 말야. 괜히 섣불리 끼여들지 말고 꺼지는 게 신상에 좋을걸? 진심 어린 충고니까 잘 생각해 봐" 요령이는 손가락으로 어깨 너머의 존 캐슬과 퀴에르를 가리키며 빠르게 말했다. 아마도 유천 패거리가 귀찮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듯 했다. 말투에 서 남을 설득해 보고 싶다는 성의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거든. 축 늘어뜨린 눈썹 끝에도 지루한 기색이 역력하고 말야. 백태청은 요령이의 말에 작게 미소짓더니 유천에게 무어라고 말했다. 아 무래도 요령이의 말을 통역해 주나보다. 그런데 백태청의 말을 들으며 유 천은 '풋' 하고 미소를 짓더니 백태청의 말이 끝난 뒤에는 재밌다는 듯 폭 소까지 터뜨렸다. 도대체 뭐지? 저 녀석, 왜 저러는 거야 도대체? 한참동안 웃음을 멈추지 못하던 유천은 가슴을 치며 말했다. -하하하, 하하하하! 뭐? 두 거물이 부딪히는 걸 모르겠냐고? 괜히 끼여들 었다 다치지 말고 어서 도망가는 것이 좋을 거라고? 하하! 내가 왜 저들을 무서워해야 하지? 유천은 우리를 향해 반문하더니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존 캐슬과 퀴에르 를 향해 고개를 돌려 말했다. -퀴에르, 내가 왔다. 반갑군. 뭐? 저... 저 녀석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런데 놀랍게도 유천의 말에 퀴에르가 상냥하게 대답했다. -반갑군요, 황태자시여. 설마 둘이 서로 아는 사이란 말인가? 나는 경악으로 입을 벌리며 둘을 번 갈아 바라보았다. 세상에, 맙소사... 말도 안 돼! 그리고 백태청 역시 우리를 향해 기대감 섞인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이봐요, 혜진 양!" -쾅! 쉬릭! 번쩍! 한창 불꽃과 얼음, 그리고 채찍이 오고 가는 전투의 현장 속에서 누군가 몸을 뒤로 날려 멀찍이 물러났다. 김혜진이었다. "백태청! 반갑군. 네 왕자님도 함께인가? 그런데 왜 이렇게 늦었지? 하마 터면 큰 낭패를 볼 뻔했어!" 김혜진이 타박하듯 말했다. 그리고 백태청은 부드럽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다행히 불미스러운 사태는 막을 수 있었지요.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것 아닙니까? 그러니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이 분은 언제 나 말씀드리지만, 왕자님이 아니라 황태자십니다" "알고 있어. 하지만 황태자라니, 역시 너무 거창해서 나에게는 어색해. 어 쨌든, 네 말대로 지금이라도 왔으니 다행이야" 김혜진은 백태청을 바라보며 요염하게 살풋 웃더니 다시금 양손에 커다란 불덩이를 이글거리며 잭슨과 루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정말 대단하네... 둘을 상대로 혼자서 조금도 밀리지 않고 있잖아..." "분명히 예전에 우리와 싸울 때보다 강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저 정도는 나나 가람이라도 충분히 할 수 있어.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사람들끼리의 대결에서의 힘의 차이는 싸움을 이끌어나가는 능숙함이나 집중력으로 충분 히 메꿀 수 있으니까 말야" 요령이는 아직까지도 서로를 노려보며 힘 겨루기를 계속하고 있는 존 캐 슬과 퀴에르를 바라보더니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물론 저 둘은 '어느 정도'라는 단어와는 상당히 거리가 먼 사람들이 지..." "요령이의 말이 맞다. 지금 혜진이라는 저 마녀는 상당히 아슬아슬한 싸 움을 이끌어나가고 있다. 그리고 잭슨이나 루나라는 저 두 사람도 혜진을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혜진을 저지하는 것이 목소리라 전력을 다하지 않 고 있어" "그렇구나..." 내게 친절히 설명해준 가람이는 유천 패거리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이윽고 백태청에게 질문을 던졌다. "너희가 어떻게 퀴에르라는 저 마녀를 알고 있지" 가람이의 질문에 백태청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백태청의 저 모습이 위선적으로 보이는 것은 나뿐일까? "반갑군요, 가람 씨. 그 때 다친 상처는 좀 괜찮습니까?" "눈을 액세서리로 달지 않았다면 말끔하게 낫는 것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쓸데없는 인사치레 따위는 역겨우니까 집어치우고 본론만 말하지. 다시 묻 겠다. 너희가 어떻게 저 퀴에르라는 여자를 아는 것이지" 그리고 백태청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뭐, 우리 조직과 저쪽 조직이 옛날부터 친한 사이였습니다. 동맹관계 비 슷한 관계이지요. 한 때 퀴에르의 흑마녀협회가 백마도사협회에 의해 붕괴 직전까지 갔을 때 퀴에르와 고위 간부들이 몸을 피한 곳도 우리 교단의 총 단이었으니까 대충 친분관계가 있다는 것쯤은 예상하실 수 있겠지요? 뭐, 더군다나 오늘 같은 경우는 서로 협력하기로 약속을 해 놓았기 때문에 미 리 만나서 얼굴을 익혀놓았습니다" "무슨 약속이지" "당신들이 쥐새끼처럼 도망갈 경우를 대비해 이 장소로 와서 퀴에르와 함 께 당신들을 잡겠다는 약속" 백태청이 싸늘하게 웃으며 비아냥거리듯 대답했다. 가람이의 딱딱한 하대 체에 짜증이 좀 났나보다. "요령이를 잡아서 넘기기로 약속을 한 것인가" 가람이의 질문에 백태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왜 너희들에게 아무런 이익도 되지 않는 일을 자진해서 돕는 것이지. 단 지 옛날부터 친한 관계였기 때문에?" 가람이의 말에 백태청은 나를 바라보며 느물느물하게 웃었다. 으으, 뭐야 갑자기 재수 없게! 내가 움찔하며 몸을 움츠리자 백태청은 낄낄대더니 가 람이에게 대답했다. "우리가 미친 것도 아니고, 왜 남 좋은 일을 하겠습니까? 우리도 다 뭔가 남는 것이 있으니까 하는 거지요. 이 바닥이 원래 다 뻔한 거 아니겠습니 까?" 백태청의 말에 가람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우리를 공격해서 무력화시킨 다음 요령이는 퀴에르에게 넘기고 세 발 까 마귀의 패는 너희가 가져가겠다는 심산이군" "90% 정도는 정확합니다. 하지만 10% 정도 모자르군요. 우리의 목적은 당신이 말한 것뿐만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지" 가람이의 물음에 백태청은 얼굴을 순식간에 차갑게 굳히며 싸늘하게 대답 했다. "잃어버린 우리의 명예의 회복과 복수" 백태청의 말을 듣자 등골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잃어버린 명예를 회복하 겠다고? 어떤 방식으로? 그리고 복수라고? 도대체 누구에게 어떻게 복수를 하겠다는 거지? 난 백태청의 말에 여러 가지 궁금한 것들이 마구 떠올랐지만, 가람이는 별로 궁금한 것이 없었나보다. 가람이는 내가 궁금해하는 것들을 묻는 대 신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백태청에게 던졌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우리를 막을 것인가, 아니면 길을 열 것인가?" "방금 전의 대화로 충분히 대답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백태청이 자세를 낮추며 대답했다. "그렇군" 가람이는 양손을 앞으로 뻗으며 자세를 잡았다. "도주길이 조금 늦어지겠다, 주인" "상관없어" 요령이가 툴툴거렸다. "이런 젠장, 한 번 피를 봤으면 알아서 자중을 해야지 말야, 하여튼 주제 도 모르는 것들이 꼭 더럽게 귀찮게 굴어요들" 나도 부채를 펴들고 상체를 낮추었다. 그런데 저 쪽의 분위기가 이상하다. 우리 쪽의 임전태세를 보면서도 유천은 아예 단지 뒷짐만 지고 선 채 물끄 러미 우리를 바라만 보고 있고, 백태청과 백화련은 서 있던 자리에서 한 발 앞으로 나오긴 했지만 자세는 여전히 편안히 서 있는 자세에 불과하다. "무슨 꿍꿍이지...?" 요령이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백태청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낮게 되뇌었다. "옛날의 우리와 같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요령이의 말에 백태청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하, 그러고 보니 주머니에 손까지 꽂고 있었군 그래? "긴장해라. 뭔지는 모르겠지만 분위기가 전 같지 않다" 가람이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잘 아시는군요. 긴장해야 할겁니다! 합!" -쾅! 백태청의 말과 함께 그의 주위를 둘러싼 대기가 진동하면서 백태청의 몸 주위에서 황토빛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으읏!" 나도 모르게 주춤, 물러서면서 부채를 펼쳐 얼굴 주위를 가렸다. 백태청의 몸 주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먼지구름 때문에 눈을 똑바로 뜰 수 없었던 것 이다. 단지 힘을 준 것만으로도 이 정도의 위력이란 말야...? "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해졌군!" 가람이가 묵직하게 내뱉었다. 요령이의 대꾸가 없는 걸로 봐서 아마 요령 이도 가람이와 같은 생각인가 보다. 백태청은 당황한 우리의 모습이 무척 즐거운 듯 소리 높여 외쳤다. 그의 주위의 대기는 아직도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발 주위의 잔디와 잡풀들은 모조리 백태청을 중심으로 한 방사형으로 누워 있었다. "자, 어떻습니까? 여러분! 아까의 등등하던 기세는 다 어디로 갔습니까? 혹시, 겁이라도 잔뜩 집어드신 겁니까? 그렇다면 유감이군요, 하하하!" "자식, 실력 조금 늘었다고 기고 만장해 하기는...!" 요령이가 불만인지 볼멘 목소리로 툴툴거렸다. "확실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내공이 상승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떻게 단시일만에 그 정도로 성장할 수 있었지" 가람이는 백태청을 계속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정말 한 순간도 백태청 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구나. 빈틈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그러는 건가? "간단합니다. 어떤 방법을 써도, 정상적인 수련을 통해서는 고작 며칠만에 이 정도로 어마어마한 힘을 얻기가 힘들지요... 하지만 비정상적인 방법을 쓴다면 가능한 것 아닙니까?" "비정상적인 방법...이라고?" 내 말에 백태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비정상적인 방법. 여러분들과의 싸움에서 전 제 현무의 힘을 빌릴 줄 아는 것만으로는 절대 여러분들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래서," 백태청이 잠시 말을 끊더니 눈을 빛냈다. "전 제 현무를 '잡아먹었습니다'" "잡아먹었다고?" 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아니, 그게 돼? 현무라면 내 패에 있는 세 발 까마귀와 비슷한 그런 존재 아닌가? 아니, 그걸 먹었다고? 그게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이긴 있는 것인가? 하지만 가람이는 별로 놀라지도 않았는지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과연. 힘을 흡수했다는 말인가, 백화련이라던 저 여자처럼" 백태청은 백화련을 힐끔 한 번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물론 백화련은 청룡을 설득해서 자발적으로 합신했지만, 저 는 현무를 강제로 잡아먹었다는 차이가 있죠. 어쨌든 둘 다 합신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신수와 합신이라... 과연, 우리로서는 내공이 어느 정도나 상승했는지 짐 작조차 하기 힘들군" 가람이의 말에 백태청은 쓰게 웃으며 엄지손가락으로 퀴에르와 존 캐슬을 가리켰다. "이미 한 발정도를 신의 영역에 걸친 저들의 힘에 비하면 제 내공은 어린 애 장난 수준에 불과하죠" "저들에 비한다면 그렇겠지. 하지만 나보다는 확실히 높은 내공을 가지고 있다" "당한 것 아닙니까? 비록 영준 씨가 가지고 계신 세 발 까마귀보다 훨씬 질이 낮은 종류이긴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신수를 놈을 흡수했습니다. 고 작 금수가 300년 정도 내공을 쌓은 것 가지고는 절대 상대가 될 수 없죠! 인간이 그 기간동안 수련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말입니다" 저 녀석, 정말 말을 재수 없게 하는군...! 나는 발끈해서 뭐라고 말하려 했 지만 가람이가 더 빨랐다. "그래. 물론 우린 동물이다. 하지만 모든 싸움은 붙어봐야 하는 것이 아닐 까" "하하하하! 허세는 그만 부리십시오. 여러분들은 절대로 저를 이길 수 없 습니다!" "내공 만이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내공과 싸움은 다르다는 것을 명심해 라" "그게 무슨...?" "싸워보면 알게 되겠지. 한가지 확실한 건, 저번 싸움처럼 봐주지는 않을 거라는 것. 알겠나" 가람이, 얼굴 표정은 자신 있어 보이는 표정이 결코 아니지만 말투로 봐 서는 그리 겁먹은 것 같지도 않다. 가람이는 말을 마치더니 기합을 질렀다. "타아!" 그와 동시에 백색 기운이 어깨에서 무럭무럭 솟아올랐다. "하압!" 옆에서 요령이의 날카로운 고함 소리도 들렸다. 동시에 요령이의 몸 주위 에서도 불꽃처럼 검푸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이제 시작인가! "당신이나 봐 달라고 빌지 마시죠, 하앗!" 백태청이 주머니에서 손을 빼더니 몸을 날리며 한 쪽으로 쭉 뻗었다. 콰 아앙! 손에서 누런 덩어리들이 쏟아져 나와서 가람이가 있던 자리를 후려 쳤다. 하지만 가람이는 몸을 날려 날렵하게 공격들을 피하더니 재빨리 청 도에게로 붙어서 얼굴을 노리고 발을 휘둘렀다. "하앗!" -부웅! 정말 대단한데? 발에서 무슨 야구배트 휘두르는 듯한 소리가 나냐! "읏!" 가람이의 발은 아슬아슬하게 백태청의 콧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비록 얻 어맞지는 않았지만 백태청은 깜짝 놀랐는지 몸을 뒤로 재빨리 날렸다. "뒤 조심!" 요령이가 소리치며 낮게 몸을 돌려 허벅지를 걷어찼다. 치이익! 풀들이 휩 쓸리는 소리와 바람이 감기는 소리가 어지럽게 들렸다. "어어!" 백태청은 당황한 듯 다시 위로 재빨리 뛰면서 양손을 가슴께에 겹쳤다가 옆으로 뻗었다. -부욱! 백태청이 수인을 맺음과 동시에 백태청의 팔방마다 한 개씩, 여덟 개의 사 람 머리 만한 누런 기의 덩어리가 맺히더니 땅에 꽂혔다. 꽈앙!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가운데 백태청이 사뿐하게 땅으로 착지하는 실루엣이 보였다. 초장부터 요란하군. "합!" -지잉, 지잉... 가람이의 고함 소리와 함께 백태청의 그림자 주위로 푸르스름한 빛덩어리 수십 개가 맺히는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빛의 덩어리들은 백태청의 주 위를 완벽하게 감싸고 있었다. "이 정도쯤이야!" -꽈앙! 지축이 울리는 굉음 함께 백태청의 주위로 무형의 기운이 노도처럼 뿜어 져 나오며 푸르스름한 기의 덩어리들을 완전히 쓸어 버렸다. 더불어 그의 주위에 자욱히 깔려 있던 흙먼지도 함께 쓸려가 버렸다. "뭐야? 사라졌잖아?" 백태청이 기가 막히다는 듯 눈을 둥그렇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흥, 그렇게 해서 보일 리가 있냐...! "어디야...?" "꺄악!" 갑자기 한마디 말도 없던 백화련이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깜짝 놀란 백태청은 반사적으로 위를 바라보았다. 과연 머리 위에 요령이가 떠 있었다. 요령이는 백태청이 기합을 내지르는 순간을 이용해서 재빨리 백태 청의 머리로 붙은 것이다. 요령이의 무릎이 백태청의 미간에 거의 도달해 있었다. 백태청은 당황했는지 대응도 못 하고 그저 눈만 크게 뜨고 있었다. 이거 뭐야? 이렇게 이긴 거야? 너무 싱겁잖아? 하지만, 요령이는 걷어차는 대신 허리를 크게 비틀면서 몸을 뒤로 날렸다. 뭐지? -지지직! 방금 전까지 요령이가 있던 허공을 시퍼렇게 빛나는 번개 한 줄기가 꿰뚫 고 지나갔다. 그리고 요령이는 크게 놀랐는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백 화련을 바라보았다. "너...!" -네 상대는 나다! 백화련은 길게 드리운 머리칼 사이로 형형 하게 눈을 빛내며 요령이를 노 려보고 있었다. "그렇게 쳐다보면 뚫리기라도 할까봐?" 요령이가 비아냥거리며 물었지만 백화련은 대답 대신 손을 들어올려서 손 을 휙, 휘둘렀다. -빠지지직! 백화련이 휘두른 손에서 번개가 다시 한 번 뿜어져 나왔다. "어쿠!" 요령이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번개를 피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백화련은 입술을 꾹 다물더니 하늘을 향해 손을 들어올리고 나직하게 기합 을 질렀다. "하!" 꽈르르릉! 천지를 진동하는 울림과 함께 굵은 번개가 하늘로 치솟더니 수 십 가닥으로 갈라져 마치 비바람처럼 요령이를 향해 휘몰아쳤다. "으앗! 이건 뭐야!" 요령이는 당황한 표정으로 양손을 급히 휘둘러 기의 막을 둘렀다. 쾅! 쾅! 요령이가 두른 투명한 막에 푸른 빛 번개 줄기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 딪혀 스러졌다. 번개의 줄기가 하나씩 부딪힐 때마다 요령이는 비틀거리며 뒤로 한 걸음씩 물러섰다. 저게 위력이 상당한가보다.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였나 보지? 백화련은 앙칼진 목소리로 말하더니 다시 양손을 포개어 가슴께에 얹었 다. 부욱- 작은 진동음과 함께 차갑고 날카로운 느낌의 푸른빛이 백화련을 감쌌다. 백화련은 이글거리는 푸른 빛에 둘러싸여 천천히 요령이를 향해 걸어왔다. -이제 난 더 이상 힘 조절도 못 해서 아무렇게나 펑펑 번개를 뿌려대는 그런 멍청이가 아냐. 어느 정도까지는 내 힘을 마음대로 다룰 수가 있다고. 더 이상 나를 만만하게 보면 안 될 걸? 그리고 요령이는 짜증이 나는지 머리를 헤집으며 외쳤다. "야! 내가 무슨 걷기 대회 결승점이냐! 왜 개나 소나 다 나만 보면 걸어 와!" 물론 요령이는 독백하듯 말한 것이라서 백화련이 알아들을 리는 없다. 하 지만 백화련은 요령이의 태도에서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걸음을 멈추고 천 천히 말했다. -너, 겁먹었구나? ...깨닫긴 개뿔을... 백태청은 계속 가람이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하압!" 꽝! 단지 다리를 들어 내리 찍었을 뿐인데도 땅바닥이 둥근 반구형으로 움푹 패였다. 가람이는 걸음을 슬쩍 움직여 옆으로 몸을 날렸다. "잇!" 백태청은 몸을 튕겨 올리더니 가람이를 쫓아서 발을 이리 저리 날렸다. 휙, 휙! 하지만 가람이는 교묘하게 백태청의 발을 피하며 몸을 뒤로 날렸 다. 백태청은 이를 악물었다. 상당히 흥분했는지 그의 이마에 핏줄이 불거져 나와 있었다. "이제...쥐새끼처럼 피하는 겁니까? 언제까지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 십니까?" 가람이는 예상외로 여유 만만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지금 단지 무서워서 너의 공격을 피하는 것으로만 보였나. 하긴, 너 의 공격은 워낙 내력이 많이 실려서 한 번만 얻어맞아도 중상일 테니, 내 가 너의 공격에 지레 겁을 먹었다고 생각해도 무리는 아니지" "그럼 아니란 말입니까?" "그럼 네가 때리는 데 맞아야 용감한 것이었단 말인가?" 가람이의 반문에 백태청은 말문이 막혔는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가람 이는 말을 이어나갔다. "경고해 두는데, 이번에는 전처럼 봐주지 않는다" "설마 지금 농담하십니까? 제발 봐주지 마십시오!" 백태청의 말에 가람이의 표정이 약간 심각하게 바뀌었다. "내 말을 흘려듣지 마라. 내가 봐주지 않겠다는 뜻은 숨겨둔 힘을 개방하 겠다 거나 하는 뜻이 아니다. 전에 너와 상대했을 때처럼 너에게 큰 부상 을 입힐 수 있는 기술이나 너를 죽일지도 모르는 기술을 가리지 않겠다는 뜻이다. 조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설마 지금 저를 걱정해주는 겁니까? 하, 정말 착각도 이만저만이 아니군 요! 설마 저를 한 대라도 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아니, 당신이 저 를 공격해서 성공했다고 칩시다! 당신의 어줍잖은 공격에 제가 부상이라도 입을 것 같습니까? 그렇다면 큰 오산입니다!" 가람이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설마 싸움이 내력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저 존 캐슬처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완벽히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내력 차가 크 지 않다면, 내력은 단지 싸움에 있어서 보조적인 것에 불과하다. 아무리 내 력이 크던 작던, 결국 때린 놈이 이기는 법" 가람이는 상체를 낮추고 양팔을 들어 자세를 잡았다. "참고로 나는 무술을 수련한 지 300년 정도 된다. 과연 너의 내력이 내 권을 어디까지 제압하는지 어디 한 번 볼까" 백태청은 가람이의 상대방을 자극하는 자신만만한 태도에 기분이 상했는 지 얼굴빛을 붉히며 대답했다. "좋습니다, 보고 싶다니 보여드리죠. 똑똑히 보십시오, 반신과 합신한 나 의 내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하압!" -꽈앙! 백태청의 주위의 땅에서 폭발하듯 흙먼지가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누런 기운이 백태청의 몸을 휘감으며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그 양은 점차 늘어 나고 있었다. 잠시 후, 백태청은 긴 숨을 내쉬며 가람이를 노려보았다. 그의 몸 주위에 는 누런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이게 반신과 합신한 제 내력입니다" "그 정도라... 꽤 고강한 수준이긴 하지만, 손도 못 대 볼 정도는 아니군"" 가람이는 백태청을 바라보다 왼손 검지손가락을 건방지게 까닥였다. "와라!" 펑! 기를 분출하며 백태청이 무서운 기세로 가람이를 향해 뛰쳐나갔다. -너도 어서 덤벼. 백화련의 목소리가 마음속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요령이는 어깨를 작게 돌려서 풀어주더니 가볍게 톡, 톡 뛰면서 물었다. -네 내력도 저 정도냐? -아니, 나는 저것보다 조금 더 높아. 하지만 별 차이는 없지. 왜? 느낌만 으로도 겁이 나? 백화련의 목소리에 요령이는 씩 웃었다. -아니. 백태청 정도 수준의 내력이면 붙어도 될 만할 것 같아서. -너 되게 건방지구나... 백화련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하지만 요령이는 백화련의 말에 고개를 가로 저었다. -건방진 게 아냐. 나는 고양이라고. 인간이... 쉬릭! 어느 새 요령이는 자신이 서 있던 자리에서 사라져 있었다. 백화련 은 크게 놀라 허둥대다 시야가 확보되어 요령이가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자신의 앞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요령이는 백화련이 서 있던 곳의 땅을 콱 찍었다. 순식간에 요령이가 백화련의 머리 위로 몸을 날렸던 것이다. 백화련은 벌떡 일어서서 기의 막을 둘르듯 번개의 막을 둘렀다. "야앗-!" -빠지지직! 번개의 반구가 백화련의 반경 3m 정도를 뒤덮으며 자신의 범위 내에 있 는 모든 것을 태워버렸다. 하지만 요령이는 이미 몸을 뒤로 날려서 피해 있는 뒤였다. 요령이는 재밌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이제 내가 왜 자신 있어 하는지 알겠지? 나는 고양이야. 인간은 웬만해 서는 나만큼 날쌔게 움직일 수가 없다고. 더구나 너는 체계적으로 몸을 단 련한 적도 없지? 아마 조심하는 게 좋을걸? 언제 내가 네 뒤를 잡을 지 모 르니까 말야. 방금 전에도 내가 널 잡으려고 맘만 먹었으면 잡았었어. 봐 준거지. 백화련은 불안감 때문인지, 아니면 요령이의 건방진 말에 화가 나서인지 짜증을 벌컥 냈다. -고양이던지 뭐던지 상관없어! 나는 너보다 더 세! 너 같은 건 내가 마음 만 먹으면 눈 깜짝할 사이에 해치워 줄 수 있다고! -확실히 몸에 담긴 기의 양은 네가 훨씬 많지만...어디 시험해 볼까? 요령이의 말에 백화련은 눈을 가늘게 떴다. 시험해 볼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밖에 더 있겠는가? -덤벼. 스스슥. 발자국 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게, 그리고 천천히 요령이는 백화련의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백화련은 긴장한 얼굴로 요령 이의 움직임에 따라서 고개를 돌렸다. 너무도 자신만만한 요령이의 모습에 긴장한 것이리라. 그녀의 양 손 주위에서 푸른 빛 번개가 파직거리며 불꽃 을 튀기기 시작했다. 스륵! 요령이가 기합도 없이 몸을 날렸다. "꺅!" 백화련이 갑작스러운 요령이의 움직임에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지르며 양팔을 들어올렸다. -쩌어엉! 백화련의 주위에서 번개의 줄기가 그물처럼 펼쳐졌다. 콰가각! 주위의 흙 들이 이리 저리 파헤쳐졌다. 수 백가닥의 번개가 촘촘히, 그리고 불규칙적 으로 허공에 선을 그렸다. 핑그르르- 요령이는 백화련의 공격에 재빨리 몸을 튕겨서 뒤로 날렸다 착 지와 동시에 땅을 박차고 다시 앞으로 튕겼다. 백화련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녀 주위를 둘러쌌던 번개의 그물은 이미 허공에 흩어진 후였다. "이얏!" 백화련이 애써 어설픈 기합을 지르며 양 손을 뻗었다. 투광! 이번엔 푸른 빛의 커다란 구가 쩌-엉, 하고 큰 소리를 내며 백화련의 손에서 뿜어져 나 왔다. 하지만 요령이는 백화련에게로 몸을 날리던 힘을 이용해서 땅을 박 차고 다시 한 번 하늘로 뛰어 올랐다. "익!" 백화련이 인상을 쓰며 손을 위로 튕겨 올렸다. -퉁! 푸른빛의 구가 느릿하게 한 번 진동하더니 빠른 속도로 하늘로 치솟아 올 랐다. 쐐액! 요령이는 백화련의 예상치 못했던 방식의 공격에 당황했는지 얼굴빛이 변했다. "뭐, 뭐야 이건!" 요령이는 황급히 양손을 위로 올렸다. 부우욱- 백화련의 것보다는 작은, 하지만 꽤 커다란 검은 빛 구체가 요령이의 손 위쪽으로 맺혔다. 요령이는 재빨리 구체를 자신의 발 밑까지 날아온 번개 덩어리를 향해 꽂았다. 꽈아 앙! 커다란 폭발음이 주위를 뒤덮었다. "캭!" 요령이는 비명을 지르며 퉁겨 나갔다. 번개 덩어리와 검은 기의 덩어리가 충돌하며 폭발한 것이다. 텅! 다행히 요령이는 떨어지는 순간에도 몸을 교 묘히 돌려서 부드럽고 우아하게 착지했다. "캬아악! 아파 죽겠네! 저 빌어먹을 계집애가!" ...우아한 착지와는 전혀 안 어울리는 대사와 행동이다. 요령이는 손을 마 구 털면서 후후 불어댔다. 요령이의 손은 붉게 변해 있었다. 방금 전의 힘 의 충돌로 인해서 충격을 좀 받았나 보군. -너 이 언니한테 혼날 줄 알아라! 쉬릭! 갑자기 마음속으로 좀 우스운 대사를 내뱉은 요령이. 양손에 검은빛 기운을 잔뜩 실으며 몸을 날린다. 하지만 조금 전 요령이의 공격을 성공적 으로 박아낸 백화련은 자신감이 붙었는지 이제 여유롭게 미소까지 띄며 왼 쪽 손바닥을 들어 요령이를 조준했다. "합!" 팟! 눈부신 빛과 함께 백화련의 손에서 다시 한 번 번개가 뿜어져 나갔다. 요령이는 옆으로 재주를 넘어 번개를 가볍게 피한 후 다시 백화련을 향해 달렸다. -몸놀림 하나는 참 재빨라서 좋겠네! 백화련이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하지만 요령이는 개의치 않았다. 백화련은 다시 한 번 손을 뻗었다. -빠지직! 요령이는 다시 한 번 부드럽게 피했다. 그리고 백화련은 짜증이 나는지 입술을 깨물며 이번에는 양손을 동시에 뻗었다. -꽈앙! 천둥소리와 함께 굵직한 번개가 요령이의 손에서 뿜어져 나갔다. 콰르르 -! 치열하게 꿈틀거리는 번개가 무섭게 요령이를 향해 날아들었다. 순간, 요령이는 몸을 뒤로 날려 드러누우며 외쳤다. "받아라! 레인보우 샷!" 펑! 요령이의 손에서 무지개빛으로 영롱히 빛나는 빛덩어리가 솟구쳐 나 오더니 무지개처럼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백화련이 뿜어낸 번개를 부드럽 게 뛰어넘어 백화련에게로 날아들었다. "어, 어어...!" 백화련은 기묘한 소리를 지르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이번엔 백화련 이 생각지도 못한 공격에 당황했나보군. 잠시 뒤로 물러서던 백화련은 요 령이가 쏜 무지개빛의 주술이 길게 꼬리를 끌며 자신을 향해 날아오자 점 점 얼굴 색이 희게 바뀌더니 비명을 지르며 손을 머리 위로 들었다. "꺄악!" -꽈릉! 백화련의 정면으로 쏟아지던 번개가 굉음과 함께 육중한 몸을 틀어 백화 련의 머리 위, 요령이가 날린 무지개를 향해 날았다. 쉬이익-! 쩡! "쳇!" 요령이가 혀를 찼다. 요령이가 날린 공격이 백화련의 번개에 휩쓸려 흔적 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백화련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 내 렸고 요령이는 씁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잘만 하면 맞는 거였는데... 아깝네" 하지만 요령이는 아쉬움을 감추고 백화련을 바라보며 비아냥거리며 말했 다. -깜짝 놀랐지? 백화련은 대답 대신 요령이를 노려보았다. 정말 화가 많이 난 표정인데. 백화련의 사나운 눈초리에 요령이는 움찔했는지 고개를 돌리더니 작게 궁 시렁거렸다. "그러면 내가 뭐 쫄기라도 할 줄 아나..." 쫄았잖아... 하여튼 저 자존심은. 백화련은 무어라 작게 중얼거리더니 손을 앞으로 뻗었다. -직... 나직한 소리와 함께 점차 백화련의 등뒤에서 커다란 번개덩이가 뭉쳐갔 다. 그런데 왜 손은 앞으로 뻗었는데 등뒤에서 번개가 뭉치는 거지? 뭐, 사 실 번개가 어디에서 뭉치던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여 하튼 그렇게 커다랗게 뭉친 번개는 '빠직!'하는 강렬한 소리와 함께 순식간 에 열 두 갈래로 갈라져서 꿈틀거렸다. 열 두 가닥의 굵은 번개 줄기가 자 신의 앞쪽으로 드리워지자 백화련은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어디 이것도 모조리 피하나 볼까? 백화련이 요령이를 향해 달려가며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와 동시에 열 두 개의 번개가 한꺼번에 똬리를 트는 것처럼 끄트머리를 치켜들더니 요령이 를 향해 덮쳐 들어갔다. "에라이-!" 요령이는 특이한 기합소리와 함께 몸을 하늘로 날렸다. 꽈앙! 요령이가 방 금 전까지 있던 곳에 번개줄기들이 연속적으로 박혔다. 콰드드득! 하지만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땅에 박힌 번개들은 소멸되지 않고 다시 한 번 머리 를 치켜들어 요령이를 향해 날아갔다. "이, 이런 씨! 뭐 이래!" 요령이는 황급히 몸을 틀었지만 번개 한 줄기가 미처 피하지 못한 요령이 의 어깨를 향해 날아들었다. 요령이는 눈을 질끈 감으며 주먹으로 번개 줄 기를 힘껏 쳐냈다. 쾅! 번개는 방향을 틀었지만 요령이도 튕겨서 넘어져 버 렸다. 쿠당! "우앗!" 백화련은 요령이를 향해 손을 뻗었고 이리저리 꿈틀대던 번개들은 다시 고개를 돌려 요령이를 향했다. 그리고 요령이는 낭패 섞인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아 이거 생각 외로 어렵네..." "합!" 백화련의 짧은 기합과 함께 열 두 줄기의 번개 줄기가 요령이를 향해 쇄 도했다. "이잇!" 요령이는 몸을 띄우면서 손을 앞으로 뻗었다. 퍼엉! 요령이의 손에서 무형 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면서 반작용으로 요령이의 몸이 순식간에 뒤쪽으로 날아갔다. 콰드드득! 요령이가 있던 자리를 번개 줄기들이 요란스럽게 파헤 쳤다. 요령이는 빙글빙글 돌아 땅에 착지하더니 건방지게 웃으며 말했다. "헤! 어떠냐? 이 요령님표 제트 추진기가!" 이제 요령이는 백화련이 알아듣던지 말던지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양 이다. 백화련은 아깝다는 듯 손가락을 튕기더니 다시 요령이를 향해 뛰어 왔다. "타아아-!" "할 줄 아는 말이 기합밖에 없냐!" 요령이는 위로 높이 뛰어 올랐다. 휙! 가볍게 몸을 날렸지만 요령이가 올 라간 높이는 3m가 넘을 것 같다. 맙소사! 인간이라면 절대 뛰어 오르지 못 할 높이다! 하지만 번개 줄기들은 높이와는 상관이 없는지 요령이를 쫓아 허공으로 쫓아 올라왔다. "끈질긴 녀석들! 이거나 먹어라! 열 두 줄기 번개 괴물 잡기 전용으로 방 금 개발한 무시무시하게 센 파워 볼이다!" 요령이는 장난스럽게 외치며 양손을 어깨 뒤로 크게 젖혔다. 부-욱! 요령 이의 손에서 축구공 만한 새까만 기의 덩어리가 맺혔다. "도깨비 슛!"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것만 같은 이름! 요령이는 하늘에서 떨어지기 시작 한 것과 동시에 양손을 앞으로 휘둘렀다. 요령이의 등뒤에 맺혔던 검은 구체가 빠르게 회전하며 번개들을 향해 날아갔다. -고작 그거 하나로 열 두 개의 번개를 잡겠다고? 웃기는 소리... 백화련은 말을 끝까지 마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백화련이 아마 나와 똑 같은 것을 봤기 때문이리라. -지이이이잉! 기묘한 울림과 함께 요령이가 던진 흑색 구가 열 두 개로 불어났다. 저건 마치... 어디선가 많이 본 것만 같은 모습...! -뭐, 뭐야? 열 두 개의 구체들은 각각 방향을 틀어 열 두 줄기의 번개들을 향해 날아 갔다. 백화련은 허둥지둥 대며 어떻게 해서든 번개들을 조절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땅에 착지한 요령이는 환성을 질렀다. "아싸! 모조리 소멸이지? 날 만만하게 보더니 꼴 좋다!" 요령이는 기세 등등해서 싱글벙글 웃으며 백화련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백화련은 차분한 얼굴로 힘을 모으듯 양팔을 움츠렸다. "뭐야? 그래봤자 소용..." "하!" -꽝! 백화련은 움츠렸던 팔을 쫙 펼쳤다. 그리고 굉음과 함께 백화련의 몸 주 위를 감싸고 있던 푸른 기운이 폭발할 듯 크게 부풀더니 번개줄기들로 나 뉘어 흡수되었다. 그리고 번개줄기는 갑자기 아까보다 훨씬 커지며 요령이 가 날린 구체들을 뚫어 버렸다. "이...이런" 요령이는 낭패라는 듯 쓰게 웃었다. 요령이의 공격이 백화련의 번개를 소 멸시키기는커녕 더욱 더 기세 등등하고 강력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백 화련은 이제 천둥의 여신 같은 모습으로 온 몸에 작열하는 푸른 불꽃을 두 른 채 열 두 마리의 용을 거느리듯 열 두 갈래의 번개를 어르고 있었다. 그에 비해서 요령이는 몸 주위에 흐릿한 검은 기운을 두르고는 있지만 상 당히 초라한 모습이었다. 과연 요령이가 상대할 수 있을까? "이렇게 된 이상... 고전적인 방법을 택하는 수밖에 없군" 요령이는 조금 굳은 얼굴로 중얼거리며 양손바닥이 위를 향하게 손을 돌 렸다. 요령이의 왼쪽 손에서는 흰색 구가, 그리고 오른쪽 손에서는 검은빛 구가 부풀어올랐다. -무슨 생각인지 몰라도 포기하는 게 좋을 거야... 백화련은 차갑게 웃으며 요령이를 향해 걸어왔다. 촤르륵! 허공을 감으며 열 두 줄기의 번개가 고개를 쳐들었다. 금방이라도 덮칠 기세였다. 그런데 요령이는 뒤로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백화련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하압! 어차피 인생은 한판이야!" -콰라라라라! 번개들이 요령이를 향해 허공을 눈부시게 수놓으며 날아들었다. 요령이는 현란하게 몸을 움직이며 번개들을 숨가쁘게 피했다. 번개들이 요령이를 스 치고 지나갔지만 요령이는 간발의 차로 그것들을 모조리 피해냈다. 아, 아니다. 하나는 피해내지 못했다! -꺄! 맞았다! 백화련의 기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저 여자 저거 이제 보니까 성질 나 쁜 여잘세... 번개 한 줄기가 요령이의 정면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요령 이는 각각 흰 빛 기운과 검은 빛 기운이 엉겨 있는 손을 재빨리 포갰다. 흰빛의 기운과 검은빛의 기운이 마치 물감을 타듯 서로 섞여 회색의 기운 을 이루었다. 번개가 요령이의 바로 앞까지 쇄도한 순간, 요령이는 손을 앞 으로 뻗었다. "퓨전 봄 오브 블랙 앤 화이트!" -터엉! 흑백융합탄이라, 멋지게 어울리는 이름이군. 작은 진동음과 함께 거대한 회색 빛 반구체가 하늘에 펼쳐졌다. 단순히 흰색 기운과 검은 색 기운을 합친 것보다 몇 배는 강한 것 같은 회색 기운이 요령이의 손에서 뿜어져 나가 번개를 덮친 것이다. 콰지직! 회색 빛 기운은 요령이를 덮치던 번개 뿐 아니라 그 주위에서 요령이를 향해 방향을 틀던 세 개의 번개까지 한꺼 번에 휩쓸어 버렸다. "어, 어엇?" 백화련이 당황한 듯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요령이는 기뻐하는 대신 계속 해서 발을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여 몸을 이리저리 옮겼다. 남 은 번개들이 쉴 새없이 자신을 덮쳤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번개의 수가 줄 어들어서 그런지 요령이는 훨씬 손쉽게 번개들을 피하는 것처럼 보였다. 요령이의 손에 다시 한 번 흰 빛 구체와 검은 빛 구체가 엉겼다. 요령이는 다시 한 번 손을 포갰고, 이번에도 회색 구체가 요령이의 포갠 손에 엉겼 다. 하지만 요령이는 회색 구체를 쏘아내는 대신 포갠 양손을 풀었다. 회색 기의 덩어리가 각각 요령이의 왼손과 오른손으로 나뉘어졌다. "합!" 양손에 회색 기운을 얹은 요령이는 기합과 함께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번 개를 후려쳐 버렸다. -빠지직! 강렬한 스파크를 일으키며 번개가 갈기갈기 찢어졌다. 요령이는 재빨리 몸을 돌리며 다시 한 번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번개를 향해 스트레이트 펀 치를 뻗었다. -빠지직! 여지없이 소멸되는 번개. 그렇게 두 번을 더 반복하자 양손에 맺혀 있던 회색 구체가 눈에 띄게 옅어졌다. 요령이는 손에 맺힌 회색 구체가 흐려 진 것을 보고는 지체 없이 양손을 포개어 두 구체를 하나로 합친 뒤 자신 의 정면에 있는 번개를 향해 집어 던졌다. -쉭! 쩌엉! 다시 한 번 번개가 폭발했다. 이제 남은 번개의 수는 네 개. 백화련은 눈 에 띄게 창백해진 얼굴로 뒤로 걸음을 재빨리 옮겼다. 그와 동시에 요령이 주위에서 종횡무진 움직이던 번개들이 그녀를 향해 물러섰다. -흥, 이제야 좀 나를 알아모실 생각이 드셨나? 요령이는 숨이 차는지 헐떡이면서도 스스로가 무지 자랑스러운지 손가락 을 들어 백화련을 똑바로 가리키기까지 하면서 싱글벙글 웃었다. 자신만만 한 표정과 행동. 하지만 요령이의 등은 땀으로 인해 흠뻑 젖어 있었다. 그 만큼 힘들고 긴장했었다는 것이리라. 백화련은 대답 대신 가만히 서서 요령이를 노려보았다. 번개 줄기들이 요 령이를 견제하듯 조금씩 흔들렸다. 설마 백화련, 두려워하는 건가? 요령이는 이죽거리듯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언니, 뭐해? 얼른 와서 그 번개 채찍으로 나 좀 때려줘, 아잉- ...우욱. 토할 거 같다... 어쨌든 요령이의 비아냥거림이 계속됐지만 백화련은 입술만 잘근잘근 깨 물 뿐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아마 참으로 난감해 할거다. '공격을 안 하자 니 그럴 수는 없고, 공격을 하자니 요령이의 방어가 예상외로 완강해서 무 모한 짓이 될 것이 뻔하다'...뭐 이런 생각을 하고 있겠지. 이거, 혹시 저 상 태로 한참동안 서 있겠다거나 그러는 거 아냐? 빨리 뚫던지 뭘 어떻게 하 던지 해서 여기를 지나가야 하는데 말야... 그 때 무언가가 '칙-!'하고 땅을 빠른 속도로 긁으며 순식간에 요령이와 백화련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뭐, 뭐야?" 요령이와 백화련 모두 놀란 얼굴로 자신들의 앞을 스쳐 지나간 것이 무엇 인지를 바라보았다. 가람이었다. 가람이가 양팔을 11자로 모아서 앞으로 가 린, 무언가를 막는 듯한 자세로 서 있었다. 도대체 저 자세는 뭐지?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가람이의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그 곳에 는 백태청이 주먹을 앞으로 쭉 뻗은 채 앞굽이 자세로 서 있었다. 그러니 까, 백태청이 주먹을 제대로 날렸고 가람이는 그걸 제대로 막은 것이로군. 대단한데. 몸을 저렇게 멀리까지 날려버릴 주먹이라니. 백태청은 가람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자세를 풀며 입을 열었다. "...전혀 안 아픕니까?" 그리고 가람이는 천천히 방어자세를 풀더니 팔을 툭, 툭 털며 말했다. "타점에 제대로 안 맞았다. 정말 제대로 맞았으면 크게 다칠 뻔했지만 아 쉽게도 난 멀쩡하다" "뭐 상관없습니다. 한 대라도 제대로 맞추면 제가 이기니까요. 제 주먹에 싣는 내력은 당신이 무의식적으로 맺는 반탄기공을 훨씬 상회한다는 것쯤 은 이미 당신도 깨달으셨겠죠" "물론. 정통으로 몸에 맞는다면 무의식중이 아닌, 신경 써서 타점에 내력 을 모은 상태라도 네 주먹의 타격력을 상쇄시키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가람이는 왼손을 들어 손가락을 쫙 펴더니 하나 하나 꼽았다. "제대로 맞은 것만 해도 복부에 둘. 옆구리에 하나. 허벅지에 걷어차기 하 나. 팔꿈치로 등을 후려친 것이 하나. 빗맞은 것까지 합치면 너는 내게 열 대도 넘게 맞았다. 그리고 난 네게 단 한 대도 맞지 않았고 말야. 아프지 않다고는 못하겠지" 백태청은 분한지 주먹을 꽉 움켜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히 아픕니다. 충격도 많습니다. 솔직히 인정하죠. 당신과 나의 내력 의 차가 이렇게까지 크지만 않았어도 벌써 제가 진 싸움이었습니다. 하지 만 당신 역시 정신적, 육체적으로 상당히 지쳤을 텐데요. 단 한 대라도 맞 으면 안 된다는 강박감이 당신도 모르게 과장되고 불필요한 동작을 많이 취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내 공격을 모두 피하기 위한 극도의 정신 집중도 당신을 지치게 했을 테고 말입니다. 과연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 요?" 백태청의 말에 가람이는 양손을 가볍게 들어 몸을 가렸다. -파앗... 가람이의 손이 흰빛으로 빛났다. "버티긴, 이제부터 시작이다. 들어와" 가람이의 말이 끝나자 백태청이 금방이라도 튀어나갈 듯 몸을 잔뜩 움츠 렸다. 그가 온 몸의 근육을 팽팽히 수축시키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몸에서 누런 기운이 무럭무럭 솟구쳤다. 움찔. 백태청이 몸을 기울이듯 앞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가람이는 미동도 하지 않고 백태청을 노려보았다. 백태청은 가람이의 빈틈을 이끌어 내기 위해 속임수를 쓴 것이고 가람이는 거기에 속지 않은 것이다. 가람이의 양 손에 맺힌 백색 기운은 언제라도 백태청이 가람이에게 들어오기라도 하면 바로 쏘아질 것이다. 백태청과 가람이는 조용히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했다. 마치 백화련과 요령이가 그러한 것처럼. 그렇게 한참동안 넷은 각각 서로의 상대를 노려보며 서 있었다. 지루함을 참지 못하는 것은 어느 쪽인가? 요령이? 가람이? 백태청? 백화 련? "아, 지루해서 못 봐주겠네, 정말!" 갑자기 버럭,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요령이도, 가람 이도, 백태청도, 그리고 백화련도 아니었다. 모두의 예상을 깬 목소리의 주 인공은 바로 한수였다. "에라! 다 큰 어른들이 잘났다! 신난다 아주 그냥!" 한수는 짜증이 잔뜩 섞인 얼굴로 그대로 한 손을 위로 들었다가 그대로 아래로 찍어 내렸다. 그리고 잔뜩 긴장해 있던 백태청이 갑자기 하늘로 2, 3미터 솟구치더니 그대로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쾅! 쾅! "크악!" "꺄아악!" 백화련이 놀란 듯 소리쳤다. 하지만 그녀는 사실 백태청의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깜짝 놀랄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 역시 하늘로 던져졌기 때 문이다. 백화련은 하늘에서 빙빙 돌다가 백태청이 있는 곳으로 날아가서 그 바로 옆에 떨어졌다. 털썩! "뭐, 뭡니까 이건!" 백태청이 놀란 얼굴로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외쳤다. 대답한 것은 한수였 다. "뭐긴 뭐야 운동이지. 한참동안 서 있느라 수고했어. 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지? 내가 부드럽게 풀어줄게!" 한수는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하며 손을 이리저리 지휘하듯 흔들었다. 그러자 백태청과 백화련이 허공에 둥실 뜨더니 이리 저리 휘둘렸다. "쿠윽! 그, 그만!" "꺄악, 꺅! 꺄아악!" 백태청과 백화련은 고통이 찬 얼굴로 사정하다시피 고함을 질렀다. 특히 백화련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요령 이가 미처 터뜨리지 못한 네 줄기의 번개는 백화련의 집중력이 풀려서인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별 것도 아닌 것들이 자기들이 뭐 대단하기라도 한 양 폼만 잔뜩 잡고 말야...!" 한수는 같잖다는 듯 코웃음까지 치다 문득 생각난 듯 거만하게 말했다. "유천인가 하는 그 놈은 어디 있어! 그 놈도 나오라고 해! 유천 어딨어? 응?" 우리는 한수의 말에 무의식적으로 유천이 처음에 서 있던 곳을 바라보았 다. 그런데 유천이...정말로 어딨지? -이 건방진 꼬마놈! 흥분 때문인지 무시무시하게 떨리는 유천의 목소리가 우리의 마음속으로 들렸다. 서, 설마!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수를 바라보았다. 유천 이 단봉을 머리 위로 치켜든 채 눈을 부릅뜨고 한수를 향해 몸을 날리고 있었다. 이런! "젠장! 너무 멀어!" 가람이가 낭패인 듯 외쳤다. 요령이는 무서운 속도로 총알처럼 유천을 향 해 뛰었지만 요령이는 가람이보다 더 한수에게서 멀다. 한수는 사색이 된 채로 굳어 버렸다. 유천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띄어졌다. -따앙! 충돌음이 들렸다. 맙소사! 사람이 머리를 제대로 맞으면 저런 소리가 난단 말야? 나는 차마 볼 수 없어서 궁금증을 참고 애써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충돌음에 이어 들린 억눌린 듯한 비명소리는 내가 다시 고개를 돌려 유천 과 한수를 바라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도대체 맞은 것은 한수인데 왜 청도의 비명소리가 나는 거지? 고개를 돌린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이를 악문 채 검으로 유천의 단봉을 막 아 선 청도였다. 청도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리면서도 용케 버티 고 서 있었다. -흥! 발을 쓰지 못하면서도 칼을 쓰겠다는 거냐? 웃기는군! 다리 병신 놈 이 어딜 까부는 거냐! 유천은 코웃음을 치며 단봉을 거두더니 양손의 단봉을 동시에 머리 뒤로 넘겼다가 빠르게 휘둘렀다. 뱀이 꿈틀거리는 듯 불규칙하고 기묘하게 두 개의 단봉이 동시에 한수를 찔러 들어왔다. "탓!" 하지만 청도는 다시 한 번 이를 악물며 발을 디뎠다. 채챙!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청도의 목검이 움직이고 유천의 단봉은 각기 다른 곳으로 튕겨져 나갔다. 유천은 벌컥 짜증을 냈다. -이 빌어먹을 놈이 감히 누굴 막는 것이냐! "끄윽..." 청도는 대답 대신 숨이 넘어가는 듯한 비명을 삼켰다. 청도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진 청도의 입 가에는 이상하게도 기묘한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휴...이제...살았...네" 유천은 청도의 묘한 여유로움에 문득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 이를 드러내 며 주위를 바라보았다. 요령이와 가람이가 어느 새 가까이에 와 있었다. "칫!" 유천은 혀를 차며 단봉을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우고 양 손바닥을 아직까 지 멍하니 있는 한수를 향해 뻗었다. -터엉! 진동음과 함께 한수가 갑자기 빠른 속도로 땅을 스치듯 앞으로 날아갔다. 쉬이익! 유천이 한수를 날려버린 것이다. 또한 청도 역시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튕겨져 잔디밭에 넘어졌다. 생각지도 않았던 일에 모두들 당황했다. "큭, 뭐, 뭐야... 우윽!" 청도는 당황한 듯 비틀거리며 일어나다가 짧은 신음소리와 함께 결국 주 저앉아 버렸다. "빌어먹을...큰일났군!" 유천의 경공술은 가람이나 요령이도 인정할 정도로 빠르다. 요령이가 죽 을힘을 다해 달렸지만 유천과의 거리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퍼퍼퍽! 유 천의 뒤쪽으로 흙먼지가 뭉게뭉게 일었다. -쉬이익!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유천과 한수의 거리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한수는 정신을 집중할 겨를조차 없는지, 염력을 사용하지도 못하고 자신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오는 유천을 경악하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요령이가 절망적인 목소리로 외쳤다. "이런 빌어먹을-!" 마침내 한수는 날아가는 것을 멈추고 형편없는 모양새로 땅에 뒹굴었다. 그 모습을 본 유천은 몸을 가볍게 날렸다. 그의 누런 도포자락이 바람에 이리저리 펄럭였다. 높이, 그리고 멀리 떠올라 허공의 정점에 오른 그는 이 윽고 양손의 단봉을 머리 위로 들고 한수를 향해 똑바로 떨어졌다. -죽어라, 건방진 꼬맹이놈-! "한수야아아앗-! 안 돼-!" 그 때 주희의 처절할 정도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힘이 순식간에 우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물론 보이지 는 않았지만 그 힘의 존재감은 분명히 느껴졌다. -텅! 한수를 향해 떨어지던 유천이 갑자기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튕겨져 버렸 다. "크악!" 비명과 함께 멀찍이 날아간 유천은 잔디밭 한 쪽 구석에 볼썽 사납게 처 박혀 버렸다. 콰당! 우리는 놀라서 한수와 주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한수 는 얼이 빠진 듯 무릎을 꿇고 멍하니 앉아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러 고 보니 우리와 싸울 때도 저 정도로 죽음의 문턱까지 가진 않았었지. 나 는 혜진과 싸울 때 죽을 뻔했던 당시를 떠올렸다. 그 때의 나도 정신이 하 나도 없었다. 더구나 한수는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멀쩡하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것이겠지. 그리고 주희는 무릎을 끓고 앉아서 부들부들 떨 면서 한수처럼 멍한 눈으로 한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희 쟤는 또 왜 저 러지? 그런데 주희의 모습이 왠지 평소 때와는 달라 보였다. 그녀의 몸 주 위에서 알 수 없는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 기운은 쉴 새없이 느릿하게 꿈틀거렸는데,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정신을 집중하고 보면 언뜻 언뜻 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언뜻언뜻 보이는 영기 는 순간적으로 흰색으로 보였다가 검은색으로 보였다가를 반복했다. 신기 한데? 영기를 눈에 살짝 집중하고 보자 주희의 몸을 둘러싼 기운이 조금 더 선명하게 보였다. 그 기운은 흰색과 검은색 기운이 한데 뒤엉켜 있는 모습이었다. 흠, 그래서 흰색과 검은 색이 반복되어서 보였던 것이군. 내가 보고 있는 순간 동안에도 주희의 몸에서는 끊임없이 희고 검은 기운이 뭉 클뭉클 쏟아져 나와 주희의 몸을 감쌌다. "유천님!" 백태청과 백화련이 황급히 소리치며 유천에게로 달려가 유천을 일으켰다. 유천은 비틀거리며 일어서더니 백태청과 백화련을 뿌리치고 바로 서서 침 을 퉤! 하고 큰 소리로 뱉었다. 유천이 뱉은 침은 붉은 색이었다. 속으로 피를 토했던지 입술을 깨물었던지 혀를 깨물었던지 셋 중 하나겠지. 유천 은 우리를 증오가 가득 어린 눈빛으로 노려보며 소맷자락을 들어 올렸다. 옆에서 백화련이 허둥지둥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유천에게 바쳤지만 유천은 그녀의 손수건을 뿌리치며 자신의 소매로 입가의 피를 닦았다. -방금 전의 그것은 뭐였지. 어떻게 순간적으로 그런 공격을 할 수 있지? 누가 한 공격이었나? 그 때 백태청이 창백한 얼굴로 유천에게 귓속말을 하며 손가락으로 주희 를 가리켰다. 그리고 유천은 심각한 얼굴로 -물론 저 녀석이 사람 팰 때 말고는 얼굴이 밝은 적이 있었겠느냐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둘의 대화가 끝나고, 백태청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주희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 여자 분은 누구십니까? 영기가 엄청난 기세로 증가하고 있군요. 왜 저 정도의 실력을 숨기고 계셨던 거죠?" 모두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요령이와 가람이 같은 경우는 '나도 그게 정말로 궁금해'라고 말하는 듯 눈가에 호기심까지 깃들 어 있었다. 당연한 것이, 이 중 누구도 주희가 능력자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예전에 중상을 입은 가람이의 상처를 말끔히 치료시켜 준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 일은 '동생이 염력자이니 누나도 뭔가 치유력이라든지 하는 초능력이 있겠지. 단지 자신이 자각을 못 해서 평소 에 못 쓰는 것일 뿐일 거야' 정도로 생각해 왔을 따름이다. 하지만 지금 주희를 몸을 둘러싸고 있는, 백태청의 말처럼 엄청난 기세로 증가하고 있는 저 흰색과 검은 색이 엉킨 채 꿈틀대는 저 기운이 과연 정 말 단지 치유를 위한 능력일까? 그렇다면 유천을 공격한 것은 누구의 힘이 란 말인가? 그 때 한수가 문득 정신을 차렸는지 부스스 몸을 일으키며 주위를 둘러보 았다. 잠시동안 자기가 어디 있는지도 기억해내지 못하나보다. 이리저리 두 리번거리던 한수는 이윽고 주희와 눈이 마주치고는 무엇인가 이상한 주희 를 의문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잠시 후, 한수는 경악으로 뒤덮인 비명을 질렀다. "누, 누나! 정신 차려! 안 돼!" 한수가 몸을 띄우더니 최고속력으로 우리를 향해 날아왔다. 쐐애애액! 능 숙하게 주희 바로 옆에서 몸을 다시 땅에 내린 한수는 급히 주희의 어깨를 흔들며 물었다. "누나, 정신 차려! 누나! 나야! 한수라고! 한수!" 주희는 천천히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윽고 얼굴을 들어 물기 어린 큰 눈 망울로 한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한...수...?" "그래! 한수! 누나 동생 한수야! 정신 차려 어서! 이러면 안 돼! 왜 이러고 있는거야 도대체?" "나는...내가...난 이상한 오빠가...너를 막 때리려고 하는 것을 보고...청도 오빠도 넘어지고...요령이 언니는 너무 멀리 있고...너무 무서워서...그래서... 그래서...?내가 어쨌더라...?" 한수는 고개를 저으며 주희를 일으켰다. "아무튼 누나 정신차려. 어서! 지금 말도 제대로 못하고 있잖아. 이게 도 대체 뭐 하는 거야? 정신차려! 어서!" "응...그래...한수야...누나...정신 차릴...게..." 주희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흰색과 검은 색 기운의 증가량이 천천히 줄 어들었다. 아무래도 한수의 설득이 효과가 있는 모양이군. 그런데 왜 한수 는 주희가 힘을 뿜어내는 것을 그렇게 말리려고 하는 거지? 한 명이라도 더 강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좋은 것 아닌가? 내가 한수가 주희를 말린 이유를 궁금해하고 있는데, 백태청이 갑자기 한 발 앞으로 나서더니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기 계신 아가씨, 미모에 어울리지 않게 과격한 힘을 가지 고 계시는군요. 분명 증가량이 줄긴 했지만 아가씨의 힘은 지금도 계속 증 가하고 있습니다. 당신을 가만히 놔두면 너무 위험하겠군요. 더군다나 당신 은 유천 님을 공격한 사람. 그러니 우리는 당신에게 벌을 내려야 하겠습니 다" 백태청은 말을 마치더니 한 손을 하늘로 치켜들었다. 부욱- 싯누런 기운 이 이글거리며 회오리치듯 몰려들어와 백태청의 손 위쪽에서 뭉쳤다. -우우웅... 동시에 백화련도 양손의 수인을 맺었다. 그녀의 앞쪽의 푸른 기운들이 바 지직, 하고 허공에서 이글거리며 맺히더니 조금씩 그 크기를 키워가고 있 었다. -지직! 지직...! 백화련의 몸에서 푸른 기운이 흘러나와 폭포수처럼 백화련의 앞에 맺힌 뇌구로 흘러 들어갔다. 그러자 뇌구의 크기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기 시 작했다. 백태청의 몸에서도 누런 기운이 쏟아져 나와 백태청의 손바닥 위 에 맺힌 황색 구체로 쏟아져 들어갔다. 물론 황색 구체 역시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빠르게 커졌다. 순식간에 양쪽의 구체가 모두 직경이 2m가 넘을 정도로 커져 버렸다. 백 태청이 말했다. "아직 요령씨, 가람씨 등 상대해야 할 분이 많으니 이 정도만 해두겠습니 다. 제 기술의 이름은 황일입니다. 백화련의 기술의 이름은 청월이고 말입 니다. 황일과 청월로 깔끔히 끝내드리죠. 하앗!" "타아아-!" 둘은 동시에 기합을 질렀고, 거대한 크기의 누런 구체와 푸른 구체가 빠 르게 주희를 향해 날았다. 미처 우리가 손도 써 볼 틈이 없을 정도로 순식 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주희는 아직 채 정신을 차리지 못했는지 더듬더듬 말했다. "아...안 돼요...안 돼...저와...한수가...다치게 되요...안 돼요...." 물론 주희가 되던 안 되던 그 구체들이 멈출 리는 없다. 구체는 주희와 그 옆에 있는 한수의 바로 앞까지 날아왔다. "...안 돼요...!" 주희가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말하며 눈을 감았다. 그런데 주희의 몸 주 위에 기운이 갑자기 순식간에 엄청나게 불어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부- 욱! 두 개의 기운은 순식간에 몇 배로 불어나더니 양쪽으로 갈라져 각각 백태청과 백화련의 기운에 충돌했다. -꽝! 강렬한 폭음과 함께 백태청과 백화련의 강력했던 공격이 허공에서 허무하 게 스러져 버렸다. 백태청과 백화련은 주희가 자신들의 공격을 가볍게 받 아내자 큰 충격을 받은 듯 했다. "주희야...맙소사...너 생각보다 화끈한 애였구나..." 요령이가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방금 전 주희가 보여준 힘이 요령이와 가람이까지 놀라게 한 듯 했다. 물론 나는 주희가 방금 뿜어낸 힘의 규모 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요령이나 가람이처럼 놀라지는 않았다. 난 그보다 한수의 표정이 굳어진 것과 주희의 표정이 다시 넋이 나간 사람 처럼 멍해진 것에 주목했다. 한수는 주희를 흔들면서 말했다. "누나, 정신 차려. 기껏 정신이 돌아오더니 왜 그래, 정신 차려!" 하지만 주희는 이번엔 아예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주희의 몸에서는 처음 에 자신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기운의 양을 압도할 정도로 많은 양의 기운 이 무서운 기세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백태청은 질려 버렸는지 자신도 모르게 한 발 물러서며 말했다. "...사람이 맞긴 한 겁니까? 처음보다 훨씬 많은 양의 기운이군요...!" "너 때문이잖아!" 한수가 분노한 얼굴로 버럭 소리 쳤다. 갑작스러운 한수의 기세에 백태청 은 움찔 놀라며 한수를 바라보았다. "간신히 안정을 되찾던 우리 누나가 너와 네 옆의 그 여자 때문에 다시 이렇게 됐어! 어떻게 책임 질 거야!" "...왜 우리가 책임을 집니까? 그럼 전투 도중에 상대방이 힘을 모으는데 팔짱만 끼고 구경만 해야 옳았을까요? 그 아가씨가 엄청난 기세로 힘을 모 으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은 우리의 공력보다 강한 수준은 아닙니 다. 난 오히려 방금 전 우리가 저 아가씨를 공격한 것이 탁월한 선택이었 다고 까지 생각되는군요. 지금 당신이 그 아가씨를 걱정하고 있지만 그 아 가씨는 지금 가히 엄청나다고 할 기세로 힘을 뿜어내고 있지 않습니까?" "...너 후회하게 될 거야" 한수는 백태청은 분노가 가득 담긴 눈으로 노려보며 말하더니 주희를 다 시 흔들며 외쳤다. "누나, 정신 차려!" 한수는 어떻게든 주희를 진정시키려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주희의 몸에 서 쏟아져 나오는 기운은 점점 더 커졌다. 한수는 진땀을 흘렸다. "더 놔두었다간 정말 큰일 나겠군요. 타핫!" 백태청이 다시 한 번 기합을 내질렀다. 그의 손에서 이번엔 누런빛의 기 둥이 주희를 향해 뿜어져 나갔다. 쉬이이익! 하지만 주희의 몸에서 똑같은 크기의 흰 빛줄기가 뿜어져 나와 백태청의 기운을 상쇄시켜 버렸다. "이익!" 백태청이 분한 듯 이를 악물며 손으로 수인을 그리고 발로는 방진을 밟았 다. 아무래도 이번엔 정말 마음을 독하게 먹고 공격을 하려나보군! 백태청 의 몸 주위에서 누런 기운이 거세게 솟구치더니 이윽고 느릿하게 회전을 시작했다. 우웅... 백태청의 몸과 백태청 주위의 대기에서 누런 빛 기운이 끊임없이 솟아 나와 백태청을 둘러싼 기운의 흐름으로 흘러 들어갔다. 우 우우- 천천히 돌면서 커지는 백태청의 주술에서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백태청은 힘을 가하는 것을 멈추었다. 주술이 완성되었나보군. 그 것은 마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거대한 회오리바람이었다. 주술력으로 이 루어진 누런 색 회오리바람... 회오리바람은 이윽고 천천히 꿈틀거리며 주희를 향해 움직였다. 콰드드득! 백태청의 주술이 땅을 헤집는 소리가 들렸다. 회오리바람이 움직인 길을 따라서 땅이 깊숙하게 패여 있었다. "마, 맙소사! 엄청난 기운인데! 주희야! 한수야! 피해!" 요령이가 창백한 얼굴로 소리치며 뒤로 물러섰다. 회오리바람과 주희, 그 리고 한수로 연결되는 선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혹시 휩쓸릴까봐 뒤로 물러 서는 것이다. 그 정도로 회오리바람의 위력이 강하다는 뜻이다. 잠시 느리게 움직이던 회오리바람은 갑자기 굉음과 함께 무서운 기세로 앞으로 뛰쳐나갔다. 퍼버버벅! 흙과 돌, 잡풀들이 무서운 기세로 파여서 백 태청이 만들어낸 기운에 빨려 들어갔다. 엄청나게 커다란 흙구름을 만들며 하늘까지 솟아 있던 그 회오리바람은 순식간에 주희와의 거리를 좁혀 들어 갔다. -고오오오옹! 소란 때문인지, 넋을 놓고 고개를 떨구고 있던 주희는 초점 없는 눈을 들 어 멍하니 회오리를 바라보았다. "...무서워...없어져..." -부우우욱! 주희의 몸 주위로 이번엔 새카만 빛이 크게 부풀어오르더니 회오리바람을 향해 쏘아졌다. 힘을 모으거나 하는 시간도 없었다. 너무도 가벼운 공격. 하지만 주희가 쏜 새까만 힘은 백태청의 회오리바람을 가볍게 뚫어 버렸 다. 그리고 실제로는 대기가 아닌 백태청의 기운으로 이루어져 있던 누런 회오리바람은 그대로 허공에 스러져 버렸다. 회오리바람이 움직인 길을 따 라 참호처럼 웅덩이가 깊게 파여 있었다. 이거 우리가 잔디밭 다 망치는군, 그래. 백태청은 헛숨을 삼키며 말했다. "어...어떻게 제 공격을 그렇게 가볍게 막아낸 겁니까...?" -쾅! 순간적으로 주희의 몸 주위가 진동하면서 주희의 몸에서 이제까지와는 비 교도 안 되는 강렬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주희의 이마 한가운데 에서 희미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한수는 경악했다. "이...이럴 수가! 벌써 이렇게까지..." 백태청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그 여자, 얼른 쓰러뜨리지 않으면 정말 더 이상 제어할 수 없 겠군요. 제 공격을 그렇게 쉽사리 막아내다니...제가 그 공격을 정면으로 받 았다고 해도 그렇게 쉽게 막아내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 멍청아! 네 녀석이 자꾸 부추기니까 그렇지!" 한수가 이를 부득 갈면서 외쳤다. 백태청은 한수의 말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예? 그게 도대체 무슨..." "우리 누나가 뿜어내는 힘은 기본적으로 상대방에 공격에 맞서 자신을 지 키기 위해 뿜어내는 힘이야. 위기감을 크게 느낄수록 더 강한 힘이 뿜어져 나온다고. 그리고 그렇게 일단 한 번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면 누나가 제어하기가 정말 어렵단 말야. 그런데 네 녀석은 계속해서 무지막지한 공 격들만 해댔잖아! 그러니 누나가 이렇게 점점 더 힘을 강하게 내뿜는 거 지! 다 너 때문이야!" "그렇습니까...? 하지만 제가 알 리가 있습니까?" 백태청은 어깨까지 으쓱이며 능청맞게 말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백태청 은 다시 한 번 손에 이글거리며 힘을 모았다. "하지만 그 정도로 위험한 여자라면 역시 죽여 없애 버리는 것이 낫겠군 요" "멍청아! 너희 같은 수준으로는 우리 누나에게 손 끝 하나도 건드릴 수 없어! 더 자극만 할뿐이라고!" 한수는 백태청의 말에 놀랐는지 황급히 말했다. 하지만 백태청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해봐야 아는 것 아닙니까?" 백태청의 몸 전체를 휘감은 누런 기운. 백태청은 자신의 온 몸에 둥글게 자신의 기운을 감더니 자세를 낮추었다. 이대로 기운을 쏘아내던지 아니면 기운을 감은 채 돌격을 하려는 것이겠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일촉 즉발의 상황! 그런데, 갑자기 주희가 머리를 감싸쥐며 소리쳤다. "무서워!" -콰앙! 주희의 비명과 함께 주희의 몸에서 다시 한 번 어마어마한 기가 쏟아져 나왔다. "누, 누나 왜 그래!" 한수는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뜨며 주희에게 물었다. 주희는 천천히 말했 다. "무서워...어두워...너무 어두워...너무 어둡고...너무 나빠...너무 나빠서...너무 무서워..." 주희는 울상이 된 채 이를 악물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내, 내가 그 정도로 나쁜 놈은 아닙니다..." 백태청은 황당하다는 듯 얼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물론 백태청의 시답 잖은 농담에 대꾸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주희의 이마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점점 더 강렬해져 갔다. 이제 작은 불꽃까지 튀기는 듯 했다. -지직...지직... 갑자기 굉음과 함께 검은 색 바람이 몰아친 것은 그 때였다. -고아아아! "크악! 뭐야!" 모두들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몸을 가렸다. 단지 무색의 바람일 뿐이었지 만 왠지 새까맣다고 느껴졌다. 휘이잉! 단지 바람일 뿐이었지만 바람이 스 쳐 지나가는 순간 왠지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단지 바 람일 뿐이었지만 끈적끈적하고 뜨거운 느낌이 들었다. 또한 머릿속에서 계 속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악하다!' 바람이 악할 수가 있나? 하지만 이 바람은 분명 사악하다. 그리고 나를 해치려 하고 있다. 내 목을 조르고 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바람을 쐬지 않기 위해 몸을 움츠렸다. 잠시 후 바람 이 잦아들었다. 주희는 이제 척 보기에도 심각해 보일 정도로 부들부들 떨 고 있었다. "무서워...무서워...무서워..." 주희의 이마에서 새어나오던 빛은 이제 마치 불이 붙은 것처럼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주희의 등에서 희고 검은 기운들이 소용돌이치며 무슨 형상을 이루려 하고 있었다. 맙소사...도대체 뭐야, 저건! 그 때 잭슨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마스터!" 이번엔 또 뭐야! 나는 지금까지 신경도 쓰지 않고 있던 존 캐슬과 퀴에르 의 싸움의 현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존 캐슬이 순백의 기운으로 온 몸을 두른 채 멀찍이 물러서 있었다. 그리고 퀴에르는 새빨간 기운에 둘러싸인 채 순수하게 기뻐하는 미소를 띄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 모습은 퀴에르에 게 묘하게 어울렸다. 그녀의 등뒤로 시커먼 색의 거대한 사람의 형상이 흐 릿하게 보였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한 힘으로 꿈틀거리는 사람의 형상... 저게 도대체 뭐지? 왠지 유황 냄새가 났다. -치이익! 퀴에르의 등뒤로 떠올라 있는 검은 색 거인의 실루엣에서 수증기와 불꽃 이 솟아올랐다. 실루엣 주위로 검은 색 촉수처럼 보이는 것들이 꿈틀거리 며 이리저리 움직였다. 검은 거인의 그림자의 머리에는 세 개의 뿔이 있었 고 그림자의 등에는 거대한 날개가 돋아 있었다. 날개의 그림자는 특정한 모양을 형성하지 않고 끊임없이 일렁거렸다. 단지 그 위치와 넓은 모양새 때문에 날개라고 추측하는 것일 뿐이다. 머리에 뿔이 나고 등에 날개가 난, 거대한 사람처럼 생긴 것이라...저 존재를 도대체 무어라고 이해해야 하나? 내 머리 속에서 떠오르는 존재는 하나 밖에 없는데... 설마? 퀴에르는 미소를 띄며 천천히 존 캐슬을 향해 걸었다. "크으윽!" 존은 벌떡 일어나며 기합을 가했다. 우르릉! 확실히 저 녀석은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놈이군. 단지 기합만으로도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저르 릉 떨었다. 하지만 퀴에르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앞으로 걸어 나갔다. 존과 퀴에르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존은 이를 악물며 손을 뻗었다. -꽝! 존 캐슬을 둘러싼 구에서 노도처럼 백색 기운이 퀴에르를 향해 쏟아졌다. 하지만 퀴에르는 가만히 서서 재밌다는 듯 입가에 가득히 미소를 띌 뿐이 었다. 대신 퀴에르 뒤의 실루엣이 천천히 팔을 들어서 퀴에르를 향해 다가 오는 백색 기운을 후려쳤다. 꿍! 백색 기운은 허망하게 스러져 버렸다. 실 루엣은 다른 손을 들어서 존 캐슬에게 뻗었다. 아직 팔이 닫기에는 멀 텐 데? 하지만 놀랍게도 실루엣의 팔이 길어졌다. -꽝! 존 캐슬의 주위를 둘러싼 기의 공간에 실루엣의 공격이 가해졌다. "크윽!" 존은 다시 한 번 신음을 내뱉으며 뒤로 물러섰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밀려났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나으리라. 존 캐슬의 기의 공간은 눈에 띌 정도로 순백의 찬란함을 잃고 있었다. 실루엣은 잠시 멈춰 서더니 강렬한 고함을 내뿜었다. -구오오오오오오오! "크윽!" 난 가슴을 움켜잡으며 주저앉았다. 허공에 울려 퍼지는 실루엣의 음울한 고함소리를 듣는 순간, '도망치고 싶다'는 막연한, 하지만 강렬한 공포감이 밀려들어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요령이와 가람이를 바라보자 간신히 서 있긴 했지만 진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을 보아 나처럼 극도의 공포감에 휩싸였었나 보다. 실루엣은 다시 한 번 고함을 질렀다. -구오오오오오오! 존 캐슬의 기의 막이 파르르 떨렸다. 고함에 에너지가 실려 있다는 뜻이 리라. 청도와 한수가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그래, 그러고 보니 저 두 사람은 영적인 내성이 전혀 없지. 둘은 기절할 듯 눈을 부릅뜬 채 주저앉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저 둘은 나보다 몇 배 는 더 심한 공포심에 휩싸였겠지. 실루엣은 팔을 들어 다시 한 번 존 캐슬의 막을 후려쳤다. 쩌엉! 강렬한 충돌음과 함께 존 캐슬은 다시 한 번 몇 발짝 뒤로 밀려났다. 퀴에르가 재 밌다는 듯 말했다. -인간치고는 꽤 잘 막는군요. 역시 당신은 강해요. -그게 네가 계약한 악마인가? 존 캐슬이 나직하게, 하지만 분노를 섞어 물었다. 퀴에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아스모데우스, 혼돈의 왕. 이게 내가 계약한 악마예요. -그리고 네가 지상에 강림시킬 악마이기도 하지... 존은 이빨을 부득부득 갈았다. 뭐? 무슨 소리야? 지상에 강림시킨다니! 도통 모르겠는걸? 존은 입술을 깨물며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쉬이이익! 검 주위에서 새하얀 기운이 일렁이며 솟아올랐다. -힘이 모자라니까 악마까지 소환하다니, 그렇다고 내가 물러설 줄 아는가. 그렇다면 오산이라도 말해 두고 싶군. -물러서지 않으면 어쩔 겁니까? 하긴, 나도 이왕 만난 김에 무리를 해서 라도 이 자리에서 당신을 죽이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당신 같은 인간은 역시 죽이는 게 낫겠죠? 나중에 기어오를 가능성이 있으 니 말예요. 호호호! 존 캐슬은 한쪽 입술 끝을 비죽 올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어쩜 그렇게 나와 생각이 같은 수가 있는가. 나도 방금 너를 죽여버려야 겠다고 생각했는데. 카르텔 양을 죽이거나 도망치게 하는 것보다 그게 훨 씬 나은 방법인 것 같거든. -그리고 불가능한 방법이기도 하지요! 퀴에르가 다시 한 번 손을 들어 아래로 내리자 거대한 암흑의 실루엣, 아 스모데우스의 손바닥이 존 캐슬을 후려쳤다. 하지만 존은 피하는 대신 검 을 머리 위로 휘둘렀다. "합-!" 휘익! 강렬한 빛과 함께 한 줄기 섬광이 검선을 따라 존 캐슬의 머리 위 로 솟구쳐 실루엣의 손바닥을 베었다. 촤악! 검은빛 어둠이 찢겨지며 아스 모데우스가 비명을 질렀다. -구아아아악! 존은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렀다. 백색 섬광이 여지없이 아스모데우스의 목을 향해 날았다. 그런데, -쩌엉! 아스모데우스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는데 존 캐슬의 공격이 허공에서 깨어져 버렸다. -호호호! 설마 아스모데우스의 주위에 마력장이 쳐져 있을 거라는 것은 생각 못 했나? 하찮은 힘을 지닌 네 몸 주위에도 생기는 것이 마력장인데, 아스모데우스의 주위에 그게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지! 퀴에르는 잔인하게 웃었다. -참으로 기쁘게도, 아스모데우스가 화가 많이 났어. 널 죽여버리겠대. 호 호! 아스모데우스는 팔을 치켜들었다. 지직, 하는 작은 스파크와 함께 그의 손 바닥 위로 검은 빛 구슬이 맺혔다. 존은 각오한 듯 힘을 끌어 모으며 검을 치켜들었다. 그의 주위의 백색의 공간이 작렬하듯 새하얗게 타올랐다. -구오오오! 아스모데우스의 손이 존 캐슬을 향해 떨어졌다. 존 캐슬의 기의 공간에 아스모데우스의 손 위에 맺힌 구슬이 부딪혔다. 쩌어어어-엉! 귀청이 떨어 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존이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악!" 터엉! 저런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존은 아스모데우스의 일격에 나가 떨 어져 잔디밭을 굴렀다. 그의 주위에 펼쳐져 있던 기의 공간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아스모데우스는 천천히 주먹을 들어 올렸다. 존은 검을 감아서 양 손으로 꾹 쥐고 아스모데우스의 주먹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에 절망과 분 노가 깃들여 있었다. 존은 검을 옆구리에 똑바로 붙였다. 주먹이 들어오면 그대로 찌를 생각인 것이다. 그의 몸 주위가 다시 백색으로 타올랐다. 힘을 다시 한 번 끌어내 나 보군. 드득...땅이 진동하는 가운데 마침내 아스모데우스가 다시 한 번 주먹을 휘둘렀다. 슈우우욱-! 멈칫. 잔뜩 긴장한 존 캐슬이 땀을 뻘뻘 흘리며 고함을 지르기 직전에, 아스모 데우스는 주먹을 멈추었다. 아스모데우스의 주먹은 존 캐슬의 바로 앞에서 멈추어 있었다. "뭐, 뭐야?" 허탈한 듯한 요령이의 말이 들렸다. 정말 뭐지? 존 캐슬은 기회라고 생각 했는지 재빨리 몸을 낮춘 채로 아스모데우스의 주먹 아래에서 빠져나갔다. 하지만 아스모데우스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 했다. 아스모데우스는 천천 히 고개를 돌렸다. 퀴에르와 존 캐슬, 그리고 우리 모두 아스모데우스의 따 라 고개를 돌렸다. 아스모데우스가 본 것은 무엇일까? 주희가 허공에 떠 있었다. 주희의 몸에서는 백색 빛과 검은색 기운이 동시에 뿜어져 나오고 있었는 데, 백색 기운은 하늘로 솟구쳐 구름 위까지 닿아 있었고 흑색 기운은 땅 으로 내려앉아 바닥에 깔리고 있었다. 그녀의 등 뒤쪽으로는 네 장의 날개 가 펼쳐져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날개같이 생긴, 두 장의 백색 에너지막과 두 장의 흑색 에너지막이다. 네 장의 날개는 찬란한 빛과 심연의 어둠을 각각 뿜어내고 있었다. 주희는 눈을 뜨고 평온한 눈길로 아스모데우스와 퀴에르, 그리고 존 캐슬을 바라보았다. 이마의 한가운데, 빛을 뿜어내던 자 리에 이상한 문양이 있었다. 두 개의 반원으로 나뉘어진 원이 하나의 작은 원을 중심으로 놓여 있는 모습이었는데, 위쪽은 백색의 반원, 아래쪽은 흑 색의 반원이었고 가운데의 작은 원은 붉은 색이었다. 또한 주희의 양손에 는 칼이 들려 있었는데 한 자루는 찬란히 빛나는, 황금색으로 곧게 뻗은 양날검이었고 다른 한 자루의 칼은 금방이라도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 꿈 틀거리며 빛나는 불의 검이었다. 아스모데우스는 작게 목울대를 울려 으르릉거렸다. 주희의 존재감에 아스 모데우스가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존 캐슬을 단 한 방에 무력화 시켰던 저 괴물이 말이다! 주희가 입을 열었다. -끔찍한 지옥의 악마가 이 곳에는 무슨 일인가. 듣기만 해도 마음이 깨끗하고 순수해 지는 는 것 같은, 너무나도 아름다 운 목소리였다. 주희의 목소리였지만 분명히 무언가 다른 것이 있었다. -끔찍한 지옥? 네 방보다 안 끔찍할 걸, 멍청이. 이봐, 후배. 여기에는 무 슨 일로 온 거야? 놀랍게도 주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다음에 이어지는 목소리는 방금 전 의 목소리와는 전혀 달랐다. 둘 다 음색으로는 주희의 목소리였지만 이번 주희의 목소리는 더럽고 사악하고 음탕한, 그러면서도 사람을 현혹시키는 마력을 가지고 있는 목소리였던 것이다. -내가 말할 때 끼여들지 말아라. -내 맘이다. 신성한 목소리가 엄숙히 말하자 타락한 목소리가 신성한 목소리를 이죽대 며 따라했다. 신성한 목소리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는지 다시 아스모데우 스에게 말했다. -지옥의 악마. 여기에는 무슨 일인가. 무슨 일로 이 땅에 그 더러운 모습 을 드러내었는가? -그래, 후배. 왜 나타났어 이런 험한 곳에? 자네 몸을 보아하니 근육 좀 잡힌 게 누가 부른다고 졸래졸래 따라 올 그런 스타일은 아닌데 말야. 응? 아스모데우스는 입을 다물고 묵묵히 허공에 떠 있는 주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주희는 짜증나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대답하지 못하겠는가! -얼른 대답해, 이름 모를 후배. 난 남이 말하는 거 기다리는 게 제일 싫거 든. '이름모를 후배'라고? 분명 퀴에르는 아스모데우스를 '혼돈의 왕'이라고까 지 표현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름 모를 후배라고? 아스모데우스는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리고 퀴에르가 천천히 입 을 열었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퀴에르의 목소리가 아닌 전혀 다른 자의 목소리였다. 사람의 목소리는 절대로 아닐 것 같은 목소리. 음울하고 어두 운, 몇 갈래로 갈라진 억눌린 목소리가 퀴에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반갑소, '지옥의 태초부터 있었던 자'여. 나는 그대의 이름을 알지 못하고 그대 또한 내 이름을 알지 못하는구려. 하지만 나는 당신의 존재감만은 느 낄 수 있소. 난 '하늘에서 떨어진 자의 추종자' 중의 하나인 아스모데우스 라고 하오. 그 말에 주희가, 아니 주희 속의 존재가 눈썹을 찌푸렸다. -전혀 못 들어본 이름인 걸? 하늘에서 떨어진 자의 추종자라. 루시퍼의 졸개냐? -그의 동조자일 뿐 졸개는 아니오. -스스로 그렇게 말할 수 있을 정도면 상당한 지위에 올라와 있는 녀석인 가 보군? -지옥에서는 나를 '혼돈의 왕'이라고 부르오. 그리고 주희는 재밌다는 듯 웃었다. -캬하하하! 혼돈의 왕? 혼돈의 왕이라고? 유치한 녀석! 캬하핫! 아스모데우스는 주희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는 듯 눈을 찌푸렸지만 주희 는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웃어대었다. 결국 참지 못한 아스모데우스가 한 마디 했다. -태도가 무례하오. -그래서? 한 번 붙어 보자는 거냐? 네가 잊어 버렸나 본데, 난 '고대악마' 중 하나야. 덤빌 테면 덤벼. 얼마든지 상대해 줄 테니. -어서 대답이나 하라. 넌 이 지상에 왜 그 불경한 모습을 드러내었는가. 다시 주희가 신성한 목소리로 물었다. -닥쳐. 네 목소리는 듣기만 해도 구역질 나는군. -죽고 싶은가? 주희가 엄한 눈빛으로 아스모데우스를 바라보았지만 아스모데우스는 비웃 듯이 말했다. -우습군. 난 아스모데우스다. 천사라면서 내 이름도 못 들어본 것은 아닐 텐데. 설마 자신이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주천사라면 혹시 나와 싸워볼만 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천국에 있어야 할 그들이 왜 하찮은 인간 의 몸 따위에 들어가겠는가. -하하하! 신성한 목소리는 재밌다는 듯 크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듣는 사람의 불안감을 모두 씻어주고 기분 좋게 만들어 주었다. -내가 누구인지를 듣고 나서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옛 하늘의 감시자들'중 하나인 세루엘이라고 한다. 너같이 미천한 것이 나의 이름을 들은 것을 고맙게 여기도록. -고대의 천사! 아스모데우스가 놀란 듯 외쳤다. 고대의 천사라고? 아까 타락한 목소리는 자신을 '고대 마인'이라고 밝혔다. 고대의 천사와 고대의 악마. 그 두 존재 가 주희의 몸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인가? "맙소사...도대체 어떻게 저런 일이!" 요령이는 주희와 아스모데우스의 대화를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는지 연신 볼을 꼬집어 대었다. 하지만 꿈일 리가 있나. 요령이는 곧 볼 을 쓰다듬으며 '쓰읍-'하고 신음을 흘렸다. -잘난 체는- '나는 '옛 하늘의 감시자들'중 하나인 세루엘이라고 한다. 너 같이 미천한 것이 나의 이름을 들은 것을 고맙게 여기도록.' 잘났다. 너 최 고다. 니가 왕이다. 니가 임금님 하세요. 주희의 타락한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이죽거렸다. -죽고 싶지 않으면 이죽대지 마라. -'죽고 싶지 않으면 이죽대지 마라.' 제발 한번만 살려주세요. 으헤헤헷! 고대의 천사와 고대의 악마라는 것들의 대화가 주희 한 명의 입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스모데우스는 묵묵히 그들의 대화를 바라보다 말했 다. -당신들은... 놀랍군. 고대의 천사나 고대의 악마를 보는 것도 천 년만의 일인데. 더군다나 고대의 천사와 고대의 악마가 한 명에게 빙의된 모습을 보다니! 이것은 태초 이래로 누구도 보지 못한 모습일 터...그런데 왜 강림 하셨습니까, 고대의 악마여? -내 이름은 트로우스. 이름을 불러 줘. 그리고 내가 강림한 이유는 간단 해. 네가 나타나서 내가 강림했다. 나와 같이 나타난 이 역겨운 천사 놈도 마찬가지고. -...내가 지옥에서 올라온 것이 당신이 등장한 이유라고? 그게 말이 되오? -말이 안 되면 어쩔 건데? 말하는 싹수머리 봐라, 한 대 치겠다? -...... 아스모데우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주희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슬며 시 미소짓더니 말했다. -자식, 쫄기는. 사실 네가 등장해서 내가 지금 내려와 있는 이 여자애가 너무 무서워하더라고. 이 애가 무언가에 의해 위협을 느끼고 두려워하면 내가 이 애를 보호해야 하거든. 그래서 내가 나왔지. "아...그래서 아까 백태청이 주희를 공격했을 때..." 요령이가 이제야 이해가 되는지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 애의 자아를 안으로 집어넣고 우리가 전면으로 나서긴 너무 힘들어. 그래서 그저 힘을 써서 외부의 공격을 막으면서 조금씩 지배력을 넓히고 있자니 네가 나타나더군. 덕분에 주희라는 여자 애의 마음은 공포 로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그래서 우리가 나올 수 있었어. -그런데...당신 같은 고귀한 자가 왜 하찮은 인간의 몸 속에 들어가 있는 겁니까...? 아스모데우스는 뭐가 그리 궁금한 것이 많은지 내쳐 물었다. 그리고 트로 우스는 다시 대답했다. -무슨 소리. 이건 신성한 내기라고, 내기. 세루엘 이 녀석과 벌이는 내기 말야. 너같은 하찮은 놈이 방해할 게 못 된다고. -...으르릉... 계속되는 트로우스의 인신공격에 아스모데우스가 이를 드러내었다. 그럼, 자기도 지옥에서는 한 자리 하는 놈이라는데. 화도 나겠지. 아스모데우스는 느릿느릿 말했다. -아까부터 말이 정말 심하군. 버르장머리없는 놈. -어, 어쭈? 너 이제 말 놓냐? 나 고대 트로우스가 기가 막히다는 듯 아스모데우스를 을러댔지만 아스모데우스는 그르렁거리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트로우스, 나는 너에게 겁을 먹지 않아. 네 녀석쯤은 충분히 내 힘으로도 상대할 수 있거든. -...뭐? 아스모데우스의 말에 주희는 얼굴을 살짝 굳혔다. -네 녀석이 '옛 하늘에서 찾아온 자'중의 하나라도 된단 말이냐? -아니. 난 루시퍼처럼 '옛 하늘에서 찾아온 자'따위는 절대 아니다. 하지 만...나 역시 나처럼 '지옥의 태초부터 있었던 자'중의 하나지. 주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옥의 태초부터 있었던 자'라고? 아까는 분명히 지옥에서... -그래.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배신한 자'로군! 트로우스가 분노한 목소리로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주희가 꿈틀거리며 불 타는 왼손의 검을 치켜들었다. -덤벼라! 네 놈을 당장 죽여서 그 간을 씹어주마! 아스모데우스는 킬킬거리고 웃으며 양손을 땅에 박았다. 콰악! 잠시 후 아 스모데우스는 손을 꺼냈다. 아스모데우스의 왼손에는 오망성이 그려진 방 패가, 오른손에는 시커먼 칼날의 세 갈래로 갈라진 검이 들려 있었다. -웬만하면 비위 맞춰주려고 조심조심 대해 줬더니 오장 육부가 뒤틀리는 것 같아서 도저히 못 참겠더군. 이리 와라. 상대해주마. -물론이다! 트로우스는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듯 외쳤다. 하지만 세루엘이 트로우스를 말렸다. -그만 둬. 자칫 잘못하다간 주희가 다친다. -...! 주희는 분하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트로우스의 표정이리라. 아스 모데우스는 비웃듯 주희를 쳐다보며 말했다. -겁쟁이 놈. 말만 많군. 오지 않겠다면 내가 간다. 크아아아앗! 아스모데우스가 새된 목소리로 고함을 지르며 위로 뛰어올랐다. 터엉! 아 스모데우스가 하늘로 떠오름과 동시에 퀴에르가 바닥에 쓰러졌다. 지금 퀴 에르는 완벽하게 아스모데우스에게 빙의되어 있는 상태인가 보다. 퀴에르 는 눈을 뜨고 있었지만 그 눈에는 초점이 전혀 없었다. 아스모데우스는 주희를 향해 날아가며 외쳤다. 놀랍게도 넘어진 채 미동 도 하지 않는 퀴에르의 입에서 이미 멀어진 아스모데우스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섬뜩한 장면이군. -으하하! 무용담에 추가할 이야기가 하나 더 늘었군! -오면 벤다. 세루엘이 짧게 말했다. 그리고 아스모데우스는 허공에 멈추어 섰다. -...지금 천사가 악마들의 싸움에 끼어들 참인가? -나와 관계 있는 일이거든. -...네가 내려와 있는 아이 말인가? -그렇다. 그 때 트로우스가 끼여들었다. -세루엘, 넌 끼여들지 마! 이건 내 일이야! 세루엘, 주희의 몸의 네 몫의 통제권을 내게 넘겨줘. 이 녀석을 죽이겠어! 하지만 세루엘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싫어. -왜지? -뻔히 알면서 왜 묻는가. 네게 주희의 몸의 통제권을 넘겨준 만큼 너의 주희에 대한 영향력은 강해지고, 그러면 결국 난 네게 내기를 지게 된다. 그럴 수는 없지. 통제권은 넘겨주지 않겠다. 그리고 아스모데우스가 우리를 공격한다면 같이 싸운다. 이것이 주희에게도, 그리고 내게 있어서도 최상의 방법이다. -흥! 하나던 둘이던 상관없다. 고작 계집아이한테나 빙의된 주제에 과연 잘 싸울 수 있을까? -빙의나 소환이나 그게 그거 아니던가? 아스모데우스는 세루엘의 말에 대답 대신 힘껏 자신의 세날 검을 휘둘렀 다. -번쩍! 쩌엉! 하늘에서 번개가 튀기며 주희의 황금빛 검과 아스모데우스의 검이 부딪혔 다. 아스모데우스는 재빨리 검을 뺏다. 주희는 이미 다시 자신의 불꽃 검을 아스모데우스의 옆구리로 휘두르고 있었다. 화르륵! 아스모데우스의 덩치에 비하면 손톱깎이용 칼로도 안 보일 정도로 작은 주희의 검에서 갑자기 불 꽃의 날이 길게 뻗어 나왔다. -우웃! -쩌어엉! 아스모데우스는 방패로 막으며 검을 앞으로 휘둘렀다. 하지만 주희가 들 고 있는 작은 황금빛 검은 조금도 밀리지 않고 아스모데우스의 거대한 검 을 막아내었다. -으으... 아스모데우스가 신음을 흘렸다. 어느새 검은 색 기운이 아스모데우스의 배에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쿠윽! 아스모데우스가 한 발 뒤로 물러서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의 입에서 누 런 유황연기가 술술 풍겨져 나오고 있었다. 아스모데우스는 숨을 들이마시 다가 그대로 포효했다. -꾸오오오! -번쩍! 주홍빛 섬광이 하늘을 온통 감쌌다. 아스모데우스가 입에서 불줄기를 뿜 어낸 것이다. 맙소사! 주희가 새카맣게 타 버리겠어! 콰콰콰...잠시 후 해일 처럼 몰아치던 불길이 멎었다. -그르르... 아스모데우스는 불만족스러운 목소리로 그르렁거렸다. 주희가 손끝 하나 다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희는 황금빛 검을 잡은 오른손바닥을 똑바로 펴서 머리 위로 들어올리고 있었다. 손바닥에서는 끊임없이 찬란히 빛나는 은빛 기운이 샘물처럼 솟아 나와 주희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아스모데 우스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세날 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그에 맞서 주 희도 자신의 양손의 검을 교차시켜 앞으로 내밀었다. 그 때였다. -쾅! -크윽! 진동과 함께 아스모데우스가 몸을 부르르 떨면서 얼굴을 무섭게 일그러뜨 렸다. -쾅! 다시 한 번 아스모데우스의 전신이 크게 일렁였다. 아스모데우스는 고통 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퀴에르에게로 돌렸다. 퀴에르가 빛나는 육망 성의 마법진에 둘러싸여 있었다. -쾅! 마법진이 진동하면서 아스모데우스의 전신이 다시 한 번 크게 일렁였다. 아스모데우스는 비명을 질렀다. -그오오오오! 존 캐슬이었다. 자신의 빛나는 칼을 땅에 박은 채 그가 이를 드러내고 웃 고 있었다. -멍청한 자 같으니. 소환을 당했으면 소환자에게 좀 더 신경을 써야지. -쾅! 존 캐슬은 땅에 박은 칼에 힘을 주었다. 그와 동시에 퀴에르의 주위를 둘 러싼 마법진이 다시 한 번 부르르 떨었다. 아스모데우스는 고통스럽게 울 부짖으며 손을 들었다. -우와아아악! 그가 순식간에 지상에 내려오더니 마법진을 향해 손을 내리쳤다. 콰앙! 단 한 번의 주먹에 마법진은 산산조각 나듯 수 천개의 빛가루로 부서지며 허 공에 스러졌다. 아스모데우스가 정신을 잃고 있는 퀴에르를 손바닥 위에 올리며 분노로 울부짖었다. 그의 무서운 얼굴이 존 캐슬을 바라보고 있었 다. 존 캐슬은 씁쓸히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 그에겐 저항할 힘조차 남지 않은 듯 했다. 그 때 아스모데우스의 등뒤에서 빛나는 창 한 자루가 날아와서 꽂혔다. 퍼억! 주희가 주술로 맺어 던진 창이었다. -끄아아아아! 아스모데우스가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순간적으로 가슴이 도려내는 것처 럼 아팠다. 아스모데우스의 고통에 찬 비명이 우리 모두에게 순간적으로 고통을 가져다 준 것이다. 아스모데우스는 왼손에 퀴에르를 얹은 채 오른손으로 잭슨과 루나와의 싸 움을 멈추고 멍하니 주위의 싸움을 바라보던 김혜진을 손에 쥐었다. 아스 모데우스는 고개를 들더니 불타는 눈빛으로 주희를 노려보았다. -크르르...내가 지상에...강림하는...날...너를...첫 번째로...죽여주지. 그리고 고개를 돌려 존을 바라보았다. -넌...두 번째다. 콰앙! 이 말을 마치자마자 아스모데우스의 몸 주위를 눈부신 홍염이 뒤덮 었다. 강렬한 폭발이 일어나고, 폭발이 사라진 자리에는 놀랍게도 아무도 없었다. "페일드 투 캣취..." 존이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희도 안타까운지 얼굴 표정이 씁쓸하게 변했다. -놓쳤군. -너 때문이야. -닥치는 것이 좋은 걸. 이제 남은 것은 백태청과 백화련, 그리고 유천, 그리고 존 캐슬과 잭슨, 루나다. 모두들 재빨리 주위의 분위기를 살피는 듯 고개를 이리 저리 움직 였다. 그 때 주희가 하늘에서 말했다. 신성한 목소리였다. 존 캐슬과 루나, 잭슨 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보시오. -우리 말입니까? 존이 셋을 대표해 대답했다. -그렇소. 자네들. 특히 당신, 방금 전에 대답한 자. 비록 당신이 아까 아스 모데우스에게 타격을 입힌 공로는 인정하오. 하지만 주희가 자네들을 무척 싫어하고 두려워하는군. 그만 돌아가는 것이 어떻소? 존은 한참동안 주희를 바라보다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습니다. 신성한 자여. 하지만 제겐 이 자들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잠시만 시간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주희는 대답 대신 묵묵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리고 존은 사정하듯 다 시 말했다. -부탁입니다. 이 자들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정말로 중요한 일입니다. 느 끼실 수 있겠지만, 이제 제 몸에는 어떠한 영력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자네의 동료들의 몸에는 아직 많은 영력이 남아 있군. 주희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이들을 먼저 돌려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저만 남도록 하겠습니 다. 잠깐만, 잠깐만이라도 이야기를 나누면 됩니다. 그것조차 안 되겠습니 까? 존은 간절히 부탁했고 주희는 존의 계속되는 설득에 마음이 조금 움직인 듯 한참이나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빠져 있다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 였다. 그리고 존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존은 잭슨과 루나를 불러서 무어라 속삭이고 격려하듯 등을 두드렸다. 그 리고 잭슨과 루나는 아쉬운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후 걸음을 우리와 유천 패거리를 지나쳐 잔디밭 입구의 숲길로 사라졌다. "인사 한 마디 없이 저렇게 가는 거야?" 요령이가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말했다. "왜, 섭섭해?" 내 물음에 요령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지만..." 주희는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타락한 목소리였다. -야, 거기 셋. 너희들, 주희가 너희들이 싫어 죽겠대. 좀 꺼져 줬으면 좋겠 대. 눈이 있으면 눈치 좀 채고 귀가 있으면 좀 새겨듣고 알아서 가라. 꼭 이렇게 일일이 말해줘야 되냐? 유천은 주희의 건방진 말투에 발끈하며 앞으로 나섰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응? -불만있냐? 주희의 눈초리는 싸늘했다. 그리고 주희의 눈빛에 위압당한 유천은 신음 을 흘리며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크윽..." -까불고 있어. 야, 당장 꺼져. 아, 아. 할 말 있다고 할 생각은 아예 하지 도 마. 너희 몸 주위에서 아주 살기가 철철 넘쳐흐른다, 흘러. 너희들은 짤 없어. 안 봐줘. 좀 가라. 안 죽이는 것도 고맙게 여기고. 유천은 다시 발끈하며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하지만 백태청이 급히 그를 잡아끌며 무어라 속삭였다. 잠깐의 대화 후, 유천은 분노의 눈으로 잠시 주 희를 노려보다 발걸음을 돌려 숲길로 향했다. 가장 뒤에 서 있던 백태청이 고개를 돌려 잠시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했다. "또 만납시다" 그리고 그들은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주희가 천천히 내려오더니 땅에 사뿐히 발을 디뎠다. 가까이 에서 다시 보고 느낀 거지만, 주희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정말로 찬란했다. 하지만 결코 눈이 부신 빛은 아니었다. 그리고 주희의 발 밑에서 흐르는 어둠은 정말이지 '칠흑'이라는 뜻이 무슨 뜻인지 알려주는 것처럼 검었다. 잠시 우리들을 둘러보던 주희. 이윽고 입을 열었다. -이제 들어가도 되겠지? 주희 잘 보살피고. 나 다시 나올 일없게 좀 잘 해라, 응? 수만 살 먹고 이렇게 나오는 것도 힘들어, 알아들어? 타락한 목소리를 이어 신성한 목소리가 말했다. -안녕히 계시오. 주희를 잘 돌봐 주시오. 내가 당신들을 항상 마음으로나 마 축복하겠소. 스팟-! 빛과 어둠이 사라지고 주희의 등뒤에서 일렁이던 날개가 부서지며 허공으로 스러졌다. 그리고 주희는 휘청거리다 땅에 쓰러졌다. 풀썩. "어어? 주희야, 괜찮아?" 나는 깜짝 놀라서 주희에게로 달려갔다. 이미 가람이가 주희의 상태를 살 피고 있었다. "괜찮다. 단지 너무 강대한 존재가 오랫동안 자신에게 강림해 있었던 바 람에 지쳤을 뿐이다. 안심해라" 그래? 그것 다행이로군. 나는 주희를 들쳐업었다. "뭐 해?" "뭐 하긴? 얘 어서 컨테이너에 눕혀야지. 여기 이대로 놔 둘 거야?" 그리고 요령이는 난처하다는 듯 말했다. "그건 알지만...너는 저 녀석이 마음에 걸리지도 않냐?" 나는 힐끔 고개를 돌려 존 캐슬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흠...그렇군. 아직 저 녀석이 돌아가지 않고 있었 군. 나는 주희를 조심스레 다시 내려놓고 존 캐슬을 바라보았다. 그는 우리 들의 분위기를 살피는 듯 했다. 요령이가 물었다. -할 말이 있다고 했지? -그렇소. 존 캐슬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이지? 설마 할 말이 있다고 거짓말하고 남아서 우리와 계속 싸우 려는 것은 아니겠지? 존 캐슬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렇지 않소. 나의 힘은 퀴에르와의 지리한 대결과 아스모데우스의 공격 을 막아내는 데 다 써 버렸소. 아스모데우스라는 악마, 정말 대단하더군. 나도 웬만한 하위 악마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건 만... 정식으로 이 땅에 강림한 것이 아닌 단지 소환된 존재인데도 그의 공 격을 서 너번 막는 것으로 내 모든 힘을 모조리 소모해 버렸소. -그래서? 어쩌라고? 요령이의 버르장머리없는 말투에도 존 캐슬은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 대 신 요령이를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던 존 캐슬은 조용히 물었다. -당신, 퀴에르가 왜 당신을 찾아다니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소? -...안 가르쳐 준다며? 말은 그렇게 하지만 요령이의 표정은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가르쳐 주지 않으려 했소. 그러나 어차피 당신의 일이고, 게다가 퀴에르 가 아스모데우스를 소환까지 하는 것으로 봐서 상황은 이미 갈 데까지 간 듯 하오. -그래서, 그런 일들이 다 나와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말해 주겠다? 존 캐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럼, 말해봐. -퀴에르가 무슨 일을 하려는 지는 아까 싸움 도중 퀴에르와 내가 나눈 대 화만으로도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 믿소. 요령이는 고개를 끄덕였군. -그래. 퀴에르 녀석, 아까 자신이 소환했던 악마 아스모데우스를 이 지상 에 강림시키려고 하더군. -아스모데우스에 대해 아시오? -그래. 알아. 혼돈의 왕. 혼란의 지배자. 지옥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큰 힘 과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지. 그의 말을 들어보면 고대의 악마이기까지 하 더군. 고대의 악마라면 타천사들, 즉 '옛 하늘에서 찾아온 자들'과도 대등하 게 싸운, 지금의 악마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강한 악마. 퀴에르도 참 운이 좋아. 어떻게 그런 악마를 구했는지. 하긴, 능력이 되니까 그런 악 마도 구한 것이겠지만. 그리고 존 캐슬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고 계시는구려. 그렇소. 퀴에르는 그런 악마 아스모데우스를 지상에 강림시키려 하고 있소. -계약을 맺어서 종으로 부리기 위해선가? -아니오. 누가 악마 아스모데우스를 종으로 부릴 수 있겠소? 그건 계약을 맺더라도 불가능한 일이오. 그녀가 악마 아스모데우스를 지상으로 강림시 키려는 이유는 간단하오. 지상을 악마들의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서. 존 캐슬의 말에 요령이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잠시 후 요령 이는 천천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 그런 유치한 이야기가 다 있냐? 퀴에르가 약 먹었냐, 전혀 득도 안 되는 그런 짓 하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아니, 말이 되오. 퀴에르가 암흑에 찬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 이유는 그녀 의 즐거움을 위해서, 그리고 그녀의 힘을 위해서, 그리고 그녀의 권력을 위 해서, 마지막으로 그녀의 영생을 위해서요. 퀴에르가 이 세상에 아스모데우스를 불러온다고 칩시다. 아스모데우스가 일단 완전한 힘을 가지고 이 세계에 강림한다면, 그는 그의 강대한 힘으로 이 세상에 자신의 마법적 공간을 만들 수 있소. 그러면 그 휘하의 사병들 이 우르르 세상으로 몰려들겠지. '혼돈의 왕'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는 세 상에 극심한 혼돈을 선물할 것이오. 그가 즐기는 것이 혼돈이니까. 그리고 여기서 퀴에르의 즐거움을 위한 이유가 충족되오. 그녀 역시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혼돈의 세상을 즐길 테니까. 그녀의 성격은 당신도 알려는지 모 르겠지만, 그녀의 마음은 이미 완전한 악마요. 그리고 그녀의 강한 힘 또한 충족되오. 그녀는 아스모데우스와 계약을 맺 은 존재. 아스모데우스가 세상에 강림한다면 퀴에르는 계약자가 가까우므 로 지금까지 아스모데우스와의 계약으로 인해서 얻었던 힘을 몇 배는 더 키울 수 있을 것이오. 게다가 퀴에르는 아스모데우스의 계약자이므로, 아스모데우스가 강림한다 면 누구도 그녀를 건드릴 수 없을 것이오. 아스모데우스와의 계약 중에는 그녀를 지켜야 한다는 조항이 반드시 있겠지. 또한 그녀는 지상의 이인자 가 되오. 아스모데우스가 지상 지배에 관심이 없다면, 그녀는 세계의 왕이 될 것이오. 혹, 그가 관심이 있다고 해도, 그녀는 세계의 이인자가 될 것이 오. 또한 마지막으로 영생에 관한 문제요. 악마들의 힘이 점점 짙어진다면, 그 리고 혼돈이 커진다면 신께서 태초에 지상에 부여한 '신성력, 암흑력 불가 침'의 주술이 깨져 버릴 것이오. 그 순간 지상은 지옥과 동일화되오. 애초 에 신께서 '신성력, 암흑력 불가침'의 원칙을 세운 이유가 지상이 천국이나 지옥에 흡수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으니까. 지상이 지옥이 된다면, 퀴에르 는 언제까지고 지상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겠지. 그녀가 가야 할 지옥이 곧 지상이니까. -마...말도 안돼... 요령이는 질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맙소사. 정말 끔찍하군! 세상이 지옥이 된다고? 그리고 퀴에르는 세상의 왕이 되고, 영원히 산단 말이지? -고작 그런 이유들 때문에 지상 전체를 지옥에 팔아 넘긴다고? 요령이가 따지듯 물었다. 그리고 존 캐슬은 우울한 눈으로 요령이를 바라 보았다. -그녀가 그러지 않을 거라 생각하오? -...... 요령이는 말문을 닫았다. 요령이도 존 캐슬처럼 '퀴에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물론, 퀴에르가 지상에 아스모데우스를 강림시키려는 이유는 내 추측 에 불과하오. 하지만 그녀가 아스모데우스와 계약을 맺은 것은, 그리고 그의 강림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오. 존은 심각하게 말했다. -그런데 그게 도대체 내가 죽거나 숨어야 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지? 요령이는 다시 한 번 물었다. -...그것은 당신이 아스모데우스의 강림을 위한 주술의 마지막 '재료'이기 때문이오. 존 캐슬의 충격적인 말에 요령이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요령이는 더 듬더듬 말했다. -재, 재료라고...? -그렇소. 재료. 암흑의 힘의 결정체인 아스모데우스가 강림하기 위해서는 충만하고 순수한 암흑의 기운이 필요하오. 그것도 아주 큰 기운. 인간은 그 런 기운을 가질 수 없소. 왜냐하면 인간은 빛의 기운과 암흑의 기운이 조 화를 이루고 있는 생물이잖소? 퀴에르라면 워낙 마음이 어둡기 때문에 가 능할 지 모르지만, 퀴에르가 자신의 힘을 스스로 깎아 먹는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지. 그래서 퀴에르는 고민했소. 아스타로트와 계약을 맺은 순간부터 이미 고양이 한 마리에 계속적으로 음기를 불어넣어 키우고는 있었지만, 그걸 제물로 써먹으려면 수십 년은 더 기다려야 했지. 그러다 우연히 당신을 보게 됐소. 언제 보게 되었는지는 나도 모르겠소. 어쨌든 퀴에르는 당신을 발견하자마자 당신이 '순수한 암흑의 기운'의 결정 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오. 고양이는 암흑의 동물이잖소? 게다가 당신 은 그 중에서도 가장 순수한 검은 고양이이고, 게다가 300년간이나 암흑의 기운을 모아 왔으니 적격이지. "암흑의 힘?" 내 중얼거림에 가람이가 말했다. "음기를 말하는 것 같다, 주인" "아, 그렇구나" -그래서, 퀴에르는 나를 제물로 쓰겠다는 생각이라고? -...그렇소. 애써 차분하게 말했지만 요령이의 표정은 숨길 수 없을 정도로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나를 죽이려고 했던 이유도 이해가 가는군. 나를 죽이면 아스모데우스의 강림을 막던지,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수십 년 동안은 그의 강림을 미룰 수 있는 시간을 얻을 테니까. -그렇소. 그래서 당신을 죽이려 했소. 잘못된 생각이었지. 사과하오. -그럼 나를 보호하겠다는 것도 사실이었겠군... -물론이오. 당신에게 세상의 운명이 걸려 있는데 어찌 보호하지 않을 수 가 있겠소? 요령이는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젠장...나보고 뭘 어쩌라고?" 존 캐슬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요령이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시름에 젖어 있을 시간이 없소.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하오. 우리와 함께 갈 수는 없소. 이미 퀴에르가 우리가 이 일에 개입했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오. 하지만 가톨릭이라면 당신을 숨겨 줄 수 있겠지... 존은 컨테이너를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은 기다리시오. 내 최대한 빨리 다시 돌아오겠소. 가톨릭에 의뢰해서 당신의 은신처를 마련해 드리리다. 알겠소? 요령이는 존의 말에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존은 대답을 듣지 않고 뒤로 돌아 뛰었다. -오늘 밤 내로 돌아오겠소! "배고프다" 한참을 멍하니 앉아서 창 밖에 펼쳐진 밤하늘을 바라보던 요령이가 몇 시 간만에 처음으로 꺼낸 말이었다. "...나도. 가람이 너는?" 나는 벽에 기댄 채 묵묵히 무언가를 생각하는 가람이에게 물었다. "그럭저럭 견딜 만은 하다" "한수와 주희는?" "집으로 돌아갔다" 요령이의 말에 가람이가 짧게 대답했다. "주희랑 한수, 참 불쌍하더라. 그치?" "너도 사람 불쌍해 할 줄을 아냐?" "이게!" 내 농담에 요령이가 손을 휙 들었다가 힘없이 내려놓았다. "됐다... 봐줬다" 사실 내가 생각해도 한수와 주희가 안됐긴 하다. 한수의 이야기에 따르면, 고대의 천사와 고대의 악마가 주희의 몸 속에 있는 이유는 어떤 내기 때문 이라고 한다. 그 내기의 이름은, '사람의 본성은 선과 악 중 무엇을 따르는 가?'라는 이름의 내기이다. 이들은 이 내기를 위해 수천 년간 이 사람 저 사람의 몸을 옮겨 다니며 그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그가 과연 인생을 살 면서 누구의 영향을 받는지를 지켜보았다고 한다. 주희가 백치인 이유도 이들 때문이라고 한다. 선과 악 어느 한 쪽으로 기울기 전의 마음은 깨끗 해야 한다면서 그들이 억지로 어린아이의 상태를 유지시키기 때문이다. - 이 말을 듣고 나는 악마는 그렇다 쳐도 소위 '천사'라는 것이 어떻게 그럴 수 있나하는 마음이 들었다. 뭐, 고대의 천사라니까 지금의 천사와는 다른 것일지도 모르겠지- 한수에게 염력을 준 것도 그들이라고 한다. 주희에게 미안함과 책임감을 느낀 그들이 주희를 돌보기 위한 존재로 한수를 선택한 것이다. 세루엘과 트로우스는 그들의 지식을 이용해서 태내의 한수의 뇌를 조금 손보았다. 그리고 한수는 초능력을 가진 아이로 태어났다. 하지만 그 이유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출산에 따른 고통 때문인지 주희와 한수의 어머니는 한수를 낳다가 죽고 말았다. 주희와 한수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내가 죽은 것이 한수 때문이라고 생각 하고 있었다. 게다가 백치인 주희에게서 자식이 커 가는 기쁨을 전혀 느끼 지 못한 아버지는 자식에 대한 사랑 또한 없었다. 그가 유일하게 정을 붙 이고 있던 그의 아내가 죽자, 주희와 한수의 아버지는 술꾼으로 변해서 늘 상 술만 마셔댔다. 그 뿐 아니라 자식들에게 손찌검까지 하기 시작했다. 특 히 한수는 싹싹하고 귀염성 있는 주희에 비해 아버지의 구타의 대상이 되 었다. 한수의 아버지는 아내가 한수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한수의 아버지는 그 날도 어김없이 술을 마시고 들어와서 한수 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수는 맞다가 괴로워서 자신도 모르게 '아빠가 저 벽에 처박혀 버렸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다. 그의 바램은 그대 로 이루어졌다. 한수의 아버지가 벽에 처박혀 버린 것이다. 한수의 아버지 는 그 날 수 십번이나 벽에 처박힌 후 고래고래 비명을 지르며 달아난 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한수는 그 날 처음으로 자신이 능력자임을 깨달 았다고 했다. 한수가 자신의 능력을 깨닫고 나서 처음 한 일은 갑부인 할 머니를 찾아가서 생활의 보장을 약속받은 일이었다. 한수는 주희와는 반대 로 뇌가 손 봐진 탓인지 나이에 걸맞지 않게 머리가 빨리 커버렸다고 했 다. 그건 그렇고, 왜 한수는 주희의 마음속의 천사와 악마가 밖으로 나타나면 안 된다고 했을까? 그것은, 천사와 악마가 밖으로 드러나 있는 동안에는 주희의 자아가 속으로 숨어 버리기 때문에 주희의 마음이 최소한의 걸러짐 도 없이 무방비로 천사의 마음과 악마의 마음에 물들어 버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 마디로, 그런 횟수가 많아질수록 주희는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천천히 일어나는 현상이라 그렇게까지 문제될 것까지는 없지 만 그런 일이 반복될 경우의 결과가 워낙 안 좋기 때문에 조심할수록 좋다 고 한다. "청도는?" "자" 청도는 다리에 소염제를 바른 후 압박붕대로 대강 발을 감아서 응급조치 를 했다. "라면이나 끓여 먹을까..." 아까 시킨 자장면과 탕수육은 불어 버렸을 뿐더러 아까 싸움에 의한 진동 으로 책상에서 떨어져 이리저리 뒹굴고 있었다. 난 요령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라면 먹자" "...뭐해?" 요령이의 말에 나는 손가락을 까닥까닥 흔들었다. "가끔씩은 네가 만드는 라면을 먹고 싶단다" "...그래?" 요령이는 내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말없이 주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나는 놀라서 요령이의 뒷모습을 한참동안이나 바라보았다 "어떻게...된 거냐 쟤가?" 그리고 가람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원래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안 하던 짓을 한다고 하더라" -쉬익! 텅! 무엇인가 은빛으로 빛나는 물건이 엄청난 속도로 가람이를 향해 날아왔 다. 가람이는 재빨리 고개를 옆으로 꺾었고, 그것은 컨테이너의 내장재를 뚫고 외벽, 즉 쇠판에 박혀 버렸다. 콰직! 그것은 젓가락이었다. 요령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쯧... 보자보자 하니까 못하는 소리가 없어" "농담이었다. 왜 흥분하고 그러나" 가람이의 말에 요령이는 묘한 음색으로 말했다. "너도 많이 변했구나. 농담을 다 하다니" "...글쎄...변했다라..." 가람이는 요령이의 말에 생각에 잠기는 듯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요령이가 라면 냄비와 그릇을 들고 와서 테이블에 내려놓더니 조용히 각자의 그릇에 라면을 덜어 주었다. "먹어" "앞으로도 자주 좀 이래봐라, 응?" 나는 젓가락을 집어들어 라면을 입에 떠 넣으며 말했다. 생각 외로 맛이 없지는 않았다. 하긴, 라면 이거 뒤에 써 있는 대로만 끓이면 되는 거 못 끓이는 사람이 어딨겠냐. 내 말에 요령이는 젓가락을 그릇에 넣고 휘휘 저으며 말했다. "자주라... 글쎄... 뭐, 때 되면 또 끓여 주지" "야, 왜 아까부터 계속 밥상머리 앞에서 청승 떨고 그래?" 나는 짐짓 쾌활한 척 말했다. 그리고 요령이는 대답 대신 젓가락을 들며 고개를 숙였다. 새까맣고 윤기 흐르는 긴 머리가 흘러내려 내 시선을 가렸 다. 그런데, 요령이는 그렇게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참 동안 이나 묵묵히 있었다. 뭐하는 거야, 얘가? "야, 밥 먹다 말고 자냐?" "......" 요령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요령이의 이마에 손을 대고 일으켜 보았다. "뭐 해? 사람 불안하게..." "하지마..." 요령이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며 힘없이 내 손을 떨쳤다. "하지 말긴 뭘 하지마? 나는 이상한 기분에 요령이의 이마에 손을 대고 다시 한 번 힘을 주어 일 으켰다. "아 하지 말라니깐..." 요령이가 다시 내 팔을 떨치려 했지만 나는 힘을 꽉 주어 버티면서 요령 이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요령이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에이 씨...하지 말라니깐 진짜... 콱..." 요령이는 내게 눈물을 보이기 싫어서 라면을 먹는 척 고개를 숙였던 것이 다. 요령이는 황급히 눈물을 닦았다. "하튼...죽어도 말을 안 들어요...끝까지...쪽팔리게...씨" "네가 한 두 번 우냐? 쪽팔리긴 뭐가 쪽팔려?" 나는 애써 담담하게 요령이에게 대답하며 라면 그릇에 젓가락을 넣고 휘 저었다. 왠지 입맛이 싹 달아나 버렸다. "울려면 그냥 툭 터놓고 울어. 안 울고 버티면 속 썩는다" 주르륵. 내 말에 요령이는 기껏 멈추었던 눈물을 다시 한 번 떨구었다. 요 령이는 어깨를 들썩이며 천천히 말했다. "자꾸...욱...그러지마...흑...씨...나...진짜...운다..." "울라니깐" 나는 태연히 라면 줄기를 입에 집어넣었다. "으흑! 내가, 울라면, 못 울 줄 알어? 흑!" 요령이는 그렇게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젓가락을 신경질적으로 집어 던져 버리곤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씨, 으흑, 나 진짜, 크흥, 가기 싫단 말야, 흑, 너희들이랑 계속, 흐윽, 즐 겁게, 그냥 이대로 살면, 바라는 것도 없단 말야, 흑, 왜 자꾸 나를 괴롭히 는, 어흑, 괴롭히는, 흑, 괴롭히는...으하앙...!" 요령이는 말을 채 마치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얼굴을 감싸쥔 손의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리고 나는 내가 요령이에게 아 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가기 싫으면 안 가면 되잖아" "흑...흑" 요령이는 대답 대신 어깨를 들썩이며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가기 싫으면 가지 마. 설마 우리가 너 하나쯤 못 지켜 주겠니? 그냥 우 리와 함께 있자. ...네가 바란다면" 요령이는 천천히 울음을 그쳤다. 손을 뗀 그녀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휴지" 요령이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재빨리 테이블 위의 두루마리 휴지에서 휴 지를 몇 장 떼어 주었다. "크흥!" 코를 풀고 던져버린 요령이는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 었다. "정말...그래도...흑, 돼?" "그래" "진짜? 너희들...흡, 무척 힘들어질 거야" 요령이는 훌쩍거림을 그치기 위해 애써 숨을 들이쉬며 힘겹게 말했다. "그렇다니깐" "...고마워..." 요령이는 웃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런데 왜 그 미소가 내게는 쓸쓸하게 느껴지는 걸까? 요령이는 테이블 위에 집어던진 젓가락을 다시 집어들었 다. "나, 라면 먹을래" "그래라. 벌써 다 불었겠다" 요령이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라면을 입에 넣었다. 나도 녀석 을 따라서 라면을 먹었다. 라면은 이미 불어 있었다. 하지만 요령이는 평소 때와는 달리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라면을 모두 먹어 치웠다. 퉁퉁 불은 눈으로 퉁퉁 불은 라면을 맛있게 먹는 요령이. 그 모습이 이상하게 예뻐 보여서 내 그릇을 비워 나가면서도 자주 요령이를 힐끔거렸다. 국물까지 깨끗이 마셔버린 요령이는 다시 휴지를 몇 장 뜯어 입을 깨끗이 닦더니 갑자기 가람이를 빤히 바라보며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왜 재촉하지 않지?" "......" 갑작스러운 요령이의 말. 하지만 가람이는 무슨 뜻인지 알지만 대답하지 않겠다는 듯 요령이의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요령이는 피식 웃었다. "가람이 너, 확실히 변했구나" 요령이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조용히 가람이 가 따라서 일어났다. "야, 너희들 어디 가...?"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녀석들의 뒤를 따라갔다. 문 밖으로 나가자, 존 캐슬 이 푸른 달빛을 맞으며 벽에 기대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같은데. 도대체 언제? 설마 요령이가 가람이에게 말한 '왜 재촉하지 않느냐'는 말이 이걸 두고 하는 말인가? -많이 기다렸어? 존 캐슬은 고개를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들어갈 분위기가 아니라 잠깐 기다리고 있었소. -웃기는군. 한참 전부터 네 존재감을 느끼고 있었어. 존은 맞받는 대신 피식 웃으며 물었다. -이야기는 끝났소? -응. -갑시다. -잠깐만. 작별 인사 좀 하고. 작별 인사라고? 내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니겠지? 요령이는 돌아서서 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영준아, 그리고 가람아. 이제 헤어질 때가 된 거 같네. 잘 지내. 청도와 한수, 주희에게도 인사하고 싶지만...할 수 없지 뭐" "야, 너...!" 내가 황급히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요령이는 내 말을 끊었다. "안녕. 잘 있어. 언젠가 인연이 된다면 다시 만나기를 진심으로 바랄게. 그 동안 너희들과 함께 있어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정말로...행복했어" 요령이는 눈물을 주르륵 흘리면서도 화사하게 미소를 지었다. 달빛에 반 짝이는 눈물 사이로 비치는 미소... 그 모습이 가슴 뛸 정도로 아름답게 보 였다. 이렇게 보내 버리면... "야! 뭐야! 안 가겠다며! 가지 마!" 나는 나도 모르게 버럭 소리 질렀다. 하지만 요령이는 미소를 띈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안 돼. 그 동안 너희들에게 너무 많은 피해를 줬어. 더 이상 너희들을 괴 롭힐 수는 없어. 이제 내 짐은 나 홀로 지어야지. 그 동안 너희들이 많이 도와 줬지만...더 이상 너희들에게 기대기엔 내 마음이 힘들어서 견딜 수가 없어..." 요령이가 평소에는 항상 장난스럽고 웃는 것 같아도 마음속으로는 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새삼스레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이 느껴졌 다. 나는 요령이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괜찮아. 무슨 상관이야? 신경 쓰지 마! 가지 마! 우리가 지켜줄 게!" 요령이는 나를 바라보았다. "영준아" "...응?" 요령이는 머뭇거리다 미소지으며 속삭이듯 작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요 령이의 말을 듣지 못했다. "...너무 작아서 못 들었어! 뭐라고?" "잘 있으라고 했어. 안녕" 요령이는 내게 등을 돌리고 존을 향해 걸었다. -이제 작별인사는 끝났소? -그래. -갑시다. "가지마!" 요령이는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손에 잡힌 주소를 만지작거렸다. 며칠 전 요령이가 숨어 있는 성당 의 주소가 적힌 메모였다. 얼마 전 존 캐슬이 직접 전해주고 간 메모. 퀴에 르에게 노출될 수도 있으니 되도록 찾아가지 말고 알고만 있으라고 했다. "어쩌지...?" 나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요령이가 보고 싶은데...요령이도 조용한 성당에 서 혼자 지내기 얼마나 외로울까...찾아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식당에서 무슨 생각을 그렇게 뚫어지게 하냐. 밥이나 먹어" 청도가 내 얼굴을 한참동안 갸웃거리며 바라보다 말했다. "그리고 그 종이 그렇게 막 다루다 헤지면 요령이가 있는 주소 영영 잃어 버린다" "뭐...뭐? 야, 그걸 어떻게 알았어?" "뻔하지 뭐. 설마 네가 캐큘러스 254페이지에 있는 공식을 적어서 그렇게 들고 다니고 있을 리는 없잖아? 그렇다고 그게 영어 단어일리는 더더욱 없 고. 스타 빌드 오더를 적고 다니자니 요즘 너 스타 안 하고. 길에서 헌팅한 예쁜 아가씨 전화번호일까도 생각해 봤는데 너같이 얼빠진 놈한테 전화번 호를 알려줄 미친 여자가 있을 리 없지" "이게 말을 해도 꼭..."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손에 잡힌 주소를 곱게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물론 이미 주소는 수첩에 옮겨 적어 놨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서이다. "그래, 네 말대로 밥이나 먹자" 밥을 깨끗이 먹고 나서 물을 마시기 위해 고개를 드는데 내 눈에 TV 화 면이 눈에 들어왔다. 화면에 비치는 모습은 처참하게 박살난 어느 건물의 경관이었다. TV에서 흘러나오는 멘트가 나도 모르게 귀에 들어왔다. -...성당의 이번 폭발사고로 인해 많은 부상자가 생겼으나 다행히도 사망 자는 생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한 편 수사팀은 신원을 알 수 없는 10대 후 반에서 20대 초반 사이의 여자가 얼마 전부터 성당에서 거주하였다가 사고 이후 사라졌다는 여러 증인들의 제보를 듣고 수사에 초점을 기울이고 있 습... 나는 놀라서 컵을 떨어뜨린 후 벌떡 일어나 TV를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이미 기사는 끝나 버린 후였다. 나는 식판을 식판 반납대에 가져다 놓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재빨리 식당 밖으로 뛰쳐나가 매점을 향해 달렸다. '제발! 제발, 아닐 거야! 내가 잘못 들은 걸 거야!' 매점으로 들어선 나는 재빨리 가판대에서 신문을 하나 뽑아 들다 문득 떠 오르는 생각에 신문을 도로 내려놓았다. "빌어먹을! 조간에 오늘 사건이 실릴 리가 없지"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겨 컴퓨터실로 뛰어갔다. 다행히 서너 자리가 비어 있었다.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인터넷 뉴스 사이트로 들어갔다. 한쪽 구석 에 작게 '반석성당 폭발사고'라는 목차가 있었다. 재빨리 클릭 했다. -반석성당 폭발사고. 수원시 팔달구 원천동에 위치한 반석성당의 폭발사고. 이번 사고로 인해 7명의 인원이 부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사망자는 없다. 아직 폭발의 원인은 알 수 없으나 경찰은 잠정적으로 이번 사건을 가스폭발로 인한 사고로 추 정하고 있다. 한편, 얼마 전부터 신원을 알 수 없는 20대의 여성이 투숙을 시작하였다가 사고 후 사라졌다는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라 수사팀은 신원 불명의 20대 여성의 행방에도 수사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나는 주먹을 부르르 움켜쥐었다. 이 곳은...이 곳은...! 요령이가 투숙했던 성당이다! <고양이>ch 24. 결전의 전장 .. 쾅! 나는 주먹으로 테이블을 거세게 내리쳤다. "빌어먹을...빌어먹을!" "야, 화나는 건 알지만 좀 참아..." "어떻게 참을 수가 있어... 젠장! 그 존인가 뭔가 하는 빌어먹을 자식...숨 겨준다고 했으면 똑바로 숨겨줬어야 할 것 아냐!" 나는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책상만 탕탕 내리쳤다. 빌어먹을! 요령이가 납 치됐다, 납치됐다고! 그 바보 같은 것, 그러기에 내가 그냥 우리와 함께 있 자니까 부득불 그렇게 가 버리더니 꼴 좋다! "어쨌든 무슨 대책을 강구해 봐야 하잖아?" 청도가 말했다. "어떤 방도!" 나는 답답한 마음에 소리를 버럭 질렀다. 젠장! 퀴에르가 납치해 간 것은 거의 확실하지만 어디로 갔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이 자식이 정말! 너, 왜 나한테 화를 내? 너 임마, 그런 놈이었어? 엉?" 계속 내 짜증을 받아 주던 청도가 결국 더 이상은 못 참겠는지 화를 벌컥 냈다. "...젠장...미안. 내가 지금 너무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어서 그래..." "그래. 이해 못 하는 건 아냐. 하지만 너무 하잖아. 우리도 불안하다고. 요 령이는 네 친구이기도 하지만 우리 친구이기도 하단 말야. 그러니 좀 차분 히 방도를 생각해 보자. 흥분하지 말고" 조용히 타이르는 듯한 청도의 말에 나는 한숨을 쉬며 입을 다물었다. 자 식, 평소에는 까불대더니 이럴 때는 또 철이 든 것 같네... 가람이가 말했다. "유천은 뭔가를 알고 있지 않을까. 전에 유천이 있는 조직과 퀴에르의 조 직이 동맹 관계라고 하지 않았었나"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래, 나도 녀석을 반 죽여놓고 퀴에르가 있는 곳의 위치를 불라고 해 볼 생각이 없지는 않았는데, 알다시피 그 놈은 맨날 싸우다 지고 나면 삐 쳐서 며칠간 잠수 타잖아. 아무리 찾아봐도 학교에 없어" "그런가" "뭐 알고 있는 정보 같은 것도 없고?" "응. 예전에 퀴에르가 낭트에 살고 있다는 말은 했었지만...그것만 가지고 는...벌써 300년 전 이야기니까 말야" 난 침울하게 말했고 나를 포함한 셋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 때 컨테이너의 문이 벌컥 열렸다. -이보게들! 모두들 고개를 돌리고는 깜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 "존 캐슬!" 문을 박차고 들어온 자는 존 캐슬, 그였다. 나는 그에게 달려들어 볼 것 없이 주먹부터 날렸다. "이 빌어먹을 개자식아! 여기가 어디라고 나타났냐!" 뻐억-! 정통으로 꽂혔다! 나는 숨을 씩씩대며 존을 노려보았다. 막거나 피 할 수 있었을 텐데도 존은 내 주먹을 맞았다. 아마도 맞아 주는 듯 했다. 맞을 때 터졌는지, 존의 입술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손으로 피를 천천히 닦아 내더니 말했다. -미안하게 됐소. "미안하다면 다냐!" 나는 씩씩거리며 그를 다시 한 번 걷어차려 했지만 청도가 재빨리 나를 말렸다. "야, 야! 잠깐 기다려! 이 쪽 이야기를 우선 들어보자고!" "놔! 듣긴 뭘 들어! 이런 놈은 아주 그냥 뼈도 못 추리게 해 버려야 해!" 나는 바둥대며 청도의 손을 뿌리쳤다. 우리는 그 뒤로도 한참을 엉켜서 우당탕거렸다. 존은 우리가 잠잠해질 때까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 다. 잠시 후, 나는 지쳐서 포기하고 주저앉아 버렸고, 청도는 그제야 내 몸 에서 손을 뗐다. -다시 한 번 사과하오. 미안하게 됐소. "가람아, 저 녀석에게 이제 와서 사과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냐고 전해 줘" 나는 이를 갈며 존을 노려보았다. -이제 와서 사과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는가. 존은 가람이에게 고개를 돌리더니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그렇소. 나의 실수로 벌어진 일, 어떻게 해서도 다시 책임질 수는 없는 노릇이오.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사과를 하고 싶소. "사과를 하고 싶다면 요령이가 있는 곳이나 어서 알아내라고 전해!" -사과를 하고 싶으면 요령이가 있는 곳이나 알려 주시지. -카르텔 말이오? 내가 지금 하려는 게 그 이야기요.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지금 하려는 게 요령이의 소재에 관한 이야기 라고? 존 캐슬은 깊은 관심을 보이는 내 모습을 흥미로운 듯 바라보다 말 했다. -카르텔은 퀴에르가 납치해갔소. "역시 그랬어..." 나는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젠장, 그 악마 같은 여자. 정말 지 독하군. 돌아간지 얼마나 지났다고? -그녀는 지금 이 나라에 있소. 처음엔 낭트의 마녀협회 본 기지를 의심했 지만, 내 정보통에 따르면 그녀는 그 곳에 온 적이 없다더군. 그렇다면 그 녀가 있을 곳이 어디겠소? 나는 마녀협회 한국 지부를 의심해 봤소. 아무 리 생각해도 성질 급한 퀴에르가 한국에서 카르텔을 찾아내자마자 바로 의 식을 지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오. 예상은 맞아 떨어졌소. 나는 한국 지부로 찾아갔었고, 그 곳에서 퀴에르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소. 그리 고 카르텔의 존재도 말이오. 그래서 당신들을 찾아 온 것이오. ...의식이 얼 마 남지 않았소.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카르텔을 구해 와야 하오. 오늘 밤, 우리는 퀴에르가 있는 한국 지부를 치고 카르텔을 구해낼 것이오. 우리 와 함께 가겠소?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벌떡 일어섰다. "좋다고 해!" -그럴 줄 알았소. 존은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섰다. 밖에선 잭슨과 루나, 그리고 제임스 스나이퍼가 그믐 달의 어둠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요령이가 떠난 지 딱 보름째 되는 날이다. 보름 전 이 날, 보름달 속에서 요령이가 떠났었지. 난 가람이에게 물었다. "가람아. 제임스 스나이퍼에게 상처는 다 나았느냐고 물어봐 줘" -제임스. 반갑군. 상처는 다 나았는가.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 후 걸음을 옮겼다. 전혀 불편해 보이는 곳 이 없는 동작이었다. 군데군데 붕대를 감긴 했지만 그래도 싸우는 데는 별 지장이 없나보군. 뭐, 상관없다. 한 명이라도 더 있는게 낫지 않겠어? 누구 던 힘을 보태줄 수 있다면 상관없어. -저 앞에 차를 세워뒀소. 따라 오시오. 존은 말없이 걸음을 옮겼고 우리는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다. "가람아, 존에게 전해 줘" "......무엇을?" "만약 요령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어떻게 해서든 존을 죽이겠다고 전 해 줘" 끼익. 달빛을 받으며 존의 승합차가 멈춰 섰다. 이름 모를 사무실이 몇 개 있는 허름한 5층 빌딩 앞이었다. 밤이 깊어서인지 지나다니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내리시오. 달깍. 부드러운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우리는 모두 차에서 내렸다. "마녀 협회의 지부라는 게 이런 허름한 곳에 있다니. 의외인데? 더구나 사무실이 이렇게 밀집된 곳이라니. 마녀 협회 지부라는 곳이 말 그대로 마 녀 협회의 한국 쪽 사무를 보는 장소인가?" 가람이는 내 말을 그대로 옮겨서 존 캐슬에게 전했다. 그리고 존 캐슬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저것들은 모두 위장에 불과하오. 진짜 마녀협회는 지하 최하층에 있지. 지하 몇 층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소만... "청도, 다리는 괜찮아?" 내 말에 청도는 엄지손가락을 올렸다. "내 걱정하지 말고 네 앞가림이나 잘 하셔" 청도의 말에 나는 왼손에 세 발 까마귀의 패를, 오른손에 '나의 칼'을 꺼 내 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의 뒤를 이어 잭슨, 루나, 그리고 제임스가 따라서 내렸다. 제임스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저 녀석, 자꾸 신경 쓰이는데. 제임스는 가람이를 보 더니 천천히 그의 등뒤로 다가와서 가람이의 어깨를 짚었다. -뭐지. -사과입니다. 그 때는 미안했습니다. 너무 화가 나서... 많이 다치지는 않 으셨습니까? -그 당시는 많이 다쳤었지. 지금은 괜찮다. -다시 한 번 사과 드립니다. 그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잊었다. 사과를 하다니, 저 녀석도 생각 외로 괜찮은 녀석인 걸. 존 캐슬은 건물의 문으로 다가갔다. 문에는 셔터가 내려가 있는데...하지만 존은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터엉! 존은 묵묵히 걸음을 멈추지 않고 옮겼다. 셔터는 이미 산산이 부서진 채 일그러져 천장에 닿아 있었다. 우리도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이런 건물이 다 그렇듯이 문에는 1층으로 들어가는 입구와 위로 가는 계단, 그리고 아 래로 가는 계단이 있었다. -역시. 퀴에르의 기운이 지하에서 느껴지오. 카르텔의 기운도...갑시다. 존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 지하로 가는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계 단 앞에는 철창으로 만들어진 문이 놓여 있었지만, -빠직! 철창 문은 순식간에 일그러지며 열렸다. 지하 1층에 도착한 우리. 존 캐슬 은 다시 잠긴 지하 1층의 문을 부수어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은 불빛 하나도 없이 칠흑같이 어두웠다. "윌-오-위스프" 파앗! 잭슨의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그의 귀걸이에서 빛이 나면서 허공에 몇 개의 빛덩이가 떠올라서 지하실 안을 은은하게 비추었다. 지하실 안은 온갖 쓰레기들과 속이 빈 상자 몇 개, 그리고 빗자루와 물통 등이 놓여 있 고 썩은 물도 좀 고인, 말 그대로 '그냥 지하실'이었다. -갑시다. "뭐야? 아무 것도 없잖아?" 내 불신감에 찬 표정을 본 존 캐슬은 해명하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지하 1층은 속임수요. 텅 빈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수작이지. "하지만 지하로 내려가는 문이 없는데?" 가람이는 내 말을 그대로 전했다. 그리고 존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은 숨겨져 있을 것이오. 당연한 소리지만. "그럼 어떻게 2층으로 갈 수가 있다는 말이지?" 존은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아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내려갈 수 있냐고 묻는 듯 하군. 이렇게 하면 되오. -꽝! 나직한 소음과 함께 바닥에 구멍이 뻥 뚫리며 존 캐슬이 구멍 속으로 순 식간에 사라졌다. "뭐야!" 깜짝 놀란 나는 놀라서 구멍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 저런 무모한 인 간... 그런데 존 캐슬의 말대로 구멍 속에서는 불빛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불을 켜 놓았다는 증거! -내려오시오. 우리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군. 우리는 재빨리 구멍을 통해 한 명씩 2층으로 내려갔다. 청도와 잭슨, 그리 고 제임스와 가람이는 날렵하게 뛰어 내렸지만 나와 루나는 뛰어 내리지 못하고 허둥대서 각각 가람이와 존이 받아 주어야 했다. 어쨌든 2층으로 내려온 나는 고개를 들었다. 유천, 백태청, 백화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반갑군. 유천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나도 반갑지 않아! 너희들이 왜 여기에 있지? -너희들이 이리로 올 것 같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내 예상이 맞았군. S.K.O.P 녀석들이 올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존은 고개를 들어 말했다. -비키시오. -그럴 순 없다. 유천은 불타는 듯한 눈빛으로 말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시오. 비키시오. -두 번 대답하지 않겠다. 그럴 순 없다. 갑자기 유천이 백태청과 백화련을 바라보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그리고 백태청과 백화련은 무표정한 얼굴로 기합을 가했다. "타핫!" "하압!" 누런 기운과 푸른 기운이 불꽃처럼 솟아오르며 무서운 진동이 방을 울렸 다. 저 녀석들, 처음부터 전력을 다 하려는 속셈인가! -콰앙! 백태청의 발 밑의 땅이 꺼져 들어갔다. 백태청의 얼굴은 무섭도록 일그러 져 있었다. "이야아아압!" "흐아아아아!" 이윽고 둘의 기합이 끝났다. 둘의 몸 주위에서 불타 오르던 기의 불꽃들 이 천천히 몸 안쪽으로 갈무리되었다. 그리고 백태청과 백화련은 무서운 눈빛으로 존 캐슬과 우리들을 쏘아보았다. 드득, 드드득. 그들의 몸 주위에 서 흘러나오는 진동은 그들의 힘이 예사로운 것이 아님을 짐작케 했다. 과 연, 반신과 합신을 했다더니. 요령이와 가람이는 저런 녀석들을 상대로 싸 웠다는 것인가? 하지만 존은 전혀 긴장되지 않는 듯, 주머니에서 손조차 빼지 않았다. -시간이 없소. 마지막으로 말하겠소. 길을 여시오. -싫다. 유천이 마지막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존은 씁쓸한 얼굴로 주머니에서 손 을 빼 양쪽으로 뻗으며 말했다. -하는 수 없군. -쾅! "크악!" "꺄악!" 순간적으로 존의 몸에서 엄청난 진동이 느껴지며 백태청과 백화련이 목을 감싸쥔 채 날아가 각각 왼쪽과 오른쪽 벽에 처박혔다. 무섭다! 백태청과 백 화련은 내력에서 요령이와 가람이를 훨씬 상회하는데도 불구하고 존의 손 짓 하나만으로 벽에 박혀서 옴짝달싹 못 하고 있다. 그 말은, 존이 마음만 먹었으면 저번 싸움에서 요령이와 가람이를 저렇게 만들어 버릴 수 있었다 는 뜻이다. 보름 전의 싸움에서 계속 '봐주고 있다. 나를 믿어 달라'라던 존 캐슬의 말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존 캐슬은 차가운 눈빛으로 유천을 지나 앞으로 걸어 나갔다. 유천은 미 동조자 하지 않고 단지 눈만을 굴려 존을 노려보았다. 그 눈빛에는 증오가 가득 담겨 있었다. 문 앞에 이른 존은 손을 다시 거두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벽에 처박혀 서 버둥대던 백태청과 백화련이 그제야 벽에서 미끄러지듯 흘러내려 땅에 주저앉았다. "켁, 켁! 콜록콜록..." "콜록, 콜록!" 숨이 막혔었나보다. 백태청과 백화련은 격렬한 기침을 해대며 가슴을 두 드렸다. 존 캐슬은 그대로 2층 지하실의 문고리를 잡았다. -펑! 문에서 스파크가 튀며 연기가 치솟았다. -문에 주술을 걸어 놓으면 내가 털끝 하나 다칠 줄 알았나보지? 존은 싸늘하게 말하며 문을 열었다. 벌컥. 문은 복도와 연결되어 있었다. 존 캐슬이 막 문 밖으로 발을 내딛으려는 순간, -번쩍! 누런 기운 한 줄기와 번개 한 줄기가 그의 등을 향해 날아들었다. -끈질기군. 존 캐슬은 태연히 복도로 발걸음을 옮겼다. 번개와 누런 기운이 그의 몸 바로 앞까지 날아왔다. 순간, 그의 몸 주위의 공간이 일렁였다. 콰앙! 번개 와 누런 기운이 순식간에 허공에 스러져 버렸다. 존은 돌아보지도 않고 기 합을 내질렀다. "타핫! -쾅! 백태청과 백화련, 그리고 유천이 뒤로 날아서 벽에 처박혔다. 콰앙! 존 캐 슬은 다시 한번 기합을 질렀다. "합!" -꾸웅... 작은 진동음과 함께 방의 천장에 금이 가더니, 잠시 후 흔들거리며 천장 이 무너져 내렸다. 쾅! 콰앙! 잠시 요란한 붕괴음이 들리고 회먼지가 뿌옇 게 올랐다. 잠시 후, 우리 앞에는 돌벽만이 있었다. -그들은 돌벽 너머에 있소. 이제 우리를 쫓아오기는 힘들 것이오.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봉쇄된 방과 뻥 뚫린 천장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다행히 천장 위쪽으로 지하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리로 나갈 수 있 겠군. 다행이다. 존이 내 불안한 마음을 눈치챈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시오. 갇힐 일은 없소. 긴 복도를 따라 달리다 보니 문이 하나 나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번 엔 김혜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가운 걸? 이게 얼마만이야?" 김혜진이 화사하게 웃으며 양손을 들어올렸다. 화륵! 불꽃이 거세게 타올 랐다. "하지만 여기까지야. 더 이상은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어" 존은 우습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무모하다는 것은 당신이 더 잘 알고 있겠지. -잘 모르겠는걸?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끌기 위해서 일부러 널 아까 그 사람과는 따로 배 치해 놓았군. 길을 터. -싫어. 김혜진은 혀를 내밀었다. 그녀의 양손에 이글거리는 둘러싼 불길이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그리고 존은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김혜진을 노려보았다. -퍼엉! 그녀의 손에 맺혀 있던 두 개의 불꽃이 순식간에 스러져 버렸다. "으악!" 김혜진은 깜짝 놀랐는지 고함을 빽 질렀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등 뒤 에서 어느 순간에 다가갔는지 가람이가 붕 떠오르며 혜진의 뒷목을 후려쳤 다. 뻑! "윽!" 혜진은 짧은 비명소리와 함께 너무도 허무하게 쓰러져 버렸다. 향년 2X세 의 일이었다...가 아니라. "죽였냐?" 내 말에 가람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기절만 시켰다" 그럼 그렇지. 난 칭찬의 뜻으로 가람이의 머리를 헤집었다. "잘 했어" 존은 다음 문을 열었다. -쉬익! 사방에서 일곱 개의 불꽃들이 동시에 존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퍼엉! 하지만 그것들은 존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터져 버렸다. 우리는 존을 따라 재빨리 방으로 들어섰다. 방안에는 늙고 추하게 생긴, 로브를 두른 일 곱 명의 마녀들이 지팡이를 들고 거친 숨을 내뱉으며 우리를 둘러싼 채 무 어라 수군대고 있었다. -이번에는 일곱 명이오. 죽인다면 시간이 훨씬 절약되겠지만... 죽이는 것 보다 기절시키는 것은 훨씬 어렵소. 시간이 좀 걸릴 지도 모르겠소. 어떻게 하는 게 좋겠소? "살려두라고 전해 줘" 나는 짧게 대답했다. -살리는 게 좋겠다. 가람이의 말에 존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잭슨, 루나, 제임스!" "예스, 써!" 잭스, 루나, 그리고 제임스는 각자 반지를 낀 손과 채찍, 그리고 봉을 점 검하며 대답했다. 그리고 존은 어깨 너머로 엄지손가락을 넘기며 다음 문 으로 달렸다. 쾅! 문이 튕겨져 날아갔다. -어서 나를 따라 오시오. 잭슨과 루나, 그리고 제임스가 우리가 지나갈 수 있는 시간을 벌 것이오. 존의 말에 우리는 황급히 그의 뒤를 쫓았다. 잭슨과 루나, 제임스가 동시 에 소리치며 각각 다른 상대를 향해 뛰어드는 모습이 보였다. 복도를 계속 달리는 동안에도 폭음과 고함, 비명 소리가 어지러이 들려 왔다. 난전을 벌 이는 모양이군. 난 S.K.O.P의 기사단들이 무사하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심지어 제임스까지도 말이다. 다음 문을 여는 순간, "꾸아아악!" 시커먼 것이 튀어나와서 우리를 덮쳤다. -펑! 그것은 존에게로 달려들다 저절로 불이 붙어서 검은 액체를 줄줄 흘리며 쓰러졌다. 노린내를 내며 타오르는 그것은 사람의 형상이었다. "사, 사람?" 내가 숨이 막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존은 내 말투에서 내가 무엇을 생각 하는지를 눈치챈 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오. 저건 좀비요. 움직이는 시체지. 보잘 것 없는 녀석이니 겁먹지 마시오. 하지만 문 너머 방 안쪽을 본 순간, 나는 겁을 먹지 않을 수 없었다. 수 백 마리의 좀비가 서로 엉켜서 꿈틀대고 있었던 것이다. 좀비들은 서로를 짓뭉개기도 하고 타고 오르기도 하면서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천장까 지 닿을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존은 인상을 찌푸렸다. -젠장. 어마어마한 수로군. 내 가까이 붙으시오. 존의 말에 우리는 존에게 바짝 붙었다. 나와 가람이, 그리고 청도가 존의 옆에 서자, 존은 기합과 함께 몸 주위에 마력장을 둘렀다. "합!" -우웅... -따라오시오. 내 옆에서 절대 떨어지지 마시오. 순백으로 빛나는 마력장을 둘러친 존은 그대로 앞으로 휘적휘적 걸어 나 갔다. 좀비들이 우리를 발견하고 소리를 지르며 덤벼들었다. "케에에엑!" "크아아아!" 하지만 좀비들이 마력장을 아무리 후려쳐대도 마력장은 끄떡없었다. 아니, 오히려 마력장을 친 좀비들의 손이나 발이 폭발하듯 터져 버렸다. -펑! 펑! 존은 빠른 걸음으로 좀비들 속을 헤치고 지나갔다. 방은 좀비들이 뒤엉켜 작은 산을 이루고 있었다. 펑! 펑! 폭음과 함께 좀비들이 온 몸으로 육탄공 격을 해대다 터져 나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내장과 시커멓게 썩은 피 가 주위로 튀는 모습. 역겨웠다. 그렇게 우리는 좀비들의 산 속에 터널을 뚫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벌컥! 문을 열자마자 우리는 재빨리 밖으로 빠져나간 뒤 문을 잠가 버렸다. 안 에서 탕, 탕! 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존은 고개를 저으며 문에 손을 슬쩍 대었다. -파앗! 문이 빛나며 안에서 괴성과 폭음이 들려왔다. -펑! -끼에에엑! -이걸로 한동안은 조용할 것이오. 존은 뒤로 돌아서서 다시 뛰었다. 우리도 그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가람아, 무슨 지하공간이 이렇게 큰 건지 한 번 물어봐" -무슨 지하가 이렇게 큽니까?" -나도 잘 모르겠소. 존의 짧은 대답. 우리는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다물었다. 존은 말을 이었 다. -단지 내 생각일 뿐이지만, 아마 이 공간은 건물 옆의 도로로 이어져서 쭉 뻗은 것 같소. 이윽고 우리 눈에 다음 문이 보였다. 역시 평범한 문이었다. 천천히 문을 열었다. 그런데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는 문이 아무런 저항 없이 열렸다. 우 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문 안쪽으로 들어섰다. -기다리고 있었다. 방 한가운데로 들어서자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한 해골이 앉아 있었다. 서, 설마 저 해골이 우리에게 말을 한 것인가...왠지 기분이 섬뜩해진다! 해골은 앞에 놓여 있는, 역시 푸르스름하게 빛나고 있는 검을 뽑아 들었 다. 잔뜩 녹이 슨 검이었다. -나와 싸우자. 존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우린 시간이 없소. 길을 비켜 주시오. -싸워야 한다. "워!" 방 전체를 울리는 해골의 괴상한 기합. 해골은 순식간에 검을 얼굴 옆에 똑바로 세우고 존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느 새 존의 눈 바로 앞까지 와 있 는 해골검사! 존은 이를 악물며 무시무시한 속도의 출검술로 자신의 거대 한 검을 뽑았다. -째-앵! 소름끼칠 정도로 높은 두 검의 충돌음이 들려왔다. 해골검사는 감탄한 듯 푸르게 빛나는 눈을 더욱 이글이글 불태우며 이빨을 딱딱 부딪혔다. -좋은 검. 하지만 불합리하게 큰 검. 해골검사가 다시 한 번 검을 빼더니 연속적으로 존의 왼쪽 목과 오른쪽 옆구리, 그리고 왼쪽 겨드랑이를 삼각형을 그리며 베어 들어갔다. 존은 비 틀대며 뒤로 물러서다 자신의 칼로 해골검사의 검을 모조리 막아낸 후 자 신의 검을 찔렀다. -카카각! 존의 검은 해골검사의 녹슨 도에 방향이 틀려 하늘로 치솟았다. -팅! 해골검사는 그대로 자신의 검을 튕겨 거두며 똑바로 존의 배로 검을 찔렀 다. -재밌는 승부였다. 죽어라. -카앙! 존은 식은땀을 흘리며 칼을 재빨리 휘둘러 간신히 해골검사의 찌르기를 쳐내었다. 하지만 해골검사는 개의치 않는 듯 다시 검을 살짝 들어 현란하 게 존을 찔러 들어갔다. -젠장! 이기려면 시간 좀 걸리겠군! 그런데 해골검사의 검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갑자기 끼여든 목검에 의해 서 막힌 것이다. 청도였다. 청도가 해골검사의 검을 자신의 목검으로 막고 있었다. "가람아, 영준아, 뭐해! 어서 존을 데리고 가!" 청도는 소리치고 자신과 검을 부딪힌 해골검사를 노려보았다. 해골검사 역시 뻥 뚫린 불타는 눈에서 푸른 불꽃을 내뿜으며 청도를 노려보았다. -우우...이번 상대는 너인가. "그렇다. 덤벼" -애송이...너와의 싸움은 재미가 없을 것 같다. "그건 겪어보면 알겠지!" 청도는 무서운 기세로 검을 현란하게 찔러 들어갔다. 그리고 해골검사는 크게 당황한 듯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채채채채챙! 처릉! 처르릉! 검 의 부딪힘이 속주를 하는 피아노의 연주처럼 경쾌하고 빠르게 들려왔다. -크, 크윽! 애송이가 아니구나! "내가 애송이면 애송이에게 밀리는 당신은 뭐야!" 그 말에 해골검사는 크게 노한 듯 검을 고쳐 잡더니 마구 치고 들어갔다. -이 놈이 감히! 건방진 놈이 버르장머리가 하늘을 찌르는구나! -카아앙! 카아앙! 카아앙! 청도는 부드럽게 해골검사의 검을 모조리 받아내었다. 존은 재빨리 검을 거두더니 손바닥을 내밀었다. -해골검사. 진검승부도 좋겠지만... 당신은 좀 소멸되어 줘야겠소. -펑! 존의 손에서 백색의 기운이 뿜어져 날아가더니 정확히 해골검사의 머리를 바숴 버렸다. 빠지직! 그와 동시에 해골의 몸체에서 푸른빛이 사라지며 검 운동이 멈추었다. 존은 그래도 의심스러운지 손가락을 튕기며 무어라 중얼 거렸다. -빠직! 뼈들이 산산조각 나며 부서져 내렸다. 그리고 녹슨 칼이 불에 휩싸여 타 들어갔다. 존은 그제서야 안심이 되는지 방을 나섰다. -퀴에르의 기운이 가까이에서 느껴지오. 이제 다음 방쯤에 퀴에르가 있을 듯 하오. 나는 손에 쥔 세 발 까마귀의 패와 치우한님의 칼을 다시 한 번 꼭 잡았 다. 다음 방에, 다음 방에 퀴에르가 있다. 그리고 요령이가... 한참을 달리자 다음 문이 나왔다. 평범한 문. 그런데 그 문에는 검붉은 색 의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검붉은 색의, 마치 피로 그린 것 같은 마법진. 왠지 찜찜한데? 존은 문에 손을 대고 기합을 가하며 밀었다. -텅! 하지만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퀴에르가 있는 곳이 이 곳이 맞나 보오. 존은 긴장한 표정으로 양손을 문 위에 얹고 무어라 주문을 외웠다. -꽈-앙! 무시무시한 굉음과 함께 문뿐만 아니라 벽까지 모조리 박살이 나며 무너 져 버렸다. -콰르릉! 우수수... 회먼지가 떨어져 눈앞을 회색으로 뿌옇게 가렸다. 그 안으로 몇 개의 어 른거리는 실루엣이 보였다. 안에 무엇인가 있기는 있군! 우리는 손으로 회 먼지를 헤치며 천천히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방은 마치 지하 1층과 2층을 합친 것처럼 넓었다. 방의 조명은 핏빛을 떠 올리게 하는 자줏빛이었는데, 열 명은 넘을 것 같은 마녀들이 앉아서 주문 을 외우듯 무어라고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바닥에는 역시 붉은 색으로 마구 휘갈긴 듯한, 알아보지 못할 문자들과 문양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우리가 서 있는 문의 맞은편에 커다란 연단이 있었다. 연단 위에 는 새까만 잉크로 그려진, 오망성이 그려져 있고 알 수 없는 문자가 가득 쓰여져 있는 큼직한 마법진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선 퀴에르가 손을 천 천히, 하지만 끊임없이 움직이며 쉴 새없이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마법진 에서는 자주색 빛이 계속해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방을 자줏빛으로 물 들이고 있는 것이 저 마법진이었군. 마법진에서 나오는 빛 때문에 퀴에르 의 얼굴은 마치 피에로처럼 과장되어 보였다. 마법진 안에는, 아스모데우스 가 있었다. 존이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퀴에르! 설마 지금 외우고 있는 주문이...! 퀴에르는 참 즐겁다는 듯 만면에 환한 미소를 띄고 있었다. 너무나도 천 진한 미소였다. -그래. 악마 강림 주문이야. 이제 거의 다 끝났지. 방 안의 진동이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스모데우스의 모습 이 예전의 그림자 같은 모습에 비해 훨씬 뚜렷해진 모습이다. 날개도 예전 의 추상적인 막의 모습이 아닌 흐릿하게 발톱까지 보였고, 단지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빛처럼만 보이던 눈도 붉은 빛 눈동자로 바뀌어 있었으며, 그 나마도 형체밖에 없던 귀, 코, 입도 온전한 모양새를 띄고 있었다. 몸에는 근육의 선이 나름대로 선명하게 그어져 있었다. 허리 아래쪽은 흐릿했지만, 그래도 다리와 꼬리의 형상이 대략 나타나 있었다. 아스모데우스는 '혼돈의 왕'이라는 별명답게 끊임없이 몸 주위에서 꿈틀거리는 검은 기운을 울컥울 컥 뿜어내고 있었다. 퀴에르는 땀에 흠뻑 젖은 앞머리칼을 귀 뒤로 젖히며 우리에게 말했다. -그래도 와 줘서 고마워. 관객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뭐, 올 줄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좀 서둘러서 왔으면 과정의 처음부터 볼 수... -쩌어어엉! 퀴에르가 미처 말을 마치기도 전에 엄청난 충돌음과 함께 존 캐슬이 뒤로 튕겨져 날아가서 바닥에 처박혔다. 콰당! 존은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말했 다. -뭐...뭐야, 빌어먹을...다가갈 수가 없잖아! -멍청이. 아스모데우스의 거의 완성된 모습을 보고도 모르겠어? 이 방은 지금 아스모데우스의 공간이나 마찬가지야. 그의 힘으로 충만해 있다고. 한 마디로, 이 방 전체가 그의 마력장에 둘러싸여 있어. 따라서 넌 이 안으로 들어올 수 없어. 아스모데우스가 너를 거부하고 있으니까. 들어오려면 지금 의 아스모데우스보다 더욱 강한 힘으로 억지로 밀고 들어오는 수밖에. 물 론 그렇게 멧돼지처럼 달려들다간 괜히 다치기만 하겠지? 존은 분노 어린 표정으로 검을 치켜들었다. 그의 검에서 흰빛의 기운이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엄청난 기세로 이글거리며 빛났다. 그는 그대로 그 검을 들어 허공을 후려쳐 대었다. 꽈앙! 꽈아앙! 건물이 무너질 듯 우르릉 거렸다. 하지만 존은 한 발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뭐, 뭐야... 이거! 어떻 게 되어 가는 거야! 존은 절망적인 표정이 되어 비틀비틀 물러섰다. "갓..." 마, 맙소사... 이거 어떻게 되어 가는 거야? 그러니까, 지금 퀴에르 저 여 자를 말리지 못한단 말이야? 그게 말이 돼? 나는 존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야 이 개자식아! 지금 뭐야! 어? 뭐하는 거냐고! 어서 앞장 서! 앞장서서 들어가라고!" 하지만 존은 우울한 눈빛으로 고개를 떨굴 뿐이었다. "쳇!" 나는 존의 멱살을 집어던지듯 놓고 퀴에르를 향해 뛰어 갔다. 하지만 과 연 무엇인가 단단한 벽처럼 내 몸을 막아서더니 무형의 힘으로 나를 튕겨 내었다. -텅! "크윽!" 나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날았다가 볼썽사납게 땅에 처박혔다. 빌어먹을.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땅에 부딪히면서 터졌나 보다. 나는 팔을 들어 피를 슥슥 닦았다. 퀴에르는 날카롭게 웃었다. "오호호호호-!" 귀를 찢는 듯한 웃음!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귀를 막았다. 웃음소리가 아 니라 짐승의 울음소리 같다! 퀴에르는 그렇게 한참을 웃더니 존에게 물었 다. -존 캐슬, 어때. 힘으로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느끼니까 어때? 절망감이 마구 밀려오지? 네 절망감이 느껴져. 그게 나를 기쁘게 해. 호호호호! 그리 고 너희 셋. 너희들도 마찬가지로 비탄해하고 있고, 절망감에 휩싸여 있고, 두려워하고 있군. 기뻐. 그런 너희들의 마음을 먹는 게 기뻐. 계속 그렇게 슬퍼하고 괴로워하렴. "야! 너! 얼른 요령이를 돌려줘!" 나는 이를 갈며 퀴에르에게 버럭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퀴에르는 내가 소리를 지르면 지를수록 생글생글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분노 역시 내게는 큰 힘이 되지. 특히 너의 분노와 절망감, 그리고 비탄 은 정말 크구나. 정말로 나를 기분 좋게 해... 퀴에르는 쾌감을 즐기듯 턱을 들며 눈을 내리깔았다. 퀴에르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저런 미치광이 변태 마녀를 봤나! "야! 요령이를 내 놓으라니까!" -요령이라는 말은 알아들을 수 있겠군. 그건 카르텔을 가리키는 말이지? 걱정 마, 지금 보여줄 테니. 카르텔을 보여준 뒤 너희의 감정에 의해 내가 느낄 쾌감은 도대체 어느 정도일까? 정말 기대되네. 퀴에르는 말을 마치고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마녀 중 한 명이 일어나 검은 색 천으로 뒤덮인 작은 상자를 하나 가져왔다. 퀴에르는 상자를 받아 들어 천천히 천을 걷었다. 그것은 철장으로 만들어진 작은 우리였다. 새까만 빛의 고양이가 들어 있는. "요령아!" 나는 목이 찢어져라 소리쳤다. 그리고 퀴에르는 그런 내 모습에 미소지으 며 요령이에게 손을 뻗었다. 요령이는 우리 안에서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어떻게 해서든 퀴에르의 손길을 피하려 했지만 그 좁은 우리 안에서 자신 에게 다가오는 퀴에르의 손을 피하긴 불가능했다. 결국 요령이는 퀴에르에 게 잡혀 버둥대면서 우리에서 나왔다. -자, 어때? 네가 찾던 요령이가 맞니? "어서 풀어 줘!" 나는 고함을 버럭 질렀다. 퀴에르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저런, 저런. 그렇게 화를 벌컥 벌컥 내면 몸에 해롭지 않을까? 뭐, 나와 는 상관이 없는 일이긴 하지만 말야...하긴, 어차피 너도 좀 이따 죽을 거니 까. 화라도 실컷 내 봐야지. 안 그래? "으으으..." 나는 분에 못 이겨 부들부들 떨면서 퀴에르를 노려보았다. 퀴에르의 요염 한 미소가 우리를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자, 이제 이 카르텔을 마법진 안으로 던져 넣으면 모든 주술이 끝난다. 카르텔이 죽으면서 풀려 나오는 암흑의 기운이 아스모데우스를 완전하게 만들어 줄 거야. 카르텔, 불쌍하게 떨고 있구나. 하지만 카르텔. 아스모데우 스 님을 위해 희생하는 거니까 오히려 자신의 죽음을 영광으로 생각해야 지? -아...안 돼... 요령이의 힘없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요령아!" 나는 목청껏 요령이를 불렀다. 그리고 요령이는 힘없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왔구나...영준아. 그리고 모두들. 존 씨도 왔네. "뭐 해, 어서 도망쳐!" 요령이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왜 왔어. 여기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최소한 죽는 시간은 늦춰졌을 텐 데... 요령이의 힘없는 말. 요령이가 저렇게 자신 없어 한 적이 있었던가? -지금이라도...어서...도망쳐... 요령이는 체념한 듯 눈을 감으며 말했다. "야! 야! 정신 똑바로 차려! 지금 뭐 하는 거야!" 하지만 요령이는 고개를 저었다. -난...끝났어. 그리고 퀴에르는 요령이를 금방이라도 마법진 안으로 집어던질 듯 높이 들어올리며 말했다. -아니, 그렇지 않아, 카르텔. 너는 이제 아스모데우스님과 함께 영원히 사 는 거야. 마지막으로 유언을 남길 시간을 주지. 어때? 이 언니 참 마음씨 곱지? 호호호! 퀴에르는 뭐가 그리 우스운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요령이는 씁쓸하 게 웃는 듯한 표정 -고양이의 모습이라 표정이 어설펐다-을 지으며 우리 를 바라보았다. 나는 세 발 까마귀의 패를 움켜쥐고 마구잡이로 힘을 뽑아 내었다. 마지 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보고 싶은 생각에서였다. 퍼벅, 퍼벅! 몸 안 에서 혈도들이 비명을 질렀지만 개의치 않았다.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도 다급한 마음에서였다. 요령이는 천천히 우리를 바라보았다. -죽는다. 세 발 까마귀의 말이 들렸다. "닥쳐!" -그러다 죽는다. "닥쳐, 닥쳐, 닥치라고! 지껄일 시간 있으면 힘이나 쏟아 부어 줘!" 나는 세 발 까마귀를 향해 마구 소리치며 강제로 세 발 까마귀의 패에서 있는 힘껏 힘을 뽑아 내었다. -...심기도 어지럽고 혈도는 들끓고 가슴속에는 암흑만이 가득 차 있다. 이 대로 가다간 자네는 십중팔구 주화입마에 빠지게 돼. "입 다물고 힘이나 보내!" -...무엇이 자네를 그렇게 절박하게 만드는지 모르겠군... "제발...제발 부탁이야...제발!" 나는 세 발 까마귀의 패에 대고 간절히 말하며 힘을 뽑아대었다. 조금씩 몸 속에서 뜨거운 것들이 이글이글 도는 것이 느껴졌다. 내 몸에서 무럭무 럭 기운이 올라왔다. 새까만 기운. 원래 내가 쓰는 기운은 세 발 까마귀의 색과 같은 주홍색인데? 하지만 그런 건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힘을 뽑았다. -...죽지 말게. 세 발 까마귀의 간절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알았으니까 힘이나 보내, 어서!" 요령이는 나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마음속으로 하는 말 이 아닌 입으로 직접 하는 말이었다. "그만 둬"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서!" -이를 악물게. "소용없어" "어서!" -흡! 꽈앙! 내 몸 속으로 엄청난 힘이 밀려들어오면서 온 몸의 혈이 들끓었다. 전자렌지 속에 들어온 기분이군! 온 몸의 뼈마디마다 비명을 질러대었다. "그러다...죽을 거야" "좀 더!" -자네 미쳤나? "미치지도 않았고 이 정도로 죽지도 않을 거고 병신도 안 될 거야! 어서!" 퀴에르는 모든 상황을 지켜보면서 얼굴 전체에 화사한 미소를 띄우고 있 었다. 이 모든 상황이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즐거운 모양이다. 퀴에르는 손 에 들린 요령이를 위협하듯 흔들었다. -호호...! 어서 유언을 하지 않으면 널 그냥 던진다. 어서 유언을 해! 요령이는 퀴에르를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다 우리를 향해 고개를 돌 렸다. "우선 존 씨..." "힘을 더 줘!" 꽝! 다시 한 번 힘이 온 몸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몸 전체에 서 검은 빛 기운이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한번 더!" 존 캐슬은 요령이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요령이는 존이 자신의 말 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는지 마음속으로 말했다. -세상은...끝나겠지? 존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쥔 주먹에서는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저었다. -신께서...도우실 거다. -신이 나도 도와주었으면 좋을 텐데...어쨌든 나를 마지막까지 도와주려 한 것, 고마워. 비록 나를 죽이려고 한 적도 있었지만, 이것으로 갚은 셈칠 게. 어쩌면 신께선 당신을 보내서 나와 이 세상을 도우려고 했는지도 모르 지. 실패한 선택이지만 말야. 쾅! 다시 한 번 힘이 밀려들었다. 온 몸의 핏줄이 불거지고 입에서 피맛이 났다. 가람이가 내 어깨를 흔들며 말했다. "주인! 그만해라! 죽는다!" "놔!" 퍼억! 난 신경질적으로 가람이를 떠밀었고 가람이는 휘청거리며 몇 미터 나 밀려나다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단지 뿌리치기만 했는데도 가람이가 저러다니, 내 손에 확실히 힘이 상당히 실려 있기는 한가보군! 하지만 가람 이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 번 나를 향해 다가왔다. "주인!" "말리지 마. 명령이다!" 나는 차갑게 말하고 다시 한 번 외쳤다. "힘을!" 쾅! 결국 내상을 버티지 못하고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 모습을 가 람이는 안타깝게 바라보았지만 명령이라는 내 말에 가람이는 나를 말리지 못했다. 존에 대한 요령이의 유언이 계속 이어졌다. -어쩌면 당신이 나를 데려가려 했을 때 당신을 따라가는 게 옳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하지만 후회는 안 해. 그 땐 정말 무서웠거든. 그럼 안녕. 살아남길 바랄게. 요령이는 쓸쓸하게 웃더니 청도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입을 열었다. "청도야" 그 때 청도는 가람이의 뒤를 이어 나를 말리고 있었다. "야! 임마! 이게 무슨 짓이야! 입에서 피를 토했잖아! 너 뭐 하는 거야 지 금, 임마!" "쿠욱...말리지 마...난 죽지...않..." 이제 말도 제대로 안 나온다. 오직 내게서 나오는 말은 이것 하나 뿐이었 다. "힘!" 쾅! 다시 한 번 세 발 까마귀의 패에서 힘이 솟아올라 내 몸 전체로 퍼졌 다. "쿨럭!" 나는 다시 한 번 피를 토하다 결국 주저앉았다. 입고 왔던 흰옷이 피에 물들어 시뻘겋게 젖어 있었다. 나는 부들부들 떨면서 세 발 까마귀의 패를 꼭 쥐었다. 고통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머릿속이 온통 깜깜했다. 몸이 말을 잘 듣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내 힘은 내가 생각해도 엄청나 다 싶을 정도로 모여 있었다. 단 한 번 힘을 모았을 때도 존의 두 손을 꺼 내들게 한 힘이다. 지금은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기운을 끌어 모았다 고! 이제 '나의 활'을 만들기만 하면...나는 천천히 손에 움켜쥔 치우한님의 칼에 힘을 가했다. 치우한님의 칼이 새카맣게 빛나며 활의 모양으로 변했 다. 응? 이것 역시 검은 색이네? 나의 활은 원래 흰색으로 빛나야 하는데? 하지만 이것 역시 내가 알 바가 아니다. 나는 그 상태로 다시 한 번 힘을 모으기 위해 몸을 움츠렸다. 몇 번만 더 힘을 모으고 쏜다. 성 "히...히..." "영준아!" 청도가 다시 한 번 소리치며 내 어깨를 붙들었다. "말리지...말라고!" 나는 청도를 가람이처럼 뿌리쳤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청도는 몇 미터 나 뒤로 날아서 벽에 부딪혔다. "쿨럭! 크악!" 요령이는 이 모든 것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청도를 향해 말했다. "청도야" 잠시 격렬한 기침을 하던 청도는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들어 청도를 바라 보았다. "넌 영준이와는 정말 잘 어울리는 친구 같아. 둘이라면 서로 도와가면서 언제까지고 멋진 친구로 지낼 수 있을 거야. 그래서 하는 말인데, 지금이라 도 영준이를 데리고 도망쳐. 살아남기를 바랄게. 이게 내 유언이야. 안녕. 행복하렴" 청도는 멍하니 요령이를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벽에 부딪힌 충격 때 문에 움직일 힘조차 모조리 빠진 듯 했다. 요령이는 다시 가람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가람아" 그리고 나를 말리지 못해 슬픈 얼굴을 하고 있던 가람이는 요령이를 바라 보았다. "...유언은 죽을 자들이 하는 말이다" "...역시 넌 변했어. 유언은 죽을 자들이 하는 말이라니... 그래도 대놓고 내 말을 막아 주었으면 더 기분이 좋았을 텐데 말야. 죽기 직전이니까 하 는 말인데, 쑥스럽지만 너라면 나와 정말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곤 했어. 영준이와 청도처럼 말야. 난 저 둘이 항상 부러웠거든. 넌 그런 생각을 한 적 혹시 없니?" "......" 가람이는 대답 대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쁜걸. 그리고 아쉽다. 살아남길 바랄게. 행복하게 살아. 안녕" 마지막으로 요령이는 세 발 까마귀에서 무리하게 힘을 받느라 바닥에 축 늘어진 채 검은 기운을 꿈틀꿈틀 뿜어내고 있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영준아. 너무 슬퍼하지 마. 고작 고양이 한 마리가 죽는 것뿐이잖아?" 나는 대답 대신 억지로 입을 벌려 다시 한 번 '힘'을 말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힘은 나오지 않았다. 젠장. 나는 요령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요령이는 말을 이었다. "영준아, 항상 고마웠어. 그리고...이것 역시 죽기 직전이니까 하는 말인 데..." 나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요령이와 눈을 마주쳤다. 요령이의 표정은 고양 이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간절해 보였다. 요령이는 죽는 마당에 뭐가 거리끼는지 말을 더듬고 있었다. "나...말인데...말이지..." "으...큭" 피가 입 속에서 다시 끓어올랐다. 피를 뱉으며 요령이를 바라보았다. "어쩌면...너를...좋아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마음 속이 캄캄해졌다. 요령이가 나를... 좋아했을지도 모른다고...? 맙소사, 생각도 못했어... 머릿속이 순간적으로 깨질 듯 아파 왔다. 그래. 나도야. 나도 그래. 하지만, 하지만, 넌 이제 죽을 거야. 나도 너를 좋아해. 죽으면 안 돼! 나는 이를 악물고 벌떡 일어났다.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온 몸에서 시 커먼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촤아아악-! 나는 고함을 질렀다. "크아아아악-!" 눈에서 눈물이 마구 흘렀지만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걸음을 옮겼다. 보이 지 않는 벽이 나를 가로막았다. 나는 주먹을 들었다. 새까만 불꽃에 휩싸인 주먹. 나는 주먹을 들어서 벽에 후려쳤다. 쾅, 쾅! 벽은 꿈쩍도 하지 않았 다. 하지만 나는 벽을 쉬지 않고 두들겨댔다. 나도, 나도 너를 좋아해! 좋아한다고! 뭐가 문제지? 응? 뭐가 문제야? 말은 목소리로 나오지 않고 단지 쉰 고함소리로만 새어나올 뿐이었다. 검 은 기운은 점점 더 칠흑같이 짙어졌다. 나는 눈을 돌렸다. 퀴에르. 웃고 있 다. 요령이를 죽이려고 하고 있지! 네가 지금 요령이를 죽이려 하고 있어! 네가 문제야! 눈에서 불꽃이 번쩍 튀었다. 마음속이 증오로 가득 찼다. 온 머리 속이 깜 깜한 암흑으로 둘러 쌓여 버렸다. 시야가 모두 검어지고, 마지막 한줄기 남 은 밝음 속에 퀴에르와 요령이, 그리고 아스모데우스가 있었다. 시야가 점점 어둠으로 좁아졌다. 나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서 외쳤다. "요령아아앗!" 쾅! 갑자기 마법진 안의 아스모데우스가 일어섰다. 마음속으로 내 마음과 같은 어둠이 들렸다. -저것이야말로 내가 원하던 어둠이다. 저 힘이야말로 내가 지상에 강림하 기 좋은 제물이다. 이성은 무너졌고 마음을 지키는 마지막 자아까지 부서 지고 있다. 마음을 암흑이 덮으면서 가지고 있는 힘도 모두 순수한 암흑의 힘으로 바뀌어 버렸다. 들어갈 수 있다. "나도...큭!" 퀴에르의 놀란 비명소리가 들렸다. "아니야! 당신이 들어갈 곳은 저기가 아니야! 나는 당신을 완전한 모습으 로 강림시켜 줄 거라고!" -저 곳에 혼돈이 있다. 아스모데우스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마법진 속에서 뛰쳐나와서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퀴에르는 놀라서 재빨리 마법진을 향해 요령이를 집어 던졌지 만, 아스모데우스는 이미 마법진에서 뛰쳐나와 나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고, 요령이는 마법진을 힘없이 통과해서 바닥에 부드럽게 착지했다. 나는 고함 처럼, 누구도 알아듣지 못할 소리로 외쳤다. "나도..너를...!" 콰아악! 해일 같은 어둠이 내게로 뛰쳐 들었다. 나는 말을 채 맺지 못하고 어둠 속에 파묻혀 쓰러져 버렸다. 혼돈이 내 마음속으로 물밀 듯이 밀고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난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다. 내 마음속이 이 미 혼돈이었기 때문이리라. "끄윽...크으윽..." 그런데 갑자기 아스모데우스가 처절한 고함을 지르면서 나에게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멈추었다. -크아아악! 누구냐! 정신을 집중했다. 바늘 같은 한 줄기 빛 속으로 희미한 고양이의 실루엣 이 보였다. 요령이다. 요령이가 내 마음속으로 들어오려는 아스모데우스의 발끝을 물어뜯고 있었다. 너무도 미비한 힘. 하지만 아스모데우스의 나에 대한 완벽한 잠식을 그 작은 요령이의 동작이 막아내고 있었다. -이 미천한 것이-! 아스모데우스가 흥분했는지 고래고래 비명을 지르며 돌아섰다. 썰물처럼 내 마음속에서 아스모데우스가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요령이를 죽이 려고 하나 보다! 안 돼, 안 돼! 나는 어떻게든 마음속에서 그를 조금이라도 붙잡아 두기 위해 애썼지만, 아스모데우스는 포효하며 완전히 내 마음속에 서 빠져나가 요령이를 걷어차 버렸다. -퍽! "캬아!" 요령이가 비명과 함께 벽에 처박히더니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지금이라도 마법진으로 돌아와, 아스모데우스! 어서! 퀴에르가 절박한 목소리로 외쳤지만 아스모데우스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아스모데우스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분노로 가득한 일갈을 내뱉었다. -이 버러지 같은 고양이놈! 너같이 미천한 금수가...감히 혼돈의 왕, 나 아 스모데우스의 발끝을 물어뜯...크아아악! 아스모데우스가 이번에는 진짜로 고통에 찬 비명을 내뱉었다. 뭐, 뭐야... 도대체...실낱같은 빛밖에는 보이질 않아...암흑으로 가득 찼어... 나는 눈을 억지로 뜨며 조금이라도 어둠을 쫓아내기 위해 애썻다. 아스모데우스의 등 에 백색으로 빛나는 두꺼운 칼이 박혀 있었다. 존 캐슬이었다. 그는 아스모 데우스가 순간적으로 정신이 흐트러져 마력장이 일그러진 틈을 노리고 그 의 등에 칼을 박아버린 것이다. 아스모데우스는 고통스러워 하며 어떻게든 칼을 빼내기 위해 몸을 이리 저리 흔들었다. 하지만 존 캐슬은 죽어라고 아스모데우스의 등에 매달렸다.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이 놈 드으으을! 이 놈 드으으을! 내 네놈들을 모조리 죽이리...끄아아아 악! 존 캐슬은 아스모데우스의 말을 끊으며 칼을 그어 내렸다. 부우욱! 아스모 데우스의 등이 크게 벌어지며 상처에서 검은 기운이 뭉클뭉클 뿜어져 나왔 다. -끄어...끄아아...끄아아아! 아스모데우스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지옥에서...돌아오는 날...네 놈들을...모조리 죽여주마... 퀴에르는 히스테리컬한 비명을 내질렀다. "꺄아아아아아아악!" -돌아와, 아스모데우스! -닥쳐라, 이 년. 돌아오면 나를 농락한 네 년도 사지를 찢어 죽여주지! 아스모데우스는 폭언을 내뱉고는 천천히 사라져갔다. 그리고 아스모데우 스가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던 퀴에르는 눈에서 불똥을 튀기며 이를 악물 더니 양 손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거대한 암흑의 구가 그녀의 손 위에 서 맺혔다. 퀴에르는 요령이를 보고 있었다. -다 너 때문이다, 카르텔! 네가 일을 모조리 망쳤어! 죽여 버리겠어! 순간, 나는 내가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랐다. 내가 잊고 있던 증오의 대상. 요령이를 괴롭힌 대상. 그리고 요령이를 죽이려 하는 대상. 지금 내 마음속을 암흑과 혼돈으로 가득 채운 대상. 내 눈 가득 퀴에르의 아름다운, 하지만 증오로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 들 어왔다. 나는 지체없이 몸을 날렸다. 아직까지 내 몸에 충만한 기운이 느껴 졌다. 내 몸을 부수며 고통과 바꾸어 얻은 힘이다. 아무 데나 쓸 수는 없 지! 나는 이를 악물었다. 내 온 몸을 가득 채운 검은 기운이 불타오르며 내 손끝으로 모였다. "우아아아아앗!" 퀴에르가 나에게로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서서히 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부릅뜬 놀란 눈이 내게 들어왔다. 그녀가 바라보고 있던 요령이의 모습이 내게 들어왔다. 나를 좋아한다고 말했었지. 어둠으로 뒤덮인 나의 시야 속에서, 아니, 나의 마음속에서 요령이의 마지 막 모습만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손을 휘둘렀다. 요란한 소음들이 들려왔고, 그 소음들이 점차 멀어지면서, 나의 정신도 또 한 점점 멀어져 갔다. 암흑. 마치, 요령이의 눈동자 같은. <고양이>CH 0. 꿈의 끝 '우아아앗!' 소리를 버럭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암흑이 나를 뒤덮는 꿈의 마지막 장면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너무도 생동감 넘치는, 긴 꿈이었다. "오늘도 주인의 상태는 그대로군" "...그래" 요령이와 가람이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는 것 같은데. "의사는 뭐라고 했지?" "매일 똑같은 말이지 뭐. 이 환자의 몸은 이미 완치되었어요. 뇌에 손상을 입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 정신은 돌아오지 않네요. 저도 잘 모 르겠어요. 떼떼떼, 따따따, 뚜뚜뚜" 요령이가 즐겨 하는 이죽거리기가 귀에 들렸다. 재밌다. "도대체...언제쯤이나 깨어날 수 있는 걸까...주인. 벌써 반년이 흘렀는데..." "걱정 마. 곧 깨어날 거야. 틀림없이" 요령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깨어난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문득 나는 내 주위가 온통 암흑으로 둘러싸인 것을 깨달았다. 주위를 둘 러보았지만 사방에 암흑뿐이었다. 이게 뭐지? 도대체 왜 이래? 청도가 요령이를 위로하듯 말했다. "그래. 영준이 이 녀석은 반드시 깨어날 거야. 이 놈이 이래봬도 삶에 대 한 집착 하나는 끝내주게 지독한 녀석이거든" "풋...그래. 네 말이 맞아. 삶에 대한 집착 하나는 정말 끝내주는 놈이지" 요령이의 말이 끝나자 무언가를 툭툭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뭘 치 는 거지? 잠시 후, 기분 나빠하는 가람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툭툭 쳐대면 주인이 깨어나서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알 게 뭐야. 식물인간이 뭘 알겠어. 하하!" 요령이는 유쾌하게 웃었지만 그 웃음은 왠지 쓸쓸했다. 뭐, 식물인간? 나 보고 식물인간이라고?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 들며 소리치려 했다. 하지만, 내 목소리는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내 손발 역시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 때 문을 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아, 한수야, 주희야!" 요령이의 반가운 소리. 한수와 주희가 왔나? "아, 주희 왔니?" "응, 청도 오빠. 주희 왔어. 나 맛있는 거 사 왔다-" "그래? 어디 보자. 와! 떡볶이네! 고마워!" 한수 저 녀석은 정말 죽어라고 주희부터 챙기는군. 근데 떡볶이라. 맛있겠 다... 잠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며 대화가 끊어졌다. 그리고 무언가를 먹는 듯한 쩝쩝거리는 소리와 함께 대화가 다시 이어졌다. "영준이 형은 좀 어때?" 요령이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휴...똑같지 뭐..." 요령이의 맥없는 대답에 모두의 말소리가 끊겼다. 잠시 조용한 쩝쩝 소리 만 이어졌다. "가끔씩은...이 녀석이 이렇게 영영 깨어나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고 더럭 겁이 나" 요령이가 못할 말을 한다는 듯 머뭇거리며 말했다. "하지만...끝까지 기다려 볼 거야. 난 믿어, 이 녀석을" "...그렇게 볼을 잡아당기면 주인이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알게 뭐야. 식물인간이 기분 나빠하던 말던" 계속해서 식물인간이라는 말이 귀에 거슬렸다. 식물인간. 식물인간. 그렇구나. 그날 이후로 나는 식물인간이 된 거구나. 나는 지금 막 잠에서 깬 줄 알았는데. 방금 전 까지 요령이와 가람이, 그 리고 모두의 꿈을 꾸고 있었는데... 마지막 싸움의 암흑 이후로 나는 식물인간이 되었나 보군... 하긴, 내가 그 때 좀 무리하긴 했었지. 방금 전의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났다. 마지막으로 나를 덮는 암흑. 요령이 를 만난 이후로부터 마지막 암흑이 나를 덮을 때까지의 긴 꿈을 꾸었다. 처음에 요령이가 공사장 쓰레기더미 속에서 처연하게 울던 소리가 기억났 다. 요령이가 사람으로 변할 때의 놀랐던 마음이 떠올랐다. 요령이와 자주 티격태격하며 항상 나를 주인이라고 부르던 가람이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청도를 처음 만났던 순간의 당황스러운 모습이 떠올랐다. 겉은 거칠지만 속마음은 착한 한수의 툭툭 던지던 막말이 떠올랐다. 툭하면 울음을 터뜨 리던 주희의 눈물이 떠올랐다. 유천, 백태청, 백화련, 존 캐슬, 잭슨, 루나, 제임스, 김혜진, 그리고 퀴에르. 아스모데우스. 모두의 모습이 떠올랐다. 요령이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나를 좋아한다고 했었지' 가슴이 뛰었다. 터질 듯이 가슴이 뛰었다. 사람들의 대화가 다시 귀에 들어왔다. 주희가 말했다. "요령이 언니, 우는 거야?" "...내가 너냐, 시도 때도 없이 울게" "울라 그러는 거 맞구만 뭐" 청도의 놀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요령이는 낮은 목소리로 대 답했다. "죽고 싶냐" "살려주세요" "...까불고 있어" "어쨌든, 너무 걱정 마라. 이 놈이 명줄 하나는 끈질긴 놈이라서 반드시 깨어나게 되어 있어" 청도는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청도형, 명줄과는 별로 상관없는 거 아냐? 영준이 형, 지금도 숨은 붙어 있어" 한수의 목소리. 누가 한수 아니랄까봐 말 심하게 하는 데에는 뭐 있다니 까. "하여튼 너는 다 좋은데 싸가지가 없어서 문제라니깐? 형이 이렇게 말해 도 저렇게 알아듣는 그런 버르장머리를 권장해주고 싶어" 그리고 한수는 이죽거리듯 말했다. "그래도 멍청한 것보단 좀 싸가지 없는 게 더 낫지" "야, 임마!" 모두에게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너무도 맑고 행복한 웃음. 저기에 끼여들 고 싶다. 나도 저 속에서 함께 이야기하고 싶다! 문득 가람이가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인은 반드시 깨어나야 한다. 깨어나지 않으면 큰일나" "......" 모두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가람이가 너무 진지했던 것이다. 가람이는 말 을 이었다. "그래야 '어쩌면 널 좋아하는지도 몰라'라고 말했던 어떤 고백에 대한 대 답을 듣지 못한 아가씨가 멋들어지게 차일 수가..." 쉭! 쉬릭! 가람이는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바람을 가르며 무언가가 오고가 는 소리가 들렸다. "...있...지! 다 말했다" 탁! 쉬릭! 퍽! 무언가가 오고가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그리고 청도의 짜증 섞인 목소리도 들렸다. "아, 다 좋은데, 대련은 좀 나가서 하지?" "...휴" 털썩. 침대에 누군가 앉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요령이의 풀죽은 목소리 가 들렸다. "그래...난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어" 손가가 간질거리며 따뜻해졌다. 이건 무슨 느낌이지? 미약하지만 따뜻한 무언가가 내 손을 감싸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귀로 무언가를 두들겨 패는 소리가 들렸다. 퍽, 퍼억, 퍼억! "그러니까 어서 일어나, 이 멍청아!" 갑자기 가슴 언저리가 간질간질해졌다. 도대체 뭐지? 왜 이러는 거야? "야, 그렇게 치다 애 잡겠다. 왜 숨막히게 애 가슴을 치고 그래? 너는 후 환이 두렵지도 않냐? 그러다 애 덜컥 죽기라도 하면 어쩔라고 그러냐!" 청도의 타이르는 듯한 목소리와 숨을 씩씩대는 요령이의 목소리가 들렸 다. "괜찮어, 식물인간인데 후환은 무슨 얼어죽을 후환! 그리고 얘가 나한테 맞아 죽을까봐 걱정하지는 않아도 돼! 이 녀석한테 대답을 들을 때 까진 절대 이 녀석을 죽일 수 없으니까!" 기다려. 대답해줄게. 기다려! "이만 가자. 한참 시끄럽게 해 줬으니 이제 영준이도 좀 쉬게 해 줘야지. 벌써 8시가 넘었다고" 청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주위가 부산해졌다. 청도의 말에 모 두가 일어나는 듯 했다. "그래. 영준이도 잠을 자야겠지" 요령이가 힘없이 대답했다. 그리고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터벅, 터벅. 잠깐, 잠깐 기다려. 얘들아, 기다려. 조금만 더 있어줘. 요령아, 기다려. 이제 난 대답해 줄 수 있어. 기다려! 대답해 줄 수 있다고! 잠깐만! 나는 애타는 마음으로 손을 뻗으며 모두를 불렀다. 그리고 요령이를 불렀 다. "응?" 주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상하다?" "왜 그래?" 한수가 주희에게 물었다. "방금 전에 영준이 오빠의 손이 쬐끔 움직인 거 같은데..." "정말?" 주희의 말에 갑자기 병실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발소리가 내 쪽으로 빠르 게 가까워졌다. 가장 먼저 내게 말을 건 것은 요령이었다. "영준아, 영준아? 내 말소리 들리니? 방금 손 움직인 거 맞아?" 나는 손끝에 힘을 주어 천천히 까닥거렸다. 갑자기 손의 무게가 천근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움직였어! 움직였다고! 분명히 움직였단 말야!" 요령이는 다시 한 번 나를 흔들었다. "정신이 들었지? 든 거 맞지? 정신이 들었으면 손을 한 번 까닥이고, 아 니면 두 번 까닥여!" "...정신이 없으면 두 번 까닥이라는 네 말도 어차피 못 알아듣지 않을 까?" 청도가 맥빠지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요령이는 청도의 말을 깨끗이 무시했 다. 나는 손가락을 한 번 까닥거렸다. 아까보다는 힘이 훨씬 덜 들었다. "깨어났어! 깨어났다고! 하하! 정말로 깨어났어!" "언니? 울다가 웃다가 하면 엉덩이에 뿔난대" "아, 나도 몰라! 뿔이 나던 말던! 야, 눈 떠, 눈뜨라고 멍청아! 응?" 퍽! 퍼퍽! 퍽! 감각이 돌아왔다는 것은 고통을 느끼는 감각 또한 돌아왔다 는 소리이다. 크윽, 괴롭다! 감각이 손가락을 간신히 까닥거릴 수 있을 정 도밖에 돌아오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아프다니, 도대체 실제로는 얼마나 세 게 때리고 있는 거냐! 엉? 요령이는 내 가슴을 한참 두들겨 패더니 이번에는 내 얼굴을 붙잡고 마구 흔들어댔다. "일어나아아아아-! 일어나아아아아-! 눈 뜨라고오오옷-!" 잠시 후, 제풀에 지친 요령이는 내 얼굴을 아무렇게나 집어던지며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눈을 뜨거나 말을 하기는 힘드냐...? 하긴, 정신이 돌아온 것만도 어 디야..." 잠시 후 누군가 내 볼을 마구 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눈을 떠! 임마! 힘들면 억지로라도 뜨라고! 이이익-!" 나는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눈에 힘을 주었다. 근데 과연 정말로 눈이 떠 지려나? 천천히, 캄캄한 세상이 느리게 반으로 갈라지면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어...어? 눈 뜨냐? 뜨는 거야? 응? 눈뜨는 거야?"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이 너무 부셔서 곧 눈을 찡그려야만 했지만, 그 리고 시력이 아직 완전히 않아서인지 주위의 모습이 똑똑히 보이진 않았지 만, 단 하나의 모습만은 가슴 시리도록 똑똑히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눈물이 범벅이 된 채 처연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요령이의 모 습이었다. 갑자기 요령이의 모습이 크게 부풀어올랐다. 그리고 무언가 뜨거운 것이 두 눈가를 타고 흘렀다. 흐릿해진 세상 사이로, 요령이가 팔을 벌리고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영준아!" 요령이는 나를 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나 역시 눈물을 흘렸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가람이가, 청도가, 한수가, 주희가 보였다. 나는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무엇인가 따뜻한 것이 목을 타고 흘렀다. 나를 안은 채 흘리는 요령이의 눈물이었다. 보석처럼 빛나는, 너무나도 따뜻한 눈물. 요령이는 으스러지도록 세게 나를 안아주던 팔을 풀더니 내 얼굴을 잡고 자세히 바라보았다. 요령이의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 였다. 나는 요령이에게 힘겹게 웃어 주었다. 난 괜찮다는 것을 표정으로라 도 말하기 위해서였다. 입술을 올리는 것조차 쉽지 않았지만, 간신히 나는 요령이에게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요령이는 나의 일그러진 미소를 보며 환하게 마주 웃어주었다. 눈물과 콧 물로 범벅이 된 요령이의 얼굴에서 피어나는 전혀 눈물과는 어울리지 않는 미소는, 이상하게도 이 세상이 아닌 것처럼 아름다웠다. 요령이는 잠에서 깨어난 나에게 그렇게 그녀가 내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을 주었다. 꿈속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이 가슴 벅차게 하는, 마치 꿈같은 미소를. <고양이>-마치 꿈같은 이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