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0 아버지는 서재의 의자에 앉아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아킨이 문을 두드리자, 그는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잠깐 기다려라." 문을 닫은 아킨은 잠자코 아버지가 할 말-아니 선고를 기다렸다. 따 라 들어온 늙은 개가 어린 주인에게 머리를 들이밀며 꼬리를 살래 살래 쳤다. 아킨은 개를 달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고, 개는 귀를 뒤로 젖히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멀리서 매미가 시원하게 울어 젖 혔고, 마차 바퀴 달리는 달각 달각 소리도 들려온다. 아킨을 한참이나 세워 놓은 아버지는, 마침내 쓰는 것을 마치고는 그 종이를 접어 하얀 봉투 속으로 밀어 넣었다. "입학이 허가됐다, 아키." 아킨이 손을 멈추었다. 그리고 천천히 말아 쥐어 허리 쪽으로 가져 가며 물었다. "언제 꺼져 드리면 되는 겁니까." 그 말투에는 신물이 나도록 익숙한 부친은 네 기분 따위 알 필요 없다는 듯 퉁명스레 말했을 뿐이다. "내일 당장." 아버지는 책상 위로 큰 봉투 한 장을 던졌다. 봉인이 잡아 뜯겨진 봉투 안쪽에는 붉은 꽃처럼 둥그스레한 도장이 찍혀 있었다. "가지고 가라. 내일 새벽 여섯 시에 마차를 준비시킬 테니, 곧장 타 고 떠나도록. 배웅은 하지 않겠다." "배려 감사합니다." "......." 아킨은 날선 목소리로 덧붙였다. "저도 이 저택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에 아버님 얼굴을 뵙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아키---" 아킨은 아버지의 책상에 놓여있는 봉투를 낚아챘다. "이 입학 허가서를 받기 위해 아버님께서 얼마나 큰 노력을 퍼부었 는지 압니다. 그러니, 이번에야말로 성인이 되어 완전히 독립할 때 까지 돌아오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본채에만 얼씬하지 않는 다면, 늪의 성에서는 휴가 때 며칠 머물러 도 좋다." "....." "그래도 자켄과는 만나겠고, 나는 네가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들어왔 다가 사라지는 꼴은 보고 싶지 않다. 그곳만은 네 마음껏 써라." 아킨은 마지막으로 한방 먹어버린 기분이었다. 실컷 두드려 팼다고 생각했더니, 이 아버지란 인간은 잘 준비 해두었던 마지막 주먹을 휘둘러 아킨을 쓰러뜨리고는, 다시 우위로 기어올라간다. "가겠습니다." "작별인사까지 마저 하고 가." "아주-건강하시길 빌겠습니다." 아킨은 저주처럼 인사를 내던지고는 돌아섰다. 그리고 곧 박힌 듯 멈추어 서, 문 옆을 노려보았다. 문 옆에 그와 똑같은 얼굴의 소년이 서 있었다. 그러나 형제애가 솟기는커녕 얼굴만 떼어 붙인 거울상이 따로 움직 이는 듯 소름끼칠 뿐이었다. 길고 검은 머리카락은 그가 아킨 쪽으 로 움직이자 부드럽게 찰랑였고, 진한 보랏빛 눈동자는 미소를 지으 며 아킨을 바라보고 있었다. 휘안토스- 아버지만큼이나, 이 한시간 차로 태어난 쌍둥이 형 휘안토스도 싫 다. 아버지는 보기 싫다는 표시라도 노골적으로 하지만, 이 형은 무 관심하게 아킨을 훑어보고는 지나칠 뿐이었다. 그리고 그 무시가 더 속 뒤집어 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학기로 압셀론의 모든 교육과정을 마친 그는 드디어 본격적인 성주가 될 것이며, 다음 해 여름 휴가 때 아킨이 '늪의 성' 에 머무를 때 즈음에는 아킨만큼이나 어린 이 형은 모두의 '주인'이 되어가고 있을 것이다. 휘안토스가 말했다. "이번에는 오래 있기를 바란다, 아키." "겨우 두 번째 전학이야." "보통은 한번도 다니지 않지." "....형처럼." 휘안토스가 피식 웃더니, 아킨의 어깨를 잡고 토닥거려주었다. "나는 네가 무사히 졸업을 하고 '돌아오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 다." 아킨은 그 팔을 거칠게 밀치고는 서재의 문을 열었다. "내일....이라고 했어?" 아킨의 말에, 자켄은 눈까지 크게 뜨며 되물었다. 오두막의 나무탁자에는 연한 호박 빛의 수프 두 사발과 큼직한 갈 색 빵 몇 개, 이제 막 구워 놓은 고깃덩어리가 거무스름하게 기름을 흘리며 놓여 있었다. 아킨은 수프를 그릇 째 마시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바로 떠나라는 거지." "그럼 오늘이 마지막 만찬이란 말이군." "마지막은 아니야. 방학이 되면......찾아올게." "일주일에 두 서너 번 보는 것과 방학 때에야 오는 건 분명한 차이 라고." 자켄이 아킨의 개 푸제에게 뼈와 음식찌꺼기가 담긴 저녁을 주고는 몸을 일으켰다. 푸제는 이가 빠진 나무 그릇에 코를 박고는 허겁지 겁 저녁을 먹어대기 시작했다. 아킨은 얌전한 고양이처럼 빵을 뜯어 입에 넣고는 건성으로 씹었다. 자켄은 한숨을 푸르르르 내 쉬고는 아킨 앞에 앉으며 말했다. "그런데.....생각보다는 빨리 결정됐구나. 다음학기는 되야 입학허가 가 내려질 줄 알았는데." "휘안 덕일 거야." 자켄의 눈이 그 '휘안'이란 이름에 차가워졌다. 그리고는 침 뱉듯 날 카롭게 중얼거렸다. "재수 없는 자식." 아킨이 말했다. "하지만 곧 그 재수 없는 자식은 재수 없는 성주가 될 것이고, 이 숲의 '재수 없는 주인'이 될 거야." 자켄이 머리카락을 거칠게 휘 저었다. "나도 가을부터 매일 녀석을 볼 생각을 하면 끔찍해. 낙제나 해 버 릴 일이지." ".....운 나쁘게도 머리가 너무 좋아서 다른 사람 6년 다닐 것을 혼자 서 4년 다니고 날아왔어. 저주 걸지마, 형. 아무래도 형은 저주가 축 복으로 작용하는 특이형인 것 같아." "핏줄 덕이지." 자켄이 큭큭 웃었다. 그리고 아킨의 머리에 손을 얹고는 따뜻한 애 정을 담아 부드럽게 말했다. "무사히 돌아와라, 아키." 아킨이 말했다. "벌써 작별 인사하지 마. 아침이 되려면 아직 멀었으니까." 자켄의 손안에 은빛 머리카락이 감겨 들어갔고, 고양이를 닮은 금빛 눈동자는 자켄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그분은 너한테 저주를 걸었는지 모르겠어. 휘안에게나 걸릴 일이지, 어떻게......너에게....그 빌어먹을 저주가 돌아간 걸까." 아킨은 웃고 말았다. "형, 나 성격 더러워." 자텐이 어이가 없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고, 아킨은 분명히 덧붙였 다. "난 형한테만 잘하는 것 뿐이야." *********************************************************** 작가잡설: 시작합니다......... 다른 곳에서 연재 되던 것과는 거의 차이 없고요...^^;; 재미있게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1장 ************************************************************** [겨울성의 열쇠] 제1장 전입생 제1편 전입생#1 *************************************************************** 방학 동안 더위와 함께 잠들어 버렸던 학교는 가을 학기를 앞 두고 아침 닭 우리만큼이나 부산스러워졌다. 마차들이 꽉 막힌 길에서 와글와글 거리고, 말들은 갈피를 잡지 못 해 우왕좌왕 하다가, 결국 짐을 쏟아 버리기도 했다. 벌써 도착한 어린 신입생들은 병아리들처럼 떠들어댔고, 부모들도 야단스레 그들 과 장단을 맞추었다. 학원의 마법 고등부 2학년 루첼 그란셔스가 교수회의로부터 호출을 받은 것은 그런 날의 오후였다. 학생이 그런 어르신들 회의에 호출을 되는 것은 대체로 징계 때문 이었지만, 다른 학생들 보다 4살이나 많아 단체로 피우는 말썽이나 개인적으로 피우는 말썽이나 담쌓고 지내던 루첼이 이런 회의에 호 출될 일은 한번도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이유를 떠올릴 수 없는 그는, 속으로 이걸까 저걸까 하는 가정과 설마 하는 부정을 한 가로이 되풀이하며 방을 나섰다. 아직은 후끈한 햇살이 쏟아지는 기숙사 복도는 개학이 되어 돌아온 학생들의 짐으로 뒤덮여 있었다. 익숙한 얼굴들이 여기 저기서 튀어 나와, "루츠 형, 잘 지내셨어요!" 하고 인사를 하고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한해의 계획을 잡으며 떠들어댔다. 창 밖 동관 쪽의 여학 생들이 잔디밭에서 오랜만에 입은 교복의 긴 휘장을 만지작거리면 서 재잘거렸고, 어느 남학생과 여학생이 만나 다정히 이야기하는 것 도 보였다. 방학의 절반을 기숙사 도서관에서 보낸 루첼은 그 번잡 함이 무척 반가웠다. "루츠---!" 굵은 목소리가 그를 부르더니, 그 목소리만큼이나 우악스런 손이 루 첼의 어깨를 잡아챘다. "루츠, 넌 두 달만에 만나는 친구한테 인사도 안 하냐?" "안녕, 쥰." 루첼은 얼결에 웃으며 이마까지 올라간 안경을 내렸다. 유일한 친구이자, 낙제를 두 번 거듭하는 바람에 루첼과 겨우 한 살 차이면서도 졸업하지 못한 유일무이한 학생 쥬나드렌 루크페일리, 그냥 쥰, 또는 쥬드로도 불리는 그는 한 여름에 얼마나 싸 돌아 다 녔는지 얼굴이 시커멓게 타서는, 루첼을 마구 흔들며 외쳤다. "반갑다, 야---! 잘 지냈냐?" "아, 아, 물론....이지." 그러자 쥰은 볼을 바짝 들이대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너야 물론 책이나 파겠지만." "나는 네 공부까지 해 줘야하니까." "잘났다, 공부벌레." 루첼은 시계탑을 흘끗 보고는, 목 위에 얹힌 쥰의 팔을 툭툭 치면서 말했다. "그리고 우리 나중에 이야기하자. 저녁에 내 방으로 와." "무슨 일 있는 거야?" "교수 회의에 호출을 받았거든." 쥰의 얼굴이 단번에 구겨졌다. "설마, 지난번에 내 컨닝 도와준 것 때문에 그러는 거야?" 그건 루첼도 찜찜해 하고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시험 전날에 찾아와서는 눈물 펑펑 쏟으며 이번에도 낙제하 면 아버지한테 죽어나간다고 울부짖어 대는 친구를 외면하는 것은, 루첼에게는 아주 고통스런 일이었다. 그래서 다음부터는 적어도 시험 이주일 전부터 같이 공부하자고 단 단히 이르고는, 기사부와 같이 시험을 치르는 역사학과 페그-라일 어 시험지를 그 옆에서 슬쩍 보여주었다. 문제는 저 멍청이가 그걸 그대로 베끼는 바람에, 라일 어와 역사학을 루첼과 더불어 1등을 해 버린 것이었다. 교수들은 다들 헛기침을 하며 넘어가긴 했지만, 그 다음 치르게 된 군사학 1과 시험 때는 루첼과 쥰을 양끝에 앉혀 놓 았다. 다행히 그 과목은 쥰이 가장 잘 하는 과목이었으니 낙제는 간 신히 면했고 그것으로 그 둘은 가까스로 용서되었다. "그건....아닌 것 같아. 끝난 문제잖아." "그럼 너 혹시 나 없는 새 학교에서 사고라도 친 거야?" "내가 한 일이라고는 공부뿐이다. 표창이라면 몰라도, 혼날 거리는 없다고." "그럼..." 루첼은 쥰의 입을 막았다. "그 다음은 나중에." 그 말을 마지막으로 쥰을 던져 내고는, 행여나 늦을 새라 바삐 걸어 갔다. 로멜 왕립학원의 교수들의 비상회의가 소집된 것은 신학기와 개학 식 이틀 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방학 동안 소집된 로멜의 두 번째 비상회의였으며, 첫 번째 회의에서 대부분을 결정한 뒤라, 그저 결 정된 일의 세부사항을 손질해 보기 위해 소집된 것뿐이었다. '그 일'이 정규 교수회의에 상정 된 것은 8월 초였다. 그리고 그 주 에, 전입신청서와 함께 왕립학원이 요청한 학적부가 베넬리아 국립 마법원으로부터 도착했던 것이다. 베넬리아 국립 마법원에서 왕립학원으로의 전학은 아예 없었고, 이 유는 그곳이 로멜보다 몇 배는 더 명성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 렇게 한 단계 낮은 학교로 전입을 요청한다면, 이유는 단 하나 '퇴 학'뿐이다. 아무리 마음 넉넉히 생각해도, 그 쪽에서 어느 귀한 집 자식을 쫓아내려다가 차마 매정해지지는 못해서 왕립학원 쪽으로 '떠넘긴' 것이나 다름없었다.(물론, 그 집에서 꽤나 귀찮은 소리를 들 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첫 번째 회의에서는 전입불가로 결정을 보았다. 로멜을 골칫 덩어리 하치장 정도로 여기는 콧대들 높은 베넬리아 마법사들에 대 한 분노와, 그 학적부에 쓰여진 전입생의 화려한 기록에 대한 당연 한 결과였다. 학생의 퇴학은 두 번째였으며, 첫 번째는 제도 압셀론 에서의 퇴학이고, 두 번째는 베넬리아 국립 마법원에서의 퇴학이었 다. 둘 다 바늘구멍만큼이나 좁은 입학문을 자랑하는 곳이었고, 전 입생은 그 문을 다 통과하고, 둘 다 쫓겨난 것이다. 그리고 퇴학은 학적부를 빼곡하게 기록하고도 남을 정도로 쌓인 기물파손과 학습 태도불량, 교수 폭행의 더미 위에 꽂힌 마지막 깃발이었다. 두 학교 다, 첫 줄은 그의 행동이 꽤나 상큼했는지 자세히 기록하고 있었다. '모월 모시에 사소한 시비가 붙어 모모의 모모를 폭행. 턱뼈 탈골.' 그리고 두 번째는 며칠 뒤에 일어나고, 그 후 일주일 가량 근 신 처벌을 받은 후 일주일 채웠다 하면 다시 문제를 일으켰다. 심지 어 교수와의 사소한 시비 끝에 '로스타의 수학적 마법연구'를 정면 으로 집어던진 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 대목에서, 학원의 '마법'교수들은 안경들을 벗으며 한숨을 내 쉬었다. 그것이야말로 전 마법교육 기간동안 아침 세수하듯 봐야 하는 책이었으며, 마법서 중 가장 두터운 것인 동시에, 나무만큼이 나 딱딱한 표지와 육중한 무게를 자랑하는 책이었다. 그것에 얻어맞 은 교수는 그 학기 강의조차 할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고, 그는 한 달의 근신처분, 또 그 중 이 주일을 로멜에서조차 악명 높은 '검은 방', 즉 '특급' 학생 반성실에서 보내야 했다. 성적은 나쁘면 점수가 아예 '없었으며', 좋으면 그 괴물들만 모인 학 원에서 수석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워낙에 뒤죽박죽이라, 전체 적으로는 낙제를 겨우 면하는 수준이었다.(그러나 거의 반 학기를 근신으로 때운 것을 생각하면 아주 놀라운 점이었다.) 그 때문에, 두 명문학교조차 포기한 골칫덩어리를 감당하기에는 자 신감이 부족했던 로멜은 점잖게 불허를 통보했던 것이다. 그러나 총 장이 두 번째 편지를 받은 날, 바로 첫 번째 '임시 회의'가 소집되었 다. 편지는 두 통이었으며, 각자 다른 곳에서 동시에 도착한 것이었다. 그 내용 자체보다는, 그 봉투에 찍힌 인장에 왕립학원은 풀썩 무릎 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그 중 한 통만 왔다면 어찌 저찌 버틸 수도 있었지만, 두 통이 동시에 왔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그제야 그 문제아가 그토록 날뛰고서도 각 학교에서 2-3년 정도 버티어 낸 이 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회의에서는 입학허가가 내려졌고, 다들 침통한 얼굴로 각자의 집으 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들 그 학생을 담당할 교수가 되지 않기를, 또 그 학생의 기숙사 룸메이트로 자신이 아끼는 학생이 걸리지 않 기만을 바랬다. 그리고 며칠 뒤 두 번째 회의가 소집되었고, 결정을 마친 총장이 교 수들에게 통보하기 위함이었다. 총장은 간단하게 몇 마디 인사를 건 네고는, 모두가 궁금해하는 것에 대한 답을 내 놓았다. "우선, 전입해 올 학생은 율버 교수가 담당할 것이오." 그 통보에 다들 이유를 짐작했고, 흘끗 율버 교수를 보며 안도와 비 웃음을 심술궂게 흘렸다. 율버 교수는 마른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총장을 노려보았지만, 총장은 두터운 손에서 '선고문'을 내리고는 율버에게 말했다. "우수한 학생을 담당하게 된 것을 축하하오, 율버 교수." "가, 감사.....합니다." 쥐어짜듯 하는 말에, 다시 교수들의 눈과 입술 근처에서 다시 비웃 음이 머물다가 사라졌다. 율버 교수는 자기 자신의 우수함과는 관련 없이, 그 생각 없는 행동 거지 때문에 늘 교수들 사이에서 따돌림당해 왔고, 그런 만큼 그 결 정이 예상 못한 바는 아니었다. 총장이 말했다. "잘 지도하여 두 명문학교에서조차 못한 일을 해 주리라 믿소, 율버 교수." "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율버는 사실 의자라도 집어던지고 싶었다. 즉, 무슨 일이 생기면 모 든 책임을 떠맡을 테니 알아서 그 학생 쪽에서 무슨 짓을 하던 참 으라는 말이다. 그래도 교수는 꾹 참아야 했다. '예상'했던 대로 아무런 항의가 없자, 총장은 차를 훌떡 마셔 비우고 는 말했다. "자, 그럼 학생을 부르겠소. 방금 전에 도착해서, 나도 아직 못 만나 봤소." 양옆에 주욱 둘러앉은 교수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차가운 차를 마시고, 옆의 교수에게 머리를 숙이며 뭐라 소곤거렸다. 중요한 문제가 다 해결되자, 이제 남은 것은 율버 한사람만 제하고는 모두 편안한 마 음으로 둘러앉아 도착한 물건의 포장을 뜯는 것뿐이었던 것이다. "들여보내게--!" 총장이 말하자 곧 문이 열렸다. 총장 비서인 젊은이가 들어와 모두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그가 데리고 온 소년에게 들어가라 말하고는 손을 밀어 넣었다. 교수들의 시선이 날개처럼 활짝 열려 햇빛 쏟아내는 회의실의 문으 로 향했다. 그리고 전입생이 모자를 벗으며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 다. 문이 닫히자, 총장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서 오시오, 학생." 소년이 모자를 앞으로 끌어당기고는, 왕처럼 앉은 총장을 올려다보 았다. 어깨를 넘어 허리까지 닿을 듯한 머리카락은 은빛이었다. 얼굴은 창 백할 거라는 총장의 기대와는 달리 약간 탄 듯 건강한 빛이었고, 금 빛 눈동자는 눈매가 뚜렷하고 소년치고는 큰 편이었다. 두 눈 위로 날카롭게 뻗은 눈썹은 짙었으며, 얼굴은 선이 곱기는 했으나 턱이 강해 보여 유약한 인상도, 날카롭고 예민한 인상도 아니었다. 고집 세고, 그런 또래의 아이가 늘 그렇듯 자존심도 강할 듯 했다. "이름은?" 소년이 말했다. "아킨토스 프리엔입니다." "어디의?" 소년은 잠시 망설이더니, 기대하지 않았던 답을 내 놓았다. "저 스스로 밝히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 니까." 총장은 이것에 대해 길게 물고 늘어지지는 않기로 했다. 어차피 사 납기로 유명한 소년이니, 처음부터 긁어 놓을 필요는 없을 듯 했다. 또, 저 소년의 집안도 '사나움'으로 유명하다. "자, 그럼.......나이는 어떻게 되나, 아킨토스 군." "내년 1월로 열 일곱이 됩니다." 발음은 놀랍도록 정확했다. 수도의 사람조차 각자의 성격에 따라 나 름의 억양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성품이나 집안을 나타내기도 한 다. 그러나, 소년-아킨토스 프리엔은 그것조차 없었다. 정확하게 잘 라내 버린 규격품처럼 완벽하긴 했으나 아무런 느낌도, 인상도 남기 지 못하는 지독히도 '비인간적인' 목소리였다. 총장이 말했다. "....그리고 자네, 지난 학교에서 전적이 아주 화려하던데......." "압니다." "그렇다면, 여기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말썽 피우지 않겠다고 맹세 하겠나?" "못합니다." 총장의 두터운 손이 바늘에 찔린 듯 움찔했다. 교수들 주변으로 다 시 호기심과, 약간의 분노가 휩쓸고 지나갔다. "왜지?" "맹세는 스스로 다짐한 것에만 합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라는 절대적인 전제조건은 그 누구도 지킬 수 없는 것입니다. 제 명 예와, 제 위치를 지킬 일이 일어난다면....그러나 저 스스로 나설 수 밖에 없는 일이라면, 나서야 합니다." 총장은 정말 기가 막혀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교수들의 반응은 반반 이었다. 반은 총장과 비슷했고, 나머지 반은 총장보다 더했다. 그러나 단 하나, 구석의 자리에 앉아 있는 마법부 교수 오거스트 롤 레인만은 흥미롭다는 듯 그를 보고 있었다. 안경 너머의 검은 눈이 반짝였고, 입술은 웃음에 젖어 있었다. 그녀를 발견한 총장은 또 뭔 가 이상한 것을 생각하는 군, 그렇게 생각하며 눈길을 거두고는 아 킨에게 말했다. "좋아, 아킨토스 군. 말썽은 자네의 소관이고, 징계는 우리의 소관이 될 걸세. 분명히 말해두네. 그리고, 마법부의 율버 교수가 졸업할 때 까지 자네를 담당할 것이네. 저번 학교에서 퇴학 전에 이미 학기말 시험을 통과했으니, 그 때까지의 학력은 인정되어 이번 학기부터 고 등부 2학년으로 진급하게 될 거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사택을 마련했나?" "이미 기숙사 신청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형식적인 질문이었네.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될 것이고, 마침 기숙생 하나가 입사를 취소하는 바람에 방이 하나 비어 있지....방의 열쇠와 교복 및 교과 과정에 대해서는 학생부로 찾아가면 알아서 해 줄 거 네." "감사합니다." 아킨은 허리를 숙여 교수들에게 인사를 올렸다. 총장이 손을 올리며 축복의 인사를 올렸다. "지혜의 성인 우뤼텐의 축복을 있기를." 그러나 아킨은 화답하지 않았다. 지혜 성인의 축복-즉, 졸업을 말하는 것이고 정말 졸업하게 되기를 그 스스로 간절히 바라고는 있었지만, 별로 자신이 없었다. 그는 인사를 올리고는 자리를 나섰다. 낮은 한숨과 분노한 교수들의 속닥거림이 그림자처럼 길게 이어졌고, 그 아킨을 바라보던 롤레인 교수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율버가 가장 먼저 일어나는 보고 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 작가잡설: 주인공은 아킨토스, 즉 아킨...내지는 아키 군입니다. 훗-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1장 ************************************************************** [겨울성의 열쇠] 제2편 전입생#2 *************************************************************** 학생부는 1층의 홀 바로 옆에 붙어 있었다. 학기초라 신입생과 그 부모들이 편히 들락거리도록 활짝 열려 있어, 찾는 데 어려움도 없 었다. 들어가자, 그곳은 입학 수속을 밟는 어린 학생들과 그 부모들로 북 적거리고 있었다. 아킨은 그 홍수 철 부푼 물살만큼이나 질서 없고 어지러운 무리들에게 여기 저기 떠밀리며 겨우 겨우 전학생 담당 테이블을 찾을 수 있었다. 신입생일까지 같이 처리하고 있다가, 이번에는 제법 나이가 있어 보 이는 소년이 테이블로 오자 담당은 그가 누구인지 금방 알아보았다. 아킨이 말했다. "아킨토스 프리엔입니다." "만나서 반가 와요. 이야기는 충분히 들었지요." 콧잔등에 주근깨가 가득한 그 여자는 아킨토스를 눈여겨보더니 흥 미롭다는 눈을 빛냈다. 아킨은 그 눈빛이 별 마음에 들지 않아 뭐라 말하려다가 관두기로 했다. 첫날부터 튀는 것은 좋지 않다. 게다가, 회의실과 집에서는 턱 들고 빈정거리기는 해봤지만, 또 퇴학당하는 것은 그로써도 아주 달 갑지 않은 일이었다. 여기서 나가면 말 그대로 3류 학교들 밖에는 남지 않고, 그 학교들은 학교라기보다는 졸업장 인쇄소일 뿐이었다. 그런 곳에 보내져서 시간 죽이느니, 차라리 꾹 참고 버티어 내 이번 에야말로 '졸업'을 하는 것이다. 서류를 뒤적거리던 담당이 마지막 장을 아킨에게 건네주었다. "담당교수님은 칸도스 율버 교수님이고, 수강 편람을 드릴 테니 내 일까지 시간표를 제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방은 기숙사 서 관 207호예요...." "어떻게 가면 됩니까." "저기 룸메이트가 마중 나왔어요. 인사 나누시고 따라 가시면 되 요." 그리고 담당은 잘 손질한 매끈한 손끝으로 맞은 편의 의자를 가리 켰다. 그 손길을 따라 아킨은 고개를 돌렸다. 머릿속으로 엄청난 생각들이 휩쓸리고 있었고, 그가 내린 결론은 어떤 놈이 걸리든 참자는 것이 었다. 그래서 얼굴이 마주하는 순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악수까지 청하며 이렇게 말했다. "잘 부탁합니다." 뭔가 하나 껑충 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킨은 무시했다. "루첼 그란셔스. 만나서 반갑다." 그렇게 그가 손을 맞잡으며 이름을 밝혔다. 루첼 그란셔스는 척 봐도 나이가 몇 살 많아 보여, 소년이라기 보다 는 청년에 가까웠다. 어깨를 넘는 진한 붉은 머리카락에, 둥근 안경 아래로 비추어지는 푸른 눈은 명석하게 빛났으며 얼굴은 금방 호감 이 갈 정도로 준수했다. 키는 컸고, 학생 로브 없이 바지와 셔츠만 가볍게 챙겨 입은 몸은 좀 마른 편으로 호리호리했지만 균형이 잘 잡혀 날렵해 보였다. "아킨토스 프리엔 입니다." "좋은 이름이군. 아킨토스 군...아, 그리고 말 놔. 얼굴도 이렇고 정 말 나이가 많기도 하지만, 아킨 군과 동급생이니까." 반말투였지만 아주 친절했고, 미소는 풍성한 밀밭을 연상시킬 정도 로 부드러웠다. "좀 이르긴 하지만 저녁식사 하고 방으로 돌아가자. 학교 안내는 천 천히 해 주지." 따분한 모범생인가.....그렇게 생각하며 아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녀석은 어딜 가나 늘 있다. 모든 규칙을 훌륭히 준수하며, 모 두에게 친절하고.....또, 이런 녀석들은 늘 그렇듯 평판도 좋고 '우수 하다.' 그 중 용기 있는 몇몇은 아킨에게 다가오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저 '칭찬 받고 싶다.'라는 허영심뿐이었다. 스스로도 그것을 모른 채, '아킨과 함께 다니는 자신'을 대견스레 여겨주기를 바랄 뿐, 정작 아킨이 어떤 인간인지, 무엇을 원하는 지, 알지도 알 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저 환하게 미소 지으면 누구나 그 선함에 감 동 해 줄 거라 착각하고, 사랑해 줄 줄 안다. 그리고 그것이 순수인 줄, 그것이 선행인줄로만 안다. 그런 녀석들은 좋아해 본적도 없거니와, 이제는 지겹다. 그것은 지 독한 이기주의이며, 짜증나는 자아도취일 뿐이다. 어째서 아킨의 세계를 침범하여, 그 자아에 대해 주인행세를 하려 하는 건가. 아킨이 그들에게 원하는 것은 '그냥 내 버려 두는 것' 뿐 이었다. 루첼이 아킨의 어깨를 밀며 말했다. "가자, 아킨토스." 루첼이 데리고 간 식당은 개학 전인 데다가 저녁을 먹기에도 이른 시간이라 학생들이 많지 않았다. 아주 친절한 루첼은 손수 식판을 가져다가 아킨 앞에 놓았다. 고기 를 끼운 빵 하나와 치즈 몇 조각, 사과 하나 뿐이었다. 그리고 루첼 은 다시 자리를 뜨더니, 따뜻한 우유 두 잔을 가지고 왔다. "학교 음식은 공짜 긴 하지만 별로 안 좋아. 그래서 대부분 저 길 아래에 있는 마거릿의 식당에서 사 먹곤 하지. 나중에 가르쳐 줄 게." "고마워." 아킨은 우유를 한 모금 마시고는 빵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루첼은 안경을 슬쩍 밀어 올린 다음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말이 없는 편인 것 같군. 나 혼자 벽보고 떠들어대는 것 같단 말이 야." ".......별로." 잘 아네,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아킨은 치즈를 씹었다. 역시나, 맛이 고약할 정도로 없다. "필요한 건 듣도록 해. 나중에 몰라서 헤매면 본인 손해니까." "알았어." "......말을 말지." 루첼은 푸우, 하고 한숨을 내 쉬고는 식사를 시작했다. 먹는 둥 마 는 둥 깨작거리기만 하던 아킨은 그 어깨를 넘어 식당의 창 밖으로 펼쳐진 캠퍼스를 바라보았다. 로멜 왕립학원, 정식 명칭 로메르드 왕립 로멜 학원은 학교 끝에서 끝까지 가려면 마차라도 세 내어야 할만큼 넓은 압셀론이나, 졸업할 때까지 몇 번이 어떤 건물인지 못 외울 정도로 복잡한 베넬리아 국 립 마법원에 비하면 시골마을 만큼이나 한산하고 간단했다. 지난 세기에 지어진 듯 낡은 오세로 왕조 풍의 건물들에, 오래된 학 원인 만큼 허리가 굵고 울창한 나무들이 우거져 있었다. 건물들은 대체로 붉은 벽돌로 지어져 있었고, 높다란 탑들과 건물 지붕이 울 창한 학내 숲 위로 비죽이 나와 있었다. 루첼이 물었다. "여기 오기 전에는 어디 있었지?" "가정교사가 있었다. 편입 시험 치르고 들어왔고....." 물론 편입시험은 베넬리아로 갈 때에만 쳤다. 이곳은 단 몇 장의 학 적부와 성적표만 보내는 것으로 충분했다. "가정교사라......? 그럼 꽤 부잣집이겠군." "조금." 이번에도 건성으로 답하자, 루첼은 더 묻는 대신 식사에 열중했다. 무책임한 짓이긴 했지만, 나름대로 현명한 선택이기도 했다. 그리고 아킨은 우유를 비우다가, 몸 끝을 움찔하게 하는 '시선'을 느꼈다. 그런 '감'은 아킨은 아주 예민하게 발달해 있었고, 그것의 얇은 끄트 머리가 무언가를 짚어냈다면 이 안, 가까운 곳에 아킨에게 신경 쓰 고 있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앞의 루첼은 아니었다. 루첼은 식사를 하며, 학생부에서 집어온 편람을 보는 중이었다. 아킨은 잔을 내려놓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식당은 2층으로 되어 있었다. 1층은 학생 전용이었고, 2층은 교수나 교직원용이었다. 아킨이 '그것'을 느낀 곳은 바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난간이었다. 그곳은 1층을 훤히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였고, 아킨과 마주하는 높이 즈음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키가 크고 좀 마른 여자였다. 머 리카락은 목이 드러날 정도로 쳐 낸 깔끔한 단발머리였고, 아킨을 내려다보는 눈은 까만 색이었다. 교수의 검은 로브 차림이었으며, 드리우고 있는 휘장은 푸른 테두리가 쳐진 황금색-마법부 정교수다. 아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킨?" 루첼이 편람에서 눈을 떼며 말했지만, 아킨은 그대로 2층으로 향하 는 계단 쪽으로 뛰듯이 성큼 성큼 걸어갔다. 교수, 그러나 그 이전에 '마법사'인 자들이 아킨을 저런 호기심 찬 눈으로 몇 번 본 적이 있기는 했다. 그리고 그 호기심의 원인이 무 엇인지, 아킨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아킨은 귀에 달랑이는 작은 귀걸이를 만지작거리고는 계단을 빠르게 올라갔다. 그러나 여교수는 아킨이 올 때까지 기대려 주지는 않았다. 아니, 도망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킨이 2층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이미 복도 끝의 문을 열 고 있었다. "잠깐--!" 아킨이 소리치자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눈이 마주치자 그녀 는 빙그레 웃고는 문을 닫아 버렸다. "빌어먹을!" 화가 불끈 솟아올라, 아킨은 달려가 복도의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나, 그가 보게 된 것은 온 방을 훤하게 밝히는 촛대들 속에서 개학의 첫 만찬을 즐기고 있는 교수들이었다. 그들의 황금휘장이 번 쩍였다. 아킨은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온통 똑같은 복장이라 그 여자를 다시 찾을 수는 없었다. 그가 안으로 들어서려 하자 검은 제복을 입은 하인이 하나 달려오더니 어깨를 밀며 점잖게 말했다. "여기는 학생이 들어오면 안됩니다. 내려가세요." "비....." 아킨은 저절로 주먹을 움켜쥐고 말았다. 그러나 휘안토스의 경멸 가 득한 눈빛이 번개 번득이듯 생각났다. 아버지의 냉대와, 자켄의 기 쁨과 걱정에 젖은 눈, 그리고 어머니.. 아킨은 주먹을 내리고는 정중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잘못 왔나 봅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아킨은 멀찍한 곳에 서 있는 그 여교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여자는 팔짱을 낀 채 아킨을 흥미롭다는 듯 보고 있었다. 아킨은 그런 그녀를 차갑게 쏘아보고는 문을 쾅 닫아버렸 다. "젠장-!" 이제는 몸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은빛 귀걸이가, 지금은 불쾌하게 뿌 리 박힌 티눈처럼 거북하게 느껴졌고 귀 째로 잘라내 버리고 싶어 졌다. 아니, 그 끔찍한 '저주'에서 풀려 날 수만 있다면, 두 쪽 다 뽑 아내 불로 지져 버릴 수도 있었다. 이 지겨운 것--! *********************************************************** 작가잡설: 학원 물..... 고등학교 졸업한 지 어언 7년째. -_-;; 프흐--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1장 *************************************************************** [겨울성의 열쇠] 제3편 전입생#3 *************************************************************** 그 마지막 날 밤, 아침 안개처럼 보드랍고 차가운 입술이 볼에 와 닿아 잠에서 깼었다. 하얀 머리카락에, 푸르스름한 빛이 날 정도로 창백한 안색의 그녀는 아킨의 이마와 입술에 입맞추고는, 두 볼을 감싸주며 속삭였다. 사랑한다, 내 어여쁜 아가야.....귀여운 아키. 봄의 미풍, 단단하게 얼어붙어 있던 것을 혀끝으로 녹여버리는 따사 로운 바람. 아킨은 두 팔을 벌려 그녀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눈물 이 솟아 나와 볼을 적셔 들어갔다. 가슴을 꽉 메울 듯 벅차 오르는 기쁨에, 작은 심장이 떨려 왔다. 그녀 역시 아킨을 끌어안으며 속삭 였다. 이제는 너 때문에 아프지 않을 거야, 아키......아니, 다시는 아프지 않을 거란다. 그리고 언제나 너와 함께 있을 거야, 예쁜 내 아가. 바람은 거세고, 파도 소리는 높았고, 창문으로는 이제 막 떠 오른 달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녀가 아킨의 등을 쓸어 올리며 말했다. 그러니 같이 죽자. "....." 또 그 생각.... 아킨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장은 나무로 촘촘히 맞대어 만들어져 있었고, 세 번째 나무판 중 간 즈음에는 빠진 까만 옹이 구멍이 보였다. 침대에서는 신선한 햇 빛 냄새가 풍겨왔고, 깃털처럼 부드럽고 푹신해서 느낌이 좋았다. 침대머리로 책상의 모서리가 비죽이 나와 있었으며, 그 위에 아킨이 풀어놓은 책 몇 권의 끄트머리가 보인다. 아킨은 눈을 붙이려다가 관두었다. 이대로 잠들면, 또 '그녀'의 꿈을 꿀 것만 같았고, 그것은 학교 첫날 에 꾸기에는 끔찍한 악몽인 데다가 심지어 불길한 전조이기도 하다. 그래, '그녀'는 언제나 방안에 틀어 박혀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멍청하게 창가에 앉아 있기만 했는데, 얼마 지나자 헛것을 보는 듯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뒤, 크게 울 며 혼절해 버리더니 완전히 정신을 놓아 버렸다. 거미줄처럼 투명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거나, 갑자기 날카롭게 소 리치고 발작을 일으키는 것이 그녀의 일과였다. 아버지가 사다 놓은 노란 카나리아를 그렇게 예뻐하더니, 어느 날 식사를 다 마치고는 그 작고 노란 새를 빵 썰던 나이프로 난도질 해 죽여버렸다. 피와 노란 솜털 투성이가 되서는 뭐라 중얼거리더니 결국에는 아키, 아키 ---! 하고 울부짖었다. 벌써 아킨은 베개로 머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 생각이 날 때면 이 렇게 머리를 짓눌러야 조금 안심이 되는 것이다. 머릿속을 천둥처럼 울리는 그 날카롭운 울부짖음이 조금이라도 잦아드는 것 같았다. 그 때, 베개가 아래로 쑥 당겨졌다. 아킨은 힘을 꾹 주었고, 그러자 그 쪽도 만만치 않은 힘으로 베개를 빼 버렸다. 빛이 확 쏟아져 들 어왔고, 앞의 그는 베개를 뒤로 던져버리며 말했다. "아킨토스." "......" 잠시 눈이 부셔 아킨은 얼굴을 찌푸렸다. "벌써 자고 있었나?" 루첼은 고개를 숙이고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붉은 머리카락이 코끝에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갑자기 루첼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설마, 벌써 집 생각 나는 건 아니겠지?" "맞아." "응?" "집생각 했어." 아킨은 침대에서 일어나 앉고는, 머리가 지끈거려오자 관자놀이를 꾸욱 눌렀다. 아킨의 불친절한 답에 그 퉁명스런 성격을 단번에 파악하고는, 더 묻는 것은 미련없이 포기해 버린 루첼은 맞은 편에 놓인 침대에 걸터 앉아 부츠를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으며 말했다. "왜 먼저 간 거지, 아킨토스?" "그냥." "그래, 그냥. 탐구정신을 단번에 때려 눕히는 멋진 답이다." 루첼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뭘 꺼내 내밀었다. 붉은 색보다는 푸 른색이 더 많은, 제대로 익지도 않은 풋사과였다. "네가 남기고 간 거다. 네 집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여기서는 귀한 거니 버리거나 하지 마." 아킨이 말했다. "그냥 네가 먹지." "그럼 가기 전에 말을 하고 갔어야지. 어쨌든, 네가 직접 주기 전까 지는 그건 네 몫이다. 자, 지금 줄래? 맛있게 먹어주지." "....." 아킨은 괜히 기분이 나빠져서 사과를 베어 물었다. 시큼하고 맛없는 사과였지만, 어쨌든 다 먹고 싶어졌다. 루첼이 물었다. "그런데 너, 대체 어디서 온 거냐?" "말했잖아." "어디서 퇴학당하고 온 거냐고 물었어." 아킨의 눈이 날카로워졌지만, 그를 보는 루첼은 아주 태연했다. 아킨이 쏘아붙였다. "어디서 듣고 온 거냐." "짐작이다. 그리고 저기 저 책들, 수업에 가지고 들어가기 전에 옛 날 학교 도장은 완전히 지워버리고 가져 가. 다른 교수라면 몰라도, 율버 교수와 카프린 교수는 다른 학교라면 질색하니까." 그제야 아킨은 자신이 책 위에 찍힌 문장을 완전히 긁어내지 않았 다는 것을 깨달았다. 반쯤 긁어내고는, 이만하면 못 알아보겠지 하 고 던져 놨던 것이다. 그리고 잊어 버렸다. 자켄의 오두막에 들락거리면서 책은 들춰보지도 않았고, 입학허가가 날아온 그날로 떠나올 때는 메리엔이 짐을 챙겼기 때문에 책을 다 시 한번 확인해 볼 틈도 없었다. "어디서 왔어?" 루첼이 다시 묻자, 아킨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쪽으로 갔다. 그리 고, 루첼의 책상에 꽂혀 있는 봉투 나이프를 들고는 책의 표지를 확 긁었다. 우드드드드--살이 찢어져 나가는 것 같은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리 더니, 책표지를 감싼 검은 가죽이 한 움큼 벗겨져 나갔다. 그리고 그 나이프로 책을 한번 쾅 소리가 날 정도로 찍고는, 단번에 뽑아 그 끝으로 루첼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시는 묻지마." 오거스트 룰레인은 연구실에 남아 늦게까지 책장을 넘겨나가고 있 었다. 램프의 빛이 낡은 양피지 위로 퍼져나가며 여러 가지 마법원과 달 필의 페그-라일 어로 씌워진 글들의 유려한 곡선을 비추어 냈다. 그러다가, 그녀는 안경을 밀어 올리고는 왼손에 든 편지를 당겼다. 편지 역시 끄트머리가 낡게 퇴색되어 오그라든 것이 아주 오래된 것이었다. 그녀는 까만 눈동자를 굴리며 몇 번이나 되풀이 읽어내고 는 책 위에 얹어 놓았다. "......" 오늘 낮의 일에 대해 생각하던 그녀는, 의자에 깊이 등을 기대고는 몸을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깨끗하게 개인 가을하늘에서 빛나는 하얀 달은 이제 거의 부풀어올라 큼지막했으며, 하얀 구름들은 달빛 에 빛나며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소년을 떠 올렸다. 빛나는 금빛 눈동자와, 고집스럽게 찌푸 린 눈썹과, 그 안에 깊이 숨겨진 거친 야성, 결국에는 웃음이 나온 다. 역시 그렇겠지, 아킨토스 프리엔. 그럴 줄 알았어..... 시계가 열 한 시의 종을 울리자, 그녀는 빛을 움직였다. 빛이 자그 마한 날개를 퍼덕거리며 책상 근처를 맴돌다가 그 위에 얌전히 앉 았다. "약속은....약속이니까." 롤레인 교수는 펜을 찾아 몇 장의 백지를 꺼내 몇 자를 적고 봉투 에 넣었고, 밀랍을 한 방울 데워 떨어뜨린 다음 그 위에 자신의 반 지로 인장을 찍어 넣었다. 둥그런 학교 문장 아래에 그녀의 이름이 선명히 돋워져 있었다. 롤레인 교수는 그것을 마지막으로 보고는, 의 자에서 일어나 느릿느릿 연구실을 나섰다. 그리고 학생부에 도착하 자 이미 퇴근한 담당의 테이블 위에 그것을 얹어 놓고는 자리를 나섰 다. 오랜만에 학생들이 돌아온 학교는 늦은 밤이 되어도 아직 시끌시끌 했고, 기숙사의 모든 방이 훤히 켜져 있었다. 롤레인은 숲 사이로 난 하얀 산책로를 걸어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 작가잡설: 되도록이면 출근 하기 전에 네 편씩 올리도록 하겠 습니다. ^^ 아마도 대부분 10-11시 사이에 올라올 듯.... (저는 규칙적으로 삽니다. ;;)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2장 ************************************************************** [겨울성의 열쇠] 제2장 시작 제4편 시작#1 *************************************************************** 결국 새벽에 그 꿈을 꾸었다. 바짝 마른손은 단단한 덩굴처럼 목을 꽉 조였다. 숨이 컥 막히고, 뜨거운 피가 몰려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도살장에 끌려온 소처 럼 바동거리며, 그 손목을 꾹 움켜쥐고 잡아떼려 했지만 꿈쩍도 하 지 않았다. 결국 그의 손톱이 바짝 마른 손목을 긁어내며 피가 튀었 다. 크게 울부짖었고, 공포에 질린 두 눈에 하얗게 빛나는 달이 내 려왔다. 처녀 여신처럼 순결한 달, 뾰족한 성들의 첨탑 끄트머리 위에 걸린 그 눈부신 보름의 빛--울부짖음이 터지고, 그것은 으르렁거리는 소 리에 가까웠다. 어머니가 손을 떼고는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피 가 튀어 하얀 시트 위에 점점이 흩어졌다. 어머니는 핏기가 가시며 시체처럼 파릇해져버렸다. 그 얇은 어깨가 푸들푸들 떨리더니, 피에 젖은 손으로 그 하얀 백발을 쥐어뜯기 시 작했다. 머리카락과 잠옷에 뻘건 피가 튀어 올랐다. 온 몸이 피투성 이가 되어 버렸다. 아니, 아니야---아니야! 그리고 아킨은 그녀의 눈동자위로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래 도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려고 시트 위를 기어갔다. 오지마.....! 그녀는 아무거나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그릇이 깨지고, 의자가 나뒹 굴었다. 아킨은 그녀를 부르고 싶었지만, 목이 꽉 졸린 듯 아무 말 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에는 답답한 아이가 늘 그렇듯 크게 울음을 터뜨려 버렸다. 그 울음소리에, 어머니의 눈이 다시 눈물을 쏟아내었고, 그 눈 가득 한 것은 연민과 뒤틀린 공포였다. 그녀는 다급히 문을 열고는 너른 복도를 뛰어갔다. 탁탁탁--가벼운 짐승이 도망치는 듯한 소리가 들 려왔다. 아킨은 그녀를 따라 문 밖으로 기어나갔다. 얼어붙은 듯 매 섭게 추운 복도를 기어가다 겨우 몸을 일으키고는 비틀 비틀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뛰기 시작했다. 달빛 퍼지는 밤하늘은 깨끗했고, 휘몰아치는 겨울 바람은 날카롭고 도 사나웠다. 얇은 옷 위로 차가운 바람은 살을 베어 들어갈 듯 했 고, 그는 뛰고 또 뛰었다. "....." 세수를 마친 아킨은 볼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며 거울을 바라보았다. 마주보는 차가운 유리면 속에, 충격과 공포에 갈가리 찢기고 내동댕 이쳐진 가엾은 어머니의 눈동자가 비추어낸 그 때로부터 10년을 뛰 어 넘은 16세의 아킨이 있었으며, 그 속에서 이제는 자신과 자신의 형 휘안토스를 보았다. 마주보며 열 달을 한 배에 엉켜서 보내고 세상에 함께 태어났던 형, 그러나 칼로 쳐낸 듯 철저하게 축복 받고 철저하게 저주받은 형제. 아킨은 물에 젖은 손가락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고, 그러자 은색의 자그마한 귀걸이들이 드러났다. 빌어먹을, 아킨은 다 시 머리카락을 당겨 그것을 가려버리고는, 옆에 놓인 초록색 휘장을 집어 어깨에 얹었다. 그리고 방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책상 위에 얹힌 편지를 집어들었다. 학생부로부터 오늘 아침 전해진 그 편지에는 오거스트 롤레인이란 서명과 함께 자신의 연구실로 찾아오라는 간략한 말이 적혀 있었다. 아킨은 쉽게 '오거스트 롤레인'이 어제의 여교수일 거라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어떤 교수냐고 루첼에게 물어볼까 하고 생각해 봤지만,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도서관으로 나간 루첼은 오늘 저녁 먹을 때 나 돌아올 것이다. 아킨은 거울을 보고 셔츠 칼라를 다듬은 다음 방을 나섰다. 학교에서 가장 큰 곳 중 하나인 마법부 교수관은 기숙사와는 좀 떨 어져 있었다. 차갑고 맑은 아침 공기에 흠뻑 젖은 한가로운 하얀 길을 걸어, 아킨 은 반시간쯤 뒤에 그곳에 도착했다. 우선 1층에 꽂힌 안내판을 보고 롤레인의 방을 알아낸 다음, 2층에 있는 그녀의 연구실로 올라갔다. 교수를 만나러 건물 안을 서성이는 학생들이 간간이 보였고, 그들 모두 초록색 휘장들이었다. 그리고 2층의 복도를 지나, 오거스트 롤 레인-마법부, 라는 문패가 걸려 있는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는 누구 냐-라는 말이 나른하게 들려왔다. 아킨은 잠시 숨을 가다 듬고는 정 중히 답했다. "아킨토스 프리엔입니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고, 의자 끄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녀가 말했다. "들어와." 방은 두터운 커튼이 단단히 쳐져 있어 침침했고, 환한 아침 임에도 램프로 안을 밝히고 있었다. 방안은 책으로 가득했고, 그녀의 책상 에는 두터운 책과 작은 수정구 하나가 놓여있었다. 어디선가 낮은 음악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오거스트 롤레인 교수는 역 시 어제 봤던 그 여자였다. 어깨까지 찰랑이는 갈색머리에, 까만 눈 동자는 활기차게 반짝였다. 롤레인은 책상에서 안경을 찾아 얼굴에 끼우고는 말했다. "가까이 에서 보니 아주 예쁘장하게 생겼네, 아킨토스 군." ".......저를 아십니까?" 롤레인이 웃으며 말했다. "넌 모르는데, 컬린은 알지." 아킨의 입술사이에서 신음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모든 신경 이 귀에 달린 은 귀걸이로 확 쏠려갔다. 롤레인이 카펫이 깔린 바닥을 소리 없이 걸어오더니, 그 귀 쪽으 로 손을 뻗었다. 아킨은 뒤로 탁 물러나 버렸다. 무안해진 롤레인은 두 손을 들어올리더니 말했다. "미안, 아주 신경 쓰는 가 보구나." "대마법사 컬린과.....아니, 이것에 대해서 대체 어떻게 알고 계시는 겁니까." 아킨의 눈에 경계가 잔뜩 어려 있는 것을 발견한 롤레인은, 편안하 고 느긋한 얼굴이 되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컬린은 내 스승이거든." "스승이요?" 롤레인이 덧붙였다. "직계 스승이지." "그에게 직계 제자도 있었습니까?" 아킨이 노골적으로 의심스럽다는 듯, 아니 불신과 비웃음까지 담아 말하자 롤레인은 손가락 세 개를 들어 보였다. "악튤런 파노제, 탈로스 고르노바, 오거스트 롤레인. 바보라서 모른 다면 이렇게도 가르쳐 주지. 천둥의 악튤런, 전능의 탈로스, 눈보라 의 오거스트." 이제 아킨은 차마 '난 모릅니다.' 라고 말하기 어려워졌다. (게다가 '바보' 라니....) 사실, 어딜 가나 '대마법사 컬린의 제자'라고 으스 대는 사람은 한둘씩 꼭 있었고, 베넬리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옷깃한 번 만져 봐도 자기가 컬린의 대단한 총애를 받은 사람이었던 것 마냥 떠벌려 대니, 그 중에서 진짜를 찾는 것은 차라리 귀찮은 일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아주 구체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었고 그리 말 하니 정말 같았다. "한 9년 전에, 사부는 내게 편지를 보냈었다. 어떤 저주에 걸린 꼬 마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그 아버지의 부탁에 따라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했지. 이 종족의 마법이 개입한 저주에 걸린 것 같은데, 그 자체를 해결 보는 것은 어렵다, 그러니 '억제', 또는 '변형' 하는 쪽으로 연구해서 도와주고 싶다고 했었다." '도와주고' 라는 말에 아킨은 실소하고 말았다. "아버님께서는 적지 않은 대가를 치렀습니다. 그러니, 그 분의 자비 심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요." "말 한번 귀엽게 하는 구나. 더군다나, 컬린을 돕느라 꼬박 석 달을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서재에 파 묻혀 있던 바로 이 내 앞에서 말이 야." 그리고 롤레인이 안경을 쓱 밀어 올리며 눈을 번득였다. "물론 나는 그 노친네한테 돈 한푼 못 받았고." "...죄송합니다." "물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어쨌건, 노친네 말에 따라 '내가 멍청 해서' 그리 고생한 거라 치고......그래서 그 일 때문에 나는 너에 대 해 아주 잘 알게 되었다. 네 저주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네 집안 에 어떤 불행을 가져다주었는지, 대체 왜 벌어졌는지 까지도." 불쾌하다- 아킨은 자신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 다. 이런 곳에까지 자신을 '아는' 사람과 만나고 싶지는 않았었다. 더군다나, 저렇게 노골적으로 다 아는 사람과는. 아킨은 어렵게 말했다. "다...말했습니까." "다. 확인하고 싶다면 한번 말해보도록 하지. 자, 너희 아버지는 스물 네 살 되던 해 어둠 숲에서 뭘 했을까." "그만 두세요!" 아킨의 이가 와득 맞물렸다. 어린 소년이 온 몸으로 내뿜는 매서운 적대감에 롤레인은 실소하고 말았다. "학생, 머리털 곤두세우지 마. 아무리 '위대한 대마법사 컬린'이라도, 도움 받아야 할 때는 받아야 하니까. 내 도움을 받기 위해 저주의 원인 에 대해 말하는 건....당시의 그로써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래서, 제게 원하는 게 뭡니까!" 책을 뒤적이던 롤레인의 손이 멎고, 안경을 낀 까만 눈이 엄격하고 차가워지더니 아킨을 향했다. 그리고 지팡이를 들어 아킨의 턱을 똑 바로 가리켰다. "아킨토스 프리엔 군, 여기까지 이르는 네 열 여섯의 생이 평탄하지 못했다는 것쯤은 자세히는 몰라도 짐작은 하고 있어. 또, 발정 난 살쾡이 긁어 놓은 듯 붉은 줄이 닥닥 그어진 네 학적부도 봤고. 하 지만 초면에 나이 많은 여자 앉혀 놓고 그렇게 눈 치뜨고 왈왈 묻 는 것은 무례라고 보는 데." "무례는 교수님께서 먼저 저지르셨습니다. 이런 식의 호기심은, 또 집안의 치부를 들추시는 것은 불쾌합니다." 롤레인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태연하게 말했다. "에파뇰 산(産) 고양이도 너보다는 말 잘 듣겠구나." "......." "그런데 그 컬린이 얼마 전에 내게 편지를 보냈었어. 지금은 여행을 떠 나야 할 것 같으니, 만약 네가 학교에 진학해서 마법에 뜻을 둔다 면, 행여나 나와 만날 일이 생긴다면 그 은봉인이 잘 되어 있는지, 상 태가 나빠지거나 한 건 아닌지 자기 대신 알아 봐 달라고." "아주 훌륭했으며 만족스러웠다고 전해드리시면 될 겁니다. 그리고 이걸로 끝내 주셨으면 합니다." 롤레인이 잠시 말을 멈춘 채 눈썹을 밀어 올렸고, 안경이 움직였다. 까만 눈 위로 깊이 있는 무언가가 스쳐지나갔다. "이 상황에서 내가 화를 버럭 내면, 너 역시 화를 버럭 낼 테고, 네 가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 그래왔듯.....나 한 대 칠 거니?" "네?" "한대 칠 거냐고 물었다." 아킨은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롤레인이 말했다. "컬린의 관심은, 자신의 성과를 자랑스레 확인하고 네게 엎드려 감 사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안전'에 대한 걱정일 뿐이야. 나 는 그를 잘 알고, 그 역시 나를 잘 알지. 그는 논문제출 할 수 없는 것은 성과로 치지 않고, 너는 논문제출이 절대 불가한 케이스라 순 수한 호의로 모든 것을 해주려는 거야." "어째서 논문거리가 되지 못한다는 거죠?" 비꼬는 것이 역력했지만, 롤레인은 넋 나갈 정도로 태연하게 말했 다. "너무 특이한 케이스로는 논문을 쓸 수 없어. 학회가 바라는 것은 '모든 진실을 지배하는 법칙'이지, '희귀병' 환자에 대한 건 아니거 든." 그리고 롤레인은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즉, 너 하나만을 위한 연구는, 모두를 위한 연구가 될 수 없고, 결 국에는 돈이 안 된다는 거야. 네 아버지가 준 돈은 내 예상컨데, 그 노친네 손버릇으로 단 삼일만에 아작 냈을 테고. 그러니 은봉인은 컬린이 예술품 만드는 심정으로 만들어 낸 거라고. 이유는 묻지마. 마법사는 원래 누구나 희얀한 자존심이 있는 족속들이고, 필수 조건 이기도 하며...그 노친네는 특히 괴상한 인간이었으니까." "......." "그러니 자, 이젠 그런 앙증맞은 눈초리는 집어치우고 내가 하는 말 이나 잘 들어. 난 내 스승과의 약속을 지켜야 해." "정말 목적은 뭡니까." "고집불통이네. 분명 호의라고 했다." "목적 없는 호의는 없습니다." "세상사는 지혜는 있지만, 사람 볼 줄은 모르는군." "네?" "네 발칙함에 대해서는....오늘 하루는 꾹 참기로 하겠어. 넌 나를 모 르고, 나 역시 너를 잘은 모르는 데다가, 나는 학생 다룰 줄조차 모 르는 교수니까. 하지만, 나는 네 상황에 대해서는 잘 알고, 너 역시 네 처지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 테지? 네 일이니까." 아킨은 잠자코 그녀의 말을 기다렸고, 롤레인은 자답하듯 말을 이었 다. "내가 다른 교수들 보다 훨씬 편할 거야. 모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네 귀에 달랑거리는 근사한 물건에 대해 대번에 관심을 표할 것이 고, 곧 너를 들들 볶아대며 귀찮게 할 테지. 하지만 난 잘 아는 데 다가, 진절머리까지 날 지경이라 널 귀찮게 할 일도 없어." "교수님의 학생이 되라는 말씀이십니까?" "빨리도 알아챈다. 그래." 아킨이 실소했다. "담당교수님은 정해진 걸로 아는 데요." "그 망할 놈의 돼지 총장이 내가 말 꺼내기도 전에 네 담당으로 얼 간이 율버 교수를 정한 거야. 하지만 그건 나와 네 담당인 율버 교 수, 그리고 네 서명만 있으면 얼마든지 바뀔 수 있어. 아직 두 달이 지나기 전이니까." "......" 아킨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그녀가 거짓은 없을 거라 판단했다. 교수씩이나 하는 여자가 어린 아킨을 상대로 치밀한 거짓을 말할 리는 없고, 어설픈 거짓을 알아볼 눈 정도는 아킨에게도 있었다. 그 러나, 역시나 누군가 '아는 사람'이 옆에 있는 것은 싫다. "율버 교수님을 만나 뵙고 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아킨은 그 편이 나을 거라 생각했다. 지도 교수를 하루만에 바꾼다 고 하는데 좋아할 교수도 없다. 특히,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전학생 이 그렇게 말한다면 말이다. 설마, 허락하지는 않겠지. 그러나 롤레인의 얼굴은 대번에 환해졌다. "율버 교수의 방은 저 반대편 끝이야. 어서 갔다 와." 아킨은 인사만 하고는 방을 나가, 곧장 율버 교수의 연구실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3분 정도 지체한 뒤, 아킨은 자신에게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작가잡설: 조아라 연재 게시판...상당히 편리한 구조군요. ^^;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2장 **************************************************************** [겨울성의 열쇠] 제5편 시작#2 ***************************************************************** 아킨이 들어오자 마자, 롤레인 교수는 뒤집어 질 정도로 크게 웃음 을 터뜨렸다. "파하하하, 역시나---!" "......" "어제 말했더니, 율버가 아주 날아갈 듯 좋아하더라고. 아, 하하....이 런, 눈물이 다 나오네. 그래서 그날로 다 끝내 버렸지." "......" 아킨은 손에 든, 이미 두 개의 서명이 끝난 신청서를 롤레인 옆에 놓았다. 그리고 펜을 집어 맨 아래에 서명을 끄적거린 다음, 손을 벌리고 있는 롤레인에게 건네주었다. 롤레인이 물었다. "뭐라 그래?" 아킨은 험악해지려는 표정을 애써 다스리며 답했다. "담당하는 학생이 워낙에 많다더군요. 그래서.......'한가하신' 롤레인 교수님을 찾아가라고....." 롤레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신청서를 접었다. 아킨이 여전히 시큰둥하 자, 롤레인은 히죽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저를 싫어하는 사람 마음에 들 생각은 별로 없습니다." "좋은 자세야, 아킨 군." 그리고 그녀는 손바닥을 서 너 번 짝짝 마주치고는 아킨에게 말했 다. "그래, 우선은 베넬리아에서 어느 정도 배웠는지 알아야겠....." 아킨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승급시험은 통과했습니다." "승급시험과 네 실력은 별개문제야." 그렇게 말하고는, 롤레인이 아킨을 바라보았다. 아킨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모를 그 장난끼 가득한 눈을 마주하며, 그래도 지고 싶지 않아 억지로 냉담하게 물었다. "어째서죠?" "성적표를 보니 넌 수석과 꼴찌를 아주 능란하고 다채롭게 하고 있 더군. 즉, 너는 닥치는 시험에는 아주 강한 체질이야. 하지만 벼락공 부로 때우는 임기 응변과 네 실력은 분명 차이가 있어." 아킨은 도전하듯 말했다. "그럼 교수님께서 시험해 보십시오." "물론 그럴 생각이야." 그녀는 손가락만 움직여 간단한 수인을 맺었다. 그 손끝에서 빛이 스며 나오더니, 파문처럼 둥글게 퍼져나갔다. 그리고 둥근 동심원이 그 둘을 감쌌고, 곧 은으로 된 테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공간분리- 아킨은 어렵잖게 그 마법을 알아볼 수 있었다. 교수들이 1대 1로 학생들을 가르칠 때 만드는 공간이었고, 교수의 재량에 따 라 이 안에서 어떤 마법을 쓰든 밖으로는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다. 개인지도를 할 때는 교수들 대부분 이 방법을 쓴다. 곧 원이 네게의 점이 당겨지며, 공간의 경계는 네모진 테두리 로 변 했다. 롤레인은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며 물었다. "지팡이는 쓰지 않겠지?" "네." "방식은 델-파사. 단계는 내 임의로 정한다. 난 변덕이 심해 뒤죽박 죽이니 절대 안심하지 말고." 아주 고전적인 방식의 시험이었다. 교수가 여러 급수의 마법을 차례차례 행하면, 학생은 그에 맞는 급 수의 마법을 시전하여 맞서는 것이다. 겨루는 것은 아니며, 이기던 지던 상관없지만, 그 급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그것은 아주 전통적 인 것이었으며, 학교에서 오래 쓰이는 것이 늘 그렇듯 그만큼 점수 매기기 편한 방법이기도 했다. 아킨은 두 손을 가슴 앞으로 모으며 말했다. "좋으실 대로하십시오." 롤레인의 마법사답게 긴 손가락이 탁탁 움직이며 수인을 맺었고, 빠 르게 주문이 흘러 나왔다. 목소리는 작았으나, 아킨은 그녀가 시전 하려는 마법이 무엇인지 느낌만으로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그녀 의 손끝에서 붉은 무리가 어리고, 손바닥 안에서 금빛의 열기가 뿜 어져 나왔다. 아킨은 두 손으로 수인을 맺었다. 한 손으로 끝낼 정도로 강하지는 못한 그였으니, 그녀와 같은 정도의 시전을 위해서는 두 손이 다 필 요했다. 손끝에 하얀 빛 무리가 어렸다가, 곧장 날카롭게 솟구치며 밖으로 뻗어 나갔다. 금빛의 열기가 산산조각 나고, 롤레인은 팔을 거두고 는 웃으며 말했다. "통과." 그리고 롤레인은 다음 마법을 시전 했다. 목소리는 조금 높아졌고, 그녀의 손끝에 어리는 마력 역시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푸른 빛, 그것이 냉기를 뿌리며 흩어졌고 사파이어처럼 빛 났다. 아킨은 역시 어려움 없이 다음 그에 응할 수 있는 고급 마법 을 골라 시전했다. 새빨간 일렁임이 퍼지고, 그것이 아킨의 주변을 감싸며 불길처럼 터지더니 그 반짝임을 와락 삼켜 버렸다. "통과.....자, 이제부터 정말 시작이다." 아킨은 역시 어려움 없을 거라는 듯 태평하게 그녀를 보다가, 롤레 인의 손끝이 뿌리는 마력과 그녀의 주문을 듣고는 예상과 너무 틀 린 것이라 당황했다. ".....저, 저기--!" "그런 주문은 없어요, 아킨 군." 롤레인이 말했다. "수건 필요해?" ".......놀리시는 겁니까." 드디어 롤레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파, 하하하하하하---!" 아킨은 정말 '창피해서' 입술을 꾹 누르고는 얼굴을 돌렸다. 머리카 락은 물에 흠뻑 젖어 있었고, 파랗게 질린 입술은 참고는 있었지만 오한 때문에 달달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꼬락서니 멋지군, 아 킨은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짐작한 바로군. 네가 어떻게 승급시험을 통과했는지 말이야." 아킨은 솔직하게 시인했다. "......점수 높은 것만 공부했으니까...요." "그리고 점수 낮은 기초는 아---예 모르지, 너?" "......" 아킨은 그녀의 정말 이기 때문이었고, 이렇게 노골적으로 말하는 사 람과 만난 것도 처음이었기에 대꾸도 못했다. "너 같은 타입은 아주 잘 알아. 요령 좋고, 머리도 그럴싸하게 돌아 가니.....시험 점수 잘 따는 법을 기가 막히게 잘 알지. 하지만 마법 은 시험만으로 배우는 게 아니라고. 꾸준히, 제대로 익히고, 시험은 그저 '아, 이 정도는 합니다.'라는 객관적인 숫자 놀음에 지나지 않 아." "에취-!" 롤레인은 웃음을 힘껏 참으며 젖은 생쥐 꼴로 달달 떠는 아킨을 보 았다. 아킨이 눈 꼬리를 올리며 롤레인을 쏘아보았지만, 롤레인은 손을 훼훼 치며 키득거릴 뿐이었다. "나중에 감기약 줄게......그렇게 보지마, 아킨 군. 어쨌든 기초가 꽝 이면 졸업시험을 통과한다 해도 형편없는 마법사로 머물 뿐이라고."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졸업.....에취! 이 목적......에취!" "아아, 그래서.....물벼락조차 막지 못하는 초, 3류 마법사가 되어도 상관없다....이거지? 맙소사, 2대 명문과 유명 왕립학교를 세 개나 거 친 녀석이 3류 라. 난감해, 정말." "....." 그 말이 아킨의 자존심에 금을 빠직 냈다. "뭘 어쩌라는 말입니까." "나한테 기초부터 다시 배우라는 말이야.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많 은 희생과 노력과 인내가 따라야 할거야. 필수 과목이 끝나는 대로 나한테 달려와서 차근차근 배워야 할 테니, 동기들과 노닥거릴 시간 은커녕 한가로이 산책할 시간조차 없을 테지. 또, 교양과목 배울 시 간도 없으니....마법부 외의 교수 강의를 들을 수도 없을 거야." "즉?" "졸업은 해야 할 테니 필수 과목은 듣고, 나머지 시간은 모두 나와 의 공부에 투자하라......이 말이란다. 물론 이번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성적은 별반 좋지 않겠지. 그러나 다음 학기부터는 차근차근 올라 가, 졸업할 때 즈음에는 상위권으로 넉넉하게 졸업하게 될 거야. 시 야를 길게 잡고, 느긋하게 마음먹고 나간다면 말이다. 내가 마음에 들면 내 연구생으로도 받아 줄 수 있어." 놀랍도록 만족스런 조건이다. 그렇게 되면, 그 누구와도 부딪힐 일없이 남은 3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담당교수가 있으니, 다른 교수들이 아킨에게 뭐라 할 수도 없게 된다. 롤레인이 이 학교에서 어느 정도의 영향력이 있 는 지는 모르겠으나,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고 있으니 분명 그런 호기심으로부터 차단해 줄 것이다. "어차피 너는 다른 아이들과는 틀려. 그리고 너 역시, 그들과 억지 로 어울릴 생각은 없을 테고... 그건 어쩔 수 없는 네 운명이야. 벗 어 날 수도, 그리고 벗어날 생각도 없겠지." "....압니다." 알고는 있었고, 그리 살아온건 사실이었지만, 크게 아쉬운 것은 없 었다. 비밀을 나눌 사람도 없고, 그 비밀을 감당할 사람은 더더욱 없을 것 이다. 어머니조차 감당하지 못하고 미치게 만들어 버렸고, 아버지의 나머지 인생을 증오로 채우게 했다. 모든 것을 알고 보았음에도 그 의 어깨를 안아준 것은 이복형인 자켄과 하녀 메리엔 뿐이었으며, 그들은 그 것을 감당해야 할 이유가 있었으며 이겨 낼 만큼 강하기 도 했다. 그러나 그들 이상의 이해자이자 동반자를 얻게 되리라고는, 그리고 그 비밀을 감추고서라도 같이 있고 싶은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기대 하지 않고, 바라지도 않았다. 억지로 우겨 넣고 싶지도, 넣을 수도 없는 것이 지금의 그였다. 또한, 아무에게도 강요하고 싶지도, 실망 하고 싶지도 않은 것이 지금의 그이기도 했다. "하지만......" 롤레인이 말했다. "......차라리 혼자 살아가는 법을 배워봐, 아킨토스 군." "지금까지도 혼자 살아왔습니다." "고독과 추방은 분명 틀려, 아키." 아킨은 입을 다물었고, 롤레인은 말했다. "정말 제대로 혼자 살아간다는 건 무리 속에서도 당당하게 혼자로 써 살아가는 거야. 도망치고 외면하고, 결국 그들이 너를 내 쫓게 하는 게 아니라. ......알겠어, '암롯사'의 아킨토스 프리엔?" 이곳으로 와서 처음으로 듣게 된 자신의 가문의 이름에, 아킨은 눈 길을 떨구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예전처럼 불쾌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녀의 입에서는 너무 도 자연스럽게, 마치 아킨토스 뒤에 '프리엔'이 오는 듯 그렇게 들려 왔다.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룸메이트의 담당교수가 바뀌었다는 말에, 정 오 즈음에 율버 교수를 찾아온 루첼은 조금은 당황했다. 게다가 율 버 교수의 얼굴의 빛이라도 뿜어낼 듯 훤해, 그 학생을 얼마나 몸서 리치게 귀찮아하고 있었을 지 짐작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대체 어느 정도로 골치 아픈 전입생이기에 그 율버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지, 루첼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율버라면, 담당학 생이던 연구생이던 가르쳐야 할 제자가 아니라 월급 안 줘도 되는 하인쯤으로 생각하는 작자다. 온갖 잡일은 다 시키고, 심지어 시험 기간에 불러서는 한가하게 논문 정리나 시켜댄다. 이러니 학생들에 게 아주 인기 없는 교수였으며, 그런 만큼 학생 하나 더 들어온다면 연구실 바닥을 방방 굴러다닐 정도로 기뻐한다. 물론 그는 실적도 우수하고, 왕실 훈장을 두 번이나 탈 정도의 상당 한 마법사였다. 뿐만 아니라 다른 교수들처럼 담당학생을 정하면서 그 부모들에게 이런 저런 돈들을 챙기지도 않는다. 그 덕에 다른 교 수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받아주지 않던 루첼이 그 밑으로 들어가 게 된 것이고. 사실을 말하자면, 루첼은 롤레인이나 카신저 교수 밑으로 가고 싶었 지만, 그들은 돈을 받지도 않고 귀찮은 일도 시키지 않는 대신 학생 들의 앞날은 철저히 자기 소관으로 맡겨 놓는다. 칭찬 후한 추천서 를 써주지도 않고, 또 학생 하나를 이런 저런 자리로 밀어 넣어 줄 정도의 정치력도 없다. 루첼은 공부는 더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무 관심한 교수들 밑으로 들어가는 것은 조금 난감했다. 학업에만 전념 할 것이라면 오히려 그런 교수는 스승이자 연구의 동반자로서 훌륭 할 테지만, 루첼은 그럴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율버가 훈장수상 경 력이라도 있기에, 그 밑으로 꾹 참고 들어간 것이다. 물론 별로 현 명한 선택은 아니었지만. 루첼이 떠보듯 물었다. "어디서 전학 온 학생입니까?" 역시나 단순한 율버는 루첼의 속셈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단번에 말했다. "베넬리아 국립 마법원에서 '쫓겨났지'." "네?" 루첼은 탄성을 질러버릴 뻔한 것을 겨우 억눌렀다. 맙소사, 그정도 되는 곳이었나. 율버가 물었다. "그래, 어제 보니 어떤 학생이던가." "......말없고 얌전한 편이었습니다." "첫날부터 사고 칠 수는 없을 테니 그리 한 거겠지......아, 맞다, 루 첼 군. 그 학생이 뭐라 시비를 걸던 간에 무조건 참도록 하게." "네?" "꽤 명문가 출신이라더군. 자세히는 모르지만, 뭐....제국 어디 백작 가나 후작가 쯤 되나봐. 지난 학교에서는, 문제를 일으켜도 그 상대 역시 명문가라 공평하게 처벌받을 수 있었지만....자네는 아니잖나. 문제 일으키면, 좀 냉정한 소리네만 학교에서는 그 학생을 보호하지 자네를 보호하지는 않을 거야. 즉, 자네 학적부에 금갈 테고, 후원금 도 자칫 중단될 수 있네. 무슨 일이 있어도 참게. 알겠지?" "......네." 루첼은 쓴웃음을 삼켰다. 그게 아니라, 행여 정학이라도 맞아서 부 리는 손이 줄어들까 무서운 거겠지. 율버 교수가 손을 흔들며 말했 다. "이만 가 보게, 이번 학기도 열심히 하고." "안녕히 계십시오." 루첼은 꾸벅 인사를 하고는 교수의 연구실을 나왔다. 복도에는 늦여름의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고, 먼지들이 어지러이 휘 청였다. 그리고 그는, 끝의 방에서 나오는 초록색 휘장의 소년과 마 주쳤다. 그 눈동자가 루첼을 향했지만, 이내 무관심하게 흐려져 버 렸다. 루첼은 그가 '명문가의 자제'임을 새삼 돌이켜 보며, 그 스스 로 가지고 있는 편견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데칼런 반도에서는 드문 은빛 머리카락이었다. 대륙인이겠지, 아마 도. 체격은 전체적으로는 날씬한 편이었지만, 어깨는 꼿꼿하고 걸음 걸이도 잘 다듬어져 있었다. 저리 보여도 몸싸움은 아주 잘 할 것이 며, 검술 훈련이나 체술 훈련을 꾸준하게 받은 적이 있을 것이다...... 손발의 골격이 잘 잡혀 있으니, 두 어살 더 먹는 동안 키도 크겠고. 루첼은 그가 지나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킨 역 시, 무관심하게 그를 지나쳐 버렸다. 그것은 오만함이라기보다는 철 저한 무관심과 자신으로부터의 완벽한 배제였다. 루첼은 계단을 내려가는 그의 뒷모습을 내려다보다가, 곧장 기사부 의 쥰을 찾아갔다. 이제 생각난 것이 있었다. "베넬리아에 있던 우리 작은누나? 당연히 만났지. 이번 학기로 졸업 했잖아....." 쥰은 고개까지 끄덕이며 그렇게 말하고는, 곧바로 심드렁하게 덧붙 였다. "그리고서는 이렇게 말하지. '어머나, 우리 쭈우우운~~~ 넌 언제 졸 업하니?' 재수 없어, 정말!" 겨우 한 살 위인 누나였지만, 쥰이 두 번 낙제하는 동안 그녀는 벌 써 졸업을 해 버린 것이다. 방학 동안 그 똑똑한 누나에게 꽤나 쪼 였는지, 그는 투덜투덜 대며 연습장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데 그건 왜 물어? 연구생 편입 알아보러?" "......." 루첼은 망설이다가, 쥰에게는 숨기는 게 없는 편이 나았고 숨겨도 며칠 만에 알아낼 게 분명해서 결국 작게 한숨을 내 쉬고는 말했다. "아킨토스 프리엔이라고 알고 있어?" 금새 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교수 턱 날리고 정학 먹은 그 아킨토스 프리엔 말이냐?" "교수를 때려?" 쥰은 손가락 세 개를 들었다. "세 명. 그리고 이번엔 드디어 퇴학당했다던데." "....." 더 엄청나다. 그런데 쥰이 고개를 꺄우뚱하며 물었다. "그건 그렇고 그 놈 이야기는 왜 물어? 네가 어떻게 알고." 루첼은 난감하게 말했다. "어제 마법부로 편입해 들어왔거든." "......." 그리고 쥰이 말이 없자, 루첼은 한마디 더 덧붙였다. "지금 내 룸메이트고." 슬쩍 보니, 쥰은 입만 딱 벌리고 있을 뿐, 연습용 검이 머리를 베어 버려 이마에서 피가 철철 흐르고 있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루첼은 저걸 말할까 말까 하고 생각하며 그 앞으로 손을 저어보았 다. "어이, 쥬나드렌--" "루츠.....너, 당장 짐 싸서 내 집으로 들어 와!" "응?" "그 녀석이 급우 폭행만도 몇 건인데! 세상에, 그 흉폭한 녀석이랑 같은 방을 써? 당장 와---! 단언컨데, 두달 만에 죽을 거야, 넌!" *********************************************************** 작가잡설: 칸도스 율버 교수의 모델은.....제가 아는 어느 언니의 지도 교수님입니다. 그리고...... 그 언니는 석사 졸업 다섯달 남겨 놓고 짐싸들고 나왔더래요;;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3장 *************************************************************** [겨울성의 열쇠] 제3장 정적 속의 자취 제6편 정적 속의 자취#1 *************************************************************** 쥰의 걱정과는 달리, 전입생은 한 달이 지나도 조용했으며, 루첼은 편안한 기숙사 생활을 계속 할 수 있었다. 초록색 잎들은 언뜻 언뜻 노랗게 바래기 시작했고, 해가 짧아지며 재빨리 찾아오기 시작하는 저녁은 제법 싸늘했다. 우왕좌왕하던 자그마한 신입생들은 차츰 자리들을 잡아갔고, 새 학 년으로 올라간 학생은 한단계식 높아진 학과수업을 따라가며 곧 닥 칠 중간고사를 준비해 나갔다. 난잡하게 정리되던 노트들은 여기 저 기서 깔끔하게 정리된 정리본으로 진화해 서로의 책상을 오고갔고, 공부벌레들은 벌써부터 이런 저런 선물들을 받고는 노트를 건네주 었다. 그리고 고등부 수석인 루첼은 저녁 먹는 즉시 놀러가려는 쥰 의 귀를 붙잡고 도서관으로 향하는 것이 하루 일과가 되었다. 그 모든 것이 매해 반복되는 모습들이었지만, 오거스트 롤레인 교수 는 평소에는 받아 보지 못한 편지를 받아보게 되었다. 학회 때나 가끔 보던 고향이자 모교인 베넬리아의 교수들이 보내온 것으로, 반쯤은 호기심에 반쯤은 그 호기심을 감추려는 허튼 예의로 채워진 편지였다. 그리고 그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어째서 '그 학생' 에 대한 소식과 원망이 전해지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아킨이 로멜로 떠난 뒤, 다들 몇 달 전에 창고에 밀어 넣었던 술이 잘 익었는지 확인하고 싶어 조바심 난 사람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 었는데, 때가 되어도 아무 소식들이 없으니 결국 그 쪽에서 먼저 편 지들을 보낸 것이다. "아키, 너.......샤파토이 교수라고 알고 있니?" 롤레인은 연구실 소파에 앉아 책을 들춰보고 있는 아킨에게 그렇게 물었다. 아킨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책장을 뒤적뒤적 거리며 말했 다. "제 두 번째 담당 교수님이셨습니다." 롤레인은 편지를 흔들며 말했다. "안부 묻는 구나. 건강히 잘 있냐는 데." 책장을 넘기던 손이 멈추었고, 아킨은 드디어 찾던 것을 발견한 듯 책을 손바닥으로 세게 문지르고는 답했다. "제 안부가 아니라 교수님 안부겠죠. 턱뼈가 무사한지, 말입니다." "턱뼈?" "은봉인과 그것이 풀렸을 때의 제 변화에 대해 관찰해 보고 싶다 하시기에, 그것이 무례라는 것을 제 방식대로 가르쳐 드린 것뿐입니 다." 그리고 아킨은 턱을 두 어 번 툭툭 두들겼다. 롤레인이 쿡쿡 웃었 다. 화려하게 등장하긴 했으나, 전입이래 근 한달 반 간 아킨은 아주 얌 전한 학생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거의 눈에 뜨이지 않는 다 는 편이 옳았다. 아킨은 한번 마음을 잡자 아주 고분고분했고, 롤레 인 역시 이래라 저래라 까다롭게 말하는 스승은 아니었다. 또, 아킨 에게 사고를 일으킬 사건 자체가 없기도 했다. 그들의 개인 수업이 시작되는 것은 대략 세시였고, 끝나는 것은 무제한. 두 어 시간 가 량 롤레인이 기본 원리를 설명해 주고, 나머지 시간에는 관련된 과 제를 내줄 뿐이었다. 다음 수업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그 과제를 다 끝내야 했기에, 아킨은 최대한 빨리, 또 성공적으로 과제를 마쳐야 했고, 그 때문에 나머지 시간들도 롤레인의 연구실에서 보내게 되었 다. 다른 수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아킨은 교양수업은 신청하 지 않았고, 베넬리아와 압셀론에서 교양을 마친 그에게 들을 만한 교양 강좌가 있을 리가 없었다. 전공 수업은 필요한 것만 골라 들을 뿐이었고, 수업 중에도 구석에 얌전히 앉아 듣거나 졸거나 둘 중 하 나였다. 그런 학생들은 구석진 자리에 넘치도록 있었기에 교수들도 구태여 문제 삼지 않았다. 그 외에 아킨을 볼 수 있는 시간은, 도 서관 장서실을 게으른 고양이처럼 느릿느릿 오고 가며 책을 골라 들 때뿐이었다. 조용한 일상만큼 잘 듣는 망각의 약도 없는 법이다. 이렇게 다른 학생들과 만날 일이 없어져 버리니, 처음에는 이 외국 인 학생에게 호기심을 보이던 학생들은 대상이 아예 보이지 않자 차츰 잊기 시작했다. 교수들도 드디어 저 학생이 정신차리고 개과천 선했다, 하며 가슴 쓸어 내리고는 8월에 그들을 고뇌로 밀어 넣었던 문제 많은 전입생 문제를 깔끔하게 잊어 버렸다. "...다 끝났습니다." 아킨은 마법원 아래에 마무리 주문을 적은 후 롤레인에게 내밀었다. 롤레인은 종이를 받아 들고 한번 가볍게 훑어 본 후, 그 종이 모서 리 위로 까만 눈길을 치켜들며 말했다. "시전." 아킨은 왼손을 위로, 오른 손은 아래로 하여 주문을 외웠다. "다케노이 위다-사스타......." 주문과 함께 방금 전까지 쓰던 탁자 위로 검은 그림자들이 스며 나 오며 팟 팟 작고 얇은 날개들을 펼쳤다. 그 위에 하얀 눈동자들이 떠오르더니, 아킨 주변을 잠자리처럼 파닥거리며 날기 시작했다. 롤 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아킨은 왼손을 저었고, 소환했던 정령들은 연기처럼 힘없이 사라졌 다. 롤레인이 말했다. "내일 부터 일주일간은 쉬자꾸나. 곧 중간고사 기간인데, 시험 공부 정도는 해야지." "네." 그리 답하며, 아킨은 시계를 흘끗 보았다. 이제 10시였고, 아킨이 그녀의 연구실에 온 것은 오전 8시였다. 그 는 롤레인보다 먼저 와 과제를 마무리하고 있었고, 롤레인은 아침에 도착한 우편물들을 들고 연구실로 왔다가 아킨과 만난 것이다. 아킨이 물었다. "컬린도 이런 식으로 가르치셨습니까?" "이런 식?" 롤레인이 반문하자, 아킨은 과제물이 적힌 종이를 가리키며 답했다. "........이런 방식 말입니다." "아냐, 그 사람은. 게다가 교수도 아니었는걸." "그럼 어떻게 연구생이 된......거죠?" "아, 몰랐구나. 나는 이런 교육기관의 연구생 과정이 아니라, 직접 마법사의 도제로 들어간 거란다. 내가 베넬리아 마법부를 졸업한 것 은 열 일곱이었고, 한 1년 빈둥거리다가 그 노친네 도제 제자로 들 어가게 된 거야. 난 대마법사 페나크 이전, 즉 페그-라일이 아닌, 고 대문자로 이루어지는 고대 마법에 흥미가 있었고, 그 때 그것을 연 구하고 있던 것은 그 노친네뿐이었거든." "...고대 문자요?" 아킨은 그 말이 낯설다는 듯 반문했다. "고등부 3학년이 되면 저절로 배우게 될 거야. 하지만, 전해진 것보 다 잃어버린 마법들이 더 많아서 별반 중요하게 다루어지지는 않을 테지....어쨌든, 당시의 난 그 구닥다리가 마음에 들어서 그 사람에게 간 것이고, 결국 전혀 다른 것만 배우고 나오게 되었어. 페그-라일 말 이야." "포기하신 건가요?" "아니. 나는 그게 별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이야. 실전 된 위대한 고대마법을 재현하는 것보다는, 아직 무궁한 앞길이 남아 있는 현재, 즉 페그-라일에 전념해서 제대로 된 마법을 만들어 내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거든. 과거는 과거의 사람들, 그 고대마법들을 끌어안고 사라져 버린 고대인의 것일 뿐, 그리고 그것이 재현될 수 있다 하더라도 내 할 일은 아닌 것 같더라고. 그래서 흥미 끊었고, 컬린도 그 편이 더 현명하고 좋은 선택이라 말해주었지.....솔직히, 그도 고대마법에 그리 큰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어. 그는 이것저것 새로운 것을 만들고 싶어하는 혈기 넘치는 마법사였지, 골동품 먼지 를 털어 내서 옛 모습 상상하는 것으로 지루한 나날을 보내는 고고 학자는 아니었거든." 그리고 그녀는 아킨의 귓불에 붙어 있는 자그마한 귀걸이들을 가리 켰다. "하지만 그건 고대 마법에 기초한 마법으로 만들어 진 거지." "이것......말씀이십니까?" "그래. 당시 그는 페그-라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는 해결할 방법을 찾아낼 수 없었지. 그래서, 결국에는 고대 마법으로 찾아내야 했 어......컬린이 내게 조력을 구한 것도 그 때문이지. 고대 마법에 대해 도움이 될 정도로 알고 있는 것은 당시에는 나뿐이었으니까." 아킨은 귀걸이를 퉁겼다. 새삼 궁금해진다. "교수님 이외의 다른 제자 분들은요?" "컬린의 정식 제자는 지난번에 말했던 대로 단 셋 뿐이었는데, 당시 좀 빈둥대는 건 나 뿐이었고, 나머지 둘은.......사정이 여의치 않았 어." 궁금해서 더 물어보고는 싶었지만 아킨은 어디까지 물어도 되는 지 감 잡기 어려웠다. 행여 너무 사사로운 비밀을 물어 무례를 저지르 는 것은 아닌지 싶어서. 그래서 입을 다물었고, 롤레인은 친절하게 말했다. "큰 비밀도 아니야, 아키. 그리고 내 제자가 된 이상, 너 역시 본의 던 본의가 아니던 간에 컬린의 계보에 속하게 된 셈이니까....당연히 알아야 하지." "제가 대마법사의 계보에 들어가게 되는 겁니까?" 비꼬는 것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그러자 롤레인이 말했다. "뭘 그렇게 놀라, 나 봐. 대단한 사람이 그 사람 밑으로 들어가는 게 아냐. 그냥 그 사람이랑 잘 맞는 사람이 들어가는 것 뿐이야." "다른 두 사람은 어떤 분 들이었습니까?" "악튤런은 나보다 한 4년 늦게 들어온 후배야. 지금은 페그-라일 쪽 으로 연구를 집중하는 중이고......그에 대해서는 스물 넘어서 마법사 길드회에 나갈 즈음이 되면 저절로 알게 될 거야. 성질 난다고 제도 길드 소 마스터의 수염을 다 뽑아 버렸을 정도로 괴팍한 녀석인 데 다가, 지금도 여전하니까." 아킨은 지난 번에 롤레인이 '바보'라고 하며 말한 것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세 이름 다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머지 한 분, 탈로스 고르노바라는 분은요?" 롤레인의 눈이 흐려졌다. "탈로스는 컬린의 첫 번째 제자였지. 사실, 컬린이 그를 제자로 받 아 들였을 때 굉장한 화제였어. 컬린이 제자를 받아 들였다는 것 자 체가 기적적인 일이었거든. 하지만 그 사람은......고대 마법과 드래 곤에 완전히 홀딱 빠져 버려서는 10년 넘게 괴상한 탑에 처박혀서 그것들에 대해 연구하는 중이야...컬린이 제일 말리던 길이지." 아킨은 롤레인의 손끝이 안경다리를 만지작거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직도 그 연구하느라 처박혀 있는 중이고.....그래도 아키, 편견은 갖지 말아라. 단지 상황이 그랬던 것뿐이니까." "네?" "너와 비슷한 사람이었거든." 아킨의 눈이 반짝이며 롤레인을 똑바로 향했다. 강렬한 호기심과, 더 큰 기대와 반가움..... 그러나 롤레인이 웃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아키, 네가 좀 더 나은 처지일 수 있어. 너 는 어찌 보면 '병'이라 할 수 있지만, 그는 결코 치유될 수 없는... 그래, 너는 저주지만, 그는 그저 운이 좋지 않아 그렇게 태어난 것 뿐이었어. 그러나 에키롯사의 명문 귀족집안 아들이었던 데다가 머 리도 아주 우수했기 때문에 컬린은 그를 무척이나 아꼈고, 자기 양 자로까지 삼았어. 자신이 없을 때는 자신 소유로 되어 있는 것은 무 엇이든 사용할 수 있도록, 또 어디서든 자신의 이름을 댈 수 있도 록." '이름'을 맡긴 다는 것은, 그 제자에게 컬린 자신의 명예 자체를 맡 겼다는 뜻, 그 정도로 탈로스 고르노바를 신뢰했다는 것이다. "대단히 아꼈군요." "물론이지. 그 정도 파격적인 대우를 받은 사람은 없었고, 없을 테 지. 하지만, 그는 컬린의 기대를 철저히 배신해 버렸어. 마법사로서 의 그 놀라운 자질을, 스스로 너무도 억울한 형벌이라 생각했던 자 신의 모습을 바꾸는데 다 쏟아 부어 버렸으니까.....고대마법과 드래 곤에 대해 심취했던 것도 그 때문이지. 고대 마법에 얽힌 전설들 중 에 모습을 바꾸거나, 그 같은 기형을 고쳤다는 기록은 많으니까. 분 만 아니라 컬린이 네 은봉인을 완성하자, 그는 더욱 열광적으로 그 연구에 집착하게 되 버렸다. 또, 나와 컬린을 교대로 찾아다니면서 연구 기록을 내 달라고 떼를 써 댔고...." "내 줬습니까?" "물론. 문제는 그가 별로 만족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더 큰 문제 는 성격이 영 고약해져 버렸다는 거지.....컬린이 슬퍼할 정도로." 그렇게 말하는 롤레인의 목소리는 많은 것을 담고 흔들리고 흐려지 고, 그렇게 잠겨 들어가고 있었다. 그 속 안에 차 오르는 것이 무엇 인지, 대충 짐작한 아킨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말을 멈춘 그녀의 눈빛이 비추어내는 그것은 너무도 진하고도 차가 운 것이었으며, 분명 서글픈 무게와 회한을 담고 있었다. *********************************************************** 작가잡설: 아마도 이거 쓸 때가 12월 20일 경....대선 끝나고 난 뒤였던 것 같군요. 으흐--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3장 ************************************************************** [겨울성의 열쇠] 제7편 정적 속의 자취#2 *************************************************************** 아킨은 결국 오전 11시 수업에 늦고 말았다. 시계 바늘이 11시 근처인 것을 발견하고는 허겁지겁 일어나 책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강의실로 향했고, 도착했을 때는 이미 율버 교수가 들어와 있었다. 아킨이 조심조심 뒷문을 열고 들어오자, 율 버는 아킨을 흘끗 보고는 다시 책 위로 시선을 내렸다. 아킨은 빈자리를 찾아 강의실 안을 둘러보았고, 중간 즈음에 앉아 있는 루첼의 뒷자리가 빈 것을 발견하고는 그 쪽으로 갔다. 교수의 강의가 가장 잘 들리는 그곳에는 학생들이 가장 적었고, 그 이유는 율버가 시도 때도 없이 변덕스럽게 던져대는 질문을 피하기 위함이 었다. 또, 그것 만이라면 약간 창피한 것만 견디면 되었지만, 율버가 출석부에 체크를 하며 점수를 깎아 대니 필사적으로 피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자리는 언제나 과 내 우등생이었던 루첼의 지정 석이었고, 그는 율버의 언제 튀어나올 지 모르는 질문에도 시원시원 하게 답했다. 율버가 까탈스러운 만큼, 루첼 역시 점수가 깎여나갈 틈을 결코 허락하지 않는 철벽같은 방어선을 가진 우등생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아킨은 율버가 강의할 책을 찾아 펼쳤다. 그리고 앞에 앉은 루첼이 어디를 펼쳤는지 확인하고는, 자신도 그 부분을 펼쳤다. 사실 강의는 거의 듣지 않기 때문에 어디를 어떻게 배우는 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 때 율버가 들고 있던 지시봉으로 책을 내리찍고는 말했다. "다이먼의 제 3응용에 대해 설명해 보게나, '늦게 온 아킨토스 군'." 아킨은 루첼이 앞에서 손끝으로 가리켜 주는 부분을 보고는, 지난 시간까지 배운 곳이 그 부분임을 알아채고 눈길을 내렸다. 율버가 교탁을 탁탁 치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아킨토스 군, 제3응용과, 그에 관련된 힘의 분배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설명해 보라고 했어." 아킨은 성의 없이 답했다. "....모릅니다." 술렁임이 아킨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율버가 지시봉을 척 당겨 어깨에 얹더니, 교단에서 아킨 쪽으로 걸 어왔다. 주변의 학생들이 슬쩍 옆으로 물러나며 침들을 삼켰다. 변 덕스러운 율버의 성격은, 그의 담당학생인 루첼이 가장 잘 알았기에 그는 얼른 손을 들며 교수를 막았다. "제가 해 보겠습니다." "자네는 필요 없어, 루첼 군. 난 아킨토스 군에게 설명을 듣고자 하 네. 그래, 모른다고 아주 딱 잘라 말하던데.....자네는 예습도 안 하 나." 턱 끝으로 다가오는 지시봉을 보며, 아킨은 속이 찬찬히 끓어올랐 다. "교수님께서 지난 시간에 진도를 나간 부분은 아탈론 까지였습니다. 그리고 다이먼은 나가지도 않았으며, 그 응용은 1법과 2법을 완벽하 게 설명하신 후에 물어 보십시오." 캉---! 지시봉의 끝이 책상을 세게 내리 찍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지팡 이처럼 짚고 서서는, 이를 뿌득 물며 아킨토스를 노려보았다. 소심 한 학생들이 움찔거렸고, 루첼은 뒤를 돌아보고는 대체 왜 그랬냐고 묻는 듯 난감한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아킨은 무시했고, 율버의 이 글거리는 눈조차 무시하며 책 위로 눈길을 내렸다. "나가게, 학생." "....." 아킨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율버는 지시봉을 바람소리가 나도록 세 게 당겨 강의실 문을 가리켰다. "다시는 자네를 데리고 수업하지 않을 거야. 교수의 권위를 학생들 앞에서 그렇게 뭉개버려 내 던지는 학생 따위는 상대조차 하지 않 겠네. 또한, 다시는 내 강의에 들어오지도 마--!" "제게는 수업을 들을 권리가 있고, 그것을 일방적으로 박탈하는 것 은 교수님 개인 권한이 아닙니다." 학생들은 정말 더는 못 보겠다는 듯 고개를 푹 떨궈 버렸고, 몇몇 소심한 학생들은 눈까지 꼬옥 감았다. 루첼도 결국 포기하고 고개를 돌리고는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그는 율버의 성격을 잘 알았고, 이렇게 되면 얼마나 끔찍할 정도로 시끄러워 지는 지 잘 알았으며, 여기서 화를 다 풀지 못하면 오늘 저녁에 연구생들과 담당 학생인 자신에게 성질을 부린다는 것도 잘 알았다. (그것이 가장 끔찍했다.) 율버가 불끈거리는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내게는 누군가가 수업을 방해할 경우 그 누군가를 강의실에서 추 방할 권리가 있네." "방해한 적은 없습니다. 단지, 모르는 것을 모른다 말씀 드렸을 뿐 입니다." "그래서, 안 나가겠다는 건가?" "........" 아킨은 눈동자만 움직여 주변을 흘끗 둘러보았고, 학생들이 제발 참 아 달라고 여기 저기서 손짓을 보내는 것을 보았다. 아킨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터운 책을 집어들었다. 학생이 선선히 복 종을 택하자, 율버는 만족스런 웃음을 지으며 교단으로 올라갔다. 학생들도 후우--하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아킨은 책을 세워 들고는 율버의 뒷모습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앞에 있는 루첼은 나중에 자신이 강의 내용을 가르쳐 주겠다고 말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는 아킨의 눈이 노려보는 곳이 어디 인지 눈치챘으며, 책을 움켜진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도 발견했다. 맙소사, 저 녀석이! "아킨--!" 루첼이 수업중임에도 크게 외치며 벌떡 일어났다. 율버가 놀라 고개 를 돌렸고, 그 순간 아킨의 손이 움직였다. 이미 늦었기에, 루첼은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육중한 책이 날아가, 칠판을 엄청난 힘으로 쿠릉 후려치고는 반으로 쪼개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칠판에 금이 쩍 갔고, 유리창이 그 진동 에 부르르 떨렸다. 놀란 학생들이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돌리거나 엎드렸다. "너, 너, 너.....!" 율버 교수는 칠판이 거의 반 조각이 날 정도로 금이 가 버린 것을 발견하고는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아킨은 교단으로 저벅 저벅 걸어 가더니, 반 동강 난 책 조각을 집어든 다음 책 면에 뭍은 먼지를 털 어 냈다. ".....안녕히 계십시오." 아킨은 주저앉아 있는 율버 교수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강의실 앞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아킨이 롤레인 교수로부터의 호출을 받은 것은 그날 저녁 루첼을 통해서였다. 과제가 없어 모처럼 일찍 자고 있던 아킨은, 루첼이 탈 탈 흔들어 대자 눈을 게슴츠레 뜨며 졸린 목소리로 되물었다. "지금....?" ".....그래, 아킨." 저녁에 불려가서 율버 교수가 부려대는 험악한 성질을 한 몸에 다 받으며 달달 볶인 듯한 루첼은, 잔뜩 지쳐 눈의 초점도 잘 맞지 않 는 얼굴이었다. 아킨은 무슨 일로 부르냐, 하고 물어 보려 했지만 루첼인 비틀 비틀 침대로 가더니 풀썩 쓰러져 버렸다. 아킨은 일어 나 그 쪽으로 가 보았지만, 루첼은 귀찮다고 손을 휘휘 젓더니 곧바 로 푹 곯아 떨어져 버렸다. 아킨은 루첼의 안경을 벗겨내 책상 위에 얹어 놓고는 방을 나섰다. 해가 저물었고, 저녁은 벌써 싸늘해져 있었다. 하늘은 검푸르게 가 라앉아 있었고, 지평선과 숲 위로는 아직 번쩍임이 하얗게 끄트머리 만 남아있다. 그 어둑어둑한 길을 걸어, 아킨은 아직도 불이 훤히 켜진 마법부 교 수관에 도착했다. 롤레인 교수의 연구실에 도착하니, 문 밖에서도 들릴 정도로 큰 율버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문이 두터워서 그 소리는 왕왕 짖어대는 소리처럼 들려왔다. 아킨은 걱정 비슷한 거라도 해 보고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오 늘 일은 지난 학교에서 교수를 셋씩이나 때려 눕혔던 것에 비하면 아주 소소한 일 같았다. 그래서 문을 두드렸고, 왕왕 대는 소리가 뚝 끊어졌다. "아킨토스입니다." "당---장 들어와!!!" 율버가 질러댄 엄청난 소리에, 문이 다 떨려왔다. 문을 열자, 방금 전에 만난 루첼 만큼이나 지쳐 늘어진 롤레인 교수 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 얼굴이 시뻘 겋게 달아 오른 율버가 아킨을 보자마자 당장에 외쳤다. "문 닫고 들어와, 아킨토스 군! 자, 이제 정식으로 사과하게 하시오, 롤레인 교수--! 저, 당신의 강의 이외에는 개 짖는 소리 취급하는 잘난 교수님의 잘난 학생에게 말이오!" 롤레인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아키, 사과 드려라." "하지만..." "아키." 롤레인이 목소리에 힘을 주자, 아킨은 잠시 입술을 꾹 물었다가 고 개를 숙였다. 롤레인이 말했다. "됐죠, 이제?" "아직 정식으로 사죄하지 않았잖소!" 아킨은 고개를 더 숙이며 정중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좀 더 정중히 해! 난 오늘 네가 던진 책에 머리가 뭉개질 뻔했으니 까--! 어서!" 아킨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롤레인이, 그렇게 버럭 소리를 지르 고는 성난 황소처럼 씩씩거리는 율버 교수에게 말했다. "나머지는 제가 대신 사죄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아킨이 말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교수님." 율버가 독수리처럼 사납게 눈을 치뜨자, 아킨이 말했다. "오늘의 일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드리겠습니다, 율버 교수님." "그럼, 다시는 그런 난동을 피우지 않겠나? 다시는 말이야!" "전 오늘의 일에만 사죄드릴 수 있을 뿐, 그 다음에는 어찌 될 지 모르며, 모르는 일에 미리 사죄 드릴 수는 없습니다." 율버가 황당하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눈은 더 벌겋게 타오르고 있 었다. "지금 뭐라 했나, 학생?" "사죄는 드리지만 맹세는 할 수 없다 말씀 드린 것입니다. 또, 전 누구에게도 맹세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첫날 분명히 말씀 드렸습니다. 제 스스로 저를 지켜야 할 상황이 되면, 예전의 학교에서처럼 또 문제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고.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전 맹세를 할 수 없으며, 그래도 강요하시겠다 면 저는 지금 상황이 그 때 말씀 드린 '그 상황'이라 판단할 것입니 다." 롤레인이 얼어붙은 율버에게 작게 속삭였다. "한대 치겠다는 말 같은데요." 다른 학생이라면 성질 급한 율버가 먼저 뺨 한 대 호되게 후려갈겼 을 테지만, 저 아킨토스는 그와 말다툼을 벌였던(훈계가 아니다.) 젊 은 교수의 얼굴에 주먹을 박아 넣고는 1층 창 밖으로 내던져 버린 흉악범이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율버는 퇴학 직전 학적부에 기 록된 그 일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율버의 어깨 너머로 간신히 웃음을 참는 롤레인이 보였다. 율버는 손바닥을 꽉 맞잡고 문지르더니, 빠르게 말했다. "좋네. 오늘 일은 이것으로 넘어가 주겠네, 아킨토스 군." "감사합니다." "그럼......잘 있어요, 롤레인 교수. 다, 다시 이런 일이 생긴다면 초, 총장께 보고하겠소!" 롤레인 교수는 책상위를 기어 다니는 개미 한 마리를 꾹 눌러 죽이 며 건성으로 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알아서 하세요." 율버는 바람처럼 후닥닥 롤레인의 연구실을 빠져나가 버렸고, 문이 닫히자 마자 롤레인은 나른히 한숨을 내 쉰 다음 아킨에게 말했다. "오늘 대체 왜 그런 거지." "상황이 그랬던 것뿐입니다, 교수님." "누구나 그 상황에서 교수 뒤퉁수를 향해 책을 집어던지지는 않아. 소심하면 울먹거리고, 좀 성질이 있으면 씩씩대며 문을 박 차고 나 가지." "......" 할말이 없는 아킨은 눈길만 돌렸을 뿐이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아킨은 볼이 달아오르고 목덜미가 불편할 정도로 난감해 져갔다. "그리고....." 그런데 갑자기 롤레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교수님?" 롤레인은 고개를 푹 숙인 채 클클 웃고 있었다. 그리고 한참을 웃다 가 글썽한 눈물을 닦아내더니, 여전히 쿡쿡 거리며 말했다. "다시는 그렇게 하지 마, 아키. 속시원하긴 하다만, 뒷감당이 너무 크다." 순간, 아킨은 갑자기 언짢아졌다. 속에서 뭐가 꽉 뭉쳐서는, 팍 치밀어 올라 입술을 가늘게 떨려오게 했다. 그래서 결국 입술 안쪽을 꾹 물고는 롤레인을 쏘아보고 말았 다. 롤레인이 흐트러진 머리카락 한 가닥을 머리 위로 던져 올리다 가 그 모습을 발견하고 정색을 하며 물었다. "왜 그러지, 아키?" "뭐가 즐거우신 겁니까." "너를 비웃은 적은 없는 데." "그건 제 일이었고, 교수님께서 나설 일도, 즐거워 할 일도 아니라 생각합니다. 또한, 개인 수업 이외의 일로는 그 어떤 도움도 바라지 않습니다. 다음부터는....제가 모두 알아서 처리하겠으니, 교수님께서 는 저 대신 사과하지도, 책임지려 하지도 말아주십시오." 롤레인은 아킨을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너무 나섰다는 말이니?" "...네." 짧고도 단호했다. 불쾌함인지, 아니면 그저 조금 신경질이 나는 것 뿐인지, 뭔가 버거운 것인지.....뭔지 모를 그 안개 같고 낯선 것에 아킨은 당혹스러웠다. 롤레인이 말했다. "아키, 나는 16년간이나 스스로를 고립시켜 왔던 녀석을 내 사랑과 자애로 녹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기대하지도 않거니 와, 나 역시 그런 모성애 증후군에 시달리지도 않으니까. 그래서 나 는 자기 길을 걸어가며 사는 이상 누구에게도 상처 입히지 않고 살 수는 없다는 건 알아. 부딪히면서 깎여 나가는 것이 인간이란 생물 이니까...." 롤레인은 작게 한숨을 내 쉬고는 덧붙였다. "하지만 아키, 조금은 노력해 주기를 바란다. 아주 조금만." 아킨은 뭐가 빠르게 뚫고 지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주 깊은 곳으로 흐릿한 것이 확 번져 들어오는 듯한 그런 것. "나가 봐라. 다음 주에 보자꾸나." "......" 그러나 아킨은 '네', 하고 간단히 답하기 어려워졌고 인사도 없이 방 을 나가 버렸다. *********************************************************** 작가잡설: 어떻게든 연재 속도를 따라 잡기 위해 필사적인 아울입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3장 *************************************************************** [겨울성의 열쇠] 제8편 정적 속의 자취#3 *************************************************************** 아킨은 기분이 이상했고, 분명 불편하고 언짢았다. 아깝고 귀한 것을 경솔하게 깨뜨려 버린 듯한, 그런 후회가 가슴 안 으로 번져들고 있었고, 그것은 지워버리기도 잊기도 그냥 넘겨버리 기도 어려운 것이었다. 그는 뛰듯이 기숙사로 돌아왔고, 도착해 1층 홀의 시계를 보니 이제 여덟 시였다. 왔다 갔다 하는데 한시간도 걸리지도 않은 것이다. 엎 어져서 잠이나 자고 싶다고 생각하며, 아킨은 방문을 열었다. 방의 램프 불은 꺼져 있었고, 달빛이 파랗게 번지고 있었다. 아킨은 어렵 잖게 램프를 찾아내 불을 밝혔다. 룸메이트 루첼은 잠들어 있었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안경까지 끼고 있는 것을 보니 방금 전에 깨어 났다가 다시 잠든 것이다. 책상 위에는 펼치지도 않은 책이 쌓여 있 었고, 그 앞에는 정리 노트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아킨은 그 위 에 붙여진 커다란 메모지와, 그 위에 뭐라 날려서 쓰고는 밑에 두 줄로 좍좍 그어진 것을 발견했다. -오는 즉시 깨울 것--! 아킨은 이것이 누구에게 남긴 것인지 잠시 생각했다. 아마도, 매일 밤 찾아오던 그 키가 크고 머리카락이 까만 남학생-쥬...뭐라고 했던 가, 여튼 그 학생에게 쓴 것인지, 자신에게 쓴 것인지. 그러나 안녕, 이상의 말을 나누어 본 적도 없는 룸메이트가 자신에게 이런 부탁 을 할 리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킨은 안경을 다시 벗겨내 주려 다가, 손끝에 닿는 체온이 좀 뜨끈한 것을 느꼈다. 아킨은 손을 펼쳐 그 이마에 대보았다. 역시, 열이 좀 있다. 안경을 루첼의 책상에 놓고, 아킨은 서랍 안의 상자를 꺼내 늘 가지고 다니 는 상비약 중 작은 환약 다섯 개를 고른 다음, 컵에 물을 따르고 가 벼운 마법으로 살짝 데우고는, 그 따뜻한 물 안에 환제를 넣었다. 환약은 눈송이처럼 조각조각 나며 물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고, 물도 노랗게 변했다. 그 약을 가지고, 아킨은 루첼을 흔들었다. 루첼이 눈 을 조금 뜨자 아킨은 그것을 내밀었다. "마셔." 루첼이 작게 신음을 흘렸다.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이마에 붙어 있 는 것을 보니, 생각보다 더 심할 지도 모르겠다. 아킨이 말했다. "푹 자둬." 루첼은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힘없이 물었다. "....몇 시지?" "아홉 시쯤 되었겠지." "이런 젠장.....왜 안 깨웠어?" 아킨은 루첼의 손을 당겨 컵을 쥐어주고는, 뭐에 얻어맞은 듯 놀라 서 멍청한 그에게 말했다. "그것, 나한테 말한 거였나." "방안에 너 말고 누가 있어?" 아킨은 루첼이 들고 있는 컵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쨌든, 밤새 골골대기 싫으면 약 먹어." 루첼은 단번에 마셔버린 다음, 관자놀이를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 다. 아킨이 그런 루첼을 바라보며 말했다. "금방 졸릴 텐데." 루첼이 짜증 난다는 듯 말했다. "그런 약을 주면 어떻게 해......" "아프면 하루 쉬든지." "시험기간이다. 너 같은 녀석에게는 별로 안 중요할 지 모르겠지만, 나는 하루가 아깝다고." "이틀 골골대면서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것보다는, 하루 푹 쉬고 다 음날 마저 하는 게 나을 걸. 급한 마음은 알겠지만, 아플 때는 쉬는 게 우선 이야." 루첼이 고개를 뒤로 꺾으며 한숨을 푹 내 쉬었다. "이봐, 난..." "......어른답게 굴어, 루첼 그란셔스. 그건 바보짓이라고." "......." 그리고 아킨은 더 이상 설득을 하지 않겠다는 듯 침대 위에 놓여 있던 책을 짚고 벽에 기대앉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너무 조용해져 서 아킨이 고개를 들어보니 루첼은 옷까지 갈아입고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루첼 그란셔스- 아킨은 별 생각 없이 그 이름을 되 내여 보았다. 첫 날이래 말 한마디 제대로 나누어 본적이 없는 룸메이트였고, 그것이 아킨에게는 편했다. 사실, 속으로는 노력하고 있었다, 다시는 쫓겨나지 않도록. 될 대로 되라지, 하면서 살아왔던 나날들이었지만 정작 그것이 손을 빠져나 가면, 그리고 뒤를 돌아보면 서글퍼진다. 애정이 두렵지는 않았지만, 호기심과 동정은 끔찍했다. 결국에는 모든 것이 그것들로부터의 방어였고, 그 대가로 추방당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추방당하면 아킨이 할 일은 성으로 돌아가 어깨를 움 켜쥐고 떠는 것뿐이다, 나는 이곳에서 사라질 것이다, 사라져야 한 다, 그 말만을 되풀이 중얼거리는 그 나날은 분명 악몽이었다. 바람소리가 들려왔고, 넓적한 입들이 흔들리며 서로에게 몸짓하고 소곤소곤 작게 술렁였다. 아킨은 책을 내리고 벽에 몸을 깊이 기대 며 창 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파르랗고, 보름에 가깝게 부풀어 오른 달은 하얗게 빛을 터 뜨렸다. 달빛이 잎과 학원 건물들 위로 쏟아지고, 바람은 그 사이를 유영하며 넓은 잎이 흔들리며, 가지들은 사브작 사브작 몸을 떤다. '그곳'에도 떡갈나무 우거진 거대한 숲이 있었다. 달빛 쏟아지는 검 푸른 너른 평원이 있었으며, 그곳을 휘감아 도는 잔잔한 은빛 강이 있었다. 넓게 트인 하늘위로는 끄트머리가 달빛에 젖은 구름이 고요히 흐른 다. 잠든 두터운 숲은 하늘을 향해 차가운 숨을 뿜어 올리고, 그 가 지사이로는 잿빛 소쩍새가 푸드득 날아오며 짤막한 울음소리를 낸 다. 다시 언덕을 쓸어 바람이 불어오면 넓고 풍요로운 평원의 밀들이 물결처럼 출렁였고, 밤바람에 깨어난 대지의 술렁임은 고요를 흔들 었다. 강의 수면은 끓어오르고, 기슭에 우거진 억새들이 흔들린다. 나뭇잎들은 주먹만한 난쟁이들이 잔뜩 모인 듯 소곤댄다. 그리고......그 깊은 떡갈나무 숲 속, 굴곡 진 골짜기를 지나 붉은 암 벽을 등진 작은 오두막에, 키가 크고 부드러운 초록색 눈을 가진 그 가 있을 것이다. 자크, 아마도 문 옆에 놓인 긴 의자에 앉아 파이프를 피우며 그 하 얀 연기를 바라보고 있을 테지. 발치에는 저녁을 배불리 먹은 푸제 가 머리를 바닥에 붙인 채 곤히 자고 있을 것이고, 가끔씩 숲 속에 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와 꼬리를 곤두세울 테지....그렇지, 자크. 나 의 형, 나의 가족. 너른 평원으로는, 아마도 오늘도 날쌘 자주 빛 매가 하늘을 가를 것 이다. 사냥매는 날카롭게 울며 탄탄한 근육이 불거진 군마 위의 소 년을 향해 날아갈 것이다. 매를 향해 손을 뻗은 소년은 달빛이 쏟아 지는 붉고 검은 머리카락, 진하고 차갑게 빛나는 보라 빛 눈동자, 그리고 그 얼굴은 거울의 상, 열 달을 마주했던 그의 거울, 그러나 그 쌍둥이형은 거울이 아닌 분명한 '실체'. 아킨의 눈 안으로 달빛이 스며들었다. 그 달빛과 함께 눈에 맺히는 것은 낙뢰에 맞아 부러져 나가 뼈만 남아있는 굵은 나무 둥치, 끄트머리에 뻗어 있는 팔 같은 긴 가지, 차가운 바람, 얇은 하얀 옷, ....그녀. 볼을 타고 흐르던 투명한 눈물 과, 그 지친 보랏빛 눈에서 마지막으로 스며 나왔던 애정. 아키, 가엾은 내 아들...내 작은 아가. 작고 뜨거운 것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고, 눈물을 닦아 내려던 아킨 은 그제야 루첼이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루첼은 막 잠에 서 깨 고개를 돌린 채, 이마에는 손을 얹고는 그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열에 들뜬 잠에서 깬 루첼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은, 한달 반 동안 계속되었던 무관심 때문이 아니었다. 아직 젖어 있는 두 개의 금빛 눈이 루첼에게 어찌 할 것이냐 묻자, 그제야 루첼은 그 눈이 기묘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무관심은 놀랍도 록 관찰력을 무디게 만들고, 당연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게 하며 특 이한 것을 지나치게 한다. 소년의 금빛 눈은, 단순한 금빛 눈이 아니었다. 빛 속에서 그 동공 은 버드나무 잎새처럼 날카롭게 서 있었고, 그 주변으로 가느다랗게 퍼지는 홍채는 운모조각처럼 다채로운 빛을 발했다. 짐승- 그 생각이 불쑥 튀어나왔다. 엉뚱한 생각이었지만, 그 단어는 수면위로 잠깐 드러난 물고기의 등 처럼 문득 튀어 올랐다가 대체 무엇이었나, 왜 떠올랐을까, 하는 의 아함 속에 지워지고 사라져 버린다. 열은 차츰 내려갔지만, 루첼은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루첼은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을 때와, 잠자코 내버려둬야만 할 때 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위로해서는 안 되는 혼자만의 비밀스런 슬 픔은, 그것 자체로 내버려두는 것이 예의인 것이며, 그것을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오만이다. *********************************************************** 작가잡설: ......흠...자, 자. 어서 업, 업--!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3장 ************************************************************* [겨울성의 열쇠] 제9편 정적 속의 자취#4 ************************************************************** 창 밖의 가을 하늘은 눈 시리게 파랗고 깨끗했으며, 언덕을 따라 우 거진 숲은 진한 주황색과 금빛으로 무르익어 찬란했다. 네모지게 깨끗하게 정돈된 정원의 화단에는 진한 보라 빛과 푸른빛, 황금처럼 노란 꽃들이 무리 지어 피어 있었으며 중앙에는 깨끗한 인공 호수가 파란 하늘을 비추어냈다. 휘안토스는 아버지와 그의 조언자이자 보좌인 늙은 마법사를 바라 보며 창가에 서 있었다. 매부리코에 훤히 드러난 이마를 가진 노 마법사는, 금빛 휘장을 어 깨에 두르고 길고 화사한 푸른색 로브를 입고 있었다. 지식과 학식, 정치적 감각은 상당히 뛰어나나, 마법사적인 자질은 별반 건질게 없 는 자였다. 그러나 그런 점이 아버지와는 잘 맞았고, 기사인 아버지 가 필요로 하는 것은 밥 축내는 연구벌레가 아닌 구체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보좌였기에 20년이 넘게 그 자리를 지켜 오고 있었다. 대화내용에 별 특별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제 집으로 완전히 돌아온 큰아들을 실질적인 후계자이자, 동지로 대하고 있었 으며, 그 때문에 누군가를 만나거나 일을 처리할 때면 늘 옆에 있도 록 했다. 그래서 오늘도 얼마 전에 도진 관절염 때문에 근처의 온천 으로 요양을 갔다가 본가로 돌아와 보고를 올리는 마법사 케올레스 를 만나는 자리에 아들을 서 있게 한 것이다. 겨우 석 달만에 오는 것이었지만, 그 동안 본가에는 '휘안토스'라는 엄청난 변화가 있었 고, 어린 후계자의 성장은 마법사를 무척 뿌듯하게 했다. 그리고 그 것은 당연하게도 본가에 없는 그 쌍둥이 동생을 떠올리게 하는 것 이다. 케올레스가 물었다. "아킨 님은.......그곳에서 잘 지내십니까?" "아주 잘 지내고 있지. 중간고사가 끝날 때까지 사고하나 내지 않고 얌전히 다니고 있네." 케올레스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곳이 맞나 보군요." "아마도. 게다가, 녀석도 이제는 다급해지게 되어 있지 않나. 거기서 퇴학당하면 정말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으니.....고집은 당나귀처럼 세 지만, 미련한 놈은 아니니까 알아서 할 테지." "담당 교수는 누구십니까." "오거스트 롤레인. 자네도 알 거야." 마법사의 눈 주름이 더욱 깊어지며 놀라움을 표했다. "설마......." "자네 생각이 맞네. 대마법사 컬린의 제자이자, 눈보라의 오거스트. 바로 그 여자이네." '컬린'이란 이름에, 뒤에 조용히 있던 휘안토스의 얼굴에까지 흥미가 일었다. 아버지와 케올레스 둘 다 그것을 눈치채긴 했으나 긴 이야 기가 될 거란 생각에 설명은 미루어 버렸다. "굉장하군요. 로멜로 간다 하셔서, 혹시나 하긴 했지만...그래서 문제 가 없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마법사라면 은봉인이라든가 도련님 의 처지라든가 하는 것에 대해 천박하게 관심을 두지는 않을 테니 까요. 또, 그만한 스승을 찾기도 힘듭니다." 그러나 성주는 냉담하고 짧게 말했을 뿐이었다. "아마도." "성적은 어떻습니까." "시원찮아. 중간에서 좀 모자라는 정도, 스승은 잘 만났는데 공부는 영 안 하는 것 같네." "이제 시작하는 걸 수도 있죠." 휘안토스였다. 아버지와 마법사의 눈이 자신을 향하자, 휘안토스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지금의 녀석이 제대로 공부하기 시작하면 그 성적이 딱 맞습니다." "그래도 작은 도련님은 몇 번 수석도 하지 않았습니까." "요령이 좋았던 것뿐입니다. 성적 나쁘다고 트집잡히기 싫으니, 점 수 올리는 방법만 잘 알아서 그리 한 것뿐이지요." "드디어 정신 차렸다는 말이군." 아버지의 툭 던지는 듯 시큰둥한 말에 휘안토스가 답했다. "맞습니다. 그리고 위급해서 그렇다는 것보다는....그곳이 정말 마음 에 들었다는 뜻이기도 할 테지요." 그러자 케올레스의 날카로운 얼굴이 순수한 기쁨으로 활짝 퍼졌다. 마법사였던 그는, 16년 전의 그 사건에 대해 분명 책임을 느끼고 있 었고, 자신의 무능을 깊게 통감하며 제 가슴에 깊게 새긴 상처가 남 아있었다. 대마법사 컬린마저도 겨우 해결한 일인 것은 사실이나, '마녀'의 마법을 이기지 못하고 주인의 아내를 그런 죽음을 맞이하 게 한 것은 지워지지 않는 오점이며 죄였다. 휘안토스가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추수감사절의 대연회에 아키를 부르셨으면 합 니다." 잔잔한 기쁨이 뚝 멎었고, 서재 안은 싸늘하게 식었다. 아버지의 눈 이 분노로 날카롭게 빛났고, 케올레스는 성주와 그 큰아들을 번갈아 보며 눈치를 봐야 했다. 결국 성주의 주먹이 책상을 꽝 내리쳤다. "그 녀석은 오점이다, 이 본가의--!" "지금까지는 그랬지만, 지금부터는 그렇지 않도록 만들어야 합니 다." "휘안-! 어떤 이유에서든, 나는 녀석을 그 들개 떼 들 틈에 던져 놓 고 싶지 않다." 성주의 성격을 너무도 잘 아는 케올레스가 나섰다. "우선 휘안토스 님의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들을 필요도 없어!" "아버님, 숨기면 숨길수록 그들은 아키에게 '아직도' 문제가 있어서 그리 하는 거라 숙덕거릴 테고, 그것은 제게 돌아올 비난이기도 합 니다. 어쨌든, 아키와 저는 열 달을 같은 배 안에 있었던 쌍둥이. 아 키의 문제가 제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고, 무지한 자들 은 당연히 그리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아키가 모두에게 공 개적으로 나오기를 바라고, 드디어 자신의 길을 잡아가는 지금만큼 적기도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휘안토스는 고개를 깊이 숙이며, 간곡한 청을 올리듯 힘주어 말했 다. "아키는 아버님의 아들이며, 제 동생입니다." 케올레스는 주인의 눈에 불꽃이 튀는 것을 보았다. 휘안토스는 하드 배팅 하는 기분으로 말했다. "....또한 어머님의 아들입니다." "...." 침묵은 고민과 분노로 삐걱거리고 있었고, 아버지는 마침내 크흠... 하고 불편하게 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그렇다면, '네 동생'인 아킨토스의 일을 너 스스로, 너 혼자서, 모든 것을 책임질 수는 있겠나" 케올레스가 끼어 들려 했지만, 성주는 손을 들어 그것을 막았다. 휘 안토스가 말했다. "그리 하겠습니다." "좋다, 그럼 네게 아키의 모든 것을 맡기도록 하겠다. 그리고 발생 하는 모든 문제는 나는 결코 해결해 주지 않겠다." "감사합니다." 휘안토스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고, 케올레스도 안도의 한 숨을 내 쉬었다. 중간고사가 끝나기 무섭게 추수감사절이 돌아왔고, 각 집에서 오는 선물들과 편지가 기숙사의 우편함을 넘치게 했다. 감기몸살 때문에 겨우 전교 3등을 해서 큰일이라고, 다른 학생들이 라면 이런 재수 없는 자식 같으니 하고 눈을 부라릴만한 고민에 시 달리던 루첼도, 매해 명절 때마다 늘 오던 편지를 이번에도 받게 되 자 행복감에 빠졌다. 늘 오던 것이지만 그는 늘 그 편지를 기다렸 고, 늘 도착하면 늘 행복해 지는 것이 바로 그 편지였다. 그러나 그의 단짝인 쥰은 이번 학기 통과를 축하하며, 다음 번에는 반, 드, 시 이보다 더 좋은 성적을 남기기를 기대한다는 말과, 이번 추수 감사절에는 큰누나 그로다의 약혼자가 오니 반드시! 머물다 가 라는 편지를 받게 되어 축 처져 있었다. 학생 휴게실에서 각자의 편지를 뜯어보고, 그렇게 각자 우울하고 행 복해 하다가 쥰이 먼저 루첼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너 혼자 그곳으로 가야겠다.....아아, 난 우리 앙 큼 맞은 누나보다는 예쁘고 착한 실비가 보고 싶은데....." 그렇게 말하며 얼굴까지 붉히는 쥰에게, 루첼은 웃으며 위로해 주었 다. "꼭 전해 주지." "그런데 너, 그곳으로 혼자 가도 되겠어?" 그렇게 묻는 쥰의 얼굴은 웃음기 없이 진지했고, 또 진심으로 걱정 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당사자인 루첼은 태평하게 말했다. "한번 정도 혼자 간다고 해서.......큰 일이 생기는 건 아냐. 또, 너한 테 매번 그렇게 속보이는 신세 지는 것도 미안하고." "신세는 무슨 신세냐. 나도 너 덕에 낙제 면하고 있는 마당에. 게다 가 그곳에서 내가 하는 일이 있기는 했냐." "아니, 옆에만 있어줘도 괜찮았어." "뭘." 쥰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나 사실 루첼도 조금쯤은 걱정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반 드시 만나야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 만남은 덧붙여 발생하는 곤 혹스런 일을 감내할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쥰이 편지를 입에 물고 흔들다가, 뭘 발견한 듯 히죽 웃었다. "아, 저기--네 룸메이트 녀석한테 부탁해 봐라." "무슨 소리야, 갑자기?" "저 녀석은 옆에 서 있기만 해도 무서울 것 같지 않냐?" 그리고 쥰은 막 기숙사 휴게실로 들어서는 아킨을 가리키고 있었다. 제복을 거의 입고 다니지도 않아 까다로운 사감의 눈총을 받고 있 는 아킨은, 그날도 셔츠만 걸친 채 들어오고 있었다. 그래도 좀 미 안하기는 했는지 휘장이 목도리처럼 어깨에 감겨 있었지만, 아무리 봐도 헐렁한 차림새 인 것만은 사실이었다. "저 녀석한테?" "응." 루첼이 어이가 없어서 한숨까지 쉬며 말했다. "차라리 살쾡이랑 데이트하라고 해라." "시도는 한번 해 봐라. 솔직히, 나....너 혼자 보내는 거 정말 찜찜하 거든. 저런 녀석이라도 달고 간다면 모를까." "쥬드, 제발.....저 녀석도 추수 감사절에는 자기 집으로 갈 거야. 또, 내가 애도 아니고, 요령 없는 도련님도 아닌데 뭘 걱정해?"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을 때, 아킨은 우편함 앞에 잠시 멈추어 섰다. 오는 편지가 아예 없었으므로 그가 그 앞에 지체한 적은 한번도 없 었지만, 그 옆에 있는 기숙사 사감선생이 "아킨토스 군, 편지 왔어 요." 하며, 편지를 흔들고 있었으므로 고개를 갸웃하며 그것을 받아 들었다. 멀찍이서 루첼이 보니, 붉은 도장이 찍혀 있는 특별 우편이었다. 어 디서 급히 보낸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루첼은 쥰과 함께 아킨을 물 끄러미 지켜보았다. 아킨은 봉인을 뜯어내고는 안의 내용을 그 자리에서 확인했다. 그리 고 단번에 훑듯이 읽어 내리더니, 편지의 위를 두 손으로 잡았다. 뭘 하려나, 하고 생각하는 순간 아킨은 그것을 반으로 쫙 찢어 버렸 다. 사감이 이봐, 학생....어쩌고 말하기도 전에 아킨은 두 번, 세 번, 네 번 거듭 찢어 버렸다. "하, 학생.....?" 아킨은 조각난 편지를 와삭 구기며 말했다. "어디다 버리면 됩니까." 루첼이 옆에 멍청하게 앉아 있는 쥰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나 혼자 가는 게 좋겠다, 쥬드." 그날 오후 아킨은 롤레인과의 수업이 끝나자 마자 추수감사절에 뭘 할 예정이냐고 물었다. 롤레인은 네가 웬 일이냐는 듯 안경을 슬쩍 밀어 올리며 답했다. "나? 당연히 남편이랑 보내야지." "남편.......분도 계셨습니까." 롤레인의 눈이 사나워졌다. "내가 어디 봐서 이 나이 되도록 시집도 못 간 노처녀로 보이니? 이거, 딸까지 하나 있다고 하면 아예 기절하겠군." "......" "아키?" "정.....말이십니까." 이제는 그게 가능이냐 하냐는 듯 묻는 아킨이, 롤레인은 지난번 그 때보다 더욱 괘씸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건데? 설마, 추수감사절 휴가 때까지 수업하 자는 건 아니겠지?"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룰레인의 얼굴이 구겨졌다. "이거 루첼 그란셔스보다 더한 공부벌레를 제자로 맞이해 버렸군. 그래, 솔직히 말해봐. 추수감사절 때 누가 뭘 어쩌자고 했기에 그렇 게 말하는 거지? 응?" 아킨이 놀랐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눈치다, 눈치. 아무리 세상 다 산 척 턱 쳐들고 으스대도, 내게는 열 여섯 살 먹은 꼬맹이일 뿐이라고. 어서 말해. 이유가 합당하면 우리 집에 데리고 가 줄게." "네?" "너, 생긴 건 아주 멀끔하니 남편에게는 사윗감 데리고 왔다고 말하 면 되. 그러니 설명 제대로 해 봐....아, 걱정하지는 마. 내 딸은 이제 다섯 살이니까, 시집갈 나이가 되면 나이 많은 남자는 싫다고 할 테 니." 아킨은 이마를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어깨를 늘 어뜨리며 말했다. "집안...사정이라 말씀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상한 말을 꺼내서.......죄송합니다. 제가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리 교수라지만, 아킨은 집안 사정을 다른 사람 앞에서 꺼내는 것은 영 꺼림칙했다. 게다가, 아무리 개인적인 일이라도 집안의 일을 가문 외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그의 고향인 제국에서는 금기중의 금기였다. '황제 선출'이라는 불안정한 실에 묶여 가문들끼리 서로 서로 힘겹게 견제 하는 것이 제국이었으니, 그런 조심성은 자연스러운 자기보호책 중 하나인 것이다. 롤레인은 아킨이 잠자코 있자 혹시 지난번처럼 털 세우려고 저러나 싶었지만, 아킨은 정말 난감해하고 있어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것 이었다. 롤레인이 생각해 보니, 이유같은 것은 묻지 않고 그냥 데리 고 가 줄 수도 있는 일이기도 했다. 롤레인의 남편은 책방 주인이었 고, 가까운 친척이 없는 그들은 추수감사절은 가족끼리 단출히 보내 고 있으니, 예쁘장한 남학생 하나 끼어 든다 해도 달라질 건 없다. 아니, 그녀의 남편이라면 외려 손님 하나 더 생겼다고 좋아할 것이 다. "말하기 난감하다면 그냥 와도 되." "아닙니다. 모르는 분들께 폐 끼치기도 그렇고....." 아킨이 우물쭈물 하며 답지 않게 예의 운운하는 것이 신기하고 재 미있기는 했지만, 롤레인은 손을 들어 다음 말을 막고는 단호하게 말 했다. "나는 28일날 출발한다. 내일 저녁 아홉 시까지 어떻게 할건지 결정 해." "사흘 뒤......말입니까?" "그래. 중간에 처리할 일이 있어서 이번에는 좀 늦을 거야." "안....되겠군요." 아킨은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니?" "날짜가 안 맞습니다." 휘안토스가 맞으러 갈 사람을 보내겠다고 한 것은 내일 모레 아침 이었고, 롤레인이 28일날 출발한 다면 떠나기도 전에 휘안토스에게 끌려갈 가능성이 높았다. 아킨은 형의 성격을 잘 알았고, 그가 어떤 식으로 목적을 이루는 지도 잘 알았다. 롤레인 교수에게까지 집안 일로 눈길 받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지난 번 일 이후로 아킨은 그녀가 개인적인 일로 신경 쓰는 것이 싫어졌다. 그건 적대감이라기 보다는, 그저 미안함 때문이었다. "심려 끼쳐서 죄송합니다." 롤레인은 짧게 혀를 차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아킨은 실망스럽게 연구실을 나갔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가며, 왜 갑자기 휘안토스가 집으로 오라는 편지 를 보냈는지, 그것도 마중 나올 사람까지 보내겠다고 한 건지 도무 지 이해 할 수 없었다. 자신의 존재가 그에게 큰 걸림돌이 되고 있 다는 것도, 심지어 휘안토스의 상태까지 의심하게 할 정도라는 것도 잘 알았다.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아버지의 동생이자 숙부인 테시오스였고, 그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점이 바로 휘안토스가 집안을 이끌 수 있 을 정도로 '멀쩡하냐' 였던 것이다. 차남인 아킨이 승계권이 완벽하 게 말소된 지금, 휘안토스만 없어지면 그 막대한 가문을 물려받게 되는 것은 바로 그 숙부였다. 그 때문에 아버지는 어떻게든 아킨을 어디에 처박아 눈에 안 뜨이 게 하고 싶어했고, 압셀론에서 쫓겨나자마자 북부의 제국귀족들이 절대 나타날 리 없는 공화국으로 숨겨 버린 것이다. "젠장--!" 처박았으면 처박은 대로 내 버려 둘 일이지, 왜 이렇게 나오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집안의 일에 얽매이는 것도, 그토록 귀중한 큰아들 의 재앙으로 미움받는 것도 질색이었다. 책임 질 수 있는 일이라면 모를까, 모두 본의가 아닌 일들일 뿐이었고 아킨에게 죄가 있는 것 은 더더욱 아니었다. 아니, 모두 따지고 보면 아버지의 잘못이었다. 아버지의---! 아킨은 거칠게 문을 열었고, 문에 묵직한 것이 쿵 맞고 나가 떨어졌 다. "앗--!" 방안으로 들어가 보니, 루첼이 바닥을 여기 저기 더듬어 대고 있었 다. 아킨은 저 멀리 나가떨어진 안경을 찾아 루첼에게 건네주었다. "이거 찾나?" "아, 고마워." 루첼은 급히 안경을 끼우고는, 무릎을 굽힌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아킨을 물끄러미 보았다. 뭔가 할말이 있는 눈치라, 아킨은 그대로 서서 루첼의 말을 기다렸 고, 루첼은 안경을 만지작거리다가 체념하듯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말 했다. "너, 휴가 때 할 일 있냐?" "......아마도...." 생길 것 같다고 말하는데, 루첼은 그 말을 기다리지도 않고는 빠르 게 말했다. "그럼 나랑 어디 같이 갈래? 내일 출발하는데." ".......어디 가는 건데." 당장에 나온 답에, 루첼이 외려 황당하다는 듯 에, 하고 얼굴을 비 틀었다. 아킨은 느닷없이 부탁 해놓고, 들어준다고 하니 더 황당해 하는 이상한 녀석이라 생각하며 말했다. "내일 출발한다면 얼마든지 같이 가 줄 수 있다. 어디로, 왜, 가는 거지." "아, 내가 예전에 신세지던 집에서 휴가 보내기로 했거든.......같이 갔으면 해서." 아킨이 아무 말 없자,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민망해진 루첼은 될 대 로 되라는 식으로 말했다. "싫으면 말고." "......왜지?" 루첼은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좀 친해져 보고 싶어서." ".....친해져?" 아킨이 그리 반문하며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루첼은 몸 끝이 오싹 해졌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건 분명 거짓말이었던 데다가, 이 도도한 소년이 그런 식의 귀찮은 호의를 어떻게 받아들일 지도 알 수 없었다. 게다 가 상황설명도 아주 횡설수설 수상하게 했으며, 본심을 말하자면 루첼은 아킨이 따라 오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쥰이 나중에 말 했어, 안 했어 하고 귀찮게 굴까 해서 그냥 내친 김에 말만 꺼내 본 것이다. 아킨이 말했다. "좋다." "에, 뭐?" "내일 출발한다면......같이 가자. 친해지고 말고는 가면서 생각해 보 도록 하고." 루첼이 아킨의 사정을 알리 없었고, 그저 아킨의 얼굴에 아주 잠깐 떠오른 희미한 미소에 기겁을 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아킨은 어쨌든 이런 식으로라도 도망칠 곳이 생기자, 정말 '기뻤다'. *********************************************************** 작가잡설: 자, 이젠....! 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뭘? ..... ......;;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4장 ************************************************************** [겨울성의 열쇠] 제4장 초대 제10편 초대#1 *************************************************************** 로멜 학원의 추수감사절 휴가는 다른 학원이 거의 그렇듯 일주일간 이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이 일주일 동안, 집이 가까운 학생 들은 외박신청을 하고 잠시 가족들 틈으로 돌아가 짧은 만남을 가 지고, 집이 먼 학생들은 기숙사나 사택에서 긴 휴가를 보낸다. 루첼은 그 중 '짧은 휴가'를 갖는 축에 속했다. 이맘때가 되면 예전 에 잠시 지내던 체놀비로 갔고, 친구인 쥰은 집이 멀었으므로 휴가 를 같이 보낼 겸해서 루첼과 함께 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하루라도 머물다 가라는 집안의 무시무시한 명령이 떨어 졌으므로, 별 수 없 이 루첼을 혼자 보내게 되었고, 루첼은 최초이자 마지막이길 바라며 체놀비로 낯선 일행을 데리고 가게되었다. 아킨토스, 출신지는 아마도 제국 어디 즈음이라 짐작할 뿐, 어느 집 안 출신인지 제대로 알려진 것은 별반 없다. 게다가 발음도 너무 정 확해서, 억양으로는 그 출신을 짐작할 수조차 없다. 집으로 오는 편 지도, 보내는 편지도 없었다. 물론 고아인 것은 아니다. 쥰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베넬리아에서는 추수 감사절 휴가는 그냥 넘겼지만, 방 학이 되면 분명 '집'으로 돌아갔고, 교수와 학우와 기물을 몇 번이나 '두들겨 팬' 학생을 새로운 학교로 전학시킬 정도로 마음 넓은 후견 인 역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뿐, 까만 도화지 구멍에서 쏟아지는 동그란 빛의 점처럼 그 이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머지는 온통 까맣기만 할뿐 그 스 스로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고, 그보다 더 알고자 했거나 친해지 고 싶어했던 학생들도 시도 며칠만에 그 냉랭한 무시에 질려 버렸 다. 물론 그가 귀족이란 것 정도는 루첼도 알아볼 수 있었다. 평범 한 차림에 귀족적인 취미도 별반 없는 그였지만(예법은 기대조차 할 수 없고) 마시는 차만큼은 제도에서 직수입되는 것으로 즐겼고, 그것도 주말마다 '직접' 항구로 나가서 손수 골라 오고 있었다. 차, 특히 제도의 차는 어렸을 때부터 제대로 길들이지 않는 한 즐기 기 힘든 취미이며 차 자체가 사치품이기도 했다. 제도의 수준 높은 취미를 따라해 보고 싶은 로메르드의 귀족들이나 부유한 상단가들 은 유행처럼 티파티를 가지긴 했지만, 그저 겉만 따라 할 뿐 제대로 즐기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아킨은 학교 근처에서 파는 차를 마셔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고, 직접 근처의 항구로 나가기 시작했다. 또 가끔 좋은 차가 나오면 평소보다 두어 봉지 더 사오긴 했으나 여분 은 담당교수인 롤레인에게 주었지, 한번 사온 것으로 이주일 이상 마시지 않았다. 루첼에게 주지 않은 것은 그가 싱거운 차대신 진한 커피를 좋아하기 때문이었고, 그 덕에 루첼은 아킨에게 그 정도 알 아 채는 섬세함은 있는 것을 알아챘다. 별난 녀석인 건 사실이지만, 사실 루첼은 아킨에게 큰 관심은 없었 다. 조용해서 공부에 방해되지 않는 다는 것만으로 충분했고, 사실 루첼은 로멜에서는 상당히 사람을 가리고 있었다. 친구는 단짝인 쥰 뿐이었으나, 루첼의 처지나 본 모습을 알고서도 쥰처럼 대범하게(라 기 보다는 둔감하게) 나올 사람도 없을 것이다..... 루첼은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아킨을 흘끔 보았다. 다음날 출발한다는 말만 했을 뿐인데 아킨은 대뜸 마차를 불렀고, 삯도 마부가 도착하자마자 직접 지불했다. 그리고 마부에게 목적지 를 말하는 것은 루첼이 할 일이었다. 루첼은 사실 마음 편하게 목적지인 체놀비로 저녁까지 걸어갈 생각 으로 일정을 잡았기 때문에, 그렇게 마차를 타게 되어 너무 빨리 도 착하면 어쩌나 걱정 될 지경이었다. 걸어가면 하루지만, 마차로는 대여섯 시간이면 충분했으니.... 그러나 그 짧은 시간은 사실, 걸어서 가는 하루보다 더 길고 어색했 다. 귀한 집 귀한 아들이라 생각(아니 추측)해도, 별 싫지는 않는 녀 석이긴 했지만, 그것이 지금 둘 사이의 어색함을 지워버릴 정도로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아킨을 맞은 편에 앉혀 놓고, 덜그럭 덜그럭 대는 소리만 삼백 다 섯, 삼백 여섯 하며 앉아 있는 루첼은 미칠 노릇이었다. 쥰 녀석은 처음에 같이 가자고 했을 때 걸어가는 내내 얼마나 떠들 어댔던가. 어디냐, 누가 있냐, 대체 어떤 곳이냐, 어쩌다가 그곳으로 갔냐...등등. 그리고 길이 끝날 때 즈음에, 루첼과 쥰은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이 완전히 바닥나 버렸고, 그렇게 서로를 적나라하게 보여 준 다음 제대로 된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아킨은 입 딱 다문 채 앉아만 있을 뿐이었다. 결국, 루첼이 먼저 말을 꺼내고 말았다. "어디 출신이냐, 너." ".......제국." 차라리 '이 물고기는 바다에서 왔습니다.'라고 답하는 게 나을 지경 이다. "가족은?" "묻지 마." 아킨은 단번에 그렇게 말했고, 루첼에게는 그것이 '절--대 묻지 마!' 라는 경고라는 것 정도 알아들을 눈치는 있었다. 루첼은 헛기침을 한번 쿨룩 하고는 물었다. "궁금한 것도 없냐. 어디냐, 어떤 곳이냐....뭐, 이런 거." "도착하면 알게 될 거 아냐." "얌전한 건지 수줍은 건지, 이야기하는 것을 귀찮아하는 건지 도통 감을 못 잡겠군. 말 하는 게 그렇게 싫어?" 그제야 아킨의 눈이 루첼을 바라보았다. 출발한 이후 처음으로 보이 는 관심이라, 놀라울 지경이었다. 아킨이 말했다. "너 역시 마찬가지잖아." "응?" 저건 또 무슨 말인가. 아킨은 손끝으로 루첼의 턱을 가리키며 말했 다. "난 아예 말을 하지 않지만, 너 역시 보여주고 싶은 것 이상의 무엇 을 보여주지도, 말하지도 않는 다는 말이야." "무슨 근거로?" 루첼은 이 녀석이 자신의 속셈을 벌써 눈치챈 건 아닌지 불안해졌 지만, 그러면서도 내심 눈치 채 주기를 바랬다. 그래야 마음이 훨씬 편해질 것 같으니까. 루첼이 물끄러미 보자, 아킨은 짤막하게 답했 다. "그냥." "....." 황당한 녀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슬쩍 드는 루첼이었다. 그래도 그는 아킨이 말하는 본 뜻이 무엇인지 궁리해 볼 정도로 아 킨의 말을 귀담아 듣지도 않았고, 그것은 루첼 역시 아킨이 그에 대 해 무지한 만큼 무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생각해 보면, 그건 루첼역시 아킨을 '무시'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루첼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지금 가는 곳은 체놀비다. 그건 알아두도록 해." 체놀비 시는 로메르드의 동쪽 해안에 자리잡은 항구 도시였다. 바로 나셀 해를 마주하고 있어 카로디 강을 따라 조금 들어가면 나 오는 수도 롬파르와 함께 로메르드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으며, 자 리잡은 상단들도 롬파르에 버금갔다. 그 중 하나인 알베스티 가는, 체놀비에서 제법 자리를 깊숙하게 잡 은 대상단이었다. 그러나 무역보다는 항구의 도박장과 주점, 사창가 에서 주로 돈을 벌고 있었고, 그런 컴컴한 일에 종사하다 보니 사람 들 사이의 신뢰는 아주 중요했다. 그래서 알베스티 가의 가주인 체 노 알베스티는 명절 때마다 큰 연회를 열어 수하의 사람들을 초대 하고는, 서로가 가족이며 운명공동체임을 머리 깊이 새겨주고, 체노 알베스티 자신은 모두의 듬직한 보호자로 그들 앞에 나서는 것이다. 그런 알베스티에게 추수감사절 연회가 다가오자 저택은 개미굴처럼 번잡해졌다. 여기 저기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집안으로 모이고, 체노 알베스티의 가족들은 거의 응접실에 살다시피 하며 손님들을 맞이 했다. 알베스티에게는 오랜 시간 같이 해온 부인과, 벌써 결혼하여 아이들을 가진 아들 하나, 아직 미혼인 둘째 아들, 그리고 늦게 얻 은 막내딸 실비가 있었다. 아버지를 닮아 우락부락한 오빠들과는 달 리, 막내 실비는 진한 갈색 머리카락에 예쁘고 파란 눈을 가진 열 여덟 살 소녀였다. 워낙에 착하기도 해서, 이제막 일하기 시작하게 된 어린 소년들에게는 기필코 출세하여 그녀와 결혼하고 말겠다는 희망에 젖게 했으며, 제법 인정을 받기 시작하는 상단 내 청년들은 조금 과한 선물들을 챙겨 와 선사하며 호감을 사기 위해 노력하게 했다. 그러나 실비는 그들에게 개인적인 대화를 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고, 모두에게 상냥하게 대할 뿐 특별히 상냥하게 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실비는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단 한사람만 제하고는 나머지 는 모두 귀찮았다. 실비는 그날도 거리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서서 방문객들의 마차를 세고 있었다. 정오가 되자 좀 뜸해지는가 싶었지만, 해가 좀 기울자 마차 한 대가 현관 앞에 섰다. 마차는 처음 보는 것으로, 옆 에 아무런 문장이나 이름도 없는 것으로 보니 어디서 빌린 것 같았 다. 이번에는 또 누굴까, 이번에 새로 인사하러 오는 사람 같은데..... 현관에서 하인들이 달려나와 마차 문을 열었는데, "어서 오십시오 --!" 하고 외치려던 그들의 얼굴들이 어색하게 굳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실비는 창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마차 안에서는 단출한 차 림새의 청년이 내렸다. 붉은 머리카락이 어깨를 넘쳐 흘러내렸고, 안경이 가을의 맑은 햇살이 반짝였다. 그가 창가의 실비를 발견하고 는 손을 흔들었다. 실비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루츠 오빠---!" 실비는 방을 뛰어나가 단번에 계단을 달려 현관으로 나갔다. 그리고 벌써 팔을 벌리고 있는 루첼의 품안으로 작은 강아지처럼 폴싹 뛰 어 들었다. "세상에, 벌써 왔어--! 너무 기뻐, 오빠--!" "실비--반갑다. 많이 컸네." 실비가 그의 양쪽 볼에 가볍게 키스하고는 물었다. "쥬드 오빠는?" "사정이 생겨서 이번에는 못 와." 그러자 실비는 금방 눈이 흐려졌다. "많이 기다렸는데....." "대신 다른 분을 모시고 왔단다. 인사하렴." 루첼은 실비의 허리를 감싸 안고는 마차 안을 보게 했다. 안에 있던 아킨은 구석에 던져 놓았던 망토를 찾아 탈탈 털고는 가볍게 마차 에서 뛰어 내렸다. 그가 내리자 마자 루첼은 재빨리 서로를 소개했 다. "실비, 이쪽은 아킨토스 프리엔, 이번에 전학 온 학생이지. 그리 고.....아킨, 이쪽은 실비아 알베스티, 알베스티 상단주인 체노 알베스 티 님의 막내 따님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알베스티 양." 아킨은 점잖게 말하고는 실비의 손을 잡고 그 위에 키스했다. 실비 의 얼굴이 금새 빨개졌고, 그 능숙한 예법에 루첼이 더 놀랐다. "아, 안녕....하세요." 아킨은 손을 놓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마차 옆에 꼿꼿이 서 있는 하인들을 발견하고 잠시 그들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그러 나 하인들은 외려 더욱 뻔뻔하게 아킨을 마주보기만 할 뿐, 아킨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도통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킨은 실비에게 물었다. "원래 이러는 겁니까?" "네?" ".....손님이 왔는데 왜 아무도 안내하지 않는 겁니까." 그 말에, 루첼은 아차 싶었다. 그리고 오면서 사정을 제대로 설명하 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러나 아킨은 아직은 이것이 '익숙하지 못 한 반도식'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아킨, 잠깐......" 루첼이 나서자, 하인들의 눈은 벌써 쌀쌀맞아져 루첼을 쏘아보고 있 었고, 그 눈빛에 루첼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혼자라면 대체로 무시해 버리는 루첼이지만, 지금 데리고 온 것은 언제 폭발할 지 모 르는 살쾡이 한 마리였다. 예전의 쥰도 루크페일리 가의 차남이라는 것이 밝혀지기 전 까지는 안내를 받지 못했다. 쥰은 이를 북북 갈며 그 냉대를 참아내더니, 대연회가 열리자 마자 기회만 노리더니 잔도 건네주지 않고 그를 지나쳐 버리는 하인에게서 직접 잔을 빼앗아 들었다. 하인이 '그것 은 귀한 손님분들께 드리는 것이다.' 라고 말하자, 근처에 있던 알베 스티 가문의 장남인 세쟈르에게 다 들리도록 말했다. '대단하군요, 이 알베스티 가문은-! 루크페일리 가의 차남이 마시는 것조차 마음대로 들 수 없단 말입니까. 하!' 분위기는 민망할 정도로 싸늘하게 얼어붙어 버렸고, 불친절하게 그 말을 했던 하인은 당장에 장남 세쟈르의 험악한 명을 듣고 끌려나 갔다. 그 일 이후 쥰은 루첼과 함께 추수감사절 연회에 같이 가 주 었고 루첼의 대우가 당장에 나아진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쥰은 그렇다 쳐도 아킨을 아는 사람은 알베르티 가에 당연 히 없었으며, 아킨 역시 이곳에서 루첼이 어떤 위치인 지 알 리도 없다. 예전에 신세를 졌다고 하니 후견인 정도라 생각하고 있을 것 이다. 실비가 말했다. "저기......제가 있어서 저렇게 있는 거예요. 안으로 들어가세요. 아킨 토스 프리엔....씨." "....." 다행히 아킨은 결국 델칸토 반도에서만 통용되는 특이한 예법이라 결론 내린 듯 했다. 여기는 신분 높은 사람이 마중을 나오는 건가 보군.....하고. *********************************************************** 작가잡설: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_- (뭐가?)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4장 *************************************************************** [겨울성의 열쇠] 제11편 초대#2 *************************************************************** 실비는 그들을 큰오빠 세쟈르에게 데리고 갔다. 실비의 아버지 체노 알베스티는 잠시 외출한 상태였고, 차남인 지오바니 역시 늘 그렇듯 어딘 가로 '나돌아다니는' 중이라 지금은 장남 세쟈르 혼자서 손님 을 맞이하고 있었다. 버드나무처럼 가늘가늘한 동생과는 달리, 세쟈르는 건장한 체구에 구레나룻이 까만 서른의 남자였다. 그런 그는 차가운 눈으로 루첼을 맞이했고, 아킨이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사조차 하지 않고 의자 에 앉아 고개만 까딱해 보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루첼은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그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반갑다, 루츠. 그리고 저 쪽 소개받을 수 있을까." 세쟈르는 턱으로 아킨을 까딱 가리켰다. 루첼은 아킨이 아랫입술을 꾹 짓누르는 것을 발견했다. 성질 긁으면 교수 면전에도 책을 날리 는 아킨의 성격을 아는 루첼은 조마조마했다. 여기서 그렇게 성질 부리면 루첼마저 끝장이다. 세쟈르는 이것이 문제였다. 모르는 상대, 게다가 어리기까지 하면 대놓고 무시하려 든다. 아킨은 이제 열 여섯이었고, 서른인 세쟈르 가 보기에는 애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온 집안 가족이 모이는 추 수감사절에 '신분 낮은' 친구를 따라오는 것으로, 세실리오는 아킨을 변변찮은 소년이라 결론 내렸다.(물론 이점은 루첼도 모른다.) "그래, 이 쪽은 누구냐." 루첼은 떨떠름한 얼굴로 답했다. "아킨토스 프리엔 입니다. 이번 학기에 로멜로 전학 온 친...구입니 다." 그 친구, 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아킨이 루첼을 흘끔 바라보았다. 루 첼은 '그런 척 해라.' 하고 마주 봐 주었을 뿐이었다. 세쟈르가 웃음 을 터뜨렸다. "그 나이에 학교에 들어와? 세상에, 그 전에는 뭘 했나." 루첼이 답하기도 전에 아킨이 먼저 답했다. "베넬리아 국립 마법원을 다녔습니다." 세쟈르는 놀랍다는 듯 눈썹을 밀어 올렸지만, 그 눈짓에는 설마 그 럴 리가, 라는 경멸이 담겨 있었다. 아킨의 눈이 한층 더 싸늘해 졌 고, 루첼은 조마조마해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래, 어쩌다가 그곳에서 전학 온 거지?" "퇴학당했습니다." 실비가 자기도 모르게 앗, 하고 소리를 냈다가 얼굴을 붉히며 입을 막았다. 세쟈르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낙제가 아니고? 퇴학이라니, 베넬리아는 아무리 문제아들이라도 우 수한 학생은 절대 놔주지 않기로 유명한 곳이라고. 그곳을 나올 만 한 이유라면 그것 밖에 없을 텐데." 루첼은 좌절했다. 아킨토스가 세쟈르의 멱살이라도 잡고 늘어진다 해도 할 말이 없을 지경이었다. 한심한 녀석, 루첼은 늘 그랬듯 속 으로만 경멸할 수밖에 없었다. 하긴, 그런 녀석이니, 루첼의 '정체'를 끝까지 모르고 지금도 모르는 중일 테지만. 세쟈르가 빈정거리며 말했다. "성적 미달로 퇴학당한 건가?" "초대 총장 분이 퇴학 기준을 정하실 때는, 정말 교수 세 명을 때려 눕히는 학생이 나타날 줄은 몰랐을 테지요." "너---!" 조롱한다고 생각해 성이 오른 세쟈르가 얼굴을 붉히며 뭐라 말하려 하자, 실비가 재빨리 나서서 그 말을 끊었다. "저, 저기....그럼 어디 출신이세요?" "말 할 수 없습니다." 여동생마저 그렇게 되자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한 세쟈르는 자리에서 요란스레 일어나더니 루첼을 내 던지기라도 할 기세로 사납게 말했 다. "이 녀석 대체 뭐냐!" "동기..입니다." "그래서! 지난번에도 나를 그렇게 창피 주더니, 이번에도 또 그럴 생각으로 이런 친구를 데리고 온 거냐!" "그야..." 본인이 그럴 상황을 만들지 않습니까, 하고 말하려는데 아킨이 먼저 손을 들어 루첼을 막았다. "이런 모독은 처음이군요, 알베스티 씨." "저런 놈과 같이 왔으니 그런 대우를 받는 것 아닌가. 이러니 친구 는 잘 사귀어야 하는 거라고, 아킨토스 군." 루첼은 결국 한숨을 내 쉬고 말았다. 한 대 맞아야 겠구나, 세쟈르~ 하면서. 뭐, 오늘은 명절이니 쫓겨나기밖에 더 하겠나. 아킨이 말했다. "제 일행을 모독하는 것은 저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저 녀석에게는 그럴만한 명예도 없어." "착각하지 마십시오. 전 제 명예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는 거지, 루 첼 그란셔스의 명예를 따지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명예는 자신이 지키는 것이니, 그의 것까지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이 자식이, 정말---!" 세쟈르가 손을 들었고, 그것을 보는 아킨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 때 굵직한 목소리가 그 싸움을 막았다. "그만 둬라, 샤즈." 세쟈르가 얼굴을 붉히더니 황급히 말했다. "아버님....!" 아킨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루첼이 문을 향해 허리를 숙이는 것을 보고, 그가 바로 이 알베스티 가의 주인이란 것을 알아챘다. 50 후반 되 보이는 키 큰 남자였다. 각이 진 턱에 구레나룻이 덥수 룩한 얼굴은 세쟈르와 아주 닮아있긴 했으나, 눈은 더욱 깊고 까만 빛이었다. 그는 아킨에게 정중히 말했다. "아들의 무례를 대신 사과 드리오, 공자." "........." 아킨이 말이 없자, 체노 알베스티는 더욱 정중하게 말했다. "당신의 나라에서는 어떨지 모르나, 이곳에서는 부모가 대신 하는 사과는 본인의 사과보다 더욱 정중한 사과로 치오. 그러니 이쯤에서 용서 해 주시는 것이 좋지 않겠소." "알겠습니다." ".....감사하오. 자, 그럼 실비, 두 사람을 손님방으로 안내해 드려라." 실비의 얼굴이 금새 환해졌다. "어서 같이 가요. 루츠 오빠, 아킨토스 님." 체노가 엄격하게 말했다. "실비, '루첼 그란셔스 씨'다. 더 이상 오빠라 부르지 말아라." 실비는 얼굴이 확 달아오르더니 우물쭈물 답했다. "네, 네....." 루첼은 아킨에게 손짓을 보내고는 실비를 따라나섰다. 아킨은 잠시 체노 알베스티를 바라보고는, 인사를 하듯 눈길을 내렸다. 체노 알베스티가 말했다. "그럼 편히 머물다 가시오, 공자." "감사합니다." 아킨은 손에 든 망토를 가슴 쪽으로 당기고는 자리를 나섰다. 체노 가 뒤에서 세쟈르에게 몇 마디 했고, 세쟈르는 몇 번 옥신각신 하더 니 쳇 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행여나 해서 귀를 기울였던 아킨은 가문 이름이 한번도 나오지 않자 더 이상 신경쓰지 않았다. "미안하다, 아킨." 객실에 도착하자 마자 루첼이 말했다. 그리고 실비 역시 손을 꼼지 락거리며 조심조심 말했다. "저도 대신 사과드릴....게요." 그러나 아킨은 비웃듯 응수했다. "이곳은 대신 사과하는 풍습이라도 있나." "얌마, 난....." "본인이 사과하지 않는 한 아무 소용없다. 방금 전....미안하지만 귀 찮아서 참은 것뿐이고, 화가 풀린 것도 용서한 것도 아니야." 아킨의 목소리에는 경멸과 분노가 가시처럼 돋아 있었고, 실비는 겨 우 동갑으로 보이는 소년에게 저런 말을 듣게 한 큰오빠의 행동이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다. 눈시울도 벌써 빨개져 있었다. 루첼이 그런 실비의 어깨에 손을 얹어 토닥여 주고는 아킨에게 말 했다. "다시 사과한다, 아킨토스.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지도 않고 너를 데 리고 온 것은 분명 잘못이다. 저 세쟈르 대신 사과하는 건 절--대! 아니니 그냥 받아." 그러나 아킨은 여전히 쌀쌀맞게 루첼을 바라볼 뿐이었고, 그 무표정 에 루첼은 조금은 당혹스러웠다. 이 아킨이 '전혀 모르는' 상대라는 것이, 또한 이런 상황에 처한 일 조차 별로 없을 것임에 분명한 귀 족가 자제라는 것이, 루첼로서는 어찌 말해야 쉽게 넘어가 줄지 감 을 못 잡게 하는 것이다. 상단에서 자라 눈치가 빠른 실비도 아킨이 루첼과 그렇게 친한 사 이가 아니란 것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만큼 루첼을 더 이상 난처하게 하고 싶지 않았고, 특히 모르는 상대 앞에서 더 창피한 꼴을 당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니, 그것은 그녀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 그런 만큼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최선을 다해보고 싶었다. "저...아킨토스 님, 대신 제가 정중히 모시어요. 저, 그러니....." 그러나 아킨은 창 밖을 한번보고는 말했다. "됐습니다." 마음 약한 실비는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고, 루첼은 그런 실비를 측 은하게 바라보아야 했다. 방안이 그렇게 얼어붙어 가고 있는데 다행히 누군가가 문을 두드려 왔다. 똑똑-실비가 완전히 힘이 빠져 있어서, 루첼이 대신 말했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자, 침대에 앉아 있어 그 사람과 정면으로 마주하게된 루 첼의 얼굴이 환해졌다. 실비도 어색하게 웃으며 방문객을 맞이했다. "작은오빠...." 루첼과 또래로 보이는 청년이었다. 키가 컸고, 검은 고수머리가 늘 어진 얼굴은 방금 전의 세쟈르와 좀 닮아 있기는 했으나, 약간 처진 눈은 그보다 훨씬 더 부드러워 보였다. "오랜만이다, 루츠. 저녁에나 도착할 줄 알았는데, 일찍 왔구나." "친구 덕이죠." 그리고 루첼은 아킨을 가리켜 보였다. 알베스티 가의 차남이자 실비 의 둘째 오빠인 지오바니는 누구에게나 친절할 듯한 호인다운 미소 를 짓더니, 아킨에게 손을 내밀며 반갑게 인사를 했다. 아킨은 건성 으로 그 손을 잡았다 놓았을 뿐이었다. 지오바니의 눈이 아킨을 아 주 흥미롭게 훑었다. "제국 남부 출신 같아 보이는데, 맞나?" 아킨의 눈이 날카로워졌지만, 그것은 아주 잠깐의 번득임이었다. "어떻게 알아보신 겁니까." "발음이 정확하긴 하지만....약간 늘어지는 억양이 섞여 있고, 그건 남쪽의 것이지." 그 놀라운 관찰력에 아킨은 솔직한 감탄을 담아 말했다. "대단하시군요." "어쨌든 만나서 정말 반갑네. 쥬나드렌 녀석도 재미있고 좋은 친구 였지만, 자네도....정말 재미있어 보여. 새사람과 많이 만나 볼수록 좋지." 그렇게 말하며 지오바니는 옆에 있는 루첼의 등을 툭툭 쳤다. 루첼 은 금방 그 뜻을 알아채고는 고개를 끄덕였고, 지오바니가 말했다. "그럼 실비, 네가 손님 접대 좀 맡아 주려무나." "나, 나...혼자서?" 실비가 어쩔 줄 몰라하며 당황했다. "우락부락하고 불친절한 하인 놈들보다는 네가 하는 편이 낳고, 아 킨토스 군도 더 좋아할 걸. 여기 루첼 군과 잠시 이야기할게 있어서 그러는데, 좀 오래 걸릴 것 같구나. 만찬에도 네가 모셔다 드리렴." "하, 하지만---" "어이, 실비. 퉁기지 말아라. 봐, 잘생겼잖아...물론 너보다 좀 어려 보인다만." 대강 분위기를 눈치 챈 아킨이 말했다. "....나가 봐라, 루첼." "미안. 나중에 보자." "사과는 이제 지겹다." 지오바니까지 웃어버렸다. 지오바니는 루첼을 끌고 곧장 서재로 갔다. 그곳은 알베스티 가에서 유일한 서재이긴 했으나 다른 명문가들의 것에 비하면 아주 작은 편이었다. 그러나 책과는 아주 사이가 나쁜 알베스티 가에서, 서재 를 마련한 후손은 오로지 지오바니 하나 뿐이었다. 서재는 햇빛이 잘 드는 남향 방에 잡아 가장 환하고도 아늑한 곳이 었고, 책 근처도 안가는 알베스티 가의 서재인지라 사람들이 거의 드나들지 않는 곳이어서 아주 조용했다. "출신지조차 몰랐단 말이냐." 지오바니가 놀랍다는 듯 말하자, 루첼은 멋 적게 웃었다. "그런데 그렇게 생판 모르는 녀석을 왜 이런 곳으로 데리고 온 거....어이, 루첼. 너 뭐 하는 거야." 루첼은 책상서랍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담배 갑을 찾아내 열 었고, 한 개비밖에 없자 울상을 지으며 입에 물었다. 지오바니는 성 냥을 던져주며 물었다. "학교에서 네가 이런 놈이란 건 아냐?" 루첼이 성냥을 당겨 불을 붙이며 말했다. "알면 여태 붙어 있겠어? 당장에 퇴학이지.....뭐, 하던 말이나 마저 하자. 혼자 오기는 좀 곤란했고, 얼결에 저 녀석에게 어떠냐고 해 본 것 뿐이야. 사실 기대도 안 했는데, 저 녀석이 갑자기 고개를 끄 덕여서 내가 더 놀랐을 정도지. 그렇게 우왕좌왕 하다 보니...여기 까지 데리고 오게 된 거야." "그 쪽에 사정이 있었나 보군." "아마도." 루첼은 연기를 후우 내 쉬었다. 하얀 연기는 안개처럼 자욱하게 어 리다 흩어졌다. 지오바니가 루첼의 옛 주인의 차남인 건 사실이지만, 이렇게 문 닫 고 둘만 남으면 그냥 반말과 애칭을 주고받는 친구가 되어 버렸다. 나이는 겨우 한 살 차이였고, 루첼이 '지금은 말 못하는 과거'생활을 하던 몇 년 전만 해도 둘은 분명 허물없는 친구 사이였다. 루첼은 담뱃재를 털어 내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넌 어디 갔던 거야? 너 없어서, 나만 된통 당했잖아." "저녁에나 도착할 줄 알아서 항구로 나갔어." "그곳에 뭐 볼일이라도 있었나?" 지오바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식이 떠돌아서 항구에 나가 본 거다. 그리고 그곳에서 내 귀로 직접 확인하고 오는 길이고....." "소식?" 지오바니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그레코 공작이 귀국한다." 루첼은 담뱃재를 재떨이에 세게 탈탈 털고는, 다시 입으로 가져가 물었다. "첸은 그런 말 안 했는데?" "네가 안 물어 보니 안 한 거겠지. 어쨌든, 지금 제국이 다시 황제 선출과 대가문 두 곳의 후계자 선정 문제로 끓고 있다고. 그레코 공 작도 주변이 워낙에 뒤숭숭하니까 빨리 여행을 마치고 내려온 것이 지." "단지 여행 떠났다 돌아온 것뿐이잖아. 그게 큰 일은 아닌 것 같은 데?" "맞아. 켈브리안 공주도 공작의 귀국일에 맞추어 여행을 중단하고 수도로 돌아온다고 하더라고. 내가 확인하러 간 건 그것이고, 물어 보니 정말 맞더군." "공주가.......?" "그래, 국왕폐하는 누가 봐도 무능하지만, 공작은 야심차고 유능하 지. 그러나 문제는 왕의 아내인 브리올테 왕비 역시 능력은 몰라도 야심은 만만찮다는 거야. 그녀는 아마도....자기 딸을 군부 쪽 사람 중 미혼이 있으면 주겠다고 슬쩍 내 비출 속셈인 것 같아. 없으면 미혼으로 만들면 되는 문제이기도 하고, 브리올테 왕비라면 그러고 도 남을 위인이다. 군부 쪽으로 안 되면 델카롯사나 암롯사 쪽에 신 부감으로 내 놓을 수도 있고, 그 쪽도 아주 좋지. 이도 저도 안되면 켈브리안 공주를 공작의 아들, 안드레아의 신부로 주겠다고 하던 가.....오랜 반목을 푸는데 자식들 시집 장가 보내는 것 만한 게 없으 니까." "가엾군, 그 공주님도. 돌아오자마자 팔려나갈 곳이나 정해질 처지 라니." "공주로 태어난 이상 각오해야 할 문제 아닌가. 어차피 윗 분들에게 는 결혼이란 건 일종의 거래 방법이니까." 루첼이 말했다. "그래서.....알베스티 가는 어찌할 생각인 거지?" "아버님은......아직은 왕비 쪽이신 것 같다. 어차피 군부는 공작을 좋 아하고, 돈줄인 상단은 왕비를 좋아하니까. 할아버님 역시 마찬가 지.....그러나 넌 신경쓰지 말고 처박혀서 공부나 해. 아버님은 널 신 뢰하지 않고, 할아버님 역시 너더러 뭘 하라 하지는 않을 테니." "그 정도로 주제넘지는 않아." 지오바니는 만족스럽게 웃었고, 눈가에 맺힌 우정어린 걱정도 웃음 과 함께 녹아들 듯 사라졌다. 그리고 한가로워진 그의 눈이 저녁놀 에 붉게 젖어드는 정원을 향했다. 연회 준비로 하인들이 바쁘게 오 고 가고 있었고 서재와 가까운 정원의 연못에 실비가 나와 있었다. "손님은 어쩌고 저기 나와 있는 거야, 저 녀석은." 실비는 벌써 단장을 하고 있었다. 날씬한 몸에 어울리는 연한 초록 색 드레스에, 진하고 숱 많은 갈색 머리카락은 리본으로 묶고 머리 에는 루비 보석장식이 달린 머리띠를 썼다. 그녀를 보는 루첼의 눈 이 아주 따뜻해서, 지오바니가 슬쩍 물었다. "실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좋아해, 아주." "......결혼하고 싶어?" 루첼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고는 말했다. "나한테 주고 싶냐?" "절대 싫지." 루첼은 담뱃재를 지오바니의 손등에 털었을 뿐이었다. *********************************************************** 작가잡설: ....^^ 후후..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4장 *************************************************************** [겨울성의 열쇠] 제12편 초대#3 **************************************************************** 아킨은 루첼과 지오바니가 나가자 마자 실비를 내 보냈다. 피곤하니 쉬고 싶다는 말뿐이었지만, 루첼이 떠나기 전 한번이라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실비는 단장이 끝나자마자 유모나 어머니 가 뭐라 말하던 말던 다시 아킨을 찾아갔다. 어쨌든 연회에 얼굴은 들이밀어야 손님으로 따라온 '척'은 할 수 있어, 아킨은 귀찮고 난감 하긴 했지만 별 수 없이 실비를 따라나서야 했다. 실비는 아주 얌전하고 상냥했지만, 앉아만 있어도 누구나 예뻐해 주 었던 소녀답게 그녀 자체는 '아주' 재미없었다. 아킨과 같이 나오기 는 했지만, 자신이 재치가 별로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아는 실비는 미칠 노릇이었다. 가슴에 꽂힌 장미꽃을 만지작거리고, 머리카락 속 으로 손가락을 넣어 돌리고, 목걸이를 톡톡 건드리다가, 어쩌다 억 지로 웃으며 화제를 꺼냈지만 아킨의 답은 '네', '아니오', '말할 수 없습니다.' 이상으로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얌전하게 있는 편이 나 을 듯 싶었지만, 나중에 이 소년이 루첼에게 어떻게 말할지 몰라 그 렇게 할 수도 없었다. 결국 실비는 귓불까지 새빨개져서, 이런 손님 과 함께 있게 한 루첼과 작은오빠를 원망했다. 루첼이나 쥰이 옆에 있다면 얼마든지 매력적인 숙녀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런 사람 과 있으니 평소의 몸가짐 마저 엉망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이렇게 시 시각각 창피해지는 건 처음이었고, 얼른 도망쳐 버리고 싶었다. 물론 아킨토스가 잘생긴 소년인 것은 사실이었다. 은빛 머리카락에, 금색 눈은 조금 기묘하긴 했으나 긴 속눈썹으로 그늘져 아주 아름 다웠다. 몸가짐 역시 알베스티 가에 들락날락 거리며 실비에게 치근 덕대던 남자들과 비할 바 못 되었다. 여기 저기서 주워 듣고 본 대 로 어설프게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곳에까지 세련됨이 깊이 배어 있었고, 그만큼 능숙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실비는 아킨 이 더 어려워졌다. 아주 작은 실수도 '촌스러운 행동'으로 보일지도 모르고, 그것을 아킨이 루첼 앞에서 비웃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겠는 가. 그렇게 있을 때, 연회장으로 향하는 복도 쪽으로 키가 작은 여자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실비를 발견하자마자 그녀가 날선 목소리로 말했다. "실비! 여기 있으면 어떻게 하니. 손님들 오시는데." "어, 엄마. 저기...." 화사한 붉은 비단에 금실로 수놓은 드레스로 한껏 차려입은 알베스 티 부인은 실비 옆에 있는 낯선 소년을 보자 얼굴이 발끈 달아올랐 다. 그리고 실비를 혼낼 생각으로 쌀쌀맞게 말했다. "누구니, 이분은." 실비는 두 손을 맞잡아 가슴에 대고는 얌전하게 말했다. "저......루, 루츠....아, 아니 루첼 그란셔스 씨의 친구분이예요." "그런 손님을 왜 네가 직접 접대하고 있는 거지? 응? 루첼 그란셔 스가 네 약혼자라도 된다던?" 약혼자라는 말에 실비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 그게 아니라 작은 오빠가..." 그러나 실비는 결국 제대로 말도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죠도 참 벌써 열 여덟이나 된 아이를 아무 남자 손에나 들려 보내 다니, 제 정신이니. 그리고....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아킨토스 입니다." 아킨이 성 없이 이름을 밝히자, 부인의 얼굴은 금방 찌푸려졌다. 큰 아들에게 이미 듣고 온 것이다. 그리고 아들이 받은 모욕을 어머니 인 자신이 대신 갚아주기라도 하겠다는 듯 호전적인 기세로 나왔다. "그럼 어디 출신이시죠?" "......무례하시군요." "여기서는 결코 무례가 아닙니다. 자신의 근본을 밝히는 것이야말로 '이런 집안'에 왔을 때의 기본적인 예의지요." "반도 구석의 어촌마을 예법 따위에는 관심 없습니다." 실비는 다시 얼굴이 달아올랐다. 알베스티 부인은 기가 막히다 는 듯 숨을 들이쉬고는, 분을 참지 못하고 더듬더듬 말했다. "다, 당신이야말로 무례하시군요! 여기가 어디라고!" 아킨은 실비의 손을 부인에게 넘겨주었다. 얼결에 실비는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무례는 이것으로 끝내주시길 바랍니다. 저도 참기 귀찮군요." "이, 이봐요!" "이만 '제 일행'인 루첼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아킨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아킨은 터벅 터벅 걸어가며 생각했다. 골치가 아플 정도로 피곤하 다, 정말. 며칠 편히 앉아서 보내기만 하면 될 거라 생각하고 왔는데, 곳곳에 서 어떻게든 깔아뭉개려 드는 사람만 불쑥 불쑥 튀어나와 귀찮게 군다. 그저 후견인이라고만 생각하고 온 것이 실수인 듯 했다. 아무 리 생각해봐도, 루첼은 이 집안에서 단단히 미움을 받는 듯 했다. 실비와 죠...어쩌고 하는 청년만 제하고는 모두 턱 세우고 적대하고 있으며, 그것은 일행인 아킨을 향한 무책임한 무례로 나타나고 있 다. 어촌, 어쩌고 하기는 했지만 알베스티 가문은 이곳에서 나름대 로 입지를 가지고 있는 상류층같아 보였고, 아킨'만'을 제한 손님 접 대는 아주 잘 하고 있었다. 아킨이 다른 손님과 함께 왔거나 혼자 왔더라면 대우는 아주 달랐을 것이다. 아킨은 홀의 사람들 사이를 지나 정원으로 나섰다. 저녁만찬에 초대된 귀빈들이 안내를 받으며 유유하게 산책하고 있 었고, 연인인 듯 보이는 어떤 남녀가 나무 구석에서 은밀한 이야기 를 주고받는 것이 보인다. 단풍들은 빨갛게 익어서는 어둠 속에서 흔들렸고, 그 사이로 밝혀 놓은 등들이 가지 사이사이에 걸려 있어 그 부분은 둥글게 금빛으로 물들어 있다. 풀벌레들이 발소리에 놀라 울음을 멈추었다가 곧 날개를 떨며 쓰르르 울기 시작했다. 아킨은 정원의 나무 틈에 서서 저택 쪽을 보았다. 벽돌로 짜여진 길 끝에 방금 전 빠져 나온 홀의 테라스가 튀어나와 있었다. 테라스 쪽 으로 루첼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 진한 붉은 머리카락은 어디 를 놔도 눈에 뜨이는 데다가, 키까지 커서 불쑥 튀어나오는 듯 금방 보이는 것이다. 다급한 모습을 보니, 아마도 아킨이 방금 전 실비를 그녀의 어머니에게 돌려보낸 것을 어디에서 듣고 아킨을 찾아 나선 것 같았다. 아킨은 주머니에 손을 꽂고는 루첼을 기다렸다. 그러나 루첼은 계속 두리번거렸고, 아킨은 자신이 나무 뒤에 있어 보지 못한 것 같아 정 원수 앞으로 나섰다. 그제야 루첼이 아킨을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 다. 아킨은 손을 들었다가 놓고는 잠자코 루첼을 기다렸다. 그러나 루첼 이 테라스로 나오는데, 그 옆으로 루첼과 키가 비슷한 청년 하나가 붙었다. 짧게 친 검은머리에, 꽤 단단하고 날렵해 보이는 체구를 가 지고 있었다. 루첼이 그 쪽을 돌아보더니 얼굴이 굳었다. 그리고 아 킨을 보며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켜 보였다. 기다리고 있으라는 말 이다. 이번에는 또 누군가 싶어, 아킨은 고개는 끄덕여 보였지만 루첼이 그 청년과 테라스를 내려와 정원 안쪽으로 들어가자 곧장 따라 나 섰다. 아킨은 적어도 이런 냉대의 원인이 조금(정말 아주 조금)은 궁금했던 데다가, 방금 전 청년의 눈빛에서 뿌리깊은 증오를 읽었 다. 놔뒀다가는 루첼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그렇게 되면 따라 나 온 아킨에게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아킨은 소리 없이 정원의 나무 틈을 빠져나가다가 어둑한 곳에 서 있는 두 젊은이를 발견하게되자 몸을 감추었다. 아주 까만 어둠이 내려앉아 있어, 아킨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작은 말소리가 들려왔다. 처음부터 듣지 않아 알아들을 수 없는, 작 지만 험악한 말이 쏟아졌고 그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루첼은 차분 하게 답했다. "....내 마음이다." "차라리 네 후견인이나 찾아다니지 그러냐. 예전에 청소나 하던 이 곳이 아니라." 그것은 걱정이 아닌 비웃음이었고, 상대가 화내기를 바라는 시비에 불과했다. 유치하군, 아킨은 그렇게 생각하며 목을 조이는 스카프를 풀었다. 루첼이 안경을 벗어 옷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본론만 말해, 샤테." "이게 본론이라구." 청년의 입술에 웃음이 걸렸지만, 그것을 보는 루첼은 차라리 태평했 다. "시시하네." "간 부었어, 루첼 그란셔스." "이건 자신감이라고, 얼간아." 저럴 줄 알았지, 하고 아킨은 생각했다. 모범생인 척은 하고 있었지만, 아킨이 보기에는 루첼 그란셔스란 녀 석은 머리가 지나치게 좋은, 조금은 음흉한 녀석이었다. 그리고 그것 은 관심을 안 가진다, 안 가진다 하고는 있었지만 같은 방을 쓰니 저 절로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 그렇게 자신감이 넘치다 보니 이젠 실비에게까지 찝쩍 대는 거냐." "아아, 역시나 그게 본론이었군." 샤테가 루첼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헛소리하지마--!" "관심이 있으면 네가 직접 나서. 왜 넌 공평하게 무시당하지 않느냐 고 억지 쓰지 말고." "너..." "비겁하고 유치하다, 샤테. 게다가, 벌써 7 년째인데 이제는 나한테 시비 걸지 말고 다른 길이나 모색해야 하는 것 아냐? 물론 너, 스, 스, 로." "물론 모색했지. 그리고 그 새로운 길로 나설 것이고! 두고 보라고. 아마도 2-3년 뒤에는 내가 너보다 더 빨리 출세할 테니! 난 젠장, 정말 기사가 될 거라고!" 루첼이 웃었다. "두고 보라고? 미안. 나는 네가 나에게 신경 쓰는 것만큼 너를 신경 쓰지는 않고 네 기쁨을 나누고 싶을 정도로 너를 좋아하지도 않지. 그러니 네가 그렇게 되어 봤자, 네 스스로 우쭐하는 것 이외에는 아 무 의미 없을 걸." 거기까지 듣고 아킨은 후, 하고 한숨을 쉬었고 예상했던 대로 철썩 ---하고, 큰 소리가 허공을 후려쳤다. 그리고 잠시, 씩씩 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고 이 즈음 나서는 게 좋을 듯 싶어 아킨은 옆의 가 지를 소리나게 꺾어 버리며 있는 표시를 냈다. 그러자 숨이 뚝 멈추더니, 샤테 인지 뭔지 하는 청년은 뭐라 험악하 게 뇌까리며 자리를 나섰다. *********************************************************** 작가잡설: ......크흠. 아킨이 먼저 슬쩍.......(뭘?)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4장 ************************************************************** [겨울성의 열쇠] 제13편 초대#4 ************************************************************** 아킨은 잠시 동안 나무둥치에 등을 기댄 채 서 있었고, 아무 소리도 기척도 내지 않았다. 씩씩거리는 소리가 아예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잠잠해져도 그렇게 서 있었고, 그런 아킨을 루첼이 부른 것은 그 상대 청년이 황소처럼 화 를 내며 만찬 장 쪽으로 사라진 직후였다. 고개를 돌리니 저 멀리 반도 특유의 경쾌한 민속음악이 바이올린을 통해 나오고, 연회장에서 한 쌍의 중년부부가 앞으로 나서 춤을 추 는 것이 보였다. 루첼이 말했다. "너, 거기 있지?" "....아마도." "자기가 어디 있는 지도 모르는 바보도 있군." 아킨이 어둠 속에서 나오자, 루첼은 주머니에 꽂아 넣었던 안경을 뽑아 다시 썼다. 물끄러미 보던 아킨이 말했다. "얼굴 맞을까봐 미리 벗어 둔 거로군." "지난번에 저 녀석에게 만나 한번 깨졌었거든......비싼 물건이라 할 아버지가 마련해 주기 전까지 꽤 고생했어." 루첼의 뺨은 빨갛게 부어 있었다. 그러나 길가다 나뭇가지에 긁혔다 는 듯한 얼굴이라, 아킨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대신 아킨은 주머니에 손을 꽂고 만찬장 쪽을 돌아보았다. 그 청년은 벌써 사람 들 틈에 섞여 보이지 않았다. 루첼이 안경을 위로 바짝 밀어 올리며 말했다. "다......들었겠네." "들어도 모르는 이야기다......네가 여기 청소했다는 것 만 빼고는." 아킨의 말은 건조했지만 무시하거나 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렇게 말 해도 루첼이 답이 없자, 잠시 생각 좀 하고는 덧 붙여 말했다. "네가 말하지 않는 다면, 묻지는 않겠어." "이상한 녀석 같으니." 아킨은 두 팔을 들어 보였다. "너와 나는 서로의 호기심을 갚아야 할 정도로 친하지는 못해. 그리 고......나는 분명 말했다. 넌 네가 보여주고 싶은 것만을 보여주고 말 한다고. 나 역시...네가 원한다면 그 이상으로는 알려고도, 상관하지 도 않겠어." "섭섭하지만...어쨌든 오늘 나 때문에 그런 일을 당했으니....가르쳐는 주겠어." 루첼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겨 하나로 묶었다. "네가 들은 대로 난 열 다섯 살 때 여기서 일했다.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셨고 여기 저기 전전하다가 누군가의 소개로 일하게 된 거야. 전에 다른 일을 하긴 했는데...눈이 나빠져서 그만뒀지." 뭔가 웃기는 이야기가 나왔는지 저 편에서 와르르 웃어젖히는 소리 가 들려왔다. "사실, 그 때 좀 힘들었어. 내가 이지경이 될 정도로 버림받은 건가, 해서 화도 나고....사실 그 전에 하던 일을 평생 할거라 생각했었거 든. 충격도 컸다고. 게다가....친구들과도 롬파르를 떠나오면서 모조 리 헤어진 데다가, 여기서는 골목길에서 일 할 때 알게 되었던 죠 나, 그 여동생인 실비 밖에는.... 좋아할 만한 사람도 없었거든." 다시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잔잔한 음악, 연회장의 사람들 이 남녀 별로 양손을 마주잡고 가벼운 무곡에 몸을 싣고 춤을 추었 다. 루첼도 그곳을 보더니 가만히 웃었다. "그 할아버지와 만나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지. '호위'를 고르려 고 본가에 잠시 들렀는데, 세쟈르 녀석이 할아버지에게 방금 그 녀 석을 소개했지." 그러나 그날 그 청년 본인조차 모르는 시간에 그 미래를 부수어 버 린 것은 루첼이었다. 그리고 나이답지 않은 눈빛이 마음에 들었던 노인은 호위를 구할 생각은 잊어버렸다. 그 후, 그는-그리고 바로 이 체노 알베스티의 아버지이기도 한 그 노인은, 늘그막에 루첼의 후견인이 되어 다른 '아들'을 키우게 된 것이다. 그것은 루첼이 너무 빨리 맞이하게 된 인생의 전환점에서 만난 놀라 운 행운이었다. "그래서 네 살이나 많았군." 루첼이 웃었다. "내가 낙제라도 한 줄 알았냐." "그럼, 왜 이렇게 너를 미워하는 거지?" "사람들이란 말이다.....자신과 아예 격이 틀리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성공하면 부러워하기보다는 포기하지. 하지만, 비슷하거나 못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자신보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맹렬하게 미워 한다. 저 녀석은 차라리 나아. 적어도 노력은 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다른 녀석들은......그것도 아니지. 그저 나를 미워하고 험담하고 냉대 하는 것으로 화풀이를 할 뿐, 내일이면, 그리고 다시 내일이 되면 남의 행운을 질투하며, 그렇다고 스스로의 행운을 만들어 낼 생각은 하지 않으면서 자기보다 '아래'라고 생각되는 자들을 비웃고 학대하 는 것으로 자신을 달래지. 그 뿐--모두를 포기하게 하고, 그 절망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싶어하고......." 그리고 루첼은 아킨을 바라보았다. "그저 '살아갈' 뿐이지." 아킨은 동정하지도, 감탄하지도, 그렇다고 불쾌해 하지도 않는 그렇 게 건조한 눈으로 루첼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더니, 냉담하게 말했다. "교활하군, 너란 녀석은." "뭐?" "오면서 말한 대로다. 모범생 루첼. 학교에서는 모두들 좋아하고 존 경하는 착한 루첼이지만, 이게 진실이군." "순진하기에는.....보고 들은 게 너무 많거든. 나, 어렸을 때부터 별짓 다하고 산 녀석이야." 다시, 아킨의 얼굴위로 비웃음이 스쳐지나갔다. 루첼은 불쾌함과 호 기심을 동시에 느끼며 물었다. "너.....대체 뭐 하는 녀석이지?" "여기 사람들이 자주도 묻던, 그 출신지가 궁금한 건가." 그렇게 말하는 아킨은 눈을 도전적으로 빛냈다. 루첼이 어깨를 으쓱 했다. "네가 알게 된 것만큼, 나 역시 알고 싶은 거야....그리고 출신지를 묻는 것은 반도의 예법이다. 알아둬." "그래, 그건 알아두지. 하지만 루첼, 너는 오늘 내가 받은 모욕에 대 한 빚을 갚은 것뿐이다. 내가 말했으니 너도 말하라는 건 억지야." "혼자 온갖 불행을 꿍쳐 넣은 것처럼 굴지는 마, 아킨. 얼마나 대단 한 건지는 몰라도,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건 아닐 걸. 물론 너 스스 로 생각하기에는 다를 테지만." "그럼, 너는 내 비밀을 감당할 능력은 되나?" "난 너보다 나이도 많고, 겪은 것도 많아." "방금 전 그들에게 그랬듯 나도 비웃을 생각이라면 관둬. 난 네 호 의나 존경을 받고 싶은 생각도 없고, 비웃음 당한다 해서 거북하지 도 않아. 그리고......" 아킨의 눈이 다가왔다. 버드나무 잎처럼 날카롭게 선 진한 갈색의 동공과, 그 주변으로 펼 쳐지는 다채로운 홍채. 루첼은 그 어떤 때보다 더욱 강렬한 호기심 과 흥미를 느꼈다. 조용한 녀석, 그러나 그 달빛 터지던 날 밤 흐르 던 눈물과, 간헐천처럼 폭발하는 뜨거운 투사의 기질. 호기심은 기묘하게도 호감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쥰이나 지오바 니, 실비에게도 느껴본 적이 없을 정도로 강렬한 '무언가'가 루첼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저것은 황야에 솟은 단단한 회색의 성채다. 홀로 우뚝 솟아, 도전자 를 기다리는 그런 굳건한 성채-- 이것은 도전이었고, 쟁취로 끝나는 것이었다. 저 견고한 고독의 성 채 안을 들여다보고 싶어지고, 그 안에 있는 것이 실제로는 아무 것 도 아니었던 것이라는 것을 알아내고, 무너뜨려 버려 진실 된 아킨 을 끌어내 싶어졌다. 이 버르장 머리 없는 꼬맹이, 하고 말하고 싶 어진다. 그 눈빛을 보며 아킨이 말했다. "너 역시 이제 스무 살 된 어린애일 뿐이다. 그러니 다 산 척 잘난 체 하지마. 세상에는 호의나 동정, 또는 그 잘난 '경험'만으로 감당 할 수 없는 진실이란 것이 있으니까." 적의는 없었다.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고, 돌아섰다. 그 리고 바로 그 순간, 루첼은 아킨의 눈에 확 타오르듯 떠오르는 적의 와 공포를 발견했다. 루첼이 돌아보자, 그 맞은 편에 하인 하나가 얼굴이 새파래진 채 서 있었고 그 옆에 키가 큰 낯선 사내가 서 있었다. 나이는 한 서른쯤 될까, 짧게 다듬은 턱수염과 부드러운 진한 금발을 가진 남자였다. 허리에는 검이 채워져 있었고, 그 가슴과 어깨는 가벼운 은빛 갑옷 으로 덮여 있었다. 기사--기사다. 아킨은 이를 뿌득 악물었고, 그대로 그 기사를 지나치려 했지만 기 사가 돌아서 아킨의 뒤를 따랐다. 아킨은 거칠게 돌아서며 험악하게 말했다. "여기는 어떻게 알아낸 겁니까--!" "못 알아낼 것도 없지요." 안면이 있는 하인이 루첼을 돌아보며 답을 구했다. 얼굴이 구겨진 것으로 보니, 이 기사 때문에 모두 당황하고 고생 좀 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리고 루첼에게는 답하느라 시간 낭비하는 것보 다는 이 하인을 끌고 자리를 비켜 주는 것이 우선이라고 알 만한 판단력도 있었다. "아킨, 나중에 보자." 그렇게 말하고는 루첼은 험악한 얼굴의 하인을 끌어 당겼다. 둘만 남게 되자 아킨은 마음놓고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다그쳤다. "마르실리오 경--!" 기사가 말했다. "당신이 '친구 집으로 놀러갔다'라는 기가 막힌 사유를 적어 놓고 도망쳐 버린 덕에 저희들이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정도는 알아주십 시오." "그래, 그럼....알아냈으니 당장 끌고 가겠습니까." "휴가는 남았고, 지금 당장 간다면 하루 정도는 그곳에서 머무실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싫습니다." 마르실리오가 엄하게 말했다. "아킨토스 님."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럴 줄 다 알고 온 마르실리오는 나른히 한숨을 쉬고는, 쉽 게 물러났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휘안토스 님께서 만약 데리고 오지 못한다면 전하라 하며 전갈을 보내셨습니다. 또, 서신으로 보내면 읽지도 않 고 찢어 버릴 테니 반드시 말로 전하라 하셨습니다." "뭡니까." "어쨌든 당신은 본가의 아들이며, 자신의 동생이다.... 어디로 가든 이 점만은 분명히 기억하라, 하고." 그렇게 말한 마르실리오는 손을 가슴으로 당겨 붙였다. "그럼, 다음 번에 뵐 때까지 건강히 지내......" "...꺼져요." 아킨은 조용하고 날카롭게 쏘아붙이고는 루첼이 사라진 쪽으로 걸어갔다. 마르실리오는 후우--하고 힘없이 한숨을 내 쉬었다. "골치 아픈 도련님이군, 정말--" *********************************************************** 작가잡설: 루첼, 너 정말............. 좋았어! <-어이, 어이...;;;;;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장 ************************************************************** [겨울성의 열쇠] 제5장 검은 빛깔의 고독 제14편 검은 빛깔의 고독#1 ************************************************************** 반도 옆구리에서 움푹 들어간 팔레노 강 옆에 붙어 있는 로메르드 의 수도 롬파르는 서대륙과 동대륙 사이에 놓인 큰 항구 중 하나였 다. 동대륙과 서대륙으로 가는 많은 화물들이 그곳을 거쳐갔고, 많은 이 들이 모였다 흩어지는 만큼, 온갖 사람들이 모이고 헤어지고, 그들 을 따라 각 방위에서 쓸려 내려온 대륙의 소식들이 다시 섞이고 퍼 져나가는 곳이기도 했다. 소식 중에는 누구나 알아도 되는 것이 있 기도 하고, 깊숙하고도 은밀한 것들 도 있었다. 전자는 그저 듣고 이야기하면 되지만, 후자의 것은 값을 매겨 주고받는다. 그리고 이 러한 것들을 파는 자들은 따로 있었고, 이런 비밀들이 오고가는 컴 컴한 곳에 이르면 비밀들은 당연하게도 '죽음'을 전제로 철저히 보 호되었다. 그 때문에 루첼은 그곳으로 갈 때면 익숙한 얼굴들이 인사를 건네 도 도무지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해가 기울자 여기 저기 뭉쳐 흐르는 구름은 발그레하게 달아오르고, 다닥다닥 붙은 건물들은 까맣게 물들었다. 갈매기가 끼루룩 우는소 리와, 늘어지는 노란 햇살을 타고 항구 안으로 들어오는 배들 갑판 에서 선원들이 거칠게 고함치는 소리도 들려왔다. 더러운 고양이가 입에 꺼멓고 자그만 것을 물고 휙 지나가고, 몸을 웅크리고 있던 걸 인들이 루첼의 옷자락을 붙잡고는 구걸했다. 그렇게 어렵사리 목적한 문에 다다르자, 루첼은 이거 잘 하는 것인 지 모르겠다 중얼거리고는 문을 밀어 안으로 들어갔다. 주점 안에서는 역한 악취와 술 냄새가 풀풀 풍겨 올랐고, 고함지르 는 듯 험악한 말소리가 소란스레 들려왔다. 루첼은 지정된 자기 자 리에 앉아 바텐더를 불렀다. "제임." 건장한 체구에 금발머리를 짧게 친 바텐더가 루첼을 돌아보더니, 눈 가에 금방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오랜만이군, 루츠. 어디로 싸돌아다니다가 이제 나타나는 거냐?" "난해한 시험의 계곡을 헤매다 오는 길이지." "엿먹을 우등생, 이번에도 수석이야?" "3등. 완전히 망쳤다고." 쥰이 듣는 다면 이런 재수 없는 자식, 하고 탈탈 털어 댔을 것이다. 루첼은 제임이 건네주는 자그마한 잔을 받아 들며 물었다. "첸은 안에 있어?" 제임이 그 잔에 술을 따라 주며 말했다. "큰 새의 일인가?" "그 할아버지가 궁금한 건 예쁜 장미 묘목이 어디서 나오느냐, 그것 밖에는 없다고. 그리고 그건 내가 항구 한번 쓸면 간단히 알아낼 수 있는 것이고. 오늘은 그냥 개인적인 궁금증 때문에 찾아온 것 뿐이 야." 제임은 술병을 당겨 찬장에 넣으며 말했다. "개인적인? 어디 예쁜 아가씨라도 하나 찍었어?" "아니, 예쁜 남자애." 제임의 얼굴이 해쓱해졌고, 루첼은 고개를 슬쩍 돌리며 말했다. "어쨌건 첸은 있겠지?" "물론. 직접 보고 물어. 마침 나와 있으니." 그렇게 말하곤 제임은 옆으로 물러섰다. 그 뒤에 검은 까마귀를 어 깨에 얹은 키가 작은 사내가 서 있었다. 날렵해 보이는 마른 체구 에, 눈은 약간 황달기가 있어 노르스름했다. 턱은 가늘었고, 코 역시 매처럼 날카로웠다. 그의 울퉁불퉁한 손에는 밀가루 반죽하다가 온 듯 허연 가루가 잔뜩 묻어 있었고, 얼룩진 앞치마에도 소스가 튀어 있었다. 루첼은 손을 흔들었다. "안녕, 체니." 첸이 으르렁거렸다. "그런 기집애 같은 애칭으로는 절--대 부르지 말라고 했지, 루치." 까마귀가 깍깍거리더니 루첼에게 푸드덕 날아왔다. 루첼은 그 턱을 밀어 올려 주며 말했다. "루치나 체니나-" "길드 마스터에게 너처럼 뺀질 뺀질 시건방지게 구는 놈도 없을 거 다. .........담배?" "끊기로 했어." "맙소사, 그 나이에 벌써 인생의 재미 하나를 끝내시겠다, 이 말이 냐. 마침 툴칸 제국산 담배가 들어왔는데....이거, 나 혼자 다 피워야 겠군." 루첼이 손을 내밀었다. "내일부터 끊기로 했다는 말이야." 첸은 킬킬 웃더니 앞치마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 루첼에게 건네주었 다. 루첼은 손끝으로 잡아 입에 물고는 첸이 건네주는 촛불로 불을 붙였다. 루첼이 담배를 한번 빨아들이고는 말했다. "그런데....내가 오는 줄 알고 있었나 보네." "마침 에나가 있었어. 널 발견하고는 잽싸게 달려와서 가르쳐 주더 군." 루첼은 손가락에 끼운 담배를 흔들며 웃었다. 첸이 덧붙였다. "가기 전에 한번 들러 줘. 아주 보고 싶어하던데.....안 보내면 날 죽 이겠다던걸." "자고 갈 시간은 없을 텐데. 오늘은 어두워지기 전까지는 기숙사로 들어가 봐야 한다고." "너는 아주 잠깐이면 되잖아." "죽인다, 체니." 첸이 심술궂게 웃었다. "이제 스물이고, 아직 할 날도 많고 쌩쌩하니 늘겠지, 뭐. 그건 그렇 고 뒤에서 듣자니 뭐 예쁜 남자애한테 관심이 간다고 하던데.....정말 은 무슨 일인 거냐?" "재미있는 녀석 하나가 굴러 들어와서." 첸이 주머니에서 파이프를 찾아 물고는 불을 붙였다. 루첼은 그 파 이프를 갈망어린 눈초리로 보았고, 첸은 의미심장하게 쏘아보았다. "누군데?" "아킨토스 프리엔. 지금 내 룸메이트야." 첸은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위 아래로 밀었다 내렸다. "이름을 보니 제국출신 같군. 그래, 뭐 하는 놈이야?" "알면 내가 여기까지 왔겠어? 하나도 몰라, 하나도-- 자기도 전혀 가르쳐 주지 않고." "그럼, 너한테 무슨 짓이라도 한 거냐." "그건 아니고....그냥, 궁금해서." "상관없으면 관심 끊어. 제국 녀석들이 얼마나 까탈스러운데, 괜히 쑤시다가는 칼침 맞는다, 너." "난 호기심이 삶의 보람인 마법사 지망이야." "잘난 마법사 양반, 좋아....궁금하다고 하니 그냥 가르쳐 주지. 아킨 토스 프리엔.......음, 귀족?" "가신까지 있는 귀족이지." "그럼, 꽤 높은 공국 기수가문이겠군. 좋아, 알아다.....가만, 아킨토스 프리엔?" 루첼은 마침 담뱃재를 재떨이에 털어 넣고 있어 첸의 얼굴을 제대 로 보지 못했다. ".....베넬리아에서 퇴학당했느니 뭐니 하는 말은 하지 마. 나도 잘 아니까."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든 루첼은, 그제야 첸의 얼굴이 핏기가 삭 가 신 것을 발견했다. 파이프는 입술 근처에 엉거주춤 매달려 있었고,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루첼이 손가락으로 입술 부근을 가리키자, 첸 은 얼른 파이프를 당겨 물었다. 그리고 그 뾰족한 턱을 쓰다듬으며 짧게 혀를 찼고, 루첼은 그것이 첸이 뭔가를 알아냈을 때의 버릇이 란 것을 알고 있었다. 첸은 길게 빨아 들였던 담배 연기를 자욱하게 내 뿜었다. 촛불의 불 빛이 흐려졌고, 첸의 눈도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느라 흐려져 있었 다. "체니?" "오늘 바로 알려주긴 곤란하니, 이번 일요일날 다시 찾아와라." "지금 가르쳐 주면 안 되는 거냐?" "그럴 수도 있지만.....좀 더 '정확하게' 알아내는 편이 좋겠지." 루첼이 눈을 찌푸렸다. "그냥 학생 인적사항인데, 뭐가 그렇게 복잡한 거냐." "'그냥 학생'이 아닐 가능성이 높으니까 그렇지. 이름만 비슷한 다른 인간일 수도 있고, 그냥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고.....하지만 네가 말 하는 꼴을 보니 그런 경우는 아닐 듯 하군." "아니라면 어떻게 되는 거지?" "혼 나는 거지." 그리고 목을 치는 첸의 목소리는 잔뜩 낮춰져 있었다. "좀 지저분한 사생활과 관련된 거니까." 루첼이 뭐라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첸이 눈짓을 했다. 그러자 싸구려 향수냄새가 확 풍겨오더니, 목 위로 둥글게 부푼 가 슴이 찰싹 달라붙었다. 첸의 의도를 알아 챈 루첼은 옷 속으로 파고 드는 손을 뒤로 밀며 말했다. "에나--나중에. 그리고 체니, 저기...." 그러나 첸은 파이프를 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요일날 다시 보지. 그리고.......뒷방 비었으니 알아서들 해." "야, 체니--" "여기서 말리면 나중에 내가 에나에게 혼난다고. 안녕~~" "저 자식이, 정말!" 루첼은 결국 포기했다. 에나까지 동원해서 말을 막으려니, 더 물어 보다가 그 다음에 뭐가 올 지 모를 일이다. 그러고 있자니, 첸이 옆 의 제임에게 눈치를 주는 것이 보인다. 제임이 다가오자, 첸은 그 귀에다 대고 뭐라 속삭였다. 그 주고받는 눈빛을 본 루첼은 왠지 잘 못 '선택'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나갔다 온 거냐." 루첼이 돌아오자, 아킨은 침대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가 그렇게 물 었다. 책 위에는 여기 저기 빨간 줄이 그어져 있었고, 소년은 턱을 툭툭 건드리더니 무언가 빠르게 적어 넣었다. 무슨 공부를 하나 궁금해서 루첼이 다가가려 하자 아킨은 손을 휘휘 저어 오지 못하도록 했다. "왜 그러는 거야?" 아킨이 들고 있던 펜 끝으로 루첼을 가리켰다. "언짢은 냄새가 나니까." "언짢은?" 루첼이 옷소매를 얼굴 가까이 당기니 담배 냄새가 진하게 풍겨왔다. "아, 담배 냄새 때문에?" "아니. 그것 말고." "그럼 뭐?" "한시간 전에 어디서 뭘 했어?" 아킨이 무슨 말을 하는지 눈치챈 루첼은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변 명이라도 하기 위해 그 침대에 걸터앉으려 했지만, 아킨은 여전히 눈을 찌푸린 채로 건너편에 있는 루첼의 침대를 가리켰다. "저기로 가." 루첼은 녀석의 머리라도 한 대 걷어 차주고 싶었다. "남자라면 누구나 하는 거다.....아킨! 게다가 난 스무 살이나 됐고." "그리 당당하면 실비란 아가씨에게 편지라도 한 장 써 주지. 어느 날 나가더니 해 저물기도 전에 사창가에서 여자와 구르다 돌아오더 라고." 루첼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이봐, 그건 내 사생활이라고. 너한테 일일이 지도 당할 이유는 없 다고 보는데, 학생?" "사생활을 존중받고 싶다면, 그 사생활이 내 불쾌함을 유발하게 하 지는 말아 줘.....뺀질이." "....." 모범생, 우등생, 착한 학생....등등의 답답한 수식어를 달고 다니며 교수들의 칭찬과 학우들의 존경과 동경, 또는 경쟁의식을 불태우게 하는 루첼이, 뺀질이라는 말을 들어본 것은 '로멜에서는' 이번이 처 음이었다. 예전에 루첼이 뒷골목 생활을 했다는 것을 알 사람이 이 로멜에는 당연히 없었고, 그가 후견인을 만나 로멜로 들어오기 전, 즉 열 다 섯 살 이전까지 뭘 어쩌고 다녔는지는 루첼 본인만이 다 기억하고 있었다. 알베스티 가로 들어간 것은 순전히 '정신차리고 자리를 잡 아보기' 위해서였고, 그 덕에 너무나 엉뚱하게 이곳에서 공부하게 된 것이었다. 순진한 사람들은 여기까지 이르는 루첼의 길이 어느 가난하지만 성 실하고 명석한 소년의 눈물나는 고생담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루첼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머리'에 가까운 위치였던 데다가 지금도 뒷골목 친구들과 어울리고 있었고, 그 교우관계를 정리할 생 각도 없었으며, 성격 역시 거기서 거기였다. 이런 상황을 모두 알려 주고 새로이 사귀게 된 친구는 쥰 뿐이었고, 섣불리 어린 학생들과 사귀었다가 그들이 비밀을 여기 저기 다 흘려 소문 퍼지고 눈총 받 게 되는 것은 영 질색이라 인간관계를 넓히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덕에 '모범생 루첼'이란 별명도 굳어져 버렸다. 아킨은 이제 책을 덮고 책상 서랍을 뒤지고 있었다. 목까지 오는 검 은 스웨터를 입고 있어, 머리카락은 더 하얗게 반짝였고 어깨나 허 리선도 잘 드러났다. 몸집은 호리호리하긴 했지만, 단단한 어깨나 팔뚝이나 아무리 봐도 마법만 공부한 녀석의 것은 아니었다. 또, 양 쪽 귀에서 세 개씩 반짝이는 은빛 귀걸이는 멋을 내기 위해 달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분명 다른 이유가 있는 듯 했다. 단순해 보이기 는 했지만, 가끔 햇빛 속에 서 있으면 그 안에 새겨진 진녹의 문자 가 드러나곤 했으니. 일요일이 되면 알게 될 테지만, 루첼은 녀석에 대해 당장에 알아내 고 싶을 정도로 호기심이 일었다. 그런데 아킨이 포트에 바닥에만 조금 남은 차를 탈탈 털어 내며 말했다. "벌써 떨어졌나?" 아킨이 외출하지 않은 지는 벌써 이 주일이 넘어가고 있었다. 지난 주에 뭐에 홀린 듯 멍청하더니, 결국 주말마다 항구에 나가던 것을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아킨은 기숙사 지붕 위로 우뚝 솟은 로멜의 시계탑을 보았다. 다섯 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그는 곧장 옷장 문 을 열었다. 루첼이 말했다. "이봐, 아킨, 곧 저녁 시간이라고." "챙겨 줘. 금방 들어올 테니." 아킨은 옷장에서 꺼낸 코트를 옆구리에 끼고는 문을 나섰다. 루첼은 그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낮에 첸에게 부탁한 것이 생각나 영 꺼림칙해졌다. *********************************************************** 작가잡설: 이번 이야기는 어쨌든 노말 입니다....(자기최면) 자, 이제 따라 잡으려면 몇편 남았나...(아득..)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장 *************************************************************** [겨울성의 열쇠] 제15편 검은 빛깔의 고독#2 **************************************************************** 롬파르의 부둣가는 벌써 해가 저물어 까만 어둠에 잠겨 있었다. 저녁노을에 젖은 하늘은 불타는 듯 붉었고, 바다는 잉크처럼 검게 출렁였다. 하늘을 등진 수도 롬파르의 높은 건물들은 어둠에 완전히 물들어 시커멓게 비죽 비죽 솟아 있었다. 부둣가 선착장의 램프들이 켜져 바다 위로 솟구쳐 올라 긴 빛을 뿜었고, 그 사이로 배들이 쓸 려 들어왔다. 사창가와 술집들의 문이 열리며 낮과는 완전히 다른 밤의 거리를 깨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킨은 항구로 향하는 한산한 길로 접어드는 순간 뒤통수에 내리 박히는 날카로운 시선을 느꼈다. 뒤를 돌아보니, 가로등이 비추는 한산한 거리뿐이었다. 하늘은 아직 끝자락이 타는 듯 발그레했고, 널찍한 허공에는 검푸른 어둠이 내려 앉기 시작하며 하얀 별들이 빛나기 시작했다. 마차 한 대가 끝에서 솟아오르더니 아킨의 옆을 지나갔다. 먼 거리를 여행하고 왔는지 지 친 말들이 내쉬는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아주 컸다. 어서 들어가야 하나, 아킨은 그렇게 생각하며 망토를 당기고는 발걸 음을 돌렸다. 그러나 다시, 날카로운 시선이 귓불을 스치는 것 같았 다. 아킨은 고개를 돌렸고, 순간 그의 목덜미 옆으로 얇고 차가운 것이 와 닿았다. "--!" "쉿." 아킨의 눈이 확 빛났고, 어둠에 밝은 그 눈에 까만 골목길을 등진 사내가 보였다. 아킨보다 목 하나 정도 큰 건장한 사내였다. 뿌옇게 얼어붙는 숨소 리에 진한 담배 냄새가 풍겨져 왔고, 싸한 박하 향도 희미하게 스며 들어 있었다. 강도인가, 아킨은 품안으로 손을 집어넣었지만 칼이 더 바짝 다가왔 다. "잠시 알아볼 것이 있어서 데리러 온 것 뿐이야. 돈 필요 없어." 사내의 연푸른 색 눈이 그림자 속에서 드러났고, 그 눈빛은 위압적 이고 거친 빛을 내며 아킨을 보고 있었다. 날카로운 검이 살 끝에 더 바짝 와 닿았다. "얌전히 따라만 와." 그렇게 말하더니 그가 어디론가 눈짓을 보냈다. 옆으로 사슴처럼 빠른 그림자가 휙 다가와 아킨의 얼굴 위로 검은 천을 덮어 씌웠다. 아킨이 몸을 돌리려 하자, 그 사람은 그의 두 팔 을 당겨 등에 붙였다. 어깨가 뻐근해져 왔고, 팔목은 부러져 나갈 듯 고통스러웠다. "길게 걸리지는 않는다. 따라와라." 얌전히 가는 편이 낫다, 아킨은 그렇게 생각하고는 어깨의 힘을 풀 었다. 그 쪽도 내리 누르던 팔을 치우고는 아킨의 겨드랑이 쪽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몸이 가까이 닿자 지독한 담배냄새가 확 풍겨왔 다. 그들은 망토의 후드를 집어 아킨의 머리에 씌우더니 앞부분을 세게 잡아 당겨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했다. 그리고 안대를 조금 내 려 얼굴 절반을 완전히 덮어버린 다음 잡아끌었다. 한참을 주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끌려갔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아킨은 몇 번이나 비틀거렸고 그 때마다 사내 둘은 나직이 욕을 중 얼거리며 더 거칠게 끌어 당겼다. 얼마나 지났을까, 악취가 점점 진하게 풍겨오기 시작했다. 뭐라 외 치는 사내들의 목소리와, 간드러지게 달라붙는 여자 목소리, 앙탈하 는 듯한 기묘한 신음......싸구려 향수 냄새가 풍겨져 온다. 걸려 넘어 질 뻔한 것만 몇 번, 그리고 한번은 정말 무릎이 얼얼할 정도로 쓰 러졌지만 그 때마다 사내들의 힘이 거세어져 팔목이 아팠다. 곧 사내 둘이 멈추더니 문을 여는 듯 문고리 덜그럭대는 소리가 들 려왔다. 문은 좀 삐걱대다가 열렸고, 진한 담배 냄새와 자욱한 연기, 밀폐된 공간에서 썩어버린 역한 온기가 얼굴에 확 닿아왔다. 뒤에서 문이 쿵 닫혔고, 그들은 계속 아킨을 끌고 갔다. 어느 정도 가자 길 고 좁은 길로 접어드는 듯 했다. 사내 둘은 아킨 옆에 바짝 붙었고, 가끔씩 차가운 벽이 어깨에 와 닿기도 했다. 바닥은 오래 된 나무였 고, 벽 너머로는 여전히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목적지에 도착한 듯 한 사내가 팔을 풀더니 문을 열었다. 머리가 아 플 정도로 진한 담배 냄새와 환한 빛이 느껴졌다. 그들은 아킨은 안 으로 밀어 넣었고, 왼쪽에 있던 사내가 칼을 뽑아 아킨의 목옆에 댔 다. 오른쪽의 사내는 아킨을 어깨를 눌러 단단히 주저앉히고는 후드 와 눈가리개를 벗겨 냈다. 갑자기 빛이 쏟아져 눈이 부셨고, 아킨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눈썹을 움찔거리며 겨우 떴다. 두터운 나무로 된 테이블이 있었고, 그 위에는 파이프를 쥔 손이 얹 혀 있었다. 그리고 볼에 가죽이 달라붙은 듯 비쩍 마른 사내가 앞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아킨이 바라보자, 그는 파이프를 입에 물고는 볼이 훌쭉해 질 정도 로 길게 빨아 들였다. 코는 날카롭고, 칼집을 새겨 넣은 듯 가느다란 눈동자는 교활함과 냉철함으로 차갑게 빛났다. 그의 어깨 옆에는 덩치 큰 까마귀가 앉 아 있었고, 까맣게 빛나는 눈으로 아킨을 보더니 날개를 퍼덕였다. "....누구요." 아킨이 묻자, 앞의 마른 남자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내 이름은 원래 안 밝혀, 아킨토스 프리엔." 아킨은 꿈틀 움직였고, 어깨를 누른 손에 힘이 들어가며 검이 더 바 짝 다가왔다. 아킨은 턱을 들어야 했다. "왜 끌고 온 겁니까." "가장 현명한 질문부터 하는 군, 아킨토스.....별 거 아니다. 내 눈으 로 확인해 보고 싶어서 데리고 오라 한 것뿐이니까." 그렇게 말하며 사내는 검은 눈을 더욱 빛냈다. 훑듯이 온 몸을 쓸어 내리는 그 시선이 불쾌했다. 남자는 다시 담배 연기를 자욱하게 내 뿜었다. 그리고 아킨의 귀를 보더니, 흥미롭다는 듯 눈이 실처럼 가 늘어졌다. "이게 그 '은봉인'인가." 그렇게 말하는 그의 손이 아킨의 귀에 와 닿았다. 아킨은 발끈했고, 그가 내뿜는 사나운 안광에 사내는 능글맞게 웃으며 손을 뗐다. 아킨이 물었다. "숙부님입니까?" 짤막한 질문이었으나, 사내는 금방 알아들은 듯 이를 드러냈다. "아니지, 아니야. 언젠가는 우리에게 의뢰를 할 테지만....지금은 아 니지." "그럼 누구입니까." "그것 역시 비밀이다." 사내의 손이 이번에는 볼에 와 닿았다. 파충류의 살갗처럼 바짝 마 르고 차가운 손이었다. "어머니와 닮았나 보군. 계집애처럼 예쁜 것을 보니--" "--!" 아킨의 어깨가 꿈틀 움직였다. 칼과 팔뚝은 더 세게 그를 짓눌렀고, 이제 목에서는 피까지 스며 나왔다. 숨소리는 떨림과 분노에 뜨겁게 내뿜어져 올랐고, 꽉 쥔 채 허벅지 위에 얹힌 손이 부르르 떨려왔 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이 머리까지 기어올라와 신경을 근질거 리게 했다. 까마귀가 그 자욱한 담배 연기에 휘감겨 날개를 털어 냈다. 아킨이 노려보자, 사내는 기름이 미끄러질 정도로 능글맞게 말했다. "그리고 네 어머니의 그 반반한 얼굴이 끔찍한 저주의 시작이었 지......안 그래, '암롯사의 아킨토스'?" 사내는 아킨의 눈빛이 어찌 변할 지 잔뜩 기대했으나, 아킨이 얌전 하자 실망한 듯 했다. 아킨이 물었다. "다시 묻습니다. 누구입니까." "비밀이라고 했어." 아킨은 턱을 뒤로 젖히고는 물었다. "즉, 제가 알아내야 한다는 것입니까." 사내가 심술궂게 웃었다. "못 알아 낼 걸? 우리에게서 뭔가를 빼내려면, 신뢰와 금이 필요하 거든. 물론 아주 많이." 아킨의 길다란 동공이 고양이처럼 번득였다. "엉터리 군, 당신." "무슨 소리냐." "그토록 꾹꾹 숨겨져 있던 '암롯사의 둘째 아들, 아킨토스'는 알아내 도, 그 암롯사가 어떤 곳인지....그리고 내 아버지가 누구이며, 내 형 이 누구인지는 전혀 모르는 것 같으니까." 옆에서 심술궂게 킬킬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내 역시 노골적으로 경멸을 내 보였다. "이봐 도련님, 네 집안이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여기까지는 닿을 수 없어. 이곳은 로메르드이고, 이 안은 그 로메르드의 그림자야! 빛이 쫓아오면 그림자는 뒤로 도망치는 법이라고. 그 누구도 나를 잡을 수 없다." "나도 그런 멍청한 뜻으로 한 말은 아냐." 아킨의 몸이 빠르게 뒤로 젖혀졌다. 까마귀가 까옥--길게 울고는 푸드득 날아올랐다. 아킨은 검을 쥔 상대의 팔을 움켜쥐고는 그대로 휙 꺾었다. 우드득, 뼈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옆의 남자가 비명을 내 질렀다. "크아 ---!" 그리고 뭐가 일어났는지 제대로 알기도 전에 아킨은 그 사내 의 멱살을 잡아 앞의 마른 남자, 첸을 향해 내다 꽂듯 던졌다. 첸은 피하지도 못하고 같이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카크, 어서 잡아!" 즉각 오른 쪽에 있던 사내가 두터운 주먹을 휘둘렀다. 아킨은 주먹 을 피하고는 그 명치로 팔꿈치를 꽂아 넣었다. 숨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그 쪽 남자도 나가 떨어졌다. 좀 쿨럭거리더니, 사내는 퉁기듯 일어나 아킨에게 주먹을 휘둘렀지만 아킨은 그의 머리를 걷어차 버 렸다. 퍼어--피와 침이 튀어 올랐고, 아킨은 주저 없이 그의 멱살을 잡아 벽에 내다 꽂았다. 벽의 천장이 쿠르르 들썩거리고, 먼지가 우 수수 떨어졌다. 그 진동에 문이 열렸고, 혼비백산한 까마귀가 깍깍 울어대더니 벌어 진 틈으로 푸드득 날아갔다. 나가 떨어졌던 사내는 비틀비틀 일어나 아킨 쪽으로 휘어진 단도를 휘둘렀다. 첸이 외쳤다. "멍청아, 저 꼬마녀석은 다치면 안 돼---! 내 버려 둬!" 그러나 사내는 아킨의 목 쪽으로 검을 베어냈다. 아킨은 뒤로 젖히 고는, 벽을 뒤로 짚고 몸을 날리며 턱을 후려갈겼다. 빠악--! 잔돌 부서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사내가 뒤로 주춤 물러나 부러진 이빨 조각을 피와 함께 뱉어냈다. 그러나 그의 검은 다시 제비 날개 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아킨은 검을 피해 뒤로 몸을 날리고는, 팔을 뒤로 꺾어 막 일어나는 첸의 멱살을 붙들었다. 첸은 마른 몸집과는 달리 제법 센 완력과 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아킨의 어깨를 잡 아 무릎으로 복부를 올려 찼다. "큭-!" 아킨이 주춤했고, 첸이 아킨의 어깨를 벽으로 밀어붙이고 턱을 후려 치려는 순간, 아킨은 두 개의 팔을 교차시켜 그 목을 짓눌러 밀어붙 였다. 바위라도 밀어젖힐 듯한 엄청난 힘이었다. 정신을 차린 카크 가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아킨은 첸의 멱살을 한 손으로 벽에 못박 듯 꽂으며, 몸을 뒤로 돌려 카크의 명치를 주먹으로 내리찍듯 세게 후려쳤다. 큰 몸이 내던져지고, 테이블과 의자가 한번에 그의 몸과 함께 쓸려 나가며 벽에 금을 쩌억 냈다. 아킨은 첸을 잡은 팔에 힘을 주며 물었다. "누구냐." 첸은 히죽 웃었지만, 그의 팔이 더 억세게 그를 짓눌렀고 그건 열 여섯 소년의 힘이 결코 아니었다. 목뼈라도 부러뜨릴 듯한, 곰처럼 엄청난 완력이었다. "너희들, 루첼 그란셔스와 대체 무슨 관계지?" 첸의 얼굴이 금새 창백해졌다. "....뭐?" "담배 냄새와 여자 냄새--! 오늘 루첼 녀석의 몸에서 나던 것과 똑 같다. 말 해! 그 녀석이냐!" 말 안 하면 꾹 눌러 죽여버릴 듯한 사나운 기세에, 첸은 죽도록 창 피한 일을 저질러 버리고 말았다. "그, 그런데...." 아킨은 대답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팔을 빼더니 첸의 얼굴을 후려 쳤다. 퍼억---! 첸은 방금 전에 걷어 맞은 부하들이 얼마나 큰 재난 을 당했던 것인지, 이가 부러져 나가는 고통 속에 철저히 이해했다. 주먹, 장난이 아니었다. 아킨이 문 쪽으로 가려 했고, 놀란 첸은 다급히 외쳤다. "젠장, 너 거기 서! 녀석은 아무 관계도 없어--!" 아킨이 돌아보았다. 두 개의 눈은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서 타오르 고, 그것은 야수--생생한 생명력으로 이글거리는 흉포한 야수의 그 것이었다. 이 상태로 나가면 루첼이 죽겠다, 싶어서 첸은 서둘러 피 를 훔치고는 외쳤다. "빌어먹을, 그래! 녀석이 알아봐 달라고 한 건 맞지만, 녀석은 그냥 호기심에 그런 것뿐이다! 네 숙부나 이 빌어먹을 왕국녀석들 과는 아무 상관도 없어!" "그러면 왜 여기까지 끌어다 놓은 거지?" "녀석과 같은 이유지...빌어먹을 호기심." 그렇게 말하곤 첸은 씨익 웃었다. 그러나 유머감각이 별로 없는 아킨은 그의 얼굴을 걷어차 버렸다. *********************************************************** 작가잡설: 에, 그러니........;;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장 ************************************************************** [겨울성의 열쇠] 제16편 검은 빛깔의 고독#3 *************************************************************** 저녁을 마친 루첼은 배식 담당에게 빵과 치즈 한 덩어리를 부탁했 다. 담당이 음식을 가지러 안으로 들어가자, 쥰은 심드렁히 말했다. "로멜의 학생 식당 음식 쟁여 놓는 놈은 너 밖에 없을 거다." 옆에 있던 다른 배식 담당 아주머니가 째려보기는 했지만, 그녀도 그 사실을 인정은 하는 지 낮게 욕을 퍼부었을 뿐이었다. 루첼은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는 말했다. "아무리 나라도 이런 것 방에다 쌓아 놓고 먹고 싶지는 않아." 쥰은 그가 누구의 것을 챙기는 것인지 그제야 알아챘다. "그래도 좀 친해졌나 보네? 저녁도 챙겨다 주는 걸 보니." "예전보다는 조금 낫지." 그러고 있을 때, 식당 입구 쪽에서 누군가가 오는 것이 보였다. 눈 이 밝은 쥰이 루첼의 등을 툭툭 쳤다. "어이, 챙겨 갈 필요 없겠는데." 루첼도 몸을 돌렸다가 입구에 서 있는 아킨을 발견하고는 손을 흔 들었다. 아킨역시 루첼을 발견하자 그 쪽으로 달리듯 걸어왔다. 앞으로 지나 가던 학생하나가 그와 부딪혔고, 아킨은 그 어깨를 거칠게 팍 밀쳐 냈다. 운수 사나운 그 학생은 고꾸라져 버렸다. 그제야 루첼은 그 눈빛이 심상치 않은 것을 발견했다. 타는 듯 어는 듯, 그렇게 이글거리고, 얼어붙고, 다시 뜨겁게 타올랐다. "아킨.....?" 아킨이 루첼의 멱살을 낚아챘다. 루첼은 아킨보다 훨씬 크면서도 맥 없이 그 코앞까지 끌려가야 했다. "야, 너...." "그렇게 궁금했냐." ".....무슨....." "그렇게 궁금해서 그런 짓을 한 거냐고 묻는 거다-!" 머리가 아찔해졌고, 루첼은 다급한 마음에 두 손을 들어 달래듯 앞 으로 밀며 말했다. "저기, 난...." 아킨의 입술을 짓누른 이가 떨리더니, 그 주먹이 루첼의 턱을 후려 쳤다. 퍼억---! 별이 한번 번쩍일 정도로 엄청난 힘에 루첼은 나가 떨어졌고, 컥컥 거리다가 피를 뱉어냈다. 코피가 터져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러 나 아킨은 멱살을 잡아 올려 그를 일으켜 세우더니, 다시 주먹을 날 렸다. 뼈 으스러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안경이 나가 떨어졌다. 드디어 저녁식사를 하던 학생들이 비명과 고함을 질렀다. 교수님을 불러오라고 누군가가 외쳤고, 몇몇 판단 빠른 학생들이 식당의 입구로 달려나갔다. "아킨토스, 그만 해!" 쥰이 아킨의 어깨를 낚아챘다. 그러자 아킨은 떨쳐내듯 팔을 휘둘렀 고, 루첼과는 달리 얌전히 맞지는 못하는 쥰은 후닥닥 물러나 그 주 먹을 피했다. 그러나 쥰은 벌써 피투성이가 된 루첼을 보게 되자, 갑자기 울화가 확 치밀어 주먹을 날렸다. 아킨은 턱을 젖히며 주먹 을 피하고 그 팔뚝을 후려쳤다. 쇠망치에 맞은 듯 어마어마한 힘이 었고, 쥰은 이까지 악물고 고통을 참아내야 했다. "큿-!" 아킨은 그 배에 주먹을 꽂아 넣고는 그를 밀어 젖혀 테이블에 내다 꽂았다. 테이블이 단번에 두 조각나고, 의자들이 쓰러져 바닥에 나 뒹굴었다. 여학생들의 비명이 더 커졌고, 드디어 입구 쪽에서 교수 의 휘장을 두른 키 크고 어깨 넓은 기사부 교수가 나타났다. "이 자식이, 정말--!" 쥰이 다시 일어나 아킨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를 덮쳐 쓰러뜨리 려 했지만, 아킨에게 발목을 걷어 채였다. 그리고 아킨은 비틀거리 는 그의 멱살을 움켜쥐고는 주먹을 당겼다. "학생, 멈춰---!" 모여있던 학생들이 놀란 벌레 떼처럼 물러났다. 교수가 달려와 아킨 의 손목을 움켜잡으며 외쳤다. "그만 해라! 학교 안에서...." 그러나 아킨은 쥰을 후려치려던 주먹을 교수에게 날려 버렸다. 퍼어 --! 학생에게 그 정도로 무방비상태로 얻어맞은 것은, 학생은 교수의 얼 굴을 보면 확 오그라드는 것이 상식이었지, 이렇게 뵈는 거 없이 주 먹부터 날리는 녀석을 상대한 적은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 고 그는 아킨이 전학 왔을 때 '쳇, 마법부 교수들은 얼마나 비리비 리하길래 저런 녀석에게 나가떨어지나?' 하고 비웃었던 것을 사과해 야 했다. 아킨은 분명 호리호리하고 늘씬한 소년이었지만, 주먹은 소도 때려잡을 정도로 장난이 아니었다. 교수마저 날아가자, 학생들 역시 완전 패닉상태가 되 버리고 말았 다. "모두 붙들어--!" "붙잡기나 해! 어서--!" 그러나 기사부 수석(실기만)학생을 '주먹'으로 쓰러뜨리고, 그 무술 담당 교수마저 날려 버린 아킨에게 달려들 정도로 정의감 넘치는 학생은 없었다. 아니, 겁 난다기 보다는 다들 놀라고 넋이 나가서, 정의감이나 호승심, 또는 모두 한꺼번에 달려들어 제압해야 한다는 당연한 생각조차 입으로는 떠들어도 손으로는 전혀 실현시키지 못 한 채 우왕좌왕 할 뿐이었다. 그 때 루첼이 아킨의 손목을 붙들었다. "아킨, 그만해---! 젠장, 내가 뭘 잘못 했는 지 몰라도 설명은 하고 때려! 맞아도 싼 일이면 참을 테니!" "본인이 말하지 않는 비밀은 알아내는 게 아니다." 루첼은 눈물이 돌 정도로 억울했다. "그게 맞을만한 일이냐!" "충분해!" 그리고 아킨의 눈이 달아올랐다. 루첼은 이를 악물었고, 엄청난 힘 이 복부를 강타했다. "쿨럭----!" 숨이 한번 헉 막혔고, 먹은 게 다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현역(?) 에서 물러난 이래 이렇게 맞아 본 것도 처음이다. 아킨이 다시 그 멱살을 붙들고는 외쳤다. "넌---" 그 때 다시 학생들이 양옆으로 물러났다. 입구에서 학생들이 데리고 온 다른 교수가 나타났고, 그 교수를 보 자 학생들의 얼굴에 실망감이 퍼져나갔다. 아킨은 어깨를 들썩이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손에서 힘이 풀려나갔고, 루첼은 재빨리 그 손을 떼 내고는 학생들이 물러난 그곳을 보았다. 오거스트 롤레인이었다. 식사 중에 급히 달려온 그녀는 빠르게 식당 안을 둘러보고는, 금방 사태를 파악하고 아킨에게 성큼 성큼 다가갔다. 주변 학생들은 물 떨어지는 소리에도 놀랄 듯 눈만 동그랗게 뜨고 얼어붙어 있었다. 학생들 틈에서 자그만 여학생 하나가 달려나와 피 투성이인 루첼을 부축했다. "루첼 오빠, 괜찮아?" "야...." 철썩--! 놀란 루첼은 후배가 건네주는 손수건으로 코피를 닦아내며 고개를 들 었다. 롤레인의 손이 올라가 있었고, 아킨의 뺨을 호되게 후려친 그 끝은 가늘게 떨렸다. 손은 방향을 바꾸더니 다시 아킨의 반대편 뺨을 후 려쳤다. 철썩--! 방금 전보다 더 크고 날카로운 소리가 침묵하고 있는 학생들 위로 울려 퍼지며 그들 모두를 소름끼치게 했다. 얼굴이 젖혀지고, 머리 카락이 한번 크게 흩어질 정도였다. 그러나 아킨은 숨을 고르며 가 만히 있었을 뿐이었다. 눈은 벌써 차분하게 식어 있었고, 움켜쥐고 있던 주먹도 힘이 빠져나가며 맥없이 펴졌다. 롤레인 교수가 쏘아붙이듯 차갑게 말했다. "모두 기숙사로 돌아가라. 그리고 아킨토스, 루첼 그란셔스 군! 오늘 은 의무실로 가고, 내일 내 앞으로 와-!" 루첼은 피가 말라붙은 턱을 감싸쥐었다. "빌어먹을..." 루첼은 아킨과는 절대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던 율버 교수의 말을 분명 기억하고 있었고, 그 율버가 무례할 정도로 진실만을 말한다는 사실도 잘 알았다. *********************************************************** 작가잡설: 조아라 라는 곳은.......음....;;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장 ************************************************************** [겨울성의 열쇠] 제17편 검은 빛깔의 고독#4 *************************************************************** 그날 일은 학생들간의 사사로운 주먹다툼 정도로 끝날 수 있'었'다. 학생들끼리 다투다가 실려 나가는 일은 그 나이 또래의 학생들이 다니는 학원에서는 늘 있는 일이었으니. 그러나 그날 부상자 명단에는 무술담당 교수의 이름이 올라가 있었 으며, 그로써 그 사건은 정말 교수 회의를 소집하게 했고, 정해진 처분은 아킨의 담당인 롤레인을 당혹스럽게 했다. 사실, 교수 회의에 나갈 때만 해도 롤레인은 아킨은 집안이 든든하 니 며칠 정학이나 받고 끝날 거라 편히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정학 중에 따끔하게 혼내줄 생각이었다(심지어 학교수업에 나가지 않을 테니 수업 강도를 높여볼까, 하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회의가 시작되니, 역시나 율버가 가장 먼저 험악하게 비난을 퍼부어 대기 시작했고, 롤레인은 그것이 율버가 지난번에 아킨에게 당한 것 때문에 그리 험악하게 나오는 것일 뿐, 담당의 루첼을 걱정하기 때 문이 아님을 당연하게도 잘 알고 있기에 그저 경멸 어린 시선으로 쏘아보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율버는 끈질긴 반복법을 통해 듣는 롤 레인 뿐만 아니라 주변의 교수들과 총장마저 짜증나게 할 정도로 쉴새 없이 쏟아 부어댔고, 롤레인마저도 슬슬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대체 학생을 어떻게 관리하는 지 모르겠군요! 제자라 스승과 닮아 가는 건가요? 안하무인, 유아독존!" 롤레인은 그래도 꾹 참고 무시했다. 주변의 교수들은 존경어린 눈으 로 그런 롤레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율버가 더 기세를 몰아 말했 다. "이번 일의 징계는, 내 학생이 연루된 만큼 '제대로' 처리되기를 바 랍니다! 특히, 저 롤레인 교수의 문제아에게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 록 더없이 엄격하게! 처리해 주십시오." 아마도 아킨이 퇴학이라도 받는 다면 저 율버는 그랜다 훈장을 받 을 때만큼이나 좋아할 듯 했다. 또, 누구나 알 듯 롤레인과 율버는 사이가 나쁘기로 유명했다. 붙었다 하면 비난하는 쪽은 늘 율버였 고, 롤레인은 거의 대부분 상대할 가치도 없어 코웃음 치며 무시하 는 쪽이었다. 그 둘이 의견일치를 보여 화사하게 웃었던 것은 단 한 번, 롤레인 교수에게 아킨이 넘어갔을 때뿐이었고. 율버가 떠벌 떠벌 말하는 것을 귀로 다 흘려 버리던 총장은, 시끄럽 던 율버가 드디어 스스로 지쳐서 잠잠해지자 롤레인에게 말했다. "그럼 롤레인 교수는 더 할말없소?"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너그러이 넘어가 주십시 오." "그것으로 끝나면 안 돼요!" 총장이 그런 율버를 제발 입 닥치라는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가엾게 도 율버는 아킨이 전학 오던 날 온 두 장의 편지에 찍힌 인장들이 '명문가'의 것, 그 정도라고 밖에 모르고 있었고, 실제 그 문장들을 제대로 알아볼 교수는 이 안에 별반 없었다. 아킨에게 정학을 준다 면, 아킨의 본가까지는 괜찮다 쳐도 가까이 있는 '다른 곳'으로부터 당장에 대체 어찌 된 거냐는 말이 들려 올 것이다. 그렇다고 교수가 얻어맞았는데 아무도 처벌하지 않고 넘어가자니, 그것 역시 학원의 위신문제이기도 했다. 학생 눈치보느라 아무 처벌도 없다면 그것도 문제인 것이다. 총장은 그 자리에 오래 있는 만큼, 학자라기 보다는 이해득실 영리 하게 잘 따지는 정치가였고, 명분보다는 스스로의 앞길을 더 중요하 게 여기는 자가 늘 그렇듯 이번 일을 '공정하게 처분' 할 시에 자신 에게 돌아올 불이익과 눈총이 어떤 것인 빠르게 계산해 나갔다. 물 론 압셀론이나 베넬리아었다면 눈치보지 않았을 것이다. 압셀론은 그 정도 되는 가문의 자제들이 다니는 곳이었고, 베넬리아는 공화국 이니 그런 것 따위에 당연히 코웃음 칠 것이다. 그러나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로멜은 아니었고, 가장 강력한 후 원자에게는 잘 보여야 했다. "그래, 롤레인 교수. 이번 사건의 이유는 대체 뭐요?" "모릅니다." "자기 학생이라고 편드는 거요?" "율버 교수, 입 좀 다물게나. 난 롤레인 교수에게 묻는 거요." 율버가 씨근거리며 자리에 앉나, 총장은 롤레인에게 다시 물었다. "말해 보시오. 난 아직 그 이유를 모르오." 롤레인은 쌀쌀맞게 말했다. "그 이유도 모르시면서 회의를 소집하셨습니까." "주임은 아무 것도 알아낼 수 없었소. 교수는 알지 않을까, 해서 그 러는 것뿐이오." 롤레인은 상황 자체가 한심해졌다. "제게도 아무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이 불이익을 감수하고 서라도 침묵을 지키고자 한다면,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롤레인은 철저한 자유방임형인 만큼, 스스로의 선택은 불이익을 동 반할 것이 분명하다 할 지라도 존중해주는 편이었다. 그리고 그 때 문에 연구생 하나 없는 교수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고. 총장은 나른 히 한숨을 내 쉬더니 두 손을 맞잡고는 그 위에 두툼한 턱을 얹었 다. "일이 어찌 된 것인지는 모르나---처벌은 있어야겠지. 아킨토스 군 에게는 근신을, 루첼 군에게는 한 학기 정학 처분을 내리겠소. 그 동안 둘 다 머리 잘 식히고, 다시 만난다 해도 주먹 휘두르며 싸우 지 않기 바라오." 율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롤레인 역시 허리를 당기며 자리에서 일 어나 앉았다. "이름 잘못 외우시고 계신 건 가요?" "물론 아니오. 그리고 사태가 어찌 흘렀든 일단의 '원인 제공'은 루 첼 그란셔스 군이 한 것 아니겠소." "하지만--!" 롤레인이 외쳤다가, 총장의 간절한 눈빛을 보고는 밀려드는 혐오에 입술을 콱 깨물었다. 제발 봐 달라는 것이다. 총장이 율버 교수 쪽 을 돌아보며 말했다. "율버 교수, 자....더 할말 있나?" "아닙...니다." 롤레인에게와는 달리, 총장에게만은 율버는 웃으며 그렇게 답했다. 롤레인은 그를 한번 쏘아보고는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렇게 되면, 일을 해결해 줄 사람은 당사자 단 하나뿐인 것이다. 예상했던 것 보다 더 심한 처분을 받게되자, 루첼은 울적해지지 않 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쥰이 전해준 통보문을 보니, 루첼은 '맞아도 싼' 것으로 은근 슬쩍 적혀 있었고, 교수에게 주먹을 날린 것도 루첼로 되어 있었다. 이 황당한 처벌이 그리도 빠르게 넘어간 것을 보니, 남의 눈에 뜨이지 않고, 뜨일 틈도 없도록 하기 위함인 듯 했다. 그러나 사정이 어찌 되었듯 한 학기 정학이라니. 그 동안 대체 어디에 가 있어야 한단 말인가. 또, 그 정도 정학을 먹은 후에 복학한다 해도 후견인 베크 만 알베스티는 계속 그를 지원해 줄 것인가. 그 성격에 턱뼈라도 날리지 않으면 다행이다(아프지는 않겠지만). "대체 그 자식 집안이 얼마나 으리으리하기래 네가 이 꼴이 된 거 냐? 나도 나 때린 녀석들을 이 꼴로 만들어 본 적은 없다고." "모르지." 그리고 그것 알아내려다 이 꼴이 됐고. 속이 답답하니, 루첼은 담배 가 간절해졌다. 그러나 학교 안인데다가 반성실에 처박혀 있는 몸인 지라 목말라 하면서도 참을 수밖에 없었고, 덕택에 신경은 잔뜩 예 민해져 버렸다. 게다가, 반성실 자체도 끔찍하기는 매 한가지였다. 나무 침대 하나 덩그러니 있는 작은 방에, 빛이라고는 얼굴 만한 창 에서 쏟아지는 자그마한 빛줄기뿐이었다. 쥰이 씩씩대더니 말했다. "차라리 너도 한 대 쥐어박지 그랬냐. 그럼 덜 억울할 텐데!" "덤볐다가 너 꼴 날 일 있냐. 두 대 정도 맞고 기절한 척 하는 편이 낫지." 그렇게 말하고는 루첼은 붕대에 감겨 있는 쥰의 어깨와 팔목을 가 리켰다. 한 방식 맞았을 뿐인데, 부러지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로 금이 쩍쩍 가 버렸다. 쥰은 이 망할 자식하며 이를 드러냈고, 루첼은 '형'답게 여유 넘치는 태도로 말했다. "그 녀석은 지금 뭐하고 있지?" "맞은 너는 이 칙칙한 반성실에 처박혀 있는데, 두들겨 팬 놈은 자 기 방에 편하게 뒹굴고 있다. 근신 먹었잖아." 루첼은 착잡해졌다. 이리 불공평한 일이 어디 있나, 하는 분노보다 는 녀석에게 말 한마디라도 건네고 싶다는 생각이 더 먼저 들었다. 루첼은 첸이 아킨에게 무슨 짓인가 했고, 아주 민감한 부분을 건드 렸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었다. 사실, 마지막으로 아킨이 멱살을 움 켜쥐고 무언가 말하려 했을 때 루첼은 그냥 맞아줄 생각이었다. 그 '실망'의 눈빛이 루첼은 끔찍하게 싫었다. 그리고 그것이 루첼을 후회하게 했으며, 아킨의 분노를 이해하게 했다. 심지어 조금 가엾 기까지 했다. 그것을 아킨과 마주하며 풀어야 마음 편하게 분노하고 절망하고 걱정하고, 앞으로의 일을 차분히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았 다. 아킨 역시, 쥰과 마찬가지로 '본질'과 잠시나마 마주했던 소년이다. 뒷골목 친구들을 정리하지 못하는 것도, 그들에게 애정을 쏟는 것도 사실은 그 본질을 알아주고, 이해하고, 받아들여주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가족, 루첼의 일부였다. 그리고 어쩌면 그 안에 포함시킬 수 있었을 지도 몰랐을 녀석을, 그렇게 실망시키고 민감한 부분마저 건 드렸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후회하게 했다. 언짢고, 그것이 지금 루첼 자신의 상황보다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역시, 그날 궁금하더라도 찾아 가는 것이 아니었다. 뭔가, 아주 아 까운 짓을 해버린 것만 같았다. "나, 참......" 앞으로 어떻게 될 지도 모르는 마당에 이 딴 걱정이나 한다니. 쥰이 말했다. "저기, 우리 집 막내 가정교사가 지난 달로 그만 뒀어. 너도 그 애 알지?" "갑자기 무슨 말이야?" "입주 가정 교사 할 생각 없냐는 말이다." 루첼이 피식 웃었다. "내가 어떤 놈인지 알면서도 네 동생을 맡기냐." "반년 참는 셈치고 여기서 하던 대로만 해. 아버님도 그렇게 알고 계실 테니." ".....술, 담배, 여자--아무 것도 하지 말고?" "물론이다." "금욕교 사제님 되어 돌아오겠군." "그건 좀 괴로울 테지만, 갈곳도 없어서 빌빌거리는 것보다는 낫지 않아?" 루첼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주 낫다, 물론. 이 순진한 쥰 녀석 과 처음 만난 것은 열 일곱 살 때, 즉 3년 전 저 녀석이 두 번째로 낙제를 먹고 술집에 퍼 질러 있을 때였다. 당시 루첼은 시험도 다 끝났고 해서(물론 쥰이 낙제를 먹을 때 루첼은 수석을 했다) 길드 패 친구들과 한잔하고 있는데 낙제에 좌절해 있던 쥰이 느닷없이 시비를 걸더니 곧바로 성난 1대 황당한 다수의 싸움이 터졌다. 곱게 자란 어느 부잣집 도련님이 실연이라도 당해서 징징댄다고 생각했 던 루첼은, 그의 친구들을 '술김'이라는 이유만으로 두들겨 패고 풀 썩 쓰러진 그 골칫덩어리를 끌고 에나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저 깨어나면 잘 타일러서 치료비 정도만 받아낼 생각이었고...... 문제는 다음날 쥰은 침대 앞에서 어떤 여자와 시시덕대는 또래의 남학생을 보고는 놀라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는 것이다. '루첼 그란셔스--! 마법 중등부 루첼 그란셔스! 맞지?' 기겁한 루첼은 사람 잘못 봤다고 우기려 했지만, 에나가 '아는 사이 야, 루첼?' 하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성격이 좀 급하고 털털하긴 했지만 아주 순진했던 쥰은 당시 루첼의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입학이래 수석자리에서 내려올 줄 모르는 규격 우등생 루첼 그란셔스가(그래서 쥰이 늙다리 샌님이라고 꽤나 무시했던), 반쯤 풀어진 셔츠를 입고, 목덜미에는 키스마크가 민망하게 찍혀 있는 데 다가, 손끝에서 담배 연기나 풀풀 흘려대고 있으니. 당시 루첼의 눈빛은, 에나의 말을 빌리면 성녀 에칼라스가 성배와 성검을 품에 안고 승천할 때의 표정과 비슷했다. (될대로 되라지.) 그리고 학교로 돌아간 뒤 루첼은 열심히 쥰을 외면했지만, 시험을 도와주지 않으면 네 정체를 까발리겠다는 둥, 다음에 놀러 갈 때 나 도 좀 데리고 가면 안되냐는 둥 시끄럽게 짖어대며 졸졸 따라다니 는 그와 연을 끊는 것은 성녀 에칼라스가 성배를 버리는 것만큼이 나 힘든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루첼이 별 원하지 않아도 둘은 붙어 다니게 되었고, 학 원생들은 '터프한 기사부 학생과 소심한 모범생'의 단짝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이중생활 뺀질이와 순진한 도련님' 단짝이었다. 그런데 쥰이 물었다. "여기는 언제까지 처박혀 있으면 되는 거냐?" "롤레인 교수 말이 다음 주말까지라던데." 쥰이 입을 쩍 벌렸다. "그렇게 오래?" "밀린 잠이나 실컷 자지 뭐. 당분간 시험 칠 일도 없을 테니.....아, 그리고....." 루첼은 눈길을 피하며 슬쩍 물어보았다. "네 동생 가정 교사 월급이 어느 정도지?" "숙식은 집에서 하고, 돈은 반년 간 열심히 가르쳐 주면 네 3년 치 장학금보다 많이 주실 거다." 루첼이 빙그레 웃었고, 쥰도 히죽 웃어 보였다. 이 친구는 후원금이 끊길 곤란한 친구를 이런 식으로 돕고자 하는 것이고, 루첼은 거절할 정도로 자존심이 강하지는 못했다. (아니, 안 되면 그 동안 신세진 것도 있는데 좀 갚아 보는 게 좋지 않겠냐고 말할 수 있는 뻔뻔함의 소유자였다.) *********************************************************** 작가잡설: 루첼, 아직은 다정모드입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장 ************************************************************** [겨울성의 열쇠] 제18편 검은 빛깔의 고독#5 *************************************************************** 롤레인 교수가 아킨을 부른 것은 그날 오후였다. 근신처분을 받기는 했지만, 지도 교수를 만나러 가는 것 정도는 허락 받을 수 있었다. 롤레인이 직접 아킨을 찾아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리고 연구실에 도착한 아킨은 롤레인이 그렇게 화가 난 것은 처 음 보았다. 아킨을 바라보는 차갑고 엄격한 눈동자는 언성을 높이고 혼을 내는 것 보다 더욱 아킨을 난감하게 했다. 지난 번, 율버 교수 에게 책을 집어던지고 한마디 험하게 내 뱉었을 때도 저런 빛은 아 니었다. "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거다. 또, 루첼 그란셔스 군에게 어떤 엉뚱한 피해를 끼쳤는지도." "......압니다." "이유라도 분명히 말해다오." 아킨이 아무 답이 없자, 롤레인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후회하고 있다면, 후회하는 만큼의 성의를 보여야 해. 이렇게 나온 다면, 나 역시 너를 용서하기 어려워." ".....알겠습니다." 아킨 역시 서로의 처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부 끄럽다'라고 생각될 정도로 화가 났다. 적어도 베넬리아나 압셀론에서는, 말썽을 부린 만큼의 처벌은 있었 다. 압셀론은 명문가의 자제들이 모이는 만큼, 모두 특별해서 황태 자라 할 지라도 특별 대우를 기대할 수 없었다. 압셀론은 그렇게 공 평하게 모두의 명예를 존중했고, 그 책임 역시 혼자서 져야 하는 것 이다. 베넬리아는 오히려 더 하다. 귀족이나 부유한 집안의 아이들 이라 해서 처벌을 일부러 하지 않는 것은, 베넬리아 국립 마법원의 명예와 원칙 문제이며, 그곳의 교수들은 그들의 원칙이 '외국의 귀 족'에게 흔들리는 것을 혐오했다. 그들의 자부심은 그들의 생명과 같은 무게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대우는 아킨으로써도 처음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 킨 자신이 더 황당했다. "어서 말해." 롤레인이 재차 말하자, 아킨은 어렵사리 입술을 뗐다. 롤레인의 말대로, 우선은 그 스스로 이번 일에 책임을 져야 하기 때 문이었고,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롤레인에게 지난번과 비슷한 일을 또 당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롤레인은 너그러이 '그 일' 을 잊어주었지만, 아킨은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그것은 시간이 지 날수록 그 시간의 이자와 함께 불어나는 빚처럼 가슴에 안겨 있었 고, 내내 그를 언짢게 하고 불쾌하게 했고, 또...후회하게 했다. 늘 그랬으니 그래야 한다고는 생각했는데, 정작 내뱉고 나니 외려 아킨 이 아킨 자신에게 화가 났다. 이번에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만 롤레인에게 진 빚을 갚을 수 있을 듯 했고, 몇 달 간 그를 괴롭혔던 불쾌한 그림자 같은 것을 떨쳐 내고 가뿐 해 질 수 있을 것 같았으며, 무엇보다 그녀의 얼굴을 또 '흐리게' 하 는 것이, 아킨에게 실망하는 것이, 그렇게 그녀를 배신하는 것이 아 주 싫었다. 이유는 없다. 그냥, 그냥 그랬다. 절대 물러나기 싫은 한 계선이었다. 대충 설명이 끝나자, 롤레인은 나직이 한숨을 내 쉬었다. 이마를 찌 푸린 것으로 보아, 어찌 해야 할 지 자신도 난감한 것이다. "그 정도로 주먹을 휘두를 것까지는 없었어. 루첼이 '그것'을 안다는 증거도 없고." "그 때는.....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단지, 화가 난다는 것...그것 하나밖에는?" 롤레인의 눈이 다시 비난을 담아냈고, 아킨은 고개를 숙이며 터뜨리 듯 힘겹게 말했다. "교수님은......아니,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기분인지.....! 그건......" "두려웠겠지." 깨져 나가는 것 같았다. 답답한 것, 애매하고 아릿하지만 분명 가까 이 다가와 있던 그것이, 그 한 단어에 거추장스러운 허물을 던져 버 리고 실체를 드러낸다. ".....네." 두려웠고, 그 이전에 무엇을 기대했던 것인지, 그 무엇이 깨져나가 며 아킨을 실망시켰던 것인지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아킨의 감정 은 정말 그랬다. 안개처럼 밀려드는 흐릿한 '슬픔'에, 그렇게 화를 냈었던 것이다. 롤레인이 다시 물었다. "그럼, 그에게 무엇을 기대했던 거지?" "....." 답을 하려 했지만 꽉 막혀 버렸고, 그건 정말 아무 것도 모르겠기 때문이었다. 속에 뭐가 들이찬 듯 너무나 답답해서, 아킨은 결국 눈을 감으며 탄 식을 내 쉬었다. 그 거북한 것은 속에서 뜨겁게 들끓고 있었고, 토 해내 버리고 싶었다. 롤레인이 말했다. "어른과 아이의 차이점이 뭔지 아니." "세상이 어떤 지 아는 건가요?" "아니. 자신이 보고 싶어하는 모습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았다 하여 그들을 비난할 권리 도, 실망할 권리도 없다는 것을 아는 거야. 그들은 너를 위해 태어 나지 않았고, 너를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권리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건, 네가 어떻게 살았든 간에 너 나름대로의 이기 야." "......." 롤레인은 안경을 벗고는 말을 이었다. "이번 일에 대해서, 난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최선을 다했다. 그러니.....이제는 네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 해라. 할 수 있는 만큼. 해야 하는 만큼-" "알겠습니다." 아킨은 그 말을 끝으로 정중한 인사와 함께 교수의 연구실을 나갔 다. 빛이 쏟아지는 차가운 복도에 서서, 아킨은 복도 끝에서 빛나는 하 얀 창을 바라보았다. 무엇을 해야 할 지는 분명히 알았지만, 도저히 하고 싶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고작 그런 것이나 떠 올리는 자신도 한심했고. 등뒤로 닿는 딱딱하고 차가운 벽과, 간혹 들려오는 소리들--그리고 아킨은 뚜벅뚜벅 소리를 들었다. 누군가가 계단을 소란스레 달려 올 라오고 있었고, 아킨을 발견하자 우뚝 멈추었다. 금방 알아 볼 수 있었다. 짧은 갈색 머리는 땀에 젖어 있었고, 건장 한 어깨와 팔뚝은 아킨을 보자 불끈 흔들렸다. 쥬나드렌 루크페일리 -였던가. 그렇게 생각하며 아킨이 발걸음을 떼려는데, 그가 험악하 게 말했다. "너, 아킨토스!" 아킨도 방을 들락 날락거리던 이 쥰의 성격은 잘 알고있었으니, 분 명히 쏟아질 험악한 욕설을 조용하게 차단했다. "책임은 지겠다." "자퇴라도 하겠다는 거냐." "해야 한다면 한다." 쥰이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키더니, 손을 뻗어 아킨의 멱살을 붙들고는 벽으로 세게 밀어 붙였다. 호되게 부딪혀서는 등이 얼얼했 고 어깨도 욱신거려왔다. 아킨이 고개를 들자마자, 쥰은 오른손으로 주먹을 쥐어 그 턱에 대고는 험악하게 말했다. "일 주일 이내로 해결 못하면---너, 나한테 죽을 줄 알아." "......." 아킨은 그를 흘끗 보고는 그 정강이를 뻑 소리가 나도록 세게 걷어 찼다. 쥰이 신음을 삼키며 허리를 꺾었다. "흐어....읍--" "죽일 수나 있으면." 그리고 아킨은, 생각보다 심한 고통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쥰을 뒤로 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쥰이 정강이를 문지르며 외쳤다. "일주일이다--! 일주일!" 그러자 저 아래에서 아킨이 답했다. "알아--!" *********************************************************** 작가잡설: 잡설만 고치는 군요, 정말;; ^^;;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장 ************************************************************** [겨울성의 열쇠] 제19편 검은 빛깔의 고독#6 *************************************************************** "그러게 왜 덤볐어." 드디어 반성실에서 나오게된 루첼은, 팔목 붕대가 사라지자 이번에 는 정강이에 붕대를 감고 나타난 쥰에게 말썽피우다 다친 아들 보 는 아버지처럼 인자하게 말했다. 아킨에게 단번에 당한 것 보다, 루 첼의 한심하다는 눈빛에 더 속이 뒤집어진 쥰은 루첼을 험악하게 노려보았지만, 루첼은 "많이 나갔어?" 하고, 더욱 노골적으로 '인자 하게' 물어볼 뿐이었다. "조금 금 간 것뿐이라고! 그 의사 놈이 호들갑 떨어대면서 이렇게 칭칭 감아 놓은 거고. 게다가 내 몸 하나라도 상하면 당장에 주치의 자리에서 떨궈져 나가니 그리 아가씨 모시듯 하는 거란 말이다! 야, 얼마 안 다쳤으니 그렇게 웃지 좀 마, 루첼 그란셔---스!" 입술 비틀며 비웃던 루첼은 힙들게 표정을 바꾸었다. "그건 그렇고, 나, 지금 기숙사로 가야 하는데. 어쩔래, 너." "뭐 하게?" 너 혹시? 하는 생각에 쥰의 눈빛이 변하자, 루첼은 태평하게 답했 다. "씻으러." 일 주일 간 목욕은커녕 세수도 제대로 못했으니 루첼은 온 몸에서 뭐가 기어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뒷골목에서 살 때는 한 두 달 목욕 안 하고 버티기도 했던 그였지만, 최근 몇 년 간 뿌리 박혀 버 린 습관 역시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쥰이 안심하더니 말했다. "그럼 씻고 바로 우리 집으로 와라." "너희 집은 왜?" "우선 반성실에서 빵이랑 물만 뜯어먹으며 금욕생활 한 너를 위해 푸짐한 저녁을 주겠고, 그 다음은....설마, 그 아킨토스 프리엔과 같 은 방에서 잘 생각은 아니겠지?" "...좀 어색하기야 할 테지만 크게 문제 될 것도 없는 걸." 사실, 루첼은 별로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일이 좀 커졌다지만, 루첼 은 벌써 스무 살이었고 아킨은 이제 열 일곱 근처가 되가는 소년이 었다. 루첼은 어른답게 참아 보기로 했고, 어색함 역시 참아주기로 했다. 달리 잘 곳도 없는 마당에 수 틀린다고 당장에 짐 싸들고 나 가서 어쩌겠나. (그렇다고 에나 네 집에서 잘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나 쥰이 이런 식으로 호의를 베푸니, 굳이 거절하지 않기로 했 다. 루첼은 준다는 것은 절대 사양하지 않는 너그러운 성품이었다. "그럼, 우선은 율버 교수를 찾아가서 허락 맡아 올게. 아, 그리고 반 성실에서 나왔다는 말도 해야지." "뭐 하러 하냐. 그 망할 자식--그냥 나와 버려." 루첼은 쥰이 험악하게 말하는 이유를 대충 짐작했고, 쥰 역시 자신 의 교수에게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대 놓고 말하지는 못했 다. 그러나 루첼은 실망하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고, 만약 율버가 루첼 을 적극 변호했다면 '이번 겨울에 할 일이 많나 보지?' 하고 생각했 을 테니. 루첼은 아주 현실적이었고, 그만큼 주변 사람들에 대한 기 대치가 아주 낮았다. 인간적인 애정을 불신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적인 도움'이 그러한 애정과는 긴밀한 비례관계는 유지하지 못한다 는 것을 잘 아는 것이다. 또, 그것을 가지고 뭔가를 기대하는 것 역 시 좋은 습관이 아니다. "어쨌건 나중에 보자." "같이 가 달라는 말은 안 하냐?" 얼마든지 그리 해 줄 수 있다고 순진하게 나오는 친구에게, 루첼은 그 어깨를 토닥여 주면서 역시 아버지처럼 말해주었다. "그 절뚝거리는 걸음으로는....지금 너희 집으로 출발해야, 나와 비슷 하게 도착할 것 같거든." "이 자식이--!" 쥰에게 한 대 맞은 정수리를 문지르며 루첼은 우선은 교수관으로 향했다. 예쁘게 씻고 닦고 율버에게 갈 생각은 애당초 없었고, 그렇게 구질 구질하게 가서 무언으로 항의도 할 겸 터벅터벅 갔다. 근 10여일 만 에 나온 학교는 길 구석구석에 큼직한 플라타너스 낙엽들이 수북히 쌓여 있는 초겨울이었다. 바람은 차고 깨끗했고, 반성실에 들어갔던 그대로 얇은 셔츠만 입은 루첼은 몸이 오싹오싹 떨릴 정도로 추웠 다. 두툼해진 제복을 입은 학생들이 휘장을 날리며 지나갔고, 그 모 습에 루첼은 조금은 서글퍼졌다. 일상에서 추방당한 사람의 빈 가슴 속으로 밀려든 것은 언제나 외로움과 서글픔이다. 교수관에 도착하니, 그 앞에는 검은 마차가 한 대 서 있었다. 진한 밤색 말 네 마리가 끄는 평범한 마차로, 잠깐 볼일이 있어 들린 사 람의 것 같았다. 혹시나 해서 루첼은 마차를 살펴보았지만, 마차의 문에는 아무런 문장이 없었다. 말의 안장에도 집안 문장을 붙여 놓 고 으쓱거리는 노친네, 베크만 알베스티의 것은 아니다. 마차 문 옆에는 남자가 누군가를 기다리며 서 있었고, 그는 키가 크 고 건장했으며 머리카락은 옅은 금발이었다. 길게 끌리는 망토를 입 었고, 그가 허리를 살짝 돌리자 검이 비죽이 튀어나와 보였다. 호위 기사인 것이다. 루첼은 높은 분이 왔나, 그렇게 생각하며 지나가려 다가 그제야 그 기사가 낯익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기억력이 아주 좋은 루첼이었고, 사람 얼굴은 절대 잊어본 적이 없었다. 아주 잠깐 지나쳤던 사람이라도 기억할 수 있다. 지난 번 추수감사절 연회 때 아킨을 찾아왔던 그 기사다. 루첼이 걸음을 멈추고 자신을 보자, 기사 역시 고개를 돌려 루첼을 바라보았다. 잠깐 눈을 찌푸리더니,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뭔가 기 억해 낸 듯한 빛을 띠며 루첼을 알아본 듯 했다. "당신...." "아, 전 여기 학생입니다." 루첼은 엄지손가락으로 교수관을 가리켜 보였다. 기사가 뭔가 말을 꺼내려다가, 갑자기 어깨를 꼿꼿하게 피더니 모자를 벗어 가슴으로 당겼다. 상관이라도 나타났나, 그렇게 생각하며 루첼은 고개를 돌렸 다.... "--!" 놀라움--그것이 쏟아지듯 밀려들어와, 루첼의 깊은 곳까지 떨리게 했다. 열 일곱 정도 되 보이는 소년이었다. 곧고 검은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쏟아져 흘렀고, 그 위로는 잘 익은 포도주 같은 진한 자주색 광택이 재빠른 환상처럼 흐르다 사라졌다. 그리고 흥미롭다는 듯 가늘게 뜨고는, 차갑고 깨끗하게 빛나는 빛으 로 루첼을 바라보는 두 눈동자는 제비꽃 색이었다. 루첼은 놀라게 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 외모는 그 충격이 약간 이나마 가시고 '다른 것'을 서둘러 찾게 했을 때에야 비로소 알아차 린 것일 뿐이었다. 아킨과 똑같다. 콧날도, 날카롭게 뻗은 눈썹도, 고집 세 보이는 턱과 귀까지 부드럽 게 뻗은 얼굴 선도, 아킨과 그 소년은 두 개의 눈동자, 두 개의 상 처럼, 겹쳐 놓아도 전혀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 똑같았다. 똑같은 스 케치 위에 색깔만 다르게 입힌 듯, 그렇게 같은 것이다. 기사가 고개를 숙이더니 그 소년에게 뭐라 속삭였다. 소년이 다시 루첼을 보았고, 루첼은 좀 쑥스러워서 어깨를 살짝 밀어 올렸을 뿐 이었다. 자신에 대해 뭐라 말하는 것인지 소년의 눈이 흥미로 반짝 였다. 뭔가, 아주 불쾌했다. 루첼은 결국 그 시선을 외면하고는 교수관 안 으로 들어갔다. 소년의 시선이 머리 뒤로 박히는 것 같아, 루첼은 손을 들어 목덜미를 쓸어 올리고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유리창으로 소년이 등을 돌리고 마차에 타는 것이 보인다. 아킨과 형제인가, 루첼은 그렇게 생각하며 앞으로 가다가 계단까지 내려와 있는 총장과 마주쳤다. 얼굴은 아주 창백했고, 지팡이를 짚 은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루첼이 바로 앞에 있었지만, 그는 계속 불편하게 숨을 몰아쉬다가 루첼이 "저..." 했을 때야 눈의 초점이 좀 돌아왔다. "루첼...그란셔스 군?" 아무리 학생 얼굴에 무관심한 총장이라지만, 학내 수석인 루첼은 기 억하고 있었다. 루첼이 처벌에 대해 항의하러 왔다고 생각했는지 총 장의 얼굴이 무섭게 창백해졌다. "군은 돌아가게나." "율버 교수님을 만나 뵙고 가야 합니다. 또...." "다 해결되었으니 가란 말이네." "해결이라뇨?" 총장이 버럭 화를 냈다. "도무지 말을 못 알아듣는 군--! 모든 처벌이 취소되었고, 없었던 일로 하겠다는 말이야! 어서 가!" 그리고 그는 지팡이를 집어던지고는, 온 교수관이 쿵쿵 울릴 정도로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루첼은 황당해서 눈만 찌푸렸을 뿐이었 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이거?" 아킨은 휘안토스를 기다리며 벽에 기대 서 있었다. 눈길은 바닥을 향하고 있었고, 그 안에는 뜨거운 것이 덩어리져 이글거리고 있었 다. 모자를 벗으며, 휘안토스가 말했다. "방 옮기지 그래? 이런 좁은 방에서 남학생 둘이서 부대끼고 사는 건......" 아킨이 그 말을 끊었다. "어떻게 되었나, 그것만 말해 줘." 휘안토스의 눈에 웃음이 어렸다. "다 해결했다, 아키." 아킨은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손끝은 하얗게 되도록 힘이 들어가 있 었고, 멈출 때마다 가늘게 떨려왔다. 휘안토스는 모자를 던져 놓고 침대에 앉았다. 아킨의 어깨가 덜컥 움직였지만, 그래도 꾹 참고 자 리에 붙어 있었다. "여기서는 놀라운 일만 일어나는 군. 네가 두 달이 넘도록 아무 문 제도 일으키지 않고, 또......내게 부탁까지 하다니." "별 수 없었을 뿐이야." "하지만......중요한 것은 너는 내게 부탁했고, 나는 들어줬다. 이거 지....그래, 너도 성의 정도는 표시해야 도리겠지?" "말해." "신년에 본가에 들러라." 아킨은 기가 막히다는듯 휘안토스를 바라보았고, 결국 그 눈이 사납 게 번득였다. 휘안토스가 말했다. "물론 얼굴만 비추고 사라지라는 말은 아니다. 신년 연회가 끝날 때 까지, 본가의 둘째 아들로써 참석해라." "미쳤어---!" "미치지 않았다. 네가 겁내는 건 이해하지만, 내 입장 때문에 용납 할 생각은 없어." "내가 나서 봐야 골치만 아플 거라고. 나에게나, 형에게나." "그래도 너는 아버지의 직계 아들이다. 또, 나의 쌍둥이 동생이기도 하고." "웃기지 마! 난 아무 권리도 없잖아! 그런데, 아버지와 형 틈에 서....뭘 어쩌라는 거야? 아니....또,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아버지 는 내게 모든 책임을 돌리겠지. 늘 그랬으니까." 휘안토스가 타이르듯 조용히 말했다. "아키, 나는 아버지처럼 너를 미워하지는 않는다. 또, 너처럼 아버지 를 원망하는 것도 아니고." "아버지가 선택한 건 형이었으니까!" 그러나 그 말을 내뱉고는, 바로 확 치밀어 오르는 자괴감에 아킨은 입술을 꽉 짓눌렀다. 그런 말을 한 자신이 혐오스럽고, 가슴이 화끈 달아오를 정도로 부끄러웠다. 휘안토스의 미소가 차가워졌다. "그건 가문의 주인이셨던 아버지에게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러니 내게는 아버지를 미워할 의무도, 너를 혐오할 권리도 없어. 다만, 가 장 공정하고 합당한 입장을 택하고 서로에게 권할 뿐이지." "......" 빌어먹게 잘난 형, 입술이 짓뭉개지며 비릿한 피비린내가 입안으로 확 퍼져들었다. 그냥 한 대 후려 쳐 버리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면 외려 자신이 더 혐오스러울 것 같았다. 형, 휘안토스는 자신이 어떤 꼴이 되든 언제나 상대방을 우습게 만들고, 마음껏 비웃는다. 휘안토스가 말했다. "기다리고 있겠어." "꺼져." "감사 인사도 안 할 거냐." "고마......워." 그 목소리에만은 힘이 빠져 있었고, 휘안토스는 손을 뻗어 아킨의 어깨를 안았다. 아킨의 숨소리가 확 타 들어가더니, 바로 세게 밀쳐 낼 듯 손이 들척거렸다. "내 말 잘 들어." "놔-!" "지금 케올레스의 후계자 자리는 비어 있어. 그리고 그 자리는 언제 나 '마법사'의 자리야." "......" "내 말뜻 알겠지, 아킨토스?" 그리고 휘안토스는 아킨의 놀란 얼굴을 보고는 빙그레 웃었다. "신년에 보자, 아키." *********************************************************** 작가잡설: 조아라....라는 곳은 덩치가 엄청나군요;; 으허..-0-; 이렇게 새 글이 무지막지하게 올라오는 줄은 몰랐습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6장 *************************************************************** [겨울성의 열쇠] 제6장 늪의 성 제20편 늪의 성#1 **************************************************************** 젊고 용맹한 남자가 있었다. 그의 적들은 반드시 패했고, 돌에 으깨지고 목과 사지가 잘려 성밖 에 걸리고 내던져졌다. 그리고 적은 언제나 그가 정하기 나름이었 고, 누가 당장에 그 적이 될지 알 수 없었다. 어린 동생들은 그런 그를 두려워하다가, 결국 그 중 하나는 반란죄 로 형의 손에 죽었다. 남자는 자신이 휘두른 철퇴에 맞아 죽은 동생 의 핏물과 살점이 진흙덩어리처럼 엉겨있는 홀에서 승리의 축연을 베풀었고 그날 열 다섯 살 난 막내 동생은 유모들의 도움으로 성에 서 도망쳐야 했다. 또, 음탕하든 정숙하든 기사의 딸이던 평민의 딸 이든 눈에 들면 그 날로 차지했고, 스물 네 살 되던 해에 사냥 나갔 던 어둠 숲의 일족까지 약탈했다. 아무도 그를 사랑하지 않았고, 그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저 모두 두 려워만 할뿐이었고, 그는 그것을 원했다. 지배당하거나 죽거나, 그의 앞에서는 단 두 가지 선택밖에는 없었다. 그런 그가 서른 둘 되던 해, 그의 성에 한 소녀가 찾아왔다. 변방의 가난한 영주의 딸이었던 소녀는 아버지가 바치는 선물을 들 고 성을 찾아왔다. 보석은커녕 입고 갈 변변한 드레스조차 없어 남 에게 사정해서 겨우 빌려 입고 왔을 정도로 가난했지만, 연회장의 어떤 보석보다 빛나던 제비꽃 색 눈을 가진 그 소녀는 그날 젊은 남자의 영혼을 흔들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약탈하지 않았다. 그런 짓을 하기에는, 그는 소 녀의 눈빛과 미소를 너무나 사랑하게 되었고, 그런 그녀의 분노와 증오는 너무나 두려운 일이었다. 남자는 그녀가 원하는 것이 너무나 궁금했고, 그녀가 원하지 않는 것은 두려웠다. 그녀를 너무나 원했 으나, 그녀가 그를 원하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남자는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열정을 속삭이고 애정을 구 했다. 다행히, 순진하고 무지했던 소녀에게 그 신분 높은 남자는 그 저 위대하며 친절한 사람일뿐이었다. 그리고 그 열정 앞에, 소녀는 쉽게도 무너졌다. 신분 차 때문에 잠시 망설이긴 했지만, 소녀는 결 국 남자의 사랑과 청혼을 받아 들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결혼했고, 결혼식 이후 남자는 아내를 기쁘게 하 기 위해 진심으로 따뜻하고 자비로운 남자가 되기위해 노력했다. 그 는 아내를 결코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고, 그녀가 자신의 과거를 알 고 두려워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이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아 내가 그의 품에 안겨 그를 숭배하고 사랑해 주기만을 바랬고 그것 을 위해 그는 최선을 다했다. 그의 죄가 불러온 재앙이 닥치기 전 까지, 그리고 결국에는 그 아내 마저 그를 증오하고 저주하게 되는 그 날까지....그는 사랑하는 아 내를 위해 진정으로 노력했다. 11월이 지나자 마자 1학기말 시험이 닥쳐왔고, 편집증에 걸린 우등 생마저 마지막 답안지를 제출할 때에는 12월말이 되어 있었다. 적갈색 가지들은 잎을 완전히 털어 내고는 바늘처럼 뾰족하게 드러 났고, 중순쯤에 큰 눈이 쏟아지며 길이 빙판이 되어 버리는 바람에 몇몇 운수 사나운 학생들이 빙판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로멜은 가 파른 언덕에 위치했다.) 그러는 중에도 기말 시험은 묵묵히 치러졌고, 신년 휴가가 시작되기 며칠 전에 채점과 통산이 완료되어 그날로 큼지막한 종이에 쓰여진 전학생의 성적표가 교수관의 게시판에 붙었다. 열흘이나 반성실에 처박혀 있는 통에 공부는커녕 수업도 못 들어갔 던 루첼은 곧바로 밀어닥친 시험에 코피 터지도록 공부했고, 그 덕 에 간신히 나마 전교 수석을 했다. 그리고 쥬나드렌 루크페일리는 그 루첼의 코피를 배로 터지게 만들며 시험 특강을 받았고, 간신히 낙제를 면했다. 반성실에 갇혔을 때 쥰이 보여준 놀라운 우정이 있 기에, 루첼은 쥰에게 너 때문에 일반부 교양까지 공부하게 되었다며 투덜거리면서도 성실하게 그를 지도했으며, 성적발표 당일 당사자만 큼이나 푹 안도했다. "1점차로 간신히 통과했다, 쥰." 시험 친 건 쥰이지만, 공부하고 고생한 것은 모조리 루첼이었다. 그 러나 그간의 수고는 단박에 잊어버리고는 당분간은 시험의 중압에 서 헤어나게 되었다는 것만 상큼하게 기억하는 쥰은 펄쩍 펄쩍 환 호하며 외쳤다. "기념으로 한잔하러 가자--루츠!" 루첼은 들고 있던 마법3과 요약본 노트(이주일 간의 겨울휴가가 끝 나면 곧바로 쪽지시험을 볼 예정인)로 그런 쥰의 머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두 잔만 마시면 고꾸라지는 녀석하고 무슨." "아껴서 마시면 된다고. 게다가 지난번에는...." 루첼은 엄격하게 그 말을 끊었다. "그래도 안돼. 그 녀석들......너만 오면 강아지 선물 받은 애처럼 심 술궂게 굴어대는데, 차라리 어디 점잖은 곳에 가서 칵테일이나 한잔 씩 하자고. 축배는 그것으로 충분해." "그 때는 네가 없었잖아." "내가 없었던 게 아니고, 있었는데 끌려나간 거라고." 그리고 반쯤 취해있던 루첼은 첸과 짠 에나가(둘은 이상하게 죽이 잘 맞는다) 찰싹 달라붙는 통에 거절도 못하고 끌려나갔고, 다음날 와 보니 패거리는 술집의 술 절반을 털어 마신 뒤 사라진 뒤였다. 그리고 남은 새근새근 잠든 쥰과 골머리 아픈 숙취, 쥰 앞으로 돌려 진 어마어마한 청구서였다. 그것이 지난 봄 학기가 끝났을 때의 일이었고, 아직도 그 일만 생각 나면 루첼은 이 망할 자식들, 하고 이를 북북 갈았다. 친구들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라, 그 지경이 되도록 멍청하게 당한 쥰에게 화가 났고, 그렇게 어벙해서 내년에 졸업하고 어찌 집안에 들어가서 일을 하게 될지 그것조차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그리고 사실, 루첼 때문 에 일어났던 사고가 없었다면, 아직도 화가 나 있었을 것이다. 루첼은 처벌이 취소되자마자 행여나 해서 허겁지겁 정보길드로 찾 아갔다. 그리고 그저 입 딱 벌리고 멍청하게 서 있어야 했다. 이 석 대와 코뼈가 나간 첸은 붕대로 얼굴과 몸을 칭칭 감은 채 끙끙 앓고 있었으며, 카크와 자코베는 몸은 뒷골목 의사 케트린의 병원에서 일주일 입원하고 났기는 했지만, 자존심은 중환자 상태였 다. 그런 그들에게 '아니, 정말 그 쪼끄만 녀석에게 맞아서 이 꼴들 이 된 거야?' 하고 말함으로써, 자존심의 응급비상사태까지 가게 만 들었던 루첼은 미안한 마음에 지난 번 일은 원한목록에서 지워주기 로 했던 것이다. "쥰. 넌 오늘 짐 싸서 집에나 가." "야, 야---!" "정 마시고 싶으면 너 혼자 가던가. 난 안 간다, 절대!" "루츠--!" "공부해야 한다." 그렇게 말하며 루첼은 책을 흔들었고, '공부'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질 수밖에 없는 쥰은 투덜거리면서도 그를 놔주었다. 기숙사로 돌아오니, 아킨은 짐을 챙기고 있었다. 그래봤자 다음 학 기부터 당장에 시작될 강의용 책 몇 권에, 갈아입을 만한 옷 몇 벌 을 가방에 쑤셔 넣고 있는 것뿐이었지만.....루첼이 보니, 아킨은 이 것저것 쑤셔 넣다가, 짐들이 튀어나오자 얼굴을 찌푸리고는 다시 힘 껏 쑤셔 넣고 있었다. 루첼은 그 옆으로 다가가 배 갈린 소 내장처럼 튀어나온 옷들을 끌 어 당겼다. 아킨이 물맞은 고양이처럼 펄쩍 뛰었다. "뭐 하는 거야!" "이렇게 개는 거다, 도, 련, 님." 그리고 루첼은 아킨이 개놓은(아니 말아놓은) 셔츠를 탈탈 털고는 착착 접어주었다. 그 다음 구겨 놓다시피 한 스웨터를 집어 역시 손 으로 작작 핀 다음 반으로 접고, 소매를 당겨 덮고는 반으로 다시 접었다. "자, 이제..." 네가 다 하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아킨은 벌써 침대에 주저앉아 루 첼의 솜씨를 구경하고 있었다. 루첼은 꾹 참고는 나머지 옷도 다 개 서 가방 안에 쌓아 주었다. 머리를 후려치는 것은 가방을 다 채워 넣은 다음, 그 묵직한 가방으로 해주어도 될 것 같았으니. 그렇게 다 넣자 가방은 반도 넘게 남아있었다. 그래도 아킨이 가만 히 있자, 루첼은 결국 책상 위에 쌓여 있는 책들을 찌르듯 가리켰 다. "저건 네가 넣어야 할 것 아냐." 아킨은 책들을 쓸어 오더니 잘 개어져 있는 옷들 위에 '쌓기' 시작 했다. 결국 속 터질 정도로 답답해진 루첼은, 챙겨야할 빌어먹을 '아 들래미'가 쥰 말고 하나 더 생긴 것 같다고 투덜거리며 책들을 빼앗 아 큰 책부터 집어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은 책들을 그 사이사이 끼워 넣은 다음, 가방의 자물쇠를 단단히 채웠다. "다 끝났다, 이 망할 도련님아." "수고했다." 고맙다가 아니고 수고했다? 녀석이 그 강철같은 주먹만 없었다면 정말 새해 복 많이 받아라, 하고 실컷 두들겨 주고 싶었다. "이러려면 뭐 하러 기숙사 신청했어? 차라리 사택이나 알아봐서 하 녀하나 시종 하나 놓고 살 일이지." "학비 이외에는 아무 것도 얻고 싶지 않았다. 시종도, 호위도---아 무 것도. 그래서 다 거절하고 기숙사로 들어왔다." '호위'라는 어마어마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자, 루첼은 질리는 기분이었다. "베넬리아에서는?" "호위는 없었지만 시종은 있었다. 가문에서 보낸 사람은 아니고, 그 곳에서 고용한 사람이었지. 물론 공화국 사람이라 일은 아주 못했 어." "....." 대 루크페일리 가의 차남 되는 쥬나드렌도 잔소리 많은 할머니 하 녀 하나 데리고 살고 있는데, 이 녀석은....가문에서 보낸 사람이니 뭐니, 호위니 뭐니...멀미날 지경이다. 그리고 이런 녀석을 어디 양아 치 취급했던 세쟈르가 슬슬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마르실리오'라는 기사가 그 집 귀한 도련님이 그런 험한 꼴을 당했다는 것을 안다면, 가는 길에 세쟈르의 목이라도 땄을 것이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거냐?" "집에." 루첼은 짜증이 났다. "그러니까 집 어디로 가냐고." 아킨은 그러니까, 하고 말하려다가 루첼의 얼굴을 보고는 물었다. "아직 모르는 건가." 루첼은 두 손을 펴 보였다. "첸에게는 안 물어봤다. 즉, 나는 아무 것도 몰라." 사실 물어볼 상황도, 기분도 아니었다. 끙끙 앓는 첸에게 '그 녀석 정체가 뭐야?' 물어 볼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렇게 두들겨 맞고 나 니 그럴 기분도 싹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아킨이 물었다. "왜....안 물어 본 거지?" "미안해서." 그리고 사실 그게 정답이기도 했다. 아킨은 가만히 한숨을 내 쉬더니,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고개를 저었다. 가방이 떨어지며 바닥으로 굴렀다. 루첼은 그 가방을 툭툭 차며 슬쩍 말했다. "아킨?" "너, 신년.....에도 그 집에 가?" "아니. 그건 왜 묻는 데?" 신년에는 체놀비의 알베스티 가족은 여행짐 챙겨 들고 마르비에서 겨울을 보내는 베크만 알베스티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곳은 마차나 말이 없는 루첼에게 아주 먼 거리라, 신년은 넘기고 봄에 베크만이 다시 롬파르로 도면 그 때에 인사를 하러 가곤 했다. 아킨이 말했다. "따라 오겠어?" 루첼이 눈썹을 밀어 올리며 반색했다. "무슨 말이냐, 너?" "지난 번 초대에 대한 보답이다. 괜찮다면 따라 와 봐." *********************************************************** 작가잡설: 올빼미 집은...제 홈페이지 이름이지요. ^^;; 주소는 http://owlland.x-y.net 입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6장 ************************************************************** [겨울성의 열쇠] 제21편 늪의 성#2 *************************************************************** 루첼은 당장에 열 받고 말았는데, 그것은 그날 출발할 예정이었으면 서도 출발 직전까지 짐을 챙기고 있던 아킨 때문이었다. 그저 다음날 오후쯤에나 출발하려니 하고 있었더니, 아킨은 당장에 짐 안 챙기고 뭐하냐는 듯한 얼굴을 보였으며, 루첼은 '그러려면 너 혼자 가라!' 하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아내며 짐을 챙겼다. 다행 히 루첼은 아킨 만큼이나 짐이 없었으며, 아킨 보다는 덜 귀하게 자 란 지라 짐 챙기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짐이 다 챙겨지자, 루첼은 메모지 한 장을 쓰고는 문 앞에 압핀으로 붙여 놓았다. 쥰에게 남기는 것이었고, 그 철없는 친구는 오늘 저녁 에 이것을 발견하고는 눈물이라도 쏟을 것이다. 그러나 목적지는 밝 혀 놓지 않았다. 루첼 자신도 몰랐으니. 짐이 다 챙겨진 듯 하자 아킨이 일어나며 말했다. "가자." "오냐." 날벼락 떨어진 듯 느닷없이 출발하게되어, 루첼은 당혹스러울 지경 이었다. 괜히 같이 가는 건 아닌가, 하는 후회가 들기도 했고. 그러나, 그저 '물어만 봤다'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교수 하나와 학생 둘을 때려눕히고, 그 유명한 정보길드의 마스터와 양팔마저 골골대 게 만들어 놓은 녀석이 '다 가르쳐 줄 테니 따라 오라'라고 하니, 그 것을 찜찜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냉큼 거절하는 것은 켈브리안 공 주의 데이트 신청을 그녀가 바람둥이라는 이유로 거절하는 것만큼 이나 멍청한 짓같이 느껴졌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냐?" "그냥." "......" 루첼은 끄흠, 하고 한숨을 내 쉬어야 했다. "그거 아냐?" "뭘?" "너, 의외로 어벙하다는 거." ".....알아." "......." 의외로 황당한 녀석이기도 하다. 장갑이 불편한지, 아킨은 장갑을 바싹 끌어당기고는 귀 뒤를 가볍게 문질렀다. 그러자, 귀에 있는 자그마한 세 개의 은빛 귀걸이가 드러 났고 차가운 햇살에 그 위에 새겨진 진녹의 문자가 드러났다. 그것 을 물끄러미 보다가, 루첼은 그 문자가 무엇인지 그제야 알아보았 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으며 물었다. "고대문자 아냐?" 순간 아킨의 눈이 확 변하더니, 루첼의 손을 세게 탁 쳐냈다. 무안 해진(그리고 손등이 얼얼하기도 한) 루첼이 사과를 꺼내기도 전에 기숙사 현관 앞에 서 있는 그들 앞으로 마차가 한 대 왔다. 사납게 친 것이 미안하기는 했는지 아킨은 뭐라 작게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돌렸다. 욕 같은 건 아닌 것 같은데, 어투가 좀 묘하긴 했다. 마차 문이 열리자 아킨은 그 안을 가리키며 말했다. "타." 루첼은 고개를 들었다가, 마차 안에 탄 남자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아, 당신?" 기사는 마차에서 내려오더니, 가슴으로 손을 당기며 정중하게 말했 다. "카프란 마르실리오입니다. 자주 뵙는 군요." 루첼은 어찌할까 하다가, 결국 꾸벅 허리를 숙였다. "루첼 그란셔스 입니다." 아킨이 덧붙여 말했다. "제 일행입니다." 마르실리오의 잿빛 눈이 갑자기 크게 떠졌다. "하지만 어제 작은 도련님께서....!" "그것이 제 의사이듯, 이것 역시 제 의사입니다. 물론 본가에는 저 혼자 들릴 것이고, 루첼은 늪의 성에서만 머물 것입니다." "곤란합니다." "늪의 성은 아버님께서 인정한 제 '영역'입니다. 그러니, 그곳으로 누구를 초청하든 제 자유. 상관치 마십시오." 마르실리오는 돌처럼 창백해졌다. 보고 있는 루첼이 안쓰러울 지경 이다. 그러나 아킨은 열린 마차 문 쪽으로 가며 말했다. "루첼, 어서 타라." 마르실리오는 정말 난감해 하며 루첼을 바라보았지만(제발 오지마 십시오.), 루첼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리고 아킨 을 따라 마차에 탔고, 마르실리오는 루첼과 아킨을 번갈아 쏘아보고 는 아킨 쪽으로 앉았다. 저 자리면 아주 잘 노려 볼 수 있겠군, 그 리 생각하며 루첼은 가방을 열어 책을 꺼냈다. 마르실리오가 문을 탕탕 치자, 철썩 소리가 들리더니 마차가 출발했다. 그리고 한시간 가량 아킨은 담담한 얼굴로 창 밖을 보고 있었지만, 마르실리오는 원망이라도 하는 듯한 눈으로 루첼을 노려보았으며 (너, 대체 왜 따라 온 거냐), 루첼은 꺼낸 책을 열심히 보는 '척' 했 다. 마차는 꽤나 흔들렸고 이런 마당에 책에 집중을 한다면 멀미라 도 할 테지만 어쨌건 마르실리오의 부리부리한 눈길은 피해야 했으 니, 꾸준히 페이지가 있을 듯한 곳만 노려보았다. 결국 루첼에게 눈치 주는 것을 포기한 마르실리오가 말했다. "아킨토스 님, 다시 한번 말씀드리는데....." "루첼은 제, 손, 님입니다. 당신이 오라 가라 할 이유는 없다고 보는 데요." "아킨토스 님." "분명히 경고하는데, 더 이상 루첼에 대해 문제 삼지 마십시오." "죄송하지만 저는 도련님만 모시고 가고 싶습니다. 아무 상관도 없 는 사람을 그렇게 고집만으로 데려 오시는 건..." 루첼은 이 사람들이 옆에 루첼 본인이 있다는 건 알고는 있는지 궁 금해졌다. 아킨이 말했다. "'제' 손님이라 문제인 겁니까, 아니면 '손님'이란 것 자체가 문제인 겁니까." "그 문제가 아닙니다." "숙부님의 친구, 형의 친구, 아버님의 친구. 그 많은 친구 분들은 대 체 어떻게 본가에 들락거리는 거죠? 아니, 그 모든 친구 분들 앞에 서도 이리 잔소리를 하셨나요, 마르실리오 경." 이제는 루첼도 없는 사람인 척 하기로 했다. 루첼은 책을 들어 얼굴 을 완전히 가려버렸고, 위로 흘끔 보니 아킨과 마르실리오는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고 있었다. 마르실리오가 갑자기 날카롭게 루첼을 쏘아보았고, 루첼은 이크 해서는 재빨리 책으로 그 시선을 차단했 다. 마차는 갈매기 소리가 들려오는 항구의 선착장에서 멈추었다. 마부 가 내려와 마차 문을 열자 찬바람이 확 몰아닥쳐 왔다. 그러나 마르 실리오가 장승처럼 마차 의자에 박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아 킨이 루첼에게 "다 왔다, 내리자." 하고 말하고는 먼저 내렸다. 파란 겨울 하늘 아래 잿빛 카로디 강이 차갑게 철썩이고 있었고, 강 위를 가로지르는 둥글고 큰 다리들과 그 사이를 누비는 날렵한 배 들이 보인다. 그리고 마차가 세워진 선착장 부근에 배가 한 척 서 있었다. 새로 건조한 듯 선체는 아주 깨끗했고 접힌 돛 역시 눈처럼 뽀얀 빛이었다. 마차에서 따라 내린 마르실리오는 그 배 쪽으로 저 벅 저벅 걸어갔다. 루첼이 아킨에게 물었다. "배타고 가는 거야?" "제국, 롯사나 반도로 가야 하니까." ".....롯사나?" 루첼은 배를 타고 데칼런 반도를 벗어난 적조차 없었다. 게다가, 배 자체가 영 질색이기도 했다. 예전에 체놀비에서 롬파르로 올 때 사 람 '화물선' 비슷한 배를 탄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고, 며칠 간 멀미 후유증에 시달리며 걸었으면 걸었지 다시는 배로 여행하지 않 을 거라 맹세했었다. 배 위에 있던 선원들이 아킨을 보자 모자를 벗으며 인사를 했다. 아 킨은 반쯤 건성으로 인사를 건네고는, 배와 선착장 사이에 놓여진 다리를 건넜다. 루첼이 주의 깊게 잘 보니, 그 선원들은 보통 선원 들(즉, 루첼의 친구녀석들)같은 차림새가 아니었다. 체구들은 건장했 고, 어깨는 균형 잡혀 꼿꼿해 보였다. 또, 고급스러워 보이는 모직 망토들을 두르고 허리에는 검들이 채워져 있었다. 아킨은 그들에게 반드시 존댓말을 썼으며, 고개까지 숙여 인사를 했다. 물론 그 기사 들(일지도)의 인사는 왕자라도 만난 듯 정중했고, 깐깐해 뵈는 마르 실리오와는 달리 루첼에게까지 정중하게 대해 그런 대우에 익숙하 지 않은 루첼은 조금 쑥스럽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아킨과 루첼이 타자, 배는 곧 닻을 올리고 출항했다. "출발---!" 배가 강물을 따라 흘러가자, 양옆으로는 완만하게 경사진 언덕과 숲 들, 파란 지붕을 인 집들이 흘러갔다. 돗이 펼쳐지며 차가운 바람을 등에 진 배는 더욱 빠르게 강을 미끄러져 갔다. 체놀비를 지나치자, 곧바로 넓은 바다--롯사나 반도와 데칼런 반도 사이에 놓인 나셀 해가 펼쳐졌다. 곧 수평선 너머에 크게 덩어리져있던 굵직한 잿빛 구름들이 위의 하늘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 해가 저물 듯 수평선에 걸 리자, 하늘은 빨갛게 물들고 바다는 금빛 용광로처럼 출렁였다. 구 름들이 달아오르고, 더욱 크게 덩어리지며 하늘 위를 빠르게 스쳐지 나갔다. 큰 돛을 날개처럼 펼친 범선들이 그들을 지나쳐 갔고, 그 위의 선원들이 손을 흔들었다. 갑판에 앉아, 루첼은 추위도 잊은 채 그런 바다와 하늘을 바라보았 다. 그리고 아킨도 난간에 앉아 바다를 보고 있었다. 은빛 머리카락에 노을이 부서져 연한 분홍빛으로 물들어 흩어졌다. 은빛 귀걸이의 문자는 노을 빛을 빨아들이는 듯 진홍색으로 빛났고, 아킨의 손길이 닿자 안으로 스며들었다. 루첼은 문득 지난번에 마주쳤던 '그 소년'이 생각났다. 검은 머리카 락과 빛나는 보랏빛 눈을 가진, 그 천둥처럼 강렬하고, 번개처럼 날 카롭던 소년.... 어느덧 어스름이 내려 앉아갔다. 주변은 연한 회색으로 가라앉았으 며, 하늘에 꽉 들어찬 구름은 작은 눈송이를 뿌리기 시작했다. 아킨 이 손을 뻗었다. 차가운 하늘을 향해, 검은 장갑을 낀 그 손위로 눈 송이가 맺혔다. 마르실리오가 다가와 말했다. "이제 더 추워질 것입니다. 들어가십시오, 도련님." 아킨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첼보고 같이 들어가자 하지 않 는 것은, 아마도 루첼이 더 있던 말던 본인의 소관이라 생각해서인 듯 했다.(아킨은 손님의 의견을 너무도 철저히 존중하는 친절한 녀 석이다...) 루첼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마르실리오가 가까이 다가왔다. 아 킨은 벌써 안으로 들어간 뒤였다. 마르실리오가 말했다. "루첼 그란셔스 군....아니, 씨, 분명히 해 둘 말이 있습니다." "하십시오." "작은 도련님과는 어떤 관계입니까." 작은--아, 그렇다. 다들 작은 도련님이라 불렀었다. 역시 그 검은머 리 소년이 '형'이며 '장자'이리라. "친구입니다." "단지 그 뿐 입니까." "그럼, 사귀는 사이겠습니까." 마르실리오가 싸늘하게 노려보았지만 루첼은 빙긋 웃어 보였다. "본론이나 어서 말하세요." 마르실리오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알겠습니다. 앞으로 많은 것을 보게 되실 것이고, 알게 되실 것 입니다. 그러나......그것이 이곳, 로메르드로는 퍼지지 않도록 해 주십시 오. 특히, 당신의 후견인이나 '친구들'에게는." 루첼은 뒷덜미로 뭐가 훅 훑고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오싹했다, 정말. "어떻게....." "당신에 관한 조사는 벌써 해 두었습니다. 조심할 건 조심해야 하니 까. 어쨌든, 이점 잘 기억해 두시고 조심해 주시길 바랍니다." 루첼이 이마를 찌푸리며 물었다. "당신들, 대체 뭐 하는 분들입니까?" "곧 아시게 될 것입니다." 마르실리오는 꽤나 퉁명스럽게 말했다. 루첼은 그 귀라도 한번 잡아서 흔들어 주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갑판 아래로 내려갔다. *********************************************************** 작가잡설: 흠...이리 보면 저리보고 저리보면 이리 보이는게 인생의 이치련가...(<-뭐냐 이건...)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6장 *************************************************************** [겨울성의 열쇠] 제22편 늪의 성#3 *************************************************************** 루첼은 그날 밤 내내, 행여나 마르실리오가 몰래 들어와 목이나 조 르지 않을지 하는 걱정에 편히 잠들지 못했다. 가만히 누워 있자니 벽 바로 옆으로 파도 철썩이는 소리가 들려오고, 호오오오오---하 는 오싹한 바람소리에 몸이 쭈뼛거린다. 부스럭 부스럭 뒤척거리다가, 그는 결국에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고 말았다. 맞은 편의 침대에 누워있던 아킨이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 다. "잠 안 오는 건가?" "...별로... 그러는 너는?" "그 쪽에서 부스럭거리니 통---못 자겠더군." "......" 아킨이 덧붙였다. "예민한 편이라." 베개로 한 대 후려쳐 줘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랬다가는 당 장에 그 마르실리오가 들어와서 칼로 쑤셔대며 응징할 까 겁나서 그렇게 하기도 곤란했다.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오자고 한 거야? 얼떨떨해서 원." 아킨이 답하기도 전에, 그 답을 벌써 예측한 루첼은 사전에 차단했 다. "그냥, 이라고는 말하지 마라, 아킨토스." 그러자 아킨은 아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루첼은 결국 이불을 걷어차고는 침대머리에 놓인 가방을 찾아 열었 다. 가장 위에 넣어 두었던 은제 담뱃갑이 튀어 나왔다. 겉에 월계 수 잎이 예쁘게 새겨진 것으로, 첸과 긴밀하게 지내는 밀수단에서 하나 집어준 것을 첸이 생일 선물로 준 것이다.....가 아니라, 루첼이 생일 선물로 빼앗아 온 것이다. ('안녕, 체니. 오늘은 내 생일이다. 그거 내놔라.'....열 두살 때였다.) 루첼은 담배를 물고 손끝으로 불을 당겼다(가끔 이럴 때도 마법을 쓴다). 그러나 불이 붙기도 전에 아킨이 이불 위로 손을 불쑥 내밀 더니 말했다. "나가서 피워." "야, 너--" "담배 냄새는 질색이다. 특히 박하냄새 나는 툴칸 제국산은 더더욱 싫고." "이 새벽에 나가서 얼어죽으라는 말이냐?" "싫으면 그만 두던가." "....." 루첼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킨이 몸을 돌려 눕히자, 루첼은 물고 있던 담배를 위 아래로 흔들며 말했다. "이제부터는 공주님이라 불러드리지, 아킨토스---공, 주." "여긴 내 방이고, 내 침실이다. 그리고 난 보통 사람보다 코가 예민 한 편이고, 익숙하지 않거나 싫어하는 것에는 배로 민감해. 비아냥 거릴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루첼은 담배를 빨아들이고는 연기를 후 내쉬었다. 좁은 방은 금방 연기로 가득 찼다. 아킨이 이불을 당겨 덮어써 버렸고, 루첼은 그 이불을 확 내렸다. "야, 너!" "나 혼자 나가기는 억울해서. 너도 나와라, 아킨토스." "내가 왜!" "그럼 여기서 계속 연기 날린다. 싫으면 한 대 치던가." 그리고는 루첼은 턱을 두드렸다. 지난 번 일이 생각나, 아킨은 얼굴 을 구기기는 했지만 그래도 질색하며 느릿느릿 일어났다. 그러더니, 내쏘듯 말했다. "뺀질이." "새침데기." "......" "......" 참고 앉아 있기가 너무도 괴로워진 아킨이 먼저 문을 열고 나가버 렸다. 그러나.....밖으로 나가자 마자 루첼은 심술 때문에 나가자고 한 것을 눈물나게 후회했다. 그냥 하룻밤만 꾹 참아 볼 걸 그랬다.... 해가 떠오르고 있는 듯 하늘위로 야트막한 빛이 깔려 있었다. 그리 고 겨울 새벽은 늘 그렇듯, 어마어마하게 춥다. 나가자마자 몸이 자 악 얼어붙는 것만 같았고, 턱이 부들부들 떨리며 딱딱거렸다. "나오자고 한 건너다." 아킨은 루첼과는 달리 겉옷조차 입고 있지 않았다. 바지와 잠들 때 입었던 셔츠만 걸친 채, 그 목을 훤히 다 드러내고도 아무렇지도 않 게 서 있었다. 하늘은 짙은 회색이었다. 바람에 쪼개지는 구름들 틈으로는 빠알간 아침빛이 피처럼 스며 나왔고 야트막한 어둠이 천천히 지워지며 느 릿느릿 밝아져 왔다. 배는 빠르게 바다를 헤치며 나갔고, 저 먼 수 평선에 까만 대륙이 얇게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거의 도착했군." 그렇게 말하는 아킨의 입술 사이에서 하얀 숨이 퍼져 나와 흩어졌 다. 거세고 차가운 바닷바람이 불어와 뒤퉁수를 확 덮치고 갔고, 루첼은 귀라도 끊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바람을 받자, 배는 더욱 빠르게 바다를 헤치고 나아갔다. 뒤에 서 있던 기사 하나가 램프를 들고 달 려와 뱃머리에 섰고, 배는 계속 똑바로 나갔다. 검은 지평선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구름의 틈은 더욱 넓어지 며 아침 노을이 퍼져나가는 진한 주황색 하늘이 보였다. 구름들도 창백한 자주 빛이 되어가고 있었다. 뱃머리 근처에 서 있던 기사가 램프를 높이 쳐들었다. 멀리 있는, 용처럼 우뚝 서 있는 거대한 섬에서 불빛이 별처럼 반짝였다. 그 섬 오른쪽 부근에는 무언가가 큰 것이 판판하게 튀어나와 있었고, 좀 더 밝아지자 루첼은 그것이 성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뭐가 비죽 솟아오르더니, 수평선이 가까이 다가오며 대륙이 넓다랗게 퍼 지기 시작했다. 섬은 겅 하구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위로 솟은 거 대한 성 중앙의 탑 꼭대기에는 큰 깃발이 겨울바람에 퍼덕이고 있 었다. 깃발 위에 그려진 것은, 붉은 장미와 날개를 펼친 은빛의 드 래곤-- 루첼이 탄성을 지르듯 중얼거렸다. "암롯사.......!" 아킨이 바람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는 말했다. "산 루에르 요새지." "역시......짐작은 했어. 생각보다 굉장한데." 서 대륙을 통일했던 쿼크 대제의 가문이 2대만에 끊어지자, 대제를 도왔던 일곱 장수들은 롯시온 제국을 황도를 중심으로 일곱 동강을 냈다. 대제의 깃발아래 충성했던 성스러운 기사들은, 당장에 서로에 게 칼을 들이대고 전쟁을 벌였고 결국 두 기사가 죽고 나머지 다섯 의 영지가 스스로의 능력만큼 주어지게 되자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않히고는 황제의 자리를 추천제로 남겨 놓았다. 그들 가문에서는 결 코 황제가 나올 수 없다고 원칙을 정해놓은 후, 여기 저기를 수소문 한 끝에 쿼크 대제가 정벌길에 남겼던 사생아를 겨우 찾아내 황제 로 추천했다. 그들은 이 어수룩한 황제에게 여인들을 듬뿍 안겨주었고, 그가 낳은 수많은 황자들 중에서 하나를 추천하여 다음 황제로 앉혔다. 그 후, 공국들은 각자의 독립된 길을 걸어갔고, 황제가 죽었을 때에 다시 모여 열흘 정도 서로 눈치들 보다가 황제를 추천하고 선출했을 뿐 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늘 가장 우둔한 자를 고르고 골라 황제로 앉 혔고, 얼굴은 아름다우나 역시나 어리석은 여인을 비로 짝지어 주었 다. 그렇게 황가는 정제된 어리석음으로 이어졌으며, 그들 선조의 영웅을 우롱하며 자유로워진 대공국들은 대륙에 뿌리박으며 자라났 다. 중앙평원을 누비는 강한 기사들과 대 함대를 거느린 암롯사, 마법과 신성의 카를롯사, 바다로부터 전해지는 부유함의 델-카타롯사, 비룡 의 기사들과 금빛 드래곤의 수호를 받는 북방의 에크롯사, 풍요로운 평원의 헤로롯사로. 그리고 산 루에르 요새는 그 중 암롯사의 것이었다. 이 유명한 요새 에서 대공왕 사이러스는 그의 기사들과 함께 서 툴칸의 침략을 막 아냈고, 그 포로들을 참수해 요새의 성벽에서 걸어 놓았다. 친동생 이 그곳을 점령해 반란을 일으키자, 사이러스는 그곳을 석 달간 포 위했고 동생을 돕기로 했던 델-카타롯사의 지원도 단번에 끊어 놓 았다. 절망한 그의 동생은 결국 성문을 열고 무릎을 꿇었다. 사이러 스는 목을 치거나 포박을 하는 대신 동생의 어깨를 다정히 토닥이 더니, 그를 옆에 세우고는 나란히 귀환했다. 그날 그는 반란의 끝을 알리는 축연을 베풀어 동생에게 첫잔을 주었다. 그리고 동생이 그 잔을 다 비우자, 직접 그 동생의 머리에 철퇴를 찍어 죽여 버렸고, 그를 따라왔던 나머지 반란군들 역시 사이러스의 측근 기사들에 의 해 난도질되었다. 아무 것도 모르고 모인 가신들은 그 피비린내 진동하는 연회에 덜 덜 떨며 참석해야 했고, 그 사건은 '암롯사 가의 대만찬'이라는 말까 지 남겼다. 어느새 바다는 핏빛으로 물들었고, 구름 역시 조각조각 나며 서쪽으 로 흘러갔다. 하늘은 온통 진한 붉은 색조였고, 구름들은 금 덩어리 처럼 눈부시게 빛났다. 검은 성채끄트머리로 햇살이 박혀들며 검붉 은 색으로 물들어갔고, 그 성채가 등진 암롯사의 언덕은 온통 진한 장밋빛으로 빛났다. 그렇게, 찬란한 아침 햇살을 받으며 푸르고 차가운 겨울하늘을 인 채, 바다의 성자, 맨발의 오르테스가 축복한 아름다운 항구 산 파로 이가 그곳에 있었다. 부두를 따라 돛을 접은 엄청난 수의 배들, 그 주변을 감싼 둑, 하얀 돌로 쌓아 올린 부두, 뿔처럼 높이 솟은 등대 와, 그 항구를 멀리서 굽어보는 푸른 지붕의 거대한 성. 루첼은 부신 눈을 가늘게 뜨고는, 벅차 오르는 마음에 자기도 모르 게 미소를 지었다. 추위도 잊었고, 담배는 예전에 잊어 버렸다. 멋지군, 정말. "이제 어디로 가는 거지?" "산 파로이 근처에 있는 '어떤 곳'으로 가야해." 루첼이 웃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니셀 해의 광룡 사이러스가 있는 곳이로군. 이야, 지나가면서 목 조심해야겠는데." 어디서 뭐 떨어지는 소리가 와장창 들려왔다. 그리고 웃는 루첼에게 아킨은 담담하게 말했다. "......내 아버지다." "응?" "암롯사의 사이러스 대공왕. 그가 바로 내 아버지란 말이다." "......." 다 타 들어간 담배가 루첼의 입에서 떨어졌다. "너, 왕자였냐?" "둘째 왕자." 아킨은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 작가잡설: 남자들이 하는 말 중 가장 섹시하게 들리는 건....... 바로 '혀엉--' 이랍니다. -_-;;;; 다니엘이나 호영이 같이 이쁘 장한 남자들이 방긋 웃으며 '혀엉--' 하면 괜히 섹시하더군요;; .....여자의 음흉이랄까.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6장 *************************************************************** [겨울성의 열쇠] 제23편 늪의 성#4 **************************************************************** 휘안토스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그리도 분노한 것은 처음 보았다. 그 것도 평소처럼 언성만 조금 높이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두 눈은 뭐 라도 하나 집어던질 기세로 무시무시하게 이글거리고 있었고, 어깨 와 주먹에도 힘이 들어가 떨리고 있었다. 그 손이 얹힌 책상이 가늘 게 떨리며, 끄트머리에 놓인 램프가 흔들렸다. "그 녀석이 본가에 누굴 들여?" 휘안토스는 앞으로 나서며 급히 말했다. "본가에 들인다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이러나 저러나, 어쨌든 천한 녀석 하나가 이 성까지 온 것, 그것도 그 녀석과 함께 라는 것은 용납할 수 없어! 네 숙부가 그것을 알아 낸 것만도 내 실책이었어! 하물며 그 천한 녀석의 가벼운 입에서 잊 혀졌던 그 일이 다시 퍼져 나가게 할 수 없다." "전하, 제발---!" 케올레스는 힘겹게 그를 붙잡고 있었다. 휘안토스가 침착하게 말했다. "아킨에게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몰라서 묻는 거냐. 녀석이 뭔지!" "아버지, 아킨은 분명 '정상'입니다. 제가 장담할 수 있습니다." "그럼, 여태 벌여왔던 그 난동들은 대체 뭐냐. 그게 정상이냐!" "아킨은.....단지 자존심 강하고 고집 센 녀석이라 그리 한 것뿐입니 다. 그리고 그건 그의 '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무슨 근거로--!" 콰릉-! 드디어 램프가 바닥에 떨어지며 박살났다. 휘안토스는 겨우 차분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것은 내일 직접 확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테시우스가 녀석과 너, 그리고 나까지 그 입안에서 난도질하는 것 을 보면서 말이냐. 그리고 그 녀석은 아마도, 이번에는 그 테시우스 의 얼굴에 주먹이라도 날릴 테고. 테시우스는 또 녀석의 '정신상태' 를 걸고넘어질 테지. 아니, 긴말 할 것도 없다. 마르실리오를 불러 라. 그리고 그 따라온 데칼런 놈을 당장 암롯사 밖으로 끌어내라고 해!" 휘안토스는 나른히 한숨을 내 쉬고는 말했다. "벌써 늪의 성으로 들어갔고, 그 성은 자케노스가 지키고 있습니 다." 대공의 얼굴이 시퍼래졌다. 뿌득,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서재 안을 오싹 울렸다. 휘안토스는 제발 아버지가 뭘 던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덧붙였 다. "아시다시피......암롯사의 그 어떤 기사도 그를 이기고 성안으로 들 어갈 수 없습니다." 결국 공왕이 집어던진 문진이 유리창을 박살냈다. 아킨이 말한 '늪의 성'은 선착장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아킨은 마차로는 그곳으로 갈 수 없다고 말했고, 루첼은 별 수 없이 성적표에 유일하게 '열등생'으로 기록되어 버린 승마수업시간에 배 운 대로 간신히 말에 탔다. 역시, 아킨은 별로 유익한 동반자는 아 니었고, 친절한 안내자는 더더욱 아니었다. 아킨은 루첼이 십 년쯤 그 근처에 산 사람인 듯 행동했으며, 그것은 허물없이 대한다는 말이 아니라 일체의 설명은커녕 주의조차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얼어붙은 냇물을 낀 숲의 길을 오면서, 루첼은 온갖 덩굴과 나뭇가지에 부딪히고 긁히고 말이 투덜거리는 바람에 떨어지기까지 하며 아킨의 뒤를 따라야 했으며, 아킨은 루첼이 말에 서 떨어져도 뒤만 흘끔 돌아보았을 뿐 절대 도와주지 않았다. "망할 자식." 그러나 가는 길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냇가로는 앙상한 버드나무들 이 긴 가지를 축 늘어뜨린 채 그 주변을 따르고 있었으며, 잔잔한 냇물 위로 푸른 하늘과 나무의 그림자들이 흩어졌다. 마른 덩굴들이 우거진 길을 겨우 겨우 헤치고, 갈대가 우거진 내를 가로지는 낡고 둥근 나무다리를 건너자 드디어 노랗게 말라붙은 수풀 너머로 진한 녹색 지붕이 보였다. 아킨은 말머리를 틀었고, 말은 옆으로 우거진 갈대를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높이 솟은 검은 철제 대문이 보였다. 그 옆으로는 긴 풀 들이 하얗게 말라 바람에 으스스하게 흔들렸고, 철제 대문으로부터 가시나무가 우거진 벽이 주욱 뻗어 있었다. 그 녹슨 대문 앞에는 하 얀 돌이 깔린 길이 뻗어 있었다. 아킨은 말에서 내려 말의 고삐를 당기며 걸어갔다. 루첼도 그렇게 했고, 그들은 곧 아킨이 말했던 그 '늪의 성'과 마주하게 되었다. 회색 벽돌로 지어진 작은 성이었다. 성벽은 채 떨어지지 않은 담쟁 이 잎이 몇 가닥 남아서 노란 저녁햇살을 받으며 파닥거렸고, 그 아 랫 부분은 이끼가 빨갛게 얼어 죽어있었다. 발을 옮기자 성 오른편에 서 뭐가 크게 번쩍였고, 그것은 성 옆에 있는 야트막한 못의 수면에 햇빛이 반사된 것이었다. 거의 얼어붙어 있었지만, 그 못만은 전혀 얼 어붙지 않은 채 수면이 고요히 흔들렸다. 아킨은 곧장 성 쪽으로 향했다. 성의 현관은 양옆에 등이 돋아 있는 까만 강철로 되어 있었고, 낙엽들이 군데군데 누워 있다가 바람에 흩어졌다. 루첼은 그 뒤를 따르다가, 성의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모 든 창에 창살이 단단하게 박혀 있었다. 마당을 바라보는 큰 창도, 2 층의 작은 창들에도, 양옆에 뿔처럼 솟은 탑의 창에도 모두 창살이 박혀 있었다. "왜 창이 저렇게...." "아버지가 저렇게 해 놨지." 루첼이 뭘 더 묻기도 전에, 아킨은 현관문의 초인종을 꾹 눌렀다. 도무지 누군가 나올 것 같지 않던 성안에서, 끼리릭---하는 소리들 이 연달아 들리더니 철컹 철컹, 하고 자물쇠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육중한 철문이 열리는 듯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고, 대체 안 에 어떤 구조로 되어 있나 궁금해하는 루첼과 늘 겪는 일이라 담담 한 아킨을 향해 현관문이 활짝 열렸다. 아킨은 두 팔을 벌렸다. "저 왔어요, 메리엔." "맙소사, 아킨 님!" 그 품안으로 여인이 안겨왔다. 둥근 하녀모자를 둘러 쓴, 서른 정도 되 보이는 여자였다. 곱슬 거리는 갈색 머리카락이 모자 아래에 흩 어져 있었고, 얼굴은 오밀조밀 작은 것이 꼭 요정 같아 보였다. 메리엔은 눈물을 훔치더니 오랜만에 동생이라도 만난 듯 떨리는 손 으로 아킨의 볼을 어루만졌다. 아킨은 그 손을 꼭 잡고는 다정하게 (역시나 루첼은 놀랐다) 물었다. "별 일 없었죠, 메리?" "네, 별일....은 당연히 없었어요. 아킨 님은 잘 지내셨어요?" "아주 요. 그리고.......저, 친구도 데리고 왔어요. 루첼 그란셔스라고 하죠." 메리엔이 두 손을 맞잡고는 루첼을 바라보았다. 눈에는 눈물이 여전 히 아롱지고 있었으며, 얼굴은 루첼이 보기 미안할 정도로 기쁨과 놀라움으로 빛나고 있었다. "작은 도련님의 친구 분이라고요? 안녕하세요?" 친구 하나 데리고 왔는데 대단히 감격한다고 생각하며, 루첼은 가볍 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이런 태도는 알베스티 가의 시건방진 하인 들이 반드시 배워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아킨과 '친구' 같은 것이 아니라 미안하기도 했고.) 그 때 저택 안에서 컹컹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메리엔은 재빨리 문 옆으로 물러났고, 문안에서 덩치 큰 것이 튀어나오더니 아킨에게 곧 장 달려들었다. "푸제--!" 진한 갈색 털을 가진 덩치 큰 양치기 개가 아킨에게 늘어붙어서는, 꼬리를 크게 흔들며 얼굴과 목을 핥아댔다. 아킨은 그 목덜미를 쓰 다듬으며 깔깔 웃어댔다. 루첼이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자 그제야 루첼을 가리키며 말했다. "푸제, 저거 루첼이란다." 개가 컹컹 짖어댔고, 아킨은 다시 킥킥 웃고는 이번에는 푸제를 가 리키며 말했다. "이 녀석은 푸제." 루첼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만나서 반갑다, 개야. 그리고....나보다 개가 먼저냐?" 그러자 푸제가 할딱거리며 루첼에게 다가왔고, 개는 정말 질색하는 루첼은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눈치 없는 푸제는 머리 를 들이밀며 꼬리를 쳤다. 루첼은 뭐라도 만지는 듯 끔찍하다는 얼 굴로 손가락만 그 머리에 슬쩍 갖다 댔다. "안 무니까 걱정 말고 만져, 루첼." "무는 개건 안 무는 개건 난 개라면 공평하게 싫어해. 이 귀찮게 헐 떡대는 녀석 좀 빨리 치워!" "개 싫어하는 녀석은 처음이군." "옛날에 개와 사이 나쁜 일을 한 적이 있었거든." 아킨이 그 목걸이를 잡아끌었다. 푸제는 학학거리며 그 옆으로 달라 붙었다. "들어가자." "어서 들어오세요, 도련님들." 태어나서 처음 듣는 어마어마한 호칭에, 루첼은 지난번에 초대했다 가 아킨에게 그 꼴을 당하게 한 것이 다시 한번 정--말로 미안해졌 다. 이렇게 턱 빠질 정도로 대단한 집안의 아드님인 줄 미리 알았다 면....루첼은 그를 데리고 가지도 않았을 것이며, 역시 따라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긴....상상력 풍부해 봐야 무슨 큰 백작가 정도 될 거라고만 짐작 하지, '왕자님'인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나. 성안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음침하던 겉모습과는 달리 둥지처럼 아 늑했다. 홀에는 두텁고 부드러운 붉은 카펫이 깔려 있었고, 그 앞에는 벌써 벽난로가 활활 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난로 위에 까만 고양이가 몸 을 드러눕히고 있다가 아킨이 들어오자 가느다랗게 울었다. 아킨이 물었다. "저건 뭐죠?" 그가 벗는 망토를 받아 들며 메리엔이 말했다. "아, 자크가 주워 왔어요. 새끼였는데 벌써 저렇게 큰 거죠." 루첼이 고양이 쪽으로 다가가 손을 뻗어보았다. 그러자 고양이가 발 톱으로 손끝을 톡톡 치더니 뒤로 휙 물러났다. 루첼은 그 목을 찬찬 히 쓰다듬어 주었고, 고양이는 곧 머리를 비벼왔다. 그러고 있는데 메리엔이 다가왔다. 루첼은 대체 왜 오시나 하고 아주 궁금해하며 물끄러미 보았을 뿐이었다. 그러자 아킨이 어깨를 쳐 보였다. "그거 벗어 드려." "....아, 죄송합니다. 이런 대우는 처음이라." 루첼은 엉거주춤 망토를 벗어 메리엔에게 건네주었다. 망토 두 개를 팔에 두르고는 메리엔이 말했다. "도련님들은 여기서 불 쬐면서 기다리세요. 곧 저녁식사 준비를 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루첼 도련님의 침실은 저녁 드시는 동안에 깔 끔하게 치워 드릴게요. 일행이 오신다고 미리 말씀해 주시면 좋았을 것을. 정말 죄송합니다." "아, 저기....전...." 그러자 아킨이 난로 앞의 안락의자에 몸을 누이며 말했다. "루첼은 원래 일정이 취소되는 바람에 그냥 같이 온 겁니다. 연락을 드릴 틈이 없었어요." 내가 언제, 하고 루첼은 생각했다. 메리엔의 착해 보이는 갈색 눈이 반짝였다. "그러셨어요?" "네, 그러니....메리엔, 마르실리오 경이 이상한 말을 하더라도 무시 하십시오." "네, 아킨 님." 푸제가 털레털레 오더니 아킨의 발치에 몸을 눕히고는 바닥을 쓸기 라도 하는 듯 꼬리를 흔들었다. 루첼은 무슨 이야기 속으로 들어온 것 같아 얼떨떨했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로맨스같은 즐거운 것이 아니라, 살인마 폭군 왕이 다스리 는 나라로 얼결에 발을 디디게 된 얼뜨기 마법사 지망생의 괴담이 었으니 문제였다. "이제 난 뭐 하면 되는 거냐?" "네 짐은 하인들이 가지고 올 거다. 그리고 너는 며칠 푹 쉬면서 뒹 굴 거리면 되. 성 안 안내는 메리엔이 해 줄 것이고, 혼자 여기 저 기 돌아다니지는 말아라. 엉뚱한 곳으로 가서 길을 잃으면...나도 못 찾으니까." "....정말 고맙다." 루첼은 창을 통해 가지만 앙상하게 남아 있는 나무들에 둘러싸인 작은 못을 바라보았다. 노란 저녁햇살에 젖어 들어가고 있었고, 그 못의 수면 역시 진한 금 빛이었다. "좋은 곳이군." 아킨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좋았던 곳이지." *********************************************************** 작가잡설: ....므흐흐한 잡담이 글의 전체 분위기를 므흐흐 하게 이끌고 가나니..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6장 *************************************************************** [겨울성의 열쇠] 제24편 늪의 성#5 *************************************************************** 메리엔이 준비한 '간소한' 저녁은 루첼에게는 어마어마한 성찬이었 다. 식당이라기 보다는 거대한 만찬 장 같은 곳에서, 아킨과 마주보는 루첼에게 메리엔과 낯선 남자 하인 하나가 더 나오더니 음식을 내 왔다. 전채 요리가 나오고, 맛이 너무나 좋기는 하지만 양이 적어서 이게 다는 아니겠지, 하고 생각하는데 곧이어 둘 먹기에는 당연히 버거울만한 음식들이 연거푸 나왔다. 그것도 좀 덜어 먹고 맛 좀 봤 다 싶다 무섭게 치우더니 다음 요리가 나오는 식이었다. 루첼은 금방 그렇게 먹는데 지쳐버렸지만, 아킨은 이것저것 얌전하 게 접시에 덜어 놓으며 태평하게 '시식'했다. "맨 날 이러고 사냐?" "너 때문에 메리엔이 무리한 거다. 군말 말고 끝--까지 듬--뿍 먹 어." 부담감에 속이 더부룩해지는 기분이었다. 먹던 조개요리가 나가자, 이번에는 생선요리가 나왔다. 허벅지만큼 두툼한 생선을 툭툭 잘라 구워, 위에 소스를 얹은 것이었다. 허브냄새와 레몬 향이 향긋하게 풍겨왔다. "네 덕에 별 걸 다 해 보는 군." "내 주변 사람들도 별난 경험을 하는 중이야." 루첼이 생선을 썰며 물었다. "무슨 소리야, 그건?" "내가 손님 데리고 온 것은...네가 처음이거든." 루첼은 입안에 생선을 넣었다. 살은 부드러웠고, 소스의 향은 아주 좋았다. 옆에 백포도주가 따라지자, 루첼은 잔을 살짝 집어 한 모금 마셔보았다. 시큼한 맛이 입안에 확 퍼진다. "하긴, 네가 하는 짓을 무사태평하게 넘길 사람은 아마도 나밖에 없 었을 걸." 루첼처럼 험하게 자라온 사람이, 로멜이나 베넬리아 마법원이나 압 셀론에 있을 리가 없었으며, 그만큼 아킨의 모든 것을 '개성이려니' 하고 넘어갈 정도의 태평함을 가진 사람 역시 별반 없었던 것이다. 아킨은 얌전했지만, 그 얌전함 주변에는 분명 벽이 쌓여 있었고, 그 안을 들여다보려 하는 사람을 가차없이 혐오했고 경멸했다. 일부러 적대하고 스스로를 고립시켜 왔던 것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어 갔던 것이고, 롤레인의 말대로 그는 그것을 어느덧 '제 길'로 인식했다. 루첼도 롤레인처럼 아킨의 벽을 존중해 주었고, 경솔하게 침범하려 하지도 않았다. 사실, 아킨이 사람들을 퉁겨내듯 그런 성 품의 루첼역시 이런 저런 별난 사람들을 끌어들여 왔다. 눈이 나빠 져서 뒷골목 생활을 완전히 정리하기 전까지, 고아인 루첼은 놀랍게 도 정보 길드 마스터를 '친구'로 만들어 놓고 있었으며, 경계심이 많 은 주변인들 마저 그 소년을 옛 친구의 아들처럼 편하게 대했다. 알 베스티 가에서도, 그렇게 빨리 떠나지만 않았다면 분명 꽤 많은 자 기편을 만들어 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드디어 디저트로 달착지근한 케이크가 하나씩 나오고 식사가 끝났 다. 단 것은 질색인 루첼이었지만, 그건 꽤 맛있었다. 옆에 향긋한 갈색 차와 진한 붉은 색 차가 한잔씩 나왔다. 붉은 색은 아킨에게, 갈색은 루첼에게 왔다. 슬쩍 보니 진한 커피였다. 아킨은 차를 조금 마시고는 앞의 루첼을 보았다. "그리고, 루첼." 그러나 뭐라 말해 보기도 전에 메리엔이 기사 하나와 함께 식당 안 으로 들어왔다. 아킨은 찻잔을 입술에서 떼며 금방 눈을 찌푸렸고, 로첼도 그쪽을 보고는 같이 기분이 나빠졌다. 깐돌이 마르실리오였다. 두 사람의 험악한 눈초리를 받게 되자, 마 르실리오는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루첼 그란셔스 씨의 일로 찾아온 것은 아닙니다.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말씀 드리려고 왔을 뿐입니다." 아킨은 피곤하다는 듯 말했다. "루첼....그럼 나중에 보자." 루첼은 집안이 반대하는 결혼을 강행하는 도련님과 어디 가난한 집 아가씨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대우는 고급이었지만 그런 태도에 정이 딱 떨어져 버려서, 루첼은 아킨이 나가자마자 곧바로 커피를 홀딱 비워버리고는 식당을 나섰 다. 메리엔은 아킨을 따라가 버려 루첼은 더듬더듬 넓은 집안을 지 나 홀 쪽으로 나가야 했다. 홀의 벽난로는 여전히 불이 탁탁 타오르고 있었다. 난로 앞에 있던 까만 고양이가 루첼에게 어슬렁어슬렁 다가오더니 다리에 몸을 비 볐다. 루첼은 주머니를 뒤져 미리 챙겨놨던 담배갑을 찾아 하나 물 었다. 그리고 손끝을 탁 쳐 담배 불을 붙인 다음 깊게 빨아들였다가 아차 했다. 근처에서 담배 피는 것도 영 질색하는 그 녀석이, 자기 집 거실에서 이렇게 뻐끔거리는 것을 안다면 얼마나 왈왈거리겠나. 루첼은 고양이의 머리를 쓸어주며 물었다. "아가야, 어디로 나가면 되는 거냐?" 그러나 고양이는 고르륵 거릴 뿐이었다. 루첼은 담배를 문 채 들어 왔던 현관문을 흘끔 보고는 그 쪽으로 갔다. 다행히 철창의 자물쇠 는 걸려 있지 않았고, 루첼은 어렵지 않게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 갈 수 있었다. 달빛이 퍼지는 숲은 어슴푸레한 빛에 젖어 빛나고 있었다. 멀리 바 다가 반짝거리는 것이 보였고, 그 위로 등대의 불빛이 번쩍이다 사 라졌다. 그리 춥지는 않아, 루첼은 어깨를 한번 문질러 주고는 못 쪽 으로 다가갔다. 못 근처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루첼이 담배 연기를 한번 토해냈을 즈음에 자그마한 고양이 한 마리가 튀어 나와 루첼의 발치를 지나쳐 도망갔다. 그리고 다시 부스럭-- 이번에는 훨씬 더 가벼운 것이 지나가는 것 같다. 루첼은 또 고양이 려니, 하고 생각했지만 그 발소리는 조심스럽고도 일정했다. 루첼은 손끝에 빛을 모았다. 작은 불꽃처럼, 그것 역시 주문 같은 것 없이 할 수 있는 가장 가벼운 마법 중 하나였다. 빛은 처음에는 별빛처럼 희미하더니, 곧 등불처럼 커져 주변을 확 밝혔다. 루첼은 손을 털어 내듯 움직였다. 빛은 날개가 달린 듯 주 변을 유영해 가며 사방을 밝혔다. 주변의 나무와 마른 풀들이 훤하 게 드러나고, 그 뒤는 더욱 어두워 보였다. 그리고 저 뒤에서 뭔가 반짝였다. 역시 들짐승인가......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루첼은 그것을 분명하게 '느끼'고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팔을 휘두르며, 숨을 탁 터뜨리듯 짧고 강하게 외쳤다. "비, 위고....!" 바람이 파아 일어나며 바짝 마른 낙엽들이 부옇게 치솟아 올랐다. 그리고 그 면에 무언가가 텅--크게 부딪혔다. "--!" 역시, 루첼은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는 발로 비벼 껐다. 그렁--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경을 낀 이후로는 제대로 싸움을 해 본 것이 까마득한 예전이었던 루첼이었지만, 그것이 검을 뽑는 소리라는 것 정도는 알아챌 수 있었다. 그리고 가벼운 가죽신을 신 은 듯한 빠른 발소리--루첼은 그 소리가 가까워지기를 기다렸다가, 단번에 빛을 터뜨렸다. 불꽃이나 전격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지만, 이런 건조한 겨울에 그 런 미친 짓을 했다가는 사방에 불내놓기 딱 좋고, 여기는 루첼의 집 도 아니었다(물어줄 정도로 싼 집도 아니고). 갑작스런 훤한 빛에 눈이 부셔 상대는 주춤거렸다. 루첼은 그대로 단박에 주먹을 휘둘러 그 상대를 후려갈겼다. "크--!" 키가 아주 큰 그 상대는 단번에 나가떨어져 못 위로 떨어졌고, 첨벙 ---! 물들이 튀어 올랐다. 루첼은 옅은 빛을 모아 못 위로 흘려 보냈다. 그 불쾌한 상대는 물 을 뚝뚝 흘리면서 얕은 못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위험천만한 검은 나가떨어지는 통에 놓친 듯 빈손이었다. "누구요?" 루첼이 묻자, 그가 고개를 들더니 젖은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 올렸 다. 한창 부풀어 오른 신록을 떠올리게 할 맑고 투명한 초록색 눈이었 다. 진한 피부색을 가진 얼굴은 정말 준수했으며, 특히 코와 입매가 아주 잘 생겼다. 그리고 물방울을 뚝뚝 흘리는 검은 머리카락은 거 의 허리까지 닿을 정도였다. 그는 물을 다 토해내더니, 허벅지까지 잠겨오는 물을 헤치며 앞으로 나왔다. 더 이상 공격할 것 같지는 않아, 루첼은 빛이 자신 쪽으로 오도록 하며 그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루첼도 키가 큰 편이었는데 그는 더 컸다. 팔목과 종아리에는 가죽 으로 된 보호대가 채워져 있었으며, 가벼워 보이는 부츠(흠뻑 젖기 는 했지만)를 신고 있었다. 못을 나오자 그는 고개를 들어 턱의 물기를 마저 닦아냈다. 길고 탄 력 있는 목 줄기가 수사슴의 그것처럼 매끈하고 날렵해 보였다. 그 렇게 물끄러미 보던 루첼은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뾰족 솟아오르는 귀를 발견했다. 루첼은 놀라 신음까지 흘리고 말았다. "숲의 일족?" ".....반쪽만." 빈정거리는 듯한 목소리였지만, 아주 부드러운 미성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남자는 턱을 돌렸다. 저 쪽에서 현관문 열리는 소리와 함 께 푸제가 튀어나오더니 남자 쪽으로 꼬리를 휘두르며 달려왔다. 개 가 오자, 남자는 그 큰손으로 푸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물었다. "자, 착한 푸, 네 주인 아키는 왔니?" 개가 컹컹 짖었다. 남자는 개의 목을 당기고는 루첼을 향하게 하며 물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누구냐, 푸?" "내 손님." 답을 한 것은 푸제를 따라 나온 아킨이었다. 그리고 흠뻑 젖은 남자 를 보더니 눈을 찌푸렸고, 어찌된 일이냐고 묻는 듯 루첼을 바라보 았다. 그러자, 루첼은 알아서 설명해 보라는 듯 그 남자를 바라보았 으며 남자는 뻔뻔하게도 루첼을 빤히 마주보았을 뿐이었다. 뭔가 아 킨과 닮은 모양새로군, 루첼은 그렇게 생각했다. 결국 아킨이 한숨 을 탁 내 쉬고는 말했다. "소개가 늦었군, 이쪽은 루첼 그란셔스, 루첼, 이 쪽은 자케노스....내 이복형이다." 정말 루첼은 '이야기' 속에 들어와 앉아 있는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제는 슬슬 장르가 헷갈리기 시작할 지경이다. "본인은 왕자에 형은 엘프. 이제는 인어 누나만 있으면 되겠군." 루첼이 투덜거리자, 무릎에 머리를 얹은 푸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킨이 말했다. "미안하지만 누나는 없어." "너희 집안은 어떻게 아들만 낳아대서 어머니 미모를 그리 쓸데없 이 버리나. 아깝다. 여자 하나만 있으면, 날렸을 텐데." 루첼은 그렇게 말하곤 연기를 길게 내 쉬었다. 아킨은 손을 휘휘 저 어 연기를 흩트리더니, 일어나 벽난로 속으로 장작을 집어 던졌다. 메리엔은 아직도 부엌정리 중이었고, 그 정도는 아킨이 알아서 할 줄 아는 몇 안 되는 일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런 둘 사이로 긴 그림자가 늘어지더니, 자켄이 다가 와 허리를 숙 였다. 땋아 내린 검은 머리카락이 툭 늘어졌다. 루첼은 옆으로 조금 물러나 앉으며 물었다. "다 말리셨나?" "대충." 그러나 그의 머리카락에서는 물 냄새가 옅게 풍겨왔다. 이상한 것 은, 다른 사람이라면 고개 돌리고 싶을 비린내였을 그 냄새가 그에 게서는 기분 좋게 풍겨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뭐가 귀찮은 지, 그 뾰족한 귀를 토끼처럼 쫑긋 세웠다가는 아래로 휘저었다. 반쪽이 라고 투덜대도 엘프는 엘프로군. 나중에 첸에게는 숲을 돌아다니는 엘프를 하나 봤다고 자랑해야겠다. 생각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자켄의 눈동자가 갑자기 루첼을 향했지 만, 방금 전 그 오싹할 정도로 아름다웠던 눈동자는 이제는 평범하 고 진한 녹색으로 변해 있었다. 아킨이 말했다. "그래도 루첼, 자켄을 이긴 건 네가 처음이다. 물론, 인간으로써는 말이야." "아주 약았지." 자켄이 투덜거리듯 말했다. 아킨이 그런 자켄의 볼을 달래듯 툭툭 쳐주고는 루첼에게 말했다. "언제 자겠어?" "곧 자러 갈 생각이었다. 네 형님 덕에 힘을 다 빼서." 그렇게 말하며 루첼이 자켄을 흘끔 보자, 자켄은 눈을 찌푸렸다. "그리고 루첼, 내일 아침까지는 모르겠지만, 정오부터는 자리를 비 울 것 같다." 루첼은 내 이럴 줄 알았지, 하고는 이마를 탁 쳤다. "루첼?" "너, 내가 네 손님이란 걸 알고는 있는 거냐?" "물론 안다." "그럼 아킨토스 공주님, 손님 접대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고 아무 도 안 가르쳐 주든?" 공주, 라는 말에 자켄이 핏 웃었다. 아마도 그렇게 불릴 만 하다고 조금은 동의하고 있는 것이다. 아킨은 정말 못 말리겠다는 듯 신음 을 흘리고는 말했다. "단 하루야. 자정 전에는 들어 올 테니, 뭐라 하려거든 내일 모레 해." 루첼은 다 피운 담배를 난로 속으로 집어 던졌다. "지은 죄만 없었으면 화라도 벌컥 냈겠지만......그래, 이걸로 공평해 지는 걸로 하자." 쟈켄이 아킨에게 묻는 듯한 눈길을 보냈다. 아킨은 나중에--하고 짧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공평하다면 이쪽 저쪽 편하게 된 셈이지. 그럼, 내일 하루는 메리엔에게 잘 말해 둘 테니 편히 지내라.....여러 모로 미안하게 됐 다." 루첼이 정말 놀라 말했다. "너, 미쳤냐.....아니면 형 앞이라 착한 척 하는 거냐. 징그럽게 왜 이 래?" 아킨은 바닥을 뒹구는 쿠션을 루첼의 얼굴로 집어 던졌다. *********************************************************** 작가잡설: 네, 드디어 프롤에서 뒤퉁수들만 나오고 슥 사라졌던 캐 릭터의 얼굴 하나가 나오는 군요....;;; 야훌라이(;;) 자켄의 정체는 바로 하프 엘프였습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6장 ************************************************************** [겨울성의 열쇠] 제25편 늪의 성#6 ************************************************************** 루첼의 '늪의 성'에서의 첫 아침은 이미 중천에 뜬 해를 보는 것으 로 시작되었다. 벌써 아홉 시는 넘어갔겠다고 푸념하며(그는 아무리 늦게 일어나도 여덟 시 이전에 눈을 떴다) 일어나 안경을 찾아 꼈다. 하늘은 어제의 그 깨끗한 날씨가 아니라, 구름이 옅게 끼어있는 흐 릿한 회색이었다. 그는 대야와 주전자를 찾아 대충 세수를 마치고 옷장에서 셔츠와 바지를 꺼내 챙겨 입은 다음, 두터운 커튼을 열어 젖혔다. 창은 대문을 향하고 있었고, 옅은 빛이 퍼지며 어둑어둑했던 방이 훤해졌다. 흐린 날이라 시야는 그리 넓지 못했지만, 높은 곳이라 그런지 저 멀 리 솟은 큰 성채와 그 아래로 덮여있는 큰 도시가 보였다. 산 파로 이--롯사나 반도 최고의 항구도시, 그리고 저 도시가 마주하는 강 으로 나가면 그 앞에는 반도와 대륙 남단의 최강함대가 잠든 산 루 에르... 참, 그저께까지만 해도 골방 같은 기숙사에서 책이나 파고 있었는 데, 이렇게 느닷없이 산 루에르 성을 구경하고, 산 파로이를 거쳐 들어와서는 그 나라 왕자님 성에 묶게 될 줄이야. 솔직히, 모험이라 도 하는 심정이고, 롬파르로 돌아간다면 그렇게 커보였던 그 도시가 꽤 작아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관문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루첼은 창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누가 나가는지 살펴 보았다. 아킨이었다. 은빛머리카락은 윤이 나며 찰랑거렸고, 입고 있는 옷도 평소 같은 헐렁한 복장이 아니라 끝단을 금실로 수놓은 고급 더블릿에, 남자용 목걸이까지 걸고 있었으며, 심지어 꿩 깃이 꽂힌 모자까지 쓰고 있 었다. 저렇게 예쁘게 단장하고 어디를 가나,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킨의 옆에 있던 자켄이 뒤를 돌아보았다. 아킨이 그를 따라 돌아 보더니 창가의 루첼을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루첼도 손을 흔들 어 주었다. 아킨은 곧장 대문을 향해 나가 앞에 서 있는 백마 위에 탔다. 말은 한 마리였을 뿐이다. 아킨은 자켄에게 뭐라 말하고는 말의 박차를 가했다. 자켄은 한참 대문 앞에 서 있다가는, 더 이상 아킨이 보이지 않을 만큼 시간이 지나자 뒤돌아 느릿느릿 성 쪽으로 돌아왔다. 길게 땋 은 머리카락이 등 뒤에서 찰랑 찰랑 흔들렸고, 옷은 어제의 그 사냥 꾼 같은 차림새였다. 루첼은 돌아서서 셔츠의 단추를 마저 채우고는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환한 아침에 보니, 복도는 붉은 카펫이 깔려 있고 장식장이라든가 장식품들은 없이 아주 깨끗했다. 그러나 그리 깨끗함에도, 사람냄새 는 아예 느껴지지 않았다. 빈집을 청소만 되풀이 해온 듯, 사람의 흔적은 전혀 없다. 누군가 살고 있다면, 누군가 흩트려 놓은 것이 있고, 누군가가 지나간 온기가 묻어 있어야 하는데, 이 성은 지독한 메마름과 냉기밖에는 없었다. 곧, 빈 꽃병이 놓여있는 테이블 옆으로 자켄이 나타났다. 그 우아하 고 소리 없는 움직임으로, 고양이처럼 부드럽게 나타난 것이다. 녹 색 눈이 빛났지만, 낮이라 그런지 밤과는 색조가 조금 틀려 보였다. 훨씬 더 투명하고 맑은 듯, 그러나 좀 더 생동감 있고 실감나는 반 짝임. "아킨 녀석은 어디로 간 거야?" "본성에. 오늘 저녁 연회에 참석해야 하니까." 연회라, 연회....루첼이 물었다. "오늘...이 며칠이지?" "섣달 그믐." "그래?" 그리고 아마도 오늘, 쥰은 자기 본가에 도착했을 것이고, 항구 녀석 들은 루첼은 대체 왜 안 오냐고 투덜대면서 제임의 주점에서 술을 퍼마시겠군. 그리고 루첼은 반쪽 엘프와 함께 동화처럼 평화로운 섣 달 그믐의 하루를 보내고 있고... 루첼이 엘프에게 물었다. "몇 살이지?" "모든 이의 어머니가 이름을 준지, 인간의 해로는 스물 네 해다." 얼굴은 이제 열 아홉이나 스물 근처로 보였는데, 역시 엘프라 그런 지 보기보다는 나이가 좀 들었다. "너희들은 명명일을 생일로 치나보네." "숲의 이름을 얻을 때 숲이 그의 탄생과 존재함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것이 진정한 탄생이다." 루첼은 이상한 말은 그냥 넘어갔다. "나는 스무 살. 태어난 날로 치는 거다....아, 자켄이라 불러도 되지?" "마음대로 해라." 목소리는 좋은데 꽤나 퉁명스러운 녀석이군, 하고 루첼은 투덜거렸 다. 그리고 그런 점은 아킨과 상당히 닮아 있기도 했다. 자켄이 말 을 꺼냈다. "숲을 보겠나?" 아킨이 관광이라도 시켜 주라 말했나? 그러나 하루 종일 이 텅 빈 성에서 빈둥거릴 수도 없는 일이라, 루첼은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 가 여기까지 와서 방에만 처박혀 있는 것도 바보 짓 아닌가. 구경 할 만큼하고, 나중에 친구들과 만나 실컷 이야기 해 볼 생각이었다. 자켄은 귀를 쫑긋 세웠다가 아래로 내리며 말했다. "날이 추우니, 점심까지 먹고 출발하자." "정말 많이 자라셨군요. 키가 이 정도나 되시다니." 케올레스가 아킨을 맞이하러 성문 앞의 길에까지 나왔다가, 아킨이 도착하자마자 달려오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본 지 거의 3년이 가까워져 가는 그는, 이제 푹 삭은 고 목 나무처럼 변해 있었다. 아킨은 모자를 벗어 그에게 인사를 건네 고는, 그 뒤를 따라 나온 본가의 기사들에게도 인사를 했다. 아킨과 만난 일이 없었던 젊은 기사들은 호기심 찬 눈빛으로 아킨을 바라 보고 있었다. "휘안 형이 자라는 만큼 저도 자랍니다." 그 말이 케올레스를 웃게 했다. 그는 아킨의 손을 마주 잡으며 부드 럽게 말했다. "휘안토스 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으로 어서 드시지요." "아버님은 어디 계십니까." 그 말에, 케올레스의 긴 수염이 흔들렸다. 대충 짐작한 아킨은 희미 하게 웃었다. "괜찮습니다, 저는. 말씀해 주세요." "저, 그게....." 케올레스가 눈치를 보내자, 호위로 나왔던 기사들이 멀찍이 뒤로 물 러났다. 케올레스는 아킨 옆으로 붙으며 작게 말했다. "같이 오신 친구 분 때문에 화가 좀 나셨습니다." "본성에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주인님께서는 그 성에 외부인을 들이는 것 자체를 극도 로 싫어하십니다. 이유는...아드님이신 아킨토스 님께서 이해해 주시 리라 믿습니다." "이제 좀 너그러워 지실 때도 되지 않았나요." "공비전하께서 돌아가신 지......십 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도련님들이 이리 장성하실 정도의 시간이었으나, 주인님께서는 고통스러운--길 고도 짧은 시간이었지요. 또, 그만큼 주인님께서는 그분을 사랑하셨 습니다. 너무나." "그것은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도련님." 케올레스가 타이르듯 말했지만, 아킨은 날카롭게 반박했다. "아버님은 어머니가 자신의 아내라는 것밖에는 기억 못하시죠. 하지 만 그분은 제 어머님이시기도 합니다." "압니다. 그러니 제발 그만하십시오. 그래도, 도련님을 사랑하는 사 람은 이 성에 많지 않습니까. 휘안토스 님만 해도 동생 분을 얼마나 생각하시는지요. 그러니 이제, 이 본가를 사랑해 보도록 하세요." 휘안토스가? 속에서 뜨거운 것이 팍 치밀어 올랐다. 아킨은 눈빛이 또 확 달아오 르지 않기만을 바랬다. 다행히, 케올레스의 눈은 저택을 향하고 있 었다. "형제분들께서 우의를 다지고 서로 돕는다면, 이 암롯사를 주인님보 다 더욱 훌륭하게 지켜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분다, 아주 뛰어 난 왕자님들이니까요. 그러니 상처를 잊고, 더 강하게 자라십시오... 두 분은 이제 열 일곱 살이고, 아직 많은 날들이 남아 있지 않나 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답하며 아킨은 고개를 들었다. 뒤의 기사들이 멈추더니 서둘러 모자를 벗어 가슴 쪽으로 당겼고, 케올레스 역시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 늙은 얼굴에는 흐뭇한 웃음이 가득했다. 그는 이미 알고 아킨을 마중 나온 것이며, 이렇게 대면하게 해서 아킨을 한껏 놀라게 하고....또, 기쁘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현관 앞에 서 있던 그는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왔느냐." 아킨은 손에 든 모자를 가슴 쪽으로 당기며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셨습니까, ......아버님." 휘안토스는 서탑의 창에 기대 정원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인다. 나셀의 폭룡, 사이러스의 상징 같은 넓 은 어깨에서 은빛 머리카락이 찰랑였다. 아킨토스가 태어났을 때, 일란성 쌍둥이라 얼굴이 똑같음에도 불구하고 머리색이 완전히 틀 리자 사람들은, 심지어 약간은 고개를 갸우뚱하던 산파마저도 아킨 의 머리카락이 아버지와 닮은 것이라 말했었다. 두 사람을 위해 두 사람 모두를 닮은 아이들을 선물했군요, 생명의 에칼라스는. 어리석었지, 바보들. 휘안토스는 창가에서 몸을 떼, 방 안 쪽으로 돌아섰다. 성의 서탑 꼭대기에 있는 그 방은 봄의 방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거의 하루 종 일 햇빛이 드는 데다가, 아버지가 어머니를 위해 정성스레 꾸민 아 름다운 방이었다. 울창한 숲과 바다를 짜 넣은 태피스트리에, 천장 에는 금빛으로 테두리를 두른 천장화가 있었다. 벽에는 격자무늬로 된 꽃 덩굴이 그려져 있고, 벽난로 위와 자주색 소파 주변에는 한눈 에 알아보기조차 힘들 정도로 정교한 무늬가 그려진 꽃병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이 방은 휘안토스와 대공왕 사이러스 이외에는 아무도 들어 올 수 없는 곳이었다. 청소마저도 늙은 집사가 손수 하고 있을 정도 였고, 그조차도 이곳에 오면 호랑이라도 쓰다듬는 듯 조심 조심 쓸 고 닦은 다음 행여 잘못 놓은 것은 없는 지 세세히 살피고는 도망 치듯 나가 버린다. 그것은 그 방에는 온 암롯사를 통틀어 단 하나밖에 없는 물건이 있 기 때문이었고, 그 때문에 왕이 이 방을 너무도 귀중히 여기기 때문 이었다. 그것이야말로 왕이 요새나 검보다 더욱 소중히 여기는 귀중 품이었다. 햇살이 비추는 벽난로 위에, 그것은 이제 막 그린 듯 신선한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결혼 직후 아버지가 어머니를 위해 그리게했 던 그녀의 초상이었다. 결혼은 단 3년만에 파탄 나 버렸으니, 그것 이 결국 처음이자 마지막 초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조용히 미소짓는 갸름하고 아름다운 얼굴에, 싱그럽게 윤기 흐르는 핑크 빛 입술은 살짝 벌어져 하얀 이를 조금 드러내고....초상의 그 녀는 금방이라도 살아나 말을 걸 듯 했다. 하얀 백합으로 장식된 까 만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는, 하얗고 긴 팔로 목을 안고 입을 맞추 어 줄 듯 했다.... 아마도 아버지는 저 소파에 앉아 그것이 현실이자 현재였던 그때의 행복을 돌이켜 볼 것이며, 아버지가 유일하게 찾았던 행복이자, 영 원히 잃어버린 행복, 그리고 그것을 결국에는 악몽으로 끝내버린 자 신의 죄과를 피를 토하며 증오할 것이다. 영혼의 자해--그러나 그것만이 아버지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 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며, 아마도 그도.....어머니가 미쳐버렸던 그날 이후로 역시 미쳐가고 있을 것이다. 휘안토스는 결국 웃고 말았다. 가엾은 아버지, 그리고 더 가엾은 동생이다. *********************************************************** 작가잡설: 어쨌든 콩가루....랍니다. -_-;; 제 신조는 말입니다, 악역이라고 해서 '그런 일을 할 수밖에 없지..' 하고 동정해 줄만 하거나, 인간적인 고뇌라든가, 악당역을 뒤집어 쓰고라도 반드시 성취해야 할만한 목적 따위를 가지는 약한 모습 을 보여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악역은 악역다워야 합니다. 본질 까지, 뼛속까지 그저 순수하게 사악해야 합니다! 구차하게 변명하는 악역은 악역이 아닙니다! 주인공 따위 신경쓰면 서, 구태여 괴롭히려고 꼼수 쓰는 쪼잔한 녀석도 악역이 아닙니다! 오로지 유아독존! 그냥 내 갈길만 가는 악역이 악역인 겁니다! 물론, 그러다 보니 주인공만 개고생하더군요.....<-어이..;;;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7장 ************************************************************** [겨울성의 열쇠] 제7장 성의 늪 제26편 성의 늪#1 ************************************************************** 암롯사 성의 연회는 해가 저물고 어스름이 야트막히 깔리자 시작되 었다. 제국의 다섯 공국의 궁에서 베푸는 새해 축연은 실제로는 껍데기만 남은 황실이나 독립 왕실에서 베푸는 것보다 더욱 성대했다. 공왕가 의 기수가문들뿐만 아니라, 공국 안에 영지를 둔 귀족들, 또 수도에 머무는 부호들도 초청만 되면 연회에 참석한다. 그렇게 초대된 귀빈 들은 수백에 달하며, 들어가는 비용도 막대하다. 반도 최고의 성인 암롯사 왕성의 거대한 '축연의 홀'에 대 만찬을 위한 테이블이 깔리고, 그 위로 수 십 백 개의 접시와 잔들이 놓여 졌다. 초청되는 귀빈들은 많았지만, '대만찬'이라 불리는 공왕이 참 석하는 만찬에 식사를 하는 것은 왕과 아주 친밀한 관계를 가진 사 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었다. 사실 '암롯사의 대만찬'은 유명한 것이었다. 반도의 놀라운 성찬 때문이 아니라, 사이러스가 동생의 머리를 부수고는 베푼 대만찬이 바로 그 홀에서 열렸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만찬에 '무사히' 다녀왔다는 말은 그만큼 대공과 실질적으로 가깝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 만찬이 한 시간 가량 계속되다가, 그것이 끝날 즈음에 무 도회를 겸한 좀 더 사교적인 연회가 시작된다. "네,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식사를 마친 아킨은 케올레스를 만나게 되자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의 마법사를 담담한 얼굴로 바라보았 다. 케올레스가 미치겠다는 듯 외쳤다. "아니, 대체 왜 그러셨습니까!" "아버님이 찾으셨나요?" 아킨이 묻자, 케올레스는 만찬장에서 데스테리아 후작부인-즉, 공왕 의 동생인 테시우스의 부인-과 평소와 별 다를바 없이 태연하게 이야 기를 나누던 왕을 떠 올렸다. 아킨이 오지 않느냐 묻기는커녕, 신경 쓰는 빛조차 없었다. 케올레스는 맥없이 답했다. "아닙니다." "그럼 된 겁니다." 대만찬에서 잔뜩 기대하고 상석에 앉아 있던 케올레스는, 주군이 휘 안토스와 함께 들어오자 크게 낙담했다. 그래도 그 가엾은 노마법사 는 소년이 행여나 뒤에 오는 것은 아닌지 한참을 기다렸다. 그러나 대공이 착석하고, 연회가 시작되고, 휘안토스에게 딸을 가진 듯한 가신들이 몇 번이나 술잔을 들어 그 건강함과 총명함에 대한 칭찬 을 지겹게 늘어놓아도 아킨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케올레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휘안토스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오늘 아침 대공이 직접 아킨을 맞이했다 하나, 아킨을 달가워하는 기색이 전혀 아니었다는 것을 모를 케올레스는 아니었으니, 차라리 휘안토스에게 물어본 것이다. 역시, 대공의 눈초리는 날카로워졌지 만 휘안토스는 아킨이 어디 있는지 가르쳐 주었다. 그렇게 허겁지겁 달려와 보니, 아킨은 벌써 혼자서 식사를 마친 것 이다. "하지만 오늘 분명....참석한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약조하셨다고 들 었는데..." "네, 분명 참석합니다. 단, 언제까지만 정해져 있을 뿐 '언제부터'는 정해지지 않은 걸로 아는 데요." "아킨토스 님...!" 그러나 아킨은 말없이 잔을 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마친 것은 정말 간단한 식사로, 연회장의 성찬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했 다. 케올레스는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화...도 나지 않으십니까....같은 전하의 자제분인데, 이렇게...이렇 게..." "오래 전에 다 내버려서, 이제 남은 것도 없습니다. 또, 저는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커 오기도 했고요." 케올레스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제 탓...입니다." "당신 탓이 아닙니다, 케올레스. 그 마법을 깰 수 있는 자는.....어디 에도 없었고, 대마법사라 불리는 컬린마저도 '정지'시키는 것 이상으 로는 할 수 없었습니다." "무능은 신하의 죄입니다." "할 수 없는 것을 하라 하는 것 역시 어리석은 주군의 죄입니다. 괜 찮으니 참석하십시오." 그리고 아킨은 나가려다가, 문 옆에 있는 소년과 마주쳤다. 머릿속 으로 열기가 확 번져 들어갔고, 피가 뜨거워지며 목구멍으로 꽉 들이 차는 듯 했다. 소년이 말했다. "만찬은 벌써 끝났다, 아키." 아킨은 지나쳐 나가려 했지만, 휘안토스가 손을 들어 그 길을 막았 다. 팍 치고 나갈까, 하다가 아킨은 그냥 멈추었다. "너란 녀석은 여러 사람 힘들게 하는 구나. 이제는 미안해하기라도 해야 하지 않아?" 그렇게 말하며, 휘안토스는 케올레스에게 눈치를 보냈다. 케올레스 는 미끄러지듯 재빨리 사라졌고, 잠깐 고개를 돌리며 아킨에게 눈빛 으로 사정했다. 제발 휘안토스의 말을 들으라는 것이다. 케올레스가 사라지자, 휘안토스는 아킨을 막았던 손을 내리며 말했 다. "나가자." "나중에." "아니, 당장이다." 휘안토스는 아킨의 어깨를 잡았다. 아킨은 몸을 빼버렸지만, 휘안토 스는 단번에 그 멱살을 세게 잡아당기며 말했다. "나와 약속했다. 그리고 그 약속을 그런 말장난으로 엉망으로 만드 는 건 용납 못해." 아킨는 휘안토스의 팔을 세게 후려쳤다. 휘안토스는 신음을 흘리며 팔을 당기고는, 얼얼한 손목을 감싸쥐었다. "질질 끌려나가지는 않아." 그러나 휘안토스는 오히려 희미하게 웃었다. 아킨이 그런 그를 쏘아 보자, 휘안토스는 가볍게 팔을 흔들고는 말했다. "우선 가기 전에 잠깐." "무슨...." 휘안토스는 아킨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다듬어 주었다. 엉킨 부분 은 손수 풀어주고, 소매의 주름을 펴 준 다음 목걸이도 정돈해 놓았 다. 마지막으로 셔츠의 칼라까지 잘 세워 놓자, 휘안토스는 만족스 럽게 웃으며 말했다. "잘 해보자꾸나, 동생아." 다시 속에서 뭐가 확 번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킨은 꾹 참아내고 는, 휘안토스의 뒤를 따랐다. 기둥들이 사열하듯 늘어선 복도를 걸어, 긴 창문들이 열 지어 있는 큰 통로도 지나갔다. 음악소리와 웅성거림이 잡힐 듯 가까워져왔다. 휘안토스가 마지막 문을 열자, 커다란 기둥들로 둘러싸인 홀이 나타 났다. 몇 미터는 됨직한 큰문이 그곳을 향해 열려 있었고, 그 양옆에 는 기사 두 명이 서 있다가 휘안토스가 나타나자 가슴에 팔을 붙이고 고개를 숙였다. 키가 크고 살집이 잘 잡힌 시종이 달려와 휘안토스를 맞이했다. "어디 갔다가 이제 오셨습니까. 대만찬은 벌써 정리되었....." 그러다가 시종은 눈을 껌뻑이며 휘안토스 옆에 있는 아킨을 바라보 았다. 휘안토스와 똑같이 생긴 얼굴에, 시종의 얼굴에 핏기가 삭 가 셨다가 한참 만에야 더듬 더듬 말했다. "저, 이, 이분은...." "당신과는 처음 만나지요. 그러나 누구인지 아시리라 믿습니다." "저, 저..." "소개는 필요 없습니다. 제가 직접 할 테니." 휘안토스는 그렇게 말하곤 아킨에게 엄지 손가락으로 홀 안쪽을 가리켜 보였다. 아킨은 한숨을 탁 내쉬고는 그 뒤를 따랐다. 이제, 사람들의 숨소리마저 들려올 듯 했다. 가까워질수록, 아킨은 현기증이 일어날 지 경이었다. 그러나 앞의 휘안토스는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갔 다. 번쩍이는 샹들리에가 빛을 쏟아내는 대연회의 홀이 쏟아지듯 아킨 을 덮쳤다. 음악은 멈추고, 앉아있던 사람들이 일어나며 대공가의 후계자를 맞이했다. 춤추던 사람들도 마주잡았던 두 손을 내리고는 돌아섰다. 그리고 홀의 가장 높은 곳에 앉아 있던 대공이 몸을 돌렸 다. 아킨은 홀에서 가장 먼저 그와 마주했다. 눈이 마주치자, 먼 거 리임에도 아킨은 그 눈이 쏟아내는 차가운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주먹을 꾹 움켜쥐며, 그는 애써 그 매서운 빛을 참아냈다.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까지는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저렇게 혐 오하는 눈빛만은 아킨도 견디기 어려웠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자, 인정을 받고자 노력해본 적도 없었다. 사실, 그저 아킨을 미워하기 만 하는 것이라면 사랑하고 싶지 않아서 저러는 것이라면 아킨 자 신도 노력할 것이다. 미움 이면에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핏줄이 흐 르고 있을 것이며, 그 흐름은 분명 서로를 통하게 하는 끈이 될 수 있을 테니. 미워하면, 사랑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저 혐오의 빛은 어찌하겠는가. 무엇으로 달래고 부드럽게 하 여 서로를 용서하고 용납하고 받아들이게 할 것인가. 아킨 자체를 용납하지조차 못하겠다는, 아킨이 살아있다는 것 하나 하나에 분노 하는 저 눈빛을 대체 어쩌란 말인가. 휘안토스가 그 차분한 목소리로 모두에게 말했다. "아킨토스 프리엔, 암롯사의 제2왕자이자 제 동생입니다." 경악의 침묵이 녹아 내리며, 벌레가 움직이는 듯한 술렁임이 퍼져나 갔다. 보통 사람보다 몇 배는 귀가 밝은 아킨에게, 그들이 서로에게 속살거리는 소리는 바로 옆에서 이야기하는 듯 잘 들렸다. '정말 둘째 아들이 있었네.' '맙소사, 그 동안 어디 가 있었던 거죠?' '소문 못 들었었어요?' 휘안토스가 아킨의 팔을 툭 쳤다. 한눈 팔지 말고 따라 오라는 것이 다. 넌 듣지 못하겠지, 휘안...아킨은 한번 더 참았다. 그리고 오늘 몇 번을 더 참아야 할 지, 감잡기도 어려웠다. 공가의 아들들은 곧장 연 회장을 가로질러, 아버지인 사이러스에게 갔다. 쉰이 다 된 중년이었지만, 아직도 건장한 몸에 빛나는 눈을 가진 기사였다. 은빛 머리는 젊은이처럼 빛나며 찰랑이고, 그 어깨도 꼿 꼿했다. 그리고 옆에는, 십 년의 추방생활 끝에 돌아왔던 대공왕의 동생이자 아킨과 휘안의 숙부인 테시우스가 서 있었다. 몇 개의 나 라를 전전하며 겪었던 고생 때문에, 그는 형보다 오히려 더 나이 들 어 보였고, 귀국과 함께 맞이해 그보다 한참이나 어린 아내 데스테 리아는 서른도 안되어 젊고 싱싱했다. 후작부인의 옆에는 열살 정도 되 보이는 작은 소녀가 그 치마를 붙잡고 있었다. 어머니와 닮아 진 한 갈색머리를 귀 옆에서 단정하게 자르고, 맑고 순진한 눈이 반짝 이는 아주 귀여운 소녀였다. 아킨과 눈이 마주치자, 소녀 쪽이 어머니 뒤로 숨어버렸다. "눈이 무서워." 소녀가 그렇게 말하자, 후작부인이 눈을 찌푸리고는 엄격하게 말했 다. "셀, 제발--그런 무례한 말을 하면 안 되는 거란다." 숙부가 앞으로 나오더니 환히 웃으며 아킨의 어깨를 붙잡았다. "많이 컸구나, 아키. 그래.....유학생활은 즐겁더냐." 그 말에, 주변의 귀빈들이 다시 속삭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동안 안 보였던 것이 그 유학 때문이라 납득 한 듯 했다. 큰아들을 제한 나머지 아들들이 멀찍한 곳으로 유학을 떠나는 것은 귀족들 사이의 오랜 풍습 중 하나였고, 특히 쌍둥이라 계승분쟁이 일어날 것이 뻔 한 아킨토스와 휘안토스는 일찌감치 서로 떼 놓는 것이 현명했다. 그 때 멀리서 자그만 말소리가 들려왔다. '미쳤었다고 하지 않았어....?' 아킨은 그 말이 들려온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고개는 거의 움직이 지 않아, 바로 앞에 있는 숙부마저도 눈치 챌 수 없었다. 또, 그 말 소리는 아킨의 귀에만 잘 드리는 것뿐이었다. 머리가 반쯤 벗겨져 나가고 어깨가 좁고 키가 작은 남자가, 그 부인인 듯 보이는 여자에 게 속삭이고 있었다. 다시 말소리가 들려온다. '맞아, 대공비가......'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아킨과 눈이 마주쳤다. 그 번득이는 듯 무시무시한 눈길에, 부인은 얼굴이 해쓱해져서는 남 편을 툭 쳤다. 남자가 재빨리 앞을 보았고, 그 역시 아킨과 눈이 마 주치자 얼굴의 땀을 닦아내며 고개를 돌렸다. "아킨토스....어디를 보는 거냐?" 숙부가 물었다. 아킨은 마지막으로 한번 그들을 쏘아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숙부를 마주 보려 했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에, 아킨은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여 자를 발견했다. 아킨은 결국 고개를 돌려 그 쪽을 바라보았다. 키는 큰 편이었고, 잘록한 허리가 돋보이는 늘씬한 여자였다. 화장 이 진해 본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지만 그 솜씨가 아주 좋아서 천박해 보이기는커녕 그것이 원 얼굴인 듯 보였다. 또, 짧은 앞머리와 옆머리는 이제 막 쳐낸 듯 했고.....아무리 봐도, 본 얼굴을 오늘 하루 정도 적당히 감추기 위해 그리 분장을 한 듯 보인다. "!" 놀란 아킨의 눈이 커졌다. 그러자 여자는 입술위로 손가락을 대 조 용히 하라고 손짓을 보내고는 사람들 틈으로 사라져 버렸다. "아키?" 휘안토스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아킨은 다급하게 고개를 돌렸 다. 그리고 믿어지지 않아, 웃기까지 하며 중얼거렸다. "켈리....?" 휘안토스가 눈을 찌푸렸다. "누구...라고?" *********************************************************** 작가잡설: 드디어 준 히로인 등장이군요. ^^;; 물론, 아키 여자 친구 는 아닙니다. 아키의 그녀는 따, 로, 있어요. ^^ (그리고, 가엘! 절-- 대 네타 하지마!!)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7장 ************************************************************** [겨울성의 열쇠] 제27편 성의 늪#2 ************************************************************** "좋은 엄마가 될 거야, 자크." 루첼은 자켄이 내미는 커피 잔 쪽으로 손을 내밀며 그렇게 말했고, 그 이마에 힘줄 돋는 것을 보니 늦게 받았다가는 그 잔으로 머리라 도 후려칠 것 같아 잽싸게 빼앗아 버렸다. 자켄이 약간은 떨리는 목소리로, 너도 한방 먹어라 라는 듯 말했다. "그렇다면 너는 못된 아들감이군." "어머니는 나 낳자마자 돌아가셨어. 아버지는 열심히 일해서 좋은 아버지가 될 거라 결심하신 건 좋은데 내가 네 살 때 병으로 돌아 가셨고....못된 아들 노릇도 제대로 못했지." 네놈가 말한 내가 잘못이라 투덜 대며, 자켄은 나무 의자에 털썩 앉 았다. 그리고 품을 뒤적거려 파이프를 꺼내더니 그 앞부분을 루첼에 게 내밀었다. 루첼은 그것을 멀뚱히 보다가는,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겨우 알고는 그 파이프에 '손수' 불을 붙여주었다. "엘프도 담배를 피우나?" "노프사의 지하굴을 여행할 때 땅의 일족이 가르쳐 줬다. 침묵과 고 독과 어둠의 벗이라 했지." "좋은 말이네." 자켄이 파이프를 문 채 물었다. "안 춥나?" "별로. 오두막인데 아주 따뜻하군." 그렇게 말하며 루첼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둘이 있는 곳은 숲 깊은 곳에 있는 자켄의 집이었다. 오래 전에 지 어진 통나무 오두막으로, 산지기나 숲의 사냥꾼이 머물던 곳인 듯 했다. 벽에 걸린 말린 풀들이 각 다발마다 싸한 향내를 풍겼다. 천장에는 훈제 고기 덩어리들이 큰 열매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고, 자켄과 함께 그중 일부를 저녁으로 뜯어먹은 루첼은 엘프들이 풀만 씹어먹 고 산다는 통설은 잊기로 했다. 자켄이 말했다. "솔직히....좀 놀랐다. 아킨이 누굴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라." "동생 손님인 줄 뻔히 알면서도 대뜸 걷어찼냐?" "기분 나빠하지 마. 그냥....네 '본질'을 보고 싶었을 뿐이다. 인간의 본질은 위급할 때 맨 몸을 드러내니까." "어땠는데?" "모른다. 넌 아직 아주 젊고.......나 역시, '모두의 어머니'처럼 인간의 미래까지 꿰뚫을 능력은 없으니까. 다만....네 지금의 본질만을 볼 수 있을 뿐.......그래서 네 본질도 좋다 나쁘다, 경솔하게 판단 내릴 수 는 없다." "그래서, 결론이 뭐야?" 루첼은 자켄이 재떨이로 내 놓은 이 빠진 나무 접시에 재를 털었다. "아주 총명하고, 또 충분히 노력 할 정도로 성실하기도 하지. 그 자 질을 가지고 너는 아마도 많은 고난을 찾아다닐 거야. 도전하고, 쓰 러지고, 그리고 다시 도전하고 이겨낼 테지." 루첼이 웃었다. "팔자 사납다는 말이군." "그건 네 선택에 따른 것이다. 어쨌든, 너는 위대해 질 수도 있고, 대단히 사악하고 강한 자가 될 수도 있지. 되도록 전자가 되기를 바 란다." "충고 고마워." 루첼이 뿜어낸 담배 연기가 오두막 안에 흩어졌다. 푸제가 킁킁거리 고, 자켄이 키우는 작은 올빼미가 끽끽 울었다. "뭐 더 궁금한 거 없나, 루첼?" "글세, 필요 없어." 루첼은 담배를 비벼 꺼버렸다. 올빼미가 다시 끽끽대며 서성였고, 자켄은 자리에서 일어나 작은 단지 안에서 생고기 한줌을 꺼내 올 빼미에게 주었다. 못생긴 회색 올빼미는 발톱으로 그것을 잡고는 짧 은 부리로 뜯어먹기 시작했다. "날개가 부러졌지. 나으려면 한 한달 정도 걸릴 거야. ...그래, 왜 필요 없다고 하는 거냐." "비밀은 원래 위험과 책임을 끌고 들어오는 불쾌한 불청객 같은 녀 석이라고." "너, 꽤나 호기심 많은 녀석 같던데?" "그리고 그 비밀의 길에 숨어있는 위험물을 피해갈 정도의 지혜는 있어."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의 오두막이 있는 깊은 계속을 덮치며 가 지가 타닥거리고, 창문이 들썩였다. 둘 다 아무 말도 없었고, 루첼은 담배갑에서 담배를 하나 더 꺼내 입에 물었다. 불이 붙고, 한 모금 빨아들이고, 그것을 다시 조용히 내 쉬고는 루첼이 말했다. "숲의 일족은 방랑이 아닌 한 절대 숲을 떠나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런데 넌 어쩌다가 여기서 혼자 '살고' 있는 거냐? ...아, 네 아버 지에게 맡긴 건가?" "어둠 숲의 일족은 가족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탄생을 신성한 축 복이라 생각한다. 반쪽이던, 반의 반쪽이던 그들은 자신의 피를 이 어받은 아들딸을 절대 버리지 않아.....그러니, 내 스스로 나온 거다." "아버지를 찾아서?" "설마. 그리고 내 어머니는 '그'와 사랑에 빠져 나를 낳은 것이 아니 라, 강제로 나를 낳게 된 것 뿐이야. 내게는 찾을 '아버지' 따위는 없다." 루첼은 난감한 것을 듣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아무 이야 기나 해 보고 싶어서 물어 본 것뿐인데.....그래, 조금 경솔했다. 자켄이 파이프를 놓았다. "어머니는 그 때 고작 열 여덟이었다. 그리고 수 백년을 사는 숲의 일족에게, 그 나이는 갓 태어난 것이나 다름없는 어린 나이이기도 했다. 인간들에게야, 적어도 열 여섯이나 열 일곱 정도는 되 보일 테지만.......일족의 기준으로 보면 떡갈나무 울에서 이제 막 자립의 인을 받았을 뿐인 어린 아이였다. 인간들 소녀들 보다 더 약하지..... 그런 그녀가 어쩌다가 숲의 경계근처를 서성이게 되었는지는 정확 히 모른다. 그녀의 반려였던 바실리카가 그녀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 았을 때, 아무도 그녀가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지 몰랐다더군. 그리 고 그녀는 그 때 운수 사납게도 숲의 경계에서 인간 사냥꾼들에게 들켜 버렸지. 사냥꾼들은 그녀를 보자마자 개를 풀고 그물을 던지며 사냥을 했고, 새끼사슴만큼이나 약했던 그녀는 그 사냥꾼들의 젊은 왕에게 붙잡혔다." 파이프의 연기는 결국 꺼져 버렸다. "그리고--" 자켄이 큭 웃었다. 어울리지 않아, 너. 루첼은 그렇게 생각하며 탁탁 타오르는 벽난로 쪽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진기한 야생동물이 인간들에게 잡히면 언제나 험한 꼴을 당하게 되지.....하물며, 인간 중에서도 잔학한 그의 손아귀에서는....뭘 더 말 하겠나. 그에게는 무서움 따위는 없었고, 금기는 부수라고 있는 것 이었다. 그는 아마도 숲의 일족, 그것도 온 일족의 울이 보호하는 어린 일족을 약탈한 최초이자 최후의 인간이었을 것이다......숲을 샅 샅이 뒤지다가 겨우 그 사실을 알아낸 바실리카는 반쯤 미쳐서는 직접 인간의 야영지로 찾아가 그녀를 요구했지. 내 어머니와는 달 리, 바실리카는 전사이자 성인이었고, 왕이 거절하자 직접 내 어머 니를 찾아갔다." 그리고는 자켄은 목옆을 탁 쳤다. "아마도 여기 즘 그 흉터가 남아 있을 거야. 내가 숲을 떠날 때까 지, 그녀는 일족 최강의 전사였고, 그녀의 분노는 목숨을 가져가지 못한다면 공포와 흉터를 남기니까." 루첼은 용사가 마침내 마왕을 무찔렀다, 라는 말을 듣는 것처럼 기 분이 좋아졌다. 어쨌든, 여자 괴롭히는 녀석들은 영웅이던 말던 영 질색이다. 암롯사 대고왕 사이러스의 악명이야 익히 들어오긴 했지 만, 그것은 루실리아와의 사랑 이야기의 '배경'에 불과했었다. 그런 망나니가 사랑의 힘으로 개과천선했다, 라는 식으로. "그래서?" "그 지옥 같은 사흘은 내 어머니, 어렸던 아델라이데의 정신을 짓밟 아 버리는 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꺾인 꽃처럼 시들어 가던 그녀는 결국 나를 낳자마자 몇 달 뒤 돌아가셨다.......그래, 열 아홉 살. '울' 을 넘어 완벽한 성인이 되어 보지도 못하고 영원의 어머니에게 돌 아간 유일한 일족이 되 버린 거야." 그러나, 숲의 일족은 인간의 사생아 자켄에게 다른 아이들과 똑같은 보살핌을 베풀었다. '모두의 어머니'는 그에게 자케노스라는 이름을 주었으며, 아델라이 데의 반려였던 바실리카는 자켄의 보호자가 되었다. 그리고 전사 바 실리카는 자켄이 어찌 태어났든 간에 그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 고, 전사로서의 기술도 가르쳐 주었다. 바실리카 같은 엘프 특유의 날렵함과 예각은 없었지만, 자켄은 놀라운 체력과 힘을 가지고 있었 던 데다가, 인간의 피가 섞여 숲과의 교감능력이 현저히 떨어졌으니 전사의 길밖에 없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자켄이 자라가며 그날의 서글픈 기억은 숲의 낙엽과 함께 묻혀갔다. 바실리카가 한해에 한번씩 유랑을 떠나 한 달만에 돌아와서는 '모두 의 어머니'에게 무언가를 알리곤 했지만, 어떤 일로 다녀왔는지 말 해주지는 않았다. 그리고 사실, 자켄은 자신이 어떻게 태어났는지조 차 몰랐으며 일족은 침묵의 규약 속에 그 일을 철저하게 비밀로 붙 였다. 일족에게, 비밀에 대한 호기심은 금기였던 것이다. 그리고 자 켄은 그저 자신이 조금 모자라는 아이라 다른 아이와 틀리거니, 했 다. 루첼은 자켄을 빤히 보았지만, 턱을 괴고 느긋하게 앉아 있는 그는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는 옛날 이야기를 하는 듯 담담했다. "그리고....내가 일곱 살 되던 해 봄이었지." 어둠 숲 안으로 인간이 들어왔다. 금기된 숲의 결계를 깨뜨리고 들 어온 것이다. 아니, 결계는 깨어지지 않았다. 견고한 숲의 결계는 스 스로의 판단 하에 그 남자를 허락한 것이다. 몇 날 며칠을 혼자서 방황한 듯 초췌한 행색이었으나, 눈은 굶주린 이리처럼 안광을 뿜어냈다. 그 단단한 팔이 움켜쥔 검과 가슴에는 그 분노에 희생된 것들의 피가 튀어 있었다. 그는 은빛 머리카락을 갈기처럼 헝클어뜨리고는, 미친 야수처럼 으르렁거리며 숲이 떨 정 도로 외쳤다. -나와, 나오라고---! 당장! 당장--! '어머니'의 명에 의해, 바실리카만이 나서 그와 맞섰다. 성난 남자는 바위라도 부수어 버릴 듯 강했지만, 바실리카의 빠른 검은 단번에 그를 제압했다. 그리고 그녀가 이기자 일족의 전사들은 즉각 검을 거두고 숲으로 사라졌다. 조용해지자, '어머니'는 옆에 자 켄을 대동하고 그 앞으로 나섰다. 긴 망토에 굵은 떡갈나무 지팡이 를 가진 마법사가 나타나자, 남자는 피를 토해내듯 외쳤다. -네가 바로 그 짓을 한 년이냐! '어머니'에게 퍼부어진 폭언에, 바실리카의 어깨가 꿈틀거렸고, 자켄 마저 허리의 작은 검을 뽑아 들려 했지만 어머니는 그들 모두를 제 지했다. -무슨 일로 찾아온 것인가, 아델라이데의 약탈자여. 아델라이데, 자켄은 어머니의 이름은 알고 있었다. -몰라서 묻는 거냐! 내 아내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어째서 내 아 내가 '그런 것'을 낳은 거냐고! -'그런 것'이라니? 그 아이는 당신의 아들이고, 당신 아내의 아들이 야. 남자의 눈에서 불꽃이 팍 튀어 올랐다. 그리고 드디어 바실리카의 검을 밀쳐내고 그 거대한 검으로 어머니의 목을 겨누었다. 바실리카 에게 베어져나간 목에서 피가 철철 흘렀고, 온 몸은 분노로 부들부 들 떨리고 있었다. 어머니가 말했다. -당신들 인간이란, 죄는 지은 자만이 잊는 족속인 듯 하군. 아델라 이데를 울조차 벗어나지 못하고 죽게 한 죄, 우리 모든 일족이 분명 히 기억하고 있고, 그 분노를 잊어 본 적도 없으며, 아직도 계속되 고 있어. 또한--- 어머니의 마법의 힘이 검을 퉁겨냈다. 남자는 저 편으로 나가 떨어 졌고, 다시 일어나려 하자 그 위로 엄청난 힘이 내리꽂혔다. 나무가 흔들리며 여린 잎새 몇 개가 떨어졌다. 겁에 질린 자켄은 그녀의 망 토 뒤로 숨으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선고하듯 엄숙하게 말했다. -지워버릴 수도 없을 거야. 하나가 죽으면 둘 모두가 죽을 테니. -그렇다면....어쩌란 말이오! -네가 죽기 전 까지는 결코 풀리지 않을 것이란 말이다. 남자의 눈에 슬픔과 절망이 들어차더니, 몸을 떨었다. 그리고 억압 이 풀리자 무릎을 꿇고 어머니 앞에 엎드리며, 쉬어 갈라진 목소리 로 애걸하기 시작했다. -용서하시오, 제발....내가 잘못 했어! 제발! 그러니 용서 해 주시오! 제발--! -당신은 죄를 뉘우치는 게 아니야. 징벌이 두렵고 무서운 것뿐이지! 용서를 구하지 않는 자에게 용서를 해 줄 수는 없으며, 그건 유감스 럽게도 아델라이데도 바라지 않을 거야. -그럼, 차라리.....차라리 나를 그런 괴물로 변하게 해 주시오.....차 라리 나를......! 아내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어! 남자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진흙과 피에 범벅이 된 볼 위로 눈 물은 계속 흐르기만 했다. 가슴을 쥐어뜯고, 그가 긁어대는 맨살위로 피가 스며 나왔다. -얼마나 괴로운 지, 얼마나 그녀가 괴로워하고, 그녀가 괴로운 만큼 나도 괴롭소.....착한 여자요, 너무나 착한 여자.....내 목숨보다 더욱 사랑하는 아내. 그러니 내 죄 때문에 그리 괴롭게 할 수는 없소! 복 수는 나에게만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나 혼자 잘못한 것인데, 어째 서 내 아내가 더 괴로운 거요. 그러자 어머니는 그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조용히 말했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야. 그리고 어머니는 뒤로 숨어있던 자켄에게 앞으로 오도록 했다. 자켄 이 나오자, 그녀는 긴 옷자락으로 자켄의 머리를 감싸 안으며 말했 다. -당신이 약탈한 아델라이데가 남긴 아이지. 인간들 식으로 하면..... 그래, 당신의 장자겠군. 그 말에, 바실리카의 눈이 도끼처럼 날카로워졌다. 그리고 자켄은 파랗게 질려서는 도망치려 했지만, 어머니는 완고하 게 그 어깨를 잡아 눌렀다. 결국 자켄은 그 자리에 계속 서서 그 남 자를 바라 보아야 했다. -당신의 모든 것은 이 아이에게 물려준다면, 그 저주를 풀어 주겠 소. 자, 이 아이를 데려가 후계자로 교육시키고 당신의 권좌를 물려 주시오. 그리 마음만 먹는 다면, 그리고 그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가엾은 아기의 저주는 그 순간으로 풀릴 것이오. -이 아이에게.....암롯사 대공왕의 자리를 주란 말이오? -그렇지. 자켄은 혐오감에 뒤로 주춤 물러났다. 저런 탁한 눈을 가진 자를 따 라가라니...맙소사. 남자가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반쪽.....의 이 종족에게, 인간을 다스리라는 것이오! -귀한 숲의 피를 이어받은 아이요. 그 어떤 인간 보다 고귀할 테지. 자켄은 어머니의 품안으로 파고들었고, 그녀는 긴 소매로 자켄의 떨 리는 몸을 감싸 안아 주었다. 옆에서 바실리카가 불편하게 씩씩거렸 다. 슬쩍 보니, 그녀는 어깨를 떨며 어머니를 간절한 눈으로 보고, 그러다가 품에 안겨 있는 자켄을 슬픈 눈으로 보았다. 루첼은 텅텅 빈 담뱃갑을 닫으며 물었다. "결과는?" "보는 대로. " 루첼이 웃었다. "이봐 자크, 너 나한테 시집올 거냐?" 자켄이 뭘 뒤집어엎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푸제가 귀를 벌떡 일어 났고, 창가의 올빼미도 서성거렸다. 자켄이 바닥을 더듬 더듬 짚으 며 물었다. "무슨 소리.....냐?" "난 바보가 아니고, '그것'이라 불렸던 쪽이 아킨이라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 있고.....대공가에서 얼마나 숨겨왔을 지도, 또 그것이 다 른 아들이자 후계자인 휘안토스에게 치명타가 될 거란 사실도 잘 알겠어. 그런데, 그런 엄청난 비밀을 왜 말 하냐, 이거다." 자켄이 아무 말도 없자, 루첼은 팔짱을 끼고는 몸을 젖혔다. "반쪽 엘프라서 그런 말 다른 사람에게 하면 안 되는 줄 모르는 건 가? 아킨은 엄--청 신경 쓰던데." 자켄이 루첼을 쏘아보았다. "빈정대지 말아라. 그래서, 뭘 어쩌라는 말이냐." 루첼은 테이블 위에 얹힌 자켄의 파이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주면 안 들은 척 하지." "......" 자켄이 아무 말이 없자, 루첼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안 그러면 소문 다 퍼뜨린다." 자켄은 파이프를 집어 던졌다. 루첼은 그것을 받아 들고는, 재를 탈 탈 털어 내며 말했다. "어이, 담배랑 같이 줘야지." "죽일 놈." *********************************************************** 작가잡설: 자크-루첼 커플도 잘 어울리는 군.....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7장 *************************************************************** [겨울성의 열쇠] 제28편 성의 늪#3 *************************************************************** 아킨은 벌써 서른 명은 만난 것 같았다. 게다가 옆에는 내내 휘안토 스가 바짝 붙어 있어 도저히 혼자 있는 시간을 낼 수 없었다. 결국 시간 날 때마다 연회장을 훑어댔지만, 수 백 명은 됨직한 어마어마 한 사람들 틈에서 제비처럼 재빨리 여기나왔다 저리로 사라져 버리 는 그녀를 찾는 것은 아예 불가능했다. 게다가, 그렇게 딴 생각만 머릿속에 꽉 들어차 있으니 아킨은 사람들이 물어 오는 데도 건성 건성 답했다. "그 동안 어디에서 공부하셨습니까?" "많습니다." "무엇으로 나갈 예정이시죠?" "모릅니다." 다 이런 식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킨의 덤덤한 얼굴과 맞물려, 영 건방진 행동거지가 되어 버렸다. 결국에는 휘안토스가 여러 번 눈치 를 주었지만, 아킨은 그 눈치도 제대로 챙기지도 못했다. 보다 못한 휘안토스는 아킨의 팔을 잡아채 당겼다. "휘안?"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순간, 아킨은 드디어 자리를 뜰 수 있는 방법이 생각나, 휘안토스의 손에서 팔을 당겨 뽑았다. 그리고 귓속말로 "형이 이 사람들 좀 상 대해 줘.""어디 가는 거야?""뻔하잖아."그렇게 주고받고는, 휘안토스 가 다시 잡기도 전에 재빨리 사람들 틈으로 파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가 뜨는 즉시, 예상대로 휘안토스쪽으로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여 들었다. 사람들은 아킨에 대한 질문을 쏟아 댔고, 그 폭격에서 벗어 나 아킨을 잡으러 떠날 때까지는 꽤 걸릴 것이다. 아킨은 소매의 먼지를 털고는 가벼워진 어깨를 으쓱해 보았다. 이런 유쾌한 기분도 꽤 오랜만이었다. 아킨은 서둘러 무도회 홀 쪽으로 향했다. '그녀의 성격'이라면, 이런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휴게실에서 따분하게 하품하기보다는 그 쪽에서 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는 왜 왔을까, 설마 내가 이번 연회에 참석한다고 알 고 있을 리도 없을 텐데. 또, 제대로 초대받고 온 것이라면 그렇게 '분장'을 하고 왔을 리도 없다. 어쩌면, 예전에 자주 그랬던 것처럼 장난 삼아 다른 사람 행세하면서 돌아다니다가 아킨이 있는 암롯사 에 들른 것일지도 모른다. 홀로 향하는데, 몇 사람이 또 말을 걸어왔다. 아킨은 대충 답하고는 자리를 나섰고, 홀에 도착하기 직전에 이번에는 데스테리아 후작부 인과 만나게 되었다. 아킨은 마지 못해 멈추어 그녀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숙모님." 후작부인은 나긋나긋한 몸에 약간 처진 눈을 가진 여자였고, 속내를 진득이 감추는 숙부에 비해, 나이가 젊어서 그런지 말이 좀 많은 편 이기도 했다. "안녕, 아킨토스. 무도회 장으로 가는 거니?" ".....아, 네." 그러자 후작부인은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 해 주겠니? 내 남편은 대공왕 전하와 함께 이야기 나누 느라 바쁘구나." 아킨은 먹구름이 머릿속으로 몰려드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하면 나 이가 배는 되는 이 여자와 '첫 춤'을 추어야 한다. 그리고 질색이었 을 뿐만 아니라, 그 꼴을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지도 않았다. 나중 에 또 얼마나 놀려댈 지, 안 봐도 선하다. "춤...은 못 춥니다." "어머나.....학교에서 안 가르쳐 줬니? 그 정도는 교양으로 가르쳐 줄 텐데." 그 속에 숨은 뜻을 아킨은 분명하게 알아챘다. "죄송합니다." 후작부인이 웃었다. "괜찮단다....그런데 아까 보니 정신이 좀 없어 보이더구나. 이런 자 리는 처음이니 좀 얼떨떨할 테지?" "조금...요." 그리고 하필 지금 나타나서 사람 혼을 빼놓아 버린 그녀를 속으로 원망하면서도 감사했다. 그녀가 없었다면 그 시간 내내 성질 나쁜 고양이처럼 곤두서 있어야 했을 테니. 차라리 얼이 빠져 있는 편이 낫다. 아무 생각도 안 나는 건, 온갖 생각을 다 해야 하는 것보다는 낫다. "그나저나, 네 아버님은 네 형을 어디와 결혼시킬 예정이라던?" "......네?" "그것 때문에 이렇게 온 것 아니니? 후계자 문제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 형--이라는 말만 나오면, 대체 왜 이렇게 민감해 지고 곤두서 버리 는 건지, 아킨은 그런 자신이 싫고, 심지어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아직은 모릅니다." "저기, 난.....네 형이 우리 세레나와 결혼했으면 해. 나이도 열 두 살에, 열 일곱. 게다가 나는 그 아이를 멀리 보내지 않고 집에서 직 접 가르칠 생각이니, 오 년만 지나면 훌륭한 신부감이 될 테지. 너 희 아버지와 내 남편이 진심으로 화해하는데.....그만큼 좋은 게 또 어디 있겠니." 세레나-라면 방금 전의 그 겁 많은 소녀를 말하는 것이다. 큰 눈에 도톰한 입술을 가진, 꽤 귀여운 아이였다. "아버님께서 정하실 바죠." "네가 나중에 네 형에게 말 좀 잘 해 보렴. 방금 전에 보니, 휘안과 꽤 친해 보이던데....아킨토스, 세레나는 집안의 평화와 신뢰를 가져 다 줄 거야. 혼수감으로 제 집안의 불화나 가져올 공주보다 훨씬 나 을 테지. 게다가 그 공주는 휘안토스보다 두 살이나 많지만 우리 세 레나는 이제 열 두 살. 정말 오 년 정도 지나서 그 공주가 여자로 좋은 시절이 다 지나가고 있을 때, 우리 세레나는 예쁜 소녀로 자라 있을 거라고." 아킨은 그것으로 이 후작부인이 어느 정도나 힘이 없는 지 알아챘 고, 또 아버지가 동생인 테시오스를 심각하게 무시하고 있다는 것 역시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케올레스는 워낙에 완고하니 둘째 쳐도, 아버지의 측근인 데케 경이나 형과 아버지 모두의 비서인 오르피나 에게 그런 말을 건네는 게, 들어도 전해줄 생각이 전혀 없는 아킨이 나 붙잡고 치근덕대는 것 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모를 후작 부인이 아니다. 행여나 해서 이렇게나마 말을 건네 보는 것이다. 그러나 후 작 부인이 하는 것을 보니, 숙부는 이 문제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 는 듯 했다. 숙부가 원했다면 그 문제가 이리 지지부진할 리가 없 다. "형과는 그 정도 이야기를 나눌 정도는 아닙니다. 또, 형과는 달리 저는 아직 학생이기도 하니...상관할 문제도 아닙니다." 후작부인이 다시 소리내어 웃었다. "아키, 너무 그렇게 매정하게 말하지 말렴. 그래도 난 네 숙모잖 니?" 아키.....아버지가 그리 부르면 덜컥 겁부터 나고, 휘안토스가 부르면 소름이 끼치고, 이 여자가 이리 부르니 '역겹다'. 그리 불러도 아무 느낌이 없는 것은 숙부와 자켄 뿐이다. "숙모님, 분명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 '공주'와의 혼담은 저도 들 어본 적이 없습니다. 형은 올해로 이제 열 일곱이고, 결혼을 하려면 적어도 5년은 기다려야 할 겁니다. 그러니 아버님이나 형이나, 벌써 부터 성급하게 정하지는 않을 겁니다." 금방 후작부인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여기 사정이 아니라 그쪽 사정 때문이야. 그 쪽에서 서두르면, 이 쪽도 서두르게 될 거야. 그러니, 그렇게 은근슬쩍 넘어가려 하지 말 렴." "대체, 어디 공주이기래 그러시는 겁니까." "능청 떠는 법만 배웠구나! 지금, 이 온 대륙을 통틀어서 스물이 가 까워도 혼담조차 없는 공주가 로메르드의 그 망나니 공주밖에 더 있어?" 누군지 알아챈 아킨은 피식 웃었다. "그 분이라면.......세레나가 5년이 지나도 대적하기 어렵겠군요." 말뜻을 알아챈 후작부인이 얼굴을 무섭게 찌푸리더니, 들고 있던 부 채를 꽉 구겼다. 숨소리까지 거칠어졌다. 성질이 급한 그녀라, 금방 화를 내고 말투도 험악해 진다. "네 형이나 너나! 능글맞은 것은 정말 똑같구나! 하긴, 한 배에서 열 달을 컸으니 다른 게 이상하지. 왜 너한테만 네 어머니의 그 끔찍한 병이 이어졌는지 이상할 정도야!" "병...이라뇨." "네 어머니가 미쳐서 죽은 줄 모를 줄 아니? 또, 네가 어머니 따라 미쳐있었다는 것도? 아니, 어쩌면....네 형도 언젠가는 미칠 테지." "--!" 순간 아킨의 손목을 강하고 빠른 손이 낚아챘다. 아킨이 이를 사납 게 갈아붙였지만, 그 팔은 아킨을 벽으로 밀어붙여 짓눌렀다. 후작부인이 새파래지더니 뒤로 주춤 물러났다. 다행히, 그 복도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고 후작부인이 말을 건넨 것도 구석진 곳이었다. 그래서 소름끼칠 정도의 살기를 담아 후작부인을 노려보는 휘안토 스를 본 사람은 주변의 기사 몇 뿐이었고, 그들은 대화를 이미 듣고 있었으니 외려 속시원해 하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후작부인이 더듬더듬 말했다. "휘, 휘안....저, 저기 난...." 아킨이 팔을 비틀었지만, 휘안토스는 손목에 핏줄이 돋을 정도로 힘 을 주었다. "하나는 확실해 졌군요. 당신 뱃속에서 나온 '것'과는 절대 결혼하고 싶지 않다는 것." "너, 정말!" 화가 치밀어 오른 후작부인이 손을 휘둘러 휘안토스의 뺨을 후려갈 겼다. 철썩-!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자마자 외면했던 기사들이 즉각 고개를 돌리고는 달려왔다. "휘안토스 님!" 후작부인은 손을 오므리고는 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언제 달 려왔는지 마르실리오 경이 나타나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지금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후작부인님! 아무리 부인이라 할 지 라도, 이 분께 손을 댄 것은 불경입니다!" "아, 아니 나는......" "기다려요, 마르실리오 경." 아킨이 당황한 후작 부인 앞으로 나섰다. 마르실리오는 숨을 씨근거 리면서도 물러났다. 후작부인이 새파랗게 질려 바라보자, 그는 손을 당겨 가슴에 붙이고는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말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숙모님." 기사들의 얼굴이 구겨졌고, 마르실리오마저 아연실색해 했다. 휘안 토스도 터진 입술의 피를 닦으며 한숨을 내 쉬었다. 후작부인는 모두를 의기양양하게 둘러보더니, 아킨토스에게 생긋 웃 어 보이며 말했다. "용서하고 말고. 여기 분들이 다 증인이 되어 주실 테니, 걱정 말 렴." "감사합니다." "뭘, 적어도 너는 예의발라....." 철썩---! 기사들 모두 입을 딱 벌렸다. 그리고 휘안토스마저 피를 닦던 손을 멈추고 멍하니 아킨토스를 보았다. 후작부인은 입술까지 터져 있었 고, 볼은 금방 부어 올랐다. 아킨은 들었던 손을 내리고는 조용히 말했다. "분명 용서 하시겠다고 했습니다." "너, 너---!" "연회가 즐거우시길 빕니다, 숙모님." 이건 휘안토스보다 더 했다. 다들 놀라서, 멍하니 있을 뿐 후작부인 에게 괜찮냐고 묻지도 못했다. 그리고 아킨은 벌건 뺨을 잡고 부들 부들 떠는 후작부인을 등지고 자리를 나섰다. "젠장!" 아킨은 마구간 쪽으로 뛰듯이 달려가, 타고 왔던 말을 찾아 직접 고 삐를 채우고 안장을 얹었다. 그러나 정원으로 나와, 그제야 결국 연 회장을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깨닫자 말의 고삐를 쥔 채 멈추 어 서 고개를 들었다. 차가운 바람이 망토도 걸치지 않은 얇은 옷속 으로 파고 들어왔고, 온 몸이 시려온다. 돌아가야 할까, 돌아가야 하나---그러나 아킨은 고개를 저었다. 싫 은 걸, 너무나. 하지만 약속했고, 약속은 지켜야 했다. 스승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 아, 결국 치욕스런 방법을 동원해야 했고, 그것으로 책임은 질 수 있었지만.....결국에는 이렇게 엉망이 되 버린다. 알고 있었다. 이제 이곳을 떠나 롬파르로 돌아가면, 또 똑같은 꿈을 되풀이 할 것이라는 것을. 헛된 꿈, 그 수치스러운 꿈을 되풀이 하 다가 깨어나면 더욱 수치스러워 하며 결국에는 스스로를 혐오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경멸받고 싶지 않았지만, '이런 자신'을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되는 것 은 더욱 싫었다. 알게 되면 더 비참해지는 진실이란 것이 있다. 그 리고 누군가를 싫어하는 것보다는, 자신을 이런 식으로 경멸하게 되 는 것은 더욱 끔찍한 경험이다. "아키-" 아킨은 뒤돌아보지 않았고, 대신 숨이 부옇게 흩어질 정도로 웃음을 터뜨렸다. "곧 돌아갈게." "아니, 됐다. 오늘 네 역할은 충분히 잘 해주었어. 돌아가서 늪의 성 에서 신년 파티나 하라고. 자켄과, 그 친구 녀석과 함께." "......." 휘안토스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방금 전.....아주 시원했다. 잘 했어." "난....." 그 때 휘안토스가 아킨의 어깨를 안았다. 아킨은 입술을 꾹 물고는 그 어깨에 턱을 묻었다. 휘안토스가 부드럽게 말했다. "새해에도....건강히 잘 지내라, 아키." 이상하게도, 자켄이 안아주면 눈물이 핑 돌 정도로 고맙고 좋은데, 이 휘안토스의 품은 어색하고 딱딱했다. 오늘 아침 아버지가 마중 나왔을 때처럼, 사실은 좋아하고 감사해야 하는데.....아킨이 아버지 와 형에게 느끼는 것은 그런 차고 메마른 것 들 뿐이었다. 물 속의 기름처럼, 섞으려고 억지로 흔들어 봐야 다시 하나로 뭉쳐서는 고립 된다. 거친 황야에 뿌려진 식물 씨앗처럼, 아킨은 그들의 대지속에 뿌리를 내리고 자랄 수 없다. 다르고, 다르게 살아왔으며, 결코 융화될 수 없는 것이 그들이었다. 원했으나, 결국에는 아킨과는 어울리지 못하는 그것들. 억지로 쥐어 봤자, 스스로를 기만하면서 차지해 봤자 무엇하겠는가. 내 것이 아 닌 것을, 내가 가질 수 없고 가져서도 안 되는 것을. 이제 아킨은 자켄의 오두막에서 따뜻한 차를 나누고 싶었고, 메리엔 이 준비한 과자를 먹으며 새해가 되기를 기다리고 싶었고, 그 휴식 이 끝나면 학교로 돌아가 롤레인 교수와 만나고 싶었다. 그들이 아킨의 세계에 속한 것들이었으며,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 아킨의 시간이 될 것이다. 그것이 드디어 찾게 된, 드디어 일구어 낼....그의 벌판이자, 그의 세 계였다. 완성되어 있는, 이미 아킨을 추방시킨 이 광활한 황야, 차디차 게 얼어붙은 성벽의 겨울성에 대해서는, 아킨은 남김없이 미련을 던져 버리기로 했다. 다시는, 다시는 원하지 않으리라. "...형도.....잘 지내." 그리고 조용히 덧붙였다. "다시는 찾지 않을 테니까." 이제는 형도, 아버지도....어머니도 다 떨쳐 내 버리고 새로 시작할 테니까. *********************************************************** 작가잡설: .....말랑말랑 하군요.....;; 이 분위기 대로 나갈 리도 없지만~~ 룰루 랄라~~~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7장 *************************************************************** [겨울성의 열쇠] 제29편 성의 늪#4 *************************************************************** 휘안과 아킨이 어머니를 잃은 것은 막 일곱 살이 되었을 때였다. 자 켄이 성에 찾아온 것은 여덟 살 때였고, 열 살 되는 해에 마침내 '은봉인'을 얻어 자유로워졌다. 기사 가문 출신이었지만, 검은 열 한 살 때 내동댕이 쳐버렸고 더 이상 배우지 않았다. 압셀론에서 결국 퇴학당해 베넬리아로 향했으 며, 그 후로는 본가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엉뚱하게도 기 사가문 출신이면서도 마법부로 들어가 버렸지만, 그렇다고 열심히 한 것도 아니었다. 휘안토스, 그가 속한 세계는 무엇이든 피해버리고 싶었던 것 뿐이었 다. 대면하고 싶지도, 느끼거나 신경 쓰고 싶지 조차 않았다. 외면하 고, 외면하고, 그렇게 필사적으로 도망쳐 왔다. 혐오하고 증오하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 너무나 간절했기 때문에. 그리고 정작 혐오 스러운 것은, 매정한 아버지도 잔인하고 집요한 휘안토스도 아닌 그 런 자신이었다. 같은 날, 같은 어머니의 배에서 열 달을 채우고 세상에 태어났는 데...어째서 너는 그렇게 빛나는데 나는 이런 그늘에서 살고 있는 것 일까. 하필 내가 왜 그 저주를 받았으며, 왜 아버지는 너를 택하고 나를 버렸을까. 그리고 아버지는 너를 위해 모든 것을 버렸는데, 나 는 왜 그 죄의 대가를 평생 짊어져야 하는 건가. 아킨은 맨 바닥에 주저앉았다. 강철처럼 단단하고 차가운 바위였고, 그 옆에는 늙은이처럼 굽은 나무가 뿌리박고 있었다. 바닷바람의 채 찍에 맞아 몸을 뒤틀다가, 어느 날 밤 벼락을 맞아 완전히 끊어져 버린 나무였다. 거칠게 거품이 이는 검푸른 바다가 몰아쳐 오며 아킨이 앉아 있는 절벽 아래에 부딪혔고, 차가운 포말이 튀어 올랐다. 어머니 루실리아는 이곳에서 몸을 던졌다. 하얀 나무에 기대고 있다 가는, 달려나온 아킨을 슬픈 눈으로 한번보고는 몸을 던졌다. "아키." 아킨은 무릎에 이마를 묻으며 말했다. "내 버려 둬." 그러나 그는 내 버려 두지 않았다. 다가와 아킨의 머리에 손을 얹고 는 몸을 기울였다. 숲의 냄새가 풍겨왔다. 겨울의 숲, 그 메마른 냄 새--그러나 언젠가는 촉촉한 봄이 몰려오며 아지랑이로 몸부림치며 깨어날 그 거대한 부활의 무덤이 품은 냄새가... 너무나 따뜻한, 그 리고 너무나 사랑하는 형이자 유일한 가족이었다. 지옥같은 일곱 살 의 끝에 만난 최초의 온기였다. 눈물이 솟아 나와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터지자 끝없이 흐르며 볼 을 적시고, 결국 신음 같은 오열마저 터진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아니. 문제는 어제나 나야. 나 자신--아킨토스 프리엔, 나 자신." 자켄은 달래 주듯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아킨의 주먹 위로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어렸을 때.......매일 기도했지. 제발.......제발....하루만이라도 좋으니 내가 휘안토스였으면, .....단 하루만이라도..." "아키...." 자켄이 나무라듯 그를 불렀다.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저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만이 아 니라......휘안토스, 그 자체를 통째로 원하고 있었다. 똑같은 데, 네가 가진 것만큼 나 역시 가지고 있고, 네가 할 수 있 는 만큼 나 역시 할 수 있는데, 어째서 너에게 쏟아지는 기회와 축 복이, 내게는 다가오지 조차 않는 건가. 어째서 너에게는 기대와 찬 사만이 쏟아지는데, 내게는 그저 저주와 분노, 증오일 뿐일까. 그것이 너무도 증오스러웠으며, 그것을 질투하는 자신은 혐오스러웠 다. "난......" 그런 아킨에게, 어머니의 시녀였던 메리엔은 머리를 쓸어 주며 속삭 였다. 당신 때문에 그분이 그리 돌아가신 게 아니에요, 어린 도련님. 아버지를 원망하는 건 괜찮지만, 아킨 님 자신을 미워하지는 마세 요, 제발..... 휘안토스를 위해-아니, 대공국, 그 이전에 '자기 자신'을 위해 아버 지는 어머니와 아킨을 포기했다. 이종족과의 혼혈을 대공왕 자리에 앉히는 것은 왕 혼자만이 내릴 수 있는 결정이 아니었다. 또, 앉힌 다 하더라도 그 뒤를 따를 엄청난 혼란을 감당할 수도 없었고, 그에 게는 그것을 이겨낼 용기도 없었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었던 왕은 결국 그대로 전했 다. 루실리아는 당연히 왕위를 포기할 거라 생각했지만, 왕은 그렇 지 못했다. 결국 루실리아는 둘째 아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아들의 저주를 풀어볼 방법을 생각하기로 했다. 동생을 희 생시키고 후계자가 될 첫째는 아버지에게 맡기고. 남편은 가엾은 아 들을 구하는 마지막 방법을 포기했고, 아내였으나 어머니이기도 했 던 그녀는 그런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이해한다고, 누구나 그럴 거라 몇 번이나 스스로를 설득하려 해 봐도 그녀는 남편의 죄 때문 에 아들이 고통받는 것이 슬펐고, 그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을 알면서도 포기한 남편이 미웠던 것이다. 아내가 떠난다 하자, 왕은 처음에는 달래고, 그 다음은 화를 내고 협박하다가, 결국 그녀를 늪의 성에 가두어 버렸다. 성의 모든 창에 철창이 달렸고, 현관의 철문에는 자물쇠가 걸렸다. 사람들에게는 둘 째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미쳤기 때문에 그 아이를 보살피기 위해 아내가 그곳에 간 거라 말했을 뿐이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정말 미쳐버렸다. 그토록 다정했는데, 그리도 서로 사랑하고 아꼈고 행복했는데.....그 손아귀를 벗어나려 하는 순간 무 시무시한 광기와 집착으로 변해버린 소유욕에, 그녀는 절망이 아닌 두려움에 무너져 버렸다. '동화'는 행복한 결혼, 그리고 오랫동안 행복하게 잘 살았을 것이다. 로 끝났지만, '현실'은 그렇게 레이디의 자살과 왕의 광기로 끝났다. 그것은 비극, 자멸의 비극이었다. "아키...이제 들어가자." "루첼은......어디 있지?" "내 집에." "다 말해줬겠군." "다는 아니다.....나머지는 그가 알아서 할 테지. 하지만 화내지는 마. 나는 그에게는 말해야 한다고 '느꼈'을 뿐이다. 네가 이곳으로 그를 데리고 오고 싶다고 '느꼈듯'" 아킨은 힘없이 웃고는, 작게 말했다. "....고마워." 구름이 미끄러지며 얼룩진 은빛 달이 드러났다. 빛은 구름 위를 적 시며 흘러갔고, 어느새 어둠이 몰려와 다시 달을 삼켜 버렸다. '그녀'는 결국 아무 목적도 달성하지 못하게 되자 일찌감치 포기하 고는 연회장을 떠났다. 오래 서성이다가는 결국에는 '아는 사람들' 눈에 뜨이고, 지금쯤 온 성을 뒤집고 쑤셔대면서 험악하게 욕을 퍼 부어 대고 있을 어머니 귀로 들어갈 것이다. 기다리고 있던 마차에 타자마자, 그녀는 풍성한 갈색머리를 풀어헤 치고는 앞머리와 옆머리를 떼어 버렸다. 얼굴은 갸름한 편이었고, 앞머리를 떼어낸 상아빛 이마는 아주 매끈했다. 또, 시원한 콧날에 서글서글한 하늘색 눈을 가지고 있어, 무거운 드레스로 바닥을 휩쓸 고 다니기보다는 엘프처럼 가벼운 샌들을 신고 볼을 빨갛게 물들인 채 숲을 뛰어 다니는 것이 어울려 보였다. 기다리고 있던 시녀가 빗을 꺼내더니 그녀의 머리를 빗겨주었다. 그 녀가 퉁명스레 말했다. "그냥 뒤로 땋아 버려. 이제부터는 '상인의 딸'로 행세할 생각이니 까." "네.......아가씨." 아가씨, 라는 말은 분명 다른 말을 꺼내려다가 아차 하면서 얼른 바 꾼 말이었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흘끔 보고는 말했다. "그거, 염색 물 빼려면 좀 힘들겠지?" "아마도요. 그리고.....아가씨, 이제는 염색하지 마세요. 너무 자주 하 면 머리 결 버리니까요. 또, 화장도 하지 마시고....밤에 몰래 나가 시지도 마시고...." 그녀는 지겹다는 듯 턱을 고이며 투덜거렸다. "즉, 이제부터는 틀어박혀서 신부 수업이라 하라 이 말이니?" "아니, 그게 아니라. 고....아니, 아가씨도 시집갈 나이가 됐으니, 이, 이제부터는 준비를 하는 게 좋지 않을런지요." 그녀가 장난꾸러기처럼 까르르 웃었다. "세리, 그냥 솔직히 말 해. 약혼할 나이도 훨씬 지나 버린 데다가, 어디에서도 결혼신청 하나 들어오지 않는 망, 나, 니, 생활 좀 제-- 발 그만 두라고 말이야." "아니예요, 공....아니, 아가씨. 그런 모습이 좋기는 하지만, 이제는.... 이제는, 그, 그냥......" "알아. 이제부터는 싫던 좋던 간에 방안에 처박혀서 예쁘고 얌전한 아가씨 흉내나 내야지, 뭐. 나도 내 나이가 몇 인지는 자각하고 있 다고. 뭐, 어디로 팔려갈 지는 모르지만." 세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저, 그분께서는 아주 좋은 혼처를 정해주실 거예요. 그, 그래도 어 머님이신데.....분명 고..아니, 아가씨 생각을 해 주실 거예요." "어머나, 우리 엄마가? 난 엄마가 열 달 투자해서 생산해 낸 '귀중 품'이고, 어머니는 부가가치 창출을 위해 노력중일 뿐이라고." "너무 해요!" 세리의 얼굴이 더욱 빨개졌다. 이 아가씨가 미모에도 불구하고 '신 부감'으로 영 점수가 낮은 것은 바로 저 빈정대는 고약한(숙녀치고 는) 말버릇 때문이었다. 아는 사람들만 있을 때만 그러면 또 모르는 데, 마음에 안 들었다 싶으면 냉큼 저런 식으로 톡톡 쏘아대고는 돌 아서 버린다. "저, 그런데....그분은 만나 보셨나요?" "아니...서로 눈만 마주쳤어. 초반엔 재수 없는 남자애 하나가 찰싹 달라붙어 있었고, 나온다 싶었더니 그 다음에는 어느 아줌마가 채 가더라고. 그리고는 냉큼 나가 버려서, 말도 못 붙였지." "저, 아가씨는 알아보시던가요?" "물론. 설마 몰라보겠니? 내가 누군데~" 그러자 세리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럼....저, 아가씨. 그분을 좋아하시는 건가요? 사실은 그분과 결혼 하고 싶은 거예요?" 그녀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가엾은 세리, 너는 연애소설을 너무 많이 봤나 보구나. 난 나보다 세 살이나 어린아이에게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요, 도망가요~~' 하고 울 정도로 멍청한 계집애는 아니라고." 세리는 이제는 울음을 터뜨릴 듯 했다. 너무 놀려대지 말아요! 하면 서. 그러나 '그녀'의 연한 푸른빛 눈은 반짝였고, 얼굴은 오랜만에 맛 본 기쁨으로 싱그럽게 빛나고 있었다. *********************************************************** 작가잡설: 왠지 누구누구 생각나게 하는 아가씨로군요......;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8장 ************************************************************** [겨울성의 열쇠] 제8장 금빛 암사슴 제30편 금빛 암사슴#1 *************************************************************** 봄이 왔다. 고양이처럼 축 늘어져서는, 울렁대는 가슴을 움켜쥐고는 멍청한 눈 으로 하늘을 바라보는 그런 봄인 것이다. 추위는 1월에 기승을 부리다간 2월에 푹 꺾여 봄볕에 녹아들었다. 아직은 으슬으슬한 3월 중순이 지나자 바짝 말랐던 가지에 물이 오 르더니, 연두색 이파리가 조밀조밀 솟아올랐고 가지마다 하얀 꽃봉 오리가 부풀어올라 터지기 시작했다. 온 산야는 녹색 안개로 뒤덮이 고, 그 아랫도리는 하얀 꽃 무리에 푸근하게 물들었다. 바다는 따뜻 한 빛으로 파랗게 빛났으며, 상선들은 활기차게 카로디 강을 가로질 렀다. 그리고 4월 중순이 되었고, 드디어 온 롬파르가 부푼 가슴으 로 기다리던 무엇이 시작이 되려 했다. "안 간다." "못 가." 쥰이 험악하게 말했다. "너희들 대체 이유가 뭐야!" "귀찮다." "공부해야 해." 그리고 그 두 사람에게 있어, 그 정도 이유만큼 막강한 것도 없었으 니, 결코! 가지 않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쥰은 왜 그 많고 많은 친구들을 일찍 졸업시키고 이런 놈들만 옆에 남겨 놓았는지, 낙제한 이후 처음으로 후회했다. 노는 것 좋아하는 쥰에게, 두 번의 낙제는 매정하게도 공부벌레 친구를 안겨 주었다. 그리고 루첼의 룸메이트라 별 수 없이 아는 사람 사정권 안에 포함 시켜 놓은 아킨토스는 우등생도 모범생도 아니었지만 쥰이 열광하 는 모든 것에 대해 시큰둥해하고 무시하기까지 했으며, 정말 짜증이 나면 그 딴걸 왜 좋아하냐는 투로 대 놓고 빈정대기까지 했다(그리 고 아킨은 그냥 빈정대도 보통 사람 보다 몇 배로 재수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쥰은 아킨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킨이 공부 때문에 시험기간을 제하고는 루첼과 보내는 시간이 외려 자기보다 더 많아진다는 것도 불쾌했거니와, 그것이 마음에 든 루첼이 '너보 다 어린 아킨토스도 저렇게 열심인데, 너도 공부 좀 해야 하지 않 니? 응?' 하고 은근히 잔소리 늘어놓는 것도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다. '난 기사 지망란 말이다, 기사! 책 싸들고 다니면서 쓸모 없는 교양으로 머리를 축내기보다는 군사학과 무예에 정진해야 용맹한 기사가 될 수 있는 거다!' 하고 말했지만, 루첼이 '넌 군사학은 자기 힘으로 낙제를 겨우 면하는 유일한 과목이고, 필수인 역사와 정치학 은 꽝 이잖아. 그리고...네가 실기 수석 인 건 나도 인정하고 정말 다행으로 생각해. 그것마저 낙제직전이면 나로서는 도저히 손 쓸 수 없거든.' 하고 말했고, 워낙 언변이 딸리는 쥰은 그 다음은 반박할 수 없었다. "재미없는 너희들 데리고 축제에 놀러 가려 한 내가 잘못이지!" 그리고 그는 우유잔을 맥주잔이라도 되는 듯 벌컥 벌컥 들이켰다. 옆의 아킨은 우유방울이 튀자 질색을 하며 닦아냈고, 그 모습에 쥰 은 더 화가 치밀었다. 녀석은 말끔하게 생겨서는, 하는 행동거지 마 저 얼굴값을 했으며, 그런 새침데기 계집애 같은 짓이 쥰은 정말 싫 었다. 식사를 마친 루첼이 말했다. "우리 볶지 말고 여학생 하나 잡아서 파트너 신청 해 봐." 쥰은 턱을 들고는 거만하게 말했다. "난 학교 다니는 여자애들은 정말 질색이라고. 집에서 얌전하게 교 육받은 여자다운 애들이야말로 정말 여자라 할 수 있지, 좀 배웠다 고 고개 빳빳하게 쳐들고 다니며 남자 팍팍 무시하는 건방진 애들 은 딱 질색이라고. 자고로, 여자란 말이야....." 주변의 여학생들이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지만, 쥰은 그런 그녀들에 게 더 의기양양하게 턱을 들어 보일 뿐이었다. 옆에서 아킨이 말했다. "그게 아니라, 너보다 공부 잘하는 여자가 부담스러운 거겠지." 쥰이 험악하게 노려보자, 아킨은 냉담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이 학교에서 너보다 성적이 아래인 여학생은 당연히 없을 테고." 그리고 루첼은 지난 번 같은 사태가 또 벌어지지 않기 위해 우유를 엎으면서 분투해야 했다. 주변 여학생들은 키득거리면서 쥰의 험담 을 속삭였고, 대충 '쟤, 두 번 낙제한 애래~~' 라는 내용이었다. 이 놀기 좋아하는 쥰이 평소보다 더욱 칭얼거리는 것은, 며칠 뒤면 루피니아 축제가 열리기 때문이었다. 4월 15일부터 18일까지 열리는 것으로, 봄의 성녀 루피니아의 탄생축일에서부터 시작되는 그 축제 는 롬파르 시민이 1년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깃털 장식에 번쩍거리는 장식을 주렁주렁 달고는, 괴상한 옷으로 요란스레 가장을 하고 거리를 누빈다. 춤과 음악이 도시에 넘쳐나고, 사람들이 모이면 저절로 시끌벅적한 야외 파티가 벌어진 다. 온 반도에서 올라온 유랑예인들의 연극이 임시로 만들어 놓은 무대에서 공연되고, 밤이 되면 곳곳에서 유명한 반도산 검은 불독들 이 나오는 '반도 투견'이 벌어진다. 뿐만 아니라 귀족이나 상단주들, 심지어 왕실에서도 온 나라의 유명한 연주가들과 무희들을 불러 큰 연회를 열며, 초대만 받으면 누구나 환영받을 수 있었다. 그런 루피니아 축제는 로메르드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해서, 그 날이 될만하면 돈 많고 호기심 많은 명문가 자제들이 우르르 몰 려와 온 롬파르의 마차와 여관을 세내어 축제를 구경한다. 그 동안 왕립 로멜은 공식적으로는 수업을 진행했지만, 시간을 내서라도 찾 아오는 엄청난 축제 기간에 정말 그곳에서 살고 있는 학생들이 수 업에 제대로 나올 리 없어 대부분의 교수들은 삼일 간 휴강을 선언 했다. 그러나 루첼은 그 기간을 대부분 도서관에서 보냈고, 이유는 축제기 간에 친구들 사는 거리가 아주 정신없는 데다가, 심지어 '살인'이 일 어날 정도로 위험하다는 것마저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루첼이 그 기간에 거리를 찾아 간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다. 외국인인 아킨은 루피니아 축제 자체를 몰랐다. 가면 쓰고 돌아다니 며 시시덕대는 미치광이들의 축제라는 것 정도가, 아킨이 아는 전부 였을 뿐이다. 그것도 스스로 알아 낸 것이 아니라, 주변에서 워낙에 시끄럽게 떠들어대서 저절로 알게 된 것들을 요약했을 뿐이었다. 아 킨이 궁금한 것은 단지 그 축제 기간동안 수업이 어떻게 되는지 정 도였다. 그 기간 동안 롤레인 교수역시 정규 수업에는 휴강을 선언 했다. "나도 텅 빈 강의실보고 실망하고 싶지는 않거든."이 그 이유 였고, 학생들의 환호 속에 그녀는 호호 웃으며 "물론 다음 주에 수 시고사를 볼 예정이니, 축제 기간 동안 잊어 먹지 않기를 바래-학생 들."하고 즉각 울부짖는 학생들에게 말했다. 개인 수업 역시 휴강일까, 쥰이 펄펄 뛰어대서 결국 식당을 나온 아 킨은 물이 오르고 연두색 잎이 솟아 나온 키 작은 나무들이 따르는 길을 걸어가며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롤레인의 수업이 어느 정도 진행되어 있는지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거의 1년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투자해 왔었으니 요즘 듣는 수업 근처까지는 온 듯 했다. 또, 시전에 들어가는 시간도 예전처럼 들쭉 날쭉하지도 않는다. 예전의 그가 벽돌을 마구잡이로 위로 쌓아 올리 기만 해서 바람 한번만 불면 와르르 쏟아질 정도로 불안했다면, 지 금의 그는 기초부터 착실히 쌓아 아주 튼튼했다. 그녀는 아킨에게는 아주 좋은 스승이었다. 물론 룰레인이 모두에게 좋은 스승인 것은 아니었다. 쥰 같은 경우 에는, 그녀가 가르치는 마법관련 전술연구(가끔 마법부 교수들이 기 사부로 가서 강의를 하곤 했는데, 그녀가 바로 그 담당이기도 했다) 를 듣고는 있지만, 그에게는 단지 '숙제만 잔뜩 내는 골치 아픈 노 처녀!' 일 뿐이었다. 당시 아킨은 그녀를 변호하지는 않았고, 그저 점잖게 '롤레인 교수님은 남편이 있어.' 해서, 쥰을 전교생 앞에서 무안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그럼...." 그 때, 자그만 것이 다다 달려와서는 퍽 부딪혔다. "큿--" "와, 와--!" 강아지가 알알 짖어 대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아킨은 무릎에 묵직 하게 찰싹 붙어 있는 덩어리를 발견했고, 그 덩어리는 동그란 얼굴 을 들고는 아킨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다섯 살쯤 되 보이는 꼬마 여자애였다. 곱실거리는 밝은 갈색 머리 에, 크고 둥근 눈동자는 검은 색에 가까운 갈색이었다. 자그마한 볼 은 얼마나 돌아다녔는지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아킨을 빤히 바라 보던 소녀는, 느닷없이 그 두 팔로 그를 꽉 끌어안았다. 소녀는 키 가 작았고, 그 높이에서 두 팔로 꾸욱 안았으니 민망하고 불편하게 도 허벅지가 잡힌 꼴이 되 버리고 말았다. "저, 저기 꼬마...야." 아킨은 힘겹게 꼬마를 뒤로 밀어냈다. "대, 대체 왜 이러는 거지?" "같이 가요--! 가서, 주리랑 놀아줘요. 네?" "......" 내가 대체 왜, 하고 말할 생각이었지만 소녀는 냅다 두 팔로 아킨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발음이 왕창 새는 그 이상한 말을 자세히 듣기 위해 허리를 숙였던 것이 실수였던 것이다. 꼬마를 매 단 채 계속 허리를 숙이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아킨은 별 수 없이 소녀를 번쩍 안아 들어야 했다. 그러자, 꼬마는 좋아서는 볼을 비벼왔다. 아 킨은 귀찮아졌다. "꼬마야." "주리--주세페리나. 그리고 주리." "........" 내가 네 이름을 알아서 대체 뭘 하겠니,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꼬마 가 목을 꽉 조이는 바람에 신음만 삼켰다. 그리고 이 꼬마의 부모를 만난 다면 아무 사람에게나 찰싹 붙는 버릇은 고치는 게 좋다고 말 하고 싶었다. 아킨은 꼬마의 팔을 잡아떼며 물었다. "꼬마야, 어머니는 어디 계시지?" "나, 엄마 만나러 왔어요! 아빠랑---오빠도 가요." "왜?" "오빠 이쁘니까." "......." 논리한번 끝내주는 군, 하고 아킨은 생각했다. "이름 뭐예요? 응? 여자가 말하면 남자도 말하는 거잖아." 원래는 남자가 먼저 말하고 여자가 말하는 것이다. "아킨토스." "그럼 아키--! 아키 오빠." 그리고 다시 볼을 비벼대, 머리가 어질어질 할 지경이었다. 비누냄 새가 풍겨온다. 그 때 저 쪽에서 키 큰 남자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주리가 고 개를 반짝 들더니 조그만 손으로 그를 가리켰다. "저기, 우리 아빠! 아빠--! 나, 이 오빠 가질래. 내가 잡았으니 내 거야." "........제발, 주리. 사람은 절--대 네 마음대로 못 가져. 잡았다고 가 지는 게 아냐." "아냐, 아냐--! 아빠는 맨날 엄마한테 나는 당신 거야, 하잖아. 나도 아키 오빠 가질 거야." "....." 팔이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아킨은 남자에게 주리를 가리키며 말 했다. "어서 떼어 가 주십시오." "죄, 죄송합니다." 남자는 서른 초반 정도 되 보이는, 아주 순한 얼굴을 가진 남자였 다. 잘생겼다고 말하기는 곤란했지만, 워낙에 선량하게 생겨서 호감 이 가는 인상이었다. "주리, 이리 와라." "싫--어!" 소녀는 볼을 부풀리더니 아킨의 목을 더 꽉 끌어안았다. 숨이 막혀 서 아킨의 얼굴이 새빨개지자, 남자는 연신 죄송하다 말하며 딸의 허리를 잡아 당겼다. 그러나 주리는 아킨에게 더 찰싹 붙어서는 도 저히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아버지가 기어코 떼어내려 하 자 갑자기 엉엉 울어 젖히기 시작했다. "싫어, 싫어---싫어! 같이 갈 거야, 같이---!" 아킨은 귀가 따끔할 지경이었다. 남자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우물쭈 물 말했다. "저, 죄송....합니다만...같이 가....주시겠습니까? 애 엄마만 만나면 금 방 떨어질 것 같은데요." "어디로 가십니까?" "교수관입니다." "다행이군요. 저도 그 쪽으로 가니까요." "주리이! 이분이 같이 가 주신 댄다. 그만 그쳐다오, 제발--!" 그러자 주리가 울음을 뚝 그치더니 활짝 웃었다. 아킨이 그런 소녀 를 흘끔 보자, 남자는 다시 머리를 푹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거, 애를 버릇없이 키워놔서." 아킨은 주리의 팔이 다시 목을 조여서 괜찮다, 라는 답을 하지는 못 했다. (켁, 비슷하게 말은 했지만 알아들었을 리 없다.) *********************************************************** 작가잡설: 열살 이상이면 여자가 아니다! 하고 말하는 모 동호회 모 군이 생각난다는....-_- (그런데 녀석은 해리포터 보면서 '아, 저 찢어진 청바지 사이로 보이는 맨살이 매력적이야~~' 하는 아울을 변태 취급하죠...이상한 넘. -_-)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8장 **************************************************************** [겨울성의 열쇠] 제31편 금빛 암사슴#2 ***************************************************************** "당장 내려와라." 그럼에도 주리는 볼이 팅팅 부어서는 찰싹 붙어 있었다. "두꺼비로 만들어 버린다." 아킨은 뜨끔했지만, 그런 것 따위 내 알 바 아니라는 주리는 완강했 다. "시, 싫.....어!" 탁탁--지팡이로 손바닥 치는 소리. "그럼 '이걸' 두꺼비로 만들어 버린다." 지팡이 끝이 아킨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에게 항의할 권리 따위는 없다. 주리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 그건 안돼!" "그럼 당장 떨어져. 토트, 어서 떼." "이리 오렴, 주리." 주리가 울먹울먹 하더니 아버지-토트에게 안겼다. 아킨은 한시간 가 량 사정없이 졸린 통에 벌겋게 부어있는 목을 주무르며 말했다. "따...님이셨습니까." "응." 롤레인은 얇고 짧은 지팡이를 휘두르며 말했다. "그럼 남편이 있다는 말.....정말 이셨군요." 룰레인이 아킨의 머리를 지팡이로 후려쳤다. 딱-윽. "소개들 하지. 토트, 이쪽은 아킨토스 프리엔. 예전에 내가 말하던 그 학생이야. 그리고 아킨, 이쪽은 내 남편인 토틀랜더 롤레인이지. 아비뇨르 시에서 '랄프만'이란 서점을 하고 있어. 나중에 그곳 들를 일이 있으면 한번 찾아가 봐. 도시가 아주 작아서 서점이라곤 그곳 하나밖에 없거든." "만나서 반가와요, 아킨토스 군." 토트는 아킨에게 손을 내밀며 활짝 웃었다. 아무리 봐도 롤레인보다 서너 살은 어려 보였다. (사실, 롤레인은 마법사라 그 나이에 비해 서는 젊어 보인다.) 롤레인이 말했다. "그건 그렇고, 넌 축제 기간 수업 때문에 찾아 온 거니?" "네." "쉬지, 뭐. 약속 잡힌 거 있니?" "없습니다." "아, 그럼...." "같이 가요!" 눈치 빠른 주리가 조르르 와서는 아킨의 팔을 붙들었다. 그리고 계 속 당기면서 졸라댔다. "같이 가요, 같이---엄마 랑도 아는데, 네? 응? 같이 가자아아아아 ---" 싫다, 라고 말하면 다시 고개를 젖히고는 엉엉 울어버릴 것만 같았 다. 롤레인이 지팡이를 들어 올렸고, 주리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그 러나 롤레인은 그 지팡이로 안경을 슬쩍 밀어 올리고는 말했다. "같이 저녁 식사하는 건 어때, 아킨토스 군?" "....설마, 교수님께서 만드시는 겁니까?" "아니. 이 사람이 만들 거야." 롤레인이 생긋 웃으며 지팡이로 남편을 가리켰다(공포의 지팡이다, 정말). "저기, 여보...아, 아무리 그래도..." "아빠아아아아-- 안 된다고 말하지 마아아아--!" "갈 거지?" "아, 네." 멍청하게 있다가 얼결에 그렇게 답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거절했 다가는, 저 쪼끄만 여자애가 온 롬파르가 주저앉을 때까지 울어 젖 힐 것만 같아서 오싹했다. 롤레인의 으름장과는 달리, 저녁식사는 그 집 하녀가 맡아서 준비했 다. 식사 중에 아킨은 롤레인에 대해 전혀 모르던 것을 몇 가지 알게 되었다. 남편과 만난 것은 그의 서점에서였고, 결혼 한지는 이제 7 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남편과 따로 사는 것은 남편이 그 서 점을 정리하고 싶지 않아 했기 때문이며, 사이가 나쁘거나 해서는 절--대 아니라 했다. (아킨은 생각외로 평범해서 놀랐다.) 조용한 대화가 오고가는 식사 내내, 딸인 주리 롤레인은 아킨만 뚫 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쪼끄만 어린아이가 내 쏘는 그 강렬한(?) 시선에 아킨은 난감할 지경이었다. 결국 롤레인이 라자냐를 접시에 떠놓으며 말했다. "주--리. 식사하는 사람을 그렇게 뚫어져라 보는 게 아니란다." "하지만." "너, 볼에 붙은 고기조각이나 떼." 주리는 금방 쀼루퉁해져서는 과일 파이를 쿡쿡 찔러대기 시작했다. "나, 이따가 오빠 안고 잘래." "큽-!" 얌전하게 먹던 아킨은 쿨럭 거리고 말았다. 룰레인이 그런 주리를 노려보았고, 토트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러나 주리는 고집스럽고 단호한 눈빛을 보냈을 뿐이다. 결국 롤레인이 아킨에게 작게 속삭였 다. "저 녀석한테는 예쁘고 신기하게 생긴 건 무조건 안고 자는 버릇이 있거든. 지난번에는 파피나 도마뱀도 안고 잤다고." 파피나 도마뱀이라면, 파피론 섬에서 사는 해괴하게 생긴 도마뱀이었 다. 온갖 색깔로 변하는 데다가, 툭 튀어나온 눈도 위 아래로 따로 따로 움직여서 신기한 녀석이긴 했지만, 그래도 파충류라 비늘은 거 칠고 살갗도 섬뜩할 정도로 차가웠고, 꾸룩 꾸룩 거리는 울음소리는 참고 있기 어려웠다. ".....설마 애 데리고 이상한 짓 하는 건 아니지, 아키?" 아킨의 볼에 붉은 색이 확 번졌다가 사라졌다. 처음 보는 모습인 데 다가, 가능할 거라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던 롤레인은 정말 놀랐 다. 아킨이 당황해서 급히 말했다. "저기, 그런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여기서 싫다고 하면, 저 녀석...밤새 엉엉 울어 젖힌다고. 네가 여기 서 그냥 고개 끄덕이면, 저 혼자 좋아서 해실거리다가 먼저 쿨쿨 자 버려. 그 때 알아서 해." 아킨은 다시 얼굴을 붉혀야 했다. 느닷없이 롤레인의 집에서 저녁을 먹게 된 것도 그렇지만, 저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 이 집에서 자고 가겠다는 답이 되 버린다. 아킨은 남의 집에서 식사를 해 본 적도 거의 없거니와 자고 간 적 역시 거 의 없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지난 번 루첼을 따라갔다가 그 집에 자게 된 것이 태어나서 처음 해 본 '외박'이었다. 롤레인이 생각났다 는 듯 말했다. "아, 자고 갈 거지? 잠자리는 벌써 낸시 더러 봐 두라고 했고, 잠옷 은 토트 걸로 입어." "......아, 네에..." 그렇게 길게 답하며 아킨은 주리를 흘끔 보았다. 역시나 주리는 볼 까지 빨갛게 물들인 채 눈을 빛내고 있었다. 롤레인은 다시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대체로 남편과 딸이 어떻게 지냈는지 에 대한 이야기였다. 주리가 파이를 다 먹어 치우더니 말했다. "저, 오빠- 나랑 나중에 카드 가지고 놀아요. 이름 맞추기 하는 거 야, 응?" 아킨은 질색을 했다. 그러나 주리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듯 아 킨의 반응은 전혀, 기필코, 당연히 신경 쓰지 않았다. "저, 오빠. 귀걸이 이쁜 데--그거 만져 봐도 되요?" 주리는 작은 손을 내밀었다. 빼 달라는 것이다. "주세페리나." 롤레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아주 차갑고 엄격했다. 주리는 고집을 피우려고 볼을 부풀렸다가, 어머니의 검은 눈이 내쏘는 냉엄한 빛에 주눅이 들어서는 고개를 푹 숙였다. 롤레인 교수는 평소에는 좀 덜 렁거리기까지 하는 유쾌한 여자일 뿐이었지만, 가끔은 아킨조차 섬 뜩할 정도로 차갑고 매서운 눈빛을 보내고는 한다. 그러나 그건 늘 상대방이 롤레인의 심중을 건드릴 정도의 잘못을 했을 경우였을 뿐 이라 겁을 먹어 본 적은 없고, 다만 지난번처럼 그토록 싫어하는 쌍 둥이 형 휘안토스를 불러서라도 일은 해결해 놓아야 한다는 중압감 에 시달릴 뿐이었다.(그래서 더 무섭다) 아킨이 그럴 지경이니, 주리는 벌써 얼굴이 빨개져서는 눈물이라도 쏟을 듯 했다. 미안해진 아킨이 말했다. "저기, 이건.....빼면 안 되는 거다." 롤레인의 눈이 아킨을 향했다. 아킨은 손을 들어 괜찮다고 손짓을 보냈다. "왜요?" "두꺼비로 변해." 그렇게 말하자, 아킨은 자기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나 무안해 옆에 놓인 과실주를 들이켜 버렸다. 그래도 목이 너무나 타서, 옆에 놓인 아무 주전자나 잡아서 잔에 채우고는 다시 마셨다. 롤레인이 멍하니 있다가, 큭--큭큭, 하고 개구리 울음 비슷하게 웃기 시작했고 아킨 은 볼이 확 달아올랐다. 주리가 눈을 댕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럼 오빠도 키스 받으면 저주가 풀리는 거야? 그리고 그 여자랑 결혼해야 하는 거야? 응? 내가 해 줄까? 응?" 기어코 롤레인은 부들부들 떨며 큭큭 웃어대기 시작했다. "일어나...." "......" "일어나아아아아아----!" ".......쿨..." 술을 몇 잔 들이킨 덕에 아킨은 주리보다 먼저 잠들고 말았다. 목이 타서 계속 마셔댄 것이 도수가 높은 파농 포도주였던 것이다. 그리 고 그에게 있어 몇 잔은 '과음'에 가까운 양이었다. 아킨이 식사를 마치고 한시간도 지나지 않아 침실로 가버리자, 주리 는 울상이 되어서는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면서 일어나, 일어나--칭 얼거리는 중이었다. 그러나 아킨은 잠에 겨운 목소리로 얼렁뚱땅 답 하고는 지친 강아지처럼 곤히 잠들어 버렸다. 주리는 결국 뿌루퉁해 져서는, 아킨 옆에 베개를 놓고 그 품안으로 파고들어 잠들어 버렸 다. "처음 보는 남자한테 저렇게 철썩 안겨 자도 되는 거야, 이거." 하고 롤레인은 투덜거렸지만, 뭘 안고 자는 지도 모르고 편하게 잠 든 제자가 귀여워 이불을 덮어주고는 방을 나섰다. 늘 어른인 척 굴 던 제자였고, 정말 고단한 열 일곱 해를 살아왔을 그였지만 곤히 잠 든 모습은 그냥 예쁘장하고 귀여운 소년일 뿐이었다. 그렇게 잠들었던 아킨은, 두 어 시간 뒤 술이 슬슬 깰 만 해질 무렵 허리가 묵직하고 답답해져서 눈을 떠야 했다. 잠버릇이 거친 주리가 잠옷 치마를 발라당 젖혀놓고는 두 다리를 아킨의 허리에 얹고 쿨 쿨 자고 있었다. 아킨은 발을 저쪽으로 밀치고는 다시 잠을 청하려 다가 벌떡 일어났다. "언제 와 있었던 거야, 이거!" 아무래도, 낸시-라 불린 그 하녀에게 말하던가, 직접 들어다가 방에 옮겨 놓던가 해야 할 것 같았다. 아킨은 주변을 대충 둘러보고는, 잠결에 벗어뒀던 옷을 찾아 껴입었다. 살짝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가니, 복도에는 작은 램프 하나만 밝혀진 채 어둑어둑했다. 그리고 저 멀리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두런두런 하는 음성 속에 롤레인의 목소리가 섞여 들려와, 아킨은 그녀에게 주리가 자기 방에서 자고 있으니 데리고 가 달라고 말할 생각으로 조심조심 걸어갔다. 안 되면 직접 데리고 갈 수 도 있고. "....그래서 어쩐다고 했어?" 토트-롤레인의 남편의 목소리였다. 토트는 롤레인보다 다섯 살이 어 렸으니, 연상인 데다가 교수인 아내에게 어투가 항상 공손했다. 아 킨은 '따님이 제 침실에 있습니다.' 하고 끼여들기 좀 곤란해서, 대 화가 좀 끝날만한 무렵에 나서기로 했다. 롤레인의 나른한 한숨소리가 들렸다. "거절했어." "하지만.....굉장한 자리잖아. 생각해 봐, 당신이..." 롤레인이 말을 끊었다. "토트, 여기는 아주 불안한 곳이라고. 특히 반쯤 정신나간 왕이 언 제 목이 잡혀 끌려 내려올 지 모르는 지금은 말이야. 게다가 토트, 당신은 서점에 들어오는 사람이 손님일지 암살자 일지 모를 그런 상황이 좋아?" "버틸 수 있어." 롤레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버티는 것과 살아 남는 건 별개 문제야. 버티는 건 정신자세 문제 지만, 살아 남는 것은.....운 문제지. 그리고 운이란 녀석은 워낙에 까 다롭고 변덕스러워서, 위대한 자도 곧잘 걷어차 버린다고." "그럼 우리들이 여기 와서 살면 되잖아. 당신 바로 앞에 있으면 당 신도 안심할 수 있을 거야." "소심하게 굴지 말라고. 거절한 진짜 이유는 첫째, 당신은 마법사가 아니라 잘 모르는 듯 한데 나는 내 고국 이외의 나라에서는 봉사할 수 없는 몸이야. 이런 교수직이라면 몰라도. 그리고 둘째는, 그 여자 가 엄청나게 싫어서야." 롤레인이 잠시 말을 끊었다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당신도 알고 있잖아. 나, 그 집안 사람과는 절대 마주치고 싶지 않 고, 마주 쳐서도 안 되. 그것은 내게 있어 아주 중요한 약속이고, 맹 세야. 어떤 치욕이 오더라도 감수해야 하는." 더 이상 그에 대한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 일은 토트를 단번에 납득시킬 정도로 쓰라린 일이었던 듯 하다. 아킨은 엿듣는 것 자체가 이상하게 볼이 화끈거릴 정도로 부끄럽게 생각되었다. 그래서 살그머니 걸어 다시 방으로 돌아가 조심조심 문 을 닫았다. 침대에는 주리가 엎드려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아킨은 침대 근처로 가, 다시 잠옷으로 갈아입고는 자리에 누웠다. 주리가 허리에 팔을 찰싹 감더니 볼을 비벼왔다. 아킨은 주리를 옆으로 밀 어내며 잠을 청했지만, 방금 전 롤레인과 남편이 나누던 이야기가 떠올라 잠들 수 없었다. 간다--어디로? 그녀를 부른 사람은 누구이며, 그 사람과 관련된 '일'이란 대체 무엇일까. 뿐만 아니라, 고국 이외의 나라에서 봉사할 수 없는 몸이라는 것은, 단 하나의 경우뿐이다. 아킨은 금방 그녀의 날카롭게 끊어지곤 하는 베넬리아 억양을 떠 올렸다. 정말 그 경우 일까? 아닐 리는 없는데.....어쩌면, 저 롤레인은 컬린의 제자라는 것 이외에도 다른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킨은 볼을 찰싹 찰싹 때렸다. 주제넘은 궁금증이다. 그녀는 스승 이며, 그녀가 아킨에게 주는 것은 오로지 지식일 뿐, 사적인 궁금증 따위로 머리를 어지럽히는 것은 스승에 대한 무례이고, 방금 전처럼 그렇게 몰래 엿들은 것도 일종의 배신이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하루 앞둔 축제 때문에 반도의 롬파르 시는 밤이라도 술렁이고 있었고, 심난한 마음과 엄청나게 난폭한 주리의 잠버릇에 두 시간 동안 뒤척이던 아킨은 차라리 술을 한잔 더 마시 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다가 하늘이 파랗게 될 무렵 겨우 잘 만한 자리를 찾아서 잠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하녀 낸시가 발견한 것은 맨 바닥에 몸을 웅크리고 는 험악한 얼굴로 자고 있는 아킨과, 자그만 몸으로 온 침대를 장악 하고 자고 있는 주리였다. "교수님이 밤새 나머지 공부시키던?"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눈이 빨간 아킨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답했다. ".......그 집 딸이 내 침대로 들어왔었어." 루첼이 책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다섯 살이다." 아킨은 행여 루첼이 오해할까 해서 그렇게 덧붙여 주었다. 루첼은 책을 주섬주섬 챙기면서 얼굴까지 붉혔다.(그제야 롤레인의 나이를 기억해 낸 것이다.) 그리고 아킨 옆에 앉더니, 책 틈에 끼워진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봉투는 연한 미색으로, 입구가 단단히 붙여져 있었다. 아킨은 그것 을 잡아 이리 저리 뒤집어 보았다. 루첼이 말했다. "어제 특별우편으로 온 거야." "특별 우편....?" 아킨은 봉투 위를 훑어보았지만 위에는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았 다. 행여나 휘안토스가 보낸 것은 아닌지 해서, 잠시 봉투를 노려 보기는 했지만 그 얄미운 형이 이런 귀여운 짓을 할 리가 없다. 그 때 얼굴이 잔뜩 부루퉁한 학생들이 앉아 있는 강의실로 율버 교 수가 들어왔다. 그 교수야말로 축제기간 유일하게 수업을 하는 교수 였으며, 축제 때문에 참석하지 않을 시 점수를 듬뿍 깎겠다는 으름 장을 늘어놓았으므로 다들 얼굴을 구기고서라도 출석해야 했다. 교 수가 들어와 교탁을 탁탁 치자, 학생들은 투덜거리면서 책을 폈다. 그러나 아킨은 책은 대강 펴놓고는 우선 봉투를 찢어 보았다. 휘안 토스를 제한 다른 사람이 본가에서 보내 온 것일지도 몰랐으니, 수 업이 다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 루첼이 옆에서 흘끔 보았 지만, 아킨은 편지를 옆으로 기울여 그가 볼 수 없도록 했다. 그리 고 편지의 서체를 확인하는 순간 아킨은 뭐가 철렁 내려앉는 것 같 았다. "이거..." "아킨?" 아킨은 믿을 수가 없어서,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어안이 벙벙해서 푸--하고 숨만 몰아쉬었다. 그 때 저 앞에서 율버 교수가 교탁을 땅 내리치더니 외쳤다. "거기--! 이상한 거 읽는 학생, 고개 들어보게나." 루첼이 이크, 하면서 목을 당겼다. 아킨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의 손에는 아직 편지가 들려 있었고, 교수의 지시봉은 아 킨을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율버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아킨이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말입니까?" 그러자 지팡이가 슬쩍 옆으로 비껴나더니, 아킨의 바로 뒤에 앉아 있는 학생을 가리켰다. "거기 학생 안 일어나고 뭐해! 어서---!" 뒤에서 후닥닥 소리가 들려왔다. "교, 교수님 이건......이, 이건....저, 저기...." "당장 들고일어나게! 그런 것 읽으려면 강의실에서 나가라고! 어서 ---!"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학생은 책을 휩쓸어 안고는 인사도 없이 재빨리 강의실을 나갔다. 강의실 밖으로 야호~~! 어쩌고 하는 외침 이 멀찍이 들려왔다. 학생들은 문 쪽을 물끄러미 보다가, 너도나도 책 속에서 봉투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심지어 어느 극장의 프로그 램을 편지인 척 읽는 학생마저 있었다. 루첼이 끄응, 하고 한숨을 내 쉬고 있는데, 아킨이 슬쩍 물었다. "루첼, 축제에 나가려면....어떻게 하고 나가면 되지...?" ".......응?" 아킨이 조심조심 물었다. "그냥 가면만 쓰고 나가면 되는...건가....해서." 루첼은 입만 작 벌렸다. 그리고 율버가 세 번째 학생을 내보낼 즈음 에 겨우 겨우 말했다. "아킨, 너는....너 자신이 그런데 내 놓기 무서운 인물이란 것 정도는 알고 있는 거냐?" "무슨 말이야?" "너도 쥰 못지 않게--" 루첼은 아킨 옆에서 좀 떨어져 앉고는 말했 다. "어벙하다고." 그리고 그 말을 한 덕에 루첼은 턱을 감싸 쥔 채 다섯 번째로 강의 실을 나갈 수 있었고, 아킨은 교수가 뭐라 하던 말던 따라 나가버렸 다. *********************************************************** 작가잡설: 이 남편 저 남편 다 챙겨야 하는 바쁜 마누라 루첼 군.... .......어느새 위치가 바뀐 듯도 하군..;;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8장 *************************************************************** [겨울성의 열쇠] 제32편 금빛 암사슴#3 *************************************************************** 문제를 일으켜도 스스로 '해결'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는 것과 문제를 아예 일으키지 않을 정도로 현명하다는 건 별개 문제였다. 아킨은 지나만 가도 문제를 일으킬만한 외모에, 건드리면 즉각 폭발 해 버리는 성질머리마저 잘 갖추고 있었지만, 피하는 요령은 전무 --였다. 물론 당연한 것이다. 아킨에게 있어, 태어나면서부터 만난 사람은 대부분이 타협이 전혀 필요 없는 투쟁대상들일 뿐이었다. 그러나 한번 지나치거나 참아주면 그 다음부터는 보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으며, 그런 사람들과는 구태여 문제를 만들지 않아도 된다. 상대방이 꽤나 무례하다 하더라도 말이 다. "어제는 관심 없다고 했잖아." "......일이 생겨서." 루첼은 그 다음 말을 인내를 가지고 기다렸지만, 기숙사가 가까워져 도 아킨은 꿍하니 입을 다물고 있었으니 결국 루첼이 먼저 말을 꺼 냈다. "무슨 일인데." "일......이라고." "그 답 하나로 납득하라는 말이냐." "나도 사생활이 있단 말이다. 네가 주말마다 어디로 가서 무슨 짓을 하는 지, 한번도 상관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넌......어쨌든 묻지 마!" 이건 거의 '떼'에 가까웠다. 버릇없는 사춘기 동생도 아니고, 원....루 첼은 에휴, 하고 한숨을 푹 내 쉬었다. 그러나 상관 안 할 수 없는 것이, 아킨이 나가서 사고를 칠 건 뻔했 고, 그렇게 되면 아킨 본인에게는 그 참에 정신 좀 차리라고 고소해 해 줄 수 있지만 루첼에게 파이프를 강탈당한 자켄에게는 미안할 일이었다. 루첼은 그것을 들고 첸을 찾아가서는 실컷 자랑했고, 파 이프 광인 첸은 그것이 땅의 일족 작품이란 것을 알아보자 마구 돈 을 불러대며 팔아 넘기라고 울부짖었다. 루첼이 슬쩍 물어 보았다. "너, 여자친구라도 있는 거냐?" "......아니." 그렇게 답하는 아킨의 얼굴을 잘 뜯어보았지만, 정말 '그렇고 그런' 사이의 여자를 두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네가 그런 것까지 왜 상관 하냐는 투로 쏘아보고 있었던 데다가, 얼굴 붉히거나 하는 기 색도 없었으며, 당황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으니. 하긴, 네놈 주변 머리에 만들 수나 있겠나. 루첼이 다시 한숨을 내 쉬고는 말했다. "루피니아 축제란 것이, 이름은 요란한데 사실 큰 준비가 필요한 건 아냐. 그냥 그 차림새로 나가도 되. 가면....은 쓰던 말던 상관없고. 단지, 사람들 따라서 광란할 준비만 되어 있으면 되지." 아킨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바보짓을 해야 한단 말이야?" "물론 본인의 선택 나름이지. 하지만 그런 것을 즐길 생각이 아니라 면 흥분하기 좋아하는 반도인들 축제에 나가는 의미가 전혀 없잖 아." 롯사나 반도나 데칼런 반도나 둘 다 반도는 반도였으나, 롯사나가 워낙에 두터워서 반도라기 보다는 불쑥 튀어나온 대륙의 일부라 한 다면 데칼런은 단도처럼 얇고 날카롭게 비죽 튀어나와 정말 반도였 다. 그리고 그런 곳의 성품답게, 국민들은 성격들이 아주 급하고 또 잘 흥분했다. 그만큼 예술적 감성도 아주 풍부해서, 음악이나 건축, 미술같은 것은 반도인들이 만들어 낸 것을 따라올 곳이 없었으며, 이런 축제가 벌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생산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게으르고 한심한 국민들.' 이라는 것이, 이 곳 국민들에 대한 전반적 인 평이었지만, 반도인들은 문화가 화려한 만큼 돈 버는 데는 아주 능란하기도 했으니 능력 없다고 보기도 곤란했다. 루첼은 정말 불안해서 물었다. "그런데 정말 나갈 거냐?" "응." "누구를 만나려고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킨이 멈춰 서더니 말했다. "실비." "아키, 둘러대려면 잘 둘러대. 네가 어떻게 실비랑....." 아킨은 턱으로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실비 맞지?" "응?" "실비?" 실비는 잔뜩 주눅든 얼굴로 기숙사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자그만 얼굴은 겁에 질린 듯 파리했고, 손은 진정이 안 되는 듯 계속 꼼지 락거리고 있었다. 차림새는 나들이라도 나온 듯했다. 좁은 소매에, 허리는 잘록하게 조이고 아래로는 풍성하게 부풀어 오른 녹색 드레 스를 입고 있었다. "....웬 일이야, 너?" 루첼이 묻자 실비는 떨리는 손을 꼭 맞잡더니 빙그레 웃었다. "별, 별일은 아니야. 그냥......저, 지, 지롤로 아저씨 댁에 놀러 왔다 가....루, 루피니아 축제잖아. 아버지가 이번에는 가도 좋다고 허락.... 하셔서. 그래서 놀러 왔다가 잠깐 들렀어....." 지롤로 자코베라는 사람은 루첼도 언젠가 어깨너머로 본 적이 있었 다. 그리고 그에게는 실비와 동갑이기는 하지만 몇 배로 활달한 말 괄량이인 이사벨이라는 딸이 있었다. "여기는 혼자 왔어?" "아, 응. 이, 이사벨이 나중에 데리러 오겠....다고 했어." 루첼은 아킨을 따라 기숙사 위에 달린 큰 시계를 흘끔 보고는 물었 다. "언제?" 실비는 모기만하게 말했다. "저녁 11시." 눈이 나쁜 루첼은 당장 시간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러자 눈이 밝 은 아킨이 손짓을 보냈다. 루첼은 아찔했다. "지금 오후 세 시야." "아, 알.....아. 지만....." "그분 댁으로 보내 줄게. 설마, 그 아가씨 벌써 집에 없는 건 아니 지?" 실비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어, 없어. 그리고 내가 먼저 들어가면 이사벨이 곤란해 질 거라고!" "실비---제발. 네가 이곳에서 나와 만났다는 사실을 알면, 네 아버 지가 날 죽여 버릴 거라고. 이사벨인지 뭔지 하는 아가씨가 곤란한 게 중요하냐, 내 목숨이 중요하냐. 어서 준비 하고 돌아가." 그 냉담한 말에 실비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실비는 다친 사슴처럼 애처롭게 말했다. "....보내지 마. 제발......겨우 온 거란 말이야..." "실비, 난 너랑...한가하게 놀아줄 수 도 없거니와, 여기 저기 놀러 다닐 만한 주변머리도 없어." 아킨이 '정말?' 하고 지긋이 바라보았지만 루첼은 상관 마, 하고 쏘 아보았을 뿐이다. 어차피 순진한 실비에게는, 루첼은 정말 착하고 다정하고 착실한 '모범생'일 뿐이었으니까. "루, 루츠 오빠아아..." "너뿐만 아니라 네 작은오빠에 대한 의무이기도 해, 실비---제발." 실비와 루첼이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루첼은 설득하고, 실비는 계속 울기만 하면서...즉, 도무지 말이 안 통하고 있었다.) 아킨은 벌써 지 겨워져서 물러났다. 아킨이 생각하는 것은 단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그 편지의 내용을 지킬 수 있냐, 그것뿐이었고..... 뒤에서 누가 쿡 찔렀다. 아킨이 쏘아보자, 그는 비웃듯 씨익 웃었다. "야, 세침데기. 루첼 어딨냐?" 아킨은 귀찮다는 듯 손짓만 보냈다. 그러자 쥰은 주먹을 들어 올려 보였다. "축제 끝나고, 연습실에서 한번 보자, 너." "난 검은 안 쓴다." "못 쓰는 거겠지." "넌 검 쓰고, 난 주먹만 쓰겠다는 말이다. 싫으면 관두고." 쥰이 아킨을 험악하게 쏘아보더니, 그 어깨를 턱 밀고는 루첼에게 갔다. 그를 발견한 루첼이 인사를 했는데, 쥰은 느닷없이 발이 바닥 에 딱 붙은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킨이 뒤에서 보니, 그는 귀까지 새빨개져 있었다. "아, 안녕....시, 실비?" "쥬드....오빠. 오랜만....이다." 남자 여자 둘 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심지어 그 사이에 휘장까지 치고 첫 대면을 한다는 동 툴칸 제국의 맞선 자리도 이보 다는 나을 듯 했다. "그, 그런.....데 왠 일...이냐? 그곳에서 여기까지는 좀........될텐데." 실비는 우물쭈물 상황을 설명했고, 옆의 루첼은 시시각각 절망하고 있었다. 그는 쥰의 단순함을 너무도 잘 알았고, 그 철딱서니 없음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설명이 끝나자, 아킨은 거의 알아듣지 못했 음에도 불구하고 쥰은 단 하나는 분명하게 알아들었다. "루첼--! 그런 건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잖아. 같이 구경 가자고." 실비의 얼굴이 빛났다. 루첼은 끄응, 하고 한숨을 내 쉬더니 아킨에 게 손짓을 보냈다. 실비 좀 부탁한다는 뜻이다. 아킨은 앞으로 나서 며 쥰의 등을 팍 밀었다. 그리고 그 큰 몸이 떠밀려 오자 마자 루첼 은 그 멱살을 잡아당겼다. "야, 너!" 루첼이 그런 쥰에게 재빨리 귓속말을 했다. "얼간아,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되는지 몰라서 그래? 당장 보내야 한 다고!" "야, 저렇게 어렵게 찾아왔는데.....어떻게 그냥 보내? 넌 저 얼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세쟈르나 체노가 이 사실을 안다면 내가 당장에 날라 간다고, 이 얼간아!" 쥰은 벌컥 화까지 냈다. "겨우 그런 게 무서워서 저 애를 보내겠다는 거야?" "겨우, 라고 할 문제가 아니니까 그렇지!" 그러나 그 당연한 말을, 쥰은 듣지도 않았다. "루츠, 넌 여기 토박이잖아. 하루 정도 안전하고 재미있는 데로 데 리고 다니는 건 쉽잖아." "토박이니까 축제가 저런 외지 여자애들에게 얼마나 위험한 지도 잘 알고, 알다시피 내가 그런 날 박으로 나갔다 하면 당장에 따라붙 을 녀석들은 더 위험한 녀석들이라고. 관두자, 제발." "좋아, 그렇다면 나 혼자서라도 하겠어. 됐지?" "너한테 어떻게 실비를 맡기냐?" "그럼 너도 따라 오던가." 쥰이 어깨에 힘을 주고 고집을 피우기 시작했다. 이럴 때 녀석이 얼 마나 말기가 안 먹혀 들어가는지, 루첼은 잘 알았다. 그리고 많고 많은 녀석들 중에서 하필 이런 녀석에게 '그 모습'을 들켜서 이렇게 질질 끌려 다니는지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정말 인생에 도움이라고는 하나도 안 되는 녀석이야, 이 나쁜 자식 아!" "나쁜 자식은 너다, 루첼 그란셔스! 네가 내 입장이라면 절대 실비 를 보내지 않았을 거라고!" 쥰이 이까지 악물며 말했다. 루첼은 이 녀석이 대체 왜 이렇게 험악 하게 화를 내나 당황스러웠지만, 결정을 꺾을 생각은 없었다. 그 모습을 흘끔 흘끔 보던 실비는, 앞에 있는 아킨이 무서워서 차마 일어나지는 못했지만 눈을 꼭 감고는 어깨를 움츠렸다. 얼굴도 새빨 개져 있었다. 쥰이 팔짱을 끼고 두 발에 힘을 주더니 으름장 놓듯 말했다. "실비를 그냥 보내면 그날로 너랑 절교다." "마음대로 해라! 절교 하든 말든, 그건 네 자유다." "이 둔한 녀석 같으니라고, 정말!" "지금 말이 앞뒤가 아주 안 맞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 둔한 거랑 지금 절교랑 대체 무슨 상관인데?" "빌어먹을, 그래 나 머리 나쁘다!" 결국 실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아킨과 닿자 몸을 확 움츠리기는 했다.). "미, 미안...해요. 루츠 오빠...쥬드 오빠....나, 나 때문에...그렇게 싸 우지 마세요. 그....그냥 갈게요." 그러나 실비의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쥰은 실비보 다 더 처량한 얼굴이었고, 루첼마저 난감해져서 고개를 돌렸다. 쥰 이 루첼의 허리를 쿡 찔렀다. 결국 루첼은 고개를 뒤로 꺾으며 한숨 을 탁 내쉬고는, 으르렁 비슷하게 말했다. "단 저녁 여섯 시까지다. 저녁 여섯 시. 그 다음은 나도 양보 못해." 실비가 두 손을 맞잡고는 환하게 웃었다. 루첼은 옆의 아킨에게 말 했다. "아킨, 너도 나간다고 했지?" "아, 난 저녁 여섯 시에 약속인데?" 쥰이 엥, 하고 루첼과 아킨을 번갈아 보았다. 루첼은 쥰을 하번 쏘 아보고는, 아킨에게는 빙그레 웃으면서(놀라운 변화였다.) 말했다. "남자 둘보다야 셋! 이 낫지 안겠어? 그리고.....우리 둘이서 파트너 할 테니, 아킨 네가 실비 파트너를 해 줘라. 네, 가." 루첼을 노려보는 쥰의 눈은 투견장의 불독 같았고, 실비의 눈은 그 앞의 사슴 같았다. *********************************************************** 작가잡설: 새침데기 아킨, 뺀질데기 루첼.....;;;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8장 ************************************************************** [겨울성의 열쇠] 제33편 금빛 암사슴#4 *************************************************************** 실비도, 쥰도 축제가 이다지도 끔찍하고 지루할 수 있다는 것을 그 날 처음 알았다. 가장행렬을 구경해도, 사람들이 와글와글 모인 중에 판을 벌인 유랑 무희들의 춤과 기예단의 기막힌 공연들을 봐도, 귀여운 동물들의 발 랄한 재주들을 봐도, 아킨을 옆에 놓은 실비는 웃을 수조차 없었다. 손바닥을 마주치며 깔깔 웃으려고 해도, 아킨이 무표정하게 저 앞을 보는 것을 흘끔 보게 되면 행여 무례하거나 철없어 보일까봐 살그 머니 손을 내려놓고는 빙그레 웃었을 뿐이다. 게다가 지난번에 지오 바니가 '아주 명문가 출신 같더군.'하고 말한 것까지 있어서, 저것이 '귀족들의 행동거지'일 거라고 나름대로 오해한 그녀는 최대한 아킨 과 비슷하게 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왜냐, 아킨은 루첼의 룸메 이트다. 즉, 실비의 모습이 어떠한지 오늘밤에라도 루첼에게 말 할 수 있다. 그래서 크게 웃고 싶어도 얌전하게, 입술 아프도록 방글방 글 웃거나 어깨 뻐근하게 서 있어야 했다. 그렇게 눈물겹게 노력하 다 어렵사리 눈을 들어 옆의 루첼과 쥰을 보면, 루첼은 실비를 마주 보는 경우조차 드물었지만, 쥰은 어떻게 알았는지 재빨리 손을 들어 보였다. 찬바람 날릴 정도로 싸늘한 루첼과 아킨과는 달리, 쥰은 환 하게 웃고 있어 실비는 얼굴을 붉히며 웃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당장 에라도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을 만큼 지겹다는 건 사실이었다(물론, 루첼이 노린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한번 이런 경험을 하고 나면,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결국 실비의 애처로운 눈빛을 참지 못한 쥰이 아킨에게 말했다. "야, 아킨토스. 넌 언제 약속 장소로 가는 거냐?" "여섯 시 즘." 그렇게 말하며 아킨은 멀리 솟은 시계탑을 보았다. 해가 탑의 옆구리에 걸려 번쩍이고 있었고, 역광에 묻혀 잘 보이지 않는 시계판이 가리키는 시간은 고작 다섯 시였을 뿐이다. "약속 시간보다 나가 있을 생각은 없어?" 쥰은 '당장 꺼져 버려!' 라는 듯한 눈빛으로 아킨을 쏘아보며 말했 다. 그 때 사람들의 환호소리가 들려왔다. 탬버린 소리가 찰찰 울리더 니, 사람들이 박수를 터뜨렸다. 바이올린 소리가 흘러나오고, 사람들 이 광장 주변으로 둥글게 물러났다. 쥰은 싱긋 웃으며 실비에게 손 을 내밀었지만, 루첼은 재빨리 그의 뒷덜미를 잡아 저 쪽으로 던져 버리고는 아킨과 실비를 광장으로 밀어 넣었다. 아킨이나 실비나, 둘 다 펄쩍 뛸 듯 놀랐다. "루, 루첼 오빠--" "너, 정말!" 둘은 당장에 다시 들어가려 했지만, 그 둘이 숫기 없는 커플인 줄 아는 주변 사람들은 깔깔 웃으며 광장으로 밀어 넣었다. 실비는 새 빨개졌고, 울음이라도 터뜨릴 듯 저 뒤에서 손을 흔드는 루첼을 바 라보았다. 그것을 본 아킨은 한숨을 푹 내 쉬었다. "별 수 없군요." "네, 네?" "한 번이라도 추고 들어가야 뭐라 말하지 않겠지요." "하지마안...." 그러나 아킨은 실비의 허리를 낚아채고는 리드를 해 나갔다. 루첼의 멱살을 잡아 뒤흔들던 쥰은 눈물이라도 쏟을 듯 아킨을 바라보았다. 춤이 진행되자, 실비가 자그마하게 말했다. "자, 잘...하시네요?" "교양이었으니까요." 라기 보다는, 열 두 살 때 만났던 스승이 정말 훌륭했기 때문이었 다. 실비는 수줍음이 많아 실수가 몇 번 있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괜 찮은 파트너였다. 갖가지로 요란하게 가장을 한 사람들이 노래를 따라 부르고, 술잔을 들어올리며 킬킬댔다. 아킨은 춤을 추며, 대체 언제 끝내려나 싶어 서 악사들이 있는 쪽을 흘끔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 틈에서 빛나 는 머리카락을 가진 누군가를 발견했다. 루피니아의 일곱 시녀 중 하나로 분장한 그녀는 아킨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얗고 얇은 옷에, 붉은 리본으로 허리와 가슴 게를 감고 있었고, 노을이 번지듯 불그스레한 기가 도는 금발 머리가 굽이치며 하얀 베일 아래로 드러나 있었다. 검은 가면으로 코 위까지 다 덮고 있었지만, 가면이란 물건은 '아는 사람들'을 속일만큼 대단한 것은 못 된다. 아킨이 미소를 지었고, 가면 아래의 붉은 입술도 환하게 웃었다. 탬버린들이 한번 크게 찰랑이고, 파트너가 바뀌었다. 숨어있던 커플 이 연인의 팔을 끌고는 열에 끼어 들었고, 드디어 루첼을 떨쳐 내는 데 성공한 쥰이 들어왔다. 그러자 그 틈에 있던 가면의 소녀 역시 안으로 들어왔다. 아킨은 쥰의 손에 실비를 넘겨주었다. 그러자 얇은 황금 팔찌를 낀 그녀의 하얀 손이 아킨의 손을 잡았고, 늘씬한 허리도 아킨의 팔에 안겨 들었다. 베일이 미끄러지며 별꽃 화관과 붉은 리본으로 장식한 금발 머리가 환하게 드러났다. 길고 치렁치렁한 금빛 머리카락이 파 도치듯 출렁이자, 주변 사람들이 작은 탄성을 흘렸다. 아킨이 고개를 숙여 속삭였다. "제가 여기 있는 줄 알고 있었나요?" 그녀가 그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아키. 네가 어떻게 그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는데?" "역시. 두 장의 편지 중 하나는 당신이 보낸 거였군요." 소녀가 그의 손안에서 한바퀴 돌았다. 옷자락이 날개처럼 펄럭였고, 금빛 머리카락은 희미한 장미향을 풍겼다. 그리고 다시 아킨의 가슴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또 한바탕 했더구나. 무술담당 교수였지, 아마?" "그건 '사고'였어요." "어머, 네가 핑계도 다 대네?" 남자 가수가 악사들 앞으로 나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감미로운 사랑의 노래였다. 경쾌하던 춤은 조용해졌고, 파트너도 간간이 바뀌 었다. 아킨이 물었다. "저 보러 제 본가에 오셨던 건가요?" "물론이지." "혼담 때문이 아니고?" 짖꿎은 말에 그녀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우습게 보지 마. 네 아버지가 너희 둘 다 준다고 하지 않는 한, 너 희 집안은 생각도 하지 않을 테니까." "어느 쪽이 첫 번째죠?" "당연히 너지. 첫 번째는 믿음직하고 조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법 이야. 재수 없는 네 형님은....무조건 둘째." 아킨이 웃음을 터뜨렸다. 소녀가 물었다. "그런데.....왜 마법사로 돌아 선 거지?" 소녀의 말투는 유쾌했지만, 아킨은 방금 전 까지 즐거웠던 기분이 싹 쓸려나가는 것 같았다. "검이 싫어졌으니까요." "아깝네. 난.....그 때 네 모습이 아주 좋았었는데." "마법사 아킨도 나쁘지는 않을 겁니다." 소녀가 다시 웃었다. "기대할게." ".....집안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소문이 안 좋던데.....아버님도 편찮으시다 하고." "아키, 난 네가 왜 검을 치워버렸는지 자세히 캐묻지 않았어." "죄송합니다." 해는 저물었고, 가로등에 불이 붙었다. 사람들은 더 모여들었고, 춤 을 추는 연인들도 늘어났다. 드디어 무시무시한 파트너를 떨쳐 버리게 된 실비는 볼이 빨갛게 될 정도로 즐거워했고, 파트너인 쥰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시 파트너 의 교체를 알리는 탬버린이 울리자, 쥰은 저 쪽에 있는 루첼에게 손 짓을 보냈다. 실비 역시 기대하는 눈빛이었지만, 루첼은 한번 더 하 라고 손만 흔들어 보였을 뿐이었다. 그는 댄스라고는 전혀 할 줄 몰 랐고, 사실 정말 질색하기도 했다. 대신 그는 광장의 계단 위로 올 라가 아킨과 쥰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을 떼지 않았다. 실비와 쥰은 너무 좋아하고 있었다. 아킨 역시 괜찮아 보았다. 또, 느닷없이 나타난 아킨의 파트너는, 아무리 봐도 '아킨과 아는 사이' 였다. 가면을 쓰고 있지만 놀라운 미인임에 분명한 소녀를 저 숙맥 이 대체 어떻게 아는 지 정말 궁금해진다. "나만 바보였군." 루첼은 투덜거리며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시계탑은 일곱 시를 가리 키고 있었고, 음식좌판이 벌어지며 여기 저기서 굽고 지지는 냄새가 풍겨왔다. 벌써 술이 들어가 목소리가 시끄러운 사람들이 말싸움하 듯 이야기하고 있었다. 사고가 나는 것을 막기 위해 출동한 경비대 가 제복차림새로 골목길에서 나왔다. 루첼은 이제 슬슬 실비를 데리 고 갈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 말을 꺼내면 쥰이나 실비나 당장 에 울상들을 지으며 루첼에게 매 달릴 테지만, 루첼은 별 수 없었 다. 술에 취한 사람들이 많아지면 숫기 없는 실비나 흥분하기 좋아 하는 쥰은 너무 위험하다. 그 때, 루첼 옆으로 털에 윤기가 흐르는 새까만 말 한 마리가 덜벅 덜벅 걸어 나왔다. 루첼은 경비대인가 하고 계단에 앉은 채 올려다 보았지만, 축제 구경 나온 듯한 귀족남자였을 뿐이었다. 나이는 한 서른 중반 정도 되어 보였으며, 큰 키에 잘 단련된 좋은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루첼이 바라보자, 남자가 루첼을 내려다보더 니 미소를 지었다. 짧은 갈색머리에, 날카로운 회색 눈을 가지고 있 었다. 어디 장교쯤 되나, 저런 눈빛이라면 나중에 출세 좀 하겠군....그리 생각하며 고개를 돌리다가 루첼은 이번에는 멀찍하게 떨어진 골목 길에 숨은 또 다른 남자를 발견했다. 후드를 깊게 둘러 쓰고 얼굴 은 가리고 있었다. 오른쪽 팔은 망토 안으로 들어가 있었으며, 그것 은 그가 검을 쥐고 있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가로등 빛에 드러나는 얼굴로 보아 고작 스물 초반 정도 되 보였으며, 키 는 루첼보다 조금 작았다. 그러나 다리는 길고, 어깨는 꼿꼿해서 훈 련을 제법 받은 기사인 듯 보였다. 그의 눈이 루첼 옆에 있는 남자 를 향하다가 다시 주변을 향하고, 다시 남자를 향했다. 옆의, 이 말 을 탄 남자의 경호역인 것이다. 이거.....뒤통수 불안하신 분인가 보군, 그렇게만 생각하던 루첼은 저 멀리서 쥰이 부르는 바람에 그들에 대해서 빨리 잊어버려야 했다. "루첼---너 빨리 와!" 루첼은 사람들을 헤치며 달려갔다. 쥰이 실비의 손을 끌어당기며 사 람들 틈으로 들어왔다. 얼굴은 사과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고, 볼이 나 이마는 땀에 촉촉하니 젖어 있었다. 루첼은 그런 그들을 마음껏 슬프게 했다. "실비. 이제 돌아가라." "오빠!" "루첼!" "분명 약속했다, 실비, 쥰." 그리고 루첼은 아킨을 찾았다. 아킨은 사람들 틈에 있어 잘 보이지 않았다. 예쁜 여자와 있으니 알아서 잘 하겠다 싶어, 루첼은 나머지 둘에게 말했다. "가자." "루첼......야, 한 시간만 더 있다가 가자? 응?" "안 돼. 그러다가는 결국 오늘 밤 새버릴 거라고. 가야 할 때 꾹 참 고 가는 것이 성인의 도리다. 따라들 와." "싫다면?" 그렇게 심드렁하게 말하는 쥰에게, 루첼이 날카롭게 말했다. "정말 화낸다." 그 매서운 빛에, 쥰은 입을 다물어야 했다. 루첼은 그를 쏘아보고는 실비의 손을 낚아채듯 잡아 당겼다. 실비의 손은 꿈틀거리더니, 그 손바닥이 루첼의 손을 꼭 감싸쥐었다. *********************************************************** 작가잡설: 또 비가 내리네요. 꽃놀이도 못 갔는데..으힝;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8장 ************************************************************** [겨울성의 열쇠] 제34편 금빛 암사슴#5 *************************************************************** 쥰은 실비의 친척이 사는 첸돌리 가로 향하는 내내 투덜거렸다. 잔 뜩 풀이 죽은 실비는 루첼이 좀 고지식한 면이 있어서 그렇다거나, 나를 걱정해서 저렇게 하는 거라던가, 자기가 잘못되면 많은 사람들 에게 면목없어서 그리 한다고 달팽이 우는소리 비슷하게 말했다(즉, 아예 들리지도 않았다). 루첼은 투덜거리는 쥰을 짜증난다는 듯 쏘 아보며 눈만 찌푸렸다. 그런데 바로 옆으로 요란스런 꽃 장식을 단 이륜마차 한 대가 지나갔다. 그 위에 탄 술 취한 젊은이들이 루첼의 팔에 매달린 실비에게 휘익 휘파람을 불며 듣기 민망한 농담을 외 쳤다. "너, 너무....해." 실비가 눈물이 고여서는 울먹였고, 쥰은 당장에 펄쩍 뛰며 나서려 했다. 그러나 루첼은 쥰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참아." "루체엘--! 실비가 저런 말을 들었는데 참으라는 말이 나오냐! 정말 실망이다! 야, 이 개자식들아, 당장 와! 한판 붙자고!" 그러자 마차가 뚝 멈추더니 그 위의 청년들이 우르르 내렸다. 킬킬 거리는 사나운 웃음소리가 어둑한 골목길에 울리자, 실비는 파랗게 질려서 루첼 뒤에 숨었다. 루첼은 속으로 욕을 퍼부어 대며, 실비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실 비가 조심조심 그의 손등에 손을 얹었다. 그러나 루첼은 실비의 손 을 잡아, 벌써 팔을 걷어 부치고 있는 쥰에게 넘겼다. 쥰이 얼결에 실비의 손을 잡았다가 외쳤다. "야, 너--!" "내가 해결해 줄게." "네가 어떻게! 저런 녀석들은 내가 한방에 때려 눕혀 줄 수 있다 고!" "....넌 배로 맞을 거다." 쥰은 펄쩍 뛰어 오를 기세였지만, 루첼이 쥐어준 실비의 손을 놓치 는 못했다. 루첼은 그 무시무시한 다섯 명이 서 있는 곳으로 걸어가 며 뭐라 말했다. 덩치 큰 쥰이 올 줄 알았는데, 엉뚱하게 키 크고 호리호리한 쪽이 오자 그들은 사납게 웃어젖히더니, 그 중에서 콧수 염을 기른 팔뚝 굵은 청년이 나서 루첼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실비 는 자기도 모르게 쥰의 팔을 내 던지고는 앞으로 나섰다. "루첼 오빠--!" 그러나 퍽--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큰 자루 쓰러지는 듯한 풀 썩 풀썩 소리만 들려왔다. 달려가던 실비는 갑자기 무안하고 부끄러워 멈추어 섰다. 청년 다섯 명 모두 바닥에 코를 박고 잠들어 있었고, 루첼은 손을 탈탈 털고 있었다. 그리고 돌아서더니, 쥰을 노려보며 험악하게 말했다. "너 때문에 쓸데없이 마법을 썼잖아! 하여간, 정말 애도 아니고! 그 런 것은 좀 참으란 말이다! 참아!" "아." 쥰이 고개를 슬쩍 들었다. 그리고 옆의 실비를 흘끔 보니, 실비는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루첼이 달려와 실비의 팔을 잡 아 당겼다. "이래서 축제 기간에 여자 혼자 오면 안 된다고 말렸던 거다. 이건 동네 아가씨들 꽃 나들이 잔치가 아니라고." "....하...지만 오빠들...이 있잖아." "그럼, 너 지키느라 우리 둘이 몇 배로 고생해도 된다는 말이...큭!" 뒤에서 쥰이 등을 퍽 치며 루첼의 말을 막았다. "다음에도 놀러 와. 우리들이 얼마든지 지켜 줄 테니까. 알겠지?" 실비가 빙그레 웃었다. 쥰이 얼굴을 붉히며 그런 실비를 보다가, 루 첼이 푹 찌르자 얼른 고개를 돌렸다. 루첼은 팔은 내밀었고, 실비는 팔짱을 끼고 머리를 그 어깨에 기댔다. 그것을 보던 쥰이 나른히 한 숨을 내 쉬고는 고개를 돌렸다. 곧 첸돌리 가의 주택가가 나왔다. 고급주택가인 그곳은 집집마다 만 찬이 열리는 듯 꽤 시끄러웠다. 루첼은 실비의 손에서 팔을 빼며 물 었다. "자, 다 왔는데.......어디까지 바래다줄까?" 실비가 우물쭈물 말했다. "집...앞까지 바래다주면 안 되는 거야?" "그러다가 너희 집 사람한테 들키면 어쩌라고 ....미안하다." "미안....무리했...지?" "알면 됐고." 루첼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고개를 숙여 실비의 볼에 키스해주었다. 실비의 볼이 확 달아올랐다. 그리고 루첼과 쥰을 우물쭈물 번갈아 보더니, 루첼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겼다. "왜?" "저.....두, 둘만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미안..., 쥬드 오빠. 하지만 잠 깐만...아주 잠깐만 둘이서 이야기하면 되." 쥰은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는 저 쪽에 있을 테니 이야기 끝나면 불러." "응....." 실비는 정말 미안하다는 여린 눈빛을 보냈다. 행여나 남이 자기 때 문에 상처받지나 않을 까, 늘 걱정하는 실비였으니 쥰의 풀죽은 얼 굴에도 미안해하는 것이다. 둘만 남게 되자, 루첼은 나른히 한숨을 내 쉬고는 말했다. "알베스티 가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니?" 실비가 멍하니 루첼을 보다가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으...으응. 어떻게 알았어?" "지난번에 할아버님 뵙고 왔을 때부터 분위기가 좀 어수선하더라고. 집사님 말씀이, 신년에 너의 아버님이 할아버님과 크게 다투셨다 그 러더라." "응. 지난...번에 국왕폐하께서 편찮으실 때, 아버지께서...공작 편으 로 돌아서셨거든. 작은오빠나 할아버님은 그레코 공작님 보다는 왕 비 전하 쪽이고. 그런데 막상 정하자마자 왕비전하 파 쪽에서 펄펄 뛰며 연을 끊자고 나서서...지금 집안이 좀 어려워." 얼간이 세쟈르, 하고 루첼은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체놀비의 해군대장과 시장은 왕비파고, 이 두 사람을 완전히 자기편 으로 만들어 놓기 위해 베크만 알베스타가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는 루첼도 알고 있을 지경이다. 공작이나 왕비나, 능력들은 다 거기서 거기다. 어느 쪽에 어떤 아군이 들어오냐에 따라 판세가 완전히 뒤 집힐 수 있을 정도로. 지금 상황에서는, 알베스티 가 같은 상단은 한발자국 물러나서 그 균형이 어느 정도 무너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쓰러 질만 하면 재빨리 그 쪽에 붙는 편이 낫다. 상단이니 늦게 입 장 정한다고 비겁하다 뭐다, 하는 잔소리를 들을 일도 없는데 벌써 입장을 정하는 것은 너무 경솔한 짓이다. 실비가 말했다. "저, 그래서.....아버님이 내 혼처를 알아보고 계셔. 지금 상황이 안 좋으니까, 어떻게든.....어떻게든..." 실비는 결국 말을 다 하지 못하고는 훌쩍 거리기 시작했다. 루첼은 이번에는 정말 세쟈르의 얼굴에 주먹이라도 퍽 박아버리고 싶었다. 결국 생각해 낸 방법이 여동생 팔아먹기라, 이거지? 실비를 특별히 아끼는 베크만이 그 깡마른 팔목을 휘두르며 펄펄 뛰어다니 고 있을 게 눈에 선하다. "그 후보들 중에서 네 마음에 드는 사람은 당연히 없겠지?" "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걸." "역시 그랬구나." 실비는 두 손을 꼭 마주잡고는 루첼을 바라보았지만, 루첼은 전혀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어 시선이 딴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루첼은 조심스레 물었다. ".....누구냐고 묻지는 않겠는데, 왕비 파 쪽 사람이니?" 실비가 가만히 루첼을 바라보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째서...그렇게 말하는 거지?" "그렇지 않다면 고민할 필요가 없잖아." 실비가 다시 눈물을 떨구었다. 눈 안에는 절망과 슬픔이 원망을 담 아 흐르고 있었지만, 루첼은 그 눈빛마저도 철저히 자기 식으로 해 석할 뿐이었다. "아니니?" "저, 난.....오빠를 좋아해. 정말....너무 좋아해." 루첼이 웃었다. 나도 널 좋아해, 라는 뜻이었지만 그것은 실비가 바 라는 것은 아니었다. 차라리 놀라거나 당황해 주었다면 더 나았을 것이다. 이렇게 애 취급당하는 것은 싫고, 비참하기까지 했다. 실비 는 눈을 질끈 감고는 힘껏 말했다. "좋아...한다고!" 겁에 질린 작은 새처럼 떨리는 목소리에, 원망은 이제 절망과 비슷 한 색채였다. 그러자 루첼이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 "...실비." "...." "오해했나 보구나. 너를 달래는 게 아니야. 도울 수 있는 일이면 얼 마든지 도와줄 테니, 우선 말 해봐. 누구지?" ".....난...." "그래." 실비는 루첼을 빤히 바라보았다. 안경너머의, 그 부드러운 눈동자는 실비가 정말 원하는 것은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았고, 솔직하게 말한다면 이 사람은 아까 그랬듯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실비를 돌려보낼 것이다. 미안하다, 라고 말 하며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더 현명한 지 말할 것이다. 그리고 연약 한 가망마저 '아예' 없어지는 그 때까지 앞에 나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루첼은 그럴 사람이었다. 열정에 자신의 운명을 걸기보다는, 지치고 고될 현실을 생각하는 사 람이었다. "저, 쥬드....오빠 불러주겠어?" 그리고 기대했지만, 루첼은 웃어주었을 뿐이었다. "녀석이었어?" 스스로가 얼마나 비겁한 지 잘 알았지만, 그래도 실비는 용기를 낼 수 없었다. 실비는 그저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그럼....왜....여기 까지 왔겠...어?" "남자 보는 눈도 없구나. 하필이면 그 녀석이라니.....나중에 후회해 도 소용없는 건 알지?" "아, 알아." "그래도 다행이다. 내가 좋아하는 녀석이라서." 루첼은 실비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갈색 곱슬머리가 손가 락 안으로 감겨 들어오며, 소녀의 뜨거운 체온과 부드러움이 손 끝 에 닿았다. "쥰이라면 졸업하는 데는 좀 걸릴 테지만 결혼은 녀석만 잘 하면 잘 될 거야. 명문 루크 페일리 가(家)의 녀석이니까." "응." "그럼 난 이만 갈게. 그리고 사실, 만나서 정말 기뻤고....그런 이야 기 해 줘서 고마워." 순간 실비가 루첼의 품안으로 파고 들어가며, 울음을 터뜨렸다. 루 첼은 그런 실비를 아이 달래듯 토닥거려 주었다. 몸은 떨렸고, 눈에 서 솟아 나온 눈물이 루첼의 셔츠를 적셔왔다. 한참 만에야 실비의 떨림이 잦아들자, 루첼은 그 어깨를 잡고는 가만히 밀었다. "가을에 보자." 루첼은 뒤돌아 골목 쪽으로 가면서 쥰에게 뭐라 말했고, 그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이내 골목길로 사라졌다. 쥰이 오는 것이 보이자, 실 비는 스스로의 비겁함이 혐오스러웠고, 그만큼 고통스러웠다. *********************************************************** 작가잡설: 제가 실비라면 달려가 뒤퉁수 갈깁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8장 ***************************************************************** [겨울성의 열쇠] 제35편 금빛 암사슴#6 ****************************************************************** "네 일행은 다 가버리고 없네." 아킨은 그녀가 사서 안겨준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돌아가는 길은 잘 알고 있으니 괜찮아요." "정말? 너, 예전에는....." "그 때는 열 두 살 짜리 꼬마였지만, 지금은 열 일곱 먹은 '소년'이 죠.......벌써 5년이나 지났다고요." 아킨은 맥주를 단번에 비워 버렸다. 그러자 그녀가 잔을 계단의 난 간에 놓고는, 아킨의 입술에 묻은 거품을 닦아주었다. "뭘....아직도 애 같은 데." 순간 아킨은 그녀의 가면을 빼앗았다. "아키, 너!" 화사한 얼굴이 드러났다. 화장기 없는 맨 얼굴에, 건강한 연푸른 색 눈과 상아빛 살색을 가지 고 있었고 땀에 젖은 이마에는 금빛의 신선한 머리카락이 붙어 있 었다. 눈동자는 개구쟁이처럼 장난스런 빛이 가득해, 벌써 여인의 모습을 가진 그녀를 장난기 많은 소녀 같이 느껴지게 했다. 그런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아키, 상자를 열면 이야기는 끝나는 거라고." "가시겠다는 말인가요?" "글쎄...." 그녀는 가면을 도로 빼앗아 들고는 아킨의 턱을 톡톡 건드렸다. "애교 떨어봐. 귀여우면 남아주지." 아킨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저 쪽에서 선배를 감시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소녀는 아킨이 눈짓으로 가리키는 곳을 돌아보았다가 같은 것을 발 견하고는 이마를 찌푸렸다. "맙소사, 엄마가 정말 펄펄 뛰고 있나봐. 저 사람들이 나온 것을 보 니...." 걱정은 하나도 하지 않는, 오히려 조롱 가득한 목소리였다. 아킨이 말했다. "각오하고 나온 게 아닌가요?" "무시하고 나온 거지." 아킨은 피식 웃고는 고개를 숙여 말했다. "어쨌든, 가보는 게 좋겠어요." "저 사람들한테?" "도망치던 붙잡히던, 그건 당신이 선택할 바죠. 알아서 하세요." "그리고 넌 어쩌게? 그냥 보내버릴 거야?" "선배, 저는 선배의 기사가 아니에요. 스스로는 스스로 지켜보세요." "예나 지금이나 매정한 왕자로군." 그렇게 말하고는, 그녀는 아킨의 입술 위로 손끝을 가져갔다. "우선 눈을 감고......자, 속으로 열까지 세고 눈을 떠봐." 아킨은 눈을 감았다. "정말 눈감아 주네, 순진한 왕자님." 그녀의 손이 스르르 빠져나가더니, 가벼운 입맞춤이 아킨의 볼을 스 쳤다. 그리고 바람에 사르락 거리는 소리처럼 작은 속삭임이 조용한 숨소리와 함께 살며시 파고들었다. "다시 봐, 아키 왕자님." 아킨은 눈을 떴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없었고, 아킨의 손에는 작은 쪽지가 들려 있 었다. 아킨은 그것을 펴 보았다. 그리고 내용을 확인하자, 그것을 쥔 채로 웃어버렸다. 역시나, 5년 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하지 않은 그녀였다. 아킨은 벌써 열 일곱이 되어 버렸는데, 그녀는 그 사실을 지금도 모르는 듯 하다. 그녀 곧장 광장을 나가, 마차를 대기시켜 놓은 곳에서 기다리고 있 던 여기사에게서 망토를 받아 어깨에 감았다. 그리고 금발머리를 뒤 로 다 쓸어 넘기고는 말했다. "수고했어, 라키." "당연히 할 일입니다. 그리고 어서 빨리 돌아가시는 게 좋을 듯 합 니다." "그렇지, 뭐. 지금쯤 엄마가 내 방을 다 헤집어 놓은 다음....내 시 녀들을 모조리 족치고 있을 테니.....그리고 당신도 어서 나오죠, 도 둑님." 주인의 날카로운 말에, 여기사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주인은 턱을 쳐들고는 맞은 편을 바라보았고, 그 쪽에서 말발굽 소 리가 달각 달각 들리더니 검은 말과 그 위에 탄 기수가 나타났다. 말이 고개를 젖히며 푸륵 울었다. "말에서 내려 주십시오." 여기사, 라키 경이 엄격하게 말하자, 그 기수는 순순히 말에서 내려 왔다. 키가 크고 체구도 꽤 좋은 남자였다. 몸놀림은 유연했고, 그 태도도 왕이라도 되는 듯 꽤나 당당했다. 그리고 남자의 차가운 회색눈은 약간은 경멸조로 그녀를 향하고 있었고, 그 눈빛에 대해 '그녀' 역시 비웃음으로 화답했다. 남자가 말했다. "소문은 들었지만 행실이 이 정도 일 줄은 몰랐소. 평민들의 난잡한 축제에 들어가서 아무 남자 손이나 잡고 춤이나 추고 있다니." 그녀는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과하게 격식차리는, 그래서 외려 조롱 하는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당신은 그 행실 나쁜 여자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며 할 머니처럼 잔소리나 늘어놓는중이군요. 이건 소문 들은 적이 없는데, 제가 퍼뜨려 드릴까요?" 라키 경이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부드러운 갈색머리를 가진 준수한 용모였으나, 그 눈만은 아주 날카로웠고 그 창백한 회색 눈동자도 잔인하게 번득였다. 남자가 말했다. "돌아갑시다." "돌아갈 생각이었어요. 그리고 '갑시다--'라고 끝나는 말을 하는 경 께 죄송하지만 제 마차는 여자 용 이라서요." "켈브리안 공주." 라키 경은 본능적으로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반대편 골목길 끝에, 다른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라키 경은 칼자루 쪽으 로 슬며시 손을 가져갔다 켈브리안 공주가 말했다. "저 앞에 계신 귀한 분의 부하야. 신경 쓰지 마." "알겠습니다." 그리고 켈브리안 공주는 남자에게 허리를 살짝 숙이고는 한껏 정중 하게, 그래서 더 조롱하듯 말했다. "그럼 궁에서 뵙지요." 결국 알아서 오라고 하는 것이다. "알겠소." 켈브리안은 그런 남자를 한번 쏘아보고는, 치맛자락을 앞으로 휙 당 기고는 앞으로 나갔다. 하얀 치맛자락이 어둠 속에서 펄럭였고, 작 은 말소리가 들려왔다. 비웃음이 터지고, 경멸 섞인 속삭임이 들려 온다. 공주가 사라지자, 남자 쪽으로 그 부하가 다가왔다. "아, 세르네긴. 민망한 꼴을 보였군." 부하가 후드를 벗었고, 갸름한 얼굴에 조용한 녹갈색 눈을 가진 얼 굴이 드러났다. 표정은 건조했으나, 그 얼굴만은 미인처럼 수려했다. 세르네긴은 이마로 늘어진 검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고는 조 용하게 말했다. "누군지 알 것 같습니다." "누구지?" "암롯사의 둘째 왕자입니다." 남자의 눈이 짓궂은 흥미를 담아 미소를 지었다. "그 둘째 왕자는....압셀론에서 나간 뒤 그 누구도 보지 못했다. 어떻 게 아는 거지?" "그 쌍둥이형이 제도 토머넌트에서 제 마지막 상대였으니까요. 일란 성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로등 빛에, 세르네긴의 볼에 길게 드리워진 흉터가 머리카 락이 흩어지며 드러났다. 남자는 그 흉터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말 했다. "그 쪽과는 얽히고 싶지 않은데." *********************************************************** 작가잡설: 아키는 연상킬러...인지, 어벙해서 연상에게 찍히고 먹 히는 건지..... 지금 하는 꼴로 봐서는 후자같지요? ^^;;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9장 *************************************************************** [겨울성의 열쇠] 제9장 넘치는 잔 제36편 넘치는 잔#1 **************************************************************** "켈브리안, 너 정말!" 브리올테 왕비는 호되게 그 이름을 불렀지만, 켈브리안은 울화가 터 지기 직전인 어머니를 앞에 놓고서도 태평하게 턱을 들고 있었다. 옷은 벌써 갈아입어서, 방금 전 거리를 누비던 가장 행렬 용 의상 대신 번듯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머리카락도, 그 분야에 있어서 는 숙련이 되다 못해 신기의 경지에 이른 그녀의 시녀들이 빗고 땋 고 핀을 끼우고 해서 감쪽같이 치장해 놓았다. 차림새만으로는 공주 는 그저 '조금 늦게' 도착한 듯 보일 뿐이었다. 왕비는 그런 딸을 쏘아보고는 말했다. "쉐플런 경은 어디 있지?" 켈브리안은 태연하게 말했다. "제 방에 온 일은 없는 데요." "켈브리안. 나를 조롱하지 말아라." 내쏘듯 엄격한 어투였다. 이 키가 큰 브리올테 왕비는 무시무시하기로 이름 높은 전대 여왕 티폴라 여왕에 비해서 좀 이성적이고 능력이 있다 뿐 크게 선한 성 격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티폴라 여왕을 은근히 무시하고 경멸해 오다가, 그녀에게 수난을 당하면서 성격은 더욱 모질게 변해 있었 다. 성 꼭대기에서 뛰어내렸던 여왕이 즉사하지도 못하게 '이상한 시술'을 했던 것도 그녀의 명을 받은 어느 이름 모를 의사였다. 독 살하려 한다, 뭐다 해서 말들이 많았지만 시의들이 지금은 뭐라 말 할 수도 없는 것이, 여왕은 제 살을 쥐어뜯을 정도로 괴로워했지만 분명 살아 있었다. 보다 못한 시의들이 그 이상한 의사를 쫓아내고 자신들이 직접 치료를 하는 순간, 여왕은 즉시 죽어버리고 말았다. 그것을, 당시에 열 한 살이었던 켈브리안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분명 기억하고 있었으며, 이유가 무엇인지, 어머니가 대체 어떤 방 법을 썼던 것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잔인하고 무서운 여자였다. "슈마허...그 사람이라면 곧 올 거예요." 켈브리안은 그렇게 답하고는 머리 위에서 바닥까지 늘어진 베일을 잡아끌었다. 브리올테 왕비가 물었다. "왜 같이 오지 않았니?" "함부로 남자를 태우는 버릇은 없는 데요." "그냥 남자가 아니야, 그는. 친절하게 해 주지는 못할 망정, 하인보 다 못한 대접을 하다니!" "그럼 마차 안에서 유혹이라도 했어야 했다는 말씀인가요?" 켈브리안의 말에 날이 섰다. 그것은 노골적인 조롱이었다. 왕비는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꾹 물고는 자신을 추슬렀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하고는 억지로 태연하게 말했다. "못 할 것도 없잖니." 기대한 것도 없었다. 정말 그러라는 것이 아니라, 딸에게 몰리는 것 이 싫은 것 뿐이다. 켈브리안은 냉랭하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저는 누굴 유혹하는 데는 통 재주가 없는 걸요. 그리 고......어머니, 어머니는 당신의 딸에게 숙부님이 보낸 플리나 부인이 아버지에게 했던 것처럼, 슈마허 그 사람에게 그런 짓을 하라는 건 가요?" 플리나 부인이라면, 숙부인 그레코 공작이 왕인 엔리케 4세에게 소 개했던 미녀였다. 그리고 여자를 크게 반기지는 않는 왕도 그 놀랍 게 아름다운 여자에게 애정을 주고 있었다. 즉, 그녀는 지금 왕의 정부였다. 분노와 모멸감에 왕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켈브리안은 자신이 생 각해도 좀 심했다는 생각이 들어,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너....!" 목소리가 자제를 잃고 올라 갈 만 하자, 저 뒤에서 누군가가 그 싸 움을 말리고 나섰다. "또 공주님을 혼내고 계신가요, 왕비 전하." 그 목소리에, 브리올테 왕비의 얼굴이 확 변했다. 켈브리안은 나른 히 한숨을 내 쉬고는 고개를 돌려 버렸고, 어머니는 딸인 켈브리안 이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얼굴을 붉힌 채 말했다. "어머나, 쉐플런 경. 오셨군요." 남자는 천천히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키가 큰 그의 어깨가 공주의 정수리 부근에 걸렸고, 켈브리안은 그를 흘끔 보고는 휙 눈길을 돌 렸다. 그러나 왕비는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오해하지 말아줘요, 쉐플런 경. 전 그저 공주가 워낙에 제 멋 대로 라 훈계를 하는 것뿐이니까요." "압니다." 켈브리안은 차가운 회색 시선이 어깨와 허리를 훑는 것을 느꼈다. 소름이 오싹 끼치고 치욕스럽기까지 했다. 저 뱀 같은 남자, 켈브리 안은 속으로 그리 욕을 퍼부어 대고는 치마를 당겼다. 브리올테 왕 비의 눈이 단번에 날카로워졌다. "켈브리안, 어디 가는 거지?" "무도회장으로요. 늦기 전에 가야죠." 그러자 왕비는 남자에게 켈브리안이 역겨울 정도로 친절하게 말했 다. "아아, 그럼....쉐플런 경, 같이 가 주시겠어요? 저 나이 되도록 다른 누군가의 에스코트를 받아 무도회 장에 들어간 적이 없답니다." "영광입니다." 켈브리안은 기가 막혔다. 켈브리안은 사실, 언제나 그 동생인 베르티노 왕자의 에스코트를 받 아 왔었다. 어리고 병약한 동생에, 키가 크고 아름다운 누나라 오히 려 동생이 에스코트 '되는' 모양새가 되어 버렸지만, 그녀는 남자들 을 귀찮아하고, 그 남자들은 그녀를 두려워하는 상황이니 베르티노 왕자만큼의 적임자도 없었던 것이다. 슈마허가 다가오자. 켈브리안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손을 쓱 내 밀 었고, 델커드는 그 손을 잡으며 속삭였다. "그 꼬마 왕자에게는 잘 해주던데요." 켈브리안이 조롱하듯 웃었다. "느끼하고 뻔뻔한 중년은 딱 질색이지만, 연하의 미소년에게 약하거 든요." 다행히 왕비는 벌써 연회장으로 돌아갔고, 아마도 그곳에서 시치미 뚝 떼고 앉아서 슈마허와 딸이 들어오면 사람들을 불러 한껏 '사이 가 좋군요.' 어쩌고 하면서 띄워줄 것이다. 순간, 슈마허의 큰손이 공주를 휙 잡아당기더니 통로로 밀어 넣었 다. "--!" 공주는 빠르게 손을 빼고는, 도망치는 대신 벽의 모서리에 등을 댔 다. 슈마허는 아차 했다. 위치가 너무 애매했다. 허튼 짓을 했다가는 당장에 도망칠 수 있는 위치였으며, 그렇다고 공주에게 왜 피하냐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분명 델커드 가까이 있었으며, 웃고있기 까지 했다. 결국 슈마허는 포기하고 두 손을 위로 밀어 올리고는 몸을 뗐다. "졌군, 왈가닥 공주님." 켈브리안은 그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쿡 찌르며 날카롭게 말했다. "이상한 기대 하지 말아요, 치한 경. 난 어머니를 위해 당신 침실로 가 줄 정도로 효녀는 아니니까." "숙녀 분이 못하는 말씀이 없군요." "당신이 그렇게 창녀 보듯 온 몸을 훑어대지만 않으면 저도 신사 대접 해 드리죠." 그리고는, 방금 전 슈마허가 잡았던 손을 불쾌하다는 듯 흔들고는 치마를 잡고 혼자서 무도회 장으로 향했다. 슈마허는 그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 따라가지 않았다. 이 이상 치근덕대서 경멸받는 것은 사절이며,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고, 정 안되면 '포기' 라는 아주 좋은 방법도 있다. "쉐플런 님." 멀찍한 곳에 몸을 숨기고 있던 벌써 세르네긴이 다가와 있었다. 호 리호리한 체형에, 워낙에 날렵한 몸가짐을 가진 그라, 그렇게 소리 없고도 신속히 다가온 것이다. 슈마허가 말했다. "이만 돌아가자, 세르네긴." "무도회는 어쩌시겠습니까." "미치광이 축제의, 천박하고 시끄럽기만 한 무도회 일 뿐이야." 그리고 잠시 말을 끊었다가, 세르네긴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가서 술이나 한잔하자. 그리고 안주로는 네 귀여운 동생 이야기나 하지." 세르네긴의 건조한 얼굴에 잠시 미소가 번졌다. 루첼은 바로 기숙사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축제 기간에는 엄청 나게 위험하다는 이유로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않았던 항구로 나가, 첸과 에나를 찾아갔다. 제임의 주점에 가니, 어느 건장한 사내에게 달라붙어 질펀하게 놀던 에나가 루첼을 보자마자 그 사내를 냉큼 던져 버리고는 루첼에게 달려왔다. "루치---!" 상대 사내는 험악하게 욕을 하며 몸을 일으키다가, 루첼을 발견하고 는 손을 흔들었다. "어이, 루치 아냐! 네가 축제에는 웬 일이냐?" "놀러." 진한 붉은 머리 여자 하나가 재빨리 다가와 루첼의 입에 담배를 물 려주고는 불까지 붙여 주었다. 에나가 그 여자를 살쾡이처럼 쏘아보 고는, 루첼의 팔을 꽉 감아 가슴 안으로 당겼다. 루첼이 물었다. "저기, 첸 있어?" "여기 있지!" 사람들은 와르르 웃어젖히더니 옆으로 쏴 물러났다. 그러자, 테이블 위에 엎어져 있던 첸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엎드린 채로 손만 허우 적대니, 시체에 동체마법이라도 건 것 같아 보였다. "체니, 너 꼴이 뭐냐?" "유, 유만이....왔어어어어어어어--끅! 너 알지, 끅?" 하고 중얼중얼 대는데, 그 말은 즉 거리 최고의 주당이었던 유만이 돌아 왔다는 말이었다. 루첼은 빠르게 주변을 훑어보았고, 저 편에 서 손을 흔들고 있는 키가 작고 팔이 긴 사내를 발견했다. 루첼과는 거의 동갑이었지만 적어도 다섯 살은 많아 보였다. 예전에도 뾰족했 던 턱이 지금은 말라서 송곳 같아 보였다. "어이, 뺀질이 루치. 너, 학교 들어갔다며!" 유만이 루첼의 가슴을 퍽퍽 치며 그렇게 말하자, 루첼은 긍정의 의 미로 손을 들어 이마에 대 보였다. 그러자 옆에서 첸이 배배 꼬인 목소리로 외쳤다. "그냥 학교에 들어간 게 아니라고--! 맨 날 수석이야, 수석--끅-- 괴물 같은 녀석. 하긴 원래 괴물이었...끅, 지......깩." 하고 다시 픽 쓰러졌다. 루첼이 유만에게 물었다. "넌 뭐하다가 나타난 거냐?" "나? 북에서 일 하다가 안 풀려서 돌아온 거야." 유만이 히죽거렸다. 루첼은 그를 빤히 보다가, 담배를 위 아래로 흔 들어 재를 털어 냈다. "말은 그렇게 하는데 아주 근사해 졌네, 유만. 별 고생 한 것 같지 는 않아." "너야말로 아주 근사한 학생이다." 말 돌리기는.....루첼은 속으로 비웃고는 넉살 좋게 말했다. "나야 원래 근사했지." 주변 사람들이 다시 웃어 젖혔다. 주점 무희출신이었던 어머니를 닮 아, 루첼은 어렸을 때부터 키도 크고 아주 반듯한 얼굴이었다. 그리 고 에나가 루첼을 가장 귀여워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저 쪽에서 술잔 두 개가 사람들 손을 거쳐오더니, 두 사람에게 쥐어 졌다. 둘은 술이 튀도록 건배를 하고는 단숨에 마셨다. 저 편에서 기타를 치던 여자가 깔깔 웃더니 기타를 탕탕 쳤고, 다른 사람들도 어이--! 하고 크게 외치고는 들고 있던 잔을 벌컥 들이켰다. 루첼은 옆에 찰싹 붙은 에나의 허리를 휘감아 안으며 말했다. "난 잠깐 들어가 본다." 에나가 콧소리를 내며 몸을 붙였고, 유만은 눈을 둥그렇게 뜨더니 그런 둘을 번갈아 보았다. "너희 둘--야, 에나! 이거 범죄잖아! 네가 몇 살인데!" "어머나, 어리니까 나이 먹은 누님이 가르쳐 줘야 하는 거 아니겠 어? 가자, 루치~" "에나, 엉덩이 만지지 마...." 루첼은 나직이 속삭이고는 에나를 끌어당겼다. 사람들이 옆으로 죽 죽 물러나더니, 야유까지 퍼부었다. 에나가 팔에 볼을 찰싹댔다. 루첼은 그녀를 끌어 당겨서는 아무 방 에나 들어갔고, 침대 하나가 겨우 들어가는 비좁은 방에 둘만 있게 되자 루첼은 우선 주변을 둘러보고는 셔츠 단추를 풀었다. 방은 누 가 벌써 문 닫고 뒹굴다 갔는지 끔찍할 정도로 더웠다. 에나가 침대 위에 앉아 다리를 꼬더니 루첼까지 같이 녹아 내릴 정 도로 말했다. "뭐가 그렇게 궁금한 거야, 루치.....?" 루첼은 턱으로 밖을 가리켰다. "유만, 저 녀석이 여긴 왜 와 있는 거지? 저 녀석은 우리와 친하긴 했지만, 여기가 아닌 저기 노조 쪽이다. 첸이 아니라 커베인를 먼저 찾아가야 옳아. 아무리 이곳이 상위조직이고 그 쪽이 하위조직이라 지만." 에나가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제임은 술을 마시고 있지 않아. 그리고 나 역시....보다시피 이렇게 멀쩡하지. 걱정 말라고." "그럼 왜 따라 들어온 거지? 계속 밖에 있지." "방금 전 뮤릴러에게 맡기고 왔어. 내가 술도 안 마시고 계속 붙어 있으면 그 자식 금방 눈치 챌 테니까." "그럼, 그 녀석이 왜 온 건지는 알아냈어?" 에나가 손가락을 들더니 양쪽으로 까딱거렸다. "루치, 유만이 그렇듯 너도 '이제는' 정보 길드원이 아니야. 가르쳐 줄 수 없지." 루첼은 얼굴 쪽으로 차갑고 어두운 것이 확 번지는 것 같았다. 그가 담배만 뻑뻑거리자, 에나는 콧소리를 섞어 말했다. "벌써 삐친 거야? 하지만 우리들 다 너를 너무 좋아하니 걱정 마. 특히 제임은, 아마 네 일이라면 자기 목숨이라도 걸걸?" "알려 주지 않아서 화가 나는 게 아니야. 너무 헐렁해 보여서 좀 걱 정된 것뿐이라고...." 루첼은 담배를 한 모금 더 빨아들이고는 덧붙였다. "게다가 난 나간지도 한참 됐고....괜찮아." 창 하나 없는 방은 금방 담배 연기로 꽉 차버렸다. 에나는 손을 휘 휘 저어 연기를 흐트러뜨리고는 말했다. "그런데 왜 온 거야? 축제 때에는 옛날부터 얼씬도 안 했잖아." 사실, 그 때에는 제임과 함께 교외에 묻힌 어머니와 아버지를 찾아 갔었다. 둘 다 어찌된 일인지 루피니아 축제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 고, 어느 날부터인가 그 때가 되면 둘 다 꽃과 검은 옷을 준비하고 는 그곳까지 터벅터벅 걸어갔던 것이다. 생각해 보니, 제임은 오늘 아침부터 자기 집에서 루첼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조금 있다가 가 봐야 겠네, 하고 생각하는데 에나가 다시 치근덕 댔다. "루치이?" "아, 뭣...좀 물어보러......" "뭘?" 루첼은 담배를 바닥으로 집어던지고는 발로 비벼 꺼버렸다. "루크 페일리 가는 어느 쪽이야?" 에나는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흐응---왜 왔는 지 이젠 확실히 알겠다. 그 쪽은 워낙에 명문상단 이라서 금방 들어왔어. 공작파 라는 걸." 루첼은 안심했다. "왕비 쪽으로 붙은 상단은 없어?" "비슷할 정도로 있어. 루크 페일리 가가 대공으로 붙으니, 왕비 쪽 으로는 일 비오네드 가가 붙었지. 이런 식으로 하다 보니 양쪽으로 비슷해지더라고." "체니는 뭐래?" "장사가 아주 잘 된다고만 해. 뭐, 지금으로서는 어느 쪽이 이길 지 점치기 어렵거든....그건 그렇고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 행여, 너 후원금 끊어질 까봐?" "꼭 그런 건 아니고.......그냥, 친구 녀석 일 때문에." 그렇게 말하며, 루첼은 자신이 오늘 잘 결정한 것인지, 선뜻 결론을 내리기 어려웠다. 이성적으로는 너무나 현명한 선택이었건만, 그는 지금 실비에게도 쥰에게도 죄책감을 느꼈고, 자신의 비겁함에 대해서도 혐오감이 일 어날 지경이었다. 이성은 찬물처럼 차가운데, 피는 뜨겁게 소용돌이 치며 스스로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대상 없이 화가 치밀어 오르고, 자신의 처지에 대한 서글픔이 밀려들어왔다. 뭘 한 거냐, 루첼 그란 셔스. 하지만.....'받아 들였다' 할 지라도, 그는 아무 것도 해 줄 수도 없었 고, 오히려 실비의 짐만 커지게 만들었을 것이다. 루첼은 늘 책임 질 수 없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었으며, 그렇게 노 력해 왔다. 지금 역시 그런 생각에 따라 그렇게 한 것인데, 평소처 럼 편안한 것이 아니라 계속 가슴이 뜨거워진다. 심장이 너무나 뜨 거워서, 터질 것만 같았다. 혐오감과, 죄책감과, 슬픔에 정말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작은 창문 밖으로 왁자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둠을 타고 흘러와, 침 묵을 깨뜨리는 축제의 음악- 루첼은 전혀 즐겁지 못한 자신을 발견했다. 에나가 옆으로 붙더니 살그머니 물었다. "루치....왜 그래?" "내 표정....많이 이상해?" "울기라도 할 것 같은데?" "....." *********************************************************** 작가잡설: 새로운 부부....가 아니라, 어쨌든 새 등장인물이 등장했습 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9장 *************************************************************** [겨울성의 열쇠] 제37편 넘치는 잔#2 **************************************************************** 아킨이 기숙사로 돌아와 보니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정말 썰렁한 바 람이 불어 올 정도로 컴컴하고 적막했다. 아킨은 루첼이 그 실비라는 여자애만 데려다 주고 돌아올 거라 생 각해서 문을 잠그지 않고 바로 침대로 들어가 누웠다. 그러나 아무 리 뒤척여도 통 잠이 오지 않아, 결국 일어나 앉아야 했다. 사실 머릿속이 정말 뒤죽박죽이었다. 오늘 무슨 짓을 한 건지, 생각만 해도 영 꺼림칙했다. 켈브리안 공주와 만난 것은 압셀론에서였다. 그녀는 당시 열 셋이었 으며, 아킨은 무엇이든 제대로 해 보고 싶었던 열 한 살 소년이었 다. 아킨이라고 처음부터 교수들을 두들겨 패고 다니던 것은 아니었 다. 처음 1년 간 아킨은 열성적이고 성과도 좋았던.....놀랍게도 기대 주였다. 그랬던 그가, 결국 검을 포기하고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된 것은 순전 히 형 휘안토스 때문이었다. 열 한 해 동안 차곡차곡 쌓여왔던 질투 는, 스스로도 너무나 괴로운 길이 될 것이 뻔한 검을 포기하게 했 다. 하나를 배울 때마다 '그는 어떠할까-' 그리고 하나를 이루어 낼 때마다 '과연 그는 얼마 만에 이것을 이루어 냈을까.' 그런 생각이 치밀어 오르는데, 가슴이 화끈거려서 도무지 주체할 수가 없었다. 아킨은 결국 검을 집어 던져버렸고, 그렇게 아무런 성취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압셀론의 생활은 더욱 괴로워졌다. 뿐만 아니라, 학교 를 나가면 당장에 호위가 따라 붙었고, 그것은 '감시'이자 '통제'였으 며, 늪의 성에서의 감금생활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는동안, 1 년 먼저 들어와 있던 휘안토스는 한번의 월반을 통해 다음학기에 바로 중급반 과목을 듣게 되어 버렸다. 그것을 보면 다시 질투가 치 밀어 오르고, 차라리 아득바득 해서 그를 따라 잡는 것이 좋지 않을 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다 보니, 원체 말이 없던 성격에 더 말이 없어져 버렸고, 사람들이 건드리면 외려 날카롭고 거칠게 날을 세우곤 했다. 그러나 한참이나 선배였던 그녀는 오히려 그런 아킨에게 관심을 보였다. 다른 학생들 보다 조금 이른 나이인 아홉 살에 들어 와 벌써 졸업반이 되어 있던 켈브리안 공주가, 왜 하필 그런 아킨을 눈여겨보았는지, 그 이유는 아직도 수수께끼였다. '그냥 마음에 들어, 너. 아주.' 하고 어깨를 으쓱해 보였을 뿐이다. 그리고는 아킨이 입학하던 해 겨울에, 병아리 같던 아킨을 붙잡아 승마를 다니고 사냥도 했다. 심 지어 등산 하자고 끌고 나가기도 해서, 아킨의 호위들을 다 벌컥 뒤 집어 놓게 했다. 그리고 그 덕에 아킨은 겨울 휴가 내내 늪의 성에 갇혀 있기까지 했다. 봄이 되자 그녀는 춤을 가르쳐 주었고, 그 즈음 열 두 살이 된 아킨 도 열 네 살이 된 켈브리안도 서로의 입장을 대충이나마 알게 되었 다. 깊은 이야기는 나누지 않았다. 아킨은 너무 어렸고, 켈브리안은 너무 반항기가 많았고 자존심도 강했다. 그저 아킨은 '말못할 병'이 있다는 것과, 켈브리안은 '마귀 같은 할머니'를 피해 압셀론으로 도 망 왔다는 것 밖에는 알지 못했다(그 때는 벌써 죽어서 그 아버지 가 왕이었긴 했지만). 그래도 둘은 압셀론에서는 최초이자 최후의 친구였으며 너무 늦게 알게 된 동반자였다. 그 해 켈브리안은 졸업을 하여 압셀론을 떠났으며, 그녀가 압셀론을 다시 찾아왔을 때 아킨은 이미 퇴학당하고 사라진 뒤였다. 그 후 행 적에 대해서는 암롯사에서 철저하게 비밀로 붙였기 때문에, 켈브리 안은 아킨이 어디로 간 것인지 도저히 찾아낼 수 없었고, 로멜로 전 학 올 때 겨우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반가운 마음에 암롯사로 까 지 찾아온 것이고....라기 보다는 어떻게 괴롭혀 줄까, 해서 슬쩍 들 여다 본 거겠지. 아킨은 그녀가 주고 간 쪽지를 다시 펼쳐 보았다. 그 안에는 '5월 10일, 아침 9시' 라는 말과 함께, 왕실 문장이 새겨진 반지가 들어 있었다. (그 밑에 뭐라 적혀 있기는 한데 차마 다시 읽고 싶지 않았 다.) 그날 궁으로 오라는 말이며, 아무리 봐도 그저 '그날 같이 놀자'라는 건 아닌 듯 했다. 그럴 생각이었다면, 비밀 호위들을 감고 다니던 꼬마를 백주에 납치(?)해서 로메르드와 암롯사의 외교문제까지 일으 킬 만큼 배짱 좋은 그녀가, 아킨이 전학 오자마자 연락을 하지 않았 을 리 없다. ".......이상하게 돌아가는 군." 퇴학을 당하려고 발악을 하다가 겨우 퇴학당할 수 있었던 압셀론, 될 대로 되라지 하면서 살다가 결국에는 교수 셋을 때려눕히고 그 만두게 된 베넬리아를 거쳐 이곳에 오니..... 마치 아킨을 기다렸다는 듯 일들이 일어난다. 컬린의 제자가 그의 스승이 되어 주었고, 이제는 5년만에 켈브리안까지 만나게 되었다. 로메르드로 오면서 그녀와 만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안 해 본 것 은 아니지만, 들어와도 한참이 지나도 연락이 없어, 그저 '잊었거 니...' 했었다. 그리고 사실 두달 만에 포기하면서 우리 둘 사이에는 특별한 일은 없었어, 라고 스스로에게 말하기도 했다. 당시, '이성'이 라는 감정은 아킨에게나 켈브리안에게나 전혀 없었다 해도 무방했 다. 아킨은 그런 감정에 신경 쓸 만큼 여유롭지 못했거니와, 벌써 여자티가 나던 켈브리안이 열 두 살밖에 안된 꼬맹이 아킨을 '남자' 로 보기도 어려웠다. 물론, 그녀와 1년 만 더 있다가 헤어졌다면 상 황은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쌍둥이이긴 했지만 이상하게 휘안보다 키도 작고 어려 보이던 아킨은 열 세 살이 되면서 갑자기 크기 시 작했고, 휘안과 얼굴도 키도 똑같이 되더니 같은 속도로 자라기 시 작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켈브리안 역시 놀랐다. 그 아기 도깨비처 럼 사납기만 했던 아이가, 5년만에 그렇게 놀랍도록 자라 있었던 것 이다. 그러나 아킨이 보기에 켈브리안은 전혀 변한 것이 없었고, 그 리 화장을 해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아킨은 반지를 세 번째 손가락에 끼워 넣었다. 롤레인에게 축제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말해볼까, 하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관두기로 했 다. 그녀는 스승이지 엄마가 아니다. 요란한 축제가 끝나고, 거리에 늘어진 쓰레기가 차츰 차츰 치워지기 시작하면서 며칠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루첼이 축제가 끝난 그 주 내내 결석을 했다는 엄청난 사건을 제하 고는, 학교는 금방 제 정신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아킨은 루첼이 결석을 한 통에, 거의 대부분의 교수로부터 '루첼 군은 대체 어떻게 된 건가!' 하는 질문에 들들 볶여야 했다. 감기 정도로 루첼이 결석을 할 리 없었으니, 정말 엄청난 사고라도 당한 거라 생각들 한 것이다. 그러나 아킨도 그 이유를 몰랐으니, 그저 '기숙사에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라는 말을 해서, 교수들의 걱정을 몇 배로 부풀려 주었을 뿐이었다. 쥰 마저도 별반 사이가 좋 지도 않던 아킨의 멱살을 잡아 흔들며 '대체 네가 무슨 짓을 했기래 루첼이 들어오지 못하는 거냐!' 하고 험악하게 으르렁거렸다. 책임이 없는 아킨은 쥰의 얼굴을 갈겨 버렸을 뿐이었다. 무단결석은 드디어 사흘이 되었고, 아킨은 예전에 부딪혔던 루첼의 '친구들'을 찾아 가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하는 생각까지 떠 올렸 다. 날이 그렇게 흐르자 루첼을 특히 아꼈던 카신저 교수는 패닉상 태가 되어버렸고, 율버 교수는 할 일도 많은데 안 들어온다고 강의 시간에 대 놓고 투덜거려 아킨이 또 한번 책을 들게 만들었다. (율 버는 새파래져서는 서둘러 화제를 돌려버렸다.) 드디어 나흘째가 되자, 아킨은 롤레인 교수를 찾아가 말했다. "오늘 수업은 쉬게 해 주십시오." ".....그란셔스 군 찾으러?" 롤레인도 걱정스럽기는 매 한가지였다. 지난번에 억울하게 정학 맞 을 뻔했던 것을 제하고는, 루첼은 단 한번도 결강이나 결석을 해 본 적이 없으니. 또, 다음주면 곧바로 중간고사가 시작될 터였다. 롤레 인 교수는 어려움 없이 허락해 주었고, 아킨은 채비를 하기 위해 기 숙사로 돌아갔다. 그리고 멀리 갈 것 도 없이, 방으로 돌아온 아킨은 바로 그곳, '기숙 사 방' 에서 책을 들추며 강의내용 체크를 하고 있던 루첼과 만나게 되었다. 아킨이 들어오자, 루첼은 태평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다." 아킨은 그대로 그 얼굴에 주먹을 날려버렸다. 퍼억--! "......" "일이 생겨서." "......" "일 있었다니까-!" 루첼은 턱에 찬 수건을 얹어 놓고는 그렇게 힘들게 말했다. 이가 부 러져 나가지 않은 게 다행이라, 퉁퉁 부어도 그는 꾹 참았다. "무슨 일?" 아킨은 대야에 얼음을 부으며 말했다. 붓는 게 아니라 거의 내동댕 이치고 있어, 찬 물방울이 침대까지 튀어 올랐다. "개인 적인 일." 그러자 아킨이 루첼 쪽으로 다가가 그 머리카락에 코를 댔다. "야, 임마---!" 루첼이 얼굴이 시뻘개져서는 뒤로 후닥닥 물러났다. 아킨은 쳇, 하 고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그곳'에 있었던 건 아니군." "성묘하러 갔었어." "어딘데?" "조오기......." 아킨의 눈꼬리가 올라가자 루첼은 뭐라 중얼거리고는 이어 말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좀.....마셨어. 정신 차려보니 이렇게 지났더라고." 루첼은 투덜거리며 수건을 뗐다. 그러나 아킨은 대체 왜, 하고 귀찮 게 퍼부어 대지는 않았다. 자기절제(라기 보다는 가면쓰기)가 거의 초인의 경지인 루첼이 다음 날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로 마셨고, 그날 저녁에는 일어났을 텐데 사흘이나 더 어물댔다. 이러니, 그 '개인적인 일'이라는 것이 꽤 힘 든 일이었을 것이라는 것쯤, 바보가 아닌데 어찌 짐작하지 못하겠 나. 루첼이 안경을 쓰며 물었다. "쥬나드렌은?" "녀석은.....며칠 빠졌어." "아니, 왜?" "나도 모른다. 하지만.....사람들이 너 어디갔나고 물어보면서....혹시 쥰 녀석과 어디 간 건 아닌지, 하고 덧붙여 묻더군. 그래서 녀석도 안 나온 줄 알고 있었는데, 어제 저녁에 학교로 돌아 와서는 너 어 디로 갔냐고 물었다." "그래서 뭐라고 했어?" "좀 거칠게 물어 보기래......그냥 한방 쳐줬다." 멱살을 잡고 뒤흔드는 것은, 이유가 뭐든 간에 아킨으로써는 용납하 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 때 쿵쿵--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루첼, 루체에엘--! 왔냐?" 루첼은 얼른 수건을 대야에 던져 버리고는 말했다. "나 여기 있다, 쥰." 쥰이 문을 벌컥 열었고, 루첼은 큭--하고 웃음을 삼켰다. 쥰의 눈두 덩도 퍼랬던 것이다. "화, 환상이다....." 쥰은 얼른 눈을 가리고는, 그 나머지 한쪽 눈으로 아킨을 쏘아보았 다. 그리고 루첼에게 멧돼지 돌진하듯 험악하게 물었다. "그 동안 어디 갔었어, 너!" "그냥 좀 마시고 놀고 하다가.....몸이 안 좋아서 며칠 앉아 있었어." 저런 단순한 말에 넘어갈 바보가 있나, 하고 아킨은 옆에서 턱을 괸 채 바라보았지만 쥰은 정말 바보였다. 쥰은 눈물이라도 쏟을 듯 애 처롭게 말했다. "너, 정말 사람 걱정시키고 말이야......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너보다 오래 살 테니 걱정 마라." 루첼은 턱을 슬쩍 건드려 보았다. 아직 크게 부어 오르지는 않았지 만, 아킨이 벌써 한 대 후려친 걸 알았다면 저 가엾은 쥰은 당장에 펄펄 뛸 것이다. 그런 쥰은 아킨을 흘끔 보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이, 잠깐 자리 좀 비켜 줘." "......싫.....알았다." 루첼이 쥰의 어깨너머에서 두 손을 모았다 내리는 것을 본 아킨은 순순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정말 물러나 줄 생각은 없어 서, 문을 닫자마자 바로 귀를 바짝 들이댔다. 문너머로 루첼이 일어 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날 어떻게 됐어?" 아주 지친 목소리였다. 아킨은 계속 귀를 기울였다. 녀석이 이런 투 로 말하는 것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쥰은 한참 우물쭈물 벅벅거리는 것 같더니, 더듬더듬 말했다. "나도....정말 의외였어. 사실.....난 여태 그 애가 널 좋아하는 줄 알았거든." 풋-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킨은 '저러고도 눈치 못 채면 쥰은 정말로 바보다--' 하고 중얼거 렸지만, 쥰은 정말, 아킨의 이해한계를 넘어간 바보였다. "그래서......다음날도 만났고, 그날로.....우리 큰형에게 달려가 말씀 드렸어. 마침....근처...에 있었거든." "뭐라고?" "결혼하고 싶다고." 쿵, 하고 루첼이 뭐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고 아킨도 문이 있다 는 것도 모르고 머리를 들이받을 뻔했다. "괜찮냐, 루첼?" "그, 그래서.......뭐라고 하시던?" "여기 저기 좀 부수어 버리시더니......이번 학기로 전 학년 월반 시 험을 통과해 졸업하면 허락해 주시겠다고 하시던걸." 절---대 안 된다는 말이군, 하고 아킨은 생각했다. 루첼이 컥컥, 숨 넘어가도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그게 가능하.....냐?" "그러니까 네가 좀 도와줄래? 너도 그 시험 같이 치면...." "미안하지만 마법부에는 월반시험이 없어. 그 시험 자체가, 집안으 로 빨리 들어가야 하는 일반부 애들에게 졸업장 일찍 주려고 만든 거잖아." 아킨은 휘안토스를 떠 올렸다. 압셀론에서는 그런 학생들이 꽤 많았 고, 휘안역시 그 시험을 치루고 이런 저런 승계 문제가 불거지던 본 가로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같이 치자니, 그게 말이 되? 또 컨닝 시켜 달라는 말이야?" "그건 아니고, 공부...좀 도와 달라고." 루첼은 한숨을 내 쉬었다. "쥬나드렌 루크 페일리, 그건 네 일이다. 네 선택이고, 네 책임이야. 네가 정말 결혼하고 싶다면.....네가 알아서 공부해." "루첼~~~" "어이, 너 벌써 스무 살이야. 스스로의 일에는 스스로 책임져야 할 나이 아니냐." 그리고 냉담하게 덧붙였다. "그러니 절대 도와주지 않겠고, 너 알아서 해라. 게다가 그 정도는 해 야지 여자 하나 책임 질 수 있는 거야. 언제까지 나나 네 아버지, 네 큰 형에게 기댈 수는 없잖아." "그래서.....정말 하나도 안 도와 줄 거냐?" 여기서 아마 루첼이 쥰을 쏘아볼 것이다. "물, 론, 이, 다!" 쥰이 크르르르르릉--실망의 한숨을 요란하게 내 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킨은 아차 싶어서 얼른 문 옆으로 물러났다. 쥰은 문을 열고 나오다가 옆에 있는 아킨을 한번 흘끔 쏘아보고는 말했다. "엿 들은 건 아니지?" "들었다." "너, 정말--!" 그러나 아킨은 방안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아 버렸다. 달려 들어오 려던 쥰의 얼굴이 문에 쿵 부딪혔지만 당연히 신경 쓰지 않았다. 루 첼은 창가에 기대 밖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어깨와 창백한 뺨을 늦 봄 뜨거운 햇살이 적시고 있었다. 아킨은 그런 그에게 툭 쏘듯 말했 다. "바보." 루첼이 힘없이 피식 웃었다. "눈치 챘냐?" "내가 저 바보와 똑같은 줄 알아?" 루첼은 주머니를 뒤지다가 텅 빈 것을 알고는 손을 빼 버렸다. 또, 이곳은 기숙사 안-즉, 학교 안이다. "비겁해 보이지, 나?" "두 번 배신하지만 않으면 되. 어차피 결정은 끝난 거잖아." "그래." "얼간이." "...." 아킨은 의외로 집요했다. *********************************************************** 작가잡설: 아키-(냉엄) 어디서 외박하고 이제 기어 들어온 거냐. 루첼-저, 저기....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아키-......... 퍽, 퍼벅--! 죄가 크다, 루첼! 호호호~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9장 ************************************************************** [겨울성의 열쇠] 제38편 넘치는 잔#3 *************************************************************** 루첼이 짐작하고 아킨이 확신하건데, 성질이 호랑이 같기로 유명한 루크 페일리 가의 장남이자, 후계자이자, 쥬나드렌 루크 페일리의 큰형 페오드렌 루크 페일리가 '그 조건'을 내걸며 어린 동생의 성급 한 결혼을 허락했던 것은 '그놈이 절대 통과할 리 없다.'라고 굳건한 확신 때문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다음날 루첼에게는 특급 우편이 도 착했고, 페오드렌이 보낸 그 편지에는 '절---대! 도와주지 마라!!!!' 하고, 휘갈겨 적혀 있었다. "정말 도와주면 편지에 잡혀 먹힐 것 같군." 아킨은 어깨너머로 그 편지를 읽으며 말했다. 그러나 페오드렌의 성격을 너무도 잘 아는 루첼은, 정말 도와줬다가 는 어떤 꼴이 될 지 잘 알기에 웃기 어려웠다. 그것은 편지에 먹히 는 것 보다 더 끔찍했다. 다행히 쥰은 루첼을 물고 늘어지는 대신 안 되는 머리를 동원하여 공부를 시작했고, 어느 날은 도서관에 루첼보다 더 먼저 앉아 있기 도 했다. 어찌하나 싶어서 슬그머니 다가가면 쥰은 늘 애처로운 눈 빛을 보냈지만 루첼은 무시했다. (심지어 멀찍이 앉기도 했다.) 그런 날이 한 일주일 지나고 '그 시간에도 공부해야 해!' 하는 쥰 대 신 조기졸업 신청을 하러갔던 아킨과 루첼은 올해가 아무래도 쥰 소원 성취의 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해 조기졸업 신청자는 티폴라 여왕 승하 이후 가장 많았던 것이 다. 그것은 각 집안에서 '일'이 생겼다는 뜻, 즉 지금 일이 어찌 될지 몰 라 서둘러 아들 딸들을 일찍 졸업시키고 집안으로 불러들이려 하는 것이다. 학교측으로써는 이 모든 학생들을 모두 통과 시켜 줘야 했 다. 합격이고 뭐고 없다. 그저 이름만 적으면 일반부 5학년 이상의 학생들은 모두 통과되는 것이다. 학교마저 어수선할 정도인 이유는, 현 왕인 엔리케 4세가 지난번에 쓰러졌고, 왕이 위급하다 보니 그 전에는 그래도 속으로만 들끓던 문제가 밖으로 불거져 나왔다. 물론 왕은 지난달에 일어나긴 했지 만, 겉으로 나온 문제들은 다시 그늘 속으로 기어 들어가지 않았다. 일의 내력은 대충 이러하다. 전전대 왕이었던 렉시모 2세는 소년 시절부터 늘그막까지 같이 살 아온 왕비와의 사이에서 병약한 딸 하나를 두었지만, 먼저 떠나 보 냈다. 불행 중 다행히, 그 딸에게는 다섯 살과 3개월 된 아들들이 있었다. 렉시모 2세는 이 아이들을 왕비와 함께 후계자로 키워 보려 했지만, 애지중지 키워온 외동딸을 잃은 슬픔에 시름시름 앓던 왕비 는 금방 세상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시름에 잠겼던 왕은, 손주들을 키우고 궁을 꾸러나가기 위해 신하들의 충고를 받아 들여 새 왕비 를 들였다. 그러나, 왕은 그해 예순 셋이었지만 새 왕비는 고작 스 물 다섯 살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몇 년 뒤 왕이 노환으로 골골대다가 앓아 눕자마자, 티폴라는 당장 에 어린 두 왕자를 궁밖으로 쫓아 내 버렸다. 그리고는, 몇몇 신하 들을 모아들여 자신을 여왕으로 추대하게 했다. 운 좋게도 그 당시 측근들은 그래도 쓸만했던 자들이었으며, 안타깝게도 렉시모 2세는 '왕자를 불러 오라--'라는 말조차 남기지 못하고 급작스레 세상을 뜨고 말았다. 누구에게 왕위를 물려 주라, 라는 유언장은 작성되지 못했으니 티폴 라는 잽싸게 왕좌에 앉고는 10여 년 간 제멋대로 나라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녀를 도와주었던 측근들은 차츰 힘을 잃기 시작 하더니, 그 자리를 듣기 좋은 거짓말에 능숙한 사람들이 차지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 측근들은 변방의 영지로 돌아가거나 지하감옥 에 갇혀 사라져갔으며, 그 자리는 여왕의 새로운 신하들이 차지했 다. 그리고 처음에는 제법 총명하던 그녀가 통치 후기에 한 일은 상 식적인 사람들이 보기에는 얼빠질 정도였다. 그녀의 엄청난 변덕스러움에는 누구도 따를 수 없었다. 이상한 점쟁 이를 들여서는 그녀에게 나라의 중대사를 정하게 했고, 근위대 자리 에 말조차 탈 줄 모르던 유랑예인 출신 애인을 앉히기도 했다. 그렇게 폭주하던 그녀는 나이 마흔에 통풍을 얻어 버렸고 성격은 더욱 신경질적이 되었다. 쾌유를 위해 대 미사를 올리게 했고, 그 미사에 들어간 비용은 턱이 빠질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그럼에도 병 이 전혀 차도가 없는 데다가, 심지어 악화되기까지 하자 신하들은 티폴라를 달래고 달래서, 예전에 그녀가 에크롯사로 쫓아내듯 보냈 던 첫째 왕자 엔리케를 후계자로 불러오게 했다. 티폴라에게는 다행 스럽게도, 엔리케는 티폴라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라리 게 으르다고 말해야 할 정도로 태평한 성품이었다. 티폴라는 이런 엔리 케를 끔찍하게 위해주었지만, 그가 데리고 온 아내, 에크롯사의 브 리올테에게 지독할 정도로 심술궂게 굴었다. 이유는 단 하나, 브리 올테의 이종 사촌 동생이자 에크롯사의 첫째 공녀였던 죠세피나가 '미친 여왕이 다스리는 촌구석 나라.'이라고 로메르드를 비웃었던 것 때문이었다. 겨우 열 두 살 먹은 소녀의 말이었지만, 신경질적인 여 인에게는 그 나라에 '선전포고'를 하게 만들 정도로 대단한 일이었 다. 그 때문에, 그 나라 출신이자 왕족이었던 브리올테를 티폴라 여 왕이 하녀처럼 학대한 것은 상식적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워도 티폴 라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여왕도 결국 병이 악화되어 고통에 헉헉대다가 서탑의 창에서 몸을 던졌고, 가엾게도 시종들이 달려와 그녀를 침대로 돌려 놓았을 때는 살 가망은 없었으나 그렇다고 즉사할 정도의 축복도 누리지 못했다. 그 후 한달 간 상처들은 깊이 곪아 들어갔고, 병은 소름끼칠 정도로 악화되었지만 그러고도 두 달간을 질기게 살아 있 다가, 겨울이 올 무렵 겨우 세상을 떠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왕위를 물려받은 엔리케는 누구나 예상했던 대로 이를 악물고 있던 브리올테의 손에 모든 실권을 넘겨주게 되었다. 엔리케 는 성품 독한 왕비를 별반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이 왕을 쉽게 정치에서 멀어지게 하고는 슬슬 왕권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실, 왕비는 엔리케의 동생인 그레코가 귀국하게 내버려둔 것을 제 하고는, 티폴라나 엔리케에 비해서는 비할 바 없이 뛰어난 인물이었 다. 비록 티폴라가 완벽할 정도로 망쳐 놓은 나라를 완전히 복구시 키지는 못했지만, 거의 미쳐버렸던 왕실은 겨우 제 정신을 차릴 수 있었고 그것은 그레코의 귀국으로 더욱 가속화되었다. 왕실을 복구 시키는 데, 지금은 철천지 앙숙이 되어버린 둘은 물론 서로 협조했 고, 결과도 좋았다. 그렇게 일종의 '공동 정권'을 구축하던 중, 왕비 는 왕자 베르티노를 얻게 되었다. 변수가 생기자, 그레코 공작의 아 들과 브리올테 왕비의 딸을 결혼시키는 것을 전제로 이루어 졌던 불안한 공조는 금방 금이 가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8년이 지나갔고, 서로의 세력이 자리를 굳히게 된 데다가, 왕마저 한번 쓰러지자, 공작과 왕비는 드디어 한 사람을 거꾸러뜨릴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왕비와 왕의 동생이 결혼하 지 않는 한--' 불가피 한 충돌이었으며, 당시 롬파르를 흉흉하게 만 들고 있었다. 허나....상황을 전혀 모르는 순진한 청년인 쥰에게 그 일은 기가 막 힌 기회가 되어준 것이다. 그래서 5월 초, 따사로운 햇살이 교정을 적시고, 봄꽃들 마저 저물 어 나른하고 아름다운 봄의 정취가 물씬 풍겨올 무렵, 쥰은 믿어지 지 않게도 조기졸업시험에 통과했다. 스스로의 힘이라기보다는 운명 의 축복으로 드디어 졸업하게 된 쥰은, 미친 듯이 기뻐했다. 쥰은 곧장 합격증과 함께 본가로 편지를 보냈고, 일주일 동안 매일 콧노래를 부르며 돌아다녔다. 그리고 중간고사 결과가 영 신통찮아 기분이 좋지 못했던 아킨에게, 쥰은 수석으로 통과한 것처럼 으스댔 다. "난 이제 학교 떠난다. 졸업이라고! 넌 아직 2년 남았지? 응?" 쥰이 그렇게 매일 같이 볶아대는 통에 아킨은 결국 공부장소를 도 서관에서 룰레인의 개인 장서실로 옮겨 버려야 했다. 그러나 그곳에 서도 롤레인의 공부 방식 때문에 애를 먹어야 했고, 가끔은 자리에 서 일어나 그녀가 사방에 흘려 놓은 책을 집어 원래 자리에 꽂아 넣거나, 여기 저기 던져놓은 마법 물품들을 정리해 놓기도 했다. 롤 레인은 '너는 반드시 내 연구생으로 들어와.' 할 뿐, 책을 여기 저기 던져 놓거나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며 연구하는 버릇은 도무지 고치 지 않았다. 게다가 가끔 씩 그 딸이 놀러와 아킨에게 찰싹 붙어 종 일 칭얼거렸고, 롤레인은 이제 딸을 말리지도 않았거니와, "저렇게 좋아하는데 그냥 얘한테 장가 와라." 하고 끔찍한 말까지 했다(그녀 도 딸에 관한한 포기해 버린 것이다). 아킨도 그렇게 정신없었지만, 루첼도 루첼 나름대로 정신없었다. 쥰 은 매일 매일 루첼과 인생상담에 바빴고, 루첼은 지은 죄(?)가 있어 서 그 수다를 다 들어주었지만 속으로는 맞아 죽을 땐 죽더라도 실 비 손잡고 도망가 버리는 편이 낫지 않았을 까, 하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그리고 낮 시간 동안에는 시달리느라 하지 못한 공부를 밤새 보충해야 했고, 며칠 뒤에 쥰이 수다떠는 동안 슬쩍 슬쩍 잠드 는 생존전략을 터득했다. 그렇게 쥰의 지인인 아킨과 루첼이 괴로워하는 나날은 쥰의 본가로 부터 온 손님을 맞이하는 순간 끝났다. 페오드렌이 찾아 온 것이다. "정말 도와준 적 없지, 루첼?" 루첼은 입술이 아플 정도로 웃으며 답했다. "네." "그런데 어떻게 녀석이 통과한 거냐." "올해.....조기 졸업 신청자가 워낙에 많았습니다." "나라가 흉흉하니 자식들을 불러들이는 거라는 건 알아-! 그런데...... 그 망할 돌대가리 자식마저 통과시키면 어쩌겠다는 거야---!" 창문이 부들부들 떨고, 귀청은 덜덜거리고 머리도 얼얼하다. 페오드 렌은 포효했다. "왕립 로멜이 이 정도 수준 밖에 안 되는 곳이었나--! 왕립 로멜이 --!" 동생이 졸업했다는 데, 이렇게 화를 내는 형도 없을 것이다. 페오드렌이 데리고 온 전속 하인이 잽싸게 오더니 그가 엎어버린 찻잔과 깨 버린 받침을 치웠다. 차 맛이 영 아니라, 아킨은 그 하인 에게 찻잔을 들려 보내며 물이나 가져 달라고 했다. 하인은 그 찻잔 을 다 들고는 페오드렌에게 속삭였다. "호텔 지배인께서......좀 조용히 해 달라고 하십니다." "지금 조용히 하게 됐어---!!! 지금! 세상에, 생판 알지도 못하는 데 다가 그 유---명한 알베스티 가의 딸을 집안에 들이게 될 판인데 ---!" 루첼은 코를 쓸고 내려온 안경을 밀어 올렸고, 아킨은 괜히 따라왔 다고 생각하며 눈을 찌푸렸다. 이 페오드렌은 도착하자마자 쥰이 아 닌 루첼을 찾았고, 루첼과 같이 있던 아킨은 '루첼의 친구입니다.'라 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페오드렌에게 끌려갔다. 그리고 그렇게 둘을 마차에 납치해서는, 시내 호텔의 자기 방에 끌어다 앉혀 놓고는 족 치는 중이다. 루첼은 힘겹게 말했다. "실비는 좋은 아이입니다." "좋은 아이면 뭐해! 그 오래비와 아비가 그리도 한심한 작자들인 데!" 쥰과는 열 살도 넘게 차이나는 형이었다. 다섯 남매의 막내라 나이 가 스물이 되어도 여전히 철없는 쥰과는 달리, 열 다섯 살 때부터 아버지와 함께 집안을 이끌어 온 이 페오드렌은 엄격하기 그지없는 남자인 데다가 자긍심마저 무시무시하게 높았다. 그 때문에, 하는 짓이 영 마음에 안 드는 알베스티 가는 바퀴벌레 일가와 동급이었 다. 그러나....우리 앉혀 놓고 말하면 대체 무슨 소용인가, 하고 루첼은 생각했지만 말을 꺼냈다가는 저 앞의 페오드렌이 당장에 씹어 삼킬 같아 입 다물고 있었다. 아킨은 벌써 신경 끄고 딴 생각하는 중이었 다. 루첼이 말했다. "쥰은...정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운...이 없었다고는 말못하겠지만, 또 그냥 시험을 쳤어도 통과했을 거라는 말은....빈말로도 못하겠지 만,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그렇지, 아키?" 그리고는 아킨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아킨은 딴전을 피우고 있다가 얼른 답했다. "아, 응." 페오드렌이 크흠, 하고 한숨을 내 쉬었다. 루첼은 그런 그를 주의 깊게 살피며 말을 이었다. "아버님 어머님은 어떠십니까?" "그 분들이야 쥰이 데리고 오면 누구라도 좋다할 분들이지. 어머님 은 벌써 새 며느리가 생기겠다고 좋아하시고, 아버지는.......자기가 결혼하는 것 같더군." "그럼 괜찮은 것 아닙니...까." "난 싫어--! 그게 제일 중요한 거고!" 루첼은 모든 책임은 자신이 지기로 했다. "저, 페드린....형님, 죄송하지만...실비와 쥰은 제가 소개했습니다." "네가?" "네. 그러니...저를 봐서라도, 실비를 좋게 봐주시길 바랍니다. 또..... 그 아버지와 큰오빠는 도저히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할아버지와 작은오빠는 아주 좋은 분들입니다." "너.....!" 루첼은 고개를 숙였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제 명예를 걸고, 그리고 형님에 대한 제 호의 와 형님이 제게 주시는 믿음을 걸고 부탁드리는 겁니다." 아킨은 그런 루첼을 흘금 보고는 뭐라 작게 중얼거렸다. 귀를 쫑긋 세워 들어보니 바보, 얼간이, 어쩌고 라는 말이었다. 페오드렌이 황 소처럼 으르렁거리더니 말했다. "좋아! 나도 너는 아주 좋아하고 있으니....너를 봐서라도 조건 두 가 지만 충족시키면 나도 양보하겠어. 녀석에게 그렇게 전해." "쥬나드렌과 안 만나실 겁니까?" "나이 스물에 장가가겠다고 설치는 그 한심한 자식과? 안 만나! 어 쨌든 분명히 말 해. 첫째, 청혼과 그 집 허락은 아버지나 나나 나서 지 않을 테니 알아서 다 받아 오라하고, 둘째! 결혼 증인으로는 직 계 왕족 이상 되는 사람으로 데리고 오라고 해." "첫 번째는 이해하는데 두 번째는 대체 왜 들어가는 겁니까?" "절대 불가능 하니까!" "......." 형이 온 줄도 몰랐던 쥰은 그 조건을 듣자 새파래졌다. 그리고 당장 에 페오드렌을 찾아갈 거라 펄펄 뛰어댔지만, 그 호랑이처럼 사나운 큰 형님은 벌써 떠난 뒤였다. "둘째 조건은 대체 왜 붙이는 거야! 순전히 억지라고, 억지! 지금 누 굴 데려다 놓으란 말이야. 로메르드에서 직계 왕족이라고는 단 둘, 켈브리안 공주와 베르티노 왕자뿐인데.....이 두 분 중 누구를 데려다 놓으란 말이냐, 빌어먹을--!" "꼭 로메르드일 필요는 없잖아." 그리 말하는 아킨을 탈탈 털어 댈 기세로 쥰이 험악하게 말했다. "그럼 어디 가서 구해? 툴칸 제국으로 가서 공주 님 좀 빌려 달라 고 할까? 득실거리는 그곳 왕자 중 하나만 빌려 달라고 해? 아니면, 에크롯사로 올라가서 세 살 먹은 줄피 공주님이랑 네 살 먹은 아힘 왕자님 중 한 분만 빌려달라고 할까? 미치겠네, 정말." ".....그렇게 결혼하고 싶나." 아킨이 냉랭하게 말하자, 쥰 역시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 난 실비를 정말 좋아하고, 어물대다가는 다른 놈이 나타나서 채갈 거라고. 벌써 몇 군데에서 혼담이 들어오고 있는데, 어떻게 든.......약혼이라도 해야 실비가 안심한다고." "당장 결혼한다는 말은 아니로군." "내가 그 정도로 생각이 없는 줄 알아? 결혼은 집안에 들어가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면 할거라고.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라, 약 혼을 서두르는 것이고." 그 말에 루첼은 웃고 말았다. 이 친구는 언제나 멍청한데, 가끔은 놀랍도록 생각이 깊기도 하다(물론 평소에 워낙에 멍청해서 가끔 멀쩡해지면 놀라버리는 것일 지도 모른다). 아킨이 그런 루첼을 보고는, 결국 푸--하고 한숨을 내 쉬었다. 저 바보, 정말 끝까지 저러는 군. 그래서 다 포기하고는 말했다. "내가 해 주지." "네가아?" 쥰이 대놓고 비웃었다. "너 지금 듣고는 있는 거냐? 지금 형이 내건 조건은 왕이나 여왕의 아들이라고!" 루첼이 그만둬, 하고 눈치를 줬지만 쥰은 알아채지도 못했다. 아킨 은 의자를 뒤로 밀어젖히고는, 허리 위에 두 손을 포개 놓았다. 쥰 이 여전히 심술궂게 보자, 아킨은 저 둔한 녀석....하고 속으로 중얼 거리며 말했다. "왜, 내가 하는 게 싫은 거냐." "넌 돈줘도 안 시켜 줄 거야! 그리고.......네가 왕자냐?" "맞아." "무슨.....뭐?" "우리 아버지가 왕이니, 나는 왕자가 되지." 쥰이 눈을 끔뻑거리다가 루첼을 바라보며 답을 구했다. 아킨이 괜찮 다고 고개를 끄덕였고, 루첼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쟤네 아버지 직업이 암롯사 왕이거든." 쥰의 얼굴이 시퍼래지기 시작했다. 행여나 해서, 루첼은 덧붙여 주 었다. "그러니까 쟤 직업은 왕자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너." 벼락이라도 맞은 듯 패닉이 되어버린 쥰이 비틀 비틀 나가자, 루첼 이 아킨에게 물었다. "어차피 형이 지난 연회에서 나를 소개했어. 그러니 더 이상은......신 분을 감출 필요가 없어." "그게 아니라, 대체 왜 쥰의 증인이 되어 준다고 한 거냐, 이거야. 둘 사이....무시무시하게 나빴잖아." "오해하지 마. 쥰이 장가가는 게 좋아서 그런 건 아니니까." "그럼?" 아킨이 루첼의 가슴을 쿡 찔렀다. "멍청한 네 녀석이 아주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거다." 루첼은 안경이 미끄러져 내렸지만, 침대 위로 벗어 던져 버렸다. 안 경이 치워지자, 근시라 초점이 흐릿한 푸른 눈이 환하게 드러났다. "아키, 난....후회하지 않아. 잘 했다고 생각해. 너도.....알잖아. 내가 그 집안에서 어떤 위치인지, 그리고 지금 내가 그 애를 위해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위치라는 것을." "따지지 마." "아키-!" "네 문제는, 늘 느끼는 거지만 너무 계산을 한다는 거다. 계산을 할 필요가 없는 문제에 있어서도." "이건 현실이다. 지금 당장이 아니라, 미래를 생각해야 해." "아니! 넌 현실주의가 아니라, 단지 게으른 것뿐이다. 어떤 것도 희 생시키지 않고, 현실적으로 가장 '편한' 길만 계산 잘 해서 나가는 건 멍청한 짓이야. 현실은 이겨내라고 현실인 법이고, 그것을 이기 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해. 그러고 싶지 않다면 평생 원 하는 것을 다 놓치고 살 거다. 네 손에 저절로 떨어지는 거란, 언제 나 드문 법이니까." "아키, 너 정말!" "아키, 아키 하지마. 그런 식으로 부르라고 허락한 적 없으니까. 그 리고 분명히 말하는 건데, 이 일은 네 발목을 묶게 될 거다. 피했던 일은, 반드시 배의 재앙으로 오는 법이니까!" 아킨은 쏘아붙이듯 덧붙였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마, 얼간이." 그리고 방을 나가서는 문을 쾅 닫아 버렸다. 둘 다, 지독하게 기분이 언짢았다. *********************************************************** 작가잡설: 그림 공부 중..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9장 ************************************************************** [겨울성의 열쇠] 제39편 넘치는 잔#4 *************************************************************** 날은 흐릿했으며, 얼룩진 구름은 아침해가 좀 더 높이 솟구치면서 오히려 더욱 짙어져갔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습기찬 바람 을 따라, 진한 풀 냄새가 흙 냄새와 함께 풍겨왔다. 드디어 약속한 5월 10일이 되었지만, 아킨은 '그 생각' 은 완전히 잊 고 있었다. 사실 아킨은 그 전까지는 어쩔까 고민하다가 결국 켈브리안 공주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그녀의 성격을 잘 아는 아킨은 '아무 말 없이' 약속을 깨 버릴 경우 엄청나게 '곤란한' 보복이 올 것 같다는 생각 을 떨치기 어려웠고, 못 간다고 연락을 할 방도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결정 봤다는 것을, 유감스럽게도 아킨 자신이 먼저 잊고 말았다. 사흘 연속으로 조성된 무시무시하게 썰렁한 분위기에, 루첼과 아킨은 서로 지쳐 버렸고 다른 생각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 던 것이다. 마침 강의가 없어서 도서관 갈 채비를 하고 있던 루첼이, 단단히 결 심한 듯 이제 막 잠에서 깬 아킨에게 말했다. "오늘 너도 강의 없지?" 그런데 아킨은 턱을 슬쩍 돌려 버렸다. 루첼은 그 침대에 털썩 주저 앉으며 말했다. ".....이젠 말도 안 할 거냐, 너." 아킨이 여전히 말이 없자, 루첼은 짜증이 치밀었다. "그럼, 지금 당장 실비에게 달려가서 사실 널 좋아했어, 미안하다. 나하고 결혼하자, 하고 말해야 한다는 거냐!" "끝난 일이라고 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험악하게 보는 거지?" "어차피 끝난 일이라도, 기분 나쁜 건 기분 나쁜 거니까." "빌어먹을 도련님." "빌어먹을 뺀질이." 그리고 둘 다 잠시 말이 없었다. "......." "......." 루첼이 먼저 말했다. "......우리 둘, 굉장히 유치하다는 거 알고는 있어?" ".....안다." 그리고 둘 다 고개를 돌려버렸다. 루첼은 루첼 대로 이 꼬마 녀석한테 핀잔 듣는 게 창피했으며, 아킨 은 아킨 대로 남 일에 너무 툴툴댄다고 생각해서 창피했다. 그렇게 둘은 서로 등을 돌린 채 앉아서 한참을 묵묵하게 있었다. 이 번에도 루첼이 먼저 말을 꺼냈다. "어쨌든 고맙다. 결혼 증인이 되어 준다고 해서." "고마워 할 것 없어. 이걸로 너는 영영 끝난 거니까." "그래도 다른 놈한테 시집가는 것보다는 나아." "그것도 그렇군." 아킨은 등뒤로 루첼이 축 늘어지는 것을 느꼈다. 생각해 보니, 바보, 얼간이, 멍청이! 하고 퍼부어 대긴 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제일 괴로 운 것은 다름 아닌 루첼일 것이다. 실비야, 슬프기야 할 테지만 성 격 좋은 남편에 근사한 명문가로 시집가게 되었고, 쥰은 그 동안 간 절히 짝사랑하던 여자와 결혼하게 되었으니 좋다. 그러나 모든 것을 포기한 루첼은 괴로움 속에 마음을 접어야 하는 것이다. 아킨은 다시 언짢아졌다. 예전에 롤레인에게 건방진 말을 해서 그녀의 얼굴을 흐리게 했을 때처럼, 지금 역시 그런 기분을 느 끼고 있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때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미안하다." "....알면 됐다." 둘 다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이제 아킨은 대체 왜 이 딴 말을 하면서 비는 것인지, 그런 자신을 이해하기 어려웠으며, 루첼은 루첼대로 이 녀석이 왜 이런 사과를 해서 사람 불안하게 하는 것인지, 그게 찜찜했다. 똑 똑-- 노크 소리에, 루첼은 그냥 멍청하게 말했다. "들어오십시오." 아킨이 갑자기 벼락맞은 개구리처럼 놀라 벌떡 일어났다. "드, 들어오라고 하지 마!!!!" "아니, 왜...." 아킨은 허겁지겁 옷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루첼은 아킨이 방 금 자다 일어나 긴 셔츠 한 장만 달랑 걸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 다. 그러나 문은 이미 열려 버렸고, 루첼은 급히 일어나 문을 막아섰다. "저, 나중에 들어오십....." 그 말을 하다 말고, 루첼은 눈을 반짝 떴다. "문 닫아 버려, 루체엘--!" 그리나 루첼은 바로 앞에 있는 엄청난 미녀에게 혼이 빠져버려, 아 킨의 울부짖음을 듣지 못했고 들었다 하더라도 신경 쓸 겨를도 없 었다. 켈브레인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허벅지 예쁘구나, 아키." 그리고 루첼은 문을 닫는 대신 비켜서서 그녀가 감상하기 편하도록 해주었을 뿐이었다. 한시간 뒤, 아킨은 마차의 창 밖을 노려보고 있었다. 입으로는 켈브 리안이 '아침'이라고 건네준 샌드위치를 깨작깨작 씹어댔지만, 눈만 은 매처럼 사납게 밖을 노렸다. "한 모금 마실래?" 켈브리안이 작은 병을 내밀었다. 아킨이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그것 을 흘끔 보더니 물었다. "술은 아니죠?" "설마. 오늘 하루 종일 들들 볶아야 하는데 벌써 취하게 하면 안 되 잖아. 그건 나중에 저녁에 해야지.....아, 아직도 취하면 귀여워?" "....그 때 저는 열두살이었습니다." 그리고 아킨은 병을 단번에 비워버렸다. "리리아, 여기 과일." 앞에 있던 시녀가 얼른 피크닉 바구니를 열더니, 잘 익은 산딸기 한 바구니를 내 놓았다. 아킨은 빼앗듯 그것을 채가서는 입에 넣었다. "뭐야, 너. 예전에는 그렇게 귀엽게 먹더니.....지금은 아구 아구....숙 녀를 앞에 놓고 뭐니, 정말." "선배님, 제발...." 아킨이 미치겠다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동그란 얼굴의 귀여운 시 녀가 그런 둘을 번갈아 보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눈이 반짝이고 볼 에 홍조가 도는 것을 보니, 아킨이 꽤나 마음에 든 것이다. 그렇게 아킨이 디저트 마저 다 먹어 치우자, 켈브리안은 손수건을 꺼내서는 그 입가에 묻은 과일즙을 손수 닦아냈다. 아킨이 물었다. "그런데 오늘은 대체 무슨 일인 겁니까?" "데려갈 데가 있어서." 아킨은 그녀의 차림새를 살펴보았다. 사냥복에, 까만 가죽 부츠를 신고 있었다. 금발머리는 땋아서 위로 틀어 올려서는, 그 위에 모자 를 쓰고 있었다. "사냥 가는 겁니까?" "응." 아킨은 자신의 옷차림을 살펴보았다. 너무 급하게 챙겨 입고 나온 통에, 평소에 입고 다니던 차림 그대로였다. 그냥 편한 바지에, 이제 는 슬슬 바꿔 신을 때가 되었다 싶은 부츠, 그리고 몸에 붙는 셔츠- 끝. 이건 등산 가기에도 난감한 차림새였다. "정말이지...." 사람 가지고 노는 건 여전한 여자였다. 아킨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 는 지, 켈브리안은 마차 창에 바짝 몸을 붙이더니 밖을 지켜보았다. 울창한 숲이 창 밖으로 지나갔다. 하늘이 흐려서 잎들은 진한 녹색 으로 어둡게 그늘져 있었다. 그러다가 마차가 덜컥 멈추었다. "여기서부터는 말을 타고 가야 해. 좀 험해지거든." 마차 문이 열리며, 늘씬한 여기사가 달려와 켈브리안에게 손을 내밀 었다. 아킨이 공주를 따라 내리니, 굵은 나무들이 우거진 깊은 숲 속에 서 있게 되었다. 워낙에 울창해, 숲 깊은 곳은 아주 어둡기까지 했다. 물 흐르는 소 리가 들려왔고, 신선한 풀 냄새와 옅은 봄꽃 향이 풍겨왔다. 곧 그 들 옆으로, 역시 사냥복 차림인 마부가 검은 말과 진한 갈색 말을 끌고 왔다. 말들의 안장에는 활과 화살이 걸려 있었고, 짧은 검도 준비되어 있었다. 공주는 그 갈색 말은 자기가 갖고, 검은 말은 아 킨에게 주었다. "자, 가자." 아킨이 그 뒤를 따르자, 여기사도 말에 타더니 둘을 호위했다. 앞이 캄캄한 아킨은 점점 불안해졌다. "단 둘이서 사냥하는 건 아닌 것 같은 데요?" "당연하지. 한번 들어 보렴." 아킨은 귀를 기울였다가 사냥개 짖어대는 소리를 들었다. 말 울음소 리도 들려오고, 아주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대는 소리도 어렴풋 이 들려왔다. 아킨은 해쓱해졌다. "서, 선배님, 저기!" "사람들 앞에 가면 '켈브리안 공주님'이라 부르는 것을 잊지 말도록 해. 또, 네 소개는 '암롯사 대공가의 차남'으로 할 생각이야. 그건 괜 찮지?" 아킨은 말고삐를 틀어쥐고는, 금방이라도 튀어 도망갈 기세로 빠르 게 물었다. "선배, 지금 대체 어디로 가는 겁니까." "아버님이 신하들과 시종들과 사냥꾼들을 잔뜩 끌고 사냥 나오신 곳. 곧 아버지 쾌차 기념으로 사냥대회가 시작될 거야." 그리고 켈브리안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 내 '연인' 역을 좀 해주렴." "선---아니, 켈브리안 공주님! 저는 사람 많은 곳....특히 사냥 대회 같은 곳은 아주 싫어합니다. 그건 선배님도 아시잖아요." 다급하다 보니 호칭도 엉망이었다. 그러나 공주는 알 바 아니라는 듯 말했다. "도착하면 알게 될 거야. 너를 왜 끌고 왔는지 말이야." "얘는 또 어디로 가서.....!" 드물게 사냥터에 나온 브리올테 왕비는, 깔끔하지만 불편해 보이는 진한 붉은 색 사냥복을 입고는 왕의 막사에 있었다. 그녀는 이 사냥이란 것을 한심한 사내들의 시간낭비 정도로 생각하 며 아주 경멸했지만, 이 사냥대회를 열자고 제의했던 것은 그녀 자 신이었다. 루피니아 축제 직전에 왕이 회복되어 일어나니, 그 기념 으로 날이 따뜻한 5월초에 사냥대회를 열자고 한 것이다. 왕은 허리 아파 죽겠는데 거기까지 나가야 하냐고 투덜댔지만, 오랜만에 밖으 로 나가는 것이라 크게 싫어하지는 않았다. 그런 왕비는 방금 전 사냥터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 온 젊은 시종에 게 물었다. "공주는 어디 있지?" "보이지 않습니다. 아직 도착하지 않으신 듯...." 그러나 왕비가 손을 휘둘러 그 시종의 뺨을 후려갈겼다. 철썩--! 당황한 시종은 뺨을 감싸쥐며 서둘러 허리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하여간! 켈브리안 하나도 못 잡....." 그렇게 소리치다가 그녀는 가까운 곳에 있는 남자를 발견하고는 그 에게 그 소리가 들릴까 해서 얼른 입을 다물었다. 슈마허 쉐플런이었다. 벌써 숲을 한번 달리고 온 듯, 그 남자는 땀에 축축하게 젖은 데다가 머리카락도 잔뜩 흐트러뜨리고 있었다. 그러 나 잘 단련된 무사의 몸을 가진 그는, 살찌고 둔해 보이는 왕보다 훨씬 더 근사하고 당당하게 보였다. 사냥터에 나온 귀부인들의 눈길 은 그를 향해 쏠려 있었고, 젊은이들도 그를 동경어린 눈으로 바라 보다가 슬쩍 고개를 돌리곤 했다. 여자들은 그의 준수한 얼굴과 남 자다움에, 남자들은 그가 젊은 나이에 쌓아 올린 놀라운 무명에 감 탄과 동경을 보내는 것이다. 그러나 브리올테 왕비는 그런 것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유로 그 남자, 용병대장 슈마허 쉐플런을 원했다. 슈마허 저 남자만 잡으면 판세는 확실하게 내 쪽으로 기우는 건데.....왕비는 그렇게 생각하며, 지난번의 좋은 기회를 제 발로 차버린 켈브리안을 원망했다. 그레코 공작에게 없는 엄청난 미끼가 왕비에게는 있었으며, 그것이 바로 젊 고 아름다운 딸이었다. 결혼만큼 확실한 동맹이 또 있을까. 물론 나중에 정말로 줄 지 주지 않을 지는 신만이 아실 일이지만, 공주가 저 남자를 잡아 준다면 델 커드는 분명 왕비 편이 되어 줄 것이다. 그레코 대공은 '충성'이란 것을 받고자 하지만, 왕비는 '이익'을 보장해 줄 생각이었다. 저 유 명한 용병대장은 '멋진 희생'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더 막강한 힘을 발휘할 자이며, 그 출신성분과 살아온 과정을 생각해 보면 그 것이 훨씬 더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그 계집애는!' 슈마허가 공주에게 관심이 있다는 건 누가 봐도 확실하건만 켈브리 안은 이리저리 생쥐처럼 빠져나갈 뿐이었다. 심지어, 지난번에는 슈 마허를 먼저 보내기까지 했다. 하여간, 저 한심한 계집애는 한번 단 단히 혼나야 해, 정말! 어머니 도울 생각은 안하고 놀러만 다니니. 브리올테 왕비는 부채를 사납게 부치며 투덜거렸다. 그 때 사냥개 짖어대는 소리가 들려 오더니, 덩치 크고 늘씬한 사냥 개 한 마리를 대동하고 그레코 공작이 나타났다. 왕을 닮아 갈색머 리에 녹색 눈을 가지고 있었으나, 더 늘씬한 데다가, 그 눈도 훨씬 영리하게 빛났다. 브리올테 왕비는 쥘부채를 착 감고는 그 공작을 주시했다. 공작은 왕비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 보라는 듯 어깨를 피고는 슈마허 쉐플러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슈마허를 먼저 차지한 것은 그의 부하인 세르네긴이었다. 늘 씬한 체구의 그 청년은 슈마허에게 다가와 귓속말로 뭐라 속삭였다. 슈마허 역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직이 답했다. 세르네긴과 슈마허의 관계에 대해서 이미 예전에 조사를 마친 왕비 는, 저 세르네긴에게도 추파를 던져 보는 것이 좋을 거라 생각했다. 브리올테 왕비는 물론 젊고 잘생기기까지 했으면서도, 성격은 음험 하기 그지없는 그 청년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슈마허는 그 청년을 나이 차 많은 막내 동생이나 조카라도 되는 듯 아끼고 있으 니 별 수 없었다. 물론, 뭘 어떻게 해줘야 넘어올 지는 난감한 과제 였지만. 그러고 있는데, 슈마허가 고개를 들더니 미소를 지었다. 왕비는 얼 른 그 쪽을 보고는, 결국 부채를 부러뜨리고 말았다. 켈브리안이었다. 그리고 그 얄미운 딸은 유쾌하게 웃으며 같이 온 소년과 이야기하 고 있었고, 그 소년은 약간 화난 듯한 얼굴로 답하고 있었다. 차림 새는 아무리 봐도 좋게 봐주기 어려웠다. 길 가던 소년을 하나 건져 온 듯, 너무도 평범해 보였다. "아니, 어디서 이상한 놈팡이 하나를 데리고 온 거야?" 그런데 슈마허가 공주 쪽으로 가고 있었다. 왕비는 그가 저 '놈팡이' 를 어서 치워 주길 바라며 그 쪽으로 노려보았다. *********************************************************** 작가잡설: 앗, 아키! 너 찍혔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9장 *************************************************************** [겨울성의 열쇠] 제40편 넘치는 잔#5 **************************************************************** 아킨은 현기증에 몸이 휘청거릴 지경이었다. 나무를 베어내고 마련한 공터에는 어마어마한 막사들이 가문의 깃 발을 내걸고 있었으며, 사방에서 개 짖는 소리에, 매 날개 퍼덕거리 는 소리, 흥분한 말들이 울부짖는 소리,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거칠 고 왁자하게들 떠들어대고 있으니.....자켄이 이 꼴을 봤다면 사나운 눈으로 "인간이란--!"하고 쏘아붙였을 것이다. 자켄은 사냥'놀이'를 병적으로 싫어했고, 그것은 그가 엘프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어둠숲 의 일족들은 능숙한 사냥꾼들이다.), 그의 상처 때문이었다. 쫓고 쫓 기는 것을 보며, 그는 아무리 자제하려고 해도 별 수 없이 '사냥'당 한 어머니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키?" "......토할 것 같아요." 아킨은 정말 속이 메슥거렸다. 특히, 옆에 있던 커다란 검은 사냥개 가 으르렁거릴 때는 정말로 뭐가 치밀어 올랐다. 다른 건 몰라도 이 건 정말 질색이었다. 숲에 들어와 사냥개들 틈바구니에 있는 것 말 이다. 아킨은 결국 말에서 내렸고, 켈브리안이 손을 내밀자 그녀가 말에서 내리는 것도 도와주었다. 혼자서 능숙히 펄쩍 오르고 훌쩍 내리는 그녀였지만, 이렇게 사람 많은 자리에서는 '내숭'이라는 숙녀의 본분 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켈브리안 공주, 늦으셨군요." 켈브리안의 얼굴이 단번에 구겨졌다. 아킨이 보니, 처음 보는 남자였다. 키는 아킨보다 훌쩍 컸고, 나이는 서른 조금 넘어 보였다. 그리고 그 날카롭고 차가운 회색 빛 눈이, 아킨은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속을 휙 꿰뚫고 지나가는 듯한, 날카로우면서도 잔인한 빛이었고...어딘지 휘안토스를 생각나게 했 다. 그러나 미소는 어딘지 소년처럼 장난스러운 데가 있었고, 그 것 만큼은-물론, 눈빛과 미소 중 어느 것이 진짜인지 모르겠으나-, 호 의를 가지게 했다. 켈브리안이 말했다. "아킨토스, 이 쪽은 슈마허 쉐플런 경, 아주! 용맹하고 놀라운 무명 을 가진 장군이에요. 그리고 슈마허, 이 쪽은 아킨토스 프리엔...암롯 사 대공가의 차남이죠. 아, 아시나?" 슈마허도 아킨이 누구인지 뻔히 알고 있었고, 슈마허가 안다는 사실 을 켈브리안 공주 역시 잘 알았다. 아킨은 대충 눈치로 그것을 알아 챘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을 끌고 온 이유를 그 남자의 눈빛으로 대 충 짐작했으며, 이 남자가 아주 만만찮은 인물이라는 것도 어림할 수 있었다. 치근덕대는 남자는 자기 선에서 치를 떨 정도로 손을 봐 줄 수 있는 켈브리안이고, 그저 '귀찮은 남자'일 뿐이라면 아킨의 신 분까지 말할 리가 없다. "만나서 반갑군요, 왕자." "저 역시 영광입니다, 슈마허 쉐플러 대장님." 슈마허 쉐플런-분명 들어본 이름이었다. 구체적으로 떠오르지는 않 지만, 어렴풋이 나마 기억에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아킨은 그의 뒤에 있는 청년을 발견했다. 슈마허의 부하인 듯, 뒤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그들을 보고 있었다. 슈마허보다, 외려 그 쪽이 더 눈 에 뜨인다. 앞머리가 긴 부드러운 검은 머리카락에, 녹갈색 눈을 가지고 있었 다. 그리고 지독하게 건조한 무표정....인형 얼굴 이보다는 더 감정이 서려 있을 듯 하다(적어도 '의도한 표정' 이라도 있으니). 기이했다. 그것은 '무관심'해서 건조한 눈빛조차 아니라, 완벽하게 '조정'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청년의 눈이 아킨을 향했다. 그 때 슈마허가 세르네긴을 돌아 보더니 손을 내밀며 부드럽게 말했다. "이 쪽 소개를 안 했군." 세르네긴이 먼저 답했다. "세르네긴 포틀러스입니다." 약간 갈라진 듯 허스키 했지만, 그 안에는 다채로운 음들이 어우러 져 단 하나의 음성을 내고 있었다. 아주 좋은 목소리다, 입을 꾹 다 물고 있는 손해라고 생각될 정도로. 그렇게 생각하다가 아킨은 그제야 번개처럼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어떻게 잊고 있었는지 놀라울 지경이었다. "저....." 그 때 켈브리안이 아킨의 팔을 당겼다. 그리고는 딱 부러지게 말했 다. "자, 아버지 뵈러 가야지." 즉, 왕을 만나러 간다는 말이다. 슈마허는 옆으로 물러나며 말했다. "나중에 뵙지요, 공주." "많이 잡으세요. 그리고 전 은여우를 좋아하니까, 살아 있는 걸로 부탁 드려요." 봄철에 은여우가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러나 슈마허도 별로 만만한 맞수는 아니었다. "드실 거면 털 색은 상관없지 않나요. 싱싱하기만 하면 될 테니." 켈브리안은 웃으면서 돌아섰지만, 돌아서는 즉시 욕을 퍼부어 대는 건 잊지 않았다. 아킨이 조용히 물었다. "누굽니까." "누구, 슈마허 쉐플런?" "둘 다." "늙은 남자 쪽은 여기 용병대 대장이야. 아버님께서 작년 이맘 때 데리고 오셨지. 물론, 어머니도 동의하셨으니 데리고 올 수 있었지 만." "그 전에는 어디 있었습니까." "에크롯사에 있었지. 그 전에는 팔론드 왕국, 그 전전에는 나프 왕 국....한번은 들어 봤을 거야. 요만했던 시절에는 네 아버지 밑에 있 기도 했으니까." "아-" 아킨은 이제 정확하게 기억이 났다. "흑대장 슈마허가 저 사람입니까?" "맞아." 흑대장 슈마허, 대장으로 올라가기 전에는 흑기사 슈마허로 불렸던 남자였다. 열 세 살에 아킨토스와 휘안토스의 아버지였던 사이러스 대공왕의 휘하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그 다음 옮겨간 델-카타에서 드디어 빛나기 시작했다. 스무 살에 해적단 하나를 마세르 해협에서 완전 소탕시켰고, 그 뒤에 이어진 캄파르 평원 전투에서는 2천의 군 사로 1만의 팔론드 왕국군을 전멸시켰으며, 그 후 엉뚱하게도 그 팔 론드에 거액으로 고용되어 세 번의 내란을 진압했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나프로 잠깐 가서 톨칸 해적단을 소탕했고, 그 다음에 베넬 리아의 용병대장과 에크롯사의 용병대장사이에서 저울질을 하다가 에크롯사로 건너갔다. 그러나 별 현명한 선택은 아니었던 것이, 그 는 그곳에서 죠세피나 여대공의 남편인 마라 공과 사이가 틀어져버 리는 바람에 이곳 로메르드 왕국으로 오게 된 것이다. 젊은 나이에 눈부신 무공을 쌓은 용병대장과, 천식을 앓고 있어 몸은 약하지만 천재적인 지성을 가지고 있던 마라 공이 서로를 '골골대는 샌님'과, '무식한 싸움꾼' 취급했던 것은, 서로가 가진 것을 은근히 질투하던 둘에게는 별수 없는 것이었으며, 유감스럽게도 마라 공은 '고용주'의 남편이라 슈마허가 양보하고 로메르드로 내려 온 것이었다. "그럼, 저 세르네긴은.......뭐 하는 사람입니까." "글세, 특별한 지위가 있는 건 아니지만 슈마허가 양자처럼 아끼고 있으니, 일이 있으면 곧바로 뭔가 하나 받을 거야. 그러니까......팔론 드에 있을 때부터 지내왔다고 하던데. 나프에 있을 때는 그를 떠났 다가, 슈마허가 에크롯사로 갔을 때 즈음에는 그곳 기사였지. 에크 로 오라고 설득했던 것도 그였지만, 슈마허가 에크를 떠날 때는 오 히려 세르네긴 쪽이 기사직을 포기하고 따라 내려왔.......아키?" 아킨은 발을 멈추고 세르네긴을 골똘히 바라보고 있었다. 세르네긴은 슈마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부하와 상관이라기 보다는 젊은 삼촌과 나이 찬 조카 같은 분위기였다. 아킨이 말했다. "저 사람은 압니다." "3년 전 제도 토머넌트 때문에?" "휘안토스를 패대기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늘 궁금했죠." 제도 토머넌트는 공식적으로는 '각 공국의 화합을 다지기 위해서' 1 년에 한번씩 벌어지는 대대적인 무투회였다. 그러나 그런 경기가 늘 그렇듯, 지금은 공국간의 명예를 걸고 무섭게 경쟁하는 전투 비슷한 경기가 되어 버려 있었다. 열에 다섯 번은 암롯사에서 우승자가 나 왔으며, 나머지 세 번은 델-카타, 에크는 운 좋을 때 한번 이기곤 했다. 나머지 공국에서는 거의 우승자가 없었지만, 10위안의 기사들 은 각 나라가 고루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아킨이 기억하는 그 해, 두 신예가 눈부신 전과를 올렸다. 그 중 하나가 암롯사의 왕자이자 후계자였던 휘안토스였으며, 다른 하나가 바로 '에크롯사 출신'이라는 단 한 줄을 이름 옆에 붙이고 참가한 세르네긴 포틀러스였다. 제국 연합 7국 중 최강국인 암롯사 의 어린 후계자와, 무명의 기사는 굉장한 화제였다. 그리고 경기가 끝날 무렵에는, 하급귀족이나 평민들은 열렬히 세르네긴을 응원했 고, 암롯사나 대귀족들은 에크롯사를 제하고는 휘안토스를 응원하고 있었다. 암롯사와 반 암롯사, 귀족과 평민. 그 둘은 엉뚱하게도 그렇 게 각자가 속한 집단을 대표해야 했고, 기록적인 관람객 속에서 마 지막 대결을 치렀다. 그리고 치열한 접전 끝에, 그 해 우승자는 세르네긴이 되었다. 아마 도-아킨이 예상컨대-출신이 깜깜한 세르네긴이 에크롯사의 기사가 된 것도 그 덕일 것이다. 그리고 그 소식은 아킨이 유학하던 베넬리 아에까지 전해졌고, 아킨은 '누군가가 휘안토스를 이겼다.' 에만 관 심을 표했을 뿐이었다. 그 후 휘안토스는 토머넌트에 참여하지 않았고, 세르네긴 역시 마찬 가지였지만 그 둘의 대결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회자되는 전설이 었다. "생각보다는 젊군요." "그러니 그렇게 화제였지....그래, 지금 싸워보면 어떨까? 난 좀 궁금 한데." "모릅니다. 그 때는.......어쨌든, 마르실리오-아실 겁니다-의 말에 따 르면 접전이었다 하는데.....실제로는 저 세르네긴의 우세였을 것입니 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저 세르네긴이 출전하지 않는 다는 말에, 형 역시 토머넌트를 취소 했습니다. 또, 운 좋은 사람이 이길 만한 접전수준이었다면 형이 그 렇게 집착했을 리도 없고요.... 형은 그와 마지막 대결을 하지 않는 우승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네 형은 열 네 살이었어. 저 사람은 스물 하나였고." ".....암롯사 대공가의 자존심은 그런 핑계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켈브리안이 흥미롭다는 듯 흐흠--하고는 말했다. "사이 나쁜 형이라며, 그 기분은 잘 아네?" "저희들은 열 달을 같은 배 안에 있던, 살과 피와 영혼을 나눈...'형 제'입니다. 서로가 느끼는 것은 본능적으로 느끼곤 합니다." 둘 다 끔찍하게 싫어하는 사실이긴 하지만 말이다- "켈리!" 공주가 막사로 들어오자, 아버지인 엔리케 4세는 벌떡 일어나서는 손수 딸을 맞이했다. 병석에서 일어난 지 얼마 안 되는 데다가 병마 저도 완쾌된 것은 아니라, 살이 오른 통통한 얼굴이긴 했지만 눈 주 변이 시커멓게 그늘져 있었다. "귀여운 켈리! 얼마나 찾았는지 모른단다." 공주와 안면이 있는 사냥개들이 꼬리를 흔들며 학학거렸고, 아킨을 보고는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사냥개는 아주 싫어하는 아킨은 입술 만 꾹 짓눌렀다. 그러자 켈브리안이 나서 그들을 쓰다듬으며 달래주 었다. "쉿, 쉿---자코, 키코---내 친구란다. 쉿, 조용조용---놀래서 도망 가 버리면 너희들이 책임 질 거야?" 그러자 개들은 곧 으르렁거림을 멈추고는 저 쪽으로 물러나 웅크리 고 앉았다. "그런데 이 쪽은 누구냐." "압셀론에서 친하게 지내던 후배지요. 아킨토스라고, 예전에 말씀 드렸죠?" 켈브리안의 아버지는 크게 웃어젖혔고, 아킨은 대체 뭐라 말했는지 궁금해지면서 은근히 불안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난 자네가 쪼끄말 줄 알았는데.....아주 큰데. 우리 켈리에게 달랑 들릴 정도면....요만할 거라 생각했지." 무슨 말을 했는지, 드디어 짐작이 되었다. 다른 나라 왕에게 그런 말이 들어갔을 거라 생각한, 아찔할 지경이다. 엔리케 4세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켈리, 혹시 내 사윗감인 거냐?" 이쯤 되니 왕과 공주가 아니라, 그냥 시골 귀족 아버지와 딸인 듯 보였다. 켈브리안은 눈을 찡긋해 보이고는 말했다. "그럼요. 지금은 좀 어리지만, 3년만 더 키우면 아주 근사해질 거예 요. 잘 키워볼 생각이에요." "아아, 그래---그래 보이는 군. 집안도 좋고, 얼굴도 잘생겼고, 성격 도 우리 켈리랑 맞고....뭐, 난 크게 성격 좋은 건 바라지 않아. 우리 공주랑 맞기만 하면 되지....첫인상이 아주 좋아, 아주." 상황이 어떻게 이렇게 흘러가는 건지, 아킨은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 했다. 켈브리안과는 겨우 몇 달 전에 재회했을 뿐이고, 이야기를 제 대로 나누어 본 적 조차 없다. 게다가, 아킨은 휘안토스와는 달리 정치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었으니 각 나라꼴이 어떤 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적어도 보통 사람보다는 잘 알지만, 휘안토스나 아 버지, 또는 숙부 정도까지는 모른다.) 그 때 시종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왕비전하께서 듭십니다." "고약한 마누라가 납셨군." 켈브리안이 책망하듯 작게 말했다. "아버지-" "아, 이런...내 정신 좀 보게나. 이봐 아키 군, 지금 내가 한 말은 잊 어주게나. 알겠지?" "저기......" 엔리케 4세는 단박에 무시하고는 밖에 있는 시종에게 외쳤다. "거기서 기다리라고 해, 내가 직접 나갈 테니." "네, 폐하!" 그리고 왕은 아킨과 켈브리안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말했다. "자, 어서 나가 보지." *********************************************************** 작가잡설: 아키는 연상에게는 약하죠...? 롤레인, 메리엔, 여기 켈브리안 까지.......;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9장 ************************************************************** [겨울성의 열쇠] 제41편 넘치는 잔#6 *************************************************************** 막사 밖에는 벌써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브리올테 왕비는 제일 앞 에 있다가, 딸과 함께 있는 아킨을 보자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녀는 재빨리 치마를 걷어올리고는 남편 쪽으로 가까이 오려 했다. "저--" 그러나 왕은 그 말을 손을 휘휘저어 막고는, 우선 시종에게(왕비가 아닌) 말했다. "이 쪽은 내 사랑스런 켈브리안의 친구이네. 그리고 오늘 사냥은 켈 브리안과 이 소년과 함께 사냥을 나갈 테니, 모두에게 그렇게 전하 도록." 왕비의 얼굴이 이제 거의 새빨개졌다. 공주는 기대했던 바였는 지 만족스레 웃었고, 아킨은 쏟아지는 시선을 피하다가 저 앞의 슈마허 와 마주쳤다. 슈마허는 고개를 숙인 채 입에 주먹을 가져가서는 큭 큭 웃고 있었다. 아킨이 켈브리안에게 재빨리 속삭였다. "상황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겁니까?" "말한 대론데?" "선...." "쉿. 그리고 난 공주야." 켈브리안은 입술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브리올테 왕비는 어쨌든 딸과 남편이라, 표정을 부드럽게 바꾸고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말씀은 미리 하시지 않고요." "당신은 어차피 막사에 있을 것 아닌가. 알아서 뭐하게?" 아킨은 왕비가 입술을 꾹 짓누르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모멸감과 분노에 타는 연푸른 색 눈이 아킨을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생각인지, 갑자기 왕비가 앞으로 나왔다. 가끔 경솔한 짓을 해 도, 지금의 그녀가 왕의 동생인 그레코 공작과 팽팽한 관계를 노련 하게 유지하는 만만치 않은 여자인 것도 사실이다. "처음 뵙는군요. 어디 출신이시죠, 공자?" "암롯사의 아킨토스입니다, 전하." 역시나, 주변으로 술렁임이 퍼져나갔다. 왕의 오른편에 있던 그레코 공작의 눈이 아킨을 면밀하게 훑었고, 사냥복 차림의 사람들이 서로를 마주보며 속삭였다. 눈치 빠른 사람 들은 벌써 슈마허 옆에 붙어 있는 세르네긴의 표정을 살피기도 했 다. 그러나 그 녹갈색 눈의 청년은 여전히 무표정하게 아킨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왕비마저도 나직하게 한숨을 내 쉬었다. "만나 뵙게 되어 기쁩니다, 왕자.....대공왕 전하께서는 안녕하신지 요?" 아킨은 엄격하고도 무서운 아버지를 떠 올렸다. 그 매서운 녹색의 눈동자...그래, 늘 건강하긴 하다. 어린 아들을 지치지도 않고 혐오할 만큼. "네." 그 때 뒤쪽에서 그레코 공작이 말했다. "만나게 되어 나 역시 기쁘군요. 토머넌트 최연소 결승진출자가 아 니었소." 아킨의 눈이 싸늘하게 내려앉았다. 브리올테 왕비의 문제가 성격이 급해서 경솔한 실수를 곧잘 한다는 것이면, 이 그레코 공작의 문제 는 바로 지나치게 오만해서 자신이 아는 것을 과신한다는 것이었다. "뭔가 착각하신 것 같군요. 그 해 준우승을 한 것은 제가 아닌 제 형, 휘안토스 입니다." 공작의 얼굴이 창백해졌고, 왕비가 뒤에서 비웃음을 흘렸다. 켈브리 안마저 기가 막혀서 웃었을 정도였다. 그런데 엔리케 4세가 크게 웃 더니, 아킨의 어깨를 잡아 앞으로 밀었다. "그럼 그 동생은 어떤지 보고 싶군." "아버지!" 켈브리안은 급히 아버지를 말리려 했지만, 엔리케 4세는 이미 세르 네긴을 향해 외친 뒤였다. "자, 세르네긴 포틀러스 군. 어떤가, 3년 전에 만난 라이벌의 동생과 한번 겨뤄 보는 것이." 무례하고 경솔한 청이었다. 이런 맙소사, 하며 아킨은 세르네긴이 이 경우 없는 청을 거절해 주기를 바랬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모자 라는 것이었고, 그것은 아킨은 비록 유폐와 추방을 거듭해왔기는 하 나 대공왕가의 직계 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거절'은, 아킨에게는 당연한 것이었지만 외국인인 데다가 출신조차 불분명한 세르네긴에 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영광입니다." 세르네긴이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상대가 먼저 이렇게 나온 이상, 아킨은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세르네긴은 슈마허에게 뭐라 속삭였고, 슈마허가 저 쪽으로 턱짓을 보내자 창을 든 호위병이 달려와 그것을 건네주었다. 세르네긴은 창 을 받아 들고는 두 손으로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그런 노련한 청년 의 모습에, 엔리케 4세는 아킨에게 기대로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럼, 자네는 그 검으로 내 딸을 위해 싸워주게나." "전 검을 쓰지 않습니다." "그럼 창이나 할버드인가?" "아닙....니다." 거절할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켈브리안의 체면을 위 해서라도 싸우는 척은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거의 알레르기에 가까울 정도로 검을 싫어하고 있으니 검 쥐기도 어렵다. 그렇다고 주먹을 휘두르자니, 그건 그것 나름대로 해괴한 꼴이다. 그러던 아킨은 사냥꾼들이 쥐고 있는 팔 길이 정도 되는 막대기에 눈이 멎었다. 덤불을 쳐서 동물을 몰아 낼 때 쓰는 것이었다. "저걸 빌릴 수 있을까요?" "저 몽둥이?" ".....목검이라 부른답니다." 켈브리안이 애써 변명했다. 휘안토스가 준우승한 그 해 신년 연회에 아킨은 물론 참석하지 않 았다. 그러나 늪의 성에 도착해, 연회를 피해 본가에 들렀던 아킨은 휘안 토스와 만날 수 있었고, 그 해 첫 출전에 준우승이라는 놀라운 전과 를 이룩해 낸 휘안토스가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눈만은 지독한 자괴감에 시달린다는 것을 눈치챘다. 늘 최고였던 휘안토스였고, 당연히 최고일 휘안토스였다. 그리고 그 열 네 살의 자존심을, 세상은 자신이 얼마나 넓고 위대한지 지는 보 여주며 매정하게 꺾어 버린 것이다. 호기심은 일었지만, 대결해서 내가 꺾겠다, 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다. 형과 '비교' 될만한 일은 무엇이든 거부해온 아킨이었다. 그토록 애 착을 가졌던 검을 1년만에 집어던져 버리고 마법을 택했을 정도였 고, 형과 같이 있는 자리는 어디든 피하고 보자는 식이었다. 휘안토 스를 신경 쓰기 시작하면, 바보처럼....그 강박관념에 눌려 마비가 되 어 버리고, 결국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 버린다. 그리고 그런 자 신을, 아킨 본인이 가장 싫어했다. 앞으로 나선 세르네긴은 동굴 바닥에 고인 물처럼 차분하고 냉정했 다. 녹갈색 눈동자는 무례한 청에도 흔들림 없었으며, 이런 하찮은 여흥 을 위해 싸우는 것이라도 몸가짐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다. 그리고 창을 받아, 그것을 세우고 이마에 갖다 대더니 조용히 뭐라 중얼거 렸다. 무슨 예의-같기는 한데, 아킨으로서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싸움 직 전의 기도 같은 것인가...그저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다. 생각해 보니, 자켄도 사냥 직전에 조그맣게 기도문을 읊는 것을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창대가 붕, 크게 소리를 내며 반원을 그렸다. 그저 여흥-상대의 신분을 고려해 적당히 싸우고 물러나도 되는 자 리. 그러나 아킨은 세르네긴의 눈빛을 보며, 그가 그런 '장난'을 허 락할 상대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대결 앞에서 무섭도록 진지해질 수 있는 자이며, 의외로 고지식한 남자 같아 보였다. 아킨은 빌려온 짧은 목검을 세웠다. 검을 쓰는 암롯사의 검법은 이 미 잊은 지 오래였다. 열 세 살부터 그의 스승은 따로 있었고, 그가 가르친 것들은 모두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것들이었다. 창이 아킨을 노리고 들어왔다. 살의는 없다-아킨은 날을 피하고는 손을 휘둘렀다. 창이 방향을 바 꾸고, 묵직한 창대가 회전하며 배를 노린다. 그것을 목검으로 가볍 게 막고는, 팔목을 비틀어 창대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꽤 세게 후려쳤는데 균형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 무겁고 긴 것을 휘두르면 서, 세르네긴은 가벼운 막대기처럼 다시 당겨 올리더니 방향을 바꾸 어 내리쳐왔다. 아킨은 피했고, 그 긴 날은 옆의 바위를 콰릉- 쪼개 버렸다. 돌조각 이 튀어 오르고, 날개 치는 듯한 바람소리와 함께 다시 창은 위로 솟구쳤다. "---!" 그제야 그 둘을 지켜보던 켈브리안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여흥으로 즐길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살의는 없다 하더라도, 세르네 긴은 그 자체가 흉기였다. 아킨이 검을 열 세 살에 치워버렸다는 것 을 아는 켈브리안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아킨이 들고 있 는 것은 목검일 뿐이었다. 그 때 콰즈--하며 세르네긴의 창을 받아치던 목검이 단번에 부러져 나갔다. "이런, 맙소사...!" 엔리케 4세가 놀라 탄식했다. 그러나 그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아킨의 흐름이 바뀌었다. 목검을 쥔 손이 세르네긴의 가슴 쪽으로 파고 들어가자, 세르네긴은 창대로 그것을 막았다. 그러나 아킨은 방향을 바꾸고는 등을 세르네긴에게 보이며 팔을 휘둘렀다. 아킨을 밀어젖히려던 그는, 목으로 파고 들 어오는 목검을 보고는 허리를 틀어 피했다. 아주 짧게 숨 몰아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반대편 팔꿈치가 세르네긴의 허리를 찍어 들어갔 다. 세르네긴이 미처 창을 회수하지 못해 그것을 막지 못했고, 아슬 아슬하게 피하긴 했으나 약간의 통증을 남겼다. 다시 목검조각이 위 로 치솟고, 세르네긴의 옷깃이 찢어지며 그 목이 드러났다. 긴 목에 걸고 있는 은으로 된 목걸이가, 그 줄이 툭 끊어지며 바닥으로 떨어 졌다. 세르네긴의 눈이 잠깐 그곳을 향했다. 아킨은 끊어진 목검을 단검처럼 쥐고는, 다시 목을 겨누었다. 그러나 왕이 급히 외쳤다. "그만---! 이제 됐어!" 검술에 대해 전혀 모르는 엔리케 4세는, 아킨의 목검이 끊어진 마당 에 더 진행시키는 것 자체가 겁이 낫던 것이다. 세르네긴의 창은 황 소처럼 무시무시했고, 그 앞에 무기도 없이 서 있는 아킨은 너무나 위태위태해 보였다. 그레코 대공이 반박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여흥이야, 여흥--! 누구 하나 다쳐 나가는 사고를 보고 싶 지는 않아." 세르네긴은 즉각 창을 당겨 올렸다. 그리고 아킨 역시 검을 내리고 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런 아킨에게 세르네긴이 말 했다. "결과는 없군요, 왕자님." 결과가 없다- 그것이 아킨은 안심 시켰다. 그래, 괜찮아, 그러니 오늘밤은 편히 잠들 수 있을 것이다. "암롯사의 군주께 영광을." 그렇게 말하고는, 세르네긴은 땅에 떨어졌던 목걸이를 집어들었다. 줄이 늘어진 목걸이에는 작은 금가락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는 그것 을 집어 행여 흠이 나지 않았는지 면밀히 살피고는 주머니에 넣었 다. 약혼반지라도 되는 걸까, 아킨은 그 조심스런 손길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바위 같은 남자였지만, 그것을 집어들 때의 손길과 눈빛 에는 무언가 아주 따뜻하고 섬세한 것이 흐르고 있었다. 세르네긴은 창을 원 주인에게 넘겨주고는, 곧장 그 주군인 슈마허에 게 다가갔다. "아키-" 켈브리안이 다가와 속삭였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엔리케 4세가 모 인 사람들을 향해 크게 말했다. "자, 이제 사냥을 시작하자고! 시종관, 어서 말 한 마리 더 준비해 오게나!" 그 때 아킨은 뜨끈한 것이 목덜미로 흐르는 것을 느꼈다. 손을 대 보니, 피가 묻어 나왔다. "이런..." "어땠나." 슈마허가 묻자, 세르네긴은 목걸이의 끊어진 줄을 손보며 말했다. "잠깐....기다려 주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말하며 계속 손을 서툴게 꼼지락거리고 있자, 슈마허 가 손을 내밀었다. 세르네긴은 잠시 망설이더니, 그 위에 목걸이 줄 을 놓았다. 슈마허는 어려움 없이 끊어진 고리를 손보고는, 그 주인 에게 건네주었다. "차라리 손가락에 끼워 넣지 그러나." "그럴.....수는 없습니다." "고지식한 녀석." 세르네긴은 목걸이를 목에 걸고는 옷 속으로 집어넣었다. 슈마허가 핀잔을 놓았다. "그렇게 다닐 거면 나중에 좋은 줄로 바꿔. 싸구려니까 그렇게 가볍 게 스치기만 해도 툭툭 끊어지는 거 아닌가." "그럴 돈이 없습니다." "저 왕비에게 하나 달라고 해 볼까? 내가 달라고 하면, 자기 것이라 도 빼 줄 테니." 슈마허의 손이 저 쪽에서 어느 키가 작고 살이 찐 남자와 이야기하 고 있는 브리올테 왕비를 향했다. 세르네긴의 눈 주위로 아주 희미 한 미소가 떠돌다 사라졌다. 슈마허가 말했다. "어쨌든......난 아직 답을 못 들었어. 어땠지?" "아주 대범하더군요." "무모하다는 말인가?" "무모한 것은 아닙니다.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보일 땐 엄청나게 강하 게 밀치고 들어오지만, 그렇지 않다면 충분히 신중합니다." "저 꼬마의 형과 비교해 보면." "비교할 수 없습니다. 저 소년은 그 형과는 전혀 다른 스승에게, 전 혀 다른 방식으로 배웠으니까요. 누가 더 낫다, 못하다...평할 기준이 전혀 틀립니다." "같은 가문의 아들인데?" "어째서 형과 동생이 그 정도로 틀린 지, 그 내력은 잘 모릅니다. 그 형인 휘안토스는 암롯사 출신의 스승과 그 아버지에게 교육을 받았다는 것을 금방 알아 볼 수 있었지만, 저 소년은......'인간'에게 배운 것이 아닌 듯 합니다." 사냥의 시작을 알리는 뿔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 개가 크게 짖어 대면서 숲 안으로 쏜살같이 달려가고, 몰이꾼들과 사냥꾼들이 그 뒤 를 따랐다. 세르네긴은 그 소리에 묻혀 자신의 답이 들리지 않을까 해서 잠시 조용히 있더니, 주변이 조금 잠잠해지자 말을 이었다. "암롯사에서는 저렇게 짧은 것'만'을 이용하는 검법은 가르치지 않 습니다. 아니, 암롯사의 어떤 기사들도 저런 검법을 구사하지는 않 습니다. 눈 나쁜 자들은 자객들이나 쓰는 법이라 하기도 하고요." "그럼 스승이 대체 누구란 말이지, 세르네긴?" "어둠 숲의 일족일 것입니다. 숲을 누비는 그 날렵한 전사들은 장검 보다는 활과 짧거나 구부러진 얇은 검을 이용합니다. 또한 그들은 검만을 쓰라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적이 동요하는 순간, 적의 공격 의 흐름이 비틀리는 순간, 그 순간을 만들어 내기 위해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하며 이용합니다." 세르네긴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는 목걸이를 한번 만지작 거리고 말 했다. "방금 전, 저는 검의 길이에 맞게 공격을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스 스로 부러뜨릴 줄도 몰랐고, 부러지는 순간 녀석은 내 공격의 틈을 파고들어....여기를 공격했습니다." 세르네긴은 목을 쳤다. "나도 한번 배워 둬 봐야겠군." 슈마허는 농담이었지만, 세르네긴은 진지하게 답했다. "못하실 겁니다." "늙어서?" "그들은 '인간'에게 그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자존심 때문이 아니 라, 인간이 할 수 없기 때문이죠. 엘프 정도의 감각을 가지지 않는 한, 그런 감각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런 것을 가 르쳐 놨다가는 외려 싸우는 데 방해만 될 뿐입니다." "그 꼬마는 그럼 어떻게 배운 거지." "녀석도 '인간'이 아니니까요." "설마 엘프라도 되나?" 슈마허가 흥미를 담은 눈길을 보내자, 세르네긴은 자신의 눈을 가리 키며 말했다. "...'짐승'에 가깝습니다." *********************************************************** 작가잡설: 세르네긴요? 아직 정체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알고 보 면 완전 바른생활 맨입니다. ^^ 하루 쉽니다. ^^ 아버님 생신이라 대전 내려갑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10장 ************************************************************** [겨울성의 열쇠] 제10장 얼어붙은 불꽃 제42편 얼어붙은 불꽃#1 *************************************************************** 큰 멧돼지가 눈앞에서 큰 창에 찍혀 죽었고, 어디선가 쫓겨 나온 암 사슴 한 마리는 뒤를 따르던 수사자 머리 같은 남자의 화살에 맞 아 피를 뿜어내며 죽었다. 사냥꾼들은 피에 흥분한 사냥개들이 달려 들기 전에 그 사냥감을 어깨에 둘러매고는 그 뒤를 따랐다. 숲 깊은 곳에서 숨 끊어지는 짐승의 울부짖음이 들려왔고, 환호가 파도처럼 쏟아졌다. 배를 갈랐는지 확 피어오르는 피비린내가 예민한 후각을 덮치고, 머리가 어질 거릴 정도로 욕지기가 쿡 치밀어 올라왔다. 자켄이 봤다면 혼절이라도 했을 테지, 그렇게 생각하며 아킨은 멀찍 이 물러났다. 가장 주목을 받는 슈마허나 세르네긴, 그 유명한 무장과 역시나 유 명한 기사는 쫓기는 짐승에는 아무런 흥미가 없었다. 그저, 저럴 거 면 대체 왜 왔나 싶을 정도로 한가로의 숲 속을 '유람'하고 다녔을 뿐이다. 브리올테 왕비 역시 마찬가지로, 호위에 둘러싸인 채 왕이 사냥에 성공하면 억지로 웃어 보이곤 했을 뿐이었다. 그녀의 목적은 어차피 왕이 아직도 건강하다는 것을 보이는 것뿐이었고, 지금 충분히 성공 하고 있었다. 그러나 왕비의 앙숙인 그레코 공작은 유명한 사냥광이 라, 벌써 몇 마리나 되는 사슴을 잡았고, 최고로 풍성한 수확을 올 리고 있었다. 막 왕과 그 주변 사람들이 놀라 튀어나온 여우 한 마리 쪽으로 몰 려가자, 슈마허 쉐플런은 왕비 쪽으로 말을 몰았다. 브리올테 왕비 는 금새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말을 건넸다. "어머나, 슈마허 경." 그 모습을 멀지 않은 곳에서 보는 켈브리안 공주의 눈이 날카로워 졌다. 그러나 정작 슈마허가 한 말은 고작 "튼튼한 목걸이 줄 하나 구할 수 있을까요?"였다. 그러나 왕비는 고백 받은 처녀처럼 얼굴을 붉히더니, 정말 좋은 것으로 마련해 줄 테니 내일 보자는 말로 답했 다. 슈마허가 웃으며 말했다. "그냥 튼튼하기만 하면 됩니다. 검으로 찍어 당겨도 무사할 정도로." 그 말에, 켈브리안 보다 더 가까운 곳에 있던 아킨이 문득 떠올린 것은 방금 전 자신이 끊어버린 세르네긴의 목걸이였다. 그것을 마련 해 주려고 왕비에게 말하는 건가. 고작 부하를 저 정도로 챙기는 상관이라니-정말 어떤 관계인지 궁 금해졌고, 그런 것을 한 나라의 왕비에게 부탁하는 뻔뻔함에는 경의 를 표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곧 흐릿한 그림자가 희미하게 사라져 버릴 정도로 어둑어둑해졌다. 시각은 고작 세시 정도였지만, 하늘은 비가 쏟아질 듯 컴컴했고 습 기도 진해졌다. 젖은 땅 냄새가 풍겨오고, 감각이 예민한 사냥꾼들 은 곧 비가 올 것 같다고 왕에게 말했다. 투덜대면서 나왔긴 하지 만, 오랜만에 사냥에 나섰기 때문에 한껏 물이 올랐던 왕은 서운함 을 감추지 않으며 "아직 오지 않잖아."라고 불평했지만, 그 말이 끝 나기 무섭게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투두두두두-- 나뭇잎들 위로 빗줄기가 쏟아지며 이리 저리 흔들렸다. 나뭇가지들 이 젖어 번들거렸고, 풀잎들은 빗방울에 맞아 아래위로 몸을 흔들어 댔다. 풀을 뽑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냥터는 금새 진흙탕이 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망토를 뒤집어쓰고 막사로 돌아갔다. 각 귀족들의 하인들이 막사에서 쏟아져 나와 주인의 말고삐를 쥐고, 사냥개들을 수습하고, 주인을 막사로 안내하며 수건을 건넸다. "이제, 다른 일은 없는 겁니까?" 아킨은 비에 젖은 머리카락을 마저 닦아내며 켈브리안에게 물었다. "나중에 연회가 있어. 오늘 잡은 걸 굽겠지, 아마." 켈브리안은 자신의 빈 막사에 아킨을 끌고 들어와서, 그렇게 단 둘 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모피가 깔린 의자에 앉고는, 젖은 모자를 벗어 의자에 얹어 놓았다. 그리고 두 손을 각지 끼고 턱을 얹은 다 음 말했다. "네가 보기에, 아버님은 어떤 분인 것 같니?" "시골 영지의 영주였으면 누구에게나 사랑 받는 훌륭한 분이 되셨 을 겁니다." 켈브리안이 심술궂은 얼굴로 물었다. "한나라의 왕으로는?" "지금 말하기는 곤란하군요." 켈브리안이 이내 웃었다. "맞아. 아버님은....얼결에 왕이 되신 분이야. 본인은 별로 바라지도 않았지만, 에크의 여대공 죠세피나는 그를 왕족이었던 어머님과 결 혼시켜버렸고, 전대 티폴라 할머님께서는 심지어 '후계자로' 불러들 이시기까지 했지. 아버님은...내가 기억하기로는, 아주 버거워 하셨 어. 아버지는 한가한 생활을 아주 좋아하셨으니까. 그러나 어머님은 정 반대로 권력에 무섭도록 집착했지. 그레코 공작 역시 마찬가지이 고, 지금의 국가적 불행은 그에 기인하는 셈이야....." "힘없는 고통을 아는 분들이실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고는, 아킨은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그렇다면.....저는 왜 끌어들인 겁니까?" "보다시피, 어머님께서는 정말 여기 저기에 나를 전시하고 있어. 어 머님의 자식은 단 하나, 기회를 얻게 해 준 고마운 베르티노 뿐이 고, 그 아이를 위해서라면 큰딸은 어디든 값 듬뿍 받고 팔아 치울 거야.....게다가 요즘 아버님이 편찮으셔서 더 신경 쓰고 있지." 그리고는 그녀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너도 짐작했다시피, 너를 부른 건 그 끔찍한 경매에 나가고 싶지 않기 때문이야." 즉, 아킨을 옆에다 붙여 놓은 것은 켈브리안이 아는 미혼 남자 중 가장 신분이 높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미 혼담이야기가 나온 암롯 사 공왕가의 아들이기도 하니, '공주의 배우자'가 정해졌다는 인상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그 정도 이유....라면" "라면?" "괜찮습니다. 하지만, 오늘처럼 평일에 부르지는 마세요" "어머나, 왜?" "공부해야 해요." "......" 브리올테 왕비는 부채를 팔랑거리며, 건너편 막사에 있을 켈브리안 과 아킨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사의 천이 내려져 있어, 안은 잘 보이지 않았다. 비가 내려 오싹할 정도로 추웠지만, 그녀의 부채질은 더욱 거세졌다. 그녀의 시녀장인 발라 부인이 브리 올테 왕비의 머리카락과 목덜미의 물방울을 닦아주었다. 왕비와 동 갑이며, 에크롯사에 있을 때부터 그녀의 절친한 친구이자 시녀였던 발라 부인은 강아지 같은 인상의 아름다운 여자였다. 또, 명석하지 는 못했지만 주제넘게 나서는 법 없이 입이 무겁고 왕비에게 충실 했다. 그녀는 그렇게 신경질을 내는 왕비에게 상투적인 위로만을 던 졌다. "너무 과민하지 마세요, 전하." "과년한 딸이 다 큰 남자를 데리고 막사로 들어갔는데 어떻게 신경 이 쓰이지 않겠나." "저 왕자 분께서 시종이 없으셔서 그런 것이죠." "왕자는 무슨. 자네는 모르겠지만, 암롯사 공왕의 둘째 아들에게는 승계권이 없어. 왕자가 아닌 그냥 '공자', 내지는 '도련님'쯤으로 불 려야 맞아." 발라 부인은 깜짝 놀랐다. "어머나, 어째서요?" 브리올테가 훗, 차갑게 웃었다. "병이 있거든." "하지만....멀쩡해 보이는데요?" "평소에는 멀쩡하지. 하지만, 제 어미랑 같이 미쳤던 꼬마가 정말 나았을 라고? 내 오라버니가 그러시는데, 그런 병은 절대 고쳐지지 않는다더군. 제 어미도 결국 죽었잖아." 발라 부인은 심술궂게 말하는 왕비의 속내를 대충 헤아렸다. 브리올테 왕비는 정치적으로는 능력 있는 여자이긴 했지만, 입이 무 거운 바라 부인 앞에서는 가끔 속 싶은 곳에 숨겨놓았던 질투심을 솔직하게 드러내곤 했다. 암롯사의 대공왕, 사이러스는 그 잔혹함을 직접 보지는 못하고 흉흉 한 소문만 들어온 귀부인들에게는 사실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에게 는 높은 지위에, 키도 크고 아주 잘생긴 데다가 동 툴칸의 함대와 해적단을 해저에 내려 박고 나셀 해를 차지할 정도의 능력도 있었 다. 순진한 여자들은 행여나 저 젊고 난폭한 왕이 자신과 사랑에 빠 져 비뚤어진 심성이 부드러워 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사이러스는 엉뚱하게도 시골에서 올라와 평민이나 다 름없던 하급귀족의 딸에게 반했고, 그녀가 죽은 후 십 년이 다 되어 가도 재혼은커녕 주변에 여자하나 두지 않고 있다. 브리올테 왕비가 불만인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왕족인 자신은 어 리석고 못생긴 남자에게 시집가서 고생하고 있는데, 그 예쁘기만 할 뿐 신분도 낮고 집안도 변변찮은 여자는 대공왕의 눈에 들어 공비 가 되고, 그렇게 사랑을 받았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안 들었다. 그 유명한 대공비가 결국 미쳐서 유폐되었을 때, 브리올테 왕비는 내심 고소해 했다. 브리올테는 냉담하게 빈정거렸다. "공주가 계승권조차 없는 엉뚱한 남자 붙들고 멍청한 짓이나 하고 있으니, 공작만 좋아하겠군." "그럴리가요. 공작님께서도....안드레아 공자와 공주와의 혼담을 이야 기하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은 나와 협상할 생각, 자체가 없어. 나를 실각시키고 자신 이 '섭정' 자리에 올라가면....그 멍청한 안드레아를 당장에 공주와 결혼시키고는, 그 아들을 왕위로 올려놓으면 되니까. 나를 방심시키 려고 일부러 그런 말을 꺼내는 거지." 다른 막사에서 슈마허가 공작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곳 에는 여러 사람이 모여 있어 막사 문이 열려 있었고, 공작은 슈마허 와 자신의 절친한 친구이자 측근인 뒬러 백작과 이야기하는 중이었 다. 예의바르고 정중한 슈마허는, 공작이 귀찮고 쓸데없는 질문이나 하고 있을 텐 데도 내색하나 없다. 왕비는 차라리 저런 남자와 결혼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 이 들었다. 신분이 낮으면 자신이 높이 올려주면 된다. 재산이 없어 도 괜찮다. 그녀가 저 남자의 아내였다면, 최선을 다해 뒷바라지해 최고의 자리로 올려놓았을 것이고, 자신도 그의 명예를 누리게 되었 을 것이다. 공주와의 혼담을 꺼내는 이유도, 반은 슈마허를 그녀 편 으로 끌어들이려는 점도 있었지만 공주를 얼간이 귀족이 아닌 정말 능력 있는 남자와 짝 지워 주고 싶은 마음이 아예 없었던 것도 아 니었다. 어쩌면 양심을 달래기 위한 기만일 지도 모르지만, 그만큼 저 슈마허가 마음에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브리올테 왕비는 귀족남자들을 경멸했다. 어리석은 주제에, 으스대 기만 하는 족속들. 그러니 그 족속들 위에 보란 듯이 군림하고 싶었 다. 특히 오만한 중에서도 더욱 오만한 그레코 공작에게는. 생각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갑자기 멀찍이 있던 그레코 공작이 고 개를 들더니 왕비에게 웃음을 보냈다. 꼴도 보기 싫어서, 브리올테 왕비는 눈을 내리깔며 내 쏘듯 중얼거렸다. "...그냥 '그 사람'이나 불러 볼까. 이렇게 머리 굴리며 고민할 필요 없이 단번에 끝날 텐데." 발라 부인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전하, 안됩니다! 지난번만 해도 얼마나 아슬아슬했는지 아시지 않 습니까. 절대 안 됩니다!" 발라 부인은 벌써 하얀 얼굴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리고는 간 절하게 말했다. "전하, 행여나 그런 생각은 떠올리지도 마십시오!" "조용, 조용...누가 들으면 어쩌라고 그러니." 브리올테 왕비는 신경질 적으로 말하고는 부채를 움켜쥐었다. "게다가, 무섭긴 뭐가 무섭다고 그리 호들갑인가. 어차피 내 손안에 있는 사람인 걸. 또, 그 정도 뛰어난 분인데.....성격이 좀 그러면 어 때. 아니, 외려 당연한 거지." 그렇게 말하는 왕비의 눈은 오만하게 빛났고, 발라 부인은 떨리는 두 손을 꼭 잡으며 제발 그럴 일이 없기만을 바랬다. 그녀는 티폴라 여왕 승하 직전에 브리올테의 부름으로 찾아왔던 '그 사람'을 다시 는 보고 싶지 않았다. 정말, 금방 지옥불에서 튀어나온 악마 같은 사람이었다. "왠 비냐....." 루첼은 처마 아래 아래로 잽싸기 뛰며 투덜댔다. 롬파르 시내에서도 먹구름이 우글우글 몰려오며 비를 쏟아냈다. 늦 은 봄비에 흠뻑 젖은 시내는 칙칙한 회색으로 변했고, 기온도 겨울 처럼 차가워졌다. 그런 날씨에 좁은 뒷골목을 걷는 것은 고역이었다. 물은 여기 저기 고여서 냇물처럼 흘렀고, 지붕에서 굵은 물방울이 줄줄 쏟아졌다. 루첼이 제임의 주점에 도착했을 때는, 완전히 물 빠진 생쥐 꼴로 흠 뻑 젖어버렸고 입술도 파리했다. "너, 오늘은 또 웬 일이야?" 제임이 그런 루첼 앞에 잔을 놓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 안에 진한 갈색 술을 따라주고, 작은 병에 든 빨간 액체를 한 방울 넣어 주었 다. "우선 몸이나 덥혀둬." "고마워.....그건 그렇고, 저기. 체니는 어디 있어?" "자고 있다. 그런데 체니는 왜?" "놀자고 하는 거지." 제임은 무표정한 얼굴로 행주로 잔들을 닦았다. 이제 오후 네 시였 고, 밖에서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어 가게 안은 아주 한산하고 습했다. 제임이 다시 물었다. "큰 새가 뭐 알아오라고 시켰나?" 큰 새-즉, 루첼의 후견인인 베크만 알베스티를 말한다. 그는 정보 길드와 접촉할 때면, 언제나 루첼을 통한다. 그리고 한창 민감한 지 금, 그 체놀비의 늙은 여우가 루첼에게 아무 것도 시키지 않았을 리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루첼은 고개를 저었다. "없어. 그냥 놀러 오면 안 되는 건가?" "오지 마." ".....응?" 루첼은 마시던 술을 반만 비우고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렇게 엄격하게 한마디 던진 제임은, 묵묵히 테이블을 닦고 있는 중이었다. 눈치 빠른 루첼은 제임의 무표정한 눈빛 아래 어떤 뜻이 담겨 있는지 알아챘다. "무슨...일이 있는 거지?" "너도 알다시피, 지금은 '예민한 시기'라고." "티폴라 여왕이 승하한 후, 반도는 언제나 예민했어. 유난 떨 필요 는 없잖아." 제임이 손가락으로 선을 그었다. "뭔가 터져 오를 최고점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특히' 예민한 거다. 너도 알다시피--네가 속한 알베스티 가 역시 입장을 이랬다, 저랬 다 하고 있잖아. 평소라면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아. 뭔가, 변수가 생 겨서 그런 거지. 왕이 생각보다 위독하다든가." "그래서...?" "그런 알베스티 가에 속해 있는 녀석이 우리 길드와 이렇게 가깝게 붙어 있는 걸 보이면 안 좋다, 이 말이다. 모든 고객에게 네 특이한 위치에 대해 다 설명할 수도 없고, 납득시키는 것은 더욱 어려워. 그러니 되도록 오지 말아라." "이거 서운하잖아." "지난번에 에나가 말했을 때 눈치 챘어야 했어. 하지만 에나가 네가 좀 정신이 없어 보인다고 하기래, 다시 찾아오면 내가 분명히 말 해 두려고 했었다. 뭐, 에나야 널 하루라도 더 보고 싶어서 그런 말을 했을 테지만." 제임은 행주를 던져 놓고는, 서랍장을 뒤졌다. 그리고 검은 끈으로 묶인 작은 나무 상자를 꺼내 루첼 앞에 놓았다. "첸이 너 주라고 한 거다. 우리로써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서운하 게 생각하지 말라면서." 루첼은 그 상자에 첸이 골라 놓은 동 툴칸 산 담배가 한가득 들어 있을 거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녀석들, 정말..... 루첼은 잔을 마 저 비우고는 상자의 끈을 집었다. "첸에게 잘 받았다고 전해. 그리고......괜찮다는 말도 해 주고." "사정이 괜찮아 지면 우리가 먼저 연락해 주겠다." ".....비 그치면 나갈게." "저녁은 먹고 가. 안쪽 식당에서 둘이서 먹자고." 루첼이 말했다. "편 드는 쪽이 있는 거지?" 제임의 손이 뚝 멈추었다. 작은 동요가 그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 갔지만, 눈빛은 차가운 구슬처럼 담담했다. 루첼은 담배에 불을 붙 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내가 행여나 '그 쪽'의 오해를 부를까 해서 오지 말라는 것이겠고." "하지만, 이건 네 안전을 위하는 길이기도 하고, 첸과 에나의 결정 이기도 하다. 우리는 널 버리는 사태가 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넌 분명 중요한 녀석이고, 첸이나 에나나 둘 다 언젠가는 네가 돌아 올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또, 나는......당연한 거고." "책임감은 있었네, 제임." "닥쳐, 이 발칙한 조카. 이름 막 불러내는 것도 겨우 참아 주는 거 니까. 어쨌건 오지마. 요는 이거다." 루첼은 고개를 저었다. "알아. 알아. 나도...이 선이 내가 당신들을 돕는 길이란 것도 알고 있으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루첼은 기분이 씁쓸했다. "몸조심해, 의절당한 삼촌." "아주, 끝까지 발칙하군. 그럴 거면 차라리 제임이라 불러. 그게 더 애정 넘치게 들린다." 루첼은 피식 웃었다. 왜 이렇게 다들 내 옆을 못 떠나서 안달들인 건가. 지금 결혼한다고 좋아하는 쥰 녀석, 그와 결혼할 실비, 그리고 이제는 이곳 친구들과 유일한 핏줄인 삼촌까지. 가을에 가지를 떠나는 낙엽처럼, 얇은 가지 하나만 남겨 놓은 채 후 후두두--바람에 휘말려 올라간다. 기분이 늦은 봄비만큼이나 차갑 게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누가 권력을 잡던, 누가 실각을 하던 루 첼은 아무 관심도 없었고, 상관도 없었다. 그저, 이렇게 점점 외로운 처지가 되어 가는 것이 불안할 뿐이었다. *********************************************************** 작가잡설: 네, 제임과 루첼은...삼촌 조카 사이였습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10장 **************************************************************** [겨울성의 열쇠] 제43편 얼어붙은 불꽃#2 ***************************************************************** "굉장한 미녀에게 납치되었다고 하던데." 그렇게 말하는 롤레인의 검은 눈이 안경 너머에서 번득였다. "그런데 우리 사랑스런 주리에게 내 입으로 어떻게 말한담.....'주리 야, 무시무시한 경쟁자가 생겼더구나.' 하고." 아킨은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알면 됐어." 루첼이나 아킨이나, 그날 정식 강의는 없었지만 아킨에게는 롤레인 과의 개인교습이 있었다. 켈브리안에게 끌려가며, 아킨은 '교수님께 말씀 드려줘!' 하고 다급히 말해 놓기는 했지만, 사정을 모르는 루첼 이 얼마나 제대로 말했을 지는, 아킨도 회의적이었다. "학기초에 분명 '모든 개인 적인 일'을 접고 내 수업에만 충실하기 로 하지 않았니?" "거절할 틈이 없었습니다. 다음부터는....절대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 습니다." "좋아. 태도가 좋으니.......이번 일은 용서해 주기로 하지. 또, 그 여, 자, 친, 구 에게는 주말에만 만나자고 말해둬." "벌써 말했습......아니, 교수님. 여자친구가 절대 아닙니다. 저보다 두 살이나 많고요." 롤레인의 눈썹이 위로 치솟았다. "아키, 난 토트보다 다섯 살'이나' 많아." 아킨은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괜찮아. 어차피 뭐, 이런 말은 안 하려고 했지만 학습 강도를 줄여 도 될 것 같고.... 물론 이번 여름 방학 때까지지만 말이야." "네?" 롤레인은 지팡이를 빙빙 두르다가 앞에 놓인 책을 탁탁 쳤다. "그 아가씨가 어떤 아가씨냐에 달린 일이니까, 자 허리 세우고, 턱 들고. 자세 좋아. 이제 잘 말해봐." "교수님..." "오늘 빠진 벌도 겸해서." 아킨은 잠시 턱을 들고 생각에 잠겼다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힘없이 말했다. "아주 예쁜 분입니다." "응. 그리고?" 그리고 아킨은 막혀버렸다. 대체 뭘 더 설명하란 말인가! 과하게 쾌 활하다고? 요즘 들어 귀찮은 구혼자들이 많다고? 그렇게는 못한다. 아킨은 그냥 삭삭 빌기로 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교수님.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테니....부탁드립 니다. 켈브리안 선배에 대해서는 넘어가 주십시오." 순간 롤레인의 지팡이가 책을 날카롭게 딱--쳤다. 아킨은 말을 뚝 멈추어야 했다. 롤레인은 책이 패일 정도로 힘주어 지팡이를 누르 며, 엄격하게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킨토스, 로메르드의 켈브리안 공주와 동명 이인인가?" 아킨은 아차 싶었지만, 롤레인에게는 비밀을 만들어 놓고 싶지 않아 솔직히 인정했다. "네. 그 공주분이 맞습니다." ".....그 공주와는 어떻게 알게 된 거지?" "압셀론에서 1년 정도 같이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 이상은 없습니다. 그저, 그 때.....좀 알고 지냈을 뿐입니다." "좀...말이지? 그런데 같이 놀러갈 정도로 '별로 안' 친하군." 아킨은 롤레인의 말투가 날카로워졌다는 것을 알아챘다. 깨진 유리 조각의 거칠고 예민한 날처럼, 지나칠 정도로 공격적이었던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인가, 아킨은 급히 고개를 들었고 스승의 표정에 얼어 붙고 말았다. 다른 곳을 향하고는 있었지만, 그것은 화났을 때의 엄격한 빛도 아 니었고, 충고할 때의 냉정한 모습도 아니었다. 그 검은 눈 깊숙한 곳에서 매섭게 타오르는 분노와, 혐오스런 것을 향해 퍼부어 대는 듯한 차가운 증오. 꾹 문 입술은 하얗게 핏기가 빠져 있었고, 책상 위에 얹힌 채 가늘게 떨리는 주먹사이로는 피가 스며 나왔다. 아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수님...?" 그제야 팽팽했던 실이 툭 끊기듯 롤레인의 얼굴이 돌아왔다. 그리고 피 범벅인 손바닥을 내려다보고는 나른히 한숨을 내 쉬었다. "왜 그러시는 겁니까." 롤레인은 손수건을 꺼내 피를 닦아냈다. "아니, 아무 것도 아니다. 오늘 과제나 받아가.....그리고, 내일은 수 업 끝나자마자 바로 오도록." "알겠습니다." 아킨은 롤레인의 책상 옆에 놓여 있는 종이를 집어들었다. 그러나 롤레인이 그것을 빼앗더니, 서랍을 열고는 종이 뭉치를 꺼내 아킨에 게 건네주었다. 아킨은 그것을 넘겨보다가, 그 엄청나게 난해한 내 용에 현기증이 일어났다. 어제까지 하던 범위에서 세 단계는 훌쩍 뛰어 넘은 듯 했다. "이거.....다 입니까?" "내일부터는 교습 범위가 좀 늘어날 테니, 놀 궁리하지 말고 열심히 하도록. 물론, 실습 시간도 늘리겠어." "하지만 교수님, 방금 전에는..." "잊어." 밤새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아킨은 한숨을 내 쉬었지만 정중히 인 사를 하고는 연구실을 나갔다. 아킨이 나가자, 롤레인은 안경을 벗고는 눈가를 짓눌렀다. 손이 다시 부들부들 떨렸고, 이마는 벌써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심 장이 벌떡이며, 몸밖으로 튀어나올 듯 했다. 분명 우연일 테지만, 그 우연은 롤레인이 몸서리치는 기억과 '위험'과 맞닿아 있었다. 맙소사, 이렇게 예상 못한 곳에서 튀어나오다니, 그리고 그 위험을 이제야 알아채다니.....! 온 몸의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편안했던 이 주변이, 갑자기 컴컴한 적으로 돌변한 듯 했다. 망할 에크롯사 녀석들, 롤레인은 그리 중얼거리며 결국 책상을 한번 세게 후려 쳐버렸다. 사냥대회가 일찍 끝났기 때문에, 그날 계획되었던 것들. 즉, 우승자 라던가 가장 좋은 모피라든가 하는 것을 정하고 상을 내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왕은 대신 사냥한 것들을 주찬으로 하여 성대한 만찬을 베 풀었다. 사슴과 멧돼지들이 구워져 나와, 시종들의 손에 의해 썰고 담겨져 귀빈들 앞에 놓였다. 구운 고기의 구수한 냄새가 만찬 장 가 득 피어오르고, 레몬과 향신료가 곁들어져서는 싸한 향취를 풍겼다. 켈브리안 공주는 자신과 왕의 기대를 저버리고 '학교'로 돌아가 버 린 아킨을 원망하며, 동생인 베르티노 옆에 앉아 대강 식사를 마치 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왕비가 눈치를 어마어마하게 주었지만, 켈 브리안은 늘 그렇듯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옆에 바짝 붙 어 있던 그레코 공작의 외아들인 안드레아 공자가 그녀를 붙잡았다. "좀 있다가 가세요, 사촌. 자주 보는 것도 아닌데." "저.....안드레......." 그런데 맞은 편에 앉은 그레코 대공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데다 가, 그 안드레아를 동생만큼이나 귀여워하는 엔리케 4세마저도 눈치 를 주고 있었다. "조금 있다가 가지 뭐." 켈브리안은 툴툴거리며 잔을 들었고, 시종이 재빨리 달려와 그 안에 붉은 포도주를 채웠다. 옆에 앉은 어린 베르티노 왕자가 누나와 삼 촌, 사촌형까지 가세한 미묘한 신경전에 주눅이 들어 그만 나이프를 놓치고 말았다. 브리올테 왕비는 손수 그것을 집어 접시 옆에 놓아 주었다. 안드레아는 켈브리안과 마찬가지로 그 할머니인 안젤리나 공주를 닮아 금빛 곱슬머리를 가지고 있는 소년이었다. 성격은 순하고 활달 했지만, 가끔은 지나쳐서 시끄럽기도 했다. 물론 켈브리안은 안드레 아를 크게 싫어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요즘 들어 지나치게 치근덕대 는 것은 질색이었다. 안드레아가 말했다. "켈브리안, 내일 시간 있어?" 또 시작이다. 켈브리안은 포도주 한 모금으로 입을 적시고는 얌전하게 답했다. "글세......." 왕비가 달그락, 하고 소리를 냈다. 켈브리안은 그 쪽을 흘끔 보고는, 별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아마도.........그런데 왜 묻는 거지?" "그날 우리 집에서 무도회가 있다. 내 이모님이신 마가레타 백작부 인이 우리 저택에 오셔서 며칠 머무실 예정이거든." 생판 모르는 남자들과 억지로 시시덕거려야 하는 한심한 자리겠군. 그러나 켈브리안은 어머니가 내 던지는 무시무시한 눈초리에 이번 에도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놀기 좋아한다고 소문난 것과는 달리, 사실 켈브리안은 무도회니 티 파티니 하는 곳에 일부러 얼굴을 내 밀어 본 적은 없다. 자주 참석하는 편이었지만, 사실 어머니가 억지 로 '보낸 것' 뿐이었다. "어쩌겠어? 이모님께서 너에 대해 아주 궁금해하시던데." "어머, 그 분이라면 나도 알고 있어. 아주 아름다운 분이셨지. 그분 께서 날 안다니, 아주 기뻐." 켈브리안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미소 에 안드레아는 얼굴까지 붉히며 말했다. "저기, 오늘 소개한 그 친구와 내일 같이 왔으면 하는데. 같이 소개 해 드리고 싶어." "어머나, 아키는 아직 학생인 데다가 마법부라고. 그렇게 한가하게 무도회나 들를 수 없어." 그러자 켈브리안의 금발머리를 황홀한 눈빛으로 보던 안드레아는 갑자기 얼굴이 활짝 펴지더니 급히 말했다. "그렇다면 내일 내가 에스코트 해 줄까?" "나야.....고맙지." 그렇게 웃으며 켈브리안은 속으로는 다시 욕을 퍼부어 댔다. 젠장, 젠장! 그렇게 되면 저 멍청한 녀석과 몇 시간을 같이 있어야 하는 거야! 아키, 그 녀석은 이 누님을 위해 몇 시간 정도는 좀 양 보할 일이지 쪼잔하게 공부해야 한다고 퇴짜나 놓다니! 퇴짜를 맞아본 적이 없는 켈브리안이었던 데다가, '공부' 때문에 퇴 짜 맞은 여자를 본 적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다가 슬쩍 보니, 안 드레아의 접시가 비어 있었다. 안드레아는 눈짓으로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도 마침 식사가 끝났는데....산책이나 좀 할까?" "아니, 괜찮아.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일찍 들어가 보고 싶어. 미 안." 켈브리안은 안드레아의 볼에 입을 맞춰 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베르티노와 왕비에게 키스하고, 벌써 두 어 잔 들어가서 얼 굴이 벌건 엔리케 4세의 볼에도 키스했다. "죄송합니다, 전 이만 들어가 볼게요." "오냐. 잘 자려무나." 아버지는 켈브리안의 볼에 키스해 주었다. 왕으로써의 능력과는 상 관 없이, 정말 다정하기만 아버지였다. 그러나 입술을 떼다가, 켈브 리안은 왕의 눈가가 까만 것을 발견했다. 게다가 눈도 충혈 되어 있 는 듯 했다. 워낙에 술을 좋아하는 왕인 지라, 공주는 은근히 그런 왕이 걱정되 었다. "괜찮으세요? 오늘 무리한 건 아니시죠?" "무리는 무슨. 날이 좀 추워져서 그런 것뿐이다." "그래도 조심하세요, 아버지. 지난번에 저도 얼마나 놀랐는데요." "우리 공주가 조심하라면 조심해야지. 그래도, 계속 몸이 좋아지니 일주일만 지나면 네 주변 젊은 녀석들 보다 더욱 팔팔해 질 거야. 어의도 그렇게 말하고 있고." 그러나 오늘 왕은 분명 건강하긴 했지만, 그것은 조명등이 터지며 확 밝아진 듯한 느낌일 뿐이었다. 그리고.....그 뒤의 어둠은 그 전보 다 더욱 까만 어둠일 뿐이다. 켈브리안은 아무래도 어의에게 왕의 진짜 상태보다 좀 더 나쁘게 말하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은 무능한 의사는 아닌데, 지난번에 왕이 쓰러질 때 어찌나 놀랐는지 왕이 조금만 회복되어도 너무나 좋아졌다고 호들갑을 떨 어버렸다. 지금도, 어의는 이제는 아주 건강하다고는 말하고는 있지 만 정말 그런지도 의문이다. 켈브리안이 말했다. "내일 찾아뵐게요." "오냐." 켈브리안은 치마를 걷어올리고는, 만찬장을 나섰다. 식사를 마친 사 람들이 벌써 밖에 나와 쉬고 있었고, 대부분 소식하는 것을 미덕으 로 아는 귀부인들이었다. 그런데, 켈브리안의 눈에 홀의 소파에 앉 아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하나가 들어왔다. 풍성한 금발머리에 화려 한 차림새의 그녀는 켈브리안이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눈길은 공 주를 향하면서도 주변 사람들에게 뭐라 깔깔거리고 있었다. 그러니, 왠지 비웃는 것 같아 더욱 불쾌했다. 하필 저런 여자와 만나나, 켈브리안은 푹--한숨을 내 쉬고는 빠른 걸음으로 지나쳐 버렸다. 그런데, 그 여자가 한껏 예의를 차린 목소 리로 말했다. "공주전하. 벌써 가시는 건가요?" 켈브리안은 예법에 대해 까다로운 편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무례함 은 신경을 거스르게 했다. 예법 상, 왕비 다음의 위치를 가진 켈브 리안 공주에게 그 누구라도 먼저 말을 걸 수는 없다. 심지어 그레코 공작 부인이라 할 지라도, 켈브리안이 먼저 말을 걸어야 했다. 켈브리안은 쌀쌀맞게 그녀를 쏘아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저, 공주전하?" "당신과는 할말이 없고, 있다 해도 없는 셈치겠어, 플리나." "전 그저 인사만 드릴 생각이었는데요." 그럴 가치도 못 느꼈지만, 그래도 켈브리안은 그녀를 쏘아보며 날카 롭게 말했다. "예법도 모르나? 내 어머님을 제하고는, 그 누구도 나보다 먼저 입 을 열 수 없어. 어머나.....맙소사, 설마 당신이 내 계모라도 되는 걸 로 착각하는 건가?" 플리나 남작부인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녀는 지금 왕의 애첩, 즉 후실이었다. 여자에는 큰 흥미가 없는 왕이 유일하게 거느리고 있는 정부였고, 그 때문에 이 여자의 콧대 는 켈브리안 공주는 물론이요 왕비마저도 무시할 정도였다. "너, 너무 하시는 것 아닌가요. 아무리 공주전하라 하시더라도, 이렇 게 사람을 무시하는 게 아닙니다!" "미안하지만, 나는 함부로 사람을 무시하는 고약한 성품은 아니라 고. 그 사람이 먼저 함부로 무시하는 고약한 성품을 가지고 있지 않 는 한, 누구라도 존중해 주지." 그러자, 플리나 부인의 주변이 싸늘할 정도로 조용해졌다. 켈브리안 공주는 마치 더러운 것을 조심하듯 치맛자락을 당기고는 쌀쌀맞게 휴게실을 나갔다. 뭐가 이따위들인지. 켈브리안은 자신의 궁인 사슴궁으로 향했다. 그 리고 막, 하얀 포석이 깔린 길을 지나 장미문을 지나려는데, 그 입 구에 세워진 여신상 옆에 서있는 누군가와 마주쳤다. 발도 빠르다--하고 속으로 욕을 퍼부어 대면서도 그녀는 살짝 웃으 며 인사를 했다. "어머나, 안녕하세요." 슈마허가 손을 한번 들어 흔들고는 말했다. "여긴 우리 둘밖에 없으니 '당신은 또 여기 왜 온 거지? 당장 꺼져!' 하고 말해 도 괜찮습니다, 공주." 켈브리안은 까르르 웃었다. "원, 고맙기도 해라. 그런데 웬 일이시죠?" "잘 자라고." "이를 어쩌나. 늠름하신 슈마허 님과 이렇게 만나 뵈어서...설렘에 잠 못 들겠군요." "나 역시." 켈브리안 공주는 치맛자락을 들고는 슈마허 쪽으로 다가갔다. 슈마 허는 기대고 있던 기둥에서 몸을 일으키고는 공주를 내려다보았다. "이봐요, 쉐플런 경. 겨우 자존심 때문에 나한테 껄떡대는 거라면 이제는 그만 둬 줘요. 어차피 어머님과 한편이 될 생각 자체가 없으 면서 괜히 피곤하게는 하지 말란 말 이예요." "본인의 입장은 생각하고 그런 말을 하는 건가요? 난, 안정된 영지 와 가정을 원하고.....당신은 그 두 가지를 모두 줄 수 있지요. 물론 최고로." 아무래도 에크롯사에서 당한 게 아주 한이 맺혔던 것 같다. 켈브리 안은 그 이야기를 꺼내서 말이 길어지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이 한심한 정쟁에 끼고 싶은 것도 아니잖아요. 당신은 이 런 문제를 아주 싫어할 테니까. 차라리 어디 부잣집 외동딸이라도 잡으라고요. 당신이라면, 다들 못 줘서 안달일 테니."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요?" "마라 공과의 싸움에서도, 당신은 골치 아픈 게 싫어서 도망 나온 것뿐이잖아요. 그 사람도 이런 저런 트집을 잡아대긴 했어도, 정말 당신이 짐 싸들고 나갈 거라고는 생각 못했을 테고....심지어 '귀중 한' 세르네긴까지 데리고 말이죠." 슈마허의 눈 위로 섬광 같은 것이 날카롭고 짧게 스치고 지나갔다. "....아는군." "물론. 지금 마라 공은 너무나 난감해서 어떻게든 당신을 불러들이 려 하지만, 당신은 돌아갈 수 있어도 돌아갈 생각은 없죠. 마라 공 정도의 위치는 아니라도, 어깨에 힘줄만한 지위를 손에 넣기 전 까 진. 하지만....난 그런 역은 별로 맡고 싶지 않아요. 당신은 '아내'에 게 복종할 남자가 아니고, 저는 그런 남자는 싫어하니까." "그런 게 억울하다면 당신이 참을 수밖에 없는데. 난 누구에게든 고 분고분 해 본 적이 없어서, 아내에게도 그리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자 켈브리안은 슈마허의 가슴을 손가락을 쿡 찔렀다. "미안하지만 나는 당신 것이 되겠다는 말은 한 적이 없고, 되지도 않아요." "아주 자신만만하군." 슈마허의 차가운 회색 눈이 빛났다. 저, 뱀 같은 사내-켈브리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 빛에, 슈마허는 외려 흥미로운 귀중품을 감상하듯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비는 그쳐 있었고, 싸늘하고 습한 공기가 목덜미에 오싹 오싹 와 닿 았다. 치마는 금새 빗물에 젖어 들어갔고, 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끝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후두두두둑--세차게 떨어졌다. 순간 켈브리안은 정말, 기이할 정도로 불안해졌다. 아주 은밀한 것 이 옷자락을 끌며, 그 얇은 불길함의 자락을 뒤집어씌우는 듯 했다. 슈마허가 말했다. "입구까지 바래다 드리겠소." "제 주변에서는 당신이 제일 위험해요. 당장 돌아가세요." 켈브리안은 그리 쌀쌀맞게 말하고는 자리를 떴다. *********************************************************** 작가잡설: 슈마허가 에크롯사를 떠난 건...역시 도피였습니다. (....무슨 도피?)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10장 ************************************************************** [겨울성의 열쇠] 제44편 얼어붙은 불꽃#3 *************************************************************** 그렇게 되리라고는, 그 해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그것은 재난 같은 일이었고, '그 일'에 대해 한 명은 가장 발빠르게 소식을 접해 대처했으며, 다른 하나는 조심스레 대처했고, 나머지 하나는 그 둘이 지켰던 게임의 규칙 자체를 뒤집어엎어 버렸다. 켈브리안 공주는 다음날 점심 식사를 하고는 바로 어의를 찾았다. 정작 그 일을 해야 할 왕비가 바깥일에 열을 올리는 지금, 왕을 살 뜰하게 챙길만한 사람은 궁에서 켈브리안 뿐이었다. 어의를 앞에 놓고는 몇 가지 추궁하고 쏘아붙인 공주는, 어의로부터 그리 말해도 왕이 전혀 믿지 않더라고 말했다. 심지어, 왕비와 공주 에게는 다 나았다고 거짓말까지 하게 했다는 것이다. 즉, 사냥대회는 켈브리안의 예상대로 '무리'였던 것이다. "하여간 아버님은...." 켈브리안은 어의를 보내고는, 곧장 왕을 찾아 나섰다. 오후 늦은 시간이라, 왕은 햇빛 따사롭게 내리쪼이는 정원을 산책하 고 있었다. "켈리, 웬 일이냐." "어제 뵙겠다고 했잖아요, 아버님." 켈브리안은 살짝 무릎을 숙여 인사를 하고는 주변을 물렀다. 호위기 사는 뒤로 멀찍이 물러났고, 왕과 이야기하던 예쁜 시녀가 얼굴을 붉히고는 좀 더 멀리 도망쳤다. 사실, 엔리케 4세 주변의 시녀들은 왕비보다는 공주를 더 어려워하고 있었다. "혹시 급하거나 곤란한 일이라도 있는 거냐?" "아니에요. 그냥...이것저것 말씀 드릴 것이 있어서요." 그렇게 말하고는 켈브리안은 주변을 휙 둘러보고는 치마를 살짝 들 어 허리로 가져갔다. 호위기사와 시녀들은 더욱 멀찍이 물러났고, 켈브리안은 턱을 들고 아버지의 두툼한 팔에 팔짱을 끼었다. "그 소년과는 오늘 안 만나는 거냐?" 켈브리안은 아버지의 손위에 손을 가져가고는 빙그레 웃었다. "자주 만날 수는 없어요. 아키는...우선은 학생이니까요." "로멜에 압력이라도 넣어 볼까? 일찍 졸업시키라고." "유감스럽게도 이젠 마법부라서 그렇게 할 수도 없어요. 2년이나 기 다려야 하죠." 엔리케 4세는 유쾌하게 웃었다. "그럼, 데이트도 없으면....우리 공주는 오늘 뭘 할 거니?" "다섯 시에 안드레아와 함께 숙부님 댁으로 가야 해요. 그곳에 숙모 님의 친척 되시는 분이 오셔서 무도회를 연다고 하더군요." "아, 어제 안드레아가 그리 말했지." "네. 그리고...아버지, 저는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물론, 제가 좋아하는 것과, 어머님이 신랑감으로 좋아하는 건 별개 문제지만...... 다음부터 안드레아가 그렇게 나오면 제 편 좀 들어주세요." 아버지 엔리케 4세는 벌써 열 아홉이 된 아름다운 딸을 조금은 슬 픈 눈으로 볼뿐이었다. 티폴라가 살아 있을 때 워낙에 수난을 당해서 아버지 품안에서 자 주 울던 어린 딸이었는데, 벌써 여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저 여기 저기 말 타고 사냥 다니고 여행을 떠났다가는 이것저것 선물을 들 고 와서 안겨주던 딸이라 크는 줄도 몰랐는데, 이제는 신랑감이 누 가 될지 걱정해야 하는 나이가 되 버렸다. 엔리케의 계모였던 티폴라 여왕으로부터 온갖 수난을 당하던 딸이 라, 이제는 조금이나마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다. 아들인 베르티노 에겐 그를 끔찍하게 생각하는 왕비 브리올테가 있지만, 이 딸을 지 켜줄 사람은 아버지인 자신 뿐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딸에게 눈독 들이는 동생 그레코 공작의 태도도 마음에 안 들었고(안드레 아는 조카로서는 좋았지만 사위감으로는 영 시원찮은 녀석이었다), 이 아이를 어디로든 값 많이 쳐주는 곳으로 시집보내려는 왕비 역 시 용서가 되지 않았다. "이젠 여행 다니지 말거라. 자라는 걸 제대로 보지도 못하잖니." "하지만 여기 있어 봤자, 어머님이 데리고 오는 신랑감밖에 더 보겠 어요?" "켈리, 너 하나 정도는 네가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도 시켜주고, 근 사한 곳에서 새 생활을 시작하도록 해 주겠어. 그러니 그렇게 나 안 보이는 곳으로 돌아다니지 말렴." 켈브리안은 웃고 말았다. 사실, 기분이 정말 좋았다. "여왕이 되라고 하실 땐 언제고. 벌써 다 잊으신 건가요?" "네 어미와 내 동생을 보니, 너는...그런 데 끼여들지 않고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구나. 아니, 내가 반드시 그렇게 되도록 해 주겠다." 켈브리안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엔리케 4세는 팔짱을 풀더니, 딸의 곱고 작은 손을 꼬옥 쥐었다. "아버지...." "반드시 말이다." 켈브리안은 자신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에 문득 슬픔이 복받쳤다. 아버지가 정말 그리 해 줄 수 있을까, 켈브리안은 회의적이었다. 약 기 그지없는 어머니나 숙부에 비하면, 시골 농부만큼이나 순진한 아 버지였다. "날 의심하는 거니?" "아, 아뇨. 전...." 엔리케가 말했다. "켈리, 저 슈마허 쉐플런더러 반드시 널 지키게 할 테니, 네가 원하 지 않는 것은 절대 시키지도, 하게 하지도 않겠다. 너도 알지? 그 사람은 정말 굉장한 기사잖니. 난 좀 어리석다만, 그 사람은 아니다. 널 훌륭히 지켜줄 거야." 켈브리안은 아찔해졌다. 그 사람이 느끼하게 치근덕대는 게 안 보이세요, 하고 말하고 싶었 지만 아버지의 눈을 보니 지금 그리 말하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는 정말 그럴 거라 생각하고 있으며, 슈마허를 믿고 있기까지 했다. 자 신이 직접 불러온 유명한 용병대장이, 나중에 켈브리안이 자신이 원 하는 사람과 결혼할 때 그 결혼을 수호해 줄 사람이라 생각하는 것 이다. 그러나 슈마허가 아버지의 청에 이곳으로 온 것은 예전에 신 세진 것을 갚으려는 것일 뿐, 아버지를 크게 존경하거나 해서는 아 니었다. 그래도 켈브리안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할 게요." 엔리케 4세는 공주의 두 뺨을 어루만지고는 이마에 키스해 주었다. "언제나 용기 있게 살아가고, 날 사랑해 다오." "네, 아버지." 켈브리안 역시 엔리케 4세의 양 볼에 키스했다. 엔리케 4세는 켈브리안과 헤어지자 느릿느릿 자신의 침실로 돌아갔 다. 그날은 몸도 무겁고 해서 일찍 자 둘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렇 게 도착하니, 시종이 한참 전에 도착했던 전갈을 전해왔다. 그것을 듣자, 왕은 눈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플리나 부인이 온다 말했고?" "네." 시종 역시 별로 좋은 소식을 전한 게 아니라는 것을 눈치챈 듯 슬 쩍 뒤로 물러났다. 엔리케 4세는 기분이 영 언짢았다. 사실, 어제 사냥 대회가 끝나자 마자 그녀는 조르르 와서는 펑펑 울면서 켈브리안에게 모욕을 당했 다고 호소했다. 오늘 오겠다 하는 것도 분명 켈브리안 험담이나 잔 뜩 하려는 것이다. ".....그래, 저녁 여섯 시쯤 오라고 해라." "그렇게 일찍......말입니까?" "그래. 이야기 할 것이 있어서." 플리나 남작부인은 그레코 공작과 연이 닿아 있는 시골출신의 여자 였다. 사실, 그레코 공작은 형이 의외로 여자에게 무관심한 만큼, 그 자신 도 여자에 대해 그리 잘 아는 편은 아니었다. 엔리케가 아내 때문에 여자에 아예 질려 버려서 그런 것이라면, 그는 같이 고생했던 아내 를 지극히 존중해서 다른 여자들에게 눈길을 돌린다는 것 자체를 죄악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공작부인이 얌전하고 순진 한 여자였다면 그레코 공작의 운명도 크게 달라졌을 테지만, 둘 다 욕심과 머리회전은 비슷비슷했다. 그녀는 최선을 다해 남편인 공작 을 도왔으며, 왕의 주변에 사람을 심어 놓는 데는 왕비보다 발이 느 려서 실패했지만 그 대신 왕의 시녀들을 슬쩍 자기 사람으로 바꾸 어 놓는 데는 성공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그들의 영지에서 발견 한 어느 시골 처녀였던 것이다.물론 이 예쁜 여자가 충성을 바칠 거 라고는, 공작도 공작 부인도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왕의 혼만 빼 놓으면 충분했다. 엔리케 4세도 그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주 는 여자를 마다하는 것은 바보짓 같아서 눈감았다. 또, 사실 플리나 도 그 방면에는 꽤 괜찮은 여자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녀가 왕의 침실로 들어가게 되자, 그런 여자들이 대부분 그렇듯 단번에 거만해졌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 플리나 남작 부인이라 불리게 되더니, 이제는 왕비라도 된 듯 으스댔다. 게다가 그녀는 다 늙은 왕비보다는 켈브리안 공주에게 강한 경쟁심을 가지 고 있어서 "켈브리안 공주의 금발이 예뻐요, 내가 더 예뻐요?" 라고 어느 젊은 기사에게 말하다가 멀지 않은 곳에 있던 공주에게 무안 을 당하기도 했다.("내년쯤에는 새치가 돋을 텐데, 뭘 그리 신경 쓰 시나?"-켈브리안 보다 두 살 정도 많았다.) 뿐만 아니라, 켈브리안은 켈브리안 나름의 기준으로 그녀를 경멸했 지만, 플리나 남작 부인 역시 나름의 기준으로 그 공주를 경멸했다. 여성스런 취미-즉, 춤, 화장, 보석, 수예같은 것에는 시큰둥한데다가, 눈에 안 뜨인다 싶으면 서재에서 책을 보거나, 연무장에서 대부분을 할 일없이 보내는 베르티노 왕자의 사부와(왕자는 연무장 보다는 병석에 더 오래 있다.) 대련을 하거나 했다. 시골에서 자라 상당히 구식인 플리나 남작부인은 그런 일을 '애교 없고 못생긴 여자들이나 하는 일', 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아무런 가치를 느끼지 못하 니, '쓸데없이 노는' 것으로 밖에는 안 보이는 것이다. 물론 시골출 신의 그녀에게, 한 나라의 공주이자 유명한 브리올테 왕비의 딸인 켈브리안이 말을 걸거나 예의를 차려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지만, 젊은 나이에 지나치게 빨리 권력을 맛본 그녀는 그런 상식에 무지했으며, 그런 사람이 늘 그렇듯 그것이 비록 상식이라 할 지라도 자신만은 예외가 되어야 한다 생각했다. 그러니 아무리 마음 넓은 왕이라도, 도저히 봐 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켈브리안이 말하는 것을 보니 요즘 들어 부쩍 고되진 것 같 았다. 정부의 불평이나 듣는 대신, 딸에게나 확실히 신경써야 겠다. 왕은 그렇게 생각하며 창가로 천천히 다가갔다. 해가 저물어 가며 햇살이 길게 늘어지고 있었다. 멀리, 아마도 켈브리안 공주를 데리 러 온 듯 그레코 공작의 문장이 박힌 마차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 굉장히 불쾌한 느낌이었다. 왕은 가슴을 탕탕 두드리고는 찬장으로 천천히 다가가 술과 잔을 꺼냈다. 몸이 으슬으슬 추웠고, 바로 옆에 오싹한 것이 웅크리고는 자신을 잡아먹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듯 했다. 그 기분을 잊기 위해, 엔리케 4세는 술을 들이키고는 가까이 있는 줄을 힘껏 당겼다. 미신을 믿는 것 같아 우습긴 하지만, 아무래도 오늘 공주를 조금 일 찍 불러들이는 것이 좋을 듯 했다. 그리고 그 플리나 남작 부인은 '좋은 집 한 채 줄 테니, 내일부터는 그곳에서 '만' 지내도록.'하고 말하고는 쫓아보낼 생각이었다. *********************************************************** 작가잡설: 다행히 로메르드 왕가는 로슈만 왕가처럼 생긋 발랄하게 웃으면서 가차없이 형제부모처단해 버리는......곳은 아닙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10장 *************************************************************** [겨울성의 열쇠] 제45편 얼어붙은 불꽃#4 **************************************************************** "어서 오십시오, 플리나 부인." "안녕하세요, 콜리우스." 궁에 도착하자 플리나는 턱을 세우고는 시종에게 말했다. 그녀는 눈에 확 뜨일 정도로 정성껏 치장하고 있었다. 목욕수는 물 론이고 향수도 신경 써서 고르고, 화장도 공을 들여 한 뒤였다. 호 위기사들은 그녀가 침실 문 앞에 서자 그 진한 향수 냄새에 싸늘한 눈초리를 보내고는 옆으로 물러났다. 시종이 따르려 했지만, 그녀는 손을 저어 거절했다. "오늘은 내가 다 하겠어요." 시종은 잠자코 물러났다. 플리나는 처음부터 늙고 무뚝뚝한 시종이 분위기 망칠 일없이, 왕을 한껏 녹여 놓을 생각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툴칸 제국에서 사들여 온 최음제까지 있으니, 더욱 들여놓을 수 없다. 왕이 침대에서조차 투덜투덜 불평해대는 왕비라면 몰라도, 그토록 아끼는 외동딸에 대해 험담을 해야 하는데 혼신을 기해야 한다. 자 칫 잘못하면 오히려 자신이 미움 받을 수도 있고, 그렇게 되는 건 정말 끔찍하다. 왕의 총애를 받지 못하는 첩이라니. "폐하." 플리나는 한껏 부드럽게 말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은 아주 후덥지근했다. 목과 볼에서 땀이 배어 나와 머리카락이 들러붙었고, 꽉 조인 옷 때문에 숨이 턱턱 막혔다. 게다가 온 방안에 이상한 냄새가 가득 풍겨왔다. 이상한 것이 타는 듯 한 냄새 같기도 하고, 잘 맡아보면 무슨 기이한 향이 희미하게 풍기기도 하는데.......향신료가 타는 냄새인가? 플리나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침실에는 난로가 세게 타오르고 있었고, 왕은 그 앞의 긴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날도 따뜻한데 무슨 난로를 피우셨담....플리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폐하, 거기 계셨군요." 그러나 아무 답도 들리 않았다. 가까이 가보니, 후끈한 열기가 벽난로에서 뿜어져 올랐고 소파 앞의 테이블에는 술과 잔이 놓여 있었다. 잔은 비워져 있었고, 그 주변에 는 무엇인지 작은 부스러기가 흩어져 있었다. 플리나는 사뿐 사뿐 걸어가 왕의 팔 위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폐하....." 역시 아무 답도 없었다. 플리나는 기분이 이상해져서, 왕 앞으로 아주 조심조심 걸어갔다. 손은 천천히 팔을 쓸고 그 손등으로 내려갔고, 바로 앞으로 왔을 때 는 바로 손등 위에 얹혀 있었다. "주무시고 계신...." 그리고 플리나는 그대로 크게 비명을 질러 버릴 뻔했다. "나, 난 몰라....!" 주저앉아 부들부들 떨던 플리나는 지금 당장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캄캄했다. 문 앞에 있는 호위기사나 시종을 부를까, 하고 생각했지만 잘못하다 가는 모조리 다 뒤집어 쓸 수도 있다. 차라리 그녀가 그 정도 생각 을 아예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거나, 어떻게 해야 올바른 처 신인지 알 정도로 영리했자면 당장에 시종과 호위기사를 불렀을 것 이다. 그러나 그녀는 너무나 어중간하게 어리석고 영리했다. "아, 아냐--설마...." 플리나는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슬쩍 왕의 몸 쪽으로 손을 가져갔지만, 돌처럼 차가운 살덩이가 닿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을 움츠렸다.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후회되었다. 왜 하필 왕에게 찾아간다 일부러 말했을까, 늘 왕이 불러야 갔는데.....내가 직접 불러 달라고 말했다는 걸 시종도 알고 있는데, 이러다가 정말 다 뒤집어쓰는 거 아닐까? 왕비는 아마 당장에 내 머리카락을 다 잘라 버리고 옷을 벗겨서 감 옥에 처넣고는 며칠 뒤에 처형해 버릴 거야. 자신의 목이 성벽 위에 걸릴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플리나는 목놓아 울 뻔했다. 답답하고 막막했다.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담, 아니 우선 누구 에게 말해야 내가 안전할까. 머리를 쥐어짜던 플리나는 겨우 그레코 공작을 생각해 냈다. 플리나 는 그 동안 자신이 공작 부부에게 보였던 방자했던 행동거지를 쉽 게도 잊었고, 그들이 천한 그녀에게 은혜를 베풀던 그 때만을 떠올 렸다. 그래, 그 친절하신 분들이라면 이 무서운 상황을 분명 해결해 줄 것 이다! 플리나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어렵잖게 종이와 펜을 찾아냈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전하고 싶었지만, 중간에 시종이 들어오기라도 하면 어쩌겠는가. 그녀는 허겁지겁 이 위급한 상황에 대해 적은 다음, 봉 투에 넣고 그 위에 '그레코 공작 각하 귀하' 라 적었다. 그리고 봉투 를 단단히 봉하고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부들부들 떨며 문 쪽으로 갔다. "진정...해야해, 우선 진정 해야 해!" 그녀는 떨리는 손을 꼭 쥐고는 노크를 했다. "시종장--" 말소리는 플리나 자신이 생각해도 완벽할 정도로 침착했다. 됐다, 이제 됐어! 시종장이 밖에서 답하자, 그녀는 문 밖으로 편지를 슬쩍 밀어 넣었 다. "지금 나갈 차림새가 아니라서 그러는 데, 그 편지 좀 공작 각하께 전해 드려 주세요." 밖에서 잠시 말이 없더니, 편지 집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무엇입니까." "폐하께서 전해 달라고 하시는군요. 우선 전해 주시길 바래요." "폐하의 필적이 아닌데요." "봉투는 제가 적었으니 그렇죠. 빨리 전해 달라고 하시니, 이것저것 캐묻지 말고 얼른 전해요. 늦으면 폐하께서 화를 내실지도 몰라요." "알겠습니다." 발소리가 곧 멀어졌다. 귀를 기울이던 플리나는 크게 한숨을 내 쉬 며 주저앉았다. 이제는 모두 운에 맡기기로 했다. 시종이 중간에 편지를 펼쳐 보지 않고 전해 주기만 하면, 자신은 이제 안전해 지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플리나는 무심코 벽난로 쪽을 보았다가. 소파 옆으 로 비죽이 튀어나온 푸릇한 팔을 보고 말았다. 플리나는 눈을 꾹 감 았다. 공작가에서는 공작부인의 동생인 마가레타를 위해 무도회가 열리고 있었다. 에크롯사의 귀부인인 마가레타는 로메르드에서까지 유명할 정도로 아름다웠고, 안드레아의 초대 때문에 별 수 없는 선택이긴 했으나 켈브리안 공주까지 있었으니, 그날 분위기는 젊은이들의 사교장 같 았다. 작년까지만 해도, 켈브리안은 시간만 났다 하면 어디론가 여 행을 떠나 버리곤 했기 때문에 '지극히 보기 힘든' 여자였다. 그러나 보기 힘든 만큼 소문은 어마어마하게 무성해서, 실제로 나타나면 온 사교계의 화제가 되곤 했다. 공작의 예상대로, 유니콘과 맞먹을 정도의 희귀종 동물 같은 켈브리 안 공주의 참석은 많은 화제를 낳았고, 평소에는 얼굴을 비추지 않 던 귀족들이 아들딸들을 대동하고 무도회에 참석했다. 그레코 공작 에게는 왕비와는 다른 속셈이 있었다. 아들인 안드레아를 공주 옆에 바짝 붙여 놓아, 다른 사람들은 얼씬도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공작이 마지막으로 살폈을 때, 켈브리안 공주는 안드레아 공자와 다 섯 번째 춤을 마치고 쉬고 있었다. 안드레아는 공주의 머리카락을 매만지거나, 가끔 어깨에 손을 얹어 놓거나 하면서 친밀함을 과시했고, 켈브리안은 켈브리안 대로 귀찮 게 지분거릴 남자들을 쫓아낼 속셈으로 안드레아의 손길을 툭툭 쳐 내지는 않았다. 너무 달라붙으면 살짝 웃으며 밀어내긴 했지만, 완 강하게 거부하지는 않았다. 공작에게 전갈이 도착한 것은 그 즈음이었다. 평소에는 턱 세우고 인사도 잘 안 하던 플리나가 보냈다 하니, 공작은 무슨 일이 생겼나 하며 서재로 가서 편지를 열어 보았다. 플리나의 편지는 그녀가 워낙에 무지한 여자라 제대로 알아보기는 어려웠지만, 그 첫마디는 분명했다. 그레코 공작은 당장에 편지를 즉시 구겨버리고는 주변을 살폈고, 아무도 없다는 것을 거듭 확인한 다음 품안에 집어넣었다. 당장에 태워 버려야 할 테지만, 지금은 불 을 발견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즉시 서재를 나가, 집사를 불러 그의 친구이자 측근인 뒬러 백작을 찾아오게 했다. 다행히 그 뿐만 아니라 많은 그의 사람들이 무도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집사가 가자, 공작은 연회에 있던 아내에게 재빨리 다가가 그녀를 잡아끌었다. "무슨 일이시죠?" 한적한 곳으로 오자마자 부인이 물었고, 공작은 다시 주변을 둘러보 고는 나직이 속삭였다. "폐하께서 위험하시다 는 군." "네? 어디가..." "쉿--우선 저 켈브리안 공주를 잡아 놓도록 해요. 다른 건 묻지 말 고, 반드시 잡아 놓으시오. 이 저택에서 한발도 나가지 못하도록." 공작부인은 더 묻지 않았다. "안드레아에게 그리 말해 놓겠어요." "좋소. 그리고 나가는 것을 말리지 못할 상황이 되면, 당신 선에서 기사들을 움직여 붙들어 놓으시오." 그 말 뜻 역시, 눈치 빠르고 영리한 아내는 잘 이해했다. "다른 분들이 어디 갔냐 여쭈면 뭐라 답할까요?" "친구들과 잠시 주변으로 산책 나갔다고 말해주시오. 어차피 내 사 람들도 다 빠질 테니." "네." 공작부인은 짧게 답하고는 자리를 떴다. 아내를 보내자마자 그레코 공작은 주먹을 꾹 쥐며 자신을 진정시켜야 했다. 기회다, 그리고 지금 단단히 움켜잡기만 하면 이길 수 있다. 기적이 라 불릴 만한 대 사건이다! 켈브리안은 옆에 붙어서 귀찮게 굴어대는 안드레아에게 미소 지어 주는 것을 잊지 않으며, 빠져나갈 궁리만 하고 있었다. 안드레아는 검이나 각 나라들의 기사들에 관해 자신이 아는 것을 잔뜩 늘어놓았고, 켈브리안은 그중 반은 틀린 것을 속으로 세며 "어 머나, 나는 잘 몰라서....""세상에, 그런 사람도 있니?""너도 참 아는 게 많구나." 등등, 말하는 내용에 따라 적당한 것을 골라서 똑같이 반복했다. 그리고 이거 너무 똑같이 반복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 슬 슬 한 두 가지 정도 추가 해 보려고 생각하는데 공작이 사라진 것 을 발견했다. 혹시 해서 주변을 둘러보니, 그와 가깝다 싶은 사람들 도 몇몇 없어졌다. '모여서 토론이라도 하나....?' 켈브리안은 이제는 과감하게 허리에 손을 얹는 안드레아를 꾹 참아 내며 생각했다. 공작부인은 그런 안드레아와 공주를 보며 만족스레 웃고 있었다. 켈브리안은 공작부인을 물끄러미 보다가, 그녀 뒤에서 얼씬거리는 그림자를 발견하고는 작게 숨을 몰아쉬었다. 어라...? 켈브리안은 얼른 안드레아를 툭툭 쳤다. "물어 볼 거라도 있어?" "안드레아, 저 사람 소개해 줄 수 있어? 왠지 낯이 익은데....." 그렇게 말하며, 켈브리안은 생판 처음 보는 남자를 가리켰다. 방금 전에 안드레아의 말을 흘려 보내면서 눈요기나 할 생각으로 슬쩍 본 사람인데, 그럭저럭 잘 생겼다...하고 생각했었다. 안드레아의 얼굴이 대판 구겨졌다. 켈브리안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여행 중에 도움을 받은 사람이 있거든. 그 때는 경황이 없어서 감 사 인사도 제대로 못했는데, 그 사람이 맞는다면....이건 로피니아의 축복이라고. 안 그러니?" 그런 사람이 있는 지는, 켈브리안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안드레아는 불쾌함을 크게 감추지도 않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 남자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그녀 옆으로 갈색 머리의 사내가 다가왔다. 키는 컸고, 어깨도 넓고 늘씬한 것이 체격도 아주 좋고 날렵해 보였다. 그런 그가 앞에 서니, 켈브리안 공주는 거의 가려졌다. 켈브리안은 턱을 살짝 들고는 빙그레 웃었다. "안녕하세요." 남자는 정중하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한 곡 부탁 드려도 되겠습니까, 공주전하?" "죄송하네요. 파트너가 잠시 자리를 비워서....." 그러며 공주는 정말 미안하다는 듯 그 큰 손위에 자신의 손을 살포 시 얹어 놓았다. 남자는 고개를 숙여 그 손등에 입을 맞추고는 말했 다. "그럼 잠시 뒤에 뵙겠습니다." "네. 그렇게 하세요......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팔로아 부대장?" 남자는 손을 쥔 채로 속삭였다. "....지금 위험하십니다." 공주는 여전히 웃고 있었고, 남자 역시 춤 신청을 할 때의 부드러운 얼굴 그대로 말하고 있었다. 공주는 눈을 찡긋 하더니 여전히 웃으 며 물었다. "아버님 일인가요?" "네. 사실, 오늘 공주님을 일찍 맞이하러 가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나서는 길에 한번 더 명령을 내리시겠다는 폐하께서 아무 말씀도 없으셨고........왕의 침실에서 나온 편지하나가 이곳으로 가더 군요. 그리고 공작 쪽에서 움직였습니다." "아....." 켈브리안 공주는 멀찍한 곳에서 어느 남자와 이야기하고 있는 안드 레아를 주시했다. 남자는 고개를 저었고, 안드레아는 불안한 눈으로 켈브리안 쪽을 흘끔 보고는 다시 남자에게 말했다. 남자가 웃으며 뭐라 말하자, 안드레아는 고개를 저었다. "우선은 때를 봐서 숨으십시오. 나머지 자세한 것은 전하의 거처가 정해지시는 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제 오판이길 바랍니다." 그리고 남자가 손을 뗐다. 공주는 손을 당기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 는 듯 태연하게 작별인사를 했고, 그 때 안드레아가 혼자서 돌아왔 다. "널 만난 일은 없다고 하는데?" "그래도 모시고 오지 그랬어." "하지만 그 쪽에서 거절했어." 안드레아의 얼굴에 우물쭈물 하는 기색이 역력한 것으로 보아, 아마 도 안드레아 쪽에서 '아니면 됐다.' 라고 말했을 것이다. "안드레아, 편지 한 장 쓸 수 있을까?" "아, 물론. 저 쪽 휴게실에 준비가 되어 있어. 그런데 편지는 왜?" "이만 가보고 싶어서." 안드레아가 당황했다. "이제 여덟 시라고. 벌써 간다니, 제발 켈리....나를 슬프게 하지 마." 그러자 켈브리안이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보냈다. 안드레아가 의아 해 하며 고개를 숙여 얼굴을 바짝 들이대자, 켈브리안은 숨을 가만 히 내 뿜으며 속삭였다. "사실, 오늘 열시 경에 아킨과 만나기로 했었거든." 켈브리안의 따뜻한 숨결이, 입술이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서 뿜어져 오자 안드레아의 얼굴이 대번에 빨개졌다. 그는 당황하며 말했다. "그 시간은 아직 멀었잖아." "일찍 나와 있으라고 하고 싶어서 편지를 보내는 거야." "그냥 열 시에 가면 안 되는 거야?" "데리고 오고 싶어서. 그리고 사람을 보내는 것보다는, 내가 직접 나가는 게 좋잖아." "그래, 그럼....알았어." 안드레아는 공주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워 주었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옆의 휴게실로 향하며, 어머니에게 눈짓을 보냈다. 켈브리안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휴게실로 가자, 안드레아는 금방 펜과 종이를 마련해 주었고 그가 물러나자 켈브리엔은 편지를 써 내려갔다. 그리고 편지를 다 쓰자 후--불어서 잉크를 말리고는 그 편지를 읽듯 작게 입술을 달싹였 다. 마지막으로 손으로 지면을 문지른 다음, 켈브리안은 잘 접어 안 드레아에게 주었다. "맡겨도 될 테지, 안드레아?" "물론이지. 잠깐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안드레아는 휴게실을 나가서는, 곧장 그 편지를 어머니에게 전했다. 공작부인은 편지를 열어 읽었지만, 정말 아무 내용도 없었다. 애정 넘치는 인사말과 함께, 팔레가 광장의 분수대에서의 약속시간을 당 기자는 말이 적혀 있었다. 공작부인은 지금이 바로 '말릴 수 없는 상황'이고, 또 공작이 요구한 마지막 일을 해야 할 때라고 판단했다. "이건 내가 로멜로 전하도록 하겠다. 공주의 채비나 도와주렴." "네, 어머님." 공작부인은 아들의 볼에 입을 맞춰주고는 대기하고 있는 용병들에 게 명령을 내리기 위해 자리를 떴다. *********************************************************** 작가잡설: 로메르드는 그리 큰 나라도, 강대국도 아닙니다... 그러니 로슈만보다는 일 처리가 굉장히 말랑한 편이죠....^^; 나라가 작거든요. ^^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10장 ************************************************************** [겨울성의 열쇠] 제46편 얼어붙은 불꽃#5 *************************************************************** 브리올테 왕비는 그 시간에 왕자가 머무는 사자궁에 있었다. 왕과 함께 쓰는 내궁인 안식궁 보다는 병약한 왕자를 보살피거나 왕자가 공부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그 궁에 더 오래 머물던 왕비였 고, 그날도 왕자와 함께 있었다. 그리고 왕비는 막 왕자의 자그만 이마에 잘 자라는 인사와 함께 입을 맞추고 나오다가, 들어갈 때만 해도 조용하던 주변에서 큰 함성 소리 같은 것이 들려오는 것을 느 꼈다. 문득 치켜드는 두려운 생각에, 왕비는 급히 시녀인 발라 부인에게 외쳤다. "아넬리, 지금 무슨 일이 있는 거지?" 발라 부인은 당황한 기색으로 창 밖을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오늘 아무 말도 못 들었어요." 왕비가 듣지 못한 것을, 겨우 시녀장인 발라 부인이 알 리가 없었 다. 브리올테는 치마를 들고는 창 쪽으로 다가갔다. 순간, 사방에서 횃불이 우르르 모여드는 것이 보였다. 놀란 왕비는 급히 호위대를 부르기 위해 나섰고, 순간 "멈춰라!", 하는 호위기사의 외침이 터졌 다. 그러나 퍽--살 뚫는 소리, 비명과 고함, 그리고 다시 칼날 부딪 히는 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왔다. 발라 부인은 새파랗게 질렸고, 노련한 왕비는 금방 침착함을 찾으며 말했다. "왕자에게 가 있어라, 아넬리." "네." 발라 부인은 어린 왕자가 자고 있는 침실로 달려가려 했지만, 순간 복도의 창문이 깨어지면서 안으로 수명의 남자들이 궁의 홀로 쳐들 어 왔다. 복장은 모두 천차만별이었고, 발은 곰처럼 지저분하고 손 도 우악스러워 보였다. 곳곳에서 시녀들의 비명이 터졌으며 시종들 이 달려왔다가 세게 얻어맞고는 나가 떨어졌다. "반역이다--!" 시종 하나가 그리 외치다가 걷어 채였다. 그 남자들이 도적이나 다 름없는 나프 섬 출신의 용병들임을 알아본 브리올테 왕비는 시종들 과 기사들에게 다급히 외쳤다. "왕자, 왕자를--! 어서 왕자를 지켜!" 그러나 브리올테 왕비는 발라 부인이 어느 털투성이 사내의 곤봉에 맞고 기절하는 것을 보았다. 발라 부인 주변으로 피 웅덩이가 고였 다. 몇 안 되는 호위기사들은 필사적으로 침입자들을 막으려 했지 만, 상대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그들 모두 무장한 사내들에게 몰렸 고, 왕비는 왕자를 찾기 위해 도망치지도 못하고 침실로 향해야 했 다. 그런데 복도 끝에서, 서너 명의 사내들이 우르르 달려 나왔다. 그들 은 용병들에 비해 깨끗한 옷을 입고 있었고, 그 중 한 명의 손에는 기절해 축 늘어진 어린 베르티노 왕자가 들려 있었다. "너희들이 감히 누구에게!" 브리올테는 분해서 눈물까지 흘리며 외쳤지만, 왕자를 붙잡고 있던 사내가 턱짓을 한번 하자 양 쪽에서 다른 남자들이 달려오더니 왕 비의 양팔을 붙들었다. 담배와 찌든 땀 냄새, 역한 몸 냄새가 확 풍 겨왔다. 브리올테는 눈을 하얗게 뜨며 발버둥쳤다. "네 놈들이, 네놈들이---! 놔라, 이 천한 것들! 놔!" 왕자를 안은 사내가 그 마른 몸을 위로 한번 번쩍 들었다가 잘 안 더니 말했다. "해치지는 않을 테니. 얌전히 따라 오시오." 왕비는 분명 그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뒬러 백자악---! 당신이!" 플리나 남작부인은 누군가 어서 달려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 고 있자니, 밖에서 다급히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폐하께 일이 생기시다니. 침소에 드실 때 만 해도 너무나 건강하셨습니다." 왕 전속의 그 늙은 시종이었다. "내가 직접 확인하면 끝날 일이니, 너무 걱정 말게." 아아, 공작님! 플리나는 드디어 일이 해결됐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흘리며 자리에 서 일어났다. 쿵쿵--하고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플리나는 달려가 직접 문을 열었다. 그러나 문 앞에 서 있는 차가운 눈빛의 공작을 보는 순간,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아챘다. "저....." 그레코 공작은 문을 세게 쾅 열더니 발소리를 크게 내며 들어왔다. 그리고 우선 벽난로 쪽으로 달려가 왕의 상태를 보고는, 못 박힌 듯 납덩이처럼 창백한 얼굴로 붙어 있는 시종에게 말했다. "정말이군, 시종장." 플리나가 옆에서 자그마하게 말을 꺼냈다. "저, 공작....님." 그러나 공작은 플리나의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곧장 손을 들며 외쳤다. "호위대, 당장 이 계집을 체포하라-!" 플리나는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공작의 팔에 매달리며 애걸했다. "공작님--! 저, 저는.....저는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들, 들어 왔을 때 이미 이리....이리 되었습니다--! 정말입니다. 사실이에요!" 공작의 머릿속에 어떤 계획이 들어 있을 지, 어리석은 그녀는 몰랐 다. 그저, 앞날만이 두려울 뿐이었다. 호위기사들이 달려 들어와, 그 녀의 양팔을 낚아채 끌어당겼다. 덫에 걸린 토끼처럼 발버둥치며 플 리나가 울부짖었다. "공작니임---!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전 아무 죄도, 아무 죄도 없습니다--! 제발-!" 공작은 싸늘하게 그런 그녀를 보다가, 그녀가 완전히 끌려나가자 왕 이 있는 난로 쪽으로 저벅 저벅 걸어갔다. 형인 엔리케 4세는 창백하게 뻣뻣하게 굳어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 었다. 공작이 얼굴 쪽으로 손을 가져가 보니, 왕의 코에서는 희미한 숨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그 두툼한 어깨가 아래 위로 아주 느리게 오르락내리락하기 시작했다. 그레코 공작은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두 명의 호위기사는 플리 나 남작부인을 끌고 가느라 보이지 않았고, 시종장은 어의를 부르러 달려가고 없다. 그레코 공작은 손수건을 꺼내 형 엔리케의 코와 입 을 틀어막고는 꾸욱 눌렀다. 심장이 벌컹 벌컹 뛰었고,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목덜미가 오싹오싹했지만, 그는 두려움과 협상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래, 이건 그리 아둔한 주제에 먼저 태어난 덕으 로 왕이 된 대가야, 그러니 이건 죄가 아니라고. ".....웬 거지?" 아킨은 1층 대기실에서 어느 낯선 남자가 건네주는 편지를 받아 들 고는 방으로 돌아왔다. 자기가 뭘 가지고 왔는지조차 모를 그 하인은 편지를 던져 놓고는 곧장 돌아가 버렸고, 그 때문에 아킨은 누가 왜 보냈는지 물어보지 못했다. 그래서 찬찬히 볼 생각으로 방에 돌아왔다. 문을 닫자마자 아킨의 과제물을 골똘히 들여다보던 루첼이 말했다. "아무래도 롤레인 교수님이 너무 하신 것 같은데." 아킨은 편지를 뜯으며 물었다. "왜?" "이거, 내가 봐도 너무 어렵다. 혹시 지난번에 과제 한 것 좀 보여 줄 수 있겠어?" "그러지." 아킨은 서랍을 열고는 그 안에 엉망진창으로 쌓여 있는 종이더미를 뒤적거리다가 제일 뻣뻣한 것을 꺼내 루첼에게 주었다. 그리고 맞은 편 의자에 앉아 편지 첫머리에 적힌 아킨에게--라는 말을 읽고 있 는데, 루첼이 갑자기 마시던 커피를 쿨럭 내 뱉어 버렸다. "루첼?" "야, 아키. 너...이걸 기초라고 배우고 있었냐?" "그런데. 설마, 그보다 더 낮은 단계인 건가?" 아킨은 그렇게 말하며 루첼의 표정을 잘 살펴보았다. 안경을 연신 들었다 놨다 하면서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데, 상당히 당혹스러워 하 고 있었다. "그건 아닌데...." 그날 롤레인이 던져준 숙제는 아킨이 아찔할 정도로 어려웠다. 그래 서 아킨은 한 두 어 시간 끙끙거리다가 결국 루첼에게 도움요청을 했고, 루첼은 그것을 보더니 한참이나 노려만 보았고, 사실 지금도 그 표정이었다. 루첼이 말했다. "롤레인 교수가 가르치는 과정은 고등부 3학년의 마법 최고 3과야. 그 분이 조용히 있어서 율버 교수가 뻐기고는 있는데, 사실 롤레인 교수는 베넬리아 국립 마법원의 총장도 한 수 숙이고 들어가는 실 력자이자 석학이라고." 아킨은 진심으로 말했다. "....몰랐다." "하여간, 너는 아무도 모르는 것은 아는데 다 아는 건 모른다니까. 어쨌든 방금 전 네가 한 걸 보니....적어도 마법 최고 2과 정도는 되 는 범위야. 페그 라일의 임의 변용과, 그에 적용되는 마나 유지 원 리는.......쉬운 건 아니지. 참, 그건 실전 했어?" "하긴 했지만, 시간이 꽤 걸리던데." 루첼의 안경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아키, 다음부터 나도 같이 들어가면 안될까?" "네가 직접 물어봐라." "하여간 학교 친구라고 겨우 둘 있는 것이, 도움되는 건 하나도 없 다니까." 루첼은 투덜거리면서도, 아킨이 작성한 예전 과제를 읽어 내려갔다. 워낙에 악필인 아킨이라, 여기 저기 북북 긋고 위에다 덧붙이고, 그 러다가 잉크가 튀거나 해서 얼룩점이 남아 있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붉은 색 잉크로 롤레인이 뭘 설명해 놓거나, 이상한 것을 슥삭 슥삭 그려 놓은 부분까지 있어서 영 보기 힘들었 지만, 루첼은 '발굴'을 하는 기분으로 차근차근 읽었다. "아키, 나머지도 좀 보여 줄 수 있겠어?" 아킨은 편지를 펼치며 서랍을 가리켰다. 알아서 하라는 것이다. 루첼은 종이더미의 거대한 위용에 눈을 콱 찌푸렸지만, 별 수 없는 지라 그 더미를 모두 꺼내 책상에 쌓아 놓고는 하나 하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너, 글씨 진짜 못쓴다." 루첼이 유려한 달필의 소유자라는 것을 아는 아킨은, 그런 루첼을 한번 쏘아보고는(할 말이 없다.) 램프의 불을 좀 더 밝게 올리고 편 지를 읽어 내려갔다. 편지에는 별 말 없었다. 약속했던 팔레비 광장의 분수대에서 열 시 가 아닌 아홉 시에 만나자는 말 뿐이었고, 아킨의 기억 속에는 그 '약속'이란 것 자체가 없었다. 무슨 장난이라도 치려고 그러나, 아니....다른 사람에게 보낼 걸 잘못 보낸 걸지도 모르겠다. 가만있자.....그래도 당할 땐 당하더라도 한번 나가 보는 게 좋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다가 아킨은 옆에 놓여 있는 아찔한 과제를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켈브리안과의 약속 때문에 못했다고 빈손으로 터덜터덜 교수에게 간다는 것은, 고지식한 면이 있는 아킨에게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 다. 단호하게 결정을 본 아킨은 편지를 램프 아래에 놓았다. 루첼은 뭔가 싶어 그 편지를 흘끔 보았다가는, 다시 악필의 협곡 탐험에 들 어갔다. 켈브리안이 숙부인 공작의 저택을 나온 것은 정확히 여덟 시 반이 었다. 안드레아가 직접 그곳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정 중하게 거절했고 어쩐 일인지 안드레아는 순순히 물러났다. 그러나 안드레아가 붙을 것만을 걱정했던 그녀는, 마차가 저택문을 나서자마자 말을 타고 따라붙는 무리가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호위기사인 라키 경은 창 밖을 살피더니 칼자루에 손을 가져갔다. 켈브리안은 머리를 쓸어 하나로 묶어 올리며 물었다. "몇 명 정도지?" "스무 명 정도입니다." "사자라도 사냥하는 줄 아나." "우선 가지고 계십시오." 라키 경이 그녀에게 길고 얇은 검을 내밀었다. 켈브리안은 풍성한 금발머리카락을 위로 틀어 올려 단단히 붙이고는, 얇고 짧은 검을 뽑아 날을 잘 점검해 보았다. 라키 경이 물었다. "어느 분에게 도움을 청하셨습니까." "도움이 될만한 사람들에게 연락을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었어. 또, 엉뚱한 사람한테 가면 공작부인이 중간에 채갔을 테고." 켈브리안은 변명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나, 라키 경이 답답한 듯 약간 곤두선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누구에게 말했습니까?" "오면 알 거야." 켈브리안은 히죽 웃었다. 반은 체념한 듯한 그 표정에, 라키 경은 이마를 탁탁 치며 답답함을 달랬다. 그녀로서는 '에칼라스여, 생명을 보호해 주세요.' 하고, 저 쪽도 똑같이 올렸음에 분명한 기도문을 중 얼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켈브리안은 칼자루를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아버지가 위험하다. 대체 어느 정도일까. 숙부와 숙모가 저리 발빠르게 움직이는 걸로 보아, 국왕은 아마도 '손쓸 수 없을' 정도로 위독할 것이다. 또, 브리올테 왕비는 아직 모 르고 있을 것이며, 그러다가 한 발 빠른 공작에게 벌써 선수를 빼앗 기고 우왕좌왕 당황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벌써 유폐되었을 지도 모르지. 좀더 상황이 나빠진다면 아버지의 '위급한 상황'을 뒤집어 쓸 지도 모르고. 온갖 나쁜 예측만이 무성하게 들뿐이다. 운 좋게 팔로아 부대장이 알아채고 알려오기는 했지만, 더 이상의 행운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 때 마차가 덜컥 멈추었다. 두두두 달려오는 말발굽 소리가 들리 더니, 칼들을 뽑는 소리가 마차 벽 하나를 놓고 크게 들려왔다. "누, 누, 누구냐---!" 마부가 부들부들 떨며 외치자, 굵직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주전하를 모시러 왔소!" 모시러 온 것이 거의 훔쳐 가는 수준일 거라는 건, 켈브리안도 잘 알았다. 그러나 그 어투는 기사답게 정중하다. "누구의 명으로....!" 마부의 목소리는 애처로울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그러자 말을 한 남자가 이 마부에게는 험악하게 외쳤다. "마부와 말할 시간은 없다-! 공주 전하, 어서 나오십시오." 켈브리안은 피식 웃고 말았다. 라키 경이 눈총을 주었다. 추격해 왔던 남자가 검을 휘두르더니 크게 외쳤다. "저기, 저놈부터 해 치워-!" 켈브리안이 재빨리 속삭였다. "활이나 석궁은 없었지?" "네." 잘못 쏘다가 공주가 다치기라도 하면 골치일 테니까. 어딜 가나 당 황하면 단번에 침착함을 잃고 허둥대는 사람은 있기 마련일 테니. 그리고 "크억----!" 누군가 날에 찍히며 내지르는 비명소리가 들렸 다. 뭐가 굴러 떨어지는 쿵, 소리가 들렸고 마차에 묶인 말들이 놀 라 히힝거리며 말발굽을 쳐댔다. 라키 경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제가 나가 보겠습니다." "누가 올 때까지는 버텨야 해, 라키." "알고 있습니다." 라키 경은 힘껏 문을 열어 젖혔다. 마차 문 앞에, 갈색 망토의 키 큰 사내 하나가 피가 철철 흐르는 허 리를 움켜잡고 뒹굴고 있었고, 다시 쿵--소리가 들리더니 도끼 날 이 어깨 언저리를 휙 스치고 지나갔다. 라키 경은 검을 뽑아 들며 외쳤다. "테오, 너--! 도끼 날 좀 잘 간수하라고!" 그러자, '마부'가 자루가 긴 도끼를 쥔 채 마차에서 뛰어 내리며 외 쳤다. "알아서 조심하시지!" 쫓아왔던 추격자들은 신음을 삼키며 뒤로 물러났다. 그제야 어둠 때 문에 보이지 않던 '마부'의 얼굴이 드러났고, 그가 왕실 호위대의 테 오 코스파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눈에 뜨이게 큰 그 덩치는 어깨를 움츠려 감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거, 아는 얼굴들이 좀 보이는 구만." 덩치 큰 코스파가 도끼를 위로 툭툭 던져 올리며 하는 말에 선두에 있던 남자가 이를 악물며 검을 세워 들었다. 다른 남자들의 검들도 그 두 기사를 향했다. *********************************************************** 작가잡설: 아, 속쓰려...크으..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10장 *************************************************************** [겨울성의 열쇠] 제47편 얼어붙은 불꽃#6 **************************************************************** "아직입니까?" "아직-!" 라키 경은 목을 찌르려는 검을 쳐내고, 그 다음 허리 쪽은 반대 쪽 손에 쥔 검으로 쳐내며 답했다. 코스퍼가 외쳤다. "빌어먹을, 언제까지 우리 둘 뿐인 겁니까!" "너 죽을 때까지." 첫 기세는 좋았지만, 단 둘 뿐인 두 기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마차의 문에 등을 대고 그들이 오지 못하도록 막는 것뿐이었 다. 거의 다치지도 않고 그 모든 기사들을 상대하는 것은 놀라웠지 만, 인간인 이상 한계는 있다. 마차 반대편에서 퍽퍽--큰 도끼로 문 내리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여자 비명이 터졌다. 켈브리안 공주는 당연히 아니고, 그녀의 시녀 가 겁에 질려 지르는 것이다. 당황한 코스퍼가 고함을 내 질렀다. "이런, 젠장--!" "침착해!" 문이 쥐어짜듯 뜯겨 나가며, 마차가 열렸다. 그러나 그 첫 번째 남 자는, 공주의 몸에 손도 대기 전에 안에서 날아온 검에 목이 반쯤 갈라졌다. 살 갈리는 소리에, 라키 경이 외쳤다. "공주전하--!" "아직 괜찮아-! 난 죽은 염려는 없으니까." 다시 챙--검을 쳐내는 소리가 들려온다. 반사는 날카로웠고, 비명과 신음은 습격한 남자들의 것이었다. 그러나 공주의 검술은 라키 경도 알고 코스퍼도 알고 있었다. 분명 뛰어난 것은 사실이나, 그저 체력 단련이나 취미로 해 왔던 것이라 기사들 보다 체력이 부족했다. 또, 그것을 커버할 정도의 기술과 순발력도 가지지 못했다. 결투라면 얼 마든지 이길 수 있는 그녀지만, 이런 급박한 실전에서는 무리가 많 다. 공주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고, 다행히 그녀에게는 무모함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마차 밖으로 나가지 않은 채, 문 쪽으로 다 가오려는 남자들을 상대하는 데만 전념했다. 벌침 쏘듯 날카롭게 찔 러 들어오는 공격에, 공주를 다치게 할 수 없는 습격자들은 주춤거 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간은 흘렀고, 습격자들의 숫자는 지칠 정도로 상대하고도 남아 있을 정도로 많았다. 드디어 라키 경의 허벅지에서 피가 솟고, 코스퍼는 목이 잘릴 뻔한 것을 간신히 면했다. 켈브리안은 거의 악 으로 버텨나갔지만 팔이 저려오고 있었다. '이렇게 나가다가는 당장에 머리채 잡혀서 끌려나가겠군.' 그러던 켈브리안은 마른 사내의 검을 막아내다가, 날카롭게 귀 언저 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소리를 들었다. 노랫소리 같기도 하고, 새소리 같기도 했다. 그리고 차르르르르르-- 물이 얇고 넓게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습격자 중 맨 뒤에서 말을 타고 있던 한 사내가 고개를 돌리더니 검을 세워 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투명하게 반짝이는 것이 그의 가 슴을 퍽 치며 솟구쳐 올랐다. 차가운 물방울이 튀어 오르고, 갑자기 얼어붙더니 주변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자갈처럼 굵고 단단한 얼음 조각들이 쏟아져, 습격자들의 공격을 늦추었다. "전하, 안으로 들어오세요--!" 시녀가 멍하니 있는 켈브리안의 허리를 잡아 당겼다. 켈브리안은 얼 결에 마차 안으로 나동그라졌고, 순간 큰 몽둥이를 휘두르는 것 같 은 거센소리가 들려오며 바닥이 으깨져나갔다. 쿠르르르릉---! 지진이라도 난 듯 바닥이 흔들리고, 습격자들이 쓰 러졌다. 용케 균형을 잡던 이가 있었지만, 그의 주변에서 뭐가 은색 으로 번쩍이더니 그를 후려쳐 쓰러뜨렸다. 켈브리안은 몸을 급히 일으키고는 라키 경과 코스퍼가 지키고 있는 맞은 편을 돌아보았다. 라키 경도 코스퍼도 모두 마차 벽에 바짝 붙어 있었고, 그 앞으로 곤충의 날개처럼 투명한 것들이 앞에서 수없이 퍼덕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몸부림치는 파도처럼 거세게 으르렁거리고, 거품처럼 끓어오 르다가는 세차게 쓸려 나갔다. 라키 경과 코스퍼의 얼굴은 시퍼랬고, 검 끝도 떨려왔다. 그들은 젊 었고, 또 두 번의 내전을 겪었던 베넬리아나 남쪽의 절대적국과 맞 서야 했던 암롯사, 신성의 델-카타롯사, 드래곤과 공존하는 에크롯 사의 기사들처럼 '거대한 마법'을 두 눈으로 본 적이 없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초자연적인 현상, 그들이 믿고 당연히 여기는 섭 리를 뒤집어엎고 무방비 상태인 정신을 향해 쏟아져 들어오는 힘의 몸부림에 그들은 소름이 끼쳤고, 켈브리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습격자들은 순식간에 쓰러져 나갔다. 반은 기절했고, 나머지는 비틀 거리다가 몸을 적신 물이 얼어붙자 움직이기조차 힘들게 되었다. 켈브리안이 재빨리 마차 밖으로 나가자, 바닥에 쓰러져 있던 남자가 일어나려다가 누군가의 주먹에 퍽 맞고 쓰러졌다. 그 얼굴을 보자, 켈브리안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키!" "친구 녀석이 가르쳐 주지 않았다면 몰랐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아킨은 편지를 내 보였다. 분수에서 만나자는, 그 장난같은 말이 적힌 편지의 서면위로 은색의 글자들이 스며 나오듯 떠올라 있었다. 루첼이 편지에 걸린 그런 작은 마법을 발견한 것은, 아킨이 편지를 옆에다 놓았을 때였다. 혹시나 싶어서 루첼은 편지를 집어들고 해제 의 마법을 걸어보았다. 그러자, 그 안에서는 전혀 다른 메시지가 떠 올랐다. 상황 파악이 빠른 루첼은, 우선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가는 것이 가장 빠른 지 가르쳐 준 다음 행여 그가 '예상하는 상황'이면 숨을 만한 장소까지 가르쳐 주었다. 아킨은 편지를 접어 주머니에 다시 쑤셔 넣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서른 정도 되는 남자들이 신음을 흘리며 쓰러져 있었고, 그들 위로 는 거친 얼음이 얇게 달라붙어 있었다. 저것들이 다 녹는 다 해도, 한 동안은 마비가 되 꿈쩍도 못할 것이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 겁니까." "우선은....어디로든 숨어야 해. 나머지는 숨은 다음 가르쳐 줄게." "정해진 곳이라도 있습니까?" 켈브리안이 힘없이 웃었다. "아직은." "그렇다면, 당분간은 루첼이 말한 곳으로 가는 게 좋겠군요. 그런 곳으로 갈거라 예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어딘데?" "첼-마리주네 거리의, 붉은 망아지 여관이라고 하는군요. 이 장소라 면 우선은 여자가 묵기에 아주 안전하고, 이곳에서 뭘 캐묻고 다니 거나 하면 당장에 쫓겨 나갈 테니 숨어있기 좋을 거라 했습니다." "첼-마리주네의 붉은 망아지?" "네." 켈브리안은 두 호위기사를 흘끔 바라보았다. 아무 것도 모르는 라키 경은 턱을 긁적거리고 있을 뿐이었고, 코스퍼의 얼굴은 울그락 푸르 락 한 것이 당장에 아킨을 한 대 후려칠 기세였다. 아킨이 그 남자 기사에게 물었다. "아십니까?" 코스퍼가 사자처럼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사창....가 근처란 말입니다-!" 켈브리안은 입을 꾹 누르며 웃음을 참았고, 라키 경은 도끼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건 어떻게 아는 거지요, 코스퍼 군?" "......남자라면 대체로 아는 겁니다, 선배님!" "......" 라키 경의 눈이 더욱 매서워지자, 코스퍼는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아킨에게 말했다. "저기, 그런데 붉은 망아지는.......주, 주로 남색가 용입니다.....만....." 이제 고지식하고 순진한 라키 경은 혼절이라도 할 듯 했다. "서, 설마 그런 곳으로 공주전하를 모시고 가겠다는 것입니까--!" "여자가 묵기에 안전하긴 할 거 아냐." 켈브리안이 말했다. 어쨌건, 남창가가 아니라 남창가 포주 집이라도 지금은 숨는 게 우 선 이었다. 발라 부인은 왕비의 침실로 기어가고 있었다.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고, 하반신은 나무토막이라도 된 듯 뻣뻣했 다. 머리는 현기증으로 어질어질 했으며, 금방이라도 뭘 토해낼 듯 속이 니글거렸다. 입안에 피비린내가 가득하다. 왕비는 혼절해 있던 왕자와 함께 끌려나갔다. 그 동안, 발라 부인은 기절한 척 눈을 꾹 감고 쓰러져 있을 뿐이었고, 실제 꿈쩍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주변이 죽은 듯 잠잠해지자, 몸을 일으키고 기어가 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지나는 자리로 긴 핏자국이 이어졌다. 왕비가 머무는 침실의 문은 열어 젖혀져 있었고, 서랍과 옷장은 온 통 뒤집어져 있었다. 침실의 커튼도 찢어져 있고, 귀한 도자기들이 깨어져 날카로운 사기 조각들이 위험하게 널려 있었다. 병약한 왕자 때문에 이곳으로 거처를 옮긴 왕비는, 귀중한 것은 모두 그곳에 두 고 있었다. 그러니, 공작은 행여나 뭐가 있나 싶어서 그렇게 다 뒤 집어 놓은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귀중한 것이 어디에 있는지, 발라 부인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비틀 비틀 일어나다가 다시 쓰러지기를 몇 번 거듭하다가, 겨우 화장대에 놓인 목욕용 화장수 한 병을 집어 들 수 있었다. 그 녀는 그것을 벽에 힘껏 내리쳐 깨어 버렸다. 진한 향내가 역할 정도 로 확 쏟아졌고, 그 안에 들어있던 자그마한 보석하나가 향수에 흠 뻑 젖은 카펫 위로 굴러 떨어졌다. 발라 부인은 그 보석을 집어 두 손에 꾹 쥐었다가는, 아직도 타고 있는 벽난로로 힘껏 집어 던졌다. 펑--! 작은 폭탄이라도 터진 듯 큰 소리가 들려왔다. 모래알처럼 작은 불씨가 갑자기 엄청나게 거대한 불꽃으로 변해 큰 독수리의 날개처럼 솟구쳐 오르더니, 사자처럼 크게 으르렁거렸다. 불꽃 위로 핏방울처럼 새빨간 두 개의 점이 떠올라 번지듯 부풀어 오르며 커져갔다. 그리고 얇고 긴 두 팔이 양옆에서 뻗어 나왔고, 작고 짧은 발이 뜨거운 장작 더미 위에 나타났다. 발라부인은 엎드려 울먹거렸다. "저, 전하께--왕비 전하께 큰 일이 닥쳤습니다!" 벌벌 떠는 그녀의 어깨로, 거센 불길이 손길을 뻗듯 크게 솟구쳐 올 랐다. 불꽃이었건만, 몸에 닿으니 너무나 차가웠다. 녹슨 쇠가 부딪 히는 듯 소름 끼치도록 쉰 목소리가 크게 터져 올랐다. -큰 일이라니--! 발라 부인은 다시 겁에 질려 눈물 범벅인 채로 외쳤다. "왕비 전하께서 잡혀가셨습니다!" 그러자 성난 목소리가 갑자기 사그라지고, 불꽃도 난로 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어디로.... "모, 모릅니다." 안 쪽에서 크르르르르--하는 성난 으르렁거림이 스며나왔다. 재가 흩어지고, 불똥이 날리다 꺼진다. 겁에 질린 발라 부인은 부들부들 떨며 뒤로 주춤 주춤 물러났다. 그러자, 황소처럼 붉고 사나운 불꽃 이 솟구쳐 그녀의 몸을 휘감아 삼켜 버렸다. *********************************************************** 작가잡설: 라키 경은 Sir 라키가 아니라 그냥 '라키 경' 입니다.... 아, 언제 다 올리나...흐으.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11장 ************************************************************** [겨울성의 열쇠] 제11장 그림자 속의 마법사 제48편 그림자 속의 마법사#1 *************************************************************** 휘안토스는 신년이후의 모든 공식석상에 암롯사의 대표로서 아버지 대신 나설 수 있게 되었다. 루실리아 공비의 자살 이후,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일을 꺼려왔던 대 공왕 사이러스는 휘안토스가 어느 정도 자격이 갖추어지자마자 자 신 대시 사람 많이 모이는 자리에 내보냈다. 공국의 실제적인 일은 아직은 거의 사이러스와 케올레스가 맡아 하고 있었지만, 연회에 참 석하거나 제도에 들를 일은 이젠 휘안토스가 하게 되었다. 물론 휘안토스는 압셀론에 머물 때 간혹 제도의 행사에 참석하기도 했고, 비록 자존심 때문에 단 한번 밖에는 출전하지 않았다 하나 제 도 토머넌트의 준우승자였기에 그리 낯선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재능 넘치고 잘생긴 소년이 아닌, 공왕가의 후계자이자 암롯사의 실 질적인 얼굴, 또 십 년쯤 뒤에는 정말 대공왕이 될 '휘안토스'는, 사 람들에게 전혀 다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보호자로 따라다녔던 늙은 이들이 사라지면서 소년은 저 혼자 판단하여 누구에게 말을 걸고 누구와 친밀히 지내야 할 지 결정해야 했고, 말을 걸고 대화를 이끌 어 나가야 했다. 그렇게 두어 달 정도 지나자, 사이러스는 슬슬 휘안토스에 대한 평 판을 듣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 빛나는 보라빛 눈동자의 소년에게 매혹되었다. 어리긴 했으나 휘안토스는 아주 영리했다. 또, 먼저 고 개 숙이는 법은 없었으나 예법이 세련되어 오히려 당당하게 보이게 했다. 열 일곱이라는 어린 나이라 무례할 정도로 그 자질과 의중을 떠보던 기수가문들 역시, 한달 만에 왕자를 미래의 주군으로 인정했 다. 콧대 높은 암롯사의 기사들도 기골이 장대한 아버지와는 달리 호리호리하고 늘씬한 왕자를 무시하지 못했다. 게다가 토머넌트의 은 트로피를 쥐었던 준 우승자다. 비록 그 후로도 우승하지는 못했 지만,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세르네긴이 나오지 않는 토머넌트의 출 전을 미련 없이 취소시키던 휘안토스의 모습은 우승자가 되는 것 보다 외려 더 인상적으로 남았다. 이런 저런 평판에 사이러스는 만족했고, 케올레스 역시 왕자에 대한 이야기를 동료 마법사들로부터 듣게 되면 아주 흡족해했다. 그리고 그는 그 때마다 아킨토스를 생각하고는 대공왕 몰래 울적하게 눈시 울을 붉히곤 했다. 가엾은 둘째 도련님은, 쌍둥이 첫째가 저리 사람 들의 칭찬과 호의를 듬뿍 받을 때 저 반도에서 홀로 지내고 있는 것이다.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며칠만의 제도여행에서 돌아온 휘안토스는, 여장을 채 풀지도 않고 그리 말한 다음 성을 나섰다. 이유는 그저 '오랜만에 성 주변을 산책하고 싶어서' 였다. 성문을 나 서자마자 단번에 호위기사들이 따라 붙었지만, 휘안토스는 그들을 완강하게 물렸다. 그리고 그 이유를 듣게 되자, 호위기사들은 숲의 입구까지 만이라도 호위하게 해 달라 고집을 피워 따라 붙었다. 휘 안토스는 그렇게되면 숲의 입구 근처까지도 가지 못할 것을 알았지 만,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또, 얼굴은 보게 될 테니, 크게 손 해 볼 일만도 아니다. 오후의 숲은 뜨거운 초여름의 햇빛 속에서 진녹으로 싱그럽게 숨쉬 고 있었다. 햇빛이 나뭇잎 틈새로 쏟아져 들어와, 숲 사이로 난 길 위로 빛 조각들이 수없이 찍혀 들어갔다. 날카로운 광선은 성긴 잎 을 지날 때마다 크게 번쩍이다가 잎에 가려 꺼져들었고, 잔잔히 흐 르는 냇물은 금빛 빛 가루를 튀겨내며 흘러간다. 그리고 자그마한 강을 가로지르는 둥근 다리에 이르자, 휘안토스는 말을 멈추었다. 조용한 가운데, 새는 울음을 멈추었고 매미들 역시 뚝 그쳤다. 숨을 멈춘 듯, 세상은 갑자기 묵직한 적막 속에 갇혀 버렸다. 그리고 휘 안토스는 조용하게 들려오는 발소리를 들었다. 사각--사각- 기사들 이 칼자루에 손을 가져갔다가, 그 소리가 더 가까이 오자 검을 뽑아 들었다. 발걸음이 뚝 멈추었다. "조심...." 휘안토스가 말을 채 다 꺼내기도 전에, 제비처럼 날카롭고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숲 속에서 튀어 나왔다. 그것은 기사들의 검을 쳐내 고는, 그 둘을 말의 등에서 떨궈냈다. 쿵--그들은 바닥에 호되게 구 르고는, 급히 검을 찾았다. 그러나 두 개의 검은 벌써 그들을 공격 한 자의 손에 쥐어져 있었고, 그는 그것을 저 쪽으로 던져 버렸다. 검이 챙그랑 나동그라지자, 젊은 두 호위기사들은 부서진 자존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공격자는 다리 쪽으로 물러나며 말했다. "나를 만나러 올 때는 분명 혼자 오라고 했다, 휘안토스." 휘안토스는 다리 난간에 큰 새처럼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물결치는 검은 머리카락의 윤곽이, 햇빛에 반짝이며 금빛으로 빛났 다. 녹색의 눈동자는 빛을 받아 깊은 물 속에서 흔들리는 해초처럼 투명해 보였고, 엘프의 긴 귀는 바람 소리도 들을 듯 솟아 있었다. 기이하게도, 사이러스와 가장 닮은 아들은 바로 저 엘프였다. 아킨 도, 휘안도, 둘 다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와 더 많이 닮아 있었다. 특 히 검은머리에 보라 빛 눈까지 가진 휘안토스는 턱과 콧날을 제하 고는 거의 루실리아의 윤곽이었다. 그런데, 엘프인 어머니의 피가 그토록 강함에도 불구하고 자켄은 분 명 아버지와 놀랍도록 흡사했다. 큰 체구, 단단한 턱선과 수려한 콧 날, 눈썹 모양새와 눈매--모두 아버지와 흡사하다. 엘프의 긴 귀와 여러 가지 색채를 가진 신비로운 녹색의 눈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 모양새만은 기이하게도 비슷한 것이다. 자켄이 물었다. "왜 온 거냐." "안부." 엘프의 녹색 눈이 날카로워지며, 그 투명하던 빛이 어둑하게 변하더 니 이끼 같은 암녹색이 되었다. "그리고?" "아키도 나도 내년이 되자마자 열 여덟이 되. 그렇게 되면 어디로 갈 거지?" "인간의 기준으로 '성년'은 열 여덟이지만, 내 기준으로는 스무 살이 다. 그리고 사이러스와 약속한 대로, 나는 그 때 까지 이곳에 머물 것이고, 그 이후는 내가 알아서 정한다." 그리고 그는 비늘처럼 번득이는 짧은 검 끝을 들어 휘안토스를 가 리켰다. "그리고 그건 네가 상관할 바도 아니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잊지마. 아킨은 내 동생이고......" 휘안토스 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자켄은 내 이복형이거든." 뭐가 번득였다. 머리카락 몇 가닥을 빠르게 베어내며, 빠른 새의 날 개 같은 것이 휙 스치고 지나가더니 바로 옆의 나무둥치에 퍽 박혔 다. 뒤돌아보니, 바로 뒤의 나무 둥치에 자켄의 단검이 칼자루까지 깊이 박혀 있었다. "재수 없는 녀석." 그렇게 날카롭게 쏘아붙이고는, 자켄은 뒤돌아 섰다. 그리고 탁--짧 게 발을 퉁기는 소리만을 남긴 채, 숲 속으로 사슴처럼 사라져 버렸 다. "괜찮으십니까!" 호위기사들이 달려오며 외쳤다. 그들의 얼굴은 창백했고, 이마는 흠 뻑 젖어 있었다. 설마 자켄이 휘안토스에게 무슨 짓을 하랴 싶었는 데, 빛이 튀듯 날카롭고 빠르게 검을 날려 버리자 둘 다 기절할 정 도로 놀란 것이다. 휘안토스는 아직도 찬 기운이 남아 있는 듯한 목덜미를 손끝으로 훔쳐보고는, 차분하게 말했다. "돌아가자." 저 자켄은 황족보다 도도하다. 강간당한 어미와 강간한 아비사이의 사생아이자, 이종족인 엘프의 피까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물론 휘안토스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사이러스는 아이에게 거리낌없이 진실의 책임을 지워버릴 정도로 잔인했고, 그것이 대공가를 이끌어 나갈 후계자의 당연한 의무라 생 각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암롯사의 그림자이자 아버지의 치부이며 상흔인 아킨토스와 자켄을 휘안토스에게 감추지도 않았다. 그래서 휘안토스는 동생에게 왜, 그리고 어떤 저주가 내려졌는지 네 살 즈음에 다 알게 되었다. 어머니가 어떻게 미쳐갔는지, 어떻게 죽 었는지도 잘 알고, 그녀와 만나는 것이 금지되었던 적도 없다. 거짓 속에 안주했던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다면, 누구라도 그를 진실로부 터 보호하고자 했더라면 휘안토스는 적어도 실망하거나 슬퍼하기라 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겨우 네 살, 휘안토스가 할 일은 그것을 '당 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그 점에서, 아버지는 잔인했지 만 현명했다. 휘안토스는 상처받지 않았고, 괴로워 해 본 적도 없었다. 그 모든 사실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알아서 처신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렇 게 단련된 영혼에, 그 누구도 상처를 입힐 수도 흔들 수도 없었다. 휘안토스는 아버지조차 외면했던 동생을 아무 거부감 없이 동생으 로 받아 들였고, 형제이자 열 달을 같은 배에서 지낸 반신으로 받아 들였다. 그러나, 그랬기에 휘안토스는 동생을 동정하지 않았고, 그래 서 책임감이라든가 자기 때문에 그 아이가 그리 되었다는 죄책감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아킨은 동정을 받을 필요도 없는 녀석이었거니와, 그런 것으로 감싸 줘야 할 정도로 여린 녀석도 아니었다. 늙은 케올레스는 병약한 손 자 감싸듯 뭐라도 해주고 싶어서 안달이지만, 아킨에게 그런 것은 필요 없다. 어머니가 미쳐 가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그녀가 몸을 던지는 것까지 보았는데, 지금 저렇게 혼자서 버티어 내고 있다. 아 킨에게 있어, 그것은 아직도 종기처럼 곪아 가는 상처가 아니었다. 이미 치유가 끝난, 그러나 흉측한 흉터는 남아 있는 그런 것이었다. 아킨은 그것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고독을 방패로 하여 스스로 싸워 나갔고, 나가고 있다. 증오하고, 질투하고, 분노하지만....아킨은, 적어 도...아니 절대로 무너지지 않았다. 동생은 스스로 생존의 방식을 터 득했고, 그것을 터득한 그는 강하고, 강해질 것이다. 그러니......길들이지 않으면, 언젠가는 물려 버릴 테지. "어디 다녀오셨습니까, 휘안토스 님--!" 성으로 오자마자 케올레스가 달려왔다. 휘안토스는 모자를 벗어 시종에게 건네주며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어서 아버님께 가 보십시오. 로메르드로부터 급한 소식이 전해졌습 니다." "아버님 앞에서 당황하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어떤 소식입니까." 그러자 케올레스는 고개를 들고는 눈치를 보냈다. 성의 시종장은 물 론이거니와, 주변의 시녀, 시종들이 바닷가 게가 바위 속으로 숨듯 사라졌다. 케올레스는 다시 주변을 죽 훑어보고는, 작고 빠르게 말 했다. "로메르드의 엔리케 4세가 사흘 전에 승하했습니다. 왕비가 독살 혐 의를 받은 채 갇혀 있고, 왕자와 공주는 실종상태랍니다." ".....그럼..." 케올레스는 숨을 헐떡이며 급히 말했다. "어서 아킨토스 님을 모셔 와야 합니다. 그런 험한 곳에서 사고라도 당하신다면 큰일이지 않습니까....." 휘안토스가 차분히 물었다. "아버님께서는 뭐라 하십니까." "당장 불러오라고 하셨습니다. 곧 로멜에서도 휴교령이 내릴 듯 하 니, 그 즉시 데리고 오라고." 휘안토스는 덜컥 멈춰 서고 말았다. 작지만 날카로운 번득임이 눈 위로 스쳐지나가고, 그것이 금새 깊이 잠겨 사라지며 차갑고 매끄러운 눈동자의 표면만이 드러날 뿐이었 다. *********************************************************** 작가잡설: 간만에 등장한 휘안토스 군입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11장 ************************************************************** [겨울성의 열쇠] 제49편 그림자 속의 마법사#2 *************************************************************** 오후의 오렌지 빛 햇살이 응접실로 쏟아지고 있었다. 집사는 장미 덩굴로 테두리와 다리를 장식한 테이블 위에 차와 과 자를 놓았다. 달콤한 차 향기와 과자냄새가 응접실 가득 퍼졌다. 집 사는 포트를 집어 얇은 찻잔에 차를 따랐다. 그리고 파이를 자르고, 쿠키를 덜어 놓은 다음 응접실의 주인과 손님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고는 물러났다. "새로 온 요리사가 아주 솜씨가 좋지....하나 들어 봐라, 루츠." 바람 새는 듯한 목소리였다. 루첼은 과자 하나를 집어 한 입 베어 물었다. 늙은이는 그런 루첼을 물끄러미 보더니, 긴 손가락으로 입 술을 툭툭 쳤다. "여긴 왜 다친 거지?" 루첼은 손끝으로 그 부분을 가리켰다. 터지면서 붉게 부풀어 있다가 겨우 가라앉은 곳으로, 지금은 피딱지가 엉겨 있었다. "여기 말입니까?" "그래. 어디서 맞은 거냐." 루첼은 웃으며 답했다. "친구가 저 때문에 엉뚱한 곳에 들어갔다가 봉변을 당했습니다. 꽤 화가 났는지 한방 날리더군요." "어디였는데?" "남창집 입니다." 늙은이는 클클 웃다가, 결국 쿨럭 쿨럭 기침을 토해냈다. "알베스티 님?" "괜찮아, 괜찮아--! 파하, 봉변을 당했다니, 남창가에서 좋아할 만한 얼굴이었나 보군." "최고가였을 겁니다." 자정이 다 되 돌아오자마자 그 턱을 날려 버리던 아킨은.....단언 하건대, 붉은 망아지 개점이래 최고가로 팔릴만한 얼굴이었다. '그 딴 곳을 소개해 주면 어떻게 해--!' 돌아온 아킨은 얼굴이 시뻘개져 있었고, 그 표정은 치한 만났다가 허겁지겁 도망쳐 온 아가씨 마냥 엉망이었다. 루첼은 이렇게 녀석이 망가진 것은 처음 보았기에(심지어 말투까지 바뀌어 있었다) 미안하 고 당황하기보다는 치밀어 오르는 웃음부터 참아야 했다. 그리고는 뻔뻔스럽게 말했다. '여자에게 안전한 장소를 소개해준 것뿐이다. 남자에게도 안전하단 말은 안 했어.' 아킨은 화를 벌컥 벌컥 내며 씩씩거렸고, 루첼은 다시 맞지 않기 위 해 뒤로 슬쩍 물러나며 생각했다. 저렇게 펄펄 뛰어대는 꼴을 보니, 붉은 망아지까지는 간 듯 했고, 그곳까지 갔다면 켈브리안 공주에게 '어떤 일'이 생겼을 거라는 루 첼의 추측이 맞은 것이다. 그리고 깜빡 잊고 주의를 주지 않았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곳이 어 떤 곳인 지 제대로 알리 없는 아킨은, 당연히 루첼이 건네준 쪽지를 직접 붉은 망아지의 주인 쿤에게 전했을 것이다. 얼굴은 겁 없이 다 내놓고 있었을 테고. 이제 열 일곱 먹은 보송보송한 소년이 와서는 마스터 쿤에게 쪽지 (그곳에서 쿤에게 쪽지를 주는 건, 사거나 판다는 의미였다.)를 건네 자, 쿤이 그 쪽지의 내역을 펴 보기도 전에 고객들은 당장에 골라잡 았던 물건들을 집어던지고 몰려들었을 것이다. 쿤은 묵묵히 쪽지를 펼치고, 그 안에 적힌 것이 이 소년의 소개와 값이 아니라 루첼이 자기 이름을 걸고 '아무 것도 묻지 말고 이 손님을 묵게 하라'라고 적어 놓은 것임을 알았다. 쿤은 종업원에게 알아서 하라고 말하고 는, 그 손님인 켈브리안 공주와 그녀의 두 호위기사를 데리고 뒷문 을 나섰다. 아킨은 자신이 어떤 위험에 처해있는지 전혀 모른 채 그 가 오기만 기다렸다. 누가 엉덩이를 쓰다듬었던 것은 그 때 즈음이었던 것 같고, 속이 부 글부글 끓어갈 누가 허리를 감아 당겼던 것 같고, 마지막으로 뚜껑 이 열려 버리기 직전...에는 차마 말할 수 없다...라고 아킨은 으르렁 거렸다. 루첼은 그런 것들을 다 무시하는 자상함을 보이며 태연하게 물었다. '그래서...그 공주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말 안 한다.' '어이, 아키--' '말 안 한다--!' 그렇게 외치고는 침대 이불 속으로 들어가서는 밤새도록 씩씩거렸 다. 당연히 불안해진 루첼은 다음날로 쿤의 붉은 망아지로 갔고, 다행히 아킨이 몇 사람 밀치고는 도망치기만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 마도 소개해준 루첼을 생각해서 필사적으로 주먹을 자제한 것 같았 다. (그래서 밤새 분을 삭히지 못해 씩씩댄 것이고.) 한참을 큭큭 웃던 베크만 알베스티가, 결국 가슴을 탕탕 두드리고는 말했다. "그래, 학교 분위기는 어떠냐." "어수선합니다." 베크만 알베스티는 차를 한 모금 마셔 입을 적시고는 말했다. "그럴 테지. 그래, 그럴 테지.......쿨럭. 나이 먹은 것들도 우왕좌왕 인데, 어린애들은 오죽하겠나." 엔리케 4세의 급작스런 승하소식이 퍼진 것은 다음날이었고, 그제야 루첼은 어제 켈브리안 공주에게 닥쳤던 위험이 무엇이었는지 짐작 했다. 모든 포고문은 공작의 이름으로 발표되고 있었으며, 그것은 곧 왕비 쪽에서 실각했다는 뜻이다. "곧 휴교령이 내려지겠군." "아마도요." "그래, 거처는 정했나?" "아직...못 정했습니다." 사실, 오늘 아침 쥰이 기숙사를 나가게 되면 자기 집에 머물라고 했 었다. 졸업생이나 마찬가지니, 그는 휴교령이 내리면 즉시 본가로 돌아갈 예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실비와의 약혼은...그 성질 급한 녀석은 결혼 증인이 생기자마자 바로 다음날로(아킨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알베스티 가로 찾아가서 청혼해 버렸고, 쥰 개인의 탐탁찮음 과는 별도로, 그 가문이 워낙에 명문가였기에 실비의 어머니도 아버 지도 동의했다. 쥰은 돌아와서는, 그 형들은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며 투덜댔다. 세쟈르라면 몰라도 지오바니까지 싫어한 다는 말에, 루첼은 약간 의아해하기는 했다. 그리고 그렇게 일이 다 정해지자, 쥰은 어수선해지기 전에 얼른 결혼을 해 둘 생각으로 본 가로 올라가는 것이다. 체면과 현실을 쉽게 타협시킬 수 있는 성품의 루첼은, 없으면 그렇 게 하겠노라고 답했다. 그런데 베크만 알베스티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딱히 머물 곳이 없으면 우리 집에 와서 머물러라." "네?" "뭘 그러나, 너는 늘그막에 얻은 아들이나 다름없는 녀석이지. 또, 이 집은 노인네 혼자 살기에 너무 넓기도 하고." 루첼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휴교령이 오래 가면, 학교도 옮기고." 베크만 알베스티는 그렇게 말하고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루첼이 말했다. "공작이 완전 장악한 것 아닙니까. 오래 갈 것 같지는 않은데요." "발빠르게 대처한 것 뿐이야. 아직 왕비는 꼼짝 안하고 있다지만 왕 비파 쪽에서 그대로 넘어갈 리 없지. 어떻게든 버티려 할 테고, 또....군부 중 몇 놈이 왕비를 지지하고 있다. 사실, 티폴라 여왕이 승하한 후 나라를 잠시나마 장악했던 것은 왕비이고, 그 때의 모습 을 다들 신뢰하고 있는 게야.... 공작은 정리가 대충 된 다음에 돌아 와서 머리를 들이민 것처럼 보이니, 고지식한 사람들은 왕비를 지지 하게되어 있지. 뭐, 내 판단에서는 그쪽이나 이쪽이나 욕심만 많은 놈들이라는 데는 똑같아." 숨이 가쁜지 한숨을 후 들이쉬고는 그는 말을 이었다. "게다가 공작 쪽에서 지금 왕비를 너무 다그치고 있어. 독살이니 뭐 니, 하고 너무 큰 소리 내고 있다는 말이야.... 이렇게 나가다가는 왕 비를 지지했던 쪽에서 뭉쳐서 한판 뜨자고 나올 지도 몰라." ".....내란을 걱정하시는 겁니까." "그래, 내란.......끔찍해, 그건. 서로를 양끝으로 몰아세우는 건...." 루첼은 정보 길드 쪽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들도 사실 그것을 조심 하고 있었다. 행여나, 내란으로라도 번져서 뒷골목까지 불길이 번지 는 것을 말이다. 다른 나라와의 전쟁은 그래도 승리와 패배, 둘 중의 하나로 입장이 결정되면 마음놓고 미워할 수 있다. 그러나 내전은 아니다. 어쨌든 한 나라 안에서 부대끼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것은 비록 끝 난다 할 지라도, 한 쪽은 다른 한쪽에게 무언가를 잃을 것이고 증오 가 그 안에 쌓여 가는 것이다. 화합할 수 없는 자들이 한 집에 사는 것은, 스스로의 기력을 낭비하는 꼴 밖에는 안 된다. 베크만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며 달그락 달그락 소리가 났다. "누가 집권하든 그 내란이 터지게 되어 있어. 작든 크든-난 그 꼴은 보고 싶지 않고." 루첼의 눈이 흐려졌다. "......제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네가 도울 일이 생길 것 같으니, 미리 이리 말 해두는 거다. 그리 고 이 점은 분명히 알아둬. 나는 너를 너무나 아끼고 있고, 이것은 너를 이용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기회를 주려 함이라는 것을.....넌 좀 별난 녀석이니까." 어떤 말을 아끼고 있는 지, 루첼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사실 루첼이 알베스티 가로 갔던 것은, 정보 길드의 작은 마스터 자 리를 그만두고 나왔던 직후였고, 그 쪽과 베크만은 여러 가지 이유 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첸은 그를 믿고 근시 때문에 뒷골목 생활 이 어려워진 루첼의 일자리를 알아봐 달라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 몇 사람을 거치며 말이 잘못 전해져서 루첼은 그만 '하 인'으로 취직이 되 버린 것이다. 호위를 구하기 위해 본가에 들렀던 베크만이 루첼을 점찍었던 것은 우연이었지만, 그 우연이 이런 미래 로 이어진 것은 그 인연 덕이 컸다. "하지만 지금의 저는.....그 때에 비해 꽤나 무뎌져 있습니다. 그러니, 절 믿으시라고, 쉽게 장담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나이도 먹었지." 베크만은 루첼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넌 괜찮은 녀석이다. 실비가 왜 너 같은 녀석을 두고, 하필 그 루 크 페일리 가의 철부지와 결혼하겠다고 나섰는지 모를 지경이야." ".....저기..." 그러나 루첼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베크만은 한바탕 쿨럭거리고는 말했다. "사실 난 말이다, 그 고집 센 아들놈 등쌀에 너를 양자로 삼을 수는 없어서, 손녀 사위로라도 들어와 주기를 바랬어. 실비, 그 애도 널 아주 좋아하는 기색이기에 내심 기대했지. 둘이 도망이라도 친 다면 박수라도 치면서 직접 도와줄 생각이었고......그런데 엉뚱하게, 영 마 음에 안 드는 사위녀석을 데리고 와서는 결혼 허락이나 해 달라니... 원." "제 친....구입니다." 루첼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러나, 귀가 어두운 베크만은 제대로 눈 치채지 못했다. "알아. 그런데, 아무리 친구라도 실비 같은 애는 양보하는 게 아니 라고. 특히, 그 쥬나드렌이란 녀석은 내가 보니 마누라 속만 썩힐 타입이더라고. 특히 실비는 너무 곱게 커서, 남편이라도 든든한 놈 이라야 하는데." 루첼은 뭐가 씻겨져 내려가는 것 같았다. 계속, 계속 씻겨져 나가..... 이제는 앙상한 뼈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는, 다시 한번 그 날의 죄책감이 내려앉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그 자신에게 비수를 내리꽂듯 말했다. 미련을 갖는 다는 것 자체가 둘에 대한 배신이야. 알겠어, 루첼 그 란셔스? *********************************************************** 작가잡설: 루첼 군...그대를 제2의 라닌으로 임명합니다. (삽질왕)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11장 *************************************************************** [겨울성의 열쇠] 제50편 그림자 속의 마법사#3 *************************************************************** 아킨은 며칠 전에 켈브리안을 보낸 주점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녀를 보낸 다음날 갑작스레 학교 수업이 중지되더니 엔리케 4세 의 승하소식이 전해졌고, 학교는 곧 엄숙한 추모에 들어갔다. 학생 들이건 교수건 모두 학교 안의 예배당으로 모였으며, 교내 사제는 조촐한 추모 미사를 올렸다. 그렇게 어둑어둑하고 침울한 분위기로 하루가 지나자, 마차 몇 대가 학교 앞으로 오더니 학생들을 하나 둘 데리고 가기 시작했다. 아킨은 바로 다음 날 롤레인을 찾아가려 했지만, 그녀가 그날은 쉬 자고 말했기에 그 다음날 찾아갔다. 과제를 결국 못했기 때문에 터 덜터덜 텅 빈 종이만 들고 갔으니, 크게 야단 맞지는 않았지만 대신 따가운 눈초리는 감수해야 했다. 이틀이나 주었는데 결국 못했던 것 은 첫날은 켈브리안 때문이었고 다음날은 워낙 심난해서 손에 아무 것도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사실 아무리 자기나라 왕이 아니 라지만, 아킨의 무심한 태도는 슬픔에 젖은 다른 학생들로부터 눈총 먹기 딱 좋았다) 그러나 차마 그 이유를 말 할 수는 없어서, 아킨은 너무 어려워서 끙끙대다가 잠들고 말았다고 했다. 롤레인은 그럼 그 렇지, 하는 눈빛을 보내더니 개인 서재에서 양가죽으로 제본된 책 세 권을 들고 왔다. 책은 인쇄한 것이 아니라 직접 정서 한 것이었 고, 그 속표지에는 제목 없이 B. K.이라 서명만이 되어 있었다. 차 마 잘 쓴 글씨라고 말하기는 어려웠지만, 아래위에 힘을 꾹 주어 그 어 댄 듯한 그 서체는 아주 특이했다. 그녀는 아킨을 앉히고는, 자신도 그 앞에 앉으며 말했다. "곧 휴교령이 내려질 것 같아." 뒤통수 한 대 호되게 후려 맞은 듯 했다. 너무 놀라서, 아킨은 들고 있던 책을 와르르 쏟아 버리고 말았고, 롤레인은 지팡이로 그 책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키, 그건 내 스승 컬린의 직접 쓴 저서다. 카신저 교수가 안다면 그 거대한 지팡이로 네 엉덩이부터 두들길걸." 놀란 아킨은 허겁지겁 그 책들을 다시 집어 책상 위에 얹어 놓았다. "집에 가면, 학교에 다시 돌아올 때까지 그 책들로 공부해라. 세 권 다 마칠 때 즈음이면 반년 정도는 넉넉히 지날 테지." "반년이라니요...?" "냉정하지만 진실을 말해주겠어. 짧아야 두 달, 그리고 두 달이 지 나면....넉넉하게 한 학기 동안 학교 문을 닫을 거야. 지금은 5월, 한 달만 더 있으면 한 학년이 끝나게 되 있으니까." 아킨은 한숨을 내 쉬고 말았다. "그럼...1년이나 못 뵙는 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건 아냐. 네가 오기는 힘들 테니 내가 직접 너희 집에 들리마. 그리 멀지는 않으니, 한 달에 한 두 번 정도는 들릴 수 있겠지." 아킨은 고개를 떨구었다. 켈브리안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며칠 전만 해도 혈기 왕성하게 사 냥터를 누비던 왕이 그리 급작스레 승하해 버린 것에는 큰 감흥이 없었다. 아킨과는 전혀 상관없는 나라 왕이었고, 싫지는 않았으나 아직 좋아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러니 켈브리안의 아버지가 돌 아가셨다...정도 밖에는 느낌이 없었다. 켈브리안이 얼마나 위급한 지, 로메르드의 사정에 무지한 아킨이 알 리 없었고 상관할 생각도 없었다. 아킨이 도울 수 있는 일은 다 했으며, 켈브리안 역시 부탁 만 하면 아킨이 아버지인 사이러스에게 도움을 청해서 공작을 물리 쳐 줄거라 생각할 만큼 순진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아킨은 휴교 령이 내릴 거라는 롤레인의 말에 생각보다 일이 복잡했다고 짐작할 뿐이었다. "정말...감사합니다." "어차피 내 할 일이니까....부담은 갖지마." 그 말에 아킨은 고개를 저었다. "이유가 어떠했든 간에, 저는 교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다. 눈시울이 확 뜨거워지더니, 결국 그 뜨거운 것이 볼을 타고 흘러 책 위로 툭툭 떨어졌다. "그리고....." 아직 한 마디가 더 남았는데, 정말 하고 싶은 말이 한마디 더....그리 고 그거야말로, 예전에 그녀를 화나게 했던 그날부터 분명하게 알고 있던 것인데, 도저히 꺼낼 수 없었다. 속에 꽉 막혀서는, 북받쳐 오 르려고 뜨겁고 단단하게 치밀어 오르지만 말할 수가 없었다. 왠지.....꺼내면 완전히 끝날 것만 같았다. 다시는 그런 말을 할 기회 도, 이유도 없어질 것만 같았다. 최악이다, 정말. 그렇게 터벅터벅 걷다가, 아킨은 드디어 '붉은 망아지' 근처에 도착 했다. '붉은 망아지'는 사창가에 있었으나, 지극히 변두리였다. 그러나 큰 길 옆으로 난 작은 도로로 접어들면 금방 나와, 찾기 어렵지는 않았 다. 단지, 손님이 '단골'로 한정되어 있는 곳이라 어떤 손님이 오건 간에 절대 간섭하지 않고, 간섭하면 그날로 탈탈 털린 다음 쫓겨 날 만큼 폐쇄적인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오에 도착해 보니, 과연 거북한 사람들은 없었다. 가게문 은 막 열린 상태였고,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잠들어서 주인인 쿤만 이 가게 안에 잠든 사자처럼 게으른 얼굴로 앉아 있었다. 쿤은 아킨이 오자 배를 북북 긁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요전에는 좀 미안했어." 아킨은 힘들게 답했다. "....괜찮습니다." "그래, 자네가 놓고 간 그 금발 아가씨는 며칠 더 묵을 예정인가." "그분이 정하실 바입니다." '그 분'이라는 말에, 쿤의 두터운 눈썹이 불끈 움직였다. "자네, 그 여자 시종인가?" "비슷합니다." 그러자 쿤은 수염 없이 살집만 잘 잡힌 턱을 쓸어 올리더니 힘없이 말했다. "알겠어....우선 따라 와." 그가 뒷문을 열자 좁고 긴 계단이 나왔다. 쿤은 램프를 집어들더니 불을 당겼다. "분명히 말해 두지만, 난 마스터와 루첼 때문에 이 짓을 하는 것 뿐 이야. 나중에 이상한 일 생기면 당장 내 보내 버릴 테니, 각오해 둬." 즉, 공작파 쪽에서 켈브리안이 이곳에 숨은 줄 알게 된다면, 쿤은 망설임 없이 그녀를 내 놓을 것이며, 누구의 부탁으로 그렇게 맡게 되었는지 다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툼한 눈꺼풀 아래 의 진한 갈색 눈에는 막연한 믿음이 담겨 있었고, 그것은 '그래도 믿고 있다.'라는 뜻이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아킨은 '마스터'가 대체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그것은 작은 돌기처럼 돌출해 있었지만, 그 뒤에는 뭔가 아주 크고 중요한 숨어 있을 것만 같았다. ".....안전하긴 했지. 남자들에게 그리 차가운 눈길을 받아 본 것은 어제가 처음이었으니까." 켈브리안은 담담하게 말했다. 눈이 부은 것 같고 좀 충혈 된 듯도 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는 건강해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아킨은 오 늘 듣고 온 것을 모두 이야기했다. 켈브리안은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듣고는 물었다. "그래서 넌 떠나야겠구나?" "아마도 본가에서 사람들이 올 것 같습니다." 켈브리안의 연푸른 눈동자가 금새 어두워졌다. "네가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었는데......그렇담 어쩔 수 없네." 아킨은 머뭇거리다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아버님 일은...안 되셨습니다." 어색했다. 켈브리안은 아킨이 호의를 가지고 있는 정말 극소수의 사람이었고, 그런 그녀가 아킨 때문에 화가 나거나 언짢아 하는 것은 싫었다. 그 래서 그렇게나마 말을 꺼낸 것인데, 막상 해 놓고 나니 자신과 영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켈브리안이 말했다. "나중에 슬퍼하기로 했어. 지금 중요한 것은, 여기서 나가는 즉시 어머님은 독살범으로 지하 감옥으로 끌려가고, 공작이 가엾은 동생 의 후견인이 되거나, 아니면 내가 안드레아와 '화해' 차원에서 결혼 해야하는 사태를 막는 거니까." 켈브리안은 쉽게 줄줄 쏟아냈지만, 아킨은 그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 는 것을 알기에 막막했다. 게다가 공주가 당사자 일인데도 저리 태 평한 것을 보니, 배짱이 너무 좋은 건지 무신경한지 모를 일이라 갈 피를 잡기 어려웠다. 사실, 아킨은 그 소식을 가지고 올 때만 해도 켈브리안이 서럽게 울 거라고만 생각했지, 이런 식으로 말 할 줄은 전혀 몰랐다. 켈브리안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듯 차분했고, 절망에 당황하거나 흐트러지는 것 없이 앞으로 어찌 해야 하는 지 생각하려 하고 있다. 켈브리안이 물었다. "본가로는 언제쯤 출발하니?" "아직 아무 연락 없습니다. 하지만, 다음주나 다 다음 주 정도에는 출발하게 될 것 같아요." "그래......" 켈브리안은 땋아 내린 금빛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 중간에....좀 도와 줄 수 있니?" 아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만 있다면." 켈브리안은 어리석거나 무모한 부탁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또, 아 킨이 위험해 질만한 부탁을 할만큼 뻔뻔하지도 어리석지도 않다. 켈브리안이 말했다. "아키, 사실......나는 네가 되도록 이곳에 오래 머물면서 나를 도와줬 으면 했어." "있다 해도, 도움 될 일도 별로 없었을 겁니다. 전 아직 학생이고, 또......암롯사에 아무런 영향력도 없어요." "바보,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도움 될 것 같지 않다면, 되게 '만들 면' 되는 문제야. 넌, 네 배경 때문이 아니라...너 자체로도 꽤나 보 물 같은 녀석이니까." 아킨은 피식 웃었다. "듣기 좋군요." 켈브리안이 말했다. "그리고....왜 묻는 지는 캐묻지 말고 잘 들어줘. 가는 길에 누군가가 너에게 접촉을 해 오면, 최선을 다해 '내 편'으로 만들어 줘."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아킨은 감을 잡기 어려웠다. 아킨에게 누가, 대체 왜 접촉을 해오며, 무슨 재주로 그를 켈브레인의 편으로 만드 는가. 아킨은 로메르드에 아는 사람은커녕,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 조차 제대로 모르는 외국인이었다. "무슨 말씀이죠, 그건?" "여기로 오면서 아무도 따라오지 않았니?" 아킨은 솔직했다. "모릅니다." "아키, 누군가가 분명 따라 왔을 거야. 또, 너 정도의 감각이라면 이 렇게 생각하고 나가도 금방 알아 챌 테고. 그래도 침착하게 네 길을 가도록 해. 그리고 어느 정도 거리가 되면 그 쪽에서 먼저 모습을 드러낼 테니까." "선배님." 켈브리안은 난감한 표정이 되어버린 아킨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아킨은 가만히 그 손끝이 움직이는 것만을 바라보았고, 켈브리안이 결국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널 좋아해, 아킨. 그리고 그만큼....너 밖에는 믿을 사람이 없어." 켈브리안의 말은 정확했다. 아킨은 나오고 얼마 되지도 않아 대로로 접어드는 큰길에서 검은 말과 그 고삐를 움켜쥐고 있는 기사와 만 났다. 큰 키에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그 흑대장 슈마허 쉐플런이었다. 그는 아킨과 마주치자마자 대뜸 물었다. "공주는 어디에 있나." 아킨은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 "아시는 것 같은데요." 그렇게 말하고는 아킨은 손가락으로 뒤로 늘어진 골목을 가리켰다. 그러나 슈마허의 회색 빛 눈은 유리구슬 표면처럼 차갑고 매끄러울 뿐이고, 그 역시 '때에 따라서는' 아킨만큼이나 농담이 통하지도 않 는 사람이었다. "저 곳이 어떤 곳인지는 나도 안다. 또, 나 같은 사람이 함부로 쳐 들어갔다가는 곤란한 일이 생긴다는 것도." "그래서, 저더러 모시고 나와 달라는 말씀이십니까." "만나게 해 달라는 거야." "거절합니다." "그녀가 저 곳에 있다고 공작파에 말할 수도 있다. 또, 그렇게 되면 아무리 이런 뒷골목이라도 고분고분 따라야 할 걸." 그리고 슈마허가 빙그레 웃으며 덧붙였다. "물론 언제가 될지는,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를 테지." "그렇게 되면, 그분의 신변은 그....,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어쨌든 그 공작의 손안으로 넘어가는 것이고, 그리 되면 당신이 원하는 대 로되지 않을뿐더러, 가능성조차 사라지게 됩니다." "요점은?" "공연한 심술 때문이라면 별로 현명하지 못하며, 협박이라면 실패했 다는 말입니다." 그 때, 저 쪽에서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아킨이 흘끔 보니, 슈마 허의 그림자 같은 그 기사 세르네긴이었다. 그는 늘 입는 검은 옷차림으로 골목길 사이에 서 있었고, 손은 칼자 루로 다가가 있었다. 그 녹갈색 눈이 차분하게 아킨과 슈마허를 응 시했다. 아킨은 눈길을 거두고는 슈마허에게 말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또, 제가 여쭤볼 것도 있고요." 슈마허는 답하지 않았지만, 말의 주도권은 아킨에게 있었기에 그는 물어볼 것부터 말했다. "그분께 무엇을 원하는 겁니까." "이거, 도무지 낭만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군." "당신은 낭만적인 생각이 들어도, 이성으로 핑계를 찾을 만한 분이 니까요. 뭡니까." 슈마허가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가볍게 움직이더니, 손을 들며 말했 다.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 "곧 가 봐야 합니다." 그러자 슈마허가 더 가까이 다가왔다. 아킨보다 나이는 배는 많고, 키도 목 하나는 컸다. 또, 체구도 좋아서 덩치는 거의 배는 되 보였 다. 그는 그렇게 서서는, 목소리를 잔뜩 낮추어 말했다.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 또, 나는 나셀의 광룡, 사이러스의 아들에 게 손을 댈 정도로 무모하지는 않으니, 걱정 말고 따라와라."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내 집." 아킨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늦은 오후의 오렌지 빛 햇살에, 둘의 그 림자가 길게 솟아올라 길가까지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날카로운 햇살 속에 숨어 있는 시선이 느껴진다. 골목길 사이에 숨어 있는 세 르네긴의 눈빛 역시 날카롭게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고, 그 역시 '누 군가가 보고 있다.'는 것 정도만 눈치 챘을 뿐 어디에서 어떻게 보 고 있는 지는 모르는 듯 했다. 순간, 드디어 그 느낌의 중앙을 관통한 아킨은 등골을 죽 타고 흐르 는 오싹함을 느꼈다. 그건 짐승 같은 느낌이었다. 원초적인 것, 그 안에 사악하고 탐욕스 런 심장이 불끈거리고 있는 끔찍한 짐승의 느낌. 슈마허가 말했다. "나도 비슷하게 느꼈다. 어서 따라 와." 켈브리안은 혼자 남게 되자 곧바로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진한 담배 냄새와 오랫동안 빨지 않은 듯 지독한 냄새가 이불에서 풍겨왔으나, 그녀에게는 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제 라키 경이 전해온 아버지의 소식을 듣고 밤 새 울어서 그런지 눈이 화끈 거렸다. 아킨에게는 '나중에 슬퍼하지 뭐.' 하고 태연하게 말했지만, 사실 그 말을 할 때 슬픔과 절망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가엾은 아버지, 얼마나 외롭게 가신 걸까. 또, 어머니와 작은 베르티 노는 지금 어디에서 어쩌고 있는 걸까. 그리고 나는 어째서 한심하 게도 아버지가 어떻게 되셨는지, 지금 어떠신 지조차 모른 채 이 매 음굴의 지하 방에 웅크리고 있는 걸까.... 지금은 이렇게 있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문득 문득 지금 이러는 것이 잘못하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 에 다급해 진다. 외로움이 밀려들어왔고, 그것은 막막한 두려움을 끌고 들어왔다. 늘 용기를 가지려고, 침착하게 상황을 바라보며 현명한 선택을 내리려 고 노력해 왔던 그녀였지만 혼자 남게 되니 밀려드는 두려움은 어 쩔 수 없었다. 그녀는 이제 열 아홉이 된 소녀일 뿐이었다. 밤새 울 어서 금새 눈이 화끈거렸고, 피곤함과 함께 잠이 파도처럼 밀려들어 왔다. 그렇게 안개처럼 가물가물하게 잠든 듯 깨어나듯 하다보니, 꿈인 듯 현실인 듯 그녀의 어깨를 누군가가 살며시 잡는 것이 느껴진다. 켈브리안은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조용히 느꼈다. 그것은 애정이 아 니라 귀중한 남의 보석을 탐내듯 만지작거리는 듯한 손길이었다. 그 러다 손끝이 찬찬히 어깨를 밀어 올리더니 목과 뽀얀 귓불을 더듬 었다. 도마뱀의 발바닥처럼, 너무나 미끈하고 차갑다. "!" 켈브리안은 놀라 벌떡 일어났다. 무언가가 후닥닥 물러나는 것 같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탁탁탁-- 몸집이 작은 것이 뛰어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켈브리안은 침대 옆의 칼을 집어 뽑아 들고는, 문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러나 복도에 는 지친 얼굴의 금발 소년 하나만이 웅크리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켈브리안은 검을 칼집에 집어넣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뭔가 지나가지 않았어?" "꿈이라도 꿨나보지, 작은 새 아가씨?" 잠에 취한 듯한 소년이 갈라진 목소리로 그리 묻더니 히죽 웃었다. 켈브리안은 잠시 소년을 의심스럽게 보았지만, 바닥에 축 늘어져 있 는 그가 방금 전에 그녀를 건드리고는 후닥닥 도망쳤다고는 생각되 지 않았다. 또, 아무도 보지 못했다는 것이 거짓말 같지도 않았다. 뭐였을 까... 켈브리안은 아무래도 거처를 옮기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칼 자루를 꾹 움켜쥐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슈마허의 집은 군인의 집이라기 보다는, 어느 검소한 상인의 집처럼 보였다. 중소 상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로파 가에 사는 것도 그랬고, 안은 그리 넓지도 않으면서도 기능적이고 편안해 보였다. 벽은 따뜻한 연 갈색으로 발라져 있고, 바닥은 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었다. 응접실 의 소파는 넓고 푹신했으며, 그 주변에는 아름다운 부인과 잘 생긴 청년의 그림이 걸려 있었고 구석에는 작은 피아노까지 한 대 놓여 있었다. 슈마허라는 기사가 아니라, 예쁘고 착한 아내와 장난꾸러기 아들과 새침데기 딸을 하나 가진 상인의 집이라면 어울릴 듯 했다. 슈마허가 응접실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통째로 샀지. 그 자체가 아주 편안해 보였고, 손대고 싶지도 않았 으니까. 사실, 저 여자도, 저 남자도 모르는 사람이다." 아킨은 그 말이 저 슈마허에게 좀 어울리지 않는 다는 생각이 들었 다. 내가 언제 물어봤나.....그러나, 저렇게 나오니 생각보다 편한 사 람 같기는 했다. 슈마허가 말했다. "대접은 생략하겠네. 이야기만 간략하게 하고 헤어지자고." "원하는 바입니다." 아킨은 뒤를 보았다. 세르네긴은 여전히 벽에 등을 기댄 채 서 있었 고, 슈마허는 변명하듯 말했다. "세르네긴은 신경 쓰지 말게. 내 몸 같은 녀석이니까." "비밀로 한다 해도 말해 주실 거라 알기에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슈마허가 웃었다. "그래, 공주가 무슨 말을 하던가?" "당신을 원합니다." 슈마허는 아킨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킨은 표정 없이, 소파의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는 그런 슈마허를 마주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말 그대로 이해해야 하는 건가?" "네." 슈마허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도도하게 퉁길 때는 언제고." "물론 '남자'로서의 쉐플런 경은 전혀 그분 타입이 아닙니다. 그분도 취향이란 것이 있으니까요." 아킨은 슈마허의 이마가 살짝 실룩이는 것을 보고는(뒤에서 키득,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하다) 말을 이었다. "실제로는 크게 노력을 기울인 것도 아니잖습니까." 슈마허가 조금 심술궂게 들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무슨 근거로?" "좋아해서 원했던, 그분과 결혼할 경우 얻게 되는 것을 원했든, 정 말 그분을 원하기는 했다면 어떻게 하는 편이 현명한 지는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당신은 단순히 '재미있어서' 그분에게 접근한 것 이상은 아닙니다. 되면 좋고, 안되면 내기에서 진 것만큼 만 아쉬울 테죠. 그 뿐이었습니다." "너는 나와 만난 지 얼마 안 되." 아킨이 이마를 가리켰다. "눈치로 아는 겁니다. 별로 틀리지도 않은 것 같고요." 슈마허가 피식 웃었다. 아킨은 등을 의자에 기대며 말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전쟁'에 대해 말 해 보고 싶습니다. 어느 쪽을 생각하고 계시는 겁니까." *********************************************************** 작가잡설: ......컬린의 본명은 병, 현 이었던 것입니다! ..;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11장 *************************************************************** [겨울성의 열쇠] 제51편 그림자 속의 마법사#4 **************************************************************** 잠깐 말없이 있던 슈마허가 말했다. "난 어차피 외국인이다. 당연히 눈치 봐서 좀 쓸만한 쪽에 붙는 게 좋아." "그건 아직은 불확실합니다. 저 쪽에서 왕비와 왕자를 붙잡고 있는 이상 '지금은' 그 쪽이 우세지요. 그러니 이제 사태를 지켜보던 왕비 파는 지금 공주님을 찾고 있을 겁니다. 공주님의 계승권은 공작보다 비할바 없이 높습니다." "계승권은 힘이 있어야 지킬 수 있는 것 아닌가, 도련님." 조롱하는 목소리였다. 아킨은 고개를 저었다. "왕비파나 공작파나 그 힘은 비슷비슷했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중 립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어느 쪽에 몰려갈 지는 모르지만, 지금 당장은 입장을 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확신할 수 있나." "한 쪽이 확실히 우세였다면, 당신이 아직까지 입장정리를 하지 않 았을 리 없습니다. 또한, '중립'이 남아 있을 리도 없죠." 슈마허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아킨은 그런 그를 마주보며, 그가 머릿속으로 어떤 생각인가를 아주 진지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아챘고, 잠자코 기다렸다. 솔직히, 아킨이 아는 것은 별반 없었다. 한참만에 슈마허가 말했다. "그럼, 내게 공주를 맡겨 줄 수 있겠나." "그건 안 됩니다." 슈마허의 눈이 날카로워졌고, 아킨은 그런 그에게 담담하게 말해갔 다. "저는 그저 그분의 후배일 뿐, 약혼자는커녕 연인도 아닙니다. 제가 맡겨 드리고 싶다고 맡겨 드릴 수는 없는 문제입니다. 그분이 선택 하실 바죠." 슈마허의 언성이 높아졌다. "그럼 내가 대체 왜 그녀를 도와야 한다는 거지?" 아킨이 말했다. "지금의 당신에게는 그것뿐이니까요." 창 밖을 보던 세르네긴의 눈이 아킨을 향했다. 그 녹갈색 눈 안으로 흥미의 빛이 일며, 시선은 외려 더 날카롭게 섰다. 그런 세르네긴의 변화를 슈마허 역시 알아챘다. 아킨은 말을 이었다. "벌써 이겼다고 생각하는 공작파 쪽에서는, 외국인 용병대장인 당신 의 몫은 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의 힘이 얼마나 되던 간에, 또 당신이 얼마나 도움이 되던 간에....그들에게 당신은 일이 다 끝 난 뒤에 나타나서 조금 도와주고는 제 몫을 요구하는 거추장스러운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내분은 오래 지속되었고, 그들 의 기대는 점점 커지고 있고, 드디어 그 기회가 왔는데.....새 사람을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겠지요. 그들은 이미 끝났다고 생각할 것입니 다." 슈마허는 아킨의 얼굴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으스대는 것도 없고, 자신 없어 떠는 것도 없다. 잘 알지도 못하는 흑대장 슈마허를 앞에 놓고, 저 꼬마 녀석은 무서울 정도로 차분할 뿐이다. "그래서 결국 왕비 쪽으로 가야 한다는 말인가?" "공주님 편이죠." 슈마허의 갈색 머리카락이 그 긴 손끝에서 흔들리다가 뒤로 쓸려 갔고, 눈은 아킨의 눈을 마주보고 있었다. 아킨은 그 눈을 되도록 긴장하지 않고 마주 보고 싶었다. 어려울 것은 없었다. 올해 서른 넷인 슈마허는 열 일곱 살 짜리 소년이 상대하기에는 지나치게 노 련한 자였다. 마침내 슈마허가 나른히 한숨을 내 쉬고는 말했다. "......우선은, 공주와 만나게 해 주게나." "내일 그 분께 말씀 드리겠습니다." "복잡하군." "제게는 결정권이 없으니까요." "분명히 말하는데, 아킨토스 왕자. 편할 때만 그런 식으로 빠져나가 는 것은....영 보기 안 좋아." 아킨은 태연히 응수했다. ".....별 수 없죠." "세르네긴, 밖으로 안내해 줘라." 세르네긴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아킨에게 다가왔고, 아킨은 그 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킨은 슈마허의 집을 나서, 곧바로 학교로 향했다. 공주의 말대로 하긴 했지만, 찜찜한 것이 사실이었다. 아킨은 정말 아는 것이 거의 없다해도 무방했고, 빙금 전 슈마허에게 이야기한 것도 순전히 평소 버릇대로 행동하면서 슬쩍 슬쩍 넘겨짚으며 말해 나간 것이 전부였 을 뿐이다. 아마도, 저 슈마허 정도라면 벌써 눈치채고 있을 것이다. 해가 막 저물어, 어둠이 옅게 깔리기 시작했다. 거리는 왕의 승하 때문에 텅텅 비어 있었고, 아킨이 걷고 있는 카로디 강은 어둠에 잠 겨 철썩이고 있을 뿐이었다. 적막함에 흔들리는 물 소리 속에, 잘박 잘박--하는 가볍게 물차는 소리가 들려온다. 누가 물가에서 장난치나....그리 생각하며 아킨은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까지 관여하는 것이 좋을 지, 아킨은 결정하기 어려웠다. 그러 나 다음주에라도 당장에 본가에서 누군가가 올 것 같았고, 일의 성 격상 아마도 케올레스가 직접 올 가능성이 높다. 마르실리오라면 당 장에 오라고 말하다가 아킨과 부딪히고 무안당하고 무시당할 테지 만, 케올레스는 아니다. 그는 나이가 많으며, 아킨은 그를 조금은 어 려워하고 있었다. 또, 현명한 그는 롤레인을 찾아가 상황을 잘 설명 한 다음 그녀를 통해 그에게 본가로 오라 말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킨은 빠져 나올 틈도 없이 당장에 본가로 가야 할 것이다. 솔직히, 켈브리안이 걱정되기는 하지만 아킨은 그녀의 약혼 자도 연인도 아니며, 그렇다고 절친한 친구 사이도 아니다. 루첼의 일이라면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켈브리안은 아니다. 그녀가 덜 중요하다든지, 그녀 때문에 위험해 질 수 있다든 지 하는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섣불리 나섰다가는 오히려 켈브리안 이 위험해 질 수 있다. 겁먹는 건 질색이지만, 경솔하게 위험을 부 르는 건 더욱 질색이다. "복잡하군..." 아킨은 나른히 한숨을 내 쉬었다. 그래도 롬파르를 떠나기 전 까지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 좋을 듯 했 다. 물론, 아킨은 왕비나 왕자를 구한다거나 하는 놀라운 일을 할 수는 없다. 다만, 켈브리안만을 최선을 다해 도울 것이다. 그리고 그 녀 역시, 방금 전 만나고 왔을 때 그랬듯 앞으로도 터무니없는 부탁 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이기적이지도, 어리석지도 않은 친구였고, 그 래서 아킨은 그녀를 정말 좋아하고 있었다. 그 때 다시 잘박 잘박-- 물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뭐지....그러다가, 아킨은 순간 몸이 확 곤두섰다. 누군가가 보고 있다-! 아킨은 급히 몸을 돌렸다. 가로등 불이 터지는 강가에서, 첨벙 소리 가 들린 것 같았다. 그리고 옅은 회색 돌길 위로 물 얼룩이 찍히기 시작했다. "!" 아킨은 뒤로 한발자국 물러났다. 물 얼룩이 아킨을 향해 느릿느릿 찍혀오며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녹슨 쇠가 서로 비벼대는 듯 듣기 싫은 쉰 소리였다. 짚이는 게 있 어, 아킨은 손가락을 피며 날카롭게 외쳤다. "비자트--!" 아킨의 발 앞에서 반짝이는 모래 같은 것이 확 뿜어져 오르더니, 앞 으로 빠르게 쓸려 갔다. "크악-!" 짐승이 불에 덴 듯한, 그 쉰 소리가 더 듣기 싫고 크게 들려왔다. 아킨은 말고삐를 붙들고는, 금방이라도 그 등에 탈 듯 몸을 긴장시 켰다. 그러나 곧바로 등을 보일 수는 없었다. 뭐가 어떻게 튀어 나 올 지, 적어도 확인은 하고 가야 안전하다. 빛이 쓸려가듯 빠르게 빠져나더니, 어둠 속에서 자그마한 몸집을 가 진 사람이 몸에 붙은 가루를 털어 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맙소사, 아킨은 신음을 삼키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 공처럼 동그란 몸에, 짧은 다리가 새 발처럼 비죽이 튀어나와 바 닥을 딛고 있었다. 원숭이처럼 긴 팔은 바닥을 쓸 정도였고, 거미발 처럼 긴 손가락은 마디가 툭툭 튀어 나와 있었다. 얼굴은 반쯤 일그 러져 있었다 한쪽 눈은 주먹만했지만, 다른 하나는 그 반도 안 되었 다. 두툼한 눈꺼풀이 개구리처럼 툭 튀어나온 눈 위로 끔뻑였고, 몇 가닥 없는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이 머리에 얹혀 바람에 흔들렸다. 그러나 겉모습이 흉측해서 소름끼치고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정말 소름이 끼치는 건, 그 번들거리는 눈이었다. 연푸른 색 눈, 보석처럼 맑고 아름다운 색채를 가지고 있었지만 활활 타오르는 안광을 내뿜 으며 아킨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안은 끔찍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 었다. "누구....십니까." 아킨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한심하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그가 히죽 웃었다. 두툼한 입술이 비틀리며, 누런 이가 드러 났다. 그 짧고 뭉툭한 혀가 아래위로 움직이더니, 박쥐 울음 같은 웃음을 흘렸다. 아킨은 뒤로 돌아 도망치려 했다. 본능은 단지 도망치라, 도망치라! 그렇게 다급히 외칠 뿐이었다. 위험해, 아주. 그러자, 그 괴인에게서 짧은 외침이 터졌다. "아리스테...!" 아킨은 바람의 방향을 읽으며 몸을 날렸다. 딛고 있던 바닥 위로 금 빛 채찍 같은 것이 날아오더니, 그 바닥을 으깨어 놓았다. 돌 조각 이 튀어 올랐다. 말이 놀라서 울부짖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 괴인이 두 손바닥을 비비더니, 다시 아킨을 향해 내밀었다. 아킨 은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그가 내 뿜는 마나는, 어린 아킨이 상대할 수준이 아니었다. 어마어마했다. 온 세상을 압도하여 으깨어 버릴 듯한, 엄청난 파괴 력이었다. 저 힘이라면 화산이라도 뿜어 올릴 수 있고 폭풍우도 불 러 올 수 있다. 마법사, 그것도 '대'마법사라 불릴 정도의 힘이다. 아킨은 다시 크게 외쳤다. "당신, 대체 누굽니까!" 그러자 그가 클클 웃었다. "그 년이 내 이야기는 한번도 안 하든?" 한껏 조롱하는 은근한 목소리였다. 아킨은 뒤로 한발자국 더 주춤 물러나며 생각했다. '그 년'이라니, 대체 누구를 말하는 건가. 설마, 켈브리안? 괴인의 손이 찬찬히 움직였다. 긴 손가락이 죽은 거미발처럼 안으로 오므라들고, 마나가 큰 짐승이 몸을 뒤트는 듯 요동하는 것이 느껴 졌다. 그리고..... "싸더스 리그흐!" 빛이 번득였고, 아킨의 주변이 쿠르릉 울부짖었다. 꽈르르--!!! 뭐가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뜨거운 것이 양 볼을 스치고, 허벅지를 스쳤다. 허리가 찢어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눈부신 빛이 주변으로 가득 차 올랐고, 찌지--찌지지--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프로텐--!" 아킨은 앞으로 팔을 뻗으며 외쳤다. 발 주변에서 창 같은 것이 수 십 개 솟구쳐 올라 아킨을 둥글게 감 쌌다. 잠시의 시간을 벌게 되자, 아킨은 손으로 재빨리 인을 그렸다. 그 끝을 따라 붉은 원과 문자가 새겨지자, 아킨은 그 중앙에 손바닥 을 대며 외쳤다. "카트 파윈--!" 쿠르르르--! 붉은 빛은 아침 햇빛처럼 날카롭게 터졌다. 차륜처럼 빙그르르 돌며 주변으로 퍼지더니, 앞을 쿵 내리 찍었다. 캐륵--! 작은 짐승이 공 격받은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터졌다. 자욱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젖은 흙 냄새가 풍겨왔다. 아킨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뒤돌아 몸을 날렸다. 자욱한 연기 속에 겁에 질린 말발굽 소리를 구별해 내, 날렵하게 달려가 그 고삐를 낚아채고 올라탔다. "달려--!" 아킨은 힘껏 박차를 가했다. 피가 볼을 타고 뚝뚝 흘렀다. 허리도 쑤시고, 어깨와 팔은 끊어질 듯 아팠다. 말이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연기가 걷히고 얼마쯤 지나자 아킨은 뒤를 돌아보았다. 뒤로는 검은 강이 흐르고 있었고, 방금 전 한번 크게 부딪혔던 곳은 이제 보이지도 않았다. 아킨은 피를 훔치고는 숨을 골랐다. 그리고 주변의 건물을 둘러보며,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뭐였지...?" 갑자기 어깨가 와들와들 떨리기 시작했다. 피 범벅이 된 손을 눈앞 으로 가져와 보니, 덜덜 떨리고 있었다. 숨소리도 여전히 거칠고, 온 몸은 땀투성이였다. 그러다가, 그는 볼과 귓불이 지독하게 화끈거리 는 것을 느꼈다. 뜨거운 피가 멈추지 않고 흐르며 아킨의 목을 흠뻑 적셨다. 아킨은 오른쪽 귀로 손을 가져갔다. 벌써 피가 마르기 시작해 찐득 찐득 거리는 상처가 손끝에 닿았다. 어디까지 다쳤나 싶어서 천천히 더듬어 올라가다가, 아킨은 손을 뚝 멈추었다. 설마..... 아킨은 심장이 두근두근 뛰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다시 귓불 쪽으 로 더듬어 내려갔다. 상처가 쓰릴 거릴 정도로 만져 봐도, 피에 젖 어 미끈거리는 살덩어리뿐이었다. 심장이 튀어나오기라도 할 듯 크 게 벌떡거리고 있었다. 아킨은 손이 떨려오는 것을 주체하지 못하며 이번에는 왼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곳 역시 피투성이였지만, 오른 쪽보다는 덜 했다. 정통으로 맞아 버린 그 쪽과는 달리, 왼쪽은 귀 위를 때려 그 부분만 피투성이였다. 곧 손끝에 차갑고 단단한 그것 의 표면이 닿았다. 아킨은 다시 오른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없다. "맙소사...!" 아킨은 말머리를 돌렸다. 그 괴인에 대한 공포는 완전히 잊어 버렸다. 오로지 '그날'이 공포만이, 몇 년 전에 겨우 끝나 버린 그 악몽이 떠 오를 뿐이었다. 차가운 물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날의 그 매섭고 차가운 바람과, 야수처럼 으르렁거리며 거품을 뿜어 올리던 거대한 파도와, 그녀의 슬픔에 잠긴 안타까운 눈, 그의 어깨를 잡아 내동댕이치던 아버지의 억센 손.... 그 끔찍한 괴물들이 갇혀 있던 우리의 문을 부수고 몸을 뻗치고 있 었다. 은봉인이 깨어졌다. *********************************************************** 작가잡설: 드디어...슬금 슬금 아울의 본색이 드러나기 시작한다...라 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없지는 않겠...죠. 뭐, 이제 50편이 넘어섰고....슬슬 고생문이 열릴 때가 되었지요. (당당!) 자...아자, 50편 넘었습니다! 고지가 보입...까지는 아니지만 어쨌건 넘기는 넘었습니다. ^^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12장 *************************************************************** [겨울성의 열쇠] 제12장 도피 제52편 도피#1 *************************************************************** 루첼은 베크만의 저택에서 저녁까지 먹고 돌아왔다. 베크만은 학교 생활에 대해 물어보았을 뿐이었고, 루첼은 아킨과 관련된 이야기는 최대한 자제하며 답했다. 베크만은 루첼을 아주 좋아했고 루첼도 상 당한 달변이라 이것저것 이야기 나누다 보니, 루첼이 기숙사로 돌아 왔을 때는 벌써 아홉 시였다. 기숙사 방안은 컴컴했다. 그러나 루첼은 들어가려다가, 벌써 돌아온 아킨이 침대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불도 안 키고 뭐 하는 거냐, 너." 루첼은 그렇게 퉁명스레 말하고는 램프의 불을 당기려다가, 흐릿하 게 풍겨오는 피 비린내를 맡았다. 루첼은 급히 램프의 불을 찾을 필 요도 없이 바로 광구를 띄워 뿌렸다. 빛이 확 터지자, 루첼은 완전 히 피투성이가 된 아킨을 볼 수 있었다. 목과 머리카락이 피에 흠뻑 젖어 있었다. "맙소사! 피도 안 닦고 뭐 한 거야?" 그러나 아킨은 말없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쥰이라면 당장에 뒤통수 갈겼을 테지만, 상대가 아킨이라 루첼은 멍청한 녀석, 어쩌고 중얼 거리며 급히 주전자를 찾아 흔들었다. 물이 어느 정도 있자, 우선 의자 뒤에 걸린 수건을 집어 물을 쏟아 부어 버리고는, 그 젖은 수 건으로 아킨의 피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아킨은 지친 아이처럼 얌전하게 앉아 있었고, 루첼은 목과 볼의 피 를 닦아내며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서 이렇게 다친 거야?" "......오다가." 늘 그렇듯, 답하는 아킨은 얄미울 정도로 차분했다. "공작파 사람에게 당한 거야?" "모른다." "그게 무슨 말이야? 모른다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내게 원하는 것도 없었지. 그냥......바 로 공격했고, 이 꼴이 되 버렸어..." 피투성이가 되서도, 떨림 하나 없이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게 말하고 는 있었지만 눈빛만은 아니었다. 그저 한곳만 멍하니 바라보는 눈 은, 겁에 질려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충격과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루첼이 다그쳤다. "의무실이라도 갈 일이지.....하여간, 누가 왕자님 아니랄까봐 자기 손으로 할 줄 아는 건 아무 것도 없다니까. 완전히 걸레 쪽이군." 그런데, 아킨은 이마를 감싸쥐더니 크게 탄식을 내 쉬었다. 온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고, 눈빛은 여전히 흐리고 초점조차 없었다. 루첼은 손을 멈추었다. "아키?" "잃....어 버렸어." "뭘?" "잃어....버렸다고!" 루첼은 수건을 뗐다. 귀와 목에는 아직 피 얼룩이 남아 있었고, 피 는 상처 난 귓불 끝에서 쏟아진 것이었다. 그제야 루첼은 아킨이 무 엇을 잃어버린 것인지 깨달았다. "너, 이......" 루첼은 급히 아킨의 턱을 돌려 반대편을 확인했다. 반대편의 두 개 는 무사했지만, 맨 위에 있는 하나에는 금이 가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은 봉인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아킨은 당장에 말머리를 돌려 그 장소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곳에 남아 있는 것은, 싸움의 흔적조차 없는 터무니없는 풍경뿐이었다. 포석이 다 으깨질 정도로 힘이 폭발했었고, 아킨 역시 상처가 나고 피가 터졌는데, 그곳에는 그런 일 따위는 전혀 없었다며 그를 기만하고 있었다. 행여 그곳이 아닌가 해서 주변을 샅샅이 둘러보다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자신의 피 얼룩을 발견했다. 아킨은 그대로 자리를 떠, 도망치듯 학교로 돌아왔다. 기숙사로 간 것은 그저 귀소본능 때문이었다. 롤레인을 찾아가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방으로 돌아오니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온 몸이 와들와들 떨려왔다. 캄캄한 두려움과 불안은 점점 거대해져 아 킨을 마비시켰다. 어둠 속에서 당장에 그 자그마한 괴인이 튀어나와 뒷덜미를 잡아채 끔찍한 곳으로 끌고 가 버릴 것만 같았다. 가슴속에 숨어 있는 그 무시무시한 공포는, 짧고 흉측한 혀로 입술을 축이며 슬며시 다가오 고 있었다. 그건 과거와 연결된 실체를 가진 공포였고, 정말 닥칠지 모르는 것이었다. 그 컴컴한 방, 쇠사슬....차가운 달빛.....! 상황을 대충 듣자, 루첼은 수건을 내 던지고는 급히 물었다. "도움 청할 만한 사람은 있어?" "롤레인 교수님." "그럼 당장 가자." 루첼은 아킨의 팔목을 낚아채 끌어 당겼다. 아킨은 천천히 일어나다 가, 그냥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루첼이 급히 아킨을 부축했다. 몸 은 뻣뻣했고, 아이처럼 떨리는 손은 루첼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 다. "뭐가 그렇게 두려운 거야...!" "내가, 나 자신이....." 그러나 루첼은 다그치듯 험하게 외쳤다. "엉덩이 걷어차기 전에 움직여, 어서-!" 루첼이 행여나 해서 교수 연구실을 먼저 들른 것이 운 좋게 되었다. 가뜩 위험할 때 이곳 저곳 허탕치면서 돌아다닐 필요도 없이, 루첼 은 아직 연구실에 남아 있던 롤레인 교수를 만날 수 있었다. 롤레인은 책상 위에 낡은 편지를 잔뜩 얹어 놓고 있다가, 루첼이 노 크를 하고 들어오자 그 더미를 한 구석으로 몰아 치워 버렸다. "무슨 일이지, 그란셔스 군?" "일이 생겼습니다. 이곳에 도움을 청하라 해서요." 롤레인 교수는 루첼을 물끄러미 보다가, 그제야 루첼 옆의 아킨을 발견했다. 그녀의 눈이 금방 흐려지더니, 조급히 이마를 매 만졌다. 그리고 뭐라 날카롭게 중얼거리고는,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문 닫고 들어와." 평소의 롤레인 답지 않게 매섭고 차가운 목소리였다. 아니, 적어도 아킨은 그 목소리를 알아도 루첼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아킨은 안으 로 들어오며 망토의 후드를 뒤로 넘겼다. 롤레인은 분명 무언가를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아킨이 후드를 벗기도 전에 그의 귀 부근을 빤히 보고 있었으며, 후드를 벗자마자 다가와 머리카락을 넘겨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탁 내쉬고는 손을 거 두었다. "....그란셔스 군, 잠시 나가 있겠어?" "네." 루첼은 연구실에 둘만 남겨 놓고는 자리를 나섰다. 룰레인은 아킨을 의자에 앉히고는 달래듯 조용히 물었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지?" "어느.....이상한 마법사였습니다.....강하고, 흉측한." "어떻게 생겼든?" "몸은.....꼭 공처럼 생기고, 팔은 길고 다리는 짧았습니다. 또...." 쾅--! 아킨은 말을 하다 말고 깜짝 놀랐다. 롤레인은 그렇게 책상을 세게 내리 찍고는, 주먹을 짓눌렀다. 꾹 문 아랫입술 위로 금새 피가 번 져 나왔다. 그녀는 손을 거두어 가슴이 붙이고는, 분노에 짓눌린 낮 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떤 식을 당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빠져 나왔는지 말 해 다오." 아킨은 상황을 기억나는 대로 상세히 설명했다. 롤레인의 얼굴이 무 섭게 창백해졌다. "가만히 있을 거라 생각한 내가 잘못이지...." "아는....사람입니까." 롤레인은 고개를 젖히며 말했다. "그렇게 생긴 사람이 둘 이상 있을 거라고는 생각 치 않아." 두 눈이 매섭게 번뜩였다. 그제야 아킨은 그 괴이한 마법사가 '그 년'이라 말했던 여자가 바로 롤레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구입니까." 롤레인은 숨김없이 말했다. "탈로스 고르노바." 익숙한 이름이었고, 아킨은 다급함 속에서도 롤레인이 예전에 했던 말을 금방 기억해 냈다. 컬린의 첫 번째 제자였던 전능의 탈로스. 고대마법과 드래곤에 심취 해 은둔한 마법사. 헛된, 그리고 지극히 이기적인 욕망에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붇는 마법사. 아킨은 그가 왜 그렇게 그 일에 집착했는지, 이제서야 짐작이 갔다. 그 모습을 바꿀 수만 있다면, 적어도 조금이라도 '정상인'처럼 만들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 롤레인이 편견은 갖지 말라고 했는지 이해되었다. 그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이해하기 는 너무도 끔찍한 고통이었고, 이해는커녕 동정조차 힘들었다. 그런데 지금 롤레인의 표정은 그 때와는 완전히 틀렸다. 흐릿하나마 동정을 품고 이야기하던 그 때와는 달리, 지금은 오로지 매서운 증 오만을 내 뿜으며 분노하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 당장 일어난 일 때문만은 아닌 듯 했다. 그것은 깊고도 단단한 무엇이었고, 예전에.......그렇다. 아킨이 켈브리안 공주와 만났 을 때도 저런 표정이었다. "당장에 본가로 떠나거라." 네, 하고 답하려다가 아킨은 다시 소름이 쭉 끼쳤다. "전 어떻게 되는 겁니까." "나도 몰라. 절반 이상이 망가졌고, 지금의 나로서는 얼마나 어떻게 변형과 저지의 마법이 남아 있을 지 모른다. 그러니, 지금 당장은..... 어서 본가로 돌아가 보는 게 나아. 이곳 일이 대충 정리되는 대로 따라 가겠다." "컬린은...." "그 사람은 실종 된지 벌써 6년째야. 너를 지켜 봐 달라는 말과 함 께 그것을 만들 때의 기록을 대부분 정리해서 넘겨준 게 마지막 연 락이었어. 그 후, 소식이 뚝 끊겨 버렸다." 다시 그 차가운 증오와 분노의 빛이 눈 위로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 고 아킨은 그녀의 탈로스를 향한 증오가 어쩌면 그 스승의 실종과 도 관련이 있을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롤레인이 말했다. "우선은 당장에 학교를 떠나 있어라. 곧 휴교령이 떨어질 테니, 다 른 건 신경 쓰지 말고 어디든 숨어 있어. 그래, 네 본가에서 사람이 오려면.....며칠 정도 걸리지?" "일주일 안에는 올 겁니다." "네 아버지의 마법사는 누구지?" "엷은 바람의 케올레스입니다." 롤레인이 아찔해 지는 지 한숨을 내 쉬었다. "어림없군.....그렇다고 내가 붙어 있으면 배로 위험해 질 테고." "왜......죠?" "내가 증오하는 만큼이나 그도 나를 증오하니까. 또, 내가 그에 대 해 아는 만큼이나 그 역시 나에 대해 안다. 그러니, 나와는 떨어져 있는 편이 좋아.....어쨌든, 케올레스 말고 다른 사람은 없니? 좀 강 한 사람으로....케올레스는 절대 안 돼." 아킨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한참만에,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보았 다. "엘프......는 어떻습니까." 롤레인의 눈빛이 안심을 한 듯 부드럽게 변했다. "어디의 일족이지?" "어둠 숲입니다." "드루이드?" "전사입니다." "어차피 드루이드는 사람 많은 도시에서는 보통 마법사만큼이나 맥 이 없으니.....그래, 어떻게 알고 있는 거니. 정말 믿을 수 있고, 너를 제 몸만큼이나 지키려 할만하니?" "제 이복형입니다." 롤레인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흐렸다가, 곧 아킨의 '상황'과 관련된 것을 기억해 낸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은 절반이라도 괜찮겠지. 그가 도착하기 전 까지 널 지켜줄 사 람은 있어?" ".......말 해 봐야 압니다." "그래.......우선은 어디로든 내가 모르는 곳에 숨어 있어라. 나중에 연락하지도 말고. 그리고, 네 이복형과는 따로 연락을 하도록 해라. 본가에는 모르도록 말이야. 탈로스가 너에게 어느 정도 신경을 쓰고 집착할 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리도록 하는 게 좋아. 그리고 배도, 네 본가의 배는 이용하지 말아라. 루첼 그란 셔스라면 잘 처리해 줄 테니, 그에게 암롯사로 가는 배를 알아 봐 달라고 해. 일단은 반도를 떠나고, 아무리 미치광이 탈로스라도 사 이러스 대공왕 코앞까지 기어가지는 못할 테니, 본가에 도착하면 안 심해도 좋을 거다." 아킨은 힘들게 물었다. "그가....왜 저를 노리는 겁니까." 그리고 귀를 가리켰다. "아무래도 이것과 관련된 것 같은데요." "그도 마법사다. 그 은봉인이 자신에게 쓸모 없다는 것 정도는 그도 잘 알아. 또, 가져가 봤자 나와 컬린이 가르쳐 준 것 이상으로 알아 낼 것도 없다는 것도." "그럼 대체 왜....." "네가 컬린의 수혜자이자 내 제자이기 때문이지. 단지 그 때문이 다...나를 향한 증오가, 너에게까지 옮겨간 것 뿐이야." 아킨은 고개를 떨구었다. 롤레인의 손이 아킨의 머리에 얹혔고, 그 녀의 따스한 체온이 가까이 다가왔다. "내가 할 수 있는 한....최선을 다해 널 지키겠다. 내 목숨과 모든 운 을 걸고." ".......그러지 마세요." "아키." "교수님이 돌아가시면, 저는.....제 어머님이 돌아가셨을 때만큼이나 슬플 겁니다. 다시는 그런 것.....겪고 싶지 않아요. 결코-" 다시 눈물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몇 번이나 강하고 어른 인 척 하던 아킨은 다시 예전의, 일곱 살 때 숲을 헤매던 그 겁먹은 어 린아이로 돌아가 있었다. 그저, 도망치고 숨는 것 밖에는 할 수 없 는....그런 어린 아이. "최선을 다해 도망치겠습니다." *********************************************************** 작가잡설: 음...핫.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12장 *************************************************************** [겨울성의 열쇠] 제53편 도피#2 **************************************************************** 롬파르 정보 길드 최고 마스터, 첸은 밤잠은 거의 없었다. 7년 전 정보 길드를 완전히 장악한 후, 그는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다녔으 며 밤에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초창기에 구사 일생으로 겨우 살아난 것이 몇 번 되다 보니, 이제는 편히 잠드는 게 차라리 사치였다. 그래서 그 시간에도 여전히 깨어 있었는데, 에나가 후닥닥 달려와 문을 쿵쿵 차면서 외쳤다. "첸--! 당장 발딱 일어나!" 자는 척 하는 게 전혀 쓸모 없는 상대였고, 정말 잔다 해도 걷어 차 일으켜 세울 망나니 계집이었다. 하여간, 저 계집애는 어린 남자들 에게는 그리 살갑게 굴어 대면서, 저랑 나이 맞는 남자에게는 영 사 납단 말이야. 첸은 투덜거리며 방문을 열었다. "무슨 일인데." 그리고 첸은 에나 뒤의 남자를 보자마자 발작을 일으키듯 외쳤다. "오지 말라고 했잖아, 루치--!!!" 루첼이 서둘러 두 팔을 들며 말했다. "지름길로 잽싸게 왔으니 걱정 마, 체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이 자식아! 너, 어서 들어와. 어서-!" 첸은 루첼의 멱살을 잡아 당겼다. 그러다가, 루첼의 등에 바싹 붙어 있던 소년(자리가 좁아서 별 수 없었다.)을 발견했다. 첸은 루첼을 잡았던 멱살을 다시 뒤로 밀며 으르렁 크르렁 외쳤다. "이, 이 자식이 왜 여기 있는 거야!!!!" 루첼이 간절하게 말했다. "좀 맡아 달라고." ".......뭐?" "사창가에 집어 넣어놔도....어이, 아키. 널 팔겠다는 말은 아니니 그 렇게 째려보지 마. 하여튼, 그런 곳도 괜찮으니 한 2-3일만 맡아 줘. 이 녀석 데리러 누군가 올 테니까." "미쳤냐, 너--! 이건 옛정이나 의리로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고! 저 골칫덩어리를 어떻게 여기다 둘 수 있는 거냐! 당장에 커크와 자코 베가 발작 일으킬 거라고. 늘씬하게 패 놓겠다고!" 에나가 입술 위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쉿, 쉿--! 바람소리가 날 정 도로 그녀가 다급히 손짓을 했다. 아킨은 결국 뒤돌아 서 성큼 성큼 걸어갔다. 루첼이 그런 아킨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어이, 아키! 가만히 있어." "다른 곳을 알아보겠다." 루첼이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롬파르에서는 여기가 제일 안전한 곳이야." "그 괴물로부터는 안전할 지 모르겠지만, 장소 자체가 워낙에 위험 한 곳이군." 그리고 아킨은 첸을 가리켰다. "저 망할 자식이--! 빌어도 모자랄 판에!" 첸은 사냥개처럼 험하게 외쳤다. 아킨이 그런 그를 쏘아보았고, 첸 도 매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그런 아킨을 노려보았다. 아킨 쪽이 먼 저 앞으로 성큼 오더니 쏘아붙였다. "그 때는 분명 당신 잘못 이었다!" "그렇다고 가는 길에 밟고 갔던 건 용서 못한다." "피하면 됐잖아." "빌어먹을-! 이 콩알만한 게!" "조용, 조용---! 조용히 하라니깟!" 에나가 히스테리 직전이었다. 현실 판단이 빠르다 못해 얄미울 지경 인 루첼은 말리는 건 벌써 포기하고 고개를 뒤로 푹 젖히고 있었다. 첸이 황소처럼 크르르르릉 거리더니, 루첼의 멱살을 휙 잡아 방안으 로 집어 던졌다. 그리고 달려들려는 에나에게 말했다. "너는 저 살쾡이 좀 데리고 있어." 에나는 아킨을 슬쩍 보고는 호홋 웃었다. "나야 좋지." "애 건드리지 마, 엔." 루첼은 당장에 첸의 어깨 너머로 얼굴을 들이밀며 험악하게 말했고, 에나는 펫 하고는 투덜거렸다. 방에 둘만 남게 되자 마자, 첸은 루첼을 앉히지도 않고 다짜고짜 말 했다. "상--세히, 그리고 솔--직히 설명해. 내가 왜 이러는 지는 충분히 알지?" 루첼은 첸의 말대로, 거의 빼놓지 않고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너무 상세해서 차라리 지겨울 정도로 긴 설명이 끝나자 첸은 얼굴이 시 뻘개지더니, 물고 있던 파이프가 고함에 퉁겨 나갈 정도로 포효했 다. "누구 죽는 꼴보고 싶어---!" "밖에 들리겠다." "들리든 말든! 맙소사, 나더러 그 '전능의 탈로스'로부터 물건을 지 키라고? 그냥 죽어라, 라고 솔직하게 말해라." "그렇게 무시무시한 마법사냐?" "당연하지! 대마법사 컬린의 수제자였던 데다가 양대 길드 마스터 둘을 차례로 곤죽 만들어 놓은 놈과 상대하라, 이 말이냐. 그리고 너, 그걸 모른다니 말이 되냐!" "현역에서 빠진지 한참 됐잖아. 그리고 저기, 그 사람이 모르면 괜 찮지 않을까." "난 마법에는 꽝이라고. 어이, 에나!! 제임, 제임 불러와!" 저 멀리서 알았어~하는 소리가 들렸다. 루첼이 말했다. "어이, 체니. 제임까지 동원해서 합리적으로 거절하려고?" "얼간아, 너는 명색이 정식 학교에서 교육받은 마법사라는 놈이, 그 냥 도제였던 제임보다 생각이 없냐." "제임은.......여튼, 그 사람은 나보다 나이도 많고 경험도 많잖아. 교 육기관 문제가 아니라고 봐." "나이는 먹으면 되고 경험은 쌓으라고 있는 거라고, 예전에 네가 그 러지 않았냐?" "이상한 논리 갖다 붙이지마, 첸." "그건 논리가 아니라 상, 식이다. 탈로스가 어떤 놈인지조차 모르는 맹꽁이 얼간이 마법사가 하는 말은, 도저히 믿지도 납득하지도 않을 테니." 그렇게 말하는 첸의 얼굴은 상당히 괴상했다. 루첼은 아무래도 자신 이 첸의 개무시 상대가 되 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쥰과 어 울리다 보니 나도 갈수록 얼간이가 되가는 군....하지만 루첼이 일부 러 모르는 척 하고 있는 것을 첸이 모를 리 없었다. 사실, 그래서 더 화를 내는 것이다. "난 저 녀석 못 맡는다. 설득해도 소용없고, 설득할 문제도 아냐. 그 리 알아 둬!" "부탁해도?" "내가 중요하냐, 저 꼬마가 중요하냐?" ".......뻔하잖아." 첸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럼 결론도 뻔하겠군." 루첼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좀 맡아 주라." 첸은 주먹을 날렸다. 결국 쓸데없이 오게 된 제임은, 잠시 첸에게 맞은 턱을 주무르는 루 첼과 아직도 상처에서 피가 스며 나오는 아킨을 번갈아 보더니 잠 시 방에서 나갔다. 그리고 조카와 그 친구에게 첸 정도로 매정하지 는 못한 그는, 상자와 술, 하얀 린넨 수건을 들고 돌아왔다. 루첼은 너 알아서 하라고 하며 둥글고 납작한 약통을 던져주고는, 아킨 앞 에 앉았다. 그리고 하얀 린넨 수건에 독한 술을 적시고는 아킨의 상 처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워낙에 급하게 오는 통에 아킨의 상처는 피만 대충 닦아내서 빨갛게 부어오른 그대로였다. 알코올에 닿자 상 처가 불이라도 붙은 듯 화끈거렸지만, 아킨은 얌전히 앉아 그가 하 는 대로 내 버려 두었다. 제임이 그 귀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여기에 정통으로 한 대 맞았군." "네." 그런데 피를 닦던 제임의 눈이 갑자기 날카로워졌다. 그리고 아킨의 어깨를 퍽 치더니, 뭐라 빠르게 중얼거렸다. 아킨은 어깨가 타들어 가는 듯 아파 왔다. "큿-!" 작은 것이 살 속을 움직이며 후벼파는 것 같았다. 그리고 살이 뚫리 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피가 터지며 어깨에서 뭔가 툭 튀 어 나왔다. 작은 구슬 같은 것이었다. 제임은 그것을 한번 흘끔 보더니, 그 옆 의 활대에 앉아 있는 까마귀에게 던져 주었다. 까마귀는 그것을 부 리로 받아 물었다. 제임이 말했다. "집착의 구슬이다. 이 골목의 고약한 마법사 놈들이 쓰는 거지." 아킨은 숨을 멎는 것 같았다. 상처의 고통은 이미 사소한 일이었다. 루첼 역시 창백해졌다. "첸이 받아 줬다면, 또 나를 부르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다. 지금 당장 떠나는 게 좋겠다." 루첼은 땀이 배어 나온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 "미안하게 됐네....." "됐어. 정식 교육받은 녀석들은 저런 사술은 잘 모르고, 나 역시 행 여나 의심하고 찾지 않는 한 찾기 힘들다. 외려, 지금이라도 발견해 서 다행이지....." 제임은 그렇게 말하며 아킨의 상처에 손을 갖다 댔다. 하얀빛이 번 쩍 터지더니, 너덜너덜한 살점이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아킨이 말했다. "치유술은 아닌 것 같은데요." "사제도 아닌 놈이 무슨 치유술. 그저, 좀 붙여 놓는 것 것뿐이다. 간단한 외과 수술이라고나 할까......마법 좀 쓰는 의사 놈들이 쓰는 거야. 하지만 상처가 나은 것은 아니다. 속에서 다 아물 때까지는 좀 걸릴 테니, 터지지 않도록 조심해." "감사합니다." "루치의 친구를 쫓아내는 데에 대한 사과 정도로 받아 둬라. 첸 녀 석, 저렇게 말해도 속으로는 미안해서 안에 들어가서 담배나 뻑뻑 피워대고 있을 거다. 지금은 나갔다지만, 어쨌건 루치는 첸의 목숨 을 세 번이나 구해준 은인이니까." 그리고 뭔가를 떠 올렸는지 이를 뿌득 갈고는 덧붙였다. "물론, 그 망할 자식은 아직 하나도 못 갚았고." 제임이 나가자 아킨은 상처가 얼마나 아픈지 살살 건드려 보며 말 했다. "의외로 파란만장했구나, 너." "....그렇지, 뭐." 루첼은 까마귀의 부리에서 구술을 빼앗았다. 까만 구슬은 아직도 피 가 묻어 있었고, 돌려보자 까만 콩처럼 반사광이 전혀 보이지 않았 다. 또, 제임의 말을 듣고 보니 그 안에서 뭔가 흉측한 것이 숨어서 지켜보는 것만 같아 오싹하기도 했다. 루첼은 그것을 까마귀의 부리에 물려주고는, 새의 까맣고 단단한 이 마에 손을 대고는 나직이 주문을 외웠다. 까마귀가 날개를 퍼덕이더 니, 활짝 열린 창문을 통해 방을 빠져나갔다. "어디로 가져가는 거지?" "기숙사로." "그 마법사가 학교로 직접 오면 어떻게 하려고...그래?" "걱정 마라. 당분간은 베크만 알베스티의 저택에서 지낼 예정이니 까." "연락은 어떻게 하고...?" "그건 네가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어쨌건, 이제는 더 이 상 적당한 장소를 물색해 줄 수 없어. 어쩔 거야?" 아킨은 한숨을 푸욱 내 쉬고는 힘없이 말했다. "처음 생각해 뒀던 곳으로 가 봐야지." "그 쪽은 상황이 이렇다는 것....알고 있어? 첸 보라고. 이름 나오자 마자 은인이고 뭐고 다 때려 치워버리지." "물론 모르지. 하지만....알면 외려 더 좋아할 걸. 그런 걸 대단히 즐 길만한 사람일 것 같으니까." "그 막 나가는 인간이 누구냐." 아킨은 잠시 천장을 보고는, 작게 말했다. "슈마허 쉐플런." "......" 루첼은 잠시, 에나가 타 준 커피에서 스푼을 뽑아 입안에 넣고는 생 각에 잠겼다가 자신 없게 물어 보았다. "흑대장?" 아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루첼은 아킨이 왕자라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와 무척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작가잡설: 다정다정 루첼. -_-;;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12장 *************************************************************** [겨울성의 열쇠] 제54편 도피#3 **************************************************************** 루첼은 '초승달의 결전'-첸 특유의 낭만적으로 유치한 센스에 의해 붙여진, 참으로 유치한 이름이었다-이후로 그렇게 먼 거리를 오고 갔던 적이 없었다. 그리고 아킨역시 일곱 살 때 늪의 성에서 도망쳤던 그날 이후 처음 이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체력상승' 요인이라도 있는데, 지금은 갑 작스레 한바탕 부딪힌 데다가 피를 쏟아내고 놀라기까지 해서 그 반도 안 되는 거리였음에도 배는 지쳐 버렸다. 그렇게 헐떡 대는 둘을 보며, 슈마허는 냉랭하게 말했다. "우선은.....내가 자네들을 별로 반가워하지 않는 다는 건 알아주게 나." 루첼이 답했다. "아주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고맙군." 슈마허는 전쟁터에서 아주 오랫동안 지내왔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 인 남자였기에, 일찍 잠들었다갔다가 금방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러 나 괴롭지 않게 잠에서 깼다 하더라도, 몇 번 만나지도 않은 소년과 청년이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그의 집을 방문한 것은, 넘치도록 무 례한 일이라 불쾌한 얼굴로 그 둘을 맞이해야 했다. "그런데, 자네 얼굴은 좀 익군." "당신 얼굴도 마찬가집니다." 루첼과 슈마허는 금방 서로를 알아보았다. 루첼은 루첼대로, 그 축 제날 오만하게 사람들을 내려다보던 특이한 인상의 슈마허를 분명 히 기억하고 있었으며, 슈마허는 슈마허대로 자신의 특이함을 어려 움 없이 식별해 냈던 호리호리한 붉은 머리 청년에 대해 기억하고 있었다. 루첼이 보기에는 슈마허는 재수없다 싶을 정도로 자신만만하고, 그 런 사람이 거의 그렇듯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사람이었다. 그 점에서 아킨의 판단은 나름대로 정확했다. 이런 사람은, 대체로 위험을 오 히려 도전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길 수 있든 없든 간에, 일단은 부딪혀 보고 칼을 휘두르고 주먹질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슈마허는 반대로 루첼을 소심하다고 무시하던 마라 공과 비슷하 게 보았다. 물론, 그보다야 대범해 보이기는 하지만 슈마허는 이런 '지나치게 차분히 생각하려는 형'을 싫어했다. 가끔은 야수처럼 부딪 혀야 하는 경우도 있는 법이고, 슈마허는 대체로 그렇게 승리해 왔 던 것이다. 그러나 루첼의 이기적으로 보일 정도로 능숙한 자기보호 와 사람을 상대하는 능란한 감각에는 호감이 갔다. 나이는 젊어 보 이나, 이런 저런 일을 겪어본 녀석 같다. 슈마허는 눈으로는 루첼을 보며 아킨에게 물었다. "그래서....나더러 도와 달라는 건가." "네." 뻔뻔할 정도로 태연한 답에, 슈마허는 입 꼬리를 올리며 비웃었다. "아킨토스 암롯사 왕자, 우리는 부탁을 하기보다는 우선 '거래'를 해 야 할 사이 같은데." "좋습니다. 그럼 당신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 시길 바랍니다." 아킨은 그렇게 당당하게 말했고, 슈마허는 외려 그 정공법이 당혹스 러웠다. 솔직히 말하자면 정확하게 '난 뭘 원한다.' 라고 말할 만한 건 없었 다. 또, 그는 아킨을 '위험하다'라는 이유로 내 치기에는 너무도 자 존심이 강했다. 잠시 생각하던 슈마허는 쉽게 나가기로 했다. "공주와 만나게 해 주고, 편이나 들어주면 되." "뭘 어떻게 말씀하실 생각입니까." "그건 왜 묻는 거지?" "쉐플런 경께서 뭘 어떻게 하실 지 알아야 도움이 될만한 말을 해 드릴 것 아닙니까. 또, 당신이 바보같은 말을 하는 데도 제가 좋다 고 말한다면 공주님께서 의심하실 겁니다. 그 분은 제가 그 정도로 얼간이가 아니란 건 알고 계시며, 공주님 역시 바보가 아니니까요." 슈마허는 피곤하다는 얼굴로 손을 저었다. "그건 꼬마 네가 가서 알아서 해. 역효과만 날지, 도움이 될지는 모 르지만.....상관없다. 그냥 끄덕여." 아킨은 슈마허의 눈과 입술 위를 잠깐 떠돌다 간 의미 있는 빛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예전에 휘안토스와 좀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완전히 취소해 버리기로 했다. ......몇 배는 더 능글맞다. 왕의 승하 후 며칠이 지나버렸지만,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는 못했 고, 그렇다고 끝나지도 못했다. 잘 되던 일이 앞으로도 잘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사람은 그 전에 넘치도록 충분하게 그의 눈앞을 스쳐지나갔던 실수와 오판을 잊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러한 오판과 실수는, 그 성격에 따라 그저 사라져 버리는 것도 있지만, 그 결과가 늦게 나오면 늦게 나올수록 무시되기 십상이며 나중에는 엄청나게 부풀어올라 핵을 잠식한다. 그런 것일수록 중요하고 치명적인 결함이었으며, 구조적인 문제점이 기 때문이다. 그레코 공작이 그 상황이었다. 몇 년 간 견고하게 준비했으며, 드디어 기회가 왔다. 멍청한 형에게 그저 늦게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왕위를 '빼앗겼을 때'부터 원했던 것이다. 어르고 얼러 측근을 만들었다. 많은 것을 약속했으 며, 그들은 그 약속된 것을 받기 위해 그레코 공작의 편이 되었다. 그렇게 기다렸고, 드디어 형인 엔리케는 '승하'했고, 왕비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두어 놓았다. 벌써 닷새가 지났으니, 지금쯤 그녀는 벽을 두드려 대며 제발 놓아 달라고, 아들과 만나게 해 달라고 애걸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슬슬 나와 무슨 일이라도 해야 할 왕비파는 아직 은밀 하게 숨죽이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고, 그것은 그들에게 아직 희망이 있기 때문이었다. 왕자나 왕비 다음으로 중요한 무언가를 그레코 공 작이 놓쳤다는 것을 그들은 눈치 빠르게 판단했고, 기다렸다. 또, 그 레코 공작의 오판은 하나 더 있었다. 양 쪽 중 그 어느 편에도 서지 않았던 사람들이 의외로 꽤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증거를 요구했 으며, 외려 공작을 의심하기까지 했다. 물론 그들이라고 왕비를 좋 아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그녀가 낳은 아들과 딸이 중요할 뿐이며, 그들까지 보이지 않는 데 불편해 하고 있을 뿐이다. 일이 이러니, 공작은 그 '무언가'를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중이 었다. 그것은 그의 손에 완전히 넣기 위해, 그래서 판을 자기 쪽으 로 끌어다 놓기 위한 단 하나였다. 그러나 그 하나는, 정말 단 하나 였는데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왕과 왕비의 장녀이자, 실제로는 베르티노보다 계승권이 높았던 켈 브리안, 그러나 계승자 자리를 동생에게 빼앗겨 버리고는 밖으로만 나돌던 공주는 정말 코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나갔던 기 사들의 기억은 믿을만한 것은 못 되었다. 마법이 관여했고, 그 마법 에 당황해 단번에 쓸려 내려가 사냥감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그들 은 애써 변명했지만, 공작은 도무지 신용이 가지 않는 변명으로 들 을 뿐이었다. 공작은 행여나 해서, 공주가 만나러 갔던 아킨토스를 찾아보기도 했지만 그로써도 무시무시한 암롯사 대공왕의 친아들을 이유 없이 데려다가 심문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그 소년이 원하 지 않는 한, 공작은 아킨을 만나볼 수조차 없었다. "자기 어머니가 위급하면 나오지 않을까요?" 걱정하는 그레코 공작에게, 공작 부인이 그렇게 말했다.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저 쪽을 자극할 수 있잖아....곤란해." "하지만 방법이 이것 밖에 없는 건 사실이에요. 여보, 이건 분명히 알아둬요. 왕비와 왕자가 우리 손에 있는 한, 우리는 어디에 서 있 든 유리하다는 것을 말이에요." 공작부인은 조금 미심쩍어 하면서도 흔들리는 남편에게 빠르게 속 살거렸다. "어서 플리나, 그 계집애를 이용해요." 그레코 공작은 그것은 조금 꺼림칙했다. 아내, 그리고 그의 가장 든든한 참모인 그녀의 의중을 모르는 것은 아니며 좋은 방법이기는 하다. 그러나 정작 그렇게 하자니, 치사하 게 느껴지는 것이다. 아무리 8년을 앙숙으로 지내온 브리올테지만, 그래도 형의 아내이자 한 나라의 왕비였다. 제국 연합이나 베넬리 아, 심지어 나프 왕국에서도 후진국 취급받고는 있지만 데칼런 반도 인들은 명예를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니, 하나라도 더 같은 편 을 만들어 둬야 하는 지금 그렇게 뻔히 보일 정도로 왕비의 명예를 짓밟는 것은 공작의 편만 줄이는 역효과를 불러 올 수도 있다. 남편이 머뭇거리자, 공작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신이 어렵다면, 제가하겠어요. 그리고 여차 하면, 모두 플리나에 게 뒤집어씌우면 되요. 그 계집애가 왕비와 공주를 싫어했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고, 정부가 정실과 자식을 모함하는 것은 흔한 일이잖아요. 손해 보는 일은 아니에요." 그제야 그레코 공작의 얼굴이 밝아졌다. "당신에게 맡겨 보겠소." 공작 부인은 남편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단출한 옷으로 갈아입고 는 검은 마차에 타고 저택을 나와 통곡의 다리 너머에 있는 감옥으 로 갔다. 티폴라 여왕 때문에 외국에서 그 고생을 했고, 겨우 귀국하니 왕비 가 나대는 바람에 오랫동안 제대로 행세도 못하고 살아 왔다. 드디 어 기회가 왔는데, 조금 어렵다고 놓칠 수는 없었다.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해 보고 싶은 것이 지금의 공작 부인이었다. 감옥의 간수들은 공작부인이 도착하자 곧바로 시커먼 옷에 검은 가 면을 쓴 차림새로 달려나와 정중히 맞이했다. 말없지만 눈치는 아주 빠른 그들은 공작부인이 말하지 않아도 램프를 높이 치켜들고는 그 녀를 안내했다. 플리나가 갇힌 곳은 감옥의 최하층이었다. 몇 마리의 쥐들과 지네와 징그러운 벌레들이 지나가고, 옷에 떨어지기도 했지만 공작 부인은 의연하게 턱을 들고는 그 좁고 깊은 계단을 내려갔다. 여기 저기서 기괴한 신음소리가 퍼져오고, 악취가 진동했다. "여깁니다." 간수는 문을 열었다. "사슬이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단, 문 가까이 계십시 오." 그렇게 말하며 간수가 램프를 건네주었다. 공작 부인은 그것을 받고 는, 그 남자의 손에 작은 주머니를 건네주었다. 10탈론 금화가 세 개 든 것이었다. 간수의 가면 아래의 입술이 히죽 미소를 그리더니, 재빨리 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공작부인은 옷 매무새를 가다듬고, 가슴도 진정시킨 다음 감방 안 깊숙이 들어갔다. 좁은 감방에는 악취가 진동하고 있었고, 램프로 안을 비추자 그 안 에 거의 반쯤 벗겨져 있는 플리나가 웅크리고 있었다. 금빛 머리카 락에는 온갖 오물이 묻어 있었으며, 찢어진 옷 틈으로 드러난 살은 상처가 곪아 시커멓게 덩어리져 있었다. "플리나, 별 일 없었어?" 아무 답이 없었다. 공작 부인은 램프의 빛을 기울여 그녀를 더 자세 히 들여다보았다. 눈빛에 초점이 없어서 멍청했고, 부르튼 입술은 창백한 데다가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리고 옷은 헤어진 것이 아 니라 누군가 찢어 놓은 것이다. 아랫도리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고, 행여나 해서 램프 불을 아래로 낮추었던 공작 부인은 순간 소름이 끼쳐서 확 당겨 버리고 말았다. "맙소사..." 플리나가 눈길을 들었다. 눈의 초점이 좀 돌아오긴 했으나, 멍청하 긴 매 한가지였다. 공작 부인이 말했다. "아, 안녕. 플리나." 그녀가 여전히 말이 없자, 공작 부인은 재빨리 말했다. "나, 나가고 싶지 않아...?" 그러자 그 눈에 빛이 돌더니, 공작 부인을 알아 본 듯 환하게 웃으 며 기어오려 했다. 공작 부인은 뒤로 후닥닥 물러났고, 사슬이 짧아 플리나는 얼마 움직이지도 못하고 발을 당겨야 했다. 그러다, 결국 울먹거리며 애처롭게 외쳤다. "나가게 해 주세요! 여긴....끔찍해요! 제발...전 아무 잘못도 없어요, 아무 잘못도!" 플리나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그리고 두 손을 모으더니 간절히 말했다. "살려 주세요, 네?" 공작 부인은 램프를 내려놓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눈길을 슬쩍 들어 밖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녀에게 말했다. "방법이 하나 있는데, 그렇게 해 줄래?" "무엇이든지요! 나가게만 해 준다면......얼마든지, 얼마든지 할 수 있 어요!" 공작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이나 내일 모레 즈음 재판이 열릴 거야. 아아, 걱정 마. 너를 재판하는 게 아니야. 너는 피고가 아니라 참고인이 되는 거야.....잘 만 되면, 여기서 나가는 것은 물론이요 앞으로도 편하게 살게 해 주 겠어." "저, 그럼......바, 방부터 옮겨 주시면 안 될까요?" "물론 네가 내 말만 잘 듣는 다면 당장이라도 옮겨 줄게." 공작 부인은 웃으며, 애써 플리나에게서 눈길을 돌려보려 했다. 머 리도 나쁘고 행동 거지 역시 천박한 여자였지만, 지금 그 꼴은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처량했다. 같은 여자이자 귀부인인 공작 부인이 보기에는 너무도 험한 꼴이었다. "그 공주와 공주의 어미인 왕비만 처리하면, 내 남편이 왕이 될 수 있어. 그리고 그렇게 되면 가장 먼저 너를 도와주겠어. 우릴 믿지, 응?" 서열체계에 대해 잘 모르는 플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그럼 참고인으로 가면, 무조건 고개를 끄덕여. 알겠지? 알아 듣기 힘든 어려운 말도 많겠지만, 날 믿고.....무조건 맞다고 답하기 만 해." "네." 공작 부인은 웃었다. "착한 플리나, 좋아....난 이만 나가 볼게. 그리고 당장에 네 방을 옮 기라고 할 테니, 오늘밤은 푹 쉬어라. 알겠지?" 플리나의 얼굴도 환해졌다. 공작 부인은 램프를 옆에다 놓았다. "이건 놓고 갈게. 어두우면 너도 무섭잖니." "감사합니다, 공작 부인 님! 너무 감사해요! 사실, 얼마나 끔찍했는 데요......" "그럼. 하지만 오늘로 끝날 테니 걱정 마. 자, 난 이만 나갈게." "네. 안녕히 가세요!" 공작 부인은 문을 크게 두드렸다. 저 쪽에서 저벅 저벅 무거운 발소 리가 들리더니 문이 끼익 열렸다. 공작 부인은 플리나에게 손을 흔 들어 주고는 밖으로 빠져 나왔다. 간수가 문을 닫고 자물쇠를 채우 자, 공작 부인이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저 애의 방을 옮겨 주도록 해. 내 남편인 그레코 공작을 대신해서 말하는 것이니, 당장 해 주도록." "알겠습니다." 공작 부인은 목소리를 더 높였다. "거칠게 대하지 말고, 아주 정중히 대우하도록. 알겠어?" "물론입니다, 마님." 아마 저 감옥 안에서 플리나는 귀를 곤두세운 채 자신의 말을 듣고 있을 것이다. 공작 부인은 가만히 웃고는 치마를 당겨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저 멍청한 계집애는 자기 자신에게 자기가 사형선고를 하면서도 모 를 테지, 아마. 그런데 미소 짓는 공작 부인 뒤로 작은 발자국 소리가 따라오기 시 작했다. 덩치 큰 간수 발걸음 같지는 않았고, 여자나 더 작은 아이 발소리 같았다. 공작 부인은 뒤를 돌아보았다. 감옥의 벽 옆에 켜진 램프 불은 어둠 속으로 녹아들고 있었고, 저 지하 감옥 깊은 곳에서 작은 발 두 개가 튀어나온 것이 보였다. 맨 발이었고, 아이처럼 작 고 얇았다. "누구지?" 그러자 어둠 속에서 불빛 두 개 같은 연푸른 눈동자가 스며 나왔다. 공작 부인은 비명을 지를 뻔 했고, 순간 그것이 안에서 풀쩍 뛰어 올랐다. 공작 부인은 주저앉으며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꺄악---!" 저 아래에서 간수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공작 부인 님---!" 간수가 달려왔다. 그리고 공작 부인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부들부들 떠는 그녀 밖에 없었다. 헛것을 봤나, 하지만 그것이 튀어나올 때의 느낌은 너무나 생생했고 귓전을 스치 는 바람마저도 뚜렷하다.....그러다가, 공작 부인은 바로 앞의 벽에 얼룩 같은 것이 묻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새빨간 색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것이 지글지글 타오르더니 작은 글자를 만들어 냈 다. 한 단어, 처음에는 '그녀'라는 말이 적히더니 사라지고, 다시 그 다 음 단어가 떠오르고, 그러다가는 그것도 사라지더니 다음 또 다른 단어가 스며 나온다.... 공작 부인은 그 단어들을 차례차례 되 내였다. "그녀를 내 놔....." 순간, 벽 위로 큰 글자가 피가 튀듯 확 솟아올랐다. -죽여 버린다. *********************************************************** 작가잡설: 공포물이 되버렸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12장 ************************************************************** [겨울성의 열쇠] 제55편 도피#4 ************************************************************** 루첼은 기숙사 1층 큰 창문의 창턱에 앉아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었 다. 초조함을 달래기 위해 벌써 세 개째 담배를 피우고 있는 중이었고, 그것마저도 거의 다 태워서 또 한 개비를 꺼냈다. 휴교령이 내려졌 기 망정이지, 평소에 그 꼴로 기숙사에 앉아 있었다간 당장에 퇴학 감이었다. 벌써 학생들이 모두 떠나버린 기숙사는 아주 조용하고, 등 하나 켜 져 있지 않아 컴컴했다. 그리고 그렇게 조용하게 깊어 가는 밤은 작 은 소리에도 쭈뼛 곤두서게 했다. 소쩍새 우는소리가 짧게 울룩 울 룩--들려왔다. 바람 헤치는 소리가 들리고, 작고 긴 것 하나가 숲에 서 눈을 반짝이며 튀어나왔다가는 안으로 쑥 들어갔다. 루첼은 손목을 움직였다. 손끝에 있던 구슬이 튀어 올랐다가 떨어졌다. 루첼은 그것을 받아 들고 손끝으로 굴려보았다. 구슬은 작은 조약돌만큼이나 조잡스런 구면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작은 글자가 하얗게 새겨 져 있었고, 그 중간 중간에는 아직 아킨의 피가 굳은 채 남아 있어 거무튀튀했다. 그 때 바스락--무언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작은 짐 승이나 바람 소리는 아니었다. 루첼은 훤히 열린 창 밖을 바라보다가, 그 작은 구슬을 밖으로 집어 던졌다. 까맣고 작은 것이 어둠 속으로 날아가더니, 풀밭에 툭 떨어 졌다. 루첼은 창턱을 발로 짚고는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날카로운 눈 에, 어둠 속에 숨어있는 무엇이 들어왔다. 루첼은 발을 퉁겨 정원으 로 몸을 날렸다. 그러자, 다듬지 않아 길게 자란 잔디가 바람을 맞 듯 차례차례 허리를 숙였다. 그 바람은 루첼에게 가까이 오자 더욱 거세어지더니, 사람 키 정도 남자 풀들이 날카롭게 갑자기 푹푹 베 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풀 비린내가 풍겨오고, 흙도 튀어 올랐다. 루첼은 가볍게 뒤로 물러나며 짧게 외쳤다. "프로텐...!" 루첼의 앞으로, 부채꼴 모양으로 풀들이 누웠다. 그것이 풀들을 모 조리 으깨어 버리면서 앞으로 뻗어 나가더니, 루첼 쪽으로 흘러오던 흐름과 부닥쳤다. 쿠르르르--! 속이 비었지만 껍데기가 두터운 무언 가 둘이 정면으로 부딪힌 듯한 엄청난 소리였다. 힘이 깨어지며, 갈 퀴에 패이듯 잔디밭이 파 헤쳐졌다. 그리고 루첼은 다시 작게 중얼거렸다. "위로드--" 바람이 일었다. 그리고 루첼은 반대편 손에 움켜쥐고 있던 주머니의 입구를 풀었다. 까만 가루가 그 바람을 따라 퍼지자, 로첼은 인을 따라 손을 움직이며 속삭이듯 주문을 읊었다. "파윈 안-데 콘테르." 콰르르--공중에서 불길이 일었다. 용이 불을 뿜듯 루첼을 중심으로 부채꼴로 확 펼쳐졌고, 주변이 한번 크게 번쩍이며 금빛으로 물들었 다. 그 빛 속에 작은 인간의 형상이 언뜻 보였다. 그는 이마를 감싸 쥐고 웅크리고 있다가, 갑자기 고개를 팍 쳐들더니 루첼을 무시무시 하게 노려보았다. 예기치 않게 받게된 방해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담력이 장난 이 아닌 루첼이지만, 소름이 죽 끼쳐왔다. 그 추한 입술이 치솟는 불길의 그림자 속에서 기괴하게 비틀렸다. "위로드 오 데 프로텐.....!" 불길의 방향이 갑자기 바뀌었다. 역풍이 거세게 불기 시작하며, 열 기는 오히려 루첼을 향해 쏟아졌다. 루첼은 열기를 막기 위해 다른 주문을 외웠다. "위테로드 오 데....." 그러자, 불길 너머에서 비명 지르듯 쉰 목소리가 터졌다. "이 건방진 자식, 당장 찢어 죽어버리겠어--!" "--!" 쿵쿵쿵쿵--! 위에서 육중한 풀밭을 쿵쿵 내리찍는 것 같았다. 흙이 패이고 풀이 튀어 올랐다. 그것이 루첼의 발 옆을 크게 내리쳤고, 루첼은 그 거 대한 힘에 떠밀려 미끄러졌다. 어깨 바로 옆으로 뭐가 휙 날아오는 가 싶더니 쿠르르--크게 패여 나갔다. 맙소사, 이것에 한 대 맞으면 정말 저 말대로 죽어나가겠군! 루첼은 몸을 수습해 일으켰다. 그러자, 채 일어나기도 전에 작고 얇은 팔뚝 이 느닷없이 나타나 루첼의 멱살을 낚아채더니 그를 내 동댕이쳤다. "큿-!" 한번 바닥에 호되게 박고는, 팔을 짚고 몸을 일으킨 루첼은 숨을 멈 추었다. 이리도 추하게 생긴 사람은 정말 처음 보았다. 얇고 긴 팔에, 다리 는 짧고 뭉툭하고 배는 거미처럼 둥글고 불룩했다. 머리는 못생긴 감자처럼 울퉁불퉁 했고 커다란 눈동자는 개구리처럼 툭 튀어나와 끔뻑이고 있었다. 사람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늙은 땅도깨비같아 보 였다. 그가 말했다. "꼬맹이는 어디 갔지?" 루첼은 그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퍽--! 꼭 그대로 찌그러질 듯 물 컹했다. 그 자그마한 몸이 저 멀리 나가떨어지자, 루첼은 재빨리 몸 을 일으켰다. 그러자 탈로스가 몸을 퉁기며 발딱 일어났다. 개구리 가 튀어 오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기괴하게 쉰 목소리로 고함을 내 질렀다. "꼬마는 어디 갔냐고---!" 루첼이 숨만 몰아쉴 뿐 아무 말이 없으니, 탈로스는 앞으로 저벅 저 벅 걸어왔다. 마나의 움직임이 폭풍의 전조처럼 서서히 몸을 뒤틀었 고, 그것은 첫 움직임이 뿜어내는 힘에만도 짓눌려 죽어 버릴 듯 거 대하다. 루첼은 일이 빌어먹게 돌아간다고 생각하며 턱의 땀을 훔쳤다. 이건 너무 터무니없이 거대해....끔찍할 정도로! 그런데 갑자기 탈로스가 멈추었다. 어깨가 거칠게 씨근거리기 시작 하더니, 이를 드러내며 크게 으르렁거렸다. 그가 딛고 있는 땅 주면 으로 둥근 원이 쿵쿵 새겨지더니 위로 쿳쿳 치솟았다. 탈로스가 몸 을 웅크리더니 날카롭고 불규칙한 이빨이 솟은 입을 크게 벌리며 고함을 내 질렀다. "꺼져--!" 루첼의 가슴 쪽으로 강한 힘이 파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 힘은 루첼 을 거침없이 호되게 밀쳐냈고, 루첼은 워낙에 갑작스럽게 당하는 일 이라 그대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그래도 몸이 가볍고 재빠른 루첼 은 금방 일어났다. 그리고 그대로 멈추어, 숨을 가만히 죽이며 놀라운 그것을 바라보았 다. 세상은 온통 우유 빛 뿌연 연막에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조용한 바람을 맞이하는 얇은 옷자락처럼 유유히 움직였지만, 그 조용한 움 직임이 품은 것은 부드러움이 아니었다. 느릿느릿 움직이고는 있었 으나, 초여름 밤의 온화한 열기를 식히고 싸늘하게 가라앉혀 가고 있었다. 그 움직임의 중앙에는 탈로스가 있었다. 어깨를 거칠게 씨근거리고, 눈은 이글이글 더욱 험악하게 타올랐다. 그의 손에서는 연신 마나가 일어났다 가라앉고 다시 치솟으려다 가라앉고 있었다. 그렇다. 루첼은 깨달았다. 지금 일어나는 이것은 그의 마법이 아닌 것이다. 이 고요, 거대한 움직임 직전의 숨죽임 같은 엄숙한 고요는 그의 마법이 아닌 것이다. 갑자기 흐름이 바뀌었다. 하얀 색은 더욱 하얗게 변하고, 주변은 더 욱 추워졌다. 잔디와 나뭇잎 끄트머리가 작은 수정이 맺힌 듯 하얗 게 되더니 더 크게 얼어붙어 갔다. 순간 탈로스의 손에서 붉은 기운이 솟구쳤다. 불꽃처럼 치솟은 그것 이, 으르렁거리며 터지려 했다. 그런데 하얀 기운이 갑자기 날카로 워졌다. 크르르르릉, 하는 큰 짐승의 으르렁거림 같기도 하고, 어쩌 면 거센 바람 소리 같기도 한 소리가 나직이 울렸다. 루첼은 벽에 등을 밀며 몸을 바짝 붙였다. 무언가 엄청난 것이 나오 려 한다, 아주 엄청난 것이.....! "오거스트---!" 마침내 탈로스가 포효했다. 그의 손에서 타오르던 불꽃이 새가 날개 를 피듯 양옆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러자 그를 둘러싼 하얀 흐름이 진해지고, 얼어붙더니, 단단해졌다. 거대하고 하얀 수사자 같은 것이 언뜻 보이는 가 싶더니, 그것들이 탈로스의 불꽃을 향해 이를 드러 내며 뛰어 들었다. 커르르르릉--! 천둥이 치고, 폭풍이 몰아치고, 눈보라가 울부짖는 듯한 소리였다. 루첼은 얼굴을 가렸다. 차가운 냉기가 쏟아져 들어오고, 맨 살이 얼어붙을 듯 한 매서운 추 위가 루첼을 덮쳤다. 세상은 온통 차갑고 하얀 눈보라로 가득 차 올 랐고, 그것들은 온화한 초여름의 밤 위로 몰아쳤다. 그리고 그것들 은 파도가 쓸려나가듯 휘몰아쳐 밀려왔다가는 물러났다. 순식간에 세상이 뒤집히고 돌아오기 시작하자, 열기가 몸을 확 덮치 며 땀이 솟아 나왔다. 루첼은 숨을 꾹 짓누르며 무릎을 꿇었다. 그 런데 갑자기 그의 뺨에 불이 번쩍 했다. 철썩--! 루첼은 찢어지는 입술에서 피를 닦아 내고는 고개를 들었다. 코앞에 키 큰 여자가 그를 노려보며 서 있었다. "롤레인 교수님?" 그러자 그녀가 그의 멱살을 잡았다. "지금 무슨 짓 한 거냐, 너." 루첼은 그 팔에 흔들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 것도 없었다. 방금 전의 매서운 추위에 얼어붙었다가 녹아든 듯, 잔디는 흠뻑 젖 어 있었고 나뭇잎들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졌다. 뜨거운 열기에 중앙 은 까맣게 그슬려 있었으며, 루첼이 누워 있던 그곳 주변은 커다란 송곳으로 찔러 넣은 듯 날카롭게 패여 있었다. 루첼이 물었다. "그 사람...어디로 갔죠?" "네가 알 바 아냐. 그리고 루첼 그란셔스, 무슨 생각으로 탈로스를 이곳으로 끌어들인 거지?" 롤레인의 눈빛은 방금 전에 그녀가 일으켰던 눈보라와 눈의 폭마들 만큼이나 무시무시했다. 그 까만 눈이 얼어붙은 듯 매섭게 루첼을 노려보고 있었다. ".....제가 아니라 아킨을 찾아 온 겁니다." 그렇게 말하다가 루첼은 멀지 않은 곳에 떨어져 있는 까만 집착의 구슬을 찾아내 집어 올렸다. "이걸로 찾아 온 거죠." 롤레인의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그것을 낚아채 눈앞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이내 으스러뜨려 가루로 만들었다. 루첼은 저 손끝으로 한방 맞지 않기만을 바랬다. "아킨은 어디 있지?" "여기에는 없죠." "그래서 넌 마음놓고 이걸 이곳으로 가지고 와서 탈로스를 유인한 거고." "....그렇습니다." "죽고 싶으면 내가 죽여줄까? 우선, 내가 죽여도 아무 죄가 아니라 는 각서 쓰고 말이야." "얼마나 위험한 지, 방금 전에 충분히 알았습니다......" 물론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루첼은 단지 그 탈로스 를 두 눈으로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탈로스가 아무 상관없 는 사람을 마구 공격해댈 정도로 괴팍하고 사나운 사람이란 것은 전혀 몰랐다. "교수님은 어떻게 되신 거죠?" 그 말에 롤레인이 루첼을 쏘아보았다. "학교에 있었던 것 뿐이야." 루첼은 다시 스며 나온 피를 닦아냈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추어 조 심스럽게 물었다. "왜 아킨을 노리는 거죠?" "내 제자니까." 루첼은 귀를 가리켰다. "그리고 아킨이 가진 그것과도 연관 있지요?" "물론. 하지만 루첼 그란셔스 군, 더 이상은 묻지 마. 이런 위험한 짓을 자청하지도 말고." 그 어투가 워낙에 싸늘해 루첼은 약간은 주눅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잊지 않아서 다행이군."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롤레인은 쏘아붙이듯 엄격하게 말했다. "어서 학교나 떠나도록 해." 네, 하고 답하고는 루첼은 고개를 끄덕였다. 롤레인이 먼저 교수관 쪽으로 가기 위해 돌아서는데, 루첼은 넌지시 말했다. "아킨이 걸린 저주.....'숲'과 '달'이 함께 연관된 것....아닙니까?" "어떻게 알고 있지?" "녀석 집에 놀러갔던 적이 있어요. 어떤 것일 지 대충 짐작은 했지 만, 확인하지는 않았습니다." 롤레인이 돌아보는 듯 옷자락 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녀 의 눈빛이 어떨지 왠지 두려워, 루첼은 잠자코 있었다. "네 짐작이 맞아." 루첼은 힘없이 웃었다. "가엾군요, 녀석도." *********************************************************** 작가잡설: 맙소사, 너무도 다정한 루첼! 자자, 폭탑의 모 군! 본좀 받아, 본좀! 이것이 마눌의 본....아차, 포지션이...;;;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12장 ************************************************************** [겨울성의 열쇠] 제56편 도피#5 ************************************************************** 아킨은 무릎 끝에서 바스러지는 오렌지 빛 햇살을 보며 생각했다. 지금 다가오는 위험은 여태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종류의 것이며, 그 크기 역시 엄청나다는 것을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또한, 자칫 잘못하면 몇 년 전에 겨우 끝낸 공포와 불안과 다시 만나게 될 것 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물론 롤레인이 모든 것을 말한 것은 아니다. 그녀는 아킨이 겨우 안 심할 정도만을 말했을 뿐이며, 나머지는 비밀로 지켜 혼자 힘으로 책임지려 하는 것이다. 결국, 그런 그녀를 위해 아킨이 할 일은 자 켄이 도착하는 대로 서둘러 암롯사로 떠나는 것뿐이다... 그러나 도망친다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암롯사로 돌아가자마 자 저주가 다시 실현된다면... 끔찍했다. 머리 속으로 두 손을 밀어 넣어 꽉 짓누르며 떨리는 몸과 터져 오 르는 한숨을 억누르다가, 결국 불안에 움츠리고 말았다. 그렇게 되 면, 이제야 말로 다시는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이 아들을 다시 떡갈나무 숲에 있는 회색 성의 철창 안에 가둘 것이다. 자켄과 메리엔은 옆에 머물러 줄 테지만, 겨우 보이는 듯 했던 희망 도, 미래도 다 끝장 나는 것이다. 그저 숨쉬는 것 밖에는 아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심지어 아킨은 지금 이 곳에서도 마음놓고 있을 수도 없는 처지였 다. 언제 어떻게 튀어나올지 모르는 그 탈로스 고르노바의, 이유도 모르고 이해도 할 수 없는 그 집착에서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 우 선 이다. 이제 겨우 찾은 그 귀중한 순간을 단숨에 망그러뜨린 그에 대해, 분노보다는 남은 것도 빼앗길 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그래, 자켄이 올 때까지, 그를 위해 무엇이든 해 줄 절대적인 아군 이며 가족인 자켄을 만날 때까지만 버텨 보자. 나머지는 그 다음에, 나머지 걱정은 그 다음에 하고 그 다음에 떨어보자.... "뭘 하고 있는 거지?" 슈마허였다. 그는 벌써 외출 채비를 마친 채 아킨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닙니다. 출발하죠." 아킨은 앉아있던 창턱에서 몸을 퉁겨 내려왔다. "쉐플런 경, 혹시 당신도 감시당하고 있습니까." "나는 언제나 감시당하고 있어. 워낙에 팬들이 많아야지." 그리고 밖을 슬쩍 가리켰다. "지난번에는 어떻게 오셨던 겁니까?" "흑대장이란 별명은 괜히 얻은 줄 아나, 도련님. 원한 다면 얼마든 지 따돌릴 수 있다. 특히 세르네긴은 그 방면에는 아주 귀재지." 아킨이 말했다. "그렇다면....오늘 하루 정도는 따돌리지 말아 주십시오." 슈마허가 잠시 아킨을 빤히 바라보더니 성큼 다가왔다. 아킨은 눈길을 슬쩍 돌려버렸다. "누구를 위해서 그리 하라는 말이냐." "저를 위해서입니다. 아무래도...금방 들킬 것 같네요." "누구에게?" "그 마법사 말입니다." 아킨은 솔직히 나가기로 했다. 서툴게 이것저것 핑계 대다가 비웃음 사는 것보다는, 저 쪽이 어이없을 정도로 맞서는 편이 낫다. 슈마허는 남자로써 가장 자신만만할 나이이기는 했으나, 아예 자만 하여 상대를 우습게 알다가 당할 정도로 어리석은 남자는 결코 아 니었다. 그래서 '내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 라는 말은 하지 않았 다. 또, 아킨이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노리는 것이 무엇인 지도 짐작했다. 아킨의 처지를 고려 해 본다면 그 방법이 좋기는 했다. '아킨 혼자 만'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아무리 공작이라도, 아킨에게 손 댈 수는 없고, 설사 끌고 간다 해도 당장에 놔주어야 하는 위험천만한 녀석 이었다. 아킨이 걱정하는 것은 그 공작 따위가 아니라 바로 탈로스 였고, 그를 따돌리기 위해서는 공작 쪽에서 우르르 풀어놓을 사람들 을 끌고 다니는 편이 나은 것이다. 어린 녀석이 정말.... 슈마허가 말했다. "너는 안전하게 될 테지만 공주는 위험해 진다." "최선을 다해 지켜 드리면 됩니다." "그럼, 나는 어쩌라고? 나는 그저 공주와 만날 예정일뿐이고, 어떤 이야기가 나올 지 모른다. 즉, 내가 그녀의 편이 될지 아니면 공작 편으로 돌아설지, 그것마저도 정하지 않았어." "어쨌든, 공주님은 그곳에 오래 계실 수는 없습니다. 일이 어떻든 간에 나오기는 하셔야 합니다." "이봐, 그렇게 되면....내가 억울해 지잖아." 만약 슈마허가 공주를 찾아가고, 그날 공주가 아킨을 따라 모습을 드러낸다면 공작 쪽에서는 당장에 달려들어 공주를 찾아가려 할 것 이다. 슈마허는 그것을 원치 않았고, 아킨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는 나서야 하고, 그가 나서면 세르네긴까지 나서야 한다. 그 싸움 이 끝나면 슈마허는 선택의 여지없이 바로 공주 편으로 돌아서야 한다. 그러자 아킨이 웃으며 말했다. "선배님이 당신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달라 하셨으니, 그분 부탁 은 확실히 들어드리는 셈이군요." "아킨토스-" "지금의 저에게는, 죄송하지만 제 안전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나 공주님과 쉐플런 경, 두 분께도 좋은 결과로 끝나기를 바랍니다." "결국 넌 조력자가 아닌 공생자로군." 슈마허는 비아냥거리듯 냉랭하게 말했지만 아킨은 별 미안한 것 없 다는 듯 차분하게 답했다. "전 켈브리안 공주와 처음부터 대등한 관계였습니다. 일방적인 도움 을 주지도 받지도 않았고......사실,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한 것입니 다." ".........." 슈마허는 맞는 말도 얄밉게 해서는 안 된다고 따끔하게 충고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슈마허의 명령에, 세르네긴은 별 반박 없이 그저 아킨을 한번 흘끔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나름대로의 불만이었다. 그러나 조용한 성품 답게, 절대 대 놓고 반대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크게 위험한 일이라 고도, 또 곤란한 일이 생길 거라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단지 그는 슈마허가 아킨에게 끌려 다니는 듯한 모양새가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다. 말들이 준비되자, 그들은 곧장 출발했다. 해가 저물어, 햇빛은 진한 노란색으로 익어가며 저녁으로 향하고 있었으며, 왕의 승하 후라 거 리는 아직도 아주 조용했다. 그리고 그 고요 속에서 아킨은 금방 시 선을 느꼈다. 골목길에 하나, 둘, 셋.....그들이 손짓을 하는 것이 보 였다. 그리고 안으로 숨어들더니, 그 앞으로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슈마허가 말을 바짝 붙이며 말했다. "턱 들고 태연하게 가." "......" "눈치 채고도 가만히 있다면 저 쪽에서 함정이라 생각한다. 달라붙 을 걸 각오는 하고 있다만, 감당할 수 있을 정도만 달라붙는 게 좋 지 않겠나."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아킨은 세르네긴을 보았다. 세르네긴은 느슨하게 고 삐를 쥐고 있었고, 습기 없는 눈도 길의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을 뿐 이었다. 그러나 그 눈동자가 아주 짧게 어딘가에 내리 박혔다가 앞 으로 향하고, 다시 다른 방향을 가늠하고는 돌아왔다. 사람 수를 세 고 있는 것이다. 슈마허가 작게 말했다. "저 대로 하면 되는 거다." "차라리 그냥 앞만 보고 가는 게 좋겠군요. 저 정도의 기술은 없으 니까." "좋아." 슈마허가 웃었다. 좀 더 걷고 나서, 아킨은 가슴 위로 손을 가져갔다. 작은 손짓을 거 듭하고는, 옆의 슈마허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인느 쉐드--" "뭘..." 그러나 큰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얇은 산들바람처럼 간질간질 한 느낌이 아킨을 시작으로 하여 슈마허를 훑었고, 뒤의 세르네긴 에게까지 뻗어갔다. 흠칫한 세르네긴이 칼자루에 손을 가져갔다. 그들 뒤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점점 옅어지기 시작하더니 완전히 사라졌다. 그늘 속에 숨어 있던 남자 하나가 후닥닥 튀어 나왔다. 그리고 그를 따라 몇 명이 더 튀어나오더니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 기 시작했다. "뭘 한 거냐." 슈마허가 말하자, 아킨은 입가에 손을 가져갔다. "우선은 빠져나가죠." "하지만 거의 다 와서...." 아킨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는 '붉은 망아지'가 있는 골목길로 말머 리를 틀었다. 아킨의 말은 차분히 골목길을 지나갔고, 슈마허는 그 뒤를 따르며 한번 뒤를 돌아보았다. 그를 추격하던 사내들이 그 길 을 뒤지고 있었지만 바로 앞에 일행을 두고서도 허둥대고 있었다. "뭐냐?" "그림자 지우기. 잠깐이지만 우리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한 것 뿐입니 다." "눈에 뜨이게 하고 싶어서 안달 난 게 아니었나?" "공주님을 그곳에 숨게 도와 준 것은 제 친구입니다. 그의 친구들에 게 폐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아킨은 말에서 내렸다. 간판이 주욱 늘어진 뒷골목이 나온 것이다. 아직 몸을 웅크린 채 자고 있는 부랑객들이 곳곳에 눈 에 뜨였고, 그 수가 지난 번 보다 좀 늘어난 듯 했다. 햇빛이 좁게 틈이진 곳에서 솟아 나와 반대편 벽에 길고 노란 띠를 그렸다. "같이 들어가시겠습니까." "물론." 아킨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붉은 망아지의 문을 밀었다. 오후라 아직 한적했다. 그리고 마스터인 쿤이 게으른 얼굴로 앉아 있더니 시큰둥 하게 말했다. "또 시종님 너로군. 어젠 왜 안 왔지?" "일이 생겼습니다. 혹시 찾아온 사람이라도 있었습니까." 쿤의 눈이 아킨 뒤의 슈마허에게 박혔다. 슈마허가 앞으로 나서려 하자 아킨이 막아 세웠다.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슈마허는 쉽게 포기했다. "....그러지." 쿤이 말했다. "망 봐줄까?" "있습니다." 밖의 세르네긴을 말한 것이다. 쿤 역시 문 밖에 서 있는 세르네긴을 창문을 통해 확인했다. 그가 돌아보자, 역시나 그 눈빛이 영 마음에 안 드는지 쿤은 눈을 찌푸리고는 아킨에게 오라고 손짓했다. 아킨이 따라 나서자, 슈마허는 태평하게 의자에 앉았다. 구석에서 마루를 닦던 소녀가 그런 슈마허를 흘끔 보더니 곧 고개를 떨구며 제 할 일을 계속했다. 아킨은 쿤을 따라 좁은 계단을 지났다. 여러 개의 좁은 방문이 다닥 다닥 붙은 복도를 지났고, 간혹 이 가게에서 일하는 남자들이 곱상 한 아킨에게 휘파람을 불었다. 쿤이 험악하게 욕을 퍼부었고, 그들 은 잽싸게 안으로 사라졌다. "그 골치 아픈 짐을 가지러 온 건가." "맞습니다. 오늘로 끝납니다." "혹시, 내 가게가 들킬 일은 없어?" "그 전에 따돌리고 왔습니다. 큰 길 저 편에서 헤매고 있을 테니, 안심하세요." 쿤이 안심한 듯 얼굴이 편해졌다. 그리고 맨 마지막 방에 이르자 문 을 두드렸다. "아가씨, 당신 애인 왔어." 아킨이 놀라 쿨럭거렸다. 문이 열렸고, 나온 것은 켈브리안이 아닌 라키 경이었다. 그녀는 아킨을 보더니 대번에 허리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왕자." 이번에는 쿤이 입을 딱 벌렸다. 아킨은 라키 경에게 말했다. "잠깐 나가 주십시오, 경." "네?" "공주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으니까요." 라키 경은 선선히 물러났다. 아킨이 안으로 들어가니, 켈브리안은 침대에 앉아 아킨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림새는 완전히 달랐다. 라키 경이 챙겨다 준 듯, 기사 같 은 편한 차림새였다. 갑옷은 입고 있지 않았으나, 허리에는 장검과 단검이 채워져 있었다. "오늘 떠나 실 수 있습니까." "무슨 일이라도 있어?" "....네. 또, 밖에서 슈마허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같이 떠나십시오." 켈브리안은 잠시, 멍하니 아킨을 바라보더니 물었다. "어디로 가라는 거야?" 아킨은 빠르게 답했다. "궁으로요." *********************************************************** 작가잡설: .....동생이 옆에서 맞춤법 훈수를 놓는 군요. -_- 의대생 주제에 맞춤법을 논하다니!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12장 *************************************************************** [겨울성의 열쇠] 제57편 도피#6 **************************************************************** 켈브리안은 아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두 개의 연푸른 눈 동자는 설명 해 봐, 하고 말하고 있었다. 아킨은 문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쨌든 슈마허가 설명해 드릴 겁니다." 켈브리안이 손을 내밀었다. 아킨은 그 손을 잡아 그녀를 일으켜 세 워 주었고, 켈브리안은 땋아 내린 금발 머리를 어깨 뒤로 넘기고는 말했다. "어머님과 관련된 일이니?" "자세히는 잘 모릅니다. 어쨌든, 가서 물어보시고......같이 떠나세요. 아무리 그가 탐탁지 않다 하더라도, 이번만큼은 믿으셔야 합니다." "너란 녀석은 참......" 그리고는 아킨을 빤히 바라보았다. "선배님?" "의외로 상당히 교활한 구석이 있다니까..... 물론 그 점도 귀엽긴 하 지만, 내게는 되도록 솔직히 굴도록 해." 아킨이 피식 웃었다. "그 정도로 당신이 좋아지면요." 켈브리안은 눈을 찡긋 하고는 살짝 물었다. "지금은 어떤데?" "조금만 노력하시면 되요." 기분이 좋아진 켈브리안은 아킨의 볼에 키스해 주고는 방을 나섰다. 아킨은 볼을 슬쩍 훔치고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다시 좁은 복도와 계단을 올라 바의 홀로 나오자, 슈마허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켈브리안은 앞으로 나가, 아무 의자나 빼서는 슈마허를 마주보고 앉 았다. 불이 탁 죽은 난로 가였다. 날은 조금 후덥지근했고, 멀리서 갈매기 우는소리도 들려왔다. 그러나 낮의 환락가는 허허로운 황야 처럼 조용했다. 잠시 말이 없었다. 켈브리안은 의자 팔걸이에 손을 얹고는 턱을 괴 었고, 슈마허는 그저 팔짱 딱 끼고 의자에 몸을 깊이 기대고 있었을 뿐이다. 워낙에 키가 큰 그여서, 작은 의자는 아주 불편해 보였다. 아킨은 그런 둘을 보다가, 뭐하고 있나 싶어서 밖에 있는 세르네긴 을 흘끔 보았다. 세르네긴의 옆모습이 보였다. 그의 눈길은 골목길 입구를 향하고 있었으나, 별다른 위험은 없는 듯 조용히 서 있을 뿐 이었다. 아킨은 다시 두 사람 쪽을 돌아보았고, 켈브리안은 그와 눈 길과 마주치자마자 대뜸 말했다. "왜 제가 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거죠?" 슈마허의 미소가 뚝 멈추었다. 그리고 쏘아보듯 아킨을 바라보았고, 아킨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저 녀석이.." 슈마허는 기가 막혀서 탁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켈브리안이 의아해서는 되물었다. "쉐플런 경?" "네, 말씀드리죠. 왕비, 그러니까 당신 어머니가 위험합니다. 어제 공작부인이 플리나....즉, 당신의 아버님이신 왕께서 돌아가셨을 때 마지막으로 같이 있던 그 여자를 찾아갔습니다. 어찌 할지는 정확히 는 모르지만, 오늘 저녁에 공작은 국왕대행의 권리로 회의를 소집했 습니다. 참고인으로 그 여자가 참석할 것입니다." "그건 어떻게 알고 계시죠?" "다 귀가 있죠. 또, 제가 공작에게 완전히 찍힌 몸이지 않습니까." 켈브리안 공주가 웃었다. "아버님 때문이 아니고요?" "에크에서 신세진 것은, 이곳에 공짜로 오는 것으로 다 갚은 것으로 압니다. 이건 고용인으로써, 고용주의 권리를 물려받은 분께 드리는 당연한 의무라 생각하면 되고." "진작에 그렇게 말씀하시지." "진작에 그렇게 말하면 아예 믿지도 않았을 것 아니오. 어머나, 당 신이 그런 사람이었다니, 믿어지지 않아요. 하고." 켈브리안이 고개까지 푹 숙이며 큭큭 웃었다. 슈마허의 켈브리안 흉 내는, 그런 흉내를 보는 당사자의 기분이 늘 그렇듯 아주 끔찍했다. 슈마허가 말했다. "지금 당장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으니....." "좋아요. 라키 경에게 말을 준비하라고 해 두겠어요. 곧장 궁으로 가죠." "보호자는 나, 세르네긴, 그리고 저기 당신 남자 친구. 이렇게 셋 뿐 이니 각오는 해 두는 게 좋을 거요." "물론이죠." 슈마허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문을 열고 나가, 창 근처에 있는 세르네긴에게 뭐라 말했다. 세르네긴이 고개 를 끄덕이더니 벽에서 등을 뗐다. 둘만 남게 되자, 아킨은 켈브리안에게 다가와 물었다. "신세를 졌다는 게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모르지? 아버지가 저 사람 의부의 빚을 대신 갚아준 적이 있었거 든. 실수로 귀한 집 아들을 죽인 일이 있었는데, 내력은 정확히 모 르지만 어쨌든 그 의부에게 엄청난 벌금이 떨어 졌지. 그 때 에크에 있던 우리 아버지가 가진 돈 탈탈 털어서 그 빚을 갚아 주었던 거 야. 물론....그 일로 어머님에게 어마어마하게 혼났지.....그게 우리 아 버지 전 재산이었거든." 그리고 켈브리안은 생긋 웃었다. "그래서 마라 공과 사이가 나빠지자마자 여기로 온 거야. 공, 짜, 로." "....그것 때문에 저 정도로 하는 겁니까." "그는 에크 남자거든. 드래곤들 하는 것을 닮아서, 약속이라면 목숨 이라도 걸고 지키지. 저 사람도 마찬가지야." 아킨은 여전히 믿어지지 않았다. 에크의 풍습에 대해서는 예전에 한 두 번 들어본 적은 있었으나, 저 슈마허와는 도무지 인연 없는 말 같아 보였다. 그러자 켈브리안이 말했다. "이걸 말하면 믿을 거야. 그 의부의 이름이 바로 그렉 포틀러스였 어." ".....네?" 포틀러스.....그리고 영지가 없는 기사가문 출신이나 평민이라면 자식 들 모두가 아버지의 성을 물려받을 것이다. "저 세르네긴이 그 의부 되는 분의 아들인 겁니까?" "유일한 아들이지." 그런데 밖의 슈마허가 고개를 돌렸고, 순간 눈이 마주쳤다. 그가 빙 그레 웃었고, 아킨은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눈빛을 보아 하니, 아킨 이 안에서 켈브리안에게 어떤 말을, 왜, 했는지 눈치챈 듯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킨은 정말 전 재산 놓고 불안하게 도박하는 심 정으로 그렇게 말 한 것이었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도 그랬듯, 이번에도 아킨은 짐작만으로 아무 것 도 모르는 주제에 외려 더 뻔뻔히 나온 것이다. 아킨은 전날 슈마허가 상당히 빠르게, 더 이상의 군말 없이 나오는 것을 보고 무슨 일이 생겼다, 라고 짐작했을 뿐이었다. 그는 어쨌든 켈브리안과 만나려 하고 있으며, 더 이상의 조건은 달지도 협상을 하려 하지도 하지 않았다. 지금 궁을 장악하려는 공작에게 넘겨주거 나 할 생각이었다면, 차라리 직접 공주가 있는 곳으로 쳐들어가 버 리지, 이렇게 복잡하게 그녀를 정식으로, 예의바르게 만나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 무언가, 발빠르게 움직여야 할만한 변수가 생긴 것이며, 슈 마허는 어쨌든 공작 편에 설 생각은 없다. 아킨은 좀 생각해 보다가, 그레코 공작이 은밀하게라도 공주를 찾으 려는 것을 보고 '아직도' 공작이 왕궁을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했을 거라 추측했다. 그렇게 되면, 바로 지금 누군가의 보호 하에 궁으로 돌아가면 된다. 그리고 되도록 공작파와 왕비파, 뿐만 아니라 중립 의 사람들까지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궁으로 돌아가는 것이 현명한 것이다. 그리고 켈브리안 공주에게 그렇게 말 한 것은, 그 다음은 슈마허가 알아서 하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아킨은 정확한 사정은 몰랐지만, 그 변수가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슈마허는 제대로 말 해주고 그녀 를 설득 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렇게 슬쩍 넘겨주자, 그는 당황 하며 대체 누가 그런 말을 했냐, 라고 엉뚱한 말을 꺼내는 대신 아 킨을 그저 슬쩍 노려보고는 넘어갔다. 그 때 켈브리안이 물었다. "내가 궁으로 돌아가면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같이 머물게 해 주십시오." 켈브리안이 놀라 눈을 깜빡였다. 아킨은 고개를 숙이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제게도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힘없이 말했다. ".....지금의 저로서는....궁 보다 안전한 곳은 찾을 수 없습니다." *********************************************************** 작가잡설: 아킨의 그녀는 대체 누구일까.......(그이 말고요. ^^)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13장 ************************************************************** [겨울성의 열쇠] 제13장 날카로운 틈새 제58편 날카로운 틈새#1 ************************************************************** 상황은 인연과 운명을 만들어 내고, 그것은 그 다음의 또 다른 상황 으로 이어진다. 아킨은 지금 그리 생각하기로 했다. 켈브리안을 데리고 나오고, 그 녀를 말에 태우고, 쿤에게 마지막 감사인사를 하면서 어차피 이렇게 된 것이니 최선을 다해 앞으로만 달리기로 했다. 해는 더욱 기울어 있었다. 햇살은 진한 오렌지 빛으로 농익어 있었 고, 그림자는 반대편 벽으로 길게 늘어졌다. 세르네긴이 가장 앞장서 말을 몰아 큰길로 나섰다. 말에 타고 검을 찬 사내 몇몇이 서성이다가 세르네긴을 발견하자 검을 뽑아들었다. 세르네긴은 일행중 가장 먼저 그 긴 검을 뽑아 들었다. 슈마허가 칼 자루에 손을 가져가더니, 오른 편 골목에 튀어나오는 두서너 명의 남자들을 보자마자 검을 뽑아 그 끄트머리가 그들을 향하게 했다. 아킨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곳곳에 숨어 있다가 급히 달려오는 사람 들의 발 소리가 들려왔고, 그 속에서 아킨은 탈로스의 흔적을 찾아 보려 했다. 그러나 아직 그는 없었다. 순간, 바로 옆으로 마른 몸집의 남자가 족제비처럼 재빨리 뛰어들었 다. 아킨은 단검을 뽑아들며 켈브리안에게 외쳤다. "피해요!" 켈브리안이 말을 뒷걸음치게 하며 중앙으로 물러났다. 아킨은 빠르 게 단검을 휘둘러 큰 검을 막아 치고는, 검을 뒤집어 칼자루로 그 목을 퍽 쳐냈다. 남자는 신음을 헉 삼키며 고꾸라졌고, 그가 탄 말 은 아킨과 눈이 마주치자 뒤로 주춤 주춤 물러났다. 짐승의 겁먹은 눈빛에, 아킨은 울컥 쓴웃음이 치밀어 올랐다. 젠장--! 하고. 아킨은 다시 단검을 휘둘러 또 다른 남자의 손목을 찍어내고는, 힘 껏 팔을 휘둘러 옆의 사내를 팔꿈치로 쳐냈다. 큰 창대가 아킨의 목 쪽으로 반원을 그리며 휘둘려져 들어왔다. 아킨은 그것을 잡아 비틀어 힘껏 밀어 던졌다. 창대가 우드득 부서지며 날카로운 끝이 튀어 올랐다. 그리고 다시, 아킨은 검으로 또 한 남자의 목을 베어 냈다. 그 목이 반쯤 갈라지며 피가 세게 튀어 오르더니, 옷자락에 후드득 쏟아지며 비린내가 진하게 풍겨 왔다. "읏--!" 켈브리안이 자신을 잡으려는 기사 하나를 검으로 쳐냈다. 그녀의 호 위기사 라키 경이 그 옆에 붙어 있었고, 반대편에는 또 아킨은 처음 보는 다른 기사가 그녀를 지키고 있었다. 어디서 어떻게 숨어 있던 걸까, 그리고 언제 나타난 걸까, 아킨은 그리 생각하며 더 이상 켈 브리안을 신경 쓰지 않았다. 한편 세르네긴은 가장 화려하게 적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아킨 자신 역시 싸우는 중이라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세르네긴은 빛이라도 번득인 듯 빠르게 검을 휘둘러 가고 있었다. 평소에 쓰는 창 대신 다른 검보다 한배 반정도 긴 검을 휘두르고 있었지만 한 해의 토머 넌트를 휩쓸었던 솜씨만큼은 확실했다. 한 걸음 뒤로 가는가 싶으면, 두 걸음 앞으로 나와 세 사람을 베어 내고 다시 검을 휘둘러 상대의 검을 쳐내고 그 목을 날렸다. 그리고 가장 치명적인 곳, 한번 베이면 더 이상 움직이지도 못할 만한 곳만 을 베어내고 찔러 넣었다. 저 정도 실력의 청년이라면, 스승의 외아 들이 아니라 하더라도 누구나 아낄 것 같았다. 그 때 켈브리안이 외쳤다. "모두 앞으로 가요-!" 세르네긴은 사슴처럼 가볍게 뛰어, 단번에 말에 올라타 고삐를 당겼 다. 그러며 그에게 달라붙는 기사 하나의 어깨를 찍어내고는 고삐를 당기고 박차에 발을 넣었다. 켈브리안은 가장 먼저 말을 달리며 외 쳤다. "따라와요--!" 아킨도 말머리를 틀었다. 라키 경과 다른 젊은 기사가 공주의 옆과 뒤로 따라붙으며 호위를 했고, 세르네긴 역시 슈마허의 뒤를 따랐 다. 아킨은 가장 빨리 말을 몰아 켈브리안 옆으로 붙었다. 켈브리안의 금발은 피투성이였다. 그리고 이번만큼은, 저 쪽도 공주라고 별로 봐준 것 같지 않았다. 어깨에 상처가 나 있었고, 지친 팔은 약간 떨 리고 있었다. 곧 좁은 골목길 뒤편에서 말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켈브리안이 단 호하게 외쳤다. "상대하지 말고 모두 따라 오기만 해!" 아킨은 뒤의 숫자가 조금씩 늘어나는 것을 알아챘다. 그러나 공주의 말에 따라 계속 앞으로 달려나갔다. 켈브리안은 큰길에서 방향을 돌려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좁은 골목 길에 나와 있던 시민들이 황급히 안으로 숨었다. 추격해 오는 말발굽 소리가 우두두두두--천둥소리처럼 들려왔다. 좁은 골목길이 우르르 울리자, 사람들은 창문까지 쿵쿵 닫아 버렸 다. 켈브리안을 선두로 하여, 일행은 드디어 진한 노을 빛이 쏟아지는 또 다른 대로로 나왔다. 그녀가 말머리를 오른편으로 꺾었다. 탁 트인 큰 광장이 나타났다. 그 포석 깔린 넓은 평지 위에는 아직 초여름의 신선하게 뜨거운 열기가 남아 있었으며, 중앙의 분수대 에서는 맑은 물이 햇살을 산산이 튀겨내며 쏟아지고 있었다. 그곳에 서 공주는 말을 멈추었다. "멈춰, 슈마허. 모두-!" 아킨은 주변을 둘러보았고, 곧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 골목길로 그들을 추격해 왔던 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두에는 켈 브리안과는 안면이 있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망토를 뒤로 젖히고는 검을 뽑아 들었다. 검이 번쩍이자, 그 뒤를 따르던 추격대의 칼자루 에서도 검이 뽑혀져 나왔다. 그들은 광장의 중앙으로 쏟아져 들어왔 고, 선두의 기사는 공주를 보며 외쳤다. "멈추십시오, 공주님." "어머나, 제가 공주라는 건 알고 있었네요." 켈브리안은 활짝 웃고는 덧붙여 말했다. "귀국의 공주에게 하는 짓치고는 아주 무례했지만." 그러나 그 기사는 웃지 않았다. "공작각하의 명이십니다. 최대한 예우하여 모시고 오라는!" 그들의 검은 켈브리안을 향하고 있었고, 그 추격대 역시 슬슬 옆으 로 퍼지며 몇 안 되는 그녀의 일행을 포위하려 했다. 켈브리안은 찬찬히 그들의 숫자를 확인하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녀의 눈길은 위를 흘끗 보았다가는 금방 아래로 향했고, 그러다가 다시 주변을 빙 둘러보듯 빠르게 움직였다. 그런 그녀의 눈길을 기 사는 별반 신경 쓰지 않았다. 갑자기 켈브리안은 손뼉을 짝짝 치고 꽉 마주 잡더니 유쾌하게 말 했다. "자, 다 됐어요." 말이 끝나자 마자 광장을 둘러싼 건물에서 그림자들이 튀어나오며 광장 쪽으로 늘어졌다. 켈브리안은 인사라도 하듯 어깨를 살짝 숙이 며 뒤로 물러났다. 라키 경도 뒤로 물러났으며, 슈마허와 세르네긴 은 이미 멀찍하게 물러나 있었다. 추격대의 선두에 있던 기사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 검 끝이 부들 부들 떨리더니 아래로 처졌다. 광장에 길을 토해내는 골목에서는 왕 실호위대의 망토가 수십 개 펄럭이고 있었다. 그들의 은빛 갑옷은 붉은 햇살에 번쩍였고, 그들 모두 칼자루에 손을 얹고 있었다. 추격 했던 자들은 뒤로 돌아 도망치려 했지만, 그 골목길에도 벌써 장전 한 석궁을 앞에 든 병사들과 그 뒤를 지키는 기사가 있었다. 그 기사가 검을 뽑고 방패를 들었다. 왕실근위대의 문장, 봄의 루피 니아를 상징하는 꽃과 창이 새겨져 있는 방패-즉, 호위대 부대장이 었다. 그것을 알아본 적들의 얼굴이 시퍼래졌다. 부대장이 외쳤다. "모두 검을 놔라--! 따르지 않으면 역모로 처리하겠다!" 검이 철컹 철컹 떨어졌다. 선두에 있던 추격대의 우두머리는 험악하 게 욕설을 내 뱉었으며, 그러다가 결국 분을 참지 못해 주먹으로 허 공을 후려쳤다. "....언제 연락한 거요." 갑자기 나타난 왕실 호위대 기사들을 보며 슈마허가 물었다. 켈브리안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그 이상한 곳에서 남자들 감상하면서 밤낮 빈둥거리기만 한 건 아 니라고요, 슈마허." 그리고 켈브리안은 아킨을 돌아보았다. 아킨은 광장을 둘러보고 있다가, 갑자기 턱을 당기더니 슈마허 쪽으 로 다가갔다. 켈브리안이 의아해 하는데, 아킨은 슈마허의 어깨를 잡아 당겼다. 슈마허가 고개를 숙이자, 아킨은 그의 귀에만 들릴 정 도로 작게 속삭였다. "있습니다." 슈마허는 찬찬히 어깨를 당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킨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 지, 그는 금방 눈치챘다. 그러나 보통 사람보다 날카롭 기는 했으나 아킨처럼 경지를 넘어서는 예민한 지각은 갖지 못한 그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색다른 것이 있다는 느낌조 차 들지 않았다. "어디에 있지?" "당신이 마주하는 건물의, 파란 커튼이 늘어진 창문 왼쪽을 보십시 오. 1층입니다." 슈마허는 다른 곳을 보는 척 하며 슬쩍 눈길을 돌려보았다. 그리고, 자신조차 놀라울 정도로 몸을 흠칫 떨어야 했다. "맙소사...." 서릿발처럼 차갑게 등골을 꿰뚫고 지나가는, 무시무시하고 소름끼치 는 '공포'가 그의 몸 속으로 확 퍼졌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는 이 글거리는 두 개의 눈동자를 발견했다. 그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그 리는 기괴한 윤곽을 확인했고, 또 눈이 깜빡이듯 재빨리 지워지는 것도 보았다. "뭐야, 저게...." "......그입니다." 아킨은 그리 말하고는 턱의 땀을 닦았다. 그 손끝이 떨려왔다. *********************************************************** 작가잡설: 이봐 아키...위험한 짓을...;; 그러다 슈마허에게 찍혀도 난 몰라~~~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13장 *************************************************************** [겨울성의 열쇠] 제59편 날카로운 틈새#2 *************************************************************** 호위대의 부대장이자 왕비파였으며, 지금은 공주의 편인 팔로아 부 대장은 '반군' 체포가 끝나자 마자 켈브리안 앞에 무릎을 꿇고는 그 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목까지 물결치는 부드러운 갈색 머리의 청년이었고, 바로 지난 무도회 때 가장 먼저 왕의 소식을 알려왔던 남자이기도 했다. 그가 말했다. "출발하십시오, 공주님. 공작이 국왕대행으로 소집한 회의는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들어가는 길에는 아무 문제없겠지?" "물론입니다. 호위대는 저희들 소관이며, 막는 자가 있다면 정당한 후계자 편에 서는 것이 저희들의 의무입니다." 켈브리안은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그리고 어머님은 어디 계시지?" "말씀 드린 대로입니다. 아직은 모르고, 공작이 실각하기 전 까지 알아내는 것은 무리라 생각됩니다." "베르티노는?" "봄의 궁에 유폐되어 계십니다. 그곳을 지키는 것은 공작님의 수하 인 뒬러 백작, 저희들은 접근하기 어려웠습니다." "내 방 앞에.....? 돌아가면 며칠 쓸고 닦아야겠군." 팔로아 부대장이 피식 웃었다. 그 보고로, 일단 일이 마무리되자 그 는 투구를 든 팔꿈치를 옆으로 돌리더니 아킨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베풀어주신 호의에, 왕국의 기사로서 감사드립니다." 아킨은 다른데 신경 쓰느라 건성으로 답했다. "해 드린 일은 별반 없습니다." "공주님을 구해주시고, 또 숨겨주시기까지 하셨는데 별반 없다 말씀 하시면 저희들이 서운합니다. 그리고...." 기사는 이번에는 슈마허를 보더니 아주 떨떠름하고 불쾌한 얼굴을 지어 보였고, 마지못해 손을 내밀었다. "경도 감사합니다." "부왕에 대한 예의였을 뿐이오." 그리고 슈마허는 누가 너랑 악수할까 보냐는 듯 그 손바닥을 후 려 쳐버렸다. 팔로아 부대장은 그런 슈마허를 한번 사납게 쏘아보곤 등을 휙 돌려버렸다. 왕실 호위대 기사 중, 쾌활하고 아름다운 켈브리안 공주를 한번이라 도 사모하지 않은 사람은 취향 이상한 녀석이거나 그녀와 만나기 전에 이미 유부남이 되거나 곧 그럴 예정인 기사들뿐이었다. 그러나 신분 때문에 별 수 없이 다들 마음을 접었는데, 어디서 왔는지조차 모르는 용병대장 하나가 왕비의 묵인 하에 대 놓고 귀한 공주에게 치근덕대고 있으니 꼴이 곱지 않은 것은 별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가 한 해에 한번씩 갱신하며 쌓아 올린 기록들이 대단한 건 사실 이었지만, 이곳 롬파르에서는 그저 느끼하기 그지없는 바람둥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니 공주를 구하는데 공헌을 하긴 했어도, 슈마허는 등뒤로 쏟아 지는 불편한 시선에 등이 따끔거릴 지경이었다. 켈브리안은 그 모습 이 아주 마음에 들어서는, 활짝 웃으며 말에 탔다. "자, 이제 출발하자고요." "왕자, 아직도 그 남자가 있습니까." 느닷없는 질문에 아킨은 깜짝 놀랐다. 세르네긴이 뒤로 다가와 있었 다. 조용한 눈빛의 그 청년은 분명 목소리를 낮추어 말하고는 있었 으나 한자한자 아주 뚜렷하게 들려왔다. 아킨은 고개를 저었다. "방금 전에 사라졌습니다." "생각 보다 훨씬 골치 아픈 상대군요." 물론일 것이다. 오거스트 롤레인 조차 얼굴이 새파래질 정도로 만드는 자이고, 슈마 허조차 흠칫 놀랐다. 그리고 아킨 역시 애당초 상대를 할 생각보다 는 피할 궁리부터 하고 있는 중이다. 그와 두 번 맞서는 짓은 결코 하고 싶지 않았고, 절반이 떨어져 나간 은봉인의 그 나머지 절반도 잃고 싶지는 않았다. 필사적으로 지켜야 한다. 그것은 인생 그 자체고, 미래이자 생명이 었다. "슈마허 님께 허락을 맡아 놓겠습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당신을 지 켜 드리겠습니다." ".....네?" "어차피 슈마허 님은 그런 상대와는 싸울 수 없습니다. 제가 하겠습 니다." 아킨은 무의식적으로 세르네긴의 상관인 슈마허를 돌아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슈마허는 등을 돌리고는 있었지만, 그가 아킨과 세 르네긴의 대화를 다 듣고 있다는 것 정도는 짐작 할 수 있었다. 그 의 어깨는 굳어 있었고, 옆에서 뭐라 말하던 말던 고개를 돌리거나 답하지도 않았다. 세르네긴이 말했다. "무례라 생각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저는 상대방의 상처보다는 현실 을 생각하니까." 그러다가는 망설이듯 입을 다물었다. 아킨은 말없이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고, 세르네긴은 결국 건조한 한숨을 내 쉬고는 말했다. "당신의 나머지 봉인이 부서진 다면, 모두에게 위험하다는 것 정도 는 저도 압니다. 최선을 다해 지켜 드리겠습니다." "모두 다 아는 겁니까......" "에크의 뉴마르냐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당신의 눈빛이 무엇을 의미 하는 지 누구나 압니다." 순간, 아킨은 아찔함에 해쓱해졌다. "그것....과는 틀린 겁니다." "물론 저로서는 더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허나, 결과는 비슷하리라 생각합니다." 괴물 같은 남자로군, 아킨은 그렇게 생각했다. 게다가 그런 말을 아 킨의 눈치 같은 것은 살피지도 않으며 냉담하게 제 할말만 하고 있 는 것이다. 아마 저 청년은 이 은봉인이 모조리 무너지고, 보름 달 빛이 쏟아질 때.......분명 똑같은 눈빛으로 아킨의 목을 향해 검을 휘 두를 것이다. 세르네긴의 눈이 다시 아킨을 향했다. 여전히 차갑기는 했지만, 적 어도 아킨이 받아들이기를 바라는 눈치다. 세상 사람들이 다 당신처럼 태연한 건 아니라고, 아킨은 쓰게 웃으 며 눈길을 돌리다가 그 목에 걸린 목걸이에 시선이 멎었다. 지난번 에 아킨에게 맞으며 줄이 끊어졌던 것 대신, 훨씬 단단해 보이는 금 줄에 걸린 반지가 전투 중에 풀어헤쳐진 셔츠 자락 밖으로 나와 있 었다. 정교하게 세공 된 백금 반지였다. 두 개의 테가 이어 붙여져 있고, 중앙에는 백조 한 마리가 날개를 접고 목은 뒤로 젖힌 채 부 리 끝으로 파란 보석을 이고 있었다. 아킨의 눈빛에 세르네긴은 그 반지를 옷깃 속으로 집어넣었다. "약혼녀라도 있습니까?" 그저 방금 전의 오싹한 화제에서 돌려버리고 싶었을 뿐이었다. 아무 리 아킨이지만, 방금 전 세르네긴이 던진 말은 정말 섬뜩하게 다가 왔었다. "아닙니다. 제 계모 되시는 분의 유품입니다." "....두개가 한 물건인 것 같은데요." "네, 나머지 하나는 제 의붓 여동생이 가지고 있습니다." 갑자기 아킨은 더 캐묻고 싶지 않아졌다. '여동생'이라 말하는 순간, 얼어붙은 듯 차갑고 단단했던 그 얼굴 위로 아주 짧게나마 따스함 과 자부심이 나타났다. 자기도 모르게 내게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 을, 또 그 여동생을 너무도 사랑한다는 것을 내 놓고 마는 것이다. 아킨은 자신이 그를 은근히 부러워한다는 것을 느끼고는 쓰게 웃고 말았다. 그 차갑고 건조한 눈빛과 얼굴만을 보고 뭔가 사정이 있을 지도 모 른다 생각했지만, 그저 '타고난 천성'이 그렇게 무뚝뚝할 뿐이었던 것이다. 의형이나 의붓 여동생에게도 저렇게 하는 것을 보면, 어쩌 면 아주 속 깊고 따스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아킨 역시 그 배려의 대상에 포함된다면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지 금은 아주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다. "갑시다." 세르네긴의 말에, 아킨은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는 떠나는 일행을 따 라 나섰다. 그 때, '그'는 아직 광장을 보고 있었다. 숨을 잔뜩 낮추어 죽인 채, 분노와 증오에 차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 들을 노려보았다. 마법이 만들어낸 그림자는 그 작고 흉측한 몸을 감추어 주었고, 그 기척과 눈빛을 저 곳에 있는 예리한 소년의 눈과 만만치 않게 날카로운 감각을 가진 청년으로부터 감추어 주었다. 그 리고 그의 신경은 사실 소년도 청년도 아닌, 기사들의 보호를 받고 있는 금발의 고귀한 숙녀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아름다운 금발 머리에, 여신처럼 아름다운 눈빛을 가진 처녀였다. 미소는 잘 익은 사과처럼 달콤하고 상쾌했으며, 젊음은 그 위에 햇 살처럼 찬란히 빛나고 있다. 눈의 주인은 그녀의 이마에서 빛날 왕관을 상상해 보았다. 그녀의 어깨에 덮일 왕의 망토와, 그녀의 손에 쥐어질 홀과, 그녀의 허리에 묶여 늘어지는 보석의 띠, 그것이 한꺼번에 햇빛에 반짝이며 경이로 운 아름다움을 만들어 낼 그 순간을 한번 상상해 보았다. 그리고 전날에 초라한 침상에 머리를 누인 채 울던 그 모습도 생각 해 보았다. 창백한 얼굴로, 눈은 빨갛게 충혈 대서는 아버지, 어머 니...베르티노를 부르며 울먹이던 그 모습을....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렇게 우는 것이 네 할 일인데...여기 서 뭘 하고 있는 거냐. 왜 네가 나서서, 네 어미와 동생을 구하려 하는 거냐. 그건 네 할 일이 아니야. 공주는, 그저 장미가시 우거진 탑에 갇혀서 울어야 하는 거야. 지난번에도 그렇게 했잖아. 너는 영 원히 그런 일만을 해야 해. 나머지는 사실 내가 해야 할 일이야. '그녀'에게 감사받은 것은 오로 지 나이며, '그녀'의 유일한 아군은 오로지 나, 나뿐이라고---! 그는 큭큭 울부짖고 울었다. 눈물이 뚝뚝 떨어지며 그 발 옆에 물 얼룩을 만들어 냈다. 그는 진심으로 괴로웠고, 치솟는 분노에 몸을 떨었다. 그러던 그는 눈동자를 크게 끔뻑거렸다. 그에게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작고 은밀한 접촉이 그를 향해 손을 뻗으며, 그를 원하고 있었다. *********************************************************** 작가잡설: 봄이라...언제나 날이 좋습니다....;; 화분들을 모조리 창가에 내 놨는데.....예전 처럼 쑥쑥 자라질 않네; 화분을 잘못 갈아줬나.....크으으으.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14장 ************************************************************** [겨울성의 열쇠] 제14장 해방된 분노 제60편 해방된 분노#1 ************************************************************** 바다가 어둠에 젖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진한 주황색 햇살은 서쪽으 로 빨려 나가고, 동쪽에서부터 남빛 어둠이 스며 나왔다. 어스름이 깔리며 수평선 위에 걸린 대지는 까맣게 물들었고, 그 위로 노란 등 이 총총히 타오른다. 자줏빛 매는 바다 냄새가 너무 낯선 듯 계속 두리번거리며 주인 옆 에 바짝 붙어 있었다. 그러다가, 바람이 불어오면 부리를 벌리고는 날카롭게 울기도 했다. 그 때 수평선 너머, 저녁노을에 물든 저 먼 하늘에서 작은 점 같은 것이 빠르게 날아왔다. 휘안토스는 매를 어깨로 옮겨 앉히고는 자리 에서 일어났다. 배의 선두로 바짝 마른 로브의 사내가 달려갔다. "왔습니다--!" 마법사인 그 남자는 이 기회에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호들갑을 떨곤 했으며, 조금만 뭘 해도 으 스댄다. 휘안토스는 그 시끄러운 남자가 별반 마음에 들지는 않았 다. 암롯사의 수석마법사인 케올레스가 마법 자체는 변변찮은 것이 사실이나, 그 노인에게는 날카롭게 번득이는 지략과 판단력, 훌륭하 게 쌓인 연륜이 있다. 그것을 원했던 아버지는 그를 아주 아끼고 신 뢰했고, 휘안토스가 원하는 것도 그런 것이다. 그런데 저 젊은이는 나이를 먹으면 케올레스보다 조금은 나은 실력을 갖추게 될 터이지 만, 지나치게 나서며 시끄럽게 굴어대는 좋지 않은 버릇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고용한 사람이 어린 소년이라는 것을 알게 되 자 노골적으로 으스댔다. 아마, 자신이 조금만 근사한 마법을 보여 주면 어리고 순진한 도련님 휘안토스는 자신에게 홀딱 반해서 좋은 자리를 주어 받아 들여 주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휘안토스는 당연히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일이 어찌 끝날 지 는 휘안토스도 짐작하기 어려웠으나, 그 결과에 따라 저 젊은 마법 사는 영원히 침묵하게 되던가 이번 일에 대한 보상만 받고 떨궈질 것이다. 그 때 소소한 바람이 쓸려 왔다. 작은 날개 치는 소리가 가까이 들 려왔고, 매는 번뜩이는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았다. 마법사가 두 손 을 뻗자 그 손안에 비둘기처럼 생긴 검은 새 한 마리가 움켜잡혔다. 새는 그 손에 잡히자마자 날개를 움츠리고 오므라들더니, 작고 까만 구슬로 변해 손바닥에 툭 떨어졌다. 마법사는 그것을 집어들고는 휘 안토스에게 넘겨주었다. "움켜쥐십시오." 마법사의 두 눈은 이제 곧 휘안토스가 자신의 마법에 감탄하게 될 거라 잔뜩 기대하며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휘안토스는 무표정하게 구슬을 움켜쥐고는 한참을 있었다. 새가 날개를 치며 둘러본 광경이 샘솟듯 머릿속으로 흘러들었고, 짧 거나 길게, 조용하다가도 시끄럽게, 그 새가 빨아들인 모든 것을 보 여주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마법사는 휘안토스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다 알아내 왔다. 한참을 쥐고 있던 휘안토스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되자 눈을 뜨 고 손을 펼쳤다. 검은 구슬은 작게 오그라들더니 연기처럼 사그라지 었다. "수고했다." 마법사의 얼굴은 활짝 펴졌지만, 기대했던 것만큼의 반응은 없으니 내심 실망한 듯 했다. 휘안토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마르실리오에게 명했다. "롬파르에 배를 들인다." "깃발은 어찌하겠습니까." "내려라." 마르실리오의 얼굴이 어두워졌지만, 그래도 명에 따라 돌아서며 큰 소리로 명했다. "롬파르로 간다--! 깃발을 내린다!" 암롯사의 깃발은 금방 내려왔다. 마르실리오는 암롯사의 기를 받아 들자 정중한 태도로 접어 다른 부하가 내미는 상자 안에 넣었다. 휘안토스가 명했다. "마르실리오 경, 자네 휘하의 기사들 중 발 빠른 사람으로 열 명만 골라 놓도록." "네." "그리고 마법사, 해류와 마법풍을 일으켜라. 한시간 내로 체놀비를 지나 롬파르로 들어간다. 또, 체놀비가 보이는 즉시 배를 그림자로 덮어주도록." "알겠습니다." 아무도 묻지 않았고, 충고하지도 않았다. 의아해하지도 않았으며, 그 저 너무도 당연한 일을 하듯 신속하고 차분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자신이 이곳으로 온 진짜 이유를 알지는 못했으나, 대공왕 사이러스 휘하에서 상관에게 충고하거나 항의하는 법을 완벽하게 잊어버린 자들이었다. 휘안토스는 배의 선두가 향하는, 어둠에 젖은 까만 바다를 바라보았 다. 바람과 파도에 섞여 노마법사 케올레스의 목소리가 귓전에 들려 왔다. -정말 제가 같이 가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그 옆에서 아버지가 조금은 못마땅하다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것도 생각나고, 마지못해 허락하며 엄격하게 하던 말도 생각난다. -되도록 조용히 데리고 오너라. 그리고 떠나기 전, 휘안토스는 마지막으로 봄의 방에 들렀다. 어머 니의 초상은 여전히 향기에 젖은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림에 붙잡힌 그 영원한 아름다움은 봄꽃처럼 싱그러웠다. 그곳에서 휘안토스는 그녀가 살아 있던 시절, 아킨이 저주에서 벗어 나지 못했던 그 시절을 생각했다. 그래도 어머니는 자살하기 1년 전 까지는 휘안토스를 알아보았다. 아니, 그녀가 유일하게 멀쩡하던 시 간은 휘안토스와 마주하던 순간뿐이었다. 창백하고 푸석한 모습이었 지만, 그래도 그녀는 웃으며 말하곤 했었다. 건강하게 잘 지내니? 외롭겠구나....네 옆에 있어 줄 수 없어서....이 렇게 네가 찾아오게 해서 미안해. 하지만.....가엾은 휘안, 내가 이지 경이긴 하지만.....그래도 강하게 커야 한단다. 아버지는 널 택했으니 까, 그러니까 넌.....네 동생 몫까지 강하게 커야 해. 어린 네게 버겁 다는 건 알아. 하지만, 이렇게 밖에는 말할 수 없구나........사랑한다, 아가야. 그런 그녀가 아킨에게 어찌 했는지는 잘 모른다. 아킨은 분명 휘안 토스를 질투하고 미워하기는 했으나, 결국 휘안토스가 그랬든 스스 로를 지키며 자라는 법을 터득했다. 휘안토스가 처음부터 진실 속에 서 살아 상처받지 않았듯, 아킨역시 보호받지 못했기에 싸우는 방법 을 잘 알고 있었다. 어쨌든 둘은 쌍둥이, 같은 어미아비의 피를 물 려받아 같은 배 안에서 똑같이 커 왔다. 자라는 방향은 달랐으나, 그 둘은 서로에게 굽히지도 않을 것이며, 서로를 지배할 수 없을 것 이며, 휘안토스 역시 다시는 그러라리 기대하지도 시도하지도 않을 것이다. 휘안토스는 가만히 그리움, 슬픔, 안타까움.....상처, 후회-그런 단어 를 떠 올려보았다. 그러나 그것들은 먼지 쌓인 방에 바람을 불어넣었을 때처럼 부옇게 피어오르다가는 가라앉아 버릴 뿐이었다. 휘안토스에게, 그것들은 그저 생명 없는 나른하고 의미없는 것들일 뿐, 그저 이렇게 해야 할 것이다 라는 푸석한 결론만이 차분하게 떠오르고, 그리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왜 그것을 해야 하는지 떠오를 뿐이었다. 그 생각에 엄격하게 반박하는 그 어떤 목소리도 없으며, 도의적-누 구나 그래야 한다 생각하는 그런 평범한 도의 말이다-인 목소리는 그저 먼지 덩어리일 뿐이다. 곧 수평선 위로 빛의 무더기를 가득 안은 체놀비 항이 보였다. 한 시간 뒤면 롬파르에 도착하는 것이다. 플리나는 거의 열흘 동안이나 하지 못했던 목욕과 단장을 마치자, 너무나 행복했다. 비록 단촐한 검은 옷밖에는 받지 못했지만, 거의 벌거벗겨진 채 몇 날을 보내다가 받게 된 것이니 처음 비단 드레스 를 입게 되었을 때만큼이나 날아갈 듯 했다. 왕의 시신을 처음 발견 하고, 공작에게 연락하자마자 그에 의해 지하 감옥으로 끌려가 그곳 에서 더러운 간수에게 욕보일 때는 지옥에 떨어진 것만 같았다. 그 런데 지금, 다시 공작 부인이 그녀를 구해 주었다. 자신을 그 감옥 에 처박아 넣은 데에는 화가 치밀어 오르지만, 지금 플리나는 어떻 게든 이 줄을 잡고 그 지하감옥에서 나왔다. 그러나 아무 힘이 없는 그녀는 어떻게든 그 공작과 공작부인의 일이 잘 풀리게 해야 한다. 다시는 자신을 버리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플리나는 베일을 머리에 감고는 한번 거울을 바라보았다. 얼굴은 공 작부인의 말에 따라 화장을 하지 못해 푸석했고, 입술도 창백해 보 였다. 목까지 올라오는 드레스는 너무 추레해 보인다. 그러나 이렇 게 하는 게 좋다 하니 별 수 없지 않은가. 플리나는 한번 목소리를 다듬고는 처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죄 없는 젊은 여인네가 되어, 사악한 누군가를 고발해야 한다. 최대한 선량한 척, 무구한 척 하면 서 고분고분 거짓말을 해야 한다. 좀 떨리기는 했지만, 플리나는 이 일의 원흉 같은 얄미운 공주를 떠올리며 스스로에게 용기를 불어넣 었다. 잘만 하면, 나는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은 물론이요 그 계집애 에게 복수도 할 수 있다. 또, 그 통통하고 못생긴 왕비에게도 말이 다. 그러니 그 까짓 거짓말쯤이야.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플리나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재빨리 지우고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베일로 얼굴을 가렸다. 입술은 우울한 듯 다물고, 눈도 내리깔았다. "들어오세요." 좁은 대기실 문이 열리며, 두 명의 긴 로브를 걸친 마른 남자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마지못해서인 듯 고개를 숙였다 들고는 플리나에 게 말했다. "나오시오." "알겠습니다." 그런데 막상 움직이자, 플리나는 몸이 갑자기 떨리기 시작했다. 이 래서는 안 되는 데, 플리나는 주먹을 꾹 쥐고는 일어났다. 그런데 오히려 다리가 더 후들후들 떨려서 몇 발자국 가지도 못하고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부인-" 남자들이 역정난 목소리로 말하자, 플리나는 그 팔에 매달려 겨우 겨우 몸을 일으켰다. "죄, 죄송....합니다. 너무 떨려서요." 남자들은 쯧쯔-혀를 차더니 그녀의 팔을 당겼다. 플리나는 그 팔에 기대며 그들을 따라 나섰다. 긴 복도를 지나고, 화사한 융단도 장식물도 사라지더니 단순하고 까 만 바닥과 복도가 시작되었다. 플리나는 근처도 가 본적이 없는 곳, 나라의 귀하고 높은 분들이 모이는 곳으로 가는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플리나는 자기가 할 말이 너무도 무서워서 더욱 떨 려왔다. 정말 잘 할 수 있을까, 왈칵 눈물이라도 쏟아질 것만 같았 다. "다 왔소." 왼편의 남자가 그리 말하더니, 양옆에 갑옷을 받쳐입은 두 명의 호위기사가 있는 문 앞에 그녀를 세웠다. 호위 기사는 플리나를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문을 쿵쿵 두드렸다. 곧 안 쪽에서 문이 활짝 열렸다. 플리나는 주저앉을 뻔했다. 정말 커다란 방이었다. 천장의 성화에는 에칼라스가 긴칼과 성배를 들고 서 있었으며, 그녀 주위에는 은빛 갑옷을 입윽 그녀의 기사들 이 하얀 날개를 뻗치며 있었다. 양옆에서 그녀를 부축하던 사내들이 그녀를 그 안으로 들여보냈다. 큰 홀 안의 벽을 따라 놓여있는 의자에 잘 차려 입은 남자와 여자 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서로 작게 소곤소곤 거리며 플리나를 흘 끔 흘끔 보았고, 낯익은 얼굴들이 그리도 냉혹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니 플리나는 정말 울고 싶어졌다. 맨 앞의, 한 단 높은 의자 의 가운데 앉아 있는 공작이 그녀에게 북돋아 주듯 미소를 보였다. 플리나는 마음 편히 생각하려 했지만, 얼굴은 더 무섭도록 창백해질 뿐이었다. 그래도 두 시종이 그녀를 이끌고는 회의실 옆에 붙은 작 은 의자에 앉혀놓았다. 그녀는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는 얌전히 앉 았다. 그런데 그 때, 오른편의 작은 쪽문이 벌컥 열리더니 기사 하나가 뛰 어와 공작에게 고개를 숙여 속삭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확 쏠렸고, 플리나도 그를 흘끔 바라보았다. 공작의 얼굴이 매서워졌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는, 사납지만 작게 그 기사에게 뭐라 속삭였다. 기사 가 고개를 저었다. 결국 그레코 공작은 나직이 말했다. "들여 보내드려라." 기사가 인사를 하고는 재빨리 사라졌다. 문이 닫히고, 다급히 달려 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플리나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려나 싶어서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사람들의 공기가 아주 달라져 있었다. 몇몇 의 얼굴이 밝아졌고, 다른 몇몇은 창백해진다. 무슨 일이지, 그리고 내가 말해야 할 것이 달라지는 건 아니지? 설 마... 다시 회의실 중앙의 문이 열렸고, 진녹의 옷을 입은 날씬한 소녀가 그 안으로 들어왔다. 회의실에 앉은 모든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공작도 잔뜩 불편한 얼굴을 이내 지우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플리나도 얼결에 일어나 고 말았고, 비명을 질러버릴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그 소녀를 따라온 기사가 말했다. "켈브리안 쥬플라 공주님이십니다." 플리나는 공작의 눈치를 다시 살피고는 회의실에 나타난 공주를 슬 쩍 바라보았다. 켈브리안 공주의 모습은 전혀 단정치 못했다. 옷은 드레스가 아닌 소년 기사 같은 차림새였으며, 금빛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있었고, 핏방울까지 튀어 있었다. 또, 팔에는 붕대가 감겨 있고 그 사이에서 아직도 피가 스며 나왔다. 세상에나, 어느 누가 공주에게 상처를 입 혔단 말인가. 모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과는 상관없이, 왕족에게 그런 해를 입힌 것에 진솔하게 분노했다. 켈브리안이 말했다. "이리 단청치 못한 모습으로 온 데 사죄 드립니다." 턱은 똑바로 숙부인 공작을 향하고 있었다. 공작이 그런 켈브리안에 게 차갑게 말했다. "기소 대상이 누구인 지는 알고 있소?" "제 어머님이신 브리올테 왕비 전하이시죠." 그렇게 말하고는 켈브리안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이곳에 제 어머님도 그 대리인도 보이지 않는군요." "그래서?" 켈브리안은 가슴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래서 제가 대신 이곳으로 왔습니다. 허나 꽤 많은 분들이 제 길 을 막더군요." 그레코 공작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켈브리안은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이제 열 아홉인 공주는, 노련한 숙부 앞에서 무모할 정도로 오만하게 나오고 있었다. 플리나는 다시 켈브리안이 얄미워졌다. 또, 여기서 공작이 밀리게 된다면 자신은 다시 그 지하감옥에 갇힐 것은 자명했다. 그제야 용 기가 솟았다. 오기가 치밀어 올랐고, 그것은 그녀를 철갑처럼 둘러 싸 양심과 두려움을 덮어버렸다. 켈브리안은 홀의 중앙에 서서, 흐트러진 금발 머리를 뒤로 완전히 쓸어 넘기고는 암사자 같은 눈빛으로 상석의 숙부를 바라보았다. 번잡한 정계에서 거의 떠나 여행만 다니던 공주였다. 난잡하게 싸우 는 어머니와 숙부를 저 멀찍이서 보면서, 그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러나 그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물러나 있었던 켈브리안 이었다. 티폴라 여왕에게 학대에 가까운 수모를 당했고, 그 티폴라 가 죽은 뒤에는 어머니에게 냉대를 받으며 살아왔다. 그리고 왕의 승하 직전까지 그녀는 겨우 누구에게 팔려갈지, 그것만이 모두의 관 심사였던 왕족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레코 공작의 손길을 피해 도망쳤고, 지금 모두의 앞에 나타나 그 손길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서 있었다. 공작과 왕비 의 싸움을, 일순간에 허무하게 만드는 최고의 위치에서. 모두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 켈브리안 쥬플라 공주가 지금 이 판 의 주인이었다. 모두가 무심히 지나쳤으나, 그녀야말로 제대로 나섰 다면 이 판의 그 누구보다 가장 큰 정당성과 힘을 거머쥐고 있었던 존재였던 것이다. 이제 겨우, 숙부인 그레코 공작은 그것을 인정할 수 있었다. 곧, 플리나 남작부인의 이름이 불렸다. 플리나는 여전히 얼어붙은 채 서 있었으며,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 지조차 잠시 잊고 있었다. 그러나 이름이 불리자 입을 단단히 악물더니 그녀에게 질문을 할 공작을 바라보았다. 이 회의의 주도권은 공작에게 있었으며, 그는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을 물어볼 것이다. 그 답은 이미 공작 부인에 게 들어서 다 알고 있다. "네." 의장인 추기경이 성배와 검의 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대가 아는 모든 진실을, 에칼라스의 검 앞에 그 심장을 놓고 말 하라." "무, 물론입니다. 맹세합니다." 그레코 공작의 냉혹한 눈이 켈브리안을 향했다. 켈브리안은 별로 당 황하는 바 없이, 그저 경멸에 찬 눈으로 플리나를 쏘아보고 있을 뿐 이었다. 추기경이 물었다. "그대가 선왕폐하를 마지막으로 뵈었다는 것이 사실인가." "네. 허나, 그 때는 이미 돌아가신 뒤였습니다." "그대가 발견한 것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나?" "물론입니다. 저, 저는...." 그냥 왕비와 만났다고 답하기만 하면 된다. 주변 상황이 어떠했다는 것, 잡다하게 말할 필요도 없다. 그날 만난 얄미운 늙은 시종은 벌 써 죽었을 것이며, 두 호위기사들 역시 공작이 알아서 처분했을 것 이다. 플리나는 한번 켈브리안에게 슬쩍 웃어주고는 말했다. "왕비전하를 뵈었습니다." 켈브리안의 눈이 매서워졌다. 그 차디찬 분노의 눈빛, 플리나는 자 신이 승리했다는 생각이 들자 너무나 통쾌했다. 사람들이 술렁였다. 그것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아는 몇몇이 이를 갈 아붙였고, 그 무거운 첫마디를 내던지자 플리나는 이제 모든 것을 다 쉽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공작이 물었다. 플리나는 답을 하기 위해 턱을 들었다가, 저 홀 구석에 있는 짙은 검은 얼룩을 발견했다. 무얼까, 플리나는 말을 멈추고는 잠시 그것 을 들려다 보았다. 그림자는 아닌 듯 했다. 그것은 처음에는 잉크방 울처럼 자그마했다가 점점 커지더니, 아메바덩어리처럼 꿈틀거리며 이동하고 있었다. "플리나 남작부인!" 공작이 다그치듯 다시 물었다. 플리나는 금방 시선을 떼고는 답했 다. "왕비전하께서 폐하를 돌아가시게 했지요." 드디어 성질 급한 자들 몇몇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순간 이었다. 플리나는 그 검은 얼룩이 벽을 타고 내려오더니, 바닥을 빠르게 달 려 자신을 향해 오는 것을 보았다. 플리나는 벌떡 일어나 뒤로 물러 났다. 의자가 뒤로 젖혀지며 우당탕 쓰러졌고, 놀란 플리나는 달아 나려다가 치마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그 검은 얼룩은 더 욱 빨리 휙 날아오더니 그녀의 가슴속으로 쑥 들어갔다. "이, 이게 뭐야!" 그녀가 날카롭게 비명을 질러 젖혔다. 온 홀이 날카롭게 베어져 나 가는 듯한, 그 끔찍한 비명을 크게 토해내고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숨이 컥 막혔다. 피는 꾹 막혔고, 머리는 터질 것만 같았다. 우악스 런 손아귀가 그녀의 심장을 꾸욱 움켜쥐고는 흔들어 대고 있었다. 그리고는 그 힘이 갑자기 세졌다. 쥐어질 대로 쥐어져 있던 심장, 피가 뭉칠 정도로 꽉 조여졌던 그것이 퍽 터졌다. 플리나의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눈과 귀에서도 피가 스며 나오고, 가슴을 움켜쥐던 손이 축 처졌다. "무슨 일이야-!" 가장 먼저 플리나에게 달려갔던 남자 하나가 외쳤다. "죽었소-!" "무슨.....! 얼토당토 없는!" 사람들이 달려왔다. 그 중 마법사인 델커 경이 달려오더니 플리나의 위로 손을 저었다. 그 손짓에, 회의 집행자이자 사제인 칼만 추기 경이 품안에서 성표를 꺼내 그 가슴 위에 얹었다. 붉은 빛이 스며 나왔다 꺼지고, 추기경이 낮게 한숨을 내 쉬더니 델커 경에게 뭐라 말했다. 델커 경이 고개를 끄덕이자, 칼만 추기경은 성표를 거두어 품속에 집어넣었다. "무슨 일이오!" 누군가가 다급히 물었다. 칼만 추기경은 이마와 가슴에 손을 한번씩 짚어 진실의 표를 올리고는 말했다. "진실의 사제관들이 마법사에게 의뢰하는 엄격한 마법이었소, 누가 이 마법을 걸었는지는 모르나....그녀가 이 곳에 오기 한참 전에 이 미 걸려 있었던 듯 하오." "무슨..." 그레코 공작이 흐릿하게 묻자, 중립의 위치를 굳건히 지켜왔던 칼만 추기경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방금 전 그 플리나 남작부인이 했던 맹세대로 된 것이오. 에칼라스 의 검 앞에 그 심장을 놓고 진실을 말하라. 무엄하게도 에칼라스 님 의 이름을 걸고서도 맹세를 어겼으니, 그 심장에 칼이 꽂힐 수밖 에!" 그레코 공작은 급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홀의 켈브리안 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도 의아해 하며, 반은 놀라움과 반은 분노로 플리나 남작부인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잠시 뒤, 켈브 리안 공주는 가볍게 한숨을 내 쉬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누구를 위해 거짓을 말한 것인가요." 웅성거리던 회의실 사람들이 소란을 뚝 멈추었다. 추기경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까지는 알아낼 수 없습니다." "적어도......저를 위해 거짓을 말하지는 않았을 테지요." 켈브리안은 그렇게 말하며 숙부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눈길은 얼어 붙은 그의 얼굴을 향해, 그러나 명령은 홀의 문을 열어 젖히는 호위 대의 기사들을 향했다. "선왕 엔리케 전하의 장녀이자 '후계자'로써 첫 번째 명령을 내립니 다. 제 숙부님을 정중히 모셔 주세요." *********************************************************** 작가잡설: 물론 제 취미는 원예가 아닙니다. --; 단지........ 재작년까지 살던 기숙사에서 키울 수 있는게 화분 뿐이라;;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14장 ************************************************************** [겨울성의 열쇠] 제61편 해방된 분노#2 *************************************************************** 기이한 일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 덕에 켈브리안은 더욱 확실 하게 기선을 제압할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 호위대를 장악한 것은 공주였으니, 공작 파 쪽에서 뭘 어떻게 하기도 전에 궁궐 안에 있던 그들은 즉각 공작을 체포해 구금했다. 그리고 켈브리안은 공작이 끌려나가자마자, 곧바로 달려가 동생 베 르티노의 구금을 풀었다. "누나!" 병약한 동생은 며칠만에 마른 짚 인형처럼 변해 있었다. 켈브리안이 정당한 후계자임을 내세우고, 그 첫 번째 적인 공작의 신상을 손에 넣은 판이니 왕자를 구금했던 뒬러 백작은 재빨리 포 위를 풀고 궁궐에서 도망쳐 버렸다. 어물쩍거리다가는 단번에 역적 으로 찍혀 끌려나갈 판이었던 것이다. 베르티노는 누나의 품에 안기며 물었다. "어머님은 어디 계시죠?" "곧 찾아 낼 테니 걱정 마요, 베니." 공작이 켈브리안의 손에 있으니, 우선은 공작에게 점잖게 묻고, 숙 부가 고집을 피우면 숙모인 공작부인을 협박하면 되는 문제였다. "우선은 잘 곳부터 옮기자꾸나. 푹 쉬어야지." 켈브리안이 동생에게는 다정한 누나인 건 사실이었다. 몇 년 간 혼 자였다가 겨우 생긴 동생인 데다가, 병석에 눕는 날이 더 많은 가엾 은 아이였다. 사실, 어머니 아버지에 비해서는 권력 다툼에 큰 관심 이 없고, 어쩌다 나서는 일도 그저 '효도' 차원일 뿐이었던 안드레아 도 이 까맣게 어린 사촌 동생을 무척 귀여워하고 있었다. 그녀는 볼에 입을 맞추어 주고, 그 얇은 어깨를 끌어다 품에 안고는 토닥여 주었다. 피로한 왕자는 곧 시녀들과 의사의 손에 끌려 본궁 의 침실로 옮겨져 잠들었다. 그리고 그제야 켈브리안은 편안하게 몸을 씻고 상처를 치료하고 옷 을 갈아입을 수 있었다. 오늘 밤에 잠들지 못할 거라는 건,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도망간 뒬러 백작 쪽에서 다시 사병들을 모아, 간 크게 궁궐을 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호위대는 물론이요, 슈마 허 쉐플런 역시 휘하 용병대를 움직여 궁궐을 지키는 중이다. 호위 대라면 몰라도, 뒬러 수준에 슈마허를 이기는 것은 완벽할 정도로 불가능했다. 또, 왕비 없이 켈브리안 공주와 베르티노 왕자만이 궁 을 지키고 있는 상황에서, 뒬러 백작은 이기지 못하면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역모죄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배수에 남겨진 것이 너무 없다. "....다 끝난 겁니까?" 아킨은 영접실에서 켈브리안을 만나며 그리 물었다. 그러나 켈브리 안은 아킨 옆에 있는 세르네긴을 뚱하니 바라보기부터 했다. 슈마허 와 늘 붙어 다니는 세르네긴이 아킨과 같이 있을 이유는 없을뿐더 러, 외려 슈마허가 아킨을 감시한다는 인상이 들 지경이었다. 아킨이 설명했다. "하루 빌렸습니다." 그제야 켈브리안은 납득했지만, 조금은 불쾌하다는 듯 눈을 찌푸리 더니 말했다. "여긴 궁궐이야. 안심해도 되지 않을까....하는데?" "그건 알지만, 최대한 조심해 두는 것도 좋죠." "그럼 둘이서 뭐 했어? 보아하니....한 사람은 저렇게 인상쓰며 서 있고, 다른 하나는 의자에 앉아 빈둥거리는 거리기만 한 것 같은 데...." "호위에는 원래 말을 걸지 않는 법입니다." 아아, 저 녀석은 암롯사 왕자님이지....켈브리안은 새삼 한숨이 나왔 다. 그 쪽 기사들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지는 예전에 당해봐서 안다. "아주 사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그래도 저 사람이 있어야 하 니?" "....글세요." 아킨은 세르네긴을 바라보았다. 켈브레인은 자신이 이렇게 이야기해 도 저리 나오는 아킨이 한 대 걷어 차 주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 웠다. "아키....." "오래 걸립니까?" "아주 잠깐. 그리고 저 사람, 일이 생기면 당장에 문 차고 들어올 곳에 세워 놓아도 좋아." 그 말이 끝나자마자 세르네긴은 고개를 까딱 숙이더니 문 쪽으로 갔다. 켈브리안은 드레스자락을 살짝 들어 몸에 감고는 자리에 앉았 다. 그러자 세르네긴은 인사도 없이 밖으로 나갔고, 문 닫는 소리는 들렸으나 발걸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켈브리안의 말대로, 그는 문 밖에 등을 바짝 들이대고 서 있는 것이다. "다 들리겠는데요. 비밀스런 이야기를 할 생각이라면 관두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상관없어." "저 세르네긴은 슈마허에게 우리가 할 말을 조사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되풀이 해줄 사람인데도요?" "비밀스런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 앉혀 놓고 꺼내기는 곤란해 서 그런 것 뿐이야. 알아도 상관없고, 알면 더 좋지." 아킨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녀의 성격을 잘 아는 아킨은, 위급한 상황이 일단 정리된 지금 그녀가 얼마나 아킨을 곤란하게 만들지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그 성격에 얼마나 참았을까. "무슨 일입니까?" "집에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까?" "네?" 아킨은 반가운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이내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 내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면 지금은 아주 좋은 상황 이다. 켈브리안이 제대로만 한다면, 아슬아슬하기는 해도 한달 정도 만 지난다면 모든 것이 평탄해 질 테니, 로멜은 반가운 마음에 휴교 령을 거두어들일 것이며 아킨이 본가에 돌아갈 일은 더 이상 없어 지는 것이다. 아킨은 고개를 저었다. "보름 전까지는...반드시 본가에 돌아가야 합니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요." "무슨 일이라니?" "집안 비밀이라 말씀 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제게는 너무도 중요한 일이고, 어쩌면 저 자신의 목숨과도 관련된 일이기 때문에......물론 그저 기우로 끝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만, 지금은 최 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는 것이 좋습니다." 켈브리안의 눈이 흐려졌다. 실망과 안타까움에, 그녀는 그저 우울하 게 웃으며 아킨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가 조용하게 물어왔다. "만약 최악의 상황이 아니라면?" "자유로워질 수는 있겠지요." 아킨은 다시 자신의 처지가 끔찍해졌다. 그 저주라는 것이, 그에 평생을 얽매여 살아야 한다는 것이, 보통사 람과 다른 버거운 짐을 평생을 걸쳐 짊어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이것이 없었다면, 암롯사의 아름다운 대공비는 여전히 장미 가득한 정원을 거닐고 있을 테고, 아버지와 처음 만난 그날처럼 화사하게 웃고 있을 테지. 아버지와 어머니는 두 아들을 서로 잘 지내게 키워 냈을 테고, 어쩌면 둘 아래로 사랑스런 여동생 두 세 명 즈음 더 생 겼을 지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이 저주가 모든 것을 파괴해 버렸다. 유리처럼 여린 것들이 다 부서져 버렸고, 그 파편에 상처투성이가 되 버린 암롯사 왕가였 다. 켈브리안이 물었다. "그러면.....다시 와 주겠니?" "....." 켈브리안은 아킨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왔다. 이제는 깨끗하게 빛나 는 금빛 머리는 이마와 어깨로 물결쳐 내리다 아킨의 무릎까지 쏟 아졌고, 아직도 수심에 찬 연푸른 눈동자는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 다. "다시 와 줘. 후계자는 아니라도 좋으니, 아니...빈 몸으로 와도 좋 아. 내 앞에 다시 서 주고, 만약 나를 좋아해 준다면.......내가 바라는 말을 해 줘. 난 기다릴 테고, 반드시 승낙할 거야......" 뭔가, 아주 두근거리는 말을 듣게 된 것 같았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이 그렇게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큰 축복처럼 다가 왔고, 그 사람과 함께 있다면 아킨 역시 편안하고 행복할 거라는 생 각이 들었다. 아킨이 말했다. "......아직...우리는 친구인 겁니까?" "물론. 그러니 이해할 수 있고, 붙잡아 줄 수 있을 거야." "두려움도요?" "물론." 그래도 아킨은 진심으로 웃을 수는 없었다. 예전에 루첼이 그 사실을 알지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 가차없이 그 의 턱을 후려갈기고 죽일 기세로 달려들었던 그 때가 생각난다. 그 때도 사실, 아주 두려웠었다. 조금 가까이 와 주었던 사람이 그 사 실을 안다는 것이, 그리고 그 활기찬 눈이 공포와 혐오에 찰 지도 모른다는 것이.....그것은 아킨 자신이 더 절망하게 되 버리는 일이었 다. 그러나 그 때 루첼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해 주어야 하는 태도 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숭고한 넋은 가지지 못했지만, 자신 이 어떤 자리에 서 있어야 하는지,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 지 알고 있었다. 루첼은 처음으로 아킨을 제대로 '인정'해 준 사람이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짐작하면서도, 아킨이라는 인간 자체를 인간으로 인정하고 동정도 두려움도 없는 눈으로 진솔하게 아킨을 바라봐 준 최초의 인간이었다. 켈브레인도 그렇게 해 줄까. 그녀도 그 정도로 강할까. 고난 앞에서 저리 강인했는데, 공포 앞에서도 강인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지금의 아킨은 알 수 없었다. "좋아해요, 선배." "나도 널 좋아해." 얼굴 붉어지는 연정은 아닐 지라도, 아킨은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 다. 몇 안 되는 따뜻한 기억들, 그것이 바로 압셀론에서의 그녀였다. 필사적으로 지키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저 그 자리에 있어 주기만 해도...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그녀는 아 름다운 정원 같은 존재였다. 문 앞에 서 있던 세르네긴은, 방을 찾아온 슈마허와 마주보는 중이 었다. 슈마허는 팔짱을 끼고는 세르네긴에게 빈정대듯 물었다. "왕자님 호위는 할만 한가?" "처음 해보는 거라 당연히 서툽니다." 슈마허는 문을 가리켰다. "혹시 만나 볼 수 있어?" "공주님께서 안에 계십니다. 그리고 전 쫓겨났고요." 그제야 슈마허가 심각한 눈으로 세르네긴을 바라보았다. 세르네긴은 덧붙여 말했다. "잘 들리지는 않지만.....한가지 확실한 건, 당신은 채였습니다." 슈마허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봐, 세냐...." 별일도 아닌데 아명이 나오자, 세르네긴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사실, 그렇게 부른 것도 순전히 세르네긴을 한번 긁어보고 싶었던 슈마허의 심술일 뿐이었다. "...어쨌든 당신은 벌써 서른 넷이고, 저 공주님은 열 아홉입니다. 정신 차리세요." "그 정도 나이 차 나는 결혼은 얼마든지 있어. 저 꼬마녀석 아버지 만 해도 나이 서른 셋에 열 여덟 살 소녀에게 장가갔잖아." 그리고 슈마허는 세르네긴의 가슴에 손을 갖다대고는 말했다. "그리고 나나 저 꼬마 아버지나, 다 큰 여자에게 눈독들인 거다. 하 지만 너는 유즈를 처음으로 본 건 갓난아기 때고, 마지막으로 본 건 그 아이가 고작 열 두 살일 때였다. 그런 물정 모르는 꼬마에게 스 물 한 살씩이나 먹었던 녀석이 세냐가 최고야, 어쩌고 하고 세뇌시 킨 거야 말로 범죄라고 보는데?" "......" 세르네긴이 입을 다물자, 슈마허는 흐뭇하게 승리를 자축했다. *********************************************************** 작가잡설: 세르네긴은 지금 스물 넷입니다. 오홍오홍.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14장 ************************************************************** [겨울성의 열쇠] 제62편 해방된 분노#3 ************************************************************** "뭐--?" 공작부인은 남편의 소식에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그리고 오늘 소집된 회의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자세히 듣게 되자, 아예 실신할 지경이었다. 그녀는 곧 '아내'로서 무엇을 해야 할지 궁리했다. 이대로 나간다면, 분명 그 켈브리안 공주가 등극할 것이다. 그러면 그녀는 가장 먼저 어머니를 찾으려 할 테고, 왕비가 어디 있는 지는 공작 부인만이 알고 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어쨌든 남편의 목숨만 은 구해 내야 한다는 것이다. 살아만 있다면 다음 기회를 노려 볼 수 있고, 운이 좋다면 안드레아가 켈브리안 공주와 결혼하여 집안을 구할 수도 있다. 지금은 최선을 다해 남편을 구출할 궁리만 해야 한 다. 공작부인은 재빨리 채비를 갖추고는 마차가 아닌 말을 준비시켰다. 그곳으로는 마차를 들일 수 없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말 타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호위를 부를까 했지만, 행여나 그들이 배신을 하여 왕비가 어디 있는 지 공주에게 알리기라도 한다면 모 든 일이 수포로 돌아가 버린다. 지금 그레코 공작부인은 모두를 의 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검은 망토를 입고, 베일과 후드로 얼굴과 머리카락을 가리고 는 은밀히 저택을 떠났다. 그 품안에는 그녀 자신이 써 놓은 편지가 있었고, 그것은 공작의 구명을 바라는 내용이었다. 그 위에 그녀는 왕비의 친필 서명을 넣어, 왕비가 살아 있음을 알리고 공작과 왕비 를 바꿀 생각이었다. 그레코 공작부인은 주변을 계속 의심 가득한 눈으로 둘러보며 롬파 르를 벗어났다. 이제 완전히 검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어, 그녀는 두 렵기는 했으나 남편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꾸욱 참으며 롬파르 교외의 숲으로 향했다. 울창한 숲은 깊이 우거져 있었고, 밤이 되자 곳곳에서 밤새 우는 소 리가 들려왔다. 램프 하나 없이 허겁지겁 나왔기 때문에, 공작부인 은 잔뜩 몸을 웅크리고는 숲을 지나야 했다. 베일이 나뭇가지에 걸 려 찢겨졌고, 가지에 드레스가 긁히기도 했다. 주인이 불안해 하니 말도 덩달아 헛발질을 하곤 했다. 그리고 한참을 지나, 그녀는 드디어 어느 낡은 성을 발견할 수 있었 다. 엔리케 3세가 이 숲으로 사냥을 나오면 그곳에 머물곤 했었으나, 티 폴라 여왕치세 동안 완전히 버려지고 잊혀진 곳이었다. 그레코 공작부인은 말에서 내려서는 품안에서 종을 꺼내 흔들었다. 딸랑, 딸랑--그렇게 처음 두 번은 짧게, 다음 두 번은 길게 간격을 두어 흔들자 안에서 탁탁 짧고 가벼운 발소리가 들리더니 남자 두 명이 달려나왔다. 공작부인은 침착하게 말했다. "왕비전하는 안녕하신가." "물론입니다." 공작부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천천히 성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컴컴했다. 행여나 불을 밝혀 누군가 이곳에 머물고 있다는 것 을 들킬까 해서, 왕비를 이곳에 가두고 두 명의 감시를 붙여 놓고는 엄격하게 경고해 놓았던 것이다. 곧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더 니, 달빛 쏟아지는 홀로 모습을 드러냈다. 어린 소녀로, 왕비를 이곳 에 가두어 놓은 다음 시녀로 붙여 놓은 아이였다. "안내 해 주렴." 그러자 소녀는 말없이 공작부인의 손을 잡더니 어둠 속으로 이끌었 다. 며칠 새에 이 컴컴하고 작은 집 안을 돌아다니는 데 익숙해 진 것이다. 소녀는 어느 방안으로 그녀를 이끌더니, 문을 닫고 불을 켰다. 그 방은 창이 없는 작은 방이라, 불을 켜도 괜찮았다. 공작부인은 소녀 에게 나가라 명했다. 소녀는 공손히 답하더니 밖으로 나가 문을 꼬 옥 닫았다. "전하." 그러자 방 구석진 곳에 놓인 침대에서 부스럭 소리가 들리더니 그 녀가 몸을 일으켰다. 감금 생활보다는, 그녀가 두고 온 아들에 대한 걱정 때문에 초췌하 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고, 눈은 분노로 이 글거린다. 그녀의 두 손은 쇠사슬에 묶여 있었고, 손목은 쇠사슬을 벗으려고 안간힘을 썼던 지 상처와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당장에 험악하게 욕을 퍼부어 댈 거라 생각했었는데, 왕비는 차갑게 말했 다. "무슨 일인가." "사고가 일어나서요." 브리올테가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그레코 공작부인은 영리했다. 무 엇을 말해야 이 왕비가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 줄지 잘 알았다. "대단한 따님을 두셨더군요, 전하." "켈브리안....그 아이가 왜?" "당신이 사라지자마자, 제가 왕이 되겠다고 나서더군요. 호위대와 근위대를 어떻게 구워삶아 놨는지 모르겠는데, 모조리 제 편으로 만 들어 놨어요." 그제야 왕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뭐.....가만, 우리...우리 베르티노는! 베노는......그 아이는 어떻게 되 었지?" "그 가엾은 왕자, 정말 왕이 되어야 하는 그 어린아이는 제 누나 손 에 잡혀 있어요. 당신이 없는데, 그 왕자가 무슨 힘이 있겠어요." 왕비가 표독스레 쏘아붙였다. ".....거짓말 마." "제가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어요. 제 남편도 당신 딸 손에 잡혀 있 으니까요! 잘못 하다가는, 국왕폐하를 죽인 게 제 남편이라고 뒤집 어 씌워서는 치워 버릴 거라고요. 우리 집은 당장 폐문 될 테고요. 이러니, 제가 어떻게 거짓말을 하죠?" "...." 왕비의 눈은 여전히 독수리처럼 사나웠다. 공작 부인은 왕비의 성격을 잘 알았다. 그녀의 가장 큰 단점인 허영 심을 어떻게 달래야 뜻대로 넘어 올지도 안다. "전하, 전하는 현명하신 분이라고 알고 있어요. 그러니, 제가 이렇게 직접....그것도 저 혼자 급히 온 이유를 짐작하실 거라 생각해요. 지 금 제 남편이 위험하고, 전하의 아드님이신 베르티노 왕자님도 위험 해요! 공주가 왕이 되려 하고 있는데, 예전부터 왕위 계승자로 낙점 되었던 베르티노 왕자가 어찌 될지는.....전하께서 가장 잘 알 거예 요. 알잖아요. 티폴라 여왕이 누구부터 내 쫓았는지." 그레코 공작 부인은 최대한 다급한 척 하면서 간절한 눈빛으로 왕 비를 바라보았다. 속으로야, 왕비가 얼른 친필 서명만 해 주면 된다 생각할 뿐이었다. 그리고 이 왕비가 궁으로 돌아가서 어머니와 동생 을 구하기 위해 그 위험을 무릎 쓴 공주에게 되려 큰 소리를 쳐서 눈총이나 받기를 빌었다. 엉뚱하게 켈브리안 공주가 여왕이 되는 건 화가 났지만, 이 보기 싫은 왕비가 큰소리 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낫 다. 다행히 감금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왕비는, 조급하고 경솔해져 있었다. 그녀는 주먹을 꾹 움켜쥐고는 이를 악물었다.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 지, 공작부인은 쉽게 짐작이 되었다. 그 머릿속에 서 상황은 정말 엉뚱하게 변질되어 있을 것이다. 좀 더 영리하다면 이러저러한 질문을 툭툭 던져서 공작 부인이 거짓말을 하는지 알아 볼 테지만, 지금의 왕비에게 그런 것은 무리다. 역시나 브리올테가 "이 망할 계집애가!" 하고 날카롭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전하께서 궁궐로 돌아가셔야 해요. 전 그저 제 남편만 제 곁으로 돌아오면 되고요." "뭘 어떻게 해 주면 되는 거지?" 공작부인은 품안에서 편지를 꺼내 내밀었다. 브리올테 왕비는 그것 을 낚아채 펼쳐보더니 샅샅이 훑어보았다. 그 안에는 그저 '당신이 등극하면...' 비슷한 말 밖에는 없었다. 누가 봐도 공주가 여왕으로 오르려 한다고 생각할 것이며, 그건 사실이기도 하다. 왕비가 부르르 떨더니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공작부인은 재빨 리 준비해온 펜을 내밀었다. 왕비가 물었다. "서명만 하면 되는 건가?" "네." 왕비는 한번 공작 부인을 쏘아보더니, 펜을 빼앗아들었다. 공작부인 은 휴대용 잉크병을 내밀었다. 왕비는 잉크를 한번 적셔 편지 아래 에 서명을 했다. 그녀가 서명을 마치자, 공작부인은 한껏 고마움을 표시하며 공손히 말했다. "감사합니다. 제 남편의 목숨이 걸린 문제이니, 정말로 최선을 다하 겠어요. 믿어 주세요." 그러나 왕비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저 배신감에 몸을 떨며, 분을 삭히지 못해 씨근거릴 뿐이었다. 그 때 쿵쿵--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냐!" 공작부인은 잽싸게 편지를 접어 품안에 밀어 넣고는 외쳤다. "마, 마님......저, 접니다." 시중들던 소녀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와들와들 떨리고 있었고, 곧 크흡--하는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공작부인은 새파랗게 질려서는 허둥댔다. "무슨 일...." 그 때 문이 열렸다. 허공에 목이 움켜잡힌 소녀가 흔들리고 있었고, 공작부인이 입을 틀어막으며 뒤로 물러났다. 축 늘어진 몸이 그녀 옆으로 툭 내 던져졌다. 다행히 소녀는 죽은 것은 아니라, 그저 기 절해 버렸을 뿐이었다. 소녀를 던진 남자가 성큼 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큰 키에 짧게 친 금발 머리를 가진 자였다. 그는 공작 부인을 발견하자 차림새를 훑어보고는 말했다. "브리올테 왕비전하이십니까?" "저, 저는 아닙니다." 잘 들어보니, 남자의 억양에는 제국의 날카로운 발음이 섞여 있었 다. 남자의 시선이 침대 뒤에 있는 왕비를 향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한 미소를 짓더니 공작부인에게 다가와 손을 휘둘렀 다. 퍽--! 그레코 공작 부인은 신음한번 내 보지 못하고 그대로 기절해 버렸 다. 브리올테는 새하얗게 질려서 뒤로 주춤 주춤 물러났다. "누, 누가 보낸 거지?" "안심하십시오. 전하를 풀어 드리기 위해 왔을 뿐입니다. 말을 준비 해 놓았으니....아, 말 타실 줄 아십니까?" 브리올테는 떨면서도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아, 알고 있어." 남자가 웃더니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녀의 손이 쇠사슬 에 묶여 있다는 것을 알게되자, 작게 탄식을 하더니 말했다. "밖으로 나오십시오. 풀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브리올테 왕비는 그 기사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마당에는 목과 허 리가 끊어진 시체가 나동그라져 있었다. 브리올테는 흠칫 놀라서는 몸을 움츠렸다. "모시고 나왔나." 그 목소리에 브리올테는 깜짝 놀랐다.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였고, 그것은 그녀로서는 달갑지 않은 어떤 꼬마의 것이었다. 설마, 해서 브리올테는 목소리가 들렸던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바짝 마른 몸집의 마법사가 서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아 닌 듯 해, 흘끔 옆을 보니 어둑한 곳에 늘씬한 체격의 소년이 있었 다. 밤이라 아주 어두웠지만, 얼굴 윤곽은 거의 차 오른 달빛에 젖 어 푸릇하게 드러나 있었다. "아킨토스?" 소년이 웃었다. 그제야 브리올테는 그 소년의 머리카락이 까맣고, 눈동자 역시 어둠에 젖어 검은 색으로 보이는 것을 발견했다. "설마....휘안....토스 프리엔 왕잔가요?" 그러자 휘안토스는 고개를 살짝 숙여 예를 표했다. "맞습니다, 브리올테 왕비 전하." "다, 당신이 어째서......." "도와드리려고 왔습니다. 당신의 처지는, 방금 전 그 귀부인께서 다 전해주셨으리라 압니다...." 다시 딸의 괘씸한 짓거리가 생각나, 화가 팍 치밀어 올랐다. 순간, 휘안토스가 검을 뽑아 들었다. 하얗게 검이 번득이더니, 곧바 로 왕비의 목을 향해 날아왔다. 금발의 젊은 기사는 정중한 태도는 싹 걷어치우고는 옆으로 물러났다. 차가움 검 날이 목에 들러붙자, 브리올테는 비명조차 막혀 벌벌 떨 뿐이었다. 휘안토스가 찬찬히 검을 당기며 왕비 가까이 오더니 말했다. "나오시오, 마법사." 브리올테는 휘안토스를 흘끔 보았다. 그 눈동자는 어둑어둑한 숲 속 을 향하고 있었고, 같이 그곳을 보니 잠잠하던 숲이 흔들거리며 그 안에서 작고 흉측한 그림자가 튀어 나왔다. 금발 기사의 눈에 끔찍하고 혐오스럽다는 빛이 확 치밀어 올랐다. 냉정한 휘안토스 역시 잠깐 눈을 찌푸렸다. 그러나 브리올테는 눈이 젖어버렸다. 보호자를 만난 길 잃었던 아이처럼, 기쁨에 겨운 목소 리로 그를 불렀다. "오라버니--!" 금발의 기사가 놀란 눈으로 왕비를 보았다. 그런데 휘안토스가 검을 빠르게 당겼다. 그 흉측한 자가 발을 멈추 었고, 겁먹은 애 같은 눈으로 휘안토스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약속했던 대로.....당신의 누이를 찾아 드렸으니, 당신 역시 저 마법 사가 부탁했던 것을 분명히 지켜 주시길 바랍니다." 그 작고 흉측한 인간은 다시 커다란 게처럼 엉금엉금 걸어오며 말 했다. "알다 마다.....!" 휘안토스는 검을 치우고는 검 집에 꽂아 넣었고, 힘이 빠진 브리올 테는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탈로스는 그 앞에 무릎을 구부려 앉고는, 브리올테의 손을 움켜쥐고 있는 족쇄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그러자 철그럭 소리가 짧게 들 리더니, 족쇄가 갈라지며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달빛에 흉측하게 긁힌 왕비의 상처가 드러났다. 탈로스는 그 손목의 상처를 이글거리 는 눈으로 보며 갈라지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 "난 에크의 남자야. 혈육의 목숨으로 빚진 약속은 생명과 같은 무게 를 지닌다." 휘안토스가 웃었다. "그럼 믿겠습니다, 탈로스 고르노바." 그 이름에, 휘안토스를 따라왔던 마법사의 눈이 커졌다. "설마, 전능의....." 순간 탈로스가 험하게 노려보자 마법사는 입을 딱 다물었다. 그러나 시퍼렇게 질린 젊은 마법사의 이마위로 식은땀이 솟아 나왔다. 휘안토스가 말했다. "어서 궁궐로 돌아가십시오. 성으로 들어갈 때까지는, 제 기사들이 호위할 것입니다." *********************************************************** 작가잡설: 사악목 악독과 겨울키속 휘안토스. 유사종으로는 음흉목 능글과 폭탑속의 로드릭이 있습니다... 그리고, 슈마허와 사이러스는 로리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들 은 그저 과하게 뻔뻔한 중년일 뿐. 정말 간크고도 흉악한 범죄자는 세 르네긴입니다......그가 스물 하나일 때 유즈는 열 둘. 스물일 때는 열 하나. 열 아홉일 때는 열. 열 여덟, 드디어 남자로써 눈을 뜨기 시작할 때......는 아, 홉, 살! 입니다. (....)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14장 *************************************************************** [겨울성의 열쇠] 제63편 해방된 분노#4 **************************************************************** 뒤척거리던 켈브리안은 결국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두 세시간 정도는 잠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무리였던 것 이다. 아직도 온 몸이 곤두서 있었고, 뻑뻑한 신경은 도무지 편하게 늘어지지 않았다. 창으로 밤하늘을 보니, 파릇한 것이 새벽까지 그 리 멀지 않은 듯 했다. 켈브리안은 시녀를 부르지 않고, 손수 옷을 챙겨 입었다. 깨끗한 옷을 입는 것도 사실 며칠 만이었다. 그것만으 로도 편해져야 하는데, 지금 너무 많은 것이 불편했다. 불안한 걸까, 하지만 다 잘 되었는데....아직도 불안해 할 이유는 없 잖아. 지금 필요한 것은 불안해서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아니라, 차 분하게 두 손을 모으고 현명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아직 어머니를 구하지는 못했다. 끝난 게 아니니, 불안해서 절망할 필요도 없는데....아니, 그래서도 안 되는 데..... 그 때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켈브리안은 그가 오기를 기 다리지 않고 먼저 침실의 문을 열었다. 침실 양옆을 지키던 호위기 사 둘이 허리를 숙였다. 켈브리안은 얇은 드레스 차림으로 침실 밖 으로 나섰고, 시녀가 달려오더니 문을 닫았다. 곧 바깥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요." 문이 열리자마자, 호위기사의 제복을 입은 남자가 나서더니 무릎을 꿇었다. 켈브리안은 몸이 으스스 해져와, 어깨를 움츠려 당기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죠?" 기사는 머리를 깊이 조아리며 말했다. "왕비전하께서 당도하셨습니다!" 다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소름이 쭉 끼쳤다. 기쁨도, 놀라움도, 없었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데 오히려 기괴하고 차가운 공포가 몸을 훅 뚫고 지나갔다. 켈브리안은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며 급히 물었다. "지금 어디 계시지?" "은의 방에 계십니다." "안으로 모시지 않고....!" "하지만 그리 하겠다 명하셔서...." 켈브리안은 치마를 걷어올리고는 내궁을 나섰다. 어떻게 된 거지? 공작 부인은 바보가 아니다. 그런데 그녀가 남편이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어머니를 보내 주었을 리 없다. 무슨 다른 생 각이라도 있는 건가, 아니면 먼저 어머니를 보낼 테니 남편을 보내 달라고 허리를 숙이는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어머님 혼자 힘으로 도망쳐 오신 걸까? 답이 무엇이든 간에, 공주는 이상하게도 몸이 오 싹 오싹 했다. 벌써 여름이 가까워지고 있는데, 한기를 참을 수 없 었다. 그것은 왕비가 있는 은의 방으로 향하며 더욱 강해졌다. 마치 겨울 로 향하는 길을 걷고 있는 듯, 온 세상이 무섭게 추워지고 있었다. 흰 갈기를 날리는 두 마리의 말과 두 탑이 새겨진 '은의 방' 문이 두 호위기사들에 의해 밀쳐지자, 켈브리안은 정말 한 겨울로 들어선 듯 했다. 그건 겨울의 문이었다. 온 몸이 얼어붙을 듯한 냉기에, 켈브리안은 정말 몸을 떨고 말았다. "켈브리안-" 엄격한 목소리가 들렸다. 켈브리안은 고개를 들어, 은의 방에 놓인 긴 의자에 몸을 기울이고 있는 왕비를 마주보았다. 며칠 동안 갇혀 있어, 무섭도록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그 숱 많은 갈색 머리카락은 묶지 않아 흐트러져 어깨와 허리를 넘쳐흘렀으며, 살결은 눈으로 된 듯 창백했다. 그리고 그녀의, 켈브리안과 닮은 그 연푸른 눈동자가 얼음처럼 매섭고도 차갑게 켈브리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머니! 어찌 되셨던 거죠?" 켈브리안은 어머니를 다시 보면 눈물이 날 거라 생각했었다. 그래도, 사실 티폴라 여왕의 그 모진 학대를 같이 견뎌왔던 어머니 가 아닌가. 베르티노가 태어난 후 급하게 멀어진 둘이지만, 그래도 그녀를 자신의 힘으로 구해내면 그녀의 사랑이 다시 오지 않을 까 막연하게나마 기대했었다. 그러나 저 매서운 증오와 분노에 얼어붙은 눈은 대체 무엇인가. 눈 보라로 된 괴물인 듯한 저 여인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켈브리안은 확인이라도 해보고 싶다는 듯 말했다. "어머니...?" "그 동안 수고했다, 얘야." 켈브리안은 애써 웃어 보였다. "어머님과 베노를 위한 일이었지요.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 다." "그럼, 다행이고 말고. 조금 고생하기는 했다만, 그래도 이렇게 궁에 있으니 꿈만 같구나." 그렇게 말하는 어머니의 눈이, 마귀처럼 무시무시했다. 켈브리안은 다시 소름이 끼쳐오는 것을 느끼며, 그러나 차분하게 말했다. "어머님께서 돌아오셨으니, 이제......." 그저 아버지의 장례를 성대히 치르자는 말을 하고, 같이 슬퍼하자고 말하고 싶었다. 어머니가 얼마나 아버지를 무시했는 지 잘 알고 있 었으나, 그래도 베르티노와 켈브리안의 아버지였다. 근 20년 간 그 녀의 남편이었다. 그러니 우선은 그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브리올테가 차갑게 웃었다. "물론 내 할 일이 무엇인지 알다 마다. 이제는 나를 그 끔찍한 곳에 가두어 두고, 사랑스런 베르티노와 생이별하게 했던 작자들을 처단 해야지." 켈브리안은 놀라서는 급히 말했다. "어머니! 아무도 죽지 않았어요. 어머님은 무사히 돌아오셨고, 베노 도....놀라기는 했지만 무사해요. 아무도 죽여서는 안 되요. 아무도- 그랬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어요." "그렇게 약해 빠져서 어떻게 여왕이 되려 했니, 켈브리안." 그렇게 말하는 어머니의 눈빛은, 켈브리안이 보기에는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켈브리안이 본 것은 먼 옛날, 죄 없는 켈브리안의 뺨을 후려갈기며 바닥에 내동댕이치던 그 마귀 갔던 티폴라 여왕의 눈과 똑같은, 그 두 개의 미친 눈동자였다. 맹목적인 분노, 그리고 그것이 토해내던 광기와 잔학함. 그것이 그녀의 주변으로 쏟아지는 눈보라처럼 한꺼 번에 모여들고 있었다. 왕비가 말했다. "모두 죽일 거야. 내게는 그럴 힘이 있고, 권리도 있어." 이젠 안 되겠다, 싶어서 켈브리안은 뒤돌아 서며 외쳤다. "밖에, 밖에 누구 없어! 어서....." 어서 어머님을 진정시켜 달라 말하려 하는데, 문 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오싹할 정도로 흉측한 남자였다. 덤불 같은 갈색 머리에, 연푸른 눈 동자가 끔뻑이며 켈브리안을 향했다. 켈브리안은 신음을 삼키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한기는 너무도 거세 어, 턱이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켈브리안은 떨리는 손을 입 위로 가져가 꾸욱 눌렀다. 무서운 것은 그 흉측함이 아니라, 빛이 튀어 오를 듯한 무시무시한 안광이었다. 앞의 켈브리안을 당장에 갈기갈기 찢어 삼킬 듯한, 어 마어마한 불꽃을 쏟아내고 있었다. 브리올테 왕비가 몸을 일으키더니 다정하게 말했다. "인사 드리렴, 켈브리안. 네 외숙부, 탈로스 고르노바 님이란다." 순간, 켈브리안의 머릿속에 단 하나의 이름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맙소사, 아키-! 아킨은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꽤 잔 듯 했지만, 하늘은 아직도 검 었다. 달은 벌써 진 듯 했고, 별들만이 무수히 반짝이고 있을 뿐이 었다. 저 앞에는 세르네긴이 침대가 잘 보이는 곳에 소파를 가져다 놓고는 잠들어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긴다면 얼마든지 벌떡 일어날 수 있다 말하고 잠든 것이다. 그 옆에는 긴 검이 세워져 있었고, 세 르네긴 역시 몸을 편안히 눕히지는 않은 채 금방이라도 일어날 듯 비스듬히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아주 잠깐 지났다 싶었는데, 갑자기 세르네긴이 눈을 떴다. 그의 눈 이 가만히 천장을 향하며 한번 깜빡이고, 다시 깜빡이고-- 아킨이 말했다. "저도 눈치 챘습니다." 세르네긴은 퉁기듯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뽑아 들었다. 스윙-! 검이 하얗게 번득이더니, 무언가를 둔탁하게 쳤다. 그 곳을 향해 손을 뻗 으며 아킨은 빠르게 외쳤다. "비자트....!" 빛이 확 터졌다. 큰 동굴에서 바람이 몰아치듯 쿠어어어--! 깊고 큰 울림이 퍼지더니, 그 빛을 따라 바닥에 길게 늘어붙은 것들이 모습 을 드러냈다. 그것은 형체없이 부유하고 있었지만, 그 위로 눈동자 같은 두 개의 새카만 구멍들이 있었다. 그리고는 흐르듯 움직이며 아킨과 세르네 긴을 감싸려 하고 있다. 세르네긴은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러, 우유 빛으로 드러난 그것의 중앙에 푹 찔러 넣었다. 뒤에서 다른 것이 빠르게 다가오자, 검을 고쳐 잡고는 세게 휘둘렀다. 검 주변으로 뿌연 빛이 스며 나왔다가 사라지고, 그 기이한 것들은 연기처럼 풀썩 풀썩 사라졌다. "잠시만 버텨요, 세르네긴!" 아킨은 침대에서 뛰어 내려 방의 구석진 곳을 향해 달려갔다. 허연 그림자가 다시 다가왔으나, 아킨은 주먹을 휘둘러 그것을 쳐냈다. 물컹한 개구리라도 쳐 낸 듯 했다. 차갑고도 오싹한 느낌이 살갗에 들러붙더니 속으로 스며들었다. "위클러....프로텐...!" 그러자 몸 안으로 스며들었던 그것이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것이 빠져나가자, 몸의 기운 역시 같이 약해져 가는 것만 같았다. 다시, 세르네긴이 검을 휘둘러 또 하나를 해치웠다. 아킨은 재빨리 구석진 곳에 서, 바닥에 손을 얹었다. "프로키 비쟈트-" 뭐가 탁, 날카롭게 터졌다. 그리고 그곳을 중심으로 하얀 번뜩임이 둥글게 쫘악 퍼지며 방 끝까지 와 닿았다. 뿌연 괴물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세르네긴은 다른 하나를 쳐내려다가 사라지는 바람에 허 공을 치고 말았다. "세르네긴." 아킨이 부르자, 세르네긴은 검을 내린 채로 차분하게 말했다. "슈마허 님께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궁궐 안까지 이런 것들이 들어 올 정도라면.......아주 큰 일이 터진 겁니다." 다시, 큰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세르네긴이 검을 한번 붕 휘둘러 고쳐 잡았다. "....우선은 한 번 더 치워야겠군 요, 왕자." *********************************************************** 작가잡설: 늘 그렇듯....주인공은 고생을 좀 해야 하는 법입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15장 ************************************************************** [겨울성의 열쇠] 제15장 어둠 속의 습격 제64편 어둠 속의 습격#1 *************************************************************** "롬파르로 갑니다." 벌써 후끈해지는 초여름임에도 두터운 후드를 깊게 둘러쓴 남자가 말했다. 달눈 호의 선장인 체구 단단한 노인은 그 청년을 유심히 바라보며 파이프의 연기를 빨아 들였다. 청년은 키는 컸고 다리도 아주 늘씬 하게 길었다. 피부색은 나프 인처럼 갈색이었으나, 그 콧날이라든가 턱선이 이루는 인상은 노인에게 문득 옛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누군가와 좀 닮은 것 같네, 청년." 청년의 눈빛이 번득이듯 날카로워졌다. 분명 스스로 인정은 하고 있 으나, 애써 잊거나 부정하고 싶어하던 것 같다. 누구와 닮았는지 본 인이 가장 잘 알 것 아닌가. "후드를 벗어 주게나. 그것으로 뱃삯을 대신 할 수도 있으니." 청년이 노 선장의 의도를 짐작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노인을 물끄러미 보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것으로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곳까지 데려다 주시기만 하면, 지금이라도 돈을 내겠습니다." 그러나 선장은 엄격하게 말했다. "벗지 않겠다면 태워 줄 수도 없네." 마지못해 청년이 후드를 벗었고, 길게 뻗은 귀가 햇살 아래 훤히 드 러났다. 크지 않은 갑판 위에서 여기 저기 게으르게 늘어져 있던 선원들이 몸을 일으켰다. 몇몇 호기심 많은 이들은 호오--하고 작게 탄성을 지르며 선장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청년, 자켄은 그 사람들을 매섭게 바라보며 말했다. "엘프는 태우지 못하는 겁니까." "엘프를 태우지 못하는 법은 없고, 대공왕의 아들을 태우지 못한다 말할 정도로 간 큰 선장도 없지." 그 말에, 자켄을 바라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재빨리 먼 곳으로 도망 가 버렸다. 자켄은 불쾌했지만, 사정이 급했다. 여기 저기 다른 배에 기웃거리며 눈에 뜨이는 것도 질색이었고, 사실 그 시간마저 아까웠 다. "그럼 태워 주시는 겁니까?" "타게. 다리를 내려 줄까?" "필요 없습니다." 자켄은 몸을 날려 큰 새처럼 갑판 위로 훌쩍 뛰어 들었다. 그의 품 안에 있던 팔뚝만한 새가 혼비백산해서는 튀어 나왔다. 짙은 회색 빛의 올빼미로, 밝은 빛 속으로 나오자 방안에 들어온 나방처럼 정 신없이 푸드덕 날아다녔다. 자켄이 손을 내밀고는 뭐라 중얼거리자, 녀석은 그제야 차분하게 방향을 잡더니 그의 팔뚝위로 날아와 앉았 다. 자켄은 올빼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그 이마에 손을 멈추 었다. 올빼미는 푸드득 솟구쳐 오르더니 바다와 가장 가까운 숲으로 훌훌 날아갔다. 배는 곧 출항했다. 자켄은 배의 갑판에 서서는 멀어지는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많은 곳을 유랑했던 그였지만, 이렇게 대지로부터 완전 히 떨어져서는 물만 출렁이는 바다 위를 가르는 배에 탄 것은 처음 이었다. 강을 타고 내려갔던 적은 몇 번 있으나, 그래도 강은 아무 리 넓다 해도 양옆으로 소리 없이 따라오는 대지와 숲이 있었다. 선장이 다가오자, 자켄은 빠르게 말했다. "일을 해야 한다면 하겠습니다." "숲의 요정에게 뭘 시켜. 게다가, 로메르드에는 겨우 닷새면 닿고." 마법사가 있다면 그 시간은 하루 정도로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이 배는 평범한 상선이었을 뿐이고, 걸릴 만큼 걸린 다음에야 로메르드 에 도착할 수 있다. "저는 절반은 인간입니다.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반은 숲의 일족이고, 그 나머지 반은 국왕폐하의 혈통이지. 그러니, 이 소심한 노인네는 자네에게 절대 일을 시킬 수 없고, 시키고 싶지 도 않아. 영 미안하다면, 돈이나 두둑이 내면 되는 거고." 결국 자켄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왕에게 대공비 전하 이외의 여자에게서 난 아들이 있다는 것?" 자켄은 고개를 끄덕였다. 선장이 킬킬 웃었다. 주름이 더욱 깊어지 며 곳곳에 진한 그늘이 패어 들어갔고, 그 눈빛은 어딘지 심술궂어 보였다. "숨긴다고 숨겨지는 것은 없어. 특히 그런 쪽 소문이란 것은, 틈새 가 좁을수록 더욱 빨리 빠져나가게 되어 있지. 물살이 좁은 바위틈 을 통과할 때 더욱 빨라지듯 말이야. 왕의 숲에 나타난 엘프에 대한 이야기는 꽤 오래 전에 퍼졌고, 그 엘프는 왕과 왕자들보다도 더 닮 았지. 그리 되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어. 왕이 예전에 어둠 숲의 일 족과 관계를 가졌다는 건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니까." 속에서 뜨거운 것이 팍 치밀어 올랐다. 관계라, 어머니가 그 사람에 게 준 것이 조금이나 있었을까. 바실리카가 말했었다. 그저 호기심이었을 거야, 하고. 호기심 많은 엘프 소녀는 그저 숲으로 사냥 나온 인간 남자에게 흥 미를 느꼈던 것뿐이다. 젊은 인간의 왕은 차갑고 잔혹했지만 적어도 아름답기는 했다. 땀에 흠뻑 젖은 검은 야생마처럼 거칠고 위험하 나, 기이하게 매혹적인 그런 분위기 말이다. 그녀는 그늘에 숨어 그 를 지켜보았고, 일족에게 곱게 보호되기만 해서 무서운 것 모르던 소녀에게 조심성이 있을 리 없다. 소녀는 너무 오래 왕을 지켜보았 고, 그 호기심과 부주의의 대가는 지독했다. 왕은 소녀를 보자마자 야만인처럼 포획했고, 그에게 그녀는 그저 놀랍고 희귀한 사냥감이 었을 뿐이었다. 그는 살찐 사슴의 배를 가르듯, 곰과 표범의 가죽을 벗기듯, 그녀를 약탈했다. 갈가리 찢고, 짓밟고, 집어 삼켰다. 그리하여 그는 자켄을 태어나게 했고, 그녀를 시들어 죽게 했으며, 숲을 진노케 했고, 저주받았다. 자켄이 그런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는 선장이 말했다. "정말 사이러스 님과 닮았군. 특히 입매가....." "저도 압니다." 어린아이에서 소년이 되고, 청년이 되어가며, 샘의 수면이 비추어내 는 자신의 모습을 또 보았다. 그리고 거의 다 큰 열 일곱 살 되던 해 그와 얼굴을 마주하며 분명하게 확인했고, 그 눈동자에 기이한 빛이 서리는 것을 보며 그 역시 자켄과 같은 것을 알게 되었다 짐 작했다. 둘은 닮아도 너무 닮아 있었다. "그와 만난 적이 있습니까?" "한번. 내가 서른쯤 되던 해였지. 툴칸과의 해전에서 승리했을 때, 온 산 파로이 사람들이 그의 개선식을 지켜보았었거든. 그 때 자리 를 잘 잡아서 왕을 아주 가까운 곳에서 볼 수 있었어......" 자켄은 노인이 아주 자랑스러워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런 기회를 가진 것을 어디서든 자랑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아주 예전, 산 파로이의 사이러스를 찾아가는 중에 묶었던 여관에서 만난 바드도 저런 눈으로 자켄을 보았다. 그 역시 암롯사 출신이었 고, 자켄의 외모에 흥미를 표하며 다가오더니 그의 긴 귀를 보고는 손바닥을 탁 쳤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는 잘 모르오, 하고 자켄이 말하자 그 바드는 밤새 사이러스에 대해 이야기 해 주었다. 바드다 운 과장과 감상적인 수사를 잔뜩 붙여 놓아, 필라들이 역사를 전하 는 관습 속에서 사는 자켄마저 듣기 짜증날 지경이었다. 어쨌든, 골 자만 골라낸다면 산 파로이에서 선왕-인정하긴 싫지만 어쨌든 자켄 의 할아버지였다-대에 약해진 함대로 남쪽 바다건너 나라의 군대를 대파했고, 이웃나라의 꼬임에 넘어가 반란을 일으켰던 동생을 무자 비하게 처형한 왕이었다. 많은 전쟁을 치렀고, 승리했고, 죽였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자켄은 그날 그의 주변을 떠돌던 탁한 피비린내 의 이유도 짐작했다. 수천 수만의 피비린내가 그 주변에 엉켜 있었 지만, 그것은 그를 정복하지는 못했다. 그 핏빛 길을 걸어가는 왕 은 스스럼없이 그들을 짓밟으며 지나갔고, 그런 그는 인간으로써, 남 자로써, 형으로써는 잔학하였으나 왕으로써는 강하고 위대했다. 그 리고 그런 남자였으니, 아내와 아들을 버리고 나라를 택한 것이다. 그가 쌓아 올린 그 빛나는 위대함의 관, 그러나 그 아래에 깊이 고인 피의 늪. 영광은 너무도 찬란하고, 그 자신도 빨아 들일 지 모르는 피의 늪은 더욱 더 두려웠기에, 그는 제발 가엾은 아들을 위해 다른 것을 다 포기해 달라는 아내의 애걸을 거절했고, 아들과 아내를 포 기했던 것이다. 그렇게 그는 어리석었다. 자켄은 밤에 혼자 있을 때 그 일이 생각나면 그리 중얼거리곤 했다. 아내와 아들을 위해, 자켄에게 가진 것 모두를 다 줄 테니...제발 그 저주만을 거두어 달라고 했으면 됐다. 모두의 어머니, 숲의 사제의 장이자 위대한 일족의 왕이었던 그녀는 사실, 그를 용서해 줄 생각이었다. 아델라이데에게 그런 몹쓸 짓을 해서 죽게 했으니, 그 고통을 자신의 죄과라 생각하며 눈 질끈 감 고 감수한다면 용서해 줄 생각이었다. 그녀는 분노했으나 증오하지 는 않았고, 엄격했으나 집요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그렇게 할 테니 그 저주만은 풀어 달라고 말하고, 정말 돌아 가서 그렇게 했다면 그는 다시 행복해 질 수 있었다. 그렇게 단 하루라도 그가 죽게 한 가엾은 엘프 소녀를 생각해 주었 다면, 자켄을 단 하루라도 아들로 생각했다면, 그는 그토록 사랑했 던 아내의 애정과 아들의 일생을 모두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어차피 자켄의 절반은 숲의 일족이며, 그에게 그 넓은 영지와 지위 따위는 필요 없다. 그런 자켄에게는 숲을 떠나 인간이 될 생각이 있 을 리 없고, 모두의 어머니는 자켄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 선택을 존중해 주었을 것이다. 돛이 큰 새의 날개가 펄럭이든 바람을 받아 팽팽하게 부풀어올랐고, 배는 수평선을 향해 빠르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문 좀 열어 주시오." 슈마허는 쏘아붙이듯 말했다. 왕비의 시녀, 발라 부인은 슈마허의 행색과 눈빛에 난감해했다. 어 깨와 팔뚝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고, 거의 반쯤 벗고 있는 허리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꼴로 일국의 왕-비록 승하했지만-의 아내를 만 난다는 것 자체가 예법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굶주린 사자처럼 흉포한 눈빛을 보니, 막아서기도 두려웠다. 발라 부인은 덜덜 떨며 말했다. "마, 말씀 드리겠습니다. 쉐플런 경...." "거절하면 문을 발로 차서라도 들어가겠소." 그 말에, 양옆에 있는 호위기사들의 손이 칼자루로 다가갔다. 슈마 허는 그들이 다 듣도록 크게 말했다. "막고 싶다면 막아 봐. 누가이기나 해 보는 것도 나쁠 것 없지." 호위기사가 날카롭게 말했다. "무례하오!" "난 어차피 용병, 예의 따위는 모른다. 그리고 너희들은 검에 갑옷 까지 잘 갖추고 있다만, 내게는 상처 난 주먹뿐이라는 것 좀 알아주 면 좋겠군!" 그렇게 말하는 슈마허의 눈빛이 더욱 이글거렸다. 발라 부인이 급히 말했다. "쉐플런 경, 어떻게든 제가 잘 말씀 드리겠어요. 기다리세요." 발라 부인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여자들끼리 소곤소곤 말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녀가 다시 문을 열고 나왔다. "들어오십시오." 호위기사들이 도끼처럼 눈을 번득이며 슈마허를 노려보았다. 슈마허 는 그 둘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보이고는 방안으로 들어갔고, 호위기사들은 홧김에 정말 검을 뽑아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슈마허 는 놀란 발라 부인 대신 문을 쾅 닫아 버렸다. "어서 오세요, 쉐플런......어머나, 웬 부상이지요?" 슈마허는 그렇게 말하는 왕비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무릎 꿇기는 커녕, 고개 숙여 인사조차 하지 않으며 무례하고 뻔뻔하게 굴고 있 는데, 왕비는 무구하고도 부드러운 눈으로 슈마허를 바라볼 뿐이었 다. 실내용의 얇은 드레스 차림이었고, 몸집은 예전 보다 훨씬 말라 있었다. 그리고 눈 주위는 시커멓게 그늘까지 드리워져 있었다. "제 부하를 지키느라 이리 되었습니다." 슈마허가 퉁명스레 답하자 브리올테 왕비는 소녀처럼 까르르 웃었 다. "세상에, 대장이 부하를 지키다니...... 누가 보면 동생이나 되는 줄 알겠어요." 슈마허는 이 왕비가 어리석고 경박스런 예전의 모습을 며칠간 감금 되었던 곳에 모두 놓고 온 듯, 광기 비슷한 집착과 매서운 분노, 그 리고 그것이 집약된 복수심으로 뭉쳐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연푸른 눈은 예전과 비할 바 없이 차가웠으며, 행동거지나 말투도 그 때의 조급함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한참을 웃던 브리올테가 물었다. "그런데 왜 온 거죠?" "켈브리안 공주님을 뵙고 싶습니다. 찾아뵈려 했더니, 왕비전하의 허락을 받고 오라고 호위기사가 말하더군요." "그 아이는 지금 아파요. 며칠 뒤에 찾아 주시면 될 듯 한데요." "그건 벌써 들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공주님께 드릴 말씀은 바로 오 늘 드려야 하고, 몸져누우셨다 해도 반드시 드려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슈마허는 지금이 고약한 악몽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나 뵙게 해 주십시오." "쉐플런 경, 지금 궁이 어수선하다는 건 당신도 아시리라 믿어요. 그러니, 그 동안 제가 그토록 눈여겨보고 특별히 생각했던 경이라 할 지라도 딸아이를 만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상황이 해결되고, 간악한 무리들이 사라진다면 그리 억지 부리시지 않아도 만나실 수 있을 테니." "왕비 전하." 브리올테 왕비가 아이 타이르듯 부드럽게 말했다. "물론 경이 공주를 꽤나 좋아하신다는 건압니다. 하지만 이제 스물 된 청년도 아니신 데, 지키실 건 지키셔야 하지 않을까요." "나 역시, 스무 살 된 청년의 심정으로 그리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 '그게' 대체 무엇이었습니까!" 브리올테는 능청스럽게 되물었다. "무엇이었다뇨?" "제 부하, 세르네긴을 습격했던 그것 말입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지 모르겠어요. 롬파르의 궁은 어디보다 안전 합니다." "하, 그렇다면! 제 부상은 대체 무어라 생각하십니까. 그 어디보다 안전한 곳에서 얻은 상처인데!" "물론 반역자들에게는 위험한 것이 궁궐이지요. 설마하니, 세르네긴 포틀러스 군이 반역자라고 생각 치 않는데...." 결국 쉐플런은 옛날 버릇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주먹을 휘둘러, 벽 을 쿵 후려 쳐버렸다. 발라 부인이 움찔 해서는 몸을 움츠렸다. "전하....!" "돌아가세요, 쉐플런 경. 당신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고, 당신 이 제가 처단할 반역자에 들어가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으니 까요." 슈마허는 부르르 떨리는 입술을 꾹 눌렀다. 솔직히 말하자면 신경 쓰지도 않았던 그녀였다. 경박한 여자라 무시 하고 경멸했다. 그런데 앞의 이 여자는 며칠만에 저 속에 있는 것을 이상한 괴물이 다 먹어치우고 그 껍데기를 둘러쓰고 있는 것 같다는 오싹한 기분 이 들게 했다. 끔찍하다, 이 정도로 징그러운 인간은 나프 섬의 해 적 두목이었던 마법사와 만난 이래 처음이고, 그것보다 더했으면 더 했지 덜하지도 않았다. 왕비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세르네긴 군은 어디갔나요? 늘 옆에 붙어 다니던데..." "잠시 일 때문에 나갔습니다." "그럼 경이 지금 세르네긴 군을 불러오도록 하세요. '경의 옆'에 있 는 포틀러스 군은 절대 건드리지 않을 테니 말이에요." 슈마허는 정말 왕비를 죽여 버리고 싶었다. *********************************************************** 작가잡설: 착한 아빠 슈마허....-.-; 축구.......뭔가 맥이 빠진 경기랄까요;; 동생이랑 궁시렁 대면서 보다가, '끝났네....' 하고 일어서는 순간 터지는 골, 골, 고오 오어어어어억, 억, 억!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15장 ************************************************************** [겨울성의 열쇠] 제65편 어둠 속의 습격#2 *************************************************************** 아킨은 새벽거리를 바쁘게 달려갔다. 밤 새, 정말 정신없이 싸우고 쓰러뜨리고 이렇게 도망치는 것 같다. 피투성이가 되지는 않았다. 그것들은 머리를 번쩍이게 할 정도의 통 증은 주었지만, 흔적은 남지 않았다. 그것이 겹치다 못해 피가 터지 고 상처를 입어 버린 슈마허 같은 경우도 있지만, 세르네긴만 해도 상처가 크지는 않았다. 단지 아직 그 통증이 아직 남아 있는 팔목을 가끔씩 꾸욱 움켜쥐었다 피고는 할뿐이다. 그리고 그 방면으로 아무 능력도 기술도 없는 아킨은 그저 세르네긴에게 미안한 마음뿐이었 다. "일이 정말...." 둘은 문을 나서지 못했다. 다시 한번 그 습격자들을 쓸어버리고 나서 문을 열자마자 그들이 마주한 것은 희뿌연 연기에 휩싸인 기이한 것들이었다. 방안에서 마주했던 것과 그리 크게 다르지는 않았으나, 방금 전의 그것들이 아예 형체가 없는 연기 같았다면 그것들은 확실히 무언가, 팔이나 머리라든가 다리, 그 손에 긴 것이 쥐어져 있는 것도 보였 다. 세르네긴이 허리의 단검을 뽑아 들어 아킨에게 집어 던졌다. "마법을 쓰든 뭘 쓰든 버티세요." 아킨은 검을 받아 빠르게 돌려 잡고는, 옆을 공격해 들어오는 것에 찍어 넣었다. 그러자 다른 방향에서 뭐가 휙 날아오더니 아킨의 어 깨로 찔러 들어왔다. 그러나 차가운 것이 닿는 듯하더니, 살이 찢어 지는 듯한 엄청난 고통이 몸을 꿰뚫었다. "큿-!" 정말 팔이 떨어져 나간 것 같았다. 그러나 고통을 참아내며 정신을 차리고 보니, 팔은 그대로였다. 피도 튀지 않았다. 통증은 계속 되고 있었지만, 팔 자체는 조금 떨리기만 할 뿐 움직일 수는 있었다. 아 킨은 통증을 꾹 참아내며, 다른 부유체의 목덜미 같아 보이는 곳을 향해 단검을 찔러 넣었다. 검 날에 연기가 갈리며 그 목이 반쯤 떨 어져 나갔으나 쥐고 있는 긴 막대 같은 것-그제야 아킨은 그것이 검 모양이란 것을 알아보았다-은 여전히 빠르게 휘두르고 있었다. 다시 그것이 휘둘리며 가슴을 노렸다. 그러나 아킨은 그것은 아슬아 슬하게 피하기만 했을 뿐, 맞서지 못했다. 귀 쪽으로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쳐 왔고, 그것이 더 다급하게 느껴졌다. "프로텐-!" 짧게 보호의 주문을 읊자, 그 주변으로 우윳빛 반원이 생겨나가며 공격을 퉁겨냈다. 아킨은 뒤로 한 발짝 물러나, 허리를 움직여 힘껏 그것의 팔뚝을 잘라냈다. 그러나 고개를 숙이자, 이번에는 목 뒤쪽 에서 다시 공격이 들어왔다. 당장에 목을 물어뜯을 것 같았으나, 그 흐름의 중심은 분명 귀의 봉인을 향했다. 아킨은 몸을 뒤로 밀어젖히며, 그 흐름에 등을 바짝 밀어붙이고는 검을 휘둘러 찍어 넣었다. "비쟈트, 홀--리테!" 검에서 뿌연 빛이 뿜어져 오르더니, 부유체의 몸을 꿰뚫으며 사방으 로 터져 나갔다. 그리고 주변의 유령같은 부유체들의 목과 팔과 다 리에서 솟구치듯 빛이 터져 오르더니 뭉텅 잘려 나갔다. 저것으론 약해, 아킨은 이를 악물며 속으로 외쳤다. 너무 약하다고! 단번에 다 쓸어버려야 한다고, 단 한번에! 그리고 그렇게 강해야 해....이 딴 것들, 묶어 세우고 괴롭히려는 이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무자비하게, 남김없이 쓸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면--! 다시, 날카로운 외침이 터졌다. 끽-끽--그리고 벽과 바닥에서 그 부 유체들이 연기처럼 빠르게 스며 나왔다. 그 때 세르네긴이 바닥을 차더니 검을 휘둘렀다. 금녹색 광채 같은 것이 검의 궤적을 따라 잔광을 남기더니, 촹--얇고 날카로운 것이 서로 부딪히는 듯한 소리를 냈다. 짧은 기도문 같은 읊조림이 들려 오고, 그 금빛의 궤적이 선명해 지며 주변으로 뻗어나갔다. 부유체 들이 뎅겅 뎅겅 잘려나가고, 날카로운 울음을 토해내고는 사라졌다. 채 잘리지 않은 것을 향해, 세르네긴은 다시 큰 검을 휘둘렀다. 보 통 사람의 다리보다 긴 검을, 그는 빠르고 날카롭게 써나갔다. 아킨은 자신의 목덜미를 노리는 다른 부유체를 베어내며 저 세르네 긴이란 남자의 힘이 검술 하나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 거대한 무언가가 속에 숨어 있으며, 다채로운 면을 가진 보석 의 일면에서 빛이 퉁기듯 잠깐씩 반짝인다는 듯한 느낌이다. 그리고 아킨은 그런 그를 보며 다시 강하게, 더욱 더 진심으로 열망 했다. 길을 막으려는 것들, 방해하려는 것들, 파멸시키려는 것들로부터 자 신을 지키고 싶었다. 압도하고, 지배해서, 다시는 이런 식으로 그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단검을 휘둘러, 다시 부유체 하나를 베어냈다. 바로 앞으로 세르네 긴이 검을 휘둘렀고, 아킨은 아차 싶어 뒤로 물러났다. 순간 귓불 근처로 차갑고 축축한 것이 닿아왔다. 아킨은 다시 반대 방향으로 몸을 뒤틀어, 그 쪽으로 검을 찍어 넣었다. 그런데 갑자기 세르네긴의 움직임이 이상해졌다. 그 검의 방향이 뒤 틀렸다. 뭐에 등을 강하게 후려 맞은 듯 세르네긴의 어깨가 크게 떨 렸고, 그의 검이 위로 솟구치더니 아래로 강하게 내쳐져 왔다. 아킨 은 머리가 쪼개질 뻔한 것을 겨우 피하며 단검을 들어 검을 막았다. "뭐 하는 겁니까, 세르네긴--!" 그 큰 검의 다시 위로 올려졌다. 아킨은 그 때까지 그가 실수한 거라 생각했었으나, 그 눈빛을 보는 순간 당장에 도망치는 것이 낫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세르네긴 자신에게 분노하며 저항하는 눈이었다. 세르네긴은 어깨를 뒤틀어 검을 안으로 당기려 했으나, 결국 밖으로 퉁겨나가고 말았다. 아킨은 그의 검을 막았고, 순간 축축한 것이 목덜미를 쓸어 올렸다. 무엇이 더 중요한 지, 아킨은 당장 결정 내리지는 못했다. 한 팔로 검을 막고, 다른 팔로는 목을 휘감으며 외쳤다. "프로텐-!" 짧은 외침과 함께, 목 근처까지 왔던 그것이 캭 소리를 내며 뒤로 후닥닥 물러났다. 아킨은 그 팔을 펴 세르네긴의 가슴을 후려쳤다. 그가 뒤로 주춤 물러나자, 그 팔목을 잡아 꺾어 가슴 쪽으로 밀어젖 히며 외쳤다. "정신 차려요!" 순간 세르네긴의 목뒤로 큰손이 휙 날아오더니, 그 목덜미를 퍽 쳤 다. 검이 떨어졌다. 곧이어 호된 발길질이 세르네긴의 종아리로 날 아들며 그를 쓰러뜨렸다. "그 녀석 꽉 눌러, 꼬마--!" 세르네긴을 쓰러뜨린 남자가 그렇게 외치더니 검을 뽑아 들었다. 아 킨은 주저 없이 이미 쓰러져 엎드리고 있는 세르네긴의 몸을 무릎 으로 눌렀다. "젠장, 이것들이 다 뭐야--!" 슈마허였다. 수많은 부유체들이 빛을 쫓는 나방 떼처럼 그를 휘감아 돌았다. 그러나 슈마허는 그들과 맞서지 않고 찬찬히 둘러보았을 뿐 이었다. 저항이 없자 몰려든 그것들이 슈마허를 물어뜯듯이 사납게 공격했다. 그의 어깨에 상처가 패이고, 그 허리와 허벅지에 피가 치 솟았다. 그러나 슈마허는 이를 꽉 물어 그 고통을 참더니, 갑자기 팔을 휘둘러 검을 날렸다. 검이 구석진 곳에 퍽 박혔다. 뭐가 깨지 는 듯 와자작 소리가 들려왔고 부유체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제야 단단하게 버티던 세르네긴이 몸을 축 늘어뜨렸다. 그리고 잠 시 숨을 고르더니 팔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땀에 흠뻑 젖은 얼굴은 창백했다. 슈마허가 돌아서더니 저벅 저벅 다가왔다. 상처에서 피가 뚝뚝 떨어 지며 바닥에 얼룩졌고, 세르네긴은 그 핏방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잘난 체 하더니 꼴 좋군, 세냐." 빈정대는 말이었으나,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분노가 꽉 들이차 있었 다. 그리고 세르네긴도 그가 이런 표정으로 아명을 부르는 것은 아 주 화가 나 호통쳐댈 때뿐이라는 것을 잘 안다. 슈마허의 손은 한번 위로 치솟았다가 내려가기까지 했다. "죄송합니다." 세르네긴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떨리는 몸을 꼿꼿이 폈다. 아킨은 그를 따라 일어나며 주변을 한번 휙 둘러보았다. 그렇게 격 하게 싸웠는데, 카펫 위에는 그들의 발자국만 나 있었을 뿐이었다. 이곳이 어떤 곳인지, 저 쪽 상대도 생각한 것이다. 흔적이 남지는 않지만, 상대를 지치게 하기에는 충분한 공격을 했다. 그리고 툭- 아킨은 숨을 훅 멈추었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던 세르네긴 도 손을 멈추더니 그런 아킨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자그만 것은 어깨 위를 굴러 바닥에 툭 떨어지더니 모래처럼 바 스러졌다. "...아..." 아킨은 가끔 너무 위급해지거나 놀라면, 외려 남의 일을 보는 듯 덤 덤해지고는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마저 소리 없이 눈 물을 흘렸지만 아킨은 그냥 구석진 곳에서 무표정하게 있었을 뿐이 었다. 그것은 산산이 부서진 희망 앞에서 철저하게 절망했기 때문이 었고, 아킨에게 있어 상황이란 늘 그런 식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아킨은 한 가지가 더욱 현실 적인 현실적인 위험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개 남아 있을 때는 행여나 하는 기대가 조금이나 마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으나, 이제는 포기하고 최악의 사태나 준비 하는 것이 좋았다. 그렇게 포기해 버리니, 아킨은 오히려 더 냉정해 질 수 있었다. "당장 떠나겠습니다." 그러자, 슈마허가 세르네긴의 어깨를 잡아 앞으로 밀치며 말했다. "이 녀석도 데리고 가라고." 세르네긴은 자신의 실수 때문에 아킨의 겨우 두 개 남은 은봉인이 깨어진 것을 알고 있었고, 그 사실을 위험하다는 이유만으로 모른 척 할 정도로 무책임하지는 못했다. 아니, 에크롯사의 남자답게 책 임과 의무, 약속에 대해서는 과하게 충직했다. 그는 슈마허에게 꾸벅 인사를 하더니 아킨 옆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갑시다." 아킨은 마지막으로 슈마허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슈마허가 엄지손가 락으로 등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일은 내가 책임지도록 하겠다. 그러니, 외국 왕자님은 제 몸 이나 간수하라고." 그렇게 셋은 헤어졌고, 아킨은 궁궐을 나오자마자 곧바로 선착장으 로 이어지는 롬파르의 뒷골목으로 향했다. *********************************************************** 작가잡설: 오늘 출근 길에 있었던 일..... 길을 가다가 뭐가 팔랑 팔랑 팔랑 날아 오길래 잡았습니다. 에라, ........1000원 짜리더군요;; 가, 갑자기 하늘에서 왠 돈이? p.s 색이 달랐으면 좋았을 것을..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15장 *************************************************************** [겨울성의 열쇠] 제66편 어둠 속의 습격#3 ***************************************************************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세르네긴이 묻자, 아킨은 약간 조급한 목소리로 답했다. "도착하면 압니다." 아킨은 기억을 더듬어 좁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이 거리 저 거리를 누비고 간혹 되돌아가기도 하며, 그렇게 더듬더 듬 주변을 헤쳐나갔다. 아직 새벽, 이른 시간이었다. 거리는 한산하 고 차가웠으며, 파릇한 어스름 속에 점점 밝아오고 있었다. 아킨은 빠르게 골목길을 헤쳐나갔고, 세르네긴은 묵묵히 그를 따라 왔다. 가끔씩 팔을 쥐었다 피는 것을 보니 고통은 여전한 것 같았지 만, 그래도 내색하나 없이 따라오고 있었다. 당신 잘못이 아냐, 상대가 너무 고약하게 강했던 거지...아킨은 그 렇게 생각하다 결국 쓰게 웃었다. 이렇게 남에게 폐나 끼치고, 그들 에게 지는 빚은 나날이 불어나 버거워 지는데도, 결국 그들에게 의 지하여 도망칠 수밖에 없는 자신이 답답했다. 휘안토스라면 어떻게 했을까, 자켄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렇게 상상도 해 보았지만 까 맣기만 할뿐이었다. 그들에게는 이런 일이 생길 리도 없다...그들이 라면, 애당초 만들지도 않았을 테니. 그렇게 걷던 아킨은 마침내 제대로 들어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본듯한 간판들이 눈에 뜨이고, 낮이라 다르게 보이기는 하나 골목길 의 물건이라든가 건물이라든가 하는 것도 본 듯 하다. 됐다, 싶어서 아킨은 천천히 주변을 더듬어보았다. 가게, 가게, 가게--그리고 그 는 자신이 원하는 간판을 찾아냈다. 가게문이 단단히 닫혀 있어, 아 킨은 문을 쿵쿵 두드렸다. 한참을 두드려대도 아무 답이 없자, 세르 네긴이 나서 아킨의 어깨를 옆으로 밀치더니 검을 들었다가 힘껏 내리쳤다. 꽈르--! 엄청난 소리였다. 두터운 나무문이 반으로 쩍 갈리며 휘청 쓰러졌 고, 안에서 공기가 확 쓸려나오며 역한 술 냄새가 풍겨왔다. 순간, 아킨은 가게의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은빛의 칼날을 발견했다. 아킨 은 주먹을 움켜쥐고는 날아오는 칼날 바로 아래를 후려쳤다. "컥-" 세르네긴이 검을 휘둘러 벽으로 찍어 넣었다. 그 검날 바로 아래에 벽에 등을 바짝 밀어 붙인채 턱을 들고 있는 사내가 있었다. 세르네 긴은 바로 그 사타구니를 발끝으로 후려치고는 검을 뽑았다. 사내가 컥컥 대며 몸을 웅크렸다. "빌어먹을, 당장 그만 둬!" 결국 보다 못한 깡마른 사내가 기둥 뒤에서 튀어 나왔다. "안녕하셨습니까, 첸 씨." "내 이름 함부로 부르지마, 꼬마. 아무리 루첼 녀석과 친하다 해도 네 놈은 아주 싫으니까!" 첸은 날카롭게 쏘아붙이고는 아무 자리에 털푸덕 앉았다. 그리고 그 가 손짓 한번 하자, 다른 곳에 숨어 있던 제임과 아킨에게는 낯선 남자가 나오더니 쓰러져 컥컥대는 그의 두 부하를 하나씩 집어들고 안쪽으로 갔다. 그들이 사라지자 이번에는 늘씬한 여자가 나왔다. 주근깨 가득한 앙증맞은 코에 크고 둥근 눈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눈빛만은 날카로운 젊은 여자였다. 첸이 파이프를 꺼내 입에 물며 물었다. "그래, 이번에는 왜 또 온 거냐." "숨을 장소를 가르쳐 달라고 온 겁니다." 첸이 기가 막혀서 컥컥 댔다. "이 꼬맹이가, 정말--!" 그 신경질적인 반응에, 에나가 나서서 말했다. "너무 툴툴대지 마, 체니. ......그래, 꼬마. 숨을 장소라니?" 아킨은 그녀가 첸 보다 편하긴 하지만 만만치 않게 까다로울 거라 생각했다. 평범한 창녀였다면 첸이 옆에 있지도 못하게 했을 것이 다. 그녀도 이 안에서 꽤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다시 쫓기는 몸이 되었습니다. 안전할 거라 생각했던 장소 역시, 크게 안전하지는 못했습니다." 에나가 조롱하듯 물었다. "어디에 숨었는데, 꼬마? 너희 하숙집 지하?" "왕궁입니다." 첸이 캑, 하고 숨막히는 소리를 내더니 결국 기침을 토했다. 에나 역시 입을 딱 벌리고 있다가, 갑자기 고개를 휘휘 저어 정신을 차리 더니 말했다. "이, 이봐....꼬마, 아무리 궁리해 봐도 거기보다 안전한 곳은 도무 지 못 찾겠거든?" "안전한 장소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또, 편한 장소도 바라지 않고요. 제가 원하는 곳은 숲 속의, 아무도 모르는 장소입니다. 버려진 건물, 그러나 단단한 건물이라야 합니다. 또 아무도 찾아내지 못할 테고, 오지도 않을 곳으로요." "조건 한번 까다롭네." 에나가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리더니 첸을 보았다. 첸은 아킨을 쏘 아보고는 퉁명스레 말했다. "하나 있기는 있다. 얼마 줄래?" 아킨은 금화 하나를 테이블 위에 얹어 놓았다. 첸이 이게 뭐냐는 듯 얼굴을 구기자, 아킨이 말했다. "나머지는 무사히 돌아오면 드리겠습니다." "어이, 도련님. 나머지가 얼마나 될 줄 알고 큰소리치는 거야." "저 역시, 당신이 알려 주실 곳이 얼마나 안전한 지는 모릅니다. 제 대로 받고 싶다면, 제대로 가르쳐 주십시오." 갑자기 첸이 심술궂게 웃었다. "누가 가르쳐 달라면 어쩔 테지? 난 대체로 그런 위험 부담료를 같 이 챙기고, 그건 선불이라고." 아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것은 정말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 었다. 그 때 세르네긴이 검을 뽑아 들었다. 에나가 팔짝 뛰며 단검 을 뽑아 들었고, 첸 역시 몸을 일으키려다가 그 검이 어깨에 얹히자 주저앉아 버렸다. 세르네긴이 말했다. "루첼 그란셔스 라는 분과 아는 사이겠지요." 첸보다 심약한(물론 아주 상대적으로) 에나의 얼굴이 금새 새파래졌 다. 세르네긴의 검에 더 무게가 얹히더니, 그 어깨를 지긋이 눌렀다. 조금만 힘 주면 팔이 뎅겅 잘려 나갈 판이었다. "세르네긴 포틀러스, 에크롯사의 수호자이자 드래곤의 수장의 알려 지지 않은 존함에 걸고 맹세하건대, 누군가 위험한 사람이 그곳으로 온다면 제 손으로 그를 죽여버리겠습니다." 에나는 아예 비명을 질러 버렸다. "이 자식 뭐야! 루치를 어쩐다고!" "그만해, 에나!" 어디선가 달려 들어온 제임이 에나의 허리를 감아 안더니 벽에 밀 어 붙였다. 에나는 얼굴이 시뻘개져서는 씩씩댔다. 그러나 세르네긴 의 검은 첸의 어깨를 떠나지 않고 있었고, 빠르게 제임을 훑었보기 는 했으나 첸이 몸을 빼고 도망칠 만한 틈을 주지도 않았다. 제임이 다가와 첸의 어깨를 지긋이 누르더니 작게 속삭였다. "첸, 협상은 내게 맡기고 가만히 있어라. 잘못 하다가는 죽지는 않 아도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로 아프기는 하겠다." "제임! 지금 뭘 가지고 거래하는 지 알고는 있어?" 제임이 첸의 입술을 툭툭 쳤다. 첸은 칫 하고는 고개를 돌려 버렸 다. 제임은 세르네긴이 아닌 아킨에게 말했다. "도련님, 너라면 절대 루첼을 죽게 하거나 하지는 않을 거라 믿는 다. 어쨌건, 좀 아는 사이 아니겠나." "물론입니다." "하지만 저 애송이는 네 부하가 아니겠지. 아니, 절대 될 수 없는 신분이란 것은 안다." 아킨은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동의의 눈빛만을 보 내며, 그러나 선택은 세르네긴이 할 바이며 거래는 제임의 수완에 달렸다는 듯. 그러자 제임의 눈썹 끝이 날개처럼 솟구쳤고, 눈 역시 싸늘한 분노로 확 얼어붙었다. "루첼 녀석은.....언제나 이상한 녀석을 끌어들이지. 그리고 제 팔자 만 망쳐. 저 망할 첸과 알고 지내더니, 결국에는 다쳐서 길드를 나 갔고. 이제는 엉뚱한 나라 왕자와 알고 지내서는, 제 목숨까지 내 놓는 군. 하여간, 쓸만한 친구 끌고 오는 꼴을 못 봤어." 첸이 슬쩍 말을 꺼냈다. "이봐, 제임." "내가 틀린 말했냐. 그 날, 네놈이 조금만 조심했더라면 루첼은 다 치지 않았을 거다. 그리고 시력을 망쳐서 이 골목을 떠날 일도 없었 을 거라고! 좋아......빌어먹을 도련님, 그 장소는 말 해 주겠다. 그리 고 가든 말든, 그건 네가 알 바다." 평소에는 루첼과 있을 때를 제하고는 별로 말이 없는 제임이 그 정 도로 길게 말하는 것은, 에나도 첸도 처음이었다. 둘 다 마스터와 부 마스터이면서도 제임의 기세에 눌려 버리고 말았다. 제임은 마지막으로 험악하게 말했다. "만약 첸이나 나, 또는 에나의 목숨이 위험하다면 우리는 당연히 네 놈이 어디 있을지 불 거야. 네가 그곳으로 가지 않기를 바라지만, 정말 그곳에 간다면......그 땐, 내가 루첼을 지키겠다." 에나가 나섰다. "제임.....! 너, 정말..." "조용히 해, 에나. 너와 첸에게야 루치는 그저 친구일 뿐이지만, 내 게는 형님이 남기신 조카다. 그러니, 이건 누구의 으름장보다 유효 해. 어쩔거냐, 도련님. 정말 들어보겠나?" 아킨은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는, 체념하듯 말했다. "말씀해 주십시오. 지금의 제게는......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제임의 눈에서 불꽃이 팍 튀어 올랐다. "....." 루첼은 잠에서 깼다. 갑자기 오싹해져서는 눈이 번쩍 떠진 것이다. "이상하네..." 평소에도 일찍 일어나는 그였지만, 베크만 알베스티의 저택에 온 뒤 로는 더 일찍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더 일찍 눈을 떴고, 온 몸이 으슬으슬해서 도저히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아침의 투명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는 신선 한 아침 공기가 솔솔 스며들어왔고, 깨끗한 가운데 짧게 새 우는 소 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왜 그렇게 오싹 했는지, 도무지 모를 일이다. 루첼은 아침 식사하기 전에 잠깐 산책이나 할 생각으로 대충 세수 를 하고는 1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현관 앞의 홀까지 내려왔다가, 응접실 문이 반쯤 열린 것을 발견했다. 안을 슬쩍 들여다 보니, 얇 은 커튼이 흔들리는 응접실 창 앞에 여자 하나가 서 있었다. 루첼은 담배를 문 채 안으로 달려가 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그 소 리에, 그녀가 놀라 몸을 돌렸다. "실비?" 루첼은 파이프를 입술 사이에서 뽑아내며, 믿어지지 않아 그게 맞느 냐고 자신에게 묻듯 말했다. 그러자, 저 앞의 소녀는 입술 위에 얹 혔던 손을 조심스레 움츠리더니 가슴 위로 가져갔다. "오빠....." 실비가 맞았다. 루첼은 가만히 문을 닫고는, 느릿느릿 실비 쪽으로 다가갔다. 실비 는 기도하듯 두 손을 마주잡고는 가슴 아래에 꾹 붙였다. 얇은 실내 드레스에 덮인 가녀린 어깨가 가만히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실비가 꺼낸 말은 전혀 엉뚱한 것이었다. "오빠....담배 폈어?" 그러더니, 자기도 웃기는 지 피식 웃어 버렸다. 루첼은 그제야 실비 가 루첼이 담배를 피우는 지 전혀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루첼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한참 됐어." 그러며, 루첼은 실비의 차림새를 살펴보았다. 실내용 옷인 것을 보 니, 여기서 하룻밤 자고 일어나 이 곳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또, 머 리카락도 좀 푸석하고 얼굴도 창백했다. "여긴 웬 일이니, 실비." "할아버지께....드릴 말씀이 있어서. 어젯밤 늦게 와서...오빤 몰랐던 거야." 실비는 루첼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마주잡은 손에 힘을 더 꾹 주 더니, 힘들게 말을 꺼냈다. "저기, 그날.......지나고 처음이지?" "그렇지." 루첼은 쥰과는 어떻게 되고 있냐고 묻고 싶었고, 그렇게 해야 한다 고 생각했다. 요즘 흉흉한데 결혼은 할 수 있는지, 행여 루크 페일 리 가에서 딴 소리 하는 것은 아닌지, 체노 알베스티나 세쟈르 알베 스티가 공연히 실비를 괴롭히지나 않는지, 그것을 물어야 한다고 생 각했다. 그러나 그는 방금 전 실비가 그랬듯 역시나 엉뚱한 말을 꺼냈다. "그 동안 잘 지냈니?" ".....별로. 오빠는?" "최악이었지." 실비는 루첼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를 마주하며, 루첼은 이 소녀를 꽤나 오랫동안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을, 조금은 서글픈 마음 으로 느꼈다. 루첼에게 '상대'는 두 가지로 나뉘었다. 그냥 좋은 모습, 존경할 만 한 모습만 보여줄 뿐 결국에는 관심도 가지 않는 사람들과, 모든 것 을 다 탈탈 털어 보여주고는 목숨까지 지켜주는 사람들로. 그런데, 처음 알베스티 가에 왔을 때 무구하게 그를 바라보던 이 소 녀에게는 그저 좋은 모습만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것은 결코 그녀를 기만하고 싶어서도 귀찮아서도 아니었다. 그저, 그를 믿으며 좋은 사람으로 봐 주기만을 바랬다. 실비가 자신에게 실망하거나 두려워 하는 것이 싫었으니, 그리 조심스러웠던 것이다. 실비가 말했다. "나....나도 그랬어. 후회하고, 또 후회했어. 내가 너무 밉고, 끔찍했 어. 나...정말 나쁜 계집애야....." 루첼은 다급해져서 그 말을 끊었다. "실비, 우리 그만두자......끝났잖아." "......아직 끝난 건 아냐." "끝났어. 이젠 나도....돌이킬 수가 없어. 돌이키고 싶지도 않고, 돌이 켜서도 안 되. 그러니 실비, 더 이상 그렇게 보지 마. 난......여기서 움직이지 않을 테니까. 알겠어?" 실비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복받치는 서러움에, 그 눈물 은 계속 볼을 타고 주룩 흘러 내려 그녀의 드레스 자락에 툭툭 떨 어졌다. "미안.....해. 다....내 탓이야. 그냥, 그냥...아버지가 하라는 대로만 했으면, 아무에게도 상처 주지도, 이렇게....이렇게 두렵지도 않을 텐 데." "실비, 제발. 그래도 네가 가까운 곳에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해. 생 판 알지도 못하는, 그리고 어쩌면 싫어할지도 모르는 놈에게 시집가 는 것 보다 훨씬, 훨씬 더 좋아." "정말?" "그래. 그러니 제발 믿어 줘, 실비." 그러나 눈물은 계속 방울방울 떨어지고 있었다. 루첼은 손으로 그 눈물을 걷어 내주었다. 그런 루첼을 바라보던 실비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숱 많은 눈썹이 내려오자, 루첼은 조용히 한숨을 내 쉬었다. *********************************************************** 작가잡설: 아키는 생고생 중인데 네 놈은.....(어이, 핀트가 이상해!) .....크으!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15장 *************************************************************** [겨울성의 열쇠] 제67편 어둠 속의 습격#4 **************************************************************** 다행인지. 아니면 한 번 더 최악의 선택을 한 것인지 모를 일이다. 루첼이 아는 것은 저지른 순간과 지금일 뿐이었고, 그 다음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잠깐의, 그러나 깊지만 조용한 파문을 퍼뜨리며 몸을 떨리게 하는 순간이 끝나고....루첼이 택한 것은 그저 그 어깨를 잡아 주는 것뿐 이었다. 실비가 눈을 뜨며 젖은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까지 뿐인 거야?" 루첼이 말했다. "미안하다." 실비는 조용히 웃었다. 마지막 남은 미련마저 떨쳐 내고, 실비는 루첼의 가슴에 손을 얹고 는 몸을 밀었다. 그렇게 멀어지자, 그녀는 치마를 살짝 들어 당기고 는 말했다. "결혼문제 때문에 온 거야. 쥰....오빠가 편지를 보냈는데, 결 혼...이 힘들어 졌대. 오빠도 알다시피, 요즘....좀 흉흉하잖아." 루첼은 이제 모든 것을 다 쓸어 내 버리고, 자상한 조언자로 돌아갔 다. 어쩌면 그렇게 방금 전 일을 싹 잊어버리고 태연하게 행동할 수 있는 것인지, 그런 자신이 가증스럽게까지 여겨졌다. "그래, 좀 어수선하긴 하지." 실비가 알 정도라면, 사태는 엄청나게 흉흉한 것이다. 그리고 아마 도, 쥰의 형인 페오드렌은 이 기회에 어떻게든 탐탁지 않은 결혼을 파기해 버리고 싶어할 것이다. 루첼은 베크만으로부터 얼추 들었던 것을 조립해 보았다. 왕비가 실각하고, 공작이 집권했다. 베르티노 왕자는 감금되어 있고, 그 가엾은 왕자는 아마도 왕이 되지 못할 것 이다. 대신, 공작은 공주를 찾아내 그녀를 여왕으로 앉히고 아들과 결혼시킬 것이다. 그 아들인 안드레아 공자가 어느 정도의 인물인지 는 모르나, 그런 강인한 아버지 그늘에서 제대로 벗어날 정도로 나 이를 먹은 건 아니니 그 과정에서 몇 사람이 피 쏟고 죽을 테고...공 작 앞에서 몸을 사려야 하는 루크 페일리 가는 왕비와 예전이든 지 금이든 조금의 연관이라도 있는 집안과 사돈을 맺는 것을 꺼릴 수 밖에 없다. 잘만 되면 신경 날카롭게 쏘아보는 가문들보다 훌쩍 클 수 있는 상황에, 막내며느리 하나 잘못 들여 흠집 내는 일은 삼가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쥰은 뭐래?" "여기서 만나자고 했어. 만나서....상의해 보자고." "도착은 언제 하고?" "그건 잘 몰라. 하지만, 도바 항에서 최대한 빨리 내려올 거라고 했 으니까...." 루첼은 계산해 보았다. 닷새 정도 흘렀으니, 그는 벌써 본가에 도착 해서 페오드렌으로부터 결혼 불허를 통보 받고는 하루 정도 달라붙 어 설득 하다가 결국에는 실비에게 특급으로 편지를 보냈을 것이다. 빨리 받은 것을 보니, 마법 길드에라도 들어가서 보냈을 테고. 그리 고 그 녀석 성질에 즉각 내려왔을 테니, 빠르면 오늘 저녁이나 내일 즈음에 도착할 것이다. "필사적이군...." 그렇게 중얼거리니 루첼은 가슴에 뭐가 푹 박혀드는 것 같았다. 다시 고개를 쳐드는 미련, 내가 실비를 책임질 테니....넌 그저 가문 으로 돌아가면 안 되는 거니, 차라리 그 편이 나아. 그런데 실비의 손을 잡아 쥰에게 떠넘긴 것은 루첼 자신이었다. 그 리고 그 바보는, 루첼과 실비를 좋아하는 만큼 최선을 다하려고 하 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아버지도 어머니도....내가 빠져나간 줄도 모르실 거야. 그냥, 할아 버지.....께만 말씀 드렸어. 집안에서 내 편은 할아버지뿐이니까." "뭐라시지?" "쥰 오빠가 도착하면 이야기 해 보겠다고 하셨어." 루첼은 조용히 실비를 보다가는 방문 쪽으로 걸어갔다. 실비가 그런 그를 붙잡았다. "뭘 하려고, 루첼 오빠." "알베스티 님과는 내가 상의해 보겠어. 그리고 좋은 방향으로 설득 해 볼 테니 알아서 해." "하, 하지만......오빠가 그런 말하는 건 싫어! 아니, 내가 어떻게든 해 볼게." "넌 못해! 쥰에게도 맡길 수 없고." "오빠, 제발....." 루첼은 그 그렁한 눈물과 애처로운 눈빛에 지금 자신의 태도가 얼 마나 실비를 비참하게 만들고 있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를 비참 하게 하는 만큼, 루첼 자신은 구차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 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루첼이 답하기도 전에 상황을 넘 어가고 싶은 실비가 외치듯 크게 말했다. "들어오세요!" 집사가 달려 들어오더니 숨을 한참 헐떡이다가 겨우 진정하고는 말 했다. "루크 페일리 가의 도련님이 도착했습니다." 실비가 잡았던 루첼의 팔을 툭 떨어뜨렸다. 하루만에 도바에서 롬파르까지 달려온 쥰은 잔뜩 지쳐 있었다. 머리 는 헝클어져 있고, 면도도 제대로 못했는지 턱도 시커맸다. "쥰." "종일 달려 왔어. 말은 저기, 롬파르 근처에서 지쳐 죽어 버렸고..... 그대로 뛰어 왔지." 쥰은 거의 넘어가도록 숨을 헐떡였다. 루첼은 차라리 녀석이 하루라 도 일찍 온 것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루첼이라도, 또 말로는 그리 단호하게 했지만 실제 행동으로는 어찌 나올 지 자신 도 장담하기 어려웠다. "언제 출발한 거냐?" "실비에게 연락한 즉시." 정말 하루 종일 밤에 쉬지도 않고 계속 달려온 것이다. 쥰은 여전히 어깨를 크게 들썩이며 루첼이 건네준 수건으로 땀을 닸았다. 진한 땀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좀 쉬었다가 만나 뵈어라." "안돼. 즉시....즉시 말해야 해. 오는 내내 생각했고, 지금이 지나 면.....나, 아무 말도 못하고 결국 다시 도바의 루크 페일리 가로 돌 아가 버릴 것 같아." "차분하게 생각해, 쥰. 서두르면 외려 일을 더 망쳐 버리고, 나중에 수습하는 것조차 힘들다." "난 네가 아냐. 난.......알잖아! 내가 얼마나 한심한 녀석인지! 어떻게 차분하게 생각하란 말이야." 루첼은 한숨을 탁 내 쉬고 말았다. 이 철딱서니 없는 녀석아, 그렇 게 일 치면...누가 책임 진다든. 그러고 있는데 집사가 들어왔다. 베크만 알베스티가 침대에서 일어 나 내려온 것이다. 루첼은 엄지로 안경을 밀어 올리고는 얼른 자리 에서 일어났다. 쥰은 후들거리는 몸을 겨우 일으켰고, 루첼은 그의 허리를 슬쩍 잡아 주었다가 베크만이 나타나자 마자 놓았다. 노인인 베크만 알베스티는 키 큰 하인의 부축을 받아, 힘겹게 응접 실 안으로 들어왔다. 밤에 한숨도 자지 못한 듯 눈은 충혈 되어 있 었고, 눈자위도 시커멓게 그늘져 있었다. 그 모습에, 루첼은 밤 사이 에 뭔가 아주 큰 일이 터졌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런 루첼의 눈빛 에 베크만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 힘겹게 앉았다. "그래, 쥬나드렌 루크 페일리 군. 오느라 수고 많았네." "아닙니다." 쥰이 쉬어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 할 말이 있네. 내게도 놀랍고, 또 충격적이었지만.......자네라면 잘 듣고 현명한 판단을 해 주리라 믿어." 그러나 루첼은 베크만의 눈에 가득한 차가운 빛에, 그가 별로 기대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챘다. 쥰이 긴장한 듯 까칠한 턱을 문질 렀다. "말씀하십시오." "그레코 공작이 어제 저녁으로 실각했네." 쥰의 눈에서 초점이 나갔다. 루첼마저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베크만은 지팡이로 바닥을 툭툭 치며 말했다. "이제, 자네 집안은 물론이요, 막판에 줄을 잘못 선 내 아들마저도 위험하게 되었네." 쥰은 제대로 실감조차 못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적어도, 어마어마 하게 절망적인 상황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드는 듯 했다. 손은 떨렸고, 창백했던 얼굴은 이제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루첼이 나섰다. "어떻게....." "나중에 이야기하자, 루첼." 베크만이 손을 들었다. 쥰에게는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베크만이 말하는 것은, 아들 집안도 위급한데 더욱 위험 한 집안으로 소중한 손녀를 시집보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베크만은 쥰을 영 탐탁지 않아 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번듯하게 철든 남자라 판단했다면 이런 식으로 나오지는 않았을 테지만, 지금 손녀를 맡기기에는 너무도 신용할 수 없다는 남자라 생각하고 있으 니 아예 주지도 않으려 하는 것이다. "지금 상황으로는 결혼을 강행할 수가 없어. 상황이 조금이라도 진 정 될 때까지 결혼은 미루어 주게나." "하지만!" 결국 쥰이 벌떡 일어났다. 그러다, 자신이 무례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닫고는 우물쭈물 다시 주저앉았다. "부탁드립니다. 반드시 실비를 지켜 주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지만...헤어지라고는, 그렇게 저를 무책임한 놈으로 만들어서 내 치지는 말아 주십시오." "자네가 조금이라도 남 생각을 한다면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어. 이 만 물러나 주게." 베크만이 무섭도록 엄격하게 말했다. 쥰은 그저 망연하게 베크만을 바라보다가, 간절한 눈빛으로 루첼을 돌아보았다. 그 눈빛에 루첼은 고개를 저었다. 베크만 알베스티의 말이 맞았다. 왕비가 제대로 실권을 잡아버리고 공작은 영영 실각해 버린다면, 이런 결혼은 나중에 얼마든지 문제가 생긴다. 게다가, 지금의 쥰은 집안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니 몸은 가볍게 하고 마음은 무겁게 하는 것이 좋다. 주변에서 도와주 지 않는 다면, 쥰은 도저히 실비까지 책임질 수 없다. 장남인 페오 드렌만 버겁게 할뿐이다. 루첼이 말했다. "실비는 여기다 맡겨두고 가도록 해." "루첼! 너마저 그러면 어떻게 해!" "둘 다를 위해서야. 데리고 갔다간...둘 다 위험할 거야." "날 믿어 줘, 제발. 루첼.....너마저 그렇게 말한다면, 난.......정말 죽고 싶다고. 너는 날 믿어야 해! " "쥬드-" 루첼은 책망하듯 그를 불렀다가, 쥰의 눈빛이 더 간절해지자 숨겨 놓은 죄책감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차라리 말해 버릴까. 내가 실비를 좋아한다, 그리고 실비도....나를 좋아해. 그러니 너무 미안하지만 내게 양보 해 줘. 그리 말한다면 너는 어떤 눈으로 나를 볼까. 그래, 저 녀석은 그저 허 탈하게 웃고, 좀 울기도 할 테지만 내 손을 잡아주고 어깨를 두드려 줄 것이다. 저 녀석은 날 좋아하고, 내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아니 까. 자기가 괴로운 만큼 나 역시 괴로워 할 거라는 것을, 어렵게 내 놓은 결정이란 것을 잘 알 테니까. 루첼은 베크만을 바라보았다. 베크만은 고개를 끄덕여 보일 뿐이었 다. 알아서 하라는 것이다. 그는 다시 쥰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고 싶은 거지, 쥬드?" "좋아, 너나....할아버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실비는 여기다 놓고 가겠어. 지금 본가가 어려워질지도 모르는 마당에, 형을 더 힘들게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쥰이 순순히 나오자 루첼은 버거운 짐을 털어놓은 듯 안도했다. "그래. 잘 했어." "그래도.....떠나기 전에 결혼식은 올리고 싶.....다." 그 때 문 밖에서 와장창 소리가 들렸다. 루첼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다가, 베크만이 저지하자 다시 주저앉았다. 쥰은 베크만 앞에 무릎 을 꿇으며 간절하게 말했다. "할아버님. 지금 저는.....그 누구에게도 실비를 양보하고 싶지 않습 니다. 비록 지금의 제가 무능해서 바로 옆에서 지켜주지 는 못하더 라도, 약혼을...그리고 그날의 약속을 모두 무로 돌릴 수도 없고, 돌 리고 싶지도 않습니다. 전 그 때 그 누구보다 행복했고, 그 행복을 그 대로 떠나보낼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니 실비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습 니다." 루첼은 아찔했다. 차라리 말 해 버릴까, 하는 욕구가 솟구치다가도 자신 때문에 쥰이 이런 위험과 고통을 감수하려 한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내 탓이다, 내 비겁함 탓이다. 그리고 실비를 넘을 수 없는 선 너머 로 멀리 보내버리고 더 이상 추하게 미련을 품지도, 친구를 배신할 생각을 하지 않고 싶었다. 비겁한 자식, 그 비난이 온 몸으로 따갑게 쏟아지는 듯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제가.....증인이 되겠습니다." "루첼 그란셔스-!" 베크만이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루첼은 고개를 떨구고는, 두 손을 모아 이마 위에 대었다. "로메르드 시민 하나와 일가 한 분이니, 증인으로 충분하다 생각합 니다. 안 된다면, 저 혼자만이라도 증인이 되겠습니다." 쥰의 얼굴이 밝아졌고, 베크만의 얼굴은 오히려 분노에 일그러졌다. 그러더니, 밖을 향해 목소리가 쉴 정도로 외쳤다. "실비, 밖에 있겠지! 들어와라-!" 문이 천천히 열리며, 떨고 있는 실비가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 러나 결국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쥰이 실비에게 달려가 그녀를 부 축했다. 실비의 얼굴은 눈물 범벅이었고, 쥰의 품에 안겨 루첼을 바 라보는 그 눈은 원망에 가득 차 있었다. "자, 어떻게 하겠냐, 실비아 알베스티! 오늘 저녁에라도 결혼식을 올 릴 테냐! 네가 좋다고 한다면 허락은 하겠다. 증인도 되어 주겠고-!" 실비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네." *********************************************************** 작가잡설: 루첼이 제2의 라닌이라면 라닌이 명예훼손 및 음해라 불 을 뿜으며 쓰러질 듯.....-_-;;; '메디 씨와 아슈 자식이 결혼하면 난 지옥에 가서라도 방해한다---!' 아아, 귀따가워....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15장 ************************************************************** [겨울성의 열쇠] 제68편 어둠 속의 습격#5 ************************************************************** 갑작스런 결혼식은 차라리 조용한 서약식에 가까울 정도로 조촐하 게 치러졌다. 알베스티 가의 하녀들은 주인의 명령이 떨어지자 마자 급히 하얀 드레스와 면사포를 구해왔다. 워낙에 급히 구한 물건이라, 드레스는 초라할 정도로 평범한 물건이었다. 결혼반지도 소박한 것이나마 구 했다. 하녀 중 하나가 실비에게 면사포를 씌워주고, 그 위에 정원의 꽃으로 만든 화관을 씌워주었다. 그렇게 신부가 준비되자, 결혼식은 근처의 작은 신전에서 치러졌다. 교구의 젊은 사제가 교구 신도도 아닌 젊은이들 앞에 섰고, 실비와 쥰은 무릎을 꿇었다. 루첼은 베크만과 함께 증인 석에 앉아 그 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되도록 그 둘을 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귀를 기울였다. 서약의 말이 오고가고, 실비와 쥰이 차례로 답했다. 증인의 동의를 구하는 말이 들리자, 베크만은 옆의 루첼을 잠깐 바라보고는 성의 없이 답했다. 루첼도 조용히 답하고는, 손에 든 반지를 만지작거리다가 사제가 말 하자 자리에서 일어나 신부와 신랑 양손에 반지를 쥐어 주었다. 실 비의 손이 떨렸지만, 루첼은 데인 듯 빠르게 손을 치웠을 뿐이었다. 반지가 교환되었다. 실비의 손에 반지가 끼워지고, 이어서 쥰의 손 에도 반지가 끼워졌다. 사제가 조용한 목소리로 결혼 선언을 하자, 쥰은 실비의 면사포를 걷고 키스했다. 그리고 루첼은 드디어 그녀가 남의 아내가 되었음 을, 그가 마음속으로 배신한 친구가 그녀의 남편이 되었음을 인정했 다. 포기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정말 아무 미련도 남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다시 속에서 뜨거운 것이 복받쳤다. 그러나 그는 웃었고, 쥰도 활짝 웃으며 루첼을 얼싸 안았다. "고맙다, 루첼. 네 덕이야." "열 받도록 잘 살아라. 마누라 애 먹이지 말고." 루첼도 쥰의 등을 토닥토닥 쳐주었다. 쥰은 허리를 당기더니 말했 다. "물론, 너를 위해서라도 반드시....행복하게 살겠어. 너, 정말 어마어 마하게 좋은 친구야." 얼간아, 내가 너를 정말 지독하게 속이고 있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 고 있어? 내가 조금만 더 뻔뻔했더라면, 너는 오늘 파혼 당하고 돌 아갔을 거야.... "축하한다." 루첼은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사실, 그것은 쥰을 위해서는 진심이었다. "피로연 준비는 시켜 놨네. 하객도 없긴 하지만, 조촐하게 식사나 하자고." 베크만이 말했다. 저택으로 오니, 그의 말과는 달리 성찬이 마련되어 있었다. 베크만 은 조용하게 축배를 들었고, 단 넷 뿐인 만찬 장에서 그 축배에 화 답하는 소리는 서글플 정도로 작았다. 음악도 없었고, 춤과 노래도 없었다. 그저 장례식만큼이나 조용한 가운데, 조용한 미소와 속삭이 듯 자그마한 축하의 말만이 오고갈 뿐이었다. 쥰은 어색할 정도로 진지하고 점잖게 행동했고, 루첼은 늘 그렇듯 행동했을 뿐이다. 그 리고 실비는 얌전하게 웃으며 할아버지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 었다. 억지로나마 루첼과 시선이 마주치는 것을 피했지만, 네 명밖 에 없는 자리라 쉽지도 않았다. 저녁이 치워지고, 아홉 시가 되자 베크만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인네는 먼저 일어나 나가겠네." 그리고 젊은이 셋만을 남겨 놓고 집사의 부축을 받으며 침실로 돌 아갔다. 그제야 긴장을 푼 쥰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죽는 줄 알았다. 내내 무시무시하게 쳐다보는데, 얼마나 떨리던지." 루첼이 토닥였다. "몇 년 지나면 괜찮아 질 거야. 그건 그렇고, 이제 올라가 봐야 하 지 않아?" 갑자기 실비가 벌떡 일어나더니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꽉 마주 잡 았다. "실비?" 그 때까지, 루첼은 자신이 큰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 었다. 그저, 예전에 친구들이나 아는 사람들이 결혼 할 때 한잔씩 들고 의례히 하던 말을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실비는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은 눈으로 루첼과 쥰을 보더니, 말없이 문 쪽으로 걸어 갔다. 쥰이 얼떨떨한 듯 그녀를 불렀다. "실비....? 갑자기 왜 그래." "머, 먼저...올라가 있을...게요. 아, 알아서 해요." 나가기 전에 실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알게 된 루첼이 얼굴을 확 붉혔다. 쥰 역시 얼굴을 슬쩍 붉 히더니 루첼을 쿡 찔렀다. "나, 따라 올라가 볼게." "아, 그래.......잘 해 봐라." 그런데 쥰이 가까이 오더니 아무도 없는 식당에서 행여 누가들을 새라 잔뜩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그런데....저기, 너 처음이 언제였냐....? 이봐, 루첼 그란셔스. 노려보 지 마." 루첼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열 두 살." ".......열 두 살?" 쥰은 존경어린 눈으로 루첼을 바라보았다. 루첼은 행여나 싶어서 눈 꼬리를 올리고는 물었다. "너, 설마......" 쥰이 얼른 말했다. "네 생각이 맞아." 결국 쥰이 뭘 가르쳐 달라는 건지 알게 된 루첼은 무시무시하게 그 를 노려보며 험악하게 말했다. "그냥 보고 듣던 대로만 해라! 정말, 친구가 아니라 아들이라도 너 정도로는 안 하겠다!" 새신랑이자 친구만 아니라면 루첼은 그 턱이라도 한 대 후려갈겨 주고 싶었다. 루첼은 그러게 내뱉고는 쌀쌀맞게 돌아섰다. 쥰이 다시 강아지처럼 그를 불렀지만, 루첼은 주먹을 위로 세우며 한번만 더 물어보면 죽 도록 패 준다, 라는 말을 대신했다. 쥰이 푸르르, 한숨을 내 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루츠." "오냐-!" "이런 말하는 거....정말 미안한데, 나중에 나한테 무슨 일 생기 면........부탁해도 될까?" "그래놓고 무사히 돌아오면, 엉덩이 걷어 찰 테다." 쥰이 웃더니, 달려와 그의 목을 꽉 감았다. "루첼. 너와 만난 건.......아마도 내 최고의 행운일 거야." "난 반대니 유감이군. 그리고 자꾸 어물대면 나한테 마음 있는 걸로 간주하겠다. 어서 꺼져 버려." 쥰은 재깍 팔은 놓고는 식당을 나섰다. 그러나 정작 혼자 남게 되자, 루첼은 어둠 속에 숨어있던 괴물이 바 람처럼 빠져 나와서는 심장을 덥석 먹어치워 버린 듯 갑자기 울적 해졌다. 뭐가 속에서 툭 빠져나간 듯 했다. 폭풍이 휩쓸려 왔다 쓸려 나가고, 가슴속에는 폐허 같은 피로와 슬 픔만이 남겨져 있을 뿐이었다. 지친 가슴으로, 그는 은청색 달빛 쏟 아지는 창가로 다가갔다. 이제 끝난 거야, 다 끝났다고, 루첼 그란셔스. 쥰은 실비와 결혼했고, 오늘밤이 지나면 육체적으로나 법적으로나 완전히 부부가 된다고. 이제 네가 끼여들면, 그건 정말 범죄다. 루첼은 큰 창을 열어 젖혔다. 그리고 식당을 나서 정원으로 향하는 테라스위로 걸어가며, 이제 완연히 부풀어올라 보름이 얼마 남지 않 은 달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달을 향해 검은 그림자가 솟구쳐 올랐다. 푸드덕--! "--!" 루첼은 달빛을 가르는 큰 그림자를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 었다. 그 그림자는 날개를 크게 뻗치더니 루첼의 손을 향해 번개처럼 내 리 박혀왔다. 순간 손을 치워 버릴 뻔했지만, 그 그림자는 더욱 빨 랐다. 파칙--! 얇은 천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컴컴한 그림자가 먹이를 덮치듯 그의 몸을 확 덮쳤다. "큿-!" 그리고 번쩍이듯 영상이 보였다. 뒤로 묶어 땋아 내린 검은 머리카락, 햇빛 쏟아지는 신록처럼 아름 다운 녹색의 눈동자, 길게 뻗은 귀와 메아리처럼 울리는 목소리. 그리고 배, 흔한 배였다. 뱃머리에는 단단해 뵈는 체격을 갖춘 늙은 남자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그의 눈은 이제 막 수평선 너머로 솟 아오르는 작은 섬을 바라보고 있었다. 루첼은 그 섬을 알고 있었다. 체놀비로 접어드는 강의 하구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바위섬으로, 갈매기 섬으로도 불리는 곳이었다. 그 위에 깃발이 꽂혀 있어 뱃사 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영상이 크게 흔들렸다. 바다 위로 미끄러지는 듯 하더니, 옆 으로 크게 방향을 돌려 뱃전을 향했다. 역시, 뱃머리 근방에 '달눈' 이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적혀 있었다. 시선은 앞으로 빠르게 달려 돛대 근방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로 달려들었고, 그는 한 손을 내밀 며 루첼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맞물렸고, 의식의 면이 닿으며 서로를 보았다. 그가 말했다. -내일 저녁쯤에 도착한다. 찾으러 와 줘. 시선은 위로 솟구쳤고, 그 순간 루첼은 달빛 쏟아지는 정원으로 다 시 돌아왔다. 선선한 초여름의 바람이 땀에 젖은 목덜미를 스쳤다. 뭐에 집어삼켜졌다가 그대로 토해진 것 같았다. 멀미라도 하는 듯 속이 매슥거렸고, 목과 어깨가 뻐근했다. "자크....." *********************************************************** 작가잡설: 진하 루첼이 한눈 파는 순간 당장에 쪽지를 날려 '나 간 다. 한눈 팔다간 내 손에 죽을 줄 알아라' 하고 경고하는 야훌 자 켄.... ...어이, 라닌. 옆에서 자꾸 궁시렁 대는데....너도 큰 소리 칠 주제 가 못 되. 말이 나왔으니 하는데, 너도 사실은 엑세를 포기하기 위 해 레논을 잠시 떠났다가 운 좋게 메디를 만난 것뿐이잖아! .....가만....그게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15장 *************************************************************** [겨울성의 열쇠] 제69편 어둠 속의 습격#6 **************************************************************** 아킨은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았다. 그러다가, 가운데 손가락을 오므 렸다가 다시 펴 보았다가, 결국 다시 오므렸다. "뭘 세는 겁니까." 세르네긴이 묻자, 아킨은 담담하게 답했다. "자유로운 시간." 그리고 몸을 일으켰다. 세르네긴은 건너편에 있는 소파에 대충 이불을 피고는 누워 있었다. 그의 턱 너머로 보이는 창에서 빛을 뿌리는 달을 보니, 이제 이틀 이나 사흘 정도 남은 듯 했다. 귀에는 이제 단 한 남은 귀걸이만이 차가운 빛을 발하고 있고, 몇 년을 붙어 있던 은봉인이 떨어져 나가 며 드러난 귀는 너무도 시렸다. 그런데 세르네긴이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인다. 자느라 셔츠를 반쯤 풀어헤치고 있어, 목에 걸린 하얀 반지가 달빛에 반짝였다. 아킨은 그것을 물끄러미 보다가 물었다. "이야기 좀 해주겠습니까?" 그러나 세르네긴은 고개를 저었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럴 것 같았어요." 그는 힘들기는 했어도, 적어도 어두운 환경에서 자란 것 같지는 않 았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 좋은 일이 있고 나쁜 일도 있고, 그 러다 다시 좋은 일이 생긴다. 존경하는 사람도, 사랑하는 사람도 있 다. 행복할 때면 그의 어깨를 안아줄 사람들이 있고, 괴로울 때는 그 품안에 얼굴을 파묻어 줄 사람이 있다. "그냥, 뭐라도 듣고 싶어서 이러는 겁니다." 세르네긴은 목에 걸린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창 밖을 향하던 눈길이 이제는 마주보는 벽을 향했고, 검은 머리카락 끄트머리는 달빛에 하 얗게 반짝인다. "친어머님은...제가 여섯 살 되던 해에 돌아가셨습니다." 일단 운을 떼자, 세르네긴은 담담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전염병이었고, 그냥....한 집에서 하나 이상 죽어 나가는 데 제 어머 님도 끼어 있었던 겁니다. 사실.....어린 제 쪽이 오히려 운이 좋았던 거죠. 그 후 아버님은 꽤 오래 혼자 사시다가, 제가 열살 되던 해 유즈의 어머니와 재혼하셨습니다. 아버님들끼리 친구 사이셨다는 데, 서로 위로하다 보니 가까워 진 거죠. 생각해 보면, 그분과 아버 지가 결혼하신 뒤....꽤 오랜만에.....편안하고 행복했습니다. 아버지와 슈마허 님, 그렇게 셋이서 살던 시절이 나빴던 것은 아니지만.....한 꺼번에 어머니와 작은 여동생까지 생기니, 비할 바 못되더군요." 어둠 속에서 세르네긴이 웃는 것 같았다. "어쨌건, 아주.....좋았습니다. 아버님은 좀 아이 같은 구석이 있어서 자주 사고를 치던 분이었지만, 새 어머님과 만난 뒤로는.....아주 점 잖아 지셨고, 붙임성 별로 없던 저도 그분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아 마.....하늘에 계시던 제 어머님도 기뻐하셨을 거라 생각해요." 아주 향긋하고 부드러운 추억. 흘러가 버려 슬프지만, 그리워하면서 미소지을 수 있는 그런 추억이었고, 그 잔잔한 흐름이 지금까지 이 어져 현재 역시 그 추억만큼이나 소중하게 된다..... 아킨은 몸을 더 깊이 누이며 물었다. "그래서....요?" "새 어머님은.....3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유즈는 열 두 살이고, 저 는 스물 한 살이었죠. 그리고...돌아가시기 전에 제게 가장 소중한 것을 남겨 주셨습니다." 아킨은 턱으로 그의 가슴을 가리켜 보였다. "그 반지요?" "설마요. 이건 유즈가 준거지요. 어머니께서는 유즈를 맡아 달라 고....그리 당부하셨습니다." 딸을 맡길 정도로 저 무뚝뚝한 세르네긴은 그녀에게 사랑 받고 신 뢰받은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문득 궁금해졌다. "의붓여동생은.....열 두 살이었으니...지금 열 다섯이겠군요." 답지 않게 그런 것을 묻자 세르네긴은 한참 만에야 고개를 끄덕였 다. 아킨이 말했다. "어때요, 그 아이는." "어렸을 때부터......걱정 많이 시킨 아이죠. 몸도 약하고, 얼굴도 많 이 가리고......잘 울고...." 요조숙녀처럼 얌전하고 병약한 아이인가.....그런데 갑자기 세르네긴 이 웃었다. "하지만 아주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이입니다. 영리하기도 하고요." 아킨은 그의 눈빛을 잘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달빛에만 반짝이는 그 눈 안에 어떤 따뜻한 애정 흐르고 있을 지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그 리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세르네긴이 부러웠다. 존경하지는 않지만 사랑하는 아버지, 두 번이나 가졌던 다정한 어머 니들, 저 무뚝뚝한 얼굴에도 미소를 퍼뜨리는 사랑스러운 여동생에, 조금만 다쳐도 얼굴이 해쓱해져서 달려드는 의형 슈마허.... 그것이야말로 핏줄과 진한 애정으로 단단히 매인 가족이다. 그들은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며 헌신하고, 저 앞의 남자가 그들이 아는 '세 르네긴'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다면 당 장에 팔 걷어 부치며 달려올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가 자살하고, 생각도 제대로 나지 않는 지옥 같은 1년을 보내 다가 결국 성을 뛰쳐나와 이복 형 자케노스를 만나기 전 까지는.....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조용히 달래어 주는 존재는, 그 렇게 따스한 기억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었다. 어머니는 그저 서글픈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고, 가장 가까운 휘안토 스는 떠올리고 싶지 조차 않았다. 쌍둥이 형 휘안토스와 마주하면, 아킨은 차라리 아버지의 이글거리 는 눈빛을 정면으로 보는 편이 훨씬 더 낫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분노나 증오라도, 차라리 터뜨리는 편이 낫다. 알 수라도 있으니. 그 러나 그 휘안토스는 아니다. 미소와 세련된 태도로 완벽하게 감출 뿐이다. 그리고 본다, 아킨의 분노에 미소짓고 거친 행동과 반항을 받아들이고, 그러며 '지켜보는' 것이다. 그 철저한 휘안토스는 아킨이란 인간, 자신과 너무도 닮았고 닮지 않은 동생을 샅샅이 훑어보며, 결국 더 알아낼 것이 없을 때까지 그 탐색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조심스런 작업이 끝나면 휘 안은 그를 철저히 길들이고 복종시킬 것이다, 편리하고도 유용한 인 간이 되도록. 휘안토스라는 인간 자신에게 맞추어 놓고서는, 혼자서 살수 없는 그런 불구로 만들어 놓을 테지....그리고 결국에는 그 뜻 에 따라 이 형을 숭배하게 되고 말 것이다. 절망과 질투에 타죽어 가면서도 말이다.... 아킨이 끔찍했던 것은 그것이었고, 그를 결코 이길 수도 휘안토스 자체가 될 수도 없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게 된 지금....아킨은 암 롯사를 완전히 떠날 생각이었다. 성년이 되어 독립해 영지와 유산을 받게 된다면, 아킨은 로메르드에 계속 머물고 싶었다. 아킨이 독립 하면 자켄은 왕의 숲을 떠나, 어둠 숲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가 없 는 암롯사는 아무 의미도 없고, 형이나 아버지와 마주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곳 로메르드에는, 롤레인이 있고 루첼이 있고....켈 브리안도 있다. 그러니, 얼마든지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새로운 추억을, 저 세르네긴처럼 따뜻한 미소와 함께 돌이켜 볼 수 있는 그런 것을 말이다. 그것이야말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 '희망'이었고, 지금 너무나 간절 히 지키고 싶었다. 자켄은 도시에 긷든 진한 불길함을 금방 감지했다. 여행 때문은 아 니다. 자켄은 열 여섯에 숲을 떠난 이후 자주 여행을 다녔으니. 방랑하는 엘프는 드물긴 하지만 분명 존재한다. 바실리카도 성년이 된 후 몇 년 간 인간 세상을 방랑했다. 다른 전사들도 각각 한 두 번 이상은 숲 밖으로 나가 방랑을 했으며, 심지어 모두의 어머니인 그녀도 인간 마법사와 교류를 했던 적이 있다. 드래곤이 숲을 다스 리는 에크롯사를 제하고는, 엘프가 가지 않은 곳은 없다. 어디로든, 원하는 대로 가는 것이 엘프였다. 그러니 절반은 인간인 자켄이 방 랑하는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었고, 사람들 틈을 누비는 것도 어색 하지 않았다. 그러나 롬파르에 도착한 자켄은 그곳에 다른 인간들의 도시보다 몇 배는 더 검은 기운이 깔려 있다는 것을 느꼈다. 다른 엘프들에 비해 그것을 느끼는 예각이 둔한 그였지만, 인간들보다는 훨씬 발달해 있 다. 이렇게 흉흉하니 이종족인 자켄이 마음놓고 돌아다니기는 좀 불 안했다. 이럴 때 긴 귀를 가리는 마법을 쓸 수 있다면 좋겠지만, 다른 엘프 들은 엘프라는 신분을 감출 필요가 있을 때 얼마든지 그것을 쓸 수 있는 데 반해, 자켄은 혼혈이라 그런지 전혀 쓸 수 없었다. 그저 행 여나 눈에 뜨일까 싶어서, 지금이 해가 저문 저녁이라는 데에만 안 도하며 후드나 깊이 쓸 수밖에 없었다. "어이-" 자켄은 앉아있던 곳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는 목소리, 익숙한 영혼 의 기운이었다. 루첼이었다. 호리호리한 그는, 벽 위에 고양이처럼 앉아서는 자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켄이 손짓을 하자, 발을 퉁겨 바닥에 가볍게 내려왔다. "롬파르에 온 걸 환영한다, 엘프." 자켄은 반갑게 인사하는 루첼을 물끄러미 보더니, 느닷없이 물었다. "무슨 일 있었나?" "일이야 많지. 그런데 왜?" 자켄은 짐을 받아 행여나 쓸만한 거 없나 하고 슬쩍 열어보는 루첼 에게 다시 짐을 빼앗아 버리고는 말했다. "기운이 안 좋다. 어둡고, 창백하고......우울하군. 무슨 일 언짢은 일 이 있었나?" 루첼은 자켄의 짐에서 손을 탁 놓았다. 그리고 멋쩍게 웃더니 고개 를 끄덕였다. "좋아하던 여자가 어제 내 친구와 결혼했거든." 자켄은 눈을 조금 찌푸렸다. "그것 뿐만은 아닌 것 같은데?" "더 묻지 마. 속 뒤집어 지니까." 결국 자켄은 그만두기로 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니 이 이상한 인 간 녀석과 친구 비슷한 것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탁 터놓게 되었던 걸까, 그저 한 일주일 정도 늪의 성에서 알고 지냈을 뿐인데, 이 녀석은 벌써 아주 몇 년은 허물없이 사귀었 던 것처럼 굴고 있고, 자켄 자신도 정말 그렇기라도 한 듯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반쪽 엘프. 너도.....여자있어?" "어떤 여자를 말하는 거지?" "같이 살고 싶은 여자." 자켄은 아주 잠깐 '그녀'를 떠 올렸다가는 억지로 고개를 저었다. 그 런 마음을 품는 다는 것 자체가 불경인 상대였다. 아니, 입 밖으로 내는 순간 그와 그녀의 신뢰와 연대는 무너져 사라질 것이다. 자켄이 말이 없자, 루첼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있나 보군. 어느 쪽이야, 인간? 아니면 엘프." "스승." ".....응?" 루첼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찌푸리고는 안경을 밀어 올렸다. 자켄은 잊어버리라고 말하듯 고개를 저어 보였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관두고.......아킨은 어디에 있지?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고 싶은데." 루첼이 너 대체 무슨 소리냐는 듯 자켄을 보았다. 대충 눈치챈 자켄 은 힘겹게 설명했다. "아킨은 그저 너를 만나라고만 말했다. 중간에 누가 전갈을 가로채 거나 할 까, 해서 그리 한 것 같아." "나를....? 맙소사, 그 고생시킨 것도 모자랐나, 이 뻔뻔한 녀석....!" 자켄은 귀를 가리켜 보였다. "아킨의 봉인에 대해서도 들었어. 그것이 완전히 깨지면, 아킨 혼자 만 위험한 게 아니다. 모두에게 위험해." "그건 알고 있어. 그리고.......옆에 '네'가 있어야 한다는 것도." 루첼의 말에 자켄이 소리없이 웃었다. "많이 알아냈네." "우선 찾아나 가자고. 그리고 그 위험물 챙기는 대로, 잽싸게 바다 로 나가." 그리고 그 말을 할 때까지, 루첼은 아킨이 이미 떠났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 작가잡설: 아울은...연인과의 이별 따위는 별 고난이라 생각하지 않 습니다. 아울 캐릭이라면 누구나 해야 하는 통과의례이자, 끝에서 그 연인과 재결합여부 역시 아울의 배알 꼴림에 달려 있는 것. 겨우 그것 가지고 고난이지 뭐니 하는 건 안되지요. 끄덕끄더.......근데, 주 변에서 번득이는 이 이상한 것들은 뭐지요...? ^^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16장 *************************************************************** [겨울성의 열쇠] 제16장 찢겨진 달빛 제70편 찢겨진 달빛#1 *************************************************************** 켈브리안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밤이었다. 먹구름이 몰려들어, 파릇한 빛을 쏟아내던 달이 어둠에 먹혀 들어갔 다. 그녀는 힘겹게 일어나다가, 한꺼번에 확 몰려드는 현기증에 다 시 쓰러지고 말았다. 속이 쥐어짜듯 뒤틀렸다. 고통에, 켈브리안은 얼굴을 가만히 찌푸리며 입술을 짓눌렀다. "아픈 거니?"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켈브리안은 조용히 숨을 몰아쉬며, 젖은 이마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 다. 그는 구석에 놓여있는 의자에 앉아 있다가, 켈브리안이 바라보자 빛 을 띄웠다. 빛은 자그마한 반딧불만 했다가는, 빠르게 커져 달걀만 해졌다. 그러나 강한 빛은 아니었다. 달빛보다 조금 강하게, 주변을 파릇하고 은은한 빛으로 젖어들게 하고는 더 이상 밝아지지 않았다. 켈브리안이 조용히 그를 불렀다. "탈로스." "외삼촌." 그가 고쳐주었다. 듣기 싫게 쉬고 갈라진 목소리였으나, 켈브리안을 겁먹지 않게 달래 보려는 듯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켈브리안은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어머니에게 무슨 짓을 한 거죠?" "아무 짓도 안 했어." "아니, 말 해줘요! 어머니는....그런 분은 아니었어요!" 탈로스가 정색을 했다. 흉한 얼굴이 더 흉하게 일그러졌다. "아니라니, 네가 네 어미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런 사람이 아니라 말 하는 거지?" 켈브리안은 입술을 꾹 물고 말았다. 뭘 알기래, 그렇다. 어머니에 대해 뭘 제대로 알았던가. 베르티노에게만 집착할 뿐, 켈브리안에게는 아무런 애정도 보여주지 않던 냉랭한 어머니였다. 이야기 해 본 적이 있었던가,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 본 적이 있었던가, 손 한번 잡아 본 적이 있었던 가, 한번도 없다. 그러니 외삼촌이 있었다는 것은 알아도, 어떤 사람인 지 몰랐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티폴라 할머님께서 돌아가실 때 어머니에게 물어 보기라도 했다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면 그 마법사, 탈로스 고르노바가 어머니의 친 오빠라는 것은 알았을 것이고, 아킨에게 그런 위험한 짓을 시키지도 않았을 것이다. "외삼촌...." "그래." 그가 기분 좋은 듯 웃었다. "왜...한번도 오지 않으셨던 거죠?" "내 모습을 봐라. 누가 나를 반기겠니." "하지만 어머니는 삼촌을 아주 좋아하시는 것 같던데요." 비꼬는 것이었다. 그러나 탈로스의 연푸른 눈이 기쁨으로 반짝였고, 그 두 손을 마주잡으며 천천히 비볐다. "집안에서 나를 좋아해 준 것은 그 아이 밖에 없었지. 탈로스 오라 버니라 부르며, 내게 달려와 내 목을 안아주고 볼에 입맞추어 주며 웃어주었던 것은 그 아이 밖에 없었어. 맙소사, 얼마나 사랑스러웠 는데! 그래서 그 아이를 위해서 무엇이든 해 주고 싶어, 나는..." 그렇겠지, 어머니는 능력 있는 사람만을 사랑한다. 지위도, 재산도, 외모도, 심지어 성격도 다 쓸모 없는 것들이다. 그녀가 사람을 판단 하는 기준은 단 하나, 능력일 뿐. 그녀의 야망과 소망을 이루게 해 줄 능력 말이다...... "어머니가 해 달라 하는 건 무엇이든 해 드릴 건가요?" 그가 탄성을 질렀다. "물론이지! 내게는 힘이 있어." "그렇다면 왜 그 전에는 오지 않으셨던 거죠?" "왔었지. 그 고약한 노파를 죽이러 왔었어....물론, 다들 너무 의심을 해대서 그 아이의 말에 따라 내 탑으로 돌아갔지만..." 그리고 탈로스는 히죽 웃었다. "이렇게 필요할 때 돌아왔지." 켈브리안은 오싹 소름이 끼쳤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최대한 태 연하게 조용히 물었다. "그럼....왜 아키를 노리는 거죠?" 탈로스의 눈이 켈브리안을 똑바로 향했다. 켈브리안은 그 눈길을 마 주보려 노력했지만,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이글거리듯 무시 무시한 안광은, 아직은 어린 켈브리안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겁다. 질려버린 켈브리안은 결국 눈을 감아버렸다. "그 꼬마를 좋아하니?" "네, 좋아해요." 켈브리안은 쉽게 말했고, 그런 자신에게 더 놀라버렸다. 맙소사, 이 렇게 필사적이라니. "그러니...삼촌, 그 아이를 괴롭히지 말아줘요." "부탁하는 거냐?" "네. 부탁드려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 드릴 테니, 제발.....그 아 이를 괴롭히지 말아줘요. 가엾은 아이에요." 탈로스가 다가왔다. 눈을 꾹 감고 있던 켈브리안은 차갑고 미끈한 손이 볼을 어루만지는 것을 느꼈다. 두려움과 아킨에 대한 걱정에, 결국 감은 눈꺼풀 사이로 눈물이 스며 나왔다. 그러자 그가 눈물을 닦아주었다. 차갑지만, 그 손길만은 조심스럽고 다정했다. "미안하지만 안 되는 구나, 아가야." "어머니가 예뻐하는 딸이 아니라서요? 어머니에게 발칙한 짓을 저 질러서요? 하지만....이해해 줘요, 외삼촌. 제게는 그게 최선이었어요. 전 어머니를 사랑해요. 어머니가 원하는 아무 것도 못 해드리지만, 그래도 어머니를 사랑해요. 제 방식대로 어머니를 위해왔어요!" "그 때문이 아니야. 너는 너무 늦게 약속을 하려 하고 있어. 나는 이미 약속했고, 지킬 수밖에 없어. 반드시...말이야." "대체 누구와 약속을 한 거죠?" 놀란 켈브리안은 눈을 떴다. 소녀의 젖은 눈을 보자, 탈로스는 마음 이 아픈지 울상이 되어서는 두 손으로 조카의 창백한 볼을 감싸 쥐 었다. "켈브리안...." "말해 줘요, 누구와 약속을 했어요! 누가....아키를 해치라고 했어 요?" "네 어머니를 구해준 소년과 약속했다." 켈브리안이 고개를 숙이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푸른 눈을 반짝 이는 소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탈로스는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켈브리안이 자기에게 묻듯 속삭였다. "휘안토스.......?" 순간 탈로스의 눈빛이 틀려졌다. 이런 맙소사! 켈브리안은 침대에서 일어나 방 문 쪽으로 달려갔다. "켈브리안!" "나가겠어요! 어머님께 말씀 드리겠어요! 아니, 내가 직접 그 휘안토 스를 만나겠어요!" "안 된다. 나갈 수 없어." 켈브리안은 문을 당겼지만 꿈적도 하지 않았다. 팔이 아프도록 문고 리를 당기며 켈브리안이 외쳤다. "밖에 누구 없어! 열어 줘, 문 열어--! 어서!" 탈로스가 황급히 달랬다. "그 아이를 죽이지는 않아, 걱정 마." "열어줘요, 어서--! 어서 열어! 이런! 그래, 죽이지 않는다고 하셨어 요? 아니, 그 아이에게 손도 대지 않겠다고! 자유롭게 놔주겠다고 약속해 줘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아무 소용없어요. 삼촌이 그 아 이를 죽이지 않을 거라는 건, 저도 아니까요." "어째서...그리 말하는 게냐!" "그렇다면 벌써 휘안토스가 제 손으로 죽였을 테니까요. 그 재수 없 는 녀석은, 제 손에 혈육의 피를 묻히는 것을 무서워할 녀석이 아니 니까! 누가 문 좀 열어-!" 순간 켈브리안은 머리가 아찔해졌다. 속이 매슥거리고, 울컥 토해낼 것만 같았다. 온 세상이 휘돌더니, 곧 깜깜하게 감겨버린다. 켈브리 안은 휘청거리며 벽을 짚었다가 결국 쓰러져버렸다. "자네는 언제나 밤중에, 그리고 참....불쾌하게 방문하는 군." 슈마허는 한 명의 기이한 방문객과 다른 한 명의 달갑지 않은 방문 객들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두 방문객 중 '기이한' 쪽이 자신의 눈을 가리키며 말했 다. "눈빛이 상당히........" "상당히?" 슈마허가 잡아먹기라도 할 듯 불친절하게 되묻자, 자켄은 고개를 저 었다. "관두죠." "그러려면 뭐 하러 말을 꺼냈나, 꼬마 엘프." 세르네긴보다 나이가 많은 자켄이었으나, 엘프로 치자면 정말 꼬마 에 해당되었다. 슈마허가 말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그 녀석들이 어디 있는 지 알고 싶 고, 알아내는 즉시 당장에 달려가야 하네." 자켄은 사소하게 감동하는 체질이 아니었다. "아키 때문은 아니겠군요. 누구, 걱정되는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그 녀석 말고, 그 녀석 따라간 내 의동생이 문제니까. 자네에게 자 네 동생이 중요하듯, 내 의동생 역시 중요하네." 슈마허는 왕비의 으름장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그녀의 말은 진심이 었다. 그리고 그 뜻은, 세르네긴이 왕비가 하려는 일을 막으려 할 시 얼마든지 제거할 수 있다는 뜻이다. 아무리 세르네긴이 펄펄 나 는 녀석이라지 만, 한 나라의 지배자와 맞설 수 없다. 물론 슈마허 는 쓸데없는 원망과 분통을 터뜨리느라 시간 낭비하는 것은 체질상 맞지 않았다. 그 녀석만 없었더라면, 하고 투덜거리기보다는 뭘 해 야 할 지나 생각하는 것이 그였다. 지금 슈마허는 수하의 용병대를 대기시켜 놓은 상태였다. 그는 외국 인, 섣불리 행동하기보다는 조심하는 편이 나았다. 특히, 지금처럼 정권을 잡은 왕비가 거의 반쯤 정신이나가 있는 상태라면. 그러니 당장에 하는 일은 세르네긴이 먼저 연락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 다. 결국 자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알아서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같이 찾아보자는 말은 안 하는 군." ".....당신은 지나치게 주변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무엇이 있군요. 죄 송하지만, 당신처럼 눈에 뜨이는 분과는 같이 있고 싶지 않습니다. 아키에게 위험할 겁니다." "내가 에크 출신이라 그러는 게 아니고?" 슈마허가 노골적으로 빈정댔다. 그는 어떻게든 자켄을 도발해 보려 하고 있었고, 화라도 벌컥 내면 서 그가 원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내 놓기를 바라고 있었다. 평소의 그라면 상대방이 전혀 모르도록 행동했을 테지만, 지금의 슈마허는 그러기에는 너무나 조급해져 있었다. 자켄 역시 날카롭게 답했다. "엘프가 거부감을 느끼는 인간은 에크의 용기사들 뿐입니다. 에크 출신의 모든 인간에게 그 정도의 거부감을 느낀다면, 당신의 세르네 긴을 못 찾을 것도 없지요." 잠시 슈마허의 회색 눈이 자켄에게 멈추었다. 그러다가 태평하게 앉 아있는 루첼을 내려다보고는 말했다. "넌 좀 나가 있어라." ".....네?" "나가 있으라고 했다." 기분 나쁘게 갑자기 웬 턱짓이야, 루첼은 한 대 쳐버리고 싶을 정도 로 화가 치밀기는 했지만 그가 '집주인'인 것은 사실이라 자리에서 일어났다.(나이가 많기도 하고) 루첼이 나가자, 슈마허는 목소리를 잔뜩 낮추어 바닥에 늘러 붙을 정도로 작게 말했다. "용기사라면 알아낼 수 있다고 했나?" "네." "드래곤과 같이 있지 않아도 가능한가?" "그렇다면, 아주 정확하게는 모릅니다. 대략적인 위치만 알 수 있을 뿐." "그럼, 그렇게 해 봐." 자켄의 눈이 커졌고, 그 긴 귀가 살짝 올라갔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엘프라 사람 말 못 알아듣나. 내가 몇 마디 한 것으로 대충 눈치 채 버려. 더 말하는 건 나로써도 곤란하니까. 어쨌든, 자네가 원한다 면 도와줄 수도, 여기 처박혀 있을 수도 있네. 하지만.......만나게 된 다면 그 곱상한 왕자님은 얼른 뺏어 버린 다음, 세냐에게 말 해줘. 당장 달려오지 않으면 내가 턱을 날려 버릴 거라고." 쫓겨난 루첼은 응접실 밖의 복도에 있는 창가에 기대서서 하늘을 살펴 보았다.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 달이 어떤 지는 도무지 모 르겠다. 자켄이 왔으니, 일단은 안심하자 했는데, 또 사건이 터졌다. 아킨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또 한번 더 깊은 곳으로 도망쳤다. 맞서겠다고 설치는 것보다는 현명해서 좋았지만, 당장 찾아야 하는 처지의 루첼 과 자켄으로서는 답답할 노릇이다. 그러던 루첼은 푸드득-작게 날개 치는 소리를 들었다. 루첼은 자세 는 그대로 유지하며 눈길만 흘끔 올렸다. 창가에 무언가가, 아주 작 은 얼룩 같은 것이 투명하게 어려 있었다. "비쟈트." 루첼은 짧게 중얼거렸다. 순간 얼룩이 새까매지더니, 양옆에서 제비 날개 같은 것이 솟구쳐 올랐다. 루첼은 재빨리 창가에서 몸을 떼고 는, 손을 확 폈다. 짧은 고단위 주문과 함께, 검은 날개를 퍼덕거리 던 그 그림자가 루첼의 손으로 억지로 끌려 들어왔다. 녀석은 벗어 나려 퍼덕대며 몸부림 쳤지만, 그것을 끌어당기는 루첼의 마법이 훨 씬 더 강했다. 조금 가까이 오자마자 루첼은 잽싸게 그것을 잡아챘 다. "뭐지, 이거..." 순간 뭐가 빛이 터지듯 눈을 덮었다. 루첼은 고개를 돌려버렸지만, 손에서 따끔한 고통이 찌릿 파고 들어왔다. 그리고 머리가 번쩍이는 가 싶더니, 얼굴이 마르고 볼이 푹 들어간 남자가 놀란 눈으로 자신 을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그 낯선 남자는 손을 급히 뻗으며 작고 빠르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손안에서 퍼덕거리던 그것이 그의 손을 호되게 후려치고는 위로 솟구쳐 올랐다. "큿-!" 결국 루첼은 신음을 흘리며 손을 당겼다. *********************************************************** 작가잡설: 세르네긴의 정체는 드래곤의 신부. 그리고 아울은 지금부터 풀 플레이트 주문 제작에 들어갑니다. -_- ........내심 찔리는 중이라...^^;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16장 ************************************************************** [겨울성의 열쇠] 제71편 찢겨진 달빛#2 ************************************************************** "....들켰군." 휘안토스는 검은 날개가 돋친 것이 손안에서 팟 깨어지자, 나른히 중얼거렸다. 놀란 매가 휘안의 어깨 위에서 날개를 푸드득 쳤다. 휘 안토스는 손가락으로 그 매의 목덜미를 쓸어 주었고, 매는 가만히 눈을 감으며 머리를 기대왔다. 마법사는 고용주인 소년의 눈치를 면밀히 살피며, 어떻게든 소년의 뜻에서 한발 앞서나가는 말을 해 보고자 했다. 여기서 제대로 짚어 서 날카롭게 말해야 소년이 자신에 대한 평가를 한 단계 높일 것이 다. 자신의 실수 같은 것은 잊도록 해야 한다. "그 남자가 누구인지 안다. 권호는 커녕, 아직 졸업도 한참 남은 학 생이지." 그리고 휘안토스가 빙그레 웃었다. 생각보다 상황이 엄청 나자, 마 법사의 얼굴이 금방 창백해졌다. 휘안토스가 말했다. "참, 자네는 가지가지로 실수를 하는 군. 지난번에는.....뒷골목근처에 서 아킨을 놓치고, 이제는 들키기까지 했으니." 마법사의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며 휘안토스는 말을 이 었다. "신뢰를 회복할 기회는 주겠어. 지금 당장." "감사.....합니다." 휘안토스는 마르실리오에게 말했다. "말 한 마리만 데리고 와. 아무 놈이나." "네." 마법사는 휘안토스를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혼자서 떠나라. 만약 없애지 못한다면, 계약은 당장 파기야." 마법사는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이 어떤 성격의 것인지 잘 알았다. 이 런 일에 있어서의 계약파기라 함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겨우 학생 을 상대 못하랴 싶기도 했지만, 그 정도로 자신에 대한 신뢰가 바닥 나 버렸다는 데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마법사는 그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마르실리오가 데리고 온 말에 탔다. 마법사가 떠나자, 휘안토스는 이번에는 마르실리오에게 명했다. "경은 나와 단 둘이 떠난다." "위험합니다. 적어도 둘이나 셋 정도는 같이 가는 게 좋습니다." "상대가 많기나 하면 그리 한다. 지난번은 비밀스러운 일이었기는 하나, 적어도 한 나라의 모후를 구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이번 일은 '집안 일'이야. 그림자의 보호자들이라 할 지라도, 이 일에 끼어 들 어선 안 된다." "그렇다면 저 역시 마찬가지 아닙니까." "경의 조부, 케올레스의 이름에 걸고 맹세해라. 그러면 나는 지금의 너를 믿고, 끝까지 믿겠다." 마르실리오의 가슴에 그 칼자루가 올라왔다. 부모나 스승의 이름에 걸고 하는 맹세의 의식이었고, 그것은 암롯사 기사들의 생명 같은 명예를 거는 것이었다. "맹세합니다, 왕자님." 휘안토스는 빙그레 웃었다. "좋아, 마르실리오 경. 자, 이제부터.....함께 가도록 하지." "네." 휘안토스는 마르실리오와 함께 배를 대 놓은 버려진 나루터를 떠났 다. 루첼은 쉐플런에게는 사실을 알리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상관없는 사람이고, 되도록 상관없어야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막 방을 나온 자켄과 함께 슈마허의 저택을 나오자, 그제야 그것에 대해 말했다. 자켄의 눈빛이 당장에 날카로워졌다. "아키가 말한 그 마법사인가?" "그 마법사보다는 열 배는 멀쩡하게 생겼던 걸." 자켄이 주변을 둘러보고는 물었다. "지금도 옆에 있나?" "내 능력으로 짚어 낼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어. 그 마법사가 나 보다는 나은 마법사라면, 내가 짚어낼 수 없는 것도 만들어 낼 수 있겠지." 그러자 자켄이 두 팔을 들더니 날렵한 손동작을 해 보였다. 그의 주 변에서 옅은 기운이 흘러나와 화르륵 퍼졌다. 그것은 마나가 아니 라, 더욱 깨끗하고 순수한 무엇이었다. 깊은 숲 속의 맑고 투명한 시냇물처럼, 그것은 아주 상쾌하게 주변을 훑었다. 자켄은 눈을 가 늘게 뜨며 그 흐름을 면밀하게 살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무 것도 없다." 루첼이 놀라 물었다. "마법이야, 이거?" "인간의 마법이 아니라 정령술의 일종일 뿐이야. 엘프라면 애도 할 줄 아는 거다. 어쨌건, 지금 당장....아키를 찾아서 떠나야겠어." "찾을 수 있겠어?" "방법을 알아냈다. 그리고 넌 당장 돌아가. 위험할 지도 모르니까." "필요할 때 끌고 왔다가는, 필요 없으니 냉큼 돌아가라는 거야, 너?" "따라 오고 싶으면 따라 와도 좋지만, 네게는 불가능하니 돌아가라 는 거다." 루첼은 대충 그 뜻을 알아챘다. 그리고 다행히 그는 책임감은 있었 지만, 고집덩어리는 아니었다. "길은 알아?" "목적지만 안다면, 가로막는 벽은 넘으면 된다." "아주 좋은 자세야, 자크. 아키 공주님 찾으면 즉각 백색 다리로 오 라고 해. 유명한 장소니, 녀석이라면 알 거다. 그 사이에 배를 준비 해 놓을 테니, 재깍 달려와." "시간은 정하지 않아도 되나?" "필요 없어. 백색 다리가 보이는 곳에 배를 대기 시켜 놓을 테니까. 또, 얼마나 걸릴 지는 모르지만 내가 배를 찾는 시간보다는 오래 걸 릴 거 아냐." 그렇게 말하고는 루첼은 지체할 것 없다는 듯 즉각 돌아섰다. 자켄이 서둘러 말했다. "고맙다." "나중에 아키한테는 엎드려서 감사하라고 전해 줘." "물론이다." 루첼은 빙그레 웃고는 항구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자켄 역시, 후 드를 머리에 쓰고는 사슴처럼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먹구름이 이 제 더욱 꽉 몰려들어,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낼 것만 같았다. 루첼은 어제나 그제 달 모양이 어떠했는지 알아 둘 걸 그랬다고 생 각하며 후회했다. 제임은 취객들을 치우고 있었다. 온 시내가 뭐가 터질지 몰라 흉흉했기 때문에, 주점의 손님은 반으 로 뚝 끊어져 버렸고, 일찍 떠나거나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곤드 레만드레 취해버렸다. 요즘 별 할 일이 없는 에나는 투덜투덜 대면 서도 그릇을 치웠고, 평소에는 길드 마스터가 아니라 그저 주방장일 뿐인 첸은 남은 음식들을 씹어 먹으며 부엌을 치우는 중이었다. 셋이 그렇게 부지런히 일하고 있는 데, 문이 벌컥 열렸다. 가게문을 닫기에는 이른 시간이었기에 제임은 이 손님을 받기로 해 서, 취객 하나를 구석으로 발로 차 던지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좀 지저분한데 괜찮겠소?" "괜찮습니다." 그 때 에나가 잽싸게 그릇을 놓더니 뒤로 후닥닥 물러났다. 그녀의 손은 허리춤에 가 있었고, 그 손끝에는 그녀가 애용하는 짧은 단검 의 칼자루가 닿아있었다. 그 얼굴은 괴물이라도 본 듯 창백했다. 제임은 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순간, 그의 목덜미에 검이 와 닿았다. 제임은 그 검을 한번 흘끔 보고는, 눈을 슬그머니 올려 보 았다. 키가 크고 잘생긴 기사였다. 금빛 머리카락에, 그 눈빛은 침착한 회 갈색 빛이다. 제임은 목의 칼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 다. 다행히, 경솔한 기사는 아니라 검으로 찌르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곳은 멀쩡하고 합법적인 술집이요. 그러니 지금 상황에서는 그 검이 불법이라 보네만......파윈!" 불꽃이 그 칼자루와 손바닥 사이에서 펑 하고 튀어 올랐다. 기사는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으나, 제임이 마법사라는 것은 아예 예상 못 했던 지라 반사적으로 검을 당겼다. 제임은 그 틈에 마르고 호리호 리한 몸을 잽싸게 움직여 뒷문으로 향하는 문 쪽으로 피했다. "....에나, 이 쪽으로 와." 에나가 그의 말에 따라 다람쥐처럼 재빨리 도망 왔다. 부엌 쪽에 있 던 첸이 큰 거미처럼 소리 없이 엉금엉금 나와, 주변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그 역시 방금 전에 에나가 발견했던 사람을 보고는 짧게 탄 성을 흘렸다. 에나는 기사에 놀란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열린 문 앞에 소년이 서 있었다. 새까만 머리카락에 보라빛 눈을 가 진 깨끗한 얼굴의 미소년이었고, 그 얼굴은 아킨과 정말 똑같았다. 소년이 누구인지 첸도 제임도 즉각 알아챘다. 휘안토스 프리엔, 암롯사의 첫 번째 왕자이자 유일한 승계자. 대체 저 놈이 왜 나타난 거야, 하고 첸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킨 만 왔다 하면 정말 기분 더러운 일만 일어났으니, 그 얼굴과 똑같으 면서도 더 얄미워 보이는 얼굴이 나타나니 기분은 정말 고약했다. 휘안토스는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제임은 주변을 샅샅이 훑었으나, 소년의 호위는 앞의 금발 기사를 제하고는 보이지 않았다. 제임은 팔짱을 끼고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누구요." "휘안토스 프리엔." "네 동생은 알고 있지. 그래, 무슨 일로 온 거요." 휘안토스는 부드럽게 말했다. "동생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알려 줬으면 해서." 첸도 에나도, 그 말이 나오자 곧바로 편안하게 몸들을 늘어뜨렸다. 둘 다, 드디어 암롯사 왕가에서 아킨을 찾아가려 왔다고 생각했고, 그들이 아킨을 데려가면 더 이상 신경 쓸 일은 없어질 거라 생각했 다. 어쨌건 아킨이 무사하게 되면, 루첼도 무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제임만은 그런 소년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네 동생을 찾아내든 뭐하든 간에, 그건 네가 알아서 해라." 휘안토스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첸과 에나도 눈을 휘둥그래 뜨며 그 렇게 말하는 제임을 바라보았다. 대체 왜 말을 안 하는지, 그들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임은 손을 휘둘러 그들을 진정시 켰다. "어쨌건, 나는 말 해 줄 수 없어." "왜지?" "내 조카의 목숨이 걸린 문제라서." 제임은 그렇게 말하며 휘안토스를 바라보았다. 눈빛이 오고가고, 그 안에 숨어있던 것들도 불꽃처럼 번득이다가는 사라졌다. 휘안토스가 순간 앞으로 나서며 검을 뽑았다. 그가 당연히 여자인 에나를 노릴 줄 알았던 제임은, 그 검이 날아가는 방향을 보자 즉각 당황해야 했다. 그의 빠른 몸은 휘몰아치듯 날쌔게 움직여, 뒷문 근 처에 있는 첸을 향했다. 첸이 단검을 뽑았으나, 휘안토스는 단번에 날려 버리고는 그대로 밀어붙였다. 퍽, 하고 나뭇조각 튀는 소리와 함께 첸은 그대로 벽에 들러붙었다. 검은 목 바로 앞에 닿아 있었 다. 에나가 검을 던졌다. 그러나 마르실리오가 퉁겨 내버리더니, 주 먹을 휘둘러 에나의 배에 꽂아 넣고는 세게 후려쳐 버렸다. "큭-!" 에나가 몸을 웅크리고는 신음을 삼켰다. 제임은 멈추어 손을 든 채로, 에나의 뒷덜미에 검을 들이대는 마르 실리오와 첸의 목을 검으로 내리 누르는 휘안토스를 차례로 노려보 았다. 휘안토스가 말했다. "어쩌겠나." 제임은 이렇게 차분히 말하는 소년이 정말 얄미웠다. 고작 열 일곱 일 텐데, 전혀 아이다운 모습이 없었다. 차라리, 성질 건드리면 볼 것 없이 주먹부터 날리던 아킨이 더 귀여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험악하게 말했다. "사냥성 동쪽으로 가다 보면 나온다." 휘안토스가 마르실리오에게 묻는 눈빛을 보냈다. 마르실리오가 검을 당겨 꽂아 넣으며 말했다. "지난번의 그 성입니다." 휘안토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을 들었다. 그러자, 그 손바닥 안 에 있던 검은 구슬이 파작 깨어지며 양옆에 날개가 튀어 나왔다. 제 임이 채 손쓰기도 전에 그것은 제비처럼 빠르게 창 밖으로 날아갔 다. 일이 끝나자 휘안토스는 돌아섰다. 마르실리오가 그 뒤를 따르기 위 해 등을 돌리자, 분이 오른 에나가 발딱 일어나 단검을 던지려 했 다. 그러자 제임이 막았다. "그만해, 에나!" 에나가 울컥 해서는 외쳤다. "저 녀석들을 그냥! 야, 그리고 넌 왜 말을 안 해서 나와 첸이 그 지경이 되게 만들어!" 에나가 분통이 터진다는 듯 벽을 걷어찼다. 갑자기 제임이 버럭 고 함을 질렀다. "빌어먹을! 그렇게 형편없는 눈치로 살려거든 당장에 이 일 때려 치 워 버려, 이 얼간아!" "내가 얼간이긴 왜 얼간이야!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말한 거 야, 정말. 그 꼬맹이가 집으로 어서 돌아가야 루첼이 안전해 지잖 아." "에나, 진정해라." 첸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아직도 상황을 모르는 에나는 그저 뻘 건 얼굴로 둘을 번갈아 보았을 분이었다. 첸은 머리를 긁적거리고는 제임에게 말했다. "어떻게 할거냐, 너." 제임은 입을 꾹 물었다가는, 주점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나오는 그의 손에는 둥글고 납작한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 하나가 들려 있었다. 에나가 새빨개진 얼굴로 물었다. "어디 가는 거야, 제임?" "마법사 길드로." "거기는 왜?" "......지금 루첼이 위험하니까." "뭐어?" 눈치 빠른 제임은 휘안토스가 동생을 '찾으러' 온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주점 주변을 떠 돌던 그림자 새들을 단번에 치워버렸을 때 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고 첸 역시, 제임이 말을 안하고 휘안토스를 떠보는 순간 그 소년이 보인 반응을 보고 눈치챌 수 있었다. 세르네긴이 말한 '위험'이 지금 아킨을 향하고 있었다. *********************************************************** 작가잡설: 조카댁이 영 마음에 안 드는 제임......'친정이 문제야, 친정 이~~~'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16장 *************************************************************** [겨울성의 열쇠] 제72편 찢겨진 달빛#3 *************************************************************** 항구로 향하던 루첼은 누군가가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챘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거나 눈치챘다는 기색을 감추기 위해 세심히 노력했다. 되도록 앞만을 바라봤고, 발걸음도 일정하게 걸어 가며 서두르지 않았다. 곧, 물 철썩이는 소리가 가까이 들려왔다. 루첼은 그 끝없고 고요한 소리가 귀에 닿을 듯 가까워지며 강이 보이자 발걸음을 멈추었다. 따라오는 녀석이 마법사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그래도, 지난 번의 그 탈로스 고르노바나 오거스트 롤레인 교수보다야 약할테지. 츳, 소리가 가볍게 들리더니 얇은 백금선 같은 것이 그의 양옆으로 그려졌다. 눈에 뜨이지 않게 하려고 결계를 거는 것이다. 루첼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는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조용히 기다리며, 그는 마나의 흐름과 방향, 성격을 읽었다. 대결이 처음인 것은 아니다. 지난 번 탈로스와의 무모한 접전이전 에, 교과 중에 대결이 들어가기도 하니까. 그러나 그 때 날아오는 것들은 담당인 카신저 교수의 지나치게 배려 높은 공격일 뿐이었다. 목숨 내 놓고 해 본 적은 없고, 그런 상황에서 빠르게 판단하고 결 정하는 것 역시 해 본적이 없다. 사람을 죽여 본 적이 없는 것은 아 니다. 아니, 그 나이또래에서 그 정도의 살인을 한 것은 루첼 뿐일 것이다. 목숨을 걸고 싸웠던 적은 많았으며, 지금 루첼은 살아 있으 니 언제나 상대방의 것을 빼앗아 온 것이다. 쿠르르르--뭐가 내 달려 왔다. 루첼은 잽싸게 물러나며 손을 뿌렸다. 활 같은 것이 날카롭게 양옆 으로 솟구쳐 올랐고, 펑--눈부실 정도로 뜨겁고 거대한 불덩어리가 바로 앞에서 터졌다. 익을 정도로 거대한 열기가 얼굴을 확 덮쳐 들 어왔다. "칫-!" 루첼은 짧게 내 뱉고는 허공에 손을 짚어 수인을 맺었다. 하얀빛이 짧고도 날카롭게 터져, 사방을 밝히고 어둠을 찢었다. "크앗!" 큰 비명이 터지고, 쿵, 하며 큰 것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상 대 마법사는 바닥에 나동그라지더니, 길다란 지팡이 같은 것을 쥔 채로 팔을 휘두르며 외쳤다. "싸더스-!" 빌어먹을, 루첼은 뒤로 피했다. 허옇고 날카로운 것이 위로 거세게 솟구치더니, 마구 쏟아져 내렸다. 열기와, 그것이 품은 파괴력에 바 닥이 패이고 공기가 웅웅, 세게 울었다. 루첼은 구차하게 보호의 주 문 같은 것은 외우지 않았다. 대신, 단번에 불꽃을 날렸다. 꽈르르-열기가 사방을 뒤덮었다. 금빛 불꽃의 급류는 사방으로 퍼지 고 전격을 짓눌러 제압했다. 오랜만에 해보는 짓 거리군, 막다른 벽에 등 붙이고 상대를 한방 걷 어차는....빌어먹을. 다시는 이딴 짓하고 싶지 않았단 말이다! 루첼은 화까지 치밀어 올랐다. 불꽃이 주변을 휩쓸고 지나가자, 곧 습기 가득한 바람이 몰려들었 다. 비라도 한바탕 쏟아질 듯, 진한 물비린내가 한가득 배어 있었다. 상대 마법사가 지팡이를 든 채 비틀 비틀 일어났다. 짧은 그것의 끄 트머리에는 달 조각 같은 하얀 보석이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얼굴 을 보니, 어제 그림자 새 너머로 본 그 얼굴이 맞았다. 마른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고, 두 눈은 금방이라도 루첼을 갈가리 찢어 놓을 듯 이글거렸다. 그가 팔을 앞으로 뻗더니, 고함을 내 질렀다. "싸더스 리그흐!" 루첼은 몸을 날렸다. 그리고 속으로, 방금 전의 전격에서 번뜩이던 마나의 크기와 그 제어력이 어느 정도였던 지 재빨리 계산해 이번 의 좀 더 거대한 마법에 걸리는 시간을 알아냈다. 카신저 교수가 닳 도록 말한 것이, 강하다고 해서이기는 게 아니라 시전시간이 생명이 라는 것이다. "아리스테!" 루첼의 손바닥 위로 부연 것이 초승달처럼 떠올랐다. 상대 마법사 주변에는 아직 시전보호조차 일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역시, 그 정 도 마법을 단번에 쏘아 던지는 것은 롤레인이나 고르노바 정도의 마법사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루첼은 마법사의 손에 쥐어진 지팡이 를 겨냥해 그것을 내 던졌다. 마법사는 팔을 휘둘러 그것을 떨쳐냈 다. 그리고 곧바로 지팡이에서 빛이 터져 올랐고, 드디어 시전보호 가 일어나려 했다. 어차피 루첼이 노린 것은 지팡이 자체가 아니었 다. 지금 이 순간, 시전보호 직전의 완벽한 힘의 진공상태를 노린 것이다. 주문조차 필요 없이 주먹만한 불꽃이 루첼의 눈앞에서 일어났다. 막 바람을 떨쳐낸 마법사는 잠시 숨을 돌리고 있었고, 루첼은 그 순간 을 노려 그 팔을 향해 불꽃을 쏘아 던졌다. 콰르--살 타는 냄새와 함께 불꽃이 작게 갈라져 터져 버렸다. 지독한 고통에 마법사가 비 명을 질렀고, 그 손에서 지팡이가 떨어졌다. 루첼은 잽싸게 그것을 걷어차 저 쪽으로 날려 버렸다. 마법사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부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네, 네놈이--!" 루첼은 몸을 돌려 그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퍼억--! "컥--!" 그는 시원하게 저 멀리 나가떨어지며 기절해 버렸다. 루첼은 턱에 맺힌 땀을 닦아내고는 한숨 돌렸다. "후--죽을 뻔했네." 발은 빨랐지만, 루첼을 보낸 자켄이 도시를 벗어난 것은 한참이나 뒤였다. 그는 강을 따라 한참을 달려, 겨우 숲의 언저리에 도착했다. 구름이 벌써 두텁게 끼어 있었고, 습기도 주변에 가득했다. 흙 냄새도 자욱 하게 피어올랐다. 곧 비가 쏟아질 것 같다, 자켄은 끈끈한 얼굴을 닦아내고는 발을 멈추었다. 대충 방향을 잡는 데까지가 그의 한계였고, 더 이상의 자세한 것을 알아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숲과의 교감능력이 어린 엘프 정도만 되었다면 이렇게 머뭇거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순수한 엘프가 숲에 묻는 다면, 숲은 늙은 할머니처럼 친절하게 대답해 준다. 드래곤에 게 복종하는 에크롯사의 숲을 제하고는, 엘프는 모든 숲과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였다. 그러나 혼혈인 자켄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에게, 숲은 언제나 매정하고 냉랭한 침묵만을 보내왔을 뿐이고, 이렇게 다급한 지금도 달빛조차 없는 컴컴한 숲 속으로 인간의 자취를 더듬어 방향을 잡 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인간보다는 훨씬 밝은 눈으로, 자켄은 인 간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자켄은 후드를 뒤로 젖히고는, 길 주변을 면밀히 살펴보기 시작했 다. 그렇게 온 신경을 그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이한 바람의 흐름을 그가 느낀 것은 그것이 아주 가까워졌을 때였다. 자켄은 검을 뽑아 들고는, 숲의 그늘 속으로 숨어들었다. 어둠이 그 의 짙은 피부색을 가려주었다. 검은 머리카락도 어둠에 젖어들자 울 창한 잎들과 구분이 되지 않았고, 숲의 일족이 만든 그의 망토 역시 같은 색으로 물들었다. 날랜 새가 날아오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다가오고 있으며, 분명 자켄을 발견하고 노리고 있었다. 자켄의 예각이 그리 판단했 다. 자켄은 숲 속으로 더 깊이 스며들었다. 엘프나 드래곤이 아닌 한, 그를 찾아낼 수 없다. 습기가 더욱 진해졌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했고, 저 멀리서 는 벌써 후두두두두---빗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꽈르르르--! 엄청난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나무들이 박살났다. 떡갈나무 둥치 가 부러져 꺾이고, 잎들이 우수수 튀어 오르고, 숨어있던 짐승들이 놀라 푸드득 후두득 날아가고 뛰어 도망쳤다. 자켄이 숨어 있던 나 무도 으깨어지며 나뭇조각과 잎들이 흩어졌다. 그리고 다시, 이번에 는 자켄을 향해 철퇴처럼 육중한 것이 날아왔다. 자켄은 바람 소리 로 가늠하여 그것을 피했고, 그가 서 있던 곳이 크게 패이며 흙과 깨진 돌 조각이 튀어 올랐다. 자켄은 소름이 죽 끼쳤다. 차가운 그림자처럼 두려움이 몸을 휙 쓸 고 지나가, 턱이 떨렸을 정도였다. 땀이 끈끈한 습기 때문에 피부에 엉겨붙었다. 그리고 그가 노려보는 폐허 너머에, 작은 그림자가 서 있었다. 자켄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엉금엉금 걸어나왔다. 그리고 눈을 번 뜩이더니, 그에게 검을 겨누고 있는 자켄에게 쉰 목소리로 말했다. "엘프로군." 그리고 혀로 입술을 핥았다. 자켄의 두 귀가 분노로 곤두섰고, 눈도 날카롭게 번득였다. 움켜쥐 고 가슴으로 당겨 놓은 단검도 금방이라도 날카롭게 상대방을 할퀴 어 놓을 듯 살기가 돌았다. 키가 작고 흉측하게 생긴 그자는, 온 몸에 흉흉한 기운이 감돌고 있 었고, 그것은 예민한 엘프인 자켄에게 축축한 안개처럼 민감한 영향 을 주고 있었다. 위험하다, 반드시 쓰러뜨리고 지나가야 할 자다. 자 켄은 검을 휘둘러 앞으로 향하게 하고는 발을 찼다. 그 마법사는 큭 웃더니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천둥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바닥 이 패이고,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바람이, 날카로운 칼 을 품은 듯 자켄의 살을 베어냈다. "이런--!" 자켄은 뒤로 급히 물러났지만, 벌써 여러 군데 상처를 입고 말았다. 피가 튀고, 따끔한 통증이 파고 들어왔다. 발뒤꿈치에 나무 둥치가 닿자, 자켄은 힘을 주고는 몸을 돌려 그를 향하는 바람을 향해 검을 꽂아 넣었다. 팔이 툭툭 베어나갔지만, 그는 힘을 더 꾹 주어 그 마 법의 중심 핵에 검을 꽂아 뒤틀었다. 바람이 흐트러지며 사라졌다. 그러자 마법사가 말했다. "엘프 치고는 좀 둔하군, 꼬마." 순간, 자켄 앞으로 다시 커다란 것이 바윗덩어리처럼 쿠르르르 밀려 들어왔다. 자켄은 발을 퉁겨 그것을 피했다. 나무가 다시 박살나며 쿵 쓰러졌 다. 그러나 그 윗부분이 자켄 쪽으로 쓰러져버려, 자켄은 나무의 단 단한 가지에 막혀 오도 가도 못하게 되어 버렸다. 뛰어 오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옆으로 도망칠 수도 없다. 공격하자니 잎과 가지 때 문에 사방이 막혀서 꿈쩍도 할 수 없었다. "파윈-!" 저 편에서 벌건 불이 확 일어났다. 나무가 으스러지며 터져 나가고, 역한 황 냄새가 풍겨왔다. 자켄은 몸을 숙이며 피했다. 콰르르--! 불꽃에 맞은 나무가 터졌다. 열기가 그리 세지는 않아 화상은 입지 않았으나, 밀려드는 힘의 파도에 자켄은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단검 은 꾹 쥐고 있었지만, 바닥에 여러 번 구르고 부딪혔다. 한참만에 구르던 몸이 멎자, 자켄은 비틀비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검은 머리 카락이 흩어져 볼을 뒤덮었다. 몸은 온통 땀과 피, 흙투성이였다. "어이, 여기다." 그 목소리에 자켄은 급히 고개를 들었다. 바로 앞에 그 자그마한 마법사가 서 있었다. 그는 자켄을 웃으며 바 라보고 있었고, 그 연푸른 눈동자는 악독한 도깨비 같은 장난기와 잔인함으로 번뜩였다. 자켄은 퉁기듯 일어났지만, 순간 살이 뚫리고 으깨지는 지독한 소리 가 들려오며 엄청난 고통이 몸과 정신을 모조리 찢어 놓았다. 피가 후두둑 쏟아졌다. 자켄은 이를 악물고는 허리를 꺾으며 무릎을 꿇었 다. 그러자, 시뻘건 피가 더욱 거세게 쏟아져 허리와 무릎을 적셨다. 자켄은 고통을 버티어 내며 기도문을 외웠다. "모두의 어머니--생명.....과...축복...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맹렬하고 뿌연 빛이 그의 상처를 감쌌다. 그러 나 눈이 흐려져 왔고, 저벅 저벅 가까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자켄은 그 자그만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자의 손이 올라갔고, 순간 그의 눈이 갑자기 험악해졌다. 비뚤어진 이가 악 물리더니, 분노와 증오를 담아 험악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이--! 또 냐, 이 년이!" 그러나 그들 사이로 단단한 것이 꽈릉 내리 꽂히며 마법사를 내 던졌다. 자켄은 팔로 얼굴을 가렸다. 흙과 돌조각이 얼굴로 쏟아져 들어왔 다. 한참만에 고개를 드니 바로 앞에 연푸른 색의 두터운 보호의 벽 이 생겨 있었다. 뭐지, 이건.... 자켄은 주변을 둘러보며 숨을 몰아쉬다가, 그 어깨를 잡아 흔드는 팔을 느꼈다. 강하지는 않지만, 꽤나 고집 세고 단호할 듯 하다.... "이봐, 살아 있어?" ....정말 죽기 직전인 자켄에게는 좀 고약한 질문이었다. *********************************************************** 작가잡설: 드디어 울프스 레인을 봤습니다. 그리고 지금....모니터를 벅벅 긁으면서 다음편, 다음편~~~~하는 중이랍니다....... 오프닝을 보면서 헉, 했습니다. 주인공이.....미, 미형이었던 것입니다! 아아, 어금니 군......그 길다란 속눈썹과 초롱한 눈동자, 고즈넉한 목 소리........아아, 어금니로 깨물어 주고파. (언제나 그렇듯 결론은 이상 하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16장 ************************************************************** [겨울성의 열쇠] 제73편 찢겨진 달빛#4 *************************************************************** "반 동강 나기 직전이었군." 그녀는 당사자 소름끼치는 소리를 쉽게 내뱉고는, 손바닥이 온통 피 투성이가 되어 일어났다. "치료 좀 부탁하겠어, 그란셔스. 알아서 해 줘." 그녀가 저 뒤에 서 있는 누군가에게 말했다. 말이 끝마자 마자, 숲 속에서 마르고 호리호리한 그림자가 걸어나왔다. 그런데.....그란셔스? 자켄은 흩어지는 의식을 움켜잡으며 그 쪽을 돌 아보았다. 흐릿한 윤곽이 루첼과 비슷하기도 했지만, 루첼 보다는 조금 작았고......머리카락도 짧았다. 그는 자켄의 볼 위에 손을 얹었다가 내리고는 상처를 짚었다. 냉정 한 남자로군, 자켄은 그렇게 생각했다. 차분할 뿐만 아니라, 당황하 거나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여자가 말했다. "최대한 멀리 도망가라." "하지만....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자켄의 말에, 여자는 날카롭게 답했다.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인지부터 제대로 판단하는 머리 정도는 있어 야 오래산다, 엘프. 그 몸으로는 아무 것도 못하고, 저 앞에 있는 괴 물 녀석은 멀쩡한 몸으로도 상대하기 어렵다고." 자켄이 뭐라 말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벌써 긴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뒤돌아 서 있었다. 갈색의 단발머리에, 잠깐 보인 옆얼굴은 안경을 끼고 있었다. 같이 왔던 남자가 자켄의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밀어 넣어 당기며 말했다. "일어나라, 엘프." "당신.....루첼 그란셔스와는...." 그러자 남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자켄은 고통에 눈을 찌푸렸다. 남자가 급히 물었다. "루첼은 어디 있나?" 자켄은 그 질문에 섞인 호의를 읽고, 쉽게 신뢰를 보냈다. 루첼의 가까운 친척인 데다가, 믿을 만한 애정을 가진 남자였다. "......백색 다리 근방에." "멀지 않군." 남자는 재빨리 손을 움켜쥐었다가 펼쳤다. 그의 손바닥에서 자그만 것이 솟구쳐 어둠 속으로 휙 날아갔다. "누구십니까?" "빌어먹을 루첼의 삼촌. 어서 자리나 피하자고, 어물대다간 가루가 되 버린다!" 롤레인은 방금 전에 쳐 놓은 보호의 벽 너머로 나왔다. 탈로스는 그가 동강내 놓은 바위에 앉아, 나서는 롤레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히죽 웃었다. "안녕, 오거스트." "네 덕에 빌어먹을 정도로 안녕했지, 탈로스." 탈로스는 큭큭 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는 어떻게 알아냈나. 네가 마스터로 있는 곳은 베넬리아이니, 여기 마법사들이 네 말을 따를 리가 없는데." "물론 베넬리아 마스터 자격으로 여기 길드에 협조 요청을 해 놓기 는 했지. 기대는 별로 안 했지만...누군가 알려는 주던데?" 그리고 롤레인은 엄지손가락 끝으로 뒤를 가리켰다 내리고는 말했 다. "우선, 원칙에 따라 경고 한번은 해 두지. 꺼져." "거부." 롤레인이 소맷자락을 펄럭였다. 그 주변으로 가벼운 빛이 반딧불이 날아다니듯 떠돌기 시작했다. "그럼 당장 시작해야지, 배덕자." 탈로스의 눈이 날카롭고 사납게 번득였다. "무턱대고 욕부터 퍼부어 대지 마, 오거스트! 넌 비난할 자격이 없 으니까." "스승을 죽인 자를 비난할 자격조차 없는 내 죄는 대체 뭐지?" 그 말에, 탈로스가 발로 바닥을 쾅쾅 내리찍고는 더욱 험악하게 외 쳤다. "난 죽이지 않았어! 그 분은 분명 살아 계신다고!" 롤레인이 차갑게 웃었다.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심지어 움직이지도 못하지만...살아있기 는 할 테지." "그 노친네는 그렇게 될만했어." "그분은 네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물려 줬다." "아니, 그 쓰레기 같은 것은 내게 아무 가치도 없어! 필요도 없고! 내가 원하는 것은 단 한가지였는데, 그는 할 수 있으면서도 거부했 어. 내가 얼마나 간절하게 원하는 지 알면서도....! 넌 몰라, 그 얼토 당토 없다고 생각하는 그 일이....내게 얼마나 중요한 지. 난 간절 히....생명보다 더욱 간절히 원했다고! 그런데 그는 해 줄 수 있어도 하지 않았어. 자기만 가지려 했어!" "얼간이, 그 분은 분명 말씀하셨어. 그 힘은 봉인조차 뜯겨서도 안 된다고. 내게도, 악튤런에게도 그렇게 말씀하셨고, 우리 둘은 스승님 의 말을 지켰다. 너 혼자만 싫다고 한 거고, 스승님이 네 황당하고 발칙한 청을 거절한 것은 당연한 거야." 탈로스의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넌 언제나 그렇지, 언제나! 컬린과 내가 부딪힐 때면 언제나 그 노 인네 편을 들고는 나를 깔봤어! 도도한 오거스트, 오만한 오거스트! 스승님에게 손바닥 닳도록 아첨해서 제 몫만 듬뿍 챙겨나가는 여우 같은 계집!" 그러나 롤레인은 분노하는 대신 경멸에 찬 눈으로 그런 탈로스를 싸늘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 탈로스. 너는 무턱대고 네 편을 들어주지 않는 모든 사람이 역겨울 테지...! 네게는, 네 누이를 제한 모든 사람이 다 적일 뿐이 야......작은 도깨비같은 녀석." 그 도깨비라는 말에 탈로스가 더욱 분노했다. 그러나, 너무 화가 치 밀어 올라 제대로 반박하지도 못했다. "네가 뭘 알아-!" "물론 알지도 못하고, 이해할 생각도 없다. 난 처음부터 너를 동정 하지도, 특별히 혐오하지도 않았으니까. 그러니, 나로하여금 너를 증 오하게 만든 것은 너 자신의 죄일 뿐이지." 순간, 롤레인의 바로 옆이 하얀 것이 퍽 내리꽂혔다. 롤레인은 팔을 휘둘렀고, 그것은 단 번에 두 조각나며 양옆으로 갈라져나갔다. 힘 의 파편에 나무 하나가 우지끈 쓰러졌다. 탈로스는 팔을 걷어 부치며 앞으로 나섰다. 눈의 안광은 이글거렸 고, 입술도 비틀려 있었다. "어디 한번 제대로 붙어 보지, 오거스트! 하지만....분명히 알아둬, 얼 간이 계집. 그 때는 컬린이 있었으니 네 년이 살아 남을 수 있었지 만 지금은 아냐. 넌 혼자야, 무능력한 너 혼자라고-!" "스승님이 그리한 것은 너와 나, 둘 다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잘난 체는--!" 롤레인이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며 두 팔을 뻗었다. 옛 시절의 기쁨, 영광, 행복....그 모든 것이 서린 것을 이기로 부서 뜨린 탈로스였다. 그는 컬린이 너무 응석을 받아준 어린아이였다. 컬린은 그의 몸이 흉한 기형이라는 것에 동정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 어리석게도 그 렇게 다른 사람과 교류를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마법에 집중하게 해 줄거라 믿었다. 컬린은 그의 자질과 탐구정신을 사랑했고, 자랑 스러워했다. 그래서 아는 모든 것을 전수했다. 사악한 뱀처럼 그를 배신한 저 가증스런 제자에게! 그러니 증오하지, 아주! 그럼에도, 그녀와 그의 위대한 스승은 탈로스에게 제 몸이 산채로 부서지면서도 남은 힘을 그러모아 부탁했다. 둘다 살아 있어라, 둘 다--! 빌어먹을 노친네, 끝까지 화나게 한다. 그래도 롤레인은 그 터무니 없는 유언을 지켰다. 조용히 절망하며, 그렇게 분과 증오를 삭히며 고향인 베넬리아를 떠나 로메르드에 온 것이다. 탈로스는 다행히 그녀를 찾지 않았다. 아니, 먼저 도전하지 않는 롤 레인을 일부러 건드리려 하지 않았던 것 뿐이다. 그는 도망치는 적은 쫓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롤레인이라는 것에는 분통이 터 졌을 테지. 그는 그녀를 증오했고, 맹렬히 질투했다. 그러니 이기고 싶어했다. 반드시 대등한 조건에서, 기필코 이기고 싶어한 것이다. "내게, 스승님의 유언은 내 생명과 같은 무게를 가진 것이었지. 네 가 아무리 미워도, 그 빌어먹을 노친네의 말에 따라 너와 나, 둘 중 하나가 죽거나 둘 다 죽는 일은 절대 만들지 않을 것이라고!" "아하, 결국 네 증오가 중요한 거지, 눈보라의 오거스트! 베넬리아의 위대한 최고 마스터! 네게는 나와 싸우는 게 중요한 거야, 네 명예 와 힘을 걸고 싸우는 것! 피가 끓지 않아, 너도? 이기고 싶겠지." "스승의 유언보다 내 제자의 안전이 소중한 것뿐이다, 망할 자식아. 하, 너와 명예를 걸고 싸워? 내게는 명예가 있지만, 네게는 시궁창 에 처박아 넣을 쓰레기 네놈 몸뚱이 밖에 없어! 너 같은 쓰레기와 마법사의 자존심과 명예를 걸고 싸운다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지." 탈로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눈은 여전히 이글거렸지만, 그것은 증 오보다는 분노에 가까운 불꽃에 타오르고 있었다. 빗방울 하나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것은 공중에서 얼어붙더 니, 바닥에 작은 구슬처럼 툭 떨어졌다. 롤레인이 말했다. "이번에야말로 지켜 보이겠다. 반드시--" 아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마는 땀에 젖어 있었고, 머리카 락이 쏟아져 들러붙었다. "무슨 일입니까." 세르네긴이 물었지만, 아킨은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창가로 달려갔 다. 작은 빗줄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안개가 부옇게 피어오르고, 습 기도 한가득 차 올랐다. 그리고 그의 귀에 소리가 들려왔다. 아킨은 조용히 말했다. "준비하시는 게 좋겠군요." "어쩔 겁니까, 왕자." "도망치는 거죠." 아킨은 흐릿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지금으로서는.....그것 밖에는 할 수 없어요." 무능함이란, 그리고 제약에 얽혀 있는 몸이란 늘 이렇게 답답하다. 너무 일찍 철이 들면서부터 아킨은 간절히 원했다, 자유롭기를. 그 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에게 얽매여 있는 모든 이들이 자유로워지 기를. 아킨은 말없이 망토를 걸치고, 후드를 썼다. 비는 여전히 작고도 날 카롭게 바닥으로 쏟아졌고, 바닥은 물이 고일 정도로 축축해졌다. 아킨은 먹구름에 덮인 하늘을 바라보고는, 세르네긴에게 물었다. "지난번에 말씀 하셨던 것....진담입니까?" "죽이겠다고 한 것 말입니까?" "네." 세르네긴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선택이 있을 리도 없지 않습니까." "저도...제 경우에 있어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압니다. 제가 묻는 것은 루첼에 관한 겁니다." 세르네긴은 검을 집어들고 있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킨은 후드 끄트머리를 잡아 당겨 내리며 말했다. "죽이지 마십시오." "이미 약속했습니다." "그렇다면 늙어 죽을 때까지 기다려 주던가." 세르네긴은 검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 작가잡설: 아키..........자, 파이팅. <-왠지 힘없는 목소리.....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16장 *************************************************************** [겨울성의 열쇠] 제74편 찢겨진 달빛#5 *************************************************************** 낡은 건물 밖으로 나오자, 곧바로 빗줄기가 두터운 후드를 툭툭 쳤 다. 아킨은 허리에 있는 짧은 단검을 짚어 보았다. 차갑고 단단한 것이 손끝에 닿자, 지금의 자신이 처연해질 지경이었다. 세르네긴은 등뒤에 검을 차고는, 허연 숨을 몰아쉬는 말의 등에 안 장을 얹고 있었다. 그 조용한 눈빛이 면밀히 주변을 살폈다. 빗줄기 소리에 젖어드는 숲은 고요했다. 툭, 투둑---수억의 잎들이 빗방울에 몸을 떨었고, 그러다가 저 멀리서 쿵--하는 큰 진동이 울 려왔다. 잎 끝에 맺혔던 굵은 물방울들이 한꺼번에 후두두두두-쏟아 졌다. 아킨은 비에 젖어드는 얼굴을 들어 저 먼 곳, 빗줄기들이 내리 박히 는 숲 속을 바라보았다. 이럴 때는 다른 사람들 보다 몇 배로 밝은 눈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이 끔찍했다. 어차피 올 것이라면, 그리고 그것을 아킨의 힘으로는 결코 막을 수 없다면....차라리 늦게 아는 편이 낫다. 숲 깊은 곳에 있는 데다가 밤이라 으슬으슬했다. 오싹 오싹, 온 몸 이 바늘처럼 곤두서다가........서서히 뜨거워진다. "준비하세요." 아킨이 조용히 말했다. 빗줄기 소리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다 가 흐릿하게 잠겨 들어간다는 것을, 아킨 자신조차 쿵쾅대는 가슴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어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세르네긴이 그런 아킨 을 보더니, 말고삐에서 손을 내리고는 물었다. "당장 도망치는 편이 나을 듯 한데요." "........" 세르네긴이 덧 붙였다. "상대가 누구든 간에 말입니다." 아킨이 웃었다. 그래, 낫다. 아킨 자신도 그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선 택을 실행할 수만 있다면, 귀라도 잘라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도망쳐 왔죠, 아주 오랫동안...." 그렇게 말하며 아킨은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눈동자가 다시 어 둠 속을 향했다. 누군가가 와 있었다. 낯선 숲을 어렵사리 헤치고 온 듯, 그의 망토 와 부츠는 온통 잎과 흙투성이였다. 아킨이 바라보자, 그는 망토의 후드를 뒤로 넘기며 얼굴을 드러냈다. 검은 머리카락이 금방 빗줄기에 젖어 들어갔다. 차갑고 어둑한 눈빛 의 보랏빛 눈동자, 그 거울 보듯 똑같은 눈동자위로 드리워진 눈썹 끝에는 벌써 작은 방울이 맺혀있었다. 무엇일까, 분노보다는 좀 더 차분한 이 느낌. 올 것이 왔다는 기분 과, 분명히 오리라 짐작하며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던 순간, 심장이 불타오르는 듯한 이 느낌은. 불덩이를 가슴속에 묻어 놓은 듯 했다. 온 몸은 떨리는데, 그 불덩어리만은 활활 타올라 그의 영혼을 불사 르고 있었다. 이것은 물론 배신감도 실망도 아니다. 그를 믿었던 적도 없고, 좋아 하려 노력했던 적도 없다. 서로를 허물없이 마주보았던 것은 단지 어머니 뱃속에 들어있던 열 달뿐. 눈을 뜨고 울음을 터뜨리는 그날 부터, 아킨과 그의 형은 언제나 적이었다. 선택받고 버려지며, 한 쪽 은 증오하고 한 쪽은 경계했다. 길들이려 하고, 밀쳐 버리고. 가두려 하고 도망쳐 버리고....그렇게, 그 둘은 단 한번도 서로가 원하는 것 을 해 준 적이 없었다. 그저 미워하고, 질투하고, 적대하고, 지배하 려 했을 뿐. "휘안." 그러자, 그가 말했다. "....왜 검을 뽑아 드는 거지, 아키." "형의 검이 먼저 칼집을 떠났으니까." 휘안토스는 망토를 젖혔다. 젖은 망토에서 빗방울이 튀어 오르고, 이미 뽑혀 나와 옷자락 뒤에 숨어있던 허연 검날이 빗속에서 번득 였다. 즉각 세르네긴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휘안토스 옆의 나무그 늘에 숨어 있던 키 큰 기사가 달려나와 휘안토스를 향하려는 세르 네긴의 검을 막아냈다. 세르네긴은 검을 흘리고는, 다시 날카롭게 찔러 들어갔다. 마르실리오는 뒤로 미끄러질 뻔한 것을 겨우 다잡으 며 다시 검을 휘둘렀다. 금속음이 비명처럼 날카롭게 터졌다. 챙-! 빗방울이 튀어 올랐다. 이미 흠뻑 젖은 마르실리오의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튀어 올랐고, 그의 젖은 망토가 무겁고 거추장스럽게 흔들 렸다. 세르네긴은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런 마르실리오의 움 직임을 뚫어 보고는, 검을 세게 내리쳤다. 채컹, 하며 마르실리오의 검이 꺾여 떨어졌다. 마르실리오는 옆구리 쪽으로 손을 집어넣었다가 세차게 휘둘렀다. 세르네긴은 가슴을 노리며 날아드는 단검의 날을 쳐냈다. 동작이 빠 른 마실리오는 그 순간 떨어졌던 검을 잡아 다시 세르네긴을 공격 했다. 세르네긴은 검을 피하고는, 두 발을 단단히 붙이고 검을 휘둘 렀다. 마르실리오는 서둘러 방향을 바꾸며 검을 치켜들었지만, 세르 네긴은 힘주어 그의 검을 밀어젖혔다. 결국 목과 검이 함께 날아가 지 않기 위해, 마르실리오는 일부러 몸을 미끄러뜨려야 했다. 마르 실리오의 검에 미끄러진 세르네긴의 검이 그 머리 위를 붕 돌아, 바 로 옆에 있는 나무 둥치를 크게 베어냈다. 콰작--! 세르네긴은 검을 뽑아 가슴 쪽으로 당기고는, 다시 두 손으로 움켜 쥐어 휘둘렀다. 순간, 휘안토스가 그 둘 사이로 끼어 들며 그 검을 막아냈다. 어차피 마르실리오로 세르네긴을 상대하는 것 자체가 불 가능했다. 아니, 이 세상 기사들 중 세르네긴을 상대할 자는 오로지 휘안토스 뿐이었다. 마르실리오는 몸을 일으켜 다시 검을 찾아들고는, 아킨을 공격했다. "마르실리오 경-!!" 아킨은 맞서지도 않고 뒤로 피해버리며, 울컥 치미는 분노에 외쳤 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그러나 마르실리오의 눈에는 살기는 없었다. 왜 이러는 것인지, 그리고 얼마나 제대로 하려는 지도 알 수 없었지 만, 그래도 아킨은 마르실리오의 주군인 사이러스 왕의 차남이자, 저 옆의 휘안토스의 동생이었다. 아킨에게 결정적인 타격만 넣는 다 면 그는 물러날 것이다. 팔이나 다리, 아니면 허리라든가. 단 한군데 만 치명적으로 만들어 놓고는 물러나려는 것이다. 그러나 아킨은 그것을 용납할 생각은 없었다. "아리스테...!" 마르실리오의 발 옆에서 빗방울이 채찍에 맞은 듯 튀어 올랐다. 마 르실리오가 그 위로 검을 찍어 넣자, 아킨은 팔을 휘두르며 짧게 말 했다. "리그흐-" 마르실리오는 금방 창백해져서는 바닥에서 검을 뽑았다. 그러나 꽈 르르르--! 허연 빛이 번득이더니, 진흙이 튀고, 물이 얇은 채찍처럼 마르실리오의 얼굴을 후려쳤다. 아킨은 긴 주문을 외우며 빠르게 수인을 맺어갔다. 손가락 주변에 뿌연 기운이 어리고, 그것은 금방 진해지더니 달빛 받은 얼음처럼 파릇하게 변했다. 마르실리오가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세르네긴이 휘안토스의 검을 단박에 내 던지고는 그 기사를 막았다. 챙--! 물방울들이 튀어 올랐 다. 빗물이 마르실리오의 눈 안으로 스며 들어왔고, 그가 눈을 질끈 감아 물을 떨구려는 순간, 세르네긴이 그를 퍽 걷어 차 버렸다. "크흣-!" 마르실리오는 진흙 바닥에 호되게 굴렀다가 나무 둥치에 크게 부딪 혔다. 물방울이 후두둑 쏟아졌다. "비켜요, 세르네긴-!" 아킨이 손을 뿌렸다. 하얀 빛 무리는 곧장 주변으로 파칭, 퍼져 들 어갔다. 고요한 호수의 파문이 퍼지듯, 그것은 빠르고도 둥글게 확 퍼져들었고, 휘안토스의 몸에 닿자 멈추었다. "아키, 너 지금.....!" 휘안토스는 팔에 힘을 꾹 주고는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 검은 거 미줄에라도 걸린 듯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휘청였다. 아킨은 이미 뽑아 들었던 단검으로 휘안토스의 가슴을 노렸다. 휘안토스는 팔에 힘줄이 돋을 정도로 힘을 주며 버겁게 검을 휘둘렀다. 챙, 단검은 긴 장검의 날에 퉁겨나갔지만 곧바로 가볍게 방향을 돌 려 휘안토스를 향했다. 휘안토스는 그 검 끝이 자신의 턱을 향하는 것을 보며 말했다. "무슨 짓을 한 거냐, 아키?" "걱정 마. 이런 역장을 만들고도 다른 마법을 쓸 정도로 강하지는 못하니까!" 아킨이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그 번개 번득이는 듯 날카로운 궤적 에서, 휘안토스는 간신히 몸을 빼냈다. 평소라면 벌써 이겼을 텐데, 지금은 몸이 둔해져서 피하는 것도 버거울 지경이었다. 결국 그 목 이 길게 베어져 나가며 피가 터졌다. 아킨이 검을 당기며 물었다. "대체.....왜 이러는 거지, 형?" 휘안토스의 검이 올라왔지만, 아킨은 단검을 쥔 손의 방향을 바꾸더 니 그 팔목을 칼자루로 퍽 쳐냈다. 뼈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휘안 토스는 검을 놓쳤다. 그리고 한발 늦게 밀려드는 엄청난 통증에, 휘 안토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오른손으로는 지금 당장 반격은 커녕, 당분간 검을 잡는 것조차 힘들 것 같았다. "말 해. 대체 내가 무슨 실수를 한 건지...!" "실수?" 휘안토스가 웃었다. 아킨은 그런 형을 노려보며 이를 갈아붙였다. "내가 뭔가 잘못했을 리 없고, 잘못할 기회도 없었어." "그래, 차라리 실수라 말하는 편이 낫겠구나." 아킨의 단검이 휘안토스의 턱과 더욱 가까워졌다. "죽일 수 있어. 얼마든지." "넌 못해." 호된 발길질이 휘안토스의 무릎을 가격했다. 휘안토스는 무릎을 꿇 으며, 다시 신음을 삼켰다. 검 날이 이번에는 휘안토스의 목에 들러 붙었다. 분명 팔 길이의 짧은 검이었지만, 아킨은 그런 칼로도 휘안 토스의 가는 목 정도는 단번에 끊어 놓을 수 있다. "말해, 휘안." 휘안토스는 고개를 들었다. 아킨의 검은 그 목에 바짝 붙은 채로 천 천히 앞으로 이동해갔다. 그리고 아킨은 비에 젖은 휘안토스의 모습에서, 이 쌍둥이형을 처음 만났던 네 살의 그 때가 떠올랐다. 검고 단정한 머리에, 어머니를 닮은 보라색 눈동자의.....그, 소름끼치도록 똑같았던 형. 그 순간부터 질투하고 증오했다. 몸짓 하나에서마저도 그와 자신을 비교하게 되 버리고, 그런 자신이 혐오스러운 만큼, 아니 그 몇 배 로 형을 미워했다. 휘안토스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아킨은 역겹도 록 추했고, 그 가슴에 품은 질투는 지겹도록 들러붙는 고약한 그림 자였으며, 절대로 그를 놔주지 않았다. 지금도 증오하고, 그 질투의 굴레를 벗어나는 것도 힘들다. ".....이젠 적어도 형의 것을 원하지 않아." "그러니 이 방법밖에 없는 거다." "무슨 소리지.....?" "질투하는 한, 너는 영원히 나를 넘어 설 수 없다. 미워하는 것도 상관없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그렇게 탐욕스럽게 원해도 상관없 어. 어차피 그것은 휘안토스만이 가질 수 있는 것. 그러니....그렇게 움켜쥐려고 발버둥치는 한, 너는 결코 내게서 벗어날 수도 넘어설 수도 없으니까....." 아킨은 순간 목이 콱 막혀 버린 것 만 같았다. 이, 숨막힐 것만 같은 분노. 여태까지 휘안토스에게서 느꼈던 미움 과는 격이 틀린, 보다 본질적이고, 그러나 더욱 뜨거운 분노가 그를 태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널 지배할 수 있던 유일한 방법이었지만, 넌 걷어 차 버렸지." "......." 아킨의 검이 서서히 올라갔다. 떨리는 칼자루를 쥔 손에, 핏줄이 돋 았다. 그래, 너는 언제나 그랬지. 내가 네 옆에서 평생을 머물면서, 너를 질투하고 증오하며 그렇게 자신에게 '속하기만을' 바랬지..... 알아, 그것이 너와 나, 둘 다 공존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제멋대로....군." "너와 난....어차피 형제다. 다르지만 같고, 같지만 달라. 내게서 벗어 난 너는, 언젠가는 내 적으로 돌아올 거야." "앞날은 아무도 몰라." "아무도 모르니 지금 조심해 두는 거지." 순간, 아킨의 단검이 휘안토스를 내리 찍었다. 어깨에서 피가 치솟아 올랐다. 휘안토스의 얼굴에서 핏기가 확 가시 더니, 뒤로 물러나며 어깨를 감싸쥐었다. 손은 금새 피에 젖어 들어 버렸다. 아킨의 눈길이 방금 전에 자신이 던져냈던 검을 향했다. 휘 안토스도 같은 것을 보고는 손을 뻗었지만, 아킨은 휘안토스의 가슴 을 주먹으로 세게 후려쳐 던져 버리고는, 먼저 그 검을 뽑아 들었 다. 가슴을 세게 얻어맞은 휘안토스가 기침을 토해냈다. "아키, 너.....!" 순간 긴 검 끝이 휘안토스의 목을 향했다. 휘안토스는 그 검을 움 켜쥔 아킨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떨리고는 있었지만, 지금의 아킨에게는 휘안토스의 목을 날려 버릴 정도의 힘과 기술은 있다. 아킨이 말했다. "앞날은 아무도 모르지." "아키...." 휘안토스의 눈이 차가워졌다. "너를 죽이려고 온 게 아니다. 죽일 생각은....애당초 없었어."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롭기는 했을 테지. 형 성격은 나도 잘 아니 까....." 아킨은 검 끝을 밀었다. 끝은 벌써 휘안토스의 목 줄기에 닿아 상처 를 냈고, 진한 피가 스며 나오며 목 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입술을 꾹 문 휘안토스의 얼굴은 계속 창백해져갔다. 조금만 힘을 준다면 목 정도는 단번에 날아갈 것이다. *********************************************************** 작가잡설: 사실....휘안을 좀 더 패볼까, 하는 생각도 했답니다....... 만, 안했습니다. (깽!)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16장 *************************************************************** [겨울성의 열쇠] 제75편 찢겨진 달빛#6 **************************************************************** 세 번째의 마법이 깨어져 나가자, 롤레인은 소매를 당기고는 앞의 탈로스를 노려보았다. 탈로스의 얇은 두 다리는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고, 롤레인의 처진 어깨도 거친 숨과 함께 들썩였다. 멀찍이서 둘을 지켜보는 제임은, 자켄의 어깨를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섣불리 움직이지는 못했다. 그리고 자켄의 부상 역시, 그가 엘프라 버티고 있는 것이었을 뿐이다. 도망치려고는 했지만, 어디로 뭐가 날아올 지 몰라 꿈쩍도 할 수 없었다. 이것은 대 마법사, 그것도 동문들 간의 대결이다. 컬린의 세 제자가 스승의 유산 때문에 반목했던 것은, 마법사들이 서로서로 은밀히 쉬쉬하고 있는 일이긴 했지만 분명 사실이었다. 그 러나 당사자들에게 직접 물어볼 수 없으니, 다들 속닥거리기만 할뿐 확인한 적은 없다. 전능의 탈로스가 컬린이 가지고 있는 '무언가'를 탐냈고, 엄격한 컬 린은 가장 아끼는 제자의 청이지만 분명히 거절했다. 그것이 무엇이 었는지는 모른다. 그저, 탈로스가 연구하는 것과 연관하여 고대마법 이나 드래곤과 관련이 되어 있다는 것 정도만 추측했을 뿐이다. 컬린은 고대마법에 대해 누구보다 능통했지만, 그것을 썼던 적은 거 의 없었다. 제대로 활동하는 두 제자인 눈보라의 오거스트와 천둥의 악튤런 역시 그에게서 배웠다는 것 만은 확실했지만 그 고대마법을 누구 앞에서 쓴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탈로스만이 제외였 고, 그만이 컬린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얼마 뒤, 컬린은 실종되었다. 그 실종과 함께 법에 따라 컬린이 가 진 모든 것은 탈로스에게 승계 되었지만, 오거스트와 악튤런은 그 결정에 불복하여 탈로스와 대립을 선언했다. 어렸던 악튤런은 탈로 스에게 완패했고, 오거스트의 경우는 어디서 싸웠는지는 모르나 얼 마 뒤 돌아왔던 오거스트의 그리 깊지 않은 부상과 탈로스의 잠적 으로, 백중세였다는 것 정도만 추측했을 뿐이다. 얼마 뒤, 오거스트 는 베넬리아를 떠나 로메르드로 들어가 버렸다. 그 후, 오거스트와 악튤런의 함구와 함께 그 일은 유명하지만 의문 만이 잔뜩 서린 사건이 되어버렸다. 세기를 초월할 대마법사, 그 스승의 위명에 걸맞은 우수한 제자 들.....그러나, 탐욕과 의혹으로 얼룩져 버린 참담한 결말. 꽈르르르--! 오거스트 쪽으로 거대한 새 모양의 불꽃이 내리쳐왔다. 오거스트의 가벼운 손짓과 함께, 그녀의 양옆과 이마 쪽에서 세 개의 마법원이 확 떠올랐다. 그것은 불꽃에 맞아 한번 허옇게 번뜩이더니, 육중한 불꽃을 모두 지워 버렸다. 그런 중에도 주문은 거의 쓰이지 않았고, 그것이야말로 대마법사들의 방식이었다. 주문이 새어나간다면 상대 방의 귀에도 들어간다. 그리고 대 마법사라 불릴만한 자들에게는 그 주문의 구성 자체를 깨뜨리는 마법이 있었다. 최대한 조심하는 수밖 에 없다. 씩씩대던 탈로스의 눈이 초점이 풀리고 있었다. 자존심이 고집스레 강한 그였지만, 결국 인정해야 했다. 페그-라일 체계로는, 악튤런은 몰라도 오거스트는 상대하기 힘들었다. 오거스트는 악튤런처럼 아주 어린 나이에 두각을 드러내 화려한 조명을 받아왔던 것은 아니었으 나, 베넬리아 인답게 적과의 대결 앞에서는 무섭도록 냉정한 여자였 다. 그리고 탈로스는 악튤런은 우습게 여기고 있었지만 롤레인은 두 려워하고 있었다. 롤레인이 말했다. "아직 남았어." 탈로스는 이번에야말로 마지막이 될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망할 계집, 탈로스는 중얼거렸다. 미워했지, 그래. 그러나 탈로스는 그녀에게 비겁하거나 음흉한 수를 썼던 적은 없었다. 날카로운 칼날 이 맞서듯 반목했던 둘이지만, 그래도 서로를 분명히 인정하고는 있 었다. 어린 데다 오만하기만 한 악튤런은, 처음부터 그 둘의 시야에 벗어나 있었지만 이 둘은 아니었다. 둘은 서로에게 있어 넘어야할 산이었고, 그러지 못하는 한 결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상대였다. 서로를 너무나 인정하고 있었지만, 미워하기에 그것을 억 지로 부정해 왔다. 오거스트의 손이 올라갔다. 그 끝에서, 하얀 빛 무리가 어렸다. 주변 은 무섭도록 차가워지더니 얼어붙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은 흩어지 고, 얼굴 위로 하얀빛이 퍼져나갔다. 탈로스도 두 손을 뻗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수는 단 하나였고, 그것은 페그 라일로는 그녀를 이길 수 없음을 인정한다는 것을 말하는 거나 진배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나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컬린의 미숙 하면 오히려 제 생명을 깎아낸다는 말에, 고대마법 연구를 그만둔 오거스트다. 이것은 그 두려움에 대한 보답일 뿐이다. 물론, 아직은 내 몸이 축나기야 할 테지만.......! 탈로스의 손에 빛이 어렸다. 처음엔 하얗다가, 그 다음에 서서히 미 색으로 변하더니 결국 진한 붉은 색으로 달아올랐다. 그리고 그 위 로, 진한 황금색의 글자가 떠올랐다. 롤레인이 외쳤다. "탈로스!" "여기서이기면.......내가 다 가지겠다! 승리도, 스승님의 유산도! 그리 고....네 제자도---!" 롤레인이 매섭게 분노했다. "그 애는 대체 왜 건드리려는 거지?" "내 수명을 내 놓고 가져가는 것인데 그 정도 보답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 탈로스의 주변으로 수 십 개의 원이 떠올랐다. 달아오른 쇳덩이처럼 뻘건 그 판 위에는, 불꽃같은 고대의 문자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용 암의 열(列), 이론만은 훤한 오거스트는 그 고대문자가 이루는 마법 원의 이름을 읽어낼 수 있었다. 또, 무엇을 해야 할지도 안다. 롤레인 주변의 하얀 빛 무리가 더욱 진해졌다. "제임, 그리고 거기 엘프! 당장 피해! 어서-!" 그렇게 외치고는 롤레인은 두 팔을 뻗었다. 소맷자락이 뒤로 세차게 펄럭이며, 하얀 마법의 힘은 이제 파도처럼 거대하게 밀려나오고 있었다. 주변이 하얗게 얼어붙었다. 거센 바람 이 일고, 눈보라가 치며, 하얀 무리는 이제 뚜렷하고 아름다운 물결 로 윤곽을 이루어 냈다. 저 앞에서 노을 빛의 붉은 것들이 일렁이다 쏟아져 들어왔다. 롤레 인의 손가락이 세 번의 수인을 맺자, 그녀 주변의 하얀 흐름은 거대 한 날개를 뻗친 백색의 용처럼 단단하고도 매섭게 휘몰아치며 붉은 용암을 향해 덮쳐들었다. 꽈르르--! 지축이 요동했다. 바닥이 녹아 꺼지고, 나무는 불타 사그라지었으며, 김이 구름처럼 뿌옇게 치솟아 올랐다. 으깨어진 얼음 조각들이 흩어 지다 허공에서 녹아들었고, 빗물에 젖은 바닥과 나무들은 뿌옇게 얼 었다가는 녹았다. 두 개의 힘이 천둥치듯 한번에 깨어져 나갔다. 휘 몰아치는 거센 바람과 함께, 깊숙이 박혀 있던 바윗덩어리들이 들추 어지며 산산이 으깨어졌다. 얼음 조각들이 롤레인 쪽으로 흩어지고, 자갈처럼 굳어버린 잿빛 용암덩어리는 탈로스 쪽으로 쏟아졌다. 거대한 힘, 현 시대의 궁극의 힘과 지나간 시대에서 끌어내 온 힘이 무섭게 부딪혔고, 세상을 으스러뜨리고 있었다. 시전 보호조차 제대로 일어나지 못했다. 롤레인은 매섭게 몸을 때리 고 지나가는 힘에, 반쯤 노출 된 채 몸을 숙일 뿐이었다. 그렇게 그 녀는 힘의 돌풍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마침내 세상은 요동을 멈추고 고요해졌다. 지친 몸을 누이며 숨을 고르고 헐떡이 고, 진정해 간다. 롤레인은 내장이 비틀리는 듯한 고통에 이를 악 물고는 김이 자욱 하게 서린 탈로스 쪽을 보았다. 탈로스 역시 배를 움켜쥐고 떨고 있 었다. 그가 쿨럭, 하고 기침을 하자 붉은 핏방울이 튀어 올랐다. 다 끝난 것이다. 둘에게, 이제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체면다 집어던지고 주먹질이라도 하면 모를까...... 그런데, 롤레인은 갑자기 허리 쪽에서 타는 듯한 고통이 밀려들어오 는 것을 느꼈다. 한번 느끼자, 그 고통은 무섭게 커지더니 몸을 덮 쳐들었다. "큿....!" 그녀는 피가 스며 나오는 허리 쪽을 보고는, 온 몸을 씻어 내리는 차가운 허탈함에 웃고 말았다. 피가 쏟아지며 바닥에 고였다. 그리고 그녀는 허리에 꽂힌 단검처럼 날카로운 돌 조각을 힘껏 뽑았다. 마법에 깨어져 나간 바위 조각에 시전보호가 끝나는 순간 맞은 것이다. 피는 더욱 거세게 쏟아졌지만, 롤레인은 그 위로 주문을 넣었다. 그 러나 마나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피는 멎지 않았고, 바닥에 더 욱 흥건히 고여가기만 했다. 목덜미의 상처에서도 핏방울이 떨어졌 다. 차가운 빗방울은 목덜미와 등을 적시고 들어왔다. 탈로스가 그녀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그 작달만한 손바닥에는 작 고 하얗게 빛나는, 달빛의 테 같은 고대문자의 원이 떠올라 있었다. 그 안에서 하얗고 자그마한 문자들이 휘감겨 빛나고 있었다. 그 원, 그 문자의 의미....롤레인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너...." 말을 채 하기도 전에 그것이 롤레인의 상처 쪽으로 파고 들어왔다. 머리가 확 탈 정도로 뜨거운 그 기운에, 롤레인은 숨을 쿡 멈추고는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안경이 툭 떨어졌다. 눈은 안개가 끼인 듯 흐려져 버리고, 의식마저 혼미하다. 탈로스가 말했다. "네가 진 거야, 오거스트." *********************************************************** 작가잡설 : ........... .....;;;;; ...........;;;;;;;;;;;;;;;;; 네, 오거스트가 졌습니다. -_- 탈로스, 승~~~~~~ 후-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16장 *************************************************************** [겨울성의 열쇠] 제76편 찢겨진 달빛#7 *************************************************************** 결정적인 것은 언제나 순간에 일어난다. 벼락처럼 허옇게 번득이고 천둥을 울리고.....박살낸다. 검을 쥔 아킨의 손을, 휘안토스가 낚아채듯 움켜잡았다. 순간 흥분 한 것이 실수였다. 주의력이 흐트러지자 아킨의 마법으로 버티어가 던 역장은 끊어진 실처럼 풀렸고, 휘안토스는 주저 없이 몸을 틀어 아킨의 팔을 잡은 것이다. 휘안토스가 힘을 주자 그 상처 난 어깨에서 핏방울이 계속 떨어졌 다. 비는 어느덧 가늘어지다 그쳤고, 흠뻑 젖은 데다가 출혈까지 심 한 휘안토스의 숨소리는 점점 흐릿해져갔다. 그러나 그 손만은 나무 줄기처럼 단단하게 아킨의 손목을 잡더니 힘주어 밀어젖혔다. 휘안 토스는 그렇게 마지막 힘을 짜내어 아킨을 막으며 마르실리오를 바 라보았다. 창백한 안색의 마르실리오는 아직 세르네긴에게 막혀 있었다. 검이 바로 목줄기에 닿아 있어, 꿈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그는 결심 을 한 듯 입술을 꾹 물더니 몸을 젖혔다. 세르네긴은 검은 휘둘렀 고, 마르실리오는 망설임 없이 팔목을 들었다. 강철로 된 보호대가 긁히며 불꽃이 튀고 강한 검날에 잘라지며 상처가 났다. 팔이 거의 잘려나갈 뻔했지만, 마르실리오는 고통을 제대로 챙길 틈도 없이 근 처 나무 둥치에 꽂혀 있는 단검 쪽으로 몸을 던졌다. 세르네긴이 그 앞을 막았다. 그러나 마르실리오는 검을 들고 뛰어가 지도, 세르네긴에게 맞서지도 않았다. 그는 힘껏 검을 휘둘러 던졌다. 그는 그저, 휘안토스가 그 검을 받 기만을 바랬을 뿐이다. 그것으로 끝날 거라 생각했다. 순간, 휘안토스가 아킨의 팔을 꺾었다. 팔을 뽑기 위해 아킨이 몸을 틀었고, 휘안토스는 더 힘주어 아킨을 밀어젖혔다. 놀란 세르네긴이 외쳤다. "멈춰요....!" 퍽--! "-!" 아킨의 옆구리로 검이 파고들며, 금새 피가 거세게 치솟아 올랐다. 팔의 힘이 풀리며 검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고, 휘안토스도 손을 놓 았다. 역장이 단번에 풀려 나가 버렸다. 비에 차갑게 식은 허공으로 아킨의 거칠고 뜨거운 입김이 뿌옇게 서렸다. "쿨럭-!" 피가 치솟아 올랐다. 차갑고 단단한 검 날은 살 속에 단단히 틀어박 혀, 살과 핏줄을 잘라냈고 칼자루 아래에 고였던 피는 후두둑 툭툭 쏟아졌다. 숨은 더욱 거칠어지며, 결국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 가쁘 게 변했다. "하....큿.....쿨럭-!" 아킨은 허리에 박힌 단검의 칼자루를 단단히 움켜잡아 뽑으려다가 곧 손을 놓고 말았다. 휘안토스는 뒤로 물러났다. 세르네긴이 달려와 아킨의 상처를 보고 는 금새 창백해졌다. 아킨은 숨을 몰아쉬며 마르실리오를 노려보았 다. 마르실리오는 이를 악문 채 어깨를 떨고 있었다. 그저 팔이나 놓게 하려 했던 그는, 아킨이 이 정도까지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줄 몰랐던 것이다. 자신의 손으로 주군의 아들을 죽이게 될 지도 모른 다는 생각에, 그의 눈은 벌써 두려움에 젖어 있었다. 그런 식이면...당한 내가 화가 난다고. 차라리, 당당하게 봐 버려-! 겁먹을 거면, 뭐 하러 검을 휘둘렀어--! 아니다, 그제야 아킨은 휘안토스가 그의 팔을 잡고 밀어젖혔던 것을 기억해냈다. 아킨은 천천히 일어나, 휘안토스의 명치에 주먹을 내리 꽂았다. 퍼억--! "큿-" 신음소리 한번 터졌을 뿐이다. 빠각-, 뼈 으스러지는 듯한 소리....손 등이 아려왔다. 검 날이 박힌 그곳에서 엄청난 고통이 치솟아 오르 며 몸이 갈가리 찢겨 나가는 것 같았고, 피는 더욱 무섭게 쏟아졌 다. 바닥에 진한 핏방울이 후두둑 비처럼 떨어지며 풀을 검게 적시 고, 아킨은 밀려드는 통증과 현기증에 나무에 등을 기대며 숨을 몰 아쉬었다. 피 비린내가 얼음처럼 차갑고 무거운 공기 속으로 물씬 풍겨왔다. 휘안토스가 풀썩 쓰러졌다. 아킨은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끌고....최대한 멀리 꺼져요, 마르실리오." ".....아킨토스 님." "어서-! 당장에 꺼지지 않으면 내 손으로 찢어 죽여 버리겠어---!" 숨이 더 거칠어졌다. 겨우 힘을 끌어 올렸던 그 필사적인 찰나가 지 나가자, 아킨의 생명도 빠르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피는 여전히 멈 추지 않고 흐르고 있었다. "시간이......" 시야는 더욱 흐려졌다. 마르실리오가 어찌 했는지, 아킨은 그것조차 알기 어려웠다. 이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너무나 어지러웠다. 시사각각 죽어간다는 것이, 죽음이 차갑고 어두운 그림자를 흐트러 뜨리며 다가오는 것을 너무나 분명하게 느끼는 것이, 두렵고 끔찍했 다. 저 뒤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저 컴컴한 어둠, 냉혹한 단절. 모 든 것은 떠나고 끝나리라. 세르네긴이 말했다. "누우십시오, 왕자." ".....갔...습니까." 세르네긴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아킨의 목에 손을 갖다 대고 맥박을 확인할 뿐이었다. 상관 말라는 것이며, 그것으로 시간이나 생명을 낭비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한에 몸이 떨려왔다. 춥다, 너무나 춥다....무겁고 추워.... 그러다, 아킨의 흐린 눈에 세르네긴의 가슴에 반짝이는 하얀 것이 들어왔다. 그, 하얀 백조의 반지.....그것이 금사슬에 매달려 달랑이고 있었다. "좋겠군요, 당신은....." 아킨이 흐릿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리 웃어도, 정말 웃는 얼굴로 보 였을 지는 의문이었다. "그만 하세요. 우선은..." 아킨은 목을 뒤로 젖히며, 세르네긴이 이끄는 대로 나무 둥치에 머 리를 기댔다. ".....여덟...살 때 죽으려고 했.......었죠." "왕자-" 영원히, 영원히 잠들어 버리고 싶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그 자리 에서 끌려와, 늪의 성의 철창에 갇히고 쇠사슬에 묶였다. 하루하루 저물고 밝아오고 다시 저물고 밝아오는 것만을 바라보며, 그렇게 1 년이 흘러갔다. 하루는 뼈가 드러날 정도로 쇠사슬을 벗어나려 해 보고, 어느 날은 철창 안의 유리를 걷어차 깨뜨리고, 그러며 아킨도 어머니처럼 미쳐갔고, 그 곳을 어느 날인가 영원히 떠나버린 어머니 가 어떤 방법을 썼는지 떠 올렸다. 살 이유 따위는 없다든가, 라는 생각을 떠올리는 것 마저 아킨에게 는 사치였다. 가엾은 어머니는 더 이상 철창 밖을 바라보며 한숨짓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다. 잠겨진 방안에서 비명을 지르지도, 울부짖지도 않 았다.... 그녀는 도망치는데 성공했고, 마침내 해방된 것이다. 아킨이 간절히 바랬던 것은 단지 그것뿐이었다. "쿨럭-!" 피가 다시 튀어 오르고, 현기증이 일며 세상이 휘청인다. 너무나 추 웠고.....보이는 것은 구름이 찢어져 가는 하늘. 순간, 눈앞에서 보름의 달이 빛을 터뜨렸다. 구름은 찢어지고, 날은 개이고, 그 구름 자락 끄트머리를 하얀 은빛 으로 물드는 만월의 달--! 한껏 부풀어 오른, 저 저주의 빛을 퍼뜨 리는 잔혹한 달.... 아킨의 운명을 짓밟고, 어머니를 죽음으로 내 몰고, 아버지를 미치 게 했던 저 달.....그리고 어둠의 숲. 고요히 숨쉬다가, 자신을 짓밟은 자에게는 무자비한 저주와 분노를 쏟아냈던 저 숲-- 아킨은 눈물이 맺히는 것을 느꼈다. 그 뜨거운 것은 차갑게 식은 볼 을 타고 흘러내린다. 여덟 살, 어느 만월의 날 아킨은 도망쳤다. 숲을 헤치고, 냇물을 건 너, 깊은 숲 속으로 도망쳐 들어가며 상처투성이, 진흙 투성이로 지 저분해 지며 도망쳤다. 달리다 보면, 언젠가는 어머니가 도망친 그 곳으로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그 길로 도 망쳐, 영원히 떠나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영원히. 어떻게 얼마나 갔는지 기억나지도 않는다. 팔이 부러지고, 몸은 피 투성이가 되었고, 끝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마지막 순 간, 그런데 그 순간만이 지금도 선명하다. 아킨은 달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시리도록, 가슴아프도록 푸릇한 빛을 터뜨리는 둥근 만월의 달이, 그 찰나에 너무나 아름다웠다. 아킨은 거의 꺼져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살고...싶었어..요. 이유 따위....그런 것 없어도.....살아있 으면...살아 있으면........" 그 달빛이 아름다운 만큼, 다시 한번 더 보고 싶어졌다. 또 한번 달 빛을 보고, 다시 한번 달빛을 보고, 그렇게 몇 번이나 그 달빛을 보 고 싶었다. 그리고 차가운 검푸른 하늘을 녹이는 연한 장미빛 여명 을 보고 싶어졌다. 생각해 보니, 그 빛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단지 그 뿐이었다. 다시 철창에 갇히고 쇠사슬에 묶일 날만이 있을 뿐인데....그 두 가 지를 다시 볼 수만 있다면, 그런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이 느 껴졌다. 아킨은 이제 하나 남은 봉인으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그 차가운 것 이 손 끝에 닿자, 그는 그것을 떼어 세르네긴 쪽으로 내밀었다. "왕자." "가지고......최대한...멀리....가 주십시오. 새벽.....해가 뜰 때까지는 얼 마 남지 않았을 테니.....두 시간...네, 그....정도만 버티면 될...겁니다." 세르네긴의 눈이 커졌다. "뭘 하려는 겁니까." "살아 남을 방법은.....이것 밖에는 없으니까...." 아킨이 손가락을 펼치자, 그것이 세르네긴의 손바닥에 떨어졌다. 어지러워, 결국 가슴을 움켜쥐고 몸을 웅크리며 아킨은 7년만에 느 끼는 그 두려운 느낌이 심장에서 솟구쳐 핏줄을 타고 흘러가는 것 을 느꼈다. 둑이 터지듯, 그것은 피를 차갑게 훑고 지나가고 점점 뜨거워지더니 몸 전체가 불타는 것만 같았다. 상처도 처음에는 고통스럽게 화끈거 리다가는 둔한 통증을 남기며 흐릿해져갔다. 눈앞은 서서히 제 모습 을 찾아갔으며, 차갑고도 선명해졌다. 숨소리는 거칠어지고, 심장은 안에서 부풀어오르기라도 하는 듯 크게 벌떡댔다. 아킨은 나무둥치를 짚고는 힘을 꾹 주었다. 나무껍질이 툭툭 벗겨져 튀어 올랐다. 핏줄이 튀어 오르며, 손톱은 길어지고 손도 굴곡이 굵 어지며 커져갔다. 얼굴 근육이 한꺼번에 뒤틀리는 것만 같았다. 이 가 서로를 밀어내며 거대해져 가고, 신음 소리는 서서히 으르렁거림 으로 바뀌어갔다. "하아--!" 아킨은 세상이 점점 작아지는 것 같았다. 온 몸이 부풀어오르는 것 만 같은데, 자제력은 사라져갔다. 무언가 으깨어 버리고 싶었다. 갈 기갈기 찢어, 내동댕이쳐 버리고 싶었다. 피 웅덩이에 내 동댕이쳐 버리며--! 17년 전, 암롯사의 위대한 대공왕과 그 아름다운 공비는 귀여운 두 아들을 얻었다. 왕은 황금꽃같은 불꽃을 터뜨리고 온 함대에 축포를 쏘아 올리게 했다. 천사처럼 아름답고 착한 아내는 그의 가슴에 기대 행복한 미 소를 짓고, 왕은 그녀의 머리를 쓸어 내리며 앞으로의 행복만을 생 각했다. 그의 얼어붙은 고독을 녹여준 온화한 봄볕만이 쏟아지는 그 행복만을.... 그러나 그것은 노을의 빛, 가을의 찬란함이었다. 왕의 모든 것이 여 물어 떨어지는, 그 마지막 순간이었다. 겨울이 성큼 성큼 찾아오고 있었다. 혹한의 눈보라가 쏟아질, 그런 겨울이. 그가 씨앗을 뿌린 절망과 분노의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자라, 이제 왕이 맞이한 가을에 열매를 맺었고, 그것이 떨어지는 순간 그 곳으로 매서운 겨울이 채찍을 휘둘렀다. 어느 날 밤, 공비는 아이의 울음소리에 침대에서 일어나 쇼올을 걸치 고는 아이 방으로 갔다. 그녀가 올 때까지 침대를 지키던 왕은 그 울 음소리가 이상한 것을 알아챘다. 울음은 기괴하게 비틀려 있었고, 사 나운 야성이 끓어올랐다. 공비가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왕은 검을 뽑아 들고는 달려가 아 이 방의 문을 열어 젖혔다. 창문으로는 만월의 빛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그 앞에는 눈물 범벅이 되어 파랗게 질린 아내가 서 있었다. 왕은 달려가, 그녀 옆의 아이요람을 보았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것'을 보고는 주저없이 검을 휘둘렀다. 그것은 요람에서 튀어 올라 후닥닥 구석으로 피했고, 요람이 부셔졌 다. 왕은 도망치는 그것에 검을 찍어 넣었다. 그러나 작고 빠른 그 것은 아이 방을 뛰쳐나가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왕은 방을 뒤졌 지만, 첫째 아들 하나밖에 없었다. 아내는 급히 그 요람의 아이를 안아 품에 안고는 주변을 미친 듯이 뒤졌지만, 둘째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 것이 아이를 헤친 거야....! 울음을 터뜨려 버리는 아내를 진정시켜, 왕은 그녀를 침실로 들여보 냈다. 그 앞에는 무장한 기사들을 세워 지키게 했고, 자신은 온 성 을 뒤지며 그 괴물을 찾아냈다. 동쪽하늘에 하얀빛이 퍼져나가고, 곳곳에 쌓인 눈이 발그레하게 물 들었다. 새벽 별은 빛을 잃었고, 하늘은 파랗게 밝아왔다. 그러다, 마침내 동쪽에서 빛이 쏘아져 나왔다. 동으로 난 창으로 빛이 퍼졌 고, 세상은 창백한 아침의 햇살 속에 빛났다. 아무 것도 찾지 못한 왕은 지친 몸을 이끌고 아내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갔다. 아내는 침대 위에 앉아, 창백하고 망연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았 다. 그녀의 품안에는 은빛 머리카락의 둘째 아들이 잠들어 있었고, 왕은 달려가 그 아들의 잠든 볼을 어루만지고는 기쁨과 안도에 미 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녀가 말했다. -이곳에....숨어 있었어요. 침대...아래에 있다가 제가 들어오자 나왔 지요. 왕은 대체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울음을 터뜨렸다. -해가 뜨자 제 앞에서...제 앞에서 변했어요--! 그게....그 괴물이 이 아이였어요.....! *********************************************************** 작가잡설: 겨울키....끝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 그리고 이제 연재분 따라 잡으려면.....아직 멀었습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16장 ************************************************************** [겨울성의 열쇠] 제77편 찢겨진 달빛#8 *************************************************************** 세르네긴은 은빛 귀걸이를 주머니에 넣었다. 도망칠 생각은 없었다. 그는 자신의 말안장 옆에 묶여 있는 창날과 두 개의 긴 봉을 꺼내 이었다. 고국을 떠난 뒤 한번도 쓰지 않은 것 이었지만, 지금은 그 봉인을 풀고 눈앞의 적을 상대해야 했다. 생명과, 맹세와, 소중한 의무를 위해. 세르네긴은 창을 들어 이마에 댔다. 그리고 고대의 기도문을 나직이 읊조렸고, 순간 긴 창대위로 빛나는 문자가 빠르게 달려 올라가, 날 에 이르자 분수처럼 퍼져나갔다. 은은한 빛이 주변으로 퍼졌다. 세르네긴은 창을 당겨 날을 눕혔다. "이제는 알아보지 못하겠지요." 크르르릉--- 낮은 으르렁거림이 어둠 속에서 흘러나왔다. 쿵--바윗덩어리라도 움직이는 듯한 육중한 소리가 들렸다. 세르네긴은 팔에 힘을 주고는, 무릎을 굽히고 어깨와 허벅지를 긴장 시켰다. 구름이 더욱 잘게 찢어지며 달빛은 너무나 밝게 쏟아졌다. 쿵--그것이 한 걸음 더 가까이 나왔고, 온 몸으로 뿜어내는 그것의 거대하고도 난폭한 살기와 광기에, 세르네긴의 창끝에서 파란빛이 스며 나왔다. 위험한 적..... 그의 분신이 그렇게 세르네긴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크헝---!" 그것이 그 창에 깊숙이 스며든 마법의 기운을 느끼고는 크게 울부 짖었다. 거대한 이가 솟은 입안에서 부연 김이 뿜어져 나왔다. 세르 네긴은 날의 끝을 겨누며, 자신을 노려보는 괴물을 차분하게 바라보 았다. 은빛의 늑대. 적어도 비슷한 것을 찾는 다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 을 테지. 그러나 다섯 배는 됨직한 거대한 몸집에, 바닥을 딛고 있 는 네 개의 발은 나무 둥치만큼이나 굵었다. 배 부분에는 이제 막 아문 듯한 상처가 있었다. 앞으로 굽은 등에, 흉측하고 사나운 머리 가 얹혀 있었다. 송곳니는 길게 뻗어 양옆으로 솟아 있었고, 벌건 잇몸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콧잔등은 주름져 있고, 그 위의 금 빛 눈은 살육의 광기로 활활 타올랐다. 어떻게 그 어린 소년이 저런 것으로 변할 수 있을까. 아니, 그 몸 안에 숨어 있던 '어떤 것'이 보름의 달빛을 받아 그 몸을 뚫고 나오 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세르네긴은 방금 전에 자신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며, 살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신음, 울부짖음, 고통스런 으르렁거림도 들었다. 저건 아킨, 달빛이 끌어낸 숲의 저주였다. 이제 그는 이해할 수 있었다. 어째서 루실리아 대공비가 미쳐버리고, 아버지인 대공왕이 그 작은 아들을 감옥에 가두고, 형인 휘안토스는 아킨이 보이는 조그만 위험 에도 그리도 신경을 곤두세우는 지. 저 괴물을 앞에 놓고, 그것도 제 아들이자 동생이라면, 그 누구도 제 정신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아킨토스, 당신은.....보름마다 저 모습이 되어야 했는데, 그래 도 살고 싶었다고? 대체 무엇 때문에-! 내가 저런 모습이 된다면 살고 싶었을까? 아버지나 의형 슈마허, 그 리고 사랑스러운 동생이 자신을 증오하고, 견디지 못해 미쳐버리고, 끔찍하게 혐오한다면....난 버틸 수 있을까. 모를 일이다. 직접 겪지 않는 한, 그 누구도 이해할 수도 장담할 수 도 없는 일이다. 버틸 수 있다고 으스댈 수도 없는 노릇, 그렇다고 가엾다고 동정하기에도 미안한 것이다. 그러니 지금 세르네긴이 할 일은, 이 '아킨'을 막는 것뿐이었다. 그가 숲 밖으로 뛰쳐나가지 못 하도록, 그래서 사람들 눈에 뜨이거나 탈로스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는 것이다. 다시 그것이 크게 울부짖었다. "크르렁--!" 숲이 부르르 떨었다. 푸드득, 놀란 새들이 뛰쳐나가는 소리가 들린 다. 지금 이렇게 세르네긴이 차분한 것은, 그 자신이 이보다 더욱 사납고 거대한 상대를 맨 손으로 마주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일 뿐. 보통 사람이라면, 저 불타는 눈동자조차 견디지 못할 것이다. 세르네긴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이 서쪽으로 걷혀 가고 있었다. 달은 서산으로 이미 기울어 있었으며, 해만 뜬다면.... 아킨은 분명 원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다. 달빛이 사그라들고, 더욱 강한 햇살이 생명과 축복의 빛을 뿌리는 그 순간, 숲은 저주를 거두 어들인다. 그래, '두 시간'만 버티면 되는 것이다. 순간, 그것이 바닥을 차고 달려들었다. 세르네긴은 창봉으로 바닥을 짚어 몸을 날리고는, 다시 휘둘러 날을 세웠다. 그것이 휘두른 발에 나무가 우지끈 부러졌고, 세르네긴을 놓치자 이를 드러내며 세르네긴을 덮쳐왔다. 세르네긴은 허리를 젖 혀 피하며 창을 휘둘렀다. 날이 그 발에 내리 꽂히자, 그것이 울부 짖으며 뒤로 물러났다. 세르네긴은 놓치지 않고 그 목을 창 뒷부분 으로 세게 찍었다. 그것이 숨막히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숙이더니, 세르네긴을 삼키기 라도 할 듯 입을 벌리며 다시 덤벼들었다. 세르네긴은 창을 휘둘러 그 목을 후려쳤다. 뼈 부러지는 듯 우득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뛰 어 오르려고 무릎을 굽혔고 세르네긴은 몸을 날리며 창을 휘둘렀다. 날에서 금빛 번득임이 터졌다. 그 위에 적힌 수 십 개의 문자가 한 꺼번에 확 밝아지더니, 번개가 번득이듯 금빛 햇살이 강하게 쏘아 졌다. 그 빛의 날에 달려들던 괴물은 단번에 맞아 나가 떨어졌다. 나무들이 쿵쿵 부딪혀 흔들리고, 바닥에 박힌 바위들이 괴물의 몸을 후려쳤다. 그리고 그것은 저 멀리 나가떨어져서는 거칠게 숨을 들이 켰다. 세르네긴은 창을 눕혔다. 벌써 팔과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일어나지 못하기를 빌었지만, 결국 느릿느릿 몸 을 일으키더니 세르네긴을 노려보았다. 크르르르르르-- 뿌연 입김이 허옇게 흐트러지고, 그 금빛의 눈동자가 타오른다. "젠장-!" 세르네긴은 몸을 피했지만, 그것이 휘두르는 발에 허리를 맞았다. 발톱에 살이 패어 나갔다. 고통에, 몸이 한꺼번에 쪼개지는 것만 같 았다. 세르네긴은 창을 눕혀 양쪽의 나무에 걸치고는 바위위로 나가 떨어지는 것을 간신히 면했다. 그리고 그 위로 몸을 퉁겨, 괴물 쪽 으로 몸을 날렸다. 발톱에 찢겨져나간 상처에서 피가 후둑 튀어 올 랐고, 통증에 현기증이 일었다. 그럼에도, 세르네긴은 창을 휘둘러 괴물의 머리를 노렸다. 그러나 괴물이 경계하며 허리를 숙이는 순간 미간 바로 앞에서 멈추어 세 웠고, 그 끝에서 다시 한번 금빛 번쩍임이 터졌다. 괴물은 다시 한 번 거세게 나가 떨어졌다. 쿠르르릉--! 천둥이라도 치는 것 같았다. 나무가 다시 뚝뚝 부러졌 다. 그것의 살이 찢겨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르네긴은 뒤로 주 춤 주춤 물러나며 숨을 몰아쉬었다. 부러진 나무위로 그것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어깨는 후들거리고, 그 코와 입에서는 검붉은 피가 뚝뚝 흘렀다. 세르네긴은 숨을 고르며 창을 들었다. 한 번 더 온다면, 이제는 세 르네긴도 찌를 생각이었다. 그것은 어깨를 아래위로 크게 들썩이며, 그 노랗게 빛나는 눈으로 기사를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목을 뒤로 젖히고 하늘을 향해 크게 울부짖었다. 세상은 한번 크게 부르르 떨었다가 곧 잠잠해졌고, 나 무에 고여있던 마지막 빗방울 마저 눈물처럼 떨어진다. 그리고.......쿵- 그것의 몸이 두터운 모래주머니처럼 풀썩 쓰러지더니 더 이상 울부 짖지도 으르렁거리지도 않았다. 세르네긴은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크게 뒤로 꺾으 며, 흠뻑 젖은 나무 둥치에 몸을 기대고는 숨을 몰아 쉬었다. 흐릿 한 괴물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세르네긴은 빙그레 웃고는, 살점이 너덜거리는 상처에 손을 가져갔다. 손끝에 닿는 느낌만 해도 지독했 다. "해 뜨면....이것도 같이 나아버리면 좋겠군." 자기가 생각해도 참 싱거운 농담이라 생각하며, 세르네긴은 웃고 말 았다. 유즈.....돌아가면 이야기 할 거리가 참 많겠다. 근사한 왕자님 하나 를 만났지. 혹시 알아, 네가 키스해주면 저주에서 풀릴 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자, 자켄은 더 서둘러 앞으로 향했다. 그러나 제임의 예상대로, 결국 비틀거리다가 미끄러졌다. 제임이 한 숨을 내 쉬었다. 당연할 테지, 출혈에 아직 상처도 제대로 낫지도 않았는데. "엘프가 숲에서 미끄러지면 망신이야." "...괜찮....습니다." 그러며 자켄이 피식 웃었다. "왜 웃는데?" "루첼과...말투가 좀 비슷하군요." 자켄은 그렇게 말하고는, 피가 스며 나오는 허리에 손을 가져갔다. 축언을 작게 속삭이자, 그 피가 곧 멎었다. 그러다, 그 자켄이 갑자 기 귀를 곤두 세웠다. "왜 그러지, 엘프?" "새 우는 소리입니다." "...." 제임은 귀를 기울여 봤지만 통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대체 새 우는 소리가 왜 중요한지 모르겠다는 듯, 시큰둥하게 자켄을 바라보았다. 자켄이 말했다. "해가 뜨는 겁니다." 뭔가 짚이는 게 있는 제임은 급히 나무들 사이를 걸어가, 울창한 나 무들이 조금 물러나 있는 공터에 다다르자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은 얇은 새털처럼 찢어발겨져 있었고, 서쪽으로 물러난 그 구름 덩어리는 장밋빛으로 발그레하게 물들어 갔다. 환한 빛이 하늘 위로 퍼지며, 세상은 눈부실 정도로 밝아 오고 있었다. 높은 나무 끄트머 리는 벌써 빛을 받아, 그 깊은 곳은 짙고 긴 그림자로 그늘져 있었 다. 세르네긴은 빛이 쏟아져 들어오자, 눈 끝으로 따스함을 느끼며 정신 을 차렸다. 눈이 부셨다, 따가울 정도로. 잎 끄트머리에 맺힌 물방울이 수정처 럼 찬란하게 반짝이고, 젖은 바위들과 나무둥치도 번쩍였다. 바닥은 흙이 보일 정도로 패여 있었고, 여기 저기 부러진 나무들과 떨어진 잎, 나뭇가지가 널브러져 있었다. 한바탕 폭풍이라도 휩쓸고 지나간 듯 엉망진창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소년이 앉아 있었다. 검은 가운 차림이었다. 성을 나올 때, 기사들의 말 등 하나에 있던 것이었다. 기사들이 우비로 쓰는 것이다. 아직도 지친 듯 숨을 몰아 쉬고 있었고, 안색은 창백했다. 그러나 흠뻑 젖은 머리카락은 은빛 이었으며, 하늘을 바라보는 얼굴은....새로 태어난 듯 싱그럽게 반짝 이는, 세르네긴이 아는 그 소년의 얼굴이었다. 세르네긴은 괜히 정신을 놓아 버려 소년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지 못한 게 아쉬웠다. 멋진 광경을 졸면서 놓쳐 버린 듯, 그렇게 묘하 게 억울했고, 그런 것을 느끼는 자신이 어이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목숨이 달랑거리던 상황이었는데, 이렇게 멍청한 생각이나 떠 올린다니. 세르네긴은 창을 짚고 일어났다. 소년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다 가, 갑자기 병자처럼 해쓱해졌다. 세르네긴의 상처에 놀란 것이다. "괜찮.....습니다." 격통이 금방 몸을 꿰뚫었지만 기사답게 참아 내며 세르네긴은 손을 내밀었다. 아킨은 그 손을 잡으려다가, 저 깊은 곳에서 들리는 소리 에 고개를 퍼뜩 돌렸다. 세르네긴도 창을 당겨 올렸지만, 지금의 그 는 사실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아킨의 눈이 서서히 얼어붙어 갔다. 긴장과 떨림에, 그 눈썹 끝과 입술이 떨려왔다. 뒤로 주춤 물러났다가, 뻣뻣하게 굳은 듯 멈추어 섰다. 환한 아침 햇살이 쏟아지는 성 앞 공터로, 누군가가 걸어나왔다. 자 그만 몸에서 솟구친 긴 그림자가 아킨과 세르네긴에게까지 뻗어왔 다. 연푸른 눈동자와 얇은 덩굴 같은 금발머리가 아침 햇살에 투명할 정도로 빛나고 있었다. 온 몸이 피투성이였지만, 그의 피는 아니었 다. 그 몸에는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그리고 그는 지쳐 비틀거리는 다리로 힘겹게 서서는, 히죽 웃었다. 아킨은 뒤로 주춤 물러났다. "당신....!" 어둠이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겨우 지탱해 왔던 의지가 이제 산산이 부서지려 했다. 공포와 절망에, 아킨은 제 정신으로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옆에 있는 세르네긴의 숨소리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탈로스는 그 를 흘끔 보았다가는, 금방 눈을 크게 떴다. 순간 세르네긴의 창이 치솟아 올랐다. 탈로스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그의 주변에 얇고 둥 그런 판이 떠올랐고, 옅은 문자들이 가득 새겨진 그것은 유리처럼 햇빛에 투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순간, 그것은 번득이듯 빠르게 날아와 아킨의 팔목과 발목을 후려쳤다. "큿-!" 그 쪽으로 팔을 뻗으려는 세르네긴을 향해, 크고 보이지 않는 힘이 내리쳐 왔다. 그는 그대로 나가떨어져 버렸고, 상처에서 다시 피가 치솟아 올랐다. 땀과 흙에 범벅이 된 채 그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 나 갑자기 온 세상이 현란한 번쩍임과 함께 두 개로 분리되었다가 는 가운데로 모여들었다. 현기증이 이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몸 을 일으켜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그의 목과 가슴을 단단한 힘이 꽉 감아 당겼다. 세르네긴은 팔을 휘둘렀지만, 새벽의 전투와 부상에 지친 그는 목을 잡아 누르는 힘을 떨쳐 내기는커녕 버티지도 못하고 있었다. 탈로스 는 히죽 웃었다. 그 비웃음에 세르네긴은 사납게 그를 노려보았다. "치우십시오!" 탈로스가 말했다. "너와 싸우는 미친 짓은 안 하겠어. 네 분노가 무엇을 불러일으키는 지 아니까." 탈로스의 손에서 빛이 솟구쳤다. 세르네긴은 그 눈부심을 버티지 못 하고 결국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고, 온 몸으로 그 빛이 쏟아져 들어 오며 그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아킨은 현란한 빛과, 팔과 발목을 조이는 고통과 현기증에 그대로 말라 소멸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는 손에 힘을 주어 버티어 내려 했지만, 그 소용돌이치는 힘은 더욱 거셌다. 그대로 저 안에 빨려 들어가 사라지고 지워져버리고 죽어버릴 것 같았다. 눈앞에서는 눈보라가 치솟아 올랐다. 아킨은 성문을 박차고 뛰쳐나가, 그 넓고도 넓은 눈 덮인 광활한 황 야를 달리다, 등뒤에 있는 그의 유일한 안식처이자 영원의 감옥인 성을 돌아보았다. 그것은 눈보라 속에 우뚝 서 있었다. 아킨은 고개 를 돌리고는 어머니를 찾았다. 그러자, 어머니는 절벽에 서서 그 지 친 눈빛으로 말했었다. -돌아가, 아키. 그렇다면 어디로 가야 하는 거죠, 어머니? 난 대체 어디로, 어디로 가야 해요! 당신마저 떠나버린 안식 없는 절망과 고통, 그 속에서 나 혼자 얼어붙어 가야 하는 겁니까....저 혼자서요? 네? 외롭다고요, 너무나....외로워요. 어머니의 하얀 머리카락이 눈보라 속에서 흩어졌다. 긴 옷자락은 날 개처럼 펄럭이고, 그 시선이 이윽고 하늘을 향했다. 그리고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너는 싸워 이겨야 해. 살아서......그래야 강해질 수 있는 거야. 순간, 차가운 손이 그의 목을 움켜잡았다. 아킨은 그 손을 떨쳐 내 고 싶었지만, 꿈쩍도 할 수 없었다. "놔 줘요.....!" 그러자, 그 마법사가 연푸른 색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너는 내 전리품이야." "--!" 날카롭고 사나운 발톱에 찢겨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세상이 갑자기 까맣게 변해 버렸다. 슬픔에 먹히고, 절망에 찢겨지더니 지옥바닥 같은 어둠이 아킨을 집어 삼켰다. *********************************************************** 작가잡설: 저 상황에서도 존댓말을 하는 예의바른 아키. -_-;;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17장 *************************************************************** [겨울성의 열쇠] 제17장 차가운 검 제78편 차가운 검#1 *************************************************************** 롤레인은 첩첩이 세워진 책꽂이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높고 큰 창 밖은 벌써 어둠에 젖어 있었다. 서재 안도 어둑해서 램 프라도 키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깜깜한 것도 아니라 일단은 내버려두기로 했다. 키가 큰 '그'는 장작더미만큼이나 엉망으로 쌓인 두터운 책 사이에 서 있었다. 그리고 콧잔등에 걸린 자그마한 안경을 통해 무언가를 골똘하게 보며, 간혹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저었다. 왔습니다. 그렇게 말해도 그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작고 낡은 책이었다. 스승이 늘 품에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얇아 뵈지만 그가 살아온 인생이 세세히 기록되어 있 는 소중한 물건이었다. 또, 그 내용을 본 사람도, 볼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저, 롤레인이 왔습니다. 그제야 컬린은 고개를 들었다. 늘 그런 모습이었지만, 오늘따라 유 독 초췌하고 늙어 보였다. 특별히 얼굴 주름이 늘어나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이 체구가 장대한 마법사는 오거스트와 만났을 때도 늙어 있었고, 그후 10 여 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늙어 있었다. 아니, 늙 었다기보다는 '늙은 모습'이라는 편이 나으리라. 그를 보면, 오거스트는 변화를 알기 어려운 단단한 바위를 보는 듯 한 느낌이었다. 아주 미세하게라도 시간의 상흔과 흔적이 남을 테지 만, 롤레인에게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스승은 품안에 책을 집어넣고는 코안경을 밀어 올렸다. 앉거라. 그러나 롤레인이 아무리 둘러봐도 앉을 만한 곳을 찾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그녀는 그냥 책이 적당한 높이까지 쌓여 있는 곳에 걸터앉 았다. 컬린은 자리에 앉지 않은 채 말했다. 이곳은 네게 남겨 주겠다. 대부분은 탈로스에게 가겠지만, 이곳만 은.......그래도 길드에 직접 말 해 놓았으니 네 것이 될 거야. 스승의 연구실은 몇 개씩 있었다. 그리고 그 중 하나인 이곳은, 다 른 곳에 비해 규모는 작았지만 롤레인은 가장 좋아했다. 롤레인의 거처인 베넬리아와 가까운 데다가 가장 안락한 곳이기도 했으니- 감사합니다, 스승님. 롤레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들어 그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둥 근 벽으로 둘러싸인 그 높다란 건물의 끄트머리까지 책이 쌓여 있 었고, 고깔모양의 꼭대기 위로 네 방위로 난 창이 있었다. 그리고 일정한 높이마다 사람 키 만한 복도가 감겨 있고, 그 층층마다 비스 듬한 계단과, 그 벽을 둥글게 감싼 책장이 있었다. 왜...떠나시는 겁니까. 롤레인이 물었다. 그리고 지난 밤, 어린 악튤런이 자신이 머무는 곳 으로 스승이 찾아왔었다는 전갈을 보내왔던 것을 기억했다. 악튤런 파노제, 오거스트 롤레인, 그리고 내일이나 내일 모레쯤에는 탈로스 고르노바를 찾아갈 테지..... 컬린이 말한다. 어떻게 되든.....떠나야 해. 이겨도 떠날 테고, 지면....당연히 떠나야 할 테지. 그러니, 이유를 묻지는 말려무나. 롤레인이 말했다. 설득 해 보실 수도 있지 않습니까. 아니, 그 아이는 그것을 너무나 간절히 원해. 그것은...누구에게도 줄 수 없는 것이고, 줘서도 안 되는 것인데...왜 이해를 못해주는 걸까. 그렇다면 왜 가지고 계셨습니까. 파기해 버리셔야 했어요. 그러자, 컬린은 고개를 저었다. 내 마지막 희망이었으니까. 넌......모르는, 그리고 알아도 이해하기 어려운.....그러나 탈로스는 너무나 원하는 억겁의 저주, 그것을 풀어 볼 내 마지막 희망. 롤레인은 컬린의 늘어진 어깨 위를 내리 누르는 묵직한 짐을 본 듯 했다. 어두운 눈빛 속으로 휘몰아치는 천년의 우주와, 고달프고도 긴 여정 을 본 듯 했다. 스승의 이런 모습, 그 유쾌한 껍질 속에 숨겨진 이 리도 지친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롤레인, 너를 제자로 맞이했던 것은....그리고 너와 짧지만 즐거운 시 간을 보냈던 것은 행운이라 생각한다. 축복, 이 길고 긴 인생이 맞 이한 눈부신 반짝임.........그래, 탈로스나 악튤런과도 사실 그렇긴 했 지. 하지만.....탈로스는 이렇게 슬픔으로 끝나고, 악튤런은 미처 키워 주지도 못했어. 그래도 너만은 이렇게, 이렇게 가끔 머릿속으로 떠 올리곤 하던 그런.....그래, 웃지 말아라. 사실 난 신화에서 나오는 듯 한 스승과 제자와의 이별을 한번쯤 해 보고 싶었다. 꽤나 폼나게 말 이다..... 롤레인은 웃고 말았다. 그리고 컬린 역시 조용히 웃더니, 부드럽게 말했다. 사랑한다, 나의 제자.....소중한 롤레인.... "마법사 님...?" 롤레인은 느릿느릿 돌아가는 천장과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하 녀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뿌옇기만 했지만 한참이나 그렇게 바라 보니 차츰 차츰 모습이 잡혀갔다. 자세히 보니, 그 하녀는 며칠이나 잠을 못 잔 듯 아주 초췌했다. 롤레인이 말했다. "너, 아주 지저분하네." 하녀는 피식 웃더니 안경을 벗고는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롤레인은 후우--하고 숨을 몰아쉬고는 물었다. "며칠 지났지?" "이틀입니다. 그래도 걱정 마세요. 의사 분 말씀이 별로 다치지는 않았답니다. 금방 일어날 수 있을 겁니다." 별로 다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물론, 의사가 그리 말한 이유를 잘 알고는 있고, '지금은' 사실이란 것도 잘 알지만, 아직 허리가 몽둥 이로 한 대 후려 맞은 듯 욱신거린다. 롤레인은 눈을 감고는, 얼굴을 문지르듯 쓸어 올렸다. 며칠 누워 있 었으니, 얼굴의 맨살은 아주 푸석하고 까칠했다. 그러며, 롤레인은 지친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누가 여기까지 데려다 줬지?" "마법사 님 학교 학생랍니다. 학생치고는 나이가 좀 많아 보이는 데.......붉은 머리에 안경을 끼고 있어요." 나이 많아 보이고 붉은 머리에 안경, 그리고 그곳을 서성일만한 학 생이라면 단 하나 루첼 그란셔스 뿐이다. "아키는?" 다행히, 하녀는 지난 루피니아 축제 때 집에 왔었던 아킨을 기억하 고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찾아오지 않았어요." "자기 나라로 돌아간 건가?" 하녀가 아무 말도 못하자, 롤레인은 체념하고는 말했다. "나를 옮겨줬던 그 학생 좀 불러 주겠어?" 롤레인은 이미 방금 전 하녀가 한 말에 섞인 그 미묘한 것을 알아 채고 있었다. 루첼은 아마도 그녀의 집안이나 아주 가까운 곳에 있을 것이다. 예 상대로, 나이 많고 양순한 하녀는 즉각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고는 나갔다. 문이 열렸다 닫히고, 밖에서 작게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 온다. 목소리가 멎고, 다시 문이 열렸다. "들어와, 그란셔스 군." 루첼은 인사 없이 안으로 들어오고는, 어려운 부탁을 꺼내려는 듯 문 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가, 머뭇머뭇 안경 을 밀어 올린 다음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롤레인에게 안경이 없어, 그의 표정은 잘 보이지는 않았다. "가까이 와 주겠어?" 그렇게 말하고는 롤레인은 허리를 당겨 침대에서 일어났다. 머리는 어지럽고, 몸도 부서질 듯 욱신거렸지만 간신히 참아냈다. 그러자 루첼이 말했다. "교수님을 뵈려는 사람이...하나 더 있습니다. 아니, 사람이라고 하기 는 뭐한 친구군요. 괜찮을까요?" "들어오라고 해." 루첼이 밖으로 나갈 필요도 없이, 아직 열려 있는 문안으로 키 큰 남자 하나가 들어왔다. 역시 흐려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진한 피 부색에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였다. 그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문을 닫았다. 그러자, 머리카락 뒤로 뾰족한 귀가 보였다. 엘프.... 그가 말했다. "처음 뵙습니다, 오거스트 롤레인 님." "자네가 자케노스군." "네." 롤레인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눈물이 나올 정도의 분노가 치솟 아 오르며, 얼굴이 달아오르듯 뜨거워져 왔다. 탈로스가 돌아간 지 금까지 이 자켄이 로메르드에 남아 있을 이유는 단 하나 뿐이다. "아키는?" "모릅니다." 그렇게 말하는 엘프 청년의 목소리는 달라붙을 듯 착 가라앉아 있 었다. 롤레인이 자켄의 답에 절망했듯, 그 역시 롤레인의 표정과 눈빛에서 자신의 마지막 희망이 절망의 무게에 깊게 가라앉아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둘은 서로에게 마지막 기대를 했으며, 이렇게 서로 묻고 답함으로써 완벽하게 절망했다. 롤레인이 말했다. "자케노스, 지금은.....조금 쉬게 해 주겠어? 괜찮다면 내일 아침에 다시 찾아와 줘." "알겠습니다." 차분하고, 또 정중했지만 차갑거나 냉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 모든 것은 거의 자학에 가까운 인내로 이루어지고 있었고, 한계 치를 지나면 산산이 부서져 버릴 것이다. *********************************************************** 작가잡설: 롤레인 교수의 성이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인 것은, 그 남편 이 롤레인의 성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네?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고요? 에, 에헴....;;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17장 *************************************************************** [겨울성의 열쇠] 제79편 차가운 검#2 *************************************************************** 문 밖으로 나서며, 루첼은 자켄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특히 일이 여기까지 이르는데 루첼은 빠져 있었고, 그 때문에 자기 탓에 일이 이렇게 까지 된 것 같아 자책감까지 드는 것이다. 루첼이 숲에 도착한 것은 해가 뜬 직후였다. 제임에게 연락을 받자 마자 달려오기는 했지만, 익숙한 길이 아닌 데다가 비가 오고 컴컴 하기까지 했으니 '인간'인 루첼에게는 거의 한시간 넘게 걸려 버렸 다. 그리고 숲의 입구에서 쓰러져 있던 롤레인을 발견한 덕에, 제임과 쟈켄을 찾을 겨를도 없이 쓰러진 그녀를 들고 나와야 했다. 그녀의 집이 어딘지는 예전에 한번 학교 일 때문에 찾아왔던 적이 있었으 니 알고 있었다. 주인의 모습에 늙은 하녀는 새파래져서는, 재빨리 침대보를 피고 그녀를 눕힌 다음 의사를 불렀다. 의사가 올 때까지 루첼은 자리 를 뜰 수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 때까지는 그는 아 킨을 별로 걱정하고 있지도 않았다. 엘프인 자켄과 권호를 받은 마법사인 제임이 있고, 아킨 자신도 꽤 쓸만한 마법을 가지고 있으니 탈로스와 맞서 싸우지는 못해도 적어도 도망칠 수는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의사가 오자, 루첼은 하녀에게 자기 이름을 말하지도 않고는 곧바로 집을 나섰다. 그리고 다시 숲으로 가, 제임과 자켄을 찾아냈던 것이 다. 루첼은 그 후부터 여기까지 이르는 동안 있었던 일은 별로 되새기 고 싶지 않았다. 루첼이 도착했을 때, 자켄은 부상으로 거동조차 힘들 지경이었고, 제임은 부상당한 자켄 대신 혼자서 아킨을 찾으러 나선 뒤였다. 루 첼은 제임을 찾아가려고 몸을 일으켰지만, 갈 필요도 없이 제임이 청년 하나를 부축하며 돌아왔다. 루첼은 그 청년을 분명 기억하고 있었고, 그가 아킨과 보호하고 있 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 순간 루첼은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너무나 빠르게 알고 말았다. "...미안하다." 루첼은 응접실 의자에 앉아 있는 자켄에게 루첼 자신이 가장 싫어 하는 말을 하게 되자 힘이 쭉 빠져 버렸다. 아킨도 아킨이지만, 망 연한 자켄에게는 도저히 뭐라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초록 눈은 이제 거의 검은 색으로 가라앉아 있었고, 목덜미에는 아 직도 피가 스며 나오고 있었지만 닦아내지 조차 않았다. 자켄이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 손과 머리는 온통 땀 에 젖어 있었고,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루첼이 물었다. "오늘 어쩌겠어?" "......다시 찾으러 가 봐야겠지. 뭔가....단서라도.....하나..." 그리고 자켄은 그대로 바닥으로 고꾸라지듯 쓰러졌다. "자크-!" 루첼은 급히 그 볼에 손을 가져갔다. 돌덩이처럼 차가웠고, 피부도 뻣뻣했다. 루첼은 그의 뺨을 몇 번 찰싹 찰싹 쳐보다가는 결국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이 녀석이, 정말...." 그 때, 누군가가 다가와 자켄의 반대편 팔을 부축해 일으켰다. "네가 깔려 버리겠다." 그 목소리에 루첼은 어둡게나마 웃을 수 있었다. "고맙워, 삼촌." "아쉬울 때만 삼촌이군." 루첼은 자켄의 안색을 살피며 제임에게 물었다. "....그 세르네긴은 어떻게 됐어? 데려다 줬어?" "물론, 슈마허같아 보이는 작자가 나를 잡아먹으려고 덤비더군." 루첼의 얼굴이 해쓱해지자, 제임이 급히 덧붙여 말했다. "그 청년이 슈마허를 붙잡고 늘어지며 '은인이다.' 어쩌고 해서 맞지 는 않았다." 길드로 달려가 룰레인에게 탈로스가 어디에 나타날 지 알렸던 그는, 세르네긴을 부축해 슈마허의 집으로 옮겨 놓은 다음 길드에 몇 가 지 보고를 한 후 이곳으로 온 것이다. 루첼은 그 흑대장 슈마허가 앞 뒤 가리지도 못하고 뚜껑이 열렸었 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그럴 만 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역시 지금의 루첼과 마찬가지로 아무 데나 화풀이하고 싶을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올랐었던 것이다. 그 때, 롤레인의 방안에서 하녀가 대야와 수건을 들고 나오다가 자 켄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디 아프신 가요?" "눕힐만한 곳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알겠습니다. 의사 선생님도 불러 드릴게요." "엘프도 치료됩니까?" 루첼이 자켄의 귀를 잡아 당겨 보이며 묻자, 하녀는 자신 없게 "비 슷하니까 어떻게 될 겁니다." 하고 말하고는 도망치듯 재빨리 사라 졌다. 롤레인은 누운 채 창 밖을 바라보았다. 여름 하늘은 새파랗고 깨끗했고, 방안은 약간 후끈한 정도였다. 너 무도 깨끗한 그 하늘 아래로, 반도 특유의 붉은 지붕들이 푸른 바다 를 향해 넓게 펼쳐져 있고, 사원과 저택의 뾰족한 탑들이 비죽이 튀 어나와 햇살에 빛나고 있었다. 아킨이 없어졌다. 그것이 모든 것을 흐리게 했다. 세상은 아무 의미도 없었고, 없어야 한다. 눈뜨고 느끼는 세상과 시간의 무게는 순간을 버티기에도 버거 울 정도로 느리고 무거웠다. 그것은 절망과 커다란 슬픔의 무게를 지고 있었으며, 자책과 아픔으 로 매서운 채찍을 휘둘렀다. 이것을 어떻게, 어디서부터 받아들여야 하는 건가. 아킨은 탈로스가 데리고 갔을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 끌고 가, 어떻 게 대할지는 모른다. 그러나 롤레인이 예상하는 것들 중 가장 약한 것을 당하는 데도 아킨은 너무 어리고 예민한 나이였다. 강하긴 하다. 그러나 그것은 수 십 번의 고초를 겪은 다음에, 믿어 지지 않을 정도로 강단지게 변해버리는 성품 때문이었다. 아킨은 예 전에 그러했듯 이번에도 육중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고난에 쓸려 내 려가다, 어느 순간에 일어나 걷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게 이겨내기는 할 테지만, 누구나 그렇게 살아가야 하지만, 지금 의 아킨은 그런 고난을 겪을 만한 나이는 아니었다. 아직은 보호해 주고, 차근차근 강하게 만들어 주어, 풍파를 견디게 할만한 힘을 그 안에 차분히 쌓게 해야 할 나이였고, 그것은 롤레인의 의무였다. 그런데 이틀 전에 탈로스는 그것을 산산조각 냈다. 그들의 스승을 파멸시켰듯, 이번에도 그 스승의 부탁을 충실하게 이 행하던 롤레인에게 파멸에 가까운 좌절을 안겨 준 것이다. 또 한번, 그는 그녀의 의무를 비웃으며 짓밟고는 빼앗아 가 버렸다. 가지기 위해 빼앗은 게 아니라, 그저 파괴하여 롤레인을 비웃기 위해 빼앗아 가 버린 것이다. 언제 생각해 봐도, 그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녀석에게 너무 많은 힘 이 주어졌다. 오로지 제 목적을 위해서만 그 큰 힘을 다 쏟아 부어 버리고 걸지적 거리는 자는 누구든 모진 꼴을 당하게 할 뿐인데. 스승은 그런 그를 너무나 편애하고 편들어 주었다. 뭘 하든, '마법' 이라는 목적 하에서는 다 용서해 주었다. 목적은 언제나 비틀린 수 단을 정당화시켰고, 정당화시키다 못해 부추기기까지 했다. 그런데 속 좋기 만한 노인은 그가 강해지기만을 바랬을 뿐이었다. 닿을 수 있는 데까지 나아가 놀라운 경지에 이르기만을 바랬으니, 그 길에 뭐가 어떻게 되든 상관치 않았고...결국에는 자신도 그에 짓밟 혀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롤레인 마저 또 한번 짓밟혀 버렸다. 8년 간 참아냈 듯, 이제는 또 아킨을 찾아내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 빠를수록 좋다. 아니, 반드시 빨라야 한다. 하루라도 낭비하면 할수 록, 롤레인이 손쓰기 어렵게 되어있을 가능성이 높다. 탈로스는 무 지한 아이가 메뚜기를 잡아 팔, 다리, 날개를 떼어놓고 병에 넣어 키우는 것처럼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하다. 아니, 겨우 그 정도가지고 뭘 그러냐고 비죽거릴 위인이다. 자신이 겪어온 고통이 너무나 크다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고통은 아무리 혹독해도 자신이 겪어왔 던 것보다는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롤레인은 다시 끔찍해졌고, 허리가 욱신거렸다. 그곳으로 손을 가져 가 보니, 이제 흉터만 조금 짚일 뿐이었다. -네가 진 거야, 롤레인. 그러나 그렇게 말하며 탈로스가 띄운 원은 다름 아닌 치료의 원이 었다. 다른 고약한 마법이 숨겨져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정말 순수한 치유의 힘을 가진,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깨끗한 치료의 원 이었다. 다 낫고 다시 붙어 보자는 건가......그래, 너라면 분명 그럴 거야. 그렇게 운 좋아서 이기는 것은 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아마, 돌아가서 수십 번은 곱씹어 보겠지. 자신이 이긴 건지, 진 건 지, 비긴 건지. 그렇다면 어떻게 이기고 지고 비겼는지. 그리고 결론 을 내리면 다시 확인하기 위해 나를 찾아올 테지. 그러나 롤레인은 차라리 빨리 그렇게 되기를 바랬다. 지금의 그녀에게, 탈로스의 거처를 알아내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아니, 절망적일 정도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탈로스가 먼저 기어 나오게 해야 한다. 그 숨어있는 구멍에 서, 이를 부득부득 물면서 기어 나오게 해야 한다. 순간 작은 새 한 마리가 퍼덕이며 창문을 스쳐 지나갔다. 롤레인은 얇은 것이 와삭 깨어진 듯 정신이 퍼뜩 들었다. 얇고도 빠 른 것은 그녀의 몸을 훑고 지나가고, 그것이 물러나자 좀 더 따뜻한 것이 되돌아 와 그녀의 가슴과 목을 적셔갔다. 그렇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8년 동안 해 왔던 것에서 정확히 거꾸로 돌 아가면 된다. 그녀가 닫아 놓은 성문을 활짝 열어 젖히고 두려움의 황야로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혹독한 추위와 긴 밤과, 얼어붙은 고 독이 있는 황야로..... 그 영리한 탈로스는 그녀의 의도를 반드시 알아줄 것이고, 도전을 받아줄 것이다. 그렇게 앞으로 걷고, 걷고, 그렇게 걸어가다 보면 언 젠가 눈보라는 그칠 것이다. 그 벌판에서 죽어버릴 지, 아니면 봄의 끝자락을 움켜쥐고 해방될 지는 모른다. 그럼에도 나아가지 않으면 겨울은 깨지지 않는다. 고독으로 겨울의 밤을 지새우지 않으면, 아침도 봄도 찾아오지 않으니.....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라도 아킨을 찾아야 한다. 그 소년을 지켜 주는 것은 스승의 부탁이자, 롤레인 자신이 진정으 로 원하던 것이었다. *********************************************************** 작가잡설: ........크흠, 흠....;;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17장 *************************************************************** [겨울성의 열쇠] 제80편 차가운 검#3 *************************************************************** 슈마허가 내내 생각한 것은 주먹과 쇠사슬 정도였지만, 아침에 깨어 난 세르네긴과 얼굴을 마주하니 그를 지나치게 과소평가 했다는 것 을 깨달았다. 슈마허는 우선 문부터 가로막으며 말했다. "간다, 이거지?" 주먹과 쇠사슬은 당연한 것이고, 슈마허 자신은 무릎이라도 꿇고 이 문 앞에서 버티고, 세르네긴이 눈 한번 똑바로 못 보는 최대 강적인 유즈가 달려와서 '가지 마~~!' 하고 와앙 울음이라도 터뜨려야 그만 둘 것 같았다. 그 아버지에게는 물론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 한심한 인간은 아들을 말리기보다는 같이 가자고 자기가 더 나설 위인이다. 슈마허는 가장 간단한 단계부터 시작했다. "상처가 다 안 나았다." "이 정도면 움직일 만 합니다." "어딘지도 모르잖아." "찾다 보면 언젠가는 알게 될 테지요." "......."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이 녀석은 생긴 것과는 달리 지나치게 어벙 한 구석이 있다. "내 손으로 직접 꿈쩍도 못하게 만들어 주기 전에 입 닥쳐라. 그리 고, 경고하건대 나는 그렇게 며칠 끙끙대다가 다 낫기도 전에 자리 박차고 일어나 속 썩일 정도로 가소로운 부상은 입히지 않아." 그리고 슈마허는 주먹을 들어 보였다. 세르네긴은 그 큰 주먹을 한 번 흘끔 보고는, 결국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저렇게 나오면, 슈마 허는 정말 '진심을 다해' 반쯤 죽여 놓는다. "하지만...제 잘못입니다." 슈마허는 지키고 있던 문에 몸을 더 바짝 밀어붙이고는 말했다. "네 잘못은 무슨 네 잘못이야. 너는 인간이고, 그 마법사 놈은 인간 경지는 예전에 뛰어 넘은 준 괴물이야. 또, 그 때 분명히 정신을 잃 고 있었고." "그게 잘못입니다." 슈마허는 크르르르릉, 하고 한숨을 내 쉬었다. "이래서 아무리 나도 에크롯사 출신이라지만 에크 녀석들은 답답하 다니까. 그렇게 세상 모든 일에 책임지고 내 탓이요, 하면 피곤하지 도 않나?" "슈마허 님, 저는 그에게 분명 약속했습니다. 제 잘못에 대한 보상 을 하기로,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 일이었습니다. 그것을 제 무능으 로 지키지 못한 것이, 어째서 잘못이 아니라는 겁니까." "그딴 거 집어 치워 버려. 못하는 건 못하는 거고, 기적은 자주 일 어나는 만만한 게 아니다. 그건 네가 가장 잘 알잖아-!" 세르네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정곡이 날카롭게 찍혀버리자, 밀려 드는 것은 좌절의 재확인이었다. 그는 잠시 입술을 꾹물고 있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저 말고...인간이 아니라면....알지 않을까요." 누굴 말하는 지, 슈마허는 단박에 알아챘다. 그래서 더 속이 뒤집어 졌다. "그 깐깐하고 거만한 할망구가 잘도 그리 해 주겠다. 내 장담하건 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그 큰 덩치 돌려 눕히고 잠들 거다. 게다가 그 할망구는 네가 에크롯사 국경으로 들어오기 전 까지는, 아무 것도 안 도와주겠다고 분명히 말했어!" "들어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슈마허는 이제 환장할 지경이었다. "국경 넘는 즉시 기사대로 자동 복귀된다는 건 알고 있지? 그럴 생 각이라면 기꺼운 마음으로 보내주마." "....." 세르네긴이 고개만 떨구며 아무 말도 없으니, 슈마허는 갑자기 후회 가 되었다. 이 참에 에크롯사로 쫓아 보내 버릴 수도 있었는데 아무 말도 하지 말걸 그랬군, 하고. 저 멍청한 녀석은 슈마허가 말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국경 넘을 때까지 몰랐을 것이다. 세르네긴이 체념하듯 말했다. "그럼....뭘 어쩌란 말입니까. 그런 식으로 아무 도움도 못 주고서..... 그러고서도 편안하게 지낼 정도로 저는 뻔뻔하지는 못합니다." "뻔뻔해져 버려." "....." "무책임해 지라는 게 아니다.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분명히 있 어. 언제나 한방 쳐주고 가르쳐 주고 싶은 네 단점은, 바로 너무 잘 났다 보니 네가 못하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다는 거야. 이렇게 말해도 그리 억지를 부린다면, 정말 다리를 분질러 버리겠다, 세냐!" 아명까지 부르며 나온다는 건, 경고정도가 아니라 지금 세르네긴의 행동에 '진심으로' 화가 났다는 뜻이다. 결국 그는 더 이상 억지를 부리지 않기로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할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알면 내 손으로 직접 쑤셔 넣기 전에 알아서 잘 챙겨 먹어." 그리고 슈마허는 문을 벌컥 열어 젖혀 나가더니, 온 집이 깜짝 놀랄 정도로 세게 문을 닫았다. 꽈릉--! 세르네긴은 고개를 푹 숙이며 한숨을 내 쉬었다. 미치겠다, 정말. 슈마허는 곧장 궁으로 향했다. 강하게 쏘아져 나오는 아침햇살에 온 세상이 길고 신선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녹아들고 있었고, 그 속으로 슈마허는 힘껏 말을 몰았다. 날은 화창했지만, 그 위로 불길함이 쏟아져 들어오고 불안함과 긴장 감이 길고도 팽팽하게 수도 위로 드리워지고 당겨져 있었다. 그의 검은 말은 그저 튼튼한 발로 힘껏 바닥을 차며 달려갈 뿐이었지만, 그 위의 슈마허는 온 몸으로 그 흉흉한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편히 지내려고 왔더니, 정말 빌어먹게 돌아가는 군." 그리고 궁에 도착했을 때는 한결 더 했다. 병사나 기사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의 눈동자에 긷든 어둡 고 움츠러든 기운들. 이것이 사람들의 얼굴에 떠오를 때쯤이면, 위 정자의 심경이 한꺼번에 기적적으로 변하지 않는 한 무언가 터지게 되어 있다. 나이는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한 사람이 20년 동안 겪을 만큼 의 전장을 10년만에 다 돌았던 슈마허는 반란, 소탕, 적국간의 전쟁, 그렇게 결과는 비슷할 지라도 그 원인에 있어서는 다양한 종류의 전투를 해보았다. 그리고 그 전에 어떤 분위기가 감도는 지도 잘 안 다. 슈마허는 전쟁의 냄새를 잘 맡았다. 또한, 그것이 어떻게 진행될 지도 민감하게 눈치챌 수 있었다. 어쩌면, 겉으로는 '은인의 부탁'으 로 이곳에 온 것이지만 본능적으로 그 기운을 직감했을 지도 모른 다. "왕비전하를 뵙고 싶소." 그를 맞이하는 시종관의 얼굴이 벌써 달라져 있어, 그는 슈마허는 본적도 없는 깡마른 남자였다. 그러나 그 깐깐해 뵈는 남자 쪽에서 는 슈마허를 알아보고는 곧장 브리올테 왕비에게 그를 데려다 주었 다. 명령받은 게 있는 듯 했다. 브리올테 왕비는 지난번에 마지막으로 만났던 그 방에서 그를 맞이 했다. 시녀들이고 시종들이고 모두 밖으로 내 보내고는, 푹신한 소 파에 앉아 맞은 편에 슈마허를 앉게 했다. 슈마허는 차라리 음침한 알현실에서 그녀를 보는 편이 백 배는 나 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비밀스러운 느낌마저 풍기는 분 위기에서, 그것도 정말 왕이나 대공이 아닌 '섭정'을 만나는 것은 좋 지 않은 일이다. 특히 예전에 불편하게 헤어진 사이라면 더욱 그렇 다. 브리올테 왕비는 며칠 새에 더 날카로워 진 듯 했다. 옷이라든가 장 신구들은 아주 단순했으나, 살짝 든 턱과 날카롭고 위압감 넘치게 그를 바라보는 눈동자라든가 하는 것은 이 넓고 화사한 방을 싸늘 하게 만들었다. "무슨 일로 오신 거지요?" 슈마허는 단박에 말했다. "......떠나고 싶습니다." 왕비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슈마허 쉐플런, 지금이 얼마나 위험한 시기인지 아세요? 사실, 이 런 날이 올지 몰라 제 남편은 당신을 부른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도망친다고 하시니...실망이네요." 남편이라? 슈마허는 정말 욕이라도 퍼부어 버리고 싶었다. 그 남편 이라는 사람의 장례식조차 치르지 않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아내인 브리올테였다. 브리올테가 말했다. "이유가 뭐죠? 근사한 자리라도 난 건가요, 아니면 단지 무서워서 인가요. 무엇이든 간에, 제 남편과 당신과의 약속을 깰만한 것은 못 된다고 봅니다만...." 슈마허는 무엇을 말하든 간에 이 왕비가 자신의 청을 들어줄 리 없 다는 것을 짐작했다. 대체 왜 이렇게 변한 건지, 슈마허는 울화가 치밀어 앞의 테이블이 라도 걷어 차 버리고 싶었다. 의외로 단순해서 다루기 편한 여자가 바로 브리올테 왕비였다. 그런데 지금은 무시의 대가라도 치르는 듯, 저 왕비는 권좌에 틀어 앉아서는 자신의 운명을 틀어쥐고는 거 만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브리올테 왕비는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말없이 앉아 있었다. 한참이 그렇게 흐르고, 결국 슈마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쉐플런 경." "베르티노 전하께서는 언제 즉위하십니까." 브리올테 왕비가 빙그레 웃었다. "남편의 장례를 치르는 즉시랍니다. 물론, 그 전에...행여나 즉위식 날 칼이라도 휘두를 위험한 사람들에게 엄중한 처분을 내릴 생각이 지요. 당신이 좀 도와줬으면 해요." "전하, 저는 그저 전투만을 생각해 온 전사일 뿐입니다. 그것은 제 능력 밖입니다." "걱정 마세요. 그런 일은 다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당신은...제가 '명령'하는 것만 훌륭히 수행 해 주면 되요." 명령이라. 벌써 여왕이라도 된 듯 군다. 그리고 어떤 일을 시킬 지, 슈마허는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곧 내전이 시작되는 것이다. 저 왕비가 사태를 얼마나 위험하게 직 시하는 지는 알 바 아니지만, 이번 일은 간단한 숙청으로 끝나지는 못할 것이다. 엔리케 4세의 갑작스런 승하로, 왕비도 공작과 비슷한 약점을 갖게 된 것이다. 베르티노 왕자는 아직 성년이 아니지만, 켈 브리안 공주는 벌써 열 아홉이다. 원칙상으로는 일곱 살 난 베르티 노 왕자가 내일 모레 장가라도 가지 않는 한, 사실 켈브리안 공주가 왕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니, 지금 왕비가 베르테노를 왕위에 앉히는 것은 무리가 따르는 일이며, 공작 쪽에 '핑계'를 주는 일이기도 했다. 브리올테가 부리는 '마법사'가 유성우라도 쏘아준다 면 모를까, 지금 그 마법사는 지금 슈마허가 알기로는 더 이상 싸우 기 힘든 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난밤에 그레코 공작이 탈출 할 수 있었을 리가 없을 것 아닌가. 슈마허는 웃음까지 치밀어 올랐다. 다 잡아놓았던 공작을, 아차 하 는 순간에 놓쳐 버린 것이다. 어떻게 그가 탈출 할 수 있었는지는 모르나, 결론은 연기처럼 사라진 공작은 이제 살았고 사태는 왕비의 승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두 번째 대결로 돌입했다는 것이다. 차라리 공주가 여왕이 되었으면 편했을 것을, 슈마허는 그렇게 쓸데 없고 헛된 생각마저 했다. 그는 아쉬워하지 않는 성품이었다. 일이 끝나면, 어찌 끝났건 간에 다음을 생각해 왔다. 어차피 자신이 왕이 될 수 없는 공작은 아들과 공주의 결혼을 통해 제 자리를 유지하려 했을 테고, 그 추종자들은 알아서 흩어지거나 남아있거나 했을 것이다. 왕비의 추종자들 역시 알아서 했을 것이 다. 그녀가 돌아오는데 도움 준 건 하나도 없었으니, 뭘 해달라고 할 수 도 없는 위치다. 그렇게, 잘 끝났을 것이다.... 그 때 브리올테 왕비가 말했다. "그래도 떠나고 싶다면....국경까지는 제 사람들이 호위해 드릴 겁니 다. 어쩌시겠어요?" 슈마허는 브리올테 왕비의 뺨을 갈망어린 눈으로 보고 말았다. 한 대 시원하게 후려갈길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국경에서 알아서 죽으라는 거다. 아무리 슈마허지만, 단신으로 나라 전체를 상대하며 탈출할 수는 없 다. 세르네긴의 도움을 생각해 볼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너무 염치가 없다. 결국 슈마허는 갈망을 더욱 불태우며 체념하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수고해 줘요, 쉐플런." 슈마허는 눈길을 거두며 말했다. "......켈브리안 님을 뵐 수 있겠습니까?" 잠깐 왕비의 눈이 아주 날카롭게 빛났다. "그 아이는 왜요?" "이제 병이 나을 만 하지도 않습니까. 아직 낫지 못하셨다면, 문안 이라도 드릴까 해서요." 왕비는 잠시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이제는 무력한 공주에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한껏 선심 베풀 듯 말했다. "발라 부인이 안내해 줄 겁니다. 따라가서 즐겁게 이야기라도 나누 고 오세요. 애가 요즘 영 힘이 없어서요." 슈마허는 그래도 궁에 와서 하나 정도는 원하는 것을 얻게 되자, 조 금 만족해 보기로 했다. "슈마허....!" 켈브리안 공주는 시녀 몇과 호위를 대동하고 산책 중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강인한 여자였다. 상황이 힘들었음에도, 그녀는 울거 나 힘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살짝 웃으 며, 바로 어제 만났고 그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얼굴이었 다. "오랜만입니다, 공주님." 그리고 그런 공주의 모습을 보니, 슈마허는 왕비가 어째서 자신이 그녀를 만나는 것을 허락해 주었는지 짐작이 되었다. 이제 공주는 섭정이 될 왕비의 아무런 방해물이 되지 못하는 것이고, 공주 역시 포기했다는 것을 왕비도 알아챈 것이다. 켈브리안은 뒤를 따르는 호위와 시녀들을 한번 슥 보고는 모두 물 렸다. 아직 호위들은 공주의 명을 따르고 있었다. 모든 기사들을 왕 비가 다 갈아치우는 것은 불가능했으니, 그냥 내 버려 둔 것이다. 게다가 '공주의 편'이라는 것은, 때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자신의 편' 도 될 수 있다는 것을 왕비도 안다. 어쨌건, 절망적일 정도로 멍청 한 여자는 아니다. 켈브리안이 말했다. "지난번에는 아주 고마웠어요." "인사라도 받으니 영 허탕은 아니군요." 켈브리안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호위중 하나인 라 키 경에게 손짓을 보냈다. 그러자 라키 경은 재빨리 달려오더니, 근 방에 서 있는 어느 시녀 하나의 손을 잡고 끌고 가버렸다. 시녀가 눈을 찌푸리며 뭐라 말했지만, 라키 경은 쏘아보지도 않으며 무시했 다. "서툰 고양이들이 많아서요." 슈마허도 동의했다. "정말 서툴군." "어쨌건.......아키는 어떻게 됐지요?" "우리는 놓쳤고, 그 이상한 마법사가 이겼소." "....." 표정을 보니, 켈브리안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듯 했다. 자신의 유폐가 풀리는 그날, 그것을 알아챈 것이다. 그녀를 도와줄 사람, 특히 왕비가 경계를 할만한 아킨이 사라진 것이다. 슈마허나 다른 사람들이라면 왕비 자신이 거두어들일 수 있다고 자신하지만, 아킨만은 아니었다. "어디로 갔는지는.....당신도 모르겠군요." "물론이오." 켈브리안이 몸을 떨었다. 나른하고 긴 한숨과 함께, 그제야 그녀의 눈 위로 슬픔이 차 올랐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그 강 인함으로, 그녀는 자신이 기댈 수 없고 기대서도 안 되는 슈마허에 게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내 탓이에요. 지켜주지도 못할 거면서, 경솔하게도 그런 위험에 빠 뜨려 버리고.....끌고 다녔으니." 슈마허는 잠시 공주를 지켜보았다. 평소라면 한바탕 쏘아보았을 테 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저 멀찍한 곳에 있는 작고 흰 장미꽃을 바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슈마허가 말했다. "그 꼬마가 당신을 위해서 나섰다고 생각하는 거요?" "....네?" 켈브리안이 다시 슈마허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당신을 사랑하기라도 해서, 당신을 위해 위험을 감수했다고 생각하 나....이 말이요." 켈브리안은 다가왔다. 슈마허는 그런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고개 를 저었다. "슬픔과 절망에 찬 공주님 역을 하고 싶은 당신께는 미안하지만..... 그건 아니라고 봐." "무슨 소리예요, 당신?" 켈브리안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숲에서 나 혼자 산다 하더라도, 적어도 오늘 날씨가 어떨 지에 따 라 영향을 받게 된다고. 그러니, 그 꼬마가 이 일에 끼여들게 된 것 은 상황이 그래서 그런 것뿐이지, 당신 혼자만의 책임은 아니오. 특 히, 당신을 위해서 이 일에 그렇게 위험을 감수하고 끼여든 것도 아 니고." "이봐요, 쉐플런..." 슈마허는 끊어버렸다. "상황 자체는 녀석이 선택한 게 아니고, 할 수도 없지. 하지만 적어 도 녀석은 상황에 따라, 자신을 위해, '선택'을 한 것뿐이오. '사랑하 는' 당신을 위해 멍청하게 당신 해달라고 하는 대로 맥없이 끌려 다 니며 다 한 게 아니라, 자신의 안전과 자유를 위해, 상황을 헤쳐나 가기 위해 그리 한 거요. 녀석에게는 그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 고, 내가 보기에도 그랬으니까." "애당초 끼여들게 한 건 나잖아요." "그건 당신의 선택이었지. 당신의 안전과 자유를 위한 선택, 그리고 그 선택 자체는 옳았소. 당신은 무사했고, 순간이나마 승선을 잡았 고, 심지어 내가 도와 줄 거라는 것마저도 알았으니까. 하지만 그 다음은 녀석이 결정한 것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책임은 스스로 선택한 것에 대해서만 지면 되요. 남이 자기 자신을 위해 선택한 것 까지 책임지려 하는 건, 얼간이 세냐만으로 충분해." "....." "그리고 분명히 말하는데, 나쁜 놈은 그 마법사랑 당신 어머니라고. 나라면, 그 두 사람 원망하고 미워하는 것만도 시간이 모자라겠어." 켈브리안은 조용하게 웃었다. 그리고 서둘러 눈길을 돌리는 그녀의 눈 끝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슈마허는 후우--하고 한숨을 내 쉬 고는 물러났다. *********************************************************** 작가잡설: 동생이 컴을 차지하는 시간이 늘어나니.... 컴의 에러빈도도 같이 늘어나는 군요. -_-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17장 *************************************************************** [겨울성의 열쇠] 제81편 차가운 검#4 *************************************************************** 오후가 되자 루첼은 창을 활짝 열어 젖혔다. 야트막한 바람이 불어오며, 얇은 커튼이 살짝 떠올랐다가 가라앉았 다. 하늘이 새파랬으니, 열기는 오후가 길어지자 더욱 뜨거워져갔다. 루첼은 담배를 창 밖으로 던져 버리고는 뒤돌아 섰다. 정말 간 큰 짓이었다. 학생주제에, 교수집에 들어와서 담배 뻑뻑 피워대면서 여 기 저기 재를 탈탈 털어 대다가 나중에는 정원으로 꽁초까지 집어 던지다니. 그런데 문득 뒤를 돌아보니 자켄이 일어나 앉아 있었다. 루첼은 손 을 들어 보였다. "일어났네." "...어지럽군....." 그렇게 말하며 자켄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루첼이 충고했다. "더 자." "너라면 잠이 오겠나?" 루첼은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루첼은 새 담배를 찾았지만, 열어보니 담배갑은 이미 텅텅 비어 있 었다. 자켄이 쓰러져 있는 내내 쉬지 않고 피워댔던 것이다. 결국, 그는 이제는 미뤄뒀던 일을 하나 하나 해 치우기로 했다. 아 침부터 내내 생각해 두었던 일이기도 한데, 정작 자켄이 일어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어찌 하는 것이 좋을까, 하던 루첼은 나서는 데까지만 나 서기로 했다. 이 문제는 몰라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롤레인 교수 의 비밀과, 탈로스 고르노바라는 인간의 비밀, 그리고 손대는 것도 조심스런 대마법사 컬린. 아직 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루첼이 서툴게 치기만 앞세워봤자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난번에 조 심성 없이 탈로스에게 덤볐다가 확실히 깨달았다. 물론 모른 척 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롤레인이야 학생인 루첼에게 뭘 부탁할 리도 없으나, 자켄이 부탁한다면 하는 데까지 해 줄 생각 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루첼 자신이 답답해서 미칠 노릇이라 자켄 이 네 도움 따위 필요 없다고 훌훌 떠나면 나쁜 자식아, 하고 멱살 이라도 잡아 흔들 생각이었다. "교수님께서 방금 전에 일어나셨다. 네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듣고 는, 지금 당장 만나실 수도 있다고 하셨어. 어쩌겠어?" "......괜찮겠나." "네가 몰라서 그렇지, 강철같은 분이라고. 이야기 할만큼 하고, 밤 되면 자둬. 잠 안 오면 내가 재워주지." 즉, 한 대 패 주겠다는 말이다. 자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답지 않게 흐트러진 동작을 보 니, 차라리 지금 한방 쳐서 쓰러뜨리고 내일 아침에 만나게 하는 편 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도 여전히 암녹색이었다. 그리고, 낮 이면 투명하게 빛나던 그 눈빛을 당분간 보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드니 아쉬워졌고, 왠지 조금 서글프기도 했다. 루첼은 그 어깨를 두 드려 주고는 롤레인이 기다리는 그녀의 서재로 데리고 갔다. 롤레인은 며칠 동안 의식 불명이었던 것 같지 않게, 벌써 혈색이 돌 아와서는 자신의 서재 안에 앉아 아주 낡은 종이 몇 장을 꺼내놓고 들여다보고 있었다. "일찍 왔군, 자케노스." 롤레인은 종이를 책상에 내려놓은 다음 책을 가져다가 그 위를 덮 었다. "쓰러졌다고 하던데......지금 말해도 괜찮겠지?" "네." "내 이름은 오거스트 롤레인, 인간의 신분은 말하지 않겠어. 네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테고, 이해하기도 힘들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리고 루첼 그란셔스 군, 군은 이곳에 있어도 좋아." 루첼은 롤레인의 의도가 무얼까, 하고 생각하다가 어렴풋이 나마 짐 작하고는 자켄 뒤로 물러났다. 롤레인은 그런 루첼을 곰곰이 보고 는, 책상 위에 걸터앉았다. "일이 이렇게 된 건 우선은 내 책임이야."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루첼이었다. 롤레인이 다시 루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탈로스 고르노바는 아키가 어디 있는 지까지는 몰랐습니다. 알았다 면, 그곳에서 며칠 지내기도 전에 끝났을 겁니다." "그래서?" ".......그 형이 탈로스에게 알려 줬습니다. 어떻게 둘이 알고 있는지 는 모르지만, 분명 그렇습니다." 이제 루첼은 자신이 이곳에 남게 된 이유에 대한 답을 하기로 했다. 롤레인은 루첼이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뭘 했는지 알고 있고, 그녀 가 원하는 것은 그런 쪽의 답인 것이다. 또, 루첼은 어차피 이 둘에 게는 비밀을 묵묵히 지킬 이유가 전혀 없고, 지켜서도 안 된다는 결 론을 내렸다. 루첼은 자켄이 그 휘안토스 녀석을 죽여버리겠다고 당 장에 뛰어나가지 않기를, 그리고 롤레인은 베넬리아 최고 마스터 자 격으로 그 왕자의 얼굴에 주먹이라도 날리지 않기를 바라며 그 친 구들과 휘안토스 사이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루첼 역시 세르네긴이라는 무시무시한 녀석의 창 앞에 목을 내놓게 되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어 머리가 아찔할 지경이었다. 설마 죄도 없는 루첼 을 정말 죽이러 올까, 싶기도 했지만 그 세르네긴이 에크롯사 출신 이라는 데에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만도 없었다. 그곳 사람들은 정 말 한다면 하는 인간들이다. 루첼의 이야기가 계속 되자 자켄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하더니, 결국 이를 부득 물었다. 롤레인은 차분하게 다 듣고는, 조용히 말했다. "실종되었던 왕비가 궁으로 돌아오게....아키의 형이 도와줬나 보군." "무슨 말씀이십니까." ".....브리올테 왕비의 본명은 브리올테 고르노바, 즉 탈로스의 막내 여동생이니까." 자켄은 놀라서 급히 묻는 듯한 눈이었지만, 눈치 빠른 루첼은 단번 에 상황을 꿰뚫을 수 있었다. 결국 망할 자식, 하고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그리고 롤레인이 아킨과 켈브리안이 서로 안다 는 데,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한 이유도 짐작했다. 행여나 탈로스가 아킨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게다가 롤레인 밑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알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롤레인이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암롯사 왕가라는 곳은....아버지인 왕이 손수 동생을 죽이더니, 이제 그 아들도 동생을 뭍어 버리는 군." 자켄이 말했다. "지배하거나, 죽이거나-" 루첼과 룰레인이 그에게 눈길을 멈추자, 자켄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 다. ".....그들에게 있어 인간이란 그렇게 단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형제 이든, 아내이든, 무엇이든 간에....지배할 수 없으면 죽여 버리는 겁 니다. 그들은 두려운 것을 남기고 싶지 않아 하니까요." 그리고 자켄은 웃었다. "그렇게 모두 겁쟁이들인 겁니다." "....." "마법사의 작은 왕, 진심으로 청합니다. 그 마법사를 찾을 방도는 없습니까." 룰레인은 엄격하게 날선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게...다치고도 그와 다시 맞설 수 있겠어?" "아키를 영영 잃는 것은, 그와 다시 맞서는 것보다 더 두려운 일입 니다. 제게 있어....소중한 동생이며, 그 아이의 곁에 있어 주는 것은 모두의 어머니가 저에게 직접 명하신 일입니다. 또한, 제 생명은 숲 의 것, 숲이 거두어들이겠다면......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슬프지만 두려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니 말씀해 주십시오." 롤레인은 고개를 저었다. "자케노스, 미안하지만 지금의 나는 모른다. 그의 탑은 모습이 보이 지 않지. 보았다는 사람도, 찾아낼 수 있는 사람도 만날 수 없을 거 다." ".....엘프는......할 수 있습니까?" "예전에 한번 해 본 적이 있지. 그러나 그녀도 찾아낼 수 없었어. 탈로스는 인간이긴 하지만 드래곤의 마법을 쓸 수 있고.....아마도, 그 방식으로 자신의 탑을 감추고 있는 것 같다. 드래곤들이 자신의 절벽과 굴을 감추듯 말이야." 그러나 자켄의 눈은 어두워지지 않았다. 엘프인 그는, 롤레인의 의 도를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절망하라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었 다. "숲으로 돌아가야겠군요." "그래, 드루이드의 왕이라면.........대략적인 위치라도 알아낼 수 있을 거야. 일단 찾아가 보도록 해라....." 그렇게 말하는 롤레인의 눈길은 방금 전 책으로 덮어놓은 종이 몇 장을 향했다. 그리고 잠시 감았다가 뜨더니, 루첼에게 말했다. "그리고 루첼 그란셔스 군." "네, 교수님." "그란셔스 군도 당분간 조심하는 게 좋겠다. 아무래도 그 형이란 작 자, 군한테도 뭔가 할 것 같아." 루첼은 그제야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다. 자켄은 이복형이자, 잡기도 힘든 엘프이며, 롤레인은 너무 거물이라 역시 건드리기 힘들지만.... 루첼은 아니었다. 이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상세히 아는 데다가, 정 보 길드원도 아니니 비밀을 지킬 리도 없을뿐더러, 애당초 아킨의 편이었다. 즉, 휘안토스가 마음만 먹는 다면 언제 어디서 뭐가 올지 모르는 상 황인 것이다. 루첼은 이마를 탁 치며 한숨을 내 쉬고 말았다. "이럴 줄 알았지...." 역시 제임의 말이 맞았다. 루첼은 친구 복이 정말 처절하게 없는 녀 석이었다. 에크롯사의 세르네긴에, 이번에는 암롯사의 흉악한 왕자님이라니. 휘안토스는 팔목을 들어 품으로 자주색 매를 맞이했다. 매는 빠르게 날개를 접고는 그의 팔목을 움켜잡았다. "수고했다." 마법사는 휘안토스가 웃음을 보이자, 그제야 안도한 듯 얼굴이 환해 졌다. "아주 쉬운 일이었습니다." "그래, 로메르드란 곳이 워낙에 형편없는 곳이긴 하지." 휘안토스의 말뜻을 짐작하기 어려워, 마법사는 그저 웃기만 했다. 사실 휘안토스는 비웃은 것 뿐이었다. "어쨌든, 이번 일로 자네를 아주 다르게 봤어. 자네는.....정말, 자신 도 모르는 새 많은 일을 해 주었지." 칭찬이 점점 수위가 올라가자, 마법사는 이제는 정말 됐다 싶었다. 그래서 앞으로의 일이 얼마나 잘 풀릴 지, 하는 망상에 가슴이 한껏 부풀어올랐다. 후계자에게 잘 보였으니, 앞으로 조금만 더 잘 하면 케올레스의 뒤를 이어 암롯사의 마법사가 될 지도 모른다. 델 카타 야, 워낙에 쟁쟁한 놈이 많은 데다가 악튤런 파노제가 버티고 있으 니 힘들 테지만 이 휘안토스의 암롯사는 아니다. 케올레스가 마법사 로서는 변변찮다는 것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알지 않는가. "자, 마르실리오 경." 휘안토스는 손짓을 보냈다. 뒤에 있던 마르실리오가 검을 뽑아 들더니, 힘껏 내리쳤다. 퍽-! 매가 다시 푸드득 솟구쳐 올랐다. 강둑의 돌 위로, 진한 붉은 피가 고이더니 강물로 흘러 들어갔다. 마르실리오는 마법사의 시체를 발로 차 물 속으로 넣었다. 마법사의 로브가 수면위로 반쯤 떠오르더니, 그 몸은 아래로 둥실 둥실 떠내 려갔다. 마르실리오는 바닥을 나뒹구는 그 머리도 발로 차 물 속으 로 집어 넣었다. 휘안토스는 등불조차 없는 까만 강 너머로 마법사의 시체가 완전히 묻혀 버리자, 후드를 올려 얼굴을 가려버렸다. 얼간이, 밤에 따로 만나자고 하면 싫다고 우기기라도 하던가 미리 도망치던가 했어야지. 휘안토스는 시내 쪽으로 향하며 말했다. "내일 정오에 떠난다." "상처가 다 나으면 떠나시는 게 좋지 않을까....합니다. 마법사가 없 으니, 적어도 닷새는 걸릴 겁니다." "그러면 너무 늦어. 또, 여기서 길게 어물대다간 너무 눈에 뜨인다." "폐하께는 어찌 말씀드릴 예정이십니까." 휘안토스가 발을 멈추고는 마르실리오를 바라보았다. 그는 휘안토스 를 믿고는 있었지만, 그 어린 소년이 자신의 안전을 얼마나 확실히 보장할 수 있는 지는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그를 잘 지켜준 다면, 휘안토스는 마르실리오라는 충직한 심복을 얻게 될 것이다. 물론 휘안토스는 최선을 다해, 필요하다면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마르실리오를 지켜줄 예정이었다. 그는 유능하며, 케올레스의 손자 인 만큼 암롯사에 충실하다. 그가 아킨을 유폐하는 것을 도운 것도, 그것이 암롯사 대공국의 후계자문제를 확실히 하여 나라를 위하는 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구할 수 없었다고 해야겠지. 가엾은 아키는 내가 도착하기도 전에 사라졌고, 내 능력으로는 찾을 수 없었다고. 같이 갔던 마법사는...유 감스럽게도 탈로스에게 당했고." "....." 마르실리오의 난감해 하는 눈빛에, 휘안토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전능의 탈로스는 컬린이 사라진 지금 현존하는 최강의 마법사, 그 의 손안에 놓인 동생을 구하지 못한 것은....죽은 마법사의 책임도, 내 책임도 아니다." "하지만..." "걱정 마라. 케올레스 님은 분명 믿을 거야. 또, 오히려 나를 위로할 테지. 그 분에게 있어, '컬린'이란 이름은 절대자의 그것과도 같으니 까." 뿐만 아니라, 케올레스는 컬린 앞에 약한 만큼이나, 휘안토스와 아 킨토스도 어린 손자처럼 아끼고 안쓰러워 한다. 그 노인은 휘안토스 는 어렸을 때부터 버거운 의무를 짊어져 일찍 어른스러워진 아이라 생각하고, 아킨토스는 이런 저런 일을 겪은 상처투성이의 여리고 가 엾은 아이라 생각할 뿐이다. 그래서 아킨이 때로는 얼마나 강하게 상황을 버티어 내고 이겨나갈 수 있는지 모르고, 휘안토스가 필요하 다면 제 손목도 잘라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잔혹하다는 것을 모른다. 둘 다, 아직 어리지만 사이러스의 피를 이어받은 어린 늑대들이다. 휘안토스가 말했다. "또, 아키가 죽은 것도 아니잖아."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살아 있어." 그 주먹에 맞아 혼절하는 바람에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아킨은 분명 살아 있을 것이다. 이 지상 어딘가에 갇혀 있을 테지만, 분명 살아'는' 있을 것이다. 어 둠 숲의 마법사가 예언한 것은 둘째 치고라도, 휘안토스가 분명 '살 려만' 달라고 말했으니. 에크의 남자인 탈로스는 그 약속을 충실하 게 지켜나갈 것이다. 그러니, 살아는 있겠지. 살아는- 다섯 살, 어머니를 어떻게든 제 정신으로 돌리기 위해 휘안토스가 아버지의 명에 따라 금지된 늪의 성으로 간 것이 그 때였다. 물론 스스로 가겠다고 한 것도 아니다. 휘안토스는 아버지의 손에 끌려, 묵묵히 늪의 성으로 가서 어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세 살 이후로는 처음 보는 어머니는 지친 얼굴에 창백한 안색이었지만 휘안토스를 보자 웃으며 팔을 벌렸다. 그녀는 휘안토스와 꼭 닮은 얼굴이었다. 눈 색도 머리카락도, 그녀의 것을 직접 뽑아 휘안토스를 빚어낸 듯 모자는 너무도 닮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웃던 그녀는 휘안토스의 얼굴을 자세히 보더니, 무 서운 것을 본 듯 얼굴에 어둠이 확 번졌고, 곧 눈물을 흘렸다. 가엾은 아가, 많이 힘들었나 보구나..... 그리고는 다시 안아 주었다. 나무둥치처럼 마르고 딱딱하기만 했지 만, 그녀의 손길만은 날개처럼 부드러웠다. 왜 그런 말을 하는 지, 휘안토스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런 어머니의 품으로 파고들다가, 휘안 토스는 같은 자리에 나와 있는 아킨과 눈이 마주쳤다. 동생과는 네 살 이후로 보름만 아니면 자주 만나곤 했다. 인형처럼 새하얗고 자그만 동생은 언제나 휘안토스를 미워했지만, 그 이후로 는 더욱 증오했다. 아버지의 죄이자, 어머니의 고통. 아킨토스 프리엔, 그의 쌍둥이 동 생...... 휘안토스와 암롯사를 위해 아버지가 버린 동생이자, 어머니 스스로 기억 속에서 지워버린 동생. 어머니를 죽게 하고, 아버지에게 버림 받고, 그럼에도 끝끝내 버티어 냈기에 그토록 미움받았던 동생..... 이제 그런 동생을 형인 휘안토스마저 자신조차 모르는 곳에 유폐시 켰다. 네 잘못이잖아, 휘안토스는 그렇게 자신에게 차분하게 속삭였다. 물론, 괴롭지 않으니 핑계도 변명도 아니다. 그건 그저 이유일 뿐이 며, 휘안토스가 할 일을 한 것뿐이다. 때문에 동생이 어떤 고난을 겪게 될지,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으며 걱정하고 싶지도 않 으니, 슬픔도 없고, 만족감도 없다. 그래서 뭐가 어떤 거지? 아니, 어째야 하는 거지....? 그가 생각하는 것은 아킨에 대해 아버지와 케올레스에게 어찌 말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만약 켈브리안 공주가 아킨에 대해 물어 보면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 할지 뿐이었다. 아킨은 이제 없고, 그것으로 끝난 것이다. 휘안토스 자신의 인생에 그는 더 이상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할 것이고, 적이 될 수도 그의 편이 될 수도 없이 완벽하 게 '제거'된 것이다. 가엾은 아가- 다시 그 슬픈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휘안토스는 자신이 왜 가엾은 것인지 아직도 알 수 없었다. 휘안토스는 아무것도 희생시키지 않았 고, 전혀 가슴아프지도 않는데, 그렇게 고통이 없는데 왜 내가 가엾 은 것인지- 그의 심장 속 피는 너무 오래 전에 말라, 이제 강철처럼 딱딱해져 있을 뿐이었다. 아무리 후려쳐도 흠집하나 나지 않을 단단한 그의 심장은 그저 텅 비어 있을 뿐이었다. 얼어붙은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휘안토스 스스로 그 차가 움을 견디지 못해 온기를 찾아 헤매기라도 할 것이며, 따뜻한 것에 녹아 내리기라도 할 것이다. 피 마른 그의 심장은 그저, 차갑고 단단하게 가슴속에 박혀있을 뿐 이었다. 너무나 단단해서, 그저 무관심하게 쿵, 쿵, 쿵--강철 기계처 럼 흐트러짐 없이 또박또박 뛰어오를 뿐이었다. 그것은 피 없고 온기 없는 울림. ......그리고 그는, 겨울 벌판 위에 박힌 차가운 칼이었다. *********************************************************** 작가잡설: 에러, 에러, 에러--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18장 ************************************************************** [겨울성의 열쇠] 제18장 하얀 빛 무리 제82편 하얀 빛 무리#1 ************************************************************** 변화는 나은 방향으로 가는 것이든 그 반대이건 간에 어쨌든 고통 스러운 것이다. 악몽 같던 티폴라 여왕의 통치가 끝났을 때조차 그랬으니, 몇 년 간 겨우 한숨 돌리고 안심했던 엔리케 4세의 국장이 치러진 직후인 지 금은 더욱 그러했다. 티폴라 여왕치세가 워낙에 혼탁했었기에, 엔리케 4세는 크게 잘한 것은 없으나 그래도 평온하게 지내게 해 주었다는 이유하나만으로 도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그가 처음 쓰러졌을 때 많은 신전의 루피니아 제단에 쾌유를 비는 초와 꽃이 올렸고, 평일에도 저녁만 되면 제단 앞에 모여 기도를 올리곤 했다. 그러던 그가, 결국 병 때 문에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은 애도기간이 끝나도 가슴과 문에 검은 리본을 달아 두었다. 그리고 시민들은 또 몇 년 전의 혼란으로 돌아갈 거라는 생각에 울 적해지고 불안해야 했다. 국왕의 죽음으로, 이제 시민들조차 알고 있을 정도로 날카롭게 대립하던 그레코 공작과 브리올테 왕비의 충 돌은 불가피 해졌다. 차라리 왕비가 기선을 완벽하게 제압했다면 모 를까, 공작은 벌써 아내와 아들과 함께 밤 새 수도를 탈출해, 남부 의 팔바 요새로 들어가 있었다. 켈브리안은 안드레아가 수도를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의외로 슬퍼졌다. 남자로서는 귀찮았지만, 성격 자체는 좋았고 베르티노에 게도 좋은 형이었다. 베르티노도 어머니 없이 켈브리안과 단 둘이 있는 시간이면 '안드레아 형'을 대해 걱정했고, 사실 켈브리안은 마 음이 편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적어도 안심이 되는 것은, 로메르 드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의 관심까지 끌었던 슈마허가 수도에 남음 으로써 왕비의 손을 들었다는 것이다. 켈브리안은 그런 슈마허의 결 정에, 적어도 어머니와 베르티노는 안전해져서 안도하기는 했다. 어 차피 끝난 일이니, 적어도 그녀와 가까운 사람들이 이기는 편이 나 은 것이다. 그렇게 대충 일이 끝나자, 켈브리안은 애도를 핑계로 궁에 틀어박혔 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마음껏, 지치도록 슬퍼하는 일 뿐이었 다. 그리고 그런 켈브리안을 슈마허가 찾아온 것은 왕의 국장이 끝난 지 딱 보름 째 되던 날이었다. 그 전날까지 애도기간이었으니, 켈브 리안은 여전히 상복차림으로 검은 베일로 머리와 어깨를 덮고 있었 다. 슈마허가 오자 켈브리안은 싸늘하게 말했다. "출정 준비에 바빠서 옛날에 치근덕대던 여자는 완전히 잊은 줄 알 았죠." 안색은 창백했지만, 어투는 여전했다. 슈마허는 이내 눈을 찌푸렸다. "비꼬지 마시오, 공주. 나도 좋아서 이 짓 하는 건 아니니까." 켈브리안이 빈정댔다. "먹고살아야 해서?" "그렇게 해 둡시다." 슈마허도 편한 건 절대 아니었다. 어차피 외국인 용병 대장, 맡은 바 일만 잘 하면 된다. 저 적진에 내 친지가 있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공작 진영에 신경 쓰일만한 거물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일 자체는 그렇게 힘들지 않았으나, 그가 최근 신경 쓰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사실, 그 일 때문에 공주를 찾아 온 것인데 켈브리안의 안색이 영 수척하니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 뺨이라도 한 대 호되게 얻어맞지 않으면 다행이겠다. "왜 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보다시피 요즘 제가 안 좋으니... 되도록 기분 좋은 것으로 말씀하시면 좋겠어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뭐, 나중으로 미룹시다." "네?" "나도 염치라는 게 있는 사람이니.....나중에 이야기하자는 말입니다." "지금 이야기해요. 맞을 만한 일이면 미리 맞는 편이 낫지 않아요?" "지금 이야기를 꺼내면 더 아프게 때릴 것 같아서." "슈마허, 난 지금 당신과 장난 할 기분이 아니에요." 켈브리안의 눈이 더욱 차가워지자, 슈마허는 결국 두 손을 들고는 말했다. "우선, 비웃지는 마시오. 나는 달 말까지는 저 공작파 군을 팔비노 까지 몰아낼 수 있소." "그렇겠죠. 그 쪽도 이쪽만큼이나 변변한 사람이 없으니까. 또, 당신 이 여기 있고 베르티노가 주말에 즉위하면 우리 쪽으로 몇 사람은 더 붙을 테지요. 그런데 그건 왜죠?" 이제부터 중요한 일이었다. 슈마허는 다시 켈브리안의 안색을 살펴보았다. 그녀는 지금 아무 것 에도 관심 없다는 태도였다. 될 대로 되라지, 지금보다 더 나쁠 라 고- 그것이 지금 그녀의 생각일 것이다. "베르티노 왕자가 즉위하면 당신은 어디의 누구와든 결혼을 해야 할거요. 이제는 눈치볼 공작도 없고, 반대할 당신 아버지도 없지. 당 신이 좋든 싫든, 당신 어머니가 정하는 대로 시집가야 해요." ".....알고 있어요." 켈브리안의 목소리는 떨렸다. 왕비는 애도기간 중에 당장에 약혼 준비라도 해 두라고 말했고, 켈 브리안은 차라리 도망이나 쳐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해 봤다. 그러나 켈브리안은 지쳐 있었다.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었고, 어머니는 이제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킨도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고, 그 때문 에 더 슬프고 불안하다. 아버지는 돌아가셨으니 슬퍼하고 그리워하 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아킨은 어디에서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고, 그러니 더욱 불안하고 슬프기만 했다. 항의라도 좋으니 암롯사에서 무슨 말이라도 오면 좋으련만, 그곳에서는 정말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일체 함구하고 있을 뿐이다. 정말, 잔혹하도록 매정한 사이러스 대공왕이었다. 아무리 미워하던 아들이라지 만, 그래도 친아들인데 말 한마디 없을까. 제국 연합에 서는 집안 문제를 다른 나라에 말하거나 도움을 청하거나 하는 것 을 금기로 안다지만, 반도인인 켈브리안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체면 이 뭐가 중요하다고 저리도 몸을 사리는 건가.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친아들이자 일국의 왕자인데. "...........그러니 우리 약혼합시다." "네?" 켈브리안은 멍하니 있다가, 한 박자 늦게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 게 되자 무섭게 그를 노려보았다. "지금 제 정신인 거예요--!" 그러다가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결국 참지 못해, 눈에 눈물 이 고였다. "아무리....아무리....염치없는 사람이라지만, 이 정도로 형편없는 자식 인 줄은 몰랐어-!" "이봐, 공주. 진정하고......! 정말 결혼하겠다는 말은 아니니까 진정 좀 해요!" "무슨 소리예요!" "나도 나 싫어하는 여자와 평생 같은 침대 쓸 생각 없소. 그건 솔직 히 말해서 정말 끔찍하다고. 하지만, 적어도 지금 당신이 결혼하는 것은 막아주는 것이 도리일 것 같아서 이런 말을 하는 거요." 무슨 말인지, 켈브리안은 겨우 알아들었다. 그러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고, 슈마허를 향한 불신과 분노에 얼어붙어 있었다. "약혼은 결혼 약속이라고요. 적어도 당분간은 다른 이상한 남자와 약혼하거나 혼담이 오고가는 건 막아 볼 수 있지만, 어머니가 닦달 하면.....정말 결혼해야 할 지도 몰라요. 난 당신 같은 남자와 결혼하 느니, 차라리.....몰라요. 그것 보다 끔찍한 일은 떠올릴 수가 없 어....." 이제는 슈마허 쪽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 당신과 결혼하면, 나 역시 매 한가지라고! 차라리 세르네긴 약혼녀를 뺏는 편이 열 배는 즐겁겠어---!" 켈브리안이 눈길을 돌렸다. 그러나 눈빛이 좀 부드러워진 것을 보 니, 분노가 좀 가신 듯 했다. 슈마허는 한숨을 푹 내 쉬고는 말했다. "중요한 건 그 당분간이 아니겠소. 그 동안이라도 최선을 다해 지켜 주고 싶은 거요." ".......뭐라고요?" "지켜주고 싶다고." 켈브리안은 슈마허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켈브리안은 아 직은 자신이 이 남자보다 어리고 경륜도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이유가 짐작은 되는데, 이 속내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실 없어 보이다가도 허를 치고, 단단히 경계하다 보면 실없게 군다. "그 꼬마녀석이 돌아오거나 하면....난 그냥 파혼해 드리겠소. 왕...아 니, 이제는 대비가 되겠군. 하여튼, 그 여자가 당장에 결혼하라고 들 들 볶아 대면 내 선에서도 많은 핑계를 대리라. 아무리 브리올테라 도 싫다는 남자에게 억지로 밀어붙일 수는 없겠지." "이해를 할 수가 없네요. 또, 믿기도 어렵고요." "당신 아버지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면?" "그건 충분히 해주었고, 당신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잖아요. 정 말 진심이 뭐죠?" "그냥 이오, 그냥." 켈브리안이 노려보았지만, 슈마허는 슬쩍 눈길을 돌리더니, 더 귀찮 게 묻지 말라는 듯 손을 휘휘 저어 보였다. 결국 켈브리안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채로, 슈마허의 답을 듣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정말 알 수 없는 남자였다. 켈브리안은 힘없이 말했다. "....그럼 우선 이겨 놓기나 해요. 우리 어머니는 한번 실수에도 무섭 도록 냉정해 지는 분이니까." 제임이 투덜대듯 말했다. "당분간은 내전이고, 교수들 중에서도 분명 누구 밑으로든 들어가는 놈이 나올 거다. 적어도 1년, 길면 2년은 있어야 학교가 열릴 걸." 애도기간에 닫아 놓았던 술집을 열렸고, 루첼은 그런 제임을 도우며 물었다. "루크 페일리 가는 어쩌고 있대?" "어쩌긴 어째. 같은 시내의 일 차노비 가와 으르렁대고 있지. 그곳 시장이 아직 입장이 결정되지 않았다지만, 슈마허 쉐플런이 대비 쪽 으로 붙었으니 조만간 자기도 정할 거야. 좀 더 어물쩍대다가는 대 비 눈에 찍혀 나갈 테니....지금 그 여자, 조심성 많은 독사처럼 변해 있거든." "티폴라 여왕과 당당한 맞수가 될 왕비 출신 여왕이군." "물론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섭정이니 그 여왕보다 더 철저할 거 야." "아하~" 루첼은 알았다는 듯 말했다. 정당성이 없으면, 그만큼 매서워 지는 법이다. 전대 티폴라 여왕이 그러했고, 결국에는 그 조심성이 아예 성격이 되어버리며 무시무시 한 폭정이 펼쳐졌던 것이다. 가게가 대충 정리되자 루첼은 아무의 자에 풀썩 앉아 테이블 위에 발을 얹었다. 제임 역시 걸레를 던져 놓고는 맞은 편에 앉았다. 루첼이 담배 불을 붙이고는 말했다. "쥰은 당분간 돌아오기 어렵겠군....실비가 힘들 텐데.." 그런데 제임이 전혀 엉뚱한 말을 꺼냈다. "실수였어, 쥰과 그 애를 결혼시킨 건." 루첼의 눈길이 멎었다. 그 말은, 돌아오기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아 예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루첼이 멍하니 보고 있자니, 제임은 뭐가 그리 난감한지 땀에 젖은 목덜미를 문지르고는 한숨을 내 쉬었다. "큰 새는 아직도 짐 안 쌌나?" "누가 덮치러 오면 그냥 죽겠대. 살만큼 다 살았다고." "그 아가씨는?" "아가씨는 무슨. 유부년데. 애도기간도 끝났으니 오늘이나 내일 본 가로 돌려보낼 예정이야. 본인은 계속 안 가겠다고 고집 피우는데, 날 되면 별 수 없지." 실비 이야기를 하니 루첼은 다시 울적해졌다. 결혼하고 나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며칠 자리 를 비웠던 루첼이 돌아오자 실비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달려왔다. 루첼은 자켄이 떠날 때까지 롤레인 교수집에 있었다. 또, 그 사이에 알베스티 가에 어디에 있다고 연락을 할 틈도 없었다. 그만큼 일이 힘들었던 것이다. 롬파르를 떠나는 배들은 벌써 자리가 다 나가버렸 고, 겨우 잡은 배는 완전히 창고였다. 그렇다고 육로로 가자니 엘프 에게는 힘든 여행지인 북쪽의 에크롯사를 반드시 거쳐야 했다. 자켄 은 군말 없이 그 배에 타겠다고 했지만, 루첼은 그 배에 실어 보내 자니 영 꺼림칙했다. 그러나 더 찾을 수도 없어서, 한참 망설이다가 결국 배가 출항하기 직전에 자리를 사서 자켄을 실어 보냈다. 그를 배웅하며, 루첼은 아킨과 만나지 못해도 좋으니 무사하기를 바 랬다. 1년 안 되는 친구에, 형제도 아니었지만, 상관없다고 무시하기에는 그 왕자 녀석은 루첼의 가슴속에 진하고 차가운 얼룩을 남겨 놓았 다. "...넌 어쩔 거냐?" "응?" "이제부터 어쩔 거냐고 물었어." 루첼은 웃으며 말했다. "우선은 알베스티 가로 가서 사정 좀 봐야지. 도울 일은 끝까지 돕 고, 그 다음...생각해 봐야 하는 것 아니겠어?" 제임은 담배를 물고는 무엇을 깊이 생각하는 지 말없이 있다가, 조 용히 말했다. "지금 당장 알베스티 가로 가라." ".....응?" "어서 가....아무래도 보내는 편이 좋을 것 같구나." 루첼은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 작가잡설: 이제 82편이군요. 으하하하하! 한번만 더 좌악 올리면 연재분 따라 잡습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18장 *************************************************************** [겨울성의 열쇠] 제83편 하얀 빛 무리#2 *************************************************************** "어딜 갔다 이제 오는 거야?" 루첼이 돌아오자, 실비가 집사보다 먼저 문 앞까지 달려와 그를 맞 이했다. 루첼은 아킨의 일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실비도 그가 며칠이나 자리를 비웠던 이유를 모른다. 그저, 자신의 결혼 때문에 그런 건 아닌가 싶어서 걱정스러워하고 있을 뿐이었다. 루첼이 말했 다. "삼촌댁에 다녀왔어." 그 말에 실비가 얼굴을 흐렸다. "삼촌.....없잖아." 거짓말이라 생각한 것이다. 루첼은 웃으며 그 어깨를 탁탁 두드려 주었다. "예전에 의절 당해서 없는 셈치던 사람이었을 뿐이야." 실비는 우물쭈물 하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혹시 없어졌었던 며칠 동안에도 거기 가 있었었던 거야?" "물론이지. 일이 좀 있어서." 그제야 실비가 좀 웃었다. 집에 돌아왔을 때 루첼이 워낙에 초췌해 서 밖에서 고생했나 걱정한 것이다. 실비는 얼른 고개를 들고는 말 했다. "저기, 저녁 먹었어?" "대충." 그런데 실비가 루첼의 팔목을 잡아끌며 말했다. "그럼 내가 커피 끓여 줄게. 차까지는 안 마시고 왔지?" "하녀는 어디 가고?" 실비는 어색하게 웃더니, 애써 밝은 척 어깨를 으쓱했다. "오늘 그만 뒀어." 애도기간이 끝난 후 처음 맞이하는 저녁, 알베스티 가는 지금 상당 히 어수선했다. 특별히 눈에 뜨일 정도로 뭔가 흐트러졌다, 하는 건 없었지만 하인들 분위기는 영 심상치 않았다. 눈빛은 겁먹은 듯 불 안해하고 있었고, 벌써 사람들이 하나 둘 줄어들고 있었다. 루첼은 실비를 데리고 부엌으로 갔다. 그러나 정작 차를 끓인 것은 실비가 아니라 루첼이었다. 실비는 불을 때는 방법조차 몰랐고, 주 전자와 필터를 어디다 어떻게 쓰는지는 당연히 몰랐으며, 절망적이 게도 커피 양 조절하는 것마저도 몰랐다. 의지야 좋았지만, 그것과 현실은 별개문제였다. 결국 루첼이 손을 데어버려서 울먹거리는 실 비 대신, 담배를 버끔거리며 물을 올리고 커피를 탔다. 뿐만 아니라, 하녀가 남기고 간 과자 몇 개와 케이크까지 찾아내 옆에 놓았다. "다 됐다." 실비는 조심조심 잔을 받고는 커피를 홀짝 마셨다. 얼굴은 벌써 새 빨개져 있었다. "미안.....난 정말 바보야." "배우면 된다." 실비는 그래도 미안한 지 잔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루첼은 자신 의 잔에도 커피를 따르며 말했다. ".....너, 본가에 돌아가 있는 건 어때?" "할아버지도 그리 말씀하셨어. 가족끼리 같이 있는 게 더 좋지 않겠 냐면서." "넌 어떻게 생각하지?" 순간 실비의 눈이 커졌다. 뭔가 충격이라도 받은 듯 떨더니, 갑자기 눈물을 떨궜다. 루첼이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 싶어서 놀랐을 정도였 다. "갑자기 왜 그래?" "아, 아니....그냥. 아니, 아니야. 내가....지금 내가 정말 너무 바보같이 생각돼서. 혼자서 할 줄 아는 건 정말 아무 것도 없고, 항상......할아 버지나 아버지, 오빠들에게 기대기만 하고....." 그런데 눈물이 테이블에 툭툭 떨어졌다. 루첼은 얼른 담배를 집어 던져 꺼버리고는, 실비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실비가 벌써 흠뻑 젖 어 버린 눈을 들었다. "나....최선을 다했다고...할만큼 다 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 아무 것도 한 게 없어. 그리고...원망만...원망만 했어.....아빠도, 오빠도, 아무 잘못 없는 루첼 오빠까지...." "실비." 실비는 고개를 떨구었고 눈물은 더 잦게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그 때 밖에서 사람 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부엌문이 열렸다. "여기들 계셨군요. 루첼 님, 아가씨!" 저택의 집사가 흐트러진 모습으로 그들을 보고 있었다. 루첼은 실비 앞으로 나서 실비가 얼른 눈물을 닦도록 해주며 물었다. "무슨 일이죠?" "알베스티 님께서 부르십니다! 급한 일이니, 얼른 가 보세요." 알베스티는 침실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루첼은 알베스티가 이 정도로 늙어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사실, 루첼의 몇 배는 나이를 먹은 노인이었으나 그 눈빛만큼은 젊은이처 럼 활기차고 날카로웠다. 그런데 지금 베크만 알베스티의 눈빛은 꺼 져 가는 불씨 같았다. 자그마하게 사그라져 가는, 그런 안타까운 불 씨. 이제 그는 완전한 노인이 되어, 부러질 순간이 가까워져오는 마 른 나뭇가지처럼 얇은 모습으로 그 앞에 있었다. "어서 이리로들 와라......" 그리고는 한참 숨을 쌕쌕거리고는 말했다. "....루크 페일리 가와 일 차노비 가가 완전히 돌아섰다. 샤보레 시에 서 그 두 가문 중 하나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게야." 실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러니 실비, 이제 네 남편을 기다리지 말고 어서 본가로 돌아가거 라. 쥬나드렌은 당분간은 이곳으로 오기 힘들 테고, 요즘처럼 힘든 시기에는 되도록 가족끼리 붙어 있는 것이 좋다." "할아버지는요?" "난 이곳에 끝까지 남을 거야. 노인네는...짐만 된다." "안 돼요, 할아버지....!" 실비가 알베스티의 침대 옆으로 쓰러지듯 무릎을 꿇었다. 노인은 그 런 손녀의 머리를 쓸어 주며 말했다. "실비야, 나더러 이곳을 등지고 도망치라는 것 자체가 모독이란다." 실비는 눈물이 그렁한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어깨가 파들파들 떨리 고, 눈 속에는 슬픔이 꽉 들어차 있었다. "오늘 밤 안으로 배를 준비시키겠으니, 당장에 체놀비로 가서 네 아 버지와 오빠들과 만나라. 밤에 항의 청새치 꼬리에서 출발 할 거라 고 하니, 곧장 그곳으로 가......그리고 루첼, 네가.....그곳까지 데려다 주거라. 쿨럭--" 실비가 루첼을 바라보았다. 루첼은 눈길을 피하며 가만히 한숨을 내 쉬고는, 실비의 어깨를 토닥였다. "준비하는 게 좋겠다, 실비." 실비는 슬픔이 복받치는지, 결국 아무 말도 못하고 뒤돌아 도망치듯 침실을 뛰쳐나가 버렸다. 집사가 밖의 문을 살짝 닫았다. 그리고 침실에 단 둘이 있게 되자, 베크만은 어둠이 내리는 잿빛의 롬파르를 보며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대충....예상하고 있겠지? 쿨럭.......그곳에 다녀왔다니, 알고는 있겠 구나." "제게도 숨기더군요." "그러냐....." 무엇을 생각하는지 베크만의 눈은 눈에 뜨이게 처연해졌다. 루첼이 물었다. "루크 페일리는 어찌 되는 겁니까." "샤보레의 시장인 켈퍼노어 백작은 벌써 대비 편으로 돌아섰다. 루 크 페일리 가는 아마도 베넬리아로 망명할 게다. 그래도, 로메르드 에서의 기반은 잃을 테지만 베넬리아의 상권은 건재할 테니, 어려워 지기야 할 테지만 버틸 수 있을 게다......쿨럭, 하지만 이걸 걱정할 때가 아니야. 우리가 더 위험해......" "용서도 없는 겁니까." "대비 같은 사람에게는 막판에 입장을 바꾼 것이 원래 공작파였던 것 보다 더욱 괘씸하게 보인다. 본보기로라도 가장 먼저 처단해 버 릴 거다." 이제야, 어째서 오늘 제임과 첸, 에나가 그에게 말을 아꼈는지 알 것 같았다. 어차피 루첼이 그들에게 돌아올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 던 것이고, 미리 절망시키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다. "끝까지 보살펴 주지 못해 미안하다, 루첼." "아무 것도 갚아 드리지 못해 죄송할 뿐입니다, 베크만 알베스티 님." 알베스티가 웃는 것 같았다. 숨 새는 소리가 쌕쌕-들려온다. "체놀비에서 돌아오면 이곳으로 오지는 말아라. 네 친구들에게 돌아 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끝까지 지켜 드리겠습니다." "루츠, 난 네가 돌아올 때 즈음에는 죽어 있을 거야." 루첼은 몸이 확 굳어 버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심장만은 제 알아서 벌떡 벌떡 크게 뛰어 오르기 시작했다. 아니 터질 듯, 크게 쿵쿵쿵 뛰어 오른다. 엉망진창, 이건 너무 엉터리다. 끔찍하게 부조리한 악몽속인 것 같 아. "장례는 내 집사가 알아서 치러줄 거야. 도와주면.....쿨럭, 그래. 도 와주면 고맙겠구나.....내 가족....중에서는 아무도 지켜주지 못할 테 니....너라도 해 주렴." 베크만은 루첼을 보며 웃었다. 그리고 애정 넘치는 눈빛으로, 그의 볼을 어루만졌다. "넌 용기 있는 녀석이야. 또, 믿을만한 녀석이기도 하고.....그러니 맡 기는 거란다." 루첼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벌써 스물도 넘 은 성년이었고, 많은 죽음과 고난을 겪어왔던 그였지만 지금 그는 너무나 슬플 뿐이었고, 감출 수도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어린 루첼은 그가 내일이면 당장 일어날 거라 생각했다. 상처에서 피가 멎고 아물 듯 그의 피도 멎고 터진 상처도 아물고 생명도 돌아올 거라 생각했었다. 사고를 당하고 붕대를 처음 풀던 날, 루첼은 흐릿해 보이는 주변이 조금만 기다리면 곧 선명해 지리라 생각했다. 이제 막 나아서 그런 거니, 괜찮을 거야...... 그러나 아버지는 결국에는 교외의 어머니 무덤 옆에 묻혔고, 시력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안경을 쓰면 될 일이었지만, 아무것도 할 줄 아는게 없는 루첼은 막 막하기만 했다. 얼굴에 뭘 끼고 주먹질을 할 수도 없었고, 험한 생 활을 하기도 어려웠다. 완전히 끝난 것이다. 아버지가 묻혔듯, 그의 미래 역시 묻힌 것이다. 지금도 어쩌면, 갑자기 공작이 복권된다던가 왕비가 명을 거두어들 인다던가 하는 일이 생길 지도 모른다고, 그저 허탈하게 웃으며, '놀 랐잖아.'하고 조금 화를 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만 있었 다. 그러나 헛된 희망을 믿지 않는 것은 언제나 당사자 자신이었는데, 끝까지 놓지 않는 것 역시 자신이었다. "안녕히.....안녕히 계십시오, 알베스티 님...." "잘 있거라, 루치." 결국 루첼은 알베스티의 침대에 얼굴을 묻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실비는 빨리 준비를 마쳤다. 벌써 모든 것이 끝나 있었고, 루첼이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루첼은 실비의 준비가 끝나자마자, 그녀와 단 둘이 알베스티의 저택 을 나섰다. 호위나 하인, 하녀들은 일체 대동하지 않았다. 지금은 어 느 누구를 믿어야 할 지 모르며, 루첼이 다른 사람 눈에 뜨이지 않 게 데리고 다닐 수 있는 사람은 한 명이 한계였다. 위험한 일이 있다는 것은 실비도 짐작하고 있는 듯 했다. 겁많은 실 비는 입술을 꾹 물고는 루첼을 따랐다. 여름의 짧은 밤이 내려앉고 있었다. 달은 벌써 지고 없었으며, 깜깜 한 하늘에는 별만이 빛을 내고 있었다. 루첼은 베크만이 말한 다리에 이르자, 작은 배 한 척이 묶여있는 것 을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남자 한 명이 앉아 있 다가, 루첼이 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비아입니다." 루첼이 말하자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루첼과 실비아를 배에 태 웠다. 루첼은 배에 타게 되자마자, 곧바로 물길을 만들었다. 물들이 빠르 게 휘몰아치더니, 강을 따라 배를 밀어냈다. 작은 배의 사공이 깜짝 놀랐다. "마법사였소?" "그렇게 될 예정이었죠." 배가 노도 닻도 없었지만 이내 빨라지기 시작했고, 물고기처럼 빠르 게 좁은 운하를 빠져나가 카로디 강에 이르렀다. 실비는 창백한 얼 굴로 배 구석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지도 못하고 후드와 망토안에 몸을 웅크리고는 가만히 떨고 있을 뿐이었다. 울지 못하는 것은, 울 음을 터뜨리지도 못할 정도로 겁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루첼은 선두에 서서 배의 방향을 잡아나가며 체놀비의 불빛이 보이 기만을 차분히 기다렸다. 간혹 불빛이 반짝일 뿐 깜깜한 주변은 예 전보다 더욱 길게 느껴졌다. 그러다, 강의 수평선 너머로 드디어 작은 불빛 하나가 떠올랐다. "갤리 전함이요." 남자가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노 젓는 소리와, 강물 쳐 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루첼은 실비의 어 깨에 손을 얹으며, 불빛을 환하게 켜 놓고 다가오는 전함을 바라보 았다. 양옆으로 노들이 솟구쳤다 아래로 텀벙 텀벙 쏟아지더니 물을 밀어냈다. 북소리와 함성 소리도 들려왔다. 실비의 떨림이 더욱 거세어져왔지만, 루첼은 외려 더 차분하게 그 전함을 바라보았다. 슬쩍 보니, 사공 남자 역시 잔뜩 긴장한 듯 주 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멈추시오!" 전함 쪽에서 장교의 모자를 쓴 남자가 외쳤다. 루첼은 마법을 멈추 었다. 배는 뚝 멈추었고, 전함 역시 저 앞에서 멈추었다. 장교가 외 쳤다. "체놀비에는 오늘밤에 들어갈 수 없소! 배를 강가에 정박하고, 내일 아침에 들어오시오." 루첼이 크게 외쳤다. "여자가 있습니다-!" 잠시 저 쪽에서 말이 없었다. 그리고 실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 씬한 몸과 치마를 보니, 루첼의 말이 맞다는 것은 그도 알게 되었지 만 그래도 고개를 저었다. "원칙은 원칙이오. 귀부인이 계신데 미안하게 됐소 만, 가까운 곳에 하룻밤 지새워야겠소." "알겠....습니다." 루첼이 포기하고 힘없이 답하자, 전함은 곧 항로를 돌렸다. 루첼은 턱을 문지르고는 사공에게 말했다. "여기까지 저 정도 전함이 나올 정도라면, 체놀비 쪽으로 갈수록 많 아지겠군요." "당연합니다. 어쩌시겠습니까?" 바다로 나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정찰을 도는 전함에 있을 마 법사들의 눈을 속이는 것 정도는 루첼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단 바다로 나간다 해도, 지금 목적지는 체놀비인 이상 그래 봤자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다. 저 정도 전함이 항구를 지킨다면, 항구에 배를 대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려서 걸어가는 것이 좋겠군요." 남자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성문도 똑같이 감시하고 있을 겁니다." "다른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저희들은 여기서 내릴 테니, 돌아가세 요." 단호한 루첼의 말에, 결국 남자는 배를 강가에 댔다. 루첼이 배에서 먼저 내려 실비를 도와주었고, 실비는 치맛자락이 물에 젖으면서도 힘겹게 내릴 수 있었다. 그리고 루첼은 남자에게 인사를 하고는 곧 바로 강가의 숲으로 들어섰다. 배는 곧장 강가에서 빠져나가 강의 중앙으로 접어들었다. 숲은 깜깜했다. 눈에 뜨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루첼은 아주 야트막 한 빛을 바닥으로 깔아 놓았고, 그것은 돌부리에 걸리는 것을 겨우 면할 정도의 빛이었을 뿐이었다. 실비는 힘겹게 루첼을 따라갔다. 귀찮게 하지 않으려고, 벌써 몇 번이나 돌부리에 부딪히고 나뭇가지 에 긁히고 옷이 찢어 졌는 데도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어느 정도 들어오자 루첼은 발을 멈추고는 실비를 불렀다. "실비-" "응...." "거짓말은 하지 않을 게. 우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게 좋겠다. 그리고.....어쩌면 네가 도착할 때에는 늦어 있을 수도 있고, 아니.... 늦어 있을 가능성이 높아." "무슨 소리야, 오빠?" "전함이 여기까지 나와 있다는 건, 체놀비 안에서.....숙청중이라는 뜻이다." 실비가 발걸음을 뚝 멈추었다. 이제야 루첼은 알베스티가 왜 실비를 그에게 맡겼는지, 어리석게도 이제서야 알 수 있었다. 정말 체놀비로 가서 실비를 보내달라는 것이 아니었다. 배까지 마련 해 주면서 그곳으로 가게 했지만,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거라는 것을 알베스티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 작가잡설: 아자, 힘내자, 힘!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18장 *************************************************************** [겨울성의 열쇠] 제84편 하얀 빛 무리#3 *************************************************************** -그러니 맡기는 거란다. 결국 베크만 알베스티가 원한 것은, 루첼이 실비를 데리고 어디로든 도망쳐 주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 아들과 손자들에게는 벌써 어디로 든 숨으라고 말하며, 막내인 실비아는 믿을 만한 곳에 맡겨 두겠다 고 했을 것이다. 차라리 잔인하다. 루첼에게 그토록 이나 맡고 싶지 않았던 버거운 짐인 실비를 이런 식으로 맡긴다는 것은. 그러나 루첼은 그러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 안도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뭐냐, 루첼 그란셔스. 대체 무엇 때문에 안도하고 기뻐하는 거냐.... 나쁜 녀석. "오빠..." 루첼은 떠는 실비를 달래주려고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아 당겼다. 가슴 안으로 깊게 안아 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실비는 놀라다가는 머뭇머뭇 머리를 기댔다. 그나마도 안심이 되는지 떨리던 몸이 조금 가라 앉아갔다. 루첼이 말했다. "하룻밤 정도 혼자서 숲 안에서 지낼 수 있겠니?" 놀란 듯 말이 없던 실비는, 한참이 지나서야 힘없이 답했다. "좀 무섭기는 하지만...괜찮을 거야." "실비, 이곳에서 날이 샐 때까지만 있어. 불도 없고, 달도 없지. 하 지만....그래도 오늘 하루는 참아야 해. 알겠지? 버텨야 하는 거다." 실비가 바르르 떨었다. "나 혼자 두고 어디로 가는 거야, 오빠.....?" "오늘밤은 여기서 지켜줄 수 없어. 지금 당장 체놀비로 가서, 어떻 게든 너의 아버지와 오빠들이 어찌 되었는지 알아보고 올게." 그리고 베크만이 내린 또 다른 명령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베크만이 배를 준비해주어 체놀비까지 가게 한 이유였으며, 루첼이 목숨을 걸고라도 지켜야 하는 무거운 의무였다. "해가 올라가도 오지 않으면.......혼자서라도 도망쳐야 해. 알겠지?" 실비가 루첼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눈물이 펑펑 쏟아졌지만, 흐느낌은 죽인 채 실비는 한없이 울었다. 그제야 그녀도 상황을 알아챈 것이고, 그것은 곱게 자라온 실비에게 는 죽음처럼 무서운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래 잡지는 않았다. 손을 내린 실비는 눈물을 닦아내지도 못한 채 말했다. "해가 저물어도 기다리고 있을 거야." 루첼은 실비의 이마에 키스해 주고는, 숲 밖으로 뛰쳐나가 뒤도 돌 아보지 않고 강가를 따라 힘껏 달려갔다. 발이 빠른 그였으니, 얼마 달리지도 않아 벌써 저 너머로 체놀비의 불빛들이 별처럼 찬란하게 떠올랐다. 커다란 전함들이 넓은 만을 감 시하듯 떠돌고 있었고, 북소리와 차르르르--노가 바닷물을 쳐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강철 빛의 선체들이 불빛에 용의 배처럼 번 쩍였으며, 그 위에는 까만 군인들이 창을 든 채 서 있었다. 루첼은 베크만이 말한 청새치 꼬리는, 구역번호로는 10인 선착장이 었다. 루첼은 그곳이 마주 보이는 선착장에서 발을 멈추었다. 지금 당장 알베스티 본가가 있는 곳으로 가기에는 무리가 많고, 그 선착 장으로 달려가는 것도 힘들었다. 그리고 그것만이 수인 것도 아니 다. 잠시 시간이 지났다. 별들이 육중한 괘도를 틀고, 드디어 저 멀리서 신호가 솟구쳐 올랐다. 누군가가 항구의 군인들과 충돌하려는 것이 다. 전함들이 방향을 들더니 빠르게 물살을 헤치며 그곳으로 달려갔 다. 바람이 불어왔다. 항구의 비릿한 냄새. 머리카락이 흩어지고, 안경에 불빛이 반사되었다. 루첼은 웃었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파윈." 꽈르르르--! 불길이 치솟자 루첼은 손을 거두어 들였다. 그리고 도망치지 않은 채, 선착장에 서서 병사들이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불길은 바람을 따라 거세게 솟구쳐 올라 주변의 창고를 집어삼키고, 근방에 있던 전함에까지 옮겨 붙었다. 루첼은 가장 가까운 전함 중 하나를 바라 보았고, 그 눈길이 멎는 순간 다시 작게 주문을 외웠다. 불길은 화살이 내리 박힌 듯 날카롭고 높이 솟구쳐 올랐다. 바다위 로 불길의 붉은 일렁임이 퍼지고, 온통 금빛으로 출렁였다. 어디선 가 날아든 창이 루첼을 향해 부웅- 날아왔다. 루첼은 재빨리 발을 당겨 피했고, 창은 나무가 쪼개질 정도로 무섭게 박혔다. "저 놈이다-!" 가까이에 있던 전함에서, 붉은 로브를 입은 남자 하나가 달려나오며 외쳤다. 마법사였다. 그리고 그가 두 팔을 뻗으며 외쳤다. 루첼은 손 을 들어 그의 마법을 막았다. 파창--! 앞으로 얇고 불그스레한 막이 생겨나가며, 물위로 칼을 휘두르듯 수 면이 솟구쳤다. 상대 마법사가 쏘아 올린 붉은 화염의 구가 그 막에 부닥치며 터졌다. 꽈르르르--! 선착장의 나무들이 비틀렸다. 물은 증발하여 부옇게 피어오르고, 바 닷물은 흔들려 솟구치고 쏟아져 들어왔다. 주변이 완전히 물바다가 되더니, 결국 선착장 한 귀퉁이가 무너져 내렸다. 전함 한 대가 또 하나 방향을 틀어 불길이 치솟는 쪽으로 왔다. 멀찍한 곳에서, 경비 병들로 보이는 자들이 불빛에 벌겋게 번득이는 갑옷을 입은 채 달 려온다. 얼마나 끌어 모을 수 있을까. 그리고 끌어 모은다 할 지라도, 이 거 리에서 그들이 무사히 도망치는 지 확인 할 수는 있을까. 그러다, 루첼은 기이한 것을 보게 되었다. 루첼 바로 앞으로 작은 배 한 척이 지나가고 있었고, 그 위에 무장 한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그러나 불길이 이글거림에도 그 사람들에 게는 그림자가 없었다. 그저, 하얗게 반짝이는 돛대와 인형처럼 멎 은 듯 앞만을 바라보는 사람들 뿐. 그것은 괴상하고 오싹한 환상 같 은 것이었다. 유령의 배, 꿈과 환상으로 짜여진 기이한 것. 뭐지, 이거? 그 때 누군가가 외쳤다. "저 쪽으로 도망간다!" 화살이 퍽퍽 날아들었다. 그러나 화살은 그 기이한 사람들과 배를 그대로 통과해 바닷물에 텀벙 텀벙 빠졌다. 불길이 이글거리고 있 어, 그것을 알아채는 사람들은 없었다. 가장 가까이 있는 루첼만이 알아본 것뿐이다. 루첼 쪽으로, 다시 전함 한 대가 노를 저어 왔다. 선두에는 마법사 가 보이지 않았고, 대신 투구를 쓴 장교만이 있을 뿐이다. 순간, 멀 찍한 곳에서 길고 붉은 불꽃이 유성처럼 쏘아져 왔다. 루첼은 몸을 피했고, 그것은 머리카락이 닿을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어깨를 스쳐 날아갔다. 머리카락이 그슬렸다. "젠장-!" 루첼은 수인을 맺고 마나를 모았다. 그리고 가장 시전시간이 짧은 것으로 번개처럼 휘둘렀다. 금빛의 길고 날카로운 공격이 쏘아져 나 가, 전함에 내리 박혔다. 촤르르릉-- 루첼의 공격이 전함 근처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금빛 빛가루가, 일 렁이는 바다 위로 안타깝게 흩어져갔다. "이런 젠장 할." 전함에 마법사가 없는 이유를 알만 했다. 미리 다 조치를 취해서 있 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긴, 로멜이 밤낮 졸업장을 날려 대도 로 메르드에서는 늘 마법사가 부족하다. 대부분이 졸업하는 즉시 이런 소국에 머물기보다는 베넬리아나 제국으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모든 배에 다 조무래기 마법사정도라도 태울 수가 없다. 그러나, 그런 것 가지고 좋아할 수만도 없는 것이 루첼은 조무래기 급도 안 되는 '학생'이라는 것이다. 지난 번같은 대결이야, 그 마법사 쪽에서 워낙에 루첼을 무시하고 있었으니 이기는 것이 가능했다. 그 마법사가 제정신이었다면, 루첼 에게 그런 행운이 있었을 지는 의문스러웠다. 그러나 루첼의 장점 중 하나는, 모자라는 것은 모자란다고 재빨리 인정한다는 것이다. 루첼은 다시 손위에서 불꽃을 터뜨렸다. 그것은 이글이글 타오르며 바다를 환하게 비추었고, 조명처럼 사람들을 이끌었다. 선착장 저 편에서 말 타고 달려오는 기사들이 보인다. 전함은 루첼을 깔아뭉갤 듯 육중하게 노를 저어 달려왔고, 루첼 옆에 있는 기이한 배가 정말 도시를 빠져나가려는 사람인 줄 착각하고 그 위로 달려나온 궁병들 이 석궁을 겨누었다. 루첼은 그 전함이 되도록 더욱 가까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하나, 둘, 셋......그리고 다섯, 까지 센 다음 손끝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내 던졌 다. 불꽃은 점점 커지며 바퀴처럼 거대해지더니, 선착장 바로 옆에 있는 창고를 후려쳤다. 창고의 나무가 무너지며, 그 안에 쌓여있던 화물들과 상자가 부서지고 깨졌다. "아리스테-리그흐." 돌풍이 일었다. 나뭇조각이 튀어 오르고, 기둥들도 불길에 휘말렸다. 그리고 그것들 이 바람에 따라 무너지며 전함과 기사들을 향해 회오리치듯 덮쳤다. 봤던 대로, 전함들은 보호의 마법은 걸려 있었지만 그런 공격에 대 한 방어는 전혀 실려 있지 않았다. 하긴, 이런 무식한 짓을 하는 마 법사가 세상에 어디 있겠냐. 말들이 부러진 나무에 찍혀 울부짖으며 쓰러졌다. 그 말에 깔려, 기 사들이 검과 창을 놓쳤다. 병사들도 엎드려 쏟아지는 불타는 기둥을 피했다. 더 많은 전함들이 방향을 꺾어, 불타는 선착장으로 향했다. 온 세상 이 이글거렸고, 울부짖으며 몸부림쳤고....그 중심에 루첼이 있었다. 여름의 밤은 뜨거웠고, 이글거리는 불덩어리 속에 있으면서도 루첼 의 가슴은 차가웠다. 저 멀리서 로브 자락을 날리며 마법사 하나가 말을 타고 달려왔다. 그 로브 끝자락에는 금빛 수가 놓여 있었다. 정식 길드원인 것이다. 게다가, 전함들은 이제 루첼의 뒤쪽에서도 다가왔다. "이제 끝장이네..." 그러던 루첼은 전함들 사이로 빠르게 다가오는 보트 한 척을 발견 했다. 그 보트는 능숙하게 전함들 사이를 빠져나갔고, 그 보트가 다 가오자 루첼 근처에 있던 그 기이한 배의 환상이 사라지기 시작했 다. 보트 위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호리호리한 키에 마른 몸집이었 고, 머리카락은 짧았다. 그가 가슴 앞으로 기도하듯 손을 모으더니, 손가락을 탁탁 움직였 다. 남자의 주변으로 금빛의 테가 떠올랐다. 루첼은 급히 주변을 둘러보아, 그를 노리며 석궁을 겨냥하는 병사 하나를 발견하고는 재빨리 불꽃을 날렸다. 병사가 그에 퍽 맞아 나 가떨어졌고, 곧 루첼 위로 화살과 석궁이 쏟아져 내렸다. "프로텐-!" 옅고 하얀 막이 루첼과 보트 위를 천장처럼 감쌌다. 화살이 수없이 쏟아져 퍽퍽 박히고, 바닷물로 투두두둑 떨어졌다. 보트의 남자가 루첼에게 외쳤다. "뛰어 내려, 얼간아--!" 루첼은 망설임 없이 바다로 뛰어 들었다. 위로 콰르르르--뭐가 크 게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 순간 루첼은 바다에 텀벙 빠졌다. 잠 시 헤엄치고 있는데, 루첼의 뒷덜미를 누가 세게 잡아 당겼다. 루첼 은 단번에 들려, 보트 위로 내동댕이쳐졌다. 흠뻑 젖은 루첼은 번쩍이는 하늘과 그 위로 드리워진 머리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어라, 우리 삼촌이네." "미친 놈." 그렇게 퉁명스레 던지고는, 제임은 품안에서 시커먼 돌덩어리를 꺼 내 보트 꼭대기에 얹어 놓았다. 보트 끝자락이 컴컴해지는 가 싶더 니, 보트가 차츰 사라지기 시작했다. 루첼이 지친 목소리로 물었다. "같이 자살하자고 온 거야?" "투명마법이다, 이 얼간아." *********************************************************** 작가잡설: 다정하고도 험악한 숙질간입니다....-_-;;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18장 ************************************************************** [겨울성의 열쇠] 제85편 하얀 빛 무리#4 ************************************************************** 강으로 접어들자, 루첼은 긴장이 탁 풀려서 그대로 픽 쓰러지고 말 았다. 배가 한번 크게 출렁였고, 제임은 질색을 했다. 루첼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죽는 줄 알았어." "....그렇다면 내가 생명의 은인이란 것도 알겠군." "당연히 구해야 하는 거 아냐? 나, 당신 조카라고." ".......배 엎는다." "배 엎기 전에 어떻게 된 건지나 말해 줘." 제임은 푸르르--하고 한숨을 내 쉬었지만, 이것저것 말하기 시작했 다. 루첼은 이리 저리 흔들리는 보트에 누워 제임의 말에 귀를 기울였 다. 노는 저 혼자서 바닷물을 떠내며 배를 밀어내고 있었고, 제임은 루첼의 맞은 편에 앉아 균형을 맞추는 중이다. 그렇게 누워 있자니, 루첼은 꼭 무슨 노래에 나오는 레이디라도 된 기분이다. 꽃에 흠뻑 젖어서는, 물길을 따라 이리 저리 흔들리고 흘 러가며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흘러가는.... 생각해 보니 좀 소름끼친다. 저 강 끝에서 잘생긴 금발 '왕자'가 키 스해주려고 기다리고 있다면 말이다. 제임이 배의 방향을 틀더니 말했다. "그렇게 그 사람들 다 잘 도망갔어. 지오바니가.....네게 인사 전하더 군. 고맙다고." "뭘, 내 덕도 아닌데...." 옆에서 주의 좀 끌어 준 것 밖에 없다. 도와줬다, 라고 말하기도 쑥 스러울 판이다. 루첼은 달이 진 하늘에서 하얗게 쏟아지는 별들을 바라보았다. 여름 의 별 조각들, 그리고 저 중앙을 희끄무레하게 가로지르는 찬란한 은하수..... "삼촌도 부탁 받았던 거야?" "부탁이랄 건 없다. 난 의뢰였어, 의뢰. 돈도 네 몫까지 듬뿍 받았 고." "언제?" "정오 전이다." "......." 베크만 알베스티는 루첼이 생각하는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준비해 놓았다. 실비는 루첼에게 맡기고, 일가는 제임에게 의뢰했던 것이다. 아무리 권호까지 있는 마법사라지만 제임 혼자 모든 것을 다 해줄 수 있을 거라 과신하지도 않아, 루첼을 또 보냈다. 루첼은 베크만의 예상대 로, 그리고 그 믿음대로, 체놀비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항구의 전함 과 경비대만 분산시켰다. 제임의 투덜대는 말을 빌리면 그게 더 신경 쓰여서 짜증났다고는 하지만, 제임이 시간 맞추어 달려 올 수 있었던 것은 그 일가가 생 각보다 훨씬 더 수월하게 빠져나갔기 때문일 것이다. "미친 놈, 그 많은 전함들을 다 상대할 생각이었냐." 루첼은 킥킥 웃었다. "적당할 때 바다로 도망칠 생각이었어." "잘도 도망쳤겠다. 끌려가 머리나 안 잘리면 다행이었지." "......벌써 모가지 잘라야 할 놈 명단에 올라가 있을 걸?" "태평 하구만." "삼촌도 마찬가지 아냐?" "그런 쪽 수는 잘 알아. 너처럼 멍청하게 맨 얼굴 훤히 드러내놓고 설치지는 않았다." 제임이 턱을 들고는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 무섭게 타오르던 선착장은 이제 자그마한 황금빛 점으로 보일 뿐이었다. 보트는 허공을 가르는 작은 새처럼 검은 물을 헤치며 앞 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루첼은 배가 한번 더 크게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잠자코 있었다. 몸 은 움직이는데, 저 쏟아지는 별들만은 그대로. 끼이--철썩, 철썩, 머 리 아래에서는 깊고 어두운 물이 출렁이며, 머리 위에는 높고 아득 한 하늘과 별들이 빛난다. "예전에....눈 다쳐서 처음 하늘을 보았을 때, 꼭 이랬어." "내 기억하기에는 흐린 날이었는데." 루첼이 웃었다. "눈이 내렸지. 이렇게 하얗게.......별 대신 빛나는 건 그 눈이었어." 별처럼 하얀 눈들이. 그건 사고였어, 루첼은 그 날이 생각나면 언제나 그렇게 말했다. 그 저 내 운이었을 뿐이니, 아무도 원망하지 말자고. 시작하면 아마도 끝없이 미워질 테니까... 루첼은 한 겨울, 눈 내리는 밤 뿌옇고 흐릿한 세상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었다. 코앞의 글자는커녕 사람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이 답답하고 흐릿한 풍경, 그것이 이제 루첼이 평생을 보아야 하는 것 이었다. 그리고 흐릿한 것은, 시야 아니었다. 루첼 주변의 모든 것들 이 그렇게 부옇게 희미해지더니 사라지고 있었다. 현재도, 미래도, 그리고 삶 그 자체도. "이런 게 있는 줄 알았으면....그렇게 궁상떨지도 않았을 텐데." 루첼은 안경을 빼 흔들며 말했다. 제임이 핏 웃었다. "베넬리아 놈들이 재주는 좋지." "대신 우리는 비싸게 주잖아." 루첼은 다시 세상이 너무나 뿌옇게 흐려진 것을 보았다. 별들은 흐 릿하게 부풀어올라 흩어져 있었으며, 바로 옆의 뱃전도 흐릿했다. 이 뜨겁고 흐린 세상, 그리고 루첼은 다시 그가 가진 것들, 그 소중 한 그의 삶이 흐려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유리판 위에 잉크 로 쓰여진 글처럼,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자 엉망으로 어그러지다가 는 씻겨 내려가고 있었다. 눈이 깜빡이자, 얼굴을 타고 뜨거운 것이 스쳐지나갔다. 제임이 물었다. "기분 어떠냐?" ".......지금은 말이야, 삼촌...." 목도 꽉 잠겨 있었다. 제임이 조용히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래, 루치." "지금은......죠와 그분의 가족이 안전하게 떠났다는 것만 생각하고 싶어. 나머지는 조금 뒤에 생각하겠어. 조금....아주 조금 뒤에....." 다시 세상이 흐려져 갔다. 뜨거운 것이 눈에서 샘솟더니, 머리를 타 고 주륵 흘러내린다. 루첼은 손을 들어 눈을 가렸고, 그제야 펑펑 쏟아지기 시작한다. 세상이 또 한번 씻겨 내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지워진 그림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고, 깨어진 것은 다시는 이어 붙일 수 없으니.....그 모든 것을 어둡고 검은 강물 위에 띄워 보내야 하는 것이다. 잠기고, 흘러가고, 그래서 저 거대한 망각과 절 망의 바다 속으로 떠내려가는 것을 강가에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아 야 하는 것이다. 제임이 이마에 손을 얹어 주었다. 그 손바닥에서 스며 나오는 온기 는 가슴 벅찰 정도로 따뜻했다. 보트에서 내리자, 제임은 그 보트에 매인 밧줄을 당겨 강가의 모래 톱 위에 올려놓았다. 루첼은 흠뻑 젖은 바지 단을 접어 무릎까지 올렸다. 그리고 구두는 안을 적당히 말려 신은 다음 바짓단을 내려 마저 말렸다. 예전에 기 숙사에 살 때, 옷이 별로 없어서 그런 발열마법을 빨래 말리는 데 쓰기도 했으니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제임이 말했다. "실비아까지 태워서 가자." "세 사람 탈 수 있어?" "네놈은 걸어와." "죽었어." 그러자, 제임은 성큼 성큼 걸어 앞으로 가며 등을 벅벅 긁더니 말 했다. "하여간..... 그 발칙한 말버릇은 틸라하고 똑같다니까." "삼촌은 내 안 좋은 것은 모조리 어머니 탓하는 버릇이 있다니 까.......그 주먹 한 대로 다 끝내버릴 수 없었어?" "너라면 내 돈 들고 도망친 마누라가 형이랑 살림 차렸는데 제 정 신이었겠냐." "그래도 임산부에게 주먹 휘두른 건 좀 심했다고 봐." "그게 눈에 보였겠냐. 살판났군, 피둥피둥 살찐 걸 보니--하는 생각 밖에는 없었지.....그래도 당장에 의절해 버린 건 너무했다." 상당히 시무룩한 어투다. 사실, 아직도 제임은 그의 편을 들지 않고 행실 나쁜(물론 당시에는 꽤나 얌전해져 있었지만.) 아내 편을 든 형에게 서운해하고 있었다. 루첼이 히죽 웃었다. "삼촌도 화해해 보려고 했던 적은 없잖아." "난 조건을 걸었으니까. 그 발칙한 틸라를 당장에 갖다 버리라고. 뭐, '그 애가 형님 애인지 아닌지 누가 알겠어!'하고 발광하다가 또 쫓겨 나 버렸지....." "이제는 의심 안 하나 보네?" "속으로 우기기야 했다만, 앞판은 네 어머니랑 똑 닮았는데 뒷판은 딱 형이더라고." 루첼은 아버지의 빈소 앞에서, '나는 네 아버지가 되어 줄 수는 없 다. 그러나 유사품은 될 거다....어쨌건 믿고 오너라.' 하고 퉁퉁 부운 눈으로 말하던 삼촌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죽일 놈이라고, 네 어머니를 패대기친 놈이라고, 그러니 너한테는 삼촌이 절대 없다고 귀따갑게 들어왔지만 그래도 아버지와 똑 닮은 얼굴을 하고 앞에 앉아있는 삼촌이 눈물 나게 반가웠던 건 사실이었다. 물론 재산은 루첼의 어머니가 다 들고 도망가서 흥청망청 써버린 바람에 한푼도 없었으니, 살림이 어려운 건 두말할 것 없었다. 결국, 다섯 살 때 글 자 대충 배우자마자 제임의 식당에서 일해야 했다. 그래도 제임은 밤이 되면 글도 가르쳐 주고, 가끔 마법도 가르쳐 주었다. 마나를 운용하는 감각이 이어져 있다는 것을 제임이 발견한 것도 그 때였 다. 그래서 당시 제임은 당분간은 자신의 도제로 데리고 있다가, 돈 좀 모이면 학교 같은 곳에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제임은 우수한 마법사인 건 사실이었으나, 워낙에 이일 저일 할 것이 많아서 진득 이 가르쳐 주기에는 좋지 못한 스승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믿던 루첼이 첸과 어울리고, 열살 조금 넘은 나이에 그 패거리 싸움에 끼어 들었을 때는 정말 속이 뒤집어 졌노라고, 루 첼이 성년이 되던 날 술 퍼마시고 엉엉 울면서 말했었다. 게다가, 루첼이 사고로 눈을 다쳤을 때 제임은 정말 첸이 죽기 직전까지 두 들겨 팼었다. (나중에 에나가 말했는데, 그녀도 열 두 살 난 루첼을 집어삼킨 다음날 죽도록 얻어맞았다고 한다.) "거의 다 왔어." 루첼은 숲의 길로 접어들게 되자 말했다. 그러자, 제임이 잠시 발을 멈추고 숲 속을 멍하니 보더니 조그마하게 말을 꺼냈다. "좋은 소식 하나 있는데 들려줄까?" "얼른 해. 워낙에 좋은 소식에 굶주려 있어야지...." "루크 페일리 일가가 국경을 넘었다. 워낙에 철저한 집안이니, 곧 베넬리아에서 자리를 틀 거야." 루첼은 푸, 하고 웃고 말았다. 사실을 말하자면, 눈물이 나올 정도로 기뻤다. 그런데 제임은 그런 루첼을 바라보면서도, 같이 웃지도 그렇게 기쁘게 해 준 데 뿌듯해 하지도 않았다. 루첼은 큭큭 웃다가 그제야 그런 제임을 발견했다. 뭔가, 아주 중요한 것을 하나 말하지 않은 것이다. 제임은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 "희생이 없지는 않았다. 사자 떼가 움직여도, 약한 새끼 몇은 들개 들에게 물려 가는 법이거든....." "......" 말하지 마, 라고 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조금만 더 발을 움직이면, 캄캄한 나락으로 떨어져 버릴 것만 같았지만, 루첼 은 피할 수 없었다. 제임이 말했다. "그리고 그 일가에서 가장 약한 것이 누구인지, 네가 가장 잘 알 거 야." 루첼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서 몸집이 가벼운 누군 가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루첼 오빠!" 제임이 고개를 들었다. 숲 속에서 실비가 달려오고 있었고, 그녀가 잘 올 수 있도록 그는 옅은 빛을 비추어 주었다. 루첼이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죽은.....거야?" "베넬리아에 들어와서......그리 된 것 같다. 다행히, 국경의 사원에서 약식으로나마 장례는 치루었다는군." "언제부터 알고 있었지?" "오늘 아침." "베크만 알베스티 님도 알고 있었어?" "정오에 만났으니, 당연히 알고 계셨지." 실비는 볼이 빨갛게 된 채 둘에게 달려왔다. 우선은 루첼이 무사하 자 그의 가슴을 끌어안았다. "오빠! 다행이다-! 다행이야!" 그리고 볼을 떼고는 바로 옆의 제임을 보았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 지만, 호리호리하게 마른 체격이 루첼과 아주 닮아 있어 행여나 루 첼의 삼촌인가 해서 얼른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제임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실비는 그 눈이 마치 가엾은 아 이를 보는 듯한 서글픔에 젖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실비는 그녀의 일가가 로메르드를 다 떠났기 때문에 그가 동정하는 거라고 생각했 을 뿐이었다. 그러나 각오하고 있었으니, 그녀는 억지로 웃어 보였 다. 무서웠지만, 이제 혼자 버텨 보겠다고 내내 결심하고 있었다. "저기....." 이제 어떻게 할 예정이냐고 물어보려던 실비는 목덜미 위로 뜨거운 것이 뚝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빗방울처럼 한없이 떨어지며 어깨로 흘러 내려갔고, 숨죽인 흐느낌과 함께 흘러갔다. "루첼....오빠....?" 실비가 고개를 들고는 루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루첼은 빛이 부서지는 그녀의 눈 속에서 또 한번 절망과 슬픔 을 담아 그에게 쏟아지는 그 하얀빛들을 보았다. 어째서 그리도 찬란히 빛나는 것인지. 가슴은 찢어지고 얼어붙고 다시 찢겨 나가는데, 어째 서 저것은 그 아득한 곳에서 한없이 찬란하게 쏟아지기만 하는 것인 지.... 제임이 루첼의 어깨를 안아 주었다. *********************************************************** 작가잡설: 루첼...너도 라닌 만큼이나 신수가 훤하구나.....;;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19장 *************************************************************** [겨울성의 열쇠] 제19장 남겨진 열쇠 제86편 남겨진 열쇠#1 *************************************************************** 하얗게 빛나는 은빛 달- 구름 자락 속에서 무결하게 빛나는 저 만월의 빛. 잿빛 구름 그림자가 연기처럼 밀려들어오더니 달을 덮어버렸다. 달 이 꺼져 들어가며, 주변이 다시 캄캄해졌다. 습기가 피어오르고, 비 에 젖은 듯한 진한 흙 냄새가 올라왔다. 그리고 웅크려 앉아 생각했다. 여기서 어떻게 가야 되는 걸까, 정말 갈 수는 있는 걸까, 가야는 하는 걸까, 달아오른 열기에 두서없이 난무하는 생각의 파편들, 그것들은 새처럼 푸드덕 푸드덕 날개를 치 며 이마를 때려대더니, 조금 지나자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로 세 차게 푸덕거린다. 좁은 곳에 갖힌 듯 미친 듯이 퍼덕대고, 결국에는 뭐가 어떤 건지, 뭐가 정말 기억인지 모를 지경이다. 어지럽다, 무섭다. 오싹 오싹 추워졌다. 여기저기 구르다 찢어진 어깨와 맨 발바닥이 아파 왔다. 긁힌 볼은 쓰려왔고, 살점이 너덜거리는 팔꿈치는 쓸릴 때마다 통증에 기절할 것만 같았다. 저 멀리서 불빛 같은 것이 보였 다. 일렁일렁 날아다니며 주변을 훑어보고 돌아가고 다시 빙글빙글 돈다. 컹컹- 사나운 개들이 짖어대는 소리가 숲을 울렸다. 개는 정말 싫다. 언제나 성 주변에는 저런 덩치 크고 시커먼 사냥개 들이 돌아다니며 엉뚱하게 들어온 사람들을 물어 뜯어대곤 했고, 아 킨이 밖으로 나가려 할 때에도 코를 찡그리며 사납게 으르렁댔다. 그 개의 반도 안 되는 아킨이 그 개들을 해 치 울 수도 없다. 휘안 토스처럼 검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버지처럼 강한 것도 아니다..... 그러다 아킨은 피에 젖은 발을 보았다. 도망치면서 찢고 물어 뜯어 버린 개들의 살점이 아직도 발톱 끝에 묻어 있다. 녀석들은 한참 컹 컹대며 달려들었지만, 자기 동료들이 그렇게 단번에 뻘건 고깃덩어 리가 되어 내던져지자 꼬리를 가랑이 사이에 집어넣고 도망쳐 버렸 다. 저것들이 온다면 지금 해 치울 수 있을 걸, 아주 갈가리 찢어버 려 핏물에 담가 버릴 수 있을 거야. 내장이 툭툭 튀어 오르고, 살점 은 찢어지고, 뼈는 부러지고 으스러질 테지.... 그러나 사냥개들은 해 치울 수 있어도 그들을 끌고 온 기사들은 해 치울 수 없다. 특히, 아버지 눈에 들킨 다면 끝이다. 아버지는 성으 로 끌고 가서, 또 쇠사슬에 채워 지하 감방에 가두어 놓을 것이다. 끔찍해, 그건. 죽어버리겠다고 나온 것이지만, 정작 이렇게 되니 아킨은 우선은 이 곳에서 벗어나고만 싶었다. 보름이 될 때마다 이성이 까무룩 사라지 고, 확확 치미는 분노에 벽에 몸을 부딪히고 긁어대고 아침이 되면 피투성이가 되어 헉헉대며 달이 지고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그 것이, 차라리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 다면 좋으련만 아침이 되면 너 무 분명히 떠오른다. 때가 되면 자제력만 깔끔하게 사라져 버릴 뿐 이다. 얌전했던 것은, 어머니가 몸을 던졌던 바로 그날뿐이었다. 그 처절한 눈으로 아킨을 바라봤을 때...그것은 이제는 꺾여 내동댕이쳐 져 버린 희망의 마지막 날개 짓이었다. 어머니는 날아갔고,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결국에는 찾아낸 마지막 길, 덧없는 비상이었다. 투명하도록 하얗고 처연한 비상. 개 짖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아킨은 숨어있던 나무둥치에서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부러진 다리는 움직일 수 없어 질질 끌어야 했고, 험준하고 깊은 숲이라 몇 번이나 나무 뿌리에 걸리고 굴러야 했다. 개 짖는 소리가 컹컹컹, 골짜기를 울리고 어둠의 숲을 찢어발기며, 그렇게 쏟아져 들어온다. 이대로 저기 그냥 찢어져 버릴까, 그냥 주저앉아서 저것들이 주인들 보다 먼저 도착해 피 냄새에 흥분해서는 목을 물어뜯고 발을 잡아 뜯도록 내 버려 둬 버릴까....산산이 부서져, 핏빛으로 흩어지며 날아 오를 테지.... 그러면 끝나는 거야- 아킨은 쓰러졌지만, 그럼에도 앞으로는 나아가고 있었다. 몸은 들러 붙은 듯 무거웠으나, 그래도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기는 했다. 기회 는 방금 전에 있기는 했다. 그러나 정말 끝낸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슬퍼졌고 두려워졌다. 이유 없이 막막했다. 이상하지, 돌아가 봤자 아무 것도 없는데. 철창에 갇혀서는, 일 주일에 한번씩 찾아오는 아 버지의 이글거리는 눈과 멀찍이 말을 타고 돌아가는 휘안토스의 백 마를 보는 것 밖에는 없는, 그런 나날..... 그래도 메리엔은 슬퍼 할 테지. 가엾은 작은 도련님, 하고는 펑펑 울다가 지쳐 죽어 버릴 테지....아니, 그녀도 사실 하루만 슬퍼하다가 잊어버릴 거야. 그녀의 팔과 어깨를 엉망으로 찢어놓곤 하는 골칫덩 어리가 사라질 테니, 이제 한달 내내 마음 편하게 잘 수 있을 테 지..... 그런데 다시 속에서 뜨거운 것이 복받쳤고, 이제 기운이 다 빠져 완 전히 쓰러졌다. 탁탁탁...자그만 것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학 학 대는 소리가 들려오는데.....짖지는 않는다. 사냥개는 아닌데, 뭘까..... 킁킁 냄새를 맡더니 곧 뜨거운 혀가 그의 상처를 핥았다. 크르릉- 따스한 살 냄새가 나자 결국 어깨를 들척이고 말았다. 그러자, 그 강아지는 몸을 움츠리고 뒤로 후닥닥 도망쳤다가 다시 조심조심 다 가왔다. 아킨이 날카롭게 뻗은 송곳니를 드러내며 눈에 불을 확 키 자, 강아지는 놀라 뒤로 주춤 물러났다. -쉿-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벼운 부츠가 바닥을 밝고 오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아킨 바로 앞 에서 멈추었다. 그런데 분명 인간일 텐데, 기이한 냄새가 옅게 풍겨 왔다. 그것은 나뭇잎의 푸르고 싱그러운 내음 같은 것이었고, 전나 무 둥치의 이끼에서 풍겨오는 향기 같은 것이기도 했다. 속이 가라 앉으며, 펄펄 끓어오르던 분노도 차츰 식어갔다. 그는 무릎을 꿇고는 아킨의 머리에 손을 가져갔다. 아킨의 들썩이던 어깨와 거친 숨소리가 가라앉아 갔다. 그러자 그가 털을 쓰다듬더 니, 뭐라 작게 속삭였다. 그것은 노래 같은 운율을 담은, 부드럽고 따스한 음이었다. 아킨은 지친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길게 굽이치는 검은 머리카락과, 어둠 속에서 빛나는 부드러운 초록 의 눈동자.....열 다섯 여섯쯤 될까, 나이가 그리 많지는 않아 보이는 소년이었다. 가벼워 보이는 망토와 옷에, 어깨에는 전통을 매고 허 리 양옆에는 단검을 차고 있었다. 그리고 머리카락 사이로 길게 솟 은 귀가 드러나 있다. 이렇게 생긴 사람은 본 적이 없다- 누구지? 속으로 그렇게 물었는데, 그 소년은 웃으며 말했다. -자케노스. 주변이 따스해지는 것 같았다. 온후한 움직임에, 숲과 대지가 공명 했다. 그리고 매몰차게 그를 외면하던 숲이 등을 돌리고 품을 열어 아킨을 감싸주었다. 그는 두 팔을 뻗어 아킨의 몸 위에 망토를 얹어 주었고, 병든 아이를 보살피듯 쓸어 준다- 그리고 그는 노래를 불렀다. 작지만 따뜻하게 퍼져 오르는, 그 작고 부드러운 노랫소리.... 까무룩 잠 이 든 가운데 새 우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빛이 퍼 지며, 숲이 밝아오고.....옅은 안개가 끼인 초원 이 연한 분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는 망토로 자그만 아킨의 몸을 감싸고는 안아 들었다. 다시 연한 풀냄새가 풍겨왔다. 그의 길고 부드러운 머리카 락이 이마와 가슴위로 늘어져 간지러웠다. -돌아가자, 아킨토스. 몸이 떨려왔다. 그러자 그가 이마 위에 턱을 얹어 주었다. 그것은 따스하고 부드러운, 그렇게 어미새가 날개를 펼쳐 감싸주는 듯한 움 직임이었다. 다시 잠이 들었고, 까만 어둠이 밀려 들어왔지만 몸은 신선한 생명의 물을 들이마신 듯 나른하고 편안하기만 하다- 꿈이 삭 지워졌고, 눈에 번쩍하며 빛이 환하게 들어왔다. 커다랗게 떠진 눈 위로 빛이 쏟아지는데, 도저히 감을 수가 없었다. 지독하게 환해, 눈이 아프고 머리가 어찔할 지경이었다. 바닥은 차 가웠고, 주변에서는 죽은 벌레에서 풍기는 듯한 비릿한 냄새가 났 다. 역겨워서 구역질이 팍 치밀어 올랐다. 어디에 있는지 주위를 둘 러보고 싶었지만, 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답답하고, 그만큼 두려 웠다. 몸부림치며 분노에 울부짖으며 소리치고 싶다가도, 그 막막함과 두 려움에 울고싶어졌다. 필사적으로 자켄을 찾아 더듬기만 했다. 어디에 있지, 형....? "겁먹지 마. 해치지는 않으니까." 거칠게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아킨은 정말 벌떡 일어나고 싶 었지만 몸이 움찔 움직이자마자 덜컥 굳었다. 온 모이 꽁꽁 묶인 듯, 그러나 팔 주변에 뭐에 묶인 듯한 감각은 없다. 아킨은 입술과 혀를 움직여 보았다. 그 곳에는 감각이 있다. "여기가 어디입니까?" 그러자 그가 히죽 웃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이지." "......이거라도 풀어 주십시오." "언젠가는 풀어 줄 거야. 보채지마-" 손에 힘을 꾹 주었지만, 외려 조이는 힘만 더 강혀졌다. 끊어져 나갈 듯한 고통에, 아킨은 이를 큭 물고는 신음을 삼켜야 했 다. ".....언제....라는 말입니까." "한줌 남은 기억의 조각까지 완전히 흩어지면........그 땐 풀어주겠 다." "무슨--!" "다 잊는 거야, 꼬마 왕자. 네 저주스런 형도, 널 미워하는 아버지 도, 가엾은 어머니도........아름다운 엘프 형도, 그 롤레인도....다 잊어 버리고, 새로 시작하는 거지. 완전히 새로, 갓 태어난 아기처럼....그 렇게....." 그가 클클 웃었다. "그리고 내가 네 아버지, 보호자, 그리고 위대한 스승이 되어주지. 그리고 이 곳, 이 위대한 힘들이 잠든 곳은 이제 다시 완전히 새롭 게 태어나는 네 생의 터전이자 집이 될 거다......아키." 숨이 멎는 것만 같다. 죽음 직전의 공포 같은 것이 몸을 적시고 들 어오고, 실제로 저 탈로스가 말하는 것은 '아킨토스'의 죽음이나 마 찬가지였다.... 아킨은 다시 가슴이 조여들고 머리가 어지러워 눈을 감았다. 몸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소용돌이 속으로, 하얀 날개를 퍼덕이며 떠나가는 것이 있었다. 파란 하늘과 자그마한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얇고 투명한 커튼이 흩 어지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그 창가에 있는 의자에 그녀가 앉아 있 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검었고, 보라색 눈은 슬픔에 젖어있었지만 아킨을 바라보며 미소짓고 있었다. 그녀가 아킨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길고 하얀 옷자락이 날개처럼 펼쳐지며 아킨을 향했다. 다가가면 안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킨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증오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당신이 아니잖아......! 그런 표정 따위, 내게 지어준 적 없어. 당신의 눈에 비추어진 것은 오로지 형 뿐, 스스로 도망쳐 숨어 버린 감옥 속에서도 당신은 그가 오면 나왔어. 난 언제나 당신 옆에 있었 는데, 내게 당신은 언제나 '없는 존재', 외면하려고만 했던 존재였잖 아....! 당신이나 아버지나, 선택할 순간이 닥쳐오면 언제나 나를 버렸고, 그렇게 나를 외면하며 미워하기만 했잖아..... 아니, 나를 살려 놓은 이유조차도 형을 위해서였지..... 그러니 저건, 저렇게 웃는 당신은 거짓이야. 달콤한 거짓. 그러나 아킨은 눈물이 나왔다. 그렇게 분노가 치밀어 올라도, 그것은 죽으려고 마음먹었던 그 직전 에 보았던 푸릇한 달빛처럼 그를 유혹하고 있었다. 거짓된 것이라 도, 차라리 저것에 어리석게 속아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발버둥치며, 어떻게든 스스로 일어서서 살아가고 싶었는데 지금 모두 다 산산조 각 나 버렸다. 그러니, 차라리 이 절망과 슬픔에 녹아들어 함몰되어 버리고 싶었다. 아킨은 두 볼을 어루만지는 그녀의 손에 얼굴을 맡기며 의식을 놓 았다. 하얗기만 한 것들이 검게 변하며 쏟아져 내리며 아킨의 의식 을 뒤덮어 버렸다. *********************************************************** 작가잡설: ........-_- 그, 뭐시기....흠, 흠......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19장 *************************************************************** [겨울성의 열쇠] 제87편 남겨진 열쇠#2 *************************************************************** 순간 휘안토스는 잠에서 깨어났다. 지독하게 긴 악몽이라도 꾼 것 같다. 머리는 욱신거리고, 가슴도 답 답하다. 목덜미는 땀에 흠뻑 젖어 있었으며, 숨소리는 힘든 운동이 라도 한 듯 거칠고 가쁘다. 고개를 들어보니 열린 창 밖으로 뜨거운 여름하늘이 보인다. 진한 햇빛이 쏟아져 카펫이 깔린 바닥이 환하게 빛났고, 사방에는 후끈한 열기가 가득했다. 휘안토스는 이마의 땀을 닦아내고는, 기대고 있던 소파에서 일어나 앉았다. 이 끈적끈적한 악몽덩어리는 암롯사에 돌아오자마자 시작되었다. 아 주 잠깐 잠들어도 며칠 밤 내내 시달린 듯 지독한 불쾌감이 남고, 무엇이 나타났다 사라졌는지도 기억 나지 않았으며, 매일 같은 느낌 인 것도 아니다. 어느 날은 가슴이 끓어오르는 듯 하고, 찌르는 듯 아프기도 하고, 차갑고 슬프기도 했다. 그리고 온통 땀에 젖어서는, 머리는 납덩어리처럼 무겁고 괴로웠다. 특별히 몸에 이상이 있는 것 도 아니다. 잠에서 깨어 조금 지나면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멀쩡해지 고, 그렇게 매일 밤 그런 괴로움에 시달려도 특별히 쇠약해지거나 하는 것도 없다. 설마, 가책이라도 느끼는 건가....? 그럴 리는 없다. 그날 이후, 휘안토스가 동생에 대해 생각했던 적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 아니, 되도록 하지 않으려 했다는 편이 나으리 라. 그리고 그의 머리와 가슴은 그 명령에 잘 통제되었다. 케올레스 가 마법사 길드로 아킨을 찾고자 청을 넣을 때도, 그가 손자인 마르 실리오에게 책임을 물으며 당장에 사직하라고 펄펄 뛸 때도 괴롭지 도 두렵지도 않았다. 아킨이 사라진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만약 자켄이 늪의 성으로 돌아와 아버지를 만나거나 했을 때 어 떻게 해야 할 지...그것들만 차분하게 생각했다. "휘안-" "...." 그 목소리에 휘안토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소파가 등지고 있는 벽난로 바로 옆에, 아버지가 있었다. "이상한 꿈이라도 꿨나 보구나." 사이러스는 그렇게 말하며 휘안토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날카로 운 눈이 휘안토스의 하나 하나를 면밀히 살펴나가더니, 자신을 바라 보는 휘안토스의 눈에 멈추었다. 휘안토스가 돌아왔을 때, 케올레스가 역시 자신이 직접 가야 했었다 며 눈물을 떨구고 있을 때 아버지는 저런 눈빛으로 휘안토스를 바 라보고 있었다. 몰라서 뭔가 알아내려고 탐색하는 것도 아니며, 그 렇다고 질책하거나 잘 했다는 눈빛도 아니다. 너무나 담담하게 살피 고, 알아내고, 고개를 돌렸다. 사이러스가 말했다. "잠시 자리를 비워 둬야 할 것 같구나, 휘안."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먼 곳은 아니다. 케올레스와 같이 비울까 하니, 당분간 나라 일은 네가 알아서 하거라." "알겠습니다." 감탄스러울 정도로, 둘 다 너무도 태연하게 말하고 답하고 있었다. 지금, 사이러스의 친아들이자 휘안토스의 친동생이 없어졌다. 그런 데 둘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주고받고 답하고 끄덕인다. 모르는 것도 아니다. 아버지는 휘안토스가 무엇을 했는지, 왜 그리 했는지 분명 알고 있었고, 휘안토스 역시 아버지가 그 사실을 안다 는 것을 안다. 그래도 둘은 서로의 눈을 피하지 않았고, 그 사이에 놓인 투명하고 차가운 벽안으로 들어오지도 않으며 그리 대화를 주 고받고 있었다. 지금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는 늘 휘안토스와 이런 거리를 유지해 왔었다. 냉정한 평가와 그에 따르는 신뢰와 질책은 어머니와 동생에 관한 것을 아무 것도 숨기지 않았을 때부터 지속되어 왔었다. 사이 러스는 어머니의 품에서 쉴 틈도 없이 그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된 아들이 후계자로서의 책임과 그 권리를 적절히 행사하고 수행하기 를 바라고 있었고, 당연하게 강요했다. 지금 역시, 아버지는 '아들' 휘안토스가 아닌 후계자이자 미래의 왕이 될 휘안토스의 결정을 존 중하고 있으며, 인정하고 있었다. "너와 나는....성격도, 판단을 내리는 기준도 아주 닮아 있구나." 그러나 칭찬은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평가'일 뿐이었고, 그것 으로 끝이었다. 휘안토스는 조금은 냉소적인 기분이 되었다. 닮은 것은 당연하지, 서로 거울처럼 마주보며 몇 년을 살아 왔는데- "알고 있습니다." 사이러스가 말했다. ".....그러나 두려움을 알아라, 휘안. 그것을 잊는 순간 넌 파멸할 테 니." "경고입니까?" "아버지로서의 충고이자 바램이다." 그 말에는 분명 진하고 뜨거운 것이 배어 있었고, 휘안토스의 몸을 떨리게 하는 강인한 무엇이 담겨 있었다. 비슷하지만 분명히 다른 것, 그것은 바로 사이러스에게는 휘안토스가 모르는 삼 십 년의 시 간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는 것이다. "분명히...기억하겠습니다." 드디어 루첼과 제임은 자신의 수배전단을 받아보게 되었다. 서로의 얼굴이 그려진 전단을 물끄러미 보던 둘은, 다시 바꾸어 자신의 수 배전단을 바라보았다. "난 잡혀갈 염려는 없겠다, 루첼." 제임은 턱이 뾰족하고 눈이 날카로운 얼굴이 그려진 전단을 바라보 며 말했다. 그리고 루첼은 눈가에 주름까지 세심히 그려 놓아 적어 도 쉰은 다 되어 보이는 자신의 전단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래, 삼촌." 대체 누가 그렸는지, 루첼과 제임에게는 고마운 일이었지만 직업 좀 바꾸는 게 좋겠다고 점잖게 충고하고 싶었다. 이런 물건이 나붙었다 가는, 이 해괴한 전단의 얼굴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만 억울하게 될 것 아닌가. 둘은 그 전단을 동시에 구겨 부엌의 아궁이에 집어 던졌다. 기분이 영 언짢아서, 불쏘시개로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러고 있자니 옆에 서 자그마하게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임은 앞치마를 찾 아 앞에 두르며 말했다. "루첼, 끓는다." "아..." 루첼은 부엌 의자에서 일어나, 뚜껑을 열고 솥 안을 들여다보았다. "익기는 한 것 같은데, 저기 여기 와서 맛좀 봐 주라. 오랜 만에 하 는 거라서...." "오냐." 제임이 터벅터벅 걸어와 솥 안에서 부글부글 끓는 스튜를 한 국자 떠 맛을 보고는 무심하게 말했다. "네가 다 먹어라." "......." 결국 루첼이 끓인 돼지고기 스튜는 루첼과 제임 둘 다 처분해야 했 다. 첸과 에나, 그 외 길드원 들은 아주 적대적인 얼굴로 스튜와 전 쟁을 벌이는 숙질을 보고는 미련 없이 다른 식당으로 향했다. 물론, 그들 모두 보복이라도 하듯 누가 하던 먹을만한 빵과 구운 감자들 을 휩쓸어 들고 나간 덕에 루첼과 제임은 결국 네 개 남은 빵을 두 개씩 나누어 지나치게 많은 스튜를 처분해야 했다. 그런데 제임이 빵에 손을 가져가기도 전에 루첼이 그 중 하나를 빼앗아 나무 접시 위에 놓았다. 그리고 벽장을 뒤져, 오늘 오후에 길드원 몰래 숨겨 놓았던 잘 익은 포도를 꺼내 빵 옆에 놓았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 람들이 손이라도 댈라치면 당장에 국자를 휘둘러 대던 복숭아 잼까 지 듬뿍 떠놓았다. 그렇게 준비를 마친 루첼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가, 제임이 방금 전에 만들어 놓은 닭고기 죽이 든 솥을 불 위에 올려 놓았다. 제임이 비죽거렸다. "남의 여자에게 아주 정성이다, 정성." "실비는 잘 먹어야 한다고." 루첼은 우묵한 사발에 한 가득 떠 넣으며 말했다. 그렇게 왔다 갔다 하더니, 루첼은 꽤 쓸만한 상을 차려 놓았다. 결국 제임이 마른 빵 을 씹으며 투덜댔다. "너, 그 녀석들 쫓아내려고 일부러 이런 스튜를 만들어 놓은 거 아 니냐?" 루첼은 제임의 험악한 눈을 얼른 회피하고는 부엌 뒤쪽을 향해 소 리쳤다. "........어이, 실비--! 식사하러 와!" 그러자 부엌 곁방 문이 열리며 실비가 나왔다. 단출한 검은 옷에, 머리카락은 하나로 모아 검은 리본으로 묶고 있 었다. 얼굴은 아주 해쓱했고, 팔이나 어깨도 얇게 말라 있었다. 겨우 한 달이 되었을 뿐인데, 실비는 그 동안 무섭도록 시들어 있었 다. 제임은 국자로 루첼의 뒤통수라도 한방 갈겨 보려고 했던 것은 관두기로 했다. 저 모습은 전혀 상관없는 제임이 보기에도 가엾고 안쓰러웠다. "식사해라, 실비." 제임이 말하자, 실비는 예의바르게 웃으며 인사를 하고는 루첼 옆에 앉았다. "저...내일부터는 저도 도울 게요. 부엌일이라든가...하는 거, 잘 못하 지만 배우면 될 거예요. 열심히 할게요." 그러나 제임은 스튜를 숟가락으로 뜨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일 하고 싶으면, 그 팔뚝부터 두 배로 불리라고. 일을 잘하건 못하 건, 그렇게 비썩 말라 비슬거리는 사람에게는 청소도 시키기 싫으니 까." "노, 노력할게요." 그러며 실비는 빵을 뜯어 입에 넣었다. 그러다가 속이 막히는 지 가 슴을 탕탕 두드리다가, 루첼이 따라 놓은 우유를 벌컥 벌컥 들이켰 다. 제임이 말했다. "그렇게 퍼먹으면 배탈만 나지 살로는 안 간다. 우선, 생쥐처럼 빵 이나 야금대지 말고 고기나 감자 같은 것이나 듬뿍 듬뿍 먹어 둬. 버터와 치즈도 듬뿍 넣고. 자, 여기." "네, 네.....!" 실비는 고개를 끄덕이곤 앞에 놓인 죽을 바라보았다. "속이 안 좋다 기래 그냥 만들어 뒀다. 먹고 배나 채워둬." "감사합니다." 실비는 한 숟가락 떠 입에 넣었다가, 갑자기 구역질이 치미는지 욱 --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계속 어깨를 들척이고 욱욱대며 구역질을 했다. 루첼이 제임을 쏘아보았다. "제임....여기다 뭐 넣었어." "......" 그런데 평소라면 '네가 만들지 그랬냐?' 하고 쏘아붙였을 제임은 눈 이 댕그랗게 커지더니 스튜 사발 위로 숟가락을 툭 떨어뜨렸다. 계속 구역질을 하던 실비는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신경 써 주셨는데...욱---토, 토하고 올게요! 너무 죄송합니다! 으, 음식 탓은...욱--" 실비는 그대로 부엌 밖으로 뛰쳐나갔다. 루첼은 도와주려고 나가려 다가, 제임에게 뒷덜미가 잡혀 끌려왔다. "왜 그래, 또?" "루첼, 내 말에 분명히 답해라. 절대 거짓말하지 말아라. 절, 대-! 이 건 아주 중요한 문제니까, 거짓말로 못 넘어간다." "알았어. 그런데 왜?" 제임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너, 저 애랑 잔 적 있냐?" "......" 루첼은 빈 사발로 제임의 머리를 내리 찍었다. *********************************************************** 작가잡설: 어쨌건 숙질간은 위대하다, 입니다..-_-;;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19장 *************************************************************** [겨울성의 열쇠] 제88편 남겨진 열쇠#3 **************************************************************** 제임은 손가락을 하나 하나 말아 쥐며 날짜를 세고 있었다. 그리고 딱 여섯 번째로 손가락을 말더니 한숨을 탁 내쉬었다. "딱 맞구나." 루첼은 으르렁 크르렁 대며 물었다. "...정확한 거야?" "정확하다. 내가 남자라 영 미심쩍으면 케틀린에게 데리고 가서 물 어 보든가 해." 케틀린이라면 이 뒷골목의 의사인 나이 50의 지긋한 여자였으며, 제 임과는 결혼하는 것만 빼고는 다 해본 사이다. 루첼은 당장에 나가 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제임이 그런 그를 붙들었다. "확인하기 전에 한 마디만 해 두자. 어떻게 할거야, 너?" 뭘 물어 보는 지 알만 해서, 기운이 탁 빠진 루첼은 다시 풀썩 주저 앉아 버렸다. 그리고 실비가 뛰쳐나간 뒷문을 흘끔 보고는, 목소리 를 낮추어 말했다. "정말이면....별 수 없잖아. 당분간은 내가 도와줘야지." 당연한 일이었다. 실비는 지금, 일가가 모두 외국으로 도망친 상태였다. 조부인 베크 만 알베스티의 장례를 치룬 지 한 달도 되지 않았고, 실비는 그날 신전에서 겨우 이틀 간 남편이었던 쥬나드렌의 몫까지 추모의 초를 올려야 했다. 그리고 제단 앞에 실비가 놓은 것은, 그가 남긴 유일 한 선물이 되어 버린 약혼 반지였다. 명에 짓눌려 질식해 버릴 것만 같던 그날, 살아서 몸부림치듯 쿠르 릉대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굵은 빗줄기에 상처의 피와 슬픔이 씻겨 내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적막과 무거운 습기에 젖은 빈소를 실 비와 함께 단 둘이서 지키던 루첼은 그날 베크만과 쥬나드렌 몫의 모든 책임을 떠맡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는 두 사람의 몫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알베스티 가나 루크 페 일리 가가 안정이 되려면 1년, 길면 3-4년이 걸릴 지도 몰랐다. 그 동안 루첼이 곱게 자라 연약하기만 한 실비를 지켜야 하고, 자신의 미래도 생각해야 했다. 그래도 후회하지는 않고, 원망도 하지 않았 다. 특히 쥰에게는, 죄책감 이전에.....그가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만 생각하기로 했다. 쥰은 어찌되었든, 실비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녀 의 남편이었으며 남편으로 죽었다. '책임지기 곤란하다.'라며 비겁하 게 도망친 루첼과는 달리, 그는 본가에서 불가능한 조건을 걸어댐에 도 꿋꿋이 결혼을 감행했고, 처지가 곤란하게 되자 그 위험한 길을 거슬러 와 실비와 결혼했다. 무책임하긴 했지만, 그래도 제 하고 싶은 대로는 다 했다. 나보다 백 배는 멋진 녀석이지, 주변 사람에게 폐만 끼치기는 해도......루첼 은 그렇게 생각하며 담배를 물었다. 식탁만 탁탁 쳐대던 제임이 말을 꺼냈다. "어이, 루첼. 네 처지를 알고는 있는 거냐." "알아, 더 이상 공부하기는 글렀지." 로멜이 언제 다시 열릴 지도 모르고, 루첼은 아직 졸업이 1년이나 남아 있었다. 또, 2년의 연구생 과정까지 남아 있다. 그 긴 기간을 후원해 줄 사람도 없고, 혼자 벌어서 학비를 충당하자니 너무 버거 웠다. 그런 마당에 실비까지 책임지는 건, 젊은 루첼에게는 너무 과 한 짐이었다. 베크만이 넘겨준 얼마간의 돈이 있기는 했지만, 루첼 이 다 포기한다 하더라도 실비가 오랫동안 버티기에는 너무 모자랐 다. 게다가, 실비는 혼자서 할 줄 아는 것이 아예 없다. 늦든 이르든 버는 것이 없다면 분명 고달파 질 것이다. 제임이 말했다. "루첼, 두 사람이 아니라 세 사람이다. 네 아이도 아닌 아이와 네 여자도 아닌 여자를 책임지는 건......아무리 그 쥰과 네가 절친했던 사이라도 오래 못해. 아니, 무엇보다 내가 못 참아주겠다." "삼촌, 친구의 아내 이전에, 은인의 손녀야. 그분께서 돌아가시기 전 에 맡아 달라고 하셨던 것...벌써 잊었어?" "잊고 있었다." 루첼은 어이가 없었다. 설득할 수 없게 되자, 제임은 짧게 자른 머 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한숨만 내 쉬었다. 루첼이 물었다. "삼촌, 당분간 여기서 일 할 수 없을까?" 제임의 눈이 당장에 험악해졌다. 루첼은 그의 주먹에 힘이 불끈 들 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말했다. "길드 일을 다시 하겠다는 말은 아니야. 그냥, 이 주점에서 일하겠 다는 말이라고. 돈 달라는 말은 안 할 테니, 실비나 잘 챙겨 줘." "못 해." "삼촌......." "실비는 내 알아서 하겠다. 아니, 너를 거두어주고 가르쳐 줬던 분 의 손녀니...뭘 못하겠어. 애 하나 키우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고, 도 리가 있지 내 할 일을 대신 해주었던 분의 손녀 일을 모르는 척 할 수는 없다. 실비도 지금은 아무 것도 못해서 비슬대기야 한다지만, 언젠가는 일도 배우고.....제 집안과 연락이 닿으면 그곳으로 보내 줄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루첼, 넌 아니다." "말은 고마운데, 나는 아니라니...그건 무슨 소리야?" "지금 당장 네가 갈 곳이 없어서 살게 해 준 거다만, 넌 여기를 떠 나야 해. 반드시." 루첼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제임을 바라보았다. 제임은 딱딱한 얼굴로 말했다. "네가 이곳에 있으면......언젠가는 너에게 첸이 손을 벌릴 거다. 그로 써는 당연하다는 것은 알고, 녀석이 널 이용해 먹으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정말 너를 높이 평가해서 그리 한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난 네가 여기 뒷골목으로 다시 돌아오게 할 수가 없다. 이기적인 생 각이지만.....난, 다른 어떤 놈이 여기로 굴러 들어와도 상관없지만.... 너만은 다시 들여보낼 수 없어." "그럼 뭘 하라는 말이지? 지난번에는 운이 좋아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지만....지금 이 몸으로 밖에 나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반 없다 고." "길드에 말을 넣어 놓을 테니, 어느 마법사 도제로라도 들어가. 7-8 년 구르다 보면 너 정도면 분명 권호를 받을 수 있을 거다." "제임-!" 제임이 식탁을 후려쳤다. "네가 고작 열 살에 사람 죽이고 피투성이가 되어 들어왔을 때....내 기분이 어땠는 줄 알아? 정말 형님 돌아가시고 그렇게 엉엉 울어본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너 눈 다쳤을 때, 나는 첸을 두들겨 패러 간 게 아니라 죽이려고 찾아간 거였어. 네가 하인으로 들어가서 고생 할 때, 소식 듣고 술 마시기는 했지만...빌어먹을, 여기서 사람 죽이 고 몸에 피 묻히는 것 보다 열 배는 낫다고 생각했다. 학교 입학했 을 때? 그날....나는 그 베크만 님에게 정말 감사하다고 엎드려 인사 올렸다. 평생 은인으로 모시겠다고-!" 결국 제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는 젠장, 하고 눈물을 닦 아내고는 격앙된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런데 여기로 다시 들어오겠다고? 네가 정말 여기서 아무 관 계도 맺지 않고 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결단코 없어! 너는 네 앞가림 잘하는 녀석이긴 하다만, 그래도 냉정한 구석이 하 나도 없다고!" "삼촌, 삼촌이 날 여기 혼자 남겨 둘 수 없듯이.....나 역시 실비를 여기 혼자 남겨 둘 수 없어. 제임을 믿고, 여기 사람들이...나와 제임 을 봐서라도 실비에게 친절하게 해 줄 거라는 건 알아. 하지만....그 래도 그럴 수 없어. 도저히-" "날 믿어주면 안 되겠냐." "믿고 믿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야. 단지....실비를 혼자 둘 수가 없을 뿐이야." "얼간이 같은 녀석." "제임...." "그렇게 좋아하면서, 왜 친구에게 양보했던 거냐." 루첼은 쓰게 웃고 말았다. "......행복할 줄 알았거든." 그러던 그는, 고개를 들다가 문 앞에 있는 실비를 발견했다. 루첼의 눈길이 멍하니 멈추자, 제임도 뒤를 돌아보더니 머쓱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이서 이야기 잘 해봐." 그리고 제임은 뒷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루첼은 다 꺼져 버린 담배를 재떨이 위로 던져 버리고는 말했다. "어디부터 들었어?" "루첼이 세 명을 책임져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다 들었구나." 실비의 얼굴은 파리했다. 그리고 벌써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 나 때문에....여기 계속 남아 있는 거야?" "아니야. 달리 갈 곳도 없거든." "그....그렇게 하지마. 아니, 안 되면 내가 여기를 떠날게." "바보냐, 너.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너 혼자 못 보내." "하지만 나 때문에 오빠가 희생하는 건.......볼 수가 없어. 한 번으로 족해...제발, 나.....여기서 잘 살아 갈게. 나, 바보 같아서 무섭고 외롭 기도 할 테지만, 그래도 강하게 버티어 나갈 거야. 그러니..." "그런 말하지마. 화 낼 지도 몰라." "오빠......!" 실비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루첼은 손을 들어 그 눈물을 닦아주 었다. 그러나 그는 편안하게 말했다. "내게 무엇이 얼마나 남았다고 생각하는 거니. 학교는 더 다닐 수 없고, 쥰도....베크만 님도 잃었어....." 루첼은 마지막 말은 아꼈다. 어디로 사라졌을 지 모르는, 그러나 도와주어 할 때 제대로 도와주 지도 못하고 그런 일을 당하게 하고...이제는 찾을 수도 없고, 찾으 러 갈 수 없는 친구 녀석도 없다. 녀석도 준 만큼이나 도움 될 일은 없을 녀석이지만, 실비와 마찬가지로 안전하다는 것만 확인한 다면 너무도 가슴 편해질 녀석이었다. "실비, 너를 위해 머무는 게 아니야.....너마저 없으면 난...정말 지 쳐 죽어버릴 것만 같아...." 그 때 조용히 문이 열리더니 제임이 다시 들어왔다. 루첼도 실비도 말을 뚝 그치고 바라보자, 그는 손에 든 봉투를 흔들더니 루첼에게 집어 던졌다. "확인해 봐라. 롤레인 교수다." 서재정리를 하던 롤레인은 편지 두 통을 받아들고 서재로 찾아온 하녀의 창백한 얼굴에 의아해하며 물었다. "얼굴이 왜 그렇지, 낸시?" 늙은 하녀는 무릎을 살짝 굽혔다 피며 말했다. "손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주인님." 롤레인은 잠시 봉투로 턱을 툭툭 치고는 말했다. "혹시, 젊은이였나?" "아닙니다. 하지만...내려가야 하실 것 같습니다." 즉, 롤레인이 직접 맞이해야 하는 귀한 손님이 왔다는 것이다. 그러 나 롤레인은 편지를 뜯으며 건성으로 말했다. "내려가서 전해, 금방 가겠다고." "알겠습니다, 주인님." 주인의 성격을 잘 아는 낸시는 예의 어쩌고 하고 호들갑 떠는 대신 얼른 문 닫고 나갔다. 편지를 뜯으니, 역시 예상했던 모든 것들이 다 담겨 있었다. 로멜 총장은 롤레인의 사직서를 받아들였으며, 베넬리아에서 온 편 지봉투에는 당장에 배를 보내겠다는 단돌로 대통령의 흥분 어린 편 지와 함께 다른 마법사들이 보낸 십 여 통의 편지까지 같이 들어있 었다. 자리를 오래 비우기는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편지를 책상 위에 툭 던지고는 서재를 나가 응접실로 내려갔다. 내려가다 보니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낯선 냄새가 물 씬 풍겨왔고, 그것은 그 '귀한 손님'이 몇몇 일행을 데리고 왔다는 것이다. 게다가 묘한 긴장감 같은 것이 집안에 깔려 그녀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러던 그녀는, 응접실 문과 현관 앞에 낯선 사내 둘이 서 있는 것 을 발견했다. 키가 크고 풍채가 좋은 청년들로, 허리에는 검을 차고 있었다. 그녀가 내려오자, 그녀가 이 집의 주인이며 예의를 차려야 할 만한 신분임을 알아본 그 기사들이 가볍게 목례를 올렸다. 그러나 롤레인 은 그들에게 아무 인사도 건네지 않고는 응접실의 문을 열었다. 옆 에 있던 기사가 그녀 옆으로 팔을 뻗어 문고리를 뺏더니 대신 문을 밀었다. "고마워요." 그녀의 인사치레에 기사는 고개만 끄덕여 보일 뿐이었다. 롤레인은 이 청년을 두꺼비로 만들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응접실 안 으로 들어갔다. 아니, 악어도 좋을 것 같다. 응접실 안에 한 남자가 서 있더니, 그녀가 들어오자 말했다. "처음 뵙겠소, 오거스트 롤레인." 키는 아주 컸고, 풍채 역시 앞서 만난 두 기사보다 좋았다. 또한, 아 직 장년의 활기가 남아있는 얼굴에는 젊은 시절의 힘과 준수함도 어렴풋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눈빛만은 아니었다. 천년을 살아온 듯 무심하고도 깊은 눈이 롤레인을 바라보고 있었고, 롤레인은 그런 모 습에 이 남자를 앞에 놓고 대부분의 사람이 느껴야 하는 감탄도, 황 공함도, 아니 너무나 당연한 놀라움조차 롤레인은 느낄 수 없었다. 그저,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오를 뿐이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사이러스 폐하." *********************************************************** 작가잡설: 로메르드의 브리올테와 켈브리안과, 로슈만의 로벨리아나 로드릭의 차이는.....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지요. 아마추어야 서툴러도 쑥스럽게 웃으며 무대에 나올 수 있지만, 프로의 세계에는 실수란 용납되지 않습니다. 살짝만 실수해도 당장에 칼에 찍히든 독마시든 해서 끌려 내려오는게 로슈만. 켈브리안 양이야 '어머나 세상에, 그런 험한 일을!'할 테지 만.....로벨리아나 로드릭이나 '아아, 이번에는 그렇게 해야 한다 이거지....해 치워. -_-' 하고 태평하게 명령할 위인들이며, 그런게 그네 나라에서는 상식이지요.......세레오드 대공 처럼 오랜 라이벌이 똑같은 수준이라는 행운을 누리지 않는 이상, 브리올테 정도면...로슈 만에서는 권력유지하기 무지 힘든....게 아니라 아예 불가능합니다. 제 멋대로인 우두머리도 용납하지 않으니까.....^^;;; 이것이 바로 로메르드가 로슈만에 비해서 말랑한 사유입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19장 *************************************************************** [겨울성의 열쇠] 제89편 남겨진 열쇠#4 *************************************************************** 롤레인이 그 유명한 나셀의 용, 사이러스를 보며 떠올린 것은 그가 지난번에 만난 자켄과 아주 닮았다는 것뿐이었다. 약간 각진 턱이라 든가, 깊은 눈매라든가, 특히 이마 선은 완전히 비슷하다. 물론 자켄 쪽의 눈매가 훨씬 부드럽고 호감가긴 하지만 말이다. 사이러스가 말했다. "지난번에 내 아들을 위해 수고해 주셔서 고맙소." "저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제게는 아드님을 말려들게 했으면서도 지켜주지 못한 죄밖에는 없습니다." "마스터, 나는 그 일에 대해 아무에게도 책임을 지우지 않기로 했 소." 롤레인은 다시 뜨거운 것이 확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면 당신의 큰아들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았다는 뜻이군 요." 사이러스의 눈길이 멈추었다. 잠시 시간이 지났을까, 멀리서 초인종의 종소리가 집안을 시끄럽게 울렸다. 롤레인이 슬쩍 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녀를 잠자코 바라보고 있던 사이러스가 말했다. "그렇소." 롤레인은 조용히 웃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군요, 전하. 그리고 전하의 큰아드님 이 관련된 그 일에 대해서는....다른 곳에서는 절대 이야기하지 않을 테니 안심하세요." "....마스터, 나는 당신을 원망하려 온 것이 아니라, 감사하기 위해 온 것이오." 문 여는 소리가 들려온다. 느닷없이 문 앞에 서 있는 기사들에게 놀 라 묻는 젊은이의 목소리와 하녀의 해명...납득한 듯, 젊은이는 웃으 며 하녀에게 인사한다....롤레인은 드디어 그녀가 기다리던 사람이 왔다는 것을 알았다. 사이러스가 말했다. "말하든 말든 상관없소. 그것은 그 아이가 저지른 일이며, 그 아이 가 책임져야 할 일. 만약 수습하지 못한다면.....그 정도 밖에 안 되 는 아이일 뿐이오." 롤레인은 차분한 자신에게 자신이 더 놀라며 말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분이군요, 전하는." "당신은 왕이 아니니까. 또한, 자살한 아내도.....저주받은 아들 역시 없으니...이해해 주기를 바라지는 않소. 그저, 나는 내 눈으로 직접 당신을 보고 싶었고, 직접 말하고 싶었을 뿐이오." "......" 무언가 퍼덕거리는 그림자를 드리우고는 쏟아지는 햇빛을 가르며 날아갔다. 열린 창문으로 가벼운 바람이 일어왔고, 사이러스의 은빛 머리카락이 잠시 흔들리고는 가라앉았다. 그는 이마로 손을 가져가 흩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다시, 은빛 머리카락위로 빛이 부 서진다..... 롤레인은 왜 지금은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 않는지, 그제야 깨달았 다. 아무 소용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생물을 향해 절규하는 듯 어리석고 허망한 일이며, 롤레인 자신에게는 끔찍하기까지 한 일이었다. 헛수고는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분노를 엉뚱한 곳에 낭비하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이 지겨 운 시간이 어서 끝나기를, 그리고 그녀의 일상으로 돌아와 그녀가 하고자 하는 일에 모든 것을 투자하고 싶을 뿐이었다. 롤레인은 그 런 자신이 우습기도 했다. 한 나라의 왕을 앞에 놓고 한다는 생각이 고작 언제 꺼지나, 정도라니. "당신이....이것도 이해할 거라 생각하지는 않소. 아니, 짐작하기도 어려울 거라 생각하오. 자신의 죄를, 자식에게서 확인하는 것이 어 떤 기분인지....그 아이를 볼 때마다, 나는 언제나 내 죄를 거듭 확인 하게 되고.....정작 괴로운 것은 그것이었소." 그 아이도 당신을 두려워했지요, 전하. 롤레인은 생각했다. 집안과 관련된 일만 떠올리면 얼굴 색이 확 변 하곤 하던 아킨을. 그 소년은 뼈 속까지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으로 옭아매져 있었다. 어쩌면, 그 형은 아버지의 연장선에 있는 것일 뿐 인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모든 것을 물려 받아, 아버지와 똑같은 것 을 행할 형 말이다- 롤레인이 말했다. "아킨은 이제 이곳에 없습니다." "물론 내가 택한 것이 옳았다고, 그게 가장 나았다고 변명하지는 않 겠소. 단지, 나는 지금 당신에게 내 입장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오......" 롤레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툭, 하고 줄 하나가 끊어지더니 담아 놓았던 것이 와르르 쏟아지고 있었다. 깊게 숨겨져 있던 무언 가가 빛이 번득이며 드러났다 사라지고.... "마스터, 지금 나는......아내를 잃었을 때만큼이나 슬프오." 그리고 연약하기만 한 진심. 이 진심을 향해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한탄. 아킨의 아버지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만큼은 롤레인은 이 아이 의 아버지를 '경멸'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하여 감동할 수 없는 지- 그래서, 지금 내게 그 말을 해서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큰아들 을 한 대 때려줄 용기조차 없는 남자가, 아들이 없어졌으니 좀 찾아 나 달라고 다른 나라에 하소연할 애정조차 없는 남자가, 어찌하여 지친 늙은이처럼 내게 한탄한단 말인가. 어차피 롤레인은 스승인 컬린과 베넬리아의 대통령을 제하고는 그 누구의 권위도 인정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무시 한다-에 가까웠다. 그러니 롤레인은 너무나 솔직한 경멸을 이 남자 에게, 권위와 위엄과 신분에 구애 없이 쏟아 부어댈 수 있었다. 사이러스가 말했다. "휘안토스를 위해서는.....내가 직접 그 아이를 찾을 수는 없소. 명령 할 수도 없고. 그러니, 이렇게 부탁할 뿐이오...마스터. 그 아이를 찾 아 주시오." 저 말이 나올 줄, 롤레인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전 혀 기쁘지도 않았다. "최선을 다해 그리할 것입니다." 롤레인은 빙그레 웃으며 그리 답했고, 그렇게 사이러스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 버렸다. 그 다음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떻게 인사 를 하고 어떤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나갔는지 하나도 신경 쓰지 않 았다. 그런 기이한 공황상태가 깨진 것은, 낸시가 들어왔을 때였다. 그제야 롤레인은 이제 응접실 안에 사이러스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혹스러울 지경이었다. 낸시는 롤레인의 눈치를 살피고는 슬쩍 말했다. "배웅.....안 하십니까?" 롤레인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알아서 가라고 해. 이쁜 귀빈도 아닌데 뭐. 그리고 누구나 다 엎드 려 배웅 할 텐데, 나 하나 정도는 안 해도 되겠지." 이런 주인에게는 눈물나도록 익숙한 낸시가 말했다. "그렇다면 마법사 님, 기다리던 분을 들여보내도 되겠습니까?" "물론. 어서 들여보내." 낸시가 나갔다가 문제의 그 손님을 데리고 들어왔다. 롤레인은 사이러스와는 정 반대로, 너무나 환하게 웃으며 그를 맞이 했다. "어서 와, 그란셔스 군. 한참이 지나도 안 와서 못 받았나 했지, 뭐 야." 루첼은 낸시가 문을 닫자 어깨를 으쓱하고는 정중하게 말했다. "....일이 좀 많았거든요. 건강해 보이시니 다행입니다." "튼튼하지, 나야. 어쨌든, 아무 데나 앉아. 아, 조기 앉으면 되겠다." 그리고 롤레인이 먼저 앉았다. 그런데 루첼은 앉지는 않고 한번 문 쪽을 돌아보다가는 결국 망설이며 말을 꺼냈다. "그런데 방금 전에 나간 분......누구와 좀 닮은 것 같군요." 롤레인은 쉽게 짐작했다. "그 엘프 말이겠지, 그란셔스?" "자케노스입니다." 롤레인은 웃고 말았다. "그럼, 그와 똑 닮은 사람이 그 아버지 밖에 더 있겠니? 그와 닮은 엘프 어머니는 세상에 없잖아." 루첼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렇다면 저 분이......" 그 엄청나게 유명한 사이러스 대공왕이라 말하나 했는데, 루첼은 엉 뚱하게 말했다. "아키의 망할 아버지군요." 그 말에, 롤레인은 웃음이 터져 버리고 말았다. "교수님?" "아냐, 아냐. 그렇게도 되나 싶어서.......파하하하~~! 멋져, 그란셔스 군. 아주 마음에 들어." 루첼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롤레인 맞은 편에 앉았다. 롤레인은 안경 을 벗어 눈물을 닦고는 다시 썼다. "그건 그렇고, 그란셔스 군......" "그냥 루첼이라 부르십시오." "미안. 학생은 워낙에 나이가 많은 데다가 벌써 성인이라, 다른 어 린 학생들보다는 좀 거북하거든. 하여튼.....학생을 부른 건 좀 중요 한 문제 때문이야. 또, 루첼에게는 갚아야 할 것도 있고." "들쳐업고 뛴 것 정도가지고.....갚아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건 안 하면 벌받는 겁니다." "그래도 그 정도도 충분히 수고한 거야, 루첼. 어쨌건, 그 일에 대해 서......그냥 넘어가고 싶지는 않아서. 그래, 이제 학교가 개교하려면 당분간은 힘들 것 같은데, 그 사이에 정해진 일이라도 있어?" 루첼의 눈이 당장에 가라앉았고, 어깨도 축 늘어졌다. "정해진 것은 없지만, 해야 할 일은 있습니다." "할 일? 중요한 일이야?" "임신한 여자를 책임져야해서요." 롤레인이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자, 루첼은 싱긋 웃으며 변명했 다. "충분히 가능한 나이지 않습니까." "....." 롤레인은 가능하지, 어쩌고 하면서 동의하는 대신 무섭게 침묵할 뿐 이었다. 장난 칠 상태가 전혀 아니라, 루첼은 얼른 말했다. "그런데 왜 부르셨습니까?" 그러나 롤레인은 그냥 넘어가 주지 않았다. "일 자리는 있나?" "아직 없습니다." "결혼은?" "물론 안 했습니다." "예정은?" "여자 쪽에서 동의해야 가능하지요." 롤레인이 끄흥---하고 한숨을 내 쉬었다. "아이는 언제 태어나지?" 루첼은 손가락을 하나 둘 구부리더니, 자신 없게 말했다. "내년 4월경에 태어날 것 같군요....열 달 맞죠?" "가끔 아홉 달이나 여덟 달이 될 수도 있어. 그런데 그런 것치고는 아주 태평하군, 루첼." 루첼은 천장을 노려보았다. "......노력 중이긴 합니다." "사고는 번개처럼 끝나지만, 고생은 애가 다 자랄 때까지 계속된다 는 건 알고 있었나, 루첼?" 억울했지만 루첼은 참았다. "알...고 있습니다." "학업은 어떻게 할 생각이지? 그렇게 나간다면, 계속하기 힘들어 질 텐데. 애 아빠란 거, 쉬운 일이 아니라고." 이번에도 참기로 했다. 그래도 상대는 자그마치 교수님이다. (제임이 면 벌써 주먹 날라갔다.) "....압....니다." "각오는 돼 있는 것 같네. 그래, 돈은 좀 있나?" "한 2-3년 정도는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요. 하지만, 무턱대고 쓸 수 는 없죠. 나중에 어떻게 될 지도 모르는데." "그럼 됐네." "일단은 된 것일 뿐, 근본적으로 해결 된 건 아닙니다. 돈 떨어지기 전에 어서 어서 일자리를 구해야 해요." "내 말은 '일단'만 걱정 없으면 된다는 거야. 좋아, 루첼 군. 어쨌 든......공부를 계속할 생각은 있겠지? 가만, 반드시 로메르드에서 공 부해야 한다는 이유라도 있나?" 루첼은 생각 없이 답했다. "그런 건 없습니다." "좋아, 그렇다면 지금 당장나가서 아무 사제나 붙들고 결혼식 올린 다음 다시 찾아와." "네?" "난 곧 베넬리아로 떠날 예정이다. 그리고, 그곳에 도착할 때 즈음 베넬리아 국립 마법원에서는 신학년이 시작될 테지. 소개장 써줄 테 니, 그곳에서 남은 1년 채우고 졸업하도록 해. 그 다음 바로 내 밑 으로 들어와." "....저, 교, 교수님?" 롤레인은 루첼이 무슨 말을 늘어놓을 지 단번에 알아채고는 그 말 을 일거에 제압했다. "생활비는 알아서 하고, 나머지 학비는 내가 베넬리아 총장에게 말 해 놓겠다. 내가 소개하는 학생이니 선심 좀 쓰라고 말이야. 집은... 그곳의 내 집이 좀 크니까, 맨 위층 하나 정도는 빌려주지. 아이 하 나 뿐인 부부에게는 부족함 없을 거야. 설마, 둘 생길 때 즈음에는 네 집이 생길 테지." 루첼은 이제야 말로, 정말 태어나서 처음으로 말문이 막혀 버렸다. 지금 롤레인이 태평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호의 인지 알고 있고, 지금의 루첼에게 그것은 기적이라 불릴 만한 엄청 난 행운이었다. 속에서 크고 뜨거운 것이 벅차 올라서, 정말 할 말 이 없었다. 루첼이 한참이나 말이 없자, 롤레인이 말했다. "....하기 싫다거나, 하는 발칙한 생각은 아니지?" "물론...아닙니다...하, 하지만....전 이 정도로는....솔직히...솔직히..." "감격해서 울고 싶으면 펑펑 울어도 돼, 루첼." "저...." 루첼은 이제야 알 것 같다. 눈부시게 빛나던 그 하얀 빛 무리들, 바 닥에 바닥까지 내려가 누워 있으며 절망했을 지라도, 루첼은 언제나 일어나 걸었다. 무엇이 나올 지 모를 그 멀고도 먼 길, 그 혼자만의 길을....그리고, 언제나 새로운 길을 찾아, 어떤 장애가 쏟아져도 한없이 걸어갔다. 그러다 막다른 곳에 도착하더라도, 그곳에서도 그는 슬퍼할 시간이 지나면 또 길을 걸었다. 등불 없는 침묵과 어둠의 길, 언제 빛이 터질지 몰라도....그래도 그 는 걷고 또 걸었다. 살아있고, 살아야 하고, 그렇게 홀로 걸어가는 것이 바로 삶이었다. 눈 덮인 황야 서 있는 하얀 성, 그리고....매서운 바람이 몰아닥치고 뿌연 눈보라에 한 치 앞도 내 보낼 수 없어도.....저것이 작고 어린 내 앞에 가혹한 길이라도.. 그래도 루첼 그란셔스는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길을 잃지도 포기하지도 않고 걷다 보면 언젠가는 이렇게 닿게 된다. 또 한번의 희망과 기회를- "감사....합니다, 교수님." 아킨은 차가운 바닥에 누워 숨을 골랐다. 두려움과 외로움, 고통...그리고 동사직전에 밀려드는 부드러운 졸 음처럼 달콤한 자멸의 유혹. 그 한 걸음 직전에 서서, 아킨은 다시 한번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그래도 이대로 사라져 버릴 수는 없다- 살 이유 따위는 필요 없었다. 사니까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으니 싸워나가야 하는 것이다. 비록 거인처럼 거대하고 천재지변처럼 무 자비할 지라도, 그래도 작은 칼 하나라도 들고 헤치고 싸워나가는 것이 삶의 힘이었다. 언제나, 가장 두려운 것이 자신의 죄이듯. 운명의 마지막 대결자는 바로 스스로가 낳은 절망이다. 그 야수에게 잡혀 먹히면 끝나는 것 이다. 드디어 자신의 이름마저 흐릿해지자....그는 무언가 하나, 아주 작은 조각 하나라도 남겨 놓기 위해 컴컴한 의식의 방을 더듬어 보았다. 생각나는 것 하나가 있을 거야, 저 탈로스가 무관심하게 지나칠 정 도로..소소하고, 나와는 전혀 상관없어 보일 법한 무엇이. 부풀어오르는 풍만한 달, 그리고...그 달을 바라보는 조용한 눈동자 가 기억날 듯 하다가, 결국 그것도 어둠에 집어삼켜져 버렸다. 아킨 은 뒤로 물러나 다른 것을 찾아보다가, 허공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 달과 눈동자가 합쳐지며 만들어 내는 반짝임이었다. 아킨은 그것을 움켜쥐었다. 그것은 이제는 까만 기억 속으로 그것이 내리 박히며, 캄캄한 하늘위를 떠 도는 구름에 쓸려나가는 자그마한 별 마냥 너무나 여리게 반짝거린다. 모래알처럼 작은 것, 억겁이 우 주 속을 떠도는 이 미약한 먼지조각 같은 것.... 그러나 그것을 아킨이 잡자, 그 손위로 또 다른 손이 얹혔다. 아킨 의 기억과 의지를 옭아매어 가두어 놓은 이 칠흑의 감옥 속에, '또 다른 수인'이 있는 것이다. 그는 이 모래알을 집는 순간 반응하여 아킨을 찾아낸 것이다. 어쩌 면, 그 역시 이 반짝임을 발견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찾기 위 해 검은 방안을 가로질러 달려오다가 아킨을 찾아내, 그 손을 덜컥 잡은 것일 지도 모른다. 그 손은 아킨의 볼을 감싸주었다. 그것은 따사롭고 부드러운 것, 전혀 다른 차원에서 날아들어 아킨을 발견하고는 그 이마에 입맞추어 주고 위로해주려는 움직임이었다. 두텁고 굵은 손이었으나, 아킨이 한번도 가져 보지 못한 '다정한 아 버지'같은 단단하고도 따뜻한 것을 담고 있었다. 부드러운 속삭임이 들려왔다. -백조를 기억해. 그것은 남자 목소리였다. 영혼자체에 속삭이는, 그 놀라울 정도로 깊고도 다채로운 음성. 언젠가 들어도 본 듯 했는데, 기억나지는 않 는다. 그 기억도 어둠에 먹혀 버렸으니까.... 그러자, 그가 다시 속삭인다. -반드시 기억해라, 아키. 드디어 아킨은 손에 쥔 것을 펼쳐 보았다. 그것은 고개를 젖히고 파 란 보석을 이고, 긴 여행을 준비하며 쉬고 있는 듯 날개를 접고 있 는 백조의 반지였다. 아아, 기억난다. 은은하게 쏟아지는 달빛과, 그 위를 향해 뻗은 긴 손가락....그리고 그 끝에서 빛나던 이 은빛의 반지가. 어둠이 그 속박을 풀기 시작했고, 정복이 완전히 끝났다 생각했는지 의기양양하게 몸을 젖혀갔다. 이제는 '이름을 잊은' 소년에게 남겨진 것은 없었다. 뺏긴 기억은 작고 좁은 방에 내몰려 갇히고, 자물쇠가 채워지더니 불이 툭 꺼졌다. 그러나 그의 손을 움켜쥔 누군가의 의 식인 크고 단단한 손은 여전히 그를 붙들고 있었고, 아직도 의식의 구석에서는 그것이, 마지막 빛 조각이 희미한 별처럼 빛나고 있었으 며, 그 봄볕처럼 부드럽지만 강한 속삭임이 지평선 위의 아지랑이 마냥 흔들리고 있었다. '소년'은 눈을 떴다. 머릿속은 그저 까맣기만 할뿐이지만, 그 가운데 무언가 하나가 분명 하게 반짝인다. 뚝하니 끊어져 떠 있는, 도저히 의미를 알 수 없는 기묘한 조각하나가. 백조를 기억해라..... 야트막한 빛이 천장에 깔리고 있었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장밋빛 여 명의 햇살이 퍼지고, 다시 소년의 머릿속으로 그 단어가 파문처럼 퍼지고 있었다. 백조- 소년은 그 단어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 작가잡설: 루첼과 만난 사이러스... 사이러스 - 누군가, 자네? 루첼 - 아, 아버님....저는... 사이러스 - 아버님? -_- 루첼, 아직 갈길이 멀다--! 네, 대충 눈치 채신 분들 계실 테지만....드디어 겨울키의 한 시즌이 끝났습니다. ^^;; 쉽게 말하면 전반전 끝난 겁니다. 이제 다음 시즌! 이 시작됩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20장 ************************************************************** [겨울성의 열쇠] 제20장 숲 속의 섬광 제90편 숲 속의 섬광#1 ************************************************************** 롯시온 제국 7연합, 실제로는 5연합이라 불러야 할 공국들 중 가장 특이한 곳은 단연 죠세피나 여대공의 에크롯사였다. 그곳은 고결하고 위대한, 그리고 그것이 고삐 풀린 욕망 앞에서 얼 마나 참담하게 뭉개질 수 있는 지를 자신들의 일생으로 증명한 쿼 크 대제의 일곱 기사들 중 유일한 여자였던 율피나 에칸이 그 시조 였다. 그녀 역시 영토싸움으로 얼룩지고만 말년을 가지고 있기는 했으나, 그 전에는 다른 모든 기사들이 그러했듯 갈등으로 혼란했던 서부를 평정했던 쿼크 대제의 충성스러운 기사였다. 마법사이자 기사이기도 했던 그녀는 서른 중반 즈음에 드래곤의 왕으로부터 수호를 받게 되었으며, 그로부터 수 십 마리의 와이번들을 선사 받았다. 인간의 일에는 냉랭한 경멸(이라기 보다는 무관심을 좀 고상한 면 으로 합리화시키고 싶었던 것뿐이었을 테지만)을 보내던 드래곤의 왕은 그녀와 그 일족의 영지를 인간들로부터 지키겠다는 율피나의 맹세를 받아들이고, 또한 그녀 자신이 왕에게 보여주었던 고결한 영 혼에 대한 존중의 의미로 일족 중 젊은 드래곤 열 둘과 단단한 날 개를 가진 와이번들을 기사들의 기마로 내 주었다. 드래곤들이 그들의 숲과 계곡을 넘보는 인간들을 그들 스스로의 힘 으로 쫓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너무 잦은 침입으로 귀찮은 것 역시 사실이었다. 뿐만 아니라, 제대로 힘을 키운 마법사나 기사들이라면 정말 드래곤들을 쓰러뜨릴 수도 있고, 그렇게 쓰러지는 드래곤들은 대체로 알이나 어린 드래곤들을 키우느라 쇠약해진 이들이었다. 더 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어린 새끼나 알은 당연하게도 약탈당 했다. 기사들의 손에 들어간 어린것들은 치욕과 괴로움 속에 죽어가 고, 마법사들의 손에 들어간 경우는 더욱 참담했다. 실제로, 검은 늪 의 마법사 팔로커스의 손에 들어갔던 어린 드래곤은 결국에는 일족 의 수장까지 나서야 할 정도로 끔찍한 마수로 커 버리기도 했다. 때 문에, 드래곤의 왕뿐만 아니라 쿼크 대제의 적이기도 했던 팔로커스 가 율피나와 그녀의 기사들의 손에 죽자, 드래곤은 자신의 영지를 이 인간의 영주들과 협조하여 지켜볼까 하는 생각을 떠 올렸던 것 이다. 드래곤들은 지독한 개인주의자들이라, 같은 드래곤들이라 할 지라도 영지 내에 들어오게 놔두지도 않거니와 지키라 명령을 하더라도 따르 지도 않는다. 이런 이유로, 드래곤의 영주는 율피나의 의견을 받아 들였던 것이다. 약속은 이루어졌고, 열 두 마리의 젊은 드래곤들과 와이번들은 기사 들에게 허락되었다. 그들의 도움으로 쿼크 대제는 툴칸과 알르간드 족을 휩쓸어 내 대륙을 통일했고, 율피나는 그 수호의 약속을 받아 낸 덕으로 대공의 위치에 올랐다. 인간 세상은 통일을 이루었고, 오랜만에 평화를 찾았으며, 율피나는 드래곤들의 숲이 산재 해 있는 모든 곳을 영지로 선사 받았다. 난잡 한 파괴자들이었던 기사들은 그들 아래로 들어가고, 마법사들은 각 지역 길드로 통합되어 법을 따라야 했다. 그러나 드래곤의 왕은 후에 그 약속을 두고두고 후회하다가, 결국 때 이른 수면기로 접어들어야 했다. 그녀가 쿼크 대제의 기사인 율 피나와 계약을 했던 것은 쿼크 대제보다는 율피나가 더 신용이 갔 기 때문이지만, 사실 율피나의 가문이 오랫동안 유지되고 쿼크 대제 의 나라 역시 그만큼이나 오래 유지 될 거라 기대 했었기에 마음놓 고 율피나와 약속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세계의 열두 수호자중 하나였던 그녀조차도 예상 못했던 일 이 쿼크 대제에게 벌어져 버렸고, 그 일은 악취 나는 급류처럼 쏟아 져 고결한 일곱 기사들을 타락시켰다. 그 유명한 일곱 기사의 내전에서, 안전과 편안을 위해 한 약속은 인 간을 도와주어야만 하는 족쇄요, 굴레로 전략해 버렸다. 드래곤의 왕은 몇 날 밤은 앓듯이 고민하다가, 겨우 생각해 낸 것이 지금 기사로 있는 자들이 죽으면 그 다음부터는 원하는 사람으로 고르라는 것이었다. 그 열두 젊은 드래곤은 왕의 명령을 나름대로 접수했고, 그로써 그들은 다시는 영토분쟁에 참여하지 않을 수 있었 다. ".......그리고 이 가문의 선조 되시는 룬다 하멜버그 백작께서는 그 최초의 용기사 중 한 분이셨단다. 그분은 하찮은 와이번이 아닌 정 말 드래곤을 타셨고, 그 벗인 에메랄드 빛 드래곤이 직접 선사한 비 늘도 여기 가보로 전해지고 있지...후에, 그 두 분은 위대한 율피 나 폐하를 위해 이 숲까지 국토를 확장했단다." 그리 뿌듯하게 말하는 귀부인은 무척이나 기품 넘치고 고상해 보였 다. 구불거리는 다갈색 머리카락에 조개 속껍질처럼 뽀얗고 고운 피부 를 가지고 있었고, 약간 처진 초록 눈은 정말 인형처럼 예뻤다. 입 고 있는 하얀 옷 역시, 툴칸에서 직수입한 비단으로 지어 놓은 듯 움직일 때마다 하늘하늘 거리는 것이 안개를 걸치고 있는 듯 했다. "그러니 너 역시 이곳에 있는 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단 다." 그렇게 말하고는, 그 자신은 용기사였을 지 모르나 후손은 얼마 뒤 에 변방으로 밀려나 버린 룬다 하멜버그의 후손을 남편으로 둔 하 멜버그 백작부인은 생긋 웃었다. 어찌나 자상하게 웃는 지, 유제니 아는 이 여인이 정말 자신이 무슨 짓을 해도 친절하고 착한 눈으로 바라봐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해 버 릴 정도로 유제니아는 순진하지 못했고, 이런 아줌마는 얌전하고 말 잘 듣는 아이들에게는 무한한 애정을 베풀지만 조금만 마음에 안 들으면 당장에 가차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유제니아는 무릎을 살짝 구부리며(덕택에 허리까지 아파 왔다) 공손 하게 답했다. "알겠습니다, 마님." 그러자 백작부인은 정색을 했다. "어머나, 마님이 뭐니. 아무리 피 한방울 안 섞였다지만 그래도 기 사가문의 아이인데 '마님'이라고 하녀아이처럼 부르면 못써. 편하게 아주머님이라고 부르렴." 유제니아는 얼굴을 붉히며 살며시 웃었다. 백작부인은 그런 유제니아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길고 까만 머리 카락에 뽀얀 피부, 짙은 푸른 눈동자에 긴 속눈썹을 가진 소녀가 그 렇게 웃으니, 정말 고와 보였다. 변변찮은 곳에서 데리고 와서 걱정 했는데, 이렇게 깨끗하고 예쁜 아이라 다행이었다. "그래, 유제니아 쥬르. 올해 몇 살이지?" "열 여섯입니다." "그래....내 생각이 딱 맞았구나. 여자아이가 가장 고울 나이지." 그렇게 말하며 백작부인은 유제니아를 아래위로 잘 살펴보았다. 분 위기만은 소녀에서 여자로 슬쩍 넘어 갈만한 애매한 시기였다. 살만 하고 좀 신경 쓰는 집 딸아이들이야 공부시킨다 뭐다 해서 스물 서 넛은 되어야 결혼 하지만, 그렇지 않은 집 아이는 열 일곱이면 시집 을 간다. 이 아이는 물론 후자일 것이고, 벌써 열 여섯이니 살던 곳 에서 바느질이라든가 요리 같은 것은 잘 가르쳐 두었을 것이다. 하멜버그 백작부인은 당장에 아직 결혼하지 않은 성의 기사들을 차 례차례 떠 올려 보았다. 그 중, 올해 스물 일곱인 제콘이라는 기사 가 떠오른다. 무척 성실하고 착한 남자로, 이 정도 아이라면 그 청 년에게 잘 어울릴 듯 하다. 그래, 한 일주일이나 이주일 정도 더 두 고보다가 말해야겠다. "오늘은 피곤할 테니, 네 방에 들어가서 쉬렴. 내일아침부터 우리 페트리샤와 다른 기사 가문에서 온 아이들과 함께 여러 가지 배우 게 될 거야. 모두 네 좋은 친구가 될 거란다." "감사합니다." 백작부인은 흡족해서 빙그레 웃고는 뒤를 살짝 돌아보며 말했다. "페티, 안내해 주려무나." 그제야 부인 뒤에 물러나 있던 예쁜 소녀가 앞으로 나섰다. 어머니 를 꼭 닮은 얼굴에, 진한 갈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소녀 역 시 활짝 웃으며 말했다. "가자, 유제니아." "잘 지내야 한단다." 부인은 다시 한번 말했다. 응접실을 나오자 유제니아는 그제야 어깨가 축 처졌다. 깐깐한 여자가 아니라 다행이었다. 뉴마르냐 성 사람들이 하도 협박 을 해대서, 유제니아는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성의 마님은 모조리 마귀라도 되는 줄 알았다. 생각해 보면 그것도 다 유제니아가 잘 처 신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테지만, '그런 아줌마들은 너 같은 여 자애를 데려다가 늙은 귀족들의 첩실로 판단다.'라고 으름장을 놓던 창잡이 뮬은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았다. 물론, 뉴마르냐에 넘쳐나는 괴물들과 마법왕국의 알르간드 족에 익 숙해져 엔간한 으름장에는 게으른 고양이 같은 반응을 보이는 유제 니아에게 그것이 가장 효과적인 협박이긴 했다. (솔직히, '마님들은 말이야, 보름마다 마녀로 변해서는 너 같은 아이를 잡아먹는단다.' 하고 말한 쿠르바 할아범의 경우에는 측은할 지경이었던 것이다.) "아차, 유제니아." 페트리샤가 부르자, 유제니아는 얼른 어깨를 피고는 허리 앞으로 두 손을 모았다. 그 꼴로 있자니 창피해서 죽을 맛이었지만, 그래도 유 제니아는 꾹 참아 버티었다. "네가 살던 곳은 어떤 곳이었어?" 밤마다 늑대인간이 울부짖고, 와이번들이 절벽을 긁어대는 소리가 훤히 들리며, 알르간드 족이 창으로 등을 벅벅 긁으며 산책 나오는 곳이라 어찌 말하겠나. 유제니아는 그저 울적하게 웃으며 말했다. "말...할 거리도 없어요. 여기에 비하면 참 어려운 곳이지요." 얼굴 간지러워 미치겠지만 이리 말해야 더 안 물어 볼 거라는 생각 이 들어 별 수 없이 꾹 참아 본 것이다. 그리고는 슬쩍 성의 창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숲과 호수를 바라보았다. 산아래 호수는 파랗고 깊어 보였고, 그 위로는 늦여름 익은 하늘이 쏟아져 내려 더욱 새파랗게 보였다. 호숫가의 숲은 아주 울창하고 거대했고, 여기 저기 하얀 절벽으로 뚝 끊어진 험준한 산으로 이어 졌다. 돌과 잿빛 흙덩이에, 풀들도 겨우 겨우 짧게 자라는 뉴마르냐 의 거친 황야에 비할 바 못 되었다. "뉴마르냐라면 정말 유명하지. 그런 곳에서 몇 년 동안 살았어?" 유제니아는 손가락을 꼽아 보았다. 아버지가 유제니아까지 딸린 어 머니를 만나 결혼한 다음 일자리 찾아 달려왔다고 하니, 정확히 따 지자면 7년이다. 아무리 보수가 두둑하다 하더라도 에크롯사에서마저도 유명할 정도 로 험한 곳으로 간다 하자 오빠와 아저씨는 절대 안 된다고 아버지 발목 붙잡고 말렸다. 그러나 철없는 아버지가 탕진해 버린 빈곤한 재정 앞에서는 할 말이 없어지는 그 두 남자는 결국에는 아버지와 함께 이삿짐을 싸야 했다. 문제는, 당시에 몸이 약한 편이었던 유제 니아가 그곳에서 자주 눕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아저씨는 바쁜 나날을 보내다 돌아오는 틈틈이 계부 의 멱살을 흔들며 '내 이럴 줄 알았어! 여기가 어린 여자애가 살기 좋은 곳이냐, 좋은 곳이냐고! 차라리 내가 데리고 가고 말지-!' 하고 으르렁대곤 했다. 워낙에 성품이 조용한 의붓오빠는 아무 말 하지 않기는 했으나 매일 매일 꼬박 꼬박 몇 시간 동안 노려보기만 함으 로써 아저씨보다 더욱 무서운 항의를 보였다. 그들이 그렇게 과잉보호를 보이는 이유는, 그 시커멓고 덩치 좋은 남자들에게 은방울꽃처럼 작고 여린(물론 그들의 '매우' 주관적인 기준일 뿐이다.) 유제니아는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존재였기 때문이 었다. 오빠의 친모이자 아버지의 전 부인을 병으로 떠나보내고 오랫 동안 칙칙하게 살아왔던 셋이었으니, 유제니아와 그녀의 어머니는 천사요 요정이요 꽃이니, 절대보호 대상이었다. 그들을 생각하자 유제니아는 갑자기 울적해졌다. 아저씨는 애당초 자주 자주 떠나 밖으로 돌던 사람이었었지만, 오빠 역시 몇 년 전에 그를 따라 떠나 버렸다. 어머니는 4년 전에 돌아가 셨고, 아버지도 두 달 전에 돌아가셨다. 그 시끄럽고도 철없는 가족 들이 이런 저런 핀잔과 악담을 늘어놓으며 다시 모일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여기야, 유제니아." 유제니아는 눈물이 글썽해지려는 것을 얼른 거두고는 고개를 반짝 들었다. 페트리샤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검고 단단한 문고리를 쥐고 있었다. "그리고 이 방을 같이 쓰게 될 여자아이가 있어. 활달하고 드센 아 이이긴 하지만,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즉, 원래부터 이 방을 쓰고 있는 아이가 있다는 말이다. 활달하고 드센 아이라고 하니, 좀 불안하기는 했지만(성질 더럽다는 말을 무 척이나 돌려서 하는 말 아닌가) 유제니아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 웃음이 마음에 드는지 백작 영애 페트리샤도 웃어주었다. *********************************************************** 작가잡설: 동생이, 내가 시집가는 꿈을 꾸었다네요. 동생은 매우 자랑스럽게 말했다만, 꿈이 그리도 쉽게 현실이 된다면 제 남자 친구는 이병헌입니다.... ........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20장 *************************************************************** [겨울성의 열쇠] 제91편 숲 속의 섬광#2 *************************************************************** 방안에는 벌써 유제니아의 짐들이 옮겨져 있었다. 방은 좁고 어두웠다. 벽이 짙은 회색 돌로 되어 있어 안은 축축하고 으슬으슬했고, 벽난로가 있기는 했지만 덧문이 헐렁하게 덜그럭거리 는 것을 보니 겨울에 꽤나 추울 것 같았다. 유제니아는 창가로 가 덧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오면서 보았던 호 수 대신, 숲으로 이어지는 긴 평원이 보였다. 그 위로 하얀 양떼들 이 한적하게 풀을 뜯고 있었고, 바람이 불어오자 녹색의 길고 부드 러운 풀들이 쓸려 나간다. 유제니아는 얼른 창가에서 몸을 떼고는 우선 짐을 챙길 생각으로 돌아섰다. 둘러보니, 침대 옆에 옷을 넣어두라는 듯 작고 낡은 궤짝 이 놓여 있었다. 궤짝을 열어보니, 안은 아주 잘 닦여 있다. 유제니 아는 기분이 좋아져 꾸러미를 열고 그 아래에 몰래 숨겨 온 것들을 재빨리 아래에 깔고는 그 위로 옷을 챙겨 넣기 시작했다. 리사가 깨끗하게 빨아둔 옷들이 기분 좋은 향내를 풍겼다. 그녀가 캐온 향초들로 빤 옷들은 늘 이런 좋은 냄새를 풍기곤 했다. 하얀 빨래들을 가득 걸어 놓으면, 그곳은 꼭 꽃밭처럼 은은한 향내가 풍 겨오고 그녀는 그 옷들을 하나 하나 널며 기이한 알르간드의 노래 를 부르곤 했다.... 다시 밀려드는 서러움과 외로움에 눈물이 치밀어 올랐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 지내다 보면 당장에 오빠나 아저씨가 달려 올 거라 했지만, 그들이 오지 않을 거라는 건 유제니아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두 달이 지나도 연락한통 없었고, 결국 석 달째 되던 어느 날 어느 낯선 사람들이 와서는 어머니의 집안과 관련된 어느 백작가에서 유제니아를 거두어 주기로 했다는 말을 전했다. 유제니아는 잘 됐죠, 뭐. 지낼 곳도 생기고......하고 웃 으며 말하기야 했지만, 혼자 빈집에 남게 되자 밤새도록 울었다. 그 두 사람이 유제니아를 잊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그 둘의 애정은 너무나 컸고 유제니아의 믿음은 더욱 컸다. 그들은 유제니아를 사랑하고, 유제니아는 그런 그들의 애정을 믿는다. 그러니 분명 일이 생긴 것이다. 그것도, 2년 동안 연락 한 번 못할 만한 큰 일이. "죽기라도 했으면....나도 따라가 버릴 테다." 유제니아는 눈물을 훔쳤다. 그 때 쾅, 하고 문이 열렸다. 유제니아는 서둘러 옷에 얼굴을 문질 러 눈물을 닦아내고는 일어났다. 그 전에 궤짝 바닥을 슬쩍 봐서 가 지고 온 물건들이 잘 숨겨졌는지 확인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키가 크고 예쁜 여자아이 하나가 턱을 들고 유제니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한 금발 머리에, 옅은 담색 눈을 가지고 있었고 꾹 문 입 이라든가 도전적인 눈빛이라든가 상당히 성깔 있어 보였다. 이 여자아이가 바로 룸메이트이구나, 해서 유제니아는 웃으며 인사 했다. "안녕." 그런데 그 여자아이가 씩 웃더니 말했다. "내 방으로 새로 온다던 촌뜨기가 너야?" "......" 유제니아는 여전히 방긋 웃는 얼굴로, 정리하던 옷 궤짝 앞에 털썩 앉았다. "이봐, 내 말 안 들려? 촌뜨기가 너냐고 물었어." 그리고는 유제니아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유제니아는 손을 휘둘러 그 손등을 찰싹 때렸다. 소녀는 아픔에 후닥닥 손을 움츠렸다. 유제니아는 고개를 슬쩍 돌려 그런 소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름." 소녀는 얼결에 말했다. "후, 후아나 레휘." "유제니아 쥬르. 만나서 별로 안 반갑다, 얘." 그리고 유제니아는 손을 흔들고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잠시 벙벙하게 있던 후아나는 금방 발끈해져서는 유제니아가 옷을 정리하고 있는 궤짝의 뚜껑을 움켜잡고 눌러 버리려 했다. 그러나 유제니아가 더 빨랐다. 그녀는 단번에 그 손을 후려치고는, 곧바로 후아나의 무릎을 빡 쳤다. 후아나가 아흑, 신음을 흘리고는 풀썩 무 릎을 꿇었다. 정말, 송곳에라도 맞은 듯 아팠다. "이, 이 계집애가!" 유제니아는 태연하게 말했다. "몇 살이야?" "뭐--!" "나이 몇이냐고." "열 일곱이야! 그러니 난 어른이고, 너 같은 꼬맹이에게 이런 취급 당할 이유가 없다고 봐! 너, 너 정말...." 벌써 말이 떨리는 모양새가 영 가소로왔지만, 유제니아는 여전히 상 냥하게 말했다. "난 열 여섯이야." 그 말에 당장에 자신감을 회복한 후아나는 심술궂게 웃었다. "발육이 참 부진하네~~? 그 나이 먹도록 그리 비쩍 마르고 비리비 리하니." 유제니아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러는 너는 한 서른 되면 할머니로 보이겠다." "이게--!" 결국 독이 올라버린 후아나가 유제니아의 머리카락을 휙 잡아 당겨 바닥에 매 꽂았다. 그런 식으로 나올 줄은 전혀 몰라, 너무 갑작스 레 당해 버린 유제니아는 얼결에 바닥에 머리를 부딪히고 말았다. 돌로 된 딱딱한 바닥이라, 쾅 부딪히니 눈물이 나올 정도로 아팠다. 숲에서 만난 알르간드 족의 주먹에 맞은 적은 많았으나, 머리끄덩이 를 잡혀 본 적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아니, 유제니아는 동네에서 또래와 싸울 때도 머리를 잡거나 잡힌 적이 없었다. 발길질과 주먹, 간혹 이와 턱으로만 싸웠을 뿐이다. "아아.....읏. 아파라..." "이 건방진 게, 정말--!" 씩씩대던 후아나가 다시 손을 휘둘렀다. 유제니아는 피하지도 못하 고 그 손에 옷깃이 잡아 뜯겨 버렸고, 옷이 찢어지며 뭐가 툭 끊어 져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유제니아는 놀라 그쪽을 보더니 후아나 를 팍 밀쳐 버렸다. 후아나가 저 멀리 나가떨어지자, 유제니아는 후 닥닥 달려가 떨어진 그것을 주웠다. 꼴이 생각보다 엉망이자 유제니아는 울상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후 아나는 그런 유제니아의 머리채를 다시 움켜잡았다. 화가 머리끝까 지 치밀어 오른 유제니아는 그 무릎을 걷어차고, 멱살을 잡아 침대 로 내던져버렸다. 벽에 뒤퉁수를 크게 부닥친 후아나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는, 곧 아픔에 눈물이 가득 고인 채 외쳤다. "너, 너 오늘 내 손에 절단 날 줄 알아!" 그러나, 그 때 문이 쾅 열리며 살집 잘 잡힌 여자가 들어왔다. "뭐 하는 짓들이냐--!" 후아나나 유제니아나 둘 다 뚝 멈춰 서서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 다. 첫날부터 일 쳤다, 라는 생각에 유제니아는 새하얘졌고, 후아나 는 새파래졌다. 헐레벌떡 달려온 듯 그 살집 좋은 여인은 숨을 가쁘게 몰아쉬더니, 아직도 이제 거의 허옇게 질린 후아나와 엉망진창이 되어서는 손에 뭘 들고 울먹거리려는 유제니아를 보았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그녀는 단번에 알아챘다. (약간의 오해를 좀 보태서) 여자는 후아나에게 달려가 그 뺨을 호되게 후려갈겼다. 철썩--! 유제니아가 찔끔했을 정도였다. "후아나 레휘-! 이 망나니 계집 같으니, 또 새로 온 아이에게 손을 댄 거냐!" "내 잘못이 아니라고요! 저 계집애가 먼저...." 유제니아는 너무나 억울하다는 듯 바르르 떨고는 눈물을 훔치며 고 개를 돌렸다. 방금 전에 그 송곳 같은 주먹과 발길질에 맞았던 후아 나는 기가 막혀서 더 험악하게 외쳤다. "속지 말아요. 저 계집애가 먼저 잘못한 거라고요! 방금 전....." "닥쳐! 내가 모를 줄 아니?" 다시 그 여자가 후아나의 뺨을 세게 후려갈겼다. 이번에는 유제니아 조차 오싹할 정도로 엄청나게 휘두른 것이었다. 후아나는 나가떨어 져 벽에 쿵 부딪혔고, 입술이 터져서 피까지 스며 나왔다. 여자가 무섭도록 엄격하게 말했다. "넌 오늘 저녁은 없다. 하여간, 제 어미 행실만 닮아서 하는 짓거리 하고는! 한번만 더 이런 짓을 하면 무너진 탑 꼭대기에 가두어 버릴 테다!" 여자는 곰 발바닥만큼이나 두터운 손을 탈탈 털고는, 유제니아를 돌 아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그래서 더 무 서웠다.) "첫날부터 좀 놀랐겠구나. 내가 단단히 주의시켜 줬으니, 안심하렴. 뭐 하면 말해라. 방을 바꾸어 줄 테니." 유제니아는 정말 놀라서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그녀는 후아나의 눈초리를 보게 되었다. 후아나는 터진 입술에서 피를 닦아내며, 독사 같은 눈으로 유제니아 를 노려보고 있었고, 유제니아는 왠지 잘못 건드린 것 같다는 생각 이 들었다. 후아나를 잘못 건드려 놓은 덕에, 유제니아는 모두 혼자서 다 해야 했다. 식사시간이 언제인지도 몰랐고, 어디가 식당인지도 몰랐다. 그 렇게 여기 저기 헤매다가 겨우 나이 또래의 하녀 소녀 몇을 만나 늦게나마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늦어서 남은 거라고는 감자 조각과 돼지고기 조금 들어있는 스튜와 눅눅한 빵 뿐이었지만, 쓰러질 정도 로 배가 고팠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대충 배를 때웠다. 그러나 먹 으면서 영 불편했는데, 성에서 머무는 소녀들이 성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고 까르르 웃으며 반겨주어 기분이 좋다가도, 저 멀리서 적어 도 스물 다섯은 넘어 보이는 청년 몇이 모여서 유제니아를 흘끔 흘 끔 보고 기분 나쁘게 웃는 것을 보면 영 기분이 고약했다. 유제니아는 그들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고는 식사를 마쳤다. 그 저 멀리서 유제니아를 보고 있는 것뿐인데 홀딱 벗겨져 있기라도 한 듯 아주 불쾌했다. 결국, 유제니아는 먼저 일어나 '수줍어'하는 듯 보이려 노력하며 식 당을 떠났다. 소녀들은 매일 아침에 페트리샤의 유모인 타냐가 수예 를 가르치니 페트리샤의 응접실로 가야 한다고 말해 주었다. 물론 수예를 배우는 것은 페트리샤와 그녀의 친구들인 소녀들, 또 이 집 의 후견을 받는 후아나와 유제니아 뿐이지만 친절한 그들은 유제니 아에게 호의를 가지고 말 해 준 것이다. 소녀 중, 금발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아이가 말했다. "내일 아침에 내가 데리러 갈게. 후아나, 그 애는 분명 자기 혼자 냉큼 달려가 버릴 거야." 다른 아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저기서 인심 잃은 성질 고약 한 기집애군, 유제니아는 그래도 다행으로 여기며 그들에게 인사를 하고는 식당을 나섰다. 방안으로 돌아가니, 그 후아나는 침대에 앉아 자수를 놓고 있었다. 그녀는 바늘을 당기다가 유제니아가 들어오자 흘끔 보더니 고개를 휙 돌렸다. 맞은 볼은 잔뜩 부어 있었고, 펑펑 울었는지 눈도 빨갰 다. 유제니아는 말없이 침대 옆의 테이블로 성큼 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그 테이블 위를 멍하니 보다가, 급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보이지 않자, 이번에는 엎드려 여기 저기 뒤지기 시작했다. "어디 갔지...?" 후아나가 심술궂게 말했다. "그 싸구려 반지 말이야?" 유제니아는 머리가 화끈 불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꾹 참으며, 주먹 을 힘껏 움켜쥐었다. "싸구려 아니야......" "내가 보기에는 싸구려 은반지던데, 뭐. 생긴 것도 조잡하고." 유제니아는 금세 눈치챘다. "어쨌어?" 후아나는 새침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잘 찾아 봐. 어디 있겠지, 뭐." "분명 여기다 놓고 갔어. 여, 기." 후아나는 유제니아를 흘끔 보더니, 턱을 들어 창 밖을 보았다. "너무 촌스럽고 보기 싫어서 내가 옮겨 놨어." "어디로?" 후아나는 창 밖으로 보이는 큰 숲을 가리켰다. "저기." "....." 후아나는 유제니아가 뒤에서 아무 말도 없자 얼굴 표정이 어떤지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뒤에 내리꽂히는 싸늘한 시선에 소름이 끼쳐 서 차마 바라볼 수 없었다.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주저앉아서 "미 안, 다시는 안 할게!!!" 하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처음 봤을 때 겁 많고 얌전한 아이인 줄 알고 기선 제압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 잘못이었다. 실제, 후아나는 성질이 급하고 고집세기만 했지 의외로 겁이 많았 다. 상대방이 조금만 험하게 나와도 그대로 겁먹어 버리는 성격이었 다. 단지, 고집 때문에 겉으로 내 놓지 못할 뿐이다. 유제니아가 말했다. "정확히 어디야?" "수, 숲길 따라 들어가다 보면 찾을 수 있겠지. 멀찍이 가다 보면, 손가락처럼 솟은 바위가 두 어 개 있는 곳이 있지. 까마귀가 잔뜩 모이는 곳인데, 거기에서 눈에 가장 잘 뜨이는 곳에 놨어. 내일 아 침이면 그 놈들 중 하나가 가져가겠지 뭐....어...아니 찾을 수 있을 거야......저...그....벼, 별로...멀지도 않..." 유제니아는 창문으로 달려왔다. 후아나는 놀라서 침대 쪽으로 후닥닥 도망쳐 버렸다. 해는 벌써 저물어 있었고, 먼 곳에 있는 숲은 어둠에 젖어 까만 그 림자 덩어리로 변해 있었다. 유제니아는 당장에 문 밖으로 뛰쳐나갔 다. 그러나 잠시 뒤 유제니아는 다시 돌아와 손을 들었다. 뺨을 후려갈기려나 해서 눈을 감았던 후아나는, 코가 주저앉을 것 같은 엄청난 주먹에 그대로 나가 떨어져 버렸다. *********************************************************** 작가잡설: 유제니아........아키 공주 좋겠어. 용사님이 씩씩해서. (아키는 이미 공주인 것이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20장 ************************************************************** [겨울성의 열쇠] 제92편 숲 속의 섬광#3 *************************************************************** 에크롯사 변방 작은 영지의 주인인 하멜버그 백작은, 부인의 이야기 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부인은 손수건에 수를 놓으며 오늘 온 유 제니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하멜버그 백작은 올해 서른 아홉으로, 딸 하나와 아들 하나를 둔 착 실한 영주였다. 여왕 죠세피나의 남편인 마라 공과 젊은 시절부터 오랜 친분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변방의 영지에 머물며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에게는 이 영지에서 할 일이 있었고, 그가 이곳의 영주이기에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것에는 별반 관심도 없고, 사실 남편이 그런 생각이라는 것을 알 지도 못하는 순진한 부인은 손수건에 그려진 잎 모양 끝에서 바늘 을 뽑아 당기며 말했다. "당신도 만났으면 좋았을 걸요....얌전하고 귀여운 아이였어요." "다행이군....그렇다면 페티와도 잘 지내겠지." "그럼요. 페티도 여러 친구들과 사귀어야 훌륭한 아이가 될 수 있겠 지요." 그러던 부부의 조용한 시간을, 백작부인의 유모이자 현재 영애의 유 모인 타냐가 문을 쿵쿵 두드리며 깨뜨렸다. "마님, 주인 마님--! 큰일 났습니다!" 타냐가 시끄럽게 호들갑 떠는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니, 백작은 그 저 눈만 찌푸렸을 뿐이었다. 부인이 들어 오라 말하자, 타냐는 육중한 몸집을 끌고 안으로 들어 와서는 고개를 떨구며 백작과 그 부인에게 말했다. "주인님, 주인 마님, 별채 아이 중 하나가 없어졌습니다." 백작 부부는 서로를 쳐다보다가, 부인이 먼저 타냐에게 물었다. "무슨 소리지? 아이가 없어졌다니." "잘 자나 확인하러 들어갔더니 없어졌더군요. 그래서 후아나를 두들 겼더니, 역시나 그 계집애가....." 백작이 후아나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나른히 한숨 을 내 쉬었다. 백작부인이 그런 남편을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타냐는 그런 백작에게 말했다. "제발 이제는 그 후아나를 내 보내세요. 이게 대체 몇 번째입니까! 이를 어째요, 그 아이는 오늘 처음 여기에 와서......이곳 지리도 제대 로 모른단 말입니다! 행여나, 무서운 숲으로 들어가서 봉변이라도 당한다면....." 순간 백작의 얼굴이 무섭도록 창백해졌다. "오늘 새로 온 아이라니, 누굴 말하는 거냐?" "혹시 그 유제니아...말이니?" 백작부인이 묻자, 타냐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마님." 하멜버그 백작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쿵 넘어졌고, 백작 부인이 화들짝 놀랐다. 하멜버그 백작은 타냐의 멱살을 잡아 던지기라도 할 기세로 물었다. "언제 없어졌냐!" 부인조차 남편이 너무나 험악한 기세로 나오자 당황했다. 타냐도 마 찬가지라, 겁을 집어먹으며 당황해서는 아무 말이나 꺼내 보았다. "후아나 계집애 말로는 저녁 먹은 바로 다음에 없어졌다는데......." "누군가 데려가기라도 한 건가?" "그건 아니랍니다. 후아나야 놀러 간다고 하고 나갔다던데......그럴 리가 없어요. 이렇게 어두운데, 또 아는 곳도 없을 텐데 어디로 간 답니까." 백작은 이마를 탁 쳤다. 그리고 맥없이 의자에 주저앉더니, 타냐에 게 말했다. "우선 나가라. 그리고....나가는 즉시 성의 경비대장 쿼렌을 불러다 오. 오기 전에 경비대를 준비시키라고 해라." 성에서 맡아 키우는 고아 소녀 하나가 없어졌을 뿐인데, 성의 경비 대까지 움직이라고 하니 타냐는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주인의 명령 이라, 그녀는 머뭇 머뭇 하면서도 군말 없이 방을 나갔다. 유모가 나가자마자 백작부인이 물었다. "여보, 여자 아이 하나 찾는데 경비대를 움직인다니요.....하인들 불 러 수색대만 보내면 될 일을. 당신 마음은 알지만, 너무 크게 일을 벌이는 것도 문제지 않나요?" 그러나 백작은 그 말에 불쾌하다는 듯 눈을 찌푸렸다. "그럴 일이 아니니 이리 하는 것 아니겠소! 부인, 내가 어제 뭐라고 말했소. 행여나 누가 데려가지 못하도록 단단히 감시하라 하지 않았 소-! 맙소사, 마라 전하의 부탁으로 맡게된 아이인데.... 그 아이가 없어진다면 나는 십 년 지기 친구는 물론 고귀한 분의 신뢰까지 잃 게 되오.....!" "무슨 소리에요, 당신. 그저.....옛날에 아는 사람 딸이라고만 말씀하 였잖아요." "당신이 놀랄 까봐 그렇게 말 한 거지!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말 하는 건데......" 부인은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았다. 자기 잘못으로 남편의 중요한 일이 크게 엉망이 된 것 같아, 너무 당황하고 놀라 있었다. "무, 무슨 말씀이신 지 전혀 모르겠어요." 부인이 울먹거리자, 누그러진 백작은 얼굴을 부드럽게 하고는 말했 다. "실버 드래곤 휠테스의 용기사에 대해 알고 있소?" "....네." "그럼, 그가 마라 전하와의 일로 나라를 떠나있다는 것도 알고 있겠 군." "당신이 예전에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그, 무슨. 암살 기도니 뭐 니....해서...." 하멜버그 백작은 이마를 거칠게 문질렀다. "당신도 알다시피, 그건 누가 봐도 마라 전하의 실수였고,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전하께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기사를 본국으로 돌아오게 해야 하오. 조금 비겁한 수를 동원해서라도 말이오." "......비겁..한 수라니요?" "전하께서 얼마 전에 내게 편지를 보냈소. 자기 손으로 직접 '이런 일'을 처리하면 명예 상 곤란하니, 우연이 겹친 것처럼 며칠 데리고 있다가 수도로 보내 달라고. 변방이니 눈에 뜨이지도 않을 거라 생 각한 나 역시 그 청을 받아 들였소." 백작 부인은 지금 일이 생각보다 훨씬 더 큰 일이고, 남편이 우려하 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다. 현재, 에크롯사의 국조와 함께 했던 열 두 드래곤 중 일곱에 달하는 드래곤들이 '마음에 드는 기사가 없다'는 이유로 아직도 굴에 틀어 앉아 있었다. 율피나와의 계약에는 '기사와 함께-' 라는 말이 들어 있었고, 그 기 사와 함께 하지 않는 드래곤들에게는 율피나의 후손을 위해 싸울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 기사의 자리를 청하러 왔다가 그들에게 죽은 기사만도 수십이었고, 정말 마음에 들거나 죽이기 아까운 기사 가 왔을 경우에만 마지못해 허락한 것이 겨우 다섯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블랙 드래곤 아약사스는 마음에 드는 기사가 태어나면 알아 서 깨어나 주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수면기에 들어가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용기사 한 명은 일개 대대와 맞먹는 가치를 가진 것 인데, 그가 떠나 버렸으니 마라 공은 끔찍할 정도로 난처해진 것이 다. 백작이 차분히 말했다. "당장 찾아야 하오. 만약 그 기사나 그의 의형이 데리고 간 거라면, 난 마라 전하를 뵐 면목이 없소." 후아나가 하루만 늦게 그 반지를 숨겼더라면 유제니아는 며칠 동안 이를 북북 갈기는 했어도 찾으러 가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제니아는 처음 왔던 데다가 성을 뛰쳐나온 게 저녁이기까지 했으 니, 성에서 한참을 달려야 하는 그 숲이 얼마나 무섭도록 울창한 곳 인 지 몰랐다. 숲의 입구에 세워진 두 개의 표석을 지나 유제니아는 숲 안으로 달 려들어갔다. 숲 안에는 여기 저기 돌들이 쌓여 있었고, 그 돌들은 언뜻 보면 규칙적으로 보일 법도 하게 늘어져 있었다. 유제니아는 그 돌들을 밟으며 숲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손가락처 럼 크고 긴 바위가 어디 있는지 주의 깊게 살피다가, 드디어 그것인 듯 보이는 것을 발견했다. 유제니아는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고 바위를 만져보아 그 바위가 맞 을 거라 확신하고는 주변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무지 눈에 뜨이지 않았다. 행여나 이곳보다 더 깊이 있는 것은 아닌지, 해서 유제니아는 컴컴한 숲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제니아는 나무 둥치 너머로 달빛에 반짝이는 작은 냇물이 흐르는 것을 발견했다. 나중에 돌아올 때는 저 냇물을 따라 돌아오면 되겠다, 하고 생각하며 유제니아는 거리낌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또 비슷한 모양새의 돌들을 발 견했다. 역시 그 고약한 계집애가 가까운 곳에 숨겨 둘 리 없지, 해 서 유제니아는 그 주변을 살펴보았다. 방금 전 그곳 보다 나무가 훨 씬 적은 곳이라 잘 보이기는 했으나 반지는 없었다. 산 속이라, 밤이 으슥해지며 쌀쌀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대로 뛰쳐나온 바람에, 유제니아는 얇은 옷 그대로였다. 어서 찾고 돌아 가야겠다, 해서 유제니아는 계속 주변을 둘러보고 돌을 들추어보았 다. 그 반지는 어둠 속에서는 하얗게 빛나기 때문에 금방 눈에 뜨일 것이다. 옷은 벌써 흙투성이가 되었고, 손도 더러워졌다. 그곳에도 없자, 유제니아는 포기하고는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돌은 적어졌고, 나무들은 더욱 빼곡하고 울창해졌다. 유제니아는 그 래도 아직 옆으로 시내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계속 안 으로 들어갔다. 또, 그 비슷한 곳에 도착하지 않을까......그러나 이번 에는 아무리 깊이 들어가도 비슷한 곳이 나오지 않았다. 둘러보고, 둘러봐도......숲은 컴컴하고 깊었고, 바람이 불어오자 우수 수---나뭇잎과 가지가 한꺼번에 몸을 떨어댔다. 순간 유제니아는 무서워졌다. 위험한 짓을 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 았다. 유제니아는 나중에 날 밝을 때 찾는 것이 좋겠다, 싶어서 돌 아가려고 급히 뒤돌아 섰다. 그러나 방금 전 까지만 해도 길을 따라 잘 늘어져 있었던 바위들이 지금 보니 여기 저기 뛰엄 뛰엄 늘어져 있었다. 유제니아는 주변을 둘러보며 조심조심 나가려다가 결국 돌 아서고 말았다. 아직 찾지 못했다는 오기 때문이 아니라, 그 컴컴한 길을 혼자서 되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무서워 진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유 제니아는 숲이 더욱 울창해 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방금 전 까지, 그저 숲 언저리를 헤매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 보니 숲 아주 깊숙한 곳까지 들어온 것이다. 유제니아는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아, 방금 전에 확인해 두었던 시냇 물을 찾았다. 그런데 분명 바로 근처에서 들리던 물 흐르는 소리가 지금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오싹한 침묵과, 가끔 그 침묵으로 부수 고는 사라지는 바람 소리.......부엉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밤 벌레 우는소리, 그리고 어디선가 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가 들려온 다. 유제니아는 그 쪽으로 급히 달려갔다. 그러나, 그러다가 결국 나무 둥치에 발이 걸려 넘어져 굴렀다. 옷이 나뭇가지에 걸렸고, 유제니 아는 치맛자락을 힘껏 당겼다. 옷자락이 북 찢어지며 그대로 비탈 아래의 나무 둥치에 머리를 박아 버렸다. "아야...." 유제니아는 욱신욱신 거리는 몸을 일으키다가, 팔과 종아리가 화끈 거리고 쓰려와 눈을 찌푸렸다. 다쳤나 보다. 게다가, 구르는 바람에 전혀 엉뚱한 곳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아서 컴컴하기만 했고, 그러고 있으니 상처가 더 아 프고 쿡쿡 쑤셔왔다. 유제니아는 눈물을 문질러 닦아내고는 다시 일 어났다. 귀를 기울이며, 어떻게든 방금 전의 그 물 소리를 찾아보려 했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유제니아는 어둠과 침묵 속에 갇혀 있었다. "....." 갑자기 막막하고 무서워졌다. 후회가 밀려들어오고, 이런 곳으로 밀 어 넣은 후아나에 대한 분노가 치솟았다. 눈물도 울컥 터져 나왔다. 아무도 보는 사람 없으니, 유제니아는 소리내어 훌쩍 훌쩍 울기 시 작했다. 그 때, 무언가 조용히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산짐승인가 해서, 유제니아는 얼른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주변을 더듬어 길고 굵은 나뭇가지 하나를 찾아내 뚝 분질렀다. 그러자, 그 발걸음 소리도 멈춘다. 유제니아는 엉거주춤 일어나 한 손에는 나뭇가지를 든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순간, 무언가가 하얗게 반짝였다. 유제니아는 팔을 휘둘 렀다. 무언가가 휙 날아왔다가 그 가지에 맞아 나가떨어졌다. 그리 고 단단한 것이 나무 뿌리에 맞아 저 아래로 퉁퉁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제야 유제니아는 자신이 낭떠러지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찔했다. 이 나무 둥치에 부딪히지 않았다면, 저 깊은 계곡에 떨어질 뻔한 것이다. 유제니아는 어떻게든 위로 올라가 보려고 했다. 그런데 위를 보는 순간, 다시 하얀 것이 섬뜩하게 반짝인다. 유제니아는 숨을 후우-- 하고 몰아쉬고는 어깨를 당겼다. "누구..." 그러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빠르고 차가운 것이 유제니아의 팔뚝을 휘감아 앞으로 당겼다. 유제니아는 그대로 저 앞으로 나동그라져 버 렸다. 쿵, 하고 무릎을 호되게 부딪혀 버렸다. "아아.....아파라...." 유제니아는 무릎을 당기며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갑자기 유제니아의 코앞으로 차가운 것이 툭 떨어졌다. 유제 니아는 놀라 뒤로 후닥닥 도망치다가, 다시 나무 둥치에 쿵 부딪히 고는 엎어지고 말았다. "가지가지로 재밌게 하는 군." 그 말과 함께 눈앞에 반딧불처럼 하얗고 자그만 것이 떠올랐다. 그것은 처음에는 아주 옅었지만 점점 더 커지고 진해지더니 주변을 환하게 밝혔다. 구렁이처럼 구불구불 솟은 굵은 나무 뿌리, 엉망진 창인 옷과 상처투성이인 팔과 다리.....그 위로 청회색 빛이 고요히 퍼지고 있었다. 유제니아는 어깨를 당기며 몸을 일으켰다. 눈앞에서 하얗게 빛나는 반지가 금사슬에 달려 흔들리고 있었다. 두 개의 테로 둘러쳐지고, 그 중앙에 날개를 눕힌 백조가 긴 목으로 푸 른 보석을 감싸고 있는 반지....어머니의 반지였다. 그리고 다시 그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찾는 게 이건가?" *********************************************************** 작가잡설: 네, 드디어............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20장 ************************************************************** [겨울성의 열쇠] 제93편 숲 속의 섬광#4 ************************************************************** 허공에 뜬 자그만 빛 덩어리에서 빛이 샘솟아 고요히 퍼지고 있었 다. 그리고 호리호리한 몸집의 낯선 소년이 유제니아를 바라보고 있었 다. 열 일곱 정도 될까, 허리까지 쏟아져 내린 긴 은빛 머리카락과 금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고, 숲에서 튀어나온 엘프처럼 기이했지 만 그래도 그 신기루 같은 숲의 정들보다 더욱 진한 야성과 생명력 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차림새만은 나뭇꾼이나 숲지기만큼이나 평 범했고, 그것이 유제니아를 안심 시켰다. 소년은 그 반지를 금사슬과 함께 건네주었다. "주인이 있는 줄 알았으면 가져가지 않았을 거다." "무슨 소리야?" "누군가가 버리고 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지고 갔지........네게는 아주 귀중한 건가 보군." 유제니아는 울음이라도 와앙 터뜨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 소년 앞에 있으니, 도저히 그렇게 되지 않았다. 말투가 왠지 명령하는데 익숙 한, 무게가 꽉 잡힌 그런 어투였다. 그것이 영 심사를 꼬이게 했다. 유제니아는 심통 맞게 말했다. ".....아주 소중한 사람이 준거라고." 하고 유제니아는 목걸이를 탁 낚아챘다. 그러자 소년은 착 가라앉은 그 목소리로 냉랭히 말했다. "네가 그것 때문에 여기를 헤맸다는 것을 알게 되면 아마도 그 사 람이 가장 먼저 후려 쳐 줬을 거다. 어서 돌아가." 하지만 길을 잃었는데, 라고 말하려는데 소년의 손끝이 가리키는 그 곳에 하얀 돌들이 늘어진 길이 뻗어 있는 것이 보였다. 어라, 방금 전 까지는 없었는데......? 소년이 말했다. "고약한 사람이 이 숲의 주인이다. 밤에 가까이 오는 사람은....늘 그 렇게 해 메다 죽게 되. 방금 전처럼." "하멜버그 백작이?" 그러자 소년이 웃었다. "그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이 숲의 주인이었던 마법사다. 그래서 더 무섭지.......가만..." 소년이 머뭇거리며 멈칫하자, 눈치 빠른 유제니아는 얼른 말했다. "유제니아." 그리 말하고 나니 뭔가 좀 아쉬워져서, 유제니아는 약간 어물대다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그러니, 넌....." ".......당장 돌아가."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제야 유제니아는 그가 원했던 것이 '이름'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산지기나 사냥터지기 아들 같은데 너무 도도해서, 유제니아는 괜히 심술이 나서는 휙 돌아섰 다. "잘 있어라." 유제니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갔다. 소년은 그 런 그녀를 지켜보다가 곧 숲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유제니 아가 다시 돌아보았을 때, 숲은 길조차도 보이지 않는 어둠에 먹혀 있었고 그 소년도 없다. 유제니아는 갑자기 오싹해져서,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 서운 속도로 달려 숲 입구에 도착하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보름에 가까운 달이 밝은 하늘에서 빛나고 있었다. 휘안토스는 잠에서 내 쫓기듯 깨어났다. 꿈은 아직도 생생하다. 굽이굽이 우거진 굵은 나무 뿌리. 숲의 천장을 향해 힘껏 뻗어나가 는 떡갈나무 잎들, 단단한 나무 둥치, 어두운 숲의 냄새, 고요한 가 운데 잠깐씩 들려오는 바람과 산짐승의 울음..... 그리고 길 잃은 짐승이 헤매는 소리. 깊은 숲은 심술궂은 미로였고, 그 짐승을 그 품 깊은 곳으로 인도했다. 숨을 헐떡이고, 그러다 넘 어진 듯 비명을 지르고, 아픔에 신음을 흘리다가....흐느끼기 시작한 다. 꿈속의 휘안토스는 그 작은 것을 더 깊은 곳으로 오게 하고 싶어졌 었다. 저렇게 몇 번 더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다가 벽에 부닥치고 결 국에는 포기하고 주저앉아 떠는 것을 보고 싶어졌고, 그 때 그 짐승 을 잡아채고 싶어졌다. 이상한 취미로군....... 휘안토스는 꿈을 꾸면서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휘안토스는 그 를 답답하게하는 것들은 영 싫어했다. 결국 그 짐승이 지쳐 주저앉아 버렸다. 토끼나 사슴 종류일까, 그러 나 다가가 보니 훨씬 더 컸다. 소녀, 어린 소녀다. 검은 머리카락에, 크게 뜬 푸른 눈동자. 아주 밝 은 색은 아니었다. 조금 어두운 색조, 새벽의 파릇함이 퍼지는 하늘 이 이런 빛깔일 것 같다..... 대체 왜 그런 꿈을 꾸었는지 통 알 수 없었다. 안면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평소에 그리던 이상형의 여인도 아니고....이런걸 생각하다가 휘안토스는 웃고 말았다. 휘안토스에게 그런 건 있지도 않았고, 현실주의자인 그는 자신의 이상형에 자신과 전혀 다른 사람을 끼워 맞추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지도 안다. 그것은 정말 꿈이라기 보다는 누군가의 눈을 통해 본 '광경' 같다는 느낌 이었고, 그것이 휘안토스에게는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깨어 났나요?" 휘안은 그 목소리에 반쯤 몸을 눕혔던 안락의자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방금 전에....." 멀리서 음악소리와 왁자하게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악사들이 류트를 연주하고 여가 수가 경쾌한 노래를 불렀다. 여자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자, 남 자들 역시 우악스레 웃어젖힌다. 창가의 의자에 앉아 있는 여자는 그 쪽을 잠깐 내려다보다가 다시 휘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그 특유의 조용 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 깊이 잠든 것 같더군요, 휘안토스." 휘안토스가 웃었다. ".....달콤한 잠이었습니다." 그렇게 답하며 휘안토스는 시계를 돌아보았다. 고작 20분 정도의 시간이었을 뿐인데, 정말 하루 종일 잠들었던 듯 푹 잤던 것이다. 그렇게 아주 짧은 잠깐의 단잠이었지만 그 꿈은 바 로 방금 전에 실제로 겪기라도 한 듯 생생했다. 그런 자신에 너무나 어이가 없어 혼자서 핏 웃으며, 휘안토스는 자신이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은 꿈이잖아, 휘안토스. 그러자, 창가의 여자가 이상하다는 듯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푸른빛 감도는 긴 머리카락에, 창백할 정도로 하얀 얼굴을 가진 아 름다운 소녀였다. 나이는 휘안토스보다 고작 몇 달 먼저 태어났을 뿐이지만, 달빛과 구름을 닮은 은빛 눈동자는 기이하고도 깊은 빛을 담고 있었다. 이마에 두른 순금 서클렛의 중앙에 루비가 반짝였지 만, 그것 역시 이 소녀에게는 차가운 반짝임일 뿐이다. 그녀는, 얼음 속의 아름다운 시체 같은 소녀였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휘안은 천천히 꿈을 더듬어보았다. 그 헐떡이 는 숨소리, 닿을 듯 닿지 않을 듯 거칠게 숲 속으로 울리는 생생한 그 생명의 소리. 뜨거운 피, 더욱 뜨거울 심장..... 그런데 꿈에서 깬 지금, 이 진짜 현실이 외려 더 차가운 환상 같다. "잠들기 전에는 안 계셨던 것 같은데, 언제 들어오셨습니까.....칼라 하스 황녀." 칼라하스가 빙그레 웃었다. "당신은 피곤을 달래러, 그리고 저는.....늘 이렇지요. 아시잖습니까." 휘안은 그제야 지금 밖의 음악 소리가 시끄러운 춤곡이란 것을 알 게 되었다. 칼라하스가 말했다. "그리고 황녀라 부르지 마세요. 이제 곧 새 황제가 등극하실 테니, 저처럼 먼 일가는 그저 델 카타롯사의 공주일 뿐이랍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얼굴에 퍼지는 세련되게 정련된 미소. 휘안토스는 자신의 미소역시 그녀의 그것과 아주 비슷할 거라는 생 각이 들었다. 사실, 암롯사의 휘안이나, 황녀를 어머니로, 델 카타롯 사의 왕을 아버지로 둔 이 칼라하스나, 제도나 다른 공국의 왕가에 서는 비슷한 평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휘안이 그렇듯 그녀 역시 두 가지 평가로 극단적으로 나뉘었다. 그 둘 다 어느 정도는 두려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고, 그 때문에 싫어하거나 외경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러나 휘안토스가 그 아버 지나 가문의 위상 덕에 후자의 사람들이 더 많다면, 이 칼라하스의 경우에는 본국인 델 카타롯사의 사람들을 제하고는 대체로 '싫어했 다.' 그러나 이 소녀는 사랑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꽤나 명석하고 뛰 어난 소녀인 것도 사실이었다. 휘안토스는 그것을 충분히 인정했고, 그녀 역시 휘안에 대해 다른 소녀들이 품는 것처럼 동경이나 사랑 같은 부드러운 감정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조용하게 눈길을 주고 는, 차갑고도 날카롭게 번득이는 눈빛을 보내다가는 소리 없이 거두 어들인다. 집요한 탐색의 눈길로, 멀찍이 떨어져서는 조심스레 살피 는 것이다. 휘안토스는 못 만난 지 벌써 1년이나 된 동생 역시 자신에게서 그 런 눈빛을 보았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소녀와 그렇듯, 아킨 역 시 휘안토스와는 타협할 수 없었다. 적이 되고, 칼을 맞대고, 결국 한 쪽이 내동댕이쳐졌다. 그 때 문밖에서 철그렁 철그렁, 하고 갑옷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 온다. 칼라하스의 눈빛이 밝아지더니, 허리를 당기며 조급히 말했다. "마하, 들어와." 휘안토스는 이 칼라하스의 그림자가 온 것을 알았다. 문이 열리며, 적어도 이미터는 됨직한 거대한 여자가 들어왔다. 팔 과 가슴에는 두터운 갑옷이 감겨 있었고, 그 어깨와 가슴 위에는 델 카타의 상징인 황금 그리핀이 새겨져 있었다. 턱은 각 지고 광대뼈 는 툭 튀어나온 데다가 코는 매 부리처럼 삐죽해서 아주 못생긴 여 자였다. 그러나 휘안토스는 이 여자가 마르실리오 정도는 간단하게 제압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열 두 살의 칼라하스가 스무 살이던 이 여자를 호위로 임명했을 때, 제도와 델 카타 대부분의 기사들은 심술 사납게 웃었다. 그러나 칼 라하스는 그 모두를 지명하여 결투신청을 했고, 마하는 모두를 말 그대로 묵사발로 만들어 버렸다. 칼라하스가 손을 뻗으며 말했다. "마하, 달의 휴식터로 데려다 주겠어?" "네, 전하." 그녀는 공손히 답하고는 두 팔을 뻗어 의자에 앉아 있는 그녀를 들 어 올렸다. 마르고 가벼운 몸이 그 두텁고 강인한 팔에 들렸다. 휘안토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를 보였다. 그런 소년을 마하는 적 대감어린 눈으로 한번 흘끗 보고는, 인사도 없이 뒤돌아 섰다. 늘 그랬기에, 휘안토스는 화도 내지 않았다. 칼라하스는 마하의 품에 머리를 기대고는 휘안토스에게 인사했다. "나중에 봬요, 왕자." "저 역시, 공주." 마하가 문으로 나서자, 그녀의 거대한 등이 문을 가득 메우다가는 치워졌다. 델 카타의 왕과 제국 황녀 켈라스의 딸인 칼라하스가 사고를 당한 것은 열 한 살 되던 해였다. 그 전에도 영리하지만 음침한 소녀였는 데, 다리를 못 쓰게 된 후에는 더 조용해졌다. 그 연년생 오빠인 칼리토는 그런 그녀를 동정해 마치 귀한 보석으 로 된 인형처럼 소중히 다루었고, 그녀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신뢰하 고 따랐다. 어느 샌가 그녀는 칼리토의 보이지 않는 힘이 되어 있었 고, 휘안토스 정도 되는 식견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녀가 델 카타 의 실질적인 손이자 발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칼리토 왕 자는 그런 그녀를 싫어하거나 배척하지 않았다. 어차피 아이를 낳을 수도 없는 몸이니, '왕위' 자체를 손에 넣을 수도 없고 원하는 사람 에게 줄 수도 없다. 또, 그녀 역시 어리석게 그것을 원하지는 않았 다. 남편을 맞이한다 하더라도 자식을 가질 수 없으니 결혼도 포기 했다. 그녀에게 칼리토는 그녀, 그 자신이었다. 그 덕에 칼리토와 칼 라하스 두 남매는 완전한 한 몸이나 다름없는 사이였고, 칼리토는 그녀의 자질이 자신의 그것을 훨씬 능가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게 다가 칼리토는 아량과 너그러움,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엄격함을 훌륭히 갖추고 있었고 동생의 의견을 듣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 다. "마하, 왜 그렇게 저 소년을 싫어하는 거지....?" "언제나 기분 나쁘지요." 마하의 답에, 칼라하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제국을 통틀어 가장 근사한 소년이야. 온 제국의 소녀들이 그를 사랑하고 동경하지....." "제가 어린 소년에게 그런 감정을 품는 다면 우스운 일입니다, 전 하." "놀리는 건 아냐. 사실, 나도......몸이 이렇지 않았다면 그의 신부가 되고싶어했을 지 모르고....될 수 있었을 지도 모르지. 델 카타와 암 롯사의 오랜 소비전을 끝내려면 결혼보다 좋은 것이 있을까-" "지금도 원하십니까?" "아니." 그리고는 칼라하스는 머리를 눕히며 마하를 올려다보았을 뿐이다. 안는 이가 불편한 자세이긴 했으나, 그녀의 몸은 가벼웠고 마하의 팔은 안락하고 두텁다. 칼라하스는 두 팔을 앞으로 모아 아기처럼 그 팔에 안겼다. 마하가 말했다. "그러시다 실수하면 떨어지시고 맙니다. 제 목에 팔을 두르세요." "괜찮아.....마하가 떨어뜨리면 아주 부드럽게 떨어질 것 같아. 깃털 처럼......언제나 부드럽거든, 마하는." "저는 마법사가 아닙니다." "농담이야, 사랑하는 나의 마하." 칼라하스도 정 많은 오빠와 반신 같은 마하만은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속삭이는 그런 말들은 모두 진심이 었고, 마하가 바치는 진실한 애정에 대한 확인이었다. 정원을 나오자 이제 거의 보름으로 부풀어 오른 달빛이 쏟아져 마 하의 턱과 칼라하스의 이마를 적셨다. 칼라하스가 조용히 물었다. "마하, 내가 말했던 것......알아 왔어?" "네." "그 꼬마는 어디에 있다든?" "에크롯사의 하멜버그에 있다고 합니다." 칼라하스는 흐음....하고는 머리를 젖혔다. 마하가 당황해서는 말했 다. "전하-머리를 당기십시오." "아아, 마하. 잠시만 이대로 있어 줘.....좋은 것을 생각하는 중이니 까." 결국 마하는 멈추어 섰다. "좋은 우연이야, 마하." "숨겨진 필연일지도 모르지요." 마하의 말에 칼라하스가 미소를 지었다. "델 카타의 오라버니에게 연락해 줘." "......어떻게 전하실 예정이십니까." "잠시 에크에 다녀오겠다고. 그 호수와 절벽의 절경, 드래곤들이 잠 든 멋진 곳을 보고, 잠시나마 편안히 쉬고 싶다고.....그렇게 말이야." 그러나 그 두 사람 모두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으리라. 마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일 중으로 배를 준비하겠습니다." "좋아, 그리고 그 마법사에게도 연락해 두도록 해. 곧 준비하라고." "네, 전하." *********************************************************** 작가잡설: 자, 드디어 사악한 마법사에게 감금된 공주와 만난 용사 유즈..... 용사 유즈 - 공주, 그대의 이름을 가르쳐 주세요. -.-! ? 공주 - 어서 도망가세요.... 사악한 마법사가 이 근방을 지키고 있 어요! 용사가 공주를 채갈 흑심을 품는 동안.....그의 옛 애인인 왕자님은 어디서 담배를 한대 피우고 계실른지.....후우. -.- (장가갔겠지, 뭐...애는 낳았으려나...?)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21장 ************************************************************** [겨울성의 열쇠] 제21장 가느다란 빛 제94편 가느다란 빛#1 ************************************************************** 하멜버그 성은 유제니아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벌컥 뒤집어져 있 었다. 유제니아가 엉망진창이 되어 돌아오자마자, 반쯤 혼이 나간 듯한 유 모 타냐는 달려들 듯 와서는 어떻게 된 것인지 무서울 정도로 다그 쳤다. 성으로 터벅터벅 돌아오던 유제니아는 반지를 그런 곳에다 숨겨 놓 았던 후아나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얼마나 오기가 치 밀었으면 그런 곳까지 달려가 반지를 숨겨 놓았을까? 유제니아는 후아나의 정성을 존중하기로 했다. 각오하고 저지른 일 일 테니, 각오한 모든 것을 돌려주기로 했다. 솔직히, 그 소년의 말 을 돌이켜 보면 섬뜩할 지경이었다. 그 시건방진 녀석을 만나지 못 했다면 숲에서 길 잃고 죽을 뻔하지 않았던가. 유제니아는 가감 없이 전후를 설명했다. 여차해서 이 반지를 찾으러 숲에 갔고, 잘 찾았다. 그러나 오는 길에 넘어져서 좀 굴렀다...등등. 물론 소년에 대한 이야기는 쏙 빼 놓았다. 그런데 그녀를 보는 하멜버그 백작의 얼굴이 시시각각 울그락 푸르 락 해지더니, 유제니아의 이야기가 끝나자 유제니아의 볼의 흙과 피 를 닦던 타냐에게 명령했다. "후아나의 처분은 그대가 알아서 해라." 그런데 그 말이 정말 험악했고, 후아나는 새파랗게 질리더니 가늘게 떨기 시작했다. 유제니아는 은근히 후아나에게 미안해졌다. 분명 후아나가 잘못한 것이긴 했고, 벌을 받아야 속이 후련할 것 같기는 했다. 그러나 유 제니아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심한 벌을 받게 되면...좀 미안한 일 이었다. 어쨌건, 후아나도 일이 이 지경까지 될 줄은 몰랐을 것 아 닌가. 솔직히 말하자면, 이 꼴이 된 것은 유제니아가 너무 조심성이 없었다는 데에도 책임이 있다. 그러나 타냐는 유제니아의 상처 치료는 어느 하녀에게 맡기고는 두 팔을 걷어 부치고 후아나를 잡아 끌어냈다. "당장 따라와--!" "하, 하지만 아주머니--" 문이 닫히자 마자 퍽, 철썩--하고 후려치고 맞는 소리가 들리고, 비 명과 흐느낌이 터졌다. 놀란 유제니아가 흠칫해 몸을 움츠렸을 정도 였다. 그런데 타냐 대신 유제니아의 치료를 맡은 하녀가 턱을 들고는 말 했다. "저 계집애는 그래도 싸. 세상에나, 그 무서운 숲에서 길을 잃었으 면 어쩔 뻔했어....많이 무서웠지?" 밖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에요--! 전.......표석에서 겨우 열 다섯 발자국 앞에 있는 곳에 다가....아악--!" 다시 퍽, 철썩. 솔직히 말하자면, 저 소리가 더 무서웠고, 슬슬 미안해지기까지 했 다. 열 다섯 발자국이라...설마, 제일 처음 발견했던 그 돌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후아나는 그저 유제니아를 밤늦게 먼 숲까지 뛰어갔다 오 게 하려고 그런 짓을 한 것뿐이고(자기도 고생인데 뭐 하러 그런 짓을 했을까?), 유제니아가 그렇게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게 된 것 은......순전히 그 반지를 웬 건가 해서 들고 간 그 '소년' 때문인 것 이다. 타냐가 천둥같은 고함을 질렀다. "내일부터 사흘간 무너진 탑에 가둬 두겠다--!" "싫....싫어요--! 요, 용서해 주세요!" 다시 철썩, 쿵-이번에는 벽에 부딪힌 것이다. 유제니아는 하녀에게 슬쩍 물었다. "무너진 탑이 뭐죠?" "아, 성 옆에 있는 탑이야. 창고로 쓰는 곳인데, 말썽 장이 아이들을 그곳에 가두곤 하지. 사나운 까마귀들이 잔뜩 사는 데다가, 천장도 없어." 하녀는 심술궂게 웃었다. 그리고 표정을 보아하니, 그녀 역시 후아 나가 그리 혼쭐나는데 은근히 통쾌해 하고 있었다. 유제니아는 언짢 아서 잠시 입술을 꾹 문 채 앉아 있다가, 훌쩍, 훌쩍--소리가 들리 자 일어났다.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얼른 밖으로 나가, 후아나가 맞고 있던 타냐의 방으로 들어 갔다. 들어가 보니, 후아나는 엉망진창이었다. 머리도 헝클어지고, 옷은 반 쯤 찢어진 데다가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다. 계속 눈물만 뚝뚝 떨구 고 있는 데, 옷과 바닥에는 핏방울까지 튀어 있었다. 유제니아가 들어오자, 타냐는 당장에 활짝 웃었다. "어머나, 유제니아. 이 아이는 내가 잘 타일러 놓을 테니, 너는 들어 가서 푹 쉬렴." "...." 유제니아가 아무 말이 없으니, 타냐는 후아나를 한번 흘끔 돌아보더 니 말했다. "가장 엄한 벌을 내렸단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야, 유제니아." "아, 네......" 후아나가 고개를 들어 타냐를 하얗게 쏘아보고는 고개를 픽 돌렸다. 유제니아는 감이 잡혔다. 그래서 후아나 옆으로 가서는, 털썩 주저 앉았다. "후아나가 제 물건에 심술 부린 것은 분명 잘못이에요. 하지만, 무 모하게 그곳까지 간 것도 잘못이라 생각하니......저도 벌을 받겠어 요." 타냐의 얼굴이 당장에 하얗게 되었다. 그녀는 살살 달래듯 부드럽게 말했다. "유제니아, 착한 마음은 알겠지만 벌은 벌이란다." 솔직히, 유제니아는 이 야수 같은 유모가 정말 같이 가둘까봐 가슴 이 벌렁거릴 지경이긴 했으나 책임 질건 져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 래서 이상할 정도로 유제니아의 눈치를 살피는 유모가 원하는 대로 해 주기만 바랄 뿐이다. "무모한 것도 분명 잘못이라고 생각해요. 또, 그 경솔함 때문에 후 아나가 과한 벌을 받게 할 수도 없고요." 솔직히 저 후아나 계집애, 아주 괘씸하기는 했지만 저 지경으로 얻 어맞았으니 벌은 충분히 받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또, 여기서 더 나갔다가는 나중에 유제니아만 고달파질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저 성질 머리라면, 징벌이 끝나고 방으로 돌아와서 분풀이라도 할 듯 수 십 배로 심술궂게 굴 것이다(귀찮다, 정말). 속셈을 아는지 모르는 지 후아나가 훌쩍거리던 것을 멈추고는 유제 니아를 멍하니 보았다. 타냐는 당혹스러운 지 그 두 소녀를 번갈아 보다가 결국 잠깐 기다리라고 말한 다음 밖으로 나갔다. 얼마 뒤에 다시 들어온 그녀는, 둘 다 방으로 돌아가라고 전했다. "운 좋은 줄 알거라, 후아나!" "....." 후아나는 아무 대꾸도 없이 그녀를 휙 지나쳐 버렸다. 타냐가 손을 번쩍 들었지만, 바로 뒤에 있던 유제니아는 냉큼 뒤돌아 타냐에게 인사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아주머니. 오늘 감사했습니다." 타냐는 손을 슬쩍 내리고는 살짝 맞잡았다. "너도 잘 자려무나, 아가야." 유제니아는 그녀의 볼에 입맞춰 주고는 후아나를 따라 나섰다. 발끈 해 있던 타냐는 유제니아의 키스에 금새 풀어져서는, 모든 일일 탈 탈 털어 버리고 활짝 웃으며 손까지 흔들었다. "너, 대체 어느 집 아이야?" 방으로 돌아오자, 후아나가 대뜸 그렇게 물었다. "아버지는 변변찮은 기사. 오빠는 좀 괜찮은 기사, 아저씨는.....음. 용병." "거짓말. 그럼 왜 온 성이 너한테 설설 기는 거야?" 후아나는 쏘아붙이는 듯 그렇게 물었지만, 유제니아는 고개를 저었 다. "처음 와서 그런 거겠지." "아니라고! 예전에 가르타가 없어졌을 때는, 날 새고 나서야 찾으러 나섰다고. 그런데, 넌 정말 온 성이 다 뒤집어지던데.......그럴 리가 없어! 정말 뭐하던 집 애야?" "뭐라든...그게 정말이야." 유제니아는 한번 더 머리를 도리도리 저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유 제니아가 거짓말 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다 말하지 않은 것 뿐이지 - 후아나는 그런 유제니아를 의심스레 쏘아보고는 고개를 픽 돌렸 다. "하여튼 나보다는 사정이 좋겠지." "넌 상황을 아주 나쁘게 만들고 있잖아. 네 잘못이다, 그거." 후아나의 눈썹이 치솟아 올랐다. "뭐야?" "제대로 깨물지도 못하는 주제에 짖기는 엄청 짖는 강아지 같던데, 뭐. 자존심 센 건 좋다만, 이런 데서는 요령 좀 있어봐라." 네 까짓게 뭘 안다고 하며 사납게 알알 거릴 줄 알았는데, 후아나는 외려 히죽 웃었다. "그건 다 우리 아버지가 백작님이라서 그래." 그러나 후아나는 유제니아가 놀라거나 의심스레 볼 거라 생각했는 데, 유제니아는 그저 태평하게 그런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아, 그랬어?). 심지어 고개까지 끄덕인다. 후아나는 괜히 무안해져서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백작님은 백작부인과 결혼하기도 전에 우리 어머니를 건드려서 날 낳게 했대. 나중에 마님과 결혼해야 되니까, 우리 어머니를 나까지 붙여서는 어디 농부에게 팔아 버렸지. 그러다가 우리 어머니가 돌아 가시니까, 계부인 파크는 돈은 한푼도 안 돌려주면서 나만 여기로 데려다 놨어. 그래서 이렇게 살고 있는 거야." 유모가 그러는 것은 이해가 되긴 했으나, 다른 하녀들까지 이 후아 나를 싫어하는 것을 보면 이 소녀의 행동에도 문제가 있을 것이다. 아마, 기죽기 싫으니까 이 쪽에서 먼저 오만하게 굴었을 것이다. 그 덕에 다들 이 후아나를 무시하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어려워하지 도 않았다. 즉, 다들 '더러워서' 피하는 것이다. 바보- 유제니아는 그렇게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후아나가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너는 대체 어디까지 들어갔다 온 거야? 난 분명 그 돌 아 래에 놓았는데....." "없었어." "무슨 소리야?" 유제니아는 목걸이의 반지를 살짝 들어 보였다 내리고는 말했다. "다른 사람이 이 반지를 들고 갔더라고. 내가 헤매면서 찾고 있으니 까, 내 것인 줄 알고 알아서 돌려주더라." 후아나가 그저 멍청하게 자기를 보고만 있자, 유제니아는 덧붙여 말 했다. "거기 산지기 아들이나 조수 같아. 숲 속 길을 아주 잘 알고 있던 걸." 후아나는 창백한 얼굴로 물었다. "어, 어떻게 생겼어?" "은발머리에 금빛 눈, 그리고....아주 예쁘게 생겼던데. 아마, 산지기 부인이 드래곤이나 엘프였나 보지." 그런데 후아나의 얼굴은 별반 밝지 않았다. 당연히 호기심을 보일 줄 알았던 유제니아는 좀 당혹스러웠다. 후아나가 더듬더듬 말했다. "이 근방에 그런 아이는 없어. 아니....이 고장에는 은발머리, 자체가 없다고." "그럼 숲 깊은 곳에 살아서 네가 모를 수도 있잖아." "바보야, 그 숲은 산지기가 없단 말이야! 아니, 사람이 살지도 못하 는 곳이라고." "무슨...소리야?" "네가 헛것을 본 거야. 아니, 숲 속에 기절이라도 해서 꿈 꾼 걸 현 실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지. 넌 모를 테지만, 그 주인 잊혀진 숲은 드래곤에게 바쳐진 숲이야. 하지만, 뭐가 좋지 않았는지 예전에 몇 분계시던 드래곤이 무슨...마법사에게 그 숲을 빌려주곤 다른 계곡으 로 떠나버려서........지금은 비어 있고, 사냥은커녕 나무도 하러 가지 도 못하는 곳이란 말이야." "......." 유제니아가 멍청하니 자신을 보자, 후아나는 얼굴까지 찡그리며 말 했다. "사람이 살 리도 없고, 숲 속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있을 수도 없 어." "하지만 동네 아이가 그곳에 들어가서..." "두 번 말해야겠니? 이 근방에는 그런 아이가 없다니까! 내가 알 아!" 유제니아는 슬쩍 반지를 들어보았다. 뭔가, 아주 오싹했다. 생각해 보니, 그 소년....분명 '마법사' 어쩌고 했다. *********************************************************** 작가잡설: 점점 차이가 줄고 있습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21장 *************************************************************** [겨울성의 열쇠] 제95편 가느다란 빛#2 *************************************************************** 다음날 밤, 성안의 사람들이 모두 잠들자 유제니아는 슬쩍 일어나 옷을 챙겨 입었다. 그리고 맞은 편 침대의 후아나가 곤히 잠든 것을 확인하고는 슬금슬금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후아나가 갑자기 몸을 뒤척이더니 잠꼬대처럼 말했다. "램프는 1층의 작은 창고에서 찾아가." "......." 유제니아가 가만히 있자, 후아나는 손을 불쑥 들더니 아래를 가리켰 다. "테이블 위에 있는 것으로 가져간 다음, 다른 램프를 꺼내 끝에다 놔. 토슨은 언제나 다섯 개씩 기름을 채워 두니까." "많이 나돌아 다녀 봤구나?" 후아나는 아무 말도 없었다. 유제니아는 얼른 방을 나섰다. 그리고 잽싸게 1층으로 내려가 후아 나가 말한 램프를 찾아낸 다음, 들고 나온 점화기를 한번 달깍여 불 이 잘 붙는지 확인하고는 재빨리 성 뒤쪽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날 오후에 봐 둔 숲의 오솔길로 들어가기 전, 주변을 샅샅 이 둘러 본 후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얼른 성 뒷길로 빠 져나갔다. 벌써 멀고 오래된 숲으로 향하는 길은 다 봐뒀다. 숲까지의 거리는 전날 밤 보다 훨씬 더 멀게 느껴졌지만, 달이 워낙 에 환해 길 찾기에 어려움이 없었다. 그래서 숲에 도착하자 그제야 램프의 불을 밝혔다. 숲을 들어서자, 우선 유제니아는 숲 속의 길을 조심조심 더듬어 가 며, 바위 하나 하나를 확인했다. 그리고 항상 뒤를 돌아보며 확인해 보았다. 곧 시냇물 소리가 졸졸 들려왔다. 유제니아는 들고 온 재봉 용 석필로 나무에 표시를 하고는 그 시냇물 쪽으로 달려나갔다. 달빛이 환하게 쏟아지고 있어 푸릇하고 밝았다. 헐레벌떡 달려와 목 이 마른 유제니아는 바위에 램프를 놓고는 그 시냇물 근처에 앉아 물을 조금 떠먹었다. 물은 아주 깊어 보였고, 달빛에 젖은 바위는 큼지막하게 덩어리져 그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물을 다 마시자 유제니아는 램프를 들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 때, 맞은 편 바위 위에 긴 그림자가 불쑥 솟아올랐다. "--!" 놀란 유제니아는 뒤로 주춤 물러나다가, 번들거리는 바위에 미끄러 졌다. "끼아아아아--" 풍덩! "바보." 그건 정말 들었는지 착각인지 모르겠다. "쿨럭, 쿨럭!" 유제니아는 물을 다 토해냈다. 몸이 흠뻑 젖어, 싸늘한 밤 공기 때 문에 와들와들 떨리기 시작했다. 입술도 파랗게 질렸고, 곧 기침이 나오기 시작했다. "콜록---콜록." 그러자, 유제니아를 물끄러미 보던 소년이 말했다. "옷 벗는 게 좋겠다." "무슨 소리야! 어떻게 벗어!" "금방 말려 줄 테니까.....일단 벗어 줘." 그렇게 말했던 소년은 유제니아의 시뻘건 얼굴을 보며 잠시 생각하 는 듯 하더니,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던져 주었다. "알몸으로 있기 뭐하면 이거라도 입고 있던가." "......" 유제니아의 얼굴이 더 새빨개졌다. 나보다 한 두 살은 많아 보이는 녀석이.....뭐 저렇게 생각이 없을까. "하지만....이건 너무 짧다구." "그럼 젖은 채로 그냥 있던가." "......" 젖은 옷은 몸에 찰싹 들러붙어 있어서, 무겁고 차가워 걸치고 있기 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유제니아가 슬슬 포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 챈 소년은 멀찍한 곳에 있는 덤불을 가리켰다. "저기서 갈아입어." "어느 정도 걸....려?" "잠깐이면 돼. 뭐하면 그 곳에 계속 웅크리고 있어도 괜찮다." 유제니아는 입술을 비죽이고는 그 으슥한 풀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 고 조심조심 옷을 벗고는 소년이 던져준 셔츠를 입었다. 소년이 물 었다. "다 됐어?" "아, 응." 유제니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옷을 던졌다. 그러자 소년이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거기 가만히 있어." ".....왜?" "옷이 너 바로 뒤에 있는 나뭇가지에 걸렸으니까." "어디....내가 다시 던져 줄게." 유제니아는 돌아서 일어나고 말았다. 소년은 막 옷을 빼가려다가, 그대로 얼굴이 확 붉어졌다. "앉아--!" 아무리 유제니아보다 덩치가 큰 소년의 셔츠였다지만, 그래도 유제 니아는 늘씬한 편이라 겨우 허벅지까지 닿았을 뿐이었다. 게다가 남 의 옷 입기가 머쓱해서 단추도 잠그지 않고 있었는데 그렇게 냅다 일어섰으니, 소년이 얼굴 벌개질 만 했다. 그리고 이런 경우는 늘 그렇듯, 본 사람보다는 보이게된 사람이 더 창피하다. 유제니아가 얼른 주저앉자, 소년은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큰 일 낼 아가씨 군." "무슨 소리야.....아..." 부루퉁하게 다 기어가는 목소리로 묻자 소년이 옷을 탈탈 털고는 말했다. "내가 조금만 더 경우 없었더라면....하고 생각해 봐. 벌써 일 났지." "......" 오싹하긴 하다. 유제니아는 몸을 웅크리고는 무릎 위에 턱을 얹었 다. 소년이 옷을 탈탈 털며 물었다. "왜 다시 온 거지?" "......" 저렇게 물으니, 애써 생각해 두었던 게 다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유제니아는 어깨를 푹 늘어뜨리는 말했다. "어제 고마웠다고." "하지만 오지 말라고 했다." "후아나가-아, 내 방 친구야. 여튼 그 애가 이상한 말을 했거든. 여 기 근처에....너 같은 아이도 없고, 이 숲에는 산지기도 없다는 거야. 게다가 나보고 헛것을 봤다느니, 뭐라느니 하기래....확인하러 왔어." 소년은 말이 없었다. 유제니아는 뒤를 흘끗 돌아보았다. 그는 옷을 앞의 바위 위에 던져 놓고는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다, 유제니 아의 시선을 느낀 듯 돌아본다. 은빛 머리카락은 쏟아지는 달빛 아래에서 더욱 눈부셨다. 정말 유령 이나 그런 것 같지는 않았고, 뭐 이상한 것이라 보이지도 않았다. 소년은 그런 것이라 말하기에는, 너무나 '생생했다'. 유제니아는 슬쩍 그를 불렀다. "이리 와 볼래?" "....왜지?" 그러면서도 소년이 다가오자, 유제니아는 허벅지와 가슴이 안 보이 도록 조심조심 하며 슬쩍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한 가닥만 가져갈게. 증명해 보여야 하거든." "그런 이유라면 손도 대지 마라." 유제니아는 기분이 나빠졌다. 뭐야, 저 녀석....지가 무슨 공주라고 저리 도도하담. 유제니아는 손을 휙 치우고는 고개를 들이밀며 말했 다. "다른 누구한테 증명하는 게 아니야. 나한테 증명하고 싶은 거야." "무슨 소리지?" "네가 유령이나....뭐 그런 거라면 내가 서운할 것 같거든. 나, 꽤나 적적한 몸이라 아는 사람이 하나라도 더 많은 게 좋아." 그 말에 소년이 웃었다. "그렇다면 나중에 주지." 그리고 둘 다 돌아앉았다. 잠시 바위 쪽으로 갔던 소년이 돌아오더 니, 유제니아의 치마와 블라우스를 내밀었다. "어라, 벌써 다 말랐어?"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제니아는 얼른 블라우스에 코를 가져가 보았지만, 방금 햇빛에 내 놓은 듯 바짝 말라 있었다. "대단하다~~" "어려운 건 아냐." "혹시, 너 마법 쓸 줄 아는 거야? 응, 응?" 다시 소년의 얼굴이 시뻘개지며 휙 돌아섰다. 유제니아는 얼른 옷을 당겨 앞을 가렸다. 소년이 힘겹게 말했다. "제발....조심 좀 해줬으면 좋겠다....." "볼 것도 없는데, 뭐. 난 정상적인 기준으로는 아직 '애'라구..." 소년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충분히 크던데." "펄펄 뛰어대면서 자세히도 봤네. 혹시 더 잘 보려고 그런 거 아 냐?" "......" 한번 기선 제압을 해 보고 싶었던 소년은 완패하고 고개만 픽 떨구 어야 했다. 유제니아는 새침하게 투덜대며 옷을 입었다. 그리고 셔츠를 휙 던져 주고는 덤불 속에서 기어 나왔다. "이제 됐지?" "충분히." "몇 살이야, 너?" 갑자기 시작된 유제니아의 질문에 소년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 기만 했다. 유제니아가 먼저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난 열 여섯." 소년은 그런 유제니아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가 고개 를 가만히 저었다. "....몰라."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다. 몰라." "고아나, 뭐 그래서 모르는 거야? 맞아, 이름도 모르는데......" 소년이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기억 안 나." 유제니아는 소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소년이 피식 웃고는 말했 다. "안개 속에 있는 것 같아. 주변은.....온통 하얗고..... 그렇게 천천히 걸어가다 보면....검은 벽에 부딪히지." "검은...벽?" "그 때부터는 온통 깜깜해 진다. 기억이 나지 않는 다, 라는 사실조 차 잠시 잊어버릴 만큼. 그냥...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가 되 버리는 거야. 늘 그래." 유제니아는 오싹했다. "그럼, 너....정말 유령이라도 되는 거야?" "무언가가 죽어서 남겨진 것이 유령이라면....나는 정말 유령일 테지. 어느 지워진 기억이 남긴 유령 말이야." 소년의 웃음이 묘했다. 그러나 유제니아는 그런 소년에게 겁먹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기에는 주변에 살던 알르간드 족과 성의 마법사 에쿠스와 마녀 리사가 친절하게 파괴해준 상식이 너무나 많았으니. 대신, 우선 가장 먼저 신경 써야 할 것부터 물어 보았다. "그럼 여기서는 어떻게 살고 있는 거야?" "어느 마법사와 같이 살고 있다. 언제부터인지, 대체 왜 같이 사는 지는 몰라. 단지, 그와 같이 산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만 알고 있 을 뿐이야." ".......어라, 그건 어떻게 알아?" "나와 관련된 흔적이란 것이, 대부분 얼마 되지 않은 것들뿐이니까. 하지만 그것 뿐이야. 나머지는....아무 것도 모르고, 모르니....안개 속 에 갇힌 듯 그의 옆에 머물 수밖에 없어." 그러다가, 소년은 유제니아를 물끄러미 보았다. 유제니아는 눈을 크 게 뜨고는 그런 그를 마주보았고, 결국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이만 돌아가 봐. 오래 있으면 좋지 않아." "나도 그럴 생각이었어. 아, 내일 와도 돼?" "아니." 유제니아가 실망하는 듯 하다가도, 정말 그럴까 보냐는 듯 한 얼굴 이자 소년은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은 보름이다. 이곳에는 절대 오지 말고, 온다면.....그 날은 널 도와줄 수 없어. 아니, 며칠간은 난 어디로든 갈 수 없다. 나올 수조 차 없으니까." "왜?" "'그'는 보름 근처에만 나를 놓아주지. 그 시간의 나는 가두는 것보 다는 그저 놓아두는 편이 훨씬 나으니까.....하지만 유제니아, 그 모 습은 너도 감당할 수 없어." 유제니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언제쯤 다시 볼 수 있을까?" "당분간은 힘들어. 하지만, 정 오고 싶다면......아니, 아니야. 오지 마."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손을 딱 움직이자, 물 속에 깊이 잠겨있던 램프가 올라왔다. 물방울이 바위위로 주르륵 떨어졌다. 소 년의 손이 다시 가볍게 흔들렸다. 램프 위의 물이 걷히더니, 그 속 에서 빛이 터졌다. "가지고 어서 내려가. 당장 가지 않으면....내 손으로 직접 던져 버릴 수도 있어." "...." 참 무서운 말을 무섭도록 차분하게 한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고마워." 유제니아는 인사도 없이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런데, 소년이 갑자기 물었다. "그 반지......누가 준거지?" 유제니아는 램프를 위로 들고는 돌아섰다. 소년이 그런 유제니아를 바라보며, 기이한 빛에 흔들리고 있었다. 문득, 유령이나 요정일 지 도 모른다 생각했던 유제니아는 이제는 완벽하게 확신하며 고개를 저었다. 저 아이는 분명 사람이다. 피와 뼈와 살을 가진 진짜 사람. 숨쉬고 있으며, 살아있는 진짜 사람인 것이다. 그 반지에 대해 묻는 지금 이 순간, 그는 갑자기 생명을 되찾은 듯 보였다. 이상하네, 정말. "어머니 유품이야. 쌍으로 된 건데, 나머지 하나는 의붓오빠가 가지 고 있어." "의붓오빠......?" "응...." 무언가 더 묻지 않을까, 하고 기다렸지만 소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제니아는 결국 머쓱해져서는 먼저 돌아섰다. 그러나, 그러다가 다시 잽싸게 돌아와서는 고개를 숙이고 그 볼에 살짝 키 스했다. "작별 인사. 다음에 봐." 그리고는 유제니아는 생긋 웃었다. "유즈라고 불러도 되. 유제니아라면, 좀 길잖아? 어색하기도 하고." 순간 소년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아무 것도 모르는 채 돌아서는 유제니아를 향해 외쳤다. "이름이.....정말 이름이 뭐지, 유제니아?" 계곡 아래로 내려가던 유제니아는 램프를 흔들며 큰 소리로 답했다. "유제니아 쥬르 포틀러스--!" *********************************************************** 작가잡설: 기억상실증에 걸린 산마로 아키와 아라 유즈. 저 멀리서 아키를 기다리고 있는 소서노 루첼......(켈브리안 공주가 아니다;;)은 벌써 마라한 실비와 결혼해 버렸다...-_-;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21장 ************************************************************** [겨울성의 열쇠] 제96편 가느다란 빛#3 ************************************************************** 방문객은 특이했고, 그 특이함은 사람들의 호기심과 호의를 동시에 자극하는 것이었다.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시거나, 그저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며 담배 한 대라도 피우려 앉아 있는 사람들의 눈길이 계속 구석진 자리에 머물렀다가는 사라졌다. 그러나 섣불리 말을 걸거나 하지는 못한다. 어디, 수다스런 바드라도 하나 나타나 '그'에게 말을 걸어주기를 은 근히 바랬지만 그 흔한 유랑가수들은 이상하게도 오늘 따라 도무지 들어올 기미가 없었다. 그 손님은 분명 엘프였다. 진한 피부색으로 보아, 어둠 숲의 일족 같았다. 귀는 모든 숲의 일 족답게 길게 뻗어 있고, 얼굴 역시 준수하나 몸은 제법 건장해서 버 들처럼 얇고 날씬한 보통 엘프들과는 좀 틀렸다. 어둠 숲의 특징인 지도 모른다. 그들은 말 그대로 어둠 숲에 은둔하는 종족이고, 불꽃 숲이나 나르실로 숲의 일족들 보다 몇 배로 강인한 전사들이다. 그는 말없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시켜 놓은 식사도 아주 간단해서, 빵 한 덩이에 맥주 한 잔만을 놓고는 정말 식사를 하려고 온 건지 그저 앉아만 있자니 눈치가 보여서 그리 시킨 건지 모를 정도로 묵 묵히 앉자 파이프만 피우고 있었다. 자욱한 담배 연기가 얼굴 언저 리에 어리다가는 흩어졌다. 안개가 끼인 듯 주변이 흐릿했고, 한 곳 만을 골똘히 바라보는 암녹색 눈동자 역시 침침함 빛이다. 그러다 가게문이 열렸다. 손님들은 행여나 싶어서 일제히 고개를 돌 렸고, 이번에야말로 정말 말을 걸고 미치겠다는 듯한 얼굴이 되었으 나 엄두를 못 내는 것은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들어온 새로운 손님은 여자 엘프였다. 늘씬한 몸에 진한 피부색을 가지고 있었고, 얼굴은 조각처럼 아름다웠으나 이마에 긴 흉터가 나 있어 보는 이를 안타깝게 했다. 검은 머리카락은 쏟아지듯 곧았고, 빛나는 눈동자는 회색이었다. 이마에는 하얀 은으로 된 서클렛을 두 르고, 그 중앙에는 동그란 진주인 듯 보이는 하얗고 둥근 보석이 박 혀 있었다. 엘프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자가 있다면 그녀가 일족 중에서 어느 정도 위치인 지 알만한 장식이었으나, 가게 안의 사람 들 중에는 그 정도 박식한 사람은 없었으니 그저 그 아름다움에만 경탄을 보낼 뿐이었다. 그녀는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더니, 구석에 앉은 엘프 청년을 발견하 고는 눈길을 멈추었다. 청년이 고개를 들었다. 여자는 그와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였고, 청 년은 곧 자리에서 일어나 주머니에서 은화 한 개를 꺼내 테이블 위 에 얹어 놓았다. "가겠소." 종업원이 달려와 돈을 가져가기도 전에 두 엘프 남녀는 자리를 나 섰다. "당신이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바실리카." 숲으로 들어오자, 그렇게 말한 자켄은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인사를 했다. 바실리카의 손길이 자켄의 얼굴로 오더니, 잠시 멈칫했다가 다시 다 가와 그의 턱을 조용히 쓸어 올렸다. 맹수라도 만지는 듯 조심스런 손길로 시작되었지만 그것은 곧 귀중한 것을 차분하게 느끼고 싶은 손길로 변해갔다. "수척하구나, 자크." 그리고 그런 손길도 곧 거두어졌다. 바실리카의 회색 눈은 안개가 깔린 듯 고요했고, 그 차분하고 차가 운 눈동자 속으로는 따스한 연민이 흐르고 있었다. 자켄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그런 눈빛을 하고도?" 자켄은 쓰게 웃었다. "역시....괜찮습니다. 이것만은 저도 어찌할 수 없군요." "어머니께서 차라리 숲에서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잖니- 이렇게 인간 세상으로 돌 필요는 없잖아." 그녀의 목소리는 책망하는 기색이 강했다. 자켄은 그녀의 엄격한 눈길을 피하려 노력하며 말했다. "제게는......그렇게 아무 하는 일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욱 고됩 니다. 헛되더라도, 직접 발로 뛰는 것이.......더 낫습니다." "자크-" "그러니 바실리카, 이렇게 지치는 것은 제 탓일 뿐이니 괜찮습니 다." "그러다가, 결국 정말 움직여야 할 때 움직이지 못하면 어떻게 할 생각이지?" "별로 힘든 일도 아닙니다, 바실리......카 님." 바실리-하고, 어렸을 때 그녀를 부르던 애칭으로 부르다가 결국 존 칭까지 붙여 버렸다. 자켄이 그렇게 어색할 정도로 격식을 차리자, 바실리카는 조용히 한숨을 내 쉬었다. "나는....왜 어머니께서 너를 그 곳을 보냈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 없 다." "아시지 않습니까. 그 때의 제가 어땠는지." "버틸 수 있었어. 조금만 더 시간을 가졌더라면, 이렇게........그 남자 와 얽매일 일없이 잘 지낼 수 있었을 거다." 자켄은 다시 웃고 말았다. 제가 무엇 때문에 그토록 혼란하고 괴로 웠는지 아직도 모르시는군 요, 바실리카. "제가 그 아이를......찾지 않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내 솔직한 심경을 말하자면 그렇다. 어머니께서 그런 의무를 내리 지 않았다면, 나는 분명.......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너를 숲으로 데려 갔을 거야." 자켄은 그저 나무 둥치에 등을 기대고는 고개를 들었다. 무성한 나뭇잎들 사이로, 훤하게 빛나는 보름달이 보인다. 그리고 그는 다시 눈길을 내려보았다. 바실리카는 그 앞에 있는 나무 그루 터기에 앉아 그런 자켄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켄은 등을 떼고는 허리를 숙였다. "가끔......어머니의 선택이 옳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 다." "자크-" 바실리카는 당연하게도 아주 노여워했다. 회색 눈이 차갑게 변했고, 눈썹 사이에도 작은 주름이 졌다. 자켄이 말했다. "많은 의문이 저를 괴롭힙니다. 차라리 그 남자에게 그 저주를 내리 시지, 왜 하필.....그 아이, 아무 것도 모르고 죄도 없는 그 아이에게 그런 일을 겪게 했는지." "네가 아델라이데의 불행을 물려받았듯, 그 아이가 아버지의 죄를 물려받는 것은 당연한 이치야. 사자의 자식은 사자, 새의 자식은 새, 그리고 인간의 아이는 그 어미아비의 것을 물려받아야 하고, 그것이 야말로 인간으로서 생명을 얻는 대가다." 바실리카는 언제나 사이러스의 일에 대해서는 감정적으로 보일 정 도로 분노하곤 했다. 어머니가 사이러스에게 자켄을 데려다 후계자 로 삼는 다면 저주를 풀어주겠다 했을 때조차, 그녀는 오히려 더 분 노하며 그런 조건은 거두어 달라고 했었다. 기억한다. 그녀는 어머니의 발치에 무릎을 꿇으며, 자켄을 인간 세 상으로 보내겠다는 말을 제발 거두어 달라고 했다. 그녀는 전사의 장, 비록 어머니 앞이라 할 지라도 쉽게 무릎을 꿇지 않는다. 그런 그녀의 행동은 그만큼 당황하고 필사적이어서 그런 것이다. 그녀에 게 있어 자켄은 지키지 못했던 여동생 아델라이데, 그 자체였다. 그 녀는 과할 정도로 자켄을 보호했다. 어린 엘프들이 혼혈이자 사생아 인 자켄에게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 시'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무도 말을 걸지도 않았지만, 괴롭히 지도 않았다. 그들은 전사들의 수장인 바실리카를 두려워하고 존경 했기에 그녀가 보호하는 자켄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단지, 지독히 냉대할 뿐이었다. 그것에 대해 진작에 이 바실리카에게 말했다면, 아마도 그녀는 자켄을 데리고 단 둘이 살아가는 것을 택했을 것이 다. 그리고 그것을 도저히 볼 수 없기에 자켄은 침묵하고 떠나는 것 을 택할 수 박에 없었다. "바실리카...." "이해해 주지 않아도 상관없다, 자크. 네 어머니가 어떻게 죽어갔는 지.....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 가엾은 동생이 시들어 죽어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건.......내 심장을 뜯어 부수어 버리는 것 같은, 그런 고통이었어.....그러니 난 별 수 없구나." "죄송합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바실리카, 그 아이를 찾지 말라는 말씀은 하지 말아 주십 시오. 당신에게.....당신의 동생이자 제 어머니였던 그분이 소중하였 듯, 제게도 그 아이가 소중합니다. 고통스럽게 놔 둘 수 없습니다. 결코--" "위험할 거야." "압니다. 알기에 가야 하는 겁니다." 자켄의 볼 쪽으로 그녀의 손이 다가왔다. 자켄은 고개를 숙여 그녀 의 손이 그 볼을 어루만지는 것을 조용히 느꼈다. 부드럽고 다정한 손길, 엄격하면서도 절대적인 보호.....어렸을 때부 터 늘 그의 옆에 놓여있던 이 손. 마침내 바실리카가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께서 드디어 대략적인 위치를 알아내셨다." 자켄이 고개를 들었고, 그는 그녀의 젖은 눈동자와 마주했다. "에크롯사의.....드래곤의 영지 중 하나다. 몇 번의 탐색 끝에, 그곳 에.......비슷한 힘을 흐릿하게나마 감지하셨다." "드래곤.....말입니까?" "그러니 제발 가지 말아라, 자크. 아무리 네가 혼혈이라지만....너의 반은 엘프다. 그곳의 대지는 너를 거부할 거야." 자켄은 그녀의 손위에 손을 포갰다. 이제야 그녀의 눈빛이 왜 이다 지도 슬펐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가야 합니다, 바실리카." "널.....위험한 곳으로 보내고 싶지 않아." "당신이 저를 사랑하듯.......저 역시 그 아이를 사랑합니다. 당신이 저를 보내며 느낄 고통은, 제가 당신과 머물 때의 고통과 비슷합니 다. 이기적이라는 것은 알지만.....보내 주십시오. 제발....여기서 당신 이 저를 붙잡으신다면, 저는 떠날 수 없어요." "자크-" "보내주십시오." 바실리카의 눈 속으로 더욱 진한, 기이할 정도로 서글픈 슬픔이 서 렸다. "........사랑한다, 자크." 은색의 달빛이 그녀의 회색 눈 위로 쏟아지고, 이마와 입술을 적셨 다. 자켄은 저도 사랑합니다, 라는 당연한 말로 응수하지 못했다. 그래 서 그 이마에 입맞추고는, 아마도 그녀보다 더욱 서글플 듯한 눈으 로 그녀를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저도 당신을 사랑하지요, 아주-너무나-- 그리고 언제나 그 말만은 입 언저리에 머물 뿐이었다. *********************************************************** 작가잡설: 유즈를 내 보내면서 무척 고민 많이 했습니다;;; 그런 위치의 여자애란 예쁘면 예쁜 대로 미우면 미운대로.....그저 총수(...) 옆에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미움 받는 다고나 할까요;; 전례) 메라디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21장 ************************************************************* [겨울성의 열쇠] 제97편 가느다란 빛#4 ************************************************************** 소년은 숲의 축축한 바닥에 누워 곧 다가올 변화의 시간을 기다렸 다. 가득 찬 달에서 쏟아지는 빛은 얇은 베일처럼 고요히 그의 위로 내려앉았고, 소년은 그 빛에 젖어 들어가며 숨을 고르고 마음을 가 라 앉혀갔다. 드디어 열 네 번째였다. 그리고 그렇게 변화의 시간을 세며, 소년은 자신이 아마도 이곳에 대략 그 정도 여기서 머물고 있을 거라고 생 각했다. 부우, 부우--부엉이 우는소리가 들려왔다. 소년은 귀를 기울이며, 행여나 며칠 전에 듣게 되었던 그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는 않는지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작은 짐승이 지나가는 사르락, 사스락 소리만 들려올 뿐, 그 작은 발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누군가가 숲으로 들어오는 것은 드문 일은 아니었다. 아이들은 이 숲의 어디까지 가느냐로 용기를 가늠했지만, 깊이 오지도 못하고 냅 다 달아나기 일쑤였다. 그 날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년과 비슷한 나 이또래의 여자아이가 들어오더니 아이들이 늘 도망쳐 버리는 거리 까지 오자 무언가 던져 놓고는 도망가 버렸다. 소년은 나무 위에 앉아 그것을 지켜보다, 그 틈에서 반짝이는 것을 주워 들었다. 백조 모양의 반지였다. 바깥에 대한 기억이 없는 소년에게 그것이 귀한 것인지, 싸구려인지는 모르겠지만......반지에서 빛나는 자그마하 고 푸른 보석은 투명하고 아름다웠다. 생각 없이 가져간 것이다. 버리고 가는 것을 보니 별로 중요한 것 같지도 않았고, 다시 찾으러 오지도 않을 거라 생각했으니.... 순간 심장이 쿵, 하고 크게 뛰어 올랐다. "--!" 소년은 가슴을 움켜쥐며, 찬찬히 숨을 골랐다. 그런데, 평소에는 안 개가 깔리는 듯 정신이 몽롱하고 흐려지는데 지금은 그 반지가 머 리 속에 가득할 뿐이었다. 그리고 반지를 향해 손을 뻗는 소녀의 손 과, 그 반지를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 다시 쿵, 하고 심장이 벌컹 뛰 어 올랐다. 피가 뜨거워지고 빨라지기 시작하더니, 세차게 휘몰아치 기 시작했다. 머리에 피가 멈춘 듯 현기증이 인다. 뭘 울컥 토해낼 것 같은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지만, 답답하기만 할뿐이었다. 어깨와 팔뚝이 부풀어오르는 것 같았다. 이가 커지며 잇몸이 깨질 듯 아파 왔고, 뼈들이 커지고 굵어지며 살이 찢어지는 듯 고통스럽 다. "크....읏--!" 손톱이 굵어지고, 다리도 굵어지고 굽어지면서 마치 잡아 뽑듯이 아 팠다. 눈물이 스며 나왔다. 이를 악물 수도 없고, 주먹을 움켜쥘 수도 없 다. 그저 컥컥대며 고통을 참아내야 할뿐이다. 젖은 눈 너머로 보이 는 달빛이 그리는 그림자는 점점 크게 부풀어오르고 있었으며, 얼굴 은 괴물처럼 거대해지고 어깨도 높게 솟구친다. -아니 야--! 바닥에 엎드려, 소년은 바로 앞에 있는 흰옷의 여인을 바라보고 있 었다. 늙은 얼굴이 아닌데, 여자의 머리카락은 온통 새하얗고 얼굴은 달빛 보다 창백하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다,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다가가려 했지만, 여자가 너무나 슬프게 울고 있어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게다가, 손등에는 발톱과 이빨 자국이 나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 붉은 핏방울이 그녀의 흰머리와 흰 피부, 하얀 옷자락에 온통 튀어 있었다. 다가가려고 몸을 움직였고, 순간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다시 떨더니, 문을 열고 달려나갔다. 그래서 그녀를 따라 뛰쳐나갔다. 여자 몇이 달려들어 그녀를 붙들었 지만, 그를 붙잡지는 못했다. 그저 비명을 지르며 여기 저기 도망치 다가, 그녀 쪽으로 소년이 다가서자 결국 그녀마저 놓고는 놀란 거 미 떼처럼 도망쳐 버렸다. 백발의 그녀는 현관 쪽으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문이 열린 것을 확 인하자마자 뛰쳐나가 달리기 시작했다. 멀리서 여자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폐하께 전해요--! 어서-! 살이 깎여나가는 듯한 매서운 추위, 눈이 몰아친다. 우르릉--쿠르르릉--거대한 바다가 몸부림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춥다, 너무나- 몸이 갈가리 찢겨 나갈 정도로. -이 녀석은 잡아 가둬라. 그저 바닥에 엎드려 숨만을 몰아 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자, 그의 거칠고 억센 손이 뒷덜미를 붙잡았다. 몸을 뒤틀어 물어뜯으려 했지 만, 그가 칼집을 들어 목덜미가 으스러지도록 후려쳤다. 결국 비명 을 지르며 몸을 축 늘어뜨렸다. 그는 소년의 자그만 몸을 차갑고 단단한 벽을 가진 어딘가에 내 동 댕이치고는, 직접 쇠사슬을 들어 목과 발에 채워 넣었다. 울부짖으 며 몸을 당겼지만, 그 때마다 오히려 더 거센 힘으로 바닥에 내동댕 이쳐질 뿐이었다. 육중한 문이 크르르르릉 닫혔다. 차가운 바닥, 상처투성이가 된 몸, 그리고 어둠과 정적.....그 안에서 눈을 빛내며, 나직이 으르렁거릴 뿐이었다. 무서웠다, 너무나......그러나 울며 기댈 곳이 아무 데도 없었다. 소년은 머리를 누이고 잠들었다. 검 집에 맞아 으스러진 어깨가 욱 신거려왔고, 달이 기울어질수록 그 고통은 악령처럼 그 어깨에 들러 붙어 머물고 있는 듯 했다......슬프고 외로워서, 그냥 눈물만이 쏟아 질 뿐이었다. -누우십시오, 왕자. 그리고 그의 어깨를 붙드는 손이 있었다. 청년, 키가 훌쩍 크고 어른스러운 표정과 눈빛을 가진 청년이었다. 비에 젖은 검은 머리카락과 그 볼에 선명히 그어진 흉터- 그러나 섬세하고 아름다운 금녹의 눈동자. 그는 아킨의 어깨를 쥔 채, 그의 상처를 바라보고는 어두운 눈빛으 로 저 편을 바라보았다. 그도 여기 저기 상처가 나 있었고, 옷도 찢 어져 있었다. 몸이 떨려오며, 무섭도록 추워지기만 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어디 가 어떻게 아픈 줄도 모를 정도였고...그저, 이것이 어서 끝나기만 기다리다가도 그 가느다란 호흡을 끝내고 싶지도 않았다. 놓고 싶다 가도 움켜쥐고 만다. 청년의 목에는 하얀 목걸이가 반짝였다. 두 개의 테, 하얀 백조의 모양, 푸른 보석...... 가만, 이건..... 순간, 검은 안개 같은 것이 밀려들어오며 그 기억들을 잘라먹기 시 작했다. 두텁고 까만 커튼을 휙 쳐버린 듯 그것들이 차례차례 사라 지기 시작했다. 소년은 필사적인 기분으로 앞으로 달려갔다. 그것은 점점 더 까맣게 만 변해가고, 드디어 실처럼 가느다랗고 하얀 한 줄기 만이 남아 있 었다. 소년은 손을 뻗었다. 그 틈에서는 하얀빛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고, 소년은 그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틈은 조금 더 커졌다. 머릿속으로, 차분하지만 기분 좋은 음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순서 없이 불쑥 불쑥 튀어나오고 있었지만, 소년은 그것들을 계속 더듬어 갔다. 빛은 좀 더 넓어졌고, 머리에 번개처럼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으.....!" 두통이 치밀어 오른다. 머리안으로 뭐가 쿡, 하고 파고 들어오는 것 만 같았다. 그런데, 빛 속으로 큰 그림자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소년은 뒤로 도망치려 했지만, '그'가 손을 뻗더니 소년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컴 컴한 가운데, 그의 강직해 보이는 턱이 언뜻 보였다. 검은 눈동자가 보인 듯도 하고, 짧게 자른 검은 머리카락도 보았다. 어깨는 넓고, 키는 장대했다. '그'는 그 크고 강한 손으로 소년의 어깨를 붙잡고는 가만히 흔들었 다. "누구....!" 그러자, '그'가 빙그레 웃었다. -여기 까지는 잘 했다. 자, 이제는 탑의 정상에서 보자꾸나. "뭐라고요?" -탑의 정상으로 가서, 서쪽을 봐라. 잊으면 안 돼. "서쪽?" 그러나 순간 빛이 번개 치듯 파앗--하고 크게 터져 나가더니, 소년 을 덮쳤다. 빛과 어둠만으로 차 있던 세상이 산산이 부서졌고, 습하고 차가운 새벽 공기가 싸하게 볼에 와 닿았다. 하늘은 아직 빛이 터지지 않은 검푸른 색, 하얀 달은 서산에 걸려 있었다. 쿵-- 발을 움직이자, 육중한 울림이 숲을 흔들었다. 순간 환한 빛이 확 다가왔다. 소년은 눈을 돌렸고, 바로 앞으로 램프의 환한 빛이 눈부 시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는 치미는 살기에 발을 휘둘러 그 램프를 떨어뜨렸다. "꺄악--!" 날카로운 비명이 터졌다. 새처럼 작은 것이 발에 맞아 저 편으로 내 동댕이쳐졌고, 발톱 끝에 무언가가 걸려 퉁겨 나갔다. 숨 헐떡이는 소리가 들려오며, 옅은 피비린내가 풍겨왔다. 순간 사나운 본능이 확 타올랐고, 고개를 드니 건너편에 자그마한 것이 떨고 있었다. 램프는 불이 꺼진 채 뒹굴고 있었고, 그 옆에 방 금 전에 퉁겨 나간 목걸이가 있었다. 소년은 그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가슴과 목이 발톱에 긁혀나가 피투성이가 된 소녀는 도망치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조금만 더 앞에 있었다면 아마 목이나 몸이 반 동강 이가 났을 것이다. 순간, 가늘게 떨고 있는 소녀의 볼이 장밋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소년은 그 빛이 스며 나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고, 곧바로 얼굴을 덮쳐 오는 무수한 빛의 쏟아짐과 그 눈부심에 눈을 감았다. 솟구치 는 아침해가 부둥켜안고 있다가 솟구치는 순간 한꺼번에 퍼뜨리는 그 빛은 몸을 따사롭게, 부드럽고도 조심스레 온 몸을 적셔왔다. 몸 위를 덮쳐 누르던 것이 순식간에 씻겨 나갔고, 기분 좋은 나른함 이 밀려 들어왔다. 재앙은 물러나고, 폭풍은 씻겨나가고, 그렇게 세 상은 원래의 그 아늑한 평온으로 돌아오고 있다. 손끝에 무언가가 걸렸다. 그리고 손은 이미 본래의 그의 손으로 돌 아와 있었고, 그 섬세한 손가락 끝에 있는 것은 얇은 반지였다. 순간 소년은 가슴이 주저앉을 정도로 놀라, 다급히 외쳤다. "괜찮아, 유제니아....?" 유제니아는 멍하니 있다가 그제야 자신의 상처를 발견하고는 기겁 했다. 램프를 먼저 치며 발톱에 스친 것이라 그리 깊지는 않았지만, 옷은 완전히 찢겨 나가있고 가슴과 목덜미는 피에 흥건히 젖어 있 었다. 안도한 소년은 한숨을 쉬고는 책망하듯 말했다. "오지 말라고 했잖아." "저기...놓고 간 게 있지 뭐야. 아, 하하...." 그런 말 믿는 사람도 있겠냐 싶은 소년은 한숨을 푸욱 내 쉬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떠올랐다. 아련하고 그리운 것, 그것이 따뜻하게 목에서 솟구쳐 오르더니 온 몸으로 잔잔하게 퍼져간다. 그리고 그것을 소년은 말했다. "아킨토스-" "응?" "아키라 불러도 되." 그제야 유제니아는 그가 무엇을 말하는 지 알아들었다. 아직 얼굴은 아주 해쓱했지만, 그래도 희미하게나마 웃어 보인다. 그러며 고개를 슬쩍 돌리는데, 그렇게 하니 피투성이가 된 목덜미가 더 잘 보였다. 피부터 닦아야겠네, 그렇게 생각하며 아킨은 유제니아 반지를 집어 주려고 했다. 그러나 유제니아가 손을 채 뻗기도 전에, 둘 사이로 날카로운 그림자 같은 것이 팍 치솟았다. 맙소사, 벌써....! 아킨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휘둘러 유제니아를 세 게 팍 밀쳐내고는, 그 팔을 당겨 얼굴을 가렸다. 팟, 파밧--! 차갑고 얇은 날개 같은 것이 앞에서 빠르게 퍼덕이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어깨 위로, 얇고 차가운 손이 다가와 그를 꽉 움켜잡았다. "--!" 순간 숲이 눈을 감듯 사라져버렸다. 빛도 사라지고, 놀란 유제니아 도 사라져버렸다. 아킨은 앞으로 당장에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꾹 참 았다. 지금 이 순간 그렇게 했다가는....위험할 사람은 다름 아닌 그 작고 약한 소녀라는 것을 잘 안다. 아킨은 손안으로 반지를 밀어 넣고는 꽉 움켜쥐었다. 손에 유제니아 의 피가 묻어 있었고, 그 피투성이가 된 몸이 생각나자 아킨은 다시 금 아찔해졌다. 그 꼴로 숲 밖까지 나갈 수는 있을까..... 그 때였다. ".....돌아 왔구나, 꼬마야." 아킨은 '그'가 제발 유제니아를 모르기를 간절히 바랬다. 등골이 오 싹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그가 다가오더니, 두터운 모직 로브를 건 네주었다. "입어라." "....." 아킨은 그것을 잡고는 세게 빼앗았다. 그는 클클 웃더니 안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 사라졌고, 아킨은 밀려드는 안도에 작게 한숨을 내 쉬었다. 알아채지 못했구나...... 그런데 그리 생각하는 순간 심장이 쿵 뛰었다. 그렇다, 아킨은 분명 반지를 기억하고 있었고, 그것은 유제니아의 것이 아니라 좀 더 큰 것이었다. 그것을 떠올리자, 본 모습으로 돌 아오기 전에 언뜻 보았던 어떤 남자도 떠올랐다. 대체 누구지? 누구지--기억해 내야 하는데. 아킨은 차분히 숨을 고르며 그것들을 더 자세히 떠 올려 보려고 노 력해 보았다. 그러나 무언가 있다는 것은 떠오르는데, 그 이상은 아 무 것도 생각나지 않아 답답했다. 갑자기 무언가가 확 치솟아 올랐 다. 정신이 돌아오고 모습이 뒤바뀌려 하는 그 순간에, 그의 의식을 비집고 들어온 남자 목소리. -탑의 정상으로 와라. 그제야 아킨은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그에게 무언가 속삭여 주었던 남자의 목소리를 기억해 냈다. 백조를 기억하라고 분명히 말 했던 그 목소리. 그렇다, 같은 목소리였다. -탑의 정상으로 와서 서쪽을 봐라. 아킨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 냈듯, 그 말 역시 입술 언저리로 중얼 거리며 기억 속에 분명히 새겨 넣었다. "탑의 서쪽-" *********************************************************** 작가잡설: 아키.....군, 자신이 아주 큰 실수를 했다는 건 알고 있으려 나... 유즈, 너 아키 책임져.....(진지)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22장 ************************************************************** [겨울성의 열쇠] 제22장 은둔자의 탑 제98편 은둔자의 탑#1 ************************************************************** 휘안토스는 또 그 꿈을 꾸었다. 이번에는 새벽녘에 꾼 것인데, 역시나 기분 좋지는 않았다. 그래서 깨어나고 한참이 지난 지금도 아직도 언짢았고, 마지막 광경이 머릿 속에서 통 지워지지 않았다. 사흘인가, 계속 이런 꿈만을 꾼다. 그 안에 든 소녀만이 똑같을 뿐 인데.....태어나서 처음 보는 얼굴이니 이상했다. 이상형이라든가, 누군가와 닮았다던가 하는 것도 아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평소에 조금이라도 흥미를 가졌던 여자들과는 영 딴판이었다. 예쁘긴 하지만, 사람 고개 숙연해 질 정도로 고결하거나 천사처럼 착해 보이는 건 아니다. 눈이 깨끗하고 반짝여 영리하게는 보이나, 무서울 정도로 압도적인 빛은 없다. 소녀는 그냥, 작은 날개를 파닥이며 까만 눈동자를 굴리는 작은 새 같을 뿐이었다. 나뭇잎들 사이에 숨어 있다가 눈길이 마주치면 파다 닥 날아가 자취 없이 사라져 버리고, 어디선가 작은 그림자를 던지 며 다시 나타났다가는 재빨리 사라져 버리는 그런 산새 말이다. 그 런 새들은 살이나 날개도 물러 터져서는 손에 잡히면 금방 지쳐 늘 어져 버린다. 재빨라서 잡기도 힘든데, 잡고 나면 더 힘든 것이다. 휘안토스로서는 까다로운 상대였다. 차라리 칼라하스나 켈브리안 공 주가 상대하기 쉽다. 그녀들은 대등하게 서로의 눈을 마주보며 대결 을 벌일 수 있는 여자들이다. 그것은 휘안토스가 늘 해오던 일이니 어려울 것 없었지만, 이 소녀 는 아니다. 이기겠다고 마음만 먹는 다면, 금방이라도 그 풀잎 같은 날개를 꺾어버릴 수 있고, 그리 되면 금새 죽어 버리겠지. 뭐야, 너. 휘안토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만나기는커녕, 실제로 있는지도 애매한 소녀에 대해 이렇게 깊이 생 각하다니.....우스꽝스러울 지경이었다. 아마도 이 '현상' 자체가 이상하기 때문일 것이다. 언짢다- 명확하지 않은 것, 아주 선명한 논리로 설명되지 못하는 것 은 무엇이든 싫다- "그러니......어떻게 생각해요, 휘안토스 왕자?" 그제야 휘안토스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이제 퇴위만 남겨 놓은 황제의 막내딸인 필리나 황녀가 그 자그마 하고 예쁜 얼굴에 기대감을 한가득 채워 넣고는 그를 바라보고 있 었다. 그렇게 보니, 그 여자애와 여기저기 비슷한 구석이 많았다. 검은 머 리카락에, 눈도 푸른색이었다. 휘안토스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필리나 황녀의 얼굴에 홍조가 돌 았다. 휘안토스는 빙그레 웃고는 말했다. "못 들었습니다. 무엇을 물어 보신 겁니까." 무안해진 필리나는 잔뜩 당황한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했다. "그렇게...중요한 건 아니에요. 그저........저, 저기..." 그러자 앞에서 조용히 차를 마시던 칼라하스 공주가 넌지시 말했다. "왕자께서 황녀전하의 얼굴만 쳐다보시느라 못 들으셨나 보네요." 필리나 황녀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 얼굴을 골똘하게 본 것 은 사실이었으므로, 휘안토스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자 필리나 는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공주께서는 내일 언제 하멜버그로 떠나시는지요?" "아침입니다." 필리나가 짐짓 놀라는 척 했다. "에크는 산도 많고, 험한데......불편하지 않으세요? 차라리 배를 타고 그냥 카를롯사로 가시는 편이 훨씬 좋은 여행이 될 겁니다." 칼라하스가 웃었다. "황녀전하, 에크에 들르겠다 했다가 취소하고 카를롯사로 간다면 두 나라 모두에게 좋지 못한 소리를 듣는 답니다. 신성의 카를롯사와 드래곤의 맹주를 모시는 에크롯사가 서로를 별 좋지 않게 생각하는 건 오랜 일. 특히 하멜버그는 카를롯사에서 과거의 일을 들먹여 번 잡하게 만드는 곳이지요." 휘안토스는 흥미로운 눈길을 칼라하스 쪽으로 돌렸다. 필리나는 그 런 휘안토스의 태도가 별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고개를 돌려 반대편 에 앉은 동갑내기 헤로롯사의 왕자 안데리온에게 말을 걸었다. 휘안토스가 칼라하스에게 말했다. "과거의 일이란 무엇입니까." "대 마법사 컬린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카를롯사 출신이랍니다. 그 리고 에크의 하멜버그는, 그 숲과 절벽에 살던 드래곤께서 컬린에게 숲을 양보하고 떠난 곳이지요. 그 때문에 카를롯사는 그 곳이 자기 네들 영지라고 주장한답니다. 정복한 곳이라 봐야 한다는 것이죠." "......그곳에 컬린이 남겨 놓은 것이라도 있습니까?" "그야 모르지요." 휘안토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그렇다면, 공주께서는 왜 그곳으로 가시는 겁니까. 보아하니, 그리 번잡한 곳에 불편하신 분이 구태여 간다는 것도 이상하군요." "카를롯사의 칼렙 호수로 잠시 여행을 떠나려고요. 배를 타고 가는 것이니, 이리 몸이 불편한 제게도 어려움이 없지요.....하멜버그는 그 저 그 길에 잠시 들러 보는 것 뿐입니다." 휘안토스는 빙그레 웃었다. "저 역시 아주 흥미가 도는군요." "숲의 전설에 대해서요?" "아니요. 곧 그곳에서 일어날 일에 대해서, 그리고 그 뒤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말입니다." 칼라하스의 눈길이 기이하게 빛났다. 휘안토스는 그녀가 일부러 자 신에게 그 말을 꺼냈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떠보려고 하는 것 이다. 그리고 그 때가서 어떻게 할 것인지, 미리 입장을 생각해 두 라는 말이기도 하다. 능글맞기는, 휘안토스는 자신과도 아주 인연 깊은 말을 떠올리며 그 얼음 꽃 같은 공주를 바라보았다. 마주치자 칼라하스는 활짝 웃었 다. 휘안토스는 하멜버그의 숲에 대해 케올레스에게 조언을 구해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마주 미소를 지어주었다. "꼬마- 꼬마- 꼬마-" 심술궂은 노파가 외치는 듯 듣기 싫은 목소리였다. 아킨은 식탁 위 를 이리 저리 서성이며 흉한 목소리를 내는 까만 구관조를 노려보 며 말했다. "시끄러워." 그러자 구관조가 칵칵거리더니 날개를 세차게 퍼덕였다. 아킨은 할 수만 있다면 새의 목을 꺾어다가 아궁이에라도 처박아 버리고 싶을 정도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아킨은 자락이 긴 옷소매를 접어 올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탁 에는 아침으로 떠놓은 수프가 사발에 반 넘게 남아 있었고, 마음껏 집어먹을 수 있을 정도로 큰 바구니에 가득 든 빵도 거의 손도 대 지 않았다. 아킨은 그래도 나중에 배가 고플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어 빵 하나를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누가 이런 식사를 준비하는 지, 아킨은 아직도 모른다. 처음에는 그 저 당연하게 식탁에 놓여진 음식들을 먹고 자리를 나서곤 했지만, 요즘은 궁금해진다. 물론 '마법사'가 음식을 장만하는 건 아니었다. 이 탑의 부엌은 때가 되면 '스스로' 음식을 토해내고는 아킨이 식탁 에서 일어나면 삼키듯 치워버린다. 그 음식들은 아무리 간소한 식사 라도 제법 먹을 만 했고, 한 달에 한 두 번 정도 차려지는 성찬은 훌륭할 정도였다. 지금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건, 그저 속이 영 좋지 않아 아무 것도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었다. 별채를 나오자, 곧 나무 그루터기 같은 모양새의 탑으로 이어진 돌 길이 나왔다. 회색 돌에 나무 지붕으로 된 별채는 아킨이 머물고 있는 곳이고, 탑 은 '마법사'가 사는 곳이었다. 아킨은 그 검은 돌로 된 탑 쪽으로 갔다. 황무지처럼 길 양옆은 울 퉁불퉁하고 잡초도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화단 흔적이 있기는 했지 만 비바람에 쓸려나가 그저 황량한 잡초밭일 뿐이었다. 길 양옆으로 는 그루터기만 남은 기둥들이 늘어져 있었고, 얇고 부드러운 덩굴에 무성하게 덮고 있었다. 엄지손가락 만한 베짱이 한 마리가 그 덩굴 의 커다란 위에 긴 더듬이를 휘젓고 있고, 그 옆에서 까맣게 익어 가는 열매가 흔들렸다. 아킨이 다가오자 베짱이는 발을 세게 퉁기고 는 풀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아킨은 검은 돌길을 걸어, 그 앞으로 뻗은 계단 위로 올라갔다. 탑 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지만, 안이 컴컴해서 마치 굴속으로 들어가 는 것 같았다. 들어서자, 탑 안은 낮임에도 금빛 등이 가득 켜져 있었다. 바닥에는 늘 새 것 같은 융단이 깔려 있고, 벽의 모서리마다 세워져 위로 뻗 어 가는 대리석 기둥들은 차고 매끄러워 보였다. 그 기둥들 옆에 장 식용 석상들이 세워져 있고, 그 모양들은 천차만별이었다. 어느 것 은 용의 모양이고, 어느 것은 사자 모양, 또 다른 것은 여인의 모습 이기도 하다. 아킨은 홀을 한번 휘둘러보고는 왼편으로 둥글게 벽을 휘감아 올라 가는 계단으로 달려갔다. 계단을 따라 꽃망울 모양의 등들이 빛나고 있었고, 아킨의 조급한 그림자가 그 반대편으로 뻗어 날 듯이 위로 향했다. 조금 지나자 2층에 다다랐다. 계단 바로 앞에 있는 작은 홀 왼편으로 접어들면 곧바로 큰 서재로 통하는 문이 있다. 아킨은 이 2층 서재를 좋아하지 않았다. '마법사'는 그 곳에 거의 매 일 있다시피 했고, 그것이 바로 아킨이 이 서재를 싫어하는 이유였 다. 마법사는 아킨이 무엇을 하든 별반 간섭하지는 않았다. 가축 방목하 듯 무관심하게 놔두었다가는, 보름이 되면 탑 밖으로 내 보내고, 모 습이 돌아오면 불러들인다. 처음에는 그것이 아주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였다. '다른' 무엇을 도저히 떠올릴 수 없었고, 이 탑과 별채, 그리고 주변을 두텁게 둘 러싼 숲 밖의 세계가 어떠한 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모습이 변하며 달을 세지 않았다면 아킨은 아마 자신이 이곳에서 나고 자랐을 거 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 새처럼 똑같은 말을 반복하며, 이곳에 뿌리 박은 저 굵고 울창한 나무들처럼 그렇게 살고 지며, 그렇게 존재하 기만 했을 것이다. 아킨은 마법사의 족쇄에 묶여 이곳에 갇혀 있었고, 나가는 방법은커 녕 나가기는 해야 하는지 그 당위조차 납득하지 못한 채 유령처럼 같은 장소만을 반복해 서성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아 가면 서부터 아킨은 마법사를 피하기 시작했다. 물론, '마법사'는 낮 동안 에는 아킨이 어떤 식으로 자신을 피하든 괘념치 않았지만, 해가 저 물면 아킨을 찾아내 서재로 끌고 왔다. 별 다른 일을 하는 건 아니 다. 그저, 아킨이 무엇을 하든 내버려두면서 골똘히 바라보는 것이 다. 그렇게 한참 보다가는 나가라고 퉁명스레 말한다. 그러면 아킨 은 지체하는 것 없이 도망쳐 나왔다. 그를 마주하면 속에 아주 기이하고 소름끼치는 두려움이 들어서 앉 아 있기가 싫다. 지금도, 아킨은 행여나 그 마법사가 볼 새라 조심조심 2층을 지나 3 층으로 올라섰다. 그 때부터는 등을 켜 놓을 필요도 없이 온 창이 활짝 열려 있어 아주 환했다. 아킨은 등이 꺼진 3층의 계단도 지나, 4층, 그리고 5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이 탑의 마지막 층이고, 5층으로 올라가면 그곳에는 완전히 무너진 첨탑이 그루터기만 남아 있다. 아킨은 그 그루터기 안으로 들어가, 거의 무너져 내린 계단을 조심 조심 올라갔다. 그곳에 둥지를 튼 까마귀 떼가 푸드득 날아올랐다. 아킨은 꼭대기에 이르자, 훤히 내려다보이는 숲을 바라보며 몸을 기 댔다. 바람이 불어와 온 숲이 한꺼번에 술렁이며 흔들렸고, 그 꿈틀 대듯 출렁이는 숲 위로는 눈부시도록 환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여기 저기 푹푹 꺼진 곳도 보이고, 높이 솟구쳐 올랐다가 절벽으로 뚝 끊어진 곳도 보인다. 솟은 산이 있고, 그 위에 뼈처럼 박힌 바위 들도 있다. 투명한 계곡이 빛을 번쩍 퉁겨내고, 하얀 거품이 이는 폭포도 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돌로 된, 크지 않지만 아름다운 성과 돌멩이 처럼 흩어진 집들이 있었다. 아킨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는 손끝에 걸리는 반지를 만지작거려 보았다. 햇살이 쏟아져 긴 그림자를 드리웠고, 아킨은 문득 그 그림자가 가 리키는 방향으로 턱을 들었다. 투명한 아침햇살이 숲 위로 퍼지고 있었다. 세상은 눈부실 정도로 빛났고, 곳곳에 신선한 금빛 색조가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아침의 모든 그림자가 향하는 그곳으로, 하얀 길이 뻗어 있었다. 아니, 길이 라 하기에는 좀 좁아 보인다. 그저 선을 그어 놓은 듯 했다. 그 길이 향하는 곳에는 큰 바위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울퉁불퉁하 지만 긴 모양새로, 그곳에 일부러 세운 듯 했다. 가만, 저 곳에 저런 것이 있었나......? 아킨은 그리 생각하며 그 바위를 물끄러미 보았다. 아침 햇살에 황 금빛으로 빛나고 있고, 그것 역시 그림자를 등지고 있었다. 그 옆에 비슷한 모양의 바위가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비바람에 쓰러져, 길 게 자란 풀과 나무에 묻혀 있었다. 탑의 정상에서 서 쪽을 바라봐라. 그대로 하긴 했지만, 당장에 특별히 뭔가 생각나는 건 없었다. 그러 다가 아킨은 그 바위에서 양옆으로 둥글게 뻗어 가나는 둥근 호를 발견했다. 호를 눈으로 따라가 보니, 그 하얀 선은 나무나 풀들이 없는 텅빈 곳으로 이어져 있고, 그 곳에서 다시 양 갈래로 갈라져 또 다른 원으로 이어졌다. 그것은 기이한 느낌이었다. 늘 지나치던 곳에서 아주 신기한 것을 발견한 호기심 많은 아이 같은 기분, 그런데 그것이 어디다 쓰는 것 인지는 모른다. 이것저것 엉뚱한 것을 머릿속에 끄집어냈다가는 이 내 잊어버릴 것만 같다. 아킨은 벽에서 몸을 떼고는 뒤로 물러났다. 그 때 아킨의 무릎이 닿 았던 곳에서 무언가가 벗겨져 나갔다. 아킨의 몸에 스치며 떼어진 것이다. 아킨은 떨어진 것을 주워 보았다. 그것은 벽과 거의 비슷한 색으로 된 가죽이었고, 자세히 보지 않는다면 있는지 없는 지조차 알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그 낡은 가죽 위에 진한 붉은 색으로 원과 문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피로 쓴 듯 여기 저기 얼룩이 지고 지저분하게 변해 있었다. 아킨은 그것이 붙어 있던 곳을 보았다. 회색 벽 위에, 같은 핏빛으 로 그려진 원이 있었다. 아킨은 슬쩍 손을 뻗어 그것을 쓰다듬어 보았다. 조금 패여 있다. 아킨은 그것을 따라 찬찬히 손가락을 움직이다가, 그 가죽을 앞으로 가져와 그 위에 쓰여진 것을 소리내어 읽어보았다. "서쪽, 달, 숲---겨울의 열쇠, 성배와 성녀의 무덤....모든 것은 의지, 파괴, 부활이자 탄생....숲과 호수의 마법사 여왕-" 대략 읽을만한 건 그것뿐이다. 아킨은 가죽을 접어 옷 속에 집어넣었다. 뭐, 대단한 것이 있을 거 라 생각했는데....대단할 지 안 할 지는 알 도리 없지만, 중요한 건 지금의 아킨은 그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 소용도 없다. 다시 아킨은 그 붉은 문자에 손을 얹어 보았다. 순간 파직, 하고 정 전기 같은 것이 튀어 올랐다. 아킨은 황급히 손을 움츠려 당겼다. 갑자기 귀 근방이 욱신거려왔다. 세상에 먹구름이 낀 듯 컴컴해지더 니, 비라도 쏟아질 듯 습하고 불길한 기운이 가득해지기 시작했다. 뚝, 뚜둑-- "!" 굵은 핏방울이 아킨의 귓불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아킨은 피를 문질 러 닦아냈지만, 계속 샘솟아 바닥에 툭툭--떨어지더니, 나중에는 피 가 넘쳐 손바닥을 흠뻑 적셨다. 그러나, 그렇게 피를 쏟아내도 꿈이 나 환각처럼 아무 느낌도 없었다. 아킨이 쏟아낸 피 웅덩이는 곧 시커멓게 변하더니, 파란 하늘과 아 킨의 얼굴을 비추어 냈다. 그리고 확 타오르듯 빛이 치솟아 오른 후, 기이한 풍광을 끌어 올려 아킨에게 보여주었다. 그것은 비가 쏟아질 듯 먹구름 가득한 하늘과, 어둠에 젖은 숲이었 다. 숲 속에서는 무언가가 별처럼 하얗게 빛났고, 그 빛은 불길처럼 흘러내리더니 양옆으로 퍼져나갔다. 그렇게 퍼지던 빛은 어느 지점 에서인가 갈래져서 다른 곳으로 흘러갔고, 그 두 개의 갈래가 중앙 에서 만나더니 앞으로 뻗어 내려왔다. 그 빛에 내리 찍힐 것만 같아 아킨은 뒤로 후닥닥 물러났다. 그러다 뒤에서 서성거리던 까마귀 한 마리가 놀라 푸드덕 날아올랐다. 아킨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갑자기 눈부신 빛이 쏟아지는 듯 하더 니, 컴컴했던 주변이 확 밝아졌다. 불길한 기운도 씻기듯 사라지고, 화끈거리던 귓불도 씻은 듯 나았다. 눈앞의 검은 웅덩이도 점점 옅 어지더니 스며들 듯 사라져 버렸다. "뭐..." 아킨은 다시 그 앞에 그려진 붉은 원과 문자를 바라보았다. 순간 머 리에 두통이 팍 치밀어 오르더니, 귀가 화끈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머리가 한번 뒤집혀 지는 것 같다가, 둑이 터지듯 낯선 기억의 조각 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킨은 머리를 감싸쥐며 몸을 웅크렸다. 숨 이 헉헉 차 오르고, 열이 올랐다. 갑자기 자그만 소년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검은 머리의 소년, 유리 알 같은 보라빛 눈- 갑자기 기억난다. 그를 미워했고, 그를 미워하는 것이 어린 그 때에는, 유일하게 '살아 있는' 감정이었다. 그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버티고, 살았다.....그것 은 불타는 기둥 같은 것이었다. 끌어안고 있으면 같이 불타 사라지 지만, 놓으면 너무나 춥다. 그 살이 얼어붙는 추위를 견디다 못해, 결국 다시 그 기둥으로 다가가 제 살을 태우고 마는 것이다.... 소년의 모습이 바뀌어갔다. 훨씬 커지고, 눈빛은 더욱 당당해지며 매서워졌다. 소년을 향한 증오는 여전했지만, 그보다 더 뜨거운 것 은 질투였고, 그것마저 정복하는 것은 '두려움'이었다. 넌 날 잡아먹어 버리고 말 거야..... 허리가 욱신거려 왔다. 날카롭고 단단한 것에 찔린 듯 지독한 통증 이 밀려 올라오며,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그리고 흐릿한 기억이나 마, 그 지독한 통증과 분노는 '그 소년'과 어떤 관련이 있었다. 아킨은 옷자락을 움켜쥐며 숨을 골랐다. 이유는 모르지만 결과는 확실한, 즉 왜 그를 증오하는 지는 제대로 모르지만- 아킨은 그를 정말 살이 타들어 갈 정도로 증오하고 있었 다. 그것은 살의와 비슷한 무언가였고, 둘 중 하나가 완벽하게 지워지지 않는 한 서로의 모습을 서로의 눈으로 퉁겨내며 끝없이 되풀이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의무였다. 아킨은 그 소년에대한 모든 것을 '반드시' 기억해 내야 한다는 생각 이 들었다. 반드시, 그래야 이 타는 듯한 가슴을 진정시킬 수 있고 조급한 공포 역시 잠재울 수 있을 것만 같다. 아킨은 자리에서 일어나, 위험하게 무너진 계단을 뛰듯이 내려갔다. 품안에는 그 가죽 조각이 달라붙듯 있었고, 방금 기억해 낸 소년에 대한 분노와 증오, 그 얼굴 역시 머릿속에 들러붙어 있다. 알아내야 해, 반드시--! 그리 생각하며 아킨은 뒤를 돌아보았다. 아침 햇살이 이제 조금씩 부드러워지고 있었고, 진한 금빛 색조 역시 옅어져갔다. 벌써 초가 을로 접어드는 공기는 꽤 쌀쌀하다. 아킨은 문득 드는 충동에 서쪽으로 달려갔다. 방금 전에 높은 곳에 서 보았던 서쪽의 바위가 더욱 하얗게 빛나고 있다. 갑자기 이 탑에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치솟아 올랐다. 물론 정말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건 아킨도 잘 안다. 예전에 한번, 보름이 한참 이 남은 어느 날인가 숲을 나가려 해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평소에는 얼마든지 나갈 수 있었던 거리이고 분명 아는 길이 었는데 그리 마음을 먹기만 하면 숲은 갑자기 몸부림을 치기라도 한 듯 무섭도록 변해버린다. 같은 장소를 되풀이해서 돌아다닌다거 나, 전혀 모르는 장소에 도착해 있다거나. 때로는 맑은 날에 안개 속을 헤매기도 했었고, 느닷없이 비가 쏟아지기도 했다. 그렇게 헤 매다가 다시 돌아가야지, 하고 생각하면 그 순간 길이 뚫리기 시작 하고 아는 길이 나타난다. 그것을 몇 번 되풀이 하다가, 결국 아킨 은 숲을 나가는 것을 포기했고 차츰 '숲을 나간다'라는 생각조차 떠 올리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아킨은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 었다. 그리고 그렇게 포기하자마자, 그 생각 자체가 안개가 햇살에 녹듯 사라졌다. 숲은 살아 있었고, 그것은 아킨을 그 품안에 녹이고 있었다. 아킨은 무심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손끝에 차가운 반지가 닿았고, 그것이 갑자기 가슴속에서 분명한 욕망을 끌어냈다. 나가고 싶다- 나가고 싶어-! *********************************************************** 작가잡설: 답변을 자주 자주 못하는 이유는......아울은 휴일 제 하면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죄송, 죄송합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22장 ************************************************************** [겨울성의 열쇠] 제99편 은둔자의 탑#2 ************************************************************** 문지기조차 놀랄 정도로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유제니아는 고약 에 거의 목욕하다시피 하며 며칠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백작과 타 냐로부터 온갖 질문이 무섭도록 쏟아졌지만, 유제니아는 꿋꿋하게 '나무에 긁혔다.'라는 되도 않는 주장을 반복했다. 하멜버그 백작은 귀중품 수선하는 것을 지켜보듯 유제니아가 다 나 을 때까지 무서울 정도로 꾸준하게 찾아왔고, 그러다가 갑자기 말도 없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 그가 찾아오지 않게 되자 일단 안심했던 유제니아는, 방문을 열자마자 여드름도 안 지워진 성의 병사들이 따 라붙자 질겁해 버리고 말았다. "......솔직히 말해, 너 정말 정체가 뭐야?" "에칼라스." "......유즈, 될 수 있으면 세상에 존재하는 것으로 말하지 그래?" "루실리아 공비." "벌써 죽었어." "알르간드의 지에나 여왕." "웃기지 마!" "남은 게 뭐야? 좀 거창한 걸로 가르쳐 주라...내가 워낙에 상상력이 부족해서." "......유, 제, 니, 아." "다시 말하는 거지만 우리 친아버지는 내가 까맣게 어렸을 때 돌아 가셔 버렸고, 계부는 워낙에 별 볼일 없는 군인이라서 결국에는 아 무도 안 가는 뉴마르냐 변방 기지의 부사령관을 지내셨고.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도, 그렉에게 나를 당부하지는 못하셨을 정도였다고. '아, 정말 미안한 이야기지만.......그렉. 당신에게는 마음놓고 유즈를 맡길 수 없군요.'" 후아나가 입술을 비죽였다. "대단한 어머니네.....그래서?" "그리고 말씀하셨지. '슈, 당신에게 맡기자니, 아직 결혼도 못한 분 에게 유즈는 너무나 버거운 짐이군요.'" "그 사람은 또 누구야?" "아버지의 양자. 사실 오빠라 불러야 하는데, 너무 나이가 많아서.... 좀 거북하더라고. 그래서 그냥 아저씨라 불렀지. 20대던 시절에는 제발 오빠라 불러 보라고 달래고 어르고 우기고 협박하고 별 짓 다 했는데, 서른 넘어가더니 그제야 포기하더라." "그래서 결국 누구한테 널 맡겼어?"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내 의붓오빠를 보고는 말씀하셨어. '세냐, 너 라면 이 아이를 맡겨도 되겠구나. 여기 있는 남자 중 너만큼 믿음직 한 남자도 없어.' 솔직히 말하자면, 그 두 사람만큼 구제 불능이 되 는 것도 힘든 일이야. 세냐가 괜찮은 사람인 건 사실이지만, 그 때... 겨우 스물 하나였거든. 열 두 살 먹은 딸아이를 맡기기에는 좀 어린 나이지." "그건 그렇다. 넌 뭐라고 했는데?" 유제니아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세냐가 너무 억울하지 않도록, 오빠가 스물 여섯이 되도록 결혼할 사람이 없으면 시집가 주겠어~라고 했어. 딸로 키우기는 거북하지 만, 약혼녀가 자라는 걸 지켜보는 건 기분 좋잖아?" "......." 후아나는 그 어머니에 그 딸이다, 비슷한말을 중얼거렸다. 둘은 다시 수를 놓기 시작했다. 유제니아는 사실, 시간 때워 보려고 여기 저기 바늘을 찌르고 당기고 하고 있을 뿐이지만. 그러고 있는데, 먼 곳에서 땡--하고 종소리가 들려오자 두 소녀는 동시에 한숨을 푸르르 내 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겹겠지?" "끔찍할 거야." 사실, 유제니아가 숲에서 아킨의 발톱에 한방 맞은 후 며칠이 지나 자, 변방의 조용한 성인 하멜버그는 갑자기 분주해져 있었다. 그리 고 사실, 백작이 유제니아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쏟아대던 것을 멈춘 것도 그 덕이었다. 원체 나서는 것 좋아했던 타냐는 물 만난 듯 성의 하녀들에게 이런 저런 명령을 내려놓고는, 성에서 맡아 키우는 유제니아와 후아나에 게는 귀족의 영양에 못지 않을 정도로 예의바르게 처신하라고 단단 히 일러두었다. 그리고 페트리샤와 그녀의 친구들과 함께 갑자기 예 절교육을 시키며 조금만 실수할라치면 단번에 회초리를 휘둘렀다. 후아나에게는 예상했던 대로 잘 해도 잔소리요, 못해도 잔소리였다. 그러나 아무리 잔소리가 파도처럼 쏟아져도 후아나는 턱을 든 채 이 따위 것 누구나 다 할 줄 아는 바보짓이라는 듯 굴었다. "하여간, 정말! 이 고약한 계집 같으니라고! 그리고 유제니아! 너도 그렇게 딴 생각하지 말고 방금 내가 주의 준 것에 대해 말해 보렴!" 타냐는 벌써 후아나와 죽이 맞는 유제니아를 싫어하고 있었다. 그러 나 성주의 엄명이 있었으니 손 댈 수도 없었고, 유제니아는 후아나 뿐만 아니라 성의 모든 하녀들과도 죽이 맞아 있었다. 괜히 잘못 건 드렸다가는 하녀들로부터 '엄격하고 공평했던 타냐가 유제니아에게 는 너무 심하신거 아닌가.'라는 말이 나오고, 그 말이 주인마님의 귀 에 들어가는 것은 타냐 자신이 싫었다. "자, 처음 귀한 분을 만나 뵈었을 때 어쩐다고 했지?" "공손히 인사드리지요." "어떻게?" "아주 공손히요." "어떻게 하나고 물어 본 거다--!" 유제니아는 방긋 웃으며 답했다. "네, 고개를 숙이고 치마를 살짝 들고는 말하면 됩니다. 안녕하세요, 하고." 약을 올리려고 작당을 한 듯한 유제니아의 태도에 결국 타냐는 대 폭발을 해버렸다. "너, 유제니아 쥬르--!" "네." 유제니아는 자신이 왜 이곳에서 특별 대우를 받고 있는 지 전혀 몰 랐다. 그러나 어차피 그리 된 것이니 최대한 이용해 보기로 했고, 후아나와 친구가 된 이상 타냐에게 잘 보이기는 글러 먹었다 생각 해서 예전의 사근사근한 태도는 다 집어치운 지 오래였다. 그래서 방긋 웃으며 타냐를 빤히 바라보았고, 타냐는 손을 들었다가 한번 부르르 떨더니 문을 뻔적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유제니아, 후아나. 너희들은 더 배울 필요가 없을 것 같으니...나 가! 당장 꺼지라고!!!!" 아마도, 보통 아이라면 그 무시무시한 기세에 눌려서 잘못했습니다 아---하고 삭삭 빌었을 테지만, 유제니아는 생긋 웃으며 "감사합니 다--!" 하고 말하고는 후아나의 손을 잡고 달려나갔다. 물론 후아나 역시 그런 타냐의 눈치를 볼 위인이 아니다. 둘은 페트리샤를 포함한 모든 소녀들의 부러움 가득한 눈초리와, 눈 빛으로 황소라도 한 마리 쏴 죽일 것만 같은 타냐에게 손을 흔들며 페트리샤의 응접실을 나섰다. "너 대단하다." "대단하다 할 것 없다. 그런데 괜찮아, 너? 나라면 몰라도 너는 내 일부터 몇 배로 고달플걸?" "흥, 상관없어. 타냐가 나를 괴롭히는 게 뭐 오늘내일 일도 아닌데." 그렇게 성의 본 채를 나와 뒷마당에 자리를 잡으며 후아나가 물었 다. "그런데 너, 뉴마르냐에서는 어떻게 살아왔어?" "그냥 사람처럼 살았지. 뉴마르냐라는 곳이, 이상한 괴물만 안 나오 면 정말 할 일 없는 변방이거든. 마법사 칼쿠바 아저씨랑 마녀 리사 에게 이것저것 배우고, 가끔.....체력단련도 하고." 후아나는 당장에 호기심이 나서는 물었다. "동네 마법사에게 뭘 배웠다면, 너도 혹시 마법사야?" "나도 그렇게 되고 싶었는데, 오빠나 나나 핏줄에 마법사가 하나도 없어서 안 된데." "어머나, 어째서?" 후아나는 핏줄이니 혈통이니 하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그런데 뭘 배우는 것에도 그런 식이라니, 외려 자기가 더 발끈해서는 되묻는 것이다. "나도 그건 좀 이해가 안 되더라고. 어쨌건, 재주 없는 애들 타이르 려고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는지 정말인지는 모르는데, 칼쿠바 아저 씨의 말에 따르면 에칼라스와 열두 수호자가 모두 승천한 후 성배 에 천상의 성수를 담아 지상으로 뿌렸다는 거야. 성수는 세상 온 천 지로 퍼져서 적당한 사람의 몸 속으로 들어갔는데, 그 사람들이 세 상의 숨겨진 이치를 깨닫고 마법사가 되었다 하더라고.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후손이 마법사가 되는 거래." "너무 억울하다. 태어나면서부터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 람이 구분된다니." "그건 말이야, 역시나 칼쿠바 아저씨가 그라는데......새는 새 나름의 인생이 있고, 사람은 사람 나름의 인생이 있는 것처럼 그것 역시 마 찬가지래. 뭐, 그 덕에 아저씨에게 이것저것 다른 걸 많이 배웠지. 또, 나중에 마녀인 리사가 받아줘서 그녀에게 약술이랑 주술 몇 가 지 배웠어. 가사일 이외에 쓸만한 건 하나도 없었지만." "마녀는 너무 시시하잖아." 유제니아는 정말 기분 나빠했다. "대마법사 페나크가 페그-라일로 체계를 새우기 전만 해도 고대 룬 의 체계를 따르는 마법이랑, 정령술이라고 하는 엘프들의 마법, 마 지막으로 주술과 소환술들도 꽤나 번성해 있었다고. 페낙에서 컬린 으로 이어지면서 페그-라일 체계는 다른 마법체계를 통괄한 게 아 니라 쇠퇴하게 만들었던 거야." 유제니아가 쏟아 놓는 말들에 주눅이 든 후아나는 슬쩍 말했다. "시시하니까 그런 거 아...냐?" 유제니아는 입술을 비죽거렸다. "싸움질하는데는 그게 최고니까 그렇지. 생각해 봐, 당장에 적들이 쳐들어오는데 숲을 지키는 마법이 필요하겠니, 치료술이 필요하겠 니? 천둥 불꽃 화끈하게 터뜨리는 게 최고지. 그게 유용하니 온갖 나라에서 페그 라일 체계로 마법을 배우는 마법사 양성소를 잔뜩 만들어 냈고, 그 곳에서 에칼라스 성배의 축수자란 축수자는 모조리 끌어가 버렸는데, 다른 마법들이 남아나겠어? 또, 마녀들이나 드루 이드들을 무시하고, 룬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구닥다리 취급하는데 누가 하려고 해? 소질 있어도 페그 라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아, 알았.....어." 말 잘못 꺼냈다고 생각해서 후아나는 난감해졌다. 유제니아가 이렇 게 화를 낼 줄은 몰랐던 것이다. 후아나는 화제를 넘기기 위해 필사 적으로 노력하다가 얼른 말했다. "그런데......저기, 내일 공주님이 오면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유제니아도 엄한 후아나 붙들고 흔들어댈 생각은 없었기에 방금 전 까지 흥분했던 것을 싹 잊고는 말했다. "배불리 먹은 다음, 재미있으면 남아있고 없으면 갈 거야." "성의 기사들은 공주가 온다고 하니까 난리더라. 쳇, 다들 꼴에 공 주는 좋아 가지고....서로 가장 먼저 춤을 줄거라 으스대던 걸." 유제니아가 갑자기 표정을 이상하게 짓더니 프흐, 하고 웃었다. "델 카타롯사의 칼라하스 공주는 다리를 못 써서......춤은커녕, 걷지 도 못해. 기사들은 아마도 그녀의 호위기사인 마도론의 우레, 마하 와 춤을 추게 되겠다." "......." 후아나는 '공주님의 호위기사는 정말 멋진 남자 일거야.' 라고 말하는 실수를 하지 않은 것만 정말 다행으로 여기며 물었다. "그런데 나는 벌써 여기 저기서 신청 받았다. 하지만 다 시시해. 그 나라에서 기사가 오면 그 기사들하고만 출 생각이야. 그런데 유즈, 넌....누구랑 추고 싶어?" "나?" 사실, 유제니아는 공주가 오든 말든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리고 성 에서 연회가 크게 열리면, 그 틈을 봐서 슬쩍 숲으로 가 볼 생각이 었다. 지금은 가는 곳마다 졸졸 따라 다니는 풋내기 병사들 때문에 성밖으로도 나갈 수도 없었으니. 그러나 만나는 봐야 한다. 유제니아는 아킨이 분명 오지 말라고 했 는데 또 숲으로 갔다가 결국 '그 모습'을 봐 버렸고, 다치기까지 했 다. 아킨이 아예 의식이 없었다면 모를까, 결국에는 제 모습으로 돌 아왔고, 유제니아가 자기 때문에 다친 것까지 다 봐버렸다. 그럴 경 우, 유제니아야 어차피 나으면 끝이지만 아킨 쪽이 오히려 더 겁을 집어먹게 된다.... 유제니아는 정말 미안해졌다. 슈마허나 세르네긴이나 그렉 아버지 나, 언제나 '넌 너무 무모한 구석이 있어.' 하고 말하곤 했는데, 늘 그것 때문에 유제니아는 실수를 하곤 했고,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 다. 유제니아는 멍하니 말했다. "아킨토스." 후아나가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그건 누구야?" "....엘프 어머니와 드래곤 아버지를 둔 숲의 레이디지." "?????" 다행스럽게도, 유제니아는 자기도 무슨 말하는지 모르고 있는 중이 었다. 생각해 보니 비슷한 전설을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못된 마녀의 저주에 걸려서 보름마다 흉측한 늑대로 변하는 가엾은 공주님과, 그녀를 구해주게 되는 용맹한 소년용사. 소년은 그 공주 를 데리고 본국으로 돌아가는데 그 공주의 원래 약혼자인 공작과 또 대결을 벌이게 된다. 결국에 소년은 그를 언제나 지켜주던 열두 수호자중 하나인 바람과 구름의 프레델로의 도움으로 멋지게 공작 을 이기고 공주와 결혼했지, 아마..... 그러다 유제니아는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자신이 아주 두려워졌다. *********************************************************** 작가잡설: 아자, 곧 100회! 아, 자!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22장 ************************************************************* [겨울성의 열쇠] 제100편 은둔자의 탑#3 ************************************************************** 다음날 아침 해가 뜨자마자 타냐는 그 육중한 몸집으로 쿵쿵 오더 니 유제니아와 후아나 앞에 드레스를 쏟아 놓고는 알아서 입든지 말든지 비슷한말을 하고 갔다. 유제니아가 뒤적거려 보니 아마도 백작부인과 페트리샤가 나들이에 입고 나갔다가 내동댕이쳐 둔 드레스를 고친 듯 했다. 키가 큰 후아 나 것은 백작부인 것인 듯 했고, 날씬한 유제니아의 것은 페르리샤 의 것 같아 보였다. 그리고 입어보니 후아나에게나 유제니아에게나 좀 크거나 작았다. "뭐야, 얼간이 같아 보이잖아!" 후아나는 큰 거울이 있는 홀로 가서 이리 저리 몸을 비추어 보면서 투덜댔다. 그리고 유제니아에게 '옷 치수 줄이는 마법은 모르냐.' 하 고 한참을 닦달하다가 결국 포기하더니('알면 내 것부터 고쳤지!' 하 고 유제니아가 쏘아붙였으니), 유제니아의 협조 하에 어떻게든 허리 와 가슴을 조금이라도 더 맞게 보이려고 노력했다. "이제 좀 괜찮아?" 후아나는 거울 앞에서 한번 돌아보고는, 다시 눈을 쿡 찌푸리고는 노려보았다. 유제니아가 하품을 한번 길게 하고는 말했다. "후아나아아아! 보는 내가 피곤하다. 조금 있으면 그 공주가 도착할 거라구. 어물대다간 굉장한 구경을 놓치고 말 거야." "나도 알아, 알아. 하지만 얼간이 같은 모습으로 나가고 싶지도 않 다고." 유제니아는 후아나의 허리를 붙잡아 당겼다. 후아나가 신경질을 팍 냈다. "유제니아, 너 정말--!" "너 자꾸 그러면 그 옷 찢어 버린다!" 유제니아가 오히려 더 버럭 소리를 질렀다. 후아나는 할 말은 없었 지만 지는 건 싫어서 조잘조잘 샐쭉거리며 턱을 돌렸다. 유제니아는 이런 후아나를 보면 볼수록 화가 치밀었다. 후아나는 사실 정말 예쁜 아이였다. 이목구비는 시원시원했으며, 늘 씬하게 큰 키에, 가슴도 나이답지 않게 풍만하고 허리도 잘록했다. 그리고 머리카락은 정말 풍성하게 물결치는 금발이다. 사실, 유제니 아가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이 바로 그 금발머리였다. 리사에게 주 술과 마법을 몇 가지 귀동냥으로 배웠던 가장 큰 이유는, 마법에 큰 관심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행여나 그 새까만 머리카락을 금발이나 좀 더 근사한 색으로 바꿀 수 없을까, 때문이었다. 그리고 리사는 그 야망을 듣게 되자 당장에 지팡이를 휘둘러 머리에 혹을 두어 개 재배한 다음 외쳤다. '자기가 가진 것조차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녀석에게 가르쳐 줄 건 없어--!' 결국 유제니아는 포기했고, 성주의 저택에 리사 대신 배달을 간다던 가 아버지 대신 보고서를 올리러 갈 때 금빛머리 찬란한 루피니아 의 그림을 보며 저 딴 그림을 그려 놓으니 검은 머리카락의 여자들 이 울적해진다고 투덜대기만 했다. 그러니 여기 와서 정말 훌륭한 금발을 보게 되니 괜히 심술이 났다. 유제니아는 차라리 세상 모든 금발머리를 검은머리로 바꾸는 마법이나 가르쳐 달라고 할 걸 그랬 다, 생각했다. 외모에 무한한 정성을 쏟는 편이 아닌 유제니아가 머리색에만 그렇 게 집착하는 이유는 단 하나, 의붓오빠인 세냐의 첫 사랑이 바로 뉴 마르냐 성의 영애였던 눈부신 금발 소녀였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시 집간 후 오랫동안 울적했던 세르네긴을 '대련'이란 이유로 수시로 쿡쿡 쑤셔 패며(마음 같아서는 후려치고 싶었지만 쪼끄만 유제니아 에겐 무리였다), 유제니아는 정말 그 때만큼은 검은머리가 싫어졌으 며, 세상 모든 금발을 타도 대상으로 설정한 것도 그 때부터였다. 그 때 나팔이 크게 울렸다. "거 봐, 늦었잖아! 얼른 와!" 후아나가 그래도 어물거리자, 유제니아는 옷자락을 움켜쥐어 당겼 다. 정말 그 으름장대로 옷을 찢어 버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서였는지 자기도 늦었다는 다급함에서였는지는 모르지만 후아나는 얼른 그녀를 따라갔다. 성에는 온통 하멜버그의 포도와 창이 수놓아진 깃발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어디서 구해왔는지, 창과 기둥 아래에는 온통 붉은 꽃으로 장식되어 있어 향기에 머리가 어질 거릴 지경이었다. 후아나와 유제니아는 성의 모든 사람들이 빠져나가 한적한 성을 재 빨리 달려 내려갔다. 그러나 성문 쪽에 도착하기도 전에, 벌써 정원 의 길을 따라 올라온 마차 문이 열리고 있었다. "내려가 봤자 너는 작아서 구경하는 사람 등짝밖에 안 보일 것 같 으니까, 우리 다른 곳으로 가자." 후아나가 그렇게 말하고는 유제니아를 잡아끌어 정원이 보이는 2층 창문으로 데리고 갔다. 도착하자, 둘은 얼굴을 창문에 바짝 붙이고 는 마차에서 내리는 공주를 보았다. 후아나가 숨을 죽였고, 유제니아는 고개를 더 내밀다가 단단한 유리 에 통 부딪혔다. 호위기사들은 거의 데리고 오지 않아, 겨우 여섯 명의 기사들만이 마차 주위에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마차 문 앞에는 보통 남자들보 다도 키가 훌쩍 큰 거인 여자가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그녀가 아 마도 그 유명한 마도론의 우레, 마하일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마하의 품에 안겨 칼라하스 공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후아나가 작게 탄성을 질렀다. 멀리 있었지만, 화사한 공주의 모습 을 보기에는 충분한 거리였다. 금색 서클렛을 쓴 긴 군청색 머리카락에, 얼음에 가까워 보일 정도 로 하얗고 창백한 안색이었다. 그 머리카락과 피부색과 잘 어울리는 은빛 드레스에, 그 허리와 팔목에는 짙푸른 리본이 매어져 있었다. 눈 속에서 얼어붙으면 딱 저렇게 생겼겠다, 하고 유제니아는 괜히 심술이 나서 생각했다. 마하가 공주를 휠체어에 앉히자, 그제야 성주인 하멜버그 백작이 허 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를 따라 기사와 하인들, 그리고 하멜버그 백작가의 영애와 아들도 너무 멋을 부려 서툴러 보일 정도로 예를 표했다. 공주 역시 불편한 몸이나마 힘들게 숙였다. "제 무례한 방문을 받아 들여주셔서,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그렇게 들어도 정말 곱고 예쁜 목소 리였다. 그러나 유제니아는 벌써 지겨워져서 창턱에 턱을 받친 채 투덜댔다. "저런 말해도 낯간지럽지 않을까? 듣는 내가 몸이 녹아날 것 같다." 그런데 평소라면 같이 빈정댔을 후아나는 멍청하니 그런 공주와 공 주의 기사들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부러움과 선망에 가득 찬 눈동 자로, 힘없이 말했다. "난 말이야, 유제니아. 저렇게 단 하루라도 있을 수 있다면....평생 다리를 못 써도 좋을 것 같아." 유제니아는 얼굴을 찌푸렸다. "다리랑 바꿀 거면 되도록 평--생이라고 말하는 게 좋지 않을까? 부러워하는 건 좋지만, 자기 인생을 너무 값싸게 매기는 것도 곤란 하잖아." 후아나가 힘없이 웃었다. "그것도 그렇네?" 유제니아가 다시 아래를 보니 인사가 끝난 뒤라 하멜버그 백작이 공주 바로 옆에 서서 그녀를 안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그 정중한 친 아버지의 모습을, 후아나는 울적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엄마와 저 백작님이 제대로 결혼했다면, 난 어디 변변찮은 기 사들 아내가 되는 대신......정말 왕자님과 사귈 수 있었을 지도 몰라. 예전에 말이야, 페트리샤가 마님을 따라 제도에 다녀 온 적이 있었 는데, 거의 한달 내내 왕자님들 이야기만 했어. 델 카타의 칼리토, 헤로롯사의 안데리온, 황자 샤벨......그리고 제일 홀딱 빠져서는, 제 국 최고의 숙녀가 되어서 반드시 결혼할 거라고 선언한 왕자가 있 었지." "누구?" "암롯사의 휘안토스 왕자." 유제니아가 한숨을 내 쉬었다. "꿈도 야무지지. 그 왕자님은 사이러스 대공왕의 외아들인 데다가 정말 유명한 왕자라고. 외국 백작가 영애쯤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걸?" "하지만 그 아버지도 어느 시골 영주 딸과 결혼했잖아." "그야, 루실리아 대공비는 아직도 모든 암롯사 바드들의 연인일 정 도의 미모니까 그렇지. 뿐만 아니라, 사이러스 대공왕은 그 때 자그 마치 서른 셋이었고, 루실리아 대공비는 열 여덟이었어. 말이 좋아 열 다섯 살 차이지, 한 10년만 지나봐. 남편이 마흔이 훌쩍 넘어갔 을 때, 아내는 아직 서른도 안 된 거라고." 후아나는 질렸다는 얼굴이었다. "넌......굉장히 현실적이다." "좀 그래." 그러다가 유제니아는 예전에 숲에서 만난 그 소년의 이름이 이상하 게 낯익었다는 느낌이었는데, 그제야 누구와 비슷한지 알아챘다. 암 롯사의 그 유명한 왕자의 이름이 바로 휘안토스 프리엔, 그리고 그 소년의 이름은 아킨토스였다. "희얀한 우연도 다 있네...." 나중에 만나면 말 해 줘야겠다. 그리고 유제니아는 리사가 준책에 기억 상실증을 치유하는 법이 적 혀 있는지 찾아 봐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아킨은 서쪽의 돌 근처에서 멈추어 서 한숨 돌렸다. 오면서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해 헤맸기 때문에 먼 거리도 아님에 도 불구하고 한참이나 걸렸다. 위에서는 바위와 길이 꽤 선명하게 보였는데, 정작 아래로 내려오니 보이는 것이라고는 겹겹이 쌓인 나 무둥치들과 우거진 수풀뿐이었다. 길 역시도 여기 저기 끊어지고 거 의 남아 있지도 않은 부분이 여러 군데였으니, 저 쪽인가 해서 갔다 가 다시 돌아오고, 이쪽인가 해서 다시 돌아오고 하다 보니 몇 번이 나 같은 장소를 맴돌았다. 그렇게 어렵사리 길을 찾으면, 아킨은 준 비해온 단검으로 나무 둥치에 눈에 잘 뜨이도록 표시를 하고 다음 길을 찾았다. 해가 정오로 기울고 배가 고파져 오자 아침에 챙겨 두 었던 빵으로 대충 요기를 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그렇게 지나오니, 해는 벌써 불그스레하게 흩어져 있고 그림자는 아 킨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돌이 박혀 있는 곳은 나무는 없고 여기 저기 울퉁불퉁한 돌과 풀들만이 있었다. 작은 주황색 꽃들이 소담스 럽게 피어 바람에 흔들렸고, 그것도 해가 기울어 더욱 진한 빛으로 잠겨 있었다. 아킨은 바위 위에 손을 짚고는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그러나 넓은 숲을 얼마나 왔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숲은 아직도 멀리까지 뻗어 아킨을 휘감아 가두고 있는 듯 했으니. 그 때, 손끝에서 뭐가 툭툭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 놀란 아킨은 급히 손을 치웠다가는, 머뭇머뭇 귀를 바위 위에 갖다 댔다. 아주 차가웠고, 방금 전의 그 느낌 같은 것은 남아 있지 않았 다. 아킨은 아주 기괴한 괴물을 발견한 듯 오싹해졌다. 여기까지 올 때 까지의 일들이 생각나자, 문득 이 바위가 자신을 끌어들이려고 그런 일이 생겼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운 카를롯사에는 바위나 나무에 이상한 마법이 깃들여 있는 경 우가 많았다. 알르간드 정도만 되도 바위 자체가 생명인 경우도 있 다. 이곳은 그곳과 가까운 곳인 데다가, 국경분쟁까지 이는 곳인 만 큼 이렇게 의미 있는 곳에 있는 바위라면 '생명'이라 불릴만한 무언 가가 깃들여 있을 수 있다... 아킨은 행여나 그런 경우인가 싶어서 바위를 여기 저기 둘러보았다. 위험할 지도 모르지만, 겁먹고 도망치기에는 여기까지 오느라 너무 고생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녁 해가 서산으로 마지막 햇살을 거두어들이고는 사라졌다. 옅은 어둠이 산과 바위와 풀들 위로 쌓여 갔다. 밤벌레들이 깨어나 찌르르 울어대기 시작했고, 숲 속 동굴에 사는 박쥐들이 푸드득 날아올랐다. 그런 고요 속에, 아킨은 드디어 바위에 흔적을 발견했다. 방금 전 까지는 주변이 너무 밝아 그 역광 때문에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것은 핏자국이었다. 몇 방울 점점이 튀어 있고, 그 아래에는 진한 얼룩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자신의 피로 쓴 듯한 글자가 남아 있었다. 무슨 글자인 지는 알아보기 어려웠다. 아킨은 그저 손 끝으로 그것을 찬찬히 따라가며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과거에나 현재에나 그것을 알았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순간 툭툭--다시, 방금 전에 손에 방금 전의 그것과 똑같은 느낌이 닿았다. 아킨은 이번에는 손을 치우지 않았다. 그 느낌은 계속 되었 고, 점점 커져갔다. 그것은 심장 소리 같기도 하고, 안에 갇힌 무언가가 두드려 대는 소 리 같기도 했다. 아킨은 다시 손끝으로 그 글자를 쓸어 보았다. 그 곳에서 온기 같은 것이 스며 나오는 가 싶더니 뭐가 팍 튀어 올랐 다. 아킨은 손을 말아 쥐었다. 뭐지, 이 바위는..... "유폐진을 이루는 봉인석 중, 그 핵이지." 갑자기 들려온 그 목소리에 아킨은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너무 급히 돌다 보니, 머리를 바위에 쿵 부딪히고 말았다. "읏-!" 아킨은 뒷덜미를 감싸 쥐며 고개를 숙였다. 저 쪽에서 흐뭇하게 웃 었다. "보기보다는 덜렁대는 구나." 아킨은 고개를 들었다. 푸릇한 어스름이 깔린 공터에 솟은 둥근 바 위에, 웬 남자 하나가 앉아 있었다. 어깨는 넓고, 앉아 있기는 했지만 앞으로 느슨하게 뻗고 있는 다리 가 길어 키는 아주 클 듯 했다. 수도사 같은 암갈색 로브 차림에, 얼굴은 후드에 푹 덮여 있었다. 적당히 각진 턱에는 모래알 같은 까 만 수염이 듬성듬성 나 있었고, 입매는 부드럽게 웃고 있는 것이 꽤 온화한 인상이었다. 아킨이 뒤로 물러나 바위 위에 등을 붙이자, 그 가 손을 들었다. "놀래지 말거라. 잠깐, 아주 잠깐 여기에 온 것뿐이니까." 그러나 아킨은 탑 근처에 사람이 나타난 것은 본 적이 없었다. 헤매 느라 꽤 걸리긴 했지만, 탑에서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다. 남자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리 눈 도끼 찍어대 말라고. 넘치도록 수상한 놈이긴 하다만, 널 헤치지는 않겠다." "누구십니까?" "....베이나트.....베이나트 칼바스." 남자는 편안하게 답하고는 물었다. "그리고 꼬마, 넌?" "아킨토스." 베이나트는 놀랍다는 듯 호오, 하고 탄성을 냈다. 아킨이 의문스레 보자 남자는 껄껄 웃었다. "달의 이름이구나. 보통 승계권이 없는 둘째 아이에게 주는 이름이 지. 여자아이일 경우에는 아키아나, 라든가 하는 이름을 주고. 그래, 꼬마야. 형이 있냐? 아마 후안이나 휘안, 내지는 휘아-등이 들어가 겠구나." "......휘안토스입니다." "역시나." 순간 아킨은 두통이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아니, 아프지는 않지 만 뭔가가 안에서 퍼덕거리는 것만 같았다. 휘안토스, 그가 형이었던 가. 맞다, 형제였다. 그런데 왜 그가 나를 헤치려 했지? 그러지 않으면 자기가 죽을 테니. 가만, 그럼 내가 그를 죽이려 했던 적이 있었나? 아니, 그런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죽도록 미워하긴 했어도, 그 를.....죽일 수는 없었다. 죽이고 싶다가도, 그 목을 끌어안은 그녀, 하얀 머리카락에 창백한 얼굴에 젖은 눈을 가진 그녀가 보이면 도 저히 그리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를 사랑했고, 그야 말로 가엾은 그녀가 남긴 것 중 유일 하게 '실체'를 가진 것,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도저히 없앨 수 없 었다.... 그 순간이 오긴 왔던 것 같다. 아니 분명히는 모르지만, 있기는 했 던 것 같다. 그리고 손에 힘이 들어가지 못했던 것은 그것 때문이었 다. 그 때 베이나트가 말했다. "그건 그렇고, 넌 어디로 가던 길이었냐?" 아킨은 상념에서 퍼뜩 깨어났다. 그 때 베이나트가 고개를 슬쩍 들 었다. 온화해 보이는 검은 눈동자가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다 시 빙그레 웃었다. "그냥....가던 길이었습니다." "숲 밖으로 나갈 생각이었겠군. 이 길로 쭈욱 가면 나가는 것 밖에 는 도리가 없지." 아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베이나트는 그런 아킨을 흥미롭다는 눈길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오다가 길이라도 잃었니? 왜 가다 말고 여기서 서성거리는 거냐." "아주 오래 전에 잃어버렸습니다." "그렇구나.......좋아. 길을 가르쳐 주마." "네?" 베이나트는 끙하니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일어나니, 체구까지 좋아 서 아킨보다 목 하나 반은 더 커 보였다. "아이는 집으로 돌아가야지. 뭐, 넌 애 치고는 좀 커 보이긴 하다 만.....그래도 아직은 어른이 돌봐 주어야 하는 나이 같구나." 순간 아킨은 자신의 나이가 '열 일곱'이었다는 것이 기억났다. 그리 고 열 네 번의 달이 지나갔으니, 이제 그는 열 여덟이었다. 갑자기 그 만큼의 시간을 도둑맞은 것만 같았다. 서글픔과, 그만큼 의 허무..... "자, 아키야- 나는 저쪽에서 이렇게 주욱 왔단다. 그러니 너도 저 쪽으로 간다면 곧장 숲을 나갈 수 있을 게다." 그리고 베이나트가 손을 들어 숲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키는 숲 속 으로 작은 오솔길이 나 있었다. 어둠 속이었지만, 그 길만은 하얀 뼛조각처럼 선명했다. "감사합니다." 아킨은 그 길로 가려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남자가 손을 흔들 며 어서 가라 손짓했고, 아킨은 다시 뒤돌아 숲 속으로 달려들어갔 다. 그리고 얼마쯤 가서 다시 뒤를 돌아보니, 이제 공터도 숲의 나 무에 가려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아킨은 기이한 느낌에 발을 멈추고는 천천히, 머뭇거리듯 앞을 돌아 보았다. 앞에는 나무들이 벌써 드문 드문 솟아 있었다. 아킨이 발을 딛고 있는 곳은 단단한 오솔길이었고, 주변의 나뭇가지가 꺾여 나간 것을 보니 꽤 여러 사람이 오고간 듯 했다. 그런데 아킨은 이 길에 대한 기억이 도무지 없었다. 보름 이틀 전에 마법사가 그를 풀어 주었을 때 숲 가장자리까지 갔던 적은 몇 번 있었다. 그러나 아킨은 그 기간에 밖으로 나가는 것이 얼마나 위험 한 지 알고 있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아킨은 무의식적으로 '절대 나가선 안 된다.'라는 강박에 짓눌려, 마치 우리에 갇힌 동물 처럼 숲의 중앙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렇게 여러 군데 오고가긴 했 는데, 이 길은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아킨은 천천히, 조심조심 걸어 그 길의 끝을 향해 나갔다. 어스름이 짙게 깔리고, 별들이 짙푸른 하늘위로 총총히 반짝이기 시작했다. 바람에 물결치는 울창한 숲은 아주 검게 젖어 있고, 우수수수--그 고요한 흥청거림이 고요하게 귀를 적셔왔다. 아킨은 좀 더 걸어 가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숲의 끝에 다다라, 탁 트인 넓은 언덕을 마주하게 되 었다. 하늘은 쏟아져 내리고, 대지는 달려나갔다. 멀찍이 작지만 짙푸른 호수가 출렁이고, 그 위로 하얗고 작은 배들이 흔들렸다. 마을의 집 들에는 불들이 켜져 있고, 그 중 가장 큰 성에서는 더욱 환하고 찬 란한 빛이 별이 달린 듯 빛나고 있다. 예민한 귀에 그 안에서 들려 오는 흥청거림이 스며들어왔다. 아주 익숙한 느낌. 가슴이 부풀어 터질 것만 같은 이 기이한 감 동..... 그리고 이렇게 넓은 곳을 바라보았던 적이 있는 듯 했다. '그곳'에는 긴 강이 있었고, 망망한 바다가 있었다. 넓고 푸른 대지 와, 울창한 숲도 있었다. 하얀 배들이 빼곡이 들어찬 항구가 있었고, 그 항구가 마주하는 곳에는 회색의 단단한 성채가 있었다. 상어처럼 날렵하고 매서운 전함들이 있고, 그 위에 탄 기사들이 있다. 그들은 깃발을 휘날렸다. 장미와 용의 깃발을--- "암롯사....." 그렇다, 그곳이 바로 아킨의 고향이었다. *********************************************************** 작가잡설: 100회! 네, 드디어 100회 입니다~~~~~ 언제 다 올리나, 싶었는데.....이제 바짝 추격중입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22장 ************************************************************** [겨울성의 열쇠] 제101편 은둔자의 탑#4 ************************************************************** 유제니아는 월귤 파이와 건포도 쿠키를 바라보다가, 슬쩍 주변을 둘 러보았다. 이제 막 무도회가 시작된 데다가 연회가 끝난 지도 그리 오래 되지 도 않아, 다과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시중을 맡은 하인들도 방 금 전에 쟁반에 포도주와 다과를 들고는 떠났다. 유제니아는 살금살 금 그 쪽으로 다가가며 주위를 경계했다. 후아나는 벌써 춤 신청을 받고는 저 홀에서 기사 지망생 소년과 함 께 신나게 춤을 추고 있었다. 성의 기사들은 변변찮다, 어쩌고 하더 니 성의 소녀들 중 그녀처럼 신나는 애도 없었다. 그리고 그녀 덕에 관심에서 떨궈져 나간 다른 소녀들이 그런 후아나를 싸늘하게 노려 보고 있었다. 홀의 앞에 있는 귀빈석에는 하멜버그 백작부부와 영애 페트리샤가 앉아 칼라하스 공주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공주가 몸이 불편하 기 때문에 그들 모두 춤추는 것을 자제하고 있었다. 페트리샤는 공 주와 함께 온 멀끔하고 키 큰 기사들을 선망 어린 눈길로 보며 한 번 춤이라도 추어보고 싶어했지만, 백작 부부가 나오기 전에 단단히 명령한 듯 그저 풀죽은 표정으로 앉아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칼라 하스 공주는 그런 백작부부를 의외로 아주 즐겁게 해 주고 있었다. 다시 백작과 부인이 환하게 웃었고, 풀죽어 있던 페트리샤도 얌전하 게 웃는다. 유제니아는 이제 괜찮겠다 싶어서 과자 쪽으로 슬쩍 손을 가져갔다. 듬뿍 슬쩍 해 두었다가, 얼마 정도는 후아나와 함께 먹고 나머지는 잘 싸서 아킨에게나 가져다 줄 생각이었다. 유령이나 요정이 아니니 뭘 먹기는 먹을 것 아닌가. "설마, 고기만 먹는 건 아니겠지?" 보름만 늑대일 테니 인간인 동안은 사람 먹는 대로 먹을 것이다. 유 제니아는 우선 쿠키 하나를 집어 입에 넣어 보았다. 조금 씹으니, 에엑--하고 얼굴이 구겨졌다. "내가 만들어도 이거보다는 낫겠다. 칫-" 아무리 봐도 저기 햄과 치즈, 올리브를 얹어 놓은 비스킷이 훨씬 맛 있어 보였다. 그러나 저런 건 오래 보관 할 수는 없다. 블루 베리 케이크도 근사하긴 했는데, 그것은 들고 갔다가는 당장에 엉망진창 이 될 것이다. 유제니아는 별 수 없이 쿠키 쪽으로 손을 뻗었다. "파트너 없으십니까?" "네?" 유제니아는 황급히 손을 떨치고는 휙 돌아섰다. 키 큰 기사하나가 유제니아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유제니아로서는 도무지 기억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망토를 고정하는 핀 머리를 보니, 델 카타 의 그리핀이 새겨져 있었다. 유제니아는 얼른 무릎을 살짝 굽혔다 피고는 귀엽게 말했다. "델 카타에서 온 손님이시군요? 만나 뵙게 되어 기뻐요." "델허스 경이오." "유제니아 쥬르에요." 남자가 빙그레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에 보니, 한참이나 이곳에서 서성거리더군요. 그래서 와 봤 습니다....." "저는 춤을 못 추거든요." 남자가 반갑다는 듯 말했다. "아가씨 만한 조카들에게 춤을 가르친 적이 있으니, 한번 믿고 맡겨 보세요. 끝날 때 즈음에는 이 홀에서 가장 춤을 잘 추는 아가씨가 되어 있을 걸요. 자." 그리고 그가 손을 내밀었다. 이 상황에서 전 파트너가 있어요, 해 봤자 소용없다. 그리고 어찌나 따끈한 눈초리로 보고 있는지, '조카를 사랑하듯' 유제니아에게 춤을 가르쳐 줄 것 같지도 않았다. 엉덩이나 안 건드리면 다행이겠군. 유제니아는 슬쩍 홀을 바라보았다. 칼라하스가 백작부부에게 조용히 뭐라 말하더니 가볍게 고개를 들었다. 그 가벼운 몸짓 하나에, 홀의 구석에 있던 마하가 성큼 성큼 오더니 그녀를 안아 들었다. 사람들 의 시선이 모두 그곳으로 집중되었고, 유제니아도 그곳을 빤히 바라 보다가 무례하게 보일 것 같다는 생각에 고개를 돌렸다. 저런 사람 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시선'이다. 유제니아가 시선을 당기자마자 남자가 말했다. "춤이 싫다면......잠시 나가 볼까요? 성의 경치가 아주 근사하던데, 아가씨가 안내 해주면 고맙겠군요." "죄송하지만, 저도 여기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요. 요즘도 길을 잃 을 지경이랍니다." 남자는 머쓱한지 이마를 긁적였다. "제가 별로 마음에 안 드나 보군요. 그렇게 핑계를 대시다니...." ".....저기, 그게....." 유제니아는 뭐 이런 남자가 다 있나 싶었다. 아무리 봐도 서른 밑으 로는 안 보이는데, 열 여섯 살 짜리 어린 여자 애 데리고 뭐 하는거 람. 그리고 이렇게 처음 보는 여자애, 그것도 다른 사람과는 한참이 나 떨어져서 서성거리는 여자애에게 달착지근한 말을 늘어놓으며 달라붙는 남자는 반--드시 조심해야 한다고 슈마허가 말했었다. 바 람둥이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미인에게만 접근하는 남자보다 순진 하고 만만한 여자들에게 접근하면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 늘어놓는 바람둥이가 더 질이 나쁘다고 했었다.....(불론 본인은 전자인 바람둥 이니 괜찮다고 뻔뻔하게 말하고)그리고 그런 말이 없었어도, 유제니 아는 이 남자와 단 둘이 있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남자가 재촉했다. "같이 갑시다." "아하, 그게요..." 유제니아는 슬쩍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에게 방긋 웃어 보이고는, 생크림이 잔뜩 얹힌 케이크 접시를 들었다. "우선 좀 들고 가요. 제가 좀 집어 드릴게요." 남자는 웃고 있었지만, 눈 안에 약간 초조한 기색이 어렸다. 그러나 유제니아는 모르는 척 웃으며 그에게 접시를 내밀었다. 남자가 손을 뻗는 순간 유제니아는 얼른 손을 놓았다. 남자는 급히 팔을 뻗어 그 접시를 잡았지만, 유제니아의 손가락이 눈에 뜨이지도 않을 정도로 잽싸게 접시 끝을 건드렸다. 접시는 엎어졌고, 하얀 크림이 그의 옷 과 부츠에 튀었다. "이런--!" 유제니아는 원망어린 눈으로 남자를 보았다. 잘 받지, 왜 그렇게 칠 칠맞게 엎어 버리냐는 듯. 그러자 남자는 대체 왜 이런 일이 생겼는 지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냅킨을 찾았다. 그 때 하인이 얼른 달려왔 다. "손님분이시죠? 제가 닦아 드리겠습니다!" "아니 저 괜찮습니다. 저..." 그렇게 말하며 남자는 급히 유제니아를 바라보았지만, 유제니아는 벌써 잽싸게 사라진 뒤였다. "이런 젠장!" 남자가 갑자기 험악하게 외쳤다. 유제니아는 손을 탈탈 털며 정원으로 나왔다. 별 웃기는 남자를 다 보겠다, 정말. 유제니아는 행여 크림이나 묻지 않았을까 해서 치맛자락을 들어보 았다. 다행히 아주 깨끗했다. 아무도 없는 정원으로 나오자, 유제니 아는 왠지 으쓱해져서는 이 차림으로 세냐나 슈마허와 함께 춤을 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못 춘다는 건 순 거짓말이고, 슈마허가 가르쳐 준 적이 있었다. 봄의 성녀 루피니아 축제 때였는데, 그 때 그는 열 살이던 자그만 유제니아를 데리고 '자상하게' 춤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그는 열 아홉이던 세냐도 불러 대충 춤을 가르쳐 준 다음 유제니아와 같이 추도록 했다. 세르네긴은 검이나 창술은 성내 최고였지만 춤은 참담 하도록 형편없어서, 아버지는 그 모습을 보며 '줄 하나씩 달고 위에 서 조종했으면 속 편하겠다.' 라고 말했고, 어머니는 웃느라 정신없 었고, 슈마허는 내가 유제니아랑 추겠다, 하고 나서려다가 아버지에 게 한방 맞았다. '네가 올해로 서른이 되어서 좀 다급하다는 건 이 해한다만, 꼬마에게는 눈독들이지 말아라.' '세상 모든 남자를 당신 같은 얼간이 취급하지마! 유즈가 적어도 열 여섯이 될 때까지는 여 자로 안 볼 테니까.' '그 다음은?' '유즈가 선택할 바지.' 그리고 슈마 허가 다시 떠나는 날 까지, 그를 짐승으로 판단한 아버지는 그가 유 제니아를 안는 것도, 유제니아가 안기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 때 탁탁 발소리가 들려왔다. 유제니아는 얼른 정원수 뒤로 숨어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어 보았다. 역시나 그 남자가 달려나와 주변 을 둘러보고 있었다. 얼굴은 방금 전의 그 친절한 모습을 싹 빨아들 이기라도 한 듯 잔뜩 화가 올라 있었다. 걸리면 한 대 쥐어 박힐 듯 싶어서, 유제니아는 정원 우편으로 돌아가려고 살금살금 나왔다. 그러나 남자가 근방 유제니아를 발견하고는 성큼 성큼 걸어왔다. 유 제니아는 못 본 척 하며 잽싸게 걸어갔다. "이봐요, 아가씨--!" 유제니아는 역시 못 들은 척 하며 계속 걸었다. 결국 그가 달려왔 다. 유제니아는 뭐라 한마디하려고 뒤를 돌아보았는데, 얼굴이 마주 치는 순간 그 남자 역시 멈추었다. 그리고 멋쩍게 웃더니 손을 들어 보였다. "여기.....계셨군요." "모시고 오라고 했지, 몰아오라고 말한 적은 없소, 델허스 경." 묵직한 여자 목소리였다. 유제니아는 대체 어떤 일인가, 놀란 마음 에 델허스 경이 바라보는 곳을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더 놀라 뒤로 주춤 물러났다. 마하였다. 그녀는 그 무시무시한 몸집으로 유제니아가 달려오던 길 앞에 우뚝 서 있었고, 앞의 델허스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델허스 경은 얼 른 변명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닙니다, 마하 님. 저는 어떤 난폭한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알겠습니다. 이만 돌아가 즐기십시오." 그러나 델허스 경은 여전히 못마땅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피고는 뒤돌아 도망치듯 사라졌다. 유제니아는 금새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마하는 남자가 성안으로 사라지자, 한껏 정중하게 유제니아에게 말 했다. "마하 칸느라고 합니다, 유제니아 아가씨." "아, 제.......어라, 제 이름 아시네요?" 그런데, 마하는 가슴 앞으로 팔을 당기더니 허리를 깊이 숙였다. "제 주군이신 칼라하스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유제니아는 완전히 질려 버렸다. 거인 여자의 넓은 어깨와 엄격한 눈빛에 주눅이 들어버렸고 그녀가 꺼낸 말은 도저히 이유를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세상에나, 나한테 공주가 신경 쓸 만한 게 있었던 건가? 유제니아 기억으로는 절대 없었다. "무슨 말씀...이시죠?" "그분께서 아가씨를 만나 뵙고 싶어하십니다." 유제니아는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들었다. 하얀 포석이 깔린 길옆에 있는 우아한 파골라에, 은빛 드레스를 입 은 칼라하스 공주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유제니아를 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우아하고 아름다운 미소인 건 사실이었지만, 지독하 게 인위적인 느낌이었다. 잘 깎아 놓은 듯한 미소, 흐트러짐 없는 저 완벽한 모습. 완벽하게 얼어붙은 시체같은 소녀다. 유제니아는 소름이 끼치는 기분이었다. "어서 가십시오." "......." 유제니아는 마하를 흘끔 보고는 그 칼라하스 공주 쪽으로 조심조심 걸어갔다. 마하가 뒤를 바짝 따라오더니, 유제니아가 칼라하스 앞에 서서 인사를 하자 멈추었다. 칼라하스가 말했다. "만나 뵙게 되어 기쁘군요. 유제니아 쥬르 포틀러스 양이지요?" "......네." 순간 유제니아는 방금 전의 그 오싹한 차가움이 더욱 강하게 몸을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무례라는 것은 알기는 했지만 칼라하 스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차갑고 투명한 은청색 눈동자다..... "내가 부른...." 그러나 칼라하스가 막 말을 꺼낸 순간, 마하가 갑자기 손을 번쩍 들 었다. 칼라하스가 입을 다물더니 그런 마하를 놀라서 바라보았다. "누군가가 있습니다. 그것도 발걸음을 죽이고 있고, 그 발걸음 역시 위험하도록 조용합니다....." "무슨...." "이곳을 노리고 다가오는 겁니다." 마하가 허리춤에 찬 도끼를 꺼냈다. 원래 연회에서 무기를 휴대하는 것은 금지였지만, 칼라하스의 신분이 워낙에 높고 그녀의 몸도 불편 했기 때문에 특별히 허락 받은 것이었다. 칼라하스가 옷자락을 당기 더니 입술을 꾹 물었다. 유제니아는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컴컴한 정원수 사이사이로 눈길을 돌리다가, 어두운 나무둥치 사이에서 무언가가 언뜻 하얗게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순간 같은 것을 발견한 마하가 발을 차더니 무섭게 도끼를 날리며 그곳을 덮쳤다. 그러나 마하는 도끼를 당겨 붙였다가는 정원수 뒤쪽으로 달려가야 했다. 마하의 모습이 나무 그 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챙---다시 챙, 챙-! 날카로운 금속 소리가 들려왔다. 정원수가 흔들리고, 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이런...!" 칼라하스가 그곳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 쉬었다. 그리고 숲 속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본 유제니아는 파랗게 질려버렸다. "아키--!" *********************************************************** 작가잡설: 조용한 주말, secret garden.......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22장 ************************************************************** [겨울성의 열쇠] 제102편 은둔자의 탑#5 ************************************************************** 무자비하게 도끼를 날렸던 마하가 찍어낸 것은 정원 바닥이었다. 땅 이 패이고, 돌까지 으깨지며 튀어 올랐다. "누구냐--!" 상대는 몸을 틀었다. 은빛 머리카락이 흩어지고, 그가 든 단검이 번개처럼 솟아올랐다. 마하는 다시 도끼를 휘둘러 그의 허리를 내리쳤지만, 상대는 단검 날로 가볍게 막았다가 몸을 틀었다. 마하는 다리에 힘을 단단하게 주어 균형을 잡고는, 질풍 치듯 매섭게 몸을 틀며 도끼를 휘둘러 소 년의 단검을 내쳤다. "큿-!" 소년이 드디어 작게 신음을 흘리더니, 단검으로 도끼를 막았다가 그 날을 따라 검을 미끄러뜨렸다. 그리고는 허리를 틀어 마하의 정강이 를 힘껏 걷어찼다. 몸집은 마하에 비하면 버들가지만큼이나 호리호 리했지만, 힘만은 돌로 찍어낸 듯 날카롭고 단단했다. "윽-!" 마하는 무릎이 부서져나갈 것 같은 고통에 쓰러지는 것을 간신히 면하고는 다시 육중한 도끼를 휘둘렀다. 소년이 고개를 옆으로 젖혀 도끼날을 피했다. 도끼가 나무에 퍽 박 혀 버렸고, 그것을 뽑기 위해 마하는 온 힘을 꾹 주어야 했다. 그러 자 소년이 검으로 그녀의 허리를 노렸다. 마하는 피하지 않고 허리 에 힘을 주었고, 순간 챙---하고 불꽃이 튀더니 검이 퉁겨 나갔다. 소년이 놀라는 듯 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마하는 도끼를 뽑아 휘둘렀다. 다시 챙- 단검이 날아가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마하는 도끼날을 눕혀 소년의 목을 노렸다. 소년이 뒤로 물러나자, 마하는 주먹을 소년의 배에 박아 넣으며 나무 둥치로 밀어젖혔다. 쿵--! 나무가 한번 크게 흔들렸다. "쿨럭--!" 소년은 기침을 토해냈다. 은빛 머리카락이 크게 흔들리다가, 마하의 도끼 날에 몇 가닥이 잘려 나갔다. 소년은 숨을 몰아쉬고는, 고개를 젖혀 나무 둥치에 밀어붙였다. 그리고 드디어 그 얼굴을 자세히 보 게 된 순간, 마하는 놀라 자기도 모르게 도끼 날을 떨고 말았다. "휴로페......!" 소년은 그런 마하를 대체 무슨 소리냐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입니까." 마하는 무섭게 그를 노려보고는 외쳤다. "아노세- 판 로쉬라!" 악령이나 사악한 것들을 쫓기 위한 델 카타의 기도문이었다. 소년은 마하의 도끼에 목이 베이지 않도록 나무에 등을 바짝 들이대며, 대 체 그녀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감을 잡기 어려웠다. 그 때 옆으로 타닥--작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마하가 주먹을 당기 고는 도끼를 휘둘렀다. "한 패냐-!" 소년이 순간 숨을 멈추었다. 그도 놀란 것이다. 마하는 도끼를 휘두 르다가, 그녀도 놀라서 급히 뒤로 당겨야 했다. "저기, 그 애는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 제 친구에요." 유제니아가 엉거주춤 서서는 단검을 들고 있었다. 그 엉망인 모습 에, 마하는 한바탕 한숨을 크게 내 쉬고는 다시 도끼를 휘둘러 소 년, 아킨 쪽으로 세웠다. 도끼날이 아킨의 코끝에 닿았다. 아킨은 도 끼가 몸을 떠나는 즉시 도망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마하가 물었다. "어디 사는 누구입니까." 유제니아는 재빨리 답했다. "사냥터지기 집 아들이에요." "이름은?" "아키...프리." 아킨은 푸, 하고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마하가 엄중히 말했다. "제가 직접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아가씨는 이만 돌아가 주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유제니아는 여전히 엉거주춤 우스꽝스런 모습 그대로였고, 하얀 얼 굴은 이제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러고 있으니 꼭 치한 만난 아가씨 같은 꼴이라, 허리라도 한 번 툭 치면 그대로 픽 쓰러질 것만 같았 다. 차라리 가엾기까지 한 모습에, 마하도 달래듯 말했다. "칼라하스 전하의 안위를 맡고 있는 기사인 이상, 전하에게 위험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철저히 처리해야 합니다. 이해해 주시길 바 랍니다. 오해였다면, 제가 제 명예를 걸고 직접 보상하겠습니다." 말투는 어눌했지만, 정말 달변이었다. 유제니아는 이제 더 이상 마하를 설득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제니아가 실망해서 풀죽은 얼굴이 되 버리자, 마하는 아킨의 목 쪽으로 무지막지한 손을 뻗었다. 기절이라도 시키려 하는 것이다. 순간 유제니아의 몸이 재빨리 움직이더니, 단검을 휘둘러 마하의 겨 드랑이 쪽으로 찔러 넣었다. "아가씨--!" 마하는 손을 거두고 다시 도끼를 세워야 했다. 그러나 상대가 어린 유제니아인지라 도끼에는 아무런 힘도 없었다. 아킨은 마하의 도끼가 멀어진 틈에 재빨리 몸을 당겨 그녀의 손을 피했다. 마하가 그를 다시 막으려는 순간, 가슴 앞으로 유제니아의 몸이 파고 들어왔다. 그리고 목 줄기가 따끔하더니, 마하의 턱을 향 해 단검 끝이 휙 치솟아 올라왔다. "가만-가만요, 마하 기사님." 마하도 그녀가 자신을 해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유제니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제니아는 마하가 잠깐 주춤하는 순간을 원한 것이 고, 그 틈에 아킨이 도망치기만 바랬다. 그러나 아킨이 끼어 들어 유제니아의 허리를 붙잡았다. "아키-! 지금 너...." 그 때 저 멀리서 칼라하스가 신경질 적으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 다. "마하--!" 마하가 고개를 돌렸다. 놀란 아기 고양이가 비명을 지르는 것만 같 았다. 아킨은 이때다 싶어서 재빨리 유제니아를 끌어당겼다. "마하, 어서 와--! 어서!" 마하는 결국 그 둘을 포기하고 공주 쪽으로 달려갔다. 아킨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유제니아를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아, 아키...? 야, 너....너!" 어디로 왔는지도 모를 정도로 달린 다음에야 아킨은 멈추었고, 그에 게 질질 끌려오다시피 했던 유제니아는 힘없이 풀썩 주저앉았다. 그 리고 할딱대며 주변을 둘러보니, 보이는 것이라곤 나무 밖에 없었 다. 옷을 보니, 드레스 자락이 여기 저기 찢어져 있었다. "물어 달라고는 하지 않겠지." 유제니아는 깨끗이 포기했다. 생각해 보니 찢어졌다는 핑계로 이 드 레스를 해체하면, 이 넘치는 천으로 다른 옷 두 어 벌은 더 만들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옷 만드는 것은 확실하게 자신 있었다. 집에 있는 남자 셋이 그 방면에는 남자답게도 너무나 무능했으니, 어머니 와 유제니아 쪽이 그 일을 다 맡아서 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슈마허 와 그렉은 도무지 앉아 있지를 못하는 체질들이라 도 닦을 생각이 없는 한 안 시키는 게 정신건강상 좋았고, 세르네긴의 경우는 못하 든 잘하듯 시키는 대로 꿋꿋이 앉아있기는 했지만 솜씨가 끔찍해서 누구도 시키지 못한다. 언젠가 유제니아가 '그럼 엄마랑 결혼하기 전까지는 어떻게 했어 요?' 하고 물었더니, 슈마허의 경우에는 꼬셔둔 여자에게 맡기고, 그 렉의 경우에는 슈마허가 단추 떨어질 때를 기다려서 같이 해 오라 고 쥐어주고, 세르네긴의 경우에는 되든 안되든 혼자서, 묵묵히, 꾸 준히, 처리했다고 답해주었다. 아킨이 피식 웃었다. "헐떡대면서도 여유만 만이구나." "설마, 나는 전혀 엉뚱한 앤데 죽이기야 할 라고. 그 거인 아줌마도 금방 오해가 풀릴 거야." "괜찮아?" "이 거창한 드레스 찢어진 거? 괜찮아. 이런 거 다루어 본 적 많은 걸. 잘 수선해 볼 수 있어." "그것 말고." 아킨은 가슴을 가리켜 보였다. 그러자 유제니아는 흠...하고는 고개 를 끄덕였다. "거의 나았어." "며칠 되지도 않았잖아." "피범벅이여서 많이 다친 것 같아 보인 거지, 별로 대단하지는 않았 어. 또, 여기 성주님 마법도 쓰던 걸? 그래서 금방 나았어." 그러나 아킨이 별로 믿지 않는 눈치여서, 유제니아는 쀼루퉁하게 말 했다. "벗어서 보여줘?" ".......아니." 아킨은 그냥 웃고는 주머니를 뒤져 반지를 꺼냈다. "이것 돌려줄게." 유제니아는 환한 얼굴로 받아 들었다. "고마워!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아킨이 물었다. ".....그런데 그 때 그거...보고 놀라지 않았어?" "물론 놀랐지. 다 큰 남자애 벗은 건 처음 봤다고....맙소사, 날 훤할 때 다 보고 말다니.....며칠 동안 잠도 못 잤다구." "........" 아킨은 정말 죽고 싶었다. 그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그리고 생각 했더라면 아킨의 최대 고민은 유제니아가 다친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것......말고!" "에에, 왜 흥분하고 그래? 피해자는 순결한 소녀인 나라고." "......." 어떻게 저런 말을 저리도 빤빤하게 하는 지,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 다. 그리고 상황이 그랬으면 아예 처음부터 그 말부터 할 일이지, 왜 시치미 뚝 떼고 있다가 이렇게 사람 죽고 싶게 만드나.... "문제......가 자꾸 엉뚱한 쪽으로 가는데, 내 말은 그게 아니야. 저기, 저.....그 모습이 아니라 다른 모습 보인 게 좀......걱정되서." 다시, 무언가가 속에서 치솟아 오르는 것 같았다. 여자, 하얀 머리카 락의 그녀. 공포와 혐오에 창백해진 얼굴과......아킨은 머리가 지끈거 려왔다. 그것은 가장 큰 덩어리였고, 너무 단단하게 속에 응어리져 있어 보통 의지력으로는 도무지 떠오르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아킨은 지금 그것을 떠올리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너무나 두려 워해서, 정말 영영 잊고 싶어하고 있었다. 유제니아가 눈을 깜빡이 며 그런 아킨을 물끄러미 보았다. 아킨은 그 기억들을 떨쳐 내고는 물었다. "하여튼.......무서웠어?" "당연히 무섭지. 나 같은 꼬맹이한테는 충분히 위험하잖아." 아킨은 힘없이 웃었다. 그러자 유제니아가 손가락 열 개를 펴 보였 다. "우리 성에는 그런 사람이 열 명 정도 있었거든." 아킨이 우두커니 바라보자 유제니아는 손을 치웠다. "아저씨 여섯에, 아주머니 넷. 내가 떠나올 즈음에는 어느 아저씨 한 분이 새로 와서 열 한 명이 되었지. 그런 병이 있으면, 다른 곳 에서는 못 살아. 자칫 잘못하다가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일단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그대로 죽어도 할 말이 없거든. 그래 서, 그런 증상이 있는 사람은 모두 우리 성으로 오지." "그곳에서는 어쩌는데?" "뭘 어째. 칼쿠바 아저씨 전임이었던 마법사가 뒷산 절벽에 큰 동굴 을 하나 만들어 놨어. 그리고 그 안에 작은 굴을 한 백 개쯤 뚫어 놓고는, 그 입구에 철창 마법을 걸어 놨지. 보름이 되면 모두 그곳 으로 가서 하룻밤 내내 있어야 해. 그렇게 한 다음, 아침 햇살이 나 면 가족들이 우르르 달려가 그 사람들을 다시 데려가지. 마녀 리사 가 그 사람들에게 몇 가지 약을 주면, 다들 하룻밤 푹 자고 일어나 고.....그 다음 멀쩡해." 다시, 무언가...은빛 머리카락의 남자. 쇠사슬과 철창...아킨은 흥 분하려는 것을 애써 억누르며 물었다. "그리고?" "끝인데." "응?" "다른 곳에서는 눈이 금색이 되는 즉시 죽여 버린다고 하지만, 우리 성에서는 안 그래. 뉴마르냐의 숲에는 정말 야수왕 브라달로스의 아 들중 하나인 늑대왕이 살고 있고, 그 늑대왕에게 덥석 물리면 어쩔 수 없이 그런 병에 걸려 버리거든. 그런 증상이 있는 사람은 늘 열 몇 명 가량 있고, 그 사람들을 다 죽일 수는 없잖아. 그래서 처음에 는 쇠사슬로 묶어 놓다가, 결국에 그 마법사가 힘들여서 그 굴을 만 든 거지. 그 마법사는 그 공로로 유배가 풀려서 돌아갔어." "위험한데도?" "한 달에 하루만 위험한 거잖아. 그리고 본인이 위험해 지고 싶어서 위험해 지는 것도 아니고, 언제 위험해 지는지 뻔히 아는데, 그것 가지고 한달 내내 위험하다고 해치거나 죽인다면 그건 바보야. 차라 리 그 하루를 어떻게 보내게 할까, 그것부터 생각하는 게 정상이 지." 그리고 유제니아는 아킨을 한번 흘끔 보고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넌 그 사람들이랑은 좀 틀리게 변하는 것 같아." "어떻게 다른데?" "다들 머리만 늑대가 되거나, 허리 위까지만 늑대가 되거든. 그런데 넌.....정말, 아예 다 늑대 모습이잖아. 물린 부위가 틀리던가, 늑대왕 과 여왕이 한꺼번에 물었던가...그 이유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그 편 이 오히려 나은 것 같아. 그렇게 되면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냥 사 나운 늑대려니~~하잖아. 뭐, 늑대치고는 좀 못생긴 늑대지만....." 아킨은 웃었다. 힘없이 웃는 게 아니라, 정말 속에서부터 웃음이 터 지고 말았다. "머리만 변하는 게 더 무섭겠다." "사실, 웃기는 사람도 있어. 옆집 파티샤 아주머니는 말이야, 몸집이 산만한데 보름이 되면 늑대인간이 되. 생각해 봐. 몸은 산돼지 같은 데, 머리만 늑대야. 언젠가 그 아주머니가 자기는 늑대왕과 산돼지 왕에게 동시에 물려서, 아래는 산돼지로 변하고 머리는 늑대로 변하 는 거라고 했지. 물리기 전에는 우리 엄마보다 더 날씬한 미녀였다 나, 뭐라나. 하지만 그 집 아들 보면 그 아주머니야말로 산돼지 여 왕이고 아들은 왕자 같았다니까." 아킨은 이번에도 큭큭 웃고 말았다.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보름마 다 그 모습이 되면서....단 한번도, 이렇게 말해준 사람은 없었다. 아 니, 그것을 그저 '특이한 무엇'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사람, 자체가 없었다. 그 때 멀리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유제니아는 미처 듣지 못했지만, 아킨 쪽은 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 여기사가 다시 나타난 것 같아." 유제니아가 순진하게 말했다. "오해 풀면 되잖아." "오해 할만한 짓은 할 수 있어도, 풀만한 방법은 모르겠어. 이만 가 보는 게 좋겠다." 그리고 아킨은 고개를 숙여 유제니아의 볼에 키스해 주었다. "오늘 고마웠어." 순간 유제니아가 아킨의 허리를 덥석 안았다. "유제니아, 너--!" "작별 인사. 흠-세냐보다도 말랐네." 그렇게 말하고는 유제니아는 잽싸게 아킨의 허리를 놓았다. 아킨은 얼굴을 붉힌 채 뭐라 어물어물 말하다가, 다시 발소리가 들리자마자 재빨리 숲 속으로 사라졌다. 유제니아는 아킨이 사라진 쪽에서 작은 소리도 들리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뒤돌아 섰다. 순간 두터운 팔이 그녀의 팔목을 낚아챘다. *********************************************************** 작가잡설: 아키도 차암..;;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22장 *************************************************************** [겨울성의 열쇠] 제103편 은둔자의 탑#6 *************************************************************** "가만히 계십시오." 유제니아는 세게 팔을 흔들었지만, 독수리 부리에 찍힌 송사리처럼 꿈쩍할 수 없었다. 마하가 물었다. "솔직히 말해주십시오. 그 소년은 대체 누굽니까?" "아파 죽겠다니까요--!" 유제니아는 버럭 고함을 치고는 마하를 노려보았다. 마하는 한숨을 내 쉬고는 그녀의 팔을 놓았다. "알겠습니다. 더 이상 묻지 않겠으니 우선 전하를 만나 뵈십시오." "그렇게 말 안 해도 알아요!" 유제니아는 어떻게든 아킨이 더 멀리 도망칠 때까지 마하를 붙들어 놓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갈 생각도 안하고 바닥만 툭툭 찼다. 마하 가 엄격하게 말했다. "아가씨-" "같이 가 줘요. 정신없이 도망 오는 바람에 어디로 어떻게 가는 지 도 모르겠어." "당신은 참 영악한 분이군요." "영악해야 할 때만 영악해요. 또, 나처럼 쪼끄만 여자애가 영악해 봤자잖아요....." 마하의 눈이 조금 슬픈 듯한 빛을 띠었다. 그 큰 얼굴에 박힌 작은 눈이 그리 유제니아를 바라보니, 유제니아는 조금 미안해졌다. 마하가 말했다. "좋습니다, 같이 가도록 하지요. 그분께서도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 지 않으시니." 유제니아는 방금 전 마하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그 공주가 날카롭게 질러대던 비명을 기억해 냈다.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나올 것 같은 그 얼음 같은 공주가 그런 비명을 질렀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가엾 은 아킨에게 그렇게 무섭게 도끼를 휘둘러대던 마하가 즉각 그곳으 로 가는 것도 나름대로 신기했다. 마하가 앞장섰고, 유제니아는 그 뒤를 작은 병아리처럼 조르르 따르 며 슬쩍 말했다. "저기......그 남자애, 제 친구예요. 믿어줘요." "산지기 아들은 아닌 듯 하던데요." 유제니아는 얼굴을 붉히며 볼을 긁적였다. 제발 그냥 넘어가 달라는 신호였지만, 마하는 매섭게 말했다. "당신이 이곳에서 토박이 친구를 사귈 만큼 오래 있었다고는 생각 되지 않습니다. 아마도 아가씨만큼이나 외로웠던 소년이겠지요?" 이번에도 할 말이 없었다. 다행히 마하는 화제를 돌렸다. "검은 누구에게 배운 겁니까." "유배 온 범죄자들에게 당하지 않으려면 제 몸 지킬 정도는 알아야 해요. 오빠나 아버지가 늘 지켜 줄 수도 있는 게 아니니까.....아버지 가 가르쳐 줬어요." "그곳에는 창녀가 없습니까?" "있기는 하지만, 거기 남자들이 늘 돈이 있는 건 아니거든요. 그러 니, 어리고 겁 많은 여자애 협박해서 건드리려는 놈들이 더 많아 요." 마하가 한숨을 내 쉬었다.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이 알고 있군요." "네?" "보통 아가씨 또래의 여자아이들이라면 그것이 무어냐 묻습니다. 그 렇지 않다면, 아예 말도 꺼내지 말라는 식으로 답 하거나요." "알건 알아야 다들 걱정 안 하잖아요. 또, 그래야 조심할 수도 있는 법이고." "유제니아, 아이는 아이답게 어른만 믿고 살아도 되는 법입니다. 어 린 나이에 어른이 되는 건, 슬픈 일이에요." 유제니아는 그냥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덧 둘은 정원으로 돌아와 있었고, 잘 둘러보니 방금 전 도망쳐 왔던 그 파골라 근처였다. "왔구나-" 칼라하스가 여전히 벤치에 앉아 창백한 얼굴로 그 둘을 보고 있었 다. 마하는 고개를 숙였다. "모시고 왔습니다, 전하." "수고했어, 마하." "괜찮습니까?" "응, 괜찮아. 미안.....큰 일도 아닌데 어리광 부린 것 같아." 마하는 말이 없었다. 유제니아는 그녀를 한번 올려다보고는, 그녀가 턱짓을 하자 얼른 그 공주 앞에 섰다. 칼라하스는 방금 전 과는 달 리 조금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얼굴은 땀에 젖어 있었고, 머리카락 도 이마에 흐트러져 있었다. "유제니아 쥬르, 괜찮으니 옆에 앉아 주겠나요?" 유제니아는 망설임 없이 털썩 앉았다. 마하가 날카롭게 눈치를 주었 지만, 실수했다는 걸 알아도 다시 일어날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칼라하스가 빙그레 웃었다. "이제 편하게 이야기 하게 되었군요, 쥬르." "네......" 유제니아는 어찌 말해야 할지 갑자기 막막해졌다. 생각해 보니, 그 녀는 호위기사들을 감고 다니는 현기증 날 정도로 고귀한 공주였고, 유제니아는 아무리 생각해도 변변하다 말하기도 곤란한 처지였다. 지금은 고아에, 보호자들마저도 어디 처박혀 있는지 모르는 처지다. 공주가 부드럽게 말했다. "좋아요, 이제는 제가 당신을 만나고 싶어했던 이유를 말해야겠지 요. 너무 긴장하지 말아요. 그리 길지는 않으니까요."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에 유제니아는 손을 꽉 맞잡았다. 땀에 젖어 미끈거렸다. "슈마허 쉐플런과 세르네긴 포틀러스와 어떤 관계지요?" 순간 심장이 덜컥 멎은 것만 같았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떨려오 기 시작하더니, 정말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무서워졌다. 그 둘과 관련된 일이란 건 짐작하고 있었다. 이 정도 되는 인물이 유제니아에게 관심을 보인다면, 그것은 유제니아가 그들에게 꽤나 중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 유제니아는 '포틀러스'라는 성을 뉴 마르냐를 떠난 이래 아킨 이외에는 말한 적이 없었고, 이곳으로 왔 을 때부터 쥬르, 라는 친부의 성을 따르고 있었다. 공주가 벌써 그 것을 안다는 것은 유제니아의 뒷조사를 좀 해 두었다는 뜻이며, 이 런 상황에서는 최대한 솔직히 말해야 안다는 것도 안다. 유제니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오빠들이에요." "친오빠들은 아니죠?" "한 분은 제 계부의 양자이고, 다른 분은....친아들입니다." 칼라하스의 눈이 빛났다. "그럼....그 분들이 어떤 일을 하는 지는 잘 아시겠군요." "네." "얼마나 유명한 지도 잘 알고요?" "조....금요." 이제는 정말 눈물이라도 왈칵 터질 것 같았다. "그렇다면, 부친이 돌아가신 지금....그 두 분이 아직도 연락이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어요?" "아직....소식이 안 간 거예요. 뉴마르냐는 워낙에 변방이니까." "한 달이면 충분해요. 더군다나, 실제로는 2년 넘게 소식이 없지 않 았어요?" 유제니아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이를 악물었다가는, 날카롭게 말했다. "빙빙 돌리며 사람 겁주지 말고, 할 말만 분명히 해요." 칼라하스가 놀라 눈을 잠깐 크게 떴다가 곧 부드럽게 웃었다. "흑대장 슈마허 쉐플런은 지금 마라 공의 암살 혐의를 받아 에크롯 사를 떠나 로메르드에 가 있지요. 포틀러스는 그를 따라갔고요." 유제니아가 파랗게 질리자 칼라하스는 타이르듯 말했다. "물론 혐의뿐이지요. 마라 공은 쉐플런과 사이가 아주 좋지 않았으 니, 화나는 김에 아무 트집이나 잡아댄 것뿐이랍니다. 결국 참지 못 한 쉐플런 쪽에서 박차고 나갔고, 포틀러스는 그를 따라 간 거지 요." ".....하지만 세냐는...!" "네, 용기사지요. 그리고 그 때문에 마라 공은 쉐플런은 몰라도 포 틀러스 만은 다시 부르려 하고 있고요." 칼라하스는 가만히 소맷자락을 매만졌다. "그런 중에 마라 공은 뉴마르냐 요새의 부사령관이 죽었다는 통보 를 받게 되었답니다. 쉐플런에게, 그 분이 얼마나 소중한 분인지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알아요. 그 때문에 젊고 경력도 없는 포틀러스를 그토록 아꼈고, 최선을 다해 뒤를 밀어 준다는 것도요요....물론 포 틀러스의 실력은 알아요. 하지만, 그 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그렇게 빨리 와 준 것은 역시나 쉐플런의 덕이지요......" 유제니아는 칼라하스가 공주만 아니었다면 뺨이라도 갈길 뻔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발로 힘껏 걷어차고 싶었다. "그래서, 마라 공 전하께서 그들을 부르기 위한 인질 삼아 저를 여 기에 데려다 놓은 거라, 이 말인가요?" 성을 나온 아킨은 다시 컴컴한 숲으로 향했다. 나온 것까지는 좋았지만, 아킨은 당장 잘 곳조차 없었으니 결국은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 반드시 벗어나고 싶다 라는 간절한 마음은 없었다. 그저 밖으로 한번 나가 보고 싶었을 뿐이고, 그것을 아주 훌륭하게 이루었을 뿐이다. 마법사와 사는 것이 괴로운 것은 아니다. 외롭기는 했지만, 마법사 는 마법과 관련된 서적 이외의 것은 얼마든지 읽게 해 주어 심심한 적은 없었다. 식사는 늘 충분했고, 옷도 허름하기는 했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겨울이 한번 오기는 했지만, 보름에 밖으로 나갔 을 때를 제하고는 늘 집안에 틀어박혀 있어 괴로울 정도로 춥지도 않았다. 모닥불과 화로는 하인하나 없어도 늘 따사로이 타올랐고, 털 이불과 배게 역시 늘 푹신하게 부풀어 있었다. 마법사는 아킨을 아끼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불편하게 하지는 않았다. 반드시 이곳에 있어야 한다고 가둬둔 적도, 뭘 강요한 적도 없다. 아킨은 그에게 있어 그저 풍경일 뿐이요, 수집품일 뿐이었다. 그 까마득하게 많은 장서들이나, 기이한 물품들처럼..... 숲 안쪽으로 들어가자 곧 눈에 익은 나무와 바위들이 보였다. 아킨은 숲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그리고 그렇게 이리 저리 더듬 어 가는데, 갑자기 나무들이 빠르게 휙휙 지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숲 속을 고속으로 날아가듯. 현기증이 날 지경이라, 아킨은 눈을 감 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 차갑고 마른손이 아킨의 멱살을 잡아 당 겼다. "큿--!" 아킨은 그대로 끌어 당겨져서는, 차갑고 단단한 바닥에 내 동댕이쳐 졌다. 사방에는 기이한 약초와 향냄새, 삭아 가는 책들과 양피지들 에서 풍겨 나오는 오래된 냄새로 가득했다. 아킨은 팔을 짚고 일어나려다가, 그 마른손이 그의 멱살을 붙들어 일으키는 바람에 그만두었다. 저 자그만 몸 정도는 손 한번 휘두르 면 얼마든지 내동댕이칠 수 있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몇 배로 고통 스러워 진다는 걸 아킨은 예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이럴 때는 내동댕이치든 걷어차든 가만히 있어야 한다. "어디 갔다 온 거냐!" 그가 쉰 목소리를 험악하게 터뜨렸다. 아킨을 무릎을 꿇은 채 차분 히 답했다. "숲 밖으로 다녀왔습니다." 당장에 마법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숲 밖이라니, 대체 어떻게! 네가 어떻게 숲의 단단한 봉인을 풀고 나간 거냐!" "풀려 있었습니다." "뭐?" "오늘....무슨 일인지 풀려 있더군요. 그래서 나간 것뿐입니다." "그럼 왜 내게 이야기하지 않았냐!" "그런 말씀하신 적은 없지 않습니까." 마법사의 손이 부르르 떨리더니, 아킨의 뺨을 호되게 후려쳤다. 철썩--! 눈앞에서 뭐가 한번 번득인 것 같았다. 그는 몸집은 작았지만 힘은 엄청났다. 아킨은 그대로 나가떨어져 바닥에 부딪혔다. 그런데 머리에 충격이 크게 오는 순간, 갑자기 주변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막아, 그만두게 해! 맙소사, 누구하나 죽 겠어! 교수님, 교수님을 불러와! 이게 무슨 소리지? 소나기 쏟아지는 소리처럼 거센 환청이 귀로 쏟 아져 들어왔다. 아킨은 머리를 감싸쥐며 이를 악 물었다. 아프다, 지 독하게- "꼬마야?" 마법사가 그런 아킨이 이상한지 불렀다. 그러나 환청은 계속 쏟아졌 다. 철썩, 하고 드디어 그 환각 속에서 한 대 호되게 얻어맞았다. 다 시 반대편에서 그 손이 날아왔다. 그런 아킨을 멍하니 보는 키 큰 남자도 있다. 얼굴은 완전히 피투성이였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은 그 피만큼이나 붉다. 그 때 마법사가 와서 그의 어깨를 붙들어 일으켰다. "왜 그러냐." 아킨은 숨을 고르며 그런 마법사를 보고는, 땀에 젖어 지친 얼굴로 말했다. "좀.....아프군요." 순간 마법사의 푸른 눈과 갈라터진 입술이 일그러지더니, 아킨의 어 깨를 던지듯 놓았다. "이건 순전히 네 잘못이야! 다음부터는 뭔가 이상한 것이 있으면 내 게 반드시 보고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네게 줄 게 있다." 아킨은 바닥에 앉은 채 그런 마법사를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마법 사는 책상 쪽으로 짧은 다리로 엉금엉금 가더니 그 위에서 두 개의 은팔찌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 아킨의 팔을 당겨 그 팔목에 그 은 팔찌를 차례차례 채워 넣었다. "뭡...니까." "스승님 유품인데, 손을 좀 본 것이다. 그 마법과 관련된 건 이것 밖에 찾지 못했으니.....차고 있어라.." "....그 마법이라니요?" 마법사는 건성으로 답했다. "네 모습이 변하는 것 말이다." "저기, 그건....." "네놈에게 걸린 건 보통 물건이 아니라, 보통 마법으로는 어림도 없 지. 고대 마법과 관련된 것이야 만 해. 그런데 스승님 남긴 건 그것 밖에 없어서, 결국 그 크고 흉한 걸로 '대신'했다." 대신, 이라는 말이 마법사가 특별히 강조하지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뇌리에 박혀왔다. 거슬렸다, 저 말이. '대신'이라니, 그렇다면 이것과 비슷한 무언가가 예전에 있었던 말인가? "......다시는 변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까?" "그건 나도 모른다. 일단 보름이 되 봐야 알지." 아킨은 두 팔을 들어보았다. 팔찌는 처음에는 헐렁했지만, 아킨의 팔목에 걸리자 곧 줄어들어 지금은 팔목에 꼭 맞게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이번 달에는 나가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마법사는 귀찮다는 듯 퉁명스레 말했다. "되도록 영영 내보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 작가잡설: 아킨은.....지하감옥에 갇혀서 변태 탈로스에게 1년 내내 고문을 당해 팔, 다리 힘줄 끊어지고 얼굴 피부 홀랑 벗겨내고, 혀 까지 잘려나가.....봤자지요. 매직데이 한방이면 모조리 회복입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23장 ************************************************************** [겨울성의 열쇠] 제23장 천둥의 전조 제104편 천둥의 전조#1 ***************************************************************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여러분 덕입니다. 여기 모인 분들의 충심 을, 이 봄의 대지를 축수하신 루피니아의 이름으로 감사드려요." 그렇게 당당하게 축사를 하고는, 오만하고 또 그만큼 잔인하기도 한 로메르드의 실질적인 지배자, 브리올테 대비는 잔을 들었다. "모두 축배를-" 홀 안에 보인 사람들은 그녀와, 그녀 옆에 있는 이 나라의 어린 왕 베르티노를 위해 축배를 들었다. 브리올테 대비는 모든 일이 그녀 뜻대로 잘 풀리고 있어서 그런지 나이를 먹어도 오히려 더 젊어 보였다. 경쟁자인 공작이 지금 사보 섬에 갇혀 마지막 항전을 하는 지금, 내 일이나 내일 모레 그 공작의 목이 베르티노의 즉위 1주년 기념 선 물로 도착하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다. 방해자가 더 이상 없으니, 드디어 루피니아의 슬픈 선택을 받은 이 나라의 여왕 브리올테 대 비는 베르티노가 성년이 될 때까지 가장 큰 권력을 누리는 것이다. 반면 정말 왕인 베르티노는 어색하게 웃으며 사람들의 인사를 받고 있었다. 베르티노가 우물쭈물 대면 대비가 대신 받았고, 그녀는 오 히려 그것을 즐기고 있었다. 한껏 우아하게 웃고, 정중한 대신들의 손에 자신의 손을 맡기고는 키스를 받고, 그리고는 그들이 묻는 말 에 재치 있게 답하며 그녀는 자신이 정말 여왕이라는 것을 지나칠 정도로 당당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홀의 오른편에 앉아 그 모습을 보는 켈브리안은 당연히 기분이 좋 지 않았다. 어머니의 모습이야 언제나 그런 것이니, 그 모습이 평소와 다르다면 오히려 더 불안했을 것이다. (세상에나, 무슨 일이 있는 거 아냐? 하고 말이다.) 그녀가 언짢은 이유는 잔뜩 기죽은 베르티노와 그의 옆에 있는 그 '약혼녀' 때문이었다. 그 열 다섯 살 난 소녀는 발라 부인이 소개해 준 아이로, 어느 몰락 귀족가 딸이었다. 부모는 이미 예전에 돌아가셨고, 맡아 키우던 친척집도 버겁게 키우던 아이를 사 오다시피 해서 데리고 왔다. 그 소녀와 처음 인사하던 날을 켈브리안은 잊기 어려웠다. 고작 일 곱 살 난 왕의 신부가 되기 위해 궁궐로 온 소녀는, 우스꽝스런 인 형 같았다. 그것도 너무 어울리지 않은 곳에 놓아 둔 장식인형. 화장한 얼굴은 켈브리안 앞에 서자마자 당장에 파리해져서, 인사고 뭐고 간에 모조리 실수 연속이었다. 말이 바뀌고, 드레스 자락을 밟 으며 넘어져 버리고, 그것이 너무 부끄러워 훌쩍 훌쩍 울기까지 했다. 속은 어떻든 간에 켈브리안은 그 가엾은 소녀와는 비교도 되지 않 을 정도로 화사하고 아름다운 공주였다. 그 때문에 소녀는 그녀가 대비만큼이나 까다로울 거라 생각해 미리 겁을 집어먹어 버린 것이 다. 결국 켈브리안은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은 소녀를 내보내야 했고, 저 애가 왕비가 되면 어머니나 좋아하겠다, 라고 생각했다. 어 린 동생에, 저렇게 겁 많은 아내라니. 둘이 힘을 합쳐봐야 어머니 머리카락 한 가닥 뽑지 못할 것이다. 그 때 브리올테가 켈브리안을 바라보았다. 켈브리안은 슬쩍 고개를 돌리고는 옆에 있는 슈마허(켈브리안이 옆에 있다는 사실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지 의문인)에게 기댔다. 브리올테 대비는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돌려 다음 귀빈의 인사를 받았다. "고개 돌렸소." 슈마허가 말했다. "알고 있어요." 켈브리안은 얼른 머리를 당겼다. 슈마허가 투덜댔다. "이 짓도 피곤하군. 당신 말고 다른 여자들을 만날 수도 없고, 그렇 다고 당신이 놀아주는 것도 아니고." ".....자청한 건 당신이에요." "그것을 자청하면서 내가 희생한 것을 조--금이라도 해아려 주길 바라는데." "나 같은 미인이 옆에 있어주는데, 뭘 더 바래요." "나도 미남이야." "......늙은 주제에." "남자의 경륜은 매력이지." 이 남자는 갈수록 뻔뻔해 지는 것 같다. 슈마허는 방금 전부터 지켜보던 곳을 다시 유심히 보기 시작했다. 그가 무엇을 보는지 궁금해진 켈브리안은 같은 곳으로 눈길을 돌렸 다가 붉은 머리에 예쁜 옆얼굴을 가진 어느 젊은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세르네긴 포틀러스를 발견했다. 슈마허의 눈이 딱 그곳 을 향하고 있었다. "부러워서 바라보는 거예요?" "아니. 이번에는 얼마 만에 떨어져 나가나 재는 중이었소."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세르네긴이 고개를 저었다. 여자는 실망 한 듯한 부채로 얼굴을 휙 가리고는 도망치듯 사라졌다. "참 이상하죠. 저 세르네긴을 노리는 여자들은, 내가 아는 여자만 여럿인데 한 명도 성공하지 못하니." 그리고는 슬쩍 슈마허를 바라보며 물었다. "정말 소문대로 당신과 사귀는 건가요?" 그러나 슈마허도 만만치 않았다. "쟨 내 취향이 아니고, 난 쟤 취향이 아니오. 되도록 그런 쪽으로 끌리는 사람과 연결 시켜 주시오. 나도 취향이란 게 있거든." "......" 켈브리안이 천장을 쏘아보는 데, 세르네긴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슈 마허 쪽을 바라보았다. 슈마허는 손을 들어 인사를 보냈고, 세르네긴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 고는 곧바로 홀을 빠져나가 버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무슨 신호 한 거죠?" "가도 되, 감사합니다. 쌩-" "하여간....." "그리고 저 녀석 험담하지는 마시오. 귀여운 파랑새 같은 애가 옆자 리 지키고 있는데, 다른 여자들이 눈에 들어오겠어?" "어머나, 의외네. 저렇게 무뚝뚝한데 어떻게 연애는 성공했나 봐 요?" "저 녀석의 경우에는 긴 투자의 결과지. 아니지, 말 그대로 도둑놈 이군." 그렇게 말하니 켈브리안은 새삼 궁금해졌다. "어머나, 당신도 알아요?" "물론. 아기 때부터 봤지. 예쁘고 사랑스럽고 영리하고 애교 있고... '슈 아저씨, 어서와요~~' 하고 폴싹 안길 때면 얼마나 귀여웠는데. 지금도 좋지만, 그 아기 때 모습이 제일 귀엽고 사랑스러웠지...." 켈브리안이 피히, 하고 비웃었다. "......그렇게 좋으면 당신이 차지하지 그랬어요?" "나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나한테는 안 주더라고. 역시나, 내 이상형 들은 너무 늦게 태어나거나 너무 일찍 남의 아내가 된단 말이 야......" 슈마허가 너무나 진심으로 애석해 하고 있어, 켈브리안은 슬쩍 말했 다. "그렇다면......저는 당신 이상형은 아닌가 보네요?" "당연하지." "....." 별로 좋아하는 남자는 아니었지만 대 놓고 이런 말을 들으니 그것 도 은근히 기분이 나빴다. 심지어, 그것으로 모자랐는지 계속 투덜 투덜 댔다. 켈브리안이 말했다. "한번보고 싶네요, 그 아이." "웬 일이오? 당신이 나한테 관심을 다 보여주고." "당신이란 남자를 그렇게 얼간이 팔불출로 만들어 버리는 아이가 정말 어떤 앤지 너무 궁금하거든요." "내 눈에 뭐가 쓰인 게 아니고 정말 예쁘다니까." "그거야 봐야 아는 거고." 슈마허가 정말 기분 나빠하는 눈치라, 켈브리안은 오랜만에 재미있 는 구경했다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그 때 갑자기 나갔던 세르네긴이 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얼굴은 창백했고, 답지 않게 너무나 허둥대고 있었다. 그런 세르네긴의 모 습에, 슈마허는 금방 뭔가 일어났다는 것을, 그것도 심각한 일이라 는 것을 눈치챘다. 슈마허는 당장에 일어났다. "잠깐 실례하겠소." "양해 안 구해도 되요. 애인 만나러 가는 건데, 뭐." "유제니아는 질투해도 되지만, 세르네긴에 대해서는 질투하지 마시 오. 나도 징그러워." "....그럼 다음에 봐요. 다, 음, 에." 켈브리안은 은근하게 으름장을 놓았다. 나가서 오지 말라는 뜻이었 다. 슈마허는 곧장 세르네긴에게 달려갔다. 슈마허가 왔어도, 여전히 세 르네긴은 어디서 한 대 맞고 오기라도 한 듯 그를 멍하니 바라보기 만 할뿐이었다. 그 눈빛에, 슈마허는 말없이 그의 어깨를 잡아 밖으 로 끌어 당겼다. 그리고 궁궐의 정원으로 나오자마자 물었다. "무슨 일이냐, 세르네긴." 세르네긴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뜨고는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슈 마허에게 건네주었다. "집에 가는 길에.....누가 이것을 건네주었습니다." "누가?" "예전에.....그 왕자와의 일이 있을 때, 잠깐 만났던 사람입니다. 뒷골 목....귀와 입이지요." 정보길드는 정보를 알려주는 것뿐만 아니라 은밀한 소식들을 전해 주는 일을 맡기도 한다. 슈마허는 이것 역시 그런 거라 짐작했다. "그런데 이건....그래, 봤나?" "받자마자요." 그 말을 하는 세르네긴의 눈빛은 부서질 듯 흔들리고 있었다. 슈마허는 더 묻지 않고 봉투를 열어 안에 든 편지를 꺼내 읽었다. 편지는 두 장이었다. 하나는 여자 필체였고 나머지 하나는 굵직한 남자 필체였다. 슈마허는 그 두 글씨체를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당장에 여자 것부터 읽었고, 다 읽은 후 가만히 한숨을 내 쉬고는 침착하게 그 다음 편지를 읽었다. 순간 그의 얼굴이 확 붉어지더니, 그 편지를 구겨 버렸다. "이 개자식이--!" 그러나 분노보다는 슬픔이 먼저였다. 아니, 그 분노조차 슬픔과 함 께 휩쓸려서 터져 올랐다. 목구멍에서 뭐가 콱 치미는가 싶더니, 금 방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렸다. "말도 안 돼.....!" 믿어지지 않았다. 너무 막막해서, 그는 이 편지들이 그 빌어먹을 마 라 공이 꾸며낸 거라는 생각부터 떠 올렸다.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이건 고약한 장난질이다, 그 음흉한 말라깽이가 저지른 장난 중 가 장 고약하고 질 나쁜 장난질! "세냐....우선 제대로 확인부터 해야겠다." "결과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무슨 소리야! 다른 놈도 아닌 마라 공이 이런 걸 보냈어." "편지 날짜를 보십시오. 하나는 두 달 전에 보낸 것이고, 나머지 하 나는......일주일 전에 쓴 겁니다." "그건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다." ".....그 편지를 쓴 종이...... 칼쿠바 님이 만드는 것입니다. 그 종이는 저도 확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특색이 있으니, 흉내내기 어렵습니 다. 그것을 쓴 것은 뉴마르냐의 유즈입니다. 그것도 두 달 전에....!" "하지만 마지막 희망을 포기해선 안 되잖아....!" "슈마허, 스스로도 믿지 못하는 것을 제게 강요하지는 마십시오, 제 발....." "세냐." 세르네긴의 볼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무심하고 건조한 눈이 투명한 눈물에 흠뻑 젖어 들어가더니 빛과 함께 가득 고이는 순간 또 한번 볼 아래로 떨구어졌다. 그제야 슈마허는 그에게 무엇을 해 주어야 하는지, 자기 일에만 정 신이 팔려서 이 앞에 있는 청년이 어떤 기분인지 너무나 쉽게 무시 해 버렸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그렉의 아들이었다. 가엾은 유제니아의 오빠이며, 이제 그 동 생을 홀로 지켜주어야 하는, 그렇게 지켜주던 모든 이들을 떠나 보 내 버린 외로운 젊은이였다. "....미안하구나." 슈마허는 손을 뻗어 세르네긴의 등을 안아 주었다. 세르네긴이 오열을 터뜨렸다. 흐느끼고, 떨고, 그러다 울부짖으 며.......결국에는 통곡을 터뜨렸다. "아버지.......아버지가..........!" "세냐--누구나 죽는 단다." "하지만, 그 분은........쉰도 안 되셨습니다! 아직.....아직......아니, 이렇 게나 갑자기....나..... 난 아무 것도 드리지 못했는데, 아직...아직 많이 남아 있는 줄 알았는데.....! 아직.....많이...이렇게 많이 사랑하는데....." 슈마허는 떨리는 마른 어깨를 감싸 안은 채, 흐릿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오열이 터지는 것을 간신히 참고 있었지만, 가슴을 적시는 세르네긴의 뜨거운 눈물에 심장이 녹아 내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슬픔과 함께, 죄책감이 가슴을 쿡쿡 쑤셨다. 가엾은 유즈, 넌....우리도 이렇게나 막막하고 두려운데, 넌 얼마나 슬프고 힘들었을까. 두 달이나 우리의 소식을 기다리며, 얼마나 외 롭고 무서웠을까. "세냐, 어서...준비해라. 당장에....당장에 에크롯사로 떠나거라." "하지만...." "유즈를 더 기다리게 하지 말아라. 함정이든 뭐든 간에, 에크에서는, 아니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너를 헤칠 수 없다. 그러니 돌아가라." "당신은 요!" "나도 따라가마. 네가 먼저 떠나면, 나도 여기 대비인 척하는 여왕 에게 말하고 가겠다. 어차피 전쟁도 다 끝났으니, 이제는 보내주겠 지." "약혼은.....어쩌시고요." "한번만 더 내 걱정하면 두들겨 패 버린다. 세냐, 생각해 봐! 지 금......유즈는 우리가 없는 그곳에서 혼자서 그렉의 장례를 치르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어. 혼자서......! 그 빌어먹을 마라 공이 미치도 록 미운 건, 이런 식으로 유즈를 인질로 잡은 게 아니라, 유즈를 그 렇게 혼자 놔두게 만들었다는 것이고! 그 작고 어린것을 혼자서! 세 냐, 그러니 지금의 내게.....너와 유즈보다 중요한 건 없다. 무엇이든 버릴 수 있고, 버려야 해!" *********************************************************** 작가잡설: 아키 기억 돌아오는 순서를 보시면... 가엾은 켈브리안의 순번은 세냐보다 낮습니다. ........ ...네, 아직 기억해 내지도 못하고 있는 중이랍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23장 *************************************************************** [겨울성의 열쇠] 제105편 천둥의 전조#2 *************************************************************** 칼라하스는 마하가 따라준 차의 향기를 확인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런 작은 것조차 그녀'만'을 위해 준비된 것이었다. 옷도, 마차도, 말도, 그리고 이런 차나 다과나 달콤한 건과도 모두 그녀의 오빠인 칼리토 대공왕이 그녀가 출발하기 직전에 보내온 것이다. 고작 반년 전에 즉위했기 때문에 주변에 번잡한 일이 많을텐데도, 그 젊은 왕 은 동생의 일이라면 나라일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 가끔 칼라하스는 오빠가 결혼해도 이 정도로 자신을 챙겨 줄 수 있 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사람은 변하게 마련이다. 아내가 생기고 자식이 생겨도,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이가 몸 불편한 여동 생일 수 있을까. 그 생각을 하면 조금 서글퍼지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는 생각해 왔다. 놔주어야 하는 것에 집착하면 추해질 뿐 이다. 차의 향기를 음미하며 칼라하스가 말했다. "그 남자아이는 다시 나타났니?" "휴로페의 사령들은 낮에 나타나지는 않고, 정체를 들키면...." "....다시는 그 사람 앞에 나타나지 않지." 칼라하스는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꽃향기가 입안 가득 퍼져 들어 왔다. 마하가 그날 놀란 것은, 그 소년과 휘안토스가 무시무시하게 똑같았 기 때문이었다. 사악한 휴로페의 종들 중 하나인 휴우가, 그것은 인 간과 만나면 언제나 그가 가장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이의 모습을 빌어 나타난다. "그 아가씨의 눈에는 무엇으로 보였을 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여 기 들어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그리 친밀히 지내는 것을 보 니......옛친구의 모습인지도 모르겠군요." ".....하긴, 며칠 전에 다쳐서 돌아왔다고도 하더군. 충분히 가능할 수 있지." 칼라하스는 빈 찻잔을 내려놓았다. 마하가 다시 포트를 들자 그녀는 손을 저었다. "하지만 휴우가는 두 사람 앞에 나타나지 않아. 절대-- 그러니 다른 경우를 생각해 봐." "그 얼굴과 닮은 이가 어찌 둘일 수 있겠습니까." "있어." 마하의 눈빛이 차분해졌다. 칼라하스는 머리를 푹신한 의자에 기대 고는 눈을 감았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하." "휘안토스는 외아들이 아니야. 형에, 동생도 있지." "그것은 처음 듣는군요." "둘째 왕자와 첫째 아들인 서자에 대해서는 왕가정도 되는 곳에만 알려져 있지. 그건 암롯사 왕가의 치부니까. 큰아들은 사이러스 대 공왕이 엘프에게서 난 자식이고, 동생은 휘안토스와는 같은 날 태어 난 쌍둥이. 그러니, 휘안토스와 얼굴이 똑같은 사람이 존재할 수 있 게 된 거지." "하지만 어떻게 암롯사의 왕자가 이곳에 있습니까." "네가 모르는 것이 당연한 것이, 그 왕자는 거의 숨겨져 있었지. 그 러나 그 소년이 단 한번 공개석상에 나온 적이 있어. 그러니까, 작 년 암롯사의 신년 연회 때였지. 또, 로메르드 국왕이 승하하기 직전 에 열렸던 어느 사냥회에서도 모습을 드러냈었어. 그곳의 공주, 켈 브리안의 친구로서 말이야. 그러나 그 후에는 또 사라져 버렸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무슨 병이라도 있는 겁니까." "그럼. 그에게는 숨겨야 할 병이 있지. 그 때문에 열 살이 될 때까 지 어딘가 갇혀 살았고, 열 두 살 되던 해에도 압셀론에서 소리소 문 없이 사라졌어. 열 일곱 살에 공개석상에 나온 것으로 보아, 아 마 가문에서는 그 병이 완전히 나았다고 짐작했겠지. 그러나 몇 달 되지도 않아 다시없어진 것을 보니......아마 재발 한 것 같아." "하지만, 이곳에 숨겨 놓았다면 말이 안 됩니다. 이곳은 에크롯사, 암롯사와는 한참이나 떨어진 곳입니다." "그러니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이곳은 변방이고, 암롯사 왕자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숨겨 놓는 다면 이런 곳이 오 히려 더 좋아....그리고 춥구나. 내 숄 좀 집어 주겠어?" 마하는 칼라하스의 녹색 숄이 집어 올리며,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 엇인지 알아챘다. "만나 뵙고 싶으십니까?" "물론이지....." "그 아가씨에게 물어볼까요?" 칼라하스가 금세 불쾌하게 눈을 찌푸렸다. "그 작은 여우같은 아이에게 아무런 부탁도 해선 안돼. 또 당하고 싶어?" '또'라는 말에 마하의 눈길이 아래로 내려갔다. "사랑하는 마하, 너를 비난하는 건 아냐. 너를 그 못된 계집애나 상 대하는 일에 낭비시키고 싶지 않을 뿐이야." "감사합니다, 전하." 칼라하스는 마하의 큰 얼굴을 어루만지며 위로의 미소를 지었다. 아킨은 숲의 오솔길을 걸어가며 팔목의 팔찌를 문질러 보고 있었다. 팔찌에는 크게 특별한 건 없었다. 은처럼 하얀색에, 그 위에는 아무 문양도 없는 단순한 모양새였다. 흉할 정도로 큰 건 아니었다. 손가 락 굵기 정도 되어, 그냥 보면 그저 장식품 같아 보였다. 아킨은 그것을 창문의 햇빛에 비추어 보았다. 순간, 빛이 그 위로 부서지며 그 안에서 진 녹색 글자가 떠 올랐다. "!" 아킨은 다시 빛을 비추어 보았다. 빛을 따라 그 글자가 수면에 스치 듯 조용히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졌다. 그러나 도저히 읽을 수가 없 어서, 아킨은 그저 내 던지듯 팔목을 내리며 한숨을 내 쉬었다. 답답했다, 정말- 숲의 나무들도 어느덧 빽빽해져서 컴컴해졌다. 아킨은 흔적이 남은 나무를 찾고, 다음 흔적의 나무를 찾았다. 역시 멀지 않은 곳에 있 었다. 그렇게 자취를 더듬어 아킨은 금방 서쪽의 바위에 도착했다. 바위에 는 한낮의 하얀 햇살이 내리꽂히고 있었고 예전의 핏자국도 더욱 선명하게 도드라져 보였다. 아킨은 그 바위에 서서 예전에 숲을 빠져나갔던 그 오솔길을 찾아 보려고 했지만 빽빽한 숲만 보일 뿐 도무지 길을 찾을 수 없었다. 가만있자, 여기서 그 남자가 서서 이렇게 가리켰던 것 같은데.... 아킨은 대충 방향만 잡고는 그 쪽으로 한번 가 보았다. 그러나 곧 실망하고 말았다. 숲은 너무나 울창하게 우거져 있고, 수풀도 머리 카락만큼이나 빼곡이 자라 있었다. 지난번에는 어떻게 빠져나갔던 걸까.......그 때가 더 어두웠는데. 그 때, 숲 안 쪽에서 하얀 그림자 하나가 보였다. 아킨은 재빨리 나 무 틈에 몸을 숨기고는 그 그림자를 지켜보았다. 행여나 베이나트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숲 안으로 들어오는 그림자는 호리호리하고 키도 그리 크지 않은 데다가, 그 뒤로 몇 사람이 조용히 따르고 있다. 이 정도로 많 은 사람이 이 근처까지 온 것은 한번도 보지 못했던 아킨은 주의 깊게 그들을 살폈다. 그들 모두, 어디를 돌아다니다 온 듯 부츠와 망토가 풀과 흙으로 얼 룩져 있었다. 그리고 숲 속에서 눈에 뜨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진한 망토에, 진녹의 튜닉차림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선두에 있는 소년은 -자세히 보면 언뜻 청년 같아 보이기도 한다-아주 눈에 뜨였다. 소년은 연한 푸른색 옷을 입고 있었다. 마르고 호리호리했고, 짧게 친 머리카락은 기이한 푸른빛이 감도는 은청색이었다. 날카로운 눈 동자는 청동처럼 차가운 빛이었다. 얼굴은 전체적으로 갸름한 편이 었고, 얼굴은 그을린 듯 옅은 갈색이었다. 그런데, 그 소년이 아킨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킨은 숨을 죽여 그 를 바라보았지만, 소년은 아킨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앞으로 오던 그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더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주 면밀 히 살피고 있는데, 여전히 아킨은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숨죽일 필요 없어. 그는 널 볼 수 없으니까." 갑자기 들려온 굵직한 음성에, 아킨은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앞으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러나 큰 소리가 났는데도 소년은 여전히 고개 를 돌리지 않고 있었다. "여전히 덜렁대는 군, 꼬마. 나중에 색시 잘 만나야겠다." 아킨은 겨우 진정하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베이나트?" "쉿. 너무 큰 소리 내면 어렴풋이 나마 들릴 지 모르거든." 그렇게 말하고는 베이나트는 빙그레 웃었다. 지난번에 그랬듯, 시골 교구의 사제처럼 넉넉해 보이는 미소였다. 그리고 후드는 뒤로 젖히고 있어, 얼굴을 잘 볼 수 있었다. 진한 갈 색 머리에, 부드러운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자, 잘 지켜 봐." 베이나트가 손을 들자, 아킨은 다시 그 은청색 머리카락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그들을 등진 채 동료들에게 무언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말소 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분위기로 보니 일이 잘 안 풀리는 듯 험악한 기세였다. 그들은 곧 여기 저기 흩어진 말들을 모으더니 숲 안으로 돌아갔다.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숲의 다른 쪽으로 더욱 깊숙 이 들어가고 있었다. "저 사람들....대체 누구입니까?" "더 묻지 말고, 어서 돌아가서 집주인에게 말해라. 이상한 녀석들이 서성거리더라고. 단, 내가 가르쳐 줬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아라. 내 가 도와줬다고 하면, 그 사람은 아주 화를 낼 테니까." 순간 아킨은 베이나트를 노려보고 말았다. 그 경계 서린 날카로운 눈빛에, 베이나트는 입을 딱 닫았다. 아킨이 물었다. "대체 누구죠, 당신은?" "베이나트." "얼간이 같은 소리는 하지 마시죠. 마법사와는 어떻게 아는 겁니 까?" 베이나트의 이마에 힘줄이 아주 살짝 돋아나더니, 끙하고 신음을 흘 리며 말했다. "......그럭저럭 친한 친구사이였지." "지금은요?" "......좋지 않은 사고가 있어서 절교했어." "그렇다면.....저와 같이 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무리 좋지 못한 일이라도, 말만 잘 하면 해결 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베이나트가 정색을 하며 손을 흔들었다. "말로 해결을 볼일이면 내가 왜 이렇고 있겠니. 하여튼, 어서 그 사 람에게 전하기만 하려무나. 그 소년 마법사의 인상만 이야기하면 길 게 설명할 필요 없을 거다." "당신에 대해서도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아킨의 말에 베이나트는 정말 너무나 끔찍하다는 듯 고개까지 크게 저었다. "절대 하지 말아라. 절, 대." "하지만 당신이 더 위험할 지 누가 압니까." 베이나트는 아킨을 빤히 바라보더니, 결국 푸흐--하고 한숨을 내 쉬었다. "이봐, 나는 분명히 그 사람을 도와주려고 이 자리에 온 거라고. 믿 어, 제발!" "처음 뵙는 분이 무턱대고 안겨주는 도움을 어떻게 감사하게 받습 니까." "정말 사람 보는 눈 없는 녀석일세. 일단 한번 의심해 보는 건 좋은 태도야, 그래. 세상 사람들이 다 네가 좋게 본다고 다들 좋은 사람 이 아니란 건 분명한 진리니까. 하지만, 나는 믿어도 되는 사람이 다." 아킨은 정중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로써는, 아직 식견이 부족해서 당신이 어느 정도 믿 을 만한 분인지 알 수 없습니다. 같이 가세요." "얄미운 녀석이로군. 좋아, 만약에 나를 그 사람에게 끌고 간다면, 나 역시 네 여자친구에 대해서 말하겠다." 순간 아킨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런 것 아닙니다!" "이런 말 하긴 정말 미안하다만, 그 사람은.....이야기를 듣자마자 그 쪼끄맣고 예쁜 아가씨를 없애 버릴 거라고. 그래도 좋아?" 말을 험해도 베이나트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래 서 아킨은 벌컥 화를 내기 곤란해졌다. "거래치고는 아주 고약한데요, 베이나트." "이런 걸 협박이라고 하는 게다, 꼬마야." "......" 베이나트가 손을 들어 자신의 입술을 툭툭 쳤다. "그러니 말하지 말아라, 알겠지?" 그리 말하고는 베이나트는 씨익 웃었다. 아킨은 이 베이나트가 정말 로 유제니아에 대해 해를 끼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탈로스를 만나는 것을 정말 곤란해하고 있어, 아킨은 말하지 않기로 했다. 왠 지 이 남자를 믿고 싶었다. "곧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가야지." 그렇게 말하고는 베이나트는 아킨의 등을 떠밀다가, 무언가 발견한 듯 급히 팔을 확 당겼다. "왜 그러시죠?" "이거, 지난번에는 없었던 것 같구나." "무엇을 말씀하시는 거죠?" 베이나트는 아킨의 두 팔을 한꺼번에 잡아 당겼다. 두 개의 팔찌가 팔목에 걸려 있었다. 그는 한참이나 그것을 들여다보다가는, 그 손 목 위로 엄지손가락을 살짝 얹었다가 치우더니 넌지시 말했다. "달과 숲-" "네?" "기억하고 있어." 아킨은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말했다. "이상한 말을 잘 하시네요. 달과 숲...이요?" "그래, 기억해 둬. 서쪽, 그리고 달과 숲- 그렇게만 기억해 두렴. 급 하면 언제나 서쪽을 보거라." 베이나트는 얼른 그렇게 말하고는 팔찌 위에 손가락을 툭툭 얹었다 떼고는 팔을 놓았다. 순간, 그의 손끝을 따라 진녹의 문자가 스치듯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자, 이제 얼른 돌아가라. 그 두 단어에 대해서는......탈로스 녀석에 게 절대 말하지 말고. 비밀이다, 무조건 비밀." *********************************************************** 작가잡설: 휘안, 칼라하스와 결혼해라--!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23장 ************************************************************** [겨울성의 열쇠] 제106편 천둥의 전조#3 ************************************************************** 아킨은 베이나트가 어서 가보라고 손을 흔들자 결국 뒤돌아 탑 쪽 으로 달려갔다. 마법사에게 말하는 것은 그리 거북하지 않다.....그는 친절하지는 않 았지만, 그렇다고 포악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무엇을 말할 때 겁을 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다가, 아킨은 문득 멈추었다. 이상한 이름을 들었던 것 같았다. 베이나트와 말할 때는 당연히 알고 있는 거라 생각하고 넘겼었는데, 여기 와서 생각해 보니 분명 이상한 것이었다. 그 베이나트라는 사람, 방금 전에 마법사를 '탈로스'라고 불렀다. 마법사의 이름이 탈로스였던 가? 마법사의 이름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냥 그는 마법사 고, 아킨은 꼬마였다. 탑 안에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고도 남았고, 그것은 탑 주변에 둘러쳐진 보이지 않는 담처럼 아킨과 마법사-탈 로스 사이에 철저히 지켜지고 있는 한계선이자 금기였다. 더 이상 기억하거나 알아내려 하면 위험하다-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탑에 다다르자, 아킨은 마법사가 늘 있는 2층 서재로 올라갔다. 검 은 고양이 한 마리가 문 옆에서 그림자처럼 스르륵 나오더니 아킨 의 다리에 머리를 비볐다. 미친 노파처럼 이말 저말 쏘아붙이는 구 관조와는 달리, 그 고양이와는 사이가 좋았던 아킨은 팔을 뻗어 그 고양이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고양이가 가르릉 거리며 손에 머리를 비비고 휘감듯 몸을 비틀었다. 아킨은 서재 안을 한번 휘 둘러 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탑의 모든 곳이 그러하듯, 그곳 역시 아무 변화 없는 곳이었다. 그 것은 정지한 깊은 우물 같은 곳이었으며, 사막의 하늘처럼 망망하고 아찔하나 하나같은 색을 담은 곳이기도 했다. 창마다 두터운 커튼이 내려와 있어 한낮이라도 어둑어둑했다. 책들 은 책꽂이에 가득 꽂혀있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바닥에도 수북히 쌓 여 있었다. 아킨은 조심조심 서재의 책과 책꽂이를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 같은 이 서재 끝에 큰 책상이 놓여 있었다. 그 위로는 커다란 등불 이 빛나고 있었고, 커다란 까마귀 한 마리가 부리로 하얀 구슬 하나 를 툭툭 건드리며 놀고 있었다. 아킨은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책상이 있는 곳은 아주 환했다. 바닥 과 옆의 벽, 심지어 책상 위에도 기이한 모양의 글자가 가득히 적혀 은은하고 투명하게 빛났다. 그리고 돌로 된 바닥, 그 중앙에 둥근 원이 그려져 있고 그 안에도 그런 글자가 적혀 있다. 또, 그 테두리 안에는 아킨의 손목이 겨우 잠길 정도로 얕은 연못이 만들어져 있 었다. 그 연못의 물은 빛이 구석구석까지 스며들 정도로 깨끗하고, 바로 옆에서 숨을 불어넣어도 얼어붙은 듯 흔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 투명한 물아래의 바닥에도 기이한 마법 원이 그려져 있었고, 그 윗 부분에는 눈 모양의 그림도 그려져 있었다. 아킨은 그것을 물끄러미 보았다. 눈의 양옆으로는 눈물이 흐르듯 긴 선이 뻗어 나가고....그것이 갈라지며 또 다른 점과 만나더니, 다시 중앙으로 향한다... 아킨은 그 모양이 탑의 정상에서 보았던 바위와, 그 양 옆으로 뻗어 나가던 선들과 아주 유사한 것을 발견했다. "무슨 일이냐, 꼬마." 아킨은 급히 고개를 틀었다. 마법사가 구석진 책꽂이에서 책 한 다발을 안고 나오고 있었다. 그는 키가 작았다. 아킨의 허리 조금 넘어서는 데, 머리는 아킨 보 다 더 크다. 얼굴은 흉측했지만, 그의 눈 색만은 맑은 하늘빛이다. 아킨은 그를 향해 두 손을 뻗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탈로스는 아킨 의 손에 책을 맡겼다. "어디다 놓을까요?" "거기, 책상 위에." 아킨은 묵직한 책들을 책상 위에 우르르 얹어 놓았다. 책상 위에는 오늘 내내 마법사가 살펴 본 듯한 낡은 양피지가 몇 장 얹혀 있었다. 양피지 위에 적힌 것은 아킨은 읽을 수 없지만 적 혀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이한 느낌을 주는 아주 오래된 글자들이었 고, 그 글자들을 액자처럼 테두리 친 아름다운 그림의 양끝에는 커 다란 날개와 긴 목과 꼬리를 가진 괴물이 그려져 있었다. 안다, 이 것이 바로 드래곤이다. 에크롯사의 수호자이며, 영원을 당연하게 살 아가는 드래곤- 그것들 모두 탈로스가 열람하도록 허락한 책들에서 읽었다. 아킨은 자기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왜 이런 곳에 사시는 거죠?" "그건 갑자기 왜 묻는 거지?" 수집품에 둘러싸여, 그렇다고 그 수집품에 집착이나 관심을 보이는 것도 아닌데.....그는 이렇게 살고 있다. 매일 매일 책에 묻혀서 읽고 쓰고 생각하고, 그렇게만 살아간다. 그렇다고 알아내거나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데 즐거워 한 적도 없었던 것 같다. 수도나 자학이라도 하듯, 시간이 추억을 쌓고 나무는 낙엽을 내리듯 그렇게 한없이 한 없이 탐구하고만 있었다. 아킨이 말했다. "그냥요." "밖으로 나갈 일이 없으니까 그렇지. 넌 모르지만, 이런 모습으로 는.....밖으로 나갈 수가 없단다. 모두 나를 아주 싫어하고 혐오해. 때 로는 경멸하기도 하지만, 혐오하는 것보다야 차라리 낫다. 적어도 내 능력은 인정한다는 거니까." 아킨은 방금 전의 그 베이나트를 떠 올렸다. 그 온화한 눈동자의 남 자와 이 탈로스는 어떤 관계일까.... 그는 분명 이 탈로스의 친구라 했는데. 그렇게 생각하던 아킨은 머릿속에 흐릿하게 뭉쳐 기억들 중 또 몇 개가 씻기듯 깨끗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한 세 개의 이름이 문 득 생각났다. 눈보라의 오거스트, 천둥의 악튤런......그리고 전능의 탈로스. 가만, 전능의 탈로스.....? 그 이름을 떠올리자 갑자기 귀가 다시 화 끈거리는 것만 같았다. 몸이 무섭도록 추워지며, 차가운 그림자 같 은 공포가 몸을 확 덮는 것만 같았다. 푹신한 깃털이불처럼 편안했던 주변이, 갑자기 낯설어졌다. 아무렇 지도 않게 보던 탈로스가 갑자기 괴물처럼 몸을 오싹하게 했다. 이 상하다, 아킨은 단 한번도 이 남자에게 이런 것을 느꼈던 적이 없 다. 반항하다가 몇 대 맞을 때조차, 그저 화만 치밀어 올랐을 뿐인 데.....지금, 너무나 두려워졌다. 껍데기, 아킨의 눈에만 보이던 그 얇은 밝은 색의 껍데기가 갑자기 씻겨 내려가고 그 안에 숨어있던 흉측하고 두려운 것이 드러난 것 만 같았다. "꼬마야?" 아킨은 뒤로 주춤 물러나다가, 그 탈로스의 눈과 마주치자 그제야 문득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물컹거리던 바닥이 딱딱해지고, 어질어 질하던 머리도 차츰 가라앉아 갔다. 꿈이나 환각에서 깨어난 것 같 았다. 그런 아킨을 물끄러미 보다가 탈로스가 물었다. "그래, 너는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 ".....모르겠습니다." 탈로스의 눈이 번득였다. "무슨 소리지?" "특별히 이렇다, 하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당신이 이곳에 있 고, 내가 이곳에 있고.......그냥, 뭐랄까......당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아 요." "당연하다...?" 그리고 탈로스가 키득 비웃었다. "이곳의 삶이란 원래 그렇지. 조용해, 너무나 조용해.....깊은 물 속처 럼 고통도, 괴로움도, 그리고 변화도 없지. 하지만 너나 나같은 이는 그렇게 살면 되는 거란다, 꼬마야. 사람들은 자기네들과 다르면 무 조건 위험하다 생각하거든....게다가 나에게는 힘까지 있단 말이야. 위대한 힘 말이다." 탈로스의 눈이 불꽃 튀듯 이글거렸다. 아킨은 다시 소름이 끼쳐왔 다. "변변찮은 인간들이란, 자기네들과 다른 이들이 자기네들을 '지배'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그들이 유일한 무기인 '다수'의 힘을 사용 하지. 똘똘 뭉쳐서는, 종기 파내듯 우리 같은 이들을 떼어 내고는 묻어 버려. 다시는 자기네들 영역에 발붙이지 못하도록.....하지만 그 들은 사실 두려워하는 거지. 자기네들이 당연하다 생각해 왔던 것 들,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 그것이 무너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 거 야! 그것만이 그 하찮은 버러지 같은 것들이 가진 유일한 가치니 까....그것마저 없어지면, 그들은 말 그대로 버러지일 뿐이니까! 그래 서 그들은 날 매장하기로 했지. 나 때문에 그들의 진리가 파괴되는 것을 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나를 내 쫓아서 그 거짓되고 하찮은 생 에 평생 안주하고 사는 편이 훨씬 나으니까." 그리고 탈로스가 아킨을 노려보았다. "너 역시 마찬가지란다......밖은 겨울일 뿐이야. 한 겨울, 이곳만이 네가 안주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란다....넌, 이곳에서 밖에 살 수 없 어." "....." "나가면 당장에 얼어죽고 만다.....알겠니?" 아킨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이글거리는 저 연푸른 눈동자의 마법사, 그 역시도 스스로 만들고 남이 만들어 준 두려움에 떨다 결국은 제 몸을 우리 속에 가두어 버린 가엾은 이였다. 하지만 아킨은 자신 역시 그와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어지럽게 그의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기 억들 중, 정말 다시 찾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건 단 하나도 없었 다. 정말 그의 말대로 일지도 모른다. 안주할 수 있는 곳은, 이 고통스 런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은 정말 여기 뿐인지도 모른다- 아킨은 마음이 가라앉아 갔고, 그제야 이곳으로 온 이유를 기억해 냈다. "방금 전에 숲에 갔다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상한 거라니?" "사람들이 몇 명 숲 속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순간 탈로스의 눈이 확 커졌다. 부들부들 떠는 것이 눈에 뜨일 지경 이었다. "어떤 사람들이었냐! 아니, 어디까지 들어왔느냐." 아킨은 속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저 쪽에 큰 바위 하나가 있죠. 저는 그 근방에 있었는데, 이상한 사람들이 건너편으로 지나가더군요." 베아나트에 관한 것은 물론 빼놓기로 했다. 탈로스가 물었다. "어떤 사람?" "대략 열 명 정도 되 보였는데.....모두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습니 다. 그러나, 그 중 저보다 조금 나이 들어 보이는 소년만은 전혀 다 른 옷을 입고 있더군요." 탈로스의 눈이 빛나자, 아킨은 그가 '소년'에 대해 더 묻고 싶어함을 알아채고는 말했다. "은청색 머리카락에 연보라색 눈, 그리고...약간 진한 피부색을 가지 고 있었습니다. 또.....눈매가 좀 날카롭더군요.....기분 나쁠 정도로." 탈로스가 탄식을 흘렸다. 워낙에 밖으로 나 돌지 않아 가뜩이나 창 백한 얼굴도 더욱 창백해 보였다. "꼬마야, 당분간은 그 쪽으로 가지 말아라. 아니, 별채에서 나오지도 말거나....이 서재에 틀어박혀 있어라. 알겠냐?" "알겠습니다." "우선 저녁이나 먹으러 가거라. 난 할 일이 있다." 아킨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고양이와 함께 서재를 나섰다. 하멜버그 백작은 부인과의 저녁을 마치고 자신의 서재에 잠시 들렀 다. 그와 비슷한 내력을 가진 대부분의 귀족이 그렇듯, 그의 서재는 성 에서 가장 조용한 곳이며 아무도 들어 올 수 없도록-심지어 하인들 에게조차도 닫혀 있는 곳이었다. 또, 그의 침실과도 가까워 언제라 도 달려갈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서재의 창문 너머로, 정원과 건너편 건물의 불빛이 보였다. 그곳은 귀빈이 머무는 곳, 즉 지금 칼라하스 공주가 머물고 있었다. 하멜버그는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져왔다. 일주일만 머물다가 곧바로 북의 카를롯사로 갈 거라지 만, 그 일주 일이라도 하멜버그 백작에게는 십 년은 된 듯 길게만 느껴졌다. 자 신과 상관없는 외국의 공주가 머문다는 것은, 기쁘다 기보다는 불편 하기만 한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공주라면 몰라도 그 유명한 칼라하스 공주다. 무엇이든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커튼을 내리고는 뒤돌아 섰다. 그리고, 커튼이 쏟아지며 그 크 지 않은 서재가 외부의 시선에서 차단되자 온 서재가 달이 터진 듯 은은한 빛으로 가득 찼다. 하멜버그 백작은 놀라지 않았다. 그는 두 팔을 앞으로 뻗어 손바닥 을 밖으로 향하게 하며 무언가를 조용하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사방 에 가득 찼던 빛이 중앙으로 모여들어, 둥그런 빛 덩어리가 되었다. 하멜버그 백작은 그 빛을 향해 물었다. "무슨 일 입니까, 탈로스 님?" 그리고 하멜버그 백작은 그가 답하는 말에 기울였다. 한참이 지난 뒤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두 손을 맞잡았다. 곧, 그 하얀 빛덩 이 주변으로 푸릇한 테가 선명하게 둘러쳐졌다. "주의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네, 그러지요." 그렇게 말하다가, 하멜버그 백작은 잠시 고민하는 듯 눈길을 슬쩍 들었다. 저 안쪽에서 묻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하멜버그 백작 은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이상한 짐승 키우십니까?" 빛 속에서 분노가 긷든 음성이 들려왔다. 하멜버그 백작은 그의 기 분이 상했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급히 말했다. "그건 아닙니다. 성안의 여자 아이 하나가 밤에 숲으로 놀러나갔다, 심하게 다쳐서 돌아왔습니다. 목숨에는 지장이 없지만, 그런 일은 처음이라서요.......사실이시라면 제가 제 성의 사람들에게 주의를 시 켜 두어야 합니다." 답이 들려왔고, 하멜버그 백작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죠. 어차피 마법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여자아이일 뿐이니, 무사히 끝날 겁니다. 네, 비밀 은 반드시 지켜져야죠......알겠습니다...아니, 아닙니다. 보통 아이들은 그곳으로 가지도 않지만, 그 여자아이의 경우 처음이라...몰랐던 것 입니다." *********************************************************** 작가잡설: 벌써 4월 20일.....시간 참 빨리 갑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23장 *************************************************************** [겨울성의 열쇠] 제107편 천둥의 전조#4 *************************************************************** 눈치 빠른 유제니아나, 성에서 오래 살아온 후아나나, 성의 분위기 가 확 달라졌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챘다. 평소에는 검 하나만 달랑 들고서는 하녀들과 시시덕대고, 성에서 돌 봐주는 고아 소녀들에게 집적대던 남자들이 갑자기 투구와 갑옷을 챙겨 입고는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는 성내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게다가 백작은 부하들로 하여금 그렇게 성을 굳건히 지키게 했을 뿐만 아니라, 주인 잊혀진 숲으로 정찰대를 보내 돌게 했다. 병사들 이 바빠지자, 여자들과는 사이가 나빠도 얼굴 덕에 남자들에게는 늘 관심의 대상이었던 후아나는 당장에 심심해져서는 쀼루퉁하게 다녔 고, 유제니아는 숲으로 나가는 것이 더욱 어려워져 내심 실망했다. 그리고, 이 어린 두 소녀가 알아챈 것을 칼라하스와 마하가 모를 리 가 없었다. 마하는 성의 경계태세가 갑자기 강화되는 것을 바로 그 날로 알아 채고는 칼라하스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떠나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왜?" "이 상태로 부딪힌다면.....'그'의 성격 상, 곱게 끝나지는 않을 것입 니다. 저항이 크면 클수록 그는 난폭해집니다." 칼라하스 공주는 냉담하게 답했다. "상관없어." "전하--" 칼라하스 공주는 차가운 눈초리로 마하를 바라보았다. 그 서릿발같 은 은빛 눈동자를 보는 마하는 별로 기분이 좋지 못했다. 침착하고 냉정한 것은 좋다. 사리에 밝고, 아주 영리한 것도 좋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너무나 그 나이의 소녀답지 못하다는 데 있 었다. 핏줄 탓만은 아니다. 칼리토만 해도, 그녀보다 다섯 살이나 많 은데도 소년처럼 부드럽기만 하다. 그렇다고, 그녀의 몸이 불편해서 그러려니-하고 봐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하가 말했다. "떠나십시오, 전하. 나머지 일은 그가 다 알아서 할 터, 공주님께서 직접 이곳에 납셔서 할 일은...이제 끝났다고 봅니다." "그럼 오늘 당장 그 작은 여우를 잡아와." "네?" "나를 떠나게 하고 싶다면, 어떤 사람의 주의도 끌지 않고 그 여우 를 잡아오란 말이다." 마하는 한숨을 내 쉬고 말았다. "전하, 그것은 인간답지 못한 일입니다." "마라 공은 해도 되고, 나는 해선 안 된다는 말이야?" "그는 이 나라의 가장 높은 분의 남편입니다. 그분에게는 그리 할 권리가 있으며, 그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전하는 결코 그리 해선 안됩니다." 칼라하스의 눈빛이 더욱 싸늘해졌다. "그럼, 내가 여기까지 온 게 헛수고란 말이구나." 마하가 물러나게 하려고 외려 날카롭게 말한 것인데, 마하는 그런 공주의 행동에 겁을 먹기에는 그녀를 너무도 잘 알았다. "네, 헛수고입니다." "마하-!" "슈마허를 부르고 싶다면, 그에게 직접 말씀하십시오. 용기사를 가 지고 싶다면, 그건 포기하십시오. 열 두 마리의 드래곤들은 그 맹주 의 명에 따라 에크롯사만을 지킬 뿐, 아무리 용기사가 다른 나라에 충성한다 하더라도 그 나라를 위해 움직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혹시 모르잖아." "전하. 설령 그리할 수 있다 할 지라도, 제 살보다 소중한 이를 데 리고 협상을 벌이려는 자에게는 그 누구도 진심을 주지 않습니다. 특히 에크롯사의 남자들은 그것에 대해 배로 민감하답니다." 칼라하스는 그 말만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마음을 열든 열지 않든, 그게 뭐가 중요한 거지? 마하, 너와 나처 럼 이렇게 진심으로 서로를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쉽게 얻을 수 없어. 아니, 결코 얻을 수 없지.....그리고 좋은 사람을 얻는 것과, 능력 있는 사람을 얻는 것 역시 틀린 문제야." "전하, 그 슈마허 쉐플런의 모든 것을 얻어야 진정으로 얻는 것입니 다. 그 사람은 지금 여기에 온다 하더라도, 언제 저 쪽으로 갈 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인질로 어떻게 한번 끌어 올 수는 있지만, 계속 있을 거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래서?" "칼리토 폐하를 위해서라면, 차라리 직접 그와 대면하여 당신 스스 로 그분으로 하여금 델 카타에 충성하도록 만드십시오." "켈브리안 공주와의 약혼을 포기하게 만들 만한 게 대체 뭐가 있어 -!" 칼라하스는 조급히 외쳤다가는 입술을 꾹 물었다. 마하가 그런 칼라 하스를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칼라하스는 고개를 젓고는 애써 조용 히 말했다. "미안, 마하.....내가 지금 조급해져 있다는 건 인정할게." "아신다면, 그 방법은 포기하세요." ".......그건 양보 못해." "하지만, 전하......" 칼라하스는 마하의 말을 끊었다. 더 듣다가는, 칼라하스가 마하에게 휘말리고 만다. 그녀는 자신과 마하의 관계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 다. "그가 이 성을 습격할 때까지 이곳에 있겠어. 그리고 작은 여우는 네가 아닌 그에게 다 맡길 테니 더 이상 상관하지 마." 마하는 슬픈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칼라하스는 냉담하게 말했 다. "그리고 너는 내 몸이나 지켜 줘." 유제니아는 털실 뭉치를 잔뜩 가져다가 후아나의 팔에 휘감았다. 그 리고 그녀를 도우며 따분해 하는 후아나에게 뉴마르냐의 민요를 가 르쳐 주었다. 지방 특색답게 괴담이라 불릴 정도로 무시무시하고 으 슬으슬한 것들 뿐이라, 후아나는 결국에는 끝까지 듣지도 못하고 새 파랗게 질려 버리고 말았다. "그, 그, 그만 해---!" "아직 안 끝났어. 바위아래 피웅덩이에는~~~" "그만 하라니까! 하여간, 노래마다 괴물이 사람 토막쳐 먹었다는 이 야기밖에 없잖아....!" "하지만 그 중에 몇은 정말 있는 거야. 사실, 그런 민요를 만든 이 유 자체가 아이들이 엉뚱한 곳에 놀러갔다가 그 괴물들에게 잡혀 먹히지 않도록 주의시키기 위해서, 였거든. 따발 따발 설교하는 것 보다는 노래로 가르쳐 주는 게 편하잖아. 안 그래?" "혹시....너도 본 적 있어?" "늑대인간은 보름마다 봤어. 녹색 늪에 사는 마귀 드가에게는 정말 잡혀 먹힐 뻔했는데.....슈마허 아저씨가 구해줬지. 하지만 그 덕에 며칠 동안 문 밖에 나가기는커녕 야채스튜도 못 먹었다니까....우엑." "그......사, 산채로 내장을 뽑아 먹는 다는 그거?" "머리만 홀랑 먹어치우고는 그 몸에 들러붙어 사는 파루세가도 있 지. 사실, 보통은 들개나 사슴, 스라소니 같은 것에 들러붙어 사는 데....가끔 사람 몸에 들어가기도 해. 그리고 난 그게 제일 무서워." 그리 말하는 유제니아는 태연하게 후아나의 양팔에 감긴 실을 뽑아 둥글게 돌돌 말고 있었다. 후아나가 해쓱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 그만 하자....이, 이러다가는 오늘밤에 잠은 다 잔 것 같아." "녹색 늪에만 안 가면 그런 괴물들 만날 일은 없어. 괴물들도 인간 들 근처에 가면 재미없다는 걸 알거든. 걱정 마. 이 근처에는 녹색 늪은커녕, 갈색 늪도 없는 것 같으니까." 후아나는 유제니아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유제니아는 벌써 알아챘지만 모르는 척 해 주었다. 그리고 드디어 주먹 두 개만한 털 뭉치가 완성되자 유제니아는 그 뭉치를 위로 한번 던졌다. 후아나가 잽싸게 그것을 낚아채서는, 유제니아 쪽으로 던졌다. 그러나 너무 멀찍이 날아가서, 유제니아는 그것을 받기 위해 문 앞까지 달려가야 했다. "받았다. 자, 이제 너 차례!" 유제니아가 실뭉치를 집어 던졌다. 후아나는 그것을 냅다 받아서는 다시 유제니아 쪽으로 던졌다. 유제니아는 다시 받아 후아나 쪽으로 던졌다. 후아나는 실뭉치를 이리 저리 돌리더니, 유제니아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과 전혀 엉뚱한 곳으로 던졌다. "치사하다-!" 유제니아는 그렇게 외치면서도 웃으며 공을 잡으러 달려갔다. 그러 나 그 때 문이 열리며 타냐가 들어왔고, 실뭉치가 그녀의 머리를 퍽 쳤다. 유제니아는 얼른 달려가 그 실을 집어들고는 방안으로 후닥닥 들어왔다. "이런데 쓰려고 털실을 달라고 했니, 유제니아 쥬르!" 타냐가 무시무시하게 말하자, 유제니아는 행여나 다시 달라고 할까 봐 등뒤로 그 실뭉치를 숨겼다. 후아나는 새파랗게 질려 있었지만 내심 타냐가 한 대 맞은 데 아주 고소해 했다. "이것에 대해서는 차차 말하도록 하겠다. 유제니아, 백작님께서 너 를 부르신다. 얼른 준비하고 나와 함께 가자꾸나." 유제니아와 후아나는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다가, 둘 다 그 이유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자, 타 냐가 퉁명스레 말했다. "얼른 준비해라. 설마, 그 잠옷차림을 성주님을 만나 뵐 생각은 아 니겠지?" 유제니아는 후아나의 눈치를 살피다가, 후아나가 손짓을 보내자 털 실뭉치를 침대 위로 던져 놓고는 타냐를 밀었다. "왜 이러는 거냐, 쥬르." "옷 갈아입게요. 금방 나갈 테니 기다려 주세요." 타냐가 뭐라 험악하게 말했지만 유제니아는 문을 쿵하고 닫았다. 그 리고 얼른 후아나에게 물었다. "무슨 일 같아?" "무언가 중요한 말을 하려는 것 같은데....하지만 굉장히 공적인 일 일 거야. 타냐가 같이 가는 것을 보니." 유제니아는 덜컥 했다. 며칠 전에 칼라하스가 했던 말이 떠오르고, 며칠 밤을 세우게 했던 걱정이 갑자기 가슴이 쿵쾅거릴 정도로 커 졌다. 슈마허와 세르네긴이 유제니아를 위해 어떤 선택을 할지, 그것이 두 려운 것이 아니라 그들이 대체 왜 그렇게 떠난 것인지, 그 진짜 이 유를 알고 싶었다. 칼라하스 공주야, 꿍꿍이가 있으니 유제니아가 겁을 집어먹을 만한 말들만 꺼내놓았을 것이다. 그 말만 듣고 경솔 하게 징징거릴 수는 없는 노릇이라, 어떻게든 정확하게 알아 놓아야 했다. 그래야 이 성에서 얌전히 슈마허나 세르네긴이 오기를 기다리 든지, 밤에 슬그머니 빠져나가든지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슈마허의 자존심을 생각해 본다면 의외로 별 일 아닐 수도 있다. 슈 마허는 잘 있다가도 한번 수틀리면 다 두들겨 부수고 나가 버리는 성질이 있고, 그 많은 공을 세우고서도 온갖 나라를 전전하게 된 것 도 다 그 때문이었다. 그 때문이라면, 슈마허는 유제니아를 위해 고집을 꺾고 에크롯사로 들어올 것이며, 용기사인 세르네긴을 위해서는 그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서로를 용서하고 툴툴 털 수 없는 큰 일일 경우, 유제니아라는 존재는 그들을 희생시키는 결과를 불러 올 것이 다. 그 경우에는 유제니아가 슬쩍 빠져나가 슈마허를 찾아가는 편이 낫다. 그들을 찾아가는 건 요령 좋은 유제니아에겐 어려운 일이 아 니었다. 최근 3일간 유제니아가 궁리한 것도 슈마허와 세르네긴을 생각하며 훌쩍거리는 것이 아니라, 후자일 경우 어떻게 성을 빠져나 가 로메르드로 가느냐였다. 돈이야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집의 재산 을 정리해 놓은 것이 있고, 행여나 해서 단위가 큰 금화와 금방이라 도 쓸 수 있는 은화로 바꾸어 놓았다. 게다가 두 개로 나누어, 만일 의 경우를 대비해 주머니 하나는 방에, 나머지 하나는 성 근방의 나 무 밑에 묻어 두었다. 당장에 도망쳐야 할 경우, 침실까지 와서 돈 을 가져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 때 밖의 타냐가 문을 쾅쾅 두드렸다. "유제니아, 어서 준비하고 나와--!" "네--" 후아나가 얼른 말했다. "돌아오면 무슨 일인지 이야기 해 줘야 해." "물론." 유제니아는 단단히 각오하고는 방을 나섰다. *********************************************************** 작가잡설: 유제니아 양, 그대를 제2의 카자르로 임명합니다. (어딜 갖다 놔도 생존율 100%!)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24장 ************************************************************** [겨울성의 열쇠] 제24장 침묵의 파계 제108편 침묵의 파계#1 *************************************************************** 하멜버그 백작은 명령을 내린 후 초조하게 앉아 있어야 했다. 그저 기사일 뿐이라면 모를까, 그는 자신이 상당한 위험에 처해 있 다는 것을 알만큼은 되는 마법사였다. 또, 상황에 따라 어떻게 하는 것이 적합한 지도 잘 아는 정치가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잊지 않고 수도의 마라 공에게 상세히 연락해 두었다. 보고가 끝나자, 그는 일이 잘못 된다 해도, 적어도 이 일에 대해 하 멜버그의 백작 혼자만 알고 끝나지는 않게 되었다 생각되어 안심했 다. 하멜버그 가(家)가 '주인 없는 숲'을 영지로 갖게 된 것은 초대 대공 율피나에게 봉사했던 기사이자 하멜버그 가의 시조인 룬다 하멜버 그가 그 숲의 드래곤 에롤라스의 용기사였기 때문이다. 룬다의 죽음 후, 다른 드래곤들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기사들을 갖기 를 계속 거부했던 에롤라스는 30 여 년 전 한 마법사에게 이 숲을 양보하고 숲을 떠나 버렸고, 현재는 드래곤의 왕과 함께 그의 숲에 살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고작 '인간'에게 숲을 양보한 이유에 대해서는 드래곤과 마법 사 모두가 함구하고있으니 물어볼 수도 추궁할 수도 없는 문제였지 만, 드래곤이 숲을 양보했다는 것과 그 마법사가 에크롯사가 아닌 카를롯사 출신이라는 문제는 함구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가끔, 보통사람들의 일반적인 수준을 훌쩍 뛰어 넘어 질투할 힘조차 잃게 하는 사람이 있다. 산의 크기를 질투할 수도, 하늘의 높이에 도전할 수도 없듯이, 그런 종류의 위대한 천재들에게 사람들은 그가 무엇을 하든 납득하며 경배하곤 한다. 마음놓고 존경해 버리면, 비 판과 질투보다는 기대와 동경의 눈빛으로 보게 되기 때문이니. 그리고, 드래곤에게 그 숲을 받게 되었던 그 마법사의 경우가 바로 그러한 경우였다. 그 마법사 컬린은 성배의 환마저 그 권호를 토해내는 것을 포기했 던 마법사였으며, 시대의 가장 큰 대마법사이자 모든 탑이 열쇠의 맹세를 바친 자였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는 카를롯사의 마스터 도 아니었으며 그 나라에 충성 비슷한 일을 한 적도 없었다. 그는 어느 나라에도 적을 두지 않았고, 두려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당시에 그것은 '카를롯사'의 컬린이 아닌, 그저 '대마법사' 컬 린의 일이 될 수 있었고, 사실 컬린이었기에 다들 군말 없이 납득한 것이었다. 또, 그는 숲을 받는 자리에서 분명히 말해 두기도 했다. -나는 숲을 강탈한 것이 아니오. 그저, 내가 원하는 것을 연구하기 위해 잠시 빌리는 것 뿐. 일이 끝난 다면 반드시 돌려주겠소. 당시 하멜버그의 영주이자 현 하멜버그 백작의 아버지를 증인으로 하여 에롤라스와 약속하고는, 그는 드디어 그 숲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컬린은 그 숲에 칩거하지는 않았다. 아니, 대체 왜 가져갔는 지 모를 정도로 거의 들어가지도 않았다. 그는 그 후에 예전에 쓰던 카를롯사의 탑에서 연구를 계속하다가, 놀랍게도 제자를 맞이했을 뿐이었다. 그가 마법사로 이름을 퍼뜨리기 시작한 지 수 십 년만에 처음으로 받아들인 제자는 놀비오 가의 차남이었던 탈로스, 그 후 베넬리아 국립 마법원을 방문하는 길에 받아들인 것이 오거스트였으며, 컬린 은 그 둘과 함께 카를롯사에 있는 자신의 탑에서 지내며 그들을 가 르쳤다. 그 후, 더 이상 제자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 여겨졌던 컬 린은 놀랍게도 실종되기 3년 전에 델 카타롯사의 천재 소년 악튤런 파노제를 제자로 받아 들였다. 그러나 결국 누구나 아는 일로 인해 컬린이 실종되고, 세 제자들도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자 비로소 그 숲에 대한 소유권 문제가 발생 했다. 마법과 신성의 중추로 불리던 카를롯사였지만, 컬린의 탑과 재산은 모두 에크롯사 출신인 탈로스의 소유가 되었고, 그와 맞설 수 있었 던 유일한 마법사 오거스트는 카를롯사와 거의 교류가 없는 베넬리 아 인이자, 공화국의 최고 마스터. 즉, 울피온의 얼음 칼 앞에 맹세 를 마치고 탑의 열쇠를 가졌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 봉사를 할 수 없는 몸이었다. 마지막 제자이자, 앞의 두 제자와 비교할 수 도 없 을 정도로 엄청난 주목을 끌었던 악튤런 파노제는 컬린의 제자라고 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짧은 시간 동안 그의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 었다. 기대할 수조차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되니, 답답하고 아쉬운 카를롯사가 결국에 억지를 부리 게 된 것이 에롤라스의 숲을 자기네들의 영지로 되찾아 가겠다는 것이었다. 그 숲만은 다른 것들과는 달리 탈로스에게 승계 되지 않 았다. 컬린은 분명 '빌리는 것'이라 했으니, 그가 실종된 지금 탈로 스가 아닌 에롤라스에게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에크롯사에서는 당 연히 거부했고, 그 때문에 이곳으로 마라 공의 친구인 하멜버그 백 작이 직접 내려와 있는 것이다. 게다가 하멜버그 백작은 그곳이 그 의 영지이기도 했으니, '휴식'을 위해 내려왔다 하면 카를롯사에도 뭐라 말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델 카타롯사에서는 왜...' 하멜버그 백작은 그 일에 불길함을 느껴야 했다. 여태까지 그가 해야 할 일은 단지 카를롯사의 침입자가 숲에 얼쩡 거리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그들은 하멜버그 수준의 마법으로도 충 분히 막을 수 있었으며, 더 깊숙이 들어가 귀찮게 하려는 자는 탈로 스의 마법이 허락치 않았다. 그러니, 그는 이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곳 에서 나설만한 이유를, 그는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기껏해야 악 튤런 파노제의 개인적인 사정뿐이지만, 그가 바보가 아닌 이상 대제 자인 탈로스 고르노바에게 다시 도전할 리가 없다. 오거스트 롤레인 이야 탈로스와 거의 비슷한 시간동안 컬린과 함께 있었다. 그 둘은 기껏 4년 차이고, 그 정도는 개인의 노력과 능력으로 얼마든지 메울 수 있다. 그런데 이 둘과는 달리 가장 늦게 제자가 된 악튤런 파노 제는 제자라 부르기에도 뭐할 정도로 짧은 시간동안 컬린의 가르침 을 받았을 뿐이었다. 도전한다는 것 자체가 미련해 보일 정도로 무 모한 짓이며, 지금까지의 그의 행적을 돌이켜 본다면 악튤런은 성질 은 급하긴 해도 그 정도로 어리석은 인물은 아니었다. 델 카타롯사라는 '국가'의 입장으로 들여다본다면 그것은 더욱 의외 였다. 부유하긴 하나 암롯사의 내전에 손을 댔다가 오히려 사이러스 에게 대패하여 나셀의 요충지인 하실론 섬을 내 준 뒤로는 암롯사 에 계속 밀리고 있다. 마법은 카를롯사에 뒤지며, 에크롯사처럼 비 룡대라는 무적의 단위병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헤로롯사 처럼 스스로의 풍족함에 안주하여 평화로이 사는 것도 아니다. 국내 문제도 번거롭다. 최근 몇 년간은 전처인 황녀 칼리나의 아들이자 장자인 칼리토와 후처 왕비인 타니아의 아들간에 벌어졌던 승계문 제 때문에 미처 다른 곳에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 그러니, 그런 나 라에서 이 먼 에크롯사까지 손을 뻗는 다는 것은 지나치게 무모해 서 더 놀라운 일이었다. 또 놀라운 만큼 알맞은 대책을 강구하기도 어려웠다. 그들이 분명한 증거를 남기지 않는다면 항의하기도 어렵 고, 지지부진하다 보면 델 카타는 아주 쉽게 카를롯사의 음모라 우 겨댈 것이다. 카를롯사 쪽은 일이 그리 되면 오히려 에크롯사를 비 난하고 나올 테고. 그래서 사실, 방금 전에 그는 마라 공에게 그 문제에 대해 의논해 보았다. 그러나 마라 공은 별로 걱정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여차하면 탈로스 고르노바가 직접 나설 테니 당신은 크게 걱정하 지 않아도 좋을 것이오. 그는 이 에크롯사의 마스터, 그가 하는 모 든 일은 이 에크롯사를 대표하는 일이 될 것이며 이 나라를 위하는 일이오. 물론 탈로스는 퍼져 있는 온갖 악명과는 달리, 귀족이자 왕족으로서 의 명예심은 아주 훌륭했다. 그는 외모만을 제한다면 나무랄 데 없 는 에크롯사의 남자이자 뛰어난 마법사였으며, 스승과의 불화가 오 히려 의외였을 정도로 마라 공과 죠세피나 여왕의 깊은 신뢰를 받 고 있었다. 그 때문에 탈로스를 믿는 마라 공은 그렇게 태평하게 답했지만, 하 멜버그 백작은 델 카타의 공주인 칼라하스를 보며 그 답에 회의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너무도 확실하게 강한 상대가 있는 마 당에 그런 무모한 짓을 할 리가 있겠는가. 속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 는, 음험하다 못해 음침해 보이는 그 공주는 나이는 어리지만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뭔가 생각해 둔 것이 있으니, 손님으로 온 땅에 이토록 발칙한 짓을 하는 것이다. "백작님-" 문 밖에서 타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데리고 왔습니다, 백작님." "아, 들여보내라." 곧 문이 열리고 그가 저녁에 불렀던 여자애가 들어왔다. 유제니아는 백작에게 인사를 하고는 흘끔 타냐를 돌아보았다. 타냐 는 예의바르게 처신하라는 말을 험악한 눈빛으로 대신하고는 문을 닫고 나갔다. "이쪽으로 오너라." 백작이 그렇게 부드럽게 말하자, 유제니아는 네--하고 조심조심 답 하고는 창가 쪽으로 왔다. 여태까지는 엉망진창인 모습만 봐와서 몰랐는데, 조용할 때 보니 꽤 예쁜 아이였다. 특히, 가느다란 어깨와 목덜미, 그리고 호리호리한 몸집은 작은 새처럼 귀엽고 여려 보였다. 하멜버그는 나이가 비슷한 자신의 딸이 생각나 기분이 아주 편안해졌다. "왜 부른 것인 지, 짐작은 하고 있니?" ".....아뇨." "겁먹지는 말아라. 다른 게 아니라...그날 숲에 들어갔을 때 말이다." 유제니아는 각오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말이 나오자 당황했다. "네 상처가 큰 짐승에게 당한 거라는 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숲 에 위험한 야수가 있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단단히 주의시켜 둬야 하니, 솔직히 말해다오. 어디서 어떻게 다친 거냐." 유제니아는 곤란해졌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한 성의 성주를 앞에 놓고서 어떤 '거짓말' 을 해야 먹힐 지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또, 며칠 동안 아무 말도 없다가 이렇게 느닷없이 꺼내 놓으니 더 당혹스러웠다. 유제니아는 고개를 푹 숙여 눈빛을 감추고는 작게 말했다. "그건...." "그래." 백작은 귀를 기울였고, 순간 쿵--! 하고 큰 소리가 들렸다. 온 서재 가 덜덜 떨리고, 창문에 금이 쫙 갔다. 백작이 이를 악물고는 벌떡 일어났다. "이건--!" 아킨은 결국 밖으로 뛰쳐나오고 말았다. 바람이 불어와 몸을 쓸고는 지나갔다. 하늘은 이제 막 해가 저물어 어둑어둑 했고, 두텁고 하얀 구름들은 서쪽을 향해 느릿느릿 흐르고 있었다. 그렇게 사위가 고요하자, 아킨은 숲을 걸어가며 여태까지 떠올린 기 억들을 정리해 보았다. 뒤죽박죽 떠오르는 데다가, 뚝뚝 끊어져 도무지 앞뒤를 알 수가 없 었다. '느낌'은 남아 있지만, 대체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났는지, 그 이 유는 잘 기억나지 않는 것이다. 반지에 대한 것은 그리 큰 일은 아 닌 듯 싶었다. 기억을 떠올리게 해준 가장 큰 계기이긴 했으나, 기 억이 살아날 수록 그것은 공교로운 우연, 그 이상의 가치는 없었다. 외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기억해 두라고 말한 그 '목소리'였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것은 그 목소리와 관련된 기억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이유 없는 도움은 이유 있는 악의보다 더 무서운 법이다. 그렇게 걷던 아킨은 자신이 또 그 바위 앞에 와 있다는 것을 깨달 았다. 그저 터벅터벅 걷기만 했을 뿐, 이곳에 올 생각은 전혀 없었 는데 어쩌다가 이곳에 온 걸까. 발길 가는 대로 무의식중에 왔다고 생각해도 이상했다. 아킨은 지금 어디를 어떻게 왔는지는 기억할 수 있었고, 그 길은 분명 이 바위로 향하는 길이 아니었다. "아니, 이게 누구냐." 역시나 들려오는 그 목소리에 아킨은 아무 생각 없이 옆을 돌아보 았다. 베이나트가 나무 둥치에 앉아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베이나트는 자신의 옆자리를 탕탕 두드렸다. 앉으라 는 것이다. 이제는 베이나트에게 익숙해진 아킨은 그의 옆으로 터벅 터벅 걸어가 털썩 앉았다. "내가 하라는 대로했니?" "네. 그리고 약속대로 당신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아, 그건 알아." "...네?" 베이나트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널 믿었다는 거지." "어째서 도움을 주는 거라 말하면서도 자신을 숨기려고 하는 거지 요?" "그는 내가 도와주는 거라면 절대 믿으려 하지도 않을 거고, 진심을 알아도 거부할 테니까. 고집쟁이야, 그 녀석은....." "그는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배척한다고 하던 데요." "예나 지금이나 하나도 안 변했군....하지만 아킨토스, 사람들이 그를 싫어하기도 했지만 사실은 그가 사람들을 더 두려워 한 거란다. 그 는 사람들의 조그만 단점도, 약한 면도 용납하지 못했다. 따지고 보 면 지독한 도덕주의자이며, 열광적인 에칼라스의 신자이지. 하지만 멀쩡한 사람이라면 그를 싫어할 수도 좋아할 수도 있지만, 딱 갈라 지는 건 아니야.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이러다가 저럴 수도, 저러다 가 이럴 수도 있는 것이 인간이다. 내가 악한만큼 선한 것이 저들이 법이니까. 그러니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틀리다고 세상은 썩었어, 사악한 사람들만 가득해~~하는 건 억지지. 단순논리의 극치." 그 말에 아킨은 피식 웃었다. 그렇게 갑자기 터진 웃음 때문에 베이 나트는 그런 아킨을 멍하니 바라보았고, 아킨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적어도.....당신이 탈로스의 적이 아니란 건 확실하군요." "빨리도 믿어 주는 구나, 꼬마야." "신중한 게 좋은 겁니다." 아킨은 그렇게 말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이만 가 볼게요. 저녁 식사시간인데.....아, 같이 드시겠습니까? 별채라서 그의 눈에 뜨이지는 않을 텐 데요." 베이나트는 고개를 저었다. "고맙긴 하다만 그만 두는 게 좋을 것 같구나. 괜히 갔다가 녀석의 눈에 뜨이면 그것도 곤란하니까...."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눈길을 멈추고는 눈을 찌푸렸다. "베이나트?" 베이나트가 손을 들어 숲 속을 가리켰고, 아킨은 얼른 그곳을 보았 다. 숲 속에, 다시 그 연푸른 색 옷을 입은 소년이 서 있었다. "저 사람, 또..." "쉿-" 소년은 그 날카로운 눈으로 한곳을 노려보고 있었고, 갑자기 그의 손 에서 빛덩이가 튀어나오더니 바닥으로 빨려 들어가듯 휙 사라졌다. 그리고 풀밭에서 빛이 스며 나오는가 싶더니, 그 소년을 중심으로 금가 락지 같은 원이 둘러쳐졌다. 아킨이 말했다. "말해야겠군요." "어서 가라. 이번에도 내 일은 비밀로 해주는 거 잊지 말고." "알겠습니다." 아킨은 뒤돌아 가려고 했다. 그 때 베이나트가 넌지시 말했다. "그리고 아키야." "네?" "너도 기억을 되살리는 것을 겁내지 말아라." 아킨은 순간 오싹함에 몸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지금 뭐라고 한 거지? 뭔가 잘못 들은 건가...? 베이나트가 말했다. "세상이란 건 말이다,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지만.....그것 모두 다 겪어야 하는 거란다. 좋은 것만 있을 수도 없고, 언제나 나쁘지도 않아.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좀 더 단단해 지는 것뿐이란 다." 아킨은 순간 뒤를 돌아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에게 달려가 질문을 쏟아 붓고 싶어지고,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다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앞으로 달려갔다. 진실을 안다는 것이 갑자기 두려워졌 고, 여태까지는 나방이 빛에 끌리듯 아무 생각 없이 밖으로 나가고 싶다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곳이 무서웠다. 그렇다면 왜 무서운 거지? 아킨은 스스로에게 물어 보았다. 그러나 숨겨진 기억은 그 답마저도 거부하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그렇게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저 멀리서 쿵--하고 천둥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그리고 큰불이라도 난 듯, 숲 너머에서 빛이 환하게 솟구쳐 올랐다. *********************************************************** 작가잡설: 오늘 대체 몇편을 올리는 거냐;;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24장 *************************************************************** [겨울성의 열쇠] 제109편 침묵의 파계#2 *************************************************************** "끼악-!" 다시 저택이 울리자 유제니아는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누군가가 땅을 한번 들었다 놓은 것만 같았다. 그리고 겨우 겨우 힘 겹게 몸을 일으켜 보니, 창 밖이 불이라도 번진 듯 붉고 훤했다. 대 낮처럼 환한 가운데, 까만 하늘조차 보이지 않고 온통 벌겋기만 하 다. 백작이 같은 것을 보며 뭐라 험악하게 내뱉고는 유제니아에게 말했 다. "다음에 이야기하자. 우선 나가 있어라--!" 유제니아는 네, 하고 짧게 답하고는 재빨리 일어났다. 순간 하멜버 그 백작의 눈빛이 변했다. "너...." 유제니아는 뜨끔했다. 그러나 백작은 고개를 젓고는 유제니아의 등 을 밀었다. "나가라." 유제니아는 당장 에라도 달려나가려고 힘껏 문을 당겼다. 그러나 문 이 갑자기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몇 번이나 거듭 힘주어 당겨도 들러 붙은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문이 안 열려요!" 하멜버그 백작은 달려와 문고리를 힘주어 당겼지만 역시 마찬가지 였다. 그는 이를 뿌득 물더니 유제니아를 밀쳐냈다. "비쟈트-!" 백작이 문에 손을 붙이며 그리 말하는 순간, 문틈으로 하얀빛이 한 번 번쩍였다 사라졌다. 그리고 그는 다시 한번 문고리를 힘주어 당 겼지만, 역시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시 쿠르릉-온 성이 경련이라 도 일으키듯 흔들렸다. "와앗-!" 유제니아는 급히 옆의 책꽂이를 움켜잡았다. 사방에 두텁고 낡은 책 들이 바닥에 쏟아져 있어서, 앉아 있는 것도 불편할 지경이었다. 그 때 문 쪽에 있던 하멜버그 백작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뭔 가가 나왔나 싶어, 유제니아는 재빨리 책꽂이 뒤로 몸을 숨겼다. 어둑한 서재가 갑자기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구석구석에 작은 불 빛들을 숨겨 놓은 듯,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유제니아는 몸을 더 웅크렸다. 무언가가 나지막하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파도처 럼 촤르륵 밀려들어오다가, 달빛처럼 흐릿하게 지워지는 듯한 소리, 자그마한 군중들이 모여 고요한 합창을 하는 듯 소름끼치는 소리였 다. 갑자기 백작이 온 방이 쩌릉 울릴 정도로 크게 외쳤다. "누구냐-!" 차작--! 얇은 채찍으로 가볍고 빠르게 후려친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주변이 한번 크게 번쩍이더니, 크고 아찔한 번뜩임이 사라지는 순간 은은한 빛들도 꺼지듯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장과 바닥, 몇 군데의 벽에서 달빛으로 쓴 듯 하얗게 빛나는 문자들이 떠올랐다. 멀찍이 보이는 하멜버그 백작의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날카로운 목 소리로 뭐라 외쳤다. 그러나 그의 애 타는 마음과는 달리 주변은 매 정하게도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문자들의 빛은 여전히 은은하고도 선명했고, 웅웅웅--낮은 웅성거림 역시 계속되고 있었다. 갑자기 백작이 두 팔을 뻗더니 외쳤다. 뭐라 외치는 지 유제니아는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다만 아주 길었다. 순간, 팟팟--작은 원들이 나타났다. 주먹만한 것으로, 세 개정도 되 었다. 그것들은 백작 주위를 행성처럼 맴돌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 다. 파직, 하고 그 세 개의 원 위로 하얀 불꽃이 튀어 올랐다. 그것 을 시전하는 하멜버그의 얼굴은 이제 얼어붙은 듯 창백해져 있었다. 칼쿠버의 마법을 몇 번이나 봐 왔던 유제니아이지만, 그건 정말 처 음 보는 것이었다. 재미 삼아 읽었던 마법의 기록을 담은 책에서도 저런 마법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효과가 있는 지 벽과 바닥, 천자의 글자들이 흐릿해지더니 소리도 잦아들기 시작했다. 유제니아는 후우--하고 작게 한숨을 내 쉬며 책꽂이에 손을 놓았다. 백작 역시 마찬가지로, 안도한 듯 어깨 의 힘을 풀었다. 빛들과 소리는 거의 잦아들어 있었다. 백작이 책꽂이 뒤에 웅크리고 있는 유제니아에게 뭐라 말하려 했다. 그가 오라고 말하려는 듯 해 서 유제니아는 책꽂이 뒤에서 나오려다가 눈을 크게 떴다. "위....." 순간, 다시 천둥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꽈르르르--! 방금 전 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충격이었다. 방안이 울부짖듯 울리고, 책꽂이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유제니아 는 몸을 웅크렸지만, 머리와 등위로 책들이 무너져 내리고 천장에서 떨어진 돌 부스러기들이 와스스스 쏟아졌다. "크악-!" 백작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유제니아는 입을 틀어막으며 급히 고 개를 들었고, 그녀가 본 것은 바닥에 짓눌린 듯 쓰러져 있는 성주와 그 앞에 서 있는 청 회색 로브의 남자였다. 유제니아는 몸을 더욱 웅크리며 그를 노리듯 바라보았다. 누구지? 아니,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지? 마법사인가? 순간 그 청 회색 로브의 남자가 발을 휘두르더니 하멜버그의 몸을 걷어찼다. 컥, 하고 신음소리가 들리더니 백작이 고통에 몸을 웅크 렸다. "쿨럭--!" "그놈이 그걸 가르쳐 주던가." 그렇게 말하고는 남자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유제니아 는 꿈쩍도 하지 않고 그를 바라봐야 했다. 움직였다가는 들킬지도 모른다. 유제니아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이었다. 로브와 비슷한 색조 의 머리카락에, 갈색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눈은 투명해 보일 정도 로 연한 녹색. 그러나 매처럼 날카롭고 사나워 보였으며, 그만큼 영 리해 보이기도 했다. 소년이 말했다. "그 따위 힘으로는 고대마법을 사용해 봤자 다. 차라리, 잡종개에게 금목걸이를 주지." 그러면 너는 미친개다, 유제니아는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소년의 로브자락이 펄럭이더니, 그 손끝을 따라 빛의 궤적을 그려졌 다. 아름다운 하얀빛이었다. 그리고 쿠르르릉-다시 천둥소리가 들린 다. 사그라지던 벽과 바닥의 문자들이 일시에 확 빛났다. 그 글자들 은 살아있는 듯 꿈틀대더니, 글자의 휘감긴 선 하나 하나에서 더욱 환한 빛이 스며 나왔다. 그리고 그 하나하나에서 뿜어져 나온 모든 빛이 소년의 가슴 근방으로 모여들었고, 그곳에서 빛으로 이루어진 다면체가 만들어졌다. 소년은 손을 들어 그것을 물끄러미 보더니, 갑자기 후려쳐 깨드렸 다. 거울이 깨지듯 쨍그랑 깨졌다. 빛들이 사방으로 터졌다. 머리 위로 번개처럼 번득이는 것이 스쳐지나갔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이제는 거의 비명처럼 들리고, 단발마 같은 날카로운 소리를 질러대더니 갑 자기 휙 꺼진 듯 사라졌다. 잠잠해지자 유제니아는 눈을 살짝 떠보았다. 그러나 그 순간, 꽈르 르르--! 붉은 불꽃이 서재 중앙에서 해가 떠오르듯 터지더니, 서재 를 확 덮었다. 벌건 불길이 일며 열기가 확 치밀어 올랐다. 나무로 된 책꽂이와 책들을, 불길이 단번에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유제니아는 앞에 누가 있는 지도 잊고는 벌떡 일어났다. 비명을 지 르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백작 앞에 있던 소년이 사라졌다. 아주 운이 좋았던 것이다. 소년은 서재를 태우고는 바로 사라지는 중이었고, 유제니아가 일어나는 순간이 막 끝나는 참이었다. 다행히 들키지 않 은 것이다. 유제니아는 곧바로 백작 쪽으로 달려갔다. 손을 짚어보니 몸은 딱딱 하게 굳어 있었지만, 이를 악물고 있는 것을 보니 아직 살아 있었 다. "일어나요! 불이--불이 났는데!" 유제니아는 그를 흔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창문은 닫혀 있었고, 벌써 검은 연기가 방안에 가득했다. 서재는 바짝 마른 것들 뿐이라, 불길은 미친 듯이 서재 안을 휘감아 돌며 문 쪽으로 번졌다. 유제니아는 문으로 달려가 문을 힘주어 벌컥 열어 젖혔다. 다행히 문은 허무할 정도로 쉽게 열렸다. 근처까지 벌건 불길이 치솟아 올 랐고, 유제니아는 급히 끙끙대며 백작의 몸을 복도로 끌고 왔다. "어서, 어서--! 어서 일어나요! 끄---" 복도로 나오자마자 시원한 공기가 얼굴을 확 휩쓸었다. 그러나 등뒤 의 불길은 여전히 사납게 이글거리며 지독한 연기를 토해냈다. 목이 매케하고, 열기에 얼굴이 익을 것만 같았다. 그 때 복도 끝에서 사람들 달려오는 듯 길고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유제니아는 힘껏 외쳤다. "이 쪽이요--!" "저기다!" 그림자들이 방향을 돌리더니 즉각 달려왔다. 그제야 백작도 정신을 차리고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병사들과 경비대장이 곧 달려왔다. 그리고 그 대장이 쓰러진 성주를 보자마자 급히 그를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별 일.......다른 곳에는 별일 없느냐!" 그렇게 버럭 고함을 내 질렀지만, 곧 힘겨운지 금방 힘을 잃고 휘청 거렸다. "동쪽 성에서 불이 났습니다. 모두 그곳에 가 있는데, 본채에서도 불길이 치솟아서...." "다른 건 없느냐." "네. 아직은 없습니다!" 백작은 숨을 몰아쉬더니 유제니아를 가리켰다. "아무나 이 아이를 보호하고 있어라." 유제니아는 어리둥절해서 병사들과 백작을 번갈아 보아야 했다. "어서-! 이 아이가 없어지거나 다치면 모두를 추궁하겠다. 단단히 지켜!" 유제니아가 뭐라 물어볼 틈도 없이 병사들 중 가장 젊은 사람이 나 오더니 백작에게 말했다. "어디로 데려가면 됩니까." 백작이 숨을 몰아쉬며 답했다. "시내로 가라. 그곳이 안전할 테니-" "네!" 병사는 답하자마자 유제니아의 손을 움켜잡아 당겼다. "어서 가자." 유제니아는 영문도 모르고 그대로 끌려가야 했다. 성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사방에서 병사들과 하인들이 물 동이를 들고 이리 저리 뛰어 다니고, 당황한 사람들의 비명과 고함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졌다. 그러나 불길은 너무나 빠르게 번지고 있 었다. 얼마 되지도 않아 성 전체가 불길에 휩싸일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병사는 성밖이 아닌 성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저기, 방향이 이상한데요..." 유제니아는 슬그머니 말했지만 그 젊은 병사는 들은 척도 하지 않 고 유제니아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 싶어 유제니아는 손을 잡아 빼려 했지만, 그 굵은 손에 움켜잡힌 얇은 팔목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놔 줘요. 알아서 갈 수 있으니까...." 유제니아는 바동거리며 빠져 나가보려 했다. 그런데 남자가 갑자기 유제니아의 몸을 당기더니 배에 주먹을 내리 꽂았다. "아흑--!" 머리가 하얗게 되며 아찔해졌다. 숨이 헉 막히며, 온 몸의 힘이 죽 빠져나갔다. 남자는 축 늘어진 유제니아의 몸을 안아 들었다. 난폭한 인간 같으니-유제니아는 금방이라도 졸도할 것 같은 고통에 숨을 몰아쉬며 그렇게 생각했다. 아주 기절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몸의 힘은 죽 빨려나간 듯 하나도 없었다. 유제니아는 남자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조심하며 남자의 검이 어디 있는지 확인했다. 불길 이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져왔다. 당황한 사람들은 유제니아가 그 남자의 품안에 쓰러져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고, 안다 해도 그냥 지나쳐 버리고 있다. 남자는 어느새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이 남자가 미쳤나! 불길이 치 솟는 소리가 이글이글 들리고, 그 미친 듯 튀어오르는 벌겋고 뜨거 운 불에 금방이라도 삼켜질 듯한 곳으로 직접 뛰어 들고 있는 것이 다. "무슨 짓이에요!" 유제니아는 파랗게 질려 남자의 가슴을 밀어 젖혔지만, 남자의 팔뚝 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힘껏 유제니아를 짓누를 뿐이었 다. 큰 주먹에 틀어 잡힌 새처럼, 세차게 퍼덕거려도 아무 소용이 없다. "당신, 정...." 그러다가 유제니아는 놀라 멈추고 말았다. 큰 주먹에 맞아 정신이 까무룩 흩어졌던 방금 전에 보았던 그 얼굴과 완전히 틀렸다. 금빛 머리카락과 큰 키에, 사자처럼 구레나룻을 기르고 있는 남자였다. 게다가 방금 전에 봤던 모습에서, 적어도 스무 살은 더 먹어 보였 다. "누, 누구에요?" "해치지는 않겠다." 목소리마저도 틀린, 아주 굵은 음성이었다. 그 때 저 앞에서 불을 끄기 위해 물동이를 들고 병사들이 달려왔다. 그리고 그들도 낯선 남자를 발견하더니 양동이를 집어던지고 즉각 검을 뽑아 들었다. "누구냐-!" 남자는 유제니아의 가벼운 몸을 한 팔로 들더니, 그의 허리에 찬 검 을 뽑아 병사들을 휙 내리쳤다. 놀란 유제니아는 도망치지도 못하고 눈 질끈 감고 그의 굵은 팔에 매달려 있어야 했다. "끼악-!" 퍽, -큭-! 피와 뇌수가 옷자락에까지 튀어 올랐다. 연기냄새와 함께 피비린내 가 풍겨왔고, 몸은 폭풍 치는 바다 위의 가랑 배처럼 흔들린다. 현 기증에, 유제니아는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기절할 것만 같았다. 마지 막 병사의 목마저 날아가고, 유제니아의 몸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 음에도 완전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유제니아는 그의 팔을 꾹 붙들고 있다가, 그가 멈추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원래 성격이야 어떻든 간에, 처음 보는 남자에게 유제니 아는 바람불면 날아갈 듯 가녀리기만 한 소녀였다. 유제니아가 비에 젖은 강아지처럼 떨며 훌쩍거리자, 남자는 달래기 시작했다. "다치게 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라." "미안해요...." "아니, 괜찮다." 순간, 유제니아는 방금 전 그 남자가 병사들을 상대할 때 그 허리에 서 빼 두었던 단검을 뽑아 그의 목에 갖다 댔다. 남자의 몸이 금방 뻣뻣하게 굳었다. "난 똑같은 배려를 해 줄 생각이 없어서 미안하다는 말인데요. 팔 놔요, 갑자기 늙어버린 이상한 아저씨." 남자가 침을 삼키고는 팔을 풀었다. 유제니아는 잽싸게 내려와서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장검을 집어 올렸다. 거기까지는 아주 잽싸고 빨 랐지만, 정작 장검을 드는 동작 자체는 엉성하기 그지없었다. 방금 전까지 뻣뻣하던 남자는 피식 웃고는 검으로 유제니아의 턱 끝을 겨누었다. "검 놔라, 꼬마야. 검이란 손에 든다고 모두 무기가 되는 게 아니니 까." 유제니아는 아하, 하고 웃었다. "검을 들었다고 언제나 검만 쓰는 건 아니에요." *********************************************************** 작가잡설: 내일이면 다 올리겠습니다..-_-;; 아이구야;;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24장 ************************************************************** [겨울성의 열쇠] 제110편 침묵의 파계#3 ************************************************************** 성 쪽에서 시뻘건 불길이 치솟아 오르자 아킨은 속에서 서늘한 것 이 확 번져 오르는 것만 같았다. 유제니아는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 아이라면 어디 에서 어떤 상황을 만나도 잘 빠져나갈 듯 했지만, 그렇다고 정말 안 심할 수도 없는 일 이었다. 정말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믿음 아닌, 그저 무관심일 뿐이다. 아킨은 결국 멈추어 서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느 것을 먼저 해야 할 지, 아킨은 잠시 고민하다가 우선 유제니아 의 안전부터 확인하기로 했다. 탈로스는 강하다. 아니, 분명 강할 것 같다. 왠지 그런 확신이 들었고, 어떤 어려움도 드래곤처럼 쉽게 이 겨낼 것 같았다. 그러나 유제니아는 아니다. 제대로 확인이라도 해 보고 싶었다. 그리고 괜찮다면 다행이다, 라고 말해준 다음 돌아오 면 될 일 아닌가. 그녀는 무사해야 한다. 아직 물어 볼 것이 많았다. 그 반지에 얽힌 것 몇 가지만 들어도, 기억이 더 확실해 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유 제니아는 앞 뒤 뚝 끊어진 다리토막처럼 허허 로운 망각의 강 위에 서 있는 그 기억을 이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한 토막 이라도 이어진다면, 분명 그 길은 다음 길을 찾아내게 해 줄 것이 다.... 아킨은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달빛도 없는 컴컴한 숲 속을, 아킨은 날랜 밤 짐승처럼 뚫고 나갔 다. 몇 개의 나무 뿌리를 넘고, 풀을 헤치고, 덤불과 관목을 헤쳐 아킨 은 다시 바위 쪽으로 갔다. 그러다, 그는 벌써 바위가 나올 때가 되 었는데 익숙한 길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챘다. 나무의 배열 이 틀렸다. 표시를 해 둔 곳도 눈에 뜨이지 않고, 하얀 길은 보이지 도 않았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이 숲이 이상한 곳이라는 건 아킨도 아주 잘 알았다. 스스로 사유하 는 듯 괴기스러운 곳이며 교활한 고양이처럼 눈치 빠르게 아킨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아챈다. 그리고 그 숲이 지금 아킨을 가두려 하고 있는 것이다. 숲은 아킨이 '나가려'고 마음먹는 순간, 언제나 이런 식으로 모습을 뒤틀어 아킨을 꽁꽁 묶어 놓고 헤매 돌게 만들고는 결국 탑으로 돌 아가게 했다. 아킨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최대한 차분하게 생각해 보았다. 가만있자....그래, 탑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면 언제나 어떤 길로 들 어서든 탑으로 향하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아킨은 그 하얀 길 밖으 로 벗어나도 개의치 않았고, 그 짧은 순간에 숲의 미로에 걸린 것이 다. 그렇다, 숲의 어디에서든 탑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숲을 나가는 길은 그 하얀 길 하나 뿐인 것이다. 결국 아킨은 자신의 실수를 후 회하며 탑으로 돌아서야 했다. 역시 돌아가겠다고 생각하자마자 숲 은 곧바로 길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앞으로 좀 걸어가니 판판한 길이 나오고, 그 긴 길은 엷은 빛이 스 며 나오듯 흐릿하게 보였다. 잠시 걷던 아킨은 화풀이라도 하듯 그 길을 달려갔다. 조금이라도 더 서둘러야 할 듯 싶었고, 가는 김에 그냥 탈로스에게 그 침입자들 에 대해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이리 된 거, 다 처리 하고 실수하지 않고 차분하게 유제니아를 찾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달려가다가 보니 그런 생각이 점점 흐릿해지기 시작 했다. 숲이 아킨의 갈망을 천천히 빨아먹고 있었다. 까무룩 잠이 들 듯, 방금 전 까지만 해도 강하게 생각했던 그것들이 점점 흐릿해진 다. 결국 왜 기억을 찾아야 하는 것인지, 그것부터 이해할 수 없었다. 조각조각, 뚝뚝 끊어져 있는 기억들 중 움켜쥐고 싶을 정도로 따사 롭고 사랑스러운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언제나 쫓기고, 끌려오고, 갇혔다. 가장 가까운 이들부터 혐오와 분노, 때로는 노려보고 경계 하고 외면했다. 아킨을 어떻게든 없애려 하고, 죽이려 했다. 그러나 이 숲은 아킨을 가두고는 있었지만, 그 두터운 팔로 그 적들 역시 막아주고 있었다. 특별하게 따스한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차 갑고 고통스런 고난도 없다. 이곳은 도피처였다. 단단한 벽으로 둘러싸인, 그 누구도 침입할 수 없는.....매서운 충격 과 두려움과 혐오를 주던 그의 잔학한 형조차도 들어올 수 없는, 그 런 도피처였다. 기억을 잠재우고, 갈망을 떠나보내면 계속 그런 식 으로 살 수 있을 것이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삶의 연속. 의미는 없지만, 그렇다고 빼앗기지도 않는 아무 것도 아닌 시간의 연속. 그래, 나간다고 그를 죽이거나 없앨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를 두려워하고, 증오하고는 있었지만 아킨은 그가 될 수 없고, 그 가 될 수 없는 한 그를 없앨 수 없었다. 그는 너무 많은 것을 가지 고, 더욱 많은 것을 짊어지고 있었다. 그녀, '어머니'의 마지막 희망 이었다. 두렵고 증오스러운데, 결국 없앨 수 없다면.....아킨 쪽에서 도망치는 수밖에 없다. 숨어서, 이렇게 웅크리고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 사는 것이다...... 그 누구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았고, 내 존재 자체가 불안이자 불운 이자 불행이었는데-그렇다고 죽고 싶지는 않으니,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그러던 아킨은 자신이 벌써 탑에 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직 도 혼란한 채로, 아킨은 천천히 탑으로 올라가 그 서재에 도달했다. 문이 닫혀 있었고, 고양이는 문 밖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아킨이 다가오자 반갑게 울었다. 아킨은 문을 쿵쿵 두드렸다. 그러나 아무 답도 없어서, 직접 열고 들어가야 했다. 책꽂이 사이로 죽 뻗은 길 끝에 탈로스가 앉아 있었다. 그 작은 모 습이 움츠린 개구리나 돌멩이 같아 보였다. 아킨은 눈을 조금 찌푸렸다 뜨고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가까이 가도 그는 도무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저 멍청하게 어딘가를 들여다보고 있었고, 가까이 가서 보니 그 커다란 물 거울을 보고 있 는 중이었다. 순간 아킨은 숨을 헉 멈추었다. 거울 속으로 불길이 보였다. 불꽃에 먹혀 들어가며 사라져 가는 서 재가 있었고, 그 창 너머로는 불길이 더욱 가깝고 벌겋게 치솟아 오 른다. 마치 서재의 창에서 새 한 마리가 빠져 나와 더욱 넓은 곳을 내려다보듯-갑자기 서재의 창문으로 시야가 휙 하고 빠르게 변하더 니 커다란 풍경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성이었다. 예전에 한번 들렀던 그 성이라는 것도 기억난다. 아킨은 유제니아 생각이 났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그저 기억을 돌 이켜 줄 존재라고만 생각했는데, 그 엄청난 불길들을 보는 순간 그 런 것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닌 듯 느껴졌다. 당장에 확인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저...." 그제야 탈로스가 고개를 돌렸다. "꼬마로구나. 무슨 일이냐?" 아킨은 다급함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숲에 다시 침입자가 들어왔습니다, 탈로스." 너무 당황해서, 자신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주의 한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말았다. 고개를 끄덕이던 탈로스가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아킨은 그를 보며, 갑자기 세상이 한층 더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귀가 욱신거려왔다. 잡아뜯는 듯, 마치 찢어지는 듯---지독한 고통 이 확 치솟아 올랐다. 눈앞이 한번 하얗다가 까매지더니, 아킨은 현기증과 함께 까무룩 의 식을 잃어갔다. 그리고 꿈을 꾸듯, 전혀 모르는 것이 눈앞으로 펼쳐 졌다. 어두컴컴한 물결이 보였다. 불빛이 그 위로 흐르고 있고, 세상은 숨 죽인 듯 조용하기만 하다. 그리고 그 앞에 아킨을 향해 손을 뻗는 그가 있었다. 그는 아킨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고, 그 눈은 사냥중인 야수처럼 불 꽃이 튀듯 빛나고 있었다. 증오와 분노와 탐욕에 타 들어가는 그 무 시무시한 안광-! 소름이 오싹 끼치고, 그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위험스레 보였다. 정신이 들었을 때 탈로스의 손이 아킨의 어깨 위에 얹혀 있었다. 아킨은 그의 손을 탁 치고는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갑자기 탈로스 가 달려들어 아킨의 목을 틀어쥐었다. "마법.....큿!" 탈로스의 자그만 손에 힘이 꾹 들어가며 아킨의 목을 짓눌렀다. 아 킨은 벗어나려 했지만, 옷자락을 틀어쥔 손은 쇠 밧줄처럼 강해 꿈 쩍도 할 수 없었다. 탈로스가 외쳤다. "누가 가르쳐 줬냐-!" 다시 힘이 꾹 들어갔다. 그러나 아킨은 입조차 열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고, 그저 이를 악물어 신음을 삼켰다. 순간 탈로스가 아킨을 대로 내 동댕이쳤다. 바닥에 부딪히고 구르 며, 아킨은 어깨와 등을 후려치는 고통보다 귀의 그 고통이 더욱 크 게 느껴졌다. "네가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거지--!" 이마가 화끈해서 만져 보니, 바닥에 쓸리며 상처가 나 피가 흥건하 게 스며 나오고 있었다. 충격과 통증에 머리는 혼란했지만, 자신이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탈로스가 다시 저벅 저벅 다가왔다. "어서 말 해--!" 아킨은 급히 말했다. "누군가가......당신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누가? 그 침입자들이? 응?" 섣불리 거짓말하다가는 당장에 들통난다. 그는 다그치듯 묻고 있고, 당장에라도 답하지 않으면 팔이라도 잡아 뽑을 듯 매서운 분노를 지금 겨우 겨우 꾹 누르고 있었다. 아킨은 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전혀 듣지 못했던 것을 기억했다. 이상하긴 이상했다. 숲 속으로 들어온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 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의 목소리만은 들리지 않았다. 무어라 답해야 할까. 그런 현상을 이 마법사가 모를 리가 없는데, 단지 그렇게 들었다고만 말한다면 내 거짓말을 알아챌 수 있을 텐 데.....하지만, 그렇다고 그 베이나트에 대해 말해도 되는 것인지, 그 건 섣불리 판단할 수 없었다. 결국 아킨은 애매하게 말했다. "누군가가....네, 낯선...사람이 말해줬어요." "낯선 사람?" "키가 크고......검은 눈. 갈색 머리....그리고 진한 회색 로브......" 탈로스의 눈이 커져갔다. "그리고?" "그리고......" 다시 머리가 지끈거려 온다. 머리가 깨질 듯하고,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현기증이 나 토할 것만 같은 머릿속의 혼란이었다. "어서 말해!" 아킨은 입을 꾹 물었다. 베이나트에 대한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다. 아니, 알고는 있었지만 지금 말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토해내고 싶은 말이 그렇게 분명 있는데, 그건 전혀 떠오르지 않는 다. 오히려 더욱 혼란해질 뿐, 그것부터 생각하지 않는 한 아킨은 그대로 석상처럼 굳어 꿈쩍도 못할 것만 같았다. 아킨의 모든 언어 는 그 강요의 사슬에 매여 입에 들러붙어, 함구의 감옥에 갇힌 죄수 였다. 탈로스가 뭐라 날카롭게 외쳤다. 매의 성난 울부짖음 같은 그 외침 이 끝나자마자, 아킨의 팔목에 있는 팔찌에 새겨진 문자들이 일시에 확 빛났다. 그것들은 달궈지듯 뜨거워졌고, 살이 타는 듯한 고통이 밀려들어왔다. "읏--!" "말하지 않겠다면 내가 직접 보지." "......!" 그리고 탈로스가 물거울을 향해 손을 휙 뻗었다. *********************************************************** 작가잡설: 아키...개기면 맞는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24장 *************************************************************** [겨울성의 열쇠] 제111편 침묵의 파계#4 *************************************************************** 탈로스의 손짓과 함께 그 잔잔한 물 거울이 잠에서 깨어나듯 반응 하기 시작했다. 잔잔히 움직이던 그것이 거울 면처럼 뚝 멈추고 마치 수은 덩어리 처럼 보였다. 그 수면위로 천장에 그려진 것이 똑바로 비추어지며 쏟아지고, 그것은 하얀 선과 커다란 원으로 된 것이었다. 어쩌면 별 들의 궤도를 그린 지도 같아 보이기도 했다. 탈로스가 그 위로 손을 올리자 그것들이 그 손길을 따라 위로 천천 히 떠올랐다. 선 아래로는 하얀빛이, 둥근 원은 눕혀지듯 서서....하 나의 입체적인 모양이 되어갔다. 순간, 아킨의 손목에서 느껴지던 고통은 갑자기 강해졌다. 마치 그 모습에 열광하듯 더욱 강렬해지는 것이다. 그런 아킨을 등진 채 탈 로스는 수면을 계속 주시했고, 한참이 지나도 그 수면위로는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그가 험악하게 외쳤다. "누구도 네게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 왜 떠오르지 않는 거지, 아킨은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아킨은 분명 베이나트에게 들었는데, 탈로스의 의도대로라면 그 모 습이 떠올라야 한다. 게다가, 그는 이 숲 안에 있다. 너무도 당연하 게, 그리고 아주 확실하게 보여야 정상인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탈로스가 기이한 눈으로 아킨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말 안 듣는 동물을 앞에 놓은 조련사 같은 눈길이었고, 그것 이 아킨을 정말 소름끼치게 했다. 그 안에는 가책이 없다. 자신이 무엇을 해도 이 앞의 아이에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고, 당연하고 도 정당한 일이라 생각하기에 얼마든지 잔인해진다. "처음부터 다시 해야겠구나." 탈로스가 그렇게 말했고, 아킨은 비록 예전의 일이 기억나지 않더라 도 저 말에 숨겨진 진실을 알 수는 있었다. "...당신이 제 기억을 지웠던 겁니까?" 탈로스는 답하지 않았지만, 그를 바라보는 눈빛을 보며 아킨은 확신 할 수 있었다. "어째서...." 탈로스는 정말 한심하다는 듯 눈을 일그러뜨리고는 말했다. "어째서라니? 기억이 나지 않는 것만큼 좋은 게 어디 있다고 그러 니.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괴롭지 않은 거야. 네가 책 임질 그 어떤 것도 기억할 필요가 없고, 너를 괴롭힐 그 어떤 것도 이곳으로는 들어오지 못한다. 어디까지 기억났는지 모르겠다만, 생 각해 보렴. 네 기억 속에서 좋은 게 있든? 네 아비는 어떻게든 너를 숨기려고만 했지. 쇠사슬에 채워 철창에 가두었어. 짐승처럼! 네 어 미는? 네 꼴이 보기 싫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 그리고 네 형은? 널 이 꼴로 만들어서 영원히 가두어 달라고 했던 것이 바로 네 형 이다! 만약에 내가 조금만 더 잔인했으면 어떻게 될 뻔했니? 넌 지 금 제 모습으로 있지도 못했어." 그제야 조각조각 났던 것들이 하나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어째서 기억들이 그토록, 돌이켜야 한다는 생각은 들면서도 한없이 두렵기만 했는지--이제야 알 것 같았다. 탈로스가 달래듯 말했다. "난 너를 사랑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네 적은 아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가장 혐오했던 게 너였다고.....그건 기억 하냐?" 알아, 아킨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래, 기억 속의 그 잔인한 남자-은발 머리의 장대한 체구를 가진 남자가 바로 그의 아버지였으며, 겁먹은 사슴 같은 눈빛으로 그를 내동댕이쳤던 것이 그의 어머니였고, 기억을 잃기 직전 그 지독한 고통 속으로 그를 내 던졌던 것이 바로 그의 형이었다..... 하지만- 어머니, 어둠 속에서 달처럼 빛나는 하얀 그녀를 보며 아킨은 그녀 를 붙잡기 위해 달려갔을 뿐이다. 그녀의 삶이 고통뿐이라는 것을 알아도, 그녀를 또 고통의 감옥에 갇히게 할뿐이라는 것을 알아도, 차라리 그렇게 놓아주는 것이 그녀를 위한 길이란 것을 알아도.... 그래도 그녀를 잃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그와 연관된 몇 개 안되는 존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결코 잃고 싶지 않았다. 아킨에게는 삶이 없었고, 그저 묵묵하고 차갑지만 언 제나 옆에 있기는 하던 그런 '존재'들 만은 있었다. 그녀를 향해 달렸다. 그러자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고, 그리고 눈물 을 흘렸다. 그녀의 눈 안에 가득한 것은 원망도, 혐오도,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저 동정과 자책만이 가득한 눈빛으로, 자장가를 불러주듯 조용하 고 다정하게 말해주었다. -넌 도망치지 마.... 아키-- 돌아가.... 석상의 마법이 풀리듯, 그것들은 느릿느릿.....그러나 분명 따스하고 도 부드럽게 퍼지는 것이었다. 얼음이 녹듯, 눈이 녹아내리 듯, 그리 고 만년설 위로 따뜻한 서쪽의 봄바람이 불어오듯- -겁내지 마라.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베이나트의 목소리는 아주 예전부터 알고 있던 목소리였고, 그 다음에도 알고 있었고, 지금도 알고 있었 다. 또, 그 말의 의미는 아킨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억과 함께, 아킨은 수 없는 도형과 원, 문자들--가끔 꿈속에서 그를 어지럽히던 것들이 질서와 인식의 징검다리를 짚으 며 건너오는 것을 보았다. 아킨은 손목으로 손을 가져갔다. 파직, 하고 작은 빛이 튀어 오르더니 그 글자가 이내 죽어버렸다. 고통이 멎고, 몸 위를 떠돌던 모래알 같은 느낌 역시 씻은 듯 사라 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어지럽지 않았다. 아직도 뚝뚝 끊어진 것들 투성이였지만, 이제는 적어도 그 작은 퍼즐들이 몇 개의 그림을 만들어 냈고, 그 이음새가 맞물리며 완벽한 하나의 무언가가 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아킨은 탑 위에서 본 놀랍고도 거대한 광경을 떠 올렸다. 커다란 바위, 그 양 옆에 길게 뻗은 하얀 선과 그 위에 또 한번 솟구쳐 있는 바위들. 또한, 탑의 망루에서 발견한 피묻은 양피지 한 조각- 그것들이 겹쳐지고 겹쳐져, 아킨이 예전에 알던 것들과 또 한번 합 쳐져 하나의 선명한 무언가가 되어 갔다. 이제 아킨은 왜 베이나트 가 탈로스의 거울에 나타나지 않았는지 알게 되었다. 아니, 나타날 수가 없었다. 그는 이 마법의 진안에 벌써 들어와 있었으며, 이 탑의 봉인을 최초 로 파괴하여 아킨을 숲 밖으로 내 보내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안의 일들을 비추어 내지 못하는 거울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신도 마찬가지지 않습니까, 탈로스 고르노바." 순간 탈로스의 물거울이 부르르 떨더니, 그 위에 떠올랐던 입체적인 기계처럼 아름답고 정교하던 것들이 무너져 내려 그 위로 떨어졌다. 탈로스가 아킨의 멱살을 다시 틀어쥐었다. "무슨 소리냐." 아킨은 두 팔을 들어 그를 팍 밀어냈다. 그러나 탈로스는 꿈쩍도 하 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눈에서 잡아 찢어 놓을 듯한 거센 안광이 튀어 올랐다. "날 비웃는 거냐?" 그러나 아킨은 차분했다. 마음은 가장 완벽한 고요, 모든 것을 내 던진 다음에 찾아오는 고독 의 고요. 그것이 바로 지금의 아킨을 적시고, 두려움을 몰아내고 있 었다. "탈로스, 당신과 똑같은 것을 제게 강요하지 마십시오." "뭐?" "두려움-그 동반자의 자리를 제게 강요하지는 마세요.....전 당신의 아들도, 제자도 아닙니다." 탈로스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분노, 그것조차 넘어서는...그의 깊은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 그것은 그의 그림자, 그의 가장 검고 추한 면, 고개 돌려 필사적으로 외면 하던 진실을 건드리는 말이었다. 탈로스가 이를 으득 물었다. 그러 다 주체를 하지 못하는 지 입술이 푸들푸들 떨리고, 그 푸른 눈에 눈물까지 맺혔다. "이 발칙한 것이, 감히--!" "탈로스-!" "좋아, 이번에는...이번에야말로 기억하겠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만들어 주지. 머릿속에 아무 것도 남겨 놓지 않겠어!" 그를 향해, 아킨은 속으로 외쳤다. 당신 역시 두려워서 숨은 거잖아, 당신 역시--!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정말 필요했던 것은 동반자였을 지도 모른 다. 자신과 똑같은 선택을 하고, 똑같은 길을 걸어 줄 사람. 적어도 같은 사람이 하나라도 더 있다 생각해서 안심하게 될 만한....그런 사람. 순간 탈로스가 아킨을 걷어차 내 던졌다. "그래, 계속 지껄여 봐라. 이제 정말 산산조각 내 줄 테니! 그래, 살 려는 놓는다. 네 형과 약속했으니! 하지만.....단지 그것 뿐이야. 단지 살려만 놓을 뿐이야--!" 그 말에 아킨은 심장이 터져 피가 벌컥 솟구칠 것만 같았다. 형과 약속했다? 형과... 그 말이 계속 아킨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가슴이 아프고, 너무나 화 가 나고 억울했다. 그래, 형...휘안토스. 쌍둥이 형, 아버지가 택하고, 어머니가 사랑하 고, 암롯사의 왕이 될 소년이자,적-! 그가 당신과 약속한 건가. 나를 이곳에 가두고, 이 망각에 젖어 들 어 바위처럼 의미 없이 스러져 가기를, 그것을 원했던 것이 형인 가..... "휘안...토스 였습니까?" "그래, 네 형. 한번 돌아가 봐라! 네 형이 가장 먼저 달려와 네 가슴 에 칼이라도 쑤셔 놓을 테니! 그래도 가겠다, 이거냐?" 몸 속에서 뭐가 솟구치는 듯 하더니, 입에서 피가 팍 터졌다. 몸이 정말 산산조각 나 버리는 것만 같았다. 아킨의 팔찌와 탈로스는 긴 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탈로스의 몸 안의 마나가 움직일 때마다 아킨의 몸에 있는 이 팔찌도 요동했고, 아킨 역시 끔찍하게 고통스 러웠다. 비릿한 내음이 입안에 가득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죽어 버릴 것만 같았다. 아니, 정말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울 것 같았다. "어서 말 해 봐! 그래도 가겠냐고! 너하곤 상대도 안 되는 형이야! 갔다간 죽어! 정말 죽을 거라고." 아킨은 힘을 쥐어짜며 흐릿하게 말했다. "난......." 그렇게 중얼거리며, 아킨은 탈로스가 등진 벽 위로 하얀 글자들이 새겨지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물 거울이 다시 진동하고 있었지 만, 탈로스는 모르고 있었다. "그래. 그냥 말만 해라. 돌아갈 생각 따위는 없다고, 그러면 이번에 는 용서해 주지." 아킨의 이마와 어깨, 가슴 위로 투명한 원판 같은 것이 떠올랐다. 그것이 한번 번쩍이더니, 그 위로 새빨간 글자들이 새겨지기 시작했 다. 달필로 휘갈기듯, 불꽃이 휘감기는 듯--그렇게 글자들이 떠오른 다. 아킨은 몸을 식히는 두려움에 눈이라도 감고 싶어졌지만, 그래도 물 거울의 변화를 주시했다. 이마의 원이 더욱 가까이 다가오고, 마치 불에 달군 부지깽이라도 다가오는 듯 이마와 얼굴이 뜨거워졌다. 아 킨은 답을 미루었고, 그것을 망설임으로 알아 준 탈로스가 말했다. "내가 그렇게 말 했잖니? 너와 난, 결코 세상과 어울리지 못해! 너 와 난 너무나 틀리다고--! 너무나! 고집 피우지 마, 아니....뭐가 모 자랐다면 내가 잘 해주지. 여태까지와는 비할 바 없이, 정말 내 아 들처럼 가르쳐 주고, 아껴주겠다...." 쉽사리 답은 나오지 않았고, 지금 생각하는 것은 '기억'이 아닌 현재 였다. 그런데 지금 고개를 떨구고 용서해 달라고 하면 괜찮을까? 다시 그 망각의 감옥에 갇혀, 매일 매일 안온한 무료 속을 헤매기만 하면 괜 찮을까-- 아니. 절대 아니다. 아킨은 그가 조금 전에 저 말을 했더라면, 차라리 처음부터 저 말을 하면서 아킨을 달랬더라면 벌써 그의 말에 따랐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저 말에 속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정말 그렇게 해 줄 지도 모른 다. 탈로스 고르노바는 괴팍하고 오만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휘안토 스처럼 교활하지도 잔인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지금 탈로스가 말하 는 것은 정말 달콤한 유혹이지만, 결국에는 아무 것도 아닌 무(無) 일 뿐이다. 그것을 분명하게 아는 지금, 아킨은 아킨 자신을 기만할 수는 없었 다. 휘안토스의 의무가 적과 적이 될 것들을 쳐내며 아버지의 뒤를 잇 는 것이듯...아킨의 의무는 바로 지금 짊어지고 있는 운명의 무게를 이겨내는 것이었다. 숨는 것도, 도망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언젠가는 돌아올 것, 언젠 가는 분명히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아킨토스 프 리엔'이라는 이름을 얻고 생명을 얻는 순간 그 생명의 권리만큼 이 겨내야 할 대가였던 것이다. 그러니 도망칠 수 없다. 문을 닫고 몸을 웅크리면,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피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을 원하지 않고, 그렇게 천천히 죽어 가는 삶과 시간의 자살이 다. 지금의 아킨은 살아 있고, 진정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뭐?" 아킨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옷자락에 옆이서 뭐가 콰작 튀어 오 르더니, 옷이 찢어지며 피가 튀어 올랐다. 머리카락이 흩어지고, 온 살들이 타 들어가는 듯한 그 고통도 여전하다.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제 결정은 이미 끝났으니까요." "무슨 말이냐...." 아킨은 차분하게 말했다. "가겠습니다." *********************************************************** 작가잡설: ...어서 용사님 구하러 가야지, 아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24장 ************************************************************** [겨울성의 열쇠] 제112편 침묵의 파계#5 *************************************************************** 탈로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뭐?" "가겠습니다." 그 순간 콰르르르르--! 하고 무언가가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물 거울 속에서 빛이 스며 나오는 듯 싶더니, 그 물 거울 안쪽 바닥 에 새겨져 있던 문장이 서서히 지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킨은 그것을 보았지만 탈로스는 보지 못했다. 그는 바로 앞에 있는 아킨을 향한 분노에 미쳐있었고, 그것이 그의 모든 감각 을 멀게 하고 있었다. 성난 탈로스가 외쳤다. "그렇다면 여기서 죽어, 아킨토스 프리엔--! 찢어 죽여 버린다!" 콰작, 하며 서재의 돌 바닥 곳곳에서 하얀 빛 조각들이 깨진 유리조 각처럼 튀어 올랐다. 그 사나운 힘의 끄트머리에 닿은 서재의 책들이 팍, 팍, 튀어 올라 종이조각들이 깃털처럼 날렸다. 고양이가 날카롭게 울부짖으며 뒤로 도망쳐 버리고, 구관조도 푸드득 날아올랐다. 빛은 미친 듯이 떠돌아, 바닥을 부수고 천장을 으깼다. 돌 조각들이 우스스 떨어지고, 종이 타 들어가는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숨 쉬는 공기가 더욱 뜨거워졌고, 몸이 타 들어가는 듯한 고통은 더욱 지독해져만 갔다. 아킨은 깨달았다. 이젠 물러날 곳이 없었다. 모든 것을 걸고 모든 것을 잃던가 이기던 가 하는 대결의 순간이 왔고, 뒤를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순간이 바 로 지금이다. 혼란한 와중에도 아킨은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겁에 질 려 우왕좌왕하면 단번에 끝난다. 다 빼앗겨 버리는 것이다. 탈로스의 소맷자락이 펄럭였다. 콰륵, 하며 불꽃이 쏘아져 나가 아 킨에게 내리꽂혀왔다. 아킨은 몸을 날려 피했고, 그것은 단단한 벽 에 내리 꽂혔다. 콰르르-! 불꽃이 터지며 벽이 부서졌다. 먼지와 돌 조각이 쏟아졌고, 별들이 쏟아지는 하늘과, 울창한 밀림이 펼쳐진 먼 숲이 먼지 흩어지는 커 다란 구멍 너머로 보였다. 아킨은 아찔한 곳에서 멀어지려 했지만, 고통 때문에 몸이 마비되어 가고 있어 꿈쩍하기도 어려웠다. 바람이 이마에까지 닿아왔다. 아아, 이 고통만 없다면, 도망이라도 제대로 갈 수 있을 텐데- 다시 탈로스가 두 팔을 펼쳤다. 숨이 컥 막히더니, 목과 팔이 꽉 조 여 들어왔다. 아킨은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어, 주먹을 휘두르듯 본능적으로 말했다. "비쟈트-홀 리테-!" 파칭, 하고 끊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목의 조임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그러나 팔의 고통은 여전했고, 아킨이 몸을 일으키자마자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세게 내동댕이쳤다. 돌 조각이 얼굴을 쓸고, 전신에 부서진 돌덩이가 부딪혀 아파 왔다. 두려움도 있지만, 답답함이 더 먼저였다. 무력한 자신이, 그리도 싫 을 수가 없었다. 나간다고 결심만 하면 뭘 해, 스스로 나갈 능력조 차 없는 걸-! 여기서는 누구도 도와주지 않아, 나 혼자 뿐인 걸- 아킨의 눈에 반 넘게 이지러진 달이 서산으로 기울고 있는 것을 보 았다. 피투성이인 팔은 그 쪽을 향해 뻗어 있었다. 그런데 팔지 위 로 달빛이 닿자, 파릇한 빛이 팟-하고 튀어 오르며 글자가 슬쩍 떠 올랐다가 사라진다. 이 글자들은 예전에 한번 본 것도 같았다. 그러나 아주 예전이라, 그것은 탈로스가 구태여 기억을 지우지 않았어도 기억하기 힘들었 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옷 속에 숨겨놓았던 그 양피지에 기억이 미쳤다. 그것은 최근이니 분명히 기억한다. 서쪽, 달, 숲---겨울의 열쇠, 성배와 성녀의 무덤....모든 것은 의지, 파괴......봉인. 아킨은 벽을 통해 저 먼 숲을 바라보았다. 크게 뚫린 그곳에서, 다 시 차가운 바람이 몰아 닥쳐왔다. 책들이 쓸려나가고, 바닥에 있는 것들이 돌풍에 휩쓸려 벽을 치고 바닥을 굴렀다. 그제야 아킨은 그 방향이 '서쪽'임을 깨달았다. 달의 여행이 끝나는 그 서산- 그렇다, 서쪽- 아킨은 방금 전까지 피하던 무너진 벽으로 몸을 당겼다. 구멍에서 쏟아져 오는 바람은 더욱 거세어지며 옷과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 다. 저 멀리 하얗게 빛나는 바위가 우뚝 서 있었고, 그 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먼 거리였지만, 아킨은 그것이 아마도 베이나트일 거라 생각했다. 아킨은 두 팔을 앞으로 들어보았다. "뭐 하는 거냐---!" 탈로스가 외쳤지만, 아킨은 그 순간에 두 팔찌의 색이 변하는 것을 발견했다. 흐릿한 달빛 속에, 그 팔찌에 숨어있던 녹색의 문자가 스며 나왔고, 그 찰나에 두 팔 사이에서 보름달이 떠오르듯 투명한 원이 맺혔다. "달과 숲...." 그 때, 아킨을 향해 불꽃이 내리꽂혀왔다. 아킨은 피했고, 불길은 무 너진 벽을 통해 밖으로 토해내졌다. 열기에 머리카락 몇 가닥이 타 고, 옷자락도 그을렸다. "읏--!" 탈로스는 아킨을 몰아세우거나 달래거나 할 가치도, 심지어 조금이 라도 더 시간을 끌며 얼마나 아킨이 잘못했는지 말하며 괴롭힐 생 각도 없는 듯 했다. 아니, 고통은 지금만으로도 충분하다. 순간 뒤에서 빛이 번쩍였다. 탈로스가 눈을 가리며 고개를 돌리고, 아킨도 고개를 숙였다. 고통이 씻기듯 멎었다. 팔목을 조이던 팔찌 의 힘이 걷히더니, 그 하얀 표면 위로 녹색의 글자가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것을 발견한 탈로스가 달려와 아킨의 팔을 낚아채 당겼다. 믿어져 지지 않는 다는 듯 그의 눈동자가 떨려오고, 그 안에 공포와 기이한 기쁨이 서렸다. 아킨은 팔을 떨쳐 내고는 벽에 몸을 밀어붙였다. 쿠 우우우--바람 소리가 좁은 곳을 통과하는 듯한 기이한 비명을 내 지르며 더욱 거세게 들려왔고, 허공을 향해 뚫린 구멍의 눈이 응시 하는 숲은 그 소리와 달빛과 함께 빛나는 듯 보인다. 그리고..... 파칭-! 천장에서는 커다란 원과 눈동자같은 그림이, 바닥에서는 물거울을 중심으로 꽃이 펼쳐지듯 문자와 도형과 선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팔 찌의 글자도 더욱 선명해져갔다. 그것은 깨어남, 태동--긴 잠에서 눈을 뜨고 몸을 떨치고 일어나려 는 무언가의 움직임 같았다. 서재에 숨겨진 무언가가 깨어나려고 발 버둥치는 것 같았다. 아킨은 이 순간 도망쳐야 한다 생각했다. 그런데, 그리 생각하는 순 간 갑자기 심장이 덜컥 뛰어 올랐다. 뼈마디가 쑤셔오고, 특히 이가 잡아 뽑듯이 아파 왔다. "--!" 그 고통이 언제 오는 것인지 아킨은 잘 안다. 그러나, 왜 지금 이런 고통이 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보 름은 아직 멀기만 한데. 아킨은 가슴을 움켜쥐며 몸에 힘을 주었다. 보름 없는 시간에 변한다면 영영 그 모습이 되어 버릴 것만 같았다. 다시는 인간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평생을 숲 속에서 짐승으로 방황 하며 살 것 만 같다. "안....돼!" 그러자 몸의 고통이 잠잠해져갔다. 아킨은 천장과 벽의 빛나던 문자 들이 차츰 가라앉아 가는 것을 보았다. 아킨은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저 편의 바위 옆에, 베이나트의 그림 자는 아직도 서 있었다. 지금, 이 모든 것은 그가 하는 짓이다. 그러 나 그는 아킨이 거부한다면 놔둘 생각인 것이다. "누구와 짠 거냐." 그 음침한 목소리에 아킨은 다시 앞을 돌아보아야 했다. 잠시나마 탈로스를 잊고 있었다. 아킨이 돌아보자 탈로스는 더욱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번에 네가 보고했던 그 녀석이냐?" ".....말 할 수 없습니다." "누구냐--! 어서 말 해! 어서---!" 아킨은 그리 다그치는 탈로스의 눈에서 절망을 보았다. 슬픔조차 녹 여내는, 저 너무나 진한 절망.... 왜지? 왜...그런 눈빛인 거지, 탈로스? 아킨은 그 눈빛만은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었다. 그는 지금 무언가 짐작하고 있으며 아킨을 통해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슬픔의 이유를 듣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지금의 당신을 슬프게 하는 것인가. 무엇이- 증오하는 만큼, 그 증오에 있어서도 당당하고 오만했던 탈로스였다. 그에게는 가책이 없으니 슬픔도 없다. 있을 수가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 자였고, 돌아보려 하지도 않는 자였 다..... 아킨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는 양팔을 뻗어 터진 벽을 짚었다. 방 금 깨어져 나간 거친 면이 손바닥에 와 닿자, 아킨은 손에 힘을 꾹 주었다. 등뒤에서 무언가가 그를 지켜보는 것만 같았다. 그 '무언가'는 엄숙 하고 조용한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며, 소년이 어떤 결정을 내릴 지 기다리고 있는 듯 했다. 버거운 운명과 선택의 무게가 아킨을 짓눌 렀다. 그러나, 아킨이 아킨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언제나 선택을 해야 한다. 망설임과 두려움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언제나 마주해야 하는 적이다- 아킨은 두 팔을 퉁겨냈다. "시작해요-!" 그 외침이 터지는 순간, 커다란 허공이 아킨을 맞이했다. "아킨토스--!" 탈로스가 달려와 아킨을 붙잡으려고 했지만, 아킨은 두 발마저도 가 볍게 퉁겨냈다. 아직은 머릿속이 꽤나 혼란하지만, 그래도 아킨은 가장 쉬운 것들부터 기억해 냈다. "아리스테-" 바람이 그의 주변으로 빠르게 모여들었다. 무섭게 떨어지던 그의 몸 이, 아래에서 깃털이 받치듯 느려지기 시작했다. 순간, 위에서 번개 같은 허연 번득임이 터지더니 아킨을 향해 내리꽂혀 왔다. "프로...." 그러나 보호의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킨의 앞에 손바닥만한 원들이 팟팟 떠오르더니 열을 만들어 냈다. 그 사이사이로 길다란 선이 솟구쳐 서로 맞물렸고, 탑에서 쏘아진 빛이 그 위에 크게 부닥 쳤다. 콰릉--! 빛은 엉뚱한 곳으로 반사되어 숲의 나무 몇 그루를 우지끈 부러뜨 렸다. 몸에서 다시 고통이 쿳 치솟아 오르자, 아킨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몸의 변화가 더욱 크게 느껴져 왔다. 뼈마디는 욱신거리고, 몸이 갈가리 찢어지는 것만 같은 고통이 몸을 흔들어 놓았다. 야성 이 치솟아 올랐지만, 그것만은 예전보다는 덜했다. 정신만 잘 집중 하면 어떻게든 버티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순간이었다. 갑자기 세상이 캄캄해지더니, 엄청난 것들이 탑 위의 검은 하늘을 향해 펼쳐지기 시작했다. 광활하게 펼쳐진 검은 장막 위로, 무수한 빛과 숫자와 글자의 찬란 한 번득임이 펼쳐지더니 빛나는 날개 같은 것이 하얗게, 하얗게 펼 쳐져 갔다. 무엇일까, 저것은....... 아킨은 눈을 감으며 생각했지만, 의식은 곧장 뜨거운 불길 속으로 휘말리듯 타올라 버렸다. 아킨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순간이 넘 어갔음을, 그 본능에 몸을 맡기며 생각했다. *********************************************************** 작가잡설: 도주, 아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24장 *************************************************************** [겨울성의 열쇠] 제113편 침묵의 파계#6 **************************************************************** 탈로스는 고함을 토해냈다. "저 꼬마가--!" 2층, 그렇게 높지도 않은 거리라 아킨이 어떻게 변하는 지 똑똑하게 보였다. 살 찢어지는 소리와 뼈 으스러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오고, 고통 스런 신음과 울부짖음이 터져 올랐다. 쿵--하는 진동과 함께 네 개 의 발이 바닥을 짚었고 커다랗고 허옇게 빛나는 그것이 벌써 거대 한 몸으로 낮아지고 작아진 세상을 굽어보았다. 그 모습을 보며, 탈로스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과 비명을 흘리고 말 았다. 이건 불가능해--! 보름은 아직 멀었고, 심지어 탈로스 자신이 스승의 유품 중에서 찾 아낸 물건을 채워 놓기까지 했는데 어떻게 가능했던 것인가. 탈로스는 몸을 날려, 바람을 모아 그의 몸을 받치게 하며 바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의 발끝이 바닥에 닿자마자, 거대한 괴물은 귀 를 뒤로 붙이고 허연 이를 드러내며 허리를 낮추었다. 털이 곤두서 서 흔들린다. 어둠 속에서 흘러나오는 낮은 으르렁거림에, 머리카락 까지 떨려올 지경이었다. 탈로스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를 마주보자마자, 그것은 몸을 날려 탈로스에게 달려들었다. 탈로스는 주문을 외울 정신도 들지 않았다. 맹수의 파랗게 번득이는 눈앞에서 탈로스가 외친 것은 주문이 아니 라 비명이었다. "저리가--!" 분노와 증오가 맹수의 눈을 지배했고, 거대한 이는 이 남자의 작은 몸을 단단한 열매를 으스러뜨리듯 씹어 삼키기 위해 번쩍거렸다. 탈로스는 지금의 녀석이 얼마나 위험한 지 알고 있었다. 마법의 감 옥조차 몸으로 부딪혀 직접 박살내는 엄청난 힘이다. 어둠 숲의 왕 이 어린 일족의 죽음에 복수하기 위해 만든 저주였고, 그런 그녀는 어린 소년을 인간이 마법이나 힘으로는 결코 억누를 수 없는 야만 과 난폭함과 잔혹함으로 가득 찬 맹수로 만들었다. 처음 변했을 때, 몸에 힘 한번 주자 팔목 두께의 쇠사슬을 밧줄처럼 간단히 끊어 버렸다. 그 다음에는 감옥을 산산이 부수고 뛰쳐나갔 고, 그 다음 달에는 강화 마법을 수십 번을 걸어 놓았던 쇠사슬을 이로 끊어 버렸고, 그날 탈로스도 죽을 뻔했다. 녀석은 주변에 무엇 이 있든 탈로스만을 공격했다. 마법에 난타되어 피투성이가 되어도 일어나 그에게 이를 드러냈다. 해가 조금만 더 늦게 떠올랐다면 탈 로스는 이미 죽은 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탈로스는 포기하고 아킨을 보름 직전에 놓아주어야 했 다. 탈로스의 힘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았다. 저주가 처음으로 발동 했을 때가 아무 힘도 없던 작고 어린 아이 시절이다. 그 때에도 감 옥의 사슬을 끊어내던 힘이었으니, 어느 정도 자란 지금의 힘은 그 때와 비할 바 못되는 것이다. 보름의 아킨은 깊은 숲 속에서만 안전 했다. 저건 정말, 숲의 드루이드가 그 주변의 사람을 모두 죽일 생 각으로 만들어 놓은 괴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프로텐-!" 그 말과 동시에, 아주 짧은 시간동안에 탈로스는 불꽃과 벼락의 벽 을 만들었다. 크르렁, 하고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더니 불꽃의 벽이 뚫리고 벼락은 깨어졌다. 불꽃과 튀겨 오르는 전격을 뒤집어 쓴 채, 거대한 늑대는 마지막 보호벽 마저 으스러뜨렸다. 그런데, 갑자기 엄청난 힘이 탈로스 앞에서 집중되더니 늑대의 가슴 을 텅 후려쳤다. 거대한 늑대는 밀려났다가 발에 힘을 주어 버티더 니, 다시 두 앞발에 힘을 주고는 탈로스에게 달려들려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풀이 뽑히고 바닥이 패일 정도로 거센 힘이 밀려들어와 그의 몸을 내동댕이쳤다. "크헝--!" 늑대가 숲과 탑이 쩌릉 울릴 정도로 울부짖었다. 쿠릉, 하고 거대한 몸이 바닥에 부딪히며 핏방울까지 튀어 올랐다. 고통과 당혹에 그것 은 경계와 적대감과 공포를 동시에 나타내며 크르르릉--울더니 어 깨를 들었다. 탈로스는 다음 주문을 쓰기 위해 준비했다. 불꽃, 벼락, 바람- 그 어떤 것도 적절하지 못했다. 영환술도 생각해 보았으나, 엘프의 마법을 상대로 그런 것을 쓰는 것은 얼간이 짓이 다. "젠장-!" 그런데 갑자기 위에서 뭐로 누르기라도 한 듯 늑대는 깽, 하는 비명 과 함께 두 발을 꺾고는 바닥에 내리 찍혔다. 당황한 늑대는 몇 번 이나 컹컹 짖고 으르렁대고는, 불꽃이 튀는 듯한 눈을 번득였다. 그 것이 바동거리는 바람에 흙이 패이고 돌이 튀어 올랐다. 뒷발에 채 인 나무가 크게 흔들리며 잎과 가지가 우수수 떨어졌다. 그리고 갑자기 허공에서 차르륵, 하나의 빛이 쏘아져 나가더니 늑대 의 앞발을 조이는 팔찌로 날아가 그 근처에서 멎었다. 버둥거리던 늑대가 죽은 듯 뚝 멈추었다. "누구냐....." 탈로스는 주춤 뒤로 물러나며 손을 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늑대가 몸을 일으켰다. 놀란 탈로스는 보호막이라도 치려 했지만, 늑대는 탈로스는 거들떠보지도 않고는 숲 속으로 달려들어갔다. 탁탁--타닥- 부드러운 발이 숲 바닥을 차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것 이 멀찍하게 멀어질 때까지 탈로스는 꿈쩍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온 숲이 울리도록 목을 들고 울어 젖히는 순간, 탈로스는 문 득 정신이 들어 어떻게든 그것이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을 막아 보 려 했다. 그러나 주문을 외치기도 전에, 이번에는 그 보이지 않는 힘이 탈로스를 밀쳐내듯 후려쳤다. "크어-!" 탈로스는 그 힘에 호되게 맞아 나가 떨어져 바닥을 굴러야 했다. 그 는 가슴을 움켜쥐며 외쳤다. "비쟈트-홀 리테-!" 순간, 바람이 스치기라도 하는 듯 주변의 잡초들이 허리를 숙이고 나무들이 흔들렸다. 숲 근방에서 빛이 팟, 튀어 오르더니 탈로스와 숲 사이에 어두운 사람의 윤곽을 만들어냈다가는 사라졌다. 저 놈이다! 둘 사이에 빛덩이가 떠올라 사방을 비추고, 숲 앞에 서 있던 그 마 법사의 모습을 어둠 속에서 도려냈다. 남자였다. 장대하다 싶을 정도로 큰 키에, 갈색의 로브를 입고 있었 다. 탈로스가 바라보자, 그 마법사는 보라는 듯 고개를 들고는 후드 를 뒤로 넘겼다. 짧은 갈색 머리카락이 우수수 흩어지다가 가라앉았 다. 빛 속에 검은 눈동자가 반짝이고, 엄숙하게 다문 입과 눈썹이 선명한 빛과 어둠 속에 확 드러났다가는 빛 뒤에 찾아오는 더욱 진 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탈로스의 빛을 그가 확 꺼트린 것이다. 그리고 야트막한 빛이 깔리는가 싶더니, 그 속에서 상대의 소맷자락 이 검게 펄럭이는 것이 보였다. 그 길고 큰 손가락 끝의 움직임을 따라, 뿌연 기운이 서리다가는 사라졌다. "누구냐!" 그러나 정체 모를 남자는 말없이 소매를 당기고는 뒤로 돌아섰다. 소맷자락과 로브 자락이 펄럭였다. 그리고 갑자기 컴컴한 '느낌'의 기운이 주변을 감돌기 시작했다. 온 숲과 풀들이 술렁이며 흔들렸 고, 갑자기 흙 냄새가 피어올랐다. 무겁지만 빠른 것들이 몰려오는 듯한 쿠르릉 소리에, 탈로스는 하늘을 보고 숨을 멈추고 말았다. 달빛이 야트막히 퍼지는 검푸른 하늘의 중심에, 마치 내리찍기라도 한 듯 검은 구멍이 생기더니, 그것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듯 먹구름 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먹물 같은 구름이었다. 비와 천둥과 벼락을 품은, 자연으로부터 뽑 아낸 듯한 구름- '힘'이 자연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것은 잡다한 마법정도가 아니었 다.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힘, 자연으로부터 복종을 받아낼 수 있 는 위대한 힘--! 경외와도, 질투와도 비슷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당장에 그 마법 사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싶었고, 그래서 탈로스는 그를 다시 바라보 았다. 그러나 그곳에 그는 이미 없었다. 오로지 숲의 어둠이 밀려드는 더 욱 까만 어둠 속으로 함몰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탈로스는 자신이 딛고 있는 탑의 잡초 가득한 뜰에서 길이 뻗어 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어두운 숲 속으로 파고 들어갔고, 그 끝에서 무언가가 맺히더니 탈로스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키 큰 마법사는 이제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탈로스도 그 마법사에 대해 잠시나마 잊고, 지금 그에게 다가오는 또 다른 마법 사를 바라보아야 했다. 연푸른 로브를 입고 있어 어둠 속에서도 눈에 잘 뜨였다. 화사한 같 은 색조의 머리카락이 흩어지며 반짝거리고, 탈로스를 똑바로 바라 보고 비웃듯 웃는 기분 나쁜 눈동자의 색조 역시 화려하다. 탈로스 는 이런 녀석 하나를 알고 있었다. "악튤런?" 그러나 결국 그 이름은 이가는 소리와 함께 끝나고 말았다. "네 놈이-!" *********************************************************** 작가잡설: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습니다.....그리고 이렇게 무더기로 올라오는 날도 조만간 끝~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25장 *************************************************************** [겨울성의 열쇠] 제25장 출구 제114편 출구#1 *************************************************************** 방안에는 빛들이 안개처럼 흐리고 느리게 떠돌고 있었다. 새알 만한 구슬들이 일정한 구획을 그리며 떠 있었으며, 그 사이로 는 투명한 거미줄 같은 선들이 이어져 있었다. 한 선이 작렬할 때마 다, 구슬의 표면에 그려진 문자들이 같이 하얗게 타 들어가며 빛났 다. 그리고 모든 선이 내뿜어내는 하얀빛이 주변으로 번지듯 퍼지 면, 구슬은 어둑한 방안에서 달이나 별처럼 빛났다. 그 사이에 앉아, 롤레인은 턱을 괴고는 그 변화를 물끄러미 바라보 고 있었다. '대마법'이라면 돌처럼 엄숙한 얼굴로, 단정한 자세로 행하는 줄 아 는 사람들은 아마도 그런 그녀의 모습에 꽤나 허탈할 것이다. 지금 그녀는 자세도 그렇게 엉망인 데다가 옆에 커피 한잔 놓고, 머리는 이리 저리 삐치고, 옷도 구겨지고 엉망이었다. 그러나 예리한 검은 눈은 변화의 하나 하나, 미세한 흔들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있었다. 어느 정도 지나자 그녀는 몸을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긴 소맷자락 을 당겨 손을 드러내고는, 손에 쥔 커다란 컵에 든 물을 주변에 촤 아 뿌렸다. 투명한 물방울이 튀어 올라, 하나 하나 살아 있는 반딧 불처럼 빛났다. 그것들이 안개처럼 잘게 흐트러지더니, 다시 빛을 내며 뿌옇게 주변을 돌았다. 구슬들 주변에 산기슭의 구름무리처럼 물방울들이 모였다. 글자들이 더욱 하얗게 빛난다 싶더니, 구슬들이 아래로 툭툭 떨어졌다. 빛도 가라앉기 시작하며 어둠이 천천히 밀려 왔고, 지지직--소리가 간혹 들릴 뿐, 이내 고요가 내려앉았다. 그녀는 너무나 낯선 것을 말하듯, 느릿느릿 말해보았다. "베이나트......라." 그녀가 앉아 있는 바닥에 흐트러진 구슬들이 구르더니 그녀를 중심 으로 자리를 하나 하나 잡아갔다. 롤레인이 손을 뻗자 구슬들의 표 면에서 빛이 쏘아져 나가, 롤레인의 머리 부근의 한 지점으로 모여 들었다. 롤레인의 손끝이 그것을 향하자, 그 사이에서 하얀 소용돌 이가 뿜어져 오르더니 빠르게 하얀 테를 만들어 냈다. 그것을 통해 전해져 오는 느낌들을 롤레인은 금방 알아챌 수 있었 다. 물론, 그것은 그녀가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전혀 의외의 일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빨리 일어날 줄도 몰랐던 것이었으며, 지금 이 시기에 일어나는 것 자체를 그녀가 별로 바라고 있지 않았다. 누군가가 탈로스의 탑 안으로 침범했고, 지금 그와 대치 중이다. 그 리고 그의 이름은 악튤런 파노제- "이 녀석은 꼭 이럴 때 나타나 일을 망친다니까-" 탈로스와 롤레인 보다는 한참이나 어려 지금 스물 둘인 그는, 롤레 인과 탈로스가 그를 동문으로 받아 들였을 때 당대의 가장 빛나는 천재였다. 여섯 살에 마법에 입문해서, 여덟 살이 되던 해에 벌써 첫 번째 스 승으로부터 벗어났다. 이겨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스승은 반 년도 못 갔고, 그 후로는 누구도 그의 스승이 되려 하지 않았다. 압 셀론도 베넬리아도, 입학하는 것 자체를 악튤런이 거부했다. 그리고 그런 방자하기 짝이 없는 소년을 컬린이 받아 준 것이다. 롤레인도 탈로스도, 그가 어리지만 않았다면 참지 않았을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대적할 자 없었던 그는 지독히도 오만했고, 인정하는 마법사라고는 컬린 뿐이었다. 차라리 탈로스는 나았다. 스승의 첫 번째 제자인 데다가, '전능-'이라는 권호가 알려주듯 그의 능력은 무 궁했다. 악튤런이 정작 자기 하녀처럼 무시했던 것은 롤레인이었다. 그에게 있어, 열 일곱에 학교를 졸업하고 스물 하나에 권호를 받았 던 롤레인은 너무나 평범해 보였던 것이다. 물론 컬린은 제자들을 공평하게 대했고, 악튤런의 방자함에 대해서 도 용서 없고 엄격하게 대했다. 그러나 악튤런은 그것을 그저 롤레 인이 '가장 모자란' 제자라서 그렇게 감싸준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어리고 철없어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그가, 그녀가 탈로스와 거의 맞먹는 실력자란 것을 알 리도 없었고, 알아도 자기는 그 나이에는 그보다 훨씬 더 높은 경지에 오를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녀의 모 든 것은 악튤런에게는 '평범한' 것들일 뿐이었다. 스승이 실종 된 후, 이런 악튤런은 탈로스에게 패하자 롤레인의 예 상과는 달리 본국인 델 카타로 돌아가 연구에 전념했다. 그러나 롤 레인은 그가 스승의 유산에 대해 오히려 탈로스보다 더 탐욕스럽게 집착한다는 것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도 잘 알았다. 게다가 탈로 스는 스승과 함께 그에 손을 댄 경험이 있기라도 했지만, 악튤런은 정말 막연하게 갈망해 오고 있는 것뿐이었고, 그런 것이 늘 그렇듯 알고 덤비는 것 보다 더 무섭다. 뿐만 아니라 탈로스가 스승을 미워 하듯, 악튤런도 자신에게서 기회를 빼앗아 버린 탈로스를 미워했다. 다른 점은 스승은 탈로스의 증오를 받아 들였고, 탈로스는 악튤런의 증오를 무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악튤런은 그를 다시 찾아갈 것이다. 그럴 거라 생각해 왔고, 그 일격이 가해질 때 롤레 인은 자신 역시 일격을 뒤 이어 가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롤레인은 악튤런이 움직이자 즉시 그의 움직임을 쫓았다. 그 는 에크롯사로 향하고 있었고, 탈로스의 출신지를 고려한다면 그곳 에 뭔가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롤레인도 알기는 했지만, 하멜버그 의 협조를 구할 수 없는 입장이라 보류해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 나 롤레인은 악튤런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그녀는 다시 기다렸고, 바로 지금 그곳에서는 아주 오래 전에 행해 진 봉인이 움직이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를 머뭇거리게 하는 것은 지금 이상한 힘이 탈로스의 거처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 특색은 낯선 것이 아니었 지만, 그 힘을 움직이는 정체는 도무지 알아낼 수 없었다. 전력을 다 해 알아낸 것은 고작 베이나트-라는 이름뿐이다. 롤레인은 좀 더 기다리기로 했다. 승패가 좀 더 확실해지고, 그 개 입한 힘의 정체가 분명해 질 때까지. 탈로스는 집착하고, 악튤런은 탐욕스럽지만, 롤레인은 '적' 앞에서는 잔혹할 정도로 냉정했다. 그것이 셋의 차이였고, 셋의 대결의 방식 을 좌우하는 것도 그 차이점이었으며, 지금도 그들은 그 특성에 따 라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들어온 거지?" 탈로스의 말에, 악튤런은 그를 경멸어린 눈으로 보며 쏘아붙였다. "8년은 긴 시간이라고. 이 탑의 빗장을 풀 방법을 알아 낼 수 있을 정도로." 탈로스가 비웃었다. 아닐 걸, 절대 아니야- 네 수준에 알아 낼 수는 있어도 깰 수 있을 리 없어. 일단 탈로스는 감탄해 주기로 했다. 미 친 듯이 달려들던 그 어린 소년을 생각해 본다면, 지금은 정말 너무 나 발전한 것이다. 그러나 탈로스는 악튤런을 상대가 된다 인정해 본 적이 없었다. 그 에게 있어 급한 것은 이 악튤런이 왜왔는 지 알아내자마자 단번에 매쳐 버리고는 아킨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그것이 더 급했다. 솔직 히, 너무나 다급해서 머리에 피가 거꾸로 돌 지경이었다. 지금 불가사의한 일이 너무나 많았다. 아킨이 보름도 아닌데 그 괴 물로 변해 도망쳤고, 쫓아가려는 탈로스를 어느 남자가 막았다. 탈로스는 어렵잖게 그 남자가 마법사이며, 그가 이 탑에 걸린 봉인 을 해제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악튤런이 이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실력이 아니라 그런 우연이 겹쳤기에 가능했 던 것이다. "그래, 왜 찾아 온 거냐....." 탈로스는 느긋하게 그리 말했고, 그것은 분명 악튤런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것이었다. 악튤런의 눈매가 확 일그러졌다. 벌써 스물이 넘었다지만, 그래도 오거스트나 탈로스에 비하면 한참 이나 어린 마법사였다. "지난번과 똑같아." "줄 수 없다고, 그 때 분명히 말했다." 악튤런이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그리고 빼앗아 가보라고 했지?" "넌 실패했지." 악튤런의 눈에 확 불꽃이 일었다. "지금은 할 수 있어!" "오거스트도 내게서 무엇을 빼앗아 갈 수 없다. 그러니, 넌 애당초 불가능해." "그 어리석고 겁 많은 여자와 날 비교하지 마. 8년 동안 도망치기만 했던 그 여자와는 달리, 난 당신을 충분히 이길 수 있을 정도로 노 력했어." "오거스트와 난, 처음부터 끝까지 스승님에게 배웠다. 그러나 넌 처 음부터도 아니고, 끝까지 배우지도 못했다. 그러니 악튤런, 돌아가 라. 나와 오거스트가 너를 상대하지 않는 것은, 너를 가엾게 여겨서 니까." 악튤런이 이를 북 갈아붙였다. "닥쳐, 이 추한 난쟁이 따위가!" "악-튤-런." 탈로스는 다시 오거스트가 그리워졌다. 물론 둘 사이에는 오로지 분노와 증오뿐이다. 그러나 단 하나의 이 유로 그리 된 것이니, 단 하나의 이유에만 분노할 뿐이고, 그 둘 사 이의 교류방법 역시 단 하나 타협점 없는 순수한 증오뿐이었다. 그 래서, 그 때문에 탈로스는 오거스트와의 대결을 갈망해 왔고, 지금 도 갈망한다. 탈로스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탈로스를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경멸하지 않고, 그러면서도 자신과 똑같은 마법사로 인정하고 있는 것은 세상에 단 하나 오거스트 롤 레인 뿐이었고, 오거스트 롤레인에게 그 특유의 무관심을 집어치우 고 그 속에 숨은 무궁한 힘을 모조리 끌어내게 만드는 마법사로 인 정한 이도 탈로스였다. 그러나 이 꼬마는 절대 아니다. 될 수도 없고, 되는 것을 용납할 생 각도 없다. "악튤런, 지금 당장 너를 추방하겠다." "해 봐. 나 역시, 그것을 찾게 될 때까지 이곳을 나가지 않겠어!" "너는 대체 왜 그것을 원하는 거냐." 탈로스는 대화를 하지 않는다. 묻지도 않는다. 그가 그리 묻는 것은 단지, 이 어린 악튤런의 주의를 끌려고 했던 것뿐이었다. 롤레인이 라면 답하는 대신 주먹이라도 날렸을 것이다. 그녀는 둘 사이에 어 차피 대화나 협상 따위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설득은 기가 막힌 기적일 뿐이라는 것도 안다. 악튤런이 말했다. "난 마법사야." "나도 마법사다." "제 몸 고칠 궁리만 하는 난쟁이가 무슨! 봐, 이 안에 틀어박혀서 당신이 한 일이 대체 뭐지? 그저, 잊혀진 것들에게만 편집광적으로 집착할 뿐 변화시킨 것은 하나도 없지! 당신은 이 안에서 썩어 주저 앉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그런 당신에게.....그 모든 것이 사치일 뿐이야. 너무 과하다고." "그래서 넌 그것으로 세계 정복이라도 하려고?" 악튤런도 탈로스도 둘 다 주춤 뒤로 물러나 버렸다. 그 것은 탈로스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약간은 화난 듯한 목소리, 그 것이 탈로스의 것일 리 없고, 악튤런의 것 일 리는 더더욱 없다. "계획서 한번 읊어 봐라. 가능성 있으면 동업해 보자고-" 악튤런은 소매를 당기며 손을 들었다. 그러나, 그 손에 마나가 모이 기도 전에 그의 이마 위로 손가락 하나가 탁 얹혔다. "누구야-!" 탈로스가 손을 들었고, 그는 악튤런 보다 더욱 빠르게 마법을 시전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두 개의 손가락이 탈로스 의 이마에 얹혔다. 그리고 양손을 뻗어 그 끝을 두 마법사의 이마에 얹은 채, 그 둘 사 이에 키 큰 남자가 서있었다. 남자는 우선 악튤런 쪽을 내려다보았 고 순간 파칭, 하더니 악튤런의 이마에 닿아있던 손에서 하얀빛이 스며 나와 확 치솟아 올랐다. 악튤런은 굳은 듯 꿈쩍도 할 수 없었고, 갑작스런 일을 당한 모멸과 분노로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남자가 말했다. "그리고 탈로스, 철딱서니 없는 것들이 짖어대는 소리를 일일이 논 리적으로 격파하려다 가는 네가 먼저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버릴 거 다. 무시해 버려." 탈로스의 눈이 커졌다. 그러자 남자가 두 개의 손가락을 교차시키며 탁탁 움직였다. 탈로스의 주변으로 빛나는 빛의 기둥이 차례 차례 솟구쳐 올랐다. 그 얇은 것들은 탈로스 주변을 휘감아 돌더니, 완전한 원을 그리자 그 사이에서 수 십 개의 빛들이 솟구쳐 올라 그물처럼 얽혔다. 남자는 팔을 당기고는 말했다. "둘 다 며칠 거기서 머리 식히라고." "어림없는 소리!" 팟, 팟--작고 짧은소리와 함께 악튤런의 이마를 짓누르는 마법의 빛 위로 푸릇한 색조의 빛이 터졌다가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를 덮 은 빛 자체는 꿈쩍도 하지 않자, 화가 치민 악튤런은 고함을 내 질 렀다. "당신 누구야--!" "꼬마야, 그 정도도 못 해치우면서......이 마법사 양반에게 난쟁이 어 쩌고 한 거냐?" 남자의 말에 악튤런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탈로스에게 당하는 것이 면 몇 번이든 당해도 되고 참을 수도 있었지만, 이렇게 어이없이 엉 뚱하게 끼여든 마법사에게 당하는 것은 스스로 용납할 수가 없었다. "누구냐고 했어....!" "내 이름 듣기 전에 어른 공경하는 법부터 배워라. 존경받는 어른 은, 존경받을 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니까." 남자는 후우-하고 한숨을 내 쉬고는 이번에는 왼 쪽에 있는 탈로스 를 내려다보았다. 워낙에 키가 큰 남자라, 정말 고개를 많이 숙여야 했다. 탈로스는 악튤런과는 달리 말없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고, 그 눈빛은 차분했다. 그러나 그것은 얼음 가시 돋친 서리같은 매서운 증오에 얼어붙어 있었고, 그런 눈빛과 마주하게 되자 남자는 그저 조용한 웃음만을 보냈다. 탈로스가 말했다. "내게도 할 말이 있나?" 남자는 그저 웃었다. 그것은 처연하고도 서글픈 것이었고, 진한 후 회를 담고 흐르는 미소였다. "무슨 말을 더 하겠나, 전능의 마법사-북을 향해 휘몰아쳐 가는 눈 의 폭풍과 함께 인간의 경지가 뻗어 나갈 수 있는 경계에 다다른, 극한의 마법사-" 탈로스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를 둘러싼 빛 의 감옥의 표면위로 검은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남자의 손 이 빛을 뚫고 탈로스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탈로스가 외쳤다. "왜 또 나타난 거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남자의 손가락 끝에서는 붉은 빛이 어렸고, 탈 로스는 분노에 떨면서도 꿈쩍도 할 수 없었다. 아니, 하고 싶지 조 차 않았다. 많은 말들을 하고 싶었고, 듣고 싶었지만 복받쳐 터뜨린 말은 단 한마디뿐이었다. "왜.....!" "답하지 않는다." "당...." "모든 잘못이 네게 절대의 문을 열어준 내게 있다는 걸 안다. 또, 그 갈망의 문 앞에서 열쇠를 감춘 것 역시 죄- 그러니 너에 대한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단지 지금이 아닐 뿐이지." 남자의 손가락이 펼쳐지더니, 세게 탈로스의 이마를 눌렀다. 반격할 기회가 수 십 번은 온 듯 했지만, 탈로스는 그 중 단 하나도 움켜 쥘 수 없었다. 그래서 남자의 마법이 완성되어 탈로스를 암흑 속에 가둘 때까지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 작가잡설: 간만에 등장한 롤레인 여왕님입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25장 *************************************************************** [겨울성의 열쇠] 제115편 출구#2 *************************************************************** 사납고 거센 불길은 온 성의 벽을 집어삼킬 듯 빠르게 번졌고, 성 사람들은 도망치지도 못한 채 필사적으로 진화에 나섰다. 그러나 불 은 어림없을 정도로 빠르게, 바람이 도망치듯 번졌다. 유일하게 불 을 진화할 수 있는 사람은 성주인 하멜버그였지만, 그 역시 습격으 로 부상당한 상태라 물 한바가지 쏟아 부을 힘조차 없었다. 그리고 그 사태의 명령자이자 조력자였던 칼라하스는 그 모든 것을 주시하고, 듣고, 기다렸다. "이제 피신하십시오." 방안으로까지 열기가 미치자 마하가 말했다. 타는 냄새가 온 방에 가득했지만, 창백하고 차가운 칼라하스만은 얼음꽃처럼 꼿꼿하게 앉 아 있었다. "조금 기다려 봐." "전하, 나가서 보고를 받으셔도 늦지 않습니다." ".....이곳도 위험하지는 않아." 심술을 부려도 될 정도로 여유가 있으니 이리 구는 것이고, 또 다른 사람에게 라면 몰라도 마하에게는 가끔 어리광도 부리고 심술도 부 려왔으니 이런 모습에 당황하는 것도 아니다. 마하는 그저 설득할 수 없는 칼라하스가 답답할 뿐이었다. 그녀의 성격으로 판단컨데, 심장이 터질 정도로 다급하게 하다가는 한참 뒤에야 태연하게 '이제 네가 하자는 대로 할게.' 하고 말할 것이다. 그 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고개를 돌린 칼라하스는 자신과 함께 왔던 마법사이자 기사였던 팔 라크를 볼 수 있었다. 기대를 하며 고개를 들었던 그녀는 이내 눈을 찌푸리고 말았다. 재투성이에, 옷 여기저기가 그을려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혼자'였다. "죄송합니다-" 팔라크는 칼라하스 공주와 마주치자마자 무릎을 풀썩 꿇었다. "팔라크, 아이는...." 그러다가 칼라하스는 피투성이가 된 팔라크의 허벅지와, 역시나 피 에 흠뻑 젖은 팔을 발견했다. 칼라하스가 싸늘한 얼굴로 아무 말이 없으니, 팔라크는 정말 끔찍한 일을 말하듯 힘들게 말했다. "놓쳤....습니다." "무슨 소리지?" 칼라하스의 눈이 더욱 차가워졌다. 팔라크는 이를 부득 갈며 일을 설명했다. 그는 예전에 칼라하스를 위한 연회가 있었을 때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로 유제니아를 봐 두었다. (그리고 그 때 그의 얼굴은 물론 지 금과 틀렸다). 그에게 그 소녀는 그저 푸른 눈이 예쁜, 가늘 가늘한 소녀였을 뿐이다. 그런 아이가 엉거주춤 서서는, 겁먹은 눈으로 자 신을 바라보며 검을 겨누고 있으니 어느 남자가 웃지 않겠는가. 그 상황에서 '혹시?' 하고 주의하는 것이 이상했다. 물론 유제니아는 정말 검술로 그를 제압한 건 결코 아니었다. 주머 니에 손을 넣더니 뭘 툭 던졌고, 그 것이 팔라크의 이마를 맞추는 순간 그는 갑자기 코가 찡하고 매워지더니 눈물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짧은 순간에, 유제니아는 생쥐처럼 잽싸게 팔라크의 칼을 퉁겨내 고는 팔과 허벅지를 베어 버렸다. "무기는 칼 말고도 많고 많다는 것을 알아둬요." 그리고 그렇게 얄밉게 던지고는 잽싸게 도망쳐 버렸다. 눈은 맵고, 코도 찡하고, 허벅지와 팔은 눈물 나게 아팠고, 주변은 매캐하고 뜨겁기만 했다. 소녀에게 당한 것 보다, 그런 꼴로 불길이 번질 때까지 우왕좌왕 한 자신이 더 한심하기만 했다. 어느 정도 진 정이 되자 팔라크는 곧장 유제니아를 찾아 나서려 했지만, 유제니아 가 사라진 쪽으로는 벌써 불길이 번진 뒤였다. 결국 그는 죽고 싶은 심정으로, 실패를 보고하기 위해 차갑고 매서운 공주를 찾아올 수밖 에 없었다. "책임은 나중에 추궁하겠다, 팔라크." "죄송합니다." 칼라하스는 문 쪽을 가리켰다. ".......우선 나가 봐라. 나도 곧 따라 나설 테니!" 팔라크는 울적한 눈으로 문을 보더니 나갔다. 그가 나가자마자 칼라 하스는 입술을 꾹 물었다가 떼고는 마하에게 물었다. "왜 그에게 말하지 않았지, 마하!" "무엇을 말입니까?" "그 꼬마 여우." "할만큼 말했습니다. 또, 작은 소녀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 것 은 팔라크의 실수입니다. 아이를 앞에 놓고서도 긴장을 늦추지 말아 야 하는 것이 델 카타의 기사로서의 자세입니다." "너도 그 앙큼한 연극에 속아넘어갔는데, 팔라크가 어떻게 속지 않 겠어." 이번에는 마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감춘 거지, 마하? 아니, 왜 방해를 하려고 하는 거야." "말씀 드렸습니다, 전하. 저는 그것이 옳지도, 현명하지도 않다고 생 각합니다." "네가 어떻게--!" 마하는 공주를 보지 않은 채 말했다. "저는 언제나 전하를 존경하나, 전하의 선택 모두가 올바르다고는 생각 치 않습니다. 저는 전하의 이번 판단에 '설득'될 수 없었으며, 그 때문에 그리 했습니다. 만약에 저를 조금이라도 더 안심시켜 주 셨다면 달리 생각했겠지요. 하지만 전하는 아무 것도 성공하지 못했 으며, 노력하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칼라하스의 눈빛은 여전히 매서웠다. "마하--!" "누구나 실수를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자신이 실수를 할 때 다른 사람은 실수를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며, 자신 이 실수했다는 것을 알게되면 그 즉시 인정하는 것입니다, 전하- 전 하는 영리한 분, 그러니 반드시 현명해 지시리라 믿습니다." 결국 칼라하스는 입술을 다시 꾹 물며 고개를 돌렸다. 마하가 두 팔 을 뻗으며 말했다. "나가세요, 전하." 칼라하스는 고개를 돌린 채 그녀의 목 쪽으로 손을 뻗으려 했다. 그 런데 그 순간, 갑자기 넓은 방의 창이 와장창 깨어지더니 방안이 쿵, 하고 울렸다. 일은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났다. 마하가 채 일어나기도 전에, 그래서 그녀가 도끼를 뽑아 들기도 전 에 일어났고, 다리가 불편한 칼라하스는 도망치지도, 피하지도, 심지 어 몸을 웅크리지도 못했다. 거대한 몸집을 가진 것이 창을 가리고 있었다. 창 밖에서 이는 불길 에, 그것의 긴 털이 같이 타오르듯 빛났고, 그것을 덮은 역광은 강 렬한 불빛을 등지고 악마의 입처럼 컴컴한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저건......!" 마하가 외치자, 그것의 빛나는 금빛 눈동자가 불꽃을 튀겨내며 번득 였고, 뜨거운 입김과 사나운 으르렁거림이 터졌다. 커다란 발톱에 뭐가 북 찢겨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고, 마하의 비명과 함께 그녀의 큰 몸이 구석으로 쿵 내 동댕이쳐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칼라하스는 마하의 안전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릴 수조 차 없었다. 포효가 터지며 그 두터운 발이 날아와 칼라하스를 후려 쳤다. 옷이 찢겨져 나가고, 발에 맞은 그녀의 몸이 방구석까지 쓸려 나갔다. 칼라하스는 숨넘어갈 듯 비명을 터뜨렸다. "마, 마하-! 마하--! 마하아아--!" "전하-!" 거대한 늑대가 칼라하스를 덮쳤다. 집어삼킬 듯 입을 벌리고 고개를 들더니, 내 치듯 그 거대한 발을 내리 꽂았다. "꺄아--!" 순간 칼라하스는 늑대가 아닌 자신을 내려다보는 전혀 다른 것과 마주했다. 아주 짧은 순간, 너무나 짧아 환상 같은 순간--정말 놀라 서 일으킨 착란이란 생각까지 들 정도였지만, 그래도 그것은 칼라하 스로 하여금 비명을 멈추게 했다. 그녀를 내리덮치는 것은 괴물이 아니라 소년이었다. 은처럼 흩어지 는 머리카락과, 금빛의 눈동자. 그리고 그 모습에 칼라하스는 숨이 멎을 지경이었다. "휘안토스?" 칼라하스는 자기도 모르게 그 얼굴과 똑같은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 버리고 말았다. 순간, 소년은 그녀의 옷자락을 던지듯 놓고는 뒤로 휙 물러났다. 환상이 깨어지고, 그녀가 본 것은 고개를 들고 그녀를 퍼렇게 노려 보는 것은 다시 괴물이었다. 그것은 고통을 참는 듯 눈을 찌푸리고 이를 악문 채 크르렁 거리고 있었고, 그 어깨에 마하의 도끼가 깊이 박혀 있었다. 상처에서 피가 쏟아져 바닥을 적시고 칼라하스의 옷깃 까지 적셨다. 늑대가 크게 울부짖으며 몸을 틀었다. 마하는 피에 젖은 도끼를 당 겨 뽑으며 외쳤다. "전하, 피하십......" 그러나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에 늑대는 마하를 들이받았다. "크헉-!" 마하가 나가떨어지며 비명을 질렀다. 칼라하스가 창백한 얼굴로 소 리쳤다. "마하--!" 순간 늑대가 허리를 숙이더니 발을 퉁겼다. 그리고 마하의 쓰러진 몸을 뛰어 넘어, 부서진 창턱을 한번 밟고는 뛰어 내렸다. 바람이 불어오고, 타는 냄새가 방안으로 쓸려 들어왔다. 늑대의 등 과 다리에 붙어 있었던 듯한 잎과 가지들이 창안으로 투탁 튀어 올 랐다. 너무나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칼라하스는 꿈쩍도 못한 채 멍하니 있다가, 결국 터뜨리듯 외쳤다. "마하, 괜찮아? 마하---무사하지? 응? 제발, 마하--!" 마하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칼라하스는 다가온 마하의 손을 꼭 붙잡았다. 마하는 발톱에 맞아 길게 긁힌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 얼 굴과 몸은 온통 피와 재 투성이였다. 그녀가 물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어서 데리고 가 줘, 마하--! 미안...다시는 이러지 않을 게, 마하.....! 괜찮아, 응? 괜찮냐고.....! 많이 다쳤어? ...미안해! 내 탓이야!" "이건 전하의 잘못이 아닙니다. 어서 이 위험한 곳을 떠나세요." 칼라하스는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하는 볼을 흠뻑 적신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는 그 가볍고 마른 몸을 안아 들었다. 유제니아는 미칠 지경이었다. 성의 지리를 잘 모르던 그녀는 방향을 잘못 들었다는 것을 알았고, 거의 동시에 너무 늦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사람을 피해 도망 치기는 했지만,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불길로 가로막힌 복도였 다. 뒤를 돌아 보았지만, 그 순간 불길이 치솟아 올라 그곳도 막혀 버렸다. 연기가 피어올라 숨이 막혔다.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막고 는 있었지만, 머리가 가물가물 할 정도로 어지러웠다. 열기에 벌써 머리카락이 탈 정도였다. "쿨럭--" 차라리 방금 그 남자에게 잡혀가는 편이 나았을 것 같다는 생각마 저 들었다. 적어도, 살까 죽을까 정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테니. 다시 멀리서 쿠르르릉-무언가 쓰러지고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허벅지 근방이 아주 뜨겁다 싶어서 내려다 보니, 치마에 불이 붙어 있었다. 유제니아는 수건으로 치마를 후닥닥 쳐서 불을 껐다. 불은 금방 꺼졌지만, 손수건을 떼자마자 연기가 쏟아져 들어와 숨이 갑갑 해져왔다. 이러다 여기서 쓰러져 죽겠다..... 그 때 쿠루릉, 쿵쿵--뭐를 들이받고 던지고 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드디어 방해물을 다 치운 그것이 복도를 달려오는 소리가 이어졌다. 유제니아는 눈물 가득한 눈으로 그 쪽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주황색 불꽃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화마에 휘말린 가 구들과 벽을 따라 불들은 달리고 집어삼키며 실내를 제압했다. 그리 고 그 가운데, 그 살아 숨쉬고 미친 듯이 날뛰며 주변의 연약하고 먹음직한 것을 휘감아 도는 불길 속에, 검고 거대한 것이 우뚝 서 있었다. 천천히 다가오던 그것이 다시 멀어졌다. 탁탁탁--그리고 다다다다 다다--빠르게 달려오더니, 바닥을 쿵 찼다. 유제니아는 눈을 질끈 감아 버리고 말았다. 불꽃이 집어삼켰던 것을 울컥 토해내듯, 거대하고 하얀 그것이 불 속에서 뛰쳐나왔다. 불길은 물에라도 닿은 듯 급히 손길을 멎고는 치직거리며 물러났다. "어이, 꼬마 아가씨-!" 유제니아가 고개를 들기도 전에, 유제니아는 그녀의 목덜미 근처에 있는 거대한 늑대의 머리를 보고는 기겁했다. 흠뻑 젖은 털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그 금빛의 눈과 입김은 불 꽃보다 뜨거웠다. 그러나 다급한 중에도 유제니아는 그 금빛 눈과 은빛의 털을 알아보다. 유제니아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늑대에 가 까이 들이대며 물었다. "아키?" 순간 늑대 위에 탄 키 큰 남자의 굵은 팔이 유제니아의 허리를 붙 들더니 훌쩍 들어 안으로 당겼다. 그리고 연기가 들어오지 않도록 재빨리 유제니아의 얼굴을 긴소매로 덮었다. "몸 정말 가늘구나. 아키가 영 마뜩찮으면 나한테 시집와도 좋아. 기쁘게 받아들이지." 솔직히 말하자면, 유제니아는 구해주면 뭘 못하겠냐, 할 정도로 다 급했다. 그래서 위에서 불길 번지는 소리가 화륵-하고 들리자마자 기겁해서 외쳤다. "그건 나중에 진지하게 논의하고....나가기나 하자고요! 어, 어서!" "녀석의 털이나 꽉 붙들어!" 유제니아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벌써 아킨의 긴 털을 쥐어 뜯을 듯 한 움큼 움켜잡고 있었다. 털은 흠뻑 젖어 미끄러웠고, 얼음처럼 차 가웠다. 그러나 유제니아를 안은 남자의 몸은 단단하고 따뜻했고, 옷깃에서는 금방 말린 듯 신선한 냄새가 났다. 이런 차림으로 어떻 게 이 안에까지 무사히 들어 올 수 있었는지, 신기할 지경이다. "자, 뛰어라-!" 늑대는 몸을 움츠렸다가 발을 탕-하고 찼다. 불길이 바로 등뒤에 있는 것만 같았다. 남자는 허리를 숙여 유제니 아가 불길에 닿지 않도록 했다. 콰르릉--이글거리고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주변에 온통 가득했다. "끼아아아--!" 결국에는 유제니아도 그렇게 비명을 질러 버렸다. 온 몸이 허공에 떠 있었고, 차갑고 습한 바람이 머리카락과 등을 매 섭게 쓸고 지나가며 머리카락을 흩트러 놓았다. 불길이 이글거리는 소리가 사라지고, 세상은 일순 아우성을 뚝 그치고 함구한 듯 했다. 유제니아는 눈을 떴다가 기겁했다. 눈앞으로 먹구름 가득한 하늘과, 성의 높다란 첨탑이 보였다. 벌건 불길은 내달리다가 결국에는 놓친 사냥감을 향해 통탄하듯 성의 창 밖으로 쏟아져 나와 활활 치솟아 오른다. "이 악물어라-!"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유제니아는 정말 이를 악물었다. 쿵---! 머리와 몸이 한꺼번에 덜렁거렸지만 남자가 꽉 붙들어 주어 괜찮았 다. 그러나 소름이 쭉 끼치며 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건 어쩔 수 없 었다. 성의 3층에서 뛰어 내린 것이다. 바닥에 닿자마자 늑대는 곧바로 앞으로 달려갔다. 남자는 허리를 피 고, 거의 혼절할 지경인 유제니아를 고쳐 안아 가슴에 푹 파묻히도 록 하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비와 바람의 수호자, 프레델로의 사랑스런 시녀여, 가을과 봄과 여 름의 하늘이 쏟아내는 차갑고 굵은 눈물이여--!" 남자의 유쾌한 목소리는, 마치 흥겨움에 민요라도 부르는 것만 같았 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 남자의 목소리에 응답하여 북이라도 친 듯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이 성을 향해 휙 쓸려 오고, 그 안에 는 진한 물비린내와 흙내음이 실려 있었다. 남자가 소매로 유제니아 의 머리 위를 덮어주었다. 그 두터운 옷자락 위로 툭툭툭툭---굵직 한 물방울들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싸한 흙냄새는 한 가득 피어오르고, 쏴아아아아아---하는 작은북을 한꺼번에 두드 려 대는 듯 세찬 빗소리가 들려왔다. "구경하라고, 꼬마 아가씨." 남자가 그렇게 말하고는 그들이 탄 늑대-즉 아키를 돌려 세웠다. 아 킨은 지친 듯 거칠게 헐떡이며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유제니아는 그런 아킨의 등에 타고 있는 것이 미안해져서는 슬쩍 말했다. "내, 내릴게요." 남자는 유제니아를 안은 채로 내려왔다. 능숙하게 행동해서, 소매가 치워지거나 날려서 유제니아가 비를 맞지는 않았다. 사방에서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엄청난 비, 정말 동이 째 쏟아 붇는 듯한 어마어마한 폭우-세상은 캄캄했고, 그 어둠 속에서 빗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그리고 폭 우에 성의 불길이 잦아들고 있었다. 위로 솟구치던 불길이 점점 작 아지더니 마침내 피식 꺼져들었고 연기를 토해냈다. 치직--하얀 연 기가 솟구치더니, 그것마저도 거세게 내리꽂히는 폭우의 기세에 짓 눌려 사라졌다. 곳곳에서 물이 고여 콸콸 흐르고, 불이 완전히 꺼진 까만 벽을 타고 물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비...." 유제니아는 그 장관을 멍하니 보다가는, 남자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 다. 몸에 힘이 다 풀린 데다가 춥기까지 해서 와들와들 떨리고 있었 다. "고맙...습니다. 에취-!" 유제니아는 겨우 힘을 쥐어짜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남자가 흐뭇 한 지 빙그레 웃었고, 그 미소에 유제니아는 작게나마 호감이 갔다. 마음 좋은 아저씨나 할아버지처럼 부드러운 웃음이었다. 남자가 말했다. "베이나트라고 한다. 또, 이 꼬마 녀석과도 좀 알지." 그리고는 여전히 숨을 헐떡이는 아킨을 가리켰다. 손끝이 닿자, 아 킨은 토해내듯 크게 숨을 헐떡이더니 뒤를 돌아 숲 쪽으로 걸어갔 다. 유제니아가 나가려고 하자, 베이나트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내 버려 둬라. 지금 아무도 못 알아본다. 가까이 갔다간, 조그만 너 는 한입 감이라고." "하지만 방금 전에는 어떻게 한 거죠?" 베이나트는 어깨만 으쓱했고, 유제니아는 지금 상황이 아주 많은 설 명과 지식을 요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유제니아는 상황을 잘 파악할 줄 아는 소녀였고, 시간을 어떻게 해야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지도 잘 아는 소녀였다. 유제니아는 설명 듣는 건 간단하게 포기했다. 그 때 쿵-- 철퍽, 하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아키!" 유제니아는 잽싸게 베이나트의 품에서 빠져 나와 어둠 속으로 달려 가다가, 길고 두터운 것을 꾹 밟고 말았다. 깽--! 하고 놀란 강아지 비명 비슷한 게 들려왔고, 유제니아는 고개를 돌렸다가 어둠 속에서 퍼렇게 빛나는 두 개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러나 유제니아가 비명도 지르기 전에 푸른빛이 꺼지더니 커다란 머리가 바닥에 떨어지는 쿵, 소리가 들려왔다. 비릿한 피 냄새가 빗 줄기 속에 섞여 풍겨왔다. *********************************************************** 작가잡설: 칼라하스와 아키의 대면 상황- 쿵- 꽥! -_-? 네...칼라하스는 아키에게 '밟혔습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25장 *************************************************************** [겨울성의 열쇠] 제116편 출구#3 *************************************************************** 휘안토스는 놀라 눈을 떴다. 어지러움과 혼란함에, 순간 적으로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깊 은 어둠과 기분 나쁜 습기, 퍼붓듯 쏟아지는 폭우--그리고 한없이 계속될 것 만 같은, 그렇게 깊은 숲 속을 달리고, 달린 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자신인지, 아니면 또 다른 자신인지 그것조차 모르겠다. 그리고 한참 만에야 그는 자신, 휘안토스 프리엔으로 돌아왔다는 것 을 알았다. 빗소리가 들려온다. 방금 전 꿈속에서 들은 그런 세찬 빗소리가 아 닌, 속삭이듯 가만 가만 뚝뚝 떨어지는 그런 빗소리였으며, 꿈이 아 닌 '현실의 소리'였다. 휘안토스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평소의 차분함을 되찾아 갔고, 그러면서 최근 몇 달간 계속되어 오던 이 낯 선 환상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몇 번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밤, 자 켄이 처음으로 성을 찾아온 날 아킨이 실종된 직후. 그리고 그것들 은 분명 '정말 현실'과 이어지고 있었고, 그 이어진 실의 끄트머리에 는 언제나 아킨과 무결한 만월이 있었다. 휘안토스는 자신의 둔함이 한심해졌다. 마법에 대해 전혀 모르는 휘 안토스였으니, 아킨은 이미 예전에 알고 있었던 것을 그는 이제서야 알게 된 것이다. "아키...." 휘안토스는 땀에 젖은 이마에 팔을 갖다 대며 지금 자신이 본 것이 어떤 것들인지, 차분하게 떠 올려 보았다. 그래, 숲을 헤치고 나가는 데부터 기억난다. 한참을 달리며 몇 개의 둥치와 바위를 뛰어 넘고 냇물을 갈라 달렸다. 그러다, 마침내 거인 의 가슴처럼 넓고 울창한 숲을 벗어났다. 이지러진 달이 빛을 흐트러뜨리고, 저 먼 곳의 성은 불타고 있었다. 하늘위로 연기와 황금 색 불빛이 솟구쳐 오른다. 아마도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굵은 팔이 갈기를 붙들더니 위로 훌쩍 뛰어 올랐다. 버티기 어렵지는 않았지만, 순간 목과 어깨 가 묵직해졌다. 그러나 날뛰지도 으르렁대지도 않았다. 익숙하고 안전하며 당연한 일을 하듯 그는 계속 달렸다. 그 기수는 그의 목덜미 털을 잡고는 허리를 숙여 등에 가슴을 붙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우거진 초원을 넘고 작은 숲을 가로질러 불 꽃에 휘감겨 타오르는 성에 도착했다. 처음 보는 성이었지만, 휘안토스는 그 영상을 떠올리며 쓸만한 몇 가지를 알아낼 수는 있었다. 성의 크기나 주변의 풍광으로 보아, 변 방의 조용한 영지일 가능성이 크다. 그토록 거대한 숲이 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국경을 가로지르는 산지를 끼고 있는 영지일 것이다. 남자가 주변을 살피기 위해 그의 등에서 내려왔고, 그 순간 그는 뒤 돌아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해 달렸다. 남자는 당황한 듯 급히 그를 불렀지만, 그는 한번 멈춰주지도 않은 채 불길을 뚫고 뒤뜰로 들어 섰다. 뒤의 남자는 잠시 머뭇거리다가는, 그가 무언가를 발견하거나 알기 때문에 그럴 거라 생각한 듯 따라 달려왔다. 그 다음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불길이 거의 없는 어느 별채로 뛰어 들어갔고, 일반적인 성의 구조에 대해 잘 아는 휘안토스는 그곳이 아마도 귀빈을 모시기 위한 곳일 거라 생각했다. 그 때부터 상당히 정신이 없었다. 아마도, 상대 역시 다급해져 있거나 당황해 있기 때 문일 것이다. 무엇을 찾으러 하는 거냐, 아키- 대체 무엇이 너를 이토록 당황하게 하고 다급하게 하는 거냐. 그러다가, 어깨가 화끈 하다 싶더니 갑자기 눈앞이 깨끗해졌다. 어 깨에 두텁고 차가운 것이 내리 박히며 지독히 아팠다. 피가 뚝뚝 떨 어지고, 그 고통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주변에 있는 피가 뜨거운 것들을 갈기 갈기 찢어 놓기 직전에 무언가가 그의 정신을 압박하며 불렀다. 그는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 명령에 복종해 물러났고, 그렇게 물러나 던 그가 발견한 것은 그의 발에 짓눌려 있던 소녀였다. 휘안토스는 정말 놀랐다. 칼라하스--? 그렇게 흐트러지고 겁에 질린 모습은 처음이고, 평소의 그녀를 생각 해 본다면 정말 웃음이 치밀 정도로 놀라웠다. 그런데, 다시 한번 그의 온 몸을 압박하는 듯한 명령이 들려왔다. -이 들개 꼬마야! 당장 안 와? 우습기까지 한 명령이다. 귀 기울여 주는 것조차 한심하긴 했지만, 그래도 따르기는 해야 할 것 같았다. 해야만 한다, 라는 생각이 그 자신의 의지인 듯 강하게 치솟아 올랐다. 그래서 결국 그는 뒤돌아 명령이 터져 나오는 곳으로 달렸다. 다시 남자가 등에 탔고, 남자는 그를 몰아 성의 본채로 향했다. 불타는 그곳으로 들어가자, 몸이 차가워지는 가 싶더니, 고통이 멎고 불길 에 닿아도 뜨겁지 않았다. 그리고 그 다음은 잊혀지지 않는다. 불길, 그리고 그 소녀- 검은머리에, 겁에 질린 자그만 얼굴과, 푸른 눈동자. 휘안토스는 이제 그 소녀와 꿈과의 관계를 알 것 같았다. 아킨은 보 름달이 가까워지는 며칠 사이에 그 소녀와 마주친 것이고, 그 순간 에 역시나 휘안토스와 닿은 것이다. 가만, 지금은 보름이 아닌데? 달의 변화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는 않지만, 적어도 지난 보름이 며 칠 전에 있었는 지 정도는 알고 있다. 어찌된 일인지는 좀 더 알아 봐야 할 듯 하다. 아킨의 신상에 무언가 아주 큰 변화가 있었다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게 알 것 같았다. 휘안토스가 알기로는, 그 마법사는 조금도 탈로 스와 닮지 않았으며, 어투나 성격은 아찔할 정도로 달랐다. 또, 적어 도 아킨에 대해 적대감도 없어 보이고, 그 소녀가 그를 대하는 것을 보니 외려 호의나 도움을 줄 만한 존재였다. 휘안토스는 이제 침대에서 일어나 땀에 젖은 이마를 가볍게 툭툭 치고 있었다. 하멜버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당장에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또, 그 여자애에 대해서도 알아보고, 그 아이가 그곳에 있다면 되도록 '데리고 오는' 방향으로 해야 할 것 같았다. 지금 휘안토스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느낌' 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도망쳤구나, 아키." 그, 베이나트는 아킨의 상처에서 손을 뗐다. 차가운 시선은 이제 사라졌으나, 베이나트는 여태까지 그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에 어이가 없었다. 벌써 볼 건 다 보고 알건 다 알았을 것이다. 또, 그 시선이 품은 냉혹함과 잔인함을 고려한다면 좀 황당할 정도로 힘든 일이 일어날 것만도 같았다. 베이나트 자신이나, 이 아킨은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었다. 베이나 트는 자신이 강하다는 것을 알고, 아킨은 아마도 그 자에 대해 아주 잘 알 것이다. 하지만 이 일에 관련된 또 다른 사람인 어린 여자아 이-유제니아에게는 아무 것도 없고, 그런 만큼 어떤 일이 벌어지든 억울하거나 당혹스러울 것이다. 우연이란 쏟아지는 별빛 같은 것이었다. 누구나에게 찾아오나, 그것 을 쥐고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우연은 운명이 되고 운명은 무거운 숙명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베이나트는 그것이 되도록 유제니아에 게 어려운 일이 아니기를 바랬다. 그러던 베이나트는, 문득 그의 온 몸을 덮치는 듯한 강한 접근을 느 꼈다. 그러나 그는 피하거나 경계하지 않았다. 그것은 시공을 초월 하여 그에게 다가오는 것이었고, 그것이 마법에 의한 것인지도 그는 금방 알아챘다. 또한, 그 마법의 끝이 닿은 거리와 마법의 흐름으로 그는 이 정도의 시공마법을 행할 수 있는 자가 세상에 단 하나 뿐 임을 알 수 있었으며, 그 단 하나는 그가 분명히 '알고'있는 마법사 였다. 싫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베이나트는 손 끝을 퉁겼다. 순간 파칙--하는 작은 마찰소리가 들리더니, 그를 향 해 시공을 뚫고 쏘아져 들어오던 감지의 마법, 시전자와 베이나트 사이에 걸린 다리가 무너지며 마법이 단번에 깨어져 나갔다. 꽤나 화내겠군, 베이나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돌렸다. 비가 멎으며 구름이 걷혀가고 있었다. 베이나트는 파랗게 밝아오다 가, 어느새 발그레하게 물들어 가는 하늘을 느긋하게 몸을 늘어뜨리 며 바라보았다. 동쪽에서 퍼져 나오는 빛이 어둠을 녹여내고 있었 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옷.....있습니까?" 베이나트는 고개를 돌렸다. 소년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뒤돌아 앉아 있었고, 나무 줄기에 거의 가려져 있어서 머리카락 끝만 보였다. "어라, 너......?" 아킨은 팔찌를 낀 손을 흔들며 힘겹게 말했다. ".......대충.....가릴 만한 거라도 하나 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그제야 베이나트는 아킨이 알몸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푹 숙 인 얼굴은, 귓불까지 새빨개져 있었다. 베이나트는 잠시 고민을 잊 고 웃음을 터뜨렸다. "파, 파하...파하하하하하--!" "베이나트으으......" "아, 하하하--! 파하하하하--! 으하하하--" "이봐요..." "으하하하....! 으하....너, 너--!" "......" *********************************************************** 작가잡설: 산넘어 산이며, 탈로스 너머 휘안이구나.....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25장 ************************************************************** [겨울성의 열쇠] 제117편 출구#4 *************************************************************** 아킨은 베이나트가 어느 운수 사나운 소년으로부터 벗겨온 옷을 대 충 끼어 입었다. "감사합니다." 아킨이 옷을 입고 있는 동안 베이나트는 그의 품안에서 콜콜 자고 있는 유제니아를 툭툭 건드렸다. 아킨이 기겁했지만(아직 덜 입었다), 다행히 유제니아는 얼굴만 찌푸리더니 베이나트의 로브 속으로 다시 쏙 파 고 들어갔다. 베이나트가 감탄하며 말했다. "아기 고양이 같군." "굉장히 위험하게 들리는 건아십니까?" "미안하지만 정말 위험한 상태야. 네 여자친구 깨어나면, 다음부터 는 남자 앞에서 아무렇게나 잠들지 말라고 해라. 정말 덥석 먹고 싶 군." 아킨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여자 친구 아닙니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유제니아가 잠든 이유 는 '당신이 재워서' 같습니다만." 으르렁-비슷하게까지 들렸다. 베이나트가 히죽 웃었다. "너 다친 것 보고 하도 놀라길래, 이렇게 재운 거다....그리고 달리 눕혀 놓을 데가 없어서 여기다 눕혀 놓은 거고." "......." 그리고 아킨의 번득이는 눈에, 얼른 고개를 돌렸다. 아킨은 그를 한 번 쏘아보고는 유제니아 쪽으로 다가가 그녀를 흔들었다. "웅--" "유즈, 일어나." "나중에, 나중에--" 그리고는 손을 휘휘 저었다. 베이나트는 소매를 들어 그런 유제니아의 얼굴을 덮어 주었다. 유제 니아는 누구 속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는 채 베이나트의 품으로 파 고 들어갔고, 아킨은 베아나트의 너무나 행복한 얼굴을 끔찍한 심정 으로 봐야 했다.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당장에 유제니아를 빼앗 아다가 옮겨 놓은 다음 앞에서 지키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 까지 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결국 아킨은 멀지 않은 나무 둥치 아래에 털썩 주저앉았다. "괜찮냐?" 아킨은 베이나트를 흘끔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뒤죽박죽입니다. 뭐가 뭔지.....아무 것도 모르겠군요." "기억은?" 아킨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앉아 있는 소년의 눈에 떠오르는 날카로운 경계의 빛에, 베이나트는 다시 웃음 이 나오고 말았다. 기억이 아예 없을 때에는 저런 눈빛으로 베이나 트를 봤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아무 것도 모르던 때에는 무엇이 이 상하고 이상하지 않은 지 구분할 수 없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킨은 분명 베이나트가 그가 아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하게 나타나서 그를 도와주었다는 것을 이제는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나 아킨은 눈길을 거두고는 말했다. "돌아온 것 같은데, 아직 제대로 자리 잡지는 않았어요." "무슨 말이냐?" "......오랫동안 침대에 누워 있다가 일어난 것 같습니다. 아무 데도 이상이 없는데, 온 몸이 쑤시고 무겁고....그런 것과 같죠. 익숙하지 도 않고, 혼란하고......" 베이나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아킨이 갑자기 물었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죠?" "베이나트." "그것 말고요. 대체 당신.....어떻게 그 안에 있었던 겁니까? 그 탑 주변에는 분명 결계, 그것도 '차원'이라 불릴 만한 거대하고 강한 결 계가 둘러쳐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 안에 있었고, 심지 어....그것을 파괴하기까지 했어요." "파괴?" "내가 처음으로 그 숲 밖으로 나간 날. 그날, 분명 '당신'이 결계의 틈을 열었습니다." "난 네가 그대로 도망치기를 바란 건데." "저는 그 때 갈 곳이 없어요.....기억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두려웠겠지." 그 말에, 아킨은 여기에 이르기까지 그토록 고민하고 두려워했던 자 신이 생각나 부끄러워졌다. 아킨은 비에 젖어 축축한 나무 둥치에 머리를 기대고는 탁 하고 한숨을 내 쉬었다. "네, 당신 말이 맞아요. 정말 그 안에서 편하게 안주하고 싶었던 것 은 저였던 것 같아요. 탈로스가 저를 묶어두고 감금해 두기는 했지 만, 정작.....모든 것을 두려워 한 건 저였죠......그래서 당장에 도망칠 수 없었고, 한참이나 머뭇거리고 서성거려야 했어요. 탈로스는 무관 심하긴 했지만 저를 괴롭히지는 않았으니까. 좋은 것도 없지만 나쁜 것도 없는 나날들. 크게 편하거나 안락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불 편하거나 괴롭지도 않은 나날들...." "그건 평화가 아니란다. 나태지." "나태....요?" "네 삶으로부터의 나태. 매일 매일 똑같은 것을 반복하여 소비와 생 산을 거듭하는 평범한 촌부에게도 삶은 있다. 무언가를 만들어 내 고, 그 만들어낸 것을 소비해서 무로 만들고, 그리고 다음 해에 다 시 만들어 내니까. 하지만 네가 말한 그건, 그저 나태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다는 것 말이다." "저는 제 형과 아버지에게 죽을 뻔했어요." "알아." 아킨은 다시 베이나트를 경계어린 눈으로 봐야 했다. 그러나, 이제 그 경계심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베이나트가 다 알겠다는 듯 그를 보고 있었고, 그런 베이나트는 아이와 이야기하듯 부드럽게 말했다. "아키, 내 목소리...어디서 들어본 것 같지 않냐?" "네."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생겼는지는 모르겠다만, 탈로스가 네 기억 을 지워가고 있는 그 때 네 의식이 잠들어 있던 내게 닿았다. 반지 를 기억해 두라고 말한 것도 나지. 네 기억들은 그때 이미 다 지워 져 버려서....네가 거의 마지막으로 본 것들 중 하나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반지가 그것이었지. 다행히, 세상에 비슷한 게 하 나 더 있어서 그렇게 네 기억이 되살아 난 거다." "다행히 비슷한 게 있었던 게 아니에요." "무슨 소리냐?" 아킨은 빙그레 웃었을 뿐이었고, 그것만은 베이나트도 알기 어려웠 다. 그래서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어쨌건......나는 네 기억이 돌아올 때 네 기억 몇 개를 봤다. 그리 고, 지금 바깥으로 나간다고 그 모든 것이 다 행복이 될 거라고도 생각하지는 않아. 좋고 나쁘고 괴롭고 행복하고, 그렇겠지.....하지만 아키, 그래도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삶을 산다는 거야." "적어도 살수는 있을 텐데 도요?" "그렇다면 왜 살고 싶었지?" ".....네?" "늘 불행하기만 하다면, 너는 대체 왜 살고 싶었던 거냐....이 말이 다. 그저 오늘 아침 눈뜨고 싶다는 것 하나만으로 그렇게 살고 싶었 던 건 아니잖니. 원하는 게 있었고, 만족시켜 주고 싶은 사람도 있 었고, 어쩌면 보고 싶고 사랑하는 사람도 있었겠지.....그래서 살고 싶었을 거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베이나트는 투명하고 차가운 아침 햇살이 퍼 지는 숲을 편안한 눈길로 바라 보고 있었다. 그런 베이나트를 보며, 아킨은 오래된 고목을 보는 듯한 그런 넉넉한 편안함을 느꼈다. 전 혀 모르는 사람인데,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있는 사람을 보는 듯 부드러운 감정이 느껴진다는 것이 이상했다.... 베이나트가 말했다. "헛된 희망-이라고도 하지. 하지만 아키, 그래도 그것을 얻지 못했 고...아마도 평생 얻지 못하더라도, 사람은 그래서 사는 거란다." "왠지 슬프군요." "그건 자기가 알아서 할 바지.....그래, 아키--솔직히 말하지. 주절주 절 쓸데없이 늘어놓고는 있지만,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이거란다. 사 람은 말이다, 죽어야 할 이유는 수 십 가지가 필요하지만 살아야 할 이유는 단 하나로도 충분한 법이니까....그 하나라도 있다면, 그것이 라도 지켜야 하지 않겠니." "돌아 가라는 말씀인가요?" "그래." 아킨은 아침 햇살과 함께 스며들어오는 아주 오래된 기억들과 최근 의 기억들, 그리고 지금 앞에 있는 베이나트와 그 품에 안겨 있는 유제니아를 보며 돌아가지 말아야 할 수 십 가지의 것들을 떠 올렸 지만, 그 비겁한 도주를 하면서 아킨은 돌아가야 할 이유 역시 그만 큼이나 많았다는 것을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다만, 떠올리지 못했던 것뿐이다. 두려움이 크고, 그 두려움을 외면하고 싶었고, 결국에는 아킨이 그 동안 살아왔던 삶과 기억 자체를 거부하고 싶었던 것이다. "베이나트-" "오냐." "다음부터는 유제니아 데리고 여자 친구니 뭐니 하지 마세요. 아니 니까요." 베이나트는 너무나 갑작스런 말에 황당하다는 듯 아킨을 보았다. 아 킨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피식 웃었다. 그러자, 베이나트는 아직 무 슨 이야기가 오고 가는 지도 모를 정도로 푹 잠든 유제니아를 꾹 안으며 말했다. "그럼 얘는 내가 가져도 되겠네?" "만만찮은 상대와 대결해야 할 텐데요?" 베이나트가 이상하다는 눈초리를 보냈다. "혹시 아는 놈이냐?" 아킨은 그저 웃기만 했고, 그것이 베이나트를 괜히 화나게 했다. "약혼자?" "그건 아닌데요." "오빠?" "비슷하긴 하지만, 그 정도로 느긋한 위치는 아닙니다." "어허, 그렇다면 직접 담판을 지어보아야 한다는 말이군." "어림없어요." 솔직히 아킨은 늘씬하고 잘생긴 데다가 성격마저 상냥한 세르네긴 과 능글맞은 '아저씨'인 베이나트는 비교하는 것조차 미안했다. *********************************************************** 작가잡설: 유즈는 주로 나이많은 남자에게만 어필하는 듯;;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26장 *************************************************************** [겨울성의 열쇠] 제26장 새벽의 여정 제118편 새벽의 여정#1 *************************************************************** 휘안토스는 케올레스가 아주 기뻐할 거라는 걸 알았고, 그 때문에 아버지인 사이러스보다 케올레스에게 먼저 말한 것이었다. 기쁨은 많은 의심을 희석시켰고, 늙은 케올레스는 예전과 비슷한 상황이 되 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케올레스가 물었다. "어찌 아셨습니까, 휘안토스 님?" 여기서부터 휘안토스는 솔직하게 말했다. 우선은 보름 근처에 자신 과 아킨이 어떤 공명을 하는 지 말했고, 케올레스가 납득을 하는 눈 치이자 전날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나 아킨과 닿았다는 것을 말했 다. 그리고 휘안토스는 자신이 본 광경에 대해서는 설명을 자제했 고, 휘안토스가 마법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생각하는 케올레스는 그 것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사실, 휘안토스는 압셀론에 머물 때 혹시 해서 한번 마법에 대해 공 부해 본 적은 있었다. 그러나 휘안토스는 곧 자신이 그런 쪽에 전혀 재주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킨이 느닷없이 마법으로 바꿀 거라 선언했을 때, 휘안토스는 자신 이 마법에 능력이 없었기에, 즉 '에칼라스의 축수자'가 아니었기에 아킨 역시 그럴 거라 짐작하고는 동생이 일주일이나 이주일 뒤에 기사부로 돌아올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아킨에게는 그 것이 있었다. 저주가 아킨에게만 떨어졌듯, 그 마법사의 자질 역시 아킨에게만 있었던 것이다. 설명이 끝나자, 케올레스는 약간은 화색이 도는 얼굴로 휘안토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믿을 만 합니까?" "그건 모릅니다. 어쩌면 그저 제 착각일 수도 있고 그저 이상하고 헛된 꿈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보름이 한참이나 지나고 역시 한 참이나 남은 상태이니까요." 케올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휘안토스 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제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멜버그라 하셨습니까?" "네. 그곳에 정말 화재가 났는지, 그것만 알아보시면 됩니다." "정말 났다면 어쩌실 생각입니까?" "조용하게라도 그곳까지 다녀오고 싶습니다. 제 동생 일이니까요." 케올레스의 흰 눈썹이 꿈틀 움직였지만, 그리 반대하는 기색은 없었 다. 그 역시 그것이 아주 적당하다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휘안토스는 마음만 먹는 다면 곤란할 정도로 찾기 어려운 곳으로 숨어들게 뻔한 아킨을 찾을 생각은 없었다. 그가 생각하는 방법은 그 소녀였다. 차림새로 보니 그리 귀한 집 아이 같지는 않았 고, 그렇다고 성의 하녀 같지도 않았다. 아마도 그 하멜버그 수하의 누군가의 친척이거나 성내 다른 이의 딸일 것이다. 그리 쉬운 대상 임에도, 그녀는 놀랍게도 아킨의 비밀을 알고 있고 아킨도 그녀를 어느 정도 신뢰하고 있다. 자켄이나 메리엔처럼 그를 위로하고나 보 살펴 주는 존재가 아니다. 또, 켈브리안 공주의 경우처럼 어느 정도 의 두려움을 전제로 한, 벽 하나를 사이에 놓은 관계인 것도 아니 다. 굳이 찾자면, 아킨이 한번 본가로 데리고 왔던 루첼 그란셔스라 는 청년과 비슷한 관계 같았다. "곧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휘안토스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케올레스가 불편하 게 기침을 토하더니 말했다. "휘안토스 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네, 하십시오." 휘안토스는 그리 답하며 케올레스의 안색을 살폈다. 주름이 묻힌 그 의 눈동자 안에는 아주 오래 전부터 생각해 온 무언가가 숨겨져 있 었으나, 쉽사리 꺼내놓지는 못하고 있었다. "케올레스 님?" "얼마 뒤면 제가 휘안토스 님과 사이러스 님께 마법사 몇 사람을 소개할 것입니다." 휘안토스가 웃었다. "보조가 필요하신 겁니까?" "아니, 후임이 필요합니다." 휘안토스는 잠시 아킨에 대해 잊었다. 아킨은 잠자코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베이나트는 유제 니아와 함께 잡은 물고기를 나뭇가지에 끼워 넣어 그 옆에 세워 놓 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베이나트는 물장구만 쳤고, 물고기를 잡은 것은 모두 유제니아였다. 유제니아는 낚싯대 없이도 별 어려움 없이 큼직한 물고기 서너 마리를 잡아 버드나무 가지에 끼어 베이 나트에게 건네주었고, 겨울잠 들어가기 직전이라 살이 퉁퉁하게 오 른 개구리까지 내 밀며 이것도 아주 맛있을 거라고 제안했다. 베이 나트은 그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였으나, 아킨은 버드나무 가지에 꿰 여 꿈틀대는 그것들을 보는 순간 입맛이 싹 달아나 버렸다. 그리고 지금, 베이나트가 죽 뻗은 개구리 세 마리를 불에 굽는 모습 을 보자, 아킨은 다시 속이 거북해졌다. "그런.....것도 먹을 수 있었습니까?" "그럼. 얼마나 맛있는데! 예전에 아주 좋아하던 별식이었는데....이런 타겠다." "......이상.....하군요." "비쩍 마른 네 영양 보충 좀 하라고 그 애가 직접, 수고스럽게, 일 부러 잡아다 준거라고. 감사할 줄 알려무나. 그런데 너는 예전에 뭐 하던 놈이기래 그렇게 입이 짧냐?" 아킨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그런 걸 먹는 게 이상한 겁니다!" "그럼 먹으라고 가져다 준 유제니아는 뭐냐, 괴물? 좋아하는 난? 알 아. 네가 날 이미 괴물 취급하고 있다는 건....하지만 착한 유제니아 까지 식습관 이상한 괴물 취급하는 건 너무한 거 아냐?" 아킨은 에크롯사에만 개구리를 먹는 식습관이 있는 거라 우기고도 싶었지만, 이럴 때 베이나트가 '난 다른 곳 출신인데?' 어쩌고 하면 서 아킨을 아예 외계인 취급할 것 같아 집어치웠다. 게다가 서로에 대해 전혀 모른다 해도 무방한 상태에서, 베이나트는 아킨을 과거 따위 전혀 신경 쓸 필요 없는 꼬맹이 취급하고 있었으 니 막 나가고 있었고, 아킨은 아킨 대로 어디부터 어떻게 물어보며 베이나트의 정체를 파악해야 할 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 상태라, 둘 다 이렇게 너무나 실없는 짓들만 하며 시간낭비 하고 있는 것도 영 못마땅했다. 베이나트가 다 익은 개구리를 내밀었다. "한번 먹어 봐. 맛 괜찮다니까." "....." 아킨이 쏘아보자, 베이나트는 입 닥치고 개구리를 뜯어먹기 시작했 다. 아킨은 이제 유제니아를 '아주 사랑스러운 아이입니다.' 하고 말하던 세르네긴을 사기꾼이라 단정하기로 했다. 그에게는 얼마나 사랑스러 웠는지 모르겠으나, 아킨이 오늘 하루 종일 지켜본 유제니아는 배고 프다, 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근처의 냇가로 달려가서 당장에 물고기 서 너 마리를 잡을 수 있을 정도의 활기찬 생활력의 소유자였으며, 거의 반나절을 모르는 남자 품에 안겨 자고 일어나도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태평함의 소유자였다. 예전에 만났을 때 그런 행동들이 하나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는데, 슬슬 기억을 되찾기 시작하자 여 태 아킨이 만나왔던 소녀들과 비교하게 되어 하나같이 다 특이하게 보였다. 공주치고는 아주 대범했던 켈브리안마저도 유제니아에 비하 면 너무나 곱게 자란 아가씨였다. 베이나트가 개구리 한 마리를 다 먹어치우는 동안 아킨은 생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걸 어떻게 먹나, 가 그의 고민이었다. 그렇 게 큰 생선을 통째로 먹어본 적도 없었고(대부분 썰어서 접시에 놓 아주는 것을 포크로 곱게 찍어 먹어 왔을 뿐이었다), 그나마도 나이 프 없이 먹어 본 적이 없었다. "생선의 고귀한 희생에 대한 묵념이라도 드리는 거냐? 안 먹고 뭐 해?" "......." 더 이상 베이나트가 잔소리하게 놔두고 싶지 않았던 아킨은 별 수 없이 생선을 뜯어먹었지만,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아키, 지금 뭐 하는 거야?" 아킨은 순간 생선을 놓치고 말았다. 유제니아가 뒤에서 고개를 불쑥 내밀고 있다가, 손을 뻗어 그 물고 기를 집어 아킨에게 다시 건네주었다. 그리고 한시간 전에 성으로 돌아갔던 유제니아는, 옆구리에 바구니 하나를 끼고 있었다. 그녀는 아킨을 한번 슬쩍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곱게 컸나 봐. 그렇게 새색시처럼 곱게 갉아먹는 걸 보니." 왕자로 컸다, 라고 답하기는 곤란한 아킨은 생선을 입에 문 채 고개 만 돌렸다. 유제니아는 으쌰, 하더니 베이나트와 아킨 사이에 바구 니를 놓았다. 베이나트가 물었다. "뭐냐, 그거?" "냄비 하나랑, 감자 몇 개. 그리고 사냥 해 온 토끼 한 마리랑, 향초 들이죠." "그래서 뭐 해주려고?" "은인들인데, 이렇게 노숙시키는 게 미안해서......뜨끈한 거 하나라도 끓어 주려고 왔지요. 걱정 말아요. 설거지까지 다 해주고 갈 테니. 그냥 편하게 먹기만 해요." "사냥?" 아킨이 묻자 유제니아는 축 늘어진 토끼를 흔들며 말했다. "성으로 돌아가다가 토끼 한 마리가 있기래 잡은 거야. 그냥 들고 올까, 하다가.....먹을 만하게 만들어 주려고 이렇게 준비해 왔지. 아, 걱정 마. 난 벌써 저녁 다 먹었으니까. 성이 워낙에 어수선해서 빵 이랑 수프 한 접시 먹고 온 거지만...그래도 배고프네." 그러자 베이나트가 개구리를 내밀었다. 아킨이 그런 베이나트를 노 려보았지만, 베이나트는 환하게 웃으며 무시했다. 앞의 사정을 모르 는 유제니아는 아킨이 어떤 표정인지, 어떤 기분인지도 모르는 채 개구리를 받아 그 앞발을 뜯어 입에 물며 물었다. "그런데 아키는 안 먹어?" "........" 유제니아가 만들어준 스튜는 솔직히 말하자면 거의 종일 굶은 둘에 게 은혜를 갚는 수준은 이미 넘어서 하늘같은 은덕을 베푸는 수준 이었다. 유제니아가 개구리 한마리와 스튜 한 사발을 먹는 동안, 또 아킨은 이런 저런 불편 때문에 양껏 먹지 못하는 동안(거의 쪼아먹 는 수준에 가까웠다), 베이나트는 거의 한 솥을 삭삭 비우고 물고기 들마저 모두 먹어 치워 버렸다. 유제니아가 '아키 것도 좀 남겨 주 시지...' 하고 구슬프게 바라보자, 베이나트는 물고기 한 마리는 남겨 두었다. "내가 좀 오래 굶었거든. 그리고 덩치를 봐라, 덩치를. 난 이 정도 먹어야 되지만, 저 공주님 녀석은 저 정도만 먹어도 충분하다고." 그 공주, 라는 칭호에 아킨은 치를 떨었지만 지금의 꼬락서니가 그 칭호에 너무나 잘 어울리기에 고개만 픽 수그렸다. 루첼의 한심하다 는 눈빛은 그래서 뭐 어쩔 거냐, 라는 눈으로 마주봐 줄 수 있었지 만 유제니아의 10살 꼬마 보는 듯한 눈빛은 견디기 어려웠다. 남자 답다, 멋지다 라는 찬사를 기대하는 바 아니었지만 이건 너무나 참 담하다. 멀쩡한 인간 취급도 못 받는 것 아닌가. 어쨌든 식사가 끝나자, 베이나트는 솥을 들고는 한번 흔든 다음 유 제니아에게 건네주었다. 유제니아는 그것을 받아 안을 들여다보곤 어라, 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깨끗해졌네요?" 겨우 한 그릇과 한 마리를 다 먹은 아킨은 빈 사발을 거의 무의식 적으로 베이나트에게 건네주었고, 베이나트는 그릇 세 개를 한번 들 었다 놓고는 솥 안에 넣어 주었다. 그것 역시 방금 씻은 듯 깨끗해 져 있었다. "세상에, 이런 마법도 있어요?" "물론. 그것이야말로 마법의 근본 취지 아니겠냐. 생활을 윤택하고 편리하게~ 그리고 아키, 다음부터는 네가 알아서 해라. 내가 네 하 인이냐? 방법 좀 가르쳐 주세요, 해야 정상이지 그냥 툭 넘기고 말 게." "......" 그제야 아킨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하지만, 그 사발로 베이나 트의 머리를 후려갈기지 않은 것도 진심으로 후회했다. *********************************************************** 작가잡설: 아키야말로 어디 내놓기 무서울 정도로 곱게 큰 도련님이 지요.......(제 손으로 한 끼 챙겨먹기도 힘든....;;) 휘안은 어떠할까, 하고 생각중인 아울.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26장 *************************************************************** [겨울성의 열쇠] 제119편 새벽의 여정#2 *************************************************************** 유제니아가 짐을 챙겨들고 돌아가자, 베이나트는 남은 불을 살펴보 고는 아킨에게 말했다. "장작 좀 해 와라. 저기, 저 쪽에 많은 것 같구나." ".......어떻게 하는 겁니까?" "이 만한(그리고 팔뚝을 내 보였다)걸로 한 짐 해 오면 되. 부러뜨 린다, 라는 아주 전통적인 방법을 권하마." 아킨은 그의 굵은 팔뚝을 울적하게 바라보고는 몸을 일으켰다. 불은 베이나트가 피우고 식사는 유제니아가 다 준비 해주는 동안 아킨이 한 일이라고는 옆에 앉아 있는 것뿐이었던 지라, 못한다 어쩌고 하 고 주저앉아 있기는 곤란했다. "좀 오래 걸릴 것 같은데 괜찮습니까?" "물론." 아킨은 그렇게 답하는 베이나트를 물끄러미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베이나트는 그냥 씨익 웃었다. 유제니아는 이 베이나트와 아킨이 당연히 아는 사이라 생각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지만, 아킨은 그리 할 수 없었다. 기억이 없을 때라면 모르지만, 이제 거의 대부분의 기억이 돌아온 상태다. 아직 갈피를 잡기 어렵다 할 지라도, 적어도 롤레인이 탈로스와 스승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 베이나트에 대한 말을 꺼냈던 적은 단 한번 도 없다는 건 분명히 기억한다. "당신....정말 정체가 뭡니까? 몇 번째인지 모르지만, 좀 더 가르쳐 주는게 서로에게 도움이 될 듯 한데요." "일단은 나무나 해 와라. 그 동안 답할 만한 말을 생각해 두지." "그것도 정리해야 하는 겁니까.......아니면 둘러댈 말을 생각해야 하 는 겁니까?" "아키, 가끔은 넘어가 주는 방법도 써 보려무나. 의심난다고 다 말 하지 말고." 어째, 이 사람은 슈마허보다 더 능글맞은 것 같다. 결국 포기하기로 한 아킨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베이, 당신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지만.....적어도 호감은 가지고 있 어요.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그것도 의심해 봐야 하는 것 아니니? 이유 없이 도와주는 것 말이 다." 아킨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당신 자신을 위해서 그 일을 했다는 걸 모를 정도로 바보 는 아니에요. 또, 유제니아를 구해주러 성에 갔던 게 아니라는 것도 요. 저는 당신의 정체를 알고 그 다음 일을 제대로 생각하고 싶은 것 뿐, 겁먹은 병아리처럼 몸 움츠리는 게 아닙니다." 베이나트가 피식 웃었다. "좀 섭섭하게 들리네. 고마운 아저씨라고 순진하게 믿거나, 행여나 날 잡아다 어디다가 이용해 먹으려고 저러나, 싶어서 경계하는 편이 더 귀여운데." "할 줄 아는 건 별반 없지만 눈치가 없는 건 아니니까요. 또, 언제 탈로스가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서로 도울 만한 사람이, 그것 도 되도록 능력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잖아요." 베이나트의 얼굴에 떠돌던 웃음이 사라졌다. 아킨이 말했다. "장작 가지고 올 게요." 그러나 아무런 답이 없었고, 아킨은 탈로스의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 한 것이었다고 짐작하며 자리를 떴다. 이제 하루가 지났고, 탈로스에 대한 걱정은 해가 중천에 걸렸을 때 부터 시작되어 시시각각 커지고 있었다. 늑대로 변했을 때의 기억이 있으니, 그 때의 탈로스가 아킨에게 밀려서 놓아준 것이 아니라 순 전히 '얼결'에 놓친 것뿐이라고는 알고 있다. 무섭군- 아킨은 등골이 오싹한 것을 느끼며 그렇게 생각했다. 떡갈나무가 우거진 숲은 관목들과 풀들도 무성하게 자라 복잡했다. 아킨은 너무 멀리 가지 않도록 조심하며 쓸만한 나뭇가지를 찾았다. 비가 온 곳은 성 근처일 뿐이라, 나무들은 다행히 고를 필요도 없이 적당히 말라 있었다. 소쩍새 우는소리가 들려오고, 그 짧게 끊어지 는 울음과 함께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지만 아킨이 주변을 보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눈은 누구보다 밝다. 가끔, 보통 사람보다 몇 배는 되는 시력과 청력, 완력이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저주의 탓이라지만, 어렸을 때 그것에 대한 책들 을 몇 개는 상세히 읽어봤던 아킨은 다른 사람의 경우 보름 이외에 는 눈빛 말고는 아무런 징후도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비정상적인 감각은 그 누구에게도 없었고, 있다는 말도 없었 다. 그러다가, 아킨은 문득 사람들의 말소리를 들었다. 아킨은 성 사람 들이 숲으로 들어왔나 싶어서 주변을 둘러보며 몸을 숨길 곳을 찾 았다. 쓸데없이 사람들을 만나서 흔적을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주 변에는 온통 휘어지고 우거진 나무 투성이인데다가 어둡기도 해서, 아킨은 어렵잖게 그들로부터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아킨은 큰 나무 둥치에 등을 붙이고는 잠자코 있었다. 곧 소리가 더욱 가까이 들려오고, 그들이 끌고 있는 말들의 말발굽 소리도 들려왔다. 그리고 그 안에서 들려온 또 다른 소리에, 아킨은 몸이 확 굳는 것을 느꼈다. 개 짖는 소리였다. 크릉, 컹컹--헉헉. 아킨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숲 속에서 개를 만나는 건 정말 질색이다. 특히, 저렇게 거창하게 짖어대는 사냥개는 말이다. 그 때 개가 갑자기 크릉-하고 으르렁댔다. "토끼라도 발견했나?" 아킨 또래일 듯한 소년의 목소리였다. 아킨은 입술을 꾹 짓누르며 허리를 더듬었다. 그러나 송곳 한 자루 없었다. "토끼는 아닌 것 같군." 여자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짓눌린 듯 어눌한 목소리를 아킨은 분 명히 기억하고 있었고, 정말 더럽게 걸렸다 싶었다. 쉿-하고 여자가 모두를 조용히 시켰고, 사냥개마저도 그녀의 명령에 끄응--하고 신음 같은 소리를 내더니 으르렁대는 걸 뚝 멈추었다. 그리고 풀을 눕히며 조용히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킨은 도망 칠 순간을 노리며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발소리가 멈추는 순간, 아킨은 발을 퉁겼다. 부웅-육중한 도끼 날이 갑자기 등뒤에서 솟아 나왔고, 아킨은 오른 쪽으로 몸을 돌려 피했다. 그리고 몸을 퉁겨 검을 뽑아드려는 그녀 의 일행인 소년을 향해 달려들어, 그의 명치에 주먹을 내리 꽂았다. "큿-" 신음과 함께 소년의 몸이 흔들렸다. 아킨은 그 정강이를 걷어차고 팔목을 휘감아 힘을 꾹 주었다. 마하가 도끼를 당겨 비껴들고는 그 큰 몸을 퉁겼다. 그리고 그녀의 발이 바닥을 찍고, 그 발을 축으로 몸을 돌리며 아킨의 정수리를 향해 도끼를 내리 찍었다. 아킨은 도 끼날을 피하며 소년의 팔을 당겼다. "이런-!" 마하가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며 급히 도끼의 방향을 돌렸다. 도끼 의 방향이 휘어지며, 그 공격에 힘을 실었던 마하의 몸도 볼썽사납 게 흔들렸다. 그 순간에, 아킨은 한번 더 소년의 허리를 걷어차고는 드디어 검을 빼앗았다. "쿠이!" 소년이 외쳤다. 개의 이름인지, 명령어인 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외 치는 순간 시커먼 사냥개가 아킨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킨은 허리를 비틀고는 검을 휘둘렀다. 개의 목이 댕강 잘리며 바닥으로 떨어졌 고, 풀과 흙바닥에 피가 쏟아졌다. 순간 저 쪽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오르더니 아킨과 그들 쪽으로 쏟 아졌다. 마하는 갑자기 도끼를 뒤집어 잡더니, 그 자루로 아킨의 가 슴을 세게 찍었다. "윽-!" 갑작스런 빛 때문에 흐트러졌던 아킨은, 그 자루에 맞아 나가 떨어 졌다. 그리고 아킨이 발을 채 세우기도 전에 차가운 도끼 날이 그의 목옆에 닿았다. 최근 거의 쓰지 않은 듯 그 날에서 기름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해치지는 않겠습니다, 암롯사 왕자." 아킨은 마하의 말에 놀라기보다는 오히려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 었다. 마하가 원하는 대로 해 준다면 해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녀 는 어쨌든 귀한 신분의 여자를 모시는 기사였다. 스스로 인정한 이 상, 모시는 주군과 비슷한 신분의 사람에게 함부로 손을 댈 수 없 다. 아킨이 물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제가 모시는 칼라하스 공주님께서 그런 가설을 말씀해 주셨을 뿐 입니다. 저는 그것이 맞는 지 시험해 본 것뿐이고요." "악신의 잔챙이 취급받는 것보다는 낫군요." 마하가 피식 웃었다. "그 실례에 대해서는 너그러이 잊어 주십시오. 상황이 그러하다면 누구나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답니다." "방금 전에는 정말 죽일 생각 아니었습니까." "당신은 제 도끼날이 어디에서 멈출 지 모르지 않습니까. 정말 당신 을 내리 찍었을 지, 아니면 이렇게 멈추었을 지." 아킨은 그녀 실력으로는 그리 방향을 비틀고 꺾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할 거라 믿어주기로 했다. 휘안토스라면 몰라도, 마르실리오 정 도는 몇 분만에 바닥에 메다꽂을 수 있을 실력이다. 그리고 그리 생각하며 아킨은 제발 그런 날이 오기를 정말로 간절 하게 빌고 있었다. 마르실리오와 함께 하는 나라의 명예보다는, 예 전에 아킨의 배에 칼을 꽂아 넣은 것에 대한 분노가 더 큰 것은 어 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 저더러 어쩌라는 겁니까?" "제 주군을 만나 주시길 바랍니다." "그녀가 제가 이곳에 나타날 줄 알고 당신에게 그런 명을 내린 것 같지는 않군요." 즉, 마하 자신의 결정이 아니냐는 것이며, 기사 혼자 그런 식으로 결정하여 상대방의 신변을 주군에게 인도한다는 것은 그 상대방이 자신의 '포로'라는 뜻. 즉, 아킨으로서는 매우 달갑지 않은 뜻이다. 그러나 마하는 아킨의 조용한 항의에 별반 당황하지도 않았다. "제게 있어 최우선은 제 주군의 안전입니다. 충분히 안심할 상황이 아닌 한, 한 나라의 왕자-특히 적국의 왕자라면 더욱 어쩔 수 없지 요-에게라도 주의해 두는 것이 의무입니다." "적국...이요?" 아킨은 어차피 휘안토스와는 달리 왕실들 일에는 상관없이 자라왔 으므로, 어떠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알아도 그 얼굴은 거의 몰랐 다. 그러다, 아킨은 지금 기억과 현재가 뒤죽박죽인 상황이라 금방 떠올리지 못했던 것이 무엇인지 그제야 깨달았다. "칼라...하스!" 아킨이 기억하기로는 방금 전 마하가 꺼낸 칼라하스라는 이름은 바 로 델 카타의 공주 이름이었고, 아킨도 압셀론에서 멀리서나마 본 적이 있는 왕자 칼리토의 여동생이기도 했다. 그제야 아킨은 마하가 '적국'이라 말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델 카타와 암롯사가 싸우지 않 는 곳은 황제령 뿐이다. 정말 더럽게 걸렸네, 하고 아킨은 생각했다. 여기서 끌려간다면 정 말 최악일 것이다. 그 때 숲을 헤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사냥꾼 차림새의 호리호리한 중년 남자 하나가 나왔다. 그가 바로 방금 전 빛을 쏘아 던졌던 마 법사인 것이다. 아킨은 그가 예전에 숲 속으로 들어왔던 일행 중 한 명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가만, 그럼.....그 마법사들도 모두 델 카타의 마법사들이 었나? 그 남자가 아킨을 보더니 마하에게 물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누구입니까?" "차차 알게 되실 겁니다. 그래, 찾았습니까?" 그러자 남자는 한숨을 푸욱 내 쉬었다. "전혀-- 정말 숲이 집어삼킨 것 같습니다. 그 전에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흔적도 전혀 찾을 수 없었습....." 그렇게 말하던 마법사가 갑자기 얼굴이 흙빛이 되더니 소매 자락을 당겼다. "조심하십시오!" 마하가 도끼날을 더욱 바짝 밀며 아킨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아킨 은 그 꼴로 있으니, 오늘 유제니아가 먹을래, 하고 흔들던 토끼 생 각이 났다. 도살당하기 직전에 이 꼴이 아니었을까, 하고. 그런데 갑자기 마하가 이를 뿌득 물더니, 창백한 얼굴로 몸을 뒤틀 려 했다. 그녀 옆에 있던 소년 역시 마찬가지로, 말의 고삐를 틀어 쥔 채 이마에 힘줄이 돋을 정도로 힘을 꾹 주고 있었지만 꿈쩍도 안하고 있었다. 또한, 마법사는 숨이라도 막힌 듯 한마디도 못하고 끅, 끅 신음을 삼켰다. 갑자기 이 사람들이 왜 이러나 싶었던 아킨은 혹시 해서 슬쩍 몸을 비틀어 보았다. 마하에게 잡혔던 옷깃이 스르르 흘러나와도 마하는 꿈쩍도 하지 못한 채 어둠만 노려보고 있었다. "나와라--!" 마하의 천둥 같은 외침에, 어둠 속에서 큰 그림자가 하나 불쑥 튀어 나왔다. "어이, 너무 힘 주지 말아요. 해 뜰 무렵이 되면 풀릴 테니......이봐, 그렇게 힘줘 봤자 신경통 밖에 안 온다고 내가 내 입으로 말해야 해?" 베이나트였다. *********************************************************** 작가잡설: 이제 정말 다 따라잡았습니다. ^^; 이제부터는 제 홈페이지, 마천루 작가 연재 게시판, 하이텔과 연재속 도 맞춰서 올라갑니다......무한연타행진은 여기서 스탑~ 이제 정기 연재로 들어갑니다. ^^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26장 *************************************************************** [겨울성의 열쇠] 제120편 새벽의 여정#3 *************************************************************** 베이나트는 하나 하나 살펴보다가 중년 마법사에 눈이 멈추었다. 마법사는 성난 까마귀 울부짖듯 날카롭게 외쳤다. "네, 네놈! 뭐 하는 놈이냐!" "자네랑 같은 직업 종사자. 동업자끼리 돕지 않는 게 우리네 철칙인 거 자네도 잘 알 테니 너무 원망하지 말아 주게나." 그러자, 마하가 말했다. "풀어 주십시오, 마법사. 저희들은 델 카타의 칼라하스 공주전하의 호위대입니다. 그분의 안전을 위해 어서 돌아가야 합니다." 베이나트는 마하를 흘끔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난 남의 나라 공주한테는 별 관심 없거든. 가만, 아키 야. 그 나라 공주 예쁘냐?" 아킨은 크르르릉 한숨을 내 쉬고는 답할 가치도 못 느끼겠다는 듯 돌아섰다. "베이나트, 헛소리 할 시간에 어서 가요." "아, 서둘지 말아라. 이 마법사에게 볼일이 있거든. 아키야, 너도 이 녀석 기억하지?" 아킨은 별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베이나트는 만족한 듯 씨익 웃 더니, 얼굴의 핏기가 사악 가시는 마법사를 보며 물었다. "이름이 뭐요?" 마법사는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답했다. "달스로커 프라운." "말하지 마십시오!" 마하가 날카롭게 외치자, 그 달스로커란 마법사는 부들부들 떨면서 자기 의지가 아니라는 듯 애처로운 눈빛을 보냈다. 아킨은 그의 모든 몸이(심지어 입마저도) 베이나트의 뜻대로 움직이 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대단하군, 이렇게 빠르게 그런 마법을 쓰 다니. 하지만 너무 고약하긴 하다. 높은 분이 꽤나 신임하는 기사 앞에서 저런 꼴을 보이게 하다니. 베이나트는 흐흠...하고 턱을 두드리더니 말했다. "아키야,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으니.....그 동안 너는 저 말에 걸린 배낭을 좀 뒤져봐라." "무슨 소리입니까?" "돈이랑 식량을 꺼내란 말이다. 또, 쓸만하다 싶은 것...그러니까, 칼 같은 것도 챙겨라. 저 꼬마 것도 챙겨 놓고." 그렇게 말하며 그는 리이, 라고 불렸던 소년을 가리켰다. 그 소년은 분노와 모욕에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베이나트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아킨은 베이나트의 의견을 존중해, 소년의 허리에 꽂힌 단검 을 뽑아 허리에 찼다. 장검은 너무 눈에 뜨이는 데다가 손에 익지도 않아 건드리지도 않았다. 그리고 말 안장에 매달린 그 배낭을 떼어 안에 든 것을 쏟아냈다. 달스로커의 눈이 그곳을 계속 흘끔 흘끔 바라보자, 아킨이 그를 가 리키며 베이나트에게 말했다. "베이나트, 저 분께서 당신에게 할 말이 무척 많은 것 같으니 얼른 물어 보십시오." "아, 그래." 달스로커의 얼굴이 아킨에 대한 원망으로 절절이 젖어드는 동안 아 킨은 그 배낭 안에 든 돈주머니와 식량 주머니를 챙겼다. 돈은 아킨 이 보기에도 꽤나 많았고, 그 정도면 로메르드까지 가고도 남을 듯 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던 아킨은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잘 하 는 짓이다, 아키. 왕자씩이나 되는 녀석이 여기서 델 카타의 공주일 행을 '털고' 있다니. 베이나트가 달스로커에게 물었다. "당신네들, 주인이 잊혀진 숲에는 왜 들어온 거요?" "그건....저기...." 아킨은 주머니의 입구를 조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이, 제가 물어봐도 될까요?" "응? 네가 왜?" "몇 개 안 되니 우선 물어보고 싶어요. 아, 제게도 솔직히 답해줍니 까?" "물론이다." 아킨은 베이나트가 허락하든 말든 그 달스로커라는 남자에게 물었 다. "마법사, 탈로스가 가지고 있고, 지금 당신의 리더인 듯 보이는 그 소년이 찾는 '스승의 유산'이란 대체 뭡니까?" 베이나트가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달스로커의 얼굴에 핏 기가 사악 가셨다. 아킨이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의 리더.....이렇게 말하니 불편한데, 그 남자 이름이 뭐죠?" "악튤런 파노제." 아킨은 눈을 가늘게 떴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유산이 대체 무엇이기래 악튤런 그 사람 이 은둔자의 탑에 걸린 오래된 봉인을 뚫고 탑 안으로 들어온 겁니 까." "저, 저는 모릅니다." "어째서죠?" "저희는 그, 그저 명을 받고..." 아킨은 빙긋 웃었다. "당신의 왕인 랑기온 대공왕도 그것을 매우 원하나 보군요. '명'이라 말하시는 것을 보니." "아니, 칼리토 폐하이십니다. 작년에 즉위하셨습니다...." 그리 답하다가 마법사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퍼렇게 질렸다. 마 하가 정말 씹어 삼킬 듯한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으니. 스스 로 인정해 버린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는데-! 달스로커는 정말 죽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아킨은 만족한 듯 말했다. "이제 대충 정리가 되는군요. 좋습니다, 그런데 성에는 왜 불을 지 른 겁니까?" "그, 그곳에 결계를 짜는 마법원의 한 축이 숨겨져 있었기 때문입니 다." "......그래서 성에서 불이 나는 순간 결계가 풀린거군요." 마하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당신은 대체 어떻게 아는 겁니까." "탈로스 고르노바 님은 제 보호자입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제 몸은 밖으로 거의 나오지 못할 정도로 좋지 못하고, 그 때문에 그곳 에서 '요양'중이었습니다. 그러나 요 며칠 전에 이상한 사람들이 숲 에 얼씬거리기래 그분께 보고했고, 그 분께서는 충분히 주의하셨지 만 어제 봉인이 풀리고 말았죠. 저는 그분의 명에 따라 숲 밖으로 피신했습니다." "컬린의 유산은 대체 혹시 아는 바가 있소?" 이번에는 마법사 달스로커였다. 그러나 아킨은 답하지 않았다. "지금 악튤런 파노제는 어디 있습니까?" 달스로커는 끙하니 신음을 삼켰지만, 온 몸에 걸린 마법 때문에 별 수 없이 진실을 토해냈다. "어제 결계 안으로 들어가신 뒤 실종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수색 중이었군요." "그, 그렇습니다." "하지만 충고하는데, 일이 그리 되었다면 지금 당장 아무 데나 터 잡고 야영이나 하시죠." "뭐요?" "당신들이 찾는 다고 결계가 찾아지는 게 아니니, 악튤런 파노제라 는 그 사람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마 법원의 축이 무너졌다고 해도 그 분께서는 또 다른 축을 만들어 내 세울 것입니다. 물론 예전보다 견고하지는 못할 테지만, 보통 마법 사들은 찾아 내지 조차 못할 테지요. 그러니 헛수고하지 말고 쉬기 나 하십시오." 달스로커가 입을 쩍 벌렸다. 아킨은 손을 허공을 치듯 가볍게 휘둘러 물어 볼 것 다 끝났다는 몸짓을 보내고는 베이나트에게 말했다. "이제 당신이 물어 보세요." "아, 응......어이, 마법사. 그런데 당신 네 공주 몇 살이오?" 달스로커가 정말 죽여 버리고 싶어 미치겠다는 눈으로 베이나트를 노려보았으며, 리이 역시 몸이 굳은 채로 눈물까지 쏟아냈다. "저와 동갑입니다." 아킨이 대신 말해주었다. "열 여덟이라......어린애라서 그렇게 겁이 없었구만. 쳇-" "이상한 소리하면서 화제 돌리지 마십시오. 그건 왜 물어 본 거죠?" "네가 내가 물어볼 건 다 물어봐서 할 말이 없어졌어. 단지, 그 공 주라는 여자가 한 짓이 꽤나 대단한 짓이라.....대체 몇살이나 되었길 래 그리 간 큰 짓을 하나 싶어서." "그렇다면 별로 알아낸 것도 없겠군요." "하나 있지. 어쨌든 오늘 새벽에 이 고장을 떠나야 한다는 것, 그것 하나만은 분명하다." 아킨은 발을 멈추었다. "저 말인가요?" "너랑 나, 둘 다." "어째서...." "우선....말이다, 내 추측인데 한 나라인 델 카타가 은밀히 추진하는 일이라면 대체로 막강한 적을 거꾸러뜨릴 가장 좋은 방법이거나, 들 킨다면 그 적에게 먹음직한 약점을 보이는 것 둘 중 하나지. 그리고 암롯사와 델 카타가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적대관계란 것은 알만 한 사람은 다 알아. 그런 상황에서 왕자에게 자기네들 비밀을 알려 줘 버렸으니, 가만히 있겠나?" "별로 놀라지도 않네요." "뭘? 네가 왕자라는 거?" 아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베이나트는 그저 웃기만 했고, 자 신이 놀라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그냥 어물쩍 넘어가 버렸다. 아 킨은 그것이 영 걸렸지만, 더 묻지는 않기로 했다. "제 사정은 그래서 그렇다지만, 당신은 대체 왜 도망가야 한다는 거 죠?" "난 탈로스 때문이지." 아킨은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정확히 말 해주세요." "오냐....내가 보기에 너는 탈로스의 보호를 받은 게 아니라 '사육'을 받은 것 뿐이야. 탈로스에게 사랑스런 존재란 제 누이동생과 그 조 카들뿐이거든." "보관물이었죠." "무슨 소리냐?" 아킨은 씁쓰레하게 웃었다. "제 형이 그 탈로스에게 저를 던져 준겁니다. 방해되지도, 귀찮지도 않도록........복잡하니 나중에 이야기해요." "뭐, 네 형이랑 승계권 다툼이라도 한 거냐?" "형은 그럴 거라 생각했죠. 저는 별 생각이 없었지만-말했잖아요, 베이나트. 제발 넘어가 주세요." 아킨은 오거스트 롤레인에 대한 이야기는 아끼기로 했다. 그녀 때문 에 탈로스와 만나게 된 것이고, 그래서 휘안토스가 그것을 기회로 하여 탈로스에게 그를 던져 버린 것이지만, 그녀 때문이라 원망할 수는 없었다. 아니, 이겨내지 못한 자신이 한심했을 뿐이다. 아킨을 살펴보던 베이나트는 결국 끄흠-하고는 말했다. "좋아, 자세히 말 해주마. 나랑 탈로스는 예전에는 분명 친구사이였 긴 하지만 지금은....별로 안 친한 정도가 아니라 원수지간이야." "네?" 베이나트는 힘없이 웃었다. "예전에 그 친구를 심하게 이용한 적이 있거든. 그는.....그 때문에 아주 화를 냈지. 사실, 그 때 나는.....그를 돕는 거라 생각했다. 기만 인지도 모르겠지만, 그 덕에 그는 정말 꽤 굉장한 마법사가 될 수 있었으니 대단히 손해봤다고 할 수도 없어.....어쨌건, 그 일로 탈로 스는 내게, 내가 결코 해 줄 수 없는 것까지 요구했다." "해 줄 수 없는 것이오?" "그래, '절대 해 줄 수 없는 일'이었지. 처음에는 괜찮을 지도 모르 겠다, 생각했지만.....결국에는 해 줄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나 는 완강히 거부했고, 그것을 끝으로 탈로스는 내게 뭘 더 요구하지 는 않았다만, 아주 난폭하게 괴롭히기는 했어." "그렇다면 그날 왜 그곳에 계셨던 거죠? 위험하잖아요." "한번 더 사과를 할까, 아니면 에이 망나니 자식! 하고 나도 포기하 고 돌아앉을까....고민하던 중이었어." "그렇다면 마법원은 대체 왜 깬 겁니까? "......어라, 너도 알고 있구나?" "아무리 생각해도 악튤런이 깬 것 같지는 않았어요. 당신이 있을 때 도 마법원은 충분히 약해져 있었으니- 그리고 제 기억을 돌려주려 고 한 건 덤이라는 것도 알아요." "덤은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꽤 신경 쓴 거라고." "어쨌건, 왜 깼지요? 그를 끌어내려고?" "그건 비밀로 해 두자. 나도 꺼내놓기 난감한 비밀이란 게 있으니 까......." 아킨은 존중해 주기로 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중요한 건 단 하나네요. 당신이나 나나, 이제 탈로스가 쫓아오기 전에 얼른 이 곳을 떠나야 한다는 것." "맞아, 바로 그거다. 솔직히 밝혀 두는데, 너를 탑 밖으로 먼저 보낸 다음 그 악튤런과 탈로스를 가둬두고 왔다.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다 만, 악튤런 녀석의 실력이라면 한 일주일 걸릴 테고.....아, 그 동안 굶어 죽지는 않을 거야. 먹을 것도 같이 넣어 뒀으니까. 탈로스는 정확히 몰라. 악튤런과 비슷한 수준으로 감옥을 만들어 놨다가는 반 나절만에 뛰쳐나올 녀석이라 드래곤이라도 가둘만한 것으로 만들어 뒀거든." "그렇다면 영영 나오지 못할 가능성도 있잖아요." "아니, 녀석이라면 나올 수 있어. 내가 확신하지. 어쨌건, 우리가 할 일은 녀석이 나오기 전까지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거야. 찾지 못할 정도로 멀리 도망치는 게 좋지." "하지만 당신 정도면.....탈로스와 맞설 수도 있지 않나요?" "아키야, 나는 다시는 녀석과 맞서고 싶지 않아. 그건 지고 이기고 의 문제가 아니라, 내 개인적인 명예와 맹세에 따른 일이라고. 한방 쳐서 가두는 거야 쉽다. 하지만......그런다고 내가 편해지는 게 아니 다. 녀석 쪽에서 나를 용서할 때까지, 난 계속 도망 다니는 편이 좋 아...." "이상하군요. 제가 당신정도라면 벌써 그 탈로스를 없애 버렸을 텐 데." 베이나트가 정색을 하고는 엄격하게 말했다. "탈로스가 널 죽이려 했던 적이 있냐?" "아뇨." "그렇다면 네게도 그럴 권리는 없어. 어제 그 일도...사실 녀석은 널 죽일 생각은 없었어. 화가 나서 막 나간 거지, 네가 다쳤으면 그만 뒀을 거다." "너무 믿는 것 아닌가요?" "그럼 넌 나를 대체 어떻게 믿는 거냐? 이리 실없이 웃고 다녀도..... 내가 어떤 놈인 지 알게 뭐냐." 아킨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무슨 근거로?"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당연히 버려놓고 가도 되는 번거로운 짐을 구태여 짊어지려고 하지 않을 테니까요." 베이나트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어딘지 울적해 보이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기분 나쁘지는 않았지만, 과분한 말을 들은 듯한 기색이었 다. "아키야, 너무 사람 믿지 말아라. 호의를 의심한다면 그건 그저 무 례한 것이지만, 선의라고 쉽게 믿는 건 위험한 짓이야." 그리고 베이나트는 큼, 하고 숨을 들이키고는 말했다. "그래. 너, 목적지는....있냐?" "우선은 로메르드로 갈 생각입니다. 그곳에서.....맡겨 놓은 걸 찾고, 또 만날 사람도 있어요." "어허, 애인?" "오거스트 롤레인, 제 스승님입니다." 아킨은 이제 짜증나서 상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돌렸고, 그래서 베이나트의 눈에 떠오른 그 기이한 빛을 발견하지 못했다. "스승......?" 그리고 그 중얼거림 역시 아킨은 듣지 못했으며 베이나트 역시 좀 더 목소리를 높여 다시 한번 묻지 않았다. *********************************************************** 작가잡설: 이봐, 아키....아키...!!! 루첼은 벌써 잊은 거냐아아아아아....-_-;; 그나 저나 일들이 많아서 연재 텀이 계속 길어집니다...으으으으!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26장 *************************************************************** [겨울성의 열쇠] 제121편 새벽의 여정#4 *************************************************************** 유제니아는 창가에 붙어 있다가, 동녘이 하얗게 번쩍이자 얼른 가죽 신을 신고는 끈을 매었다. 전날의 화제는 타격이라 할만큼 큰 건 아니었다. 때맞춰 쏟아진 소 나기 덕에, 불길은 크게 번지기도 전에 잡혔던 것이다. 그 덕에 유 제니아는 잠잘 곳을 잃어버리지는 않았고, 지금도 전날까지 머물던 방에 있는 것이다. 끈을 다 매자, 유제니아는 침대 밑에 놓아두었던 가죽배낭을 들고는 성을 나섰다. 여명의 하멜버그는 도도한 미녀처럼 싸늘하고 고요했다. 하늘은 파 랗게 밝아오고, 동쪽 끄트머리는 발갛게 달아올라 있다. 그리고 아 직 어둠에 젖은 진녹의 숲이 그 하늘과 맞닿은 지평선 위에 두텁게 펼쳐져 있었다. 유제니아는 어렵잖게 야영했던 흔적을 발견했다. 그리고 잠을 잤던 흔적이 없는 것을 발견하게 되자, 그들이 새벽이 오기도 전에 떠났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찍도 갔네." 어차피 떠날 거라는 걸 알았기에 유제니아는 일찍 일어나 기다렸던 것이고, 그녀가 배낭에 챙겨온 것 역시 어젯밤에 성의 창고에서 슬 쩍 해둔 여행용 식량이었다. 다행히 전날의 사고 때문에 경비는 아 주 허술했고, 유제니아는 어렵잖게 듬뿍 챙길 수 있었다. 유제니아 는 배낭을 슬쩍 들었다가 어깨에 둘러매고는, 다 탄 장작을 일일이 발로 부수고 까만 재를 땅에 묻었다. 괜히 눈물이 나왔다. 나빴어, 작별 인사 정도하고 가면 안되나. 누군가가 떠난 다는 것은, 떠나는 당사자가 유제니아 자신이라 할 지라도 슬픈 일이다. 얼마나 같이 있었냐,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고 받았냐 하는 건 별개 문제였다. 그러나 그리 짧은 기간이라도, 자신 의 의미가 작별인사 하나 남기지 않고 떠나도 가책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그것이라면 그건 누구에게라도 서글픈 일이었다. 그 때 뒤에서 바스락 소리가 났다. "아키?" 그러나 돌아보니 아무도 없이, 푸릇한 어둠만이 싸늘하게 유제니아 를 마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차라리 세냐, 라고 부르지 그랬나. 어차 피 답이 없을 건 뻔한데. 유제니아는 치-하고는, 재를 묻은 땅을 단 단하게 발로 다졌다. 그리고 돌아서다가, 단단한 가슴에 콩 부딪혔 다. "어?" 유제니아는 슬쩍 고개를 들었고, 자기도 모르게 크게 외쳤다. "아키-! 떠난 거 아니었어?" 아킨은 약간 당황한 듯 얼른 시선을 돌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제야 유제니아는 자기 목소리가 너무 컸다는 것을 알고 입을 꾹 막 았다. 주변에 아무도 없자, 그제야 아킨은 안심하고는 말했다. "놓고 온 게 있어서." "내가 다 묻었는데." "재를 찾는 게 아니야. 다른 건데........별 다른 거 못 봤어?" 유제니아는 고개를 저었다. 뭘 놓고 갔다는 거야, 아무 것도 없었는 데......다른데 놓고선 여기 뒤지고 있는 거겠지. 하여간, 보기와는 다 르게 꽤나 덜렁대는 오빠라니까. 그리 생각하며 유제니아는 들고 있 던 배낭을 불쑥 내밀었다. 아킨이 얼결에 그것을 받아 들고는 물었다. "이거 뭐야?" "어차피 떠날 거 아니었어? 건과랑 훈제 육포, 또.....소시지, 소금도 넣었어. 아, 내 점화병도 넣었으니까 나중에 불붙일 때 써." 아킨은 멍청하니 그 가방을 들여다보았다. "저기, 이렇게 까지..." "아키는 내 생명의 은인이잖아. 아키가 어느 나라 출신인 지는 모르 겠는데, 에크에서는 생명의 은인은 부모와 동급이라고. 이 정도는 당연히 해 줘야 해." 아킨은 정말 웃고 말았다. 이렇게 기분 좋은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너도 내 은인인 걸. 너무 신세졌다고 생각하지는 마." "내가 해 준 건 아무 것도 없는 데?" 아킨은 손을 들어 유제니아의 목걸이를 가리켰다. 금줄이 완전히 박 살나서, 이제 유제니아는 반지를 튼튼한 실에 꿰어 놓고 있었다. 유 제니아는 그것을 집어들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게 왜?" "세르네긴 포틀러스.......를 알고 있지?" 유제니아는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엄청나게 솟구쳐 올라 쏟아지려는 의문들을 그녀 스스로 주체할 수 없었다. 너무 많이 쏟아내려면, 결 국에는 말이 막히고 만다. "어, 어떻게....." 아킨이 말했다. "작년에 로메르드에 있을 때 그분께 큰 신세를 졌어." "로메르드?" "그래. 여기서는 소반도라고도 하지. 어쨌든 목숨이 오락가락 할 정 도의 꽤나 큰 신세였지. 그 목걸이...보고 알았어. 그 사람이 너에 대 해 말한 적이 있거든." 유제니아는 다른 의문은 씻은 듯 잊었다. 마치 오랫동안 떠나온 고 향의 사람을 만난 듯, 비록 그 사람과는 알지도 못하고 헤어지면 다 시 만날 일도 없을 지라도, 긴 그리움에 지친 방랑자의 마른 가슴을 그 촉촉한 만남이 적시듯. 그리고, 그저 울고만 싶었다. 주책 같다는 생각은 드는데, 정말 당장 에 울고 싶은 건 어쩔 수 없었다. "뭐라고......했어?" "소중한, 아주 소중한.......아이라고." 짙푸른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고개를 숙이자, 그 눈물 방울들은 계속 아래로 툭툭 떨구어졌다. 어깨는 떨리고 숨은 멎을 것만 같다. 벅차오르는 기쁨과 그리움에 가슴이 터질 것 만 같았고, 그래서 유 제니아는 계속 눈물만 툭툭 흘릴 뿐이었다. "유제니아?" "무사....히 있는 거지?" "나 때문에 고생한 것 빼면 아주 무사히 있어." "나, 그리웠어....아주....아주 많이....." 비록 그 말들이 세르네긴을 향한 슬픔과 기쁨이 뒤섞인 부름이라 할 지라도, 그래도 아킨은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베이나트가 기다 리고 있으니 지금 당장 가야 함에도, 아킨은 유제니아의 떨리는 어 깨를 가만히 안아 주었다. 그 자그만 몸은 너무나 따스했고, 그 온 기가 아직 언 곳이 남아있던 아킨의 가슴 한구석을 따뜻하게 녹여 주고 있었다. "찾았냐?" 베이나트는 지루함에 녹아 내릴 것 같은 얼굴로 바위에 앉아 있다 가, 아킨이 어깨에 배낭 하나를 맨 체 오자 그렇게 퉁명스럽게 물었 다. 아킨은 잠시 하늘과 땅을 번갈아 보고는 말했다. "아뇨. 탑에 놓고 왔나 봐요." 베이나트는 잔뜩 심드렁한 표정을 짓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게 대체 뭐기에 가다 말고 그렇게 잽싸게 돌아간 거야? 시간도 없는데." "그냥......" 베이나트가 그제야 아킨의 어깨에 있는 배낭이 떠날 때는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키야, 그건 뭐냐?" "아....어젯밤에 있던 그곳에 가니.....유즈가 와 있었어요. 주더군요. 가면서 요긴하게 쓰라고." 그렇게 말하고는 아킨은 배낭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베이나트는 입 구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맘에 드는 아이 군. 우리가 곧장 떠날 건 알았나 보네?" "아마도요. 아, 안부 전해 달라고 했어요." "고맙구나. 나도 작별 인사 정도는 하고 싶었는데....."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무척 마음에 들어 하시군 요." "네가 아직 여자에 대해 잘 몰라서 그렇게 시큰둥한 것 같은데, 그 런 애는 절대 흔하지 않다고. 나중에 스물 넘고 장가가려고 해 봐 라. 그 때 왜 붙들지 않았을까, 하고 후회할 걸." "전 이제 열 여덟이에요. 그리고........" 아킨은 왠지 세르네긴과 유제니아가 피가 섞이지 않았다는 것, 그리 고 그 어머니가 그에게 유제니아를 맡겼다는 말이 '약혼' 비슷한 것 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반지를 주고받는 다는 건 언약의 뜻, 비록 서로의 손가락에 끼고 있 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배우자를 고를 때 가장 먼저 생각해 보겠다 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게 생각하다가, 남의 일에 왜 그리 신경 쓰나 싶어서 급히 고개 를 저었다. 게다가, 그 생각을 하다 보니 그렇게 생각하니 새삼 그 에게 했던 그 쑥스러운 말이 다시 기억나 버리고 말았다. 좋겠군요, 당신은- 백조의 반지, 그리고 왜 그 반지에 대한 기억이 그토록 오랫동안 남 아 있었던 것인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아킨은 세르네긴이란 사람이 '당연히' 가진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 었다. 그 반지와 얽힌 세르네긴의 수많은 추억을, 그리고 세르네긴 을 강하게 일으켜 세우는 그 힘을. 그 소망은 분명 아킨의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까지 남아 있 었고, 그것의 간절함만큼이나 강하게 고통스런 기억을 떠올리게 했 던 것이다. 좀 다른 것이었다면, 차라리 자켄이나 켈브리안과 얽힌 것이었다면 좋은 것부터 떠올랐을 테지. 어둡고 축축한 숲 속에서 그를 찾아내 안아주던 따뜻한 형의 품과, 아름다운 봄의 루피니아 같던 그녀의 눈빛과 미소가 먼저 생각났더라면, 아킨은 좀 더 쉽게, 두려움과 고 민 없이 탈로스와 맞섰을 것이다. 그러나 하얀 백조가 먼저 일깨운 것은, 그 백조가 날개를 치는 겨울 처럼 혹독한 것이었다. 지금 그가 다시 얼굴을 맞대야 하는 현실처 럼, 그 기억들은 돌아가야 할 곳이 고향처럼 푸근한 곳이 아닌 아직 이겨내야 할 고난과 적이 칼을 뽑아들고 아킨의 턱을 겨누는 그런 곳이라 먼저 말해 버렸다. 아킨은 발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하늘은 이제 하얄 정도로 밝아 있었고, 서쪽하늘만은 쫓겨나는 어둠 의 옷자락 같은 짙은 쪽빛에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지평선 끄트머 리에는 길게 뻗은 거대한 주인 잊혀진 숲이 보였고, 아킨은 그 숲 앞에 서 있는 자그마한 인영을 발견했다. 아킨이 넓게 뻗은 풀 짧은 평야를 가로질러 걸어가고 있었으니 멀리 있어도 보이는 것이다. 멈 추어 선 것을 알아챈 듯 그 그림자가 손을 위로 뻗어 크게 흔들었 다. 순간, 그 무서운 앞날이 이상하게 가벼워 보이고,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되었다. 분명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자신도 잘 알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새벽 여명에 씻겨 내려가는 어둠처럼 그렇게 옅어지기만 한다. 보일지, 보이지 않을 지는 모르지만-아킨은 그래도 손을 휘저으며 인사를 보냈다. 좋겠군요, 당신은- 그렇게 그 말이 다시 한번 아킨의 가슴에 맺혔다. 그것은 과거의 그 가 되어 되 내이는 것이 아닌, 바로 지금 세르네긴 포틀러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었다. "마하!" 칼라하스는 마하와 마주하게 되자마자, 달려갈 수는 없어 그저 그녀 를 부축하고 있는 기사의 팔에 매달린 채 그렇게 외쳤다. 칼라하스는 마하가 없으면 너무나 불안해하는 건 사실이었지만, 다 른 호위자들이 있는 경우에는 예외였다. 물론, 그 호위자들에 대한 신뢰라기 보다는, 그런 자들을 붙여 주는 마하에 대한 신뢰-즉 그녀 가 맡기고 갔으니 분명 믿을 만할 것이다-때문이었다. 칼라하스가 하멜버그 성을 떠난 것은 전날 아침이었다. 그녀 역시 하멜버그 백작만큼이나 재투성이에, 여기 저기 옷이 찢어 진 초췌한 모습이었다. 하멜버그 백작은 바보가 아니었다. 아니, 마 라 공의 신임을 받는 만큼 그 정도의 예민함과 영리함은 있었다. 그 래서 그런 공주를 보고 처음 생각한 것은 '꽤나 정성껏 준비했군.' 정도였다. 그러나 백작이 한 말은 성이 이 꼴이니 당장 떠나는 게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칼라하스는 좋지 않은 때에 들러 죄송하게 되 었다는 말과 함께 몇 가지 보석을 부조 명목으로 내 놓은 후 떠났 다. 다행히 그녀가 떠나는 동안에 유제니아는 내내 나타나지 않았 다. 칼라하스는 차라리 잘 되었다 생각하며 그녀의 마차에 타고 길을 나섰다. 물론 하멜버그 백작은 배웅은 나가지 못한다 말했고, 칼라 하스는 그것에 감사했다. 그녀는 하멜버그 외곽에 마차를 세워 두고 는, 주위 기사들에게 명했다. "마법사들과 연락할 수 있겠나." 그러자 마하가 나섰다. "제가 찾으러 가겠습니다." 다른 기사에게 맡기기 곤란하다는 것을 아는 칼라하스는 쓰게 웃으 며 마하가 자리를 비우는 것을 허락했고, 그녀가 몇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모두 떠나 보낼 수는 없 어서, 칼라하스는 두 세 명씩 기사들을 내 보내고 그들이 돌아오면 다음 기사들을 내보내며 마하를 찾았다. 그리고 세 번째 기사들이 돌아오며 드디어 그녀에게 보고를 올렸다. 마하가 어떤 상태인지 듣 게 되자, 칼라하스는 당장에 기사 하나를 불러 그녀를 부축하게 했 다. 기사들은 펄펄 뛰며 위험하니 절대 안 된다고 말렸으나, 그녀는 듣지도 않았다. 기사 몇이 완강하게 버티자, 칼라하스는 걷지 못하 는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며 직접 마차 문을 열고 나서려 했다. 결국 파랗게 질린 기사들이 달려와 그녀를 부축했다. 칼라하스는 마하와 만나자마자 말했다. "괜찮아, 마하?" 이유는 나중이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계모 밑에서 왕자 칼리토와 함께 오랫동안 외로이 지내왔던 그녀에게, 마하는 어머니요 형제요 친구, 또 제 몸 의 일부 같은 존재였다. 마하는 뻣뻣하게 굳은 몸으로, 턱을 들고 팔은 앞으로 뻗고 있는 자 신의 모습이 아주 우스꽝스럽다 생각하며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전하." "어찌 된 거지?" "저 마법사에게 물어보십시오." 마법사가 침을 꿀꺽 삼켰다. 칼라하스는 그를 책망하듯 바라보고는 물었다. "상세히 설명해 다오." 설명이 끝나자 칼라하스의 눈초리는 더욱 싸늘해졌다. 마하가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키 큰 남자 쪽은 처음 보는 남자였지만.....소년은 아킨토스 프리엔, 암롯사의 왕자입니다." 칼라하스는 금새 알아챘다. "그렇다면......적국의 왕자에게 털, 렸, 다 이거로군." 그렇게 말하곤 칼라하스는 그녀를 부축하는 남자에게 말해 그녀를 근처의 바위에 앉히게 했다. 공주의 말에 마하는 담담한 눈빛이었으 나, 마법사는 시퍼렇게 질려 말했다. "와, 왕자라니.....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칼라하스는 더욱 냉담하게 말했다. "은발 머리- 그 쪽이 암롯사의 둘째 왕자란 말이다. 그런데 그런 사 람에게 더 들통날 것도 없이 들통나다니-" "죄송합니다." 마법사가 아닌 마하가 사죄하자 칼라하스의 얼굴도 누그러졌다. 마 법사의 능력이 모자라서였을 뿐, 그의 잘못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 그 상황에서 아킨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은 마하뿐이었다. "마법사 달스로커, 마법이 풀리는 대로 곧장 지원을 요청 해 다오. 단, 그건 천둥의 악튤런을 구하기 위함이 아니라 암롯사의 왕자를 추격하기 위한 거라 말해두고." "그렇다면 마스터는.....!" "당신 말고도 일행은 많지 않나. 그들 모두에게도 그 이상한 마법사 에 대해 주의하도록 하고, 악튤런 파노제에 대한 수색은 그들에게 맡기고 그대는 내 명에 따르도록 해." "알겠습니다." 칼라하스는 앉은 자세를 고치고는, 다시 주변을 한번 둘러 본 후 말 했다. "그럼 나는 여기서 모두의 마법이 풀릴 때까지 기다리겠다." "안됩니다!" 그녀를 모시고 왔던 기사들이 모조리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그러나 칼라하스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내 명에 따라 임무를 수행하다 재난을 당한 자들을 걱정하지 않는 다면 무슨 공주라 하겠나. 그리고 이들의 마법이 풀리면, 몸 상태를 봐서 천천히 출발하자." 그렇게 말한 그녀는, 어둠과 냉기가 남은 숲의 바위에 앉아, 어젯밤 에 남은 목 주변의 생채기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어젯밤에 나타났 던 괴물 같은 늑대와, 순간에 보았던 소년의 얼굴을 떠 올렸다. 칼라하스는 마법을 쓸 수는 없었으나 마법의 종류에는 아주 밝았다. 그녀는 어렵잖게 아킨토스가 암롯사 왕가에서 얼마나 숨겨지고 있 었는지를 떠올리며, 18년 전의 일에 대해 물어볼 만한 사람을 찾아 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 작가잡설: 아키....여자가 너무 많은 거 아냐, 너! 떽!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27장 *************************************************************** [겨울성의 열쇠] 제27장 그림자 속의 그림자 제122편 그림자 속의 그림자#1 *************************************************************** 켈브리안은 처음에는 놀려 줄 생각이었지만, 앞의 슈마허가 그런 것 을 받아들일 상태가 아니라 판단하고는 관두었다. 대신, 누군가가 선물해 주었는지 기억도 잘 안 나는 화사한 툴칸 산 부채를 휘두르 며 슬쩍 물어보았다. "그래서, 결국 에크로 돌아가고 싶으시다, 이건가요?" "그렇소." 그 모습은 여태 슈마허가 보여왔던 모습 중 가장 멀쩡한 모습이라, 켈브리안은 피식 웃고 말았다. 무슨 생각하는 지 모를 이 음흉한 남자가 보여주는 것이라고는 믿 어지지 않을 정도로 귀여웠고, 심지어 먼 곳에 딸을 두고 온 착한 아버지 같아 보이기까지 했다. "역시나 대단한 꼬마군요. 그 유명한 용병장군 슈마허 쉐플런을 이 렇게 새파랗게 질리게 해서는 오락가락 하게 만들다니." "비웃지 마시오. 다른 사람한테는 별로 안 대단할 지 몰라도, 내게 는 내 몸 같은 아이니까." "비웃는 거 아니에요. 하지만, 목숨이 위험한 것도 아닐텐데....당신 까지 갈 필요는 없지 않아요? 힘없는 애한테 무슨 짓을 할 정도로 마라 공이 경우 없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갑자기 슈마허의 눈빛이 변했다. "경우? 지난번에는 충분히 경우 없었소! 아니, 나는 그 딴 자식한테 유즈의 신상이 떨어졌다는 것 자체가 끔찍하다고!" 켈브리안은 공주의 거실 안에 둘밖에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시녀인 척하는 왕비의 감시인들과 라키를 비롯한 호위들을 '약혼자 와 다정한 한때'를 보내겠다는 핑계로 내보냈던 것이다.) "슈마허, 그런 건 잊어 주는 게 좋지 않아요? 애들도 아니고....." "그냥 학자라면 내 말을 안 하지. 얼마나 자신이 없었으면, 지 마누 라에게 생판 관심도 없고 취향도 아닌 남자를 의심할까! 하고 말이 오. 하지만......그, 그 빌어먹을! 어떻게 한나라의 대공이라는 작자가 지 마누라와 내가 바람 피는 것 '같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멀쩡하고 건전한 남자에게 그딴 누명을 뒤집어 씌우냐, 이거요-!!!" "슈마허...." 당신 꽤나 난잡한 사생활을 가지고 있지 않나요, 그러니 의심할 만 도 하지요...하고 말하려던 켈브리안은 슈마허의 태도가 워낙에 진지 해서 관두기로 했다. (스무 살이나 어린아이를 신부감으로 찍었다고 고백했던 그 때만큼이나) 그래서 이런 상황에서 상상력 부족하고 얌전한 아가씨들이 할 만한 말을 했을 뿐이다. "....참으세요." 이런 말이 늘 그렇듯, 역시나 효과는 없었다. "참아? 그게 참을 일이오! 그 깐깐하고 매정한 유부녀와 바람을 피 운다니, 그건 나를 향한 모독이야! 어째서 내가 그런 여자 때문에 그 딴 누명을 써야......(여기선 그도 숨을 좀 들이마셨다) 하냐고! 허 어...." "......" 켈브리안은 부채로 얼굴을 부치며 이 정도 수준인 남자가 그 유명 한 슈마허 쉐플런이요, 만만치 않은 수준으로 놀았던 남자가 명석한 것으로 유명한 마라 공이라는 데, 충격 비슷한 감상을 느꼈다. 대륙을 통틀어 개인능력으로 가장 출중하다 평을 받는 사람을 들자 면, 바로 용병장군 슈마허 쉐플런과 마라 공이었다. 슈마허가 에크 롯사로 적을 옮겼을 때, 사이러스 대공왕마저도 고개 돌려 에크롯사 에 주의를 기울였을 정도였고, 정치에 무관심한 편이었던 로메르드 의 켈브리안도 상당한 호기심을 느꼈다. 그러나 몇 달만에 슈마허와 마라 공의 사이에는 금이 가고 말았다. 둘 다 너무 뛰어났던 것이 문제였고, 그 둘의 분야가 너무도 달랐던 것은 더욱 큰 문제였다. 차라리 같은 분야에서 튀는 두 사람이었다 면 경쟁심에서라도 잠자코 있었을 테지만, 그 차이는 가히 절망적일 정도였다. 게다가 이런 두 사람은 서로 양보하고 존경해면 해결될 문제를, 서로의 분야를 무시하는 것으로 서로의 골을 팠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두어 달 계속되다가, 드디어 사고가 터지고 말 았다. 슈마허의 주장대로 라면 슈마허는 사실 죠세피나 여대공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슈마허가 관심을 보였던 것은 여왕의 시녀이자 에크 롯사 사교계의 장미꽃이었던 코로노 백작부인 록셀린느였다. 아름다 운 데다가 춤과 노래에 능하며 발랄하기까지 했던 록셀린느 자체가 슈마허가 부담 없이 바람을 피울 수 있을 정도로 온갖 연애사건의 중심이었으니, 슈마허의 새 애인이 그녀가 된다 해서 문제 될 건 없 었다. 그러나, 늙은 코로노 백작이 허리 두들기며 슈마허에게 결투 신청을 하기도 전에 마라 공이 무섭게 나서 모두를 황당하게 했다. 슈마허는 록셀린느 때문에 죠세피나 주변을 맴돌았던 것뿐인데, 마 라 공은 엉뚱하게도 슈마허와 죠세피나 여대공에게 치근덕댄다고 의심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을 밝히면 될 일을, 슈마허는 마라 공 앞에서 대 놓고 '여왕폐하의 미모에 착각하는 것 아니우? 전하 빼고는 아무도 관심 없어요.' 라고 말해 마라 공을 더욱더 열 받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마라 공의 동생이자 비룡대 기사 에루다가 더 펄펄 뛰며 '너 내 손에 죽어 봐라', 하고 마라 공 대신 나서는 것 을 막았고, 슈마허가 '좋아, 결투로 승부하자고! 아무나 당장 나와 --!' 하고 나서는 것도 막아야 했다. 결국에는 세르네긴이 에루다의 결투를 대신 받아 들였고, 해 뜨는 시간에 시작된 이 결투는 '첫 햇 살이 전나무 끝에 맺히는 순간' 세르네긴의 승리로 끝났다. 온갖 망신을 당한 마라 공은 당연히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러던 어 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사고로 말에서 굴러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 자, 그는 당장에 '암살 음모가 있었다.' 어쩌고 하면서 사람들을 불 렀다. 지난번에는 눈이 뒤집혀서 실수를 저질렀으나, 마라 공 자체 는 명석한 사람이었다. 또, 슈마허와의 민망한 대립이 그의 명예와 권위에 어떤 악영향을 끼치는 지도 알았다. 그는 이번 기회에 슈마 허의 버릇을 단단히 들여놓고 엉망진창이 된 체면도 살려볼 생각으 로 그 암살 혐의가 슈마허에게 있는 듯 분위기를 이끌었다. '암살' 앞에, 둘의 다툼을 그저 궁중 추문 정도라 생각하며 킬킬대던 사람 들은 긴장했고, 그것까지는 마라 공도 기대했던 바였다. 그는 느긋 하게 그 다음 슈마허가 먼저 손을 내밀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마라 공이 명석한 만큼이나, 슈마허는 자존심 앞에서는 물불 안 가리는 인간이었다. 전장에서 뼈가 굳고 늙어갈 사람에게, 그런 치사한 수작은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마라 공이 슈마허를 불러서 '다음부터는 그런 일로 싸우지 말고 나라를 잘 이끌어 나갑시다. 내 가 실수한 것에는 분명히 사과할 테니, 당신도 나를 인정해 주시길 바라오.'하고 말하기도 전에, 슈마허는 당장에 사표를 내 던지고 에 크롯사를 떠나 로메르드로 건너가 버리고 말았다. 그것만도 턱 빠질 일이었는데, 그 다음 일어난 일에 마라 공은 죠세피나 여왕으로부터 이혼선고를 받을 뻔했다. 실버 드래곤 휠테스의 용기사였던 세르네긴까지 슈마허를 따라 떠 나 버린 것이다. "제 솔직한 감상을 말하자면 둘이서 오붓하게 만나서 주먹 한방씩 갈긴 다음 합의를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어쨌건 당신 고향이 고, 돌아가야 할 곳이잖아요." "그럼 당신은 어쩌려고?" "저는 왜요?" 슈마허가 한심하다는 듯 푸르르, 한숨을 내 쉬었다. "내가 당신과 약혼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이곳에서, 당신 어머님을 도와, 그 하기도 싫은 '반란 소탕'을 했기 때문이란 말이오. 또, 당신 은 그런 나와 약혼했으니 어머니 명에 따라 엉뚱한 남자와 결혼하 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고. 내가 에크로 건너간다면, 당신 어머님 쪽에서는 당장에 파혼을 해 버릴 거요. 그리고 온갖 비난이 쏟아지 겠지. 한 나라의 공주와 약혼했으면서 다른 나라로 건너가 봉사한다 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고." "알아요....아, 혼삿길 막힐까봐 그러시는 건가요?" 이제는 슈마허도 켈브리안이 그와 비슷한 수준으로 말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슈마허는 켈브리안의 태도에 한바탕 화라도 내고 싶었지만, 일단은 한번 참기로 하고는 진지하게 물었다. "혹시, 마음에 드는 남자라도 나타난 거요?" 켈브리안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지만, 제 일로 당신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아요. 더 군다나 정략적이거나 출세 때문이 아니라 당신 의부의 딸 문제로 그러시는 거잖아요. 그러니, 제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기 싫다는 이 유만으로 붙잡을 수 없어요." "각오가 된 거요?" "네. 저도 이 생활은 이제 지쳤고....언젠가는 맞닥뜨려야 할 문제잖 아요. 차라리 이런 식으로 일찍 찾아와서 다행이라 생각해요." "누구와 결혼하게 될 지도 모르는데도 괜찮다는 거요." 켈브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알아서 하겠어요." 슈마허는 잠시 말없이 있다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나른한 한숨 과 함께, 그의 양미간에 작은 주름이 졌다. "안 가는 게 좋을 것 같군." "괜찮다니까요. 당신 의부께 죄짓는 것보다는, 차라리......" "미안하지만, 당신이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건 내가 싫소. 그 꼬마 라면 차라리 나아. 예쁘장하게 생긴 데다가 어리고, 당신 취향이기 도 하니까. 하지만 다른 놈은 싫어." 켈브리안이 굳은 채 그를 보는 동안, 슈마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꽤나 어색했다. 아킨이 실종되고 브리올테 왕비가 섭정이 되어 온 나라를 휩쓰는 동안 잘 노닥거리는 친구사이로 지내왔는데, 이런 어 색함은 불안하게까지 생각된다. 아주 귀중한 것을 머리 위에 번쩍 들고 깨어 버리려고 하는 것만 같았다. 마침내 켈브리안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하고 여행....떠나시지 않겠어요?" "에, 그건 또 무슨 말이오?" "오랜만에 제가 태어났던 에크롯사의 놀비오로 가보고 싶어요. 어머 니도 그 정도는 허락하시겠죠.....어때요? 약혼자 소개 하러 외숙부님 찾으러 가는 건데, 설마.....싫어하지는 않겠죠." 멍청하게 있는 슈마허에게 켈브리안은 활짝 웃어 보였다. *********************************************************** 작가잡설: 켈리, 네 남자친구 바람 났다........(중얼중얼중 얼.........) 무언가, 아주 길게 해 오던 일을 끝낸 다는 건 참 어렵군요;; 가장 힘든 건 속도 조절입니다. 빨리 하자니 '성급한 완결' 이랄 수도 있고, 느긋하게 하자니 '막판에 너무 질질 끈다~' 랄 수도 있 고;; 허 참.... (물론 겨울키 얘기는 아닙니다;; 겨울키는 아직 끝나려면 멀었 습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27장 *************************************************************** [겨울성의 열쇠] 제123편 그림자 속의 그림자#2 *************************************************************** 하멜버그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잎줄기와 닿은 부분이 약 간 씩 노랗게 변하는 울창한 숲은 싸늘하고 깨끗한 초가을 공기에 젖어 있었고, 그 숲 언저리의 호수는 가을이 깊어질 때까지 더욱 파 랗고 청명하게 깊어질 것 같았다. 휘안토스는 아직은 파릇한 초원을 건너, 성을 둘러싼 마을을 가로질 러 성으로 향하는 벽돌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워낙에 한적하고 조 용한 곳이라, 휘안토스와 그 일행이 지나가자 몇 사람인가 나와 구 경을 했다. 마르실리오가 옆으로 붙으며 말했다. "제가 먼저 성으로 가는 게 좋을 듯 합니다." 휘안토스는 간단히 답했다. "아니. 호들갑 떨 필요는 없다." 되도록 하멜버그의 성주가 다급하게 자신을 맞이하기를 바랬다. 칼 라하스 공주가 머물다 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마당에, 하멜버그와 더욱 상관없을 것이 분명한 암롯사 왕자의 방문을 받는 것이다. 그 공주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 라고 의심할 만한 시간도 주고 싶 지 않았다. 휘안토스의 말에 마르실리오는 순순히 물러나 다시 그를 호위했다. 휘안토스는 성문이 가까이 오자, 그제야 머리를 덮은 검은 후드를 뒤로 젖혔다. 곧, 성의 경비병들이 창을 기울여 문을 막았다. "누구십니까." 변방의 경비병들답게, 그들의 태도는 일단 긴장하기보다는 새로 온 손님을 대하듯 꽤 정중했다. 특히 상대는 정갈한 소년과, 역시나 정 갈한 기사들이었다. "암롯사의 휘안토스 프리엔이오." 암롯사, 라는 나라 이름은 알아도 그 왕자 이름은 모르는 듯한 에크 롯사 변방의 경비병이 답했다. "제가 성주님께 말씀 드리겠습니다.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주십시 오." 휘안토스는 알겠다, 답하고는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그가 내리자 그 일행인 기사들도 모두 말에서 내렸다. 잠시 뒤, 휘안토스의 일행은 성 안쪽에서 누군가가 두 어 사람을 대 동하고 화급히 달려왔다. 휘안토스는 달려오는 사람의 단정한 모습 을 보며 그가 이 성의 성주임을 어렵잖게 알아볼 수 있었다. 남자는 성문에 다다르자 헛기침을 한번하고는, 정중하게 물었다. "혹시 휘안토스 암롯사 왕자님이십니까?" "맞습니다." 그렇게 답하며 휘안토스는 검을 들어 그 칼자루를 보였다. 에크롯사 와는 드래곤과는 전혀 다른, 해룡또는 써펜트라 불리는 것이 칼자루 를 감고 있었고, 칼집에는 장미가 새겨져 있었다. 당장에 경비병들의 얼굴이 굳었고, 직접 나온 성주인 하멜버그 백작 역시 창백해졌다. 그와 같이 따라나온, 집사인 듯 보이는 중년 남자 가 급히 옆에 있는 하인들에게 명하자, 하인들이 허둥지둥 달려와 휘안토스 옆에 있는 말의 고삐를 잡았다. 백작이 말했다. "우선 안으로 드십시오, 왕자." "감사합니다." 휘안토스는 빙그레 웃고는 성안으로 들어섰다. 아름답지만 작은 성은 숲을 등지고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으며, 그것 은 휘안토스가 보기에 '경관을 편안하게 즐기고 싶다'라는 의도 외 는 전혀 없는 한가한 입지였다. 초대 하멜버그 백작이 에올레스 옆 에서 조용히 지내고 싶다, 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지었던 성다웠다. "그런데 어쩐 일입니까?" "지나가던 길에 예전에 알고 지내던 사람의 행방을 아는 분이 이곳 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왔습니다." "알고 지내던 사람이요?" 약간 긴장한 목소리에, 휘안토스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어 보였다. "아주 절친했던 사람인데, 피치 못할 사정으로 연락도 없이 사라졌 습니다. 수소문하던 중, 그 사람과 여기 있는 어떤 소녀가 인연이 있었다 하더군요. 그래서 그 분의 행방을 물을 겸, 또 여행도 좀 다 닐 겸해서 왔습니다." 거짓말은 하나도 없었다. 보통 휘안토스가 아킨을 부를 때나 칭할 때의 호칭이 모조리 바뀌었다는 점은 제하고 말이다. 달리 칭하는 것과 거짓으로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어떤 소녀입니까?" "따님...계십니까?" 그렇게 말하는 휘안토스의 눈길은 성 정원의 파골라를 향했다. 그곳 에 덩치 큰 유모와 그녀와 함께 산책 나온 듯한 소녀가 있었다. 긴 갈색 머리에, 멀리서 봐도 꽤나 자태가 고운 소녀이긴 했다. 백작이 눈을 크게 떴다가는, 곧 약간의 기대를 담아 물었다. "혹시 왕자께서 찾는 소녀가 제 딸입니까?"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어차피 누구라고 딱 집어 말할 정도로 그 소녀를 잘 알지도 못하고, 그 딸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니 그렇게 애매하게 말했다. "이름은 모릅니다만 인상정도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보면 알아볼 수 있겠지요." 그 말에 하멜버그 백작이 환하게 웃고는, 그 옆에 있는 하인에게 얼 른 속삭였다. 하인은 곧 백작 영애 페트리샤 쪽으로 달려갔다. 하멜버그 백작은 칼라하스 공주의 방문은 버거운 손님을 담당하는 것 같아, 또 실제로도 정말 재앙이 되어 버렸으니 아주 탐탁지 않았 다. 그러나 산책하다 이웃집 들르듯 찾아온 암롯사의 왕자, 휘안토 스의 방문에는 행여나 루실리아 대공비 같은 행운이 자신의 딸에게 도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범한 부모는 자 식의 능력에 대해 도저히 냉정해 질 수 없고, 자식을 사랑하는 평범 한 부모인 하멜버그 백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백작은 휘안토스가 찾는 소녀가 페트리샤이길 간절히 바랬고, 행여 나 이 유명한 왕자가 자신의 딸을 만나기 위해 그런 엉뚱한 핑계를 대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마저 했다. 그리고 지금 성이 망가진 데, 너무나 애석해했다. 며칠 전의 재난만 아니었다면, 이 소년을 며 칠 간 더 붙잡을 수 있는 텐데. 드디어 페트리샤가 사뿐 사뿐 걸어와 인사를 했다. 볼은 벌써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고, 눈은 기쁨으로 반짝였다. 휘안 토스는 정중하게 그녀의 손을 잡아 손등에 입맞추고는 말했다. "기억에 있는 분이군요. 혹시 지난봄에 제도에 들른 적이 있습니 까?" "마, 맞습니다." "성함이 페트리샤 그론다셨죠." 페트리샤가 수줍게 웃으며, 암롯사의 휘안토스 왕자가 자신을 기억 해 주는 데 너무나 기뻐했다. 하멜버그 백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킨과 휘안토스에게 공통된 처세가 있다면, 그건 상대 눈치 봐가며 '적당히 아는 척'하는 것이었다. 휘안토스는 페트리샤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보통 귀족 영 애들의 짧은 제도나들이는 봄에 이루어지고, 겨울이 오기 전에 모두 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건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백작 영애 의 이름은 오기 전에 당연히 알아두었으니 특별히 그 때 기억해 둘 필요도 없었다. 하멜버그 백작이 정중하게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제 아내도 아주 기뻐할 겁니다." "감사합니다." 휘안토스는 그렇게 답하며 팔을 내밀었다. 페트리샤는 이런 행운이 자신에게 온 것이 믿어지지 않는 다는 듯 기쁨에 겨운 표정으로 그 의 팔짱을 끼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옷도 대강 고르고 머리손질 도 늘 하던 대로 한 것이 너무 마음에 걸리고 후회가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옷도 제일 근사한 것으로, 머리 손질도 신경 써서 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페트리샤는 타냐를 바라보았다. 타냐는 눈물 까지 글썽해져 그런 아가씨를 보고는 잘 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 였다. 그것을 다 알아채고 있는 휘안토스는 앞으로 이 집 부인과 딸이 꽤 나 귀찮게 할 것이라는 데 벌써 피곤해졌지만, 머무는 동안에는 하 멜버그 백작의 호의를 사 두는 것이 좋아 그들이 착각하는 대로 내 버려 두기로 했다. 그 때 성의 안쪽에서 소녀 둘이 튀어 나왔다. 유모가 갑자기 눈을 매섭게 찌푸리더니 그런 둘을 노려보았고, 그 눈빛으로 휘안토스는 소녀들의 위치를 대강 짐작했다. "거 봐, 내가 뭐라고 했어. 그 애는 나한테 절대 거짓말 안 한다고! 정말이잖아!" 앞장서 달려오던 소녀 하나가 뒤따라 오는 다른 소녀에게 그렇게 크게 말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꽤나 당차 보이는 소녀였다. 진한 금발 머리에 발갛게 상기된 살구 빛 볼을 가지고 있어, 지금 옆에 붙어 있는 창백한 페트리샤보다 몇 배는 예뻤다. 눈이 잠깐 마주치자, 그녀는 얼른 옷매무새를 다듬고 는 뒤로 살짝 물러나 인사했다. 유모의 눈빛이 더욱 매서워졌지만, 그 소녀는 자신이 영애보다 훨씬 예쁘다는 사실을 잘 알고있었고, 지금 그 사실을 마음껏 과시하고 있었다. 곧, 그 금발 소녀에게 끌려 나온 다른 소녀가 살짝 고개를 내밀었 다. 중얼중얼 비죽이는 입 모양을 보니 '왕잔지 뭔지 내가 알게 뭐 야. 나랑 결혼할 것도 아닌데....' 등이었다. 그리고 휘안토스는 조용히 고개를 돌리며 자신의 기분과 표정을 모 두 감추었다. 자연스러운 동작이었고, 옆에서 누가 본다면 그저 페 트리샤에게 말을 걸기 위한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눈은 모든 필요한 것을 빨아들이고, 머리는 벌써 판단을 마쳤 다. 몇 번 보지 않은 얼굴이었으나 휘안토스는 분명 기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소녀가 맞다 는 것 정도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소녀는 휘안토스로서는 여자에게는 처음 받아 보는 종류의 눈길로 그를 보고 있었으니. "유즈, 너 침대위로 기어올라온 두꺼비라도 본 듯한 얼굴이다?" 휘안토스가 사라질 때까지 황홀한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쫓던 후아 나는, 드디어 고개를 돌렸다가 그렇게 해괴할 정도로 이상한 유제니 아의 표정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유제니아는 놀랐다기 보다는 소름이 끼치고 있는 중이었다. 마.....맙소사, 아키와 똑같이 생겼다! 그리고 우연히 이름도 비슷하고 얼굴도 똑같을 리 없다. 필연적인 이유가 있으니 그런 것이며, 그것은 '형제'라는 이유 말고는 달리 궁 리해 낼 것이 없었다. 또한, 숲을 떠나기 전날 유제니아가 참으로 한심하게 바라봤던 그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그가 정말 '왕자'라서 그랬다는 것도 짐작이 되었다. 그렇게 결정하자마자 무섭도록 현실적인 문제들이 유제니아의 머릿 속에 떠올랐다. 난 몰라! 사이러스의 아들에게! 정말 친아들에게!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가, 가만. 이게 아니지. 암롯사의 왕자는 분명 휘안토스 뿐이라고 들 었는데? 이상하잖아. 뒤죽박죽 튀어오르는 온갖 생각 때문에 현기증 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유제니아? 어디 아픈 거야, 아니면 황홀해서 정신을 못 차리는 거 냐?" "......." 황홀할 리가 있냐, 이 기집애야! 하고 버럭 고함이라도 질러 버리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유제니아는 대체 어떻게 그곳에 암롯사의 왕 자가 있는 건지 도무지 그 이유를 추측 할 수가 없었다. 물론 평소 의 유제니아라면 추측은 물론이요, 현실과 매우 근접한 결론도 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창잡이 뮬에게 기습키스 당한 이래로 이렇게 당황한 적도 없었다. 그 당시 그녀는 사흘 동안이나 정신을 못 차렸 고, 아버지 대신 겨울식량을 확인해야 한다는 사실을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지금도 마찬가지. 아킨과 사귀거나 한 일은 없는 데다가 유제니아 자신도 아킨을 크게 남자로 본 적이 없고, 그 때 유제니아의 행동 자체가 그런 쪽으로 뭔가 불러일으키게 할 만한 게 전혀 없었으니 걱정이 되거나 기대되는 건 절대 아니었다. 그러나 사정이 좀 복잡해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꽤 좋은 오빠 같다 고 생각했던 소년이 '왕자'라는 사실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유제니아 에게 충분히 충격이었다. 칼라하스 공주야 처음부터 공주인 줄 알았으니 문제될 것 없지만 아킨은 아니었다. 그냥 반짝이는 돌 인줄 알고 구슬치기하던 것이, 알고 보니 다이아몬드였다는 것을 알게된 것처럼 숨 멎을 것만 같 다. "차라리 공주일 것이지....." 이거나 저거나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공주는 한번 만난 경험(?)이 있지 않은가. 그렇게 유제니아는 터무니없기도 하고 아킨이 들으면 되려 더 억울 해 할만한 말을 중얼거리며 비척비척 뒤채로 갔다. 저 왕자인지 뭔 지가 돌아갈 때까지는 꿈쩍도 하기 싫었다. 휘안토스는 어렵잖게 소녀의 이름이 유제니아 쥬르, 라는 사실을 알 아냈다. 성으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도, 또 성의 하녀가 아 니라 백작을 후견인으로 둔 고아 소녀라는 것도 그냥 자연스럽게 '하녀들이 좀 어리군요.' 라고 묻는 것 하나만으로 다 알아낼 수 있 었다. 그리고 피후견인이 더 있는지 정중히 물어봄으로써, 그 소녀 가 자신이 찾는 소녀가 아닌 듯 자연스럽게 말해 두는 데도 어렵잖 게 성공했다. "행여 최근에 성을 떠난 아이는 없나요?" "죄송합니다만 더 없습니다. 가르타라고, 오갈 데가 없어서 제가 돌 봐주었던 아이가 하나 더 있긴 합니다만...그 애는 소녀라 할 수도 없는 나이인데다가, 한달 전에 시집갔답니다." 휘안토스는 실망한 듯 웃었다. "그렇다면 제가 잘못 알았나 보군요. 죄송합니다." "아니, 괜찮습니다. 왕자의 방문은 저희 가문의 영광입니다." "아닙니다, 바쁘신 백작 님께 큰 실례를 저질렀군요. 그렇잖아도 성 에 사고가 났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번거롭게 해 드린 것 같군요." "그리 큰 사고는 아니었습니다. 때 맞춰 비가 내려서 불길은 금방 잡혔지요." "다행이군요." 그리 답하고는 휘안토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휘안토스가 이만 가봅니다, 라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백작이 당장에 정색을 했 다. "혹시, 지금 나가시려고 하는 겁니까?" "오래 머물 생각은 없었습니다. 또, 사고를 당한 성에 저희 인원이 번거롭게 해 드리는 것은 큰 실례이기도 하고요." "괜찮으니 부디 하룻밤 정도 묶고 가십시오. 이곳은 변방인 데다가 험준해서, 이렇게 늦은 시간에 출발하신다면 가장 가까운 마을에 닿 기도 전에 벌써 해가 저물 것입니다. 에크롯사의 산은 밤에는 아주 위험합니다." "제게는 훌륭한 기사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그 훌륭한 기사들에게 괜한 고생을 시키지 마십시오. 집 안 사정이 이래서 융숭한 대접은 해 드릴 수 없지만, 적어도 하루 정도는 편안하게 주무시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이런 호의를 거절한다면 오히려 휘안토스 쪽이 이상해 보일 것 같 았다. 게다가 천천히 알아볼 것도 있어서, 휘안토스는 선선히 승낙 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하멜버그에 대해 잘 아는 말벗을 원하신다면 제 딸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속셈이 너무 쉽게 드러나니, 휘안토스는 동정심까지 일어났다. 알만 한 건 벌써 다 알아냈다. 그리고 더 알 필요도 없으리라는 것이 휘 안토스의 생각이었다. 변방의 성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그래도 휘안토스는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 작가잡설: 어라, 유즈. 아키는 공주야~~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27장 *************************************************************** [겨울성의 열쇠] 제124편 그림자 속의 그림자#3 **************************************************************** "어째서, 어째서--!!!" "후아나아아~~" 유제니아는 어떻게든 후아나를 달래 보려 했지만, 결국 후아나의 신 경질적인 손에 배게가 부욱 찢겨져 나가고 말았다. 속을 채웠던 오 리털이 눈송이처럼 풀풀 날렸다. "망할 타냐 할망구! 그 못생긴 페트리샤 계집애가 어떻게 왕자님 눈 에 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나를 못 봤다면 모르지만, 벌써 나 를 봤는데 그 양배추 인형 같은 기집애가 눈에 들어오겠어? 응? 유 제니아, 너도 동의하지! 그렇지? 안 그래? 어서 말해!" "헤취-!" "말 안하고 뭐해! 어서 말하라고 했잖아!" "헤, 헤취-!" "유제니아, 어서!" 오늘 하루 동안 방안에서 나오지 못하게 되어 버린 후아나는 눈물 까지 글썽이며 울부짖고 있었다. 그리고 유제니아는 너나 페트리샤 나 별로 눈에 차지도 않을 거다, 하고 생각하며 훌쩍거렸다. 드디어 후아나가 벌떡 일어났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어. 이건 내 인생의 기회일 지도 몰라!" 유제니아는 건성으로 물었다. ".......그래서? 킁-" "직접 그 왕자님을 만나 뵈어 보겠어! 루실리아 대공비가 한 일을 나라고 못할 게 뭐 있어?" 유제니아는 루실리아 대공비는 엄청난 미녀다, 라고 말해봤자 '나도 그 정도 미모는 된다고!'하는 답이나 들려올 것 같아서, 고개만 끄덕 였다. 현실적인 충고는, 환상이라는 말로도 모자랄 정도로 거대한 망상 앞에서는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그건 구름이야, 하고 말하면 난 높이 뛰기 잘하니까 잡을 수 있어! 하고 답하면 할 말이 없지 않은가. 유제니아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머리를 다듬는 후아나를 슬쩍 보았 다. 한숨이 나왔다. 후아나가 이 지긋지긋한 성에서 벗어나고 싶어 안달이나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고, 조각처럼 잘 깎인 얼굴과 당 돌해 보일 정도로 자신만만한 분위기의 후아나가 보기 드문 미모의 소유자인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미모의 여인은 질리도록 봤을 저 왕자에게, 또 자신에게 잘 보이려는 여자가 넘치도록 많은 그 소년 에게, 이 변방의 소녀 후아나가 매력적으로 보일 것이냐, 에는 의문 을 제기할 수밖에 없었다. 루실리아 대공비의 행운이 자신에게도 올 지 모른다, 라는 꿈은 가상했으나 그것이 전무후무한 일이기에 그 정도 이슈가 되었다는 것은 왜 생각 못하는 건지 모를 일이다. 결국 뜨개질은 포기한 유제니아는 현실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후아나, 타냐 덕에 지금 방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되었잖아. 들키 면 한달 내내 무너진 탑에 갇힐 거라고." 후아나는 고집스레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좋아. 그게 무서워서 이 일생 일대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 어." ".......흠." 유제니아는 친구를 위해 힘 좀 써 보기로 했다. 그래서 무릎을 모아 침대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조금 있다가 같이 나가자. 타냐에게 들키면 내가 그 왕자 얼굴 한 번 보려고 나온 건데 너무 쑥스러워서 너 끌고 나왔다고 해 줄게. 이리 혼나든 저리 혼나든 마찬가지잖아." 후아나의 얼굴이 당장에 환해졌다. "고마워! 일이 잘 되면 네 덕이야." "....." 유제니아는 정말 잘 되면 뒤돌아보기나 하겠냐, 라는 부정적인 생각 만이 들었다. 그러나 후아나가 너무나 기뻐하는 얼굴을 보니, 그리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후아나가 준비하는데 한시간이 낭비될 무렵 하녀가 후아나의 저녁 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하녀는 유제니아에게는 식당에 맛있는 음 식이 잔뜩 있으니 지금 먹으러 오라는 말을 넌지시 전했다. 보아 하 니, 후아나는 싫어해도 유제니아는 좋아하는 그들은 이 기회에 유제 니아마저도 후아나로부터 떼어놓으려고 유제니아만 부른 것 같았다. 그리고 하녀는 비웃듯 후아나를 보고는 휙하고 지나치며, 후아나가 휘안토스 왕자가 있는 곳에 얼씬도 못하게 된 데 고소해했다. "우선 먹어." 그러나 후아나는 보리 빵에 치즈 한 덩어리만 덩그러니 있는 초라 한 식사를 보더니 고개를 팩 돌렸다. "안 먹어. 꾸역꾸역 먹고 배 튀어나온 모습을 보일 수는 없으니까." ".......가상하네, 정말." 유제니아는 몸서리가 쳐질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꾹 참으며 빵과 치 즈를 챙겨 테이블 위에 놓고는 빈 그릇을 밖에 내 놓았다. 그릇이 비어있어야 아무 의심을 하지 않을 것 아닌가. 유제니아가 방문을 닫자, 후아나가 몸을 한번 돌려 보이고는 물었 다. "그런데 네가 보기에 나 어때?" "후아나, 작전을 잘 세워야 해. 작전을. 고양이처럼 사뿐사뿐 지나가 는 게, 다가 아니라고. 우선 말이야, 남자들은 가엾은 처지의 여자들 에게 동정심이 많아. 특히 그 가엾은 처지의 여자가 놀라운 미모의 소녀라고 해 봐, 남자라면 누구나 도와주고 싶어할 걸." 슈마허 덕에 남자에 대한 환상을 키우기보다는 절망적인 진실을 더 많이 봐왔던 유제니아였다. "그래서?" 후아나는 벌써 솔깃해져 있었다. 유제니아는 속으로 한숨을 내 쉬고 는 재빨리 말했다. "타냐에게 들켜." "타냐에게! 너 미쳤어?" "우선 내가 몇 마디 해 둘게. 그 타냐 아주머니란 사람, 분명 페트 리샤 옆에 꼭 붙어 있을 테니....내가 거기 가서 조금 큰 소리로 네 가 정말 구제불능이다, 사고 쳤다, 어쩌고 말하겠어." "......그래서 뭘 어쩌라고?" "페트리샤가 따분한 애라는 건 나도 잘 알고, 그런 애가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는 더욱 따분한 아이가 될 거라는데 얼마를 걸어도 좋 아. 잔뜩 흥미 없는 마당에 색다른 이야기가 나 와봐. 귀라도 한번 기울여 볼 거야. 자, 이러면 우선 주의를 끄는 데는 성공했지? 그리 고 단순한 타냐는 아마도, 너와 죽이 맞아 돌아다니던 내가 네 험담 을 하는데 아주 기뻐할 거야. 게다가 행여나 왕자가 너에게 흥미를 보일까 잔뜩 긴장해 있었을 테니 나에게 맞장구 쳐주며 그 왕자에 게 네 이야기를 할 걸. 정말 못된 애다, 구제불능이다, 같은 방을 쓰 는 이 착한 아이도 괴롭히나 보다, 등등." "너 일을 도와주려는 거야, 말려는 거야?" "바보야, 일이 그렇게 되면 어느 남자가 가련한 처지의 예쁜 소녀가 모함 받고 있다 생각하지 않겠어? 특히, 휘안토스 왕자는 이런 저런 여자들을 상대해 본 소년이라고! 봐, 나는 아무리 잘 봐줘도 좀 예 쁘장한 시골 계집애 정도라고. 이런 내가 재잘 재잘 네 험담을 하 면, 남자들은 당연히 내가 네 미모를 질투해서 그리 말하는 거라 생 각할 테지. 적당히 예쁜 애들이 작당해서 뛰어나게 예쁜 애를 모함 하는 건 상식이라 생각하는 게 남자거든. 자, 생각해 봐. 이제부터는 네가 잘 해야 해. 그렇게 관심을 끌어줄 테니, 너는 어디 눈에 잘 뜨이는 곳에 서서 억울하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봐 줘. 왕자가 발견 못하면 내가 '어머, 저기 나와 있네?' 하고 도와줄 테니. 단, 절대 노 려보면 안 되, 알겠지?" "알았어!" "고개 돌리면서 입술 꾹 무는 것도 잊지 말고. 타냐는 아마도 네 험 담을 잔뜩 하면서 그에 비해 우리 페트리샤 아가씨는 얼마나 조신 하고 어여쁜 숙녀인지 잔뜩 늘어놓을 거야. 하지만 그때의 승자는 이미 너야. 넌 그저 참고 있다가 눈에 잘 뜨이도록 하며 뜰로 나가. 내가 네가 어디로 가는 지 슬쩍 흘려 놓을 테니, 인내심 가지고 기 다리고. 알겠어?" "대단하다, 너..." 사실 유제니아가 그런 계획을 말하는 것은 후아나가 정말 휘안토스 왕자의 눈에 들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 아니라, 그 왕자가 떠난 후 타냐가 후아나를 어찌 다룰 지 뻔하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일어 날 사태라면, 조금이라도 피해범위를 줄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유제니아는 후아나의 금발에 묶인 장미색 리본을 보고는 말했다. "리본은 빼." "야아--" "화려하게 보이는 게 오히려 안 좋다고. 아니, 내가 일부러 이쁘게 꾸며야 더 쉽게 오해를 해 준다고." 벌써 유제니아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따르게 된 후아나는 고개를 크 게 끄덕였다. "좋아!" 유제니아는 그 리본을 얼른 빼앗아다가 머리에 묶었다. 후아나가 떨 면서 말했다. "나, 나는 언제 나가면 되?" "내가 타냐 근처로 가면. 숨어서 지켜보다가 아주 자연스럽게 나오 는 것처럼 천천히 걸어나오도록 해. 알겠지?" "응!" 그리고 유제니아는 이 장미무늬 리본은 나중에 수고비로 챙겨야겠 다고 생각했다. 색깔과 무늬가 아주 마음에 들었는데, 아무리 봐도 후아나의 금발머리보다는 자신의 검은머리에 어울릴 것 같다. 게다 가 그 왕자 근처에 가는 것만도 끔찍한데, 그것을 감수하는 마당에 이 정도 보답도 없어서야 되겠나 싶었다. 성주 가족과 최고의 귀빈인 암롯사의 휘안토스 왕자는 성에서 악사 이자 페트리샤의 음악선생인 길리아가 타는 만돌라를 들으며 후식 으로 나온 과일을 먹고 있었다. 그를 수행해온 기사들은 엄격한 눈 빛으로 그 음악을 듣고 휘안토스를 살폈다. 성의 기사들이 그들에게 말을 걸었지만, 그리 친절한 답변을 듣지는 못했다. 암롯사 왕자를 호위하는 기사들에게, 그들은 그저 변방의 시골뜨기 정도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행여나 문 꼭꼭 닫고 자기네들끼리만 이야기하고 있을까 걱정했던 유제니아는 일단 안심했다. 그래서 지나가다 구리 화병에 얼굴을 비 추어 보며 리본이 잘 묶였는지 확인하고는 타냐 쪽으로 갔다. 휘안토스 옆에는 예상했던 대로 페트리샤가 찰싹 붙어서 무언가 열 심히 이야기 하고 있었다. 휘안토스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은 초점이 어긋나 있었다. 유제니아는 되도록 그를 보지 않으려 노력하 며 타냐의 옷자락을 슬쩍 잡아당겼다. "누구.....어머나, 유제니아." 타냐는 후아나 없이 유제니아 혼자 있자, 당장에 반색을 했다. 사실, 하녀인 마샤가 식당으로 오라고 한 건 그 때문도 있었다. 만찬이 끝 나면 나가서 휘안토스의 기사들을 상대하라고 부르려고 했던 것이 다. 타냐는 유제니아가 마음에 드는 상대에게는 꽤나 재미있게 재잘댄 다는 사실을 잘 알았고, 이런 재치 있고 귀여운 소녀가 분위기를 얼 마나 잘 살리는 지도 안다. 게다가 유제니아는 후아나처럼 눈에 확 뜨일 정도로 예쁜 것도 아니니 페트리샤보다 빛날 염려도 없었고, 유제니아는 자기 나이보다 어려 보이기까지 하니 남자들은 이 소녀 를 귀여운 여동생쯤으로 볼 테니 걱정도 없다. "마샤에게 너도 이곳으로 오라고 전하라 했는데....못 들었니?" "아뇨, 들었어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타냐는 활짝 웃으며 주변의 기사들에게 유제니아를 소개했다. 유제 니아는 방긋 웃으며 그들에게 인사를 했고, 시골 기사들의 지겨운 질문에 시달리던 기사들은 귀엽고 발랄한 소녀가 오자 흥미를 표했 다. "그런데 좀 늦었구나. 왜, 후아나가 못 나가게 하더니?" 유제니아는 타냐가 먼저 후아나의 이야기를 꺼내자 덥석 안아버릴 뻔했다. "아아, 그 애 요.....그 덕에 못 나올 뻔했지 뭐예요...." "내 그럴 줄 알았지. 워낙에 심성이 못된 아이라서.....너도 그 애와 가까이 지내지 말렴. 착한 네 심성마저 흐려질까 걱정이구나." 유제니아는 흘끗 휘안토스 쪽을 보았다. 휘안토스의 눈길은 아직 페 트리샤 쪽이었지만, 그가 타냐와 자신의 대화에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은 고개를 살짝 튼 것만으로도 금방 알 수 있었다. "어머나, 저기 있네요. 나오지 말라고 했는데 왜 왔나 몰라." 유제니아는 얼른 손을 들었다. 타냐의 눈이 당장에 험악해졌고, 순 간 휘안토스가 고개를 들어 유제니아를 보더니 그녀가 가리키는 방 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제니아는 그가 완전히 고개를 돌릴 때까지 성실하게 치켜들고 있다가 얼른 손을 내렸다. 타냐는 급히 휘안토스에게 말했다. "인자하신 성주께서 후견인이 되어주신 아이지요. 하지만, 얼굴은 저렇게 고와도 심성은 영 아니랍니다." 후아나는 유제니아가 시킨 대로 잘 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타냐 를 더욱 불쾌하게 했고(평소모습과는 영 딴판이니), 휘안토스가 흥 미를 보이자 더욱 기분 나빠했다. 옆의 페트리샤마저도 불안한 눈초 리였다. 왕자의 눈길이 후아나를 향하자, 다른 기사들 역시 모두 그 녀를 향했다. 몇몇 청년들의 눈빛에 호감과 탄성, 그리고 은밀한 갈 망이 일었고, 생각보다 더욱 굉장한 반응에 유제니아까지 놀라 버렸 다. 그 때 타냐가 얼른 갈리아에게 눈짓을 보냈다. 갈리아가 냉큼 고개 를 끄덕이고는 경쾌한 춤곡을 연주했다. 타냐가 휘안토스에게 말했 다. "어머나, 춤곡이.....아가씨와 한번 추어 보시겠나요, 왕자님?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그러나 휘안토스의 눈길은 여전히 후아나를 향하고 있었다. 타냐가 점점 초조해하고, 페트리샤도 손가락을 움찔거리며 불안한 기색을 참지 못했다. 그러던 휘안토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마르실리오-" 휘안토스가 부르자, 그를 계속 지켜보던 금발의 키 큰 기사가 다가 왔다. 그는 유제니아 뒤에 있어서, 가까이 오니 유제니아 바로 뒤에 서게 되었다. 몸이 닿자, 유제니아는 갑자기 오싹해져서는 슬쩍 몸을 뺐다. 그러 나 그 순간, 기사의 큰손이 유제니아의 허리에 닿았다. 아주 조금 힘을 준 듯 보였지만, 유제니아는 그 동작이 상당히 교묘하다는 것, 그래서 타냐가 비키지 않는 한 꿈쩍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칼라하스와 마하에게서도 느끼 지 못한 오싹한 공포에, 유제니아는 정말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직감이 그렇게 온 몸을 벌벌 떨어대고 있었다. 위험해, 이 사람들--끔찍할 정도로. "타냐, 저기.....좀 비켜 주시겠어요?" "어머나, 유제니아. 어디 아프니?" "네, 갑자기....배가 아파서....." 순간 발에 탁, 하고 가벼운 충격이 오더니 유제니아는 앞으로 쏟아 지고 말았다. 그리고 기사의 큰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아 당겼다. "제가 모셔다 드릴까요, 아가씨?" 유제니아는 현기증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어디로 모셔주게? 내 방, 아니면 당신 방? 온갖 생각이 다 든다. 하지만 이 남자와 단 둘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겠다. 춤곡 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휘안토스는 페트리샤에게 춤 신 청을 하지 않았고, 다른 기사들은 마땅한 파트너도 없었다. 유제니 아는 좋은 생각이 났다. "아니, 좀 낫네요. 방까지 갈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그리고 허리를 당겨 기사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 그런데 춤추실 줄 알아요?" 순간 기사의 얼굴이 변했다. 유제니아는 생긋 웃으며 그의 손을 잡 아끌어 홀의 안쪽으로 갔다. 이 키 큰 기사가 암롯사에서 어떤 위치 인지 모르겠지만, 그가 작고 귀여운 소녀에게 끌려오자 암롯사의 기 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리고는 큭큭 웃었다. 휘안토스의 얼굴 역시 웃는 듯 불쾌한 듯 기묘해졌고, 페트리샤는 휘안토스가 자신에게 춤 신청하기만 초조하게 기다리느라 그의 눈치를 살피지 못했다. 마르실리오가 급히 말했다. "아가씨, 저는...." 당장에 뒤에서 암롯사의 기사들이 야유하기 시작했다. "어이, 마르실리오 경, 예쁜 아가씨 세워 놓고 너무 무안 주시는 거 아닙니까?" "춤 못 추신다고 빼는 거 아니시죠?" "아가씨, 겉모습에 속지 마시오. 온 암롯사 여자들을 휘어잡을 정도 의 춤꾼이니!" 늘어질 정도로 재미없던 만찬장에서 드디어 재미있는 거리가 생긴 암롯사 기사들이 신나서 외쳤다. 갈리아가 더욱 열심히 만돌라를 켜 주었다. 유제니아는 마르실리오의 손에 허리와 손을 나누어 맡기고는 그를 이끌었다. 춤 자체는 그리 알지 못하지만 유제니아는 날씬한 데다가 가볍고 빠른 몸을 가지고 있었다. 사근사근 다루니, 결국 마르실리 오도 긴장으로 굳었던 몸의 힘을 빼고는 유제니아를 리드해 주었다. 게다가 기분은 좋은 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 웃음에만큼은 유제니아도 조금이나마 호감이 갔다. 암롯사의 기사들이 환호했다. "마르실리오 경, 여기서 장가가겠군." "안돼. 저 귀여운 아가씨에 비하면 마르실리오 경 쪽은 너무 늙었다 고. 나라면 또 몰라." "아가씨- 그 다음은 나요." 유제니아는 박자와 가락에 주의를 기울이며, 곡이 끝나는 순간을 기 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페트리샤가 직접 나서 휘안토스의 손을 잡아 끌었다. 남자라 거절할 수 없는 휘안토스는 별 수 없이 끌려 나오고 말았고, 그 순간 음악이 멈추었다. 갈리아가 아가씨를 위해 곡을 좀 더 길고 부드러운 것으로 바꾸려 하는 것이다. 유제니아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저는 여기서 물러 날 게요, 기사님. 왕자님과 영애가 계신데.....비교 될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마르실리오의 손이 허리에서 내려가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그의 뺨에 입을 맞추고는 뒤돌아 섰다. "잠...."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유제니아는 족제비처럼 빠르게 마 르실리오의 손을 빠져나가, 암롯사의 기사들에게 발랄하게 웃으며 인사를 하고는, 치마를 당겨 어두운 복도 쪽으로 사라졌다. 그 동안 마르실리오가 한 일은, "......깐." 까지 말한 것뿐이었다. *********************************************************** 작가잡설: 어제 배가 고파서 우유를 꺼내 먹었답니다. 유효기간이 3일 지난 것을 알게 된 것은, 그 안에 든 것을 모두 비운 뒤였습니다... 어허이고, 배 아파라아...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27장 *************************************************************** [겨울성의 열쇠] 제125편 그림자 속의 그림자#4 *************************************************************** 어느 정도 도망 왔다 싶자, 유제니아는 숨을 고르고는 벽에 등을 기 댔다. 방금 그 남자, 유제니아가 아차 하는 순간에 그녀를 끌고 가려고 했 다. 마하는 그래도 여자며, 또 친절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남자는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고, 손에 닿는 순간 소름이 쭉 끼칠 지경 이었다. 게다가 남자다. 그런 남자가 신분 낮은 아이를 험하게 다루 지 않을 거라, 누가 보장하나. 유제니아는 한참이나 그렇게 있다가 등을 떼고 방으로 돌아가기 위 해 돌아섰다. 그리고 순간, 어디서 갑자기 손 하나가 튀어나오더니 유제니아를 어둠 속으로 끌고 갔다. 갑자기 컴컴해졌다. 지난번에 불이 나서 천장도 남아있지 않은 복도였고, 달빛도 어스름했다. 사 실 그 때문에 유제니아는 그 쪽으로 도망 나온 것이었지만, 이렇게 느닷없이 붙들리니 더할 나위 없이 끔찍한 곳이 되어 버렸다. "누구..." "조용히." 그 목소리에 유제니아는 순간 아키?, 하고 부를 뻔했지만 어둠에 익 어 가는 눈에 보이는 머리카락은 분명 검은 색이었다. 차갑게 빛나 는 보랏빛 눈동자가 보인다. 맙소사....너무 차가워, 소름끼치도록- 유제니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손을 당겼다. 그러나 손목을 움켜쥔 그 의 손에 힘이 꾹 들어가더니, 위로 꺾듯이 젖혀 벽에 밀어붙였다. "꺅-!" "조용히 하라고 했다." "......!" 정말 겁에 질려서가 아니라, 그 오싹한 차가움에 몸이 굳고 말았다. 휘안토스가 물었다. "아키는 어디에 있지?" "무슨 소리죠?" 휘안토스는 후, 하고 웃었다. "너도 짐작했다시피, 아킨토스 프리엔은 내 동생, 그것도 쌍둥이 동 생이다. 그러니 말해라. 내 동생은 어디 있지?" "무슨 소리하는 지 모르겠네......아....!" 다시 유제니아의 팔목을 움켜쥔 손에 힘이 꾹 들어갔다. 유제니아는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눈만 질끈 감았다. "나는 시간낭비는 아주 싫어한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말하는 건 단 하나의 답만을 제하고는 모두 알고 있을 때뿐이라는 것도 알아 둬라. 아키는 어디에 있지?" 유제니아의 눈이 차가워졌다. "떠났어요." "어디로?" "몰라요, 그건. 어쨌건 떠났어요." 휘안토스가 웃었다. "짐작 가는 데는?" "한 마디도 안하고 훌쩍 떠나버렸고, 저는 그걸 들을 수 있을 정도 로, 또는 짐작해 볼 수 있을 정도로 아키와 친하지는 못했어요." 그리고 유제니아는 휘안토스를 노려보았다. "이제 손 놔줘요." "정말 모르는 건가?" 그러자, 유제니아는 휘안토스에게 잡힌 손에 힘을 주어 당기며 사납 게 말했다. "이 손목을 끊어도 몰라요." "다른 방법을 동원한다면?" "모르는 건 모르는 거예요." 휘안토스의 웃음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소름이 쭉 끼쳐왔다. "넌 알아." "근거가 뭐죠?" "아키는 내 동생이고, 나는 그 애고 그 애는 곧 나지. 내가 믿으면 그 애는 반드시 그렇게 했기 때문에 그리 믿는 거야." 유제니아는 고개를 돌렸을 뿐이었다. 대체, 얼굴은 똑같은 데 느낌 은 왜 이다지도 틀린가. 차라리 이 왕자와 그 칼라하스 공주가 남매 지간이라 말하면 그게 더 믿기 쉬울 지경이었다. 휘안토스가 그녀의 턱을 돌려 자신을 향하게 했다. "진실을 짜내는 방법은 아주 많아." "유혹이라도 하려고요?" "그럴 것까지는 없다. 오늘 보니, 내가 데리고 온 기사들이 너한테 흥미를 표하더군...그리고 그들은 내 명령은 아주 착실하게 들어." 유제니아는 당장에 그 뜻을 알아차렸고, 혐오에 찬 눈으로 휘안토스 를 노려보았다. "소문 날텐데?" "너는 그냥 고아 계집애다." 유제니아의 턱이 떨려왔다. "너는 흔적도 남지 않을 것이고, 남는다 할 지라도 너 혼자의 치욕 으로 끝날 거다. 또, 나는 한다면 반드시 해. 자, 이제 어쩌겠어?" ".....아키는 내 은인이에요." "나는 그 애 형인데." 유제니아는 혀를 날름 내밀었다. "보자마자 뜯어먹어 버릴 듯한 눈으로 그렇게 말하면, 누가 마음놓 고 가르쳐 준데요? 아키가 위험할 것 같으니, 나는 절대 말 안 하겠 어요. 아키는 내 은인이고, 지키는 건 당연하니까요." "말 해." ".....보통 이럴 때는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 어쩌고 하지 않나요?" "말했다. 난 그런 걸로 낭비 안 한다고. 생각 따위는 필요 없어." "안 하면?" "방금 선고한 대로 실행시킬 생각이다." "당장?" "어려울 거 없지." 유제니아는 예쁘장한 입으로 너를 내 기사들에게 돌리겠어, 하는 말 을 태연하게 하는 모습이 차라리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리고 아 킨이 암롯사가 고향임에도 로메르드로 간다고 했는지도 짐작이 갔 다. 떠나기 전, 아킨는 그녀에게 그렇게 말하며 세르네긴에게 유제 니아에 대한 말을 전해주겠다고 약속하기까지 했었다. 그래서 그저 그곳이 고향이려니, 했는데..... 유제니아는 아직 왼손이 자유로운 것을 이제야 알았다는 듯 손바닥 을 쫙 피고는 번쩍 쳐들었다. 휘안토스의 턱이 그 쪽을 행했다. 그 러나 유제니아는 그것을 휘둘러 휘안토스의 손에 붙들리는 것 보다 몇 배는 더 효율적인 방법을 알고 있었다. "큿-!" 그리고 잠시 뒤, 휘안토스는 눈앞에서 유제니아가 사라짐에도 손 하 나 까딱 못 한 채 벽에 손을 짚고 숨만 몰아쉬어야 했다. "뭐 저 딴 녀석이 다 있어!" 방으로 돌아와서 한참이 지나도 유제니아는 진정하기 어려웠다. 차 라리 그냥 페트리샤나 후아나처럼 멍청하게 '멋진 왕자야!' 하고 정 신이나 팔 걸 그랬지. 암롯사의 그 유명한 왕자에 대해 유제니아가 아는 것은, 루실리아의 미모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눈부신 미소년에, 한 해의 토머넌트를 열 네 살의 몸으로 휩쓸고, 거의 수석에 가까운 실력으로 압셀론을 졸 업했다는 것 정도였다. 게다가, 외아들인 그는 당연하게 암롯사의 왕위를 물려 받을 것이고, 현재 그 뒤의 경쟁자가 될만한 상대도 기껏해야 숙부인 테시우스 정도였다. 그러나 그 모든 눈부신 배경보다, 유제니아는 휘안토스 프리엔이라 는 소년 자체가 끔찍하게 생각되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후아나가 잔뜩 볼이 상기된 채 들어왔다. "어머, 너 벌써 들어왔어?" 유제니아는 턱을 괴고 있다가 후아나를 돌아보았다. 후아나의 갈색 눈은 정말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유제니아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무슨 일 있었어?" "네가 말한 대로되었어!" "으, 응?" 후아나는 자기 일에만 정신이 팔려 있어, 유제니아의 얼굴이 해쓱해 지는 것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그녀는 유제니아 옆에 앉으며 말 했다. "그 분이, 정말 그분이 내게 오셨어! 지금까지 내내 이야기했는데! 아아, 얼마나 근사한 분인지! 그렇게 친절하고 멋진 분은 태어나서 처음이고, 앞으로도 없을 거야!" 유제니아는 그가 민망한 곳을 얻어맞고 바로 이 후아나를 찾아갔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런데 왜 찾아 간 거야? 왜! 그냥 자기 기사들에게 돌아갈 일이지! 그런데 후아나가 유제니아에게 바짝 다가오며 말했다. "그분이, 나에 대해 정말 많이 물어보셨어! 그렇게 사소한 이야기에 도 어쩜 그리 친절하게 귀를 기울여 주시는지, 처음에는 너무 떨려 서 더듬거렸는데 나중에는 정말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었어. 그리 고.....내 손등에도 키스해 줬다!" 나라면 지금쯤 그 손을 세탁비누에 대고 문지르고 있을 거다, 하고 유제니아는 생각했다. "그 자.....아니지, 아니지. 왕자님이 뭘 물어보셨는데?" 하마터면 그 자식이, 하고 말해 버릴 뻔한 유제니아는 아주 당황했 다. 다행히, 잔뜩 흥분한 후아나는 귀담아 듣지도 않았다. "음, 별 거 아냐. 우선 나이와 이름은 당연히 물어보지? 그리고...어 떻게 지내냐, 누구와 지내냐...걱정 마. 네 이야기는 잘 해뒀으니까, 못된 아이라 생각하지는 않을 거야." 유제니아는 침대에서 굴러 떨어질 뻔했다. 온 몸이 쭈뼛 곤두서는 것 같았다. "나, 나에 대해?" "응.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말하려면 당연히 네 이야기를 해야 하잖 아." "뭐라고 했는데?" 후아나는 유제니아가 그저 자기와 같은 이유 때문에 물어보는 거라 생각하고는 어떻게 말했는지 신나게 이야기 해 주었다. "그리고......어느 기사가 너한테 굉장히 흥미가 있다던데? 한번 만나 봐. 그래도 암롯사의 왕자를 호위하는 기사님이잖아! 혹시 알아? 나 는 왕자와 결혼하고 너는 암롯사의 가장 멋진 기사와 결혼하게 될 지." "......" 이 때만큼 유제니아는 후아나의 뺨이라도 갈겨 버리고 싶었다. 그녀는 몰랐지만, 유제니아는 그 말뜻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았 다. 이 자식이, 정말!! 갈 때까지 가자는 거야, 뭐야? 유제니아는 진 심을 다해 후회했다. "좀 더 세게 찰걸." "응?" "아무 것도 아냐. 나 잘래!" 유제니아는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가, 이불을 휙 올려 머리를 덮어 썼다. 이렇게 되면 오늘밤에 당장 위험해 질 것 같았다. 한다면 한다, 라 고 말했고....그 눈빛을 보니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해치울 것 같았 다. 그것은 곧 목적을 위해서 상식 같은 것은 얼마든지 가볍게 무시 해 줄 수 있다는 것이며, 내일 아침에는 '내 기사 중 하나가 그 애 에게 청혼을 했다. 데리고 가게 해 달라-'말하며 그대로 끌고 가 버 릴 수도 있다,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말해 두면 아무도 확 인하려고도, 유제니아를 붙잡아 두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자식.....! 유제니아는 결국 방법이 하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오늘 밤에 도망가야 한다, 어디로든! 밤이 되자, 유제니아는 후아나가 곤히 잠든 것을 확인하고는 궤짝을 열어 배낭 하나를 꺼냈다. 많이 챙길 필요는 없다, 판단한 그녀는 우선 옷가지 몇 개와 여행용 망토, 그리고 단검을 꺼냈다. 겨우 팔 뚝길이인 검을 보니 뮬에게 주고 온 장검이 아쉬워졌다. 그것만 있 다면 좀 더 안심할 수 있을 텐데.... 유제니아는 머리를 땋아 말아 올려, 핀으로 고정했다. 그리고 망토 에 달린 후드를 쓰고, 짐을 맸다. 부츠를 끝까지 당겨 신고, 허리 밸 트를 채우고는 그 옆에 돈주머니와 단검을 잘 채워 놓았다. 거울을 보며, 유제니아는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르 간드를 넘나들고, 숲의 흉족들과 싸우고, 핏줄처럼 산 위를 넘나드 는 성의 흉벽에 기대 뮬과 함께 알르간드의 회색평원에 대한 꿈을 꾸고, 어느 날인가는 전나무 숲까지 넘어가고.... 붉은 진홍의 빛이 깔리는 그 회색 평원을 지켜보며 뮬이 말했었다. -나중에는 '천개의 눈'까지 가 보자고. 얼음의 여왕이 황제의 성배를 숨긴 그곳으로 말이야....혹시 알아? 내가 그 성배를 찾아 황제가 될 지. 유제니아는 피식 웃었다. 잘 하면 나 돌아갈 지 모르겠다, 뮬. 사정이 별로 안 좋으면 네 오 두막에 신세지지, 뭐. 이상한 왕자님이 쳐들어 와서 말이야~ 유제니아는 창턱을 밟고는, 후--하고 숨을 들이마신 다음 발을 퉁 겼다. 창 바로 앞으로 큰 가지를 드리운 나무 위로 부츠바닥이 닿 자, 유제니아는 몸을 앞으로 숙여 균형을 잡으며 나뭇가지 하나를 붙들었다. 그 다음은 쉬웠다. 유제니아는 어려움 없이, 미끄러지듯 나무 둥치 를 밟고 내려가 뒤뜰에 내려왔다. 멀리 도망칠 생각은 없었다. 유제니아는 이 근방 지리에 대해 잘 알 지도 못하고, 그런 마당에 무턱대고 휘안토스를 피해 도망치다 길을 잃고 헤맬 생각은 없었다. 유제니아는 몇 개의 나무 둥치와 길과 바위를 지나, 성의 뒤를 감싼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걸리지 않아 숲 속에 우뚝 솟은 탑에 도달했다. 그곳은 하얀 뼈다귀처럼 음산하게 숲의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었고, 높고 길었지만 그 끄트머리는 무너져서 달빛과 별빛을 그대로 받아 들이고 있었다. 벌받는 아이가 아니라면 아무도 오지 않는 곳이니, 이곳이라면 괜찮 을 것이다. 이 근처로는 아무도 오지 않고, 또 유제니아가 그저 아 무 것도 모르는 어린 소녀라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녀가 마을로 내려가거나 성문을 통과할 거라 생각할 테지. 그 휘안토스 역시 그 렇게 생각해 줄 것이다. 유제니아는 탑 안으로 들어가, 무성한 잡초를 헤치고 성의 벽에 붙 은 계단을 올라갔다. 꼭대기에 도달하니, 천장으로 향하는 계단과 그 천장에 납작하게 붙 은 문이 보였다. 아래에서 밀어 올리는 식이다. 유제니아는 문을 슬쩍 밀어 올려 보았다. 그리고 작게 탄성을 흘리 고 말았다. 별빛이 쏟아지는 까만 하늘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별들의 바다, 하늘의 대지- 그 속으로 추락할 것만 같은 아찔함- 유제니아는 눈 을 감았다 뜨고는 꼭대기에 올랐다. 탑의 벽 구석에는 짚이 가득 쌓 여 있고, 여기 저기 이상한 물건들이 쌓여 있었다. 유제니아는 가장 컴컴한 구석으로 가서 몸을 숨기려 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둠 속에서 갑자기 손이 와락 솟아 나왔다. 비명을 질러 버릴 뻔했 지만, 그 빠른 손은 벌써 유제니아의 입을 틀어막고는 안으로 끌어 당겼다. 몸을 비틀려 했지만 강한 팔이 허리와 가슴을 꾹 눌러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발로 차려 했지만, 그는 그녀를 움켜잡은 채 벽에 몸을 밀어 붙였고, 유제니아는 꿈쩍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쉿-" 안온한 바람이 조용히 불어오는 듯한 목소리였다. 목소리 자체보다 는, 그 안에 실린 느낌이 그러했다. 유제니아는 벽과 그의 품안에 갖힌 채 조용히 숨을 내 쉬었다. 뒤에 있는 자는 분명 사람일 테지만, 그에게는 인간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나무 둥치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듯, 그의 몸에서는 싱그러 운 숲의 내음이 풍겨왔다. 땀 냄새도, 오랜 여행에 찌든 냄새도 없 었다. 그것은 젊고 싱싱한 숲이 내 뿜는, 고요한 밤의 숨결 같은 기 이한 향기였다. 유제니아는 힘겹게 고개를 돌렸지만, 그가 다시 앞을 보게 하더니, 갑자기 망토끝자락을 들어 유제니아를 덮어 버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유제니아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별빛 속에 길게 솟은 귀와 기이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보였다. 유제 니아는 그의 품안에서 내 쉴 수 없는 탄성을 흘렸다. 엘프-? "소녀, 무슨 소리가 들려도 꼼짝도 하지 말아라." 몇 마디 되지 않는 말이었으나, 그것은 달빛과 별빛이 쏟아지는 언 덕 위에 솟은 오래 된 나무가 바람에 실려 보내는 자장가같은 편안 함과 온화함이 있었다. 유제니아는 그의 품에 기댄 채 가만히 있었고, 곧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쉿-" *********************************************************** 작가잡설: 좀 더 세게 찼으면.... 아키가 암롯사의 후계자다... (....어이..;;)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28장 *************************************************************** [겨울성의 열쇠] 제28장 거울 속의 달빛 제126편 거울 속의 달빛#1 **************************************************************** 자켄은 소녀의 숨소리가 거칠어지자 그녀의 어깨를 쥔 손을 몇 번 토닥여 달래주었다. 겁먹은 새끼 고양이라도 만지는 것 같았다. 곧, 엘프의 민감한 귀가 인간이라면 결코 듣지 못할 짖는 소리를 세 세히 판별해 냈다. 숫자, 크기, 속도까지. 하나, 둘-겨우 두 마리다. 다루는 이는.....하나. 다행이군. 그래, 아무리 이곳이 변방에 시골이 라 할 지라도 적어도 외국인데 많이 내 보낼 수는 없었을 테지. 같은 것을 듣고 있음에 분명한 소녀가 숨을 죽여갔다. "이제 무엇이 와도 가만히 있어라." 소녀가 품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자켄은 목소리를 더욱 낮추어 말 했다. "움직이지도 말아라." 소녀의 떨림이 뚝 멈추었다. 자켄은 자신이 엘프의 피를 절반이나마 가지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생각했다. 그것은 비 록 녹슨 쇠 비린내 같은 나무들의 기운과, 낯선 흙 냄새를 품은 험 상궂은 숲의 근처라 할 지라도 소녀를 안심시켰다. 킁킁- 그 소리가 가까워진다. 자켄은 가만히 어둠을 응시했다. 무너져 팔 뚝만한 높이만 남은 맞은 편 벽은 어둠 속에서 뿌옇게 빛났고, 그 너머로 달 없는 밤의 뿌연 은하수가 저 높고 험준한 산이 솟은 지 평선 너머로 흘러가고, 그 위로도 찬란한 별빛이 쏟아진다. 순간, 갑자기 허공에서 불이라도 킨 듯 뻘건 빛이 두 개 화륵 타올 랐다. 벽에 잉크병이라도 던진 듯 그림자가 얼룩지더니, 하늘위로도 어둠이 퍼지며 별빛을 삼켰다. 그르릉-낮게 으르렁대는 소리가 들려 온다. 탁, 탁-얇고 긴 다리가 돌 바닥을 밟는 소리도 들려온다. 자켄은 조용한 눈으로 벽의 그림자 속에서 시커먼 형체가 뽑혀 나 오는 기괴한 광경을 지켜보았다. 소녀가 놀라 움직이지나 않을까, 했지만 다행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눈을 질끈 감은 채 몸을 꾹 웅 크리고 있었다. 검은 것은 긴 목과 짧은 귀, 사슴처럼 늘씬한 다리와 날렵한 허리를 가진, 검고 큰 도베르만 같은 사냥개였다. 그리고 그것은 붉게 타오 르는 눈으로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뾰족한 코끝을 움찔거리며 킁킁 댔다. 그러다가 드디어 자켄 쪽으로 스르륵- 소리 없이 다가왔다. 송곳 같은 이가 드러나고, 목구멍 안에서는 유황인 듯 역한 냄새를 풍기는 검은 연기가 흘러나온다. 자켄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고 망토를 움켜쥔 손에만 힘을 주었 다. 개가 다가오더니 코끝을 망토에 대고는 킁킁댔다. 다행히 소녀 는 움직이지 않았고, 개는 크릉-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으르르 르르릉-성질이라도 내는 듯 울더니 갑자기 휘릭 사라져 버렸다. 자켄은 조용히 한숨을 내 쉬었다. 컹컹-사냥개 짖는 소리가 점점 멀 어지더니 이윽고 사라졌고, 자켄은 한참을 더 기다린 뒤에야 망토를 젖혔다. 소녀는 파랗게 질린 채 엎드려 있다가, 갑자기 망토가 치워지자 고 개를 들었다. 얼굴은 땀에 젖어 있고, 까만 머리카락도 이마와 볼에 마구 흐트러져 붙어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있었지만, 그녀가 인간인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자켄이 말했다. "이제 괜찮다, 소녀." "뭐......뭐죠, 방금?" "그림자 정찰견. 암롯사에서는 그림자의 수호자들과 그 사냥개들이 라 불리지." 소녀의 얼굴이 갑자기 변했다. "암롯사.....요?" "그래. 저들을 소환하여 부릴 수 있는 것은 암롯사의 왕이나 직계 후계자뿐이다. 보통은 전장을 살펴 볼 때 쓰지만, 누군가를 찾아 낼 때도 쓴다." 그리고 자켄은 소녀의 안색을 살펴보았다. 더 창백해지고 있었고, 자켄은 그 짖는 소리가 엘프를 제하고는 그들이 찾는 사람에게만 들린다는 것은 말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도 충분히 놀라 있다. 대신, 자켄은 자신의 망토를 흔들며 말했다. "하지만 이 어둠 숲의 망토는 사냥감을 저들의 눈으로부터 가려주 지." "아, 그래서 그렇게 한 거 군요...." "이름이 뭐지, 소녀?" "유제니아." "......나는 자케노스. 그런데, 왜 암롯사의 휘안토스가 너를 찾는 거 냐?" "어라, 어떻게 알았어요?" 이제는 별 수 없어, 자켄은 말하고 말았다. "개들이 짖는 소리는 그들이 찾는 사람들의 귀에만 들린다. 너는 들 었고, 나는 엘프니 당연히 들었던 거야....그러니 말 해주렴. 그가 왜 너를 찾고 있는 거지?" "비밀인데요." 유제니아는 어색하게 웃었고, 자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피식 웃으 며 고개를 저었다. "아키에 대한 일이겠지?" 그리고 자켄은 유제니아의 눈빛으로 그녀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을, 그러나 말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어렵잖게 읽었다. "휘안토스가 이곳 에크롯사로 들어왔을 때부터 그를 지켜보고 있었 다. 내가 아키의 행방이 머문다고 듣게 된 곳이 바로 이 근방인데, 휘안토스도 이곳으로 온다고 하니.......당연히 의심이 가더군. 그래서 그를 따라 이곳까지 온 거다." "그럼, 왜 여기 있었죠?" "네가 이곳으로 몸을 숨기러 온 것과 같은 이유다." 자켄으로서는 아주 현명한 답이었다. 이곳으로 온 합당한 이유를, 유제니아는 넘치도록 가지고 있었다. 여기로는 아무도 오지 않으며, 성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은 숲에 이런 곳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다. 유제니아는 편하게 앉고는 자켄에게 물었다. "......왜 아키를 찾는 거죠?" "너는 왜 휘안토스로부터 도망쳤지?" 유제니아는 순순히 답했다. "그는 아키에 대해 알고 싶어하고, 나는 아키에게 꽤나 신세를 졌으 니 그의 안전을 생각해야 해요. 그 두 가지 입장이 상당히 적대적이 라 판단했기 때문에 잠깐 숨어 있기로 한 거죠. 그리고 나 숨어 있 는 동안 녀석이 포기하고 돌아가면, 난 다시 성으로 돌아가면 되고. 계획은 대충 이랬어요." "그가 협박했나?" 유제니아는 생각하기도 싫었다. "....끔찍한 협박이었고, 나는 그것을 당하고서도 아키가 어디로 갔는 지 말하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아이는 아니에요. 또, 그 왕자님을 보아하니 아무래도......내가 말 안 하면 정말 실행할 것 같기도 했고 요. 그런데 당신은 왜 찾는 거죠? 아직 못 들었어." "나는 아키와 휘안토스의 형이다. 또, 입장의 방향은 너와 비슷하 지." 유제니아는 다행히 한 단계, 그러니까 '어떻게 엘프가!!' 라 외치는 단계는 생략했다. 대신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슬그머니 물어왔다. "어느 쪽이 같아요?" "......" 아무런 성과가 없어도 휘안토스는 별로 실망하지 않았다. 그의 발 밑으로 검은 그림자들이 빠르게 스며들어왔고, 램프 불이 조금 흔들렸을 뿐 세상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휘안토스가 아는 숫자의 모든 그림자들이 사라지자 침실 안으로 음 산함이라 불릴 정도의 오싹한 정적이 휩쓸려 들어왔다. 마침내, 휘 안토스의 옆에 있던 검은 망토와 그림자를 삼킨 듯한 후드, 뼈를 깎 아 만든 듯 하얀 가면을 쓴 자가 휙하니 사라졌다. 휘안토스가 반쯤 몸을 눕히고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자, 마르실리오 가 물었다. "알아 내셨습니까?" 그림자의 수호자들을 부를 때면 늘 그렇듯, 지금도 마르실리오의 얼 굴은 창백했다. 조부가 마법사 임에도, 그는 그런 것들과는 도무지 친해지지 못했다. "아니- 전혀 알아내지 못했군." "멀리 도망갔나 보군요." "마르실리오, 현실적으로 생각해 봐. 그 어린 여자애가 오늘밤에 방 에서 빠져나가 어디까지 갔을 까. 기껏해야 아직 숲에 숨어 있는 게 고작이지." 그가 수호자들을 보낸 것은 정확히 한시간 전, 그러나 유제니아는 방에 없었다. 수호자들은 자의로 정찰견들을 풀어놓았고, 그것들은 주변을 샅샅이 수색했으나 소녀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런 경우를 휘안토스는 단 한번 경험한 적이 있었다. 당시 휘안토스는 아주 어렸고, 수호자들을 풀어 주변을 뒤지게 했던 것은 그의 아버지 사이러스였다. 그러나 사라진 아킨은 온 숲을 샅 샅이 훑어도 찾을 수 없었다. 물론, 그들은 아킨을 찾아내고 가까이 다가가기까지 했었다. 그 후로 아킨은 꽤나 오랫동안 사냥개라면 병 적으로 싫어했고, 지금 역시 멀리서라도 누군가 사냥개와 함께 사냥 이라도 하면 당장에 얼굴이 어두워졌으니. 즉, 아킨은 그들을 보았 고, 대상이 그들을 보았음에도 그들은 아킨을 찾지 못한 것이다. "마르실리오, 에크롯사의 수색자 길드에 말을 넣어봐라." "말씀하십시오." 휘안토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어둠 숲의 엘프와 소녀 일행을 찾아 달라고, 말이다." 휘안토스가 기억하는 바로 그 일이 일어난 그날, 자켄이 사이러스를 찾아왔었다. 그리고 그것은 현상의 이유를 충분하게 설명하고 있었 다. 자켄이 이 근처에 있는 것이다. 밤이 깊어가고, 옅어지고, 마침내 별빛이 사그라질 무렵이 되었다. 달은 이미 진지 오래, 검은 어둠은 햇살에 씻겨 내려가기 시작했다. 자켄은 귀를 기울이더니 말했다. "성의 사람들이 깨어나려 하는 군......어떻게 할 생각이지, 유제니 아?" "지금 성으로 돌아가면 건란한 일이 생긴다는 것 정도는 저도 알아 요. 그렇다고 매일 밤 여기로 도망칠 수도 없고, 그 휘안토스가 오 늘 실패했다고 다시는 시도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고- 그래서...." "그래서?" "남쪽의 소반도로 갈 생각이에요. 아키도 그 쪽으로 갔어요." 자켄의 눈이 커졌다. 유제니아는 엘프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들의 고고함과 정결함만은 잘 안다. 그들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상대를 속여서 타협을 보는 것 자체 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부심 넘치고 당당하며, 그 때문에 자신의 위치를 낮추는 '거짓말'을 싫어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쨌건, 이 엘프의 말은 모두 사실일 것이다. "너는 며칠 여기서 숨어 있다가 성으로 돌아가는 편이 나을 거야." "그게 더 좋기는 하지만, 그럴 수 없으니 나가야 하는 거예요." "가족들이 걱정할 텐데?" "저긴 제 가족들 없어요. 그리고 내 가족들이 저곳에 저를 맡긴 적 도 없고요.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내 가족들을 이곳으로 부르 기 위한 포로이자 인질이었어요. 지금은 까딱 잘못하다가는 아키 용 인질 역까지 덤탱이 쓸 수도 있고." 자켄의 얼굴이 복잡해졌다. "뭔가.....곤란한 일이 있나 보군." "네. 그러니, 당신도 아키를 찾으려면 로메르드로 가야하고 나도 그 곳으로 가야 하니.....같이 가요." 자켄이 묘한 웃음을 터뜨렸다. "난 인간들 마을에는 잘 머물지 않는다." "그러니 더욱 괜찮아요. 저도 되도록 사람들 눈을 피해야 하니까. 또, 엘프 끌고 다니는 소녀라면 한 일주일만에 전 에크롯사에 소문 이 날 걸요? 여기는 엘프가 살지 못하니까." "유제니아, 숲에서 자는 걸 우습게 알지마. 인간들은....특히 너 같은 아이는 하루도 잘 수 없어. 각오가 없다면 데리고 갈 수 없다." 유제니아는 그녀의 단검을 자켄에게 건네주었다. 자켄은 그것을 받아 들어 살펴보았다. 검 집의 위에 드래곤이 새겨 져 있고, 그것은 하얀 숲과 가시들을 밟고 있었다. "이게 뭐지?" 유제니아는 단번에 실망해 버렸다. "정말 몰라요?" 자켄은 단검을 유제니아에게 건네주었다. "난 에크롯사에는 처음 온다. 엘프에 대해 조금이라도 안다면, 이 에크롯사의 숲과 엘프들과의 관계도 알겠지. 어쨌든,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 거지?" "당신보다는 덜 날렵할 테지만, 그래도 보통 사람보다는 자주 숲 속 을 돌아다녔다는 뜻." "사냥꾼 마을에서 큰 건가?" 유제니아가 피식 웃었다. "비슷한 거죠. 어쨌든, 요는 당신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별로 짐이 되지는 않을 거라는 말이에요." "너는 이동속도를 맞추지 못할 거다." "별 수 없네요. 그럼 먼저 가요. 나는 따라 갈 테니. 어쨌건 제가 걱 정하는 건 여자 혼자, 그것도 저처럼 어린애가 혼자 가는 것에 따르 는 귀찮고도 어려운 일이고, 당신이 없다면......아주 주의하면 되는 문제지요. 아주--말이에요." 자켄은 잠시 유제니아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리고, 반짝이는 눈동자 안에 잔뜩 숨어 있을 생각이 무엇일지 생각해 보았고, 그녀가 건네 준 아주 귀중한 소식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자켄은 휘안토스가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로 위험한 인간이란 것을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그것을 숨긴 유제니아가, 자켄에게는 아주 쉽 게 말해 준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곧 짐작했다. 자켄은 지금의 자신이 그녀에게 아주 감사해야 함을, 그리고 적어도 국경까지는 동행해 주어 그녀를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 았다. 그녀가 휘안토스의 손에 들어가면, 아킨도 위험해 진다. 유제니아는 내심 그것을 알아주기를 바랬고, 자켄에게 그 정도 눈치 는 있었다. "좋다." 자켄의 답에 유제니아는 활짝 웃었다. *********************************************************** 작가잡설: 요즘 정신이 없어서 하루 늦었습니다;;; ...그리고 정신없다 보니 챕터도 실수;;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28장 *************************************************************** [겨울성의 열쇠] 제127편 거울 속의 달빛#2 *************************************************************** 베넬리아는 이제 초가을로 접어들고 있었다. 바다는 차가워지기 시작하고, 하늘은 새파랗고 높아 졌다. 수평선과 맞닿은 하늘위로는 하얀 구름들이 유유히 흐르고, 갈매기들은 그 파 란 가운데 고즈넉하게 유영한다. 항구에 정박한 어선과 상선들은 위 아래로 몸을 흔들고, 그 가장자리로 파도가 철썩이며 튀어 오르곤 했다. 아무리 고요한 바다라도 호수처럼 조용하지는 않다. 한없이, 정말 끊임없이 속삭인다. 밤이 되어도 그 소리는 끊이지 않고, 가끔 은 사납게 노호하기도 한다. 조용한 바다, 이야기하듯 노래를 부르듯 끝없이 속삭이고 모래와 해 초를 쓸어 올리며 넘실대는 바다, 어부와 상선들이 편안하게 품에 안기고 사랑하는 바다, 순항을 약속하고 평안한 귀항을 보장하며, 때로는 풍족한 수확을 안겨주는 바다는 맨발의 오뤼테스의 것이다. 그리고 사나운 바다, 노호하고 치솟고 파괴하고 삼켜버리거나, 아찔 한 한순간에 어마어마하게 치솟아 절망처럼 무섭게 쏟아 들어와 매 정하게 휩쓸어 가는 광포한 바다, 그것은 바로 천둥의 마도론의 것 이다. 뱃사람이라면, 그 두 신을 모두 다 경배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 긴다. 배의 선두에는 언제나 마도론과 오뤼테스 모두의 이름이 마법 의 언어 페그-라일로 쓰여진다. 오뤼테스는 사랑하고 마도론은 두려 워하나, 공짜로 행운을 바라는 부적이라도 지니거나 오지 말라고 쫓 아내는 의식도 절대 하지 않는다. 그리 하는 것을 뱃사람들은 '불경'이라 생각하고, 그런 마음 깊은 곳 으로부터의 진심어린 경배는 배와 그들밖에 의지할 데 없는 곳으로 나아가야 하는 자들, 크고 절대적인 존재의 변덕스런 의지에 모든 것 을 맡긴 채 헤치고 나아가야 하는 힘없는 자들이 엄격히 지켜야 하는 것이다. -에칼라스는 바다에게만 두 사람의 극단적 성향의 마법사를 보냈지. 그래, 모든 성인들은 두 가지 성향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물론 양 극단을 다 가지고 있다는 게 아니야. 어떤 성향이든, 그 극한의 형 태는 당연히 존재하는 법이니까..... 스승이 또 이상한 철학논쟁을 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아챈 롤레인 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게 제가 그 배에는 투자하지 말라고 말씀 드렸잖아요. 사부님 은 카를롯사 사람이라 배에 대해 전혀 모르시지만, 저는 베넬리아 사람이라 잘 알아요. 그 배는 난파할 배였어요. 스승은 악튤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느니 뭐라느니 하며 마구 우겨댔지만, 롤레인은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마도론의 이름 끝이 떨어져 있는데도 고치지 않더라고요. 그런 배 는 반드시 침몰해요. 당시 스승의 눈은 한 손에는 이제 백일 된 남자 아기를 안고, 다른 손에는 주리를 '들고', 대체 지금 뭘 하고 계시냐는 거냐고 폭발적으 로 외칠 준비를 하고 있는 붉은 머리 청년의 눈과 비슷했다. 롤레인은 손을 멈추고는 그런 청년을 흘끔 올려다보았다. "할말 있어?" 그러나 청년은 롤레인과 자신의 관계를 심각하게 재고해 보고 싶다 는 듯한 눈빛을 보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롤레인이 말했다. "루첼, 할 말은 얼른 해야지." ".......'또' 만들고 계시는 겁니까?" "몇 번이나 권하는 건지 모르지만, 너도 한번 해 봐. 아주 재미있다 고...." "아버님께 소개해 주실 생각이라면 관두세요." 여기 베넬리아로 와서 루첼이 처음으로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는 데, 그것은 롤레인의 아버지가 몇 년 전에 은퇴한 선장으로 이 베넬 리아에서 살면서 모형 범선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루첼은 어떤 결론도 내릴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롤레인의 성격 은 환경과 유전자의 영향이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녀와 정말 똑 같은 인종이었다.) 롤레인이 애석하다는 듯 말했다. "루첼, 다 너를 생각해서 이런 말을 하는 거야. 가슴 답답할 때는 이게 최고..." 루첼은 허허 웃으며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다. "가슴이 답답할 때가 아니라, 일하기 싫으실 때 시간 보내는 방법으 로 아주 좋은 것이겠지요. 하지만 그 시간들을 다 보내고 난 뒤에 몰려올 재난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신 적 없나요, 교수님?" ".....안 될 때는 아무리 억지로 하려고 해도 안 되는 거야. 차라리 머리 식힌 다음 느긋하게 차근차근 생각해 보는 것이 좋지. 아, 루 첼. 저기, 그 긴 거 좀 집어 줄래? 활대 부분이거든....아, 그래. 그 거... 이런, 다 애들한테 잡혀 있네." 롤레인은 그것을 둥실 떠오르게 하여 가까이 가져와서는 모형범선 의 돛대 옆에 붙였다. 그리고 간단한 접착 마법을 써서 그것을 붙이 고는 다음 조각을 찾았다. 베넬리아의 최고 마스터씩이나 되는 여자 의 취미가 모형 범선 만들기고, 그 위대한 마법이 이런 데에도 쓰이 고 있다는 것은 차라리 절망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솜씨와 감각, 진열 방식에 대해서는 루첼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각 유리 상자에 들어있는 모형 범선들은, 그 안에서 조용한 바다를 하얀 돛 을 활짝 펼치고 나가거나, 폭풍우 치는 거친 바다에 불안하게 흔들 리고 있거나, 무수한 별들이 떠 있는 하늘의 바다를 유유히 헤치고 나가는 놀라운 모습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롤레인은 모든 배를 만든 뒤, 그 유리상자 안에 하나의 공간을 만들어 배를 넣어두었고, 그것 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그 마법의 크기 자체는 대단하지 않을 지 모 르나, 힘을 세세하게 안배하여 현실처럼 재현하는 것은 정말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물론 그 놀라운 마법 을 저런 곳에 써먹는 것이 매우 아까울 따름이지만.) 그렇게 생각하던 루첼은 주리가 책상에 매달려 어머니의 작업을 지 켜보는 것을 헉, 하는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행여나 그 말썽 장이 꼬맹이가 스승의 작업을 방해(물론 루첼도 매우 하고 싶은 일이었 다) 하지 않을까, 했지만 주리는 아버지와 루첼에게는 가혹한 재앙 이었으나 롤레인과 실비에게만은 아주 고분고분한 귀염둥이였으니 (아주 영악한 꼬맹이다......) 지켜보기만 했다. 롤레인은 돛대를 손보며 말했다. "피오는 실비에게 맡기고 오지 그래? 주리도 맡기고 오고....." "실비는 저녁 준비중입니다." "그럼 토드에게 맡겨. 어차피 넌 저녁 도와주러 가야 하잖아?" 아무리 롤레인이라지만, 저리도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니 그 남편인 루첼은 조금은 서글퍼졌다. "요즘은....혼자서 잘 합니다. 먹을.....만 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왜 그렇게 창백한 거지?" "........" 차마 저도 먹기 두렵습니다, 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루첼은 두 손으로 세르피오를 안고 뒤돌아 서야 했다. 주리가 당장 에 조르르 따라 붙었다. "잘 생각했어, 루첼 군." "...이따가 뵙지요." "아 참, 왜 찾아 온 거지?" 그제야 루첼도 자신이 그녀를 찾아온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냥 온 것은 아니었다. 루첼은 잠시 천장을 쏘아보고는, 아기를 안은 채 뒤 돌아 서며 말했다. "누가 길드에 의식을 받고 싶다 신청한 겁니까?" "어머나, 연락 왔니?" "네. 게다가 전 아무 기억도 없는데, 방금 전에 연락이 왔더군요. 이 번 회합은 다음 주말에 있을 예정이니 준비하고 오시게나, 루첼 그 란셔스! 하고 말입니다." 롤레인은 태평하게 말했다. "내가 했어. 너 이번에 졸업했잖아." "....그건 올해 6월의 일입니다, 교수님! 어느 누가 졸업하자마자 의 식을 신청합니까....! 전 연구생 생활도 하지 않았다고요." "1년 한 걸로 쳐야지." "그걸로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하지 마세요. 신청하신 이유가 뭐죠?" "너, 몇 살이지?" "스물 두 살입니다." "네가 늦게 입학했다는 것 정도는 자각해야지. 보통 그 나이면 신청 을 시작해. 게다가 이번 기회를 놓치면 3년을 기다려야 하는데, 그 때 너는 스물 다섯이고. 스물 다섯에 처음 신청하는 것보다는, 스물 둘에 되든 안되든 한번 신청하고 스물 다섯에 두 번째로 하는 게 좋잖니." "망신이나 안 당하면 좋겠군요! 제가 졸업한지 두 달 겨우 넘었다는 것을 누가 알아줍니까." 그러나 롤레인만 어깨를 으쓱했다. 루첼은 속이 뒤집히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제발, 교수님....보통 사람처럼 생각해 주십시오. 이게 뭡니까. 이번 달 생활비 계산하다가 다음 주에 있을 의식에 나가야 한다는 걸 알 게 되다니! 다들 졸업 후에 적어도 1년은 처박혀 공부만 한단 말입 니다. 그런데 전...! 맙소사, 말하기도 무섭군요." "의식이 있는 날 찾아가면 그런 말하기 어려울 걸. 아아, 난 의외로 괜찮은 실력이었군~하고 말이다. 게다가 너무 걱정 마. 그렇게 어렵 지는 않으니까." 루첼은 백 명 중 두 명 받을까 말까, 하는 권호를 받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다고 말하는 배짱이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게다가 루첼 은 현재 베넬리아에서 롤레인의 제자로 알려져 있고, 그런 자리에 나간다면 온 마법사들의 주목을 받을 것이며, 아마도 회합이 끝난 다음에는 전 세계의 마법사들에게 소문이 퍼져나갈 것이다. '롤레인 의 제자라는 놈 별거 아니더라고~~'하면서 말이다. "교수님은 언제 권호를 받으셨습니까?" "스물 하나. 열 여덟에 처음 시도했고." 루첼은 이제 말하기 싫어졌다. 지금 앞에 있는 모형 범선 조립에 열 중하고 있는, 거북이처럼 느긋하고 헐렁한 마법사는 컬린의 제자이 며 베넬리아의 최고 마스터이며 베넬리아 내전을 그 유명한 베네카 스 만의 백색 진을 펼쳐 끝장낸 괴물이었다. 그녀에게 상식적인 수 준의 토로를 한다는 것은.....불가능하다.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 차라 리 곱게 포기하고 이 가혹한 운명을 어찌 받아들일까 하고 고민하는 게 낫지. "나가겠습니다." "준비 잘해." "....." 루첼은 그녀에게 상식 선의 토론을 하기보다는, 오늘도 부엌에서 무 언가를 태워먹고 낸시로 하여금 차라리 유급하녀를 더 구할까, 하고 고민하게 만들고 있을 실비나 도와주기로 했다. 그러려면, 우선은 벌써 장난칠 궁리를 시작하는 주리와 곤히 잠든 세르피오를 토드에 게 맡겨 두어야 하기에 롤레인에게 건성으로 인사를 하고는('오늘 중으로 완성해 주시길 바랍니다.' 하고 말하며) 1층으로 내려갔다. 그러다가, 루첼은 정말 놀라서 세르피오를 떨어뜨릴 뻔했다. 1층 현관 앞에 낯선 소년이 서 있었다. 루첼은 재빨리 주변을 둘러 보았지만 그를 맞아 들였을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말 그 대로 정말 '그냥' 들어온 것이었다. 롤레인의 집에 그냥 들어왔다면, 그냥 미친놈 아니면 롤레인과 아주 잘 아는 사이임에 분명하기에 루첼은 그를 살펴보았다. 루첼보다는 한참은 어려 보이는 소년이었다. 그을린 듯 짙은 피부색 에, 특이한 은청색 짧은 머리카락에 비슷한 눈색을 가지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짧았으나, 턱이나 눈매는 꽤나 귀골이었다. 롤레인과 비 슷한 구석을 전혀 발견하지 못해 그가 그녀의 친척은 아닐 거라 판 단한 루첼은 드디어 물었다. "누구십니까?" 그러자, 소년은 사나운 눈빛으로 그를 보더니 갑자기 눈을 엄청나게 크게 떴다. 정말 '경악'이라 할만한 표정이어서, 루첼은 은근하게 기분이 나빠졌 다. "언제 답해주실 생각입니까? 급히 할 일이 있어서 마냥 기다려 드 릴 수 없군요." "너, 롤레인의 남편이냐?" "......." 아들을 집어던질 수도 없는 노릇이라, 루첼은 대신 눈을 감고 파하- 하고 한숨을 내 쉬고 말았다. "교수님이 결혼생활을 하신 햇수를 계산한다면, 저는 교수님과 열 넷에 결혼한 셈이 되는군요.....교수님이 뛰어난 분인 건 사실이지만 서른 하나에 열 네 살 소년과 결혼할 정도는 아닙니다." "......아, 응. 집에 남자라면 남편뿐일 거라 생각해서 그랬다." "제자, 라는 상식선의 생각은 못하시는 이상한 분이군요. 아니면 멍 청하신 겁니까?" "뭐야--?" 루첼은 놀라서 바동대는 세르피오의 등을 서둘러 탁탁 두들겨 주고 는 말했다. "세 번째 묻는 거지만, 대체 누구십니까? 들어올 만한 분이 아니라 는 판단이 선다면, 나가시라고 권고해 드리겠습니다." "이 자식이 건방지게!" "이게 건방진 건지 정당한 항의인지는, 먼저 신분을 밝히신 후에 따 져보도록 하지요. 하지만 제국황제라 할 지라도 그렇게 남의 집에 서, 처음 보는 사람에게, 꼴사납게 건들거리는 건 충분히 사과할 일 이라 생각합니다만." 갑자기 소년의 얼굴이 더욱 험악해졌다. 그리고, 소년의 머리를 딱 딱하고 자그마한 것이 후려친 것은 그 순간이었다. 따콩- "읏-!" 소년이 머리를 감싸쥐며 허리를 숙이자, 루첼은 흘끔 고개를 들어 2 층 난간을 보았다. 롤레인이 조립하고 남은 것임에 분명한 나무토막들을 손끝으로 흔 들고 있었다. "네가 철딱서니 없다는 것이야, 이곳 베넬리아까지 널리 퍼져 있어 서 별반 놀랍지는 않다만 남의 지에 허락도 없이 문 불쑥 열고 들 어온 것은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로 짜증이 나는 군......악튤런 파노 제." 루첼이 놀랐지만, 그것은 '세상에나 그렇게 귀한 분이었습니까!'하는 놀라움이 아니라 걷어차려고 보니 그것이 돌이 아니라 말하기 난감 한 물건임을 발견했을 때와 비슷한 놀라움이었다. 그것을 눈치 못 챌 정도로 바보는 아닌 악튤런은 루첼은 험악하게 노려보았고, 루첼은 허허--하고 웃으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올라와, 악튤런. 그리고 루첼, 실비의 요리는 그냥 참기로 할 테니 토드에게 애들 맡기고 올라와라." 악튤런이 당장에 날카롭게 말했다. "너와 단 둘이서 이야기하고 싶다, 롤레인! 하긴 뭐, 저런 녀석 앉혀 놔봐야 알아듣지도 못할 테니....크게 걱정되지는 않지만." 롤레인은 뒤도 안 돌아보고는 말했다. "그건 나도 모르겠는데, 내가 아는 바로는 루첼의 몸은 아주 잽싸. 네가 발광하기 전에 한방에 쓰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말이야." "......" 루첼은 오늘 하루 동안은 롤레인이 저질러 놓은 범죄는 참기로 했 다. *********************************************************** 작가잡설: 보시다시피 이 느아쁜 루첼 놈은 아키가 탑에 박혀 있을 때 실비와 살림 차리고 잘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 득남을 했습니다;; 누구를 닮을 지 심히 걱정되는 바입니 다...(으흐흐흐흐) p.s 루첼과 악튤런은 물론 동갑입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28장 *************************************************************** [겨울성의 열쇠] 제128편 거울 속의 달빛#3 **************************************************************** "조잡한 취미는 여전하군." 서재에 들어오자 악튤런은 그렇게 퉁명스레 말했고, 롤레인은 그와 만나면 늘 겪는 일이라 태평하게 답했다. "스승님의 취미인 '세상에서 제일 해괴한 음식 맛보기' 보다야 낫지. 그리고.......악튤런, 짜증하나 내자면 너는 네가 못하는 모든 것을 무 시하고 싶어하는 것 같아." "조잡하니 안 하는 거야." "'못하는 것'일 때는 자존심 상하지만 '하찮은 것'이라 우기면 못하 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라 생각할 수 있어 안심이 되는 것뿐이지. 하여간, 고집 센 아이는 나쁜 버릇만 잔뜩 키운다니까." "롤레인, 너-!" 롤레인은 지팡이를 들어 악튤런을 가리키고는, 그 끝을 틀어 앞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 악튤런은 로브를 걷고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오늘은 뭘 투덜대려고 온 거지, 악튤런?" "베이나트라는 사람 알아?" 설명이고 뭐고 없다. 그러나 롤레인은 악튤런의 성격을 알았으며, 그의 버릇없음이 얼마 나 경지에 올라 있는 지도 잘 알았다. 악튤런은 저것 하나를 묻기 위해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며, 왜 알고 싶은지, 어찌 알게 되었는지 등등을 설명해줄 시간도, 생각도, 심지어 알기 쉽게 설명해 줄 재주 조차 없다. 롤레인은 아주 진지하게 생각하는 표정을 지어주고는 엄숙하게 물 었다. "어떻게 그 이름을 알게 된 거지?" "알 거 없어! 어쨌건, 알고 있기는 한 거로군! 대체 누구지? 스승님 과 어떤 관계야!" "탈로스가 안 가르쳐 주든?" "너....." 악튤런은 롤레인이 자신이 어디에 다녀왔는지 알고 있다는 것을 깨 달았다. 성격이 불같긴 하나, 그래도 바보는 아니었다. 저돌적인 추진력을 가지고 있고, 그런 사람이 늘 그렇듯 한번쯤은 해 보는 것이 좋은 사려 깊은 재고를 싹 무시하는 버릇이 골치인 건 사실이지만, 어쨌 든 그도 젊은 나이에 마스터 직을 맡고 있는 걸출한 마법사였다. "그 베이나...트 인지 뭔지 하는 마법사가 나와 탈로스를 가두고는 도망쳐 버렸다. 난 그 마법의 감옥을 며칠만에 겨우 해제하고 나올 수 있었고...." 롤레인은 설명을 더 듣지 않아도 다 예상할 수 있었다. 악튤런은 '스승의 유산'을 찾기 위해 탈로스를 찾아갔고, 탈로스가 머무는 곳에 걸린 대부분의 봉인을 풀고 그 탑에 닿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을 뿐이다. 악튤런은 탈로스를 만나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그 베이나트라는 마법사가 갑자기 개입하는 바람에 모 든 것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악튤런은 탑을 둘러쌌던 마법진 밖으로 다시 내동댕이쳐졌고, 그 마 법의 틀 자체가 바뀌어 버리는 바람에 다시 들어갈 수도 없었다. 악 튤런이 탈로스가 지금 머무는 탑의 위치를 알아내고 그 결계를 푸 는 데 들어간 시간만도 8년이다. 또 되풀이한다면, 이번에는 10년이 걸릴 지도 모른다. 롤레인이 물었다. "탈로스는?" "내가 어떻게 알아! 아마도 나보다 먼저 족쇄를 푼 다음 탑을 옮겼 을 거야. 카를롯사, 헤로롯사, 암롯사! 어디에든 그 탑이 못 가겠어!" 그 점에서, 롤레인은 사실 악튤런의 엉덩이라도 걷어 차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스승이 만든 '은둔자의 탑'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그것이 어디로든 스승이 정해 놓은 곳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롤레 인은 탈로스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이고, 최근에야 겨우 찾아낼 수 있 었는데 결국은 완벽하게 망쳐 버렸다. 그리고 상황은 다시 8년 전으 로 돌아갔고, 악튤런은 실력을 키웠고, 탈로스는 더욱 괴팍해 진 데 다가 그의 손에는 아직 아킨이 있다. 즉, 롤레인에게만은 상황이 더 나빠진 것이다. 롤레인이 지금 모형 범선을 만들고 있는 것은 일이 그렇게 된 것에 대한 분노와 허탈함을 달래기 위함이었다. 아는지 모르는지, 악튤런은 버럭 버럭 외쳤다. "롤레인, 나는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러 여기에 온 게 아니야! 아무 소용없으니까....그러니 이거나 말해, 베이나트가 누구지?" 롤레인은 나른히 한숨을 내 쉬고는 말했다. "그는 스승님의 아들이야." 악튤런이 뭐라 말도 못하고 입을 딱 벌렸다. 그러자 롤레인은 창문 쪽으로 시선을 던지고는,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30 년 전 유랑을 하던 스승님께서는 한 시골 처녀를 사랑하게 되 셨지. 그러나 스승님께서는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유랑을 떠나셨 고, 가엾게도 그 아가씨는 그 분을 기다리다가 얼마 안되어 세상을 뜨고 말았지. 당시 어린 소년이었던 베이나트는 아버지를 원망하며 길을 떠나게 되었고.....다시 찾기는 했지만 부자사이의 골은 너무나 깊어져 있었고, 주변머리 없던 스승님은 자신을 미워하는 아들의 마 음을 도저히 되돌릴 수 없었어." "그럼 그는......" "그런 그가 탈로스를 찾아갔던 것은 아버지의 복수라기 보다는 아 버지의 마지막이 어땠는지 알아 보려 갔던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너희 둘이 성질 나쁜 고양이처럼 뒤엉켜 싸우고 있으니, 그는 아버 지의 불행을 애도하며 둘 사이에 물을 뿌리고 도망간 거지. 아아, 실망이 컸을 꺼야. 원망하기는 했지만 내심으로는 존경하고 있던 아 버지의 제자라는 것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놓고 그렇게 민망하게 티 격태격 하고 있으니까." 악튤런이 자리를 박차며 벌떡 일어났다. 롤레인이 말했다. "내 이야기 아직 안 끝났는데?" "알 건 다 알았어. 그럼, 결국 그 아들에게 자신의 유산을 남겨 줬 을 지도 모르잖아! 어떻게든 달래고 싶던 소중한 아들이라면, 또 그 아들도 마법사라면! 당연히 뭔가 굉장한 것을 줘야 하지 않아?" "아마도 그럴 지도 몰라...." "쳇, 결국 그런 데 숨어 있어서 탈로스도 모르고 나도 몰랐던 거군! 좋아, 가르쳐주느라 수고했어!" 롤레인은 너무나 슬픈 눈빛으로 그렇게 일어나는 악튤런의 뒷모습 을 바라보았다. 악튤런은 인사도 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갔고, 문 옆 에 서 있던 루첼을 한번 사납게 노려보고는 쿵쾅거리며 집을 뛰쳐 나갔다. "....정말입니까?" "다 들었어?" "문은 왜 열어 놓으신 겁니까?" "아하~" 롤레인은 악튤런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슬쩍 주변 공기를 움직여 문 을 조금 열어 놓았었다. 그리고 루첼은 예의 따지느라 스승의 의도 를 무시할 정도로 고지식하지는 못해서, 거의 처음부터 다 들었다. 루첼이 말했다. "어쨌든, 방금 전의 이야기.....정말입니까?" 롤레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연히 거짓말이지" "....." 루첼은 지난번에 만난 그녀의 아버지 줄리어스 롤레인을 떠올리며, 주리라도 이 롤레인 부녀와 닮지 않기를 바랬다. (줄리어스가 늙어 서 그 별남이 주변에 별다른 피해를 미치지 못하게 되기까지, 당분 간 재앙이다.) "루츠, 나는 분명 내 이야기 다 안 끝났다고 했고, 필요 없다고 달 려나간 건 저 녀석이야. 난 잘못 없어." "그 베이나트...인지 뭔지 하는 사람에게 미안한 일이군요. 그건 그 렇고, 교수님께서도 그 일로 탈로스 님과 대결하지 않았습니까?" "원인은 그것이라도, 대결이유 자체인 건 아니야. 나는 녀석에게서 스승님을 구하기 위해 싸움을 걸었고, 탈로스는 그저 응수한 것뿐이 지. 그러나 악튤런의 경우는 행여 그것이 탈로스에게 있을 지 모른 다고 생각해서 달려 든 거고....지난번에 왕창 깨져나간 후로도, 내내 그것에 집착했지. 녀석은 그 점에 있어서는 탈로스와 거의 비슷해." "어쨌든 결론 하나는 벌써 났군요. 그 유산이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 도 모른다는 것." "그래, 스승님 빼고는 아무도 모르지." "......그렇게 대단한 겁니까?" "아주~ 대단한 거지." 루첼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롤레인을 보았지만, 롤레인은 문을 가 리켰을 뿐이었다. 루첼이 말했다. "저.....정말 가르쳐 주실 수 없는 겁니까?" "대 마법사 세 명이 이렇게 치고 박는 물건에 대해서는, 그냥 모르 는 게 나아. 아는 것 자체가 위험한 거니까." "네, 네~" 루첼은 결국 포기하고는 서재를 나섰다. 그리고 그의 뒷모습위로 문 을 닫으며 롤레인은 착잡한 마음을 달래야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속으로는 '그것'을 원했을 지도 모른다. 마법사들이 꿈꾸는 것. 아니다. 인간 자체가 원하는 것일 지도 모른 다. 쿼크 대제가 꿈꾸었으며, 그의 일곱 기사들이 갈망했으며, 페낙이 죽는 그날까지 환각으로 보았던 것- 그 귀중한 것이 눈앞에 있는데, 조금만 더 뻗으면 닿을 지도 모르는데, 움켜쥐어 그 영광과 기적을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있을 지도 모르는데, 어찌 탐나지 않겠는가.... 그러나 롤레인은 스승의 한마디에 갈망을 수장시켜 버렸다. -나는 너를 사랑하고,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느냐...... 슬픔의 잔으로 영원의 방랑을 택한 자. 그리고 롤레인은 그를 더 슬프게 할 수는 없었다. *********************************************************** 작가잡설: 연휴 동안 대전에 내려갑니다. ^^ 그런데 이거, 주말마다 일이 생겨서 비축분이 영 안 쌓이는 군요. 으...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28장 ************************************************************** [겨울성의 열쇠] 제129편 거울 속의 달빛#4 ************************************************************** 아킨은 과한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의 얼굴에 주먹을 날려 본 적은 많았지만, 이다지도 무관심한 사람과는 만난 적이 없었다. 게다가, 예전에 이 사람 저 사람 두들겨 패 눕힐 때만 해도 믿는 구석이 없 지는 않았으니 마음놓고 그리 할 수 있었다면, 이 사람의 경우에는 '신세'를 지고 있고, 그 '신세'가 없으면 아킨은 당장에 막막해 지기 에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그저 고개 푹 수그리고 이 꽉 물고 참는 수밖에 없었고, 이제는 누구 하나라도 제발 시비를 걸어 주기를 바 랄 지경이었다. 주먹이 근질근질했다. "안 먹니?" "......" 아킨은 오늘 저녁도 먹기는 글렀다고 생각했다. 이건 입이 짧다, 뭐 하다 할 거리도 아니었다. 선심 쓰듯 오늘은 근사한 데서 먹자고, 하고 외친 그는 시내의 큰 식당으로 아킨을 끌고 갔고, 많고 많은 식사 중에 하필이면 '카므 강 유일의 투구게살 볶음'라는 것을 시켰 다. 고급요리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킨은 시큼한 향의 소스를 참기 어려웠고, 과일과 고기를 잔뜩 담은 채 배를 뒤집고 누워 있는 이상 하게 생긴 물건을 똑바로 보기도 힘들었다. 창살처럼 길고 뾰족한 꼬리까지는 괜찮다. 하지만 거대한 벌레를 연 상시키는 등에, 배 양 옆으로 붙은 여덟 개의 다리, 그리고 그 배의 살과 '내장'을 여러 가지 양념을 해서 볶은 다음 그 안에 쓸어 넣어 김을 모락모락 내는 모양새는 그 내용물만큼이나 문제였다. 그러니, 꼭 살아있는 거대한 벌레의 배를 파먹는 것 같지 않는가. 그럼에도 베이나트는 황홀한 표정으로 그 뱃살을 긁고 있었고, 그 포크에 딸려 나오는 내장들을 보며 아킨은 속이 거북해졌다. 결국, 아킨은 힘없이 손을 들며 말했다. "여기요, 빵 하나 더 주세요. 잼도 가져다주시고........" 주식인 투구게를 시키면 그런 부식은 무한대로 시킬 수 있기에, 아 킨은 마음놓고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이 이상한 음식의 값도 지난번에 어느 가엾은 델 카타의 마 법사의 주머니에서 슬쩍 해 온 돈에서 나갈 거라는 생각이 들어 억 울해 지기까지 했다. 이상한 음식은, 맛과는 상관없이 이상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다 른 음식들의 두 세배 값이었고, 그것은 도시 사이사이에서 노숙을 하며 절약한 돈을 탕진하고도 남았다. "대체....왜 이렇게 이상한 음식만 골라 드시는 거죠?" "오랜 취미거든. 세상에서 제일 해괴한 음식 골라 먹기. 여행의 즐 거움이었다고나 할까." "......." 그리고 아킨의 해쓱한 얼굴을 향해 베이나트는 너무나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넌 입이 영 짧아서 재미가 없단 말이야. 예전에 같이 여행했던 애 는 말이야, 이 취미를 같이 즐겼단다. 음식을 다 먹은 다음 이어지 는 그 맛과 해부학적 특색에 대한 토론은 가장 즐거운 식사코스 중 하나였지....." 베이나트의 눈은 그 때의 추억에 빛나고 있었고, 아킨은 당연히 그 아련한 기쁨 따위는 무시했다. "당신만큼이나 별난 분이었나 보군요." "별났다기보다는 나와 죽이 잘 맞았던 것 뿐이야. 그 애는 취미가 인생에 얼마나 즐거운 양념이 되는 지 잘 알았고, 그것이 좀 이상하 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아이였거든. 나중에 나도 그 애의 취미를 배웠고, 그 애가 내 취미를 좋아한 만큼 나도 그 취미를 경배했다." "경배요?" "그저 지리책 들여다보고 찾아가기만 하면 되는 이 취미와는 달리, 그건 정말 난해한 취미였거든. 이것보다야 더 실용적이긴 했다만, 같이 즐기기에는 너무 어려웠다." "......." 즉, 자신이 못하면 그 일은 너무나 위대하고 힘든 일이라 자신 따위 의 실력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마음을 놓아 버린 것이 다. 그리고 아킨은 베이나트가 녹색 내장을 입에 집어넣는 것을 보 며 이 남자와 비슷한 사람이 더 이상 없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런데 베이, 오늘은 여기서 묶으실 생각인가요?" "당연히 아니지. 여기 룸서비스는 정말 최악이거든." 지나가던 여급이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하는 베이나트를 째려보았다. 아킨은 슬쩍 그 눈길을 피하며 말했다. "아는 곳이었습니까?" "물론, 몇 번 왔던 곳이지. 어쨌건 저녁 식사 마치면 일어나자. 이 근처에 내 옛날 집이 있거든. 몇 년 버려 둬서 좀 고약하긴 할 테지 만, 하룻밤 자는 데는 지장 없을 거다." "그렇다면....여기가 고향이었나요?" "그냥 워낙에 여기 저기 자주 돌아 다녀서....여기 저기 집이 있는 것뿐이란다. 어서 먹고 나가자꾸나." 늘 신경 쓰는 문제지만, 아킨은 이 베이나트의 정체가 정말 궁금했 다. 아킨은 치를 떨고, 베이나트는 희희낙락 기뻐하며 식사를 마치자, 베이나트는 바로 도시 밖으로 나섰다. 도시는 그저 조금 번화한 마 을이라 생각해도 좋을 정도로 조용한 곳이었고, 옆에 작은 강을 끼 고 있었다. 베이나트는 그 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며 말했다. "노래 하나 불러줄까?" ".....아닙니다." 지난번에 저 말에 네, 하고 답했다가 끔찍한 경험을 해야 했던 아킨 은 단호하게 말했다. 어두운 수풀 속에서 귀뚜라미 우는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이 어두워 지자 달빛이 더욱 환해지며 숲과 강 위로 흩어졌다. 아킨은 가방을 고쳐 매다가 달이 벌써 절반 넘게 부푼 것을 보고는 불안해졌다. 일주일 안으로 롬파르로 도착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 할 것이다. 차라리 이 근처에서 적당히 시간을 보내다가 보름을 넘기고 다시 출발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가던 베이나트가 멈추더니, 무릎을 꿇으며 풀밭에 엎드렸다. "베이?" "쉿-" 베이나트는 풀을 뽑고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흙 속에서 네모지고 평평한 돌이 나타났다. 베이나트는 그 위의 흙 들을 후 불어 쓸어내고는 손바닥으로 닦아냈다. 아킨이 내려다보니, 그 네모진 돌 위에는 기하학적인 문양이 세세히 새겨져 있었고, 그 중앙에 긴 홈이 파여져 있었다. 베이나트가 손끝으로 허공을 그었다. 그러자, 그 부근에서 반투명한 금색 얼룩 같은 것이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점점 길어졌다. 열쇠였다. 평범한 둥근 머리에 길게 뻗은 몸체를 가지고 있었고, 공 중에 선 채로 깃털처럼 느릿느릿 네모진 돌 위로 가라앉더니 홈에 들어갔다. 베이나트는 그 머리를 잡고는 힘을 꾹 주어 돌렸다. 그러자, 열쇠를 중심으로 무늬와 글자들의 얇은 선을 따라 빛이 퍼져 나갔다. 아킨은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두 사람이 있는 곳은 젊은 자작나무들이 둥글게 감싸고 있는 공터 였다. 달빛을 받아 나무줄기는 뼛조각처럼 하얗게 빛나고, 여린 잎 새들은 잔잔한 바람에도 수없이 흔들린다. 아킨은 바닥에서 엷은 바람, 따스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뿜어져 오르 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엷은 빛이 바닥에서 안개가 퍼 지듯 올라오고, 자작나무와 잎들은 달에 물들 듯 은은한 빛을 흐트 러뜨리기 시작했다. 손목에서 기이한 진동이 몰려와 아킨은 두 손을 들어 올렸다. 탑에서부터 계속 가지고 온 것, 그러나 그것을 빼는 법을 몰라 계속 차고 있던 그 팔찌에서도 같은 빛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 베이나트를 보니, 그는 그 풍광을 보다가 아킨을 돌아보고는 빙긋 웃었다. 그리고..그의 몸에서도 같은 빛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 검 은 머리카락은 작고 얌전한 벌레의 날개처럼 흔들리고, 까맣고 온화 한 눈동자에 가득한 미소는 빛처럼 푸근했다. 베이나트가 손을 들어 공터를 가리켰다. 그곳, 달빛 쏟아지는 차가운 허공위로 무언가가 떠오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흐릿하고 투명하다가, 마치 흔들리던 수면이 가라앉듯 그 모양이 잡히기 시작하더니 점점 뚜렷해진다. 아킨이 다가가려 하자, 베이나트가 막았다. "아직이다." 그 동안에도 현상은 계속되었다. 투명하던 벽이 하얗게 변하더니 굳 어지듯 단단한 재질로 변했고, 곧 손에 잡힐 듯 현실감을 가지기 시 작했다. 울퉁불퉁하던 윗 부분은 화가가 붓질을 하듯 섬세한 나무껍 질로 만들어진 지붕으로 변했다. 검은 구멍인 듯 보이던 곳으로 탁 자와 책장, 찬장이 보이더니 아늑하고 고요한 집안을 보여주는 창이 되었으며, 아킨이 마주하는 벽에서 검은 얼룩이 스며 나오더니 곧 커져 사람 키보다 더 큰 네모진 입구로 변했다. "대단....해요." 이것은 달빛 비추는 숲의 화폭을 향해 베이나트의 마법이 소리 없 이 그리는 작고 단아한 그림이었다. 아킨은 이런 마법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니, 비슷한 마 법조차 감 잡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저 놀랍고 신기하기만 했다. "자, 보름이 될 때까지 여기서 푹 쉬다 가자고." "알고 계셨습니까?" "출발 할 때부터 계산하고 있었다고.....내 마법으로는 이틀이나 삼일 정도 당겨 볼 수 있으니, 어서 해 치우고 다시 떠나자." "하지만....그거, 아주 위험합니다." "지난번에 나 업고 달렸으면서도 날 못 믿는 거냐. 걱정 말라고. 하 루 내내 강아지처럼 얌전하게 있게 해 줄 테니." 이제 할 말이 없었다. 베이나트는 배낭을 어깨에 고쳐 매고는, 마치 긴 여행에서 다녀와 비워두었던 그리운 집을 보듯 고요한 눈빛으로 그 오두막을 보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집에 온 것을 환영한다, 아키야." 그리고 그 목소리는 분명 젖어 있었다. *********************************************************** 작가잡설: 가장 강적인 파트너를 만난 아키 군입니다. --;;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28장 *************************************************************** [겨울성의 열쇠] 제130편 거울 속의 달빛#5 *************************************************************** 오랫동안 비워두었다는 말과는 달리, 베이나트의 집안은 어제 떠났 다 돌아온 듯 아주 깨끗했다. 벽난로 옆에 쌓인 장작은 이제 막 팬 듯 했고, 테이블 역시 방금 닦 아 놓은 듯 먼지 하나 없었다. 바닥에 깔아 놓은 밀짚 카펫은 낡은 것이었지만 그저 오랫동안 썼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 버려 두어 서 그리 된 것 같지도 않았다. 또, 더러워지기 쉬운 찬장이나 벽장 위도 깨끗하다. 전체적으로 그리 넓지도 않고 평범했으며, 어딘지 넉넉한 여유가 있 는 농가 같은 분위기였다. 집의 동쪽으로는 2층으로 향하는 나무 계 단이 하나 있고, 그 2층에는 침대와 작은 서랍장 하나가 놓여 있었 다. 계단 뒤편에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하나 더 있었으며, 그 계단 도 어제까지 쓸고 닦기라도 한 듯 아주 깨끗했다. 아킨은 그것을 보며, 그가 이 집을 비운 것이 고작 한 달 정도밖에 안 되었나, 하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는 그 이름 잊혀진 숲에 막 도 착했을 때 아킨과 만난 것인 지도 모른다. 베이나트가 벽난로에 불을 피우고 주전자와 차 상자를 찾아 차를 끓이는 동안, 아킨은 한적하게 집안을 돌아다니다가 벽에 걸린 작은 거울을 발견했다. 그것도 잘 닦아 수정처럼 깨끗했고, 그 위로 아킨은 참 오랜만에 자 신의 모습을 비추어 볼 수 있었다. 탈로스의 집에는 거울이 하나도 없었다. 수면 위에 자신을 비추어 본 적은 많았지만, 이렇게 뚜렷하게 자신을 비추는 것과 그 흔들리 고 어두운 수면 위로 얼굴을 디밀어 보는 것은 아주 틀리다. 머리카락이 좀 길어지고, 키도 좀 큰 것 같기는 했지만 크게 달라진 것은 없는 듯 했다. 고개를 돌려 귀를 보니, 몇 번 변신을 거듭했음 에도 은봉인을 채워 두었던 곳에는 바늘에 찔린 듯한 흔적이 뚜렷 하게 남아 있었다. 지난번에 탈로스에게 찢겨 나간 부분도 벌써 나 아 흔적도 없는데, 이상하게 그것만은 방금 전 까지 하고 있었던 듯 선명하다. 그 때 뒤에서 베이나트의 모습이 불쑥 나타났다. "너, 예쁘니까 거울은 그만 들여다봐라." "......" 아킨은 거울을 떼어다가 그 베이나트를 한 대 후려치고 싶어졌지만 (그리고 그가 베넬리아나 로멜의 교수만 되었어도 당연히 그렇게 했을 테지만), 일단은 집주인이라 참기로 했다. "차 마셔라." 베이나트가 방금 끓여 온 차를 건네주었다. 아킨은 그 잔을 받으려 다가, 거울에서 뭐가 번쩍인 것 같다는 생각에 무심코 다시 돌아보 았다. 그런데 거울 속에서, 마치 눈이라도 깜빡인 듯 무언가가 빠르게 스 쳐지나갔다. "뭐...." "이런!" 순간 베이나트의 손이 빠르게 움직이더니, 그가 들고 있던 찻물이 거울위로 확 쏟아졌다. 아킨은 뒤로 급히 물러나며 목에 튄 뜨거운 찻물을 훔쳤다. "뭐가 나타난 겁니까?" 베이나트가 말했다. "아키야, 그 거울을 볼 때는 조심해라. 자칫 잘못하다가는 엉뚱한 녀석의 눈에 뜨일 수도 있으니까....나라면 모른다만, 너는 제대로 쓸 줄 모르잖아." "하지만 방금 전에....." "호들갑 떠느라 수고하는 너한테 미안하지만 나도 봤다. 거 참.....그 런데 아키야, 너 마법 배운 적 있지?" "아, 네." "그렇다면 더더욱 근처에도 가지 말아라. 평범한 거울을 가져다 줄 테니, 단장하고 싶다면 그걸 보고해라." 아킨은 손에 든 차를 그의 머리에 쏟아 부어 버리고 싶어졌지만, 이 번에도 참기로 했다. "...그런데 이 거울은 대체 뭐죠?" "옛날 여자친....구라고 하면 그 할망구가 내 머리털 다 뽑아 놓을 테니 관두지. 하여튼,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 선물해 준거 란다. 그 일족들의 말로는 파테 암모나-, 달의 거울이라는 말이지.... 여튼 그렇게 부른 단다. 자, 보렴." 베이나트가 거울과 맞은 편의 창을 한번씩 가리켰다. 그제야 아킨은 그 거울이 맞은 편에 있는 창문의 달이 비추는 곳에 똑바로 놓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초승달이든 보름달이든 반달이든 반드시 저 위를 지나가게 된단다. 그리고 달빛이 이 거울에 긷든 마법을 깨우고, 마법사가 그 마법을 다스리면 거울이 원하는 사람의 모습을 비추게 해 주지. 하지만 힘 이 모자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다면, 너를 쫓는 고약한 사람을 비 추게 할 수도 있다. 문제는 그 사람이 마법사인 경우, 그리고 꽤 민 감한 사람인 경우 네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는 데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다는 거야. 탈로스 정도의 마법사라면 접촉만으로도 그 위치를 알아낼 수 있단다." 그렇게 말하고는 베이나트는 거울 옆에 놓인 휘장처럼 생긴 녹색 천을 가져다 거울에 덮어 씌웠다. "좋아하던 사람이라도 있었습니까?" "응, 무슨 말이냐?" "그냥....그런데 쓰면 유용할 것 같아서요. 구태여 가지고 계시다면, 그런데 쓰시려고 하는 게 아니었나...해서요." 베이나트가 빙그레 웃었다. "날 싫어하던 놈들이 많아서 그런 거란다. 그리고 난 좋아하는 사람 은 절대 그렇게 훔쳐보지 않아. 보고 싶으면 그저 다음날 해 뜰 때 까지 기다리거나, 아예 내 사람으로 만들어서 매일 같이 지내지." "좋은 자세입니다." 아킨은 다시 검은 천에 덮인 거울을 아쉬운 듯 돌아보았다. 지금 당장 볼 수 있다면, 그렇다면 하루라도 빨리 다시 보고 싶은 이들이 있었다. 1년의 망각 뒤에 봇물처럼 쏟아지던, 등돌리던 기억 을 향해 돌아서던 순간 고통스런 기억과 함께 찾게 된 기억들. 자크-- 내가 없어진 뒤 어떻게 지내고 있을 지 너무 잘 알 것 같은데, 지금 그에게 알릴 방법도 없고, 당장에 만나러 갈 수도 없고....어디에 있 는 지도 모른다. 어둠 숲으로 돌아갔을까, 아니면 나를 찾기 위해 돌아다니고 있을까. 그리고 롤레인 교수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루첼 그란셔스는 무얼 하고 있을지......게다가 켈브리안에 대해서도 궁금한 것이 많다. 그제야 아킨은 지나가던 길이라도 로메르드의 소식을 물어 볼걸 그 랬다는 후회가 들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켈브리안에 대해서는 그렇게 물어봐서 알 수 있었을 텐데. 베이나트가 차를 훌쩍 마시고는 물었다. "그런데 넌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 눈치다?" "아, 네. 하지만 위험하다고 하니....관두죠. 구태여 위험한 짓을 하기 에는 너무 피곤하군요." 아킨은 그렇게 말하고는 두 손을 저었다. 그러자 베이나트가 말했 다. "걱정 말려무나, 내가 도와줄 테니. 그러면 괜찮아." "수고 끼치고 싶지는 않아요, 베이." "아, 아주 쉬워. 유즈는 나도 알잖아." 아킨은 정말 그의 정강이라도 한 대 후려쳐 주고 싶어졌다(이번에 는 발이 꿈틀 움직이는 단계까지 갔다). "유제니아는 아닙니다--!" "그럼 왜 네가 거울을 들여다보자마자 그 애 모습이 나타난 거지?" "당신 탓 같은데요." 사실, 아킨은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너무 빨리 나타났다가 사라졌 기 때문이었다. 가만, 잠깐 휙 나타났다 사라진 게 정말 유제니아였 나. 그것조차 의심스럽다. 베이나트는 턱을 긁적였다. "그럼 역시 내 때문에 그 애가 나타난 건가? 나도 원, 많이 헐렁해 졌군...." "그...런가 보죠." 그리고 아킨은 베이나트가 유제니아에게 치근덕댔던 것이 귀여운 여자아이에 대한 아저씨다운 호감이 아니라, 행여나 '진심'이었나 라 는 생각이 들어 소름이 끼쳤다. 생각해 보니, 아버지는 서른 셋에 열 여덟이던 어머니와 만나 결혼을 했고, 브리올테 왕비는 서른 넷 이던 슈마허에게 열 아홉인 켈브리안을 주려 했다. 그 정도 나이차 이가 나는 결혼은 정략결혼이나 연애결혼이나 드문 경우는 아니었 다.....그러나 그건 남의 일이니 그렇다 쳐도, 아킨이 보기에 유제니 아는 아기 토끼와 비슷할 정도로 어리고 작아 보였고, 베이나트는 나이 먹은 곰처럼 크고 늙어 보였다. 아킨은 갑자기 궁금해져서 물어보았다. "...몇 살이죠, 베이?" "......글세?" 베이나트는 정말 모른다는 표정이었고, 아킨은 그런 그의 얼굴을 자 세히 들여다보았다. 어찌 보면 서른 초반 같기도 했고, 다시 보면 20대 후반 같아 보이 기도 했으며, 좀더 까다롭게 눈을 부릅뜬다면 서른 후반까지도 되 보인다. 그런데, 갑자기 베이나트가 씩 웃더니 말했다. "우리, 유즈가 뭐 하고 있는지 볼까? 혹시 아냐. 목욕이나 옷 갈아 입기나, 그런 귀여운 일을 하고 있을 지." "그 애 오빠가 안다면 아마 우리 둘 다 죽이려고 할겁니다." "그러니까 같이 보자는 말이다, 아키야. 너도 같이 보면 그...오빠인 지 뭔지 하는 녀석에게 이르거나 하지는 못할 거 아니냐." 아킨은 뚜껑이 열리고 말았다. "그렇게 파렴치하지 않습니다, 베이나트!" "너, 그날 느닷없이 돌아간 거... 유제니아 때문 아니었니? 적어도 보고 싶기는 할 거 아니냐." 그제야 아킨은 하멜버그를 떠나기 전에 갑자기 돌아갔던 그 일을 떠 올렸다. 아예 모르거나 모르는 척 해주길 바랬건만--! "그렇게 많이 도와줬는데 작별 인사도 없이 온다는 게 걸린 것뿐입 니다. 어쨌건, 저는 그 애가 저 때문에 언짢아 하는 것은 싫었고, 방 법이 있는데 그냥 간다는 건 도리도 아니라고 생각했고요. 제발 부 탁이니, 다 그렇고 그래야만 서로의 입장을 생각한다는 편견은 버려 주세요. 딴 마음 없더라도, 좋은 사람은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그만 큼 잘 해주고 싶은 건 당연한 거란 말입니다!" 그렇게 말 해 놓고 아킨은 아킨 자신이 더 놀라버렸다. 맙소사, 지 금 내가 무슨 말을 한 건가.....!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 말을 한 당사자가 아킨 자신이라는 것은 분명 스스로가 두려워질 일이었다. 루첼이나 켈브리안이 들었다면, 둘 다 눈부터 크게 뜨고 혹시 아킨 이 세 쌍둥이가 아니었나, 하고 생각할 것이다. "알았다, 알았어. 원, 녀석...장난 좀 친걸 가지고 그리 고지식하게 받아들이기는. 그럴 때면, 그냥 '네, 유즈는 정말 귀엽고 좋은 아이 지요.' 라고 말하면 되는 거라고." "죄송합니다." "그럴 것 없다. 어쨌건, 유즈가 뭐하고 있는 지 정도는 너도 궁금하 고 나도 궁금하니 한번 들여나 보자꾸나." 그렇게 말하며 베이나트는 거울 위의 휘장을 걷어 올렸다. 아킨은 벌써 고개를 돌리고 거울을 보다가, 거울 위로 비추어지는 창에 눈 이 멎었다. 베이나트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라, 유즈가 이렇게 생겼었나?"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아킨은 벽난로 앞에 놓여진 돌을 집어들어 던졌다. 챙그랑--! 유리가 깨져 나가고, 낯선 남자의 비명이 터졌다. "으악-!" 그리고 뭐가 쿵, 떨어지는 소리도 들려왔다. 아킨은 허리에 꽂힌 단 검을 뽑아 들었고, 베이나트는 금방 새파래졌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 "모릅니다!" 그 때 쾅, 하고 문이 박살나며 안으로 거센 바람이 불어닥쳤다. 매 운 안개가 피어오르더니, 곧 눈에서 눈물이 나오고 기침이 쿨럭 쿨 럭 터졌다. 아킨은 발을 박차고는 문 쪽으로 달려가, 막 안개를 헤치고 들어오 려는 검은 그림자를 밀어붙이며 밖으로 몸을 날렸다. 쿵, 하고 몸이 바닥에 떨어지고 그가 밀어젖힌 남자도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아직 도 눈과 목이 따가웠지만, 밖으로 나가니 시원한 공기가 쏟아져 들 어와 훨씬 견딜 만 했다. 그러나 그 때, 어깨너머에서 칼 뽑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킨은 허리 를 당겨 몸을 일으키고는, 거의 동시에 상대의 무릎을 걷어찼다. 남 자가 주춤하는 새, 아킨은 빠르게 검을 놀려 남자의 가슴을 베어 냈다. 피가 튀고, 신음이 흘러 나왔다. "큭-!" 비틀거리는 상대의 멱살을 잡아 패대기치려는데, 갑자기 발목 근방 에서 거센 진동이 몰려왔다. 땅이 흔들리며 얇은 살얼음판처럼 갈라 지고 있었고, 그 틈에서 기이한 색조의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순간에, 뒤에서 날카로운 공격이 파고 들어왔다. 아킨은 검으로 그것을 막아 치고는, 팔을 당겨 상대의 가슴에 팔꿈치를 찍 어 넣었다. 그러나 바닥이 너무 흔들려 균형이 비틀어지고, 힘의 중 심도 어긋나 공격이 빗나가 버렸다. 남자가 피-웃더니 아킨의 배에 주먹을 밀어 넣었다. "젠장!" 아킨은 몸을 비틀어 공격을 피하며, 검을 휘둘러 그 상대의 허벅지 에 꽂아 넣었다. 균형이 무너진 몸이 앞으로 쏟아지며, 엄청난 힘과 속도로 상대의 허벅지에 검을 쑤셔 넣게 했다. 뼈까지 닿은 듯 검 끝에 딱딱한 것이 닿으며 우드득 소리가 들린다. 뽑는 것은 이미 무 리라 아킨은 검을 놓았다. 그리고, 바로 넘어지고 말았다. 엎어지며 머리가 박살 날 것만 같은 충격이 쾅, 하고 턱을 후려치며 머리가 아찔해졌다. 그러나 더 고역인 것은 주변 가득한 매운 연기였다. 정 신이 혼미해지고, 숨이 턱턱 막혀왔다. 그 때 누군가가 아킨의 뒷덜미를 거세게 찍어눌렀다. 이마가 다시 바닥에 쾅 부딪혔다. 양팔에 힘을 주려 해도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 았다. "크--" 숨이 턱턱 막히고 먹먹해지는데, 갑자기 베이나트의 고함소리가 들 려왔다. "너희들 뭐냐!" "......" 아킨은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조차 잠시 멈추었다. 그런 걸 누가 알 려 주나....(그리고 참 일찍도 나온다..) 그런데 쿵--! 하고 발로 바닥을 세게 밟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아킨 을 향해 차가운 바람이 빠르게 휩쓸려 왔다. 그것이 스치는 순간, 흔들리던 바닥이 멎고 갈라지던 땅은 붙고, 고약한 연기도 사라졌 다. 그리고 신선한 바람이 얼굴을 확 덮치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퍽-! "윽-!" 베이나트가 날린 돌이 아킨을 누르던 상대의 이마에 맞은 듯 했다. 베이나트가 급히 말했다. "아키야, 어서 일어나! 난 몸싸움은 못한단 말이다!" "바보, 그런 걸 자기 입으로 말하면 어떻게 합니까..! 아리스테!" 아킨의 목 부분에서 공기가 빠르게 집중되었다가 크고 사납게 쾅 터졌다. 목을 누르던 상대가 밀려 나가떨어지자마자, 아킨은 허리를 당겨 몸을 일으키고는 베이나트를 향해 달려가려는 남자에게 달려 갔다. 그리고 그대로 그의 뒷덜미를 잡아당기고는, 그가 고개를 돌 리자 바로 그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퍼어-! 남자가 메다 꽂히듯 나동그라졌다. 베이나트가 서둘러 주문을 외우 자, 바닥에서 덩굴 같은 것이 휙휙 솟구치더니 쓰러진 남자의 몸을 휘감았다. 아킨은 그 남자의 턱을 갈겨 기절 시켜 버린 다음, 방금 전 아킨을 내리 찍었던 남자를 향해 달려갔다. 마법사는 그였다. 그가 방금 전의 지진을 일으키고, 그 독 안개를 뿜어 올렸다. 남자가 손을 뻗자, 그의 앞에 회오리치듯 하얀 방사선 이 뿜어져 나와 주변으로 휙휙 퍼졌다. 그러나 아킨은 바보도 아니고 마법을 아예 모르지도 않았다. 아킨은 바닥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마법사의 눈이 단번에 커지고, 뒤에서 베이나트가 그 놀라운 재주에 박수를 보냈다. "멋지구나~" 아킨은 우선 베이나트부터 때려눕히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으며, 아 슬아슬하게 하얀 거미줄 끝을 넘었다. 그리고 건너편에 착지하며, 그대로 팔꿈치를 휘둘러 마법사의 등을 찍어눌렀다. 마법사가 비틀 하자, 아킨은 그의 뒷덜미를 잡아 하얀 거미줄 쪽으로 집어 던졌다. *********************************************************** 작가잡설: 매우 비협조적인 파트너입니다..-_-;; 오랜만에 집에 돌아갔더니, 집이 완전히 둔갑;; 을 했더군요. 사방이 번쩍 번쩍....;; 온 집안을 갓 사온 강아지처럼 데굴 데굴 굴러 다니며 '엄마, 나 그냥 집에 내려와 살까~~~' 하다가 왔습니다;; 집나와 산지 벌써 8년째가 되다 보니......이제 정말 '집'에서 살고 싶어집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28장 ************************************************************** [겨울성의 열쇠] 제131편 거울 속의 달빛#6 *************************************************************** "이거 먹으면 완벽하게 괜찮아 질 거다." 그렇게 말하며 베이나트는 찬장 위에서 꺼낸 단지 안에 들어있던 환약을 한 알 꺼내 아킨에게 주었다. 아킨은 단번에 꿀꺽 삼켜 버렸 고, 곧 배속이 화끈거리며 따갑던 눈과 목덜미가 가라앉기 시작했 다. 아킨은 몸이 진정되자마자 문쪽으로 걸어갔다. "뭐 하려고?" "물어는 봐야 할 것 아닙니까. 설마하니, 이 집 구경하려고 들어온 것 같지는 않은 데요." "뭐, 그럴 수도 있지." "........." 베이나트와 같이 지내는 나날의 최고 장점은, 아무도 하지 않는 고 민을 하느라 언제나 하는 고민을 잊게 된다는 것이다. 베이나트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한 다음 말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고 확인할 필요는 없을 거다. 저 사람들, 한참 전부터 우리를 발견하고 쫓아 왔다고." 아킨은 정말 놀랐다. 누군가가 따라 온 것을, 그것도 베이나트가 알아채는 것을 자신이 전혀 몰랐다는 것이 놀라웠다. 보름이 가까워져서 그러나, 했지만 아킨은 곧 자신이 더욱 터무니없는 생각을 떠 올렸다는 것을 깨달 았다. '그 때'가 다가오면 오히려 온 몸이 바늘이 곤두서듯 예민해진 다. "하지만, 네가 알아채지 못한 건 당연한 거야. 네가 저 녀석들 일찍 발견해서 패대기치지 못하게 한 건 나니까-" "대체 왜 그런 거죠?" "그래야 다른 놈들이 오지 않으니까." "......네?" "저들이 중간에 실패하면, 곧장 다른 놈들이 따라 붙었을 거야. 또 그들이 떨궈져 나가면 또 다음- 그러나 우리가 전혀 눈치 못 챈 듯 행동하니, 저 쪽에서도 계속 단 둘만 따라왔다. 저 쪽은 날렵한 녀 석하나와 교활한 마법사 하나, 그리고 이쪽은 곱게 자란 어린애와 나사 빠진 사내 하나. 충분하고도 남을 상대라 생각할 만 하지....아 마 다른 일행에게 연락도 안 했을 거다." "지금쯤 저 사람들이 사라진 걸 알게 될 것 같은데요." "걱정 마, 신경 안 쓸 테니. 이 시간부터 연락이 없어진다면 아마도 성과가 없어서 잠이나 자러 갔을 거라 생각할 거란다." 그리고 베이나트는 손끝에서 반짝이는 빛 가루를 만들어 내더니 후 불었다. 그것들은 문틈으로 빠져나가 마법사와 또 다른 남자주변에 안개처럼 어렸다. 그리고, 끙끙대던 남자가 축 늘어지고 발악하던 마법사도 고개를 푹 꺾었다. 베이나트가 말했다. "잠들었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숲에서 다정하게 부둥켜안고 있는 자신들을 발견할 거다. 오늘 일은 다 잊고 말이다." 아킨은 푸--하고 한숨을 내 쉬고는 자리에 앉았다. "아마, 그 공주 짓이겠군요." "그렇겠지......하지만 생각보다는 세게 나서는 구나. 네 정체가 무엇 인지 분명 알고 있는 데도 이리 나선다면..." ".....죽일 생각도 있다는 거죠." 아킨은 베이나트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며 웃고 말았다. "휘안토스나 아버지에겐 차라리 제가 없어지는 편이 나아요. 또, 지 금....아마도 저는 실종되거나 요양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을 겁니다. 그러니 칼라하스 공주는 저를 죽인다 해도 크게 문제 될 건 없을 거라 판단했을 겁니다." "거, 참 성격 고약한 공주님일세." "그녀로서는 당연한 일일 테지요. 어쨌건....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이상한 녀석들하고 만나게 되어서..." "뭐, 너는 나 때문에 탈로스에게 죽어라 쫓기게 될 텐데 피장파장이 지. 아니, 저런 조무래기들이야 몇이 와도 상관없다. 괜찮아, 괜찮 아." "저도 탈로스에게 쫓길 만한 이유가 있는 데요." "너와 나는, 탈로스에게 미움 받는 격이 틀려. 너는 몇 대 쥐어박히 고 끝낼 수 있다만, 나는 정말 씹어 삼켜도 신통찮을 정도로 미움 받고 있거든." 아킨은 다시 궁금해졌다. "대체 왜 그렇게 미움 받는 겁니까? 혹시, 그 여동생 되는 분과 사 귀다가 걷어차기라도 했어요?" 베이나트의 얼굴이 당장에 시퍼래졌다. "농담으로라도 그런 가설은 내 놓지 말아라! 생각만 해도 끔찍하구 나." 아킨은 브리올테를 떠올리자, 자신도 몸서리가 쳐졌다. 그런 어머니 에게서 켈브리안 같은 딸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어쨌건- 집은 숨겨 놓자꾸나. 며칠 편하게 쉬고 있으면 저기 저 패 거리들이 먼저 다른 곳으로 떠날 테니." 그렇게 말하곤 베이나트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뽑고, 아킨의 머리카 락도 두어 가닥 뽑았다. "아얏- 왜 이러는 거에요?" "그야 쓸데가 있으니까 그렇지." 베이나트는 창문으로 가서 그 머리카락들을 차례차례 훅 훅 불었다. 머리카락들이 뿌옇게 변하더니, 마치 반딧불처럼 날아가 마법사와 남자의 주변을 떠돌고는 사라졌다. "저 패거리들은 안심해도 될 정도로 헷갈리다가, 진짜 우리를 봐도 정말 우리인지 의심하게 될 거다. 이제 칼라하스...인지 뭔지하는 마 귀 할멈 같은 공주님에 대해서는 안심해도 좋아." "별 마법을 다 아시는 군요." "페나크란 마법사가 전쟁에 쓰기 좋은 마법만 번성하도록 해서 이 런 쓸모 있는 것이 애석할 정도로 사라진 거란다......그래, 며칠 여기 서 쉬면서 배워 볼래?" "저야 고맙죠." 베이나트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당장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당장에 지하로 내려가자꾸나. 보여 줄 게 많거든." 아킨은 네, 하고 답하려다가 베이나트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달의 거울'의 휘장 아래에서 빛이 스며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베이, 저거 지금 이상한 데요?" "응?" 베이나트는 그것을 보다가, 갑자기 급히 달려가 휘장을 잡아뜯듯이 걷어냈다. 순간, 아킨은 그 거울이 아주 커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엄청난 빛의 소용돌이가 거울 속에서 휘몰아치고 있었고,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베이나트가 소매를 걷어올리고는 거울 표면위로 무언가를 탁탁 그 려 넣으며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소용돌이가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 다. 곧, 거울은 동굴 안의 수면처럼 깨끗해졌지만, 거울이 비추는 것 은 베이나트가 아닌 누군가의 손이었다. 유리창에서 손을 맞대듯, 베이나트가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이 반대편 면에 손을 얹고 있는 것 이다. 매끈하고 부드러운 것이 여자 손 같았다. 손가락에는 여러 가지 굵 고 얇은 반지들이 끼워져 있고, 긴 손톱 끝에 이상한 그림들이 가득 그려져 있었다. 그 때, 거울 저편에서 놀란 듯한 여자 목소리가 들 려왔다. -혹시 칼롭--? 베이나트가 놀란 듯 눈을 끔뻑이더니 물었다. "나루에?" 아킨이 물었다. "칼롭이라니요?" "저기, 그게..." 다시, 거울 속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맙소사, 정말 다시 돌아왔군! 이 쪽으로 가까이 와 주겠어? 잘 보 이지 않아. 탄성을 지르듯 터뜨리는 그 목소리는 정말 매혹적이고 아름다웠다. 그저 평범한 말 한마디에도, 귀를 기울이고 싶은 신비로운 매력과 힘이 숨어 있는 듯 했다. 베이나트는 그녀가 말하는 대로 거울 앞에 서서는 손을 들어 보였 다. "나루에, 나 여기 있어- 이봐, 너도 멀찍이 있는 건 마찬가지잖아. 좀 가까이 오라고." 거울 속에서 여인이 나타났고, 아킨은 놀라서 흠칫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엘프였다. 짙은 갈색 피부에, 길게 뻗은 귀- 머리카락은 검게 물결치고, 눈은 아름다운 녹색이었다. 긴 귀에는 귀걸이들이 흔들렸고, 이마에는 초 승달을 겹쳐 놓은 듯한 장신구가 매달려 있었다. 아킨은 나루에의 얼굴을 살펴보다가, 그녀가 나이가 꽤 지긋한 엘프 임을 알아보았다. 예전에 자켄이 엘프들에 대해 이야기 해 준 적이 있었다. 숲의 드루이드들은 이마에 초승달 모양의 장식을 걸고, 지 위가 높아질수록 겹치는 초승달의 숫자도 많아진다. 그녀의 것은 다 섯 개였고, 그 중앙에 자그마한 원까지 달려 있었다. 정말 높은 드 루이드인 것이다. 그 나루에가 말했다. -대체 언제 탈출 한 거지? "좀 됐다. 그런데, 그러는 너는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건 어떻게 안 거야?" -방금 전에 거울이 반응을 보였거든. 그 거울에야 누구든 비추어질 수 있지만, 그 거울이 있는 오두막에 들어갈 수 있는 건, 너밖에 없 잖아. 그러니...네가 돌아온 거라 생각했어. 다행이야, 이럴 때 네가 돌아와 있어서. 부탁할 게 있었거든. 베이나트의 얼굴이 구겨졌다. "엘프답게 고상하게 뻔뻔한 건 여전하군. 아니, 고생고생하다가 겨 우 쉬려는 사람한테 뭘 부탁하려고 그러는 거야, 넌?" -미안. 하지만 너무나 급한 일인 데다가, 그곳의 숲으로는 내가 힘 을 쓸 수 없어서.....이렇게 부탁할 수밖에 없는 거야. "나도 일 많아." 아름다운 웃음소리가 거울 너머에서 들려왔다. -도와준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한해서....그리고 네가 해준 일과 내게 바라는 일, 양쪽의 무게를 저울질하는 것은 네 양심에 맡기며 무엇으로든 보답하겠어. 칼롭, 나는 어둠 숲의 어머니야....내가 이렇 게 말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일인 거야. 아킨은 갑자기 주먹을 들어 거울을 깨버리고 싶을 정도로 증오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머리가 뜨끈해지고, 손이 부들 부들 떨려왔 다. 어둠 숲의 어머니- 숲 전체의 어머니라 함은, 단 하나의 경우밖에 없다. 드루이드의 장, 그리고 아킨에게 저주를 내린 장본인! 순간, 나루에가 눈을 날카롭게 빛내고는 귀를 세웠다. -옆에 누군가 있군......칼롭, 당신도 알 테니 우선 그 애한테 지금은 진정해 달라고 말해 줘. 어서-! 말이 끝나자마자 베이나트는 아킨의 손목을 움켜잡아 꾹 힘을 주었 다. "놔요--!" "진정해라, 아키야." "당신은 알지도 못하잖아요! 그러니 놔요--!" "제발, 진정해!" 베이나트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고, 그 얼굴은 시뻘겋게 변했다. 팔 에 힘줄이 돋으며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온 힘을 다 주고 있는 것이 다. "아키.....네 괴로움은.....그래--! 제대로 알지는 못해도.....적어도, 얼마 나 괴로운 지는 알아. 하지만..이것도 이해해 다오. 그 죽은 아이는 소중한 일족의 아이인 동시에 그녀의 손녀였다!" 아킨은 베이나트가 깊숙하게 숨겨진 이야기를 아무렇게 하고 있는 지 전혀 깨닫지 몰랐다. 치솟는 분노에, 정신은 이미 나가버린 지 오래였다. 베이나트가 알고 있던 것과 전혀 모른다 생각했던 것이 무엇인지, 아킨은 그 경계조차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그건 아버지의 잘못이었습니다--! 그런데, 대체 왜 저와 어머니가 그렇게 되어야 했던 거죠! 대체 왜--!" 거울 저편에서 나루에가 말했다. -나는 분명 저주를 풀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것을 거부한 것은 네 아버지였고. "들어 줄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그 정도도 감수하지 않고 죄를 씻을 수는 없어. 타인의 죽음에 대 한 죄를 대체 무엇으로 씻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거냐, 소년- 그 도도하고 오만한 목소리에, 아킨은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 킨의 어깨가 다시 들썩이자, 드디어 베이나트가 주문을 외우고는 손 을 좍 펼쳐 아킨의 눈을 가렸다. 아킨은 순식간에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지며 그대로 무릎을 꿇으며 쓰러졌다. 베이나트는 그런 아킨을 부축하고는 나루에에게 말했다. "어쨌건 용건이나 어서 말해. 나도 이런 짓 오래하고 싶지 않으니 까." -좋아, 칼롭. 내 일족의 아이 중 하나가 드래곤들과 인간의 영지에 있어. 알다시피, 그곳의 숲에는 내 힘이 미치지 않아. 그러니....당신 이 그 모든 숲을 벗어날 때까지만 동행해 줘. 베이나트가 화가 치밀어 오른 듯 목에 힘줄이 솟았다. "그러니, 네 말은 나더러 위험한 곳에서 헤매는 철부지 애 좀 봐 달 라, 이 말이냐? 제길, 그 애는 뭐 하러 여기까지 온 거야? 너희 일 족은 이 근처에는 얼씬도 안 하잖아." -갈 만한 이유가 생겼으니 간 거야. 그리고...지금 어떤 생각하고 있 는 지 알아. 걱정 마, 당신과 그리 멀지도 않는 곳이니까. "우연인가?" -필연이지. 그 애는 당신을 쫓아서 오고 있는 거니까. 베이나트는 물론이요 아킨까지 놀랐다. 베이나트가 당황한 듯 한참 허둥대다가 겨우 자기 턱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 나를 왜? 난 너희 일족에서는...너하고 바실리카 하고 밖에는 알지 못한다고! 가만....설마, 바실리카야?" -바실리카가 아니라 내 증손자야. 즉, 아델라이데의 아들이자 바실 리카의 조카인 셈이지...이러면 내가 이렇게 부탁하는 이유를 이해하 겠지, 칼롭? 네가 모르는 아이도 아니잖아. 아킨의 눈에서 분노가 걷혔다. 베이나트가 그런 아킨을 한번 흘끔 보고는 다시 나루에에게 말했다. "그래, 그 애가 어디에 있기래 이러는 거지?" -거울 위로 손을 뻗어. 그럼 알게 될 거야. 그리고 나루에가 사라졌다. 베이나트가 손을 뻗자, 거울 위로 어둠 에 흠뻑 젖은 컴컴한 숲이 나타났다. 울창하고 무거운 잎들을 가득 인 굵직한 나무들과, 그 나무들이 굽어보는 맑은 강줄기가 보인다. 베이나트가 가만히 탄성을 내 쉬었고, 아킨은 그가 그 장소를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아킨도 베이나트도 보았다. 강가에 서 있는 키 큰 남자-검은 머리카락과, 그 사이로 뻗은 긴 귀- 흐릿해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 만, 그래도 잘 아는 사람은 어렴풋한 윤곽만으로도 알아 볼 수 있 다. 아킨이 조용히 그를 불렀다. "자크....!" "그리 멀지는 않군. 하루거리....이런!" 베이나트가 서둘러 아킨의 얼굴을 가리려 했지만 이미 늦어 버리고 말았다. 거울이 어둑해 지는 듯 하더니 갑자기 붉게 확 하고 번쩍였다. 횃불이었다. 그것이 옆으로 치워지자, 거울 위로 흉측한 얼굴이 휙 떠올랐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곧 오른 쪽으로 몸을 기울 여 면밀히 횃불을 비추어 보기 시작했다. 아킨은 이를 악물었고, 베이나트가 탄식했다. "벌써 풀려났군......!" 그런데 그가 갑자기 고개를 휙 돌렸다. 눈이 번쩍이고, 비틀린 입에 서 쉰 목소리가 동굴이 울리듯 음침하게 들려왔다. -커...... 베이나트는 거울을 떼어 바닥에 내 동댕이쳤다. 쨍그랑--! 거울이 달빛과 함께 깨어지며 유리조각이 튀어 올랐다. 그리고 베이 나트는 쓰러지려는 아킨의 몸을 끌어안았다. "진정해라, 제발 진정해--아키!" 공포에 질려 떨기 시작하는 소년에게, 그는 강인하고 온화한 노인이 겁먹은 손자를 달래듯 그렇게 속삭였다. *********************************************************** 작가잡설: 나와 살면 좋은 것은, 정말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 다는 게지요. 언제 자든 뭘 보든 어디로 나돌아 다니든, 전혀~ 조용한 혼자만의 시간. 늘 나를 기다리는 고독의 공간.... 그리고 별로 좋지 않은 것은, 역시나 모든 것을 혼자서 해결해야 한다는 거죠. -_-; 세상에 저절로 되는 것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 니다. 빨래도 식사도 청소도, 스스로 하지 않으면 빨래는 스스로 깨끗해지지 않고 쓰레기는 저 알아서 안 보이는 곳으로 숨지 않으며, 밥은...구해야 구해지는 것. 그리고 심심하다 보니 이상 한 버릇도 생긴답니다. 동생이 저와 방을 합치고 제일 기겁했던 버릇인데, 바로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며 혼자서 중얼 중얼 하는 버릇입니다;;; (의외로 이런 버릇 가진 독신자들이 많더군요;;) 이제는 동생과 살고 있습니다. 좋은 점.....은 혼잣말 하는 버릇이 많이 고쳐졌다는 것 뿐. 빨래는 두배로 늘어나고, 청소 정리는 정말 꼬박꼬박 해야 하며, 동생이 놀러나간 날 어머니께 서 전화라도 하시면 기를 쓰고 변명해야 합니다. 보는 TV프로는 우찌 그리도 저와 파장이 안 맞는지, 밤낮 요란스럽게 히히덕 대는 쇼프로나 보고 있고....뿐만 아니라 보고 있는 와중에도 리모콘 찍찍 눌러 대면서 여기 저기 틀고...! 제 고요한 독신생활은 아작난 지 오래입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29장 *************************************************************** [겨울성의 열쇠] 제29장 기억과 소망 제132편 기억과 소망#1 *************************************************************** 산산 조각난 거울조각들이 흐트러져 달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수 십 개의 크고 작은 달과 얼굴들이 수 십 개의 눈에 비추어진다. 베이나트는 그 중 한 조각을 집어 손수건에 싸서는 옷 속에 집어넣 었다. 그리고 그가 소맷자락을 당기며 주문을 외우자, 나머지 조각 들은 눈을 감듯 새카맣게 변하며 달과 베이나트의 얼굴이 지워졌다. 아킨은 어깨를 들썩이다가, 벽에 등을 기대며 겨우 진정했다. 귀가 욱신거리는 것 같고, 그 탑을 탈출할 때의 기억이 다시 솟구쳐 오르 고, 그러다가 남는 것은 그냥 컴컴한 공포뿐이었다. 그것은 그저 까 맣고 까만, 알 수도 이겨낼 수도 없는 끔찍하기만 한 괴물이었다. "진정해라..." "알아...낸 건가요?" "아마도. 당장 출발해야 한단다." 아킨은 등을 기대고는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가 득하고, 손은 아직도 가늘게 떨린다. 그렇게 파랗게 질린 아킨에게 베이나트가 말했다. "우선 준비나 하자꾸나. 이것저것 챙겨야 할 게 많으니..." 그러나 그런 베이나트의 차분한 얼굴을 보는 순간, 아킨은 자기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그....엘프와는 어떻게 알고 있는 거죠?" 아킨의 갑작스런 물음에 베이나트는 어찌 말해야 할 지 모르겠는지 머뭇거리다가 겨우 답했다. "그냥......예전에 이곳 저곳 여행하다가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건 나 중에 이야기하자꾸나." 아킨은 자신이 이상하게 웃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야, 아킨-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거지? 정말 고약한 표정이라 고. 너무 고약해.... "나중에요?" "지금 중요한 건 아니야." "뭐가 아니라는 겁니까, 대체 뭐가!" "아키!" 두려움과 놀라움에, 온 몸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다. 지금의 아킨은 스스로 어둠 속으로 도망쳐 문을 닫고 웅크리고, 들여다보는 자를 난폭하게 밀쳐내고 있었다. 그것을 물어 본 것도, 어쩌면 정말 궁금 해서가 아니라 그저 베이나트를 밀쳐내 버리고 싶은 것뿐인지도 모 른다. 예전에 롤레인에게 무례하고 차갑게 굴었던 것처럼, 루첼에게 주먹 을 휘둘렀을 때처럼, 그렇게 밀쳐 내는 것이다. 아는 것이 싫다. 아킨이 그토록 숨기려던 것을 모두 알고 있는 것 이, 그것도 이렇게나 자세히 알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 두려워서 이 렇게 어디로든 숨어 버리고 밀쳐내 버리고 싶은 것이다. 더 이상 들 여다보려 하지마,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마, 두려워 미칠 것 같아...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겁니까?" "....그래." 생각해 보니 베이나트는 처음부터 아킨을 마치 아는 듯이 대했고, 당시 아무 기억이 없던 아킨은 별 다른 의심도 없이 그와 가까워졌 다. 전혀 의심을 하지 않았던 것이 한심해진다. 편해서 그런 걸까, 하지만 아무리 편해도 그렇지 보통 사람의 상식 같은 것을 전혀 고 려하지 않았던 건 바보짓이었다. 당연한 것을, 평소처럼 당연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속은 것 만 같았다. 서로에 대해 잘 모르지만, 적어도 조금이라도 더 알게 되면 친구 하나 정도는 만들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생각했 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아킨과 만나기도 전에 다 알고 있었고, 가장 처참한 기억과 관련된 자와 친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다른 사 람도 아니고, 하필 그 여자라니- 휘안토스나 아버지의 친구였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 만 같았다. 갑자기 화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혹시 그 때...도와준 건 있나요?" "아니, 결단코 없다." 아킨은 등을 기대고 있는 벽이 등골이 시리도록 차다는 생각이 들 었다. 갑자기 막막하고 외로워지고, 온 세상이 캄캄해지고 아킨 혼 자만 덩그러니 서 있는 것만 같다. "당신...에게 이런 말해도 될까 모르겠습니다. 당신에게 아무 책임이 없다면....그러면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건지, 해서는 안 되는 건지.... 죄송합니다, 하지만 지금 아주 정신없어요. 이해해 줘요." "해 보렴." "왜 하필 저였던 겁니까." "네가 그의 아들이었으니까..." "아버지는 저 때문에 괴로워하신 적은 없어요. 가엾은 어머니만 저 때문에 괴로워하시다가 결국에는 돌아가셨죠. ......그건 아십니까...? 어머니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안다......." 아킨이 본 것은 그 최후 직전의 모습이었을 뿐이었다. 시신을 수습 했을 때는커녕, 장례식에조차 갈 수 없었다. 아니, 열 다섯 살이 될 때까지 그는 어머니의 무덤에 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의 죽음에 책임질 죄인은 아킨 혼자 뿐이었고, 영원히 아킨 혼자 모든 죄를 짊어지고 살아야 했다. "그 어둠 숲의 어머니라는 분은 아마도 아버지가 조금이라도 슬퍼 하고, 괴로워하고, 그러면서 고통받기를 바라셨는지 모릅니다. 하지 만...그건 잘못이었어요. 아니, 아버지를 몰라도 너무 몰라서 그렇게 한 거예요--!" "아키..." "아버지는.....내게 모든 죄를 떠넘기고, 나를 미워하는 것으로 자신 을 위로했어요..... 내게 죄가 있어서 그리 된 거지, 자기가 잘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기만했죠. 모든 고통, 모든 불행! 모두 다! 그렇게 저한테 떠 넘겨 버리고....저를 마음껏 증오하면서 살아가셨고, 지금 도 그러시죠. 네, 아마도....휘안이 저를 그 꼴로 만들어 놨을 때, 누 군가에게 찾아 달라고 말하기도 하셨을 거예요. 슬프다고 사람 감동 시켜줄 말도 하셨을 테죠! 아버지는 그럴 분이니까! 휘안의 손을 빌 려 저를 치워 버리고....그리고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은 아무 죄도 없다고.....그래도 아버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그렇게 기만하 실 분입니다. 분명!" 베이나트의 손이 다가왔지만, 아킨은 그 손을 세차게 뿌리치며 소리 쳤다. "그러니 그 여자가 한 복수는 아무 소용도 없었어요-! 아무 소용도! 가엾은 어머니만 돌아가시게 했을 뿐이고, 저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 들었을 뿐이에요! 아버지는......그 어떤 것도 아버지를 변화시키지 못 했어요.......아무 것도--! 차라리 직접 달려와 그를 찢어 죽이는 편이 몇 배는 나았어요! 그랬다면 적어도 어머니는 살아 계시고 그 탑에 갇혀 그 한심한 고민이나 하고 있지도 않았을 테고, 지금 탈로스에 게 어찌 될까 두려워서 덜덜 떨지도 않았을 테고....." 그리고 드디어 목에 꽉 막혀있던 말이 터져 나왔다. "적어도.....난 '사람'이었을 테니까....!" 자켄에게조차 그런 말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자켄에게는 도저 히 말 할 수 없었다. 그 일 때문에 태어나고 괴로워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 옆에 있어주었던 이에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 겠는가. 그런데 정말 아무 소용도 없는 이 사람 앞에서는 그 참았던 것이 다 쏟아져 나오고, 결국에는 눈물까지 샘솟으며 볼을 적셨다.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라 이러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위와 바다를 향 해 목에 피가 터지도록 소리치듯, 아무 답도 해 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베이나트가 말했다. "아키, 많은 이들이 자기가 택할 수 없는 것 때문에 괴로움을 받는 단다." "별 수 없으니 참으라는 건가요?" "그게 아니란다. 최선을 다해, 네 모든 힘을 다해.......버티고 나가야 한다는 거야. 그것은 생명을 얻은 자의 의무다 사슴은 끝없이 맹수 를 피해 도망쳐야 하고, 맹수들은 굶주리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그들을 쫓아야 하지. 살아있기에, 살아있는 것을 누리기 위해서는 고통도 그 의무가 되는 거야......미안하다, 쓸모 없는 말이나 지껄여 서-" 베이나트는 말을 아끼려 했다. 잠시 불편하고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 고, 결국 그는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아델라이데-이 이름은 알고 있겠지?" "자크의 어머니....말입니까?" "나도 그 아이를 안단다." "....." "아델라를 만난 건 그 애가 열 일곱 살이던 가을이었다. 그 아이는 바실리의 어머니와 나루에의 아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였고....그러 다 보니 그 아이와 인사라도 나누게 된 거란다. 그래, 그 때는 유즈 만큼.....작고 귀여웠다. 깃털 예쁜 새처럼 사랑스런 아이였지...." 그리고 그는 말하기 어려운 지 숨을 크게 몰아쉬고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그렇게 작고 여렸던 것이 제대로 크지도 못하고 시들어 죽어 가는 것을 보는 건......끔찍한 일이었다. 그것도 제 힘에 부쳐 죽는 것이 아니라, 죄도 없이 그저 약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토 록 잔인하게 짓밟혀 죽어간다는 건...... " 그리고 그 참담함은 베이나트에겐 충격을 넘어선 공포였다. 잘 아는 소녀는 아니었지만 그 소녀가 어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슬프고 가슴아팠고 이리도 처참하게 죽어 간다는 것이 무섭도록 끔 찍했다. 그런 그에게 바실리카가 말했다. -손은 묶여 있었고, 그 줄은 피에 젖어 있었어.....맙소사, 얼마나 괴 로웠으면 손목의 뼈가 드러나고 그 상처가 짓무르도록 발버둥쳤던 걸까.....! 밤만 되면 늑대처럼 울부짖고, 내 살이 패일 정도로 움켜쥐 고는 놓아주지 않아....! 끔찍해, 나도 산채로 죽어 가는 것만 같아....! 차라리 내가 죽어 버릴 것만 같다고! 속에 든 것을 다 게워내고 싶을 정도로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고, 그 런 잔인한 짓을 한 자에 대한 혐오와 분노에 몸이 다 탈 지경이었 다. -그렇다면 차라리 그 기억을 지워 줘, 옳은 방법은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 살릴 수는 있잖아. 그러나 베이나트가 알게 된 것은, 그것을 그보다 먼저 알았던 바실 리카와 나루에가 얼마나 끔찍한 기분이었을 지 짐작이 되고도 남는 사실이었다. "자켄....때문이었군요." "임신 중의 엘프는 모든 파괴의 마법을 거부하고, 다른 종족의 마법 은 당연히 거부하지. 결국에는 아무 수도 쓸 수 없었다. 그저 죽지 않도록 겨우 겨우 목숨을 유지하게 해주는 것 뿐. 그리고, 그나마도 자케노스가 태어나고 난 다음에는 손쓸 수도 없이 쇠약해져서.....보 내야 했지. 생명수의 품으로.....그리고 그 아이는 바실리카가 키웠 다." 바실리카- 가끔 자켄이 그녀에 대해 이야기 해 주곤 했었다. 자켄에게 검을 배 웠고, 자켄은 그 검을 바실리카에게 배웠다. 그러니, 그녀에 대한 이 야기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자켄에게 있어 그녀는 존경하는 스승이고, 사랑을 베풀어 준 부모이 자 형제이며, 경애하는 여인이었다. 자켄은 아킨에게 주는 것 외의 모든 것을 그녀에게 바치고 있었고, 아킨과 바실리카만이 자켄의 모 든 것이었다. 그녀에게는 자켄의 절반을 이루는 아버지의 피 보다는, 나머지 절반 인 여동생의 피가 훨씬 더 중요했던 걸까. 아니, 어쩌면 신경 쓸 필 요조차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있어 갈가리 찢어 버리고 싶 을 정도로 증오하는 대상은 단 하나, 사이러스로도 충분했을 테니 까.... 그래서 그에게 속한 것, 그가 아끼는 것부터 파괴하는 것이....아무 렇지도 앟았던 걸까. 그저, 사이러스에게 속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도 그런 운명으로 몰아 넣는 데 전혀 거리낌 없었던 걸까... 답이 없다. 아니, 원망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을 것 같다. 대상이 없을 때는 그저 상황 자체만 생각하면 되었는데 이제 그 대상을 확인하게 되니 미움이란 것은 송곳처럼 날카로워지고 그것은 아킨 자신을 더 괴롭게 할 뿐이다. 더 이상 생각하게 놔 두는 것이 오히려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듯 베이나트가 말했다. "아키야, 내 창고에 같이 가 주겠니?" "....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탈로스란다. 그리고 나루에와 네 아버 지의 일은 그 둘의 일일 뿐, 너와 내 문제는 아니다. 그러니 어서 내려가서 필요한 것만 몇 개 챙기고, 나도 네가 필요할 만한 것이 있다면 주마. 내려가자." 그리고 베이나트는 아킨이 답하든 말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지하 로 향하는 계단을 향했다. 아킨이 여전히 앉아 있자, 그는 몸을 돌 리고는 손짓을 했다. 결국 아킨은 그를 따라 일어나 지하로 내려갔다. *********************************************************** 작가잡설: 뭔가.......답답한 나날이군요. -_-;; 으흐이;;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29장 **************************************************************** [겨울성의 열쇠] 제133편 기억과 소망#2 **************************************************************** 아킨이 베이나트의 '창고'와 처음 마주하며 생각 한 것은, 서재와 집 의 관계가 집과 지하실이 아니라 거대한 본체와 그 위에 돌출한 '입 구' 비슷한 관계라는 것이었다. 베이나트가 문을 열고 그 손끝에서 빛을 띄웠을 때. 그리고 그 빛이 천장에 닿아 햇살처럼 빛을 퍼뜨리며 지하의 어둠 속에 고요히 잠 든 어느 오래된 서재를 깨웠을 때, 아킨은 잠시나마 방금 전에 터뜨 리던 원망과 탈로스에 대한 두려움을 잊을 수 있었다. 그곳은 궁궐의 홀만큼이나 컸다. 거대한 기둥들이 솟아 천장을 받치 고 있고, 그 기둥 아래와 주변에는 온갖 물건들이 쌓여 있었다. 벽 에는 책꽂이가 가득 있고, 그 안에는 온갖 크기의 책들이 먼지와 거 미줄을 뒤집어 쓴 채 눕혀 있었다. 베이나트가 빛을 몇 개 더 띄우며 말했다. "마음에 드는 것 있으면 가져도 된다." "어디다 쓰는지 알아야 가지죠." 아직은 좀 퉁명스러웠다. 베이나트는 손을 들어 아킨이 마주하는 곳을 가리켰다. "저 쪽에 검이 있으니 챙겨 두거라. 난 따귀도 제대로 못 갈길 정도 로 둔해서, 어디서 문제가 생기면 네가 다 해결해야 할거야.....아, 그 리고 너라면 보석 보는 눈이 좀 있을 테니 그 옆의 상자에서 괜찮 은 걸로 몇 개 챙겨 둬라. 나는 통 눈이 없어서 말이다." "보석을 팔만한 곳이 있을까요?" "여기서 국경까지는 어려울테다만, 로메르드로 가면 충분히 많아." 아킨은 베이나트가 가리켰던 곳으로 터벅터벅 걸어가고는, 이제부터 는 방금 전에 베이나트에게 화냈던 것을 잠시나마 잊어 보기로 했 다. 검은 장작인지 칼인지 도무지 구분을 못한 듯 엉망으로 쌓아 놓았 고, 대체 뭘 어떻게 골라야 할 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많아 도 너무 많았다. 결국 아킨은 손에 이것저것 쥐어보아 손에 맞다 싶 은 것을 골라서는 뽑아 보고는 정말 놀랐다. 베이나트의 말을 빌리 면 '따귀도 제대로 못 갈기는' 사람이 검을 제대로 보관할 리가 없 고, 그렇다고 치한 만날 일도 없을 테니 들고 다녔을 리도 없을 텐 데 검날은 매일 매일 손질해 놓은 듯 수정처럼 깨끗하고 예리했다. 아킨은 검을 돌려 잡고는 허공을 겨누어 보았다. 검 끝에서 별이라 도 빛날 듯 했다. 아킨은 검을 모조리 뽑아 보고 싶은 욕망을 겨우 억누르며 베이나트가 말했던 상자의 뚜껑을 끙하고 열어 보았다. 상 자 안에는, 순간 주변이 훤해질 정도로 보석이 가득했다. "부자였군요?" "아, 땅의 일족이 거기 일 몇 개 도와준 보답으로 준거다. 거기는 넘치는 게 보석이니. 근검절약 안 해도 많이 남더구나." 아킨은 보석 궤짝을 뒤적뒤적 거리며 너무 값져서 살만한 사람이 아예 없을 만한 것과 무게만 많이 나가는 것을 제하고 몇 개 적당 한 것을 골라 그 옆에 놓인 가죽 주머니 안에 챙긴 다음 입구를 조 였다. 그러다가, 보석함 안에 에메랄드로 상감을 해 넣은 금 상자가 놓여 있어 한번 열어 보았다. 그 안에는 정성스레 세공된 장신구들이 들어 있었다. 자그마한 귀걸 이에서부터 팔찌와 목걸이, 반지 등등. 그 중에는 귀걸이와 목걸이, 반지로 된 세트도 발견할 수 있었다. 결혼 예물로 쓸만한 것이었다. 아킨은 혹시나 해서 반지를 들여다보다가, 그 안쪽에 새겨진 부부의 이니셜을 발견했다. '아루아다. K'와 '발로어. K.' K-로 시작되는 것 이 성인 듯 했다. 아킨은 반지를 넣다가, 예쁜 팔찌하나를 발견하고 는 집어들었다. 금으로 된 덩굴모양의 장미 팔찌였고, 장미는 빨간 루비로, 잎은 빛 나는 에메랄드로 되어 있었다. 크게 값져 보이기보다는, 정말 금과 보석으로 된 덩굴인 듯 정교한 솜씨에 감탄이 일었다. "이것들 대체 뭐죠?" 아킨이 그것을 들고 흔들자, 베이나트는 뒤를 흘끔 보고는 다시 돌 아앉았다. "아내에게 선물해 준거지." "아내.....요?" 베이나트가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검은머리에 푸른 눈, 허리가 정말 버들가지처럼 날씬하고 예뻤는 데.....성격은 좀 왈가닥이었어. 좋은 여자였지." 그러나 아킨은 지금 그녀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지는 못했다. 그녀에 게 선물했던 모든 것이 이렇게 먼지 쌓인 구석에 있다는 것으로 충 분히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게다가 베이나트의 얼굴을 보면 고작 서른 초반정도였고, 결혼을 했다면 몇 년 전의 일일 가능성이 크며, 그 결혼생활이 벌써 끝났다면 얼마 같이 지내지도 못하고 젊은 아 내를 보낸 것이다. 그러다가 아킨은 베이나트의 이름이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분 명 베이나트 칼로바가 아니었나? 그런데, 이 이름은 완전히 틀리잖 나. 발로어라니? 그렇게 생각하며 아킨은 옆에 놓여있는 책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킨은 그 중 노트 같은 것을 집어 뒤적거리다가, 별로 낡아 보이지 도 않는 그것이 꽤나 고색 창연한 어투로 적혀 있다는 것을 알게되 었다. 고시를 좋아하던 사람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노트를 보던 아 킨은 그것이 그저 연구 기록노트란 것을 알게 되었다. 원본은 아주 깨끗하게 적혀 있었지만, 그 위에 덧대어 여기 저기 붉은 잉크와 푸 른 잉크로 지저분하게 휘갈겨져 있고, 가끔 핏방울도 튀어 있다. 수 정을 했다기보다는 읽는 사람 자신이 이해를 돕기 위해 일부러 메 모를 해 둔 듯 했다. 아킨은 몇 장 더 넘기다가, 그 안에 끼워져 있는 작은 봉투를 발견 하고는 열어 보았다. -칼바인에게 그 부분을 읽자, 아킨은 잠시 베이나트를 돌아보고는 그 편지를 읽 어 나갔다. 왜 남의 편지가 끼워진 노트를 가지고 있는 건가, 해서. 편지에는 별 특이한 말은 없었다. 그저 몇 가지 안부와 함께, 아내 는 잘 있는지, 아이들은 잘 크고 있는 지, 그리고 이번의 집회에서 어떤 발표를 할 예정인데 그 연구의 대략적인 정리본을 보낸다, 좀 봐 주길 바란다- 아무리 봐도 선배나 스승에게 한번 봐 달라고 보내는 연구논문에 끼워 넣는 정중한 편지 같았다. 그러나 존댓말을 쓰지 않는 것을 보 니, 자신보다 학식이 많은 친구에게 보내는 같기도 했다. 아킨은 곧 흥미를 잃고는 그것을 접어 노트 위에 끼워 넣으려다가, 다시 한번 펼쳐 보았다. 그리고 맨 아래에 적힌 서명에 놀랐다. -그대의 친구, 페나크 아코바. 동명 이인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세상에 성과 이름이 똑같은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정말 대 마법사 페나크의 친필 노트인 것 이다. 아마도 이걸 로멜의 카신저 교수에게 보낸다면, 보낸 이를 평 생 은인으로 모실 것이다. 그 외에도 페나크 아코바의 기록, 이라는 말로 끝나는 노트가 몇 권 있었고, 그 노트 옆에는 페나크의 저서가 쌓여 있었다. 그렇게 탐색하던 아킨은 어느덧 벽장에 놓여 있는 유리상자에 눈이 멎었다. 아름다운 물건이었다. 상자 안에는 하얀 돛을 부풀린 자그 만 요트가 한 척 있었고, 그것은 별들의 바다를 한가로이 유영하고 있었다. 별들은 파도처럼 흔들리고, 희끄무레한 구름과 어울리는 바 람은 유유하게 불어오고- 그것이 유리상자 안에서 하나의 세계가 되어 어우러져 있었다. 세공 된 보석처럼, 잘 꾸려진 화단처럼, 그것은 인간의 손으로 다듬 어져 이 곳에 정지해 있는 작지만 아름다운 것이다. "이거....멋지네요." 아킨이 말하자, 베이나트가 다시 뒤를 돌아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아킨이 방금 전 보다 훨씬 더 부드러워져 있어 그도 안심한 것이다. "예전에 말한 그 애가 준거란다. 그 애 취미가 그거였지....하지만 그 건 못 주니까, 차라리 방금 그 팔찌를 가져가라." "....그건 괜찮습니다. 남자가 보석 같은 거 가져서 뭐하게요." "아니. 남자가 보석에 관심을 표하면, 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뜻 이지. 그러니 가져가도 되." 아킨은 갑자기 기분이 탁 풀어지고 말았다. 그냥 다 잊고 마음 편하 게 웃고 싶어졌다. "베이, 그런 건 직접 사 줘야 의미가 있는 겁니다. 누군가에게 공짜 로 얻은 걸 여자에게 선물로 주는 건......좀 창피한 짓이에요. 여자도 싫어할 테고." "누가 왕자 아니랄까봐 따지기는.......그런데 누구한테 주고 싶어?" "당신 혼자 앞서 나간 겁니다. 있을 리가 없잖아요." "없긴- 말하기 좀 그런 거겠지. 그냥 누가 주더라, 하고 솔직하게 말하고 줘. 네가 선물 해 주는 건 나중으로 미루고." "나 아직 화 안 풀렸습니다." 베이나트가 입을 다물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딱히 누구다. 라고 단호하게 말할 여자는 없었다. 그저 팔찌의 장미를 보니 여자에게 어느 특별한 날 선물로 주기 좋 겠다, 싶었고.....그러다 보니 켈브리안이 생각났을 뿐이다. 그녀는 이 것을 받으면 '네가 이런 걸 선물해 줄 정도로 컸다니, 감동이야.' 하 면서 깔깔 웃었을 것이다. 그리고 화사하고 아름다운 그녀에게라면 무엇이든 어울릴 것이다. 유제니아라면 어떻게 할까.... 그러나 유제니아에게는 절대 이런 것을 선물해 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게 무엇을 주든 세르네긴과 나눈 반지보다 소중한 것은 없을 테고, 그 반지가 소중하게 끼워진 손에 이 팔찌가 짤랑이는 것은 이 상하게 싫었다. 그녀에게는 아킨이 선사한 천 개의 보석보다 세르네 긴이 걸어주는 소박한 금목걸이가 몇 배로 소중할 테고, 그렇게 세 상에서 가장 귀중한 보석을 가진 아이에게 더 값진 보석을 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때 베이나트가 말했다. "아키야, 정말 줄까?" 아킨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당신 아내의 물건이잖아요." "아다는 보석에 전혀 관심 없었어. 그녀에게 소중했던 건.......내가 처음으로 준 반지뿐이었다. 뭘 주어도 그녀는 그 반지만 소중하게 여겼지." 베이나트는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 생각하고는 머쓱하게 어깨를 으 쓱해 보였다. "어쨌건.....그건 그녀 무덤에 그녀와 함께 있으니, 나머지는 다 처분 해도 괜찮은 거야. 처분해야지, 처분해야지 하다가도.....뭐랄까, 그냥 그게 정말 없어지면 너무 서글플 것 같아서.....결국 아무 것도 버리 지 못했어.....딸애와 아들에게 몇 개 주기도 했는데, 그 안에 있는 것들만큼은 차마 보내기 어렵더구나." 아킨이 물었다. "아이들도 있나요?" "그래, 아내보다 조금 늦게 보냈지." 아킨은 더 이상 물어볼 수 없었다. 그리고 나른한 한숨과 함께 푸념 처럼 힘없고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내와 함께 아담하고 예쁜 집을 지었었단다. 젊고 주목받는 마법 학자와, 그를 내조하는 당찬 부인에게 어울릴법한 그런 집 말이 다..... 굉장히 근사하다고 말하기는 좀 곤란한데, 그래도 참 편안하 고 괜찮은 집이었어. 아내는 둘레에 오렌지와 레몬을 심었고, 그것 들이 익을 때면 향기가 참 근사했지.....뭐, 맛은 영 시원찮았지만 말 이야-언젠가 아다가 그걸로 잼을 만든 적이 있었는데, 여태 먹은 모 든 이상한 요리 중 최고봉으로 올려놓고 싶더군. '내 집 마당에서 난 오렌지로 만든 끔찍한 잼을 바른 빵.' 이라고 말이다....." 아킨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방금 전에 보던 모형 범선을 바라보았 다. 그러다가 아킨은 그 선체의 앞부분에 배의 제작자이름처럼 무언 가 적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줄리어스. R. 그리고 그 옆에 책처럼 접혀 있던 액자를 하나 있었다. 아킨은 베이나트가 눈치채지 못하도 록 주의하며 살짝 그것을 열어보았다. 너무나 흔해서, 너무나 눈물나도록 그립고 사랑스러운 그런 그림이 었다. 나무하나에 오두막 하나 있는 흔해빠진 풍경이라 할 지라도, 그곳에 기다리고 있을 아내와 아이를 사랑하는 남자에게는 가장 아 늑한 곳이며 아름다운 곳, 동쪽 하늘이 발그레하게 물들고 하늘이 파랗게 밝아올 때 그 집을 나서기 전 까지,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그리고 그 그림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액자 안에 있는 여자는 자그마한 얼굴에 눈과 미소가 예쁜 젊은 여 자였다. 어머니 루실리아처럼 눈부신 미녀는 아니었지만, 아버지의 분노 속에 박제되어있는 그 슬픈 초상보다, 지금 베이나트가 슬픔과 기쁨을 함께 담아 그리움에 적시는 이 여인의 모습에서 더 따스한 온기를 느꼈다. 아킨은 액자를 닫으려다가 그 그림 구석에 적힌 글자에 눈이 멎었 다. 아내에게 주는 작은 시였고, 그것은 아래위로 힘주어 내리 긋는 듯한 특이한 필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날짜와 서명이 적혀 있 다.... "--!" 아킨은 손이 떨리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그것을 덮고는 책 위에 얹 어 놓았다. 그리고 다시 그 유리 상자 안의 배를 올려다보다가 별들 의 바다에 묻혀 잘 보이지 않는 배의 아랫부분에 적힌 글자를 발견 했다. 뒤로 주춤 물러나다가, 발뒤꿈치에 놋쇠 그릇 같은 것이 걸려 요란 한 소리를 냈다. "아키...?" "아, 네. 저.........." 그리고 아킨은 돌아섰다. 베이나트가 책을 하나 들고는, 그런 아킨을 보고 있었다. 아킨은 방 금 보던 액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부인 초상을 봤습니다. 미인이시네요?" "헛말로라도 그렇게 하지 말아라. 내 눈에만 지상 최고의 미녀라는 건 나도 잘 알아." "그분께....는요?" "자기 없으면 한끼도 제대로 못 챙겨 먹는 세계 최고의 얼간이였지. 뭐, 실제로도 그랬지만 말이다-" 아킨은 웃고 말았다. "그녀와 있는 동안에는...그녀가 언젠가는 떠날 거라는 것을 생각해 본 적조차 없었지. 아이들이 크고 늙을 거라는 것도 몰랐고, 그 순 간 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하지만 시간이 그렇게나 빨리 가는 것이란 것을 몰랐고, 시간이기에 흐르기만 하는 거라는 것을 몰랐다. 세상 모든 것이 내 손으로 움직일 수 있었건 만, 시간과 그것이 끌어들이는 죽음만은 내 손으로 어찌할 수 없는 거였지....." 아킨은 아찔해져서 결국 벽에 등과 머리를 기댔다. 그러치 않으면 쓰러질 것만 같았다. 방금 전의 원망도 분노도 잊었 다. 탈로스에 대한 두려움도 순식간에 사라진다. 지금 이 순간,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베이나트는 여전히 구석진 곳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고, 그 젖은 눈동자가 무엇을 짚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아킨은 자신이 무 엇을 보고 있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환상, 꿈--아니, 이건 환각이다. 말도 안 되는, 기괴하고 비현실적인 환각- "......그리고 어느 날 빈집에 앉아서 깨닫고 말았지. 세상에 나 혼자 라는 것을- 저 먼 어느 신전의 묘지에 있는 것이 내 아내의 무덤이 고, 그 옆에 누워 있는 것이 내 아이들이라는 것을.....그런데 나는 멀쩡하게 살아서, 너무나 멀쩡하게 그들을 기억하고 있어....그리고 갑자기, 너무나 갑자기 그 고독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단다. 많이도 겪은 이별이고 죽음인데, 그 순간에만큼은 너무나 무서워졌단다. 그 리고 오랫동안 그랬지.....길게, 아주 길게- 내 고통을 달래기 위해 남의 슬픔을 보지 못할 만큼--" "......." 말을 꺼내려던 아킨은 베이나트가 입을 열자 입술을 꾹 물었다. "그리고....요?" 그저, 그렇게만 되물어 볼뿐이었다. 떨리지 않기를 바랬는데, 너무나 당황하면 늘 그렇듯 이번에도 차분 했다. "그러다 탈로스를 만난 거란다." 아킨은 다시 그 별의 바다에 떠 있는 배를 바라보고 말았다. 그리고 머뭇거리다가, 이번에도 싱겁고 허탈한 것을 물어 보고 말았다. "그 때 친구가 되신 건가요?" "그래, 그 때 녀석은 날 믿었고, 나도....그게 녀석을 위한 길이라 착 각하고 있었지. 녀석이 뛰어나기 때문에, 다른 이에게는 너무나 위 험한 짓이라 결코 허락하지 않았던 많은 것을 그에게는 허락하는 거라, 그렇게 나 자신이 나를 속였다. 그렇게 하며, 나는 혹시나 녀 석이 내가 원하는 것을 해 주지 않을까, 정말 그 경지를 이루어 그 소망을 이루어주지나 않을까.....하며 바랬지. 녀석에게는 많은 지식 이 전해졌고, 녀석은 그 모든 것을 소화하고도 여력이 남을 정도 로...정말로 굉장한 녀석이었다. 신이 그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가 버리고, 마법과 우주의 비밀에 한해서는 무한한 은총을 베푼 듯.....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나보다 뛰어난 놈이었다." 전능의- 모든 마법을 쓸 수 있는 자. 그리고 그 전능이란 권호는 단 하나, 대마법사 페나크에게만 허락되었던 위대한 이름이었다. 오거스트에게 '눈보라'라는 권호가 내려지며 그녀가 결국에는 베넬 리아의 최고마스터가 되었듯, '천둥'의 권호가 악튤런을 델 카타로 이끌었듯, 탈로스의 권호 '전능'은 그의 운명이 우주의 진리와 원리 를 터득할 수 있는 은총을 베풀었다는 뜻이었다. 평생 단 한번만 주 어지는 권호는 그런 의미였다. "하지만...그러다가 어느 날 내가 먼저 알게 되었단다. 내가 얼마나 나를 기만하고 있었는지, 그 기만으로 내가 진실을 얼마나 속이고 있었는지....나 자신부터 속였으니, 누굴 더 못 속이겠느냐-" 베이나트의 눈을 적시는 그것은 슬픔, 후회와 자신을 향한 분노였으 며, 그것이 어우러져 상처를 새기고 그 상처의 고통에 그의 눈은 떨 리고 있었다. "그리고 뒤엉킨 오해 속에, 녀석은 자기 혼자만이 악당이 되어 있더 구나.....스승을 살해하고, 동문들을 박해하고, 혼자서 스승의 모든 것 을 독차지한 천하에 쳐죽일 놈으로--" "언젠가-" "언젠가?" 아킨은 어렵사리 말했다. "아주.....답답한 친구가 하나 있었습니다. 자기 때문에 누구든 힘들 어 지는 것을 싫어했고, 자기 옆에 있는 누구든......이해할 수 있다 생각하는 녀석이었죠." "착한 놈이네." "솔직히...그렇게 착하다 말하긴 뭐해요. 녀석이 그렇게 신경 쓰는 건 자기에게 잘 해주는 국한되고, 녀석에게 그 범위는 무척 좁았으 니까.... 하여튼....그래서 그런지 녀석은 그 안에 포함되는 사람들의 일은 다 자기 책임이라 생각했어요. 사랑하는 여자가 있어도, 그녀 가 신분도 낮고 가난한 자기 때문에 고생한다면 모조리 자기 책임 이라 생각해서 그녀를 다른 남자에게 맡겼죠. 엉망진창이던 친구 하 나가 있었는데, 녀석이 그리 엉망진창인 게 다 자기 책임이라 생각 했는지 엄청 챙기고 다녔어요. 물론.......저한테도 그렇게 해 줬지요. 제가 탈로스에게 끌려가기 전 까지, 녀석은 내가 쫓기는 게 다 자기 책임이라도 되는 듯 굴었죠. 자기도 몰랐을 겁니다. 나는 멍청하니 까, 그리고 그 쥰...인지 하는 녀석은 한심하니까, 실비는 연약하니까 --그러니, 그 만큼 다 자기가 해야 한다고....그렇게 멋대로 생각하 기만 했어요. 멋대로-" 아킨은 답지 않은 말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멈춘다면 더 우스워 질 것 같아서, 그래서 그냥 되는대로 이어 이야기했다. "스승님이 그러셨습니다.... 자신이 보고 싶어하는 모습을 남에게 강 요하지 말고....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았다고 그들을 비난할 권리도, 실망할 권리도 없다고요. 녀석은 이것이 옳다, 이렇게 살아야 가장 괜찮은 것이다...그리 정해 놓고는, 모두다 그렇게 해 주기를 바랬던 겁니다....그리고 베이, 당신도 그들이 선택한 것까지, 그들이 책임져 야 할 몫까지 다 자기 것이라 생각하시는군요....." "네가 알 수는 없는 일이란다." "탈로스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뛰어난 마법사입니다. 당신이 일부러 길을 보여주지 않았어도, 언젠가는 찾아 갈 수 있을 정도로.....또, 그것이 위험한 길이란 것을 알고도 있었을 겁니다." "....." "아마도....탈로스가 당신에게 분노했던 건, 당신이 그를 그렇게 이용 했다는 것이 아니라.....당신이 도와주었던 그 길이 그토록 위험한 길 이었다는 것을 깨달아 분노한 것이 아니라.....당신이 끝까지 믿어 주 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벼랑으로 가는 길이었는데도?" "그는 자신이 그 벼랑을 뛰어 넘을 날개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겁니다. 실패하면 온 몸이 산산이 부서진다 할 지라도..... 그는 그럴 사람입니다. 단 하나에 미쳐서, 모든 것을 가볍게 잊을 정도로--" ".....아키야-" "베이, 그러니 당신도 인정해 주셨어야 했어요........그가 당신과 같은 지평선을 바라보는 '마법사'라는 것을." 베이나트가 한숨을 터뜨린다. 그리고 아킨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게 된 것을, 그의 이름을 부 르고 싶은 것을, 그리고 확인하고 싶은 것을 참은 데 다행으로 여겼 다. *********************************************************** 작가잡설: ..........드디어 루첼 생각이 좀 나나 보구나, 아키야. 디카를 샀습니다....동생이 사고 쳤습니다;; 과외도 없는 주제에 36만원짜리를 3개월 할부로;;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29장 ************************************************************** [겨울성의 열쇠] 제134편 기억과 소망#3 *************************************************************** 휘안토스는 칼자루를 움켜쥐고 검을 뽑아 들려는 마르실리오를 저 지해야 했다. 그는 정말 급작스레 그렇게 움직였고, 그 순간을 겨우 놓치지 않은 것에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손떼라." "할 수 없습니다." 마법사의 단점이 보이지 않는 것을 지나치게 파고들려 하는 거라면, 기사들의 단점은 보이는 것을 과하게 맹신한다는 것이다. 여전히 칼 자루를 꾹 움켜쥐고 있는 마르실리오에게, 휘안토스는 더 엄중히 명 했다. "분명히 말한다. 손떼라. 내리쳐 봤자 아무 소용도 없고, 만약 그리 한다면 그것은 네 조부에 대한 무례이기도 하다. 저것을 보낸 자는 너의 조부가 존경하는 대 마법사의 제자이자 후계자다." 마르실리오는 결국 검을 내려야 했다. 그리고 이래서 제대로 된 마 법사가 휘안토스를 수행해야 된다 생각했다. 적어도 마법에 대해 전 혀 모르는 자신이 아닌, 휘안토스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마법사가 말한다면 조심 하기는 할 텐데 말이다. 이제 손 쓸 수는 없지만 여 전히 불안한 그는, 대신 테라스에 앉아 루비처럼 붉은 눈을 빛내는 까마귀를 향해 한 걸음 나섰다. 저것이 조금만 몸을 뒤척이면 당장 에 뛰쳐나가 머리를 내리치겠다는 기세였다. 휘안토스는 그의 의도를 눈치 채기는 했으나 뭐라 하지는 않았다. 그 정도는 봐 주어도 될 듯 했고, 더 이상 핀잔을 준다면 그것은 마 르실리오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일이 된다. 그렇게 주변이 정리되자 휘안토스가 말했다. "말하십시오, 탈로스. 그래서 용건이 무엇입니까." 까마귀가 입을 벌렸다. 시뻘건 입안에서 뭐가 들릴 듯 했으나, 정작 목소리가 흘러나온 곳은 그 가슴 안이었다. 그곳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르더니,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카람파의 노예들을 빌려다오. 많이는 필요 없다. 수호자 하나와, 그 사냥개 세 마리면 충분하다. 마르실리오의 안색이 삭 변하더니, 절대 안 된다는 얼굴로 휘안토스 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휘안토스는 무시했다. "마법사, 죄송합니다만 그것은 저희 가문에만 허용된 것입니다. 빌 려 드린다 해서 빌려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한다. 허락한다, 그 한마디면 충분하다. 카람파의 노예들이 어찌하여 너의 가문에 복종한다 생각하느냐. "그렇다 할 지라도 안심할 수는 없습니다." -내 명예를 걸고 맹세하건대, 반드시 돌려주겠다. 휘안토스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까마귀가 불쾌한 듯 머리를 숙 이며 날개를 들썩였다. "탈로스 고르노바, 당신 역시 에크롯사의 왕실과 연이 닿아있는 명 문가의 자제라 들었습니다. 그러니, 제 처지와 책임에 대해 이해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어디에 쓰실 생각인지 여쭙고 싶습니다." -답해 줄 수 없다. 그러나 보답으로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세 가지 들어주겠다. 그것은 내 혈육의 목숨에 걸고 맹세하는 것이며, 그 안에는 내가 하는 일을 취소시킬 권리 또한 포함된다....그러나 어딘가에 봉사하는 것은 제외시킨다. 마르실리오가 믿지 말라고 말하려다가, 휘안토스의 날카로운 눈길을 받고는 입을 다물었다. 에크롯사의 사람에게 혈육의 목숨을 건 약속을 믿지 말라 말하는 것은 모욕이나 다름없다. 명분과 실리를 최대한 챙겨야 하는 국가적 거래라면 모를까, 이것은 개인 대 개인의 일이다. 특히 저 탈로스는 겉보기는 유랑극단의 구경거리인 난쟁이 같아 보이긴 하나, 한 나라 의 왕비의 오빠이며 대마법사 컬린의 제자이자, 그 계승자이기도 하 다. 휘안토스가 말했다. "탈로스 고르노바, 그렇다면 당신의 조카인 켈브리안 공주를 걸고 맹세해 주십시오." 당장에 효과가 왔다. 돌로 된 테라스가 쩌적 갈라지고, 휘안토스가 딛고 있는 바닥이 덜 덜 떨렸다. 마르실리오가 검을 뽑으려다가, 또 휘안토스에게 저지되 어 버렸다. "제게 있어 그것을 빌려주는 것이 어느 정도의 책임을 요하는 것인 지, 당신이 모르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그 정도는 거셔야 저도 당 신을 믿을 수 있겠습니다." 이내 떨림이 멈추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주 망설이는 듯 힘든 답 이 들려왔다. -.....좋다.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저도 이제는 당신을 믿을 수 있겠으니, '빌려 드리지요'." 순간, 휘안토스의 주변에서 검은 얼룩이 만들어지더니, 그 안에서 검은 덩어리 네 개가 솟구쳐 올라 까마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휘 안토스는 결국 뒤로 한 걸음 물러나야 했다. 솔직히, 그것은 휘안토 스에게도 뒷골 서늘할 정도로 놀라운 일이었다. -고맙다. "탈로스, 잠시만-" 까마귀가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환하게 빛냈다. 밝은 빛이었고, 그 것을 말해 된다는 몸짓이라 짐작하며 휘안토스는 물었다. "아키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조용한 밤바람이 스며들어와 머리카락이 흩 어지고, 달빛 흐르는 바다만이 저 멀리서 넘실댔다. 마르실리오가 옆에서 침을 꿀꺽 삼킨다. 그리고 탈로스는 한참이 지난 뒤에야 말했다. -탈출했다. "당신과 만나기 전과 같은 상태로 나간 겁니까?" -나에 대한 기억과 비밀까지 안고 갔지. "그렇다면, 아키를 도와주었던 마법사 베이나트는 대체 누구입니 까?" 까마귀의 눈이 다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엄청난 분노와 살기가 퍼 져나가, 드디어 테라스가 콰작 부서지고 말았다. 상황을 짐작한 휘 안토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들을 이용해 주고 싶은 당사자인가 보군요." -더 이상 묻지 말아라--! 목소리가 매가 울부짖듯 매서워졌다. 휘안토스는 그 까마귀의 눈이 조금 가라앉는 것을 기다려 말했다. "그를 공격할 거라면, 아키는 이곳으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그것은 세 가지 부탁에 포함되는 것이냐? "탈로스 고르노바, 당신의 동생인 브리올테 고르노바를 제 손으로 구해드리고 부탁한 것이 바로 그 아이의 일이었습니다. 그 아이를 놓친 것은 당신의 책임, 그에 대한 뒷수습 정도는 해주셔야 도리 아 니겠습니까." -건방진-! "저는 당신 보다 어리긴 하나, 암롯사를 책임져야 하는 왕자이자 후 계자입니다. 미숙하다 할 지라도, 저는 암롯사를 걸고 말하는 것입 니다." -미안하지만 그 애는 이미 내 비밀까지 떠 안고 갔다. 돌려보낼 수 는 없다. "그렇지만 해칠 생각은 없겠지요? 당신 조카 얼굴을 봐서라도." 이번에는 탈로스 쪽에서 아무 말도 없었다. 그리고 까마귀의 붉은 눈이 이제는 거의 검은 색으로 보일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휘안 토스가 말했다. "그리 해 주실 거라 믿습니다." -휘안토스 프리엔--! "탈로스 고르노바, 그것은 이미 끝난 거래였고, 실수는 당신 쪽에서 한 것입니다. 그에 대한 책임조차지지 않으시겠다면, 저는 당신을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약속을 믿지 못하겠다는 거냐? "약속이 아닌, 당신의 능력 말입니다." 당장에 펄펄 뛸 것 같았던 탈로스가,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 다. 단지 고요한, 터뜨리기 직전까지가 오히려 더 숨죽어드는 거대 하지만 고요한 분노가 천천히 타오르는 것이 느껴질 뿐이었다. 폭풍 전의 고요, 아찔한 높이로 솟구친 파도가 쏟아지려는 그 직전의, 그 렇게 금방이라도 세상과 함께 꺼질 듯한 그런 종류의 고요였다. -그 아이는 대체 왜 만나려 하는 거냐? "지금 암롯사는 마법사가 필요합니다." 비웃음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넘치는 게 그 정도 되는 마법사다! 아니, 당장에 권호를 받고 자리 를 기다리는 마법사만 수십이다! 권호는 커녕, 배우는 것조차 제대 로 마치지 못한 녀석이 대체 왜 필요하다는 거냐! "그 모든 것은 제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탈로스 고르노바. 상관하 실 바가 아닙니다." 크르릉, 하고 한숨 내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탈로스는 어차 피 학자이며 마법사이다. 그에게, 협상을 통해 거래를 조정하는 능 력은 애당초 없었다. 강대한 힘과 방대한 지식에 비하면 현실을 보 는 감각은 순진한 학자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좋다. 네 마음대로 해라. 보내주지! 하지만 녀석의 이에 목이 뜯겨 나가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다! 그 말에 휘안토스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상관없습니다. 그것 역시 제 일이니까요." -좋다, 이것을 남겨 놓도록 하겠다. 네가 원한다면 당장에 나타날 테니, 군말 없이 받아라. "알겠습니다." 휘안토스가 승낙하자마자, 그리고 테라스에 앉아 있던 까마귀가 날 개를 푸드득 치더니 연기가 꺼지듯 사라졌다. 어디로 사라진 것인 지, 정말 그 전령을 남겨 놓기는 한 것인지 마법에 대해 전혀 모르 는 휘안토스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제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금간 테라스, 갈라진 바닥, 그리고 옆에서 멍하니 있는 마르실리오 뿐이다. 정신을 차린 마르실리오가 급히 물었다. "아킨토스 님을 불러오실 생각이십니까?" "그래." "무모합니다." "걱정 할 것 없다, 마르실리오. 녀석이 널 어떻게 하지는 못할 테 니." "그런 하찮은 것을 걱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휘안토스 님-!" 아킨을 다시 암롯사로 불러들이려는 것에, 마르실리오가 휘안토스는 제정신이 아니라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게 당연했다. 서로 죽고 죽이 는 것 밖에는 길이 남지 않은 상대를, 바로 코앞으로 데려다 놓겠다 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마법사 옆에 있는 것이 가장 낫지 않겠습니까!" "어머님께서 그 말을 듣지 못하는 것이 다행이군.....하지만 마르실리 오, 아키는 분명 도망쳤고 다시는 그의 손에 잡히지 않을 거야. 상 황이 이렇다면, 차라리 내 옆으로 불러들이는 게 낫다. 아키는 나를 절대 죽일 수 없고, 나 역시 녀석을 죽일 수 없어. 네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다." ".....그래도 무모합니다." "현실을 직시해 주기 바란다, 마르실리오. 케올레스가 물러나면, 당 분간 암롯사의 마법사 자리는 비워지게 된다. 물론 아키는 당장에 케올레스 대신이 될 수는 없다. 아직 졸업도 못한 처지이고, 또 나 이도 어리지. 내가 지금 당장에 원하는 것은 케올레스가 아직 현역 으로 있을 3년과, 그 3년 동안 그를 도와줄 마법사. 또, 그 후에 오 랫동안 아키와 함께 왕의 마법사 자리를 지켜줄 수 있는 바로 그런 마법사다." "정해둔 사람이라도 있는 겁니까?" 휘안토스는 명쾌하게 답했다. "팔라의 불꽃-" 그리고 덧붙였다. "이번 가을에 새로이 탄생한 권호지. '팔라의 불꽃, 루첼 그란셔스.'" *********************************************************** 작가잡설: 휘안의 신조는 아키거는 내거, 내거는 내거~입니다. 루첼도 예욀라고~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29장 *************************************************************** [겨울성의 열쇠] 제135편 기억과 소망#4 **************************************************************** "그걸로 사겠나요, 아가씨?" 주인은 망토를 물끄러미 보는 어린 소녀에게 말했다. 그러자, 소녀 는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그녀의 일행을 가리켰다. "이 분에게 맞는 게 필요한 거라고요. 이건.....여자용도 아닌데 허리 까지 겨우 닿겠어." 그 말에 주인은 저 손님이 키가 너무 큰 거 아닌가, 하고 울적하게 중얼거리며 뒤돌아서야 했다. 소녀가 물었다. "헌 거라도 괜찮으니, 기사나 용병들이 팔고 간 건 없나요?" "용병들은 마르고 닳도록 쓰니까 그런 녀석들이 맡기고 가려는 건 받지도 않아. 그리고 기사 중에서도 저 정도 키는 드물겠군." 그러며 옷가게 주인은 남자를 흘끗 보았다. 정말 키가 훌쩍 큰 남자였다. 긴 검은 머리카락과 아주 잘생긴 외모 를 가지고 있었으며, 피부색은 아주 진했다. 머리에는 터번을 두르 고 있는 것을 보니, 나프 섬이나 툴칸 제국에서 온 남자 같았다. 그 리 생각하며 주인은 그의 옆에서 자신을 물끄러미 보는 소녀 쪽을 보았다. 이제 고작 열 대여섯 정도 되 보였고, 얼굴이 자그마하고 눈이 커서 더 어려 보였다. 게다가 허리나 팔 다리가 아주 날씬해서, 예쁜 요 정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주인은 이 소녀가 외모와는 달리 남자보다 세상물정에 훨씬 더 밝다는 건 벌써 알아채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는 어느 주인집 아가씨와 그 호위인가, 싶었지만.....이제 주인은 남자 쪽이 순한 도 련님이고, 소녀가 그를 수행하는 보좌 정도로 보이기 시작했다. "안에 쓸만한 게 있을 거요. 좀 기다려 주겠소?" "네, 그렇게 해 주세요." 주인이 내려가자, 소녀-유제니아에게, 남자-자켄이 말했다. "유제니아, 난 추위를 타지 않아. 괜찮다." "그럴 거 없어요. 나한테 빌려주면 뭔가 받을 각오는 해야 하니까." "하지만 낭비잖아." "인간의 이기라고 생각하고 이해해 줘요. 받은 만큼 줘야 마음이 편 한 것. 특히 그것이 그 사람에게 단 하나밖에 없는 물건이라면 말이 죠. 그리고 혹시 알아요? 이 여행이 끝날 때 즈음 자크와 제가 좋 은...네, '아주 좋은' 사이가 되어서 아주 먼 훗날에 자크가 그 망토 를 쥐고 나를 기억하며 밤하늘을 바라볼지." "미안하지만 나는 인간 여자들하고는...." 유제니아가 생긋 웃었다. "나도 귀 큰 남자한테는 흥미 없네요." 윽, 해버린 자켄이 뭐라 말하려 하자마자, 주인이 알아서 망토를 들 고 나왔다. 그 손에 들린 물건은 자켄의 망토와 비슷한 색조의 진 녹색 모직 망토로, 헌 것이긴 했지만 그리 낡지도 않았다. 유제니아 는 주인에게 그것을 받아 들어 들추어보며 눈을 찌푸렸다 피고, 폈 다 찌푸리더니 손가락 두 개를 들어 보였다. 주인은 고개를 저으며 다섯 개를 들어 보였고, 자켄이 둘이서 무엇을 하는지 몰라 당황하 는 동안 둘의 손가락이 드디어 몇 번 펴졌다 움츠렸다를 반복하다 드디어 세 개가되었고 흥정은 이루어졌다. 유제니아는 두툼한 은화 세 개를 꺼내 값을 치르고는 망토를 펼쳐 자켄의 어깨를 감싸주고 핀으로 고정시켰다. 그리고 그 어깨를 톡톡 쳐주고는 말했다. "멋져요, 자켄." "유제니아, 꼭 이럴 필요는..." "안 입으면 화낼 거에요. 제가 화내는 것이 싫으면 그냥 입고, 화내 는 게 상관없으니 도로 주겠다면 자크는 제 기분 따위는 상관하지 않는 불친절한 사람이라 생각할 거에요." 자켄은 그 '우기는'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원래 우기는 말은 그 의도 에 충실할수록 대꾸하기가 어려운 법이다(말이 안되기 때문에 말로 답하기 어려운 것이다). 유제니아에게 어둠 숲의 망토를 빌려준 것은, 밤에 그림자들로부터 추격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그들이 다시 나타난 것은 아니었지만 미리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고, 매일 유제니아를 안고 잘 수도 없는 노릇이며, 밤바다 덮으라고 입던 것을 주는 것도 여자 아이에겐 미안한 일이었으니 결국 아예 빌려 준 것이다- 라고 자켄 본인은 말했지만 유제니아는 별 믿지 않았다. 엘프인 자켄이 그런 호의를 베푼 것은, 실제로는 유제니아가 자기 때문에 늘 숲에서 노숙을 하게 하는 것이 미안해서 이러는 것이었 다. 숲의 밤은 춥다. 겨우 열 여섯 된 소녀가 망토 하나만으로 버티 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그러나 엘프의 망토에는 스스로 온기를 내는 마법이 걸려 있으니, 한 겨울이 아닌 이상 크게 추위를 타지 않는 자켄은 거창한 재채기로 아침을 시작하는 유제니아에게 그 망토를 건네준 것이다. 그리고 유제니아는 자기 망토가 자켄에게 터무니없 이 작다는 것을 알게 되자 결국 자켄을 끌고 시내로 들어와 망토를 산 것이다. "오늘도 숲이죠?" "원한다면 그냥 이곳에서 머물 수도 있다." "아뇨. 이제 슬슬 익숙해지려는데요, 뭐. 후우-" 유제니아는 자그만 주먹으로 허리를 톡톡 치고는, 자켄을 따라 성문 을 향했다. "자크는...보다 보면, 휘안보다는 아키와 닮은 것 같아요. 뭐, 난 셋 다 잘 모르지만. 어쨌건 두 사람은 느낌만은 비슷해요." 자켄이 웃었다. "아키와 나는 같이 지낸 시간이 아주 많거든." "그것보다는......어린 시절에 누군가를 아주 좋아한다면, 무의식적으 로 닮아보려고 하거든요. 특히 자크는 나이도 많잖아요. 내가 보기 에는 아키도 그런 것 같은데~" "칭찬인가?" "물론이죠. 난 휘안토스는 두꺼비보다 싫었다구요. 서로 안 닮아서 다행입니다." 동감하며 자켄은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막 성문을 나서는 데 유제니아가 손바닥을 딱 쳤다. "아차, 사 둘 것이 있었는데 깜빡 했어요." "뭐가 떨어진 거지?" "건과랑 소금이 다 떨어졌어요.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좀 곤란하잖 아요. 또, 언제 큰 시장이 있는 도시에 닿을지도 모르는 데 사 놓아 야 해요. 게다가 그건 가격이 딱 정해져서 깎고 흥정할 필요도 없는 거니까, 잠깐만 기다려 줘요." "같이 가 주겠다." "아하, 걱정 말아요. 그런 곳에는 아주머니들과 아가씨들이 워낙에 많아서 구태여 호위해줄 필요도 없으니까요. 저기, 아까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금방 다녀 올 테니." 자켄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유제니아는 벌써 시내로 들어가 버렸다. 자켄은 어쩔 수 없겠다, 싶어서 멀리 가지 않고 성문을 마주하는 숲 언저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귀여운 아이지?" 자켄은 화들짝 놀라 돌아섰다가, 더 놀라서 뒤로 후닥닥 물러나고 말았다. 그리고 말문까지 막혀서 숨 들이키던 그가 진정한 것은 한 참이나 뒤였다. "그만 방정 떨려무나, 자크~~" 자켄은 여전히 믿기 어렵다는 듯 눈을 찌푸리고는, 아주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그러나 말하기도 전에 상대가 먼저 유쾌하게 말했다. "혹시 어쩌고 하며 극적인 장면 구태여 만들 필요 없다......예전에는 칼립이었다만, 이제는 베이나트란다. 그렇게 부르려무나." 자켄은 잠깐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놀라 움과 반가움이 한꺼번에 터지면서 폭발하고 만, 진짜 기쁨의 웃음이 었다. "놀랐습니다. 모습이 너무 틀려서." "이런, 이런- 아직 눈이 어리구나, 자크. 그 모습에서 좀 젊어진 게 이 모습이란다. 모르겠니?" 그렇게 말하고는 베이나트는 앉아 있던 바위 위에서 두 팔을 벌려 보였다. 자켄은 그를 찬찬히 살펴보다가, 결국 웃으며 고개를 끄덕 였다. "그렇군요, 베이나트. 저는 여태 당신 모습이 완전히 변하는 건 줄 만 알았어요....그런데 아니었네요." "나는 마법사이긴 하다만, 파격적으로 변하는 재주까지는 없어." 그리고 베이나트는 옆을 가리켜 보였다. "앉을래?" "괜찮습니다.....저기, 당신 소식은 들었습니다. 결국 탈출하셨나 보군 요?" "좀 우여곡절이 많았다만, 성공하기는 했다." 자켄이 반가이 말했다. "잘 되었군요.......아, 이제 어디로 가실 생각입니까? 혹시 제자 분을 찾아가실 생각이시라면...." 베이나트는 그 말을 끊었다. "나루에가 나에게 연락했다. 너를 데리고 국경을 넘어 달라고." 자켄의 표정은 단번에 확 변했다. "어머니...께서요?" "자크, 너는 나루에가 어둠 숲의 어머니인지, 그것부터 확인해야 할 정도로 얼간이였냐. 그래, 그녀 말고 너좀 돌봐 달라고 부탁할 이가 또 어디에 있겠느냐. 내가 네 대부니까 이제 막 도망 나와서 피곤한 사람에게 가출한 애 잡아 달래듯 부탁하더구나. 그래도 생각보다 건 강해 보이니 다행이구나." "당신은 아주 젊어지셔서 다행입니다." 베이나트는 콧등을 찡그렸다. "나이 먹더니 능청만 느는 것 같구나. 그건 그렇고, 저기 저 아이는 어떻게 만난 거냐?" "아는 아이입니까?" "첫눈에 반했지." "......." 아킨은 자신을 살펴보는 눈초리를 벌써 알아채고 있었다. 시선의 느 낌을 가만히 살피던 그는, 그것이 자신을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그가 가진 무언가에 대한 갈망이라는 것을 대충 알아챘다. 어렸을 때 그 를 졸졸 따라다니던 호위들에 비하면 지나치게 서툴며, 휘안토스나 사이러스에 비하면 너무 헐렁해서 가엾기까지 할 지경이었다. 아킨은 머리를 넘기고는 뒤돌아 섰다. 그리고 오후의 시장에 나온 사람들 틈으로 그를 열심히 살펴보는 소녀를 발견하고는, 기가 막혔다. 나이는 고작 열 두엇 정도 되 보 이고, 사마귀처럼 깡마르고 눈은 아이답지 않게 교활하게 타오르는 소녀였다. 소녀는 한참 전부터, 그러니까 아킨이 시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를 노리고 있었다. 아킨은 베이나트의 제안에 따라 머리 라도 염색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깨끗한 은발머리에, 얼굴 도 말끔하고 곱살한 녀석이 혼자 이런 곳에 나오면 저런 손 빠른 녀석들의 표적이 되기 딱 좋다. 누가 봐도 호위나 하인 없이 나들이 나온 도련님 모양새니까. 보통 하인들과 함께 나온 귀한 집 아이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물건 고르는 일 뿐이고, 돈을 치르는 것은 하인들 일이다. 그런 하인들은 대체로 깐깐하고 철저한 사람들이라, 그들의 돈을 날치기하는 것은 불가능에 수렴한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한번 아무 간섭 없이 자유 로이 돌아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하인과 호위를 따돌리고 나오 는 도련님들과 아가씨들이 아예 없는 건 아니고, 소매치기 아이들은 그런 사람은 귀신같이 알아본다. 아킨은 소녀를 못 본 척 하며 뒤돌아 섰다. 베이나트가 시킨 것은 먹을 것 몇 가지를 사오라는 것이었다. 근처 에서 만날 사람이 있다고 아킨 혼자 시내로 들여보내긴 했지만, 보 아하니 혼자 어디선가 노닥거리고 있을 것이다. '따라가 달라니! 그 정도는 혼자서 해야 하는 것 아니니?' 하고 말하는 베이나트에 대꾸 할 말이 없는(이라기 보다는 말하기 귀찮은) 아킨은 묵묵히 돈을 받 아 들고 거리로 나왔다. 예전에 혼자서 거리로 나올 때, 아킨은 늘 사람들이 별반 없는 저녁 을 택했다. 그리고 돈도 필요한 만큼만 들고 나와, 털려도 크게 문 제가 없을 정도였다. 돈이 있는 것도 언제나 아킨의 손 근처에 닿는 곳이라, 훔쳐가기도 어렵게 해 놓는다. 아킨이 도련님과보다 한 단 계 높은 왕자님과인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물정 모르고 어리버리한 것도 아니었다. 곧, 소녀가 등뒤로 조심조심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아킨은 어쩔 까, 하고 있다가 그대로 있었다. 곧, 다른 쪽에서 아킨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이 느껴져 흘끔 보니 건장한 남자 하나가 아킨을 지켜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 쪽도 한 패인 것 같다. 순간, 소녀의 손이 허리 쪽으로 슬그머니 다가왔다. 아킨은 재빨리 그 손목을 움켜쥐었 다. 소녀가 놀라 손목을 비틀었지만, 아킨은 힘을 꾹 쥔 채 놓아주 지 않았다. 소녀가 갑자기 얼굴을 확 구기더니, 세상이 벌컥 뒤집어 질 정도로 사납게 울부짖었다. "아, 아파아아--! 이 사람이 왜 이래!" 귀가 따가울 지경이라 아킨은 손목을 놔줄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순간 반대편에서 또래로 보이는 소년하나가 슬쩍 다가오더니 아킨 의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가 재빨리 뽑았다. "너--!" 아킨은 소녀를 내동댕이치듯 놓았으나 소년은 베에, 하고 혀를 내밀 고는 벌써 사람들 틈으로 사라져 버린 뒤였다. 아킨은 당장에 그 소 년을 쫓으려 했지만, 이번에는 소녀가 아킨의 다리를 붙들었다. 아 킨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들고 말았고, 이번에는 그 손목을 방금 전부터 그를 지켜보던 건장한 사내에게 잡히고 말았다. "잠깐." 그런데 아킨의 다리를 붙들고 늘어지던 소녀가 어리둥절한 듯 했다. 전혀 모르는 사람 보는 눈빛이었고, 아킨은 그제야 이 남자가 소녀 의 편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아킨은 반사적으로 남자의 정강 이를 걷어찼다. "크-!" 남자가 잠깐 흔들리자, 아킨은 바로 그 가슴에 팔꿈치를 힘껏 찍어 넣고는 팔을 돌려 배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소녀는 아직도 멍청하 게 아킨의 다리를 붙들고 있었고, 그녀를 향해 아킨은 날카롭게 외 쳤다. "놔라-!" 소녀는 놀라 후닥닥 뒤로 물러났다. 아킨은 망설임 없이 소녀의 뒷 덜미를 움켜잡고는 거리 복판으로 나섰다. 소녀가 독수리에게 붙들 린 생쥐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다, 당신 뭐하는 거야! 이봐요 사람들, 살려줘요-! 이 사람이 절 끌 고 가려고 해요! 끼아악, 끼아아아아악~~!!!!!" "네 동료 어디 있지?" "아아아아아아으으으윽! 이 색마, 치한, 나쁜 놈! 무슨 짓을 하려고! 사람 살려요오오오! 사람 살려어!" "미안하지만 너처럼 못생긴 애는 건드리기도 싫다." 그 어마어마한 모독에, 소녀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너, 너 뭐야--!" "네 동료가 어디 있는 지나 말해." 소녀가 온갖 고함을 치고 버둥거리고 호들갑을 떤 덕에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아킨과 소녀를 향하고 있었다. 소녀가 소매치기란 것을 아는 시장 상인들이 손님들에게 설명하자, 그제야 다들 고개를 끄덕 이고는 소년과 꼬마가 어찌 하는 지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아킨은 방금 전 그를 붙들었던 남자 쪽을 흘끔 보았다. 남자는 사람들 시선 때문에 나서지도 못하고 이만 부득부득 갈고 있었고, 어느 샌가 그 남자들 뒤로 여자 하나와 남자 하나가 나타났다. 이래서야 오래 못 가겠군, 돈은 포기하고 어서 베이나트나 찾아가야 겠다- 아킨은 소녀를 붙잡은 손을 흔들었다. 소녀는 아킨의 손목이라도 물 어뜯으려 했지만, 아킨은 손목을 비틀었고 소녀의 이는 허공을 딱 쳤을 뿐이었다. 사람들이 큭큭 웃어대기 시작했고, 소녀는 얼굴이 더욱 시뻘개졌다. 소녀는 다시 몸을 뒤틀며 성질 오른 생쥐처럼 날 카롭게 외쳤다. "리크쥬!! 리크쥬우! 이 자식 한방 쳐 줘--! 당장!" 그 때 사람들 틈에서 방금 전의 그 소년이 뛰어 나왔다. 아킨은 소년의 얼굴을 보고, 그가 이 소녀의 오빠라는 것을 당장에 알아볼 수 있었다. 붉은 머리에 주근깨 가득한 얼굴이 정말 닮아 있 었다. 소년은 가죽 주머니를 앞으로 불쑥 내밀더니 외쳤다. "돈은 여기 있으니 동생이나 놔줘요!" "열어라." "뭐?" "그게 빈 지갑이면 내가 곤란하니까." 소년이 부들부들 떨더니 지갑입구를 열려 했다. 아킨은 그의 눈길이 아킨의 뒤편에 머물다가 슬쩍 거두어지는 것을 발견했다. 아킨이 팔 을 당기며 뒤로 돌아서려는 순간, 여동생을 위해 나섰던 소년의 팔 목에 날카로운 돌멩이 하나가 퍽 내리꽂혔다. "왓-!" 소년이 돈주머니를 놓치자마자, 재빠른 발이 그 주머니를 걷어차더 니, 튀어나오는 팔이 공중에서 그것을 낚아챘다. 소년이 주머니를 빼앗으려 하자, 뭐가 번득이더니 소년의 코앞에 단검 끝이 나타났 다. "사소한데 목숨 걸지 말자, 우리." 소년은 코앞에 나타난, 동갑 정도 되 보이는 소녀를 노려보았다. 그 검은머리의 예쁘장한 소녀는 단검을 헐렁하게 쥔 채 주머니를 흔들어 보고는, 안에 돈이 가득한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단검을 거 두었다. 그리고 거꾸로 쥐더니, 그의 코를 칼자루로 눈물이 쑥 빠질 정도로 호되게 후려쳤다. 소녀는 소년으로부터 되찾은 주머니를 흔 들며 아킨에게 말했다. "이제 그 쪽도 놔주세요." 아킨은 당장에 손을 놓아 버렸다. 벗어나려고 바동대던 소매치기 소 녀는 아킨이 손을 놓자마자 그대로 바닥에 턱을 찧어버렸다. 쿠엑! 그래도 오기가 치밀어 앞에 서 있는 소녀를 향해 손가락을 쳐들고 는 외쳤다. "저 계집애가 더 못 생겼잖아!!!" 소녀가 다리를 붙들고 늘어지고 치한, 어쩌고 욕할 때도 가만히 있 던 아킨은 갑자기 발끈한 얼굴이 되더니 소녀의 머리에 주먹을 꽂 아 넣었다. 소녀는 캑, 하고 눈물 찔끔 흘리며 주저앉아 버렸다. 아 킨은 그런 소매치기 소녀를 한번 노려보고는, 이번에는 앞에 있는 그녀를 향해 말했다. ".......유제니아....너, 여긴 어떻게!" 그런데 유제니아가 갑자기 후닥닥 달려오더니, 아킨의 손목을 꽉 붙 들었다. "유, 유제니아?" 유제니아는 그 손목을 휙 당겼다. "어서 따라와, 바보 공주님! 아주 미행자를 줄줄 달고 다녀!" 그것을 들은 주변 사람들 몇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공주래.." "정 말?" 아킨은 지금만큼은 그런 것을 다 들을 수 있다는 데 마음놓고 미쳐 버리고 싶었다. *********************************************************** 작가잡설: 다시 만난 용사와 공주님..-_-;;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29장 ************************************************************** [겨울성의 열쇠] 제136편 기억과 소망#5 *************************************************************** 아킨은 유제니아가 잡아당기는 대로 여기 저기 끌려 다녔고, '지금 어디 가는 거야?' 라고 물어볼 틈도 없었다. 그리고 이리 저리 달리 다 숨어들었다 빠져 나오는 것을 한참을 거듭하다가, 드디어 막다른 벽에 다다르자 유제니아는 멈추어 섰다. 아킨은 숨을 헐떡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앞에는 가로막듯 높은 돌 벽이 있었고, 그 오른 편에는 사슴 머리 모양의 조각상이 불쑥 튀어 나와 있다. 그리고 그 입에서 차갑고 투명한 물이 쏟아지고 있고, 그 앞에는 돌벽돌을 둥글게 쌓아 만든 깊고 맑은 우물이 있었다. 덩 치 큰 여자가 커다란 병으로 물을 뜨고 있다가 그 둘을 이상하다는 듯 흘끔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목 좀 축이고 가자." 유제니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물을 떠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실컷 마셨다 싶자, 물을 떠 땀에 흠뻑 젖은 얼굴을 적셨다. 아킨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유제니아가 고개를 들자 자기도 모르게 품안을 뒤졌 다. "뭐 하는 거야?" ".....아니." 아킨은 얼른 손을 빼고는 고개를 저었다. 차마 '손수건 찾느라-' 라 고 답할 수 없었다. 이제 그에게 손수건 따로 챙겨주는 하인 따위는 없고, 아킨 혼자서 그런 세세한 것을 다 챙길 여력도 없다. 그런데 물 뿌린 화초처럼 축축한 유제니아를 보자, 거의 반사적으로 찾게 되 버린 것이다. 왠지 창피한 짓을 한 것 같아, 아킨은 얼굴이 화끈 해졌다. 유제니아는 턱에 방울진 물방울을 손바닥으로 문질러 닦아내고는 말했다. "좀 쉬자. 그 이상한 사람들도 여기가지는 못 쫓아 올 테니." "알고 있었어?" "물론- 아키를 너무나 열렬히 바라보기래, 행여나 도둑맞을까봐 냉 큼 들고튀었지." "....." 유제니아는 우물가에 앉아 묶어 올린 머리를 풀었다. 새카만 머리가 허리까지 쏟아졌고, 유제니아는 주머니에서 빗을 꺼내 머리카락을 빗기 시작했다. 해가 기울어 금색으로 익어 가는 햇살이 머리카락 위로 쏟아지고, 그것이 아킨에게 누군가를 생각나게 했다. 그러나 유제니아 앞에서 '그녀'를 생각하는 것이 괜히 미안해져서 죄라도 지은 듯 고개를 돌리고는 말했다. "놀랐다......이렇게 갑자기 만나게 되서." "난 안 놀랐지. 아키 쫓아서 여기까지 온 거거든." "무슨 소리야?" 유제니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 오빠랑 아저씨 찾아서 소반도로 가기로 했어." "별 일 아니라고 내가 말 해줬잖아. 차라리 기다리는 편이 낫다고." "중간에 그럴 만한 사정이 생겼거든. 또, 믿을만한 일행도 생겼으 니.....상황이 꽤 괜찮다고 생각해서 떠난 거야." "일행?" "아주 잘생기고 친절하고 근사한 데다가, 나를 지켜줄 수 있을 정도 로 강한 남자." 아킨은 은근히 불안해졌다. "몇 살....정도 되는 남잔데?" "스물 다섯인가 여섯 정도. 구태여 물어 본 적 없다." 아킨은 정말 벌떡 일어날 뻔했다. "그럼 전혀 모르는 남자와 단 둘이서 여기까지 왔다는 거야?" 유제니아가 빙긋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킨이 보기에는 그 웃음이 너무나 순진해 보여, 유제니아가 그래도 제법 요령 좋은 아이란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아킨은 아버지가 어머니와 만나기 전에 얼마나 난잡했는지 알고 있고, 같은 방을 썼 던 루첼이 여자와 어떻게 지내는 지는 주말마다 확인하고 있었으니, 그 나이 때 남자가 어린 소녀 옆에 있다는 상황 자체를 안심하고 용납하기 어려웠다. 아는지 모르는 지 유제니아는 순진하게 말했다. "아주 믿을 만한 사람이야. 로메르드 까지 안심하고 같이 갈 수 있 을 정도로 말이야." "무슨 근거로 그러는 건데?" "어라, 왜 그래? 혹시 아키도 세상 모든 남자는 나 빼고 모두 나쁜 놈이다, 라고 생각하는 거야? 하긴, 세냐나 아저씨나 아버지도 귀가 닳도록 그렇게 말했지. 우리 빼고 친절하게 해 주는 모든 놈들을 경 계하거라, 하고." "유제니아, 미안하지만 그 말이 맞아." "에헤, 그렇게 말하는 아키는? 어차피 남 아닌가?" "......."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아킨은 유제니아의 오빠가 아니었고, 그리 잘 안다고 말하기도 곤란한 상대였다. 그런데 이렇게 고지식하게 '남자 조심해.'라고 말한다니....상황이 아 주 우스꽝스러웠고, 갑자기 처참하도록 민망하고 죽도록 창피해지기 시작했다. 켈브리안의 경우, 그녀는 아킨보다 두 살이나 많았고, 또 원체 사람 이 쾌활하고 분방해서 그녀가 하자는 대로 따라만 해도 괜찮았다. 그녀 신상에 대해 대놓고 걱정해 본 적은 별반 없고, 사실 무슨 일 이 생겨도 알아서 잘 하려니- 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녀는 당 차고 장난스럽기는 해도, 알고 보면 굉장히 순진하고 순수한 사람이 었다. 그녀가 조금만 더 냉정하고 야심에 찼더라면 왕위를 동생인 베르티노에게 빼앗기기는커녕, 어머니나 그 숙부가 정권 다툼하게 놓아두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름답고, 아름다운 만큼 사랑 받고, 사 랑 받는 만큼 사람들을 사랑하는 그녀였다. 그런데 오히려 그녀에게 '조심하세요.' 하고 나서는 게 더 어울릴 텐데, 그녀보다 더 요령 좋 은 유제니아에게 입술 비죽이며 잔소리하지 마, 라는 말을 들어도 할말없는 한심한 소리나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별 도움도 안되고, 그렇다고 현명한 말도 아니고, 하품 나올 정도로 뻔한 말일뿐인데.... 이상하게, 그 한심한 말들이 유제니아 앞에서는 나오고 만다. 말 할 때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정신 차려보면 끔찍하게 민 망하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는 몸조심하라고 했고, 그 다음에 봤을 때는 위 험한데 왜 그러고 다니냐고 하고......그것만도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 인데, 지금은 '모르는 남자와 함부로 같이 다니지 말라.'라고 무시무 시한 말을 꺼낸 것이다. 아킨이 원래 고리타분한 성격이라면 모를까, 켈브리안 공주에게는 뭘 하든 마음대로 하세요, 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그녀를 지키려 하 기는커녕 심지어 이용까지 했었는데, 그녀보다 더 남남인 유제니아 에게는 알아서 잘 할 수 있는 일에서마저도 나선 것이다. 아킨은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지금....오빠 행세하려고 했구나." 유제니아가 어려서 그런가.....하긴, 말이 두 살 차이지 켈브리안의 열 아홉과 아킨의 열 일곱이 차이 나듯, 아킨의 열 여덟과 유제니아 의 열 여섯은 애와 어른같이 느껴질 정도로 멀어 보였다. 게다가 유 제니아는 눈도 크고 몸도 가늘어서, 원래 나이보다 어려 보이기까지 하다. 유제니아는 아킨의 말에 놀란 듯 여전히 물끄러미 아킨을 보고 있 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아킨은 자기도 모르게 말하고 말았다. "어쨌든 만나서 반갑다." 유제니아는 활짝 웃었다. 아킨은 갑자기 굉장히 어색하고 쑥스러워 져서 시선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며 물었다. "저, 그런데 네 일행....이라는 사람 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엘프." "엘프?" "그리고 아키의 이복형이라 주장하던 걸?" "........." "아키는 잘 있습니까?" 그렇게 자켄이 묻자, 베이나트는 눈썹을 휙 올리고는 그런 자켄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런 얼굴과 마주해도, 자켄은 그저 웃기만 했다. "너....어떻게 알았니?" "유제니아와 함께 오면서 듣게 되었습니다. 아키가 베이나트라는 마 법사와 함께 로메르드 쪽으로 갔다고요.....하지만 그 마법사가 당신 일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 말에, 결국 베이나트는 얼굴을 구겨버리고 말았다. 그러니, 이제 는 베이나트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다는 말을 듣는 순간에 아킨과 동행하고 있다는 것까지 모두 알게 되어 버렸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하려면 아예 처음부터 하던가, 이렇게 난데없이 불쑥 물 어 보니 당혹스럽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태평하게 굴었던 거냐?" "당신이 이야기 해주려 하지 않으셔서 기다렸던 것뿐입니다." "역시나 어둠 숲 녀석들은 음흉한 데가 있다니까.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솔직하게 다 말하지도 않지...원, 참. 나르실로 녀석들은 바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솔직한데 말이야." "숲의 성격에 따라 저희들의 성격도 다 다릅니다, 베이나트. 그리 고....당신이라면 그 아이에게 잘 해주셨을 거라 믿었으니 묻지 않았 던 것이기도 합니다." "자크, 세상 모든 애들이 너 어렸을 때처럼 고분고분한 건 아니라 고. 특히, 그 나이 또래 '인간' 애들은 고집이 무시무시하게 세단다." "아키는 착한 아이입니다." "착한 거랑 나사 하나 빠진 건 틀리다고 본다. 아키는 물론 후자인 데다가, 낯도 엄청나게 가리는 까다로운 녀석이었어." "당신은 착한 아이에게도 잘 해주시지만 나사 빠진 아이에게는 더 잘 해주시죠. 저도 사실 그 후자였지 않습니까." "녀석, 띄워주기는- 어쨌건, 네가 알아채 주었으니 말이 쉬워졌다. 아키가 롤레인-아, 알고 있겠지? 여튼, 그 애를 찾아갈 예정이니 에 크롯사를 넘어가거든 그 때부터는 네가 같이 가 주거라." "당신은요?" "난.....너희들을 보낸 다음, 곧장 탈로스와 만나러 갈 생각이다." 자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만나도 괜찮으십니까?" "몇 년 간 누워서 생각해 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도망치는 게 능 사는 아니더구나. 그리고.....그 아이와의 일을 해결한 다음 북쪽으로 갈 생각이다. 가는 길에 어둠 숲에 들를 생각은 있다만, 그곳에서 너를 만날 수 있을 지는 모르겠다." "오래 떠나 계실 생각이군요." 베이나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아마도 꽤나 오래 지낼 것 같아....네가 네 손자에게 옛날 옛 적에 이상한 거 먹고 죽지 못하게 된 마법사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할 때 즈음에 돌아올 정도로....그리고 그 때가 되면 내가 남긴 컬린 이라는 녀석의 흔적도 거의 지워져 있겠지." "칼립-" "미리 이야기하는 것뿐이다. 언제 또 이렇게 조용한 시간을 가지고 이야기하겠니....걱정 마라. 내가 너희들을 떠나는 것은 한참이나 뒤 의 일이 될 거다." "지난번에도 그리 안심시켜 주시고는 갑자기 사라져 버리셨죠." 베이나트는 가볍게 웃었다. "탈로스와의 일은 슬픈 일이긴 했지만, 무시무시한 일은 아니었다. 그 정도로도 충분한 작별 인사였다고 본단다." "당신은 누군가와 만나는 즉시 이별을 준비하시는군요.....그래요, 당 신의 잔은 '슬픔'이었으니까......" "자크-" 그렇게 책망하듯 자켄을 부른 베이나트의 눈은 젖어 들어가는 듯 했다. 저녁 노을에 물든 그의 눈가에 작은 주름이 잡혀가고......그러 다 그가 눈을 감았다. 더 이상의 말은 할 수 없었다. 자켄은 베이나 트의 가슴 깊은 곳에 꼭꼭 가두어 놓은 가장 차갑고 어두운 것을 툭 건드린 것이고, 그 속살이 찍힌 듯한 아픔에 베이나트는 할 말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죄송합니다. 언짢은 말을 해서..." "아니, 아니란다. 사실인 걸.....그리고 그렇게 사는 걸 택한 건 분명 나고,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져야겠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자켄이 무엇을 들었는지 귀를 세우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를 따라 눈길을 든 베이나트는, 석양빛 부 서지는 그의 두 눈에 기쁨이 차 오르는 것을, 아침 햇살처럼 순수하 고 밝은 기쁨의 빛으로 가득 차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계곡의 시냇 물처럼 차갑고도 깨끗한, 그저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싶어지기 만 하는 것이었고, 베이나트의 그늘을 씻어 내리고, 환하게 비추고, 잠시나마 모든 것을 잊게 해 주는 귀중한 조각이었다. 베이나트는 그가 보는 곳을 돌아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네 동생.....이 왔구나." 자켄이 말했다. "정말.....정말 너무나 감사합니다.....베이나트." 베이나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냥, 숲에서 길을 잃은 미아 데리고 온 것뿐이란다." "아니--정말, 어떻게......감사 드려야 할 지 모르겠.....정말 모르겠습 니다...." 그리고 자켄이 다시 웃었다. 그래, 아주 오래 전, 그의 손에 베이나트- 그 때는 '컬린'이던 그가 은으로 된 여섯 개의 봉인을 쥐어줄 때도 그 초록색 눈은 저리도 깨끗한 기쁨으로 빛났다. 그래서 그 소년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 소년의 동생에게 그런 일을 해 준 것을....그 아비가 어떤 놈이건 간에 그렇게 해 준 것을 기뻐 했고, 나루에가 왜 그 소년을 파렴치한 아버지에게 보냈는지 깨달았 다. 그 아버지에게 모든 미움을 쏟아버린 그녀는, 자켄에게만은 오 로지 사랑만을 베풀었다. 적어도, 엘프들의 왕인 그녀는 인간에게까 지 베풀어 줄 자비는 없어도 동족에게만은 최고의 사랑을 쏟아 부 어 주고, 그들을 위한 길을 배려해 주는 것이다..... 그렇게 베푼 사랑이 아직도 건재하기에, 지금의 베이나트는 밤새 긴 폭풍우에 지쳐 있다 동쪽에서 발그레하게 물들어 오르는 아침 노을 을 보았을 때처럼 편안해졌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잘될 것 같고, 어 쩌면 이것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저 멀리서 아킨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크-!" *********************************************************** 작가잡설: 베이나트는 컬린이지만, 컬린이 페나크 인 것은 아닙니다. 페나크는 베이가 컬린으로 살던 시대보다 훨씬 전시대 사람이며, 당 시의 베이는 여우같은 마눌과 토끼같은 아가들과 살림 차리고 전혀 다른 이름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당시 페나크와의 관계는 선후배 사이였고요..... (그리고 베이나트의 모든 이름들은 B.K로 시작되는 이름들입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29장 ************************************************************** [겨울성의 열쇠] 제137편 기억과 소망#6 ************************************************************** 어스름이 깔리고, 굵직한 구름들이 동쪽으로부터 몰려오며 하늘은 금방 새카맣게 어두워지고 있었다. 구름 틈새는 피가 스며 나오듯 빠알간 노을 빛으로 물들어 있었지만, 구름은 시체 얼굴처럼 푸릇하 고 거뭇했다. 바람이 조금 거칠게 불어닥쳐 왔고, 멀리 보이는 강물 들도 술렁였다. 예민한 자켄은 벌써 폭풍우가 닥칠 거라 느꼈고, 그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보통 사람보다는 몇 배로 민감한 아킨도 마찬가지였다. 그리 고 벌써 그것을 느낀 베이나트는 성안으로 다시 들어가자고 말했다. 여관 잡고 방 잡고 하는 모든 것을 스스로 리더라 자청하는 베이나 트가 알아서 했고, 모든 것이 끝났을 때에야 어떻게 했는 지 통보를 받은 아킨은 당황했다. "모두 같은 방에서 자는 겁니까!" 그러나 베이나트는 태평하게 답했을 뿐이다. "4인실이니 좁지는 않을 거란다." ....어째서 이 베이나트는 다른 사람들이 가장 먼저 신경쓰는 것을 당연하게 무시하는 건가. "그게 아니라, 유제니아는 여자아이입니다!" "여자니까 더더욱 그래야 하는 거 아니니." 아킨의 눈꼬리가 당장에 올라갔다. "왜 그래야 하는지, 차근차근 대 보시죠." "첫째, 자크는 엘프니까 남자든 여자든 괜찮다. 둘째, 나야말로 정말 믿어 되는 남자니까 괜찮아. 결국 문제는 너 하나인데.....(아킨이 노 려보았다.) 설마 아무 짓도 안 하는 남자 둘이 눈 벌겋게 뜨고 있는 데 무턱대고 덤비기야 할 라고. 뿐만 아니라, 하나는 점잖은 아이들 의 보호자이며, 다른 하나는 네 착한 형. 이 앞에서 무슨 짓을 하겠 니. 자, 이제 설명 됐지?" "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아니, 그럼 너는 유즈가 우리를 덮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 냐....? 아키야, 그건 영광이지 겁낼 일은 아니라고 보는데." 주먹이 다시 근질근질해져 오는 아킨의 어깨를 짚으며(그리고 웃음 도 참으며) 자켄이 말했다. "아키, 베이나트 말이 맞다." "자크....!" "그러니까 내 말은, 유제니아 혼자 재우는 것 보다 우리들 틈에서 재우는 게 오히려 안전하다는 말이다. 여기는 성이 아니라, 온갖 사 람들이 다 모이는 여관이야. 성에서는 예의를 따져도 되지만, 이런 곳에서는...그냥 좀 참고 같이 있는 편이 좋아." "....." 자켄의 말에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자켄은 엘프라, 유제니아와 단 둘이서 여행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을 테지만 아킨은 아니었다. 여자애가 바로 옆 침대에서 자고 있다는 것이, 아킨에게는 아무렇지 도 않은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불편해서 미칠 노릇이었다(그런 문제에 있어서 아킨은 완전히 보수주의자였 다). 그 때 목욕을 마치고 볼이 발그레해진 유제니아가 문을 열고 들어 왔다. 아킨은 제발 유제니아라도 싫다고 해 주기를 바랬지만, 유제 니아는 오히려 방긋 웃으며 말했다. "저는 2층으로 할게요. 자크나 베이가 2층에서 잔다면 불안할 것 같 거든요. 그리고 아키, 아키도 2층에서 자. 베이 아저씨 밑에서 자는 건 찜찜할 거 아냐." 얼어붙은 아킨에게 베이나트가 슬쩍 속삭였다. "거 봐, 너 혼자 신경 쓰는 거라니까." "....." 아킨이 무섭게 노려보자, 베이나트는 얼른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리 고 저 멀리서 자켄이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날 밤, 엄청난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아킨은 여관 1층의 벽난로 앞에 주저앉아 있어야 했다. 나올 때만 해도 절대로 들어가서 자지 않겠다, 하고 다짐하고 나왔건만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어떻게 해야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갈 수 있을까, 를 고민하게 되었다. "아, 베이나트가 잠이 안 온다고 해서..." 자켄은 아주 미안하다는 듯 말했고, 베이나트는 아킨의 바로 뒤에 있는 의자에 앉아 책을 펼치고 있었다. 그리고 번쩍, 하고 창 틈으로 번개가 하얗게 터지더니 곧 이어 빗줄 기 소리가 쏟아 붓듯 거세어지며 쿠르르릉, 하고 천둥소리가 들려왔 다. 창문이 덜덜거리고, 벽난로에서 타던 불길은 그에 놀란 듯 타닥 치솟았다. 덧문까지 꼭꼭 닫힌 창문은 바람에 덜그럭댔고, 그 틈으 로 비가 스며들어 벽 아래에는 물이 흥건했다. 그리고 그 세찬 빗소 리에 섞여,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키이이....베이......자크으으으으으..." 그 목소리에 아킨은 놀라 쓰러질 뻔했다. 자켄이 피식 웃었고, 베이 나트도 책에서 시선을 뗐다가 이내 웃으며 고개를 내렸다. 방에 혼자 자던 유제니아가, 잠에 젖어 비슬거리는 유령처럼 슬슬 기어 나온 것이다. 유제니아는 셋 다 여관 1층의 식당에 나와 앉아 있는 것을 둘러보더니, 푸르르르르- 하고 심통을 부렸다. "후아아아아음.......텅텅 비었기래 다들 나 버리고 도망갔나, 했잖 아.....흐아음..." 유제니아는 그리 말하고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확인했으면 그냥 들어가서 자거라, 시커먼 남자들만 울적하게 앉아 있는 곳에 뭐 하러 앉아 있는 거니." 배이나트의 말에 유제니아는 고개를 도리도리 젖고는 벽난로를 가 리켰다. "여기가 더 따뜻해요." "그럼 포도주나 한잔할까, 유즈?" 유제니아는 고개를 저었다. "식당 아저씨 귀찮잖아요. 뭐, 여기서 몸 좀 녹이고......조금 있다가 올라가서 자야지." 그리고 아킨 옆으로 슬슬 기어갔다. 제발 베이나트나 자켄 옆으로 가 다오, 하고 속으로 빌던 아킨은 고개를 푹 떨구고는 유제니아가 그리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유제니아가 목소리를 낮추어 살짝 말했다. "아키, 물어볼 거 있는데." "물어봐." "천둥번개 치니까, 엉뚱한 생각만 자꾸 나는 거야. 잠이 들려고 온 갖 정성을 쏟아 붇기는 했는데... 계속 복잡한 생각만 나는 거 있잖 아....이런 기분 알지, 아키?" "알아." 알긴 뭘 아나. 들리지도 않는데. "로메르드에.....그러니까, 아키도 잘 알 거 아냐. 왕자님이니, 거기 높은 사람들이나 유명한 사람들이나 잘 알지?" "미안하지만 거의 몰라. 나는 그곳에서 공부 중인 학생었고, 또...... 사정이 좀 복잡해서 그런 쪽으로는 인연이 없었어." "그럼, 아저씨나 오빠가 어떻게 지냈는지 전혀 몰라?" "아주 조금...은 알지." 유제니아는 반가운지 얼굴을 붉혔다. "슈마허 아저씨는 기대도 안 해. 거기서 예쁘고 몸매 근사하다 싶은 여자가 있다 싶으면 모조리 한번씩 치근덕거렸을 테니까. 내 말 맞 지, 응?" 아킨은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켈브리안 공주에게 얼마 나 치근덕거렸는지, 아킨이 알고 있을 지경이니. 오죽 귀찮았으면 아킨까지 불렀겠는가....그리고 그 덕에 엉뚱하게 로메르드의 복잡한 일에 끼어 들게 되었다. "세냐는 안 봐도 알아. 밤낮 무표정하게 있다가, 좋아하는 여자가 있어도 말 한마디 못하다가 그 여자가 떠나고 난 다음에야 후회하 고 한숨 쉴 거야." ".......세르네긴이?" "응, 그런데 왜 그렇게 놀라?" "아니. 그 사람이 그런 식으로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상상도 안 되서." "세냐도 첫사랑도 있고, 마음 졸이며 좋아했던 사람도 있다고. 모조 리 내가 아니었다는 게 문제였지만......혹시, 거기에 예쁜 금발 머리 여자 있어? 아마, 결혼식 끝날 때까지 한마디도 못하고 있다가 일이 다 끝나면 구석에서 한숨 푹푹 내쉬면서 하루 종일 하늘만 바라볼 거야." 유제니아는 아킨이 도깨비라도 만난 듯 바라보자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가며 말했다. "비밀이니까, 나중에 세냐에게도 말하지 마. 나만 혼난다구." 아킨은 한 대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거의 '무생물' 비슷할 정도로 조용한 세르네긴에게 그런 면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난 그 사람이......" 아킨이 무엇을 말하려는 지 유제니아는 금방 알아차리고는 히죽 웃 었다. "세냐도 남잔 걸, 뭐. 아버지랑 슈마허 아저씨가 워낙에 철없이 굴 어서, 자기는 외려 애 늙은이가 되 버린 거야. 하지만 알고 보면 덜 렁이에, 숙맥에, 고지식하기는 엄청 고지식한 데다가, 끔찍한 고집불 통이라고." 아킨은 세르네긴이 유제니아에 대해 말했던 것을 떠올릴 수밖에 없 었다. 몸 약해서 걱정 많이 시키고, 아주 사랑스럽고 귀엽고...뭐, 기 타 등등이었던 것 같다. 사실 세르네긴에게 그런 면이 있는 줄 몰랐 다는 말의 뒤에 숨은 것은, 그런 평범한 구석이 있는 줄 몰랐다-가 아니라 그가 이 유제니아 말고 다른 여자를 좋아할 수도 있다는 사 실, 그 자체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킨은 괜히 웃음이 나왔다. 왜 이렇게 이상하게 기분이 들뜨는 건지, 조금 당혹스러웠다. 재잘재잘 말하던 유제니아는 아킨이 무슨 말을 할 지 기다리다가 결국 졸린 병아리처럼 꾸벅 꾸벅 대기 시작했다. 아킨이 말했다. "들어가서 잘래?" "여기가 더 따뜻하다고 했잖아. 거기 추워......그리고 혼자 있는 건 끔찍하단 말이야. 특히 이런 우르릉 쿵쿵 요란한 밤에는." "하지만..." "내버려둬라, 아키야." 뒤에서 베이나트가 넌지시 말했다. 그러자 유제니아가 베이나트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기, 베이 아저씨. 자장가 불러줘요." "네가 애냐? 웬 자장가?" "여기서 내가 제일 어리다는 건 확실하잖아요." "불러주는 거야 어렵지 않다만, 나는 좀 심한 음치야." 베이나트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음치인지 아는 아킨은, 곧 닥쳐올 재 난이 끔찍해지기 시작했다. 제발 유제니아가 거절해 주기를 바랬지 만, 유제니아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나도 슈마허의 그 끔찍한 노랫소리를 듣고도 그게 노랜 지 뭔지도 모르는 역시나 끔찍한 음감의 소유자니까." "그렇다면 골라." "'세 잔의 마법사들.'" 칼날을 살펴 보던 자켄이 문득 고개를 들어 베이나트를 바라보았다. 베이나트는 강아지처럼 자리를 잡고 눕는 유제니아에게 마음씨 좋 은 아저씨처럼 웃어 보였다. "뉴마르냐의 노래구나." 그제야 아킨도 유제니아가 왜 여기에 나왔는 지 알아챘다. 비오고 천둥치는 이 밤이, 유제니아도 겁먹게 한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의 옆에라도 꼭 붙어서 오랫동안 살아왔던 고향 같은 그리움을 간직한 곳을 생각하고 싶은 것이겠지- 유제니아가 말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뉴마르냐가 아니라 알르간드의 노래에요. 음, 그 러니까.....어떻게 시작하더라..." "첫잔을 마신 마법사, 라고 시작하지." 자켄이었다. 유제니아가 놀라서 말했다 "어라, 자크도 알아요? 난 우리 나라 북쪽 사람만 아는 줄 알았는 데...." 자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래를 이었다. 슬픔은 강물처럼 흐르고, 고독은 빙원처럼 얼어붙고, 비탄은 불길처 럼 타올라. 황금은 녹슬고, 강철은 피되어 녹아도, 그리하여 천년 만년- 하늘이 죽어 해와 달이 눈을 감아도. 해지지 않는 설원과, 세계를 휘감는 지친 강물과, 꺼지지 않는 핏빛 불길 속에서 영원을 살 이들이여- 첫 잔을 마신 마법사여, 고요한 밤의 눈동자, 떡갈나무의 아들이여- 강줄기에 자갈들 녹아들고, 쉴 줄 모르는 하얀 물은 바다 품으로 흘 러가건만- 차가운 강물에 발 적시고 있을 바위. 짜디짠 슬픔은 강물처럼 흘러 그대를 떠나지.... 두 잔을 마신 마법사여, 하얀 볼과 어깨, 얼음과 눈의 딸이여- 모든 창공을 나는 새는 멈추고, 모든 바다를 헤치는 물고기도 돌아 가니- 영원의 만년설, 세상 끝의 외로운 얼음 탑. 한숨 섞인 고독은 서리 인양 얼어붙어 그대에게 닿지 못하겠지... 세 잔을 마신 마법사여, 불길 같은 머리카락, 불꽃과 피의 아들이여- 대지의 뼈는 심장의 불길에 녹아버리고, 하얀 살은 마른 낙엽처럼 사그라지니- 영원의 불길, 지옥보다 깊은 땅이 품은 비탄의 불꽃. 그대의 증오 섞인 비탄은 핏빛 지옥불보다 뜨거우니, 그대가 불사르 며 그대를 불사른다. 그리하여 우주가 피를 짜낸 세 잔을 마신 마법사들이여- 첫 번째 잔에는 슬픔, 두 번째 잔에는 고독, 세 번째 잔에는 비 탄....... 슬픔은 강물처럼 흐르고, 고독은 빙원처럼 얼어붙고, 비탄은 불길처 럼 타올라 황금은 녹슬고, 강철은 피되어 녹아도, 그리하여 천년 만년- 하늘이 죽어 해와 달이 눈을 감아도. 그대들, 해지지 않는 설원과, 세계를 휘감는 지친 강물과, 꺼지지 않 는 핏빛 불길 속에서 영원을 살겠지- 눈물과 고독의 영원을- 베이나트가 부르는 것에 비할 바 없는 목소리였다. 엘프인 자켄의 목소리는 아름답고, 그 노래는 그 자체가 부드러운 파도소리 바람소 리처럼 주변과 어우러진다.... 아킨은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노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자 켄이 왜 지금 저 노래를 부르는 지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그것도 즐 거운 노래도 아니다. 차가운 슬픔이 서린 단조에, 엘프의 미성이 어 우러지며 더욱 애잔한 슬픔이 몸을 적셔온다.... 무슨 노래냐고 불어 보려던 아킨은 허리 쪽에서 작고 고른 숨소리 가 스며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유제니아가 어느 틈 엔가 둥지 안의 작은 새처럼 곤히 잠들어 있었다. 자켄이 말했다. "이제 데려다 주렴. 그 아이는 한번 잠들면 잘 안 깨니...괜찮을 거 야." "알아, 자크." 아킨은 유제니아를 안아 들고는 침실로 향했다. 빗소리는 어느덧 잦 아들고 있었다. 차갑고 습한 바람이 어디서 들어오는 지 뒷덜미를 싸늘하게 한다. 그리고 침실의 문을 연 아킨은 웃음이 나오고 말았 다. 방안은 여관의 홀보다 몇 배는 따뜻했다. 방이 워낙에 커서 화 롯불은 두 개나 놓여 있었으며, 덧문은 꼭꼭 닫혀 외풍도 별반 없었 다. 맙소사, 이런 곳이 춥다니....온기가 아까울 지경인데. 아킨은 2층까지 데리고 갈 수는 없을 듯 해서, 그냥 1층 침대에 유 제니아를 눕혔다. 자켄의 말대로, 좀 거칠게 눕히는 데도 유제니아 는 축 늘어져 깨어나지 않았다. 아킨은 이불을 끌어 올려 유제니아 를 덮어주고는, 그 이마에 입 맞추어 주었다. "잘 자-유즈." 그렇게 속삭이고 입술을 떼었을 때, 아킨의 눈을 적시며 들어오는 것은 고요히 잠든 작고 어린 소녀의 얼굴이었다. 밖에는 천둥이 치 고 벼락이 번쩍이며 비바람이 불고 있건만, 이 따스한 방의 두툼한 이불 속에 누워 있는 소녀의 얼굴은 고요와 평화에 젖어 있었다. 아킨은 무엇에 끌리듯 그 자그만 볼을 손끝으로 쓸어 올렸다. 작은 숨소리가 팔목에 와 닿았고, 얼굴에 무엇이 닿자 소녀는 잠깐 뒤척 인다. 이상하게도, 아킨은 지금 이 순간이 아주 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이 길었으면, 폭풍우가 길었으면, 그리고 롬파르로의 여정 이 조금이라도 지체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랫동안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건 아니다. 그냥, 아주 조금만....이 렇게 푹신하고 따뜻한 침대에 앉아서 자켄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잠 들어가는 유제니아의 이야기를 듣고, 베이나트가 가끔 터뜨리는 실없는 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조금만 쉬고 싶어지는 것뿐이었다. 그것은 좁은 곳에 몸 웅크리고 있던 그 때, 탈로스의 탑에서의 그것 과는 틀린 것이었다. 고요하고 따뜻한 것, 너무나 귀중하고......그렇기에 사랑하고 간직하 고 싶어지는, 추억이 아닌 현재로 언제까지나 머물기를 바라는...그 런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 작가잡설: 배, 배알이....!!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30장 ************************************************************** [겨울성의 열쇠] 제30장 첫 번째 잔 제138편 첫 번째 잔#1 *************************************************************** "저, 저기......자, 자네는 괜찮나, 그란셔스 군?" 토드의 말에 루첼은 빙긋 웃으며 답했다. "실연 당한 마도론이 통곡하는 듯한 폭풍도 겪어 봤는걸요. 그에 비 하면 이건 소나기 정도죠." 그렇게 유쾌하게 말하고는 하하 웃던 루첼은 토드의 안색이 해쓱한 것을 발견했고 그제야 이 사람이 '저도 무섭습니다!' 하고 답하며 고 통을 나눌 사람을 찾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루첼은 슬쩍 창 밖 을 보았다. 멀리 보이는 검푸른 바다는 비바람에 들끓어 오르고 있 었고, 구름 뒤의 별빛 마냥 희미하게 빛나는 울피온의 눈동자는 파 도에 금방이라도 집어삼켜질 듯 가녀려 보이기만 했다. 다시 쿠르르르릉--! 온 방이 덜그럭거릴 정도로 엄청난 천둥이 울렸고, 토드의 얼굴이 핏기가 확 가시며 새하얘졌다. 루첼은 담담하게 그런 그를 위로했 다. "걱정 마십시오, 토드 씨. 마도론이 몸이라도 던지지 않는 한, 이 곳 은 안전하니까요." 그리고 루첼은 커피를 마시며, 그 천둥치고 파도치며 어마어마한 해 일이 항구를 집어삼킬 듯 무시무시하게 솟구치는 바깥을 절경이라 도 보듯 감탄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다시 번쩍--! 방에 하얀빛이 가득 찼고, 비에 흠뻑 젖어 컴컴했던 도시도 한번 하 얀 빛 속에 확 드러났다가는 눈을 감듯 캄캄해진다. 그러더니, 마도 론이 주먹이라도 내려꽂은 듯 어마어마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콰르르르르르르릉---! "차 더 드시겠어요?" 실비가 포트를 들며 말했다. 루첼은 반쯤 비운 잔을 내밀었고, 그 동안 요람 안의 피오는 자그만 과자들을 주물럭거리며 해실 거리고 있었고, 주리는 실비가 만들다 실패하고 루첼이 완성해 준 말랑한 오렌지 젤리를 뜯어먹고 있었다. 모두 그렇게 태평했지만, 토드만은 딸꾹질을 시작했다. "나, 나는...딸꾹! 도무지....딸꾹! 이런 폭풍에는 적응이...딸꾹, 안 되.....는 군. 딸꾹-" "너무 그러시지 마십시오. 교수님은 지금 서재에 혼자 계시는데..." 아마도 롤레인은 루첼 만큼이나 태평하게 창 밖을 바라보며, 방금 전 실비가 상납한 커피를 마시고 있을 것이다. '비가 좀 많이 오는 군...' 하면서 말이다. 토드는 내륙 출신인 자신만 오그라들어 있는 것을 알게되자, 완전히 좌절해 버렸다. 주리야 어머니로부터 그 듬직한 배짱을 물려받았으 니 괜찮다 쳐도, 평소에는 메뚜기가 타닥 튀어 올라도 실신할 정도 로 겁 많은 실비도 태연한데 토드 혼자만 잔뜩 해쓱해져 있는 것이 다. 그 때 가족이 모여 폭풍우를 감상하고 있던 응접실 문이 열렸다. "어이 루츠, 나 좀 보자." 루첼과 토드가 동시에 뒤를 돌아보니, 롤레인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종이를 말아 쥐어 손바닥을 툭툭 치고 있다가, 루첼이 아무 말 없이 있자 눈을 찌푸렸다. "루첼 그란셔스, 방 치우는 것 좀 도와달라는 말은 아니니 걱정 말 고 와." "차라리 그게 나을 지경입니다.....이번엔 또 무슨 일일까 두려울 지 경이군요." 원망이 가득한 그 말에, 뭔가 언짢은 일이 있었던 듯한 롤레인은 당 장에 눈썹을 밀어 올리며 짜증을 냈다. "또 그거냐. 어쨌든 통과되었으니 된 거 아냐?" "결과가 좋은 건 그저 우연일 뿐이잖습니까. 아니, 교수님께서는 저 를 죽일 뻔 했습니다." "미안하지만, 의식에서 죽어나가는 마법사는 전 길드의 역사를 통틀 어 단 하나도 없었어. 내 호주머니에 있는 울피온의 백색 열쇠에 걸 고 맹세해도 좋아." "교수님, 엉뚱한 문제를 부각시킴으로서 정작 중요한 것을 자꾸 미 루고 계시는 것 같은데 제가 문제 삼는 것은 그렇게 멋대로 정하신 것, 그 자체란 말입니다." 루첼과 롤레인의 이마에 힘줄이 하나씩 돋았다. "벌써 끝난 문제를 너무 지겹게 물고 늘어지고 있다 생각하지 않아, 루첼 그란셔스?" "끝난 문제가 아닙니다. 이번에는 운이 좋아 넘어갔다지만, 다음 번 에 또 그러시지 않을 거라 누가 보장합니까? 이번에 확실히 해 두 자고요. 저와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 작든 크든 간에 저와 상의해 주십시오. 이번처럼 '별일 아니다.' 라고 판단하고 혼자서 결정한 다 음 느닷없이 통보하지 마시고요. 저한테는 별일 아닐 가능성이 매우 크니까." "귀찮은 녀석일세. 어쨌든 여기서 떽떽 거리며 싸우지 말고 올라오 기나 해. 나는 지금 할 말이 있고, 그건 저 위에서 해여 하는 거니 까." "그거, 혹시 지난 번 같은 '통보' 아닙니까?" "통보하려고 했는데, 네가 그렇게 나오니 토론 비슷한 건 해보기로 했다." "네, 알겠습, 니, 다!" 루첼은 그리 쏘아붙이고는 먼저 응접실을 나섰다. 롤레인은 파, 하 고 한숨을 내 쉬고는 그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쿵--! 천둥 같은 문소리와 함께 집에서 주리가 떼쓰는 소리 다음으로 시 끄러운 사제지간이 나가자, 광포한 바람과 세찬 빗줄기와 언제 천둥 번개가 터질 지 모르는 불안한 하늘만이 토드와 실비 사이에 있었 다. 실비는 벌써 풀이 죽어 축 늘어져 있었다. 주리는 어머니와 그 제자 가 티격태격하는 것을 보고 하품을 하다가 잠이 들어 버렸고, 그런 주리는 토드가 피오의 요람 옆에 있는 부드러운 카펫 위에 눕혔다. 실비가 힘없이 말했다. "다...저 때문이에요. 그날 아침은 잘 해주려고 했는데....그렇게 중요 한 날 감기에 걸려 버리다니.." 그날 실비는 감기에 걸려 누워 버렸고, 루첼은 실비를 간호하느라 거의 밤을 새 버린 후에 아침 식탁에 얼굴을 박을 듯 졸다가 비틀 비틀 나가야 했다. 그날 내내 실비는 침대 위에서 골골대며 미안해 했고, 저녁 늦게 루첼은 롤레인의 팔에 거의 질질 끌려오다시피 해 서 돌아왔다. '권호? 아, 땄어.' 실비와 토드가 달려와 묻자 롤레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녀 의 팔에 매달려 있던 루첼은 거의 죽다 살아난 듯 시퍼렇게 질려 있 다가 그렇게 말하는 롤레인을 남은 힘을 다 그러모아 째려보았고, 그 것이 정말 마지막 발악이 되어, 침대 앞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풀썩 쓰러져 이틀을 꼬박 잤다. 그렇게 겨울잠 자는 곰처럼 쿨쿨 자다 깨어난 후, 그는 거의 하루 종일 롤레인에게 투덜 댔고 지금도 투덜대는 중인 것이다. 실비는 권호에 대해 잘 몰랐다. 그저 루첼이 쉽게 할 수 있는 일을 자기 때문에 어렵게 해서 그렇게 지쳐 버린 거라고 짐작했기에, 루 첼이 화가 나 있는 것을 모두 자기 책임이라 생각하고만 있었다. "난 정말....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어요. 맨 날 짐만 되고...방해 만 하고......" 실비 자신이 생각해도 루첼에게 도움되는 일은 하나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어려울 때 철없이 루첼에게 달려가서 그를 힘들게 했고, 결 국 쥬나드렌을 택하긴 했지만 그 결혼 때문에 실비는 쥰에게도 루 첼에게도 버거운 짐이 되어 버렸다. 브리올테 왕비와 그레코 공작의 내전으로 쥰은 죽었고, 가족은 떠나 고,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실비만 홀로 남겨졌다. 혼자서라도 열심 히 살겠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의사로부터 임신이란 이야기를 들었 을 때는 아무 옷자락이나 붙잡고만 싶었다. 혼자서도 힘든데, 둘이 서 살아야 한다는 것...그것도 아이 아버지도 가족도 없이 살아야 한 다는 것이 너무나 무서웠다. 루첼에게는 매달리지 않겠다고 생각했 는데, 결국 루첼 밖에는 없었다. 루첼은 어려운 그녀를 외면하지 않았다. 그렇게 무능한 그녀를 받아 들여 주었고, 그의 가족이자 보호자가 되어 주었다. 그에게 감사하 며 아내로서 그를 힘껏 도우려 했지만, 결과는 언제나 엉망진창이었 다. 곱게 자란 실비는 집안 일에 대해서는 루첼보다도 몰랐다. 요리 와 바느질 하나도 제대로 못했고, 집안 청소를 시작했다 하면 늘 하 나씩 깨먹기 일쑤여서 결국에는 낸시의 업무만 과중해지고 말았다. 그렇게 엉망이었지만 루첼은 단 한번도 화를 내지 않았다. 다음부터 는 내가 하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 엉망인 것을 향해서 고맙다고 말하고 미소지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배려와 다정함은 실비에게는 화를 내거나 역정내는 것 보다 몇 배로 무거운 짐이 되 어 돌아왔다. 결국 실비는 눈물이 치솟고 말았다. "실비? 우...는 거야?" "죄송해요.....하지만 제가 너무 바보 같은 걸요. 할 줄 아는 건 하나 도 없고.......그렇다고 똑똑한 것 도 아니에요. 루첼의 공부에 도움되 는 걸 아는 것도 아니고....아니, 전혀 몰라요....." "나도 마법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걸? 그리고 공부라곤 예전에 다니던 작은 시골 학교에 몇 년 다닌 게 전부지. 그런데 이런 내가 지금 오거스트의 남편이잖아." "하지만 토드 씨는 훌륭하신 걸요. 책방도 하시고, 아는 것도 많으 시고......" "그야 귀동냥이지. 책방 운영하려면 책에 대해 전혀 모를 수는 없거 든. 정말 제대로 아는 건 별반 없어......그러니 오거스트와 처음 만났 을 때, 그냥 지나가다 들른 어디 마법사 도제 제자인 줄 알았지 뭐 냐." 실비가 눈물을 훔치고는 웃었다. "처음 듣네요....그건." "아무에게도 말못할 일이니까 그렇지. 그래, 어느 날 나와 나이 비 슷해 보이는 여자가 와서는 밤늦게까지 책방에 죽치고 있지 뭐냐..... 물어 보니, 근처의 여관에 묶고 있는데 워낙에 시끄러워서 그곳에 온 거라 답했지.... 사실, 그 때 난 그녀가 책 살 돈이 없어서 그런 핑계를 대고 앉아 있는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창고에서 의자와 테 이블을 꺼내다가 서점 구석에 놓고는 그녀를 기다렸지. 거기 앉아서 편하게 보라고 말이다. 그녀는 다음날도 왔고, 그 다음 날도 왔 다.......그리고 언제나 가게 문을 닫을 때까지 앉아 있었지. 그렇게 한달 내내 그러더구나." "한 달이요?" 토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한달. 그리고 그 한 달이 지나니 내가 먼저 말을 걸기 시작 했지. 그리고 그 때 그녀가 베넬리아 출신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토드는 그녀가 풋내기 마법사 인 줄로만 알았다. 왕실에 대해 묻는 것을 보니 궁중 수석 마법사의 도제를 노리는 것 인지도 모르고, 로멜에 대해 묻는 것을 보면 그곳 교수를 찾아가려 고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토드는 가끔 그녀에 대해 묻기도 했다. 가족은 있는지, 있으면 어디 있는지- 평범했다. 어머니는 일찍 돌아 가시고, 아버지는 은퇴한 선장으로 베넬리아에서 장사를 하고 있다. 형제는 없다. 공부는 베넬리아에서 했고, 그 곳에서 아는 사람 소개 로 어느 마법사의 도제로 공부했다. 지금은 서로 따로 지내고 있고, 당분간 만나지 않을 생각이다....등등. 또, 젊어 보이는 얼굴과는 달 리 그 보다 다섯 살이나 많다는 것을 알게 되어 깜짝 놀라기도 했 다. "사실 결혼하고 나서도 그녀가 그렇게 굉장한 마법사일 거라 생각 해 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난 그저......이제 막 마법사로 독립한 그녀를 최선을 다해 뒷바라지 할 거라 결심했을 뿐이었지. 그래서 그녀가 더 이상 올라갈 데도 없는 마법사란 것을 결혼 2년만에 알 게 되었을 때 난 아주 슬펐다. 내 인생의 목적 하나가 처음부터 존 재할 수조차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하게되니.....아니, 그럴 기회조차 없었다고 생각하니....너무나 슬퍼지는 거야. 조금만 더 일찍 만났다 면, 조금만 더.....그랬으면 그녀를 위해 무언가 아주 작은 거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그랬을 텐데....하고 말이다." "....." "네게도 루첼이 그럴 테지, 실비?" "....네...." "실비......이런 말하긴 아주 부끄러운데, 나는 가끔 오거스트에게는 나 같은 남편보다는, 그란셔스 군 같은 짝이 더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단다. 도와주고 도움 받을 수도 있는 그런 동반자 말이다..." "마, 말도 안 되요!" "물론 말도 안되지. 하지만......실비, 그 둘은 정말 강하고, 그란셔스 군은 나는 엄두조차 못 내는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니 몇 년만 지나면 아주 중요한 사람이 될 거야. 컬린에게 탈로스와 오거스트가 그랬던 것처럼......" 실비는 가슴이 아파왔다. 지금도 그 둘은 충분히 그렇게 하고 있으 니까. 실비가 밤을 새는 루첼을 위해 커피 한잔 제대로 끓여주지 못해 쩔 쩔 맬 때, 롤레인은 그에게 룬과 성문자까지 가르쳐 주었다. 페나크 와 그 전시대의 마법사들이 이루어 왔던 고위 마법을 차근차근 가 르쳤으며 베넬리아 국립 마법원을 졸업하게 해 주었다. 아내인 실비가 아무 것도 못해주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그의 모든 것을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실비, 오거스트가 탈로스와 맞서 싸우기 위해 저 먼 곳으로 갔을 때, 그리고 그녀가 돌아와 베넬리아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로메르 드로 왔을 때, 그 깊은 절망에 바진 그녀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서점에 있는 그녀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 녀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바로 나일 테지만, 정작 그녀를 위해 아 무 것도 할 수 없지....그건 정말 비참한 기분이란다.." 그리고 눈물을 떨구는 실비에게 토드는 조용히 웃어주었다. "하지만 너도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 같구나, 실비.....왠지 그런 예 감이 든단다." 롤레인의 말을 듣고 루첼은 저 무시무시하게 몸을 뒤틀어 대는 파 도 속으로 몸이라도 던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속에서 터지기라도 할 듯 펄펄 끓어오르는 화를, 도무지 주체하기 힘들었다. "그....그걸 통보하실 생각이었단 말입니까?" "설마 그럴 라고. 내 개인적 의견으로는 찬성이지만, 내가 댈 수 있 는 몇 가지 이유보다 네가 지난번에 그 재수 없는 녀석과 진 원한 이 더 크다면 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어쨌건, 네 의견을 존중 할 생각이야." "아하, 그 자식 덕에.......제 후견인 가문은 절단이 났고, 절친한 친구 는 죽었고, 다른 친구는 실종되고, 저는 학교까지 옮겨야 했습니다. 그것보다 뭐가 더 중요할 지 의문입니다만....아니, 그 자식은 제가 그 일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걸 전혀 모르는 거 아닙니까?" "알고 있겠지. 네 식구들 통해서 아키가 어디 있는지 알아냈으니까. 하지만 그는 그 모든 것이 별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무시하고 있을 거야." "네?" "네가 얼마나 자신을 재수 없어 하고있는 지는 잘 알지만, 무시하는 거지." 루첼의 얼굴은 지난번에 악튤런을 상대할 때만큼이나 구겨졌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아버지와 케올레스 사이에 대해 가르쳐 줄까? 케올레스와 사이 러스는 보통 사람들이라면 얼굴 마주하기도 힘든 사이야."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케올레스의 딸을 사이러스가 건드렸거든. 게다가 한참이나 그의 정 부였고.....워낙에 유명한 일이라, 내 나이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다 알아." "......." 루첼이 할말을 잃었다. 세상에나 그 사이러스란 작자의 사생활은 왜 그 모양이란 말인가! 아들이 자켄을 비롯하여 셋밖에 없다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다. (어쩌면 말 잘못 꺼냈다가 그 사이러스의 성질이 라도 긁어 놓을까 해서 아이를 낳아도 모두 쉬쉬하고 있는 것인지 도 모른다.) "루첼, 그만 넋 놓고 내 말이나 들어라. 가끔은 사람 상식으로 이해 하기 힘든 희귀한 족속들이 있는 법이야. 예전에 자케노스 군이 말 하고 갔지. 죽이던가, 지배하던가- 그리고 일단 지배할 수 있다고 판단되거나 그리할 수 있게 되면, 그들은 아무 것도 상관하지 않 아." "그렇다면 저는 그 후자라는 겁니까?" 롤레인은 고개를 저었다. "정확하게는 몰라. 하지만 네 원한이란 걸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을 거라는 건 분명해. 너는 직접적으로 당했다기보다는, 그로 인해 발 생한 상황의 피해자에 불과하거든. 그 모든 것을 휘안토스의 잘못이 라 생각하기에는.....좀 곤란하지 않니?" "아키의 일만은 아닐텐데요." "역시 마찬가지야. 너와 아키는 대등한 관계고, 네게 아키를 지켜야 할 의무는 없었잖아." 루첼은 슬슬 기가 막히기 시작했다. "너무 하신다는 생각 안 하십니까?" "아니. 자켄이나 나에게는 물론 문제의 격이 틀리지. 나한테 그런 제안이 들어오면 말하는 녀석을 당장에 두꺼비로 만들어서 뱀과 결 혼시켜 버릴 테니까." 결국 루첼은 머리에 열이 오르고 말았다. "교수님....정말 중요한 문제는 잊고 계시는 듯 한데, 저는 이제 스물 둘이고, 교수님과 연구생 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상 황에....다른 나라로 떠나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건 좀 곤란하지 않습 니까?" "물론 네가 케올레스를 스승으로 모시고 살 리 난무하고, 케올레스 가 너를 제자로 맞이할 정도로 간 큰 마법사가 아니라는 것 역시 알아. 또한, 네가 아직 배울 것이 널렸다는 것도 알고있고." "아시니 다행입니다. 그러니 암롯사 왕의 마법사 밑으로 들어가느 니, 차라리 베넬리아 최고 마스터 밑에 계속 있는 것을 택하겠습니 다. 지금 당장은 모르겠지만, 멀리 본다면 이 쪽이 훨씬 더 낫잖아 요." "내가 부탁한다면 어쩌겠어?" "네에?" "말 그대로다. 상황 같아서는, 내가 직접 암롯사로 가고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내 호주머니 안의 울피온의 백색 열쇠 때문에 나는 이 나라 말고 다른 나라에 봉사 할 수 없어. 그러니 나 대신 가 달 라는 말이야." "교수님...." "지난번에 악튤런과 만났겠지? 또, 그가 델 카타에서 어떤 위치를 가지고 있는 지도 알고 있겠지?" "하지만 그는 최고마스터는 아니잖습니까." "그래, 서른이 될 때까지 제 아무리 최고 마스터의 수염을 뽑아 놓 을 정도로 펄펄 뛰는 녀석이라 할 지라도 열쇠의 문을 수호하는 다 섯 명의 마스터 직에 머물러야 하지. 하지만 새로 즉위한 칼리토 왕 의 마법사 자리는 아직 비어있고, 그건 나이가 어찌 되든 간에 상관 없어." ".....네?" "아직 젊은 네게, 또 외국인인 네게 국가 기밀을 펑펑 퍼 줄 수는 없는 게 유감이야. 하지만 조만간 암롯사에서 그 악튤런 파노제를 감당해야 할 일이 생길 것이고, 케올레스로서는 어림 반푼 어치도 없다는 게 문제지. 하지만 너라면 분명 승산이 있어." "그게 말이 된다고 진심으로 믿으십니까." 롤레인은 방긋 웃었다. "너는 마법은 아직 미숙하지만, 싸우는 법은 아주 잘 알고 있잖아. 승산은 충분해." 저건 욕이다, 하고 루첼은 생각했다. "좀 복잡한 이야기를 하자면, 베넬리아에서 바라는 것은 툴칸과 파 노바로 향하는 나셀 해가 한 나라의 손에 떨어지지 않는 거야. 그런 관문이 한 나라 손에 들어간다면, 관세는 엄청나게 불어나고.....무역 으로 먹고사는 베넬리아 같은 경우에는 치명타지. 심지어, 델 카타 는 사이러스에 의해 나셀의 함대 대부분이 가라앉기 전 까지 그들 배가 아니라면 그 해역을 통과하지도 못하게 했고, 그 운송료로 어 마어마한 돈을 챙겼었지. 사이러스가 나셀 해를 장악했을 때도 그리 상황이 낫지는 않았다. 제일 맘 편했던 것은 사이러스가 델 카타를 치고 올라갔을 때였어."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상선 쪽에서 보호받기 어려워지지 않습니 까." "그건 괜찮아. 보호세를 암롯사나 델 카타에 냈다면 그 책임은 보호 세를 받은 측에 있거든. 로메르드의 배라면 모를까, 베넬리아는 행 여나 손해라도 가지 않을까 눈 벌겋게 뜨고 있는 해양 강국이야. 해 적들의 습격이 몇 번 이어진다면 베넬리아 쪽에서는 '상선 보호' 명 목으로 해군들을 보낼 지도 모르거든. 실제, 내전으로 신경 쓰지 못 하게 되어 델 카타에 빼앗기게 된 하실론 섬은 베넬리아의 것이기 도 했고.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해서라도 둘 다 해적 소탕은 성실하게 할거야." "결론은?" "네가 델 카타가 우세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암롯사로 가 주어야 한다는 거지." "그리고....제가 좀 힘들 것 같으면, '스승' 자격으로 오실 생각이시 죠?" "물론." 루첼은 이제 슬슬 집히는 게 있었다. "아무래도 그 녀석....분명 이걸 노리고 저에게 추파를 던지는 것 같 습니다." "아마 네가 권호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이게 웬 횡재냐 했을 걸." "......." 모든 것을 체념한 루첼은 허망하게 답했다. ".....그렇겠군요." *********************************************************** 작가잡설: ......유부남인데도 여기저기서 추파를 받는 인기 만점의 루 첼 군...-_-;;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30장 *************************************************************** [겨울성의 열쇠] 제139편 첫 번째 잔#2 *************************************************************** 컴컴한 꿈- 지독한 악몽이었고, 악몽이 늘 그렇듯 제대로 깨지도 못했다. 양파 껍질 벗기듯 눈을 뜨면 또 다른 꿈이 고약한 장난을 토해내고, 그것 에서 버둥거리며 벗어나면 또 다른 악몽이 튀어나온다. 컹, 컹-- 뒷골을 울리듯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온 몸이 얼어붙는 것만 같 다. 몸이 여기 저기 욱신욱신 거리고, 미열에 들떠 어지럽고 혼미하다. 덤불에 뒤엉키고 늪 속에 갇힌 듯 한 걸음 옮기기조차 힘들 지경이 었다. 그러나 다른 것은 휘감아 돌리기라도 하듯 멀미가 날 정도로 빠르 다. 훤하고 둥근 달은 하늘을 달리듯 가로지르고, 구름은 물살처럼 빠르게 검은 하늘위로 흐른다. 개 짖는 소리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치달아 오고, 곧바로 그 크고 흉악한 이빨에 꽉 물려 으스러질 것만 같았다. 그 개의 뒤를 따르는 키가 훌쩍 크고 팔 다리가 긴 기이한 사냥꾼 들의, 그 검은 강철의 장갑을 낀 손이 어둠 속에서 철그럭 댔다. 그 들이 손에 쥔 쇠사슬이 질질 끌리며 짐승 울음같은 소리를 스르릉 스르릉 냈다. 숨고 싶었지만, 둘러보니 텅 비고 광활한 황야 한 가 운데였다. 얼어붙은 물웅덩이가 달빛을 반사했고, 흉흉하게 말라붙 은 잿빛 덤불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아무 데도 숨을 곳이 없고, 잔인한 만월의 달은 아킨을 남김없이 드 러내고, 맞서 싸울 방법이라고는 주먹 뿐. 아마도 그들을 향해 한번 휘둘러보고는 결국에 그 이에 갈기갈기 찢겨져 뼈와 살점이 튀고 내장을 쏟아낼 것이다.... 외쳐보고도 싶지만, 이 작은 짐승의 울부짖음을 누가 들어줄까. 허허 로운 황야에는 차가운 달빛만이 쏟아지고, 무심한 검은 새와 잔학한 들짐승들만이-오로지 그 매정한 것들만이 아킨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아킨이 끝장나는 순간을 숨죽여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순간, 갑자기 머리끝까지 확 밝아지는 듯 톡 쏘는 향취가 코를 쿡 파고들었다. "-!" 눈이 번쩍 떠지며, 램프를 흐릿하게 밝힌 방안으로 아킨은 쏟아지듯 돌아왔다. "눈 떠. 아주 크게-" 옆에 있던 유제니아는 그렇게 말하곤 들고 있던 자그만 약병의 코 르크 마개를 쿡 집어넣었다. 아킨은 그녀가 하라는 대로 눈을 크게 떴고, 아직 꿈속을 헤매는 듯 흔들리던 시야가 차츰 정리되기 시작하며 현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머리는 어지러웠고, 몸 여기저기가 쿡쿡 쑤셨다. 아직 미열 에 들떠 있었지만, 땀에 흠뻑 젖어 있어 오히려 오싹오싹했다. 유제니아는 가방 안에 그 약병을 집어넣고는 침대에 앉았다. 그리고 차가운 수건으로 아킨의 이마를 닦아주기 시작했다. "어떻게....된 거지?" "아침에 일어 나보니 옆에서 아키가 끙끙대고 있더라고. 흔들어도 안 깨어나기래....약을 좀 썼지." "아침?" 아킨은 고개를 돌려 활짝 열린 창밖을 보았다. 그러나 유제니아의 말과는 달리 하늘은 아직 캄캄하기만 했다. 유제니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구름이 잔뜩 껴서 아직도 밤 같은 거야.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해는 벌써 뜬 것 같은 걸." 그리고 멀리서 쿠릉--하고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어제 쏟아지던 비 는 그쳤지만, 금방이라도 세차게 쏟아질 것만 같았다. 유제니아의 하얀 수건이 이번에는 젖은 목덜미의 땀을 훔쳤다. 무엇을 뿌렸는지 수건에서도 희미하고 상쾌한 향기가 풍겨왔고, 기분도 점점 가라앉 아 갔다. "고마워." 유제니아가 피식 웃었다. 그 얼굴을 보니, 방금 전의 그 피와 살점 의 진흙탕에서 뒹구는 듯한 끔찍한 기분도 찬찬히 흩어지는 것 같 았다. 문득 전날 밤의 일이 생각나고, 그 조용하고 편안한 기분도 기억난다...... "우리가 만난 지 얼마나 됐지, 유제니아?" 유제니아는 금방 손가락 하나를 들었다. "한달 정도 된 것 같아." "한달...?" 되묻던 아킨은 그것이 꽤 정확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보름이 되 기 이틀 전에 유제니아와 만났고, 이제 내일이나 내일 모레 정도가 되면 보름이 될 것이다. 그러니 한 달이라는 말은 거의 정확한 것이 다. 생각보다 얼마 되지 않았는데, 지금 옆에 있는 유제니아는 아주 오 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듯, 자켄 정도는 아닐 지라도 적어도 오랫동 안 옆에 있어주었던 것 같고, 그러니 옆에 있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듯한...그런 느낌이다. 세르네긴에게 들었던 것은 꽤 되었다. 그 때는 그저 비현실적일 정 도로 너무나 먼, 그러나 한번은 가져 보고 싶었던 그런 존재였다. 그저 귀엽고 사랑스런 여동생을 가지고 싶었던 건 아니다. 세르네긴 의 조용한 웃음을 보며 아킨이 느꼈던 것은 조금 다른 것이었다. 행복. 편안함...또한, 고요한 평화와 함께 언제나 옆에 머물러 줄 소 중하고 사랑스러운 존재- 그것이 세르네긴에게는 있었고, 아킨은 그 런 그의 행복을 가지고 싶었다. 소중한 상대가 있고, 그 상대에게도 그가 소중하다는 것을 진심으로 믿고 있기에 보여 줄 수 있는 그런 편안한 행복을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때에는 세르네긴을 통해서 그것을 보았듯, 지금은 유제니아를 통해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꿈, 막 연한 기대 속에 구체화 시켜 버린 헛된 희망이었다. 어린 시절 그토 록 휘안토스가 되기를 갈망했던 것처럼, 이제는 세르네긴같은 그런 존재가 되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바보 같은 생각이다. 세르네긴에게 유제니아가 그런 존재라 할 지라도 나한테도 똑같이 다가올 리 없는데. 이것이야말로 누군가가 공들여 완성해 놓은 것을 채 가려는 짓 밖에는 안 되는데...... 정말 그럴 생각도 없고, 가능할 거라 생각할 정도로 바보도 아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떠올린다는 것 자체가, 아킨을 위해 목숨까지 걸었던 세르네긴에게 죄스런 일이었다. 부러워하는 것도 좋지만, 그 것을 가로채고 싶어하는 건 죄다. "아키? 왜 그래?" "아니....그냥. 저기, 베이는 어디 있지?" "올라오지 않았으니......1층에 있을 거야." "그래." 아킨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달아오르듯 화끈거리는 얼굴을 식히기 위해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창가로 다가가, 무심코 비에 축축하게 젖은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여관 문을 나서는 베이나트를 발견한 것은 그 때였다. 처음에는 그저 바깥바람이라도 쐬려고 나왔나 하고 생각했을 뿐이 었다. 그러나 아킨은 이내 그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챌 수 있었다. 그는 어깨에 짐을 매고 있었고, 소매 자락과 부츠의 끈도 단단히 매 두고 있었다. "베이-! 어디 가는 겁니까!" 아킨이 외치자, 베이나트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그저 희미하게 웃고는 아무 말 하지 않더니, 다시 앞을 보고 거리로 나섰다. 혹시 나 하는 불안감에, 아킨은 그대로 뛰쳐나가 1층으로 날아가는 듯한 속도로 내려갔다. 그리고 아직은 텅 빈 1층의 홀에서 아킨이 발견한 것은, 식탁에 엎드려 자고 있는 자켄이었다. 아킨은 자켄을 흔들었다. "자크, 자크--!" 그러다 아킨은 그가 그냥 잠든 것이 아닌, 마법에 의해 잠든 것임을 알아챘다. 하루 정도 안 자도 몸에 별 무리도 없는 엘프를 이 정도 로 재워둔 다는 것에, 아킨은 단 하나의 이유밖에는 떠올릴 수 없었 다. 아킨은 되든 안되든 간에 여관을 뛰쳐나가 베이나트를 찾았다. "베이--!" 그러나 어두운 골목에, 베이나트의 옷자락 하나 보이지 않았고 주변 가득한 것은 이른 아침의 컴컴한 정적뿐이었다. 아킨은 더 크게 외 쳤다. "답해요! 어디로 가는 겁니까, 베이나트-!" 아무런 답도 없었다. 아킨은 뒤돌아 여관으로 들어가 자켄을 깨웠 다. 그런데 자켄은 정말 시체처럼 축 늘어져 있었고, 아무리 흔들어 도 일어나지 않자 결국에는 그에게서 마법을 걷어 내야 했다. 그러 나 주문을 몇 번을 외우고 심지어 주먹으로 후려치기까지 했는데도 자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킨은 그제야 자켄의 팔꿈치 밑에 있 는 자그만 쪽지를 발견했다. -두 시간 푹 자다 일어날 거다. 그리고 네 실력으로는 절대 안 깨어 날 테니, 그 시간에 아침이나 먹거라. p. s. 앞으로는 가리지 말고 골고루 먹어둬라. 넌 살 좀 쪄야겠더라. "......" 아킨은 쪽지를 구겨서 자그만 불씨만 남은 벽난로에 집어 던졌다. 그리고 계단을 올라 2층에 있는 방으로 갔고, 유제니아가 창에 붙어 있는 것을 보고는 그녀를 불렀다. 유제니아는 당황한 듯 얼굴도 하 얗고 눈도 커져 있었다. "유제니아." "저기, 아키. 베이 아저씨는 어디로 간 거야? 나도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갑자기 사라졌어."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되든 안 되든 찾으러 가 볼 생각이야. 자크 가 깨어나면 그렇게 말 해줘." 유제니아가 놀라 눈만 말똥하게 떴다. 아킨은 유제니아가 불안해하 는 것에, 별일 아니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다녀올게, 유제니아." 유제니아가 자신 없는 얼굴로 말했다. ".....왠지 말려야 할 것 같아." "아니, 너는 있어. 자크가 깨어나면 걱정할 테니, 적어도 너라도 옆 에 있어야 해." 그러면 자크를 깨워서 가라, 라고 유제니아가 말할 것이라 벌써 짐 작했던 아킨은 재빨리 유제니아의 볼에 키스했다. 그리고 말할 기회 를 그 아차 하는 순간 놓쳐버린 유제니아에게, 아킨은 다짐시키듯 말했다. "정말 간다." 유제니아가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기도 전에 아킨은 재빨리 방을 빠 져나가 자켄이 깨지 않도록 조심하며 여관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막 문을 나섰을 때, 아킨은 덩치 큰 개들이 짖어대는 소리를 들었다. 스릉스릉--무언가가 끌려가는 소리도 들려온다.... "!" 몸에 소름이 확 돋았다. 이건 꿈이 아니다.....! 아킨은 오른쪽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가는, 곧장 그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벌써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 다. *********************************************************** 작가잡설: 아무리 잡아 놓은 물고기라도 그물코가 성기면 금방 도망 가는 법. -_- <-?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30장 ************************************************************** [겨울성의 열쇠] 제140편 첫 번째 잔#3 **************************************************************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 갈 만한 시간이 되었지만 먹구름 가득한 세 상은 짙은 회색 그림자에 덮여 있었다. 기분까지 같이 젖어들게 만들 듯한 축축하고 차가운 바람이 숲 깊 은 곳에서 휘이 불어왔고, 한여름 철 햇살과 함께 싱싱하게 부풀어 올랐던 나뭇잎들은 이제는 빛 바래 가며 그 차가운 바람과 함께 흔 들렸다. 구름은 여전히 짙었고 온통 그림자뿐인 세상은 아직 어두웠 다. 숲 구석구석은 더욱 짙은 그림자가 스며들어 동굴 안처럼 캄캄 하기만 했다. 바람이 다시 쓸려왔다. 숲은 몸을 흔들고, 끄트머리 맺혔던 물방울들은 우수수 쏟아지고, 세상은 심난한 듯 뒤척거리며 술렁였다. 베이나트가 마주하는 작지 만 깊은 호수 수면이 전율하듯 부르르 떨었다. 짙푸른 물위로 은빛 등을 가진 물고기들이 잠깐 튀어 올랐다가는 호수 바닥으로 빠르게 내려간다. 온 나무들에 쉬고 있던 새들이, 아직도 바람이 세고 언제 비가 쏟아질지 모르는데도 검은 구름처럼 숲에서 날아올랐다. 푸드 덕 푸드덕 날개를 치고, 고함치듯 울부짖고, 그렇게 최대한 먼 곳으 로 도망쳐간다. 베이나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은 아직도 까맣고 빈틈없이 빽빽했다. 어두웠지만, 비에 씻긴 초가을의 숲은 강철로 조물된 듯 선명하기만 했다. 다시, 그의 등뒤로 세찬 바람이 휙 불어와 로브 자락과 머리카락을 휩쓸어 올렸다. 그리고 베이나트는 육중한 도끼처럼 빠르고 위험한 것이 순식간에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뒤돌아 섰고, 츠캉--!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그의 발치에 검고 차가워 보이는 것이 툭 떨어졌다. 바닥을 내려다보자, 그것은 시커멓게 녹아 퍼지더니 바닥으로 스며들어 사라져 버렸다. 베이나트는 눈을 찌푸렸다. "이건......어디서 빌린 거냐." 답은 곧바로 들려왔다. "줄 수 있는 사람에게서." 숲 속에서 선명하게 들리는, 그 갈라지고 탁한 목소리에 베이나트는 한숨이 탁 하고 터졌다. 고개를 들었고, 그가 마주하게 된 이는 허 벅지에 겨우 오는 작은 키를 가진 난쟁이 사내였다. "이야기...해 볼 수 있을까, 탈로스?" "그건 예전에 많이 나누었지. 너무나 많이." 그 목소리는 늙은 나무가 타닥 흔들리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언 제 부러져 나갈지도 모르는 그 늙은 나무는, 타닥-타닥--오래되고 단단한 가지를 거센 바람에 흔들어 댄다..... 베이나트가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지." "이해하려 하지 않았던 것은 당신이지. 믿어주지도 않았고....." 베이나트는 자신을 향해 뻗은 그 앙상한 손을 보며, 아주 예전에 그 손이 자신을 향했던 그날의 일을 또 겹쳐 볼 수밖에 없었다. 속에서 터지려는 분노를 간신히 참아 내며 베이나트는 말했다. "나는 분명히 말 해두었다. 인간에게 그것을 줄 수는 없다고." 탈로스가 말한다. "결국에는 당신도 똑같군." "이제 좀 믿어 다오. 그건 불가능하고, 비록 가능하다 할 지라도 네 가 그 길로 가게 놔 둘 수는 없다-!" 탈로스의 눈이 확 타올랐다. "당신은 대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지? 내가 당신과 처음 만났 던, 그 때 열 아홉의 청년에서 영원히 정지한 줄 아는 건가? 물론 고집스런 것은 변하지 않았지! 어쨌든 난 에크의 남자니까. 그리고 나를 향한 혐오와 멸시와 타협하지 못하는 것 역시 똑같지.... 그건 어쩔 수 없어. 내 자존심이니까.....! 하지만 제자로써, 동료로서....당 신을 실망시킬 생각은 없었고, 지금도 없어!" "탈로스....! 네가 인간인 이상, 천 번의 맹세도 소용없다." 탈로스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그렇다면 왜 시작했던 거지?" "--!" "애당초 나를 믿지도 않았더라면, 대체 왜 나에게 그것을 가르쳐 준 거지. .....어째서!" 베이나트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 힘없는 눈빛에 탈로스가 비 웃었다. "알아, 진실은 원래 잔인하다는 걸. 그러나 나는 내가 듣고 싶은 것 을 말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야. 마음껏 분노할 테니, 마음껏 말 해. 그저 날 이용한 것뿐이라고, 언젠가는 그 불멸의 저주......당신이 마신 그 영원의 잔을 깨어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날 이용한 거라고. 그러나 일이 잘못되면 내가 당신의 저주를 오히려 축복으로 알게 될 지도 모르고, 그 원리와 핵을 알게 되어 결국에는 당신과 똑같은 자가 될 지도 모른다는 것을 당신도 분명히 알고 있었고, 알면서도 무시했다는 것을. 그것을 말 해봐. 그래, 인간인 이상 누가 그 유혹 을 뿌리칠까." "잔인하구나....." "당신도 알고 있었잖아. 다만.......당신이 나보다 더 오래 걸렸을 뿐 이지. 그래서 당신은.....어쨌든 당신이 책임져야 할지도 모르는 죄에 서 발버둥 쳤던 것 뿐이야. 단지 그것뿐이지, 나를 위해서 생각한 건 하나도 없어. 당신은 그저 방법만 알게되기를 바랬는데, 그 방법 을 아는 동시에 그 비밀까지 노출되는 것이 두려웠던 것뿐이지!" "탈로스.....!" "물론 알지. 당신 혼자 그것을 누리기 위해 그렇게 나온 것이 아니 란 것, 그것을 이해 못할 정도로 난 어리석지는 않아. 물론! 그런데 당신은 왜 나를 그렇게 이해하지 못한 거지! 대체 왜!" 탈로스가 한 걸음 다가왔다. "하지만 이건 알아둬, 컬린! 당신조차 잊었던 것! 나, 탈로스 고르노 바 역시 당신이 택한 제자라는 거야. 전 세계에서 당신이 골라내고 골라낸, 단 세 명의 제자 중 그 첫 번째. 그래서 당신을 존경하고, 내가 그렇게 존경하는 만큼.....당신도 나를 믿어 주기를 바랬어. 오 거스트 때문에 조바심 나긴 했지만, 그녀가 먼저 그것을 포기했을 때는 안심했지. 원리와 진리를 알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그것을 주무르고 도전하며 당신을 믿고 존경하는 것은 나뿐이라고! 그런데, 이런 내가....나를 위해 그 비밀을 썼을까?" "세상을 거듭 거듭 방랑하는 나와 얼음 성에 스스로를 가둔 지에나, 그리고 우리의 손에 의해 불길 속에 봉인된 팔로커스--! 우리 역시 그 길이 분명 가혹할 거라는 건 알았지만, 아무도 거부하지 못했다. 닥쳐온 최후와 잔인한 영원 중에, 우리는 모두 후자를 택했다." 탈로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컴컴한 숲으로 그 크고 높은 웃음이 터 졌고, 그 큰 소리는 침묵보다 더 무거운 침묵이었다. 한참을 웃어젖 힌 그가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어째서 당신인 당신이 믿고 생각하는 것만을 다른 이에게 강요하 는 걸까--아니, 그리 오래 살아서....인간으로 생각하는 법을 잊은 건가?" "제발!" "스승, 내게 있어 인생이란 목적이 있고 의지가 있는 것이었어. 의 지가 있기에 삶이 있고, 그 삶을 살기 위해 걸어가는 것이 나였 어.....! 목적은 당신의 신뢰에 보답하는 것, 의지는 그것을 위해 내 생명도 불사를 수 있다는 것, 삶은...그래서 살아야 한다는 것!" 베이나트는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만 하자고 했다!" "끝까지 들어....컬린. 당신에게 삶이란 죽느니 차라리 수만 수천 번 의 죽음을 바라보는 것을 택할 정도로 집착하는 것이었지만--내게 삶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어. 수단을 위해 목적을 잊지는 않아. 잊 을 수도 없고---내게 삶은, 그 잔인한 눈들 아래에 산다는 것이었 고.......그것을 영원으로 연장한다는 건 당신의 영원보다 더 큰 저주 야. 그리고 이 모습을 고치고 멀쩡하게 살아 갈 수 있다 해도, 그래 도 그것도 저주지. 이미 사람들의 잔인한 면, 그 추한 면...그것을 속 속들이 알았는데, 그런 이들이 내 모습이 좀 변했다고 내게 호의를 품고 다가온 다는 건 역겨워! 그 역겨운 세상에서 영원을 살라고? 고문이지! 진리야말로 내가 진실로 사랑하는 거야. 그런데 당신은 그 사랑을 완성할 기회를.....내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그 유일한 이 유를, 나를 사랑한다는 자기 기만으로 빼앗아 버렸어!" "아무 것도 닥치지 않는 한 모른다. 나는 그렇지 않을 거라 믿기보 다는, 누구나 그렇다-하고 조심하는 것을 택한 거다." "하지만 당신은 믿어 줘야 했어. 당신만은! 오거스트가 그렇게 나를 비난하는 건 상관없지만, 당신은 그래선 안 되었어!" ".....탈로스, 더 이상 괴로움을 강요하지 말아 다오. 그리고 제발, 더 이상 나 때문에 죄인이 되지 말아라. 오거스트와 화해하고, 인간과 화해해라.....그 위험한 진리를 알아내는 것보다 네가 할 수 있는 일 은 넘치도록 많아! 제발...그들에게 너를 이해시키고, 너 스스로 고립 되는 것도 그만 두어라! 지금까지 네가 알아온 것만으로도, 너는 지 금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마법사다." "삶을 살라는 건가?" "삶을 위한 삶-- 생명을 위한 생명......인생이 그렇지 않다면, 그건 슬픈 일이다. 그렇게 살아 다오, 제발." 탈로스의 눈에 경멸이 치받아 올라왔다. "날 바라지 않는 자들, 그리고 내가 바라지도 않는 자들.....그런 이 들을 위해 나더러 살육을 하고 파괴를 하고, 그러며 그들 옆에 있게 해달라 구걸하라는 말인가, 당신은? 오거스트가 그랬듯, 나 역시...내 가 마스터로 있는 나라의 영광을 위해 그런 무자비한 파괴를 하라 고? 그것이 삶이란 건가, 그것이 생명을 위한 생명? 차라리 그냥 내 탑에 처박혀 사는 게 나아. 적어도 '나만을' 위해서는 살 수 있으니 까." ".....그래서-" "이래서 당신과 나는 타협할 수 없는 거지. 내가 바라는 건 단 하 나, 성스러운 잔...당신과 그 두 동료가 움켜쥔 그 잔의 비밀, 그 뿐 이야. 죄인이 되어도, 다른 모든 사람이 나를 혐오한다 할 지라도 상관없어. 나는 그것을 원해." "이번에도 주지 않겠다면 어쩌겠느냐?" "지난 번 보다 좀 더 고통스럽게 봉인되는 거지. 그리고, 이번에 는....지난 번 보다 좀 더 단단할 거야. 이번에도, 그 때 그랬듯 내 생명을 걸지." 그리고 베이나트는 자신이 이 탈로스가 내 던지는 그 어떤 것도 막 아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죽지 않는 자가 죽어야 하는 자와 싸우는 것-이 탈로스는 유감스럽 게도 지금이 그런 싸움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고, 베이나트 가 무엇을 택할 지는 더욱 잘 알았다. 베이나트는 죽을 수 없기에 아무도 죽일 수 없었고, 탈로스는 죽을 수 있기에 죽일 수도 있었다. 어둠이 찢겨나가듯 숲 깊은 곳에서 바람 소리와 함께 개 짖는 소리 가 들려왔다. 베이나트는 이를 갈아붙이듯 외쳤다. "카람파-!" 빠르게 어둠이 몰려오는 것을 느끼며, 베이나트는 험악하게 말했다. "암롯사 왕가와 무슨 거래를 한 거냐!" 그러나 탈로스는 답하지 않았다. 그의 앙상한 손바닥이 위로 치솟더 니, 신호하듯 아래로 빠르게 내려갔다. "탈로스--!" 주변의 모든 그림자들이 일제히 치솟아 올랐다. 나무와 바위와 풀들 속에 숨은 어둠 속에서, 그 모든 것이 콰콰콰 ---하고 숨을 토해내듯 치솟아 오른다. 그리고 탈로스가 어둠 속에 서 스스로 빛나듯 뚜렷하게 서 있었다. 머리카락 하나 하나, 눈가의 주름 윤곽까지...그 모든 것--그의 안에는 그림자가 없었으며, 모든 그림자 속에서 그만이 유일한 빛의 절대자인 듯 그렇게 서 있는 것 이다. 바람이 휘몰아쳐 왔다. 머리카락이 흩어지고, 로브 자락은 부풀어올 랐으며, 긴소매는 날개처럼 휘청 인다. 베이나트는 뒤돌아 섰고, 그가 본 것은 이제는 시커먼 숲 속의 암 흑, 그 깊은 암흑 속에서 들려오는 울부짖음 같은 소리였다. 쿠어어어--두두두두두--타닥, 타닥- 그에 섞여 개 짖는 소리가 들 려오고 있었다. 말발굽소리가 바람이 불어오고 파도가 밀어닥치며 천둥이 쏟아지듯 무시무시한 속도로 커져갔다. 베이나트는 몸을 반쯤 돌리고는 손끝을 탁 퉁겼다. 탈로스와 베이나 트 사이에 구름 속에서 달이 스며 나오듯 둥그런 원이 나타나고, 그 위에 수 십 개의 문자와 그림이 둥근 원을 따라 치솟듯 파랗게 떠 올랐다. 별의 글자들, 잊혀지고 버려졌지만 우주와 가까운 귀한 힘을 가진 것. 룬까지는 지상의 인간이 어렵게나마 쓸 수 있으나, 별의 글자... 그 고대의 성문만은 '생명'이라는 '자신의 우주'를 바쳐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컬린은 제자들이 그것을 쓰지 않기를 바랬고, 그것을 컬린 자신만큼 쓸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하기를 바랬다. 그리고 그 것이 단지 방법을 아는 것만으로 끝날 거라고 편안하게 믿을 수도 없기에 탈로스 앞에 놓인 마지막 문을 걸어 잠갔던 것이다. 그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너무 늦었기에 탈로스를 크게 실망시킨 것은 알았지만, 그래도 늦었지만 옳은 선택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 의 분노를 일으켜도, 오랫동안 건실하게 쌓아온 스승과 제자의 인연 을 끝내는 길이 되어도, 그래도 그것이 옳다고 생각해 왔다. 베이나트는 뒤돌아, 그 원을 등진 채 서서 그를 향해 몰아쳐 오는 검은 사냥꾼들을 마주보았다. 어둠 속에 그들의 윤곽이 희끄무레하게 보였다. 바람을 받는 그들의 망토들이 날개처럼 치솟고 있었고, 그들이 탄 말과 그들의 손에 쥔 길고 날카로운 창과 그 옆을 따르는 대 여섯 마리의 사냥개들이 시 커멓게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개들이 바닥을 박차며 베이나트를 향해 달려왔다. 기사들의 창끝이 치솟더니 베이나트를 향했다. 개들이 짖는 소리와 기사가 일으키는 날카로운 바람 소리에 영혼이 같이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전 율 같은 공포, 절망적인 공포, 그래서 어쩌면 경이와 놀라움으로까 지 이어지는 공포-그러나 파멸로 이어지기에 끔찍한 공포. 카람파의 노예들, 그리고 암롯사에서는 그림자의 수호자라 불리는 검은 기사들. 휴로페가 밤과 안식의 수호자 라레스나의 제자인 카람파를 죽여 그 노예를 빼앗았고, 그것들을 지옥불의 마법사 팔로커스가 소환하여 부렸으며, 훗날 암롯사의 대공이 된 테루비셔스가 그 마법사로부터 직접 빼앗은 것들이었다. 테루비셔스는 아들과 동생을 잃으며 팔로 커스의 손을 잘라 이것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그의 황 제에게 바치지 않고 자신이 가졌고, 황제도 율피나와 드래곤의 관계 를 인정하듯 그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리고 테루비셔스와 그 후손들도 이것들을 함부로 사용하지는 못 했다. 지나친 남용은 경계를 부른다는 건 누구나 아는 바이고, 또한 이것을 부리는 자들에게도 당하는 당사자에는 미치지 못하나 어느 정도의 전율을 선사했다. 또, 훗날 테루비셔스가 아들의 배우자로 마법사를 들였던 것에 알 수 있듯이 마법사가 아닌 이상 팔로커스 가 보여주었던 그 전율에 가까운 무시무시한 공포를 재현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탈로스는 마법사였다. 빌렸든 어찌했든 간에, 그 컴컴한 악몽들은 무시무시하게 증폭되어 지옥에서 금방 뛰쳐나온 듯 울부짖고 있었다. 세상을 집어삼켜 갈가 리 찢어 삼킬 듯- 어찌할까- 베이나트는 그 와중에도, 정말 코끝에 그들이 닿기 직전인데도 그렇 게 생각했다. 그리고 베이나트는 손을 뻗어, 또 한번 손가락을 탁 퉁겼다. 울부짖는 개들과 기사들의 이마위로 하얀 성문이 팟팟 박혔 다. 그들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베이나트는 땅을 진동시켰다. 흔들리는 중에, 선명한 숲이 어둠으로 검게 물들고는 회색의 기이한 색조로 변해갔다. 그 숲의 허공에 검은 구멍이 자그마하게 뚫리더니, 점점 더 크게 확장되었 다. "돌아가라-너희들이 나온 어둠의 휴식터로! 라레스나의 옥좌 옆에 있는, 안식으로 다시 태어난 카람파의 곁으로--!" 그 순간 개들과 기사들의 이마 위에 있던 하얀 성문이 갑자기 사라 졌다. 눈을 감듯, 하나 하나- 모두 꺼지듯 사라져 버렸다. 그들이 다 시 움직였다. 어두운 구멍 위로 또 하나의 성문이 떠오르더니, 전기 공처럼 방사상으로 빛이 퍼지며 입구를 막았다. 그 모습을 본 베이나트는 아찔해지는 것 같았다. "탈로스--위험한 짓은 그만 둬라!" 그러나 베이나트는 그렇게 외치면서도 탈로스가 말하는 것이 무엇 인지, 원하고 의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내가.....그렇게 미운 거냐." 답은 없었다. 지금 가장 잔인한 약점을 물고 늘어지는 탈로스는, 그 때 그랬듯 지금도 침묵하고 있었다. 절대적인 신뢰는, 탈로스의 성 격이 그러하듯 아주 자그맣게 금이 가도 완전히 박살나 버릴 수 있 는 것이었다. 티없는 것은 한 점 티끌에도 무서울 정도로 더렵혀진 것을 보인다. 그것이 바로 탈로스가 가진 에크롯사 인으로서의 완고 함인 것이다. "하지만....돌아갈 수 없다는 건, 너도 잘 알지 않느냐." 이렇게 말해도, 베이나트보다 그 진실에 대해 더욱 잘 알고 있어도, 그래도 탈로스는 기다릴 것이다. 어쩌면, 어쩌면--하고. 어쩌면 베 이나트가 탈로스를 믿고 양보하지 않을까, 그래서 그 터질 것 같은 갈망을 채워주지나 않을까....어쩌면 그리 되지 않을까. 그리고 베이나트 역시 기다릴 것 같았다. 베이나트가 영원히 살 듯, 탈로스는 인간. 베이나트가 수 백 명의 삶을 살았듯, 탈로스는 단 한 명의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탈로스가 포기 못하는 것을, 그는 쉽게 포기할 수 있었다. 좋다, 차라리 네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마-- 그리고 컬린의 생을 완전히 정리하고 세상에 나오는 편이 낫겠구나. 순간, 바닥이 하얗게 변했다. 하늘이 저 동 끝에서부터 물이 빠지듯 더욱 하얗게 변하고, 돌덩어 리로 만든 듯했던 회색의 숲이 변하기 시작했다. 검은 사냥개들이 성난 듯 더 크게 짖기 시작했다. 그들이 뒤돌아 서 그 하얗게 터져 오르는 끄트머리를 노려보더니 바닥을 차며 그곳으 로 달려갔다. 기사들이 말머리를 꺾고 뒤돌아 섰다. 컹컹--커겅--! 숲이 울리고, 지축이 떨린다. 순간, 마치 간헐천이 터지듯 그곳에서 하얗고 차가운 바람이 치솟아 올랐다. 검은 개들 위로 그 하얀 것들이 내리 덮치듯 쏟아지고, 기 사들의 말들이 앞발을 들어올리고는 크게 울부짖었다. 기사들이 창끝을 세웠다. 그 끝이 향하는 말발굽을 으스러뜨릴 듯 쏟아지는 백색의 물결 속에서, 네 발과 긴 꼬리, 뾰족한 귀와 코를 가진 것이 뛰쳐나왔다. 늑대가 눈보라와 함께 달려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허연 것은 말의 목을 날카로운 송곳니로 으스러뜨리고 내동댕이쳤다. 그 늑대 의 이가 으스러뜨린 말의 목이 얼어붙듯 하얗게 변하더니 조각조각 으깨어졌다. 그 위에 탄 기사가 창을 들고 늑대의 목에 내리 꽂았 다. 눈보라 같은 목덜미에서 검은 기운이 피처럼 뿜어져 올랐다. 늑 대가 기사에게 다시 달려들었고, 기사가 두 팔을 뻗었다. 기사의 시 커먼 두 팔이 얼어붙더니 늑대의 몸부림과 함께 산산이 으깨어져갔 다. 말을 달려오던 다른 기사가 위에서 늑대의 등에 창을 내리꽂으 려 했다. 늑대는 몸을 뒤틀었고, 눈보라가 그 몸부림과 함께 휩쓸려 올라오며 창과 말을 한꺼번에 얼어붙게 했다. 늑대는 유리상처럼 얼 어붙은 기마를 향해 몸을 던졌다. 말과 창이 산산조각 났고, 그 기 사의 몸은 늑대의 입에 물려 으스러졌다. 그러자 사냥개들이 한꺼번 에 달려들었다. 귀와 목덜미, 배와 다리에 모조리 달려들어 커다란 물소를 공격하는 들개처럼 물어 뜯어댔다. 늑대가 위로 머리를 들고는 울부짖었다. 눈보라가 그 울부짖음에 응 답하듯 매섭게 쏟아져 들어왔다. 검은 기운이 그에 뒤엉키며 눈보라를 찢어놓았고, 모든 것이 그렇게 휘말리 시작했다. 개들이 얼어붙고 늑대의 몸도 검게 물들어 찢겨지 기 시작했다. 이런 마법을 베이나트는 단 하나 알고 있었고, 지금 그것을 시전할 수 있는 마법사가 달리 있을 거란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오거...스트?" 그러나 아니다- 오거스트의 것은 이렇게....이것도 강하긴 하지만, 그녀의 것은 이보 다 더욱 매섭고 빠르고 무시무시하다. 마침내 늑대가 산산조각 났다. 검은 개들 역시 얼어붙어 망치로 깨 듯 터졌고, 눈보라와 검은 물결이 같이 휘감겨 밖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회색의 숲은 검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후수수수수---작은 새들이 한꺼번에 날개를 치는 듯한 소리가 들려 오고, 물결 이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고, 쿠릉--마른천둥 소리도 들 려오며, 차갑고 축축하지만 그래도 실감나는...넘치도록 실감나는 현 실의 바람이 불어와 베이나트의 땀에 젖은 얼굴을 시리도록 식혔다. "쿨럭--!" 그 지친 기침 소리는 뒤에서 터졌다. 베이나트는 설마 해서 그 쪽을 돌아보았고, 그곳에 있는 것은 거의 실신하기 직전인 듯 비틀거리다가 나무둥치에 기대는 아킨이었다. "아키....!" 그러자, 아킨은 헐떡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바보 같은 짓 좀 하지 말아요.......컬린!" *********************************************************** 작가잡설: 아키가 정말, 제대로, 쓸만하게, 마법을 쓴 건 이번이 처, 음, 입, 니, 다. 으하하하하~! 자주 자주 무시되는 사실이지만, 어쨌 든 아키는 오거스트의 수제자입니다. -_-;; 차분히 주문 외우는 것 보다는 주먹부터 날리는 것을 너무 선호해서 탈이지;;; (생각해 보니.....폭탑에서의 칼딘은 흑룡제 주제에 제일 남발하는 필 살기가 눈웃음과 허벅지 살짝 보여주기;;; 였다는.)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30장 *************************************************************** [겨울성의 열쇠] 제141편 첫 번째 잔#4 *************************************************************** 베이나트는 아킨의 어깨를 잡았다. 아킨은 크게 숨을 몰아쉬더니 그 대로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마치 베이나트가 툭 쳐서 쓰러뜨린 듯 한 꼴이었다. "너, 여긴 왜 온 거냐!" "......그냥....와 봤습니다." 그걸로 납득하라는 말이냐, 라고 말이 치솟는 것을 간신히 억누른 베이나트는 다시 숲의 어둠 속에서 달갑지 않은 것들이 살그머니 눈을 뜨는 것을 보았다. 그것들은 붉은 눈을 뜨고, 검은 몸을 더욱 크게 부풀리며 스르륵 스 며 나오고 있었다. 아킨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순간이나마 후퇴하게 만들 수는 있었 지만, 그것들은 조금 놀라 도망친 것뿐이다. 곧 더욱 집요하고 매섭 게 탐색의 눈을 밝히며 다가올 것이다. "난감하군." 그 때 아킨의 팔이 휙 치솟아 오르더니 그 멱살을 꽉 붙들었다. "아, 아키야?" "분명히 말해두는 데, 이 상황에서는 당신의 과거보다는 제 목숨이 더 중요합니다." "무슨 말하려고 그러는.....켁--!" "방금 전처럼 죄니 뭐니, 하며 낯간지러운 소리하지 말고.......! 당장 저것들 좀 물리 쳐 달란 말입니다! 어쨌건 대 마법사라니까 할 수는 있겠....아니, 당장 해요!" "저, 저기....그게 말이다....." 결국 아킨이 얼굴이 시뻘개져서는 외쳤다. "무서워 죽겠단 말입니다! 더 이상은......끔찍하다고요! 어서 없애요!" 그제야 베이나트는 아킨의 얼굴이 창백한 것이 피로 때문만이 아니 라는 것을 알아챘다.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고, 눈동자도 점점 커지 고만 있었다. 정말 혼절해 쓰러질 것만 같았다. "맙소사, 너--" 베이나트는 긴 소맷자락을 펼쳐 그런 아킨의 얼굴을 덮어버렸다. 그 러자 격한 숨소리와 떨림이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고, 베이나트는 지 금의 아킨이 얼마나 엄청난 힘을 쏟으며 방금 전의 그 일을 한 것 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또, 아주 어린 시절부터 뇌리에 박혀 있던 끔찍한 상처와 싸워야 했다는 것도. 앞에 있던 탈로스가 말했다. "그 형이 꼬마를 암롯사로 돌려보내 달라고 했으니까.....그 녀석에 대해서는 걱정할 것 없어." "뭐?" "그러니 다치게 하고 싶지 않으면 어디로든 던져 둬. 나도 꼬마가 상하는 건 달갑지 않아." 아킨의 어깨가 꿈틀 움직였고, 베이나트는 손에 힘을 꾹 주었다. 아 킨이 뭐라 속삭였다. 로브 자락에 가려, 그 목소리는 베이나트 이외 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베이나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탈 로스가 앞으로 나서려 하고, 수호자들은 머리와 몸을 그림자 속에서 꺼내놓고 있었다. 수호자들이 거의 모습을 다 찾고 있었고, 탈로스가 외치기만 하면 뛰쳐나와 모든 것을 다 끝장 낼 듯 몸을 조심스레 당겼다. "물러 나 다오, 탈로스." "그래도 덤비겠다면?" "이번에는 좀 혼날 거다." 개들이 크게 짖기 시작했다. 수호자들의 창이 치솟아 올랐고, 말들 이 발굽을 탁탁 찼다. 베이나트는 아킨의 어깨를 감싼 손에 힘을 꾹 주고는, 탈로스가 채 주문을 외우기도 전에 반대편 팔을 휘둘렀다. 바람이 갑자기 어디서 날개라도 치듯 거세어졌다. 구름이 빠르게 흐 르며 찢어지기 시작하고, 그 틈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에칼라스가 내 던지는 빛의 창처럼, 마도론이 뿜어내는 천둥의 철퇴처럼, 빛이 펑펑 터지며 어두운 대지와 숲에 내리 박히기 시작했다. 나무들이 허리를 휘청거리고 그 잎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빛은 숲의 바닥 에 퍽퍽 내리꽂혔다. 구름의 그림자들이 찢겨져 나가고, 나무의 그림자들이 사라지며- 세상은 쏟아지는 찬란한 금빛의 햇살을 향해 빛을 터뜨리고 있었다. 어떤 마법의 빛도 아니었다. 기울어지는 황금의 햇살, 하루에 가장 길고도 강한 햇살. 그것은 바 로 저녁의 햇살이었으며, 조물주가 에칼라스의 성배에 담아 첫 번째 로 뿌렸던 절대의 빛 자락이었다. 수호자들은 크릉--하고 으르렁대며 그림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개들이 귀를 젖히고는 그 들을 따라 오그라들더니 그림자가 되어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그 그림자마저도 빛에 의해 지워져버렸다. 바람은 여전히 거세게 불어 닥쳐오고 있었다. 잎들이 휘몰아치고, 구름의 그림자는 마치 달리듯 빠르게 숲과 대지를 훑었다. 그리고 타닥, 나무 둥치를 밟고 수풀을 헤치는 사슴처럼 빠른 발자 국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그 빛 속에서 차갑고도 짧은 빛이 번뜩 이며 탈로스를 향해 내리꽂혀 왔다. "그만 두십시오." 그 조용한 목소리와 함께 검은 머리카락이 내려앉았다. 짙은 초록의 망토와 녹색의 옷자락이 금빛 찬란한 햇살 속에 드러났다. 길게 뻗 은 귀는 주변을 세세하게 더듬으며 또 다른 마법의 징조를 감시했 다. "익숙한 엘프 녀석이군." 탈로스가 웃으며 말하자 자켄의 검이 더 바짝 다가왔고, 피가 스며 나왔다. 어둠 숲의 엘프들이 쓰는 검을 날카롭다. 힘만 조금 준다면 목이 뎅 겅 잘려 나갈 정도로. 베이나트가 말했다. "자크--그만 둬라. 어쨌든 내 제자니 예의는 지켜다오." 자켄은 서늘하게 그런 베이나트를 한번보고는 검을 거두었다. 탈로 스는 목을 뒤로 젖히며 피에 젖은 상처를 감싸쥐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자켄은 검을 휘돌리고는 칼집에 꽂아 넣은 후, 뒤로 한발자 국 물러났다. 탈로스가 투덜댔다. "고약한 녀석-" "그 때의 당신은 더욱 고약했습니다, 탈로스 고르노바."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순간, 자켄은 어깨를 스치는 따끔한 느낌에 다시 검을 뽑아 들었다. "읏-!" 그의 어깨가 갈라지며 피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깊은 상처는 아니 었다. 칼로 베어낸 듯 날카로운 상처였다. 아킨과 베이나트가 동시 에 앞으로 나섰고, 베이나트가 먼저 주문을 외웠다. 츠캉, 하며 자켄 과 탈로스 사이에서 뿌연 섬광이 튀어 올랐다. "이제 물러나라, 탈로스." "무슨--!" "탈로스, 이번에는 나도 좀 적극 적으로 나설 것 같고, 방금 전처럼 공격하는 너를 걱정해서 차라리 다시 그 환경 나쁜 곳에 갇히는 것 을 택하지는 못할 것 같구나." 그리고 순간 탈로스와 베이나트 사이에 빛으로 된 글자가 휘릭 떠 올랐다. 탈로스의 눈이 분노로 커졌지만, 베이나트는 험악하게 외쳤 다. "어서 가란 말이다!" "아직 안 끝났어!" "아니, 나한테는 벌써 끝난 문제다. 그리고 분명하게 말해둔다. 나는 천년 만년이 지나도 줄 수 없고, 그래도 원한다면 네 힘으로 직접 가져가라. 네 말대로 너와 나의 사제지간이 끝장난 거라면, 자비를 구하지도 조르지도 말아라." 탈로스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웃는 건지 실망하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마치 얼룩이 지듯 변했다. 그리고 큭-하고 웃고는 뒤돌 아 섰다. 그림자 속에 숨어있던 것들이 슬그머니 기어 나오더니, 탈 로스의 그림자 속으로 빠르게 스며들어 사라져 버렸다. 순간 베이나트 앞에서 타오르던 문자의 빛이 희미해지는 가 싶더니, 안개처럼 탈로스와 베이나트 사이를 뒤덮었다. 탈로스가 고개를 돌 리며 그를 노려보았지만, 그 모습은 이내 희미해졌다. 탈로스가 완전히 사라지자 그제야 베이나트는 아직도 창백한 아킨 에게 말했다. "이제 괜찮냐?" "......" 방금 전에 한 짓이 생각나 아킨은 얼굴만 붉혔다. 그 때 자켄이 가장 먼저 서쪽에서 빠르게 몰려오는 강한 존재감을 느꼈다. 무언가가, 아주 크고 거대하고, 그러나 빠르고 강한 것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엘프인 자켄에게 완벽하게 반하는 강철 도끼처럼 강 력하고 차갑고 날카로운 존재였다. 베이나트가 같은 것을 감지하고 는 고개를 들었다. 그가 바라보는 서쪽의 높은 산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구름은 거 의 찢겨져 나간 뒤였고, 그 검푸른 먹구름의 조각들 위로 피처럼 붉 은 노을이 구름을 불태우듯 물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다가오는 것, 빛나는 은조각을 던져 올린 듯 반짝이는 것이 있었다. 베이나트는 눈이 부셔서 그것을 자세히 보기 어려웠다. 하루 중 가 장 번쩍이는 것이 아침 햇살이며, 버티기 어려울 정도로 눈을 아리 게 하는 것은 저녁 햇살이다. 그 강렬함 앞에서는 누구라도 오래 눈 을 뜨고 서 있기 힘들었다. 그래도 베이나트는 무엇이 오고 있는지 는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저거...." 아킨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망연히 중얼거렸다. 저 먼 곳에서 찬란하 게 반짝이는 것은 분명 거대한 날개였고, 그 정도 거대한 것이 '그 것'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아킨은 누군가가 생각났다. ".....세르네긴?" 유제니아는 자켄이 표시해 놓은 흔적을 따라가긴 했지만, 그 거리가 너무도 멀자 그냥 주저앉아 기다리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숲에서 꽤나 오래 미적거린 듯 벌써 기 울어지고 있었다. 하늘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아직 굵직한 구름들 은 창백하면서도 그 끄트머리는 붉게 타올랐다. 유제니아는 그런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내렸다. 그녀가 서 있는 곳은 자그마한 호숫가였다. 붉게 피어난 꽃들이 바 람에 흔들리며 차가운 호수 위에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고, 수면이 바람에 흔들리자 창백한 꽃 무리의 그림자들도 같이 떨려왔다. 해가 차츰 차츰 기울어 가는 지 금빛과 구름으로 얼룩진 하늘을 그대로 비추어 내던 수면은 붉게 물들어 간다. 그냥 여기서 기다리는 편이 낫겠다, 내 발로는 따라 잡기도 힘들겠 고..... 그렇게 생각하며 주저 앉으려는데, 거세던 바람이 더욱 거세져갔다. 쿠우우--휘익, 휘익- 나뭇가지들이 심하게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 고, 아주 묵직한 것이 바람을 헤치는 듯 바람 소리 치고는 지나치게 힘찼다. 수면이 부르르 떨리더니, 세차게 물결치며 앞으로 쓸려 나 간다. 이게 뭐지? 뭐가 오기라도 하는 건가? 유제니아는 고개를 들고 그 바람의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벼락이 내리꽂히듯, 그것은 주변을 급작스레 휩쓸며 쏟아지 듯 나타났다. 콰르르르--! 호수는 파도처럼 솟구쳐 쓸려 나갔고, 나무는 휘청이다 꺾여 나가 고, 풀들과 돌조각들이 회오리치며 흩어진다. 유제니아는 어깨를 움 츠렸다. 그러나 바람이 너무 거세, 가벼운 유제니아는 휩쓸려 날아 갈 것만 같았다. 머리카락이 세차게 휘몰아치며 볼을 따갑게 때렸 다. 유제니아는 나무를 붙잡으며 고개를 묻었고, 순간 무언가가 내 려앉는 듯 천둥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쿠르르르르--! 땅이 울렸다. 물이 치솟아 발목까지 적셔왔고, 나무가 뚝뚝 부러지 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비명을 지르려는 순간에, 그 모든 것이 갑자기 뚝 멈추었다. 소리가 그치더니, 바람이 멎었다. 뒤가 간질간질 한 것이 무언가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거대한 것이 부드럽게 움직이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탁--하고 가벼운 발소리가 났다. "유제니아-!" 놀란 유제니아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녀가 본 것은, 어두운 호수 위에 머리를 드리우고 있는 실 버 드래곤이었다. 은빛의 비늘위로 저녁 햇살이 부서지고, 그 아름답고 유려한 몸체가 드리우는 호수 위로 달빛 흐르는 듯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녀를 바라보는 녹색의 눈동자는 깊고도 엄격했으며.....그래도 몸서리 쳐질 정도로 아름다웠다. ".....저거..." 그 때, 누군가가 그 드래곤의 목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검은 옷 차림의 그는, 잠시 머뭇거리듯 멈추어 서더니 곧장 달려오며 외쳤 다. "유제니아-!" 유제니아는 믿어지지 않아서, 그렇게 너무나 조용하게...설마 그 꿈 이 부서지기라도 할 듯 조심스럽게 입술을 달싹였다. "세냐...?" 세르네긴의 팔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유제니아는 그 조용한 침묵 속에 얼 마나 큰 기쁨과 안도가 흐르고 있을 지 너무도 잘 알았다. *********************************************************** 작가잡설: 아키의 작업전선에 드디어 이상이 왔습니다. 으흐흐흐~~!! <-되게 좋아한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31장 *************************************************************** [겨울성의 열쇠] 제31장 충만한 만월 제142편 충만한 만월#1 *************************************************************** 오랜만에 큰외삼촌인 놀비오 후작을 만나게 된 켈브리안은, 그의 양 볼에 입을 맞추고는 사랑스럽게 말했다. "이렇게 밤늦게 도착해서 죄송해요, 외숙부님." "내일 아침에 도착하는 것보다 비할 바 없이 낫구나, 사랑하는 켈브 리안." 비록 브리올테의 친오빠이긴 했으나, 놀비오 후작은 왕비와는 달리 꽤나 부드럽고 후덕한 사람이었다. 왕족에게 주는 명예치레 정도의 직위만을 하나 가지고 있을 뿐이었지만, 에크롯사에서 가장 넓고 풍 요로운 영지를 가지고 있었기에 별 다른 욕심 없이 조용하게 사는 것을 미덕으로 알고 있었으며, 그럴 만한 여유도 있었다. 그리고 바 로 아래 동생인 탈로스를 마법사로 키우고 후원할 정도로 애정도 있었다. 켈브리안은 놀비오 후작의 손을 잡아끌며 뒤에 시큰둥한 얼굴로 서 있는 슈마허를 소개했다. "이 분은 제 약혼자인 슈마허 쉐플런 경이에요. 아시죠?" 슈마허는 건성으로 손을 들었다 놓았을 뿐이었고, 그것이 켈브리안 을 아주 민망하게 했다. 지금 뭐 하는 거죠, 하고 날카롭게 쏘아보 자 슈마허는 마지못해 허리를 까딱 숙여 인사를 했다. 놀비오 후작 이 먼저 인사를 했다. "오랜만이오, 쉐플런." "저 역시." 꽤나 무례해 보일 수도 있는 그런 처신에, 놀비오 후작은 표정도 어 색하게 바꾸지 않으며 부드럽게 웃었을 뿐이다. "지레짐작해서 경계하지는 마시길 바라오. 나 역시 그 때 침묵했던 귀족 중 하나라는 데 변명할 생각은 없고, 자네를 별 달갑지 않게 생각했던 것 역시 사실이오. 하지만 내 조카인 켈브리안의 안목은 아주 훌륭하다는 걸 알고 있고, 그런 안목이 고른 약혼자인데 믿지 않으면 어찌하겠소...축하하오, 둘 다." 켈브리안은 그런 숙부의 말에 가책이 느껴졌다. 슈마허와의 약혼은 순전히 브리올테가 이상한 곳으로 그녀를 시집 보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을 뿐, 그가 괜찮은 남자라 고른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런 마당에 착한 외삼촌이 이렇게 기뻐하니, 나중 에 그와의 약혼이 깨지기라도 한다면 그가 얼마나 실망할 까 해서 벌써부터 미안해지는 것이다. 놀비오 후작이 켈브리안의 손을 잡아 끌며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우선 쉰 다음...." 그런데 슈마허가 불쑥 말을 꺼냈다. "그런데 주변이 왜 이리 험악한 겁니까?" 놀비오 후작은 여전히 부드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대체 지금 무슨 소리냐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슈마허가 따지듯 물었다. "난 후작님의 영지가 어떤 곳인지 알고 있고, 그런 곳에 이 정도로 많은 병력이 좍 깔려서 감시하고 있는 상황이 이 영지의 일상이라 단정하기에는 좀 예민한 편이라서." "그건 내 성에 묶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요. 심각한 일은 아니니 걱정 마시오." 슈마허가 심술궂게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지은 죄가 좀 있어서 말입니다." "그에 대해서는, 마라 공께서 공식적으로 오해였다 말씀하지 않았 소. 그 분은 자신이 한 말을 스스로 어길 정도로 명예를 모르는 분 이 아니오." 켈브리안은 지금 슈마허의 속에서 어떤 생각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지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그래서 얼른 나서서 그녀가 예상하고 있 던 것을 물어 보았다. "귀한 손님이라도 오시는 건가요?" 후작이 빙그레 웃었다. "알아주니 고맙구나. 맞다." 당장에 슈마허의 얼굴이 굳었다. 켈브리안이 그런 슈마허의 팔을 잡 아끌었다. "우선 들어가요, 슈마허." "왠지 들어가기 싫군-" 켈브리안은 그의 허리를 팍 꼬집어 버렸다. "으--이봐요, 공주--" "닥치고 오기나 하라고요. 다른 데라면 몰라도, 제 숙부님이 있는 곳에서 저를 곤란하게 하는 건 용서할 수 없어요." "성질은." "당신 행동부터 반성하고 남의 성질에 대해 불평해요. 내 나이 두 배는 되는 아들 키울 생각은 없으니까, 더 이상 충고하게 만들지도 말고요." 안으로 들어가니 본성 주변에도 경비병이 쫙 깔려 있었다. 그들의 하얀 창과 날카로운 눈이 어둠 속에서 빛났고, 그들은 후작과 그 호 위들이 지나가자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성안은 밤이 늦었음에도 아주 환했고 벽과 바닥을 덮은 화려한 태 피스트리와 융단은--마치 누군가를 모시기 위해 새로 꾸며진 듯 했 다. 놀비오 후작은 별로 화려한 사람이 아니다. 낭비를 좋아하지도 않으며, 그 부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 두 사람이 주인으로 있는 성이 그러하니, 켈브리안은 점점 이상한 생각에 들었다. 아무리 연 락을 했다 쳐도, 상식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그렇게 빠르게 앞질러 나와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도 이상했다. 또, 진작에 알고 있다 쳐도 후작이 직접 나오기보다는 그 큰아들이 마중 나오는 것이 합 당하다. 후작은 앞장서서 홀을 지나 귀빈을 맞이하는 데 쓰이는 진녹의 방 으로 향했다. 그곳의 문 옆에 가장 거창하게 무장한 기사 둘이 있었 고, 그들의 가슴에 황금 드래곤과 창과 방패의 문장이 그려져 있었 다. 그것을 발견한 켈브리안이 놀랐고, 슈마허는 노골적으로 등을 돌려 버렸다. "어디 가는 거에요?" "안 들어갑니다." 켈브리안이 그의 망토 자락을 잡았다. "고집 피우지 마세요, 슈마허. 애도 아니고...이러면 제가 곤란하다는 건 아세요?" 슈마허는 이만 뿍 갈고는 다시 돌아섰다. 기사들이 무심하게 그런 슈마허를 보고는 문을 열어 젖혔다. 진녹의 방은 놀비오 성에서 가장 화사하게 장식된 곳이었다. 정 12 각형으로 된 둥그런 홀에, 각 벽마다 세계의 열두 수호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으며 그 주변에는 모두 장식적으로 변화된 잎과 꽃들이 무성한 수풀처럼 그려져 있었다. 덩굴은 열두개의 기둥을 따라 휘감 겨 천장까지 휘돌았고, 그 중앙에는 에칼라스가 그 성배와 검를 양 손에 쥔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 입구의 맞은 편 벽에는 에크롯사 의 수호자이자 현재 이 땅의 지하에 잠들어 있는 황금의 드래곤, 모 든 드래곤들의 왕이자 절벽의 왕인 펠톤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보라빛 드레스를 입은 키가 큰 여자가 하나 서 있 다가, 그들이 들어오자 미소를 보였다. 놀비오 후작이 허리를 숙이며 그녀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모시고 왔습니다, 폐하." "수고했소." 갈색에 가까운 금발의 여자였다. 눈은 연푸른 색이며, 아주 미인이 라기 보다는 우아하고 품위 있어 보이는, 여자라는 느낌 이전에 '높 은 사람'이라는 분위기부터 풍겼다. 나이는 서른 즈음으로 보였고, 곧게 편 어깨와 꼿꼿한 자세는 오만할 정도로 당당해 보였다. 그녀 옆에는 그녀보다 키가 조금 큰 깡마른 남자가 서 있었다. 어깨 는 좁고 다리는 길었으며, 마른 얼굴과 날카로운 콧날에 검은머리와 검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 여자 옆에 서 있으니 부부처럼 보이 기는 했지만, 부인보다 오히려 더 부드럽고 유약한 인상이었다. 여자가 말했다. "오랜만이구나, 켈리. 로메르드로 보낼 때만 해도 자그만 아이였는 데......정말 많이 컸어." 켈브리안은 아직도 놀라 미처 답하지도 못했다. 여자는 빙그레 웃고 는 이번에는 슈마허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로메르드로 간 이유가, 핑계는 내 남편이고 진짜 목적은 이 아이가 아닌가 싶을 정도 군. 하지만 약혼을 축하하오, 슈마허 쉐플 런 경-" 슈마허는 묵묵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고개를 들며 여자 옆의 깡마른 남자를 한번 쏘아보았다. 남 자 역시 마주 그런 슈마허를 쏘아보았고, 결국 둘 다 고개를 슬쩍 돌렸다. 여자가 그런 둘을 보고 훗 웃더니 말했다. "모두 나가 주겠나? 쉐플런과 단 둘이 할 말이 있으니까." 켈브리안은 놀비오 후작이 눈치를 주자 인사를 올리고는 물러났다. 놀비오 후작은 그런 조카의 허리에 손을 얹은 다음 이끌 듯 방밖으 로 데리고 갔다. 문 앞을 나서자마자 켈브리안이 말했다. "어떻게 된 거죠, 외숙부?" "뭐, 보이는 대로지." "하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숙부댁으로 오지 않았을 거라고요. 일이 잘못되면 그는 물론이고 저까지 곤란해진다고요." "이곳 국경을 넘었다면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어야지, 켈리. 그것도 몰래 온 것도 아니고, 나한테 편지까지 거창하게 써서 보냈 는데 폐하께서 모르실 거라 생각하면 그건 너무 방만한 자세란다." "숙부께서 알리신 건가요?" "물론이다. 하지만 걱정하지는 말아라. 그 분은 귀한 분이며, 명예를 아는 분이다. 해 될 일은 없을 거다." 켈브리안은 별 수 없이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리고 숙부 말을 믿을 수밖에 없기도 했다(슈마허는 별반 믿기 어려워도). 놀비오 후작이 그런 켈브리안의 어깨를 토닥여 주며 말했다. "넌 더 이상 걱정 말고 푹 쉬려무나. 브리올테 때문에 마음 고생이 심했을 텐데-" ".....저..." 그 친절한 말 한마디에도 목이 메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별로 좋아진 것 같진 않군, 슈마허." "폐하의 남편 덕이지요." 여자-죠세피나 여왕은 웃으며 말았다. "무슨 일인지 짐작이 되고도 남는 군. 하지만 경의 조카아이 일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 다른 사람도 아닌, 당신도 아는 하멜 버그 백작의 집에 맡겼으니까." "그 샌님 말입니까?" "마법사나 학자들은 대 놓고 무시하는 버릇은 별로 좋다고 보기 어 려운데."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 애는 내 딸이나 다름없는 아이란 말입니다. 아직 어리기도 하고요. 그런 아이를 데리고 있으니 오라고 하는 건 문제 있다고 보지 않으십니까? 게다가, 두 달이나 소식을 못 듣게 하기도 했지 않습니까." "브리올테 대비가 당신에게 돌아가는 모든 서신을 감시하고 있었으 니까. 특히 에크롯사로부터 오는 모든 소식은 그녀의 손에 들어갔 지. 그러니 당신이 당장에 뛰쳐나갈게 뻔한 경의 의부 그렉 포틀러 스에 대한 소식은.....그냥 보냈더라면 영영 모르게 되었을 가능성이 더 높아. 그리고 그녀가 알기라도 했다면 그런 편법으로 국경을 나 올 수도 없었을 테고." "배려, 눈물나게 감사합니다." "그래....그 아이를 찾으면 곧장 로메르드로 돌아갈 생각인가?" "세르네긴은 남을 겁니다. 주먹으로 패서라도 그리 해 드리지요." 여왕 앞에서 하기에는 어휘에 문제가 많았지만, 죠세피나 여왕은 전 혀 신경 쓰지 않으며 유쾌하게 웃었다. "그건 고맙군. 휠테스도 기뻐할 거야." "그 일로 너무 골치 썩혀 드린 데에 대해서는 죄송하게 생각합니 다." "아니야. 포틀러스의 결정을 이해하듯, 나도 내 남편의 무례에 대해 서 사과하겠어. 하지만, 그가 그렇게 나온 데에 대한 책임은 경에게 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단지 그 일을 너무 크게 만든 데에만 사과 드릴 수 있습니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저는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저는 십 수년전의 그 철없고 시끄러운 청년이 아니니까요." "그 사람은 신경 썼거든." 슈마허는 당장에 험악하게 외쳤다. "말도 안 된단 말입니다!" "말은 안 되더라도 알아서 이해해 줘." "뭘 이해해 드립니까! 적어도, 그는 그 때에 가문 든든한 남자였고, 나는 빈털터리 용병이었고, 결국에 그는 당신과 결혼했고, 나는 채 이고 저 먼 델 카타로 짐 싸들고 가야 했는데! 당한 건 나지, 그 사 람이 아니라고!" 앞뒤가 전혀 안 맞는, 말의 높이가 아주 가파른 하향선을 그리고 있 었다. 그러나 죠세피나는 오히려 그것이 더 재미있다는 듯 쾌활하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슈마허. 나는 정말 내 남편을 사랑했고, 사랑하고 있 어. 그리고 그 때 당신이 채인 건 슈마허, 당신의 매력이 모자랐던 거지 가문 탓은 아니었다고 봐. 나는 내 마음에 들고, 그 남자도 제 법 쓸만하다면 무엇을 무릅쓰고라도 결혼할 수 있거든." "폐하..." "어쨌건.....당신이 나에 대한 사랑을 당신답게 무시무시한 원망과 함 께 잊어 주었듯, 나 역시 당신에 대한 기억을 약간의 한심함과 좋은 감정을 더불어 가지고 있어. 그러니 남편 일에 대해서는 너그러이 용서해 주면 좋겠어." "폐하께서 대신 사과하시는 겁니까?" 그 비난하는 듯한 눈초리에 죠세피나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이것이 마라에게 있어, 본인이 직접 사과하는 것 보다 더욱 힘든 일이라는 것 정도는 알아 줄 수 있지 않나? 우리는 그냥 부부가 아 니라....나는 왕이고, 그는 왕의 남편이야." "아니, 그 다툼은 철없는 두 남자의 꼴불견이었을 뿐 폐하께서 이 정도로 나오실 정도로 대단한 일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차라리 영광 이군요." "그리고 포틀러스에게도 감사하도록 해." "네?" "그가 국경을 넘는 즉시 휠테스 역시 국경으로 향했어. 그리고 그 는.....휠테스와 함께 에크-찬다에 도착하게 되자 휠테스는 성 밖에 세워 놓고 단신으로 나를 알현해 자네의 죄를 청원했네. 용기사이면 서도 나라를 버린 죄는 얼마든지 받겠으니, 당신의 죄만은 용서해 달라고." "이, 이 바보가....!" "너무 그러지 마. 그는 휠테스마저도 질릴 정도로 아주 고지식한 기 사이고, 그런 이상 생각해 낼 수 있는 방법도 그런 것뿐이지. 또, 그 방법이야말로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고." "그래서......지금은 어디로 갔습니까?" "동생을 데리러 갔지. 그리고 방금 전에 찾았다 연락을 보냈으니, 곧 이곳으로 올 거야." "그것도 알고 계셨습니까?" 슈마허는 사실 세르네긴에게 이곳 놀비오 성으로 오라고 미리 말해 두었었다. 그리고 그것마저 들켜 버리게 되자, 어쩐지 바보가 되 버 린 것 같았다. "당연하지 않겠나." 그렇게 말한 죠세피나는 약간은 짓궂은 눈빛을 보내더니 덧붙여 말 햇다. "그리고...그 아이와 함께, 경과 포틀러스 경과 조금 안면이 있는 손님이 올 것 같아." "안면이 있는 손님이라니요?" "암롯사의 아킨토스 왕자와 조금 안면 있는 사이 아니던가?" 슈마허는 웃고 말았고, 그것은 결코 좋아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내일 아침에 도착할 테니 만나보도록 해." 그러나 슈마허의 표정은 제발 한달이나 뒤에 그를 보고 싶다는 얼굴이었다. *********************************************************** 제31장 ************************************************************** [겨울성의 열쇠] 제143편 충만한 만월#2 ************************************************************** 켈브리안은 그날 밤 결국 슈마허를 만나지 못하고 잠들어야 했다. 그러나 별로 신경 쓰이지는 않았고, 또 그녀의 친척들은 너무나 잘 해주었다. 워낙에 놀비오 가가 여자 귀한 집안이라, 역시나 남자 셋 뿐인 놀비오 가의 사촌오빠들은 그녀가 오랜만에 찾아온 누이동생 인 듯 친절하게 대해 주었고 외숙모도 친어머니 브리올테보다 부드 럽게 그녀를 대해주었다. 방은 마련되어 있었고, 그 푹신하고 아늑 한 방에서 내일 아침에는 어머니가 얼마나 어떻게 볶아댈까, 하는 걱정 없이 푹 쉰 켈브리안은 아침 일찍 일어났다. 찬란한 아침 햇살, 이란 말을 많이도 들었지만 켈브리안은 그날 아 침처럼 찬란한 아침은 처음 보았다. 이틀 전에 온 비로 씻겨 내려간 듯 청명한 하늘에, 가을의 차가움에 금빛 테두리를 친 이파리들이 흔들렸다. 아직도 젖은 풀과 고여 있는 물웅덩이는 정말 황금처럼 빛났고, 나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켈브리안은 아침 단장을 마치고는 침실을 나서 복도로 갔다. 성 곳 곳이 빛으로 가득 찬 듯 환했다. 너무 일찍 일어난 듯 아침 식사시간은 좀 남아 있었고, 하녀와 하인 들은 부산스럽게 오고가다가 그녀와 마주치자 얼른 멈추어 서서는 반갑게 인사를 올렸다. 어렸을 때 알고 지내던 나이 먹은 하인들도 있었고, 처음 보는 젊은이들도 있다. 그러나 그들 모두 귀한 손님인 데다가 아름다운 여인이기도 한 켈브리안에게는 아주 공손하게 대 했다. 켈브리안은 분위기 만으로도 이렇게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처음이 었다. 너무 오랜만에 맛보는 편안함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의 따가운 눈초리가 느껴지지 않는 곳에 그저 그녀를 좋아하 고, 또 그녀도 좋아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는 것은- 그러면 서글퍼지기도 했다. 이곳은 휴식터이고, 휴식터에서 또 전쟁 터로 돌아가는 것은 숙명이자 의무이다.... "여어- 늦잠 잤네." 그렇게 갑자기 불쑥 끼여든 그 인사에, 켈브리안은 눈을 콱 찌푸리 며 그를 쏘아보았다. "충분히 일찍 일어났어요. 당신 쪽에서 밤 샌 건 아닌가요?" "물론 아니지. 잠깐 자기는 했소. 음...한시간?" "그럼 더 주무시지 뭐 하러 나왔어요?" 걱정해 주기보다는 말 그대로 보기 싫으니 잠이나 자라는 뜻의 말 이었다. 당연히 아는 슈마허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히죽 웃었다. 켈브리안은 오죽 사람이 없었으면 이렇게 능글맞고 느끼한 남자를 보내는 것마저 아쉬워했나, 하는 생각이 들어 참담해졌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 길이었소?" "날이 좋아서 산책 좀 하려고요. 같이 가시겠어요?" "별로-. 그건 그렇고 켈브리안, 우리 약혼에 대해서 말인데......" 어제 그가 죠세피나 여대공을 만날 때부터 짐작하고 있었던 일이라, 켈브리안은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건 왜요?" "이제부터 파혼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보자고." 켈브리안은 주먹이라도 한 대 휘둘러보고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 도 이 슈마허에게는 도무지 통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턱을 들고는 외려 더 차갑게 말했다. "그래, 이유가 뭔가요?" "파혼의 전제조건이 드디어 실현된 듯 하다, 라고 말하면 어떨까?" 켈브리안은 머리가 어질어질거려서 더 생각하기도 힘겨웠다. 그리고 그와 약혼하기 전에 대체 무엇을 전제로 했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 았다. 아마도 아주 중요한 일이었던 듯 한데, 그리고 분명 잘 기억 하고 있었던 듯도 한데, 당장은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켈브리안은 생각나는 대로 아무 말이나 하는 수밖에 없었다. "좋아요, 그 파혼의 전제 조건? 아하....그렇군요, 음. 실현된 것 같으 면 어서 파혼 핑계를 어떻게 쓸까 궁리 해 봐요! 그리고 슈마허, 당신이 먼저 파혼해요. 알겠지요?" "이봐, 켈브리안 공주- 남자가 파혼선고 하는 것과 여자가 파혼선고 하는 건 틀리오. 여자가 파혼선고 하면 남자가 못난 놈이라 시시덕 거리는 거 듣고 끝날 수 있지만, 다 큰 남자가 제 입으로 파혼선고 했다간 당장에 매장이라고. 내 미래를 생각한다면 되도록 당신이 해 주면 좋겠는데." 켈브리안은 고개를 돌렸다. "유감스럽지만, 그 정도는 감수해 주셔야겠네요. 세상에나, 오기 전 에는 아무 남자에게나 시집가게 놔 둘 수 없다며 그토록 생각해 주 는 척 하더니, 이곳에 오자마자 생각이 변하는군요." "당신이야말로 오기 전에는 가도 된다 어쩌고 하며 그토록 생각해 주는 척 하더니, 정작 말 나오니 그게 뭐요?" "그 때와 지금은 틀려요. 차라리 그 때 말했다면 충분히 준비하고 있는 상황이니 괜찮았지만, 이게 뭐에요. 잘 자고 일어나더니 갑자 기 '나 당신이랑 파혼하고 싶어.'하고 뒤통수나 치다니." "공주~~" "앙앙 거려봐야 소용없어요. 귀엽지도 않으니 오히려 끔찍하기도 하 고요. 어쨌든 나중에 봐요.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로 생각하고, 이곳 을 떠난 후에나 그 말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해요. 여기서 그 말 꺼 냈다가는....장담컨대, 아마도 제 외숙부께서 당신을 절단 낼 버릴 걸 요." "너무 하는 군." "원래 미인은 매정한 법입니다." 그러며 켈브리안 공주는 몸을 휙 둘렸다. 뒤에서 슈마허가 쿡-웃는 소리가 들려서, 더 기분이 나빴다. 뭐야, 저 남자는-! 그렇게 돌아섰던 그녀는, 이번에는 반대편 복도에 서 있던 또 다른 남자와 마주쳤다. 아무래도 슈마허를 찾아온 듯 한데, 그는 그녀를 보자 눈썹을 아주 살짝 움직였고---그것이야말로 이 남자에게는 아 주 큰 당혹감의 표시였다. 어쩌다가 이 남자가 여기까지 왔나, 싶어 서 켈브리안도 꽤나 어리둥절했다. "어머나, 여기는 웬 일이에요, 포틀러스?" 세르네긴이 막 답하려는데, 그 때 뒤에서 슈마허가 말했다. "어이, 세르네긴--그냥 와라." 그 다음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세르네긴이 입을 살짝 벌리며 고개를 들더니, 뒤의 슈마허를 멍하니 바라보는 것이다. 말문이 막 힌 것이다! 늘 잔인한 말 무례한 말 허를 찌르는 말 뒤퉁수 치는 말 들을 마치 '하늘은 파란색이지요.' 라고 말하듯 아무렇지도 않게 하 던 세르네긴 포틀러스가! 켈브리안은 슬슬 무서워지기까지 했다. 이 정도라면, 이 청년은 정말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당황해 있는 것이 다. 드디어 세르네긴이 말했다. "아무 말씀 없으셨잖습니까, 슈마허 님." "말 해둘 필요를 못 느꼈으니까. 그리고 말한 다고 결과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잖니." "그래도-"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자 슈마허가 말했다. "어차피 말했어도 결과는 똑같았을 거 아니냐. 그런데 세르네긴, 유 즈는 어디 갔지?" "곧 올 겁니다. 잠깐 먼저 가 있으라고 말하던데..." "뭐야, 그 녀석은. 오랜만에 나를 만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거냐." "잘 모르겠습니다....." 켈브리안이 더 놀랐다. "혹시, 그 아이 말인가요?" 그렇게 물으며 뒤돌아보자 슈마허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세르네긴이 데리고 왔소." 켈브리안은 방금 전의 원망을 잊어 버렸다. 그녀는 정말 순수하게 기뻐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다행이군요. 축하해요." "고맙소. 그래, 켈브리안--그건 그렇고 당신은 가려던 곳이 있지 않 소?" 얼른 안 가고 뭐하냐는 듯한 슈마허의 말에, 켈브리안은 또 방금 전 의 기분을 돌이키고 말았다. 켈브리안은 기분이 팍 상해서 고개를 휙 돌리고는 내 쏘듯 말했다. "알았어요! 그리고 되도록 오늘 하루 종일 보지 말도록 하지요." "너무하네." "이렇게 말해도 치근덕댄다면 만날 때마다 따귀 한방씩 갈겨 줄 거 에요. 그래도 좋다면 열심히 얼굴 들이밀어 봐요." 그제야 슈마허가 입을 다물었다. 정원으로 향하는 테라스를 찾으며, 켈브리안은 속으로 욕을 엄청나 게 퍼부어 대야 했다. 저 남자가 정말! 사람을 어디까지 가지고 놀려고 하는 거야....! 내가 바본 줄 아나! 등등등. 그러던 켈브리안은 드디어 그녀가 찾던 테라 스에 도착했다. 문은 활짝 열려 있고, 상쾌한 아침 공기에 머리와 가슴이 씻기듯 상 쾌해지는 듯 했다. 후--하고 작게 숨을 들이쉬며 화를 겨우 누른 켈브리안은, 막 테라 스를 나서 정원으로 내려가려다가 창 옆에 서 있던 낯선 소녀를 발 견했다. 하녀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차림새를 보니 아니었다. 푸른 원피스에, 작고 빨간 리본을 까만 머리카락 양옆에 달고 있었고, 자그맣고 앳 된 얼굴을 보니 켈브리안 보다 한참은 어려 보였다. 열 다섯이나 될 까- 게다가 몸까지 호리호리하고 날씬해서, 더욱 어리고 작아 보인 다. 소녀는 당황한 듯 눈을 깜빡거리다가, 그녀가 귀한 신분이라 결정을 본 듯 고개를 숙였다. "안..." 인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저 멀리서 누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즈--! 너 거기서 뭐하니. 어서 와!" 슈마허 목소리였으며, 성안에서도 저렇게 뻔뻔히 굴 정도의 인간도 슈마허뿐이다. 그러나 그 이름을 듣게 되자, 켈브리안은 소녀를 한번 더 바라봐야 했다. 놀란 토끼처럼 당황한 소녀는 이 기회에 얼른 도망쳐야 된다 싶었는 지 슈마허가 있는 곳으로 조르르 달려갔다. "아저씨--!" 아주 예쁜, 그리고 사랑스런 목소리였다. 슈마허가 두 팔을 벌렸고, 유제니아는 그런 슈마허의 품에 폴싹 안 겼다. 키가 크고 덩치가 좋은 슈마허의 품이니, 정말 그녀는 강아지 만해 보였다. 그리고 그런 유제니아를 안아주는 슈마허는 오랜만에 딸을 만난 듯 아주 기분 좋아 보였다. 켈브리안은 그 소녀를 그토록 사랑하는 슈마허의 기분을 조금은 이 해할 수 있었다. 소녀는 작고 예쁜 보석 같은, 깨끗하고 사랑스러우 면서도 결코 부서지거나 더럽히지 않는 단단함을 갖춘 그런 존재였 다. 그래서 켈브리안은 잠시나마 방금 전에 그가 저지른 무례를 용 서해 주기로 했다. "감동 적일 정도로 컸구나. 이제는 예전에 내가 했던 제안을 진지하 게 생각해 보면 어떻겠니, 유즈?" 그 말에 켈브리안은 웃고 말았다. 유제니아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물 었다. "아저씨 약혼했다면서요?" 슈마허가 무슨 말을 할지 뻔히 아는 켈브리안은 이마를 짚으며 고 개를 돌렸다. 역시나 슈마허가 말했다. "걱정 마라. 방금 파혼 당한 것 같으니 이제 아주 가뿐한 홀몸이란 다. 어쩔래?" "에헤, 바람 피다가 한방 맞은 거죠? 다 알아-" "그러지 말아라. 이번에는 꽤 충실했다고." "일주일에 한번씩 다른 여자 만나는 것을 한 달에 한번으로 줄인 정도겠지요. 맞지, 세냐?" "이봐라, 유즈...." "으흠, 애처롭게 우겨봐야 소용없다고요. 아버지가 언제나 그러셨잖 아요. 온갖 여자들과 온갖 낭만을 다 만들고 히히덕 놀러 다니는 것 도 좋지만, 서른 넘어서도 그러다간 모두 제짝 찾아 눌러 앉아 있을 때 결국에는 혼자만 남아서 징징대고 있을 거라고." "이거, 이거 너무 하는 군." "사실이잖아요." 슈마허가 꼼짝 못하고 있다. 켈브리안은 그 쪽으로 돌아가서 그 대 화를 좀더 제대로 경청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예쁜 목소리로 재잘재 잘 대니, 켈브리안도 한번 안아주고 싶었다. 여동생이라면 한번쯤 가져보고 싶었던 존재고, 저런 동생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다. "그런데 아저씨, 아저씨 약혼녀도 여기 있어요?" 켈브리안은 윽, 하고는 얼른 치마를 당기고 도망치듯 테라스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오자 마자 눈부시지만 차가운 아침 햇살이 쏟아졌다. 벌써 싸늘해진 바람이, 드러난 어깨와 팔목을 서늘하고 오싹하게 했다. 켈브리안은 눈가를 웃음으로 채우며 정원에 섰다. 정원의 분수에서 쏟아지는 투명한 물에 햇살이 부서지고 있다. 금가루가 쏟아지듯, 그 투명한 구석구석에 빛이 가득 차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선배....?" 켈브리안은 그쪽을 돌아보다, 햇살이 따가워 눈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분수대의 대리석 난간 위에 누군가가 손을 얹고 그녀를 돌아보고 있었다. 걷어붙인 손은 물에 흠뻑 젖어 있고, 은빛 머리카락 끝도 물에 젖어 물방울을 떨어뜨리 고 있었다. 그는 믿어지지 않는 다는 듯 손을 당기며 다가왔다. 빛이 어긋나며 그의 모습에서 역광이 지워졌고, 그런 그는 놀란 얼 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떻게....." 투명한 햇살도, 맑고 차가운 물줄기도, 아침의 황금빛 가득한 아름 다움도 순식간에 흐려져 버렸다. *********************************************************** 작가잡설: 자, 과연 누가 채이고 누가 건질 것인가! 크하하하하하!!! <-이승환의 결혼으로 반쯤 실성상태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31장 ************************************************************** [겨울성의 열쇠] 제144편 충만한 만월#3 *************************************************************** 자켄은 고개를 들어 나뭇잎들이 뒤엉켜 자그마하게 햇살이 반짝이 는 숲의 천장을 보았다. 푸드득, 하고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올라 숲을 가로질렀다. 베이나트가 그의 옆에서 나뭇가지를 휘두르며 말 했다. "그래도 네가 엘프라 다행이구나. 드래곤의 숲도 숲은 숲이니까 말 이야." "어느 곳의 숲이든 제게는 마찬가지입니다. 제게 있어 숲은 언제나 살아온 고향이지만, 숲에게 저란 존재는....그 숲의 자식이 아닌 그저 많고 많은 짐승과 인간들과 똑같습니다. 매정하죠, 제게는- 단지 인 간들 틈에 섞여서 이상한 눈초리를 잔뜩 받는 것보다는 몇 배나 나 을 뿐입니다." 그리고 베이나트는 '언젠가는 숲과 통하게 될 것이다.' 라는 말을 해 주어봤자 자켄에게 상처만 주리란 것을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 다. 자켄이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그는 영원히 사이러스의 아들이 듯, 숲 역시 인간의 피를 가진 자켄에게 영원히 닫혀 있을 것이다. 그나마 이 숲이 아닌 다른 숲에 있는 것이 나은 것은, 순전히 그 숲 들이 나루에와 통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키에게는 왜 유제니아와 함께 가라고 말씀하셨던 거죠?" "그야......그렇게 그냥 헤어지면 좀 섭섭하잖니. 하루 정도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끼리 그 동안 뭐 했는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차근차근 이야기하고 헤어지는 것도 나쁘진 않잖아." "하지만 아키는 별로 가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응, 왜? 그 용기사 청년은 아키의 은인이라며. 게다가 아키도 전혀 싫어하거나 퉁명스럽지 않았어. 오히려 아주 정중했지." 베이나트는 몇 시간 전에 만난 세르네긴에 대해 벌써 '괜찮은 녀석 이군.' 하고 결론 내렸다. 용기사답게 차분하다 못해 바위처럼 무뚝 뚝한 인간이기는 했지만, 성품은 꽤 깨끗해 보였다. 게다가, 무엇보 다 그는 유제니아의 오빠다. 여동생을 먼 길 지켜준 사람인데 정중 하게 대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네가 엘프고, 그는 용기사라서 그렇게 느끼는 건 아니냐?" "베이, 이것은 용기사에 대한 엘프의 일반적인 반감이 아닙니다....... 아키는 분명 달갑지 않아 했고, 그 아이가 그러는 건....정말 처음입 니다." "어떤 의미에서?" "아키는....어린애였습니다. 좋은 감정은 어렵게 내 놓으면서도, 나쁜 감정에 있어서는 전혀 숨기지 않지요. 아니,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몇 배로 공격적으로 표출하던 것이 아키였습니다." 베이나트는 아킨과 처음 만났을 때를 떠 올렸다. "좀 그렇기 했지." "하지만 그런 경우는 처음입니다. 그렇다고 세르네긴과 아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고 생각하기도 어렵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그는 아 키에게 자기가 본의 아닌 피해를 끼쳤다고 생각하게 되자 목숨을 걸고 그 아이를 지켜 주었던 사람입니다." "그 밖에는 정말 아무 것도 없니?" "네. 아무 것도 없습니다." 베이나트는 턱을 문질렀다. 자켄은 순해 보이는 말투와 얼굴과는 달 리, 아주 철저하고 냉정한 구석이 있는 녀석이라는 것을 그도 잘 안 다. 베이나트도 이런 자켄을 아주 신뢰하고 있었고, 그의 대부인만 큼 애정도 각별하다. "네가 그렇다면 정말 그런 거지. 특히 아키의 일이라면 너 이상 가 는 조언자는 없을 테고 말이다. 그렇다면, 왜 내가 아키를 보낼 때 아무 말도 안한 거냐." "아키가 거부한다면 그건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숨기려 한다 면, 그건......차라리 밝히기 꺼려지고 부끄럽다는 뜻. 즉, 자기가 잘못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별 문제 될 건 없잖아." "상대가 세르네긴인 것이 문제입니다. 그는 용기사이고, 용기사인 이상 그 공통된 성격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베이나트는 자켄이 왜 걱정하는 것인지 그제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베이나트는 같이 걱정하는 대신 자켄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 다. "자크, 그 애는 이제 아이가 아니다. 상처받을 수도 있지만, 그 상처 를 이기는 것은 스스로의 몫이란다." "그 애는 충분히 상처받았습니다, 베이나트." "너도 겪어 봤고 겪고 있어서 알 테지만, 고난이란 어느 날 갑자기 기적처럼 사라지는 게 아니야. 인간이 경험과 함께 얻어 가는 것은 강인함이고, 고난보다 더욱 강해졌을 때 겨우 운명의 승자가 되는 거란다." "슬프군요...." "세상사가 그런 거지, 뭐." "아뇨, 이렇게 친절한 당신이 왜 그리 서글프도록 고독한지......그것 이 슬프다는 말입니다....." 베이나트는 웃기만 했을 뿐이었다. 다시 열이 화끈 오르는 것 같아, 자켄은 등을 나무 둥치에 기대며 말했다. "물...주시겠습니까?" 어제 탈로스에게 상처 입은 후로, 계속 이런 식으로 열이 올랐다. 베이나트가 가죽 주머니를 내밀자 자켄은 그것을 받아 한 모금 마 셨다. 그리고 손바닥에 조금 적셔 이마와 목덜미를 식힌 다음, 상처 에 가져가자 베이나트가 손을 저었다. "쏟아 부어 봐야 쓰리기만 할거다. 내 버려 둬." "불덩이라도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 물로는 아무 소용없으니 그만 고집 피워라." 자켄은 붕대에 감긴 상처를 가리키며 물었다. "위험한 건 아니겠지요?" 베이나트는 답하는 대신 자켄의 상처 위에 손을 얹었다. 파칭--하 고 빛이 번득이는가 싶더니, 열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그러나 어지 러운 것도, 묵직한 것도 여전했다. 어디 시원한 그늘이나 물 속에 들어가서 한참 있고 싶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하자, 베이나트의 눈 안에 무언가 어두운 기색이 가득 찼 다. 그제야 그가 여태까지 어떤 말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된 자켄은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칼롭...?" "너에게 할 말이 있다.....이렇게 급작스레 말한다 하더라도 화내지는 말아라." 자켄은 부드러운 얼굴로 말했다. "당신이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믿을 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내 힘으로라면 여기서 어둠 숲까지 바로 보내 줄 수 있다. 돌아가 거라." 자켄의 눈이 커졌다. "말도 안됩니다. 아직은...." "솔직히 말해주겠다.....지금의 네 몸 상태, 당장에 나루에에게 보내 지 않으면 상당히 위험할 지경이다. 탈로스가......나나 아키에게 꽤 고약한 장난을 치고 돌아갔구나.....미안하다. 그 녀석이 그렇게 쉽게 물러날 때 처음부터 의심했어야 하는 건데." 자켄이 믿어지지 않는 다는 듯 멍하니 베이나트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아키는요?" "아키는....내가 맡아 주겠다. 그 아이의 스승인 오거스트가 나의 제 자이기도 하니까, 반드시 지켜 주겠다. 그러니 너는 돌아가 다오." "하지만....." "나루에도 그녀가 말한 의무를 네 생명까지 걸고 수행하는 것을 원 치 않을 것이고, 바실리카는 네가 비틀거리기만 해도 나를 난도질해 죽여 버릴 엘프다. 그리고 아키는.....네가 잘못되면 자기가 더 자책 할 거다. 그러니 제발 현명하게 행동해 다오, 자크." "그래....서 아키를 보낸 겁니까?" 베이나트가 아무 말도 없자, 자켄은 한숨을 탁 내쉬며 나무둥치에 등을 기댔다. 철로 된 벽에 갇힌 듯한 시린 두려움과 함께, 어쩌면 자켄이 손쓸 수도 없는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이런 곳에서 뵐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켈브리안이 눈물을 멈춘 것은 한참이나 뒤였고, 내내 그녀를 바라보 며 아무 말도 못했던 아킨은 그 흐느낌이 조금 잦아들자 그렇게 말 했다. 켈브리안은 눈물을 훔치고는 물었다. "삼촌....이 보내주신 거니?" "도망 나왔습니다." "혼자서?" "도와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선배는 모르는 사람들이에 요." 켈브리안은 다시 눈물이 치솟아 올라 고개만 끄덕였다. 아킨은 그런 켈브리안의 눈물을 손수 닦아내 주고는 물었다. "약혼....축하해 드려야 하는 건가요?" "응.......응?" "어제 세르네긴에게 들었습니다." 순간 켈브리안은 가슴이 뜨끔했다. 그리고, 방금 전에 슈마허가 말 한 '파혼'의 전제 조건은 아직도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가 갑자기 그 말을 꺼낸 이유가 짐작이 되기 시작했다. "....그 사람하고 만났니?" "아직은 아닙니다." 괜히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 켈브리안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 "너 없을 때 많이 도와줬어.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야."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아킨이 편안하게 웃자, 켈브리안은 조금은 놀랐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니?"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절 도와준 사람 중에, 슈마허와 잘 아는 아 이도 있거든요. 그 아이가 그 사람을 그렇게 좋아하니, 저도 나쁘게 보기 어렵더군요. 지금 이 상황에서 선배가 그 사람 욕을 했다면, 오히려 제가 난감했을 겁니다." 켈브리안은 아침 햇살 속에 빛날 정도로 밝게 웃는 그 얼굴을 보며, 기쁨 이전에 묘한 상실감을 느꼈다. 그 웃음은 너무나 편안하게 흩 어지는, 속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그런 웃음이었다. 그리고 켈브리안 으로서는 처음 보는 것이기도 했다. "그 동안....어떻게 지냈니?" "크게 고생한 건 없습니다. 몇 번 위험한 적이 있기는 했지만, 도와 준 사람이 있어서 운이 나쁘지는 않았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선배 님....좀 실망하실 지도 몰라요. 생각보다 시시해서요." "어떤 사람들이 너를 도와줬는데?" "두 사람인데...한 사람은 좀.....말하기 곤란하군요. 엉망인 데다가 괴 팍하기만 하고, 영 제 멋 대로고....하지만 그래도 입장이 비슷해서 서로 도움을 받을 수는 있었지요." "다른 한 사람은?" 아킨의 얼굴이 묘해졌다. 곤란한 얼굴, 그리고 감추고 싶어하는 얼 굴--그리고 말을 꺼내 놓고는 싶은데 정말 꺼내도 되는 지 망설이 는 꽤나 복잡한 얼굴이었다. 켈브리안은 왠지 서글퍼졌고, 그것은 그녀가 잃어버린 것이 어쩌면 영영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아 련한 예감 때문이었다. "혹시......그 꼬마 여자아이니?" "네. 그렇게 어린 여자애에게 신세나 지다니....한심하죠?" 그러나 켈브리안은 그렇게 멋쩍게 말하는 아킨이 그 소녀에게 정말 말하기 힘들 정도로 신세진 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작고 소소한 도움이었을 테고, 그것에 대해 아킨은 너무나 중대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 아이 어떤 아이지?" "......그게..." 눈길을 피하려는 듯 아킨은 고개를 들었고 무언가 발견한 듯 얼굴 이 환해졌다. 켈브리안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아킨의 눈과 입술에 떠도는 환 한 빛과 따스함은 얼마든지 바라볼 수 있었다. 아킨은 앞에 켈브리 안이 있다는 것도 잊었는지 손을 한번 올렸다 내리며 자신이 그녀 를 발견했다는 것을 알리고는, 작게 말했다. "귀여워요." "얼마나?" "........그냥 훔쳐 가고 싶을 정도로." 켈브리안은 웃고 말았다. "엉큼하네, 아키-" "선배--" 아킨은 눈에 뜨이게 당황했다. 켈브리안은 그런 아킨의 모습에, 왠 지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으흠---그럼 훔쳐가서 뭘 어쩌겠다는 뜻이야? 설마, 남들 다 보는 데에 놓을 리는 없고......" "말이 그렇다는 뜻이지, 그렇게 나쁜 생각은 절대 아닙니다." "이제는 예전의 아키 같네. 미안하지만 나도 농담이야. 귀여운 여동 생 하나 가지고 싶었나 보네?" 아킨은 안심한 듯 한숨을 푹 내 쉬었다. "아마도요." "하긴, 형제라곤 시커먼 형들뿐인 데다가 그중 하나는 원수보다 더 얄미울 지경인데 어쩌겠니. 이해하고도 남지." 그리고 키가 큰 기사 하나가 들려온 것은 그 때였다. 켈브리안은 아 쉬운 듯 그 기사를 보았고, 그녀만큼이나 아킨 역시 그 기사가 얼른 할말이나 하고 가 버리기를 바랬다. 그러나 둘의 바램과는 달리, 기 사는 엄숙하게 말했다. "주군께서 뵙고자 하십니다." 생각 없이 있던 아킨은 기사의 얼굴이 향하는 방향이 켈브리안이 아닌 자신인 것을 그제야 알아채고는 물었다. "혹시, 저 말씀이십니까?" "네, 왕자님." 그 '왕자'라는 호칭에 아킨이 켈브리안에게 묻는 눈길을 보냈다. 켈 브리안은 고개를 숙여 아킨의 귀에다 그 폐하가 누구인지 소곤거려 주었으며, 그가 암롯사의 왕자인 것을 그녀가 어찌 알고 있는 지도 전했다. 아킨은 더 놀라, 켈브리안과 기사를 번갈아 보며 되물었다. "에크롯사의 여왕폐하가 이곳에 계신 겁니까?" *********************************************************** 작가잡설: 같은 총수임에도 아키가 이놈 저놈 요놈 다 모시고 살아 야 하는 공주라면, 라닌은 이 놈 저놈 요놈 다 챙기느라 바쁜 아낙 네......-_-;; 그리고 비유를 하자면, 저는 탈로스 씨와 베린을 동류;; 로 봅니다. 삼두의 하나이며, 절대자(컬린-에블리스)를 향한 배반감에 시달리며, 여왕님들(롤레인-칼딘)과 매우 사이가 나쁘며, 둘 다 고집불통들인 데다가 붙임성도 0! 다른 점이라면....탈로스가 꿋꿋한 독신자 스타일이라면 베린은 완전 히 재벌가의 망나니 도련님 스타일이란 거지요. -_-;;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31장 *************************************************************** [겨울성의 열쇠] 제145편 충만한 만월#4 *************************************************************** "무슨 말씀을 하실 예정입니까, 폐하." 죠세피나는 남편 마라 공이 그리 묻자 고개를 저었다. "그저 안부 인사일 뿐이야." 그리 말하며 그녀는 넓은 창이 바라보는 정원과, 아침 햇살 부서지 는 분수, 그리고 그 앞에 서서 켈브리안과 마주 보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분명 그녀의 부름에 대한 이유를 물어 보는 듯한-소년을 바라 보았다. 죠세피나 여왕은 휘안토스는 물론이요, 아버지인 사이러스와 어머니 루실리아도 알고 있었다. 그 파격적인 결혼은 물론이며, 각 연합국 의 왕가들에게조차 숨겨진 공비의 의문의 자살과, '병'이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숨겨져 왔던 둘째 아들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그가 작년 에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후 조심스레 그에 대한 조사를 해 보기도 했으며, 그녀 역시 철저한 암롯사의 벽에 부딪혀 더 알아내지는 못 했다. 계승권까지 깨끗하게 말소되어 버린 아들이었건만, 그런 아들 이라도 왕가의 명예에 누를 끼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죠세피나 여왕은 창가에서 눈을 떼고는 자신의 남편, 마라 공에게 말했다. "이곳으로 오면 당신도 한번 봐 둬. 괜찮은 소년인지, 또......켈브리 안에게 잘 어울릴지. 여자 눈도 중요하지만 남자 눈도 중요할 테 지." 마라 공이 놀라 되물었다. "그건 무슨 말씀입니까." "승계권은 없고, 그 형은 다름 아닌 휘안토스 왕자. 아킨토스 쪽에 서 암롯사에 대한 욕심이 별반 없다면, 소반도 여왕이 될 공주의 남 편으로서는 적당하지 않겠어." "하지만 켈브리안 공주는 슈마허와 약혼한 몸입니다." "어렵긴 하지만 결혼을 깨는 것 보다야 쉽지. 그리고 슈마허는 에크 롯사로 돌아오게 하면 되는 문제야." "왜 그런 생각을 떠올리신 겁니까?" "갑자기 떠올린 건 아니야. 켈브리안이 압셀론에서 암롯사와의 문제 까지 일으키면서 저 소년을 각별히 대할 때부터 생각해 둔 거지.... 알다시피, 현재 브리올테는 도무지 나라를 안정시켜줄 위인은 아니 야. 티폴라 여왕보다야 조금 나을 테지만, 그 얼마 안 되는 능력도 제 욕심과 오만으로 얼마든지 망가뜨릴 수 있는 위인이지...봐, 저 슈마허 쉐플런을 데려다가 그런 한심 한데나 써먹고 있는 것을."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린 죠세피나의 눈에, 아킨이 분수대를 떠나 성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에크롯사로서는 소반도의 안정은 아주 중요한 문제 아니겠어. 지난 티폴라 여왕의 난잡한 시대에, 베넬리아는 내전을 끝마치고 그들답 게 빠르게 안정되었어. 그 중요한 시기에 로메르드는 좋은 기회는 모조리 놓쳤고....." "그리고 이번에는 암롯사와 델 카타 때문이시겠군요." "그렇지. 둘 다 어떻게든 로메르드와 손을 잡으려 할거야. 암롯사는 현재 상황에서 등뒤에 델 카타의 동맹자를 놔둘 수는 없을 테니 손 잡으려 할 것이고, 델 카타는 적의 뒤에 아군이 있는 것이 마음에 들 테니 손잡으려 할 테지. 그러나 브리올테는 그것을 제대로 써먹 을 위인도 아니고, 오히려 둘 중 하나를 화나게 할 가능성마저 있 어." "켈브리안 공주는 믿는 겁니까?" "무엇보다 그 아이는 정통성이 있어. 그리고 지금 로메르드로서는 그 정도 안정성마저도 아쉬울 판인걸." 발자국 소리가 가깝게 들려왔다. 마라 공이 말했다. "너그러우시군요." "난 여왕이고, 내 나라의 이익 앞에서는 한없이 너그러워져야 하지. 우리가 좋은 만큼 그도 좋기를 바래야 하고, 그렇게 만드는 건....귀 여운 켈브리안 자신이지. 그 착한 아이가 지난번처럼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중이야."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죠세피나 여왕은 밖에 있는 누구에게나 잘 들릴 목소리로 말했다. "안으로 모시게." 문이 열리며 여왕은 소년과 마주하게 되었다. 소년에게 죠세피나는 우아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만나서 반갑군, 아킨토스 왕자." 아킨은 등뒤에서 문이 닫히는 것에 긴장하며 그런 여왕을 바라보았 다. 옆에 서 있는 깡마른 남자는 아무래도 그녀의 남편인 마라 공일 듯 했고, 방안에는 그 두 사람밖에 없다- 그러나 가벼운 인사가 끝 나자, 마라 공이 곧 밖으로 나갔다. 둘 만 남자 여왕이 말했다. "갑작스러울 테지만.....다음에 만날 일이 별로 없을 듯 해서 지금 조 금 긴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것 같아, 왕자."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죠세피나가 빙그레 웃었다. 그녀는 사이러스보다 20년도 더 젊음에 도 불구하고 아버지만큼의 무게와 엄숙함, 그리고 아버지의 냉혹함 은 없었으나 그에 맞먹는 부드러운 힘이 느껴진다. "그래, 켈브리안과는 어떤 사이인지 물어봐도 무례는 아니겠지, 왕 자?" 아킨은 생각보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새 우는 소리가 들리고, 바람소리도 들리고-- 그 활기찬 소리를 들 으며, 이 에크롯사의 여왕과 마주하며, 아킨은 오랜만에 '현실'로 돌 아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슈마허의 말이 끝나자, 유제니아는 정말 노골적으로 비죽였다. "그렇게 손해보는 짓을 하고 있었어요? 바보, 바보-" 그러자 슈마허의 큰손이 유제니아의 작은 머리를 꾹 눌렀다. "너 같은 꼬맹이에게까지 그런 말들을 이유는 없다." "그럼 왜 그런 말을 해요?" "내 주변에 그런 문제 털어놓을 여자라곤 너밖에 없잖니." "그런데 그 눈치 없는 옛날 남자친구는 누구에요?" "아직 비밀. 미리 알면 너 마저도 그 남자에게 홀딱 반해 버릴까봐 걱정이구나." "그야 봐야 아는 거고. 그런데 너무 하잖아요. 그 공주님은 파혼 당 하면 옛날 남자 친구랑 손잡고 결혼하면 되는데, 아저씨는.....완전히 손해보는 장사야! 그 나이에 노총각인 것도 다급할 판에 파혼남이라 는 꼬리까지 붙으면..." "그래서 하는 말인데, 너 나한테 시집올래?" "그건 내가 너무 손해잖아요. 열 살이라면 몰라도 스무 살이나 많은 남자가 무슨 남편이에요. 아빠지." "뭐, 나쁘진 않잖니." 그 때 그런 그들 옆에 세르네긴이 털썩 앉았다. 슈마허가 슬쩍 물었 다. "감시하러 온 거니?" 언제나 그렇듯, 세르네긴은 그 말을 말한 사람 무서울 정도로 진지 하게 받아들이고 진지하게 답했다. "그게 아니라 오던 길에 놀비오 후작 부인을 만나 뵈었습니다. 유제 니아를 찾고 계시던데요." "난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이렇게 아저씨랑 놀기만 했어." 그러며 유제니아는 뒤통수로 슈마허의 가슴을 툭툭 쳤다. 슈마허 역 시 두 팔을 벌려 보였다. 누가 본다면(그리고 브리올테 왕비는 특 히) 기겁할 모양이었다. 그러나 상대가 세르네긴이었기에, 그는 그 문제에 대해서는 놀라거나 호들갑 떨 가치가 일체 없다 판단하고는 차분하게 할 말만 했다. "오늘 저녁에 국왕 폐하 부부를 모시고 만찬을 여실 생각이라 합니 다. 그리고 유즈는 우리와 가까운 아이이니, 참석하라고......단장시켜 주겠다는군요." "그냥 이대로 가면 안 되는 거야?" "너는 괜찮을지 몰라도 그분들께는 아니거든. 체면 차리는 것과 예 의바른 것은 다른 문제라고 본다." "세냐는 맨 날 그래." "유즈, 나도 네가 예쁘게 있는 게 더 좋아." "세나한테 잘 보이라고 그러는 거지, 지금?" "물론." 유제니아는 방긋 웃었다. "그럼 언제 가면 되는 거야?" 세르네긴이 손을 내밀었다. "지금." "세르네긴--너무 하는 거 아니냐. 이렇게 뺏어 가는 게 어디 있냐." 슈마허가 노골적으로 불평하더니 유제니아를 꾹 안았다. 세르네긴은 역시나 진지하게 말했다. "거의 하루 종일 노닥거리지 않으셨습니까. 누가 보면 여태 결혼 못 하신 게 바쁘셔서가 아니라 취미가 이상해서, 라고 생각할 겁니다." "너는 무서운 말을 너무 태연하게 하는 게 문제라니까." 슈마허는 결국 손을 내리고 허리를 당겼고, 그제야 유제니아는 세르 네긴의 손을 잡으며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앉아 있어 서 그런지 다리가 저려왔다. 유제니아가 무릎을 굽히며 눈을 찌푸리 자, 세르네긴이 말했다. "다시 앉아, 유즈." 유제니아는 당연하게 다시 앉았고, 세르네긴은 신발의 끈을 풀고 신 을 벗긴 다음 자그만 발을 주물러 주었다. 유제니아가 무릎에 턱을 대고 그런 세르네긴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세르네긴이 고개를 들었다가, 눈이 마주치자 조용히 웃었다. 유제니아가 발가락 을 쪼물락 움직이자, 그는 유제니아의 발에 다시 신을 신겨 주고는 끈을 묶어 주었다. 신발은 꽤나 낡아 있었고, 그것이 세르네긴의 가 슴을 싸하게 했다. "여기 까지 오도록........고생시켜서 미안하구나." "괜찮아. 멋진 여행이었는걸. 내가 언제 또 그런 걸 해보겠어? 왕자 에 공주에, 엘프와 마법사. 게다가.....여행의 마지막에는 은빛 드래곤 을 을 탄 기사님이 마중까지 나왔는데 말이야. 굉장한 여행이었는 걸." 세르네긴은 신발의 끈을 꼭 조였다. "이제는.....다시는 그럴 일이 없도록 내가 지켜줄게. 아버지, 어머니 --모두를 대신해서......." "세냐가 어머니 아버지를 대신해 줄 필요는 없어. 세냐는 세냐 역할 하나만 해도 충분하니까....그냥....세냐는 내 옆에 있어주기만 하면 되...." 세르네긴은 그렇게 말하는 유제니아의 어깨를 감싸 안고는 토닥거 려 주었다. 작고 따뜻한 몸이 품안에 안겨 들어왔고, 그 작고 약한 소녀가 이렇게 가까이 있다는 것이 그를 안도하게 했다. 그런데 유 제니아가 메인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나, 다시는.....혼자 있고 싶지 않아." 그 말에 세르네긴은 가슴이 아파 왔다. "다시는 혼자 있게 하지 않을게......다시는." 그리고 그렇게 말하던 세르네긴은 멀리서 그를 보고 있는 시선을 느꼈다. 세르네긴은 누구인가 해서 눈을 들었고, 순간 그 시선도 도 망치듯 사라져 버렸다. 기울어져 가는 햇살에 은빛 머리카락이 반짝 였다. "왕자...?" *********************************************************** 작가잡설: 어머님과 장보러 가던 길에 괜찮은 츄리닝이 있어서 하나 사 들고 올라왔답니다. 이것을 본 동생이 매우 탐을 내기래, 내 허 벅지의 1.4배에 달하는 네 놈이 입었다가는 당장에 늘어날 게다! 했 더니만 녀석 왈, '뭐 어때! 늘어나면 여유 있고 좋잖아. -_-!' ....요런 괘씸한;;; 그나 저나, 요즘은 서점에 거의 가지 못했습니다. 신간에 뭐가 나온 지도 모르고....그냥 예전에 사놨던 책들을 재탕 본탕하고 있는 중 입니다. 아울은 대여점을 아예 이용하지 않습니다. 예전에 말씀 드렸듯 책을 고르는 1차 기준을 대여점 주인에게 맡겨 놓는 것이 영 언짢 으니까요. 그리고 괜찮은 책들이 대여점의 천덕꾸러기가 되어 반품당 하는 것을 보면 서글픕니다...-_-;;;;;;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31장 ************************************************************** [겨울성의 열쇠] 제146편 충만한 만월#5 ************************************************************** 죠세피나 여왕과의 이야기가 끝난 것은 한참이나 전이었지만, 아킨 은 켈브리안을 당장에 찾아갈 엄두가 나지 않아 그녀와 만났던 정 원의 분수대에 바닥만 차며 앉아 있었다. 그녀를 찾을까 해서 방금 전에 조금 돌아다닌 건데, 정작 발견한 것은 세르네긴과 유제니아였 다. 그런데, 거기까지는 괜찮은데 대체 왜 도망친 건지. "아키-?" 아킨은 퍼뜩 놀라 고개를 휙 들었고, 그를 부른 것은 켈브리안 공주 였다. 그녀는 활짝 웃고는 아킨에게 말했다. "언제 나온 거니? 그리고 와서는 왜 한 마디도 없었던 거야. 아직 할 말이 많았는데." 그런 그녀를 보니, 아킨은 방금 전 죠세피나 여대공이 꺼낸 말이 떠 올라 갑자기 당혹스러워졌다. 그가 평소답지 않게 굴자, 켈브리안은 어렵잖게 그것이 죠세피나 여 대공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당황하는 꼴을 보니, 역시나 켈브리안 자신과 연관이 있을 것임에 분명했다. 슬쩍 장난치며 물어 보려는데, 아킨은 다른 화제를 꺼냈다. "저기, 롤레인 교수님은 아직 로메르드에 계십니까?" 갑자기 그 말은 왜 꺼내나 싶었지만, 켈브리안은 쾌활하게 답했다. "아니. 베넬리아로 돌아갔어." "......그분 고향으로요?" 켈브리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물론 혼자 간 건 아니야. 그래, 그 사람은 나도 알지.... 루첼 그란 셔스--예전에 그 이상한 곳에 숨겨줄 때 도움 주었던 네 룸메이트 지?" 아킨은 순간이나마, 방금 전 까지 고민하던 것을 가볍게 잊어버릴 수 있었다. "루첼이 롤레인 교수님과 떠난 겁니까?" "응." "정말 다행이군요." 아킨은 여행길을 수정해야 한다는 것을 미리 알려준 그녀에게 감사 했다. 이제 로메르드의 롬파르가 아닌, 베넬리아로 바로 가야 한다. "그렇다면 롬파르로 같이 가기는 어렵겠군요." "그래도 그곳에서 오는 길에 들러 주는 건 잊지 마. 그리고 그 때는 조금 느긋하게, 단 둘이 이야기를 나눠 보자고." 그 말에 아킨은 방금 전 죠세피나 여대공이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려 야 했다. 다시 미치도록 당혹스러워 지기는 했지만, 그녀가 꺼낸 말 은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이며, 아직 구하지 못했던 어떤 문제의 답 을 가르쳐 준 것도 사실이라 당황하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선배, 저기......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네가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예전에.....그런 말씀하신 적 있죠? 이해할 수도, 붙잡아 줄 수도 있 을 거라고--그리고, 제 두려움도." "기억하고 있었구나." "네, 아주 오랫동안.....그리고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킨은 아직도 그때의 편안함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것을 지키지 못 했던 아쉬움도, 눈앞에서 잃게 되었을 때의 서글픔도 기억하고 있었 다.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조금만 더--그랬다면 조금은 더 행복할 수 있었을 텐데. 그리고 그에게 친절하게 해 주었던 켈브리안을 그 렇게 외롭고 힘든 처지로 남겨 놓고 떠나지도 않았을 텐데- 그 때 손등에 닿는 부드럽고 따뜻한 손끝의 촉감에 아킨은 그 말을 좀 더 쉽게 꺼낼 수 있게 될 것 같고, 어쩌면 지금 꺼내도 되지 않 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그래도 책임질 수 있는지, 각오는 되어 있는 것인지, 명확하게 확신하기는 어려웠다. 지금은 어렵다, 그래서 아킨은 지금은 말을 아끼고 좀 더 신중해져 야 할 때라 생각했다. 아킨 자신은 어떨지 몰라도, 그녀가 얼마든지 불쾌하게 생각할 수 있는 문제였다. 아킨은 결국 조금 뒤에 그 이야기를 꺼내기로 했다. "나중에 저녁에 또 뵈요." "그래...." 그녀의 손길이 떠났고, 그 손은 조용히 다른 손을 맞잡으며 치마 위 에 포개졌다. 아킨은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해는 저물었고, 야트막한 어스름이 내려앉고 있었다. 나뭇잎들은 검 은 어둠에 물들어 갔고, 청명한 하늘 위로 하얗고 둥근 달이 떠오르 고 있었다. 약간 붉게 물들어 있던 구름들 위로도 짙은 쪽빛 어둠과 달빛이 젖어 들고, 하늘이 까맣게 변하며 별들이 하나 둘 반짝인다. 연회가 있을 거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켈브리안과 헤어진 직후였 다. 사실, 자켄이 걱정되어 밤이 되기 전에 얼른 성을 떠날 작정이 었던 아킨은 그렇다고 거절할 이유도 찾지 못해서 새벽 일찍 성을 떠나기로 했다. 그리고 아차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달이 거의 둥글기는 해도 몸에 아무 느낌이 없는 것을 보니 다행스럽게도 완 벽한 만월은 아니었다. 그것을 생각하며 세르네긴에게 은봉인을 어 찌했냐, 라고 물어 볼까 했지만 여태 아무 말 없는 것을 보니 아마 그날 잃어버리거나 망가진 것 같았다. 괜히 물어봐서 그를 미안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아서, 아킨 쪽에서 먼저 그 말을 꺼내지 않기로 했 다.... 그 때 작은 방울 울리는 소리가 딸랑-하고 들려왔다. 아킨은 급히 고개를 틀었고, 마주보자 유제니아가 작은 방울을 들고 있다가 살짝 흔들었다. 다시 딸랑- "손-" "응?" "손 내밀라고." 유제니아가 들고 있는 것은 그리 비싸보이지는 않는 손톱 만한 금 방울이었지만, 정성껏 만들고 고른 듯 제법 예쁜 물건이었다. 아킨 은 얼결에 손을 벌리며 말했다. "뭐야, 이건?" "선물-" "선물?" 유제니아는 손바닥 위에 방울을 톡 얹어 놓았다. 그리고 막 떠오른 하 얗고 큼지막한 달을 가리켰다. "그런데 괜찮아?" 아킨은 웃고 말았고, 유제니아가 어리둥절 하자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아니야, 유제니아." 유제니아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 그럼 다행이다. 난 또 지금 당장 가려고 그 공주님 보낸 줄 알 았지 뭐야--행여나 해서 헐레벌떡 온 보람이 없네." "응?" "방금 전에 세냐가 말해 줬거든....." 아킨은 방금 전에 도망친 일이 생각나 뜨끔했다. 왜 도망친 건지 도 무지 모를 일었지만, 그렇게 하고 나니 그 행동 자체가 왠지 부끄러 워진다. 아킨은 방울을 흔들어 보고는 물었다. "그런데 이건 정말 뭐야?" "에칼라스 축일에, 에크롯사에서 소나무에 다는 방울이야. 사람들마 다 다들 하나씩 가지고 있는데, 에칼라스 축일이 되면 소나무에다 걸어 놓고서는 기도하는 거야." "그럼 나한테는 왜 주는 거지?" "에크에는 말이야, 타지 친구와 헤어지게 되면 그 사람에게 자기 방 울을 주는 풍습이 있어. 축일의 축복을 듬뿍 받은 거니까.....내가 줄 수 있는 것 중 최고로 좋은 거야." 아킨은 그것을 한번 더 흔들어 보았다. 값비싼 물건은 아니지만, 왠 지 아주 귀중하게 느껴졌다. "나는 선물로 줄게 없는데 어쩌지." "에, 무슨 소리야. 덕택에 아저씨랑 세냐와도 이렇게 일찍 만나게 된 건데. 또, 그날 성에서 구해준 것도 아키잖아. 갚을게 없어서 그 걸 주는 건데." "베이가 서운해 할 걸." "여기 없잖아. 아, 베이 아저씨에겐 이거 비밀이다. 나, 하나밖에 없 거든." 유제니아는 손가락을 입술로 가져갔다. "그런데 아키, 그 왜 옛날 이야기 하나 있잖아. 어느 거만한 아가씨 가 남자를 만났는데, 그녀는 그가 그냥 거지인줄 알고 퉁명스럽게 대했어. 그런데 나중에 보니 그는 신부를 찾아다니는 왕이었고, 그 래서 그 왕은 그녀가 친절이라고 으스대며 베풀었던 상한 빵 한 덩 이를 받고 표표히 떠나 버리지. 나도 그런 것 같아...그냥 사정이 곤 란한 소년인 줄 알았는데 왕자님이지 뭐야. " "우리 어머니도 그러셨지." "응,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킨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사람들은 아버지가 그저 연회장에서 어머니에게 첫눈에 반한 줄 알지만 사실 아버지가 혼자 제 멋대로 놀러 나오셨다가 낙마해 숲 에 쓰러져 계신 걸, 어머니가 구해주신 거야. 메리엔이 말하는데, 그 때 어느 사기꾼이 순진한 아가씨 앞에서 다친 척 하고 있는 줄 알 았다더군. 그 때 아버지 꼴이 아주 엉망진창이었거든. 굴러서 흙투 성이에, 성에서 빠져 나오느라 몰래 입고 나온 옷도 엉망이고..... 팔까지 다쳤으니 오죽하겠어?" 아킨은 유제니아의 얼굴에 웃음이 번지는 것을 보았다. 푸른 눈도 기대로 반짝거렸다. "어머니께서 아버지가 암롯사의 왕이란 것을 알게 된 것은 사실 결 혼 약속까지 한 다음이었고....그 때 어머님 고향에 계신 외할아버지 께서 놀라 쓰러지셨다더라고." "그건 처음 듣는데." "그 유명한 나셀의 폭룡이 말에 떨어져 끙끙대고 있었다는 이야기 는...소문내기 적당한 건 아니지. 그냥, 연회장의 어느 아름다운 소녀 에게 왕이 첫눈에 반했다, 가 더 듣기 좋잖아." 그 이야기를 들었던 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한참이나 뒤의 일 이었다. 겨울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던 절벽에 한참이나 서 있다가 그 곳을 찾아온 휘안토스와 만나 말없이 마주한 다음 헤어졌을 때, 자켄 은 그를 마중 나와 성으로 데리고 갔고 그 후 아킨은 학교에 돌아가는 날을 미루어야 할 정도로 지독하게 앓았었다. 그리고 그런 아킨에게 메리엔이 그 이야기를 해 주었다. 아무에게도 그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다. 아무에게도- "대신 너만 알고 있어. 알고 있는 건 아버지와 내 유모, 그리고 나뿐 이거든." 그리고 아킨은 '좀 걸을래?' 라고 말하려고 손을 들었다. 그 때 저 멀리서 유제니아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고, 유제니아는 귀라도 쫑긋 올라갈 듯 고개를 반짝 들고는 말했다. "세냐-!" 그리고 유제니아의 말대로, 정원의 자그마한 나무 위로 세르네긴이 나타났다. 세르네긴은 유제니아를 발견하자마자 곧장 다가오며 말했 다. "금방 가야 한다고 했잖니. 그렇게 길어지면 내가 곤란하단다." "하지만......아키에게 할 말이 있어서. 다 끝났어." "왕자님이라고 부르라고 했다." 세르네긴의 조용하지만 엄격한 말에 유제니아는 금방 시무룩해졌다. 아킨은 괜찮다, 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눈치챈 듯 세르네긴이 먼저 말했다. "그 동안 편하게 대해 주신 것만도 감사드립니다만, 많은 분들이 계 신 자리에서 유제니아가 당신을 그렇게 대한다면 유제니아의 평판 이 문제됩니다.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유제니아는 아킨에게 미안한지 그의 손을 한번 가볍게 잡았다 놓고 는 작게 말했다. "미안-" 분위기를 유제니아도 느낀 것이다. 세르네긴은 유제니아가 아닌 아 킨을 책망한 것이고, 다른 사람도 아닌 세르네긴의 그것은 더욱 엄 격하고 매서운 것이었다. "나중에 봐, 아키.....왕자님." 유제니아는 그렇게 슬그머니 말하곤 세르네긴에게 달려가 그의 옆 에 섰다. 세르네긴이 팔을 내밀자 유제니아는 아기 고양이처럼 찰싹 달라붙어서는 팔짱을 끼었다. 그 모습을 보며 아킨은 오른 손-방금 전에 유제니아가 준 작은 방 울을 쥔 손을 들었다. 성에서 밝힌 조명이 그 자그만 방울의 매끄러 운 표면에서 반짝이자, 아킨은 그것을 꾹 움켜쥐었다. 문득 서글퍼진다. 아킨은 암롯사의 왕자였고, 유제니아는 어느 이름 없는 기사의 딸인 동시에 세르네긴이 지키는 보물이었다. 애당초 세르네긴의 품안에 있어야 했으며, 그렇기에 아킨은 다시는 그 안에 있는 유제니아에게 손을 내밀 수도, 그리고 어느 비바람 치던 밤에 그랬던 것처럼 조용 한 눈으로 지켜볼 수도 없을 것이다. 아킨이 돌아가야 했듯, 유제니아도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는 순간, 유제니아는 영원히 아킨의 손에 닿지 않는 곳으로 가 버리는 것이다. 몇 년이 지나면 우연히 만나게 될 지도 모르지만, 그 몇 년의 시간 은 아킨이 절대 손댈 수도 간섭할 수도 없는 시간이었고, 아마도 그 몇 년 동안 유제니아는 저 세르네긴의 품안에서 견고하게 지켜질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빗물이 바다에 녹아들 듯 그의 일부가 될지 도 모르지... 그것은 당연한 순서, 또 그런 유제니아는 어쩌면 가볍게 스치는 봄 바람 같은 것--온기에 얼어붙은 모든 것이 녹아들건만, 덧없이 흘 러가 또 다른 바람에 뒤섞여 먼 곳으로 흘러 가 버리는 그런 바람 이었다. 가슴을 적시는 것은, 갑자기 망망한 황야로 내 던져진 듯한 그런 서 글픔이었다. *********************************************************** 작가잡설: ......................에흐;;; 애꿎은 세냐만 죄인 되는 상황;; 메디야 이것도 먹고 저것도 먹고 요것도 먹어도 상관없다만;;; 유즈 는 딱 하나만 골라야 하는 가엾은 처지....그렇다고 베린 처럼 '안 먹 어도 다 내거다!' 랄 정도로 오만방자하지도 못하고...; p.s 엑세를 본받으면...-_-!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31장 *************************************************************** [겨울성의 열쇠] 제147편 충만한 만월#6 *************************************************************** 죠세피나 여왕의 만찬은 그리 크지도, 너무 조촐하지도 않게 열렸 다. 다른 나라의 왕이 참석한 자리에 있어 보는 것은 아킨으로서는 처 음이었다. 그리고 같은 왕가라도, 당장에 무언가 터져 나갈 듯 불안 하기만 한 암롯사 왕가와는 꽤나 다른 분위기였다. 암롯사 왕가의 세 사람이 함께 있으면 언제나 최악이다. 아버지인 사이러스는 아들 중 하나는 철저하게 외면했고, 아킨역시 아버지와 형과 같은 자리에는 도저히 있기 싫다는 듯 싸늘한 얼굴로 있다가 식사를 마치면 식탁을 걷어차기라도 할 기세로 험악하게 나가 버린 다. 아버지는 예의를 들먹여 붙잡지 않았고, 휘안토스역시 그런 동생과 아버지 사이를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해 보려 노력한 적 역시 없었 다. 지난 신년 연회 때 휘안토스가 아킨을 불렀던 것은, 순전히 아 킨이라는 존재를 숨기는 것보다는 공개하는 편이 몇 배로 편하고 안전하기 때문이었다. 숨기면 온갖 억측을 불러일으키나, 일단 공개 하고 나면 오히려 그 난잡한 것들을 다 씻어 내리게 된다. 단지 그 것 뿐, 서로 좋아서 모였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에크롯사의 여대공 죠세피나와 그 남편사이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죠세피나와 마라 공 사이에는 기본적이 신뢰와 애정이 있어 보였고, 그것이 애당초 결여된 암롯사 왕가에서는 '언제나 같이 지내야 한다.' 라는 사실 자체가 고문인 것 이다. 자리는 편안하게 진행되었고, 죠세피나 여대공은 이것저것 물어보지 도 않은 채 그저 가벼운 농담과 옛 이야기, 음악과 노래에 관한 이 야기를 했을 뿐이었다. 아킨은 그런 화제로는 영 재주가 없었지만, 반면에 그 쪽으로는 아주 박식한 켈브리안은 죠세피나와 즐겁게 대 화를 주고받았다. 아킨은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음식이 나가고, 남도산의 귀한 과일들이 나와 식탁을 채웠다. 향긋 한 과일냄새가 풍겨 오르고, 잔마다 다시 포도주가 채워졌다. 흔들 리는 촛불이 촉촉해 보일 정도로 신선한 과일의 표면에 흐르고, 검 붉은 포도주 잔 안으로 둥그런 빛들이 흔들렸다. 아름다운 음악소 리, 그리고 고혹적인 노랫소리-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어느 여자 악 사의 음성은 밤 꾀꼬리의 울음처럼 어울려 들어온다. 아킨은 문득 세르네긴 쪽을 돌아보았다. 무인인 그 역시 꽤나 지루 한 듯 옆의 유제니아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간혹 웃고, 그리고 슬픔에 잠긴 눈빛으로 유제니아를 바라보고- 아마도 아버지 이야기 를 하는 걸지도 모른다. 끼여들 틈이 없다는 건 슬픈 일이다. 아버지와 형 휘안토스의 틈에 끼어 들고 싶었던 적은 한번도 없고, 외려 자신에게는 신경 안 쓰고 둘이서만 알아서 하기를 바래왔지 만.....저 둘을 보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궁금하고, 자세히 알 고 싶어진다.... 그러던 아킨은 달빛이 환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창가의 테라스에 서 있는 여자를 발견했다. 아킨은 포도주잔을 들었다가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내려놓으며 그 런 그녀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다행히 그녀는 아킨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고, 아킨도 여자를 그렇게 골똘하게 바라보면 무례라는 것을 알 기는 했지만 그녀가 너무도 특이했기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너무나 비현실적인--달이나 은의 화신인 듯 차갑고도 빛나는 미모 의 여자였다. 은빛 머리카락은 길게 길러 바닥에 닿을 정도였고, 그 은빛은 아킨의 빛과는 전혀 틀렸다. 아킨의 머리색이 '달빛'에 가깝 다면, 그녀의 머리카락은 정말 은에서 뽑아낸 듯 차가운 빛이었다. 키는 컸고, 몸의 곡선은 잘록하면서도 풍만해 조각처럼 아름다웠다. 그리고 턱을 들고 굽어보듯 만찬장 바깥에서 사람들을 보고 있었으 나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이라든가 깊고도 차가운 눈빛을 보면 오히 려 그녀가 이 자리의 여왕인 듯 당당했다. 입고 있는 옷은 위 부분 은 은으로 된 듯 하얗고 깨끗한 갑옷이었으나 아래로는 부드럽게 쏟아지는 얇은 치마였다. 달빛이 스며들어 그녀의 다리 곡선을 은은 하게 비추어냈다. 그제야 같은 것을 발견한 죠세피나 여왕이 그 쪽으로 고개를 틀더 니 조용히 미소를 짓고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여자 역시 여왕의 미 소에 화답하고는, 그 옆의 마라 공이 놀라 고개를 살짝 숙이며 올리 는 인사도 턱을 들고는 왕처럼 당당하게 받았다. 슈마허가 고개를 들었고, 그는 그녀와 사이가 별반 좋지 않은 듯 별 인사도 없이 시 선을 휙 돌려 버렸다. 그러자, 그녀의 시선이 이번에는 슈마허와 가 까운 곳에 있는 아킨을 향했다. 초록색 눈이었다. 진한, 그리고 은빛의 속눈썹이 드리워진 아름다운 눈동자는 오랜 전설을 담은 골짜기처럼 은은하고도 도도한 기품이 있었다. 아킨은 켈브리안을 사이에 놓은 채 슈마허에게 물었다. "누구입니까?" 슈마허는 퉁명스럽게 답했다. "실버 드래곤 휠테스." 아킨은 다시 그녀를 눈여겨보아야 했다. 그녀, 그 휠테스는 천천히 걸어 세르네긴의 뒷자리로 가 섰다. 세르 네긴이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이내 환한 얼굴이 되더니 고개를 숙 여 그의 귀에다 입술을 대고는 작게 속삭였다. 세르네긴이 손을 뻗 어 유제니아를 가리켰고, 휠테스의 도도한 눈동자가 유제니아를 향 하자 유제니아는 조금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아킨은 은근히 언짢아졌다. "어째서 저러는 겁니까?" "휠테스가 우리들과의 대화를 원한다면 세르네긴을 통해 말한다. 하 지만 세르네긴이 아무 말 하지 않는 다면 휠테스가 대화를 원하지 않는 다는 의미, 그리고 우리 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 봤자 그녀는 답하지도 않아." 슈마허의 말은 정말 싫어하는 사람을 험담하는 듯 꽤나 거칠었다. 켈브리안이 슬쩍 말했다. "치근덕대다가 채였나 보군요." "저 여자가 세냐에게 치근덕대는 거야-!" 발끈한 슈마허가 목소리를 확 낮추어 쏘아붙였다. 그러나 아킨은 들 었고, 못 들었을 리 없는 휠테스가 고개를 들더니 슈마허에게 비웃 음을 보냈다. 슈마허가 빠르게 손짓을 보냈다 거두어 들였고, 휠테 스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같은 것을 본 세르네긴은 이마에 손 을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벌써 본 아킨은 민망할 지경이었다. 그 때 상석에 있던 죠세피나 여대공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포틀러스, 휠테스에게 잠시만 시간을 내 달라 말씀드려주겠나?" 세르네긴은 휠테스에게 그대로 전했다. 휠테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속삭이듯 뭐라 말했다. 세르네긴이 여왕에게 말했다. "오늘밤에는 누군가를 뵈러 떠나셔야 한다 하십니다. 괜찮으시다면, 지금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시다는 군요." 여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옆의 아킨에게 양해를 구했다. "먼저 일어나게 되어 미안하군, 왕자." "괜찮습니다...." 그렇게 답하며 아킨은 세르네긴 쪽을 다시 돌아보았다. 어차피 만찬 은 거의 끝나 있었고, 저 휠테스가 나타난 것 역시 그 때문일 것이 다. 포도알을 집던 유제니아가 자기 쪽을 보는 아킨을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아킨은 재빨리 엄지손가락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유 제니아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아킨은 켈브리안에게 말했다. "선배, 잠깐 나갔다가 올게요." "아, 그래.....오래 걸리니?" "별로 안 걸릴 겁니다. 여기 계속 계실 건가요?" "아니. 동의 객실로 갈 생각이야. 아무 하인이나 붙잡고 물어보면 가르쳐 줄 테니, 너도 그곳으로 와." 아킨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만찬장을 나섰다. 그리고 똑바로 뻗은 복도를 지나, 하얀 돌을 깐 정원에 도착했다. 달빛이 쏟아져 내리고, 오래된 듯 보이는 정원의 기둥과 작은 여신 상을 마주하는 파골라에는 담쟁이와 등나무 덩굴이 가득 우거져 있 었다. 여신상은 떡갈나무의 티피안느 상이었으며, 나뭇잎으로 만든 관을 쓰고 쏟아지듯 긴 머리카락을 발목까지 기른 세계의 열두 수 호자중 하나인 그녀의 발치에도 담쟁이덩굴이 자라 있었다. 뽀얀 달 빛이 그 긴 머리카락과 맨발등위로 흐르고, 고개를 살짝 들고 있는 자그만 얼굴도 하얀 빛에 젖어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들고 있는 잔 에서 자그마한 물줄기가 쏟아져, 그 아래에 있는 작은 샘으로 쏟아 지고 있었다. 그 때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고, 아킨은 뒤돌아보며 막 뭐라 말하 려다가 그대로 얼어붙듯 멈추어 섰다. "유즈는 좀 나중에 나올 겁니다." 세르네긴이었다. "알겠....습니다." 물줄기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아킨은 그렇게 답했다. 세르네긴은 아 킨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오더니 한 걸음 정도 남기고는 멈추어 섰 다. "제대로 감사 드리지 못했습니다. 유즈를 구해주고, 또 그 아이를 지켜 주시고....이렇게 만나게 해 주신데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 역시 당신에게 여러 모로 신세를 졌습니다. 괜찮습니다." "그 날의 일들은 제 실수로 벌어진 일들에 대해 제 최선을 다해 책 임을 지려한 것뿐입니다. 저는 끝까지 지켜 드리지 못했고, 그것은 아직은 제 빚입니다." 그리고 세르네긴은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맡고 있던 그것입니다. 언제 돌려 드릴까, 꽤 생각했는데.....지금이 가장 적당한 것 같군요." 아킨은 손을 내밀었고, 그의 손바닥 위에 은으로 된 귀걸이가 달빛 에 반짝이며 떨어졌다. 아킨은 그것을 손안에 꾹 쥐며 벅차 오르는 감정을 힘겹게 억눌러야 했다. "감사....합니다." "아니, 돌려 드리게 되어 제가 감사드립니다, 왕자. 이제 보름에도 편안하게 주무십시오." 세르네긴은 그렇게 말하고는 돌아서려 했고, 그를 막아서듯 아킨은 급히 말했다. "세르네긴, 이제 어디로 가실 생각입니까?" "당분간은 에크롯사에 머물러야 할 듯 합니다. 슈마허 님께서는 당 연히 로메르드로 돌아가실 테고요." "그럼, 유제니아는 누구와 같이 가는...." "그건 묻지 마십시오, 왕자." 그렇게 말하며 세르네긴은 고개를 돌려 아킨을 바라보았다. 눈빛은 차분했고, 그래서 그것이 아킨으로 하여금 그저 멍한 기분만 들게 했다. 그 차가움은 사이러스와 휘안토스의 차가움을 훨씬 넘어서는, 강인하고도 엄격한 차가움이었다. 아킨은 그 시선을 외면하며 말했 다. "유제니아와는 오래 알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친구였습니다. 어디로 가는 지 정도는 알아두고 싶습니다." "그것뿐입니까?" "지금은." "그리고 그 다음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아킨은 물줄기 소리에 다시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아무 것도 들리 지 않았고, 무서우리만큼 무거운 침묵과 고요가 주변에 가득 차 아 킨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듯 했다. 아킨은 침묵할 수 없었다. 무언가 말하고 터뜨려야 했고, 세상은 그러기를 잔인하게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세르네긴이 말했다. "친구끼리 아는 것보다는 더 많이 알고 싶어질 테고, 친구끼리 보내 는 시간 보다 더 많은 시간을 바라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아킨은 무거운 침묵을 깨뜨리며, 힘겹게 말했다. ".....아마도-" 한마디가 이렇게도 무거운 것은 처음이었고, 그 말이 퍼뜨리는 의미 가 두려운 것도 처음이었다. 잠시 그런 아킨을 바라보던 세르네긴이 말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끝내주십시오. 더 이상의 의미는 없도록." "무슨 말씀입니까?" 손에 힘이 들어가, 세르네긴이 준 그 은봉인이 부서질 지경이었다. "왕자, 유제니아는 제게 그 누구보다 소중한 아이입니다. 그리고 유 제니아에게 저 역시 똑같은 의미이며, 그 아이에게 어떤 사람이 다 가오든 그 소중함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겁니다....그러니, 유제니아에 게 어떤 새로운 사람이 생기든 저는 괜찮습니다. 유제니아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나라는 것만은 분명하니 누가 그 아이를 좋아해 주든 괜찮고, 오히려 저도 기뻐할 것입니다. 그 아이가 사랑 받는 다면, 그리고 좋은 사람에게 사랑 받는 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니까 요." "세르네긴--" 오해가 생겼다 생각하며, 아킨은 급히 말을 꺼냈다. 그러나 세르네 긴이 말한 것은 아킨을 단번에 침묵시켰다. "하지만 당신은 아닙니다. 결코-" 한방 맞은 것 같았다. 아주 끔찍한 말, 정말 듣기 싫었던 단 한마디 가 머릿속으로 파고 들어와 가슴을 화끈거리게 했다. "세르네긴, 지금의 유제니아는 제게 있어 좋은 친구입니다. 나중에 어떻게 될 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문제고, 그러니 지금 그런 말을 들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지나치게 생각한 거라면 사죄 드리겠습니다." 그리 정중하게 말하고는 세르네긴은 고개를 숙였다. 그는 아킨이 처음 보았을 때 생각했던 것처럼, 지금도 단단한 대리 석으로 깎아 놓은 듯 완벽한 기사였으며, 지곰드 이 차분하면서도 정중한 태도에는 아무런 티도 없었다. 그는 정말 진실만을 말했고, 그만큼 잔인했고, 그 잔인함에 아킨은 물줄기 소리 마저 잊었다. 그리고 당장에 토해내지 않으면 숨막혀 죽을 것만 같은 말이, 세르네긴의 눈빛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순 간 터져 버렸다. "세르네긴, 저는 아니라는 말은 대체 왜 하신 거죠?" 세르네긴은 답하지 않았고, 결국 아킨은 듣고 싶지조차 않았던 것을 스스로 말해야 했다. "제 병 때문인 겁니까?" "그런 것 때문이라면 저는 정말 형편없는 놈이겠지요." "그게 아니라면 대체 뭐 때문입니까--!" "당신의 운명이 위험하다는 말입니다." 그 말이 더 화가 났다. 아킨은 떨리는 입술을 꾹 눌렀고, 세르네긴 은 그 모습을 보면서도 무서우리만큼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러지 않기를 바라며, 그럴 리 없다 생각하지만-- 당신이 그 아이 를 당신의 운명에 끌어들인다면, 그 아이는 견딜 수 없습니다. 저는 그것을 바라지 않는 겁니다. 아니, 어느 누가 바랄까요-" 더욱 불쾌해진다.... "연관될 리 없지 않습니까. 제 일은 제일일 뿐인데, 누가 그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물린단 말입니까." "연관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왕자, 당신의 어머니가 당신 아버지 가 끌어들인 그 가혹한 운명에 어떻게 부서져갔는지 당신이 더 잘 알 것입니다. 사이러스 대공왕은 강한 사람이었고, 또한 자신으로 인해 생긴 운명이었기에 견딜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어머니 는...." 더 참고 듣기 어려운 아킨은 날카롭게 말했다. "그만두십시오!" "왕실의 일을 하찮은 제가 들먹이는 것이 얼마나 큰 무례인 지는 압니다. 하지만, 제 마음은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 "그만 두라고 했습니다, 세르네긴 포틀러스!" 세르네긴은 잠시 말없이 아킨을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떼고는 포석 으로 덮인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붙잡고 싶었고, 그가 아킨과는 상대도 되지 않는 기사라는 것은 알지만 주먹이라도 날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 때 길 끝에서 유제니아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세르네 긴 앞에 멈추어 섰지만, 세르네긴은 간단한 인사만을 하고는 아킨 쪽으로 보내주었다. 유제니아는 아킨 쪽으로 달려오며 손을 흔들었다. "아키-!" *********************************************************** 작가잡설: 음......세냐는 눈치라도 챘건만, 당신은 뭐하는 겁니 까.....켈브리안 공주.....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31장 *************************************************************** [겨울성의 열쇠] 제148편 충만한 만월#7 **************************************************************** 유제니아가 말했다. "세냐가 '그 분'과 잠시만 같이 있어 달라고 해서 늦었어. 많이 기다 렸어?" "별로." 아킨은 웃었지만, 유제니아는 그런 그를 보며 얼굴을 흐리더니 조심 조심 물었다. "그런데....얼굴이 왜 그래?" "아니. 신경 쓸 것 없어." 아킨은 손을 젓다가 그만 은봉인을 놓치고 말았다. 손을 떠난 얇고 작은 귀걸이는 돌바닥을 굴러 얕은 분수대의 연못에 퐁당 빠졌다. "앗, 저거.....주워줄게." 유제니아는 소매를 바짝 당겨 붙이고는 엎드려 귀걸이를 찾기 위해 연못 속에 손을 집어 넣었다. 연못은 그리 깊지 않았지만, 유제니아 의 팔 길이로는 어깨까지 물에 담궈야 겨우 바닥에 닿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귀걸이는 손이 일으킨 물살에 흔들려 그 손끝을 떠나버렸고, 유제니아는 더 깊게 손을 뻗어, 소매 자락은 절반이나 흠뻑 젖었다. 저러다가 물에 첨벙 빠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아킨이 말했다. "유제니아, 내가 할게." "아니...닿았다." 유제니아는 드디어 그것을 잡아 꺼냈다. 하얀 손과 자그마한 은빛 귀걸이에서 투명한 물방울이 방울방울 떨어졌고, 유제니아는 흠뻑 젖은 손을 아킨에게 내밀었다. "여기~" 아킨은 그것을 손끝으로 집어 귓불에 채워 넣었다. 유제니아가 가까 이 다가와 유심히 보더니, 손을 뻗어 어긋난 고리를 잘 맞물려 주었 다. 자그만 손끝이 귓불을 스치고, 약간은 긴장한 듯한 숨소리가 부 드럽게 와 닿았다. 다 되자, 유제니아는 손을 가슴 쪽으로 가져가고 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하나밖에 없으니 이상하다." "원래는 좀 많았어." 아킨은 그렇게 말하며 작게 한숨을 내 쉬고는 하려던 말을 꺼냈다. "유제니아. 나, 내일 떠나." 유제니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디로?" "베넬리아로. 그곳에서 만날 사람이 있거든." 유제니아는 주변을 슥 둘러보며 망설이다, 겨우 말했다. "저기, 그럼 그 일 끝나면 한번 들러 줄 수 있어?" "너는 어디로 가는데?" "그건 잘 몰라. 세냐가 아직 어디로 갈 건지 안 가르쳐 줬으니까..... 하지만 아무래도 아저씨랑 같이 있을 것 같아." "그렇게 되면 만나기 힘들겠네." "........그래도 들러 주면 좋을 텐데......" 유제니아는 손을 깍지끼고는 턱 앞으로 가만히 가져갔다. 작고 뽀얀 손이었고, 그 턱도 작고.....어깨도, 몸집도, 가만히 웃는 얼굴도 작기 만 했다. 아킨은 달빛 속에 빛나는 그녀를 보며, 이런 작은아이를 대체 무엇 이 발견할 수 있을까, 아킨 자신이 아니면 대체 누가 발견할 수 있 을까--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작은 만큼, 너무나 쉽게 부서져 버릴 것 같았다. 조 금만 힘 주어도 바스러지는 무른 운모조각처럼, 손아귀에 잡히는 순 간에 죽어버리는 자그만 새처럼.....그렇게 작고 약하다. 그러니 세르 네긴의 말은 분명 사실이었고, 지금의 아킨은 자신의 현재 상황이 그렇게 밖에는 볼 수 없다는 것도 알며, 그래도 괜찮을 거라 장담할 수도 없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할 지라도 지금 발견한 하나의 가능성을, 이 소중한 가능성 하나를 쉽게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 가슴에 심겨진 이 작은 감정이 어떻게 변할 지는 아킨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버리고 싶지는 않았기에, 이것을 되도록 오래 간 직하고 싶었다. 아마도 유제니아를 다시 만난 다면, 그녀에 대해 좀 더 알고 그녀가 그에 대해 좀더 알게 된다면, 같이 보낸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길어 진다면, 그 때 그 씨앗은 싹을 틔우고 자랄 것이다. 그것이 그 때가서 무엇으로 자라든, 지금 그 씨앗은 아킨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 중 하나가 되어줄 것이며,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지 금 견고하게 닫힌 겨울의 성문을 열어줄, 아직은 얼음과 겨울의 성 에 숨겨지고 단단한 얼음의 벽 아래에 갇힌 봄의 심장을 깨워줄 '무 언가'일지도 모른다..... "....만나러 올 게." 유제니아가 기쁜 듯 눈을 반짝였다. "정말이지?" "그래. 약속할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제니아는 아킨의 허리를 안았다. 아킨은 정말 당황했다. "유제니아, 저기--" "기뻐서. 아키가 건성으로 대답했으면 아주 슬펐을 거야." "그럴 리 없잖아." 그렇게 말하며 아킨은 유제니아의 가느다란 팔의 느낌과, 가슴으로 파고드는 볼의 따스함이 물결처럼 영혼을 적셔오는 것을 느꼈다. 그 저 머리 한번 쓸어 주고, 볼에 키스해 주고는 헤어질 수 있었는데, 갑자기 유제니아를 안고 싶어졌다. 좀 더 가까운 곳에서 좀 더 편하 게 느끼고 싶었고, 그렇게 언제까지고 있고 싶었다...... 어째서 너는 바로 그날 내게 왔던 걸까. 어째서 조금 더, 하루라도 더 일찍 내게 와 주지 못했던 걸까. 아니 한시간만이라도 더 일찍 만났더라면.....그랬다면 방금 전 당당하게 외칠 수 있었을 텐데, 우 기기라도 했을 텐데, 아니면 적어도 상관 말라며 한방 치기라도 했 을 텐데...... 그런데, 그 때는 그렇게 아무 말도 못했으면서....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을 알게 되 버린 걸까. 그렇게 속으로만 수 십 번을 되 삼키며, 아킨은 그녀의 어깨를 가만 히 안아주었다. 깨달음은 그렇게 순식간이었고, 또 조금 늦어 있었 다. "달에 취한 건가요, 왕자?" 휘안토스가 시선을 뗀 것은, 그의 옆으로 드레스 자락 끄는 소리가 멈추고 그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였다. 그리고 그 여자는 휘안토스가 고개를 돌리자 조용하게 웃음을 터뜨 렸다. 휘안토스가 말했다. "일부러 화제를 만들어 내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당신을 기다리 고 있었으니까요." 휘안토스는 그녀를 살펴보았다. 미인이기도 했고, 실제 나이는 마흔 중반이지만 작지만 세련되게 솟 은 코와 초록색 눈동자를 가진 얼굴은 이제 겨우 서른 중반 정도로 젊어 보이기도 했다. 갈색 머리는 위로 틀어 올리고, 옷은 장식이 별로 없는 평범한 실내복 같은 옷이었으나 이상하게도 그것이 더 화사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풍겼다. 달빛을 받아 투명하게 속내를 비 추는 하얀 베일이 그녀의 머리와 어깨를 감아, 마치 날개처럼 보인 다. 휘안토스는 허리를 테라스 난간에 기울이며 그런 그녀에게 말했다. "자기 집에 오신 듯 하군요, 마르타." "잠깐 들른 것뿐입니다." "잠깐 들리시는 곳이 왕궁이라는 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마르타, 즉 롤탄 백작부인은 웃음을 터뜨렸다. 보통 이렇게 찾아오는 여자들이 늘 그렇듯 천박한 분위기도, 지나치 게 오만하게 굴며 과시하는 분위기도 전혀 없었다. 그녀의 웃음은 여유에 넘쳤고, 그러면서도 휘안토스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긴 장하고 있었기에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아니, 휘안토스는 자신이 이 나라의 왕자이며 왕인 사이러스의 아들 이라는 입장만 아니라면 그녀를 아주 좋아할 것만 같았다. 그녀는 지적이며 아름답고, 또 예의바르고 세련되었으며,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든 단번에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는 매력을 가진 암롯사의 귀 부인중의 귀부인이었다. 마르타가 말했다. "경계할 것 없어요, 왕자. 나는 폐하께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폐하 역시 제게 줄 것이 없습니다. 벌써 20년 전에, 저는 받을 수 있는 것은 다 받았고, 폐하도 줄 수 있는 만큼은 다 주었어요." "그런데 왜 지금 이렇게 나타나시는 겁니까?" "정열은 소진되었지만, 그래도 우정은 남아있거든요." "단지 그것뿐입니까?" "휘안토스 왕자, 당신이 평범한 젊은이가 아니란 건 잘 알아요. 하 지만 이건 어른, 그것도 조금은 늙고 적적한 사람들의 일이랍니다. 게다가 크게 걱정할 필요도 없을 거라 생각해요. 저는 늙었고, 폐하 도 늙었지만, 당신은 너무도 젊고 힘에 넘치니까요." "몰론 당신 자체에 대한 걱정은 별반 하지 않습니다. 제가 우려하는 것은 제 숙부에 대한 것입니다. 그분은 아직은 모든 것을 포기하기 에는 너무나 젊은 나이니까요." "테시오스에 대한 걱정? 맙소사, 그건....제 힘으로 어찌 해 볼 수 없 는 의심이군요." "해명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마르타는 어찌해야 할까 고민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충분히 예상하 고 있었으며, 어찌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왕자, 사이러스 님이 그 아내의 죽음으로 모든 사랑과 야심을 태워 버렸듯 저 역시 제 딸의 열 다섯 번째 생일과 함께 모든 사랑과 야 심, 또한 증오까지 모두 소진해 버렸답니다. 제게 무엇이 더 오든, 제 딸이 다시 돌아오는 것보다 못하며, 그 어떤 소망도 그 앞에 빛 을 잃는군요. 그걸 믿어 주시면 좋겠어요." "부족합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어요. 차라리 당신의 아버지가 당신이 당연히 제기하는 의심을 무시해 버릴 정도로 내게 빠질 리 없다는 것을 믿 기를 바랄까-" "부인-" "저를 못 믿겠다면, 그렇게 당신 아버지를 믿어요......또, 당신의 숙 부 테시오스를 지나치게 과소평가하지도 말고." "그것이 어찌 과소평가란 말입니까." "자기편이 되어봐야 아무 소용없고, 자기편이 되는 즉시 아무 쓸모 도 없어지는 상대를 고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라는 거죠. 그는 당신 이 생각하는 것 보다 몇 배는 현명한 사람이랍니다." 휘안토스는 더 이상 그녀와 말할 이유를 잃어버렸다. 휘안토스가 물 러나는 듯 하자, 마르타 롤탄 백작부인은 부드럽게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옷자락 끌리는 소리가 사라지자 휘안토스는 난간에 앉아 달 빛 쏟아지는 먼 나셀의 바다를 바라보며, 고요히 불어오는 바람소리 와 파도소리를 들으며, 지금 자신이 답지 않게 꽤나 감상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기이하게, 저 파도처럼 조용히 출렁거리는 듯 하다...... *********************************************************** 작가잡설: 친구들 결혼식에 다녀왔습니다. 신랑신부 모두 같은 단과대 동기라서 오랜만에 친구들이 와글와 글 몰려왔답니다. ^^;; (그래서 신랑친구와 무언가 썸씽이 생긴다던가 하는 일은 절 대 불가능하지요. -_- 고딩티나던 그시절부터 머리쥐어뜯으며 시험공부하던 사이니...)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31장 *************************************************************** [겨울성의 열쇠] 제149편 충만한 달빛#8 **************************************************************** 마르타는 침실과는 전혀 반대방향으로 난 복도를 걸어갔다. 그리고 곧 달빛 충만하게 쏟아지며, 저 먼 나셀의 바다와 그 위에 무수히 정박한 배와, 그 항구와 먼바다를 비추는 등대를 바라보는 커다란 창이 있는 방에 도착했다. 암롯사의 왕인 사이러스는 그 방에서 창 밖의 평화로운 정경을 바 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들어와도, 바로 옆에 앉아도 그는 그렇게 턱을 괴고 앉아 먼바다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이러스-암롯사의 왕이자, 나 셀을 델 카타와 툴칸으로부터 평정한 그는 조용하게-그래서 오히려 얼핏 잠이 든 드래곤처럼 더욱 두려운 모습으로 앉아 있는 것이다. 그녀는 그 옆에 있는 자그마한 잔과 병을 들어 잔을 채워 그 한잔 을 왕 쪽으로 밀고는 자신의 잔도 채워 앞에 놓으며 말했다. "오던 길에 휘안토스를 만났어요." "언젠가는 그럴 줄 알았지." "아버지에게 실망했을 지도 모르겠군요. 언제나 어머니 생각만 하느 라 아무 여자도 가까이 하지 않는 아버지라 생각했을 텐데 말이에 요." "그런데 투정부릴 정도로 애는 아니야. 또, 당신이 내 오랜 친구라 는 것을 알아내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게 있지도 않았을 테고." "아직 당신과 내가 친구이긴 한가 보군요." "떠난 건 당신이고 다시 돌아온 것 역시 당신이야.....난 언제나 이 자리에 있었지." 마르타는 술 한 모금을 마시고는 말했다. "변함없이." "그래, 변함없이." "존경스러울 지경이에요. 어쩌면, 내가 당신을 처음 만난 26년 전에 서 하나도 변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마르타가 사이러스를 만난 것은 그녀가 열 아홉이던 해였다. 사이러스의 잔인함이 절정에 이른 시기였지만, 마르타에게만은 별로 난폭하게 굴지 않았다. 다른 여자들처럼 사랑을 구하지도, 자기로 인해 그 사이러스가 변하기를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마르타였다. 게 다가, 당시의 마르타는 암롯사의 가장 주목받는 사교계의 꽃이자, 그 명석함으로 인정받는 인재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는 사이러스를 크게 두려워하지도 그렇다고 동경하지도 않았고, 무시한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사이러스 자체의 분방함과 난폭함을 좋아했고, 사이러스는 그녀의 멋스런 자유로움을 좋아했 다. 관계도 가졌고, 한때 그녀가 대공비가 될지도 모른다는 소문까 지 퍼졌다. 그러나 그녀도 그도, 그것이 별로 현명한 선택은 아니라 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평범하게 전락해 버리고, 그것이 낡고 변색되 는 것은 둘 다 바라지 않았다. 사이러스는 그녀에게 끝까지 청혼하 지 않았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마르타는 점잖고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평범한 아들과 병약한 딸을 낳았다. 그녀는 그와 함께 남 편의 영지로 가서 십 수년을 평탄하게 살았고, 장성한 아들은 아버 지의 작위를 물려받아 영지를 다스리고 있다. 그러나 병약한 딸만은 그녀에게 고통이었고, 그 딸이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암롯사의 수도 로 돌아왔다. 사이러스와 다시 만나게 된 것은 허무할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어제 까지 만나던 듯 마르타는 당연하게 왕을 찾아왔고 사이러스 역시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를 대했다. 마지막 남은 열정을 쏟아 부은 상 대가 세상을 떠나고, 그렇게 남겨진 둘은 예전으로 돌아와 버린 것 이다. 마르타가 말했다. "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루실리아와 닮아있더군요." "얼굴은 정말 똑같지." "아뇨. 성격 자체도 그녀와 너무도 닮았어요....눈빛을 보면 알아요." 사이러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나 당신이군....그래, 너무 닮았지." "둘째 아이는 어떤가요. 난 그 아이는 한번도 보지 못했는데." "성격은 어머니와 닮았어." "루실리아와?" "아니, 내 어머니....이레크트라." 마르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돌고 도는군요." "지겨울 정도로." "벗어나고 싶나요?" "가끔은." ".....그렇다면 잠시 여행한번 떠나 보지 않겠어요? 한번도 해 보지 않은 일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텐데." "나는 아직 왕이야." "알고 있어요. 하지만 한번쯤 쉬고 싶을 때면 언제든 말해요. 내 어 머니 아버지가 물려준 성은, 물려줄 딸이 없는 지금 평화롭고 한적 하게 비어 있으니까요." "근사한 제안이군....마리." 사이러스는 술에 가득 찬 잔을 달을 향해 들었다. 하얗고 창백한 빛 이 잔의 모서리에 반짝이고, 그 잔이 비추는 달에 가득 차는 듯 했 다. 사이러스가 말했다. "나의 잔이 비면, 그 때 당신을 찾아가지." "그 잔이 깨어지지 않기를 바래요." "축복 고맙군." 사이러스는 그 잔을 마셨고, 마르타 역시 잔을 비웠다. "오래 걸렸네, 아키?" 켈브리안은 아킨이 그녀가 기다리던 객실로 오자 그렇게 환하게 웃 으며 말했다. 아킨은 그녀가 혼자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주변을 둘 러보며 물었다. "슈마허 님과는 같이 계시지 않는군요." "아아, 요즘 내가 싫어졌대. 뭐, 상관 안 해. 어차피 오랜만에 귀여 운 레이디와 동생이랑 있는 건데 너그럽게 봐 줘야지." 그렇게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켈브리안은 읽고 있던 책을 테이블 위 에 얹어 놓았고, 아킨은 그녀가 손을 모아 허리 앞으로 가져오자 그 제야 말을 꺼냈다. "그 사람과 함께 돌아갈 예정입니까?" "봐야 알지." 켈브리안은 오늘 아침에 슈마허가 꺼냈던 파혼 이야기를 머리에 떠 올리며, 그렇게 자신 없게 말했다. 대체 갑자기 왜 그런 말을 꺼낸 걸까.....너무 갑자기 들어서, 머리만 멍할 뿐이다. 오늘밤에 잠들기 전에 좀 생각해 봐야 하겠다. "그런데 그건 왜 물어 보는 거니?" 아킨은 잠시 망설이는 듯 했다. 그러나 켈브리안이 그런 그를 물끄 러미 보며 틈을 주지 않자, 결국 어색하게 웃고는 말을 꺼냈다. "선배는 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켈브리안은 당황하고 말았다. 평소의 그녀라면, 그리고 상대가 슈마 허라면, 적어도 '이 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저러나.' 하고 살펴보기라 도 했을 텐데, 지금의 아킨은 똑바로 보기조차 어려웠다. "무슨 소리니?" "방금 전에 죠세피나 님께서 어려운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것도 선배와 관련된. 언제 꺼낼까, 생각했지만....아무래도 저 혼자 생각할 일은 아닌 듯 해서 이렇게 바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켈브리안은 머릿속이 하얗게 되는 것만 같았다. 가슴이 두근거려, 말문이 막혀 버렸다. 죠세피나 여왕은 분명 상냥하고 예의발랐으며, 또 현명한 여자였다. 게다가 켈브리안의 멀지 않은 친척인 만큼 켈브리안만 잘 처신한다 면 얼마든지 우호적인 입장이 되어줄 존재였다. 그러나 그런 만큼 죠세피나 여왕은 분명 켈브리안에게 무언가 기대하는 것이 있을 것 이며, 그것은 꽤 어려운 일이 될 가능성이 높다. "뭐라 말씀하시든?" "결혼에 관련된 이야기였습니다." 켈브리안은 벌떡 일어날 뻔했다. 얼굴은 벌써 새빨개져 있었고, 그 말을 꺼낸 아킨 역시 별로 즐거운 얼굴은 아니었다. 켈브리안이 말까지 더듬으며 말했다. "그, 그러니까.....혹시 너와 내가 결혼한다, 이....말인 거니?" "오해하지 마세요. 지금 선배에게 청혼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 고......선배와 결혼하고 싶다거나....아니, 선배를 여자로 본 적도 없습 니다. 그러니 우선 안심하세요." "차분히 말해 줘. 나, 지금 아주 당황했어." "그러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휘안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전혀 이해를 못했었습니다. 저는 별다른 야심도 없고, 또....암롯사의 일에 끼여들 생각도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죠세피나 님께서 그 말을 꺼내 시니, 그제야 이해가 되더군요. ......휘안이 우려했던 것은, 제가 선배 를 돕고, 선배가 저를 돕는 상황자체였습니다." "무슨...." "선배는 제게 잘 해 주셨죠. 또, 저도 선배를 좋아했고......그런데 제 가 선배를 도와 선배가 왕위에 오르는데 도움을 주고, 그것이 성공 한다면 저는 꽤나 유리한 입장을 얻게되는 거에요. 그리고.....휘안은 일이 그렇게 되면 나중에 제가 선배와 결혼해서 로메르드의 왕이 될지도 모른다 생각했나 봐요." ".......터무니없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켈브리안은 어디 도망칠 곳이라도 있으면 어디 로든 도망쳐 버리고 싶었다. 아킨은 지금 정말 난감하게 그 말을 하 고 있었고, 그것은 섣부른 오해를 받게 되어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된 사람의 그것이었다. 아킨은 '정말' 그것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휘안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결론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지금까지 마음놓고 차지하고 있던 그의 위치가 흔들 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겠지요. 암롯사에 계승권 분쟁이 테시오 스 숙부와 휘안이라는 별 주목도 못 끄는 시시한 구도가 될 수 있 었던 것은, 제 계승권이 말소되어 있기 때문이니까요. 힘없는 데다 가 몸에 제약까지 있는 동생과, 로메르드의 왕이 될 지도 모르는 동 생은 격이 틀리니까....." 그리고 거기까지 말한 다음에야 아킨은 켈브리안을 바라보았다. 켈 브리안은 급히 눈길을 돌렸고, 그것을 아킨은 '불편해 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죄송합니다, 선배. 휘안이 그런 오해를 한 데는, 그리고.....브리올테 왕비가 돌아오고 선배가 곤란한 처지가 된 데는 제 책임이 크니까." "아키...." "그래도 선배, 믿어 주세요. 어차피 저는 그럴 생각이 없고, 있지도 않은 야심을 위해 선배를 이용할 생각도, 힘들게 할 생각도 없다는 것을." 아킨은 그녀의 손을 잡아 끌어당겼다. 그저 동생이 누나에게 하듯, 친구가 친구에게 하듯, 아무런 망설임도 떨림도 어색함도 없이, 너 무나 자연스럽게. 그렇게 아킨의 말 하나 하나에 그녀를 향한 정중 함과 배려가 스며들어있었건만, 켈브라인에게는 전혀 즐겁게 다가오 지 못했다. 그리고 그 따뜻함이 켈브리안은 이상할 정도로 아쉽게, 또 서글프게 느껴졌다. "이렇게 솔직하게 말하는 건, 선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선배가 저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게 되는 건 싫습니다. 그러니....행여 부담 가지거나 하지는 마세요. 저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을 것이고, 속 된 마음으로 기대하지도 않을 테니까....." 그리고 아킨은 그녀의 손등에 키스했다. "행복하세요. 그리고, 당신의 행복을 위해 저 역시 노력해 보겠습니 다.....최선을 다해, 보답 같은 것은 바라지 않고....." "아무 것도?" "네, 아무 것도." 켈브리안은 더 이상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달빛이 부서지는 아킨의 은빛 머리카락과 가만히 감은 눈이 눈부셨고, 떨리는 손등에 닿는 입술은 따뜻하며....그의 말은 너무도 잔인하다는, 단지 그것 밖에는 알 수 없었다. *********************************************************** 작가잡설: 그렇게 막강 라이벌을 상대로 작업중인데;; 다른 게 눈에 들어오겠냐, 아키야.....;; 에구 불쌍한 켈브리안.; 누구와 누가 될 지는.....어쨌건 겨울키는 끝나려면 멀었다는 말밖 에는 드릴 수 없답니다. ^^;;;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32장 ************************************************************** [겨울성의 열쇠] 제32장 항구에서의 재회 제150편 항구에서의 재회#1 *************************************************************** 위대한 황제는 하얀 대리석 관에 누워 있었다. 성배는 정수리 위에 성검은 그 가슴에 놓여 있었으며, 상복 차림의 젊은 황후와 창백한 안색의 어린 아들은 그런 황제의 머리맡을 지 키고 있었다. 제단을 둘러싼 수 십 개의 작은 촛불이 차가운 겨울 바람에 흔들렸 다. 황제의 벗이기도 했던 늙은 사제는 죽은 황제를 위해 안식의 기 도를 올렸고, 황제의 충직한 일곱 기사들은 황제를 위해 휘둘렀던 그들의 검을 바닥에 눕히고 슬픔으로 무거워진 고개를 숙여 주군의 안식을 기원했다. 높고 긴 창 밖의 컴컴한 하늘이 황제의 시신을 내 려다보고, 사원의 정면에 세워진 에칼라스의 상은 황제를 향해 손을 뻗어 그 죽음을 애도했다. 그리고 막, 늙은 사제가 향유를 들어 황제의 이마에 바르려 했을 때 였다. 사제는 사원의 문 앞에 서 있는 검은 베일의 여인을 발견했 다. 여인은 검은 베일로 얼굴과 몸을 덮고 얇은 황금 테를 머리에 두르 고, 손에는 라레스나의 꽃인 백합이 몇 송이 들려 있었다. 혼자는 아니었다. 그녀의 옆에는 검은 망토를 덮어 쓴 장대한 체구의 남자 가 서 있었다. 모두들 숨죽인 채 그들을 지켜보았다. 여자는 베일을 걷고는 얼굴을 드러냈고, 남자 역시 후드를 벗었다. 여자는 새카만 곱슬 머리카락 과 차갑고 푸른 눈동자, 그리고 키 큰 남자의 진한 갈색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을 알아본 기사들 은 놀란 사제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선황폐하의 귀한 친구 분들이요. 여자는 제단 옆에 꽃을 놓았다. 남자는 활활 타는 횃불 위에 들고 있던 주머니를 쏟아 부었고, 순간 불길이 화륵 치솟더니 기이한 향 기가 풍겨져 올랐다. 그것은 그 누구도 맡아보지 못했던, 아주 깊고 오래된 소나무 숲에서 풍겨오는 듯한 신비로운 향기였다. 그 향기 하나로 주변은 한없이 아늑해지고 고요해지는 것 같다. 여자가 먼저 황제의 싸늘한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하얗고 긴 목에 걸린 황금 목걸이가 차갑게 짤랑였다. 그녀는 황제의 얼굴을 잠시 내려다보고는 고개를 들었고, 그 머리맡에 놓여 있는 성배를 들었 다. 남자가 그녀를 따라 황제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진한 갈색 머리 카락이 넘쳐흘러 황제의 목덜미까지 닿았고 조용하고 까만 눈이 슬 픈 듯 흐려지며 황제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는 황제의 가슴 에 놓여 있는 검을 집어들었다. -당신들, 지금 무엇을 가져가려 하는 겁니까! 아무 것도 모르던 젊은 황후가 놀라서 외쳤다. 그녀는 그 검과 성배 가 모두 아들인 황자의 것이 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자, 여자가 말했다. -이것은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이 나라의 주인이신 황제의 것입니다. 그 누구도 그것에 손댈 수 없습니다. 놀란 황후에게 남자는 타이르듯 부드럽게 말했다. -이것들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황제의 아내여. 그는 우리의 형제였던 팔로커스에 대한 대가로 이것을 요구했고, 우리는 그가 살 아 있는 동안에만 그 권리를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단지 그 뿐입니 다. 황후는 고개를 저었다. -성스러운 에칼라스가 이 롯시온 제국의 주인이신 제 부군에게 그 것을 선사해 주신 것입니다. 그것 없이는 평화는 없습니다. 부디, 이 제국의 평화를 위해 그것을 저희 롯시온에 남겨 주십시오. 이 나라 가 다시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황후의 말에 여자 마법사가 웃었다. -에칼라스는 모두의 어머니이자 모두의 딸입니다. 세계는 넓으며, 그녀가 사랑하고 사랑 받을 사람은 넘치도록 많습니다. 오로지 이 나라를 위해서 무엇을 선사할 리가 없지요....황후여, 이런 물건의 권 위에 의지하지 않아도, 쿼크의 나라는 얼마든지 유지될 수 있습니 다. 그리고 그리 되도록 노력하시길 바랍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래도 그 당연한 말에 따라 그것을 포기하고 순 순히 넘겨줄 자는 없다. 특히 남편이 죽어서 불안한 황후에게는 두 말할 것도 없었다. 황후가 외쳤다. -기사들이여, 무엇하고 계시나요! 어서 막아요...! 저 자들이 황제의 보물을 훔쳐 가려하고 있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사들은 바닥에 놓인 검을 지켜 들었다. 일 곱 기사들은 두 사람을 둘러싸며 검을 올렸고, 검 끝은 검과 잔을 쥔 두 마법사들을 향했다. 그러자, 갑자기 남자가 황제의 성검을 뽑아 들었다. 그가 뽑아드는 동시에, 검의 중심에서 심장이라도 생긴 듯 붉고 뜨거운 덩어리가 생겨났다. 남자가 팔을 비틀자, 검은 얼음 조각처럼 산산조각이 나 허공으로 흩어지더니 녹아들 듯 사라져 버렸다. 남자는 칼자루만 남은 검을 집어 던졌다. 쇳덩이에 불과한 자루가 돌 바닥에 챙캉, 챙캉--흉한 소리를 내며 굴러갔다. 그러나 방금 전에 탄생한 붉은 빛 덩어리만 은 허공에서 여전히 빛나고 있더니 여자가 들고 있는 잔으로 흐르 듯 들어갔다. 붉은 빛이 잦아들자, 여자는 잔을 높이 들며 말했다. -이 성배는 천 개의 눈, 그 천 개의 호수 바닥 중 하나에 넣어 놓겠 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곳을, 겨울의 숲과 얼음의 강줄기와 인간의 언어를 모르는 마법의 종족들로 하여금 지키도록 하겠습니다......그 리고 성배와, 이 성배에 담겨진 성검의 심장! 그대들 말대로 이것이 황제를 만든 다면..... 그리고 여자는 그 검은 베일로 성배를 덮었다. -성배는 진정한 황제의 품으로, 제 발로 찾아갈 겁니다. 그렇게, 지상 위에 밤이 오듯 성배는 사라졌다. 그 후 병약했던 황후의 아들은 즉위 1년만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황후는 아들을 잃고 라레스나 수도원으로 들어가 버렸고, 옥좌는 공 석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한달 뒤, 일곱 명의 기사들은 서로를 향 해 검을 들었다. 휘안토스는 텅 빈 제단 앞에 발을 멈추었다. 둥그런 쟁반 같은 제단으로, 크기는 고작 반 미터 정도였다. 그러나 고급 대리석으로 만들어져있고, 그 테두리는 세계의 열두 수호자 조 각상이 둘러싸고 있었다. 성상은 겨우 주먹만한 크기들이었으나, 살 아 있을 듯 생기 있게 만들어져 있다. 그 테두리 안쪽에는 원이 새 겨져 있고, 테두리와 그 원 사이에는 에칼라스의 축언이 부드러운 필체로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안쪽에 원 하나가 더 그려져 있으 며, 그 정 중앙에 둥그렇게 움푹 패인 곳이 있다. 그곳은 성배를 놓는 곳이었다. 진정한 황제가 돌아오는 날 성배는 스스로 제 자리를 찾아 올 거라 는 두 마법사들의 선언이 이 사원에 울려 퍼진 후로 벌써 200 여 년이 흘러갔건만, 이 제단은 아직도 비어 있다. 일곱 명의 기사 중 두 명이 죽고, 다섯 명도 결국에는 황제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각자 의 영토를 챙겨 주저앉았다. 성배가 돌아오지 않는 한, 어차피 그 누구도 황제가 될 수 없으니 살아남기라도 해서 영지라도 챙기려 한 것이다. 그리고 그 고착상태가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들이 추대한 황제는 여기 이 제단에 입을 맞추지만, 성배는 단 한번도 떠 오르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제대로 된 황제가 나타나면 성배 가 이곳으로 온다는 말은 근거가 전혀 없는 말이었다. 이 제단은 3 대 황제 로카니온이 만들어 놓은 것이고, 그는 성배는커녕 아버지 쿼크 대제조차 만난 적이 없다. 뿐만 아니라, 그를 데리고 온 겔버 스 델터가 성배가 무엇이고 성검이 무엇인지 제대로 가르쳐 주었을 거라는 보장도 없다. 그래도 이번에 추대되는 황제, 그것이 휴거인 이 될 지 베로크가 될 지 모르나 어쨌든 그 두 청년 중 하나도 분 명 여기에 입을 맞추고 행여나 하는 기대로 이 제단을 볼 것이다. 그리고 역시나 아무리 들여다봐도 차가운 돌덩어리로 남아 있을 것 이다... 휘안토스는 제단을 가만히 쓸어 보고는 손을 뗐다. 이백여 년 전의 물건이나, 당시의 대마법사이자 카를롯사의 대공왕이 된 와제티온의 마법 덕에 아직도 새것처럼 차갑고 매끄럽다. 그렇게 서 있던 휘안토스는, 바로 앞에 있는 긴 의자에 앉아 그를 물끄러미 보는 소녀를 발견했다. 한참 전부터 이곳에 있었던 듯 하지만, 물줄기가 쏟아지는 소리에 그녀의 기척이 묻히고 황제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새로이 심겨진 화양초의 꽃더미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휘안토스는 그녀에게 다가갔고, 그녀는 앉은 자세 그대로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무슨 생각을 저리 골똘히, 그것도 나를 보면서 하고 있었던 건가, 휘안토스는 그리 생각하며 인사를 건넸 다. "오랜만입니다, 칼라하스 공주." 칼라하스도 예의바르게 답했다. "안녕하세요, 휘안토스 왕자. 그 동안 잘 지내셨나요?" "물론입니다." 휘안토스는 칼라하스를 잘 살펴보았다.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군청색 머리카락은 평소와는 달리 연분 홍색 진주로 장식되어 있었다. 아마도, 내일 저녁에 있을 투표 때문 일 것이다. 다섯 나라 모두 장자인 휴거인에 표를 던질 예정이었다. 누가 누구 를 뽑을 지는 각 나라에서 대표가 파견되기도 전에 서로 밀담을 주 고받아 뜻을 굳힌다. 그리고 도착하는 즉시 회의가 소집되고, 그 회 의에서 정해진 대로 표를 던지고 후계자가 결정되면 얼마 되지도 않아 대관식이 이루어진다. 사절은 그 후 축하연이 베풀어지는 2주 동안만 황도에 머물고 본국으로 돌아간다. 이 중요한 일에 왕이 직접 오지 않고 대표가 오게된 것은 5대 황제 선출회의에서 왕이 황도로 떠났던 에크롯사에, 아직 왕이 출발하지 않았던 카를롯사가 침략해 왔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는 모두 대표들만 참석하게 되었고, 그래도 황실에 대한 예의가 있는 지라 대표들은 왕의 직계자손이나 형제들이었다. 떠나기 전에 누구 를 지지할 지 미리 정해지는 것도, 그들이 황도에 체류하는 시간을 최소로 줄이기 위함이었다. "마하는 보이지 않는군요, 공주." "저 혼자 조용히 있고 싶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근처에 있을 것입니 다." 휘안토스는 어렵지 않게 신전의 홀의 입구 앞에 있는 기둥으로 눈 길을 돌렸다. 나중에 마르실리오에게 한마디 해 주어야 할 듯 했다. 아무리 상대가 마하라지만, 다른 나라의 기사가 무장한 채 왕자 가 까운 곳에 있게 했다는 것은 한마디들을 만한 실수였다. 휘안토스가 말했다. "그렇다면 저는 이만 자리를 뜨겠습니다. 평안한 휴식이 되시기를-" "휴거인 황자전하겠지요?" 휘안토스는 웃으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그리고 공주 역시 마찬가지 아니신가요......어차피 칼리 토 님께서는 그 자리로 나설 수 없는데." 칼라하스 공주는 차분했지만, 눈 속으로 잠깐 치밀어 오르는 열기는 미처 감추지 못했다. 저런 눈빛을, 예전의 칼리토도 한번인가 보냈 었다. 서리 앉은 풀잎처럼 차가운 동생보다는 솔직한 위인이라 좀 더 노골적이었긴 하지만. 지금 베로크나 휴거인이나 모두 왕의 직계가 아니다. 물론 황제에게 직계자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유감스럽게도 황후가 아닌 다른 여 자의 아들인 큰아들은 일치감치 수도사가 되어 버렸고, 황후 태생인 둘째 셋째 아들은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났으며, 막내인 필리나 황녀 는 너무 어린데다 여자라 예외이다. 결국 그의 누나들의 자식들 중 하나에게 황위가 돌아가게 된 것이고, 랑기온과 결혼한 켈라스 역시 황제의 큰 누나였으니 칼리토에게도 기회가 오는 것이다. 칼리토와 칼라하스의 아버지인 랑기온이 쿼크 4세의 큰누나 켈라스 황녀와 결혼한 것은 놀랍게도 그녀를 사랑해서였다. 그녀와의 결혼 은 다른 대공국의 엄청난 반대에 부딪혔고, 가장 크게 반대한 것은 바로 이웃나라인 암롯사였다. 그 우려 속에서도 랑기온은 결국 황녀 와의 결혼을 감행했다. 그 둘의 결혼 생활은, 랑기온이 암롯사의 내 란에 끼어 들기 전까지만 해도 아주 행복했었다. 그러나 암롯사의 사이러스에 의해 반란은 평정되고, 사이러스의 동 생을 도우려 했던 랑기온 대공왕의 함대는 나셀 해에서 참패했다. '암롯사의 대만찬'으로 델-카타롯사와 연이 닿은 반대 세력을 남김 없이 참혹하게 살해하고, 그럴 의도가 있는 사람의 기마저도 깨뜨려 버린 사이러스는 곧장 델 카타의 수도, 카티온까지 진격했다. 사이 러스는 나셀 해를 손에 넣는 것과 함께, 랑기온과 황녀와의 결혼 무 효를 요구했다. 암롯사에게 매수되었던 신하들은 왕비의 폐위를 뻔 뻔하게 주장했고, 결국 랑기온은 황녀를 제도로 보내야 했다. 몇 년 뒤, 사이러스가 그 유명한 루실리아와의 결혼으로 한결 부드 러워지자 랑기온은 다시 아내를 불러들이고 결혼무효선언도 취소했 다. 그리고 그 후 아내와 같이 지내며 낳은 것이 바로 칼라하스인 것이다. 그러나 사이러스의 결혼이 3년만에 파탄 나고, 잠시 조용히 있던 친 암롯사 파의 신하들은 칼리토가 왕이 될 경우가 두려워 지기 시작 했다. 칼라하스를 낳은 황녀 켈라스는 그 일에 마음 고생하다 결국 에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슬퍼하는 왕에게 그들은 급히 재혼을 주장했다. 재혼은 겨우 한달 뒤에 이루어졌고, 다음해에 새로운 왕 자가 태어났다. 당연히 친 암롯사 파들은 어떻게든 칼리토를 제거하 고 재혼한 왕비가 낳은 왕자를 왕위로 올리려 했다. 그렇게 그들의 음모로 일어난 사고에서, 칼리토는 살았으나 칼라하스는 지금 이렇 게 불구가 되고 말았다. 그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드디어 성인이 된 칼리토는 반 암롯사 파 를 모아 델 카타의 왕이 되었지만, 그의 암롯사에 대한 증오는 오히 려 더 탄력을 받고 있었다. 그는 칼라하스의 사고는 물론이요, 어머 니 켈라스 황녀의 죽음에 대해서도 암롯사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리 고 그의 미움을 사이러스의 아들인 휘안토스는 고스란히 불려 받고 있었고, 지금 이 앞의 칼라하스는 오빠보다 더 매섭게 암롯사 왕가 를 증오하고 있었다. 단지, 놀라울 정도로 부드럽게 웃으며 정말 호 의라도 있는 듯 굴뿐이다. -언젠가는 정면 대결을 치러야 할거다. 작년에 있었던 암롯사 대공왕 사이러스는 칼리토의 대관식에 다녀 온 아들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물론 휘안토스도 대관식 때 그를 바라보던 칼리토 대공왕의 눈빛으 로 충분히 짐작하고 있는 바였다. 기회만 된다면 저 남해의 해룡에 게 물렸던 사자는 다시 동굴에서 뛰쳐나올 것이고, 그것은 아마도 지금 휘안토스 앞에서 차분하게 미소짓는 푸른 암사자가 판단을 마 칠 때 즈음일 것이다. 그리고 휘안토스는 아무래도 그것이 꽤 가까이 온 것 같다는 예감 이 들었다. *********************************************************** 작가잡설: 자, 이렇게 사이불편한 두 나라를 화해시키는 것은 바로 결혼! 이제 아키가 칼리토 왕에게 시집을! ......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32장 *************************************************************** [겨울성의 열쇠] 제151편 항구에서의 재회#2 *************************************************************** 베이나트가 사라졌고, 아침에 그의 텅빈 침대를 발견한 아킨은 당황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짐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 또 여급에게 아킨에게 전해 달라는 쪽 지까지 남기고 떠난 것을 보니 잠시 외출한 것 같다. 쪽지에 적힌 것도 잠시 외출할 테니 그렇게 크게 걱정하지는 말고 오늘 하루 편하게 기다려 달라는 것이었다. 아킨은 그것을 찢어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여급에게 그가 어디로 갔 냐고 물었다. 여급은 당연히 몰랐고, 다만 안젤리나 가(街)로 가려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 지 정도만 물었다고 했다. 아킨은 말이 끝 나기 무섭게 '다시 돌아오겠다.' 라는 말을 분명히 남기고는 여관을 나서버렸다. 놀비오를 떠난 이래 계속 이런 상태였다. 아침 일찍 켈브리안과 대 공왕 부부에게만 인사를 하고 놀비오 성을 떠나 숲으로 돌아왔을 때 자켄은 이미 없고, 베이나트 만 남아 있었다. 아킨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고, 그로부터 듣게된 답에 아 킨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를 내지도 않았고, 슬퍼하 지도 않았으며, 최대한 담담하게 받아 들였다. 그리고 그렇게 여기 까지 온 것이다. 그 후 베이나트에게 어떻게 굴었을 지는 잘 모른다. 그냥,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게 베넬리아의 수도 울파논으로 왔고, 도착한 다음날 아침에 베이나트가 느닷없이 사라진 것이다. 화를 낸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냥 조용하게 굴었고, 여기까지 별 군 말 없이 왔는데 느닷없이 이렇게 행동하니 불안해 진다. 아무리 생 각해 봐도, 예전에 단 둘이 여행하던 시절보다 더 얌전했다. "대체 왜...." 알 수 없고, 답답한 아킨은 그저 안젤리나 가로 향할 뿐이었다. 베넬리아의 수도 울파논은 예전에 베넬리아 국립 마법원에 다닌 적 이 있으니 그다지 낯설지는 않았다. 물론, 그 때는 학교에 처박혀서 거의 나오지도 않아서, 길을 나서면 당황하지 않을 정도로만 아는 것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아킨은 어렵게 그 주소로 향하는 길로 접어들었고, 가는 길에 작은 상가로 접어들게 되었다. 아무 생각 없이 작은 가게들을 지나치던 아킨은, 한 가게 앞에서 끌린 듯 멈추어 섰다. 가게의 창문에는 베넬리아의 수도 울파논과 똑같이 생긴 모형이 만 들어져 있었다. 울피온의 눈동자도, 안식의 전당도, 진짜 도시를 자 그마하게 축소시킨 듯 섬세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다. 아킨은 가게 앞에서, 정말 태어나서 처음으로 순수한 '재미'에 의한 호기심을 느꼈다. 주변에 뭐가 있다고 자각하기 시작하던 어린 나이에는 내내 철창 안에 갇혀 지냈었다. 그 안에도 아이들에게 필요하다 싶은 모든 것 이 갖추어 있기는 했고, 휘안토스에게 주어지던 것이-물질 적인 것 에 한하여- 아킨에게도 주어지기는 했지만 그것들 덕에 즐거웠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 아킨은 정말 '신기해서' 그것들 앞에서 발이 멎었고, 정말 '재미있어서'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현관의 창을 통해 가게 안 을 들여다보니 그리 크지 않은 가게 안에는 온 벽에 자그마한 상자 들이 가득 꽂혀 있었고, 오솔길 같은 통로를 제하고는 가게 중앙도 온통 그런 상자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오른쪽 벽에는 좁은 계단이 나 있고, 그 계단이 향하는 2층에도 그 상자들이 가득 차 있다. 그 때 문이 벌컥 열리며 방울이 딸랑딸랑 울었다. 아킨은 얼결에 뒤 로 주춤 물러났다. 그러자, 가게 안에서 나온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구경하고 싶으면 안에 들어와서 하시오. 사라고 하지는 않을 테니 까." 주인인 듯 보이는 남자는, 허리가 꼿꼿하고 어깨가 넓어서 그렇지 꽤나 나이 많아 보이는 남자였다. 머리와 턱수염은 하얗게 새어 있 었고, 돋보기 안경을 낀 눈가나 이마에도 주름이 가득했다. 그러나 눈빛이나 웃음이나, 너무나 활기 넘치고 건강해 보인다. 그 굵은 팔 에는 손자인 듯 보이는 아기가 안겨져 있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듯 아주 작았고, 노인의 굵은 팔뚝과 크기가 거의 비슷할 정도였 다. "어서 안 들어오고 뭐하시오." "아, 아닙....니다." "원, 쑥스러워 하기는......" 노주인은 껄껄 웃고는, 가게 앞에 놓인 의자에 털썩 앉았다. 테이블 도 놓여 있고, 그 위에 파란 파라솔도 있다. 주인은 아기를 무릎에 앉히고는, 다른 손에 들고 있던 투명한 공을 아기에게 주었다. 그 둥그런 공안에는 작은 배가 들어 있었고, 반쯤 채운 파란 물은 파도라도 치듯 출렁였다. 아기가 공을 이리 저리 굴리며 까르르 웃 었다. 그런데 그 공 위로 연기가 피어오르듯 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아킨이 호기심이 일어 그것을 더 잘 보기 위해 다가서자, 공안에서 멀리서 비가 내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공의 바닥에서 출렁이던 물이 거칠어지고 그 위를 떠다니던 조각배도 뒤집어 질 듯 요란하게 흔들렸다. 아기는 놀란 듯 그것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그 안에서 비가 그치고 구름이 걷히자 까르르 웃었다. 그렇게 아이 와 놀던 노인이 돋보기 안경을 슬쩍 내리더니, 그 까만 눈을 장난꾸 러기처럼 반짝이며 말했다. "에크롯사 인이오?" 그것을 왜 묻나, 하고 생각하며 아킨이 답했다. "아닙니다." "으흠, 그럼 여자친구가 에크롯사 아가씨인가 보군." "네......네?" 아킨은 얼굴이 갑자기 불이라도 난 듯 화끈 했다. 그러자, 노인은 아킨의 가슴을 가리켜 보였다. "거기, 그 목걸이." "네....?" 아킨은 노인이 가리키는 것이, 유제니아가 준 작은 방울이 든 주머 니라는 것을 알아챘다. "아, 이건 친구가 준겁니다." "친구?" "아, 네. 친구입니다. 에크롯사에는 외국인 친구와 헤어지면 이걸 준 다고....그래서 받아 온 건데." 노인이 은밀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그 친구가 남잔가?" "여자입니다. 저보다 두 살 정도 어린....." 당장에 노인이 히죽 웃었다. "이런, 이런. 이 둔한 소년 덕택에 아가씨 고생이 좀 심했겠군." "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네가 외국인이라 전혀 몰랐던 듯 하네만, 에크롯사 아가씨들은 그것을 아무에게나 주지 않아." "제가 그 아이를 구해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그 애가 보답으로 준 건데......저....." 노인의 눈동자가 너무나 처량해서 아킨은 말꼬리를 흐렸다. 여기서 더 말하다가는 점점 구제하기 힘든 바보 꼴이 되어갈 것만 같았다. "이봐, 내가 내 입으로 직접 말해야 하나? 그 방울은 좋아하는 남자 를 먼 곳으로 보낼 때 살짝 건네주는 거라고." "......네?" 그 반문에 노인의 눈은 더욱 처량해져갔다. "어느 가엾은 아가씨의 짝사랑이었나 보군. 왜, 아가씨가 마음에 없 었소?" "아니, 저희는 그런 쪽으로 말을 나눈 적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저 희는 그냥 친구였고, 또......" 그렇게 말하던 아킨은 갑자기 유제니아와 헤어진 놀비오로 당장에 돌아가고 싶어졌다. 저 말이 정말인지 확인해 보고 싶어졌고, 얼굴은 계속 달아오르고 있었다. 이렇게 당황한 것도 처음이다. 노인이 은근히 물었다. "또.....?" "....아닙...니다." 상황을 대강 눈치챈 노인이 다시 장난꾸러기처럼 짓궂게 웃었다. "나중에 돌아가면 말 한 번 해 보시오. 단, 너무 직설적으로 '너 나 좋아했냐?' 하고 물었다가는 아가씨가 기겁해서 도망칠 테니, 최대 한 돌려서 말하는 건 잊지 말고." "아니, 저.....저....그것이..." "그것이?" "아니, 아니.....저, 전...." 얼굴을 붉히고는 더듬더듬 대고 있는데, 그 꼴이 정말 치떨릴 정도 로 얼간이 같아서 아킨은 어디로든 숨어버리고 싶었다. 전혀 상관없는 사람에게, 그 쪽에서 먼저 다가오기 전에 '저 사람이 나를 좋아해 주면 좋겠다.' 라고 생각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자켄은 이복형이었으니 당연하게 먼저 왔고, 켈브리안은 아킨이 정 신차리지도 못하게 다가왔고, 루첼은 '믿음'이 있었으니 아킨이 벽을 낮춘 것이었다(베이나트는 인간이 아니므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아킨이 먼저 누군가를 바라보고 그에게 기대했던 적은 별반 없었고, 그것은 반드시 실망하게 될 거라는 확신과 그에 대한 두려 움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유제니아와는 처음부터 그런 긴장감이 없었다. 기억이 없는 얼떨떨한 상태에서 처음 만났고,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보름 의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유제니아는 그것을 그저 '다른 사람과는 다른, 조금 유별난 상태'로 받아 들였을 뿐이다.... 아마도, 그래서 기대를 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원하는 것을 해 주기를 바라는 것일지도, 좀 더 오래 옆에 있어 주기를 바라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는 그런 사람이 생기지 않을 것 같으니까. 단지 그 뿐이다. 그러니 다시 만나고, 좀 더 친하고 가까이 지내고 싶은 것 뿐이다. 더 이야기를 나누면 있지도 않은 사실까지 믿어 버리게될 것 같아, 아킨은 급히 말했다. "감사했습니다. 이만......가보겠습니다." 아킨의 말에 늙은 주인은 몸을 으쓱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항구로 향하는 길 쪽에서 누군가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고, 주인 은 그 쪽으로 고개를 들어 그 유쾌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니, 얘야. 벌써 온 거냐? 피오는 내가 돌볼 테니 너는 오후 늦게 와도 좋다고 했지 않니." 아마도 주인이 안고 있던 아이의 어머니이자, 이 남자의 며느리인 듯 했다. "아, 아니에요. 마, 많이 샀어요. 집으로 다 보냈고...그러니 너무 폐 를 끼칠 수는 없어서...저기...." 그리고 아킨은 그 가늘고 얌전한 목소리를 분명 알고 있었다. 놀라 서 급히 고개를 쳐들지 않으려 노력하며 노인의 품에 안긴 아기를 보니, 아기의 짧은 갈색머리와 담갈색 눈이 아무래도 눈에 익다 싶 었다. 아킨은 절대 고함지르거나 하지 말자 몇 번을 속으로 말하며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여자가 아킨을 보자마자 비명을 질렀 다. "끼아악---! 어머나, 난 몰라! 맙소사!" "......저..." 저 얌전하면서도 끝없이 덤벙거리는 성격은 정말 여전하다.....주인이 급히 여자의 손에서 아기를 빼앗아 들더니 둘을 번갈아 보며 물었 다. "그런데 아가야. 아는 사이니?" 그 '아가야' 라는 어마어마한 호칭에 아킨은 이 노인이 그 루크 페 일리 가의 가주였나 해서 다시 봐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들여다봐 도 쥰과도, 그 미친 호랑이 같던 큰형과도 전혀 닮은 구석이 없었 다. 게다가 아킨이 '닮은 것 같다' 라고 떠올리는 사람은 오싹할 정 도로 엉뚱한 사람이었다. 실비가 더듬더듬 물었다. "아, 아킨토스....아킨토스 님이 맞지요?" "맞습니다.....아, 결혼하셨군요. 실비아 알베스티 양." "아, 네.....네! 자, 작년에 했어요!" 실비는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했다. 아킨은 예전의 그 덤 벙거리는 성격이 전혀 고쳐지지 않았을 뿐더러 더 심해지기까지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망적이다, 그 남편에 이 부인이라니. "베넬리아에는 언제 오신 겁니까?" "저....어기, 자......작년에요. 결혼하자마자 왔어요." "이보소 젊은이, 우리 아이의 고향 친구요?" 주인이 불쑥 끼여들며 그렇게 말했고, 실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 아니에요! 이 이분은.....그러니까.....아차, 아, 아킨토스 님. 오해 하지 마세요. 이분은 그냥......그, 그이 스승님의 아버지...그러니....저 기..." "실비, 그렇게 말하면 내가 섭섭하잖니. 나는 정말 너희들을 말년에 공짜로 얻은 손자와 손자며느리라 생각하고 살고 있는데......" "줄리어스 할아버지...그게 아니에요! 제가 할아버님을 얼마나 좋아 하는 지 아시잖아요. 아차, 아킨토스 님. 이분은 그러니까......저기.... 아닌데, 이게! 난 몰라......" 아킨은 점점 혼란해지고 있었다. 쥰에게 스승이 있었나, 설마 베넬리아에 와서 누구에게 또 제자이니 뭐니 하며 빌붙어 사는 건가, 혹시나 싶지만 로멜에서 그 인간이 해 온 짓을 생각해 본다면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킨은 꽤나 냉소적인 기분이 들었다(짜증도 좀 나고). 아킨은 결국 실비의 외계어 비슷한말을 끊으며 말했다. "알베스티 양,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저, 저....저기, 저기...아직 하, 할말이 있는데요." "하십시오." 그러나 실비는 산만하게 더듬대기만 할뿐이었다. 무언가 할 말은 있 는데, 너무 힘겨워 하는 꼴이....예전의 일과 겹쳐져, 아킨을 끝도 없 이 짜증나게 했다. 결국 아킨은 냉랭하게 말했다. "더 없으신 것 같군요." 그 때 뒤에서 옆집 가게 주인인 듯한 여자가 나오며 말했다. "어머, 부인!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실비는 드디어 이야기를 돌릴 수 있는데 감사하며, 천상에서 에칼라 스가 하강하는 것이라도 본 듯환하게 외쳤다. "안녕하세요. 마이암 여사님!" "그런데 남편 분은.....아, 저 쪽에서 오시는군요......좋겠어요, 부인은. 남편이 그렇게 다정해서....우리 그이도 반만 닮으면 좋으련만." "뭐, 뭘요...." 실비가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허둥댔다. 그 때 아기가 반가운 사람을 발견했는지 손을 뻗으며 웅얼댔다. 주 인노인은 아기가 손을 뻗는 방향을 보고는 활짝 웃으며 손을 들었 다. "어서 오게나, 그란셔스!" 아킨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고, 거의 동시에 몸이 확 굳 는 것을 느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킨은 자신이 무엇을 보고 무엇 을 들었는지도 파악이 안 되었다. 갑자기 먹먹하고 캄캄해지는 것 같고, 속에서 뭐가 폭발할 것만 같았다. 탁, 하고 저 쪽에서 발을 멈추었다. 순간이 길게 느껴지고, 길다가도 짧게 느껴지고, 주변은 너무나 환 하다가도 캄캄했다. 준비되지도 않았던 일이 갑자기 벌어지는 것은, 기쁜 일이라 할 지 라도 사람의 모든 순간을 멎게 하는 것이다. 아킨은 그렇게 한참을 서 있다가, 멍하니 말했다. "살쪘다, 너." "......." *********************************************************** 작가잡설: ........... 왠지 쉘부르의 우산의 마지막이 생각난다 고나 할까;; 인어 '아줌마'가 드디어 6월 말에 끝난 다는 군요. 영화든 드라마든 소설이든 간에 할 말이 많아지면 그것은 언제나 비난을 하기 위함인데, 이 인어 아줌마처럼 비난밖에 할 말이 없 는 드라마도 또 처음입니다. (그 전의 최고봉은 같은 작가의 작품인 '보고 또 보고' 였더래지요?) 이 엽기 홈쇼핑 드라마가 정말 끝날지는 의문이지만, 그 작가... 제발 부탁이니 다시는 드라마 안 썼으면 좋겠습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32장 *************************************************************** [겨울성의 열쇠] 제152편 항구에서의 재회#3 *************************************************************** 그란셔스 부부를 내 보내고 오전 시간을 한가로이 보내던 롤레인은, 낸시로부터 손님이 찾아왔다는 말을 받았다. 롤레인은 또 어디서 귀 찮은 손님이 왔나 해서 건성으로 물었다. "누구든?" "처음 뵙는 분입니다. 아무래도 마법사 분 같아 보이는데..... 키는 굉장히 큰 편이고, 짧은 갈색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분이에 요." 평소라면 루첼이 눈치껏 알아서 상대한 다음 누구인 지 대충 알아 내서 롤레인에게 전한다. 그는 예전의 경험도 있고, 또 꽤나 능란했 던 만큼 아주 정확하게 손님들을 판단해 준다(제자라기보다는 비서 로 쓰고 싶을 정도로 쓸만한 녀석이다). 그러나 낸시는 하녀로서는 아주 유능했지만 주인과 자신의 위치를 꽤나 까마득하게 보고 있기 때문에 손님에 대해 함부로 품평을 늘어놓지 않는다. 주제넘은 무례 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대충 설명을 들은 롤레인은 들추어 보던 책을 책상 위에 놓으며 말했다. "서재로 모셔라." "네? 아, 네...." 보통은 객실로 안내해 왔던 낸시는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재빨리 내려가 그를 데리고 왔다. 그가 서재로 들어오자, 롤레인은 안경을 조금 밀어 올리고 허리를 폈다.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예의바르고 부드럽게 웃었다. 근사한 미남이라고 보기는 곤란하지만, 그래도 그 미소는 보기 좋아 기분이 편안해진다. 남자가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베이나트라고 합니다." "오거스트 롤레인." 롤레인은 그렇게 짧게 말하고는 소파를 가리켰다. "앉겠습니까?" 그가 자리에 앉자, 롤레인은 그 맞은 편에 앉으며 그를 살펴보았다. 나이는 한 서른 정도 될까, 눈이 아주 검고 깊어 나이답지 않아 보 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웃음과 눈빛에는 젊은이의 활력이 넘치고 있 었다. "처음 뵙는군요, 베이나트 씨. 어디서 오셨나요?" "에크롯사입니다." "역시-" "네?" 베이나트가 의아하게 반문하자 롤레인은 고개를 저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그냥, 들어오실 때 그렇게 추측했던 것뿐입니 다.......그런데 무슨 일로 찾아오신 건지, 이렇게 물어도 될까요?" "아니, 괜찮습니다. 바쁘신 분인데 용건은 짧게 하고 가는 것이 좋 겠지요....." 그렇게 말하며, 베이나트는 양손의 손가락 끝을 서로 조심스레 맞대 었다. 롤레인은 무관심한 듯 베이나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손등의 흉 터는 놓치지 않았다. 그것을 유심히 보며 롤레인은 손가락으로 안경 다리를 툭툭 건드렸다. 베이나트는 그런 롤레인의 손짓을 발견했고, 긴장한 듯 입매가 굳었다. 롤레인이 말했다. "에크의 탈로스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아, 네. 최근에.....그의 사제인 악튤런과 충돌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탑을 떠나.....외유 중이기도 하고요. 최고 마스터 님과 그 분과 의 사이가 그리 좋지 않으니..." 롤레인이 프하, 하고 웃고는 말했다. "조심하고 있으라는 말을 전하라고 에크롯사의 길드에서 파견한 것 같지는 않군요. 그 쪽은 내가 제발 사라져 달라고 빌고 있는 입장일 테니." "국가간의 자존심싸움은 둘째 치고라도, 최고마스터가 자리를 비운 에크롯사로서는 베넬리아에 긴장할 수밖에 없는 건 사실입니다. 하 지만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롤레인은 다시 괴상한 웃음소리를 냈다. 베이나트의 얼굴이 쭈뼛 굳 었다. "언제부터 에크롯사와 베넬리아의 대립이 우리들 싸움의 원인이 된 건지 모를 일이군요. 베이나트 씨, 저희는 순수하게 개인 적인 이유 로 싸운 것이고, 이 싸움에 그 외의 다른 이유가 끼여드는 것은 바 라지 않습니다. 흠, 말 그대로 유산다툼 한 거고.....구차하게 멋진 핑 계를 대고 싶지는 않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세상 사람들 눈이라는 게 그렇지 않습니다. 뭐, 굉장한 이 유로 두 사람이 싸웠다고 생각하던가 생각하고 싶어하던가." "아하~ 알겠어요." 롤레인은 하녀인 낸시를 부르는 끈을 흘끗 보고는 말했다. "그건 그렇고 차라도 드시지 않겠나요? 아직 점심은 이르고, 그렇다 고 아무 것도 대접하지 않자니 멀리오신 분께 죄송한데." "아닙니다. 곧 일어날 예정이었습니다...놓고 온 일행도 있고....아 니 지금 일어나죠." 그렇게 말하며 급히 베이나트가 몸을 뒤척이자, 롤레인은 먼저 자리 에서 일어났다. 베이나트는 그런 롤레인을 아주 긴장한 눈초리로 바 라보았고, 롤레인은 역시나 괴상하게 웃고는 말했다. "이제 그만 좀 내숭떨어요, 컬린. 내가 다 근질거리네." 베이나트는 웃는 얼굴 그대로 굳어 버렸고, 그 덕에 꽤나 어정쩡하 고 이상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냐." 롤레인은 담담하게 말했다. "탈로스가 알고 있던 만큼." "악튤런은 알고 있니?" "모르는 것 같더군요." "그건.....다행이구나." 그리고 베이나트는 잠시 마주잡은 손의 엄지손가락을 툭툭 맞대다 가, 망설이듯 말했다. "아키도 알고 있단다." 롤레인의 눈이 잠깐 움찔 움직였다. 그러나 이내 피식 웃으며 말한 다. "당신이 데리고 나오신 건가요?" "그래, 놓고 올 수는 없더구나......게다가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네 제자이기도 하고. 인연이 있었나 보지......" 베이나트는 한숨을 훅 하고 내 쉬었다. 그리고 홀가분하다는 듯 어 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꽤 쾌활하게 말했다. "어쨌건 이제 이야기하기가 쉬워졌구나, 오거스트. 나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이 이야기를 해야 할 지 몰라서, 그리고 정말 하기는 해야 할지, 한다 해도 믿어는 줄지....확신할 수 없어서 아주 난감했거든. 너도 알다시피, 내가 이런 쪽으로는 영....재주가 없잖니." "저는 엔간한 일에는 별로 놀라지도 않잖아요." 그러나 베이나트는 울적하게 웃었다. 오거스트가 숨을 한번 길게 내 쉬고는 말했다. "그래, 여기에 오래 머무실 생각인가요?" "아니다. 곧 북쪽으로 갈 생각이다." "알르간드?" "그래, 그곳. 그곳이라면 적어도 탈로스가 쫓아오지는 못할 테지." 롤레인의 눈이 흐려졌다. "아주 멀리 가실 생각이군요." "물론....이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정말 이렇게.....너와 나의 기억을 엉망으로 만드는 것을 감수하면서도 네 앞에 나타난 것에는 사죄하 마. 별 수 없었단다." "아예 모르고 있었다면 모를까,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으니 그 정도로 미안해 할 필요는 없어요. 그리고.......그냥 당신 혼자만 털레 털레 나타났다면 한방 갈겼을 지도 모르는데, 감사할 일이 있으 니.......용서해드리죠." "감사 할 일?" "아키의 일. 아시죠?" 베이나트는 흠, 하고는 숨을 들이쉬었다. 롤레인이 말을 이었다. "꽤 복잡한 일이 있었고, 그것은... 제 힘으로 어찌 되는 일이 아니 었지요. 결국 저는 별 수 없었고, 그 애는 탈로스에게 끌려갔고, 저 는.....그 동안에 끙끙 앓으며 누워 있었어요." "병...났었니?" "탈로스 덕에 배가 이만큼 찢어졌어요. 이번에는 좀 심하게 싸웠어 요." 그렇게 말하며 롤레인은 허리를 슥 그었다. 베이나트의 얼굴이 해쓱 해졌다. "대체 어떻게 탈출해서 그렇게 놀라운 회춘을 하신 건지는 천천히 묻도록 하지요. 그래, 탈로스는 어떻게 하셨어요?" "가둬 두기는 했는데, 부수고 나왔단다. 그리고.....한번 마주쳤지. 싸 우기도 했고." 베이나트는 그 말을 하면서 롤레인의 눈을 스치는 차가운 분노를 발견했다. 그는 가라앉은 눈으로 타이르듯 말했다. "오거스트, 내가 이렇게 돌아왔으니 더 이상 탈로스를 미워하지는 말아다오." "당신이 도망친 거지, 탈로스가 직접 당신을 놓아 준 건 아니지요. 또, 아직도 당신을 쫓고 있고..." "아키는 더 이상 쫓지 않을 거란다. 그러니, 그 아이에 대한 일이라 면 그만 잊어도 될 거다. 게다가 그와 함께 지내는 1년 동안 아키가 그렇게 크게 고생한 것도 아니고." "당신의 실종으로 제가 받은 좌절과, 아키의 실종으로 제가 받은 좌 절은 생각하지 않으세요? 차라리 절망이었으면 그저 나 자신을 동 정하며 쓰러져 있어도 될 테지만, 그건 죄송스럽게도 절망보다는 더 욱 차갑고 제정신으로 살 수 밖에 없는 '좌절'이었어요." "하지마, 난....그래, 그건 내 잘못도 컸다." "이해해요, 납득하고, 나라도 그렇게 했을 거라 생각해요. 아무리 당 신이더라도 인간에게 그 잔을 순순히 내 줄 수는 없었을 테니까. 그 러나 운수 사납게도 탈로스는 당신이 가장 가깝고 신뢰를 받고 있 다 생각되던 '자신'에게 그것을 주지 않았다는 데 화가 난 것이고." 베이나트의 눈이 흐려지며 이제 새까맣게 보였다. 한 장의 활기찬 도시는 소란스러웠지만, 지금 그와 그녀 사이의 침묵과 두려움을 부 스러뜨릴 수는 없었다. "너도 다...알고 있구나." "탈로스는 당신이 저를 아낀다 말했지만, 제가 보기에 당신은 우리 둘을 당신만의 편견으로...당신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대했 을 뿐이에요. 탈로스는....'힘'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을 원했고, 저는 두려움과 무능 때문에 그것에 손대지 못한 것이 아니라....제가 원하는 완성은 그것과는 다르기 때문에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뿐 이에요. 그러나 당신은 탈로스에게 완성의 기회를 앗아가고, 저에게 는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하는 좌절을 안겨 주었어요....." "그렇게 모든 것을 알아도 탈로스를 미워하는 거냐...." "탈로스가 저를 미워하듯, 저 역시 탈로스를 미워해야죠. 애당초 우 리들은 서로 화해할 수도, 좋아할 수도 없었어요. 미워하고 있으니 많은 일들은 그 미움에 미움을 덧붙이는 구실이었을 뿐....." 작은 한숨이 흘렀고, 그것이 베이나트에게는 탄식처럼 들렸다. "컬린....아니, 베이나트. 당신이 특별한 사람인 건 사실이지만, 당신 의 주변사람들이 모두 당신의 뜻에 따라 움직여 줄거라 생각하지는 마세요. 당신이 용서한다 해서 제가 그를 용서할 수 있는 건 아니에 요.....아니, 이제 그에 대한 증오는 당신과는 상관없는 완벽한 별개 의 무엇이 되어 버렸어요. 그도 마찬가지겠죠." 베이나트는 땀에 젖은 이마를 문질렀다. 오거스트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할 생각인 지도 충분히 짐작된다. 그러 나 그것은 베이나트로서는 당연히 원하지 않는 것이었지만, 그것을 막을 훈계도 조언도 떠오르지 않았다. 롤레인이 말했다. "우리는...누구보다 서로를 인정하지만, 그렇기에 미워할 수밖에 없 어요. 그리고 그렇게 미워하고 있기에, 우리가 직접 마주하지 않는 한 우리의 문제는 영원히 해결할 수 없기도 하고요." "너희들은.....충분히 자제력이 있는 아이들인데 그만 둘 수는 없는 거냐." 롤레인은 가볍게 웃었다. "우리는 단 한번 그것을 그만둔 적이 있었어요. 여전히 미워하기는 했지만, 직접 싸우지는 않았죠. 그게 언제였던 것 같아요?" 베이나트는 차마 답할 수 없었다. 자신이 실종되고, 그것이 죽음일 거라 누구나 예상했던 그 때. 희생으로밖에 이룰 수 없는 화해는, 죽지 못하는 베이나트로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롤레인은 들고 있던 지팡이를 한번 가볍게 휘두르고는 소파의 가죽 위에 얹 었다. "당신의 컬린으로서의 불행은, 나와 탈로스...서로를 인정하고 용납 하기 어려운 우리들을 한꺼번에 제자로 들인 거예요." 베이나트, 그리고 컬린도 알고 있었다. 뜨거운 열정과 약한 것들에 대한 애정을 가진 탈로스와.....현명하지 만 냉정하고 철저한 롤레인은 애당초 서로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녹이거나 얼리거나, 둘은 둘 중의 하나였다. 같은 공간 안에 들어 있는 그 두 가지는 결코 서로 융화할 수 없다. 베이나트는 이제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여전히 안타깝지만, 그것을 해소할 수 없는 지금 그저 마음 단단히 붙들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오거스트, 네가 나에 대해 알게 되었으니.....해 둘 말이 있다. 네가 어떻게 생각할 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게 제일 현명한 생각 같아 서....이런 말을 하는 거란다." 롤레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리고 베이나트 역시 웃다가, 결국 얼굴을 흐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로서는 이 제자를 마주보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베넬리아 탑의 열쇠를 빌려 줄 수 있겠니? 네가 허락만 한다면, 소 환은 내가 알아서 하마." 롤레인은 잠깐 멍하니 있다가 말했다. "아키에게 권호를 주게요?" "그래. 어쨌건, 되든 안 되든 한번 해 보기는 해야 할 것 아니냐." "죄송하지만, 성환을 유지하는 다섯 마스터에게 '내 제자 하나에게 특별히 권호를 부여하기 위해 불렀소.' 할 수 없다는 건아시죠? 여 기는 공화국이고, 다섯 마스터를 임시소집하려면 대통령한테 달려가 야 하고, 대통령은.....절대 허락 안 해 줄 겁니다." "그건 내가 하마." 롤레인이 의심스런 눈초리를 보내자, 베이나트는 어깨를 으쓱해 보 였다. "여태까지 삼 백 명분의 인생을 살았는데, 여섯 사람 역할을 못하겠 니? 걱정 말고 맡겨라." "소환도 하고 유지도 하겠다, 이건가요?" "가능해." "뿐만 아니라, 정말 받게 될지 못할 지는....장담하기 어려운 거, 아 시죠? 아무리 당신 혼자 다 해도, 당신 마음대로 누군가에게 줄 수 는 없어요." "상관없다." "알겠어요.....하지만 컬린, 이번에 안 되다면 2년 정도 뒤에 다시 '데 리고' 오세요." 베이나트는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아키도....저기, 설마 알르간드로 데리고 가라는 말이냐?" "어쨌건 결국에는 그 애가 선택할 바지만, 저는 되도록 그 아이가 당신과 같이 갔으면 좋겠어요....그 애 몸 상태는....아시다시피 이런 곳에 놔두기 곤란한 상태고, 예전의 그 '복잡한' 상황이 지금이라고 해결된 것도 아니에요. 나는 그 아이가 다시는 그런 일에 연관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렇게....복잡한 일이었니?"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그 애 형과 아버지죠. 그리고 그 둘은...아키 가 이 땅을 아예 떠나지 않는 한 인연을 끊기 어려운 위인들이고. 어디로 가든 불안할 테지만, 당신 옆이라면 언제든지 안심할 수 있 겠지요......저의 제자이고, 저는 당신의 제자. 그러니 그 아이가 제대 로 힘을 키울 때까지는 당신이 지켜주세요.....부탁드립니다." 베이나트는 오랜만에 편안하게 웃을 수 있었다. 내일 할 일이 있다 는 것은, 그리고 그것이 기다려지는 일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든 행복 한 일이었으니. 그 때 아래에서 현관문이 거칠게 열어 젖힌 듯 방울이 크게 울렸다. 낸시가 당황한 듯 "안에 손님이 계셔요!" 하고 쳐들어오듯 들어온 사람을 말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상대는 외려 더 큰 소리로 외쳤 다. "더 중요한 놈 왔단 말이에요! 비켜요, 비켜!" 베이나트가 말했다. 그리고 계단 뛰어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쾅하고 문이 거의 때려 부셔질 듯 세게 열렸다. 베이나트가 놀라 움 찔 했다. 그 사람은 방안으로 몸을 던지듯 들어와서는 외쳤다. "교, 교수님!" 스물 조금 넘어 보이는 붉은 머리 청년이었다. 몸이 호리호리하고 훌쩍 컸고, 안경을 쓴 얼굴은 꽤 영리해 보이고 잘생겼다. 그 청년 에게, 롤레인은 아무 대꾸 없이 지팡이로 베이나트를 슬쩍 가리켰 다. 들어온 청년은 베이나트를 발견하자 얼른 안경을 밀어 올리고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소란 피워서 죄송합니다." 롤레인이 말했다. "앞의 손님보다 더 중요한 놈이 대체 누구지, 루첼?" 루첼은 옆으로 비켜서서는 안쪽을 가리켰다. 베이나트가 놀라 눈을 큼지막하게 떴고, 롤레인은 놀랐다가는 이내 부드럽게 웃었다. "어서 와라, 아키." 그리고 루첼도 롤레인도 심지어 베이나트마저도 입을 딱 벌리고 말 았다. 아킨은 달려와 롤레인을 끌어안았다. *********************************************************** 작가잡설: 아키........상황 - 다다다다다다.....폴싹! 부비부비. 강아지 모드 아키. -_-;; 드디어 '20세기 소년' 12권을 샀습니다. 그리고 그 결정적 장면을 보고 말았습니다--! 이럴수가! ....그 사람이 누군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32장 ************************************************************** [겨울성의 열쇠] 제153편 항구에서의 재회#4 *************************************************************** 황제선출을 앞두고 황도에서 열린 연회는 아주 떠들썩했다. 초청된 사람과, 초청 없이도 얼마든지 들어올 수 있는 사람들이 오 랜만의 성대한 연회를 즐겼다. 황궁 창고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고급 포도주가 나오고, 온갖 진미 가 테이블 위에 차려졌다. 정교하게 짜 넣은 레이스가 달린 테이블 위에 은과 마노로 된 식기가 차려지고 그 안에 각국에서 선사한 특 산요리들이 담겨져 나온다. 그 연회를 대접받는 사람들은 모두 가장 화려하게 차려 입고 있었고, 그들의 옷도 식탁 위에 차려진 것만큼 이나 번쩍였다. 식사를 마친 휘안토스는 마지막으로 포도주를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빈은 황제 후보인 베로크와 휴거인이었으나, 정말 주인공은 큰형 인 휴거인이었다. 제국의 모든 나라에서 그를 지지하기로 암묵적으 로 결정한 것을 그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평범하게 생긴 휴거인 황자는, 행여나 하고 은근히 기대하고는 있었 으나 정말 기회가 찾아오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어차피 명목 상의 황제, 힘이라고는 황궁 안에서 궁녀와 시종들에밖에 쓸 수 없 는 위치의 허울 좋은 황제일 뿐이었으나 아무리 그러하다 해도 거 대한 황궁이 집이 되며, 평생 호화로운 생활이 보장된다. 그것만으 로도 올해 스물 둘인 휴거인에게는 대단한 행운이었다. 객관적으로 본다면 차라리 베로크가 낫지, 하고 휘안토스는 생각했 다. 형에 비해 욕심이 별반 없는 그는, 아마도 이 황제선출이 끝나 면 압셀론으로 돌아가 예전에 하던 공부나 마저 할 것이다. 휴거인 이 택해진 이유는 그가 장자이며 별 문제 없이 무난한 황제 노릇을 해 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며, 베로크 역시 그렇게 황궁에 갇혀 아 무 것도 안 하고 그저 먹고 자기만하는 고급 애완견 같은 삶을 사 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던 휘안토스는 문득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베로크 황자가 무언가 기대하는 듯 그를 바라보 고 있었다. 휘안토스는 그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베로크 황자전하." "아, 안녕하시오, 휘안토스 왕자." 둥글둥글한 형에 비해, 어머니를 닮아 날카로운 얼굴의 청년이었다. 사촌간인 칼리토 대공왕도 얼굴 윤곽은 그와 조금 비슷한 편이다. 눈은 진한 녹색이고,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은 갈색이다. 그런데 평소 라면 무관심한 눈초리로 휘안토스를 맞이했을 그가, 지금은 약간 창 백한 안색으로 여기 저기 면밀히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무슨 하실말씀이라도 있으신지요." "아...이번 대관식에는 성배가 돌아올까요?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 누어 보고 싶었습니다." 이 무슨 멍청한 말인지. 휘안토스는 웃으며 말했다. "이제는 탐색자들 조차 드문 세상입니다. 쿼크 대제의 영광이 재래 할 거라는 믿음은 늘 가져야 하는 것이지만, 이번에야말로 그리 될 거라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이번 대관식에도 보석으로 치장된 황금잔이 성배인 듯 나타날 것이 다. 진짜 성배는 그저 낡은 구리잔일 뿐인데, 말이다. 그 가짜 성배 처럼. 이 제국역시 그저 껍질이자 번질번질한 기만일 뿐이다. 그리 고 이 황제선출마저도 언젠가 과격하고 야심만만한 자가 왕위로 오 르는 나라가 생긴다면 끝장날 것이다. 직접적인 전쟁을 피하기 위해 이 노골적인 기만을 계속 거듭하는 연합이지만, 어느 한 나라라도 힘이 커진다면 그 나라에서 분명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려 할 것이 다. 그리고 그 때부터는 정말 끔찍한 혼란의 연속이다. 기만은 단지 기만이 아니라 마지막 양심 한 조각이다. 선을 넘으면 얻게 되는 것과, 선을 넘지 않으면 지킬 수 있는 것에 대한 끝없는 저울질에 대한 시한부 판단 보류이며, 그 기만을 모두가 지키기를 바라면서도 누군가가 대신 어겨주기를 바라는 비겁함의 얄팍한 그 림자이다. 때로는 그것을 '나이 든 평화'라고도 한다. 노쇄하여 비틀거리며, 그 렇게 겨우 겨우 지켜지는 것. 그러나 이것은 이미 기울어질 대로 기 울어진 그뭄달이 지는 순간, 단 하룻밤의 암흑이 밤을 까맣게 물들 이는 그날의 예감에 불안해 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쿼크 대제의 성배는 지나간 영광의 헛된 희망. 제국 롯시온 5연합을 지키는 것은 전면전을 두려워하며 서로서로를 견제하는 각 대공국들의 왕들일 뿐. 쿼크 대제의 은색 달빛의 잔, 그의 팔에 움 켜잡혀 햇빛에 번쩍이던 황금빛 성검, 그 앞에서 무릎을 꿇으며 참 된 복종과 헌신으로 명예를 맹세했던 일곱 기사들은 그믐달마저 저 물면 잊혀질 것이다. 잔이 검을 축복하고, 검은 잔을 지키던 시대는 이미 갈 데까지 갔 다. 자신조차 믿지 못하는 희망과 기만으로 위장된 이 낡은 유리 돔 안의 세계는....언젠가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다. 그 때, 베로크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저...." 무슨 어려운 말을 꺼내려는 것 같아 휘안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씀하십시오." 그러나 베로크는 더듬더듬 대다가, 갑자기 눈을 훅 하고 크게 뜨더 니 입을 꾹 다물었다. "베르크 황자전하?" "아니....아는 사람을 발견했군. 즐거웠소-나중에 보지." 휘안토스는 황당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베로크가 방금 전에 본 듯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으나, 그가 발견한 것은 한 무리의 아가씨들일 뿐이었다. 글세, 누구를 발견한 거지...? 좀 더 시선을 멀리 잡아 보 아도, 역시 로브 차림의 젊은 마법사들이 보일 뿐이다. 이상하군,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휘안토스에게 마르실리오가 달려왔 다. 그는 주변을 한번 빠르게 둘러보더니, 휘안토스 쪽으로 고개를 숙여 작게 속삭였다. "큰일났습니다, 휘안토스 님. 델 카타롯사 쪽 기사들과 저희 쪽 기 사들이......은의 연회장에서 싸움이 붙었습니다." "어쩌다가?" "그 나라 왕과 기사 마하에 대해, 저희 쪽에서 그 쪽의 신경을 거스 를만한 농담을 했던 듯 합니다. 칼라하스 공주 호위대의 기사 하나 가 저희 쪽 기사에게 결투를 신청했고, 이대로 나간다면 싸움이 커 질 듯 합니다." "칼라하스 공주는?" "아직 마하와 있습니다. 그 쪽도 기사를 보냈으니, 곧 도착할 듯 합 니다." "가자." 휘안토스는 당장 연회장을 나서려다가, 정원 구석진 곳에서 주변을 둘러보는 베로크 황자를 발견했다. 그의 얼굴은 방금 전 보다 훨씬 더 창백해져 있었고, 그것이 휘안토스의 머리에 아주 강하게 기억되 었다. 뭔가가 있어- 그렇게 생각하며 휘안토스는 망토를 당겼다. 황금의 홀은 왕족과 높은 귀족들을 위한 자리이고, 은의 홀은 그를 수행하러 온 하급기사들을 위한 자리였다. 기사들 중 물론 높은 자 들, 예를 들면 마르실리오 같은 기사는 왕족을 수행하기 위해 황금 의 홀에 머물 수 있으나, 다른 기사들은 거친 무인들이라 몇몇 신분 높은 자들을 제하고는 따로 연회를 가졌다. 그리고 부하들과 사이가 좋은 상관들이 그런 자리에서 부하들과 함께 노는 것은 미덕 중 하 나였다. 휘안토스가 도착했을 때, 그 은의 홀은 아주 조용했다. 암롯사 왕자 가 먼저 나타나자, 기사들은 숨소리도 죽였다. 각자의 나라를 상징 하는 색의 망토들이 각 색깔 별로 모여 있었다. 그리고 유일하게 붙 어 있는 것은, 바로 델-카타롯사의 빛깔인 청색 망토와 암롯사의 붉 은 망토였다. "물러나라." 왕자의 출현에, 암롯사 기사들은 안도하고 델-카타의 기사들은 반대 로 얼굴을 확 구겼다. 이 상황에서 신분 높은 자가 오면 결투를 그 만둘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 온 자는 암롯사의 왕자, 아무래도 델-카타가 암롯사에 사과하는 방향으로 끝날 지도 모른다. "오면서 들었다. 모두 검을 내려라." 붉은 망토를 걸친 암롯사의 기사는 왕자의 명이라 별 수 없다는 듯 델 카타롯사 기사를 향해 투덜대며 검을 꽂아 넣었다. 그러나 내심 자국의 왕자가 먼저 온 것에 대해 안도하고 있었다. 그가 검을 거두 자, 휘안토스는 아직도 검을 들고 있는 델 카타롯사의 기사에게 시 선을 돌렸다. 나이는 스물 중반쯤 되 보이는 청년으로, 눈썹이 아주 짙고 눈동자도 검었다. "경도 내려놓으면 좋겠소." 자기나라는 아니지만 그래도 귀한 왕자의 명이다. 지금이 전시도 아 닌데 이 기사가 계속 버틴다면, 당장에 암롯사 기사들이 모두 달려 들어도 할 말이 없다. 결국 델 카타의 기사도 검을 내렸다. 그러나 그의 눈은 모멸감에 불타고 있었고, 그 때문에 손도 부들부들 떨리 고 있었다. 휘안토스는 싸늘히 무시하고는 암롯사 기사들에게 명했다.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라. 한번 더 이런 일이 생긴다면, 모두 숙소 로 돌아가게 하겠다." 암롯사 기사들 쪽은 대체로 안도하고 있었고, 사과를 하지 않은 것만 도 승리한 거라 자축할 수 있었다. 반대로 델-카타 쪽은 빨리 움직 이지 않은 마하와 공주를 원망하며 이만 뿌득 갈았다. 그 때였다. 막 돌아서려는 휘안토스에게 누군가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못한 쪽은 암롯사입니다." 기사들이 술렁이기 시작했고, 델 카타롯사의 기사 쪽에서 작은 환호 까지 터졌다. 휘안토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두 나라간의 문제요." "또한, 두 기사간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휘안토스는 그제야 그렇게 말한 기사를 바라보았다. 키는 그렇게 크 지 않았지만, 아주 늘씬하고 다리가 길어 날렵해 보였다. 에크롯사 의 색인 검은 옷에, 금빛 테두리가 쳐진 검은 망토를 걸치고 있었 다. 그리고 휘안토스가 약간 멈칫한 것은, 너무도 잘 아는 그 얼굴 때문이 아니라 그 옷 때문이었다.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자, 기사는 정중하게 말했다. "에크롯사의 세르네긴 포틀러스입니다." 소리 없는 환호성이 터진 것만 같았다. 얼굴은 몰라도 이름은 누구나 아는 유명한 기사였고, 그의 명성을 설명할 때면 반드시 옆에 붙는 이름이 바로 '휘안토스'였다. 몇몇 델 카타롯사 기사의 눈에 승리감이 떠올랐고, 그 이유를 아는 휘안토스 는 그들을 조용히 경멸했다. 세르네긴이 얼마 전에 에크롯사로 돌아왔다는 소식은 들었다. 슈마허가 켈브리안 공주와 함께 잠시 그녀의 외가인 놀비오로 여행 을 갔다는 말이 전해졌고, 슈마허가 가는 길에 세르네긴이 빠질 수 는 없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슈마허는 켈브리안과 함께 로메르 드로 돌아갔으나 세르네긴은 에크롯사에 남았다. 그리고 에크롯사의 수도 찬다로 돌아온 그는, 당장에 떠나며 버렸던 모든 것을 회복했 다. 기사의 지위도, 용기사의 명예도- 심지어 왕족을 호위할 수 있 을 정도의 신뢰도. 아무리 이런 자리에 나오는 왕족의 호위로 용기 사를 보내는 것이 전통이라지만, 이제 막 복귀한 세르네긴 보다는 다른 용기사를 보내는 것이 좋다. 그러나 세르네긴이 로메르드로 떠 나버린 것이 온 제국에 소리 없이 퍼져 있었으니 이번 기회에 그의 귀환을 알릴 생각으로 보낸 것이다. "에크롯사와는 상관없다고 보는데." "상관없기에 더 공평한 의견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그, 이론적으로는 당연하지만 실제로는 황당할 수밖에 없는 말에 휘 안토스는 웃음을 보였다. 아킨과 아버지 사이러스를 제한 그 누구라 도 그 웃음을 상대를 향한 '호의와 존경 섞인 웃음'으로 보았을 것 이다. "내 기사들의 명예는 내가 거두고, 그런 나의 명예를 지키는 것은 나의 기사들....결국 기사들의 방식으로 명예를 지킬 수밖에 없겠군." 세르네긴이 말했다. "검을 뽑지 않아도 되는 일입니다." "아니, 경은 지금 내 기사들의 잘못을 훈계한 것이 아니라 내 판단 에 대해 걸고넘어지는 거요. 나는 지금 이 판단이 내 기사들을 위해 충분히 옳은 거라 판단했고, 그렇게 실행한 것. 그러니 나는 마델러 경과 델 카타의 기사의 결투를 허용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나의 결 투를 신청하는 거요." 숨소리조차 멎었다. 마르실리오가 창백해졌고, 사태가 심각해지자 암롯사의 다른 기사들 역시 얼굴이 새파래지며 침을 삼켰다. 다들 세르네긴 포틀러스와 휘안토스의 관계를 알고 있고, 최근 에크 롯사로 돌아온 세르네긴의 실력이 어떠한 지도 잘 안다. 섣불리 나 섰다가 패하면 어떤 불명예가 오는 지 알고 있으며, 그 세르네긴과 맞설만한 실력을 갖춘 자가 온 제국을 통틀어 그의 상대였던 휘안 토스 뿐이라는 것도 안다. 마르실리오나 다른 암롯사 기사들은 제발 세르네긴이 사죄하기를 바랬지만, 그렇게 안전을 위해 물러나기에는 세르네긴은 너무나 고 지식한 남자였다. "받아들입니다, 휘안토스 님." 델 카타 기사들의 안색이 창백해졌고, 그러면서도 휘안토스 보다는 세르네긴 쪽이 더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는 지 세르네긴이 별반 신 경 쓰고 있지 않음에도 잘 해 보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들의 시선이 담은 것은 분명 격려였지만, 세르네긴은 차분하고 무관심한 눈빛으 로 그들을 보며 더욱 매서운 분노와 경멸을 표했을 뿐이다. 휘안토스는 그들이 조용해지자, 곧 몸을 돌려 연회장 안을 빠져나갔 다. "무슨 생각이신 겁니까, 휘안토스 님." 나서자마자, 역시나 마르실리오가 잔소리 조로 말했다. "상관 마라." "상관 안 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지난번에...." 순간 마르실리오는 휘안토스의 눈빛에 입을 꾹 다물어야 했다. 휘안 토스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태연한 눈으로 마르실리오를 보고 있 었지만, 마르실리오는 순간 적으로 소름이 쭉 끼치는 기분이었다. 그러자 휘안토스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키에 대해 들은 것이라도 있나?" "아킨토스 님에 대한 소식은......새로운 것은 아무 것도 전해지지 알 지 못했습니다. 다만, 지난번에......자케노스와 그 소녀를 추격해 보 라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는 알아냈습니다." "그건 다행이군. 뭐라고 하던가?" "소녀의 본명은 유제니아 쥬르 포틀러스, 저 세르네긴의 여동생입니 다." 순간 휘안토스의 발길이 멈추었다. 약간의 환멸 어린 한숨이 터지 며, 휘안토스는 눈까지 찌푸렸다. "그 탈로스란 자가 정말 여기 저기에 일을 흘리고 다녔나 보군." "확신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저 우연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당사자에게 '직접' 물어 보기 전에는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지." "세르네긴 말입니까?" "아니, 그 소녀." 순간 마르실리오는 휘안토스의 눈빛에 맺히는 차가운 살기를 보았 다. 그것이 예전의 패배 때문인지, 동생과 관련된 치부 때문인지, 아니면 방금 전에 세르네긴이 휘안토스를 향해 보여준 차가운 경멸 과 분노 때문이지, 마르실리오도 도저히 알 수 없었지만 문득 불안 해 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두운 수풀에서 벌레소리가 들리고, 밤새들이 음울하고 어두운 울 음소리를 냈다. 가을이라, 주변은 벌써 오싹할 정도로 싸늘해져 있 었다. 이제 그믐달이 뜰 때라 달도 없어 이른 밤은 더욱 컴컴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별들만은 더욱 하얗게 빛나며 까만 하늘에서 쏟아 져 내리고 있었다. 마르실리오는 갑자기 오싹해지기는 했지만, 휘안토스의 어깨에 망토 를 덮어주며 그런 기분을 떨쳐냈다. "나중에 생각하시고, 우선 들어가십시오-" 너무나 평범하지만, 역시나 너무나 오싹하고 기이한 밤이었다. 꼭 무언가가 가슴속에 컴컴한 그림자를 품고 세상을 주시하는 것만 같 고, 그의 악의에 온 몸이 곤두서는 것만 같다. *********************************************************** 작가잡설: 그 동안 질문 받던 것을 한번에 대답! 1. 겨울키는 출판.... ....계약한 곳이 있어야 출판되지요..-_-;; 없습니다. 하자고 달려 들어주는 데도 없고;;; 모르지요. 아울의 통장잔액이 확보된다면 한정 소장본으로라도 만들 지. ^^;; 2. 아키와 휘안의 이름.... 그리스신화의 휘아킨토스가 맞습니다. -_-;;; 3. 주문은 어찌 만드나..... 공식이 있습니다....비밀 공식;;; 매트릭스 2- 리로디드를 봤습니다. 영화 내내 생각한 건.....키아누, 액션 너무 못합니다........ (물론 영화자체는 재미있게 봤습니다만, 자꾸 키아누의 허우적이 눈에 걸리더군요....으으으...;;;)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33장 *************************************************************** [겨울성의 열쇠] 제33장 주인 없는 잔 제154편 주인 없는 잔#1 *************************************************************** 뒤척거리던 아킨은 결국 잠이 오지 않아 일어나 버렸다. 넓지는 않지만 아늑한 방안의 벽난로에 모닥불이 따뜻하게 타오르 고 있었다. 두터운 커튼이 반쯤 가린 창 밖으로는 그믐달이 얇게 빛 나고, 별빛은 그 달빛을 덮어버릴 듯 무섭도록 쏟아진다. 잘 정돈 된 방안은 푸릇한 어둠에 묻혀 있고, 벽난로 위에 놓인 자 그마한 탁상시계는 자그마한 심장 소리를 내며 돌아간다. 시계는 베 넬리아 물건답게 예쁘고 섬세하게 만들어진 것으로, 주리가 예전에 줄리어스가 선물한 것이라며 으스대고는 놓고 간 것이다. 1년만에 만나는 주리는 겨우 한 살 더 먹은 주제에, 오늘 저녁 내내 새침하게 턱을 세우고는 "나, 많이 성숙해졌어요. 이제는 예전처럼 경망스럽게 행동하지 않아요." 라는, 주변 사람이 치 떨만한 말을 했다. 토드의 말을 빌리면, 주리가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얌전하 다 못해 소심한 실비와, 그런 아내에게 아주 다정한 루첼을 보면서 저렇게 해야 나중에 '아킨에게 사랑 받는 부인'이 될 수 있다고 판 단한 덕이다. 그리고 그 때 옆에서 줄리어스 롤레인이 "저 녀석, 사 귀는 여자가 있는 것 같던데?" 하고 눈치 없게 말해서 주리는 그 후로 계속, 내내, 끊임없이 "그 여자 대체 누구야? 예뻐?" "몇 살이 야?" "어디 있어?" "당장 말 해줘어어어! 말해, 말해, 말해앳!" 하고 쏟아 부어 대며 아킨을 쪼아댔다. 아킨은 괴로운 얼굴과 침묵으로 일관했고, 결국 주리는 그의 일행인 베이나트를 생각 내고는, "그 늙은 아저씨는 알 거야! 어디 갔어!" 하고 온 집안을 휘 젖고 다녔 다. 그리고, 그제야 아킨은 베이나트가 보이지 않는 것을 알게 되었 다. 어디로 간 걸까, 혹시나 또 혼자만 사라진 건가....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눈치 빠른 루첼이 "교수님과 서재에 있다." 라고 말해 주 었다. "그런데 그 베이나트라는 사람은 정체가 대체 뭐야?" 주리가 실비의 품에 안겨 잠들자 루첼이 그렇게 물었다. 아킨은 잠 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답했다. "컬린의 아들." 당시 루첼의 표정은 꽤나 심각했는데, 그런 표정을 보는 것은 예전 에 흑대장 슈마허를 찾아간다고 말했을 때 이후로 참 오랜만이었다. (물론 그 사이에 만날 일도 없었지만) 실비가 주리를 안고 어린이 방으로 들어가고, 다시 객실로 내려와 루첼에게서 피오를 받아 루첼과 아킨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는 올라갔다. 둘만 남게 되자, 루첼은 그제야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차 근차근 가르쳐 주었다. 안락한 시간이었다. 루첼이 따라주는 커피 향기는 좋았고, 그의 즐 거운 목소리도 그리웠던 만큼 듣기 좋았다. 이야기는 길지는 않았지 만 충분했다. 실비와 쥰이 결혼했지만 쥰은 죽고, 실비는 임신하 고.....결국 루첼은 실비와 결혼했다. "끝내주는 결혼이었지. '누더기 추기경'이 주례를 해 주었거든. 온 뒷골목 패들이 하객으로 우르르 몰려 와서는, 정말 별 짓을 다했 고....실비는 졸도할 뻔했고, 나는 신혼 첫날에 맞아 죽는 줄 알았지 뭐냐." 그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르자(특히 첸), 아킨은 웃음이 나왔다. "그 결혼식을 못 봐서 유감이군.....그래, 행복하겠구나." 그 말을 했을 때 잠시 루첼의 얼굴이 흐려졌던 것 같다. "쥰에게 미안할 정도로.....그리고 그 아들인 피오의 얼굴을 보면 슬 퍼질 정도로......하지만 어쨌건 둘 다 사랑하니까." "얼마나?" "이만큼 그녀와 아들을 사랑한다, 하고 으스대는 짓은 못해. 사랑은 밑 빠진 독 같은 녀석이라, 주어도 주어도 여전히 부족한 것 같지..... 그러니 그걸 어떻게 재겠니. 그냥 좋구나, 예뻐 죽겠구나.....뭐 이렇 지." "좋겠다." "노총각 푸념 같은 소리하고 있네. 이제 열 여덟 먹은 녀석이." 아킨은 그렇게 말하곤 웃는 루첼을 보며, 그 역시 아주 젊은 나이이 긴 하지만 적어도 아킨 보다 네 살이나 많고, 또 이제는 남편이자 아버지라는 것을 느꼈다. 아킨은 아직 열 일곱 살 그곳에서 제자리 로 앉아 있는 듯 한데, 아직도 어미 잃은 어린 짐승처럼 일주일 전 에 떠난 자켄을 그리워하는데, 루첼은 작년의 루첼이 아니다. 지금 의 그는 강하고, 누군가를 지켜주고 돌보아 줄 수 있고, 그들로부터 신뢰와 사랑을 받을 자격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그런데 난....아무 것도 혼자 할 수 없다. 언젠가는 혼자가 되어야 할 텐데... 아니, 벌써 혼자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숲으로 돌아간 자켄은 다시 는 돌아오지 않을 지 모른다. 아킨은 열 여덟이다. 인간으로 치면 성년이고, 자켄은 예정대로라면 올 1월로 떠났어야 했다. 애당초 아 킨이 성년이 되는 날까지만 아킨 옆에 머물기로 아버지 사이러스와 약속했으니까. 아버지가 어떤 생각으로 그것을 허락했는지는 모른 다. 아킨이 부탁하지도 않았고, 휘안토스역시 침묵했을 뿐이다. 그렇 다고 아내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아킨마저 그토록 혐오하는 사 이러스가 문제의 진짜 원흉인 자켄을 아들로 인정할 리도 없다. 그래도 사이러스는 그를 늪의 성에 머물도록 허락했고, 그 덕에 아 킨의 보름은 얌전해졌다. 자켄은 아마도 그것을 조건으로 걸었는지 모른다. 보름마다 아킨이 울부짖는 소리에 '암롯사의 둘째 왕자는 미쳤다.'라는 소문이 흉흉하게 퍼지던 때에, 자켄은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그를 진정시켜주었다. 소문이 잦아들고, 결국 잊혀졌고, 아킨은 압셀론에까지 갈 수 있었다. 자켄이야 말로 어머니였고, 아버지였고, 진정한 형제였다. 열 여덟이 되는 지금까지 진정 사랑하고 사랑 받고 싶은 존재이며, 무엇으로든 지키고 싶은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조용한 숲의 엘프 자켄이었다. 언젠가는 떠날 거라는 것을 알아도, 그래도 붙들고 싶었다. 어머니 에게도 아버지에게도 받지 못한 사랑을 그에게라면 받을 수 있을 것 같았으며, 휘안토스에게 빼앗기지 않고 빼앗길까 두려워하지 않 아도 되는 존재가 되어줄 것 같았다..... "아키?" 루첼이 그렇게 부르자, 더 이상 기분이 가라앉기 싫었던 아킨은 로 메르드 왕가에 대해 물었다. 루첼은 별로 생각하기 싫다는 듯 가볍 고 짧게 말했다. "반정, 진압....그리고 사형. 그래도 그레코 후작과 그 아들과 부인은 탈출한 것 같아. 죽었다는 말은 못 들었거든." 그리고 아킨은 생각 없이 들었다. 루첼에게는 미안했지만 전혀 관심 이 안 갔다. 어차피 켈브리안과는 만났고, 그녀에게서 그간 사정은 다 들었으니. 다행히 당시 베넬리아에 있던 루첼은 그 일에 대해 꽤 나 대충 설명했고, 아킨은 별로 캐묻지도 않았다. 그 이야기를 마치 고 루첼에게서 베넬리에서의 1년에 대해 듣게 되었다. 솔직히 별 것 아닌 그 이야기가 더 흥미로웠다. "제자가 아니라 완전 집사였구나, 너." "하인이라고는 안 하니 다행이구나." 그리고 솔직히 말할 수는 없었지만, 아킨은 조금은 서운했다. 아킨이 갇혀서 보낸 1년 동안, 세상은 아킨같은 존재는 애당초 없었 다는 듯 너무나 쉽게, 당연하게 돌아가 버렸다. 각자의 마음속에 아 킨은 분명 빈자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뿐이다. 지난 1년 동안 아 킨은 아무 것도 가지지 못했고 이루지 못했고, 그래서 결국 이렇게 예전에 가지고 있던 자그마한 자리마저도 남에게 비켜주고 '손님'이 되어서 앉아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도무지 더 이상 즐거워지지 않았다. 투명하고 가 벼운 존재 같다는 느낌이 드는 건, 미움받는 것 보다 오히려 더 슬 픈 일이었다.... "아키-" 아킨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베이나트가 맞은 편에 서 있었다. 그러나 방의 구석진 곳이라, 눈이 밝은 아킨도 주 의를 기울여야 겨우 그의 얼굴이 보일 정도였다. "언제 온 거죠?" "이제 막 돌아왔다." 아킨은 시계를 보았다. 벌써 한시다. "이야기가 길었나 보군요." "뭐, 하다 보니 벌써 이 시간이더구나......" 그렇게 말하고는 베이나트의 숨소리가 망설이고 긴장하는 듯 아주 작게 잦아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몇 번이나 미루어 두었을 듯 한 질문을 마침내 물어보았다. "내가 컬린이란 건 어떻게 알았니?" "그 지하창고에서......몇 가지 물건 보니 금방 알겠더군요. 모두 B. K로 시작되는 이름들에, 그 서명이 들어간 날짜는 믿을 수 없을 정 도로 차이가 나요. 그런데, 그렇게 시대가 틀려도 필체는 다 똑같더 군요.....같은 사람이 쓴 듯." "그리고?" "제가 꽤 흥미롭게 봤던 그 범선 모형의 선체 아랫부분에 오거스트 롤레인이라 적혀 있었습니다...... 그제야 당신과 탈로스의 관계가 이 해되더군요. 왜 그가 당신을 미워하는 지, 당신은 왜 그를 죽이지 못하고 도망쳐 다녀야만 하는지. 또, 왜 그렇게 저를 도와주셨는 지......너무나 쉽게 그 엉킨 고리들이 풀려 나갔죠." 베이나트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그날 이후로 그 저주에 대해 아무 말도 안한 거구나." "당신이 이 은봉인을 만들어 주었다는 것을 아니까요. 어쨌든, 저는 당신 덕에 그 늪의 성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더 이상 목에 사슬 이 채워지지 않았고, 성밖을 나서면서 혹시 아버지가 사냥개들을 풀 어놓지 않을까 겁먹을 필요도 없었고,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변신을 하지 않아도 되었어요....그것만은, 그리고 당연하게도, 또한 너무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그에게 저주의 책임이 없다면, 그 저주를 막아 주고 적어도 보통 사람처럼 살게 해 준 데 더욱 깊이 감사해야 한 다. 그것은 책임도, 의무도 아닌 단지 자비와 은혜일 뿐이었다. 베이나트가 말했다. "부탁 하나 있다." "말씀하십시오." "나는 곧 아주 멀리 떠날 예정이란다. 괜찮다면 나와 같이 가 주겠 니?" 아킨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뒤에야, 겨우 어렵게 말했다. "어디로...말씀이십니까?" "어둠 숲에 잠시 들렀다가 북으로 방향을 틀어 숲을 넘어 갈 예정 이다. 그리고....그곳에 있는 내 집에 묶을 생각이란다." 아킨은 가볍게 웃었다. "집이...정말 많군요." "그곳이 제일 좋은 집이란다. 제일 크고 재미있는 곳인 데다가.....근 처에 나보다 더 별난 친구 놈이 살고 있어. 녀석이라면 너를 아주 좋아할 거다. 너도...뭐, 적응되면 좋아하겠지. 게다가 말이다.....그곳 이라면 탈로스도, 네 아버지나 형도.....아무도 상관 할 수 없어. 평화 롭게 살 수 있을 거다." "도망치지 말라고 한 건 당신 아닌가요?" "그건 도망치는 건 아니다. 네 삶을 찾는 거지. 그곳에서라면, 너는 지금보다 훨씬 더 안정되게 살며...강해질 수 있을 거다. 때가 되면 그곳을 떠날 지도 모르지. 말리지는 않겠다만, 적어도 그 곳에 애착 을 갖는 다면, 그래서 그곳을 네가 '돌아올 곳'으로 여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거란다." 아킨은 베이나트의 손이 젖은 이마를 쓸어 주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고목 나무의 그늘처럼 편안하고 아늑한 것이었다. 아주 예전 에, 갓 태어났을 때 어머니가 이렇게 해 주셨을 지도 모른다. 열에 들떠 지쳐 쓰러져 있던 아킨을 안아 주던 자켄의 손길도 이랬을 지 도 모르고, 어쩌면......잠든 유제니아의 이마를 쓸어 주던 아킨의 손 길도 이러했을 지 모른다... 베이나트가 말했다. "아키야, 너는 그래도 사람이고, 아직....은 너무 어리다. 그러니, 적 어도 행복해 지고 싶겠고, 행복해져야 할 기회를 한번이라도 잡아야 하지 않겠니." "......" 그러나 아킨은 그 고마운 말에 아무런 기쁨과 희망을 느끼지는 못 했다. 그러기에는, 그 동안 그를 줄곧 따라오던 그림자가 너무나 진 하고 차가웠고, 아직도 등골이 시릴 지경이다. 과연 내가 죽인 어머니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어머니가 사랑하고 아버지가 지키는 휘안토스를 잊을 수 있을까. 이 사람을 따라 간다 면, 그래서 이 땅과의 연을 영원히 끊어버린다면, 과연 그의 말대로 행복해 질 수 있을까. 아니. 아무 것도 버릴 수도, 잊을 수도 없다. 그것은 이미 아킨의 살과 뼈 와 피였고, 영원히 품어야 하는 어둠이었으며, 결국 아킨 그 자체중 의 하나인 것이다. "죄송합니다...." 그 힘없는 말에 베이나트의 눈은 흐려졌다. "그래도 잘 생각해 보려무나. 나는 강하고, 너를 강하게 해 줄 수 있고.....그리고 강하다면, 너는 좀 더 많은 기회를 얻게 될 거란다." "압니다.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그리고 어떤 것이 진정 아킨 자신을 위 해 현명한 선택이며, 이 고마운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일까- 아직 결정 내리기 힘든 아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이나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킨은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 작가잡설: 6.10 항쟁 기념일이 지났군요..... 이 즈음에 아버님께서 교 환교수로 가셔서 미국에 있었는데, 그 때 주요 뉴스 중 하나가 바로 한국의 민주화 운동상황이었지요. ^^ (그런데 정작 우리 나라 뉴스 에서는 거의 나오지도 않았다는군요. -_-;;) 그날 거리로 나오셨던 분들께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33장 ************************************************************** [겨울성의 열쇠] 제155편 주인 없는 잔#2 *************************************************************** 롤레인은 잠들지 않고 이제 막 베이나트와 함께 마친 일에 대해 생 각해 보고 있었다. 어차피 잠자는 시간을 훌쩍 넘겨 버렸으니, 그냥 해 뜰 때까지 날밤 새우고 내일 일찍 자는 편이 낫기에 그저 생각이나 정리해 보기로 한 것이다. 베이나트가 제안한 것은 이론 적으로는 가능했고, 그것 의 성공 여부는 어쨌든 베이나트-즉 컬린의 능력에 달려있다. 알아 서 하겠지, 천년인지 만년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엔간한 드래곤이 나 엘프보다 연상인 그이니 무책임하거나 무모한 짓은 하지 않을 테지.... 그 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시계를 보니 새벽 두 시였다. "접니다, 교수님." 아킨의 목소리였다. 롤레인은 갑자기 어깨의 힘이 탁 풀렸다. 아아, 그래.....아킨이 돌아와 있었다. "들어오려무나." 아킨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서재를 한번 둘러보더 니, 아주 좋은 기억을 떠올리며 조용히 웃었다. "로멜의 서재와 똑같군요." "내 취향이 어디 가겠니. 그건 그렇고, 밤중에 웬 일이니?" 아킨은 그렇게 말하는 롤레인의 피로해 보이는 안색을 보게 되자 미안해졌다. 그래서 문 쪽으로 돌아서며 말했다. "저, 피곤하시면 내일 여쭙겠습니다. 너무 늦었군요." "아아, 괜찮아. 1년이나 못 만났는데, 하루 피곤한 것 정도 참지 않 으면 벌받을 일이지. 그리고 불쑥 온 게 미안하다면 얼른 말 해주는 게 좋아. 밤 새 '네가 왜 왔을까' 하는 궁금증으로 뒤척이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냥.....여러 가지. 여쭤 볼일이 있어서요." "그 여쭤 볼일이, '베이나트는 컬린이다!' 라면 생략해도 좋아. 나도 알고 있으니까." 아킨은 멍하니 롤레인을 바라보았다. "알고 계셨습니까?" "나와 탈로스, 둘 다 알아. 물론 악튤런은 전혀 모르지만...어쨌든 앉으렴." 롤레인이 먼저 앉자 아킨도 그 앞에 앉았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롤 레인이 먼저 물었다. "그곳에서는 어떻게 지냈지?" 그러나 당장에 흐려질 줄 알았던 아킨의 얼굴에는, 여전히 편하고 부드러운 웃음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의외의 말로 답했다. "나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고약하게 끌고 갔는데도?" "친절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괴롭힌 적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제 친아버지보다는 잘 해줬습니다. 적어도 맨 정 신일 때에는 쇠사슬에 묶어 가두지 않았으니까요." 롤레인이 가볍게 한숨을 내 쉬었지만, 아킨은 담담하게 말해나갔다. "그는........고집 세고 자존심도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 게 이해 받지 못해도 상관하지 않고, 이해시키려 하지도 않지요...... 그래서 그 사람은 늘 혼자가 되 버리는 겁니다. 스승인 컬린과 동기인 교 수님과의 싸움에 대해서도 전혀 해명하지 않았고, 그 덕에 그는 온갖 비난을 뒤집어쓰며 은거해야 했고요....." 해명했으면 모두 믿어주지는 않아도, 그래도 그를 편들어 주려던 사 람 몇은 이해해 주었을 텐데- 그래도 그는 일체 해명하지 않았다. 시끄러운 말을 모두 무시했고, 그 지식과 침묵의 깊고 깊은 동굴에 은거하며 해 오던 일을 계속 해 올뿐이다. 모든 사람이 신경 쓰는 것을,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다. "탈로스가 가장 믿는 것은 탈로스 자신이었고 탈로스 자신이 자신 을 믿는 한 그 외에는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킨은 잠시 말을 멈추고는 롤레인의 검은 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래도 교수님에게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나?" "그는 누구보다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누구보다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 교수님이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지독하게 미워했거든." 롤레인이 말했다. "나는 탈로스를 미치광이 취급했고, 탈로스는 나를 스승에게 아부나 하는 야비한 사기꾼 취급했다. 물론, 그래서 미워한 게 아니라, 미워 하기 때문에 그렇게 보인 거지. 그리고 은봉인의 일이 그에게는 아 주 결정적이었지. 그는 내가 스승에게 아부해서 지식과 유산을 능청 스럽게 빼 돌린다 생각했지......물론 나도 그 탈로스란 녀석이 그 모 든 것을 그냥 성형수술에 쓸거라 착각했지만....그래, 생각해 보면 참 유치했다, 둘 다." "두 분 다...." "지금 보면 전혀 안 그럴 것 같지? 하지만 당시에는 정말 그럴 줄 알았고, 꽤 최근까지 그랬다니까." 생각해 보니, 아킨이 처음 로멜이 왔을 때 롤레인이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정말 최근까지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너를 보내 놓고, 두어 달간은 정말 이를 갈면서 지냈지. 겨우 그런 시시한 일에나 쓸 거면서, 뭐 하러 너를 데리고 가고 컬린을 그 꼴 로 만들었을까....." "그리고요?" "얼마 전에 알게되었지. 모습을 고치는 것 정도는, 그는 이미 예전 에 알고 있었을 거라는 것- 그리고 드래곤에 심취했던 것은 그 모 습을 바꾸기 위함이 아니라 세계의 수호자들과 직접 대화할 수 있 는 그들의 사도인 드래곤들이야말로 그의 연구를 완성시켜줄 자들 이기에 그들이 남긴 것을 추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그래, 너 무나 당연한 일이었지. 너무나......" 그리고 롤레인은 흐릿하고 씁쓸하게 웃었다. "너무 골똘하게 생각해서 일부러 보지 않으려 했는지도 몰라. 이미 오래 전부터 스스로 알고 있었는데, 내 미움이 흐려질까 봐, 그리고 그를 인정하게 될 까봐 억지로 부정했던 것일 지도 모르지...우린 서로를 이기기 위해 여기까지 걸어왔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 버리는 것이 싫었다. 우습게 여겨도 상관없어. 원래 미움과 편견이란, 아주 사소한 것도 곡해하게 하는 고약한 녀석이니까." "......" "컬린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어떻게든 우리 둘이 제대 로 붙지 못하게 하기 위해 노력했지. 하지만, 결국 '그것'을 주지 않 음으로써 탈로스의 분노를 샀고, 탈로스의 분노는 나의 분노를 정당 화 시켰고......그렇게 서로가 넝마가 되도록 싸웠다." "다시 만난다면, 역시 다시 싸우실 겁니까?" "탈로스도, 나도-- 우리의 최종 목표는 서로를 이기는 거다. 나는 페그-라일로, 그리고 탈로스는 살육마법이라 결론지은 그 마법대신 별들의 문자를 쓰는 그 눈부신 고대 마법으로. 우리가 택한 길이 얼 마나 옳은 지 거듭 스스로에게 물어보며, 언젠가는 서로에게 인정받 아 보려 하지- 그가 그 물건을 찾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도 그 때문 이다." 롤레인은 다시 웃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씁쓸하지도, 울적하지도 않 은 부드러운 웃음이었다. 아킨이 물었다. "탈로스가 찾는 그 물건은....대체 무엇입니까." "신을 만드는 물건." 답은 참 쉬웠지만, 아킨은 그런가 보다...하다가 순간 넋을 놓을 듯 그녀를 바라보고 말았다. 부정할 수는 없었다. 순간이나마, 아킨은 '그것이 있으면 이 저주를 풀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바라지도 못했던 모든 것을 한 손에 휘어잡을 수 있 다고, 어쩌면 휘안토스와 사이러스마저 지배할 힘을, 그들에게 복수 할 기회를 주게 될 거라 생각했다. 눈 안으로 어떤 욕망의 빛을 내 비추었을 지 모를 일이었다. 환희와 희망을 보였을 지도 모르며, 탐욕으로 추하게 빛났을 지도 모른다. 추하다고, 지금 스승 앞에서 그런 것을 생각할 수 있냐고, 양심은 그렇게 말하지만 욕망 역시 강해진다... 죄책감이 강해지는 만큼, 갈 망도 강해진다. 그래도 얻기만 한다면, 그 죄책감보다 더 큰 기쁨을 얻게될 텐데? 그 때에야 말로 정말 이 지긋지긋한 저주에서 벗어나 정말 자유롭 게 될 텐데? 그렇게 생각하니 간절히, 정말 간절히 바라기 시작한 다. 가슴이 뜨거워지고, 손에는 힘이 들어간다. 그것을 롤레인이 보지 못했을 리 없다. 그녀의 날카롭고 차가운 눈은 그런 아킨의 속내를 너무나 쉽게 간 파했을 것이고, 그것이 아킨을 다시 부끄럽게 했다. 롤레인이 말했다. "그것은,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심술궂은 마법을 거는 구나." 그 말에 아킨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롤레인이 조용히 읊조렸다. "첫 번째 잔에는 슬픔, 두 번째 잔에는 고독, 세 번째 잔에는 비 탄......." "....교수님?" "알르간드의 노래란다. 알고 있니?" "언젠가......자크가 불러 준 적이 있습니다." "아키, 에칼라스는 인간이 아니라 애당초 신이었다가 성배의 성수 와 성검의 힘으로 각성한 것뿐이다. 그 나머지 수호자들 역시 마찬 가지이고, 드래곤의 왕은 인간도 아니었다. 하지만 평범한 인간이 인간인 채로 신이 된다는 건 그저 끔찍한 일일 뿐이야." "...." "아키, 루첼에게도 그것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았단다. 그런데 아직 어리고......슬픔에 쉽게 다쳐도 슬픔을 이겨내는 것은 힘든 네게 왜 이것을 가르쳐 주는 지 알아주렴. 나는 네가 현명한 선택을 하리라 믿고 있고, 그 기대가 어긋나지 않기를 바란다." "너무 과하시군요. 저는 아직....어립니다." "갈망이란 어리든 나이가 많든 상관없고, 그저 운명의 잔인한 실험 일 뿐이지. 그래, 솔직하고 객관적으로 본다면 네게 그 비밀의 문이 드러난 다는 것이 외려 더 위험하겠지. 루첼은 내가 아는 누구보다 강하고, 또 가끔 너무 소심하게 보일 정도로 자기가 책임지기에 버 거운 것은 피하려고 한지.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분명히 아는 녀석이니까. 그는 같은 일을 당한다면,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피할 가 능성이 크다. 하지만 넌....." 롤레인의 시선이 아킨의 은봉인에 닿았다가 거두어졌다. "아키, 네 문제는 네 힘으로 해결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러기 위 해서 필요한 것은 바로 네 힘으로 강해지는 것이고, 너는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줘." ".....하지만..." "짐작한다. 네 모든 버거운 일을 한번에 해결 할 수 있는 쉬운 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게 어떤 것인지. 하지만 어려운 일이 쉽게 끝난 다는 건 행운이 아니란다. 언젠가는.....늦던 이르던 간에 대가 를 치르게 된다. 공짜로 주어지는 건 없어." 롤레인은 아킨의 볼에 손을 얹었다. 그것은 예전에도 그랬듯 여전히 부드럽고 기분 좋은 손길이다. "아키, 8년 전에 헤어진 노인이 청년이 되어 돌아오는 건.....회춘을 축하드립니다 하고 웃어넘기기에는 너무나 무서운 일이었다. 그리고 자기보다 훨씬 젊고 어렸던 사람들이 훌쩍 늙어 가는 것을 보게 되 는 것, 몇 번을 거듭해도 익숙해지는 일이 아닐 거다." 흐릿했지만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짜디짠 슬픔의 강물. 그것이 흐르고 흘러, 모든 이가 떠나건만 강물 에 박힌 바위처럼 그를 떠나는 그 모든 것을 바라보며 영원히 서 있을 뿐.....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눈물은 잠시 품었던 욕망과 희망과 함 께 흘러내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베이나트의 창고에 쌓인 그 슬픔의 흔적들. 그것이 바로 베이나트가 택한 첫 번째 잔에 담긴 슬픔과 비 탄이었다. 죽음과 이별로 쌓아 올리고, 슬픔과 상처로 문을 닫아, 그 리움으로 열쇠를 채운 그런 창고였던 것이다. "강해져라, 아키. 너의 힘으로, 너에게 주어진 생명과 시간을 바 쳐.....그렇게 강해져라. 그것이 너의 스승이자 아직도 너를 지켜보고 있는 나를 위한 길이고.....또, 너 자신을 위한 길이 될 거다." *********************************************************** 작가잡설: 드디어 이사날짜와 이사갈 집이 정해졌습니다! 하하하~ 그런데 이거 하숙집 주인아주머니가 사람 속을 박박 긁으시는 군요. 나간다는 말을 하니 당장에 '2년 있겠다고 약속하지 않 았냐.' 라는 뜬금없는 말을 불쑥 내 놓으시더니 화를 벌컥 내시데요. 지난 달에 방 보러 온 애들이 정말 많았는데 진 작에 말해야지 않았냐는 둥, 나는 너희들이 2년 계속 있을 줄 알고만 있었다는 둥, 그렇게 약속을 어기면 쓰냐는 둥;; 듣자 듣자 하니 기가 막혀서... (5월 말은 시험기간이며, 6월부터는 대부분의 대학은 방학 에 들어갑니다. 이런 기간에 방보러 다니는 학생이 있다 니, 이거 완전히 거짓말이잖아요!) 그래서 언제 내가 계약이라도 했냐고 했죠. 사람 사정이 이 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건데, 2년 전에 문서상으로 계약한 것도 없는데 왜 그런 걸 가지고 내 책임으로 무냐고 요. 1년 계약하고도 사정 생겨서 방 뺄 수도 있는데, 이건 다달이 돈 내는 하숙집인데 그리 말하니 기가 막히죠. 그랬더니 대뜸 너희들을 진즉에 내보내려 했는데 2년 동안 쓴다고 약속해서 너희들 서운할까봐 참았다나요? 그 동안 제가 시끄럽게 전화받고 떠들어 댄다고 우리 때문에 나간 다는 애들도 부지기수였다나? -_- 그래서 방이 아, 예 방음이 안된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이런 저런 '하드웨어'상의 문제점을 말했더니 '그럼 왜 다른 애들은 아무말도 안하는데 너희들만 그러냐!' 라고 답변하시는 군요. 거, 참....지난 겨울에 방을 아예 냉장고로 만들어 놓고 서도 '추운데요. 손발도 이렇게 차고...' 했을 때 '네 체 질이 그래서 그렇다.' 하고 말한 사람이 누구며, 밥반찬은 먹다 남은 거 긁어주는 듯한 밥상인데다가, 단백질이라 고는 어묵볶음 하나밖에 없는 하숙집이 어딘데....;;; 아무리 사이가 나쁘더라도 가는 길에 웃으며 보내면 나쁜 기억 잊어주는 것이 사람 심정입니다. 그런데 이 아주머니는 그 동안 쌓여왔던 모든 기억들을 단번에 업 그레이드 시켜주시는 군요. 거, 참..... 이런 분들 볼때마다 아울은 아울의 인생관을 다시 점 검합니다. 인생관이 뭐냐고요? '곱게 늙자.' 입니다. -_-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33장 ************************************************************** [겨울성의 열쇠] 제156편 주인 없는 잔#3 *************************************************************** '탑의 열쇠'는 각 나라의 길드의 명예로운 상징이었다. 그리고 마법 사들은 각 나라별로 돌아가면서 모여 '탑의 열쇠'를 소환하는 의식 을 갖는다. 전체적으로는 적게는 한해에 한번, 많게는 서너 번 씩 이루어지게 되어 있으나, 같은 나라에서는 거의 3년마다 한번씩 이 루어지게 된다. 각 나라의 길드에서 열쇠를 소환하는 것은 그 나라의 최고 마스터 다. 그리고 그들 바로 아래에 있는 다섯 마스터가 열쇠가 소환되는 '성배의 환'을 유지하고, '마법사로서의 이름'인 권호는 그 환에서 떠 오르게 된다. 열쇠가 소환되는 환을 유지하려면 어느 정도 되는 힘 을 갖춘 마법사가 다섯 명 이상 필요하고, 그 안에서 열쇠를 뽑아내 는 것은 열쇠가 직접 선택한 자만이 가능하다. 최고 마스터가 물러 나거나 사망하면 새로운 최고 마스터를 뽑는 의식은 다섯 마스터가 환을 유지하는 순간에 일어나게 되는데, 열쇠는 그 안에 모인 자들 중(다섯 마스터를 포함하여) 가장 강한 자를 찾아가게 된다. 이렇게 열쇠를 맡아 관리하는 것은, 물론 가장 큰 명예이자 권력의 상징이 될 뿐(어쨌건 그들은 그 자리에 모인 마법사들 중 가장 강 한 자라고 공개적으로 인정된 것이니)이다. 게다가 마법사가 길드 안의 누군가보다 약해지면 열쇠를 소환하거나 유지시킬 수 없기 때 문에 알아서 물러나야 하니, 한번 얻었다고 영원히 가지고 있을 수 도 없는 것이다. 물론 힘이 강하다면, 다른 땅의 열쇠를 가질 수도 있다. 어차피 우주적 힘이란 국경이나 인종 같은 사소한 구분을 당 연히 무시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해도, 실질적 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환은 반드시 다른 사람이 유 지시켜 주어야 하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하 다. 최소 다섯이며, 최대 스무 명까지도 필요로 한다. 또, 이것이 유 지될 때 주변의 마나가 흐트러질 정도로 방해받지 않기 위해 다른 마법사들이 그 주변을 지킨다. 이 정도 규모의 인간들을 다 자기편으로 만들지 않는 한 두 개 이 상의 열쇠를 소환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실질적인 힘이 주어지는 것 도 아니라 그저 열쇠의 주인이 되는 것뿐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그 정도로 공을 들이는 바보는 없다. 그리고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환에서 권호를 부여받 는 다는 것은, 그것도 한 나라의 길드회에서 그런 권호를 부여받는 다는 것은, 마법사로서의 국적은 그 길드가 속한 나라에 포함되게 된다는 뜻이다. 그것은 반드시 지켜라 정해진 바는 아니지만 암묵적 인 관습법이었으며, 어길 시에는 이런 종류의 법이 늘 그렇듯 침묵 의 폭력으로 응징된다. 그리고 이렇게 부여받은 권호자체는 힘을 부 여받는 다는 의미가 아니라 마법사로서 '어떤 길'로 접어들지를 예 시해 주는 것일 뿐이다. 마법의 길은 복잡하고 다양하다. 마법사 자 신에게 적합한 길을 스스로 찾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것을 좀 더 우 주적이고 포괄적인 존재에 의해 판정 받는 것이 바로 권호인 것이 다. 그리고 이것을 받아야 비로소 마법사로서 완전하게 인정받게 되 는 것이다. 그렇게 중요한 것이니 다른 마법사 지망생이라면 마르고 닳도록 아 는 것이 바로 그 탑의 열쇠와 권호수여였지만, 아킨은 그것에 대해 별반 아는 바가 없다. 그래서 베이나트가 권호에 대한 말을 꺼냈을 때, 다른 마법사 지망생이라면 '말도 안됩니다!' 라고 말하며 펄펄 뛰었을 것을 아킨은 태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그것을 당신이 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물론이다." "대체 왜....." "롤레인의 제자에 대한 호의라고 생각해 두렴. 또, 내 또 다른 제자 인 탈로스 덕에 너는 졸업도 못하지 않았니. 그에 대한 책임이기도 하단다....그리고 권호가 특별히 굉장한 힘을 주는 건 아니지만 앞이 분명한 게 좋지 않겠니." 아킨이 그런 문제에 무관심했던 것은, 그만큼 '알 필요가 없기' 때문 이었다. 물론, 처음 압셀론에서 '마법을 배울 겁니다.' 했을 때, 그가 과연 축수자인지 아닌지 판단했던 케올레스가 조금 설명해 주기는 했다(그리고 케올레스는 전 세계를 통틀어, 최고 마스터는커녕 다섯 마스터의 자격을 가진 것도 아니면서 왕의 마법사가 된 유일한 인 물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아킨은 그 말을 아주 건성으로 들어 버렸 다. 형과 경쟁하기 싫었던 치기로 선택한 것인 만큼 큰 흥미를 가지 고 있을 리도 없었고, 흥미가 없으니 무언가 해 보겠다는 생각도 당 연히 없었던 것이었다. '되면 되는 거고 안되면 안 되는 거고.'가 당 시 생각이었고, 그 덕에 수틀리면 망설임 없이 명문 학원 교수들에 게 주먹을 날렸던 것이다. 소중해 지면 조심스러워 지는 법이었으 니, 당시의 아킨에게 미래도 인생도 어쩌면 그 자신도 별반 중요하 고 소중하지 않았으니 조심성도 참을성도 양보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에 안개 낀 듯 흐리고 불분명하기만 했던 미래가 조금은 확실하게 보였던 것이 로멜에서의 생활이었다. 그곳에서의 생활이 희망, 기대......그리고 작은 평화와, 어쩌면 기쁨이라 불릴 수 있는 감정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래서 소중해졌으니까,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놓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필사적으로 '노력'했었다. 그러나 그것도 형 앞에서는 다 끝이었다. 조금은 강해졌다고 생각했건만, 휘안토스 앞에서는, 그리고 그 뒤에 서 침묵하는 아버지 앞에서는 아무 소용도 없었다....그들은 아킨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않는 다면 아킨을 지옥에라도 가둘 수 있는 이들이었다. 유제니아에게 휘안토스가 나타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 처음에는 무 심히 넘어갔지만 갈수록 소름이 끼쳐왔다. 형이 마음만 먹는 다면 얼마나 잔인하고 철저해지는 지 잘 아는 아킨은, 그가 유제니아에게 얼마나 잔혹한 보답을 해 줄 지 예상되고도 남았다. 세르네긴이 그 렇게 말하는 것도, 그가 직접 그런 휘안토스를 봤기 때문일 것이 다.... 아킨은 그 두려움을 다시 분명하게 느끼며, 행여나 하는 희망과 기 대를 품는 것마저도 망설이면서 말했다. "어제....같이 가자고 하셨지요." "그래." "저는 이 곳을 완전히 떠날 수는 없습니다. 분명하게는 모르지만, 어쨌든....다시 이곳으로 와야 한다는 생각은 듭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렇게 될 것 같아요." "이해하마." "어제.....강하다면 좀 더 많은 기회를 얻게 될 거라 하셨습니다. 저 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많은 기회를 바라는 건 아니고, 그저 버틸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으면 됩니다." 도망치는 것까지는 괜찮지만, 막다른 길에 다다랐을 때 예전처럼 맥 없이 무너지고 싶지는 않았다. 남의 도움 없이도 한번 더 도약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롤레인이 탈로스와의 싸움에서 무너지고, 세르네긴은 지치고 다쳐 있다가 당했고, 그들의 도움이 없던 아킨은 기회를 송두리째 빼앗기게 되었다. 어렸으니까, 그리고 아직은 어리니까 도움 없이는 이겨낼 수 없다는 건 안다. 하지만 내일, 내일 모레...그렇게 조금씩 앞으로 나가다 보 면 언젠가는 혼자서도 할 수 있는 날이, 어쩌면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날이 올 지도 모른다. 아킨이 원하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어차피 주어진 것에 원망하고 주저앉을 수는 없고, 벌써 절망할 수 도 없다. 그리고 그것은 어제 롤레인이 말했던 대로, 아킨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베이나트, 다른 건 원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저는, 영원히 형을 질투하고 아버지를 미워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하지만, 그 래도 저는 조금 더 현명하고 강해지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원한다 할 지라도 지금 따라가려는 베이나트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것이 별반 없다. 그가 가진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그 토록 긴 생을 살아 와는지도 모른다. 그 긴 시간동안 그가 무엇을 해 왔는지도 모르며, 누구와 만나고 사랑하고 미워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아무 것도 모르고, 그저 지금 앞에 있는 것은 베이나트이며, 그를 보는 것이 아킨 자신이란 것만을 안다. "베이나트....그런데 이렇게 염치없이 부탁드리면서도 제가 당신께 해 드릴 수 있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겁먹지 말아라, 아키. 네가 내게 주는 것은 그저 내가 아직은 누구 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다는 기쁨이면 충분하니까. 단 하나만 약속 해다오, 나를 실망시키거나 슬프게 하지 않겠다고.....그것으로 나는 충분하다." "....." 아킨이 아무 말도 없자, 베이나트는 마음 좋은 아버지처럼 웃으며 아킨의 머리에 두 손을 얹었다. "탈로스와 롤레인이 내게 한번 더 살게 해 주었듯이, 이제는 너로서 한번 더 살기를 바란다...나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고, 이런 내게 네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별반 없으니까......단지 그것만이면 된단 다." 슬픔과 비탄- 그것이 왜 그의 잔인지, 아킨은 이제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첫 번 째 잔은 슬픔, 주어서 보내건만 강물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고, 그렇 다고 멈추게 할 수도 없다. 끝없이, 정말 끝없이. 강물 위로 수천 억 의 석양이 부서지고 여명이 퍼져도, 그래도 멈추는 법은 없다. 그들 을 보내면 또 흘러오고, 그리고 그들을 다시 보내야 한다. 그것이 그에게 주어진 삶이자, 죽음의 두려움과 맞바꾼 영원의 비탄 이었으며, 그것은 바로 베이나트라는 남자, 또 컬린이라는 남자, 좀 더 예전에는 칼립, 좀 더 먼 옛날에는 전혀 다른 이름이었을 누군가 의 숙명이었다. "베이, 당신의 생이란 늘 이런 겁니까?" "그리고 끝없이 되풀이하지....하지만 그것을 택한 것은 나였다. 누구 에게도 그 슬픔의 책임을 떠넘길 수는 없었다." 베이나트는 아킨을 일으켜 세웠다. "자, 가자꾸나. 오늘 안으로 일을 다 끝마치고.....조금 쉰 다음에 그 곳으로 떠나자." 전날에는 아주 날씨가 좋았지만, 그날은 비라도 한바탕 쏟아질 듯 아주 궂은 날이었다. 베넬리아의 울파논 항이 마주하는 바다는 검푸 르게 물들어 있고, 그 위로 흐르는 구름은 바다에 닿을 정도로 낮고 두터웠다. 집안에서 낸시와 거의 비슷할 정도로 일찍 일어나는 루첼은 2층을 한번 둘러 본 후 곧바로 롤레인의 서재로 올라갔다. 그러나, 예상과 는 달리 서재의 창문 근처에 롤레인이 혼자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 는 그도 모르게 뒤로 조금 물러나고 말았다. 그제야 롤레인이 고개 를 돌렸고, 루첼은 그녀의 지친 얼굴과 어제 저녁을 마쳤을 때 입고 있던 옷 그대로인 것을 발견했다. "밤새우신 겁니까?" "그래, 밤샜어." 일주일 중 이틀은 밤을 새우는 그녀였다. 루첼은 '어서 주무셔야지 요!' 하고 호들갑 떠는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롤레인이 물었다. "그런데 아침부터 웬 일이지, 루츠?" "지금 밖에 기회가 없을 듯 해서 여쭙습니다." "베이나트에 대해 묻고 싶은 게로군." 루첼은 작게 네, 하고 답했다. 롤레인이 말했다. "어떤 사람으로 보이든?" "분명 마법사이고, 중산층 정도 되는 가정에서 평범하게 자란 젊은 이 같더군요. 하지만 보기보다는 나이가 훨씬 들은 것 같기도 했습 니다." "어째서?" "정말 젊은 사람의 눈빛과 표정이 그렇다면, 그건 좀 무서운 일이지 요. 지나치게 평온하고, 그건...성격이 느긋해서라기보다는 속내를 겉 으로 드러내지 않기 때문인 듯 합니다. 늙은이가 그렇게 속이 시커 멓다면 몰라도, 젊은 사람이 그렇다면.....당연히 무서운 것 아닙니까. 그래서 나이가 좀 들었다, 라고 생각한 겁니다. 교수님과는 아주 잘 아는 사이 같아 보였지만, 그렇다고 친구 같아 보이지는 않았습니 다. 아키는 무언가 알고 있는 눈치였지만, 솔직히 말해주지는 않았 고요....." 롤레인은 피식 웃었다. "미안하지만 루첼, 그에 대해서는 나도 몰라." "하지만 어제 분명....." "물론 아예 모르는 건 아니야. 하지만 내가 아는 건 정말, 너무나 극히 일부야. 그러니 잘 모른다는 말이지." 루첼은 그녀의 목소리가 왠지 무겁다는 생각이 들어, 어색하게 안경 을 밀어 올렸다. 롤레인이 고개를 돌리고는 지팡이를 휙 휘둘렀다. 커튼이 휙휙 닫히고 문이 쿵 하고 닫혔다. "교수님?" "그냥 조용히 있고 싶어서. 그래, 루첼......암롯사로 떠나게 되었다는 것....아키에게 말했니?" "아직 못했습니다." "준비는 됐고?" "아무리 해도 모자라는 것 같죠." 루첼은 분위기가 지나치게 푹 가라앉은 것 같아 애써 쾌활하게 말 한 것이지만 별반 나아지지는 않았다. 괜히 더 어색해지기만 했다. "루첼, 그냥 마법사로 남는 것과 왕과 가까운 마법사가 되는 것은 아주 틀릴 거다......내가 가라고 했지만, 그건 너를 믿어서이지 네가 하는 모든 일에 내가 대신 책임지겠다는 말은 아니야. 네가 하는 일 에는 모두 네가 책임져야 할 것이고, 그건....여태 네가 하던 일과는 전혀 틀릴 거야." "벨카네스의 백색 진...처럼 말입니까?" 잘못 말했나 싶었지만, 롤레인의 얼굴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그 녀는 강했고, 쉽사리 흔들리지도 않았다. "그래. 너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을 한꺼번에 휩쓸어 죽여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그 피해 입은 사람들은 절대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저 군대와 군대가 맞붙는 것이라면 괜찮아. 누가 누구를 죽 였는지 전혀 모르니까. 하지만, 너와 나 같은 마법사는 틀리다. 우리 의 이름이 확실하게 남고, 이름이 확실하게 남는 다는 것은 그 모든 명예가 우리의 것이듯 비난과 원망과 분노, 그리고 증오까지 모두 우리에게 정확하게 향할 거라는 말이지....." "알고 있고, 각오도 되어 있습니다." 롤레인이 말했다. "루첼, 네게 어떤 길이 펼쳐질 지는 모른다. 또, 네가 어떤 선택을 내릴 지도 모두 정확하게 예상할 수는 없고. 그래도, 단 한가지만은 약속해 다오. 아니, 그렇게 해야만 네가 전쟁에 관련된 수많은 마법 사들이 떨어졌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게 되니......반드시 그렇게 해 주렴." "무엇이든 약속드리겠습니다...." "아무리 네가 강하다 하더라도, 네가 인간인 이상 너는 너의 편을 이기게 할 수는 있어도 정의 자체가 될 수 없다. 그러니.......루첼, 무 슨 일이 있어도 너 스스로 너를 용서하지는 말아라. 천명이든, 만 명이든....아니, 세상 모든 사람이 너를 용서하고 존경한다 할 지라도 너 스스로 너를 용서해서는 안 되는 거다......." 루첼은 성상 앞에서 맹세하듯 조용하게 말했다. "약속드립니다." 롤레인이 가볍게 웃었다. "나는 제자들은 잘 둔 것 같구나.....고맙다, 루첼." *********************************************************** 작가잡설: 자.....이제 아키는 알르간드로 떠나는 것인가! 그렇게 쉽게 보내주면 아울이 개과천선 한 게지요. 크흐흐흐흐~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33장 ************************************************************** [겨울성의 열쇠] 제157편 주인 없는 잔#4 ************************************************************** 아직 어둑한 가운데 아킨과 베이나트는 집을 나섰다. 베이나트는 자신이 멈추어 되돌아 볼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말라 고 했고, 안전과 관련된 일이라면 반드시 지키는 아킨은 그의 말에 고분고분 따랐다. 그러나 꿈속에 있는 듯 몽롱했다. 두 사람이 길을 나섰을 때는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컴컴한 새벽이었 고, 한참을 걸어도 먹구름 낀 하늘의 윤곽이 드러나고 나무와 건물 들의 윤곽이 뚜렷해 졌을 뿐 더 이상 밝아지지는 않았다. 베이나트는 울파논에서 2년이나 생활해온 아킨도 처음 보는 길로 접어들었다. 성문으로 향하나 했지만, 한참을 걸어도 성문은 나오지 않고 그저 건물만 끝없이 이어질 뿐이었다. 오른편으로는 운하가 흘 렀지만, 그 어둠에 젖어 검게 흐르는 물위로는 한참이 지나도 배 한 척 지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날이 샌 것 같은데도 사람이 지나가지 않았다. 갑자기 사람들이 모두 증발해 버린 듯, 한 명도 없다. 소리 도 들리지 않고, 건물의 창에 불하나 켜져 있지 않았다. 사람 냄새 하나 없는 메마른 환각 같은 거리였다. 롬파르와 더불어 가장 활기 찬 상업도시인 베넬리아에 이런 곳이 있을 리 없다. 그렇게 기이하고 궁금했지만 아킨은 베이나트의 주의에 따라 단 한 마디도 묻지 않으며, 앞서가는 베이나트의 뒤만을 따랐다. 베이나트의 손에 든 램프가 뿜어내는 빛이 주변을 파랗고 창백하게 적셨다. 강물 위로도 그 빛이 흩어진다. 그리고 찰브락- 물고기가 튀어 오르는 듯한 소리에, 아킨은 무의식적으로 운하의 물을 내려다 보고는 흠칫 놀랐다. 물 속에 두 개의 눈동자가 바깥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음엔 하나였는데, 불빛을 보고 모여들 듯 이내 수 십 개로 불어났다. 물 고기나 개구리의 눈이 아니다. 그것들 모두 큼지막한 아이들의 눈빛 이었다. 맙소사, 저게 뭐지? 그 때 베이나트가 소매를 걷으며 램프를 당기자, 물 깊은 곳까지 파 란빛이 퍼졌다. 그리고 물 속에는 바짝 마르고 눈만 큼지막한 아이 들 수 십 명이 헤엄치며 그 빛을 따라오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수초 처럼 천천히 흔들리고, 심해어처럼 반투명한 마른 팔이 빛을 움켜쥐 려는 듯 뻗쳐왔다. 빛이 닿자 아이들이 소리 없이 웃었다. 커다란 눈이 일그러지며 웃음이 퍼졌지만, 전혀 귀엽지 않았다. 베이나트가 말했다. "루살카 들이다. 쉿, 너는 내가 무엇을 말하든 그저 듣고만 있어라 -" 그리고 아킨이 베이나트 옆에 서게 되자, 그의 파란 빛이 아킨의 볼과 목덜미, 그리고 손을 적셨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건물은 이 제 없었다. 성문을 나온 기억이 전혀 없는데, 그 두 사람이 있는 곳 은 옆으로 갈대가 우거진 냇물이 흐르는 황야였다. 여기 저기 비틀 어진 나무가 서 있었고, 그 나무가 굽어보는 덤불과 잡초 밭에는 희 끄무레하게 빛나는 꽃들이 피어 있었다. 검고 작은 것이 그 틈에 웅 크리고 있다가, 베이나트의 램프 불이 그곳을 비추자 퉁 하고 퉁겨 나갔다. "신경 쓰지 말아라. 너에게 무슨 짓을 할 수는 없으니까." 아킨은 어깨를 추슬렀다. 볼이 차갑다 싶더니, 곧 작고 여린 보슬비 가 내리기 시작한다. 머리카락과 볼, 눈썹 끝에 물방울이 맺히기 시 작한다. 그리고 풀이 밟히던 바닥이 딱딱해 지며 드문드문 포석이 깔린 길이 나타났다. 포석이 점점 많아지더니, 길이 돌로 된 넓은 바닥으로 이어졌다. "멈추거라." 그렇게 멈추니, 그 둘이 서 있는 곳은 둥글게 만들어진 거대한 광장 이었다. 그 광장 중앙에는 사람 키 만한 기둥 다섯 개가 둥글게 서 있었고, 그 둥근 기둥들 아래에는 붉은 얼룩이 남아 있었다. 기둥 위쪽에는 몇 개의 글자들이 적혀 있고, 그것들은 어딘지 은봉인에 새겨진 옛 글자들을 생각나게 했다. "이젠 말해도 된다." "...여기가 어디입니까?" "별을 지표로 삼았던 옛 사람들이 남긴 터지." 아킨은 그것이 대체 무슨 소리인지 이해도 안 될뿐더러, 아무리 생 각해 봐도 베넬리아에 이런 곳이 있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든다. 황야는 자그마한 언덕이 몇 개 솟아 있을 뿐 지평선 끝까지 평탄하 게 뻗어 있었고, 여기 저기 우거진 잡초와 희끗희끗 피어난 꽃 무리 가 보일 뿐 숲이나 집 한 채 보이지 않는다. 아킨이 기억하기로는, 울파논 교외에는 수확이 풍성한 포도원들과 소나 양들을 키우는 목장들이 몇 개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곳은 암 롯사나 델 카타에서나 볼 법한 넓은 황야가 아닌가. 베이나트를 바라보며 답해달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베이나트는 답하 는 대신 들고 있던 램프를 바닥에 놓고는 기둥들 안쪽으로 들어갔 다. 순간 기둥들 아래에서 검은 얼룩 같은 것이 번지더니, 그 안에서 검 은 망토를 길게 늘어뜨린, 비정상적으로 팔과 다리가 긴 사람들이 나왔다. 그들은 느릿느릿 기둥 뒤로 가더니, 그 주변을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음울한 노랫소리가 그들의 검은 후드 아래에서 흘러나왔 다. 그러자, 그들이 도는 원의 안쪽에서 빛으로 된 원이 떠올라 주 변을 환하게 밝혔다. 아킨은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베이나트가 손짓을 해 안쪽으로 들어 오라 했다. 아킨은 최대한 그들에게 신경 쓰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기둥 안으로 들어갔다. "저들은 뭡니까?" "라레스나의 사제들." 그 말에, 순간 뒷덜미가 서늘할 정도로 오싹했다. "걱정 말고 어서 들어와라." 아킨은 빛의 원 안으로 들어섰고, 순간 밑에서 무언가가 갑자기 확 하고 치솟는 것 같았다. 아킨이 몸을 움츠리자, 베이나트가 그의 어 깨를 잡아 안으로 당겼다. "너무 머뭇거리면 위험하단다." 아킨은 넘어지지 않기 위해 허리를 당기고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원 안에 둘 만이 아닌 것을 발견했다. 베이나트가 바라보는 오른쪽과 왼쪽에, 낯선 남자와 여자가 서 있었 다. 그리고 아킨은 그 세 명의 중심, 즉 정 삼각형의 중심부에 서 있었다. 남자나 여자나, 둘 다 얼굴은 어둠에 묻혀 잘 보이지는 않는다. 둥근 어깨와 날씬한 몸으로 여자라 생각되는 쪽은 여자치고는 키가 큰 편이었다. 검게 물결치는 곱슬머리는 허리까지 닿고, 창백한 피 부를 가진 가는 턱과 선명한 붉은 색 입술이 그림자 아래로 살짝 드러나 있었다. 흰 목에는 금으로 된 목걸이가 가득 매어져 있었으 며, 그 목걸이마다 기하학적인 문양이 가득 새겨진 둥근 메달이 달 려 있다. 남자 쪽은 베이나트 만큼이나 키가 컸다. 그러나 베이나트와는 달리 체격이 크지는 않고, 외려 늘씬하고 호리호리한 편이었다. 붉은 머 리카락을 가지고 있었고, 로브의 소매 자락 아래로 뻗은 구리 빛 팔 뚝에는 덩굴이 감긴 듯한 모양의 금제 팔찌가 치워져 있다. 절반 정 도 보이는 얼굴의 양 볼에는 기이한 문신이 새겨져 있었고, 귓불에 달려 있을 듯한 커다란 황금 귀걸이가 늘어져 있었다. 남자치고는 아주 화려한 차림새다. "내 친구들이다." 그 말에, 남자와 여자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얼굴은 절반 이상 보이지는 않았으나, 둘의 눈동자가 잠깐 보이기는 했다. 여자 는 짙은 푸른 색 눈, 남자는 빛나는 금빛 눈동자였다. "그들은 지금 아주 멀리 있으니, 나는 확실하게 볼 수는 있지만 너 를 볼 수는 없다. 게다가 저기 저 남자 쪽은 지금 잠들어 있기도 하 고....둘 다 그저 희끄무레한 것이 여기에 놓여 있다, 그렇게만 느 낄 뿐이지....안심해라." 그렇게 말하고는 베이나트는 두 팔을 양옆으로 펼쳤다. 여자가 팔을 들어 후드를 걷어냈다. 남자 역시 그렇게 했고, 아킨은 그들의 얼굴 을 자세히 보려할 틈도 없이 갑자기 주변에서 솟구쳐 오르는 빛에 압박되었다. 방금 전에 들어왔던 원의 테두리를 따라 빛이 세차게 솟구치는 같 다. 수 천억 마리는 될 법한 벌들이 날개를 치는 듯한 웅웅, 소리가 주변에 가득 찼다. 귀가 얼얼하고 아플 지경이었다. 그 속에서, 아킨은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빛에 압사해 버릴 것만 같다. 세차게 번득이며 내리 덮치는 빛 속에서 제 정신이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순간 너무나 하얗기만 해서 붕 떠 있는 듯했던 주변 세상이, 순식간 에 바뀌었다. 몸에 옷을 걸치고 있는데, 그 옷이 투명해지거나 사라 지기라도 한 듯 몸이 가벼울뿐더러 아킨의 무게 자체도 사라진 듯 한 이상한 느낌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여전히 황야에 서 있었다. 딛고 있는 바닥은 단단 한 잿빛 돌로 된 포석으로 덮여 있고, 주변에 있는 기둥도 그대로였 다. 하늘은 차가운 푸른빛이며, 솜뭉치처럼 새하얗고 굵은 구름이 서쪽 으로 빠르게 흘러간다. 넓고 황량한 벌판은 겨울인 듯 탁한 회색이 었고, 바람에 억눌려 비뚤어져 자라난 작은 나무들 역시 앙상하다. 바람에 추위에 시들어 마른 잎들이 우스스 흔들렸다. 그리고 아킨을 중심으로, 베이나트와 다른 두 사람이 서 있던 자리에는 그들 대신 다섯 개의 기둥모양의 제단이 서 있었다. 아킨의 허리정도 되는 네 모진 제단이었고, 그 중 두 개는 비어 있고 나머지 세 개 위에는 각 각 커다란 잔들이 놓여 있었다. 황금이나 은이나 보석은 전혀 없는, 청동이나 구리로 만든 듯 낡은 잔이었다. 아무 무늬도 없고, 잘 닦아내지도 않아 온통 진 녹색 녹 으로 지저분하게 얼룩져 있었다. 양옆에 달린 고리는 말라비틀어진 겨울 덩굴처럼 금방이라도 삭아 떨어질 듯 했다. 그런데, 그런 하찮은 물건인데도 그 잔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잔 하나에는 하얀 안개 같은 것이 휘돌고 있고, 다 른 잔에는 루비를 녹인 듯 진한 붉은 색 액체가 소용돌이치고 있으 며, 다른 하나에는 수정처럼 차갑고 맑은 물이 휘돌고 있다. 그것들 은 잠시 끓어 넘치듯 튀어 오르고, 그 때마다 그 위로 붉고 하얗고 반짝이는 것들이 흐트러지다가는 사라졌다. 아킨은 그 중 정면에 놓여 있는 잔 쪽으로 손을 뻗어 보았다. 그러 나 주변에 아무 것도 없는 듯 했는데, 손을 들자마자 갑자기 매서운 바람이 손끝으로 느껴졌다. 행여나 해서 오른 쪽의 잔 쪽으로 손을 뻗자, 이번에는 데일 뜻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고, 왼편의 잔에서는 손끝이 근처로 다가가자마자 하얀 성에가 끼며 얼어붙는다. 무엇일까, 이것들이 대체 무엇이기래 이곳에 서 있는 걸까. 아킨은 혹시 해서 비어 있는 두 제단을 둘러보았다. 이제 그 두 제 단은 비어 있지 않았고, 역시나 다른 세 개와 같은 모양의 두 개의 잔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그 두 개는 다른 세 개와는 달리 텅텅 비 어 있었고, 그 안에는 투박한 송곳으로 새겨 그린 듯한 조잡한 그림 이 그려져 있을 뿐이었다. 오른 편에 있는 잔에는 가운데가 소용돌 이치는 해가 그려져 있고, 왼편의 것에는 둥근 원이 그려져 있다. 그 중 둥근 원이 그려진 쪽으로 아킨은 손을 뻗었다. 다른 잔들과는 달리, 그 주변에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곧 거친 잔의 표면이 손 끝에 닿았다. 아킨은 천천히 그것을 쓰다듬어 가다가, 그 고리에 손 을 멈추었다. 순간, 양팔에 걸린 팔찌가 무섭게 진동했다. 팔목이 아 프도록 시큰거려와, 아킨은 급히 손을 거두고는 팔목을 움켜잡았다. "크--!" 아킨은 다시 그 잔을 보았다. 그런데 잔 안에서 빛이 고이고 있었다. 은을 녹인 듯한 물이 가득 차 오르듯, 그 커다란 내면을 환하게 밝히며 차 오르는 것이다. 다 시 손을 뻗어 보려 했지만, 이번에는 팔찌가 팔목을 거세게 조였다. 그리고 갑자기 턱과 관절, 그리고 이가 욱신거려왔다. 피가 끓어오 르고, 근육이 긴장하며 팽팽해지기 시작했다. 얼굴이 쥐어짜듯 뒤틀 리는 것 같고, 귓불이 근질근질해 오는 것 같더니 와삭--하며 얇은 과자 부스러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젖히는 순간에, 주 변으로 은 조각들이 산산이 튀어 오른다. "!" 순간 아킨은 모든 평정심을 잃었다. 갑자기 밀려오는 공포와 절망에, 그리고 그것이 깨어지자마자 갑자 기 빠르게 진행되는 몸의 변화에 아킨은 몸서리쳤다. 아니야, 이건 아니야-- 이건 환각이다. 이건 그저 악몽이니까, 당장에 깨어나 버려야 한다. 지금 여기서 벗어나야 이 끔찍한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 벗어나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짐승의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크르렁--! 황량한 벌판위로, 그 천둥 같은 울부짖음이 길게 퍼졌다. 제단이 갑 자기 컴컴한 그림자로 얼룩지기 시작하더니 찢듯, 태우듯, 삼키듯, 아킨을 둘러싼 세상이 성큼 성큼 사라져간다. 그 다음, 온갖 혼란이 온 몸을 덮치고는 사라져갔다. 무수한 별들을 본 것 같고, 별들 위로 흐르는 우유 빛 안개 같은 빛 무리를 본 것 같고, 온 하늘을 가득 채울 듯한 거대한 달을 것을 본 듯도 하다. 엄청나게 거대한 호수를 본 듯도 하고, 그 호수를 가르 는 하얀 뱀 같은 괴물을 본 듯도 하다. 황금빛 날개를 펼친 금빛 드 래곤을 본 듯 하고, 그 우렁찬 목소리를 들은 듯 하다. 땅이 갈라지 고, 그 상처에서 피가 솟듯 시뻘건 용암이 솟구쳐 오르는 것 같고, 쿠르르릉--천둥 울리듯 땅이 울린다. 온통 혼란한 세상. 부서지고 으깨어지고 녹아버리고 뒤섞여 한데 섞여 사라지고, 그리 고 그 사라진 구멍에서 다시 세상이 쏟아져 내리는 듯 하다. 빛이 퍼지고, 어둠이 따라오고, 어둠을 부수며 빛이 다시 쏟아진다. 물이 치솟아 나무와 바위와 계곡과 강과 높은 산들과 그 위에 사는 작은 생명체들을 싹 휩쓸어 버릴 듯 무섭게 쏟아져 들어온다. 번개 가 치고, 천둥이 울리고, 먹구름이 몰려와 우글댄다. 아킨은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다. 같이 갈가리 찢겨져 사라져 버릴 것 같았고, 그것은 예전에 탈로스가 기억을 지워버릴 때의 기분과 비슷했다. 이 혼란에 함몰되어, 영영 아킨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래, 곧 피비린내가 풍겨올 것이다. 뼈와 살이 튀어 오르고, 비명소 리가 터져 오르고, 물은 온통 시뻘겋게 물들고 바위보다 찢겨진 살 점들이 너 넘쳐날 것이고, 혼란과 악이 잉태한 것들로 가득 찰 것이 다....! 그런데 무언가가 아킨을 불렀다. 부드러운 부름은 결코 아니었지만, 적어도 투명하고 정갈한 에너지 의 흐름을 담고 있었다. 그것은 이 세계가 아닌 전혀 다른 세계, 질 서와 아름다움과 빛이 있는 세상의 것이었고, 그것을 따라가면 이 끔찍한 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 듯 했다. 아킨은 고개를 돌렸고, 그 것을 따라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아니, 그저 날아가듯 흘러갔 다. 그리고 어두운 굴을 빠져 나온 듯 순식간에 그 혼란한 세상이 씻은 듯 사라지고, 깊은 계곡과 울창한 침엽수들이 우거진 숲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높이 솟은 험준한 산이 하늘로 뻗어나가고, 하늘에 둥글 게 뜬 하얀 달은 빛을 뿌린다. 그리고 아킨은 높고 굵고 울창한 나 무가 있는 비탈에 서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겨울의 숲은 앙상한 나뭇가지를 흔들어 대며 구슬 픈 울음소리를 냈다. 차가운 달빛은 그 위로 쏟아져, 온 숲은 그 창 백한 빛에 얼어붙는다. 산의 어둠에 숨은 늑대들이 고개를 길게 뻗 고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오고, 깊은 계곡에 그 소리가 울리며 수십, 수백, 수천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쳤다. 어디지, 여기는? 대체 어디야......! 아킨은 머리를 감싸쥐며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그는 이미 '짐승'이 었다. '네 다리'로 주춤 주춤 물러나다가, 결국 숲으로 휙 돌아섰다. 그러나 그는 잡혀 있었다. 묶인 것도, 갇힌 것도 아닌데, 그는 그 자 리에서 물러나지도 빠져나지도 못한 채 있을 뿐이었다. 그를 부른 것이 이렇게 붙들어 놓아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감금해 둔 것이다. 쉿- 그렇게 어디에선가 목소리가 들리더니, 어둠 속에서 달빛을 받는 진 한 갈색 로브의 여자가 나타났다. 으르르르릉--낮은 울음소리가 어 두운 숲으로 울려 퍼졌지만, 여자는 천천히 걸어와 아킨 쪽으로 손 을 뻗었다. 그녀의 손끝이 스칠 때마다 그 부분이 타는 듯 했고, 그 지독한 느낌과 함께 몸이 더욱 꽉 죄어드는 것 같았다. 결국 몸이 꽁꽁 묶인 듯 꼼짝도 못하게 될 때에야 그녀는 고개를 들더니 후드 를 뒤로 걷었다. 검게 물결치는 머리와 진녹의 눈동자--그리고 길게 뻗은 귀를 드러 냈다. 아킨의 온 몸이 떨렸다. 그르르릉-울부짖음이 다시 어둠 속으로 퍼 지고, 금빛 두 눈에서 안광이 튀어 올랐다. 그녀는 나루에였다. 어둠 숲의 어머니, 끔찍한 저주를 내린 자. 그런 그녀는, 달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아킨을 바라보고는 속삭였다. -가라, 브라달로스의 이빨, 휴로페의 핏방울, 달의 사생아여....그 자가 사랑하는 아내의 뱃속에 스며들어, 그의 아이와 같이 자라거 라.....그리고 보름마다 그의 죄를 일깨워라. 그의 피를 말려 버리고, 그의 정신을 으스러뜨려 버리고, 그렇게 산채로 죽여 버려라.... 그녀의 손끝과 닿은 부분이 점점 뜨거워지는 것 같더니, 나중에는 아킨의 온 몸을 녹여낼 듯 지독하게 뜨거워졌다. 나루에-그 엘프 여인이 속삭인다. -가거라. 가서, 그녀가 너를 잉태하도록 해라.......어서! 달이 지기 전 에.....! 순간 몸이 강철로 변하듯 날카롭고 무겁고 차가워지는 듯 하다. 아 킨은 발버둥치며 거부했지만, 몸을 조이는 힘이 그를 내버려두지 않 았다. 뭐야, 지금.....뭐야, 지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순간, 그의 어깨를 누군가가 강하게 잡아당겼다. "그만-! 이제 그만해라, 아키! 돌아와--!" *********************************************************** 작가잡설: 다음 편은 좀 일찍 올라올 것 같습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33장 ************************************************************** [겨울성의 열쇠] 제158편 주인 없는 잔#5 *************************************************************** 그 다급하고 날카로운 외침이 터지는 순간, 컴컴한 주변에 빛이 터 지며 숨이 턱 막힐 듯한 열기가 몸을 확 덮쳤다. 아직 눈앞이 흐리고 초점이 잡히지 않았고, 대체 어디에 있는 지조 차 모를 지경이었다. 알만한 것은 방금 무릎을 풀썩 꿇은 바닥이 아 주 차고 딱딱하다는 것 정도. 그러면서도 아킨은 거의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귀를 더듬었고, 손끝에 단단한 것이 닿자 그제야 먹먹했 던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숨이 터지자 반쯤 나갔던 정신도 가라앉고 흐릿한 시야도 점점 깨끗해지기 시작했다. 잠시 지나자 베이나트의 얼굴이 보였다. 먹구름 가득한 하늘도 보이 고, 습기찬 바람이 땀에 젖은 볼에 와 닿는다. 주변을 둘러보니 돌로 된 방안이었다. 오각형으로 된 방에, 각 모서리마다 기둥이 세워져 있고 그 면 마다 사람 키만큼이나 긴 창문이 있었다. 축축한 바닥에는 이끼가 끼어 있고, 그 위에 그려진 흐릿한 그림과 선들이 보인다. 언제 이곳으로 온 걸까, 방금 전 롤레인의 저택을 나섰을 때 이후로는...아니, 어떻 게 나섰는지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이런 곳에 온 기억이 전 혀 없었다. 베이나트가 아킨의 볼을 가볍게 치며 말했다. "아키, 정신 차려라. 어서-" "방금.....대체 뭘 본 겁니까." 거의 넋이 나간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베이나트는 고개를 가로 젓고는 말했다. "나중에 이야기하자 꾸나.....지금은 아무 것도 이야기 해 줄 수 없구 나." "아니, 당장 말해요.....! 그게 대체 뭡니까--!" 아킨은 가슴을 꾹 움켜쥐었다. 가슴 안의 심장이 놀란 짐승처럼 벌 떡대고 있었다. 아직도 방금 전에 본 광경과 나루에가 외친 말이 생 생히, 마치 칼로 새겨 넣은 듯 뚜렷했다. 그래, 이상한 세상을 보았 고, 나루에가 불러서 그 이상한 세상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녀는 아킨에게 속박의 주문을 걸고는 말했다. 그래, 분명 말했다. "베이나트, 나루에...그 여자가 말했습니다. 가라고, 가서 그 아내의 몸 속으로 가라고, 그 아이와 함께 자라라고....! 이게 무슨 소리입니 까....?" "어디서 그런 말을 듣고 온 거냐." "어디서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분명 들었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게 대체 뭐죠? 그냥 꿈입니까, 아니면.....정말 입니까! 아니, 저는 보 름마다 짐승이 되는 겁니까, 아니면 보름이 되어 본 모습으로 돌아 가는 겁니까--!" "아키, 잊어라. 더 이상은 기억하지 마." 그러나 베이나트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을 보며 아킨은 지금 말한 것이 생각했던 것 보다 더욱 큰 일이란 것을 알아챘다. "뭔가....아시는 겁니까." "잊으라고 했다! 환상이다." "벌써 보고 들었습니다. 아신다면 솔직하게 말 해 줘요! 어서요!" 그러나 더 이상 물어 볼 수 없었다. 베이나트의 주먹이 아킨의 명치 를 강타했고, 고통을 참는 듯한 신음소리를 귓전으로 들으며 아킨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이런 젠장!" 아킨이 쓰러지자, 베이나트는 그대로 털썩 주저앉아 숨을 크게 몰아 쉬었다. 주먹이 얼얼하다. 정말 숨이 넘어갈 것 같은 것은 그였다. 그는 그렇게 몇 번을 어깨 를 들썩이며 주저앉아 있다가, 품을 거칠게 뒤져 예전에 가지고 있 던 '달의 거울' 조각을 꺼냈다. 천 조각을 펼치자, 손바닥만한 거울 조각이 나왔다. 예전의 절반 크기가 되어 있는 것은 지난번에 자켄 을 엘프의 어둠 숲으로 보낼 때 썼기 때문이다. 베이나트는 그것을 바닥에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 작은 조각이 얼굴 전체를 비추도록 하고는 두 손을 펼쳤다. 곧 거울이 눈을 깜박이듯 변하더니 골똘한 얼굴로 무언가를 지켜보 는 여자를 비추었다. 베이나트는 그녀를 불렀다. "나루에--" 나루에가 놀라 고개를 휙 둘렸고, 그의 얼굴을 발견하자 그 눈빛이 환해졌다. -칼롭! 연락하려고 했었어... 베이나트가 당장에 말을 쏟아내려는 데, 그녀가 먼저 말했다. -일전에 자크를 이곳으로 보내주어서 정말 고마웠어.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활짝 웃자, 베이나트는 욕이 튀어나오려는 것 을 간신히 참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나루에가 말했다. -이제 자크는 많이 나아졌어. 완전히 나으려면 좀 기다려야 할 테지 만, 올해 안으로 당신에게 감사 인사하러 갈 정도는 되. 그런데 참, 왜 부른 거지? 드디어 베이나트는 힘겹게 토해냈다. "대체 뭘 소환했던 거야!" -무슨 소리야? "사이러스의 아들에게 건 그 저주 말이야. 몰랐던 내가 바보 얼간이 멍청이였지! 눈이 금색이기래 그냥 늑대인간 저주인 줄 알았는데.... 이런 젠장할!" 나루에가 저 편에서 한숨을 내 쉬었다. -역시나 편견은 인간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군. 정말 전혀 몰랐던 거야? "뜬구름 헤집는 소리 집어치우고, 이것부터 물어야겠어. 대체 어디 에서 뭘 소환한 거야. 혹시 이계의 것에 손을 뻗었던 건......맞겠군. 정말 이계의 것을 가져다 놓은 건가?" 나루에가 잠시 말없이 있다가는 목소리를 낮추어 차분하게 말했다. -.....맞아. 베이나트는 당장에 주먹을 휘둘러 거울조각을 내리찍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으며 말했다. "대체 왜 그렇게 까지 한 거지? 대체 왜--!" 나루에는 피곤한지 손으로 이마를 짚고는 가만히 한숨을 내 쉬었다. 그리고 그 손을 치웠을 때, 그녀의 눈은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어. 당신은....인간이라 몰라. 그 애의 울부짖음뿐만 아 니라 그 마음이 외치는 소리까지 듣는 것이 어떤 심정인지! 그 잔혹 한 짐승을 내 손으로 죽일까? 아니, 생명수는 복수를 위해 생명을 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만약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그 일을 한 다면 모든 어둠 숲이 위험해져. 바실리카 역시 마찬가지야. 그 애에 게는 숲을 지키는 의무가 있고, 그 아이의 힘은 오로지 약탈자와 침 략자, 그리고 그녀를 해치려는 사람들에게만 쓸 수 있어! 그것은 그 아이가 검을 받으며 생명수 앞에서 맹세한 바이고. 그런 내게는 그 방법만이 최선이었고, 게다가 그에게 마지막 기회도 주었어. 아델라 를 죽인 자에게는 터무니없이 너그러운 기회를! "하지만, 나루에....당장 저주를 거두어 들여." 나루에가 눈을 흐렸다. 그러나 베이나트는 거침없이 말했다. "당장 저 저주를 불러들이고, 저 애 몸에 들러붙어 있는 그 이상한 녀석도 당장에 불러들여. 논의는 그 다음에 하자....복수고 뭐고간에 너무 위험한 짓을 했어! 나까지 떨릴 지경으로." 그러나 나루에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중에 이야기 해. 그가 흥분했기 때문이고, 나루에는 다른 것은 몰라도 흥분한 자와는 대화를 하려 하지 않는다. 그것을 잘 아는 베이나트는 숨소리를 낮 추며 말했다. "나루에, 복수를 위해 저 아이의 몸에 저주를 거는 것은 아무 소용 없는 짓이야. 나도 찢어 죽여 버리고 싶은 그 사이러스 자식은 더 이상 저 아이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으니까. 안 되면 내가 직접 죽여 주겠어! 그러니 저주 자체를 거두어 들여. 예전에 그의 아내가 살아 있고, 그 기억이 생생하던 그 때라면 모를까.....이젠 아니야. 괴로운 건 저 아이 뿐이라고." 나루에는 고민하는 듯 했다. 거울 속에서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고, 잠시 뒤 그녀가 다시 나타났을 때 그 얼굴은 사라지기 전보다 훨씬 더 고요했다. 그녀가 말했다. -알았어, 해 주겠어. 베이나트는 땅이 꺼질 정도로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그러나 나 루에가 말했다. -단, 당신에게 해 둘 말이 있었어. "뭔데?" -생명수 뿌리에 있는 '알다의 샘'에서 계시가 떴었어. "뭐?" -곧.....인간 세상이 혼란해 질 거야. 큰 하늘이 흔들리다가 무너질 테고, 땅은 산산 조각날 거야....예전에 그랬듯, 이번에도 당신 '친구 들'이 모두 모여서 이 일이 진짜 실체를 드러낼 때 어찌 할 것인지 논의해 주기를 바래. 지난번처럼 당신들이 그런 식으로 세상일에 관 여하게 되는 건.....그 누구도 바라지 않아. "그 말은 곧 팔로커스를 깨우란 말이군......좋아, 네가 아키의 저주를 풀어 준다면, 그것만 확인하고 곧장 연락하겠어. 어쨌건 해결할 일 은 해결해야 하니까." 나루에는 흐릿하게 웃었다. -잘 생각했어. 숲에서 자크도 기다리고 있으니 되도록 빨리 어둠 숲 으로 와. "그래.....좋아, 나중에 딴 소리 하기 없기다." -약속하지. 베이나트는 안도하고는 아직 쓰러져 있는 아킨을 깨우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순간, 그는 갑자기 손을 움츠리고는 막 사라지려는 나루에를 급히 불렀다. 나루에는 그 초록색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 고, 베이나트는 아킨을 한번 더 바라보고는 말했다. "나루에, '그 자가 사랑하는 아내의 뱃속에 스며들어, 그의 아이와 같이 자라거라.......' 대충 이런 말 한적 있지 않아?" 나루에의 초록색 눈이 깊은 암녹색으로 변하더니, 곧 거의 까맣게 보였다. 그 눈빛에 베이나트는 불길해졌다. "흥분하지 않을 테니 솔직히...정말 솔직히 말해 줘. 그 말....대체 무 슨 뜻이지?" 그러나 베이나트는 아무 말도 없는 나루에의 눈이 점점 차가워지는 것을 바라보며, 망연하게 한숨을 내 쉬었다. "설마.....그 아이들..... 애당초 쌍둥이가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인가?" 나루에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 여자가 아이를 가지고 있을 때 근처에도 간 적이 없어. 그 두 아이가 정말 쌍둥이인지 '아닌지'는, 직접 봐야 알 것 같아. "....아니라면?" 베이나트의 목소리가 떨린다는 것을, 나루에 역시 눈치챈 듯 했다. 그녀의 눈은 이제 그늘 안의 이끼처럼 어두운 색이 아닌, 조금 투명 한 색조로 변해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은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어. 베이나트는 눈을 감으며 가만히 한숨을 내 쉬었다. 상황은 그가 최 악이라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최악이었다. "나루에, 그렇다면.....우선 내 친구들을 만난 다음 너를 찾아가도록 하겠어. 그것이 우선일 듯 하군." -....혹시 당신 '과거'와 관련된 건가? "아마도- 하지만 더 이상 묻지는 마. 금지된 선이야." 그리고 그 말과 함께, 나루에가 더 묻기도 전에 베이나트는 거울의 빛이 휙 꺼뜨렸다. 나루에의 마지막 눈빛이 어땠을 지는 전혀 모르 겠다. 관심 가질 여력도 없었고- 그는 잠시 이마의 땀을 문질러 닦 아내고는 거울조각을 천 조각으로 싸고 품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며 속삭이자, 주변이 갑자기 물에 비친 상이 흔들리듯 변하기 시작했다. 창문 사이로 투명한 유리창이 퍼지고, 이끼 낀 돌 바닥은 푹신한 카펫이 깔린 실내로 변했다. 주변은 책들로 가득했 고, 온갖 물건들이 여기 저기 쌓여 있다. 방금 전에는 오각형이었으 나,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팔각으로 되어 있었다. 창문마다 커튼이 내려와 있었고, 오른쪽에 있는 창문만은 반쯤 커튼이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 창문이 비추는 것은 베넬리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흔한 숲과 평원, 풍성한 포도원이었다. 베이나트는 벽난로 쪽으로 손을 뻗었고, 펑! 하며 벽난로에서 불꽃 이 터져 올랐다. 빈 램프에 불이 붙으며 사방을 밝혔다. 그리고 다 시 쿠르르릉, 천둥 치는 소리가 들리자 아킨이 퍼뜩 눈을 떴다. 그 는 주변이 방금 전과 완전히 틀려진 것을 보고는, 멍하니 물었다. ".......어딥니까." "울파논의 교외에 있는 내 서재 중 하나다. 다른 것은 다 탈로스에 게 주었다만, 이곳만은 롤레인에게 물려주었었지......아키, 해 둘 말 이 있다. 지금 당장에 어딘 가로 떠나야 될 것 같구나. 하지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다. 일주일이나 이주일, 그 안에는 반드시 돌아오 겠다. 그 동안은 이곳에서 혼자 지내고 있으려무나. 반드시-" "혼자요?" 베이나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걱정하지는 않아도 된다. 주변에 마법진이 있으니, 너나 롤 레인은 오고 나갈 수 있어도, 다른 이는....비록 탈로스라 할 지라도 올 수 없다." "베이-이건 너무 갑작스럽지 않습니까. 방금 물어 본 것에 대한 답 도 없고요!" "안다. 하지만.....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버렸구나. 그래도 내가 약속 한 것은 분명히 지킬 테니, 믿고 기다려 다오. 그리고 이건 방금 네 가 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정확하게 구하고자 하는 길이기도 하단 다." 그러나 아킨의 눈에서 당혹감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또, 방금 전의 그 공포심은 여전히-아니,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더 커지 고만 있었고, 혼자 남게 된다면 그 감정은 아킨의 모든 감정과 사고 를 지배하게 될 지도 모른다. 베이나트는 안타깝다는 듯, 그리고 타 이르듯 말했다. "아키- 나를 믿을 수 없다면 나를 믿는 롤레인을 믿어 다오. 또, 절 대 너를 버리고 가지는 않겠다. 분명히 약속한다." 그렇게 말하며, 베이나트는 그를 바라보는 아킨의 눈 안에 든 것들 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 수 있었다. 의혹과 두려움, 자신에 대한 공포와 불신. 그리고 결국에는 의지할 것, 믿을 것을 찾다가 그것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면 증오와 분 노로 바뀌게 될 지도 모른다. 이 불안한 녀석을 잠시라도 놓고 가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무던 히도 들었지만 베이나트는 지체하는 것보다는 하루라도 빨리 다녀 오는 것이 좋을 듯 했다. 베이나트 자신도 지금 일어난 일들을 제대 로 확인하기 전 까지는 도저히 안심할 수 없었다. 아주 '중요한 일'이 전혀 모르는 곳에서 숨을 쉬며....마치 그림자처 럼 따라붙어 있었던 것이다. "기다려 다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러나 이렇게 말해도 불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베이나트는 간절 하게 말한 것이 절대 지켜지지 않을 때에 어떤 예감이 드는지 어렴 풋이 알고 있었고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 작가잡설: 동생이 아기 고양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생후 1개월 반. 제 발바닥 만하네요....아이고, 귀여운 것. ^^ (물론 이렇게 웃 으며 다가가면 매우 경계서린 눈초리로 바라봅니다..-_-;;) 이름은 아직 없습니다. 그래서 아직 '녀석', 내지는 '나비'라고 불 리고 있지요. 메디, 라고 부를까도 생각했지만...왠지 이름 따라 어벙벙할 것 같아 보류. 아키, 라고 불러보자 동생이 제안했지만 '아키는 남자야!' 하고 아울이 비토. 이러저러하여......아직도 나비;;; 지금 꼬맹이는 제 옷장 안에 둥지를 틀고 제 남방을 물어뜯으며 마냥 행복해 하는 군요. -_-;; 전선 물어 뜯어 대는 것 보다야 낫지만....출근 길에 옷에서 고양이 털 떼는 건 영 달갑잖은 일입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33장 ************************************************************** [겨울성의 열쇠] 제159편 주인 없는 잔#6 ************************************************************** 그날 밤에 아무런 일도 없었다면 휘안토스가 직접 신청한 그 결투 는 암롯사는 물론, 에크롯사와 델 카타롯사에서도 꽤나 오랫동안 회 자되었을 것이다. 몇 년 전 제도 토머넌트 자체도 엄청난 화제였는 데, 그 대결이 왕자와 에크롯사 기사로서 다시 시작된다 하니 다들 적극적이던 소극적이던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황제 선 출 전날이다. 형식적인 것이라 할 지라도, 새로운 것이 시작되려는 전의 은근한 불안감을 전혀 상관없는 것에 흥분하면서 해소시키고 싶어하는 것이 사람 심리다. 그러나, 결투에 대한 생각만으로 잠들었던 각 나라의 기사들이 막 일어났을 때, 그리고 연회에서의 일이 다른 나라의 왕족들과 귀족들 에게 그들 수행원들의 입으로 퍼지기도 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마저도 까맣게 잊을 만한 사건이 터졌던 것이다. 그 소식을 휴거인 황자의 시종장으로부터 가장 먼저 듣게 된 것은 황궁의 근위대장이었고, 델 카타롯사 출신인 그는 선출 위원회장이 자 전 황제의 사촌인 렌던 공작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델 카타롯사 의 공주인 칼라하스를 찾아갔다. 전 대공국의 왕족들에게 알린 것은 그로부터 두 시간이나 지난 뒤였다. 그 날은 아침 햇살이 없는 지독히 흐린 날이다. 사람들이 잠든 새, 구름들은 소리 없이 우글우글 몰려들어 온 하늘 을 덮고 햇빛을 삼켜 버리고 그림자를 드리웠다. 저녁처럼 컴컴한 가운데, 초가을 숲은 어둑한 하늘아래 술렁이고 성벽은 축축한 내음 을 풍겼다. 짙은 청회색 어둠에 잠긴 하놀리어 강은 평소의 투명함 을 잃은 채 수도에서 도망치듯 쏜살같이 흘러갔다. 제도의 시민들은 황제 선출 회의의 시작을 알리는 열 두 번의 종소리가 울려야 할 시간이 한참이 지나도 조용하게 침묵하는 황궁의 분위기에 적잖이 당황했다. 어젯밤에는 분명 온 궁이 흥청거리게 먹고 마시고 했는 데, 바로 다음날 이렇게 불꺼진 빈집처럼 보이니 당연한 것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난 휘안토스는 그런 분위기를 직접 두 눈으로 보 고 있는 중이었다. 평소처럼 일어나 거의 비슷한 시간에 달려올 마 르실리오를 기다렸지만, 한시간이 지나도 그는 오지 않았다. 어제 술도 마시지 않았고, 워낙에 엄격한 마르실리오는 평소에도 전날에 머리가 깨질 듯 마셔도 다음날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멀쩡한 얼굴로 와서는 휘안토스를 수행한다. 그런 그가 늦자, 휘안토스는 당연하게 전날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아챘다. 휘안토스는 침실을 나서 시종에게 암롯사의 기사들 중 몇몇의 이름 을 불러 휘안토스가 머무는 2층으로 오라 전했다. 시종 역시 어린 기사 지망생이었으므로, 휘안토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더 말하 지 않아도 눈치챘다. 소년은 재빨리 1층에 머무는 기사들을 모두 깨 우고 무장시킨 후 그 중 몇을 2층으로 올려 보내고, 나머지는 그 궁 의 앞뜰을 지키도록 했다. 휘안토스는 그 후에 마르실리오를 기다렸 고, 마르실리오는 오전 9시의 종이 울릴 즈음에 급히 달려왔다. 마르실리오는 뜰을 지키는 기사들을 보고는 만족한 듯한 눈빛을 보 내 기사들에게 인사를 건넨 후 서둘러 2층으로 올라갔다. 그가 나타 자마자 휘안토스가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마르실리오는 차분하게 보고를 올렸고, 휘안토스는 마르실리오로부 터 그 보고를 들은 후에 냉담하게- 그래서 약간 신경질 적으로 들 릴 만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자연사인가?" 마르실리오는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겉으로는 그저 자연사처럼 보이지만, 누가 보기에도 암살입니다. 단, 암살은 암살이되 암살의 증거가 남지 않는 암살- 즉, 시끄러워 지기 싫으면 자연사라 결론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독인가 칼인가." "독...같습니다." 휘안토스는 뭔가 짚이는 게 있었다. "베로크 황자는 어디에 있나." "......도망치셨습니다." 그 목소리만은 떨렸고, 휘안토스는 역시나 어젯밤의 일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분명 황자 베로크는 무언가를 걱정하는 눈치였고, 별 어려움이나 고난과 심지어 책임감도 별반 없이 살아 온 그 인지라 조금만 난감한 일이 닥쳐도 그렇게 당황하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 다. 그런데 어제의 그는 휘안토스가 판단하기에 적어도 당황하고 있는 것은 아닌 듯 보였다. 그는 분명 두려워하고 있었고, 그 두려움을 입 밖으로 내는 것을 더욱 두려워하면서 몸을 움츠리고 겁을 집어 먹고 있었다. '무언가'가 그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성격과 판단력을 고 려해 본다면, 어제 휘안토스가 자리를 뜨는 즉시 역시 사라졌을 가 능성이 크다. 실제로, 휘안토스는 어제 일을 해결한 후 연회장에 들 러 몇 몇 중요한 이들에게 일찍 잠자리에 들겠다는 말을 전한 후에 돌아가면서 베로크 황자를 찾았지만 그는 그곳에 없었다. 물론 그 동안 휴거인 황자는 헤로롯사의 안나마리 공주와 함께 잘 놀고 있 었다. "수색은 이루어지고 있나?" "곧 시작될 거라 합니다." 아마도 찾기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라, 휘안토스는 마르실리오에게 물었다. "네가 직접 황자의 침실까지 가 보았나?" "네." "상세히 설명해라. 하나도 남김 없이-" 마르실리오는 곧 설명을 시작했다. 몇몇은 중요한데 마르실리오가 대강 넘어가기도 했고, 어떤 것은 별반 중요하지 않은 것도 상세히 설명했다. 마르실리오의 설명이 끝나자, 휘안토스는 별 어려움 없이 판단을 마치고는 말했다. "베로크 황자는 잡기 어렵겠군." "아직 황도에서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겁니다." "아니, 벌써 황도에서 멀리 멀리 도망쳐서 라셀본 항에 도착해 배를 잡고 있을 거다.....지금 달려가 봐야 찾지도 못하겠군." 그리고 폭풍우가 칠 지 몰라 출항할 배는 별반 없을 테지만, 그래도 우격다짐으로 해서 배 한 척은 빌려 도망쳤을 것이다. 물론 로메르 드나 베넬리아 까지 가는 배를 잡기 어려웠을 테고......기껏해야 급 발로 에크롯사의 에크-마리온 항에 가는 것을 탔을 테지.......그 다음 2-3일 머물다가 로메르드의 체놀비나 롬파르로 갈 것이다. "무슨....말씀이십니까, 휘안토스 님." "마르실리오, 어제의 그는 나마저도 두려워하고 있었고, 행여나 내 가 아닐까 해서 의심하고 있기까지 했다. 또, 그러면서도 나와 이야 기하는 것을 누군가의 눈에 뜨이게 하지 않을까 조심하고 있었고..... 최대한 빨리 빠져나가려고 했었다." 그리고 휘안토스는 마르실리오를 가리켰다. "그런데 경이 나를 찾으러 왔었지. 기사끼리 시비가 붙었으니, 어서 해결하기 위해 가보라고.....나는 당연히 서둘러야 했다. 그런 다툼에 는 먼저 도착하는 쪽이 이기는 거니까. .....그런데 그 틈에 베로크 황자는 어디론 가로 사라졌어." 그렇게 말하던 휘안토스의 눈이 갑자기 빛났다. 그리고 짧은 감탄사 가 터졌다. "이런-" "휘안토스 님?" "이제 생각나는 군- 어제 시비를 걸었던 그 기사, 델 카타롯사 수행 기사들의 부대장이었다." 마르실리오는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맞습니다." "그리고....그는 공주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아도 이상할 것이 없는 기사 아닌가." 마르실리오의 눈이 커졌다. 그 역시 휘안토스가 알아챈 것을 짐작한 것이다. 휘안토스는 이마를 손가락을 툭툭 치고는 어이없다는 듯 가볍게 웃 었다. "나도 델 카타롯사의 기사들에게는 꽤나 편견이 많았나 보군. 그 정 도 되는 기사가 난동을 부리는데 당연하다고 생각했다니.....그래, 마 르실리오. 설마 제도를 폐쇄하거나 하지는 않겠지?" "그런 일을 했다간 아마, 당장에 각 나라와 연결된 국경에 군대가 밀려들 것입니다. 제도의 수도방위대장은 분명 각 나라에서 어떤 연 락이 올 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휘안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에 제도를 떠나도록 하겠다. 그리고 본국에 연락을 해, 제도가 수상하니 스무 명 이하의 기사를 골라 라셀본 항 쪽으로 보내 달라 해라.....이렇게만 전하면 나머지는 아버님께서 알아서 해 주실 것이 다. 그리고 첫 번째 편지만을 제하고는, 나머지는 모두 세루비아나 경을 통해 연락이 이루어지도록 해." "성 레기아 호에 연락해 두겠습니다." "그리고 티라 섬에도 연락 해 두도록. 그곳에서 이틀이나 사흘 정도 머물 것 같다고." 티라 섬의 성은 휘안토스에게 오래 전에 주어진 성이었고, 여름 별 궁이기도 했다. 본토와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있어 암롯사 보다는 라 셀본 항과 더 가까웠지만, 그 경관이나 좋은 기후 때문에 암롯사에 서 차지한 것이다. 또, 크지는 않지만 암롯사의 요새가 있어서 왕자 인 휘안토스는 제도로 가는 길에 그 섬에서 반드시 하룻밤 정도 머 물렀다. 라셀본 항을 떠난 다면 그곳에 들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마르실리오는 왜 그곳으로 가는 지에 대해서는 전혀 묻지 않았다. 그렇게 마지막 명령을 내리자, 휘안토스의 머리에 가득한 것은 델 카타롯사의 공주 칼라하스의 모습이었고, 그것은 결코 기분 좋은 느 낌은 아니었다. 앙큼한 고양이를 보는 듯했고, 물정 모르고 건방진 강아지를 보는 듯 했으며, 그것은 휘안토스가 가장 싫어하는 느낌 중 하나였다. 칼라하스-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지금 휘안토스라는 상대를 너무 우습게 알고 있다. 그녀가 뛰어난 건 사실이지만, 그녀의 지략이란 보통사람 상 대로는 빛을 발하나 그녀와 비슷하거나 보다 높은 기량의 사람에게 도 똑같이 적용시킨 다면 낭패를 보기 좋다. 휘안토스는 기선을 잡는 다면 최대한 이용해 보기로 했고, 그 칼라 하스 공주에게 더 이상 이런 곤혹스런 상황을 만들 기회 자체를 주 지 않기로 했다. 아니, 완전히 기를 꺾어 버리고 꿈쩍도 못하게 해 주겠다. 지배하지 못하면 죽이는 것이 암롯사의 신조지만, 휘안토스는 칼라 하스는 결코 죽이지 않고 완전히 무릎꿇게 하여 영향력 안에 두는 것이 더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칼라하스에게 손을 댄다면 칼 리토의 증오만 받게 될 가능성이 높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한 나라 를 다스리는 군주의 증오는 자존심과 연관되므로 꽤나 골치 아픈 물건이다- 휘안토스는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며 창 밖을 바라보았다. 황궁의 금 빛 지붕위로 빗줄기가 우드드 쏟아지기 시작했고, 곧 창문도 빗방울 로 점점이 가득 찬다. "오늘 저녁 중으로 출발할 수 있도록 모두 준비시켜라." 마르실리오가 나가자 휘안토스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지금 당장 출발한다면, 칼라하스가 일주일 뒤에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 지, 아주 기대가 되는 바였다. *********************************************************** 작가잡설: 저 자신이 운이 별반 좋지 않다고 생각해 왔지만....지금에 와서야 제가 실력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_- 오늘 아는 언니와 전화했는데 그 언니가 말하더군요. 늘 그렇게 긴장상태로 살지 말라고. 언제나 모든 사람들이 너를 좋아할 수 없고, 모든 일이 너를 위해 일어나지도 않으니까. 그저 너 하는 대로만 최선을 다하고, 이번일이 꼬였다고 다 포기하지 말고 언제나 '그 다음'만을 생각하라고. 물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고는 있습니다;;; p.s. 제가 좀 주인공 애를 고생시키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제가 그렇게까지 잔인한 녀석은 아니에요~~~;; 정말입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34장 ************************************************************** [겨울성의 열쇠] 제34장 약탈자 제160편 약탈자#1 *************************************************************** 불안하면 불안한 만큼 시간이 더디게 흐르는 법이다. 베이나트가 떠난 지 겨우 사흘이 지났지만, 아킨은 3년은 지낸 듯 했다. 답답하고, 답답한 만큼 시간은 느리게 지나가고, 그만큼 짊어지기 버거워지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사흘간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면 아 킨은 벌써 롤레인을 찾아갔을 테지만, 그것도 아니기에 아킨은 그 편안한 장소로 찾아가 안일하게 지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서재에 혼자 지낸 사흘 간, '기억'이 아주 분명해 지고 있었다. 예전에 탈로스의 탑에서 지낼 때, 당시 아킨은 그 단조로운 탑에서 의 생활이 주는 지루함을 서재에 있는 책을 읽으며 보냈다. 그 때 읽었던 지식들이 예전의 기억들이 되살아 나면서 거의 사라진 듯 했는데, 롤레인에게 배운 것들이 뚜렷해지면 질수록 그 당시 보던 책들에 대한 기억 역시 더불어 뚜렷해진다. 정확히 말하자면 되살아 나고 있다기보다는 '정리'되고 있는 것이다.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탈로스의 탑에서 탈출한 후, 베이나트와의 조금은 정신없는 여정을 거쳐....조금 안정이 될 만 하니 베이나트가 컬린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베이나트가 '컬린'으로 돌아가 탈로스를 상대하는 것을 막아야 했다. 그것으로 끝났다면 모를까, 그 다음에는 자켄이 다쳐 서 어둠 숲으로 돌아간 덕에 생각이 아예 '없어져' 버렸다. 자켄이 숲으로 돌아가야 할 정도로 몸이 좋지 않다는 것은, 모든 의지를 소 거시키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베이나트가 떠나기 전에 '자켄은 거의 다 나았다.' 라는 말을 전해 주었고, 돌아오면 바로 어둠 숲으로 출발하자는 말까지 남겨 두었으니 그에 대한 걱정은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어렴풋한 기대가 자리잡았다. 상황이 어렵고 답답할수록 자그마한 온기도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가운 법이다. 그래서 아킨은 그저 그것만을 생각하고, 분 명하게 답해줄 누군가가 있는 '그 문제'에 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 지 않기로 했다. 고민하고 걱정하고 두려워한다고 바뀌는 것은 아니다. 답이 희망적 인 것이라면 그 때부터 그 희망을 따라 나가면 되는 것이고, 절망적 이라면 그 때부터 절망해도 되는 것이다. 절망하기 전에 남겨진 얼 마 안 되는 시간마저 두려움에 맡겨 놓을 수만은 없었다. 주변에는 벌써 사흘간 훑어 본 책들로 가득했고, 점점 맑아지는 머 리는 책들의 도움으로 탑에 갇히기 직전까지 거의 돌아갈 수 있었 다. 수많은 마법진들을 외우고, 그리며, 간단한 것들부터 시작해서 고단위 주문들까지 되풀이해서 읊곤 한다. 그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가자, 아킨은 예전의 불안함을 차츰 지워갈 수 있었다. 이제는 정말 '아킨토스 프리엔'으로 돌아간 것 같고, 그것만도 아킨에게는 큰 안 정감을 주고 있다. 밖에서 바람소리가 들려온 것 같아, 아킨은 책을 덮고는 창 밖을 바 라보았다. 어둠이 내려오고 있었다. 하늘은 며칠 전에 내린 비 덕에 아직도 깨끗하기만 하다. 별은 재잘 거리듯 반짝이며, 그 위로 하얀 구름이 흐른다. 멀지 않은 울파논의 불빛들이 어둠 속에서 빛나고.....그 유명한 등대 울피온의 눈동자에 서는 빛이 쏘아져 나가며 수평선에 자그마하게 솟아오르는 지친 배 들을 인도한다. 내일은 롤레인을 찾아가야 할 것 같다. 그녀가 물어보면 솔직하게 말해야겠지, 그리고 그녀라면 무언가 답해 줄지도 모르지....... 아킨은 앉아 있는 안락의자에 몸을 깊이 눕혔다. 누군가를 생각하 니, 문득 지금 혼자라는 것이 더욱 분명해진다. 어둠 속에 등불 하 나를 들고는 서 있는 듯, 답답하고 두려우면서도 누군가가 오리라 기대하고있다.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자켄? 아니면.... 어디선가 자그만 방울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볼에 자그맣고 따 뜻한 입술이 닿는 것 같고, 발랄하게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유제니아- 어리석지만, 정말 부질없는데, 그래도 어렴풋이 바라기는 했다. 절대 그리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렇게 말할 자격도 없다는 것을 너 무도 잘 아는데도, 아무 것도 해 줄 수도 지켜줄 수도 없다는 것도 아는데도, 그래도 어쩌면 괜찮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렇게 아무 말도 못하고 헤어져 버려서 결국에는 낯모르는 타인보다 더 먼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은 싫다고. 모르겠다..... 루첼과 헤어져도, 켈브리안과 헤어져도, 세르네긴과 헤 어져도.....언젠가는 다시 만나고, 다시 만나면 정말 반가울 것 같고, 그들이 행복하다면 아킨도 행복해 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 상하게도, 아킨 자신과 함께 있지 않는 유제니아는 싫었다. 그녀 혼 자 어딘가에 있다는 것이, 아킨이 전혀 모르는 곳에서 전혀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하며 전혀 모르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그것이 아주 싫어졌다. 지금도 그녀가 옆에 있어주면 좋을 것 같았다. 예전에는 옆에 자켄 만 있는 것으로도 충분했는데, 이제 그 자리에 또 누군가를 채워 넣 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손을 뻗으려다가도, 결국 그 부질없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먼저 깨달아 버린다. 자신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만 큼 두려운 것이 뭐가 더 있겠는가. 잊어버리려고 하면 할수록, 좀 더 나중에 생각하자면 할수록 그 장 면만은 뚜렷하게 머릿속에 떠 오른다. 감정 자체를 보류한다 할 지 라도, 그 자체만은 계속 떠오르는 것이다. 가라, 브라달로스의 이빨, 휴로페의 핏방울, 달의 사생아여....! 그 자 가 사랑하는 아내의 뱃속에 스며들어, 그의 아이와 같이 자라거 라.....그리고 보름마다 그의 죄를 일깨워라. 그의 피를 말려 버리고, 그의 정신을 으스러뜨려 버리고, 그렇게 산채로 죽여 버려라. 그녀-달빛과 나루에의 매서운 녹색 눈동자가 공포보다는 분노로 다 가온다.... 은빛 머리, 금빛 눈동자--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또 다른 괴물. 그 것이 어쩌면 늘 이것이야 말로 진실이며 내 본모습이라 생각해왔던 '껍데기'를 찢고 세상 밖으로 튀어나온다는 것이, 그리고 지금 이렇 게 느끼고 생각하는 아킨 자체가 애당초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두려움을 넘어 '끔찍했다.' 화창한 가을날 아침, 켈브리안은 얼굴이 잔뜩 굳어 있는 슈마허의 방문을 받았다. 올해로 서른 다섯이 된 이 용병대장이 이 나라 저 나라를 전전하며 쌓은 것 중 가장 훌륭하게 가다듬은 것이 바로 눈치였고, 그것은 거 의 초능력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는 아침에 늘 그렇듯 켈브리안을 찾아 왔다가 시종장으로부터 사흘 연속으로 '공주님께서 편찮으십니 다.' 라는 답변을 들었고, 나흘째 드디어 그 시종장을 한방에 날리고 공주를 찾아온 것이다. "아, 네.....짐작이 가는 군요." 켈브리안은 한숨부터 나왔다. 1년이나 지났고, 심지어 '고난' 비슷한 것도 겪었건만, 브리올테 대 비는 조금도 나아진 것 없고 차라리 악화에 가속이 붙었을 지경이 었다. 왕족이자 한 나라 왕의 어머니라는 자부심은 지나쳐서 보는 사람 속 거북할 정도의 거만함으로 발전했으며, 그런 주제에 조금만 어려운 일이 벌어지면 당장에 대마법사인 오빠에게 응석이나 부린 다. 그럼 점에서 탈로스가 에크롯사의 최고 마스터라 다른 나라에 직접 봉사 할 수 없다는 건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렇지 않았 다면, 아마도 그 브리올테 대비는 그를 이용해 세계 정복이라도 나 섰을 것 아닌가.... "어머니는 제가 어디에 있는 줄도 모르면서, 나지도 않은 병은 어쩜 그리 잘 아시는 지 모르겠군요." "나도 그 핑계가 상당히 진부해 지고 있는 중이오. 차라리 다른 남 자가 생겼소, 사랑의 도피를 했소, 기타 등등....뭐 좀 충격 먹을 만 한 핑계를 대면 좋겠단 말이야." 켈브리안이 그런 슈마허를 쏘아보았다. "어쩜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신다운지 모르겠군요. 행여나 당신이 파혼 비슷한 이야기라도 꺼낼 지 모른다고 생각해서 그러시는 것 아닐까, 하는데요." "내 생각인데, 브리올테 대비는 그 정도로 기특한 생각을 할 인물은 아니오.....물론 당신 생각도 그렇겠지." "네. 당신 의견을 들어보고 싶군요." "그렇다면 나도 당신이 짐작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의견을 내 놓을 수밖에 없소." 켈브리안은 으흐, 하고 한숨을 내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도 이번만큼은 화를 참고 싶지 않았다. "참담하네요, 정말-!" 요 며칠 전에 제도에 파견된 대사로부터 급한 전갈이 전해졌다. 브 리올테는 그것을 받고 며칠 간 고심 좀 하는 듯 하더니, 얼마 뒤에 슈마허의 출입을 막으라는 은밀한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1년 간 잘 구워삶아 이제는 거의 그녀 편이 되어버린 감시자들은 켈브리안에 게 놀랄 만한 소식을 전해주었다. 며칠 전에 휴거인 황자가 급사하 고, 그 다음 서열을 가지고 있는 베로크 황자는 그날로 실종되었다 는 것이다. 각 나라의 사절은 즉각 본국으로 돌아갔으며, 그 자리에 는 대신 각 나라의 대사들이 눈을 날카롭게 뜨고 서로가 어떤 돌출 행동을 하지 않을까 주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비상사태도 이런 비상사태가 없었다. 5연합이 서로를 견제하는 것에 만족하며 각자의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은 옥좌가 늘 채워져 있었 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나라에서든 제도로 군화를 날린다 면, 다른 나라에서는 '반역'이라는 이유로 똘똘 뭉쳐 그 나라를 응징 할 핑계를 가지는 것이다. 그런데 옥좌가 비워지게 되는 이 상황을 잘못 해결한다면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불러일으킬 지는, 안 봐도 뻔하다. 제국이 유지되기를 바라는 것은, 사실 5연합의 왕들이다. 온 나셀을 장악한 암롯사는 누구보다도 그 제국이 유지되기를 원하며, 에크롯사의 여왕에게는 드래곤들을 국경 밖으로 내 보낼 방도가 없 고, 헤로롯사는 그 풍족함과 평화를 오래오래 누리기를 원하지 자기 네 나라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 죽는 것도, 국경 안에서 전쟁으로 누 군가가 죽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또, 카를롯사에서는 다른 나라와 의 교류가 단번에 막히게 되는 마법사들부터 반대하고 나설 것이다. 남는 것은 델 카타롯사 뿐인데, 그 나라는 암롯사가 바로 옆에서 살 기 등등 버티고 있는 이상 꿈쩍하기도 어렵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옥좌의 주인이 명목상으로나마 존재하고 있다 는 데에 기초를 둔 것이었는데, 지금 그 중요한 옥좌가 쿼크 2세의 승하 이후 처음으로 비워지게 되는 것이다. 켈브리안은 당장에 에크롯사나 베넬리아의 입장을 우려했지만, 브리 올테 대비는 그 시간에 전혀 다른 것을 고민했고 결정까지 마쳐 버 렸다. 왕좌는 이제 튼튼해졌고, 그레코 대공은 재기불능일 것이다. 그러니 이제 슈마허를 더 붙잡아 놓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 다. 그것을 시녀로부터 들었을 때, 켈브리안은 그 어이없고 경솔한 판단 에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그레코 대공을 물리치는데 가장 큰 공헌 을, 아니 압도적인 공을 세운 것이 바로 슈마허 쉐플런이었다. 그런 그를 이제는 필요 없다는 이유로 고작 1년만에 버리려는 것이다. 그 가 그런 수모를 당한다면, 좋아할 나라는 한 두 나라가 아니다. 당 장에 에크롯사로 떠날 수도 있고, 에크롯사에 힘이 실린다면 위험한 것은 로메르드 뿐이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슈마허는 꽤나 시큰둥하게 말했다. "당신이 '제게는 슈마허 뿐이에요.' 하고 울고불고 해도 소용없겠 군......안됐소. 그런 여자가 어머니라서." "헛소리 그만하고- 벌써 이렇게 당신 출입을 제한하려는 것을 보니 얼마 안 되어서 파혼할 것 같아요." "그리고, 당신은 또 어디의 누구에게 시집보낼 생각이신 것 같소?" 켈브리안은 말도 꺼내기 싫다는 듯 말했다. "누구긴 누구에요. 그 중증 시스터 콤플렉스 환자 칼리토 대공왕이 지!" 슈마허가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켰다. 어허, 어허~ "꿈도 야무지시군. 에크롯사라면 몰라도, 뭐? 델 카타롯사? 당장에 에크롯사에서 난리가 날 테고, 암롯사에서는 당신이 시집가기도 전 에 온 나셀에 상어 떼라도 풀어놓을 거요. 그런데 그게 가능할 거라 고 생각하시는 거요?" "어머니는 원래 그런 분이에요. 긍정적인 것을 조금이라도 본다면, 그 몇 배는 되는 부정적인 것을 모두 무시해 버리는 분이죠." 상황이 너무도 절망적이라 슈마허는 프르르르, 하고 한숨을 내 쉬었 다. "이렇게 둘이 손 붙잡고 어쩌면 좋아, 하는 것보다는......당장에 무엇 을 할 지부터 생각해 놓는 게 좋겠군." 켈브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슈마허는 그런 공주에게 슬쩍 말했다. "반정이라도 일으켜 보는 게 어떨까?" "아, 그건.....뭐라고요! " 그러나 슈마허의 눈빛을 보며, 켈브리안은 그것이 정말 진담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무슨 소리에요, 당신-" "헛소리는 아니오. 여태까지는 당신이 별로 원하는 것 같지 않아 참 고 있었지만, 지금 내 힘으로 당신을 왕위에 앉히는 것 정도는 쉽지 는 않아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오. 군부는 노력을 좀 기울이고 당신 이 손을 들어준다면 장악할 수 있고, 그들은 사실 대비에게 별로 우 호적이지 않소." "지금 왕은 제 동생이에요. 벌써 즉위식도 마쳤고-" "아직 결혼하지 않은 이상 그에게는 정당성이 없소. 원래는 당신이 왕이 되어야 했고, 그것은 누구나 동의하는 바요." "슈마허, 나는 더 이상 가족끼리 피를 흘리고 미워하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아요." "당신이 왕이 된다면 사이만 나빠지고 말일이지만, 대비가 이대로 나간다면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파멸하게 될 거요. 그래도 좋소?" 켈브리안은 멍하니 그런 그를 바라볼 뿐이었고, 그것이 슈마허를 더 답답하게 했다. "왕비는.....아마도 빠르면 며칠 안으로 내게 어떤 죄라도 뒤집어 씌 워서 파혼시켜 놓을 거요. 그리고, 당신은 또 왕비 소유의 귀중한 짐승이 되어 어디로 어떻게 팔리든 왕비의 뜻일 뿐이오. 그러니, 그 게 싫다면 되도록 빨리 정하시오. 당신이 어머니의 오판마저 따를 정도의 효녀는 아니라는 걸 잘 알아." "슈마허-" "켈브리안, 일주일이 지나도 당신이 우물쭈물 하면, 당장에 당신을 납치라도 해서 내가 직접 일을 쳐버릴 거요. 그 때는 당신 의견 따 위는 상관없소." 켈브리안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이건 농담이 아니오, 켈브리안. 당신은 한때 당신의 동생과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를 위해 왕이 되려 했던 사람이오. 그리고 그 때의 당 신도, 지금의 당신도! 여전히 변하지 않았고. 그러니 이번에도 확실 하게 해 주길 바라오. 다시는 그런 일 당하기 싫으면, 자신은 갇히 고....소중한 이는 빼앗겨 버리고, 결국에는 엉뚱한 사람과 억지로 결 혼하게 될 지도 모르는 그런 처지가 싫다면 차라리 잔인해져 버려." 켈브리안은 그 말에 조용히 웃었다. 속 뒤집어 지기 직전인 슈마허 는 결국 손을 내 치듯 던지고는 험악하게 뭐라 뇌까렸다. 그러나 켈 브리안은 그런 그의 손위에 손을 가져갔다. "그렇다면....이런 것 고민하기 전에, 당신의 그 귀여운 레이디부터 안전한 곳으로 보냈어야죠."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어머니는 원래 '그런 짓' 잘해요. 지난번에 당하고도 몰라요?" 이번에는 슈마허의 안색이 방금 전 보다 더 창백해졌다. 켈브리안이 말했다. "당신이 알아채셨으니 다행이에요. 되도록 빨리 보내요. 저는 파혼 과 그 아이가 거래되는 것은 싫고, 당신이 그런 처지가 되는 것은 더더욱 싫어요." "그렇다면, 내가 말한 그 제안은 어찌 되는 거요?" "그건 그 아이를 보낸 다음에 생각해 봐요." 슈마허의 얼굴이 그제야 조금 밝아졌다. "이제 좀 정신 차리는 것 같군." "오늘 저녁에 라키 경을 보낼 테니 알아서 해 줘요." 슈마허는 그 말에 놀란 눈으로 켈브리안을 바라봐야 했다. "지금 뭐라고 한 거요." "오늘 저녁이라고 했어요." 이거 아무래도 좀 이상한데, 하고 생각하는 슈마허의 눈빛이 약간 날카로워졌지만, 켈브리안은 그의 볼에 키스해 주며 그 의심을 녹여 내 버렸다. *********************************************************** 작가잡설: 고양이.....정말 귀엽군요. 저 혼자 투닥닥 뛰어다니 다가 자빠지고 넘어지고 구르고 부딪히고;; 보는 재미가 쏠쏠한 녀석입니다...... p.s 고양이와 동생녀석의 공통점 1. 스스로 하는게 거의 없다. 2. 자는 시간이 거의 비슷하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34장 *************************************************************** [겨울성의 열쇠] 제161편 약탈자#2 **************************************************************** 유제니아는 쀼루퉁하게 투덜댔다. "또 혼자 있으라고요?" "잠시면 되. 그리고 믿을 만한 사람을 붙여 줄 테니, 다음부터는 절 대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유제니아는 파란 눈을 번뜩이며 슈마허를 노려보더니, 고개를 팩 돌 렸다. 슈마허가 보니, 혀까지 쏙 내밀고는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시 하는 중이었다. "유즈으으으으~" "그렇다고 밤중에 꽁꽁 묶어다가 어디론가 보내 버리면 정말 용서 안 할 거에요." "날카로운 녀석." 슈마허가 절대 설득 못하는 두 사람이 있었으니, 그것은 유제니아와 세르네긴이었다. 둘 다, 성품이 자기들 친어머니만 닮아서 세르네긴 은 한번 옳다고 결정을 보면 아무리 어르고 달래고 구슬리고 협박 해도 절대 의지를 꺾지 않았으며, 그 판단은 현실적으로는 별반 점 수를 얻을 수는 없어도 도의적으로는 무결했으니 설득하는 슈마허 만 치사해진다. 유제니아는 정 반대다. 분명 파란 눈 반짝이며 귀엽 게 웃는 병아리 만한 소녀건만, 이리 저리 이야기하다 보면 결국 유 제니아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슈마허가 버린다. 그래서 슈 마허는 세르네긴이 말을 듣지 않으면 그저 너 하는 대로해라, 하고 포기해 버렸고, 유제니아가 말을 안 들으면 애당초 설득도 하지 않 았다. 세르네긴은 절대 막을 수 없고, 유제니아는 조금 포악한 방법 을 동원하면 시끄럽긴 하지만 해결은 된다. "그런데 대체 왜 떠나 있으라는 거에요?" "말 안 한다." "말 해 줘야 나도 조금 안심하고 떠날 거 아니에요. 그냥 느닷없이 이렇게 너 꺼져, 하고 말하면 유즈는 서운해요." "그래도 말 안 한다. 네가 할 일은, 오늘 저녁에 올 사람을 따라서 체놀비 항으로 가는 것뿐이거든." "오늘이라고요? 맙소사, 아저씨!" "어허." "자꾸 그러면 체놀비에 도착하기도 전에 도망가 버릴 거에요." "그렇다면 세냐에게 '네가 자꾸 말썽 피우니 내가 피곤하구나. 데려 가 다오.' 하고 말해야겠지. 그리고 녀석이라면 아마도 정말 당장에 달려와 너를 데려갈 테고. 녀석이 바쁘다는 건 네가 더 잘 알 테니 그 녀석 신경 쓰게 하지 말고 얌전히 가는 거다." 여기서 고분고분해지면 유제니아가 아니다. 유제니아는 당장에 입을 내밀고는 쏘아대기 시작했다. "아저씨야말로 세냐랑 한 약속을 어기고 있잖아요. 세냐가 용기사로 복귀하는 조건으로 아저씨한테 나를 맡긴 건데..." "나도 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너를 옆에 끼고 살라는 말이 아 니라, 사정이 어쩔 수 없다면 너를 다른 안전한 곳에 보내라는 말이 기도 해." "하지만 아무 것도 모르고, 전혀 모르는 사람 손잡고 여기 저기 끌 려 다니는 건 무서운 걸요. 어떤 일인지....알려 주시면 안 되요?" 네가 무서운 것이 있기는 하겠냐, 라는 생각이 간절한 슈마허였지만 그런 말해서 뒷꼬리 잡히고 싶지는 않은 슈마허는 착한 어른으로 남아 있기로 했다. "유제니아, 알면 더 무서운 것도 있다. 그리고......내가 하는 일은 네 가 나에 대해 아는 것 보다 더 위험하고 무서운 일들투성이야. 너는 어려서 잘 모를 테지만 나는 이 곳에서 꽤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떳 떳하지도 않은 일을 하고 있었단다. 그리고 여태까지는 그것이 너를 위험하게 만들지는 않았지만, 지금부터는 그렇지 않을 지도 몰라." 유제니아의 눈이 어두워졌고, 그 그림자가 왜 드리워 지는지 모를 슈마허는 아니었다. 슈마허는 유제니아의 작고 하얀 볼을 가볍게 토 닥이며 말했다. "사랑하는 유즈, 나는 너를 짐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어. 불안하다 싶으면 귀중품부터 챙겨다가 깊숙한 곳에 숨겨 놓는 법이란다. 너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귀중품이니까, 이렇게 가장 늦게 부르고 가장 먼저 보내는 거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은 없도록 하마." "아저씨가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언제나 이런 일들만 생길 것 같아 요. 아저씨는 늘 위험한 데만 골라 다니잖아요." "아니, 그렇지 않아." 유제니아는 고개를 저었다. 슈마허는 그 어깨를 부드럽게 움켜잡고 타이르며 말했다. "유즈- 그래도 그건 내 일이란다. 내가 원하는 일이고, 그 일을 하 지 않으면....그게 더 괴롭단다. 이해해 다오." 그러자 유제니아는 젖어 들어가는 눈으로 슈마허를 빤히 바라보았 다. 속 깊은 곳까지 뚫어 볼 듯한 그 투명한 눈빛에, 슈마허는 갑자 기 쑥스러워졌다. 이 꼬맹이는 늘 이렇다. "그 공주님....일이죠?" 슈마허는 답 대신 가볍게 웃었다. 유제니아는 아직도 눈썹이 흠뻑 젖는 눈으로 그런 슈마허를 보다가, 눈길을 떨구며 가여울 정도로 힘없이 말했다. "아저씨는 공주님은 다른 사람 좋아하는 데도, 그리고 아저씨도 그 걸 아주 잘 알고 있는 데도......왜 나까지 보낼 정도로 위험한 일을 하려고 하는 거죠?" 그러나, 그렇게 물어도 슈마허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어떻게 알게 된 거냐고, 사실 그런 게 아니라고 묻고도 싶었지만 상 대는 유제니아다. 슈마허는 자신이 무엇을 물어보아야 할 지 알고 있었다. "하지 말라는 말이니, 유즈?" 유제니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슈마허가 물어보기도 전에, 유제 니아는 두 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내가 하지 말라고 앙앙 울어 봐야 아저씨는 들은 척도 안 할 걸요. 그러니, 대신 어디에든 꼭꼭 숨어서 열심히 기도하고 있을 게요. 아 저씨...행복하게 해 달라고. 에칼라스 님은 내 소원을 몇 번이나 안 들어 줬으니, 이번에는 미안해서라도 들어줄 거에요." "유즈-" "그리고 서비스로 세냐에게도 비밀로 해 줄게요. 나중에 실컷 감사 해 주기-" 슈마허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녀석은 바로 옆에 유제니아가 있 는 데도 그런 위험한 일을 벌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슈마허를 무 표정한 얼굴로 골똘히 바라보며 '말없이' 화낼 것이다. 그리고 늘 그 렇듯 그것이야 발로 세상에서 제일 무섭게 화내는 얼굴이었다. 유제니아는 곧바로 준비를 시작했지만, 너무 일찍 끝나 버려 약속한 사람이 오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지겨울 지경이었다. 하나밖에 없 는 하인-그리고 거의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는-은 유제니아의 얼마 안 되는(정말 얼마 안 된다) 짐을 챙겨주었고, 슈마허는 그 짐을 처 량한 눈으로 보며 "돌아오면 옷부터 사야겠구나." 하고, 진심으로 미안해했다. 종일 얌전하게 있던 유제니아는 해가 기울고 하늘이 발그스레하게 물들자, 그제야 무언가를 내 놓았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어머니 짐이랑 아버지 짐이랑 다 정리하면서 발견했어요. 완전히 새 거인 데다가, 포장까지 되어 있어서......열어 보니 아버지나 세냐 사이즈는 아니더라고요. 아무래도 엄마가 아저 씨 주려고 만들어 놨던 것 같아요." 장갑이었다. 그리고 유제니아의 말로 미루어 보면 4년이나 지난 물 건이지만, 여전히 새 것 같았다. 아마도 슈마허가 언제 돌아올지 모 르는 사람이라, 소피아나 유제니아가 마녀 리사에게 부탁에 쓸만한 마법을 걸어 두었던 것 같다. 슈마허는 장갑을 끼워 보며 물었다. "그런데 왜 이제 주는 거냐?" "세냐가 있을 때는....세냐한테 미안해서 못 주고, 여기 와서는 아저 씨가 보여야 주든 말든 하죠. 데려다 박아 놓기만 했지, 들여다보지 도 않고......이제는 쫓아 보내려 하고." 툭 쏘아붙이는 말에, 슈마허는 유제니아를 꽉 안아 주는 것으로 달 랬다. 4년 전에 헤어질 때만 해도 번쩍 안아 들어 어깨에 얹어 놓아도 나 뭇가지 앉은 산새처럼 작았는데, 이제는 제법 커서 그렇게 해 줄 수 없다. 유제니아는 어차피 그 손으로 덩치 큰 슈마허를 안는 것은 불 가능한 지라, 그저 아기토끼가 엄마 품을 파고들 듯 슈마허의 품에 안겨 볼을 비벼댔다. 그 때 뒤에서 크흠, 흠흠--하는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슈마허 님- 모시고 왔습니다." 하인이 그렇게 전하자, 슈마허는 얼른 유제니아의 어깨를 돌려세웠 다. 유제니아는 긴장한 얼굴로 그녀를 데리러 온 여자를 바라보았 다. 짧은 갈색 머리에 키가 아주 컸고, 긴 망토에 남자처럼 차려 입은 여기사였다. 그녀는 슈마허를 아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조카분을 데리러 왔습니다, 쉐플런 경." 그런데 그 눈빛이 '조카가 맞기는 합니까?' 라는 눈치였다. "이봐, 아무리 내가 뻔뻔하다지만 이렇게 어린애에게 눈독 드릴 정 도로 철판은 아니라고." "충분히 철판이고 뻔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쉐플런 경." "......." 포기한 슈마허는 필요한 말이나 하기로 했다. "이 쪽이오, 라키 경. 인사하렴, 유제니아. 라키 경이다.....켈브리안 공주님의 호위시지." 유제니아가 신기한 것 발견한 아이처럼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분이 그......" "인사부터 해라." 슈마허는 그렇게 말하며 유제니아의 머리를 눌렀다. 유제니아는 찍소리도 못하고 허리를 직각으로 푹 꺾으며 인사해야 했다. 그리고 라키 경은 슈마허가 자신에 대해 대체 어떻게 말해 놓 았을 지 뻔했으므로, 더욱 싸늘하게 슈마허를 쏘아보았다. 유제니아 가 저 여기사의 속을 얼마나 긁어놓을 지 조용히 기대하며 슈마허 는 웃어 보였다. 라키 경은 그런 그를 다시 사납게 쏘아보더니, 유 제니아에게 어색하게나마 웃어 보였다. "어서 출발하지요, 아가씨." "어디로 가는 지 여쭤봐도 될까요?" "제 어머님 댁입니다. 혼자 사시는 분인 데다가 오랫동안 외로웠던 분이라, 쥬르 양이 간다면 아주 좋아하실 겁니다." 유제니아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 모습이 마음에 드는 라키 경도 큰언니처럼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슈마허가 말했다. "그곳이 불편하면 그냥 와도 되, 유즈." "구질구질한 독신남 보다는 잘 해 주실 겁니다." 툭 쏘아붙이는 라키 경의 말에, 슈마허는 신세지는 처지라 반격도 못했다. 유제니아가 슈마허에게 조르르 달려와 그 볼에 살짝 키스하고 는 말했다. "저....그곳에서 잘 지낼께요, 아저씨." "자꾸 세냐 녀석 부럽게 하지 말고.....어서 가렴." 그리고 슈마허는 유제니아의 입술에 살짝 키스해주었다. 놀란 유제니아는 눈을 깜빡이다가, 얼굴을 살짝 붉히더니 저택 밖으로 뛰쳐나갔다. 라키 경은 그런 슈마허를 말없이 노려 보고는('역시 그럴 줄 알았지') 인 사도 없이 나갔다. *********************************************************** 작가잡설: 가설 몇가지. 아키가 유즈를 데리고 가면 켈브리안은 슈마허와 되고 세르네긴은 휠테스 와 되면 됩니다. 이렇게 되면 모두 약간의 아쉬움과 함께 행복을 찾게 됩니다. 아키가 켈브리안 공주와 되면 세르네긴은 유즈와 해피하게 되지만 휠테스와 슈마허가 울게 됩니다. 휠테스가 아키를 덥석 물고 가 버리면 세르네긴과 슈마허는 이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게 됩니다.... 네, 어디까지나 가, 설이지요. 가, 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34장 *************************************************************** [겨울성의 열쇠] 제162편 약탈자#3 *************************************************************** 저녁이고, 이제 해가 저물어 가며 하늘은 피를 뿌린 듯 온통 붉은 색이었다. 구름은 자주빛으로 어둑어둑 물들어 있고, 건물들은 벌써 어둠에 잠겨 까맣다. 동쪽에서 어둠이 밀려나오며 서쪽을 향해 번져 나가고, 핏빛 노을은 서산으로 잠겨 들어간다. 유제니아는 마차 안에서 언제 롬파르의 선착장이 나올까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라키 경에게 물었다. "저기, 언제 도착하나요?" "금방입니다." 라키 경은 역시나 별로 좋은 대화상대가 아니었다. 뭐, 공주님 호위 니까-유제니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창에 턱을 얹었다. 호위들은 다 이렇게 말없고 시큰둥하기만 할까? 아, 생각해 보니 휘안토스 왕자 의 호위기사인 마르실리오라는 기사도 그랬다. "그런데 저기, 어머님 댁이라는 곳.....여기서 멀어요?" "체놀비에서 조금 북으로 올라가면 시실라라는 섬이 나온답니다. 조 용한 시골인데, 어머님께서는 그곳의 별장에 머물고 계십니다." "고맙습니다." "네?" "댁에 묶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요....." 그러자 라키 경이 빙그레 웃었다. "공주님께서는 쥬르 양을 아주 좋아하신답니다. 감사인사는 나중에 그분께 드리십시오." "아, 네에-" 갑자기 방금 전에 슈마허와 나눈 이야기가 생각나 볼이 화끈해졌다. 그리고 새삼 슈마허가 대단하게 생각되었다. 뒷골목 소매치기였다가 아버지가 양자로 삼아서 귀족('기사'라는 명함 하나밖에 없는 최말 단이지만)이 된 처지였지만, 온갖 전쟁터를 전전하며 공을 세워 드 디어 일국의 공주와 혼담이 오고갈 정도의 위치가 된 것이다. "처량하네요." "네?" "그냥, 아무 것도 못 하잖아요. 요렇게 귀중품 운송되듯 여기 저기 돌아다니는 것 밖에는-" "그래도 쥬르 양, 모두 쥬르 양을 생각해서 이러는 거랍니다." 참으로 진부한 답변이로다, 하고 생각하며 유제니아는 말했다. "나도 알아요. 괜히 되지도 않는 일 하겠다고 설치는 것보다는 아무 도 걱정 안 하도록 안전한 곳에 숨어 있다가 일이 다 끝나면 달려 나와 와락 안아주는 것이 몇 배는 기특한 짓이라는 것." "바로 그거랍니다. 그리고 그것만도, 얼마나 큰 힘이 되는 지 아시 리라 믿습니다." 역시나 진부한 답이다. 유제니아는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기로 했 다. 드디어 금빛 노을에 젖은 선착장이 나오자 유제니아는 고개를 반짝 들었다. 곧 마차가 멈추고, 라키 경은 누가 열어주기도 전에 직접 마차 문을 열고는 밖으로 나가 유제니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유제니 아는 고개를 젓고는 직접 마차에서 뛰어 내렸다. "몸이 아주 가볍네요." "이래 봬도 뉴마르냐 국경을 뛰어다닌 몸이라고요." 유제니아는 그렇게 말하곤 어깨를 으쓱했다. 라키 경이 말했다. "여기서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배가 약속된 장소에 있는지 알아보 고 데리러 오겠습니다." "네. 그런데 오래 걸리나요?" "별로 걸리지 않습니다. 여기 근처니까요." "네." 라키 경은 그 큰 키로 우아하게 걸어 선착장 쪽으로 갔다. 그녀의 그림자가 어둑어둑한 선착장에 묻혀 잘 보이지 않자, 유제니아는 괜 히 오싹하고 무서워져서 마차에 등을 붙였다. 초저녁이라, 선착장은 아직도 분주했다. 배들이 오고가고, 짐을 내리 고,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소리지르고 답하며 짐들을 옮긴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사람들 중에 있어도 유제니아는 외로웠다. 또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간다는 것이, 슈마허도 세르네긴도 없는 곳으로 간다는 것이, 그것이 울적하게 느껴졌다. 아무리 좋은 사람들이 있 어도, 그 두 사람이 곁에 없으면 옆에 천명이 있든 만 명이 있든 이 렇게나 외롭다. 그래도 그 땐 아키가 있었는데- 그 생각이 나니, 또 우울해진다. 아킨이 떠난 것은 그날 새벽이었다. 유제니아와는 그날 저녁에 헤어 지는 것으로 끝났고, 다음날 새벽 죠세피나 여왕과 마라 공, 그리고 켈브리안에게만 작별 인사를 하고는 떠났다. 언젠가는 헤어질 거라 는 건 알았는데, 정작 그렇게 아킨이 떠나니 유제니아는 정말 서운 해졌다. 마지막 인사 정도는 하고 떠날 줄 알았는데, 결국 귀한 분 들에게만 인사하고 떠나 버린 것이다. 그래, 뭐....아키도 왕이니 여왕이니 하는 분들들과 마찬가지로 정말 귀한 몸 아닌가. 예전에 부하들 잔뜩 끌고 와서는 유제니아를 '천한 것' 취급하던 휘안토스의 친동생인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 유제니아 란 아이는 어쩌다가 도움을 받은 귀여운 시골 소녀, 그 이상도 이하 도 아닐 거다..... 정말 다시 만날 수는 있을지, 그것부터 의심스럽다. 찾으러 오는 건 기대도 하지 않지만, 적어도 우연히라도 한번 만나길 기대하는 것도 과욕일까- 유제니아는 무엇이든 바라보고 있고 싶어져, 사람들이 모인 선착장 쪽을 보았다. 벌써 어둠이 꽤 가라앉아 있어 그곳의 사람들은 검은 덩어리처럼 보였다. 드디어 불이 탕탕 켜졌다. 배들의 꼭대기에, 가 로등에, 사람들이 든 램프에 불들이 차례차례 들어오며 금빛, 붉은 빛, 하얀빛들이 사방에서 터지며 조금씩 밝아졌다. 마차에도 불이 들어왔다. 유제니아는 그 불빛을 한번보고, 마부가 손짓을 하자 고 개를 저었다. 어둠이 오고 있다. 붉은 노을은 이제 정말 빨갛게 되어 서쪽끄트머 리에만 남아 있고, 하늘은 검푸른 어둠에 흠뻑 젖어 들고 있었다. 벌써 떠 있는 반달이 더욱 하얗게 빛나기 시작하고, 자그만 별들이 눈 깜빡이듯 반짝였다. 이제 라키 경이 올까, 해서 유제니아는 고개 를 내리고 사람들 무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빛과 어둠이 선명하게 서로를 밀쳐내고 침범하는 그곳에서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했다. 어? 유제니아는 눈을 크게 뜨고 그 뒷모습을 살펴보았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유제니아를 등지고는 옆에 있는 누군가에 게 말하고, 그러다 무엇이 불만인지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때 누군가가 킨 램프 불이 번쩍이며 그의 얼굴을 잠시 비추었다가는 뒤로 사라졌다. 유제니아는 혹시 잘못 본 건 아닐까 해서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마부가 그녀를 불렀다. "어디 가시는 겁니까, 아가씨?" "아, 저기....아는 얼굴을 발견했어요. 그 분이 오시면 금방 오겠다고 전해 주세요." 그렇게 말하고는 유제니아는 뛰쳐나가듯 달렸다. 혹시, 정말 혹시-- 아니, 잘못 본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봤자 손해 볼 것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 뒷모습과, 빛에 드러난 얼굴 은 분명--아니, 확실하다. 잘못 볼 리 없다. 그렇게 닮은 사람이 또 있을 리 없고, 그것도 이곳에 있을 리 없다. 유제니아는 선착장 쪽으로 달려갔다. 소년이 있는 곳은 사람들이 많 은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었고, 가까이 갈수록 어둠이 더욱 진하 게 몰려왔다. 갑자기 멈추어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 가가 돌이킬 수 없게 될 것만 같은, 너무 멀리 와 아무도 없는 곳에 서 있는 아이의 두려움 같은 것이 느껴진다. 그러나 여기까지 왔으 니 그저 기분이 이상하다는 이유만으로 돌아간다면 내내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확인만 하면 된다, 전혀 다른 사람이면 그냥 고개 꾸벅 숙이고 돌아가면 되는 것이고, 정말 맞는 다면 너무나 기 쁠 것 같았다. 결국 유제니아는 잠시 멈추었던 발걸음을 더 빨리 했다. 어둠이 더욱 까맣게 내려앉고, 멀리 등을 킨 배가 하나 지나가며 선 착장까지 빛이 스며들고 강물이 반짝였다. 그리고, 그 빛에 앞에서 등을 돌리고 옆의 남자와 무언가 이야기하는 소년의 윤곽이 더 뚜 렷해진다. 그가 고개를 살짝 틀었고, 유제니아는 주춤했다. 그가 드 디어 유제니아를 발견했다. 어디선가 터진 빛이 환하게 주변을 밝혔 고, 소년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유제니아는 뒤로 주춤 물러났다. 소년의 머리카락이 검은 색인 것은 어둠 탓이 아니고, 끔찍하게 차 가운 눈빛 역시 어둠 탓이 아니다. 다시는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차가운 어둠, 그것이 그 끝에 생생하게 서 있었다. "휘안토스...?" 그냥 고약한 꿈일 뿐이라 생각했던 그것이, 다시 실체를 가지고 서 있는 것이다. "너......" 소년의 그 눈이 더욱 차갑게 빛났고, 그 앞에 서 있던 키 큰 남자가 후드를 벗고는 유제니아 쪽으로 손을 뻗었다. 비명을 지를 정신도 없었다. 너무나 두려워, 유제니아는 파랗게 질 린 얼굴을 돌리고 눈을 질끈 감았고 그의 손을 벗어난 것은 조그만 행운이었을 뿐이었다. 남자의 손끝이 어깨에 닿자, 그제야 유제니아 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서 남자의 정강이를 후려 차고는 뒤돌 아 달리기 시작했다. "읏-" 맙소사, 난 몰라! 유제니아는 사람들을 헤치고, 밀치고, 밀리고, 그러며 어둠 속으로 달아났다. 낯선 사람들, 풍겨오는 물비린내, 그리고 외치고 답하고, 그것들이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진다. 헐떡이는 숨과 쿵쿵 뛰어오르는 심장소리만이 들릴 뿐, 그리고 그렇게 달린 유제니아는 겨우 어둡고 빈 골목을 찾아 숨었다. 벽에 등을 기대며, 주변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제야 다리의 힘이 풀렸다. 라키 경이 찾을 텐데, 어서 그곳으로 가서 배 를 타고 도망쳐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소년, 휘안토스가 왜 이곳에 있는 지는 잘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고, 그 를 만난 것 자체가 그저 환각이라 생각하고 싶다. 그냥 깜빡 잠이 들었던 것이다, 이곳은 마차 안이다. 아니, 마차 안도 아니다- 그냥 뉴마르냐의 집에 누워 있는 것이고, 이상한 꿈을 아주 오래 꾸고 있 는 거야- 어둠 속에 유제니아가 숨을 헐떡이는 소리만이 크게 들려왔다. 그리 고 그것도 곧 가라앉고, 심장만 쿵쿵거린다. 유제니아는 손을 모아 가슴을 꾹 움켜쥐었다. 어둠이 더 진해졌고, 무거워지고, 차가워진 다. 사람들 소리가 아주 멀리서 어렴풋하게 들려오는 듯 했다. 이제 나가도 될 것 같다고 생각하며 유제니아는 등을 뗐고, 그제야 그곳 에 숨은 사람이 유제니아 혼자만이 아니란 것을 알아챘다. 그 쪽도 바라지 않았을 것 같았고, 유제니아도 별반 바란 것이 아니 었다. "누구...." 어둠 속에서 상대의 겁먹은 눈동자가 반짝였고, 그 숨소리가 들려왔 다. 모르는 척 하려고 했지만, 벌써 눈이 마주쳤다. "쉿-" 상대가 그렇게 말했고, 유제니아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못한 채 눈만 크게 뜨고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고요가 밀려들어왔다. 숨 헐떡이는 소리가 조용히 잦아들었고, 그 소리마저도 고른 숨소리로 바뀌자 유제니아는 몸을 숙였다. 갈 생각이었다. 이대로 돌아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렇게 잊어버리면 모두 끝날 것 같았다. 남자도 안도한 듯 뒤돌아 서 어둠 속으로 스며들 듯 조용히 멀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고요한 안도에 가라앉는 순간 침묵과 어둠이 갈가 리 찢기는 듯 엄청난 소리가 터졌다. 컹컹--! 개 짖는 소리였다. 정 신을 찢어 놓을 듯 했고, 혼절할 듯 끔찍하게 귀와 머리와 온 몸을 흔들고 찢고 위협했다. 컹컹, 컹--! "끼악--!" 도망치려 온 몸이 꽁꽁 묶인 듯 꿈쩍도 할 수 없었다. 아니, 몸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얼어붙어 버렸다. 지옥으로 들어가는 것만 같았 고, 모든 것이 끔찍하고 두렵기만 했다. 정신을 놓아 버리고, 그대로 미쳐버릴 듯하다. 어디선가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울부짖음이 터지는 것 같고, 통곡하고 저주하며 외치는 듯 하다. 그리고 그 모 든 것이 유제니아의 영혼을 통과하고, 그것마저 끌어들이려고 하는 듯 하다.. 순간 가슴에 호된 통증이 밀려왔다. "읏-!" 끔찍한 것들이 산산조각 나며, 악몽에서 확 깨어나듯 깨끗하게 걷혔 다. 명치에 닿아있던 주먹이 치워지고, 단단한 팔이 쓰러지는 유제니아 를 휘감듯 받쳤다. 갑자기 모든 것이 캄캄해지고, 유제니아는 끊어 진 의식과 함께 공포마저 잃어 버렸다. "휘안토스 님!" "조용." 휘안토스의 날카로운 말에, 그의 이름을 불렀던 마르실리오는 자신 의 실수에 아차하며 입을 다물었다. 휘안토스는 어둠속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분을 모시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마르실리오가 어둠 속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뒤 마른 몸집의 사내 하나를 질질 끌고 나왔다. 휘안소트는 그저 넋을 잃고 있을 거라고 만 생각했지만, 별로 정신이 강하지는 못한 그 남자에게는 완전히 기절해 버릴 만한 일이었던 것이다. 희미하게 스며든 달빛에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얇았던 얼굴은 단 며칠의 도피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더욱 무섭도록 수척해져 있었고, 옷차림도 머리도 엉망이었다. 휘안토스는 가볍게 한숨을 내 쉬고는 마르실리오에게 명했다. "수고 좀 해 줘야겠다. 모시고 배까지 가라." 마르실리오는 남자를 부축하듯 세웠다. 기사인 데다가 키도 커서, 그렇게 남자를 드는 데는 별 무리가 없었다. "어쩌실 생각입니까." "배로 모셔라." 마르실리오가 고개를 저었다. "그 소녀 말입니다." 휘안토스는 팔 안에 쓰러져 있는 소녀, 유제니아를 내려다보았다. 긴 머리카락이 뒤로 쏟아져 발치까지 닿았고, 축축한 얼굴과 희미한 호흡은 가슴을 향하고 있었다. 얼굴빛은 방금 전에 그녀에게 쏟아져 내렸던 공포에 창백해져 있었다. 마르실리오가 말했다. "죽이실 생각입니까?" "물론." 휘안토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유제니아의 몸을 안아 들었다. 마르실 리오가 칼자루에 손을 가져가자, 휘안토스는 고개를 저었다. "근방에 이 아이의 보호자가 있을 테니, 일단 데리고 간다. 그런 일 을 하는 데는 바다 위가 더 편하니까." "알겠습니다." 마르실리오는 당연하다는 듯 그렇게 답하고는, 팔에 든 남자를 당겨 몸을 세우고는 선착장 쪽으로 갔다. 휘안토스는 그를 바로 따라가지 않고 잠시 어둠 속에서 기다리다가, 얼마 뒤에 마르실리오가 빈손으 로 오자 그에게 유제니아를 넘겼다. "바로 티라 섬으로 떠나자." 휘안토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곧장 선착장으로 향했다. 마르실리오가 유제니아를 안아 들고는 그를 따라 갔다. *********************************************************** 작가잡설: 이제나 저제나 백조 공주님 오실날만 기다리던 우리의 용사, 유즈......그러나 확 나타나 용사님 발목을 덜커덕 잡은 것은 흑조공주 휘안토스....-_-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34장 ************************************************************** [겨울성의 열쇠] 제163편 약탈자#4 *************************************************************** 달빛과 별빛이 어둠에 젖은 바다위로 쏟아졌다. 바람은 고요했고, 바다 아래를 흐르는 해류와 파도는 편안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 위 를 가르는 암롯사의 배는 제비처럼 빠르게 바다를 가르고 있었다. 돛은 불룩하게 부풀어올라 있고, 그 뒤로는 긴 거품이 하얗게 늘어 졌다. 달빛이 그 위로 미끄러지고, 별들은 그 긴 거품위로 흐를 뿐 이었다. 고요한 가운데, 그 물소리만 물이 쏟아지듯 차르르--차르르 르- 들릴 뿐이다. 휘안토스가 사이러스에게 연락을 보낸 후 제도를 떠난 것은 대략 일 주일 전이었다.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쏟아지는 폭우를 뚫고 출항했고, 티라 섬 에 잠깐 정박하여 원래 가지고 있던 레기아 호보다 작은 배로 갈아 타고 롬파르로 향했다. 당연히 롬파르에는 정체를 숨기고 정박했고, 그곳에서 휘안토스는 어렵잖게 베로크 황자가 그곳에서 머물고 있 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거기까지는 휘안토스도 마르실리오도 나서지 않았으나, 베로크 황자를 찾는데는 그 이상의 진척이 없었다. 마법 사인 세루비아나는 사람 찾는 마법에는 별 재주가 없었고, 케올레스 와 가장 빠르게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이유로 그녀를 택해 데 리고 왔던 휘안토스는 별로 실망하지 않았다. 아니, 애당초 휘안토 스는 자신이 나서야 할 것도 계산하고 나온 것이었다. 최대한 빨리, 그래서 되도록 누구의 눈에도 뜨이지 않도록 하여 황자를 데리고 와야 한다. 즉, 암롯사가 베로크 황자를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 롯사와 그 외의 측근들 외에는 전혀 모르도록 해야 하며, 그것이 바 로 휘안토스가 티라 섬을 고른 이유였다. 2-3일 머무는 것은 별로 눈에 뜨이는 일이 아니었고, 실제 제도에서의 일에 주시하며 암롯사 로 돌아갈 길도 빠른 곳은 티라 섬이기도 했으니 그곳에서 며칠 머 무는 것은 의심을 사는 일은 아니었다. 달이 수평선에 걸릴 때 즈음에 마법사 세루비아나가 휘안토스에게 베르크 황자가 깨어났다는 것을 전해왔다. 그러나 정작 휘안토스가 찾아가니, 베로크 황자는 눈만 뜨고 있을 뿐 아직도 겁에 질려 있었 다. 온 몸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고, 슬쩍 이마에 손을 가져가 보니 돌처럼 차갑고 딱딱했다. "황자전하-" 그렇게 불러 봤지만, 그 눈초리를 보니 전혀 사람 말을 알아듣는 것 같지 않았다. 세루비아나가 말했다. "내일 아침은 되어야 제정신이 되실 듯 합니다." 휘안토스는 그의 멍한 눈과,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을 보고는 별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아직 여유가 있으니 천천히 물어 보는 게 좋겠지." 그리고 이렇게 거칠게 잡아 왔으니, 너무 서두르다 보면 오히려 베 로크 황자가 함구해 버릴 수도 있다. 그가 함구한다고 휘안토스로서 는 협박할 수도 없다. 안심하고 믿게 하고, 그리고 사실 암롯사로서 는 그가 절대 무사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만 편안히 해 드려라." 명령이 끝나기 무섭게 세루비아나가 황자의 이마에 손을 얹고는 몇 마디 주문을 외웠다. 황자의 얼굴에 핏기가 돌고 뻣뻣했던 표정이 편안해졌다. 그리고 잠시 뒤 그는 눈을 감고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 다. "내일 아침이면 될 것입니다." "수고했다. 오늘밤은 푹 쉬고, 배의 조정도 멈추어라. 그리고 티라 섬에 도착할 때까지는 편히 쉬도록." 세루비아나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 역시 아주 피곤했지만, 빨리 티라 섬에 닿아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섬에 도착할 때까지는 쉬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휘안토스는 가볍게 웃으며 그런 그녀에게 말했다. "대신 내일은 두 배로 속도를 내 주면 좋겠다." "물론입니다, 휘안토스 님." 휘안토스는 만족한 얼굴로 베로크 황자가 머무는 선실을 나가, 그를 위해 마련된 배의 가장 크고 넓으면서도 편안한 선실로 찾아갔다. 선실 문 앞에는 마르실리오가 지키고 있었고, 그가 들어가려 하자 약간 당황한 듯 말했다. "곧 데리고 나오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잠시 마르실리오는 휘안토스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상당히 놀란 눈초리였지만, 휘안토스는 웃는 것으로 답했다. "알아 볼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물론. 좀 걸릴 것 같으니 경은 쉬어." 마르실리오의 눈은 별로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런 그에게, 휘안 토스는 분명하게 말했다. "이건 내 '개인 적인' 일이다. 상관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 짧은 말과 함께 마르실리오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납득을 한 것 이고, 그가 나서거나 충고를 하지 말아야 할 영역으로 이 일을 밀어 넣은 것이다. 휘안토스는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 램프는 꺼져 있고, 캄캄한 어둠 만이 방안에 꽉 들이차 있었다. 불을 키자, 그리 넓지 않은 방이 빛 에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아버지인 사이러스가 쓰던 곳이니 넓지는 않더라도 아주 편안한 곳이라는 건 분명했다. 휘안토스는 모자를 벗고는 램프의 불을 켰다. 주인이 들어오자 깨어 난 그의 매가 횃대 위를 서성이며 그를 반겼다. 그리고 뒤에서 뒤척 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내 그녀가 기절해 있을 줄 알았던 휘안토 스는 침대 쪽을 돌아보았고, 곧 놀란 눈과 마주쳤다. 베로크 황자처 럼 눈을 뜨고는 있어도 역시나 정신이 없을까, 했던 휘안토스는 그 녀가 뒤로 후닥닥 물러나자 오히려 감탄했다. 그리고 새삼 베로크가 존경스러워졌다. 어린 여자아이도 벌써 이렇게 멀쩡한데, 나이도 많 은 사람이 왜 그 모양인가. "어디에요?" "내 침실." 소녀-유제니아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 표정에 휘안토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 배는 그리 넓지 않고, 여자애가 편히 잘 곳은 이 방과 다른 방 뿐이다. 설마, 배 창고에서 자고 싶은 건 아니겠지." 유제니아는 벌써 침대모서리를 넘고 있었다. 차라리 창고가 났다는 뜻이다. 휘안토스가 말했다. "내 침대 위가 싫다면 방구석에서 자도 좋다. 그리고 충고하는데, 이곳은 내 배 위고 네가 어디로 어떻게 가든 간에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굴지 마." 유제니아가 풀썩 주저앉았다. 얼굴은 더욱 해쓱해져 있었고, 예전에 하멜버그에 있을 때 그에게 붙들렸을 때보다 더 겁을 집어먹고 있 었다. "왜.....데리고 온 거죠?" "내 얼굴을 봤으니까." 상황을 대강 파악한 듯 유제니아가 질린 눈으로 휘안토스를 바라보 았다. "설마....죽이거나 해서 입다물게 하는 건 아니겠.....지....요...?" "여자 애 하나 말 듣게 하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유제니아는 잔뜩 긴장한 눈초리로 휘안토스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 얼굴을 바라보며 휘안토스가 말했다. "유감스럽게도 너는 세르네긴 포틀러스의 동생이더군. 아무리 내가 암롯사의 왕자라지만, 그래도 용기사의 증오를 사는 짓은 자청하고 싶지 않다. 보내줄 때가 되면 보내줄 테니 그 점에 있어서는 안심해 도 좋다." 그렇게 말하자 유제니아의 얼굴 위로 자부심이 옅게 깔렸다. 그러나 그 표정이 휘안토스는 별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쨌든, 네가 너 스스로 자해라도 하지 않는 한, 이곳에서 다칠 일 은 없을 거다. 그것은 분명히 약속해주지." 유제니아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런 휘안토스를 바라보았다. 그것이 정말이면 다행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정작 믿고 안심할 수는 없다는 듯.....휘안토스는 피곤하다는 듯 말했다.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 지 짐작이 되는데, 너는 엉뚱한 짓을 하고 싶을 정도로 예쁘지 않아." "아하, 정말 고맙군요." 말은 그렇게 쏘아붙였지만 그래도 유제니아는 안도한 듯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작은 한숨과 함께, 몸의 모든 긴장이 산산이 흩어지는 듯 그렇게 늘어진다. 그러다가 얼른 어깨를 추스르더니 말했다. "어디 있으면 되요?" "무슨......" "내내 이 침대 위에 있을 수는 없잖아요." 유제니아는 완전히 긴장이 풀어져서는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이가 없어서 휘안토스는 웃으며 말했다. "주의 하나 시켜줄까?" 유제니아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방금 전처럼 팽팽 하게 긴장해 있는 것은 아니라, 그저 무슨 농담이라도 하려나-- 그 렇게만 생각하고 있다. "다음부터는......남자와 단 둘이 있을 때는 절대 긴장을 풀지 마." 조금 시시하다는 듯 유제니아가 핏 웃었다. 휘안토스는 여전히 미소 짓는 얼굴로 말했다. "분명 풀지 말라고 했어." "네?" 휘안토스는 허리를 숙여 유제니아에게 다가갔다. 갑작스레 '남자'가 가까이 오자 유제니아는 창백해졌고, 어깨를 움켜쥐는 그의 손을 떨 치려 했지만 휘안토스의 손은 가벼우면서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완 전히 겁에 질린 유제니아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놔요!" 유제니아는 힘껏 휘안토스를 밀어냈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몸을 뒤틀어 빠져나가려 해도, 휘안토스의 손은 먹이를 움켜쥔 듯 놓아주 지 않았다. 강한 거부의 비명과, 놀란 짐승 같은 다급한 울부짖음이 터졌다. "놓으라니까........제발!" 그런 유제니아를 보며 휘안토스는 잠시 어찌할까 생각했다. 웃으며 '장난이다.' 라고 물러날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그러면 당장 에 펄펄 뛰면서 악쓰듯 뭐라 외치고는 뺨이라도 후려 칠 지도 모르 고, 행여나 다시 올까봐 구석으로 도망쳐 버릴 지도 모르고, 손에 잡히는 나이프라도 세우며 다시는 근처도 오지 말라고 외칠 지도 모른다- 그러나 휘안토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사냥감은 그의 손안에 있고, 이렇게 작고 약한데- 전혀 서두를 필요 가 없다. 막을 사람도 없고, 이 아이를 구하러 달려올 사람 역시 없 다. 그리고 그럴 이들이 달려왔을 때는, 모든 것이 끝난 뒤일 테 지...... 밤은 길다. 세상은 어둡고, 침묵하고, 외면한다. 아무리 정결한 기사인 들, 그리 고 위대한 은빛 드래곤의 깨끗한 믿음과 애정을 받는 자 인 들, 이 어둠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수정의 심장, 가장 고결하게 지키고 싶어하는 것, 귀중하고 소중한 것...그것이 이 앞에서 부서지고 더렵혀지고 짓밟혀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이 다. 지배할 수 없으면 죽이고, 죽일 수도 없으면 산채로 파괴해 버리면 되는 것이다. 이 소녀가 아닌, 바로 이 소녀를 지키는 세르네긴....그를. 정결한 기사- 스스로 더렵혀지지 않게 자신을 지킬 수 있을 정도로 강한 기사- 그렇다, 수정 같은 남자였다. 어지간한 것으로는 흠집내 기도 어려운 그런 남자 말이다. 물론 예전에 그를 미워하거나 질투한 적은 없었다. 늘 이기고만 살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런 것에 집착하는 것은 어린아이 같은 짓이다. 세르네긴이 언짢은 것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이유였으 며, 그것은 휘안토스 자신의 자존심과도 관련된 일이었다. 차가운 투명함, 그 흠 없는 정결함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자가 휘 안토스를 향해 당연히 가지게 되는 감정, 바로 '경멸'이 휘안토스에 게 끝없는 모멸감을 선사했다. 다른 이라면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지만, 그의 예리한 성품에는 살 이 따끔해진다. 부서지지 않는 한, 마주치면 언제나 내 살을 찌를 그 날카롭고 차가운 칼날에는 무심할 수 없다- 그것이 싫다, 아주- 정말 그 심장에 칼을 박아 넣고 비틀어 버리고 싶어진다. 비명이 잦아들고, 울부짖음이 숨죽인 흐느낌이 되어갔다. 손끝에는 공포에 뻣뻣하게 굳은 몸과 땀에 젖은 맨살이 닿고, 공포에 굳고 절 망에 지친 소녀의 팔목에는 더 이상 힘이 없었다. 작은 몸은 떨리고 있었고, 활기 넘치던 푸른 눈동자는 흠뻑 젖어 있다. 작은 새 같다.... 그냥 움켜쥐면 죽어 버릴 작고 연약한 새- 그런데 그 작은 날개로 세차게 퍼덕이며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하는 그런 새..... 그리고 지금은 막 사냥되려는 순간, 바로 앞에 매의 발톱을 앞에 놓고 있으면서도 필사적인 그런 새였다. 비명을 터뜨릴 줄 알았지만 고통에 짓눌린 신음을 흘렸을 뿐이고, 한참이나 뒤에야 그 모든 것이 어그러져 숨죽인 흐느낌의 덩어리가 되었다. 공포에 충격이 더해지고, 그 충격은 절망에 빨려 들어간다.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나자 휘안토스는 그 젖은 이마에 키스해 주었 다. 품안의 작은 몸이 몸서리친다. 그리고 그 모습이 휘안토스는 충 분히 만족하게 했다. *********************************************************** 작가잡설: 이제 휘안에 관한 한 포기하겠습니다.......포기합니 다...........;;; 이제 실컷 미워하십시오... 이제부터 2-3 주정도 쉴 예정입니다. 주말에 이사도 가야하고, 짐 정리하고 이래저래 하다 보면 1주 정도는 정신없을 것 같더군요. 물 론 포장이사 같은 거 안 합니다. 돈 없습니다. 동생과 제가 100% 알아서 해야 합니다.....(게다가 동생은 있으나 마나한 인력. -_-;;;) 그리고 나머지 1주일은.......제가 좀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읽고 감동 받아서.....라고 말하면 농담이고요(마르크 스 사위가 쓴 책이라죠? 헛헛;;), 남자친구라도 생겼냐면 그거야말로 해피할 일이지만 역시나 그럴 일은 없습니다. 슬럼프? 아닙니다....아 울은 슬럼프가 와도 그냥 밀고 나가버리는 무대포 일중독증 환자입 니다..... 그저 말 그대로 당분간 좀 쉴 예정입니다. --; 하필 여기서 끊어 놓 고 룰루 랄라 놀러가냐! 하실 분 많은 줄로 사료되나........챕터가 여 기서 끝난 걸 어쩝니까;;; (에헴, 에헴.....;;) p.s 무작정 쉰다는 건 아니고.......쉬는 동안 비축분은 잘 쌓여나갈 겁니다. ^^;;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35장 ***************************************************************** [겨울성의 열쇠] 제35장 늑대 사냥 제164편 늑대 사냥#1 **************************************************************** "--!" 아킨은 엄청난 악몽에서 깨어났다. 손에 걸린 책들이 책상 밑으로 와르르 쏟아지고, 램프도 바닥에 부딪 혀 와장창 깨져버렸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도 않았고, 비틀 비틀 일어나다가 결국 다시 주저앉아 버렸다. 내 뿜는 숨소리는 성 난 사자처럼 거칠어졌고, 악문 이가 뿌득 맞물리다 결국 울부짖음 을 토해냈다. 분노, 혐오, 그리고 증오에 머리 속이 깨지기라도 하는 듯 욱신거린 다. 피가 탄다. 내장이 뒤집히고, 속에 있는 모든 것이 거꾸로 솟구친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에 다시 무언가가 쓰러지고 와장창 깨졌다. 그러 나 분노에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덜덜 떨리는 잇새에서 다시 으르렁거림이 스며 나왔고, 이대로 짐승이 되어 그냥 미쳐버리고 잊어버리고 싶었다. 지금 보고 느낀 것이, 사실 그저 지독한 악 몽이었을 뿐이라고 우기고 싶어진다..... 그렇다. 정말 그럴 리가 없 지 않은가--! 유제니아는 지금 에크롯사에 있을 테고, 휘안토스는 당연히 암롯사에 있다. 게다가 휘안토스가 유제니아같은 아이에게 관심을 둘 리도 없지 않은가. 아킨은 서재의 책꽂이에 등을 기댔다. 언제 다쳤는지 손에서 피가 뚝 뚝 흐르고 있었지만 고통은커녕 남의 팔인 듯 감각조차 없다. 숨 몰아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킨 자신이 내 쉬는 소리건만, 어디 어둠 속에 숨은 짐승이 헐떡이는 것 같다. 안에서 심장이 튀어나오 기라도 할 듯 벌떡대고, 쿵쿵 소리가 귀에까지 들려온다. 아킨은 피 에 젖은 손을 꾹 움켜쥐었다. 그제야 뜨끔한 고통이 쿡 치밀 듯 느껴지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소리마저도 선명하게 들린다. 램프가 모두 깨져 서재는 컴컴한 어둠 속이었다. 창밖에는 풍만한 달 이 빛나고, 그 달빛은 서재 로 은은하게 스며들어 어둠을 흐릿하게 밝혔다. 아킨은 벽에 등을 기대고 한참이나 숨을 몰아쉬다가 비틀 비틀 일어 났다. 머리에 피가 몰려 아무 생각도 안 났지만, 단 하나--당장 달려가야 한다는 것, 어디로 가야 할지조차 모르지만 그것만은 분 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굶주린 짐승이 먹을 것을 찾듯, 갈증에 말라죽어 가는 새가 샘을 찾듯, 그렇게 '확인해야 한다.' 라는 생각 만이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돌뿐이다.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계속 맴 돌기는 하지만, 그것이 속에 숨은 커다란 불안의 그림자를 지 워주지 않았다. 모든 것이 다 산산조각 나 깊고 컴컴한 계곡으로 흩어지고, 그 까만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져 버린다. 온 몸을 지배하는 것은 분 노와, 그리고 당장에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불안뿐이다. 아킨은 피에 젖은 손은 대충 닦고 아무 천으로 들쳐 맸다. 상처에서 계속 피가 스며 나와 천을 적셨다. 가야 해.... 그런데 어떻게 가야 하는지 도무지 알 도리가 없자 갑자 기 막막해졌다. 순간에 아킨은 자신이 혐오스러워졌다. 갑자기 막 막해지는 자신이, 그토록 답답하고 치 떨릴 수 없었다. 지금은 혼자다. 누가 도와줄 수도 없고, 도와주러 와 줄 수도 없으며, 마냥 기다리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되고 말 것이다. 그러니 아키, 잘 생각해 봐-- 날뛰는 건 집어치우고 우선 생각해. 무엇을 어떻게 할 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그리고 어떤 방 법이 있는지, 하루라도 지체하지 마. 그것이 정말이라면, 하루 지체하 는 것에도 아마도 평생 후회하고 말 테니까. 심장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발작이라도 일으키듯 쿵쿵대던 심장 이, 이제 작은 발자국 소리만큼이나 잦아들고 숨소리도 이제는 완 전히 가라앉았다. 푸릇한 달빛이 아킨의 피 젖은 손에 맺히고, 머 리카락 속으로 스며들고, 땀에 젖은 볼을 매만진다. 그리고 아킨은 상처를 맨 천을 꽉 죄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휘안토스는 몸을 뚫고 지나가는 날카로운 감각에 문득 불쾌해졌다. 분명하지는 않지만, 속에 든 무언가가 끓어오르듯 찬찬히 분노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불쾌한 것은 그것이 마치 휘안토스 자신 안에 있는 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런 느낌을 가질 리도 없고 가질 수도 없는데, 그것이 '느껴진다. 유 령이라도 있는 건가,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다. 불을 끄지 않아 방안은 훤했다. 자주 빛 매가 날카롭게 끽끽대며 푸 드덕댄다. 그리고 턱 밑에서는 심장이 뛰어 오르고 있었다. 그 주 인이 놀라고 겁먹어 있어 심장은 터질 듯 빠르게 뛰어 오르고 있었고 , 이마 부근에 닿는 숨소리도 헐떡이듯 숨죽이듯 그렇게 거칠게 떨린다.... 휘안토스는 몸을 일으켰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휘안토스의 팔을 세게 후려쳤다. 갑작스런 공격에 휘안토스는 무의식적으로 팔을 당 겼고, 그에게 잡혀 있던 소녀는 드디어 그 손에서 빠져나갔다. 순간 램프가 와장창 깨지며 방안이 눈을 감은 듯 확 어두워졌다. 캄 캄한 어둠이 방안에 가득 찼고,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방안의 윤 곽이 어슴푸레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잠자코 앉아 있 던 휘안토스는 저 편에서 그를 노려보는 눈동자를 발견했다. 벽에 몸을 잔뜩 밀어붙이고 있었고, 두 팔로 하얗게 드러난 상반신을 가 리고 있었다. 분노와 증오, 그리고 참담함과 공포에 질려 거칠게 헐떡이고 있었고,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더니 결국 털썩 주저앉아 버린다. 휘안토스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소녀는 놀란 고양이처럼 도망치려 했 지만, 휘안토스는 그녀가 채 움직이기도 전에 그 팔목을 잡았다. "놔-!" 소녀가 버둥대다가, 그 팔목을 물어뜯으려 했다. 휘안토스는 그녀의 양팔을 잡아 벽에 짓눌렀다. 지쳐있던 몸에서 금방 힘이 빠져나갔 지만, 그래도 가느다란 팔에만은 힘이 꽉 들어가 있었고 어둠 속에서 도 소녀의 분노에 찬 눈동자는 뚜렷했다. 체념하면서도, 그러면서 도 마지막 자존심인 듯 입술을 꾹 물고는 휘안토스를 노려보고 있 는 것이다. "죽여 버릴 거야...." "그리고? 죽이고 죽을 생각인가." 소녀는 아무 말도 없었고 단지 손안에 틀어 잡힌 손목에서 마저도 힘 이 빠졌을 뿐이다. 그래도 휘안토스는 손의 힘을 풀지 않았다. "아무리 밉더라도 그래도 살아서 미워하는 게 낫다, 유제니아." 이름이 불리고, 유제니아는 다시 확 밀려드는 공포에 눈을 감았다. 어떻게든 휘안토스의 손길도, 몸도 피하고 싶었지만 소용없었다. 그 저 큰 짐승의 발에 꽉 짓눌린 작은 짐승처럼 버둥대며 울부짖다가 찢기고 삼켜지고 그렇게 먹혀 버리는 것이다. 어떻게 이 한 순간에, 이리도 끔찍한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을까..... 눈물이 나왔다. 수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제발 도 와달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이 어둠 속에서 누가 그것을 듣고 와 줄까- 그저, 그대로 그 손안에 떨어져 그가 하는 대로 당하는 수밖에 없었 다. 결국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제발 빨리 끝나게 해 달라고 속으로 간절히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엉망으로 뒤엉키고 짓밟히는 속에서, 유제니아를 지배하는 것 은 오로지 공포와 증오뿐이었다. 그리고 그 증오는 지금 그녀를 집 어삼킨 이 약탈자를 향한 것뿐만 아니라, 바로 유제니아 자신을 향 한 것이기도 했다. 상대를 향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결국 그 증오가 집어삼키는 것은 그의 손에 잡힌 자신이고, 빼앗긴 자신이 고, 힘없이 약탈당한 자신이었다..... 어둠은 그녀를 외면하며 침묵했고, 조용한 세상은 아무도 들여다보지 도 않았다. 유제니아를 가두어 손아귀에 움켜진 이 휘안토스 만이, 지금 유제니아에 허락된 이 좁고 컴컴한 세상을 지배하는 왕이자 절대자이며 약탈자였다. 아키...이래서 그를 두려워 한 거구나. 이래서--- 이렇게 아무렇지 도 않게, 이리도 차가운 눈빛으로 원한다면 얼마든지 파괴하고 짓 밟고 태연하게 가져가서, 그렇게 그가 빼앗고 부수는 것을 지키지도 막지도 못해서....그래서 친형인데도 그렇게나 두려워했구나.... 유제니아는 울음을 삼키며 말했다. "놔 줘요."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 "그리고?" "....그냥.....놔 달란 말이야!" 어둠 속에서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그의 손이 얼굴에 닿았다. 유제 니아는 어둠 속에서 몸을 확 움츠렸다. 휘안토스는 그저 귀여운 병아리를 가지고 놀듯 웃으며 말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돌려 보내주지. 일이 끝나고, 네가 나를 만났다는 사실이 전혀 문제되지 않을 정도의 시간이 지난다면.....그래, 일주 일이나 길어야 이주일 이면 충분하다." 어디로든 피하고 싶은데 얼어붙어 꿈쩍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손이 볼을 툭툭 치고는 아래로 내려갔다. 행여나 다른 곳에 손 을 댈까 해서 소름이 쭉 끼쳤지만, 그는 더 이상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돌아가서 네 의붓오빠에게 하소연해도 상관없다. 네가 숨기 려 해도 언젠가는 알게 되고....하지만 유제니아, 아무리 용기사라도 정말 '죽을 각오'로 덤비지 않는 한 나를 어찌할 수는 없다. 그건 분명히 알아 둬." 유제니아는 더 할말이 없었다. 다시 눈물이 흐를 줄 알았지만, 치솟 는 증오에 그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끔찍한 자식- 차갑고 끔찍한 뱀 같은 자식--! 그렇게 울분에 찬 외 침만 가슴속에서 터지고, 그보다 더한 절망이 몸을 덮어 짓눌렀다. 그리고 지금의 그녀는 그 이상으로는 아무것도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그저, 너무나 비참하고 끔찍해서 소리 없는 흐느낌만 터질 뿐이다. **************************************************************** 작가잡설: 당한 건 당한겁니다. --;; (아하하하;;;) 사실 2 주만 쉴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컴이 나가는 바람에 일주일 더 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3주나 되니 상황이 좀;; 그렇게 되었군요. (차라리 두 편 더 올리고 쉴 것을. -_-;;) 하지만 이것이 불필요한 상황;; 일 리는 없잖습니까. -_- 제가 뭐 18금 작가도 아니고, 이런 장면 '쓸데없이' 넣는 것은 아울 본인도 별로 안 좋아합니다. 그렇다면 대체 왜? 왜? 왜! 휘안은 저런 짓을 했을까? 저는 글 앞머리나 뒷머리에 '이럴 의도로 이렇게 썼다~'하고 붙이는 거 별반 선호하지 않습니다. 글을 쓰는 것은 작가본인이지만, 하나의 텍스트에는 수 만 가지의 해석이 가능합니다. '몽테크리스토 백작' 도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죄짓지 말자' 라는 훌륭한 교훈이 담긴 책이 될 수 있으며, 복수극의 모든 요소들이 낱낱이 들어간 당대의 대중소설일 수도 있으며, 므흐흐한 성향의 사람에게는 에드몽과 막시밀리앙의 러브 스토리 일수도 있는 법입니다(;;;;). 어찌 해석을 하고 무엇을 받아들이든, 그것은 읽는 분 모두의 고유권 한이며 그것의 방향을 일일이 잡아주는 것은 작가의 월권입니다. 책을 읽고 이야기를 듣는 데 있어서 그 어떤 정답도 없습니다. 스스 로 무언가를 선택하여 받아들이는 데 있어 1번 정답 3, 2번 정답 1, 하는 식으로 착착 주어지는 정답은 기대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어떤 식으로 해석되든 어쩔 수 없습니다...-_-;; 원하는 대로 해석해 주신다면야 좋은 일이지만, 그렇지 않다 하더 라도 그 것 역시 읽는 분의 권리일 뿐입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35장 ****************************************************************** [겨울성의 열쇠] 제165편 늑대 사냥#2 ****************************************************************** 다음 날, 베로크 황자의 상태는 한결 나아져 있었다. 겁에 질려 덜덜 떨어대며 혼절하던 것에 비하면, 지금은 여전히 창백 하기는 했으나 눈빛도 정상이며 지금 어디에 있는 지도 알고 있었다. 거의 새벽에 가까운 시간에 그를 찾아온 휘안토스는 우선 검을 풀어 마르실리오에게 건네준 후 그를 내보냈다. 둘만 남게 되자 베로크 황자의 눈에 가득한 긴장도 조금 풀렸다. "어디로 가는 거요." "티라 성입니다." 사나운 군대가 와글대는 암롯사가 아닌, 평화로우면서도 제도와 가까 운 곳으로 간다 하자 베로크 황자는 완전히 안심했다. "내가 그 곳으로 도망친 것은 대체 어떻게 알았소." "조금만 생각하면 될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다급하게 도망치신 이 유는 전혀 모릅니다." 베로크 황자의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손수건으로 얼굴에 맺힌 땀을 닦기 시작했다. 휘안토스는 그런 그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그 리고 그가 답답한 듯 셔츠 단추를 푸르고 있을 때, 느닷없이 물었다. "델 카타에 대체 무엇이 있는 겁니까?" 베로크 황자의 손이 멈추더니, 곧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얼굴은 더욱 창백해지고, 금방이라도 기절할 듯 몸이 뻣뻣해졌다. 휘안토스가 말했다. "델 카타롯사와 암롯사는 별로 사이가 좋지 못합니다. 그리고 델 카 타롯사에 유리한 일이 암롯사에 좋을 리 없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델 카타롯사로부터 위협을 받고 계시다면, 저에게 털어놓는 것이 가 장 현명할 것입니다." 베로크 황자의 눈이 크게 흔들렸지만 그렇다고 안심하지도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연합의 그 어떤 왕족도 믿지 못하오." "저 역시 당장 저를 믿으라고 설득하지는 않겠습니다." "그거 참 현명하군." 빈정대는 말투였지만, 그 말투에서 휘안토스는 이 베로크가 안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믿는 데가 있어야 빈정대며 여유를 부리는 법이니까. "휴거인 전하께서 돌아가신 것은 알고 계십니까?" "물론이오." "그러나 확인하고 떠나신 것은 아니겠지요?" 힘겹게 베로크가 답했다. "물....론이오. 그래도 그가 위험하다는 건 짐작했고.....그가 죽으면 당 연히 황위를 물려받을 나 역시 위험하다 생각했던 것뿐이오. 최대한 빨리 도망치는 게 좋을 거라 생각했지." 역시나 짐작하던 바였다. 그리고 이렇게 털어놓는 것으로 보아, 베로 크 황자는 휘안토스와 그 뒤의 암롯사를 믿기로 작정한 듯 했다. 물론 델 카타롯사를 적으로 판단한다면, 암롯사는 당연히 아군이 되 는 것이다. 델 카타롯사의 기사 쪽에서 그렇게 느닷없이 소란을 일 으킨 것도 휘안토스가 베로크 황자 옆에서 무언가 이야기를 하려 하자 행여나 그가 휘안토스에게 사실을 털어 놓을까봐 델 카타롯사 쪽에서 서두른 결과였다. "하지만 베로크 전하께서 없다 해도, 델 카타롯사의 칼리토가 황제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 어떤 나라도 칼리토의 즉위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칼리토가 아닌 다른 황족들에게 기회가 가 게 됩니다." "양위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제위가 비어 있을 때는 양위할 황제도 없는 것입니다." "채워져 있다면 어쩌겠소?" "황족이 없습니다." "있다면?"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휘안토스는 이야기가 쉽게 풀려나가는 데 안심했다. 행여나 겁먹고 답답하게 굴어댈까 걱정했는데, 휴거인에 비해 이 베로크는 담대하 지는 못해도 상황파악만은 예리하다. 물론 그 정도 되는 판단력이 있으니 휴거인처럼 죽지 않고 롬파르까지 도망칠 수 있었던 것이지만- "선황 폐하께는 자식이 없는 것이 아니오." "황자 둘 황녀 하나가 있었지요." 셋 모두 황제보다 일찍 죽어 버렸고, 황후는 네 번째 아이까지 유산 하자 곧바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황제 역시 별로 건강한 편은 아니어서, 아내가 죽자 얼마 뒤에 가벼운 폐렴을 얻더니 그것이 악 화되어 양위를 밝히고 후계자들 후보들을 정하자 마자 곧장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리고 그 덕에 방계인 베로크와 휴거인에게도 기회가 간 것이다. 칼리토에게도 기회가 있기는 했지만, 이미 델 카타롯사 의 왕인 그에게 황위를 주자고 주장할 나라는 결단코 없다. 베로크 황자가 말했다. "황제께는 황후 소생이 아닌 황자가 있소." "시실리온과 필리나에 대한 이야기라면 그만 두지요." "나도 시실리온이 라레스나에게 심취한 수도승이고, 필리나가 계율을 깨고 여제가 되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정도로 얌전한 소녀라는 건 알고 있소. 하지만 황제는 이렇게 알려진 자식 말고도 아들이 하나 더 있고, 그 아이는.....좀 처치 곤란이었소." "그건 처음 듣는 군요." "당시 그 아이 어머니는 황족에게 주어지는 연금으로 만족할 여자가 아니었소. 그 때문에, 황후는 그 여자와 아이를 어디로든 멀리 보 내려고 했고 마침 델 카타롯사로 보낸 거지. 게다가 그곳에는 황녀 가 왕비로 가 있으니 모양새가 나쁘지도 않았고. 여자는 그곳에서 세상을 떴고, 아이는 황녀의 손에서 자랐소." "황녀가 폐비가 되었을 때는?" "그건 잘 모르겠소.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 아이가 어떻게 컸는지 전혀 모르고 있소. 요 며칠 전에 그 아이를 다시 만나게 된 것뿐이지." 휘안토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과 휴거인 전하가 없다면, 그 아이를.....물론 저보다 나이가 많 겠지만, 어쨌건 그 사생아를 황자로 입적시켜 제위를 물려받게 할 수 있겠군요." "물론이오. 어쨌건 당신네들이야, 정말 아들인지 아닌지는 별반 중요 한 일이 아닐 테지. 그저, 제위만 채워진다면 누가 앉아 있든 무슨 상관이겠소. 내가 하겠다고 나서면, 좋다구나 하고 찬성표를 던 지고는 제 나라로 급히 돌아가고는 잊어버릴 것 아니오." "하지만 황제라는 것이 그렇게 별 볼일 없는 자리라는 것을, 칼리토 가 모를 리가 없는데요." 베로크는 휘안토스의 의도를 어렵잖게 짐작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의 말대로, 현재 황제의 위란 친한 사람이 되든 모르는 사람이 되든 그저 채워지기만 하면 되는 자리요. 이렇게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자리를 일부러 친한 사람으로 채우기 위해 황족을 죽이는 짓 을 하는 것은 바보짓이지. 하지만 '양위'의 경우에는 문제가 아주 틀려지게 되오." 휘안토스의 눈길이 흥미를 발하자, 베로크는 만족했다. "쿼크 대제 이후, 그 어떤 황제도 멀쩡할 때 양위를 한 적은 없소. 모 두 제위기간을 채우고 죽거나, 양위 의사를 밝힐 때 즈음에는 본인이 제대로 버틸 여력조차 없는 경우뿐이었지. 그 때문에 그렇게 의 도적인 양위의 경우에는 그 누구도 대비하지 않았을 것이오." "즉, 그 사생아를 제위에 올려놓은 후, 그 황제가 칼리토에게 양위하 는 방식으로 일을 진행하려 했다--이 말이군요." "물론이오." 휘안토스는 여전히 미심쩍다는 듯 그런 베로크를 보며 말했다. "하지만 새로운 황제가 칼리토에게 양위를 할 거란 보장도 없지 않습 니까. 지나치게 안일한 신뢰에 바탕을 두고 있군요." "당신 같은 사람에게야 그리 보일 테지. 하지만 나는 그가 분명 양위 를 할거라 확신할 수 있고, 동시에 그가 칼리토를 얼마나 신뢰하는 지도 알고, 선출로 뽑히는 황제자리를 얼마나 경멸하는 지도 알고 있소." "....마법사 로군요." 휘안토스의 말에 베로크 황자의 얼굴이 확 굳었다. 휘안토스는 빙그 레 웃고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며 외쳤다. "마르실리오, 세루비아나 경을 불러 와라--!" 당황한 베로크가 말했다. "왕자, 아직 말이 다 끝나지 않았소. 내 안전에 대해서는......" "전하의 안전은 저희 암롯사는 물론이요 모든 제국의 나라들이 보장 할 것입니다. 또, 델 카타롯사에서 더 이상 전하께 위해를 가하지 못하도록 조처하겠습니다. 암롯사의 안전과도 관련된 일이니."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오! 마법사라고 다 같은 마법사가 아니 란 말이오." "믿고 기다리십시오. 그리고 아무리 강한 마법사라 한 들, 결국 그 나 라에 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라의 안전이 흔들리고 개인의 양보와 국가간의 전쟁이 양쪽 저울에 있다면 개인의 양보를 택해야 하는 겁니다." 그러나 베로크 황자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휘안토스가 상황 을 제대로 판단하고 있는 지 그것조차 의심하고 있는 판이었다. 곧 세루비아나가 달려왔고, 휘안토스는 그녀에게 명령했다. "아버님께 연락해다오. 베로크 황자 전하의 신병을 확보했으니, 생각 하시는 바대로 하시라고." "알겠습니다." 베로크 황자가 대체 무슨 생각이냐고 물으려 하다가 휘안토스의 차분 한 얼굴을 보고는 관두었다. 그리고 휘안토스의 아버지, '사이러스'의 이름이 나왔다는 것 하나가 그를 안심하게 했다. "정말 무모하게 나오는 군. 믿는 구석이라도 있다는 건가." 티라 섬으로부터의 보고를 받은 사이러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케올레스가 그 답게 현명한 답을 내 놓았다. "지금 상황이 꽤 불합리하고 답답하다 생각할만한 나이지 않습니까." "또한, 그 변화를 자기 손으로 얼마든지 이룰 수 있다고 착각할 수 있는 나이이기도 하고-" 그렇게 말하곤 사이러스는 큭-웃었다. "나를 정말 우습게 보는 군.....아무리 나이 좀 먹었다지만, 적어도 그 런 애송이를 상대하지 못할 정도는 아닌데 말이다." 아내를 잃고 거의 은거하다시피 살아온 그였으나, 암롯사의 해안을 위협하던 툴칸 해군을 격파해 나셀 해 아래로 가라앉힌 것이 10년도 되지 않았다. 또한, 그의 옆에는 칼리토만큼이나 젊은 아들까지 있 고 칼리토와는 달리 누군가를 죽이거나 경계할 필요도 없는 유일한 후계자이다. 그러나 델 카타의 경우, 제대로 진압하기는커녕 해군 기지까지 점령 당할 정도로 속수무책이었던 마르세 해협의 해적들은 젊은 슈마허 쉐플런의 힘으로 소탕했고, 팔론드 왕국군의 침공군도 그의 힘이었다 . 팔론드가 내분에 휩싸였던 것은 델 카타롯사의 운이었으며, 당시 그 팔론드로 갔던 슈마허 쉐플런이 친 델 카타 정권에 고용된 것 역시 운이었다. 슈마허 쉐플런이 떠난 후 델 카타롯사는 왕위 계 승분쟁에 휩싸였고, 결국 또 한번 깊은 상처를 입고 말았다. 그런 나라에서 이런 큰일을 벌이려 하니, 사이러스는 차라리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아니, 이렇게 당장에 들킬 줄 몰랐던 것이겠지. 적어도 몇 년 간 착 실히 준비 한 후에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할 생각이었던 거야....." 몇 년 뒤라면, 아마도 휘안토스가 왕이 되어 있을 것이다. 아무리 재 능 있는 소년으로 불린다지만 휘안토스는 겨우 20대 초반인 데다가 정권 초기일 테지만, 스물아홉인 칼리토는 그 즈음에는 벌써 왕권 이 안정되어 있을 테고 남자로서 꽤 무르익은 나이가 되어 있을 것이 다. 암롯사가 위험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타격정도는 받 을 것이다. 헤로롯사는 애당초 상대가 되지도 않을 것이며, 에크롯사 는 국경 밖으로 군대를 마음대로 움직일 만한 여건이 되지 못한다 . 카를롯사가 남지만, 그곳은 암롯사와 너무 멀다. "회의를 소집하며, 미리 하실론 요새로 연락해라. 모든 군을 전시대비 체제로, 함대는 모두 바다로 집결시키고, 포구는 델 카타롯사로 향 하도록 하며-" 사이러스는 간략히 덧붙였다. ".....모든 탑에 왕기를 올리도록 하라." 왕기- 즉, 왕의 친정을 말하는 것이다. **************************************************************** 작가잡설: 후우~ 굉이가 두 마리가 되었습니다. -_-;; 샴인데.....정말, 정말, 정말! 미 소년입니다. 애교 만땅에, 몸매는 늘씬 탄탄.....게다가 순진해 뵈는 파란 눈은 정말 아득해 질 정도입니다~ 문제라면 역시나 지나치게 활달하다는 것과 질투가 장난 아니라는 걸 까요. -_-;; 가엾은 세니는 장난감도 다 뺏기고, 저랑 동생이 세니 이뻐 할라치면 새로 온 녀석이 휘리릭 달려와서 세니 밀쳐내고는 자기가 그 자리에 앉습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35장 ***************************************************************** [겨울성의 열쇠] 제166편 늑대 사냥#3 ***************************************************************** 암롯사의 움직임은 로메르드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아니, 워낙에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어서 거의 눈치도 못 채고 있었으며 롬파르 궁궐의 브리올테는 그런 깊은 정보를 얻을 만큼 주의 깊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유감스럽게도 슈마허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것은 그가 이용하는 길 자체의 문제 덕이자 그가 처한 더 급한 문제 때문 이기도 했다. 암롯사 쪽의 정보통과 길을 터놓기는 했으나, 그 쪽은 대체 무슨 일 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려오지 못했다. 그저 휘안토스가 제도 에서 물러나 티라 섬으로 갔다는 것 정도뿐인 데다가, 그것이 겨우 사흘 전의 일이라 슈마허는 정확한 의미를 부여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그럴 만한 여력도 별반 없었다. 그는 롬파르 안에서 두 가지 일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고, 둘 다 그의 어깨를 으깨버릴 정도로 무거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성급하게 날뛰거나 당황해서 중요 한 순간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냉정했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래 도 다행이라 안심하고 그를 믿을 테지만, 그를 오래 알고 지내왔던 그렉이나, 세르네긴은 그런 상태의 그가 얼마나 위험한 지 잘 안다. 당황해서 허둥댄다는 것이 아니라, 여유를 부릴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철저하게 잔인해지기 때문이다. 체놀비를 떠나려던 라키 경이 '체포'된 것은 그녀가 떠난 그 당일이 었다. 그녀는 휴가를 받아 어머님을 찾아가는 길이었다고 밝혔지만, 이유도 없이 호위대의 기사를 체포한 것도 기가 막힐 노릇인데 그 당연한 말을 듣고도 근위대는 그녀를 풀어주지 않았다. 고초를 당 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자존심 높은 기사를 지하 감옥에 며칠이나 이유 없이 감금해 두는 것은 충분히 상식 없는 짓이었다. 밖에 있는 슈마허는 브리올테 대비가 무언가 알고 있거나 하려는 일 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켈브 리안 마저 그녀를 찾아갈 수 없으니, 무슨 이유로 라키 경이 갇혀 있 는 지는 정확히 알 도리가 없다. 게다가 끌려온 것은 라키 경뿐이 었고 유제니아는 없었다. 어디로 갔는지, 유제니아만 사라진 것이 고 그것은 슈마허에게 나라 하나 뒤집히는 일만큼이나 중요한 일이었다. 슈마허는 사흘이 지나도 아무 차도가 없자, 결국 직접 켈브리안 공주 를 찾아가기로 했다. 그러나 그가 궁에서 만난 이는 시종이 아닌 대비의 호위기사였고, 그 옆에는 대비의 시녀인 발라 부인이 기다리 고 있었다. 그녀는 예전의 얌전한 모습은 간데없이 오만하고 당당 한 모습으로 마치 하인이라도 부리듯 슈마허에게 말했다. "대비전하께서 경을 뵙고자 하십니다." "공주를 만나러 왔는데." "당연히 대비전하가 먼저 아닌가요." 뺨을 갈겨 주고 싶은 것을 참으며 슈마허는 그녀를 따랐고, 역시나 대비는 정식 알현실이 아닌 그녀의 객실에서 슈마허를 맞이했다. 브리올테는 예전에는 통통했지만, 지금은 그 반으로 말라 있었다. 무 언가에 쓰인 것 같다, 라는 공주의 평대로 브리올테는 그날 밤 이 후로 완전히 달라져 있고, 지금도 다르다. 혐오스러울 정도로. "오랜만이네요, 슈마허 경. 요즘 딸아이와는 잘 지내시나요?" 인사와 상투적인 몇 가지 안부가 끝나자마자 브리올테가 그렇게 물었 다. "늘 그렇지요......조금 기다리면 결혼을 해도 될 정도로 사이가 좋아 질 것 같습니다만." 그 퉁명스런 말에 대비는 비웃는 듯한 웃음을 보냈다. 아직도 상황 파악 못하느냐는 듯한 그 보기 싫은 미소에, 슈마허는 요 며칠간에 받았던 압박을 단번에 폭발시켜 버릴 뻔했다. 브리올테가 말했다. "경은 그 아이를 좋아하시죠?" "공주님은 아주 좋은 분입니다." 브리올테 대비는 턱을 들고는 그렇게 답하는 슈마허를 살펴보더니, 다시 빙그레 웃었다. "그렇다면....그 아이에게 당신 보다 더 좋은 혼처가 생긴 다면, 그 아 이의 행복을 위해 양보해 주실 수 있겠군요." "아, 툴칸 황제가 청혼해 왔나 보군요. 그래, 몇 번째 마누라로 데려 가겠다고 말하더이까?" 그 비꼬는 말에 브리올테의 얼굴이 발끈했다. "당신 정말!" "무례에 무례로 답해 드린 것뿐입니다." "당신과 내가 같은 위치인가요! 나는 이곳 왕의 어머니이고, 당신은 고작 용병 대장일뿐인데!" "그렇다면 제발 부탁이니 걸맞은 우아한 자태를 보여 주십시오. 예의 지키지 말라 해도 바닥에 엎드려 길 테니." 브리올테의 손이 꿈틀 움직였지만, 차마 뺨을 갈기지는 못하고 주먹 을 꾹 움켜쥐었을 뿐이었다. 슈마허가 말했다. "이리 저리 돌려서 말하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예의 차리 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저 놀리려고 그러는 것이라면 더더욱 싫고. 그러니, 전하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파혼해 달라는 말이 아닙니까." 브리올테가 그런 그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달라는 말이 아니에요. 당신에게 파혼해 달라고 애걸할 생각 없어. 내가 하겠다면 하는 거예요!" "그렇게 일방적으로 사람 뺨치듯 일을 처리한다면 하신다면, 다음 혼 처에서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그렇게 배짱부리지 말아요. 그 쪽에서는 아주 호의적으로 우리들에 게 말했고, 어떤 식으로 파혼을 하든 괜찮다고 말했으니까." "칼리토 폐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이 말입니까?" 그렇게 노골적인 말에 브리올테 대비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슈마허는 웃음을 터뜨렸고, 브리올테의 얼굴은 이번에는 모멸로 붉게 물들 었다. "당신....그렇게 여유 부릴 처지가 아니지 않아요?" "지킬 정도의 힘은 있습니다. 물론 델 카타롯사의 왕이 저보다 나은 신랑감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지만, 켈브리안 님과의 결혼가능성은 제가 더 높을 듯 합니다." 브리올테가 대번에 날카롭게 대꾸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암롯사에서 가만히 지켜 볼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 말이 나오자 브리올테의 얼굴에 다시 자신만만한 표정이 떠올랐 다. "그건 상관없어요. 델 카타롯사가 그리 나온다면, 당연히 암롯사 쪽에 서도 우리에게 같은 제안을 하지 않겠나요?" "뭐요?" "그 쪽에도 올해 열여덟 살 된 왕자가 있잖습니까." 슈마허는 그 말에 차라리 가엾을 지경이었다. 브리올테 대비야 자신 만만하지만, 사이러스는 델 카타롯사와 함께 공주를 구걸하기보다는 중무장할 함대를 나셀에 풀어놓는 것을 택할 위인이다. 그의 거래 방식은 협박이며, 협박은 그가 그 동안 행해온 일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기에 상대는 당연히 겁부터 먹는다. 험악한 사람하나가 앞에 칼 들고 있으면 품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별반 없듯, 그가 협박 으로 나온다면 협상이고 뭐고 다 끝이다. 그리고 그런 그를 단순히 저울의 양끝 중 하나에 얹어 놓고 다른 상대를 저울질한다는 건 브리올테가 아니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델 카타롯사에서 제안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당장에 '공주는 이미 약혼한 몸이라서 어쩔 수 없다.' 라는 답변을 보낼 것이다. 슈마허는 예전부터 그녀에 대해 기대는커녕 아주 부정적인 판단을 내 려놓고 있었다. 그러니 여전히 이렇게 상황파악 못하는 어이없는 상대를 앞에 놓고 설득하는 시간낭비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로메르드가 위험해 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으니 점잖게 말했다. "어쨌건 저는 파혼할 생각은 없습니다. 정 안 되겠다면, 그냥 제 마음 대로 결혼해 버리는 수도 있습니다." 브리올테가 그를 쏘아보았다. "지금 누구를 잡아 왔는지 알면서도 그러시나요?" 순간에 슈마허는 가슴을 쿡 찔린 듯 했다. 작은 유제니아는 끌려가지 않았다고 분명히 들었는데-행여나 해서 그는 말했다. ".....별로 자랑하실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자랑할 일은 분명 아니에요. 아, 그리고.....슈마허, 댁에 아가씨 한 분이 있었지요?" 슈마허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그는 눈에 뜨이게 내색하지는 않았고, 그것이 브리올테를 다급하게 했다. 브리올테가 기대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다급해지면 허둥대고, 허둥대면 경솔한 언사도 나 가 버리는 것이 브리올테였다. 예전이라면 조심했을 테지만, 1년간 모든 일이 그녀 뜻대로 풀려 그녀는 이미 예전의 감각과 조심성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린 여자애가 험한 꼴을 당하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면, 조심하라는 말이에요." "험한....꼴이라뇨." 브리올테는 알아서 생각하라는 듯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오해를 불러일으키며 얼마나 엄청난 분노를 불 러일으키는 지도 몰랐다. 그저, 슈마허의 눈빛이 약간 흔들리는 것 을 보며 자기가 이겼다 생각하며 턱을 들었을 뿐이다. 슈마허가 조용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전하, 그 아이 신상에 어떤 일이 생기든......그것이 다 전하 께서 하는 일이라 생각하면 되는 겁니까?" "그렇게 까지 생각하실 필요 없이, 그저 경고라고 생각하세요." 그 순간에 슈마허는 입장도 태도도 모두 뒤집어엎어 버렸다. 얄미워 도 같은 편과 '적'은 그 근본부터 틀리며, 슈마허에게는 같은 편에게 쓸 인내는 있어도 적을 향한 자비 따위는 없었다. "전하-한 가지 주의를 시켜 드리지요." "얼마나 대단한 주의인지 한번 들어보도록 하지요." "섣불리 사람의 증오를 부르지 마십시오. 아무리 하찮은 자의 증오라 도, 그것은 결국에는 비수가 되어 당신의 등에 박힐 겁니다." 브리올테는 그럼에도 오만하게 말했다. "위협이라 봐도 되나요?" "남 위에 서려는 자라면 누구나 알아야 할 상식입니다." 브리올테는 코웃음치고는 말했다. "잘 듣지요. 그럼, 제 경고도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마시고 가 보세 요.....아, 가시는 길에 켈브리안에게 들르는 것 정도는 허락해 드리 지요." 슈마허는 인사도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늘 브리올테를 끔찍하게도 싫어했지만, 지금처럼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증오스러웠던 적은 없었다. "정말 죄송해요." 켈브리안 공주의 말에 슈마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 실수요. 대비가 그렇게나 주의 깊게 감시하고 있는 줄 전혀 몰랐던 게 잘못이지. 젠장, 우리 꼬마만 큰일 나게 생겼소." "슈마허, 어머님이 말씀하신 것....그저 우연일 수도 있어요. 너무 걱 정하지는 마세요." "무슨 소리요?" 켈브리안은 희미하게 웃었다. "인질이 필요했다면, 어머니는 그렇게 근위대를 움직이실 리 없어요. 정말 티가 안 나게 잡아와서, 당신의 불안이 최대치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협상하실 테지요. 하지만 이건 아니에요. 어머님은.....그 저 시위용으로 라키 경을 억류한 것에 불과해요.....그녀가 당신 집 으로 향했던 것도 벌써 알아챘을 테고, 그래서 그녀를 당신과 저의 연락책 정도로 생각하셨나 봐요." ".....즉?" "드디어 시작을 하려나 보다, 그렇다면 초장에 내가 너희들을 충분히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지- 하신 거죠. 아마도 라키 경은 다음 주면 풀려날 거에요. 그리고 저희는 더 이상 그녀를 우 리 사이의 일에 쓸 수 없게 되겠지요." "하지만 우리 작은 유즈는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거요? 게다가 대비의 말은 또 뭐요!" "라키 경과 만날 수 없으니 아직은 몰라요. 하지만.....몸이 자유로운 상태라면 와도 벌써 왔을 거라는 의견을 내 놓을 수밖에 없군요. 미안해요." 슈마허는 주먹으로 테이블을 퉁퉁 쳤다. 일이 대비 브리올테 손으로 넘어가면, 그 다음부터는 아무리 슈마허라도 그저 직책이 용병대장인 이상 깊이 파고들 수가 없게 되버린다. 그래도 켈브리안 공주의 말을 들으니, 대충 상황이 짐작되었다. 대비 는 조만간 슈마허가 무언가 일을 칠거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고, 그와 정면으로 맞서는 것보다는 슬슬 협박해서 알아서 떨어져 나가도 록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아마도, 유제니아는 정말 '우연히' 걸려든 것뿐이다. 고약한 우연이었다. "결국 모두 내 잘못이군." "아니라니깐요, 슈마허." "아니오. 이건 분명 내 잘못이오. 오만은 패배의 절대경로라 누구나에 게 말해왔건만, 나 역시 마찬가지였던 거요. 대비가 마음을 굳혔다는 것이 분명한데, 그녀가 그대로 아무 일도 하지 않을 거라 생각 한 건......오판이었소." "무모한 일은 하지 마세요." 슈마허는 답하는 대신 그저 쓰게 웃었을 뿐이었다. 켈브리안은 불안 해 졌으나, 그의 눈이 아주 차가운 것을 보며 이것을 어떻게 받아 들여 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이만 가 보겠소." 슈마허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켈브리안이 넌지시 말했다. "슈마허, 만약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고 계신 거라면...." "켈브리안, 그렇게 된다 해도 적어도 당신에게 해가 될 일은 절대 하지 않겠소. 나는 당신을 아주 좋아하니까. 하지만, 대비의 경우에는 미안하지 만 아무 것도 약속해 줄 수 없소. 지금도 충분히 고약하지만 정말 최악이 라면 나는 그녀를 용서할 이유가 전혀 없는 거요." "제.....어머님이신데도요?" "알고 있소. 무슨 짓을 해도, 결국에는 당신의 어머니. 하지만 최악의 상황, 그리고 당신이 나를 이해는 해도 용서는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면.....그렇다면 그냥 나를 미워해 버리시오. 아마도 당신의 미움 정도는 감수하기로 작정하고 벌이는 일이 될 테니." 그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짐작이 되고도 남는 켈브리안은, 떨리는 몸을 추스르고는 조용히 말했다. "슈마허, 제가 망설이는 가장 큰 이유는 어머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더 무서운 존재가 그 뒤에 있기 때문이에요." 무엇을 말하는지, 슈마허가 아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탈로스 고르노바 말이겠군. 하지만 그는 에키롯사의 최고 마스터, 다 른 나라의 국정에 관여할 수 없소." "국정이 아닌, 여동생을 지키기 위해서 움직인다면 그것은 에크롯사 인 으로서는 당연한 의무이고, 왕도 어쩔 수 없어요. 당신이 어머님과 대립하 게 된다면, 그리고 당신이 이길 가능성이 매우 높아지면....어머니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외숙부를 끌어들일 거에요. 게다가 당신은 외국인, 더 할 말이 없어요." 슈마허는 켈브리안의 간절한 눈동자에서 짚이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여태 아무 일도 안한 거요?" "네. 그러나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렇게 당신이 그러하듯 다른 사람들 의 불만이 증오로 바뀌는 순간을 늦추는 것뿐이었어요. 우유부단하게 처신하 거나, 머뭇거리는 듯 보이거나, 어머님 손에 단단히 틀어 잡힌 듯 보이거나 ......그렇게 당사자인 저를 믿지 못한다면 아무도 일어날 수 없으니까-" "켈브리안--" 한숨을 쉬는 듯한 목소리였다. 켈브리안은 그런 그의 손등에 손을 얹고는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슈마허의 주먹이 꽉 쥐어지며 그런 그녀의 손길을 피 했지만, 켈브리안은 미소를 잃지 않으며 말했다. "슈마허, 나는.....사람들이 어떻게든 희망을 찾아, 불안을 떨치기 위해 일 어나는 것을 막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그들이 그저 희망을 가졌다는 이유 하 나만으로, 지나치게 불합리한 어머님에게 반하여 일어났다가 지난번처럼 무참 하게 '학살' 되는 것은 참을 수 없어요." "고약하군." "알아요. 고약하죠. 불합리하고, 화도 나지요. 하지만.....슈마허, 적어도 저를 생각하는 당신이 다치는 건, 그것도 그렇게 허무하게 학살되는 건 그 모든 불합리와 고약한 상황을 다 합친 것보다 싫어요. 한 번으로 족해요." 슈마허는 언뜻 연상되는 것이 없지는 않았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켈브리안이 말했다. "슈마허, 아무리 당신이 흑대장 슈마허라 할지라도, 숙부님 앞에서는 그저 인간일 뿐이에요." "그렇다면....왜 그 아이를 보내라고 한 거요! 그렇게 아무것도 할 생각도 없었고, 원하지도 않았으면서!" "같이 떠나기를 바랬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켈브리안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러나 슈마허는 오히려 화가 치밀어 올라 사납게 말했다. "적어도, 당신을 버리고 갈 일은 없을 거요. 결코!" 그리고 그렇게 말한 그날 슈마허는 정말 어디로도 갈 수 없게 되었다. 아니, 적어도 뚫린 길이 단 하나 있기는 했으나 그 방향으로 가는 것을 슈마허 자신 이 허락하지 못했다. 저택으로 가는 즉시, 그의 집은 대비가 보낸 근위대에 의해 포위되었고 그대 로 슈마허는 가택 연금상태가 되어 버렸다. ************************************************************************ 작가잡설: 브리올테는....이렇게 하면 안 된다, 의 표본이랄까요. -_-;;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35장 ***************************************************************** [겨울성의 열쇠] 제167편 늑대 사냥#4 ****************************************************************** 티라 성의 경비병은 소년의 손에 멱살이 틀어 잡혀 멍하니 그 활활 타는 눈동자를 바라보아야 했다. 뭐라고 외쳐야 정상인데, 정작 입이 굳고 틀어막히기라도 한 듯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문 열어라." 흠뻑 젖은 머리카락은 은빛이었고, 당장 찢어 놓을 듯 분노로 이글거 리는 눈동자는 금빛. 그 기괴하고 신비로운 빛깔 속에서도, 얼굴만은 그들의 왕자인 휘안토스와 똑같았다. 처음에는 비와 함께 나타난 휴로페의 사령이라 외치며 마법사를 부르 려 했지만, 제대로 부르기도 전에 소년은 그렇게 외치는 경비병을 갈겨 버렸다. 빗줄기는 더 굵어졌고, 흠뻑 젖은 그의 눈빛은 더욱 사나워졌다. "문 열어--!" 그 사나운 외침이 빗속을 울렸다. 급히 달려온 기사 하나가 검을 뽑 아 들며 외쳤다. "멈추어라! 누구....."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소년이 그를 걷어차 버렸다. 기사는 캑 하고 날아가 성벽 아래로 나동그라졌다. 방금 전 소년에게 멱살이 잡혔던 병사가 창을 휘둘렀지만, 소년의 팔이 그 얼굴을 후려쳤다. 피와 빗물이 흩어졌고, 비명이 터졌다. 성문 위에서 거친 목소리가 터졌다. "당장 멈춰라!" 소년은 성문 위를 보았다. 그곳에서 궁병들이 모여 소년을 향해 활을 겨냥하고 있었다. 소년은 뭐라 작게 중얼거렸고, 가장 눈이 밝은 병사가 급히 외쳤다. "피해, 모두!" 빗줄기가 회오리치고, 빗방울이 멈추었다가는 밖으로 세차게 튀어 올 랐다. 바람이 모이는 세찬 소리가 들리는 듯 하더니, 콰르르르--! 벽돌이 으깨어지며 사방에 자갈들이 쏟아졌다. 비명이 터지고, 신음 이 이어진다. 소년은 눈앞을 온통 가린 젖은 머리카락을 걷어냈다. 성 문이 열리며 그 안쪽에서 키가 큰 금발의 기사가 뛰어나왔다. 마르실리오였다. 그는 달려오자 마자 우뚝 멈추더니 문 앞에 서 있는 소년을 믿어지지 않는 다는 눈으로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그와 같이 온 기사가 칼자루에 손을 가져가자, 마르실리오는 급히 그를 막으 며 앞으로 나섰다. 순간 소년의 눈이 번쩍이더니, 그대로 달려와 마르실리오의 턱을 갈겨 버렸다. 퍼억-! "마르실리오 님!" "괘, 괜찮....쿨럭!" 기침과 함께 피와 침에 섞여 피범벅이 된 이 조각 하나가 튀어 나왔 다. 이가 깨진 것이다. 마르실리오는 피를 훔치고는 몸을 폈지만, 턱이 돌아갈 정도로 엄청난 주먹이 다시 그의 얼굴을 다시 후려쳤다 . 그는 그대로 벽에 내동댕이쳐졌고, 터진 입술과 깨진 코에서 피 가 주륵 흘러내렸다. "마르실리오 님!" 이제는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듯 기사들이 서둘렀으나, 이번에도 마르실리오는 그들을 말렸다. "손, 손대지 말.....쿨럭!" 소년이 마르실리오에게 다가가려 하자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와 소년 을 막았다. 소년이 말했다. "비켜라." "당신 대체 누구요!" "비키라고 했다-!" ".........아킨토스 프리엔 님이시다."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마르실리오가 말했다. 그제야 새파랗게 질린 기사들은 겁먹은 듯 뒤로 주춤 주춤 물러나며 소년의 얼굴을 살폈고, 흠뻑 젖은 얼굴이 휘안토스와 똑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킨은 젖은 머리를 다시 걷어내고는 마르실리오에게 다가가, 그의 멱살 을 움켜잡더니 잡초 뽑듯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형은 어디에 있나." "성안에 계십니다." "어디 있어!" "우선 안에서 기다리십시오. 곧 모시고...." 아킨은 마르실리오의 몸을 내동댕이쳤다. 빗길에 미끄러지며 그 등이 성벽에 크게 부딪혔다. 나이가 아킨과 거의 비슷해 보이는 어린 소 년이 달려오더니 말했다. "아킨토스 님, 제가 그분께 모시고 오겠습니다." "필요 없어." 아킨은 내 던지듯 말하고는 성안으로 들어섰다. 기사들은 물러났지 만, 갑자기 마르실리오가 급히 일어나며 외쳤다. "뭐 하고 있나! 어서 막아-! 어서! 휘안토스 님과 만나게 해서는 안 돼!" 아킨이 돌아서며 그를 노려보았다. 예전, 아주 예전의 어두운 숲과 차가운 빗줄기와 허리가 끊어지는 듯 한 고통이 다시 생생히 되살아 나 아킨을 뒤흔들었고, 그것은 분노와 증오로 바뀌었다. 뚝뚝- 주먹을 꾸욱 움켜쥐자 관절 꺾이는 소리 가 들려왔다. 그 눈을 마주하면서도 마르실리오는 외쳤다. "어서 막으라고 했다! 명령이다! 어서--!" 병사들이 아킨에게 달려왔다. 그러나 그들은 왕자 앞에서는 차마 검 을 뽑지 못했고, 그런 맨 몸으로 아킨을 이겼던 '사람'은 아킨이 열 다섯 살이 된 이후로 단 한 명도 없었다. 그것을 분명히 아는 마르 실리오는 그를 부축하는 소년의 팔목을 움켜잡으며 빠르고 작게 속삭였다. "어서 휘안토스 님께 보고해라! 빨리-!" 유제니아는 비가 내리는 창 밖의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밤이다, 아주 평화롭고 조용한 밤. 비는 거세지는 않지만 끊임없이 속삭이듯 내리고, 젖은 바위들이 방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에 번 들거린다. 파도가 하얀 거품을 내뿜으며 부서지고, 바위는 바다에 잠겼다가 드러나며 하얀 거품을 뒤집어썼다. 몇 번째 밤일까.....가만히 손가락으로 세어 보니, 열흘은 안 된 것 같 지만 일주일은 넘은 것 같다. 아흐레? 그 정도 될지도 모른다. 내 일이 지나면 열흘이 되고, 조금 더 지나면 보름이 되고- 그 언니가 굉장히 걱정할 거야, 그리고 아저씨는 어쩌고 있을까. 유제니아는 눈물을 문질러 닦아내려 했지만 눈은 전혀 젖어 있지 않 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첫날을 제하고는 거의 울지 않았다. 그가 왜 그런 짓을 했을까, 하는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다. 생각조차 하기 싫었으니, 그런 것을 고민하는 것 자체만도 끔찍하다. 게다가 다행스럽게도 휘안토스는 배에 있던 며칠을 제하고는 더 이상 유 제니아를 찾아오지도 않았다. 그의 말대로 무언가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다. 주변의 시녀들이 의심받을 새라 긴장하고 조심 조심 다니는 것을 보니, 더욱 그런 것 같았다. 뭘 하는 걸까- 생각해 보면, 그날 유제니아와 만난 '그 남자'와 관련 된 일 같다. 또, 휘안토스는 그 남자를 찾기 위해 그 롬파르까지 온 듯 하다. 늘 그렇듯 모든 것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왜 하필 그 때 그 곳을 바라보고, 왜 하필 그를 아키라 생각했을까. 왜 바로 라키 경을 찾아가지 않고 도망치기만 했던 걸까. 왜 하필 많고 많은 곳 중에 그곳으로 피했던 걸까. 그렇게 멍청하게 굴어서 그 꼴이 된 거잖아. 그 당연했던 일들이, 모두 멍청하게만 보인다. 어쩔 수 없었던 일들 이 일부러 그렇게 굴기라도 했던 것처럼 느껴진다. 세냐가 알면 뭐라고 할까....휘안토스에게 화를 낼까, 아니면 그렇게 멍청하게 굴고 제대로 밀쳐내지도 못한 나에게 화를 낼까. 그래도 어찌 되든 이 낯설고 무서운 곳에서 벗어나 슈마허의 팔에 매달리고 싶고 세르네긴의 품에 안기고 싶고, 괜찮다고...다시는 그럴 일이 없을 거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아킨과는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을 것 같다. 똑같이 생긴 얼 굴을 보게 된다면, 아무리 아킨이 친절하고 상냥하고...또, 그렇게 좋은 사람이었어도 휘안토스를 생각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좋아 하기는 했지만, 지금은 그를 아무렇지도 않게 볼 자신이 없고, 아무 죄도 없는 아킨이 그 때문에 상처받는 것은 싫었다. 그래서 그가 슬퍼한다면, 그것을 보는 유제니아는 정말 죽고 싶을 정도로 슬퍼질 것 같았다. "유제니아-" 유제니아는 고개를 들었다. 깜빡 잠이 든 듯 했다. 밖은 아직도 캄캄했고, 겨우 여덟시나 아홉시 되었을까- 그리고 멍한 그녀가 본 것은 휘안토스였다. "--!" 유제니아는 급히 몸을 움츠리고는 일어났다. 다시 그 끔찍한 순간이 생각난다. 눈앞이 막막해지고, 가슴이 쿵쾅쿵쾅 뛰어 오르고, 겁먹은 몸은 떨려왔다. 도망치거나, 적어도 주먹으로 치기라도 해야 할 텐 데 온 몸이 얼어붙은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휘안토스가 말했다. "곧 이 성을 곧 떠나게 될 것 같다는 말을 전하러 온 것뿐이다." 그런 말하러 직접 여기까지 올 필요는 없잖아, 하는 말이 치솟아 올 라왔지만 결국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돌아가는 길에 돌려 보내주겠다." 역시 고개를 끄덕이지도 못했다. 휘안토스의 손이 닿았고, 순간 유제니아는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긴 장과 두려움에 온 몸이 굳어 있었으니, 그 가벼운 충격에도 온 몸이 휘청거리는 것이다. 바보 같다, 정말......이렇게 달달 떨어 대다가는 또 당해 버릴 거야. 그 모습에 휘안토스가 웃으며 말했다. "아직도 겁먹는 건가?" 머리가 뜨끈해졌다. 살기가 확 치솟아 올라, 당장 그를 뭐로든 죽여 버리고 싶었다. '그 때'는 지쳐서 버티는 것도 포기하고 있었다. 무슨 소용이겠냐는 생각도 들었고, 그렇게 생각하니 다 무의미해 보였던 것이다. 단지 꾹 참으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다시 그가 그녀를 가진 다면, 그리고 유제니아 자신이 한번 더 그런 식으로 포기하면 이번에야말로 영영 포기하게 되어버릴 것 같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포기'하는 자신은 싫었다. 휘안토스는 얼굴은 아킨과 소름끼치도록 똑같았지만, 검은머리와 차 가운 보라색 눈의 그는 아킨과는 비할 바 없이 잔혹했다. 유제니아를 억지로라도 가지고 싶어 할 정도로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 고 그날 여자가 필요했던 것도 아니다. 이유는 단 하나, 그저 유 제니아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더 끔찍했다. 여자가 필요한 것이라면 다른 여자가 생기면 유제니아를 얼마든지 잊어 줄 것이고, 상상도 안 되지만 좋 아하기라도 한 것이라면 적어도 이 정도의 두려움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잔혹한 그가 지금은 돌아가라, 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 그 말 안에 어떤 잔인한 의도가 있을지 유제니아는 짐작도 되지 않았고, 그래서 더 두려웠다.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오히려 이렇게 몸을 움츠리고 떠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답을 기다리던 휘안토스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고, 그 의 눈이 차갑게 반짝였다. 대체 무엇을 느껴서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찰나의 벌어짐이 유제니아 에게는 기회로 보였다. 유 제니아는 휘안토스의 손이 움직이려는 순간 그를 팍 밀쳤다. "너-" 어디로 도망치든 상관없지만, 적어도 휘안토스의 눈에 뜨이지 않는 곳이면 충분하다. 돌아가 봤자, 아무 것도 예전처럼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안 다. 상처는 끝끝내 유제니아를 따라 다닐 것이고, 지금 휘안토스를 벗어난다 할지라도...이렇게 그의 눈앞에서 벗어나 보이지 않게 될 지라도, 휘안토스의 뜻에 따라 얼마든지 또 그런 꼴이 될 것이다. 그가 원한다면, 그것으로 모든 것은 끝인 것이다. "나쁜 자식...." 유제니아는 눈물을 훔쳤다. 얼굴은 벌써 눈물범벅이었고, 결국에는 멈추어 서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쁜......" 목소리가 흐느낌에 묻혔고, 그런 그녀의 팔에 누군가의 젖은 손이 와 닿았다. 두 손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양어깨를 움켜잡았고, 가까워지는 숨소리 는 한참을 달려온 듯 지치고 거칠게 떨려왔다. 유제니아는 흠뻑 젖은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 빗속에 얼마나 있었던 것인지, 바로 호흡도 손도 차갑기만 했다. 그 러나 유제니아를 바라보는 눈길만은 불붙은 듯 뜨거웠다. 그러던 그의 손이 떨리며 유제니아의 젖은 볼을 건드리더니, 눈물에 덴 듯 손을 움츠렸다. 유제니아는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저 떨면서 그를 바라보기만 했고 , 그는 지쳐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왜......여기 있는 거지, 유제니아?" 그러나 그 목소리가 싣고 있는 것은 놀라움과 의문이 아니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듯한, 정말 너무나 끔찍해서 내내 부인했지만 결국에는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된 자가 쓰러지기 전에 내 뱉는 체념 같은 것이었다. 유제니아는 차마 답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에 그녀가 떠올린 것은 바로 휘안 토스였다. 유제니아는 자기도 모르게 그의 손을 떨쳐 내 버렸다. 순간에 아킨의 얼굴에 떠 오른 망연함과 절망감을 보며, 유제니아는 이미 예상했던 것 보다 더 지독한 아픔을 느꼈다. "나....." 그런데 유제니아는 무언가가 몰려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저 멀리 서 거센 바람이 몰려오는 듯 무시무시한 기분, 어디선가 뭐가 다가 오는 것 같다. 사냥개처럼 킁킁대며 다가오고 있다. 이 느낌을 유제니아는 알고 있었다. 예전에 머물던 하멜버그 성 뒤의 버려진 탑에서 자켄이 그녀의 어깨를 안아 숨죽이게 했을 그 때, 휘안토스가 그녀를 찾기 위해 풀어 놓았던 그 검고 무시무시한 것들 의 느낌이다! 그녀를 보던 아킨의 눈이 확 커졌다. 비에 젖어 차갑고 창백하던 얼 굴은 더 해쓱해졌고, 두 눈의 불길이 걷히며 얼어붙기 시작했다. "....아키...! 어서...." 갑자기 눈앞이 어찔하더니 캄캄해졌고, 온 몸이 얼어붙은 듯 차가워 지기 시작했다. 유제니아는 듣지 못했지만, 아킨은 그를 향해 다가오는 차가운 손길 과 음침한 웃음소리, 그리고...... 개 짖는 소리를 들었다. 광포하게 내지르는 외침이 아킨의 머리를 울렸고, 그 생생한 울부짖 음에 심장이 터져나갈 듯 했다. 검고 단단한 힘이 팔을 붙잡고 목을 움켜잡고 입을 틀어막고 온 몸을 결박했다.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신음소리도 들려오고, 휘안토스의 차가운 눈빛을 본 것도 같았다. 어린 그날 숲을 헤매다가 어둠 속에 숨어서 내내 들었던 그 공포스 런 소리가, 이제 온 몸을 덮치고 그를 집어 삼켜 버리고 있었다. **************************************************************** 작가잡설: 흑조는 흑조입니다...-_-;;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36장 *************************************************************** [겨울성의 열쇠] 제35장 만월의 왕 제168편 만월의 왕#1 ***************************************************************** 세르네긴에게 패배하고 돌아온 휘안토스를 보며, 아킨은 그가 느끼는 것을 '같이' 공유하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쌍둥이 형의 조각처럼 완벽한 미소와 철저한 냉철함 뒤에 숨은 것들, 그 가늘게 금간 자괴감과 날카로운 분노를...... 그래서 단 한번도 보지 못했던 세르네긴을, 그 사냥터에서 처음 보는 순간에 때의 감정 을 언뜻 느낄 수 있었다. 기시감처럼 야릇하게. 간혹 그것을 쌍둥이의 교감이라고도 말한다. 휘안토스가 느끼는 것을 느끼고, 보는 것을 보고, 그랬기에 어렸을 때 언제나 휘안토스와 자신이 '같다'는 것을 진절머리 나게 알게 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늘 불쾌함만으로 끝났었는데, 이번에는 아킨은 정말 터질 것 만 같은 분노 속에 그와 같은 날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나게 한 운명을 저주했다. 베이나트가 서재에 남겨 놓고 간 보석을 던져 주고 거의 강탈하다시 피 해서 구해온 배 위에서, 아킨이 생각한 것은 지금 믿을 것은 오 로지 본능뿐이라는 것이다. 휘안토스와 연결된 본능이 있으니, 그 끄트머리에 있는 휘안토스가 어디에 있는 지 알아내기 위해서는 결국 그 선인 '본능'을 이용해야 했다. 그러나 그 본능이라는 것은 아 킨이 알기로는 '철저하게' 그 자신에게 국한된 것이다. '그것'을 느낀 것 자체가 아킨에게 주어진 저주 같은 본능의 일부였으니, 그 본 능을 끌어내기 위해 불안과 두려움에 멈칫거리며 돌아섰던 모든 한 계점을 넘어 버리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 될 것이다. 보통 사람에게라면 불가능하지만, 아킨은 마법을 배운 몸이었다. 마나 를 움직여 무언가의 상태를 -자신의 몸이라 할지라도- 의도적으로 바꾸어 깊이 잠들어 있던 힘을 억지로 끌어내는 것은 분명 가능했다. 그러나 옆에 도와주는 사람도 없이 자신의 몸을 가지고 그런 일 을 하는 것은 위험했다. 자칫 실수해서 더 이상 마나를 조율할 수 없게 되면 몸을 회복시킬 수 없게 되는데다가, 망망한 바다 위에서 정말 그런 상황이 발생한다면 누구도 도와줄 수 없게 되고, 꼼짝 못하는 신세가 되어 말 그대로 눈뜨고 말라죽게 된다. 아킨은 자켄과 베이나트, 그리고 롤레인과 루첼을 생각하며 그가 그 들에게 얼마나 결정적인 도움을 받아 왔었는지 깨달았다. 늘 나 혼 자다, 그렇게 생각해 왔건만 그들이 도와주고 보호해 주고 희생해 주었기에 여기까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덩그런 허공과 허공의 사이에 누워, 자기 자신의 두 손과 힘 과 의지만을 믿으며 지금 하고자 하는 일을 해야 했다. 그런 그들 없이, 그들의 보호 없이, 그들의 손길 없이- 괜찮을 리가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아킨은 했다. 배의 갑판에 마법진을 그리고, 마법어 중 페그 라일에 해당되는 주문 을 외웠다. 그런 종류의 마법에는 드루이드들이 잘 쓰는 룬이 가장 쓸모 있는 것이었지만, 아킨은 룬까지는 배우지 못했다. 그러나 첫 번째는 실패했다. 페그 라일은 아킨의 힘으로는 조정할 수 있었으나, 너무나 미약했다. 그저 약간 예민해진 정도였고, 그 정도로 휘안토스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몇 번을 거듭해도 그 모양이었고, 결국 아킨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 정으로 은봉인을 떼어 그 위의 문자를 확인했다. 예전에 루첼이 언뜻 말했던 적이 있는데, '고대' 문자라면 아직도 어느 정도 쓰이는 룬 과 대마법사 정도 되는 롤레인이나 탈로스나 쓸 수 있는 성(星)문자 두 가지다. 은봉인에 적힌 것은 후자였고, 아킨은 행여나 하는 심 정에 마법진 위에 그것들을 그려 넣었다. 비슷하게 해 보려고 했지만 어디가 모자라는 듯 어설펐다. 베이나트 나 탈로스처럼 강하다면 마나가 직접 그 문자의 형태를 그리게 할 수 있고, 실제로는 그것이 가장 강력하다. 성문자는 페그 라일과는 달 리 말 그대로 힘의 흐름을 담은 글자이며, 까다롭게 보자면 글자 라기보다는 '형태'라 칭해야 한다. 그러니 마나 자체로 직접 만들어 내는 것이 효과적이지만, 아킨의 힘으로는 불가능해서 결국 직접 그 려 그 위에 마나를 불어넣어 주어야 한다. 그것이 결국 인공적으로 만든 수로같은 작용을 해서 마나의 흐름을 잡아주고 원하는 힘을 이끌어 내게 한다. 그 모든 것을 마치고, 아킨은 기진맥진한 채 배 위에 누워 있었다. 침묵의 달빛은 하얗게 쏟아졌다. 만월에 가까이 부풀어 오른 빛이 온 통 쏟아져 바다를 적시고, 잔잔한 바다는 그 빛을 산산이 흩트리며 출렁였다. 마법진 위로 힘이 은은하게 모이기 시작했고, 그것은 이제 시작임에 도 불구하고 방금 전에 페그 라일로 최선을 다해 만들어 놓았던 마 법진 보다 몇 배는 더 강력했다. 그러나 강한 만큼 더욱 위험하다는 것을 아킨은 알고 있었다. 조금만 실수해도 금방 통제를 잃어버리게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마법은 마나로 시작할 수는 있지만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좀 더 근원적인 에너지를 요한다. 아킨은 그 저 추상적인 이론만 들었던 정도였기에 지금까지 '근원적인 에너지' 가 무엇인지 몰랐으나 그것이 발동되자 무엇인지 드디어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생명, 누구나 가지고 있는 진정한 근원의 에너지였다. 힘 을 얻기 위해 그의 생명을 내 놓아야 하는 것이다- 아킨은 문득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곧 무의미하게 생각되었다. 힘이 없기 때문이다. 무능하기 때문이다....그러니, 결국 무언가를 얻 기 위해서는 더 필사적으로 버둥거려야 하는 것이다. 왜 욕심내겠는가. 그저 늘 이렇게 살아왔고, 이렇게 살아야 할 것을- 약하면 약할수록, 할 수 있는 일이 적으면 적을수록, 무언가를 얻기 위해 내놓아야 하는 것은 점점 커져서 결국 제 피와 제 살까지 내 놓아야 것이다. 그래서 아킨은 포기했다. 어차피 그 방법밖에 없다 면, 지금은 그것을 쓸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어렴풋하게만 느껴지던 것들이 눈앞에서 보는 듯 생생해졌다. 시력을 회복하듯 희미했던 것들이 뚜렷하게 떠오르고, 막혔던 귀가 뚫리듯 생생해진다. 그렇게 고요한 가운데 파도소리에 몸을 맡기고 그 변화를 생생하게 느끼는 것은, 몸이 찢겨지며 괴물이 되어야 하는 보름의 날보다 더 두렵고 끔찍한 일이었다. 그 때는 적어도 돌아온다는 보장이 있지 만 지금은 아무 것도 장담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 '휘안토스가 된다 '는 것은 세상에 다시 없이 끔찍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마침내 원하는 것을 알아냈을 때, 아킨은 몸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렸다. 다행히 힘은 이내 사그라지고, 갑판에 그려 놓았던 성문 자도 금방 사라졌다. 마법진마저 사라지자 결국 남은 것은 달빛과 가슴이 부글 부글 끓어 오르기 직전인 아킨 뿐이다. 아킨은 은봉인을 만지작거리다, 예전에 탈로스의 탑에서 가지고 나온 팔찌를 바라보았다. 두 팔에 걸린 팔찌는 달빛에 찰랑였고, 그 빛은 여느 때보다 더욱 강한 듯 했다. 문득 이것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위에 적힌 것도 고대 의 문자였고, 이것도 은봉인의 그것처럼 햇빛과 달빛에 선명하게 드러났다가는 사라지곤 했다..... 그러나 아킨은 이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팔찌를 눈앞에서 치 우고는 알아낸 티라 섬으로 배의 방향을 잡았다. 뱃길을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베넬리아를 떠나기 전에 지도 를 구했고, 마법을 쓰는 아킨은 바다를 항해한 경험이 없다 할지라도 지도를 북극성 아래위로 놓는 것만으로도 배 자체를 그곳으로 향하 게 할 수 있었다. 한 시간도 되지 않아 극심하게 피로해지며 온 몸이 끊어지는 듯한 통 증이 오고, 신물이 올라왔다. 그렇게 몸은 목적한 곳에 닿기도 전에 넝마가 되어 버렸지만, 분노는 오기를 불러오고 오기는 몸을 혹 사시키는 것을 외면했다. 그러며 온 몸이 알려왔다. 만월이 가까워져 온다고, 곧 변신의 때가 다가와 온 몸이 찢겨지며 숨겨진 모습을 끄집어 낼 것이라고. 민감해진 본능이 예민하게 그 변화를 알려왔다. 은봉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변화는 정말 괴물 이 되려 하는 듯 너무 격정적이고 분명했다. 방금 전에 썼던 마법 이 문제일까, 그리고 그것이 행여나 몸 상태에 영향을 미쳐 그 괴 물의 모습으로 더 오래 지내게 하는 것은 아닐까- 정체 모를 두려움은 미신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사소하고 하찮은 것에도, 행여나 그것이 큰 영향을 미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사방에 무언가가 숨어서 노리고 있는 것만 같고, 혼자 지내는 시간 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바다가 망망하면 망망할수록 달빛이 찬란 하면 찬란할수록 그 공포는 더욱 더 커져만 갔고, 결국 심장이 터져 죽을 듯 불안해져간다. 속으로 몇 번이나 자켄을 불렀다. 형, 제발....제발 형! 제발...... 숲은커녕 풀 한 포기 없는 그 망망한 바다 위에서 아킨은 숲의 엘프 를 필사적으로 부르며 버텼다. 그래도 여기서 포기하고 의지가 무 너진 채 망가져 버린다면, 그렇게 어디로든 도망쳐 버린다면 후회할 것 같았다.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다친 자켄이 고통을 꾹 참으며 곁에 있어주려 했던 것도, 그만큼 아킨이 약하기 때문이다. 또 그 에게 의지하고 기대고 도움을 받는 다면 영영 그들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힘들 때마다 겁먹은 강아지처럼 울부짖으며 그들을 찾게 될 테고, 다시 그들의 짐이 되어 버릴 것이다. 그래서 아킨은 지쳐도 나갔다. 속으로 끓어오르는 분노에 몸을 싣고 분명 절망과 분노로 이어질 사 실을 확인하기 위해 쌍둥이 형이자 반신, 그 자신이자 적인 휘안토 스를 찾아갔다. 달빛이 인도하는 대로, 의지가 인도하는 대로, 그렇 게 바다를 헤치고....달리고 달렸다. 어떻게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아무것도 자각하지 못한 채 분노가 이끄는 대로 그냥 그렇게 달렸다. 지친 몸에 분노가 뒤섞이며 거의 미쳐 버렸고, 마르실리오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나마 조금 남아 있던 이성마저 사라져 버리는 듯 했다. 휘안토스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만이 들었을 뿐, 왜 찾아야 하는지 찾 아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지는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아킨은 휘안토스가 어디 있는 지 알 것 같았다. 무리한 마법과 보름달 덕에 바늘 끝처럼 예민해진 몸은 휘 안토스가 어디 있는지 귀에 속삭이듯 가르쳐주었고, 그대로 아킨은 달려갔다. 그리고 머릿속에 가득 차오르는 것은, 휘안토스-죽여버린다, 휘안토 스- 정말 죽여 버린다! 그 두 마디뿐이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날 밤 망각에 젖어 까만 숲 속을 홀린 듯 걸어갔을 때 들려왔던 그 소리가, 컴컴한 망각과 침묵의 어둠 속에 갇혀 있던 아킨을 깨 웠던 그 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봄의 숨결에 눈과 얼음이 녹듯 아킨은 깨어났다. 그제야 왜 그곳에 왔는지 깨달았다. 어떤 일이 벌어졌기래 이렇게 반 쯤 정신이 나갔는지도 깨달았고,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 지도 깨달 았다. 아주 멍청한 말을 했던 것 같았다.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는데도 묻 고 말았고, 그 말을 들자 작은 얼굴에서 빛나는 두 눈동자에서는 공포가 확 차올랐다. 다시 눈물이 고이고, 몸은 떨리기만 했다. 죽여 버리고 싶다. 가장 저주스런 운명이라면 보름마다 그런 미친 괴 물로 변해 어머니의 운명을 삼켰던 것이었지만, 이제는 휘안토스와 형제라는 것 자체가 가장 끔찍한 저주다. 그렇게 속이 활활 타오르는 순간에 컹컹- 아주 어린 시절에 들었던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둠 속에서 튀어나와 붉은 눈을 번득이며 허연 이를 드러내며 달려오는 것들. 그들의 발소리, 그들을 부리는 휘 파람과 피리소리, 그들이 킁킁대며 달려오고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검은 사냥개들. 숲에 숨은 어린 늑대를 찾아 갈기갈기 찢어 낼 이와 발톱을 가진 자 들, 아버지처럼, 그의 쌍둥이 형처럼 그들의 이와 발톱은 아킨을 잔 인하고 냉혹하게 밟고 찢고 집어 삼켜버렸다. **************************************************************** 작가잡설: 빈사의 백조...-_- 제헌절날 고양이 두마리 예방주사 맞추러 갔습니다. 크으....쎈은 괜찮은데 자룡이 녀석이 지하철 안에서 내내 야웅야웅 대니 시선집 중. -_-;; 강아지 데리고 가면 별 말들 없는데, 고양이 데리고 가니 아주 진귀한 사람 취급이군요;;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36장 **************************************************************** [겨울성의 열쇠] 제169편 만월의 왕#2 **************************************************************** 눈을 뜨니 어디엔가 누워 있었다. 그는 땅 위에 있었고, 달 아래 있었으며, 하늘의 품 안에 있었다. 그 리고 냉정한 눈동자 같은 달은 배 위에서 내내 보았던 그것만큼이나 언제나 찬란하다. 가득 차 오른 달이 온 세상을 비추고, 눈을 적시고 몸을 빨아들이고 그를 미치게 한다. 별은 빛이 죽어 검푸른 하늘에서 희미하게 빛날 뿐이고, 하늘은 너무 나 깨끗해 흰 구름으로 얼룩진 곳 하나 없다. 오로지 대지가 바라 보는 광활한 어둠과 그 위에서 얼음 같은 빛을 발하는 만월 뿐..... 이제 아킨은 누워 있었고, 그 곳은 그런 하늘을 마주하는 완만하게 경사진 언덕이었다. 꿈인 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꿈일까- 아니, 태어나면서부터 늘 쉼 없는 악몽 속에 있는 것만 같다. 그러니 알게 뭔가. 나는 여기에 있고, 나는 저것을 보며, 지금 어디에도 돌아가고 싶지 않은데. 달을 마주하는 언덕 위에는 다섯 개의 울퉁불퉁한 기둥이 서 있었고 그 안쪽에는 낮은 제단인 듯 뭉툭하고 낮은 기둥들이 똑같은 위치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중 아킨과 마주하는 기둥 위에 언젠가 본 듯 한 낡은 잔이 놓여 있었다. 예전에 베이나트가 권호를 이야기 할 때 잠시 보았던 환상에서 저런 잔을 보았었다. 아킨은 손을 뻗으려 했지만, 그 잔을 향해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손을 움츠리고는 몸을 돌렸다. 숨이 훅 멈추었다. 그를 마주하고 있는 것은 거대한 늑대였다. 어마어마한 몸집에, 온 몸 은 윤나는 은빛 털에 뒤덮여 있었다. 위협하듯 콧잔등이 일그러져 있었고, 활활 타오르는 금빛의 눈동자는 아킨을 잡아먹기라도 할 듯 흉포하게 빛났다. 그릉- 하는 소리와 함께 그 굵은 이가 드러났다. 송곳니가 달빛에 은 처럼 번득인다. 당장에 도망쳐 버리는 것이 순리였지만, 아킨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꿈쩍도 할 수 없었다. 등 뒤로는 낡은 잔, 바로 앞에는 흉포한 괴물. 그렇게 그 사이에 놓 여, 아킨은 그 사이를 주관하듯 서 있는 것이다. 아킨을 바라보는 금빛 눈에 잔인한 기쁨이 스며 나오고, 그 빛이 번 득이자 아킨은 두려워졌다. 휘안토스를 마주할 때 같은 그런 기분, 그것은 마치 알몸이 되어 치욕스럽게 서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수없는 외침이 머릿속을 울린다. 약한 것...........물어 뜯으면 당장에 부러져 쓰러질 그럴 약한 것. 아킨은 그 잔인한 진실을 유쾌하게 떠벌릴 것만 같은 그 괴물을 바라 보며, 어쩌면 아킨 자신의 속에 숨어 있을 듯한 그것을 바라보며 겨우 입술을 움직여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뭐지?" 짐승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우스웠으나, 그 눈빛을 보니 이 괴물은 그저 으르렁 짖어대는 괴물이 아니었다. 보고 느끼고 생각 하는, '진짜 괴물'이었다. 과연 늑대가 말했다. -니왈르도. 기이한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발음도 묘하게 꼬이고, 니왈르도- 라고 발음하는 순간에 주변으로 은은한 파장이라도 일어나는 듯 했다. 이름 자체가 정체 모를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듯 말이다. -너의 이름을 말해라, 꼬마. 이상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킨은 답했다. "아킨토스." 니왈르도의 금빛 눈이 빛났다. -너의 이름에도 달이 느껴지는 군.....그러나 우리의 달은 아니다. 이 계의 달......우리의 늙고 지친 달과는 전혀 다른 젊고 활기찬 달 이다.....그래, 꼬마 너처럼. 아킨은 그 마지막 말에 소름이 끼쳤다. 니왈르도가 허연 이를 드러내 며 큭--하고 웃는 듯 하더니, 순간에 그의 모습이 변했다. 아킨은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 늑대의 털만큼이나 찬란한 은빛의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의 모습이 었다. 전체적으로 이목구비가 뚜렷한 아주 잘생긴 얼굴이었다. 흰 속눈썹이 드리워진 금빛 눈에 어린 비웃는 듯 차가운 웃음은 잔인해 보였다. 키는 아주 컸고, 입고 있는 옷은 아주 단순한 차림새였다. 그리고 어딘지 아버지 사이러스를 닮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얼굴은 전혀 닮지 않았으나, 그 자신만만한 잔인함은 분명 닮았다. 그리고 그런 그를 보며, 아킨은 그에 대한 이름보다 더욱 더 근원적 인 것을 알고 싶었고, 듣고 싶었다. 기이한 느낌과 함께, 예전에 보 았던 악몽 속에서 보았던 것들이 겹쳐진다. 그 여자, 나루에가 분노에 차 외치던 그 진실. 가라, 가서 그 여자가 너를 잉태하도록 하라. 보름마다 너를 보여라. 그 늑대와 남자를 보게 되자, 사이러스의 눈과 휘안토스의 미소와 아 킨의 색을 가진 그 남자를 보게 되자, 아킨은 방금 전에 아무것도 모르는 채 막연한 희망과 절박함을 담아 행했던 위험한 마법이 남 아 있을 지금, 이렇게 아킨의 몸과 힘이 아킨의 의지 아래에 있지 않은 지금, 예전의 그 의문이 다시 치솟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연 관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고, 결코 연관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불안함도 치밀어 오른다. 그런데 그 때 옆에서 그림자 하나가 다가오는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그 곳에는 니왈르도보다는 작지만 훨씬 더 아름답고 우아한 늑대가 있었다. 역시나 금빛 눈동자이기는 했으나 보라 빛이 방사상으로 섞여들어 이상할 정도로 신비로운 느낌이었다. 니왈르도가 손을 뻗자 늑대도 방금 전의 그가 그러했듯 여자로 변했 다. 검은 머리카락에 늘씬하고 하얀 피부를 가진 미녀였으며, 니왈 르도와는 달리 훨씬 더 온화하고 친절해 보였다. 여자가 입술을 열 어 물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시나요. -아무래도 브라키니언 족속의 마법사 칼리반스가 보낸 전령인 듯 하 군....그냥 낯선 소년이야. "아닙니다." 그 단호한 답에 니왈르도의 눈이 더욱 차갑고 오만하게 빛났다. 지독 하게 거만한 남자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과연- 그렇게 물어 보면서도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오만하게 자신하며, 상대가 무슨 말 을 하든 자기가 믿는 대로만 믿을 것이다. 아킨은 한 번 더 힘주어 말했다. "절대 아닙니다." 남자가 입술을 심술궂게 비틀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의 마법으로 온 몸을 덮고 있지는 않을 것 아닌 가, 젊은 늑대......정말 브라키온 칼리반스의 하찮은 전령이 아닌가? "전혀 모릅니다, 그런 자는." -어디에 누가 있나요, 니왈르도- 여자가 다시 묻자, 니왈르도는 부드럽게 말했다. -스카디아, 그대 눈에는 보이지 않아. 그 지저분한 브라키니언의 마 법사가 이계에서 불러 낸 거요. 점점 더 알 수 없는 소리만 한다. 아킨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알 수 없는 말은 그만하십시오.....! 저는 그런 사람은 모릅니다." 니왈르도가 웃어젖혔다. 웃음이 어둠 속으로 퍼지고, 그 웃음에 응답 하여 숲 곳곳에서 울부짖음이 환호하듯 터져 올랐다. 아킨은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검은 그림자들이 곳곳에서 솟아 나오고 있었고, 붉고 하얗고 파란 안광이 사방에서 활활 타올랐다. 니왈르도가 달려와 아킨의 멱살을 움켜잡았고, 드디어 '접촉'이 일어 났다. 양팔에 낀 팔찌가 타들어 가는 듯 뜨거워졌고, 순간 니왈르도의 찬란한 금빛 눈이 빛났다. 날카롭게 솟은 송곳니가 번득이고, 그 목구멍 안에서 으르렁거림이 터져 올랐다. 집어삼킬 듯한 어마어마 한 포효가 터진 것도 순간이다. 크르렁--! 니왈르도가 외쳤다. -자, 이계에서 온 전령아! 당장에 돌아가 너를 보낸 마법사에게 말해 라! 나, 니왈르도는 이 세계의 죽음 따위는 믿지 않는 다고. 그리고 이 마지막 잔은 나의 것, 얻고 싶다면, 가지고 싶다면! 그렇다면 내 게 직접 와서 빼앗아 가보라고! 무슨 소리.... 순간에 빛나는 둥근 원이 아킨을 둘러싸며 그려졌다. 그 안에서 빛이 솟구치고, 그것이 아킨을 휘감았다. 빛의 난무에 지독하게 눈이 부 셔와 아킨은 눈을 감았다. 팔이 타들어 가는 것 같더니, 갑자기 누 군가가 그의 손을 움켜잡아 당기는 것이 느껴졌다. 니왈르도의 눈이 더욱 사납게 타올랐다. 그러나 입술은 잔인하게 웃 고 있다. 팔목을 휘감던 손길의 느낌도 사라진다. 아킨은 이 난폭한 상대와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았다. "놔--!" 아킨은 그의 팔을 세게 뿌리치고는, 그가 주춤하자 발을 날려 그의 가슴을 걷어 차 버렸다. 워낙에 갑작스레 당한 일이라, 그렇게 덩치가 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스카디아-그 검은머리의 여자가 달려와 그를 급히 부축했고, 니왈르도는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즐거워 미치겠다는 듯 웃으며 아킨을 보았다. -맙소사 스카디아, 어쩌면 저 꼬마는 우리의 일족인 지도 모르겠 군...... -방금 이계라고 하셨잖아요. -그야 몸뚱이가 다른 곳에 있으니 그렇지.....하지만 그곳에서 불러온 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그 말이 더없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이건 '실제 상황'이다. 꿈 따위가 아니야! 무책임과 망각으로 끝나는 지독한 악몽이 아니라, 방금 전에 행한 마법이 이끌어 낸 아킨으로서는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가혹한 재앙이었다. 니왈르도가 휙하니 빠르게 다가왔다. 그의 두 팔이 아킨의 어깨를 움 켜쥐었고, 그의 눈동자는 아킨의 눈동자 깊은 곳을 바라보았다. 온 몸이 떨려왔다. 두려움과 강한 거부감- 그 컴컴하고 차갑고 단단 한 것들이 가슴속에서 꽉꽉 뭉치고 있었다. 이 접촉은 끔찍했다. 만 나선 안 될 것을 만난 듯 하고, 이대로 잊어야만 하는 끔찍한 진실 과 조우하고 있는 기분이다. -너 역시 만월의 아들이구나. "닥쳐--!" -진실이 코앞에 있건만 무엇을 부인하나. 어디서 어떻게 컸는지 모르 나, 그리고 어찌하여 이계의 달이 너의 온 몸에 스며들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너는 우리의 아들이다. 만월의 아들, 겨울성의 수호자.....! 얼어붙어 가는 아킨의 눈을 보며 니왈르도가 더욱 잔학하게 웃었다. 끔찍한 취미다. 두려워하고 거부하려고 버둥대는 상대를 계속 구석으 로 몰아넣으며 즐거워한다..... -왜 너의 근원을 거부하는 거냐. 돌아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너의 가족, 너의 일족의 품으로 오는 것은.......안 그런가, 젊은 늑대! 더 참고 듣기 어려웠다. "손 떼-!" 그리고 그가 뭐라 말하든 아킨은 더 이상 듣지 않았다. 빠져나가야 한다, 라는 생각만이 천둥치듯 강하게 든다. 니왈르도의 손아귀가 점점 실체감을 갖기 시작하며, 드디어 그의 손 톱에 살이 찔리며 따끔한 고통까지 느껴진다. 방금 전까지는 그저 쥐고 있는 '힘'만이 느껴졌을 뿐이고, 아킨역시 그에게 '힘'만을 썼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실체감이 있다. 안의 살과 뼈와 체온을 느 끼게 하는 그런 실체감이! 순간 팔목이 화끈해지는 것 같았다. 니왈르도의 팔에서 주춤 힘이 빠 졌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아킨은 그의 손을 후려쳐 떨쳐냈다. 등 뒤에서 솟구친 뜨거운 흐름이 아킨을 휘감아 당긴다. 달빛이 사 라지고, 니왈르도의 잔인한 눈빛도 사라지고, 주변에 순식간에 가득 차는 것은 컴컴한 '무'의 공간이었다. 그의 손목을 누군가가 움켜쥐고 있는 듯 했지만, 그저 힘만이 있을 뿐 느낌은 없었다. 그리고 그 때였다. "아키, 아키냐! 맙소사, 아키로구나!" 순간 아킨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것은 어이없게도 바로 베이나트의 목소리였다. 아킨은 급히 그를 불렀다. "베이나트, 지금 어디 있는 거죠? 베이나트!" 그러자 어둠 속에서 그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외치는 듯 들려왔다. "그야 말로 내가 할 말이다. 너 어디 있는 거냐." "방금 대체 뭐였습니까!" "역시나 내가 할 말이다, 아키야. 너 혹시 최근에 이상한 마법 쓴 적 있냐?" 아킨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상대편에서 아무 답이 없자 소리를 내어 답했다. "네. 은봉인에 적힌 성문자로 마법을 쓴 적이 있었습니다." "뭐야--!" 귀가 찢어져 나갈 듯한 외침이었다. 아킨은 간신히 눈을 꾹 감아 그 소리를 참고는, 저 쪽이 잠잠해지자 급히 물었다. "그런데 방금 그건 대체 뭡니까. 그 사람은......대체 누구죠?" "신경 쓸 거 없다." "그 사람은 분명 저를 봤고, 저를 잡았어요!" "이계끼리의 접촉은 순서대로 이어지는 게 아니다. 한번 접촉하면, 그 다 음 접촉 순간은 그 과거가 될 수도 미래가 될 수도 있는 거다. 이계와 이 계사이에 놓인 공간은 혼돈이고, 아무런 법칙도 없으니까. 그러니 걱정 하 지 않아도 된다. 그가 너를 제대로 찾을 확률은 아득할 정도로 희박하니까." 아킨은 소름이 끼쳤다. 유령이라도 본 기분이 아닌가. "그나저나 지금 어디에 있는거냐, 너. 탑에 있는 건 아닌 듯한데....." "암롯사입니다." "아니, 그곳에는 왜 갔어?" 꽤나 놀란 목소리였다. "가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제 손으로 해결해야 해서.....가야 했습니다." "무슨 일인데?"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죄송합니다."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저 쪽에서 그가 어떤 표정일지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그리고 풀이 잔뜩 죽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복잡한 일이냐?" "아주...복잡한 일입니다." "돌아올 수 없을 정도로?" "모르겠습니다." "좋아, 그렇다면 내가 그곳으로 가겠다. 암롯사....그러니, 산 파로이로 가야 하는 거냐?" "오지 마십시오." "아키--" "오지 마십시오. 아니, 자켄에게도 말하지 말아주시고....자켄이 알게 된 다면 절대 도우러 오지 말라고 전해주십시오. 제가 제 손으로 해결해야 하 는 일입니다." "아키야, 네 힘으로 해결 할 수 없는 일에 구태여 어렵게 매달릴 필요는 없잖니." "아니, 제 힘으로 해결할 수 없으면....만약 지금 당신이나 자켄의 도움 을 받게 된다면, 저는 또 이런 처지에 놓일 것입니다. 제 힘으로 해야.... 그래야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대체 뭐기에 이러는 거냐!" "베이- 당신이 정말 좋은 분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아무리 그 러셔도 말씀 드릴 수 없어요....죄송합니다."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그리고 아킨의 팔목을 잡고 있던 힘이 스르르 풀리며 사라졌다. "네 뜻이 그렇다면.....좋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마법은 쓰지 말아라. 지금은 우연히 내가 비슷한 일을 하고 있어서 너를 찾아낸 것이지만, 다 음에 또 이런 일에 이런 행운이 있을 거라고는 보장 못한다. 알겠지?" 그리고는 아무 말도 없었다. 아킨은 그가 '다시 일이 잘못 되는 듯 하면 달려오겠다.' 라는 말을 해 주지 않은 것에 감사했다. "일이 끝나면....찾아뵙겠습니다." 베이나트는 아무 답도 없었지만, 아킨은 그가 분명 들었을 거라 믿었다. 캄캄한 어둠은 고요와 함께 계속되었고, 아킨은 분명 어디론 가로 흘러 가고 있었다. 노 없는 작은 배 위에 누워 있는 듯, 아킨은 어디로 어떻게 흐르든 괘념치 않고 그 흐름에 몸을 맡겼다..... 꿈인 듯 어둠인 듯, 잠결인 듯 뚜렷한 듯, 그리고 현실인 듯 환각인 듯 앞이 가물가물 했고, 그 흐릿한 시야에 흠뻑 젖어 눈물을 떨 굴 것 같은 푸른 눈이 아킨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인다. 유제니아? 무어라 말해야 할까...하지만 한마디라도 꺼낸 다면 이 우울한 몽상과 환상이 산산 조각나 버릴 것만 같았다. 이 달빛 이글대는 몽상, 그리 고 미쳐버릴 것 같다. 그래서 눈길을 돌려 다시 어디에 떠 있을 지도 모를 만월을 찾았다. 어 디에 있지도 않지만 어디에나 있는, 저 컴컴한 하늘에 박혀 세상을 침울 하게 바라보는 창백한 빛 덩어리- 밀려드는 고요와, 그 고요보다 더욱 진한 슬픔에 온 영혼이 떨리고 있 었다. 길고 고된 여행을 한 듯 진하고 무거운 피로가 밀려들어왔다. 잠 시 불어온 바람에 눈을 떴던 그는 이제 다시 눈을 감고 싶어졌다. 땀에 젖어 차갑고 축축한 손이 볼에 와 닿았다. 감겨오는 눈에 다시 푸른 눈동자가 다가왔고, 눈이 완전히 감기는 순간에 따뜻한 입술이 이마에 닿았다. 웃으려고 했지만 정말 웃었을지는 모르겠다. 어둠이 밀려들어온다. 차갑고 깊은 어둠, 그리고 조금 길게 지속될 것 같은 어둠이-- 언제 새벽의 빛이 다가올지 모르는 그런 어둠이. ********************************************************************** 작가잡설: 이제 이계까지 가서 찍히고 돌아와 버린 아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36장 *************************************************************** [겨울성의 열쇠] 제170편 만월의 왕#3 *************************************************************** 완전히 정신이 들었을 때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빛으로 가득 찬 아침 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유제니아를 찾았지만, 그녀는 어디에도 없었고 그것이 아킨을 안심하게 했다. 무엇이 현실인 지는 잘 알지만, 눈 뜨자마자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까만 비구름이 찢기듯 흩어지며 붉은 아침노을에 물들어 있었고, 창 아래의 바다는 온통 금빛 붉은 빛으로 가득 차 넘실대고 있었다. 비에 젖어 번들거리는 바위위로 온통 햇빛이 부서져 눈부셨고, 그 위 로 차가운 파도가 부닥치며 하얗게 끓어오른다. 잠에서 깬 아킨은 한동안 그런 창 밖을 바라보았다. 방을 둘러보지도 않았고, 어디에 있는 것일까...하고 한 순간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날이 밝았구나, 오늘 날씨는 아주 싸늘하지만 화창하겠구나― 그 렇게만 생각했다. 하늘은 깨어질 듯 푸르고, 차가운 비가 씻어 내린 공기는 정말 투명할 것이다. 그 깨끗한 수평선 너머로 드문드문 까만 섬들이 보였고, 더 먼 곳에는 대륙도 흐릿하게 보인다. 순간 어디선가 날개가 빠른 새가 푸드득 날개를 치는 소리가 들렸다. 밖에서 들리는 소리는 아니다. 차가운 침묵을 견디지 못한 그것이 바로 옆에서 몸을 움직인 것이다. 고개를 돌리니, 그를 물끄러미 보 고 있는 자주빛 매와 마주쳤다. 날카로운 부리를 살짝 벌리고 무심 하게 아킨을 바라보던 그것은, 아킨과 정면으로 마주치자 놀란 듯 날아올랐다. "......" 아킨은 눈길을 돌려 아침 햇살이 내리꽂히는 창 건너를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방금 날아올랐던 매는 누군가의 팔위에 날개를 접고 앉아 있었다. 반대편 손이 빛 속으로 나와 매의 턱을 어루만져 주었다. "좋은 아침이구나, 아키." 휘안토스였다. 화가 확 치밀어 오를 거라 생각했었는데, 정작 그와 마주하게 되니 가슴 속이 한번 출렁이긴 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담담하다. 전날에 분노와 어둠 속에 다 쏟아 내 버린 것만 같고, 나머지도 방금 전 에 해맨 그곳에서 모두 집어던져 버린 것만 같다. "1년 만이네, 휘안토스." "정확하게는 열 넉 달이지." 순간 구름이 해를 덮은 듯 빛이 휙 꺼져들었다. 빛이 눈부셔 잘 보이 지 않던 휘안토스의 모습이 옅은 어둠 속에 오히려 선명하게 떠올 랐다. 휘안토스가 다가왔다. 부드러운 카펫 위를 밟는 발자국소리는 아킨이 오히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기에 단단한 돌을 밟는 것 보다 더욱 선명하게 들리기만 한다. 겨우 1년이었지만, 소년의 1년은 그냥 1년이 아니다. 휘안토스는 아킨이 자란 만큼 자라 있었다. 키는 커지고, 어깨도 좀 넓어진 것 같다. 소녀처럼 보일 정도로 곱던 얼굴선도, 이제는 남자 티가 난다. "그래, 그 동안 잘 지냈나?" "그럭저럭." "다행이구나." 누가 본다면 그저 오랜만에 만난 형제의 인사라 생각할 테지. 하지만 조금만 주의 깊게 본다면 얼마나 싸늘한 분위기인지 알 것이다. 둘은 한 걸음 떨어져 있었고, 손을 내밀거나 고개를 기울이지 않은 채 그렇게 대면하고 있었다. 휘안토스와는 언젠가는 최악으로 다시 만나게 될 거라 생각했지만, 이건 생각보다 더 최악이었다. 아니, 악몽도 이런 악몽이 없었다. 휘안토스가 물었다. "어떻게 알고 찾아 온거냐, 아키?" "느껴졌으니까." 휘안토스의 눈이 커진 듯 했지만, 이내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이상한 기분이군.....설마하니 '그런 것'도 느껴질 줄 몰랐다." 아킨은 드디어 열이 확 치받아 올라왔다. 이마가 뜨끈해지며, 눈시울 이 화끈해졌다.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냐고 외쳐봐야 헛소리. 그래 봤자, '그래서 뭘?' 이라는 답만 들려 올 것이고, 정말 그 말을 듣고 난 후 제 정 신일 자신이 없었다. 그는 당연한 말은 당연하게 무시하는 인간이고 , 그것은 언제나 잔인한 짓이다. "그래, 어디서부터 온 거지? 오자마자 그렇게 쓰러질 정도라면...." "울파논." "굉장하군......상으로 뭘 줘야할지 고민될 지경인데." 아킨은 망설임 없이 말했다. "유제니아." 갑자기 나온 그 말에, 휘안토스는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무슨 소리냐 그건." "말 그대로야. 형이 가진 것을 줘." 휘안토스는 아킨이 대체 왜 이런 말을 하는 지 이해 못하는 듯 했다. 그러나 그 태연한 표정이라는 것이, 다시 속을 끓어오르게 했다. 저런 얼굴로 내게 칼을 들이밀었었다. 저런 얼굴로 탈로스에게 나를 집어 던져 던졌을 테고, 역시나 저런 얼굴로 케올레스와 아버지에게 '아키를 찾지 못했습니다.' 라고 말했을 테지. 그가 아킨을 그렇게 만들어 놓고 괴로워하는 것도 우습지만, 저렇게 철저하게 무관심한 것은 차라리 절망적이었다. 얼어붙을 피라도 있 는지 궁금하다. 휘안토스가 말한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그 애를 좋아하니까." 휘안토스는 이번에는 좀 놀란 것 같았다. 그러나 비웃거나 하지는 않 았고, 정말 순수하게 놀라고 의외라는 눈빛과 함께 미소를 지었다. "의외 군. 나는 켈브리안 공주일 거라 생각했는데." 누구이든 무슨 상관일까. 이제는 누구를 어떻게 생각하든 아무런 소 용없다. 네가 지금 나를 다 망가뜨렸으니까. "아키, 미안하지만 그 애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돌려보낼 예정이었다. 그 애를 돌려보내기 위해 그런 말을 하는 거라면.....다른 것을 권하 겠다." 하찮은 자비. 그 뒤에 숨은 몇 배의 잔혹함. 그래, 이래서 너와는 상 대하고 싶지도 않았어. 너는 절대 변하지 않을 테고, 그것은 모조리 나를 향한 자괴감과 너를 향한 질투심만 불러일으킬 뿐이니까. 너 는 괜찮은데, 너는 그렇게나 당연한데, 그리고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데.....왜 나는 정 반대일까. 그렇게 쓸데없는 한탄과 분노만 하지. 그 아무것도 남지 않는 부스러기같은 것들....하찮은 것들. 아킨이 말했다. ".......그리고 언제든지 다시 데리고 돌아올 테지. 그 애가 돌려보내 달라면 다시 돌려보내 줄 테고, 다시 생각나면 데리고 오고.....그렇게 마음대로 반복할 테고, 그 틈틈이 무슨 짓을 할지는 안 봐도 뻔해." 순간 구름이 걷히며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방안은 순식간에 환해졌 고 빛은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왔다. 아킨은 더 이상 휘안토스와 마 주하기 싫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태연한 얼굴 표정을 보면 속이 뒤집어 진다. "그리고.....그 아이를 네게 주면 뭐가 달라지는 데?" "세르네긴의 여자와 동생의 여자는 틀리지." 휘안토스의 눈길이 멈춘 듯 했다. 아킨은 그의 기분과 생각을 아직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고, 그것이 지금의 그를 꽤나 불쾌하게 했다. 어떤 감정이든, 휘안토스의 감정이 느껴진다는 것 자체가 끔찍하기 만 하다. 그 몸서리쳐지게 차갑고도 메마른 감정들에, 그리고 그것 이 향했던 상대가 바로 유제니아와 자신이었다는 것에 대해. "별로 기분 좋은 말은 아니구나." "진실은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잖아. 세르네긴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는 모르겠지만, 그 일에 유제니아를 끌어들이지는 마." 휘안토스는 별 다른 변명은 하지 않았다. 아니, 휘안토스에게는 인간 대 인간의 일에 있어서 변명이란 없었다. 휘안토스는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동생이 어떤 꼴인지, 어머니가 얼마나 피폐해져 있는지,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 단 네 살이 되던 해에 모두 다 알고 받아 들였던 인간이다. 아니, 어쩌면 그 때부 터 진실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모조리 증발해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 그래서 지금 정확한 진실을 말해도 별반 감흥이 없이, 너무도 태 연하게 이 상황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 지나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휘안토스를 잘 아는 아킨이 먼저 말했다. "조건이 있다면 무엇이든 말해." "암롯사로 돌아와라." "........" 어차피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었지만, 한숨이 나오는 건 별 수 없었 다. 휘안토스와 매일 마주할 테고, 아버지의 아래에 들어갈 것이다. 모든 것은 그들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이며, 그 안에서 아킨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 길밖에 남 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아는 아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아키, 이것으로 거래는 끝내자. 그 아이는 돌려보내든, 데 리고 있든......이제부터 나는 아무 상관도 하지 않겠어." "고마워." 그러나 정작 고마운 건 하나도 없었다. 준다, 그리고 대신 암롯사로 돌아와라. 뭘 하든 네 마음이다? 너 때문에 또 산산조각 나 버렸다. 가질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소중 했던 추억이,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망가져 쓰레기통에 처박혀 버 렸고, 이제는 그리워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으며 기억되는 것조차 끔찍한 덩어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더 열 받는 것은, 네 가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는 거야.... 휘안토스가 말했다. "어쨌건 돌아와서 기쁘구나, 아키." 아킨은 휘안토스를 돌아보며, 그대로 주먹을 날렸다. 빠악--! **************************************************************** 작가잡설: 그래도 한방은 갈겼다...-_-;;;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36장 *************************************************************** [겨울성의 열쇠] 제171편 만월의 왕#4 *************************************************************** 베이나트는 어그러진 마법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원래는 둥그렇 게 그려 놨지만, 누가 땅자체를 찌그러뜨린 듯 여기 저기 이지러지고 울퉁불퉁 튀어나와 엉망이었다. 베이나트는 머리를 긁적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탈탈 털었다. 그러나 그러다가 낮은 바위천장에 머리를 부딪쳤다. 아파 죽겠다고 몸을 돌리다가, 이번에는 불쑥 튀어나온 바위에 무릎을 찧고 말았다 . 큭, 하고 신음을 삼키며 그는 겨우 허리를 숙이고 몸을 오므려서 그 굴의 구멍을 빠져나갔다. 굴 입구에 드리워진 휘장을 치우자, 이제는 넓고 높으며 평평한 방이 나타났다. 바위는 잘 깎여 있고, 그 중앙에 긴 기둥도 서 있었다. 한 구석에 화려한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고, 그 앞에는 휘어진 다리를 가진 우아한 대리석 테이블이 놓여 있다. 베이나트는 그 위에 놓여있는 병들을 보며 눈을 찌푸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와 마주하는 방향에 몸을 눕혀 앉는 긴 의자가 놓여 있 었고, 그 위에는 푹신한 방석과 함께 보라색 덩어리 같은 것이 축 늘어져 있었다. 베이나트는 쿵쿵 소리가 다 나도록 발을 세게 찍으 며(그래봤자 바닥에 푹신하고 두툼한 알브로이 곰 가죽이 깔려 있 어 먼지만 날릴 뿐이었지만) 그 덩어리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그것 이 꿈틀 움직이더니, 그 끝에서 얼굴하나가 슬쩍 솟아 나왔다가는 다시 아래로 축 늘어졌다. "어이, 좀 깨라." 약간의 효과는 있어서, 그 쪽은 아주 하기 싫어 미치겠다는 표시를 풀풀 내며 느릿느릿 돌아누웠다. 그러나 그렇게 나무늘보에 육박하는 부지런함을 보일 지라도, 얼굴은 갸름하고 눈매는 뚜렷한 굉장한 미남이었다. 타는 듯 붉은 머리카락을 허리를 넘어 무릎까지 닿도 록 기르고 있는데다가 아주 매끄러워서 몸을 일으키자 붉은 물이 쏟 아지듯 의자와 바닥으로 넘쳐흘렀다. 그러나 그런 그는 해파리처럼 축 늘어진 채로 베이나트 옆에 있는 테이블을 가리켰다. "갖다 줘." "술 마시지 마." "물이야." "아, 술 냄새가 풀풀 풍기는 참으로 이상한 물이군." "먹어 보면 알아." 그리고 혀를 쏙 내밀고는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인다. "......" "줘." 순간 베이나트는 울화가 팍 치밀어 올랐다. "이제는 좀 깰 때도 되지 않았냐, 팔루시온 팔로커스! 일어난 지 일 주일이 되도록 아직도 비몽사몽인 게 말이 되냐고! 네 놈 일이 아 니라도, 나는 할 일이 천지인 바쁜 몸이란 말이다." 그러자 팔로커스는 칭얼대는 것도 피곤하다는 듯 축 늘어지며 말했 다. "난 이 백년을 내리 잤고.......깨려면 좀 더 기다려야해. 저어기.....저 거 주면 안 돼? 잠이 확 깰지도 모르잖아...하아아함..." "안 돼." 말이 끝나자 남자는 꾸벅 꾸벅 졸기 시작했다. 베이나트는 그의 멱살 을 잡아 앉혔지만, 그는 다시 풀썩 쓰러졌다. 이대로 놔두었다가는 지치도록 잔다는 것을 아는 베이나트는 그를 붙잡아 흔들었다. "일어나 있으나 자고 있으나 도움 안 되기는 매 한가지인 녀석을 왜 구태여 깨워야 하는지 모르겠다, 정말." 팔로커스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는 말했다. "그러니까....내가 늘 말하잖아......일 생기며언....그냥 지이랑....같이 이야기하고.....끝내라고." "그럴 수 없으니까 그렇지, 이 자식아!" "없으면 되게 하는 거야, 비키." "죽을래! 그 이상한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팔로커스는 잠시 베이나트를 물끄러미 보더니, 그것마저도 피곤한 듯 다시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베이나트는 화가 나서 그를 잡은 손을 탁 놓았고, 남자는 그의 손에 서 그대로 미끄러져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그러나 바닥에 깔린 카 펫과 양털이 워낙에 푹신해서 별 타격도 없었고, 남자는 외려 그 바닥에 늘어붙으며 다시 잠을 청했다. 베이나트는 기가 막혀서 그의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가 제정신인 기간은 실제로 얼마 없으며, 한 5-60년 이 상태로 흐 느적거리다가 회복되면 그 기간은 좀 멀쩡하다가도 어느 날 느닷없이 우울증에 걸려서 사고를 치고 다닌다. 그리고 그것은 2-300년 마 다 한번씩 정기적으로 있는 일이니 그와 지에나는 그 때가 되면 팔로커스를 찾아가 설득하는 대신 조용히 뒤통수를 가격해 20년가 량 재워버리곤 했었다. 그러나 지난번에 이 녀석이 친 사고는 그 동안의 사고에 비해 그 규모가 지나치게 웅대했고, 결국에는 세계의 수호자중 하나였던 펠톤으로부터 엄청난 분노를 사야 했다. 당장 짐 싸들고 나가라고 펄펄 뛰는 것을 빌고 빌어서 제 정신 돌아올 때까지 재우는 것으로 해결을 보았지만, 그 때만 생각하면 베이나 트는 현기증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이 백년 간 자느라 피곤했던 건 아는데 이번 일인 일이 일이라 네가 제 정신 차려야 해." "....아하......" 베이나트는 기가 막히다 못해, 이제 그를 자근자근 밟아 없애버리고 싶을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올랐으며 이놈을 죽여 살려, 하는 원초적 고민까지 덩달아 해야 했다. "차라리 당장 지에나를 불러오는 게 낫겠군." 그러자 팔로커스는 손가락을 척 쳐들더니, 그 맞은편에 뚫린 굴을 가리켰 다. "저기, 저기로 가면 되....저기 가면 바로 지이에게 전화할 수 있어." "이상한 단어 좀 쓰지 말아다오. 자면서 무슨 꿈을 꾸는지 모르겠다 니까." 팔로커스가 엎드린 채 큭큭, 킬킬, 우헤헤헤 웃어대기 시작했다. 슬슬 베이나트가 지치고 짜증나고 화가 치밀어 올 무렵 그가 눈을 번쩍 뜨고는 말했다. "그런데 저기, 비키. 네 엘프 여자친구는 아직도 살아 있니? 이름 이.....이데나였나...아니, 가만 그건 내 여자친구였나? 아닌데......어 쨌든 굉장히 예뻤던 것 같은데......여튼, 아직 살아 있니?" "헛소리 그만 나불대고 내 말이나 진지하게 들어다오." ".....야, 대체 무슨...일이기래...이러는....거야" "우리 말고 우리 세계에서 온 녀석이 하나 더 있을 지도 모른다." 팔로커스가 그제야 몸을 바로 눕혔다. "여자야, 남자야?" "미안하지만 남자 같다." 그 말이 끝나는 즉시 약간의 흥미를 보였던 팔로커스는 다시 눈을 척 감았다. "일 다 끝나면 불러." "팔, 로, 커, 스." "울적하고 칙칙한 남자는 너 하나로도 충분해......미소년이 오던 미청 년이 오던 너처럼 영 안 생긴 인간이 굴러 오던....남자는 진부해. 싫어. 짜증나. 여자, 미소녀....아, 열 네 살 정도면 좋겠는데......그래, 열 네 살. 이야말로 너무나 근사한 나이지. 지이도 늘 그 나이 또 래로 있으면 참 행복하겠는데.....비키, 너도 지이가 그렇게 매일 매 일 아줌마로 있는 건 싫지? 응? 좋아, 나중에 그렇게 우리 둘이서 동시에 말하는 거야. 지이도 들어줄 거야. 으흠....아아, 생각만 해도 잠이 깨는 군." "......." 아직도 비몽사몽, 저것은 말이 아니라 거의 잠꼬대 비슷한 헛소리다. 그렇게 흐느적흐느적 대는 팔로커스의 귀를 붙잡아 올리며 베이나 트는 버럭 외쳤다. "그런데 그게 니왈르도 같단 말이다-!" 순간 팔로커스의 몸이 확 굳었다. 정말 잠이 번쩍 깬 듯 그는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그 변태자식?" "다른 놈이랑 헷갈리는 것 같은데, 좀 괴팍했다 뿐이지 변태는 아니 었어." "아니, 라키언 족의 그 자식은 정말 변태였단 말이다! 아아, 내가 그 자식을 설득하러 갔을 때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너도 알잖아! 그 녀석 꿈만 꾸면 지금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니까....나는 남자 는 너무 싫다고!" 베이나트는 지금 팔로커스가 누구를 말하고 있는 지 대략 짐작이 갔 다. 그리고 동시에 이 팔로커스가 헷갈리고 있다는 것도 깨달았으며, 그 녀석이었으면 이 놈이 언제나 멀쩡할 것 같아 차라리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그리고 자다가 벌떡 일어난다? 다음에 한번 써 봐야겠다). "그건 세샤티우스고, 내가 말하는 그 녀석은 라키언이 아니라 펜리키 언이었다. 알잖아, 만월의 왕. 다섯 바위의 주인이자, 열 개의 성 문 자를 가진 마법사. 알지?" 그제야 알았다는 듯 팔로커스가 씨익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마누라가 예뻤던 그이?" "......" 이런 놈하고 그렇게 피 터지게 싸웠던 쿼크 대제와 그 일곱 기사에게 진심으로 동정이 가는 베이나트였다. **************************************************************** 작가잡설: 이 총각이 누구냐믄........20장 초반에 잠시 이야기되었던 그 어둠의 마법사, 카람파의 살해자, 결국에는 펠톤까지 분노 시 켰던.....그 놈입니다.....핫핫;; 어중간하다는 건 언제나 슬픈 일이군요. 거대규모의 독자들로부터 추앙숭배받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높은 소수의 인정을 받는 것 도 아니고. 이러다 보니 양 쪽에서 꽤나 만만하게 보는 군요... -_-; 거 참...혼자서 하는 일이야 최선을 하지만, 이건 혼자서 할 일이 아니니....애매하군요.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37장 *************************************************************** [겨울성의 열쇠] 제37장 은빛 길 제172편 은빛 길#1 **************************************************************** "열흘?" 휘안토스가 반문하자 아킨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적어도 그 이상은 넘지 않을 테고, 일찍 끝나면 바로 돌아오겠어." "도망치거나 하지는 않겠지." "언젠가는 도망칠 지도 모르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야." "번거롭지는 않겠군." 그 아무렇지도 않게 던지는 무심한 말이 주먹이 꿈틀 움직이게 했지 만, 아킨은 당장 일어나 후려치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휘안토스에게는 그런 방법을 쓴다는 것 자체가 지나치게 하찮아 보였 다. 감정적으로 날뛰면 날뛸수록 몰린다. 그는 그럴수록 상대를 경 멸하고, 경멸하는 만큼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무언의 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폭력이 그 무엇으로도 그를 이길 수 없는 자가 막다른 골 목에 달해서 내지르는 마지막 방법이란 것을, 그럼에도 승자는 자신 이 될 거라는 것을 이 형은 너무나도 잘 안다. "좋다, 열흘......그리고 세르네긴을 찾아갈 생각인가?" "그래." 휘안토스의 차가운 눈빛이 정수리에 닿는 듯 했다. 맞서고 싶지 않아 서 아킨은 그저 눈길을 먼 곳으로 돌렸을 뿐이었다. "너도 참 한심한 녀석이구나." "상관하지 마." "한심한 건 한심한 거다, 아키. 나는 네가 네 선만을 지킨다면 네 것 에는 손대지 않는다." "싫어." "어차피 이제부터는 내 옆에 있어야 할 텐데, 네가 가질 수 있는 것 은 모두 가지는 게 좋잖아." 아킨은 그를 한번 더 후려쳐 버리고 싶었지만, 그래도 참아냈다. 너는 대체 어디까지 잔인해지려는 걸까- 휘안토스가 말했다. "나와 똑같아 지는 게 싫어서 그러는 거냐." "닥쳐." "진지하게 말하는 거다, 아키. 나와 똑같아 지는 게 싫어서 원하는 것 을 포기하는 건 그냥 바보짓이야. 가지고 싶으면 아예 가져버려." "......" 그렇게 아킨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휘안토스는 나른한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부터 정확히 열흘이다. 그리고 그 아이를 어떻게 할지는 알아서 정해라. 상관할 바 아니니." 먼저 태어났고, 먼저 축복 받았고, 먼저 사랑 받았고, 그렇게 먼저 모 든 것을 얻어 버렸는데- 그런데 왜 이 잘난 형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아킨이 손을 뻗었던 것을 눈앞에서 산산조각 내 버리는 건가. 온 세상이 너를 보호하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혼신을 다해 너를 사랑 하고 있는데, 겨우 나 하나에 네가 무너질까. 내가 너에게 눈 돌린다 해서, 네 모든 것이 송두리째 바뀌어 버릴까.....아니, 내가 원했던 것은 그저 어머니의 추억과 아버지의 증오와 너의 손아귀에서 벗 어나 평온하게 지내는 것 뿐이었는데. 그런데 너는 왜 그렇게 자비 한줌 없이 산산조각 내 버리는 거지- 그렇게나 태연하게, 그렇게나 무감각하게, 그렇게나 잔인하게. "아키-" 유제니아는 아킨이 그녀가 머무는 방에 오자마자 달려왔지만, 정작 그녀가 다가오자 아킨은 자기도 모르게 옆으로 주춤 물러나 버리고 말았다. 그 모습에 유제니아의 발걸음이 뚝 멈추었다. 분위기는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서로 두어 걸음 떨어져서, 유제니 아는 행여나 아킨이 무슨 말을 할 지 몰라 두려워하고 있었고, 아 킨은 무엇부터 말해야 할 지 몰라 망설이고 있었다. "저기..." "형과 이야기했어." 휘안토스의 이야기가 나오자, 역시나 유제니아의 얼굴이 더욱 새파래 졌다. 그러나 아킨은 최대한 편안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오늘은 곤란하니, 내일 바로 출발하자. 세르네긴에게 데려다 줄게." "세냐는 지금 제도에 있어." "그럼 그곳으로......" "조금만......조금만 나중에 가면 안되?" 유제니아의 떨리는 말에 아킨은 고개를 저었다. "너를 휘안토스 옆에 오래 있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일단 이곳을 떠나 제도로 가는 길목에서 며칠 머물고 천천히 가자. 그건 괜찮아." 유제니아는 말로는 제대로 답하지 못할 듯하자 고개만 끄덕였다. 아 킨이 말했다. "유제니아, 소용없다는 건 알지만, 형이 한 짓에 대해서는 내가 대신 사과할 게." "아키가 용서받을 수 있을 리 없잖아. 잘못한 게 없는데." "대신 사과하는 거야." "아니, 아키가 조금이라도 휘안토스라는 친형을 사랑한다면....그러면 그 사과는 당연히 받을 수 있어. 하지만 아니잖아. 그러니까 아무 소용없는 거야." "....."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갑자기 답답해지며 지독하게 피곤해진다. 유제니아가 말했다. "하지만....와 줘서 고마워, 아키." "일이 그렇게 된 것 뿐이야." 유제니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키가 그 때 오지 않았다면, 정말 다 포기하고 여기 주저앉아 버렸 을 지도 몰라. 그래서....정말 고마워. 아키가 구해준 것은......아주 많아." "유제니아..." "그 때 너무 무서웠어. 그냥, 그냥 너무 무섭기만 했어.....끔찍하고 비 참하고, 그리고 무서워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어....나는......정말 그렇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에게는...정말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계집애 하나였으니까." 유제니아의 눈이 흔들리더니, 다시 눈물이 흘러나왔다. 얼어붙은 듯 조용한 가운데 그 눈물이 바닥에 툭툭 떨어지는 소리도 소름끼치도록 선명하다. "다시는 휘안토스를 잊을 수 없을 거야. 그를 보든 보지 않든.....그는 언제나 내 뒤에서, 내 옆에 바로 옆에서 숨을 쉬며 나를 보고 있을 것 같을 거야.....지금도 너무 무서운 걸. 아키, 내가 바보 같은 거야? 응...? 나는 이렇게 비참하고 끔찍한데 왜 그.....는 왜 그렇게 태 연한 거야! 대체 왜--! 그러니 내가 잘못한 거야?" "유제니아, 제발....다시는 그럴 일없을 거야. 다시는- 내가 약속할 게." 그렇게 말하며 아킨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유제니아의 어깨에 손 을 얹어 주는 것뿐이었다. 행여나 휘안토스에 대한 기억 때문에, 전날에 그랬듯 손을 뿌리치고 도망치지는 않을까 했지만 유제니아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왔다. 눈물이 아킨의 가슴을 적셔왔다. 지독한 뜨거움이었다. 생살을 뚫고 나와 심장을 찌른다. 아무 것도 되돌릴 수 없고, 그렇다고 잊을 수도 없다는 것에 답답해진다. 그 러나 이런 데도 미움 받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할 말은 해야 하는 자신이 싫다.... "하지만 복수하겠다거나....하는 생각은 하지마." 유제니아의 떨림이 멈칫 멈추었다. 지독한 기분이다. 이 딴 말이나 해야 한다니. "내가 대신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할 테니까, 위험을 무릅쓰지는 마. 차라리 어디로든 도망치고 숨어 줘." "아키-" 분노해도 분노를 풀 힘이 없으면 참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대가 너무 고약하다. 도저히 뭘 해 볼 수가 없는 상대 아 닌가- 그래도 적어도 남은 인생은 소중한 법이니까, 비록 아프게 금 이 갔다 할지라도 강해지면 버틸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라도 무너 지지 않고 남아주기를 바라는 것이 지금의 아킨이었다. 그런데 유제니아가 말했다. "하지만 세냐가 알면......." "......유즈..." 그리고 다시 눈물이 흐른다. 그녀는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고, 곧 닥쳐올 미래이기도 했다. 너무나 당연 한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아킨 자신도 충분히 어찌 될지 예상하고 있는 일이었으니까. 아킨은 그럴 리 없다고 헛된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절대 그럴 리 없 어, 하고 순간을 달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나중에 받을 상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당분간은 그도....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울 거고, 아마도 서 로를 바라보는 눈빛에 또 상처받고 말 거야. 미워할 상대는 분명하 지만, 그 상대를 어떻게 할 수도 없고.....그 상대가 고약할 정도로 태연하다면, 그러면 결국 미워할 상대는 자기 자신이 될 테지......" 내가 그랬으니까- 언제나, 아버지나 휘안토스와의 일이 끝나고 남는 것은 미워할 것은 자신밖에 없는 아킨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머니를 잃었을 때와 똑같이, 책임과 슬 픔의 경계선에서 아킨은 책임의 선 밖으로 떠밀리고 있었다. "하지만 유제니아, 세르네긴은 강하고.....너도 강해. 그러니까 그를 괴 롭게 하지 않기 위해 너 혼자 분노와 두려움을 안고 살지는 마. 그는 네 가족이고, 얼마간 미워할 대상을 찾지 못해 자기를 학대할 지 도 모르지만.....결국에는 너를 위해서 버텨낼 거야." 그리고 아킨은 그녀의 두 손을 잡아 입술 가까이 가져갔다. 땀과 눈 물에 젖은 손은 차갑고 축축했지만, 그 손을 잡은 아킨의 두 손은 끓는 듯 뜨거웠다. "그리고 내가 부탁할게. 잊게 해 줄 수는 없지만, 그래도.....그래도 부 탁할게. 네가 나를 찾아내고 내가 너를 찾아냈던 그날 이후.....너는 언제나 작지만 유일한 빛이었어. 네가 내 옆에 있어 줄 수조차 없다는 것을 아는 데도 바보같이 그렇게 생각했지.......그러니 유제니 아, 그렇게 너는 소중하니까.....제발 나를 슬프게 하지는 말아 줘. 제발-" 너만은 어머니처럼 망가지지 마, 유제니아. 그렇다고 아버지처럼 매 정해 지지도 말아 줘. 옆에서 지켜볼 수도, 네가 내 옆에 머물며 내게 기대 줄 수도 없겠지 만, 그리고 지금도 슬프지만, 화가 나고 억울하고 안타깝지만, 유제 니아라는 존재 자체가 껍데기만 남고 사라진다면 그건 더 끔찍해.... "아키....." 이제는 눈이 젖은 것은 아킨 자신이었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지 말고, 그냥 내 옆에 있어 달라고 할 수는 없는 걸까. 내가 대신 지켜줄 테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줄 테니까, 그러니까 돌아가지 말고 내 옆에 머물러 주면 안 되는 걸까. 그렇게만 해 주면 무엇이든 해 줄 수 있을 텐데, 할 수 있으면 하고 할 수 없으면 어떻게든 되게 할 텐데. 그저 네가 옆에만 있어 준다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정작 말하고 싶은 건 이것들인데, 지금 전혀 거꾸로 말하고 있다. 그런데 잔인한 형 휘안토스, 너는 이것을 느껴줄까. 이 찢겨나가는 심정을, 이 참담한 심정을.....내가 너를 느끼듯 너 역시 나를 느껴 줄까. -가지고 싶으면 아예 가져버려. .....그래, 어쩌면 그것이 '아킨이 무엇을 생각하는 지 느낀' 그의 배려 인지도 모르겠다. 휘안토스다운 배려, 잔인하고 차가운 배려. 그리고 이 앞에서 아킨은 비참해 질 수 밖에 없었다. **************************************************************** 작가잡설: 지난 번에 무슨 일이 있었냐면......좀 머리가 멍~ 해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좀 심한 일이었다는 것만은 분명하고, 그런 일을 당하리라고는 그 일이 터지는 1분 전까지 전혀 모르고 있었거든요. -_-;; 그러다 보니 말이 좀 그렇게 나왔습니다.......;; 어쨌건 제가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은, 언제나 저 자신에게 냉정해지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지금 하고 있는 일 자체에 최대한 성실을 기하고 있다는 겁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37장 ************************************************************** [겨울성의 열쇠] 제173편 은빛 길#2 *************************************************************** 휘안토스는 턱을 만져보았다. 다른 건 다 같을지 몰라도, 아킨은 주먹 힘만은 휘안토스의 그것과 격이 틀리다. 그 한방에 어금니가 한대 나갔고, 겨우 이틀 전의 일 이라 아직도 욱신거린다. "열흘이라..." 휘안토스는 아킨이 말한 날 수를 입 속으로 말해 보았다. 열흘이면 그리 긴 시간도 아니고, '그 일'을 시작하기에 적당하기도 하다. 게 다가 드디어 손안에 들어온 동생이니, 자칫 실수라도 해서 또 도망 쳐 버리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이번에 그 녀석이 도 망친다면, 다음번에는 정말 손쓰기 어려운 괴물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아킨에게 차라리 유제니아를 가지라 말한 것도 그 때문이다. 지켜야 할 소유물이 생기면 나머지는 그 다음순위로 물러나는 것이 순리다. 휘안토스에 대한 자존심도, 사이러스에 대한 증오도, 자유 롭고 싶다는 욕망도, 모두 차선으로 물러날 것이다. 그렇게,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아킨은 무엇이든 희생해 줄 것이다. 아킨은 늘 빼앗기며 살아왔고, 그 때문에 지켜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지나치 게 완고하다. 일이 커지면 예리하게 살피며 도박을 걸지만, 그렇게 작고 섬세한 일에 대해서는 아이처럼 약하기만 하다. '자신'을 걸 고 하는 일에는 대범하지만, 다른 이를 거는 것에 대해서는 그 상 대가 약하면 약할수록 아무 것도 못하게 되어 버린다. 어차피 아킨의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가둘 생각은 애당초 없었다. 아 버지는 그렇게 했지만, 휘안토스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또, 그러면 외려 더 단단해 지는 녀석이다. 다룰 수 없을 정도로- "녀석....." 물론 어찌 할 지는 아킨이 정할 바이지만, 되도록 다루기 편하게 있 어 주는 편이 좋을 텐데. 세르네긴과 자신의 문제가 변질되는 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지 만, 어쨌든 좋은 쪽으로 갈 수 있는데 그 자존심 때문에 되는 일을 억지로 돌릴 생각은 없다. 그리고 아킨 역시 휘안토스에 대한 자 존심을 접고, 세르네긴에 대한 자존심도 접고, 그저 원하는 것 앞에 서 솔직해 지기를 바란다. 나쁠 것 없지 않은가. 원하면 가지는 것이 고, 가질 수 있을 때 놓치면 안 되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당연한 일 아닌가- 그러는데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역시나 마르실리오였다. 그는 휘안토스의 얼굴을 살피더니 힘없이 말 했다. "죄송합니다." "단 둘이 있는 상황에서 맞은 거다. 형제끼리 주먹이 오고 갈 수도 있지." 그러나 어금니가 날아간 것은 형제끼리 주먹 찜질한 결과라고 보기에 는 조금 중상이었다. 아킨의 주먹이 조금만 세거나 방향이 달랐다면 턱이 날아갔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지금처럼 여유부릴 수만도 없다. 휘안토스가 말했다. "베로크 황자는 어떤가." "곧 출발하실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휘안토스 님을 뵙고자 하십 니다." "알겠다." 휘안토스는 욱신거리는 턱을 몇 번 누르고는 자리를 나섰다. 성의 귀빈실에 있는 베로크 황자는 역시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 있 었다. "어, 어제 소동이 있었다고 들었소. 어찌 된 거요." 휘안토스는 한숨이 나왔다. 별 일 아니라는 것을 평소의 본인이라면 뻔히 알 텐데, 이렇게 신경 이 예민해져 있다 보니 그 정도 일에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날카롭게 구는 것이다. "동생이 왔습니다. 그러나 동생을 못 알아본 기사들이 칼을 들이댔고, 동생이 별로 점잖은 성격이 아니라 주먹을 날린 것뿐입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베로크 황자의 마른 얼굴에 신경질 적인 경계가 떠올랐다. 휘안토스는 조금 부어 있는 턱과 터진 입술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 얼굴에 이 정도 상처를 내고도 그렇게 조용히 끝날 수 있는 사람 은 제 아버지와 동생뿐입니다." "당신에게 동생이 있다는 건 처음 들어서." 휘안토스는 이제 이 베로크 황자에 대한 기대를 접기로 했다. "분명 있습니다. 황자 정도 되는 분이 설마 모르셨습니까." "오, 오래 전....죽었다고 들었소." "별 소문이 다 돌았군요. 하지만 제 동생 아킨토스 프리엔은 지금 멀 쩡하게 잘 살아 있습니다. 보고 싶으시다면 보여 드리지요. 어제 그 아이가 쓰러지는 바람에 소개 해 드리지는 못했습니다만......" "아니오. 괜찮소." 이 상황에서 그래도 보고 싶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휘안토스에 대한 무례였다. 휘안토스가 말했다. "곧 출발하실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나는....아직 안심하기는 이르다고 생각하오." "제 아버님께서 바르젤에서의 친정을 경고하셨습니다. 암롯사에서 눈 치챘다는 것을 알린 이상, 델 카타롯사가 함부로 움직이지는 못할 것입니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오. 나는 언제라도....언제라도 위 험에 빠질 수 있단 말이오. 내 형이 그랬듯!" 마법사의 문제인지, 아니면 이 베로크의 문제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정말 그렇게 겁날 일인지 휘안토스로서는 어떤 이유에서이든 만족 스럽게 그를 바라보기 어려웠다. 약간은 무시하는 눈빛을 보였을 지 도 모르고, 어쩌면 한숨도 쉬었는지도 모르겠다. "당신의 안전은 전 제국의 안전이기도 합니다. 저희는 최선을 다해 당신을 도울 것입니다." "내 형이 어떻게 죽었는지 몰라서 하는 말이오? 정말 아무도 모르는 방법으로 죽지 않았소--!" "베로크 황자, 저는 마법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베로크 황자가 노골적으로 신경질을 냈다. 그러나 휘안토스는 차분하 게 말했다. "누가 더 강하고 약한지 정도는 알지만 말입니다." "하, 과연 그럴지 모르겠군." "베로크 황자, 그 숨겨진 황자의 정체를 당신만이 알고 있을 거라 생 각하지는 마십시오. 에크롯사나 베넬리아의 첩보망은 벌써 당신이 알고 있는 것만큼 알아챘을 것입니다. 물론 두 나라 다 델 카타롯사 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직접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당신은?" "저 역시 최근이긴 하나 알고는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믿어!" 정말 한심할 지경이다. 방금 전에 암롯사 왕가에 왕자가 몇 인지도 몰랐던 주제에. 그래도 휘안토스는 인내심을 가지고 차분하게 말 했다. "전하, 휴거인 황자전하의 일에 대해서는 저 역시 애석해 하고 있습 니다.....하지만 그것은 아무 준비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벌어진 일 이라 그런 것뿐입니다." "절대 아니오. 당신이 몇 천, 몇 만의 군사로 나를 감싸준다 해도....... 그 마법사를 막을 수는 없단 말이오." 휘안토스는 이해했다. 그냥 칼로 찍어도 막을 수 없는데 마법사를 막 기는 더욱 어려운 것이 상식이다. 뿐만 아니라 제도 자체가 혼란한 상황이다. 그것이 겉으로 터지지 않는 것은 베로크 황자를 찾고 휴거인 황자의 장례를 치르느라 미처 터질 틈도 없기 때문이다. 어 쩌면 필리나를 급히 결혼시키든가 수도원에 있는 시실리온을 끌고 나올 생각들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휘안토스에게도 방법은 있었다. "전하께서 걱정하는 마법사보다 더 강한 마법사가 당신을 지킬 거라 면 믿어 주시겠습니까." 순간 베로크 황자의 눈이 확 커졌다. 얼굴이 해쓱해지고, 어깨와 손 도 놀라움에 떨렸다. 그러나 그것은 공포라기보다는 기쁨에 가까운 놀라움이었다. "누가 있겠소." "탈로스 고르노바." 베로크 황자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왕자, 최고 마스터는 다른 나라에 봉사할 수 없소! 아무리....제국의 일이라지만 당신은 암롯사의 왕자요." "방법이 있습니다." "설마 죠세피나 여왕께서....도와주시는 거요?" "비슷합니다." 휘안토스는 길게 설명할 생각은 없었다. 그 어중간한 답에도 베로크 황자는 충분히 안도했다. 그런 그의 얼굴을 살피며 휘안토스는 진짜 중요한 말을 꺼냈다. "곧 출발하도록 하지요." "탈로스 고르노바가 내 옆에 있다는 확신이 없는 한 나는 움직이지 않겠소." 휘안토스는 가볍게 손뼉을 쳤다. 순간, 창 밖에서 검은 그림자가 휙 솟구치더니 창 밖으로 거대한 날개를 펼친 검고 큰 새가 나타났다. 방 안이 순식간에 어둑해졌고, 오싹한 어둠과 등골 시린 두려움이 안으로 확 퍼지는 듯 했다. 베로크 황자는 순간 후닥닥 일어나다 가 의자를 넘어뜨리고 말았다. "어, 어떻게....!" "분명 방법이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어쨌건 당신이 충분히 안전해 질 때까지 당신을 지켜드릴 테니, 이제 안심하고 황도로 떠나 즉위 하십시오." 그렇게 말하고는 휘안토스는 선착장 쪽에 명령을 내리기 위해 일어났 다. 베로크 황자는 아직도 멍하게 창 밖의 큰 새를 보며 저것이 정말 탈로스 고르노바가 보낸 것인지 믿어지지 않는 다는 듯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경이로운 마법임에는 분명했고, 휘안토스가 함부 로 탈로스 고르노바의 이름을 들먹일 리도 없었다. 그런 베로크 황자를 보며 휘안토스는 이 일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끝나기를 바랬다. 일전에 카람파의 노예들을 빌려주며 탈로스가 약 속했던 세 가지 부탁을 이런 기회에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적어도 그 덕에 일이 쉬워지기는 했다. 또, 만약 이것이 국정에 관련된 일 이라 탈로스가 서약에 금내는 결과를 불러일으킬 지라도 죠세피나 여대공은 너그러이 눈감아줄 것이다. 그녀로서도 중요한 일이 될 테니. 지금 사분오열 된 제국을 다시 재통일하여 제대로 된 황제로 등극하 는 것은 어린 시절에나 꾸어보는 망상일 뿐이다. 근 이 백여 년을 다른 나라로 살아 왔는데, 이제 와서 통일하겠다고 설치는 것은 바 보짓인 것이다. 칼리토 대공왕도 그것을 모를 정도의 바보는 아닐 것이다. 헤로롯사 까지는 몰라도, 에크롯사와 카를롯사까지 정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마도 암롯사와의 전쟁에서 이기는 것까지가 그의 최선이 될 테고 , 그 왕이 제정신이라면 거기까지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 후 에, 카를롯사와 에크롯사는 베넬리아와 로메르드와 연합하여 델 카타롯사에 맞설 것이다. 암롯사는 예전처럼 돌아가지는 못해도 언 젠가는 다시 나라를 찾을 테고. 그러나 그 즈음에 델 카타롯사는 벌써 서부의 패자가 되어 있을 것이 다. 델 카타롯사가 바라는 것은 바로 그것, 툴칸과의 무역로를 독 점하고 나프로부터의 공물을 제대로 받아낼 수 있고, 나실론과 산 파로이를 차지하여 제국으로 나갈 수 있는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그저 점잖은 꿈으로 끝나게 하는 것이 지금 휘안토스 의 할 일이었다. 그 무모한 델 카타롯사의 왕 칼리토를 시작도 되기 전에 압박해야 한다. 그러나 휘안토스는 칼라하스 공주를 떠올리면 그 전망이 그리 밝지도 않고, 지금 이렇게 한다 할 지라도 길게 가지도 않을 거라는 예감도 들었다. 암롯사의 협박 정도로 그만둘 수 있는 일이라면 애당초 시작도 하지 않았을 테니. 그래서 지금 하는 일이 잘 끝난다 할 지 라도 더 이상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 안심할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이제부터가 '시작'이 될 지도 모른다. 물론, 아무리 나중에 그리 된다 하더라도 이번에는 보답이 있을 테지 만- 휘안토스는 지금 같은 성 안에 있는 동생을 떠 올리며, 그 '충분한 보답'에 대해 오늘 밤에 충분히 생각하고 아버지께 보고하기로 결 심했다. **************************************************************** 작가잡설: 로드릭이 사악하다면 휘안은 악독하달까요. --; 어쨌건 그는 지난번의 한방으로 어금니가 나갔습니다.........그리고 '날리려면 앞니를 날려 버리지...'하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당연히 계실...테지요? .....(;;) 아무리 악역이라도 미모는 유지해야 하는 법입니다;; 앞니면...치명타입니다. 치명타;; 훗- 하고 사악한 웃음을 날리는 순 간 검은 구멍 하나가 보인다면.....그 순간 겨울키의 장르는 바뀝 니다....(상상하지 마세욧! 어허, 어허!) 그나저나 하이텔의 VT모드가 없어지는 군요. 이거 뭐랄까...... 예전에 대학원 박사과정인 친구하나가 03학번 신입생 면접에 교수님 도우러 갔다가, '이분은 약대의 원로중 한분이신 96학번 *** 옹이시 다.' 라고 소개되어 대략 충격에 시달렸다더군요. 제 기분이 딱 그래요. -_-;;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37장 ************************************************************** [겨울성의 열쇠] 제174편 은빛 길#3 ************************************************************** 아킨은 일부러 출발시간을 밤에 가까운 새벽으로 잡았다. 아무의 눈 에도 뜨이고 싶지 않았고, 한 시간이라도 빨리 떠나 버리고 싶을 정도로 지긋지긋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바다 위에서까지 서두를 생각 은 없었기에 마법사는 당연히 타지 못하게 했고, 배를 운항해 줄 최소한의 선원만 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정도의 사람이 타는 것도 싫었지만, 그렇다고 티라 섬을 거치는 상선을 이용할 수도 없 고 해서 별 수 없었다. 섬을 떠나며, 아킨은 내내 갑판 위에 있었다. 마흔 정도 되어 보이는 선장은 듣고 온 것이 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아킨 역시 그에게 아무 말도 걸지 않았다. 그렇게 앉아 있으니, 바람은 쌀쌀하고 거칠었다. 구름이 두텁게 끌려 있었지만 동쪽 끝은 아직 구름에 덮여 있지 않아 피를 뿌리듯 벌겋게 달아올라 있다. 파도는 솜씨 없이 깎아낸 양 거칠었고, 그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아 외려 그 끝없는 속삭임이 오싹하도록 적막하기만 하다. 아킨은 난간에 등을 기대고는 그 적막에 온 몸을 맡긴 채 앉아 있었 다. 바람이 차갑게 목덜미를 스치고, 머리카락을 세차게 헝클어뜨 리고는 사라졌다. 돛대가 날개를 치듯 한번 크게 펄럭인다. 아킨은 붉은 빛이 퍼지는 동쪽을 등지고 뱃머리가 향하는 서쪽을 보 았다. 그 서쪽은 어둑한 어둠에 젖어 있었고, 어느덧 까만 그림자 같은 섬 몇 개가 수평선 너머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 몇 시간 더 가면 항구에 도착한다. 도착하면 제도까지는 금방 이다. 항구에서 출발하는 이툴리아 가도는 제도까지 직통으로 잘 닦여 있고, 마차를 타고 가면 사흘이면 도착할 테지..... "아키-" 아킨은 고개를 들었다. 유제니아가 얇은 보라색 숄을 걸치고 서 있었 고, 어둑한데 봐도 얼굴이 아주 푸석했다. "아직 멀었어. 도착하면 깨워줄게." "......같이 내려가 줄래?" 아킨은 잠시 말없이 유제니아를 바라보았다. 유제니아는 아킨의 답을 기다리기 힘들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는 바다 를 내려다보았고, 그러다가 곧 어깨를 움츠리더니 배 안쪽으로 달려 들어가 버렸다. 그제야 아킨은 갑판에 얼룩진 몇 개의 물 얼룩을 발견하고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제니아-!" 유제니아는 벌써 방문을 닫고 들어앉은 뒤였다. 문을 두드렸지만, 유 제니아는 문 바로 앞에 있는 듯 뚜렷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는 그런 말 안 할게." "힘들면 말 해. 괜찮으니까......유제니아, 우리는 친구잖아." 의미 모를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한참만에야 젖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제는 괜찮아." "유제니아 제발- 아무 말도 안 할 테니 들어가게 해 줘." 유제니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킨은 문을 열었다. 방안은 컴컴했고, 유제니아는 도망치려다가 아킨의 손에 붙잡혔다. "놔--!" 유제니아가 버럭 고함을 치고는 팔을 뿌리쳤다. 아킨은 문을 닫고는 빛을 떠 올렸다. 낮처럼 환한 빛이 방안에 확 퍼졌고, 아킨은 눈물에 흠뻑 젖은 유제니아의 얼굴과 마주했다. 순간에 한숨이 나오고, 화가 치밀어 오르고, 다시 휘안토스에게 돌아 가 주먹이라도 날리고 싶었다. 어둑한 갑판 위에서는 몰랐지만, 환한 곳에서 보는 그녀의 표정은 아 킨이 보기에는 참담했다. "미안, 아키...." 유제니아는 손등으로 눈물을 문질러 닦아냈다. "하지만....혼자 있으면 무서운 걸." "지켜 봐 줄 테니.....그만 자." 유제니아는 터벅터벅 걸어왔다. 아킨은 그녀가 침대 쪽으로 가는 것 이라 생각하고 비켜섰지만, 유제니아는 그의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 었다. 한참이나 그렇게 있었다. 유제니아는 무언가 아주 어려운 말을 하려는 듯 망설이고 있었고, 아 킨은 짐작할 수가 없어서 뭐라 말을 꺼낼 수도 없었다. 결국 유제 니아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녀가 앉자, 아킨도 침대 앞에 주저앉았다. "아키...?" "지켜봐 주겠다고 했잖아. 자."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킨은 침대에 기대고는 눈을 붙였다. 잠이 도무 지 올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유제니아가 편하기를 바랬다. 적어도 헤어지기 전까지는, 마지막이 너무 울적하지만은 않고 싶었다. 부스럭 소리가 들리고 이불을 덮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리고 유제니 아가 다가오는 듯 숨소리가 느껴지는 가 싶더니, 곧 조그만 속삭임이 들려왔다. "잘 자." "....." 눈을 뜨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리고 같이 속삭여 주고 싶었지만 입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고, 그것은 그렇게 하면 정말 어딘가가 터져 나갈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입술이 다가와 아킨의 볼에 닿았다. 바 닷바람에 식어 차갑고 촉촉했지만, 그래도 그 깊은 곳에는 온화한 온 기가 흐르고 있었다. 아킨은 고개를 돌렸고, 아직도 젖어 있는 푸른 눈동자와 마주쳤다. 까만 속눈썹에 반쯤 잠겨 있었지만, 그래도 그 눈동자만은 조용하게 아킨을 향하고 있었다. 조금 웃은 것 같았다. 입술은 시트에 가려 보이지 않아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눈만은 살짝 웃은 것 같았다.....아니면 제발 그래주기를 바랬기에 든 착각일까..... 예전의 그 고요한 호수 같던 평화와, 그 평화를 동경하던 아킨은 어 둠에 먹혀 버렸다. 이제는 분노하는 데에도 지쳐 버렸다..... 어느새 유제니아는 잠들어 있었다. 잠시 고요한 숨소리가 흐르는 가 싶었지만, 곧 악몽이라도 꾸는 듯 유제니아가 신음소리를 내더니 이불을 꾹 움켜쥐었다. 이마에 땀이 맺히고, 몸도 움츠러든다. 아킨 은 그 젖은 볼에 손을 얹고는 이마를 댔다. 거친 숨소리가 피부에 닿고, 손에 닿는 유제니아의 몸은 차고 끈끈했 다. "유제니아........" 모든 것이 처참하다. 어디선가 피비린내가 풍겨오는 듯 하고, 신음소 리와 고통에 찬 비명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고, 그렇게 지옥 같은 새벽일뿐이다.... 그저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아서 죽고만 싶고, 사라져 버리고만 싶 고, 온 세상이 컴컴하기만 하다. 언제나 모두에게 이런 의미만이 되어 왔다. 겨울이 다가오면 모두가 죽어버리고 얼어붙어 버리고 잠들어 버리듯, 아킨이 다가가면 모두 그렇게 되었다. 어머니도, 켈브리안도, 자켄도, 루첼도.....그리고 이 유제니아도. 상처주고 싶지 않아도 상처입어 버리고, 그들이 떠 난 자리에 남겨지는 것은 그들보다 더욱 상처받은 아킨 자신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밖이 부산스러운 것 같아 눈을 떴을 때에 벽 틈으 로 하얀 햇살이 스며들어오고 있었다. 아킨은 유제니아를 깨우기 위해 고개를 돌렸지만 그곳에 유제니아는 없었다. "유제니아-!" 놀라 벌떡 일어나자, 어깨를 덮고 있던 담요가 툭 떨어졌다. 아킨은 문을 벌컥 열고는 갑판으로 달려갔다. 그러다가 파이프를 피 우고 있는 선장과 마주쳤다. 선장은 눈웃음을 짓고 있다가 아킨이 나오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곧 선착장에 도착할 겁니다, 왕자님." 배에 탄 후에 선장이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갑판으로 나가니, 구름이 반쯤 걷혀 곧은 햇살이 한참 쏟아지고 있었 다. 늦은 아침이라 가을햇살임에도 따갑고 뜨거웠다. 아킨은 햇살을 등지고는 뱃머리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벌써 항구안에 들어서고 있었다. 바다는 어제의 그 깊고 탁한 빛이 아닌, 얕고 푸른빛이었다. 주변에는 온통 소란한 사람들의 외침이 들려왔고, 정박한 수많은 배들 위로는 구름의 그림자가 얼룩졌다. 그리고 아킨은 뱃머리에 서 있는 유제니아를 발견했다. 거친 바닷바 람에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과 치맛자락은 날개를 치듯 날리고 있 었고, 하얀 손은 등 뒤에 맞물려 있었다. 아킨은 서두르지 않았다. 잠시 서서는 그런 그녀를 보고 있었고, 유 제니아의 손가락이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다듬으려 할 때에 그는 그녀 옆에 서 있었다. "아키-" "언제 일어났지?" "....조금 됐어." 유제니아는 머리카락에 얹혔던 손을 내리고는 아킨을 바라보았다. 푸른 눈 위로 햇살이 가득 쏟아져 빛나고 있었고, 눈물이 마른 하얀 볼과 투명한 핑크 색 입술에는 흐릿한 미소가 스며들어 있었다. 유제니아가 말했다. "곧 도착한대." 아킨은 조금은 편안해졌다. 부드럽고 따스한 깃털이 등 뒤에서 그를 조심스레 안아주는 듯한, 그런 편안함이 조금이나마 다가온 듯 했다. 아직 지친 듯한 유제니아의 목소리에는 그래도 겨울을 지새운 두터 운 나무 둥치 속에 차오르는 봄물처럼, 그 안에는 분명 촉촉하고 따 뜻한 생기가 있었다. 봄의 자그마한 새싹처럼 온화로우며 사랑스러 운 것이었으며, 그것은 희망의 상징이자, 예고이며, 약속이었다. 아직 은 아무 것도 장담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아직은 살아 있는 것이다..... 이제는 어찌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최후의 순간에 모든 것은 너무도 그립고 따뜻하게 보이기만 하는 건지 모를 일이다. 끝 끝내 남는 미련, 결국에는 아킨의 옆으로 돌아오는 이 잔혹한 따스함.. ..이것들이 아킨을 완전히 자포자기하지 못하게 하고, 결국에는 삶 으로 돌아오게 한다..... 이것 역시 바로 그런 희망... 그러나 아직은 찬바람은 거세고, 이 여린 싹은 그 바람이 조금만 거 칠어도 금세 얼어붙고 시들어버리고....죽어 버릴 것만 같다. "도착하면......곧바로 그에게 갈 수 있을 거야." "세냐에게?" 아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제니아는 아직도 세찬 바람에 머리카락을 맡기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머리카락 끝이 스친 듯 그녀가 움찔 눈을 감았다. 아킨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걷어냈다. 잠 깐 감았던 진한 푸른 눈이 떠지며 그를 향하고, 놀란 듯 입술이 살 짝 벌어지며 무어라 말하려 했다가 곧 닫힌다. 다가간 것은, 그렇게 확인하고 확인시켜주고 숨었던 감정의 실체를 먼저 만들어 내 버린 것은 아킨이었다. 뜨겁지도, 따뜻하지도 않았다. 그저 차고 여린 입술이 입술에 닿았고, 그 너머에는 놀라움과 슬픔 이 담겨 있었다. 놀라움은 유제니아였고, 서글픔은 아킨의 것이었으 며, 그 안에서 자신의 또 다른 슬픔을 찾아낸 것은 유제니아였다. "어째서...." 그 작은 속삭임이 들려왔을 때 아킨은 입술을 뗐다. 흠뻑 젖어 떨리 는 그 두 눈동자에서는 아침햇살이 슬프게 흔들리고 있었다. 유제 니아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이고, 다시 몸이 가늘게 떨려오기 시 작했다. "나, 이렇게 아무 것도 못해 주는데.....난......" 그녀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 지 아킨은 알았다. "괜찮아." 아킨이 말했다.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 보다 많은 것을 해 주었으니까." "나.....쓸모없는 계집애 인 걸." "휘안에게는 그럴 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게 있어 너는 기적이었고, 나에게만 가치 있는 기적이었고, 너만이 줄 수 있는 기적이었어..... 그것만으로도 너는 내게 넘치도록 과분한 빛이야." 유제니아가 고개를 숙였다. 눈물은 계속 흘러 툭툭 떨어졌고, 손을 가져가자 그 손등을 적시기 시작했다. "미안...." 그리고 유제니아가 할 수 밖에 없는 그 단 한마디의 말이 아킨을 더 욱 슬프게 했다. **************************************************************** 작가잡설: 아 따가, 아 따가와.....아따따따따~~~~~~ 제 잘못이 아닙니다! 모두, 모두, 모두! 저 간악한 흑조공주의 농간때 문에.....에, 저시기...머시기....무시기....으하하하하하....!! 아, 그리고....마천루 연재실 정리되었습니다. ^^;; 링크 하셨던 분은, 텅빈 화면에 경악하지 마시고 적힌대로 가시면 됩니 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37장 ************************************************************** [겨울성의 열쇠] 제175편 은빛 길#4 *************************************************************** 잠시 옆에 머물던 것을 돌려보내는 것은, 그것도 만나기 힘들고 잘 보이지도 않는 곳으로 보낸다는 것은 언제나 힘들다. 어머니를 그렇게 보냈고, 일전에는 자켄도 그렇게 보낸 것 같다. 베 이나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자켄도 언급 비슷한 것도 하지 않았지만, 아킨은 이제는 예상이 되고 있었다. 그래, 어쩌면 그렇게 보내는 것이 가장 현명할 지도 모른다. 눈앞에 서 그를 보내게 된다면, 자기도 모르게 붙잡을 지도 모른다. 자켄은 당연히 웃으며 '그럼 좀 더 머물지.' 하고 옆에 있어줄 테고, 연장 한 기간이 다 되면 아킨은 또 그를 붙잡을 것이다. 유제니아도 그래서 그렇게 보냈다. 그녀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아킨은 떠나기 전에 필요한 모 든 것을 해 두었다. 그리고 아킨은 배를 출발시키는 그 순간부터 아무런 희망도 남기지 않았고, 새벽의 컴컴함과 싸늘함 속에홀로 앉 아 아직도 삼키려 하던 미련을 하나하나 수장시켜버렸다. 거친 물 살이 뱃전을 두드리고 어둠 속으로 빛이 스며들며 주변의 윤곽이 어 슴푸레 떠오를 무렵에는 그 미련과 함께 남겨 두었던 흐릿한 희망 도 수장시키고 있었다. 더 이상은 헛된 것이라 판단했으니까.....유 제니아가 나온 것은 그 때였던 것이다. 기적은 그녀가 일으켜 주었다. 누구의 눈에도 뜨이지 않는 곳에서, 그녀는 아무도 오지 않는 곳으로 찾아와,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 에서 아킨을 발견해 그렇게 기적을 만들어 준 것이다. 숲을 빠져나가고 싶어지게 했던 것도 그녀였고, 어떻게든 밖으로 나 가야 한다 생각하게 만들었던 것도 그녀였으며, 이제 다시는 가고 싶지 않았던 그 가시덤불 속으로 뛰어들게 만드는 것도 그녀였다...... 그리고 '그 순간'에 말을 토해내고 안아 버린다면, 그가 떠나기 전에 했던 모든 것을 취소시켜 버린다면, 아직 한 걸음 남은 이 순간에 되돌아가 버린다면, 그러면 그녀는 눈물에 젖은 얼굴로라도 아킨에 게 안겨줄 것 같았다. 그런데 무엇이 두려웠던 걸까- 이대로 휘안토스에게 영영 얽매이는 것이, 세르네긴을 분노하게 한다 는 것이, 유제니아를 잃는 것이? 아킨은 완전히 혼자가 된 지금 자신이 무엇을 두려워했는지 분명히 알 것 같았다. 그것은 완전히 '포기하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여태까 지 버텨오던 저항을 꺾어 버리고 포기하고 무릎을 꿇는 것이었다. 매이고 의지하고, 그렇게 뒤엉켜 같이 흘러가 버리는 그런 힘없는 모습이 끔찍했던 것이다. 타협하고 거래하고 스스로를 똑같게 만들면 서도 어쩔 수 없다고 비겁하게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것이, 스스로 가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부여하고 가책을 달래는 그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휘안토스에게 그렇게 한번 굴복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나도 가질 권 리가 있다고 생각하며 그의 뜻을 받아들인다면 영영 그렇게 되는 것이다. 아킨 자신에게라면 몰라도, 그런 아킨의 운명에 유제나아까 지 끌어들이는 것은 싫었다. 아니, 그것은 지금 이 순간이 지나고 현실과 삶을 봐야 하는 때가 되면 둘 다 비참하게 만들 것이다. 시 작점이 뒤틀리면 끝까지 뒤틀리게 된다. 상처투성이가 될 것이다. 그러니 보내 주는 것이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게 해 주고, 돌아갈 수 있으면 있게 해 주는 것 이다. 할 수 있는데 욕심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은 죄다. 모든 것은 예정대로 되는 것이다. 처음 결심했던 대로, 그렇게- "소년-" 그 목소리에 아킨은 고개를 돌렸다. 누워있는 질경이 우거진 풀밭에, 석양빛 부서지는 하늘을 등지고는 어느 키 큰 여자가 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낯선 여자는 아니었지만, 이런 곳에 그녀가 있고, 그것도 '혼자' 있는 데다가 아킨에게 말까지 걸고 있다는 것이, 마치 바위나 물이 말이 라도 걸어온 듯한 놀라움을 주었다. 이름은 휠테스- 였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언뜻 들어서 거의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고, 한참 이나 뒤에 그녀가 직접 자신의 이름을 말했을 때에야 아--하고 중얼거렸다. 자신의 이름을 밝혀도 그녀는 아킨의 이름은 묻지 않은 채 그저 아킨의 몸을 훑어보았을 뿐이다. 은을 녹여 만든 듯한 은발머리카락은 물길처럼 바닥까지 흐르고, 그 녀가 입은 은빛 갑옷의 비늘은 그녀가 자리에 앉자 한꺼번에 찬란 하게 반짝인다. 그녀의 머리와 귀에 찰랑이는 장신구들이 자작나무 잎처럼 떨리고,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는 그런 자신의 고귀함과 아름다움을 잘 알고 있는 듯 당당하고 오만하다.... "어떻게......여기 계시는 겁니까." 그가 있는 곳은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질경이 우거진 언덕이었 고, 바닷바람이 거칠게 휘몰아치고는 있지만 온통 금빛으로 빛나는 석양의 하늘과 그에 물드는 두터운 구름들, 그리고 그 구름들과 같 이 흐르는 바다가 훤히 보이는 곳이었다. 그녀가 올 만한 곳도 아니 고, 아킨 자체가 그녀가 찾아올 만한 사람도 아니다. "세르네긴이 보낸 겁니까?" 그러자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베이나트는 그토록 오랜 삶을 살았지만 그가 간직하고 있는 것은 서 글픈 신비로움과 어그러진 듯한 기이함이었다. 이종족의 피를 물려받은 자켄이 간직하고 있는 것은 샘과 숲 같은 순 수함이었다. 그리고 완벽한 이종족이자 신과 가장 가까운 종족인 그녀가 간직하고 있는 것은, 제련된 금속같은 차가운 힘과 당당함이었다. 아킨은 어딘지 그녀의 이름이 휘안토스와 비슷하게 들린다고 생각했 고, 전혀 다른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돌로 만든 조각상인 듯 비슷한 존재같이 느껴졌다. 둘 다 강할 것이고, 둘 다 차가울 것이며, 그럼에도 둘 다 잔인하면서도 오만하며 당당할 것이다..... 그런 휠테스가 다시 웃음을 보였다. 속내를 다 보여주고 있는 듯하 고, 그래서 대체 자신이 무엇을 보여줄 지 몰라 두렵기까지 하다. 그것 역시도 휘안토스와 닮아 있었다. "소년, 네가 보낸 편지는 세르네긴에게 잘 도착했다." "다행이군요......세르네긴이 마법을 몰라 어찌 될까 걱정했는데..." "난 알고 있다." 휠테스의 눈빛에 이채가 돌았다. 호기심 어린 눈이고, 그 호기심은 너무나 금방 채워질 것이기에 아킨은 조금 불쾌하기도 했다. "그가 뭐라고 하던가요." "그답게 별 말 하지는 않았어." "다행이군요." "하지만 소년, 그래도 내가 그와 같이 한 이래 그가 그토록 분노하는 건 처음이야.....아니, 자신에게조차 처음일 테지. 알고 있겠지, 그는 언제나 말없이 분노할 뿐이란 걸.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도 터뜨 리지도 않지만....." 휠테스가 다가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마치 차가운 바위라도 가까이 오는 듯한, 그런 무감각- 그녀의 손가락이 아킨의 볼을 쓰다듬었다. 날카롭고 차가운 손톱이 볼을 스치자 따끔했다. "그는......슈마허 앞에서 밖에는 울거나 분노한 적이 없고, 그 소녀 앞 에서 밖에는 웃거나 기뻐한 적이 없어. 내 앞에서는 언제나 정지한 물처럼 고요한 모습만을 보여주지......그는 고요한 자야. 깊고 깊 은 샘물, 바위보다 더 단단하지만 투명한 수정 같은 아름답고 정갈 한 영혼.......그래서 나는 그를 사랑한다." 아킨은 그 말이 슬펐다. 아무 것도 모르고 이해할 수도 없는데, 슬픈 느낌만은 분명하게 전해 지고 동감하고 같이 느껴버리고 말았다. 그런 아킨의 눈빛에 휠테 스는 무언가를 찾아낸 듯 눈을 빛냈다. 은처럼, 달처럼......그렇게 차갑고도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리고 아킨 은 그런 그녀가 자신에게 세르네긴에 대해 말하는 의도를 알 것 같 았다. "저를 책망하시는 겁니까." "좋아하면 그대로 데리고 가 버리지 그랬니." "그게 옳았습니다." "하지만 너도 원했잖니." "그녀가 원하지 않았습니다." "확인했니?" "아닙니다." 아킨은 가슴이 따끔해져 오는 것을 느끼며 꾹 움켜쥐었다. "더 이상 비참하게 만들지는 말아 주십시오.......당신도 이런 것을 안 다면." "상관없어." 이것 역시 휘안토스와 닮아 있었다. 이상한 일이지.....이 거대한 영혼을 가져 섬세하게 흔들리는 감정에 무감동한 자와 인간인 휘안토스가 닮아 있다는 건. 대체 누가 비정 상인 걸까- 그녀의 손이 볼을 쓸고는 턱을 매만졌다. "'원하게 만들어 줄' 수도 있어." "그것 역시 비참합니다." 으흠---하고는 휠테스는 흥미롭다는 듯 아킨을 바라보았다. 이제 더 이상 이런 식으로 장난치지 않기를 바라던 아킨의 마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는 듯, 그렇게 감탄사 비슷한 소리를 내는 것이다. ".....떠나오는데 그가 묻더군. '휠테스, 제가 잘못한 겁니까?' 하고." "상대가 고약했던 것뿐입니다." "무슨 뜻이지, 소년?" "당신이라면 당신을 모멸한 자를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인간일 경우?" "당연합니다." 휠테스가 가만히 그런 아킨을 바라보더니, 무언가 알았다는 듯 눈썹 을 살짝 움직였다. "좀 더 말해주겠니? 나는 솔직히 그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거든." "세르네긴은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습니다. 그리고 휘안토 스 역시 같은 방식으로 갚아 준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공교로운 우연이었고, 결국 끔찍한 악연이 되어 상처를 남긴 것뿐이었다.... 해가 완전히 저물어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하늘은 이제 어둑어둑해 져 있었고, 등지고 있는 숲과 바다는 벌써 검게 물들어 있다. "그건.....가장 약한 부분을 부수어 버린 겁니다." 알아 들었을까? 아니, 다시 무엇을 물어볼까......그렇게 기다리고 있 는데 마침내 휠테스가 말했다. "그가 전해달라고 하더군. '만약, 그 아이를 돌려보내기 위해 그 분이 희생한 것이 있다면, 어떻게든 그 희생을 취소시켜 달라 하십시오.'" "싫습니다." "그렇게 답하면 이렇게 말해 달라 했어.....'유제니아에 관한 한 아무 것도 빚지고 싶지 않습니다. 특히 당신에게는.'" ".......그리고.....?" "'일이 그렇게 된 것이 제 책임이듯, 그로부터 유제니아를 지키는 것 은 저의 의무일 뿐입니다. 당신이 무엇을 해 줄 필요는 없고, 원하 지도 않으며, 하시겠다면 거부합니다.'" 아킨은 웃어버렸다. "그 사람답군요." "당연하지......소년, 그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었어. 어린 시절에는 귀 여운 누이동생이지만, 그 누이동생이 어른이 되면 언제든지 그녀를 누이에서 연인으로 바라볼 준비가. 그에게 그처럼 사랑할 수 있는 여자는 그 아이 뿐이다." 유제니아도 그런 걸까... 이제는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궁금했다. 미련은 다 떠내려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가슴에 남은 그것은 잊었다 말해도 잊혀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에게 전해 주십시오......당신이 뭐라 하든 말든, 그것은 제 일일 뿐이라고요." "희생은 너 혼자만의 문제가 아닐텐데." "휠테스 님, 제가 유제니아를 위해 희생한 것이 아니라, 제 싸움에 그 녀가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에게 보낸 것뿐입니다.....저는 아무 것도 포기하지 않았으니까요." "네 싸움?" 그렇게 반문하고는 휠테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는 오만한 웃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즐거운 것을 보는 듯한 유쾌한 웃음이었다. "소년, 말해다오....너의 이름을." "아킨토스.....아킨토스 프리엔." "언제나 기억해 주겠다, 아킨토스 프리엔......그리고 이것만은 알아다 오. 내가 용기사 이외의 인간의 이름을 인간에게 직접 묻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녀는 아킨의 이마에 키스했다. 달빛에 젖어 들어가는 듯한 조용한 입맞춤이었으며, 그것은 아킨이 이 여자- 휠테스라는 이종 족에게 처음으로 느낀 온기였다. "어떤 길이 오든 강하게 가기를, 그리고......돌아오기를 빈다...달의 왕자이자 겨울성의 죄수, 아킨토스 프리엔." **************************************************************** 작가잡설: ......세냐, 네 죄라곤 꽃 같은 용사님을 암롯사의 흑조백조 공주들 눈에 잘 뜨이는 곳에 놓아두고 말았다는 것 뿐. -_-;; ......그리고 또 연상에게 먹음직하게 찍힌 게냐, 아키야...-_-;;; 아, 저 휴가 갑니다. ^^V 일정은 아직 잡히지 않았지만....아마도 그냥 여기 저기 돌아다닐 것 같네요. 일이 이러니 담주 중에 글 올리기는 힘 들 것 같고.....아마도 금요일이나 토요일 경에 다음 편이 올라가겠습 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38장 *************************************************************** [겨울성의 열쇠] 제38장 푸른 탑의 노파 제176편 푸른 탑의 노파#1 **************************************************************** 암롯사의 가장 중요한 해군기지는 산 루에르고, 그 뒤를 잇는 산 바 르젤 요새는 규모면에서는 산 루에르에 미치지 못할지는 모르나 서 툴칸과 델 카타롯사를 바라보는 나실론 섬에 위치하여 두 적을 상대해야 하는 난감한 위치에 있는 곳이자, 베넬리아에서 델 카타롯사 로, 델 카타롯사에서 다시 암롯사로 주인이 몇 번이나 바뀌었던 내력 복잡한 요새였다. 그러나 루첼이 이런 바르젤 요새를 처음 보고 생각한 것은 '주변 경 관이 굉장히 삭막하다.' 정도였다. 워낙에 어린 시절부터 이런 저런 일을 겪어 왔던 그는 미리 긴장하는 좋지 못한 습관도 없었고, 그 유명하다 못해 이름만으로도 사람 오금 저리게 만드는 사이러스 대공왕과도 구면이었다. 또, 이런 저런 일로 그 두 아들과도 나름대 로 긴밀하다면 긴밀하다 말할 수 있는 사이가 되어 있었으니 지금 루첼에게 있어서의 가장 큰 고민은 '이렇게 말을 못 타는데 괜찮을 까' 뿐이었다. "울파논 출신이십니까?" 그를 마중 나온 기사가 그렇게 말하자, 그 의도를 뻔히 짐작하는 루 첼은 아주 정중하게 답했다. "롬파르 출신입니다." 그리고 그 답은 베넬리아 출신이라는 답과 별 다를 바 없는 결과만을 불러왔을 뿐이다. 기사의 눈이 '그래서 꼬락서니가 그랬군-' 이었다. 항구출신, 그것도 거의 배로 다니는 것이 일상인 베넬리아의 수도 울 파논 사람들은 말이라면 질색들을 한다. 그리고 아마도 내륙출신임에 분명한 이 기사의 머릿속에 있는 장사로 유명해진 '항구'란 울파논 과 별 다를 바 없는 모양새일 것이다. 항구라고 모두 울파논처럼 사 방이 운하로 뚫려 있는 건 아니다, 라고 말해봐야 구차해 질 것 같 아서 루첼은 그가 속으로 얼마나 어떻게 비웃든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어쩌다가-' 베넬리아에서 쾌속선을 타고 단번에 이 바르젤 요새가 있는 나실론 섬에 도착했을 때, 군항까지 마중 나온 것은 이 기사 한 명뿐이었다. 그리고 그 소년을 아무리 훑어보고 뜯어봐도 기사 견습생 정도라 고 밖에 볼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루첼을 마중 나온 것이 이 기 사가 처음 맡아보는 임무인 지도 모를 일이다. -전혀, 절대, 조금도 기대하지 말도록 해. 아무리 왕자인 휘안토스가 너를 추천했다지만, 그 왕과 왕의 마법사인 케올레스가 너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를 일이니까. 떠나기 전에 롤레인이 해준 말은 정확했다. 기사는 왕자가 추천한 마법사가 아닌, 케올레스의 비서라도 도착한 듯한 태도였다. 어깨도 넓고 가슴도 두툼한 체격을 가지고는 있었 지만 아무리 높이 쳐도 휘안토스보다는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은 소년주제에, 그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는 '바르젤 요새로 모시 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퉁명스럽게 말하며 끌고 온 말고삐를 던져 준 다음 앞장섰다. 그런데 루첼이 말을 타는 폼도 영 어수룩하니, 소년은 더욱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중이었다. 루첼은 한숨이 나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루첼은 다른 나라로 쏘다지니 못했다 뿐이지 그가 살아온 롬파르와 울파논은 전 대륙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도시들 중 하나였다. 살벌한 최전선의 기사에게 시골 취급당할 곳이 '전혀' 아 닌 것이다(그 반대라면 또 모르겠다). 그런데 그 소년기사가 불쑥 말을 꺼냈다. "아주 유명한 마법사님의 제자 분이라 들었습니다만." "꽤 유명한 분이지요." 그런데 갑자기 그 기사의 눈빛이 슬쩍 적대적으로 변했다. 뭔가 말하 려나 싶어 루첼은 말없이 기다렸고, 기사는 큼큼--헛기침을 하고는 턱까지 들며 엄숙하게 말했다. "사실, 그 분은 제 멀지 않은 친척분이십니다. 이런 말씀드리기 외람 되오나, 아무리 위대한 마법사 님의 수제자라 할지라도 케올레스 님을 무시하신다면 절대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경이 말씀하시는 것이 암롯사의 마법사이신 케올레스 님이 맞습니 까?" 소년은 아주 자랑스럽게 말했다. "맞습니다." "거 참, 헷갈리는군요. 제가 찾아온 것은 나이 지긋하신 마법사 분이 라고 알고 있는데, 경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보니 곱게 지켜드려야 하는 어디 레이디인 듯 합니다." 소년의 얼굴이 당장에 새빨개졌다. "무례합니다!" "충고하나 하자면, 제가 얼마나 어떻게 방자하게 굴던 그것을 다루는 것은 케올레스님의 일입니다. 기사 서임을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도 모를 정도로 새카만 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 죄송하지만 오히 려 케올레스 님의 체면을 깎는 짓입니다." 소년이 무시무시하게 노려보았지만, 루첼은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루첼에게도 어린 녀석이다. "케올레스 님 정도 되는 분이라면 스스로의 명예는 스스로 지켜야 한 다는 것 정도는 아는 분이라 믿습니다. 아랫사람들 불러다가 저 녀석 혼내주거라, 하는 건 쪼잔 한 소인배나 하는 짓이고 그럴 분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소년의 어깨가 들썩이는 것을 보았지만, 루첼은 역시 상관하지 않았 다. 어차피 저 정도 되는 기사 하나 때려눕히는 것 정도는 루첼에 게는 일도 아니었다. "주, 주제넘게 나서지 말라는 말입니까!" "비슷한말이지만 그렇게 자학에 가깝게 앞서 나가지는 마십시오. 제 가 드릴 말씀은 저 역시 그 정도로 경우 없는 놈은 아니고, 경께서 그렇게 나오시는 것을 존중해 드릴 정도로 너그러운 놈도 아니란 겁니다." 소년이 있는 대로 으르렁 크르렁 대기 시작했다. 이래서 어린 녀석은 피곤하다...루첼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옆의 소년 기사가 씩씩대는 대로 내 버려두었다. 그러나 생각 모자라고 나서기 좋아하는 녀석이 이렇게 나서는 이유를 짐작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루첼은 롤레인의 제자이며, 롤레인은 바로 지금 이 요새가 코앞에 마주하고 있는 델 카타롯사의 마법사 악튤런 파노제와 동문이다. 까다로운 마법사들은 악튤런 파노제가 대마법사 컬린의 제자라고 하는 데에도 시큰둥한 반응들을 보일 정도 지만, 마법사들 세계에 대해 아는 바도 별반 없고 '컬린'이라는 이름만은 어린아이 동화 듣듯 들어왔던 기사들에게 루첼의 내력은 어 떻게 보면 저 방자한 악튤런과 '같은 편'으로 보이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예상은 하고 있지만, 이렇게 어린 녀석이 그런 말을 할 정도 면 다른 보통 기사들은 어느 정도로 루첼을 경계할지는 안 봐도 뻔 했다. 조금만 실수해도 당장에 패다 죽일 놈으로 찍히게 될 것이다. 게다가 루첼은 마법사이며, 호리호리한 체형이라 젊고 혈기 왕성한 기사들에게는 '빼빼 마르고 비리비한 놈'으로 보인다. 이렇게 시커먼 남자 바글거리는 곳이라면, 가는 곳마다 시비일 것이며 마 주치는 곳마다 비웃음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아아, 피곤하다. 루첼은 왜 암롯사와 관련만 되면 이리도 피곤해지는 지 모르겠다 생 각하며, 그러면서도 팔자려니 받아들였다. 요새 안으로 들어가니, 암롯사가 델 카타롯사를 향해 '전쟁' 비슷한말 도 꺼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는 꽤나 경직되어 있었다. 기사들은 무장하고 있었으며, 눈빛들은 예리하게 갈려 있었다. 요새의 각 탑에는 지금 이곳에 왕이 머물고 있음을 표시하는 왕기가 걸려 있었다. 포구는 모두 델 카타롯사를 향하고 있었고, 델 카타 롯사와 암롯사 사이를 오고가는 모든 배들이 요새의 꼭대기에서 감 시되고 있었다. 모든 것이 그렇게 경계태세였으니, 이것은 선전포고 만 없다 뿐이지 상황만 된다면 언제라도 뛰쳐나가 신나게 두들겨 부수어 주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역시나 험악하게 그를 안내하는 소년의 뒤를 따르며, 루첼은 아무래도 처음부터 꽤 골치 아픈 일을 시작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산 파로이도 아닌, 말 그대로 최전방이 랄 수 있는 바르젤 요새로 오라고 할 때부터 예상하고는 있었다. 갑자기 예전에 조직 일에 처음 들어갔을 때가 생각난다. 그것보다야 조금 덜 살벌하고, 규모는 훨씬 더 크면서도 아주 조직적인 것이 다를 뿐 거의 비슷한 상황이다. 조금만 실수하면 당장에 달려들어 갈기갈기 찢어 놓을 아군에, 대체 왜 싸우는 지도 모를 적군이라니- 한숨만 팍팍 나온다. 돌로 된 차가운 복도를 어디로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르게 여기 저기 지나서야 루첼은 겨우 케올레스를 만날 수 있었다. 방금 전의 충고 덕에 인심 주기를 완벽하게 거부하기로 결정을 본 안내자는 어디 로 어떻게 가는 지 전혀 이야기 해 주지 않았고, 처음에는 이런 저 런 길들을 더듬어 기억해 두려 했던 루첼은 그가 너무도 빠르게 가는 지라 결국 그 뒤통수만 보며 졸졸 따라가야 했다. 그렇게 걸어가 니 길은 정말 멀게 느껴지고, 별로 복잡하지도 않을 요새는 개미 굴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마법사인 케올레스의 거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소년 기사는 케올레스에게만 그란셔스 씨입니다, 어쩌고 하고 말하고는 휙하니 방을 나가 버렸다. 루첼은 그가 닫지도 않고 떠나 버린 문을 대신 닫고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 오게나, 루첼 그란셔스 군."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케올레스 님." 케올레스는 아마도 베크만 알베스티 이래로 루첼이 만난 사람 중 가 장 늙은 사람이었다. 아니, 인간에게 그런 것이 가능하다면 이 케 올레스는 알베스티보다 백년은 더 묵어 보이는 어마어마한 백발노 인이었다. 갸름한 얼굴에 훌쭉한 볼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코도 매부리코라 날 카로웠다. 푹 꺼진 깊은 눈매 안에서는 옅은 갈색 눈이 날카롭게 번득였다. 긴 백발은 허리까지 기르고, 게다가 수염까지 길게 기르 고 있어서 이렇게 본다면 어딘지 늙은 고목에 잔뜩 엉겨 붙은 이끼 를 연상케 했다. 엄격하고 까다롭긴 하지만, 괴팍하거나 고집스런 사람은 아닐 것 같았다. "그래, 올해 나이가 몇인가?" "스물 둘입니다." "가족은?" "롬파르에 숙부님이 한 분 계시고, 베넬리아에는 아내와 아들이 있습 니다." 역시나 예상했던 반응이 나왔다. 눈을 보아하니 '그 나이에?' 라고 놀 라고 있었다. 집안을 물려받아야 하는 상단 가문의 아들이라든가 귀족의 아들이 아닌 이상 마법사가 루첼처럼 일찍 결혼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마법사는 스물부터 서른까지가 배워야 할 것이 가장 많은 나이이고, 그 나이를 넘겨서 결혼하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 었다. 그리고 사실, 이 케올레스도 서른다섯이나 되어서 결혼한 사 람이기도 했다. "가족도 데리고 올 예정인가?" "아닙니다. 아내는 울파논에 계신 제 스승님과 함께 살고 있고, 제가 돌아갈 때까지 그곳에 살 예정입니다." 몇 년간의 지독한 내전만 없었다면 사실 전 대륙에서 베넬리아처럼 살기 좋은 곳도 없었다. 앞으로 10년만 더 흐른다면 베넬리아는 예 전처럼 전 대륙에서 가장 부유하고 안전한 나라가 되어 있을 것이며 , 지금 서서히 나셀 해로 눈길을 돌리는 것부터가 이미 많은 부분 회복되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니 루첼은 아들과 아내를 그 나라 외의 다른 곳에서 살게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케올레스가 그렇게 말하는 루첼을 꽤나 불만스럽게 보고 있었 다. 게다가 날카롭게 번득이는 눈을 보니, 루첼의 말이 꽤 못마땅한 듯 했다. 뭘 잘못 말했나, 하고 루첼은 고민해야 했다. 아무리 생 각해도 루첼을 할 말만을 했고, 그 안에 이 케올레스가 이런 눈빛을 보낼 이유는 전혀 없었다. 마침내 케올레스가 말했다. "하긴, 베넬리아가 이렇게 쉽게 사람을 내 놓을 리가 없다는 생각은 했지." "?" 눈치 빠른 루첼이지만 이번만은 짐작하기 어려웠다. "자네도 알다시피, 이번에 자네가 할 일은 별반 없을 거네. 그저 한두 달 정도 내 조수 노릇만 해 주면 되네." 역시나 예상했던 일들인 데다가, 사부인 롤레인이 되도록 그 이상의 일을 맡을 일은 없도록 처신하라는 말까지 남겼으므로 루첼은 실망한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델 카타롯사와 암롯사와의 일이 해결되면 루첼은 돌아갈 예정이다. 적어도 7-8년은 롤레인 밑에서 수련해야 하며, 그 기간이 지나야 쓸만한 마법사가 될 수 있을 될 것이다. 그리고 암롯사도 이제 막 권호를 받은 데다가, 그마저 도 지나치게 일찍 받은 루첼을 중용할 생각은 전혀 없을 것이다. 어 차피 이번 일에서의 루첼은 베넬리아와 암롯사 사이의 다리에 지나 지 않았고, 이런 일에는 지나치게 깊이 관여해서 나중에 제거대상 이 되는 것을 사양할 수 있을 정도로는 처신해야 했다. 롤레인은 아 마도 루첼이 그 정도는 알아서 할 거라 생각하고 그를 보낸 것일 테 고, 루첼도 그 믿음에 보답해야 한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케올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면 내 시종이 자네 방으로 안내해 줄 테니 따라가도록. 내일 아 침에 부르도록 할 테니, 일찍 일어나 있도록 하게." 이 노인이 '일찍' 이라 말하면 적어도 새벽 다섯 시 정도일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폐하를 뵐 지도 모르니 준비 단단히 해 두도록. 공화국 사 람에게 가장 걱정되는 건, 귀한 분들 모실 줄 모른다는 것이지." 이 상황에서 '저는 로메르드 왕국 출신입니다.' 하고 덧붙일 필요는 없을 거라 판단한 루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케올 레스가 눈을 크게 뜨더니 루첼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심상치 않아서 루첼은 조금 긴장해야 했다. "자네, 가만있자.......혹시 예전에 암롯사에 온 적이 있지 않나?" "맞습니다. 아키의.....아니, 아킨토스 님의 초대로 잠깐 영광을 누렸 습니다." 사실, 영문 모르고 질질 끌려왔던 당시의 루첼이었지만 말만은 그렇게 하는 것이 예의였다. 그런데 케올레스의 얼굴이 갑자기 부드러워졌다. 방금 전 사막의 콘도르처럼 눈이 부리부리하게 빛나던 노인이 갑자기 줄리어스만큼이나 온화한 노인으로 변하는 것은 사막이 갑자기 봄의 벌판으로 탈바꿈한 듯 놀라운 일이었다. 멍하니 있는 루첼에게 케올레스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말했다. "........거 참, 이거 늙어서 기억력이 영 시원찮아 진단 말이야. 진작 말하지 그랬나. 그랬으면 이렇게 영 딱딱하게 만나지도 않았을 텐데." "아, 저....." "이해하네. 아주 마음에 드는 군, 자네. 보통 젊은이였다면 벌써 말했을 텐데.......그래, 오늘은 편히 쉬게나. 앞으로 잘 해보도록 하지." "......" 이거, 단단히 오해를 받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루첼은 웃기만 했다. ************************************************************************* 작가잡설: 유즈 용사님이 흑조 공주로부터 받은 스트레스로 물러난 틈에, 방 만하게 장가까지 갔던 루첼 왕자가 돌아왔습니다. -_-!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38장 **************************************************************** [겨울성의 열쇠] 제177편 푸른 탑의 노파#2 **************************************************************** 소년 기사는 역시나 못마땅해 미치겠다는 얼굴로 루첼의 안내를 떠맡 았다. 그러나 케올레스의 말이 단단한 효과를 발휘하기는 해서 방금 전처럼 필요한 말 필요 없는 말 전혀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적어 도 필요한 말은 해 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년은 정말 '너 따위를 신경 쓰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조금도, 조금도 없지만 그래도 케 올레스 님의 명령이니 별 수 없이 이나마 해 준다.' 라는 티를 무 던히도 내고 있는 지라, 안쓰러워지기까지 한 루첼은 저녁식사를 마 친 후에는 '나도 당신 생각 잘 아니까 그만 좀 티내라.' 하고 말하 고 싶을 지경이었다. 물론 그렇게 말했다가는 방금 전처럼 적대감과 미움을 넘어선 살의까 지 치솟게 한다는 것을 알기에, 루첼은 소년과 함께 차를 마신 후에 이제는 쉬고 싶다고 점잖게 말했다. 소년은 퉁명스럽게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말했지만 루첼은 가는 길이라도 편하게 가고 싶어서 거절했다. 그래도 한 번 더 권할 줄 할 줄 알았는데, 소년 은 그 말이 끝나자마자 차를 훌떡 비워버리고는 인사도 없이 나는 듯 나가 버렸다. 앞으로도 저 소년과 같이 지낼 생각을 하니 루첼 은 까마득해졌지만, 어차피 어리고 단순한 녀석이니 충격적인 일 한 두 가지만 겪으면 태도가 확 변할 거라 희망을 가지고는 신경 끄기로 했다. 그리고 루첼은 소년이 가르쳐 주었던 방으로 돌아왔다. 방안은 어수선했고, 낯설면서도 차가웠다. 돌로 된 벽에, 깨끗하지만 편안해 보이지도 않는 침대에, 그 옆에는 루첼이 가지고 온 책 몇 권이 쌓여 있다. 루첼은 책을 집어 방안의 테이블 위에 차곡차곡 쌓 아 놓고는 파이프를 꺼냈다. "이제 좀 편해졌군...." 루첼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창 밖으로 펼쳐진 짙은 푸른색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베넬리아의 밤하늘처럼, 이곳 역시 로메르드의 시커먼 하늘과는 달리 짙은 쪽빛으로 펼쳐지는 밤하늘을 가지고 있다. 루첼은 어렵잖게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빨아 들였다. 결혼이래 처음으 로 마음 편하게 담배 피우기는 것이긴 했지만, 역시나 옆에서 '이제 담배는 끊는 게 좋지 않을까...요?' 하고 자그마하게 말하는 실비 가 없으니 그저 쓸쓸하기만 하다. 아마도 지금도 세르피오를 안은 채 눈물 뚝뚝 흘리며 울고 있을 거다. 아니면, 이제는 굉장히 강해 져서 울지 않아도 루첼의 부재를 견지고 있을 지도 모르고 줄리어 스와 노닥거리느라 그리워할 틈도 없을 지도 모른다. 뭐, 그래도 워낙에 외로움 잘 타는 성격이니 힘들기는 할 테지. 벌써부터 마누라 생각이면 나중에 어쩌려고 그러니, 그렇게 생각하며 루첼은 연기를 한번 더 내쉬었고.... 순간 그의 목을 누군가가 휘감아 당겼다. "!" 루첼은 몸을 뒤틀었으나, 상대는 빠르기도 빨랐거니와 힘도 강했다. 루첼이 입을 열려 하자, 그가 재빨리 그 입을 틀어막았다. 루첼이 마 법사인 줄 당연히 알고 있으며, 이렇게 빠르게 차단하는 기술도 상 당하다. 다른 상대였으면 어떻게든 떨쳐 냈을 테지만, 루첼은 벌써 바람결에 실려 오는 옅지만 익숙한 체취를 맡고는 그가 누구인지 알아챘다. 루첼이 몸의 힘을 빼자 그를 제압하고 있던 등 뒤의 남 자가 조용히 말했다. "나다, 루첼....안심해라." 그리고 그가 손을 떼자마자 루첼은 몸을 돌려 그대로 주먹을 날려 버 렸다. 빠악-! 루첼은 암롯사로 오며 꽤 특이한 일들을 겪을 거라 생각했지만, 코피 를 막고 있는 엘프를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이건 아마도 두고두고 특이한 일이 될 가능성도 크며, 어느 날 문득 생각할 때마다 키들키 들 웃게 될 것 같다. "어이, 멎었냐?" 그 긴 귀를 축 늘어뜨리고는 루첼의 손수건으로 코피를 막고 있던 자 켄은 루첼의 말에 그 손수건을 떼어보았다. 그러나 다시 코피가 주륵 흘러내렸다. 루첼은 좀 심했다고 반성하며 주전자의 물로 얼음 조각을 만들어 손수건에 싼 다음 자켄의 코 옆에 대었다. 느낌이 영 좋지 않은지 자켄은 그 자리에 그대로 앉은 채로 얼굴을 찌푸렸다. 귀도 신경질적으로 곤두선다. "떼 봐라." 자켄은 머뭇머뭇 손수건을 뗐고 이번에는 피가 흐르지 않았다. "굉장한 첫인사군, 루첼 그란셔스" "남의 침실에 숨어 들어와서는 느닷없이 덮친 게 누군데."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네 아버....아니, 어쨌든 암롯사 안인데 그렇게까지 몰 래 몰래 숨어 들어올 필요는 없잖아." 네 아버지의 영토 아니냐, 라고 말하려던 루첼은 실수했다는 생각에 아차했다. 역시나 자켄의 눈이 암녹색으로 어두워 졌고, 원체 차분 하고 무표정한 얼굴이 이제는 컴컴해 보일 지경이었다. "내게는 몸을 숨기는 재주가 없다. 또 들킨다면 두 번 다시 기회가 오지도 않을 테고.....별 수 없었어. 하지만 불쾌했다면 사과하겠다." "아니, 별로 불쾌하지는 않았어. 나도 네 얼굴에 그렇게 정확하게 날 아갈 줄 몰랐거든." 루첼의 말에 자켄의 눈빛이 그제야 좀 밝아졌다. "그나저나 무슨 일로 온 거야?" "이런 쪽으로 나오는 이유야 뻔하지." "아키 일이군." 자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아키...와 만나봤었나, 루첼?" "물론. 하지만 어느 날 아침 일행과 함께 느닷없이 사라졌어. 그 다음 은 몰라." 자켄의 눈빛이 다시 어두워졌다. 무언가를 조금은 기대해고 왔는데, 기대치는커녕 실망의 하한선으로 조정해 놓은 것 보다 더욱 미달되어 실망한 듯한 표정이었다. "일행은 역시 베이나트...님이겠군." "아, 알고 있구나." "내 대부님이시니까." 그런 자켄의 답에 루첼은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루첼은 엘프 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만나본 엘프 자체가 반쪽인 자켄 뿐이었다. 엘프들의 대부란 것에 대해, 루첼은 전혀 짐작되는 바가 없었다. 자켄이 설명해주었다. "엘프의 아이가 태어나면 기본적으로 두 명의 보호자가 있어야 한다. 예외 없이 그 어머니와 아버지가 보호자가 되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어서......어머니 대신 바실리카가 대모가 되 어 주었고, 아버지 대신.....베이나트가 대부가 되어 주었지." 그리고 어째서 엘프가 아닌 인간이 그의 대부가 되어 주었는지는, 루 첼은 안 봐도 대충 짐작이 되었다. "그 베이나트라는 사람, 대체 뭐 하는 사람이지?" "어둠 숲의 어머니이신 그분의 친구 분이다." 루첼은 정말 놀랐다. 엘프들과 그저 알고 지내는 수준을 넘어서 '친 구'라 불릴 정도면 정말 대단한 것이다. "젊은 사람 같아 보이던데 의외로 대단한 마법사였군." "아주 특별한 분이지." 그렇게 말하며 자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라, 벌써 갈 거냐." "불쑥 찾아와서 미안하다. 하지만......오래 머물 수는 없어서." "동생 걱정되면 직접 찾아보지 그래." "어디 있는 지는 안다. 다만, 그 아이가 왜 그곳에 있는 지는......그것 을 알 수 없어서 너를 찾아온 거다." "어디에 있기래?" "암롯사에 있는 늪의 성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놀라서 눈만 껌뻑이는 루첼에게 덧붙여 말했다. "그러나 베이나트 님과 어둠 숲의 어머니께서는 더 이상 그 아이 일 에 관여하지 말라고 하셨고, 어머니의 말은 '명령'에 가까운 것이라 나는 거부할 수도 거절할 수도 없었다. 이렇게 찾아온 것은 그 때문이고." ".....사정 한번 복잡하군." "미안하다......하지만 이 쪽에서 아는 사람은 너 뿐이라." "자크, 하지만 나한테도 별달리 뾰족한 수가 있는 게 아니거든. 내가 엘프에 대해 모르듯, 너 역시 인간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 같은데.... .나는 여기서 그런 높은 집안일에 끼어들어도 될 정도로 든든한 녀석이 아니야." 자켄의 눈이 어두워져, 이제는 새카맣게 보일 정도였다. 루첼이 말했 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내는 대로 알려 줄게. 굉장히 황당한 일이면 어떻게든 즉각 알려줄 테고." "고맙다." "뭘........어쨌건 너도 동생 챙기느라 고생이다." "아키는 그냥 동생이 아니다. 그 아이를 지키는 것은 내 첫 번째 의 무이고, 내가 사랑을 베푼 첫 번째 대상이고......나를 사랑해 주는 몇 안 되는 존재 중 하나다. 그러니.......최선을 다해 지켜줘야지." 그 말이 루첼에게는 좀 안쓰럽게 들렸다. "자크, 누구나에게 사랑 받는다는 건 누구에게도 절실한 존재가 아니 라는 뜻이나 다름없다고. 호감과 사랑은 다른 것이고, 호감을 받지는 못해도 사랑은 받을 수는 있는 거다. 넌 전자는 조금 부족해도 후자는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니....한 번 더 그렇게 말하면 한 대 더 때려줄 거다." 그렇게 말하곤 루첼이 주먹을 들어 보이자, 자켄이 가볍게 웃었다. 눈빛이 좀 밝아지는 것을 보니, 루첼도 기분이 좀 가벼워졌다. 그 런데 자켄이 갑자기 아주 놀라운 것을 발견한 듯 눈을 깜박였다. "왜?" "아니.....너... 살이 찐 것 같아서." 루첼은 주먹을 한 대 더 올려붙이고 싶어졌다. "아킨토스 님께서 성에 도착하셨다는군요." 마법사 케올레스의 말에 사이러스는 의자에 몸을 눕히고 고개는 뒤로 젖힌 자세 그대로 응-하고 무관심하게 답했다. 눈은 감고 있었고, 그의 왼편에는 환한 빛이 오른 편에는 반대로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 져 있었다. "언제 만나보실 예정입니까." "곧 이곳으로 불러들일 일이 생길 거다. 그 때 만나보면 되겠지." 케올레스가 조용히 한숨을 내 쉬었다. 휘안토스와 사이러스가 애정 이상의 무엇으로 연결된 동지 같은 부자였다면, 같은 날 태어난 아 킨토스와 사이러스는 차라리 아예 모르는 사이인 것이 나을 정도였다. 분위기가 침묵으로 차가워지자, 케올레스는 애써 크흠--하고 헛기침 을 하고는 말했다. "건강....하시다는군요." "제 발로 들어올 정도면 충분히 건강하겠지." 더 할말이 없어지는 케올레스였다. 사이러스가 말했다. "제도로부터 전해진 소식은 있는가?" "아직입니다. 하지만 베로크 황자전하께서 황도로 돌아오신데다가, 헤 로롯사를 제한 모든 나라의 사절이 아직 황도에 머무는 중입니다. 내일이나 내일 모레면 곧 소식이 전해질 것입니다." "휘안은 뭐라고 하던가." "역시나 별 다른 움직임은 없다고 하십니다. 뒤로 전해진 말도 없으 며, 앞으로 던져지는 말도 없습니다." 그 말은 '긴장상태'라는 뜻이다. 서로의 힘과 선택의 기회를 재고, 어떻게든 손해 보지 않고 일을 처 리하고 싶은 것이다. 이런 일은 이익은 없어도 손해는 확실하다. 암롯사는 확실한 손해를 방지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인 것이며, 모 두 황도를 떠나려고 준비하는 동안에 티라 섬으로, 티라 섬에서 다 시 롬파르로 빠르게 움직여 베로크 황자를 찾아 귀환한 것이다. 케올레스가 말했다. "물론 일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칼라하스 공주가 병을 이유로 귀국길에 나섰고, 그분 대신 다른 누군가가 올 듯 하다고 하십니다." 사이러스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그리고 잠시 뒤 이마를 짚은 손가락 을 탁탁 움직이더니 말했다. "케올레스, 산 루에르에도 왕기를 올리라 전해라." "네-" "단, 카야시누스 사령관에게는 출정준비는 하되 병사들을 지나치게 흥분시키지는 않도록 주의하라 말해 두도록." 케올레스는 정중하게 답하고는 연락을 위해 물러났다. 사이러스가 무 언가 명령을 내리면, 그 즉시 처리해온 것은 그와 사이러스간의 누 구도 하지 않았으나 누구나 지키는 오랜 약속이었다. 혼자 남게 되자 사이러스는 눈길을 돌려 엷은 커튼이 드리워진 요새 의 창 밖을 바라보았다. 기울어진 달빛과 별빛이 흘러들어 그의 몸을 적셨고, 그 달이 보름에서 한참이나 먼 것에 기이한 평화로움을 느끼며 사이러스는 먼바다와 더 멀리 펼쳐진 델 카타롯사의 거뭇한 대지를 바라보았다. 고요했고, 그것은 산산이 부수고 찢어발기고 짓밟아 버리고 싶은 그 런 고요였다. *************************************************************** 작가잡설: 휴가의 목표는 충분히 달성했습니다. '빈둥빈둥~~' ;;;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38장 ************************************************************* [겨울성의 열쇠] 제178편 푸른 탑의 노파#3 ************************************************************** 1 년여 만에 돌아온 고향은 그만큼 낯설어져 있었다. 바다는 여전히 푸르고, 온화하게 구릉진 언덕은 여전히 산 파로이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 있었다. 달빛 비추는 날이면 은빛으로 빛나던 강역시 여전히 산 파로이를 통과하여 나셀로 흘러가고 있으며, 그 바다를 바라보는 암롯사 대궁의 푸른 지붕도 바다와 하늘보다 깊은 쪽빛으로 빛났다. 그러나 낯설다. 차갑고 건조하고 매정한 그 모든 것들은, 그대로이 면서도 낯설었다. 다행인 것은 늪의 성의 일부 같던 메리엔과 그의 늙은 개 푸제가 아 직도 그곳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늙은 개는 걸음도 느려 지고 활기도 없어진데다가 털의 윤기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러나 메리엔에게만은 1년 반의 기다림이 긴 시간은 아니었던 듯 전혀 변함없이 성의 주인인 소년을 맞이해 주었다. 처음에는 그것에 반 가움을 느꼈던 아킨이지만, 결국 그녀의 눈가에 패인 주름과 그녀가 울적할 때면 만들곤 하던 테이블 보의 레이스가 지나치게 화려해 진 것을 발견했다. "어떻게 지내셨어요, 아킨토스 님." 예전에는 그토록 정겹고 그립기만 했던, 이제는 조금 나이 먹어버린 유모의 안부인사가 아킨은 아주 어색하고 멀게만 느껴졌다. 그녀는 여전히 다정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아킨은 예전 같지 않 았다. 가책이 느껴진다. 미안하다- 그녀는 아킨을 위해 젊은 시절을 바쳤는데, 아킨 자신은 조금 컸다고 이런 식의 감정이나 느낀다는 것이. 얼마나 떠나있었다고 이러는 건가. 어머니 대신...아니, 세상을 대신하 여 그를 키워줬던 사람인데.... 보통 때면 거의 다섯 달 정도 비워놓고 돌아오던 집, 그런데 그와 별 차이도 나지 않는 1년을 밖에서 보내고 돌아왔을 뿐인데 이렇게나 낯설게 느껴지다니. 그토록 거대하고 거칠어 보이던 것들이,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바 라볼 수는 없어도 적어도 예전처럼 절대적으로 거대해 보이지는 않 았다. 늪의 성의 철문은 탈로스의 탑의 문보다는 덜 무거워 보인다. 게다가 담쟁이 덮인 두터운 돌 벽들은 이렇게 눈에 보이니 타 넘 을 수라도 있지 않겠는가..... 아주 오래 전부터 이렇게 보였어야 하 는데, 왜 이제야 이런 것들이 보이는 걸까. 오전을 그렇게 보낸 아킨은 오후에 늪의 성을 나섰다. 어디로든 가보고 싶었다. 그러나 말을 달리지는 않았고, 오히려 돌아 갈 때를 위해 말을 끌고는 나왔지만 말고삐를 당기며 성 주변을 걸 었을 뿐이다. 탈로스로부터의 위험은 이미 사라졌고, 아버지는 없고, 완전히 휘안 토스의 손안에 있는 이상 그가 더 이상 무엇을 하겠는가. 이제는 어디를 어떻게 가든, 하늘아래 땅위에 그를 위협할 것은 없다. 그러나 고요는 오히려 아킨을 조롱하는 듯 했고, 안전은 아킨을 희롱 하는 듯 했으며, 그랬기에 외로움은 오히려 더 커진다. 혼자라는 것이 이토록 강하게 느껴지는 적도 없었다. 들판의 가을들꽃들은 붉고 노랗고 푸르른 화사한 색채로 터져 흔들렸 고, 이제는 차갑고 예리해지는 바람 속에 나뭇잎들은 그 깊은 곳에 서부터 빨갛고 노란빛을 뿜어 올리고 있었다. 지나가는 숲 너머로 암롯사 왕가를 위한 묘지와 그 곳을 지키는 사원의 지붕이 보인다. 햇볕이 잘 드는 평화로운 곳이라 그 지붕도 햇살에 번쩍였다. 암롯사 왕가의 묘지는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수도사들이 돌보아 주고 있었다. 젊은 수도사들은 짧게는 1년 길게는 6년 간 이런 조용한 사원에 머물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머무는 동안 이곳을 담당하는 라레스나의 안식회 소속의 사제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그 시간을 보 낸 후에 티피안느의 자비회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 양한 햇수를 보낸 후에 에칼라스의 성회로 가서 장로라 불릴 만한 위치의 성직자가 되는 것이다. 암롯사 왕가의 묘지역시 안식회 소속의 사제 둘과 그 제자들 셋이 돌 보고 있었다. 그리고 사원을 책임지는 것은 아킨과도 안면이 몇 번 있는 마릴라 라는 여사제다. 그들을 아는 것은, 아킨이 묘지 참배만은 매년 갔기 때문이었다. 그 곳에는 먼 선조부터 최근에는 어머니까지 암롯사의 왕가 직계와 그 직계의 아내나 남편들 모두가 잠들어다. 물론 아버지 사이러스에 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무참히 살해되고 그 시체는 나셀 해에 버려 졌던 숙부를 포함하여, 반정을 일으켰던 왕족들은 제외된다. 그들 의 묘지는 매정한 바다와 험악한 절벽뿐이다 어느 새 아킨은 묘지의 철문 앞에 서 있었다. 입구의 양옆에는 라레 스나의 제자인 카람파와 알제셔의 입상이 서 있었다. 그들 모두 그 안으로 안내하듯 팔을 안으로 뻗친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그 런 그들 발치에는 이끼가 돋고, 그 아래에는 하얗고 노란 자그만 꽃 들이 그들을 우러러 경배하듯 가득 우거져 있었다. 아킨은 안으로 들어섰다. 사원 오른편으로 즐비한 묘비들이 보였고, 그 묘비를 지켜보는 듯한 푸른 탑 꼭대기의 창문은 열려 있었다. 아킨은 그 창문에 누군가가 서서 사원 안으로 들어오는 자신을 지 켜보는 것을 발견했다. 아킨은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고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어째서 이곳에 있는 지는 짐작되었기 때문이다. 곧 사원의 현관문이 열리며 은빛 테두리를 친 검은 옷을 입은 여자가 달려 나왔다. 아킨과도 안면이 있는 라레스나 안식회 소속의 사제 마릴라로, 마흔 정도 되 보이는 얼굴에 차분한 갈색 눈동자를 가진 여인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마릴라 사제님." "어서 오십시오, 아킨토스 님." 여자는 그렇게 조용히 웃고는 아킨의 팔을 잡고 안으로 이끌었다. 예배당은 텅 빈 고래의 배처럼 거대했다. 묵직한 돌기둥들이 지붕을 이고 서 있었고, 정면에는 에칼라스와 라레스나의 상이 서 있었다. 에칼라스가 바라보는 대야에는 수정처럼 맑은 물이 고여 있고, 대야의 받침대에는 장미 덩굴이 가득 새겨져 있었다. 사제는 그 대 야로 가, 손을 적시고는 그 물을 아킨의 이마에 한 방울을 적셨다. 차가운 물방울은 곧 말라버렸지만, 그 물 안에 섞여 있는 소나무 향 같은 냄새에 기분이 깨끗해졌다. 사제가 말했다. "들리는 소문이 워낙에 흉흉했는데, 이렇게 건강하게 돌아오셔서 다 행입니다." "몸이 안 좋아 멀리 요양 갔던 것뿐입니다." 사제는 부드럽게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테시오스 님께서도 와 계십니다. 만나보고 싶다고 하십니다 만..." "숙부님...께서요?" "네, 뒤채의 마님을 뵈러 오셨습니다." 아킨은 뒤채, 즉 방금 전의 그 푸른 탑에 머무는 '마님'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이레크트라, 그녀는 바로 올해로 일흔 셋이 되는 사이러스의 어머니 이자 그의 할머니, 동시에 선왕의 대공비였다. 그녀가 푸른 탑에 은거하기 시작한 것은 사이러스의 즉위 직후였다. 처음에는 남편인 대공왕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함이었지만, 그것은 곧 둘째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은둔이 되었으며, 얼마 뒤에는 어린 막내아들의 무사함과 귀환을 위한 은둔이 되었다. 아킨이 그녀를 찾아간 적은 없었다. 휘안토스역시 마찬가지였던 듯 하고, 아버지인 사이러스는 바로 옆에서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십 여 년이 넘도록 그녀와 단 한번도 만나지 않았다. 아들이지만 또 다른 아들의 살해자를 조모가 만나보고 싶어 할 리도 없고, 사이 러스 역시 그의 어머니이자 그가 죽인 자의 어머니를 구태여 만나 려 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모두가 금지되어 있엇지만, 숙부이자 그녀의 막내아들인 테시오스만은 저승과 이승을 오고가는 사자처럼 그 탑 안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 받았다. 사제는 아킨이 별 말이 없자 허락한 것으로 알고 안내를 위해 그 앞 으로 나섰다. 거절할 기회도 이유도 없었던 아킨은 그녀를 뒤따랐다. 그러나 곧 복도 끝에서 발걸음 소리가 울리더니 남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남자는 아킨을 발견하고 발을 멈추었고, 아킨은 그에게 인사를 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숙부님." 테시오스 왕자는 그런 조카를 보며 웃었다. 나쁜 의도는 없이, 그저 '좋은 웃음'이었을 뿐이었다. 피 섞인 가족 중 거의 유일하게 나쁜 기억이 없는 가족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럴 만한 일도 없었다고 말하는 편이 나으리라. 만난 적도 별로 없으니까. "그래, 그 동안 잘 지냈느냐." "조금 지겨웠습니다." "요양생활이 다 그렇지.......그래, 가까이 오겠니." 아킨은 그 말대로 몇 걸음 정도 가까이 갔다. 테시오스는 아버지보다 10년 정도 젊었지만, 그 동안의 고생 때문에 아버지와 동년배로 보일 정도로 나이 들어 있었다. 게다가 숙부가 이렇게 생겼었나-하고 새삼 다시 볼 정도로, 이 숙부와는 이야기를 제대로 나누어 보기는 커녕 이렇게 얼굴을 마주한 적도 별반 없다. 마르고 나이 들어 보여서 그렇지, 의외로 부드러운 얼굴이었다. 아버 지와 닮은 초록색 눈동자는 아버지보다 훨씬 깊고 부드러워 보였고, 옅게 주름진 이마나 눈매는 꽤 사려 깊어 보였다. 아버지처럼 건 장하지는 않았으나, 잘 잡힌 풍채와 곧은 허리를 보면 그 역시 상당 한 무인이라는 것 정도는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어머님께서 너를 만나고 싶어하신다." 어머님-즉 테시오스와 사이러스의 어머니, 그리고 아킨의 친할머니 가 된다. 아킨은 당연한 말을 들었다는 듯 무관심하게 답했다. "....뵙겠습니다." 테시오스는 아킨의 반응이 예상보다 조용하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처음 뵙는 건데 기쁘지도 않느냐." "모르겠습니다." 솔직한 말이었다. 예전에 자켄이 이 숙부를 만나보고 한 말이 '냉철한 사람'이라는 것 이었다. 아킨도 동의한다. 숙부는 잔혹하지도, 냉정하지도 않은....말 그대로 '냉철한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그를 속이려는 것은 어리석 은 짓이었으니, 최대한 솔직해야 한다. 테시오스는 더 이상 그에 대한 언급 없이 앞장섰고, 아킨은 그 뒤를 따랐다. 가는 길에 테시오스가 말했다. "지난번에 아내에게 근사한 선물을 주고 갔더구나." 작년 신년 연회 때 그의 아내 뺨을 후려갈긴 그 일을 말하는 것이다. "죄송합니다." "아니, 벌써 1년이나 전 일이니......괜찮다. 아내의 말이 심했던 것도 사실이고, 네가 지나치게 나섰다는 것도 사실이니....비긴 셈치지. 하지만 딸아이 더러 못생겼다고 한 것은 좀 심했더구나." "그것 역시 피차일반입니다." 테시오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중에 한번 만나 보려무나. 1년 동안 그 아이도 정말 예뻐지고, 또 철도 들었으니......만나서 이야기 좀 해 보고 그 때 일들은 서로 서로 사과하고 잊어버리라고. 그 나이 여자애들이 얼마나 예민한지 모르지?" 그리고 숙부는 두터운 나무 문 앞에 발을 멈추었다. 아무런 장식도 없이, 그저 윤기가 흐르는 검은 나무로 두텁게 만들어 진 문이었다. 강철로 된 문고리는 매일 매일 닦은 듯 검은 윤기가 흘렀고, 그 위에 암롯사의 장미무늬가 새겨져 있다. 테시오스는 문 을 두드렸다. 안에서 종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가자, 아킨토스." 그리 말하고는 테시오스는 문을 밀어젖혔다. **************************************************************** 작가잡설: 간만에 학교 친구녀석들 끼리 모여서 수다 좀 떨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학교 동기라 해도 나이들이 천차만별인데....... 20대 후반;; 이 되니 한 두살 차이가 꽤 크게 느껴지더군요. ^^;; 그날은..... 친구 하나가 한숨 푸욱 푸욱 쉬면서 '나는 내가 매일 매일 푹푹 늙어 가는 것만 같아......' 하더군요. '내 꿈은 스물 셋에 결혼하는 거였고, 지금은 두 아이의 엄마가 되 어 있어야 한다고! 그런데 지금 나를 봐! 내 꿈은 일곱 아이의 엄 마가 되는 거야! 내일이라도 당장 결혼해야 다 낳을 수 있다고! 이제 가정을 가지고 싶어. 나는 안정을 원해.....흑흑흑.' ;; 거 참...동기중에 제일 어린 녀석이 저런 말을 하니, 그보다 대부분 한두살 많은 다른 동기들은 다들 하늘과 땅만을 바라보았 습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38장 *************************************************************** [겨울성의 열쇠] 제179편 푸른 탑의 노파#4 **************************************************************** 문이 닫혀도 아킨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 만나게 되는 할머니에 대한 반가움도 슬픔도 없었고, 그저 약간의 놀라움과 어렴풋한 낯설음....단지 그 뿐. 당연한 인사 말은 잠시 잊혀졌다. 먼지와 긴 시간만을 뒤집어쓰며 헤어지고 낡아 가는 것이 있다면 꼭 이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몸은 바짝 말라 있었지만 두툼한 옷에 푹 파묻혀 있었다. 주름진 얼 굴은 늙은 고목 같았으며, 아직도 풍성한 하얀 머리카락은 틀어 올려 검은 리본을 매고 있다. 앙상한 손에는 반짝이는 반지가 끼워져 있고, 그 팔목에도 여러 개의 팔찌가 끼워져 금방이라도 철렁일 것만 같았다. 테시오스가 말했다. "어머님, 손자가 왔습니다." 그러자 노파가 눈을 깜빡였다. 두 푸른 눈만은 정말 이제 막 탄생하 여 빛나는 수정처럼 뚜렷하고 맑았다. 여전히 예리했고, 분명하고 깨끗한 지각과 이성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뚜렷하게 빛나는 눈동자만이 식물처럼 이 방 안에 뿌리를 내리고 늙어 가는 여인이 나무나 조각이 아닌 사람이란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상한 느낌이다. 마치 무생물 속에서 빛나는 별개의 생물인 듯한, 그 눈동자는 무서울 지경이다. "가까이......가까이 오너라." 그 굳게 닫힌 입술이 열리며 흘러나온 그 목소리는, 오싹할 정도로 차갑기는 했지만 적어도 '산 사람'의 목소리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의 몸에서 풍겨오는 오래된 나무 가구 같은 냄 새가 닿을 듯 가까워졌다. 거친 숨소리도 가까워지고, 그 번쩍이는 눈빛 역시 아킨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 가깝다. 그 주름지고 차가운 손이 가까이 오더니 아킨의 뺨을 어루만졌다. 아킨은 그녀와 자신 사이에 핏줄이 놓여 있다는 것을 믿고 확신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마치 전혀 다른 생물이나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인 듯, 아킨과 그 근본부터 다르다는 느낌이었다. 노파가 어둡게 젖은 탄식을 내 쉬더니 속삭이듯 입술을 달싹였다. "나와 아주 닮고 말았구나......가엾은 아가." "......" 할머니의 모습을 젊은 시절의 초상화에서만 봤던 아킨은 그녀와 자신 이 전혀 닮은 구석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젊은 이레크트라는 키가 크고, 또 아름답고 품위 넘치지만 오만하게 사람들을 내리 깔아 보는 듯한 그런 분위기를 가진 여자였다. 그 안에서 자신과 닮은 점이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녀의 눈 매라든가 큰 키라든가 콧날 같은 것이 사이러스와 닮았다고 생각한 적은 있어도 말이다- 그 눈빛을 알아본 노파의 날카로운 눈이 웃음을 보였다. 그러나 어째 서 둘이 닮았는지, 대체 어디가 닮은 것인지 답을 해 주지는 않았다. 그저 너 알아서 알아내라는 듯 비웃는 듯 깔보는 듯- "내가 말하는 건 얼굴이 아니란다, 아가야. 네 얼굴은 네 나이의 루실 리아와 꼭 닮았지." "어머님과....." 노파의 눈이 반짝였다. "너희 둘을 가졌을 때 네 애비 몰래 나를 찾아왔었지. 자수정처럼 아 름다우면서도 행복하기 그지없는 아이였단다..... 사랑 받고 있다고 생각했고, 정말 그 사랑을 진심이라 생각했지...그렇게 그때의 그 아이는 어항안의 예쁜 금붕어처럼 자그마한 꿈속에 있었단다." 그렇게 말하고는 노파는 큭큭 웃었다. 심술궂고 냉혹한 웃음이다. "그러나 내가 말해주었지. 그 아이-사이러스는 짊어진 그림자가 너무 많아. 꿈에서 깨, 잔혹한 현실.....사이러스가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고, 그의 발을 적신 피를 봐. 그리고 그 아이가 절대 변하지 않는 다 는 것을 깨달아라..... 언젠가는 그 야수 같은 잔인함이 드러나고 말 거야! 너를 찢어 죽여 버릴 거라고! 네 영혼을, 네 섬세한 몸을! 분명 그럴 거야......그러니 그러라고 했어! 알라고, 보라고, 인정하 라고-! 네 흉포하고 잔인한 남편을!" "......" "그런데 네 어머니는 그러지 못했지. 내가 그랬듯, 자그맣고 예쁜 네 가 철들면서부터 그랬듯......아아, 아가야.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라.... 너는 나를 보지 못했지만, 나는 늘 너를 보고 있었으니까.....그 늪 의 성을 오고가고, 덤불을 헤치며 울부짖고......어느 비 오는 날에 는 하얀 짐승이 되어 뛰쳐나갔지." 두렵지도 않았고 놀랍지도 않았으며, 그저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이듯 담담할 뿐이었다. 그런 손자를 노파는 앙상한 손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그렇게 너를 지켜보듯 또 다른 아이를 지켜봤단다.... 그 예 쁜 요괴 같은 아이를 말이다." "휘안....말입니까." 요괴- 순간 아킨은 유제니아를 생각했다. 그 휘안토스가 길 가다가 무심코 꽃을 꺾듯 아무렇지도 않게 망그러 뜨린 소녀를....늘 미워했지만 그렇게 죽여 버리고 미웠던 적도 없고, 아직도 속이 바짝 바짝 타 들어가 버릴 정도로 증오한다. 생각하 면 끔찍해지고, 비참해지며, 증오만이 타오른다. 죽여 버리고 싶다. 진심으로- 아니, 간절하게...,, 사랑하지도 않고, 그렇게 되려고 노력해 본 적도 없다. 갈망과 질투, 이제는 살의와 증오. 그런데 대체 무엇이 마지막 파멸을 막는 걸까, 대체 무엇이-! 그 눈빛에 담긴 모든 것을 훑어낸 노파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말했 다. "그 아이가 너의 '무언가를' 망그러뜨렸구나.....그렇지, 아가야?" 옆의 테시오스가 약간의 호기심을 보였지만 묻지 않았다. 그러나 노 파는 무엇인 지 짐작이 된다는 눈빛이었다. 그 날카롭게 번득이는 눈은 과거도 현재도, 그리고 미래마저도 꿰뚫어 보는 듯 했으며 반면 에 아킨은 단단하게 잠긴 낡은 나무상자를 보는 듯 그녀와 마주하 고 있을 뿐이었다. "철저하게 파괴했지요.....아주 철저하게." "가엾은-" 노파가 이제 두 손으로 아킨의 뺨을 감쌌다. 앙상하고 차가웠으나 아킨의 체온에 젖어 그 손도 따스해지는 것 같 았다. 그러나 기분 좋은 온화함이나, 피 흐르는 생명력이 아니다. 그저 차가운 돌과 나무에 손을 얹었을 때 그 안으로 체온이 녹아든 듯한 그런 허무하고 생명 없는 온기일 뿐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혼자가 되어 이 자리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너 역시 이 늙은 나무처럼 차갑고 잔인한 땅에 뿌리박고 살거니." "모릅니다." 노파의 손가락이 움직인다- 아킨이 말했다. "하지만, 떠날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래, 기회는 있었다. 단지 산산조각 났을 뿐- 여전히 제대로 된 기억을 이끌어내 지 못했던 불안한 아킨을 탑 밖으 로 끌어 낸 것은 유제니아였다. 아킨이 숨어있던 컴컴한 가시더미 속으로 날아 들어와 깃털 몇 조각과 따뜻한 온기를 뿌리고는 돌아갔 던 그 유제니아. 휘안토스가 짓밟아 버린 작은 새, 결국에는 부러진 날개와 겁먹은 눈 동자만이 남아 아킨에게 돌아왔던 소녀. 나가지 않았다면, 탈로스의 손에 운명을 맡긴 채 그 감옥 속에 이렇 게 뿌리박고 살아간다면- 잊혀지고 잊어버리지만 증오와 분노만은 속으로 삼킨 채, 그러나 아무 것도 하지 못하기에 이렇게 살아갔 더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다. 휘안토스가 유제니아를 만날 일도 없었을 것이고, 유제니아는 그저 숲에서 어떤 소년을 만났다...그 기억만을 안은 채 예정된 대로 세 르네긴과 만났을 것이다. 그랬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다, 정말 아무 일도 없이......상처받고 부서질 일도 없이 세르네긴의 소중한 새장 안에서 보호되고 있었을 턴데.... 아킨은 미소를 보였다. "그리고 결과가 이겁니다." 노파의 손이 내려갔다. 그녀의 차가운 눈동자는 여전히 아킨의 눈에 머물렀고, 기괴한 미소 역시 여전히 흐릿하게 떠돈다. "결과?" "어리석은 믿음이란 것은 알지만, 아버지와 형....그리고 이 암롯사라 는 가문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늘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했습니다." 처음 암롯사를 떠나려고 했을 때, 아킨은 탈로스의 손에 잡히고 켈브 리안은 실각했다. 롤레인은 중상을 입은 채 베넬리아로 돌아갔으며, 루첼은 후견인과 많은 벗들을 잃은 채 고향을 떠나야 했다. 두 번째로 암롯사를 떠나려고 했을 때, 이상한 비밀을 알게 되어 버 린 듯한 베이나트는 떠나버리고 유제니아는 짓밟혔고 세르네긴은 아마도 평생 아킨이 빚질 수밖에 없는 증오를 안고 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아가야, 너도 이렇게 스스로를 가두려는 거니?" "아직은 아무 것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는 장담하지. 너는 결코 갇히지도 포기하지도 않을 거야....." 노파의 눈이 더욱 빛났다. "나는 단 한번도 이 운명의 틀 안에서 벗어나려 한 적이 없다. 네 아 비가 이 암롯사의 왕이 된 후에.....그리고 그의 손에 내 한 아들은 처참하게 죽고 다른 아들은 그리도 외로운 방랑의 길을 떠나야 했 을 때,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그 후에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내가 할 일은 네 아비를 외면하는 것뿐이었고, 이곳이 그런 내가 숨은 곳이란다. 네 아비를 향한 두려움과, 네 아비가 불러 일으키는 잔인한 피 보라를 외면하는 것.....단지 그것뿐이었다." 아버지가 자신의 몫까지 짊어지게 했던 무거운 죄의 대가와, 휘안토 스가 완벽하게 강탈해 버린 인생의 기회. 남은 것은.....이런 내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노파가 말했다. "하지만 아가야, 너는 한번은 버둥거려 봤다. 도망쳐도 봤고.....이건 아주 중요한 것이지." "......" "자유란 한번 맛본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고, 그것은 일생을 지배하 는 가장 향긋한 기억이 된다. 한번 벗어나면, 더 처참하게 끌려온다 할지라도.....너는 그 향긋한 기억을 찾아 또 벗어나려 할 것이다. 반드시-" "그리고 더 처참하게 끌려 올 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너는 또 벗어나려 할 거다. 그건....아가야, 중독성이 너무나 강해. 결코 잊을 수 없는 거야....너는 또 그것을 찾아가고 말 거 란다." "그리고 더 고통스러울 테지요." "아가야, 그건 말이다.....'도망치려' 하니까 그런 거란다. 잊고 털어 버 리고 없애려 하니까, 그러니까 너는 다시 자석처럼 이곳에 끌려 들 어오는 거야..." 노파가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돌아서서 맞서 버리렴. 등을 보이며 도망치지 말고, 네 눈과 네 힘을 안고는 돌아서서 마주 봐....그리고 없애 버려라. 산산조각 내, 찢어 버리고, 삼켜 버리고, 영영 일어나지도 못하게 만들어 버려........! 어여쁜 아가야, 그건 네 그림자를 쫓아서 오는 거란다. 네가 돌아 서서 마주 보지 않는 한.....절대 너를 놓아주지 않아. 네 살을 뜯어먹 고 네 피를 마시고도 배고프다 목마르다 외칠 거란다....." 아킨은 볼을 스치는 그녀의 차가운 손길을 느끼며 조용히 말했다. "휘안토스를 어찌할 수는 없습니다, 할머님."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하는데도 말이니?" 그녀의 미소는 더욱 기괴해졌고, 아킨은 그 미소 속에서 아버지와 휘 안토스와 그 자신을 보았다. 마음 깊은 곳에 쌓여있는 살의와 잔 인함. 그것이야 말로 암롯사의 핏줄 안에, 선조 테루비셔스의 핏줄에 카람 파의 그림자들이 녹아들던 그 때부터 계속되어왔던 것이다. 성배가 사라진 날, 델 카타롯사는 탐욕을, 헤로롯사는 방종을, 에크롯사는 오만함을, 카를롯사는 질투를, 그리고 암롯사는 바로 이 차가운 잔인함을 선사받았다. 사라진 성배와 성검은 그들의 가슴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자그맣고 은밀한 상자를 열게 했고, 그곳에 숨어 있 던 것은 각자가 가진 가장 광포한 야수였다. 아킨 역시 그런 것을 가지고 있었다. 피가 나올 정도로 움츠리고 움츠리는 단단한 발톱과, 부러질 정도로 악물고 있는 날카로운 송곳니들. 증오와 분노 속에 그 광포한 힘을 해방시켜, 휘안을 갈가리 찢어 죽여 버리고 싶다. 모든 것을 혼자 서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그 작고 여리고 소중한 존재를 짓밟아 버렸 다. 그리고 그 지치고 상처받은 존재를 위해, 이렇게 스스로 철창 안으로 돌아오게 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어도 아킨의 그것을 억누르는 것은 단 하나, 온 몸 의 뼈와 살과 피 속에 아로새겨진 단 하나. 가장 비참하고 증오스 러운 상황에서도 또 한번의 인내를 강요하는 것..... "....어머님은......그를 사랑했습니다......" 노파의 손이 내려갔다. 아킨은 그런 그녀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러니 저는 결코 그를 죽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증오와 분노 속에서도 최후의 검은 검 집으로 돌아오고, 이기 는 것은 언제나 휘안토스였다. 그 앞에는 언제나 그녀가 있었고, 그의 손 위에는 언제나 어머니의 손이 있었고, 그 이마에는 언제나 어머니의 입술이 있었다. 어머니- 그녀야 말로, 감옥의 자물쇠를 채워버린 열쇠였으며, 이제는 바다 속 으로 가라앉아 버린 열쇠였으니, 자물쇠는 영영 열리지 않을 것이다. *************************************************************** 작가잡설: 홈페이지 주소가 http://owlland.com 으로 바뀌었습 니다. 그 동안의 트래픽 초과사태로 자주 자주 주저앉아 버리는 바람에......;;; 앞으로는 저 주소로 오세요. ^^ 자, 받아 적으십시오...! http://owlland.com 입니다! 아, 그리고 곧 계정도 바뀔 예정이니...톱으로 들어오셨던 분들도 주소를 바꿔 주세요....;;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39장 *************************************************************** [겨울성의 열쇠] 제39장 얼음의 공주 제180편 얼음의 공주#1 *************************************************************** 아버지로부터 나실론으로부터 전해진 마지막 명령을 듣게 된 휘안토 스는, 이제 거의 할 일이 없어졌다 결론 내렸다. 그리고 사건이 있 었던 근 한 달 만에 유명한 르 마시에르의 정원을 한가로이 거닐 수 있었다. 가을로 접어드는 로시온 제국의 황궁은 진한 붉은 색과 황금색에 둘 러싸여 있었다. 하늘에서는 날카롭고 차가운 햇살이 쏟아지고, 그 끄트머리는 분수대의 물줄기 위에 찬란하게 부서진다. 물줄기 소리 는 숲으로 들어온 듯 세찼고, 숲 속에 숨은 자그만 새들의 울음소 리가 들려왔다. 휘안토스가 붉고 작은 포석으로 덮인 오솔길로 접어 들자, 인기척을 느낀 작은 새들이 도망치는 소리가 푸드득-들려온다. 일주일 정도 만에 모든 일이 다 끝나 버렸다. 베로크 황자는 황궁으로 돌아왔고, 막 떠나려던 사절과 떠났던 사절 모두 돌아와 각자가 머무는 궁에서 어서 황자를 제위에 올리고 돌 아갈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베로크 황자가 왜 도망쳤을 지, 에크 롯사와 카를로사에서는 벌써 짐작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암롯사 가 움직인 것에서, 그 일에 어느 나라가 연관되었을 지도 역시 예측 했다. 나셀의 공포 사이러스가 직접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가 어떻 게 일을 처리해 왔는지 잘 아는 두 나라는 이번 사건의 원인과 과 정에 대해 왕이 분명하게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하는 것이라 짐작 할 수 있었다(또한 확인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들은 델 카타롯사에서 일주일 내내 보내는 요청에 당연히 침묵했다. 그 어떤 경고도 항의도 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이 얌전하고 델 카타롯사가 알아서 머리를 숙이면 사이러스가 구태여 전쟁을 하 지 않을 거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렇게만 되면 일은 꽤 조용 히 끝날 수도 있고, 델 카타롯사의 도발 역시 더 이상 진척되지 않 을 것이다. 두 나라 사이에서만 전쟁이 일어나면 상관없지만, 이번 의 일은 일의 성격이 성격인 만큼 델 카타롯사를 묵인할 수 없는 것이 카를롯사와 에크롯사였으며, 이에 늦게나마 눈치 채기 시작한 헤로롯사 역시 동조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인내와 그 인내를 뒷받침할 수 있는 힘이 서로 밀고 당기는 보이지 않는 전쟁이었다. 델 카타롯사의 암롯사에 대한 굴복이냐, 아니면 델 카타롯사의 사활 을 건 싸움이냐. 물론 이번에 델 카타롯사에서 굴복하면 암롯사에서 요구하는 것은 꽤 많아지게 될 것이다. 다시는 움직이지 못할 가 장 큰 족쇄를 그들의 목에 들이밀어 채운 후 그 열쇠를 저 휴전의 바다 깊은 곳에 내동댕이칠 것이다.....사이러스 대공왕, 휘안토스의 아버지는 별로 자비롭지 않다. 그러다가 휘안토스는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물줄기소리가 세차게 들리고 있었고, 그 분수가 뿜어져 오르는 깊은 인공연못 위에는 드래곤의 상이 있었다. 그리고 붉게 물든 단풍나 무가 드리운 그림자 속에 얇고 흰 베일이 바람에 흔들렸다. 휘안토스 는 그것이 날아온 바람이 잔잔하게 불어오는 방향을 보았다. 어두운 그림자와 그 속에 반짝이는 햇살조각이 점점이 떨리는 가운 데, 소녀 하나가 서 있었다. 베일을 주우려고 온 듯 했지만 휘안토 스를 보자마자 얼어붙은 듯 멈추어 서서는 망연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휘안토스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도 돌리지 못한 채 더욱 창백해진다. 휘안토스가 말했다. "이곳에 머무는 건가?" 소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술이 하얗게 되도록 짓눌렀다. 꼭 쥔 자그만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증오보다는 두려움이 먼저인 것이다... 휘안토스는 별 말없이 베일을 들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러나 그 녀가 손을 내밀지 않자, 결국 분수대 위에 얹어 놓았다. 그녀가 왜 이곳에 있는 지 짐작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아킨은 그녀를 세르네긴에게 보냈고, 그 세르네긴은 아직 에크롯사의 공주를 호위하며 이 황궁에 머물고 있다. 그런 그에게 저렇게 작은 여동생 하나 옆에 머물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다. 물론 그날 이후 세르네긴과는 만나지 않았다. 찾아오거나 하지는 않 았지만 분명 알고는 있을 것이다. 용기사답게 예리할 테니, 갑자기 그에게 돌아온 동생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를 리가 없다. 그래도 그는 찾아오지 않았다. 항의는커녕, 오히려 그가 피하는 듯 얼굴 마주한 적조차 없다. 세르네긴 혼자만이 관련되었다면, 차라리 세르네긴 자신에게 일이 일 어났다면 그는 결코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저 소녀에 관해서는 아니다. 생채기 하나만 나도 손을 거둘 수밖에 없는 소중한 존재이고, 그렇다고 상처 입는다 하더라도 섣 불리 복수할 수 도 없다. '복수'라는 것을 시도하는 순간에, 저 소 녀부터 산산조각 날 테니까 말이다. 저것이야 말로 세르네긴의 두터운 갑옷아래 숨은 여린 심장이자 두려 움이다. 마지막 두려움, 진짜 두려움- 그러니 이래도 나를 경멸할 텐가, 세르네긴. 아무 것도 희생시킬 필 요가 없고, 그 누구의 목숨 값도 빌릴 필요 없이, 자신의 힘과 고 결함을 지키면서 그 자리까지 갔고 앞으로도 그럴 일이 없을 당신이. 이해 받고 싶었던 적도 없고, 그러니 후회할 생각도 없었다. 스스로부터 납득시켜 본 적 없이, '가장 합리적이다.'라고 생각되는 대로 판단해왔고 그렇게 해 왔다. 아버지가 그랬듯, 그 아버지의 아버지가 그랬듯, 더 멀리 나가 암롯 사의 초대왕이 그러했듯, 군림의 왕좌는 언제나 죄악으로 쌓아 올린 길 위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 피비린내를 외면할 생각도 없고, 그것이 더 큰 것 더 위대한 것을 위해 반드시 치러야 하는 것이라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도 납득 못하는 논리로 기만할 생각도 없다. 누가 누구의 기준으로 나를 판단할 것인가. 이해할 수도 없고, 정작 그런 일을 해야 한다면 그것을 피하기보다는 두려움에 떨면서 일을 저지르고도 나는 옳다, 나는 무언가를 위해 이 일을 해야 한다-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기만할 자들이. 적어도 휘안토스는 그런 적은 없었다. 두려워 한 적이 없으니, 그 두 려움을 피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휘안토스에게 그 모든 말 들은 전혀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무지한 자들이 떠들어 봐야 역시나 무시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대체 왜- 대체 왜 너만은 그토록 신경 쓰이는 건가, 세르네긴. "아키는....." 갑자기 소녀가 말문을 열었지만 정작 말을 제대로 꺼내지는 못했다. 휘안토스가 대신 말했다. "설마, 잡아먹기라도 했을까, 유제니아." "...." 예전에 자신이 했던 말을 기억한 듯 유제니아의 눈이 확 타올랐다. "너에 대해서만 걱정해. 정말 잡혀 먹혀 버린 것은 너였으니까." 유제니아는 더 새파래졌다. 휘안토스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모든 것을 유제니아는 처참한 상처와 함께 기억하고 있었다. 제대로 저 항하지도 못하고 짓밟힐 때의 비참함도, 몸이 찢겨 나가는 듯한 고 통 속에 느끼던 공포도- 그 상처는 심장 가장 깊은 곳에 박혀서 어 둡고 차가운 피를 뿜어내고 있다. 그런 유제니아를 보며 휘안토스는 새삼 아킨이 왜 이 아이를 좋아하 는 지 궁금해졌다. 예쁜 아이이긴 하지만 켈브리안 쪽이 훨씬 아름 답고, 밝고 귀여운 아이'였던' 것도 사실이지만 더 이상은 아닐 것이다 . 그리고 단지 그 이유 때문이었다면 차라리 예전에 켈브리안 공 주를 진심으로 좋아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 때 분명 '처녀'였으니 아킨과 다른 일이 있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휘안토스가 다가오자 유제니아의 얼굴은 이제 새하얘지고 있었다. 도 망치고는 싶지만, 휘안토스를 마주하고 그 정도 용기를 내는 것은 지금의 그녀에게는 불가능했다. 휘안토스는 먼저 물러나 주기로 하 고 돌아섰고, 순간 그를 지켜보던 검은 옷의 기사와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지는 않았다. 그는 곧장 휘안토스를 지나쳐 몸의 힘이 탁 풀리며 쓰러지는 유제니아를 붙들었다. 거의 혼절해 버린 듯한 유 제니아는 기사-세르네긴의 옷자락을 꽉 움켜잡으며 겁먹은 작은 짐승처럼 파들파들 떨었다. "왕자-" 세르네긴이 먼저 그를 불렀고, 휘안토스로서는 그런 반응 자체가 아 주 의외였다. 휘안토스가 고개를 돌리자 눈이 마주쳤다. 분노 같은 것은 없었다. 그 눈동자는 늘 그렇듯 마치 유리알처럼 차 갑고 아무런 감정도 없어 보였고, 그것은 평소의 세르네긴과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얼마나 인내하고 있는 걸까? 휘안토스는 새삼 궁 금해졌다. 그런데 세르네긴이 말했다. "예전의 그 결투는 아직 유효한 겁니까." "유효하다." 순간 유제니아가 세르네긴의 옷자락을 더 세게 움켜잡았다. 하지마- 작은 속삭임이었지만 휘안토스에게도 들렸다. 절대 하지마--제발. 더 작은 속삭임이었는데도, 역시 휘안토스에게도 들린다. 그리고 는 유제니아는 세르네긴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 순간에나마 세 르네긴의 눈 안으로 감정이 스쳐지나갔다. 분노와 슬픔, 그리고 그 두 가지보다 더 크고 진실 된 것은 '애정'이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에 휘안토스는 깨달았고, 아련하게나마 동생을 동정 했다. 이것이었나, 아키- 어리석게도 저것을 원했던 것이냐. 휘안토스가 세르네긴이 가진 고결함과 자존심을 그토록 싫었듯, 아킨 은 그가 누군가에게 베푸는 '순결한 애정' 자체를 갈망했던 것이다. 아마도- 저 소녀를 보지 못했을 때부터 아킨은 무의식적으로 세르네 긴이 가진 애정의 대상을 동경했을 것이고 갈망했을 것이다. 시작은 그러했을 지라도, 그 감정을 자신의 일부로 만드는 것은 본인이다 . 아킨은 분명 '애정 자체'를 바랬지만, 그것은 분명 생명을 부여 받고 자라나 드디어 진심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아킨은 작아도 소중한 것을 가지고 싶어했고, 평화로운 안식처를 바 랬다. 지킬만할 것을, 그만의 것을, 그리고 그의 영혼을 지켜줄 것을. 그렇게 휘안토스가 파괴하고 싶어할 때 아킨은 가지고 싶어했다. 그리고 그 우연 아닌 우연으로 아킨 쪽이 엉망이 되어 버린 것이다. 휘안토스는 또한 왜 아킨이 유제니아를 보내고 남은 것인지 알 것도 같았다. 그것은 희생 같은 것이 아니었다. 이미 아버지의 죄에 희생되고 어머 니의 절망에 희생되고 휘안토스의 지위를 위해 희생된 아킨이 또 희생을 자청할 리 없다. 부서뜨리지 않기 위해 가장 안전한 곳으로 보내버린 것뿐이다. 그리고 아직도 휘안토스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 는' 마지막 권리를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죽고 죽일 수는 없어도, 적어도 형인 휘안토스에게 아무 것도 의지하 지도 빚지지도 않은 채 등 뒤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것이다. 그, 가장 위험한 곳에서. 너답구나, 아키- 정말 너다워.... "결투는 정말 할 건가?" 휘안토스의 말에 세르네긴은 차갑고 무감한 눈으로 휘안토스를 바라 볼 뿐이었다. 침묵- 용기사다운 짓이군. 휘안토스가 말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하는 건가. 예전의 그 일 때문인가, 아니면 당 신 여동생의 순결을 위해서인가." 순간 세르네긴의 눈 안에 뜨거운 빛이 번득였다. 그리고 유제니아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누구에게든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합니다......그 누구도 신부의 몸에 손댄 자는 용서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유제니아조차 놀란 듯 했다. 여전히 겁에 질린 푸른 눈동자가 휘안토 스를 향했고, 그녀와 휘안토스의 눈이 마주치기도 전에 세르네긴은 그녀의 얼굴을 가려 보이지도 보지도 못하게 했다. 포기한 휘안 토스가 말했다. "그 이유를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해도 상관없다. 하지만 아무리 고지 식한 사람이더라도, 그것이 정말 누구를 상처 입힐 지 정도는 알거라 생각하는데.....세르네긴 포틀러스, 귀한 신부에게 결혼도 하기 전 에 낙인을 찍어 놓을 생각이 아니라면 관둬." "그러나 당신 잘못입니다." 차분하다. 미치도록, 고약하도록, 그래서 또 부수어 버리고 싶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를 정도로. 이래서 네가 싫다. "그렇다면 사과라도 할까?" "하십시오." "미안하게 됐군." 그리고 더 이상 아무 말도 없었다. 세르네긴은 가만히 서서 휘안토스 의 말뿐인 사과를 받았고, 받아들인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휘안토스는 여전히 투명한 듯한 세르네긴의 표정을 보고, 그 품에 안긴 유제니아를 보았다. 기분이 갑자기 나빠졌고, 휘안토스는 뒤 돌아 자신이 머무는 귀빈궁으로 향했다. 무언가 갈가리 짖어버리고 싶은 욕구가 다시 솟구쳐 오른다. 휘안토스가 사라지자 유제니아는 놀란 눈으로 세르네긴을 보았다. "세냐- 방금 무슨 말 한 거야?" "순서가 뒤바뀐 건 인정할게." ".....무슨...." "우리.....결혼하자, 유제니아." 순간 유제니아는 잡고 있던 세르네긴의 손을 놓고 말았다. 놀라서 그런 것이다. 너무나 놀라서. 그러나 세르네긴은 그런 유제니아의 손을 다시 잡아 당겼다. "영원히 지켜줄게, 유제니아 쥬르- 그리고 이제 그 누구도 네게 손대지 못하도록, 나외의 그 누구도 너를 위해 희생할 필요가 없도 록." 유제니아는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세르네긴의 큰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 손은 언제나 옆에 머물면서 그녀를 사랑해 주고 소중히 지켜주던 손이었다. 언제나 이 손이 옆에 있어줄 거라 생각했고, 언젠가는 영원히 있어주겠다 약속해 줄 거라 생각했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길 거라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그에게는 언제나 가장 사랑하는 존재이기를 원했다. 그리고 결코 변하지 않 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유제니아는 그의 손을 놓았다. "조금만....기다려 줘." ".....유즈-" "미안. 하지만......지금은 조금만 기다려 줘." 잠시 말없이 있던 세르네긴은 그런 유제니아를 끌어안았다. 유제니 아는 이마에닿는 그의 심장소리가 아주 크게 느껴졌다. **************************************************************** 작가잡설: 정리해 보자면.....이제 막 취직한 녀석이 여중생(3)에게 청혼하는 셈;; 그리고.....고2가 라이벌이고, 역시나 고2짜리 나쁜 넘이 그 여중생 을 나꿔채 간 형국. 게다가 고2를 노리는 명문가 여대생과 그 여대생 을 노리는 중년의 유명 벤쳐 사장님! (해 놓고 보니 좀 무섭군;;; ) 어찌되었건 유즈는 풋풋한 열 여섯 소녀, 세냐 스물다섯 청년~~ 에잇, 도둑놈!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39장 ************************************************************** [겨울성의 열쇠] 제181편 얼음의 공주#2 *************************************************************** 바위 산 너머로 해가 떠오르자, 산 바르젤 요새가 세워진 하얀 절벽 과 그 잿빛 성벽, 주변을 감싼 나이 많은 나무들과 바다가 모두 불 그스레한 금빛으로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루첼이 이 바르젤 요새에서 열두 번째로 보는 아침 해이기도 했다. 편했다고 말하면 정말 거짓말이고,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면 그 것 역시 거짓말이었다. 루첼은 여러모로 요령이 좋은 청년이었다. 케올레스처럼 늙고 유능한 사람 앞에서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잘 알았고, 제대로 알기도 전에 무시하려고 들거나 대 놓고 적대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도 잘 알았다. 케올레스에게는 평소답게 부지런한 모습을 보이며, 앞으로 나서는 대 신 그의 지도에 귀를 기울이며 겸손하게 처신했다. 케올레스는 루 첼이 롤레인의 제자라는 것에 상당히 신경을 썼지만, 며칠 지나자 루첼을 그저 성실하고 영특한 젊은이 정도로 편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 그리고 일부 기사들은 케올레스가 루첼을 마음에 들어 하자 적 대감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자존심 강한 몇은 어떻게든 루첼을 한번 정성껏 만져주고 싶어 했다. 그 나머지 일부에 관해서는, 루첼은 가장 험악하게 빈정대는 기사 하나를 골라 그가 극단적으로 시비 걸때까지 침착하게 기다린 후 연무장에서 단번에 때려 눕혀 버리는 것으로 해결을 보았다. 몇몇은 마법이다 어쩌고 했지만, 그것을 지켜 본 왕의 근위대 기사 하나가 보증했기에 루첼의 결백이 증명되었다 . 이렇게 되다 보니, 적대하던 일부마저도 루첼에게 호의적으로 돌 아서고 그래도 고집 센 몇은 이제는 별로 귀 기울여주지 않는 험담 을 술주정하듯 하게 되었다. 루첼을 향한 젊은 기사들의 적대적인 분위기를 벌써 눈치 채고는 있었지만 루첼 스스로 해결하기를 기 다렸던 케올레스는 만족했으며, 루첼은 아주 편해졌다. "젊은이치고는 요령이 있군, 자네." "나름의 경험입니다." 케올레스는 그것이 그저 젊은이의 농담이라고만 여겼을 뿐, 루첼이 조직생활에 하인생활에 괴팍한 후견인을 둔 고학생에 베넬리아의 마스터 롤레인의 제자까지 되는 파란만장한 청소년시절을 보냈다는 것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그리고 주먹다짐에는 능숙하면서도 말은 못타는 것은 좀 이상하게 여겼지만, 루첼이 가난한 평민출신인 데다가 항구사람이라는 것으로 납득해버렸다. 그렇게 일단 주변 사람들에게 익숙해지고 주변사람들도 루첼에게 익 숙해지니 생활은 몇 배로 편해졌다. 이 틈을 이용해 루첼은 자켄의 부탁대로 아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내려 했지만, 에크 롯사의 여왕마저 알아내기 힘든 것을 왕의 마법사 '비서'인 루첼이 알아내기는 극단적으로 힘들었다. 그러나 나랑 상관도 없는 녀석 때문에 괜히 고생이다 불평을 하면서도 아는 사람의 일에는 매정하 지 못한 루첼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흐르는 중에 제도로부터 베로크 황자가 즉위하게 되었 다는 소식이 날아들었고, 살벌한 산 루에르 요새에서도 축기가 내 걸렸다. 적국이라도 같은 제국내의 대공국인 델 카타롯사 쪽의 기 지에서도 축기가 걸렸다. 그리고 이제부터 '성배의 서약'에 의해 두 달간의 대공국간의 전쟁이 금지된다. 즉, 기지 내 기사들은 두 달간 은 할 일이 없어지는 셈이다(그리고 그것은 루첼을 아주 싫어하는 기사 몇이 루첼을 어떻게 괴롭혀 볼까, 하고 고민할 만한 여가 시간을 늘려주는 결과도 가지고 올 것이다). 축기가 걸린 이틀 뒤 정오 즈음에 델 카타롯사쪽에서 전령의 배가 쏜 살같이 바다를 가르고는 산 루에르 요새에 도착했다. 전령은 왕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대신 케올레스와 루첼을 만나 그쪽 델 카타롯사 의 서신을 받아 왕에게 전했다. 협상을 위한 사절을 보내겠다는 말이었고, 사이러스는 축기 옆에 사신을 받아들이겠다는 초록색 깃 발을 올리게 했다. 곧 델 카타롯사에서는 이틀 뒤 아침에 사절을 보 내겠다는 연락을 보내왔고, 이번에도 케올레스와 루첼과 몇몇 왕의 근위대가 그 사절을 맞이하러 내려갔다. 그리고 그 사절을 보게 되자 루첼은 입을 작 벌리고 말았는데, 그것은 그 사절의 수행원 중에 익숙한 얼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시나 그 얼굴을 알아본 케올레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악튤런 파노제였다. 그는 배에서 내리자마자 케올레스가 아닌 루첼을 대뜸 쏘아보더니, 사절의 대표이자 칼리토 대공왕의 막내 고모인 랑그레아 공주에게 뭐라 말했다. 랑그레아 공주는 당연히 고개를 저었고, 악튤런 파노제는 쳇--하고 뭐라 투덜댔다. 아마도 루첼과 이야기 해보고 싶다고 청한 듯한데, 이번 협상을 재빨리 끝내고 도망가고 싶은 공주에게는 협상 이외 의 것을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두려운 변수였던 것이다. 그러나 눈빛과 분위기만큼은 거둘 수 없어서, 루첼과 악튤런은 서로 를 마주보지도 않으면서도 사절과 암롯사 쪽의 분위기를 동시에 냉 각시켜 버렸다. "폐하께는 제가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케올레스가 말하자 랑그레아 공주는 슬쩍 악튤런의 눈치를 살피고는 치마를 살짝 들며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왕의 마법사님." 동시에 델 카타롯사로부터 온 사절들이 모두 인사를 했고, 젊은 악률 런이 뻣뻣하자 랑그레아 공주는 그의 옷자락을 슬쩍 잡아당겼다. 동시에 케올레스와 그를 따라온 모든 수행원들이 허리를 숙였다. 악튤런도 그 정도 눈치를 주자 케올레스에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인사가 끝나자 케올레스는 공주를 에스코트하며 요새 안으로 안내했 다. 온 성에 병사들이 중무장한 채 배치되어 있었고, 전함이란 전함은 모 조리 대포가 장전되어 바다에 깔려 있었다. 기사들은 요새 곳곳에서 칼자루에 손을 얹은 채 공주와 사절을 차가운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고, 케올레스가 눈길을 보내자 곧바로 인사를 올렸다. 이건 어 째 같은 편이 루첼이 봐도 살벌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악튤런 파노제 정도 되는 마법사가 일행을 따라온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일이 틀어지면 곧바로 공주를 데리고 도망칠 수 있을 정도의 마법사이기 때문인 것이다. 케올레스는 델 카타롯사의 공주를 연회장으로 안내했다. 아무 말 없 이 따르던 루첼도 오늘 왕이 사절을 어디에서 맞이할 지에 대해들은 바가 없었던 지라 호기심이 일었다. 점심대접부터 하고 이야기를 하려나? 홀 앞에도 기사들이 쫙 깔려 있었다. 호위를 하는 것인지 지금 이 일 행과 전투를 하자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중무장하고 있는 것은 매 한가지였으나, 그래도 그들의 어깨에서 허리까지는 제국의 경사를 축하하는 황금휘장이 둘러쳐져 있었다. 케올레스가 문 앞에 멈추자 시종들이 달려와 문을 열었고, 곧 펼쳐지는 연회장의 모습에 루첼은 대체 언제 이렇게 준비를 했나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정오의 환한 햇살이 온 연회장에 쏟아지고 있었으며, 사절들을 위한 음식과 술, 게다가 잘 차린 시종들까지 대기하고 있었다. 암롯사의 왕 사이러스는 그 연회장을 내려다보는 왕좌에 앉아 그들을 기다리 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랑그레아 공주." 예의바르고 부드러운 목소리였으나, 델 카타롯사의 사절들은 단번에 모두 새파래지고 말았다. 악튤런 파노제는 대 놓고 이를 드러내 보 이며 암롯사 대공왕을 노려보았고, 다시 공주로부터 주의를 들어야 했다. '암롯사의 대만찬' 이라는 말이 있다. 암롯사의 대공왕 사이러스가 반란을 일으켰던 동생과 그 수하들을 불 러 푸짐하게 차린 홀로 안내했고, 그 화려한 만찬장에서 그들을 처 참하게 살육해 버렸다. 그리고 그 뒤로 그 유명한 '암롯사의 대만찬 '이라는 말이 생긴 것이다. 만찬에 참석하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걸 어야 하는 일이고, 그곳에서 돌아온다는 것은 아직은 사이러스의 신임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그 살육잔치가 단 한번만 일어난 것 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사이러스가 준비한 이 연회가 대체 어떤 의미인지 사절은 짐작하기 어려웠다. "이미 들으셨겠지만 제도에서 드디어 베로크 황제폐하가 성검과 성배 의 맹세에 따라 등극하셨소. 직접 그 대관식에 참석할 수는 없으니, 이곳에서 새로운 황제폐하의 탄생을 축하하고자 이렇게 조촐한 축 하 연회를 마련한 거요." 시종장이 최고 상석을 빼 사이러스 대공왕을 앉혔다. 사이러스는 사 절들에게 말했다. "어서 앉으시오." 곧바로 시종들이 나와 사신일행을 각자의 신분에 따라 상하석으로 나 누어 안내해 앉혔다. 그들 옆으로 곧바로 잔이 놓이고, 피처럼 붉은 포도주가 따라졌다. 케올레스를 따라왔던 기사들은 연회장의 문 앞 을 지켰고, 그것으로 왕의 허락 없이는 그 누구도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악튤런 파노제가 그런 기사들을 노려보았다. 루첼은 아무렇지도 않게 포도주가 다 따라질 때까지 기다리는 사이러 스 대공왕을 보았다. 신분이 신분이라, 루첼은 그들과 함께 식사할 수 없었다. 게다가 케올레스의 충고에 따라 식사는 미리 미리 마 쳤으므로, 별반 식욕도 없었다. 그래서 기사들 옆에 서서 차분하게 사이러스와 그를 마주하는 사절을 볼 수 있었다. 롤레인을 찾아왔던 그 때와는 달리, 사이러스는 정말 '암롯사의 왕'으 로 앉아 있었다. 간편하게 차려 입은 그 때와는 달리 지금은 왕의 차림이었으며, 머리에는 왕관까지 있었다. 나셀의 광룡이자 델 카타 의 악몽인 그 모습으로- 잔이 다 채워지자 사이러스 대공왕이 자신의 금잔을 들었다. "첫 잔은 새로이 즉위하시게 되는 베로크 황제폐하를 위해-" 케올레스가 자신의 잔을 들었다. "축복을-" 그러자 랑그레아 공주가 잔을 들었다. "영광을-" 마지막으로 악튤런이 잔을 들었다. "또한 평화를-" 너는 그냥 붙어 싸우고 싶다는 눈치다, 하고 생각하며 루첼은 잔을 비우는 악튤런을 보았다. 악튤런이 눈치 챈 듯 루첼을 한껏 쏘아보 고는 눈길을 돌렸다. 잔이 모두 비워지자 대공왕이 말했다. "공주, 미리 말해 두지만 내가 이곳 델 카타롯사를 마주하는 산 바르 젤 요새까지 온 이유는 귀국을 위협하기 위함이 아니오. 나는 다만 델 카타롯사의 귀한 분이 이곳까지 오셔서 축배를 나누게 된 데, 그리고 내 뜻이 잘 전달된 것에 기뻐하고 있소." 온 병사들을 무장시켜 놓고 함대를 발진만 남겨 놓은 채 대기시켜 놓 은 왕이 그렇게 말하자, 랑그레아 공주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졌다. 그것을 보는 사이러스가 미소를 지었다. 루첼도 소름이 쭉 끼쳤다. "나와 귀국의 선왕이었던 랑기온 사이에 불미스러운 일이 많았다는 것은 나도 인정하는 바이오. 그러나 이것이 내 아들들에게까지 이 어지는 것을 나는 바라지 않고, 서로 평화로이 지내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소....." "그것은 저희 국왕폐하께서도 바라는 일입니다." 랑그레아 공주도 얼른 말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귀국과 짐의 나라는 그 평화를 원하기는 해도 반드시 필요한 신뢰를 쌓기 어려운 처지요." "폐하께서 성의를 보여 주신다면 저희는 얼마든지 평화를 지킬 수 있 습니다." 악튤런 파노제였다. 즉, 제발 저 바다에 와글거리는 함대를 치워달라 는 것이다. 말은 바른 말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근 악튤런이 꺼낼 만한 말도 아니고 꺼내서도 안 되는 말이었다. 악튤런은 이름은 유명했으니 지나치게 젊고, 또 그 위치도 조금 의심스러웠다. 사이러 스는 그런 악튤런을 지긋이 보고는 말했다. "물론 성의를 보여줄 생각이오. 또, 그것을 델 카타롯사에서도 기쁘게 받아주기를 바라고 있소." 악튤런이 갑자기 끼어들어 잔뜩 긴장했던 공주의 얼굴은 당연히 밝아 졌다. "무엇이든 기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기껍게 받아주시니 고맙소.........좋소, 나는 돌려 말하는 성품 은 아니니 직접 말하겠소. 지금 내게는 아들이 둘 있소." 대화를 듣는 루첼은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아들이 '둘'이다? 설마.... 그래서 얼른 케올레스의 눈치를 살폈으나, 케올레스는 무덤덤한 얼굴 일 뿐이었다. 역시나 저 케올레스와는 이야기를 이미 마치고 논의도 충분히 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 아무 것도 눈치 채지 못한 랑그레아 공주는 눈을 반짝이 며 왕의 말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공주에게 사이러스는 말했다. "그리고 공주, 귀국에도 내 아들들과 동갑인 아름답고 명석한 공주가 있는 걸로 알고 있소." 순간 델 카타롯사의 사신들 중 가장 먼저 상황을 깨달은 악튤런의 눈 에 불꽃이 튀어 올랐다. 랑그레아 공주는 그런 악튤런에게 주의를 시키려다가 같은 것을 깨닫고 납덩이처럼 새파래졌다. "저....저기..." "그리고 나는 양국의 영원한 평화를 위해, 또 새로운 황제폐하게서 등극하신 이 경사스러운 해에 내 아들인 아킨토스와 귀국의 공주이자 칼리토 대공왕의 누이동생인 칼라하스 공주가 혼인식을 올리는 만 큼 좋은 일도 없을 거라 생각하오." 순간 악튤런이 잔을 바닥에 거세게 내동댕이쳤다. 와장창- 날카로운 소리가 방안을 울렸고, 그것은 누군가의 울부짖음이나 비명같이 들 려왔다. 랑그레아 공주는 거의 쓰러질 듯한 얼굴로 왕을 바라보았지만 , 사이러스 대공왕은 그 두 사람의 반응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 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폐하.......저희 공주님께서는..." 그러나 차마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얼어붙을 뿐이었다. 무엇을 말 하든 자국 공주에 대한 모독이었다. 평범한 공주였다면 아직 어리다 거나 모자라다고 말해도 될 일이었으나, 칼라하스 공주의 경우 그것이 '진실'이기에 절대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사이러스가 말했다. "거절하고자 하시는 거요?" "폐하, 하지만 이것은 너무나 급작스런 일이라- 게다가 워낙에 중요한 일이라 저희 칼리토 대공왕 폐하께 말씀을 드리고 본국에서 깊이 논의 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양국의 평화를 위 한 길이며, 이 제국의 안정을 위한 길이오. 그러나....행여나 칼리토 대공왕이 거절한다면 그야 말로 애석할 일이겠소. .....나는 별로 싸 우고 싶지 않거든." 사이러스 대공왕을 노려보는 악튤런의 눈에서 불꽃이 확 일었다. 분위 기는 순식간에 경악과 두려움으로 얼어붙었고, 랑그레아 공주는 전혀 엉뚱하면서도 무시무시한 제안을 떠맡게 되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 었다. 사이러스가 말했다. "자, 이제 식사를 시작하도록 하지." 그리고 그 말과 함께 홀의 한쪽 문이 열리며 악사들이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아름답고 조용한 음악소리가 퍼지는 가운데, 사이러스의 '초대'를 받은 델 카타롯사의 사람들은 음식이 어디로 어떻게 들어가는지 모르 게 식사를 시작했고, 그 중 악튤런 파노제는 결국에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순간 기사들이 문 앞으로 나섰다. 검을 뽑지는 않았지만, 손은 벌써 칼자루 위로 가 있었다. 악튤런은 그런 기사들을 사납게 노려보고는 뒤돌아서 다시 제 자리로 돌아앉아야 했다. 암롯사의 대만찬- 루첼은 그 말이 대체 왜 나왔는지 이제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지배하던가 죽던가- 그것이 판단되는 자리가 바로 이 대만찬이었으며, 이 사절은 완벽하게 사이러스의 살기와 잔인함에 압도되어 '지배'되 고 있는 것이다. 살아는 있을 것이나, 이것으로 완벽하게 암롯사의 손 안으로 들어와 그의 뜻에 따라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지 않으면 죽어 나갈 뿐이다. 루첼은 사이러스 대공왕을 다시 한번 바라보아야 했다. 예전에는 그저 아킨과 휘안토스의 아버지이자 막연한 암롯사의 왕이라고만 생각해 왔지만, 지금의 그는 나셀의 광룡이자 살아있는 델 카타와 툴칸의 악몽, 그리고 그 유명한 '암롯사의 왕' 사이러스였다. ***************************************************************** 작가잡설: 칼리토에게 시집보내겠다는 말을 실수한 사이러스. 아아, 어제 술 마시고 들어왔습니다. 아울- (핼렐레~) 우이구, 우리 이뿐 자룡이~~ 이모 왔어. (와락, 꽉, 부비부비부비 주물럭 주물럭-) 자룡- 캬라라라랑~~! 캬라라라랑~~~ (우에, 술냄새~ 술냄새~~!!)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39장 **************************************************************** [겨울성의 열쇠] 제182편 얼음의 공주#3 ***************************************************************** 사이러스의 무시무시한 제안은 그날로 델 카타롯사의 왕궁이 있는 수 도 카티온으로 들어갔다. 칼리토 대공왕은 그것을 받자마자 당장에 집무실을 박차고 나가 여동 생을 찾아갔고, 암롯사에서 악튤런 파노제가 거의 미친 듯이 보내온 그 제안을 칼라하스 공주는 차분하게 들었을 뿐이었다. 가장 비 밀스런 자리조차 허락받은 마하는 얼음꽃처럼 흐트러짐 없이 완벽한 자태로 듣고만 있는 공주를 동정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칼라하 스는 마하를 등지고 있었으나 그 눈빛이 어떠할 지 짐작이 되어 자 신의 창백한 손을 마하의 두툼한 손위에 얹었다. "고약한 제안이군요." 칼라하스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저 편에 앉은 칼리토 대공왕의 한숨 소리가 들려온다. 칼라하스는 눈을 들어 열한 살 위인 오빠를 바라 보았다. 눈매 부근이 칼라하스와 닮은 얼굴이었지만, 인형처럼 예쁜 동생보다 얼굴선이 굵어 훨씬 남자다운 인상이었다. 머리는 칼라하스와 비슷한 검푸른 색이고, 역시나 비슷하게 물결치며 어깨까지 늘어져 있는 단발머리였다. 저녁노을은 그의 어깨와 볼을 붉게 적셨고, 그 눈 은 분노와 증오에 노을보다 더욱 진하게 타오른다. "생각할 필요도 없다. 이건....휴전의 대가로 너를 인질로 보내라는 말 이잖느냐!" "네, 우리만 꼼짝 못하는 제안이지요." 사이러스는 선심 베풀 듯 결혼의 모든 것은 암롯사에서 부담하겠다 말했다. 신부가 되는 공주는 별로 준비할 것도 없이 그저 암롯사로 와서 암롯사 왕이 혼주가 되는 결혼식을 암롯사 왕의 아들과 올리고 , 암롯사 왕이 제공할 성과 영지를 받고 암롯사 안에 편안하게 살 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즉, 정말 칼라하스 공주를 인질로 내 달라는 말을 아주 길고도 부드 럽게 번역해 놓은 것에 불과했다. "어쩌실 거죠, 오라버님?" "당연히 거절해야지." ".....그리고 전쟁을 하실 생각이신가요?" "당연하지 않느냐! 나는 너를 인질로 팔아 평화를 살 생각도 없고, 또 '그런 신랑'에게 여동생을 보낼 오래비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칼라하스는 웃음이 나왔다. 그런 신랑- 이라. 똑같이 생긴 쌍둥이이니 그 휘안토스와 얼굴만은 닮았을 테고, 그렇 다면 꽤나 예쁘장한 소년임에는 분명할 것이다. 또한, 컬린의 제자인 오거스트 롤레인의 대제자이며, 탈로스 고르노바와도 연관이 있으며, 새로이 나타난 의문의 마법사이자 컬린의 가장 큰 비밀을 쥐고 있는 베이나트와도 아는 사이다. 즉, 암롯사의 왕자만 아니라면 어 떤 수단을 써서라도 델 카타롯사로 불러와야 할 존재인 것이다. 칼 라하스는 어떤 것이 더 좋을지 정말 판단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칼라하스는 무심한 척 하며 물었다. "대체 그 왕자가 어떻기래.....그러시는 거죠?" "입에 담기도 곤란해." "심각한 병이라도 있는 건가요?" 칼라하스는 다 알고 있음에 불구하고 그렇게 물었다. 칼리토가 말한 다. "그 대공비는 미쳐서 죽어 버렸다. 또, 그 녀석 역시 어머니와 함께 열한 살이 되도록 갇혀 지내고......압셀론에서도 단 2 년 만에 사라져 버렸지. 같은 이유일 거라는 것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 "아무리 미천한 집안이라도 그런 신랑에게는 절대 시집보내지 않는 다. 하물며 너는 공주이고, 왕인 나의 동생이야!" "저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요." 칼라하스의 어깨위에 얹혀 있던 굵은 손이 움찔 움직였다. 칼리토 대 공왕도 놀라움과 슬픔에 잠긴 눈으로 칼라하스를 바라보았고, 칼라 하스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 역시 제가 아무리 지참금이 많고 고귀한 집안이라 할지라도 어디 에서도 받아들여 주지 않을 신부에요......" "무슨 말이냐, 그게." "그 혼담은....아마도 제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게 될 혼담이 될 거에요." "칼라하스-" 칼라하스는 오빠의 얼굴이 그렇게 큰 슬픔과 분노에 젖어 드는 것을 처음 보았다. 칼라하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렇게 남매는 한참이나 침묵 속에 마주하다가 결국 칼리토 쪽에서 열기어 린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소중한 아이다. 그 누구보다. 그래서 그런 너를 미친 아들에게 사서 주는 신부 취급하는 사이러스 대공왕은 절대 용서할 수 없고. 그러니 칼라하스, 한 번만 더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그 때는 정말 화를 내겠다." "죄송해요." "그리고 결혼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 "대공왕이 직접 넣은 혼담이에요." "황제가 직접 명한다 할지라도 나는 용납할 수 없는 건 없는 것이다. 이유는 얼마든지, 그 대공왕이나 그 재수 없는 휘안토스 녀석 앞에 서도 말 할 수 있다. 그런 괴물에게 내 누이를 줄 수 없다고-!" "그래도 직접 만나보고 싶은데요." 머리가 화끈거리던 대공왕은 찬물 같은 동생의 말에 처음에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하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누구를 말이냐." "혼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조건으로, 이 수도 카티온에서 아킨토스 프리엔 왕자와 만나보고 싶습니다." 처음에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칼리토 대공왕의 눈이 그제야 가 닥을 잡은 듯 희미하게 밝아졌다. 칼라하스가 말했다. "그리고 그가 오라버님 말대로 정말 발작을 일으키거나....혹시 괴물 로라도 변한다면 저희로서는 이 혼담을 거절할 수밖에 없겠지요. 싸울 이유도 필요 없이 말입니다." "방법이라도 있는 거냐?" "만들어 주는 사람이 있지 않나요?" 칼리토 대공왕이 알겠다는 듯 감탄의 탄성을 냈다. "나름대로 좋은 방식이구나." 칼라하스는 눈앞의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이 비추고 있는 마하의 눈길은 먼 곳을 향하고 있었고, 그녀의 눈빛은 체념이었다. 그녀 역시 이 달갑지 않은 방법밖에는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그저 인정의 문제일 뿐이었다. 납득하지는 못했고, 조금만 더 참을성을 가지고 생각한다면 좀 더 나은 방법이 있을 거라 생각 하고 있을 것이다. 칼라하스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며 그 기분을 달래 주었다. "오라버님, 혼담이 중요하다면.....되도록 빨리 그와 만나고 싶어요." ".....알겠다. 그렇게 추진하도록 하지." 그렇게 답하는 칼리토 대공왕은 들어왔을 때처럼 얼굴이 어둡지 않았 다. 그는 여동생의 말뜻이 무엇인지 충분하게 짐작했고, 그 뜻을 수긍할뿐더러 아주 만족하고 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는 암롯사 왕의 아들이 아주 커다란 원흉덩어리라는 것을 만 천하에 보여주고 싶어 하고 있는 것이다. 칼리토 대공왕이 응접실을 나가자, 역시나 마하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말했잖아. 악튤런이라면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데." 마하는 당연히 부정적이었다. "지나친 도박입니다. 뜬소문과 짐작이 합쳐진 지나치게 흐릿한 그림 일 뿐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짐작으로 끝난 다면, 오히려 암롯사를 크게 자극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어차피 도박이다, 마하. 진다면 시집가면 될 일이지." "공주님, 그리 쉽게 말씀하실 문제가 아닙니다. 그곳으로 가시게 된다 면, 델 카타롯사는 선제공격도 방어도 힘든 몸이 됩니다. 또한 공 주님의 안전 역시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혼담을 거절할 핑계도 없잖아." "거절하여 전쟁이라도 하게 된다면, 적어도 제약은 없게 됩니다. 폐하 께서도 언젠가는 일전을 치르게 될 거라 분명 각오하시고 계실 겁 니다. 언젠가는 하게 될 거라면, 팔을 떼고 발을 떼는 일은 하지 않 는 것이 좋습니다. 오히려 경솔한 일입니다." 칼라하스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마하, 나는 그래도 그 왕자를 만나보고 싶어. 그 편이 나을 거라 생각해." "만난 후에 방금 전에 말씀하신 대로 하실 생각이십니까?" "알 수 없지." 마하의 눈이 어두워졌다. "공주님, 입장에 따라 적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비록 적의 것이라 할지라도 그 어떤 분노도 증오도 사지 마십시오. 왕과 왕사이의 전쟁에서, 서로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것과 명예를 구하고 분노를 달래기 위해 싸우는 것은 격이 틀립니다." "......." "어떤 이유에서든, 어떤 이익을 위해서든, '아킨토스 프리엔'이라는 개 인을 비참하게 만들지는 마십시오. 그는 암롯사의 왕자일 뿐만 아 니라, 오거스트 롤레인의 대제자이며, 탈로스 고르노바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그의 분노가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 지 장담하기 어 렵습니다." "모험이라고 했잖아." "공주님, 이것은 모험이 아니라 아무런 득도 없는 위험입니다." "그래도 보고 싶다면 어떻게 하겠니." "다른 이유를 바랍니다. 좀 더 제가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말입니 다." 말을 하기 전에 칼라하스는 주변을 살폈다. 노을은 더욱 진하게 내려 앉고 있었으며, 얇은 커튼과 창 밖의 테라스는 온통 핏빛이었다. 그리고 아무런 그림자도 기척도 없다. "그를 적으로 돌리기 위해 만나보고 싶은 게 아니야, 마하......오히려 그를 우리 편으로 만들기 위함이지." 마하의 눈에서 그제야 엄격함이 사라졌다. 그리고 약간의 기대와 우 려가 섞이고 있었고, 그것이 칼라하스를 기쁘게 했다. "봤잖아, 너도.....그는 정말 에크롯사까지 요양을 가야 했고 곧장 암 롯사로 가지 않고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갔어. 암롯사를 피해 다녀야 했다고...." "저희는 끝까지 추격하지 못했고, 아킨토스 왕자는 지금 암롯사에 있 습니다. 그 행보에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는, 짐작만으로 결론내릴 수 없습니다." 칼라하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건 짐작이 아닌 확신이야. 그는 광증때문이든 다른 병 때문 이든 간에, 현재로서는 암롯사 왕가의 치부야. 이런 식의 혼담에나 쓰일 수밖에 없는.....! 그런데....그 곳에서 너도 봤잖아. 그가 얼마 나 멀쩡했는지, 또 오거스트 롤레인의 대제자이자 탈로스 고르노바 의 보호까지 받을 수 있다면 그가 아직도 비정상이라고 보기도 어려 워. 그런 숨겨진 왕족들이 얼마나 기회에 목말라 하는 지......너도 알잖아." 마하는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생각하는 마하의 얼굴 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선왕폐하같은 방법을 쓰고 싶으신 겁니까?" "그리고 나는 절대 실패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그 왕자가 그렇게 어리석을까요." 칼라하스가 웃었다. "아니, 나는 어리석은 상대를 고르고 싶지는 않아. 그들은 반드시 실 패하니까. 내가 원하는 것은 반드시 성공할 사람이고, 나는 내가 그 사람을 지배할 만한 능력이 되기를 빌어." "......역시나 도박이군요." "그래, 내가 지금 가진 모든 능력을 끌어 모아야 하는 거야....내 운 명, 오라버님의 운명, 어머니와 아버지의 슬픔까지 모두 걸어야 하는 일이니까." "실패하신다면 어쩌실 겁니까." 칼라하스의 눈초리가 차가워지자, 마하는 엄격하게 말했다. "그 어떤 것도 계획대로 되지 않는 법입니다. 작은 변수로라도 예상 은 빗나가게 됩니다. 만약 그렇게 실패하신다면......어쩌실 생각이 십니까." "그 때에는 악튤런에게 맡겨야지. 지금 악튤런이 가장 만나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바로 그 왕자, 아킨토스 프리엔이니까.....그도 기쁘게 받아들일 거야." 이제 모든 것을 예상하고 자신이 관여할 수 있는 모든 한계선이 그어 졌다는 것을 깨닫게 된 마하는, 그녀가 해야 하는 가장 합당한 말을 했다. "가호가 있기를 빕니다." 칼라하스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마하는 그 작고 차가운 손을 따뜻하 게 움켜 잡아주며 그녀의 불안을 달래주었다. 아무리 온갖 지략을 쥐어짠다 할지라도, 지금 마하 앞에서는 칭찬과 사랑을 바라는 작은 소녀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마하의 손길에 칼라하스는 상기된 볼로 활짝 웃었다. **************************************************************** 작가잡설: 자꾸 잊지 맙시다. 아키는....'왕자' 입니다;; 공주인 칼라하 스가 시집 와야 해요...... 저기요, 왜 다들 '그랬나?' 하고 머리 긁적이시는 거죠? ;;;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39장 *************************************************************** [겨울성의 열쇠] 제183편 얼음의 공주#4 **************************************************************** "웬일로 오신 겁니까." 아킨이 묻자, 테시오스는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저녁이나 좀 얻어먹을까 해서." 그러나 아킨은 그렇게 말하는 테시오스에게 역시나 불신을 표할 수밖 에 없었다. 게다가 그 손에 든 포도주 병은 도무지 태연하게 봐 줄 수가 없었다. 열 여덟 먹은 조카의 성을 찾아오면서 들고 올 선물 은 아니었다(게다가 웬 리본?). 아킨은 슬쩍 메리엔을 보았다. 테 시오스를 안내해 아킨이 쉬고 있던 거실로 왔던 메리엔은 행여나 무 슨 무서운 말이 오고갈까 해서 긴장하며 서 있었다. 그런 메리엔에게 아킨이 말했다. "메리엔, 오늘은 두 사람 분으로 준비해 주십시오." "네, 아킨 님." 메리엔은 답하고는 하녀들에게 명하기 위해 부엌으로 돌아갔다. 둘만 남게 되자, 아킨의 옆에서 왔다 갔다 하던 푸제가 숙부에게 꼬 리를 치며 다가갔다. 테시오스는 그런 늙은 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고, 푸제는 꼬리를 살래살래 치며 그에게 머리를 들이밀었다. 이 늙은 개가 이렇게 호의적으로 나오는 경우는 그렇게 흔하지 않다. 처음에는 무관심하게 물끄러미 보다가는 주인이 호의적이면 자 기도 호의적으로 나오고, 그렇지 않으면 같이 으르렁대기까지 한다. 그런데 이렇게 마치 아는 사람 보는 듯 나오는 것을 보니, 푸제와 숙부는 처음 만나는 사이가 아닌 것이다. 눈치 챈 숙부가 포도주 병을 흔들며 말했다. "네가 없을 때 간혹 찾아오곤 했단다. 그리고 이 포도주는 너 주려고 들고온 게 아니라, 메리엔을 주려고 가지고 온 것이고." "메리엔이 어디다 쓰는 겁니까?" "가끔 네 식사에 들어갈 테지." "우선 앉으십시오." 아킨은 왠지 긴 이야기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숙부에게 자리 를 권했다. 테시오스는 아킨이 권하는 푹신한 의자에 앉았고, 푸제는 주인에게 돌아와 그 발치에 길게 누웠다. 이미 해는 저물어 있었다. 성을 둘러싼 늪과 숲은 어둠에 젖어가고, 차가운 밤하늘 위로는 별들이 반짝였다. 수풀은 사늘한 바람에 몸을 떨고, 그 깊은 곳에 숨은 풀벌레들이 뚜렷하게 울기 시작했다. 집 안 어두운 곳에 숨어 있던 고양이가 슬그머니 나와 냐아--하고 울며 저녁밥을 보챘다. 그러나 낯선 사람과 낯선 사람이나 다름없는 아킨 뿐이자, 푸제를 발로 툭툭 건드리며 깨웠다. 그러나 푸제가 푸르릉-하며 귀찮다는 몸짓만 보내자 고양이는 냐앙--하고 불만 섞인 울음을 내고는 메리엔이 있을 부엌으로 조르르 달려갔다. "재미있는 식구들이로구나." 테시오스의 말에, 아킨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고양이를 보며 답했 다. "저 녀석은 저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엘프가 길들인 고양이라 보통 고양이보다 더 까다롭겠구나. 사람들 에게야 귀 길이 차이 뿐 이다만, 동물들에게는 천지차이겠지." 엘프-라는 말에 아킨은 긴장감을 느꼈다. 그러나 단도직입적으로 '왜 온 겁니까?' 하고 대뜸 물어봤다가는 비웃음만 사고 듣고 싶은 것을 듣지도 못하게 될 것 같아 잠자코 있었다. 테시오스은 이제 벽난로를 바라보며 조용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몇 년 간 여러 나라 전전했다고는 하지만, 어린 시절을 제하고는 이 테시오스가 다른 나라에서 홀대를 받은 적은 거의 없었다. 용병들 쪽에서는 테시오스라면 아주 유명했고, 사이러스의 눈을 피하기 위 해 다른 이름으로 활동한 것을 합친다면 슈마허 정도까지는 가지 않 아도 그래도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높은 명성이다. 이런 동생을 사이러스는 인정하면서도 경계했고, 그 저울이 '경계'로 기울어지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아는 테시오스는 최대한 조 심하고 사는 수밖에 없다. 아직도 사이러스는 이 테시오스를 끝없이 경계하고 의심했으며, 섣불리 죽여 없애지도 못하게 된 지금은 더 욱 경계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제는 델 카타롯사와 다시 날카롭게 대립하기 시작하고 있다. 먼 옛날 그의 큰 동생이 저질렀던 일을 이 테시오스가 다시 되풀이 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다. 그 때문에 아킨도 그를 상당히 경계했었다. 후계자 상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휘안토스에게 문제될 것이라고는 아킨이라는 동생 하나 뿐이었고, 그는 그 비밀을 속속들이 다 안다. 그리고 이 테시오스가 형 사이러스를 두려워하고는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휘안토스에게까 지 그러리라 믿는 것은 지나친 기대였다. 어쩌면 아킨을 빌미로 해 서 무언가 트집을 잡아 휘안토스의 후계자 자리를 위협할 지도 모르 고, 그 자신이 별반 뜻이 없다 할지라도 주변에서 부추기면 아무 리 욕심 없는 사람이라도 한번은 흔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지난 번 정작 눈빛을 교환하고 이야기를 나눈 후에는 그것이 단지 테시오스라는 사람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생긴 두려움이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숙부야말로 암롯사 왕가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었다. 탐욕스럽 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안일하고 게으른 것도 아니며, 무모하지도 않지만 겁쟁이도 아니다. 왕과 후계자가 동시에 성을 비우는 기간에 대신 그 자리를 맡을 정도의 신임을 받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 다. 테시오스도 더 바라지도 않았다. 그런 숙부에게 아킨이 지금 가지게 된 감정은 존경과는 전혀 다른 '인정'이라 할만한 감정이었다. 게다가 아킨의 비밀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악의적으로 이용한 적은 없었다. 아니, 사실 어머니와 아킨의 명예에 금을 내는 것임에 분명한 '대공비에게는 유전적인 정신질환이 있다.' 라는 소문을 낸 것이 그였다. 잔인한 방식이기는 했지만 적어도 더 이상의 의심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 테시오스가 말했다. "너는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모르겠습니다." 숙부는 피식 웃었다. "솔직하군." "그러나 왕이 되고 싶어 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건 잘 봤다." "이유를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숙부님?" "너무 늦었거든. 또, 내 아들 녀석과 아내를 보면 도무지 왕과 왕비감 도 아니란 말이다. 내 제위기간 끝난 다음에 내 아들과 아내가 아 마도 형이 일으킬 것에 분명한 반란군에게 죽어나가는 것은 별로 달갑지 않아." 역시나 솔직한 답변이었다. "그러나 내 아내는 적어도 딸이라도 왕비로 만들어서 이런 권좌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서러움을 달래고 싶어 하지. 그걸 가지고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기회가 된다 하더라도 휘안토스 같은 아이에게 딸을 주고 싶지는 않아." 생각나는 것이 있어, 아킨은 쓴 웃음이 치밀어 올랐다. 그것을 발견한 테시오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지만, 아킨은 들켜도 상 관없다고 생각했다. 짐작은 했지만 그것을 물어 겨우 생길까하는 신뢰가 깨지는 것을 바라지 않은 테시오스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않았다. "너희 형제만큼 틀린 쌍둥이도 없을 것 같구나." "전혀 다른 곳에서 자랐으니까요." "아니다, 아키. 사람 성격은 타고 나는 거란다. 나 역시 그러하지. 형 은 태어나면서부터 잔혹하게 타고났고, 나는 이렇게 소심......." "냉정하게-" 아킨의 말에 테시오스가 잠시 멈칫했다. "숙부님은 냉정한 분입니다. 주변사람들에게도, 가족들에게도, 심지 어......자기 자신에게조차도." "인정하마." "어쨌든....그 성격을 타고 나셨다는 말에는 동의하는 바입니다. 억누 르고 부추기는 것은 본인 소관일 테지만 말입니다." 테시오스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렇게 평범해 보일 정도로 부드러운 웃음을 가진 사람이었으나, 두 번의 추방-합쳐서 15년간의 추방생 활을 무사히 견뎌내었던 강한 운과 능력의 남자였다. 그런 숙부가 말했다. "그리고 기회의 차이다. 형은 그 잔혹함을 자제하고 다스리지 않아도 되는 왕좌를 얻었고, 나는 살기 위해 더욱 냉정해질 수밖에 없는 막내왕자의 자리를 얻었지.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분명하 게 알아야 했고, 불확실한 요소....내 운이라든가 의지력이라든가 하 는 것은 냉정하게 평가해야 했다. 상황이 그렇게 주어지니, 성격대 로 방법을 택한 거지.....그렇게 자기 성격이야말로 사는 방법의 차 이를 만드는 거다." "....제 어머니에 대해 여쭤 봐도 될까요?" 그렇게 불쑥 물었지만 테시오스는 벌써 예상하고 있었던 듯 빙그레 웃었다. 사실, 지난번에 할머니를 만나 본 후에 숙부가 오면 반드시 묻고 싶은 말이었다. "귀국 허락을 받았을 때, 내 형을 그렇게 자비롭게 바꾼 여자를 나는 아마도 천사라 생각했었단다. 가엾으신 어머님을 뵙고 드디어 형의 결혼식을 보게 되었을 때, 그 때도 나는 정말 네 어머니를 천사라 생각했다. 그래, 어떤 의미로는 정말 천사 같은 여자였지. 눈부시 게 아름답고, 얼음처럼 투명한 영혼에, 모든 믿음과 사랑을 남편에 게 바치는-" 메리엔도 늘 그렇게 말했다. 몇 년 간 그렇게 보내시기는 했지만, 사 실은 정말 아름답고 착한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테시오스가 말했다. "형님이 조금만 더 평범하고 조금만 덜 잔혹하고 조금만 덜 자존심 강했더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거다. 그리고 그녀가 조금만 더.....'인 간적'이었다면 역시 아무 일도 없었을 테지. 아마도 한 몇 년 울고불 고 싸우다가는 결국 서로에게 돌아갔을 거다." 순수했다고 말했다, 메리엔은. 너무나 순수해서, 세상이 조금만 모질어져도 버티지 못했던 것이라고 - "아키, 너무나 순수한 것은 인간적인 것이 아니란다. 인간은 그 자체 가 깨끗한 예술품이 아니라 같이 살고 타협하고 양보하고....빼앗고 짓밟는 존재란다. 고결한 인품은 강한 사람만이 지켜낼 수 있는 것이고, 순수한 인품은 보호받는 아이만이 가지고, 또 역시나 잔인 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란다." "그렇다면 아버지와 마찬가지 아닙니까...." "아니, 네 아버지는 다르다. 그는 상대의 고통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리고 상대가 고통 받을 거라는 것을 알기에 잔혹해지는 거다. 그 리고 그렇게 네 어머니를 사랑했던 거지. 그 순수하고 잔인한 여자를 . 하지만 한없이 약했던 여자를......." 아킨은 생각했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아버지만 원망하고 살 수 있 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래도 그녀에게 자비로운 사랑을 받았 다고 착각하고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애당초 그녀에게 아들은 휘안토스 하나밖에 없었다. 순수하고 깨끗하며 아름다운 아들- 미쳐버렸다는 무책임 속에서 그녀는 모든 속내를 보여주었고, 그것은 어리지만 예민한 아킨에게 쓴 추억이 되어 박혀 있었다. 어쩌면, 그녀에게 끔찍했던 것은 자신의 몸에서 그런 괴물이 나왔다 는 것과, 바로 남편이 그런 끔찍한 괴물을 낳게 했다는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 남편의 죄라는 것을 용납하기 어려웠고, 그것이 바로 옆에서 독기를 뿜어내고 있다는 것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화되어 나타난 아킨을, 처음에는 그 저주를 풀려고 했고, 그것이 불가능하게 되자 거부했고, 결국에는 죽 여 없애 버리려 했다. 마침내 그것마저 불가능하자 그녀는 죽어 버린 것이다. 아무 것도 변화시킬 수 없었으니, 결국에는 떠나 도망 쳐 버린 것이다.... "아키-" ".....아닙니다." 이제 그것을 위한 눈물은 다 말라 버렸다. 충분했다, 라고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작은 몸과 머리에 담기로는 넘쳐날 지경이었으니- 그래서 지금은 그저 조금 멍하니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다. 타 닥타닥- 불꽃소리가 들려온다. 삼켜지고 불타오르고 그리고 다시 삼켜지며 잦아들다 어느 샌가 확 솟구쳐 오른다. "......휘안도 그렇지요." "아는 구나." 아킨은 웃었다. "그러나 그는 강합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그를 바꾸거나 파괴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날카롭 고 차갑고 피없는 칼날에 가까이 있거나 걸리는 모든 이들이 상처 입고 망가질 뿐이다. 아킨도, 자켄도, 그리고......그 세르네긴과 유제니아도. "형이 밉겠지." "해가 뜨고 달이 지듯." 그런 조카를 바라보다가, 테시오스는 자리를 고쳐 앉고는 말했다. "너에게 전할 말이 있다. 오늘 오후에 형이 있는 산 바르젤 요새에서 전해진 말이지-확실하게 정해진 것은 없지만, 아마도 각오는 하고 있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알겠습니다." 사이러스가 그곳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뭔가 일어날 거라 어느 정 도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숙부가 괜히 저녁식사 하면서 옛날이야 기나 하자고 이렇게 불쑥 찾아왔을 리 없으니까. "네 아버지가 네 결혼이야기를 꺼내셨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하얗게 변하는 것만 같았고, 여 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이 그에게서 떨쳐 나가며 산산 조각나는 것만 같다. 정말 순간적으로는 너무나 아찔해서, 당장에 해야 할말마저 도 잠시 잊고 있었다. 아킨은 정말 간신히 말했다. "자세히...말씀해 주십시오." "요즘 암롯사와 델 카타롯사 사이가 어떠한 지는 너도 알고 있을 거다. 형님께서 영구적인 평화를 위해 너와 델 카타롯사의 공주 칼라하스와의 결혼을 제안하셨다." "...." "결혼에 필요한 모든 것은 암롯사에서 부담하며, 결혼한 후에 영지와 성 역시 마련해주겠다 약조했다. 물론 이 일에 있어서 네가 위험할 일 은 없다. 결혼을 통해 인질이 되는 것은 델 카타롯사의 공주니까.....단." "단?" "델 카타롯사 쪽에 머리를 좀 쓸 줄 아는 자가 있다면, 아마 네 과거를 들먹이며 너와 직접 만나보고 싶다고 할 것이다. 칼라하스 공주의 상태 는 누구나 아는 바이지만, 네 상태는 온갖 억측만이 난무할 뿐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무니까." ".....그곳에는 악튤런 파노제가 있습니다. 컬린의 제자인 그가 비밀을 모를 리 없습니다. 아니, 어쩌면....." "아키, 그 정도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이라면 네 약점을 그렇게 쉽게 만 천하에 공개해서 미움만 받는 대신 전혀 다른 제안을 할 것이다." 그리고 테시오스는 허리를 당기고는 아킨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킨 은 다시 이 눈이 말하는 것을 알기 어려워졌다. 보면 볼수록, 아버지나 휘안토스와 전혀 다른 의미로 무서운 남자였다. "혹시, 돌아가신 큰숙부님에게 랑기온 대공왕이 했던 것과 똑같은 제안 말입니까." 아킨은 숙부의 눈길을 피해 불꽃을 바라보았다. 활활 타오르는 가운데, 자그마한 모래 같은 불티가 굴뚝위로 휘말려 올라간다. "아마도 그럴 걸." "........" 다시 불길이 확 치솟아 올랐다. 그 안에 숨어 있던 괴물 하나가 놀라 솟구치는 것만 같다. 잠시 둘 다 아무 말도 없었고, 먼 곳에서 까마귀가 우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을 때 테시오스는 입을 열었다. "분명하게 말하고 싶은 게 있다. 아킨토스 프리엔- 네가 정말 원하는 것은......뭐냐. 자유? 권력? 아니면.......그래, 지나치게 진부한 것 을 물었구나. 하지만 정말 알고 싶기도 하단다. 무엇을 원하는 거냐." "말해도...비웃지 않으셨으면 좋겠군요." "비웃을 만 하면 속으로만 웃어주지." 분명 농담이었지만, 아킨은 웃지 않았다. 그저 활활 타오르는 난로의 불길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저는 그저 '그'가 되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언제나." 숙부의 눈이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 턱을 매만지는 손이 조금 빨라지는 것 같기도 하다. "지금도......원하는 거냐?" "저주하면서도 원합니다. 혐오하면서도 원합니다. 그리고.......언제나 가장 끔찍하고 징그러운 것은, 그가 무슨 짓을 해도 여전히 그를 질투하 고 원하는 저 자신입니다." 아킨은 다시 치미는 열기에 쓰게 웃었다. 무언가 말할 줄 알았던 숙부는 아킨을 잠자코 바라보기만 했고, 결국 조용히 한숨을 내 쉬고는 눈길을 돌렸다. 불길이 치솟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소리가 크게 들려오고, 순 간 창문이 덜커덕 움직였다. "....형도 그렇게 말했었지." 잘못 들었는지 잘 들었는지는 아킨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형' 이라는 말은 들었고, 그것이 아버지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아킨도 알 수 있었다. ".....숙부-" "오늘은 저녁만 먹자꾸나. 아킨토스....." 그리고 테시오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킨은 그의 등을 보며 그가 너무나 낯선 사람이라는 것을 느껴야 했다. 지독히 낯설고 '차가웠다.' ******************************************************************* 작가잡설: 워, 원해....? <-이보시게나.......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40장 ************************************************************** [겨울성의 열쇠] 제40장 도약 제184편 도약#1 *************************************************************** 슈마허가 자택에 감금된 채 꼼짝도 '안'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 게 되자, 켈브리안은 절망을 삼켜야 했다. 그가 빠져나가지 못해서 그러고 있을 리도 없고, 지난번에 에크롯사 쪽에서 전해진 소식을 벌써 전달했으니 그 여자아이 일 때문에 가 만히 있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그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었으며, 그것은 바로 켈브리안 자신이 택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녀도 지금 자신의 처지가 어떠한지 알고 있었으며, 어머니인 브리올테가 무엇을 하려는 지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또, 어떤 기준 으로 행동하느냐에 따라 그 방향도 결과도 분명하게 달라질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이 인내할 때가 아닌 '마지막 기회 '라 판단된다면, 켈브리안의 선택이 끝나지 않아도 모든 일을 알아 서 다 처리해 버릴 거라는 것도 안다. 그리 되면 켈브리안은 책임 지지 않아도 되지만, 결과는 고스란히 슈마허에게 향할 것이다. 공식 적인 책임 자체는 켈브리안을 향하더라도, 외숙부인 탈로스의 분노 는 분명 슈마허만이 뒤집어 써야 하는 것이다. 켈브리안은 결국 어머니를 찾아가기로 했다. 포기한지 오래인 어머니 이니, 그녀의 애정이나 자비를 구할 생각도 없고 기적적으로 그녀가 현명한 판단을 내려 줄 거라는 기대도 하지 않는다. 오랜만에 딸의 방문을 받자, 브리올테는 어머니답게 화사하게 웃으며 딸을 맞이했다. "어서 오려 무나, 켈리." 사건 후로 1년이나 지났지만, 켈브리안은 여전히 어머니가 낯설게 느 껴졌다. 왜 이리 다른 사람 같기만 한지- 분명 그녀의 목소리이고 그녀의 눈 빛이건만, 예전에는 간혹이라도 보여주곤 했던 애정은 한줌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예전부터 딸인 켈브리안은 그녀가 가진 '재산'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 때는 위선일지언정 적어도 '그 편이 저 아이에게는 좋아' 하기라도 했다. "급하니...긴말을 하지는 않겠어요, 어머님.....부탁드릴 것이 있어요." "들어줄 수 있다면 얼마든지 들어주지, 그래......원하는 게 뭐니? 그리고 그녀가 부드럽게 웃자, 켈브리안은 정말 소름이 끼쳤다. 과연 그녀가 어머니인지, 정말 그것조차 의심이 갈 지경이었다. "슈마허 쉐플런을 직접 만나게 해주세요. 그를 부를 필요도 없어요.... 제가 찾아가겠어요." "그리고?" "사흘 안으로 그가 이 로메르드를 떠나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다른 의심은 하지 않으셔도 되요. 정말 깨끗하게 떠나도록 할 테니까요." "의심이라니, 말도 안 된다. 딸아이의 말인데 당연히 믿어야지, 켈리." 브리올테도 켈브리안만이 슈마허를 말없이 떠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 슈마허가 직접 나서기라도 한다면 골치 아픈 수준이 아니다. 그 때는 정말 반정이 일어날 지 도 모르고, 아무리 브리올테라지만 켈브리안이 작심하고 나서게 된 다면 꽤 위험해 진다는 것은 분명 알고 있었다. 켈브리안이 말했다. "감시자도 붙이지 마세요. 이렇게 솔직하게 말하고 떠나는 마당에 정 말 우려하는 일을 저지르려 간다면, 그것이야말로 바보짓이니까요." "하지만 그건 다 너를 위해서란다." 켈브리안은 토악질이라도 해 버리고 싶어졌다. 너를 위해서라.....이제는 역겹다, 정말. 진절머리 날 정도로. "제 약혼자에요, 어머니. 또, 예전에 위급했던 저를 도와주었던 사람 이기도 하고요. 아무리 저를 위한 일이라 할지라도, 그리 하신다면 정말 그에 대한 모독입니다." 브리올테는 그래도 여전히 불만이 있는 듯 했다. 그 날카로운 눈동자 를 보며 켈브리안은 차분하게 말했다. "정 안심이 안 되신다면 라키 경을 데리고 가겠습니다. 그녀라면 슈 마허 쉐플런도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이며, 그녀는 어둠의 마법사 팔로커스가 다시 재림한다 할지라도 저를 지키기 위해 검을 뽑을 기사입니다." 여전히 성에 차지는 않는 듯 했지만, 그 말에는 더 이상 할 말이 없 는 브리올테는 드디어 허락을 해 주었다. "어서 가 보렴." 그 말에 켈브리안은 웃어 보였다. 얼마나 다정하게 보였을 지는 의문 이지만, 이제는 어머니가 증오스러워졌다. 그렇게 뭐라 한바탕 퍼 부어 버리며 울고 싶은 기분을 삼키며 켈브리안은 곧바로 달려가 외출복으로 갈아입고는 라키 경과 함께 슈마허의 저택으로 향했다. 마차도 타지 않았다. 그녀가 아끼는 검은 말에 타고 곧바로 그곳으로 달려갔고, 그녀는 슈마허의 저택 주변에 퍼져있는 병사들의 숫자를 보고 잠시 놀랐다. 적어도 오 백 명은 넘고도 남을 듯한 어마어마 한 숫자가 그리 크지도 않은 저택을 감싸고 있었고, 그들은 공주와 기사를 알아봤음에도 불구하고 길을 비켜주지 않았다. 켈브리안은 그런 병사들을 둘러보며 외쳤다. "나는 이 나라의 공주이자 그의 약혼녀다! 당장 비키지 않으면, 왕실 모독으로 간주하겠어!" 그제야 상황에 주눅이 좀 들은 대장인 듯 보이는 남자가 병사들에게 비키라 명했다. 켈브리안은 그들을 쏘아보고는 저택 안으로 들어 갔다. 맞이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컴컴한 가운데, 드디어 젊은 하인 하나 가 달려 나왔다. 켈브리안은 어렵잖게 그를 알아보았다. "슈마허는 어디 있지?" "벌써 기다리고 계십니다. 망토를 주시고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켈브리안은 망토를 벗어 그에게 건네주고는, 라키 경에게도 따라 오 지 말라고 전한 후에 2층에 있는 작은 객실로 향했다. 노크도 없이 문을 여니, 방안은 어둑어둑한 가운데 램프 하나만이 켜 져 있었다. "슈마허!" 켈브리안은 급히 안쪽으로 달려갔다. 막 커튼을 닫고 있던 슈마허가 그녀를 맞이했다. "영영 못 만날 줄 알았군. 그래, 독한 어머니께서 보내주시던가?" "제발 부탁이니....상황 봐서 여유 부려요." "허둥대면 어쩔 거요. 뭔가 뾰족한 게 나오는 것도 아니잖소. 차는 당 장 내 놓기 힘들 테니, 포도주나 한잔하겠소?" "농담할 기분 아니에요, 슈마허. 지금....제 말 잘 들어요." "무엇이든지." 켈브리안은 행여나 운 나쁜 시간에 찾아 온 것은 아닌지 해서 우선 그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는 평소와 전혀 다를 바 없었다. 머리는 단정했고, 면도도 깨끗하게 마쳤다. 옷차림새도 가벼운 셔츠차림 일 뿐이었지만 흐트러진 매무새는 아니었다. 제 정신이라서 다행이 다, 라고 생각하며 켈브리안은 말했다. "어머님께....사흘 안으로 당신이 떠나도록 하겠다고 약속하고 왔어 요." 슈마허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미쳤소?"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어요. 반정을 일으키든가, 당신이 떠나든 가--그 두 가지 밖에 없고, 저는 후자를 바라고 있어요." "켈브리안!" 성난 목소리로 슈마허가 외쳤다. 켈브리안은 차라리 자신이 심약한 아가씨라 기절이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차분하게 말했다. "떠나세요. 이것이 저와 당신을 위하는 길이에요." "그리고! 그리고 어쩔 거요. 또 예전같은 일을 되풀이하면서 오늘은 그냥 넘어가서 다행이다, 하며 가슴 졸이고! 한숨 쉬고! 그렇게 살 건가? 늘 말하는 거지만, 그냥 잔인해져 버려도 당신을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슈마허....제발." "당신 혼자 고결하고 깨끗하게 살고 싶어서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 드는 건가! 그렇다면 어디 가둬놨다가 일 끝나면 꺼내 드리는 수도 있소. 이건 당신 허락 없어도 얼마든지 할 수 있고." "당신이 죽는 다니까요!" "나를 몰라서 그리 말하는 거지! 이렇게 자존심 상하고 비참 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어!" "어머님을 죽이실 거죠?" 뭘 험악하게 외치려던 슈마허는 그 말에 입을 다물었다. 켈브리안이 말했다. "그리고.....베르티노도 죽이실 거죠." "공주-" "그리고....외숙부님께서 나타나신다면 당신만 죽겠죠." "냅두시오. 나 혼자 설치다 죽는 거니." "내가 싫어요." "내 마음이라니까." "그렇다면 정말 미워하겠어요." 잔뜩 성이 올랐던 슈마허의 얼굴이 누그러졌다. 켈브리안은 그에게 다가가 그 손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당신의 어린 시절이 어떠했는지는 몰라요. 하지만.....슈마허, 당신에 게는 당신의 의부가 소중하죠? 그리고.....그래서 세르네긴과 그 작은 유제니아를 그토록 사랑하시는 거고요." "켈브리안- 그건 다른 문제요." "아니, 같아요......이 나라에 왔을 때, 제 할머님이 제게 가장 먼저 한 일은.....제 머리를 잡아 바닥에 메치는 거였어요. 더러운 창녀의 뱃 속에 있던 계집이라고 욕하시더군요. 그리고 손수 옷을 잡아 뜯고 머리를 잘라 버리고는 채찍으로 때리셨죠....." 슈마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 여자는 누구나 미친 여자로 인정하고 있소. 그건 그냥 재수 없는 경우고-" "그 때 제 아버님이 저를 구해주셨어요. 할머니가 퍼부어 대시던 모 독과 고통을 모두 감수하시고, 숙부를 불러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아버지는 감옥에 가둬 버리겠다는 협박도 무시하고 저를 압셀론에 보내셨어요. 그 동안 어떤 고초를 당하시던 간에 제게는 괜찮다고 말씀하셨고.........그 후에도 내내 저를 지켜주고 사랑해 주셨어요. 그리고 그런 아버지가 제게 남겨준 것이 바로 베르티노에요...." "......" "그 아이를 당신 손에 죽게 할 수 없고, 당신 손이 그 아이의 피에 젖게 할 수 없어요......슈마허, 당신이라면...누군가가 당신을 위해 작고 힘없는 유제니아를 죽인다면 그를 용서할 수 있겠나요? 아무리 그를 좋아하고 있다 할지라도.....그래도 용서할 수 있겠어요?" "아니-" 켈브리안은 슬펐지만 그래도 조용히 웃었다. 그러나 어두운 중에 그 미소가 어떻게 보였을 지는 물론 알 수 없었다. "슈마허, 저는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왕좌에 오르고 싶을 정 도로 강한 여자는 아니에요. 그냥.....이런 저만 원망해요. 그리고 떠나줘요-" "당신을 버리고 가란 말이오?" "이대로 계신다면 어머니가 당신을 얼마나 비참한 꼴로 만들지 몰라 요." "언제나.....남 좋은 일만 시켜주는 군, 당신은. 예전에도 그렇더니, 이 번에도 그래. 그래놓고 본인은 밤낮 손해만 보지." "아버지 딸이라 그런가 보죠." 슈마허는 한숨을 내 쉬고는 말했다. "좋소.......하지만 예전에 이런 말했던 적 있었지. 당신이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내가 싫다고." "당신이 납치라도 해 주시지 않는 한 별 수 없어요." "....." 그런데 켈브리안은 그렇게 말하다 말고 슈마허의 눈빛이 기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슈마허, 무슨......." 그러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슈마허는 켈브리안을 끌어 당겼다. "장난치지 말아요!" "급해 죽겠는데 장난칠 여력도 업소. 나는 지금 진심이야." "슈마허, 정말--" "미안하지만 켈브리안, 지금은 당신이 그토록 우겨대는 '당신과 나의 안전'을 위해 놓고 가는 것뿐이오. 그러나 만약 다른 놈이 당신에게 치근덕댄다면, 비록 상대가 칼리토 대공왕이라 할지라도......정말 데리고 도망쳐 버릴 거요. 사랑하는 여자를 버려놓고 도망쳐 버리 는 놈은 몹쓸 자식이 되는 건 지금 한번 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켈브리안의 눈은 슬퍼졌다. 그리고 그 눈빛의 의미를 아는 슈마허는 그녀의 떨리는 어깨를 끌어 안았다. "물론....그 꼬마 왕자는 예외야." **************************************************************** 작가잡설: 슈마허....들인 공이 얼마입니까. --;;; 아키가 소년의 풋풋 함으로 유즈를 공략하고 있다면, 슈마허는 중년의 능력과 끈기와 약간의 느끼함으로 켈브리안을 공략 중. 자, 중년 파워다--! (그러나 어쩌리.....원래 머슴형 캐릭일 수록 차이는 확률도 높은데!)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40장 *************************************************************** [겨울성의 열쇠] 제185편 도약#2 *************************************************************** 휘안토스는 10월 중순경에 암롯사의 산 파로이로 돌아왔다. 휴거인 황자가 죽은 지 한달 여만, 베로크 황자가 즉위한 지 3주 만, 그리고 아킨이 암롯사에 도착한지 한 달만의 일이었다. 왕과 후계자 대신 암롯사를 지키고 있던 테시오스는 점잖게 그에게 모든 것을 돌려준 후에 자택으로 돌아갔다. 휘안토스는 웃으며 그를 보냈고, 그날 저녁에 사람을 보내 아킨을 본성으로 오게 했다. 그런 성에 왔을 때, 아킨은 이곳이 오랜만에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 온 듯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변한 것은 없다 하더라도 주 인이 있는 집과 없는 집은 분명 틀렸고, 주인이 돌아온 즉시 원래의 모든 모습을 찾다. 정말 진절머리 나는 모습 말이다. 본성으로 들어오니, 그곳은 이제 아킨토스 프리엔이라는 암롯사의 둘 째 왕자에게 익숙해져 있었다. 인사만 하고 슬금슬금 피하는 사람이 더 많긴 하지만, 몇 명을 제하고는 누구냐는 눈길을 보내던 예전 에 비하면 꽤나 많은 발전이다. "잘 지냈겠지, 아키." 객실에서 휘안토스와 만나게 되자, 그를 마주하는 자신의 정신상태가 생각보다 훨씬 멀쩡해서 아킨 자신이 더 놀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다시 보게 되면 정말 미쳐 날뛸 줄 알았었다. "덕택에." 휘안토스가 건네는 인사에 아킨은 무심하게 답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길고도 쓸데없고 관심도 없는 많고 많은 인사말을 건네는 대신 단칼에 물었다. "형 생각이겠지?" "물론." 역시나 답도 피해 가는 법이 없다. 칼라하스와의 혼담소식이 정확하게 정해진 것은 숙부가 다녀간 지 얼 마 지나지도 않아서였다. 언제 출발해야 하는지도 바로 다음날로 정해졌다. '휘안토스가 도착하는 즉시'였다. 그리고 그 후의 일은 역시나 숙부가 말했던 대로 되었다. 델 카타롯사쪽에서 보내온 소식은 신랑이 될 아킨을 선보여 달라는 것이었다. 사이러스는 당연히 승낙했고, 아킨은 길든 짧든 델 카타 롯사로 일단 떠나게 되었다. 아킨은 델 카타롯사 쪽에서 그 말을 한 것이 아무래도 칼라하스 공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어쩐지 그럴 것 같 다는 '예감'이 든다. "정말 결혼하라는 건 아니겠지." "물론. 하지만 정말 결혼하게 되어 그 칼라하스 공주가 이곳으로 온 다면 그것은 꽤나 좋은 수확이지. 하지만 크게 기대하지는 않으니, 부담 가지지 마라." "그리고 내가 델 카타롯사에서 죽게 되면?" "....네가 죽는 것은 바라지 않아." "엘프의 예언 때문에?" 그러나 휘안토스가 그런 예언을 믿을 리도 없고 신경 쓸 리도 없다. 그러나 아킨을 죽일 수 있는 많은 기회와 납득할만한 이유가 있음 에도 불구하고 휘안토스는 동생의 목숨만은 건드리지 않았고,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역시나 휘안토스는 눈빛하나 변하지 않은 채 태연히 말했다. "마음대로 생각해라.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덕에 너는 목숨 걱정 할 필요는 없이 살고 있다는 거다. 테시오스 숙부님과는 달리." "죽고 죽이게 될 테니까." 갑작스런 말에 휘안토스의 눈이 멎었다. 그러나 아킨은 그 눈을 똑바 로 보지는 않았다. "형이 그런 예언 따위 믿을 리 없다는 건 알아. 또, 아무리 아버지가 직접 그 숲까지 다녀왔다 할 지라도 그 예언을 믿어서 나를 그렇게 미워하면서도 한번도 죽이려 하지 않았을 리 없고......친동생도 죽였던 아버지야. 아들이라고 못 죽일 리도 없지." "그래서?" "형 역시 마찬가지일 테지. 하지만.....형이 죽이려 하면 나 역시 형을 죽이려 할 테고, 그런 경우가 되면 죽는 것은 분명 형 쪽이 될 테지. 나와 형은 형제고, 내가 형을 아는 만큼 형 역시 나를 알고 있고... ..형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 듯, 나 역시 형이 무엇을 할 수 없는 지 잘 아니까." "......." "알아. 그렇게 되면 아버지는 나에게 왕위를 물려주느니 차라리 테시 오스 숙부님께 왕위를 물려주시고 날 죽여 버릴 분이시지. 예언이랄 것도 없어......그저 아버지의 성격과 후계자가 필요한 곳에서의 쌍둥이가 어떤 의미인 지만 제대로 안다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일 뿐." ".....자켄이 가르쳐 준건가?" "자크가 알려줄 리 없지. 엘프이자 숲의 어머니인 그녀가 단번에 꿰 뚫어 본 것을 나는 좀 오래 걸린 것뿐이야. 어쨌든, 나에게는 그 정도의 안목까지는 없었으니까.....그러나 이제는 형이 왜 그렇게 했는 지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아. 살려 놓고 잘 구슬려 지배하는 것 과 잘못 건드리면 벌집처럼 터질지 모르니 그냥 죽여 버리는 것 중 형이 무엇을 택할 지는.....어려운 일도 아니었어." "........." "하지만 그 숲에서 형을 죽이지 않았던 것은 그 때문만은 아니야."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좋다. 들어도 별로 기분 좋을 것 같지는 않 군." 아킨은 웃었다. 휘안토스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 지 확인해 보지 않아도, 지금 아킨의 가슴속에서 퍼지는 느낌만으로 그가 무슨 생 각을 하고 있는 지 분명히 알 것 같았다. 휘안토스가 말했다. "어차피 곧 델 카타롯사로 출발하게 될 테니, 오늘 저녁은 나와 먹 고......일찍 자라. 편하게 출발해야지." 너답다, 하고 아킨은 생각했다. 이런 말을 듣고도 내일 해야 할 일이 나 훈계 놓고 있다니 말이다.... "아마도 가는 길에 아버님을 뵙고 가야 할 거다. 하지만 내게 했던 그 말은 아버님께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결과가 전혀 딴판일 테 니까."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야." "아니. 지금도 충분히 멍청한 짓이었다, 아키. 진실은 최후가 되지 않 는 한 되도록 말하지 않는 게 좋다. 진실은 자신을 지켜주는 자에 게만 힘을 줄 뿐, 말하는 자에게는 적들만 만들어 주는 거니까." "진실은 진실이었나 보군." "그러나 그것이 '비밀'이었을 때에는, 적어도 너에게는 유리했다." "지금 나를 죽이고 싶다 해도 상관없어. 차라리 그렇게 해 준다면 나 도 편해지고 형도 편해지고.......형과 나는 솔직한 편이 좋아." "너와 나의 위치가 이렇게나 분명한데도 그런 말을 하는 거냐." "형에게는 암롯사와 아버지가 있지만, 내게도 형이 가진 것과는 전혀 다르지만 그만큼이나 강한 자들이 있지." 휘안토스의 미소가 차가워졌다. "나를 죽이고 싶은 건가?" "아니, 형을 죽이게 된다면, 아마도 영원히 형의 악령을 눈앞에서 보 게 될 것 같아.....그렇게 되면 정말 지긋지긋할 정도로 보겠지." "아키-" 아킨은 드디어 휘안토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처음이었다. 이렇게 그가 '분노'한 얼굴을 본 것은, 아킨으로서는 정말 처음이었 다. 표정은 여전히 얼음처럼 고요했고, 눈빛은 싸늘하고 차가웠지만, 그 래도 지금의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이마를 짚은 손가락에는 힘이 들어가 손톱 끝이 하얗게 변해 있었고, 안쪽을 살짝 물고 있는 듯 입술 끝도 하얗다. "형을 증오해." "알고 있다." "아버지도 증오하지." "알고 있어." 그런데 어머니는 당신들을 사랑했지. 하얀 머리카락 사이로 침울하게 젖은 눈동자로 하늘을 바로면서도, 간혹 부르곤 했지. 사이러스- 그리고 너를 보면 언제나 환하게 웃으며 말했지. 휘안토스, 내 아가- 이제 다 지긋지긋해. 암롯사로 돌아와 늪의 성의 침대위에 누워 있으 면 늘 내 머리를 울리는 그것들이. "마지막이 되기를 빌겠어." "돌아오게 될 거다." "그건 형의 의지지, 내 의지는 아니야. 그렇게 만들겠다면 그렇게 해. 나 역시 내 의지대로 할 테니." "아키...." "어차피 형은 모든 것을 가졌고, 지금 뜻대로 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 렇게 할 거잖아.....그러니 지금은 놔 둬. 지껄이는 것만은 내 자유 니까." 그리고 아킨은 뒤돌아 방을 나섰다. 휘안토스도 그를 부르지 않았다. 가을이 물씬 무르익어 있었고, 그것은 겨울을 맞이하는 세계의 마지 막 향연이었다. 노을이 아름답듯, 가을도 아름답다. 단풍과 싱싱하게 익은 열매들은 차가운 바람에 흔들리며 수확과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긴 죽음의 겨울, 그러나 언젠가는 봄을 맞아 깨어날 희망 있는 죽음- 성스럽 고 위대한 죽음은 언제나 다른 의미로의 부활을 전제한다. 아킨은 성의 뒤편으로 난 길을 지나, 무르익은 가을 숲 속으로 난 길 로 말을 몰았다. 놀란 꿩이 푸드득 날아오르고, 벌서 황금빛이 되어버린 풀들이 흔들 리며 길 쪽으로 쏟아지다가는 뒤로 휘청 쓰러진다. 차갑고 맑은 냇 물은 햇살에 반짝이며 갈대풀들을 헤치고 지나고, 그 위로는 금빛 붉은빛 나무들이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제는 시든 가을꽃과 벌써 떨 어진 낙엽이 얕은 물아래에서 흔들리며 수면 밖을 물끄러미 내다보 고, 오래 전에 쓰러져 물에 반쯤 잠긴 나무둥치는 시커멓게 썩은 몸을 구부리고는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 사이로 작고 날렵한 물고 기들이 재빨리 헤엄치다가 아킨의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쏜살같이 도 망쳐버렸다. 암롯사의 가을은 아름답지만, 그 가을에 성에 머무는 것은 정말 몇 년 만이다. 열 살 때였나....아마 그 이후로 가을에 수도로 돌아왔던 적은 없다. 은봉인을 얻었던 것도 그때 즈음이었다. 컬린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자켄을 통해 그것이 들어왔고......보름이 지나도 아무런 변화도 없었을 때 아이답게 기뻐했었다. 세상의 고난이란 그것 하나밖에 없 었을 듯 했고, 불행은 그것만 해결되면 모두 해결되어 버릴 듯 했다. 그것만 없어지면, 정말 언제나 행복한 나날만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별로 없었다. 어머니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고, 아버지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고, 휘 안토스가 미운 것도 변하지 않았다. 산을 하나 넘으면 그 뒤로 또 다른 산이 있다. 여정은 멀고 갈 길은 많이도 남았고 그 사이로 드리워진 그림자와 절벽은 지치도록 많 았다. 넓고 좁은 차이는 있을 지라도, 아직은 어린 아킨이 넘고 싸워 야 할 것은 그렇게나 많은 것이다. 물소리가 점점 잦아들고, 예전에 잠시 말을 멈추고 물을 먹이곤 하던 크고 둥근 바위가 있는 냇가가 보였다. 아킨은 말에서 내려 말고삐를 끌고는 그 앞으로 갔다. 고삐를 놓자 말은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햇살이 눈부시도록 깨끗하고 차가웠다. 물줄기가 흘러오는 곳에서는 금빛 파편이 부서지고, 그 쏟아지는 빛에 눈이 부실 지경이다. 아킨은 고개를 숙이고 수면을 내려다보았다. 얼굴을 드리우자마자 물 고기들이 잽싸게 도망쳐 버리고, 남은 것은 그것을 물끄러미 보는 아킨과 햇살 부서지는 은빛 머리카락과 어두운 금빛 눈동자뿐이다. 아킨은 동공이 날카로운 눈에 손을 얹어 보았다. 만약 저주가 풀린다면-그렇게 된다면 휘안토스와 똑같은 보라 빛 눈 에 검은 머리카락을 가지게 되는 걸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것이 보름마다 그의 모습을 뚫고 나오던 괴물의 모습보다 더욱 흉측하게 생각된다. 늘 휘안토스가 되기를 바랬지만, 그에게 칼을 겨누고 유제니아를 짓밟고도 미소 띤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던 그 얼굴과 똑같아 지는 것은 끔찍하게 느껴진다. 아니, 그것이야 말로 정말 '괴물의 모습'같이 생각된다. 저 앞에 잠자리 한 마리가 수면을 스치고는 재빨리 날아갔다. 오면서 전혀 의식하지 못했는데, 사방에 반짝이는 날개를 부산히 움직이는 가을 잠자리들이 가득했다. 그들이 툭툭 스치자 자그마한 동그라미 가 빗방울이 떨어지듯 문득 문득 그려진다. 그리고 꼬리가 파란 잠 자리 한 마리가 아킨의 눈길이 닿는 바위 위에 앉아 있다가 휙 날아오른다....... 아킨은 달아오른 바위에 몸을 눕히고 푸른 하늘과 그 하늘을 쉴 새 없이 파닥이며 날아다니는 잠자리 떼를 바라보았다..... "잠자는 중이냐, 아킨토스?" "으헉-!" 테시오스 숙부였다. "비명을 질러줄 줄은 몰랐다." "....." 아킨은 비명이 으헉, 정도로 끝난 것에 진심으로 안도했다. 꽥, 이라 든가 으악! 이라고 질렀다가는 정말 두고두고 창피할 것 같았다. ( 꺄악- 이었다면, 아마 아킨은 그 자리에서 도망쳤을 것이다) 숙부가 말했다. "어쨌건 반가워하는 것으로 접수하마. 인사 잘 받았다." "......" 아킨은 이 숙부에 대한 설명을 하나 더 추가하기로 했다. 암롯사 왕가 출신으로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유머감각을 가지고 있음- 하고 말이 다. "웬....일 이십니까?" "산책 중이었다고 해 두지." "죄송하지만 이곳은 산책로도 아니고, 사람들이 자주 오가는 길은 더 더욱 아닙니다." "산책로가 아닌 것도 사실이지만, 낮잠 자기에도 난처한 장소 같은데." "......." 아킨은 숙부와 아버지가 친형제라는 분명한 사실조차 저 먼 우주에서 퍼트린 헛소문이라고 믿어버리고 싶어졌다(하긴, 크게 닮지도 않았으니 정말 형제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숙부는 아킨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내일이면 혼삿길이구나." "....아직 정해진 바는 없습니다." "그래도 장가가는 길인 건 사실이잖니. 그 신부한테 홀딱 반했으면 좋 겠다만, 아무리 낭만적인 사람이라도 그걸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구 나." "....." 칼라하스 공주는 본 적은 있다. 정신없을 때 봐서 잘 기억나지는 않지 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녀가 좋아질 것 같지는 않았고 당분간은 유 제니아 외의 다른 사람을 좋아하기도 힘들 것 같다. "네가 지난번에 한 말에 대해 생각해 봤다.....이해하기 어렵지는 않더 구나." "저는 아직 어립니다." "안다. 그러니, 그만큼 세상 보는 눈은 그렇게 넓지도 너그럽지도 않을 테고......게다가 그런 감정은 나이를 먹는 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다. 내 형만 해도, 너보다 몇 살이나 많았는데도 도무지 주체를 못했지." 왜 큰 숙부 이야기를 꺼내는 건지 알 것도 같다. 그러나 아킨은 아무 말 도 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한다면, 질투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감정이란다. 아니, 그런 게 없는 인간은 다방면으로 아득하게 잘난 인간이거나 게으른 사람, 둘 중 하나지." "숙부님도 있겠군요." "나도 사람인 걸. 게다가 잘난 인간도 게으른 사람도 아니고...... 하지 만 너처럼 단 하나의 차이가 모든 것을 빼앗았다면.....열 안 받는 게 이상하지." "그럼 카시오스 숙부님처럼 뒤집어엎기라도 해 보라는 겁니까." "쉿, 선을 지나치게 넘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너에게는 몰라도, 나에게 는 너무 위험한 말이야." "요점이 뭡니까." 숙부가 어깨를 으쓱했다. "거, 참. 살쾡이 같은 녀석이로군. 당장에 답을 내 놓으라고 다그치지 말 고, 처음에는 좀 공손하게 해 다오. 그래야 나도 기분 좋거든." 어쩌면 롤레인과 남매지간진 지도 모르겠다, 하고 아킨은 생각했다. "질투하는 건 상관없지만 너 스스로에게는 냉정 하라는 말이다, 아킨토스. 상대를 깎아내고 너 자신을 추켜세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고, 상대를 지나치게 두려워하여 지레 겁먹고 굴복한다면 더 어리석은 짓이다. 적든 많든 간에, 현실과의 오차는 그만큼의 오판을 만들어 내는 법이고, 이 바 닥에서 그 정도 오판은 목숨을 잃고도 남을 정도의 실수라고." 숙부는 그렇게 말하고는 빙그레 웃었다. 아킨은 그렇게 그와 마주하니, 정 말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친한 숙질간이라도 된 듯 했다. "하지만 이번....것은 타격이 컸습니다." 묻지는 않았고 답하지도 않았는데 테시오스는 짐작은 하고 있는 듯 했다. 그 의 눈에 아련한 동정이 걸려 있었고, 그것은 분명 '아는 사람'의 것이었 다. 아킨은 그가 알고도 침묵해주고 묻지 않는 것에 감사했다. "그래도 아킨토스, 백번을 내팽개쳐져도 너의 삶이 너의 것이라는 것은 변 함없단다. 그리고 너의 삶을 위해 너보다 더 노력해야 하는 사람도 없고....... 그러니 아무 것도 포기하지 마라. 두려움에 떠밀려 절망에 안기고 결국에는 복종을 택하는 것만큼의 기만은 없으니까." "......지금 제게 충고를 해 주시는 겁니까?" "별로 친하게 지내지는 못했다만, 어쨌건 혼삿길 떠나는 조카에게 아무 것도 건네지 못하는 것도 미안해서 말이지....." 아킨은 숙부를 보며 하늘만큼이나 푸른 지붕을 가진 탑에 머무는 상복 의 노모를 생각했다. 돌아서라고 했지, 그냥 마주보고 같이 으르렁대 고 잡아먹어 버리라고 했었지.... 차갑지만 부드러운 바람이 쓸려 내려왔다. 아킨은 눈을 감았고, 머리 카락이 사르르 흔들리며 이마와 코를 간질였다. 쏴르르르르-- 물결과 갈대가 한꺼번에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베이나트가 말했었다. 세상이란 건 말이다,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지만.....그것 모두 다 겪 어야 하는 거란다. 좋은 것만 있을 수도 없고, 언제나 나쁘지도 않아.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좀 더 단단해 지는 것뿐이란다. 할 수 있는 일이라... 할머니가 택한 것은 그냥 탑에 박혀서 매일 매일 아버지를 미워하는 것 뿐이었다. 잊혀지고 낡아가고, 다시 잊혀지면서. 아킨도 마찬가지로 살 수도 있었다. 탈로스의 탑에서 아무 것도 기억 하지 못한 채로 매일 매일 안일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때 결국에는 삶을 택한 것은 아킨 자신이었다. 탑을 박차고 나와 달려가, 또 다시 거센 현실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것은 바로 아킨 자신이었다. 후회는 언제나 선택의 그림자라는 것을 알고, 그 현실에 얼마나 강한 자가 있었는지도 알고 있으면서도, 그곳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낙원도 행복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도 돌아가기로 한 것 역시 아킨 자신-- 절망하고 자책하고 결국에는 휘안토스에게 굴복하여 그에게 운명을 맡 기는 것이야 말로 아킨 스스로 선택하여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두 려움으로부터 '휘안토스에게 보호 받는 일' 이었던 것이었다..... 아킨은 웃고 말았다. 그곳에 처박혀 있었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거라고 후회했던 것이 어리석 게 느껴졌다. 거대한 하늘과 품 넓은 숲에 안겨서, 아킨은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을 했었는지 깨달았다. 베이나트가 봤다면 주먹이라도 휘갈겼겠군. 이 바보 녀석아, 그렇게 말 해도 못 알아듣겠냐? 하고 말이다- 그래, 잊고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베넬리아에서 본 환영에, 유제 니아가 당한 일에, 또 다시 보게된 이상한 환영- 그리고 암롯사로 다시 돌아온 것....그것에 겁먹고 주눅 들고 휩쓸려 나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다 잊고 있었다. 또 몸을 움츠리고 안일하게 살기를, 원하지 않기에 상처받지도 않는 삶 을 택하려 했다. 한번 패했다고 주저앉아 포기하려고 했다. 바보처럼, 어리석게도, 아킨에게 삶이 아킨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어 떤 대가를 원해왔었는지 잊고 있었다...... 또 웃음이 나온다. 그렇게 중요한 것을 왜 잊고 있었던 것인지.... 아킨의 미소에 테시오스 역시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그 미소를 보며, 아 킨은 다시 한번 이 테시오스가 암롯사의 왕가에 어울리지 않는 다는 생 각을 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 말고, 네 할머니에게 감사해라." "네?" 테시오스는 이마에 붙은 낙엽을 떼어내며 말했다. "너를 보내고 말씀하시더구나. 저기, 길 잃은 가엾은 아가에게....제 길을 가르쳐 주려무나. 지쳐 헤매다 보니, 자기가 어떤 길로 가야 하는 지도 잊고 있구나- 하고." 작은 낙엽 하나가 흔들리며 저 앞의 수면에 떨어졌다. 조용한 파문이 퍼 지고, 작은 물고기 떼가 그 주변으로 몰려들어온다... "무사히 돌아와라, 아키. 네가 할 일은 네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욱 많다." ********************************************************************** 작가잡설: 날이 어마어마하게 좋군요! 와우~~ 그런데 정말 덥군요..;; p.s 오타 수정;;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41장 ************************************************************** [겨울성의 열쇠] 제41장 해뜰 무렵 제186편 해뜰 무렵#1 ************************************************************** 자켄은 어둠 숲의 분위기가 자신에게 별반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숲과 대화할 수 없는 자켄이 그런 것을 느끼는 이유는 단 하나, 숲 자체의 의지라기보다는 숲 속에 살고 있는 엘 프들의 의지가 자켄에게 호의적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생명수까지 이르는 길 내내, 자켄은 숲 속에서 그를 주시하는 냉엄한 드루이드들의 눈길을 느꼈고 검만 뽑지 않았다 뿐이지 거의 '적대'에 가까운 눈빛을 보내는 전사들을 보았다. 그러나 모두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자켄에게 '숲 밖으로 절대 나가지 말고, 암롯사에 있 는 이복 동생의 일에도 관여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던 이들은 생명수까지 가야 만날 수 있는 이들이었고, 그 명령을 어기고 무단으 로 숲을 나가버린 자켄에게 합당한 벌을 내리며 질책하는 것 역시 그들만의 권리였다. 이미 각오하던 바였으니, 냉담한 엘프들의 태도에 자켄은 별반 주눅 들지는 않았다. 아니, 이미 예전부터 그들의 냉대와 무관심에는 익 숙해진 지 오래였다. 그리고 그의 보호자들이었던 종족의 두 지도자, 즉 바실리카와 나루에의 명령을 어긴 지금 그들은 원래의 태도 에서 강도를 조금 높이고 노골적이 된 것 뿐이다. 자켄은 그들에게 있어 영원한 이방인이었으며 외지인이었으며 이종족 이었다. 절반은 피비린내 진한 인간이었고, 그 절반을 준 자는 일 족의 소중한 아이였던 아델라이데를 죽인 원흉이다. 그러나 나머지 절반은 분명 숲의 자식이었으니 그 때문에 엘프들은 자켄에게 냉 담하기는 해도 대 놓고 배척하지는 않았다. 긴 시간을 살아온 이들이 고, 역시나 긴 시간을 살 이들이다. 남의 약점에 대해 아량을 베풀 지 못할 정도의 종족이었다면, 애당초 티피안느는 그들에게 그렇게 긴 인생을 약속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또 싫다. 대 놓고 적대한다면 미워하기라도 할 텐데, 다리 부러진 강아지를 대하 는 듯한 그 고상하기 그지없는 동정에는 오히려 비참해지기만 한다. 마침내 숲의 심장인 생명수에 도착한 자켄은 빛이 한번 번쩍일 정도 로 호되게 한 대 맞아야했다. 기다리고 있던 바실리카가 손을 날린 것이다. 아무리 자켄이 키가 크고 남자라지만, 바실리카의 벼락같 은 따귀에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야 했다. "어째서 명령을 어긴 거냐." 그 냉엄한 말에 자켄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나는 사죄를 원하는 게 아니라, 그 이유를 알고 싶은 것이다." "아직은 의무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말에 바실리카의 눈이 분노로 뜨거워졌다. 자켄이 말했다. "저는 성인입니다. 비록 명령을 어기는 일이었다 할지라도 필요하다 생각했기에 한 것뿐입니다." 바실리카의 눈이 확 타오르고, 그녀의 손이 다시 치솟아 올랐다. 그 런데 그런 그녀의 손에 굵은 지팡이가 얹히며 그녀를 막고 나섰다. "그만 해라. 그 말이 맞으니까." 그 부드러운 남자 목소리에 자켄은 등골이 확 굳는 것을 느끼며 고개 를 더 깊이 숙였다. 전사들이 옆으로 물러나며 그가 가까이 오도록 해 주었고, 그 남자는 자켄 쪽으로 걸어오며 한결같은 차가운 눈 초리를 보내왔다. 발레스- 드루이드 들 중 하나이며 나루에의 아들, 또한 아델라이데 의 아버지인 남자였다. 원칙상이로나 혈연 상으로나 자켄의 대부가 되어야 했던 것은 바로 그였지만, 그가 나루에 앞에서 너무나 완강하게 거절했기에 그 자 리에 있던 베이나트가 대신 대부가 되어준 것이었다. 그는 아델라 이데의 아버지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드루이드이기도 하다. 숲과의 교감능력이 아예 없는 자켄이니, 그들에게 자켄은 인간과는 거의 다 를 바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켄이 자신의 핏줄이란 것을 납득할 수 없었고, 인정할 수도 없었다. 아니, 그는 자켄을 정말 '혐오'했다. 발레스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바실리카, 자케노스는 벌써 스물이 넘은 지 오래다. 그런 식의 명령 으로 묶어 둘 수 있는 나이는 벌써 지났다고 보는데." "저는 그의 보호자입니다, 발레스 님." "일족의 아이들에게 보호자가 필요한 것은 열여덟까지다. 반려라면 몰라도, 보호자가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된다고 보는데." "그에게는 반려가 없습니다. 그러니 아직 제게 권리가 있다고 봅니 다." "보호의 기간은 벌써 끝났다. 반려가 없다면 혼자 지내며 모든 일을 스스로 결정하여 스스로 책임지면 될 일이고, 아무리 보호자라 할 지라도 그대가 그의 안전을 생각하여 명령을 내릴 권리는 없다. 그 가 현명한 판단을 내리기를 기다리거나 조언하면 끝날 일. 명령을 내리고 지키지 않았다고 이렇게 나서는 것은 그대의 권리를 지나 치게 남용하는 것이다." 자켄은 그 말이 자켄을 인정하거나 지금 이 질책을 피하게 해 주기 위함이 아니란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것을 역시 잘 아는 바 실리카의 눈이 날카로워졌지만, 대꾸할 말이 없었으니 조용히 있어 야 했다. 자켄의 반려가 되어줄 엘프가 이 숲에 있을 리가 없다. 바실리카가 그의 보호자의 자리에서 물러나면 그는 완전히 혼자가 되어 버리는 것이고, 자켄은 미련 없이 이 숲을 떠나 버릴 것이다. 발레스가 원하는 것은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 때의 그 끔직한 일이 남긴 이 거추장스러운 흔적을 치워 버리고, 그저 순수한 슬픔만 가슴속에 남 긴 채 달래고 싶은 것이다. 반쪽 엘프가 자켄이 처음인 것은 아니다. 여자든 남자든 아버지 쪽이 든 어머니 쪽이든 그런 특이한 존재는 몇 명이 더 있었지만, 그들은 성년이 되는 즉시 모두 숲을 떠나 버렸다. 그들 모두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그들을 숲에 묶어 놓는 유일한 끈인 보호자들과의 관 계가 끝나자마자 나가 버리는 것이다. 숲과 일족은 분명 그 생명을 버리지는 않는다. 단지, 그 스스로 그것을 버티지 못하고 퉁겨나 가게 만들어 나가는 것뿐이다. 그리고 정말 사랑하여 낳은 아이들이 그렇게 될 정도인데, 잔인한 약탈에 의해 태어난 자켄의 경우는 두 말할 것도 없었다. "바실리카, 그대가 현재 전사들의 장이며 가장 뛰어난 전사라는 것은 나 역시 진심으로 인정한다. 그러니 그런 그대가 일족의 상식대로 행동해 주기를 바란다." "......발레스 님." "이 일에 대해서 어머니께 직접 말하겠다. 그분께서 어떤 판단을 내 리실지 모르나, 자켄의 출생의 특별함보다는 일족의 상식과 율법을 중시할 거라 믿는다." 그 차가운 말에 자켄은 쓴웃음이 치밀어 올라왔다. 바른 말만 하는 듯하지만, 결론적으로는 더 이상 꼴도 보기 싫다는 말이 아닌가- 그러나 언젠가는 그가 저렇게 나올 거라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단지 나루에를 불쾌하게 하고 싶지도 않고, 바실리카의 분노도 건 드리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다. 자켄을 향한 배려 같은 것은 존재조 차 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바실리카가 말했다. "일어나라, 자켄." 그리고 자켄이 일어나자, 그녀는 이번에는 전사의 대장들과 발레스에 게 말했다. "자켄과 단 둘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어떤 결정이든 내릴 것이고, 그 결정에 자켄이 동의한다면- 다시는 자켄의 일에 상관 하지 마십시오. 어떤 방식으로든." "나는 일족의 율법에 맞추어서 이야기하는 것뿐이다, 바실리카. 그대 가 다음에 어떤 방법을 쓰든, 일족의 율법에 어긋난다면 얼마든지 말하겠다." 발레스가 사라지자, 바실리카의 짧은 부탁과 함께 다른 전사들 역시 자리를 비켜주었다. 자켄은 그들이 다 사라질 때까지 말없이 생명수 너머의 어둠을 바라보았고, 그 어둠 속에서 그를 지켜보는 나루에 를 발견했다. 지난번에 베이나트가 다녀간 뒤 그녀는 자켄에게 '숲 밖으로 나가지 도 말고, 동생과 관련된 일에 관여하지도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그것으로도 부족하다 생각했는지 그의 보호자인 바실리카에게 도 또 한번 같은 명령을 내리게 했다. 숲에서 가장 높은 두 사람의 명인 데다가, 같은 명령을 동시에 내렸다. 그렇게 두 번에 걸쳐 단 단히 명한 것은, 숲 밖으로 아예 나갈 생각이 없는 한 반드시 지키라 는 말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자켄이 어긴 것이다. 그것도 명령을 내린 지 이틀 만 에. 나루에는 벌써 흥분하고 분노하는 바실리카와는 달리 차분하게 상황 을 보고 있었다. 아들이 자켄에게 어떤 말을 하는지도 보았고,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도 분명히 알고 있다. 바실리카가 말했다. "자켄.....대체 무슨 각오를 하고 숲을 나간 거냐." "모든 것을 각오했습니다." "그리고 왜 돌아온 거지?" "역시 각오하고 돌아온 것입니다." "나와 어머니의 입에서 직접 추방명령을 받으려고 온 거라는 말이냐 -!" "네." 바실리카가 다시 자켄의 뺨을 후려갈겼다. 철썩-! 차갑고 날카로운 소리가 생명수의 가지를 굽이굽이 흔들며 지나갔고, 그 모습을 보 면서도 나루에는 나서지 않았다. 물론 조용히 한숨을 내 쉬기는 했지만, 크게 흔들리지는 않았다. "이 딴 대접을 받으려고 너를 키운 게 아니라고-!" "죄송합니다.....하지만 바실리카 님, 이제는......결정해야 할 때라고 생 각합니다. 보시지 않았습니까....이런 방법으로 숲에 남아 있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다시 바실리카가 손을 쳐들었다가 이를 갈아붙이고는 겨우 내렸다. 벌써 두 대나 갈긴 뒤니, 또 때린다면 이건 아무리 자켄이 잘못했다 하더라도 지나쳤다. "그래서! 그래서 숲을 나가서.....모든 혼혈들이 했던 것처럼 똑같이 타락하겠다는 거니! 피바다를 헤매고 지저분한 것들과 어울리고! 그 꼴을 보느니 차라리 이렇게라도 숲에 묶어 두는 편이 나아!" "제 선택입니다, 바실리카. 타락하는 것도 저의 책임이고, 이렇게 숲 을 나가는 것도 저의 책임입니다. 제가 책임져야 하는 것까지 힘겹게 책임지려 하지는 마십시오......하지만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서라 도 지켜야 하는 것이 바로 그 아이, 아키입니다." 다시 바실리카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어머니는 너를 쫓아내기 위해 그런 명령을 내린 게 아니야!" "압니다. 어머니께서 그런 명령을 내리셨기에 저는 제 나머지 절반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비록 그 남자를 용서할 수는 없을 지라도, 적어도.......아키는 사랑하고 있으니 제 나머지 절반을 받아들 일 수는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제 저에 대하여 분노하지도 않고, 그 어떤 것도 증오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숲을 떠나려 하는 거냐." "지금 제 절반을 부정하시는 것은 바실리카 님입니다." "자케노스--!" 자켄은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다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검을 뽑아 그녀의 발 앞에 놓으며, 그녀가 얼마나 분노와 슬픔에 떨고 있을 지 충분히 짐작하면서도 말했다. "몇 번을 생각하고, 몇 번을 고쳐 결심했었습니다.....바실리카 님. 이 숲은 저를 낳았고, 저는 이 숲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인간 역시 저를 태어나게 했고, 인간의 아들이란 것 역시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곳에 몇 년을.....아니 숲이 허락하여 제게 수 백년의 수명이 주어 진다 하더라도, 저는 그 나머지 절반을 떼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바실리카가 고개를 돌리며 날카롭게 말했다. "그만 해라, 자켄. 검도 거두어들이고..." "......거부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그러셔도 오늘 일은 없었던 일이 될 수 없습니다." "나도 알아.......안다고!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간에 너를 인간 세 상을 보낼 수는 없다. 너와 영영 이별하는 것은, 다른 일족이라면 몰라도 나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저 시간이 다가온 것뿐입니다, 바실리카." "......" 자켄은 머리를 더욱 깊이 조아리며 말했다. "숲을 나가겠습니다." 그렇게나 단단히 결심했건만, 목소리 끝은 떨리고 있었다. "나루에 님과 바실리카 님께 저는 언제나 감사드렸으며, 지금도 감사 드리고 있습니다. 어디에 있든, 그 마음만은 변하지 않을 것이며 늘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바실리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고 저 뒤에 서 있는 나루에를 바 라보았다. 그 간청의 눈빛을 받으며, 나루에는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바실리카를 위한 말이 아니었다. "자켄의 뜻을 받아 들어라, 바실리카. 그리고 발레스의 말이 맞다. 너 는 벌써 자켄을 보냈어야 했다." "........하지만...!" "네가 자켄을 잡아 놓은 방법은 아무도 납득할 수 없는 방법이었고, 그 불안한 관계 속에서 더욱 불안했던 것은 바로 자켄이었다....... 일어나라, 자켄. 그리고 너의 검도 거두어 들여라. 그 검은 내가 너에 게 준 것, 비록 네가 숲을 떠난다 할지라도 결코 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켄의 손이 움직이지 않자, 나루에는 손수 검을 집어 검 집 에 채우고 자켄에게 내밀었다. 자켄은 결국 그 검을 받아야 했다. "이제.....너의 선택만이 남았구나, 바실리카. 어쩌겠느냐." "이대로 자켄을 보내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은 너의 자유이다. 나는 네가 현명하다는 것 을 믿고 있다. 그러니 모든 이를 납득시키고 자켄마저 납득시킬 수 있 는 방법을 찾아 낼 거라 믿는다." 자켄이 말했다. "나루에 님, 삭월의 날 선언해 주신다면, 지금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자켄-" "급합니다.....어떤 일이 벌어질 지 불안하고, 저는.....제발 늦지 않기를 바랍니다." "자켄, 조금 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면 네 의부인 베이나트가 숲 으로 올 거야. 그와 만난 후에 떠나라. 너 혼자 여기 저기 어리석게 돌아다니는 것 보다는 그와 함께 하는 편이 나을 거다." 그렇게 말하고는, 나루에는 뒤로 한발자국 물러나며 바실리카를 바라 보았다. "자, 바실리카.....이제 네가 선택할 차례다." 바실리카의 눈동자가 자켄의 어깨에 머물렀다. "나는 언제나 너를 위해왔다." "당신의 사랑이 진심이라 믿고 있고 저 역시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 다. 이것만은 진심, 그 어떤 일이 저와 함께 한다 할지라도 변치 않 을 것입니다." ".......영영 떠날 거니?"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올 것이고, 당신이 찾아오신다면 언제라도 반길 것입니다." 바실리카는 희미하게 웃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한 가지.....부탁이 있다. 이제부터 너의 보호자이기를 그만 두는 대신, 나는 한 가지 권리를 얻었으니까." "무엇이든 들어드리겠습니다." ".....우리를 보살피는 생명수와, 진실을 말하는 알다의 샘과, 또한 그 들을 대신해 우리를 보살피는 모두의 어머니이신 나루에 님 앞에서 가장 신성한 내 심장의 진실로서 말한다......자크." "......!" 자켄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말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모든 것을 감수할 생각이었기에 평온하기만 했던 자켄의 얼굴은, 지금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말에 창백해졌다. "바실리카 님....!" "네가 떠나는 것을 막자는 것이 아니란다, 자켄......원한다면 떠나도 된다. 하지만.....나는 그래도 네가 돌아오기를, 네 절반인 인간이 아 닌 네 다른 절반인 엘프의 길을 따르기를 바란다." "전......안 된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나는 받아들인다." "또 다른 가혹한 운명을 만들고 싶지는 않습니다, 바실리카 님." "원하지 않는 다면 만들지 않아도 된다. 너를 위해서라면 감수할 테니." "아니, 제 운명에 당신을 끌어 들일 수는 없습니다." "자케노스, 네가 네 동생을 사랑하고, 네 동생 역시 너를 사랑해서 소 중히 여기듯......내게 너는 누구보다 소중하다. 그리고 그런 너를 지 키고 내 옆에 두기 위해서는 이 방법 밖에 없구나." "이렇게 까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러지 않으셔도 당신은 정말 소중한 분이고, 저는 결코 당신을 저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이대로 떠나보낸 다면 너는 결코 숲으로 돌아오지 않을 거 다.....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나 역시 이 숲에서 살수 없게 된다." 그렇게 말하는 바실리카의 눈빛에, 자켄은 도저히 그녀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것은 분명 진실이었고, 그녀의 투명한 눈이 간파해 낸 자켄 자신의 슬픔이기도 했으니. 그것이야말로 진정 이 숲을 떠나고 싶던 이유였으 며, 그러면서도 이 숲을 떠날 수 없었던 가장 간절한 이유였다. "그러니 자케노스, 외로운 떡갈나무의 아들이여--나의 반신이 되어다오." 이제 자켄은 아무 것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나루에가 원하는 것이었음을, 나루에와 감응하는 생명 수의 따스한 기운으로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 작가잡설: 아아, 바실리카! 너야 말로 슈마허와 세냐를 단번에 제압하는 최강이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41장 *************************************************************** [겨울성의 열쇠] 제187편 해뜰 무렵#2 **************************************************************** 늘 잊고 지내던 일이 가끔 전혀 상관없는 것에 갑자기 연상되는 때가 있다. 그리고 그 뒤로는 그 기억을 따라 모든 연관된 것이 쏟아지듯 떠오르고, 결국에는 불쾌해진다. 사이러스는 대체 왜 케올레스가 문을 두드리는 순간에 '그 여자'가 생각난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잠시 고요에 몸을 담고 있었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똑똑- 짧게 들렸고 그 순간에 갑자기 그 소녀 에 대한 기억이 떠 오른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사이러스는 그 여자에 대한 기억보다는 그 후에 만 난 엘프 여전사에 대한 기억이 더 생생했다. 분노에 번뜩이는 눈과 단번에 목덜미에 닿던 차가운 검날과 바닥에 떨어지던 붉은 핏방울. 그 어이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끝난 일전과 기가 막히는 패배는 늘 기억하고 있었고, 그 후로는 검을 뽑을 때마다 오래된 상처가 쑤시듯 그 여전사의 모습이 떠오른다. 자켄을 보며 떠 올렸던 것 역 시, 그 어머니가 아니라 그의 스승이자 자켄의 몸놀림 하나 하나 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 넣은 그 여전사였다. 아마도 그 소녀는 여전사의 동생이라 했었지..... 그래, 이름이 아델라 이데였던 것 같다. 사실, 지금은 거의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저 애처로운 목소리로 흐 느끼던 소리만이 조금 기억날 뿐이다. 깊은 골짜기의 허공에 뒤섞여 흐릿하게 변해 가는 길고 긴 메아리처럼. 정말 힘든 사냥감을 잡았다는 오만함에 차 있었고, 그 오만함은 당연 하게 잔혹한 정복욕을 부추겼다. 처음에는 그저 인간에게 잡힌 것에 대한 두려움밖에 없었던 그녀의 눈이 더 없는 공포에 질리고, 그것 이 그를 만족시켰고 부추겼다. 여자들을 억지로 가졌던 적은 많았 지만 그렇게 애처롭게 저항했던 여자는 처음이었고, 그렇게 철저하 게 범했던 것 역시 처음이었다. 더 울부짖게 만들고 싶었고, 더 애 걸하게 만들고 싶었으며, 그에게 그녀를 유린할 권리와 힘이 있다는 데 만족하고 흥분했다. 그런데 그날의 정복이 그를 파멸시켰다. 행복의 절정에서 그는 산산 조각나 버렸고, 33살의 봄 드디어 찾아낸 심장처럼 소중하던 아름다운 보물은 그의 눈앞에서 천천히 부서져 갔다. 너무나 천천히, 너무나 생생히, 너무나 진절머리 나도록. 가끔 생각한다. 그녀가 떠나게 내 버려두거나, 아니면 정말 자켄에게 왕위를 물려주 겠다고 약속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그 엘프들의 수장의 말에 따라 둘째 아들과 아내를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했더라면- 그녀를 그 성에 가두어 버리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그러나 그는 그렇게 가정을 시작한다 해도 결론까지 가 보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모든 것은 그저 의문, '그랬다면-'이라는 차라리 유희에 가까운 중얼거림으로 시작되어서는, 그 자리에서 단 한발자국 도 앞서 나가지 않고 끝나버리곤 했다. 아무 쓸모도 없다는 것을 너 무도 빨리 깨달아 버리고, 낭비를 모르는 사이러스는 당연하게 더 이상은 생각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폐하, 아킨토스 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케올레스가 재촉하듯 그를 부르자, 그제야 사이러스는 자신이 그녀를 생각한 것이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번개가 치듯, 컴컴한 어둠에 묻힌 기억의 전당에 불이 확 들어왔다가 는 다시 더욱 까만 어둠에 짓눌린 듯-그 짧은 순간에 그리도 많은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사이러스가 말했다. "들여보내고.....그대는 물러나게." "알겠습니다, 폐하." 사이러스는 다시 창 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바다는 물결치고, 그 위로 햇살이 부서지고, 갈매기가 유유자적 그 허공을 가르고 있다. 지독하게 고요하군. 그리고 귓전으로 문 열리는 소리와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 까, 모든 소리가 멎고 억눌린 침묵만이 남았을 때 사이러스는 고개 를 돌렸다. 그 곳에 둘째 아들, 아킨토스가 있었다. 지금 그의 옆에 있는 아들과 같은 날에 태어나, 칼로 쳐낸 듯 전혀 다르게 살아온 그런 아들이. 확실히 컸다, 라고 사이러스는 생각했다. 키도 커지고, 눈빛도 날 카롭고 단단해지고, 어깨와 팔에도 어느 정도의 자신감이 붙어 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버지." 1년도 넘게 단 한번도 보지 못한 아들이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태 어나서 처음 보름이 되는 그 날까지 마주했던 날들과 그 이후 18년 간 마주했던 날을 비교해보라면 전자가 더 많았다. 제대로 보려했 던 적도 없고, 구태여 보려했던 적도 없다. 어린 아들이 보기 싫었던 것은 언제나 저 눈빛, 지금 자신을 바라보 며 역시나 똑같은 빛을 보내는 저 눈빛 때문이었다. 침묵 속에서, 고요한 어둠 속에서 늘 한결같은 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저 눈. 그 속에는 기대도 희망도 의지도 없었으며, 오로지 환멸과 증오만이 있었다. 그저 자신을 두려워하고 미워하기만 하는 것이라면 괜찮으 나, 그런 무지속의 두려움과 속속들이 알고 미워하는 것은 분명 달랐다. 그래서 저 아들을 미워했고, 그것은 아내의 죽음에 대한 모든 책임을 떠넘길 수 있었던 좋은 핑계이기도 했다. 일단 넘기고 나면 모든 것은 편해진다. 이미 다 끝난 문제, 그렇게 무덤에 묻힌 것에 관해 책임을 지려고 해 봐야 질 수도 없다. 사이러스는 죄책감을 믿지 않았고, 가져본 적도 없었다. 이미 끝난 일인데 후회해서, 미안해 해서 무엇이 바뀌겠는가. 사이러스에게 필요했던 것은 들끓는 분노와 증오를 퍼부어 댈 대상이었고, 그것이 바로 그 어둠 숲과 어둠 숲 이 선물해 준 괴물과, 이 아들이었다. 아킨의 눈길이 거두어졌다. 기대한 것 같지도 않았고, 역시나- 하는 확인과 함께 그냥 그렇게 체념해 버리는 것이다. 갑자기 어머니가 생각나다. 나도 죽이지 그러냐, 나도! 그 아이를 낳은 나도 죽여 버려라! 그래, 내가 그 아이를 부추겼다. 그 아이더러 반란을 일으키고 제 형을 제위에서 떨궈 내라고 내 입으로 했다! 자, 이제 나도 죽여보지 그 러느냐! 어서! 네 동생과 네 사촌과.......네 적을 죽이듯, 나도 죽여라 ! 어서--! 그러나 그렇게 울부짖는 어머니를 죽일 수 없었다. 제발 사라져 주기를 바라며 그렇게나 미워했지만, 그녀는 복수라도 하듯 끝끝내 그의 눈앞에 있었고, 그럼에도 사이러스는 스스로의 손으로 그녀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이 아들 역시 마찬가지다. 사라져 주기를 바라나, 결코 사라지지 않 는다. 어디로든 떠났다가, 업보처럼 돌아와 이렇게 언제나 눈앞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아들을 어쩌지 못하는 것은, 그럴 '이유' 가 도무지 없기 때문이었다. 온갖 잔혹한 명성을 달고 다니는 그였지만, '이유 없이' 누군가를 죽 였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의 손에 죽은 이들에게는 적어도 '적 '이라는 이유는 있었고, 그 때문에 그들에게 어떤 잔혹한 짓을 한 다 한들 그것은 사이러스 자신의 '권리'였을 뿐이다. 그런데 아킨토스는 벌써 열 여덟인데도 언제나 암롯사를 떠나 버릴 궁리만 해 왔을 뿐, 그 먼 옛날 동생 카시오스가 그랬듯 반란은 생 각도 하지 않고 가장 위험한 존재인 테시오스와도 전혀 관계가 없다 . 휘안토스는 철저하게 피하려고만 할 뿐, 얼굴 한번 마주치려고 도 하지 않는다. 늘 저럴까- 앞으로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 휘안토스가 왕이 되 고 사이러스가 힘을 잃게 되어도 언제나 저렇게 있을까. 궁금했지만, 사이러스는 아들의 금빛 눈동자 속에서 아무 것도 찾아 낼 수 없었다. 무엇을 원하는 지, 무엇을 어떻게 할 작정인지....아무 것도. 18년에 가까운 무관심은 그에 합당한 무지를 선사해 주었다. "그래, 그 동안 잘 지냈냐." "잘 쉬었습니다." "앞으로 꽤 어려운 일을 해야 할 텐데, 우선 쉬어 두는 것도 좋겠지." "언제 떠나면 되는 겁니까." "물론 내일 당장이다. 너를 수행할 인원은 네가 오기 전에 모두 뽑아 두었으니 신경 쓸 필요 없다." ".....감사합니다." 차분하게 답하는 것을 보면 예전보다는 조금 나아진 듯도 하다. 예전 에는 결국 제 성질을 참지 못해 험악하고 날카롭게 쏘아붙이고는 도망치듯 사라져 버리곤 했으니. "더 이상하실 말씀이 없으실 듯 하니 나가보겠습니다." "아니, 아직 더 있다." "하십시오." "그 동안 어디에 있었느냐." "휘안토스에게 물어 보십시오. 그가 제일 정확하게 말해 줄 것입니 다." "아니, 그 '다음'을 말하는 것이다." 잠깐 그를 보는 금빛 눈동자에 분노가 번득인 듯 했다. 예전으로 돌 아가나 싶었지만, 이번에도 아들은 참았다. "베넬리아로 갔었습니다." "누구와?" "자케노스와 함께 갔습니다." "베넬리아 국경을 넘은 후에는?" 잠시 아들은 말이 없었다. 한순간에 손에 힘이 들어가며 주먹을 움켜 쥐더니,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말해라. 그 베이나트라는 남자는 대체 누구이며, 무슨 이유로 너와 함께 있어 준 것이냐." "스승이신 오거스트 롤레인 님과 관련된 분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분들끼리의 비밀이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명령이다." "복종하지 않겠습니다." 아킨은 그가 벌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고 저렇게 배짱을 부 리는 것이다. 그것을 모를 사이러스가 아니었고, 지금 당장 아킨에 게서 진실을 토해내게 할 방법조차 없었다. 사이러스는 다시 한번 이 아들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확인했다. 짜증난다. "좋다. 그렇다면.....암롯사로 돌아온 이유는 뭐냐." "휘안으로부터 찾을 것이 있었습니다. 찾는 대가로 저는 이곳에 남기 로 했고, 지킬 생각입니다." "그 찾을 것이 뭐였냐." "역시 휘안에게 물어 보십시오. 답하고 싶지 않습니다." "......형제끼리 여자문제로 싸우는 일은 꼴불견이라는 건 알고 있겠 지." 다시, 두 번째로 아킨은 말을 멈추었다. 이번의 숨소리는 좀 더 크고 깊었고, 움켜 쥔 주먹은 조용히 떨려왔다. "싸우지는 않았습니다. 휘안....은 순순히 그 아이를 내 주었고, 저 역 시 그 아이를 보호자에게 보냈습니다. 문제될 것은 없다고 봅니다." "좋은 선택이었다. 나 역시 신분 낮고 하찮은 계집애 하나로 내 두 아들 모두의 명예에 흠집이 나는 건 싫다. 게다가 그런 계집애일수록 입도 가벼운 법이지." "........" 빠각-이가 맞물리는 소리였다. 그러나 사이러스는 무표정하게 아킨 의 떨리는 어깨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킨이 말했다. "이제....나가 봐도 됩니까?" "그래. 가서 쉬도록 해라." 이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없었다. 아킨은 자리에서 일어나 당장에라 도 뛰쳐나갈 듯 문 쪽으로 돌아섰고, 그런 아들에게 사이러스가 말 했다. "작별 인사까지 마저 하고 가거라." "아주 건강하시길....빌겠습니다." 저 저주 같은 인사말. 늘 되풀이 되는 저 어투.....이제 사이러스는 만 족했다. 1년, 그가 전혀 모르는 곳에서 전혀 모르는 시간을 보내 전혀 모르는 방향으로 변했을지 모를 아들이, 이제야 예전처럼 돌아 온 듯 했으니까. "잘 다녀오너라." 쾅-! 문 닫는 소리에 방 안이 울렸다. 그리고 아들은 잠시 문에 기대 숨이 라도 고르는 듯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사이러스는 다시 그만의 고요 속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아들 을 예전과 같은 상태로 돌려놓았다는 데에 안도했다. 아니다..... 어 쩌면 이건 그의 자신을 향한 기만일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세상은 아직 그대로'라고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는 그 기막힌 기만. 사이러스는 다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아니, 정말 화가 났다. 무엇 인가 아주 중요한 것이 사이러스의 손을 떠나 버린 것만 갔다. **************************************************************** 작가잡설: 어쨌건....이제 아키의 삽질은 끝났습니다;;; 솔직히.... 쓰는 본인도 '이게 마지막' 이락 생각은 했지만 좀 괴로 웠습니다. (아하하핫~) 그래도 그렇지....작업중인 여자애가 다른 누구도 아닌 형에게 그 꼴 이 됬다면...잠시 멍해지는게 정상이죠. -_-; 게다가 다른 누구도 아 닌 뒤에 든든한 사이러스가 버티고 있는 형님이십니다. 이부터 들이 댔다가는 외려 이쪽 턱이 날아가는 상대라구요......아닥아닥 화가 나기는 하지만 섣불리 건드릴 수 없는 상황이라, 아키가 택한 상황 대처방안은 '당분간 패닉' 이었습니다.....;; 그리고 형님 밑으로 들어가기로 한 마당에 유제니아까지 데리고 있었 다가는 나중에 얼마나 더 험한 꼴을 볼지 모르니 일단 보내 버린 거 고요. 자기 학대라기 보다는 일단 참고 나름대로 이게 낫다, 라고 하는 방향 으로 행동한 것 뿐이죠....;; 휘안 상대로 뒤짐 지고 달려드는 게 얼마 나 위험한 지는 아키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41장 ************************************************************** [겨울성의 열쇠] 제188편 해뜰 무렵#3 *************************************************************** 아킨은 문에 기대 있었다. 이럴 거라는 것은 분명 예상하고 있었고, 늘 이래왔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도 또 화가 난다. 아버지와 만나고 헤어지는 것에 이제 는 익숙해질 때도 되었건만, 언제나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아킨에게 무 관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휘안토스보다 더욱 철저하게 아킨의 하 나하나를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베넬리아로 간 것도, 그곳에서 암롯사로 온 것도, 심지어 이번 귀환에 유제니아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도 모두 알고 있었다. 휘안토스 뿐만이 아니었다. 아버지인 사이 러스 역시, 그와 만만치 않은 무게와 존재감과 잔인함으로 아킨을 옭아매고 있었던 것이다. 진절머리난다, 정말- 알고는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확인하게 되면 언제나 기분 더럽다. 그런데 그 때 그 앞에 누군가가 멈추어 섰다. 사이러스를 찾아온 것 같지는 않고, 왠지 아킨을 만나기 위해서 온 듯 했다. 로브 끝자락이 보이자, 아킨은 행여나 케올레스인가 해서 고개를 들었다가 전혀 의외의 인물과 마주하게 되었다. "어...." 호리호리한 체격에 큰 키, 반짝이는 투명한 안경 뒤로 파란 눈이 약 간 난처하다는 빛으로 아킨을 향하고 있었다. 놀란 아킨은 문에서 등을 떼며 외쳤다. "루첼......! 너...." 루첼은 급히 아킨의 어깨와 주먹과 발끝을 빠르게 훑어보고는, 그 사 정거리라 짐작되는 거리 밖으로 슬쩍 물러났다. 아킨은 그가 대체 왜 그러는 지 어안이 벙벙한 채 보다가, 한 박자 늦게 겨우 그 이유 를 알아챘다. "너,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아니, 왜 여기에 있는 거냐?" 루첼은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고는, 문 양 옆을 지키고 있는 기사 두 명이 아주 심상치 않은 눈초리로 그들을 보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기사들은 언제나 질색이었지만, 이 암롯사 기사들은 유달리 질색이 라 생각하며 루첼은 급히 말했다. "상황이 좀 길다. 저기, 저 방에 네 빌어먹을 아버지 앉혀 놓고 이 런 저런 이야기 하기는 곤란하니까 얼른 따라 와라." 그리고 아킨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기사들이 '왕자께 무슨 반말인 고!' 하고 불호령 날리기도 전에, 루첼은 그의 옷자락을 잡아 끌어 당겼다. 아킨은 루첼과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에만 경악하고 있어서 얼결에 질질 끌려가 버렸다. 루첼은 아킨을 끌고 그대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몇몇 사람들이 그 렇게 납치라도 당하듯 끌려가는 왕자의 모습에 놀라는 것도 보여서 아킨은 미칠 노릇이었다. 그래서 그의 팔을 잡아떼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음에도 루첼은 꿋꿋하게 아킨을 '질질 끌고' 갔다. 그리고 잠시 뒤에 루첼은 겨우 방에 아킨을 밀어 넣고는 문을 잠가버 릴 수 있었다. 아킨이 뭐라 사납게 외치려 했지만("너 뭐야!" 임에 분명한) 루첼은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가 아킨을 조용히 시키고는 밖 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엿들으러 오는 사람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자, 그제야 푸후--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 쉬고는 말했다. "반갑다." 기가 막힌 첫마디였다. 아킨은 기가 막혀서 당장에 루첼의 턱부터 갈 겨 버릴까, 하다가 겨우 관두었다. ".....방금 한 말이나 답해라, 루첼. 대체 왜,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 냐." "말하자면 좀 긴데, 다 들어도 절대 때리지 않겠다고 맹세하면 아주 상세하게 가르쳐 주지." "봐서." "그러면 아예 말 안 한다." "맞고 말하나, 말한 다음 맞나. 그리고 덧붙이는 데, 맞고 말한다 할 지라도 말이 끝난 다음 바로 맞을 가능성도 높아. 그러니 말해라." 그런 아킨의 말에 루첼은 얼굴을 와삭 구겼다. 옳은 말을 하는 건 좋 은데, 이 녀석은 조금-가끔은 아주 심각하게- 얄밉게 말한다. "좋아, 그렇다면 이건 어떠냐, 아키. 우선 내가 여기로 오게 된 모든 사정을 상세하고도 친절하게 말할 테니, 너도 여기에 네 발로 기어 들어온 이유 좀 가르쳐 줘. 맞든 패든 그건 각자 알아서 하기로 하고." "그건 공평하군." 그렇게 둘은 각자, 한 사람에게는 너무나 의외의 일이며 다른 한 사 람에게는 이미 예상하고 그 어려움을 충분히 각오하고 있었던 일을 각자 받아들이기에 앞서, 그동안의 일들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루첼은 별로 숨길 것이 없었지만, 아킨은 베이나트에 대해서만은 거 짓말을 해야 했다. 베이나트의 비밀은 그런 교환으로 거래될 수 없는 성격의 것이었으니. 결국 베이나트가 떠난 이유는 '그냥 급한 일' 이 되었고, 루첼은 끈질기게 물었지만 아킨은 계속 '그냥 급한 일' 이라고만 박박 우겼다. 결국 루첼은 그 답을 구하는 것만은 포기했다 . 그래도 그렇게 피해 다니던 본국으로 오게 된 이유만은 제대로 설명해야 했기에, 유제니아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야 했다. 물론 유 제니아에 대한 아킨의 감정이나 둘의 관계는 아예 빼버리고, 그저 '세르네긴의 여동생' (약혼녀라 말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말하는 건 아킨자신이 싫었다.)이라 말했다. 루첼은 아무리 그가 세르네긴에게 빚진 게 많다지만 그 여동생 일에 그토록 열심히 나섰다는 데 그 둘의 관계를 아주 의심할 수밖에 없 었다. 그러나 그 '일'의 성격상 도저히 '혹시 네가 그 애 좋아하고 있 던 것 아니냐?' 라는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 예상(그리고 거의 확 신에 가까운)이 맞다면, 아킨이 받은 충격은 아마도 그 어린 여자 아이가 당한 것만큼이나 클 것이다. 그리고 더불어 휘안토스에게 존경 비슷한 감정도 들었다. 별 놈 다 보고 살아온 루첼이지만, 그리 도 '순수하게' 엿 같은 놈은 정말 처음이었다. (어떻게 예쁜 구석 이 하나도 없을까?) "그 여자애 괜찮은 거야?" "모르겠다. 그 날 이후로 한번도 안 만나봐서." "그럼, 휘안이 다시는 안 건드릴 거라는 보장은 있어?" "약속한 대로라면 다시는 안 할 거야." 루첼의 얼굴은 아주 침울해졌다. "그걸 믿냐?" "당연히 안 믿는다." "......" 그 자신감 넘치는 답에 루첼은 이 녀석 역시 휘안토스 만큼이나 존경 하고 싶어졌다. "그렇다면 대체 왜 바보같이 여기까지 와서 시집가려는 거야?" "말이 이상하군. 나는 그 나라 공주와 결혼하는 거지, 그 나라 왕과 결혼하는 게 아니다." "이상한 데 집착하지 마라, 제발.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내 말은 휘안토스를 믿지도 않을 거면서 여기까지 왜 온 거냐, 이거다." 아킨이 루첼 쪽으로 조금 가까이 왔다. 좀 더 중요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에 루첼은 약간 긴장했다. 아킨이 말했다. "잘 들어, 루첼. 어차피 나는 휘안을 별반 믿지 않고, 언젠가 또 다른 이유가 생긴다면 얼마든지 똑같은 짓을 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아." "그래서?" "하지만 그건 세르네긴이 알아서 할 문제야." "그렇다면 다시 본론이네." "솔직히 말하자면, 네가 한방 쳐도 할말 없을 정도로 한심한 생각으 로 휘안 앞에 무릎 꿇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은 자학하는 취미도 없애고, 절망하는 버릇도 없애 버릴 예정이야. 그러니 시작 이 어찌 되었든 간에, 지금만큼은 포기하기 위해서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니라 믿어 줘." 루첼은 슬슬 답답해져갔다. "대체 무슨 짓을 할 생각이지?" "아직은 비밀이다. 하지만.....루첼, 우선은 솔직히 말해 줘. 교수님 명 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라면, 적어도 암롯사에서 출세해서 케올레스의 자리까지 올라갈 생각은 아니겠지? 만약 그럴 생각이라면 더 이상 끌어들이지 않겠다." "서운하게 구네, 도련님." "서운한 게 아니다, 루첼. 나는 되도록이면 누군가의 미래를 건드리고 싶지는 않다. 너의 것이든, 켈브리안 공주의 것이든, 그리고.....그 아이의 것이든. 그러니 정확하게 선을 긋고 싶어." "너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너한테는 몰라도 나한테는 우리 는 친구사이야. 도움 청하고 싶으면 편하게 청해도 돼는." "그건 뻔뻔한 짓이잖아." "남 걱정 시키면서도 나 혼자 다 할 거야, 하는 놈이랑 처음부터 이 사람이 뭘 해주겠지, 하고 기대하는 놈은 당연히 달라. 어쨌건 너는 칭얼거리며 먼저 엉겨 붙은 주제에 상대방이 못하겠다고 하면 되 려 엉뚱한 사람 죄인 만드는 녀석은 아니니 기쁘게 도와줄 수 있어 . 네가 무슨 짓을 하던 간에 나는 나 알아서 할게. 이러면 되는 거지?" "그래도 부담되는 데." "아키- 네놈 잘못 되면 무시무시한 두 사람이 내 모가지 흔들어 댈 거고, 그 두 사람 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 무서워서라도 도와줘야 해." 아킨은 희미하게 웃었다. "예전에는 전혀 이해 못했는데........이제는 좀 될 것도 같네."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네가 그렇게 쥰이나 실비를 챙기고 다녔던 것 말이다. ......엉뚱한 이 야기 꺼내서 미안하지만, 나는.....그 때의 너를 전혀 이해할 수도 없었고, 솔직히 말하자면 둘 다 아주 싫어하기도 했어. 그런데 그 때 그들의 위치와 조금은 비슷하게 되어 보니, 적어도 네가 있다는 것에는 안도하게 된다..... 어쨌건 정말 고맙다." 루첼의 눈에 웃음이 번졌다. "뭘, 너한테 빚진 게 있는데." "빚?" "좀 큰 거야......어쨌건 너한테 빚진 거니, 확실히 갚아주지 않는 한....내내 미안할 것 같아. 그러니 부담 가지지 말고 편하게 받아 들여라. 해야 할 일을 하는 거니까." 아킨이 대체 그것이 무어냐 묻는 눈길을 보냈지만 루첼은 답하지 않 았다. **************************************************************** 작가잡설: 루첼...역시 자크를 찍었었군. .............훗~ <-? p.s 오타 수정했습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41장 **************************************************************** [겨울성의 열쇠] 제189편 해뜰 무렵#4 **************************************************************** 아킨은 아버지 사이러스에게 최소한의 상식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리 고 그랬기에 그가 말한 모든 말이 진심이며 진실이란 것을 약간의 의심도 기대도 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즉, 정말 내일 아침 당장 떠나야 하는 것이다. 저녁이 되자 아킨은 케올레스를 찾아갔다. 그 시간이 가장 적당하다 고 판단했기 때문이었고, 그 전이나 이후에 시간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저녁에 웬 일이십니까." 케올레스는 아킨이 찾아오자 병약한 손자라도 찾아온 듯 반갑게 맞이 했다. 동정과 죄책감 때문일 지라도, 케올레스가 아킨을 걱정하는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아킨도 그것의 값을 싸게 매길 정도로 어리지는 않았고, 너무 과한 기대를 할 정도로 이기적이지도 않았다.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케올레스는 언제나 그렇듯 가진 모든 것을 쏟아 줄 듯 온화하게 말했 다. "들어 드릴 수 있다면 무엇이든 들어드리겠습니다." "델 카타롯사로 같이 떠나는 제 수행인원 중에 루첼 그란셔스를 넣어 주십시오." 케올레스의 눈이 확 커졌다. "하지만 아킨토스 님, 수행인원 중에는 이미 마법사인 세루비아나가 있고, 그런 그녀가 있는 마당에 또 다른 마법사를 넣는 다는 것은 모양이 좋지 못합니다." 아킨도 그 몸집 마른 여자를 알고 있었고, 그 계산 속 밝은 여자가 휘안토스의 사람이란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아마도 눈빛 날카롭게 아킨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는 냉큼 냉큼 보고할 것이다. "그렇다면 세루비아나 대신 루첼을 넣어 주십시오." "그것은 더 어렵습니다. 세루비아나는 암롯사 출신이며, 돌바 백작가 의 딸입니다. 그러나 루첼 그란셔스는 외국인인 데다가,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습니다. 친구이기 때문이라면, 오히려 이곳에 남겨 놓 는 것이 친구를 위하는 길이 됩니다." "그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저는 세루비아나에 대해 잘 모르지만, 적어 도 그곳의 마법사인 악튤런 파노제보다는 못하리라는 데 의심을 품지 않습니다. 제가 이런 말을 드리는 이유....짐작하시겠지요?" "인정합니다, 아키토스 님. 하지만 지상의 마법사들 중 컬린의 세 제 자를 능가할 마법사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건 아킨토스 님도 잘 알지 않습니까?""하지만 저와 루첼 그란셔스는 컬린의 계보에 속 합니다. 그는 직계 제자이신 오거스트 롤레인 님의 제자이며, 비공 식적이었던 저와는 달리 베넬리아 마법사 길드가 열쇠로서 인정하고 맹세했던 롤레인 님의 진짜 제자입니다." 케올레스는 이제 날카로운 눈으로 아킨을 보고 있었다. 케올레스의 애정과는 별도로, 이것은 아주 중요하고 민감한 문제였다. 아킨은 드디어 본격적으로 설득할 때라고 생각해서 차분하게 말했다. "그가 젊고, 또 외국인이기 때문에 이런 일에 무턱대고 신뢰를 보낼 수 없다는 것은 분명히 인정합니다. 그러나 저는....'암롯사의 왕자' 로서 부탁드리는 것이 아니라, '오거스트 롤레인' 님의 같은 제자이자 , 컬린의 계보에 속하는 똑같은 마법사로서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케올레스의 눈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아킨은 마음이 약해지며 조 금 미안해지기도 했다. 거짓말 하는 것은 없었지만, 진심을 말하는 것도 아니었다. 속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알 아주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이래저래, '죄악'만을 슬슬 피해가는 약아빠진 처세였다. 잠시 생각해 보던 케올레스가 말했다. "제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대체 왜 세루비아나 경이 아닌 루첼 그란 셔스와 델 카타롯사로 가고 싶으신 겁니까? 설마하니, 같은 계보에 속하는 마법사가 있다는 이유로 그 악튤런 파노제가 조심스러워 질 거라는 보장도 없는데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그는 상식적인 인 물은 아닙니다." "압니다. 하지만 보장이 없기는 하지만, 조금은 가능성이 있는 일입니 다. 아예 하지 않는 것 보다야 나을 거라 생각합니다." 고집스런 케올레스의 얼굴은 그렇게 말해도 별로 변하지 않았다. 아 킨은 좀 더 목소리를 높였다. "아예 믿어버리자는 것은 아닙니다, 케올레스 님. 하지만 악튤런 파노 제가 제 스승님을 존중하지는 않아도 인정은 하고 있다는 것은 누 구나 알고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그가 안하무인에 방약무 도하다 할지라도, 델 카타롯사의 칼리토 대공왕이 바보가 아닌 이상 스승님을 의식하여 악튤런을 조심하게 할 것입니다. 스승님은 무 엇보다 베넬리아를 움직일 수 있고, 델 카타롯사로서는 그런 움직 임이 일어날 빌미 자체를 제공하지 말아야 하니까요." "일 리가 있군요." 케올레스의 눈이 조금이나마 부드러워져 있었다. 드디어 납득은 한 것이다. 아킨이 롤레인의 제자라는 것은 악튤런 파노제가 모를 가 능성이 높지만, 루첼은 아니다. 최근 소식에 귀 기울이고 있는 자라 면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휘안토스가 세루비아나 경을 지목한 이유를 케올레스가 모를 리가 없다. 아무리 휘안토스와 아킨의 관계를 '좋은 쪽'으로만 해석해 왔던 케올레스라도, 군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조심성에까지 그 믿음과 애정을 확대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암롯사에는 이미 '전례' 가 있는 상황이고, 아무리 아킨이라도 그 전례를 따르지 않을 거라 는 보장도 없다. 그 때문에 휘안토스는 그와 가까운 마법사인 세루 비아나를 지목했고, 그녀는 분명 아킨과 델 카타롯사의 접촉이 어 떻게 이루어지는 지 날카롭게 감시할 것이다. 아킨은 그 점을 분명 히 알고 있었고, 그 때문에 세루비아나를 아예 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아킨은 '같은 편'을 일행 안에 하나라도 넣어 놓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루첼 에게는 아킨으로서 내놓기 간편한 핑계를 하나 가지고 있었으며, 루첼 본인도 '괜찮다'라고 했으니 일단 시작해 보기로 했던 것이다. 마침내 케올레스가 말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어쨌건 아킨토스 님도 꽤나 불안하실 테고, 그런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안심시켜 드리는 것은 저의 의무. 폐하께 말씀 올리겠습니다." 아버지-가 나오자 아킨은 단번에 상황이 어둡게 느껴졌다. 아버지라면, 아킨이 내 놓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거절할 가능성이 높다. 오늘 만난 아버지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정도로 아킨을 미 워하고 있었고, 그 미움을 '공적인 상황'으로 표출하는 방법역시 잘 알고 있었다. "곧 출발해야 하실 테니, 오늘은 푹 쉬십시오. 부탁하신 것은 제가 최 선을 다해 노력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케올레스 님." 아킨은 그렇게 감사인사를 하며 웃어보였다. 그것은 가식이 아닌 진 심이었고, 사실 아킨은 휘안토스와는 달리 속내와는 전혀 다른 표 정을 가면 바꾸듯 연출하지는 못했다. 웃음과 분노만은 아킨이 진 심이었을 때만 나올 수 있는 것들이었다. 케올레스는 그 웃음을 애정 어린 눈으로 보며, 아킨의 손을 두 손으 로 잡았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제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아킨토스 님을 무사 히 암롯사에 돌아오시도록 하겠습니다." 아킨은 노인의 손이 따뜻하다고 느꼈다. 아버지의 가장 충직한 심복 이자 휘안토스의 믿음직한 보호자, 그리고 마르실리오의 조부인 그가 아킨에게마저도 부드러운 할아버지 같은 존재라는 건 모순이라 생각된다. 그들 모두가 케올레스를 믿듯, 아킨 역시 그를 믿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으니.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든......케올레스 님의 애정은 늘 기억하고 있겠 습니다." "아킨토스 님-" "안녕히 계십시오. 그리고......언제나 감사하고 있었고, 지금도 감사하 며, 앞으로도 감사할 것입니다." "저는 아무것도 해 드린 것이 없습니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주셨고, 저는 그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킨은 케올레스의 손을 꾹 움켜잡았다 놓고는 자리에서 일어 났다. 노인의 손이 남긴 온기가 아주 오랫동안 남아 있을 듯 했다. 그날 밤, 아킨은 잠이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정말 그렇게나 하 얗도록 잠이 오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말 그대로 한줌도 오지 않았고, 그래서 아킨은 하늘이 파르랗게 밝아오도록 숨을 내 쉬듯 물결치는 바다의 속삭임을 들어야 했다. 아킨은 침대에 한참을 누워 있다가 그냥 자는 것은 포기하고 일어났 다. 그렇다고 어디 나갈 생각도 들지 않아, 그냥 창턱에 앉아 바다와 성벽을 지키는 병사들, 그리고 하얗게 펄럭이는 암롯사의 깃발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암롯사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왔었고, 외국으로 유학을 떠나면 서도 언제나 이 속에 있었던 것 같다. 심지어 에크롯사의 탈로스와 함께 있으면서도 아킨은 '암롯사의 아킨'이었으며, 사이러스의 아 들이자 휘안토스의 동생이었다..... 돌아오는 곳이 아니라, 돌아오게 되어 버리는 곳. 어머니는 떠나지 못하고 죽음으로 끝냈고, 자켄 역시 엘프의 숲을 떠 나 암롯사로 와야 했고, 아킨 역시 눈을 떠 보면 언제나 이곳에 있다. 세르네긴도 비록 그가 원했던 바는 아닐 지라도 휘안토스와 칼 을 마주하고 눈을 마주하고 그의 감정을 건드리는 순간부터 이 암 롯사 왕가의 잔혹한 그림자에 얽매이게 된 것이다.... 차가운 밤바람이 목덜미를 스쳤고, 아킨은 그 무관심한 손길에 턱과 목덜미를 맡기며 눈을 감고 등을 기댔다. 어찌 될지 모르는 내일이 있었지만, 지금만큼은 평화롭고 고요한 순간이었다. 이런 기분을 느꼈던 적이 없지는 않았다. 베이나트와 만났을 때, 잠든 유제니아의 이마에 입 맞추어 주었을 때, 롤레인과 루첼을 다시 만났을 때....그리고 바로 지금- 불안한 내일과 고통스런 어제가 있었을 지라도, 지금만큼은 모든 것이 아 킨에게 무관심하고 아킨도 무관심했으며 그런 단절 속에서 아킨은 고독하고도 평화로웠다. 콰르르- 파도가 치솟아 오르며 정적이 부서지자 아킨은 눈을 떴다. 넓은 바다가 다시 쏟아지듯 보이고, 그 바다를 굽어보는 성벽위에 키 큰 남자가 서 있었다. 아킨은 기이한 전율을 느꼈다. 깊은 곳에 서부터 스며 나오는 실낱같은 떨림이 그를 고요히 흔들고는 지나간다. 아버지, 위대하며 잔인한 아버지가 망토도 호위도 없이 홀로 서 있 다. 긴 은빛 머리카락이 차가운 바람에 흩어졌다. 별빛은 그 머리카락 위 로 내려앉고, 멀찍이 타오르는 횃불의 밝은 빛은 등과 어깨를 비 춘다. 한없는 바다는 그를 맞이하며 펼쳐져 있으며, 그 바다를 마 주하는 아버지는 넓은 어깨로 아킨을 등지며 서 있는 것이다. 나셀의 광룡- 암롯사의 은빛 야수. 아킨은 어렸을 때부터 많이도 들 었던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어린 찬사를 하나하나 돌이켜 보았다. 그런 아버지가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곳에서 그를 보았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아킨이 그를 발견했을 때면 그는 언제나 아킨을 한 발 먼저 바라보고 있었고, 아킨은 자신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날카 로운 눈빛만을 기억하고 있을 뿐 그 등은 전혀 기억하고 있지 못했 다. 한번도 보지 못했으니, 기억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지켜 보니, 뒷모습이 어딘지 자켄과 닮아 있었다. 아니, 앞모 습도 닮았다. 가장 혐오하는 상대들 끼리, 어이없게도 가장 닮아 있는 것이다. 루실리아의 아들임을 부정하고 싶었던 아킨이 그녀와 너무도 닮았듯, 휘안토스의 동생이라는 것을 부정하고 싶었건만 쌍둥이라 그린 듯이 똑같았듯, 사이러스의 증오와 분노의 대상은 마치 그를 놀리듯이 그런 고약한 가면을 뒤집어쓰고 찾아오곤 했다. 가끔 생각했었다. 저 아버지라도, 그 어머니라도, 어쩌면 형 휘안토스도, 첫 번째 보름 의 모습 이전까지는 아킨을 사랑했을 것이라고. 그리고 모든 이가 아킨을 사랑하던 그 때에는 아버지는 강하고 다정했으며, 어머니는 아름답고 상냥했고, 휘안토스도 그저 평범한 아이였을 것이라고. 그것은 헛된 가정이 아닌, 어쩌면 진실이자 진심이었을 과거였고, 아 주 어렸을 때는 정말 바라 마지않던 꿈이었다. 그러나 그런 꿈도 달빛이 아킨의 껍질을 벗겨내어 숨겨진 야수를 불 러내면 산산조각 난다. 원래는 어떤 그림이었던 지 기억조차 나지 않게 갈기갈기 찢겨지고 조각난 그 그림은 피를 뿜어 올리듯 슬픔만 을 자아낼 뿐 아무 가치도 없다. 부서진 것은 부서진 것일 뿐이다. 그 때 아버지가 등을 돌려 아킨이 있는 방 쪽을 바라보았다. "....." 아주 잠깐이었지만 아킨은 처음으로 자신이 먼저 아버지를 바라보고 아버지가 그를 바라보는 순간을 경험했다. 준비되지 않은 것은 아버지였고, 아킨 역시 무방비 상태로 있었다. 너무나 짧은 순간. 구름조각 사이로 햇살이 확 쏟아졌다가 덮이는 듯한 그런 순간. 좀 더 오래 바라보았으면 아버지가 어떤 생각을 하고 그를 보는지 '알 수 있었을' 테지만 아킨은 눈길을 거두어 더 이상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다시 고요함이 어깨를 적셔 왔다. 두려움인지 설레임인지 모를 긴장감에 심장이 빠르게 뛰고 호흡도 잦아진다..... 그러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눈을 떴지만 사이러스는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원래 그곳을 지키던 위병들이 나타난 것을 보니, 왕은 아 마도 벌써 집무실이나 침실로 돌아갔을 것이다. 사이러스는 돌아갔지만 아킨은 그대로 있었다. 어느덧 별빛은 희미해 지고 하늘이 밝아왔다. 동쪽 하늘은 발그레하게 물들어 오고, 어둠에 젖어 거멓게 물결치는 바다 끄트머리가 하얗게 빛나기 시작한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준비를 시작하라고 달려온 성질 급한 시종인가 했는데, 문 밖에서 들린 목소리는 루첼의 것이었다. "아키, 자냐? 아키--" 아킨은 창턱에서 내려오며 말했다. "들어와라." 당장에 문이 벌컥 열리며 루첼이 들어왔다. 머리카락도 흐트러져 있 었고, 안경도 코에 엉거주춤 걸린 것을 보니 정말 급하게 뛰쳐나온 듯 했다. "무슨 일이지?" "너 혹시 나를 수행에 넣어 달라고 이야기 했었냐?" "그래. 싫다면 안 와도 된다." "미안하지만 그건 내 선택사항으로 남겨져 있어서 네가 그렇게 친절하 말 해줄 필요 없어." "나보고 말 얄밉게 한다고 투정 부리지 말고 네 말투도 성의껏 고쳐라. 어쨌든 어제 케올레스 님께 부탁드렸었다." "네 아버지가 허락했다고 하던데?" "......아버지가?" 루첼은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보통 아들이었다면 놀라거나 기뻐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킨은 아버 지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에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아주 조금 속이 시큰거리기는 했지만, 온 몸이 떨릴 정도도 아니었고 사실 착각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너무나 미미했다. 루첼이 물었다. "그런데 너, 대체 무슨 짓 저지르려는 거야?" "도망칠 생각이다." "......." 루첼이 할말을 잃고 멍청하게 바라보고만 있자, 아킨은 고개를 들었다. 눈가에 날카로운 아침 햇살이 비쳐 따가웠고 눈부시기도 했다. 목덜미 가 따스해져 오고, 열린 창문으로는 아직은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어온 다. 사방이 달아오르듯 발그레하게 장밋빛으로 물든다. 아킨은 멍하니 그를 보는 친구에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저주를 풀러 가야지." ***************************************************************** 작가잡설: 저는 어디까지나 '삽질'이 끝났다고 했지 '고생'이 끝났다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 .............. ......;;;;;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42장 ************************************************************** [겨울성의 열쇠] 제42장 차가운 신부 제190편 차가운 신부#1 *************************************************************** 누군가가 잔인하게 킬킬 웃으며 던지는 질 낮은 농담 같기만 했다. 끔찍하게 비현실적인데, 팔목을 아프게 꽉 조이는 힘은 이것이 현실 이라 잔인하게 속삭인다. 눈이 아프도록 밝은 불빛이 쏟아졌고, 그 녀를 짓누르고 있는 자는 그 역광에 덮여 악마처럼 컴컴하다. 놔 달라고, 제발 여기서 이 고약한 장난을 끝내고 가달라고 애걸하고 싶었다. 여기서 끝난다면, 누구라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감사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결국 블라우스의 단추가 툭툭 떨어졌다. 어떻게든 막아보기 위해 발버둥쳤지만 꿈쩍도 할 수 없었다. 얄팍한 장벽과 저항을 쉽게 망그러뜨린 약탈자는 너무도 쉽게 목적지 에 도착했다.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가장 잔인한 약탈의 직전, 그 공포의 극한에서 유제니아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눈 을 감는 것뿐이었다. 싫어.....이런 것 너무 싫어. 심장이 터질 듯 벌컹거렸고, 두려움과 치욕감에 온 몸이 뻣뻣하게 굳 었다. 눈물이 치솟고, 대체 그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제발 이 것만은 그만둬 달라고 외치고 싶었다. 무엇이든 할 테니, 이것만은 하지 말라고. 눈물범벅이 되어, 그저 제발--제발, 하고 애걸하고 만 있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얼마나 처량하고 비참한 꼴을 차정하는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왜 이런 꼴이 되어야 하는 지는 더더욱 모르겠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 그냥 언제나처럼 슈마허에게 웃고 세르네긴을 기다리고 가끔 아킨이 어디 있을 지만 생각하면 되는 나날이었는데, 대체 이 어둠은 뭐지- 지금 나를 덮치고는 먹어 치우려는 이 괴물 은 뭐지..... 그런데 갑자기 그가 멈추었다. 가슴 속에서는 어리석게도 아련한 희 망이 빛났고, 행여나 여기서 그가 그만두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에 눈을 떴다. 애걸하는 눈빛으로, 겁먹어 떨고 있는 눈빛으로, 그리 고 '약탈자'가 가장 원하는 눈빛으로. 차가운 보랏빛 눈동자가 그녀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아킨과 똑같은 얼굴, 너무나 똑같아 장난 같은 얼굴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눈빛으로 처절하게 애걸했다. 끝내줘, 제발-- 이제 충 분하잖아. 여기서 넘어간다면 정말 아무 것도 되돌릴 수 없다고, 제발.......무엇이든 할 테니, 그리고 당신을 불쾌하게 한 것이 있다면 무조건 잘못했다고 할 테니 제발......제발 그만둬 줘! 잠시 그렇게 내려다보던 그는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입술이 볼에 와 닿고, 귓불로 미끄러지며 목덜미에 멈춘다. 손이 허벅지 사이로 파 고들어 오자 유제니아는 눈을 감고 입술을 꾹 물었다. 눈물이 다시 샘솟아 볼을 타고 흐르고, 이미 땀과 눈물에 젖어 축축한 시트를 다시 적신다. 그리고 그대로 끝장나 버렸다. 머리가 하얗게 될 정도로 고통스러웠고, 몸이 찢어지고 쪼개지는 것 만 같았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몸뚱이는 감각만이 남아 있는 전혀 다른 사람의 몸같이 느껴질 뿐, 아무런 저항도 집착도 들지 않는다. 무거운 육식 괴물에 짓눌린 채 그저 덥석 덥석 먹혀 가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갈가리 찢겨서 어두운 계곡으로 던져지고, 그 깃털처럼 하 얗고 보드라운 것들이 어둠 속으로 흩어지다 스며들어 사라져 버 린다. 이제 내게 무엇이 남을지 모르겠다, 이렇게 산산이 부서지고 있는 데......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이렇게 하찮게 찢어져 나가고 짓밟 혀버리고 있는데. 그런 내게 대체 뭐가 의미가 있는 걸까. 밝고 행복 한 것이 이제 남아 있기는 할까? 그래, 나는 아무것도 아냐... 너무나 하찮고, 하찮아서.......그는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집어 삼켜 버려. 눈물이 흐른다. 배게는 이미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등도 허벅지도 땀에 젖어 있었다. 다시 그 체액냄새와 피 냄새가 풍겨 오는 것만 같았다. 그 장미향 섞인 체취가 몸을 짓누르는 것 같고, 거친 호흡 과 단단한 손길이 옷을 갈가리 찢어버리고 속살을 탐하고 집어삼킬 것 같았다. 끝난 일인데,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일어나게 하 지도 않을 텐데. 그저 하찮고 하찮은 나 같은 아이, 그는 벌써.... 아니, 그 다음 날로 잊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 눈물이 나왔다. 억울해서가 아니라, 이런 고통 이 정작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차라리 처참하다. 언제 라도 그가 어둠 속에서 다시 튀어나와 그녀를 낚아채 짓눌러버릴 것 같았고, 다시 그 끔찍한 나락에 빠져 헐떡일 것만 같았다. 그렇게 강한 척 하고 잊은 척 했지만, 이렇게 밤이 되면 결국에는 그 때의 힘없고 하찮고 비참한 자신으로 돌아가 버린다. 이렇게 떨고만 있다. 울고 있는 유제니아의 어깨위로 부드러운 손이 얹혔다. 그 단단하고 큰 손이 그녀의 떨리는 작은 어깨를 감싸주자, 유제니아는 몸을 웅크 렸다. "미안하다." 작은 속삭임이 들려온다. "미안해...." 지금 세르네긴 포틀러스의 속이 얼마나 갈가리 찢어지고 있을지 유제 니아는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아니, 짐작이 아니라 그의 심장과 닿아 있는 듯 분명히 알고 있다. 괜찮을 거라 생각하며 잠든 첫날에 유제니아가 깨달은 것은 다시는 혼자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니, 언젠가는 그리 될 지도 모르 겠지만 당장에는 결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 옆에 있는 모든 그림 자 속에 '그'가 있었고, 그녀가 등진 모든 것에 '그'가 숨어 있었다. 당장에 그가 나와 짓누르고 덮쳐버릴 것만 같았고, 그렇다고 눈을 감아도 그 속에도 역시 그가 있었다. 잠이 들었다 싶으면 그는 악몽 속에서 수십 번도 더 그녀를 범했고, 눈을 뜨면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며 언제나 그녀를 집어 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눈을 뜨면 기다리고 눈을 감으면 덮쳐온다. 그리고 그렇게 그 날의 공포는 작은 영혼에 너무나 깊은 각인을 새겨 넣었다. 너무나 처참 하게 갈기갈기 찢겨져, 아무리 아물어도 그 흉터는 너무도 뚜렷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세냐........" 유제니아는 결국 울음을 삼키며 세르네긴의 옷자락을 움켜잡았다. 한 숨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온 첫날 밤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그의 품안으로 파고들었을 때 부터 그는 그녀 옆에 있었다. 지저분한 소문까지 돌았지만, 그래도 그는 언제나 유제니아의 침실에 머물면서 두려워 떠는 그녀의 어깨 를 안아주었다. 그에게 유제니아는 어린 동생이자 소중한 신부였으 니, 그녀를 위해 그녀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에 안도하면서도 유제니아는 더 비참하기만 했다. 대체 몇 사람을 힘들게 하고 있는 거야. 어서 나아야지, 어서 강해져야지, 그래야 하는데..... 내가 자꾸 이러면 모두가 힘들어질 거야. 세냐도, 아키도- 그렇게 몇 번이나 다짐해도 밤이 오면 결국 무너져 버린 다. 매달리는 것 밖에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옆에서 작은 속삭임이 들려온다. "잠들려무나." 여자 목소리였다. 부드럽지만 날카롭고, 따뜻하지만 차가운 목소리. 세르네긴이 약간 놀라는 것이 느껴진다. 그러나 유제니아는 편안하고 따사로운 느낌이 어깨를 덮어주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너무도 부드러웠고, 어미의 날개처럼 평화로운 안식으로 인도했다. 이것이 근본적인 치유가 아닌 그저 마약 같은 것이라도......그것은 잠시나마 유제니아를 편 안하게 해 주었다. 유제니아는 겨우 눈을 감고 잠 속으로 빠져들 수 있었다. "오늘은 푹 잘 수 있을 거다." 유제니아가 잠들자 그녀가 꺼낸 말에 세르네긴은 진심으로 답했다. "감사합니다." 휠테스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물었다. "....조용히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나중에요....죄송합니다." 그리고 세르네긴의 눈길이 유제니아를 향했다. 휠테스가 유제니아의 이마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검은 머리카락을 가만히 걷어 내고는, 사랑스러운 작은 동물을 매만지듯 조심스레 쓸어주었다. 유제니아는 꿈쩍도 하지 않은 채 그날 이후로 처음 보 는 평화로운 얼굴로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휠테스가 침대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걱정 마라. 네 소중한 꼬마 아가씨는 내 모든 일족이 한꺼번에 날아 올라도 모를 정도로 푹 잠들었으니까." 세르네긴은 침대에서 일어나 유제니아를 바로 눕혔다. 그리고 시트를 올려 덮어주고는, 그 이마에 키스한 다음 잘 자라는 말을 다정하게 속삭여 주고 고개를 들었다. 휠테스역시 일어나 창문의 커튼을 닫았다. 그녀가 움직이자 차르르- 그녀가 입은 갑주의 가벼운 금속 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음악소리처럼 들려왔다. 찬란하다, 라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는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은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을 발했으며, 도도하고 차가운 초록색 눈동자는 그녀다운 빛으로 세르네긴을 향했다. 세르네긴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의 미소 띤 다정한 눈길 이 그런 세르네긴을 보다가, 그가 가까이 오자 그 어깨에 손을 얹 었다. 세르네긴은 거부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녀에게 더 가까 이 다가가지도 않았다. 한 걸음- 그 밖에 서서 세르네긴은 그 다운 자세로 그답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고, 그 이상은 원하지도 허락하지도 않았다. "많이 지쳐있구나, 나의 기사." "누구를 미워해야 옳은 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해야 할 지도.....그리 고 얼마나 참아야 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휠테스." "그리고 나 역시 너에게 어찌하라 충고할 수도 없군." 세르네긴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가 그런 존재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세르네긴이 그녀를 보는 눈길은 언제나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무생물'을 보는 듯한 것이었고, 그 숭배와 거리감이 휠테스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휠테스가 말했다. "나는 인간을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할 생각도 없지만.....너의 감정에 만은 민감할 수밖에 없어. 네가 기쁘면 나 역시 기쁘고, 네가 이리도 비통해하면 나 역시 그러하다." "죄송합니다. 당신까지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해서." "....." 휠테스의 눈길이 잠시 잠든 유제니아를 향했다. 그리고 그 때 세르네 긴이 말했다. "죽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휠테스는 침묵했고, 세르네긴은 다시 차분하게 말했다. "어떤 방법이든 상관없습니다. 죽여주실 수 있습니까?" 그러나 휠테스는 고개를 저었다. "없다." "어째서......입니까." "우선은 그는 한 나라의 왕자, 내가 인간의 권력에 연연하는 것은 아 니나 나로 인에 그가 죽는 다면 너는 인간세상에서 추방당할 것 이다." "아무도 모르는 방법으로는 괜찮지 않을까요." "........." "진심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휠테스. 그리고 이것이 진심이란 것은, 그 누구보다 당신이 잘 알지 않습니까." "내가 한 일이라는 것을 영원히 감출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대체 무엇을 위해 그리 하겠다는 거냐. 네 가엾은 신부를 위해? 아 니면 분노하는 너 자신을 위해?" "모르겠습니다. 하지만......누군가의 죽음을 이토록 간절히 원하는 것 도 처음입니다. 갈수록 갈망하고, 갈망하다.....목이 타 죽어 버릴 것만 같습니다." 휠테스가 웃었다. "하지만 해 줄 수 없구나, 세르네긴. 인간들끼리의 일은, 아무리 용기 사의 일이라 할지라도 인간들끼리의 일. 나는 관여할 수 없다..." 세르네긴은 절망했다. 마지막 기대가 무너지자 남는 것은 참담한 마 음뿐이다. 그런데 휠테스가 말했다. "차라리 다른 방법을 택해 보려무나. 그래, 기억을 지운다거나 하는 것 말이다" "그것이야 말로 가장 쉽지만 무책임한 짓입니다." "너라면 모르겠지만, 너의 꼬마 아가씨는 아직 어리고 약해. 그런 아 이가 고통의 무게를 얼마나 버티어 낼 수 있을까?" 그 말에 세르네긴은 흔들렸고, 그 흔들림은 분명 휠테스에게도 전해 졌다. 드래곤과 그 용기사는 영혼과 영혼으로 얽매인 존재였고, 그 때문에 드래곤들의 영향을 받아 용기사들의 평정심은 인간의 것을 당연히 초월한다. 그런데 그의 깊은 동굴 안처럼 고요하기만 했던 영혼은 지난번의 폭풍으로 들끓어 올랐고, 지금 역시 거센 바람에 크게 흔들 리고 있다. 이렇게 그가 터질 듯 불안한 것은 휠테스로서도 처음이었다. "휠테스 님, 제게.......유즈는 너무나 소중합니다.....연인보다 더, 아내보다 더, 저 자신보다 더......" "알고 있다." "그래서 용서할 수도, 이 들끓는 분노와 증오를 어디에도 던져 버릴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가 죽는 다 해도, 유즈가 그 모든 것을 남김 없이 잊는 다 해도......." "적어도 저 아이가 고통 받을 일은 더 이상 없겠지 않니." 그리고 휠테스는 그의 볼에 손을 얹었다. 그녀가 본 인간의 눈동자 중 가장 아름다운 두 눈이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가장 원하는 입술은 굳게 닫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휠테스는 웃었다. 영혼은 지금 상처받아 복수심에 들끓고 있었지만, 그는 그녀가 아는 기사 중-아니, 모든 남자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결한 자였다. 그녀는 세르네긴의 볼에 입을 맞추고는 그 목을 두 팔로 감았다. 아 름답고 매혹적인 여자의 몸짓이었으나, 세르네긴의 눈에는 늘 그렇듯 경배와 조심스러움만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 고대 유적의 여신상이 되어 버린 것 같군, 그렇게 생각하자 휠테스는 다시 쓴 웃음이 치밀어 올랐다. "내일 내가 그 아이에게 말 해 보겠다. 네가 말하는 것 보다는 그 편 이 나을 거다." "감사합니다." 인간의 일은 기묘하다.......단 혼자만의 삶을 살아왔던 휠테스는 그 렇게 생각했다. 얽히고 얽혀서, 서로를 끌어들이고 밀어버리고 다시 끌어들이고. 그래 서 인간의 선택은 언제나 어느 정도는 누군가에 의해, 누군가를 위해 이루어지게 된다. 그리고 서로에 대한 무지와 오해 속에서, 믿음과 배신 속에서, 때로는 조금씩 때로는 어마어마하게 어그러지는 것만 같다. ****************************************************************** 작가잡설: 휠테스의 취미는 미소년 미청년 수집. -_- (미소녀 따위는 관심 밖) 늙다리 슈마허는 당연히 작업대상에서 제외. -_- (경쟁대상일 지도 모름.) 토요일날 자룡이 여동생인 오드리랑 누나 초선이가 놀러 왔답니다. 그 리고 그 고양이 두마리가 이동장에서 튀어나오는 순간 떠헉! 했습니다. 분명 같은 날 태어난 형제건만....자룡이가 두배로 크더군요;; ....네, 3개월 반 된 아깽이가 2.4 kg이라면...(여동생과 누나는 모두 1.7-8, 쎄니도 1.8키로....) 뭔가 문제가 있는 걸지도....... p.s 형제들이었다는 건 까맣게 잊은 듯, 오드리랑 초선이는 자룡이 보고 마구 하악- 하악 해 대고, 자룡이는 마냥 므흣한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는 군요;; 저 녀석은 지금도 저리 느끼한데 나중에 커서는 얼마 나 더 느끼하고 음흉해 질지 걱정입니다, 걱정~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42장 *************************************************************** [겨울성의 열쇠] 제191편 차가운 신부#2 **************************************************************** 델 카타롯사와 암롯사의 대립의 역사는 유구하다. 쿼크 대제시절부터 각 대공국의 시조가 된 델리언과 테루비셔스의 대 립은 온갖 시와 이야기에서 거듭 거듭 읊어질 정도로 유명하다. 그 것은 그 둘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비슷비슷하면서도 그런 종류의 것을 제한 모든 것이 서로가 가장 싫어하는 것들뿐이었기 때문이었 고, 이런 경우 원수라면 마음 편할 일이지만 같은 편이라면 주변 사람 피곤할 정도로 사사건건 부딪히게 된다. 쿼크 대제는 이 둘의 경쟁심을 적절히 이용해 각자가 가진 것을 최대 한 잡아끌어 활용하도록 했지만, 그의 사후에는 그것이 오히려 그 들의 미움을 부채질 하는 결과가 되어 버렸다. 그런 둘이 끝까지 남 아 영토를 챙길 수 있었던 것은, 그 둘 자체가 워낙에 뛰어나기도 했지만 그 각각의 아들들이 아버지들 보다는 덜 호전적이어서 그 들의 아들 딸들을 시집장가 보내 오랜 휴전을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 델리언과 테루비셔스는 그 혼인에 극구 반대하여 결혼식장에 나 오지도 않았고 평생 그 아들과 며느리, 또는 딸과 사위를 보지 않았 다. 뿐만 아니라 손자손녀들이 태어나도 성찬식은커녕 생일날에도 오지 않았다. 그래도 그 덕에 암롯사와 델 카타 사이에서 마지막까지 지속되던 영 토분쟁은 드디어 막을 내렸고, 다른 세 기사들과 함께 그 둘도 새 로운 황제를 찾아 제위에 올려놓는 데 동의하고 그리 했다. 그러나 허무하게도 그 당사자들이 사망하자 십 몇 년 만에 그 휴전은 끝나 버렸고, 대립은 주기적으로 반복되었다. 그 후로 결혼까지 생 각할 할 정도로 휴전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단 한번도 없었으며, 사 이러스의 경우에는 델 카타롯사에 동조해 반란을 일으켰던 동생을 직접 죽임으로써(아주 과격한 방식으로) 더 이상 어떤 휴전도 타협도 없을 거라 '몸소'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렇게 델 카타롯사에 적대적인 입장을 보여 왔던 그가 '결 혼'을 먼저 제의했다는 것에, 그것도 다른 공주도 아닌 칼라하스 공주와 그의 단 둘 뿐인 아들인 아킨토스의 결혼을 제의했다는 것에 , 긴장한 연합국은 그에 관련된 모든 정보를 끌어 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렇게 전 대륙이 지켜보는 덕에, 아킨은 '목숨이 위험한' 대 면을 위해 떠나면서도 아주 편안하게 카티온까지 갈 수 있었다. 그 런데 여행길에 가장 번거로운 일은 다름 아닌 그의 친구 덕에 일 어났다. 암롯사에서 마련된 배 위, 암롯사 인들만의 호위 속, 그리고 이중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것은 날카롭게 눈 번득이는 세루비아나 와 그 매서운 눈빛에 태평하고 뻔뻔하게 방어책을 구사하는 루첼이 었다. 별로 넓다고 할 수도 없는 배 위에서, 그 둘의 보이지 않는 대립은 눈치 빠른 사람을 한없이 피곤하게 했으며 눈치 없는 사람 은 더없이 어리둥절하게 했다. 결국에는 세루비아나의 신경질과 그 신경질이 하늘로 치솟든 바다를 휩쓸든 말든 무관심하게 반응하여 사태를 악화시키는 루첼을 참다 못한 대장이 달려와 그 둘을 말려달라고 부탁했지만 아킨은 담담하 게 답했다. "......알아서들 하게 하십시오. 그 둘은 성인이니, 그 두 사람이 어찌 행동하든 제가 상관할 바는 아닙니다." 당연하지만 열 받는 말에 대장은 별 수 없이 돌아가야 했다. 물론 처음부터 세루비아나가 그렇게 으르렁 컹컹댄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젊은 나이에 왕자의 호위에 포함될 정도의 위치를 얻는 것은, 아무리 명문 가신가문에서 태어났다 할지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분명 어느 정도 분별력이 있고 능력 있는 마법사였으며 '평범한 상황'이었다면 그 능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결국 문제는 루첼이었는데, 그는 세루비아나가 휘안토스의 명으로 자신을 감시할 거라는 것을 미리 미리 알고 있었고, 그 감시를 피할 수는 없으 니 세루비아나의 감정을 건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어차피 사람의 감정이란 객관적인 사실을 흐리게 만들고 곡해하게 한다. 루첼이 바 라는 것은 그것이었고, 그런 방면에서는 별로 재능 없다 할 수 없 는 루첼이었으니 카티온의 입구인 카타로스 항에 들어올 무렵에는 냉정한 세루비아나는 히스테릭 세루비아나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덕에 루첼은 그녀가 그에 대한 험악한 악평을 휘안토스에 쏟아 붇듯 보고하는 동안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휘안토스는 루첼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그 험악한 평들을 보고문을 통해 보면서 '루첼을 제대로 감시할 수 없게 되었다.' 라고 판단했을 것이 다. 그리고 나중에 어떤 일이 벌어지든 간에, 세루비아나가 그렇 게나 끈덕지게 평가절하 해 왔으니 그녀가 무슨 말을 하던 (그것이 진실이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 이성 있는 사람이라면 '설마 그러지는 않았겠지.'하고 생각해 줄 것이다. "피곤하지도 않나." 도착 전날 아킨이 그렇게 말을 꺼냈지만 루첼은 히죽 웃는 것으로 답 했다. 솔직히, 세루비아나에게 무슨 죄가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좀 난감한 상대에 걸린 것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모두 델 카타롯사 의 카타로스 항에 도착하게 되었다. 선착장에는 암롯사에서는 절대 쓰지 않는 색인 검푸른 망토를 두른 기사들이 일행을 마중 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랑기온 선 왕의 여동생이자 현 왕실에서 가장 나이 많은 왕족에 속하는 랑그레 아 공주가 있었다. 게다가 그녀 바로 뒤에 있는 기사 들 중 서너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의 망토에는 그리폰이 그려져 있었다. 왕실 호 위대인 것이다. "어서 오세요, 왕자." 델 카타롯사 왕족들에게 자주 보이는 검푸른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틀 어 올리고 나타난 랑그레아 공주는 암롯사의 숨겨졌던 왕자를 웃는 얼굴로 맞이했다. "만나 뵙게 되어 기쁩니다." 아킨은 그녀의 손등에 입 맞추고, 그녀가 정말 그의 아내가 될 여자 의 고모라도 되는 듯 그 볼에도 키스했다. 휘안토스와 똑같은 얼굴 이었지만 전혀 다른 머리카락과 눈 색을 가진 왕자를, 랑그레아 공주 는 아주 신기한 듯이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 어깨너머에서 눈길 을 보내는 다른 델 카타롯사의 기사들은 아킨의 예상대로 공주의 신랑이 아니라 공주를 훔치러 온 도둑놈이라도 보는 듯 싸늘한 눈 초리들이었다. 마주보는 암롯사 기사들의 눈빛도 별로 만만하지 않았 으며, 오로지 전혀 상관없는 나라에서 온 루첼만이 태평하게 주변 경관 감상이나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루첼이 갑자기 귀신이라도 본 듯 눈을 크게 뜨더니 선착 장 쪽으로 달려오는 말과 그 말의 기수를 바라보았다. 아킨도 뭔가 해서 그 쪽을 보았는데, 달려오는 것은 흰 백마와 청회색 로브를 걸친 마법사였다. 델 카타롯사의 기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고, 랑그레아 공주는 살며시 아킨의 손을 잡아 당겨 그를 보게 하며 그 사람을 맞이했다. 지금 오는 상대에게 '앞으로 우리의 가족이 될 사람'을 맞이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었다. 대체 누구이기래 그러는 것인가, 해서 아킨은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열 아홉이나 스무살 정도 되 보이는 남자였다. 은청색 머리카락에 나 프 섬사람 같은 거무스레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으며, 사나워 보일 정도로 날카로운 눈초리에는 오만해 보였다. 루첼이 옆에서 자그마하게 속삭였다. "악튤런 파노제다." 그러나 그리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아킨은 그의 얼굴을 분명 알고 있었 다. 그 당시에는 아킨만이 그를 볼 수 있었기에 악튤런은 그가 자 신을 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을 테지만. 아킨은 왜 베이나트가 롤레인과 탈로스에 대한 이야기는 자주 했어 도, 이 악튤런 파노제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지 궁금해졌다.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아서 그랬던 걸까? 아니면 그 저 그 두 사람에 비해서는 너무도 짧은 시간을 가르쳤기 때문일까? 아킨은 악튤런이 처음으로 은둔자의 탑 근처에 나타났을 때 그를 보 던 베이나트의 표정을 기억해 보려고 했지만 워낙에 모르던 때에 일어난 일이라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어렴풋하고 애매하게 남 아 있어, 이리 생각하면 이리 생각되고, 저리 생각하면 또 저렇게 도 생각된다. 악튤런이 말에서 내려와 인사를 했다. "악튤런 파노제, 델 카타롯사의 마스터 중 하나입니다." "아킨토스 프리엔, 암롯사의 둘째 왕자입니다. 제 사부의 사제 되는 분과 만나 뵙게 되어 기쁩니다." 거의 대부분이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사실 루첼과 아킨, 그리고 롤 레인 본인을 제하고는 아무도 모르는 사실을 아킨 스스로 밝히자 가장 큰 놀라움을 표한 것은 랑그레아 공주였다. 악튤런의 눈이 날카롭게 번득였고, 그 눈에 담긴 이상한 분노의 이유 를 아킨은 꿰뚫어 보기 어려웠다. '롤레인의 제자'이기 때문은 아닌 듯 했다. 그런 이유라면 루첼에게는 '단순하게 화가 나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 면서, 아킨에게는 말 그대로 잡아 족쳐 버리고 싶 다는 듯한 매서운 눈길을 보내지는 않을 테니까. 그 살벌한 분위기를 눈치 챈 랑그레아 공주는 나이 많은 사람다운 노 회함을 발휘하여 오랜 만에 만난 벗을 맞이하듯 아킨의 팔에 손을 얹고는 부드럽게 말했다. "이만 궁으로 출발하도록 하지요. 저희 폐하와 제 사랑스러운 조카인 칼라하스 공주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기다림이 길지 않 도록 해 주세요.....왕자." 순간에 아킨은 악튤런의 눈에 떠 오른 날카로운 분노의 빛을 놓치지 않았다. 그 살벌하게 치솟아 오르는 살의에 가까운 증오에, 아킨은 겨우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일이 꼬여 있었군, 그렇게 생각하며 아킨은 공주가 이끄는 대로 그녀가 가지고 온 마차에 탔다. 여섯 마리 말이 끄는 호화로운 마차 안은 아주 편안했지만, 암롯사의 호위대 대신 델 카타롯사의 기사들이 호위했다. 노골 적이다.....아킨은 그렇게 생각하며 마차의자에 등을 기댔다. 상 식적으로라면 반은 암롯사의 기사들이, 나머지 반은 델 카타롯사의 기사들이 마차를 호위해야 한다. 그런데 그들은 아킨을 마치 포 로라도 되는 듯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기사들이 이 정도라면 델 카타롯사의 왕인 칼리토가 어떻게 나올 지는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그 동안 요양을 하셨다고 들었는데요, 이제 몸은 괜찮으신가요?" "완치된 것은 아닙니다만 보시다시피 일상생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 습니다." 아킨은 그렇게 답하며 공주의 안색을 살폈다. 역시나 공주는 약간은 실망한 듯한 눈초리였고, 그 실망의 초점이 어디에 맞춰져 있을지 짐작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제 조카아이인 칼라하스를 보신 적이 있나요?" "한번 뵈었습니다." 물론 그 때는 정신없는 상황이었고, 칼라하스 본인은 아마도 그녀가 만난 것이 아킨인 줄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킨이 칼라하스 공주와 '아주 드문' 인연을 가졌다는 건 분명하다. (왕족들 끼리 털 고 털린 사이가 되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 "보시기에 저희 공주님은 어떠했나요, 왕자." "........" 아킨으로서는 잠시 고민해야 했다. 유제니아를 괴롭혔다? 그러나 그것가지고 뭐라 하기에는 휘안토스가 저질러 놓은 일이 너무 크다 보니 할 말이 없다. 모르는 여자에 대해 말할 때 가장 간편한 방법인 '아름다운 분이더군요.' 하고 말하자니 , 이건 너무 성의 없다. 아킨은 아주 솔직하게 답했다. ".......모르겠습니다." "네?" "죄송합니다만, 그 때 아주 정신이 없어서 기억도 잘 나지 않습니다. 그저 얼굴만 마주한 정도니까요. 다시 한번 제대로 뵌다면 오늘 밤 에라도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게다가 칼라하스 공주의 몸이 어떠한 지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그 런 그녀의 외모에 찬사를 보내는 것은 별로 현명하지 못하기도 했다. 나이 많은 왕족 여인이자, 델 카타 왕실의 어른으로는 유일하다 할 수 있는 랑그레아는 그런 아킨의 태도에서 씁쓰레한 기분을 느 끼며 더 이상 조카에 대해 묻지 않았다. 마차 안이 조용해지자 아 킨은 이제는 마음 편하게 창밖으로 시선을 던질 수 있었다. 무엇을 물어볼까 하며 긴장하는 것 보다는 그냥 어색하게나마 침묵하는 편 이 훨씬 낫다. 창밖으로 너른 초원과 덩어리져 우거져 있는 나무들이 보이고, 저 멀 리 숲과 초원 너머로는 넓고 푸른 바다가 넘실대고 있었다. 찬란한 햇빛이 그들 위로 쏟아져 황금빛 가을은 더욱 진하게 빛난다. 차가 운 가을바람이 불어오자 진하게 물든 너른 풀밭이 넘실대고, 숲도 그 바람에 잠을 깬 듯 쏴르르 소란을 터뜨렸다. 어느덧 마차가 카티온으로 접어들었다. 해자를 건너고 두터운 성벽을 통과하자, 마차는 곧 델 카타롯사의 카티온의 품안으로 안겨들게 되었다. 아킨의 예상대로 공주의 진짜 신랑이 아닌'신랑후보'가 공 주와의 대면을 위해 온 것뿐이라 카티온은 조용했다. 귀빈을 맞이한 다는 것을 표시하는 듯 왕실의 깃발이 길목마다 걸려 있기는 했지만 , 그 뿐이었다. 아킨은 정말 이 나라의 공주와 결혼한다면 어떻게 될까, 하고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금방 그만 두었다. 아버지 사이러스는 아킨을 델 카 타롯사로 보내기 보다는, 칼라하스 공주를 이보다 더 냉혹한 대접을 하며 암롯사로 불러 들여와 결혼시킬 위인이다. 아무리 아들을 미워해도, 자신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에는 고약한 고리대금업 자처럼 몇 배로 이자 쳐서 확실하다 못해 질릴 정도로 복수하는 사이 러스다. "다 왔습니다." 랑그레아 공주가 준비 해두라는 듯 그렇게 말했다. 아킨은 잠시 눈을 감았다. 햇살이 잠시 휙 꺼지는 것을 보니 왕궁의 성문을 통과한 듯 했다. 달박 달박-- 매끈하게 다듬어진 길을 마 차가 달려가는 소리가 들린다. 향긋한 꽃 냄새가 풍겨오고, 분수대에서 물이 솟구치는 소리와 대리석 으로 만들어 놓은 작은 운하를 따라 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도 들려온다. 그 속삭임처럼 옅은 물비린내를 맡으며 아킨은 눈을 떴고, 잠시 동안 이나마 경이감을 감추지 못했다. 암롯사의 궁이 웅대하고 아름답다면, 델 카타롯사의 궁은 화사하고 아름다웠다. 암롯사의 궁이 귀부인이라면, 이곳은 화사한 아가씨였다. 고른 높이에서 선명한 빛을 발하는 푸르고 노란 꽃들과, 그 꽃들 사이 로 흐르는 은빛 시냇물에, 곳곳에 아름답고 풍만한 몸의 석조상들이 그 정원을 보살피듯 허리를 살짝 숙이고 서있고 그들이 쥔 항아리와 병에 서 물이 쏟아지며 햇살에 눈부시게 반짝였다. 촤아아아아-- 그 소리는 작은 탄성, 소리죽인 경배, 또한 적국에서 유일하게 아킨의 기분을 부 드럽게 해 주는 상냥한 소리였다. 그리고 마침내 마차가 멈추었다. 랑그레아 공주는 몸을 추슬렀고, 아킨 도 허리를 떼고 마차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마차 문이 열리자 아킨은 먼저 내려 랑그레아 공주의 손을 잡 고 그녀가 내리는 것을 도와주었다. 마차의 문에서 궁의 현관까지 기사들이 사열하고 있었다. 그리핀의 망토는 차분하게 아래로 늘어져 있고, 그들이 뽑아 위로 세우고 있는 검이 날카롭고 차갑게 번득였다. 그러나 이건 사열이 아니라, 지나갈 때마다 한번씩 찔러주겠다는 분위기라 전혀 감동적이지 못했다. 문의 양 옆에 세워진 그리핀의 상들은 두 발로 서 날개를 펼치고 발톱을 세우고 있었고, 마치 그들의 호위라도 받듯 그 사이에 델 카타롯사의 젊은 왕 칼리토가 서 있었다. 아킨은 허리를 숙였다. 랑그레아 공주 역시 치맛자락을 당겨 그에게 인사를 올리고는 아킨을 소개했다. "암롯사의 아킨토스 프리엔 왕자입니다, 폐하." ***************************************************************** 작가잡설: 정말 어제는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더니, 오늘은 또 쨍쨍~ 이군요. -_- 그런데............휴일날 비가 오다니. (중얼중얼...)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42장 *************************************************************** [겨울성의 열쇠] 제192편 차가운 신부#3 *************************************************************** 랑그레아 공주의 소개말이 끝나자 아킨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칼 리토 대공왕과 마주하게 되자 그의 모습에 약간은 실망했다. 검푸른 머리카락에 큰 키를 가진 남자였고, 칼라하스 공주와 약간 닮 은 얼굴이기는 했지만 그 눈은 칼라하스만큼 예리하지는 않았다. 얼굴선이 좀 더 부드럽기는 했지만, 그만큼 어딘지 유약해 보이는 느낌도 든다. 그리고 검푸른 고수머리 사이의 청회색 눈동자가 보내 는 적대감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더욱 노골적으로 보였다. "오느라 수고가 많았소, 아킨토스 프리엔 왕자." 아킨은 그 말에 숨어 있는 냉랭한 반감을 어렵잖게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오랜 적국인들 사이에 당연히 도는 긴장감에다가 설익은 듯한 풋내까지 덧붙여진 것이었다. 어쩌면 그는 아버지 사이러스와 불행과 행복을 공유했을 지도 모른다 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분노했을 때 그도 분노해야 했고, 아 버지가 증오하고 있을 때 그 역시 증오했으며, 아버지가 행복했을 때 그도 행복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아내를 잃었을 때, 그 역시 그 의 어머니를 잃었다. 아버지가 적과 싸울 때, 그 적인 칼리토 대공 왕도 적인 사이러스와 싸워야 했다. 생각했던 것 보다 일이 쉬울 지도 모르겠다고 아킨은 생각했다. 이런 일에는 누구든 감정을 '솔직하게' 내 보이면 내 보일수록 불리하고, 아는 것이 많아지는 쪽이 유리해진다. 어린 아킨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 했고,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만큼 노골 적이었다. "자, 리스-" 리스- 라, 애칭인 듯 하다. 그리고 그렇게 조용히 여동생을 부른 칼 리토 대공왕이 조금 뒤에 앉아 있던 칼라하스를 아킨과 대면하게 했다. 아킨은 진즉에 그녀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칼리토 대 공왕이 그녀를 소개할 때까지 그 쪽으로 시선조차 돌리지 않고 있 었다. 칼리토 대공왕은 여동생에 대한 애정을 과시라도 하듯, 또 그녀의 몸 상태에 대해 아킨이 어떤 노골적인 실망과 반감을 표하는 것도 허 락하지 않겠다는 듯 칼라하스 공주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내 누이인 칼라하스 요." 아킨은 드디어 그녀와 제대로 마주하게 되었다. 얼음의 공주와 겨울의 왕자, 차가운 신부와 고독한 신랑의 만남이었 다. 그리고 명목상의 신랑이자 신부였으며, 어쩌면 절대 결혼하지 않을 상대와의 만남이기도 했다. 헤어짐과 깨어짐과 반목을 전제하 는 기만적인 결합의 약속이 지금 모두를 노골적으로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아킨은 쓴웃음이 치밀었다. 기가 막힌 희극이다, 이것은. "아킨토스 입니다......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리고 아킨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칼라하스 공주는 그가 다 가오자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아킨은 그녀를 보는 순간 같이 몸이 차가워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 불타는 성에서 겁에 질리고 흐트러진 그녀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검푸른 머리카락이 물결치며 의자의 발치까지 늘어져 있었고, 눈 위 에 놓인 대리석인 듯 하얗고 창백한 피부는 동굴 속에 사는 물고기의 비늘보다 투명해 보일 지경이었다. 흐트러짐 없는 몸가짐으로 앉아 , 은청색 눈을 차갑게 반짝이며 아킨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는 어 딘지 휘안토스를 생각나게 했다. 칼라하스 공주는 눈가에 미소를 띠우더니, 완벽하게 정돈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역시 만나 뵙게 되어 기쁩니다." 아킨은 말없이 그녀의 손등에 키스하고 그 볼에 키스했다. 살 끝만은 모든 인간이 가진 체온만큼 따뜻했다. 그런데 아주 잠깐 그녀가 몸을 떨었다. 무엇에 놀란 듯 했다. "좋은 시작이 되기를 원합니다, 칼라하스 공주." 맞선 볼 때 신랑이 늘 하는 인사말이다. 그러자 칼라하스 공주가 역 시나 수줍은 신부처럼 응답했다. "또한 행복한 결합과 둘이자 하나로 이루어지기를, 아킨토스 왕자." 과연 그렇게 될까? 웃으며 말하고는 있지만, 아마도 이 당사자들만큼이나 그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아킨은 그녀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는 쥐고 있던 모자를 썼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들며 발견한 것은 멀리 떨어진 기둥 옆에서 그를 바라 보는 우람한 몸집의 여기사였다. 아킨은 그녀의 얼굴을 잘 안다. 마하였다. 그 사려 깊은 눈에 담긴 것은 약간의 경계와 대부분의 동정이었다. 그러나 그 부드러운 감정이 그녀의 행동이나 판단에 영향을 줄 리 없다는 것을 아는 아킨은 그녀에게 투명한 웃음으로 보답했을 뿐이다. "첫날밤에 신랑을 잡아먹을 듯한 분위기군." 그리고 멀리서 루첼이 중얼거리는 말이 들려와 아킨은 동의를 하면서 피식 웃었다. 그 때 칼라하스 공주의 눈길이 아킨을 향했고, 그녀의 눈에는 의외의 광경을 발견한 듯한 작은 놀라움이 담겨 있었다. 아킨은 그런 그녀에게도 미소를 보냈다. 말 그대로 그냥 웃은 것이 다. "어떻더냐." 단 둘만 남게 되자 칼리토가 꺼낸 말에 칼라하스는 늘 그렇듯 무관심 하게 말했을 뿐이었다. "휘안토스와 생긴 것은 똑같더군요." "그리고?" "속을 알 수 없다는 점에서도 역시나 똑같고, 전혀 다른 방향일 거라 는 점에서는 분명히 달라요." 그리고 칼라하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직 궁금한 것 이 많이 남아 있던 칼리토는 답답해졌고, 그것은 그녀가 아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자신에게는 이렇 게 말하고도 마하에게는 모든 것을 다 털어놓고 의논할 거라는 생 각이 드니, 속 좁은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딘지 서운했다. "너무 서두르지 마세요, 오라버님. 오늘 밤에 이야기 해 보면 좀 더 자세하고 제대로 알게 될 테니....벌써부터 옳지 못한 편견을 만들어 놓는 건 좋지 않아요." "하지만 첫 인상이 중요하지 않겠니. 나중에 어찌 될지 모르겠지만 그 소년은 어쨌든 네 '신랑'이 되기 위해 이곳까지 온 거다. 내가 묻는 것은 바로 그것, 즉 '남자'로서 묻는 거다." 칼라하스는 놀랐다. 그래서 이렇게 장난스럽게 말하는 오빠의 얼굴을 멍하니 보며,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묻지도 못했다. 칼리토가 웃음을 터뜨렸고, 그 유쾌한 얼굴이 아무 걱정 없었던 아주 먼 옛날의 소년과 더욱 어렸던 소녀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 칼리토가 말했다. "당황했구나, 리스." "그런 문제는 생각 안 해도 되잖아요." "잠시 그렇게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고, 오히려 자연스럽기도 하지. 나중에 어떻게 해 보라는 것도 아니고, 그를 유혹해 보라는 얼토당토 없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 일을 해 줄 여자들은 많고 , 네가 구태여 나설 필요는 더더욱 없지. 나는 그저 평범한 소녀로 서의 마음을 한번 물어 보는 것뿐이란다." ".....전...." 칼라하스는 오늘 만난 아킨에 대해 생각해 보려 했다. 어떤 문제점이 있는 지는 아직 정확하게는 모른다. 악튤런 파노제는 그에 관해 들 었을 때 자신이 알아보겠다고 하고서는 아직도 아무 말도 없었고, 그것은 그가 상당한 기분파라 '그 일은 생각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 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그저 아킨에게 '주기적인 발작'이 있고 , 그것은 치유법은커녕 일어날 때를 대비한 방책조차 없다는 말을 했을 뿐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칼라하스는 문득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 렇다면, 그런 악조건을 가진 소년이야 말로 다리를 못 쓰는 자신과 가장 어울리는 신랑일지도 모른다. 평범한 삶은 애당초 멀찍한 곳 에 놓고 달려왔던 나날이다. 새삼 평범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고, 조금이라도 평범함과 가까워지기 위해 더욱 비참해질 생각은 더더욱 없다. 칼라하스는 차분하게 말했다. "오라버니,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으리라 생각해요." "무슨 뜻이냐." "저는 그와 결혼하지 않을 테니까요......또, 그 누구도 '남자로서' 사랑 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나 칼라하스는 이렇게 말하는 자신이 다시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 었다. 다른 여자들처럼 살지 못하는 것이 서러운 것이 아니라, 다른 여자가 '시집가기 싫어요.' 새침하게 말하면 귀여운 애교로 넘어갈 수 있을 텐데, 자신이 이리 말하면 분명 다른 이에게 동정과 비웃음의 대상 이 될 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얼어붙는다. **************************************************************** 작가잡설: 그놈의 호주제 말은 많은데 정작 문제의 본질은 흐려진 채 '아버지 성 안 따라도 된다 카드라~' '이제 아버지역할은 없는 거나 매 한가지라드라~' 라는 선정적인 말들만이 난무하는 군요. 심지어 그깟 이혼녀들이나 미혼모들 위해서 우리가 귀찮고 돈 들 어가는 일 감수해야 하냐~ 라는 상식이하의 말들도요. 호주제라는 건 없어져야 합니다. 말그대로 호'주'제 말입니다. 여자의 호주 우선순위가 낮아져서도, 재혼시에 아이들 성문제 때문 도 아닙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나라의 호주법 안에서, 어머니와 딸은 없는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어머니를 말그대로 '합법적인 자궁 대리인' 쯤 취급하는 게 그놈의 호주제고, 딸이 결혼이라도 하면 당장에 호적 파다가 남편 호적에 넣도록 하여 '법적으로는 자식이 아니 게' 만드는 것이 바로 그 호주제입니다. 아버지의 자식은 언제나 아버지의 자식이지만, 어머니의 존재는 그 아버지와 헤어지거나 다른 남자와 재혼할 경우에는 없어지는 것이 바로 그 호주제이기도 하고요. (친아버지 성을 따르는 문제 를 떠나서, 아버지가 재혼하면 전처의 자식은 재혼한 여자를 어머니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재혼하면 재혼 한 남자를 아버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친부-친모를 정확 하게 해야 한다면, 적어도 둘 다 공평하게 안 되게 하고나서 큰소리 쳐야 할 것 아닙니까) 효율성, 효율성 하지만...합리성과 형평성이 없는 법은 이미 법이 아닌 악법일 뿐입니다. 호주제 없애면 우리 모두 짐승된다~ 하는 할아버지들, 짐승이라도 자식은 제 어미를 알아보고 어미는 제 자식을 챙기려 합니다. 그것을 부정하는 호주제라는 법은 '짐승만 도 못한' 법입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42장 ************************************************************** [겨울성의 열쇠] 제193편 차가운 신부#4 *************************************************************** 저녁이 되자 그날 도착한 암롯사 왕자를 위한 우아한 연회가 준비되 었다. 아킨은 그 연회참석을 위한 모든 준비는 암롯사에서 같이 온 수행원 에게 맡겼다. 아버지 사이러스 대공왕이 붙여준 그들은 그 날카로운 눈이 고른 사람들답게 조용하고 냉정하면서도 제 할일은 확실하게 하는 이들이었으며 아킨이 단 한치도 실수하지 않도록 보호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그 덕에 아킨은 사람들과 만나서 이야기 하는 것을 제하고는 아무 것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잔 소리도 하지 않았고, 충고도 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잘 될 거라든 가 하는 위로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아킨을 왕이 맡긴 '귀중품'이라 도 되는 듯 행동 할 뿐이다. "언제부터 이러고 살았냐?" 결국 루첼이 그렇게 투덜댔다. 아킨은 루첼의 표현을 빌리면 '곱게 단장한' 모습으로 다리를 까딱이고는 답했다. "압셀론에 있을 때는 거의 매일 이런 사람들 속에서 살았지만 베넬리 아에서부터는 없었다. 물론 거기서 이랬다가는 당장에 출국권고라도 날아왔을 걸." 호위를 데리고 다니는 것은 뭐라 하지 않지만, 지나치게 티내면서 데 리고 다니면 따갑게 눈총 주는 것이 베넬리아다. 그곳은 왕국이 아닌 공화국, 그런 식으로 왕족이 왕족 티내는 것을 아주 경멸하고 싫 어한다. "나라면 귀찮아서라도 못해 먹을 짓이다. ....하여간, 네 덕택에 별 일 을 다 당한다니까." 그런데 그렇게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귀빈궁의 응접실로 일행의 시종 장이 들어왔다. 마흔 정도 되는 남자로, 역시 아버지가 골라 붙여준 사람이었다. 다행히 마르실리오보다는 덜 깐깐해서, 루첼이 아킨 과 언제 어떻게 노닥거리든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 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루첼은 그와 함께 있을 때면 아킨이 소름끼 치고 느끼하다고 쏘아볼 정도로 아킨에게 정중하게 대했다. "아직 시간이 좀 남은 걸로 압니다." 그렇게 말하자, 시종은 루첼을 흘끔 보고는 정중하게 답했다. "델 카타롯사 분께서 아킨토스 님을 뵙고자 하십니다." "누가 온 겁니까?" 칼라하스 공주나 그녀의 호위인 마하일까 했지만 시종이 말한 이름은 아킨으로서는 조금 의외의 이름이었다. "악튤런 파노제 님이라고 하십니다." 아킨은 앞의 루첼을 보았고, 루첼의 눈이 잠깐 반짝였다. 아킨은 루첼을 살피며 시종에게 물었다. "저를 만나고 싶어 하는 겁니까, 아니면 저와 루첼을 만나고 싶어 하 는 겁니까?" "아킨토스 님 한분만 뵙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옆에 붙어 다니는 빨 간 머리 뺀질이는 근처에도 오지 말게 해'.... 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시종장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얼굴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있었다. 루 첼은 고개를 푹 숙이며 한숨을 푸르르 내 쉬었고, 아킨은 대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궁금해 하며 그런 루첼을 보아야 했다. 아킨이 말했다. "별 수 없다, 루첼. 나가 봐야겠지......중요한 일이면 나중에 말 해주 겠다." "........" 루첼은 '알겠습니다, 아킨토스 님', 어쩌고 말하자니 낯간지러워서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시종이 열어주는 문을 나가 복도에 들어섰을 때, 문 바로 앞에 서 있던 악튤런과 마주쳤다. 어라, 정말 이 놈이 정말 왔네 하면서 보고 있자니, 그의 사나운 눈 이 루첼을 한껏 노려보고는 방향을 휙 바꾸었다. 루첼은 새삼 겨우 동갑인 이 인간이 서열상으로는 오거스트 롤레인의 사제이며 루첼의 사숙이라는 데 억울해졌다. 루첼이 살던 동네 꼬 맹이도 이보다는 점잖을 것 같다. "오랜 만입니다, 사숙님." "너 따위와 나는 아무 상관도 없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지만.....현실이 그렇지 않으니 어쩌겠나요." 악튤런이 당장에 성난 강아지처럼 으르렁대며 다가왔다. "여기는 델 카타롯사 안이다! 아무리 베넬리아에서는 롤레인의 제자 였다지만, 이곳은 내가 마스터인 내 나라다." "누가 아니랩니까. 그러니 마음 놓고 발광하셔도 됩니다. 여기서야 다 른 곳에서만큼 쪽팔리지는 않을 테니까요." "너, 너--!" "안에 볼일 있어서 오신 것 아닌가요?" 악튤런의 얼굴이 시뻘개 지다가, 루첼이 뒤돌아 문을 똑똑 두드리자 새파래졌다. 당황한 것이다. 루첼은 그 모습은 좀 귀엽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저기, 어서 안으로 데리고 가세요. 언제 들어갈지 몰라서 밖에서 우 물쭈물 하고 계시는 군요." "죽여 버린다, 너!" "아, 그리고 충고하는데.....저기 저 안에 있는 왕자분은 저보다 성질 도 고약하고 참을성도 없으며 유머감각도 거의 없습니다. 아무리 같은 롤레인 님의 제자이지만 그런 태도는 좀 바꿔 주셔야 대화에 유리할 거라 생각되는데요." "너, 나중에 보자! 나중....." 그러나 루첼은 문을 열고는 악튤런의 뒷덜미를 잡아 안으로 집어 던 졌다. 악튤런이 당장에 버럭 고함을 지르려 했지만, 루첼은 안쪽을 슬쩍 가리키고는 문을 쾅 닫았다. 이제부터는 루첼 보다 '성질도 고약하고 참을성도 없는데다가 유머감 각마저도 거의 없는' 상대에게 맡길 차례다. 그리고 더불어 아킨이 이 악튤런에게도 근사한 주먹 한대라도 선사 해주기를 바랬다. "어서 오십시오, 악튤런 파노제 님." 아킨은 앞에서 일어나는 소란을 이미 다 듣고 있었으므로, 악튤런이 들어오자마자 시종으로 하여금 문 앞에 서게 하여 악튤런이 다시 뛰쳐나가지 못하도록 막고는 그렇게 인사를 했다. 방금 전까지는 열 살 먹은 애처럼 성질을 부려대던 악튤런이었지만,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단번에 매서운 기세로 아킨을 바라보았다. 나 이는 젊었지만 어쨌건 마스터는 마스터였다. (그리고 방금 전의 사태 는 악튤런의 자질보다는 루첼의 과하게 발랄한 성격, 그리고 악튤 런으로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발랄한 롤레인의 가르침 덕이었다) 시종이 악튤런에게 자리를 권하고는 나가고, 문밖에 행여나 루첼이 없나 하고 악튤런이 확인하는 작업이 끝난 후에 아킨은 무관심한 어조로 물었다.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베이나트는 어디에 있지?" "......" 아킨은 악튤런과 '제대로' 대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고, 유감스럽 게도 루첼처럼 유들유들한 구석도 없었다. 아킨은 우선 악튤런의 어깨너머에 있는 여신의 조각상을 바라본 후, 시선을 당겨 안광이라도 쏘아낼 것 같은 악튤런을 비슷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나가십시오." ".....뭐?" "그리고 무엇을 설명할지 생각해 보신 후에 들어오십시오." "뭐야, 너!" "악튤런 파노제 님, 저는 이곳에 롤레인 교수님의 제자이자 로멜의 학생이었던 아킨토스 프리엔으로 온 것이 아닌, 칼라하스 공주의 청혼자이자 암롯사의 왕자로서 온 것입니다. 예의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상황을 알 만한 간단한 설명 정도는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악튤런의 눈에 아킨의 예상 밖으로 엄청난 분노가 으르렁거리듯 타올 랐다.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너를 끝내 버릴 수 있어." "어떤 사태를 불러 올지 알면서도 그러십니까." "그 딴 거 알게 뭐야. 내가 한다면 하는 거다." "........" 경의감이 들 지경이다. 도저히 뭘 찔러볼 수 없을 정도로 단순명료하 다. 아킨 자신도 솔직히 말하자면 대인관계에 있어 우등생이라 할 수 없 는 몸이었지만, 이 정도로 심각하게 설득 및 설명을 일거에 생략해 버리고 자기 의견만 집중적으로 우격다짐할 정도로 대범하지는 못했다. "악튤런 님, 제가 원하는 것은 그리 번거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 소한 것을 들어주는 것과 제 죽음이 가지고 올 별로 사소하지 않은 일을 감당하는 것 중, 어느 것을 택하는 것이 합리적인 지는 본인 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베이나트 님이 지금 어디 계신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왜 찾는지 알려 주신다면, 적어도 연락을 위해 노력은 해 볼 수 있습니다." 그 말은 즉, 어차피 아무 것도 답해줄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왜 베이 나트를 찾는 지 정도는 알아야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사안이 급 하면 악튤런에 대한 이야기를 베이나트에게 '일러바칠' 용의도 있다 는 뜻이기도 했다. 악튤런이 알아들었을 리는 그 반대인 지는 어차 피 모르겠지만, 그의 얼굴이 한결 누그러지더니 아킨 앞에 있는 의 자에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그에게 받을 것이 있다." "무엇입니까." "만나서 이야기해야 한다. 어쨌든, 그에게 그렇게 전해주면 되. 알아 듣겠지." "......지난번에 탈로스 고르노바를 찾아 오셨던 이유와 같은 겁니까." 악튤런의 눈이 단번에 천둥치듯 사나워졌다. 아킨은 짐작하고 확신까 지 마친 후에 말했다. "그런 것이라면 이야기 하셔도 소용없을 듯 하군요. 그분께서는 그것 을 그 누구에게도 주실 용의가 없으니까요." "....뭔지 알고는 있냐." "아마도." 악튤런의 눈에 빛이 돌았다. 의심과 확신 속에, 강요를 해야 할 지 거래를 해야 할지 끝없이 측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킨은 지금 악튤런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진정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환상과 실재의 구분이 없던 '그곳'에서 보았던 낡은 잔이 문득 기억난다. 그저 짐작일 뿐이지만, 아킨은 아마도 그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악튤런이 아킨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가 어디 있는 지나 말해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모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연락할 방도는 있다고 했잖아." "......죄송합니다만 그건 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며, 실제로 될지 되지 않을 지도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킨은 정말 다시는 그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별 수 없어서 있는 능력 없는 능력 다 끌어 모으기는 했지만, 정말 자칫 실수했 으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될 뻔 했다. "나를 놀리는 거냐." "감춘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단지 노력을 해 보겠다 말씀 드렸을 뿐입니다." 이 갈아붙이는 뿌드득 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왔다. 아킨은 본의 아니 게 이 성질 급한 남자의 분노를 산 것을 알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분노를 사지 않을 방도도 알 수 없었다. "악튤런 님, 당신이 조금만 더 신중한 분이시라면 지금 이것이 얼마 나 위험한 일인 지 잘 알 거라 믿습니다. 저는 제 위치상 지켜야 할 예의로 당신이 탈로스 님의 탑에 갔다는 것을 본국에 말하지 않 았습니다. 한 번만 더 이러신다면, 저는 그날의 일을 제 본국에 보 고할 뿐만 아니라 당신이 찾고자 하는 것에 대한 자세한 보고 역시 올려야 합니다. 그러니 끝까지 예의를 지킬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건방진...!" "그런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게 한 것은 당신입니다. .....그리고 당신 이 착각하지 않기를 바라며 말씀드리는 건데......비록 쿼크 대제의 성배가 당신에게 주어진다 할 지라도 델 카타롯사의 왕 칼리토는 황제로서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순간 방 안의 공기의 흐름이 바뀌었다. 보다 사나워지고 날카로워지면서도 적대적으로 바뀌었다. 휘안토스가 말했었다. 진실을 섣불리 내 놓지 말라고- 아킨은 자신 이 어느 정도 선의 진실을 말한 것인지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적어도 악튤런이 더 이상 억지를 부리지는 못할 거라 짐작했다. 그것만 으로도 지금은 충분하다. 그럼에도, 아킨은 마법을 쓰겠다는 그 어 떤 표시도 하지 않았다. "정당성은 강해진 다음에 찾는 겁니다. 그리고 정당성이란 힘이 붙는 데 있어 가속을 붙여 줄 수는 있을지언정 방향을 완전히 트는 데는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지금의 델 카타롯사에는 방향을 뒤틀 힘 자체가 없습니다." "후회할 말은 하지 마라." 여태까지의 악튤런의 말투와는 전혀 다른, 분노에 짓눌린 그 목소리 는 분명 떨리고 있었다. 눈썹은 꿈틀 움직이고 턱은 경련을 일으 킨다. 아킨은 자신이 진실을 말했음을 알게 되었고, 그 진실이 탈로스가 그 것을 바라는 이유와는 전혀 다르다는 데 기묘한 경멸을 느꼈다. 이상한 일이다. 원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이고, 각 자 방향은 너무도 틀리다. 하나는 지나치게 형이상학 적이며 나머지는 지나치게 속세의 때가 묻어 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이유 중 그 어떤 것이든, 그것을 가지고 있는 컬린- 베이나트를 설득 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어쨌건 아무것도 해 드릴 수 없겠군요." 아킨의 말에 드디어 악튤런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네가 대체 뭘 안다고 그러는 거냐. 네가 뭘 안다고.....!" 악튤런이 무의식 적으로 불러일으키는 마나의 흐름은 더욱 거세지고, 이제 창문까지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아킨은 여전히 무관심 한 얼굴로 있을 뿐이었고, 그것을 보는 악튤런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 졌다.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잘난 체 하지 마라. 기껏 해야 반 쪼가리 인간 주제에--!" 아킨은 속에서 뭐가 꿈틀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왈칵 끓어오르기 직전인 듯 고요히 뜨거워진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악튤런의 미소가 잔인해졌다. "네가 진실을 말했으니 나 역시 진실을 말하는 것뿐이다. 너야 말 로 숲으로 돌아가야 할 짐승이다. 미쳐서 제 어미도 뜯어 먹은 그 런 괴물 말이다!" "후회할 말은 하지 말라고 본인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뭐?" 아킨은 그대로 악튤런에게 주먹을 날려버렸다. 아마도 밖에 있던 루첼 이 달려오지만 않았다면, 아킨은 그날로 악튤런을 죽여 버렸을 것이다. ***************************************************************** 작가잡설: 아키의 전투 방법. 상대가 주문 외울 틈도 주지 않고 주먹을 날린다. 퍼억-- 그래서 아키는 마법사 중에 최강~ p.s 휘안에게도 좀 그래봐라, 아키야. -_-;;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42장 ************************************************************** [겨울성의 열쇠] 제194편 차가운 신부#5 *************************************************************** 아주 거대한 것, 그것도 큰 눈을 끔뻑이며 숨죽이고 있는 괴물 같은 것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꽤 소름끼치는 일이다. 모르는 새 집어 삼켜지는 것만 같고, 그 뱃속에서 눈 뜬 채로 소화되어 버릴 것만 같다. 그리고 엘프들이 사는 숲이라는 곳이 꼭 그러하다. 엘프들은 난폭한 인간들과 드래곤들은 적대한다. 그리고 그들이 사는 숲에 둘러쳐진 결계, 인간과 드래곤들을 향해 철저하게 적대적인 그 마법의 힘은 결계를 유지시키는 생명수와 엘프들의 수장에 의해 더 욱 더 적대적으로 변해있었다. 깊은 곳으로 들어오면 마치 그림자 곳곳에 무언가가 숨어 있을 듯하고, 슬그머니 다가와 목을 휙 감 아서는 우적 우적 씹어 삼킬 것만 같다. 축축한 이끼냄새는 입김 같고 , 간혹 적막하고 어두운 숲 속에서 간혹 번쩍이는 산짐승들의 눈 빛과 마주하면 꼭 이상한 짐승이 송곳니라도 드러내는 것 같다. 이런 숲으로는 오로지 허락된 이들만이 오고갈 수 있고, 이것은 엘프 들이 세상의 세 숲에서 티피안느의 배려로 살게 되면서부터 약속되고 공포된 것이었다. 이런 것들이 싫거나 두렵다면 오지 않으면 되고 , 감수하고서라도 온다면 그에 합당한 보답을 받는 것이다. 엘프들의 숲은 모두 그렇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적대적이고 위험한 곳은 단연 어둠 숲이었다. 어둠에 물든 듯 짙은 피부를 숲 속에 숨 기고 있다가, 긴 머리카락을 무성한 잎처럼 흐트러트리며 튀어나와 번개처럼 예리한 칼과 화살을 들이대는 그들은 엘프들 중에서도 최 강의 전사이자 가장 위험한 아름다움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런 어둠 숲의 전사들이 숲 가까이 다가오는 바람과 불의 기운을 느 꼈다. 드루이드들은 온 숲이 몸을 떨며 경계하기 시작하는 것을 느 꼈고, 그들이 받드는 생명수는 그 두 가지 힘 중 하나를 향해서 성 난 듯 어마어마하게 반발했다. "걱정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다. 전사들은 모두 얌전히 있고, 드루 이드들 역시 그들을 자극하지 말고 숲을 진정시켜라. 위험한 자들 이긴 하나, 우리가 위험하게 굴지만 않는다면 괜찮다." 온 일족을 다스리는 나루에의 명이 떨어졌고, 그럼에도 엘프들은 어 둠 속에 숨어서 그 강력한 기운이 숲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 았다. 그러나 그나마도 나루에가 모든 엘프에게 생명수 근방에 대 기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별 수 없이 그만두어야 했다. 나루에는 지팡이를 들고 숲의 결계 근방으로 나갔다. 그녀가 대동한 것은 바로 며칠 전에 돌아와 또 떠날 준비를 하고 있던 자케노스 였고, 이것으로 다른 엘프들은 누가 찾아온 것인지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나루에는 서둘러 결계의 경계 근방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이끼에 덮 인 경계의 표석에 다다랐을 때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쉬고 있는 키 큰 남자를 발견하고는 기쁨에 겨운 목소리로 외쳤다. "칼롭-!" 키 큰 남자- 베이나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그녀를 맞이했다. 나루 에는 옛 연인을 맞이하는 소녀처럼 달려가 그를 안았다. "맙소사, 칼롭.....! 이렇게 다시 보게 되다니." "다른 엘프들이 네가 이러는 걸 본다면 기절들 하겠어, 나루에......어 쨌건 만나서 반가워." 그리고 어둠 숲 쪽에서 다시 가벼운 발소리가 들리더니 자켄이 나왔 다. 나루에가 팔을 풀어주자, 베이나트는 그에게 다가가 어깨를 감싸 쥐었다. "건강해 보이는 구나, 자크." 자켄이 부드럽게 웃었다. "당신도 그렇습니다, 베이나트." "자크- 미안하지만 그 어떤 병도 나를 침탈할 수는 없단다. 나한테 건강해 보인다는 말은, 드래곤더러 '많이 크셨군요.' 하는 거랑 매 한가지라고." "여전하십니다...." 자켄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렇게 대충 인사가 끝나 자 베이나트는 그의 뒤에서 꾸벅 꾸벅 졸고 있던 일행의 어깨를 팍팍 쳤다. 그 일행은 느릿느릿 돌아앉았고, 베이나트는 푸르르 한숨을 내 쉬고는 그의 뒷덜미를 잡아 일으켜 새웠다. 남자의 후드가 벗겨지며 붉은 머리가 후두둑 쏟아졌다. 나루에가 화 들짝 놀랐고, 자켄의 손은 벌써 허리의 검에 다가갔다. 둘 다 그 남자의 몸이 강하게 내 뿜는 힘을 느꼈고, 그것이 숲과 철저하게 반한다는 것도 느꼈다. 특히나 나루에와 그 남자는 구면이었고, 재 회를 기뻐할만 한 사이는 결단코 아니었다. 그러나 정작 남자는 졸 린 눈으로 그런 둘을 게슴츠레하게 보다가 베이나트에게 흐느적거 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늙은 여자와 시커멓고 칙칙한 남자 놈뿐이잖아." 당장에 베이나트는 남자- 팔로커스의 귀를 흔들어 대며 으르렁거렸 다. "내가 언제 엘프 소녀들이랑 시시덕대러 간다고 했었냐--! 당장 정 신 차리고 성의를 보여다오, 성의를-!" 그러자 팔로커스는 성의 없이 손을 들었다. "처음 뵙겠소, 나는......가만. 이 여자 분은 언제 본 듯도 한데...." "나루에다." "아아...잠결이라. 그런데........그건 그렇고 나이 먹어도 여전히 예쁘 네, 나루 양. 엘프는 이래서 좋다니까. 볼 때마다 예뻐서." 베이나트는 나루에 쪽으로 슬금슬금 다가가는 팔로커스의 손을 재빨 리 붙잡고는 험악하게 노려보았다. 팔로커스는 궁시렁거리더니 베 이나트가 앉아 있던 그루터기에 털썩 주저앉았다. 베이나트는 새파랗 게 질린 나루에에게 급히 설명했다. "좀 당혹스럽겠지만, 내가 지난번에 말 한 것 기억하고 있겠지? 이 놈이 언제나 항상 늘 그렇게 괴팍한 것만은 아니라고." "하지만 숲 속으로 들어오게 할 수 없다는 건 알겠지? 예전의 일 때 문에 생명수는 이 마법사를 아주 강력하게 거부하고 있어. 들어 왔 다간 온 숲이 벌벌 떨어 댈 테고, 그렇게 되면 내가 괴로워." "알아, 알아. 나도 나 태워먹은 놈이 다시 나타난다면 발작을 일으킬 거다. 그러니 그건 걱정 안 해도 되고, 네 일족이나 안심시켜 두 라고." ".....알았어. 그런데 칼롭, 지난번의 충고 때문이라면 우선 펠톤 님을 먼저 뵙는 게 좋지 않을까? 여기부터 찾아올 필요는...." "너 하고 볼일이 있어서 그런 거야. 펠톤 할멈과는 좀 나중에 이야기 해도 되고, 사실 그 천년만년 사는 할머니하고는 좀 늦게 이야기해도 큰 무례는 아닐 거라고 봐." "대체 나한테 무슨 볼일이 있어서 그러는 건데?" "별로 안 좋은 일이라는 건 짐작하지?" "당신이 서두르면 늘 좋지 않은 일들뿐이지." 그리고 베이나트가 가장 서둘렀을 때가 바로 이 팔로커스의 일이었 다. 베이나트는 힘없이 웃어야 했다. "어쨌건 말 꺼내놓는 부담은 적어져서 좋구만. 아, 그리고 자켄은 돌 려보내지 않아도 돼. 이 녀석이 빨리 도망치지 못하도록 잡아 달라고 한 건 분명 나고, 또 녀석과도 상관있는 문제이기도 하니까." 자켄은 놀랐지만, 워낙에 나이도 많고 높은 사람들의 이야기라 무엇 이냐고 끼어들지는 않았다. 예의바른 그는 그답게 뒤로 물러났다. 나루에가 말했다. "우선 앉아." 나루에는 결계의 표석 앞에 있는 자그마한 돌 의자에 앉고는 앞에 있 는 조금 큰 의자를 베이나트에게 권했다. 베이나트가 앉자, 나루에는 지팡이로 그들 사이를 살짝 가리켰다. 그러자 그 위에 빛이 파앗 - 하고 퍼지더니 달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원판이 만들어졌다. "나루-"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지 짐작하고는 있어......하지만 제대로 말 해 줘. 낭비하는 시간은 적을수록 좋은 거니까." 베이나트는 이마를 긁적이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일전에 건 저주에 관한 일이다. 저기, 그 '실체'를 볼 수 있을 까?" "실체라 하면.....무엇을 말하는 거지?" "보름마다 나오는 그 늑대 괴물 녀석 말이다. 아무래도 녀석과 이야 기 좀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이지." "........"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일단 불러 오기나 해줬으면 해." 나루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은빛의 원판 위에 손을 얹었다. 그 안에 샘물에 돌멩이 하나가 떨어진 듯 파문이 끝없이 그려지고, 그 퍼지는 동심원을 따라 몇 개의 글자들이 부드럽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엘프들의 언어인 룬이었다. 베이나트는 그 글자들을 차례차례 읽어 가다가, 글자가 이루는 원이 완성되자 그 중앙으로 눈을 옮겼다. 그 때 저 뒤에서 졸고 있던 팔 로커스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의 흐리멍 덩하던 눈에 초점이 돌아오더니, 갑자기 확 얼어붙은 듯 날카로워졌다. 그 변화를 바로 옆에 있던 자켄은 금방 알아챘다. 그래서 행여나 무 슨 일이 일어날까 싶어서 허리의 칼에 손을 가져가며 그를 주의 깊게 감시했다. 글자가 이루는 원 안이 흔들리더니, 그 부분만 액체가 된 듯 출렁였 다. 잠시 뒤 이제는 아예 기체로 변해버린 듯 느릿느릿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올려다보는 구름의 바다처럼, 나루에와 베이나 트 사이에서 연기의 우물이 휘몰아치고 뒤척이고 흘러가고 있다. 그리고 그런 변화들 위로 팔로커스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팔로커스-" "지켜보기만 할 거야." 자켄은 그렇게 말하는 팔로커스의 목소리에 방금 전과는 달리 뼈대가 있음을 알아챘다. 무관심하지도 무성의하지도 않다. 그래서 칼자루를 더욱 힘주어 잡으며, 팔로커스의 어깨와 입술을 면밀히 지켜보았다. 마침내 구름 같은 흐름 사이로 별처럼 반짝이는 두개의 점이 나타났 다. 팔로커스의 눈이 확 커졌고, 베이나트의 검은 눈도 예리해졌다. 나루에는 두 손을 그 위로 뻗으며 룬 어로 된 주문을 외웠다. 쿠르릉--! 천둥이라도 친 듯 했다. 땅이 몸을 떨고, 나무가 우스스 흔들렸다. 그 러나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고, 젊은 자켄 만이 고개를 들어 하 늘을 보았을 뿐이다. "왔어-" 나루에가 속삭였다. 자켄은 팔로커스를 감시하는 것을 잠시 잊고 나루에 앞의 빛의 원반 위로 치솟는 하얀 연기 같은 것을 보았다. 연기는 이제 연기라 부를 수도 없을 정도로 굵고 진해졌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뱀이 똬리를 풀 듯 느리지만 분명한 형체로 위로 올라오고 있었으며, 한참 전부터 반짝이던 두 개의 점들 도 더욱 크고 뚜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펜리키언." 베이나트가 조용히 말하자 그 흐름이 갑자기 얼어붙은 듯 뻣뻣하게 경직되었다. "달테로 니와르." 더욱 조용한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반응이 왔다. 마치 작은 짐승을 어르고 부르듯 베이나트는 부드럽게 말했던 것인데, 갑자기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울었다. 빛의 원반이 부르르 떨리고, 금방 이라도 깨어질 듯 들척거리기 시작한다. 자켄이 검을 뽑아 들었다. 스캉-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는 순간에 나루에가 지팡이를 들어 그 검을 막아냈다. "하지마라, 자크." 성스러운 물건에 칼이 닿자 자켄은 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순간 이었다. 갑자기 팔로커스가 두 팔을 앞으로 뻗으며 천둥처럼 외쳤다. "니왈르도 페라키!" 사자가 울부짖는 듯한 외침이었다. 그의 예리하던 눈이 불꽃처럼 이 글거리고, 방금 전까지 힘없이 늘어져 있던 두 팔의 근육이 팽팽해 졌다. 관자놀이에 핏줄이 서고, 목줄기의 힘줄이 뻣뻣하게 당겨졌다. 콰릉-! 바위가 무너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엄청난 열기가 팔로커스 의 주변에서 뿜어져 올랐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며 나무들의 형상이 흐릿해지고, 땅의 습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그러자 정지해 있던 , 니왈르도라 불린 그 연기가 서서히 늑대의 모습으로 변했다. 처음에는 문지른 그림처럼 흐릿했으니, 이내 자아내는 듯 섬세하고 분명해진다. 크르렁-! 울부짖음과 함께 거대한 이가 팟팟 치솟아 올랐다. 엄청나게 굵은 다리가 무시무시한 발톱을 세우며 드러나고 , 일그러지고 흉악한 콧잔등이 나타났다. 팔로커스가 앞으로 나섰다. 그 주변의 열기는 더욱 뜨거워져 주변은 아지랑이처럼 흔들렸고, 풀과 나무들이 녹아들 듯 으스러졌다. "그만 둬, 팔로커스! 이곳은 엘프들의 숲이고 경계의 근방이란 말이 다!" 베이나트가 외쳤지만 팔로커스에게는 들리지도 않는 듯 했다. 그의 볼과 팔등에 있던 문신이 뭉뚱그리듯 일그러지더니 그 문양이 완전히 새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발톱으로 긁어놓은 듯한 모양새가 둥글 게 말리고, 그 위로 불꽃같은 점들이 파파파팍 일어났다. "빌어먹을!" 이미 글러먹었다고 판단한 베이나트는 늑대와 팔로커스 사이로 달려 갔다. "나루에, 저 들개 자식 안으로 처박아 넣어-! 팔로커스는 내가 맡을 테니까." "알았어!" 그러나 나루에가 움직이기도 전에 늑대가 방향을 확 바꾸더니 나루에 를 향해 달려갔다. 엄청난 힘에 땅이 퍽퍽 패어나갔고 공기가 찢어 지는 듯한 굉음이 들려왔다. 나루에는 지팡이를 들었지만 늑대는 그것을 이로 부러뜨렸다. 자켄이 달려와 검을 뿌렸지만, 그 검 역시 늑대의 이 사이에 박혀버렸다. 자켄의 팔뚝에 이가 꽂히며 피가 튀 었다. 나루에가 비명처럼 외쳤다. "자크-!" 늑대는 검을 떨쳐내고는 크르렁--! 하고 크게 울부짖으며 자켄을 찢어 놓을 듯 노려보았다. 자켄은 숨을 헐떡이고는 다른 검이 없나 허리를 더듬었지만 베이나트 를 마중 나오는 일이었기에 검을 단 하나만 가지고 나왔다는 것을 깨 달았다. "젠장....." 그런데 갑자기 공중에서 불꽃이 솟구치더니 늑대의 머리에 내리 박혔 다. 늑대는 깨갱-- 하고 울부짖으며 바닥에 메다 꽂혔다. 나무와 잎 이 타며 매캐한 냄새가 났다. 그러나 늑대는 단번에 퉁기듯 벌떡 일어났다. 나무 둥치가 그 발과 등에 부딪혀 쓰러졌다. 팔로커스 역시 같은 야수로 돌변한 듯 무시무시하게 으르렁대며 팔을 내뻗었다. 자켄이 재빨리 그의 발을 걷어찼다. "쿠엇!" 팔로커스가 무릎을 굽히자마자, 자켄은 그의 명치에 주먹을 밀어 넣어 팔로커스를 메다꽂았다. "잘 했다, 자크!" 베이나트는 팔로커스가 쿨럭 거리느라 잠시 정신이 없는 틈에 외쳤다. "발 잃은 허무의 왕, 허공의 방랑자, 그러나 팔토의 발톱보다 광포 한 너! 라바이커-! 주인 된 자, 복종시킨 자, 함께할 자로써 명한다!" 그 소맷자락이 펄럭이더니 세찬 바람이 일어났다. 숲의 나무들이 우 지끈 쓰러진다. 울부짖기라도 하는 듯한 엄청난 굉음이 터졌다. 공 기가 압축되며 세상이 우그러지기라도 하듯 뽑힌 풀과 부서진 돌과 흙들이 회오리를 따라 세차게 휘몰아쳤다. 늑대가 이를 드러냈지만, 베이나트는 그대로 그 힘으로 뭉친 회오리를 내 던졌다. 쾅--! 그리고 울부짖는 비명소리가 들려오자마자 베이나트가 외쳤다. "나루에!" 나루에가 손을 뻗어 빛의 반원에 얹었다. 글자가 한꺼번에 사그라 지기 시작하며, 늑대의 모습 역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베이나트는 늑대에게 달려가 그 목의 털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험악하게 속삭였다. "이거나 답해라, 이 빌어먹을 늑대 대가리--! 너는 니왈르도냐! 어서 지껄여보라고--! 니왈르도, 그 자식이 맞냐고!" 늑대가 갑자기 웃는 듯 입을 일그러뜨렸다. 베이나트는 멍하니 그 런 늑대를 보았고, 손에 움켜쥐고 있던 털이 연기처럼 흐릿해지 더니 희미한 감각마저도 빠르게 사라졌다. 베이나트는 허공을 보다가, 방금 전에 늑대를 잡았던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손을 꽉 움켜쥐어 가슴 안으로 당기며 망연하게 비틀거렸다. 적대와 분노에 날카로워진 눈길이 내리꽂히는 것 같아 뒤를 돌아보니, 팔로커스가 그를 노려보고 있 었다. "왜 막았냐." "진정해, 팔로커스." "왜 막았냐고 물었어-! 니왈르도.....그 자식이 맞아! 그 니왈 르도가 맞다고! 그런데......그런데 대체 왜 막은 거냐! 대체 왜! 그냥 죽여 버려!" "그 자식을 죽인다고 뭐가 달라져! 아니, 죽여서는 안 되는 이 유가 더 많다." 팔로커스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아니, 너와 나, 그리고 지에나가 겪은 일만으로도 그 자식은 열 번, 백 번, 아니.....수 천번을 찢어 죽여도 모자라! 아니, 그냥 곱게 죽일 수도 없어! 우리가 겪은 천년만큼 그 녀석은 만 년을 썩어야 해! 만년을--!" "진정하라고 했다...." 팔로커스가 으르렁 거렸다. "진정? 빌어먹을, 너는 언제나 그렇게 말하지! 진정해라, 진정 해! 잘난 척 그만하라고! 모든 것이 그 자식 탓이었어......그 자 식만 제 할일을 해 줬어도 지에나는 그렇게 반병신이 되지 않았을 테고, 나는 이렇게 돌아버리지도 않았을 테고, 너도 그렇게 얼간 이처럼 궁상이나 떨고 있지는 않았을 거 아냐-!" "이제 그만 닥쳐, 팔로커스-!" "아하! 위선 떨지 마! 잘난 척, 차분한 척! 모두를 용서하고 감 싸고 사랑하는 척 하지! 차라리 솔직하게 인정하는 게 덜 역겨워! 우리 중에서 그 놈을 가장 미워하는 것은 바로 너, 그 자식 때 문에 모든 모멸을 참고 그 드높은 자존심을 구겨버렸던 너야, 브 라키온 칼리반스--!" 결국 참다못한 베이나트가 외쳤다. "자크!" 자켄이 달려와 팔로커스의 얼굴을 후려 갈겼다. 컥-- 하고 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팔로커스는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주변이 잠잠해지자 베이나트는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며 뇌까 렸다. "젠장......!" *********************************************************** 작가잡설: 본인이 때리면 별 소용없으니 치사하게 자켄을 시키는 베이. 이 꼼수 대마왕~ 훌훌.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42장 ************************************************************** [겨울성의 열쇠] 제195편 차가운 신부#6 *************************************************************** "--!" 아킨은 와장창 깨진 잔과 흩어진 붉은 포도주를 멍하니 보았다. 온 몸이 오싹하더니, 얻어맞기라도 한 듯 쑤셔오기 시작했다. 숨소리도 점점 거칠어지고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속이 매슥거려서 먹은 것을 다 토해내 버릴 것만 같았다. "아키!" 루첼이 다가와 다그치듯 그렇게 부르자, 그제야 아킨은 정신이 들었 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답하자니 방금 전의 몸의 느낌이란 것은 절대 평소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몸이 아프거나 좋지 않은 것이 라고 여기자니, 크게 이상한 것도 없었다. 그 이상한 기분은 정말 순간에 몸을 확 덮치고 갔고, 그 느낌 자체는 사라졌을 지라도 기 억만큼은 너무나 분명하게 남아 있었다. 아킨은 땀에 젖은 이마를 짚다가 주변의 시선이 그에게 쏠려 있는 것 을 발견했다. 특히나 연회장의 최상석에 있는 칼리토 대공왕의 눈 빛은 아주 싸늘했다. 연회장 안에서 무슨 짓인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큰 연회는 아 니다. 이것은 가까운 인척들이나 측근이랄 만한 높은 가신들이 모 이는 자리였고, 칼리토 대공왕의 주변사람들인 만큼 암롯사에 대해 서 완벽하게 적대적이었다. 게다가 오늘 있었던 일도 문제였다. 원 인이 무엇이든 간에, 어쨌든 결과는 이들에게 아주 불쾌한 일이니 (마법사들의 마스터 중 하나가 이웃나라 왕자에게 '얻어맞은' 일은 흔한 일도, 웃기는 일도 아니다). 하나라도 실수하면 그들이 품은 악의가 어떤 얄궂은 해석을 쏟아 부 어 댈지 모를 일이다. 그래, 정말 인정사정 보지 않고 미친 듯이 난도질을 할 테지. "아무것도 아냐." 결국에는 이런 싱겁고 흔한 답뿐이다. 루첼은 아킨이 이렇게 나오면 절대 제대로 답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퉁명스레 말 했다. ".....그놈 패느라 무리한 거냐." "일도 아니었는걸." "하긴, 말리던 내가 더 힘들었지." 잠시 끊어졌던 음악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음악에 귀를 기울이던 아 킨은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그리고 얼마 되지도 않아 그의 옆으로 덩치 큰 여기사가 다가왔다. 당연히 마하였다. "공주께서 조용히 뵙고자 하십니다." 칼라하스는 신부후보가 신랑후보를 맞이하고 대접하는 것이 예의임에 도 불구하고 아킨 옆이 아닌 맞은편의 조금 먼 자리에 앉아 있었다. 눈에 뜨이는 짓이기는 했지만, 아킨은 그 편이 편했다. 가장 신경 써야 하는 사람이 알아서 그렇게 피해주는 것이니. 아킨은 붙임성 도 별로 없고, 사실 먼저 말을 거는 일에는 영 재주가 없었다. 게 다가 악튤런까지 때려 눕혀놨으니 칼라하스가 먼저 친절하게 굴기 도 어색하다. 차라리 눈치 좀 보이더라도 이런 식으로 아예 멀리 있 는 편이 낫다. 공주가 옆에 있었다면 자리 자체가 끝도 없이 냉랭해 졌을 테고, 아킨은 아마도 벌써 자리를 떠나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녀가 만나자고 하는 것도 이상할 것 없었다. 연회 내 내 이렇게 어색하게 있는 것도 이상할 일이니까. "알겠습니다." 그리 답하고 아킨이 일어났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리자, 아킨 의 옆자리(그래봐야 최상석이라 어느 정도 떨어져 있지만)에 있던 칼리토 대공왕이 말했다. "칼라하스가 신랑 후보와 단 둘이 이야기 하고 싶어 하는 것뿐이오. 이 정도는 허락해야 오빠의 도리겠지." 그 말에 칼라하스가 빙그레 웃었다. 아킨은 그 미소를 보며, 아킨은 아주 싫어하는 이 대공왕이 여동생만은 극진히 사랑한다는 것을 알 아챌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아킨이 아닌 '멀쩡한 신랑'이 왔어도 싫어했을지 모르겠다. 아킨은 연회장 안의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는 마하의 안내를 받아 연회장을 나섰다. 예상했던 대로 당장에 아킨의 암롯사 소속의 기 사들이 따라붙었다. 그러나 아킨은 그 기사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모두 괜찮으니, 대신 루첼을 불러 주십시오." "하지만 그는 기사도, 암롯사 인도 아닙니다." "대신 제 친구이며, 마법사이자, 같은 스승 아래에서 배운 학우입니 다. 당신들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역시 믿을 만 합니다. 걱정 마세요." 아킨은 그 호위기사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분 명 아킨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임을 금방 알아챘다. 그러나 기사는 물러났다. 그렇게 둘 만 남게 되자 마하가 먼저 말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왕자마저도 경계하는 군요." 아버지가 시킨 일일 테니까-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킨은 당연하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쨌 건 아킨은 암롯사 인이고 앞의 마하는 델 카타롯사 인이다. 아킨이 침묵하자, 그 이유를 짐작 못할 리 없는 마하는 조용히 웃고는 말했다. "곧 공주님을 모시고 오겠습니다. 그리고 왕자, 지난번의 일에 대해서 는......" "어차피 한 일이나 당한 일이나 거기서 거기입니다. 잊도록 하겠습니 다. 그리고 마하 칸느, 저는 그 일을 그저 예의 문제로 끝내고 싶 습니다." 공주가 왜 그 곳 하멜버그로 왔는지, 아킨이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 는 지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마하는 아킨의 말 뜻을 금방 알아들었다. "공주님을 모시고 오겠습니다." 그리고 마하가 잠시 자리를 떴다. 루첼은 언제 올까, 하고 기다리던 아킨은 홀의 창쪽으로 다가갔다. 하늘을 맑았고, 이지러진 달은 푸 릇한 빛을 내고 있다. 총총한 별들은 얌전하게 빛을 발하고, 달빛 머금은 정원수들은 고요히 잠들어 있다. 좋은 밤이군......아킨은 그렇게 생각하며 창턱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그렇게 한참이나 있자니, 뒤에서 바퀴 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 아보니 역시나 휠체어에 앉은 칼라하스였다. 마하는 휠체어를 밀어 칼라하스를 아킨 바로 옆에 있게 하고는 뒤로 물러났다. 아킨이 칼라하스에게 말했다. "제 이름을 걸고 그 어떤 위험한 짓도 하지 않을 테니, 공주의 기사 는 물려주십시오." "마하, 밖에 나가 있어주겠어?" "알겠습니다." 그 부드럽게 부탁하는 듯한 어투에 아킨은 조금 놀랐다. 풍부하고 따 뜻한 애정에 넘치는 어투였고, 기사나 시종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정말 처음이다. 마하가 물러나자 넓은 홀에 있는 것은 푸르른 달빛을 받는 두 사람 뿐이었다. 그 달빛 속에서 창백한 칼라하스의 투명한 은청색 눈동 자는 더없이 차고 아름다워 보였고, 검푸른 머리카락 역시 출렁이는 밤바다처럼 신비로웠다. 칼라하스가 말했다. "두 번째로군요." "세 번째 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눈이 보내는 의문을 향해 아킨이 말했다. "하멜버그에서 한번 뵌 적이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그 때 공주는 비명을 지르셨고, 저는 마하의 도끼에 어깨를 맞았습 니다. 그렇게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어쨌건 평범한 만남이랄 수는 없군요." "네?" 처음에는 대체 무슨 말인지 몰라 기억을 더듬던 칼라하스는, 그 때 있었던 일이 떠오르자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 쉬고 말았다. 어깨 역시 자기도 주체하지 못하고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젓더니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난폭한 녀석 하나가 공주의 방에 쳐들어오지 않았습니까?" 칼라하스의 얼굴이 더 창백해졌다. 턱이 잠시 경련을 일으키듯 떨렸 다. 아킨이 말했다. "그것이 제 비밀이며, 제가 그토록 오래 암롯사의 그림자 속에서 지 내 와야 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공주 정도 되는 분이라면 그 '병'이 무엇인지 아시리라 믿습니다." 칼라하스는 정말 태어나서 처음으로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그저 아킨의 '병'을 '발작'- 즉, 광증 같은 그런 종류의 것이 라 생각했던 것이다. 몇 번이나 조사를 거듭해도 그 이상은 나오지 않았고, 악튤런마저도 그에 관하여는 '스승과의 약속'을 이유로 들 어 함구했다. 그녀 스스로 알아낸 것이라면 괜찮다. 아킨이 실수로 흘린다거나, 당사자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입으로 듣게 되어도 차라 리 괜찮다. 그런데 아킨은 지금 그 엄청난 이야기를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침착한 칼라하스지만, 이렇게 바로 앞에 확 들이미는 듯한 어법에는 대비한 적도 없었다. 늘 숨기고 뒤로 물러나 재고만 있는 것만이 정상이라 생각했지, 이런 전법이 있다는 것도 쓰는 사람이 있을 거라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그녀다. 이렇게 되면 그녀가 이야기 하 려고 했던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린다. "전...." 아킨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공주, 오늘은 아무 이야기도 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되도 록이면 내일도, 그 후로도 아무 이야기도 하지 말아주셨으면 합 니다.....이해하시겠지요?" 칼라하스는 정말 바보가 되어 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다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루첼은 호위의 말에 따라 아킨이 있는 홀의 입구에 도착했지만, 입구 를 지키던 덩치 큰 여기사에게 막혔다. 루첼은 두 손을 올리며 그녀에게 말했다. "저는 무기 없습니다." "마법사는 그 몸뚱이 자체가 무기입니다." 루첼은 머리를 좀 굴려보았지만, 아무리 굴려 봐도 이 유명한 여기사 를 설득시킬 만한 방도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루첼에게 마하가 말했다. "하지만 마법사, 해를 끼칠 수 없 분과 끼칠 리 없는 분이 이 안에 계십니다. 조용히 놔 드려도 괜찮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럴 줄 알았다고 루첼은 생각했다. 그래도 들어가겠다고 말한다면, 마하의 주먹에 한방 맞을 일밖에 없다. 칼라하스 공주는 다리를 못 쓰고, 아킨은 가끔 앞뒤 안 가리는 일을 벌이곤 했지만 이런 적 진에서 그럴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게다가 칼라하스의 몸가짐이나 말투를 고려해 본다면, 괜히 아킨을 긁어 놓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여기서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성질이 좀 고약한 왕자님 인건 사실이지만 사정 안 봐줄 정도로 매정한 분은 아니니까요." 그러자 마하가 빙그레 웃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마법사." "루첼 그란셔스, 그냥 그란셔스라 부르시면 됩니다." "마하 칸느, 칸느라 부르셔도 됩니다." 루첼은 그녀의 말투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적이라지만 나 중에도 적이 될 거라는 확신은 없는 상대였으니(루첼은 어쨌건 암 롯사 인이 아니었다), 루첼은 마음 놓고 그녀를 호의어린 시선으로 볼 수 있었다. 키는 루첼도 꽤 컸지만 그녀는 정말 컸다. 예전에 만난 베이나트라는 남자도 장신이었는데, 그녀는 그와 거의 맞먹는다. 어투는 조금 어 눌하기는 했지만 말 자체는 아주 조리 있었으며, 눈빛도 예리하다. 나이와는 상관없이 '어른'의 눈빛과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 이 있는데, 루첼이 보기에는 그녀가 바로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런데 마하가 말했다. "나이답지 않게 좋은 눈빛을 가지고 계시는 군요." "네?" "보통 당신 나이의 사람들은 저를 볼 때 자기가 어느 정도는 우월한 입장이라 생각하고 보지요. 하지만 당신은 아니군요. 좋은 눈빛입 니다. 누구나 당신에게 호의를 품을 수 있을 겁니다." 루첼은 피식 웃었다. "당신 같은 분을 앞에 놓고 그런 건방진 짓을 하는 건 바보뿐일 겁니 다." "하지만 그란셔스 군, 세상에는 의외로 바보가 많습니다." "제가 아니면 된 거에요." 그리고 루첼은 이 마하와 예전에 먼발치에서 봤던 세르네긴 포틀러스 에 대한 인상을 비교해보고 말았다. 어딘지 비슷한 데가 있다. 마하가 별로 아름답지 못한데다가 남자 같 은 외모를 가지고 있는 반면에, 세르네긴은 어린 시절에는 난처한 일이 꽤 많았을 듯한 정말 곱상한 용모였다. 그녀는 꽤나 외롭게 살았지만, 세르네긴은 든든한 보호자와 사랑하는 가족이 있다. 그러 나 그렇게 생김이 다르고 살아온 시간들도 분명 극명하게 다를 텐데 도, 그들의 눈빛과 태도가 아주 흡사하게 느껴졌다. 진짜 '기사'다, 이 둘은...... 그런데 마하가 턱을 들더니 홀 안쪽을 돌아보았다. "댁의 왕자께서 나오는 군요." 루첼은 벌써 이야기가 끝났을까 해서 돌아섰다. 그런데 정말 아킨이 어두운 기둥 그림자 사이에서 나타났다. "금방 끝났군요, 왕자." 마하의 말에 아킨은 고개를 들었다.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고, 아마도 앞으로도 하지 않게 될 것입 니다. 그래서 이렇게 나온 겁니다." 순간 마하의 얼굴에 떠오른 난처함을 루첼도 아킨도 놓치지 않았다. 아킨이 말했다. "댁의 공주께서 조금 놀라신 듯하니 진정시켜 주십시오." ************************************************************** 작가잡설: -_- 다모 보느라 늦었습니다;;; p.s 다모 보는 사람의 특징 중 하나는...................다모가 끝 나도 한없이 게시판을 뒤진다;; 는 게지요. 왜 보냐고요? 괜찮은 남자가 둘이나 나옵니다............안 볼 이유 가 없지요~ 흣흣. (제 취향은 윤 나으리지만. ^^)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43장 *************************************************************** [겨울성의 열쇠] 제43장 천둥 치는 밤 제196편 천둥 치는 밤#1 **************************************************************** 암롯사 대공왕의 동생이자, 가장 파란만장한 생을 살고 있는 왕족 중 하나인 테시오스는 갑작스런 사제의 방문에 사태를 어느 정도 짐작 했다. 속으로는 맞지 않기를 바라기는 했지만, 맞지 않을 리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별 수 없이 한 밤중에 달려온 사제의 말에 담담하게 귀를 기울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 가겠소." 준비는 별로 필요 없었다. 어차피 아내와 아들딸들은 여행을 떠나고 없고 혼자만 남아 있었기에 수선피우지 않고 집사에게만 채비를 시켰다. 호위가 필요 없냐고 그가 물었으나 고개를 저었다. 마차를 준비할까요, 물었지만 역시나 필요 없다고 답했다. 그 거리는 말로도 충분하고, 마차를 준비한 다 말을 맨다 하며 시간낭비하고 싶지도 않았다. "폐하께는 말씀 드렸소?" 젊은 사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테시오스 님께만 전하라 하셨습니다." "....그래....." 테시오스는 어머니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집 세고 단호하며, 일단 결정을 보면 옳다고 믿기에 절대 타협하지 않는다. 귀부인으로서, 한 나라의 대공비로서는 정말 이상적인 여인이었다. 그러나 아내로서 는 지나치게 냉정했고, 어머니로서도 너무나 용서도 자비도 없었다. "곧 출발하도록 하지." 달 없고 별 없는 밤하늘은 컴컴하기만 했다. 바람은 거세었고, 온통 습기가 가득해서 진하고 비릿한 흙냄새가 물씬 피어오른다. 비라도 한바탕 거세게 쏟아질 것만 같은 밤이었다. 그리고 그런 무거 운 어둠 속에서, 사제가 타고 온 사원의 늙은 말과, 테시오스의 젊고 힘찬 말은 저택을 빠져나가 암롯사 왕가의 사원으로 향했다. 한참을 달렸다. 낮에는 숲과 수풀에 감싸인 조용한 오솔길이었지만, 밤의 그곳은 어 둠과 침묵 속에서 음험하게 숨죽이고 있었다. 수풀의 탄성이 들리고, 나뭇가지들의 웅성거림이 들리고, 바람의 탄 식이 퍼지는 숲을 달려, 마침내 저 멀리 반짝이는 불빛이 스며 나 왔다. 어느덧 불빛 아래 사원의 조각상과 수풀이 어슴푸레하게 보인다 . 굵은 기둥들이 뼈처럼 하얗게 빛나며 어둠 속에 드러나 있으며, 사원 안에서 퍼져 나오는 빛에 그 그림자들은 밖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 테시오스는 사원의 정원에서부터 말에서 내렸다. 견습사제 한 사람이 나와 두 마리의 말을 마구간으로 데리고 갔고, 늘 만나는 사원의 여사제가 현관에서부터 테시오스를 맞이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 고 눈은 눈물로 가득 차 있었다. 테시오스를 보자마자 눈물을 훔친 그녀는, 흠뻑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 기다리고 계십니다." "늘 감사하오." 이 여사제 마릴라는 어머니가 이곳에서 은둔하던 그 때부터 이 사원 에 있었다. 열다섯이던 테시오스가 탈출하던 그 때 그녀 역시 열다 섯이었고, 이곳으로 숨어들었던 테시오스는 그녀의 도움으로 이레 크트라를 만난 후 곧바로 암롯사를 탈출했다. 그 다음은 '왕자'로 태어나서 할 만한 고생은 아니었지만,'인간' 의 기준으로 본다면 그렇게 힘들지만은 않았다. 인간은 언제나 나름 대로 불행한 것일 뿐이니, 나름대로만 잘 견디어 낸다면 극단적으로 불운하기만 한 건 아닌 것이다. 그리고 10 년 뒤, 루실리아와 결혼 한 형이 그를 불러 들였을 때 반신반의하면서 그는 떠날 때 그랬듯 어머니 이레크트라와 사제 마릴라를 찾아왔다. 그리고 그는 이곳에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게 되었다. 그 어두운 날이 닥쳐오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밝고 화창하기만 했었 다. 그 때의 이레크트라가 도도한 중년의 귀부인이었듯, 마릴라는 조금 우스울 정도로 어른스럽게 굴던 어린 소녀였고, 테시오스는 유머감각 풍부했던 쾌활한 소년이었다. 10여년 뒤, 돌아온 테시오스를 맞이하는 것은 벌써 여자의 나이가 되 어버린 마릴라였고, 늙어버린 어머니였으며, 그들이 맞이해 준 것은 훌쩍 큰데다가 고생으로 서른이 넘은 형과 거의 동년배로 보일 지경이었던 자신이었다. 많은 것이 변하고 낡아가고 익어갔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것이 변했 는데, 이상하게도 그의 형 사이러스는 예전이나 그 때나 전혀 변하지 않았고 지금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녹슬지 않는 강철이자 깎이지 않는 바위, 그리고 잠들지 않는 폭풍- 그것이 바로 그의 형 사 이러스였다. 암롯사 왕가의 큰 아들이었던 사이러스는, 그 두 동생에게 있어 같고 도 다른 의미였다. 막내 동생에게는 높은 산꼭대기에 빛나는 듯 강 하고 위대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다른' 형이었다면, 바로 손아래 동 생에게는 나이차가 얼마 나지 않는 만큼 '목표'이자 '과정' 그 자체였 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그 동생 카시오스로 하여금 반란을 일으 키게 했고, 참혹한 죽음을 맞이하게 했다. 사이러스로 하여금 그 피비린내 물씬 풍기는 대만찬을 열게 하였고, 이레크트라를 그 푸른 탑의 세계에 갖히게 했다. -당신 집안이랑 인연 맺고 싶지는 않다고. 하지만......두고 보라고, 언젠가는 당신 형보다 더 굉장해져 있을 테니. 그 땐 나더러 뭐라고 할 거야, 얼간이 왕자? 나도 그렇게 겁낼 거야? 용병 노릇하던 시절 그의 동료였던 새카맣게 어린 어느 꼬맹이가 그 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그 꼬맹이에게 역시나 말하고 싶다. 이 제국의 대공가들 중에 그렇지 않은 왕가가 몇이나 있을까. 이복형 제끼리는 당연한 것이고, 친형제자매간에도 피를 보는 것이 왕가. 그런데 그게 왜 일 것 같아, 꼬맹아. 그건 말이다, 그것 자체가 힘 근처에서 살게 되는 인간의 본질이자 본능이기 때문이다. 야심과 욕망 앞에서는 말이다, 신중함은 어리 석음이 되고, 무능함이 되고, 경멸받지. 자기 자신에게도 말이다. 그래서 끝없이 잔인해진다. 인간은 누구나 속안에 검고 차갑고 단단 한 괴물을 담고 있고, 그것은 언제나 깨어날 준비를 하고는 이를 드러내고 있어. 차가운 숨을 내 뿜으며 기다리지. 발톱을 세우고 으르렁대면서 그 적을 으깨어버리고 원하는 것을 집어 삼킬 순간을 말이다.... 누구나 그렇고 나 역시 그러하지. 나 역시.....그러나 나는 다른 사람 들 보다 좀 더 냉정하고 신중할 뿐이야. 아니, 냉정하고 신중해진 것이다. 많고 많은 산과 강과 바다를 건너 고 헤치며, 열 다섯 어린 왕자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도와주고 도움 받고 배신하고 배신당하고 이용당하고 이용하여 이렇게 이 자 리까지 서있는 것이니. 테시오스는 어두운 복도를 따르는 굵은 기둥사이를 스쳐지나가고, 매 끄럽고 차가운 바닥을 달려 마침내 그와 형들의 어머니가 있는 방에 도착했다. 그리고 근 이십여 년 간 단 한발자국도 나오지 않은 방 안에, 그의 어머니이자 사이러스의 어머니이며 카시오스의 어머 니이기도 했던 이레크트라가 누워 있었다. 꼿꼿한 고목 같았던 그녀, 그 고집 세던 그녀는 이제 침대에 누워 조 용하고 흐릿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사제는 그녀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전하, 왕자님께서 오셨습니다." 늙고 주름진 어머니의 가느다란 입술이 움찔 움직였다. 테시오스는 자기도 모르게 그녀에게 달려가 그녀의 차갑고 마른 손을 움켜쥐 었다. "어머니-" 연년생으로 낳은 위의 두 아들과는 달리, 이제는 아이가 더 생기지 않을 거라 생각했을 때 낳게 되었던 막내아들이었다. 워낙에 형들 과는 나이차가 많아서 대공왕과 대공비는 그 아들을 무척 귀여워했고 , 벌써 어른이 되어 있던 두 형들도 까맣게 어린 동생에 대해 전 혀 신경 쓰지 않았다. 자유롭고 쾌활하게 컸다. 세상은 온통 반짝이며 신기한 것들 투성이 였으며, 크고 멋진 어른들의 세계였다. 압셀론으로 가서 이것저것 배우며 친구들도 사귀었다. 그리고 '그 해'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본국 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새로 사귄 친구들과 학교 공부 에 대한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았었다. 생각해 보면 당시의 어머니는 벌써 무언가를 예감하고 있었던 듯 했 다. 그녀는 수심에 가득 차 있었고, 막내와 둘째 아들을 모아 놓고는 형제의 우의를 강조하곤 했다. 한숨을 쉬며 차라리 둘 다 여자아 이였더라면, 하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서둘러 압셀론으로 돌아가지 않았던 것은 그런 어머니가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몇 번 이나 그냥 가라고 했지만, 테시오스는 거절했다. 그리고 마침내 작은 형이 반란을 일으켰다. 아버지 다음 가는 남자라 존경했던 큰 형 사이러스는 만찬장에서, 어 머니가 둘째 아들을 맞이하기 위해 성을 나서려하고 막내 아들은 두려움 속에서 그런 어머니를 말리고 있을 때 동생 카시오스를 죽였다 . 결국 어머니의 고집대로 테시오스와 그녀가 만찬장에 도착했을 때 남아 있는 것은 피비린내, 살덩이, 뼛조각과 허연 뇌수들......죽지 않은 자의 비명, 죽지 못한 자의 신음. 시체더미- 그리고 두개골이 반쯤 함몰되어 입을 쩍 벌리고 있던 시신이 눈앞에 있었다. 눈은 튀어나와 살점에 묻혀있고 뇌수가 그 위로 하얗게 쏟 아져 있었다. 어깨와 허리역시 철퇴에 으스러져 뭉개져 있었는데, 손 과 다리는 너무도 선명하게 퍼렇게 굳어 있었다. 어머니가 울부짖고 , 그런 어머니의 눈을 가리고 팔을 잡아끌어 성으로 모시고 갔다. 잔인한 형이 자신을 내버려 둘 리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두려웠다. 그리고 마침내 유모가 달려와 일의 상황에 대해 말했을 때 열다섯 살 난 테시오스는 당장에 도망쳐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천둥이 쳤다. 벼락이 번뜩이고, 온 세상이 사자처럼 울부짖었다. 쿠르릉--! "테오...." 흐릿한 목소리에 테시오스는 젖은 눈으로 늙고 병든 어머니를 보았 다. 아니, 병들었다고 말 할 수도 없다. 그녀는 지금, 이 최후의 순간 직전까지 오롯이 서 있었다. 그녀는 핏빛 노을에 젖은 구름이 몸 부림치는 곳에서 불타는 저녁의 해였다. 결코 병든 것이 아니다....다 만 사라질 뿐이다. 밤과 새벽과 일출과 빛나는 내일을 위해, 그렇 게 사라지는 것이다. 그녀가 말했다. "생각보다는 나쁘지 않구나." 무슨 말을 하는 지 잘 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빛나는 눈 동자는 허공을 향하고 있었으며, 그 초점은 너무도 뚜렷하다. "시간은 돌아오지 않고, 잃은 것은 돌아오지 않고, 나 역시 내가 버린 것은 찾지 않으니.......이렇게 너무도 잘 알겠구나." "어머니-" "쉿, 테오....울어도 내 앞에서는 울지 말아다오. 너를 위해 많이도 가 슴 아팠던 나이니, 마지막만큼은 나를 위해 인내해 다오...웃어다오." 그러나 테시오스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은 이레크트라의 이마를 적셨 다. 테시오스는 그 눈물을 훔쳐내고는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 "알겠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님." 이레크트라가 웃었다. "너는 정말 착한 아들이구나." 형님을 모셔올까요, 하고 물어보려 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그녀는 이 최후의 순간까지 스스로의 고집을 꺾을 사람이 아니며, 형 역시 마지막까지 용서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괴로워할 사람이 아니다. 테시오스는 그런 둘을 너무도 잘 알기에 그 둘에게 아무런 충고도 부 탁도 하지 않기로 했다. 고집 센 사람은 타인의 올바른 충고에도 분노한다. "너에게는.....아무 것도 못 해주었구나. 지켜주지도, 많이 사랑해 주지 도." "어머님은 언제나 제 마음 속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테시오스는 부드럽게 웃었다. 노파의 눈에 행복함과 따스함이 감돌았다. "무능한 어미를 행복하게 해 주는 구나......아들아..." "아닙니다......" 다시 눈물이 후두둑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녀의 마르고 차가운 손이 아들의 눈가를 닦아주고는 툭 떨어졌다. 이제 다시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 손은. "내가 떠나도 너는 지금껏 살아왔던 대로 살겠지...... 그렇지 아들아?" "형의 인생이 그러하듯, 저의 인생역시 이렇게 나아가는 것뿐입니다. 저는 오로지 제 할일을 하며, 해야 할 일을 하며 나갈 뿐입니다..... .그렇기에 아무도 탓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테시오스는 그녀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이레크트라가 말했다. "나 역시 말리지 않으마. 네가 원한다면 그리 가거라.... 용서하라 참 아라 말 하지도 않겠다......자, 가려무나. 네가 원하는 길을, 네가 가야 하는 길을.....그러나 가엾고 외로운 나의 아들아, 너는 또 그 야수같은 것들을 길들이다가 상처입고 위협받겠지....." "어머님." 노파의 마른 손을 쥔 테시오스의 손이 뜨겁게 떨렸다. 그는 통곡이 터질 것만 같았지만, 노파의 목소리는 너무도 조용조용하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강하게 살려무나.....언제나 그러했듯.......그리고..... 테오...부탁......한다.....그...." 목소리는 꺼져 들어가고 숨소리는 잦아들어간다. 손은 이제 얼음장처 럼 차가워지고, 그녀의 눈빛마저 흐려지며 천천히 감기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녀가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마지막 힘을 다해 말했다. ".....그 아이를......" 테시오스는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았다. "알겠습니다." 그리 하겠습니다, 당신과 저를 위해. 그러나 그 마지막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 않아도 그의 어머니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드럽지만 흐 릿한 눈동자로 아들을 보는 저 두 눈은, 기원해 주지도 그리 될 거라 위 로해 주지도 않을 것이다. "사랑합니다, 어머님...." "......." "안녕히......" "......" "부디....안녕히....." 그러나 이레크트라도 더 이상 아무런 말도 없었다. 숨소리도, 손 안에 감돌던 마지막 힘도 사라지고, 테시오스의 젖은 눈을 비추는 이레크트 라의 눈동자는 멎어 있었다. 테시오스는 그녀의 손을 놓고는 반대편 손과 마주잡게 했다. 그리고 그 녀의 눈을 감겨주고, 그 마르고 주름진 이마에 키스했다. 밖에서 기척이 들려왔고, 들어오라 말 하지 않아도 마릴라 사제가 한 손에 안식의 배를 들고 들어왔다. 그녀는 벌써 사제로서 그녀가 모시던 한 귀부인이 세상을 떠난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테시오스가 조용히 말 했다. "준비해 주시오. 형님과.....휘안토스에게는 제가 전하도록 하겠소." 마릴라가 눈물을 훔치고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테시오스는 마지막 눈 물을 닦은 후 그가 맡은 바에 따라 암롯사의 성으로 향했다. ***************************************************************** 작가잡설: 40대 중반의 왕자님...... 세상 모든 왕자가 결혼적령기 인 것도 아니고, 총각인 것도 아니며, 아내가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 죠.........;;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43장 ************************************************************** [겨울성의 열쇠] 제197편 천둥 치는 밤#2 *************************************************************** 휘안토스는 할머니의 소식을 들었을 때 그저 아주 먼 곳이나 전혀 상 관없는 이야기를 듣는 듯한 기분이었다. 동화책 한권을 읽고 있는데 그 안의 등장인물 하나가 죽은 듯, 너무나 무감각하기만 했다. 내게 할머님이 계셨던가. 당연히 계시겠지. 하지만 살아 계셨던가? 그래, 방금 돌아가셨다고 하니, 방금 전까지는 살아 계셨겠지. ".....장례준비를 시작해야겠군요." 휘안토스는 가장 먼저 침묵을 깨고 말했다. 이 상황에서 가장 제 정신인-전혀 상관없는 일 같으니까- 그가 그 런 말을 먼저 꺼내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침묵 속에 있던 사이 러스는 나른하게 말했다. "테시오스, 네게 일임한다. 어머님도 내 손을 빌려 라레스나의 옷 깃 속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으실 거다." "감사합니다." 휘안토스는 그렇게 말하는 숙부를 바라보았다. 일가 중 가장 가까운 사람이 바로 이 숙부였지만, 그렇게 가깝게 닿 아있어도 별로 아는 바가 없다. 아버지는 그를 아주 싫어했고, 그 것은 그가 신경 쓰일 만큼의 인물이라는 뜻이다. 아무것도 아닌 존 재이면, 아버지는 조용히 죽여 버리거나 아예 꼼짝도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 숙부는 둘 중 아무것도 아니기에 이 렇게 내버려 두고 미워하기만 하는 것이다. 사이러스가 물었다. "남기신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없단 말이냐." "하실 말씀이 있으셨다면 형님을 부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게 그 것을 숨길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사이러스는 조용히 한숨을 내 쉬었다. "그래, 믿으마. 나가서 준비나 하도록 해라. 왕으로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빠짐없이 보고하고, 지금은 휘안토스를 데리고 가라." "안 가실 생각이십니까?" "어차피 장례식 때 뵐 것 아닌가. 지금 간다면, 아마 다시 벌떡 일어 나실 지도 모르겠군." 빈정대는 것이 역력했다. 휘안토스는 말없이 숙부의 얼굴과 눈빛을 살폈지만, 그는 이미 다 알고 예상한 듯 담담할 뿐이었다. "알겠습니다. 휘안토스, 가자." "네." 테시오스가 일어나자 휘안토스도 따라 일어났다. 그런데 테시오스가 사이러스에게 말했다. "아킨토스는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그 녀석은 아직 할 일이 남았다." "그래도 빨리 부르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만약에 부르지 않는 다면, 그만큼 아킨토스의 혼담도 어려워집니다." "어째서?" "아무리 그런 공주의 신랑이라도, 본국에서도 그렇게 냉대 받는 왕자 는 달가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들'의 결혼을 추진하고 계신다면, 그 '아들'을 아들로서 대접해 주셔야 합니다." "내가 알아서 하겠다, 테시오스." "현명하신 판단을 하리라 믿습니다." 테시오스는 정중하게 말하고는 돌아섰다. 휘안토스는 그런 숙부와 아버지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다가, 숙부 가 나가자 그의 등을 바라보며 따라 나섰다. 밖으로 나오니 성 안에는 벌써 번잡해져 있었다. 곳곳에 훤하게 불이 밝혀져 있고, 멀리서는 국상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온다. "어머님과는 몇 번 뵙지 못했겠지?" "딱 한 번 뵈었을 뿐입니다." "언제?" "아키가 실종된 직후였습니다. 사원에 어머님 묘소를 참배하러 갔었 는데, 그곳의 사제분이 부르시더군요." 테시오스는 돌아보지 않았고, 휘안토스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 을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테시오스가 물었다. "찾아가 본 적은 없느냐." "그 전에도 몇 번 있었지만 한번도 허락해 주신 적은 없습니다. 그리 고 열 살 이후로는......부탁드리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이해한다...." 역시 휘안토스는 아무 느낌 없다. 할머니를 기억해 보았지만, 색다른 것은 없다. 그 때의 그녀는 그저 낯설고 늙은 여인이었을 뿐이었다. 잘 아는 것도 없고, 잘 알만한 것도 없으니 드는 것은 그냥 그런 무덤덤한 감정들 뿐. 기억에 남는 것은 그저 그 단단하고 고집 센 눈동자뿐이다. 분명 신분 높은 귀부인인데, 그 빛만은 전사보다 더욱 강인하게 빛났다. 그리고 그것이 어딘지 아킨을 생각나게 했 기에 그것'이라도' 기억에 남았던 것이다. "슬퍼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 하지 않겠다. 솔직하게 답해 줘서 차라리 고맙구나." "죄송합니다." "하지만.....돌아가신 분은 나의 어머님이자 너의 할머니이신 분이다. 성의를 보여 다오." "알겠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성의를 보여야 할지 모르겠다. 슬퍼하는 척을 하라는 건지, 냉정하고 무덤덤한 태도 대신 좀 더 가엾어 보이는 태도를 취해달라고 하는 건지. 그런데 어느 것도 이 삼촌이 원할 만한 것은 아닌 듯 하다. 어느덧 비가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쏴아아아아아아-- 하고 쏟아지기 시작했다. 테시오스가 말했다. "빗길 채비를 하라 말해야겠구나." "네." 휘안토스는 그의 뒤를 따르던 시종에게 말했다. "맡기겠다. 준비해 다오." "알겠습니다." 시종이 물러나자 휘안토스는 테시오스에게 말했다. "여기서 잠시 기다려야 될 것 같습니다." 테시오스는 별 말없이 복도에 서서, 그 등을 벽에 기댔다. 휘이...쏴아아- 빗줄기 쏟아지는 소리는 더욱 거세지고, 바람소리가 뒤섞여 더욱 사납게 들려온다. 휘안토스는 가만히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휘안토스에게는 아니지만,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던 여인이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장벽이자 망설임이었던 여인이 세상을 떠 나고, 그녀와 함께 가느다란 생명력을 가지고 흐릿한 숨을 내쉬던 자비심역시 같이 떠나가 버린 것이다. 그리고 휘안토스가 생각하는 것은 아버지의 숙부에 대한 감정이 아 닌, 바로 숙부의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었다. 약해진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숙부에 대해 잘 모르기는 하지 만, 어쨌건 그가 만만치 않을 거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 기분이 오래가지는 않을 테지만, 이런 자신을 문득 발견하게 되면 기묘한 느낌이 든다. 오한이 들듯 오싹하게 찾아와서는 흔적 없이 사라지 는 듯한, 그런 느낌이 든다. 언제 이런 걸 느꼈을까.....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자케노스가 찾아 와서 아버지에게 칼을 들이댔을 때, 아킨이 예상과는 전혀 다른 존 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리고 그것들 보다 더욱 충격적이었 던 것은, 아마도 세르네긴의 창날이 목덜미에 닿았을 때...... 앞에 있는 휘안토스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무관심하게 바라보는 유 리알 같은 눈동자--그리고 그 눈동자와 같은 온도를 가진 창날- 그 순간 안에서 무언가가 금이 갔다. 그렇게 벌어진 틈을 메울 수 없 기에 영영 잊지 못하게 될 것 같았다. 무엇으로도 그 앞에 있는 남 자를 정복할 수도 없고 파괴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이, 그리고 그런 사람이 바로 코앞에서 그를 무관심하게 보고 있다는 것이. 문득 그 소녀가 생각난다. 이름이 뭐였더라.....그래, 유제니아였다. 한 달 동안 단 한번도 생각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지금 이 어둡게 으르렁거리는 하늘과 침묵하는 대지사이에서 생각난다. 어두운 숲 속에서 길을 잃은 채 땀과 눈물에 젖은 얼굴과, 불길 치솟 는 복도에 지저분한 모습으로 서 있을 때의 그 얼굴이 생각난다. 그를 '처음' 보는 순간에 놀라던, 그러나 휘안토스에게 복종하기를 완강하게 거부하던 그 얼굴이 생각난다. 그에게 짓눌린 채 애걸하던 얼굴과, 결국에는 송두리째 빼앗기고 짓밟히고 난 후에 충격에 얼 어붙어 있던 그 얼굴이 생각난다.... 그리고 햇살 쏟아지던 그날에, 그를 바라보며 도망치지도 못한 채 서 있던 그 얼굴이 생각난다. 왜 지금 생각나는 걸까. 모르겠다. 그런데 그냥 생각난다.......계속 눈앞에 어른거린다. 순간 휘안토스는 빗줄기가 세차게 때리는 복도의 창 너머 깜깜했던 밖이 빛에 확 들이차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을 때 쿠르릉---! 천둥이 울리고 창문이 부르르 떨린다. 잠시 뒤 시종장이 채비가 다 되었다고 알리기 위해 달려왔고, 휘안토 스는 불청객처럼 찾아온 예전의 기억을 떨치며 빗줄기 쏟아지는 길을 나섰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기억은 천에 깊이 배어든 잉크 얼 룩처럼 도무지 지워지지 않았다. **************************************************************** 작가잡설: 이제 추석이네요;; 한편 더 올리고 본가에 내려갈 지... 다음 편은 다음 주에 올리게 될 지 모르겠습니다. --;;;;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43장 *************************************************************** [겨울성의 열쇠] 제198회 천둥 치는 밤#3 **************************************************************** 잊혀졌던 사람이 살아있었다는 것을 '아아...' 하며 확인하게 되는 것 은 역설적이게도 죽음이다. 이레크트라의 소식은 빠르게 사방으로 전해졌고, 암롯사의 시민들은 그저 약간의 조의를 표하고, '그런 분이 계셨단다.' 하며 갑작스런 국상을 이해 못하는 아이들에게 설명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오래된 이야기였다. 카시오스 왕자사건을 분명하게 기억하던 이는 늙어가고 있었고, 멍하니 듣기만 하던 아이들도 벌써 자라나 각자의 아이들을 낳고 키우고는 있었지만 그들이 기억하는 것은 어린시절의 기억이 늘 그렇듯 윤색되고 변질되어 있었다. 그래도 고귀하지만 슬픈 자의, 그러나 오랫동안 잊혀졌던 자의 죽음 은 평범한 사람의 동정을 받는다. 옛것은 언제나 좋았던 시절의 그 것이고, 그것은 누구나 아련한 슬픔과 함께 떠나보내야 하는 것이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며, 언제나 손을 떠나게 마련이니. 델 카타롯사로 그 소식이 전해진 것은 물론 다음날이었다. 그 나라에 있는 사람들 중 가장 먼저 소식을 받은 것은 암롯사의 사절의 대표로 있는 마법사 세루비아나였고, 그녀는 받는 즉시 왕자인 아킨에게 알렸다.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 아킨은 그녀에게 그 소식을 듣자 그렇게 담담하게 답했다. "아버님께서는 뭐라 말씀하십니까?" 세루비아나는 쌀쌀맞게 말했다. "혼담에 대한 이야기를 완전하게 끝낸 후에 돌아오라 하셨습니다." ".......알겠습니다." 당장 돌아오지는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아킨은 제발 그 말이 델 카 타롯사 쪽으로는 들어가지 않기를 바랬다. 이런 식으로 냉대를 받는 다면 너무도 당연하게 델 카타롯사의 칼리토 왕에게 무시당하게 된다. 가장 가까운 자로부터도 무시당하는 자가, 전혀 상관없는 타인으로부터 인간대접을 받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다. 아니, 지금 이 델 카타롯사의 사람들은 조금만 틈이 보여도 이를 들이대고는 갈 기갈기 찢어놓을 적중의 적이다. "세루비아나 경, 사절 모두를 채비시켜 주십시오." "무슨 채비말씀이십니까?" "곧 암롯사로 돌아갈 수 있는 채비 말입니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경은 그렇게만 해 주십시오." "하지만 폐하께서 분명 명령하셨습니다." 아킨은 그녀의 태도가 침착한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라리 그건 안 된다며 펄펄 뛰는 편이 좋을 텐데, 마르실리오와 남매라도 되는 지 비슷한 반응만 보인다. "제가 명령합니다." "폐하의 명령이 우선입니다." "아버님의 명령을 어기지는 않을 테니, 저를 믿어주시길 바랍니다." "왕자님-"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 어투였다. 책망하고 어르는 듯한 엄격한 어조 라니. 휘안토스에게도 저러나, 새삼 궁금해진다. "세루비아나 경, 저는 당신이 모시는 왕의 아들이며, 여기까지 아버님 을 대신해서 왔습니다. 당신이 그런 태도를 보여주신다면 저로서는 매우 불쾌합니다." "공적인 일이 우선입니다. 조금 불편하시더라도 책망은 뒤로 미루어 두시길 바랍니다." 아킨은 이제 짜증이 났다. "이렇게 우리 둘이 삐걱댄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혼담자 체는 제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한 칼리토 왕이 먼저 나설 리 없고, 당신이 제 부탁을 들어주시지 않는 다면 저는 적극적인 의욕 이 들지 않을 겁니다." "그런 식으로 나오신다면 제가 곤란해요." "당신 역시 저를 곤란하게 했습니다. 떠나기 직전까지는 모든 것을 마칠 테니, 지금은 제가 요구하는 대로만 해 주십시오." 이렇게 나오자, 세루비아나의 태도도 조금 누그러졌다. ".....좋습니다. 단, 책임지시고 제대로 해 주시면 좋겠군요." 그러나 냉담한 눈빛을 보니 네가 할 수는 있겠냐, 하는 기색이 역력 하다. 아킨은 이제는 아주 언짢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신 경도 쓰지 않기로 했다. 아버지와 휘안토스가 저런 사람을 붙여 놓은 이유를 짐작 못하는 것 은 아니다. 하지만 잘 아는 만큼 그 뜻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딱딱거리는 세루비아나를 보낸 후, 아킨은 곧장 카티온 궁에 소속된 시종 하나를 불러 어디론가로 보냈다. 그리고 루첼을 찾아갔다. "어라, 네가 웬 일이냐." 루첼은 자기 방에서 책을 보고 있다가, 노크도 없이 쳐들어 온 아킨 을 맞이했다. 셔츠에 바지만 걸치고는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보니, 왠지 작년의 그날로 돌아간 것만 같아서 아킨은 마음이 편해졌다 . 또, 그것이 겨우 작년이란 생각을 하니 조금 어이가 없기도 하다. 그토록 많은 일이 있었는데 고작 1년이고, 그렇게 많이 변한 것 같은 데 열 일곱이던 아킨은 겨우 열 여덟이 되어 있을 뿐이다. "할 말이 있어서." "어깨너머로 들었다. 네 할머니 일 때문에?" "그래. 세루비아나가 모든 일행에게 출발준비를 일렀다. 잠시 뒤에 칼 리토 대공왕에게 알릴 생각이야." "네 아버지가 돌아오라든?" "설마." 루첼이 웃어버렸다. 그러나 놀라거나 화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는 벌써 사이러스 대공왕과 휘안토스을 '정상적인 아버지와 형'의 기 준으로 생각하는 것을 아예 포기했고, 그 덕에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으니 실망할 일도 없었다(시험되는 것은 오로지 루첼의 상상력 뿐이었다). "그렇다면....돌아가자고 명령한 것은 네 자의라는 뜻이군. 그런데 뭐 때문에 그렇게 한 거지?" "나중에 가르쳐 줄게." 루첼은 눈을 찌푸렸다. "네가 그런 식으로 나오면 언제나 사고치고 있는 중이었다는 거, 기 억은 하고 있냐?" "내가 언제 그랬어?" "내가 너를 체놀비로 데리고 갔을 때, 그 다음 그 휘안토스를 불러 내 문제를 처리했을 때, 그 다음 켈브리안 공주의 일이 있었을 때,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을 때....등등. 나중에 알려 줄게- 라고 말하고, 내가 그 답을 기다릴 때면 물어볼 시간도 없이 일이 터지더 군." "그걸 일일이 다 기억하고 있었나." "기억 못하면 그게 더 이상한 거야." 그러데 그 때 아킨이 방금 전에 명령을 내렸던 시종이 돌아왔다. 아 마도 아킨을 찾아왔다가, 아킨이 이곳으로 갔다는 말을 듣고 찾아온 듯 했다. 이마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고, 창백한 얼굴로 그 피를 손수건으로 막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죄송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공주님을 찾아뵈러 갔지만, 그 곳에 악튤 런 파노제 님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악튤런 파노제를 만날 거라는 것은 전혀 예상 못했기에 아킨은 웃음이 조금 나왔다. 어이가 없어서 나오는 쓴 웃음이었다(솔직히 말하자면 벌써 돌아다닐 정도로 멀쩡해진 데 놀란 것뿐이었다). 그런데 시종은 난처한 얼굴로 아킨의 안색을 살피더니 힘없이 말했 다. "지금 당장 모시고 오라 하셨습니다." "당장?" ".......네에...." 아킨은 조금 얼빠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건가? 그렇다. 오라고, 시종을 시켜서, '명령'하고 있다. 신분가지고 으스 대는 것을 즐기는 취미는 없지만, 이건 그런 종류의 너그러움으로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누가 그리 말하던가. 악튤런이? 아니면 칼라하스 공주께서?" ".......악튤런.....님께서.....저기...그....." 어린 시종의 목소리는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다 기어들어가고 있었 다. 루첼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켰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 거냐, 아키?" "별 것 아니다.....그래, 같이 가자." "뭐?" 아킨은 반쯤 체념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가자고. 미안하지만 제대로 믿을 수 있는 건 너 밖에 없다. 그 러니....이번에도 지켜봐줘." 솔직히 말하자면 세루비아나를 데리고 가는 것이 정석이었지만, 방금 전에 그렇게 노골적인 반응을 보인 그녀를 데리고 갔다가는 그녀에 대해 신경 쓰느라 할 일도 제대로 못할 것 같았다. 눈치 빠른 루 첼이라면 아마도 요령껏 상황을 파악해 줄 것이며, 악튤런 파노제에 게는 절대천적이니 그를 다루기도 잘 할 것이다. "알겠다, 공주님." ".......한번만 더 그렇게 부르면 너부터 쫓아내 버리겠다." "......" **************************************************************** 작가잡설: 다모가 끝났습니다............후우. 아아, 매정한 작가분. 그래도 우리 채옥이는 좀 살려 주시지. ;; p.s 원해 씨는 미혼이었습니다. -_-;;;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43장 **************************************************************** [겨울성의 열쇠] 제199편 천둥 치는 밤#4 **************************************************************** 칼라하스는 마하의 난감한 눈초리와 그래서 어쩔거냐는 듯 그런 마하 를 노려보는 악튤런 사이에서 난처한 입장이 되어 버렸다. "대체 왜 그랬지요, 악튤런?" "그 자식 하는 게 시건방져서." "그는 명령을 받고 온 것일 뿐이고, 우리나라 사람이에요. 게다가 아 킨토스 왕자는 오늘 밤에 만나 뵐 수 있냐고만 물었을 뿐, 저더러 오라고 한 건 아니에요." "자기가 뭔데 만나자 말자 합니까!" "파노제 님, 그 분은 지금 청혼자로서 이곳에 계시는 것입니다." 마하였다. 악튤런의 눈동자에서는 벼락이라도 치는 듯 했지만 마하는 차분하게 말했다. "예의는 지켜 주십시오. 당신의 행동 하나 하나가 오히려 공주님께 누가 되고 있습니다." "마하....너무 심하게 하지 마." 칼라하스가 부드럽게 달랬지만 마하의 눈은 여전히 조용한 분노로 채 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어린 아이 훈계하듯 엄격하게 말했다. "그는 아마도 전대 대공비 전하의 일로 만나 뵙고자 하시는 걸 겁니 다. 그리고 그것은 악튤런 님께서 화를 낼 일도 아니고, 그분께서 직접 찾아 와 그에 대한 말씀을 나누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무 례이며 '건방진' 일입니다." "......." 악튤런이 결국 입을 다물었다. 날카로운 눈은 반쯤 분노와 증오에, 그리고 나머지 반은 부끄러움으로 채워졌다. 칼라하스가 물었다. "그런데 대체 왜 그렇게 화를 내시는 거죠, 악튤런 님?" "그는 사이러스의 아들입니다." "그것은 제가 화를 낼 이지, 당신이 화 낼 일은 아니에요." "그래서 화를 내는 겁니다!" 칼라하스 공주의 눈이 당혹함에 흔들렸다. 그녀의 난처한 기색을 알아챈 악튤런은 결국 버티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런 악튤런을 눈으로만 계속 쫓으며 칼라하스 공주는 그가 조금만 더 설명해주기를 바랬다. 그러나 악튤런은 말하지 않았고 , 더 말할 시간도 없이 시녀가 아킨의 도착을 알려왔다. 악튤런이 입술을 짓누르며 고개를 돌렸다. 아킨은 응접실에 들어오게 되자, 왠지 험악하게 얼굴 들이미는 두 사 람과 난처한 중재자가 있는 곳으로 들어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마하는 정중하게 인사하기는 했지만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고, 아직도 터진 입술이 아물지 않은 악튤런은 그런 마하를 대체 왜 인 사하냐는 듯 쏘아보고는 퉁명스레 아킨을 바라보기만 했을 뿐이었다 . 칼라하스는 그런 둘을 나른히 한숨을 내 쉬며 바라보고는, 들어 온 아킨에게 미소를 보냈다. "어서 오세요, 왕자." 그러며 그녀는 하얀 손을 내밀었다. 아킨은 그 손에 가볍게 키스하고 는 손을 뗐다. "제 본국의 소식은 이미 들으셨을 것으로 압니다." "압니다....정말 안 되셨어요." 그렇게 말하고는 칼라하스는 정말 다정하게 아킨의 손위에 자신의 손 을 가져갔다. 예상하지 못했던 부드러움에 아킨은 조금 당황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킨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성급하다고는 생각하지만.......제 사정은 이 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괜찮아요....말씀하세요." "이번 주 내로 암롯사로 돌아갔으면 합니다....그래서 청혼에 대한 답 은 되도록 빠르고 확실하게 듣고 싶습니다." 악튤런의 눈이 다시 사나워졌다. 칼라하스도 의외의 말- 아니, 정확 히 말하자면 이 일이 이렇게나 빨리 이야기 되어야 하는 데에 놀 랐다. "다른 길이 아닌, 제 할머님을 보내드리는 길입니다. 되도록 좋은 소 식과 함께 가고 싶은 것이 제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렇게 말한 아킨은 이 자리에 루첼이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루첼은 입구에서 저지되어 버렸다) 아마도 들었다면 당연하게 어, 어허...하고 심술 사납게 웃어댔을 테지.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정상이었냐? 하고. "거절을 하시든 승낙을 하시든 확실하게 해 주십시오." "하지만 너무 갑작스럽군요. 저는 왕자에 대해 전혀 모르고, 이런 상 황에서는 거절도 승낙도 경솔한 판단이 될 거에요." "가장 중요한 말씀은 드렸습니다. 비록 거절이라 할지라도, 공주님을 원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말- 즉, 저주에 대한 말이다. 알아챈 듯 공주의 하얀 얼 굴이 더 해쓱해졌다. 거절하든 말든..... 아킨은 별로 기대도 하지 않고 있었다. 세루비아나가 말한 것은 분명 '혼담을 분명히 하고' 오라는 것이지, '성사'까지 시키라는 말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일이 꼬이면 아킨은 그 얄밉게 굴었던 세루비아나에게 모두 뒤집어씌울 생각이었다. 어쨌건 대표는 아킨이라도 실질적인 '책임자'는 그녀 였으니까. 칼라하스가 눈을 내리깔며 물었다. "거절한다면 어떻게 하시겠나요?" "괜찮습니다." "승낙한다면..." "역시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 때는 공주께서 저와 함께 가셔야 합니 다." 악튤런이 드디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칼라하스는 그를 주의어린 시선으로 달래고는 다시 아킨에게 말했다. "같이 가야 한다는 건 무슨 뜻이지요, 왕자?" "암롯사 까지 같이 가야 한다는 말은 물론 아닙니다. 하지만, 결혼 준 비를 위해 떠나는 신랑을 배웅하는 것은 신부의 의무가 아닙니까. 적어도 혼사가 성사되었으며, 그 약속이 분명 지켜지리라는 것을 제대로 알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델 카타롯사 쪽에서 아킨에게 손댈 수 없도록, 아예 공주를 국경까지 끌고 가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배로가든 육지로 가든, 공주가 있는 이상 아킨의 암롯사 일행은 손도 댈 수 없게 되는 것이 델 카타롯사다. 물론 거절당하게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그 때는 아킨을 손댈 이유 자체가 없어지므로 역시 위험부담이 적어진 다. 이유 없이 왕족을 손대는 것은, 양국 관계를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만드는 일이 된다. 칼라하스는 잠시 생각하는 듯 차분하게 있더니 작게 말했다. "좀 더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어요, 왕자?" "알겠습니다. 그러나 대신 되도록 빨리 답을 해 주시길 바랍니다." "물론이죠. 오라버님과 이야기를 나눈 후에 말씀드리겠어요." 아킨은 이야기가 꽤나 진부하게 돌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 주시 겠나요, 네. 그리고 정말 할지 하지 않을 지는 신만이 안다. 벌써 진절머리 나기 시작하는 아킨은 슬슬 일어날 준비를 하려 했다. 그런 데 칼라하스가 말했다. "잠시만 단 둘이서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왕자?"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아킨은 약간 당황했다. "지금 말입니까?" "네." 악튤런의 눈이 험악해졌다. 아킨은 그 사나운 눈초리를 등 뒤로 느끼 며 나른히 한숨을 내 쉬어야 했다. 게다가 마하는 아예 움직일 기 색도 없었는데, 칼라하스가 그녀의 손에 손을 얹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 마하가 당혹해 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 악튤런은 버텨 보려고 했지만, 마하가 나가며 문을 가리키자 자신 역시 '당연하게' 나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별 수 없이 그녀 를 따라나섰다. 아킨은 루첼이 그와 한바탕 해 주기를 기대하며 그 의 등을 바라보았다(물론 마하가 있으니 불가능할 테지만). 그렇게 모두가 나가고, 아킨과 칼라하스는 다시 단 둘이 남게 되었 다. 아킨은 그녀의 손이 머뭇 머뭇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다.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불안해하지는 않아요, 왕자. 단지......." "네. 말씀하십시오." "지난밤에 제대로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저도 당황했었거든요......그 러니 지금 말씀드립니다." 아킨은 잠자코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무슨 말을 할지는 예상이 되었 지만 내색하지 않았고, 그랬기에 그녀가 어떤 식으로 그 말을 꺼내든 놀라지 않을 생각이었다. "저희는 당신을 도와드릴 수 있어요." "......어떤 도움 말씀이십니까." "당신이 암롯사에서 어떤 위치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 위치를 전혀 다르게 바꿀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다는 말이에요." 역시- 숙부의 말이 맞는 것 같다. 아킨은 막 생각했던 말을 하려 했지만, 칼라하스 공주가 먼저 그 차가운 눈을 빛내며 속삭였다. "저희는 당신의 숙부이신 테시오스 왕자님에게도 같은 말씀을 드렸습 니다." 놀라지 않았다면 정말 그건 허세였다. 아킨은 진심으로 놀랐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당황하기까지 했다. 아마도 얼굴도 꽤 뻣 뻣해져 있을 것이다. 처음으로 아킨이 '예상'했던 반응을 보이자 칼 라하스 공주는 빙그레 웃었다. "당신만 말씀을 분명하게 해 주신다면 저희는 당신을 위해 최선을 다 할 것입니다." 갑자기 오싹해졌다. "......어째서입니까." "물론, 이건 당신을 위한 일만은 아니에요. 그런 말에 당신이 속아 넘 어가리라고는 생각지 않으니까. 그저, 저희는 사이러스 대공왕은 물론, 그와 비슷할 것임에 분명한 휘안토스가 그 뒤를 잇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에요." "그렇다면, 숙부님께서는 뭐라 말씀하셨습니까." "분명하게 답하셨습니다. 당신의 선택에 따를 것이며, 당신이 무엇을 선택하든 최대한 도울 것이라고." "......." 아킨은 나른하게 한숨을 내 쉬고 말았다. 이런 식으로 일이 돌아갈 줄은 전혀 몰랐다. 그리고 떠나오기 전에 테시오스와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이런 제안을 벌써 받았음에 분 명한 그가 대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짐작해 보려 노력했다. 감이 잡히기 시작한 것은 조금 뒤였다. 하지만 제대로 판단한 것인지 확신하기는 어려웠다. "제가 승낙한다면 어쩌실 겁니까." "저와의 결혼이 성사되며, 그 결혼을 담보하여 저희는 모든 조력을 드릴 것입니다." "거절한다면?" "예상하시는 모든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지만 왕자, 양국을 위해서 는 이 편이 나을 거에요. 사이러스와 휘안토스는 전쟁과 살육만을 부를 테지만, 제 제안은 분명 양국의 평화를 가지고 올 테니까." "평화....말입니까?" 칼라하스는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미소에는 승리감이 차오르고 있었다. "왕자, 지금 전쟁을 바라는 건 암롯사 뿐이에요. 최소의 피로 평화를 살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게 좋지 않나요?" "지금 저더러 제 아버지를 죽이고 형을 몰아내라 말씀하시는 겁니 까?" 그를 보는 칼라하스의 눈빛은 찬란했다. 아킨은 그런 그녀의 눈을 바 라보며, 조용히 되물었다. "평화를 위해?" "네, 사이러스 대공왕이 없는 평화를 위해." 평화- 그런데 그 기만적인 단어가 떠오르는 순간에 환상은 깨지고 기대는 무너지고 가장 단단하고 중요한 현실만이 중요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가 성급하게도 '사이러스'를 내거는 순간에 아킨과 칼라 하스가 나눌 수 있었던 모든 타협도 끝나버렸다. 몽상을 이야기하 면서, 너무나 무겁고 차가운 현실을, 손에 닿고 볼에 느껴지는 그런 현실을 이야기 해 버리면 꿈은 쉽게도 깨어진다. 바보-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고 말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순간적으로 기대를 했던 것 같았고, 아마도 '정말 그렇게 된다면-' 하고 조금 들뜨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 마지막 말이 아킨을 현실로 돌려놓았고, 이 앞의 칼라하스 공주가 적이자 타 인이라는 것을 다시 깨닫게 했다. 현실은 차갑고 냉정하며 이기적이다. '아킨을 위해'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이곳에는 없다. 아니, 이자들이야 말로 모든 사냥이 끝나면 아킨을 포식할 자들이다. 아는지 모르는 지 칼라하스가 더욱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현명한 선택을 해 주세요. 유폐되고 핍박받았던 과거를 보답 받고, 두 나라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길이 될 테니. 모두가 행복해 질 수 있어요." ".....공주-" 칼라하스 공주가 그의 말을 기다렸다. 아킨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의 손을 잡아 그 손등에 키스했다. 칼라하스는 이제 그가 승낙을 하기만을 기대하고 있었다. 무릎을 꿇고 감사와 맹세를 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킨은 이제 들뜨지도 열기에 차지도 않았으며, 오로지 냉정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을 할 준비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저에 대해 정말 모르시는 군요." "그저 당신의 병 때문이라면 괜찮아요. 악튤런이 말해 주었어요. 은봉 인이 있는 이상 더 문제될 게 없다고." "공주, 저는 그 이야기를 하게 되면 당신들이 결코 '그런 제안'을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렇게 이야기를 꺼내시는 것을 보니, 그것을 별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생각하는 게 아니라 단지 조급해 하시는 듯 하군요." "왕자!" "칼라하스 공주, 지금은 결혼에 대한 답만을 듣겠습니다. 그 외에는 어떤 것도 받지도, 거절하지도 않겠습니다. 그리 알아주십시오." 칼라하스의 눈빛이 뜨거워졌다. 모멸감에 어깨가 가만히 떨리고 있었다. "거절인가요?" "거절합니다. 그리고 제가 그 말을 제 아버님께 전할 정도로 아버님 과의 사이가 돈독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십시오." 몸을 일으키려는 아킨의 옷깃을 칼라하스 공주가 붙잡았다. 보통 공주 라면 그런 무례를 저지르지 않았을 테지만, 다리가 불편한 그녀에게 아킨을 붙잡을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아킨은 뿌리치지 않은 채, 그의 옷자락을 움켜쥔 그녀의 손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칼라하스가 말했다. "어째서죠? 대체 왜 거절하시는 건가요." "당신과 당신의 마법사 악튤런은 '성배'를 찾기 위해 제가 있는 곳까지 왔습니다. 또한, 슈마허 쉐플런을 끌어들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했습니다. 이런 마당에 당신들이 진심으로 평화를 바란다 는 것은 믿기 어렵지요. 또, 일이 끝난 뒤에 저를 어떻게 하실지 예상 하기 어렵지도 않고요." 칼라하스는 당황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목 소리에는 이미 떨림이 얹혀 있었다. "바라지 않는 건가요? 당신의 형과 아버지가 가진 것을 당신이 가질 수 있는 기회인데 고작 저희들의 입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러 는 거에요? 왕자, 그 어떤 이도 당신이 원하는 정도로 순수하게 당신 을 돕지 않아요......사람들이 오로지 당신에게 좋은 목적만을 위해 살지 않는 다는 것을 당신도 잘 알지 않습니까....이게 현실이에요!" "압니다. 하지만 어떤 현실이든, 당신들이 저를 희생시키려는 것도 현실이라 납득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올라서고 싶지 않아요? 복수하고 싶지 않냐고요!" "그것은 당신이 흥분할 문제가 아닙니다. 당신이 예상했던 대로 일 이 되지 않는 다고 조급해 하지 마십시오." 칼라하스 공주의 눈이 커졌다. 아킨이 말했다. "지금 제가 듣고 싶은 말은 단 하나, 저와 결혼을 하실지 하지 않 으실지.....그것뿐입니다." "......" 그녀가 아무 말도 없자, 아킨은 그녀의 손등을 가만히 두드려 주고 는 몸을 일으켰다. "내일 아침까지 기다리겠습니다. 답해주시지 않는 다 할 지라도, 저 는 제 할머님의 장례를 위해 곧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칼라하스 공주는 떨리는 목소리로 목구멍에까지 다가왔던 말을 해버렸다. "당신은....겁쟁이이군요." "부인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 역시 어리석은 건 마찬가지 입 니다." "....." "공주, 제 아버지와 제 형에게 복수하는 것 말고도 제게 중요한 일은 많습니다. 그리고 그 일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서 다른 이의 것을 빼앗을 생각도, 그들이 책임지고 있는 것을 대신 짊어질 생각도 없습 니다. 또한 지금의 제 위치와 힘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기에, 강하고 흉포한 주인이 사라진 직후에 저부터 갈기갈기 찢어 놓을 자들을 집안 으로 끌어 들이는 바보가 될 생각 역시 없습니다......그러니 더 이 상 제게 그런 제안은 하지 마십시오. 제 결정은 이곳으로 오기 전에 끝나 있었으니까요." **************************************************************** 작가잡설: 추석 전에 두 편 더 올리고 본가로 갑니다. 즐거운 추석 되세요. ^^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43장 ************************************************************** [겨울성의 열쇠] 제200편 천둥 치는 밤#5 *************************************************************** 아킨이 나가고 혼자 남아, 칼라하스는 지금 자신이 당한 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거절당했어. 당연히 승낙할 거라 생각하고 있었고, 그 당연한 과정 뒤에 할 일만 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가장 기본적인 것이 틀어졌으니, 그 뒤에 공들여 세워놓았던 모든 것이 무너지려 하고 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아니, 포기해서도 안 된다. 모든 불행의 원천, 그 모든 악연-- 그것을 당장에 끝장내고 승리할 수 있을 기회였는데. 아니, 그 기회가 지금 내 손에 있는데 포기할 수는 없어! 어머니를 희생시키고, 아버지를 죄인으로 만들고, 오빠를 그 많은 위 험에 처하게 만들고, 내 몸도 이 꼴로 만든 그 남자에게 복수할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승리'할 수 있는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묵직한 발걸음이 안으로 한 걸음 들어오 는 소리가 들린다. 칼라하스는 실패한 지금 그녀 앞에서 너무나 작 아지고 비참해 지는 자신을 느꼈다. "혼자 있게 해 줘, 마하." "알겠습니다." "아냐, 그대로 있어줘.....미안." "알겠습니다." 마하는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벌써 알고 있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녀는 애당초 아킨이 이곳으로 온다고 할 때부터 예상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칼라하스는 눈물이라도 나올 것 같았다. 늘 침착하게 살려고 했지만, 마하만 옆에 있으면 이렇게나 약해져 버린다. 악튤런이나 오빠만 옆에 있었어도 이렇게 약한 모습은 보이지 않을 텐데, 마하만 옆에 있으면 그녀의 손을 붙들고 울면서 어쩌면 좋겠냐고 물어보고 싶어 지는 것이다. 그런데 마하가 말했다. "왕자를 따라가십시오." 마하의 말에 칼라하스는 젖은 눈을 들었다. 마하는 가까이 오지 않으 며 부드럽게 말했다. "공주님, 다시 말씀드립니다. 국경까지 그 왕자를 따라가십시오. 단, 육로를 택하셔야 합니다." "정말 그와 결혼이라도 하란 말이야?" 마지막 한마디는 떨리고 말았다. 그리고 칼라하스는 다시 그녀를 외 면했다. 마하가 어떤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을지 안다. 얼마나 동정어린 눈으 로, 얼마나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을까. 그런데 다른 사람이 그렇게 바라보면 비참할 텐데도, 그녀가 그렇게 해 준다면 그 품에 안겨 버리고 싶어진다. 위로해 달라고, 도와달라고 말해 버리고 싶어진다. 마하가 말했다. "그리고 암롯사의 아킨토스 왕자가 출발하는 즉시, 또는 오늘 당장 암롯사 쪽으로 정보를 넣도록 하십시오. 테시오스 왕자에 대한 일을. 단, 우리가 흘렸다는 표시는 나지 않도록- 아시겠지요?" 칼라하스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어느 새 다가온 마하의 손 이 그런 그녀의 손위에 얹혔다. "그렇게 되면 공주께서는 결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원하는 만큼 얻 지는 못해도, 아예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허무한 결과는 없을 것입 니다...." "아킨토스 왕자를 한 번 더 설득하면?" 마하가 한숨을 내 쉬었다. "공주님, 공주님께서는 이제 더 확인할 수도 없을 정도로 저 왕자에 대해 확인했습니다. 그는 결코 공주님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갑자기 칼라하스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 겁쟁이였어, 그는!" "분노 때문에 진실을 외면하려 하지 마세요. 그것은 무지한 것보다 더 위험한 거니까요.....그는 겁쟁이인 것이 아닙니다. 공주님의 제 안을 덥석 받아들일 정도로 어리석지는 못했던 것뿐입니다." "아냐, 그냥 겁쟁이인 거야! 왜 받아들이지 않는 거지? 위험을 무릅 쓰는 것보다는 아버지와 형에게 짓눌려서 외면 받는 것이 더 좋다는 거야? 한번 도전해 보지도 못할 정도로 그 사이러스와 휘안토스가 대단해? 대단하냐고!" "현재 사이러스는 암롯사의 모든 전력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휘안토스는 단 한번도 그 위치가 흔들렸던 적이 없는 후계자. 테시 오스 왕자는 사병을 모을 수 있는 능력은 있으나, 그것은 암롯사 밖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또한 아킨토스 왕자는 존재조차 지워져 있던 왕자. 지금 당장 나타난다면 암롯사 안의 그 누구도 바보가 아닌 이상 지지해 주지 않을 것입니다......결국 의지해야 하는 것은 델 카타롯사 뿐이죠." "도와주겠다잖아!" "적의 적을 이용하는 것은 현명하지만, 그 적의 손에 잡혀서 자신의 적을 치는 것은 바보짓입니다. 적을 쓰러뜨리면 당장에 버려버릴 것이 뻔하니까요." "그 때는 자기가 알아서 하면 되잖아." "그리고 위험할 테고, 그는 그 위험을 감수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대체 왜 가치가 없다는 거지? 대체 왜--!" "사람마다 기준은 틀립니다. 공주님께서는 그 다른 기준 자체를 이해 못하시는 거고요." 칼라하스는 침묵했다. 안다, 안다고. 그 고집스러운 말이 머릿속에서 빙글 빙글 돌며 그녀 를 괴롭혔다. 방금 전 그녀를 싸늘하게 바라보던 그 눈동자가 계속 내리박혀 왔고, 그녀 자신이 '패했다'는 사실은 부정하려 하면 할수 록 분명해졌다. 마하가 그런 그녀의 손을 힘주어 잡아 달래주며 말했다. "사랑하는 공주님, 제가 바라는 것은 공주님의 행복입니다. 좀 더 현 명해 지셨을 때도 후회하지 않을 그런 행복 말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충고 드립니다. 기적은 매우 드물게 일어나는 것이며 당연한 결과 는 언제나 일어나는 일이라고. 지금 델 카타롯사가 암롯사의 사이러 스를 이기는 것은 바로 그 기적에 해당되는 일입니다." "악튤런이 있는데도?" "베넬리아의 롤레인이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제자인 루첼 그란셔 스를 암롯사로 보냈으며, 심지어 사절에도 포함되었습니다. 마법사 들의 율법을 아시잖습니까. 그 어떤 것도 사제간의 신의와 보호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 "차분히 생각하십시오. 이번 일은 기회가 아닙니다......이것은 공주님 의 운명이 파 놓은 함정일 뿐이고, 그 위에 어떤 좋은 것이 놓여있는 듯 보이더라도 집지 마십시오.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얼마든지 오고, 기회라 생각하고 쥔다면 오히려 해가 될 것입니다. 다시는 헤어나올 수 없는 구렁텅이가 공주님을 기다릴 지도 모르고요." 칼라하스의 눈이 흔들렸다. "이 이상의 기회가 영영 오지 않는 다면." "그들은 지금 '경계'하고 있습니다. 베로크 황자의 즉위를 보시지 않 았습니까. 그들은 우리를 주도 면밀하게 관찰하고 있습니다. 무모 하게 덤비는 자의 목덜미는 쉽게 물수 있지만, 충분히 주의하고 있 는 상대에게는 그 누구도 쉽게 이길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니 지 금의 공주님께서 하실 일은 그들의 아군을 없애는 것뿐입니다. 지 나치게 주의하는 자는 가끔 제 팔뚝을 물어뜯기도 하는 법이니까요... ..제발 제 말을 들어주세요." 칼라하스는 눈물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잠시 그렇게 울먹이고는 한참 이 지나서야 겨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라버님을 뵙고 오겠어. 우선 악튤런을 불러줘." "알겠습니다." "칼리토 폐하를 뵙고 싶습니다." 아킨은 나오자마자 문 바로 밖에 있는 악튤런과 마주쳤다. 그러나 그 는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맞은편에 고개를 숙이며 대기하고 있던 시녀에게 그렇게 말했다. 시녀는 즉각 명을 들으려 했지만, 그런 그녀를 악튤런이 막았다. "왜지?" "곧 떠나게 되었습니다." "공주께서 청혼을 받아들이셨나?" "그것이 아니라 제 집안일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혼에 대한 답은, 거 절이든 승낙이든 내일 아침에 분명히 듣게 될 것입니다. 어떤 선택을 하실 지는 잘 모릅니다만....어쨌건, 저는 내일 오후에 떠날 것 입니다." 악튤런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폐하께 말씀드리겠다. 언제 꺼지든 그건 네 알 바이니, 상관하지 않겠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말해두지. 공주는 너를 따라가지 않으실 거다." "......아직 답은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녀가 너를 따라 가겠다 하더라도 내가 그렇게 놔두지 않겠 어. 또한 폐하도 용납하지 않으실 테고." "그건 알아서 하십시오. 내 알 바 아니니." "이, 짐..." 순간 아킨은 빠르게 그의 멱살을 낚아채 벽에 짓눌렀다. 시녀가 놀라 고, 먼 곳을 보고 있던 루첼의 눈길이 그 들을 향했다. "지난번에 저는 온 몸으로 경고 드렸습니다." "--너!" "악튤런 님, 저는 진실과 함께하는 모욕을 참아낼 정도로 너그러운 성품이 아니니, 제가 참을 수 없는 일을 벌여서 일부러 미움 사지는 마십시오. 이런 종류의 증오는 쉽게 가시지도 않는 거니까." 악튤런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리고 그 사나운 빛이 더욱 세게 번득 이는 순간에, 루첼이 아킨의 어깨를 낚아채 당겼다. 날카로운 대립의 각이 확 떨어져나가고, 갑자기 숨이 턱 트인 듯했다. 악튤런이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이번에는 두텁고 큰 손이 악튤런의 손목을 꽉 움켜잡았다. 마하였다. "공주님께서 부르십니다, 악튤런 님." "무슨 일로?" 악튤런의 눈이 누그러졌다. "긴히 부탁드릴 일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악튤런 님, 왕자는 이만 보내 주십시오." 그 엄격한 말투 뒤에는 분명 '더 이상 시비 걸면서 창피당하지 말고, 당장 들어와라-' 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악튤런은 이를 북 갈아붙이고는 뒤로 물러났다. 마하가 아킨에게 정 중하게 말했다. "왕자, 폐하께는 제가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공주님과 폐하의 답 은 내일까지 듣게 되실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마하가 빙그레 웃었다. "귀한 분을 정중하게 배웅해 드리고 싶은 것이 저희 심정입니다. 여 유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급한 일 있는 줄은 알지만 이삼일 더 있으라는 말이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답하며, 아킨은 주변이 아주 습해지는 것을 느꼈다. 루첼이 그의 어깨를 짚었던 손을 내려놓자, 아킨은 고개를 돌려 응 접실문이 마주하는 창을 바라보았다. 창이 비추는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고, 침묵과 어둠으로 얼룩진 두터운 구름 사이로 갑자기 날카로운 빛이 번득였다. **************************************************************** 작가잡설: 아자! 아자! 드디어 200회 입니다~~!!!! 와우, 이 정도 큰 숫자를 달아 본 건 정말 처음이군요...! (폭탑이야 길기는 했지만 1, 2, 3부로 나누어져 있었으니.....) 그러나 200회 기념 이벤트는......조금 뒤로 미뤄야 할 것 같네요; 하기는 할 거냐고 부루퉁해 하시는 분 계시죠? 네.....이리 저리 정신없이 다니면서 내일 내일 하다가 넘어갈 가능성이 매우 높기는 합니다;;; 에헤, 그래도 축하해 주실 거죠? ^^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43장 *************************************************************** [겨울성의 열쇠] 제201편 천둥 치는 밤 #6 **************************************************************** 휘안토스가 말 그대로 벼락처럼 느닷없이 찾아온 마르실리오의 방문 에 잠에서 깬 것은 자정 조금 전이었다. 11시 50분- 그렇게 시계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나, 대충 옷을 껴입고 침실을 나섰다. 침실 문 앞까지 달려온 마르실리오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머리카락과 볼은 온통 비에 젖어 있고, 부츠도 진흙 투성이가 되어 엉망진창이다. 아주 안 좋은 일을 알아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휘안토스는 잠시 그가 생각과 전할 말을 고를 시간을 주기로 하고 기다렸다. 창 밖에서는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빛이 확 터졌다 꺼 지더니 곧 이어 천둥소리가 쿠르릉 들려왔다. 바람은 그리 세지 않 지만, 빗줄기만큼은 내리 꽂듯 어마어마하다. 여리고 어설픈 것들은 모조리 휩쓸어 갈 듯한 비다. "인사도 안하는 것을 보니 큰일은 큰일인 듯 하군." 마르실리오는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아주 큰일입니다...." "그렇게 큰일이라면 우선 아버님께 말씀드리는 것이 순서 아닌가." 사이러스를 언급하자 마르실리오의 얼굴은 당장에 굳었다. 아무리 케 올레스의 손자인 마르실리오라도 대공왕 사이러스는 두려워했다. 사이러스의 눈빛이 변하는 순간에 주변을 덮치던 그 엄청난 피바람 을 마르실리오는 분명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휘안토스도 자신이 '휘안토스'가 아니었으면 당연하게 아버지를 두려 워했을 것 같았다. 어머니와 아킨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어떤 일인 지 대강 들어볼 수 있을까?" "....테시오스 왕자님에 대한 일입니다." 휘안토스는 마르실리오가 가지고 온 소식이 무엇일지 대강 짐작이 갔 다. 어쩌면 가벼울 수도 있고, 무거울 수도 있다. 하찮은 일일수도 있고 좀 더 중대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이러스의 동생'인 테시오 스와 관련된 일인 이상,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결과는 언제나 같을 것이다. "일어나라, 마르실리오. 숙부님의 일이면 내게 먼저 전해서는 안 된 다." "하지만 휘안토스 님. 일의 성격 상 곤란합니다. 휘안토스 님께서 먼 저 듣는 것이 좋습니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아버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끝이 다. 그리고 나 역시 아버님의 판단에 의의를 제기할 수도, 설득할 수도 없다. 가자." 휘안토스는 그의 침실을 나서, 아버지가 있는 2층으로 향했다. 창문 마다 빗물이 물에 잠긴 듯 줄줄 흐르고 있었다. 이틀 전부터 시 작된 이 비는 거세지거나 약해지거나의 차이가 있을 뿐 계속 쏟아 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이레크트라의 장례식 준비 역시 더뎠다. 갑자기 환하고 하얀 번개가 어둑한 성안을 확 밝혔다. 그리고 그 환 한 빛이 꺼진 듯 사라지자 램프불은 유령의 옷자락처럼 희끄무레하게 빛을 퍼뜨리고, 그 사이로 천둥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낮고도 깊숙이 울린다. 천둥소리마저 입을 다물자, 그 작은 발자국 소리 같 은 빗줄기소리가 끝없는 행군을 하며 바닥에 내리박힌다. 휘안토스는 성 가득한 차가운 습기와 함께, 그 비릿한 비내음에 옅은 피비린내가 같이 뒤섞여 풍겨오는 듯하다는 착각이 들었다. 이 성과 성 지하와 성 벽 너머 어둠 곳곳에서 살고 묻힌 이들이 엄숙 하고 차가운 의식을 위해 모여 있는 듯 하다. 그리고 그들은 곧 다 가올 그들의 축제와 향연과 만찬을 기다리고 있었다. 피로 잔을 채우고 살과 뇌수로 접시를 채우는 그런 암롯사의 대만찬 을- 몇 번이나 이 성의 바닥을 적시며 뿌리로 스며들어 암롯사라는 거목 을 키워왔던 그 대만찬을. 휘안토스는 낮은 목소리로 마르실리오에게 물었다. "심각한 일인가?" "......별로 좋지는 않습니다." "아버님께는 숨김없이 모두 말해라.....단 하나도 빠트리지 말고." "네." 마침내 왕의 침실 앞에 도착했다. 벌써 시종들이 앞장서 달려가 왕에 게 왕자가 올 것이라 알려놨기에 호위 기사들은 당장에 문을 열었다. 사이러스는 벌써 잠에서 깨 가운만 걸친 채 침실 의자에 앉아 테이블 에 기대고 있었다. 방안은 어둑했으며, 벌서 16년 째 아내 없이 혼자 써 오고 있는 왕의 침실은 한없이 황량하기만 했다. "반정에 대한 소식을 가지고 왔다고 들었다." 마르실리오의 얼굴이 당장에 납처럼 창백해지더니, 예의도 잊고 급히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듣고 온 것은, 단지 델 카타롯사가 테시오스 님께 접 촉을 시도했다는 것뿐입니다." 휘안토스는 마르실리오를 살펴보았다. 마르실리오는 당혹해 하고 있 었고, 자신의 말이 잘못 전해져 억울하게도 테시오스가 희생되는 것은 아닌 지 두려워하고 있기도 했다. 사이러스는 무관심하게 말했다. "그래, 테시오스는 그 제안을 어떻게 했다고 하던가." "그 분께서는 곧바로 할아버님께 연락하셨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지 병이 도지셔서, 제가 대신 서찰을 가지고 왔습니다." "테시오스가 왜 직접 전하지 않은 건가?" "그건 모릅니다. 방금 전에 그 서찰을 전하시고는 곧바로 자택으로 돌아가셨고, 저는 할아버님 대신 그 일에 대해 듣고 이리 서찰을 들고 오는 길입니다." 휘안토스는 일이 생각과는 조금 틀리다고 생각했다. 케올레스나 마르 실리오가 그 일을 알아낸 것이 아니라, 테시오스 본인이 알려왔다? 그런데 그것을 본인이 직접 전한 것이 아니라, 케올레스에게 전 하도록 했다? 반은 납득이 되는데, 나머지 절반은 전혀 납득이 되지 않았다. 반은 당연한데, 반은 이상한 것이다. 사이러스가 손을 내밀자 마르실리오는 그가 가지고 온 케올레스의 전 갈을 건넸다. 사이러스는 묵묵히 봉인을 뜯고 내용을 확인하고는, 마치 아주 흥미 없는 사람에게 온 안부 편지인 듯 건조한 얼굴로 다 시 접었다. "마르실리오,. 테시오스가 언제 찾아 왔었나?" ".....직접 오시지는 않았습니다. 방금 전에 그 댁의 하인 하나가 편지 를 전하고는 갔습니다." "어떻게 생겼던 가?"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체구가 좋고.......볼과 턱에 흉터가 있었습니 다." 하인 일리 없다. 그렇게 험악한 얼굴의 하인을 썼다간, 아마 숙모부 터 히스테리를 일으켰을 테니까. "그것이 몇 시간 전이지?" "한 시간 전 입니다." 사이러스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했다. 턱을 든 채 의자에 등을 기대 고, 그 초록색 눈동자로 어딘가를 응시하더니 그의 말만 기다리고 있는 휘안토스에게 드디어 명령을 내렸다. "휘안- 나가거든 오르피나를 불러와라. 내가 명할 것이 좀 많을 테니 준비 단단히 하고 오라고 전하도록." "네." 그리고 휘안토스는 그렇게 답하며 테시오스가 바로 며칠 전에 아내와 아이들을 베넬리아에 있는 그의 '지인'들에게 보냈었다는 것을, 그 럼에도 테시오스 본인은 마치 이레크트라의 죽음을 예상하고 있기라 도 하는 듯 남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하나 더 깨닫게 된 것 이 있었다. ".....항구를 막아야 합니까?" "아니, 날이 이러니 아마도 육로로 도망쳤을 것이다......시킨 사람을 보니, 벌써 용병길드 쪽에 말을 넣어 도주로를 확보해 놓은 듯 하 구나. 일이 그렇게 되면 항구를 막는 간단한 방법으로는 어림도 없다." ".......알겠습니다." 휘안토스는 다시 한번 그의 숙부에게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테 시오스가 카시오스 대신 둘째로 태어났다면 지금 왕좌에 누가 있을지 모를 정도다. "아키도 당장 불러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숙부님께 접촉을 시도했다 면, 아키에게도 그러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마르실리오의 얼굴이 더 해쓱해졌다. 그러나 정작 그 아버지인 사이 러스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보다 더 냉정하게 물었다. "녀석이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나, 휘안토스?" "당연히 거절했을 겁니다. 당장에 좋아 보인다 할지라도, 신뢰는커녕 불신만 드는 상대를 집안으로 끌어들일 정도로 바보는 아닙니다. 또, 아키가 거절한다면.....델 카타롯사 쪽에서 무사히 보내줄 리도 없고요." "아마도 그렇겠지......아니, 분명 그렇게 했을 거다." 휘안토스는 다시 아버지의 눈을 살폈다. 아무 변화도 없었다. 마르실 리오가 눈치를 살피는 기색이 보이자, 사이러스가 손짓을 보냈다. 그리고 그가 창백한 얼굴로 문 밖을 나서자, 휘안토스가 말했다. "세루비아나 경에게 명하겠습니다. 당장 귀환하라고." "세루비아나에게는 그렇게 말해라. 단, 아키는 돌아오지 않을 테니 신 경 쓸 필요 없다." 휘안토스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예상을 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불가능한 일을 눈앞에서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는 돌려 말하지 않는다, 휘안토스. 내 말은 말 그대로의 말일 뿐이 야." "버리시는 겁니까?" 이미 예전에 버려버린 아들이지만, '문서상'의 아들이기에 사이러스는 문서상 해야 하는 책임은 끝까지 다해왔다. 휘안토스와 다른 이들의 손을 빌린 적은 있지만, 이렇게 직접 말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내가 버리는 것이 아니다. 녀석은.....드디어 나를 버리기로 했고, 나 역시 그렇게 해 주는 것뿐이다. 살든 죽든, 아키는 그렇게 하기로 했고, 나는 용납해 주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최소한의 보호 도 해 주지 않는 것이고, 녀석은 그런 것에 기대지 않고 제 갈 길 을 나가야 할 것이다. 단지 그 뿐이다." 이해할 수 없군요, 라는 말이 떠올랐다. 용납? 그런 말이 아버지에게 가능하기나 한 말이었던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고, 거역하며 등 돌리는 상대를 '용납'했 던 적이. "아키 혼자서 델 카타롯사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알아서 할 바지." "만약 벗어난 다면......" "제 갈 길을 가야겠지. 암롯사의 아킨토스가 아닌, 그냥 아킨토스로서 말이다." "........." 이제 휘안토스는 아버지의 속을 이해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속에 든 의도란 것은, 휘안토스에게는 아주 '부정적인 의미'였다. 아킨은 문득 들려오는 천둥소리에 잠에서 깼다. 잠에 절어 앞에 있는 게 무엇인지도 잘 구분 안가는 가운데, 비가 내 리고 있다는 것만은 대강 알겠다. 하지만 워낙에 멍해서 꿈에서 내 리는 건지 정말 내리는 건지도 모르겠다. 온 몸이 땀에 축축한데다가, 목도 답답하다. 잠을 놓지 않으려는 몸 은 무겁기만 하다. 잘 자고 있었는데, 이상한 것이 다가와 차가운 손을 댄 듯 놀라 깬 것이다. 그래서 잠에 겨운 만큼 짜증도 난다. 겨우 잠 든 건데......지금 다시 누우면 또 몇 번이나 뒤척거리게 될 테지. 아킨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는 나른히 한숨을 내 쉬었다. 태연한 척 했지만 속이 몇 번이나 들썩 거렸던 게 사실이다. 테시오스가 떠나기 전날에 했던 말이 계속 잠들려는 머릿속에 떠올랐고, 그것이 끊임없이 깊은 잠을 방해했다. 그는 분명 '무사히' 돌아오라고 했고,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했다. 그것이 지금 이 공주가 말한 그 제안일까? 그러나 테시오스의 성격을 고려해 본다면, 이렇게 단순한 일로 그런 말을 할 리는 없다는 생 각이 들었다. 테시오스 본인이라 할지라도 거절했을 것이고, 아킨이 그 정도로 바보가 될 거라 기대했을 리도 없다. 또, 구태여 큰 숙 부의 일까지 들먹였을 리도 없고. 다시 어둑한 방 안으로 눈부시도록 하얀 번갯불이 확 번졌다. 아킨은 물이라도 마시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그제야 방 안에 그 혼자만이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번개의 허연빛이 퍼 지면서 일순간에 깊은 그림자를 늘어뜨린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고는 휙 사라졌다. "!" 아킨은 주먹으로 치듯 손을 휘두르며 빛을 퍼뜨렸다. 방 안이 순식간 에 환해지자, 상대는 소맷자락을 이마로 가져가며 얼굴을 가렸다. 아킨은 당장에 침대에서 뛰쳐나가 침대 맡에 놓인 단검을 뽑아 들었 다. "누구...." 그러나 외치려다 말고 아킨은 단검을 세우고, 상대가 입이라도 열면 당장에 뛰어나가 그의 목이라도 쑤셔 놓을 듯 팔과 어깨에 힘을 주 었다. 더 이상 누구라고 물어볼 것도 없었다. 이유를 불어 볼 필요도 없었고, 안심할 이유도 없었다. 오로지 '당연 히 경계해야 한다.'라는 결론만이 빠르게 솟구쳐 아킨의 몸을 방어와 경계로 뒤덮어 버렸다. "왠일이십니까, 악튤런 파노제." **************************************************************** 작가잡설: 허억! 악튤런....너, 너! 너 설마 아키를 덮치러! (그게 아니 잖아!!!) 그렇구나....그렇게 기분 나빠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구나....... 그것도 만나자 마자............. (아니라고 했잖아!) 어마어마한 폭풍이 올라왔는데 다들 추석 잘 지내셨는지요. --; 사방팔방 고향내려갔다가 물 푸고 왔다는 말만 들립니다......(저는 본가가 대전이라) 추석 내내 슬램 덩크 재탕에 몰입했습니다. 강백호와 딱 동갑^^이던 시절에 보던 것을 근 10년 뒤에 다시 보니, 그럼에도 감동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10년, 아마도 20년이 지나도 똑같은 감동을 줄 것 같 군요. p.s 그건 그렇고.....왜 고교 레벨이 높아질 수록 선수들 미모는 울적하게 변해가는 건지. --;; 상양이랑 할 때는 김수겸, 해남에 는 이정환, 능남에는 윤대협이라는 플라워 포인트가 있었건만, 산왕에서는......................정우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 밤 토리 머리로는 한계가 있더군요....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44장 ************************************************************** [겨울성의 열쇠] 제44장 갈망의 잔 제202편 갈망의 잔#1 ************************************************************** 아무리 남자끼리라지만, 호위를 둘 정도의 신분인 아킨의 방으로 느 닷없이 찾아온 것은 무례의 정도는 훌쩍 뛰어넘어 차라리 위험한 짓이었다. 악튤런 혼자 혼나고 말 일도 아니라 아킨의 방을 지키는 호위는 물론이요 델 카타롯사의 왕실 자체까지 책임을 물고도 남 을 일이었다. 기가 막히는 군, 정말- 아킨은 우선 물을 한잔 마신 후에, 손에 물을 적셔 땀에 찐득거리는 목덜미를 닦았다. 그 동안에 악튤런은 젖은 이마를 닦아내고 물방 울을 뚝뚝 떨어뜨리는 머리카락을 털어냈다. 빗속에서 헤엄이라도 치 고 온 듯한 꼬락서니였다. "무슨 일입니까." 아킨은 그렇게 말하고는 문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악튤런이 여기 까지 들어와 있다면 시종이나 호위를 불러봤자 아무 소용없을 듯 했다. 악튤런이 말했다. "첫날에 네게 물어본 것이 있었지." "거절했습니다."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듯 아킨은 그렇게 답했다. "앞으로도 거절할 생각인가?" "네." 그리고 아킨은 문고리에 손을 가져갔다. 순간 파칭--! 하고 날카로 운 빛이 확 튀어 오르며 아킨의 손끝을 후려쳤다. 급히 손을 당겼 지만, 결국 손끝이 찢어지며 핏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각오 단단히 하고 들어 왔군- 그리 생각하며 아킨은 다시 악튤런을 보았다. 악튤런은 자리에 앉아 있었고, 그 부리부리한 눈은 컴컴한 창밖을 쏘아보고 있었다. 아킨은 어딘지 그가 탈로스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갈망의 광 기가, 그리고 그 광기를 달래기 위해 무엇이든 할 자세가 되어있다는 것이 너무도 닮아 있다. 그러나 이 상황이 더 고약한 이유는, 탈 토스는 아킨을 봐주지만 이 악튤런은 결코 그러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네 몸이 어떤지 잘 안다. 나 역시 내 스승의 노트를 봤으니까."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확신'했다. 알지 못하고서야 '그런 말'이 함 부로 나올 리 없으니까. 쓴 웃음이 나온다. 베이나트가 지금 이곳에 있다면 뭐라고 할까. 아 마도 꽤나 슬퍼하고 후회할 것이다. 그리고 아킨은 그런 그에게 ' 인간이 원래 그렇다.'고 위로할 수도 없을 테지. "그래서, 왜 그 이야기를 꺼내시는 겁니까." "나는 너를 저주에서 완전히 해방시켜 줄 수 있어." "누가 저주를 걸었는지는 아십니까?" "당연히." "아신다면 다행이군요. 그녀는 어둠 숲 엘프들의 수장이며, 그녀 외에 는 그 누구도 저주를 풀어줄 수 없습니다. 아니, 당신의 스승도 풀 어주지 못했습니다." "나는 할 수 있어." 아킨은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빛이 보내는 고집과 자존심, 단단하고 옹골찬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별로 호의도 믿음도 생기지는 않았다. "조건은 무엇입니까?" "같이 성배를 찾자. 나를 도와다오." "......." 떠난다고 하니 다급해 진 걸까? 그렇다면 이건 정말 곤란하다. 악튤 런의 성격을 고려해 본다면, 이렇게 찾아온 것은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런 성격의 사람이 뒷일 생각 안하면, 곤란하고 위험해지는 건 앞에 있는 사람이다. "나 혼자 모든 것을 차지하겠다는 말은 아냐. 그것의 힘으로 너의 저 주를 풀어주겠고, 나는 나의 왕을 세계의 왕으로 만들고 나 자신이 원하는 힘을 얻겠다. 그리고 너에게는 이후에도 그 어떤 해도 입히 지 않겠고, 원한다면 무엇이든 도와주겠어.....약속한다. 나의 권호, 천둥을 걸고." "어디 있는지,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그 방법은 아십니까?" "네가 도와준다면 가능해." "제게 너무 많은 기대를 하지는 마십시오. 저는 그저 베이나트와 우 연찮게 같이 있었다 뿐이고, 정말 단편적으로 알고 있을 뿐입니다. 아마도 당신보다도 모를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모르는 것을 네가 알지도 모르지." 아킨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상대를 너무 간단하게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법은 별로 현명하지 는 못할 지라도, 그는 분명 많은 것을 알고 있고 알 수 있으며 하 려고 하고 할 수도 있는 강한 마법사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금 그 마법사가 자신의 명예를 걸고(이렇게 단순한 사람일수록 그런 자존 심에 대한 집착도 강하다)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제게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된다면, 그 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는 당신의 비밀을 알게 되고, 당신은 저로부터 아무 이득도 얻지 못한 채 비밀만을 잃게 되는 데." "......" "그 때는 저를 죽이시겠지요." "그래서 협조하지 않겠다는 거냐?" "어쩔 수 없습니다. 성급하게 당신과 손을 잡아, 더 큰 위험에 저를 노출시키고 싶지는 않습니다." "빌어먹을, 그 저주만 풀면 네 재수 없는 형과 똑같이 올라갈 수 있 다! 네 승계권이 말소된 이유는 단 하나, 네 '병'때문이었으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뒤로 주춤 물러나는 거냐." "지금 당장에 제 몸이 정상이 되어도 어려운 건 어려운 겁니다." "내가 도와주지." 아킨은 웃었다. "그렇게 쉽게 보이십니까?" "네가 지레 겁먹는 것이다. 해보지 않는 한, 아무도 장담 못하는 거 다." "그러나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십니다." "너 역시 모르는 건 매 한가지다, 꼬마." 마지막 말에는 분명 경멸과 도발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다운 당 돌함과 그가 아는 것에 대한 분명한 자신감이 넘쳤고, 자신의 말을 제대로 듣게 된다면 아킨이 분명 긍정적으로 나올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킨은 이 자리에서 물러나고 싶었다. 아니, 물러나야 한다. 그리 하기 위해서는 어찌해야 할까? 당장 나가라고 해 봤자 듣지도 않을 상대고, 자칫 잘못한다면 위험해지기만 한다. "대체.....그것을 왜 바라시는 겁니까." 그 말에 악튤런의 눈이 만족스럽게 변했다. "받아들이겠다는 이야기인가?" ".....듣고 나서 정할 바 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듣게 된다면 나를 돕거나 죽던가, 둘 중의 하나밖에 남지 않을 텐데. 태도는 확실히 해 줘." "말해 주시지 않는 다면, 저는 거절 이상의 답은 해 드릴 수 없습니 다. 그리고 행여나 성급한 결정을 내리실까 해서 말씀드립니다. 그리 하신다면 당신은 베이나트 님과 만나지도, 손을 잡을 수도 없게 될 것이고, 당신의 모든 노력은 제 죽음과 함께 끝날 것입니다." 악튤런의 눈에 불꽃이 일었다. 아킨은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델 카타롯사는 암롯사에 의해, 당신은 아마도 제 스승님이나 그분께 끝장날 테죠. 그것만은 분명히 장담하고 경고해 드릴 수 있 습니다." 루첼은 별로 잠이 오지 않아서 책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급작스럽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을 때 시계를 돌아보니, 자정을 한 시간 남겨 놓고 있었다. "누구십니까?" 그러나 말이 제대로 끝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루첼은 안으로 뛰어 들어온 엄청난 거구의 여자를 보는 순간에, 자기도 모르게 주 먹을 날릴 뻔 했다. 그러나 주먹을 날릴 틈도 없이 그녀가 다짜고짜 외쳤다. "그란셔스 씨! 아직 주무시지 않았군요." "마, 마하 님?" 마하는 당황했다기 보다는 서두르는 듯 보였고, 그것에 루첼은 무언 가 아주 난감한 일이 터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슨 일이죠?" 마하는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다른 사람도 아닌 루첼의 침실 근처 라, 호위는커녕 병사 하나 보이지 않았다. 마하를 말리러 올 사람 은커녕, 그녀가 이곳으로 쳐들어 왔다는 것을 아는 사람조차 없을 듯 했다. 마하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자 침착하지만 빠 르게 말했다. "당신이 아킨토스 왕자와 긴밀한 사이라는 것은 눈치로 알고 있었습 니다. 그러니 긴히 부탁드립니다." "말이 좀 이상하긴 한데, 저희 둘은 동문 친구사이일 뿐 주군과 기사 같은 사이는 아니에요." 마하가 실망한 듯 얼굴이 흐려졌다. 루첼은 이어 말했다. "하지만 그에게 어떤 일이 생긴다면 저는 제가 존경하는 스승님을 위 해 무엇이든 해야 합니다. 그와 관련된 일이라면 더 위험해 지기 전에 어서 말씀해 주세요." "지금 아킨토스 왕자께서 위험합니다." "네?" "악튤런 파노제 님께서.....지금 귀국의 왕자를 찾아가셨습니다." 루첼은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데이트 신청하러 간 것 같지는 않군요. 대체 무슨 일로 간 거죠?" "폐하와 악튤런 님이 자린 자리에서, 저희 공주께서 왕자의 청혼을 받아들이시겠다 말씀하셨습니다." 루첼은 잠시 말없이 있다가, 자신 없게 물었다. "설마......그걸 전해주러 간 건 아닐 테죠?" 루첼을 바라보는 마하의 눈초리가 굉장해서 루첼은 괜히 말했다 싶었 다. 눈치를 살펴도 그 굉장한 판단이 좀 나아질 기색이 없자, 결국 그는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죄송하지만 악튤런이....왜 아키를 찾아간 겁니까?" "암롯사로 떠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킨토 스 왕자와 칼라하스 공주님이 결혼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입 니다." 그리 말하고는 마하는 정말 이런 말을 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한심하 다는 듯 한숨을 내 쉬었다. 지금 사고를 친 당사자를 향한 답답함 때문이었다. 잠시 그런 마하를 바라보던 루첼은 더 자신 없는 목소리 로 슬쩍 물었다. ".........그리고 그 악튤런은 점잖게 설득하지는 않겠군요." **************************************************************** 작가잡설: 모닝 키스 해 주는 남자가 있습니다. 자고 있으면 살그머니 다가와서는 촉촉한 키스를 해 주죠..........눈 을 번쩍 뜨면 그가 속삭입니다. '꺄아아아앙아앙-!' (해석 - 밥 내놔.)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44장 **************************************************************** [겨울성의 열쇠] 제203편 갈망의 잔#2 ***************************************************************** "그래, 어디까지 알고 있지?" "대체로 모릅니다." 악튤런이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초조해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킨 은 이 악튤런이 우려하는 선을 넘기지 않을 지, 그것부터 걱정되기 시작했다. "성배에 대해서는 알고 있겠지?" "어렸을 때부터 가장 지겹도록 듣는 것이 제국 역사입니다. 성실하게 공부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알만큼은 알 거라 생각됩니다." "쿼크 대제의 성배 이전의, 에칼라스의 성배 말이다." 이야기가 상당히 원론적으로 나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킨은 악튤런의 설명을 기다렸고, 악튤런은 조용히 숨을 몰아쉬고는 말 했다. "에칼라스의 성배는.....그녀를 신으로써 각성시키고, 열두 수호자들을 찾아내게 했던 힘을 지니고 있던 것이다. 그 전의 그녀는 그저 평 범한 소녀였을 뿐 이지." 그것 역시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다. 아킨은 악튤런의 말을 들으 며, 자신이 들었던 '현신의 장'을 기억해 보았다. 평범한 소녀였던 에칼라스에게, 어느 날 세 명의 마법사가 찾아왔다. 하나는 키 크고 나이 많은 마법사, 하나는 검은 머리의 귀부인, 다른 하나는 젊고 아름다운 청년. 그들은 그녀 앞에 낡은 잔과 빛나는 검을 내어 놓으며 그녀를 성녀이자 신으로 각성시켰다. 성배와 성 검은 그녀에게 성스러운 힘을 부여하고, 지혜와 깨달음을 주었다. 그러나 에칼라스의 승천과 함께 성배는 사라졌고, 성검 역시 사람들 손을 거치면서 '실종'되었다. 그런 성배와 성검이 다시 나타난 것은 검은 늪의 마법사, 사악한 팔로커스와 쿼크 대제의 전쟁이 끝난 뒤였다. 팔로커스의 보물창고에서 쿼크 대제는 성배와 성검을 찾아 내 사람들 앞에 내어 놓으며, 혼란한 대륙이 평정되고 평화가 올 것이라 선언했다. 사람들은 희망과 믿음을 담아 황제를 따랐고, 황제 는 통일 제국을 이루고 마법의 종족 알르간드 족과 그들이 부리던 마물들도 북방으로 추방했다. 마법사들도 제 질서를 찾아 지키기 시작했고, 모든 길드가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세상에는 진정 한 평화와 질서가 찾아오는 듯 했지만, 황제의 죽음과 함께 성배 와 성검이 사라지자 결국에는 예전만큼의 혼란이 뒤따라 왔다. 그리고 알르간드의 땅에 있는 '천개의 눈'에 묻혔다는 전설 같은 말 과 함께,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떠났고 돌아오지 않거나 빈손 으로 허무하게 돌아왔다. 아킨은 상당히 냉소적인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설마 천개의 눈까지 가서 찾자는 말씀이십니까?" "내 말 끝까지 들어. 거기까지가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진 바고, 내가 말하는 것은 좀 더 다르고 중요한 것이다. 스승님의 일지에는 전혀 다른 것이 적혀 있었다. 소유마법이 걸려 있어, 그 분이 아니면 손 도 대기 힘든 물건이긴 하지만 나는 그분 제자가 된지 2년 만에 그 마법을 풀어 읽을 수 있었지." 아킨은 아마도 베이나트가 깜빡 잊었을 거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 어처구니없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마법은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일상적인 주의력 면에서는 정말 바보 근사치인 인간이다). "그 일지에는 성배에 대한, 우리가 여태 알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 적혀 있었다. 나는 그것을 모두 기억해 두었고, 하나도 틀리지 않고 적어 두었지." 그 말에 약간의 자만심이 배여 있어서 아킨은 좀 웃음이 나왔다. 롤 레인이나 탈로스나, 마법에 있어서 약간 뻐기는 면이 없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이 악튤런에 비하면 성인에 가까운 겸손함이다. "말씀 하십시오." "주신이자 세계의 주인이신 분에게 '세 명의 신'이 찾아왔다. 그들은 그들 세계가 멸망하기 직전에 놓여 있어 우리의 주인에게 그 힘을 빌려 달라 했지. 우리의 주인은 그 청을 받아들이셨고, 이계에서 온 자들은 그분께 다섯 개의 낡은 잔을 내 놓았다. 그들이 말했다. 첫 잔은 바람이요, 두 번째 잔은 불꽃, 세 번째 잔은 물, 그리고 나머 지 두 잔은 해와 달의 잔이며, 그들이 놓이는 곳은 땅의 진이라고. 그 잔에는 자신들의 세계를 멸망에서 구할 수 있는 힘이 들어 있으 며, 신을 신으로 만들 수 있는 위대함이 깃들여 있다고-" 아킨은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천둥소리를 들은 듯도 하고, 확-- 다시 빛이 터져 들어온다. "그 것이 무엇인 지는 정확하게 모른다. 제대로 적혀 있지도 않았던 데다가, 처음 보는 문자와 그림들로 문장들이 적혀 있었으니....... 글쎄, 겨울의 열쇠....같기도 했고, 겨울성의 열쇠 같기도 했다. 그리 고 서쪽, 달, 숲....이 정도만 기억하지." "....." 순간 쿠르르릉-- 천둥이 울렸다. 갑자기 문득 문득 생각나는 단어들 이 있었다. 아주 먼 예전에, 탈로스가 기거하던 은둔자의 탑에서 베이나트의 말 에 따라 서쪽을 바라보았을 때, 그 때 발견했던 낡은 양피지와 그 위에 적힌 글자들......... 서쪽, 달, 숲---겨울의 열쇠.....성배와 성녀의 무덤....모든 것은 의 지, 파괴, 부활이자 탄생....숲과 호수의 마법사 여왕- 대략 적힌 것은 그 정도였지만, 그 사이사이에 적힌 말들은 그보다 더 많았다. 아킨은 당장에 그것을 꺼내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그 양피지는 잃어 버린 지 오래였다. 탈출할 때 어딘가에 흘리고 와 버렸다. 아킨은 애써 그려진 그림들과 글자들을 기억해보려 노력했지만, 어두운 굴속 에 손을 집어넣어 헤치듯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젠장-- 정작 필요할 때 아무 쓸모도 없는 기억력 같으니라고. 그러나 놀랍거나 의외인 건 아니었다. 어쨌건 탈로스의 탑은 베이나트-즉 컬린의 것이 었으니, 그 안에 컬린의 연구와 관련된 것이 있는 건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아는 게 없으니, 무슨 연관이 있고 무슨 가치가 있는 지 알아내는 것은 난감하기만 하다. "아킨토스?" 그렇게 아킨을 부르는 악튤런의 청회색 눈에는 기대감이 있었다. 행 여나 뭔가 관련된 걸 기억이나 해 주거나 말해주려나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킨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계속.......말씀해 주십시오." 실망한 듯 악튤런이 쳇, 하고는 내뱉었다. "....그러나 그들의 청은 성공하지 못했던 듯 하다. 신이 지목한 여인 에게 해의 잔을 주고, 그들의 다른 동료 마법사를 불러 달의 잔을 주기로 했었다. 그리고 땅의 진위에 자신들이 자신의 잔을 놓고 자 신들의 세계를 되살리기 위한 위대한 마법을 행했지........그러나 적 힌 바에 따르면, 달의 잔을 가진 자가 결국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고 하더군. 배신, 배반, 무능, 실수....온갖 단어들이 있었다. 내 생 각인데 경우는 두 가지다. 첫 째는 그 마법사가 처음부터 없었던 걸 로 보아, 그는 다른 마법사들에게 애당초 협조할 생각이 없었던 자 다. 그리고 아마도 그를 설득하는 중에 일이 급하게 되어, 그설 득을 진행시키면서 우리의 주인에게 부탁드린 거겠지. 그리고 두 번째 는 협조할 거라 약속한 말한 후에 혼자서 남아서 그들을 배신한 것이다." "그가 능력이 부족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아니. 그렇다면 그들은 아마도 다른 마법사를 찾거나, 애당초 우리의 주인께 둘을 찾아 달라고 했을 것이다. 그건 아닐 거야." "실패한 뒤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아무 것 얻은 것 없이 에칼라스만 신이 되었다- 이거지. 나 머지 열두 수호자 역시 그녀의 힘을 나누어 받아 신이 되었고. 그 리고 그것으로 주인 없었던 두 개의 잔 중 하나인 해의 잔은 그녀의 것이 되었다." "나머지 하나는......" 기대했던 질문인 듯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악튤런이 말했다. "그것이 바로 쿼크 대제의 성배라고.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지금 그것은 우리의 스승님 손에 있었다. 탈로스가 스승님께 원했던 건 그것이고, 나 역시 그것을 원해." 이상한 목소리였다. 자신감 넘치는 저 목소리가, 정말 이상하게 느껴진다. 웃음이 나올 정도로. 글쎄, 아마도 탈로스도 저렇게 말하고 거절당했겠지.....아 니다. 그라면 좀 더 제대로 설명하고 부탁했을 것이고 상대방 역시 지금의 아킨보다는 성의 있는 자세로 임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제게 바라시는 건 정확히 무엇입니까." "우선은 베이나트와 만나고 싶다. 그리고 나머지 할 일은 그 다음부 터는 내가 정한다. 이 일은 네 생각보다 더 깊고 굉장한 일이야." "당신은 그것을 빼앗을 수 없을 텐데요." "말 했다. 해 봐야 아는 거라고!" "아니, 이것은 예상도 아니고 체념을 권유하는 것도 아닙니다. 당신은 그것을 결코 빼앗을 수 없고, 그 힘을 허락받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너는 나를 몰라." "물론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을 모르는 만큼, 베이나트 님의 힘과 과 거 역시 알고 있습니다.......죄송합니다, 악튤런 님. 어쨌건 제게 그런 중요한 제안을 해 주신 것에 대해, 제 스승님의 이름을 걸고 감 사드립니다. 하지만.........." 악튤런의 어깨가 떨렸다. 눈은 분노에 타오르고, 두 손 역시 핏기가 가신 채 떨리다가 꽉 쥐어졌다. 아킨이 말했다. "그것은 인간이 가질 물건이 아니며, 이 세계의 물건도 아닙니다." "에칼라스는 그것으로 신이 됐어! 그녀는 우리 세계의 사람이고!" 롤레인의 말이 생각난다. 에칼라스는 애당초 인간이 아니 었다- 다 시 자켄의 조용한 노래가 머릿속을 헤치고 지나간다. 첫 번째 잔은 슬픔, 두 번째 잔은 고독, 세 번째 잔은 뜨거운 비탄- 다시 웃어 버리고 싶어진다. 당사자들은 그렇게 괴로움에 무너져 가는데, 그들 을 제한 모든 이들은 이리도 갈망한다. 성배 안에 가득 찬 갈망은, 단 한모금만 맛봐도 평생을 갈증에 시달리게 한다. 그것은 성스러운 잔이 아니라, 말 그대로 악마의 검은 입 그 자체다. "애당초 그 분 역시 인간이 아니었습니다.......그러니 다시 말씀드립니 다. 그것은 인간의 것도, 이 세계의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컬린은 탈로스 님께 주시지 않았고, 제 스승은 애당초 거절했습니다." "너는 아무것도 모르잖아! 내가 어떤 힘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는 지! 내 손에 들어오면 어떻게 될 지는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이다." "......세상 모두가 저더러 바보라 하더라도, 결코 실망시키고 싶지 않 은 분들을 위해서입니다.....그러니 이제 돌아가십시오." 악튤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돌아갈 거라 생각했던 아킨은, 그 주변의 마나가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숨을 쉬듯, 몸을 뒤틀듯, 그 것이 서서히 움직이고 끓어오르려 하고 있다. "!" 아킨은 그가 딛고 있는 바닥으로 마법진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양 쪽의 벽과 천정에도 검은 선으로 그려진 마법진이 일어나고, 그 위로 문자의 열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바람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고, 무언가가 튀어 오르는 파짓- 파짓--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아킨은 낮게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무슨 짓입니까." "나는 분명 경고했다. 나와 돕지 않겠다면, 내게 너를 살려둘 이유 따 위는 없다. 폐하께서는 분명 허락하셨고, 나는 네가 살 수 있는 마 지막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너는 그걸 거절한 거야." 다시 속이 끓어 오른다. 솔직히 말하자면 답답하고 짜증에 가까운 분 노였다. "......저 역시 경고했습니다, 악튤런 님." "물론 감당하겠다." 미친 놈, 이라는 말이 목구멍 까지 치솟아 올랐다. **************************************************************** 작가잡설: 이제 더, 덮치려고? (아니라고 했자나.................) 이제 상황 1. 간밤에 아키의 침실을 덮친 악튤런. 그리고 자, 이제 루첼 왕자가 침입지를 내 던지러 간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45장 *************************************************************** [겨울성의 열쇠] 제45장 해와 달 제204편 해와 달#1 **************************************************************** "--!" 루첼은 아킨의 침실 문이 열리지도 전에 침실 안에서 엄청난 굉음이 들리자 멈칫했다. 안에서 곰 한 마리가 날뛰기라도 하는 듯한 소 리다. "맙소사, 무슨....." "비키십시오." 마하가 루첼을 밀치고는 도끼를 뽑아들어 그대로 내리쳤다. 꽈르르르릉--! "윽-!" 안에서 천둥이라도 울부짖은 듯 했다. 사방이 지진 난 듯 울리고, 창 과 복도의 장식물들이 전율하며 몸을 떨었다. 그러나 문에는 손톱 으로 긁은 듯한 작은 흠집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마하는 도끼를 뒤 로 한껏 당겼다가 다시 내리쳤다. 문 조각이 조금 튀어 올랐지만, 역시나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루첼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만 두세요. 안에 뭔가 걸어 놓은 것 같으니." "당신 힘으로는 어려울 것입니다." "마하, 지금 당신 힘으로도 어려운 건 마찬가지잖아요. 모자라는 힘끼 리 합쳐 놓으면.....자신하건데 결과가 조금은 나을 겁니다." "좋습니다." 마하가 물러나자 루첼은 두터운 문 위에 손바닥을 댔다. 파창--! 문 표면위로 번개가 번득이듯 빛이 확 펼쳐지더니, 문 위에 둥글게 적혀 있는 문자가 눈을 깜빡이듯 잠깐 드러났다가는 사라졌다. "문 자체가 봉인되었군요." "정확히 말씀해 주십시오." "이 안은 그저 폐쇄된 것이 아니라, 완전한 하나의 공간으로 '분리'된 거란 말입니다....." 동시에 루첼은 악튤런을 향해 이 미친 놈, 이라는 욕이 솟구쳐 올랐 다. 미쳐도 단단히 미친놈이다. 어떻게 이렇게 다 보고 있는 곳에서, 한 나라의 왕자에게, 그것도 청혼을 하러 온 왕자에게 손을 댈 생각을 했단 말인가. 대체 무엇이 그를 이렇게 몰고 가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무엇이기래 끄트머리에서 빛나는 한 지점을 향해 달려가면서, 주변에 어떤 가 시가 있고 장애가 있는지 하나도 보지 않을 수 있는 가! 차라리 경의감이 들 지경이었고, 그것은 예전에 루첼이 알고 있던 어 느 친구를 생각나게 했다. 그리고 둘의 공통점은 인생에 도움이라곤 하나도 안 되는 종자들이라는 것이며, 차이점은 친구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해 줄 테지만 이 놈은 무엇이든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루첼은 뒤로 한발자국 물러났다. 두려움보다는, 아킨은 이상하게 경외감이 더 먼저 들었다. 방안은 온통 까맣게 변해있었고, 그 검은 공간위로는 사각형의 면을 따르듯 문자와 도형들이 그려져 하얀 빛을 뿜어 올렸다. 갑자기 가장 깊고 어두운 이계의 우주로 빠진 듯한, 꿈속을 걷고 있 는 듯하지만 만져지고 느껴지는 그런 곳에 있었다. 그러나 꿈쩍도 할 수 없었다. 보이지 않으면서도 얇고 단단한 실에 단단히 묶여 있 는 듯 하다. 족쇄다, 마법이다- 몇 가지 가정과 결론이 머릿속에 떠돌다가는 사 라진다. 악튤런이 웃었다. "이 방에는 언제나 '적대적 관계'의 나라에서 온 귀빈들이 묵는다. 방 자체가 '죽이기 위해'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니까." "...." 금방 짐작이 가는 군- 즉, 지금 행해지고 있는 마법 자체가 아주 오래된 것이라는 뜻이다- 또한, 이 방을 아킨에게 주었다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아킨을 죽 여야 할 경우.'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킨은 칼리토 대공왕의 적의어린 눈동자와 차가운 입매를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악튤런의 증오에 가까운 적대감과, 그 뒤에 숨은 더 큰 위험도. "네가 도착하기도 전에 폐하께서 이미 허락하신 바다. 청혼이 성사되 든 성사되지 않든 간에, 너는 이 수도를 벗어날 수 없어." "전쟁을 원하시는 겁니까." "어차피 일어날 전쟁이다. 그리고 어차피 일어날 것이라면, 두려워하 고 망설이며 일을 늦추는 것은 쓸데없고 어리석은 짓! 그러니 너는 이 자리에서 죽어라. 이 자리에서, 내 왕과 나의 복수를 위해." "암롯사가 당신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암롯사 따위가 아냐! 이 모든 제국, 이 세상 자체! 그것을 향해 복수 하는 거다." 그리고 파칙-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더니, 귓불이 화끈해졌다. 아킨은 오른쪽 귀로 손을 가져갔다. 곧 손끝이 피에 젖어 들어가고, 어떤 일이 일어났 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된 아킨은 나른히 한숨을 내 쉬고 말았다. 마지막 은봉인이 박살 나 버렸다. 정말 마지막 봉인이! 산산이, 그저 피와 통증만을 남긴 채! 그런데 정작 모든 것을 잃게 되자, 아킨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마음은 차갑고 머리는 텅 비고, 저 앞에 있는 악튤런은 오히려 더욱 뚜렷하게 보이기만 한다. 언젠가는 끝장 날 거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 그 순간만을 지 치도록 연기하고 있었다. 지쳐가면서도 차라리 정말 아예 끝장나 버리기를 바랬다. 그러면서도, 그래도- 그래도-- 제발 하루만이라 도 더, 하고 매달려왔다. 체념 속에서도 가지고 있던 빛바랜 희망 이었는데, 그 마지막 빛 조각이 사라지고 이제 컴컴한 암흑과 약속 된 재앙만이 기다리고 있다.... 젠장- 아킨은 다시 쓰게 돌이켰다. 그리고 팔을 당겨보았지만, 역시 꿈쩍도 할 수 없다. "죽이진 않겠다, 아킨토스 왕자.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네 생도 여기 서 끝내주마."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 했지. 나는 스승의 모든 기록을 보았고, 탈로스와 전혀 다른 문제 에 초점을 맞추어서 연구했고, 지금 그 결과를 보려는 중이지." 아킨은 웃음이 나왔다. 핏방울이 계속 흘러 목덜미를 적신다. "당신은.....제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무모한 분입니다...." "결과밖에 볼 수 없는 자는 늘 그렇게 말하지." 악튤런의 눈에는 자신감이 차 있었다. 그리고 컴컴한 방 안에 빛나던 마법진이 눈을 감든 확 사라지더니, 전혀 다른 것이 떠올랐다. 페그 라일도, 룬도 아니었다. 그 것들은 모두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 전혀 다른 문자들이었고, 하얀 빛을 뿜어 올리며 아킨이 익숙하게 아는 것과는 전혀 다른 에너지를 발산했다. "전능의 유일자여..." 아킨은 악튤런을 보았다. 악튤런의 옷깃은 날개처럼 펄럭이고, 머리카락역시 일어나는 마법의 돌풍에 휘몰아쳤다. 스스로 빛 덩어리가 된 듯, 어둠 속에서 가장 뚜렷한 모습으로 서 있었으며 그 주변에는 작고 옅은 것들이 그를 중심으로 돌고 있었다. 악튤런이 손을 뻗었다. 그 옅은 빛 덩어리들이 악튤런의 앞으로 방향 을 틀어 모이더니, 방사상으로 늘어졌다. 그의 목소리가 주문을 흘 리고 힘을 부른다. "첫 번째는 해- 두 번째는 달. 세 번째는 바람과 불과 물, 대지를 축 수하고 파괴하나 다시 보듬는 정 없는 존재...." 빛들에서 마치 빛으로 금을 긋듯 그 사이사이에서 얇은 선이 팟팟 그 려졌다. 그리고 가장 위에 있는 빛에서 선이 뻗어가고, 그 양 옆에서 부채꼴의 선이 펼쳐진다.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한다. 팔 다리가 욱신거리고, 이가 커지는 듯 턱이 쑤신다. 심장이 점점 크게 뛰어오르기 시작하며, 온 몸의 피가 같이 뜨거워진다....금방이라도 끓어오를 듯. 아킨은 가슴을 움 켜쥐며 속으로만 외쳤다. 안 돼.....! 그러나 손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쏟 아지고 흐트러져도 속절없다. 아킨은 주먹을 움켜쥐고는 악튤런을 보았다. "뭘....하자는 겁니까?" "달이 속박하는 네 야성을 완전히 풀어 주겠다는 말이다. 아마도 영 원히-" 이마가 타는 듯 했다. 불로 지진 인두로 무언가를 새겨 넣는 듯한 지 독한 고통이다. 악튤런의 손이 그 위에 얹혔다. "성문자의 위대한 점은 말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 고 성배야 말로 그 힘을 무한히 쓸 수 있게 해 주는 가장 위대한 것이고......너는 그것으로 구원 받을 수도 있었고 파멸할 수도 있었지 . 네가 택한 것은 유감스럽게도 후자로군." "......." 아킨의 눈에 그물망 같은 빛의 선들이 무수히 그어지는 것이 보였다. 별들을 엮어 놓은 듯 눈부시게 빛나는 그것- 피는 점점 더 뜨거워지고, 눈앞의 별 같은 빛들은 착시인 듯 분명한 형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점점이 박힌 것들이 모이고 뭉치고 뚜렷 해진다. 그리고.... 힘을 이끌어 내는 몸짓. 움직이려 했지만, 꿈쩍도 할 수 없었다. 악튤런의 눈빛이 보인다. 그러나 그 활활 타는 눈빛이 마음에 안 든 다. 상감을 포획하기 직전의, 그 승자의 희열.....흥분하고 들떠서 비명이라도 질러 젖힐 것 같은 저 눈빛. 아주 마음에 안 든다. 아주--! 아킨은 사납게 웃었다. "노트, 꼼꼼하게 읽어 보셨습니까." "뭐?" 아킨은 피가 끓는 것을 그대로 느끼며 앞으로 걸어갔다. 악튤런이 멈 칫했다. 몸을 옭아매던 힘이 흩뿌리듯 사라진다. 열기에 앞이 흐려지고, 욱신 거리는 고통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속에서 몸을 뒤틀며 울부짖는 분노만은 못하다. 물론 정신력 따위는 별로 믿지 않는다. 방금 전까지 단단하게 몸을 옭아매던 족쇄를 마치 얇은 거미줄 걷듯 가볍게 치워버릴 수 있는 것은, 힘과는 전혀 상관없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으니까. "진실은 수십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고, 그 중에 당신이 원하는 모습 하나 정도는 있을 테죠......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 "그리고 어떤 진실을 자기편으로 하고, 어떤 진실에 배반당하지 않을 지는....당신이 알아서 할 바이며, 당신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아킨은 손을 들었고, 그 끄트머리는 악튤런의 가슴을 향했다. "당신의 마음이 어떠하든 상관없습니다. 저를 이용하려는 것도, 죽이 려는 것도.......하지만......제 아버지와 제 형 이외의 사람이 그러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 말해도 악튤런의 눈은 여전히 당당했다. "어차피 막을 수 없을 텐데." 다시 쓴 웃음이 치밀어 올랐다. "당신의 스승이신 컬린이 그것을 막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변화 자체가 모든 제약의 마법을 거부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슨..." 마나가 모이며, 아킨 주변 위로는 하얗고 차가운 빛 무리가 어리기 시작했다. "당신이 제 몸의 변화를 이끌어낸 순간부터, 이 방안의 다른 모든 마 법이 제게 쓸모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딛고 있는 바닥위로는 아킨이 아는 수십 개의 페그 라일이 번개 치듯 휙 드러났다가 사라지고, 그것이 다시 또 다른 수십 개의 또 다른 페그 라일로 변했다. 그것이 번득이는 순간순간마다 주변은 더욱 차가워지고, 마나가 움직 이며 일으키는 돌풍에 머리카락이 흐트러지고 커튼과 카펫이 들썩 였다. "너, 언제부터....!" "저 역시 이 방에 묶게 되는 그 순간부터 죽지 않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으니까요." **************************************************************** 작가잡설: 역습의 아키. -_-! 며칠 간 연참모드에 들어갑니다. 훌훌~ 왜냐고요? 이 이유를 아시는 분이 계시다면, 그냥 그대로 알고 계시 면 돼겠습니다;; 제 패턴을 아신다면 대체로 짐작 하실 테죠.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45장 ************************************************************* [겨울성의 열쇠] 제205편 해와 달#2 ************************************************************** 루첼은 급히 마하의 팔목을 잡았다. 거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마하 쪽이 멈추지만 않았다면 루첼은 아마 그 팔에 휘둘려 내동댕 이쳐졌을 것이다. "왜 그러십니까, 그란셔스!" "물러나세요!" "네?" "당장 물러나라고요!" 그리고 그렇게 외치는 순간 순식간에 일이 일어났다. 쩌르르-! 온 궁이 한꺼번에 몸을 떨기라도 하는 듯 했다. 창에 금이 가고, 테이블이 쓰러지며 놓여있던 꽃병과 도자기들이 와장창 깨어 졌다. 바람이 빗방울과 함께 휘몰아쳐 들어와 볼을 차갑게 때렸다. "젠장--" 그렇게 중얼거리는 순간에 마하가 앞으로 달려 나가더니, 루첼의 가 슴을 팍 밀치며 도끼를 세웠다. 방문을 중심으로, 벽과 천정에 금이 쩍쩍 가기 시작하더니 그 사이로 수정처럼 반짝이는 것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 위로 새싹이 돋듯 하얀 결정이 맺히며, 엄청난 속도로 증식하여 온 벽을 뒤덮기 시 작했다. 루첼이 생각한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니, 단 하나였다. 위험하다, 라는 것뿐이다. "물러나요, 마하--!" 콰광--! "큿-!" 방문이 거대한 괴물의 이에 으스러지듯 깨어졌다. 차갑고 거세고 뿌 연 것이 쏟아져 나오고, 갈라졌던 벽들은 터지듯 무너졌다. 창문은 더 멀리 와장창 깨어져나가기만 하고, 빗줄기마저 안으로 들어오 자마자 얼어붙어 얇은 싸락눈처럼 화르륵 쏟아졌다. 마하는 도끼를 들었지만, 정작 사태를 막아야 할 마법사 루첼은 멍하 니 그 광경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눈보라였다. 시야를 가리고 발을 묻고 한 송이 한 송이 일 때는 한없 이 부드럽지만 마음먹으면 무자비하게 쏟아져 뒤덮어 버리는 그 하얀 연무! 문은 깨어져 커다란 동굴 입구처럼 변했고, 비 쏟아지는 컴컴한 밤이었건만 그곳만은 별들이 쏟아지는 듯 빛나는 눈에 휘감 겨 뿌옇게 보인다. 창문은 날아갔고, 벽은 무너졌고, 바닥은 쩍쩍 금이 가 있었다. 곳곳 이 얼어붙어 있고, 결정이 맺혀 반짝였다. 그렇게 방 안은 완전히 폐허였다. 바닥에는 무언가가 흐릿하게 어려 있다가 루첼의 눈길이 닿자 눈 녹듯 사라진다... 루첼은 그것을 알아보았다. 그것은 수 십 개의 페그-라일, 그 툴칸의 벽화처럼 화려한 문자열이 한꺼번에 만들어낸 것은 힘을 담는 공간과 그 공간이 응축시켰다가 터뜨리는 거대한 힘-즉 방금 전의 그 어마어마한 폭발이었다. 그리고 저것은 '오거스트 롤레인 방식'의 마법이다. "아키.....!" 스승의 이름이 떠오르자 루첼은 정신이 들었다. 빗줄기들이 얼어붙어 있는 방위로 쏟아지며 그것들이 찬찬히 녹아들 기 시작하고, 어둠이 밀려들어오며 빗소리와 천둥소리와 함께 환상 같은 광경이 깨어졌다. "아키!" 루첼은 급히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킨은 무릎을 꿇은 채, 어깨를 움켜잡고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손 을 대는 순간에 불이라도 붙은 듯 뜨겁게 느껴졌다. "아키, 어떻게 된 거야!" 아킨이 루첼을 돌아보았고, 루첼은 순간 섬뜩했다. 두 눈은 루첼을 갈기갈기 찢어 놓을 듯 이글이글 타올랐고,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흔들리며 흐트러져 있었다. 악문 이 사이에서는 신음소리가 아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스며 나오고, 숨소리는 금방 넘어가기라도 할 듯 거칠었다. 온 얼굴은 땀과 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너......." "루첼...세루비아나 경에게 말해. 지금...지금 당장 모두 카티온을 떠나 라고......!" "네 몸부터 추슬러라." "나.....지금 떠나야 해! 지금 당장.....그러니 너도 서둘러!" 그리고 아킨이 그렇게 외치는 순간에, 아킨의 눈동자가 확 커진 것 같았다. 드러난 이의 송곳니가 길어지는 듯 했고, 외침도 순간에 온 몸이 떨리게 할 정도의 포효소리로 들렸다. 순간 그의 어깨를 잡 은 손을 놓칠 뻔 했다. "너.....이상해." "알고...알고 있어! 그러니 서둘러야 한다는 거야....!." 루첼은 아킨의 귀가 상처 때문에 피에 젖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 킨이 앞을 노려보며 이를 갈아붙였다. "저....자식 짓이다. 이제 어떻...게 될지 나도 몰라.......큿!" 루첼은 아킨의 분노어린 눈이 향하는 곳, 역시나 무너지고 빗물에 씻 겨 내려가는 맞은편의 벽에 등을 기대고 가슴을 움켜쥐고 있는 악 튤런을 발견했다. 주변에 파편이 둥글게 늘어져 있고, 바닥이 그 원까지만 금이 가 있는 것으로 보아 보호의 마법이라도 쓴 듯 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 뒤로 밀려 벽에 크게 부딪히며 갈비뼈에 금이라 도 간 듯도 했다. 그의 눈은 섬뜩할 정도로 차가웠다. 어깨는 가늘게 떨렸고, 그 얼굴 에 가득한 것은 모멸감이었다. 그의 성격을 알고 있어 그가 무슨 짓을 할지 알아챈 루첼은 아킨의 어깨를 쥔 채로 빠르게 말했다. "아킨토스, 우선은 가장 가까운 숲으로 도망쳐. 뒷일은 그 도도하고 성질 더러운 여자가 다 알아서 할 테지." 세루비아나를 말하는 것이다. 아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루첼은 그 어 깨를 가볍게 탁탁 쳐 주고는 손을 당겼다. "하지만 너무 멀리는 가지 마라.......찾아주기 어려울 것 같으니까." 루첼은 그리고는 빙그레 웃었다. 아킨의 눈길이 멈칫했지만, 루첼은 그 웃음만으로 모든 것을 답하고는 몸을 일으켜 아킨을 등졌다. 순간 날카로운 빛이 루첼을 향해 콰작 내리박혔다. 악튤런이 이제 제 대로 정신을 차린 것이다. "프로텐...!" 루첼 주변으로 뿌연 막이 생겨나며 공격을 퉁겨났고, 반사된 힘은 그 대로 왼편의 벽을 박살냈다. 콰르--! 벽돌조각이 와르르 쏟아져, 더 엉망이 되려야 될 수도 없는 방 안에 또 한번의 폐허를 만들어 냈다. 악튤런이 몸을 일으켰다. 그의 손이 앞으로 향하고, 소맷자락이 펄럭 인다. 주변에 바람이 일어나며, 빗줄기와 고인 물이 날개를 펼치듯 양 옆으로 촥 갈라졌다. 바람소리가 점점 더 거세어지고, 점점 더 사납고 날카로운 소리를 낸다. 허벅지와 가슴 근방에 흐릿한 페그 라일이 떠오르고 사라지고 다시 바뀌어 떠오른다. 시전 보호는 애 초부터 일어나고 있으니, 주먹이나 발이 들어갈 틈도 없다. 굉장하군. 예전의 탈로스와의 무모한 결전을 떠올리며, 루첼은 컬린의 세 제자 이자 마지막 제자역시 지금의 그에게는 아득한 존재라는 것을 확인 해야 했다. 방금 전의 아킨도 분명 저 녀석이 정신 놓고 있는 틈에 치고 들어가서 겨우 한번 밀쳐낸 것이겠지.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방법은 단 하나다. 뭘 어떻게 해 볼 상대가 아니니, 그냥 도망 칠 틈이나 보는 편이 낫다. 그렇다면 제대로 몇 개까지 쓸 수 있나? 무식하게 때려대는 마법이야 수 백 번이라도 쓸 수 있겠지만, 그런 아담한 단계로는 만 번을 때 려봐야 소용없을 테고.....페그 라일은 지금으로는 스무 개 정도가 한계 . 새삼 롤레인에게 억울한 생각이 든다. 아킨에게는 아무래도 꽤 가르쳐 준 것 같은데, 나한테는 왜 거기까지만 가르쳐 주신 건가. 그것도 본인의 마법과는 전혀 다른 것을..... 순간 앞이 번쩍 했다. 콰창-! "프로텐--!" 루첼은 급히 보호막을 쳤지만, 엄청난 힘이 루첼을 강타했다. 바닥이 무너지듯 꺼지고, 벽은 쿠르릉 무너지고, 주변은 울부짖는 듯 했다. 빛이 방전하고, 천둥이 울리고, 온 빗줄기가 작은 바늘처럼 따갑 게 몸을 친다. "피아레...." 그 중얼거림이 들렸는지 앞의 악튤런의 입에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루첼은 마주 보며 히죽 웃고는, 그의 주변에 확확 타오른 불꽃을 그대로 앞으로 내 던졌다.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주변이 뜨거워지자, 빗방울들이 마르며 주 변은 부옇게 변했다. 한치 앞도 보기 힘들 정도로 변해버리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공중에 몸이 붕 뜨는 것 같을 정도로 주변 이 안개로 가득차는 순간에, 루첼은 최대한의 힘을 끌어 모았다. 안개 속에 연분홍색으로 그려진 페그 라일이 떠올랐다가는 사라진다. 그리고 발걸음 소리와 마나, 숨소리가 들려오는 장소를 짚으며 악 튤런이 어디 있는지 대강 짐작하고는 그대로 불꽃을 쏘아 던졌다. 온 몸에서 힘이 긁혀다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가슴 앞에서 이글거 리던 불꽃이 앞으로 화살처럼 쏘아져 나가며, 양 옆으로 좌악 펼쳐 졌다. 불길은 안개 낀 주변을 마르게 했지만, 그 바깥의 물들을 모조 리 수증기로 뿜어 올렸다. 왕궁 자체가 자욱한 안개에 뒤덮여 버렸다. 그리고 콰르릉--! 엄청난 빛이 열기와 함께 터졌다. 칼처럼 날카롭고 예리한 악튤런의 것과는 다른, 거대한 파괴력으로 무지막지하게 내리 누르는 엄청난 힘이다. 그러나 저 멀리서 차갑고 단단한 백색 빛의 날이 솟구쳐 올랐다. 그 것이 안개를 밀어내고 불꽃을 내 던지고 연기를 걷어내며 달려오며 바닥을 으깨어 놓았다. 루첼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가는 쫙 펼쳤다 . 바로 앞에 페그 라일이 떠오르고, 그것들이 달구어진 듯 빨갛게 변해갔다. 다시 한번! 루첼은 페그 라일 하나하나를 짚으며 주문을 외웠다. "에오슬, 우크, 코그사-" 점점 열기가 거세어진다. 손끝이 저리기 시작한다......간단한 마법이 야 써 봤지만, 이렇게 정식으로 진과 페그 라일로 이루어지는 마법을 써서 대결하는 건 정말 처음이었고, 점점 바닥과 가까이 닿아있는 힘까지 이끌어내야 한다는 것이 루첼 자체를 오히려 더 냉정하게 했다. "자바....시- 브...." 방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열기가 솟구쳐 올랐다. 바위 조차 녹여버릴 듯 주변이 벌겋게 변하더니 그것이 밀려나듯 앞으로 돌진해 나갔다. 안개는 더욱 자욱하게 엉키고, 열기와 습기가 뒤엉 겨 한여름 밤이라도 된듯했다. 불길이 뿜어져 오르며, 악튤런이 있 는 곳으로 한꺼번에 내리박혔다. 그러나 콰앙-! 불길과 열기가 깨어지듯 터져 올랐다. 엄청나게 하얗고 날카로운 전 격이 치솟아 오르고, 그것이 루첼의 페그 라일이 이루는 마법의 열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는 파괴했다. 여기서 도망치는 것이 처음부터 계산된 바였지만 상황을 보아하니 마 음 놓고 도망쳤다가는 뒤통수 깨질까봐 움직일 수도 없었다. 등골이 오싹오싹해지려는데, 갑자기 두터운 도끼가 날아와 루첼과 악 튤런 사이에 퍽 박혔다. 그리고 악튤런이 주춤 뒤로 물러나려는 순 간에, 두터운 손이 루첼의 어깨를 낚아채고 도끼를 뽑아 들어 악튤런 을 겨누었다. "이제 그만 두십시오, 악튤런 님." 마하였다. 악튤런이 불처럼 노했다. "너는 당장 꺼져!" "모두를 곤란하게 하지 마십시오." 악튤런이 다시 사납게 이를 갈아붙이고는 험악하게 외쳤다. "네 년 따위가 나설 일이 아냐! 이건 폐하의 명령이다." 루첼의 어깨를 쥔 마하의 손이 꿈틀 움직였다. 이를 뿌득 무는 그녀 의 눈빛은 분노와 경멸로 불타올랐고, 그녀가 조금만 성질이 급했 더라면 고함이라도 한바탕 질렀을 것 같았다(그녀의 신분이 좀 더 높았으면 주먹이 날아갔을 지도 모르겠다). "정말 폐하께서 귀빈궁을 박살내고, 암롯사 왕자를 죽기 직전까지 몰 아가며, 그 일행을 이 지경으로 만들라 명하셨습니까!" "의심난다면 네가 직접 물어봐라. 나는 분명 폐하께 직접 명을 들었 다. 암롯사의 왕자를 죽이고, 그 일행을 작살내고, 폐하는 암롯사에 물러날 곳이 없는 선전포고를 하겠다 하셨다." "........!" 루첼은 뭘 잘못 들었나 싶었다. 열기와 습기에 머리가 어지러워서, 분명 누군가가 헛소리를 하거나 헛것을 듣게 된 것이라 생각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마하 역시 비슷한 눈빛이었다. "그란셔스 씨, 도망...치십시오. 귀국의 일행은....제가 최선을 다해 도 망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마하 칸느, 정확히 말씀해 주세요! 이게 뭡니까." "들으신 대로입니다....그러니 들으신 대로 전하도록 하십시오. 먼저 알거나 늦게 알거나, 아니면 한번 알고 두 번 알거나......언제 어떻게 보고를 드려도 페하의 결정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루첼은 진심으로 기가 막혔다. 그러나 마하는 도끼로 악튤런을 겨누 며 침착하게 말했다. "방향을 구분하실 수 있다면, 어떻게든 동쪽으로 달려가도록 하십시 오. 그곳에 깊은 숲이 있습니다. 아마도, 왕자께서는 그 쪽으로 가 셨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다가 마하는 생각을 바꾼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 같이 가도록 하죠." "그랬다가는 당신도 난처해 질 듯 한데요." "지금의 제 할일은 사태가 최악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뿐입니다." "최악보다 좀더 좋은 사태란 아키가 살아 있어서, 아키의 신상을 데리고 협상을 벌여 보는 겁니까?" "사이러스 대공왕은 일이 그리된다면 아마도 칼을 보낼 위인이죠. 알아서 죽으라고." 그것이 농담이 아니라 '정말'이기에 루첼은 스산한 웃음을 흘려 야 했다. "그란셔스, 왕자가 어떤 상태냐에 따라, 전쟁의 끝이 틀려집니다. 왕자가 살아 있다면 '보상'으로 끝날 수 있지만, 죽는 다면....철 저한 '보복'으로 끝낼 수밖에 없는 겁니다......아시잖습니까. 죽 음에 대해서는 죽음으로만 값을 받아 가는 것이 바로 암롯사라는 것 을- 도와주십시오." 빗줄기가 드디어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그것을 목덜미로 느끼며, 루첼은 아킨이 방향을 제대로 잡아 도망쳤 기를, 그리고 그가 만들어 주었던 안개가 아킨의 추격을 조금이나마 늦추어 주었기만을 바랬다. 암롯사와 델 카타롯사 사이의 전쟁은 상관없고, 아킨에게 무슨 일 이 생긴다면 자켄과 롤레인에게 면목이 없어진다. 그러니 지금의 루첼에게는 그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악튤런이 외쳤다. "비켜, 마하-!" 드디어 마하가 분노했다. "알아서 치십시오! 도망치게 놔두시던가, 아니면 저를 치고 그란셔 스 씨를 치든가." "폐하의 명령이라고 했다!" "직접 듣지 않았으므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명이 라면 거역합니다." 그리고 악튤런을 향하는 마하의 도끼가 빛났다. 말 그대로 마하를 치는 것 밖에 남지 않은 악튤런이 이를 갈아붙였다. ************************************************************** 작가잡설: 루첼 왕자와 마하 기사!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45장 ************************************************************** [겨울성의 열쇠] 제206편 해와 달#3 *************************************************************** 마법사가 대표로 있는 사절의 가장 큰 장점은, 어떤 소식이건 즉각 전하고 즉각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급한 연락을 위해 마련해 두었던 수정구가 번쩍거려 몸을 추슬러 나 갔던 케올레스는, 세루비아나의 전갈이 끝나자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아니, 왕에게 보고해야 한다- 라는 의무감만 없었으면 마음 놓고 졸도했을 것이다. "신이여.......!" 테시오스의 일이 터진 것이 고작 몇 시간 전인데, 델 카타롯사로부터 전해진 이번 소식은 그냥 악몽의 연장이라 생각해 버리고 싶을 정 도로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집사와 아내가 말려도 당장에 채비를 갖추었다. 그리고 마차가 준비되자마자 부축을 받아 힘겹게 타고는 곧바로 암롯사의 궁으로 향했다. 이틀 째 쏟아지던 비는 어느덧 그쳤지만, 길 곳곳에 물이 고이고 진 흙투성이라 엉망진창이었다. 그런 길이라 마차는 더욱 느렸고, 케 올레스는 마법만 쓸 수 있다면 차라리 날아가고 싶을 정도로 초조 해져갔다. 그렇게 겨우 겨우 성에 도착하게 되자 케올레스는 곧장 왕을 찾아갔 다. 케올레스였으니, 직접 왕을 찾아가도 아무 문제가 없었고 말리는 사람은커녕 부축하는 사람까지 달려왔다. 그리고 왕의 집무실에 도착했을 때, 그 곳에는 왕과 휘안토스와 해군 사령관 칼바 대장까지 와 있었다. 사이러스가 말했다. "아프다고 들었는데, 케올레스." "델 카타롯사에서 큰 사고가 나서 이렇게 달려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폐하." 칼바 대장이 왕의 눈치를 살폈다. 사이러스는 그에게 손짓을 해 집무 실에서 내보냈다. "그래. 무슨 일인가, 케올레스?" "델 카타롯사쪽에서 우리를 배반 했습니다." 사이러스의 이마에 주름이 졌다. 문 쪽으로 가던 휘안토스가 멈추어 서 돌아보았다. 사이러스가 물었다. "무슨.....소리냐, 그것이." 케올레스는 머리를 조아리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누군가가 귀빈궁에 머무시던 아킨토스 님을 공격했다 합니다....! 아 킨토스 님께서는 카티온에 머무는 모든 암롯사의 사절을 모두 철수 하라 명하신 후에 행방이 묘연해지셨습니다." "묘연해졌다는 건 정확히 어떤 의미지." "말 그대로 사라지셨습니다. 세루비아나가 직접 귀빈궁으로 갔으나, 그곳은 드래곤이라도 한 마리 휘젓고 간 듯한 폐허뿐이었다 합니다." "델 카타롯사에 억류된 것인가?" "그건 아닌 듯 합니다. 그랬다면 그들은 세루비아나를 통해 저희에게 협상을 제의해 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암롯사 사절을 추방 하겠다는 말만 했을 뿐, 아킨토스 님에 대해서는 그 어떤 말도 없 었습니다. 그들도 놓친 것입니다." "아니면 죽였거나." 케올레스가 고개를 들었다. 사이러스는 잠시 아무 말없이 있었다. 그러던 그의 눈길이 문 앞에 서 있는 휘안토스를 잠시 향했고, 그런 아버지의 눈길을 받아도 휘 안토스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키가...." 휘안토스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중얼 거렸다. 그 리고 방안이 침묵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문득 눈을 들었다. 아버지 사이러스의 눈길이 그를 향하고 있었고, 그제야 그 는 자신이 해야 할 말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휘안토스가 말했다. "죽지 않았습니다." "확실하겠느냐." "확실합니다. 아니, 제가 살아있는 것만큼 아키가 살아있다는 것 역시 확실합니다." 케올레스가 막연한 눈빛을 보냈다. 믿고 싶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그 런 본능적인 확신을 진심으로 믿기는 곤란해 하는 것이다. 휘안토 스는 차분하게 말했다. "제 본능 때문만이 아닙니다. 아키가 죽었다면, 아키의 시체와 함께 사절을 추방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사이가 나쁘다 하지만 왕가와 왕가의 문제, 그 정도 예의는 지키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미루어 짐작하건데, 아키는 그들 손에 없는 것이며, 그들 역시 급하게 찾으 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겠지." 그렇게 말하고는 사이러스는 풋 웃었다. 케올레스의 눈빛이 어두워졌 다. "케올레스, 카티온에 머무는 사절을 모두 귀국시켜라." "하지만 아킨토스 님을 찾아야 합니다!" "아키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도망쳤을 것이다. 그리고......장담하지. 아키는 잡히지 않을 것이고, 암롯사로 향하는 길만을 제하고는 어 디로든 갈 것이다." 휘안토스는 조용한 눈길로 아버지 사이러스의 말을 들었다. 아버지의 말 하나하나에 무엇을 찾아내고 있었으며, 어찌 해야 할지도 생각해 나가고 있었다. 아니다. 사실 전날부터 짐작하고 있었던 일이고 이렇게 '확인'되었으니 생각했던 대로 하면 될 뿐이다. "케올레스, 오르피나를 불러 레노아 백작와 함께 오도록 해라. 곧바로 항의서한을 보낼 테니....." "항의...로 끝내실 생각이십니까?" "물론 나는 지속적인 항의를 할 것이다. 협상은 없고 협박만이 있을 뿐이며, 타협은 없고 오로지 승리와 패배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사이러스는 서서히 밝아오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은은한 빛이 퍼지며 하늘은 환해지고, 어둠에 묻혀 있던 숲과 도시의 윤곽이 회색빛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멀리 있는 바다의 끄트머리는 번쩍이고, 구름이 벌겋게 물들며 흩어지자 구리 빛 하늘이 조각조 각 얼굴을 들이민다. "먼저 선전포고를 하실 생각이십니까?" 휘안토스가 묻자 사이러스는 고개를 저었다. "물론 아니다. 파렴치한 자들은 끝까지 파렴치하게 만들어 줘야하는 법이지. 모든 것이 끝났을 때, 내가 어떤 자비도 타협도 베풀 가치가 없도록 말이다." 휘안토스는 아버지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빛나는 하늘과는 달리 어 둠에 잠겨 있는 아버지의 옆 얼굴은 이제는 늙어가고 있었으나 눈 빛만은 고집과 힘으로 단련되어 있었다. 돌은 시간에 깎여나가지만, 나무는 시간에 따라 더 크고 단단해지기만 한다. 그래, 아버지는 오래된 나무였다. 단단한 가시와 더욱 단단한 껍질을 가진, 그런 나무 말이다. "휘안, 너 역시 이번에는 좀 바쁠 것이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좋다......우선은 장례준비나 마치도록 해라. 저 어리석은 젊은 왕과의 전쟁은 아마도 한달 하고 보름이 있어야 시작될 듯하니, 아직은 여 유를 가져도 좋다." 성배로 언약된 기간이 끝나야 무엇이든 시작된다. 아무리 칼리토 대 공왕이라도, 그 정도까지 정당성을 잃으면서 전쟁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나머지는 아침에 생각하도록 하지. 당장 우리가 할 일은 없을 테고, 주변 모든 나라들이 충분히 경악할 시간을 준 후에 움직이는 것이 좋을 테니." "알겠습니다, 폐하." "케올레스, 오르피나에게 명해 둘 테니 자네는 편히 쉬게. 그리고 휘 안, 너도 마찬가지다. 쉬어라." "네." 휘안토스는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아버지의 집무실을 나섰다. 대기하고 있던 마르실리오가 따르려 했지만, 할아버지나 잘 모시라는 말만 남기고는 혼자 그의 침실로 돌아갔다. 아버지 말 대로 바빠지기 전에 하루라도 푹 쉴 생각으로 들어오기는 했지만, 휘안토스는 침 실 문을 닫자마자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아버렸다. 주변이 조용하면 조용할수록 그의 머릿속은 들끓어 오르고 있었다. 숨죽이면 숨죽일수록 그 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날뛰며 울부짖으려 하고 있다. 휘안토스는 머리카락 때문에 간지러워 이마를 쓸어 올리려다가, 그제야 얼굴이 땀에 흠뻑 젖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뭐냐, 이건. 덥거나 몸에 열이 올라 땀을 흘린 적은 있어도, 이런 식으로 땀을 흘 린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긴장하고 있다. 무엇 때문에? 곧 전쟁이 일어날 거라서? 아니, 그건 아니다. 예전의 토너먼트 때도 이런 적 이 없는데. 휘안토스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거울 덕에 바로 자신을 바라보는 자신과 마주쳤다. 잠시 휘안토스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새삼 이상한 기분이 든다. 이렇게나 아킨과 자신이 '같은 얼굴이었던가'. 이렇게 똑같이 생긴 채, 서로를 그렇게 바라봐 왔던가- 웃음이 나온다. 그리고 솟구쳐 터지려는 그 웃음을 삼키며 휘안토스 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미친 듯이 걷고 걸어 어딘가에 도착했다. 그리고 문을 닫고 멈추어 선 채 잠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아니, 할 수 없었다. 조금 지나자 여러 생각들이 이것저것 떠오르기 시작한다. 왜 여기에 있는 거지, 휘안토스는 자신에게 묻기 시작했다. 어떻게 여기로 온 거지 ? 오면서 무슨 생각을 했지? 오기 전에는 또 무슨 생각을 했던 거 지? 질문이 드는데, 그 질문에 답할 것이 하나도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 생각도 계획도 없이, 그저 걷고 걸었고 걷다가 그 정신없는 것이 끝난 직후에 이렇게 여기에 서 있는 것이다. 간밤의 천둥번개에 씻겨 내려간 하늘은, 아직 절반은 구름에 덮여 있 었으나 수정물로 씻은 듯 맑고 깨끗했다. 창이 바라보는 하늘은 서 산이라 아직은 어둑했고, 그 아래에 깔린 산등성이와 숲은 어둠이 고 여 까맣다. 휘안토스는 창가에 기대 아직 어둡게 물결치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동쪽 바다끄트머리는 반짝이고, 하늘은 피를 뿜어 올리듯 붉게 물 들어 있었다. 자줏빛 구름은 계속 서쪽으로 밀려나가며, 어두운 그 림자를 거두어 들였다. 그리고 어느덧 하늘이 환하게 밝아오기 시작했 다. 빛이 퍼드러지자, 덩어리져 물결치는 바다위로는 찬란한 금빛 햇살이 부서지며 아찔할 정도로 화려하게 반짝거린다. 휘안토스는 문득 오른쪽을 돌아보았다. 텅 빈 벽난로와 차갑고 화려한 벽에, 언제나 그곳에서 모든 이를 내 려다보고 있는 정지한 시간속의 어머니가 있었다. 다시 그녀가 속 삭여 온다. 가엾은 아가. 그 그림을 볼 때마다, 소녀처럼 젊고 아름다운 그녀는 그 안에 홀로 앉아 그렇게 속삭였다. 가엾은 아가. 내 가엾은 아가. 밤바다의 조 용한 속삭임처럼, 사랑 넘치는 어머니의 자장가처럼 끊임없이 들려오 는 그 말..... 대체 왜! 휘안토스는 갑자기 치밀어 오르는 그 신경질적인 외침에 자신이 더 놀랐다. 대체 왜.......! 언제나 답답할 정도로 의문이 들지만, 답을 듣거나 얻 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닫힌 문 너머로, 어머니는 자신의 죽 음과 함께 그 답을 가지고 영원히 떠나 버렸다. 어느 보름달 밤....아니 , 정확하게는 보름의 새벽에. 그 날 휘안토스는 악몽에 깨어나 정신없이 달려 나갔다. 엄청난 재앙이 내릴 것만 같은 새벽이었다. 노호하는 폭풍속의 바다 처럼, 언제나 고요하기만 했던 그의 모든 피가 들끓어 오르고 있 었다. 그렇게 달리고 달려서, 마침내 지상의 뚝 끊어진 끄트머리 절벽에 도 착했다. 그 아무도 없는 빈 절벽에 매달린, 황야 위를 구르는 하얀 뼛조각처럼 남은 고목나무는 찬바람을 맞아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 고 달은 이미 지고 없는 그곳-- 옅은 빛이 뿌옇게 깔리는 그곳에, 동생이 있었다. 은빛머리카락은 겨울 세찬 바람에 나부끼고, 작고 하얀 얼굴은 어머 니가 사라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휘안토스는 자기도 모르게 외쳤었다. -어머니--! 그 때, 정말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절규하며 울부짖었다. 뜨 거운 눈물과, 그 눈물을 얼리는 차가운 칼바람. 그리고 그 때의 그 작고 하얀 아킨이 그런 휘안토스를 보았다. 눈물조차 마른 절망과 슬픔과 분노, 그리고 증오에 찬 그 두 눈이 휘안토스를 보고 있었다. 기억의 손길이 그날의 그 모습에 닿자, 휘안토스는 이번에는 좀 더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그리고 그렇게 웃다가 속삭였다. "아키가.....떠났군요." 그 활활 타던 두개의 눈동자가, 이제는 무심하고 차갑게 변해 떠나버 렸군요. 아시죠, 언제나 녀석은 말하죠. 나는 형의 것을 원하지 않아, 내가 무 엇을 하든 형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가지 않잖아. 날 좀 내버려 둬! 괴롭히지 마! 빼앗지 마! 본인조차 거짓인 줄 모르는 그 거짓을, 내 손에 잡힐 때마다 외쳤지요..... 하지만 나는 진실을 아는 데. 가슴이 차가워진다. 잠시 들끓어 오르던 피는 모조리 식어버리고, 차 갑고 무거운 심연의 바닥에 수장되어 버린다. 그러나 가엾은 아가- 그 말만이 추위에 움츠린 겨울계곡이 거칠게 내 쉬는 숨소리 마냥 뚜렷하 기만 하다. 가엾은 아가? 휘안토스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집어치우자고. 그렇게 몇 년 간 답을 찾아도 구하지 못했으니, 아마도 답은 아예 없을 거야. 휘안토스는 무겁게 뛰어오르는 가슴을 움켜잡았다. 피 없는 심장, 이 메마른 울림....이것이 또 명령을 내린다. 이제 무엇을 하라고, 어찌 해야 한다고, 그래야 '올바른' 것이라 '선고'한다. 아니, 정확하 게 말하자면 일이 이렇게 돌아가면 해야 할 일이라 어제부터 생각하 고 있던 것이다. "탈로스-" 드디어 그 이름이 나왔다. 순식간에 바람이 빠르고 가볍게 모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등 뒤로 검 고 큰 날개를 가진 것이 휙 나타났다. 휘안토스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로 조용히 말했다. "두 번째 부탁을 들어주십시오." 그리고 온 방이 어둠으로 덮이며 괴괴한 그림자 같은 거대한 새가 나 타났다. ****************************************************************** 작가잡설: 캐리비안의 해적을 보고 왔습니다. ^^! 원래 조니 뎁을 좋아하기는 했는데, 잭 스패로우는 정말 사랑스럽군요. (흐흐흐....) 게다가 윌 터너 군과는 상당한 싱크로율을 자랑하는 멋진 커플♡ 그래서 마지막에 손붙잡고 사랑의 도피;;라도 하기를 바랬건만 결국 잭 은 윌 군을 빛의 세계에 남겨 놓고 떠나 버리더군요. 에잇, 잭! 그 상황에서는 이쁜 윌 군의 허리를 붙잡고 끌고 가야 하는 거란 말이다! 엘리자베스에게 양보하면 어떻게 햇!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45장 ************************************************************* [겨울성의 열쇠] 제207편 해와 달#4 ************************************************************** 휘안토스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앞에서 흔들리는 기괴한 새 를 바라보았다. 아니, 새라기보다는 새의 그림자 같기도 했다. 그저 형체 없이 바닥에 길게 그려진 채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으니. 그것 을 드리우는 본체는 없고, 오로지 길고 크고 검은 것만이 앞에 있다 . 그러나 그 끝에는 분명 붉게 타오르는 눈동자가 있었다. 눈동자 아래에는 길게 찢어진 입이 붉게 타오르는 속을 보여주며 비틀린 웃음을 짓고 있었고, 그 안에서 금방이라도 고막을 찢을 정도로 크 고 두려운 외침이 터져 나올 듯 했다. 드디어 그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무엇이냐. 생각과 전혀 다르다. 지친 듯, 그러나 손자나 까마득한 조카를 보는 듯한 부드러움이 담겨 진 목소리였다. "끝내 주십시오." 새의 그림자가 흔들렸다. -무엇을? 그리고 검은 그림자가 성큼 다가왔다. 몸이 오싹할 정도의 차가움이 밀려들어왔다. 지지지지징-- 작은 벌 레들이 가득 날개를 치는 듯한 소리도 들려온다. 휘안토스는 가만히 그 그림자를 바라보았고, 그림자는 휘안토스에게 바싹 다가오자 히 죽 웃는 듯 했다. 휘안토스가 말했다. "제 동생을 말입니다." 상대가 놀란 듯 했다. -대체 왜? "답해드릴 수 없습니다......탈로스, 당신은 그저 저와의 약속대로 제 부탁을 들어 주시면 됩니다." -결과는 내가 책임져야 하는데. 휘안토스는 새의 그림자가 마치 끓어오르는 듯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별로 두렵지는 않았다. 탈로스가 그를 해칠 리 없고, 해칠 수도 없으며, 결코 해치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면 당신이 두려워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실대로 말씀하십시 오. 저는 상관없으니까요." -맙소사, 굉장한 용기로군. 네 아비와 같은 오명을 뒤집어 쓰겠다는 거냐. "아뇨. 당연한 것입니다. 당연한 건 당연할 뿐, 두려워하고 외면한다 고 저 스스로 없어지지는 않을 테죠." 클클--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웃는 것은 아니고, 정확히 짚어보 자면 '어이없다'는 웃음에 가까웠다. -그래도 누군가가 네게 분노할 것이다. "분노를 두려워하지는 않습니다. 맞서겠습니다. 또한, 그들이 두려워 서 여태까지 이래왔던 것이 아닙니다." -이상하군. 그렇게 두려운 것 없다면 왜 여태까지는 아이를 살려 놓 으라고 해 왔었지? 왜 모든 것을 깔끔하게 끝낼 기회를 계속 미루어 왔던 게냐. "탈로스 님, 저는 저를 지킬 뿐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을 택하는 것은 저의 소관. 더 이상 묻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림자는 휙 하니 멀어졌다. -요괴 같은 녀석. "그냥 필요에 따라 입장을 바꾸는 것뿐입니다. 제가 아닌, 제 아버 지....제 큰 숙부, 또한 더 많은 왕족들과 황족들이 이런 일을 합 니다." -하지만 지금 네 동생에게 이러는 것이 그런 목적 때문이라고는 생 각되지 않아. "다스릴 수 없다면, 가장 튼튼한 발을 가진 야생마라도 쏴 죽이는 수 밖에 없습니다. 하물며 발톱가진 야수가 사슬을 끊고 도망쳐 버렸 는데, 어찌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래, 부정할 생각은 없다. 분명 아킨을 지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분노를 달래고 증오를 수그리게 만들어, 자신과 아킨토스 사이의 차이가 얼마나 아득한 지를 끝없이 인식시켜 주고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왕이 될 휘안토스와 그가 다스릴 암롯사를 위해서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킨은 결코 휘안토스를 사랑할 수 없다. 아버지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고,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을 잊을 수 없듯이, 그의 들끓는 증 오와 분노역시 결코 달랠 수 없는 것이며 없앨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위해 그것의 형태와 방향을 바꾸어야 했던 것이다. 죽일 수 없다면, 어떻게든 지배해야 했다. 그의 증오와 분노가 휘안 토스의 심장을 '정확하게' 향하는 순간, 아킨은 앞에 무엇이 있든 갈가리 찢어버리고 달려와 휘안토스의 심장을 움켜잡고 물어뜯을 것이다. 그 누구보다, 그와 열 달을 마주하고 18년을 등 뒤에 지고 있었던 휘 안토스는 그 누구보다- 아니, 아마도 아킨 자신보다 아킨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지배하지 않으면 죽여야 한다. 지배되지 않으면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테니까. 한번 목덜미를 드러내면 단박에 물어뜯어 버리는 것이 이 곳이다. 마침내 그림자- 탈로스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확실히, 다시는 후회하지 않을 거라 자신하며 원하는 거냐. 그리고 그림자가 뒤로 더욱 멀리 물러났다. 이글거리던 붉은 눈동자 의 빛이 꺼지며 검게 변해갔고, 벌어진 입도 점점 가늘어진다.... '원한다' 라는 말이 갑자기 이상하게 들려왔다. 늘 쓰는 말인데도, 지 금만큼은 그것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이것을 '원했나?' 물론 싫어하거나 꺼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 다고 '원하는 것'이라 말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이것은 '필요한 일'일 뿐, 자신의 안전을 위해, 그리고 암롯사의 후계자인 자신의 안전은 곧 암롯사의 안전이므로 그 궁극의 목표를 위해, '필요한 일 '인 것이다. 그림자가 어둠 속으로 녹아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쪽으로 늘 어진 휘안토스의 그림자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탈로스가 무엇을 바라는지 알고, 또 이미 한참 전부터 무언으로 허락하고 용납하고 있었기에 휘안토스는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 이제 이것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아무리 탐스러운 털과 용맹한 발톱을 가진 짐승이라도 길들일 수 없 으면 결국에는 잡아온 사냥꾼의 목을 노릴 뿐인 위험한 야수일 뿐 이고, 길들이지도 못했는데 놓친다면 그야 말로 스스로 죽음을 자 초하는 것뿐이다. 어둠 속, 휘안토스의 그림자 속에 숨어 있다가 언젠가는 내 목을 끊어 놓을 이를 드러내고, 내 심장을 뚫을 손톱을 내 놓으며 살그머니 다가올 테니까. "......아키를......죽여주십시오." 그러니 이제, 너를 길들이는 것을 완전히 포기한 나. 드디어 내가 다 스릴 수 있는 한계선 밖으로 도망친 너, 이제 우리 둘 사이에 남은 것은 오로지 하나, 네가 죽는 것뿐이다. 그렇게 하는 게 '필요해' 순간, 휘이이--! 거센 바람이 솟구치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 왔다. 휘안토스의 그림자에서 긴 그림자가 뽑혀지는 듯싶더니, 어둠 속으로 휙휙 빠르게 도망쳤다. 램프의 불이 깜빡이고, 커튼이 위 로 치솟아 올랐다. 벽난로의 불이 휘청거리고, 창문이 부르르 떤다. 필요한 일이다, 휘안토스는 다시 한번 자신에게 그렇게 말했지만 동 시에 여태까지 자신이 '원해서' 한 일이 대체 얼마나 있는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그 소녀의 일을 제하고는 단 한번도 없 었던 같다. 갑자기 세상이 입을 닫은 듯 조용해졌다. 휘안토스는 마지막으로 부 드럽게 움직이는 커튼 쪽을 돌아보았고, 차츰 저물어 가며 피를 퍼 뜨리는 진한 노을을 발견했다. 그런데 마음속에서 또 다른 질문이 들려온다. 그 때 그 아이를 '원했다'고? 아킨은 비에 젖은 바닥위에 누워 있었다.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다. 여기까지 오고는 그대로 풀썩 쓰러져 기절해 버렸고, 눈을 뜨니 지금이다. 깊은 숲으로 들어왔으니 울창한 나뭇잎들 때문에 하늘이 가려 주변은 어둑했다. 낮일까 밤일까- 조금 밝은 것을 보니 낮인 듯도 한데, 아침인지 오후인지 도 모르겠다. 여기저기 생채기투성이였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다친 곳은 없 다. 어디쯤일까, 하고 생각해 보려 고는 해봤지만 별로 기억나는 것도 없다. 허기와 피로에 온 몸이 끊어져 나갈 것 같았고, 머릿속 도 같이 마비된 듯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머릿속은 하얗게 텅 빈 듯 했고, 그저 몸이 차고 상처가 따끔거린다는 것 정도밖에는 아는 것이 없다. 등지고 있는 나무둥치에서 풍겨오는 진한 나무 냄새, 짓밟히고 젖은 풀들의 비릿한 냄새, 그리고 온 몸이 그 현기증 나는 것들과 어우러져 혼미해지고 그대로 얼어붙어 가는 듯 하다. 차 라리 변해버렸으면 이 정도로 춥지는 않을 텐데......하는 생각이 들자 , 갑자기 웃음이 치밀어 올랐다. 참 간사하군. 방금 전까지는 어떻 게 될지 몰라 그렇게 다급했던 주제에, 정작 이렇게 되니 한다는 생각이 고작 그거냐.... 곧 툭툭툭--나뭇잎 끄트머리에 맺힌 물방울들이 쏟아져 아킨의 어 깨와 정수리를 차게 적셨다. 옛날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다. 그 때는 정말 죽으려고 도망쳤 던 건데, 정작 죽으려고 하니 죽기 싫어졌었다. 절벽 끄트머리에 서서 하늘을 봤을 때, 그 순간에 너무나 죽기 싫었다. 그래서 손에 잡히는 나무를 잡고, 절벽에 튀어나온 바위를 딛고는 살아남았다. 헛된 희망 때문에? 아니, 그냥 완벽한 절망이 싫어졌던 것이다. 모든 가능성을 스스로 내 팽개쳐버리고 마는 것이 싫었고, 솔직히 말하 자면 그 컴컴한 어둠이 두려웠다. 물론 해방될 수도 있을 거라 생 각했다. 더 이상 고민할 필요도, 슬퍼할 필요도 없이, 세상과의 모든 인연을 끊어버리고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으로부터의 기억들로부터 도망쳐 버리고 싶었고 그렇게 단 한번만 하면 다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 순간에 생각한 것은 단 하나- 너무나 어이없게도 보름달 이 아름답다, 그것뿐이었다. 그렇게 진절머리나게 증오했던 만월이, 그 순간에는 너무도 아름다워 보였던 것이다. 예전에 베이나트가 말했던 것처럼 죽을 이유는 그토록 많았는데, 살 이유는 그것 하나 로도 충분했다. 그래서 다시 살기로 했다. 내일, 내일 모레, 그렇게 한달, 아니 딱 두 달만 더. 아주 조금만 더 살기로 했다. 갑자기 그 날의 일이 이상하게도 생각된다. 보통 때의 보름에는 단 한번도 '의지'대로 몸을 움직였던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날만은 스 스로 도망쳐 스스로 죽으려 했다. 짐승이라면 자살을 할 리도, 생각 할 리도 없다. 생각난다. 아주 예전, 탈로스에게 기억을 잃기 직전에 베이나트의 목 소리를 들었을 때, 아킨은 분명 그것이 기억 속에 있는 듯 하다고 느꼈었다. 처음 듣는데 처음 듣지 않는 듯한 목소리, 그 뿌연 안 개 같은 기시감- 어쩌면 '그 때 그곳'에 자켄 뿐만 아니라 베이나 트도 있었을 지도 모른다.....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베이나트 는 자켄의 대부였고, 그의 성격으로 본다면 아직 성인도 되지 않았던 당시의 자켄과 함께 암롯사 까지 온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때 멀리서 개 짖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아킨은 등을 떼고는 몸을 일으켰다. 벌써 이곳으로 델 카타롯사의 수 색에 들어간 것인가. 그러나 그들이 비속을 헤치고 달려 나가던 갈색 말과 엉망진창이던 그 갈색말의 기수에 대해 묻는 다면 백 명도 더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그 갈색 말은 지금쯤 숲 언저리를 배회하고 있을 테고, 그것만 발견하면 이 숲에 아킨이 있을 거라 고 누구나 예상할 수 있을 테지. 다시 개 짖는 소리....컹, 컹-- 아킨은 망토를 던져 버리고는 숲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렇게 급 히 달리면서 옷을 말리고, 머리카락의 흙과 나뭇잎도 털어냈다. 여 전히 엉망진창 지저분하기는 했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최대한 숲 깊은 곳 까지 들어가 이들의 수색을 피해야 한다 . 수색이 멀어지면 그 때는.... 그러다가 아킨은 멈칫 했다. 뒤돌아서서 다시 귀를 기울였다. 컹컹- 짖는 소리가 분명하다. 타닥, 타닥- 말 달리는 소리도 들려오는 듯 하다. 피이--피이-- 작은 피리를 부는 듯한 소리가 언뜻 언뜻 들려온다. 그리고 다시 컹 컹-- 점점 가까이, 타닥, 타닥, 타다다다-- 빠르고 가늘지만 날카롭고 잔인한 발이 달리는 소리가 이어진다. 사방에서 몰려오는 그 소리는 분명 아킨을 중심으로 빠르게 집중되고 있다. 주변의 굵 은 나무둥치아래에 마치 검은 물이 올라오듯 그림자가 진하고 크게 어리고, 주변은 숨죽인 듯 침묵으로 빨려 들어갔다. "!" 온 몸의 피가 뚝 굳은 듯 했다. **************************************************************** 작가잡설: 걱정마세요. 저는 죽지 않을만큼만 괴롭힌답니다. ^^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45장 *************************************************************** [겨울성의 열쇠] 제208편 해와 달#5 **************************************************************** 아킨은 단검을 움켜잡았다.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통하지 않을 것임에 분명하지만- 적어도 무언가 쥐고라도 있어야 자신을 잃지 않을 듯 했다. 처음에는 차가웠던 칼자루가 체온 때문에 점점 달아올라 미지근하게 느껴진다. 떨지 않기 위해 이로 입 안쪽을 꾹 물고 있어, 피비린내가 입안에 가득하다. 심장은 쿵쿵 뛰어오른다. 주변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더니, 곧 까맣게 변했다. 팔과 다리에 닿는 나무둥치와 작은 돌들 덕에 아직 숲 안에 있다는 것을 알 뿐, 눈이 밝은 아킨도 그 어둠을 뚫고 주변을 둘러 볼 수 없었다. 컹컹- 개 짖는 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피이-- 피이- 또 피리 소리..... 그 특이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분명 '그들'이라 확신시켜주었지만, 그 럼에도 아킨은 쉽게 긍정하기 어려웠다. 정말 카람파의 노예들인가? 아니, 설마 그럴 리가 없다. 이곳은 델 카타롯사인 데다가, 그것을 부릴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휘안토스와 아버지뿐이다... 아킨은 우선 악튤런을 떠 올렸다. 그가 어느 정도 되는 마법사 인지 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 역시 탈로스와 롤레인처럼 베이나트의 제자이다. 탈로스가 할 수 있는 것을 그라고 못할 리도 없다. 하지 만 다른 마법이라면 몰라도 카람파의 노예들, 즉 이 그림자의 수 호자들은 암롯사 왕가에서 직접 허락받지 않는 한 팔로커스 자신이 아 닌 한 결코 쓸 수 없다. 그러니 악튤런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더욱 가까워져서, 누구 짓인지 생각하는 것은 집어치우기로 했다. 젠장- 아킨은 예전의 일, 그러니까 탈로스가 베이나트를 습격했던 그 때를 떠 올려 보았다. 아킨은 개 짖는 소리를 따라 숲 속으로 달려갔고, 그가 발견했던 것은 뚝 끊어진 것 같은 어둠이었다. 세상을 잘라 놓은 것만 같았다. 반으로 휙 베어내어서는, 아킨이 서 있는 곳은 온전한 세상이었으나 그 저편은 깜깜할 뿐이었다. 어두운 것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잘라진 듯' 검기만 했다. 그러나 그 때 공격받은 것은 베이나트였고, 아킨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동원하여 눈앞에 펼쳐진 검은 벽을 향해 쏟아 부었 던 것뿐이었다. 아킨은 단검을 세워들었다. 그 때 했던 그대로 하면 이 어둠이 깨어질까? 확신하기는 어렵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거의 하루 종일 숲 속에 있었던 듯 하고, 그렇게 되면 지금시각은 저녁- 즉 곧 '밤'이 된다. 당시의 탈로스는 분명 구름이 짙어서 해가 보이지 않을 때 베이 나트를 공격했다. 베이나트는 아킨에 의해 탈로스의 마법이 흔들리자 마자 구름을 헤쳐 놓아 햇살이 쏟아지게 했고, 카람파의 노예들은 더 이상 쓸모없게 되어 버렸다. 그러나 아킨은 아무리 자신에 대해 너그럽게 생각해도 빛줄기 하나 만들어 내는 것이 고작일 것 같았다. 그르르릉-- 낮은 으르렁거림이 들려와 아킨은 흠칫 눈길을 내렸다. 그곳에, 달군 동전처럼 활활 타오르는 두개의 눈동자가 있었다. 아킨은 뒤로 주춤 물러나다가, 뜨거운 입김이 닿자 손을 확 움츠렸다. 그곳에도 붉 은 눈동자와 허옇게 번득이는 송곳니가 있다. 그르릉-- 그르릉-- 그 소리가 점점 많아진다. 온통 컴컴해서, 그 소리가 온 세상에 가득 찬 듯 했다. "프로텐..." 아킨은 조용히 읊조렸다. 아킨 주변에 얇은 금테두리 같은 것이 쳐지 더니, 그가 딛고 있는 바닥위로 내려와 하얀 원을 그렸다. 그르릉-- 낮은 울음소리가 더욱 가까이에서 들리는 듯싶더니, 희미 하게 빛을 뿜어 올리는 테 위로 흉측하게 생긴 개의 머리가 드러 났다. 시든 오이처럼 찌그러진 얼굴이다. 검은 윤기만을 흐를 뿐 털 도 살도 없어보였다. 그것이 코를 들이밀자 파칭- 하고 성냥 긋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개는 뒤로 주춤 물러났다. 아킨은 칼자루를 양 손으로 쥐고는, 가슴위로 들어 올렸다. "코브사, 유크, 바시-" 검이 견딜 리 없을 테지만, 별 다른 수도 없어서 아킨은 그 주문을 끌어 왔다. 검 위로 몇 개의 시뻘건 페그 라일이 그려졌다. 불에는 별로 자신 없기는 했지만, 이 지옥에서 기어 나온 괴물들에게는 달구고 달군 것 외에는 별로 효과가 없을 것 같다. 순간, 탁-- 가볍게 발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보호막은 번뜩이듯 한 번 빛났다가는 그대로 사라졌다. 아킨은 검을 휘둘러, 가장 먼저 그에게 달려든 검은 그림자의 목덜미에 칼날을 꽂아 넣었다. 푸욱- - 살타는 냄새가 난다. 비명소리가 터진다. 크어어어어어엉--! 역겨운 비린내가 주변에 자욱하게 퍼졌다. 그러자, 갑자기 개들이 사 나워지기 시작했다. 짖고 울부짖고 으르렁대다가 날뛰었다. 아킨은 간신히 자신을 억누르며 주문을 외워갔다. "바시어, 로브사-" 칼날위에 드러난 페그 라일 위로, 다시 다른 페그 라일이 떠올랐다. 검은 이제 녹아내릴 듯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아킨은 검을 휘둘러 잡고는, 바로 앞에 있는 사냥개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목덜미에 칼날을 찍어 넣고, 뽑아 들어 다시 옆의 개를 찔렀다. 푹-- 피가 튀고, 뼈가 우드득 부러진다. 살이 찢어지고, 울부짖음이 터져 올랐다. 그러나 뭐가 등 뒤를 퍽 덮쳐오더니 어깻죽 지가 으깨어진 듯 엄청난 고통이 몸을 갈가리 찢어 놓았다. "큭--!" 그대로 신음을 흘리며 아킨은 검을 되돌리고는, 그를 공격한 상대의 심장에 박아 넣고 비틀었다. 개의 갈비뼈가 와드득 깨어지고 살이 타올랐다. 그 칼이 뿜어내는 열기에 개의 검은 심장이 터져 피가 기둥처럼 솟구쳐 올랐다. 그러나 어깨가 부서진 듯한 통증은 여전했다. "하악......큭-!" 다른 개가 다시 또 공격해 들어온다. 아킨은 그 머리에 검을 찍어 넣 었지만, 단검은 결국에는 열기를 버티지 못하고 불티처럼 산산이 바스러져 버렸다. "젠장-!" 아킨은 머리가 반쯤 부서진 그 개를 걷어찼다. 육중한 몸이 퍽 날아 가자마자, 다시 다른 개가 옆구리를 갈기갈기 찢어 놓으려고 입을 벌리고 달려든다. 아킨은 주먹을 휘둘러 그 개를 날려 버렸다. 그 머리뼈가 통째로 으스러지며 두개골이 절반은 함몰되어 버렸다. 다 른 개가 달려오자, 이번에는 목덜미를 움켜잡고는 힘을 주었다. 손 톱이 살을 파고 들어가며 찐득하고 지독한 비린내를 풍기는 피가 손가락 틈으로 스며 나왔다. 역겨웠지만, 그대로 힘을 주어 잡아 뜯어 버렸다.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고, 예상했던 대로 금방 피로가 밀 려들어왔다. 팔과 다리에는 벌써 뻐근해지며 힘이 빠져나간다. 게다 가 방금 전에 세게 물린 어깻죽지가 다시 쓰려오기 시작했다. 왼팔 이 벌써 출혈과 통증에 마비된 듯 했다.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어디까지..... 그러다가 아킨은 자신을 꽉 눌렀다. 바보처럼 벌써 포기하는 거냐! 어디까지는 무슨 어디까지. 다 쳐 죽 일 때 까지다. "프로텐--" 다시 아킨의 주변에 빛으로 된 원이 둘러쳐졌다. 아킨은 피에 젖은 팔을 휘두르며, 그 순간에 세 번의 인을 맺었다. "미락스, 우크, 오하...." 주변을 둘러싼 십 수 마리 정도 되는 개들의 머리위에 순식간에 하얀 페그 라일이 쓰였다. 아킨은 두 팔에 힘을 주며, 눈을 감고 입술을 달싹여 짧은 해방의 주문을 외웠다. 위험한 짓이라는 건 알았지만 , 계속 주먹질 하는 것과 무리한 마법을 행하는 위험부담을 재보 면 거기서 거기였다. 개들의 이마 위에 박힌 하얀 페그 라일에서 갑자기 날카로운 빛이 솟 구쳐 올랐다. 그 머리가 망치에라도 맞은 듯 퍽퍽 터지고, 피와 살 점이 하얗게 얼어붙어 자갈처럼 쏟아졌다. 아킨을 둘러싼 보호막 주변으로 하얀 눈의 결정 같은 것이 새싹 돋듯 날카롭게 치솟아 오르 며, 달려드는 개들을 베어냈다. 퍽퍽-- 퍼버버벅--! 살이 찢기고 뼈가 깨지는 소리가 소름끼치게 들려오다. 그리고 뒤에 서 찢기는 듯 엄청난 소리가 들려오는 가 싶더니, 아킨이 뒤돌아서는 순간에 그 머리를 노리며 시커먼 칼날이 내리꽂혀왔다. "-!" 바닥이 패이고, 바위가 산산이 깨어지는 엄청난 소리가 들려왔다. 꽈르르--! 거인이 발을 꽂아 넣기라도 한 듯 바닥이 울렸다. 젖은 흙냄새가 자 욱하게 피어오르며, 진흙덩어리가 얼굴까지 튀어 올라왔다. 어둠 속에서 다시 뻘건 눈동자 두개가 불을 켰다. 개들 머리가 아니다 훨 씬 더 높은 곳이었으니. 그런데 개들이 갑자기 물러나기 시작했다. 엄한 주인이라도 나온 듯 뒤로 주춤 주춤 물러나며, 깨진 머리를 추 스르고 갈라진 배를 보듬고 잘려진 발을 절뚝거리면서 어둠 속으로 사라지려 한다. 그리고 주변이 조금 밝아지는 듯 하다. 완전히 캄캄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적어도 숲의 풍광은 조금씩이나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아킨은 허벅지와 어깨에 힘을 주며 무엇이 나타난 것인지 살펴보았 다. 추위와 출혈에 몸이 오싹오싹했다. 해가 저문 듯 기온이 점차 떨어지고 있었고, 몸은 상처와 피투성이였다. 개들의 피는 어둠이 조 금 가시자마자 그 피들은 지워지는 듯 사라져 버리고 남은 것은 아 킨의 살점 너덜거리는 상처와 그 상처에서 흐르는 피 뿐이다. 상처 는 독이라도 들어간 듯 그냥 다친 것보다 몇 배는 쓰라리고 고통스 러웠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둠이 내려앉는 숲이다. 그리고 바로 앞에는 거대 한 말을 탄 기사가 아킨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은 화르륵 타오르고, 투구벌레 껍질처럼 기분 나쁜 윤기를 흘리는 시커먼 갑주를 뒤집 어쓰고 있었다. 아킨이 바라보자 그가 탄 말이 이를 확 드러냈다. 말마저도 육식동물인 듯 엄청난 송곳니를 가지고 있었고, 흉흉한 안 광을 내뿜는 눈 역시 오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탄탄한 근육질의 어 깨와 긴 다리가 움직일 때마다, 그 안을 피 대신 흐르는 살기가 약동하며 더욱 뜨겁게 달아오르는 듯 했다. 그 때 등 뒤에서 다시 푸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킨이 돌아보 니, 그곳에도 앞에 있는 것과 똑같은 기사가 있었다. 또 한번 푸륵- 이번에는 오른 쪽. 다시 푸륵- 이번에는 왼쪽. 몇? 넷? 아니다. 아킨은 어둠 속에 보이는 또 다른 이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들은 뒤로 한걸음씩 물러나 있었지만, 이 싸움이 조금만 진척되면 당장에 달려올 것이다. 확실하게 카람파의 노예들이다. 모습도, 느낌도, 모조리 그것이다. 허탈하다. 이것은 너무나 친절하지 않는가. 아무런 희망도 품지 않도 록 철저하게 압도적으로 나오는 것은. 방금 전에는 그래도 버텼잖아......그렇게 생각하다가 웃고 말았다. 그 때는 분명 '아직은 낮'인 시간이었다. '수호자'들은 밤에 강력하고, 빛 자락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시간에는 부리는 사냥개들을 사납게 하는데 에만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정말 누구 짓일까.......아버지? 아닌데. 그는 분명 루첼과 함께 떠나는 것을 허락해 주었고, 그런 마당에 아킨이 무엇을 어찌 할지 예상 못 했을 리 없다. 그렇다면 휘안토스? 맙소사- 그제야 예전에 탈로스가 수호자들을 그 에게서 빌렸던 것을 기억해 냈다. 순간 사고가 멎어버리는 것 같다. 확신과 분노에 머릿속이 확 마비되어 버린다. 웃음이 따라온다. 기 가 막혀서 나오는 웃음이. 역시 그렇겠군, 역시 너겠지...휘안토스. 롬파르의 숲에서, 티라 섬에 서, 그리고 또 지금 이 이름 모를 숲에서. 이제 너의 칼끝이 또 한번 턱을 향하고 있구나.....또! 왜 이딴 식인지- 죽일 수도 없는 상대가 죽이지 않을 작정으로 저지 르는 모든 일들이, 정작 끝을 볼 수 없으면서도 떨쳐내야만 하기에 이렇게 지독한 상황을 만들어 낸다. 버리고 떠나려 했지만 할 수 없었고, 다시는 만날 일이 없기를 바랬 건만 우연 아닌 우연으로 지독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고, 이제는....또 이런 식이다. 떠나기 위해 발걸음을 떼는 순간에, 휘안토스의 검 집에서는 칼이 뽑혀져 나와 그를 겨눈다. -미워하지 않으면 돼. 미워하면서도 도망치는 것부터가 모순이지 않았어? 벗어날 수 없는 긴 그림자를 저 끄트머리에 남겨두고 가려고 했던 것 자체가 말이야. 휘안을 처음부터 형으로써 후계자로써 왕으로써 존중하고 사랑하 며 질투하지만 않았다면, 애당초 아무 문제도 없었을 지도 모르잖아? 안 그래......? 왜 이렇게 바보 같은 생각이 드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이 막다른 곳에서 아킨은 자신이 몇 번이나 숨기고 숨겨왔던 말을 자 신에게 내 던지고 있었다. 못난 질문들, 생각하는 것 자체가 치욕 스러운 이 질문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현기증이 일어나고, 숨이 거칠어진다. 무엇 이든 갈기갈기 찢어버리며 으르렁거리고 싶어진다. 그 때 그르륵-- 그르륵-- 수호자이 긴 창을 끄는 소리가 들려왔고, 창 만큼이나 긴 칼날들이 날을 번쩍이는 것이 보인다. 그 거대한 날에서 는 검은 안개 같은 것이 추운 새벽의 입김처럼 뿜어져 오른다. 그리고 그림자들이 차츰 차츰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그들이 내미는 검이 날카롭게 번득였고, 그들이 흘리는 차가운 죽음의 그림자 들이 차갑게 살 끝을 얼린다. 그리고 칼날 중 하나가 드디어 목덜미에 와 닿았다. 급소- 내 찌르면 단번에 꿰뚫려 모든 것을 끝낼 테지. "바보-" 아킨은 자신에게 그렇게 속삭였다. 지금 단 하나의 진실만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면 되는 문제잖아. 선택하지 않았던 선택지를 망연히 바라보면 뭐가 달라지지? 이미 택하고 걸어간 길인데, 자꾸 뒤를 돌아본다면 바로 코앞에서 칼이 날아오고 말 거라고. 분명히 보라고. 지금 휘안토스는 '나를 죽이려 하고 있다.' 고. 그리고 그는 바로 너 의 적이자, 그의 적은 바로 너라고--! "프로크..." 푸른빛이 치릭 솟아올랐다. "오크람-" 상처가 타는 것 같다. 기만하지 마, 아킨토스 프리엔. 또 기만하려고 하지 마-- 미련 가지고 엉겨 붙지 마. 추해. 서로를 사랑 한다 기만하여도, 도저히 너를 따라갈 수 없으니 속편하게 숭배 하겠다 하며 기만하여도, 그래도 어차피 진실은 드러날 것이었지. 그래, 우리 둘 다, 상대방이 마지막 선을 넘지 않을까 조바심 내고 있 었고 상대방이 먼저 넘어주기를 기다리기도 했어. 나는 너를 미워했고, 너는 나를 '두려워' 했으니까.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게 되는 순간에, 우리 사이에는 서로의 턱을 향해 겨누는 칼밖에 남지 않을 테니까! ****************************************************************** 작가잡설: 아아, 머리 지끈거리는 중입니다. -_- ;; 이러다 내일 몸살 날라.....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45장 ************************************************************** [겨울성의 열쇠] 제209편 해와 달#6 *************************************************************** "가만-! 멈추십시오." 마하가 팔을 들었지만, 루첼은 즉각 말을 멈추어 세울 수 없었다. 대로에서도 버거울 판에 숲 속을 말을 타고 달리는 일은 루첼에게 정 말 고역이었다. 그러나 일이 급하다 보니 고역이라고 생각할 틈도 불평할 여유도 없었다. 아무리 의지가 있다 하더라도 못하는 것은 못하는 것이라, 루첼은 마하가 정지하라 말했던 그곳에서부터 한참 이나 달려와 버렸다. 그나마도 내동댕이 쳐지는 것을 간신히 면하고 주변 숲을 둘러 보니, 이제 해가 저문 듯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게다가 이미 숲 깊은 곳까지 들어와 있어 우거진 숲 저편은 이계 로 뚫린 문인 듯 컴컴하기만 하다. "무슨 일인 겁니까?" 루첼이 물었지만 마하는 답하지 않고 단검을 뽑아 숲 속을 겨냥하더 니 휙 던졌다. 칼날이 수풀 속으로 내리박히는 순간에 챙캉--! 단 검이 튀어 올랐다. "!" 누군가가 있다. 루첼은 방어마법을 준비했다. 그러나 마법이 시전 되기도 전에 마하 가 말머리를 돌려 도끼를 휘둘렀다. 순간 어디선가 빛 같은 것이 번득인 것 같았다. 풀을 베어내기라도 한 듯한 비릿한 내음이 확 풍겨오더니, 빠르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루첼의 머리카락을 휩쓸 고 지나갔다. 마하가 고함을 내 지르며 도끼를 반대방향으로 휘둘렀다. "하아--!" 챙캉--! 소리가 기묘하게 경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얇은 은으로 된 종이라도 울린 듯 깨끗한 울림이다. 흙바닥과 나무둥 치를 빠르게 차는 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하얀 빛이 번득였다. 마 하는 도끼를 휘둘렀다. 그러나 다시 챙캉-- 하고 검에 부딪히더니, 얇은 칼날이 도끼날 위로 미끄러졌다. 그 힘의 변화는 미묘해서 마 하의 도끼가 미끄러지며 나무 둥치에 퍽 박혔다. 마하는 도끼를 뽑 아 당기려 했지만, 거의 동시에 빗물에 젖은 부츠가 안장 끝에 얹 히면서 마하의 목 쪽으로 구부러진 단검의 칼날이 확 다가왔다. 마하는 급히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녀의 코앞에는 그 잎들보다 더욱 푸르게 빛나는 눈동자가 있었다. "그만 둬, 자크--! 지금은 이쪽 편이다." 루첼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습격자가 안장에서 발을 퉁겨 큰 새가 내려앉듯 바닥에 섰다. 뒤로 땋아 내린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흔들 렸다. 마하는 아직도 냉기가 뭍은 듯한 목덜미를 훔치며, 대체 어느 정도 되는 인간이기에 자신을 급습하는데 성공했나 하고 그를 보았다. 그러나 그녀를 경계하며 바라보는 자는 인간이 아니었다. 장신에 녹 색 눈을 가진 남자 엘프였다. "숲의 일족이...." 엘프- 경계하듯 귀를 뒤로 눕힌 자켄이 그녀에게 말했다. "습격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저는 루첼을 만나러 온 것뿐이고, 먼저 공격한 것은 당신입니다." "인정합니다." 마하는 솔직하게 인정했다. 어차피 그녀는 가치 없는 잘잘못 따지기에 시간 낭비할 정도로 여유 있는 성격은 아니었으니. 그렇게 논쟁할 필요가 없어지자 그녀는 루첼에게 눈빛으로 답을 구했다. 루첼이 서둘러 설명했다. "궁을 떠나기 전에 그에게 연락했었습니다. 약속한 거거든요......말씀 드리지 않아서 죄송하지만, 악튤런을 등지고 도망오느라 그럴 틈이 없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건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 청년에게 연락한 것입니 까?" "아키의 보호자이자 이복형이거든요." 마하는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곧 암롯사 왕가의 내력을 기억해 냈다. 역시나 그녀의 눈에 경멸과 혐오가 치밀어 올랐다. 자켄을 향한 것이 아니라, 자켄이 태어나게 한 사이러스의 죄과 그 자체에 대한 것이 었다. 마하는 나무에 박힌 도끼를 뽑아 허리에 차고는 자켄에게 물었다. "왕자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실 수 있습니까, 자케노스?" "당장에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제게는 믿을 만한 일행분이 계시고, 그분이라면 분명 찾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마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닥을 가리켰다. "왕자는 숲 언저리까지 말을 타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숲 깊은 곳으 로 가기 위해 말을 버리고 도망치셨고, 우리는 그 흔적을 찾고 있 습니다." 자켄은 마하가 가리키는 바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나뭇가지 부러 진 흔적과 젖은 발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이 숲에 대해 잘 아시는군요." "어렸을 때 늘 이곳에서 지냈습니다. 다급한 사람이 어느 방향으로 도망칠지 예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고, 당신의 동생은 당연히 그 방향으로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추격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 본능을 가지는 사람이, 그리고 그런 본능을 짐작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은 것은 아니니까요." 자켄은 부드럽게 웃었다. "현명하시면서도 친절한 분이군요.....감사합니다." 마하가 손을 내밀었다. "같이 가도록 합시다." "아닙니다. 저 쪽 친구를 도와줘야 할 듯하니, 저 말에 같이 타겠습니 다." 그 말을 마치고 자켄은 곧장 루첼의 뒤에 올라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보기 싫은 남자와 만나기라도 한 듯 신경질을 부리던 말은, 엘프가 오자마자 다정한 애인이라도 만난 듯 얌전해졌다. 루첼은 그 가 뒤에 앉자마자 물었다. "그런데 아까 말한 일행이라는 게 대체 누구야?" "나중에 이야기 해 주겠다. 우선은....아키를 찾는 것이 중요해." 루첼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말이 달리기 시작하며 정말 어지러워지기 시작해서, 정신 자체가 멀 미를 시작해 버렸으니. **************************************************************** 작가잡설: 근사한 폼이로군. 자켄에게 안겨 말을 달리는 루첼 왕자~ (물론 달리면서 진하 루첼의 모가지를 흔들기는 하겠지요. '믿고 맡겨 놨더니 이게 뭐야, 뭐야, 뭐얏!!!')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45장 *************************************************************** [겨울성의 열쇠] 제210편 해와 달#7 **************************************************************** 주변에 차가운 얼음조각들이 아킨을 휘감고 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살 끝에 닿기만 해도 타는 듯 쓰릴 테지만, 지금 이 앞의 상대들에게는 오로지 '물리력'하나밖에는 가치가 없다. 유리조각처럼 하얗고 얇은 그것들은 주변에 띠처럼 머물고 있었다. 방금 전에 크게 폭발시켰긴 하지만, 변화한 것이라고는 거의 부러질 듯 둥치가 패여 나간 나무들과 조각조각 난 바위, 그리고 깊이 긁혀나간 흙바닥. 그들이 한발자국 앞으로 다가왔다. 다가오는 순간에 그들의 시커먼 손과 옷자락, 망토가 새하얗게 얼어붙어 버렸다. 그러나 그들은 개 의치 않았다. 그들이 손 한 번 흔들자 표면을 하얗게 덮었던 얼음 조각들이 산산이 부서져 바닥으로 툭툭 떨어지고 바닥에 닿기도 전 에 녹아 사그라져버린다. 지독한 기분이다. 이렇게 초라해 지는 건 말이다- 잠시 멈칫거리기라도 해 줘야 희망이 조금이 있지 않겠나. 이건, 정 말 힘없는 아이가 반항하다가 덩치 큰 어른을 조금 뒤로 밀치는데 성공한 것 정도이지 않나. 아킨은 잠시 숨을 멈추었다. 이래서 싫지. 약하다는 건.....무력하다는 건, 내 생명과 운명을 앞에 있는 자의 자비와 잔학함에 맡기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건. 이건 거대한 벽이다. 어마어마하게 거대하고 차가운 벽, 그러나 메마 르고 감정 없는 벽. 그들이 쉽게 공격하지 않는 다는 것에만 감사할 뿐이다. 그러다가, 아킨은 앞에 있는 검은 수호자의 눈길과 마주쳤다. 붉게 타오르는 그것은, 이제는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무엇을 하려는 건가- 아니, 무엇을 '기다리는' 건가. 물러날 수도 없고 다가가기는 두려운 상태에서, 아킨은 그것을 바라 보았다. 그리고 그 눈빛 속에서 무언가를 느꼈다. 아니, 솔직히 말 하자면 그냥 본능이자 예감이었을 뿐이다. 그럴 것 같았고, 그 느낌 이 드는 순간에 이상하게 '확신'이 되었다. "탈로스 님?" 그저 기대 때문이었을 지도 모르지만, 왠지 긍정을 한 것 같다는 생 각이 든다. 예전에 있었던 베이나트와의 일을 떠올리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래, 다른 가능성은 전혀 생각할 수 없다. 이것을 다룰 정도로 강한 마법사가 많지는 않을 테고, 탈로스는 휘안토스 에게 빚진 것까지 있지 않은가. "대체......왜 이러시는 겁니까." 드디어 응답이 들려왔다. -내가 그 탑에 계속 있으라 하지 않았냐. 적어도 이렇게 죽어야 할 일은 없었을 텐데. 아킨은 웃었다. 너무 뻔한 말을 해야 하니까. "하지만 제가 선택한 길입니다. 그리고 지금도......현명하다고는 확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옳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앞의 수호자가 손을 내밀었다. 투구벌레 껍질 같은 갑옷위로는 차가 운 윤기가 흐르고, 그 손끝에서는 흉흉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다시 같이 가자꾸나. 너를 숨겨주겠다. 네가 너를 잊고 형을 잊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면 가능하다. 그렇게 아킨토스 프리엔은 사 라지고 전혀 다른 사람- 다른 이름과 다른 얼굴과 다른 기억을 가지 고 숨어 지내라. 그리 되면 적어도 '아킨토스 프리엔'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니, 네 형과의 약속을 어기는 것도 아니지. 아킨은 허탈해졌다. 확신과 확인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문제였던 것이 다. "역시 형이었습니까." -그래. 이번에는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너를 '죽여 달라'고 부탁 했다. 예전에는 살려'만' 놓으라고 했을 테고. "기억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탈로스 님. 그 때 한번으로 족합니다." -적어도 살 수는 있어. 집착하지 마라. "그렇다면, 당신은 왜 성배를 바라셨습니까." 그의 분노에 주변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진다. 그러나 아킨은 망설이 지 않았다. "당신도 그것을 포기하고 그것에 대한 기억과 욕망을 지웠으면, 컬린 님을 배신할 필요도 없었고, 제 스승이신 오거스트 롤레인 님과 대 립할 필요도 없었으며, 악튤런 파노제 님이 당신에게 도전할 일도 없습니다. 또한, 다른 나라의 왕자의 명령으로 다른 사람을 죽일 필 요도 없었을 테죠.....당신이 가장 싫어하는 일말입니다." 누가 믿어줄까- 아니, 베이나트라면 믿어줄 것이다. 탈로스는 사람을 죽이는 것을 싫어한다. 그것이 마스터가 되어버린 그를 은둔하게 한 가장 큰 이유였고, 아킨이 여태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또한, 그렇게 미워하던 상대였 던 롤레인 마저 살려주게 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아마도 이 때문에 베이나트는 탈로스를 죽일 수 없었고 죽이려 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 몇 번이나 거듭 거듭 용서하는 것은, 그래도 탈로스가 마지막 선을 넘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 답도 없었다. 검은 수호자들은 침묵과 더불어 이제는 까만 돌처 럼 굳어 있었다. 아킨은 조용히 웃었다. 쓴 웃음이다. "당신이 그러했듯, 저 역시 영원히 포기할 수 없을 겁니다...그것은 그냥 제 살과 피에 함께 녹아 있는 겁니다. 그렇기에 그것을 버리고 바꾼다면, 저는 더 이상 제가 아닙니다. 제가 아킨토스인 이상, 그림자조차, 제가 넘어야 할 벽과 고난 역시 저에게 주어졌으니 저 의 것인 겁니다. 그리고 이런 저를 포기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네 형과의 약속을 지킬 수밖에 없다. "저는 저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모든 것을 배반해도, 저 자 신만은 배반할 수 없고 저만은 속일 수 없습니다.....모두가 기만해도, 제가 저를 기만할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저 자신에게 당당하게 살았던 적이 단 한번도 없는데 그러기도 전에 포기할 수는 없으니까." -고집 센 녀석! 그 말은 농담처럼 들렸지만, 아킨은 그가 현실 앞에서는 진실만을 말 한다는 것을 안다. 드디어 탈로스가 물러나는 것이 느껴진다. 확신할만한 근거가 있는 건 아니지만, 어쨌건 '그렇게 하고 있다.'라고 생각된다. 마침내 탈로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면 최선을 다해라. 네 모든 것을 끌어내-! 롤레인이 가르친 것이든, 네가 알아서 알아낸 것이든, 정말 그랬다면 컬린이 가르쳐 준 것이든-! 나는 너를 살려내 줄 수 없지만, 너는 너를 살려내라 . 방법은 그것 하나뿐이니까, 아킨토스! 그 외침이 터지는 순간에, 앞과 뒤와 옆에 있는 모든 수호자들이 검 을 뽑고 창을 들었다. 창 자루와 칼자루가 위를 향하며 그 모든 날 끝이 아킨을 향해 겨누어진다. 거대하고 잔인한 검은 거인들 사 이에서, 아킨은 작고 약하며 혼자인 채로 내던져 있었다. 그런데 알아서 모든 것을 끌어내라고? 생쥐가 고양이 앞에서 모든 것을 끌어내서 뭘 어쩌라고? 수호자들 속에서 기괴한 울림이 흘러나왔다. 신경이 굳고, 귀청은 얼 어붙고, 침 삼키는 것조차도 많은 용기를 요하는 울림이다. 안식의 여왕이자 망자들의 어머니인 라레스나, 그녀의 제자였으나 세 계의 수호자인 휴로페에게 살해당한 가엾는 마법사 카람파가 부리던 노예들. 이것을 다시 팔로커스가 차지하고, 그와 맞섰던 쿼크 대제 의 기사이자 암롯사의 선조였던 테루비셔스가 차지했다. 선조-아주 먼 윗대의 할아버지가 했던 일을 이제는 아킨이 아킨의 또 다른 형제에 맞서 해야 하는 것이다. 순간 바람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칼날이 내리박혀 오고, 그것이 바로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가며 아킨의 살 끝을 찢어 놓았다. 피가 튀고, 그냥 베인 것에 몇 배- 아니, 머리가 아득할 정도의 통증이 몸을 확 덮었다. 세상이 온통 캄캄해지고, 사방에 서 피비린내와 유황냄새 비슷한 것이 뒤섞여 덮쳐와 토악질이 치밀 어 올랐다. 등 뒤에 다시 차가운 칼날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진다. 피 했지만, 또 옆구리를 베였다. 다시, 타는 듯한 통증- 비명이 터져 나왔다. 진하고 붉은 핏방울이 얼굴에 후두둑 튀었고, 그것은 아킨 자신의 피였다. 고통이 한번 더 몸을 파고 들어온다. 갈가리 찢겨지는 것만 같다. 머리 속은 하얗게 탈색 되어 버리는 듯 하고, 그저 끔찍하게 아프다, 라는 생각 하나밖에 들지 않는다. 아킨은 그래도 정신을 놓치지 않고, 바로 보호마법을 둘러쳤다. 주변 에 하얀 막이 생겼고, 그 막 위로 엄청난 힘이 쏟아졌다. 꽈르르--! 돌풍이 돌과 흙이 뒤섞여 몰아쳐 왔고, 아킨은 그 힘에 휩쓸려 내던져졌다. 젖은 흙과 단단한 바위가 얼굴을 긁고 등을 후 려쳤다. 그리고 다시 머리를 향해 거대하고 검은 창날이 내리꽂혀온다 . 아킨은 급히 몸을 돌려 피하고는, 바닥을 짚고 다시 창날이 꽂혀 오자 또 한번 피했다. 그리고 그 착지하는 동시에 바닥에 손을 짚고 는, 다시 한번 다른 방향- 남쪽이라고 짚이는 곳을 향해 몸을 날 렸다. 목과 어깨사이로 검 날이 파고들어왔다. 그것을 간신히 피하며 , 아킨은 팔이 부러질 것 같은 고통 속에 다시 한번 바닥을 짚었다 . 그리고 다시 몸을 돌리는데, 등 뒤로 엄청난 타격이 왔다. "--윽--!" 등뼈가 부러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내동댕이쳐지면서 나무 둥치에 부딪히고, 다시 경사진 비탈로 굴러 떨어져 뒤통수를 바위에 크게 부딪혔다. 어찔하더니, 이미 진흙과 빗물에 젖어 지저분해진 등위로 뜨끈한 피가 흘러나왔다. 출혈과 통증에 정신이 혼미해진다. 게다 가 팔찌 때문에 나뭇가지 사이에 팔이 끼어버렸다. 팔을 당겼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젠장-! 아킨은 그제야 그 팔찌 덕에 탈로스가 자신을 그렇게 쉽게 찾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몇 번 노력해도 도저히 뽑히지 않아서 내버려 뒀는데, 결국 이것이 또 탈로스를 끌어 들인 것이다. 예전에 그가 베이나트를 습격했을 때처럼. 아킨은 팔에 힘을 주어 나뭇가지를 부러뜨려 버렸다. 몸에 힘을 주는 바람에 또 통증이 치솟아 올랐지만, 참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 검게 얼룩진 핏방울을 보다가, 아킨은 고개를 들었다. 푸릇한 어둠이 보였다. 아주 진한 푸른 빛.......그리고 그 위로 말들의 시꺼먼 그림자가 나타났다. 검은 망토를 드리운 수호자들이 그를 다시 한번 둘러싸고 있었다. 아킨은 살의가 치솟아 올랐다. 보름달과 함께 짐승이라 된다면, 그냥 다 물어뜯어 버리고 싶을 정도다. 아킨은 손을 들었다. 그리고 두개의 손가락은 위로, 엄지손가락은 손 바닥으로 향하도록 했다. 순간 아킨이 무엇을 하려는 지 알아챈 말이 푸르릉-- 투레질을 했다. 같은 것을 알아챈 수호자들의 검과 창 이 철컥, 철커덕-- 제자리를 찾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히히히힝---! 바람소리처럼 세찬 말 울부짖음이 들려오고, 그 말발굽이 바닥을 거 세게 찼다. 망토가 세차게 휘몰아치며 날개처럼 치솟아 올랐다. 내 리박히듯 그들이 쇄도해 왔다. 갈가리 찢기 위해, 찍고 비틀고 잘 라내기 위해, 피와 살과 뼈를 산산조각내기 위해, 그들의 창이 올라 가고 그들의 눈이 형형히 불타오르고 그들의 발톱 같은 창과 검이 치솟아 올랐다. 망토의 후드가 벗겨지며 흉악한 얼굴이 드러났다. 야 수 같은 입과 울부짖는 구멍 같은 목구멍과 갈가리 물어뜯을 거대한 이빨--! 주변으로는 돌풍이 치고, 나무는 부러지고 잎들은 뽑히고 바위가 조 각났다. 온 몸이 얼어붙을 듯한 고통, 절망적인 힘의 쏟아짐 앞에 홀로 있는 무력감- 그래도 아킨은 도망치지 않았다. 도망치는 순간에 정말 끝장난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돌아서는 순간에, 등을 보이는 순간에, 저들의 발톱과 창과 칼날이 무력한 등을 조각조각 낼 테니--! 공존할 수 없으면, 맞서는 수밖에 없다. "그로, 퀴직스..." 모든 것을 다하여 맞서는 수밖에 없다. **************************************************************** 작가잡설: 뭐......생명에는 지장 없습니다. -_-;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45장 *************************************************************** [겨울성의 열쇠] 제211편 해와 달#8 **************************************************************** 순식간이었다. 방금 전에 창과 칼을 피하며 바닥에 차례차례 새겨 넣은 지정된 페그 라일이 빛을 뿜어 올렸다. 바닥에서 온통 하얀 빛이 쏘아져 올라 주변을 눈부시게 뒤덮었다. 세 차고 하얀 바람이 치솟아 오르고, 그곳에서 솟구쳐 오른 은빛 빛과 얼음과 눈 덩어리가 단단한 바람과 함께 쇄도해 왔다. 검은 기사들이 창을 뒤틀고 검을 돌렸다. 그러나 그들의 위로 거대한 눈의 야수들이 흰 빛을 쏟아내며 달려들어 목덜미를 물었다. 타고 있는 말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팔을 으깨어 부수어 버렸다. 검은 피들 이 솟구친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매섭도록 차가운 기류에 휘몰아쳐 얼어붙어 우박처럼 후두둑 쏟아진다. 아킨은 가장 중앙에 있는 키 큰 기사에게 달려갔다. 그는 가장 거대 하고, 언제나 가장 먼저, 가장 중심이 되어 달려들었다. 아킨은 그의 말고삐를 움켜잡고 힘껏 잡아 당겼다. 말이 울부짖으며 몸을 뒤 틀었다. 귀를 찢고 심장을 터뜨릴 듯한 엄청난 소리였다. 그리고 그 검은 수호자, 이 말의 기수가 드래곤이 포효하듯 엄청난 소리를 내 질렀다. "큿--!" 팔을 놓고 도망쳐 버릴 뻔 했다. 그러나 이를 악물어 버텨야 했다. 드디어 그가 창을 내리꽂았다. 피했지만 목덜미를 다치고 말았다. 또 쓰라린 통증- 아킨은 창을 비틀어 움켜잡았다. 그가 창을 당기자, 그대로 힘껏 도약하여 말 위로 올라가 기수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그 살결과 닿는 순간에, 엄청난 공포와 무력감이 몸을 엄습했다. 두려웠고, 다 끝장날 것만 같은 끔찍한 느낌이 몸을 얼어붙게 했다. 조금만 마음이 약해졌다면 덜덜 떨며 울음을 터뜨려 버리고 싶을 지경이다. "크허어어어어어--!" 다시 그 포효가 천둥처럼 터져 올랐다. 바로 앞에서 터지는 그것은 격이 틀렸다. 정말 몸이 굳어버리는 듯 하다... 놓지 않아- 아킨은 자신에게 윽박질렀다. 놓으면 안 돼. 한계라면 부수어 버려. 벽이라면 넘어 버려--! 그 너머를 두려워하 지 말고, 무력하게 주저앉으려 하지도 마. 몸의 마나가 불끈 거렸다. 주변에 쇄도하던 눈과 얼음의 바람이 아킨 을 중심으로 회오리쳤고, 팔 안에 잡힌 수호자가 울부짖으며 몸을 비틀었다. 그 손이 어깨를 쥐어뜯어버렸다. 살점이 뜯겨나갔다. 긁 혀나가며 피가 튀어 올랐다. 그리고 붉은 핏방울이 앞의 수호자의 얼 굴에 닿는 순간 진주 방울처럼 하얗게 얼어붙었다. 손끝에 시린 감 이 느껴진다고 생각되는 찰나, 다시 포효가 터진다. 크어어어어어어엉--! 그리고 아킨은 갈가리 찢고 잡아 뜯으려는 듯 입을 적 벌리며 다가왔 다. 역한 입김이 뿜어져 올랐다. 땅이 울릴 지경이다. 그가 탄 말이 앞발을 세차게 들어올리며 울부짖 었다. 아킨은 말고삐를 틀어쥐었다. 순식간에 일어난다. 기적적인 변화의 순간, 모든 것을 걸었던 단 한 번의 역습이 터지는 순간- 햇살이 터지고 달빛이 퍼드러지고 파도가 치솟듯-- 그렇게 터진다. 주변에 가득한 것은 하얀 빛과 추위. 손 시린 빙설의 조각들, 그것들 이 온통 주변을 뒤덮었다. 정신이 아득해져갔다. 온 몸이 얼어붙을 듯 추운데, 고통스러운데, 이상하게 졸리고 피곤해져온다. 아킨은 거센 힘에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그러나 손에 쥔 고삐만은 놓치지 않았다. 아찔하고 아득하지만, 손에 움켜쥔 끈이 마지막 구원 한 가닥인 듯, 지옥을 벗어나는 마지막 희망인 듯 꾹 움켜쥐었다. 하얀 하늘이 거세게 펼쳐진다. 주변의 수호자들이 그 거세고 차가운 바람에 휩쓸려나간다. 몸의 감각은 사라지고, 오로지 손안에 움켜쥔 차가운 끈만이 현실과 이어진 것이다. 고개를 돌리지 않았는데, 누워 있는 장소가 바뀌는 듯 하다. 보인다. 마치 똑바로 서서보고 있는 듯, 아름다운 카펫과 태피스트리 의 방이 보인다. 꿈일까? 하지만 꿈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지나치게 생생하다. "....." 아는 방이다. 꿈결처럼 보이는 그 방안으로는 바람이 고요히 불어오고 있었고, 커 튼은 그 바람과 더불어 부드러이 물결친다. 그리고 아킨은 그 창문이 바라보는 곳에 놓여진 의자와, 그 위에 앉아 있는 소년을 발견했다. 검은 머리카락은 어깨위로 쏟아져 바람에 흔들리고, 땀에 젖은 얼굴 은 창백하다. 자고 있지는 않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는 초점이 없이 그저 사유의 혼탁한 바다를 유영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러다가 그 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속눈썹 아래로 그림자가 드리워지며, 그의 사유역시 눈을 감고 잠을 청한다. 쌍둥이 형. 너와 나, 저주받은 운명. 기만속의 기만, 위선 속의 위선, 그렇게 양 파 껍질처럼 꽁꽁 싸져서는 벗기고 벗기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너와 나. 순간 휘안토스가 다시 눈을 떴다. 시선이 마주치지 않는 두 개의 차 가운 보랏빛 눈동자는 다시 창밖을 향했고, 그러다가 다시 눈을 내 리깔더니 머리를 젖히며 의자 등받이에 댄다. 그 모습에서 아킨은 아주 오래된 기억을 떠 올렸다. 지금의 휘안토스와 너무도 닮은 어머니. 결국에는 아킨 혼자 버려놓 고 도망쳐 버렸으면서, 아킨에게는 그래도 버티어 살아남으라 말했던 어머니. 가끔 생각한다. 어머니는 정말 어머니가 그토록 사랑했던 아들인 휘안토스와 아킨이 어떤 사이가 될지 몰랐던 걸까. 아킨이 휘안토스를 미워한다는 걸 몰랐을까? 아니, 정말 몰랐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노골적으로 잔인 하게 굴지는 않았을 테지. 미쳐버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렇게 마음껏 상처 입히고 난도질하고 버려놓지는 않았을 테지. 그리고 그러면서도 그리도 무책임하게 가버리지도 않았을 테지..... 어머니를 증오했다. 그러나 그랬기에 사랑받고 싶었다. 그 증오의 무게가 너무나 무거웠 기에, 그 무게가 흘리는 슬픔의 핏방울이 너무나 아팠기에, 언젠가는 그녀와 그에게 사랑받아 그 어둡고 차갑고 아픈 증오를 떨쳐내 버리고 싶었다. 증오하는 만큼 사랑받고, 분노하는 만큼 인정받고 싶었다. 휘안토스처럼, 휘안토스 만큼--! 그 미련이 끝끝내 들러붙어 있었기에 아킨은 암롯사의 그림자 속에 있어야 했다. 가장 벗어나고 싶었던 것은 자신이었지만, 오래 된 소망을 끌어안고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랬던 것 역시 자신. 끝내고 싶다고 그렇게 외쳤건만, 정작 끝내지 못했던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휘안토스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킨이 자신의 등을 바라보며 한없이 동경하고 원한다는 것을- 그 질투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그렇게 아킨이 질투 의 세계가 전부인 듯 갇혀 있는 이상 얼마든지 아킨을 지배할 수 있을 거라는 것을- 그러나 이제 열쇠는 아킨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벽을 뛰어넘고 싶다면, 이고 있는 무거운 짐부터 떨쳐 버렸어야 했 다. 곪아 터진 살덩이를 깎아내야 했고, 꾹꾹 억눌러 왔던 것도 다 긁어서 태워 버려야 했다. 아킨은 편안해졌다. 웃음도 나온다. 이제 숨어있던 이 좁고 작은 방을 뛰쳐나가면 쏟아지는 눈보라와 바 람을 헤치고 나가야겠지. 내 안에 쌓인 봄과 여름과 가을을 삯으로 치루고, 극한이 겨울을 넘어 기회와 성장을 얻어 또 한번의 봄을 맞이하기 위해 외롭고 외로운 길을 또 걷고 걸어야 하겠지. 그렇게 겨울이 왔다. 공존과 기만과 선택과 후회 속에 걸어가던 고난 과 투쟁으로 들끓어 오르던 봄과 여름과 가을이 지나, 이제 극한- 아무런 여지도 남지 않은- 그것만이 남은 겨울이 온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단 둘 만이 남은 지금, 언제나 등을 보여주고 있어도 여유 만만했던 형이 돌아서서 내게 칼을 겨누고 있는 것이다. 나를 끝장내려 하고 있다. 이제는 완벽하게 지배할 수 없게 되었으니까 , 휘안토스의 등만 바라보고 질투나 하고 도망치려다가 뺏기고 짓밟히던 동생이 이제는 이를 드러내고 발톱을 세우고 도전하고 있으니까- "이제...." 네가 칼을 겨누었듯 나 역시 가야겠지.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피하는 것도 아니라, 나를 위해 가는 나의 길 을. 그리고 이제 너와 내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기 시작했으니, 이제야 말로 진짜 너와 나의 싸움이 되겠지. 여기, 이렇게 닥쳐온 겨울. 그 고독의 계절이 나이테의 흔적만을 남 기고 북쪽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뛰어 넘어야지. 아킨은 그렇게 속삭이며 손에 힘을 주었다. 모든 감각이 휘몰아치듯 돌아오기 시작했다. 상처 입은 온 몸이 갈가리 찢어지는 듯한 엄청난 통증이 밀려들어왔다. 속에 뭐가 꽉 들이차는 듯 하더니, 결국 피 를 토해냈다. "쿨럭-! 그러나 아킨은 손을 놓지 않았다. 온 몸이 찢어지는 것 같아도, 그것 이 마지막 줄인 듯 꽉 움켜 쥔 채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어둠과 어둠이 스쳐지나가고, 고통은 계속된다. 온갖 생각과 온갖 기 억들이 뒤섞이며 번쩍인다. 휘안토스, 아버지, 어머니, 자켄- 갈가리 찢겨지고 뒤엉키고 결국에는 산산이 부서져 눈보라와 함께 북 쪽으로 날아가 버린다..... 멀리 멀리, 아득하고 아득하게. 그토록 고통스러웠는데도, 멀어지면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 버린다. 그것은 그저 먼별의 반짝임, 서산 멀리 쫓겨나는 어둠의 옷자락, 그 별이 하늘을 스쳐 사라지고 어둠 이 불살라 사라지면 아무 의미도 없어진다. 아킨은 고삐를 더욱 꽉 움켜 잡았다. 거센 소용돌이가 점점 잦아드는 것이 느껴진다. 추위도 무뎌지고, 으 르렁 거리는 소리도 사라진다. 등에 아주 딱딱하고 차가운 것이 닿는 듯 하다. 고통스럽기만 했던 온 몸의 감각이 불을 붙인 듯 되살아났다. 정말 갈가리 찢어지는 것 같은 지독한 통증이었다. 특히나 왼팔은 나무토막이라도 매 달고 있는 듯 아무 감각도 없이 무겁기만 하다. 몸은 피와 진흙투성이였고, 손에는 검은 가죽으로 된 말고삐가 쥐어 져 있었다. 아킨은 지친 눈길을 돌렸다. 그러자 말이 푸르륵-- 하고 낮게 투레질을 하고는 아킨을 돌아보았다. 검은 말이었다. 날렵한 몸집에 긴 다리를 가지고 있었고, 머리에서 등까지 검은 껍질 같은 갑옷을 두르고 있었다. 눈은 루비처럼 진한 붉은 빛이었지만, 방금 전처럼 야수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지는 않다 . 그냥 지치고 지겨운 듯한 눈길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안장은 텅 비어 있었다. 혹시 해서 누운 채로 고개를 젖혀 보니, 주변에 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부러지고 깨지고 헤쳐진 나무와 바위와 흙더미만이 달빛 아래 드러나 있을 뿐. 아킨은 고삐를 쥔 손을 당겼다. 말이 다가온다....그러다가 팔목에 툭 -- 하는 느낌이 들어 손을 멈추었다. 손목에 있는 팔찌가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고, 그 위에는 진녹의 문자들이 빛나고 있었다. 멍하니 바라보는데, 그 손목을 누군가가 잡았다. 팔찌의 빛이 사그 라지더니 곧 평범한 은팔찌로 변했다. "...." 그리고 그 손은 아킨이 움켜 쥔 손을 펼치고는 고삐를 풀었다. 고삐 가 손에서 벗어나자, 말은 새까맣게 변하더니 밤이 품은 어둠 안으로 바람처럼 휙 사라졌다. 그 큰 손은 아킨의 손을 유리 그릇을 놓듯 조심스레 놓아주고는 말했다. "저건 네 거다......부르고 싶다면 언제라도 부를 수 있을 거다. 나중에 가르쳐 주마." 아킨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키 큰 남자를 마주 보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입을 연 것은 정말 한참이나 지나서였다. "베이....?" 베이나트가 빙그레 웃었다. "오랜만이구나."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참을 수도 주체할 수도 없었다. 눈물은 정말 왈칵 쏟아졌다. **************************************************************** 작가잡설: 어리버리 왕자와 오래비가 헤매는 사이 결국 혼자서 다 처 리해 버린 가엾은 아키. -_-;;; 저런 저런 정말 서러웠구나, 토닥토닥- 울지마, 뚝~ p.s 아키 셉니다;; 꼼수와 주먹질로는 따라갈 '마법사'가 없답니다. (악티는 처음에는 주먹에, 두번째는 꼼수에 당한 겁니다....) 물론 루첼도 셉니다...........그 나이 치고는요.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46장 ************************************************************** [겨울성의 열쇠] 제46장 겨울의 반대편 제212편 겨울의 반대편#1 *************************************************************** "큿--!" 지독한 통증에 정신이 확 찢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배에 칼이라도 꽂힌 듯 하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찍어 넣고 베어내고 다시 찍어 넣고는 휘젓는 듯한 끔찍한 고통이다. 비명을 지르지 않은 것은 휘안토스의 참을성과 자존심 덕이었다. 그 통증의 원인을 분명히 알고 있고, 그것이 몸 자체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 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 괜히 비명을 질러 서 사람들이 몰려오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휘안토스는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었다. 머리에 몰아치는 현기증에 천정화는 쏟아질 듯 흔들리고, 온 몸을 오싹 오싹하게 하는 오한에 손발은 차고 뻣뻣해진다. "이런...." 휘안토스는 손끝으로 이마를 짚었다. 얼굴은 깜짝 놀랄 정도로 끈끈 한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탈로스-" 그 이름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아니 당연한 일이었기에 가장 먼저 나 왔다. 당장에 방 안이 컴컴해진 듯 했다. 꽃병 하나가 늘이는 그림 자가 갑자기 확 부풀어 오르듯 커지더니, 그 끝에서 두개의 붉은 눈동자가 켜졌다. 휘안토스는 그 그림자를 향해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보는 대로 느끼는 대로. 나는 네 동생을 죽이는 데 실패했다. 그리 고 카람파의 노예들이 모두 강제로 떠밀려 돌아와서 그 여파가 너 에게 전해지는 거지......물론 모두 돌아온 건 아니다. 수호자의 기마 하나는 아킨토스에게 빼앗겼다. 녀석이 좀 똑똑하다면 저 스스로 방법을 찾아내 부릴 테지. 휘안토스는 허탈하게 웃었다. 카람파의 노예들이 그냥 돌아올 리 없 다. 적어도 비교할 기준이 있는 휘안토스는 그렇게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마법을 거둔 겁니까?" -네 동생이 나를 이겼으니까. 할 말이 없다. 당연한 말인데, 그 말이 탈로스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 이 기가 막힌다. 이겼어? 아니, 봐 준 거겠지. 열여덟 먹은 꼬마가 에크롯사의 최고 마스터를 이겼다면, 이건 누구라도 코웃음 칠 일이다. ".....당신...." -여기서 확실하게 해 두지. 너와 나의 약속에 '불가능한 일'은 포함 되지 않는다. 너는 부탁을 했고, 나는 들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 리고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으니 어쩔 수 없어. 휘안토스는 더 기가 막혔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화가 난다'에 가 까운 감정이었다. 지금 탈로스는 휘안토스를 상대로 놀리는 것이다. 나이 많은 할아버 지가 고집 센 손자를 보고 히죽 웃는 듯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핑 계를 찾아봐도 이 일은 이제 끝난 것이고, 지금으로서는 그의 두 번 째 부탁을 없던 일로 돌릴 수는 없으니 다른 핑계도 없다. 휘안토스는 조용히 웃었다. 아주 차분한 미소로 보일 것이다. "알겠습니다. 이해해 드리지요." 휘안토스가 화를 내지 않자 탈로스는 상당히 의외인 듯 했다. 그림자 가 한번 크게 일렁거렸으니. 물론 탈로스가 그러는 것은 이해한다. 보통 사람이라면 적어도 '어떻 게 당신이 질 수 있냐!' 하고 버럭 고함이라도 질렀을 테니까. 그러나 휘안토스는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 탈로스가 어떤 식으로 자신을 기만하고 있는 지도 잘 알고, 머리는 벌써 이 남 자를 '적'으로 판단했다. 휘안토스는 화를 내는 대시 그 무거운 몸 을 의자에 눕혔다. 땀에 젖은 몸은 욱신거리고 머리는 여전히 지 끈거리면서도 무겁다. "언제까지 이런 상태가 계속됩니까?" -아아, 이삼일은 갈 거다. 말 그대로 강제로 쫓겨난 것이니까. 휘안토스는 탈로스가 또 그를 조롱했다는 것을 짐작했다. 노예를 빌 려간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탈로스이고, 예전처럼 언제 돌아왔는 지도 모르게 돌려보내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그러나 탈로스는 이 노예들을 전혀 다스리지 않고 고스란히 돌아오게 한 것이다. 그것 은 당연히 마법과는 전혀 상관없는 길을 걸어온 휘안토스를 괴롭게 했고, 이리 될 거라는 건 탈로스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난쟁이가- 그러나 휘안토스는 부드럽게 말했다. "이제 돌아가십시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림자는 휙 하니 사라졌다. 이질적으로 어두컴컴하던 방 안으로 다시 빛과 일상이 돌아오자, 휘 안토스는 두통을 참으며 몸을 눕히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지러이 흔들리던 천장화는 차츰 차츰 가라앉아갔고, 그 위에 그려진 누 군가의 얼굴이 가만히 휘안토스를 내려다보기 시작한다. "살아 난 거냐, 아키?" 휘안토스는 피식 웃었다. 그래, 네가 아예 아무것도 못하고 멍청하게 있었으면 탈로스가 저렇 게 봐 줬을 리 없지. 그렇다면 너는 정말 네 힘으로 살아 난 것이고, 너 스스로의 힘만으로도 나를 벗어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졌구나. ' 아니, 수호자들과 사나운 번견들도 물리쳤으니 이제 네가 뭘 두려워하겠냐. 더 사나운 웃음이 치밀어 올랐다. 두통은 더욱 강해지고, 치밀어 오르는 구토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였 다. 가슴은 지독하게 답답하고, 숨소리도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 리고 안개 낀 듯 듯 부연 시야에 다시 그 천장화의 여인이 쏟아졌다. 그래, 아키. 이제.....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너를 지배할 수 없게 되었어. 어둠과 그림자 속에 숨은 '죽음'을 제하고는 너를 얽맬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지. 푸른 눈동자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휘안토스는 현기증에 밀려들 어와 눈을 감고 안식을 청했다. 그러나 몸이 술에 취한 듯 느릿느릿 도는 것만 같았고, 그는 곧 의식을 잃었다. "쓰다." 아킨은 자켄이 입에 거의 쑤셔 박다시피 한 약을 간신히 삼키고는 그 렇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옆에서 루첼이 너는 나이가 몇이냐, 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아킨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자켄이 아킨의 상처를 붕대로 감아주며 말했다. "의외로구나. 휘안의 손은 언제나 '죽기 직전'에서 멈추었었는데." "그건 나도 모르겠어. 상황은 알겠는데, 이유는 모르겠더라고. 특별히 실수 한 것도 없는데 갑자기 왜 그랬는지......하지만 분명한 건 내가 위험하다는 거야." "휘안은 언제나 그렇지. 혼자서 모든 것을 생각하고 결정하고 당사자 에 강요해." "그리고 그 결정은 언제나 마음에 안 들었지. 예전에도, 더 먼 예전에 도......그리고 지금도." "동의한다." 자켄은 붕대를 자르고 잘 묶었다. 지혈을 하고 상처를 묶었음에도 붕 대로 금세 피가 스며 나왔다. 자켄은 나른히 한숨을 내 쉬었다. "완전히 엉망진창이구나." "죽지는 않았잖아." 별로 농담으로 할 거리가 아니라, 자켄은 자꾸 그러면 상처가 다시 벌어지든 말든 두들겨 패 줄 테다, 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아킨은 슬쩍 눈길을 돌리며 루첼에게 말 좀 걸어 달라고 눈치를 보냈 다. 그러나 축 늘어져 있는 루첼은 당연히 무시했다. 결국 아킨이 보챘다. "이봐, 루츠-" "아키, 밤 새 너 때문에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또 너 때문에 번거롭 고 싶지는 않아." "말이라도 해야 덜 아플 것 같은데." "조용히 음미하면서 고통을 느껴봐. 혹시 아냐? 숨겨진 욕망에 눈 뜰 지." "......" 잠시 뒤, 붕대감기는 얼어붙은 듯한 침묵 속에서 끝났다. 상처는 다 기웠고, 약도 충분히 발라 두고 붕대도 단단히 감았다. 방 금 먹은 진통제 기운이 슬슬 퍼지기 시작하는 듯 통증도 서서히 무 뎌지고 있었다. "완전히 넝마군.... 붙이고 깁고 감고-" 아킨이 그렇게 퉁명스럽게 말하자 루첼은 피식 웃었다. 아킨은 붕대 감긴 팔을 내리고는 말했다. "어쨌건.....둘 다 고마워. 자크도, 루첼도." 감사인사였지만, 목소리는 기어들어가는 듯 작기만 하다. 그래도 기특하기는 해서, 자켄은 아킨의 머리에 손을 얹고는 헝클어 뜨려 버렸다. 진흙과 피로 얼룩진 은발은 더 엉망이 되어 버렸다. 자켄이 물었다. "이젠 어쩔 생각이지? 설마 암롯사로 돌아갈 생각은 아니겠고." "어둠 숲으로 가고 싶어." 자켄은 잠시 멍하니 아킨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루첼의 눈치를 살폈 다. 루첼이 그에게 그냥 잠자코 들으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자켄은 그제야 아킨이 그 말을 그냥 불쑥 꺼내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아챘다. "제대로 설명해다오, 아키. 대체 왜 어둠 숲으로 가고 싶다는 거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분-- 나루에라는 엘프를 직접 만나서 저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어. 풀 수 있는 것인지, 풀어 줄 수는 있는지-- 그리고 만약에 그렇게 해 줄 수 있다면 보답으 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할 수 없다면.....뭐, 다른 방법을 강구해 봐야지."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아키? 여태까지 단 한번도 그렇게 나온 적 없잖아. 아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데 이러는 거지?" 아킨은 말을 꺼내기가 다시 어려워졌다. 그리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들릴 듯 말 듯 자그맣게 말했다. "유제니아가 휘안에게 당했어." 자켄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악 가셨다. 그리고 아킨은 그의 눈에 활활 타는 분노가 어리는 것을 보았다. 아킨은 역시 괜히 말했다 싶었다. 그냥 다른 핑계를 지어 내면 좋았을 것을. 아마도 그 어머니에 대 한 기억이 났을 테지.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휘안토스 에게 엎드려 빌고....그 아이를 빼 오는 것뿐이었어. 그리고 약속도 받았지.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지만 그것 뿐......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사실....휘안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두려웠던 것도 사실이야. 그는 언제나 내 상상을 초월하곤 했으니까." "그래서 암롯사에서 그렇게 고분고분 있었던 거니?"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충격이 컸다고 봐야지. 아무 생각도 안 나더 라고. 다시는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을 만큼 지독한 기분. 내가 뭐든 하려고만 하면 언제나 내 주변의 힘없는 사람들을 엉망진창이 된다 고 생각했지. 그 사람들이 겪는 모든 일이 다 내 책임인 것만 같았 고, 그냥 다 때려치우고 휘안이 하라는 대로만 하면 아무 일도 없 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 "아키-" 자켄의 언성이 높아졌다. 노여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아킨은 쓰게 웃었다. "순식간에 지쳐버리는 기분- 형은 모를 거야. 앞으로만 달리면 이곳 을 벗어날 수 있을 거라 해서 달리고 달렸는데, 내 길 앞에 있던 수 미터짜리 벽에 쾅 부딪힌 기분이었어. 자신은 한없이 작고 초라하고 , 상대는 너무나 크게 느껴졌지. 벗어나려 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나 어리석게 느껴졌어. 그래서 결국 예전에 하던 것처럼 그를 미워 하고 질투하는 편이 몇 배는 나아 보였지..... 적어도 나 혼자만 괴 롭고 끝나니까." 역시나 자켄의 눈이 걱정을 담고 있었다. 아킨은 농담이라도 한 듯 피식 웃어버렸다. "걱정 마, 자크. 지금은 아니니까. 그런 생각 떠 올렸다는 것 자체가 창피할 정도로 지금과 그때는 틀려. 어쨌건, 나는 그 길로 도망치 기로 작정했고....도망쳐서 어둠 숲으로 갈 생각이었어. 일단 저주라 도 풀든 말든 해야 할 것 같아서." 그제야 자켄의 눈길이 한결 부드러워졌지만, 걱정만은 여전했다. "아키, 하지만 그 분은 인간이 쉽게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아무 리 네가 내 동생이고, 베이나트 님과도 친분이 있다 할지라도 그분이 거부하신다면 끝이야." "알아. 하지만 돼든 안 되든, 어쨌든 시도하기도 전에 안 될 거라 돌 아서는 것 보다는 나을 거라고 생각해." 그렇게 말하는 내내 상처가 욱신거렸지만, 이상하게도 너무나 가볍게 느껴진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정말 개운하다. 이런 말을 이렇게나 편안하게 하게 될 때가 올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모든 것이 잘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실망하게 될지도 모르고, 더 크게 절망할 지도 모른다 . 그러나 여태까지 어깨를 꽉 누르던 짐을 한 덩이 내려놓은 지금은 그 자체만으로 기뻐하고 싶었고, 그것은 아킨의 권리이기도 하다. "어둠 숲으로 가겠어, 자크." **************************************************************** 작가잡설: 아키의 부상 상황을 말하자면....어쨌건 살았지요, 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46장 *************************************************************** [겨울성의 열쇠] 제213편 겨울의 반대편#2 **************************************************************** 칼라하스가 마하의 귀환을 보고 받은 것은, 거의 정오가 다 되어서였 다. 마중 나갈 수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그녀는 마하를 기다렸다. 오빠인 칼리토 대공왕의 결정을 알게 된 것은 마하로부터였다. 어째 서 그런 결정을 상의도 없이 내릴 수 있었는지 놀라웠고, 암롯사의 왕자 아킨토스가 위험해졌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마하는 그 말을 전한 후 곧장 루첼을 찾아 그와 함께 아킨토스를 찾으러 나섰다. 그러나 그 길지도 않은 사이에 일은 생각보다 심각해져 버렸다. 귀빈 궁이 날아가고, 암롯사의 사절은 당장에 자기네 나라로 급전을 보 냈다. 극심한 항의가 쏟아졌지만, 칼리토는 모두 무시하며 사절에게 추방령까지 내려 버렸다. 최악이 되어 버렸다, 칼라하스는 마하의 충고를 떠 올리며 그렇게 생 각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마하가 왜 그런 말들을 했었는지도 이 해하게 되었다. 그녀가 생각한 것이야 말로 아무 일도 일어나기 전 까지만 해도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 테시오스가 도망쳤으니, 아킨 역시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귀환하게 된다 할지라 도, 또한 칼라하스와 약혼이 되어 있는 상태라 할지라도, 아킨은 당연히 본국과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게 된다. 사이러스의 성격을 고려해본다면 잘 해야 추방이다. 그리 되면 델 카타롯사에서 손을 쓸 필요조차 없게 된다. 결혼문제 자체는 없던 이야기나 다름없게 되 고, 암롯사는 한동안 번잡한 문제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그런데 칼리토 대공왕은 그 기회를 버린 것이다. 마하가 미루고자 했 던 결전을, 지금 당장 앞으로 끌어다 놓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마하가 그녀의 응접실로 왔다. "마하-- 괜찮아?" 그러나 마하는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옷깃은 빗방울에 흠뻑 젖 어 있었고, 머리카락도 온통 흙투성이다. 마하는 쑥스러워하며 말 했다. "급히 오느라 이 모양입니다." "아니, 괜찮아 마하. 어떻게 됐지?" "모두 잘 되었습니다. 하지만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겨서 그러는데, 악 튤런 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네가 온다는 이야기를 듣자 마자 불렀으니 곧 올 거야......좀 다쳐서 치료 중이었거든." '좀' 다치는 데 '조금' 일조를 한 마하는 속으로만 웃었다. "다행이군요. 그 분을 찾아뵈러 온 귀한 분이 계시니." 칼라하스는 묘한 불안을 느끼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자 마하가 고개를 들고는 정중하게 말했다. "나오십시오." 그리고 칼라하스는 정말 깜짝 놀랐다. 빛이 쏟아지는 창가 뒤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숨어 있 다가 나온 것도, 칼라하스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정말 말 그대로 아무데도 없었다가 갑자기 '나타난' 것이었다. "위험한 분은 아닙니다." 마하가 그렇게 말해도 칼라하스는 마하의 손을 잡았다. 키가 정말 장대하다 말해도 될 정도로 큰 남자였다. 진한 갈색 로브 를 입고, 후드는 뒤로 젖히고 있었다. 얼굴은 부드럽고 온화해 보 였고, 특히나 그 검은 눈동자는 칼라하스의 긴장마저 풀어질 정도로 선량해 보였다. "베이나트라고 합니다." 남자가 그렇게 자신을 밝혔다. 칼라하스는 그 이름을 잘 기억하고 있 었다. "그렇다면 당신이..." 베이나트는 빙그레 웃었다. "당신 일행을 털었던 주범이죠." 칼라하스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베이나트가 말했다. "어제 이 나라에 도착했습니다. 제가 보호해야 할 아이를 찾아서, 또 누군가를 만나러. 그리고 그 아이는 찾았고, 이제는 만날 사람만 만나면 됩니다." "누구를 찾으시는 겁니까." "악튤런 파노제." 칼라하스의 손끝이 잠시 떨렸다. "이유가 뭔지 여쭤 봐도 될까요." 그렇게 물어보며 칼라하스는 마하의 손을 더 꽉 잡았다. 마하가 그 손등을 두드려 주었다. 괜찮습니다,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그 속 삭임에 칼라하스는 긴장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의 스승인 발디어스 컬린에 관한 일로 찾아온 것입니다. 의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누구도 마법사의 일에 스승의 일을 사칭하지 않고, 제자의 일을 핑계대지 않습니다. 저는 어쨌건 건전한 정신을 가진 마법사고, 그 건전한 율법을 충실히 지킬 것입니다." "불렀으니 그는 곧 올 것입니다. 단, 거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 약조해 주십시오." "물론 합니다. 또, 악튤런 파노제 쪽에서 거친 일을 한다면 막아드리 기도 하겠습니다." 칼라하스는 그 말에 섞인 분노를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당신이 아킨토스 왕자의 안전에 책임이 있는 분이라면, 저 역시 사 죄를 드리겠습니다. 하지만.....그래도 저는 왕자께서 안전하기를 원 하고 있습니다." "그는 안전합니다. 심하게 다치기는 했지만, 조금 쉰다면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칼라하스는 빙그레 웃었다. 정치적인 이유 없이, 그가 안전하다는 사 실 하나에 이상하게도 가슴이 편해진다. 웃기는 일이다. 사이러스의 아들인데, 단 하룻밤 동안 나라일 때문에 그의 안전을 걱정한 것 뿐인데도 기분이 좋다. "같이 기다리죠." 베이나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와 단 둘이 이야기해야 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렇다면 제가 자리를 뜨도록 하죠. 피곤하기도 하니까.........그런데 그와 만난 후 곧장 떠나실 건가요?" "네." "그리되면 여기서 작별 인사를 드려야겠군요........베이나트, 가시는 길 에 아킨토스 왕자에게 전해 주세요. 적국의 왕자와 공주를 떠나서, 아킨토스 님만은 아주 좋은 분이었다고요." "그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네?" 의외라 칼라하스 공주는 조금 놀랐다. 베이나트가 말했다. "언제나 건강하게, 그리고 자신은 신랑이 되어 줄 수 없지만 언젠가 는 누군가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사시길 바란다고. 그렇게 전해 달라 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리고 아킨의 말은 왠지....아니 분명 히 '진심'이라 느껴졌다. 칼라하스는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고맙...다고 전해 주세요." "물론입니다." 칼라하스는 마하의 손을 당겼다. 마하는 두 손을 뻗어 그녀를 안아 들고는 방을 나섰다. "안타깝군요." 응접실 문이 닫히자 마하가 그렇게 말했다. "적국의 왕자만 아니라면, 그가 어떤 괴물로 변하든 공주님과 행복하 기를 바랐을 텐데 말입니다." "마하-" 칼라하스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그러나 아예 듣기 싫지는 않았다. 칼라하스 공주를 보내고, 베이나트는 응접실에 석상처럼 차분하게 앉 아 있었다. 하얀 겨울 햇빛처럼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일이 왜 이런 식으로 된 것일까, 하는 생각과 그 모든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순간, 그 공백 속에서 베이나트는 잠시 모든 생각을 집어치우고 멍하게 있는 중이었다. 쿵 쿵 쿵-- 드디어 누군가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베이나트가 문 쪽을 바라보기 무섭게, 문은 노크도 없이 벌컥 열렸다. "다, 당신--!" 성 끝에서 끝까지 달려오기라도 한 듯 어마어마하게 숨 헐떡이는 목 소리가 들려왔다. 베이나트는 앉은 그대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마지막 제자이자 가장 어린 제자이며, 아직도 젊기만 한 악튤런 이 그의 눈길이 향하는 곳에 있었다. 밝은 낮에 제 정신으로 멀쩡하게 보는 것은 참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저 녀석을 처음 만난 게 저 녀석이 몇 살 때였더라-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정말 주먹만한 꼬맹이였던 건 사실이다 . 까만 콩처럼 시커멓고 쪼그만 녀석이, 눈만 부리부리하게 태우 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훌쩍 큰 모습을 보니, 조금 기쁘기도 하면서도 아주 많이 서 운했다. "오랜만이다, 악튤런." 순간 악튤런의 눈이 커졌다. "날 아나?" "네가 요만 할 때부터 가르쳤는데, 기억 못하면 노망난 거지." 악튤런이 어이가 없다는 듯 베이나트를 바라보았다. 정말 지금 무슨 헛소리 하느냐는 듯 하다. 내가 니 애비다, 라는 말을 들어도 저것보다는 좀 나을 것 같군....그 렇게 생각하며 베이나트가 말했다. "크게 실망하지는 않으마. 너는 나와 고작 3년을 같이 있었고, 그 시 간은 스승이 어떤 모습으로 변하든 단번에 알아 볼 정도로 긴 건 아니니까." 악튤런의 안색이 해쓱해졌다. 몸이 분노로 떨려온다. "당신....정체가 대체 뭐지?" "지금은 베이나트, 그리고 무수히 많은 이름을 썼고, 그 중에 컬린이 라는 이름도 있지. 너도 잘 아는 그 이름말이다." 악튤런은 믿어지지 않는 다는 듯 턱에 가벼운 경련이 일어나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정말 확인해 보고 싶다는 듯 베이나트 쪽으로 다가 왔다. 그의 눈이 샅샅이 베이나트의 얼굴을 훑었다. 그리고 역시나 예상대로 검은 눈동자와 눈매에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베이나트가 말했다. "여기 저기 좀 묻고 다녀봤다. 내가 실종 되어 있는 동안, 너는 참 많 은 일을 했더구나. 그리고 그 중 몇 가지는 내가 굉장히 싫어하는 일이었고.....아무리 어렸더라도 내가 뭘 싫어했는 지 기억하고는 있겠지?" 드디어 악튤런이 눈이 커졌다. 눈은 이제 경악과 경이로 떨리고 있었 고, 어쩌면 기쁜 듯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아직 의심의 그림자가 머물고 있었다. 베이나트는 가볍게 한숨을 내 쉬었다. "루기아가 너를 맡기던 날, 나는 너에게 분명하게 충고했었지. 너의 분노를 다스리라고, 네 안에 숨은 그 야수를 길들이지 못한다면 너는 결코 위대해질 수 없을 거라고...... 하지만 결국 너는 다스리지 못했고, 네 안의 야수는 더욱 사납고 거대해져버렸구나." "하지만 스승님--!" 드디어 악튤런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믿어지지 않지만, 지금 베이나트가 말한 것은 모두 진실이었으며 동시에 비밀이었다. 이 젊은 남자가 그의 늙은 스승이었던 그 남자다. 악튤런은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그 이유가 없다면 대체 왜 마법을 배우고 힘을 키웠겠습니까. 강해 져야 할 이유가 있으니 저는 악착같이 강해졌고, 지금 이렇게 이 자리에 있는 겁니다. 목적 없는 인생이 무슨 가치가 있단 말입니까." "그런 너를 이끄는 것은 대체 무엇이냐. 너 자신이냐, 아니면 네 안의 분노냐." "둘 다 저 자체입니다. 분노가 나이고, 내가 분노입니다!" "그렇다면 분노가 너를 먹었구나. 네 안을 샅샅이 훑어 먹고는, 결국 네 껍질만 남겼어." 악튤런의 눈에 정말 사나운 분노가 일었다. 그것은 바로 앞의 스승이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것에 대한 울분이었다. "저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있어요!" "안다. 그래, 너는 뭐든 얻으려 하면 얻을 수 있을 힘과 능력이 있다. 가르쳤던 제자 중에 너처럼 과속하는 놈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너 처럼 네 머리를 부수어 버릴 게 뻔한 벽을 향해 무식하게 돌진하는 놈도 없었어." "저는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할 수 있으니 하는 것이고,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고, 바로 제가 이룩해 낼 것 입니다." "그런데 과거의 그림자가 왜 네 뒤에 그렇게 길게 늘어져 있는 거냐. 너보다 더 큰 야수를 질질 끌고 다니면서, 무엇을 다스려보겠다고 나서는 거냐." "제게는 권리가 있지 않습니까! 그건 그냥 헛된 그림자가 아닌 당연 한 순리이자 의무에요." "황제의 자식이란 것? 미안하지만......쿼크가 얻었다고, 그 먼 후손인 너까지 같은 것을 가질 권리는 없다. 아니, 빌어먹을 인간의 율법을 제하고는 그 누구도 그런 권리를 주지 않았다. 네가 그에게 얻은 것은 단지 네 생명일 뿐이지.....그것을 이유로 그 소유의 물건을 내게 달라고 한다면, 그거야 말로 그냥 억지일 뿐이다." "아닙니다. 제가 그것을 가지려는 게 아니에요." "저 옥좌에 앉은 것은 너의 일부이자 너의 분신이다. 그러니 너 자신 이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이냐." "스승님!" "정신 똑바로 차려라, 악튤런. 그 성배는 이 세계에 속한 그 누구의 물건도 아니다. 그리고....분명히 말해두지. 제 안에 있는 야수도 제 대로 못 다스리는 자에게는, 그 어떤 힘도 줄 수 없다. 자기 손에 쥐 어진 고삐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자야 말로 가장 약한 자인데, 누 구의 고삐를 탐하겠고 누구의 고삐를 맡기겠느냐." 악튤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베이나트는 여전히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성배를 주는 것을 제한다면, 내가 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 은 무엇이든 해 줄 수 있다. 다시 들어오고 싶다면 역시나 허락한다. 북쪽 끝까지라도 데리고 가서 너를 가르쳐 주겠고, 너 스스로만 잘 다 스린다면 너는 그 누구보다 강하고 위대해 질 수 있을 거다." "그건 필요 없습니다." "롤레인과 탈로스도 내 밑에 서른이 넘을 때까지 있었어. 그리고 너 는 고작 스물 둘이고." 악튤런은 사납게 웃었다. "아뇨, 저는 이제 그 누구에게도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아직 멀었다." "상관없습니다. 제 앞에 있는 것은 오로지 성배, 제가 정복해야 할 유일한 것도 성배, 오로지 그것 하나뿐입니다. 오거스트나 탈로스와 비유할 것 없습니다. 저는 이미 예전에 그들보다 강해졌습니다." 베이나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작 좀 해라." "그리 끝끝내 반대하신다면, 그럼 그 꼬마는 대체 뭡니까. 보아하 니, 그 꼬마는 저보다 좀 더 많이 알고 있는 듯 한데요." "답하지 않는다." "아니, 답해 주셔야 합니다! 대체 무엇입니까. 무엇이 당신의 직속 제자인 제가 아닌 그를 택하게 한 겁니까! 말해 주세요....그 이유 가 저를 납득시킨다면 저는 물러나겠어요!" "나는 그 아이를 택한 적도 없고, 그 아이 역시 그것을 원한 적이 없다. 아무도 원하지 않았는데 그 비밀이 그냥 저 스스로 몸을 드러 낸 것뿐이다." "말도 안 됩니다!" "억지 부리지 마라." "억지가 아니에요! 제가 뭐가 부족하기래-!" 베이나트는 한숨이 나왔다. "몇 년이 지났건만 너는 어떻게 그 때의 그 꼬마에서 조금도 벗어 나지 못한 거냐......그래, 예전에 너 같은 놈이 하나 있었지. 고 집 세고, 자존심 강하고, 타협할 줄도 구부릴 줄도 모르고, 그러 나 무지막지하게 강한 놈이었다는 건 분명했다. 그러니 내 동료들 은 그에게 아부해야 했고, 나 역시 그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간청 해야 했지. 나는 그를 싫어했지만, 그는 나를 경멸했다. 네가 네 사 형들을 경멸하는 것과 같은 이유로 말이다. 그리고 분노했다! 왜 자 기에게 모든 권리가 주어지지 않느냐고.....! 왜 자기가 신이 아니 냐고!" "....." "그래도 그가 강했기에 우리들은 우리들의 중요한 일을 이루기 위 해 그에게 간청했다. 그는 나에게 가장 예의바른 간청을 받기를 바 랬고, 나는 엎드려 기고 빌고 빌며 부탁했다. 제발 우리를 위해 힘 을 써 달라고, 우리가 만든 모든 것을 바칠 테니 이루어 달라고! 우 리를 구해 달라고--!" 베이나트는 어린 제자에게 화를 내는 자신이 한심해 지기 시작했지 만 쏟아 붇기 시작하자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욕망과 분노가 절제를 찢어 죽였고, 나와 내 동료들 을 경멸하던 그 오만함이 우리를 배반하는 가책을 압사시켰지. 그리 고 그는 우리 모두를 파멸시켰다. 나는 다른 건 몰라도, 내 제자 놈 이 그 놈을 닮아가는 건 참을 수 없어." "저는 아무도 파멸시키지 않을 겁니다." "너 자신부터 파멸할 거다.....! 아니, 이만 이야기 끝내자. 다음 에, 내 속의 분노를 다스리고 네가 좀 더 철이 들거든 그 때 다시 보자꾸나. 지금 계속 하다가는 정말 네 엉덩이를 걷어 차 버리겠 구나." 그리고 베이나트는 인사도 없이 돌아섰다. 악튤런의 분노와 갈망의 눈빛이 느껴졌지만, 그래도 그는 문을 열어젖혔다. 악튤런이 말했다. "그렇다면 왜 저를 찾아오신 겁니까. 고작 그 이야기를 하시려고 요?" "아무 것도 가르쳐 주지 못한 못난 스승 밑으로 네가 다시 오기 나 할까, 하고 한심한 기대를 한 것 뿐이다." 그리고 베이나트는 문을 쾅 닫아 버렸다. ************************************************************** 작가잡설: 악티, 질투가 너무 심해~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46장 *************************************************************** [겨울성의 열쇠] 제214편 겨울의 반대편#3 **************************************************************** 해가 기울며 기온이 떨어지자 아킨은 다시 상처고 쑤셔오는 것을 느 꼈다. 정말 여기 저기 따끔거리고 욱신거리고, 다양한 종류의 고통이 다양한 수위로 온 몸을 괴롭게 했다. 뿐만 아니라 상처가 나아가려 고 하다 보니 몸에 열까지 난다. 그런 아킨이 루첼로부터 "나 간다." 라는 말을 듣게 된 것은, 저녁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어디로 가는 건데?" 루첼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당연히 벌써 쫓겨났을 암롯사 일행을 따라가야지. 정 안 되면 그냥 나 혼자 암롯사로 기어들어가고." 아킨은 열만 없었으면 루첼을 가볍게 한대 주물러 주고 싶어졌다. 짜 증이 치밀어서였다. "그리고 나에 대해서는 뭐라 말할 생각이지?" "적당히 말해야겠지. 일단, 너는 위험을 피해 도망쳤다. 그리고 위로 죽 올라가면 헤로롯사이니, 일이 급해서 그리로 갔다, 이렇게 말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야." "납득할까?" "네 형이나 아버지는 납득해 줄 걸." "그러고도 남을 위인들이지." 왠지 암울하게 들리는데, 그게 '당연하다'라는 생각에 더 암울해진다. 루첼이 머리를 긁적이고는 말했다. "그리고 아키, 나는 어쨌건 베넬리아를 대신해서 암롯사에 온 것이기 도 해. 악튤런이 이 델 카타롯사에 있는 한, 내가 일 번거롭다고 다른 나라로 도망치면 나뿐만 아니라 롤레인 교수님께도 누를 끼치 게 되어 버린다고." "알고 있어. 그래도 무사히 가라." "걱정 마라. 운 하나는 타고났으니까." "일 꼬이는 것 보면 그런 것 같지도 않던데." "네놈이 사건 사고를 몰고 오는 것뿐이다. 너만 없어지면 돼." ".......너, 말투가 교수님 닮아가는 것 같다." "........" 그것은 어떤 의미로는 아주 심각한 모욕이었다. 루첼은 정말 웃는 얼 굴 그대로 굳어버렸고, 아킨은 그런 얼굴을 보며 롤레인을 따라가 려면 한참 멀었다는 생각이나 떠 올렸다. "돌아가면 아마도 휘안이 너에게 몇 가지 물어 볼 거다. 어떻게 말해 달라 특별히 부탁하지는 않겠는데,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예상은 하고 있어." "자꾸 번거롭게 하는 것 같다......미안해." "변하긴 변했구나. 그런 말도 다 하고." 그 퉁명스러운 말에 아킨은 다시 웃어버렸다. "솔직한 심정이라면, 나는 네가 그냥 베넬리아의 교수님께 돌아갔으 면 해......더 이상 문제없이 말이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일단 암롯사의 일을 제대로 처리해야 나중에 피 곤할 일이 없을 거 아냐. 할 건 해야 할 때 해 둬야지, 미뤄 뒀다 가는 뒷골만 근질근질 하다고." "동감이야.....그렇다면 루츠, 교수님 만나 뵙게 되면 좀 전해줄래?" "말이냐 물건이냐." "말이다....탈로스님에 관한 것." 루첼은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님과 탈로스 님이 사이가 어떤지는 알아. 내가 이래 달라 저래 달라 말할 순번은 아니니, 두 분의 관계에 대해서는 뭐라 말하지 않겠지만....적어도 나에 대한 일만은 잊어 달라고 해 줘." "무슨 말이냐, 그건?" "탈로스 님이 더 이상 내게 해를 끼칠 일은 없을 것이고, 예전에 있 었던 일도 잊겠다는 말이야.....오해는 하지 마. 마음이 넓어진 것도, 그가 무서워진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적어도 예전처럼 밉지도 두렵지도 않아." "너를 이 지경으로 만든 건 그 탈로스 인데도?" "맞아. 하지만....그래, 아주 예전이라면 나는 정말 힘만 된다면 아무 렇지도 않게 그를 죽일 수 있었을 거야. 그리고 당연하게 생각했을 테지.......하지만 지금은 그가 죽게 된다면 조금 슬플 것 같아........ .그래, 조금 말이야." 아킨은 그가 그 이유를 짐작해 주기를 바랬고, 그 짐작한 바를 롤레 인에게 제대로 전해줄 수 있기를 바랬다. 탈로스는 어떤 의미에서, 아니 분명- 아킨을 살려줬다. 아킨은 탈로스가 자신을 봐주었다 는 것을 모를 정도로 자신만만하지는 못했으니. 루첼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제 정말 간다." "멀리 못 나가." "붕대 투성이로 기어서 따라 온다면 그게 더 부담스러울 걸. 어서 낫 기나 해라....." 그리고 루첼이 손을 내밀었다. 아킨은 그 손을 꽉 잡았다가, 아쉬움 과 함께 놓았다. "언젠가는 다시 만나자." 루첼은 빙그레 웃었다. "나 역시. 그리고 되도록 좋은 일로 만났으면 좋겠구나." 해가 저물어 버렸다. 어둠이 깔리고, 밤새우는 소리가 들려오며 기온은 계속 내려갔지만 자켄이 덮어준 망토는 깃털 많은 새의 품처럼 따뜻했다. 그리고 밤이 기울 무렵에 드디어 베이나트가 돌아왔다. 자켄은 반갑게 그를 맞이했고, 아킨도 창백한 안색으로나마 그에게 미소를 보냈다. "일은 잘 끝나셨습니까?" "아니. 최악이었다. 다음에 만나면 아마도 탈로스보다 더 무시무시한 놈을 제자라고 반겨야 할 게다." 그렇게 말하고는 베이나트는 들고 온 짐을 내려놓았다. 그 안에는 소 시지와 빵, 치즈가 들어 있었고, 베이나트는 그것을 아낌없이 쏟아 냈다. "실컷 먹고 푹 자둬라. 내일 아침에 출발하자꾸나." "어디로 출발하는 겁니까?" "어둠 숲으로." 아킨은 자켄을 보았지만, 자켄은 아직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게다가 베이나트의 말에 상당히 놀라는 것을 보니, 베이나트가 자켄에게도 이런 말을 하지 않은 듯 했다. 아킨이 베이나트에게 물었다. "혹시, 저도 같이 가는 겁니까?" "그럼 너 하나만 여기 달랑 버려 놓고 가리? 이건 말이다, 너를 데리 러 오기 전부터 정해진 거야. 싫다고 할 생각은 하지도 말고, 그렇 다고 도망칠 생각은 더더욱 하지 말거라. 가자." "저, 갈 생각이었습니다." "응?" "사실 그곳으로 갈 생각이었다고요." 베이나트의 눈이 댕그래졌다. 아킨은 아주 피곤했지만 자켄에게 했던 말을 다시 되풀이해야 했다. 간신히 아킨의 말이 끝나자 베이나트의 얼굴이 아주 온화해졌다. 상당히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잘 생각했다. 어쨌건, 그렇게 뜻이 맞으니 나도 기분이 좋구나." "그런데....그럴 생각이셨으면서, 왜 자크에게는 말하지 않은 거죠?" 베이나트는 오른 쪽에 앉은 자켄의 눈치를 살펴보더니 어깨를 으쓱했 다. "말 했다가는, 나루에와 함께 너를 어둠 숲으로 데리고 오는 것이 좋 은지 아니면 내 버려 두는 것이 좋은 지에 대한 토론을 벌여야 했을 테니까. 솔직히, 나는 토론에는 별반 자신이 없는데다가 나루에와 는 절대 토론하고 싶지 않아. 생각 기준이 완전히 틀린 녀석이니까 양 쪽 다 속 터지는 것으로 끝나거든." "즉, 그냥 오면서 정하신 거라....이거군요." "그렇지." "하나도 안 변했군요." 반쯤 체념한 듯, 그리고 나머지 반은 조금은 한심하다는 듯 말하는 아킨에게 베이나트는 얼굴을 구겨 보였다. "너, 나랑 헤어진 지 얼마나 되었다고 생각 하냐? 두 달도 안 됐어." ".....그런데 이십년은 흐른 것 같습니다." "그건 나도 인정한다." 그런데 자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이나트가 어디 가냐고 묻자, 자켄은 주변을 둘러 봐야 한다는 말을 하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베이나트는 대체 주변에 뭐가 있어서 그가 그러는 지 어리둥절하다가, 자켄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는 아킨의 눈빛을 보고는 대충 짐작했다. 아킨이 그를 보낸 것이다(아 마도 허리를 푹 찌르는 방식으로). "너, 뭐 물어볼 거 있는 거냐?" "자크가 들으면 곤란한 거라서요." 베이나트는 동생이 듣지 말라고 한다고 냉큼 일어나 가버리는 형도 나름대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자크에게도 숨겨야 할 일인데 어서 물어봐야지." "그곳에 가면......다 알 수 있을 까요?" "그 늑대 녀석에 대한 일 말이겠지?" 아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이 니왈르도 였던가요......대체 뭐죠?" "본명은 니왈르도 펜라키, 내가 아는 자들 중 가장 위대하지만 쓸모 없는 마법사였지." "원한이 상당하셨나 보군요." 저 녀석은 얄밉게 말하는 버릇 좀 고쳐야겠다, 하고 생각하며 베이나 트는 우울한 미소를 던졌다. "모든 힘을 다 가지게 되었지만, 결국 모두를 잃었고 그래서 자신마 저 잃은 놈이란다. 그렇게 말해주는 것만도, 내가 많이 용서해 준 거란다." "자세히 이야기 해 주시겠습니까?" "너 지금 아파. 실컷 나불댔는데 네가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하고 뻔뻔하게 말하면 복장 터질 지도 모르겠다." "그건 그 때가서 생각하지요, 뭐." "조금 이상한 이야기가 될 텐데, 네가 다 이해할 수 있을까?" "그것 역시 듣고 나서 생각하겠습니다." 베이나트는 모아 놓은 굵은 장작을 모닥불에 던져 넣었다. 불꽃이 펑, 하고 튀어 올랐다. "나는.....'이 세계'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알고 있겠지, 그건?"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어쩌면 이 세계의 바다와 땅이 있기 전부터 살던 사람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이 별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 태어난 사람일 지도 모르지. 그러나 분명한 건, 이 세계에 적을 두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 세계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있고, 그렇기에 나는 이곳의 절대자로 부터 자유롭다는 것이다." "그 때 제가 잠시 보았던 그곳이 당신의 세계인가요?" "그래. 별의 글자들- 즉 성문자들은 시공을 초월하여 공용되는 유일 한 문자다. 같은 글자라도 다른 의미로 쓰이고, 다른 의미를 같은 글자로 쓰기도 하는 문자지. 어쨌든, 너는 네 은봉인에 적힌 성문자 를 이용해서 너의 몸 상태를 변화시켰고 그 힘이 너와 이계가 잠시 나마 접촉하도록 해 준 거다. 어쨌건 내가 남긴 글자였으니, 나와 관련된 곳으로 안내한 것이지......즉, 나의 세계." 베이나트의 눈에 서글픈 그리움이 떠올랐다. "하지만......내가 살던 그 시대에 우리 세계는 종말을 고하고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너무 늙어 있었던 거란다. 그 때 상황은.....복잡하게 설명하자면 한없이 복잡해지지만, 간단하게 말 해주마.....나는 그 곳에서 꽤 높은 직책을 맡고 있었단다. 그리고 나만큼이나 높은 직 책을 맡고 있었던 지에나 아브롤린이라는 친구와, 우리만큼 높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책임 있게 일을 해야 했던 팔로커스는 대회의의 지원을 받아 닥친 종말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모든 지식이 동 원되었고, 모든 가능성이 검토되었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가장 확 실한 방법을 알아내게 되었다." "혹시 그게 성배와 관련된 겁니까?" 베이나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의 잔과 달의 잔, 바람과 물과 불의 잔, 그리고 대지의 제단. 그 유산이 어떻게 탄생해서 언제부터 내려왔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하 지만, 그것이 우리 세계만큼이나 오래된 물건이라는 데는 분명했고 우리 세계를 지킬 수 있는 마지막 보물이었다는 것 역시 분명했다 . 나머지는 다 우리 손에 있었지만, 그 중 하나인 달의 잔만은 오래 전에 약탈당해 적대하는 종족의 수장의 손에 들어가 있었지...... 그리고 그가 바로 니왈르도였다." "원래 그의 것이었던 겁니까, 아니면 빼앗긴 겁니까?" "빼앗긴 거지. 젊었던 그는 우리 종족에게 도전했고, 결국 우리는 그 에게 달의 잔을 빼앗기고 그것은 그의 소유가 되었다. 몇 번이다 되찾고자 했지만 불가능했다. 그는 오만하고 흉포한 자였고, 도전하 고 도전받고 승리하는 것을 즐기는 자였다. 그는 그것 때문에 도전 하여 오는 자들을 이기는 것을 즐겼을 뿐,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지 개의치 않았고 믿지도 않았지." 그리고 베이나트는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아킨이 먼저 물었다. "그 때 본 것은......그 때 즈음인가 보군요." 베이나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는 몇 번이나 고개 숙여 부탁했다. 그저 달의 잔을 되찾는 것뿐이라면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서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패 주면 될 문제였다만, 달의 잔뿐만 아니라 그의 힘까지도 필요했기에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단다. 원한도, 자존심도, 우리는 다 내팽개치 고 그의 발목을 붙들고 애걸했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다, 우리가 살 고 당신네 일족도 살기 위해서는 당신도 도와야한다.....제발 부탁이 다." 베이나트의 눈은 계속 흐려졌다. 아킨은 왠지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 해왔던 옛 이야기들이 베이나트의 이야기와 맞물리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에칼라스를 찾아왔던 세 명의 마법사 이야기와, 결국에는 실패하고 만 그 마법사들의 원정. 양 끝에서 달려오던 그 아득한 두 가지 이야기가, 이제 서로의 손끝이 닿는 거리까지 온 것이다. 이상한 기분이다. 그것은 천년도 전에 있었던 일인데, 그 이야기가 비슷하고 비슷하니 어쩌면 '같은' 이야기라는 것이, 그런데 그것이 '정말처럼', 너무 도 당연하게 느껴진다는 것이. 그러나 아킨은 말하지 않았다. 그냥 환상은 환상처럼 느끼고 싶어졌다. 내일은 또 어찌 될 지 그 누구도 모르지만 그저 지금만큼은 그렇게 꿈 처럼 듣고 싶었다. "그리고......어찌되었습니까?" "마침내 그는 우리의 설득을 들어주었다. 겨우 안도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세계를 재생시키기 위한 대마법을 행하기 위해 이계로 갔다. 그 리고 이곳, 이 세계에서 우리는 이곳의 힘의 원천이 되는 존재를 찾아 가 부탁했다. 그는 대가를 원했고, 우리는 지불해 주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조각을 지상으로 보내, 그 조각으로 하여금 우리와 함께 하도록 했다. 너희들이 에칼라스라 부르는 존재 말이다...." "현기증 날 지경이군요....." 베이나트는 피식 웃었다. "그렇다면 이건 그저 꿈이라 생각하렴. 꿈에는 시간도 논리도 상식도 필요 없이, 그저 보고 듣고 느끼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계속해 주십시오." "그러나 우리가 이계에서 재생의 법을 행할 때, 우리의 세계에 있던 니왈르도는 우리를 배신했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채 세계의 문을 닫아 버렸고, 우리는 돌아갈 수 없게 되어 버렸지." "문이 닫혀서 이곳에 계속 계시는 겁니까?" 베이나트의 흐릿한 한숨이 터졌다. "그랬다면 오죽 좋겠니......문이 닫히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 우리의 세계는 당연하게도 완전히 파멸해 버렸다......산산이 부서져, 별들의 검은 무덤 속으로 빨려 들어가서 영원히 돌이킬 수 없게 되었지. 영 원히......." 베이나트는 땀에 젖은 이마를 문질렀다. 눈이 젖어 있었다. 오랜 시간을 살아온 그였지만, 그때의 기분은 영영 잊혀지지 않고 돌이킬 때마다 눈물 치솟게 하는 깊은 슬픔인 것이다. 몸뚱이 하나만 빼고, 모든 것이 송두리째 사라져 버린 것이니. "니왈르도는 상황을 너무 쉽게 보았던 것이다. 자신의 힘에 그 달의 잔의 힘만 보태지면, 자기 혼자서 그 세계를 완벽하게 손에 넣어 주 무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거다. 그래서 처음부터 우리를 배만해서 이계로 추방시킬 셈으로 동의하는 척 했던 거야. 우리가 바깥 세계로 가자마자 그는 세계의 문을 닫을 작업을 시작했고, 가장 결정적인 순 간에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우리를 비웃어 버린 거지. 하지만.....그 의 분노와 오만함이 모든 판단을 흐려버렸던 거다. 그건 불가능했다. 애당초- 그래서 그는 세계와 함께 멸망해 버렸다......그래, 최근까 지는 그렇게 생각했지. 아주 최근까지." "제 권호를 주려 하셨던 그날까지....?" 베이나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단다. 정말 우연이라면 우연이고 기적이라면 기적이지. 나루 에는 복수를 위해 이계의 것을 소환했고, 그 소환된 것이 바로 고약 하게도 그 녀석.....니왈르도였던 거다. 그 원수 같은 자식." 아킨은 몸이 떨리는 것을 느끼며 조용히 물었다. "그렇다면 저는 대체 뭡니까." "너다." "......그걸 묻는 게 아닌데요." "나 역시 엉뚱한 답을 하는 게 아냐. 너는 너다, 아킨토스. 빌어먹 을 아버지의 아들이고, 가엾은 어머니의 아들이며, 징글맞은 형의 동 생인 아킨토스 프리엔이 맞아." 그리고 베이나트는 장작 하나를 더 모닥불에 던졌다. 타닥--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상처가 다시 욱신거리며, 몸을 감싼 열기도 더욱 뜨 거워진다. "예전에 말했지. 이 세계와의 접촉은 순서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 니라, 말 그대로 아무렇게나 이어지는 것이라고. 네가 본 것이 우리 세계의 과거일 수도 현재일 수도 미래일 수도 있단다....그런데 네 가 본 것은 내게 있어 과거였던 모습이지. 내가 원래 속했던 나의 세계에 살고 있던 그 때. 그의 아내가 아직 살아있고, 그의 오만함 은 무르익어 있던 그 때......나와 내 동료들이 모든 것을 걸었던 재생과 부활의 마법이 실패하여 모든 것이 절단나기 전인 그 때." 바람에 불길이 흔들리며 베이나트의 긴 그림자가 아킨의 몽롱한 정 신처럼 휘청거렸다. 베이나트가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이계와의 접촉이라도, 단 하나 불가능한 게 있단다.....그리고 그것이 불가능했기에, 우리는 우리의 실수도 오판도 결코 되돌릴 수 없었지.......무슨 말인지 알겠니?"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선택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고 모든 것이 끝나 버린 후,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시도 했다. 그 와중에 니왈르도의 손에 들어갔던 달의 잔을 회수하는 것이 기적적으로 성공했고, 그것을 찾게 되자 더욱 필사적으로, 더욱 간절히 기적을 갈망하며 제대로 된 방법을 찾아내려 했다. 그리고 그 중에 세계와 차원의 강을 넘어 우리의 과거로 가 우리의 실수를 바로잡으려는 시도도 당연히 포함되어 했었단다. 하지만 가장 당연한 방법이자 가장 확 실한 방법이었던 그것은 절대 불가능했지......" 그리고 베이나트는 다시 이마를 문질렀다.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같은 사람이 동시에 있을 수 없었다." "......" "그러니 너와 그가 동시에 있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너는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어진 거다. 어떤 방식으로 너와 그가 '결 합'되어 있는지는 나루에를 직접 만나야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적어도 지금 하고 있는 고민만은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된다. 너 는 너, 그리고 인간이 맞다." "정말.......'인간'인 겁니까?" "아키야, 너의 존재를 남으로부터 확인받고자 하지 말거라. 너 스스로 너 자신에 대해 확신한다면, 너는 너 자신이 맞다. 가장 가까운 너 자신이 너를 확신하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너를 인 정하겠느냐....그러니 너는 너를 믿어. 너를 증오하지 말고 너 를 혐오하지 말고 부정하지도 말고, 네가 너라는 것을 믿어..... 그러면 모든 문제는 너무도 쉽고도 간단해진다. 강한 바위는 폭풍이 쓸려나간 뒤에도 단단하게 서 있는 법이니까." 불길이 한 번 더 치솟아 오르며, 숲 깊은 곳까지 빛을 드리웠다. 그리고 아킨은 그 빛의 범람과 함께 멀지 않은 나무 둥치 뒤에 있는 자켄의 옷자락을 발견했다. 베이나트가 고개를 숙이며 작 게 말했다. "오늘은 푹 자둬라. 그 동안....고생 많았다." "......감사합니다....." 베이나트가 손을 들어 아킨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러나 눈물 은 멈추지 않고 계속 흐른다. 솔직히 말하자면, 앞에 베이나트 만 없었으면 엉엉 울었을 것 같다. 결국 베이나트가 웃으며 말 했다. "두 달 동안 나이를 거꾸로 먹은 거냐. 정말 계속 울기만 하 는 구나." "너무.....오래 참았던 거니까요." 안도의 눈물이었다. 가장 불안한 순간에 가장 불안한 방식으로 시도했던 그 방법이, 가장 확실한 구원의 빛을 던져 주었다. 그래서 눈물이 나왔다. *********************************************************** 작가잡설: 에에에에엥-- 아키 울보 공주~ 그러다 온달 왕자에게 시집을~ (퍽!)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46장 *************************************************************** [겨울성의 열쇠] 제215편 겨울의 반대편#4 **************************************************************** 그날 밤 꿈을 꾸었다. 열기와 통증에 몸이 쑤셔오고, 가슴은 뭐에 눌 린 듯 답답하기만 하다. 그래서 꿈은 어지럽고 두서없고 산만했으며 의미의 윤무 속에서 전혀 무의미했다. 아킨은 작고 아무도 없는 방 안에 앉아 있었다. 바닥은 회갈색 나무로 되어 있었고, 벽도 낡고 비틀린 나무로 되어 있었다. 걸린 그림은 낡고 어두웠으며, 여기 저기 놓여있는 낡은 장식물들에는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다. 거울에도 먼지가 내려앉 아 그저 흐릿한 윤곽만을 반사할 뿐 아무것도 비추어내지 못한다. 그렇게 모든 것이 낡고 지쳐있었으며, 메말라 있었다. 거미줄 하나 없었고, 곰팡이 쓴 곳도 없다. 그곳은 오로지 마르고 말라 비틀어져 정들지 못하고 정착하지 못하는 먼지 쓸고 죽어버린 공간이었을 뿐이다. 세찬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창밖은 어두웠고, 그 창 위로 앙상하고 하얀 겨울 나뭇가지들이 드리워져서는 창문을 타닥타닥 쳤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아킨은 창가로 다가가 창문의 고리를 열고는 힘껏 밀어젖혔다. 어마어마하게 세찬 바람이 불어 닥쳐왔다. 머리 카락이 흐트러지고 옷깃이 나부낀다. 목덜미는 베어나갈 듯 아프고 춥다. 숨을 내 쉬자 뿌연 성에가 온통 어린다.... 그리고 아킨은 손을 뻗어 보았다. 손끝에 작고 뽀얀 눈송이가 하늘하늘 내려앉아 녹아들어 버린다. 눈물방울 같은 작은 방울 하나만 남기고는 그렇게 사그라져 버린다. 아킨은 그렇게 쏟아지는 바람을 등지고, 방 안 가득 흩어지는 눈발 속에 뒤돌아섰다. 그 낡은 방에는 하얀 옷을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의 눈길은 창 밖을 향하고 있었지만, 아킨을 향하고 있지는 않았다. 머리카락은 검었고, 그 위에는 얇은 왕관 같은 금빛 테가 둘러쳐져 있었다. 그리 고 얼굴은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 거울 속에서 보고 기억 속에서 보고 증오와 분노 속에서 보았으며 연민과 사랑으로도 보았었던 그 녀- 언제나, 또는 영원히 젊고 깨끗하며 아름다운 어머니. 그녀가 눈길을 살짝 내리더니 아킨을 바라보았다. 이제 아킨보다 작아져 있 어 그녀의 머리가 어깨에 겨우 닿을 정도다. 이상하다. 기억속의 그 녀는 언제나 아킨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아킨 역시 작기만 했다. 그 런데 지금의 그녀를 바라보는 아킨은 훌쩍 커 있었다. 이런 경우는 정말 처음인 것 같았다. 그리고 처음이자, 아마도 완전히 마지막이 될 것 같았다. 아킨은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 "잘 가요, 어머니-" 아킨은 눈 녹은 물이 그녀의 이마에 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눈발 이 날린 거야, 아킨은 그렇게 생각했다. 내 눈물이 아니라고........ 그런데 그녀의 모습이 흐려진다. 그 이마에는 계속 그 물방울이 뚝뚝 어린다. 그렇게 눈가가 타는 듯 뜨거웠지만, 그것은 겨울 숲의 모 닥불처럼 기분 좋은 온기였다. "잘 가요....." 이제는 끝내드리겠습니다. 보내드리겠고, 저 역시 더 이상 당신이 잠 가 버린 방안에 웅크리고 있지는 않습니다..... 내 감옥의 열쇠는 당신이 아닌 내 손에 있었고, 어쩌면 처음부터 잠 가졌던 적도 없었을 지도 모르죠....그저 앞으로 걸어가 문을 밀어 젖히기만 하면 되었을 지도 몰라요. 방이 산산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낡은 그림이 부서지듯, 모래로 빗은 성이 무너지듯, 바닥을 이룬 나뭇조각들이 조각조각 나며 바 람에 쓸려 흩어진다. 벽들은 가루가 되어 눈발과 함께 휘몰아쳐 올라 가 버린다. 그리고 이제 눈 덮인 벌판위에 아킨이 있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은 하얗게 빛나고, 구름 걷히기 시작하는 하늘에 는 무수한 별빛이 쏟아질 듯 빛난다. 바람은 차고 깨끗했지만, 에일 듯 날카롭기만 하다. 그리고 이제 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으며, 아무도 지켜보고 있지 않 았다. 벽도 창살도 없이, 그저 아킨 혼자만이 덩그러니 서 있었다. 강요하는 자도 없었지만, 책임을 떠넘기고 원망할 자 역시 없다. 자유로웠지만, 벽이 사라진 지평선 너머는 검고 아득하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불확실하기만 하다. 그렇게 아킨은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바람은 여전히 차고 날카로웠 지만, 아킨의 속 안에 있는 것은 술이라도 한잔 한 듯 뜨거운 열기 였다. 그리고 그가 간직한 그것이 겨울 벌판 위에서 단 하나의 온기 가 되어 그를 덥히고 있었다. 별을 따라, 별빛이 뿌리는 빛을 따라, 아무도 기만하지 않는 하늘이 보여주는 진실을 따라. 눈 덮인 벌판 끝은 보이지 않았지만, 아킨은 분명 스스로의 의지로 스스로 걷고 있었다. 그래서 행복했다. 휘안토스는 예상하는 것과 정말 사실을 듣게 되는 것이 틀리다는 것 을 다시 한번 깨달아야 했다. 아버지 사이러스와 병석에서 간신히 일어난 케올레스, 그리고 휘안토 스 앞에 엎드려 있는 검은 로브의 마법사가 올리는 보고를 하나하나 들으며 휘안토스는 자신이 아는 것과 대조해 나가며 확인해 나갔다. 보고가 끝나자 사이러스가 마법사에게 물었다. "아키는 어떻게 된 건가?" "헤로롯사 쪽으로 가셨다 합니다. 그 젊은 마법사 말에 따르면 모든 채비를 하고 가셨다 하고, 또 도착하시는 대로 연락 하겠다 하셨다 합니다." "....." 사이러스는 가만히 턱을 짚었다. 그리고 수염을 쓰다듬는 그의 손길 을 바라보며, 휘안토스는 아마도 그 역시 아킨이 정말 헤로롯사로 갈 리도 없고 연락을 할 리도 없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을 거라 생 각했다. 케올레스가 병에 지친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면....그 마법사는 대체 왜 돌아왔다 하던가....같이 수행해 가 지 않고!" 마법사는 머리를 더 깊이 숙이며 말했다. "자케노스....라는 사람이 같이 있었으니, 자신은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다고만 말했습니다. 제가 들은 것은 거기까지일 뿐입니다." 마법사는 그 이름이 누구의 것인지 전혀 몰랐기에 그 말이 어떤 방향 을 일으킬지 몰라 두려워만 했다. 케올레스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그러나 사이러스의 얼굴은 여전히 냉정했고, 휘안토스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이러스가 말했다. "일행은 언제 암롯사에 도착하나?" "어제 아침에 항구를 출발했을 테고, 또 세루비아나 경께서 계시니 일주일이면 산 파로이에 도착할 거라 생각됩니다." "좋다-- 그 때 자세히 들으면 되겠지. 수고했다." 마법사는 머리를 조아리며 인사를 올리고는 왕의 집무실을 나갔다. 다시 셋만 남게 되자, 케올레스가 물었다. "어쩌실 생각입니까?" "핑계는 충분히 만들어 졌지 않나. 그들은 혼인과 평화를 말하러 간 내 아들을 습격했고, 내 아들은 간신히 목숨만 건졌다. 하지만 그 아이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건 자명하고, 그렇게 된 이상 나는 내 아들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게 된다." 케올레스가 조용히 한숨을 내 쉬었다. 상황이 나빠진 것과, 그 상황 을 타개할 만한 힘이 그에게 없음을 안타까워하고 있으며, 아킨의 안위도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건 그에게 있어 아킨은 왕자라 기보다는 병약한 막내 손자 같은 존재였다. "제도의 베로크 황제에게 말해야겠지. 성배로 맹세된 평화와 인내의 시간이 지나면, 나는 내 아들의 죽음에 대한 복수로 델 카타롯사와의 전쟁을 원한다고. 그리고 먼저 맹세를 어긴 것은 그 쪽- 가장 중요한 의무를 수행하지 않은 것도 그쪽- 그러니, 그 어떤 나라라도 이 파렴치한 델 카타롯사를 도울 수 없다고 말이다." 휘안토스는 칼리토 대공왕이 가장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무리 사이러스와 암롯사가 미워도 그렇게나 어리석은 선 택을 했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칼리토 대공왕이 제 정신이 아닌 건 둘째치고라도, 옆에 그를 말릴 정도로 제 정신인 사 람 하나 없었단 말인가. 그런 아들의 생각을 알아챈 사이러스가 말했다. "주변에 같은 말을 하는 사람만 잔뜩 있었을 것이다. 같은 것만 보는 사람밖에 없으니, 오로지 그 길 하나밖에는 보이지 않았을 테지. 원래 어리석은 머리 옆에는 어리석은 수족들만 모이게 되는 법이다." "......." "어쨌건 확실한 것은, 칼리토가 직접 성배를 찾아 황제라도 되지 않 는 한 그 어떤 나라도 델 카타롯사를 돕지 않을 거라는 거다. 우리 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뿐이다." 휘안토스는 갑자기 나온 그 단어가 왠지 마음에 걸렸다. 성배- 성배라. 예전에는 너무나 막연했던 그 말이, 지금은 이상하리만큼 현실감 있 게 들린다. **************************************************************** 작가잡설: 동생이 자룡이 발을 밟았습니다. --;; 놀래긴 놀랬는지 자룡이 녀석 계속 도망만 다니네요;; 다친 자룡이 보다 동생의 울 부짖음이 더 큽니다............... '으엥, 으엥! 이제부터 날 미워할 꺼야아아!' -_-;;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47장 *************************************************************** [겨울성의 열쇠] 제47장 경계의 열쇠 제216편 경계의 열쇠#1 **************************************************************** 슈마허를 맞이해 준 것은 역시나 그가 기대했던 대로 유제니아였다. "아저씨-!" 슈마허는 웃으며 그를 반겨주는 유제니아를 껴안았다. "날이 갈수록 감동적으로 크는 구나, 유즈." 소년 시절부터 십여 년간 온 나라를 다 휘젓고 다닌 그였지만, 그래 도 그에게는 다른 용병들과는 달리 돌아갈 곳이 있었고 그곳에서는 언제나 포틀러스 일가가 그를 맞이해 주었다. 십 수 년이 지나도록 철들 가망이 아득해져가는 그렉과, 그와는 달리 징그러울 정도로 조숙했던 소년 세르네긴, 그리고 천사처럼 다정한 소피아와 이 작은 유제니아는 그에게 있어서 그 누구보다 소중한 존재들이었다. "어디 보자.....그 동안 별 일 없었지?" 그리고 슈마허는 유제니아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유제니아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물론 없죠. 아저씨 옆에 있으면 없을 것도 생기지만 세냐 옆에 있으 면 있을 일도 없어지니까. 하지만 별 일 많은 건 오히려 아저씨 아 니에요?" 그리고 그 눈에 걱정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슈마허는 그의 어린 아가 씨의 머리를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 "마음아파 해 주는 건 좋지만, 너무 그러면 내가 더 서글퍼지니 적당 해 주려무나." 슈마허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유제니아의 얼굴에 행여나 무언가 를 발견하거나 자신이 왜 이렇게 바라보는 지 눈치를 채버리지 않 을까, 하고 걱정했지만 유제니아의 얼굴은 여전히 환했다. 그렇게 여전히 방금 핀 꽃송이처럼 구김 없고 밝은 모습에, 슈마허의 긴장 은 결국 풀어졌다. "다행이다, 유제니아." "네?" "아니, 정말 다행이다." 유제니아는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하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말을 못 알아들으면 이렇게 귀여운 짓을 한다는 것을 잘 아는 슈마허는 소녀의 볼을 살짝 꼬집어 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너는 금방 금방 예뻐지는 구나. 내년에는 얼마나 예뻐 질 지 걱정될 정도야." "아저씨 늙을 동안 나는 커야죠. 그리고 여자니까 당연히 예뻐져야 하고." 슈마허가 얼굴을 구겼다. "나는 이제 겨우 서른다섯이다. 어디 가서는 아직 젊다는 말만 잔뜩 듣는 다고." "에에, 저는 열여섯인데요." "자만하지 말라고. 너도 언젠가는 내 나이 된다." "그리고 그 때 아저씨는 쉰이네요." "말은-" 그렇게 핀잔을 주며 슈마허는 완전히 안심했다. 그래, 가장 중요한 것은 '사고' 자체가 아니라, 이 귀여운 아이가 아직도 사과 꽃향기 같은 웃음을 터뜨릴 정도로 밝다는 것뿐이었다. 그래, 이제부터는 절 대 이 아이 앞에서 내색하면 안 된다. 이걸로 된 거다. 사실을 기억 하는 사람은 분노를 삼키며 이를 갈 테지만, 이 소녀만은 아무 것 도 모르는 채 웃으며 그들을 안아주며 키스해 줄 것이다. 이것으 로 만족한다. 그 일이 아예 없었던 것이 되는 것을 빼고는 이 방법 이 가장 좋은 방법 아닌가.....비록 미치도록 기만적인 짓이긴 하지만. 유제니아가 그런 그의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세냐가 기다리니 어서 가요, 아저씨." "아아- 그래." 슈마허는 유제니아가 이끄는 대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늦가을 햇살은 따사로이 퍼지고 있었지만, 집 안은 적막하고 서늘했 다. 슈마허는 왠지 집 주인 다운 분위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투명하고 강렬한 빛을 비추는데, 그 속에 품은 것은 칼날처럼 서늘 한 그 녀석과 말이다. 세르네긴은 응접실에서 슈마허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 는 희미하게 - 보통 사람이라면 정말 환하게 활짝 웃는 얼굴과 맞 먹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건강해 보여서 다행입니다." "속이 벌컥 벌컥 뒤집어지는데, 먹고 자기라도 잘 해야지." 말은 그렇게 해도, 세르네긴이 그의 속내를 짐작 못할 리 없었다. 로 메르드에서는 거의 쫓겨나다시피 왔고, 슈마허의 성격을 고려해 볼 때 그렇게 잠자코 나온 것 자체가 고문이었을 것이다. 어두운 분 위기를 대강 눈치 챈 유제니아는 응접실을 나가 살짝 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렇게 둘만 남게 되자, 세르네긴이 말했다. "이제 델 카타롯사로 떠나실 겁니까?" "나야 늘 싸움 판 벌어지는 데로 가잖니. 이제 곧 그곳에서 싸움판이 벌어질 테고, 암롯사로 가고 싶지는 않으니 델 카타롯사로 가야지." "그렇다면.....저도 데리고 가 주십시오, 슈마허 님." 절대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지만 짐작하던 말이었고, 듣게 되면 분명 기분이 엉망진창이 될 거라 각오는 했다. 그러나 수 십 번을 각오 했건만, 정작 듣게 되었을 때의 기분은 상상했던 것 보다 더 고약 하기만 하다. 그래도 슈마허의 답은 벌써 정해져 있었다. "에크롯사에 계속 있어라. 너한테는 그 편이 낫다." "데리고 가 주십시오." "고집피우지 마. 네가 그냥 평범한 기사라면 괜찮지만, 아니다. 너는 이곳 에크롯사의 용기사고, 너와 함께 하는 휠테스는 그냥 네 마누 라나 여자친구가 아니라 에크롯사를 지켜야 하는 드래곤이다. 그런 데 네놈이 이렇게 멋대로 나돌아 다니는 건 무책임한 짓고, 그런 짓은 지난 번 한번만으로도 충분하다 못해 넘쳐." "휠테스 님께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내가 양해 못해줘." "제발 부탁드립니다... 데리고 가 주십시오! 예전에는 늘 그렇게 다니 지 않았습니까! 예전처럼 하면 되는 겁니다." 재촉하고 조바심 내는 듯한 그 목소리에 슈마허는 언짢아졌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걷어차고 몇 대 두들겨 패주고 싶을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누구와 싸우고 싶어서 그러는 거냐." "뻔하지 않습니까." "그래, 그 왕자 놈 멱살 붙들고 칼이라도 꽂을 생각이냐." "네." 슈마허는 기분이 더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다. 차라리 뭐라 좀 더 말 해서 꼬투리라도 잡게 만들어 줄 일이지, 뭐 저렇게 깔끔하게 말하는 건가. 세르네긴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죄송합니다, 슈마허 님. 하지만 아무리 궁리해도 제 머리로는 이 방 법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정말 이 방법 밖에는요." "현명하게 생각해라." "가장 현명한 것은 이대로 참고 묻어 두는 것이겠지요. 유즈는 기억 하지 못할 테고, 저는 기억하지 않는 척 하고. 분노는 살아 있을 테지만, 희생도 위험도 없을 테지요......" "그래." 순간 세르네긴의 손이 확 치솟아 슈마허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슈마허는 놀랐다기보다는 그런 세르네긴이 오히려 측은했다. 주먹이 라도 날려주고 싶지만, 그러기 전에 그 어깨를 힘주어 끌어 안아주고 싶었다. 이 앞에 있는 청년은 용기사 세르네긴이 아닌, 그보다 열 살이나 어린 가엾은 세냐였다. "당신마저도 참으라는 겁니까? 상대가 자그마치 암롯사의 왕자이니, 그냥 참고 묻어두라고요? 네?" "지금 만큼은 참아라. 너는 지금 아무 판단도 못하는 상태다....조금 더 뒤에 생각하자." 세르네긴의 눈에 열기가 치솟아 올랐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그거야 말로 과하고 잔인한 요구입니다! 당신은 모르십니다. 그 때 먼 곳에 계셨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정말 저 아이가 무너져 가는 걸 하나하나 지켜보았단 말 입니다.......! 제대로 자지도 못했어요. 어쩌다 잠들어도 늘 악몽만 꾸 고, 밤새도록 열병에라도 걸린 듯 힘들어했어요......그 아이가 밤 새 무슨 말을 하는 지, 듣지 않은 당신은 모릅니다! 제가 미워서 그 런 짓을 한 거라면.........! 내가 얼마나 건방졌던 것인지 보여주기 위해서였다면, 적어도 그건 성공했습니다! 정말 산채로 찢어지고 불타는 것 같은 고통이었으니까-!" "유즈는 잊었다. 그러니 너도 잊어." 세르네긴은 고개를 저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에서 피가 스며 나 와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무리한 요구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슈마허 자신조차 못하는 일을, 어떻게 세르네긴에게 강요하겠는가. "유즈는 잊어도 저는 잊지 못합니다. 잊지도 못할 테고요.....아니 잊 어서도 안 됩니다. 잊으려고 해도, 눈을 감아도 떠도 생각나 버립 니다! 도저히 잊을 수가 없어요....!" "하지만 유즈를 위해서는 복수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잖아." "아니, 이건 유즈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제가 그가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를 용납 못하겠습니다. 바로 제가--! 그 아이를, 그 죄 없고 순수한 아이를 그렇게 능욕하고 유린한 그가 태연하게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천명, 만 명, 아니 모두가 침묵해도 저는 침묵할 수 없습니다...그는 죽어야 합니다. 반드시--!" 그리고 세르네긴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울분과 분노, 증오에 뒤섞 여 활활 타는 그 눈빛을 보며 슈마허는 몇 배로 침통해졌다. 유제 니아가 당한 일이 세르네긴을 분노시키듯, 반쯤 허물어진 세르네긴 에 대한 슬픔과 유제니아가 당연히 겪었을 고통에 대한 분노가 한꺼 번에 뒤섞여 몇 배로 부풀어 슈마허를 분노하게 하고 있었다. 유제 니아도 엉망이었을 것이고, 이 섬세한 녀석은 몇배로 엉망이었을 것이다. 정말, 진심으로 미칠 노릇이었다. 휘안토스 뿐만 아니라, 그 아버지이자 보호자인 사이러스도 손닿는 곳에만 있다면 주먹을 날려 버렸을 것이다. 왕이면, 왕자면 뭐하나. 지금 그에게는 솜털 보송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열여섯 살짜리를 강간한 발정난 개새끼에 불과한데. 용병출신이라, 거친 동료나 부하 들이 적들의 여자나 힘없는 근처 여자들을 범하는 것을 드물지 않게 봐 왔다. 다친 짐승처럼 울부짖는 여자들과, 그에 오히려 더 흥 분하며 들어붙어 거칠게 헐떡거리는 지저분한 녀석들을 보면, 전쟁 끝나면 늘 보는 광경이기는 해도 역겨웠다. 그런데 그런 일을 유 제니아가 당했다 생각하면, 정말 피가 거꾸로 치솟아 올랐다. 그에 게 유제니아는 언제나 곱고 순수하기만 한 소녀였다. 난폭한 힘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하니, 거친 세상에서 언제나 지켜줘야 하는 존 재이기도 했다. 그런데 휘안토스는 그런 소녀를 약탈한 것이다. 그저 세르네긴의 신부가 될 날만 기다리고 있었을 그 아이에게, 그 저 화풀이를 하나를 위해 씻을 수 없는 고통을 남긴 것이다. "정말 죽여 버릴 거냐, 세르네긴." "맹세합니다." "뒷일은 생각 안할 작정이고?" "어떤 일이 벌어지든 최선을 다해 버티겠습니다. 각오하고 있고, 각오 해야 하는 일이고, 각오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슈마허는 세르네긴이 얼마나 오랫동안 생각했는지 알 것 같았고, 얼 마나 단단히 각오하고 있는 지도 알 것 같았다. 이렇게 고집을 부 리기 시작하면 결코 그를 설득할 수 없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말리는 건 포기하고 최선을 다해 도와주는 것뿐이다. "그렇다면.....전쟁터에 유제니아를 데리고 다닐 수는 없어. 또, 만에 하나 그 휘안토스와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애써 유제니아의 기억을 지운 보람도 없어질 거다." 그리고 그 아버지인 사이러스의 성격을 휘안토스가 물려받았다면, 이 번 한번으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마저 있다. 그건 정말 생각하고 싶 지도 않은 일이다. "그러니 세냐, 유즈는 뉴마르냐로 보내라. 그곳이라면 휘안토스가 근 처도 지나갈 일이 없을 테고, 또 좋은 사람들도 많고 믿을 사람도 많으니 괜찮을 거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를 죽이는 것 자체 보다, 어떤 상황에서 죽여야 하는 지 먼저 생각해라. 어쨌건 그는 왕자, 성공 자체에만 마음 편하게 집 중할 수는 없다......그래, 그건 내가 최선을 다해 도와주마." "감사합니다." "감사할 일만은 아니다. 유즈의 일에는 내 책임도 크니까......당연한 일이기도 해." 그리고 슈마허는 세르네긴의 어깨를 안아 당겼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약속해 다오. 만약 복수와 네 목숨 중 하나를 택해야 할 일이 생긴다면, 반드시 네 목숨을 택하겠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죽겠다는 각오로 들린다. 하지만 그러지 말아라, 세냐. 절대-- 유즈 를 혼자 남겨 놓는 놈은, 그 누구든 용서 못하니까. 특히 그게 네 놈이면 더더욱 용서 못한다." 세르네긴의 어깨가 떨렸다. 슈마허는 팔에 힘을 꽉 주며, 사실 슈마 허 자신이 그럴 작정이었다는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로메르드에서 쫓겨나다시피 하여 에크롯사로 향하던 그에게 델 카타 롯사로부터가 접근해 왔을 때, 슈마허가 생각한 것은 전쟁 자체가 아 니라 암롯사 왕자 휘안토스 뿐이었다. 반드시 죽여 버릴 테다, 개자식-! **************************************************************** 작가잡설: 오늘 예방 접종하러 병원에 갔습니다............... 고양이 한마리가 수술을 받는 바람에 손님들이 많이 밀려 있더군요;; 그래서 기다리고 있는데, 사방에 고양이들 야옹 하악 캬르르르릉 하는 소리만 난무했습니다. 쎄니는 겁먹어서 바구니 구석에 처박혀서 바들 바들 떨고 있는데, 자룡이 녀석이 문제였습니다. 이놈이 소녀 고양이들 한테는 마냥 므흣 치근덕 치근덕 거리더니, 아줌 마 고양이;; 한테는 어마어마한 적대감을 보이더군요. -_- 결국 성질 난 아줌마 고양이는 자기 아들한테도 하악 -캬릉! ;; 그리고 자룡 이랑 캬악- 카릉-! 하악~! 아아, 정신없더군요. -_-;; 자룡이는 누님 취향이 아닌가 봅니다..........;; p.s 주먹만한 아기 고양이를 두 마리나 봤습니다! 어떤 사람이 옷 더미를 안고 왔는데, 그 안에서 정말 한달 밖에 안 된듯한 아가가 꼬물 꼬물 기어 나오더군요! 너무 귀여웠습니다.....(당장에 병원 스타가 되었지요. -_-;;)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47장 **************************************************************** [겨울성의 열쇠] 제217편 경계의 열쇠#2 ***************************************************************** 아킨은 어둠 숲 안으로 들어서며, 생각보다 훨씬 더 어마어마한 곳으 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에 전율했다. 가장 흔한 굵기의 나무 둥치들은 두 세 사람이 팔을 맞잡고 둘러싸야 겨우 감길 정도였고, 그 껍질은 아주 진한 갈색이거나 옻칠이라도 한 듯 까맸다. 우거진 나뭇잎들이 겹치고 겹쳐서 진한 그림자가 어려 있었으며, 그들이 드리우는 그림자가 다시 겹쳐져 숲 깊은 곳으로 가면 갈수록 더욱 컴컴해지다가 마침내 밤처럼 까만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짐승들은 충분히 많았다. 진한 붉은 빛 새가 나 뭇가지에 앉아 있다가는 사람들이 오자 포르르 날아갔고, 작은 토 끼와 사슴들이 몇 번이나 길을 가로질렀다. 어그러지고 비틀리거나 죽죽 뻗은 나뭇가지들이 하늘위로 뻗어나가 터널처럼 감싸며 어둠을 품게 했으며, 하얀 오솔길만이 어둠 속에 뽀얗게 빛나며 굽이굽이 치고 있었다. 분명 숲 밖에서 보면 평범한 돌과 흙일 텐데도, 이 곳에서는 미미한 박명속의 하얀 바위들처럼 빛난다. 아킨이 자켄에게 말했다. "뭔가.....먹히는 듯한 기분이네." "숲 자체가 살아 있으니까 그렇게 느껴지는 거지." 그리고 자켄은 앞장서 아킨을 이끌었다. 그의 뒷모습이 어둠 속의 불 빛처럼 환하게 느껴진다. 숲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길은 더욱 하얗게 빛나는 것 같았다. 나 무들은 더욱 굵고 빽빽해졌으며, 갈수록 색과 모양이 기이한 색들이 돌아다녔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두개의 큰 바위가 호위처럼 서 있는 곳에 도착했다. 바위 위에는 동심원 몇 개와 단정한 필체의 룬이 적혀 있었으며, 그 꼭대기에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문양이 그러져 있었다 . 중앙에 직선이 하나 있고, 양 옆으로 몇 개의 가지가 뻗어 나 와 있다. "어둠 숲의 문장이다. 티피안느가 약조한, 영원한 결계의 징표이자 권 리의 상징이지." 뒤 따라오던 베이나트가 설명했다. 아킨은 그것을 한번 만져보고 싶 어 손을 뻗었다가, 한 뼘 정도 거리에서 뻗어 나오는 따끔한 기운에 손을 움츠렸다. 베이나트가 장난치는 아들 보는 듯 피식 웃었다. "조심하는 게 좋아. 엘프가 아니면 손 한번 잘 못 댔다가 고약한 꼴 을 당하게 되거든." "아...." 그렇게 답하다가 아킨은 문득 시선을 느꼈다. 돌아봤을 때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어둠 속에 숨은 남녀들이었다. 키들은 크고, 어깨와 팔도 탄탄했다. 그러나 건장한 느낌은 들지 않고, 날렵해 보이며 늘씬하다는 느낌이다. 모두 숲의 그림자 인 듯 한 진한 녹색이나 진갈색 망토나 옷을 입고 있다. 남자들은 표범 같았고, 여자들은 암사자들 같았다. 아킨이 바라보자, 그들의 손이 자연스럽게 허리나 가슴 쪽으로 올라 갔다. 옆에 있던 자켄이 가볍게 손짓을 보냈다. 그러자 그들이 어둠 속으로 휙휙 사라졌다. 고집 센 듯한 이들이 늦게까지 남아 있었으나, 자 켄이 베이나트를 가리키자 수긍한 듯 냉담하게 고개를 휙 돌렸다. 그리고 그들이 마지막으로 보내는 날카로운 적대감의 시선을 아킨은 놓칠 수 없었다. 아킨은 그것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지만, 베이나트 가 아킨의 머리를 돌려 앞을 보게 했다. "신경 쓰지 말거라. 여기 일족은 외부 인이라면 상대가 드래곤이라도 저런 눈빛을 보낸다." 아킨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지만, 아직도 먼 곳에서 쏘아보 내는 적대감 어린 시선이 느껴져 등이 근지러울 지경이다. "자, 이제 그저 앞만을 봐라." 그렇게 말하며 베이나트가 아킨의 이마 양쪽에 댄 손을 놓았다. 뿌옇게 빛나는 길의 끝이, 마치 길고 두터운 터널의 끝이 나온 듯 환 한 빛을 뿜어 올리고 있었다. 처음엔 진주 빛이라 생각했었지만, 조금 더 지켜보니 연한 노을빛인 듯도 했고, 달빛에 젖은 바위 같아 보이기도 했다. 아킨은 자기도 모르게 멈추어 서서 그 빛을 바라보았다. 빛은 기이하게도 아킨 쪽으로 천천히 퍼져 오는 것 같았다. 주변의 나무와 길과 바위와 풀들을 적시며 다가와 마침내 아킨의 눈썹 끝에 닿았다. 그리고 아킨은 그의 양 볼에 닿는 부드러운 손길을 느꼈다. 투명했던 눈앞에 얼룩처럼 진한 갈색과 검은색이 어리는 가 싶더니, 진녹의 눈동자 두개가 떠올라 아킨을 주시했다. 그리고 그 변화와 함께 여 린 바람처럼 흐릿하던 손길도 점점 실체감을 띠기 시작했다. 마치 색을 집어넣듯, 생명을 불어넣듯, 환상이 현실이 되는 듯, 눈앞에 누 군가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의 여자 엘프였다. 굽이치는 머리카락은 무릎까지 늘어지고, 이마에는 달 조각 같은 장 식이 붙어 있었다. 피부는 어둠 숲의 일족답게 갈색이고, 두 눈은 신비롭고 우아하게 빛난다. 이 얼굴을 알고 있기에, 아킨은 조용히 그녀를 불러 보았다. "나루에...?" 이렇게 부르면 건방져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켄은 그녀의 이름조차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단 한번도 그녀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았다. 그런데 어린 인간의 소년이 이렇게 존칭도 붙이지 않고 대뜸 부르다니. 그러나 그녀는 별로 기분나빠하지는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의 얼굴은 무관심했다. 분명 아름다운 얼굴이었지만, 그 눈에는 아주 오랜 기억이 쌓여 있었으며 입술에는 그 정도 되는 기억을 담 은 자가 가질 법한 흔들림 없는 차분함이 어려 있었다. 새삼 아버 지가 대단하게 생각된다. 이 정도 되는 존재를 앞에 놓고서도 그 난동을 부렸다니- 하긴, 아버지가 무서울 게 뭐 있었겠는가..... 아킨은 베이나트나 자켄을 찾으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주변 에는 안개 끼인 듯 뿌옇기만 할 뿐 아무도 없었다. 그러자 나루에가 말했다. "베이나트나 자크는 이 숲 어디에 있어도 좋지만, 너는 아니다. 너에 게는 숲의 심장으로 향하는 길을 걷게 해 줄 수 없기에, 부득이하게 이리 한 거야." "어떻게 하신 겁니까?" "바로 이곳으로 오게 한 거란다. 일이 끝나면 바로 숲 밖으로 보내 주겠다." 즉, 만나는 것 자체부터 아주 싫긴 하지만 어쨌든 해야 할 일이 있으 니 하고, 끝나는 즉시 버리듯 치워버리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처 음부터 못 들어오게 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기는 했는데 이건 생 각보다 더하다. 전염병 환자도 이것 보다는 좋은 대접을 받을 것 같 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쨌든 만나 뵙게 되어 기쁩니다." "인간은 예의라 표하며 거짓을 말하지- 너의 미움은 잘 안다." 역시나 부드럽지만 '차가운' 목소리였다. 글쎄, 이렇게 대한다면 호의 를 가지고 있던 사람도 금세 악의로 변해버릴 것 같다. 그렇게 아 킨은 조금 서운해하는 자신을 발견했고, 조금 어이가 없기도 했다. 뭘 기대했던 걸까- 정말 그녀의 말대로 미워했으면서, 어째서 그녀 만은 다정하기를 바랬던 걸까. 좀 밝아지는 것 같아 아킨은 고개를 들고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나무와 풀과 꽃들이 우거진 평범한 숲에 있는 공터 같은 곳이었다. 나무는 벽처럼 둥글게 그곳을 감싸며 위로 뻗어나가고 있었고, 하 늘에는 하얀 빛만이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하늘같지도 않았다. 그 저 이 공간이 녹아 사라지는 구멍 같다는 생각이 든다. "베이나트와 약속했다. 네가 이곳으로 오면 너의 저주를 풀어 주기 로." "네?" "의심할 것 없다. 나는 거짓을 말하지 않으니까. 네게 걸린 저주를 분 명 풀어 주겠어." 그녀가 그렇게 너무나 쉽게 말하자, 갑자기 모든 것이 허무하게 생각 되었다. 아니,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허탈해서 서글플 지경이었다. 그렇게 힘들었던 일을 어떻게 이렇게 쉽게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이 더 잔인하다. "정말 그 저주를 풀어 주실 겁니까?" "물론이다. 나는 내 오랜 벗의 부탁을 복수를 위해 거절할 정도로 어 리석지도 매정하지도 않아." 그리고 손길이 턱에 닿았다. 부드럽다.....아킨은 그렇게 생각하고는 갑자기 어이가 없어졌다. 지금 천년은 산 듯한 마귀할멈을 앞에 놓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몇 가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답할 수 있으면 해 줄 것이고, 모르는 것이나 비밀을 지켜야 하는 일이라면 해 줄 수 없다." 아킨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나루에의 손이 멀어지더니, 그녀는 아킨 과 두 걸음 정도 되는 거리로 물러났다. 온통 하얗기만 한 비현실 적인 빛 속에 잠긴 그녀는 어딘지 자켄과 닮은 듯도 했다. "왜 제게 그런 저주를 걸었던 겁니까. 아버지는....아무런 고통도 겪지 않았는데." "소년, 나의 복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너의 고통으로 더욱 고통 받을 인간이었다면, 벌써 나의 제안을 받아 들여 자유로운 몸이 되었을 거다." "....네?" "그건 분명 중요하긴 하나 일부일 뿐, 전부는 아니야. 아직 내 복수는 완성되지 않았고, 그것이 완성되는 순간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고 통이 될 거다." "그게 대체 무엇입니까?"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겠지. 하지만....너에게 대해서는 가르쳐 줄 의 무도 이유도 없어." 여전히 차갑기만 하다. 아킨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는 물었다. "그렇다면 그냥 하던 이야기나 계속 하고 싶습니다. 제 안에 있는 것 은 대체 무엇입니까." "베이나트가 허락하지 않으면 답해줄 수 없는 거야." "아니, 그의 과거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대강 아니까요. 제가 알고 싶은 것은....그의 실체, 그 자체일 뿐입니다." 나루에가 턱을 살짝 들었다. 그 눈빛이 담은 빛은 분명 아킨에게는 희망적인 것이었다. 잠시 뒤 나루에의 손이 위를 향하며 올라갔다. 그녀의 손끝에서 파앗-- 하고 얇은 빛 조각이 터지는가 싶더니, 그녀의 앞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얗게 빛나는 원이 떠올랐 고, 그 안은 마치 돌을 던진 샘물표면처럼 흔들리기 시작한다. 위 에서 쏟아지는 빛이 그 위에 무수하게 반사되며 아킨의 얼굴과 몸 위로 빛 얼룩을 그려냈다. 나루에가 말했다. "알다의 샘, 계시의 눈이자 창이지. 잘 들여다봐라. 아킨은 그 흔들리는 공간을 보았다. 공간은 정말 수면처럼 흔들리고 있었고, 그 안이 비추어 내는 것은 그 반대편이 아닌 전혀 다른 공 간이었다. 정말 물처럼 푸르고 깊었다. 깊은 동굴의 호수를 들여다보는 듯, 신 비롭게 출렁이며 안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들여 다보고 있는데, 그 수면이 천천히 다가왔다. 무의식적으로 뒤로 주 춤 물러났고, 나루에가 그의 어깨를 잡아 가만히 앞으로 밀었다. 순간 찬 안개 같은 것이 얼굴을 확 덮치고는 사라졌다. 그리고 겨 우 정신을 차렸을 때, 아킨은 그 일렁이던 수면을 등지고 있었다. 안으로 빨려 들어온 걸까- 물고기라도 된 것 같다. 고개를 다시 돌 려 보니, 위로는 흰 공간 같은 것이 뻥 뚫려 있을 뿐이다. 바닥은 고운 모래로 되어 발을 디딜 때마다 부드러운 발자국이 생겼다. "어떻게 하면 되는 겁니까?" 아킨이 그렇게 묻자, 뒤에서 나루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원하는 것을 생각해라.....그러나 샘이 원하지 않는 다면 아무것 도 보여주지 않을 것이고, 보여주어도 좋다고 판단한다면 보여줄 것이다." 알 수 없는 소리만 한다, 하고 아킨은 생각했다. 나루에가 말했다. "무엇을 보든 네가 원하는 것이었고, 또한 진실이기도 하니까. 그러니 그곳에서 무엇이 일어나든 전적으로 너의 책임이다....나는 필요하다 판단되면 관여하겠다." 아킨은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보았다. 뿌옇기만 하던 그곳에, 이제 아킨의 전신을 비출 수 있을 정도로 길 고 얇은 거울이 생겨났다. 아킨은 그 표면을 쓸어 보았다. 그러자 그 손짓과 함께 그 표면이 수면처럼 흔들리다 가라앉았다. 아킨은 잠자코 그것을 지켜보았다. **************************************************************** 작가잡설: 나이 많고 도도하면서도 한없이 까다로운 할머니, 라고나 할까요. 굳이 비유를 빌리자면 종갓집 시어미. 흠. -_-! 다음 편 올라갈 때 중대 발표 있습니다. ^^;; 예상한 분 잔뜩이시죠?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47장 **************************************************************** [겨울성의 열쇠] 제218편 경계의 열쇠#3 **************************************************************** 밝은 방 안이 보인다. 얇은 커튼이 바람에 나부끼고 자그마한 꽃을 수놓은 시트와 테이블보 가 있는, 금방이라도 은은한 향내가 풍겨올 듯한 그런 여자 방이다. 그리고 그 방의 창 옆에 놓인 침대에 누군가가 누워 있었다. 긴 머리 카락은 시트위에 검은 깃털처럼 흩어져 있고, 하얗고 가는 팔이 그 위에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그 얼굴은 아킨이 봐도 너무나 지쳐 보였다. 눈가는 해쓱하고, 입술도 창백했다. 감긴 눈썹 끝은 금방 운 듯 젖어 있었고, 아직도 어깨를 떨고 있는 것을 보니 잠들어 있는 것도 아니다. 유제니아- 아킨은 소리 내어 부르지는 못했지만 속으로 그렇게 자신을 타이르듯 그 이름을 불러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역시나- 볼에도 눈물자국이 있었다. 기억하고 있을까, 처음 만난 날도 울고 있었는데. 그리고 아킨은 그녀의 목에 걸려 반짝이는 반지를 보았다. 백조의 반 지는 처음 봤을 때와 같이, 얼마 되지도 않는 짧은 시간이자 너무도 길기도 했던 그 시간동안 변함없이 반짝인다. 구원을 바랬던 적이 있었다.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그를 구해주고 지켜주기를 바랬던 적이, 약한 자신을 그렇게 감싸주기를 바라기만 했던 적이 있었다. 평화를 바 랬었고, 사랑을 바랬었고, 그래서 그 속에 부드럽게 안주하고 싶었다 . 단지 그것만 주어진다면 무엇이 더 필요 하겠는가- 그저 그렇 게 생각했었다. 그리고 유제니아가 그것을 주기를 바랬고,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그녀는 분명 그렇게 해 줄 수 있는 존재이기도 했다. 아킨은 느낌이 묻어 나오지 않는 손길로 거울 표면을 쓸며 그녀의 이 마를 쓸어 올렸다. 머리카락 한 올 건드릴 수 없는 위치였다. 그래, 역시 꽤나 안일한 생각 이었다. 세상이란 처음부터 평화도 안주도 없는 곳이다. 어미젖에 매달려 무 지로 이루어진 평화 안에 있을 때조차도, 그 어미가 지켜줄 수 있 기에 그런 것을 누릴 수 있는 것뿐이다. 처음부터 어딘가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이 있을 거라고, 그것을 지켜줄 자가 나타날 거라 생각하는 것 자체가 헛된 희망이었던 것 이다. 잠시 안도할 수 있는 순간은 올 지라도, 영원히 안도할 순간 따위는 그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는다. 지킬 수 없는 상황은 너 무도 당연하게 바뀌는 것이다 아킨이 그대로라도, 주변은 변하게 마련인 법이니. 태어난 이상 언제나 전쟁인 것이다. 도망친다고 해서 그 전쟁터가 없 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냥 그곳에는 전혀 다른 전쟁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벽을 넘어선다고 해서 전쟁이 완전히 끝나는 것도 아니다. 그 위에는 더 강하고 더 혹독한 전쟁이 기다리고 있고, 그 전쟁에 살 아남아야 다음 전쟁을 대비할 수 있는 것이다. 가장 평화로운 것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아무 생각도 안 하 며 사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삶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저 낭비 되는 시간의 술 취한 향연일 뿐이다. "미안........." 유제니아, 너에게 지나친 것을 요구했고, 내가 원하는 환상만을 봤었 지. 그리고 그 환상 때문에 세르네긴에게 화가 나고 죄책감 비슷한 것도 들었지. 그 환상의 진짜 주인은 그였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그녀가 무엇을 해 줄 것이다.' 라는 이유 따위는 필요 없다. 그냥 그녀와 나눈 기억과 감정만이 중요할 뿐이고, 그 사실을 지키고 간직하기 위해 해야 할 일만이 있을 뿐이며, 그녀의 상처 에 가슴 아프고 화가 치밀어 오를 뿐이다. 그리고 그것 역시 또 다 른 전쟁이다. 유제니아가 눈을 떴다.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는 허공을 향하다가, 눈 길을 돌려 아킨 쪽을 바라보았다. 아킨은 그런 그녀의 이마에 키스 했다. 아무 느낌도 없었지만, 더운 공기 같은 느낌만은 분명히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거울이 보여주는 광경이 변해갔다. 이제 아킨은 눈 덮인 벌판 위에 있었고, 그 앞에는 거대한 기둥들이 서 있었다. 그 울퉁불퉁한 기둥은 모두 여섯 개였고, 그 앞에 있는 같은 수의 제단에는 각자의 낡은 잔이 안배되어 있었다. 아킨은 그것들이 모두 익숙한 잔들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러나 그 중 그 어떤 것에도, 예전 같은 불길과 물과 바람이 흐트러지고 있지는 않 았다. 물 마른 샘과 멈추어 버린 분수처럼 텅 비고 낡은 잔들이 그곳에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예전과는 다른 것이 또 있다. 아킨과 마주하는 곳에 있는 제 단 앞에, 남자 하나가 앉아 있었다. 눈길을 헤치고 온 듯 온통 눈 투성이인 그는 낡은 망토와 끝에 털을 덧 댄 가죽 후드를 쓰고 있었다 . 추운 듯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덜덜 떨며 무언가를 끊임 없이 중얼거리고 있었고, 그 목소리에는 적대감과 분노가 차 있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그의 옷자락이 나부꼈다. 찬 바람에 정신이 라도 든 듯 그가 고개를 들었고, 아킨은 깜짝 놀랐다. 베이나트였다. 그러나 지금의 모습에서 10년은 늙은 듯한 모습이었다. 눈가에는 주 름이 잡혀 있었고, 눈빛은 한없이 지쳐보였다. 추위에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고, 눈썹과 갈색 머리끝에는 얼음조각이 맺혀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지친 눈은 아킨의 등 쪽을 향하고 있다. 아킨은 돌아보았다. 역시 그곳에는 다른 남자가 서 있었다. 니왈르도- 그렇다, 그였다. 은빛 머리카락은 설원을 등진 채 나부끼고, 활활 타는 금빛 눈은 열 기로 번득인다. 온통 가죽과 털로 감싼 베이나트와는 달리, 그는 얇은 옷 한 벌만 걸친 채 맨발로 서 있었다. 그리고 얼굴은 지친 기 색 하나 없었으나, 분노와 증오로 일그러져 있었다. 베이나트가 고개를 숙였다. 후드 끝의 털이 그림자를 드리우며 그의 얼굴을 감추었다. -당신이 하라는 건 무엇이든 다 해드리겠습니다. 어떤 굴욕과 모욕 도, 당신이 내리는 것이라면 참고 복종할 것입니다. 어떤 일도 당 신이 하라하면 내 몸이 부서지는 일이라도 하겠습니다. 그러자 니왈르도의 입술이 비틀렸다. -아니, 엎드려야지. 머리를 조아리고, 더욱 공손하게 부탁해야지. 그 렇게 건방지게 앉아서 무엇을 빌고 있다는 거냐, 무엇을 얻겠다는 거냐--! 베이나트의 입술이 경련을 일으키는 것이 보인다. 그럼에도 베이나트 는 몸을 일으키고 엎드려 머리를 땅에 댔다. 굵은 눈물이 흘러 바 닥에 떨어진다. 울분과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러나 그의 간절한 소망을 위해 억누르며. 하지 말아요- 아킨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 말라니까요-! 그러나 베이나트는 차가운 눈에 얼굴이 묻힐 듯 더욱 허리를 깊이 숙 이며 말했다. -이렇게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지상에 가장 위대한 마법사여. 지금 우리의 세계를 위해, 우리의 목숨을 구해주십시오. 우리를 구원하 시고, 우리의 경배를 받으십시오.... 그제야 니왈르도가 조금 만족한 듯 했다. 그리고 저벅 저벅 걸어와 발을 들었다. 무엇을 하려는 지 알아챈 아킨은 순간 숨을 죽였다. 빠악--! 니왈르도는 그대로 베이나트를 걷어찼고, 베이나트는 엄청난 힘에 날 아갔다. 바닥을 구르고, 머리를 굵은 돌기둥에 부딪혔다. 흰 눈 위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진다. -자, 다시 빌어 봐라. 니왈르도가 심술궂게 속삭였다. 베이나트는 다시 비틀 비틀 돌아서 서, 똑같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부탁드립니다. 니왈르도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스치더니,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새로 조물을 하듯 일그러진다.....아킨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흐려지 며 사라지고 있었다. -부탁드립니다.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다시, 베이나트의 목소리가 긴 메아리처럼 흐릿하지만 길게 들려온 다. 귀를 막고 싶었고, 너무나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런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무너지고 비참한 모습은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았다. "니왈르도--!" 그리고 다시 아킨은 정적이 앉은 모래벌판 위에 있었다. 이제 그 앞 의 거울이 비추는 것은 거대한 늑대였다. 거대한 은빛 늑대, 흉측한 얼굴과 험악한 눈빛을 가지고 귀를 눕힌 채 경계하는 무시무시한 괴물이었다. 아킨과 마주치자 그가 거대한 이를 험악하게 확 드러냈고, 그 깊은 곳에서 으르릉-- 먼 곳에서 울리는 천둥소리같이 들려온다. 이렇게 생겼을 줄은 몰랐는데- 아킨은 그렇게 생각하며 씁쓰레하게 웃었다. 왜 이런 어이없는 표정이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이상하게도 그런 생각부터 들고 웃음이 나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 안에 숨은 괴물의 정체를 '제대로' 보는 것이다. 보름이 벗겨내어 실체를 보여주는 그 괴물-- 아킨은 그에게 다가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복종의 표시 같은 것 은 아니다. 그저 그렇게 해야 그 얼굴을 정확하게 마주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늑대는 으르렁대기는 했지만 공격적이지는 않았다. 그 냥 경계만 하고 있는 것이다. "니왈르도......" 그가 맞을까. 그런데 바로 뒤에서 나루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맞단다....하지만 지금은 너의 언어를 모르니 그렇게 가만히 있는 것 이지." 아킨은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여전히 수면처 럼 흔들리는 벽만이 있을 뿐인데, 나루에는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듯 가깝게 말하고 있었다. "대체....어떻게 된 겁니까." "네가 예상하는 대로다, 소년. 나의 증오와 분노, 주체할 수 없었던 복수심은 지금의 너 역시 겪고 있으니 애해해 주리라 믿는다. 그 어떤 자비로운 자라도 혈육을 그렇게 비참하게 만들어 죽게 한 자를 용서할 수는 없을 거다.....나 역시 그러했고, 내 증오는 모든 죄의 면죄부였다." 그리고 그녀의 손길이 어깨에 얹히는 것 같았다. 늑대의 눈이 확 빛 나더니 어깨를 들척였다. 아킨은 뒤로 주춤 물러났고, 그 늑대 역시 공격적인 자세로 일어난다. 금방이라도 뛰어 올라 사방을 부수어 버릴 듯 하다. "그러나 그는 용서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해져갔다. 사랑하는 여인을 찾았고, 그녀역시 그를 사랑하여 행복한 결합이 이루어졌지. 그에 게는 계속 행복만이 있을 것이고, 나의 가엾은 아델라는 피지도 못 한 꽃송이를 접고 썩은 낙엽 속에 누워 있다......합당한 징벌이 있 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나는 알다의 샘에 답을 구했다. 그를 위한 가장 합당한 징벌을, 가장 위대한 징 벌을 달라고-" 순간 빛나는 그림자들이 한꺼번에 일렁였다. 마치 수면이 흔들린 듯 - "알다의 샘, 계시의 창은 내게 답을 주었지.......그날 이 눈이 나에게 보여주었단 것은 내가 속한 곳과는 전혀 다른 이차원의 세계, 임종 직전의 세계였다. 위대한 문명이 이루어 낸 듯한 성과 집과 찬란한 신전들은 모조리 바스러져 용암의 솟구침과 땅의 몸부림에 무너지 고 있었고, 하늘은 불타고 바다는 들끓었지. 그리고 그 속에서 나 는 울부짖고 있는 그를 발견했다." "살아......있었습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거의 죽어가고 있다고 봐야 했지.......나는 그에게 물었다. 나를 도와주면 또 한번의 생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어떤 생이든 좋다면 살려 주겠다고. 그는 죽어가면서 당연히 동의했지... ..그렇게 그와 나는 약속을 하고, 나는 그를 이곳으로 소환하여 네 어머니의 뱃속으로 들어가게 했다. 태아였던 너에게 육신 없는 그가 들러붙었고, 강력한 그는 너의 몸을 침탈하여 자신의 몸으로 만들고자 했다." 순간 혐오감이 확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뭐라 쏟아 부어대고 싶었던 아킨은 엘프와 대화하는 것 자체가 갑 자기 허탈하게 생각되었다. 기준이 어느 정도 비슷해야 무슨 말이든 꺼내보지, 이건 너무 틀리니 신경 쓰는 당사자만 화가 치밀어 오른다. "저와 그는 대체 어떤 관계입니까." "만월은 세계와 세계의 경계를 흔드는 신비로운 힘의 원천이지. 천 계 유일의, 가장 크나 언제나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별. 그것이 차고 기움은 숨었던 것을 이끌고 있던 것을 잠들게 한다. 그래서 다른 세 계에 온 그가 그 만월이 완벽하게 차오르는 순간에 정신을 차리고 네 몸을 뚫고 제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지........" "다시 묻습니다. 그렇다면 저의 이 눈과 머리카락 색, 그리고...... 짐승 같은 힘과 감각은 대체 누구의 것입니까! 저의 것입니까, 그의 상징입니까." 수면이 더 크게 흔들리며 사방의 빛나는 그림자들이 놀란 듯 휘청거 린다. 나루에가 말했다. "너에게는 거울이 있구나-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거울이." "답해주십시오." "인정한다....그 모든 것이 그와 네가 함께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일 이다. 그가 너의 육신을 침탈한 것도 사실이며, 당시의 그가 육신을 거의 잃어버렸다는 것도 사실이고, 너의 육신으로 완전해 지려는 것도 사실. 하지만....소년, 더 이상 화내지도 알려 하지도 말아라. 이제 그것도 곧 끝날 테니. 더 이상은 몰라도 되고, 아무런 책임도 의무도지지 않아도 좋다. 나는 내 벗의 부탁에 따라, 너를 이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시켜 주겠다." 그제야 아킨은 그녀가 저주를 풀어주겠다고 했던 것을 기억해 냈다. 아니, 왜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인지...그게 더 신기할 지경이 었다. 예전 같으면 그것만 기억하고 생각하고 있을 텐데. 그런데 전혀 기쁘지 않았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순간에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말과 함께 쫓겨나는 것만 같다. "정말....저주가 끝나는 겁니까?" "그렇다. 그리고 너는 이대로 인간의 삶으로 돌아가면 된단다. 잊 어라, 돌아서라. 그것으로 끝날 테니." 그러나 아킨은 혼란스러웠다. 정말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니, 정말 끝나면 그 일에 대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고통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 아들이는 것 자체가 너무나 혼란스럽다. 분명 맞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 자체가 너무나 부조리하고 억 지스럽게 느껴졌다. 아니, 차라리 웃기기까지 했다. 어이없고 웃 겨서, 화까지 치밀어 오른다. 이건 아니다. 이건 절대 아니다. 이렇게 끝나서 영영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 되게 할 수는 없 다. 아니, 심장이 맹렬하게 거부하고 있었다. 나루에의 손에서 희 미한 빛이 스며 나왔다. 그리고 그녀의 눈빛이 이제 준비하라는 듯 다그친다. "전......." 아킨은 입술을 열었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것을, 후회할 거 야-- 라는 속삭임이 귓가에 수없이 반복되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더 후회할 일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 작가잡설: 자꾸....그렇게 눈 번득이지 말아요;;;; '그래, 일이 그렇게 될 리가 없었지잇!' 하고 계시죠? 네, 원래 그런 법입니 다. -_- 그건 그렇고....왜 제가 결혼할꺼라는 예상들을 하시는 건지. --;; 그런 가정이 현실성을 가지고 있는 나이라는데 울적해지고, 그럼에 도 불구하고 가망성 있는 상대가 하나도 없다는데 더욱 울적해 집 니다. -_-;;;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47장 ***************************************************************** [겨울성의 열쇠] 제219편 경계의 열쇠#4 ***************************************************************** 산 파로이에 도착한 루첼은 당장에 호출을 받았다. 일행을 마중 나왔던 기사를 통해 "그란셔스, 당장에 왕자님을 뵙도록 하시오."라는 말을 "수고했습니다."라는 말보다 더 빠르게 들었다. 그리고 그 기사는 바로 마르실리오였다. 루첼은 각오하고는 있었지만 이렇게나 빠르고 갑작스럽게 듣게 될 줄 은 정말 몰랐다. 그래서 잠시 '의외입니다.' 라고 말하듯 침묵을 유 지하고는 말했다. "그냥 따라 가면 되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그렇게 딱딱하게 말하고는 마르실리오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은 채 돌 아섰다. 어물쩍대지 말고 빨리 빨리 따라오라는 것이다. 루첼은 다른 일행에게 인사를 하고는 그를 따라갔다. 일행과 멀어져 철창문 하나를 통과하자 마르실리오가 물었다. "어떻게 합류하셨습니까." "중간에요." 마르실리오의 눈이 날카로워진다. "그 정도로 델 카타롯사에 대해 잘 아십니까?" "물론 도와준 분이 계셨습니다." "그건 누구지요?" "마하 칸느. 아시리라 믿습니다." 마르실리오가 멈추었다. 그 눈이 칼침 놓듯 사납게 루첼을 향했지만, 루첼 본인은 담담하게 마주봤을 뿐이었다. 마르실리오가 험악하게 말했다. "지금 제 정신이십니까!" "개인적인 호의로 도와주신 것뿐이고, 저는 그 도움을 거절할 정도로 암롯사에 충성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저를 믿지 못하시겠다면 저를 해고하시고 베넬리아로 보내라고 당신의 할아버지께 청하시면 되고요." 그렇게 말하고는 루첼은 케올레스가 있는 방향을 가리키듯 천장을 가 리켜 보였다. 마르실리오의 눈이 더욱 매서워졌다. "지금 장난하자는 겁니까!" "아뇨. 진심으로 말하는 거니, 진심으로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여기는 다른 곳도 아닌 암롯사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도움 받은 기 사는 다른 누구도 아닌 마도론의 우레, 마하 칸느입니다! 첩자혐의로 당신을 체포하여 암롯사 왕명에 따라 처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하라는 분은 바로 당신네 나라 왕자를 찾는데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 분 덕에 아키가 도망치는 동안 악튤런 파노제를 막을 수 있었고, 역시나 그 분 덕에 숲 속에서 넝마가 되어 쓰러져 있 던 아키를 찾을 수 있었고, 마지막으로 그분 덕에 아키를 자크와 함께 보낼 수 있었어요. 그 상황에서 당신네들 '잘난 암롯사'는 아 무것도 도와주지도 않았고, 두와 주려 하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저 를 첩자 혐의니 뭐니 하며 협박까지 하시는 군요. 상식적으로 살 아오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노골적인 비상식은 또 처음입니다." 마르실리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루첼은 그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대 며 날카롭게 말했다. "당신 나라 왕이나 왕자나 당신이나, 제일 마음에 안 드는 건 제일 힘들고 필요할 때는 게으르게 있다가는 일 다 끝나면 호들갑 떨며 달려드는 겁니다. 마치 정말 걱정이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 보호하 고 싶었다는 듯, 그렇게 가증 떨며." "그란셔스-!" "이 참에 분명하게 말해두죠. 아키는 제 친구고, 친구이전에 저와 동 기간이며, 저는 그에게 존경하는 스승을 빚졌습니다. 그리고 그 날 일에 대해서는 속속들이 알기도 하고요." 마르실리오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그러니 제 앞에서는 더 이상 가증 떨지 마십시오. 알만큼 잘 아니까, 당신들이 뻔뻔하게 벌이는 코미디에 감동 먹어 줄 수는 없어요." 그 말에 마르실리오가 이를 뿌득 물었지만, 결국 분을 삼키며 돌아섰 다. 그리고 휘안토스가 있는 성의 집무실에 이를 때까지 그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조금 편찮으시니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마십시오, 그란셔스." 그것이 마르실리오가 루첼이 휘안토스와 만나기 전 마지막으로 한 말 이었다. 루첼은 그런 마르실리오를 조용히 쏘아보고는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컴컴했다. 밝은 낮임에도 휘안토스가 두터운 커튼을 쳐 놨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빛이 가느다랗게 스며 나오는 커튼을 등진 채 서 있던 휘안토스가 그를 맞이했다. "오랜만이군." 정말 오랜만이었다. 베넬리아로 암롯사의 요청이 도착하여 암롯사에 왔을 때조차도 루첼 은 휘안토스와 만난 적이 없다. 아니, 생각해 보니 이 소년과 마지 막으로 만난 것은 정말 몇 년 전이었다. 제대로 말을 나누어 본 적 은커녕 인사조차 건네지 않았었다. 정말 너무나 잠깐 얼굴만 스쳤을 뿐, 더 이상의 만남은 없었다. 그런데 아킨 때문일까. 루첼은 휘안토스 프리엔이라는 이 소년이 전 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킨 만큼이나 오랫동안 알고 지낸 듯한 기분이며, 아킨을 아는 만큼이나 그를 안다는 느낌이 든다. 전혀 근거 없는 느낌임에도, 진실이라도 되는 듯하다. 휘안토스가 물었다. "아키는 어디로 갔지?" "본인이 가고 싶어 하는 곳으로." "그곳이 어디지?" "모릅니다." 아킨과 똑같이 생긴 녀석에게 존댓말을 쓰니, 그것도 참 어색했다. 어쨌든, 휘안토스가 그렇게 단출하게 답한 루첼을 바라보았다. 루 첼은 왠지 한숨이라도 내 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이건 무언가 아주 부조리하고 이상한 세계로 들어온 듯하다. 그림이 말을 하고 물이 하늘을 흐르고 천장에 문이 달려 오고가고 바닥에는 창이 뚫려 하늘을 바라보는 그런 세상 말이다. "어쨌건.....저는 이제 해고된 겁니까?" "아니. 계속 이곳에 있어. 네가 할 일은 아직 안 끝났으니까." 이건 좀 의외다. "죄송하지만, 불편하실 듯 한데요." "네가 원하는 누구에게 말하든 상관없다. 암롯사의 후계자 휘안토스 가 바로 그 동생인 아킨토스를 죽이려 했다고. 그게 진실인데 누가 뭐라 하겠나." 맙소사! 이건 부조리한 중에 가장 부조리한 물건이다. 뭘 그렇게 당 연한 말을 하느냐는 듯 말하고 있는데, 문제는 전혀 당연한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루첼은 허탈하게 웃었다. "왜 웃지?" "기가 막혀서." "그렇군." "......." 루첼이 더욱 기가 막혀하는 동안 휘안토스는 커튼을 조금 열었다. 강한 빛이 확 치솟아 오르며 맞은 편 벽까지 비추었고, 달아오르는 듯 진한 황금빛 선이 그려졌다. 쏟아지는 빛 속에 먼지들이 정신없이 휘청거린다. 루첼이 물었다. "그런데 제가 할 일이란 대체 뭡니까?" 순간 휘안토스가 커튼을 확 열어젖혔다. 촤르르르-- 엄청난 햇살이 폭포처럼 쏟아졌고, 루첼은 눈이 부셔 고개를 돌려 버렸다. 휘안토 스가 웃으며 말했다. "언젠가는 나를 위해 죽는 것." "....네?" "말 그대로다. 10년이 될지, 20년이 될지 모르지만, 어쨌건 나를 위 해 죽어라. 루첼 그란셔스." 베이나트는 견습 드루이드들 중 하나가 가져다 준 차를 마시고 있었 다. 소녀는 베이나트를 꽤나 신기하다는 듯 보다가 도망쳤고, 그 쪼그만 소녀가 오늘 어머니나 아버지에게 뭐라 말할지 뻔히 아는 그 는 괜히 한숨이 나왔다. 아마도 '나, 그 유명한 인간 괴물 아저씨 봤어요!' 하고 말할 테지. 두 모금 정도 마셨을 때 똑똑- 하고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이 엘프 들의 숲에서 달갑지 않은 이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잘 아는(물론 나루에의 아들인 발레스와는 사이가 무척이나 나빴지만, 그와는 아 예 상종도 안하고 산다) 베이나트는 부드럽게 말했다. "들어오시오." 그리고 그 사람이 들어오자, 베이나트는 찻잔을 내리며 눈을 멍청하 게 깜빡였다. "아키?" "확인 안하셔도 될 겁니다. 저 맞아요." 그리고 아킨은 저벅 저벅 걸어와 베이나트 앞에 앉았다. 베이나트는 여전히 멍하니 아킨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키야, 그런데 너....." "네, 그대로입니다." 아킨의 은빛 머리카락도 그대로였고, 금빛 눈동자도 그대로였다. 베 이나트는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못 한다든?" "아닙니다." "그렇다면......너, 원래 이렇게 생겼던 거냐?" "저는 제 형과 다르게 태어날려야 날 수도 없습니다." 합리적인 말이었지만, 베이나트는 그렇게 말하는 아킨의 머리카락이 라도 확 잡아당겨 버리고 싶어졌다. 그러나 아킨은 원래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게 이야기하고 왜 납득 못하냐고 물끄러미 보는 녀석이다. 그는 결국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며 물었다. "뭐, 위험한 일이라도 발생한다고 그러더냐." "역시 아닙니다. 그 분은 원래 제가 그랬어야 할 상태로 돌려주시겠 다고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설마 네가 겁나서 안 한 거냐? 행여나 무슨 일이라도 생 길 것 같아서?" "그것도 아니에요." "이렇게 예, 아니오. 해 봤자 내가 듣고 싶은 건 하나도 못 듣겠구나. 그래, 어떻게 된 거냐?" "제가 거절했습니다." 베이나트의 얼굴이 흐려졌다. "저주를 푸는 건 그 누구보다 네가 원한 것 아니니. 또, 언제 다시 이 런 기회가 올 지도 몰라." "맞습니다. 제가 원한 일이었고, 사실....지금도 그냥 이 저주를 풀고 어디로든 편안한 곳에 안착하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며 아킨은 나무 테이블의 옹이무늬를 손끝으로 쓸었다. 베이나트를 똑바로 보고 말하기에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왜 그런 거냐." "그냥 지금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아니라니?" "우선은 여쭤보겠습니다. 왜 그는 당신을 미워하죠?"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베이나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킨 이 다시 물었다. "니왈르도-- 그가 왜 당신을 미워하는 겁니까. 그저 자존심이나 오 만함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어요." 베이나트의 눈이 커졌다. 그러나 잠시였을 뿐이다. 그는 곧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알게 된 거냐." "방금 전....알다의 샘 안에서 봤습니다." 베이나트는 잠시 말없이 있었다. 망설이는 듯한 침묵이 끝나자, 그는 너무나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그의 아내를 죽였으니까." 너무나 담담해서 그 말에 얼마나 엄청난 진실이 담겨 있는 지 금방 알기도 어려웠다. 베이나트가 말했다. "변명하지는 않겠다. 그 아내가 나를 죽이려 했고, 나는 그 아내를 죽 였다. 그 뿐이다." 각오는 하고 있었다고 생각했건만, 아킨으로서는 너무 감당하기 어려 운 비밀이 나오고 말았다. 그러나 그렇게 알게되자 니왈르도가 조금 이해가 되기도 한다. 그가 왜 '신'이 되고자 했는지, 왜 실패를 알고 있으면서도 헛된 희망 에 모든 것을 걸었는지. 좀 더 생각한다면 그저 힘에 대한 욕망만은 아니었을 듯싶다. "엉뚱한 말로 이상한 데 삽 대지 말고,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하자꾸나. 대체 왜 그만 둔 거냐."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였다면, 또 방금 전의 그 광경을 보지 못했다 면, 그리고 예전의 저였다면 당신의 은혜에 감사하고 이 행운을 받아 들였을 겁니다. 하지만....당신의 과거를 알고, 지금 이 몸 안에 있 는 것이 당신의 과거와 상관있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지금- 그냥 털어버리고 떠날 수만은 없게 되었습니다. 아직은 제가 할 일이 있 는 것 같아요." 베이나트는 한숨을 내 쉬었다. "아키, 그 일은 너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다. 상관없는 사람에게, 그것도 너처럼 어린아이에게 도와달라고 하는 건....미안하지만 나나 내 동료들에게는 창피한 일이다. 우리는 우리 선에서 그 일을 처리 할 것이고, 되든 안 되든 다 우리책임이야. 네가 신경 쓸 필요는 없 고, 바라지도 않아." "하지만....베이, 생각해 봤습니다. 왜 나루에는 많고 많은 자들 중에 그자를 택했고, 저는 어째서 많고 많은 분들 중에 당신의 도움을 받았 고, 또 당신은 왜 탈로스의 탑에서 저를 도와주셨을까요." "이해한다. 그러나 말은 고맙다만, 우리의 일은 인간정도의 지식이나 능력으로는 절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네가 그놈과 연관이 된 건 그 저 우연이라고 생각하고, 이 우연이 악연이 되기 전이 끝내고 싶은 것이 내 솔직한 심정이다. 그냥 네가 어딘가에 편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게 해 주려무나."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 때는 당신이 제안하셨지만 이제는 제가 원합 니다. 일이 잘못될 수도 있지만, 또 두렵지 않다면 그것 역시 거짓말 이지만, 지금 이 길을 피해간다는 건... 예전에 탈로스의 탑에 그대로 안주하기를 택하는 것과 별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키야-" 그 차갑게 가라앉아가는 검은 눈빛을 마주하며, 아킨은 차분하게 말했다. "예전에, 저는 언제나 형같이 되기를 바래왔습니다. 형처럼 사랑받고 형처럼 숭배 받고 형처럼 당당하게 살 수 있기를.........휘안은 강하 고 냉정하면서도 영리했으니, 언제나 승리했고 모든 것을 얻어갔습니다. 그에게 벗어나려 할 때마다 저는 언제나 그에게 끌려와야 했고, 몇 배 로 비참해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가 가진 것을 그처럼 누리기를 바랐 습니다......." 베이나트는 여전히 침묵했고, 싸늘하게 식어가는 차향기만이 피어오 르고 있었다. "그는 세계의 왕이었고 모든 것을 가지고 누릴 존재였습니다. 세상 모 든 것을 그가 지배하고 있었고, 그 속에서 제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아 무것도 없어 보였습니다.......인연을 끊고 새로 시작하고 싶었지만 그 운명이 저를 속박했고, 무지와 망각 속에 안주하고자 했지만 그것 이야 말로 가장 어리석은 것이었기에 끝내버렸습니다. 유제니아에게 구원과 평화를 원했지만 그 자체가 애당초 저의 것도 아니었던 데다가 그렇게 참담하게 빼앗기니 더 이상 아무 길도 없어 보였어요......제 게는 그렇게나 소중한 구원 같은 존재였는데, 그에게는 정말 아무렇지 도 않게 짓밟아 버리고서도 태연히 웃을 수 있는 하찮은 존재였으니 까...." 그리고 아킨은 고개를 숙였다. 찻잔이 흔들리는 것이 보인다. 베이나 트의 손이 가만히 테이블을 짚은 채 탁탁- 타닥- 하고 움직인다. "하지만 베이, 저는 어리석었고 어렸습니다. 휘안토스에게 집착하고 만 있었기에 역시 그 테두리 안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겁니다. 그가 세상의 전부라 생각했기에, 제가 볼 수 있는 세상도 그것뿐이었 던 거죠........"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고르고는 아킨은 말을 이었다. "휘안토스라는 벽 너머의 세상은 제 생각보다 훨씬 더 넓고, 제가 할 수 있는 일도 많을 겁니다.....물론 알아요, 차라리 휘안토스라는 벽 하나만을 보고 사는 것이 더 행복하던 나날이 될 수도 있을 거라 는 걸... 저 스스로 제가 원해서 가는 길은, 저에게만 책임을 요하고 의무를 지우는 무겁고 힘든 길이라는 것을. 하지만......하지만 어 쨌건 저는 지금 벽 하나를 겨우 넘어섰고, 저 스스로, 제가 할일을, 저를 위해 찾고자 합니다." "그래서... 바로 지금 나와 그 녀석 사이의 일에 끼어들겠다는 거 냐?" 드디어 베이나트가 말했다. 아킨은 선뜻 답하지 못하며 방금 전에 쓸어보았던 옹이무늬에 손끝을 얹었다. 그 모습을 보며, 베이나트는 목소리를 낮추어 타이르듯 말했다. "이건...네 생각보다 훨씬 더 힘들고 무시무시한 일이다." "앞에 무엇이 있든, 어쨌건 저에게 주어진 길이고 저는 가야 하는 겁니다....... 하려 하다 보면 할 수 있게 되고, 그렇게 우선은 할 수 있는 일을 하다보면 언젠가는 해야 할 일도 알게 될 테지요. 지 금의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 그러니까 이 길을 피해가지 않고 똑바로 가는 것을 택하겠습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제가 해야 할 일도 나올 것 같습니다." "무모하다 말해도?" "그 어떤 길도 처음에는 무모한 법입니다. 노력하겠습니다. 허튼 꿈도 희망도 없이, 그저 걸어가기 위해서만 노력하겠습니다. 당신 을 위해, 자켄을 위해, 제 스승을 위해, 제 친구를 위해,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 "하지만 아키야....." 베이나트의 두 손이 아킨의 머리 양 옆에 얹혔고, 그 손끝에서 희 미한 빛이 스며 나왔다. 따스했다, 너무나- 눈물이 나올 정도로. "하지만 세상은 어딜 가나 싸움터란다. 한 가지 싸움이 끝나면, 승 리한 뒤에 잠깐의 기쁨이 있을 뿐 언제나 더 크고 고되고 긴 싸움이 시작된다. 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승리의 영광이 아닌 더 크고 무 서운 적이 될 거다......그건 각오하고 있니?" "노력하겠습니다." 베이나트는 부드럽게 웃었다. "가장 진실한 말을 해 주는 구나- ......고맙다." 그리고 아킨은 점점 주변의 흐릿해지는 것을 보았다. 베이나트도 얼 룩처럼 사라지고, 주변을 둘러싼 벽과 테이블 역시 희미하게 사라진 다. 오로지 그 손의 온기만이 남아 따뜻하고 부드럽게, 편안하게 아킨의 이마를 적셔준다. 베이나트가 말했다. "네가 노력해 준다면, 나 역시 노력하겠다. 오래 전에 시궁창 속에 처박아 버렸던 희망을 찾아, 내 가엾은 친구들과 함께 우리가 지쳐 멈추었던 이 여정을 다시 시작하겠다. 그리고 같이 가자.....어쩌면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원하던 희망의 다른 모습일 수도 있으니." 그리고 보인다. 진한 남빛의 하늘과 그 위에서 빛나는 푸른 달이. 가득 차오른 만월 은 빛을 뿌리고, 그 빛에 온 세상이 흠뻑 젖어 있었다. 달빛이 출렁 이는 바다위로 쏟아지며 그 수면 위로 조용한 은색 빛 무리가 흘렀 으며, 그 바다에 감싸인 절벽은 명상에 잠긴 듯 단단한 얼굴로 그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씩 파도가 철썩여 그 절벽을 때리면, 바다는 하얀 거품이 끓어 올리며 달빛을 빨아들인다. 그리고 아킨이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밤풍경이었으며, 처음으로 만나는 평화로운 보름의 밤이었다. 아킨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아니, 믿음을 얻어낸 것은 바로 너 자신이다." ***************************************************************** 작가잡설: 중대 발표 있다고 했지요? 뭐냐고요? 뻔하지 않습니까. -_-;; 저처럼 부지런한! 작가에게 있어 잠시 논다는 말이야 말로 중대한 발표인 것입니다! 이것으로 시즌2가 끝나게 됩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다음 시즌 시작할 때까지는 쉽니다. ^^;; 아마도 지난번에 그러했듯 한 2-3주 정도가 될 테지요. 그 사이에 이것저것 미루어 두었던 일들을 할 예정입니다. 사 실, 벌써 해 두었어야 하는데 다음 다음~ 하고 있었지요. (으흐흣;;;) 쉬는 사이에 잊지 말아 주세요. ^^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외전 ************************************************************** [겨울성의 열쇠] 외전 제1편 잔인한 봄 잔인한 봄#1 ************************************************************** 암롯사 대궁전에서 가장 빛나는 것이 있다면, 그건 올해 여덟 살이 되는 왕자였다. 까만 머리카락은 햇빛을 받으면 진한 자줏빛 윤기를 흘리고, 제비꽃 색 눈동자는 보석처럼 투명하다. 왕을 단번에 휘어잡은 미인이었던 어머니를 꼭 닮아, 얼굴 역시 놀라울 정도였다. 목소리는 천사처 럼 곱고, 예의바르고 어른스럽게 굴어서 오히려 귀여운 어조는 언 제나 화제였다. 이 예쁘고 작은 소년이 허리를 숙이며, "안녕하셨습니까?" 하고 말하 면 귀부인들은 마치 잘 생긴 청년에게 하듯 치마를 살짝 들어 인사 하고는 소년에게 입 맞추어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당장에 서로 알 고 지내는 귀부인들을 불러 모아, 소년이 얼마나 예쁜지 이야기 하 고는 그 어머니가 슬프게 세상을 떠나버린 것에 대해 쑥덕거린다. 그런데 그렇게 화제가 루실리아 대공비에게 넘어가면, 비난의 대상 은 어김없이 그녀의 남편이자 소년의 아버지인 사이러스 대공왕이었 다. 결혼하기 전의 그가 얼마나 화려한 편력을 쌓아 왔는지 너무나 잘 알기에, 엄청난 화제를 뿌렸던 결혼식을 올렸다 하더라도 왕이 왕비에게 오래 오래 충실했을 거라는 데는 다들 부정적이었다. 그 리고 상상력 부족한 그네들의 쉴새 없이 속닥거리는 것들은 하품 나 올 정도로 뻔하고 눈살 찌푸려질 정도로 유치하다. 아름다운 부인에게 금세 실증이 나서 버려두었을 거에요, 들었어요? 마르타 롤탄 백작 부인이 왕과 만나고 다녔다지 뭐예요? 어머나, 그 여자가 영지에서 돌아왔나요? 누가 아니래요? 그래서 대공비 전 하께서 폐하를 원망하셨는데 폐하께서는 화를 내시며 그분을 가두셨대 요. 세상에나, 얼마나 괴로우셨을까. 그러니 그리 돌아가신 거지요. 왜 헤어지지 않았대요? 왕께서 그런 걸 허락하셨을 라고요. 남 이야기를 열광적으로 수군대는 사람의 마음속은 거의 비슷비슷 하다. 잘 되는 것 보다는 잘 안되는 것에 심술궂은 흥미를 보이며, 자신은 그에 비하면 얼마나 잘나고 행복한 가를 거듭 확인하는 것이 다. 사실, 그렇게 수다 떨어대며 험담을 하는 것은 질투를 달래는 데 가 장 싸게 먹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암롯사의 귀부인 중에 루실리아 대공비를 질투하지 않았던 여자는 별로 없다. 결혼을 하든 하지 않았든, 딸이 있든 없든 간에, 그녀가 나타나 사이러스의 마음을 단 번에 휘어잡아 약혼했을 때 각 저택 연회장의 휴게실은 루실리아에 대한 추측과 험담으로 모든 창이 깨져나갈 지경이었다. 그 유명한 마르타 마저도 왕과 결혼하지 못했는데,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시골뜨기 소녀 하나가 왕비가 되는 것이다. 마르타의 경우라면 괜찮 다. 그녀는 누구나 인정하는 귀공녀, 미모뿐만 아니라 높은 지성과 상아 같은 우아함까지 갖춘 최고의 여인이었으니. 누구나 수긍할 수 있고 적어도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고개까지 끄덕일 수 있다 . 그러나 루실리아는 아니었다. 말 그대로 '얼굴' 빼고는 알려진 것이 '아예' 없었다. 모든 산 파로이의 가문에서 그 대단한 루실리아를 두 눈으로 확인하 고 싶어 수십 통의 초청장을 보냈다. 나오기만 하면 당장에 온갖 흠집을 잡아대며 난도질을 할 기세였고, 기대들도 잔뜩 했다. 그러나 루실리아는 단 한번도 초청에 응하지 않았고, 질투어린 험담 의 수위는 나날이 높아져만 갔다. 세상에나 벌써 왕비라도 되는 듯 구는 군, 신분이 천하니 별 수 있겠어? 겁먹어서 못 오는 거야. 심지어 경우 없고 뻔뻔한 어느 가문은 예전 왕의 연인이었던 마르타 롤탄 백작부인에게까지 초청장을 보냈다. 그들은 루실리아와 그녀 를 동시에 초청하여, 도도하고 세련된 귀부인과 시골에서 막 올라온 순진한 소녀를 비교해 보며 허기진 호기심을 충족시켜 보려 했다. 그러나 루실리아도 마르타도 오지 않았다. 그런 천한 짓거리를 혐오하고 경멸하는 마르타는 그 경우 없는 짓을 한 가문의 주인에 대 해 왕에게 '상세하게' 알렸고, 그 저택을 방문한 것은 여자들이 아니라 바로 사이러스였다. 그 후에, 그 악의어린 초대는 씻은 듯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그 마음 속에 숨겨진 질투가 사라진 건 아니다. 결국 3년 만에 왕과 왕비의 결혼이 파탄 나고 왕비가 미쳐버려 성에 감금되어 버리자 다들 안타까워하면서도 '그럼 그렇지.' 하며 안도했다. 그리고 그녀가 낳 은 눈부신 왕자를 보면서, 새삼 이렇게 예쁜 아이를 낳아 놓고 그 렇게 비참하게 살았던 그녀를 동정하면서도 스스로의 행복을 재확인 하는 것이다. 케올레스는 아마도 그래서 휘안토스가 꺼낸 말에 그리도 슬픈 반응을 보였으리라. 그에게는 부인도 딸도 있고, 그 딸은 왕의 옛 정부이기도 했다. 결혼 3년 만에 미쳐 버려 감금되고, 결국 작년에 자살한 루실리아 대공 비에 대해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가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압셀론으로 가고 싶다고요?" "네." 휘안토스는 짤막하게 답하고는 체스판을 내려다보았다. 체스판 위로 햇살이 선명하고 네모지게 그려지며, 그 창을 바라보는 여왕 말 등 뒤로 망토 같은 그림자가 늘어지고 있었다. 휘안토스는 그것을 집 어 들려다가 말았다. 그 때 응접실 새장에 갇힌 작고 파란 새가 구슬프게 울었다. 늘 비실대기는 했는데, 오늘따라 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휘안토스 님-" "아, 죄송합니다. 압셀론으로 가고 싶어요." 압셀론이라면 제도 옆에 붙어 있는 소도시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언 덕이 많고 숲이 우거진 그 아름다운 곳에 왕가와 수많은 귀족가문 들의 자제들이 입학하여 공부하는 압셀론 학원이 있다. 베넬리아와 서부 다른 공화국들을 제한 모든 왕과 여왕들이 그곳에서 공부하였 고, 그곳은 각 나라의 자제들이 어떠한 지 살펴보는 곳인 동시에 그들의 능력을 가장 먼저 인정받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귀한 몸들이 잔뜩 오는 대신 특별대우 같은 것은 별반 없다. 왕자이 든 하층 귀족가문 자제든 간에 똑같이 취급되고 똑같이 평가받는다 . 그리고 그만큼, 조금이라도 모자란 듯싶으면 가차 없는 불명예 를 당하는 곳이기도 하다. 케올레스는 어린 왕자에게 타이르듯 부드럽게 말했다. "아직 휘안토스 님은 어리십니다. 그 곳의 공부는 아주 어려운 데다 가, 많은 귀족 자제분들이 온답니다. 충분히 준비를 하고 가시는 것이 휘안토스 님께 좋습니다." 별로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휘안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체스 말을 옮겼다. 사실, 압셀론을 꽤나 우수한 성적으로 다니고 있다는 귀족가 자제들 과 휴가철이 되면 만나곤 한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모두 열대여섯 쯤 되는 데도 여덟 살인 휘안토스보다도 못난 아이들이 많다. 그 자리에 자주 같이 있던 케올레스가, 지금의 휘안토스가 압셀론에서 충분히 따라가고도 남는다는 것을 모를 리 없다. 게다 가 열 살 전에 입학하는 학생이 없는 것도 아니고, 로메르드 왕가 의 켈브리안 공주는 여덟 살에 입학하여 무리 없이 다니고 있다. 또 , 휘안토스는 외아들이나 다름없는 위치이므로 되도록 빨리 입학하 여 졸업하는 것이 낫기도 하다. 그러나 케올레스는 휘안토스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그저 공부에 대 한 욕심이나 왕가에 대한 의무감이라기보다는 작년에 루실리아가 죽은 충격 때문이라 생각하기에 반대하는 것이다. 이 작은 꼬마 왕 자 안에 숨겨진 것을 알아내기에는, 그의 동정심은 너무나도 컸다. 케올레스가 말했다. "한번 더 생각해 보십시오. 공부에 관해서는, 제가 좋은 스승을 구 해 드리겠습니다." "아뇨, 저는 지금이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가기 힘들다면, 그곳 에서 가정교사를 두면 되지요. 그래도 따라가기 힘들다면, 그 때가서 한 학기나 두 학기 정도 쉬면서 공부하면 될 테고요." "몇 번을 생각해도 같은 답을 드릴 수밖에 없답니다. 일단 학교에 입학하면 휴가 때를 제하고는 본국으로 올 수 없답니다. 그러니 휘안토스 님, 열 살이 되실 때까지는 이곳에 계시면서 아킨토스 님 과 자주 만나보도록 하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아키 와요?" "네. 아시다시피 아킨토스 님은 루실리아 님께서 돌아가신 뒤부터는 성에서 홀로 지내고 계십니다. 정말 아무도 없이, 그렇게 외롭게 지내세요. 형 되시는 휘안토스 님께서 챙겨 주시고, 지켜 주셔야 합니다." 루실리아가 죽은 후 아킨은 완전하게 혼자 지내고 있다. 모자를 보살 피던 시녀들은 모두 쫓겨나 '사라졌으며' 하인들이나 호위들도 시 녀들 보다 조금 늦게 '사라졌다'. 유일하게 메리엔만이 루실리아와 절친했기에 남겨져 아킨을 보살피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아킨은 철창에 갇히고 사슬에 묶여, 오로지 그 자신밖에 없는 철저한 외로움 속에 살게 되었다. 그런 동생에게 다른 미래가 있을 리도 없다. 본인의 자질과는 전혀 상관없이, 돌과 철로 된 감옥에 갇혀 그 깊은 어둠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휘안토스는 그런 동생을 당연히 동정하고 사 랑해 주어야 한다. 아버지의 증오와 사나운 시선들로부터 보호해야 한다. 그렇다, 너무나 당연하고 필요한 일들이다. 휘안토스가 말했다. "그리 하겠습니다, 케올레스." "그렇다면, 오늘이라도 찾아가십시오. 같이 가 드리겠습니다." 당장에 케올레스의 얼굴이 환해지며 그리 말하자, 휘안토스는 빙그레 웃는 것으로 답했다. 긍정이자, 그런 조언을 해준 것에 대한 감사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게 미소만은 여덟 살 난 아이의 것이라 , 기분이 좋아진 케올레스도 흐뭇하게 웃었다. 그 때 다시 새가 울었다. 구슬프고 힘없는 울음소리였다. 봄이 와, 늪의 성 주변은 온통 연두 안개로 물들어 있었다. 정원에는 짤막한 새싹들이 싱싱하게 돋아나 있고, 여기저기 제비꽃 무리들이 보랏빛 꽃을 가득 피워내며 같은 색 호수처럼 고여 있었다. 넓은 벌판과 길 지평선에 따뜻한 아지랑이가 노곤하게 피어올라 일렁댄다. 새들이 짝을 찾아 울고, 우거진 덤불을 지나다 보면 작 은 참새 떼가 우르르 몰려 나와 건너편 나무로 쏟아지기도 했다. 대궁전에서 늪의 성으로 오는 길 끝에 마차가 보이자, 그 성의 유일 한 고용인인 메리엔은 장미덩굴을 매만지던 손을 놓고는 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성을 찾아오는 사람이라고는 단 하나, 사이러스 대공왕 뿐이다. 그러 나 그는 언제나 거대한 검은 말을 타고 악마처럼 나타나, 성 안을 휙 훑고는 처박아 놓았던 둘째 아들이 '성안에 있는 지'만 확인하고 돌아가 버린다. 건강한 지, 잘 지내는 지, 필요한 것은 무엇인 지,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작은 아들이 할 일이라고는 그저 그 자리 에 제대로 있기만 하는 것이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분노하며 바라보던 메리엔은 이번에는 마차 가 오자 '폐하가 다치기라도 하셨나?' 하고만 생각했다. '다쳤다면 아예 오지 말 것이지.' 안으로 들어와, 메리엔은 문을 꼭 닫고는 성의 거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금방 정원을 향하는 창 근처 의자에 앉아 있는 왕자를 찾아 내고는 살며시 다가갔다. "아킨토스 님." 그러나 어리고 작은 왕자는 축 늘어져 잠들어 있었다. 왕자가 어제 서재에서 날이 새도록 책을 읽었다는 것을 잘 아는 메리 엔은 어찌해야 하나 고민했다. 깨우나 안 깨우나 결과는 마찬가지다. 왕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이렇게 아들이 잠들어 있는 것을 보면 '성안에 있기는 있으니' 그냥 돌아갈 것이다. 차라리 깨우지 말고, 얼굴대면도 하지 않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녀는 아버지가 한번 왔다 가면 소년이 어떻게 변 하는 지 잘 안다. 겁먹은 고양이처럼 벽에 등을 착 붙이고는, 아버 지의 냉담한 눈길을 피할 뿐 그가 나갈 때까지 인사조차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가 가면 하루 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햇살 잘 드는 창 가 근처에 앉아만 있다. 소년은 햇빛에 집착했다. 환하게 내리쬐는 곳만 찾아가 앉아 있고, 해가 길어지고 흐려지다 꺼져도 불타는 서녘하늘을 한참이나 쳐다 보곤 했다. 그리고 보름이 조금 남은 지금, 소년은 더욱 더 햇빛에 집착했다. 붙잡기라도 하고 싶다는 듯, 붙잡아 가 달라는 듯, 그 안에 녹아들어 버리고 싶다는 듯- 서재에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날이 밝으려면 몇 시간이나 남았는 데 침대에서 일어나 해가 뜨기만을 기다린 것이다. 그러나 미명이 퍼지고 날카롭고 투명한 햇살이 그 작고 고운 손끝에 닿자, 어린 왕자가 말했다. "이제....끔찍한 밤이 더 가까워 졌어." 기다리던 것이 다가오면, 기다리지 않는 것 역시 한걸음 더 가까이 온다는 것을 소년은 너무 빨리 알아 버렸다. 그렇다고 기다리지 않을 수도 없기에, 기다리고 맞이하고 절망하는 것이다. 가엾은 왕자님....이렇게나 예쁜데, 그렇게나 다정하신데, 왜 그런 운 명이 당신을 찾아 왔을 까. 메리엔은 담요를 찾으러 안으로 돌아섰다. 그런데 뒤에서 뒤척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와." 메리엔은 돌아보았다. 소년이 몸을 일으키고는 오후의 늦은 햇살이 비추는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온다니요?" "누가 와. 하지만......아버지는 아니야." "폐하 외에는 아무도 이곳에 올 수 없답니다." 아킨은 고개를 저었다. "하나 더 있어." 메리엔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놀라서였고, 설마 정말 그럴까 하는 의심도 든다. 어린 소년이 꿈이라도 꾼 거라고 생각되었다. 그렇게 그 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아킨이 메리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금빛 눈이 빛에 반짝이고는 있었지만, 그 안에는 그저 유리구슬 안을 비추어 내는 듯한 무관심 밖에 없었다. 게다가 동공이 빛에 수축하여, 훨씬 더 날카롭고 차갑게 변해 있었다. 루실리아 님은 저 눈을 보면 언제나 기겁했지. 화들짝 놀라서는 내 팔 에 매달려 울먹였지..... 그리고 그 모습을 소년은 속속들이 바라보곤 했지. 그저 슬픈 듯한 눈으로, 그리고 그 슬픔에 지친 눈으로. 메리엔은 서글픔에 눈물이 치솟으려는 것을 애써 가다듬으며 물었다. "준비할까요?" "내가 명령해야 해?" "이 성의 성주는 아킨토스 님 이십니다. 손님이 오시면 맞이할 준비 를 하셔야 해요." "아버지가 올 때는 안 그랬잖아." "폐하는 손님이 아니니까요." 그는 침입자랍니다......검고 차갑고 무자비한 침입자요. 메리엔은 묻지도 않았지만 물은 질문과, 답하지 않은 답을 속으로 되 내이며 소년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 것도 준비하지 마. 성의 유령이 그를 반기고 있으니까." ***************************************************************** 작가잡설: 음울하고 울적하고 한없이 차갑기만 한;; 암롯사 대공가의 이야기 입니다. 아키와 휘안이 이 때 여덟 살....즉 초등학교 1학년 그 시절. -_-;; 네...초, 등, 학, 교 입니다. 뭐, 지금은 겨울키 최강의 불량청소년이 되어버린 휘안 역시 여덟 살 아가 시절이 있습니다. (이 때의 유즈는 대략 여섯 살 아가....-_-;; 쯧-) 얼음과 불의 노래 3부를 보는 중입니다;; 아무래도 주인공을 사랑하는 작가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_-;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외전 ************************************************************** [겨울성의 열쇠] 외전 제1편 잔인한 봄 잔인한 봄#2 *************************************************************** 언어로 대화하는 존재들이 사는 곳 중 가장 조용한 곳을 꼽으라면, 당연하게 그림자 일족 엘프들이 사는 어둠 숲이다. 그들의 위계질서는 드래곤들만큼이나 철저하며, 나이 먹은 자는 먹은 만큼의 지혜를 품 안에 가지고 있었다. 손아래 엘프들은 그들의 지 혜를 존중했고, 그런 만큼 그들의 의견에 반대할 때는 몇 번 거듭 생각한 뒤에 말한다. 그리고 손위 엘프들은 그렇게 그들이 반대의사 를 표하면, 그만큼 깊은 생각을 했다는 것을 알기에 부드럽게 받아 들여 다시 생각한다. 그 때문에 '반대'가 한번 나오면 결정이 끝도 없이 미루어진다는 단점이 있었으나, 일단 결정이 나면 모든 일 족이 철저하게 따른다는 장점도 있다. 그런 일족을 다스리는 나루에는 어둠 숲의 어머니가 된 이래로, 정말 처음으로 어마어마하게 극심한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다. 누군가가 반대할 것이고, 그 당사자가 분명 바실리카가 일거라 생각했건만 이 정도로 극렬할 줄은 그녀도 예상 못한 바였다. "거두어 주십시오!" 바실리카의 눈동자는 정말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나루에는 조용 히 한숨을 내 쉬고는 달래듯 말했다. "바실리, 이건 그 아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야." "그렇다면 정식 회의라도 소집해 주십시오. 그 회의에서 그리 정해진 다면 저도 따르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추방'과 뭐가 다르니. 이건 그 아이에게 일을 맡기는 것이고, 일이 끝나면 언제라도 돌아올 수 있다. 하지만......알잖니. 만약 회의에서 발레스가 그 아이를 내보내자는 의견을 내 놓고, 그것 이 정식 안건이 되어 생명수의 이름으로 결정된다면 나 역시 손 쓸 수 없게 된다. 나는 그 아이의 신병이 회의에 거론되는 것만은 막고자 한다." "그렇다면 그냥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이유가 뭔데?" "없습니다. 하여튼 안 됩니다." 바실리카가 고집 세다는 건 나루에도 알고 있었지만, 정작 당하는 입 장이 되어 버리니 그 성격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내 말 잘 들어다오, 바실리. 네가 그 아이를 사랑한다는 건 나도 잘 알아. 또, 나도 그 아이를 무척이나 사랑한단다. 이건 분명 진심 이야.....그러니 내가 그 아이를 위해 이리 결정했다고 믿어 다오. 제 발 부탁이다." "하지만 자크는 이제 열여섯입니다! 어려도 너무 어린 나이에요! 아 무리 그 아이를 위한 일이라지만, 적어도 스물은 된 뒤에 시키십 시오." "나도 그 어린 아이를 내 보내는 것이 마음에 걸린단다. 하지만 지금 가야 하는 걸 어쩌겠니." "그렇다면 제가 같이 가겠습니다." "바실리카......!" "저는 그 아이의 보호자입니다. 당연한 의무에요." "같이 갈 사람은 벌써 정해져 있으니, 너는 이곳에 있어라. 그 아이의 보호자라는 의무 외에도, 너는 이곳 전사들의 수장이라는 의무 역시 가지고 있다. 함부로 나다니게 할 수 없어." "그렇다면 전사들의 수장이라는 직책을 포기하겠습니다. 제게는 자크 를 보호하고 지켜주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이 쯤 되면 골 아프게 설득하는 것 보다는 며칠 푹 재우고 그 틈에 자켄을 보내는 편이 나을 듯 했다. 그러나 그 뒤에 발생하는 재난에 가까운 사태가 충분히 예상이 되고도 남기에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칼롭이 그 아이와 같이 가 줄 거다.......만약 네가 이렇게 나선다면, 칼롭이 섭섭하게 생각할 거야." 바실리카의 눈이 커졌다. 그러나 안색이 오히려 어두워지는 것을 보 니, 나루에의 결심이 얼마나 단호한지 알게 된 것 같았다. 나루에는 제대로 쐬기를 박을 생각으로 말했다. "정 그 아이와 함께 가고 싶다면, 칼롭을 설득해라. 또, 그와 함께 가 겠다고 결정한 자크도 설득하고." 바실리카의 어깨가 떨렸다. "설마...... 자크에게 벌써 말씀하셨단 말입니까? 제게 말하기도 전에 요?" "그래. 그리고 행여나 네가 반대하거나 너와 동행하겠다면 어찌할 거 냐 했더니, 그 아이도 네가 따라 오는 건 바라지 않더구나. 반대한 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했고." "그럴 리가 없어요! 그 아이는 저 없이는 하루도 버틸 수 없는 어린 아이입니다." "겨우 열여섯이지만, 벌써 열여섯이기도 하단다. 불완전한 분별이 생 기면서 예민해지고 불안해지는 나이지. 나도 안다. 하지만 그 아이를 믿을 지, 보호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이번은 믿는 것을 택 하거라." "하지만....." 바실리카는 결국 말을 끝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슬퍼 보이는 그녀를 보니, 나루에는 정말 미안해졌다. 그녀의, 사이러스에 대한 미움만큼이나 큰 자켄에 대한 애정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그것 이 '지나치기에' 나루에는 잠시 그 둘 사이를 떨어뜨려 두고 싶은 것이다. 이리 나간다면, 둘 다 상처받고 지쳐 버리게 될 것이다. 지 나치면 모자라는 것만 못하다. 모자라면 아쉬움이 사랑이 될 수 있 지만, 지나치면 오히려 피로와 원망과 미움이 되어 버리니까. 나 루에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여기서 잠시 쉬면서 잘 생각해 보려무나. 자크를 데리고 오겠다." "아뇨, 제가 가겠습니다." "그런 상태로 나갔다가는, 당장에 자크의 뺨부터 갈기고는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더 아프게 때려 줄 테다.' 하고 윽박지를 것 같구나. 우선은 차분히 생각을 다듬고 안정시키고 있어라. 자크와 만났을 때 '대화'를 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리고 나루에는 방을 나섰다. 그러나 나서자마자 바실리카가 따라 나오려고 벌떡 일어나자, 그녀가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방 전체에 가벼운 마법(즉, 수면)을 걸고는 자리를 떴다. 나루에가 향한 곳은, 커다란 떡갈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는 숲의 공터 였다. 간혹 어린 엘프 들이나 연인들이 산책을 나오곤 하는 곳으로, 떡갈나 무가 마주하는 곳에는 작은 시냇물이 졸졸 흐르며 햇살을 퉁겨내는 예쁜 장소였다. 나루에도 예전에 발레스의 아버지인 비엘로와 이곳 에 오곤 했다. "여기~" 떡갈나무 아래에 있는 남자가 그녀를 그렇게 부르고는 손을 흔들었 다. 나루에는 빙그레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갈색 로브를 입고, 목에는 둥근 펜던트를 늘어뜨린 노 마법사다. 그러나 한 때는 젊은 청년으로 보이고, 노회한 중년으로도 보이고, 잠시 쉬고 싶을 때에는 이런 노인이 되는 자이기에 얼굴에 새겨진 나이는 아무 필요도 없다. "칼롭-" 그렇게 그녀는 다정하게 그 이름을 부르고는 말했다. "자크는 같이 왔어?" "아아, 준비하고 오겠다는 걸. 그래서 내가 먼저 왔다." 그 말에, 나루에는 기분이 좋지 않아졌다. 어쩌면 바실리카가 느꼈을 감정과 비슷할 것이다. "준비라면... 설마 지금 당장 떠나겠다는 거야?"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말하더군......그래서 '자크야, 오늘 당장 떠 나고 싶은 거냐?' 했더니, '그래도 괜찮습니다.' 라는 거야." "칼롭,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 어린아이를 어떻게 그리도 급하게 데리 고 가려고 해? 일주일 정도 머물면서 천천히 준비해도 괜찮아." "뭐, 그 일주일 동안 여기 저기 볼일 좀 보고 가지. 녀석이랑 나도 서 로 서로에게 좀 더 익숙해질 필요가 있겠고..........알잖아. 그 녀석은 겉으로는 예의바르고 사근사근 굴지만 안으로는 꽁꽁 닫혀 있다 는 거. 며칠 두고 보면서 지켜봐야....나도 녀석에게 뭐가 더 좋은 지 결정할 수 있을 듯 해." 물론 그 아이가 어떤 상태인 지닌 나도 알아, 나루에는 간신히 버티 던 힘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자켄은 어렸을 때부터 발랄한 곳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반항은커 녕, 응석한번 피워본 적 없다. 말도 없다. 감사합니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에서 발전된 답을 들어 본 적도 없다. 터무니없는 신 세지는 것 마냥, 제 집이고 제 할머니이고 이모인데도 조심스럽기 만 하다. 자켄 같은 혼혈들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 여 년 전의 흑마 법사 팔로커스와의 전투 때만 해도 많은 엘프들이 인간과 맺어졌다. 그러나 자켄처럼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지금도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린다. 그러니 아들이자 아델라의 아버지인 발레스에게 화를 내면서도,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아델라의 어머니 브리나가 충 격으로 칩거해 버린 것에 슬퍼하면서도, 다른 방법을 충고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바실리카처럼 자켄을 병든 새 돌보듯 조심 조심 살피고 싸고도는 것에도 동의할 수 없다. 거부도, 지나친 과 보호도 다 같이 어린 자켄을 상처 입혀 버렸고, 결국 열여섯 밖에 안 된 자켄은 오래 전에 마음을 닫아 버렸다. 냉대에도, 증오에도, 집착과 애정에도, 그는 언제나 조용하고 예의바 르게 답할 뿐이다. 매끈한 것, 거칠지 않은 것, 흠집 없는 것은 그 만큼 상대의 마음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자켄은 착한 아이 인 것이 아니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큰 상 처를 남겼는지 알고 있기에, 스스로의 존재 자체를 '없애는' 것이다 . 손톱마저 미끄러지는 단단하고 차가운 유리구슬처럼. 마음에 흔적을 남기지 못한다면, 누구에게도 의미를 줄 수 없다. 그 리고 자켄은 차라리 그러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루, 왜 하필 그곳으로 가라고 하는 거지?" 나루에는 선뜻 답하지 않았다. 칼롭-지금 인간 세상에서는 컬린-인 남자가 다시 물었다. "그 여자가 죽었기 때문인가?" 나루에는 웃었다. "그녀를 죽인 건 내가 아냐." 그리고 그녀는 그런 말 못 들었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나는 인간 아이에 대해서는 몰라. 관심도 없고. 하지만 엘프의 아이에 대해서는 잘 알지.......지금 자크에게 필요한 것은 노력하는 것 그 자체야." "무엇을 노력해야 하는 건데?" "자크는 자크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법을 알아야 해. 숨어서 죽어가는 방법 따위를, 그렇게 아무 죄도 없고 어린 아이가 배우는 것은 좋지 못해." "......그 아이도 죄 없기는 마찬가지야." 나루에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차가운 기운이 그 초록색 눈에 확 치밀 어 올랐다. "누구를 말하는 거지?" "네가 저주를 건 그 꼬마 아이. 자켄은 열여섯이라도 됐지만, 그 아이 는 이제 여덟 살이야. 그냥 어미 품에 안겨서 새근새근 자는 것이 제 할 일이이어야 하는 어린 아이. 그 아이도 죄가 없기는 마찬가지야." "상관하지 마. 당신과 그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아." "아니야, 나루. 다른 건 몰라도, 그 방법은 옳지 못했어. 더군다나 전 혀 책임이 없는 사람이 죽었어." 나루에는 고개를 저었다. "변명은 하지 않겠어. 하지만 결과를 최악으로 만들어 버린 건 그 당 사자야!" "너는 그가 그렇게 할 거라고 분명 예상하고 있었잖아. 그런 자식이 니까! 뻔히 알면서도 그런 제안을 한 건, 분명 기만이라고." 일순 나루에의 입술이 꾹 닫혔다. 칼롭은 힘주어 말했다. "너는 그가 그렇게 상황을 최악으로 만들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 고 있었어. 그 자신보다도." "그리고 자기 죄가 무엇인지, 그것이 죄인 지도 모르고, 오로지 자기 에게 닥친 인과의 응보만을 남의 탓이라 여기는 그 남자를 내버려 둬야 했다는 말이야?" "나루에-" "그래, 그 아내와 아이에게는 아무런 죄도 없겠지. 하지만 아델라에게 는 죄가 있었나? 가엾은 바실리에게는? 소중한 딸을 잃은 발레스와 브리나에게는-!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어 그렇게 산채로 피가 마르고 있지? 그리고 나는! 자크는! 가장 축복받아야 할 탄생마저 저주받아 버린 그 아이야 말로 대체 무슨 죄가 있어!" 칼롭이 고개를 돌렸다. 또 결론 나지 않을 문제를 들추어 서로를 상 처 입히고 있는 것이다. 피곤하다, 이런 일은. 결국 칼롭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루에는 고개를 젓고는 목소리를 낮추 어 말했다. "조금 있으면 자크가 올 거야...오는 소리가 들려. 그러니 그 이야기 는 더 이상 하지 말자. 듣게 하고 싶지 않아.....결코." 칼롭이 막 생각났다는 듯 조용하고 넌지시 말했다. "그렇다면.....저기, 그 저주를 내가 손봐도 괜찮을까?" "무슨 소리지?" "막든 풀든.....내가 손보겠다는 말이야. 그 아이에게 죄가 없다면, 적 어도 조금 덜 슬프게는 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나루에의 눈에는 별다른 저항감은 없었다. 당연한 말을 들었 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단, 조건이 있어. 그렇지 않다면 허락할 수 없어." "말 해봐." "자크가 그 아이를 사랑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아이의 슬픔을 같이 슬퍼할 수 있다면......그러면 나는 얼마든지 허락해." "풀어 줄 수는 없는 건가." "그것만은 안 돼." 나루에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 그런 그녀의 태도에, 칼롭은 그 아이의 아버지, 사이러스 대공왕이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은 하 지 않기로 했다. 아니, 해서는 안 된다. 지금 그 일을 그녀가 알게 된 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허락할 수 없다고, 그리 하면 당장에 절교라고 펄펄 뛰어댈 테니까....... ...........대마법사 컬린, 한 나라의 왕으로써 이런 치부를 드러내 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결정이었는지 알아주기를 바라고, 그것을 안다면 비밀로 해주길 바라오..... 나는 그 예기치 않은 불행으로 내 아내를 잃었고, 내 어린 아들을 유폐시켜야 했소. 그 사특한 저주를 풀어 주시오. 풀 수 없다면, 적어도 막아만 주시오..... 그것마저 할 수 없다면, 차라리 내 아들을 죽여주시오. 생각하니 또 쓴 웃음이 치밀어 오른다. 그 일의 시작도, 과정도, 그리고 지금 돌아가는 결과마저도 똑똑히 알고 있는 컬린- 그리고 칼롭에게 그 편지는 당장에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 을 정도로 가증스러웠다. 일을 맡기로 한 것은, 순전히 그 왕이 불쌍해 서가 아니라 자켄에게 더 이상 죄가 얹히지 않기 위함이었을 뿐이다. 죄 없는 자켄에게 저주를 퍼부어 대는 것은 발레스 하나만으로도 충분했 으니까. ********************************************************************* 작가잡설: 네.........당시의 자크는 매우 풋풋한 소년이었답니다. ^^;; 이제 복귀;; 입니다. ^^;; 외전은 짧은데 그 의의를 두는 법! 금방 끝납니다;; 네, 본편 금방이에요.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외전 ***************************************************************** [겨울성의 열쇠] 외전 제1편 잔인한 봄#3 ***************************************************************** "늪의 성에 갔다고 들었다." 당연히 이렇게 될 줄 알았던 휘안토스는, 아버지의 말에 고분고분 답 했다. "네. 다녀왔어요." "왜 찾아간 거냐." "이제는 만날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습니다.....어쨌건 아키는 제 동생 이니까요." 동생? 그래, 동생은 동생이다. 그러나 의자에 앉아서 그를 물끄러미 보던, 분명 쌍둥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한두 살 어려 보이던 그 아이가 친동생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같은 여덟 살인데 아킨 쪽은 겨우 예닐곱으로 보였다. 얼굴은 거울 보듯 똑같지만, 머리카락은 이질적인 은빛이고 눈은 사악한 짐승처럼 활활 타오르는 금색이다. 동생을 보면, 꼭 도깨비의 거울이라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고약하 게 비튼 상을 보여주는, 악의와 심술의 마법을 빚어내는 환상의 거 울말이다. "그래서 좋은 형 노릇이라도 하겠다는 거냐. 그리고 과연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거냐." 냉담하다. 비웃는 것도 아니다. 말 그대로, 무관심하고 냉담할 뿐이 다. '정말' 그럴 거냐고 '진지하게' 묻고 있기에 나올 수 있는 어조다. 어리광도, 얼버무리는 것도, 그렇다고 아이다운 귀여운 답을 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지...... 그래.....그렇지. 아버지는 '이해'하려 하면 안 된다. 고작 열 살도 안 된 아이가, 대체 무엇으로 그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아직은 모릅니다. 하지만....아예 하지 않는 것 보다는 나을 거라 생각해요." "어째서?" "제가 택할 가능성은 많을수록 좋으니까요." 사이러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에도 비웃음은 아니었다. 안다, 이건 일종의 시험이다. 아버지 사이러스 대공왕은 어떤 일이 있을 때마다 휘안토스에게 묻는다. 어째서 했지, 필요하다고 생각 해서? 과연 해야 할 일일까......? 그렇다면 대체 왜? 끝없이 생각하 여 올바로 답해야 한다. 반드시- 사이러스가 원하는 답을 말하지 않는 다면 시험에 통과할 수 없으니까. "케올레스에게 들었다. 압셀론으로 가고 싶다고?" 이번에는 통과한 것이다. "당장 갈 필요는 없겠죠. 하지만 일찍 떠나 일찍 돌아오는 게 좋을 거라 생각됩니다." "이유가 무엇이냐." "아버지는 아직 젊습니다. 때가 되면 다시 결혼하실 테고, 제 동생들 이 태어날 테죠." 어색하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 사람들이 쑥덕거리는 것을 몰래 들었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 는데, 왜 내가 말하니 이렇게 나 어색하고 이상한 걸까. "그리고 새로 결혼하는 상대는 분명 명문가의 여식이 될 테니 그 아 이들은 분명 훨씬 더 탄탄한 자리를 차지할 거라 생각해서 그러는 거냐." "지금은 아무 것도 모릅니다." 이상하게 어딘가가 시큰거렸다. 소리라도 버럭 지르고 싶은데, 그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드니 싸늘하게 가라앉아 버린다. 글쎄, 뭐가 필요하고 필요하지 않은 걸까. 아니, 그렇게 충분히 따져 봐야만 하는 걸까....따지고 계산해서 현명한 판단을 해야 한다고 ' 납득'은 하는데, 아직은 이해는 못하겠다. 결정을 하고, 그 결정을 말 할 때마다 언제나 막막하기만 하다. 아무 것도 모르니까. 그리고 상 대는 너무나 크고 차가우니까..... 그러나 해야만 하기에 멈출 수 없 다. 멈추는 순간 준비된 것은 나락뿐이니까. "하지만 걱정 마라, 휘안. 너는 유일한 후계자가 될 것이고, 암롯사 왕위 계승 서열은 첫 번째 이외에는 없을 것이다. 아직은 모른다 말하지 말거라, 휘안......이것만은 분명히 약속해 주마. 왕의 이름과 내 선조 테루비셔스의 이름을 걸고." 휘안토스는 여덟 살 난 꼬마에 불과했지만, 이런 아버지의 말에 감격 하여 그 품에 안길 정도로 순진하지도 어리지도 못했다. 휘안토스는 아버지가 그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그러니 그저 당연한 말을 할 뿐이지.... 이렇게 얌전하게 앉아서. "네 어미의 목숨에 네 동생의 운명까지 덧붙여 바꾼 후계자 자리다, 휘안. 그러니 너 역시 최선을 다해 그 자리를 지켜라. 나를 실망시 키지도, 화나게 하지도, 후회하게 하지도 말아라." "노력하겠어요." "노력만으로는 안 된다. 네게는 중간은 없다. 그리고 그리 되기 위해 쏟는 노력을 칭찬해주고 상을 줄 너그러운 사람조차 없다. 그리 하는 것은 네가 첫 번째이자 유일한 후계자인 이상 너무나 당연한 것 이니까." "알고 있어요." 언제나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하고는 있다. 말하지 않는 것은 미루어 짐작하고, 실망시키지 않아왔다. 그러나 휘안토스가 그렇게 하는 것은 아버지에게 '잘 하는 것'도 아 니고, '기특한 것'도 아니었다. 당연한 일, 필요한 일, 해야 하는 일 이었을 뿐이다. 해가 알아서 서쪽으로 가듯, 달이 알아서 이지러지 다 차 오르듯, 휘안토스도 알아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당연한 것을 하는 데 포상은 없다. 다 채우지 못하면 벌과 질책이 올 뿐이지.... 처음부터 휘안토스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으니, 더 가질 필요는 없다. 그리고 누구나 그렇듯, 지나치게 무겁고 버거운 것 을 지키는 것이 모자라는 것을 얻어가는 것보다 더 힘든 법이다. "나가 보거라." "네." 휘안토스는 이제 드디어 오늘 해야 할 모든 일이 끝났다는 것을 깨달 았다. 모든 시험에서 통과했다. 그러니 이제 돌아가 잠들면 되는 것이다. 푹 잘 거야.....꿈도 안 꾸고. 그냥 까만 잠에 푹 파묻혀서, 환한 낮이 될 때까지 자야지.... 그리고 내일 또 이렇게 시작하고 이렇게 흘 러가고 이렇게 끝날 테지.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어린 아들을 끌어안고는 '잘 하고 있단다, 사랑하는 아가야. 너는 잘 하고 있어........그러니 분명 훌륭한 왕자가 되고 더 훌륭한 왕이 될 거야.' 그렇게 속삭여 줄 테지. 그리고 부드러운 입맞춤과 함께 잘 자라 인사하고는 아름 답게 웃어줄 테지. 아키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비슷했을 것이다. 갇히고 묶여서 그 렇게 작지도 않았을 테고, 아마도 지금 휘안토스와 똑같이 자라나 건강하게 웃으며 동생다운 심술과 응석을 부리며 살고 있을 테지...... -아이답게 커 주십시오, 휘안토스 님. 그리고 소년답게, 청년답게 커 서, 훌륭한 분이 되어 주십시오......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오는 길에 그렇게 케올레스가 말했다. 슬픔과 사랑을 담아, 작고 예쁘지만 불행한 소년에게 그렇게 말해주 었다. 그러나 휘안토스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아이에게 없는 것이 있고, 다른 아이들이라면 겪지 않은 일을 겪었어요. 그래도 그들처럼 자란다는 건.....이상한 일이에요. 아니, 그래도 그들과 똑같이 하려고 한다는 게 오히려 멍청한 짓이에요. 다르면 다른 데로 해야죠. 휘안토스가 그렇게 말할 때 케올레스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슬픈 듯 이, 안타까운 듯이. 동정하지 말아요, 케올레스. 휘안토스는 그렇게 다시 말하고 있었다. 동정하면 무너져 버릴 것 같아요.....그리고 내 가 울며 매달리면 대체 누가 내 손을 잡아주고 입맞춰주고 안아줄까 요. 아무도 없어요.... 그러니까 울지도 무너지지도 쓰러질 수도 없는 거에요. 그게 제 할일이니까요. "죄송합니다, 휘안토스 님!" 왕자궁에 도착하자, 그의 시중을 드는 시녀가 복도까지 달려 나와 그 렇게 울먹거리며 말했다. "무슨 일이지?" "아끼시던 새가 죽어 버렸어요. 제 실수입니다. 제 잘못이에요! 죄송 합니다!" 그리고 시녀는 손에 든 새장을 보였다. 새장 안에 작은 새가 축 늘어져 있었다. 시녀가 제발 깨어나라고 흔 들어 대서 그런 지 깃털이 여기 저기 빠져 있다. 그러나 새는 눈은 꾹 감고 발은 오그리고 있다. 그 깃털은 올 때부터 빛깔이 바래지 기 시작해서 이제는 낡은 천처럼 변해 있었다. 처음에는 정말 파란 깃털이 반짝 반짝 거리던, 눈이 까맣고 예쁜 새였는데 무섭도록 빠르게 시들어버리더니 결국 이렇게 죽어버린 것이다. 하긴, 이 새를 잡았을 때 사낭꾼 바이터가 절대 키울 수 없을 거라 말하기는 했다. 이렇게 작고 약한 건, 아무리 먹을 것을 잔뜩 주며 잘 해줘도 시들시들 거리다가 죽어 버린다고. -상관없어, 바이터. 한달이든 두 달이든, 일주일이든 이주일이든...... 어쨌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내 거잖아? 그리고 그렇게 했다. 금으로 된 새장을 구해다가 넣고는, 물과 먹을 것을 풍족하게 주며 키웠다. 말은 그리 했지만 그래도 오래 살아 있어주길 바랬다. 처음에는 겁먹 어 파들파들 떨어도, 나중에는 생기 있게 날개를 파닥거리며 반겨 주고 울어주기를 바랬다....... 그러나 새는 첫날에는 새장 안에서 벗어나려고 미친 듯이 퍼덕대고, 그 다음에는 지쳐서 시들거리다가, 결국에는 이리 죽어버린 것이다. 시녀가 훌쩍거릴 때마다 새장이 흔들리며 축 늘어진 몸이 이리 저리 쓸려 다녔다. 깃털이 빠져 바닥에 흩어진다. 휘안토스는 무관심하게 말했다. "묻어줘." "죄송합니다." "네 잘못이 아니다. 상관없으니, 어디에든 네가 좋은 곳에 묻어......" "네....." 시녀는 가슴에 새장을 안고는 거실을 나갔다. 새장에서 빠진 깃털이 낙엽처럼 여기 저기 쓸려 다니고 있었다. 그래....다음에는 매잡이가 길들인 매를 키워야지. 처음부터 잘 따르고 원래 이곳이 제 집이라도 되는 듯 튼튼하게 잘 크는 그런 매를....... .휘안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푸른 깃털을 밟았다. 그래도 한번이라도 노래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제 주무실 시간이에요." 아킨은 메리엔이 그렇게 말해도,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럴 때에는 재촉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아는 메리엔은 잠자코 기다 렸다. 1년 만의 만남이었다. 그것도 루실리아가 죽던 밤에 마지막으로 보고 는 끝이었다. 굉장한 일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정작 만나자 둘 다 말없이 서로 를 바라보았을 뿐이다. 오싹한 정적, 바늘 끝이 맞닿아 있는 듯 조 금만 비틀려도 서로를 찌를 것 같은 그런 대립 속에, 그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케올레스가 자리를 비켜주고, 메리엔도 따라 나갔다. 얼마 뒤에 휘안 토스는 케올레스를 찾아 나왔고, 아킨은 메리엔을 불렀다. 그것도 날카롭게 울부짖듯이, 메리엔! 메리엔! 당장 와--! 하면서. 무슨 일 이 있었느냐 물어도 답하지 않았다. 그냥 숨만 몰아쉬며, 이를 뿌 득 물었을 뿐이다. 그리고 휘안토스가 나가자 숨이라도 답답한 지 가슴을 움켜쥐며 꿈쩍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날이 기울어 해가 넘어가고 마침내 어둠이 깔리며 별이 뜰 때까지. "형이 미워." 초에 불을 붙이던 메리엔은 깜짝 놀랐다. 휘안토스가 다녀간 후 처음 으로 꺼내는 말이다. 아킨이 말했다. "형이 없어지면....." 그리고 아킨은 흐릿하게 웃었다. 아이 답지 못한 웃음이다. 아이가 그렇게 '지친 웃음'을 짓는 것은 너 무나 어울리지 않는다. 되지 않는 일에는 억울해서 우는 게 정상 이다. 아이가 포기라는 것을 너무 일찍 배우는 것도 좋지 못한데. ".......형이 없어지면 어머니가 나를 미워하겠지?" "아킨토스 님." 그만 두라고 책망하는 목소리로, 메리엔은 그를 불렀다. 하지만 그것 으로 그를 달랠 수는 없었다. "수십 번은 물어봤을 텐데, 어머니는 한번도 답해주지 않았지.....내가 미운 거에요, 아버지가 미운 거에요......아니면 그냥 내가 무서운 거에요. 그렇게 잡고 물으면 그녀는 언제나 고개를 돌려 버렸어. 모르는 척, 못 들은 척하면서 도망쳐 버렸어." "그 분은 많이 편찮으셨어요." "사람들은 다 그렇게 말했지. 메리엔도 그렇게 말했어. 비전하께서는 지금 편찮으시니까, 아킨토스 님이 이해해 주세요. 가까이 가지 마세 요. 조금만 쉬시면 다 나아서 아킨토스 님을 사랑해 주실 거랍니다. 그 러니 참고 이해해 주세요....... 울지 마세요. 사실 그분은 아킨토스 님 을 많이 사랑하시니까요.....언제나 똑같이 말하지. 아무도 믿지 않았으 면서." "....." "그냥 그렇게 믿고 살았으면 좋았을 거야. 기다리면, 기다리면 언젠가 는 사랑해 주실 거라고. 어머니가 사랑해 주면 아버지도 나를 사랑해 줄 거라고. 그리고 나도 형을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그냥 그렇게 생각 했어......믿었어. 참으면 되, 참기만 하면.....그냥 버티면 되."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채,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으며 제 멋대로 살아도 되는 것이 아이다. 그냥 뽀얗고 깨끗하게, 순진무구하 게. 눈송이처럼, 세상 어렵고 더러운 것 모르고....... 아킨이 말했다. "벌레는 왜 살까?" "나비가 되기 위해 살지요." "언젠가 예쁘고 멋진 것이 될 테니까, 그러니까 저렇게 흉하고 힘없고 하찮아도 꾹 참고 사는 건가?" "그렇답니다." "그럼 벌레일 때는 아무 가치도 없는 건가? 겨우 며칠 나비로 날기 위 해, 몇 달을 벌레로 사는 건데.......그 몇 달은 아무 소용도 없는 시간 이야?" "그건......" "그 때도 살아 있고, 그 때도 보고 느끼는데, 왜 아무 가치도 없는 거지?" 이제 메리엔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번데기를 뜯고 나왔는데 볼품없고 작은 나방이라면, 그러면 그 벌레는 애당초 아무 가치도 없었던 거야?" .....그러나 아이는 얇고 투명하다. 그저 작고 약할 뿐, 그들의 얄팍한 가슴은 너무도 쉽게 '진실'을 바라 보아 버린다. 아킨이 손을 들었다. 작은 손끝에 뽀얀 달빛이 어렴풋이 어렸다. 그러나 아이는 울지 않았다. 메마른 눈물샘은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서 샘솟을 정도로 풍족하지 못했으니. 아니, 어쩌면 너무 많이 울어서 이제는 다 바닥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 작가잡설: ..............암롯사 집안이 개판인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니 라 이때도 무리 없이 개판~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외전 **************************************************************** [겨울성의 열쇠] 외전 제1편 잔인한 봄#4 ***************************************************************** "보름 까지는 닿을 거란다." 숲 언저리에 도달했을 때, 칼롭은 그렇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자켄의 차분하고 얌전한 답에 칼롭은 축 늘어져 버렸다. 네, 아니요, 알겠습니다, 그리 하겠습니다- 하긴, 칼롭이 이 자켄과 알고 지낸 열여섯 해 동안 이 외의 말을 몇 개나 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런 칼롭의 뒤집어지는 심정을 전혀 모르는 소년은 순한 눈빛으로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 그 돌 석상 같은 차분함에, 칼롭은 외려 좌절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우리 아이가 너무 말을 안 들어요!' 라고? 복 받은 줄 아시라. "자크, 기대이하의 반응도 실망스럽지만, 지금의 너 같은 반응은 더욱 실망스럽구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너는 지금 내가 '자, 지금부터 하늘이 무너질 거란다. 준비하거라.' 하면,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분부하실 일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 어볼 녀석이라 이 말이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저는 단지...."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거라, 이 말이냐." "지금 칼롭 님께 신세지고 있으니, 그건 당연한 것입니다." 이제는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다. "그만, 그만~ 그만하자, 그만해. 예전에 만든 태엽인형도 너보다는 발랄했겠다." 칼롭은 손을 휘휘 저어버리고는 털썩 주저앉았다. 칼롭은 꽤나 오래 살았지만, 기껏 열여섯 살 된 엘프 아이와 여행 다닌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스물도 안 된 엘프가 숲을 나왔다 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인 것이다. 물론 자켄은 시끄럽기로는 따 를 종족이 없는 인간 소년이 아닌데다가, 엘프 치고도 고분고분한 성품이라 번거로운 일은 없었다. 아니, 정말 제발 사건 하나 만들어 주라고 애걸하고 싶을 정도로 없었고, 그것이 칼롭을 더 피곤하게 했다. 너무 시끄러우면 몇 대 가볍게 주물러 주어 고쳐주면 되지 만, 너무 조용하고 고분고분한 녀석은 무섭다. 열여섯이라 철이 일찍 들어 그렇다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칼롭은 못 쓰는 주먹으 로라도 한방 갈겨줄 수 있었다. 자켄은 얌전한 것도, 착한 것도, 철이 일찍 든 것도 아니다. 무엇을 요구해도 받아들이고 불가능한 일이라도 반드시 해서 바친다. 자켄이 엘프 아이들보다 무엇이든 빨리 배우는 것도 그 때문이다. 다른 아이들이 사랑스럽게 응석부리며 '오늘은 그만 해요.' 라고 말하며 스 승의 손을 잡아끌 때, 자켄은 그저 시킨 것을 꾸준히 할 뿐이니. 천 번이든 만 번이든, 시키면 무엇이든 한다. 이 때문에 스승인 바실리카가 더욱 자켄을 감싸고도는 것인지도 모른 다. 그저 가엾고 안쓰럽기만 해서.....그러나 그래서 자켄은 더욱 고 분고분해 진다. 더욱 말이 없어지고, 더욱 얌전해지기만 하며, 그저 '착한아이'가 되어 갈 뿐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떠나 버릴 것이다. 스물이 넘어, 바실리카가 보호해 줄 수 없게 되면 반드시 이 숲을 떠나 어디로든 정처 없이 방황하게 될 테지. "자크야. 왜 그를 찾아가는 건지, 왜 그 아이 곁에 있어야 하는 건지 묻지 않는 거지?" "어둠 숲의 어머니께서 정하신 일입니다." "그녀가 왜 그런 일을 시켰는지 알겠니?" "모릅니다. 하지만.....정하신 일이니 해야지요." 조금 반항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자켄이 말하니 '당연하게' 들린다. 칼롭은 다시 한숨을 푸륵- 내쉬고는 말했다. "왜 네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왜 네가 '그렇게' 태어났는 지.........화 내 본 적 있느냐?" "화 낼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그렇게 해서 태어났고, 태어난 이 상 그 원인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온 어둠 숲이 너를 미워하는 것도, 네 또래 아이들이 너만 보면 마귀라도 나타난 듯 슬금슬금 피하는 것도, 발레스가 세상에서 제일 미워하는 게 네 아버지와 너라는 것도 다 납득하고 있다 이 거구나." ".......당연한......거니까요." "사랑하고 사랑받아 보고 싶던 적은 없냐?" "바실리카와 숲의 어머님, 그리고 칼롭 님께서는 저를 진심으로 아끼 십니다. 그것으로도 충분합니다." 나름대로 감동적이긴 했지만, 나름대로 불쾌하기도 했다. 더 필요 없 다는 말이니까. 평생 이러고 살겠다는 말이니까. 칼롭은 허리를 당겨 고쳐 앉고는 말했다. "숲을 나오면서 생각해 둔 게 있단다. 뭔지 이야기 해 줄까?" "네." "......" 호기심이나 불안으로 눈 반짝이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으면 하십시 오- 다. 그리고 무엇을 말하든 납득할 테지. 칼롭은 씨익 웃으며, 그의 주먹이 보통사람 따귀보다 약하다는 것을 원망했다. "여기서부터는 너 혼자 가거라. 아무리 반쪽이라지만, 그래도 너는 숲 의 아들이니 낯선 숲이라도 누비는 데 어려움은 없을 테지. 여기서 남쪽으로 쭈욱 내려가면 내일이면 그곳에 닿을 거다." 자켄의 눈이 커졌다. 무엇이든 생각하고 왔을 그였지만, 이런 경우는 단 한번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 혼자......말입니까?" 그것은 칼롭이 처음으로 들어보는 자켄의 '반문'이었다. 칼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는 여기서 기다릴 테니 너 혼자 그곳으로 가서 네 동생을 만나 봐라. 그리고 네 동생을 만난 뒤에, 그 '자식'도 만나 보거라..... 네 동생에게, 그리고 그 '자식'에게 무엇을 어떻게 할지는 네가 알아서 해라." 자켄의 숨소리가 조금 거칠어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짐작은 된 다. 그렇다. 두려운 것이다. "무엇을.....어쩌란 말씀입니까." "난 몰라. 네가 알아서 하거라." 자켄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칼롭을 바라보았다. 칼롭은 만족했 다. 정말 자켄이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불안해하고 있었다. "자크, 나는 네 슬픔도, 네 고통도, 그 어떤 것도 완벽히 이해하지 못 하기에 완벽한 해결책을 내 놓을 수 없다. 하지만 구원이란 놈은 귀 어둡고 눈 어두운 녀석이라,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발버둥 쳐야 겨 우 한번 돌아본단다. 체념 섞인 한숨 따위는 그 녀석 귀에 들리지 도 않아. 그러니 자크야, 발버둥쳐라. 발악해라......그것만이 네가 구 원받는 길이다." "구원은.......필요 없습니다. 전 그저......." "자크야, 어차피 한 번 사는 거라면 좀 더 낫게 살아야 덜 억울하지 않겠느냐. 그리고 그 방법은 아무리 옆에서 가르쳐 주고 명령해도 알아낼 수 없는 거란다. 너 혼자가 되어야, 너 스스로 실수를 두려 워하면서도 하나하나 결정해 나가야, 그리고 그 결정에 따른 책임을 짊어질 자세가 되어 있어야 너의 앞길 역시 좀 더 밝아지고 또렷해 질 거란다. 그래서 지금 너에게 이렇게 말하는 거다. 네가 가장 두려워하는 너 자신, 네 반쪽이 가져다 준 운명에 맞서보아라." "........저......혼자서 말씀입니까?" "그래. 아무리 네 옆에 있는 이들이 너를 사랑한다 할지라도, 결국에 는 너 혼자서밖에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있단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 겁니까........전 아무것도 모르겠습 니다." "묻지 말거라. 생각하고 생각해서, 이것이 옳다 하는 것을 택해라." "틀린 선택을 할지도 모릅니다." "안다. 선택을 하나 둘 하게 될 때마다, 그것도 너 혼자 하게 될 때마 다 무서울 거다, 화가 날 거다, 도망치고도 싶을 거다, 주변에는 아 무도 없으니까.......옳다고 답해줄 사람도 고개를 끄덕여줄 사람도 없 얼 테니까. 하지만 앞서는 두려움을 인정하고 뒤따라오는 거부감도 받아들이며 어떻게든 무언가를 택하려 하면.......언젠가는 무엇이 가장 옳은지 알게 될 거란다." "하지만 잘.......할 수 있을까요?" "나는 믿는다........그리고 나는 너를 사랑하고, 바실리도 너를 사랑하 고, 나루에 역시 너를 사랑한다. 그러니, 그렇게 사랑받은 너는 사 랑할 수도 있을 거다.......그러니 노력해다오. 이렇게 네, 네, 네~ 하 는 태도는 집어 치워버리고." 칼롭은 그렇게 말하며 그의 대자인 엘프 소년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만월을 기약하는 달이 떠올라 그의 눈 끝에 빛을 뿌리고 있었다. 칼롭은 자켄의 어깨를 감쌌던 손을 놓고는 부드럽게 말했다. "자, 이제 다녀오너라. 그리고 돌아올 때 환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안 아줄 수 있기를 바란다.......사랑하는 내 아들아." 이제 달빛은 자켄의 눈 속에서 아롱지고 있었다. 그리고 서늘하지만 따스함을 담은 봄바람이 숲을 휩쓸 때, 어둠 숲의 소년은 사라지고 없었다. "현재를 밟고 미래를 움켜 쥐거라........자크." 칼롭은 바람에 실어 그렇게 속삭였다. "글쎄, 형들이 시키신 게 이거 요거 조거 이이이이거 조오오오거 그 외 추가로 조거 요거니까,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합계 21 베넬로. 보통 반 푼이는 깎아 드리니, 두개로 해 드리는 거라고요." 슥슥 쓰고 자르고 나누고 하여 밑줄까지 좍좍 그어 놓는 영특한 카운 터의 말에, 그가 꼬맹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슬쩍 도망치려 했던 학생들은 심박동수만 올리고 있었다. 이건 보통 꼬맹이가 아니다. 나이는 겨우 열 서넛 밖에 안 되어 보이 는 녀석, 그것도 뒷골목 허름한 주점에 있는 녀석이라고 우습게 볼 게 아니었다. 사실 학생들은 이 꼬맹이를 놀려서 술값을 줄여볼 생각으로, 이것저 것 떠벌 떠벌 말해 소년의 계산이 틀렸다고 우기고 있는 중이었다. 이것 먹었다 하면 저것 먹었다 하고, 이렇게 먹었다 하면 계산 실수라고 하고. 보통 아이라면 겁먹고 알겠어요, 할 텐데 이 빨간 머리 소년은 절대 속아 넘어가 주지 않았다. 실랑이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눈도 날카로워지고 주점의 지배인 인 듯 보이는 건장한 남자는 일손까지 멈추고 그들을 노려보기 시작 했다. 더 나가나다가는 실컷 두들겨 맞고 돈도 내야 할 판이라, 학 생들은 이제 포기하기로 했다. 그래서 두 손 모아 애처로운 표정 을 짓고는 말했다. "저기, 우리가......돈이 좀 모자라...는...데...." "얼마나요?" "은화 다섯 장." 소년이 경악했다. "그러면서 그렇게 시키셨어요?" "저기, 그게....." "정말 없어요?" "그렇다니까. 아하하하.....저기, 우리들은 로멜의 일반부 학생이거든. 절대 떼어먹지 않을 테니, 달아 둬주라. 너, 로멜이 어떤 데인지는 알지?" 소년의 푸른 색 눈이 번득거렸다. "아하, 본인들이 얼마나 먹었는지도 제대로 계산 못하는 돌대가리들 이 다니는 곳?" 학생들 사이에서 이가 뿌득 갈리는 소리가 하나 들려왔다. 소년은 손을 내밀었다. "돌대가리에게든 새대가리에게든 돈 받을 건 받아야 해요. 자, 거기 뒤쪽에 계시는 분은 외투 놓고 가시고. 저기, 옆에 계시는 분은 스 카프 좋아 보이는데 그거 놓으시고, 당신은 장갑 벗고, 당신은 목걸.. ..에이, 싸구려네. 들고 있는 책 내놔요." 외투를 징발당한 학생이 으르렁댔다. "꼬맹이 너 미쳤냐! 이것 한 벌만도 은화 열 장은 된다!" "억울하면 돈 들고 다시 와요. 곱게 입다가 돌려 드릴 테니." "얌마, 그런데 왜 우리들만 내! 저 녀석은 하나도 안 벗고--!" 우정이고 뭐고, 망신 앞에서는 의미 없다. 자기가 당한 마당에 저놈 이 안 당하면 그것 또한 억울할 일. 어차피 당한 망신, 모두 다 공 평하게 당해야 한다. 소년은 그 학생이 가리킨 벌벌 떨고 있는 말라깽이를 슬쩍 보고는 고 개를 저었다. "모두가 마신 것이니, 가장 돈 될만한 것을 무작위로 징발하는 것뿐 에요. 그리고 다시 한번 말씀드리는 건데, 돈만 내신다면 언제든지 돌려 드려요. 나중에 돌아가셔서, 각자 공평하게 돈 모아서 다시 오세요. 그러면 되잖아요." 할 말이 없다. 학생들 일동은 천장을 향해 한숨을 푸르륵 내쉬고는, 어떻게 도망칠 수 없을까 하고 문 쪽을 돌아보았지만 문 앞에서 웬 주근깨 가득한 여자 하나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 옆에는 건장한 사내 하나가 버티고 있어, 학생들 힘으로는 도저히 벗 어날 수 없었다. 결국 학생들은 곱게 옷을 벗기 시작했다. "잘 생각하셨어요." 그 얄미운 말에 학생들은 일제히 이를 뿌득 갈았다. 붉은 머리 소년은 받을 것을 다 받자, 문 쪽에 손짓을 보냈다. 당장 에 그들이 비켜주자 학생들은 우르르 몰려나가 문을 열어젖히고는 도망쳐 버렸다. 밖에서 소란스레 욕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가게 안 의 사람들은 모두 킬킬 비웃을 뿐이었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여자가 슬그머니 다가와서는 소년에게 말했다. "제임은 좋겠어. 조카가 똘똘해서." "저 쪽이 지나치게 멍청한 거라고. 속일 걸 속여야지." ".....으흠. 그런데 저리 멍청해서 어떻게 그 유명한 로멜에 들어갔을 까?" "아마도 부모들이 싸고 닦달해서 간신히 입학시켜 놨을 걸. 게다가 일반부라잖아. 돈 내고 들어가는 학부." 그리고 소년은 혀를 내밀었다. 여자-에나가 히죽 웃고는 말했다. "너, 예전에 로멜에 다니고 싶다고 했었잖아?" "언제?" "지난번에 나랑 잤을 때." 소년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그러자 에나는 그의 목을 슬쩍 감고는 은 근하게 말했다. "오늘 밤도 해 줄래?" "저기, 에나. 삼촌이 보고 있는데." 그리고 소년은 바에서 부리부리한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는 중년 남자를 가리켰다. 눈빛으로 황소라도 쏘아 맞출 듯한 살벌한 제임의 눈초리에, 에나는 억지로 손을 내려놓아야 했다. 소년이 말했다. "그리고 에나, 내가 가고 싶은 건 저런 바보들이 다니는 일반부가 아 니라, 마법부라고. 그렇게 무시하지 마." "그래서? 대마법사 컬린처럼 되고 싶어, 루츠?" "그런 말은 아가 시절에나 하는 거지. 그렇게 위대해질 거창한 야망 까지는 안 가도, 언젠가는 굉장해 질 거라고. 그래서 위대한 대마법사 의 세 번째 제자가 되는 거지. 전능의 탈로스, 눈보라의 오거스트, 그 리고......뭐뭐의 루첼. 근사하지?" 소년다운 발랄하면서도 염치없는 야망에, 에나는 킬킬 웃었다. 그러나 비웃는 다기 보다는 '정말 그렇게 될 거야.' 라는 격려와 사랑의 웃음이었다. 그 때 뒤에서 제임이 음산하게 말했다. "어이, 무식한 놈. 컬린의 제자는 셋이다." "응? 무슨 소리야?" "지난달에 델 카라롯사의 천재 소년, 악튤런 파노제가 세 번째 제자 가 되었다고. 그리고 장담하건데, 컬린은 너처럼 말 많고 뺀질대는 놈 은 절대 안 받아 줄 거다." "안 되면 제자의 제자로 들어가지 뭐. 그래도 좋잖아. 음......되도 록이면 여자 스승님이 좋을 것 같으니까, 눈보라의 오거스트의 제자 가 되는 거야. 혹시 알아? 나중에 미녀마법사의 남편이 될 지." "......내가 얼굴을 아는데, 미녀는 절대 아니다." "......." 조카의 허황된 야망을 친절하게 각개격파해 준 제임은, 루첼이 술값 으로 받은 책을 집어 들며 흔들었다. "그리고 루츠, 정말 로멜에 들어가고 싶다면 이상한 놈들이랑 어울 리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 자꾸 엉뚱한 일에 손대다가는 나중에 크게 다칠 거다." "에헤. 공부는 열심히 하고 있는데?" "......양심껏 지랄해라." "......" 다시 손님하나가 들어왔다. "내 경고 잘 기억해 둬라. 다시는 그 패거리랑 어울리지 마.....다치기 전에 손떼. 그딴 짓 하느니, 차라리 하인으로 일하는 편이 열배는 낫다." "하지만 제임-" "삼촌이다. 그리고 내게는 네놈에게 충고할 권리도, 그 충고가 안 먹힐 경우에 충분한 폭력을 행사할 의무도 있다." "난 잘 하고 있다고! 게다가 난 바보도 얼간이도 아니니까, 절대 실수 하지 않을 거야." "이야기 더 안한다. 내가 할 말은 하지 마, 그걸로 끝이야." 제임은 손을 털털 털고는 바로 돌아갔고, 루첼도 다음 손님이 계산하러 오 기에 입 다물고 제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창밖으로 진하게 빛나는 만월이 빛을 뿌리고 있었다. 어두운 뒷골목도 오늘만은 은빛 달빛에 어슴푸레 젖 어 환하다. "쳇, 늑대 인간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네." 제임에게 혼난 게 억울해서, 루첼은 그렇게 투덜거리고는 다시 계산을 시 작했다. 그러나 꼭 무언가 아주 중요하고 엄청난 일이 일어날 듯 가슴 두근거리는 밤인 것만은 분명했다. ***************************************************************** 작가잡설: 자폐 궁상아 갱생 카운슬러로 탁월한 자질을 가진 베이나트 씨~;; 였습니다. 이 길지 않은 외전의 의미는......큰 사건을 이야기 하다기 보다는, 그 저 '캐릭터 조금 더 알기' 라는 취지로 쓰여 진 겁니다. ^^;; 각자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 중 하나를 코앞에 두고 있는 그 때랄까요......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48장 ************************************************************** [겨울성의 열쇠] 제48장 하얀 숲의 왕 제220편 하얀 숲의 왕#1 *************************************************************** 세 명의 마법사가 그녀, 에칼라스를 찾아냈다. 하나는 갈색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건장한 남자였고, 두 번째는 검 은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여인이었고, 세 번째는 붉은 머리카락의 아름다운 남자였다. 그들은 에칼라스 앞에 무릎 꿇고, 낡은 잔과 방금 모루에서 집은 듯 날카롭게 빛나는 검을 바쳤다. 세 마법사 중 가장 나이 들고 키 큰 이가 말했다. -목마른 것은 우리고 추운 것도 우리입니다. 우리의 목을 축여줄 것 은 그대이고, 추위를 몰아낼 것도 그대이며, 우리를 밝혀줄 것도 그대입니다. 이 세계의 주인께서, 그의 조각을 떼어 내려 보낸 당 신에게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세 마법사 중 여 마법사가 말했다. -당신에게 원하는 것은 그저 베풀어 주시는 것 뿐, 당신이 절망에 찬 우리를 도와주시면 우리는 세계에 우리가 놓을 수 있는 모든 선 물을 놓고 가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젊고도 활기찼던 마법사가 말했다. -당신의 손길 한번만 빌려 주시면 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얻고 구원받게 될 것이며, 당신은 모든 것을 베풀 수 있는 자가 될 것입 니다. 그들이 무엇을 바랬는지는 모른다. 적히지 않았고 전해지지 않았고 모르는 채 잊혀지며 무시되어버렸다. 성스러운 은총이 베풀어져 지상은 가장 성스러운 신의 대리자와 열 두 명의 수호자를 얻게 되었고, 그 이야기는 그렇게 끝났다. 사 람들에게는 그것만으로 충분했고, 말 많고 시간 많은 학자들이나 그 들의 정체에 쓸 데 없는 관심과 허무맹랑한 가정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천년하고도 몇 백 년이 지나갔다. 잠시 평화로울 듯 했던 세상은 다시 혼란해졌고, 그중 가장 큰 재앙 은 사악한 마법사 팔로커스였다. 드래곤들이 죽었고, 성스러운 열두 수호자들이 남겼던 그 이름의 승계자들마저 패배하였다. 쿼크 대제는 일곱 기사들을 모아 그에게 대항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사람들은 겁먹어 움츠릴 뿐 도와주지도 않았다. 이미 오래전에 분 열되었던 세상은 계속 황폐해져갔고, 팔로커스는 세계의 수호자들이 남겨두었던 흔적을 파괴하며 이미 갈라진 세상을 난도질하여 더욱 더 황폐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에칼라스에게 마법사들이 찾아왔듯, 쿼크 대제에게도 마법사 가 찾아왔다. 에칼라스를 찾아온 자는 셋이었으나, 황제에게 찾아온 마법사는 단 둘이었다. 갈색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건장한 마법사와 검은 머리 에 푸른 눈을 가진 여자 마법사. 그들은 쿼크 대제에게 도움을 약 속하였고, 보답은 요구하지 않았다. 다섯 계곡과 두개의 평원에서 싸움을 거듭하여, 쿼크 대제와 마법사 들과 그의 기사들은 결국 팔로커스의 보금자리였던 칠보의 계곡에서 그를 죽였다. 쿼크 대제는 그 기사들을 이끌고 마법사들의 안내를 받아 함께 팔로 커스의 대 미궁으로 들어섰고, 그곳에서 그는 낡은 잔과 금빛 찬란한 검을 발견했다. 마법사들이 그것을 가져가려 하자 쿼크 대제는 그 잔과 검을 요구했 다. -황제, 이것은 이 세계에 속한 물건이 아니오. 또한 그대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에칼라스의 성배도 아니며 인간이 주인이 될 수도 없는 물건이오. 그러나 황제는 완강하게 버텼다. -지금 세상은 혼란하오. 사람들은 영웅을 바라고 인도자를 원하며 구원을 간절히 갈망하고 있소. 그들에게 희망의 실체를 보여주고 싶소. 에칼라스가 약속하고 내가 인도할, 그런 희망 말이오. 그러니 성배를 내게 빌려주시오. 세상이 평화로워지면 그대들에게 돌려 줄 테니, 가엾은 세상을 동정하여 자비를 베풀어 주시오. 두 마법사는 오랫동안 토의한 끝에 그 성배와 성검을 황제에게 빌려 주었다. 그리고 그가 말한 평화가 오면 반드시 찾아가겠다고 말했 으며 거부할 시에는 힘으로 가져갈 것이라 경고했다. 여 마법사가 충고했다. -단, 반드시 알아두세요. 평화를 가지고 오는 것은 그것을 원하고 이 루고자 하는 인간 자체이지, 이 낡은 잔과 검이 아니라는 것을. 황제, 이것이 없어도 올 것은 오고, 이것이 있어도 갈 것은 갈 것 입니다.......만약 이것에 기대어 이룬다면, 이것은 그 모든 것을 함께 가지고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예언이었을 지도 모르고 경고였을 지도 모른다. 젊은 황제와 그 일곱 기사들을 둘러보며, 천년도 더 된 시간을 살아온 그 마법사들은 그 들의 미래를 일치감치 짐작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노인이 철없지만 순수한 아이를 보며 기대하면서도 걱정하듯, 그리고 그 아이가 결국에는 방탕한 청년이 되어 버릴 것을 예감하듯, 그렇게 그 두 마법사는 기사들과 황제에게 인사와 축복을 건넨 후에 먼 길 을 떠났다. 영광은 짧았고, 희망도 쉽게 바스러져버렸다. 아름답게 빛나던 순간 은 얼마 되지도 않아 쓰라린 추억이 되어 사라졌고, 기만과 배반과 욕망의 계절은 너무도 길게 찾아와 버렸다. 하지만 시간은 흐른다. 뿌린 대로 가꾸고 거둔 가을을 보내고, 가을 의 수확을 가지고 버티어내는 고독의 겨울이 지나면, 다시 새롭게 싸우기 시작해야 하는 봄이 오는 것이다. 날이 어두워지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초저녁 무렵에는 그리 많은 눈은 아니었다. 그냥 조그맣게 솔솔 흐트 러지다가 언 땅 여기 저기 떨어져서는 흔적도 없이 녹아 없어졌을 뿐이다. 그러나 날이 기울며 구름은 점점 두터워졌고, 눈송이도 뭉치 듯 굵어지기 시작하더니 드문드문 쌓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눈이 곧 많이 쏟아질 거라 예상하고, 일찍 저녁 일을 마친 후에 집 안 으로 들어가 덧문을 닫고 벽난로 옆에 땔감을 듬뿍 쌓아 놓았다. 냄비를 걸고, 펄펄 끓는 물 안에 감자와 소시지를 넣고 익혀갔다. 스 튜 냄새가 방 안에 가득 차고 허기진 아이들과 부모는 음식이 다 익기를 기다리며, 그들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잊었던 것을 먼저 기억해 낸 것은 어머니였다. 아직 스튜가 익지 않 았고, 또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의 일이기에 그녀는 아이를 불러 주머니 하나를 건네주었다. 아이는 추운 밖으로 나가는 것이 싫었지 만 결국 받아 들고 집 밖으로 나갔다. 흩어지던 눈발은 이제 거의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높고 낮은 집들과 담벼락 나무와 벌판은 눈이 덮여 있었다. 아이는 희뿌옇게 흐려진 산등성이를 한번 바라보고는, 서둘러 마을 마녀의 집으로 달려갔다. 어머니가 맡긴 것은 감자 한 바구니와 우유 한 병이었다. 어제 마녀 가 암소를 치료해준 대가였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여서, 아이는 금방 그녀의 작은 오두막에 도착했다. 문을 두드리자 늙은 마녀가 나타났다. 워낙에 편하고 좋은 여자라, 아이도 동무들과 함께 그녀 를 찾아가 옛 이야기를 청하곤 했다. 마녀는 아이에게 감자와 우유 를 받고는, 주머니에 있던 감초 과자 세 개를 건네주었다. 아이는 활짝 웃으며 감사 인사를 하고는 제 집으로 돌아갔다. 눈은 아이가 지나간 길 위로도 계속 쌓여 곧 발자국을 지워버렸다. 집집마다 피어오르는 연기가 눈에 섞여 하얗게 날아오르고, 덧창 틈을 비집고 흘러나오는 노란 불빛이 눈 위를 적셨다. 마녀는 아이가 자기네 집 골목길로 사라지자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 왔다. 그 집 냄비에도 물이 끓고 있었다. 마녀는 감자를 썰어 그 안에 넣었다. 그리고 냄비 앞에 쇼올을 걸치고 앉아 있는 소녀에게 말했다. "어때, 내가 말하지 않았니. 조금만 기다리면 감자가 올 거라고." 소녀는 썰어 놓은 소시지를 냄비 안에 쏟아 넣으며 답했다. "죄송해요, 리사. 마을 밖에서 조금 살다 보니 리사가 얼마나 대단한 지 잊고 있었어요." "불만 있는 듯한 목소리구나. 하지만 그리 퉁명스레 말하면 못쓴다, 유제니아." **************************************************************** 작가잡설: 시즌3 시작 합니다~! 드디어 시작~~~!!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48장 ***************************************************************** [겨울성의 열쇠] 제221편 하얀 숲의 왕#2 ****************************************************************** 유제니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싫은 게 아니에요.....그냥 그것도 모르고 있었던 게.......어쨌건 그게 한심하게 느껴져서요. 나사 빠진 것 같죠?" "글쎄다." 리사는 국자로 스튜를 휘저었다. 아직 먹을 만 하게 익으려면 한참이 나 남았다. 그녀는 작은 단지를 찾아 그 안에 있는 향초 가루를 조금 뿌리고는, 벽에 매달린 마른 풀 몇 개를 바스스 부스러뜨려 끓는 스튜 안에 밀어 넣었다. 향초의 향이 물에 녹아들어가며 야릇한 냄 새를 풍겼다. 음식이 차려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까마귀 스키어 드가 천장의 횃대에서 푸드득 날개를 치며 내려왔다. 그리고 여주 인보다 만만한 유제니아 옆을 어슬렁어슬렁 대며 사람 말 몇 마디를 지껄여 댔다. 유제니아가 아무 대꾸도 없자, 까마귀는 단단한 부 리로 그녀의 까만 머리카락을 물고 잡아당겼다. "아얏! 뭐하는 거야!" 유제니아는 팔을 휘둘러 까마귀를 쫓았지만 잠깐이었을 뿐이다. 뒤로 겁먹은 듯 주춤 물러났던 스키어드 녀석은 눈을 번쩍이며 후닥닥 날아오더니, 이번에는 더 세게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결국 그 주인 이 나서야 했다. "이리 와라, 이 심술꾸러기야." 그 한마디에 까마귀는 즉각 멈추고는 리사에게 날아갔다. 그리고 리 사의 팔에 앉아, 그녀가 주는 마른 고기를 덥석 덥석 받아먹기 시 작했다. 유제니아는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지며 까마귀를 쏘아보았다. 리사가 웃으며 그런 유제니아를 달랬다. "그렇게 우울한 얼굴로 있으니 그렇지. 알잖니. 스키어드는 만만한 사 람에게만 집적댄다는 걸." "추워서 그래요." "나는 반팔이란다." "외로워서 그래요." "그러면 내가 섭섭하지." ".......뮬이 뭐라고 했군요?" 그리 말하고는 유제니아는 리사에게서 눈길을 돌려 스튜를 바라보았 다. 향초가 녹아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리사가 나른히 한숨을 내 쉬었다. "그래, 너한테 무슨 일이 있었냐고 슬그머니 물어오더구나. '할머니, 이상해요. 그저 성에서 듣고 온 바깥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유제니 아는 저를 죽일 뻔 했다구요.' 하고 말이다." 유제니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무 짓도 안한 건 아니에요." "청소년기 남녀 문제에는 끼어들지 않는 게 상식이지만, 어쨌든 그 애가 너를 좋아한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아둬 주면 좋겠구나. 그 애는 그저 네가 돌아온 게 좋아서 너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던 것 뿐이고, 여기가 툴칸도 아닌데 손잡는 것 정도에 그렇게 정색을 할 필요는 없었잖니." "나중에 미안하다고 할게요. 그냥 놀라서 그런 것뿐이에요." "손잡은 게 그리도 놀랄 일은 아닌 듯한데." 유제니아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는 바닥을 쿡쿡 찌르기 시작했다. "유제니아-" "......." 결국 아무 말도 듣지 못한 리사는 나른히 한숨만 내 쉬어야 했다. "오늘 세냐로부터 편지가 왔단다." 유제니아가 고개를 들었다. 당연히 눈빛이 밝아져야 하는데, 어둡고 침울하기만 했다. 제발 오지 말아달라고 생각하는 듯이. 리사가 말 했다. "네가 이곳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 묻더구나. 그런데 그것 만이라면 괜찮겠다만, 이상한 질문이 몇 개 있었단다. 밤에 잠은 잘 자는 지, 주변에 남자들에게 과민하게 반응하지는 않는지......지나치게 사 소해서 오히려 수상한 질문이었지. 너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잖니?" 유제니아는 손끝이 떨리는 것을 보이지 않게 하려고 조심스레 움츠리 고는 치마 폭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래서 뭐라고 하셨어요?" "아직 답장은 하지 않았다. 오고 나서 한 숨도 못자서 결국에는 내가 잠 오는 약을 주어야 했다는 이야기도, 병사들이 머리만 툭 쳐도 새파랗게 질리는데다가 뮬이 근처에 와도 깜짝 깜짝 놀란다는 것도, 아직 안 썼단다." 몸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유제니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 했다. "그럼, 아무 일도 없다......고 해 주세요." "그래도 괜찮을까?"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요." "이런 문제에 있어서 거짓말은 더 안 좋은 거란다." "하면 안 돼요!" 유제니아는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그러나 숨넘어갈 정도로 온 몸이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또 생각나 버렸어...... 생각하지 않으려고 몇 번을 다그쳤지만, 밀어내면 밀어내려 할수록 그 무서운 기억은 더 집요하게 다가온다. 감당하기로 결정한 것은 자신이면서도, 정작 감당 못하고 무너지고 있는 것도 자신이다. 정 말 싫었다, 그렇게 그림자를 떨쳐내지 못하는 못난 자신이. 리사가 물었다. "누구니? 대체 누가 그런 나쁜 짓을 한 거니?" ".......그런 일 없어요." "유즈, 나는 너보다 몇 배는 더 많이 산몸이란다. 네가 처음 왔을 때 부터 짐작하고 있었어. 그러니 어떤 못된 사람이 그런 난폭한 짓을 했는지, 속이지 말고 말해다오." 유제니아는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리사의 손이 다가와 그녀의 어깨 에 얹혔다. 순간 눈물이 왈칵 터졌다. 마른 바닥에 뚝뚝 떨어지며 진한 얼룩을 만든다.... 이 할머니처럼 다정한 여인에게 뭐라 말해야 좋을까. 아름다운 왕자님을 만났다고. 온 소녀들이 그 앞에 몸을 던지며 꽃이 라도 뿌릴 듯이 근사한데다가, 멋진 망토를 두른 기사들이 옆에서 그를 지켜주는 그런 왕자님을 만났다고 말해야 하나. 옛날이야기에 서 악한 마법사나 드래곤들을 물리치고, 위기에 처한 공주님을 구하 고, 못된 사람들에게 괴롭힘 받는 아름다운 아가씨를 구해줄 것만 같은 그런 왕자님을 만났는데, 그런 왕자가 그 무서운 밤에 그녀 를 덮쳤다고? 유제니아는 고개를 저었다. 눈물이 끊임없이 툭툭 떨어지고 있었고, 볼은 벌써 흠뻑 젖어 눈물범벅이었다. 그 때의 공포와 치욕이, 그늘 속에 애써 숨겨 놓았던 것이 다시 깨어 나 다가오고 있다. 유제니아는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몸을 웅크렸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가 다시 그녀를 발견할 것만 같았다. 다시 다가와 또 똑같은 짓을 할 것만 같았다. "미안, 미안....해요, 리사. 하지만 말 할 수 없어요! 정말.........." "세냐는 그 일에 대해 모르고 있니?" "아뇨, 알아요." "그렇다면 어째서 내게 이런 조심스런 편지를 보냈고, 너는 왜 아무 렇지도 않다고 말해 달라 하는 거지? 또, 네가 그런 상태였다면 왜 그가 너 혼자 이곳에 남겨 둔 거고. 나는 세냐의 성격을 알아. 그 는 다른 모든 것을 내팽개쳐두고서라도 네 옆에 있어줄 아이지, 이 렇게 너를 맡겨둘 사람이 아니야." 유제니아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다 잊은 줄 알아요, 세냐는......" 그리고 젖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너무 괴로워 하니까 결국 휠테스 님께 부탁했어요. 제발 제 기 억을 지워 달라고.......하지만 훨테스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을 때, 저는 거절했어요. 대신 잊은 척 하겠다고만 했죠....." "왜 그랬니?" "세냐를 괴롭힐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세냐 혼자 괴롭게 놔 둘 수도 없었으니까요....할 수 없었어요, 정말! 너무 이기적이잖아요." 사실 거절하고도 후회가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그 아름답고 차가운 이 종족 여자가 우아하게 웃으며 하는 말에, 유 제니아는 정말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하고 싶었다. 고개만 끄덕이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 되는 것이다. 예전에 그랬 듯, 그냥 웃으며 세르네긴의 볼에 키스하고 슈마허의 품에 안기고 잠들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잠들려고 눕기만 하면 언제나 옆에 찾아 와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그 숨 막히는 공포가 사라지는 것이다. 잊으면, 그냥 잊으면 그렇게 끝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무책임해 질 수 없었고, 외면할 수도 없었다. 혼자만 그렇게 빠져나 가고는 그 지옥 같은 고통 속에 세르네긴만 내 던져 놓고 갈 수 없 었고, 그녀를 위해 증오하는 대상 앞에서 인내를 감수했던 아킨을 위해서도 그럴 수 없었다. "하지만 유즈, 너는 어린데다가.....이런 말하기는 뭐하지만 처녀였잖 니. 그런 네가 그렇게 혼자서 버둥대며 버티려 하는 건 가엾고 안 쓰러운 일이야." 유제니아는 고개를 저었다. "저 혼자 잊는 다고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저 혼자 '그런 일 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고, 다른 모든 사람은 그런 일이 있었던 현실 속에 있는 거에요......그들이 마련한 작은 상자에 들어가서, 그들이 만들어 놓은 게 정말 현실인 것처럼 나 혼자 착각하며 사 는 거죠......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없어요....." "그렇다면 왜 세냐에게는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지?" "알잖아요.....제가 지금도 어떤지..... 처음에는 이것 보다 더 끔찍했어 요. 그대로 말라 죽어 버리고만 싶었고, 그런 저를 지켜보는 세냐는 몇 배는 괴로웠다고요! 하루라도 빨리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 고 싶었어요." "세냐에게 말 하거라." "안 돼요!" 그렇게 외치며 고개를 든 유제니아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리사의 눈 에 노여움이 흐르고 있었다. 동정이 아니라 냉정한 분노였다, 그것은. "그렇다면 너는 뭐가 틀린 거니? 세냐는 너를 거짓된 현실 속에 있게 하더라도 고통 받지 않게 하고 싶었다. 너는 그것을 거부했고....... 하지만 유즈, 지금은 네가 세냐를 그런 거짓 속에 머물게 하고 있구나." "리사는 없어서 몰라요....없어서 모른 다고요! 아니, 다른 사람은 절 대 몰라요! 그게 어떤 일인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게 어떤 건지!" "유즈-" 유제니아는 고개를 저었다. "걱정 마세요. 잊지는 못해도, 그래도 무너지지는 않을 거에요.....그리 고 언젠가는 이겨 낼 거라고요! 이렇게.....벌벌 떨면서 울지 않게 될 때가 올 거에요. 그 때가 되면 세냐에게 말할 거에요.....하지만 그 전에는 안 돼요!" "그렇다면 이겨 내는 동안 너 혼자 모든 고통을 감수하려고 그러는 거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그래서 아무에게도 기대지 않고?" 유제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세냐만 옆에 있어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제가 의지하려 하면 할수록, 세냐는 몇 배로 고통 받았어요......자기 책임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자기가 그 왕자의 비위를 상하게 해서, 그 사람이 저를 겁탈했다고 생각했으니까......!" 유제니아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리사의 주름진 손이 유 제니아의 흠뻑 젖은 볼을 닦아주었다. "예쁜 내 아가......가엾기도 하지. 가엾기도 해라.....울음을 그치 거라, 가엾은 아가." 눈 내리는 소리조차 들릴 듯 했다. 난로의 불길이 오르고, 화덕에서 는 온화한 열기가 뻗어 나왔다. 부글부글 끓는 소리가 들리며, 익 어가는 스튜의 냄새가 풍겨온다. 그리고 쿵쿵- 크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리사는 일어나 도망치려는 유제니아의 어깨를 가만 히 눌러주며 말했다. "어서 와라." 나무문이 삐걱대며 열렸다. 유제니아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가, 추위 에 빨갛게 얼어붙은 소년과 마주쳤다. "저 왔어요, 할머니." 갈색 머리에 갈색 눈을 가진, 반듯한 얼굴의 소년이었다. 키는 그렇 게 크지 않았지만, 변경의 숲을 누비는 경비대답게 어깨와 다리는 아주 다부졌다. 방금 순찰을 끝내고 온 듯, 털 부츠에 털 망토도 눈 을 흠뻑 묻힌 채였다. 그리고 그의 자랑인 창이 그 망토 사이로 비 죽이 튀어나와 있었다. 유제니아는 충혈 된 눈을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웃었다. "다녀왔어, 뮬?" 소년-뮬은 들고 있던 털 뭉치를 내밀었다. 하얀 토끼 한 마리였다. "올무에 걸려있더라고." 그는 그렇게 퉁명스레 말하고는 모자를 벗었다. 이 뮬은 리사가 키운 소년이었다. 아버지는 모른다. 그저 어머니가 임신한 채 이 마을로 왔고, 그를 낳고 2년 만에 죽었다. 리사가 그를 키워주었고, 지금은 경비대에서 일하고 있었다. 뮬은 유제니아를 빤히 바라보더니 물었다. "연기라도 먹었어? 왜 그렇게 눈이 빨개?" "양파." 그리고 스튜를 슬쩍 가리켰다. 뮬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제니아는 그 가 눈치 채지 않기를 바라며 물었다. "그런데.....오늘은 일찍 왔네?" 뮬은 망토를 벗어 건 다음에, 편한 털 신발을 꺼내 갈아 신었다. 유 제니아는 그에게 부츠를 받아 난로 옆에 놓았다. 뮬이 말했다. "파수대에 각각 두 명씩만 남고 모두 들어가라고 했어." 유제니아는 망토의 진흙을 털어주고는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데?" 그리고 유제니아는 등에 닿는 뮬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뮬과는 전혀 상관 없는 일인데, 같은 남자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소 름이 끼쳤다. 참으려고 했지만 결국 고개를 돌리고 뮬을 마주봐야 했 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어색하게 웃었다. "너, 나 불편하냐?" "아, 아냐." 너무나 완강하게 고개를 저어서, 그게 더 어색하게 보였다. 뮬은 별 수 없다는 듯 귀를 긁적이고는 체념조로 말했다. "나도 내가 채인 거 알고 있고, 어쨌든 상대가 세냐인 이상 도리 없 다는 것도 알고 있어. 너무 신경 쓸 필요 없고, 그렇게 미안해하지도 마라. 그러면 그럴수록 내가 더 처량해진다. 아까워져서." 그게 아냐, 너하고 전혀 상관없는 이유 때문에 이러는 거야- 죄책감과 함께 우울한 기분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유제니아는 빙그레 웃었다. "오늘 무슨 일이 있어서 모두 돌아간 거야?" "아무래도 숲의 왕이 바뀌려나봐." 스튜 맛을 보던 리사가 말했다. "뮬, 왕이 바뀐 지는 고작 3년도 안 됐다. 덩치 큰 늑대를 너희들이 잘못 본 거겠지." "하지만 저도 봤다니까요! 정말 왕이 될 녀석이었다고요! 아니, 다른 놈이 숲의 왕좌에 있다는 건 절대 상상도 할 수 없어요." 뮬은 정말 잔뜩 들떠 있었다. 유제니아는 잠시 우울한 기억을 잊었다. 자기도 모르게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어땠는데?" 그 표정에 뮬도 신이 났는지 얼굴이 붉어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유제 니아가 뉴마르냐의 변방 기지로 돌아온 후 가장 밝은 얼굴이었다. "조제크 작은 대장이랑 순찰을 돌고 돌아오는 길이었지. 그런데 해가 저문 지 꽤 된데다가 눈발까지 날리기 시작해서 서둘러 기지로 들어 가다가 그만 길을 잘못 들고 만 거야. 물론 멀리 돌아간 건 아니라서, 금방 방향을 잡고는 제 길로 들어섰지만 말이야. 그런데 오던 길에 이상한 발자국을 발견했지. 정말 덩치 큰 놈이 산책 한 듯 이리 저리 돌아다닌 듯한 그런 발자국 말이야!" 그리고 잠시 뮬은 유제니아의 얼굴을 살피며 말을 멈추었다. 유제 니아가 가까이 다가오며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 "내가 따라가 보자고 했지. 다들 이건 브라달로스의 아들놈이 남긴 거라고, 따라갔다간 당장에 그 밥이 되던가 늑대인간이 되던가 할 거라고 말렸지. 하지만 말이야, 그 정도로 그만둘 수는 없잖아. 그 래서 꼬시고 꼬셔서 기어코 데리고 갔지.....그리고 얼마 가지도 않 아서 녀석을 발견했어!" 뮬의 눈이 빛났다. 모험가 기질이 다분한 그는 신기한 것이 있으면 위험하든 말든 무조건 달려가 확인해야 만족했고, 그것이 최상으로 만족되면 이렇게 아이처럼 기뻐한다. "눈 덮인 비탈에 서서는,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었지. 하지만 지 금 그 숲에 돌아다니는 브라달로스의 일흔 두 번째 아들, 숲의 왕 은 아니었어.....지금 왕 되는 녀석이 시커먼 털이라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잖아? 그런데 녀석은......" 뮬은 훌륭한 보석을 발견한 사람처럼 들뜬 목소리로 답했다. "은빛- 정말 눈 덩어리나 달빛으로 만든 듯한 은빛이더라고-!" 유제니아가 가볍게 탄성을 질렀다. 그런 유제니아의 모습에, 뮬은 진심으로 기뻤다. 돌아온 내내 색깔 잃고 시드는 꽃처럼 안타깝기만 했던 유제니아가, 이제 다시 예전의 반짝임을 가지고 그 앞에 있었다. "덩치는 어마어마했지만, 정말 아름다운 거인처럼 날렵해 보였어. 게 다가 두 앞발에는 팔찌가 채워져 있었는데, 조제크는 그게 아마도 알 르간드의 여왕으로부터 선사받은 걸 거라 했지.....맞는 말일 거야. 브라달로스의 아들들은 언제나 알르간드의 여왕에게 사랑과 충성을 바치니까. 이제 막 탄생한 젊은 왕에게 그녀가 선물로 준 걸 거야." "왕....?" "그래, 그야 말로 진짜 왕이었어. 그리고 아마도 여태 탄생한 숲의 왕 중에서 최고로 근사한 왕일 거야." 그러던 뮬은 유제니아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발견했다. 방금 전의 그 호기심어린 반짝임이 아닌, 온 빛이 모여드는 듯 그런 진한 반짝임이 었다. 그런 유제니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오늘.....달이 뭐지?" "아, 멧돼지 아주머니가 오늘 돌산으로 갔잖아. 당연히 보름이지...." 그리고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유제니아를 돌아본 뮬은 놀라 고 말았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그냥 호기심에 어린 잠시의 미소도 아니고, 거짓 된 미소도 아니고, 정말 진심과 심장이 비추는 햇살 같은 미소였다. ******************************************************************* 작가잡설: 아아, 몽쉘 미쉘같은 수도원에서 며칠 찬물 마시며 수도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군요. -_-;; 번뇌를 잊어라, 번뇌를~~~ 으윽! 이래저래............으휴.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48장 *************************************************************** [겨울성의 열쇠] 제222편 하얀 숲의 왕#3 **************************************************************** 그날 밤 눈은 그리 많이 오지 않았다. 바람은 거세지 않고, 덧문도 꼭꼭 닫혀 있어 리사의 오두막 안은 그 날 밤 내내 아주 조용하기만 했다. 들뜬 뮬은 유제니아에게 이 이야기 저 이야기 잔뜩 하다가 겨우 잠들 었다. 리사는 벽난로가 새벽 내내 식지 않도록 마법을 걸어 놓고는 짚으로 된 침대위에 몸을 눕혔다. 유제니아는 그녀를 위해 마련된 2층의 침대 위에 누워 얼핏 선잠이 들었다가, 거센 바람이 확 불어오는 소리에 문득 깨어났다. 유제니아는 찬바람이 세게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며 창문을 살짝 열 어 보았다. 구름이 걷히며 하늘이 파랗게 밝아오고 있었다. 아직 어둑어둑했지 만, 눈이 뿜어 올리는 뽀얀 빛과 어슴푸레한 미명에 조금씩 그 푸 릇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유제니아는 덧창을 탁 닫고는 일어났다. 어차피 잠은 오지 않을 테 고, 그런 마당에 눈 뜨고 시간 낭비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얼른 옷을 갈아입고는 장갑과 부츠를 신었다. 그리고 막 목도리를 찾는데 , 1층과 연결된 사다리 끝에서 뮬의 얼굴이 불쑥 튀어 나왔다. 유제니아는 정말 기절할 뻔 했지만 간신히 뒤로 주춤 물러나는 것 정 도로 끝낼 수 있었다. "갑자기 불쑥 튀어나와 놀랐잖아, 뮬." 뮬이 히죽 웃었다. "너, 궁금해서 나가보려고 그러는 거지?" 유제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뮬의 차림을 보니, 그는 완전히 제대로 차려입고 있었다. 그는 턱으로 밖을 슬쩍 가리켰다. "잠깐 나갔다가 오자. 소집시간 전까지는 돌아올 수 있을 거야." "같이?" "나도 남자라 '여자아이를 보호하고 싶어서'하고 핑계대고 싶지만, 그 건 거짓말이고. 사실 무진장 궁금해서 한숨도 못 잤단 말이야." 유제니아는 조금 어색하게 웃어야 했다. 그렇다면 밤 새 뒤척이는 걸 알고 있겠구나. 아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녀가 밤에 잘 자지 못한다는 것은, 리사 뿐만 아니라 뮬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뮬 이 이렇게 나오는 것도, 평소에는 푸석 마른 듯 만사에 무관심하던 유제니아가 어제 밤 이야기에 꽤 흥미를 보였기에 어떻게든 유제 니아를 즐겁게 해 주고 싶어 하는 것이다. 유제니아는 다시 뮬에게 미안해졌다. "어서 나가자." 유제니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사다리 쪽으로 왔다. 뮬이 얼른 뛰어내 리더니 손을 내밀었다. 어찌할까, 하다가 유제니아는 그가 허리라도 안으면 자기도 모르게 놀라 펄쩍 뛸 것 같아서 그만두기로 했다. "혼자 내려갈게." 유제니아의 말에 뮬은 조금 실망한 듯 어색해진 손을 옷자락에 문질 렀다. 유제니아는 그런 뮬을 안쓰럽게 보고는 볼에 입을 맞추었다. "미안, 뮬. 하지만.....이해해 줄래?" 뮬의 눈이 커지더니, 이내 그 볼이 붉어졌다. "툴칸에서 숙녀 교육이라도 받고 온 것 같다, 너. 예전에는 위험할 정 도로 부비 대더니, 요즘은 손도 못 대게 해." 어색해지는 것이 싫어서 유제니아는 어깨만 으쓱하고는 돌아섰다. 다 행히 뮬은 더 이상 가까이 오지 않았고, 유제니아는 겨우 안도하며 문을 열고 오두막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밖은 한겨울의 새벽답게 깨어져 나갈 듯 추웠다. 구름이 걷혀가는 하 늘은 파르라니 깨끗했고, 별빛은 새날의 빛 속으로 녹아들고 있었다. 아직 지지 않은 보름달은 서산 끝에 걸려 점점 빛을 잃으며 분가 루 칠한 듯 하얗게 변해가고 있다. 마을의 집의 지붕과 담벼락, 작은 텃밭은 온통 같은 색 눈에 뽀얗게 덮여 있어 뽀송한 솜털을 뒤집어 쓴 갓난아기 같았다. 아직 구석구석 컴컴했지만, 눈빛 덕에 주변은 쉽게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환했다. 유제니아는 금세 귓불이 얼어붙는 것을 느끼며 숨을 내 뿜었다. 뿌연 성에가 어리다 사라지고, 그보다 더 하얀 구름이 마을을 둘러싼 나무 성벽 너머로 흐르는 것이 보인다. 유제니아는 하얀 것을 보니 왠지 가슴이 아팠다. 세르네긴은 정말 그 런 것 따위 신경 쓰지 말라고, 그런 것 따지는 것 자체가 말 도 안 되는 거라고 몇 번이나 다그쳤지만, 하얀 것을 보면 그냥 서러 워진다. 더럽혀졌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몸 한구석이 와작 뜯겨져 나가 진흙탕에 처박혀 버린 듯해 서러워지는 것이다. "어서 가자." 뮬이 말했다. 유제니아는 멈추었던 발걸음을 떼고 그를 따라갔다. 흰 눈 곱게 쌓인 길 위로 발자국이 뽀득 뽀득 새겨졌다. 아직 해가 뜨려면 조금 걸릴 것 같았다. 하늘은 하얗게 환해지고, 눈 덮인 산자락이 푸릇하게 떠오른다. 그러 나 어느덧 구름이 물러나는 방향에 있는 동쪽 끝이 점점 발그레하게 타올랐다. 소나무 전나무들은 거친 껍질과 날카로운 잎 위에 눈을 두텁게 얹고 있었고, 유제니아와 뮬이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눈 덩어리를 우수수 떨어뜨렸다. 숲은 점점 깊어졌고, 비탈도 가팔라졌다. 뮬이 먼저 올라가 나무 둥치를 붙잡고는 유제니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예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아하, 숙녀가 되어 돌아왔으니 숙녀 대접을 해 드려야지." 유제니아는 피식 웃고는 그의 손을 잡았다. 이 정도 비탈을 못 오를 리 없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신경 써 주는 뮬이 고맙기는 했다. 그 러나 막 발을 디뎠을 때, 바닥에 있는 돌을 잘못 밟아 미끄러지고 말았다. 돌은 그대로 뽑혀 비탈 아래로 굴려갔고, 유제니아의 몸도 넘어질 듯 기우뚱했다. "꺄앗-" "유즈!" 뮬이 손을 뻗어 유제니아의 허리를 끌어 당겼다. 유제니아는 자기도 모르게 그 팔을 붙들며 그의 가슴에 안겼다. 작은 한숨 소리가 들 려왔다. 그러나 유제니아는 그 순간에, 가슴속에서 머리끝까지 오 싹하고 두려운 것이 확 치밀어 올랐다. 유제니아는 자기도 모르게 그의 손을 탁 쳐버렸다. 그러나 지나쳤다. 너무 세게 쳐서 찰싹 소리 가 날 정도였고, 뮬이 아픔에 눈을 찌푸렸다. "미, 미안!" 유제니아는 다급히 사과를 했다. 그러나 뮬은 잠시 멍하니 있더니, 갑자기 유제니아의 어깨를 양 손을 붙잡았다. "너 요즘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아, 아냐. 아니라니까....실수 한 것뿐이야!" "한두 번 해야 실수라고 봐 주지! 솔직히 말해. 내가 그렇게 싫은 거 야? 싫은 거냐고-!" 뮬이 정말 화가 나서 버럭 버럭 고함까지 지르며 유제니아를 다그치 는 것이다. 그의 양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고, 점점 가까워진다. 다시 소름이 끼치기 시작했다. 두려워진다. 겨우 외면했던 그 추악하 고 무서운 것이 솟아 나오려 하고 있다. 유제니아는 뒤로 주춤 물 러나려 했지만 뮬의 팔이 유제니아를 와락 끌어안았다. 팔에 더욱 힘 이 들어가며, 뮬의 단단한 가슴이 볼에 와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그러나 몸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려왔다. 치밀어 오르는 공포에, 주체 를 할 수 없었다. 그도 그 날 밤 이렇게 안았지.......단단하게, 무섭게, 꼼짝도 못하도 록...... "놔--!" 갑자기 터진 날카로운 비명에 뮬이 당황해서 팔을 풀었다. "왜 그래, 갑자....." 유제니아가 버둥거렸다. "놔, 놓으라니까! 제발 놔 줘! 싫어-!" "유즈, 왜 이래!"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뮬은 그 어깨를 붙들었다. 그러나 유제니아 는 울부짖으며 그의 팔을 뿌리쳤다. 눈물이 치솟으며 머리 속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다. 꿈인지 현실인 지, 그 때인지 지금인지 모르겠다. 아니, 공포 때문에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도망쳐야 해, 도망쳐야 해, 붙잡히면 이제 정말 끝장 날 거야! "싫어...!" "유즈-!" 버둥대던 유제니아는 어깨를 쥐어뜯을 듯 감싸 안으며 주저앉았다. 그리고 결국 차가운 눈에 얼굴을 묻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뮬이 손을 내렸다. 그의 눈이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떤 놈이야." "....." "어서 말해, 어떤 개자식이 너한테 그런 짓을 한 거냐고--! 어떤 개 자식이야-!" ".....그만 해...." 정말 죽고 싶었다. 또 누가 알아 버렸어...... 그런데 다른 사람이 알 면 알수록 상처는 배가 되어 버린다. 더 움츠러들어서, 어디로든 아무도 없는 곳으로 숨어 버리고 싶어진다. 위로하면 할수록 비참 해진다. "제발.....제발 그만해.....!" "유즈-!" 유제니아는 몸을 일으켰다. 뮬이 일으켜 주려 했지만, 뿌리치고는 비 틀 비틀 일어났다. "아무....말도 하지 마."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됐어! 내 속 뒤집지 말고 말 해. 어떤 자식이 그런 짓을 했어-! 어떤 개자식이! 당장 죽여 버릴 거야--! 당장!" 갑자기 화가 났다. 그녀의 볼에 입 맞춰 주면서 당분간만 뉴마르냐에 있으라고 다정하게 말했던 세르네긴이 생각난다. 그 역시 말했었다. 잠시만 헤어지는 거야. 그리고 돌아오면 평생 네 옆을 지켜줄게, 누구도 손대지 못하도록, 오로지 나만 믿고 내게 의지하며 살 수 있도록..... 몸이 떨린다. 슬퍼, 무서워, 화가 나, 그래서 다 진절머리 나. "가지 마...." "그럼, 너 혼자 그렇게 억울하고 말겠다는 거야?" "그럼 죽을 게 뻔한 길로 가겠단 거야! 개죽음 당하겠다는 거야--! 겨우 나 때문에!" "대체 어떤 자식이기래 그러는 거야! 그렇게 센 놈이야! 아아, 그래! 그러니까 너한테 그런 짓을 하고도 뻔뻔하게 살고 있겠지!" 유제니아는 뒤로 주춤 물러났다. 뮬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하지만 황제 폐하라 해도 상관없어! 어서 말 해! 그 자식이 누구야 --!" 참을 수 없었다. 왕자인 걸, 아버지는 지상에서 가장 무서운 왕인 걸.......널 잡아 찢어 죽이고 말 거야. 갈기갈기 찢어서는 삼켜 버릴 거라고! 차라리 내가 참는 게 나아, 다른 사람....소중한 사람들을 그 앞에 내 복수를 위 해 가라고 할 수는 없다고! 세르네긴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복수보다는 세르네긴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세르네긴이 안전과 그녀의 몸을 바꾸라면 얼마든지 그리 할 것이라고. 그러니 가지 말라고! 잊은 척 하고 참으면 그렇게 될 줄 알았다. 유제니아만 괜찮아지면 모두 괜찮아 질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때부터 유제니아는 그 문제 자체에서 떨어져 나가 버리고 말았다. 관여할 수조차 없게 되어 버렸다. 그냥 소중한 물건처럼, 자물쇠 잠긴 광속에 안전하게 앉아 지켜만 봐야 했다. "유제니아!" "........." 유제니아는 돌아섰다. 뮬이 다가오자 발걸음을 더 빨리 했다. 달려오 려 하자, 결국 유제니아는 비탈을 타고 뛰기 시작했다. 이대로 무 책임하게 도망치고 싶은 건 아니지만, 적어도 잠시 동안만은 아무도 없는 곳에 있고 싶었다. 동정도 분노도 연민도 싫었다. 그냥 혼자 있고만 싶었다. 찬바람이 젖은 볼을 얼렸다. 눈을 벌써 예전에 감고 있어서 어디로 어떻게 달리는 지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무 없는 빈 공터에 도착했다. 하늘은 이미 파랬고, 하얀 구름들은 발그레하게 물들어 동쪽으로 흘러간다. 서산에는 아직 쪽빛 어둠이 머물고 있었지 만, 동쪽만은 불타는 듯 하다. "유제니아--!" 멀리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유제니아는 돌아섰다가 다시 도망치려 했다. 흠뻑 젖은 눈에 헤쳐진 바닥이 눈에 뜨였다. 곰처럼 큰 짐승이 누워 있었던 듯, 엉망이었다. 그제야 유제니아는 자신이 뉴마르냐의 변방 숲, 마법의 땅인 알 르간드로 향하는 숲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맙소사, 이렇게 되면 위험할 텐데.....그런 생각이 들다가도, 그 알르간드로 가면 적어도 아무도 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혼자 있고 싶었다. 하루만 그렇게 쉬면, 모든 것을 다 받아들 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순간 크릉- 하는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마어마하게 큰 짐승이 근처에 있는 듯 하다. "!" 유제니아는 방금 전 헤쳐진 흔적 위에 눈이 덧쌓인 흔적이 전혀 없 고, 그 주변에 금방 찍힌 발자국도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섭 다가도, 그냥 잡혀 먹혀 버리고 싶어지기도 했다. 어떤 고통이든, 휘안토스에게 강간당한 그날의 참담한 고통보다는 못해 보였다. 그 뒤에 겪었던 역시나 지옥처럼 가슴 아픈 나날들만도 못해 보였다. 하 지만, 그러다가도 두려워졌다. 아직 세르네긴에게 거짓말 한 것이 있는데, 뮬에게 미안한 짓을 저 질렀는데, 리사의 걱정을 덜어주지도 못했는데, 아직, 아직.....아직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을 못 만났는데..... 젖은 눈동자에 창백한 하얀 달이 높고 날카롭게 솟은 서산으로 넘어 가는 것이 보인다. 다시 크릉- 사나운 으르렁거림이 등 바로 뒤에서 바짝 들려온다. 눈 밟는 소리도 너무나 가깝다. 돌아서면 무언가 엄 청나게 무시무시한 것과 대면할 것 같고, 그대로 갈기갈기 찢겨지며 끝장날 것만 같다. 순간 발치의 눈이 발그레하게 물드는 가 싶더니, 나뭇가지 위로 그림 자가 솟구쳤다. 햇살이 쏴르르 쏟아지며 그 위의 눈이 연한 장밋빛으 로 타오르며 반짝인다. 푸릇한 그림자는 선명했고, 어둠을 씻어낸 눈 과 세상은 환하게 기뻐하는 듯 하다. 스륵....가벼운 옷자락 소리가 난다. 뿌득- 눈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방금 전처럼 천둥이라도 친 듯 바닥이 떨릴 정도는 아니었다. 유제니아는 솟구치려는 울음을 겨우 삼키며 천천히 돌아섰다. 비쳐드는 햇살에 눈이 따가웠다. 고동치는 가슴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냥 눈물만 나왔다. 엉엉 울어 젖히 고 싶을 만큼, 그러나 가슴이 꽉 조여드는 것 같아서 눈물은 샘솟듯 조 용히 흐를 뿐이었다. 차가운 두 손이 양 볼에 다가와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고, 그녀를 바 라보는 그 찬란한 금빛 눈동자에는 진한 그리움과 슬픔이 담겨 있었다. ******************************************************************* 작가잡설: 아키, 제발.....실수 좀 하지 마, 실수 좀!!! 대체 몇 번째야! (무슨 실수? 아이, 그런 거 있잖아요.....발그레)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48장 *************************************************************** [겨울성의 열쇠] 제223편 하얀 숲의 왕#4 **************************************************************** 휘안토스는 햇살이 비껴드는 순간에 눈이 따가워져 눈을 떠 버렸다. 바다위로 햇살이 쏟아 부은 듯 한꺼번에 반짝이기 시작하고, 붉게 물 들었던 구름들은 이제는 황금빛으로 빛났다. 신선한 겨울 아침 햇 살에, 모든 것은 차갑고 깨끗하게 불타오른다. 휘안토스는 아무 생각 없이 바닷가를 바라보고 있다가, 그 환함이 눈 부셔 잠시 고개를 돌렸다. 어둠이 씻겨 내려가듯 간밤의 피로가 쌓여 만든 몽롱함 역시 부드럽게 사라진다. 벌써 몇 번의 보름이 지나갔지만, 그 환한 보름달이 뜨면 언제나 잠 이 오지 않는다. 달의 변화에 신경 쓴 적은 전혀 없는데, 너무 잠이 안 와서 뒤척거리다가 문득 창밖을 보면 언제나 만월이 휘황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전날 역시 마찬가지였다. 피로가 쌓여서 당연히 푹 쓰러져 잠 들어야 했는데, 해가 저문 지 한참이 지나도 잠이 들지 않았다. 몇 번을 뒤척이다가 창밖을 보니 역시나 만월이었다. 휘안토스는 되지 않는 일에 매달리는 취미는 없었다. 그래서 침실을 나서, 혼자 생각할 일이 생기면 늘 앉아 있곤 하던 서탑 꼭대기에 있는 봄의 방으로 향했다. 잠이 오지 않으면 그 잠 안 오는 시간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머 리는 멍한데다가 약간 초조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어서 시간이 가고 날이 새기만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역시나 잠이 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꾹 참으며 눈을 감고 있다가 결 국 새벽 2시가 넘어서는 일어나야 했다.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챙겨 입고 어디로 갈까, 하다가 서쪽 탑의 봄 의 방으로 향했다. 다른 사람들 눈에 뜨이지 않고 있을 만한 곳은 성 안에서는 그 방뿐이다. 그렇다고 특별히 무언가 할 일이 있는 건 아니라, 그저 앉아 있었을 뿐이다. 불도 피우지 않아 방은 얼음장 같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새벽을 보내다가 싸늘한 밤의 어둠 속으로 희끄무레한 빛이 퍼지고 세상의 윤곽이 잿빛으로 떠오를 무렵에 처음으로 잠깐 잠에 들었다. 정말 아주 잠깐이었을 뿐이다. 눈을 떴을 때, 잿빛이던 세상은 아침 햇살에 발그레하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구석진 곳에는 푸릇한 어둠이 남아 있었지만, 암롯사의 대 궁전이 내려다보는 산 파로이의 지붕 끄트머리 높이 솟은 첨탑의 끝 에 빛이 맺혀왔다. 아무 꿈도 없었다. 오로지 오랜 갈증을 축인 듯한 달콤한 만족감만이 있었다. 그래서 휘안토스는 다시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어둠이 완전히 빛에 쓸려나가기 전에 좀 더 자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어둠 속에 숨어있던 꿈이, 그렇게 눈을 감는 순간에 무섭게 빠른 속도로 튀어나와 휘안토스를 덮쳤다.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휘안토스는 벌써 모든 것을 보고 느껴버렸고, 그렇다고 눈 을 뜨고 잠에서 깰 수도 없었다. 비껴드는 햇살이 겨우 그 꿈을 쫓아내며 휘안토스를 현실로 와락 끌어왔다. 휘안토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쏟아지는 햇살이 오른 편의 벽을 선 명하게 비추며, 그곳은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빛나고 있 었다. "젠장....!" 휘안토스는 갑자기 울컥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주먹을 움켜쥐며 의자 를 후려쳤다. 차라리 모르면 좋으련만- 차라리-! 알르간드와 마주하는 뉴마르냐의 모든 변방 기지에는 사냥개들을 잔 뜩 키운다. 이 사냥개들은 수 백 년 간 공들여 품종을 다듬은 지방 특산으로, 돈 많은 귀족들도 '뉴마르냐 산'이라면 최고로 치며 값 을 듬뿍 매겨 사들인다. 그러나 이 사냥개들이 용맹하고 튼튼하며 사나운 것은 생존을 위한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알르간드와 면한 변방 숲에는 아직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이상한 것이 잔뜩 있고, 겨울만 되면 그것들이 마을 쪽으로 어슬렁어슬렁 기어 내려온다. 마을로 내려올 정도의 것들은 거의 대부분 가축들만 배불리 집어 삼 키고는 사라지지만, 때때로 사나운 것들이 있어 사람들을 습격하기도 한다(그러나 정말 위험한 것은 마을로 잘 내려오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사납고 위험한 만큼이나 주변 환경에 지나칠 정도로 까 다로워서, 숲이나 늪 밖으로는 잘 나오지 않으려 하니). 이런 이상한 것들이 오면, 개들이 가장 먼저 알아보고 짖어대기 시작 한다. 한두 마리가 먼저 알아채고 짖기 시작하면, 다른 것들도 일 제히 짖어대며 날뛰기 시작한다. 그 때면, 성의 경비대는 창과 칼을 들고 성 안으로 기어들어온 마물을 찾아내야 한다. 물론 가끔 도 망자들이 기어들어오다가 경비대에게 들키는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해가 떠오르고 세상이 온통 환해질 무렵, 개들이 갑자기 짖기 시작했 다. 그것도 묶어 놓은 줄을 끊어놓기라도 할 듯 펄쩍 펄쩍 날뛰며 사납게 짖어댔다. 성벽의 모든 개들이 짖어대는 바람에, 마을 전체 가 개 짖는 소리로 가득 찼다. 말들과 다른 가축들도 불안해서는 히잉 꾸룩 울어댔고, 마을 사람들은 아침에 그들이 그렇게 사나운 이유를 짐작 못해서 당황했다. 마물들은 낮에는 결코 사람 마을 근 처로 들어오지 않는다. 의외로 까다로운 족속인 데다가, 마을이란 곳을 사냥하는 데는 낮보다 밤이 훨씬 더 편한 시간이라는 것을 오 랜 본능으로 잘 터득하고 있었다. 파수대의 병사들은 대체 얼마나 굉장한 것이 나타나서 그러나 해서 숲 쪽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물론 잔뜩 경계해 두는 것은 잊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숲 쪽에서 한 사람이 달려 나왔다. 그런데 그 사 람의 망토는 경비대의 것인 데다가, 그 얼굴마저도 유명한 녀석이라 경비대는 더 당황했다. "뮬 아냐?" "뮬이네." 다들 허탈하기까지 했다. 행여나 그가 그 '굉장한 녀석'에게 쫓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했으나 느긋하게 걸어 나오는 폼을 보고는 그 가정 역시 집어치워야 했다. 그렇게 지켜보고 있는데, 뮬 뒤로 새벽에 그와 같이 성을 나갔던 유 제니아와 낯선 남자 하나가 따라왔다. 그리고 그제야 경비대는 그 남자에 주목했다. 그냥 보기에는 특별한 점은 없었다. 몸매는 늘씬했고, 키는 조금 큰 편이다. 수도자처럼 검은 로브 차림에, 깊은 후드로 머리를 가리고 있었다. 역시나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개들이 더욱 날뛰기 시작했다. 이제는 꼬리까지 집어넣고 으르렁 그르렁대는데, 정말 손 쓸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 요란한 소리에, 남자는 잠시 멈추어 서서는 성벽 위를 올려다보았 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평범한 사람일 뿐, 특별히 위험하거나 수 상한 기색은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환한 아침이다. 수상한 마물들 이 절대 기어 나올 수 없는 시간이다. 그의 옆에 있던 유제니아가 성벽을 향해 손짓을 보냈다. '수상한 사람 아닙니다. 여행자입니다.' 라는 신호였다. 경비대는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고, 결국 그들의 대장이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어이, 유즈--! 그 손님 분 얼굴 좀 보게 해 다오." 유제니아는 남자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겼다. 그러자 남자가 팔을 들었다. 팔목에 걸린 팔찌가 반짝이는 가 싶더니, 그의 얼굴을 가린 후드가 벗겨지며 햇살에 눈부신 은빛 머리카락이 쏟아졌다. 그러 나 얼굴은 멀어서 잘 보이지 않아 확인하기 어려웠다. 대장 로이드가 크게 외쳤다. "유제니아! 잠시 그곳에서 기다려라!" 유제니아가 당황한 듯 했다. 그 남자의 옷소매를 꼭 붙잡더니 외쳤 다. "아저씨, 이 분은 제 친구에요--! 사정은 설명해 드릴 게요." "미안하다. 그래도 개들이 너무 심하게 짖는 구나. 우선 확인 하고 들 여 보내줄 테니 걱정 말려무나." 유제니아가 잠시 말없이 있더니 결심한 듯 아주 크게 외쳤다. "이 사람, 늑대인간이에요!" "뭐?" 그렇다면 개들이 짖어대는 것도 이유가 있는 것이다. 지나치게 과민 반응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아예 납득 못할 정도도 아니다.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로이드 대장은 턱을 긁적였다. 옆에서 부대장 이 어떻게 할지 빨리 결정하라고 슬쩍 바라보자, 대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외쳤다. "내가 확인해 보마!" 유제니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낯선 소년에게 작게 뭐라 속삭였 다.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개 짖는 소리가 뚝 멈추며 주변이 갑자기 조용해 졌다. 로이드 대장이 급히 주변을 둘러보니, 개들 은 이제 겁먹은 듯 꼬리를 배 아래에 척 감으며 끙끙대고 있었다. **************************************************************** 작가잡설: 초반의 마법사들은.....역시나 베이나트, 지에나, 팔로커스 입니다. ^^ 붉은 머리 마법사는 팔로커스 씨가 맞습니다. (이 때만 해도 꽤나 멀 쩡했더래지요....-.-;)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48장 *************************************************************** [겨울성의 열쇠] 제224편 하얀 숲의 왕#5 **************************************************************** "아저씨가 오면 그냥 적당히 말 해." 유제니아는 소년 - 아킨의 옷자락을 잡으며 말했다. 눈이 마주치자 아킨이 웃어보였다. 별로 변한 것은 없었지만, 이상하게 예전보다 훨씬 보기 좋은 느낌이다. 어디가 달라진 걸까. 은빛 머리카락은 확실히 예전 보다 상당히 길어 져 있었지만, 얼굴은 거의 달라지지 않은 듯 했다. 그리 생각하다 유제니아는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당연하잖아. 나한테만 견디기 어려워서 길고도 길었을 뿐,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길지도 않은 시간인데. "어떻게 답하면 되는 건데?" "많이는 안 물어 볼 거야. 그냥 이름, 나이, 출신지, 부모님 성함 정 도.....아키는 별로 숨기지 않아도 되잖아." 그런데 옆에서 뮬이 불쑥 물었다. "몇 살이요, 당신?" 상당히 시비조였다. 유제니아는 아킨의 눈에 떠오르는 당혹감을 발견 했다. 어떤 답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유제니아는 갑자기 불 안해졌다. "혹시 또 다 잊어버린 거야?" "설마.......하지만 그 동안 계획적으로 산 게 아니라서......저기, 지금 몇 월이지?" "2월." "12월이 아니고?" 조금 놀란 듯 했다. 그러나 바닥에 쌓여 있는 눈을 맨 발로 걷어차듯 툭툭 치더니 웃으며 중얼 거렸다. "하긴, 여긴 한참이나 북쪽이니까." 그러니 2월이 되어도 이렇게 새 눈이 내려 쌓이는 것이 당연한 것이 다. 질문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뮬이 다시 부루퉁하게 물어왔다. "이봐요, 몇 살이냐고 물었잖아요." 그런데 아킨은 엉뚱하게 유제니아에게 물었다. "유즈, 너 지금 몇 살이지?" "아직 열여섯." 아킨의 눈이 커졌다. "열....일곱이나 여덟이 아니고?" 유제니아는 아킨이 왜 이렇게 묻는 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지금 상 황에서는 너무나 엉뚱하기만 한 질문이었다. "내 생일이 4월이니까 아직 열여섯이야. 당연하잖아." 아킨은 정말 믿을 수 없다는 듯 멍청하게 유제니아를 보았다. "그럼 우리가 헤어진 게 언제지?" 옆에 있던 뮬의 눈이 한번 번쩍 빛났지만 아킨도 유제니아도 눈치 채 지 못했다. 아킨은 당황해서였고, 유제니아는 그 당황한 아킨에게 당황해서였다. 당시 일이 기억나 유제니아는 창백해지기는 했지만, 곧 옅게 웃으며 답했다. "작년 10월." 아킨의 눈이 더 커졌다. 이제 그는 정말 놀라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는 믿어지지 않는 다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정말 이런 일이 가능하 냐는 듯 격이 확 올라간 놀라움이었다. "한 2년은 흐른 줄 알았는데.....정말 넉 달 밖에 안 지난 거야?" "당연하지, 아키. 그런데 갑자기 2년이라니? 갑자기 왜 그런......" 아킨은 고개를 저었다. "정상적인 곳에 있었다고 보기 어려운 건 사실이고, 알고도 있었는데 이 정도 일 줄은 정말 몰랐으니까. 넉 달이라....지엔의 말이 정말 맞았구나. 터무니없다고 생각해서 그녀가 착각한 거라 생각했는데." "지엔?" 그 때 대장이 눈밭을 가로질러 달려왔다. 아킨이 보니, 건장한 체구에 짧고 까만 곱슬머리를 가진 중년 남자였 다. 그는 우선 아킨을 훑어보고, 그 눈동자를 유심히 살피더니 고 개를 끄덕였다. "늑대인 건 맞구만. 그래, 꽤 젊은데 올해로 몇 살인가?" ".......열아홉입니다." 로이드 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나이 보다는 어려 보이는 군." 유제니아는 그렇게 답하는 아킨의 웃음이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문을 통과하자, 유제니아는 곧장 아킨을 데리고 리사의 집이 아니 라, 그렉과 소피아가 살아 있을 때 살던 옛 집으로 데리고 갔다. 뮬도 따라가려 했지만, '일해야지?' 하고 음산하게 말하는 동료들에 게 붙들려 버렸다. 집은 마을 어귀에 있었다. 아무리 유제니아의 아버지 그렉이 요새 사 령관을 지냈다고는 하지만, 구석진 변방에서는 대단한 관저를 주지는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아득할 정도로 엉망인 집이어서 2 년 뒤에 다른 집을 구해 이사 가야 했다. 이사람 저 사람 엉망으로 쓴 관저가 아닌 깨끗한 새집에서 살게 되자, 유제니아의 어머니 인 소피아는 집을 정성스레 가꾸어서 마을에서 제일 근사한 곳으로 만들어 놓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유제니아는 집을 팔지는 않았다. 아니, 에크롯사의 법에 따라 그 집은 유제니아가 아닌 세르네긴의 소유가 되었으니 그가 직접 나서지 않는 한 집은 어떻게 처분할 수 없기도 했다. 그래서 결국 하멜버그로 떠날 때 깨끗하게 청소하고 문만 잠그고 갔고, 돌아온 후로는 적적하게 지내게 된 유제니아를 안쓰러워 한 리사의 배려로 그녀의 집에서 살게 된 것이다. 집안은 너무 오래 비워두어서, 먼지는 없었지만 적적하고 메마른 느 낌이 가득했다. 벽난로는 오랫동안 쓰지 않아 재 한 움큼 없었고, 벽에는 겨울을 지 세기 위해 말리는 채소나 소시지 한 줄기 없었다. 곡식을 넣어두는 단지도 모두 텅텅 비어 있고, 부엌의 오븐도 굳게 걸어 잠겨 있었다 . 게다가 바깥이나 다를 바 없이 춥기만 했다. 유제니아는 우선 벽장을 뒤져 부츠 하나를 꺼내 아킨 앞에 놓았다. 아킨은 숲 속에서부터 맨발이었다. "세냐가 신던 건데, 잘 맞을 거야." 아킨은 멍하니 있다가, 유제니아가 부츠를 흔들자 얼결에 받아버렸 다. 유제니아는 벽난로 옆에 쌓인 장작들을 안에다 쌓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가 부싯돌을 찾자, 아킨은 그녀의 어깨를 옆으로 밀고 는 벽난로로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순간 불길이 펑 하고 터지더니 , 장작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잠시 뒤 집 안은 조금씩이나마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쉬고 있어, 아키. 나는 리사 네 집에서 먹을 것 좀 얻어 올게." 그리 말하고는 유제니아는 집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정원을 나가기 전에 돌아보니, 아킨은 난롯가에 서서 그 위에 얹힌 자그마한 조각 상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유제니아는 대체 왜 아킨이 방금 전에 자기 나이도 기억하지 못했던 것인지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아주 오래 지났다면 모를까, 고작 작 년에 헤어졌는데 그것도 헷갈리다니. 게다가 2년은 지난 줄 알았다 하지 않았나. 몇 개월 차이라면 몰라도, 그렇게 크게 차이가 나니 너무나 이상하다. 착각할 만한 차이가 아닌 것이다. 본인은 아니 라고 말하지만, 예전처럼 또 기억을 잃다가 최근에 되살아난 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며 유제니아는 리사의 집으로 향했다. 도착하니, 리사 는 오두막 구석에서 청동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유제니아가 살 그머니 들어오자, 리사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유즈-" "아, 리사. 친구가 찾아왔어요. 아침 정도는 차려 주고 싶어서 그러는 데, 좀 가져갈게요." 어차피 세르네긴이 유제니아를 맡기면서 생활비는 넘치도록 주고 갔 다. 그러니 유제니아가 좀 챙겨 간다고 해서 폐 끼칠 일은 없고 비록 그렇지 않더라도 리사는 인색하게 굴 위인은 아니었다. 유제니아는 바구니를 챙기고, 그 안에 감자와 햄, 마른 야채들을 넣 었다. 그런데 리사가 다가와 그녀에게 청동 거울을 내밀었다. 유제 니아는 막 마른 사과 몇 조각을 넣다가 그 거울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 윤나던 그 거울은 먼지 낀 듯 흐려져 있고, 그 위에 경고의 룬 이 빨갛게 떠올라 있었다. "왜 이러는 거에요?" "방금 전에 이렇게 되었구나. 그리고 경고의 룬이 뜰 때 즈음에, 온 마을의 개들이 짖기 시작했고....." 유제니아는 방금 전 경비대에서 키우는 개들이 사나워졌던 것을 기억 해 냈다. "제 친구도 늑대 인간이거든요. 아마도, 그래서 그런 걸 거에요." "아니, 아무리 그런 병에 걸린 사람이라도 개들이 그 정도로 사나워 지지는 않는 단다. 이 정도 반응이 올 정도라면, 마을에 있게 하는 것도 곤란해." "예전에 제가 하멜버그에 있을 때 신세졌던 친구에요. 좀 특이한 병 에 걸린 건 사실이지만, 그것 뿐에요. 보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괜찮아요." "하지만 이렇게 사악한 기운이 감지되었던 적은, 내가 이 마을에 산 이후 한번 도 본 적이 없어." 순간 유제니아는 머리가 뜨끈해졌다. "사악하다니요? 아키는 좋은 사람이고, 다른 사람에게 폐가 갈만한 데는 조금도 없어요!" "그 아이 정체를 숨기지 말아다오. 뭐지, 그 아이는?" 리사가 이렇게 나오니 유제니아는 답답해졌다. "숨기는 것 없어요! 아키는 아키고, 또 의심할 것도 없이 너무나 좋 은 사람이에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고, 더 이상은 알 필요도 생 각할 필요도 없어요." "유즈, 다른 곳에서라면 몰라도 이곳은 알르간드 근방이란다. 상식과 고집만 가지고 살다가는 위험해 지는 곳이야. 게다가 정말 그렇다면 너만 위험해 지는 게 아니라, 이 마을 전체가 위험해진단다. 제발 말해다오." "정말 사악한 건 아키의 형과 아버지지, 아키가 아니에요! 아무리 리 사라도 그런 말을 하는 건 참을 수 없어요." "유즈- 왜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거니? 나는 마을 전체의 안전을 걸 고 말하는 거란다." 유제니아는 바구니를 쥔 손에 힘을 꾹 주었다. 분노로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좀 특이한 병에 걸려 있다는 건 인정할게요. 하지만 보름에만 그런 모습이 되는 것뿐이에요.....맹세할 게요. 보름만 아니라면 아무 문 제도 없어요. 그리고 아키는.....정말 저에게 너무 많은 것을 해 줬어요 .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인데도, 나 같은 거 신경 안 써도 괜찮 은 데도, 그래도 저를 위해 최선을 다해 주었죠......그러니 리사, 다 른 건 강요하지 말아주세요. 만약에 리사가 아키가 위험하니 나가 야된다 말씀하신다면, 저도 따라 나갈 거에요." 리사의 얼굴에서 동정심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나른히 한숨을 내 쉬 고는 타이르듯 부드럽게 말했다. "좀 더 자세히 말해 줄 수 있겠니? 비밀을 지켜야 할 일이라면 지켜 주마." 유제니아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젖은 목소리로 힘겹게 말했다. "'그 사람'에게 잡혀 갔을 때......아키가 구해줬어요. 그리고 그 사람 이 다시는 제게 손대지 않는 조건으로 자유를 포기했어요." 리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맙소사, 그랬니?" "........네. 게다가........그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아키의 쌍둥 이 형이었어요. 몇 번이나 아키를 비참한 꼴을 당하게 했던 그런 형이요. 그런데도 저 때문에 그 사람에게 고개를 숙인 거에요........ 저 때문에.......그러니 리사, 더 이상 사악하드니 하는 말씀은 하지 마세요. 나는 아키와 똑같이 생긴 진짜 악마를 알고 있고, 그 악 마가 아닌 아키를 그렇게 말하는 건.....참을 수 없으니까요." 리사는 유제니아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그렇다면 나 역시 오늘 하루 아무 말도 하지 않으마. 하지만 내가 허락해도, 칼쿠바가 허락하지 않으면 어쩔 수 없다는 건 알고 있 겠지?" "네?" "아마도 오늘 저녁 까지는 그에게 보고가 갈 거란다. 오늘 그 아이가 이곳에 왔을 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던 건 사실이니까.......그 때는 이렇게 설득할 수 없을 테니, 생각해 두고 있으렴." 유제니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리사의 집을 나섰다. **************************************************************** 작가잡설: 뭐, 이런 저런 일들이 번잡하게 일어나는 군요. 번잡합니다, 심난합니다, 그와 더불어 머리가 지끈덕. -_- 이렇게 판단하고 이런 자세로 사는 것이 가장 좋다, 하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꼭 남에게 강요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후- 어차피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 보아요' 라는 선교사스런 선량함과는 거리 먼 인간이었는데, 그럼에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무능함이라 는 이유로 마음껏 공격해 버리는 면은 있더군요. 잘잘못을 떠나서, 저도 지나치게 저를 과신하고 살았나 봅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48장 *************************************************************** [겨울성의 열쇠] 제225편 하얀 숲의 왕#6 **************************************************************** 집에 돌아왔을 때 창으로 보니 아킨은 여전히 의자에 앉아 벽난로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저걸 보는 걸까, 별 다른 것도 없을 텐데.......... 유제니아는 행여 눈이 빨간 것을 들킬까 해서 한번 문지르고는 집 안 으로 들어왔다. 아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즈-" 유제니아는 바구니를 내밀었다. "기다리면 맛있는 거 해 줄게. 아키는 앉아 있기만 해." 그리고 유제니아는 냄비를 꺼내 물을 붓고 그 안에 야채와 소시지를 넣고 끓이기 시작했다. 또, 오븐에 불을 피우고 빵 반죽을 넣었다.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스튜는 금방 끓기 시작해서 다 익은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고, 오븐에 서도 빵 냄새가 구수하게 피어올랐다. 연기가 가득했지만, 집안에 그렇게 음식냄새가 가득 차니 참 오랜만에 사람 사는 곳이 된 듯 했다 . 앉아있기 미안해진 아킨이 슬쩍 물어왔다, "안 도와줘도 돼?" "에에, 왕자님이 부엌일에 대해 뭘 안다고. 아키는 아마 감자하나 못 깎을 걸." 그냥 내 놓는 생선도 제대로 못 먹는 위인이 요리는 얼마나 할 줄 알 겠는가. 유제니아는 너무나 오랜만에 그릇들을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왠지 기분이 좋았다. 이렇게 누군가가 집 안에 있고, 즐겁게 식사하기 위해 식탁을 차리고, 음식이 익고 그릇 마다 음식이 가 득 차면 서로 마주 앉아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익는 걸 기다리는 것 밖에 남지 않게 되자, 유제니아는 주전자에 차 를 한줌 넣고 물을 붓고는 난로 위에 걸어 놓았다. 아킨은 한 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그저 음식이 차려지는 것을 물끄 러미 보고 있다가 유제니아가 뜨거운 차를 내밀자 받아들었을 뿐이 었다. "그 동안 어디에 있었기래 날짜 가는 것도 몰랐던 거야?" 아킨은 가볍게 웃었다. "비밀." "가르쳐 주면 안돼? 응?" "미안. 하지만 지금은 안 돼." 유제니아가 눈을 말똥말똥 뜬 채 바라보고 있자, 아킨은 정말 못 말 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정말 안 된다니까." "에헤- 너무해, 아키." 그렇게 말하던 유제니아는 그의 긴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는, 벽장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그곳에서 얇은 끈과 빗을 꺼내왔다.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 지 알아챈 아킨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당겼다. "유즈-- 저기, 내가할게." "아키는 덜렁대서 안 된다니까. 내가 해 줄게." 아킨은 결국 얌전히 머리를 맡겨야 했다. 머리카락은 좀 많이 엉겨 있었고, 빗에 엉긴 곳이 걸릴 때마다 아킨은 가볍게 신음을 흘렸다. 머리카락이 다 빗겨지자, 유제니아는 끈으로 잘 묶어 주었다. 그리 고 그렇게 해 주며 유제니아는 아킨의 차림새를 살펴보았다. 검은 로브는 다시 보니 올이 굵지만 좋은 천으로 되어 있었고, 움직 일 때마다 삼나무 향 같은 향기가 풍겨왔다. 머리카락도 방금 전에 집에서 목욕이라도 하고 나온 듯 깨끗하고 좋은 냄새를 풍긴다. 유제니아는 더욱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집 근처로 놀러 나 온 듯한 모양이잖은가. 옆집에서 방금 달려 나와도 이보다 깨끗할 수는 없을 듯 했다. 정말 어디서 어떻게 지내다 온 건지 궁금해진다 . 그런데 아킨이 물었다. "여기서 혼자 사는 거야?" 유제니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나 혼자살기는 뭐해서 세냐가 리사 할머니 네에 맡기고 갔어. 여기는 가끔 와서 청소하는 정도지.....아키?" 유제니아는 갑자기 창백해지는 아킨의 얼굴에 당황했다. 아킨이 손을 뻗어 유제니아의 손목을 잡으며 급히 물었다. "그럼 세르네긴은 어디 있는 거야?" 그 갑작스런 물음에 유제니아는 더 당황했다. 예상도 못했다. 그래서 얼결에 답한 것이, 완전히 실수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에크-찬다에." "유즈, 거짓말 하지 마. 그가 그곳에 있다면 이런 변방에 너 혼자 있 을 리가 없잖아. 정말 어디로 간 거야?" "저, 저기......정말 중요한 일이 있어서 간 거야. 괜찮아. 금방 올 거 야." 유제니아는 불안한 마음에 고개까지 저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완강하게 부인해도 아킨은 속아주지 않았다. 아킨이 창백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휘안에게 복수 하러 간 거야?" "아냐!" 그러나 그렇게 날카롭게 외치는 순간에 유제니아는 뒤로 주춤 물러나 고 말았다. 정말 너무나 공포에 질려야 나오는 행동이다. 아킨이 그런 그녀의 양 볼을 감싸려 했다. 그러나 유제니아는 고개를 숙이 며 그의 손을 피했다. 그러자 아킨은 다시 물어 확인하지 않았다. 그 눈빛과 행동에 다 짐작한 듯,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 손을 내 렸을 뿐이었다. "유즈, 나 도망쳤어. 휘안과의 약속을 내가 먼저 깼고, 휘안 역시 나 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을 거야.......그리고 그건 세르네긴이 너를 지켜줄 거라 생각해서였어." "뭐?" 온 몸이 떨려왔다. 이래선 안 된다는 건 아는데, 정말 자기도 모르게 두려워져서 몸을 떨고 말았다. "너 혼자 있으면 안돼. 더군다나.......이런 변방에서, 아무도 지켜주지 못하는 곳에 있으면 안 돼." 유제니아는 떨리는 것을 꾹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 "설마, 그 사람이 찾아오려고? 아니, 아닐 거야. 그 사람한테.......나 같은 거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걸. 그냥 싫어하는 사람 골탕 먹이려고 그가 소중하게 여기는 물건 부수듯 날 덮치고 망가뜨린 것뿐이라고 ! 그러니까, 더 이상 안 올 거야.......더 망가뜨릴 곳도 없이 망 가졌는데, 또 무슨 짓을 더 하려고!" 그러나 그렇게 부정하면서도 결국 어깨를 감싸 안으며 몸을 웅크렸 다. 떨렸다. 걷잡을 수 없이 와들와들 떨려온다. 아킨이 조용히 한 숨을 내 쉬고는 말했다. "미안.......안 좋은 기억만 떠올리게 했구나." "아냐, 아키! 아키 잘못이 절대 아니야! 다 그 자식이 나쁜 거고, 그 자식이 악마인 거야! 그러니까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다시는..... .제발....." 가느다란 목소리마저도 흐느낌에 묻혀가고 있었다. 왜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정작 그녀를 능욕한 나쁜 놈은 따로 있고 너무도 태연한데, 왜 괴로워하는 것은 소중한 사람들인지. 그리고 왜 그들이 다 미안하다고 하는 건지...... 그것이 너무나 싫고, 그럴수 록 휘안토스는 더욱 치 떨리게 혐오스럽고 증오스럽다. 밉다, 그리 고 그럴수록 칼집이 온 몸에 새겨지는 듯 아프기만 하다. 유제니아는 다시 터지려는 눈물을 꾹 눌렀다. 안돼, 참아. 또 아킨을 상처 입히고 그를 잃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애써 목소리를 가다 듬으며 말했다. "그 이야기 이제 하지 마, 아키. 오늘은 여기서 쉬기만 해." "일이 어떻게 된 건지......설명해 줄 수 있어?" 유제니아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고 했잖아. 여기는 먼 변방이야........나 따위를 찾으러 올 리가 없잖아. 그러니 알려 하지 마." "하지만 네가 가장 겁내고 있잖아." "그럼 상관하지 마." "유즈, 제발. 휘안은 내 형이야." "아키가 미워하는 형이잖아!" "그렇게 미워하는 형에게 너를 뺏기는 건 한번으로 족해. 유즈, 그러 니 제발 말 좀 해 줘.......부탁할게. 아니, 그것도 안 된다면 그냥 나를 위해 말 해 줘." 맙소사, 심장이 찔린 것만 같았다. 그 날 새벽이 생각나고, 괴로움에 울다 지쳐 아킨을 찾아갔던 것도 기억난다. 아킨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었다. 그냥 그녀에게 친절한 사람이 라고, 세르네긴을 위해 자기를 구해준 것뿐이라고 만 생각 했었다. 호감을 가지고 좋아했지만, 그 이상은 안 될 거라 생각했다. 그저 미소 짓고 미소로 화답 받으며 보내는 사이로 끝날 것이고, 그것 이 가장 좋을 거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래서 떠나는 그에게 신년 방 울을 선물해 준 것이. 다시 와 줄 거라 약속 해주었지만, 정말 지켜 질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소중한 선물과 함께 기억되 고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랬다. 단지 그것뿐이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소중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따뜻한 손길이 와 닿았을 때, 유제니아는 아무것도 받아 들이지 못할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그것도 아킨의 쌍둥이 형에게. 세르네긴에게는 잠들지 못할 분노를 선사했지만, 아킨에게는 정말 나을 수 없는 지독한 상처를 안겨 버렸다. 아킨에게 얼마나 큰 좌 절과 상처를 안겨 주었을 지, 유제니아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킨의 두 팔이 조용히 다가와 유제니아를 껴안았다. 가슴 안 으로 새처럼 작은 몸이 안겨오며 떠는 것은 아킨에게 안쓰럽기만 했다. "아키..........난.........." 아킨이 한숨쉬듯 말했다. "유제니아, 너에게 있어 내가 아직은 가치 있는 존재라면 말 해줘. 너 는 나에게 아직도- 아니, 아마도 영원히 소중한 존재일 테니까." 그 말에 유제니아는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었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아킨을 끌어안으며, 그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 하면 가시덩어리처럼 그들을 상처 입힌다는 건 알아도, 그래도 그녀를 안아줄 사람이 있기를 바랐었다. 가슴이 필요했었다. 눈물을 쏟을 가슴이, 그리고 그녀를 안아줄 팔이..... 그리고 그것이 원하 는 사람의 것이기를 더욱 간절히 바랐다. **************************************************************** 작가잡설: 아아, 가엾은 세냐. -_-;; 놓고만 가면 엉뚱한 도둑놈들이 꼬이냐;; 요즘 허접한 것들만 나온다는 말들을 여기 저기서 듣는 군요...;;;; 하지만 판타지 시장이란 게 그리 넓지 않습니다. 좋든 나쁘든 많은 사람들이 찾으면 팔리고 팔리면 나옵니다. 역시 나, 좋든 나쁘든 적은 사람들이 찾으면 안 팔리고 안 팔리면 안 나 옵니다. 어디서냐고요? 대여점에서요. -_-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49장 ************************************************************** [겨울성의 열쇠] 제49장 천개의 눈 제226편 천개의 눈#1 *************************************************************** 다 아는 데는 한 두 시간이면 충분했다. 넉 달은 별로 길지도 않은 시간이었고, 원래 큰일이란 의외로 간단한 몇 가지만 알면 다 알게 되는 법이다. 유제니아가 세르네긴으로부터 뉴마르냐로 가 있으라는 말을 듣게 된 것은 작년 11월이었다. 그는 두 손을 잡아주며 최대한 다정하게, 마치 예전에 길 떠나기 전에 작별인사 하듯 아무 일도 아니라고 말 해주었다. 그가 무엇을 하려는 지 유제니아는 잘 알고 있었지만, 묻지도 에크롯 사에 남아 있으라고 설득하지도 않았다.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 이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 세르네긴은 유제니아를 뉴마르냐에 데려다 주고, 아버지 어머니의 묘 를 찾아가 사제의 주관으로 성묘를 마치고 떠났다. 말해야 하는데, 말해야 하는데, 그 목소리만이 수십 번 머리를 떠돌았지만 결국에 는 세르네긴을 보내야 했다. 혼자 남겨지고, 고통도 죄책감과 고스 란히 남고 말았다. 닫힌 철문 앞으로 멀리 멀리 뻗어가는 길을 보는 듯, 그렇게 처량하게 이 뉴마르냐에서 지내게 되었다. "바보 같지, 나?" 아킨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라도 다른 생각은 나지 않았을 거야......그리고 정말 바보는 나였구나." "아키...." 아킨은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그래도 유제니아인데 괜찮을 거야. 버티어 내겠지, 하고 안심하려 했 지. 또 바로 세르네긴이 있는데 내가 걱정할 필요는 당연히 없다, 라고 더욱 더 많이 생각했어........하지만 과욕이었나 봐. 아니, 결국 나 하나만 안심시켜 준 셈이지..... 나 하나만 '착각'하고 있었으니까." 다시 만난 유제니아는 너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유제니아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단 넉 달이었을 뿐인데, 얼굴 자체 는 전혀 달리지지 않았지만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생기발랄하게 반 짝이던 눈빛이 아니다. 꺾인 꽃처럼, 날개 잃은 새처럼, 그렇게 시들 고 지쳐만 있었다. 유제니아가 말했다. "하지만 그 사람.....벌써 잊었을 거야. 나보다 예쁜 여자들도 많을 텐 데,...." "......애써 농담하려 하지 마. 휘안이 그런 이유로 너를 안았니?" "......헤 짚지마, 아키." "힘들 거라는 건 알아. 하지만 유제니아, 최악부터 생각하자." 유제니아는 차갑게 웃었다. "그럼, 다시 만나면 이번에는 어디다 쓸까? 지난번처럼 또 실컷 망가 뜨리고는 돌려보낼까..? 할 테면 하라고 해! 처음만큼 끔찍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리고 겨우 그까짓 것을 하려고 여기까지 오지도 않 을 테고." "내가 싫어."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 "확실해." "무슨 근거로?" "내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유제니아는 속에 있던 것이 철렁 주저앉는 것만 같았다. 순식간에 온 몸이 싸악 얼어붙는다. "그래서......세냐에게 가라는 말이야.....?" 아킨은 유제니아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그리고 그래, 하고 작게 속삭여 주었다. 들릴 듯 말 듯 작았지만, 얼어붙은 침묵 속에 그 목소리는 충분히 컸다. 심장이 찔릴 정도로. 유제니아는 더 작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리고.....세냐의 손을 잡고 어디에든 숨어 있어야 하는 거야?" "그밖에는 널 지켜줄 사람이 없으니까, 그리고 그 사람이야 말로 너 를 위해 무엇이든 해 줄 사람이니까." 그러나 아킨이, 휘안토스가 쌍둥이 형제라 그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 을 고스란히 알 수 있을 듯이 유제니아도 그가 모르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세르네긴과 함께 있고, 그가 그녀를 지켜주는 한 위험은 오히려 더 커질 것이다. 모순이지만 정말 그랬다. 유제니아 혼자는 아무 가치도 없지만, 세르네긴의 유제니아가 가진 가치는 셀 수 없이 크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다시 그의 손안에 들어오면 또 난폭하게 능욕할 것이다. 세르네긴이 분노할 만큼, 더 이상 분노하지도 못해 스스 로 망가질 만큼.......그래서 바다 속에 던진 소금 덩어리처럼 녹아 사라지도록 할 것이다. 그녀를 사랑하지도 원하지도 않으면서...... "아키. 나는 힘들어하는 세냐를 다시 마주볼 용기가 없어." "......." 유제니아는 아킨의 가슴에 이마를 기댔다. 그리고 아킨이 제발 그 거 짓말을 믿어주길 바랬다. 검은 옷깃에서 방금 전에 맡았던 그 향긋한 삼나무 냄새가 깊이 있게 풍겨온다. 겨울 햇살이 볼 옆으로 쏟아져 점점 따스하게 달아오른다. 이대로 영원히 있고 싶었다. 이 깃털 가득한 둥지 같은 포근함 속에서 영원히 있고 싶었다. 그런 그녀에게 아킨이 말했다. ".....그럼 내 옆에 있을래?" "아키 옆에?" "그래, 내 옆에- 지금 나는 베이나트와 함께 있어. 어떤 곳이라고는 말 못하지만, 너 하나정도는.....아니 너라면 그 곳에 머물게 해 줄게. 그리고 그곳이라면 세상 모든 악마가 너를 쫓아도 찾을 수 없을 거야. 그건 믿어도 돼." "언제까지?" "세르네긴이 너를 찾을 때까지.....그 땐 무엇이든 해결되어 있을 테니 까. 복수하던가, 아니면 그냥 너를 돌봐주고 지켜주기로 하던가." 유제니아는 기운이 빠졌다. 안도하면서도, 그렇게 안도하는 자신이 너무나 한심해졌다. "나란 계집애는 왜 이렇게 다른 사람들을 상처 입히기만 하는 걸까." "그러지마. 그런 점에 있어서라면, 나를 따라갈 사람이 없으니까." 아킨의 웃음소리에 왠지 서글퍼진 유제니아는 그저 그의 가슴에 기대 며 아련한 삼나무 향기만을 느꼈다. 이상하다. 얼마 전만 해도 사 람들이- 특히 남자들이 건드리는 것이 제일 끔찍했는데. 어째서 휘안토스와 똑같이 생긴 아킨 옆에는 난롯가 고양이처럼 편하기만 한 걸까. "같이 가 주겠어?" 아킨이 다시 물었지만 유제니아는 선뜻 답하지 못했다.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고 무턱대고 따라 간다는 것이 두렵기도 했고, 다른 누구도 아닌 아킨에게 신세진다는 것은 너무 미안하다. 아킨이 유제니아의 어깨를 잡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눈물에 젖은 볼 을 닦아주고 헝클어진 머리카락도 뒤로 넘겨주었다. "지금 당장 못하겠다면, 가서 결정해. 어떤 곳인지 보여줄 테니.......하 지만 돌아오겠다면 언제든지 돌려보내 줄게. 정 안되면 뭐 하루 초 대한 셈 치면 되겠지." "대체 어딘데?" 아킨은 손을 들었다. 어느 방향인지 금방 알 수 없었지만, 햇살 쏟아 지는 방향과는 정확히 수직이었다. 잠시 멍하니 있던 유제니아는 그 방향을 알게 되자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북쪽이잖아. 그곳에는 알르간드 밖에 없어." "그래, 그곳. 그곳에서 베이나트와 그의 친구 한분과 함께 지내고 있 어." 그제야 유제니아는 아킨의 차림새가 왜 이런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가까운 곳에 머물고 있으니까 이렇게 깨끗했던 것이다. 또, 그곳이라면 방금 전에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몰랐던 것이 이해 된다. 오늘 일어난 모든 말도 안 되는 일들은 '알르간드니까' 라는 한마디로 설명될 수 있다. 그곳은 그런 곳이니까. 마법의 땅, 신비 로운 땅, 여왕 지에나가 경계의 숲으로 벽을 쌓은 그곳에서 어떤 일이 불가능할까. 그러나 놀랍기도 했다. 어떻게 북쪽 알르간드, 여신같은 마법사가 지 배하는 땅에 머물 수 있는 건가, 그것도 이렇게 마음 놓고 오갈 정 도로 편안하게. "그곳으로 도망친 거야?" "도망친 게 아니야. 그곳에 할 일이 있어서 간 것뿐이니까. 그리고 그 건 탈로스의 탑에 있을 때와도 틀려. 그곳에서는 안주와 태만을 허 락하지도 않고, 이제 나 자신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검은 로브자락이 가볍게 출렁이더니, 그 틈으로 보이는 팔목 의 팔찌가 햇빛이 없는데도 반짝였다. 유제니아는 그것을 물끄러미 보다가, 주변이 점점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둘러보니, 창 밖이 밤이라도 된 듯 새카맣다. 유제니아는 놀라 창밖으로 달려가려 했지 만, 아킨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내가 있으니까 괜찮아." "어떻게 된 거야, 아키?" "기다리기만 하면 돼." 그리고 천장을 가리켜 보였다. 유제니아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낮 은 오두막 천장이 새카맣게 물들더니, 그 사이로 반짝이는 것들이 하나 둘 얼굴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보일 듯 말 듯 여렸지만 , 점점 진해지더니 결국에는 끝없이 반짝거렸다. 그 주변으로 같은 색 빛 가루들이 스며 나왔다. 유제니아는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킨이 입술에 손을 가져갔다. "이제부터는 아무 말도 하지 마. 궁금하면 마음속으로만 생각해. 언제 라도, 무엇이든 답해줄 테니." 그렇게 말하는 아킨의 머리카락이 잔잔한 바람에 흐트러지고 있었다. 하나하나, 달빛으로 짜 넣은 듯 반짝거린다. 그의 검은 로브자락 역시 술렁이듯 흔들린다. 유제니아도 마찬가지였다. 머리카락이 잔 잔하게 움직이며 목덜미를 간질였다. 시원하지만 차갑지 않은 바람 이 화끈거리던 볼과 눈시울을 식혀주고는 이마에 입 맞추듯 머물다 가는 사라진다. 아킨이 유제니아를 끌어안았다. 볼에 닿는 그의 가슴은 여전히 서늘 하고 향기로운 숲의 냄새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점점 따스해져왔고, 귓가로도 두근두근- 그의 심장소리가 다정한 사람의 발자국 소 리처럼 들려왔다. 그의 턱이 이마에 닿아왔다. 까칠하고 차가웠지만, 그 턱이 스치자 유제니아는 두 팔로 그의 목을 끌어 안아주고 싶어졌다. 그의 팔이 더욱 단단하게 어깨를 감싸주더니, 그 입술이 무언가를 부 르는 듯 조용하고 짧게 몇 마디를 중얼 거렸다. 순간, 바람이 어마어마하게 거세어졌다. 차갑고 광활한 고공을 활주하는 새의 날개 속에 있는 듯, 그 바람은 등을 밀어붙이고 머리카락을 사납게 잡아당겼다. 게다가 정말 얼음 처럼 차가워져 있었다. 아킨의 품안에 있어 주변은 여전히 컴컴했지만 , 울부짖는 듯한 바람소리만은 귓가에 크게 윙윙댔다. 두려워 몸 이 떨린다. 순간 아킨이 소매를 확 걷었다. "꽉 잡아--!" 소맷자락이 창의 커튼이 걷히듯 화락 펼쳐지며 물러났다. 세차고 차 가운 바람이 얼굴을 휩쓸고 지나가자, 유제니아는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러 버릴 뻔 했다. 하늘이 펼쳐지고 있었다.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대해를 가르는 배 위에서나 볼 수 있는 거대 한 하늘이- 달빛 젖은 구름들이 하얗게 흘러가고, 그 위로 환한 달이 유영하며 빛을 쏟아낸다. 총총한 별빛은 달빛에 빛을 한웅큼씩 잃었으나 그 래도 함초롬이 빛나며 검푸른 하늘에 놓여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 방금 전에는 분명 환한 아침이었는데-- "마법의 땅이니까." 아킨이 말했다. "비틀린 공간이 길 잃은 시간과 함께 방황하는 이계와 현실의 경계 니까......" 유제니아는 고개를 돌렸다. 아킨의 손에는 말고삐가 들려있었고, 그 소맷자락은 바람에 걷혀 팔꿈치까지 밀려나 있었다. 하얀 팔찌에서는 푸릇한 글자가 달빛을 받아 빛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태우고 허공을 가르는 것은 검고 거대한 말이었다. 두 눈동자는 불덩어리처럼 빛나고, 윤나는 털은 구름사이 달빛에 번쩍 인다. 그것이 발을 구르더니, 방향을 꺾어 아래를 바라보았다. 대지를 따라 날카로운 산맥이 솟구쳐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그 높은 꼭대기에는 구름이 드리워져 뿌옇게 흐려져 있었지만, 자락이 뻗어 나가는 곳과 깎아 지르는 협곡은 검은 어둠이 고여 있었다. 그리고 그 눈 쌓인 비탈, 깊은 협곡 사이에서 쏟아지며 우르릉 천둥소리를 내는 폭포와 그 위 아래로 굽이치며 흐르는 강줄기는 하얗게 빛난다. 아킨이 한쪽 손의 고삐를 놓더니 유제니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리고 다른 손에 쥔 고삐를 당기자, 말이 앞발을 앞으로 뻗고 고개를 들었다. 바람이 아래에서 위로 불어오며 광포할 정도로 세차고 날카로워졌다. 눈을 감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래로 추락하 는 아찔함 속에서도, 그녀를 붙잡고 있는 아킨의 단단한 팔에 매달 리면서 눈을 크게 떴다. 하늘의 구름과 별들과 달이 끝없이 멀어진다. 바닥이 등이 닿을 정도 로 가까워졌다. 높게 솟은 산등성이들이 위로 솟구쳐 오른다. 아킨의 팔에 힘이 꽉 들어갔다. 그리고 깃털이 떨어지듯 부드럽게, 소리 없이, 검은 말은 눈 쌓인 비탈에 발을 디뎠다. **************************************************************** 작가잡설: 데이트, 데이트!! 자아, 그대로 들고튀는 거다, 아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49장 ************************************************************** [겨울성의 열쇠] 제227편 천개의 눈#2 *************************************************************** 말발굽이 일으킨 바람에 쌓였던 눈이 뿜어 올랐다. 그 눈송이가 볼에 닿아 녹는 차가운 느낌은 아주 선명했다. 그러나 유제니아는 지금 현실인지 꿈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말하지 말라고 했기에 입술을 꾹 닫고 있었지만, 묻고 싶었다. 비명을 지르고 탄성을 지르고 싶었다 .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없기에 모든 것이 비현실적인 꿈같이 느껴 질 뿐이다. 말은 비탈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 달리는 속도가 나는 듯 빨라지며, 양 옆에 솟구친 험준한 산은 마치 아래에서 위로 자라는 듯했다. 그리고 다시 말이 바닥을 세게 박찼다. 몸이 붕 뜨는 가 싶더니, 뚝 끊어진 벼랑 위로 말이 날아올랐다. 바람과 허공이 말을 감싸 안았다. 회오리치는 차가운 바람에 얼어버 릴 것 같았지만, 안아주는 아킨의 팔만은 단단하고 따뜻했다. 아킨이 말했다. "이제 비틀린 숲을 통과할 거야. 그곳은 알지?" 알아, 하고 유제니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알르간드와 인간 세계를 나누는 진정한 결계가 바로 그 비틀린 숲이 었다. 침묵의 숲, 겨울의 숲- 많은 이름들을 가지고 있는 그 무서운 숲을 넘어서 천개의 눈에 이르렀던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 그 경계에서 헤매다가 운 좋은 사람만이 돌아왔다. 말은 협곡사이를 달려, 얼어붙은 강을 밟으며 달렸다. 단단한 얼음이 말발굽에 깨져 튀어 올랐다. 유제니아는 아킨의 팔을 꽉 잡으며 고 개를 들었다. 양 옆으로, 진한 회색 둥치를 가진 전나무들이 높고 꼿꼿하게 자라 있었다. 나무는 빠르게 빽빽해져갔지만, 숲은 어둡지 않았다. 모든 나무에서 빛이 스며 나오는 듯, 멀리 있는 나무마저 도 뚜렷하고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들의 가지가지와 날카로운 잎들 위에는 눈이 쌓여 있지 않았지만, 그 잎들은 모두 겨울 같 은 은빛이었다. 달빛을 빨아들여 감사하고 찬탄하는 듯한 은은한 은빛. 그리고 그 사이에 뿌연 것이 유영하며 나돌아 다니고 있었다. 안개처 럼 흐르다가 구름처럼 뭉쳐서는, 살며시 다가왔다. 유제니아는 비 명을 지를 뻔 했다. 손바닥만한 요정들이었다. 양 옆에 잠자리 날개 같은 것이 돋아 퍼덕거릴 때마다 뒤로 긴 궤적이 이어졌다. 그건 보기 좋았지만, 생긴 것은 너무도 흉측하다. 송곳니는 길게 솟구쳐 사나와 보이고, 위로 눈 꼬리가 치솟은 눈동자는 끔찍해 보였다. 그것이 이를 확 드러내더니 유제니아에게 다가왔다. 그러자, 그 주 변에 있던 뿌연 안개 속에서 그것과 비슷한 것이 하나 둘 빠르게 튀 어나와 이를 확확 드러냈다. 끼이이-- 사나운 울음소리가 들린다 . 사르르르르르르- 엄청난 날개 짓 소리가 아킨과 유제니아를 둘러 싼 안개 속에서 들려온다. 금방이라도 메뚜기 떼 처럼 와르르 달 려들어 물어뜯을 것만 같다. 알르간드 족은 아니다. 그들은 기괴하 기는 해도 이렇게 사납지는 않으니까. 아킨이 팔을 뻗었다. 소맷자락이 펄럭이며 그 궤적이 빛 가루를 뿌린 듯 반짝였다. "물러나라....나는 너희들 주인의 손님이며, 그녀는 그런 나의 손님이 니." 그러자 가장 먼저 나왔던 것이 위로 빠르게 솟구쳐 사라졌다. 다른 것들도 되돌아 숲으로 쏜살같이 사라져 버렸다. 날개 짓 소리가 잦 아들더니 완전히 사라지고, 안개마저도 숲 속으로 빨려 먹히는 듯 스며들어 사라져 버린다. "가자, 유즈." 유제니아는 그의 품에 몸을 묻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숲 속으로 난 오솔길을 터벅터벅 걸었다. 흑암같은 발굽을 딛을 때마다, 바닥 에서 반짝이는 가루가 흩어졌다. 다시 부우-- 하고는 무언가가 나지막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또 다른 것이 따라오고 있었다. "눈 마주치지 않도록 해. 저 녀석은 내 말은 절대 안 듣거든......위험 하지는 않지만 불쾌한 녀석이야." 아킨의 말에, 유제니아가 속으로 물었다. 그런데 이것들은 대체 뭐야? "숲의 수비자들이지. 아무도 이 숲을 넘어 천개의 눈에 이르지 못하 도록 하려고." 뉴마르냐의 숲에도 이상한 것들이 잔뜩 있는데....같은 건가? 아킨이 웃었다. "그것들과는 틀려. 그들은 공간이 비틀리면서 같이 비틀려 버린 괴물 들이고, 이것들은 모두 지엔이 만들어 낸 그녀의 하인들이야." 지엔? "베이의 친구. 하지만 나한테는 꽤 쌀쌀맞지." 아킨은 그리 답하고는 말고삐를 당겼다. 말이 좀더 발걸음을 빨리하 자, 그것이 따라오는 속도도 같이 빨라졌다. 그런데 귓가에 웅웅 울리는 듯 기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이잖아. 유제니아는 흠칫 놀랐다. 우우우웅-- 굵고 두터운 관을 통해 들리는 듯한 울림이 뒤섞인 목소리다. 인간이야......너무 멀쩡한 인간이네. 경계너머로 인간을 들일 수 없다 는 거 알잖아? 그 목소리는 말을 마쳐도 계속 귓가를 울려서, 아무 말도 아닌 데도 가슴이 두근거리며 떨린다. 유제니아는 귀를 꽉 틀어막았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크고 노 골적으로 들려왔다.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속삭인다, 작고 나지막하 게- 하지만 분명하게. 네 여자친구니? 곱게 생겼구나......예뻐. 작은 꽃처럼, 작은 새처럼. 하지만 알지? 예쁜 꽃이 피어나면 쉽게 눈에 뜨여서 금방 꺾여. 깃털 예쁜 새들은 금방 사냥꾼들의 활에 맞지..... 눈에 잘 뜨이니까. 하지만 어떻게 하든 아무도 뭐라 하지 않으니까. 차가운 기운이 볼에 와 닿았다. 유제니아가 두려움에 내뿜는 숨이 하 얗게 얼어붙어 주변에 어린다. 그런데 이 아이의 처녀는 누가 가져갔나.....너냐, 은빛 늑대? 네가 이 아이와 잤냐? 아니, 아닌 것 같은데? 아가야, 말해 보렴. 누가 네 순결을 가져갔니? 무서운 밤에, 대체 누가 뽀얗고 깨끗한 신부였던 너 를 약탈해 집어삼켰지? 분노에 고함을 질러 버릴 뻔 했다. 아킨의 손에도 힘이 꽉 들어가, 잡힌 어깨가 아플 지경이었다. 아킨이 으르렁 거렸다. "닥쳐, 위데르. 한번만 더 지껄이면 정말 죽여 버릴 테다." 아킨의 목소리에는 증오와 분노가 담겨 있었다. 그러자 히죽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그 아이와 잔 건 아니로군? 하지만 탐내기는 했나 보네.... 너 말고 다른 놈이 먼저 저 아이 위로 올라갔으니까, 가져갔으니까, 먹었으니까! 그러니 화나지? 네가 해야 하는데 다른 놈이 했으니까? 사실은 네가 그러고 싶었지? "닥치라고 했어-!" 그 날카로운 분노의 외침에 유제니아는 결국 고개를 들고 말았다. 뭐 라고 한 마디라도, 입을 열어 분명하게 한마디라도 해 주고 싶었다. 질 나쁜 농담을 멈추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보고 말았다. 기괴한 것이 뿌연 옷자락을 휘날리며 말을 따르고 있었다. 입술이 귀 까지 찢어진 얼굴이 그 날개처럼 너울거리는 옷자락 속에서 히죽 히죽 웃고 있었다. 눈은 차가운 회색이고, 피부는 백납 바른 듯 하얗다 . 눈이 마주치자 그것이 더욱 사납게 웃더니 고개를 휙 돌려 앞을 가로 막았다. 유제니아는 비명을 겨우 억누르며 몸을 움츠렸다. 그 러나 발목이 개구리라도 닿은 듯 축축하고 차가워졌고, 유제니아는 내려볼 엄두도 못 내고 발을 당겼다. 그러자 그 느낌이 스륵 물 러나더니 겨드랑이 쪽으로 파고 들어와서는 얼굴 쪽으로 치솟아 올 랐다. 심술궂게 늙은 노파의 얼굴처럼 생긴 것이 이가 다 빠진 입을 길게 찢으며 히죽 웃었다. 길고 깡마른 두 팔이 아래에서 불쑥 솟아 나오더니 유제니아의 뺨을 어루만진다. "읏--!" 이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유제니아의 입술이 열리는 순 간 그것의 입이 잡아 찢은 듯 크게 벌어지더니 유제니아를 덮쳤다. 쿠어어어어--! 회오리치는 곳으로 몸을 던진 듯, 터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유즈-!" 깊은 우물 속에 내던져 지기라도 한 듯 얼음처럼 차가운 것이 몸을 확 덮었다. 그대로 까무러칠 뻔 했다. 세상이 깜깜해지더니, 한번 뒤집히기라도 하는 듯 어지럽고 현기증이 치솟아 올라왔다. 목이 졸리는 듯 숨이 턱턱 막힌다. 몸이 꽉 조인 듯 답답해진다. 바위처 럼 무거운 것이 몸을 짓누르고 있다. 꿈쩍도 할 수 없다. 차라리 까 무러쳐 버리고 싶었지만 정신은 너무도 멀쩡했다. 아니, 찬물 속에 담긴 것처럼 생생했다. 눈을 감고 있고 싶었지만 아무리 완강하게 거부해도 떠졌다. 뭐지? 어디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질문이 솟구쳐 오르지만 연기처럼 사라지며 나도 몰라, 알 수 없어, 모르는 게 좋아, 하는 답을 속삭여 온다. 그렇게 컴컴하고 답답한 가운데 희미하게 들리던 숨소리가 점점 거칠고 강렬해지며 귓가를 파고들어왔다. 목덜미를 더듬는 입술은 뜨겁다. 허벅지를 더듬고 다 리를 벌리는 손은 무자비하다. 다시 소름이 끼쳐왔다. 아아, 싫어-! 그대로 울음을 터뜨려 버리고 싶은 분노와 공포에 완강하게 외치는 순간에, 정신이 완전히 번쩍 들었다. 낯선 침대에 누워 있었다. 침대는 넓고 푹신했고, 방 안은 넓었다. 화려하게 치장된 휘장이 쏟 아져 내려 침대를 가려주었고, 그 휘장너머로 높고 큰 창문이 보 인다. 눈이 커졌다. 숨이 멈추는 것만 같다. 당장에 일어나버리고 싶었지만 몸은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저 침대에 누운 채 천장 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맨 등을 매끄러운 시트에 댄 채, 그렇 게 누워만 있을 뿐. 넓고도 호사스런 방이었다. 안락하고 아름답고, 아마도 이 방 하나가 유제니아가 사는 집보다 클 듯 하다. 그러나 몸에는 아무것도 걸 치고 있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여기는 어디고 나는 왜 이러고 있는 거지? 귓가로 그 축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그의 여자가 될 거야. 그가 널 원하니 당연히 그리 될 테지. 아 내로 삼아주지는 않을 테지만, 적어도 너를 아껴주기는 할 거다. 어차피 그리 될 거 너도 그런 셈 쳐. 그렇게 되면 너는 아내보다 더욱 사랑받을 거야. 왕자의 아내는 아마도 어느 외국의 슬픈 공주님쯤 될 테니까! 자, 그 러면 누가 복수할 필요가 있지? 그 누구도 피를 뿌릴 필요가 없어 지는 거라고. 눈물이 흘렀다. 고약한 말인데, 그 안에는 진실이 있었다. 괴롭지만 피는 흘리지 않 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세르네긴은 그냥 그 예쁜 드래곤 여자랑 잘 살면 그만이잖아. 슈마허 아저씨는 그 공주님이랑 결혼할 수 있을 테고, 아키는.......... 눈물이 더 뜨거워졌다. 하지만 나는 죽는 게 더 나을 정도로 괴로울 거야. 그러면, 내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그 누구도 행복하지 못해. 나는 바 보지만, 그걸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냐. 약하지만 다들 치를 떨만한 희생을 감수할 정도로 갸륵하지도 못해. 힘없던 어깨와 팔에 힘이 들어가고, 여리게 흩어졌던 마음도 굳고 단 단해진다.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그에게 몸을 주는 것이 옳다고? 천명이 괜찮 다고 해도 유제니아 자신이 용서할 수 없다. 너무나 똑같이 최악이라 화가 난다. 누군가를 편하게 해 주기 위해 불행을 감수하는 건 그 냥 자아도취다. 착각이다. 순간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답답하게 조이고 누르던 힘이 씻은 듯 사라지고, 차가운 칼바람이 얼굴을 후려치고는 지나 간다.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나무가 휘감은 터널 같은 길이었다. 은빛 침 같은 소나무 잎들이 흔들린다. 찰랑 차르릉- 하며 그 날카로운 잎 들이 부딪히며 내는 듯한 소리도 들려온다. 그리고 그 터널의 끝은 환한 달빛 쏟아지는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하얀 구름이 흐르고, 총총한 별들이 빛난다. 멀리 멀리 펼쳐진 산맥이 어슴푸레하고 푸 릇하게 드러나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이제 그녀를 괴롭히던 악귀는 없었다. 달빛에 씻겨나가기라 도 한 듯- 세상은 오로지 찬비에 씻긴 듯 차갑고 청명할 뿐이었다. 그제야 아킨의 손이 느껴진다. 어깨를 단단히 안은 손은 분노로 떨 리고 있었다. "방금 위데르가 한 말에는 신경 쓰지 마." 하지만 거짓만은 아니었는걸. 유제니아는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고마워." 이제 말을 해도 되는 걸까- 될 것 같다. 숲이 거의 끝에 다다랐으 니. 그렇게 말하고는 유제니아는 소리 없이 웃었다. 순간, 드디어 검은 말이 숲의 경계를 넘었다. 나무들이 뚝 끊어지 며, 울퉁불퉁한 바위들이 솟은 눈 덮인 벌판이 펼쳐졌다. 유제니아 는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 했다. "천개의 눈이다." 아킨이 말의 고삐를 당기며 말했다. ****************************************************************** 작가잡설: 드디어 자룡이가............중성화 수술을 했습니다. 귀엽게 말하면 땅콩수확을 했고, 좀 처절하게 말하자면 자손볼 수 없는 몸이 되었으며, 대놓고 말하자면 거시기 깠습니다. -_-;; 고양이 중성화 수술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지만, 좀 미안하긴 하네요;;;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49장 *************************************************************** [겨울성의 열쇠] 제228편 천개의 눈#3 **************************************************************** 베어낸 듯 평평한 대지가 쏟아지듯 펼쳐지고 있었다. 지평선 끝에 솟아 대지를 둥글게 휘감은 산 끄트머리가 흐릿하게 빛 난다. 뽀얀 구름들은 검푸른 하늘위로 흐르며 별빛과 함께 어우러 지고, 하얀 빛을 쏟아내는 둥근 달은 찬란하다. 그리고 그 하늘과 마주하는 대지위에, 바로 그 천개의 눈, 수없는 사 람이 도전했지만 그 누구도 도달하지도 그 안에 들어있는 보고에 손닿지도 못했던, 위대하고 냉혹한 전설이 담긴 천개의 눈이 있었다. 유제니아는 왜 천개의 눈이라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 곳에는 하늘을 향하는 눈동자들이, 하늘을 똑바로 바라보며 비추 어내는 수 백 개의 눈동자가 있었다. 그것은 엄청난 수의 호수들이었다. 작고 크고 둥글고 네모지고 이지러지며, 오솔길만한 경계를 맞대고 있는 그런 호수들이 끝도 없이, 수도 없이, 마치 빽빽이 박힌 눈동 자처럼 고여 있었다. 가지 앙상한 나무들의 하얀 눈을 덮어쓰고 드문드문 솟아 있고, 기다 란 바위가 솟아 있기도 했다. 오래된 기둥 같은 것이 세워져 있기도 했고, 주변에 무너진 벽 같은 것이 둘러쳐져 있기도 했다. 굽어보 는 듯 높은 바위를 끼고 있기도 했고, 마른 갈대로 한구석이 덮여 있기도 했다. 깊은지 얕은지는 모른다. 그 안에 무엇이 있는 지도 모 른다. 온갖 모양의 호수의 거울 같은 표면위로는 빛나는 하늘의 달과 구름과 별들이 반사되어 흐르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을 향하는 천개의 눈동자, 가장 찬란했던 영광의 그 시절이 묻힌 곳. 하늘을 비추고 우러르며, 한번 깜빡이지도 않은 채 땅에 박혀 정지하여 한없이 하늘만을 바라보는 천개의 눈들이다..... 처음 뉴마르냐에 도착했을 대 세르네긴이 성배가 잠든 천개의 눈에 대해 말했었다. 마법사 여왕 지에나는 쿼크 대제의 성배를 가지고 눈보라가 끄는 겨 울의 마차를 타고 이 성역으로 와 성배를 묻었다고... 잃어버린 제국, 이제는 허울과 가식만이 남은 제국이 순수하고 위대 했던 시절의 전설이 저문 곳에 서 있는 것이다. 아무도 닿지 못했던 곳, 수많은 탐색자들과 모험가들이 도전하였으나 경계의 숲조차 넘지 못한 곳. 그리하여 제국 최고의 보물이 수 백 년 간 잠들어 있는 곳- 바로 그곳이. 바람이 잔잔하게 불어왔다. 깎아낸 듯 고르게 정지해 있던 수십, 수 백-- 아니 정말 천개의 호수들이 일제히 몸을 떨었다. 하늘도 별도 구름도 산도 소리 없이 떨린다. 가슴이 떨리고 몸이 떨리고 눈동자 가 떨리며, 마침내 심장이 떨려온다. 그래서 뜨거운 한숨이 나왔다. 이것을 볼 수밖에 없다는 것에, 이 광경을 담을 수 있는 유제니아 자신이 너무나 작다는 것에. 아킨이 손을 들어 호수들이 있는 지평선 끝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높 은 산이 솟아 있었고, 그 앞에는 희끄무레한 기둥 같은 것이 대여섯 개 정도 서 있었다. "저곳을 넘으면 지엔과 베이가 있는 곳으로 가게 돼..... 그러니 이제 어쩌겠어?" "어쩌냐.......니?" "확실히 결정해줘. 여기서 돌아갈 건지, 아니면 앞으로 갈 건지." 그렇게 말하고는 아킨은 말에서 뛰어 내렸다. 눈이 뿌드득 소리를 내 며 짓눌린다. 유제니아는 다시 추위를 느끼기 시작하며 몸을 움츠 렸다. "여기서 고개를 끄덕이면........마지막이라는 거야?" "그래." "같이 가면.....어떻게 되는 거지?" "같이 지내는 거야. 지켜줄게." "......" 유제니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며 시린 손을 오므려 입가로 가져갔 다. 아킨이 손을 내밀었고, 유제니아가 주춤거리며 그 손을 잡자 아킨은 그녀에게 열기를 건네주었다. 마법이다.....몸이 따뜻해지며 추위도 사라져갔다. 기분도 훈훈해졌다. "뉴마르냐에 남으면 어떻게 되는 건데?" "아마 일주일에 두 세 번은 찾아가서 무사한지 확인하겠지." 유제니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그거잖아?" "나한테는 엄청난 차이야." 그러나 그렇게 말해주는 것만으로도 유제니아는 안심이 되었다. 아니, 너무나 평화로워진다..... "여기까지 데려다 줘서 너무 고마워........하지만 아키, 아직은 할 일이 남아 있어. 그 일이 끝나면 숨겨줘. 나는 도망치는 것 밖에는 할 수 없는 힘없는 여자아이지만, 도망쳐서 숨어 있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면 그거라도 제대로 해야 할 것 같으니까." "할일이란 게 뭔데?" "세냐에게 사실대로 말할 거야." "그리고....복수하는 것을 말릴 생각이야?" 유제니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그렇게 할 수 없고 아무리 그만두라고 말해도 세냐는 듣 지 않을 거야. 그리고.....그건 세냐의 목숨과 안전은 확실히 구할 수 있을 테지만 그를 속박하는 거야......그를 괴롭게 할 테지. 그건 세냐가 택한 거야. 그저 나의 고통만을 생각한 거라면, 내가 기억을 잃는 즉시 휘안토스에 대한 원한도 잠재웠을 테지. 하지만 아니잖아 ? 세냐는 말 그대로 자신을 위해 그 길을 간 거고, 그러니 나는 말 릴 수 없어. 그래서 내가 할 일은 그냥 단 하나, 다시는 휘안토스 손에 잡히지 않고 아무 일도 당하지 않는 거야......" 그리고 유제니아는 아킨의 볼에 키스했다. "언제나 나를 구해줘서 고마워, 왕자님. 예전에도, 지금도." "구해주는 건 너지." 그 말에 유제니아는 활짝 웃었다. 마음속의 공포와 어둠은, 비틀린 숲에 남아 그 심술궂은 눈보라에 휩쓸려 나간 것 같았다. 상처는 여전히 남아 있고, 고통도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적어도 두려 워하지는 않을 것이고, 노력할 것이다. 마음속의 심장은 펄떡대고 있 고, 의지가 남아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건네는 햇살이 따사로 이 내비치고 있으니까. 유제니아가 말했다. "돌아갈 게......하지만 시간나면 찾아와 줘." "언제나 기억하고 있을게." 그리고 유제니아는 아킨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이제는 열기에 녹아 내린 그의 손은 예전보다 컸고, 더욱 부드럽고 따뜻했다. 아킨이 말했다. "너와 만나기 전부터 너를 동경했었던 것 같아. 세르네긴에게 네 이 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정말 부러웠지. 그의 옆에는 언제나 그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그도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이......그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장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고, 그는 그가 가진 모 든 것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지킬 사람이었지." "......" "그래서 너라는 존재 자체를 동경했지. 사랑한다는 것 자체를, 사랑받 는 다는 것 자체를.....그래서 처음 너와 만나 잠시나마 같이 지내게 되었을 때, 세르네긴이 받고 너에게 주는 사랑 자체를 나도 똑같 이 받고 주고 싶었지. 내가 아닌 그가 되고 싶었고, 네가 그가 아 닌 나를 그리 생각해 주기를 바랬어......" 그리고 아킨은 유제니아의 손을 바라보았다. 작고 하얀 손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네가 그날 배 위에서 말했지. 미안하다고,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고, 그리고 그 말이 내가 원했던 것이 애당초 존재조차 할 수 없는 허상이었다고 가르쳐 줬지.....그렇게 깨졌어. 연기처럼, 아침의 꿈처럼, 내 헛된 꿈은 진실이 다가오니 다 사라져 버린 거야...... 모두 다......." "아키...." "슬퍼해 주지 않아도 돼. 허상은 사라졌지만, 진실은 내 앞에 있고, 나는 그 진실을 사랑하니까." 아킨은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떨림, 간절함.....그리고 생명력이 그녀의 눈 안에 있었다. 찬란하고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이. "그날 주인 잊혀진 그 깊은 숲에서 나를 깨워준 건 너였어..... 따뜻하 고 소중하게 다가와 준 것도 너였고. 세르네긴의 아가씨는 사랑스 럽고 순수했지만, 나의 아가씨는 햇살처럼 환했지.....온 어두운 숲을 비출 정도로. 그리고 그렇게 세르네긴의 아가씨는 그의 것이지만, 나의 너는 내 안에 있어. 너무나 소중하게......" 그리고 아킨은 조용히 웃었다. "너를 좋아해, 유제니아." "....." "......그리고......시간이 허락해 준다면, 기회가 나를 보살펴 준다면...... 나는 그에 감사하며 너를 사랑하게 되겠지.......겨울 다음에 봄이 오듯." 유제니아는 무엇으로 화답해야 할지 알 길이 없었다. 뜨겁게 복받치는 감정 때문에, 떨리는 심장 때문에, 그래서 순간이 영원하도록 바라는 마음 때문에 결국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아킨이 그녀의 손등에 입 맞추었다. "언제나 너를 지켜봐 줄게." 이제 유제니아는 웃을 수 있었고 울 수 있었다. 눈물이 맺히고 온 몸 이 떨려왔지만, 그래도 그녀는 조용하게 흐릿하게 웃었다. 슬펐지만 기뻤고, 기쁘면서도 안타까워 슬프다. 아킨이 드디어 말고삐를 놓았다. 말은 머리를 돌리며 울부짖더니, 그 단단한 말발굽이 눈 덮인 땅을 박찼다. 몇 번을 얼었다 녹아 모래 처럼 서걱거리는 눈이 부옇게 피어오른다. 세상이 누르듯 이지러진다 . 그러며 별들이 돌고, 달이 돌고, 하늘이 돌고, 세상이 갈라진다. 까무러치는 듯 혼란스러웠지만, 그래도 세상은 세상이었고 유제니 아는 단단한 돌처럼 그 안에 흔들리지 않았다. "잘 가, 유제니아." 금방 다시 보게 되겠지?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채 묻지 못한 채 세상 은 눈을 감듯 까맣게 변해 버렸다. 빨려 나가듯 몸이 빠르게 흐른다. 다시 보고 싶을 거야...... 그리고 다시 만난 다면, 그 때야 말로 웃으 면서 만나고 싶어. 정말 환하게 웃으며 안아 주고 싶어.....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입술이 열리지 않았다. 어둠이 그 녀를 밀어냈다. 어서 돌아가라고 재촉하듯,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외치듯, 그렇게 빠르게. 저녁의 종소리에 유제니아는 잠에서 깼다. 문이 닫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눈을 비 비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돌아 본 창밖에 가득한 것은 붉은 노 을에 타오르는 하늘과, 저물어 가는 해가 내 쏘는 진한 황금빛 햇 살이었다. 몸을 일으키다가 유제니아는 그녀의 머리맡에 놓여 있는 소나무 가지 를 발견했다. 달빛 속에서는 은으로 된 듯 했던 가지와 잎은 이제 노을빛에 진한 황금처럼 빛나고 있었다. 유제니아는 그 작은 나뭇가지에 입술을 가져갔다. 이제 막 밖에서 온 듯 깨끗하면서도 차가운, 새벽녘 미명이 퍼지는 그 시간의 상쾌한 서늘함이 그 잎과 가지에 있었다. 금방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어디선가 그 다정한 화답이 들려오는 것만 같다. 너무나 따뜻하게..... 왠지 오늘 밤에는 정말 너무나 편안하게 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리고 아마도 몇 번의 밤이 와도, 역시나 편안하게 잠들 것이다. **************************************************************** 작가잡설: 배알 꼴림으로 실신 직전. ............자룡이는 애당초 땅콩따위는 없었다는 듯 잘 지내고 있습니다. -_-;;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49장 **************************************************************** [겨울성의 열쇠] 제229편 천개의 눈#4 **************************************************************** 어둠이 커튼을 거두듯 빠르게 걷히며, 저녁의 길고 강렬한 햇살이 사 방을 내리덮었다. 창백하던 산과 벌판은 붉게 타올랐고, 하늘을 바라보는 천개의 눈에 고인 깊고 얕은 물들도 핏방울처럼 시뻘겋게 변한다. 별은 감은 듯 사라지고, 달은 빛을 잃고 하얗게 탈색되어 버린다. 나무와 수많 은 기둥들에 진한 그림자가 솟구친다. 아킨은 볼을 쓸어 올리는 진한 햇살에 잠시 눈이 부셔서 감았다가, 볼이 따사로워지자 천천히 떴다. 방금 전 까지 어둠과 차가운 달빛만이 존재하던 그곳에, 이제는 저녁 햇살이 쏟아지며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먼 곳에 있는 산 아래 기둥들도 저녁 햇살에 장밋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아킨은 자리에서 일어나 비탈을 내려갔다. 호숫가에 닿자, 이제 저녁 해는 절반만이 남아 서산에 걸려 있었다. 햇살이 서산으로 빨려 들 어가며 가까운 호수들이 밀려드는 어둠에 젖어 하나 둘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멀리 있는 호수 수면은 아직 진한 붉은 빛이었으나, 걸어가면 갈수록 하나 둘 줄어들기 시작한다. 그래서 절반 정도 왔을 때 해가 완전히 저물어 하늘만이 아직 붉게 물들어 있을 뿐, 천개 의 눈을 이루는 호수들의 수면은 모두 어두워져 자주 빛과 어두운 진홍색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렇게 해가 저물었지만 아킨은 이곳의 낮과 밤이 전혀 의미가 없다 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낮이 되었다가 밤이 되기도 하고, 밤이 며칠 이나 계속되다가도 어느 날부터는 낮이 계속된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자 아킨은 손을 뻗었다. 훅- 하고 숨 불어넣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아킨의 손안에 검은 가죽 고삐가 잡혔다. 그리고 이제 검은 말 한 마리가 그의 옆을 따르고 있었다. 하늘이 금방 까맣게 변했다. 구름이 밀려들어 오는 것을 보니, 오늘 은 아마도 눈보라치는 밤이 될 것 같다. 변덕스럽지, 지에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킨은 말의 등자를 밟고는 올라탔다. 오늘의 날씨를 그렇게 하기로 지에나가 작정한다면 느긋 하게 노닥거리며 갈 수 없다. 서둘러 돌아가야 한다. 말이 나는 듯 달리기 시작했다. 수면을 밟으며 달리자, 호수 수면에 서 긴 파문이 일어났다. 아킨의 팔찌에서 빛이 스며 나오며 주변을 은은하게 밝혔다. 달리면서 스치는 모든 수면 위로, 눈을 깜빡이 듯 그 빛이 스쳐지나간다. 어느덧 정말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아 킨은 말을 더 빨리 몰았다. 어느 덧 길 양 옆으로 낡은 기둥들의 흔적이 따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거의 절반 이상 부러져 나가고 닳아 있었는데, 달리면 달릴수록 높고 깨끗하게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기둥들이 사열하는 그 끄트머리에 도달했을 때, 그 앞에는 깎아낸 듯한 암벽이 양 옆에 서 있었다. 암벽 아래에는 기둥 두개가 높이 서 있었다. 그 끝에는 작은 불빛이 빛나고 있다가, 아킨이 다가오자 더욱 환하게 타 올랐다. 아킨은 말에서 내렸다. 말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팔찌에서의 빛도 서서히 사그라지었다. 그러자 기둥 뒤에 숨어 있던 두개의 회색 그림자가 슬며시 스며 나왔다. 창백한 얼굴의 노인과 노파였다. 그들은 아킨의 얼굴을 살피더니 이내 등을 돌려 돌아갔다. 아킨은 '허락된' 자다. 기억하고 있다, 이들은. 그렇지 않으면 이들은 당장 에 눈 덩이처럼 불어나 아킨을 집어삼켰을 테니. 그들이 사라지자, 암벽뿐이던 공간이 변하기 시작했다. 암벽은 안개로 지운 듯 흐릿하게 사라지고, 발 딛고 있는 길은 위로 길게 솟아오르며 계단이 되었다. 그리고 그리 길지도 높지도 않은 그 계단 끝에, 또 다른 광장이 펼쳐졌다. 아킨은 계단을 올라 그곳에 도착했다. 그 위에 서자, 바닥에 그려진 둥근 꽃 같은 마법진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아킨은 가만히 서서 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허공뿐이던 하늘위로 기둥과 둥근 천장이 만들어 지기 시작했다. 아 킨을 둘러싸며 기둥들이 세워졌고, 그것들은 떠있는 듯 흐릿했다가 어느새 그 화려한 받침을 단단히 디디며 진해졌다. 끝났다는 생각이 들자 아킨은 앞으로 나섰다. 발을 디딜 때마다 주변 에 기둥과 벽이 솟구쳐 올랐다. 그러나 온통 하얗기만 할 뿐, 다른 색조는 거의 없었다. 이곳은 날카롭게 다듬은 강철 바늘처럼, 신경 질 적인 꿈같은 곳이다. 좀 더 앞으로 나가자, 드디어 커다란 문이 앞을 가로막으며 나타났 다. 그 문만은 백색이 아닌 푸른빛이었다. 소용돌이치는 듯한 무늬의 푸른 돌로 만들어 진 것으로, 그 앞에는 둥근 손잡이가 늘어뜨려 져 있었다. 아킨은 그것을 잡지 않고 그대로 밀었다. 문은 부드럽게 열렸다. 안 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로브자락이 펄럭이고 머리카락도 흐트러진다. 그리고 그곳은 눈과 얼음의 정원이었다. 서늘한 바람이 감돌고 있었 으나 에일 듯 춥지는 않다. 그저 서늘할 뿐. 곳곳에 투명하게 반짝 이는 나무들이 있고, 그 아래는 솜 같은 눈으로 덮여 있었다. 중앙에 는 얼지 않는 푸르고 깊은 인공 못이 야트막한 테두리 안에 흔들리 고 있었다. 그 못을 둘러싼 야트막하고 두터운 벽만 보면 보통 인공 못인 듯 보이지만, 가까이 가서 안을 들여다보면 그 끝없는 깊이 에 아찔해진다. 깊고 푸르다 못해 심연처럼 검어 보이기까지 하고, 간혹 그 안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스쳐지나가곤 했다. 그 옆에는 횃대가 세 개 놓여 있었다. 지금 하나는 비어 있고, 그 두 개에는 푸른 새 한 마리와 붉은 새 한 마리가 각각 앉아 있었다. 푸른 새 한 마리는 곤히 잠들어 있었고, 붉은 새는 눈을 깜빡 깜빡 거리다가는 푸드득 날아왔다. 아킨은 서둘러 도망치려 했지만, 새는 벌써 그의 어깨를 움켜잡으며 앉아 버렸다. "까아아아아아아악-----!!!" 까마귀 울음보다 아주 조금 고운 그 울음에, 아킨은 귀가 얼얼해서 잠시 멍하니 있었다. 새가 미친 듯이 울부짖어대기 시작했다. "까악- 어디 갔었어! 까악-! 길 잃었지! 까아아아악! 바보!" "........." 아킨은 그 부리를 꽉 움켜잡았다. 발톱으로 할퀴려 하자, 이번에는 두 발을 움켜잡았다. 그러자, 당장에 새가 날개를 미친 듯이 퍼덕 였다. 아킨은 두 팔을 최대한 멀리 뻗었다. 아무리 퍼덕대도 소용없자 , 새는 날개를 축 늘어뜨렸다. 아킨은 발은 그대로 잡고, 부리만 슬쩍 놓았다. 역시나 예상대로 새는 당장에 달려들어 쪼려 했고, 아킨은 목을 움켜잡았다. "까아아악--! 나쁜 놈! 까아아아악--!" "좀 점잖게 구십시오." "까아아악! 내가 왜! 깍! 캑 캐랙...나쁜 놈! 그래도 나는 네가 없어져 서 궁금했는뎃! 까아아아아아악--!" "......." 걱정되었다, 가 아니라 궁금했다? 별로 기대도 안하던 인간이지만, 이렇게 거듭 확인하게 될 때마다 각별히 불쾌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찾으러 돌아다니셨습니까, 팔로커스?" "까아악! 미쳤냐? 까아악! 귀찮아! 깍, 깍!" "......."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이렇게 게으른 인간이 어떻게 그리도 복잡하 고 번거롭고 힘든 '세계정복'에 나섰는지 모를 일이었다. 솔직히 말 하자면, 세계 정복이라는 야망 자체는 참으로 근사해 보이지만 그에 따르는 엄청난 '잡무'는 보통 사람이 할 일이 아니었고 아킨은 정 말 하고 싶지 않았으니. 아킨은 두 손을 거의 동시에 놓았다. 새는 푸드득 날아오르더니, 아 킨을 향해 번개처럼 내리꽂혀 왔다. 그러나 근처에도 오지 못하고 쾅! 하는 엄청난 소리를 내며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히더니 그대 로 낙하해 버렸다. 붉은 깃털이 훨훨 날려 하얀 바닥에 떨어진다. 아킨은 잠시 기절해 버린 새를 내려다보다가, 그 새를 노려보고 있는 푸른 새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푸른 새는 웅크리고 자던 자세 그대로 고개만 빠끔히 들고 있었다. "시끄러워, 정말." 여자 목소리였다. 아킨은 축 늘어진 새를 집어 들어 그가 늘 앉아 있 곤 하던 횃대에 '걸어' 놓고는 그녀에게 사과했다. "수선 피워서 죄송합니다." "아, 괜찮아. 네가 사과할 일 아니고, 저기 저 놈에게 사과 받은 것은 아마도 천년도 더 된 옛날 이야기니까." 새는 퉁명스레 말하고는 다시 고개를 날개 속에 푹 파묻었다. 어차피 이 새들은 각자 연결된 마법사들의 말을 전할 뿐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그들이 직접 이곳에 있어야 했지만 그것이 귀찮은 그 두 마법사는 이렇게 새들만 앉혀 놓고 자기네들은 잠이나 자며 뒹굴거리는 것이다. 아킨은 이 사람들의 게으름이 날이 갈수록 경지에 이르며, 또한 자신 의 상상력을 가뿐히 넘어선다는 것을 재차 확인해야 했다. 그러나 어차피 천년만년 이러고 사는 위인들이라, '좀더 부지런해지시는 게 어떨까요?' 하여 온 정원이 깍깍 소리로 뒤덮이게 하는 것은 포 기하기로 했다(그건 정말 '지옥 같은 고통'이 될 것이다.) 아킨은 연못 왼쪽으로 난 포석 덮인 길을 걸어 정원을 빠져나갔다. 곳곳에 얼음으로 된 꽃들이 반짝 거렸고, 그 위로 눈으로 된 나비 들이 길고 하얀 궤적을 그리며 날아 다녔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입 벌리고 감탄할 테지만, 아킨은 정원의 주인인 지에나의 변덕에 따라 이 작고 고운 꽃들이 식인괴물로(식물 본연의 식성을 과감하게 포기하는 치욕이다), 우아한 나비들이 거대 사 마귀에 육박하는 터프함을 자랑하는 대괴수들로 변한다는 것을 잘 안다(아아, 예쁘다 하며 건드리는 즉시). 그렇게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길 저편에서 검은 새 한 마리가 날개를 펼치며 날아왔다. 방금 전의 그 두 새들과 같은 쓰임새로 만들어졌 지만, 이 새의 주인이 '부지런'해서(극히 상대치) 쓰여 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킨은 팔을 뻗어 그 새를 앉히고는 곧 따라올 사람을 기다렸다. 역시나 예상대로, 굽은 길을 가리고 있는 기둥 뒤에서 키 큰 남자가 나타났다. "아키야, 너 어디 갔다 온 게냐?" 베이나트는 아킨을 보자마자 그리 물었다. "숲 밖으로 나갔다가, 그만 늦어져서 보름달 뜨기 전까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그대로 펑 하고 변해 버렸어요. 그 때 부터는 제 뜻대로 안 된다는 건 아시지요?" "옷은?" 아킨은 헐렁한 로브의 소맷자락을 흔들어 보였다. 예전에 지에나가 준 것이었다. "이걸 입고 있어서 괜찮았습니다." "어쨌든 속옷은 날렸겠군." ".......베이나트으으으으........" 아킨의 시뻘개진 얼굴에 베이나트는 히죽 웃기만 했다. 아킨은 붉어 진 얼굴을 돌렸고, 그제야 베이나트는 아킨의 머리에 묶인 끈을 발 견했다. 아무리 덜렁대는 베이나트라지만, 그것이 바깥세상 것이라 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그런 깜찍한 물건을 챙겨 놓을 정도로 섬세한 사람이 없으니). "이거 뭐냐?" 아킨은 급히 그것을 가리며 말했다. "아, 변방 기지 근처에서 유제니아를 만났습니다. 그곳에서 지내고 있 더군요." "어라, 정말? 잘 지내더냐?" 베이나트의 얼굴에 당장에 화색이 돌았다. "그럭저럭 지내고 있더군요. 하지만 불쑥 찾아가거나 하지는 마세요. 놀랄 테니까." "너 보고 안 놀라면 나 보고도 안 놀랄 거야." "근거가 뭡니까?" "뭐, 알몸 왕자보다야 나을 것 아니니." "......." 아킨은 더 이상 말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멱살 잡고 흔들지 못한 것은 순전히 베이나트가 그보다 천살 정도 연상이기 때문이었다. 베이나트가 말했다. "그런데 그 동안 별일 없었다니?" "뉴마르냐의 변방기지는 특별한 일이 일어날만한 곳이 아니고, 특별 한 일이 일어 날 만큼 오래 지나지도 않았더군요. 지엔 말이 맞았 어요...... 정말 넉 달밖에는 지나지 않았더군요." "내가 뭐라고 했니. 그래도 이제부터 믿게 되어서 다행이구나." "믿어지지 않았거든요. 그렇게 오래 있었던 것 같은데, 고작 넉 달밖 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요." "이곳은 시간의 흐름 자체가 이상한 곳이니까." 아킨은 어째서 이곳을 그렇게 만들었느냐고 묻지는 않았다.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살아야 하는 그들은 그들이 머무는 곳의 시간의 흐름을 바꾸어 그들이 원하는 속도로 지나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백년을 하루같이 지낼 수 있고, 하루를 백년 같이 지낼 수도 있는 것이 그들이다. 아무리 같은 강이라도 물살이 빠를 수도 느릴 수도 있으니 , 그들은 바로 그 유속을 조절하는 것이다. "이상해요......탈로스의 탑에 있을 때, 단 하루가 지난 것 같았는데 세 상은 1년이나 지나 있었습니다. 저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는데, 세 상은 너무나 많이 변한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몇 년은 있었던 것 같은데, 저는 정말 많이도 변한 것 같은데, 세상은 고작 넉 달이 지 나 있더군요." 그렇게 말하며 아킨은 고개를 돌려 정원의 인공 못을 돌아보았다. 푸 른빛이 출렁이며, 흐릿한 겨울 햇살을 반사하고 있었다. 경계 밖에 놓아두었던 많은 것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자켄도, 늪의 성도, 그 안의 메리엔도, 루첼과 켈브리안도......... 그리고 그의 스승인 롤레인도. 아직은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아는데, 그래도 너무나 그리 워 당장에라도 뛰쳐나가 그들을 안고 싶어진다. "언제.....제 일이 끝나는 겁니까?" "지에나가 허락할 때까지." "그게 언제가 될지 짐작하십니까?" 베이나트는 고개를 저었다. 아킨은 아무 말 없이 성이 마주하는 높고 험 준한 협곡과, 그 협곡 틈을 보이는 끝없이 펼쳐진 호수들을 보았다. 이제 그 호수들 위로 눈발이 흩어지고 있었다. ******************************************************************** 작가잡설: 난처한 비밀~ 이 하나 있었던 겁니다. 내일이면 수능이군요. ^^ 노력한 만큼 좋은 결과들이 있으시기를.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0장 *************************************************************** [겨울성의 열쇠] 제50장 눈보라 속의 탐색자 제230편 눈보라 속의 탐색자#1 *************************************************************** 베넬리아 공화국은 전성기 즉, 내전 전만 해도 나셀과 남해를 '내해' 로 선언할 정도로 최강자이자 평정자였다. 그러나 바셀 공이 일으킨 내전으로 전사자만 4만. 함대의 절반이 같 은 깃발을 건 배들끼리 부닥치며 내해 바닥으로 가라앉아 버리고, 천년이 지나도 베넬리아를 지킬 거라 외치던 자랑스러운 요새 두 곳 은 자국인에 의해 전파되었다. 최악의 내전. 반목과 원망밖에 남지 않은 어지럽고 무의미하며 부도덕한 집안싸움이었다. 그 진절머리 나는 내란이 끝난 것은 현 대통령이자 당시 총사령관이 었던 단돌로의 노력과 능력 덕이었고, 그의 큰 행운 중 하나는 오 거스트 롤레인을 발견하고 설득하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바셀 공을 재기불능으로 만들어 놓은 단 한번의 일격은 그녀의 것이었으니. 그 누구도 스물여섯 밖에 안 된 젊은 마법사의 능력이 그 정도나 될 거라 생각지 못했었다. '컬린의 제자'라는 것 이상은 알려지지 않았던 마법사, 그나마도 전능의 탈로스라는 빛에 가려 한걸음 뒤에 있었 던 마법사였다. 그녀가 처음 단돌로 공의 함대에 합류했을 때, 다 들 그녀가 총사령관의 신임 비서인 줄만 알았다. 아니, 그녀가 기 함 선두로 갔을 때조차도 무엇을 하려는 지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그날, 오거스트 롤레인은 바셀 공의 함대 절반을 가라앉혔으 며 사기와 의욕은 완전히 가라앉혔다. 거대한 눈보라가 성난 사자 처럼 치솟아 반란군의 함대를 뒤덮었고, 그 눈부신 백색 설마는 모 든 배를 휩쓸며 돛대를 부러뜨리고 노를 부수었다. 얼어붙은 바닷물이 바윗덩어리처럼 돌진하여 배를 으깨었고, 오도 가 도 못한 배들은 서로 부딪혀 가라앉았다. 찬 바다에 빠진 병사들은 익사하기도 전에 동사했고, 바셀 공의 아들마저 그 난리에 휩쓸려 죽었다. 시간이 지나자 롤레인은 마법을 거두었다. 마귀처럼 울부 짖던 눈보라는 씻은 듯 사라지고, 얼어붙었던 바다도 녹아 철썩거 리기 시작했다. 멍하니 있던 베넬리아 군에게, 단돌로는 드디어 공 격을 명했다. 그리고 그 어마어마한 광경에서 간신히 정신을 차린 베넬리아 해군은 7여 년간 베넬리아의 살과 내장을 곪게 했던 바셀 공의 반란군을 완전히 소탕했다. 그렇게 벨카네스의 백색 진이라는 오랫동안 회자될 전설과 함께, 내 란은 총사령관이자 임시 통령으로 선출되었던 단돌로 공의 완승으로 끝났다. 드디어 대통령 궁에는 베넬리아 공화국의 수호자 울피온 의 깃발이 올라갔고, 대문마다 평화의 화관이 걸리며 도시의 거리 와 광장은 기쁨의 함성과 흥분된 축가로 가득 찼다. 그러나 승리의 가장 큰 공헌자인 롤레인은 그 날로 수도를 떠나 스승 에게로 돌아갔다. 돌아온 것은 몇 년 뒤의 베넬리아 회합 때였고, 그 해에 그녀는 열쇠의 마스터이자 베넬리아 최고 마스터가 되었다. 그러나 그나마도 몇 년 가지 못했다. 대마법사 컬린의 실종 후에 벌어진 탈로스와 대전 후에 그녀는 아예 칩거해 버렸다. 그 후는 컬린과 그 세 제자들- 특히 롤레인에게 있어 참담한 해였 다. 온갖 비난과 추문이 세 제자들의 뒤를 따라다녔다. 컬린이라는 존재의 위대함에 대한 질시가, 그 대상이 사라지자 제자들을 향해 쏟아졌던 것이다. 탈로스는 은거했고, 롤레인은 침묵했고, 악튤런 은 이를 갈았다. 지나친 위대함이란 그런 것이다. 하나를 제한 다른 모든 것이 공평하 게 하찮아 지게 된다. 그 안에도 분명 높고 낮으며 하찮고 고귀하고 천박하고 현명하고 어리석은 차이가 있음에도, 더 아래의 자들은 더 위에 있는 자들을 '당신이 잘난 건 알겠는데, 어쨌든 그 사람보 다는 못하다'라는 이유로 서로를 공평하게 만들고자 한다. 컬린의 세 제자가 가장 치를 떨었던 것은 바로 그것이고, 가장 점잖 은 성격(상대적으로)이었던 롤레인은 언제나 그 중심에 놓여 있었다. 베넬리아의 백색진도, 보지도 못한 컬린의 위대한 마법에 비해서 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베넬리아는 쉽게도 그녀의 공을 잊었고, 오 로지 탈로스에게 패한 것만을 기억하며 거듭 거듭 확인했다. 그러 나 롤레인은 자신을 과시하기 보다는 돌아서서 침묵하는 것을 택했 다. 시끄러운 이들을 조용히 경멸하며, 스스로의 초라함을 알아서 깨닫고 입 닥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결국 베넬리아 공화국의 최고 마스터, 열쇠의 주인은 롤레인 뿐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열쇠는 소환되지 않았다. 어느덧 시끄럽던 이들은 점점 잠잠해지고, 마침내 침묵했다. 한 마디씩 수군대며 ' 그녀는 뭐가 부족해' 하고 말하며 억지로나마 스스로를 위안했으나, 결국 마음 속 깊은 곳으로는 그녀가 그 나라의 최고자임을 인정해야 했다. 그리고 또 시간이 지나자, 결국 사람들은 그녀가 돌아오기를 바라게 되었다. 그러니, 그런 롤레인이 울파논으로 돌아왔을 때, 게다가 '제자'라는 청년까지 데리고 왔을 때의 반응은 엄청났다. 롤레인은 그 해 서른여덟이라 제자 한둘을 두는 것은 당연했지만, 그 녀가 제자 없기로 유명한 컬린의 제자인 동시에 그 자신 역시 제자가 없었으니 모두 그 청년을 '컬린 계보의 적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 뿐만 아니라 탈로스가 에크롯사를 제한 다른 모든 마법사 길드로 부터 배척당하게 된 지금(그리고 악튤런은 제자로 치지도 않고), 롤레인이야 말로 컬린의 후계자로 공인되어 있었으니 로멜에서 온 청 년 루첼 그란셔스는 컬린의 후계자까지 되는 것이다. "가다가 넘어지기만 해도 온갖 뒷말이 쏟아질 거다." 루첼이 베넬리아에 도착한 날 롤레인은 그렇게 말해주었다. 롤레인은 누구보다도 본국 마법사들의 특징을 잘 알고 있었다. 끝없이 그 자 신과 루첼을 재고 자르고 하여, 루첼의 부족함과 자신의 뛰어남을 비교할 것이다. 루첼에게 있고 자신에게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루첼에게 없고 자신에게 있는 것은 '전부'가 될 것이다. 지독한 경쟁사회- 결국에는 그것으로 대륙 최고의 부와 힘을 거머쥔 베넬리아였으나, 그것은 오히려 공화국민의 피를 말리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 환경에서 자라지 않은 타국인에게는 더욱 힘들지도 모른다. 그래도 루첼은 노력했다. 보답하고 증명하기 위해. 인정받으며 제대 로 꼿꼿이 서기 위해......아마도 예전의 롤레인이 그러했듯. 대외적인 루첼에 대해 아내인 실비가 아는 것이라고는 단 하나, '직 업이 마법사'라는 것뿐이었다. 최고마스터가 무엇인지 몰라 그냥 높은 마법사인가 보다, 하고 생각 하고 있어서 롤레인이 얼마나 대단한 마법사인 줄도 모르고, 그러니 제자인 루첼이 더불어 유명하다는 것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루첼 이 떠날 때까지만 해도, 아니 지금도 그저 '마법사의 수련 과정에 서는 누구나 하는 일'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가르쳐 주는 대로 곱게 믿는 것으로 유명한 실비가 가 게로 쳐들어 와서는 울음부터 와앙 터뜨리자, 줄리어스-오거스트 롤레인의 아버지-는 그녀가 울다 지칠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린 후 물었다. "누가 이상한 말을 했니?" 실비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무언가 엄청나게 놀랄 만한 일을 듣고 온 것이다(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놀랄 만한 일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 "오늘 장 보러 갔다가 노라 아주머니에게 들었어요. 제국에서 큰 전 쟁이 일어날 거래요......어쩌면 좋아요." "암롯사 말이냐?" "암롯사에서 전쟁이 나는 거에요? 맙소사, 어떻게 해..............!" 이제 실비는 거의 혼절하기 직전이 되더니, 다시 흑흑 울음을 터뜨렸 다. 그 처량한 모습에 줄리어스는 나른히 한숨을 내 쉬었다. 처음 들어서 가 아니라, 그걸 '이제야' 들은 실비가 가엾어서 그런 것이었다. 오거스트는 사실대로 가르쳐 주었다가는 병아리 비슷한 신경 구조를 가진 실비가 당장에 졸도 할 거라 짐작(아니 확신)하고 입 다물고 있었으리라. 그런 아내의 뜻을 짐작한 토드 역시 마찬가지일 테고, 다른 사람들이 '가르쳐 주지' 않는 한 아무것도 모르는 실비는 선전포고 석 달이 지난 지금까지 몰랐던 것이다. 게다가 로메르드의 내란으로 가족과 헤어지고 전남편까지 잃은 소심한 실비에게, 제국 의 '내란(그러나 말이 내란이지, 실제로는 그냥 타국 간의 전쟁이다 )'에 남편이 말려들었다는 것은 지옥에 두 번 갔다 온 것 보다(물 론 실비의 담력을 기준으로 하여) 무서운 일인 것이다. "루첼이 편지를 안 보내더냐?" "아뇨. 언제나 아무 일 없다는 말 뿐이에요. 하지만 그이는 바로 옆에 서 전쟁이 일어나도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날씨 이야기나 할 사람이 잖아요...." 맞는 말이다. 루첼은 머리 위로 화살을 넘기면서도 실비를 위해서라면 '오늘 하늘 은 참으로 맑고 화창해!' 하고 말할 위인이니. 그리 생각하니, 줄리 어스는 다시 한번 딸의 남편과 그 제자의 아내를 동정하고 싶어졌 다.(물론 늘 동정하고는 있지만, 이렇게 확인하게 되면 좀 더 적 극적으로 동정하게 되는 것이다). 보통 사람보다도 담력 없는 사람들이, 어쩌다가 담력 큰 사람도 살 떨리는 일을 하고 다니는 괴물들을 남편과 아내로 맞이하게 된 걸까. 물론 그도 악명 높은 바셀 대공의 검은 깃발 함대에 포위된 아립파 시를 상대로 밀수를 하여 돈을 벌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아내가 죽은 뒤에 그리 한 것이다. (그리고 밀수 짓을 할 때, 당시 휴가차 집에 와 있었던 오거스트 롤레인이 이를 북북 갈며 도왔다는 것은 둘만 아는 비밀이었다) 그런데 훌쩍거리던 실비가 갑자기 새파래지며 입을 딱 다물더니 쇼윈 도우 쪽을 바라보았다. 줄리어스도 그 쪽을 보니, 딸인 오거스트 롤레인이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마침 잘 되었구나! 오거스트에게 물어보지 그러냐?" 그렇게 말하며 줄리어스가 실비를 쿡 찌르자, 놀란 실비는 오히려 딸 꾹질을 시작했다. "끅- 끅-" "......" 아아, 안다. 알다 못해 이해도하고, 이해하다 못해 납득도 할 수 있 다. 롤레인 가의 집안사람 중에, 오거스트 롤레인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은 오로지 한술 더 뜨는 일생을 살아온 줄리어스 롤레인 뿐 이었다. 드디어 롤레인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실비는 무시무시한 식인 괴물이라도 들어오는 듯 더욱 심하게 딸꾹질을 했다. 롤레인은 실비를 슬쩍 보고는 말했다. "웬일이니?" "딸꾹-" 줄리어스가 서둘러 말했다. "아, 얘가 남....." 그러나 실비가 줄리어스의 팔을 콱 꼬집었다. 평소라면 툭 치는 것도 제대로 못하는 실비지만, 너무 당황하는 바람에 자기도 모르게 그 렇게 한 것이다. 롤레인의 눈썹이 슬쩍 치솟았다. "남?" "남자 아기가 한살이 되면 필요한 게 뭐냐고 묻지 뭐냐! 아하하하!" "네, 맞아요 교수님! 그런 일이에요! 아하하!" 롤레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더 생각하기 귀찮은 것이다) 말했다. "걱정 마라, 실비. 루첼은 어차피 애송이라, 별것 아닌 일이나 하고 있으니까." 실비가 더욱 심하게 딸꾹질을 시작했다. "네? 딸꾹- 무- 딸꾹!" "루첼은 이제 막 졸업하고 권호를 받았으니 중요한 일은 '못'해. 그리 고 전쟁에서 중요하지 않은 일이란 위험하지 않은 일이라, 이 말 이야." 실비가 딸꾹질을 계속 하면서도 기뻐했다. "저, 정말---딸꾹! 이죠? 딸꾹!" 롤레인은 실비의 가슴을 탁탁 쳤다. 실비가 딸--을 하려고 숨을 들 이키는 순간에 딸꾹질이 멈추었고 결국 히익! 하는 희귀한 숨소리와 함께 끝났다. "어서 집에 가 봐. 오다가 들렀더니, 피오가 자지러지게 울고 있더 라." "어머나! 피오가 어디 아픈가요?" "그냥 떼쓰는 것 같던데. 누구 닮아서 그렇게 울음이 큰 지.....너는 달팽이 우는 목소리랑 비슷하고, 루첼 목소리도 꽤 점잖은 편인데 그 녀석은 한번 울면 정말 천둥이라도 치는 것 같다니까." 실비의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다시 끅- 하고 딸꾹질을 시작했다. 롤 레인이 다시 그 딸꾹질을 멈추게 해 주려 했지만, 실비는 후닥닥 일어나 외투도 제대로 챙기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 안녕히 계세요--!" 그리고 문 열고 나가자마자 바로 빙판에 쿠당 미끄러졌고, 그렇게 기 어가다시피 가다가 간신히 일어나 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으악, 저러다 괜찮은 거냐!' 하고 놀라던 줄리어스도 이제는 '알아서 일어 나겠지.' 라는 성스러운 믿음을 가지고 그녀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 리고 실비가 멀찍이 사라지자, 그제야 줄리어스는 딸에게 물었다. "정말이냐?" "뭐가요?" "루첼이 별로 중요하지도 위험하지도 않은 일만 한다는 것." "당연히 거짓말이죠. 오늘 알아보니 최전방 바르젤 요새에 있더군요." 멍하니 있는 아버지에게, 롤레인은 태평하게 말했다. "와오, 그 표정 참 오랜만이군요." 줄리어스는 숨을 크억 들이키고는 외쳤다. "미안하지만 오거스트, 나는 네가 컬린 님의 제자가 된 이래 이런 표 정은 처음 지어 보는 거다! 제대로 말해다오. 어쩌다가 스물 셋 밖에 안 된 녀석이 그곳으로 간 거냐? 어떻게 된 거냐고--!" 롤레인은 잠시 아버지를 바라보고는 외투 단추를 끌렀다. "우선 차나 한잔 주세요." 이제 줄리어스의 얼굴은 단돌로 대통령이 찾아와 '따님과 만나게 해 주 시오. 아, 물론 데이트 신청은 아니오.' 하고 말했을 때와 대강 비슷했다. ***************************************************************** 작가잡설: 최강숙질 제임-루첼, 무적 부녀 줄리어스 - 오거스트. ;; 드디어 수능이 끝났습니다~ 아마도 어제 답들 맞춰 보시고 밤 새도록 노시거나 울부짖으시거나 흐뭇하게 주무시거나 했을 테죠; .....그러나 방송은 믿을 게 못됩니다. -_-;; 원래 뉴스란 조금만 호들갑 떨일이 생겨도 오바하는 습성이 있답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정말 수능이란 세상 모든 것을 결정하는 위대한 절대유일신이었습니다. 하지만 졸업하고 대학다니고 대학마저도 졸업하고 나니.......수능 이란 어쩌면 가장 이해하기 쉬운 관문이자 시험이란 생각이 듭니다. 보는 날짜도 정해져 있고, 답은 정확하며, 결과는 한달이 지나지 않아도 나옵니다. 하지만 더 많은 시험이 정해지지 않고 치루어 지더군요. 언제 볼지도 모르고, 준비 되지도 않는데 찾아오기도 하고, 준비되어도 찾아오지 않기도 합니다. 정답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고, 누구도 그것이 정답이라 확인해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언제 찾아올 지 모르죠. 그래도 수능치신 분들, 다음 달 성적표 나올 때 씨익 웃을 수 있 으시기를.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0장 **************************************************************** [겨울성의 열쇠] 제231편 눈보라 속의 탐색자#2 ***************************************************************** 차 끓는 데는 잠깐이면 충분했다. 2월 말. 베넬리아는 아직 겨울 끝자락이라 찻물로 쓸 물은 언제나 난 로 위에서 끓고 있었다. 잠시 뒤, 베넬리아 사람이 가장 많이 마시는 모그 차의 싸한 향기가 가게 안에 가득 찼다. 오거스트 롤레인은 차받침에 절반, 찻잔에 절반(즉, 거의 없었다)만 남아있는 차를 받아 들자마자 옆으로 치워 버렸다. 차는 필요 없다. 진정이 필요했던 것은 그녀가 아닌 그녀의 아버지였으니. "물론 저도 의외였어요. 젊은데다가 외국인인 루첼이 바로 델 카타롯 사와 마주하는 바르젤 요새로 가다니." "하지만 곧 전쟁이 날 거잖니! 그것도 바다 도깨비들의 난동 같은 전 쟁!" 롤레인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바젤 공의 검은 갈매기 틈도 누비던 아버지 말씀치고는 좀 의외군 요." "그건 너랑 나였으니까. 솔직히 말해서, 너와 내가 손잡으면 누가 막 을 수 있겠니?" "....." '아버지, 나 휴가 왔어.'하고 온 딸의 손을 붙잡고 '자, 우리 동업 한 번 해 보지 않겠냐?' 하고 시킨 일이 바로 밀수였다. 그것도 강철 요새가 있던 가텔 항을 점령하고, 그 도시의 생존자를 그날로 절반 이하로 줄이고 처녀를 전멸시켰던 검은 갈매기 함대가 포위한 아 립파 시로 말이다. 그러니 그런 아버지가 루첼이 위험한 곳으로 갔다고 하여 이렇게 걱 정하는 것에 대해, 오거스트 롤레인은 참으로 서운했다. "루첼을 많이 좋아하시나 보네요." "물론 나는 그 청년 좋아해. 아주 유쾌하고, 영리하고 착실한데다가 마누라 아낄 줄도 아는 젊은이니까. 게다가 네 제자이기도 하니, 내 아들이나 손자와 다를 바 없지 않니." 그리고 루첼은 이 줄리어스 롤레인의 체스 상대이자, 카드놀이 상대 이자, 술친구였다. 사위인 토드가 술도 못하고 제대로 놀지도 못해서 둘이서 하는 일이라고는 가끔 주리와 함께 보트 놀이나 가는 정 도였는데, 루첼은 줄리어스의 10년 지기인 듯 착착 맞았던 것이다. 루첼은 늙은 줄리어스 롤레인이 간만에 만난 활력, 그 자체였다( 루첼에게는 간만의 난처함이지만). "그리고 오거스트, 너도 벌써 알겠지만 루첼 같은 아이를 그리 위험 한 곳에 놓는 다는 건 말 그대로 '그냥 맘 푹 놓고 죽어라.' 라는 거잖니. 아무리 내가 밀수선 선장이나 하던 놈이라지만, 높은 놈들 머리가 어느 식으로 돌아가는 지는 잘 알아. 혹시 거기 높은 놈 긁어 놓기라도 한 거 아니냐? 그런 놈들 그냥 한번 수틀리면, 루첼 처럼 힘없는 젊은이 인생 조지는 건 순식간이잖아." 아버지 말이 없어도, 롤레인은 짚이는 바가 없지는 않았다. 루첼은 아킨과 친구 사이였고, 지난번에 보낸 마지막 편지를 보면 그 곳 후계자인 휘안토스에게 찍히고도 남은 짓을 했다.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도 끝까지 아킨을 찾아 도운 것은 칭찬할 만 했지만, 아무래 도 상대가 휘안토스였으니 무슨 일이 나도 날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역시나, 한 달 뒤에 루첼의 소식은 뚝 끊어져 버렸다. 일주일 에 한 번 정도 상황 정리해서 보고하던 편지는 완전히 끊겼고, 실 비에게는 어디 '지루한 편지 교본' 같은 곳에서 베껴온 듯 '나 잘 있어 . 당신도 잘 있어?' 하는 편지만 보냈다. 행여나 그 안에 다른 무 엇이 숨겨져 있는지 몰라, 몇 번이나 탐색마법을 시전 해 보았지만 말 그대로 깨끗한-내용에 있어서도-편지일 뿐이었다. 결국 롤레인은 베넬리아 통령 단돌로를 찾아가 그 일에 대해 물었고, 베넬리아 정보부에서 전해진 것은 루첼이 지금 바르젤 요새에 있다는 것이었다. 이제 막 불꽃을 탁탁 튀기고 있는 델 카타롯사와 암롯사 의 관계를 고려한다면, 가장 먼저 천둥 벼락이 쏟아질 곳이다. 물 론 자기 나라라면, 특히나 공화국이라면 시민의 책임과 의무가 있 으니 편한 곳만 골라 다닐 수 없다. 그러나 루첼은 말 그대로 암롯 사와 '아무 상관도 없는' 몸이었으니, 그렇게 '괘씸죄'로 위험한 곳 에 있다는 것 자체가 억울한 일인 것이다. 그리고 일이 그렇게 된다 면, 정말 전쟁이 터져서 그곳이 위험해지면, 더욱 위험해 지는 것이 루첼이다. "그렇잖아도 통령에게 말 해두었어요. 직권남용이라는 건 알지만, 어 쨌건 제 제자이며 컬린의 계보에 속하는 귀한 몸이니 신경 써 달 라고." "신경 써 준다든?" "높은 놈들 속내는 왕국이나 공화국이나 거기서 거기에요. 다른 점이 라고는, 여기 높은 놈들은 수틀리는 대로 하기 위해서는 허락받아야 할 곳이 너무 많다는 것뿐이죠. 그러니 지금 상황으로는 그리 큰 기대를 할 수는 없어요.........암롯사 대공국이 제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한, 루첼과 연락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 상 없다고 봐야 해요." 줄리어스 롤레인이 한숨을 내 쉬었다. 그 한숨과 함께 10년은 풀썩 늙어버린 듯 했다. "일이 왜 이렇게 돌아가는 거냐....." "지금으로서는 루첼을 믿어야죠......제 실수에요. 빌어먹을 사이러스가 아키를 델 카타롯사 공주에게 장가보낼 생각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으니까. 또, 역시나 빌어먹을 휘안토스가 탈로스를 통해 아키를 죽이려 할 줄도 몰랐고......." "탈로스가 그 소년을 도와 줄 거라는 것도 몰랐을 테고." 아버지의 말에 롤레인은 쓰게 웃었다. "아마도요." ".....그리고 뭐, 다른 짚이는 건 있냐?" "좀 더 간단하지만, 좀 더 위험한 생각이 하나 더 있어요. 델 카타롯 사가 먼저 도발할 가능성이 훨씬 높고, 그렇게 되면 첫 전투에서 악튤런 파노제가 나올 가능성이 아주 높아요. 그리고 루첼이 그와 만나는 시간이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제가 끼어들어야 하는 순간도 빨라질 거에요. 암롯사로서는, 제가 끼어드는 시간이 빨라질수록 좋거든요." 줄리어스 롤레인은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고는 어색하게 바닥을 내 려다보았다. 롤레인이 말했다. "이런 제가 자랑스러우세요?" "......당연한 말을 하고 그러니." "그렇다면, 제가 세운 공이 자랑스러우세요?" "잔인한 질문은 하지 말아다오, 오거스트. 확답할 수 없는 것에 확답 을 해야 하는 건 말이다, 내게는 참 힘든 일이구나." "죄송해요." "하지만 오거스트,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뭐, 애비가 딸 사랑하는 거 야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어쨌든, 그래서 네가 힘든 일이 없 었으면 한단다." 롤레인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이 나라의 최고 마스터에요. 더군다나 왕국도 아닌, 공화국의 최고 마스터. 하지만 그 최고 마스터로서, 단돌로 통령의 청을 받 아들여 루첼을 그곳으로 보낸 건 후회할 수밖에 없군요." 줄리어스는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담배 연기가 피어오르며 닫힌 가 게 안에 자욱하게 퍼졌다. "그 때 단돌로의 손을 잡은 것도 후회하니?" "루첼을 보낸 것은 바로 잡을 수 있지만, 그건 틀렸다 생각되어도 바 로 잡을 수 없는 일이었어요. 이미 선택한 일, 그리고 그 선택을 위해 누군가와 싸워 이겨야 했고......아무런 싸움도 하지 않고는 제 선택을 증명할 수는 없었어요. 죽이지 않고 이길 수 있다면 좋 았겠지만, 당시 상황은 그렇지 않았죠.....아시잖아요. 저는 어차피 정의감이나 애국심 같은 따끈한 감정과는 거리가 먼 위인이라는 걸. 그러니 그 많은 사람들을 죽인 게, 당연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 저는 분명 수 천 명을 죽인 학살자이고, 그 '사실' 자체를 옳은 일이라거나 합당한 일이라든가 당연한 일로 만들고 싶지 않아요." "오거스트-" 줄리어스는 파이프를 내려놓았다. 연기는 점점 희미해지다가 꺼져 버 렸고, 그것을 바라보는 줄리어스의 검은 눈도 흐려져 있었다. "어째서 너는 좀 더 편하게 살지 않는 거냐......왜 그렇게 너 자신에 게는 그토록 가혹해서, 그렇게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는 거냐......." "끝까지 제가 어디로 가고 있는 지보고 싶으니까요. 폭풍우 속에서도 나침판을 놓지 않듯, 저 역시 제가 가는 길 끝이 어디로 향하고 있 으며 어떤 길인지 제대로 아는 것을 놓치고 싶지도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세상은 합리적이지도 공평하지도, 정직하지도 선량하지도 않아요. 그리고 저는 그래도 세상은 괜찮다고 믿을 정도로 순진하지 못 하고, 같이 형편없는 사람이 될 정도로 뻔뻔하지도 못하지만, 고칠 정도 로 강하지도 못하지요...........그래서 힘든 거에요." 롤레인은 그리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것이 제가 사는 방식이에요." 그녀의 머리 위에, 줄리어스의 두툼하고 주름진 손이 얹혔다. 먼 옛 날, 멀고 위험한 항해를 갈 때, '안 나가면 안돼? 엄마가 열 받으면 나만 혼나.' 라고 말하는 어린 그녀를 이렇게 쓰다듬어 주며, 그 역시 그녀가 했던 말을 했었다. 이게 내가 사는 방식이란다, 아가야 . 하지만 걱정 마라. 나는 절대 길을 잃지 않고 이곳으로 돌아올 테니. "그렇다면 네가 옳다 생각되는 대로 가려무나. 나는 언제나 이곳에서 너를 기다려 줄 테니.......사랑하는 아가야." 델 카타롯사와 암롯사는 대치상대로 한 해의 첫머리를 넘겨 버렸다. 성배의 언약으로 얽매인 기간인 두 달이 지나자, 휩쓸 듯 차가운 겨 울이 닥쳐온 것이다. 피에 굶주려 미치기 직전인 인어들조차 바다 밑에 가라앉아 잠을 청 하는 시기이니, 아무리 싸우고 싶어 안달 난 델 카타롯사와 암롯사 라도 잠시 쉴 수밖에 없었다. 한 겨울에 병사들을 전쟁터로 내몰았 다가는, 아마도 암롯사나 델 카타롯사나 전사자 보다 동사자를 세는데 더 바빠질 테니. 그러나 바르젤 요새의 덧문까지 꼭꼭 닫고 겨울을 지세며, 각 나라의 적대감과 승부욕과 호승심은 한겨울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불꽃보다 더욱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지루한 겨울밤에, 온갖 이야기들이 오고갔다. 지저분한 이야기가 반이고, 나머지 절반은 봄이 오면 적 들을 어떻게 갈가리 찢고 썰어 삼켜 줄까였다. 인간은 성적 불만과 잔인함의 실현에 있어서는 가장 상상력 빈곤한 인간이더라도 놀라운 발상들을 한다는 것을 겨울 내내 확인했던 루 첼은, 솜털 보송한 소년 병사가 새로운 상상의 세계를 펼쳐 보일 무렵에 자리를 떴다. 병사들 사기가 어떠하냐고 물을 케올레스에게 는 그저 '늘 그렇듯, 오늘도 엽기발랄 합니다. 델 카타롯사의 병사 중 누가 나타나든, 그 발랄한 상상력을 멋지게 시험해 줄 걸요. 구 경하고 싶지는 않지만'하고 답해줄 것이다. 케올레스의 방으로 돌아오니, 그곳은 케올레스의 병 때문에 한여름처 럼 후덥지근했다. 한 겨울 요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느라 털 코트에 목도리까지 두르고 있던 루첼은, 방안에 들어오는 즉시 그대로 쪄질 것만 같아 목도리를 푸르고 코트도 벗어 던졌다. 그리고 벽난로근처에 놓인 안락의자 로 가자, 그 곳에 담요에 푹 덮여 있던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왔군."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었다. 말랐던 얼굴은 더욱 말라, 이제 볼과 턱 에 철썩 붙어 있었다. 머리카락도 반이나 빠져, 빈 머리가 훤히 드 러날 지경이었다. 두 달의 전쟁 금지 기간이 끝나고, 휘안토스가 산 파로이로 돌아갈 준비를 할 무렵 케올레스가 이곳 바르젤로 왔다. 병색이 완연해 비 틀대면서도 암롯사 왕가에 대한 그의 책임감 하나로 온 것이다. 베 넬리아로 '모범 답안' 같은 편지를 아내에게 보내는 것을 제하고는 그 어떤 서신교환도 금지되어 버린 루첼은, 그런 케올레스의 간호 와 보좌를 맡아 바르젤에 남게 되었다. 뭔가 심상찮은 일이 생길 거라 생각했던 루첼에게는 뜻밖의 행운이기도 했다(어쨌건 휘안토 스와는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좋다). 그러나 무리해서 온 케올레스의 병은 나날이 깊어져, 이제는 하루에 두 시간 이상 돌아다니는 것조차 힘들게 되었다. 한 겨울 동안은 전쟁이 없으니, 마법사이자 형식상의 '후임'인 루첼이 그를 간호하며 그의 일을 대신하게 되었다. 물론 중요한 일은 케올레스가 직접 하 고, 몸으로 돌아다니는 일만 루첼이 하고 있었다. 성 안의 병사들 의 동태라든가, 코앞에 있는 델 카타롯사 군의 움직임이라든가 하는 것을 알아내 보고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케올레스는 힘겹게 손을 들어, 책상 위에 놓인 손가락만한 두루마리 세 개를 가리켰다. "좀 가지고 오게나....쿨럭!" "네." 루첼은 그것을 긁어다가 케올레스에게 건넸다. 케올레스는 떨리는 손 으로 그것을 집어 들려다가 결국 모두 떨어뜨리고 말았다. 루첼은 그 두루마리를 모두 집어 올리며 말했다. "제가 펴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루첼은 그 중 가장 급한 소식인 붉은 인장의 두루마리를 뜯어 펼쳐 보였다. 케올레스가 눈을 찌푸리자, 루첼은 돋보기안경을 찾아 그에게 씌워 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케올레스의 눈에 초점이 맞지 않아, 루첼은 두루마리를 뒤집었다. 케올레스가 희미하게 웃었다. "미안하네." "아뇨, 괜찮습니다." 중요한 이야기가 잔뜩 있었다. 사이러스가 출정 준비를 거의 마쳤으 니, 날이 풀리는 대로 출발하겠다, 그 사이에 카톤 케이 백작이 군 오천을 끌고 와 지원할 것이다. 기다리고 있으면, 아마도 3월 하 순 안으로 모든 준비가 끝날 것이고, 그 때 사이러스가 직접 암롯 사 군을 지휘하여 델 카타롯사를 칠 것이다. 케올레스는 안락의자에 몸을 눕힌 채 루첼이 읽어주는 전갈을 경청 했다. 그리고 붉은 인장의 전갈을 다 읽자, 이번에는 푸른 인장을 가리켰다. 루첼은 그것을 뜯어 읽어 내려갔다. 세루비아나 경의 것으로(그리고 루첼은 그 서명을 보고 좀 웃어야 했다), 케올레스의 병이 깊어지는 듯하니 왕명으로 다음 주 중으로 요새에 도착하여 케올레스를 보좌할 것이라 적혀 있었다. 말이 보 좌지, 아마도 케올레스는 근처에 있는 카톤 케이 백작의 영지로 가 서 푹 쉬어야 할 것이다. 그것을 다 읽자, 케올레스는 쓰게 웃었다. "쿨럭-- 웃기는군. 병으로 돌아갔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는데." "편찮으신 채로 힘겹게 계시는 것 보다는, 푹 쉬시고 돌아오시는 게 나을 듯 한데요." "자네는 젊어서 그렇게 말하지. 하지만 나 같은 늙은이에게, 한번 쉬라는 말은 영원히 쉬라는 말이나 다름없어. 어서 다음, 저 녹색 봉인을 뜯어 주게나." 붉고 파랗고 노란 것까지는 아는데, 녹색 봉인일 경우에는 무엇인지 루첼은 들은 바가 없었다. 궁금해서 얼른 뜯으며 케올레스의 눈치를 살피니, 케올레스 역시 굉장히 의외라는 듯 눈길을 멈추고 루첼의 손에 있는 두루마리를 보고 있었다. 루첼은 그것을 펼쳐 보며, 우선 서명부터 확인했다. 그리고 두루마리 를 떨어뜨릴 뻔 했다. "누구 서명이기래 그리 놀라나?" "왕자...님이시군요." 그리고 루첼은 입을 비틀며 웃어야 했다. 다른 것 때문에 놀란 것이 아니다. 휘안토스가 서신을 보낸 곳은 암롯사와 전혀 다른 곳이었고, 그것이 그 가슴속에 알 듯 모를 듯한 불길함이 번지게 했다. 이 자식 이거 또 무슨 짓 하려는 거야. *************************************************************** 작가잡설: 왜 이리 지치는 건지.........후으으으;; 동생에게 '야, 내가 일에 중독되어 사는 것 같냐?' 하니 매우 쉽게 '엉' 하더군요. 그래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말이다, 이제부터 어떻 게 하는게 좋을 것 같냐?' 동생은 진지하게 말해주었습니다. '우선 컴퓨터를 나에게 양보하는 것부터 시작해. -_-!' ...............아아, 사랑스런 나의 동생!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0장 *************************************************************** [겨울성의 열쇠] 제232편 눈보라 속의 탐색자#3 **************************************************************** 시를 읊는 듯 고요하고 잔잔한 노랫소리가 들려와, 아킨은 읽고 있던 책에서 눈을 떼고는 정원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정원에는 마법사들이 부리는 세 마리의 새들이, 각자의 횃대 에 날개를 접고 그 안에 머리를 묻은 채 자고 있을 뿐이다. 바람한점 없었다. 거울처럼 판판한 못 위에 희게 얼룩진 구름이 떠돌 뿐. 그리고 그 기이한 노랫소리는 못 속에서 은은하게 들려오고 있 었다. 아킨은 책을 덮고 그 넓고 둥근 못 쪽으로 갔다. 구름이 못 끄트머리 로 사라지자 그 위로 별빛이 하나 둘 어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 중에 푸른 새가 고개를 들었다. 새가 늘어뜨린 긴 꼬리 깃 이 부스럭대며 바닥을 쓸자, 눈이 바싹 마른 모래처럼 뿌옇게 흩어 졌다. 그리고 그 눈동자가 깜빡이더니 환하게 빛났다. 그 빛이 푸릇 한 못 수면위에 어리자 가장 밝은 별이 내린 듯 했다. 아킨은 못에 다다르자 멈추어 섰다. 그러자 새가 휙 하니 위로 날아 올랐다. 푸드득- 푸른 깃털이 날려 흩어진다. 그리고 잠시 뒤 바로 그 자리에 검푸른 로브를 늘어뜨린 호리호리한 여자가 나타났다. 검은 곱슬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기르고, 머리에는 금빛 서클렛을 쓰 고 있었다. 눈은 어두운 군청색이고, 그것이 그녀의 엄격한 얼굴에 어울린다. 여자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리 저리 푸른 깃을 뿌리며 날아다 니는 그녀의 새를 향해 손을 뻗었다. 새가 그녀의 손끝으로 내려와 앉자, 여자는 그 새를 어깨로 옮기고는 손끝으로 주변을 휙 쓸었다 . 그러자 주변의 기둥들 위로 하얗고 자그마한 빛들이 켜지더니 커 지기 시작했다. 주변이 그렇게 어느 정도 밝아지자, 여자는 손을 내 리고는 못가에 걸터앉았다. 아킨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안녕하십니까." "자다 일어난 거야. 안녕한지 말지는, 잠에서 좀 깨고 나서 생각해 봐 야겠지." 그녀의 퉁명스러운 말에 아킨은 킥 웃었다. 지에나 아브롤라인- 이라고 베이나트가 그녀의 이름을 가르쳐 주었 었다. 베이나트와 팔로커스와 함께, 그들 세계를 구하기 위해 세계의 강을 뛰어넘어 이곳으로 왔던 위대한 마법사. 당시 베이나트가 가 장 나이가 많았고, 그녀는 그 보다 두 살 정도 어렸다. 물론 팔로커 스는 스무 살 정도의, 아득하게 젊은 마법사였지만 십 몇 년 정도 의 나이차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 지금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곳에 도착한 그날 저녁에(정말 저녁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녀와 만 났다. 처음 도착해, 베이나트는 이 엄청난 눈의 궁전의 위용에 멍 해진 아킨을 데리고 그녀 앞으로 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지루하다는 눈길로 아킨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마치 움직이는 조상이 흘끔 움직인 듯 그렇게 짧고도 무관심한 몸짓이 었다. 영원의 만년설, 세상 끝의 외로운 얼음 탑이라 했던가...... 그녀가 불 렀던 오래된 노래가 기억난다. 한숨 섞인 고독은 서리처럼 얼어붙어 닿지 못할 거라 했었지..... 아마도 그 부분은 그녀 자신을 위한 노래일 것이다. 베이나트의 잔이 슬픔, 팔로커스의 잔은 광기, 그녀의 잔은 고독. 인간이 짊어지기에 너무도 버겁고 무거운 그 길고 긴 시간이, 그녀의 영혼을 고독의 차가운 빙하 속에 잠재운 것이다. 지금의 그녀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이 눈의 궁전과 함께 얼어 붙어, 그저 기억만이 살아 숨쉴 뿐 화내지도 슬퍼하지도 괴로워하 지도 않는다. 너무 오래 지치도록 살아왔지만 쉴 수도 없는.....그렇 게 그녀는 바싹 마른 기계 같은 존재였다. 아무 것도 모르는 채 그저 가야 한다, 해야 한다, 생각하며 이곳으로 왔다. 그렇게 이곳에 도착하여 눈의 궁전과 경계의 숲이라는 거대한 환상을 만들어 낸 그녀와 대면하게 되자, 그녀는 아킨에게 이렇게 말했다. -작고 무지해. 너무나 자그마하고 무지해서.........가여워. 그리고는 다시 눈 조각처럼 조용해져서는, 군청색 어두운 눈동자로 아킨을 응시하며 있든 말든 네 마음대로 하라는 듯 말없이 있었을 뿐이다. 넉 달 동안 아킨을 돌보아 준 것은 당연히 베이나트였다. 2년이나 지 났다고 생각한 것은, 그가 이곳의 시간을 천천히 흘러가도록 배정한 덕이었다. 이곳은 지에나의 영지였지만, 베이나트의 것이기도 했다 . 예전의 그가 분명 '그곳에도 나의 집이 있다.'라고 말했었는데, 그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그래서 이곳을 지배할 수 있는 힘과 그리 할 수 있는 권한이 베이나트에게도 있었다. 누군가가 머리카락을 당기는 듯 느껴져 눈길을 돌려 보니, 뿌연 나비 요정 같은 것들이 아킨 주변을 떠돌고 있었다. 얼핏 보면 예쁜 여자 같기도 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눈의 착시였 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흐릿하게 흔들렸다. 아킨이 돌아보자, 그들은 소녀들처럼 와르르 웃음을 터뜨리더니 아킨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어깨에 앉고, 그 손가락을 잡고는 당겼다. 그리고 그 중 하나가 아킨의 머리끈에 흥미를 보이더니, 풀어보려고 매달렸다. 아킨은 머리를 흔들어 그 요정을 털어냈다. 요정이 얼굴을 잔뜩 부 풀리더니 휙 돌아서 멀리 솟구쳐 올랐다. 이상한 일이다. 이곳을 만들어 숨쉬듯 아무렇지도 않게 이 어마어마 한 것들을 지배하는 그녀는 이리도 무관심한데 그녀의 창조물들은 아이들처럼 활달하고 장난스럽고, 그러면서도 잔인하고 이기적이니. 그런데 지에나가 수면위에 손을 얹었다. 그녀의 손가락에서 다섯 개 의 파문이 가만히 퍼지더니, 서로 겹쳐지고 섞이며 가장자리로 번 져나갔다. 얼룩진 흰 구름이 흔들리고, 별빛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안쪽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며, 바다보다 깊고 깊은 못의 심연이 거 대한 하늘처럼 드러났다. 새파랗고 늘씬한 그림자가 그 빛을 가로 질러 지나가기도 했고, 때로는 아찔할 정도로 거대한 그림자가 휘 익 지나가기도 했다. 간혹, 머리카락 너울대는 인어가 긴 꼬리를 흔들며 헤엄쳐 나가다가 돌아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새파란 못 안이 비추어내는 것이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피가 번지듯 붉게 변하기 시작하더니, 곧 진한 노을에 불타오르는 하 늘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하늘이 늙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이제 막 광란의 피 보라를 끝마친 전쟁터였다. 시체의 산, 내동댕 이쳐진 패자의 깃발, 부러진 창대가 여기 저기 꽂혀 있고 칼자루는 무덤의 묘비인양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멀찍이 그 벌판을 응시하던 시선이 점점 낮아지더니, 그 시체들을 하 나하나 비추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피비린내가 훅 솟구칠 것만 같았다. 바람이 불어오는 지, 끈끈한 피와 먼지에 엉겨 붙은 머리 카락이 흔들렸다. 새카맣게 들러붙은 파리 떼들이 부웅 치솟아 윙 윙대더니 다시 시체에 까맣게 들러붙는다. 구름은 더욱 진한 핏빛으 로 물들어 갔고, 낮은 지대에는 어느덧 땅거미가 깔리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그 선홍빛 빛이, 찢어진 깃발을 비추어낸다. 다시 바람이 불어오며 깃발이 진한 그림자를 떨쳐내며 휘청거렸다. 하얀 깃발이었을까, 금빛 깃발이었을까......흰 색이면 서부, 금빛이면 동부인데....... 그렇게 무관심하게 보던 아킨은 순간 숨 멎는 충격을 느꼈다. 깃발에 그려진 것은 장미와 해룡이었고, 그 문장 아래에 왕검과 왕홀 이 교차하여 그려져 있었다. 왕의 친정을 알리는 깃발이다. "--!" 아킨은 급히 고개를 숙여 그 수경을 바라보았다. 머리카락이 쏟아지 며 수면에 닿았고, 순식간에 그 영상이 흐려지며 눈을 감듯 사라져 버렸다. "조심해야지." 지에나가 무관심한 목소리로 그리 중얼 거렸다. 아킨은 급히 물었다. "설마,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까?" "바보로구나. 지금은 겨울이고, 저 전쟁터는 아무리 둘러봐도 봄 같지 않니?" 그러나 과거 일 리는 없다. 사이러스는 단 한번도 패한 적이 없고, 저 깃발은 기수가 죽는 한이 있어도 사수해야 하는 중요한 왕기다. "그렇다면......과거입니까?" 가장 가까이는 할아버지가 델 카타롯사에 패한 적이 있다. 더 먼 과 거로 가면, 몇 번인가 패하기는 했다. 언제나 이기기만 했다면, 그 반목이 그리도 오래 갈 리도 없으니. 그런데 지에나가 고개를 저었다. "과거는 아니야. 나는 과거를 보이라고 말한 적 없거든." "그렇다면 곧 일어날 일.....즉, 미래라는 말씀입니까?" "미래라면 어쩔 건데?" 순간적으로 '아버지가 패했다.' 라는 생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 다. 지에나가 다시, 그 물소리처럼 투명하고 무감각한 목소리로 물 었다. "슬프니?" "어이가 없다, 에 가깝군요." 지에나가 흐릿하게 웃었다. 물론 그녀가 아킨의 말이 재미있어서 저 런 표정을 짓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저 반사, '예전에 이런 경우가 생기면 이런 표정을 지었다.'라는 기억에 따라 행동하는 것뿐이다. 슬픔도 기쁨도, 그녀의 예리하고 섬세했던 감정과 감성은 시간의 물 결에 쓸려 나가 반들반들한 면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녀에게 의미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눈앞에서 무엇이 어떻게 되던, 그녀는 '기억'하고 있는 표정만을 지어 보일 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지에나는 다시 수면위에 손을 얹었다. 파문이 다시 그려지더니, 또 다른 모습을 비추어 보여주었다. 방금 전 노을에 진하게 물들어 있던 왕기는 이제 곱게 접혀 나무 상 자 안에 들어 있었다. 깃발에 묻은 피 얼룩은 이제 진갈색으로 변 색되어 있었으며, 그 얼룩의 끄트머리- 상자의 중앙이자, 왕기의 장미와 해룡이 그려진 그곳에 단검이 꽂혀 있었다. 단검의 칼자루 끝은 그리핀이었다. 날개를 접고 머리를 들고 있는, 금방이라도 살 아 날아오를 듯 섬세하게 만들어진 물건이다. 적국 왕의 승하를 알려 후계자의 선택을 재촉하는 승전국 왕의 메시 지이다. 남자의 큰 손이 다가오더니 그 칼자루 끝을 툭 건드렸다. 아킨은 그 사람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러자, 영상의 방향이 금방 변하며 그 손의 주인을 비추어주었다. 슈마허 쉐플런이었다. 앞의 깃발을 좍좍 찢어 삼켜 버리고 싶다는 듯 분노에 이글거리는 눈 동자였지만, 그럼에도 얼굴 전체에는 흐릿하나마 쾌감이 퍼져 있 었다. 그러나 승자의 표정이 아니었다. '승리했다고 믿고 싶어 하는' 표정일 뿐이다. 호기심과 함께,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해졌다. 대체 무슨 일이 생기 는 걸까, 그리고 그 일은 어떻게 시작되어 어떻게 일어났으며,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올 것일까. 아니, 이것이 정말 분명히 일어날 미 래이기는 한걸까? 순간 수면이 떨리더니, 그 영상마저 사라졌다. 수면은 금방 깎아낸 듯 잠잠해지며 또 다른 풍경을 보여주었다. 밤인 듯 했지만, 사방에서 불길이 치솟아 오르고 있어 환했다. 불길 이 비추는 바닷물은 검고 무겁게 출렁인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불 길을 등지고 서 있는 세르네긴이 보였다. 그의 두 눈은 믿을 수 없다 는 듯 엄청난 슬픔에 차 있었고, 그럼에도 금방이라도 울부짖을 듯 흔들리고 있었다. 그대로 쓰러져 무너질 것 같았다. 모래처럼 쏟 아져 흔적도 없이 사라질 듯 했다. 맙소사, 아킨은 그런 세르네긴을 본 적이 없었고 그런 표정을 지을 거라 상상 해본 적조차 없었다. 아버지가 패할 지도 모른다는 것만큼이나, 세르네긴이 이런 식으로 무너진다는 것 역시 절대 진리가 박살나는 듯 머릿속을 휘저어 놓 는다. 아버지가 패하는 상황을 상상하기 어렵듯, 이 세르네긴이 이렇 게 부서지려는 상황 자체도 상상하기 어렵다. 무언가, 예전의 것들 을 짓밟아 무너뜨릴 무언가가 일어난 것이다. "지엔, 대체 뭘....보여주시는 겁니까?" "미래가 뭘까?" "네?" "말 해 줘. 너는 미래가 무엇이라 생각하니?" "어떤 대답을 바라시는 겁니까?" "어렵게 생각하지 마. 그저, 네가 바라는 미래를 말하면 되는 거야." "그냥, 제가 원하는 대로 되었으면 하는....그런 거죠. 하지만 그것과 이게 무슨 상관이 있는 겁니까?" "방금 본 것 중에, 네가 원하는 게 있니?" 솔직히 말하자면 하나도 없었다. 세르네긴이 무너지는 것은 당연히 바라지 않고, 슈마허가 어디에서 승리하든 상관없지만 암롯사를 상 대로 승리하는 것은 껄끄럽다. 아버지를 사랑한 적은 없지만, 어쨌 건 아킨은 암롯사의 왕자였으니 '왕'이 패하는 상황이 달갑지만은 않다. 지에나가 말했다. "원하는 게 없다면....네가 두려워하는 일은 있니?" "마지막.....은 조금 그렇군요." 어쨌건 세르네긴은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동경도 했던 사람이다. 그 가 무너지는 건, 소중한 추억이 망가지는 것처럼 안타깝다. 지에나의 눈이 가늘어졌고, 그러자 군청색 눈이 더욱 검어 보인다. "그렇다면 왜 그런 일이 생기는 지 궁금하겠지? 알게 된다면, 되도록 그 일을 막고 싶겠고." "당연히 그렇습니다." "왜지? 네가 좋아하는 여자아이의 약혼자인데, 되도록이면 멀리 떼어 놓고 싶고 없어지면 좋겠고....그런 생각 안 드니?" 가슴이 쿡 찔린 것 같았다. 작년, 만월이 하루 남은 그날 달빛에 젖 은 정원에서 세르네긴이 했던 말이 기억나 버린다. 당신은 아닙니다. 당신의 운명이 위험합니다...... 아킨은 희미하게 웃었다. "아니라면 거짓말일 겁니다. 하지만....그는 제 은인이고, 저는 그에게 정말 많은 것을 빚졌지만.......아무것도 갚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선택은 유제니아의 몫입니다. 그 선택의 여지를 제 손으로 없애고 싶지는 않아요 .......치사한 짓이니까." "이런, 어리네. 원래 사랑을 할 때는 말이다, 온갖 치사하고 비겁한 술 수를 다 동원해야 해. 사랑하는 사람을 놓고 싸우는 데 있어, 정당한 방 법이야 말로 바보짓이라고. 사랑은 말이다, 스포츠가 아니야. 어떤 방법 을 동원해서라도, 먼저 손을 잡고 키스하고 심장을 단단히 묶어 두는 사 람이 이기는 거라고." "죄송하지만....이 문제와 그 문제는 전적으로 틀린 문제입니다." "어쩌면 같을 수도 있지." "틀립니다. 그렇게 되면......저는 그 아이를 속여야 하고, 그것 때문에 불안할 테지요. 그럴 바에는 차라리 잃는 편이 낫습니다." 지에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고지식하구나." 그리고 손끝으로 아킨의 이마를 툭툭 쳤다. 애 취급당하는 것 같아 영 기 분이 나빴지만, 어쨌건 지에나 쪽이 나이도 많고 상식과는 따로 노는 인 물인 것도 사실이라 참기로 했다. 지에나가 말했다. "나나 칼리반스나 팔로커스에게는 미래라는 것이 없어..... 과거도 없 고, 현재도 없지. 그저 조각나고 파탄 난 세계의 흔적. 그래서 욕망도, 원망도, 사랑도, 행복도 없지. 고민하고 후회하고 만족하고 기뻐하는 건 말이다, 우리는 이제 다 잃어 버렸어... 그런 우리에게는, 추억조차 의 미 없지." "돌아가고 싶어 하시잖습니까." "천년 쯤 지나면 돌아가야 할 이유조차 납득 못하게 되지. 그냥 본능 이야......앞으로, 앞으로. 왜 앞으로 가야 하는 지, 정말 앞으로 가는 걸 바라기는 했는지, 그건 잊어 버렸어. 여태 그렇게 해 왔으니, 앞으 로도 그렇게 하는 것뿐이야....천년을 뿌리박고 위로 자라는 나무에게 물어봐. 왜 위로 뻗고 아래로 파고드나요? 이리 답하겠지. 그냥 그러는 거야.....이렇게." 뭐라 말하고 싶기는 했지만, 막상 말을 하려고 보니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녀의 깊지만 무관심한 눈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는 듯한 기분이다. 작아져서, 초라해 지고, 앞에 있는 것이 너무나 거대하고 광활해서 할 말조차 없어진다. 이해하려 하면 할수록 깊고 난해한 것, 납득하려 하면 납득할수록 거부하고 싶을 정도로 막막한 이 것. 지금 이 앞의 그녀는, 천년을 견디어 낸 조각상이다. 처음에는 살아 있었을지 모르나, 이렇게 석화되어 '모습'만이 남아 있는 그런 조각상. 그녀의 모습도, 감정도, 추억도, 기억도, 불타는 정렬도 가녀린 애정도 증발해 버렸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베이나트 - 최초의 이름은 브라키언 칼리반스였 던- 그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녀가 조각상이 되어 버렸다면, 베이 나트는 그 반대였다. 바람처럼, 오로지 바람처럼- 그의 육신은, 그의 집착과 집착, 그리고 욕망은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 남은 것은 머물데 없고 머물려 하는 곳 없는, 그저 떠도는 바람 같은 그런 영혼뿐이다. 시간은 가혹하고, 그것은 늙지 않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가장 가벼이 들고 있던 것부터 그 홍수 같은 시간이 휩쓸어 가 버린 것이다....... 지에나가 말했다. "이런 우리가 가엾니?" "바위가 가엾습니까.... 어째서 언제나 저곳에 외로이 있을까, 하며. 바람이 가여울까요? 왜 그렇게 날아가기만 하느냐고......당신을 가 여워 한다면, 그건 당신들이 정말 불쌍해서가 아니라......그저 제가 지금 당장 그렇게 된다면 저 자신이 가엾어질 것 같아 그러는 걸 테죠." "그렇다면.......네 미래가 어떤 모습이던 간에, 너는 우리보다 행복 할까?" 아킨은 그녀가 이제 '노여워하는 표정'을 기억하여 그리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무엇이 그녀의 잠들었던 노여움의 기억을 불러냈을까. "기분 나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당 신들처럼 되는 건 두렵습니다. 저는 감당할 자신이 없으니까." "우리 모두 누구나 그랬지만.......각자의 방식으로 감당했지. 닥치면 뭐든 하게 되는 게 인간이거든.....자, 여기를 봐......." 지에나의 손가락이 다시 수면을 휙 쓸었다. 순간, 여태 흔들리던 수면이 다시 가라앉았다. 물속에서의 빛이 더욱 깊어지며, 그 아래에 떠도는 물 고기 떼의 푸른 그림자는 더욱 진해졌다. 그 깊은 못에서 뿜어져 오르는 빛이 그것을 바라보는 그녀의 군청색 눈동자를 적시며 사파이어처럼 빛난 다. 수면에 다채로운 색채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찬란한 보석을 쏟아내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 고운 빛깔들은 어느새 자주색 커튼으로 변했다. 매끄러운 비단 위에 햇살이 쏟아지며 우아하고 부드러운 윤기를 뿜어냈다. 커튼 아래에 달린 금술이 손짓하듯 날개 짓 하듯 흔들린다. 그리고 커튼이 드리워진 창이 향하는 곳은 잘 정돈된 정원이었다. 둥근 향나무, 무리지어 핀 빨갛고 노랗고 파란 꽃들에, 그 사이를 졸졸 흐르 는 작고 고운 은빛 운하..... 아킨은 이 정원을 잘 알고 있었다. 암롯사, 산 파로이 대궁전의 정원 이다. 고향이자 그의 집이었지만, 단 한번도 여유롭게 산책하거나 거닐 어 본 적도 없는 정원.... 지에나가 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방 안의 각도가 바뀌며 더 안쪽이 비추 어진다. 창가에는 청년이 기대 서 있었다. 젊음의 절정에 이른, 이제 스물여덟 정 도 되어 보이는 청년이다. 검은 머리카락은 등까지 기르고, 보랏빛 눈동 자는 부드러운 빛으로 방 안쪽을 향하고 있었다. 복장은 완전한 성장이 었다. 화려하지는 않으나, 우아하고 단정한 차림에 그의 손가락에는 왕의 인장까지 끼워져 있다. 그는 왕인 것이다. 암롯사의 왕. 그 푸른 대지와 더욱 푸른 바다의 주인 인 왕인 것이다. 휘안토스, 암롯사의 왕 휘안토스. 언제나 이리 될 거라는 건 알고 있는데, 정작 이렇게 바라보니 서글펐다. 당연히....아마도 근 20년 동안 예정된 대로 된 것 아닌가. 그런데 왜 이 렇게 허탈한 걸까...... 하지만 그 뿐인데, 예전처럼 두려운 것도 괴로운 것도 아닌데 왜 그녀가 하필 이것을 보여주는 건지 모를 일이다. 수경 안쪽의 휘안토스가 손을 들었다. 그러자 누군가의 손이 다가와 그 위에 얹힌다.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가 끼워진 하얗고 예쁜 여자 손이다..... "--!" 아킨은 수면을 후려쳐 버렸다. 최아악--! 물이 튀기며 광경이 확 흐려져, 산산이 부서졌다. 빛이 꺼지고 어둠이 밀려들어 거대한 보석처럼 투명하게 빛나던 물이 시커멓게 변했다. "어떠니?" 그녀가 조용히 물어왔다. 오싹할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였다. ********************************************************************* 작가잡설: 뭐.......아직 끝나려면 많이 남았으므로. -_- 므흣~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0장 ****************************************************************** [겨울성의 열쇠] 제233편 눈보라 속의 탐색자#4 ******************************************************************* "뭡니까?" "말 했잖아......미안하지만 나는 두 번 말하지 않아." 그러나 머릿속이 텅 비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치밀어 오르 는 건 그저 이 악물고 싶은 분노 뿐이었다. "죄송합니다.......하지만, 이게 정말 앞으로 일어날 미래인 겁니까? 정 말 닥쳐옵니까? 말 해 주세요-! 대체 뭡니까!" 지에나가 조용히 말했다. "뻔하고 식상하고 허탈하고 별로 안 믿기는 말이지만 미래는 미래이 기에 정해지지 않았어. 네가 딛고 있는 지금 현재에 어떤 일을 할 지에 따라, 방금 본 그 광경은 얼마든지 말 그대로 헛소리가 되어 사라질 수도 있지." "아니면 정말 저렇게 될 수도 있는 겁니까?" "물론이야." 아킨은 뒤로 주춤 물러나다가,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손에 닿자 정신 이 확 들었다. "지독하군요......" 기가 막힐 지경이다. 지금 수경으로 본 모든 광경이, 기가 막히다. 말 도 안 되는 것만 잔뜩 올라와서는, 혐오스러운 거짓을 토해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아무것도 모르고 어린 아킨을 놀리는 농담이다. "왜 이런 걸 보여 주시는 겁니까? 주의라도 하라는 건가요?" "내가 왜 네게 주의를 주어야 하지?" "그야....." 그 뒤에 이어 붙일 말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정말 잠깐 이면 충분했다. 아킨은 '아득하게 나이 먹은' 여자들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예전에 나 루에가 그러더니, 이제 이 지에나라는 여자마저도 이런다. 왜들 그리 심술궂은 건지 모를 일이다. 그것도 아킨에게만. 아킨은 땀에 젖어 엉겨 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는 말했다. ".....본심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런데 지에나의 군청색 눈이 더욱 어두워졌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 자면 '초점이 풀어졌다.'가 적당했다. 지이잉-- 하는 소리가 달리 더니, 거울처럼 판판하던 못의 수면이 부르르 떨려왔다. 횃대에 앉 은 나머지 두 마리의 새들이 잠에서 깨어나 고개를 쳐들었다. 사방을 제 멋대로 떠돌아다니던 안개의 소녀들이 갑자기 날개를 빳빳하 게 곤두세우더니 멈추었다. 지에나는 품 안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내더니, 그 안에 든 투명한 액 체를 수경 위에 한 방울 떨어뜨렸다. 그 반짝이는 한 방울이 수면에 퐁당 떨어지자, 거친 땅처럼 부르르 떨던 수면위에 둥그런 파문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침입자가 들어왔군." "....늘 있는 일 아닙니까?" "피라미야 늘 들어오지만, 이번에는 경계의 숲이 말 그대로 경계태세 다. 굉장한 침입자가 들어온 거야.....즉, 이번에는 적어도 상어정도는 된다는 거지." 그리고 지에나가 가볍게 무어라 중얼 거렸다. 주문이다. 파장이 점점 느려지더니, 수경이 드디어 사건이 일어나는 곳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눈 내리고 있는 깊은 숲의 풍광이 나타났다. 그리 굵지 않은, 얇은 소금 같은 눈이 솔솔 내리며 반짝거린다. 잠시 뒤 눈이 점점 가늘 어지더니, 마침내 드문드문 포르르 날리다가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 그리고 둥치 굵은 나무들 사이에서, 눈부시게 하얗고 아름다운 백마가 터벅터벅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평범한 말은 아니다. 말의 이마에, 빛나는 글자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아마도 추운 겨울 숲을 가로지르기 위한 마법이리라...... 말의 고삐는, 당연히 누군가의 손에 잡혀 있었다. 기수는 두터운 털 가죽으로 된 망토를 입고 있었고, 그 후드 끝에도 뽀얀 털이 덧대 어져 있었다. 장갑이나 부츠는 고급품이라, 눈보라 속을 헤치고 왔 을 텐데도 젖지도 얼지도 않아 있다. "어떻게 경계의 숲까지 온 겁니까?" 길을 잃지 않고 저기까지 온 것만도 기적이다. 대부분의 탐색자들은 저 경계의 숲 언저리에서 해결되어 버린다. 그런데 저 말과 기수는 이 숲을 '제대로' 통과 하고 있는 것이다. "경계의 숲에 걸린 마법을 파해하고 있어.......하지만 놀랄 것 없어. 저 정도도 대단한 건 사실이지만, 어쨌든 겨우 한 겹을 푼 것에 불 과하니까." 그리고 지에나는 들고 있던 병에서, 다시 투명한 액체 한 방울을 수 경 위로 떨어뜨렸다. 방울이 퐁당 떨어지며, 이번에는 시커멓게 변 하더니 잉크라도 들어간 듯 몸을 뒤틀며 물 안으로 퍼졌다. 순간, 그 기수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후드를 뒤로 세차게 젖히더 니, 손을 앞으로 확 당기며 뭐라 외쳤다. 빛이 솟구치며, 어둠 속에서 그의 얼굴이 환하게 드러났다. "악튤런-?!" 아킨은 자기도 모르게 외치고 말았다. 악튤런 파노제였다. 이건 과거도, 미래도 아니다. 바로 지금, 바로 여 기로, 저 악튤런이 온 것이다. 지에나가 그 악튤런을 가리키며 말 했다. "쫓아 내 주겠니?" "무슨...." "나는....보고 싶어. 꼬마 네가 과연 우리와 같이 설 수 있는 지, 같은 일을 감당해 줄 수 있는지......그리고 믿어 되는 지. 너는 칼리반스의 신뢰는 얻어냈지만......아직 내 신뢰를 얻어내지는 않았어. 한번 보 여 주겠니? 네가 어떤 아이인지......그걸 보여 줄 수 있어?" "보여 줄 수 있다면 어찌 되는 겁니까." "나 역시 네가 보고 싶어 하는 많은 것을 가르쳐 주겠지. 또한, 얻고 싶은 것을 얻는 것을 도와주겠어." 아킨은 손을 확 뻗었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솟구쳐 오르더니, 그 끝에서 얇고 긴 끈이 뻗어 나와 아킨의 손에 감겼다. "해 보이죠. 그리고 방금 전에 본 그 모든 것을 설명해 주셔야 합니 다." "알았어." 아킨은 고삐 끈을 휙 당겼다. 날카로운 울부짖음이 공기를 찢을 들 울려 퍼지며 어둠 속에서 거대한 흑마가 솟구치듯 튀어 나왔다. 아 킨은 바닥을 박차고는 그 위에 올라탔다. 눈 오는 숲은 많이도 들어가 봤지만, 이런 물건은 또 처음이라고 악 튤런은 생각했다. 온 숲이, 이렇게 숨죽인 듯 고요한 건 정말 어둠 숲보다 더하다. 단 단하게 봉인되어 있던 나프 섬 아카바의 궁전도 이보다는 시끄러 웠다. 적어도, 악튤런 자신의 발자국 소리는 들려왔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놈 경계의 숲은 정말 진공으로 된 공간이나 깊은 물 속에 들어 앉아 있는 듯 하다. 정말, 숨 멎은 듯한 정적뿐이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숲이었으나, 그 본질은 그렇지 않다. 평범한 껍데 기를 둘러쓴 엄청난 괴물의 숲이다, 이것은. 처음에 미친 듯이 달려들던, 그 모기떼처럼 시커멓게 달려들던 마귀 들이야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악튤런 주변에 투명한 담벼 락을 쌓아 놓은 듯 '모든 것이' 적대적으로 변해 있는 것은 위험하다 . 어둠 숲이 위험한 것은 어둠 숲 속에 괴물이 있어서 아니라, 숲 자체가 거대한 괴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경계의 숲은 그보다 더 크고 더욱 음험하고 차가운 괴물인 것이다. 역시 멍청한 놈들의 기록은 믿을게 못된다. 대체 뭐가 중요한지 모른 다! 그 놈들이야 이 숲 자체가 그냥 '적막한 숲'이라고 얼간이 같이 써 놨지만, 이게 어디가 그저 적막한 숲이란 말인가. 차라리 사냥 전에 몸 수그리고 있는 호랑이를 얌전하다고 말하라. 아니, 아니지 . 그저 먼발치에서만 이 숲을 보았을 지도 모른다. 정말 뭘 알고 해 보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돌아와 기록을 남겨 놓지도 못했을 테니. 그냥 언저리에서 겁 집어먹고 후닥닥 달려와 놓고선, 사 람들에게는 뭐 대단한 거라도 본 양 떠벌린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한 얼간이들은 그 바보들이 떠벌이는 것을 열심히 받아 적어 도 서관에 쑤셔 박아 놓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거라도 읽어야 했다. 급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지금, 바로 당장, 이 겨울에 성공해야 한다. 그래야 한다...... -이렇게 중요한 때에 꼭 그곳으로 가야하나요? 칼라하스 공주가 떠나는 그를 말리며 그렇게 말했다. 강하게 반대한 것은 아니다. 그녀는 악튤런의 고집을 알고, 그의 힘 을 믿었다. 말 그대로, 행여나 그 사이에 다른 일이라도 벌어질까 해서 그리 말린 것뿐이다. 아니, 칼라하스가 그를 '걱정'해서 그런 말 을 한 거라면 그건 더 싫다. 결국 칼라하스는 그가 떠나는 날, 그의 이마와 양 볼에 입 맞춰 주며 행운을 빌어 주었다. -악튤런, 당신을 믿어요. 그리고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그 자그만 행운을 기원하는 것뿐이군요. 하지만 보통 아가씨들이 하는 것처럼 예쁜 손수건 같은 것은 드리지 않겠어요........그것이 오히려 모욕 같으니까요. 당신은 훌륭한 분이니,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겠 고 아무 형체도 없는 것도 움켜쥐실 수 있겠지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니, 그야 말로 가장 원하는 말을 해 준 것 이다. 악튤런이 원하는 것을 칼리토도 원하고, 칼리토가 원하는 것을 칼라 하스 공주도 원한다. 칼라하스의 소원이 이루어지면 칼리토의 소원이 이루어지고, 악튤런의 소원도 이루어진다. 나프 섬, 아카바의 폐궁에서 맹세한 대로 모든 것을 이룰 것이다. 어디선가 사락-- 샤락-- 하고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무 게가 거의 없는 것이 달려오는 것만 같다. 악튤런은 숨소리를 낮추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곧, 어두운 나무둥치 너머에서 하얀 빛이 달 아오르듯 켜졌다. 하나 둘, 셋, 넷-- 꼭 두개씩 쌍을 지어 초롱초 롱 빛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주변에 뿌연 연기 같은 것이 어리 며 일렁거렸다. 악튤런은 이를 악물었다. 오냐, 드디어 나온 거냐. 나오는 것이 열배 는 좋지! 숨어서 숨죽이면서 지켜보면서 시시덕거리는 녀석들이 더 질색이니까. 그런데 바닥에 쌓인 눈이 갑자기 물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얗던 눈 덩어리들이 점점 옅어지기 시작하더니, 그것들 속에서도 숲의 어둠 속에서 보이던 눈동자들이 하얗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내 그것들이 악튤런을 휘감아 돌았다. 연기처럼, 안개처럼, 투명한 천 조각처럼- 악튤런은 페그 라일을 읊었다. "그자, 엡-" 크르러러엉---! 엄청난 굉음이 터졌다. 천둥이라도 쏟아지는 듯, 온 숲이 흔들렸다. 뿌연 안개처럼 흐리기만 하던 것들이, 갑자기 얼어 붙은 듯 뻣뻣해지더니 악튤런을 향해 쇄도해왔다. 나무들이 패이고, 땅이 퍽퍽 갈라질 정도였다. 걸렸다가는 단 번에 분쇄되어 버릴 듯 하다. 악튤런은 두 손가락을 위로 들었다가, 가로로 빠르게 그으며 주문을 외워나갔다. "가, 파즈, 프, 즈와프-" 그리고 앞으로 팔을 뻗었다. 손에서 푸릇한 빛이 솟구치며, 그를 향해 쇄도해 오던 하얗고 날카로 운 마물들의 몸이 갈가리 찢겨나갔다. 그리고 점점 잘게 바스러지 더니, 마침내 눈보라가 되어 주변을 휩쓸었다. "큿-" 악튤런은 소매로 얼굴을 가렸다. 생긴 건 눈보라였지만, 살에 닿자 칼로 베인 듯 따끔했다. 두터운 가죽으로 된 옷이 찢겨나가기 시작 했다. 행여나 해서 몇 번이나 강화마법을 걸어 놓은 물건이다. 이것 이 찢겨 나갈 정도라면, 어둠 숲의 일족에게 받은 칼을 땅의 일족이 준 숫돌에 간 것 보다 더 예리하다는 것이다. "라크브, 에오, 흐, 파프, 브모슬-" 악튤런 주변으로 회오리치듯 바람이 일었다. 그리고 그 힘은 차가운 칼날이 솟구치듯, 파도처럼 엄청나게 솟아올라 주변을 휩쓸었다. 칼날 같은 파편들이 봄눈 녹듯 순식간에 사그라지었다. 겁먹은 아이 같은 날카로운 비명이 여기저기 흩어지다가 숲 속으로 메아리치며 사라진다. 악튤런은 피가 스며 나온 볼을 훔치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유령이 도망치기라도 하듯, 어두운 숲 여기 저기 비명소리가 굽이굽이 흩 어지고 있었다. "이제 또 뭐냐...." 그러나 그렇게 중얼거리는 순간, 말의 이마에 맺혀 있던 족쇄의 마법 이 파창 깨어졌다. "--!" 악튤런은 본능 적으로 고삐를 움켜잡아 당겼다. 그러나 말이 울부짖 으며 두 발을 번쩍 들었다. "히히이이이이잉--!" 엄청나게 겁에 질린 것이다. 악튤런은 이를 갈아붙이며 고삐를 쥔 손 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러나 말이 악튤런의 손을 뿌리치려 완강하게 고개를 내 저었다. "큿-!" 악튤런은 두 발에 힘을 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말을 놓치면 정말 숲 속에서 얼어 죽는 것 밖에는 도리 없다. 필사적으로 버티며, 악튤런은 숲 속에서 대체 무엇이 숨어있나 찾으려 했다. 그런데 숲의 그림자 속에서, 다시 안개 같은 것이 부옇게 어리기 시작 했다. 방금 전의 그것들과 같은 것일까, 했지만 그들과는 달리 울지도 소란을 떨지도 않으며 가만히 피어오르고만 있었다. 뭐지, 저게? 말이 푸륵거리며 악튤런을 매단 채 뒤로 주춤 주춤 물러나기 시작했다. 방금 전에는 그저 놀란 것이라면, 이건 어디서 큰 맹수라도 발견한 듯 한 몸짓이다. 완전히 압도되어 겁에 짓눌려 버린 것이다. 크르르릉-- 어디선가 낮은 소리가 들려온다. 말의 숨이 더욱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악튤런도 오싹 했다. 순간, 어둠 속에서 두개의 붉은 불꽃이 화륵 지펴졌다. 그리고 크르렁--! 온 숲이 쩌르릉 울릴 정도, 천둥 같은 울부짖음이다. 숲이 부르르 떨고, 말 은 완전히 광란상태가 되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히히히히힝---!" 순식간이었다. 악튤런이 말고삐를 놓쳤다. 기다렸다는 듯 숲 속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휙 솟구쳐 올라 악튤런의 백마를 덮쳤다. 백마는 비명을 지를 틈 도 없이 목이 뜯겨져 나갔다. 뼈가 와드득 으스러지며, 붉은 핏방울이 눈 위로 후두두둑 쏟아졌다. 이게 뭐야, 악튤런은 거대한 그림자를 자세히 보기 위해 빛을 그러모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 때, 등 뒤의 나뭇가지에서 탁-- 하는 가벼운 발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 악튤런은 빠르게 몸을 뒤틀며 그 쪽을 돌아보았다. 허공에서 차가운 빛이 번득이며 악튤런을 향해 내리꽂혀 왔다. 악튤런은 필사적으로 허리를 당겨 공격을 피했다. 검이 허공을 내리 그었다가, 다시 뒤로 당겨지더니 날카롭 게 파고들어왔다. "그, 퀴즈브-!" 악튤런은 그렇게 외치며 소매를 뿌렸다. 바로 앞에, 공기가 돌풍이 치듯 뭉쳤다가 펑 터졌다. 눈보라가 치솟았다. 차갑고 세찬 바람이 상대의 얼굴 과 몸을 확 덮쳐눌렀다. 검을 찔렀던 상대가 재빨리 폭발을 피하며 뒤로 물러났다. 검은 옷자락이 펄럭였다. 허리를 조인 하얀 끈이, 눈보다 더욱 하얗게 번득인다. 그리고 제비처럼 날렵하게 몸을 추스르고는 다시 검을 휘돌려 올려붙였다. 주변을 밝힐 필요도 없었다. 온 나무에서 불을 킨 듯 빛이 뿜어져 오르며, 어두운 숲을 대낮처럼 밝혔으니. 그리고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게 되자, 악 튤런이 외쳤다. "아킨토스-!" ********************************************************************** 작가잡설: 아키의 '꼼수'는 여기서도 빛을 발합니다. 우선 슬쩍 주의 끈 다음 '검'으로 공격하기. -_- 어차피 마법으로 정면 대결은 대략 낭패~ 악튤런은 뭐.....정직하게 공격하는 타입이랄까요. 자, 주먹이다. 너도 주먹! 뭐, 발이라고! 그럼 나도 발이다! -_- 나는 할 수 있다! 자, 오너라! 오오, 열혈남아~ !! (왠지 카즈와 악튤런이 같은 카테고리에 속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0장 *************************************************************** [겨울성의 열쇠] 제234편 눈보라 속의 탐색자 #5 **************************************************************** 첫 시도는 실패라고 판정한 아킨은 검을 거두어 꽂아 넣었다. 악튤런 은 상처에서 스며 나온 피를 소매로 닦아내며 물었다. "여기엔 왜 있는 거지?" "그럴 만한 사정이 있으니까요." 겨우 넉 달 만에 보는 사이였지만, 악튤런은 자신에게는 정말 순식간 에 지나간 그 시간이 아킨에게는 몇 년에 걸쳐 천천히 사라진 듯 느껴졌다. 얼굴이 변한 것은 아니다. 얼굴은 그 사나운 날에서 도망치던 날 마 지막으로 보았던 하나도 변하지 않은 그대로, 아직 열여덟 아홉 밖에 안 된 소년의 것이었으니. 그러나 머리카락은 겨우 넉 달 동안 저 정도 자랐을까 싶을 정도로 기르고 있었다. 눈 덮인 새벽 벌판처 럼 고요한 눈빛도 예전과는 분명 다르다. 무엇이 달라졌는지는 정 확히는 모르겠으나, 달라졌다는 것 하나만은 알겠다- 그리고 그것 이 아킨에게는 유리하고 악튤런 자신에게는 불리한 방향이라는 것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다. 아킨이 물었다. "여기는 왜 오신 겁니까?" "나 역시 마찬가지. 사정이 있어서." "그게 뭡니까?" "....." 앞에 테이블 하나 놓고, 그 위에 각자를 위한 찻잔 하나씩 놓고 이야 기를 나누고 있는 중이라면 당연한 질문이지만 깊고 어두운 숲 안 에서 대치상태인 지금 나누기에는 한심한 대화다. "알아서 생각해-!" 아킨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짧게 말했다. "돌아 와라." 순간, 악튤런의 뒤에서 그 백마를 우적 우적 뜯어 먹던 검은 그림자 가 고개를 휙 들었다. 아킨이 손짓하자, 그것은 정말 바람처럼 빠 르게 아킨 쪽으로 달려오더니 그의 그림자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게 뭐냐." 그러나 그렇게 묻는 순간에, 아킨의 그림자가 꿈틀하더니 그 위로 붉 고 사나운 눈이 나타나 화륵 타올랐다. 아킨이 눈길을 보내자, 그 붉은 두 개의 눈동자는 이내 감기며 까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돌아가십시오, 악튤런 님." "뭐?" "이 숲의 주인께서 달가워하지 않으십니다.....물론, 이렇게 심각하게 기물 파손하면서 들어오는 불청객을 반길 주인은 어디에도 없지만, 그분은 불쾌함을 보통 사람보다 더욱 과격하게 표현하시는 분이니... ..돌아가 주십시오." 물론 아킨 자신이 그 '과격한 표현 방식' 중 하나라 말하기는 곤란하 니 그에 관해서는 입 닫았다. "그 숲의 주인은.....알르간드의 여왕, 지에나 겠군." "상식입니다." "성배를 가져간 그 두 명의 마법사 중 하나이고." "돌려받은 겁니다. 그리고 그 두 분과, 당시에는 타의로 취침 중이셨 던 다른 분께서는 그것을 되찾기 위해 쿼크 대제보다 더 큰 노력을 들였습니다. 가져가시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너도 그것이 어디 있는 지 알고 있냐?" "아는 것과 가져갈 수 있는 건 전혀 별개 문제입니다." 순간, 악튤런이 빠르게 외쳤다. "사즈, 프시오, 스브-" "!" 철컥- 차가운 족쇄 채워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아킨의 팔과 다리를 뿌옇지만 단단하고 차가운 것이 휙 휘감아 조였다. 아킨은 당황하 지도 않고 그 마법을 물끄러미 보고는 손을 당겨 보았다. 그러나 손 은 허공에 고정되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악튤런이 말했다. "아는 거라도 말해라." "여전히 무례하시군요." "원하는 것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자세가 되어 있는 것뿐이야. 기 분 나쁘다면 협조하면 될 거 아냐." 아킨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아야 했다. 참으로, 진심으로 기가 막혔 다. "왜 이러시는 건지는 묻지 않기로 하겠습니다.......무슨 이유이든 저와 는 상관없을 듯 하니까요." "너도 제국인이 아닌가?" "하지만 당신 같은 낭만과 야망과는 상관없는 몸입니다." "제국은 겪지 않아도 되는 혼란을 그 성배 때문에 겪었어! 지에나가 그 성배를 가져가고, 남겨진 것은 혼란과 파괴, 그 추한 것들뿐이 지-!" "말 했잖습니까. 가져갈 걸 가져 간 거라고. 혼란을 수습하지 못한 건, 유감스럽게도 당시 높으신 기사 분들의 책임이라고 봅니다." "성배는 겨우 그런 의미가 아니다. 평화와 정의의 상징이었고, 희망이 었어. 그런데 그것을, 모든 제국의 것을 그 마법사들은 원래 자기가 가져야 할 것이라고 가져간 것이다. 그리고 결과가 뭐지? 강력한 왕은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은 채, 그저 각자의 영토에 안착하여 툴 칸과 나프 왕국의 도발, 그리고 욕심 많고 난잡한 공화국들의 협잡 에 놀아나고 있잖아. 그 뿐이 아니지. 각자 미워하고 질시하며 스 스로의 힘을 낭비하고만 있다. 이게 대체 뭐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애당초 뭔가가 잘못 되어 있으니, 결국 썩은 나무에 썩은 열매가 달리듯 이 꼴이 되는 거다. 성배는 그냥 물건이 아니야! 원래 가지 고 있었다고 도로 가지고 갈 물건도 아니었고!" "그게 온다고 다 해결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아니, 해결 할 수 있다. 내가 해결해 보이겠어. 나는 그럴 권리도 의 무도 있으니까." 악튤런의 눈은 정말 '순수하게' 빛나고 있었다. 너무나 순수하게. 아킨은 조금 감탄이 일기도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조금 부럽 기도 했다. 저렇게 의심 없이, 망설임 없이, 거침없이 앞만 보고 달 려갈 정도로 열정 넘치는 사람은 흔히 보는 게 아니다. 자신이 원하 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빛나는 햇살 같은 것이라 믿기에, 다른 사람 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이렇게 강요하는 것이다. 당연한 것이니 당연 한 줄 알아! 라는 유형이라고나 할까. "당신이 그렇게 주장하는 건 존경스럽긴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지에 나 님께서는 별로 동의하지 않으실 텐데요." "그렇다면 만나게라도 해 다오. 내가 설득해 볼 테니." "당신은 첫 관문인 저도 설득하지 못했습니다. 뭐, 예전에도 설득 못 하셨고....." 그리고 아킨은 팔을 털어냈다. 단단해 보이던 족쇄가 쩍쩍 갈라지더 니 유리처럼 산산 조각 나 사라졌다. 그러나 악튤런은 별로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 "모두의 평화를 위한 길이 될 거다." "그 안에 저의 평화는 없습니다. 그리고 천명이 행복할 지라도, 제가 별로 달갑지 않다면 끝인 겁니다." "얼간이 같으니!" "악튤런 님, 죄송하지만 원하는 것이 있다면 치러야 할 것이 무엇인 지도 알 것 아닙니까. 당신이 꽤나 열정을 가지고 계시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세상 모두가 그에 감동하여 당장에 무릎 꿇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동의 안한다고 사람 바보 취급하지도 말고." 악튤런의 입술이 비틀렸다. "너는 예전부터 겁쟁이였지. 형에게 뭐든 다 뺏기고도, 그리고 결국에 는 그런 결혼을 위해 팔리듯 보내지면서도, 그러면서도 대항할 꿈도 못 꾸는 겁쟁이. 그런 네 녀석이 뭐 대단한 생각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아." "기준이 틀리다고 몇 번을 말씀 드려야 하는 겁니까?" "기준은 무슨 기준! 나는 정말 네놈이 답답하단 말이다! 기회가 와도 걷어찼지! 도와준다고 해도 거절하지! 그럼, 결국 네가 하고 싶은 건 네 손에 피 안 묻히고 어디 조용한 숲 속에 처박혀 사는 것뿐이 잖아-!" 아킨은 다시 한번 하늘을 올려다보아야 했다. 다시는 이 아득한 문제 를 논의하고 싶지 않았으니, 또 이렇게 나오면 피곤할 일이다. "악튤런 님, 본인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잘난 체 하지 마! 적어도, 뭐가 더 나은지는 알고 있으니까." "나은 것에는 나은 방법이 있는 겁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 때 제시했 던 방법은 당시의 제게는 정말 최악이었고요." "뭐?" "설명하기 귀찮습니다. 알아듣지도 못하실 테고요." 무적인 아버지가 왕좌에 버티고 있고 휘안토스가 그를 물려받을게 뻔 한 마당에 암롯사의 가신들 중 대체 어느 바보가 '아무 것도 없는' 아킨을 돕겠는가. 심지어 적국에다가 지난 카시오스의 반란을 돕다 가 크게 데였던 델 카타롯사의 도움을 받는 다면, 아예 포기하는 편이 낫다. 아버지는 몇 번의 푸짐한 대만찬을 베풀어서 의심될만한 귀족들을 싹 쓸어버렸다. 신경 안 써도 될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들은 아버지 사 이러스의 공포에 완전히 압도되어 벗어날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 반란이 혼자 일으킨다고 되는 일인가. 뭐든 제 힘이 튼튼하고 돕는 사람도 어느 정도 되고, 이제 해 볼만하다 판단되면 하는 것이 순 리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때 그 제의를 들었을 때 이 사람들이 아킨토스 라는 인간을 뭐 취급하는 지 궁금했었다. 아무리 아킨이 굶주렸다 쳐도, 독이 든 고기를 집어 삼킬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그건 실패 할 가능성이 높더라도 도전해 볼 만하다 어쩌고 말할 문제가 아니었 다. 이용만 당하다 버려질 게 뻔하고, 버려졌을 때 자신을 보호할 방법도 전무한 마당에 그런 일에 뛰어드는 건 정말 한심한 짓이었던 것이다. 도전이란, 준비가 충분히 된 뒤에 도약해야 성공하는 것이 다. 행운이라는 지나친 불확실 요소에 기대는 건, 호방하고 야심 찬 인간이 아니라 그냥 바보다. "그러니 더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 자리에서 꺼지시고, 그게 싫다면 저를 꺼지게 하십시오." 악튤런이 망토가 내팽개쳐졌다. 그리고 그의 소맷자락이 한번 펄럭이 는 순간에 주문이 터져 나왔다. "르, 자이, 바- 즈브, 삭르-!" 페그 라일이 쏟아지며 순식간에 별 조각처럼 터지며 빛났다. 숨어있 던 야수가 뛰쳐나온 듯 어마어마한 굉음이 터졌다. "프로텐-" 보호마법을 시전 하기는 했지만, 단번에 주먹 맞은 듯 박살나며 아킨 은 저 멀리 내동댕이쳐졌다. 그러나 아킨이 등진 어둠 속에서 더욱 시커먼 것이 솟구쳐 오르더니, 아킨의 몸을 감싸 받았다. 이내 주변이 어둑어둑 컴컴해 지는 가 싶더니, 하얀 빛이 내리꽂혀 왔다. 츠캉--! 다시 검은 그림자가 아킨의 앞을 가로막으며 그 빛을 퉁겨 났다. 어둠이 빛에 찢겨지는가 싶었지만, 빛은 순식간에 흰 실처 럼 얇아지며 사라졌다. 잠시 위험이 사라지자, 그림자는 몸을 걷듯 이 비켜나 아킨 뒤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악튤런의 공격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더욱 강 하게 증폭되어 가고 있었다. 쿠르릉, 하며 바닥이 울리는가 싶더니 다시 허연빛이 솟구쳐 올랐다. 주변이 드래곤이라도 날뛰는 듯 박살나기 시작하며 그 파괴의 힘이 아킨을 내리 덮쳐 왔다. 바로 코앞까지 엄청난 힘의 진동이 느껴지고 바닥이 부르르 떨려와, 당장 에라도 아킨은 으스러져 버릴 것 같았다. 아킨은 팔을 뻗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 검은 가죽 끈이 휘릭 감겨왔 다. 아킨은 그 끈을 당기고는 바닥을 차고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온 흑마에 올라탔다. 꽈르르르르르--! 엄청난 힘에 숲이 박살났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바위가 온 숲을 부 수고 있는 듯 하다. 흑마는 바닥을 차고는 솟구쳐 올랐다. 고공의 세찬 바람을 맞으며, 아킨은 예민한 청력을 기울였다. 쿠릉, 쿠릉- - 거대한 북을 치는 듯 둔중한 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온다- 숲 저편, 아킨이 등진 곳에서 반투명하고 뿌연 것이 파도처럼 밀려오 고 있었다. 나무들이 우수수 흔들리며 그 쌓였던 눈이 허옇게 솟구쳐 올랐다. 악튤런도 같은 것을 발견하고 턱을 들며 험악하게 외쳤다. "이 자식이!" 악튤런은 소매를 다시 당겨 붙였다. 쿠어어어어엉---! 괴물이 울부 짖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밀쳐 들어오는 허연 덩어리에서 시 퍼런 눈동자가 켜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 길고 시커먼 선이 그어 지더니, 아래위로 찢겨지듯 벌어졌다. 거대한 괴물의 눈과 입처럼, 시 퍼런 안광을 내 쏘는 눈과 검은 구덩이 같은 입이 쇄도해 오고 있었 다. 아킨은 그 즉시 말을 달려 비껴났다. "비겁한 자식 같으니!" 악튤런이 퍼부어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아킨은 개의치 않았다. 어 차피 이 숲은 경계의 숲이자, 지에나의 성벽이다. 침입하고 반하는 모든 것을 공격하고, 침입자들을 알아보기 가장 쉬운 것이 바로 '마법'이다. 숲은 마법사를 가장 먼저 알아보고 달려드는 것이다. 처음에는 작은 것을 쫓기 위해 마법을 쓰면, 그 다음 더 큰 것이 침 입자를 솎아내기 위해 달려든다. 그리고 더욱 큰 마법, 지금의 악 튤런처럼 차라리 자연재해 급의 마법을 쓰게 된다면 뒤따라오는 것 역시 비슷한 급의 마물이다(지에나는 매우 공평한 성격이다). 그러나 아킨만은 예외였다. 그는 지배자이자 주인인 지에나의 허락을 받은 자였으니, 아킨이 무 엇을 어떻게 하든 그 어떤 마물도 아킨에게는 접근하지 않는다. 집 지키는 영리한 개 같은 이들이었다. 주인과 친하다고 판단되면 꼬리 를 흔들지만, 침입자라고 판단되면 가차 없는 것이다. 콰르르르-- ! 파도처럼 허옇게 치솟아 오른 괴물이, 드디어 쏟아져 나와 악튤런을 집어 삼켰다. 아킨은 뒤로 물러나 주문을 외워 나갔다. "수, 에악스- 뤼, 틱사- " 눈앞의, 악튤런을 내리 덮쳤던 허연 덩어리가 꿈틀거린다. 그 반투명 한 몸체 안에서 푸릇한 빛이 스며 나오기 시작한다. 시간이 다 됐다. 이제는 좀 상대할 정도로 약해져 있겠지. ******************************************************************** 작가잡설: 또 꼼수. -_-;; 늦었습니다.... 요 며칠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는 데다가 몸상태도 영 골골...해서요. --;;; 보약이라도 지어 먹어야 하나.....(비실비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0장 ************************************************************** [겨울성의 열쇠] 제235편 눈보라 속의 탐색자#6 *************************************************************** 엄청난 빛줄기가 허연 몸통을 꿰뚫고 솟구쳐 올랐다. 그 뿐이 아니 다. 사방으로 쏟아져 나무를 부러뜨리고 바닥을 헤 짚었다. 하늘이 라도 뚫을 듯 날카롭게 뻗어 나갔다. 아킨의 어깨 쪽으로도 한줄기 아슬아슬하게 뚫고 지나갔다. "르, 시스프...........쿠오, 지, 사프-!" 아킨은 빠르게 페그 라일을 짚어나갔다. 그려 넣은 수십 개의 페그 라일이 빛을 발하며 한데 뭉쳤다. 그리고 콰앙--! 마침내 악튤런을 덮쳤던 백색의 괴물, 지에나의 종이 완전히 찢겨 나갔다. 아킨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마지막 페일의 명령어를 내리찍었다. "루오-!" 허연 빛 덩어리가 괴물이 찢겨져 나가는 그 중앙을 향해 내리꽂혔다. 눈보라가 같이 일어났고, 주변이 싸악 얼어붙었다. 엄청난 냉기가 아킨에게도 닿아왔다. 그리고 허연 빛 덩어리들이 날카로운 이와 다리를 가진 짐승들로 변했다. 그것들 앞발을 갈퀴처럼 내저으며, 악튤런이 있는 곳을 향해 쇄도해 갔다. 콰앙-! 다시 바닥이 쩌릉 울렸다. "마이, 아스, 팍스-!" 악튤런의 외침이 아킨의 귀에도 뚜렷이 들려왔다. 흔들림 없었다. 지 친 기색도 없었다. "르, 자이, 바- 즈브, 삭르-!" 흰 짐승들이 가죽이 씻겨 내려나가며, 마치 뼈가 드러나듯 그 자리에 있는 마법의 핵- 페그 라일이 드러났다. 그 페그 라일을 향해, 푸른 섬광이 내리꽂혔다. 모두 깨어져 나갔다. 젠장, 역시나- 아킨은 솔직히 악튤런을 조금 가볍게 봤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하 는 짓이 워낙에 굉장하기에, 그의 실력마저도 비슷하게 봐 버리는 우를 범한 것이다. 아킨은 말의 등에서 뛰어내리며 나뭇가지 위로 올라섰다. 말의 형상이 콰작, 하고 날카롭게 솟구치더니 검은 번개 처럼 변해 악튤런을 향해 쏟아졌다. 악튤런이 그것을 향해 돌아섰고 , 그 순간에 아킨은 바닥으로 내려왔다. "아이, 익시마--- 즈미, 파....!" 바닥이 쿠르릉 떨렸다. 페그 라일이 좌라락 불타오르며 바닥을 밝혔 다. 악튤런이 험악하게 뇌까리며 돌아섰고, 그의 몸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바닥의 진동을 잠재우기 위해 그가 다음 마법을 시전하려 했지만, 마법이 바뀌며 시전의 절대보호가 걷히는 그 순간을 놓치 지 않고 아킨은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나 거의 비슷한 찰나에 아킨은 다른 것을 발견했다. 악튤런의 눈길이 아킨을 향했고, 그 앞 에 또 다른 페그 라일이 어리고 있었다. 아킨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이건 마법을 바꾼 것이 아니라, 말 그 대로 두 가지 마법을 '한꺼번에'하고 있었던 것이다. 젠장...! 아킨은 검을 거두고 뒤로 물러났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산산 조각 날 것 같다. 페그 라일의 빛이 합쳐지며, 다시 푸른 섬광이 쏘아져 나왔다. 아킨의 그림자가 휘릭 날아와 그 섬광을 막아냈다. 츠캉--! 빛이 꺾이며 숲 속으로 파고들어갔다. 캉, 캉, 캉---와드 득! 하며, 나무들이 베이고 쓰러지는 소리가 온 숲에 메아리쳤다. "건방진-" 사자 이가는 소리 비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킨은 몸을 바로잡고 는 악튤런을 마주보았다. 땀범벅이 되어, 옷매무새도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은청색 머리카락도 땀에 젖어 이마에 붙어 있었다. 아마 도 아킨 역시 그리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악튤런이 입술을 뒤틀며 웃었다. "고난 중 가장 하잘 것 없는 고난이로군." 화를 내자니, 진실과 그다지 차이도 없는 말이라 아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아버렸다. 다시 악튤런이 팔을 내 뻗었고, 아주 잠깐의 찰 나에 벌써 그 손가락 끝에 페그 라일이 어렸다. 마나가 모이는 것을 눈치 채지도 못하게, 정말 번개처럼 빠르게 일어난 일이었다. "숲의 덫이 모두 이런 식이라면, 반나절이면 모두 깨고 천개의 눈에 이를 수 있겠어." "......" 그 마법이 완성되는 속도를 보니, 다음 덫이 시작도 되기 전에 아킨 먼저 끝장날 것 같았다. 시간을 끌자니, 악튤런의 성격이 너무 과 격하다. 그럼.... "그만들 둬라." 아킨의 등 바로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아킨은 쭈뼛 했지만, 두 손이 아킨의 어깨를 가볍게 잡았다 놓아 금방 진정할 수 있었다. 악튤런의 얼굴이 기쁨 반, 분노 반으로 차올랐다. 그러나 손을 내렸다 . 시전 되던 페그 라일도 금방 사라졌다. 아킨은 뒤를 돌아보았고, 곧 무표정한 베이나트와 마주쳤다. "스승님." 악튤런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 말과 함께 왜 하필 지금 나타나 서 방해 하냐! 라는 외침이 따라 들리는 듯해서, 아킨은 오히려 불 안했다. "베아니트 님, 어떻게...." 아킨이 말을 꺼내려 하자 베이나트는 손을 저었다. 나중에 이야기 하 자는 것이다. 아킨은 입을 다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베이나트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그 엉망진창인 모습에 한숨을 내 쉬었다. "참 멀리까지 왔구나, 악티." "스승님께서 허락하지 않았고, 베풀어주지도 않으니......제 스스로 해 야지요." 베이나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오냐, 그래. 그건 하든 말든 이제 내 버려두기로 하마. 내가 뭐라 조 잘대든 가볍게 무시하는데, 내가 뭐하러 붙들어 말리겠느냐. " 악튤런의 눈이 빛났다. 아킨 역시 기가 막혔다. "저기, 베이. 지금...." "가만, 가만. 하지만 악티...... 하든 말든 말리지도 않겠고, 도와주지도 않겠어. 그리고 가능하다면 훼방도 놓을 생각이다." "네?" "솔직히 이 왕자님은 너하고는 상대가 안 된다. 최고 마스터씩이나 해 먹는 놈이랑, 이제 권호도 받지 못한 무면허 마법사랑 비교하는 것 자체가 허무한 노릇 아니겠느냐. 비교하면 네가 더 기분 나 쁘겠고. 그러니 이 녀석이 방해가 된다, 뭐다 하고 조잘댈 거리가 아니 라, 이 말이야." 악튤런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렇다면 스승님께서 저 녀석을 대신해서 저를 막으시겠다, 이 말씀 이십니까?" "물론이다." 악튤런이 웃음을 터뜨렸다. "맙소사, 스승님--!" "비웃지 말거라. 솔직히 말하자면 말이다, 이 왕자님 녀석에게는 이 숲을 지키거나 성배를 보호해야 할 아무런 의무도 없어. 지에나가 이 숲을 오가고 그녀의 거처에 머무는 것을 허락했다지만, 그건 순전 히 내가 허락해 달라고 해서 그리 한 것뿐이다." 그 말에 악튤런의 눈이 당장에 빛났다. 항의가 터졌다. "그렇다면, 저 녀석은 괜찮았는데 저는 왜 안 돼는 거죠? 저 녀석은 롤 레인의 제자이지만, 저는 당신의 제자인데!" "또한 내 대자의 동생이자, 나와 내 친구를 위해 희생을 치르기로 한 아이다. 그에 합당한 대우와 보답은 해 줘야 한다." 악튤런은 고개를 저었다. "저 역시 무엇이든 해 드릴 수 있습니다." "맡기는 즉시 들고 튈 녀석에게 뭘 맡기겠냐. 때에 따라서는 신뢰는 능력보다 중요한 거란다." 순간, 다시 악튤런의 앞에 페그 라일이 희미하게 어렸다. 베이나트는 무관심하게 그것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눈빛에 상황이 어찌 될지 대강 짐작한 악튤런은 이를 악물었다. 베이나트가 말했다. "이 숲에서 나가라, 악티. 아무리 내가 가르친 너라지만, 그리고 별로 가르쳐 주지도 못해서 죄만 지은 나이지만, 내 친구에게 이런 식으로 폐를 끼치는 것은 용납하기 어렵구나." "거부합니다. 저 자신을 증명할 테니, 신뢰를 얻게 해 주십시오." "말 했잖니. 그리고 너는 예전에 내가 제시한 기회를 걷어 차 버렸고, 그것만으로도 너에 대한 내 신뢰는 금간 지 오래란다." "스승님--!" "신뢰를 얻기 위해서 치러야 할 것은 많으며 고되다. 또, 만들기는 힘 들지만 깨기는 너무도 쉬운 것이 역시 그 신뢰다. 탈로스에게는, 내가 두렵고 어리석어 우리 둘의 신뢰를 깨 버렸고.....롤레인은 스스 로 신뢰를 깰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물러났다. 너보다 더 현명했던 네 사형들에게도 힘들었던 것이 그것이다. 그러니 돌아가, 악튤런 . 지금의 너는 안된다." "물러날 수 없습니다. 제게 그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건, 스승님도 잘 알지 않습니까." ".....안다. 또, 네가 그것을 얼마나 원하는 지도 알고.........그래서 네 게 비밀이 새어 나가게 한 것을 후회한다." "왜 이해해 주시려 하지 않는 겁니까-!" "그리고 너 역시 나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 건 매 한가지다. 네가 먼 저 나를 이해하고 동정해 준다면, 나 역시 너를 이해하고 동정해 줄 수 있다. 나이 까마득하게 먹은 녀석이 새카만 아이에게 이런 투 정 부리는 것도 우습지만......지금의 나로서는 이 말 밖에는 할 수 없구나." "그래도 얻으려 할 겁니다." "안 말린다. 그리고 허락받아 가져가려면 어렵사리 신뢰를 얻어야 할 테지만, 뺏어 가려면 주먹이 세야지." 악튤런의 눈이 더 사나워졌다. 그리고 그의 페그 라일이 진해지려는 찰나, 베이나트가 소맷자락을 당겼다. 모든 것이 칼로 치듯 단번에 이루어졌다. 악튤런과 그 사이의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그대로 뒤틀려 찢겨 나가 며 시커먼 구멍이 드러났다. 쿠어어어엉--! 절벽에서 몰아치기라도 하는 듯한 엄청난 바람소리가 귀청을 찢을 듯 솟구쳤다. "너를 아꼈고 지금도 아낀다, 악티. 그리고 네게 옳다고 생각되는 길 이 정말 네게 옳을지 그러지 않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적어도 하나 분명한 것은, 나는 원하지 않는 다는 거야. 아니, 결코 원하지 않는다......나와 내 친구들이, 내 세계를 희생하여 얻게 된 힘, 결국 에는 비극과 상처만 남긴 이 힘은 그 누구에게도 나누어 줄 수도 양보할 수도 없는 거니까......비록 내 아이들 같은 제자들이라 할지라도!" 악튤런이 만든 페그 라일에서 섬광이 솟구쳐 올랐다. 지징--! 심장 까지 같이 진동할 듯한 소리에, 온 숲이 몸을 떨었다. 아킨도 뒤로 주춤 물러났다. 베이나트의 소맷자락이 순간 펄럭였다. 찢어진 듯 시커멓던 구멍이 더욱 길게 찢어지며, 아래위로 벌어졌다. 그리고 아킨은 그 검은 구멍 속으로, 아릿한 빛이 스며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 빛은 점점 거세지더니, 갑자기 확 솟구쳐 올라 주변을 눈부시게 덮었다. 악튤 런이 쏘아 던진 푸른 섬광이 먹힌 듯 사라졌다. 그가 만들어 낸 페 그 라일의 빛도 사그라지더니 흐릿한 문자의 흔적만을 남기고는 완 전히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앞에 펼쳐지는 것은, 빛도 눈 덮인 숲도 아니었다. 벌판, 겨울의 벌판이 펼쳐지고 있었다. 하늘은 푸르고 넓고, 눈 덮인 평원과 무리지은 숲은 하얗게 빛난다. 그 벌판을 같이 마주보는 악 튤런의 눈이 커졌다. 무언가 아는 곳을 본 듯한 눈치다. 순간, 그 벌판 위로 거대한 성이 나타났다. 옆으로는 푸른 바다와 거 대한 절벽을 끼고 있고, 다른 반대편으로는 파얀 벽과 붉은 기와지 붕을 인 도시가 있다. 그림처럼, 마치 상상으로 빚어낸 듯 아름다운 곳이다. "돌아가라, 악티." 베이나트의 그 부드럽고 짧은 목소리와 함께, 틈새로 보이는 듯하던 성이 감긴 듯 사라졌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와 아킨은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가, 주변이 잠잠해지자 고개를 들었다. 온 숲은, 난폭한 침입자의 흔적만을 남긴 채 잠잠해져 있었다. 악튤 런의 목소리도, 그가 움직이는 기척도 들리지 않는다. 아킨은 베이 나트 쪽을 보았다. 그곳에는 베이나트만이 석상처럼 서 있었다. 조용한 눈으로 이제는 빈 허공을 보다가,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작은 조각 하나를 집어 올렸다. "베이!" 베이나트는 조각을 집은 채로 고개를 돌렸다. 그 조각은 루비처럼 빨 간 것이었다. 그가 손가락에 힘을 주자, 그것은 이내 산산 조각나 바스러졌다. "그는 어디로 갔습니까?" "날려 보냈지. 공간을 넘나드는, 가장 위대하고 강인한 붉은 혼돈의 바람에 실어서." "공간....을 넘어요?" "물론 다른 곳에서는 불가능하다. 이렇게 엉망진창인 숲 속이니 말도 안 되는 마법도 가능한 거지.....사실 다른 곳에서 이런 마법 펑펑 써댔다가는 이곳의 높으신 분에게 당장 짐 싸들고 나가라는 말이나 듣게 될 거라고." 붉은 가루가 반짝이며 흩어졌다. 그리고 베이나트는 땀에 젖은 이마를 매만지고는 고개를 저었다. "지에나에게 들었단다. 하여간 그 할망구는 나이 먹어갈 수록 심술만 는다니까." 그렇게 험악하게 중얼거리곤(본인은 그녀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을 기 억은 하고 있는지 모르는) 베이나트는 아킨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어쨌건 돌아가자." **************************************************************** 작가잡설: 죄많은 아키 군...-_-;;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1장 ************************************************************** [겨울성의 열쇠] 제51장 기다리고 있는 것들 제236편 기다리고 있는 것들#1 *************************************************************** 악튤런은 눈이 얇게 덮인 회랑 뜰에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놀랍다기 보다는 정말 기가 막혀서, 그는 잠시 우두커니 서 있어야 했다. 너무나 갑자기 일어난 일이다. 눈 감았다 뜨며 꿈에서 깨듯, 세상이 갑자기 뒤집히듯 변한 것이다. 악튤런은 그의 스승이 무엇을 했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보내버린' 것이다. 공간을 찢고 그 너머로 보내고는 닫아 버렸다. 둘러보니, 안뜰의 키 작은 측백나무들 위로는 눈이 야트막하게 쌓여 있고, 바닥은 여기 저기 눈이 헤어져 갈색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잘 알고 있는 곳이다. 아니,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곳- 아주 어린 시절, 유모가 그를 그의 고모이자 델 카타롯사의 왕비, 그 리고 칼리토와 칼라하스의 어머니였던 켈라스에게 맡기고 갔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여러 스승들을 이기고 때려눕히고 자괴감과 절망 과 분노에 던져 버리고는 돌아왔던 곳이 이곳이며, 그의 마지막이 자 가장 위대한 스승을 만났던 곳도 여기다. 스승에 대한 생각이 미치자, 악튤런은 화가 팍 치밀어 올랐다. 대체 왜! 하는 질문이 치솟아 오르면서 그를 괴롭힌다. 속에서 타오르는 건 갈망이고 분노였다. 이해할 수 없는 건 싫다........할 수 없는 건 없었고, 하려해서 안 되는 건 없었건만, 그 스승은 벌써 몇 번 이나 허락하지도 용납하지도 않는다..... "악튤런?" 그, 펄펄 끓어오르는 단번에 식히는 시원한 물줄기 같은 목소리에 악 튤런은 고개를 돌렸다. "언제........돌아오신 거죠?" 칼라하스였다. 추운 회랑에서 대체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지 만 그녀는 단정한 차림새로 벤치에 앉아 있었다. 달려 나오지도, 일어나지도 못한 채 앉아만 있는 그녀를 보게 되자 악튤런은 갑자기 자신이 한심해 지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그의 머릿속을 꽉 채 우고 있던 생각이 의미 없이 투명해져 버린다. "......오래.......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자 칼라하스는 활짝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갈 수 없으니, 와서 안아주시겠어요?" "그런데 악튤런의 정체가 대체 뭡니까?" 성으로 돌아오자마자 아킨은 그렇게 물었다. 그런데 베이나트도 되물 었다. "어떤 정체? 내 제자라는 거야 뻔히 다 알겠고, 성질 머리는 더욱 뻔 히 알겠고." "어떻게 저렇게 성배에 관한한 당당해 질 수 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은 겁니다." 그러나 베이나트는 난감하다는 눈치였다. "미안하구나, 아키. 그건 말이다......비밀이거든." "지키기로 약속하신 겁니까?" 베이나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킨이 물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요?" "특별한 경우를 제하고." "알겠습니다." 짧게 답하고는 아킨은 돌아섰다. 그러나 아킨이 이렇게 나오면 고분 고분 착하게 말 듣기 위함이 아니라 다른 방안을 강구하기 위함이 라는 것을 모르는 베이나트가 아니었다. 베이나트는 설마 멱살잡고 협박이라도 하려고 하나, 하고 긴장해야 했다(그리고 그리 되면 베이나트는 절대 아킨을 이길 수 없다). 그런데 아킨은 정원의, 지 에나의 수경 쪽으로 터벅터벅 갔다. "야, 너...." 말이 채 나오기도 전에 아킨은 수경 위로 손을 뻗었다. 베이나트가 설마 설마 하는데, 정말 그 안에서 뿌연 빛이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기겁한 베이나트는 나는 듯 달려 와서 아킨의 손목을 붙잡았다. "아키, 너!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가르쳐 주지 않으시겠다면 제가 보면 되겠지요." "그, 그거 쓰는 법 지에나가 가르쳐 줬냐?" "당연히 아닙니다. 그냥 어깨 너머로 배운 것뿐이고, 그분처럼 대단하 지는 못해서 미래까지는 내다 볼 수 없습니다. 단-" 아킨은 손을 거두었다. 정말 수경의 물결이 사악 사라지며 판판한 유 리판처럼 되더니, 그 안에서 스며 나오는 빛은 더욱 진해지고 있 었다. 그리고 깊은 곳에서 탁한 얼룩같은 것이 부풀어 오르기 시 작했다. "과거는 어떨지 모르겠군요." 베이나트는 수면을 탁 쳤다. 표면이 한꺼번에 차르르 떨리더니, 빛도 얼룩도 사라지며 검푸르고 차가운 물 덩어리만이 남았다. 아킨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어쩌시겠습니까?" "뭘?" "가르쳐 주시면, 그것이 거짓이든 진실이든 믿어 드리겠습니다. 하지 만 가르쳐 주지 않으면 몰래 라도 또 시도할 겁니다." "왜 그렇게 알고 싶어 하는 거냐?" "저는 그 덕에 세 번은 목숨이 오락가락 했습니다. 알 권리 정도는 있다고 생각하는 데요." 베이나트로서는 대꾸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거짓이든 진실이든 믿 어 주겠다고 하니, 괜히 어설프게 거짓말해서 들키는 것도 곤란하다. 베이나트는 거짓말 하는 재주가 영 없었고, 아킨은 거짓말 알아내 는 재주가 탁월했다. 어설프게 굴다가 아하, 그래서 이리저리 요리 조리 해서 이상한데요? 하며 아킨이 딴죽걸기 시작하면 아마도 베이 나트는 토해내고 싶지 않은 진실까지 다 토해내고 저녁에 머리 쥐 어짜고 있을 것이다. 포기한 베이나트는 바닥에 털푸덕 주저앉고는 심드렁히 말했다. "황실 족보에 대해 아는 게 있니?" "거의 없습니다. 단, 선황폐하의 자식들이 모두 일찍 죽었다는 건 알 고 있습니다. 그리고 칼리토가 현 황제와 거의 비슷한 서열을 가지고 있지만, 제 아버지에 의해 승계권이 막혔다는 것도요." "악튤런이 그 황제의 아들이다." "네? 하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 지는 안다. 그래, 황후의 자식은 아니지. 하지만, 어쨌건 그는 황제의 자식으로 인정받았고 그에 합당한 혜택도 주어 졌다. 마법사의 자질 때문에 일부러 황족이라는 사실을 숨기기는 했다만, 그렇게 많은 스승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황실이 주던 혜택 덕이었지. 그리고 녀석과 내가 만난, 녀석이 열 두 살 되던 해에는 나를 제하고는 그 누구도 스승으로 나설 수 없을 정도였다. 너야 모를 테지만 녀석은 정말 당시에는 모든 마법사들이 주목하던 천재였지...." 휘안 같군, 하고 아킨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누구나 녀석이 내 제자가 될 거라 예상했지. 탈 로스도 롤레인도 내 제자였으니, 그들과 동년배이던 악튤런의 마지막 스승은 내게 그를 부탁했다. 그리고 황실에서 보낸 사람도 그와 함 께 찾아와 말하더구나. 신분이 이러저러하니, 되도록이면 그가 마법 에만 정진하도록 하여, 엉뚱한 야심에 눈뜨지 않도록 해 달라고...... 그들은 지나치게 강한 마법사가 역사를 뒤집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았다. 가깝게는 롤레인이 그렇게 하여 베넬리아 내전을 끝내기도 했고, 멀리는 팔로커스가 역사를 새로 쓰게 했으니까........게다가 악튤런은 델 카타롯사의 왕실과 가깝기도 했다. 누구보다 황위와 가까운 자리에 있으면서, 힘까지 갖추고 있는 칼리토 왕자와 가까웠단 말이다." "그리고 칼라하스 공주를 좋아하는 것 같던데요?" 베이나트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자기보다 네 살 어렸던 그 예쁜 아이를, 녀석은 정말 좋아 했지. 나를 어느 정도 인정하게 되자, 녀석은 곧 그 나이 또래 소 년이 나이 많고 경험 많은 숙부에게 매달리듯 기대고, 또 그 공주에 대해 늘어놓고는 했지. 그 아이는 악튤런을 어렸을 때부터 맡아 키워주었던 켈라스 황녀의 딸인 데다가, 절친한 친구인 칼리토의 동생이었으니까 그들의 은혜와 우정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잘해주어 야 한다 생각했지." "......비슷한 입장의 사람들 끼리 뭉쳤겠군요." 예전, 아킨을 바라보는 칼리토의 눈동자는 정말 적의에 활활 타오르 고 있었다. 하긴 어머니를 앗아가고, 델 카타롯사 안의 귀족들을 이용하여 그를 몇 번이나 죽이려 하고, 심지어 몸이 불편한 여동생 을 '환자'인 아들과 결혼하라 '정중히 제안'한 남자의 아들을 바라 보는 눈이니 별 수 있겠느냐 만은. "뿐만 아니라, 당시의 왕비는 타니아 였지. 칼리토 왕자는 성년이라 버텨낼 수 있었다만, 어린 공주는 아니었단다. 그 꼬마 공주에게는 꽤나 고달픈 나날이었지. 그래서 악튤런은 미친 듯이 강해져야 한다는 데만 집착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도움이 될 힘을 하루라도 빨리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내가 실종될 즈음에, 악튤 런은 칼라하스 공주가 크게 다쳐서 델 카타롯사로 돌아가야 했다. 당시 왕비였던 타니아의 짓이었지......그 때 악튤런은 편지를 보냈다 . 그들은 황손이며, 나 역시 황제의 자식이니 스승님께서 가지고 계신 성배를 '정당한 권리'로서 원한다고. 화가 났다.....그 비밀을 또 누군가에게 들켜버리고, 오랜 친구들의 비밀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한 내게, 그리고 마지막으로.....어리석은 오판과 터무니없는 자만 으로 모든 일을 망쳐버린 내 과거에. 어린아이의 분별없음을 탓하기 에는, 자기가 믿고 있는 것이 옳으니 오로지 납득만 하라는 이기를 경멸하기에는, 내가 저지른 실수가 너무 많았다. 결국 그러다 보 니 탈로스에게도 그런 식으로 대하게 되어 버렸지. 탈로스의 학구적 갈망이 악튤런의 그것과 같아 보여 두려워지기 시작했고, 녀석도 종국에는 다 똑같이 될 것 같았다......그래서 이제 모든 연구를 접 자고 했고, 탈로스의 분노는 당연한 결과였지. 나는 실종되고 , 롤레인과 탈로스는 크게 다치고........악튤런도 탈로스를 찾아갔 다가 깨졌지." ".......그리고 그 때 다시 찾아온 거군요." "그렇단다. 에크롯사의 숲에서 녀석을 다시 봤을 때 정말 아득했지. 게다가, 당시의 그는 고작 열다섯이었지만 그때는 스물 둘. 칼리토는 그 사이에 왕이 되었고, 타니아와 그 아들은 축출되었지. 녀석의 분노는 힘을 얻었고, 그렇게 되면 아무도 말릴 수 없게 돼는 법이지." "별 것도 아니군요." "응?" "이유가 참 단순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습니다. 하지만.....뭐, 단순 하니까 그만큼 무식하게 돌진하는 거겠지요. 의심할 여지가 없으 니까.......반박하거나 회의할 틈도 여유도 없으니까. 저는 그냥 칼리토 를 황제로 앉히고 제국의 부활을 위해서인 줄 알았는데......훨씬 더 단순하네요. 그냥 내가 세상에서 최고 먹겠다, 이것밖에 없잖아요." 그러니 왕 자리 주겠다는 데 걷어차는 아킨에게 그렇게나 험악하게 군것이다. 이해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너무나 바보 같아 보이니까, 그토록 숭 배하는 진리가 부정당하고 있으니까. 답답했을 것이다. 왜 믿지 않 는지, 왜 그의 뜻대로 해 주지 않는지. 그게 진리인데, 그게 순리인데. "자기와 자기 편 빼고는 다 악당이라 생각하고 있겠군요. 그리고 그 들의 모든 것을 뺏어서 지배하지 않는 한 언제나 억울하다고 생각 하겠고......내가 세상에서 제일 억울한 인간이니까, 너희들 것을 내 가 다 빼앗아도 너희들은 이해해야 해.......뭐, 이런 식이군요." "......그래 보이냐?" "그냥 넘겨짚는 것뿐입니다. 어차피 저는 그에 대해 잘 모르니......... 하지만 저도 그런 혐의에서 크게 결백하다 할 수 없는 몸이니, 난 안 그렇다 하고 잘난 체 할 생각은 없어요." 그리고 솔직하게 말해서, 만약 아킨에게 어느 정도의 힘이 있고 준비 가 되어 있었다면 그의 제안을 그렇게 단박에 거절할 수 있었을 지도 의심이 된다. 아니, 분명 어느 정도의 위험을 안고서라도 감행했 을 것이다. 분노도 증오도 충분했다. 그 때처럼 휘안토스와 형제라 는 것이, 아버지의 자식이라는 것이 치 떨렸던 적도 없었고 무력한 자신이 혐오스러웠던 적도 없었으니. 악튤런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 할 위치가 아니다. "뭐가 더 옳은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스승과 사형들 속 썩히 고 엉뚱한 사람에게 피해막심하게 끼치면서도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그냥 그들과의 인연을 끊고 제 갈 길만 가 는 게 좋은지......" "너도 뭐, 네 형한테 복수라도 하고 싶은 거냐?" "물론 저를 그 꼴로 만들어 놓은 것에 대해서는, 저도 기회만 된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 줄 겁니다. 하지만.....상대가 상대니, 멍청하게 주먹만 휘두르다가는 저만 당할 테니 신중해야겠지요." 베이나트가 나른히 한숨을 내 쉬었다. "아키야, 승리란 그냥 기회 한번을 더 얻는 것뿐이란다. 그리고 황제 나 왕이란, 단 한명에게 주어지는 기회이고.......그 찬란함에 많은 이들이 끌리지만 그 앞에 놓인 것은 여태 달려왔던 길보다 더욱 험하 고 거친 길이지. 그리고 그 길은 점점 좁아지다가, 마침내 제 몸 하나밖에 걸을 수 없는 길이 되어 버려.......하지만 뒤에서 계속 쫓아 오니까 결국 뛰어야 하지. 길을 잃을 지도 모르고, 넘어질 지도 모르 고, 중간에 절벽이 나올지도 모르지만, 멈추지 말고 계속 뛰어야 해 . 그냥 충고하는데, 되도록 그 사람들한테는 상관 말려무나......뭔 가 굉장히 꼬여버릴 것만 같아." 아킨은 고개를 저었다. 베이나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알지 만, 고분 고분 들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저는 어쨌든 되도록이면 원하는 대로 나갈 생각입니다. 옆에서 천 마디 옳은 말을 해도, 자기가 원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법이 니까....사람은 원래 듣고 싶어 하는 말만 골라 듣지 않습니까. 네 가 옳다고, 네가 잘 하고 있다고, 너는 분명 잘 될 거라고.......그리 고 막상 어려움이 닥치면 주저앉아 원망하죠. 왜 하늘은 이런 식으로 날 몰아넣는 걸까, 왜 나를 방해하는 걸까......." 왠지 쓴웃음이 치밀어 올랐다. 사실 그런 생각들을 참 많이도 했었다. 거침없이 아킨의 운명을 휘두르던 휘안토스를 바라보며, 아버지와 함 께 암롯사를 휘어잡는 그를 바라보며, 유제니아를 아무렇지도 않게 짓밟아 버린 그를 바라보며, 아킨은 정말 그가 가진 힘을 갈망했다. 휘 안토스가 아킨을 짓밟을 수 있는 만큼, 그 역시 휘안토스를 짓밟을 수 있기를 말이다. 그래서 항상 초조해했었다. 그와 똑같은 기회를 얻을 수 있기를, 그와 똑같이 인정받을 수 있기를, 그가 사랑받은 만큼 사랑받고 얻은 만큼 얻을 수 있기를...... "하지만.......저는 그저 제대로 살고 싶습니다. 후회도 하고, 실수 도 할 테지만.......적어도 그럴 일이 조금이라도 적었으면 좋겠어요." 아킨은 눈을 들어 수경을 바라보았다. 시야가 완전히 닫힌 그 수경은 이제 어둠에 젖어 검은 덩어리처럼 정지해 있을 뿐이다.... 다시, 방 금 전에 보았던 그 광경이 눈앞에 잡힐 듯 어린다. 아프다, 아리다, 시리다- 만약 정말 그리 된다면, 아마도 또 예전과 같은 괴로움밖에는 남지 않 을 것이다.... 그런데 그 때 빈 횃대 위로 푸르고 큰 새가 훨훨 날아와 내려앉았다. 지에나가 나타난 것이다. ******************************************************************* 작가잡설: 정신없는 나날........ 2-3일마다 한번씩 올리는게 좋을까요, 아니면 비축해 놨다가 쏴아 푸는게 좋을까요? ....................그나저나, 요즘 정말 정신없습니다;;; 지난 주말에 선배 두분이 결혼하셨습니다. 혹시 아실지 모르겠지만, 예전 아주 예전~~ 에 '성격나쁜 노총각 장가보내는 101가지 방법'을 공모한 적 이 있습니다. 바로 그 당사자입니다.........-_-;; (나중에 들켜서 무진장 혼났답니다...핫핫;;) 두 분다 참 멀리서도 짝을 찾더니만, 결국에는 코앞에서 제 짝을 찾아 결 혼 하는 군요....(그리고 그 둘을 맺어주기 위해 두 실험실에서 눈물나는 노력을 했었다는. -_-;;; 특히 아줌마 부대의 성원이 컸습니다........) 어쨌건....모두 감개무량한 가운데 두분은 늦은 결혼식을 올리셨습니다. 행복하게 사세요.............! .................그리고 청첩장을 두장 받아왔습니다. -_- (젠장)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1장 ************************************************************** [겨울성의 열쇠] 제237편 기다리고 있는 것들#2 *************************************************************** 서늘한 목소리가 그녀의 모습이 보이기도 전에 귓가에 와 닿았다. "잘 해결했다고 봐야 할까?" "지켜보신 대로 되었습니다." 지에나의 모습이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그녀는 방금 전 아킨과 헤어 질 때와는 조금 다르게, 머리카락을 푸른 리본으로 하나로 묶고 있 었다. 그런 그녀를 보는 베이나트의 눈빛은 늘 그렇듯 서글펐다. 그 는 언제나 무너진 옛집을 보는 듯, 서산마루에 걸린 하현달 한 조 각을 바라보듯 그녀를 바라본다. 지에나가 그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칼리반스, 좀 비켜 주겠어?" "엿 듣는 건 상관없나?" "상관없어." 그녀는 긴 소매 자락을 당기고는, 못을 감싼 낮은 난간에 앉았다. 아 킨은 그녀를 바라보느라 베이나트가 어디로 사라지는 지보지 못했다. 지에나가 말했다. "해결한 셈 쳐 주겠어." "감사합니다." 지에나는 다시 수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수경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방금 전에 보았던 것을 다시 보여줄까?" "괜찮습니다. 하지만......약속하신 대로 방금 전에 본 것들이 대체 무엇 인 지는 가르쳐 주십시오. 정말 다가올 미래입니까?" "바꿀 수도 있는 미래이지." ".....그렇다면 다가올 수도 있는 미래라는 뜻이겠군요." 지에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원하지 않으면 바꾸게 해 줄 수 있어." "대가는?" "당분간 내가 하라는 대로 하기만 하면 돼." 아킨은 자기도 모르게 베이나트를 찾았지만 정원에는 이제 아무도 없 었다. 지에나가 말했다. "아킨토스, 네가 이곳으로 온 첫날에 칼리반스가 너에 대해 다 가르 쳐 주었어. 그리고 나도 너에 대한 많은 것을 나의 방식을 통해 보 았고....." 그녀의 어두운 눈길이 수경을 향했다. 아킨은 행여나 방금 전에 보았 던 그것을 다시 보게 될까, 해서 고개를 돌려 보았다. 그러나 수경을 통해 보이는 것은 어둑어둑한 숲 속이었다. 얇은 비가 소근 소근 내리고 있었고, 온 숲 속에 뿌연 안개가 어려 있다. 아킨은 그녀가 무엇을 보여주려 하는 지 알아 챘다. 어느 날의 어느 모습인지- 그리고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너무나 잘 안다. 허리에 다시 그 타는 듯한 통증이 밀려드는 것 같고, 절망과 분노에 시 달리던 그날의 공포마저 생각난다. 아킨은 더 보고 싶지 않아 눈을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잘 알겠습니다." "너는 칼리반스에게 우리를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었지." "벌써 넉 달이나 전의 일입니다." "또는 2년, 또는 넉 달, 그리고 나에게는 그저 네 시간 정도. 이곳의 시간은 의지에 따라 현실적인 의미조차 가지게 되지......너는 길었고, 바깥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였고, 내게는 짧았어." 아아......무슨 뜻 인지 알 것 같다. 그녀는 잠시 쉬었던 시간이었을 뿐- 즉, 그녀에게는 이곳의 시간이 빠르게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다시 그녀가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나루에보다 더욱 더- 나루에에게서는 분노와 증오라도 느낄 수 있었지만 지에나 안 에는 아무것도 없다. 시간마저도, 그래서 그 시간이 수놓아 펼치는 기억과 추억도 의미 없다. "이제부터 네가 할 일을 가르쳐 주겠어. 하지만....성공하든 실패하든 잘 하든 못하든 간에, 그건 네 책임이야. 그리고 네가 우리의 기대나 예상과는 달리 어긋난다면 우리는 너를 봉하거나 파멸시켜야 해..... ..나는 상관없지만 네가 원하지 않는 다면 잘 해줘." "어긋난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순간 오싹한 건 사실이다. "니왈르도가 했던 실수를 네가 되풀이 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거야..... 아킨토스-" 그녀가 그렇게 아킨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에, 수경의 색이 바뀌었다. 가라앉았던 앙금이라도 끓어 오르듯 뿌옇게 변하더니, 그것은 곧 눈보라치는 벌판이 되었다. 그리고 그 설원 안에, 눈부신 은빛 머리카락의 남자가 서 있었다. 아 킨과 똑같은 금빛 눈을 활활 태우며, 그는 그 곳에 오롯이 서 있 었다. 모든 것에 도전하고 모든 것의 도전을 받아들일 듯... 몇 번 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아킨이 기억하고 있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 어딘지 아버지와 닮은 모습 그대로. "네게는 곧 엄청난 힘이 주어질 거야. 그리고 너의 과거는, 너의 욕망 과 분노를 잠재워야 했던 시간들, 그 갈망의 샘은 바짝 말라 어떻 게든 목을 축이고 싶어 하고, 모래마귀처럼 무엇이라도 잡아 끌어당 겨 집어 삼키고 싶어 하지. 그런데........바로 지금 우리가 하라는 대 로만 하면 네 손에 달콤하고 감미로운 힘의 잔이 들어와 너를 신보 다 강하게 만들어 줄지도 몰라." 그리고 수면에 파문이 일어나며 니왈르도의 모습이 사라졌다. 햇살이 내리쬐듯 수면이 환하게 반짝거리기 시작하더니, 그 위로 가루묻은 손가락으로 찍은 듯 투명하지만 단단해 뵈는 것이 어리기 시작한다 . 그리고 얼어붙기라도 하듯 점점 뿌옇게 변하더니 마침내 낡은 잔 으로 변했다. 그 안에는 성에처럼 뿌연 바람이 감돌고 있었으며, 작고 동그란 것이 그 주변을 빙글 빙글 돌고 있었다, "저것은 나의 잔, 나를 이렇게나 위대하고 초라하게 만들어 주었던 물건이지......또한 칼리반스에게는 기쁨과 슬픔을, 팔로커스에게 젊 음과 늙음을 안겨주었던 것이지. 그리고........네가 우리들에게 약속 한 대로 우리를 돕고자 한다면, 네게 남겨진 마지막 잔을 주겠어. 우연이자 필연, 고통이자 기쁨인 이유로 네 안에 니왈르도, 우리 세계의 사람이자 위대한 힘을 가졌던 저주스런 마법사가 있으니까.... . 그런 네게는 이 세상 그 누구도 갖지 못한 기회와 권리, 또한 원죄가 있지." "버리기 위해 가져야 한다는 건 압니다." "아니, 너를 위해 쓸 수도 있어. 네게는 그럴 권리가 충분히 있으니 까.......그래, 그로 인해 잃었던 것을 그로 인해 얻어야겠지." "어머님을 다시 살려낼 수 있다는 말입니까?" 지에나가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그 일'을 아예 없었던 일로 돌릴 수 있습니까?"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지." "그렇게 잃은 것을 보답받기 위해, 가장 소중한 몇 개를 보상해 주기 위해....덜 중요한 천개, 만개를 주는 겁니까.....그 힘은?" "아니." 짧고도 차가운 답변이었다. 아킨이 말했다. "저는 맹세 할 수 있는 것에만 맹세를 드립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적어도 제가 약속한 것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합니다. 지엔, 저는 그저 제 슬픔을 보상받기 위해서만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더 이상 슬플 일이 없도록 하고 싶을 뿐입니다." "무엇이 슬픈데?" "방금 전에 보았던 그것- 정말 그리 된다면, 제 힘이 부족하거나 제 잘못으로 그리 된 거라면, 막을 수 있는데 막지 못한다면.....그건 정말 슬플 겁니다." 지에나가 웃었다. 아주 흐릿해서 보일 듯 말 듯한 미소였지만, 너무 나 오랜만에 하는 일이라는 듯 조금 어색해 보이기까지 했지만, 분명 '진실 된 웃음' 이었다. "나를 가장 망설이게 했던 것은, 네게 니왈르도가 머물고 있는 동시 에 네가 암롯사의 왕자인 아킨토스 프리엔이라는 거야. 너는 우리 와는 달리 그 힘으로 이 세계를 지배할 수도 있고, 역시나 우리와는 달리 말리거나 금지할 존재조차 없다. 하지만 그리 된다 해도 내 게 약속해 주겠니? 너 자신을 위해 그 엄청난 힘을 쓸 수는 있겠지 만, 결국에는 우리를 위해 포기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그렇다면......우리 역시 잔인하게 굴며 너를 시험하지는 않겠다. 네가 우리의 약속을 기억하는 한, 또한 네가 사려와 인내와 자제를 가지고 있는 한, 네가 지금의 너 같은 한.......너에게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던 가장 위대한 힘의 열쇠를 맡겨 놓겠다. 불과, 물과, 바람의 잔을 넘어- 대지위에 빛나는 달의 잔을......" 그리고 그녀는 수경에 다시 손을 뻗었다. 수경의 색이 다시 변하더 니, 이번에는 넓은 숲을 보여주었다. 넓고도 넓은- 울창한 숲을.... 그 숲을 아킨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 숲 언저리에 있는 맑고 푸른 호 수 하나도, 그 호수를 바라보는 작지만 아름다운 성도, 그리고......그 숲 속에 있는 은둔자의 탑도. 1년 동안 갇히고 가둔 곳이었다. 누군가를 만나고, 깨어나고, 또 한 가지를 선택한 곳이기도 했다. "저건...." "칼리반스가 이 세계를 방황하며 만들어 놓았던 많은 탑들 중 하나 지. 저 모든 것이, 우리가 행했던 많은 시도들 중의 하나야......그리고 저 곳에서 우리는 마지막 시도를 하고 최후의 포기를 했지." 이제 수경은 숲을 바로 위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가운데에, 은둔자의 탑이 하얀 점처럼 보였다. "저 곳에서 네가 찾아올 것이 있어........ 그것을 찾아 와, 천개의 눈이 감기는 순간에 우리가 이 세계로 가지고 온 가장 위대한 힘 중 하 나를 가지 거라." 고요한 흥분이 몸을 뜨겁게 했다. 상도 보상도 아니라는 건 알지만, 무언가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기뻤다. 성배도, 휘안토스도, 아버지도 잊었다....지금 중요한 것은 '인정' 받았다는 것 단 하나뿐이다. "노력....하겠습니다." **************************************************************** 작가잡설: 세상 참 좁군요;;; 저와 매우 유사한 이름을 가진 동생놈을 아는 모모님, 이 자리를 빌어서 인사드립니다......;; p.s 오타의 정체는 하'지'만이었습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1장 **************************************************************** [겨울성의 열쇠] 제238편 기다리고 있는 것들#3 ***************************************************************** 슈마허는 지저분한 술집의 한 구석에 앉아, 옆에는 싸구려 맥주를 놓 고 실실 웃고 있는 중년의 남자를 대체 어떻게 만져줘야 돌아섰을 때 속 시원할까 고민하며 바라보아야 했다. "팔자 좋~ 구만." "낙천이야 말로 방랑자의 마른 목을 적시는 감로주지." "........" 슈마허는 주먹, 발길질, 박치기....등등을 머리에 떠 올렸지만, 무엇을 고르든 부족할 것 같았다. 게다가 그렇게 실실대는 당사자의 꼴을 보면, 이건 정말 웃을 꼴이 아니었다(비웃음과 허탈한 웃음 정도는 좀 어울릴만하지만). 말 그대로, 동네 불량배 두들겨 패서 얻어 온 듯한 걸레 비슷한 옷에 면도도 제대로 안 해 수염은 덤불처럼 수북 하게 자라 있다. 머리는 떡이 되어 있고, 목과 얼굴은 그을린 듯 시 커멓다. 옆으로 종업원이 다가오자, 슈마허는 남자 앞의 잔을 보고는 말 했다. "같은 걸로 하나." 그 주문에 남자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나? 둘이 아니고?" "저 녀석이 술 안 마신다는 건 당신도 알잖아." 그리 험악하게 말하고는, 슈마허는 두어 발자국 떨어져서 경계어린 눈빛을 보내는 세르네긴을 가리켰다. 이런 곳에 오면 지나치게 눈에 뜨이는 얼굴이라, 후드를 깊게 덮어 쓰고 있었다. 중년 남자는 빙그레 웃으며 세르네긴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갈수록 예뻐지는 구나, 세냐." 그리고 잠시 뒤, 남자는 세르네긴이 뽑은 단검의 칼끝에 턱을 맡기고 있어야 했다. 슈마허는 말리기는커녕 같이 쏘아보며 이까지 뿌득 물고 있었다. 그래도 남자는 태평하게 칼을 탁탁 치며 슈마허에게 말했다. "이것 좀 치우라고 하면 안 되나?" "예전에 만난 치한이 또 느끼한 눈빛을 보내는데, 가만히 있는 게 이 상하지." "미안하지만 그 때는 정말 여자애 인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이제 사내놈 인 줄 잘 아니까 얼른 치우라고 해..........그리고 뭐,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냐. 난 건강한 남자인데." 슈마허가 사자처럼 이를 드러냈다. "그럴 수도 있지이? 그 때 세르네긴은 열일곱이었고 당신은 늙은이 된 지 한참 지난 나이였어. 세냐가 정말 여자였다 치더라도 지나치게 뻔뻔한 짓이었다고 보지 않아?" "어허, 제 얼굴에 침 뱉지 말라고. 당시의 나는 지금의 자네랑 동갑이 었고, 자네도 한참이나 어린 여자애와 약혼 했다가 깨진 상태 아 닌가. 나보고 염치없다 뭐하다 하고 떠들어 대기 전에, 자네부터 당당해 지는 게 어때?" "남의 정직한 사생활을 본인의 추태를 가리는 데 쓰지 마시지? 나는 그녀의 호감과 신뢰와 사랑을 얻어 내기 위해 노력했고, 당신은 상호 동의는 가볍게 무시하고 '치근덕댄' 거라고. 지저분하게, 노골적으 로 말이야." "정말 여자였다면 상황이 달랐을 걸. 이래 뵈도 난 꽤 인기 좋은....... 어이 슈마허, 이제 그 이야기는 좀 그만하지 그래? 칼이 점점....기 울고 있군. 이제는 좀 아파." 남자의 말 대로, 단검은 이제 살을 파고들 지경이었다. 조금만 힘준 다면 피가 나올 상황이다. 그러나 슈마허는 '느릿느릿' 그 남자의 앞에 앉았다. 세르네긴역시 남자 옆으로 돌아서서 검이 더욱 철썩 달라붙도록 했다. 여러 모로 남자에게 달갑지 않은 방향으로 진행되 고 있었다. "이봐 들, 너무 하는 거 아냐. 아무리 그래도 옛 친구인데." "옛 친구우우? 당신의 그 빌어먹게 잘난 조카 놈이 한 짓을 생각하 면, 정말 당신 집안 남자 물건들을 모조리 끊어놓던가 죽을 때까지 박아버리고 싶은 심정이라고--!" 순식간에 주변이 싸늘해지더니, 모두의 시선이 슈마허와 중년 남자- 즉 테시오스 델, 암롯사 왕자를 향했다. 알르간드 최북단까지 가도 이보다는 뜨뜻할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테시오스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고, 슈마허는 끄흥- 하고 한숨을 내 쉬고는 세르네긴에게 손짓을 보냈다. 세르네긴은 단검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가 마음만 먹는 다면 당장에 다시 뽑아 목젖에 쑤셔 넣 을 실력이라는 것을 알기에, 테시오스는 생명보전을 위해서 더 이 상 그를 놀리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새로 들어온 예쁜 여자 용병인 줄 알고 슬쩍 수작 걸었다가 죽을 뻔 한 것이 먼 옛날 일도 아니고 , 이 세르네긴이라는 청년은 그런 실수를 넉살좋게 허허 웃으며 잊어줄 위인도 아니었다. 슈마허가 말했다. "......그래도 그 무시무시한 상황에서 도망친 인간이 희희낙락 뻔뻔하 군." "자네나 나나, 위기상황에도 여전한 것이 장기 아닌가." "같은 급으로 만들지 마." 테시오스가 몇 가지 이름으로 활동할 때 가장 많이 손을 잡았던 이가 바로 이 슈마허였다. 그러나 테시오스는 누군가와 경쟁하기 보다는 쓸만한 사람들과의 인연을 더 중요시 여겼고, 그 인연을 투자할 상대를 고르는 눈은 탁월했다. 그러니 그의 눈에 슈마허가 들어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같이 일하던 당시, 이 둘은 지나치게 개성 풍부한 이들이었다. 그래 서 부하들이 시시덕대면서 이야기 한 것이, 아마도 라레스나를 상 대로 수작을 걸 위인이 슈마허이며 카람파를 상대로 농담 따먹기를 할 위인이 이 테시오스라는 것이다. 정말 그러고도 남을 위인들이 바로 이 테시오스와 슈마허였기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 그리고 슈마허는 '내 취향은 휴로페라고.'라고 점잖게 정정해 주기도 했다. 어쨌든 예전의 동료이자, 앞으로도 몇 번은 더 동료가 될 거라 생각 해 왔던 사이였기에(중간에 '치한사건'만 없었으면 더 돈독했을 것 이다) 슈마허는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건 그렇고, 델 카타롯사 까지는 왜 찾아온 거야?" "뻔하잖아." "도와달라고?" "아니, 도와주려고 왔지." 슈마허는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지금 당신이, 그 꼴로, 나한테, 도와주려고 왔다고?" "어허, 예전에 그렇게나 나한테 도움을 받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그 땐 젊었으니까!" "그래서 이젠 늙을 만큼 늙었으니, 더 노회한 사이러스 형을 이길 자 신이 있다는 건가. 자신감 과잉이군." "싸움을 자신감으로 하는 바보가 어디 있어! 상황 봐서, 싸울 만 하 면 붙고 아니면 냅다 도망쳐야지." "자신 없다는 말이군." 슈마허가 천둥을 뿜으려 했지만 그 때 맥주가 나와서 쑥 들어가 버렸 다. 테시오스는 그 잔을 받아, 자신의 빈 잔을 채우고는 나머지를 슈마허에게 내밀었다. 슈마허는 이를 뿌득 갈며 그 잔을 받고는 세 르네긴을 돌아보았다. 세르네긴은 고개를 끄덕였다(얼굴 표정이 엉 망이기는 했지만). 슈마허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최악의 맛이다 ), 그것을 모조리 테시오스의 잔에 쏟아 부어 버리고는 말했다. "그래, 어쨌든 암롯사를 갈가리 찢고 밟고 씹어 삼킬 예정이니, 좀 더 능률적으로 할수록 좋지." "아무리 그래도 내 나라인데. 아무리 휘안토스와 그 아비인 사이러스 가 미워도 그러는 건 좀 곤란하지. 거기까지 도와줄 생각은 없어." "그럼 사이러스와 휘안토스만 치워줄 테니 자네가 왕 자리로 기어 올 라가든가." "생각 없어." "웃기네. 물려줄 자식까지 있는데, 정말 싫어?" "미안하지만, 나는 내 아버지에 대한 예의를 알고, 내 선조인 테루비 셔스가 겨우 차지한 카람파의 노예들을 승천시켜줄 생각도 없거든." "무슨 헛소리야 그건?" "아무리 그 애들을 이뻐한다 하더라도, 내 자식이 아닌 이상 암롯사 왕좌는 물려 줄 수 없다는 말이야." 슈마허가 눈살을 찌푸렸다. "헛소리의 수준이 점점 황당해지는 군." "헛소리가 아니라 진담이라고. 아이가 과하게 빨리 태어나거나 친인 척 관계가 전혀 없는 사람과 지나치게 닮았다면 확신할 수밖에 없지 않나......? 결론을 말하자면, 지금 내 집에 살고 있는 애들은 내 아이들 아니야." 슈마허는 끙하니 한숨을 내 쉬었다. 지금 데리고 있는 자식들이 마누 라가 바람나서 낳은 아이라는 말을 저리도 태평하게 할 남자도 없을 것이다(어쩌면 정말 무관심한 걸지도). "그렇다면 그 여자 갈아 치우고 딴 여자 만나서 애 낳으면 될 거 아 냐." "미안하지만 데스테리아와 헤어져도, 그 두 아이는 법적으로 내 자식 으로 남거든. 내가 뭐가되든 승계권은 최우선이야." "그렇다면 먼저 태어난 다른 자식 놈을 찾아! 밤낮 이 여자 저 여자 만나고 다녔으면서 한둘 못 만들어 놨겠어?" "그런 면에서는 나 역시 자네처럼 조심성이 많아서, 다른 여자에게 난 자식은 없네.....아니, 하나 있기는 했지만 일찍 죽었으니 소용 없고. 그러니 차라리 세레나와 마키를 내 자식이라고 자기 최면 거 는 게 더 편해." "골치구만. 그렇다면 대체 뭘 어쩌고 싶어서 날 돕겠다는 거지? 당신 이 암롯사를 델 카타롯사에 넘겨주고 싶어 할 정도로 염치없는 인 간이라 생각되지는 않는데." "기억력 나쁜 건지 추리 사고력이 엉망인 건지, 단지 머리가 나쁜 건 지 모를 일이군. 암롯사 왕가에는 나 말고 하나 더 있다고. 그리고 그 녀석이라면 자네랑 나랑 손 붙잡고 형님과 빌어먹을 조카놈 휘안토스를 치워 버린 후에 그 자리에 올려놓아도, 내 선조와 아버지 에게 전혀 죄 될 게 없고." "그건 헛소리지?" "이것도 진담인데." 주변을 경계하던 세르네긴마저 고개를 돌렸다. 테시오스는 그런 그를 향해 빙글 웃어 보였지만, 세르네긴은 한번 쏘아보고는 고개를 돌 렸다. 옆에서 슈마허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지금 어디 있는 지도 모르잖아." "일주일 쯤 전에 휘안토스가 느닷없이 산 파로이를 떠났네. 정말 쏜 살같이 어디론가로 가더군. 자리에 착 붙어서 정신 차리고 있어도 모자랄 판국에 그렇게 급작스레 떠난 이유가 뭘까?" 꽝-! 슈마허의 주먹이 테이블을 호되게 후려쳤다. 테시오스는 움찔 해서는 벌떡 일어날 뻔 했으며, 세르네긴도 다시 고개를 돌려 슈마 허를 보았다. 슈마허는 으르렁대듯 말했다. "그렇다면.....대체 뭘 하고 있기래 나타나지 않는 거야?" "나야 모르는....데." "빌어먹을, 무사하다면 더 괘씸하잖아! 왜 나타나지 않는 거야. 내가 그 개자아아식을 얼마나 필요로 했는지 알기나 해! 그녀가 그 꼴이, 그 지경이 되어 있는데! 그 자식만 있었다면 그렇게 비참하게 되지 는 않았다고! 그리고 그녀가 그렇게 희생을 자청하지도 않았을 테고 ! 녀석이라면 왕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힘을 실어 줄 수 있었어!" 테시오스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성질 내지 마. 내가 그 때 상황에 있어 봐서 아는데, 그 아이는 밖으 로 나올 수조차 없었어. 자네와 자네의 공주님이 어쩌고 있는지 알 수도, 알아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네." "조카라고 편드는 건가?" "이런 상황에서는 오해가 낳은 편견은 집어 치우는 게 나아서 조언하 는 것뿐이야, 슈마허. 당했으면 당한 만큼 정신 차리고 냉정해져 야지." "빌어먹을 이성, 빌어먹을 계산! 하여간, 당신은 일 하나 정하는 데 왜 그렇게 따지는 게 많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고 되면 되는 거지!" "누구나 자네처럼 목표 정해 놓고 수단을 만들어 내거나 상황을 뒤엎 어 버리는 건 아니거든. 때에 따라서는 피할 줄도 알아야 장수하는 법이네." "그래서 당신은 얼간이처럼 밤낮 도망만 다니는 건가? 그 잘나고 잘 난 인생관에 따라?" "지금은 도망 다녀야 할 때니까 그렇지......그리고 당분간은 도망 다 녀야 하기도 하고. 하지만 어쨌건 그 덕에 자네도 좋은 손 하나 구한 셈 아닌가?" "좋은 손? 아아,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야겠군. 그래, 당신이 나한테 뭘 해줄 수 있는데?" 테시오스는 자신의 목을 쿡쿡 찔러 보였다. "자, 이 내가 사이러스 형님을 치워주지." 슈마허의 얼굴은 파격적으로 구겨졌다. 그것은 아마도 그의 속내가 세살 먹은 아들이 '제가 집안의 우환을 해결하겠습니다.' 라고 의젓 하게 말할 때의 아버지 심정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무슨 수로?" 테시오스는 세르네긴을 가리켰다. "이 녀석만 빌려주면 사이러스 두 놈 정도는 너끈히 잡아 줄 수 있 네." **************************************************************** 작가잡설: 세냐 - 무, 무슨 짓입니까! 더 가까이 오시면 용서치 않겠습니다! (척, 은장도-!) ............그건 그렇고 꽤나 하드한 대사가;; 나왔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뭔데요, 하고 물으신다면 씨익 웃으면서 이리 답해드리지요. 에잉, 알면서~~~ ^^ (.......)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1장 *************************************************************** [겨울성의 열쇠] 제239편 기다리고 있는 것들#4 ****************************************************************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일이라, 아킨은 보름이 지나자마자 바로 출발 하기로 했다. 준비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아킨에게는 아무리 세상 한바퀴를 도 는 일이라도 일주일 안에 끝내줄 정도로 빠른 말이 있었고, 이 삼일 걸리는 짧은 여행준비는 그것으로 끝낼 수 있었다. 해가 저물고 어둠이 깔리자 아킨은 다시 어둠 속에서 그의 말을 불러 냈다. 그림자 속에서 잠자던 흑마는, 손짓 한번만으로 어둠 속에서 휙하니 나타나서는 그 앞에 섰다. 지난 탈로스와의 일전(이라기보다는 탈로스가 봐 준 것에 불과했지 만)에서 얻은 이 말을 다루는 법은 베이나트가 가르쳐 주었다. 그 리고 일주일 만에 손발처럼 손쉽고 능숙하게 다루게 되었고, 또 그만 큼 유용해졌다. 이거 없는 동안에 불편해서 어떻게 살았나 싶을 정 도로 말이다. 그렇게 준비가 끝나자 옆에서 지켜보던 베이나트가 말했다. "자신 없으면 같이 가 줄 수도 있는데." "당신이 같이 가면 더 위험합니다, 베이." "그럴 때는 뻔히 알면서도 괜찮습니다, 아 그렇구나. 하는 거란다..... 원, 얄밉게 말하는 버릇은 도저히 고쳐지질 않는 구나." "다음부터는 그렇게 해 보죠.....하지만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겁니다. 휘안토스의 부탁도 거래도 없는 지금, 탈로스 님께서 저에게 해를 가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스승이신 당신이 더 잘 알 테지만, 탈로스 님은 이유 없이 공격하는 분은 아니잖습니까." "그렇긴 하지......그런데 기분 묘하구나. 녀석이 그렇다는 건, 세상에 나 밖에 모를 줄 알았는데 말이다......" 아킨은 다시 예전 생각이 나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탈로스에 관한한 나쁜 기억은 잊기로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 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브리올테 대비까지 생각나면, 아무리 노력해 도 기분이 확 나빠져 버리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간다면, 최선을 다해 피하거나 도망치거 나 하겠습니다. 도망칠 정도의 재주는 있으니, 크게 걱정 안하셔도 될 겁니다." "그것만 걱정되면 좋겠다만, 지금은 악튤런도 신경 써야 하잖니. 탈로 스야 네가 튄다면 놓아줄 아량이 있지만, 악튤런은 끝까지 쫓아다닐 애정 넘치는 놈이거든. 행여나 중간에 악튤런 놈이 눈치라도 챈다 면 낭패란다." "그 땐 제 실력을 믿어 봐야지요. 잘 할지는 모르겠지만, 잘 되도록 노력은 해 볼 생각입니다." 베이나트는 흐릿하게 웃었다. "오거스트 녀석은 제자는 잘 고른 것 같구나.... 나는 정말 하나같이 최악인 녀석을 최악으로 모아다 놨는데 말이다." "누가 들을까 무섭네요. 각 나라의 모든 마스터를 제자로 두고도 그 리 불평한다고." "각자는 뛰어났지만, 합쳐 놓고 보면 최악의 조합이었다는 말이고, 나 같은 놈 스승으로 만나서 더 최악이 되어버렸다는 말이다. 그런 녀 석에 그런 스승이란 것이, 또는 저런 녀석에 이런 동기라는 것이 의외로 일 꼬이게 만든다고." "그렇게 따지고 보면 저희 집안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런 아버지에, 그런 어머니에, 그런 형에.....나머지 하나는 저. 떼어 놓고 보면 나 름대로 괜찮은데, 합쳐 놓고 보니 마찬가지로 최악이군요." "자크는 왜 빼지?" 아킨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자크는....분명 제 이복형이긴 하지만, 암롯사 가문에 속한다기 보다 는 어둠 숲에 속하는 것 같아요. 뭐랄까, 암롯사 가문에 속한다- 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이상하게 들립니다." "어쨌건 인간의 피가 진한 만큼 숲의 힘도 강하니까- 자크도 그렇게 생각할 게다. 나 역시 녀석은 인간보다는 엘프 쪽에 훨씬 가깝게 생각하고 있고......아, 이런. 어서 가거라. 이러다가 날 샐라." 아킨은 말고삐를 당겼다. "그럼,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조심하는 건 잊지 말고.........잠깐 기다려 봐라. 안내자를 붙여 주마." "길 아는데요?" "아하, 참 잘도 알겠구나. 여기서 뉴마르냐를 거쳐 하멜버그 까지 '걸 어' 가는 거야 어렵지 않을 테다만, 너는 지금 '날아' 가는 거야. 헤 매는 일 없이 즉각 날아갔다 오는 게 좋지 않을까." "어떤 안내자를 붙여줄 생각이신 겁니까?" 베이나트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의 손바닥 위에 흐릿한 연기 같은 것이 어리더니, 갑자기 긴 날개가 휙휙 뻗어 나왔다. 뿌연 안개에 날개만 솟구 친, 무언가 굉장히 되다 만듯한 모양새였다. 베이나트가 손을 움켜잡았다 가 확 펼치자, 그것이 위로 가볍게 날아올랐다. "뭡니까, 이건?" "각 탑으로 흐르는 모든 바람의 방향을 아는 아이지. 은둔자의 탑이 그 어디에 있어도 이 아이는 찾아내 줄 수 있단다. 결계를 여는 건 뭐 네가 해야 할 테지만, 결계석 정도는 찾아 줄 거야." 그것은 아킨 주변을 파닥 파닥 산만하게 날아다녔다. 아킨은 날개달 린 강아지를 키우면 이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나중에 보자꾸나." "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아킨의 검은 말이 날듯이 가볍게 바닥을 찼다. 나머지는 꽤나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말은 눈의 궁전을 감싼 결계를 통과하고 천개의 수면을 밟고, 그 담벼락 같은 경계의 숲을 통과 했다. 이방인이라면 누구에게든 파리 떼처럼 들러붙는 숲의 경비자들 은 아킨에게는 아무런 경계도 하지 않는다. 밤을 향해 흐르는 저녁 바람은 찼다. 별빛 쏟아지고 달빛 적셔드는, 그런 밤. 그리고.....깊어 가면 갈수록 더욱 깨끗하고 차가워지겠지. 그렇게 정결하며 차다. 아름답고 차다- 겨울, 밤- 여명이 내뿜는 싸늘한 한숨의 순간 까지 그렇게...... 어느덧 앙상한 겨울나무들 사이로 불을 훤히 밝힌 뉴마르냐 변방 기 지의 파수대가 보였다. 파수를 서는 경비병들의 얼굴이 멀리서도 보이고, 그들을 돕는 시커먼 개들이 벌써 아킨을 감지하고는 컹컹 짖어대기 시작했다. 불이 더욱 커지더니 하얀 눈 위로 황금색 불빛 이 퍼지며 어른거렸다. 아킨은 기지를 돌아서 지나가려다가 문득 생 각나는 것이 있었다. 그래, 여기는 한번 와 본 곳이다. 유제니아가 있는 곳이다. 밤이니, 지금 마을로 들어간다면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어찌할까.......그러나 오래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주변을 날아다니는 투명한 안내자 쪽으로 손을 뻗자, 그것은 안개처럼 흩어져 손 쪽에 어리다가 사라졌다. 아킨은 망토의 후드를 집어 머리를 가리고는, 말고삐를 당겼다. 만나고 가는 것이다. 유제니아는 또 개들이 짖어대기 시작하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컹컹- 어둠 속에서 그 소리는 찢어놓을 듯 사납기만 하다. 무얼까, 하고 고민하며 머뭇거릴 순간도 없이, 유제니아는 곧바로 리사의 집이 아닌 그녀의 집으로 달려갔다. 집 안은 캄캄했다. 지난번에 돌아온 뒤 조금 치워놓기는 했지만 그래 도 빈집으로 놔두었기에 춥고 메말라 있었다. 유제니아는 가만히 서서 주변에 무엇이 있나 살펴보았다. 그런데 치륵- 하는 가벼운 소리가 들리더니 빈 램프에 불이 켜졌다. 빛이 집 안을 순식간에 밝 히며 구석구석 스며들어갔다. 집 안에는, 낮처럼 환하면서도 램프 킨 방안 특유의 안온함이 머물고 있었다. 그리고 벽난로 앞, 언제나 어머니나 아버지- 또는 세르네긴이 앉아 쉬곤 하던 의자 옆에 검은 옷을 입은 소년이 서 있었다. 유제니아는 놀라지도 소리 지르지도 않았다. 그저, 그 소년 자체가 수선피우면 깨어질 얇은 꿈인 듯 조심스레 다가갔을 뿐이었다. "어떻게 온 거야?" "어떻게....는 비밀이야. 가르쳐 주면 다음부터는 몰래 들어오지 말라 고 막을 것 같아서." 유제니아는 손을 저었다. "그게 아니라, 난 이 집에 자주 들르지 않는 다고. 자지도 않고......그 러니 밤에 몰래 들어올 엉큼한 남자 막을 필요는 없지만, 아키는 잘못하면 빈 집에 오는 난처한 상황에 처할수도 있다고." 그렇게 말하는 유제니아를, 아킨은 예전처럼 조심스레 살피거나 하지 않았다. 유제니아는 엉뚱한 말만 한 것 같아, 결국 슬쩍 고개를 돌 려버렸다. 아킨이 말했다. "저기, 잠깐 밖에 볼 일이 있어서......가는 길에 와 본 거야. 잘 지내 나 싶어서." "예전 보다 열 배는 잘 지내." 적어도 이제는 밤에 잠 못 들거나 하는 일은 없으니까. 씻은 듯 잊은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과거에 얽매여 후회하고 원망하지는 않는다. 분노를 잊은 건 아니지만, 절망에 무너지지도 않기로 했다. 그렇 게 자신은 없지만 노력은 해 보기로 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자 아킨은 오히려 어색하게 웃었다. "완전히 잘 지내게 된 건 아니구나." "......솔직하게 말해서 미안......." 그리고는 유제니아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래도 아키가 자주 와 주면 좋겠는데." "아니야, 방금 전에 와 보니, 정말 온 마을 개가 다 짖어 대더라고. 너무 자주 들락날락거리면 다들 난처해 질 것 같으니........대신 생 각나면 숲 쪽으로 와." 아킨은 그렇게 말하곤 유제니아의 목덜미에 손끝을 살짝 얹었다가 내 렸다. 너무 빨리 일어난 일이라, 유제니아는 그의 손이 내려갈 때 에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게 되었다. "뭐 한 거야?" "표식- 그렇게 오면 내가 부리는 녀석 하나가 마중 나갈 거야. 물론 내가 만든 거라 꽤나 우스꽝스러울 테지만, 그래도 꾹 참고 따라오면 내가 맞으러 나올게." "나오지 않으면?" "그럼 내가 그곳에 없는 거니까, 서둘러 돌아가야지." 유제니아는 아킨이 손이 닿았던 곳을 만져 보았다. 손으로 건드려 봐 야 아무 것도 없는데, 이상하게 그곳이 화끈거리는 것만 같았다. "그럼 이만 가 볼게." 그 말에, 유제니아가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저녁이라도 먹고 가." "내 말은 밤에 달리고 낮에 쉬는 녀석이거든. 해 뜨기 전에 최대한 멀리 가 둬야 해...... 게다가 굉장히 급한 일야." 유제니아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다 판단한 것이다. 아킨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볼에 작별 키스를 하려다가, 갑자기 멈칫 했다. "왜 그래?" "아니야, 그냥......" 그러자 유제니아는 머뭇거리는 그의 양 볼에 키스했다. "그렇다면 내가 해 줄게.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지만, 잘 다녀와." 그리고 그렇게 고개를 들다가 아킨과 눈이 마주쳤다. 그제야 그가 왜 방금 망설였는지 알게 된 유제니아는, 볼이 화끈해지 는 것 같았다. 갑자기 이상하게 어색해져 버려서, 그리고 방금 전에 아무렇지도 않게 한 행동들이 하나하나 모조리 창피해져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정말, 어디로든 숨어 버리고 싶었다. 감당이 안 된다. 아킨 앞에서 이렇게 안절부절 못하는 건 정말 처음이었다. 차분해 지려 하면 할수록, 눈길을 피하려 하면 할수록 심장은 더 뛰고 얼 굴도 화끈거렸다. "저기...." 손이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 손길은 어깨와 등을 타고 내 려오며 유제니아를 끌어안았다. 입 맞춰 주지는 않았지만, 두 팔과 목과 볼에 와 닿는 온기는 예전 보다는 더욱 가깝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더 꽉 끌어안아 주고 싶을 만큼, 입 맞추고 느끼며 더욱 가까이 오래 있고 싶을 만큼......그리 고 영원히 같이 있고 싶을 만큼.... 유제니아는 아킨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제야 모든 것이 편안해 지는 것 같았다. 처음부터 이래야 했던 것처럼. 휘안토스는 다시 두통 같은 것이 쿡 치밀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이상하게도, 그 갑작스런 통증은 갈증 비슷한 느낌을 남긴다. 무언 가가 부족한 듯한, 그래서 채워야 하는 듯한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는 그 갈증. 혹시나 해서 휘안토스는 하늘을 보았지만, 검푸른 창공에는 막 이지러지기 시작하는 하얀 달이 구름을 적시며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휘안토스는 다시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러자, 그렇게 눈 을 감자 오히려 마음 속 그늘진 곳 숨어있던 것이 소리 없이 스며 나와 휘안토스를 흔들었다. 기억이 아련한 갈망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강한 아침 햇살 이 이슬을 말리고 땅을 말리듯, 예전의 '그 기억'이 그렇게 타올라 점 점 더 갈증을 일으킨다. 누군가의 체온이, 누군가의 향기가, 누군가의 저주를 쏟는 듯한 울부 짖음과 젖은 눈동자가......예전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했는데, 그날 이후로는 다시는 생각나지도 신경 쓰이지도 않을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 바로 지금 그 모든 것이 보고 싶어진다. 다시 느끼고 싶어 지고 확인하고 싶어지고 이번에는 절대 놓아주고 싶지 않다. 부서 지든 망가지든 시들어 버리든, 최초부터 최후까지 그의 손안에서 그리 되기를 갈망한다. 이상한 밤이다, 너무나 이상한 밤- 예전에도 이랬던 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 기억난다. 예전에.... 정말 아주 예전에, 마르타가 아버지 사이러스를 찾아온 그날 밤 달빛 젖은 바다를 바라볼 때 바로 이 기분이었던 것 같다. 아주 이상한, 모든 것이 고요히 술렁이는 밤 속으로 푹 잠긴 듯한 이 기분 말이다. ****************************************************************** 작가잡설: 이 위험한 시각, 세냐는 테오 삼촌에게 희롱;; 당하는 중입 니다.............-_-;;;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2장 ************************************************************** [겨울성의 열쇠] 제52장 얼음 속의 봄 제240편 얼음 속의 봄#1 *************************************************************** 봄이 가장 먼저 오는 나라는 당연하게도 그 수호성자가 봄의 성녀인 루피니아인 로메르드 왕국이다. 또한, 가장 먼저 따뜻해질 뿐만 아 니라 가장 먼저 술렁이기도 하다(그 나라 국민성과도 아주 인연이 깊다). 북방의 에크롯사나 뉴마르냐가 아직 하얀 눈과 얼음에 덮여 얼어붙어 있을 때, 암롯사마저도 아직은 추운 겨울이지만 로메르드는 벌써 봄이 되어 버린다. 가장 먼저 봄꽃망울을 터뜨리는 산수유 꽃봉오리가 가지 끝마다 알알 이 맺히고, 바람은 녹아들 듯 훈훈해진다. 눈이 녹으며 땅은 검고 축축해지며 사방에 진한 흙냄새가 풍겨 온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코트는 버거워지고 벽난로 불은 거추장스러워지게 되고, 안에 있자 니 괜스레 뒤숭숭해져서는 아직은 쌀쌀맞은 바깥나들이라도 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켈브리안은 이번 봄만큼 쓸쓸한 봄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 었다. 혹독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했던 티폴라 여왕이 살아 있을 때에는 사 랑하는 아버지라도 있었건만, 지금은 옆에 아무도 없다. 의논할 상 대는커녕, 가벼운 대화를 나눌 상대조차 없다. 물론 아예 갇혀 사는 것만은 아니다. 연회나 무도회라도 벌어지면, 어머니가 보낸 시녀들이 우르르 몰려와서는 빗기고 다듬어서 심심 한데 트집 잡을 거리 하나 없나 눈 빛내는 사람들 가운데로 내 보낸다 . 그런 사람들에게는 워낙에 익숙해져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너무도 잘 아는 켈브리안이라, 당한 적은 단 한번도 없다. 그러나 지켜주는 사람도 의지할 사람도, 웃어주고 싶은 사람도 없는 곳이다 . 그 움직이는 거대한 조각상 무리 속에서, 그녀는 그녀 혼자만 살아 있는 듯한 끔찍한 기분이 들곤 했다. 차라리 세르네긴이 낫지, 하고 켈브리안은 생각했다. 얼마나 지겹고 답답했으면 아는 남자 중에 가장 재미없고 냉담한 남자를 그리워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자신은 너무나 불쌍했다 . 그래도 그 남자는 귀찮게는 하지 않았고, 그것만도 켈브리안에 게는 굉장한 미덕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래도 아무리 그런 생활의 연속이며 브리올테가 켈브리안이 아무 소 식도 못 듣게 꽁꽁 막아 두었다지만 또래 아가씨들이 떠들어 대는 이야기를 듣는 것 까지 막지는 못했다. 켈브리안은 당연하게도 아킨 의 결혼 소식을 듣게 되었고, 결혼 진행 중에 일어났던 사고와 걷 잡을 수 없이 험악하게 된 델 카타와 암롯사에 대한 이야기도 듣 게 되었다. 아마도 양 나라 다, '싸울 핑계'를 만들어 내기 위해 가 엾은 아킨을 이용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사이러스가 결혼 제안을 하자, 델 카타롯사는 아킨을 보내라 했고, 기다렸다는 듯이 사고를 냈다. 그리고 암롯사는 마치 연습이라도 한 듯 항의를 하고 당연 하게 예정된 답을 듣고는 더욱 험악한 항의를 보냈다. 한 바탕 듣기 민망한 비난을 받은 델 카타롯사는 드디어 선전 포고를 날려 보냈 고, 암롯사는 기다렸던 것이 오게 되자 마음 편하게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 그렇다. 둘 다 본격적으로 싸울 핑계가 필요했던 것뿐이고, 아킨과 칼라하스 공주의 결혼을 '서로 망쳐주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사이 러스가 아무리 아킨을 아들 취급 안한다지만 그 콧대 높은 인간이 '왕자'를 델 카타롯사로 장가보낼 리 없고, 여동생을 끔찍이 사랑 하는 칼리토 대공왕이 아킨에게 동생을 시집보낼 리 없다. 그렇게 상종도 하고 싶지 않은 집안끼리 사돈맺자고 허허 웃으며, 뒤로는 저놈이 언제 칼을 뽑나만 기다렸던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니, 켈브리안은 어느 편이 이기기를 바라야 할지 난감 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나 객관적으로나 어느 편이 이기든 거기서 거기였다. 그러나 좀 더 개인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되도록 델 카타롯사가 이기기를 바라야 하는 켈브리안이었다. 칼리토 대공왕이 사이러스와의 전쟁에서 이긴다면 그것은 아마도 슈마허의 공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 된다면 슈마허의 입장이 또 달라질 테니, 그 때가서 그가 켈브리안에게 다시 청혼이라도 해 주고........ "무슨 생각 하는 거야, 지금?" 켈브리안은 그런 생각을 떠 올린 자신에게 깜짝 놀라 버렸다. 그렇게 모진 꼴을 당하게 해 놓고, 또 오기를 바라고 있다니! 이건 뻔뻔한 정도가 아니다. 정말 한심하다! 게다가 그것을 자연스럽게 떠 올 리면서도 아무런 거부감도 없는 자신은 더 무서웠다. 정신 차려, 켈브리안! 지금은 그 때와는 상황이 틀리다고. 다시 약혼 한다면 그 때는 정말 결혼해야 해! 물론, 처음 그와 만났을 때와는 달리 그에 대한 거부감이 흔적도 없 이 사라진 건 사실이다. 처음에야 '세상에나, 저렇게 늙은 주제에 누구에게 치근덕대는 거야!' 하고 소름이 주욱 끼쳤었다. 당시 켈브 리안은 겨우 열여덟이었고 아킨은 열여섯에 불과 했으니, 서른셋인 슈마허는 아버지 엔리케 4세보다 '조금 젊어' 보이는 정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거의 2년이나 같이 지냈다. 처음 1년이야 원수보다 조금 사이 좋은 정도였지만, 그 다음 1년은 그저 친구처럼 편하게 지냈다. 켈 브리안이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는 처지였을 때도 그는 떠나지 않고 머물러 주었다. 켈브리안은 슈마허가 그저 장난으로 치근덕댄 것이 라면 그 정도로 해 줄 리 없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매정하지도 둔 하지도 못했다. 진심이었던 것이다.......그렇게 모진 일을 묵묵히 당하면서도 켈브리 안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정도로 진심이었던 것이다. "바보 같은 남자." 켈브리안은 씁쓸하게 중얼 거렸다. 정말 바보 같은 사람 아닌가. 그렇게나 뻔뻔하고 능글맞은 사람이었 던 주제에, 왜 그녀에게는 그토록 망설였던 걸까. 가까이 다가왔다 가도 손 내밀기를 머뭇거리며 한숨쉬고 돌아갔던 걸까. 그랬다면 마지막 까지 그렇게 상처 입히지는 않았을 텐데...... 적어도 한번 안아주기는 했을 텐데, 그랬다면 이렇게나 미안하지도 않았을 텐데. 그 때 파드득- 작게 날개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껍질 딱딱한 풍뎅 이 날개 짓 같은 소리라, 켈브리안은 창가 쪽을 보았다. 그러나 곤 충들, 그것도 큰 곤충들이 날아다니기에는 너무 추운 날씨였다. 창가에 손가락만한 까만 풍뎅이 한 마리가 매달려 계속 날개를 퍼덕 이며 창문을 치고 있었다. 보통 아가씨였다면 꺄악, 비명이라도 한번 지르고 시녀를 불렀을 테지만 그녀는 그러는 대신 그 풍뎅이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순간 그 날개에 금빛 글자가 반짝이며 드러났다. 켈브리안은 급히 창문을 열어젖혔다. 풍뎅이는 반가운 듯 부웅 날아 들어와 켈브리안의 팔목에 앉았다. 까만 날개에 금빛의 작은 글자 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잘 지내셨습니까- "아키......!" 켈브리안은 믿어지지 않아, 그 풍뎅이의 날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기쁨이 긴 겨울 끝의 봄 햇살처럼 가슴 가득 채우고 있었다. 뜨거운 눈물이 눈에 가득 차 올랐다. 아킨은 작업이 다 끝나자 바닥에 그려 놓은 마법진을 손으로 지워버 렸다. 흔적을 알아볼 사람은 당연히 없을 테지만, 그래도 이런 버릇은 일찌 감치 들여 놓는 것이 좋다. 켈브리안이 어찌 지내고 있는 지 정도는 물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나온 김에 연락을 한 것이다. 그리 고 아킨이 무사하다는 것도 알려야 한다. 그녀라면 너무나 당연하 게(그리고 조금은 상세하게) 아킨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고 도망 쳤고 실종되었는지 잘 알 테고, 당연히 걱정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마법진이 다 지워지자, 아킨은 새벽빛에 어슴푸레 드러나는 숲 속으 로 들어섰다. 아무리 자주 오고 다니더라도 숲은 언제나 낯선 공간이다. 깨어나고 일어나고 어둠에 묻히고 드러나는 것을 반복하며 끝없이 변화하는 곳이 바로 숲이니. 그래서 반년 만에 오게 되는 하멜버그의 숲은 낯설기만 했다. 익숙한 길- 그러니까, 호수를 끼고 하멜버그의 아름다운 성을 등지 는 부분으로 먼저 들어섰지만 아킨은 도무지 낯익은 무엇을 찾아낼 수 없었다. 그저 닳고 닳은 오솔길 하나에, 표석은 '있다'는 기억만 이 있을 뿐이라 다시 보니 전혀 낯선 물건 같아 보였다. 맞는 것인 지 아닌지도 구분하기 어렵다. 아킨은 결국에 베이나트가 선물로 주었던 안내자를 불렀다. 파다닥- 하고 작은 날개 치는 소리가 들리 더니, 투명한 날개를 가진 손바닥만한 안내자가 나타났다. 그(어쩌 면 그녀 일지도 모르는....아니, 의미없다)는 주변을 이리 저리 둘러 보더니, 곧 숲 안쪽으로 휘릭 날아갔다. 그 날개 짓 뒤로 빛 무리 가 잔영처럼 어려 아킨은 쉽게 따라 갈 수 있었다. 어느 샌가 숲 속으로 빛이 비추어들기 시작했다. 겨울이라 가지들이 앙상해 투명한 햇살은 그늘진 곳을 남기지 않고 구석구석 세세히 비추었다. 빛이 눈을 화살처럼 날카롭게 휙 비추 고는 꺼져들자, 아킨은 그제야 자신이 동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방향 자체는 맞는 것 같지만, 확신이 들 만한 증거가 전 혀 없으니 그냥 막막하게 나아가는 수밖에는 없었다. 얼어붙은 낙엽이 버석 버석 밟혔다. 작은 짐승하나 돌아다니지 않아 메마르고 차가운 바람기척만이 있을 뿐 적막하다. 얼마나 걸었을 까, 아무도 손보지 않아 거의 반쯤 기울어진 표석이 있는 곳에 닿자 안내자는 날개를 멈추었다. 그리고 나뭇가지의 그 림자들이 수없이 바닥에 그어진 바닥까지 내려오더니 그 위를 둥실 둥실 떠돌아다니다가 다시 날아올랐다. 순간 얇은 베일 같은 것이 머리와 어깨를 가볍게 스치고 지나가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아킨은 혹시나 해서 앞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갔고, 아무 변화가 없자 두 어 걸음 더 나가보았다. 순간 츠캉-- 하고 얇은 철사 줄 끊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바로 앞에, 마치 예전부터 당연히 있었다는 듯 커다란 바위가 나타났다. 그래, 이곳은 '기억'하고 있다. 아킨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맞다. 예전에 베이나트를 처음 만난 곳, 그러나 한여름이던 그 때와는 달리 바닥은 노랗고 나뭇가지들도 앙상한 회색이었다. 아킨은 망토를 여 미고 손도 소매 자락 안으로 넣었다. 그렇게 마치 금욕교의 은둔자 같은 모양새로, 바위에서 뻗어나가는 하얗고 낡은 길로 들어갔다. 이제 들어간다, 하는 생각만 하면 그곳에 다다를 수 있다. 숲은 금방 달리는 아킨을 품안에 집어넣었다. 낙엽 밟는 소리만 버석 버석 요란하게 들려왔다. 안내자 역시 빠르게 앞을 헤치며 날아간다. 그리고 그렇게 한참을 달리자, 마침내 어긋난 나뭇가지들 사이로 텅 빈 공터가 보였다. 다 왔나, 해서 아킨은 발을 멈추고 숲을 헤 치고 앞으로 나갔다. 그러나 다다르는 순간에, 아킨은 차가운 불길 함이 등을 쿡 찌르고 지나가는 듯했다. 맙소사- 아킨이 도달한 곳은 큰 바위가 있는, 방금 전에 처음으로 결계 안에 들어섰을 때 발을 디뎠던 그곳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아킨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 맞다. 방금 전 그곳이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이런 일은 단 한번도 없었 는데........ 예전에 숲을 한번 빠져나갔다가 돌아왔을 때조차도 어려움 없이 탑에 도달했었다. 행여나 해서 안내자를 보니, 그(또는 그녀 )역시 날개만 이리 저리 파닥거리며 날아다닐 뿐 방향을 잡지 못하 고 있었다. "혹시, '그것'이 이곳에 있는 겁니까?" 그러나 안내자는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마치 막힌 굴에 갇힌 생쥐 같은 모양새라, 아킨은 그것 역시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거라 짐작했다. 이렇다면 결론은 하나 밖에 없다. 아킨에게도 '결계가 닫힌' 것이다. **************************************************************** 작가잡설: 사실......슈마허랑 켈브리안 아버지랑 열 살 차이;;도 안 납 니다............... 게다가 안타깝게도 켈리는 오지취향도 아니었던 겁니다! (그녀의 취 향은 미소년!) 동생이 인터넷을 하다가 제게 말하더군요....'언니에겐 아로마 테라피 가 필요해! -_- 자, 이게 제일 적당하겠다.' 뭐냐고 물어보니 하는 말- '*** 향, 우울증, 강박장애, 주의력 개선. -_- 딱이지?' ..................여전히 사랑스럽습니다..... p.s 행여나 해서 드리는 말......제 동생 '여자' 입니다. -_-;;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2장 *************************************************************** [겨울성의 열쇠] 제241편 얼음 속의 봄#2 **************************************************************** 길나올 때까지 헤매 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결론은 참으로 금방 내려 졌다. 아킨은 이곳을 도망쳤고, 탈로스는 후에 아킨을 놓아 주었다. 악튤런 이 찾아온 일까지 있었으니, 결계의 진이 예전과 똑같을 리도 없다. 게다가 예전의 아킨은 '결계에 속하도록' 되어 있었으니 어디로 가 든 결계에 갇혀 있어야 했지만 지금은 그것도 아니다. "바보." 예전처럼만 하면 쉽게 끝날 거라 생각하다니.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아킨이 가진 재주로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라 고는 베이나트에게 돌아가 '방법 좀 가르쳐 주십시오.' 하는 것뿐이 었다. 나가는 방법이야 어렵지는 않다. 결계 안에는 분명 밖으로 나 갈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 있고, 베이나트가 붙여준 안내자의 꽁무니만 쫓아가면 쉽게 길의 출구를 찾아 나갈 수 있다. 그러나 그 렇게 쉽게 돌아가자니, 그것도 나름대로 속 쓰리다. 게다가 이렇게 털레털레 돌아가면 지에나가 어떻게 말할지 안 들어도 뻔하고, 그리 되면 지금까지 해 온 것 자체가 수포로 돌아간다. 신용을 얻기는 어렵고, 그것을 잃는 것은 지나치게 쉬운 것이 그녀와의 관계다. 아킨은 탑 안에 있을 때의 기억들을 최대한 돌이켜 보려고 노력해 보 았다. 혼란하던 상황이긴 했지만, 인상 깊은 것 정도는 기억해 낼 수 있겠지. 가만, 가만.....그러다가 아킨은 등지고 있는 바위에 머리 를 콩 부딪쳤다. 이런, 하며 머리를 만지는데 예전에 베이나트와 처음 만났을 때 그가 탑에 올라가 서쪽을 보라 했던 것이 떠올랐다. 가만.....그래, 그 때 그 곳에서 낡은 양피지 한 조각을 찾아냈고 그것 이 있던 벽에서 이상한 문자를 발견했었다. 그리고 그것에 손을 얹자 이상한 광경을 보았었다....... 비가 쏟아질 듯 먹구름 가득한 하늘과 어둠에 젖은 숲이 나타났고, 그 숲 깊은 곳이 별이 떠오르듯 하얗게 빛나더니 갑자기 불길처럼 솟구쳐 올라 양옆으로 촤르륵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렇게 퍼지던 빛 은 어느 지점에서인가 갈래지더니, 그 각각의 갈래가 몇 번 거듭 갈라지다 다시 중앙에서 만났다..... 아킨은 기억을 더듬어 그 붉은 글자를 한번 바닥에 그려 보았다. 정 확한 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리 복잡한 글자는 아니었으니 대략 기 억은 난다. 그렇게 하다 보니 그 문자가 익숙한 모양새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아, 맞다. 이건 알르간드에서 베이나트에게 배웠었다. 어떤 방식으 로 쓰는 지도 대강 안다....물론 쓰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될 테지만. 아킨은 뒤돌아 바위를 보았다. 바위 위로 햇살이 똑바로 쏟아지고 있 었다. 아킨은 단검을 꺼내 손끝에 상처를 내고는, 그 바위 표면에 그 문자를 그려 넣었다. 핏방울이 닿자 바위 표면이 달궈진 듯 뜨거 워져갔고, 문자를 완성할 때에는 손을 대고 있는 것조차 어려울 지경 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아킨은 마지막 선을 긋자마자 손을 뗐다. 불이라도 지핀 듯 바위 표 면은 이제 거의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바위가 무언가를 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갈망어린 눈길을 받는 듯한, 그런 느낌이 든다. "다음엔.....뭘 해야 하는 거지?" 그러나 그렇게 중얼거리는 순간에, 바위에서 불길이 확 치솟아 양 옆 으로 펼쳐졌다. 당황한 아킨은 뒤로 주춤 물러나려 했지만, 뒤도 느닷없이 사납게 치솟은 뜨거운 불길에 가로 막혔다. "이런....!" 아킨은 팔을 휘저어 그림자 속에서 그의 검은 말을 불러내려 했지만 그림자 하나 없을 정도로 주변이 불타오르고 있어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지징-- 하는 부르르 떨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가 싶더니, 불길이 점 점 가까이 오기 시작했다. 이런 맙소사- "프로텐!" 짧게 외치자, 바닥에 둥글고 하얀 원이 그려지며 밖으로 펼쳐졌다. 불길이 물러나는 가 싶었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이다. 불길 안 쪽에서 쿠허헝--! 하고 큰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소름이 주욱 끼쳤다. 어린 시절 카람파의 사냥개들과 처음 마주했을 때 이후로 이 정도 공포를 느꼈던 적도 없다. 쿵-! 거대한 것이 발을 옮기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아킨은 턱에 맺힌 땀 을 급히 닦아내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열기에 현기증이 일어나며 눈의 초점도 풀어질 것 같았지만, 그것보다는 필사적이고 다급한 심정이 더 먼저였다. 다시 쿵- 아킨은 그 소리가 들린 곳을 정확히 짚어 고개를 돌렸다. 주변은 온 통 벌겋게 달아올라 붉은 금빛으로 찬란했고, 그 속에서 검고 거대한 것이 서 있었다. 도마뱀 같다. 다리가 길고 꼬리도 길고, 머리도 길고......그 머리는 뾰 족하니 날카롭다. 어쩌면 드래곤 같기도 하지만.....날개는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움직일 때마다, 검은 비늘 틈으로 마치 비틀린 대지 사이에서 용암이 스며 나오듯 붉은 불길 같은 것이 뻘겋게 드러났 다가 묻혔다. 뭐야, 이건........! 이곳을 수 십 번은 오갔지만 저따위 것은 처음 본다고. 그런데 그것의 눈동자가 아킨에게 머물자, 그 입이 비틀리며 열렸다. 쿠허허헝--! 으르렁거림이 터지며, 시뻘건 불길이 아킨을 향해 쏟아져 왔다. 그대 로 구워질 듯 엄청난 열기였다. 보호고 뭐고 필요 없이, 아킨은 결국 직접 도망쳐야 했다. 아슬아슬하게 등 뒤로 불길이 스치고 지나갔다 . 바닥이 눈 녹듯 힘없이 내려앉았다. 사방이 그렇게 녹아들 듯 뜨거웠지만, 아킨 만은 얼음 속에라도 들어간 듯 오싹했다. 대체 뭘 했기래 이렇게 된 거지? 도망치면서도 끝없이 생각해야 했 다. 대책을 토해내지 않고서는 정말 도망치다 지쳐서 쓰러지든가 빨리 불길에 먹히던가, 둘 중 하나다. 아마도 탈로스 외의 사람에 의해 결계가 깨어지려하거나 바뀌려 하면 나타나도록 되어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방금 전의 그 글자를 지워 버리는 수가 있지만, 지금 그 바위는 불길에 휩싸여 있어 손도 댈 수 없었다. 순간, 불길이 다시 거세게 내리꽂혀 왔다. 아킨은 불길을 피하며 바 닥을 손끝으로 그었다. "그로, 퀴직스-" 손끝이 스친 곳에서, 페그 라일이 차례로 떠올랐다. 흰 섬광이 솟구쳐 불길을 칼처럼 날카롭게 휙 갈랐다. 불길을 뿜어내 는 도마뱀이 고개를 틀더니 꼬리를 휘둘렀다. 엄청난 바람이 일며, 천둥이라도 치는 듯 굉음이 터졌다. 힘도 힘이지만 그 열기만으로 도 얼빠지는 데 충분했다. 아킨은 간신히 그 공격을 피하고는 도마 뱀의 머리 쪽을 보았다. 아주 잠깐, 아킨의 안내자로 따라온 그 녀석이 빠르게 날아와 그 위 를 한번 스치듯 날고는 솟구쳐 올랐다. 그런데 그 날개가 차가운 빛을 뿌리는 순간에, 도마뱀의 검은 머리 위로 하얀 점 같은 것이 살 짝 스치듯 나타났다가는 사라졌다. 아킨은 그것이 어디 있는지 놓치지 않고 손을 짚어 나갔다. "그, 샤이, 페어븜, 오하-" 손이 스치는 길을 따라 다시 페그 라일이 떠올랐다가는 사라졌다. 열 기가 조금 잦아드는가 싶더니, 아킨의 가슴 앞에서 하얀 섬광이 솟 구쳐 올라 그 정수리를 노리며 내리꽂혔다. 콰르릉-! 바닥이라도 깨지는 것 같았다. 정수리가 깨어지고, 그것을 중심으로 하얀 얼음바람이 휩싸듯 쏟아져 내렸다. 굉음을 내며 움직이던 몸이 얼어붙으며 꿈쩍도 할 수 없게 되었다. "휴, 쿠오, 슬로븜, 오하-!" 눈보라가 일어나며 사방을 휩쓸었다. 불길이 바닥에서 빨아들이듯 사 라지고 온 세상을 녹일 듯했던 열기도 잦아들었다. 불길에 가려졌던 주변이 드디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얼음조각들이 계속 반짝 거리며 주변으로 퍼지고 있어 나뭇가지 마다 눈이라도 내린 듯 얼 음조각들이 맺혔다. 아킨은 얼어붙은 도마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순간 우직, 하며 얼음이 쪼개졌다. 그리고 그것을 덮었던 얼음이 깨문 듯 와르르 쏟아졌다. 불 꺼진 숯 덩어리처럼 까만 몸이 다시 드러났다. 그 눈동자는 이제 죽은 듯 진한 암적색이었고, 불길과 연기가 뿜어져 오 르던 입도 거멓게 죽어 있었다. 쿠르르릉-- 그리고 그것은 그리 으르렁거리더니 바닥에 쿵, 쓰러졌다. 독약을 삼키고 죽어가는 쥐처 럼 바닥에서 꿈틀대고는, 잠들 듯 눈을 감았다. 아킨은 얼른 달려가 바위위에 그린 피의 문자를 지워버렸다. 그러자 그것의 비늘이 더욱 시커멓게 되더니, 와스스 흩어져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큰 일 날 뻔 했다, 아킨은 한숨을 내 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섣불 리 건드렸다가는 길 잃고 헤매는 것 보다 더 큰 낭패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다시 파르르륵, 하고 날개 짓 소리가 들리더니 안내자가 옆으로 다가 왔다. "고마웠다......" 아킨은 힘 빠진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히 며 한숨을 토해냈다. 이제 뭘 더 해야 할지 막막하다..... 그런데 안내자가 갑자기 긴장한 듯 날개를 세우더니 날개를 떨었다. 뭐가 또 나타났나 싶어 아킨은 벌떡 일어났다. "벌써 실망할 것 없다. 이 결계 진을 제 힘으로 풀었던 것은 오거스 트 롤레인 뿐이었으니." 쉰 남자 목소리- 안내자가 도망치듯 위로 날아올랐다. 아킨은 뒤로 주춤 물러났다. 이 가 딱, 하고 부딪힌 것은 정말 불가항력이었다. "아아, 정말 오랜만이구나..... 아킨토스." 탈로스 고르노바, 그가 바로 앞에 서 있었다. **************************************************************** 작가잡설: 주문 만드는 공식은 언제나 비밀입니다. -_-;; 이 주문의 비밀을 푸신 분은......시간이 많은 분이라 존경해 드리겠습 니다. ;;; 핸드폰을 주웠습니다....주인 돌려주려고 보니, 최근 발신자 번호에 '자기'라는 것이 찍혀 있더군요............ ............돌려주기 싫었습니다. -_- 래픽 님이 장가갔습니다~ 앞으로 훌륭한 공처가가 되어 사랑받는 남 편이 되기를 빕니다~ ^^;; (결혼식...은 근무중이라 못 갔네요. -_-;) p.s 에잇, 래픽 오빠 도둑놈!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2장 ***************************************************************** [겨울성의 열쇠] 제242편 얼음 속의 봄#3 ****************************************************************** "거의 반년 만이지." 쉰 목소리도 여전하고, 그 작은 키와 찌그러진 얼굴도 그대로였다. 지나지도 않은 시간에 어딘가 확 변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머리카락만은 훨씬 줄어든 듯 보였다. 그가 그 연푸른 눈동자로 아킨을 빤히 바라보더니, 입술을 틀어 올리 며 히죽 웃었다. "하지만 너는 몇 년은 보낸 듯 변해버렸군......그래, 그 동안 대체 어 디에 있었지?" "알르간드에 있었습니다." 탈로스의 눈이 커졌다. '알르간드'라는 이름이 그에게 불러일으키는 것이 무엇일지 짐작하기에, 아킨은 그의 눈길을 피하며 덧붙였다. "그리고 베이나트 님......그러니까 컬린 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데리고 갈 거라 알았으니 그렇게 어렵게 답할 건 없다. 그런데 여기 는 왜 또 온 거냐. 다시는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저 역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답하며 아킨은 왜 이리 그와 자신 사이가 편하고 가벼 운 지, 기쁘면서도 이상했다. 방금 전만 해도 머리털이 쭈뼛할 정 도로 겁먹었는데, 정작 이야기를 나누고 눈빛을 주고받다 보니 아 무렇지도 않게 되어 버린다. 이상하다, 정말....... 여전히 그는 스승인 오거스트 롤레인의 숙적이며, 원한과 갈망을 위 해 베이나트를 노리고 있다. 아킨을 한번 비참하게 유폐시켰었고, 휘안토스의 부탁으로 죽이려 했었다. 그럼에도 그는 켈브리안의 숙부이며, 결과적으로는 휘안토스로부터 아킨을 구해준 사람이기도 했다. 그렇다. 때에 따라서는 적대관계가 될 수도 있지만, 정말 때와 사정 에 따른 일이기에 아킨은 그를 증오하지는 않는다. 아니, 할 수도 없고....하고 싶지도 않다. "찾아갈 것이 있습니다." "네가 찾는 거냐, 아니면 너에게 그 심부름을 시킨 사람이 찾는 거 냐." "후자입니다." "컬린이?" "아닙니다. 하지만 어쨌든 아주 중요한 심부름이고, 저는 반드시 해야 합니다.......귀찮게 해 드리지는 않을 테니, 안에서 찾게 해 주십시오." 탈로스는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그리고 꽤나 생각하는 듯 한참이나 턱을 문지르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해결 되었다, 하고 생각하는 것도 잠시. 탈로스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허락 해 줄 수 없다, 꼬마. 이 탑은 나의 것이고, 이 안에 속한 그 무엇도 밖으로 가지고 나가게 할 수 없어." "그렇다면.......제가 직접 찾아가야 한다는 겁니까?" 직접 찾아가는 방법은 훔쳐가거나 빼앗아 가거나, 둘 중 하나뿐이다. 그리고 아킨은 탈로스를 상대로 그 무엇도 성공시킬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우선은 결계조차 파해할 수 없는 힘으로 탑에 몰래 들어갈 수 있을 리 없고, 빼앗아 가는 건 더더욱 불가능하다. 탈로스가 말했다. "대체 무엇을 가지러 온 거냐. 솔직히 말해준다면, 그 솔직함과 성실 함에 따라 도와줄 수도 있다. 하지만 섣불리 거래하려 하면 당장에 내쳐버린다." 점점 복잡하게 되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이나트와의 일이었다면 어떻게 재 볼 수도 있겠는데, 이것은 까다로운 지에나의 심부름이다. 비밀을 섣불리 말하거나 한다면, 그 여자가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 하지만 아예 하지 못한다면, 그것도 비슷한 결과를 불러올 것이 다. 이리 밑지나 저리 밑지나 마찬가지이니, 적어도 뭔가 해 보는 방향으로 밑지는 편이 나을 듯 하다. 게다가 상대는 탈로스다. 까 맣게 아래인 아킨으로서는, 그와 거래를 하기 위해서 가진 모든 것을 털어 내 놓아도 모자랄 판이다. 거래 단위가 아예 틀린 사람이다. 그런데, 탈로스가 불쑥 말했다. "혹시 성배와 관련된 일이냐?" "맞습니다." 이판사판이다. 속일 상대도 아니고- 그냥 답해 버렸다. 그러자 그 답 에 탈로스가 빙그레 웃었다. "그렇다면 찾는 건 이것이겠군." 그러며 탈로스는 주머니 안에서 낡은 양피지 묶음 하나를 꺼냈다. 아 킨은 하마터면 그대로 낚아채 빼앗아 버릴 뻔 한 것을 간신히 억누 르며, 약간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보여 주시겠습니까?" 탈로스는 당장에 펼쳐보였다. 역시, 찾는 것이 맞았다. 예전에 탈로스의 탑 꼭대기에서 찾아낸 그 양피지였다. 그리고 그냥 더듬더듬 짚어가던 그 때와는 달리, 그 위에 적힌 말을 거의 읽어낼 수 있었다. "어떻게 가지고 계신 겁니까?" "네가 그날 도망 칠 때,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찾아냈 다. 무엇인지 몰라서 챙겨 놨지만, 언젠가는 컬린이 찾으러 올 거 라는 생각이 들었지......자, 그래. 이걸 컬린이 원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 분이 아닌, 다른 분께서 원하십니다." "마법의 땅을 다스리는, 아마도 눈 궁전의 주인인 지에나겠지." 아킨은 다시 한 번 탈로스와 자신의 차이를 깊이 절감해야 했다. 감춘다고 감추고 있었건만, 탈로스는 벌써 모든 것을 다 알고 아킨을 떠 보는 것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생각하게 되니 외려 긴장이 다 풀어져 버렸다. 아킨이 생각해야 할 것이 단번에 팍 줄어버린 셈이니. "그래, 이것과 성배가 대체 어떤 관련이 있기래 그녀가 이걸 원하는 거냐." "저는 잘 모릅니다. 어쨌건 그분께서는 그것을 가지고 오라 하셨고, 저는 가지고 가야 합니다." "그렇다면......대가는 무엇이냐."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저 심부름일 뿐이었다면, 그래서 네가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면.......그녀가 이런 중요한 일을 너 같이 아무 상관도 없는 꼬맹이 에게 시킬 리 없어. 네가 그녀의 도움으로 무언가를 해야 하거나 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녀는 너에게 책임질 만한 일거리를 준 거겠지 . 버겁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야.......그러니 지금 이 과제를 해결 하여 돌아간다면, '어떤 자격' 하나를 증명하게 되게 되겠지.........자, 내 말이 틀렸냐?" 목이 꽉 조여드는 것 같았다. "맞습.....니다." "그래, 어떤 거짓도 용납지 않을 테니, 솔직하게 말해다오. 그녀가 네 게 무엇을 준다 하였냐." 다시 긴장감이 확 돌았다. 차가운 칼끝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는 것만 같다. 거짓을 말한다면, 무지를 가장한다면, 이 칼이 머리를 꿰뚫겠지.....그는 마법사, 그것도 최고 마스터 직에 있는 자다. 진실을 쥐어짜는 방법 쯤, 몇 가지 나 알고 있다. 아킨은 조용히 답했다. "성배를 맡긴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아무 것도 속일 수도 감출 수도 없다. 탈로스는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당장에 뭐가 날아올 줄 알았는데, 컬린을 상대로 그렇게나 폭주하던 사람이, 어린 아킨을 앞에 놓고서는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 결론은 아득한 차이. 그 힘이, 아킨을 언제 어떻게라도 가볍게 처리 하게 할 수 있는 그 힘이 여유의 근원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더 편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녀- 지에나가 약속한 거냐." "정확히는 모릅니다. 어쨌건 비슷하게 말씀하셨고, 저는 여기까지 왔 습니다." 탈로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와 나의 차이가 대체 뭘까?" "많....겠지요." "그렇다면 그 중 무엇이 너에게는 허락되고 내게는 금지되게 했을 까." 당신은 얻기 위해 갈망하고, 나는 버리기 위해 갈망하는 것이었으니 까. 진짜 중요한 차이는 그것일 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어찌 될지 알 수 없지만, 지에나나 베이나트같은 엄격한 사람들은 시작부터 중요시 한다. 시작이 마음에 들지 않는데 결론이 좋다면 그건 그저 우연일 뿐이고, 그런 우연만을 기대하기에는 그들은 지나치게 이성적이다. 원하는 이유로, 원하는 목적을 향해, 원하는 방법으로 움직여 주기를 바란다. "저는 잘 모릅니다." "솔직하게, 숨기지 않고 말해라. 네 놈이 아무 것도 모르고 들어 올 리 없어.......정확히 모른다면 아는 것이라도 말해라. 어서-!" "아는 것이라면 단 하나, 제 몸의 저주에 관련된 자가 그 성배의 원 주인이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성배의 힘을 누리기로 약속되어 있던 자지요." "설마, 니왈르도 펜라키?" "알....고 계셨습니까?" "나와 컬린이 나눈 지식은, 네가 아는 것보다 훨씬 많다. 아무 것도 아니라면, 무시 할만한 것이라면 컬린이 모든 것을 거두고 돌아섰을 리 없지. 그는 강한 자고, 자기가 다스릴 수 있다 판단되면 다스리 려 들지 파괴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 한계를 벗어나 버렸고 , 상황을 되돌리기 위해서 컬린이 쓸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뿐이었지.......날 배반하는 것!" 다시 불꽃이 일 듯 탈로스의 눈이 이글거렸다. "그런데 대체 왜 네게는 허락하는 걸까. 네가 할 수 있다는 거냐? 네 게 자격이 있다는 거냐? 아니면 내가 무능했던 게냐!" "제게는 그저 짐일 뿐이었던 저주가 만든 인연일 뿐입니다. 그리 고........당신과는 달리 저는 그것을 원한 적도 없습니다." "엄청난 힘이 네게 주어질 텐데?" "어디다 어떻게 쓰는 지도 모릅니다. 무엇을 해주는 지 조차도요! 제 가 아는 건, 그저 그것이 베이와 지엔, 그리고 팔로커스의 세계에 속한 것이라는 것. 그들 세계를 되돌리기 위해 필요하다는 것! 또, 그 힘 때문에 니왈르도가 그들을 배반하여 모두가 파멸했다는 겁니다." "숭고하군. 결국 그들을 위해, 너와는 상관도 없는 그들을 위해 그 엄 청난 것을 가져다 바칠 생각이란 날이냐? 희생이냐, 애정이냐, 그 것도 아니면 그저 뜬금없는 정의감이냐--!" "저는 그저 제 몸, 제 운명의 저주를 풀고 싶은 겁니다......그래서 그 것에 연관된 모든 일을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돕고 싶은 겁니다." "겨우 그것 때문에?" "당신은.....모릅니다. 한달에 한번 괴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리고 영원히 그런 괴물이 되어 버릴 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 하루하루를 살아야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물론 이것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일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그래도 그건 제 생에 주어졌습니다. 태어나면서 치른 값, 단지 저에게만 주어 졌던 고통.......주어졌다면 극복해 내고 싶은 겁니다. 제 힘으로, 그리고... ...할 수 있다면 제대로 된 값을 치루고." "맙소사, 그 보다 편한 방법이 몇 개는 있었을 텐데-!" "편한 방법을 택했다면, 제 저주는 그저 고통과 슬픔.....그리고 어머 니의 죽음을 부르고 아버지의 증오를 불렀던 불행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저는 제게 속한 그 무엇도.....그것이 어두운 것이든 밝은 것이든,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부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 한다면 제 불행과 운명을 탓하며 그 안에 안주해 영원히 저 스스 로를 동정하고 누군가를 원망하며 살게 될 테니까요......" "사서 고생하는 게로군." 아킨은 희미하게 웃었다. "어떤 도전이든, 처음에는 사서 고생하는 걸로 시작하는 법입니다." 탈로스가 들고 있던 양피지를 흔들었다. "......그리고 그걸 위해 이게 필요하다고?" "그러니 가지고 오라 하셨겠지요." 탈로스의 눈이 다시 빛났다. 입술도 비틀리니, 무언가 꿍꿍이를 꾸미 는 듯 불길해 보인다. "좋아, 줄 테니 대신 조건이 하나 있다."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하겠습니다." "아아, 할 수 있는 일이라기보다는 해야 할 일이다. 나는 가치 없는 인간에게는 아무 것도 주지 않아.......게다가 너는 내가 그토록 갈 망하던 것을 얻을 예정이야. 그러니 네 가치를 증명해 보인다면 주겠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용납할 수 없어." 다시 아득해져갔다. 무엇이든, 아킨에게 버거울 것임에는 분명하다. 탈로스가 말했다. "니왈르도와 만나라. 직접 얼굴을 맞대고." 가슴 안에 있는 것 중 하나가 철렁 내려앉은 것만 같았다. "무슨....말씀이십니까?" "말 그대로다. 니왈르도와 만나라." "불가능합니다. 그는 다른 어디도 아닌 바로 제 안에 있습니다. 불러 낼 곳에 있는 게 아닙니다..... 숲의 왕 나루에는 복수를 위해 다 죽 어가던 니왈르도를 소환하여 임신 중이시던 제 어머님에게 저주를 걸 었습니다. 하지만 저희들이 쌍둥이였기에 저에게만 그 저주가 들어간 겁니다.......! 제 안에 있어요, 그는! 결코 어디서도 부를 수도 없습 니다." "그건 방금 전에 네가 한 말로 다 짐작했다." 아킨은 더 얼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니왈르도를 만나게 해 주신다는 겁니까...... 이기는 건 또 무엇이며, 증명하는 건 또 무엇입니까!" "내가 알아서 한다. 그리고 그와 만나 어찌할 건지는 네가 판단할 바 야..........어찌 할지는 이제부터 내가 정한다. 너는 그와 얼굴을 맞 대고 나서 어찌할 지만 생각하면 된다." 아킨은 상대가 엄청난 존재라는 것을, 그래서 터무니없는 요구도 얼마 든지 하고 강요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정말.....하실 수 있는 겁니까?" "내게 불가능한 일은 몇 가지 없다. 죽은 자나 사라진 자의 흐트러진 의식을 모아 불러내는 것 정도는, 네 나이보다 조금 많을 때부터 가능 했다." 예전에 숲에서 나루에가 보여주었던 것이 생각난다. 하지만 그건 그저 '보여주는 것'일 뿐, 서로 느끼거나 하지는 못했다. 제대로 느꼈던 것 은 그 때 정말 우연히 세계 강을 넘어 서로 접촉했을 때 뿐이었다. 하지만 그건....베이나트조차 어렵게 할 수 있는 일인데? 정말 탈로스가 그 정도로 대단한 마법사인가? "따라와라, 아킨토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아킨은 결국 그의 뒤를 따라야 했다. 불안해진다. *************************************************************** 작가잡설: 선배 결혼식에 다녀왔는데..... 으윽, 정말 시장바닥이더군요;;; '아아아, 신랑 친구- 여기다 서시고 신부 친구 여기다 서시고~~~' 하고 외치는 진행자 말이, 어째서 '자, 한단에 천원, 세일 시간은 앞으로 한시간~~!' 으로 들릴까요. -_-;;; 그리고 정말 콩볶듯이 10분만에 끝나고, 밀어 넣듯이 피로연장으로 쓸어 넣고, 시간 되자 마자 '자자, 손님 나가요~~' ;; 아이고 정신 없어라;;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2장 *************************************************************** [겨울성의 열쇠] 제243편 얼음 속의 봄#4 *************************************************************** "정말 그게 다 사실이에요. 의심이 가신다면, 마법을 쓰시면 되잖아 요." 유제니아가 그리 단호하게 말하자, 그녀 앞에 있는 뉴마르냐의 마법 사 칼쿠바는 한숨을 내 쉬었다. 이 소녀가 꼬맹이 이던 시절부터 가르쳐 왔기에, 이 소녀가 얼마나 요령이 있는 지 너무나 잘 안다. 일 끝나면 농락당하는 것은 늙은 칼쿠바 자신이 되어 있을 것이다. "좋아, 좋아. 나도 내 왕년의 제자에게 기분 나쁜 마법은 쓰고 싶지 않으니....이번에는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차근차근 물어보겠다." "네." 유제니아는 허리를 피고는 자세를 꼿꼿하게 고쳤다. 그녀 앞에 있는 뉴마르냐의 마법사, 올해로 쉰일곱이 되는 칼쿠바는 왕년에 '말 못할 실수'를 한 덕에 여기까지 귀양 온 신세였다. 그러나 그리 큰 실수는 아니라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 칼쿠바는 마치 ' 친구와 함께 오듯' 그의 감시병과 왔고(그리고 각자 주머니에 술병 도 꽂혀 있었다) 묶여 있지도 않았다. 늘그막에 저지른 가벼운 실 수에 에크롯사 길드로부터 징계를 받자, 그는 그 징계를 '뉴마르냐 에서의 근무'로 바꾸겠다고 자신이 자청했고, 경악한 길드 원들을 뒤로 하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지상에서 가장 신기한 것들이 잔뜩 있는 곳이 바로 이 뉴마르냐였고, 칼쿠바는 이 모든 이상한 것들을 언젠가는 연구하고 말겠다는 야심에 불타던 차에 '귀양'을 오게 된 것이다. 그가 다 늙어서 귀양을 자청 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은, 징계를 받으면 기록에 남 지만 이렇게 귀양을 오게 되면 이곳 생활이 워낙에 힘들기에 봐 주 는 의미에서 끝나는 즉시 모든 기록이 지워진다는 것이다. 또 이곳에 있으면 어쨌건 '국가의 일'을 하는 셈이니, 비용은 국가에서 알아 서 해 준다(비록 제공하는 질이 매우 낮다는 낭패가 있지만) 칼쿠 바로서는 '기회!' 라고 할만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 사정을 유제니아는 잘 알았기에, 이 칼쿠바가 단지 개인적인 호 기심 때문에 이리 시시콜콜 묻는 것이라 벌써 눈치 채고 있었다. 이 변경에서 공적으로 신경 써야 할 일이라면 유제니아가 이렇게 여 유 만만하게 나올 수도 없고, 칼쿠바가 봐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른들 일에 있어 응석을 부릴 수 있는 선이 얼마나 엄격하게 그 어지는 지, 유제니아는 잘 알았다. "그러니까, 음.......여튼 그 소년이 늑대 인간이라는 건 알겠다. 눈이 금색인데다가, 그 눈동자에도 확실히 변화가 있었다고 하니까 말 이다." "그리고 개들이 그렇게 반응 했던 건.......아키의 병은 좀 특이한 케이 스라서 그런 걸 거에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 아마도 지방마다 다 른가 봐요." 유감스럽게도 암롯사에 늑대 인간이 나타났다는 보고는 단 한건도 없 었다. 물론 유제니아도 그 사실을 잘 알았지만, 그녀가 안다는 것을 칼쿠바는 모르기에 모르는 척 해 보는 것이다. 물론 칼쿠바는 그녀 의 반짝거리는 눈을 보며 대강 짐작은 했지만, 이 참새 같은 소녀 를 그도 귀여워하고 있기에 그냥 넘어가 주기로 했다. "리사에게 들었다. 이번에도 역시 경고의 룬이 떴다는데........넌 뭐 아 는 거 있니?" 유제니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몰라요. 하지만 아키가 마을에 해 끼친 건 아무것도 없잖아요." "아아, 그래. 그리고 아무리 해 끼친 것 없다지만, 그 정도 되는 사람 이 왔다 가도 아무 말 하지 않은 건 분명 잘못 아니니?" "잠깐 들렀다 간 것뿐이에요. 리사나 아저씨에게 보고하러 갔다 오면 벌써 떠나버렸을 테고요." "말은 좋다. 그렇다면 왔다 간 다음에라도 이야기 했어야 하잖아." "아무 일도 없었으니, 아무 말씀 안 드려도 될 거라 생각했어요." "아하~ 좋아, 좋아. 하지만 휴로페의 악질적인 사령이었다면 어쩔 뻔 했니? 만약 그것이었다면, 우리는 이렇게 참새처럼 짹짹대는 네가 아니라, 반쯤 뜯어 먹힌 너를 네 집에서 발견했을 거다." 유제니아는 쀼루퉁하게 말했다. "그런 말에는 안 넘어가요, 아저씨. 마을 안으로는 어떤 사령도 못 들 어온다는 건 아저씨가 더 잘 알잖아요. 정말 넘어왔다면 혼나는 건 제가 아니라 아저씨였을 걸요. 그런 기본적인 것도 못 막는 엉터 리 마법사라고요." "유즈-!" "아무 일도 없었으면 된 거잖아요. 그리고 다음에 아키가 오면 정말 아저씨에게 데리고 올 게요. 그러면 되죠?" "네가 참 고분고분하게 그리 하겠구나." "약속드릴게요. 아키가 다시 찾아오면 분명히 말 하겠어요." 칼쿠바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좋아, 이번에는 넘어가 주다. 하지만 다음에 또 그 소년이 온다면 그 때는 분명 데리고 와야 한다. 너도 매번 이렇게 성에 불러와서 귀 찮은 질문 잔뜩 듣는 건 피곤하잖아." "네." 그건 정말 그렇다. 지난번에 아킨이 한번 들렀다 갔을 때 내내 칼쿠 바로부터 취조를 받아야 했고, 그제는 정말 잠시 다녀갔을 뿐인데 대체 어떻게 안 건지 당장에 다시 한번 오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유제니아는 정말 아찔아찔했지만, 칼쿠바는 지난번과 똑같은 질문만 을 했기에 그럭저럭 견딜 만 했다. "이만 늦기 전에 어서 가 보거라. 약속한 건 반드시 지키도록 하고." "감사합니다." "돌아가기 전에, 마론 집사를 만나고 가는 건 잊지 말아라. 그리 되 면, 뭐 하룻밤 이곳에서 머물거나 같이 가줄 사람을 붙여 줄 거다." "저는 괜찮은 데요?" "하라면 해. 이렇게 컴컴한 데 여자 아이 혼자 보냈다가는 내가 리사 와 뮬 녀석에게 혼난단 말이야." 리사와 뮬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칼쿠바가 걱정하기 때문이란 것을 유 제니아는 잘 알고 있었다. 이곳의 밤길이 어떤 지는 유제니아도 잘 알았기에, 그리 하겠다 답하고는 집무실을 나갔다. 칼쿠바가 머무는 별채를 나오니 하늘은 정말 컴컴한데다가 별들도 몇 개 떠 있었다. 유제니아는 망토를 여미고 목도리도 잘 추슬렀다. 뉴마르냐에는 에크롯사의 왕실에서 보낸 총사령관이 있고, 더 북쪽에 는 변방을 직접 감시하는 요새가 몇 개 있다. 유제니아의 아버지는 그 요새의 사령관 중 하나였는데, 그 모든 요새들은 알르간드를 감시하기 보다는 유배된 사람들을 감시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 하고 있었다. 각 요새마다 돌아가는 죄수의 죄질은 각각이었으나, 유제니아가 살던 곳에는 가장 가벼운 죄수들이 오는 곳이었다. 온 갖 자질구레한 잡범들이 모여 들어, 온갖 자질구레한 사고를 치다 가 자질구레한 방식으로 얻어맞고 갇히곤 한다. 그러나 다른 곳으로 는 어떤 사람들이 가서 어떤 일을 하는 지, 유제니아도 잘 모른다. 정말 극악한 범죄자들이 가는 곳은, 죄수들이 들어가고 문 닫으면 밖에 있는 사람은 아무 것도 모르게 되기 때문이다. 유제니아가 아 는 건 요새 중에 푸른 바위 감옥 이란 요새가 있는데, 그곳으로는 신분 높은 사람들이 유배된다는 것 정도였다. 성의 본채로 오니, 성의 현관에 불빛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유제니 아는 어렵잖게 성의 집사를 찾아 물었다. 올해 마흔 정도 된 남자인 집사 마론은 카바 요새 전 부사령관의 딸인 유제니아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그 질문에 흔쾌히 답해 주었다. "아, 오랜만에 뉴마르냐로 귀한 손님이 찾아 왔단다." "귀한 손님이요?" 누구냐고 물어 보려다가 유제니아는 관두기로 했다. 어차피 유제니아 는 전직 부사령관의 딸일 뿐이고, 지금은 취조를 위해 끌려온 상황 이다. 알아서 나쁠 건 없지만, 그렇다고 득 될 것도 없으니 마론을 귀찮게 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다면......저기, 저는 그냥 혼자서 돌아갈게요." "이런, 벌써 성문이 닫혔단다. 워낙에 귀한 손님이다 보니 그렇게 되 었구나." "네에? 저 돌아가야 해요! 저기, 그냥 살짝 열어주시면 안되나요?" 마론은 마른 어깨를 으쓱해보이고는 고개를 저었다. "살짝 열어주는 거야 어렵지 않다만, 그리 되면 너 혼자 카바 마을까 지 돌아가야 해. 지금은 보호자를 붙여 줄 수 없는 상황이니까 말 이다." "혼자 가죠, 뭐." "맙소사, 뭐가 급하기래 그리 위험한 길을 자청하려고 하니. 하룻밤 자고 가려무나." "하지만.....리사가 오늘 반드시 들어오라고 했는걸요." "리사 할멈도 상황이 이렇다면 용서해 줄게다. 자, 어서 뒤채로 가서 기기아를 찾아 가려무나. 뜨끈한 스프와 치즈 끼운 빵 한 덩이 먹고 푹 잘 수 있을 거야." 그리고는 마론은 유제니아의 어깨를 탁탁 쳐 주었다. 아마도 유제니 아가 여기 저기 얼쩡대다가 낯선 사람들에게 걸리지 않기를 바래서 서두르는 것 같아 보였다. 정말 귀한 손님이 온 것이다.....일이 이렇게 되니, 유제니아는 별 수 없이 뒤채로 향하는 길로 향해야 했 다. 그러나 리사가 오늘은 반드시 들어와야 한다고 으름장 놓듯 말했기에, 마론의 말에 고분고분 따르기도 곤란했다. '하지만 성문은 닫혔고, 경비병들이 문을 열어 줄 리도 없고, 뉴마르 냐의 겨울 숲을 혼자서 헤치고 가면 더 위험할 테고.....그냥 하룻밤 자고 가야겠네.' 유제니아는 리사의 엄격한 얼굴은 잠시 잊기로 했다. 아마도 저녁에 무슨 일이 있는 듯싶은데, 사정이 이리 되었다고 내일 아침에 말하면 봐줄 것이다. 안뜰로 들어서니, 늘 조용하던 뉴마르냐의 성이 조금 어수선해 져 있 었다. 크게 수선을 피우지는 않았지만, 경비병들도 좀 늘어나고 불이 켜진 창도 평소보다 많았다. 어디 왕족이라도 오셨나, 유제니아는 그리 생각하며- 그리고 같은 왕족인데 왜 아킨은 나타났다 하면 그렇게 머리털 곤두세우고 경계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 안 뜰을 가로 질러 본채로 들어간 다음 뒤채로 향하는 좁은 복도로 접어 들었다. 그곳에는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컴컴하기만 해서, 안에서 뭐라도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러나 유제니아는 건너편에서 비추어 들어오는 흐릿한 불빛을 따라 복도를 걸어갔다. 자주 왔던 곳이니 , 별로 무섭지도 않다. 멀리 부엌에서 부산떠는 소리가 들린다. 좋은 냄새도 풍겨와, 주방장 크로머에게 먹을 것 좀 달라고 해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곧 벽을 쓸던 손이 허전해졌다. 고개를 돌려 보니, 성의 본채 안으로 들어가는 커다란 복도였다. 기둥이 불빛에 어슴 푸레 빛나며 드러나 있고, 먼 곳에서는 더욱 환한 빛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 저곳에서 가벼운 만찬이라도 준비하나 보다.....유제니아는 귀빈이 누굴까, 궁금해져서 그 복도로 할 걸음 내 디뎠다. 마라 공이 와도 '안녕하쇼' 하고 한마디만 할 총사령관이다. 그러니 이 정도 준비한다면 굉장한 손님이겠지. 그 때 크릉- 하고 개가 낮게 으르렁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총사령관 의 검은 사냥개 캄인가 해서 유제니아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카므?" 그리 이름을 부르면 이 사냥개는 당장에 유제니아에게 달려들어 꼬리 를 친다. 무시무시하게 생긴 녀석이긴 했지만, 얼굴이 익숙한 사람 에게는 강아지처럼 달려드는 귀여운 녀석이니. 그런데 그 으르렁거림 은 더욱 커졌다. 크르르르르릉-- 혹시 그 손님이 데리고 온 개인가 ? 만약 그렇다면 곤란한데......귀족들 사냥개들은 정말 너무 사나 워서 골치니까. 유제니아는 급히 뒷걸음 쳤다. 순간, 어둠 속에서 붉은 눈동자 두개 가 확 켜졌다. 유제니아는 순간 비명을 지를 뻔 했다. 맙소사......! 설마 성에 마물이 들어온 건가? 서둘러 경비병을 불러야 한다는 생각 에 유제니아는 그 붉은 눈동자를 주시하며 조심스레 뒤로 물러났다 . 뒤채로 향하는 복도로 접어드는 순간에 뛰어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붉은 눈동자가 꺼지듯 사라졌다. 유제니아는 컴컴한 주변을 둘러보며 더욱 조심스레 움직였다. 손은 벌써 허리의 단검 으로 가 있었다. 순간 타닥- 가벼운 발소리가 들렸다. 유제니아는 단검을 뽑아 그 쪽으로 내리꽂았다. 칭캉-! 어둠 속에서 불이 번쩍 하더니, 잠깐 상대의 얼굴이 드러났 다가 사라졌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남자 같다.....키는 중간 정도. 몸매는 호리호리한 편.... 유제니아는 단검을 고쳐 쥐고는 찔러 들어갔다. 그러나 손목이 꽉 움 켜잡히며, 그대로 꺾이며 벽에 세게 내리쳐졌고, 아픔에 유제니아는 칼을 놓치고 말았다. 챙그랑-- 조용한 복도에서 단검이 떨어지는 소리는 정말 컸다. "읏....." 유제니아는 팔을 비틀어 뽑으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상대가 가까이 다가왔다.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연한 장미향이 풍겨왔다. 방금 뿌린 듯 진하고 깨끗한 향수냄새가 아 니라 몸에 깊이 배어 있는 체취인양 아련한 냄새다. 유제니아는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이 향기는 단 한번도 잊은 적이 없다. 유제니아의 몸이 떨리자, 어둠 속에서 훗-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와들와들 떨리며 그대로 까무러쳐 버릴 것만 같았다. 마물보다 더 무서운 괴물이 앞에 있는 것만 같다. 그런데 아무도 없다. 뒤를 지켜줄 세르네긴은 멀고 먼 전쟁터에 있을 것이고 , 아킨은 숲 깊은 곳에 있다. 유제니아는 팔에 힘을 꾹 주고는 당겼다. 어떻게든 벗어나야 했다, 어떻게든! 또 그때처럼 당할 수는 없어! "놔요......" 비명을 질러야 하는데 입이 틀어 막힌 듯 맥없는 목소리만 나왔다. 겁먹어서 그런 것이다. 너무 공포에 질려서,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맙소사, 이렇게 멍청하다니......이러다가 또 당 하면 어쩌려고-! "너는 언제나 내가 가는 곳에 있군....... 집어 가 달라는 듯이." 유제니아는 그대로 숨을 몰아쉬며,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왜.....여기 있는 거죠?" "찾을 것이 있어서. 그냥 조용히 다녀갈 생각이었지만, 이곳은 낯선 손님들은 모조리 불려가 신분을 토해내야 하더군. 돌아다니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고..... 예상 밖이라 당황하는 중이었다." 찾는 것은 아키- 답은 금방 나왔다. 다시 오싹 떨린다. "하지만 그 덕에 엉뚱한 것을 찾았군." 숨소리가 닿을 듯 가까워졌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극심한 공포 앞에서 오히려 얼어붙어 있으니 불안하고 답답했다. 사나운 육식동물 앞에 있는 듯, 뱀의 차가운 눈초리 앞에 있는 듯하다. 비웃고 있는 것이다. 정작 유제니아는 바로 자신 앞에 있는데, 정작 지 켜야 할 때 세르네긴은 먼 곳에 있으니. 모든 것이 그날로 돌아가 있었다. 눈이 아프도록 하얗게 쏟아지던 빛과 차갑게 반짝이던 그 보랏빛 눈동자와 마주하던 그날, 산산이 부서져 버 린 그날.......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순간, 고통에 몸부림치고 절망 에 나락을 헤매던 그 순간..... 잊으려고 노력하고, 그저 흉터만 남은 상처로 만들기 위해.....고통만은 없애기 위해 그렇게나 노력했는데, 정작 그의 앞에 다시 서게 되니 모두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유제니아는 여전히 무력했고, 그는 여전히 잔인했다. "마르실리오, 총사령관께 전해라. 일이 생겼으니, 잠시 뒤에 찾아 가겠 다고." 알겠습니다, 먼 어둠 속에서 짧은 답이 들려왔다. 유제니아는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 또 다른 어둠에 덮이며, 오늘 하루 만이라도 좋으니 차라리 아무 생각 없는 인형이 되기를 간절히 바랬다...... 아니, 제발 꿈이기를- ! 이 까만 밤, 이 아무도 오지 않는 밤- 지켜줄 사람 없고 지킬 힘도 없는 이 밤, 유제니아는 또 이 잔혹한 사냥꾼의 손에 떨어진 것이다. ******************************************************************** 작가잡설: .................유즈라는 캐릭터를 잡을 때, 그 목표는 한없 이 밝고 깨끗하고 순수하며 끝없이 망가지는;; 캐릭터였지요. (자백 중) ..........;;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2장 **************************************************************** [겨울성의 열쇠] 제244편 얼음 속의 봄#5 **************************************************************** 이른 아침에 왔건만, 이제 주변은 까만 어둠에 젖어 있었다. 구름 없 이 맑은 밤하늘이었지만, 그런 만큼 추위는 더욱 심해 차가운 얼음 속에 들어있는 듯 했다. 갑자기 귀가 끊어져나갈 듯 차가운 바람 이 쏟아져 들어왔다. "두려워 진 거냐?" 아킨의 얼굴이 갑자기 해쓱해지자 탈로스가 그렇게 물었다. "아뇨, 그건 아닙니다.........." 그것은 두려움이라기보다는 불쾌함에 가까웠다. 아주 거북스럽고 싫 어하는 존재가 옆에 있는 듯한 그런 기분 말이다. 옆에 뱀이라도 한 마리 똬리 틀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탈로스가 아킨 옆에 등불을 내려놓았다. 누런빛이 주변의 벽과 바닥 을 적시듯 밝힌다. "그런데 아직 멀었습니까?" "재촉하지 말거라." ".....하루 종일 걸리고 있지 않습니까." "제대로 된 마법에는 원래 시간이 걸려. 그냥 쏘아 던지는 것만이 전 부가 아니란 말이다." 별 수 없다. 그러나 갑자기 촉박하다는 듯한 생각이 들었던 건 어쩔 수 없다. 정말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그 이유를 짐작하자니 이상하다. 아무 이유도 없으니까. 초조해 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은 아킨은 앞으로 나아가 노파의 이처 럼 울퉁불퉁 흔적만 남은 벽을 짚었다. 돌로 된 벽 역시 얼음처럼 차갑다. 그리고 그 앞에는 어두운 숲이 펼쳐져 있었다. 그들이 있는 곳은 탈로스의 탑 - 정확한 이름은 '은둔자의 탑' 꼭대 기였다. 예전에도 자주 올라오곤 하던 곳으로, 베이나트와 처음 만 났을 때 그가 이곳으로 올라오라고 했었고 그 낡은 양피지를 찾기도 했다. 그리고 탈로스는 그를 이곳으로 데리고 와 앉혀 놓고는, 기다리라는 말 한마디만 남겨 놓고는 자기 혼자 이것 저것 하기 시작 했다. 그 동안 아킨은 예전에 양피지가 붙어 있던 벽의 문자를 찾 았지만, 흔적도 남지 않은 채 깨끗하게 사라져 있었다. 행여나 못 본 것은 아닌가 해서, 아킨은 다시 그 근방을 둘러보았다. "그 결계는 깨졌어. 찾아 봤자 없다." 뒤에서 탈로스가 불쑥 던진 말이었다. 아킨이 찾는 것이 무엇인지 모 르는 것이다. "저, 혹시 이 탑의 결계가 깨진 겁니까?" "설마. 그게 아니라 예전에 컬린을 유폐할 때 썼던 결계가 깨졌단 말 이다. 아마도, 너와 처음 만난 날 이곳으로 가서 무언가 하라고 했을 테지.......안 봐도 알아." 그리 말하고는 탈로스는 손을 뿌렸다. 벽에 은빛 글자가 확 드러났다 가는 사라졌다. 바닥과 벽에도 온갖 문자들이 화려하게 드러났다가는 스며들 듯 사라졌다. "이제 와라." 아킨은 그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탈로스가 서쪽을 가리켰다. "저곳을 보면서 서 있어." 왠지 예전에 베이나트가 '서쪽을 보라'고 말했던 것이 생각난다. 돌아서 서쪽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어둠에 젖은 울창한 숲이 시커먼 덩어리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킨의 발아래에서 은빛 선이 촤륵 그려지더니, 똑바로 쏘아져나가 똑바로 서쪽을 향해 내리꽂혔다. 그리고 그곳에서 해라도 솟구치듯 엄청난 빛이 뿜어져 올랐다. "큿-" 아킨은 뒤로 물러나며 신음을 삼켰다. 빛이 너무나 날카로워, 아무 느낌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뜨거운 것에라도 닿을 듯 뒤로 주춤 물 러나게 된 것이다. "대체 뭡니까?" 그러나 탈로스가 손을 들어 서쪽을 가리켰다. 다시 그곳을 바라보고 있으라는 것이다. "탈로스 님, 대체 뭘 하시려는 겁니까? 가르쳐 주세요!" "넌 잠자코 있기만 하면 된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대체 무엇을 하려는 지, 왜 하는 것인지 정도는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말 했잖느냐. 니왈르도와 만나게 해 주려는 게지. 위험한 일이 될지, 별것 아닌 일이 될지....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지만." 그러나 아킨은 그리 들어도 아직도 탈로스를 믿기 어려웠다. 대체 어 떻게? 그게 가능이나 한 가? 니왈르도는 다른 어느 곳도 아닌, 바로 아킨 안에 있는데. 의문만 계속 떠오를 뿐이다. 그런 아킨에게 탈로스가 말했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모르겠구나. 아킨토스, 나를 악튤런처럼 무대 포로 덤벼드는 얼간이 취급하지 말거라. 나는 그 어리고 바보 같은 녀석이 모르는 많은 것을 알고 있고, 할 수 없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기껏해야 내노라고 윽박지르는 것 밖에는 모르는 녀석과는 엄연히 틀리다고." "......하지만.....하지만 탈로스 님! 그와 꼭 만날 필요가 있습니까? 그 는 위험한 인물입니다. 게다가 제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사람이 기도 하고요." "그래도 그는 성배의 주인이다." 빛이 이제 아킨의 손까지 하얗게 물들일 정도로, 금방이라도 집어삼 킬 듯 가까워지고 강렬해진다. 탈로스가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킨토스.......네가 할 일인지 할 수 있는 일인지, 그 차이가 얼마나 되는 지 알 수는 없지만.......어쨌건 지금 네 자격을 증명해라." 어떻게 하냐는 말을 하기도 전에 빛이 아킨을 내리 덮었다. 순식간에 차가운 바람만이 불던 주변이 확 변했다. 따뜻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에일 듯 차가운 바람은 멎은 듯 사라졌다. 부츠를 신고 있어도 발 이 시렸는데 그 역시 괜찮아졌다. 투명한 바닥에 투명한 공기 속에 있는 듯, '무(無)'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공간에 갇혀 있는 듯한 그런 기이한 압박이었다. 이런 느낌, 처음이 아니다. 분명 아주 예전.......맞다. 유제니아를 구하 러 갔을 때, 카람파들로부터 습격을 받은 후에 의식을 잃었을 때........그 때의 느낌과 같다. 곧, 밟고 있는 바닥이 안개 걷히듯 드러나기 시작했다. 적갈색 흙바 닥이었다. 바닥에는 주먹만한 회갈색 자갈들이 여기 저기 나뒹굴고 있고, 하늘에는 먹물을 뿌린 듯 진한 얼룩이 배인 구름들이 가 득했다. 그리고 아킨은 흰 원이 그려진 부분에 서 있었다. 그 바깥에 그려진 성(星)문자들이 아킨의 눈길이 닿자 녹는 듯 사라졌다. 주변을 돌 아보니, 그 곳에는 다섯 개의 기둥과 제단이 있었다. 여긴.... 그렇다, 이곳 역시 분명 기억에 있다. "이건 또 뭐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전과는 달리 너무나 뚜렷했다. 정말 현 실에서 들리는 듯......이상한 기분이다. 많이는 아니지만 적어도 몇 번은 들었는데, 지금 듣는 목소리는 또 전혀 다르게 느껴지니. 물 속에서 듣다가 물 밖에서 듣는 듯 말이다. "니왈르도...." 아킨의 그 목소리 역시 뚜렷하다. 아킨 자신이 놀랄 정도로. 꿈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뚜렷이 듣고 깨어날 때, 그 직전의 느낌이다. "맙소사, 이게 누군가. 그 꼬마 아닌가.....!"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 가깝다. 예전의 여유는 말린 듯 사라지고, 분노에 꽉 들어차 그대로 상대를 으스러뜨릴 듯 한 그런 목소리다. "그 전령이군. 잘 만났다, 칼리반스는 어디 있냐. 그 빌어먹을 마법사 는 대체 어디로 간 거냐. 아무리 찾아도 없어, 어디에도!" 그리고 그 순간 아킨의 바로 앞에 니왈르도가 나타났다. 아킨은 뒤로 주춤 물러날 뻔 했지만, 니왈르도가 손을 뻗어 그의 멱 살을 움켜잡는 바람에 꿈쩍도 할 수 없었다. 확 다가온 금빛 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드러난 송곳니가 금방이라도 갈기갈기 찢어 삼킬 듯 번득였다. "어서 말해--!" 정말 니왈르도다, 정말 탈로스의 말 대로 되었다. 아킨은 얼결에 답 했다. "먼 곳에 계십니다." 니왈르도의 눈이 더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아킨은 그 손에 힘이 들어 가며 목이 점점 조여 오는 것을 애써 버티며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그러나 어떻게 만들어진 공간인지 쉽게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저 , 예전의 제단과 먹구름에 황야- 그리고 뭐가 더 있는 건지.... "그곳이 대체 어디냐! 말하면 내가 찾아갈 테니, 어서 말해--!" "찾아가서 무엇을 하실 생각입니까....." "찢어 놓겠다! 똑같이! 그 딸년들을 그 놈 눈앞에서 능욕하고 씹어 삼켜 테고, 그 다음에는 그 자식을 그리 해 주겠어! 어서 말해라! 차라리 죽여 달라고 울부짖게 하기 전에, 어서!" "당신이 먼저 그 분을 배반하지 않았습니까......!" 니왈르도의 눈이 비틀렸다. "내가 뭘 배반해?" ".......당신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니왈르도는 아킨을 내동댕이쳤다. 워낙에 강한 힘이라, 아킨은 그대 로 나가떨어져 버렸다. 등을 치는 자갈은 정말 '생생하게' 아팠다. 다시 한번 탈로스를 원망하고 싶었다. 내가 대체 뭘 잘못했다고 이러 는 건지! "미안하지만 그 자식과의 약속을 대체 왜 지켜야 하는 거지? 그 자식 은 스카디아를 죽였고, 나는 복수할 의무와 권리가 있다! 내 어린 시절부터 내 옆에서 나를 돌보아 주었던 소중한 아내란 말이다! 그 런 소중한 여자를 그 가증스런 놈이......그 놈이 죽였어!" "약속은 약속이지 않습니까.......당신은 지키겠다고 했고." "애당초 지킬 생각도 없었다, 얼간이! 그런 짓을 하고도 믿은 놈이 병신이지! 그 자식은 어디 있냐! 그거나 어서 말 해--!" "당신이 모르는 곳입니다." 니왈르도의 주먹이 날아왔다. 아킨은 피했지만, 바로 방향을 바꾸어 날아드는 다음 주먹에는 결국 맞고 말았다. 바위로 후려치기라도 한 듯, 정말 턱이 부서질 정도로 엄청난 힘이었다. 이 주먹에 그리 맞고도 꿋꿋이 있던 베이나트가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말해라, 젊은 늑대." "만나서 무엇을 하실 생각입니까." "죽여 버려야지! 세상 모두가 같이 망한다 할지라도, 그 놈은 내 손 으로 먼저 죽여 없애야 해." "......죽을 수 없는 몸이 되셨습니다." "그 성배의 힘으로 그리 된 거냐." "당신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당신 세계의 힘은 모두 그분 들이 가진 성배로 돌아갔습니다.......물론 당신이 가지고 계시던 그 성배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실패하긴 했으나, 어쨌건 그 의식의 영향이 아직 남아, 그 모든 힘이 그분들 것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그 힘을 얻기 위해 나를 속인 게로군!" "당신이 속였기에 '사고'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그 몸 이 된 것은 그 사고 때문입니다. 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니왈르도의 발길질이 가슴에 내리 박혀왔다. 숨이 끅 넘어갈 듯 엄청 난 통증이 명치를 강타했다. "네 놈의 정체는 대체 뭐냐! 역시나 그 잔소리 많은 칼리반스가 나를 괴롭히기 위해 보낸 놈이냐!" "저는 당신의 주인입니다. 제가 여기까지 온 건, 어쩔 수 없는 일들과 해야 하는 일들의 결과일 뿐입니다." 니왈르도가 기가 막혀 얼굴이 일그러졌다. "헛소리-! 나는 지금 자유다! 누구의 무엇에도 지배받지 않아! 뭐, 주인? 너 같은 꼬마 녀석이?" "아니, 맞습니다." "어째서!" 아킨은 욱신거리는 가슴을 움켜쥐며 토해내듯 말했다. "당신은 죽었으니까요." **************************************************************** 작가잡설: 식스 센스..... p.s 니왈르도의 본심이 나왔습니다...! 무엇인지 알아채셨다면 장미꽃 다발을...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2장 ************************************************************** [겨울성의 열쇠] 제245편 얼음 속의 봄#6 *************************************************************** 니왈르도의 얼굴이 더 일그러졌다. 아킨은 피를 닦아내며 간신히 그 에게 초점을 맞출 수 있었다. 나왈르도가 몸을 떨고 있었다. 분노와 놀라움에, 배신감과 절망감에. "내가 왜 죽었지?" ".....그건 잘 모릅니다......하지만, 어쨌건 당신은 죽었습니다." "빌어먹을, 죽었을 리 없어--! 죽기 직전에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나에게 기회를 주겠다고 했어, 그리고 나는 그년이 하라는 대로 했고! 빌어먹게도 자존심 상하고 열 받지만, 적어도 그것 밖에는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이겁니다......" 아킨은 자신을 가리켰다. "잘 보십시오. 당신이 말하는 그 일족의 흔적이 대체 누구의 것인지, 이 머리색과 눈동자가 누구와 닮았는지." 니왈르도의 얼굴이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르게 더욱 기괴해지고 있 었다. 도깨비 같아, 아킨은 그리 생각했다. 이건 정말 망령이야, 아 킨은 그리 거듭 생각했다. 이건 정망 망령이라고-! "당신은 제게로 왔습니다..........그리고 이 안에 당신이 있습니다. 언 제나 이 몸의 주인인 제가 당신을 지배하지만, 만월이 되면 당신이 깨어납니다. 그날만은 당신이 내 몸을 지배하고, 당신의 의지대로 움직이죠......그분, 당신을 불렀던 숲의 왕 나루에가 그리 하도록 만들었으니까...." 아킨을 살펴보는 니왈르도의 눈은 차갑고 단단한 금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그는 포악했지만 영리했기에 하나 하나 빠르게 깨달아 가고 있었다. 눈빛이 변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그가 말했다. "오호라, 그렇게 된 거로군." "....." 니왈르도는 두 팔을 벌려 보였다. "그럼, 지금의 나는 왜 이렇게 너를 보고 느낄 수 있는 거지? 내가 네 안에 있다면, 어째서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는 거냐." "그야....." 그 순간 아킨은 공간에서 빈틈 같은 것을 본 것 같았다. 하늘을 보고 바닥을 보는 순간에, 아주 중요한 핵 같은 것이 잠깐 모습을 드러 내고 사라진 듯 하다. 아킨은 주변을 잘 살펴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그의 눈길이 어디로 움직이는 지 니왈르도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어서 말 해!" "모릅니다." "뭐?" "모릅니다." 정말 모르니까. 니왈르도가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하는 눈초리로 아 킨을 보더니 이를 드러내며 고개를 들었다. "그래,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어쨌건, 나와 네가 서로를 보고 있다 는 게 중요할 뿐이니까. 그리고 나도 내 신세가 어떤 지도 알게 되 었고......" 그리고 아킨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갑자기 바짝 들이대고는 히죽 웃었다. "그년이 말한 기회란 게,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았다. 자, 그렇게 된 것이라면 만월이 내 잠을 깨워 나를 끌어내기 전에, 그 달빛에 신 세지기 전에 직접 네 모든 것을 지배해 주마." "네?" "그 년이 나를 이 세계에 불러, 거짓된 계약으로 내게 불완전한 육신 을 주었지만......나는 그것을 완전하게 만들겠다. 여기서 나는 내 힘으로, 내 의지로, 너의 육신을 얻어 이 세계에서 다시 시작하겠다.... ..칼리반스를 파멸시키고, 다시 시작하겠단 말이다!" ".....왜 그렇게 그분을 미워하시는 겁니까." "내 아내를 죽였다." "당신은 그의 모든 것을 죽였습니다." "가치 없다." 논리 간단하다, 아킨은 한숨을 내 쉬었다. 그러니까 스카디아는 베이 나트를 죽이려 했고, 베이나트는 그녀를 죽였고, 니왈르도는 베이 나트를 죽이려 했고, 사정이 꼬여서 베이나트는 니왈르도와 손을 잡아야 했고, 아마도 '일이 급하니 잠시 은원은 잊도록 하자.' 라고 베이나트가 설득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베이나트가 얼 마나 고생을 했는지는 짐작이 되고 확인도 했다. 뭐 이런 답답한 인 간이 다 있나. "하나.....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갑자기 그렇게 묻자, 니왈르도가 이를 드러냈다. "당신은 저를 지배하겠다고 하셨습니다.......그렇다면, 그리 되어도 예 전에 가지고 있던 당신의 힘을 그대로 쓰실 수 있는 겁니까?" "당연하지." 하긴, 당연히 그렇겠지. 보름의 날, 아킨은 '제정신'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건 그저 야수, 위대한 힘과 야만적인 본능밖에 없는 재앙 같은 야수였을 뿐이다. 육신의 지배권이 니왈르도에게 가는 순간에, 정말 아무도 통제할 수 없게되는 것이다. 그래, 그는 '미쳐' 있었다. 탈로스의 마법을 퉁겨내고, 모든 제약의 마 법을 끊어 버리고, 어마어마한 힘으로 강철 쇠사슬마저 물어뜯어 떨쳐내던 '그' 는 분명 미쳐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미쳐 있었다고는 하나, 어쨌건 탈로스의 모든 마법을 '본능적으로' 막아내기는 했었 다. 힘은 쓸 수 있는 것이다.......게다가 아킨은 눈도 밝고 귀도 밝 다. 힘도 보통 사람보다 몇 배는 된다. 형인 휘안과는 달리 눈 색 도 머리색도 다르다. 그의 힘은 아직 '존재 하고' 있으며, 분명 영 향력도 행사할 수 있다. "어떻게 제 몸을 지배하실 겁니까?" 니왈르도의 손이 아킨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다른 쪽 손끝이 이마를 스치고, 어깨를 찍고, 목을 찔렀다. 아팠다. 손가락이 스친 곳마다, 불덩어리라도 내리 박히는 듯 뜨겁고 고통스러웠다. "그건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해 봐라!" 니왈르도의 목 안에서 성난 으르렁거림이 터지며, 고통은 더 거세어 졌다. 아킨은 그의 무릎을 걷어찼다. 그가 주춤 움직이자, 그대로 그의 머리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니왈르도가 손을 놓으며 아킨의 손목을 잡았다. 아킨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가 아닌 전혀 다른 방향- 왼쪽을 향해 손을 뿌렸다. 츠캉, 하며 저 쪽에서 유리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세상 이 무너지는 듯, 그 곳이 깨어지며 검은 구멍이 드러났다. 그림이 찢겨지듯, 시커먼 공간이 드러났다. 니왈르도의 눈이 커졌다. "뭐 하는 짓이냐!" "당신이 제 몸을 어떻게 차지하게 되는지 알게 되었으니, 이제 당신 이 어떻게 이렇게 저와 마주하게 되었는지를 가르쳐 드릴 생각입 니다." 그리고 아킨은 니왈르도의 손을 후려쳐 떨쳐냈다. 니왈르도의 힘은 확실히 약해져 있었다. 아킨은 다시 바닥에 손을 짚고는 뒤로 물러 났다. 그곳에서 츠캉, 하며 역시 유리 깨어지는 소리가 나며 공간이 무너져 내렸다. "이, 건방진--!" "지금의 제게는 육신이 있지만, 당신은 정 반대. 누군가가 당신을 불 러내어, 이 장소에 강령시킨 것뿐입니다. 하지만......아무리 큰 물고 기라도, 물이 없으면 죽는 겁니다.....즉, 그 강령시킨 마법 자체를 깨버리면 끝나는 문제란 말입니다." 니왈르도가 으르렁 거렸다. 그런데 순간에 아킨의 팔찌가 뜨거워지더 니, 그 안에서 문자들이 확 치솟아 올라왔다. 아킨은 팔을 당겨 보 았다. 그 위에 문자가 새겨지고 있었고, 아킨은 이제 그 문자를 읽 을 수 있었다. "이건....." 니왈르도의 얼굴이 비틀렸다. 지독한 비웃음이었다. "차고 있으면서도 몰랐더냐. 푸른 양의 족쇄, 너보다 강한 마법사라면 누구나 너를 지배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물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몰랐구나. 나는 처음부터 알았는데 말이다!" "!" 그제야 아킨은 이것으로 탈로스가 그를 찾고, 이것을 통해 베이나트 역시 늑대로 변했을 때 그를 제어할 수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자아, 겁쟁이 같은 네놈에게 무슨 할 일이 남아 있겠나. 이제 내가 그 몸의 완전한 주인이 되겠다. 애당초 그러려고 여기까지 온 것, 늦었지만 이제라도 제대로 해야지! 네 몸을 통해 새로이 환생하여, 정복하고 지배하고 복수하며 기뻐할 것이다." 아킨은 팔찌를 세게 당기며 생각했다. 혹시 이게 나루에가 진정 원하 던 '복수'가 아닐까?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과 어머니에 대한 미련, 형에 대한 집착과 질투조차 없는 이 완벽하게 이기적이고 엄청나게 강한 마법사 니왈르도가 다른 누구도 아닌 아킨을 통해 '환생'하 여 사이러스를 파멸시키는 것- 이 남자라면 정말 사이러스 대공왕이라는, 그 누구도 꺾을 수 없었던 왕을 철저히 짓밟아 줄 테니까. 정말 철저히... 이 지나치게 닮은 둘은, 분명 서로를 제대로 파멸시킬 것이다. 그렇다.......고작 슬픔, 그것도 아버지 같은 인간이 느낄 리도 없는 감 정을 불러일으키고자 그런 일을 했을 리 없다. -내 복수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정말 이건가? "하지만 아비에게 제대로 반항 한번 못하고, 형에게 네 여자가 짓밟 혀도 순순히 고개 숙이는 짓 밖에 안하는 하잘 것 없고 쓰레기 같은 네놈의 복수는 내가 대신 해주마. 이 몸의 옛 주인에 대한 예우로 말이다." 아킨은 주춤 했다. "그걸....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네가 나고 내가 너라고 네가 말했지! 누가 가르쳐 주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알고 있어! 네가 알 듯 나도 안다." 갑자기 기묘하게 생각되었다. 방금 전까지는 완벽하게 남이라고 생각 되었는데, 바로 지금 아킨은 그림자가 고개를 돌려 말을 건 듯 오 싹했다. "내가 네 복수를 해 주지! 네 아비를 파멸시키고, 네 형을 나락으로 던져 주겠다. 그리고 모든 것을 움켜쥐어 네 세계의 왕이 될 것이다. 너는 저 먼 곳에서 지켜보도록 해 주겠어. 속 시원해 질 거다. 만족할 거다...! 그리고 내게 감사할 테지. 너는 도저히 못할 정도로 처절히 복수 해 줄 테니까 말이다. 그 무엇보다 달콤한 복수를 말이다." "설득입니까?" "약속이다. 너는 분명 그리 못할 테니까! 또 네 아비에게 굴복하고 네 형에게 네 여자를 건네줄 테고, 그러면서도 아무 것도 못할 테 니까." 웃음이 나왔다. 분노가 치밀고, 그런 말을 지껄이는 니왈르도를 향한 증오에 타죽어 버릴 것 같다. 속속들이 아는 상대와 만난 다는 것, 바닥까지 박박 긁어서 추한 것까지 보여주는 상대와 만난다는 건 정말 고문이다. 부인하고 싶었던 진실을 얼굴을 맞대고 말하는 상대만큼 증오스러운 건 없다....... 작년의 그였다면 맡겨 버렸을 지도 모른다. 절망과 좌절에, 결코 할 수 없을 거라 두려워하며 굴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무엇에도 맡기지 않는다. 아킨 자신이 결정하고 선택하고 책임지면 되는 것이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필요 없습니다." 니왈르도의 숨이 거칠어졌다. 아킨이 말했다. "특히나, 지금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도 파악 못하는 바보의 도움은 더더욱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아킨은 마지막 수인을 맺었다. 하늘이 순식간에 시커멓게 찢 어졌다. 바닥은 불타듯 거멓게 오그라들어 좁아들고, 텅 빈 곳에는 컴컴한 암흑만이 들이차기 시작했다. "너--!" "가십시오." 니왈르도의 팔이 날아왔다. 아킨은 피하지 않고 그 손을 맞섰다. 손 은 순식간에 하얗게 탈색되며 아킨의 몸을 꿰뚫었고, 마치 빛이나 연기가 몸을 후려친 듯 그대로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갔을 뿐이다. 아킨이 말했다. "다시 잠드십시오." 그리고 아킨의 팔찌에 감돌던 붉은 빛이 은빛으로 변했다. 그것을 보 는 니왈르도의 눈이 커졌다. "저는 바보가 아닙니다. 또, 제 응용력은 꽤 괜찮은 편이었고요.... 덕택에 이것을 쓰는 법도, 그 위험성도 잘 알게 되었으니 감사드립니다." 어쩌고의 족쇄인지 뭔지 알거 없고, 어쨌든 이것이 무엇인 지도 알게 되었고 쓰는 법은 니왈르도가 몸소 가르쳐 주었으니 이제 실습하는 것만 남았다. 이것으로 누군가가 아킨을 지배할 수 있다면, 그리 하려는 사람을 거꾸로 지배할 수도 있게 하는 것이다. 어차피 마 법은 모든 역의 가능성을 포함하는 것이니. 되든 안 되든 한번 해 보자고 시행한 것이었지만, 방향은 성공적으로 흐르고 있었다. 니 왈르도의 몸은 이제 더욱 흐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몸 위로 수 십 개의 문자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것만은 마치 빛으로 그린 듯 환하고 선명했다. "지배하는 건 당신이 아니라, 바로 접니다." **************************************************************** 작가잡설: 역시나 꼼수;; 수다 떨 때 고분고분 듣고 있다가 뒤퉁수 치 기. -_-;; 브리카디아 고교짱, 이와도.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쌍한 놈이라고 궁상 떨던 이놈은, 어느 날 세계 멸망이 닥쳐오자 그에 같이 휘말리게 되는 데....... 그러나 이와도는 미소녀 엘프 마법사 나루에에 의해 이세계 의 미소년 왕자로 환생! 드래곤을 만나 서클 1000의 마법사가 되고, 길 가다가 전설의 미소녀 보검을 주워 이틀 만에 소드마스터가 되었으며, 엘프 미소녀 나루에는 이유는 모르나 어쨌든 이 남자를 보는 순간에 한 눈에 반해 밤낮 쫓아다니고, 유희를 즐기던 오만 방자한 드래곤 휠테스 는 이와도를 보자 마자 홀딱 반해 쫓아다니게 되는 데...! 그리하여 이와도는 미소녀들을 거느리고 천년만년 살면서 깽판 치며 잘 살게 되었다......! ..........일리가 없죠? -_-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2장 **************************************************************** [겨울성의 열쇠] 제246편 얼음 속의 봄#7 **************************************************************** 니왈르도의 몸에 나타난 것들과 똑같은 문자들이 아킨의 목과 팔목에 드러났다가는 사라졌다. 니왈르도를 불러낸 공간 자체도 상당히 무 너져 있었고, 그렇기에 니왈르도의 의식이라든가 힘은 확실히 약해 져 있었다. 성공할 수 있을지 없을 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그런 것 고민하며 흔 들릴 틈조차 없는 순간이니. 그는 강했지만, 물이던 바람이던 쏟아 지듯 강할 때가 있다면 잠시 숨 들이 마쉬듯 약해지는 때가 있는 법이다. 대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힘이 비슷하다면 상대가 잠시 약해지는 순간을 낚아채는 자가 이기는 것이다. 니왈르도의 몸이 찢기듯 솟구쳐 올라 두 갈래로 갈라지더니, 아킨의 팔목에 걸린 두개의 팔찌에 내리꽂혀 왔다. "큿-!" 후려 맞은 듯한 충격이 생각보다 거세 뒤로 주춤 물러났다. 팔목에서 불이라도 붙은 듯 엄청난 열기가 오고 있었다. 그 안에 갇 힌 니왈르도가 덜덜 떨리고 우르르 울리고 날뛰려 한다. 아킨은 힘이 빠져 무릎을 꿇었다. 차가운 돌바닥이 무릎을 호되게 쳤 다. 그리고 그 바닥마저도 우르릉 울린다. 마치 살아 있는 짐승이 다쳐 분노하며 날뛰듯- 건방진 것--! 또 그 울부짖음이 터지며 머리와 허공에 메아리친다. 그리고 파도처럼 거센 것이 쏟아져 들어온다. 거대한 해와 달의 기억, 끝도 없는 바다와 그 바다 끝에 더 푸른 대 지가 있다. 구름은 새처럼 빠르게 흐르고, 그 어두운 그림자 역시 나는 듯 대지를 훑는다. 그리고 낯선 복장을 한 사람들의 음울한 행렬 , 그들 모두 검거나 진한 갈색의 긴 옷들을 걸치고 이마에는 금테 를 둘러썼다. 그들의 입술 사이에서 흐르는 노랫소리는 낮고 무거웠 으며, 검게 물결치는 바다를 보는 듯 괴괴했다. 주변에는 높고 낮 은 돌기둥들이 서 있고, 그 기둥들 위에는 몇 개의 성 문자들이 진 한 붉은 색으로 쓰여 있다. 그 주변에는 검은 안개 같은 것이 떠돌 고 있었다. 무언가가 휙 튀어나올 듯한 그런 안개들이............. '그'는 그렇게 어두운 곳에 살았다. 무엇 때문인지 주변의 동족들은 그를 두려워하여 유폐하려 들었고, 그 어미를 죽이고 아비와 타협 하여 그를 돌과 어둠에 보금자리를 틀고 분노와 증오 복수심을 식 량삼아 자라게 하였다. 그러나 꽃잎들 흩어지는 아름답고 경쾌한 행렬과, 그 위에 펄럭이는 금빛 찬란한 깃발들도 있었다. 높고 낮은 건물들이 펼쳐져 있고, 울창한 숲들이 햇빛을 받아 찬란한 녹음을 토해낸다. 당장에 쏴아아- 쏟아질 것만 같은 그 태고의 밀림. 하얀 건물들이 숲 속에 세워져 있었고, 그 건물의 푸른 창들이 하늘을 토해낸다. 그리고 그 곳곳에 밝은 사람들이 서 있었다. 하얀 옷, 연분홍색 옷, 연푸른 색 옷....마치 봄으로 자아낸 듯 가볍고 밝으며 예쁜 색조의 옷들이다. 그들이 밝게 웃음을 터뜨리고 떠들어 댔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라, 마치 재잘 재잘 거리는 새 울음 같은 소리처럼 들려온다. 그리고 그들 중에 검은 머리에 보랏빛 눈을 가진 어린 소녀가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 위의 하얀 수선화가 햇살에 진주보다 하얗게 빛난다........아름답고, 순결하며, 유일의 가 치를 지닌 것. 스카디아- 아킨은 그녀의 이름을 속으로 불러 보았다. 지금은 이리도 멀게 보이지만, 그는 이제 이 모든 동족들을 차지할 것이다, 그렇게 시작하여 그는 모든 것을 지배할 것이다. 동족을 넘어, 간악한 세샤티언들을 정벌하고 오만한 브라키니아의 인간들을 굴복시키고 아발칸의 반족을 짓밟을 것이다. 세상 모두가 복수신 을 부른다 할지라도 그의 심장은 용암보다 뜨겁게 뛰리라. 하늘이 다시 어두워졌다. 어둠이 깔린 가운데, 숲이 드리운 그림자는 더욱 어둡다. 컴컴하다....어둠과 불길함만이 가득한 곳이 되어 버 렸다. 바닥에는 피가 고여, 그 위에 흰 꽃 같은 몸뚱이가 잠겨 있다. 그 아 름다운 얼굴은 흉하게 일그러져 있고, 초점 없는 보라색 눈은 투명 하고 하얗게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키 큰 남자가 서 있었다. -나는 살아야 했고, 그녀를 죽이지 않고 살 방법은 없었다...... 남자가 피투성이 된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모든 것을 각오한 그 의 검은 눈은 단단하고 고요하다. '그'는 분노했다. 포효하고 으르렁거리고, 이를 드러내 그를 갈가리 찢을 생각이었다. 아무것도 없다, 용서할 것도 자비를 베풀 것도 이해할 것도 없다. 그러나 남자는 각오한 듯 보였지만 감수할 생각 은 없어 보였다. 지쳤지만 포기하지는 않으려 하고 있었다. 그의 옆 으로 푸른 로브의 여자가 나타났다. 지치고 피투성이인 남자를 감싸 며, 여자는 푸른 눈에 매서운 분노를 담아 그를 노려보았다. 다시 , 이번에는 등을 확 덮치는 열기가 있었다. 돌아보니, 붉은 머리 카락의 남자가 그 뒤에 있었다. 호리호리한 체격의 마법사, 예전에 는 열정과 활기로 빛났던 그 눈이 지금은 분노와 의지로 타오른다. 안다, 이들은 남자의 동료이자 친구들이었다. 성별도 연배도 성격마저도 확연히 틀렸으나, 브라키니언 일족의 가장 위대한 세 마법사. 검은 머리 여자나 붉은 머리 남자나, 일족의 이 름을 최초의 이름으로 부여받은 이 칼리반스- 남자만큼이나 강대한 마법사들이다. 여자가 그 사나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둘 다 상대할 생각이면 와라, 그리고 달려 와서 마음껏 덮쳐. 그리 하면 내가 축복을 내려주지. 네 패악스런 마귀할멈 마누라와 같은 곳으로 돌아가 영원히 쉴 수 있는 축복을 말이다. 그녀가 쓴 서클렛 안의 푸른 보석이 번쩍였다. 물 흐르는 쏴아- 소 리가 들리며, 온 주변에 습기가 차올랐다. '그'가 외쳤다. 후회할 날이 올 거야, 그 사나운 얼굴과 독기를 접고 내 앞에 무릎 꿇고 빌 날이 올 거다! 그리고 무엇이 닥치든 결코 잊지 않을 거 야-! 또한 무엇이든 나를 방해한다면, 내 발목을 잡는다면 거부할 것이다. 짓밟을 것이며 무시할 것이며 그리 못한다면 산산이 부술 것이다--! 그리고 칼리반스를 가리켰다. -특히 네 놈. 언젠가 네놈은 네 모든 일족의 죽음을 너의 죄와 바꿔 야 할 날이 올 것이다. 반드시--! **************************************************************** 작가잡설: 아하핫! .......드디어 커그가 정상화 되었습니다! 그 동안 열심히 글을 썻습니다. -_-;; 물론 디아블...도하기는 했지만 그저 체조 하는 정도로 했습니다;;; 비축분이 상당히 쌓였기에, 무한 연 참...........은 아니고, 어쨌건 이제 느긋하게 올려야죠. 훌훌~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2장 *************************************************************** [겨울성의 열쇠] 제247편 얼음 속의 봄#8 **************************************************************** 아킨의 팔목에 걸린 팔찌의 진동이 더욱 거세어졌다. 성난 소처럼 거 세게 거부하며, 제압하려는 아킨에게 대항하여, 산산이 부수고 짓 밟으며 다시 예전의 힘을 회복하기 위해 날뛰고 있다. 그 과거가, 그 의 마지막 힘을 끌어내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약해져 있었다 . 그는 그 육신의 근원을 아킨에게 두고 있다. 그의 기억과 이성 을 끌어낸 것마저도 탈로스의 힘. 그 끌어낸 마법을 파괴하고 있는 지금, 니왈르도에게 다른 방법이 있을 리 없다. "당신의 과거가 무엇이든......" 순간 팔찌의 붉은 글자가 더욱 진해졌다. 우르릉 울리던 진동이 잦아 들고, 울부짖음 같은 굉음도 점점 줄어든다. "당신의 분노가 얼마나 대단하든, 당신이 얼마나 위대하든 상관없습 니다. 중요한 건......저는 당신을 원하지 않고, 그 누구도 당신을 원 하지 않는 다는 겁니다." 다시 콰앙-! 엄청난 굉음이 거인이 땅을 내리찍은 듯 터져 올랐다. 아킨은 눈을 꾹 감았다. 그러나 머릿속으로 엄청난 소용돌이가 울리는 것 같았다. 아귀처럼 끌어당기려 하고 있었다. 휘말리면 죽는다, 끝난다! 아킨은 한 번 더 수인을 맺었다. 그러자 글자의 빛이 더욱 거세어지 고, 진동 역시 더 커진다. 그렇게 하며 아킨이 말했다. "복수든 뭐든, 제가 제 삶을 살 수 없다면 아무 소용도 없는 겁니다."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 따위가? 너 따위가 뭔데! 그렇다면, 네가 살아야 할 이유는 뭔데? 나만큼이나 살아야 할 이유 가 확실한 거냐? 아니잖아! "그런 건 없어도 됩니다." 건방진 것....! "여태까지의 제 생이 비록 누군가에게 상처 입히고 피해 입히고 저주 받기만 한 그것이라 할지라도,.......그것을 갚을 기회조차 남에게 넘 긴다면 그야 말로 가치 없는 생이 될 겁니다. 그러니...포기하지 않고 , 희생시키지도 않고, 넘기지는 더더욱 않을 것입니다." 너 따위가! 너 따위가--! 그러나 그 외침은 이제 가녀린 외침일 뿐이었다. 깊은 계속 안에 울려 퍼지는 힘없는 메아리처럼, 그 소리는 아득한 곳으로 사라져 버린다. 소용돌이, 온 바다가 지하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엄청나 소용돌이 속 에 있는 듯 어지럽기만 하다.... 문득 생각난다. 촉촉한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고, 여름밤이었건만 성에가 안개처럼 어 릴 정도로 춥기만 했었다. 피가 쏟아져 바닥을 흥건히 적셨건만, 그렇게 많은 피를 흘렸는데도 이상하게 온 몸은 무겁고 차갑기만 했었지. 그 속에서 출혈과 두려움에 떨며, 그저 외롭기만 했었지. 어느 보름달이 뜨는 날이었던가. 어머니가 그의 작은 몸을 꽉 끌어 안아주고는 사랑한다, 아가야, 가 엾은 아가야...속삭여 주었었고, 그 슬픈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리고 짓누르고 목을 졸랐다. 그러니 같이 죽자, 아가야. 살아가야 한다고, 죽지 말아야 한다고, 내 옆에 있어달라고 너는 소 중하다고 하는 이 없이, 강요되는 것은 어둠 속에 몸을 꼭꼭 웅크 리고 있든가 죽던가, 둘 중 하나뿐이었다. 부정되고 부정되는 나날. 그러나 그 때마다 그를 구해준 것은 오히려 그가 그토록 저주했던 푸 른 만월. 그것이 숨결을 불어 넣었다. 그것이 기회를 주었고, 그것이 나락으로 함몰되는 그의 손을 움켜잡아 당겼다. 기만하듯 그를 저주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는, 포기하려 하면 그러면 안 되지 속삭 이며 삶의 한가운데로 집어넣었다. 달이 지고 해가 뜨면, 또 같은 날이 되풀이 될 뿐인데도 만월은 끝끝내 그가 악몽에 함몰 되어 사 라지지 못하게 했다. 희망 따위는 없어도, 내일은 달라질 거야 하며 스스로를 기만할 수도 없어도, 그래도 포기하고 마지막 줄을 놓으면 정말 아무것도 없어 지는 것이고 만월은 그것을 막은 것이다. 그렇게 흙투성이 피투성이가 되어도 버텨야 하는 건, 그건 어제까지 의 삶이 가진 마지막 가치마저도 스스로 내 던져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최후의 취후까지 가서 아무도 도울 수도 위로할 수 없는 철저한 고독 속에 갇혔을 때, 눈감지도 포기하지도 놓지도 않으며 버티는 건 스스로의 의지뿐이다. 길 끝은 좁고 좁다. 혼자밖에 설 수 없고 갈 수 없는 길이고, 겨울바 람 거센 벌판의 나무처럼 외로이 꼿꼿이 서서 버텨내야 하는 것이다. 버틸 이유도, 원망할 것도 없다. 그저 그래야 할 때는 그래야 하 는 거니까. 하지만 버티고 나면, 그 때에는 누군가를 품에 안을 수 있을 것이고, 그 누군가는 함빡 웃으며 그의 품안에 안겨줄 테지. 불행도, 슬픔도, 상처도, 그 따뜻한 사람을 품에 안으면 모두 녹는 듯 사라질 테지...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눈물나게 넘치게 느껴질 테지. 마지막 남았던 공간 한줌마저도 완벽하게 사라졌다. 팔찌의 진동이 잦아들었다. 붉게 빛나던 문자들이 가라앉고, 굉음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차가운 바람이 날카롭게 귓전을 훑고 지나갔다. 그러나 방금 전 같은 그런 낯설고 이상한 것들이 아닌, 오싹하지만 실체 있는 것이었다. 햇살 비껴드는 겨울 아침마다 늘 느끼던 그런 바람이다. 현실이다, 이것은. 아킨은 눈을 떴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연푸른빛 눈동자와 마주치 게 되자, 뒤로 물러나다가 넘어질 뻔 했다. 그런 그의 어깨를 탈로 스가 붙들었다. 피가 깨끗하고 차가워진 듯한 기분이었다. 온 몸이 녹초가 다 되어 피곤하기만 했으나, 그대로 쓰러져 며칠 동안 잠 자고 싶을 정도였지만, 더운 여름날 찬 물로 목욕했을 때처럼 상쾌했다. 정말, 무시무시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제가.....이긴 겁니다." 지에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바라보고 있던 수경은 투명했고, 그 것이 그녀의 눈동자인 듯 그녀가 보는 것들을 비쳐주고 있었다. 그 러나 그녀가 고개를 들자, 그 안에 어둠이 들이차기 시작했다. "이겼어." 지에나의 말에 베이나트는 흐릿하게 웃었다. 비틀린 자조였다, 그것 은. 지에나가 물었다. "너도 그를 미워하지?" "팔로커스와 비슷한 말을 하는 군.......그렇게도 많은 시간을 보내며, 그렇게 많은 죽음과 이별을 하고, 그렇게도 많은 추한 것과 아름다운 것을 보았으면서도......왜 내게 천년도 더 된 옛 이야기를 하는 거지?" "너와 나는 친구였고, 친구야....... 칼리반스, 천명, 만 명을 만나도 그 의미는 바래어지지지도 사라지지도 않아. 그러니 솔직히 말해줘." 베이나트는 고개를 저었다. "의미 없어졌어......그에 대한 미움 따위는.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 때에는 그에 대한 분노가 전부였는데 지금은 그것이 차지하는 면적이 점점 작아져 버렸지......줄어든 건 아냐. 그것을 받아들이는 내 마음과 기억이 너무나 커진 거지. 부담스러울 정도로."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 "그래, 너무나 많이........ 그리고 그 안에서 제일 미운 놈을 찾아 봤자 거기서 거기인 것뿐이야. 천 만큼 미운 놈이랑 천 하나만큼 미운 놈이랑 뭐가 틀린 건데?" 지에나는 다시 수경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이제 새까만 어둠만이 가득 차 있을 뿐이다. 검은 강철처럼. "사람들은, 특히나 약한 사람들은 자신이 언제나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하지. 그저 착각이라도, 믿고 싶은 것을 믿는 어리 석은 짓이라 할지라도, 그래도 대단한 고민을 대단한 이유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 해........ 자기가 느끼고 보는 것이 대단한 것 이길 바라고, 자신의 불행이 세상에서 제일 큰 불행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하고, 자신의 고민이 세계의 축을 흔들 범상한 것이기를 바 라지. 끝없이 나는 대단해, 나는 굉장해, 그러니 나를 그렇게 여겨줘 , 나의 불행을 동정하고 나의 위대함을 숭배해줘.....그렇게 지겹도록 응석부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자신은 언제나 어리석으면서 , 그러면서 자기 외의 인간이 자신을 이해하고 보듬어 주고 숭배해 주길 바라지. 그러지 않으면 원망만 하고.......남을 희생시키는 것 도, 남에게 요구하는 것도, 그 때문에 당연한 거라 납득하라 우겨대지......" "그렇게라도 살아야 하는 게 인간이야. 진실만을 보고 살라고 하는 건 오히려 잔인한 짓이야." "알고 있어. 하지만......그 초라한 것을 인정하지 않고, 찾으려 하지 않고, 변화하려 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그 만큼의 세계밖에 주어지지 않잖아. '지금의 자신'이 대단하다 생각하는 사람만큼 가소로운 자들도 없으니까......." 지에나의 손이 수면을 훑었다. 갑자기 검은 수면이 비라도 쏟아지는 듯 들끓어 오르기 시작하고, 물 빛도 검은 색에서 점점 어둠이 빠져나가며 검푸른 빛이 되었다. "그리고 니왈르도는 그런 인간이었어, 칼리반스. 그를 핍박했던 그 일 족과 계부, 그 아내의 죽음, 그 자신의 고난..... 그 모든 것으로 자 신의 모든 행동, 자신의 모든 욕망, 치 떨리는 배반을 정당화 시켰지 . 자신이 겪은 고난이 그만큼 대단한 것이니, 나보다 더 행복했을 당신들은 내가 무엇을 하든 참아라......." "......" "그리고 잘못 하는 줄 알아도, 그걸 부정하기 위해 자신의 불행을 이 유로 들지. 끝없이 핑계를 대, 나에 비하면 너는 행복했으니까, 나에 비하면 너는 별로 대단하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희생해, 희생해, 희생해........그러니 나는 그를 동정하지 않아." 수면이 이제는 거의 사파이어처럼 푸른빛이 되었다. 그 아래를 감도 는 진한 그림자들이 더욱 푸른 보석들처럼 수면 아래를 맴돌고 있 었다. "그 소년은 과연 어떠할까?" ".....아킨토스 말인가." "그래, 그 소년 역시 마찬가지가 되지 않을까. 아버지와 형으로부터 받은 것들, 그 모든 것을 보상받기 위해 다른 이들을 희생시키고 그것을 당연하다 여기게 되지 않을까.........그에게 주어지는 그 힘들 이 결국에는 그렇게 쓰여 지게 되지 않을까?" "그건 아무도 몰라." 베이나트가 말했다. "지이, 어쩌면 희망이란 것은 세상과 운명이 우리에게 던지는 기만일 지도 몰라. 그래서 그 기만에 속아 내가 그 아이에게 우리의 미래의 일부를 맡기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짓이 될 지도 모르지. 정말 예전의 팔로커스 때문에 벌어졌던 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 엄청난 일이 벌어질 지도 몰라....... 그리고 안타깝게도, 팔로커스는 그리 할 권리가 없었기에 막을 수 있었지만 아키의 경우는 그 나마도 아 니야. 그렇게, 어쩌면 우리는 가장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막을 수도, 막을 권리도 없는 괴물을 깨우는 짓 말이야......" 지에나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러면서도 왜 그 아이를 데리고 온 거지?" "하지만 그 아이는 내게 노력하겠다고 말했지. 그리 하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좀 더 강해지고 커지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 했다....... 그래서 믿기로 했다. 지금 이 녀석은 자신의 과거를 보상받 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미래와 현재를 위해 발버둥치려 하고 있다고.......앞을 위해 달리고 있다고." 베이나트는 검은 눈동자로 이제는 파르랗게 밝은 깊고 깊은 물의 거 울을 바라보았다. "나는 믿고 싶어." "가치가 있을까?" "노력할 자세가 되어 있다면, 일단 믿어 보는 것이 예의지." **************************************************************** 작가잡설: 트럭에 얼마나 들어갈까, 하고 생각중입니다. 등 뒤로 뉴스 듣다가 150억이란 말에 동생이랑 동시에 끄흐흐흐흠...하 고 신음을 토해냈더래지요. -_-;; p.s 날이 추워지니 자룡군이 컴퓨터 모니터 위에서 잠드는 날이 많아지 는 군요. 잘 뒹굴뒹굴 굴러다니다가도, 컴만 키면 조르르 와서는 터 잡 고 잡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이곳에 와서 잘 자던 쎄니 양이 멀찌감치 떨어져서 자기 시작한답니다......... 그렇습니다, 모니터는 고양이 세계의 상석인 겁니다. 그리고 모니터 앞 의자 역시 인간세계의 상석. -_-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3장 **************************************************************** [겨울성의 열쇠] 제53장 용의 아들 제248편 용의 아들#1 ***************************************************************** 녹아드는 듯, 단단하고 차가운 대지로 봄이 스며들어왔다. 겨울이나 여름이나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계절이라면, 봄이나 가을 은 살피 다가와 제대로 느끼려는 순간에 사라져 버리는 그런 소리 없는 계절이었다. 벌써 3월이니, 남쪽인 암롯사에 봄이 찾아오는 것은 에크롯사가 아직 겨울이라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이었다. 흙은 젖은 듯 새카매지고, 짧지만 맑은 빛 새싹들이 조금씩 대지를 덮기 시작한다. 얼었던 냇물들이 녹으며 피가 솟구치듯 힘차게 계곡 아래로 흘러가기 시작했 다. 강철 빛 바다도 푸른빛으로 맑아지고, 그 위를 오고가는 배들 역시 온화한 서쪽 바람을 받아 활기차게 바다를 갈랐다. 열기어린 대지와 볼을 맞댄 대기는 벌써 따스해져서 아지랑이가 모락모락 피어 올랐다. 예전 같으면 어부들이 그물을 손보고 상인들이 동부나 서부로 보낼 물품들이 적힌 장부를 들여다 볼 시기였지만, 그 해의 나셀 해에서는 전함들의 출정 준비가 먼저였다. 하셀바의 넓은 언덕에는 막사들 이 세워지고 왕이 소환한 각 가문의 깃발들이 펄럭였다. 날이 녹는 듯하자마자 모인 이들이다. 조금만 더 따스해 지면 그 모 든 이들이 깃발과 막사를 거두고 우렁찬 나팔을 울리며 카티온을 향해 북대로를 출발할 것이다. 자리 한번 잘 잡았군- 휘안토스는 하셀바의 언덕이 정면으로 보이는 창가에 서서 그렇게 생각했다. 의도한 바는 물론 아니다. 휘안토스가 이 방을 잡았을 때, 저 언덕에 있는 것은 진한 회색 하늘과 바스스 흔들리는 마른 덤불들뿐이었으 니까. 그러나 암롯사 근방에 저 정도 군대가 모일만한 곳이 그곳밖 에 없어서, '아차-' 싶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구태여 신경 쓸 일도 아니라 결정을 바꾸지는 않았다. '아무 수확 없이' 에크롯사에서 돌아온 것은 2월 말의 일이었다. 출발 한 지 이 주 만에, 정말 쏜살같이 에크롯사를 다녀온 휘안토스는 여행과 관련된 단 한 가지 일을 처리한 후에 원래 그가 해야 할 일 을 시작했다. 사이러스가 친정에 나서고, 그의 빈자리는 휘안토스가 채우게 되었 다. 모든 인계 절차는 자주 하던 일이라 금방 끝났다. 남은 것은 사이러스가 이기고 돌아올 때까지 그 빈자리를 대신하는 것이며, 그 자리가 언젠가는 완전히 휘안토스의 것이 될 것이기에 당연한 일이 기도 했다. 예전에는 테시오스가 돕기도 했지만, 사이러스가 이레크 트라의 죽음과 함께 숙청해 버렸으니 그는 더 이상 사이러스의 뒷 자리를 대신할 수도 이을 수도, 심지어 옆에서 도울 수조차 없게 되었 다. 이제 남은 것은 휘안토스 뿐. 예전에 사이러스가 약속한 대로 , 암롯사의 후계자는 첫 번째이자 유일한 단 한명뿐이었고, 결국 에는 공식적으로도 그리 된 것이다. 그리고 이제 남은 것은 아버지가 만족할 정도로 훌륭히 하는 것뿐이니, 그는 아킨에 대한 일은 잠 시 묻어 두기로 했다. 바빠질 것이고, 이리 되기를 원했던 것은 사실 휘안토스 자신이었다. 북쪽까지 가서 휘안토스는 돌아왔다. 핑계는 넘치도록 있었건만, 휘안토스는 자신이 아킨을 찾고 싶지 않 아졌기에 돌아온 것이라 알고 있었다. 찾지 않으려 했다. 찾고 싶지 않았고,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고, '무언가'를 한 번 더 확인하게 되는 건 지독하게도 싫었다. 답을 알 아내는 것은 상관없지만, 뻔한 답을 재확인하는 건 싫다. 그래서 단 한걸음도 적극적으로 나가지 않고, 그저 그곳까지 다녀와서 할 일은 다 했다는 자기기만만을 했을 뿐이다. 그러나 기만의 효력은 휘발 성이라 너무나 빨리 끝나 버렸다. 휘안토스는 자기 자신에 대해 너무나 잘 알았다. 좋은 점이든 나쁜 점이든, 아무것도 부인하지 않고 냉정하게 바라보아 왔으니 어떤 일이 벌어질 때마다 한번도 당황한 적 없다. 자기 자신을 너무도 잘 아니, 왜 그러는 지도 너무나 잘 안다. 그러니 아키, 다시는 너를 찾지 않겠다. 끝까지 쫓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 지금, 더 이상 하지 않겠어. 찌직-! 날카로운 소리에 휘안토스는 정신을 차렸다. 손에 힘이 들어 가 움켜쥐고 있던 커튼을 찢은 것이다. 뒤에서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났다. 방 안에 같이 있던 사람 역시 조금 놀라 그를 쳐다보는 것이다. 휘안토스는 고개를 돌렸다. 흐린 봄 햇살이 퍼지는 방 안에 놓인 붉 은 가죽 의자에, 푸른 옷의 소녀가 앉아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 녀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암롯사 궁에서 선 호 되는 밝고 화사한 차림새였다. 검은 머리카락은 땋아 붉은 리본 으로 묶고, 자그마한 보석 핀 두어 개를 꽂고 있었다. 길고 치마폭이 넓지 않은 푸른 드레스를 입고, 빛깔이 은은한 베일이 정수리에 서 허리까지 늘어져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에크롯사 출신이라고 하 니, 세심하고 귀찮게 간섭하는 것을 자랑으로 아는 시녀장이 그리 준비해 준 것이다. 왕자궁의 시종장에게는 아는 기사가문의 딸이라 말해 두었다. 믿을지 안 믿을 지는 의문이지만, 오랫동안 휘안토스를 돌보아왔던 자이니 그 성격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특별히 휘안토스의 연인 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은 듯 하다. 그랬으면, 이런 수녀 같은 옷을 입혀 놓았을 리 없으니까. 아마도 소녀의 목에 걸린 반지를 보고, '휘안토스가 아는 사람의 약혼녀'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뿐만 아 니라, 휘안토스는 그들에게 소녀를 맡긴 후에 단 한번도 만나러 가지 않았다. 처음에는 혹시, 하고 고개를 갸우뚱 하던 시종이나 시 녀들은 일주일도 되지 않아 '하긴, 그럼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 이며 관심을 끊었다. 쉽다, 지나치게- 정말 우스울 정도로 쉽기만 했다. 이 소녀를 에크롯사의 뉴마르냐에서 처음 만나 사령관에게 '데리고 가야 할 일이 생겼다.' 말 했을 때, 사령관은 정말 너무나 쉽게 '보 호자는 없소. 그 아이의 의사를 확인했다면 데리고 가도 좋소.' 하고 답했다. 그 눈빛 안에 숨은 생각을 모르지는 않는다. 의붓오빠마 저도 외국으로 간 지금, 그 소녀는 정말 의지할 데 없는 아이였으니 외국 왕자가 찾아와 어떻게 하든 누구도 상관하려 하지 않았다. 소녀에게 묻지도 않았고, 어떤 일인지 확인하려 하지도 않았다. 성 의 집사가 보내는 눈빛이 심상치 않기는 했지만, 그는 감히 왕자에게 접근도 할 수 없는 신분이었다. 역시나 성의 마법사가 매서운 눈 초리를 보내긴 했으나, 그는 공식적으로 범죄자이기에 휘안토스가 허 락하지 않는 한 말도 못 붙인다. 그리고 그렇게 쉽게 데리고 왔다. 물론 건드리지는 않았다. 그저 아 무 감정 없는 일행인 듯 대우해 주었을 뿐이다. 어차피 지금 이 소 녀가 '필요한 이유'는 '그런 목적'이 아니니까.... "여전히 긴장하는 군." 휘안토스의 말에 유제니아는 움찔 했다. "하지만 솔직히 해 두자고. 너도 눈치가 있다면 알겠지만, 너와 나의 관계는 처음 외에는 아무 의미도 필요도 없다." "그 때도 그랬죠.....그리고 지키지 않았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온갖 감정을 다 억누른 후에야 나올 수 있는, 마 치 부서지기 직전의 유리인형이 내는 목소리 듯한 느낌이다. 왠지 언짢다. "네가 내 기억을 헤집어 놓지만 않았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거야." "......무슨 말이죠, 그건?" "넘어가자. 내 입으로 말하면 왠지 구차할 것 같으니까. 하지만 어쨌 건 그 때 네가 할일이 그것이었듯, 지금 네가 해 줄 일은 얌전히 여기 앉아 있어 주는 것이야. 이번 일에 있어 네 역할이 끝나면 알 려 주겠고, 그 후의 처분은 내 소관이다." 유제니아의 눈이 흐려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는 기억해 내고 싶 지도 않을 것이다. 어쨌든 둘 사이의 결론은 단 하나 뿐이다. 세르네긴- 그녀가 그 때 기분을 상기시켜 주지만 않았다면, 그렇게 짓밟고 싶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그를 상기시키는 순간에, 휘안토스는 그 세르네긴을 꺾어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오만한 경멸의 눈빛을 다시는 보내지 못하도록, 그 심장 같은 존재를 짓밟아 돌려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가지 방법이 떠올랐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단 하나였고 실행했을 뿐이다. 필요보다는 '원했다'. 솔직히 말하자 면, 그를 그렇게 짓밟아 둘 필요는 없다. 어차피 상관 없는 사람 이다. 아키와의 일이 있기는 했으나, 그가 그 일을 가지고 휘안토 스를 공개적으로 비난한다 한들 외국 기사가 외국 왕자를 비난하는 것에 아무도 상관 하지 않고 귀 기울이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도 휘안토스는 원했다. 그 수정 같은 고결함이 깨어지기를, 강철이 부러지기를, 황금 같은 심장이 피투성이가 되기를.....'원했다.' 휘안토스는 다시 확인시켜주듯 자신에게 말했다. 그래, 그렇게 '원했 어.'..... 그는 커튼을 쥐었던 손을 놓고는 발걸음을 뗐다. 유제니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몸을 기댔다. 그대로 나갈 수도 있었지만, 휘안토스는 짧게 스쳐지나가는 충동과 그 충동을 어찌할까 하는 망설임을 느꼈다. 그리고 나중에 생각하는 건 왠지 싫다. 휘안토스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유제니아가 주춤 물러나다가 벽에 등 이 닿자 비켜서려 했다. 의미 없는 몸짓. 예전에도 그랬다.......어떻게든 밀쳐내려고 발버둥쳤 지만, 결국에는 그의 것이 되었던 그 예전에도 필사적인 저항은 모두 의미 없었다. 그리고 지금도 의미 없을 것이다. 답할 필요 없다. 그리 해줄 필요는 더더욱 없다. 그렇기에 휘안토스는 지금 그대로 그녀를 끌어안으며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안아 버리고 싶어진다. 시트위에 짓눌러 눕히고 그 겁에 질린 거친 숨소리를 듣 고 싶어진다. 울부짖으며 발버둥치는 몸 안으로 들어가, 그렇게 다 시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주고 싶어진다. 난폭하게 가지고 싶어지고, 그의 것이 되는 순간을 다시 느끼고 싶어진다. "휘안토스 님-!" 시종장의 목소리였다. 휘안토스는 고개를 들었고, 그 순간에 유제니 아의 목덜미에 반짝이는 반지를 발견했다. 백조 모양의 반지. 예전 에도 봤던 것 같은데 그 때와는 느낌이 전혀 틀리다. 그렇다. 분명 그 때말고 훨씬 전에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뚜렷이 기억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휘안토스는 그 반지에서 눈길 을 거두며 문 쪽을 향해 말했다. "무슨 일이냐."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휘안토스는 어제 아버지가 했던 말을 떠 올렸다. 회의가 끝난 뒤, 오 늘 중으로 단 둘이서 이야기 할 일이 생길 거라 말했던 것이다. "곧 가겠다." 유제니아가 긴 한숨을 내 쉬었다. 그리고 휘안토스는 그 한숨이 아주 불쾌했다. **************************************************************** 작가잡설: -_-;;; 머.................음.......;;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3장 **************************************************************** [겨울성의 열쇠] 제249편 용의 아들#2 **************************************************************** "아마도 단 둘이 이야기할 시간으로는 마지막이 될 것 같구나." 사이러스가 그를 부른 곳은 봄의 방, 즉 서탑이었다. 그곳에서 사이 러스는 포도주 한잔을 앞에 놓고 푹신한 의자에 몸을 깊이 누인 채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휘안토스는 서탑의 방이 오늘 따라 아주 어둡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 컴컴하다......흐린 날도 아닌데. 아니, 오히려 화창하고 따스하게 봄 물이 오르기 시작하는 초봄의 하루인데, 왜 이렇게 주변이 어둡기만 한 걸까. 커튼을 닫아 놓은 것도 아니고, 햇살이 안 드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이렇게 어두운 걸까. 해가 떠 있는 동안 이 방에서 빛이 물러나는 순간은 없다. 아침 해가 떠서 저녁이 될 때까지, 이곳은 온 방이 환 한 빛을 빨아들여 언제나 화창한 빛깔로 있다. 밖이 가을이든 겨울이 든, 이곳만은 신선한 봄으로 충만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어둡다는 생각이 들었다. 곳곳에 그 차가운 어두움 이 고여, 마치 살아 있는 양 찬 숨을 내 쉬며 춥고 어둡게 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지금 이 자리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 이 들고, 일찍 끝나게 해서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러는 거냐?" "느낌이 이상해서 그렇습니다......정말 이상하군요." 사이러스가 가볍게 웃었다. 그 웃음이 이상하게 생각되어 휘안토스는 고개를 들었다. 햇살 속에 그 은빛 머리카락이 반짝이고 있었다. 깊은 눈매 안에 긴 그림자가 드리워져있고, 그 그림자 속에서 반짝이는 초록색 눈은 조용하게 뜨여져 휘안토스를 향하고 있었다. 낯설게 보인다. 아버지의 얼굴이 이리 생기셨던가, 이런 눈빛과 표정 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계셨던가. 눈가와 이마의 주름이, 모두 새로 발견한 양 낯설기만 하다. 냉소적이고 잔혹한 빛을 띤 입술과 눈 매 역시, 늘 그렇다고 '생각'하고만 있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긴,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눈길과 눈길을 제대로 교환한 적이 우리에게 몇 번이나 있었을까. "여러 가지 물어보고 확인해 둘 것이 있어서 불렀다, 휘안." "알고 있습니다." "에크롯사에 다녀온 이유는 무엇이냐." "아키를 찾으러 갔습니다." 예상하고 있었던 듯 사이러스의 눈빛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무 관심했다, 그냥 상관없고 재미도 없는 보고를 받는 듯 말이다. "찾았나?" "못 찾았습니다." "그 여자아이는?" "아는 사람의 약혼녀 입니다." "........데리고 온 이유는?" "그 사람과의 관계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입니다." 역시나 아무 눈빛이 변화도 없다. 언제나 아버지의 차가운 거대함을 등 맞대고 살아왔던 그였지만,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면 그가 원하는 것이 대체 무엇이며 어떻게 하여야 만족할지 알 수 없다. 거대한 벌판에 홀로 꽂혀, 아무도 가르쳐주지도 요구하지도 않는 허허로운 하늘과 대지 사이에서 거대한 적과 맞서야 하는 기분이다. 언제나 이런 식이다.......말을 던지고 답하고, 그러면서 그것이 그를 만족시켜줄지 분노하게 할지 모르는 채 고개를 숙이며 그의 판결을 기다릴 뿐이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준비는 잘 되어 있으니, 걱정하실 일은 없으 리라 믿습니다." "아니, 네가 왕이 될 시간 말이다." 휘안토스는 차분하게 있을 생각이었다. 흥분할 일도, 기뻐할 일도 아 니다. 당연한 일일 뿐이며, 왕이 되는 즉시 지금과는 몇 배로 무거운 의무를 짊어져야 할 것이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왕위에서 물러날 생각이다........ 너도 내년이 면 벌써 스무 살이다. 왕으로서는 부족함 없을 나이라 생각한다." 사이러스 역시 스물 하나에 왕이 되었다. 휘안토스도 새삼스러울 것 없다. 너무 이른 것도, 늦은 것도 아니다. 아니, 압셀론에서 돌아온 뒤 2년 간 준비한 것은 오로지 이것이다. 왕이 될 준비, 그것도 빠 른 시일 내에. "알겠습니다." "......그리고 네가 왕이 되면, 우리의 관계역시 예전과는 달라질 것이 다. 어찌 될 거라 확언해 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이렇게 잔뜩 긴장하는 관계는 아닐 것이다." 무언가가 금이 와삭 나 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번데기의 등이 갈라져 성충의 날개조각이 보이듯, 익은 석류열매가 갈라져 그 시뻘겋고 시큼한 속살을 보여주듯. 세상은 방금 전 보다 더욱 어두워져 있었으며, 그 어두움이 이제 심 장 근처까지 다가와 있었다. 너무 어두워져서, 당장 무언가를 말하여 이 어둠을 몰아내야 할 것만 같은데, 그는 너무 깊이 가라앉아 있 어 도저히 찾을 수도 빨리 꺼낼 수도 없었다. 휘안토스는 자기도 모 르게 아버지가 등진 어머니의 초상을 찾았다. 그러나 지나치게 쏟 아지는 햇빛이 반사되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정말 눈이 아릴 정도로 번쩍인다. "네 어미와 동생, 그리고 너와 암롯사 사이에서....나는 후자를 택했 다. 그 후의 십여 년은 오로지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기 위핸 필사 적인 노력뿐이었지.....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랬기에 네 최선을 다해 노력해 왔다고 생각한다." "아닙니다." "아니, 너는 내 기대 이상으로 훌륭하게 처신해 왔고 너의 능력을 보 여 왔다.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내 기대 이상으로, 나 이상으로 잘 헤쳐 나가리라 믿는다." 어둠이 더 진해지는 것만 같다. 휘안토스는 숨이라도 막힐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그럼에도 고개를 숙여 차분하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 겨우 시작이라는 것도 분명히 새겨 두어라. "알겠습니다." 사이러스는 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다. 그 잔 끝은 보석과 별빛처럼 반짝이건만 고여 흔들리는 술 안으로는 햇빛이 스며들어 핏물인 양 시뻘겋다. 구름이 낀 걸까, 순간 방 안에 옅은 잿빛 그림자가 드리워지며 온 방 안에 가득 차 눈부시던 햇살이 사라졌다. 방 안의 모든 것이 서늘한 윤곽을 드러내며 나타나고, 아버지가 등진 어머니의 초상 역시 잿빛의 세상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휘안토스는 아련하지만 서늘하게 다가오는 감정의 그림자를 느끼며, 자기도 모르게 말하고 말았다. "정말....." "응?" ".....후회하지 않으십니까?" 사이러스가 무관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택하면서 후회하지 않는 자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다른 선택지를 바라보며 후회를 거듭하는 것이 아니라 후회하지 않 도록 만드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해 왔고, 너 역시 어리석지 않아 내 기대에 훌륭히 부응해 왔다.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리 하면 되 는 것이다. 희생시킨 만큼 노력하면 되는 거야." 휘안토스는 이제 어머니의 초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초상화의 그녀는 여전히 젊고 아름다웠다. 검은 머리카락에, 머리를 장식한 수선화 화관에, 싱그럽게 반짝이는 아름다운 미소. 눈부시다, 너무도 눈부셔서 슬프다. 휘안토스도 열아홉이며, 저 초상화의 어머니 역시 열아홉이다. 그리고 지금의 휘안토스는, 마치 그린 듯 이 초상의 어머니와 꼭 닮아 있었다. 아니, 지나칠 정도로 닮아있다. 악령처럼 환영처럼 그림자처럼, 그리고 비추는 상처럼. "그립.....지는 않으십니까?" 휘안토스는 눈길을 거두며 그를, 아버지를, 어머니의 남편이었던 남 자를 바라보았다. 사이러스의 눈이 커졌다. 무관심하고 담담하고, 냉정하고 잔인하기만 했던 그 초록색 눈 안으로 불길 같은 것이 확 번졌다가는 사그라지었다.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거냐." "그저....그저 그런 기분이 들 뿐입니다. 하지만 아들로서 여쭙는 것입 니다. 그립지 않으십니까?" 그가 그리워하지 않는다면 분명 거짓말이다. 아버지가 얼마나 이 방을 자주 찾는 지는, 아들인 휘안토스가 가장 잘 안다. 때로는 새벽에, 때로는 저녁 해질 무렵에, 때로는 산책하듯 잠깐, 때로는 저녁부터 동쪽 하늘이 불타오르며 여명이 퍼질 때까지. 아버지는 미친 듯이 어머니, 그 아내였던 루실리아를 그리워하 고 있었다. 혼자 남게 되면, 그렇게 암롯사 대공왕이 아닌 사이러스 델, 이라는 남자로 남게 되면 그는 아내를 그리워한다, 끝없이, 끝 없이- 그녀야 말로 그의 영혼이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늪이며 사구이며 지옥이다. "나는 값을 치룬 것뿐이다, 휘안. 그 값이 밤마다, 아침마다, 매 순간 순간 내 심장을 찌른다 할지라도.....버텨나가야 하는 거다. 그리 하 기로 결정한 것은 나이고, 희생시킨 것은 나이며, 지금 그 결과가 이것인 것이니 누구를 원망하며 슬퍼하겠느냐." 그러니 당신이 원망하는 것은 오로지 당신 자신일 뿐이지요, 아버지. 그리고 그렇기에 아버지는 당신의 분신이자 어머니의 분신인 나와 아키에게 책임과 원망을 나누어 짊어지게 했었지요. 네,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언제나 뒤로 물러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짊어졌던 것 은 오로지 슬픔 뿐, 그리고 나머지는 모조리 나와 아키가 짊어졌지요. 끝없는 강요, 끝없는 의무, 끝없이 높아만 가는 기대치. 만족시키기 위해, 만족시키기 위해, 만족시키기 위해! 결국에는 내가 여태까지 해 왔던 모든 것은 당신의 양심을 편안하게 해 주기 위함이고, 후회하 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며, 어머니 대신 살고 동생 대신 거머쥔 자 의 당연한 의무. 그리고 이제 이 아버지는 그 의무에서 마저도 벗어날 것이다. 휘안토 스에게 왕위를 물려주며, 아들이 빛나는 왕이 되기를 '요구하며' 뒤 쪽에 앉아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거듭 확인할 것이다. 값을 치룬 것은 사이러스가 아니다....... 휘안토스와 아킨이었다. 서로 를 미워하며 반목하고 질투하고 두려워하면서, 이 사이러스를 위해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바친 두 아들들이었다. 휘안토스는 기가 막혔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런 생각을 하는 자 신이 기이하게 느껴졌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원망이라도 하고 싶다는 건가? 이제 정말 왕 위를 물려받게 되니, 긴 시험의 기간이 끝나고 또 다른 시험의 기 간이 시작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감상적인 기분이라도 드는 건가? "하지만 한 가지만은 솔직하게 말해주어도 되겠구나, 휘안-" 사이러스의 말에 휘안토스는 생각을 멈추었다. 구름이 비껴갔는지 다 시 햇살이 온 방으로 가득 차 올라, 온통 눈부신 빛이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아들아." 심장이 박살난 것만 같았다. 얼어붙은 칼이 뚝 부러진 것만 같았고, 피없는 심장에 균열이 가는 듯 하다. 그리고 손길이 다가왔다. 볼과 턱에, 그 두툼하고 강한 손이 부드럽 고 조심스레 스친다. 진정 사랑스럽고 소중한 것을 만지듯....... 아 마도 어머니에게도 이리 해 주셨을 테지. 태어난 직후 저주 같은 것 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던 그 시절의 아키에게도 이리 해 주셨 을 테지........ "감사......합니다." 아마도, 정말 기쁨에 떨리는 목소리로 들렸으리라. **************************************************************** 작가잡설: 연말이 다가오는 군요. 거, 참...올 한해는 참 부산스레 보낸 것 같은데, 부산스레 보내면 늘 그렇듯 별로 한 것도 없는 것 같네요. -_- p.s 저랑 p모 출판사랑 아무 관련도 없습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3장 *************************************************************** [겨울성의 열쇠] 제250편 용의 아들#3 **************************************************************** 아주 어렸을 때였다. 아직 뼈 무른 여덟 살 소년이었던 휘안토스에게 검술 선생이 소년용 검으로 가르치자, 아버지는 당장에 그 검을 무거운 어른용으로 바 꾸게 했다. 선생은 무리라고 극구 반대했지만 아버지는 단 한마디도 귀담아 듣지 않았다. 당시 휘안토스는 그 검을 제대로 들지조차 못했다. 못 한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키보다 더 큰 검을 들고 자 유로이 휘두른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포기하는 대신 어떻게든 해 내야 했다. 휘안토스는 자신이 어린 소년으로 서 응석부리고 어리광부릴 수도 없고,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아버 지가 요구한 이상 무엇이든 해 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 한 앞으로도 영원히 이러리라는 것도. 한 달 뒤에 휘안토스는 기가 막혀하는 검술 선생 앞에 그 검을 들어 보였다. 열 살 이전에는 결코 들 수 없을 거라는 검으로 배우고 연 습하여, 1년 뒤에는 몇 살이나 위인 소년들을 상대로 가볍게 이겼다. 그 검술 선생마저 열 살 때 이기고, 압셀론에 입학한 후 2년 뒤 에는 학원 안의 그 누구도 휘안토스를 상대할 수 없었다. 휘안토스는 그렇게 '첫 번째 시험'을 통과했다. 사이러스는 만족했고, 그 후에도 언제나 그런 식으로 일을 휘안토스에게 과제를 던져 주고 어찌 해결하는 지 기다렸다. 얌전한 말에 처음부터 탄 적도 없다. 덜 길들여져 사나운 말에서 떨 어져 다리가 부러졌는데도, 아버지는 다음부터는 몸에 맞거나 온순한 말을 타라 하지 않았다. 오히려 매서운 눈초리로 휘안토스를 책 망했을 뿐이다. 수 천 명의 기사들을 지휘하는 것을 열 한 살 난 아들에게 맡겼고, 그 아들이 열여섯이 되자 산 파로이 요새의 총사령관을 맡겼다. 어린 왕자는 밤새도록 도서관에서 책을 찾아보았고, 요새 모든 장교들 의 이름과 경력은 물론이요 고향까지 외워야 했다. 어리고 예쁘장 한 소년이라 무시하는 다 큰 기사를 상대로 결투를 벌여야 했으며, 절대 모를 거라 생각했던 모든 것을 예리하게 말하며 그 비웃음을 멈추게 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소년에게 버거운 일들을 맡겨 두고 아버지가 하는 일 이라고는 돌아서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 등을 지켜보며, 휘안토 스는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했다. 그를 만족시키기 위해, 마침내 그 가 돌아서서 휘안토스를 바라보는 눈에 냉혹함이 깃들지 않도록. 일을 마쳤을 때에야 아버지는 비로소 돌아서서 충고나 질책을 했다 . 언성을 높이는 법 없이, 조용조용히. 그러나 그 조용함은 차가 움과 휘안토스 안에 있는 감정 자체를 무시하는 무관심함 위에 세워 진 단단한 성이었기에 더 두려웠다. 그리고 지금 역시, 그는 또 버거운 과제를 던지듯 놓고는 다시 돌아 서는 것이다. 단지 그 뿐이고, 그렇게 그가 돌아서면 휘안토스는 이 무거운 짐을 그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발버둥 쳐야 하는 것이다. 다시 그가 돌아왔을 때 그 차가운 눈초리로 비난하지 않도록, 휘 안토스라는 인간 자체를 인정하도록 하기 위해. 인정받지 않는 한, 그렇게 그를 만족시키지 않는 한, 휘안토스는 '부정' 당하기에 반드 시 해야 한다. 열 살 때부터 사용해 온 연습실에 오자, 휘안토스는 허리의 검을 뽑 았다. 츠캉- 검이 뽑혀져 나가며, 석양의 붉은 햇살이 그 끝에 번쩍인다. 방향을 꺾을 때마다 쉴 새 없이, 눈을 깜짝이듯 번쩍거린다. 이 앞에 간혹 아버지가 있기도 했다. 어린 휘안토스가 그를 만족시키지 못할 때면, 언제나 그렇게 단 둘이 검을 맞대게 했다. 마치 사형집행이라도 하는 듯 데리고 와서, 그 자리에서 마지막 기회 라도 던져주듯 검을 주고는 맞서게 했다. 찌르고, 베고, 다시 찌르고 베며, 휘안토스는 두 배는 되는 아버지에 맞서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러며 생각했다.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무엇이 그를 실망시킨 것인 가, 무엇이 내 존재를 위협하는 가. 어떻게 하여 다시 그 신뢰를 되찾을 것인가, 그를 만족시킬 것인가! 그런데 그래 놓고 사랑한다, 라니. 그 기괴한 모순 덩어리를 던져주고는 감사히 받아먹으라는 건가. 그 것이 '상'이라는 건가? 그건 상이 될 수 없다, 아니 상이라고 생각하는 아버지 자체를 이해 할 수 없다. 휘안토스의 검 끝이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향했다. 어깨를 들썩이는 자신의 실루엣을 보며, 휘안토스는 그 그림자속으로 검을 쑤셔 박 아버리고 싶어졌다.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어진다. 화가 나서가 아니었다. 가치 없어, 쓸데없어, 사라져야 해. 그런 생각 의 파편이 끝없이 치밀어 올라 까마귀 떼처럼 퍼덕거리며 머릿속을 흔들어 놓기에 찢어 버리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 조용하기만 하던 연습실 안에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났 다. 휘안토스는 확인하지도 않고 그대로 몸을 틀어 검을 집어 던 졌다. 퍽-! 나무로 된 바닥에 검이 깊게 박혔다. 읏- 하는 신음 소리가 들 려왔다. "누구냐." 상대는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휘안토스는 검이 꽂힌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석양의 시뻘건 빛에 흠뻑 젖은 그곳, 검이 박힌 그곳 바로 옆에 유제니아가 서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막 일어나 있 는 상태였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왜 여기 있는 거지?" "......" 아무 답도 없다. "도망이라도 치는 중이었나?" 역시나 답은 없었고, 유제니아는 고개를 돌려 휘안토스를 외면했다. 휘안토스는 웃어버리고 싶어졌다. "도망치는 길로는 최악이군. 나는 저녁마다 이곳에 오니까." 왜 새삼 도망치려 했을까....... 어차피 전혀 모르는 곳인 데다가, 휘안 토스는 그녀에게 '잘' 해주었으면 잘 해주었지 괴롭힌 적은 없다. 아아, 그렇다. 방금 전 그런 일이 있었으니 또 내가 손댈지도 모른다 는 생각 때문에 도망치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궁의 지리를 전혀 모르니, 이곳저곳 헤매다가 여기까지 왔을 테지. "돌아가라. 그리고 다음에 도망칠 때는 되도록 안 들키도록 해 봐." "....." 유제니아는 옷을 당기고는 벽에 몸을 붙였다.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가고 싶어 하는 것이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휘안토스가 먼저 나가고 한참 뒤에나 나가고 싶은 거겠지....... 휘안토스는 그런 그녀를 배려해 줄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빼돌려 온 남의 귀중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쓸 데' 제대로 쓰면 되고, 그 다음에는 좋을 대로 처리해 버리면 된다. 뭐가 더 필요하겠는가. 없겠지, 아무것도. 휘안토스는 벽에 박힌 검을 뽑았다. 꼼짝도 하지 않던 유제니아는 그 가 검을 뽑아 돌아갈 때까지, 제발 그 검이 몸을 뚫지는 않기를 바 라는 듯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다가, 그제야 휘안 토스는 그녀가 등 뒤에 단검을 감추고 있음을 발견했다. 유제니아도 자신이 들킨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단검을 꼭 쥐고는 놓지 않았다 . 그제야 휘안토스는 그녀가 왜 많고 많은 곳 중에 하필 이곳으로 왔는지 깨달았다. "그것을 어디다 쓰든 네 마음이다. 나를 죽이든, 도망칠 때 쓰든, 자 결할 때 쓰든." 유제니아의 몸이 덜컥 굳었다. 휘안토스는 개의치 않고 검을 검 집에 꽂아 넣었다. 순간이었다. 뭐가 번쩍이더니, 목옆에 차가운 검이 달 라붙었다. 그리고 소녀의 눈은 차분했다. 그 눈빛을 보는 순간에 휘안토스는 자신이 처음부터 잘못 생각했었다 는 것을 깨달았다.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 애당초 이럴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가 자신을 얼마나 무시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는지 알기에, 처음부터 이곳에서 단검을 찾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겁먹은 듯 행동했던 것도, 모두 처음부터 이러기 위해 연극을 한 것이다. "원하는 게 뭐지?" "죽어요." "너도 살지 못할 텐데." "알아요. 따라 죽을 거예요." 유제니아는 망설임 없이 손에 힘을 주었다. 순간 욱신 하더니 피가 스며 나와 흘러내렸다. 휘안토스는 억양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어리석은 짓을 하려는 거지?" 검이 떨렸다. "당신이 살아 있는 것을 용서할 수 없을 만큼 증오하니까........ 내내 생각했어요. 도망칠 수 없다면, 도망쳐도 잡힌다면, 그렇게 끝도 없이 되풀이 할 거라면.......그냥 당신을 죽여 버릴 거라고." "성공할 거라고 생각해?"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순간, 휘안토스는 그녀의 배를 후려쳤다. 큭, 하는 신음을 흘리며 단 검이 흔들렸다. 휘안토스는 놓치지 않고 바로 그 손목을 움켜잡아 벽에 짓눌렀다. 단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꽤 훌륭했어. 그건 칭찬해 주지만....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 돼. 적이 완전히 끝장 날 때까지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고, 그 찰나에도 승패는 얼마든지 바뀌는 법이다." 아버지가 그렇게 말했었다. 방심하지 마라, 상대의 검이 떨어져도 안 도의 한숨 따위는, 승리의 웃음 따위는 보이지 마라. 적의 목을 따, 그 머리에 검을 쑤셔 박을 때까지 전쟁은 끝나지 않은 거다. 그 때였을 것이다, 아마도. 세르네긴과의 마지막 결전에서 패배했을 때, 그 마지막 대결을 하나하나 바늘 찔러 넣을 틈도 없이 꼼꼼히 살핀 사이러스는 아들에게 그렇게 말했다. 기분은 정말 최악이었다. "너는 졌다.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최악의 실수를 저질렀어." 그리고 그렇게 말했지. 그 차가운 눈동자로 휘안토스를 바라보며, 무 관심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질책도 아니다, 비난도 아니다, 오로지 진실만을 가르쳐 주며 벗어날 곳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는 듯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 사랑한다고? 유제니아가 팔목을 비틀었다. 그러나 꿈쩍도 하지 않자, 이번에는 다 른 손을 들었다. 휘안토스는 망설임 없이 그 명치에 주먹을 꽂았다. 세지는 않았지만, 자그만 여자아이에게는 충분히 큰 타격이었다. 숨을 흑 몰아쉬며 유제니아는 주저앉았다. "죽이려면 죽여요....." "죽이진 않아. 어차피 크게 위험하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 까. 또, 너는 당분간 살아 있어줘야 해." 휘안토스는 무릎을 꿇으며 그녀 앞에 앉았다. 겁에 질린 푸른 눈동자 가 그런 휘안토스를 바라보았다.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먼저 도발한 건 너다. 그리고 넌 실패하고, 난 승리했고." 저무는 해의 노랗고 강렬한 햇살은 구석구석 스며들어 눈부셨다. 아 직 고통에 숨을 몰아쉬며, 그러나 어떤 일이 벌어지려는 지 예상했 기에 유제니아는 어떻게든 일어나려 했다. 눈에는 벌써 눈물이 맺혀 있었다. 햇살이 목덜미를 따갑게 했다. 핏방울 튄 단검이 빛을 퉁겨낸다. 새 떼 날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팔 소리도 들린 것 같았고, 누군가가 달려가는 소리도 들었던 것 같다. 해가 서산으로 빨려 들어가듯 저물자 하늘은 꺼멓게 어둠에 물들어 갔다. 창문으로 쏟아 지던 빛은 점점 흐릿해지더니 완전히 사라지고 그늘과 함께 어슴푸 레 저물어 버린다. 소녀의 볼에도 발그레한 석양의 빛이 빠지며 옅은 어둠으로 창백하게 젖어 들어갔다. 그리고 떨고 있었다. 땀에 젖은 목덜미에 검은 머리카락이 물 흐르는 흔적처럼 붙어 있었고, 눈은 벌써 빨갛게 충혈 되어 있었다. 시선을 느낀 유제니아는 고 개를 더 깊이 숙이며 그를 외면했다. "너를 사랑한다....." 그 말에 유제니아의 눈이 커졌다. 입술이 창백해지고, 경악과 분노에 턱이 경련을 일으켰다. "기가 막히지? 나 역시 그 '농담'을 들었을 때 너 같은 기분이었다." 사랑한다. 그 달콤한 기만의 말 뒤로, 아버지는 또 등을 보이고 모든 책임에서 도망쳐 버렸다. 지난 십 수년간 그러했듯, 이번에도 똑같이. 이래서 아버지를 증오한다. 이래서 아버지가 진절머리 난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했다 말하니까. 모든 것을 망치 고도, 모든 것을 지켰다고 주장하니까. 창백한 하늘에는 하얀 달이 어둠을 밀쳐내며 떠오르고 있었다. 진하 고 풍만하며 완벽하게 잔인한 만월이었다. 그리고 그 달이 이지러져 갈 때, 아버지는 북으로 출정할 것이다. 왕의 검과 홀을 건네주고, 그 자신은 햇빛에 번쩍이는 은빛 갑옷과 검푸른 망토를 늘어뜨린 채 검은 말의 고삐를 당겨 북으로 갈 것이다. 암롯사의 기가 펄럭이 고, 아버지가 소환한 가문들의 깃발도 그 뒤를 따라 펼쳐지며 승리 를 외칠 테지. 그 때였다. 손등에 엄청난 통증이 왔다. 정말 부서지는 듯한 통증이 었다. "큿!" 유제니아가 물어뜯은 것이다. 손등에 잇자국이 나더니 그 사이에서 피가 스며 나왔다. 유제니아는 입술을 훔치고는 휘안토스를 노려보 았다. 휘안토스는 멍하니 있다가, 상처 난 손등을 보았다. 피투성이에 살점 이 흉측하게 찢어져 있어, 어디 가서 내 놓기 민망할 정도로 처참 했다(그리고 잇자국도 선명했다). 유제니아가 쏘아붙였다.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은 쪽 잘못이에요." 휘안토스는 순간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유제니아는 여전히 경계서 린 눈초리로 그를 볼 뿐이었지만, 휘안토스는 피를 닦아내지도 않고 몸을 일으켰다. "정신 하나는 번쩍 드는 군." ****************************************************************** 작가잡설: 휘안............'물렸다' 유즈의 역습입니다................. 다음에는 얼굴 할퀴기! 부욱~~! 그 다음은 아키를 후계자로~!! (어디를 치려고?) p.s 어제 친구들이랑 놀았습니다. 겨울키의 끝과 주제를 알게 되자, 앞의 4차선 도로와 뒤의 공사장 흙더미를 매우 갈망어린 눈으로 보더 군요. -_- .....뭔지는 비, 밀.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3장 ************************************************************** [겨울성의 열쇠] 제251편 용의 아들#4 *************************************************************** "닥쳐, 위데르." 아킨은 허공에서 흐느적거리는 위데르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위데 르의 컴컴한 눈동자가 일그러지고, 입술 끝이 아래로 축 늘어졌다. 난 아무 말도 안 했어! 그건 모두 네 꿈이라고! "닥치라고 했어. 네놈이 아니라면 그런 터무니없는 꿈을 꿀 리가 없 잖아." 그리 말하며 아킨은 누워있던 양털처럼 부드러운 잔디 언덕에서 몸을 일으켰다. 흰 가루라도 묻어 날 듯 하얗기만 한 잔디였다. 그 눈부신 흰 색을 보니 다시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토악질이라도 한바탕 할 듯 속이 답답하다. 그런 아킨에게 위데르가 툴툴거렸다. 며칠 골골대더니, 분별을 어디 굉장히 지저분한 곳에다 처박아 버린 듯 해! 정말 바보가 되어버린 거냐! 나는 아무 짓도 안 했어! 정말 이야! 아킨은 그의 얼굴이 제대로 보인다면 주먹이라도 박아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더 일그러질 데도 없는 얼굴이다). "어떤 실없는 농담을 건네든 상관없는데, 유제니아와 휘안토스와 관 련된 농담은 어떤 것이든 용납할 수 없어. 한번만 더 이따위 짓을 하면 지에나가 뭐라 하든 말든 내 손으로 연기로 만들어 주겠어." 위데르는 굴뚝처럼 연기를 털털 토해내더니, 크르렁 거리고는 몸을 거두어 사라졌다. 아주 멀찍이서 '개애애애 자식!' 하는 소리가 길게 메아리쳐 들려왔다. 아킨은 안개자락 같은 그의 몸의 숲의 어둠 깊 은 곳으로 완전히 사라지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꽤 느릿느릿 움직 이고 있는데도 욕지기가 치미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아킨은 주 머니를 뒤져, 작은 약병을 꺼내 그 안에 든 푸른 액체를 한 모금 입 에 털어 넣었다. 단 한 병만 줄 거라고 지에나가 까탈스럽게 말했기 에 아끼고 있었지만, 이럴 경우는 어쩔 수 없다. 곧 속안에서 차갑 고 상쾌한 것이 확 퍼지며, 욕지기가 멈추고 어지러운 것도 가라앉았다. 벌써 한달 째 몸이 엉망진창이었다. 열이 오락가락 하고, 제대로 먹 지도 못하고, 밤만 되면 온 몸이 쑤신다. 그러나 많이 나아지기는 했다. 처음에는 움직이기는커녕 목구멍으로 뭘 넘기지도 못했다. 게다가 일 주일 만에 간신히 죽이라도 삼킬 정도가 되자 탈로스가 말한 것은 '나가'였다. '일주일도 많이 봐 준 거다. 이제 좀 정신이 드는 것 같으니, 어서 나 가라.' '아직....그렇게 먼 곳으로 갈 정도는 아닙니다.' '아, 그럼 밖에다 놓아줄 테니 회복되는 대로 일어나 가.' 아킨은 그토록 서러웠던 적도 별로 없었다(아버지에게 당한 것이 많 기는 했지만, 사이러스에게는 기대치가 '아예' 없었으니 실망할 일도 없었다.). 물론 근 사십년 넘게 독신생활을 고수하던 남자이니, 옆 에 골골대는 열아홉 소년이 영 귀찮기는 할 것이다(예전에는 아킨은 '알아서' 살고 있었으므로 탈로스가 귀찮을 일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거의 반쪽이 녹아 흐물대고 있는 데 그런 식으로 말하니, 아킨은 탈로스가 원망스러운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처지가 서러웠다. 아아, 어쩌다가 다 죽어가는 데 쫓겨나는 처지가 된 것인가. 그러나 탈로스의 무지막지한 성격을 잘 아는 아킨은, 다 죽어가는 몸 으로 꾸벅 인사를 하고는 숲을 나와야 했다. 그리고 거의 악으로 악으로 알르간드에 도착해, 경계의 숲에 도착하자 그대로 쓰러져 하루를 지새웠다. 베이나트가 와서 업고 가지만 않았다면, 아마 그곳 에서 백골이 진토 되도록 쓰러져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 일주일 을 '조금 더 나은 상태'로 앓았고, 그러는 중에 지에나가 찾아와 푸른 액체가 든 약병을 놓고는 '견딜 수 없을 때 한 모금 마셔라. 그것 한 병밖에 안 줄 테니까.'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다시 서러 워 지는 순간이었다. '한 병밖에 없다'가 아니라, '그것만 줄게'였다. 베이나트의 멱살을 붙잡고 '만드는 법 좀 가르쳐 주십시오!' 해 봤 지만, 그는 '그건 지에나만 아는 비법이야.' 하고 말했을 뿐이었다. 아킨은 정말 알르간드를 떠나버리고 싶을 정도로 서러웠지만, 그것마저도 지에나가 허락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에 꾹 참아야 했다. "꼴 좋다아~" 롤레인이 보았다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무모하다 못해, 정말 바보짓 을 해 버렸으니 말이다. 그리고 지금 결과는 그 당연한 인과였고, 그랬기에 당연히 치러야 하는 일이었다. '차라리 못 하겠다고 하지 그랬느냐, 최악으로 한심한 바보 멍청아.' 사정을 듣자마자 베이나트가 단번에 날린 그 말에, 아킨은 정말 팔 들 힘이 없는 것만 원망했다. 못하겠다고 말할 상황도 아니었는데 어쩌란 말인가! 탈로스가 한 일은 간단했고, 간단한 만큼 무시무시한 집중력을 자랑 하는 강력한 물건이기도 했다. 그런 마법을 그가 썼다는 것을 알면 에크롯사 마법사 길드가 발칵 뒤 집힐 테지만, 어쨌건 탈로스가 행한 것은 '강령술'이었다. 당연하다. 이계의 것을 정확한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 정확한 시간 에 만나게 하는 것은 나루에조차 불가능한 일. 그렇게 탈로스는 니 왈르도를 불러내어 대면하게 한 것이다. 강령술을 본 건 정말 처 음이고, 예전에 롤레인에게 대강 들었을 때는 '쓸모없는 마법'이라 생각해서 그냥 넘어갔다. 하지만 가끔 부채질로도 태풍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이 있고, 그것이 탈로스였던 것이다. 베이나트가 가르쳐 준 바에 따르면, 그 은둔자의 탑이 있는 마법진은 탑이 이 공간 저 공간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해 주며, 또한 '정신' 이나 '영혼'같은 것도 실체와 힘을 지닐 수 있도록 해 준다. 그 덕에 베이나트는 육신이 지하 깊은 곳에 갇혀 있을 때에도 아킨 앞에 나 타나 탈출할 수 있게 해준 것이며, 자신 역시 영만의 힘으로 유폐 된 육신을 해방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스승의 육신을 가두 며 마법진을 사용했던 탈로스이니, 이번에도 역시 니왈르도를 불러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아킨은 팔목을 흔들었다. 차가운 팔찌가 손목에서 흔들린다. '그래, 그건 니왈르도가 만들었던 거다. 그 아내의 영혼을 소환하여 다른 자의 육신이나 만든 몸에라도 깃들게 하려고. 그 위에 적힌 성문자는 그 안에 깃든 영혼이 그 팔찌를 가진 자의 육신을 지배할 수 있도록 해 준다. 물론 육신의 원 주인의 영혼은 일단 몸이 죽은 것이 아니니 그 몸 안에 머물러 있기는 해. 단지 자기 몸에 대한 지 배력만 상실할 뿐이지.' 즉, 몸을 의지대로 움직이지는 못할 뿐 아킨은 멀쩡히 살아 있기는 살아 있는 것이며, 그것을 알았던 니왈르도는 나름대로 양심적인 제안을 했던 것이다(본인의 매우 독선적이고 불쾌한 가치관에 입각 하여서 말이다.......정말 사이러스와 형님 동생 해도 될 것 같다.). 아 킨이 원하는 것을 대신 해 주겠다고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별로 달갑지 않았기에, 아킨은 그 마법 자체를 거꾸로 돌려버렸다. 우선 은 니왈르도의 정신에 물리적인 힘까지 부여하던 마법진을 깨뜨렸고, 그 다음 약해진 그의 정신을 팔찌에 깃들게 했다. 그리하여 지배하 게 된 것은 니왈르도가 아니라 아킨이었다. 팔찌를 매개로 아킨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것을 매개로 니왈르도의 의지를 아킨이 지배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니왈르도의 육신으로 변 하는 보름에도 아킨이 그를 지배할 수 있다. 제대로 되었을 지는 며칠 뒤 보름이 될 때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네 몸이 순수하게 네 몸이 아닌 지금, 니왈르도의 정신을 억 지로 떼어 그 안에 깃들게 했으니 그렇게 고생하는 거야. 즉, 두개의 지붕이 합쳐져 여러 개의 기둥에 받혀지고 있었는데, 너는 한쪽 지붕을 받치고 있는 기둥을 모조리 치워 버린 거지. 이러니 이리저 리 흔들리고 기우뚱거리는 거야.' 즉, 근 19년 동안 아킨은 아킨대로 니왈르도는 니왈르도 대로 어우러 져 지내왔는데 지금 그 균형이 어그러져 삐걱댄다는 말이다. 아킨은 그렇다면 지에나가 약속한 물건을 가지고 오면 성배를 주겠다 고 한 약속은 어찌 되는거냐 물었다. 아킨의 몸이 예전 같지 않은데, 예전의 계획대로 하면 곤란하지 않나 싶어서. 그리 묻자, 베이나트 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지에나에게 물어보고 오겠다 하고는 나갔 다. 그리고 하루 정도 지난 뒤에 베이나트는 아킨으로 하여금 당 장 알르간드에서 짐 싸고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그녀는 그럴 계획으로 너를 그곳으로 보낸 거라 하더군...... 어쨌건, 우리 중에 유일하게 성배의 힘으로 예지의 능력까지 손에 넣은 그 녀니까 말이다. 즉, 그녀는 네가 니왈르도를 지배할 수 있게 되어 그 의 힘까지 쓸 수 있게 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지금 너 혼자만의 힘으로 성배를 네 것으로 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니까. 뿐 만 아니라, 니왈르도의 정신이 보름마다 해방되는 지금 그를 지배하 지 않는 다면 매우 위험하기도 하고.' 아킨은 온 힘을 다해 외쳤다. '만약 거꾸로 되었다면 어떻게 될 뻔 했습니까! 제가 제 육신을 빼앗 겼다면, 당신들은 최악의 적과 싸우고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지에나가 약을 들고 찾아온 것은 그때 즈음이었다. 그녀는 그 것을 툭 던져 주고는 이렇게 말했다. '성배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네가 몰라서 그러는 것 같은데, 그 정도 능력은 가지고 있어야 지배할 수 있는 물건이다. 물론 네가 니왈르 도에 비해 까맣게 어리고 약해서 코끼리 집어삼킨 뱀처럼 불룩한 배 를 움켜쥐고 소화불량을 호소하고 있다는 건 인정하겠어. 하지만 언젠가는 그 코끼리를 다 소화하게 될 테고, 그 때의 너는 예전과 비 할 바 없는 몸이 되어 있을 거다. 그리고 그 때 너는 성배를 비로 소 네 힘으로 지배할 수 있게 될 거야.' 결국 아킨이 해야 할 일은 몸조리나 하는 것뿐이었다. 다행히 며칠이 지나자 열이 대강 내리고, 몸도 많이 좋아졌다. 그리 고 그렇게 회복되어 가며, 잠들면 간혹 니왈르도의 옛 기억을 꿈꾸 기도 했다. 회색 돌로 된 도시들, 거대한 바위가 비석처럼 서 있는 황야, 강철 빛 날카로운 절벽속의 협곡, 울창한 숲, 하얀 햇살-- 푸릇한 달빛과 아름다운 아내........ 숲 속에서 잠들다 황야를 누비는 달의 일족, 그 거대한 늑대의 무리들- 기억의 파편들이 꿈속을 날아다녔다. 알 것 같지만 모르는 곳, 모르 지만 알고 있기에 그립기도 한 곳이었다. 눈물이 날 듯, 한숨이 쏟 아내며, 그렇게 보고 싶어지며 몸담고 싶어지며 다시 손으로 느끼고 긴 호흡으로 내음을 맡고 싶어지는 곳. 그것만은 아킨은 니왈르도가 안겨준 선물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아킨 에게는 그리도 눈물나게 그리워하며 돌아가고 싶어 하는 곳, 그렇게 두 팔로 안으며 기쁨을 터뜨릴 만한 곳이 없었다. 아킨의 고향에 있는 것은 언제나 슬픔과 분노, 그리고 증오뿐이었으니까. "이제 몸은 좀 괜찮냐?" 돌아오니, 정원 긴 의자에 앉아 책을 보고 있던 베이나트가 그렇게 물었다. 아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한 꿈을 꾸기는 했지만, 많이 괜찮아 졌습니다." "다행이구나." 아킨은 그 옆에 털썩 앉았다. 이상한 꿈은 이상한 정도가 아니라 정 말 불쾌하기까지 했으니 영 찜찜했다. "보름이 얼마나 남았죠?" 그러자, 뒤에서 푸른 새가 고개를 들더니 말했다. "사흘." 아킨은 그쪽을 돌아보았다가, 푸른 새의 눈이 감기자 다시 돌아앉았 다(신경 쓸 필요 없다는 것을 깜빡 잊었다). 베이나트가 말했다. "시간은 많으니, 서둘 필요는 없다." "당신들에겐 그럴 테죠." 그러다가 아킨은 문득 생각난 것이 있었다. "저기, 베이. 혹시 저 쪽 세계에 딸이 있었나요?" "둘. 하나는 내 딸이고 다른 하나는 결혼한 여자가 데리고 온 딸인 데......성질 고약한 녀석이었지, 정말." 그리고 베이나트는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이 묘하다고 생각하며 아킨 이 물었다. "사이가 나빴습니까?" "어마어마하게 나빴어...... 정말 말 그대로 '세상 끝장나는 그 순간까 지' 날 미워했단다." "뭐 실수 한 거라도 있었나 보네요." "그 애 아버지가 내 친구였거든."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말하기 좀 그런 과거 인건 사실인데........그래, 어쨌건 뭐..... 불륜이었지. 친구 녀석은 꽤나 일찍 결혼했고, 나는 혼자 사는 괴짜 노총 각이었다. 여자한테 인기는 정말 최악에 바닥을 긁어대던 그런 괴짜 말이다.. 그런 내가 불쌍해서인지, 녀석은 나를 자기 집에 초대하 고는 했지. 그렇게 한 몇 년 같이 지내다 보니, 그녀와 그렇게 되어 버렸다. 어떤 비난도 감수할 생각으로 모든 것을 고백하자, 친구는 순순히 이혼을 해 주고 딸도 우리에게 맡겼지......" 그리고 그는 아킨을 한번 보고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울적한 웃음이 어려 있었다. "그로부터 반년 뒤 그 친구는 자살했다........유서는 없었단다. 아무 것도- 그것이 복수인지 혼자가 된 절망에 대한 자포자기인지, 나는 아직 도 모르겠어. 하지만 어느 쪽이든 괴롭기는 마찬가지였고, 내가 잘못했 다는 것도 분명하지. 철들 나이였던 그 딸아이가 나를 미워한 건 당연 한 일이었고, 나는 나 나름대로 보상한답시고 꽤 노력했다." 지에나의 푸른 새가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 눈빛이 쉴 새 없이 번쩍이는 것을 보며, 아킨은 그녀 역시 그 사정을 아주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알 게 되었다. 베이나트도 눈치를 채고는 핏 웃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지에나와 나는 아주 절친한 사이지...... 그 때 저 여자는 어떻게 하든 후회할 테니, 마음대로 하라고 했고." "같이 책임질 수 없었을 테니까요." "알아. 그리고 아키- 제발 그 얄밉게 말하는 버릇 좀 고쳐다오. 들키 기 싫은 속마음이라는 건 누구나에게나 있는 법이니까." "아, 죄송합니다..........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뻔해. 그 아이는 열다섯 살이 되자마자 아버지 재산을 돌려받고 독립 해 버렸지. 아내하고도 인연을 끊어 버렸고...... 간혹 그 애 여동생- 그래, 나와 그녀의 딸이지. 어쨌건 그 아이랑은 연락하긴 했는데.... 그 뿐이다. 그 애와 다시 만난 건 대회의에서였다. 스무 살도 안 되어 벌써 소의원이 되어 있더구나. 그날 그 애를 대의원 실로 불러서 엄청 싸웠지." "대회의.....전 모르겠는데, 혹시 그 분도 마법사였던 건가요?" 베이나트의 눈이 어두워졌다. "마법은 몰랐어, 그 아이. 아니, 쓸 수도 없었다. 제 아버지 닮아서 머리는 좋았지만......" "그렇다면 뭐였습니까?" "좀 틀린 쪽 능력에, 의사이기도 했지. 그 아버지도 그랬으니까." "그렇다면 복수할 생각이었을까요?" "응?" "그 분.....아무래도 당신에게 복수하고 싶어 했을 것 같습니다. 하 는 일이 틀림에도 당신 근처에 있고자 했다면, 아무래도 당신이 가는 길을 자기 방식대로 따라가고 있는 것 같아서요." "아마도 그랬겠지." "아내 분은 사랑하셨죠? 그래서 그분을 위해서라도 그 따님분과 더 이상 사이가 틀어지고 싶지 않았을 테고요." "그래. 당연하지 않겠니...... 행복하게 해 주고 싶어서, 내가 옆에 있어야 행복할 것 같아서 갖은 수를 다 해서 내 사람으로 만들었는 데 안겨주는 건 눈물뿐이라면 꽤 속상하지. 뭐, 어디서 기적이라도 일어나서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 아이는 영원히 날 용서하지 않을 것 이고, 아마도 살아 있는 내내 복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테지. 그리고.... 언젠가는 그 때문에 내 아내가 가슴을 안고 슬퍼할 날 이 올 거라는 것도 알아. 하지만 이렇게 천년을 버티어 살았어도, 나는 아직도 그것을 막을 방법을 모른다. 그리고 천년 만에 만나도 우리는 어제 헤어진 듯 싸워댈 거야.....알아, 분명 그럴 거라고." "그래도 그 때로 돌아가고 싶습니까?" 베이나트가 웃었다. 슬픈 미소다. "그리움이란 말이다, 가장 처절했던 것도 아름답게 보이게 해 준단 다. 모든 행복, 모든 빛나는 것, 모든 사랑하는 것이 그 손닿지 않 는 곳에 있는 듯 착각하게 하지..... 이렇게 오래 살았건만, 그 어 리석은 버릇만은 고칠 수 없구나. 이제 고작 열 몇 살 먹은 너나, 천년에 마흔 몇 살 더한 나나........옛 기억은 세상에서 제일 아 름다운 시절이 되어 남아있지. 사실 거기서 거기인데 말이야........." 그리고 그 눈길이 푸른 깃 새를 향했다. 푸른 깃 새의 눈빛이 이제는 까맣게 가라앉아 있었고, 이 오랜 벗들 의 눈빛을 보며 아킨은 자신이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끼어들 없는 단단한 믿음과 신뢰, 그리고 그것을 더욱 단단히 붙게 하는 오 랜 기억이 그 둘 사이에 있었으며 그것은 천년의 시간이 만들어 낸 훌륭하고 단단한 성채였다. "천년 동안 많은 죽음을 보고, 더 많은 이별을 했지만.......그녀와 내 귀여운 아이만은 잊혀지지 않는다. 그래, 그건 북극성 같은 거다. 언제나 같은 하늘, 같은 자리에서 빛나지.....수천 개의 별이 반짝거 리고, 환한 보름달이 빛을 쏟아내도, 그것만은 그 자리에서 한결같은 빛으로 빛나는 거란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며 계속 앞으로 앞으로 가.....그 대지위에 어떤 험한 것이 있어도, 그것만을 바라보며 걷지. 천년이 지나도, 만년이 지나도......그녀는, 그리고 내 아이는 그 자 리에 있어 나를 인도하겠지." 푸른 새의 날개 짓 소리가 들린다. 천년을 담은 고독의 탄식이 그 안 에 담겨 있었고 그녀를 바라보는 베이나트의 젖은 눈에도 역시나 천 년의 슬픔과 비탄이 담겨있었다. **************************************************************** 작가잡설: .....네, 그 쪽에서도 마누라에 자식까지 있었습니다. -_-;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4장 *************************************************************** [겨울성의 열쇠] 제54장 봄의 폭풍 제252편 봄의 폭풍#1 **************************************************************** 세르네긴이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생각한 것은, 정말 완벽한 귀부인 이라는 것이었다. 섣불리 손댈 수 없을 듯 깊이 있는 도도함으로 빚어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부드러움과 다정함이 섬세하게 스며들어 있었다. 나이는 지긋했으나, 그녀의 몸짓과 눈빛에는 젊은 여자 들에게는 결코 찾아볼 수 없을 듯한 차분함과 우아함이 깃들여 있었 다. 뿐만 아니라 옷차림새도, 장신구를 고르는 안목도, 단 하나도 어긋난 점이 없었다. 화려함을 넘어 우아했고, 화사함을 넘어 찬란하다. "당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청년이군. 테오." 그래서 그런 그녀가 세르네긴에 대해 그렇게 말했을 때, 세르네긴은 조금 당황하기까지 했다. 그 어조만은 분노가 어려 싸늘하고 날카 로웠으니. 의자를 당겨 그녀를 앉히며 테시오스가 말했다. "어떤 의미에서 어울리지 않는 다는 거지?" "차갑고 맑은 물과 질척한 기름처럼, 너무나 과분해 보여." "이런, 이런. 나더러 느끼하다니, 너무 하는 거 아냐?" "농담하지 마. 불쾌하기만 하니까.." "예전에는 좋아했잖아." "지금은 네가 벌거벗고 춤을 추어도 웃지 못하겠어." 테시오스는 웃음을 터뜨렸고, 그것은 오히려 귀부인을 분노케 할만한 것이었다. 세르네긴 역시 별반 듣기 좋지는 않았다. 세르네긴은 이 암롯사의 왕자 테시오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바로 저런 능글맞은 태도 때문이었다. 속 안에 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 지 모르겠고, 대체 뭘 더 꺼내놓을 지는 더욱 더 모르겠다. 끈적끈 적한 기름이 가득한 통처럼, 안에 든 것은 보이지 않고 꺼내려고 손이라도 집어넣으면 오히려 낭패를 본다. 귀부인이 세르네긴에게 말했다. "단 둘이 이야기하고 싶은데......." "세르네긴 포틀러스." "고마워요. 어쨌건 그렇게 해 주세요, 포틀러스." "하지만 부인, 저는 테시오스 왕자님에 대한 신뢰가 그렇게 깊지 못 합니다. 제가 모르는 일은 되도록 없도록 하고 싶습니다." 여자가 웃었다. 정말 아름다운 미소다. 그저 보기 좋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보는 이를 가슴 깊은 곳까지 환하게 밝혀줄만한 웃음이다. 예전에 그의 계모였던 소피아의 미소역시 저랬다. 그러나 그녀는 훨씬 쾌활했고, 그 미소가 가진 환함은 정말 햇살처럼 눈부셨다. 그리고 그녀를 꼭 닮은 유제니아의 웃음도 그랬'었'다. 볼 때마다 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그 웃음을 터뜨리며 두 팔을 벌려줄 때 더 없이 행복할 정도로. "저를 믿어 줄 수는 없을까요?" "죄송합니다." "정말 사적인 이야기 나올 거예요." "그렇다면 부인, 저를 믿어 주십시오. 어떤 사적인 이야기가 나오든,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또, 필요하다면 나가는 즉시 잊 도록 하겠습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는 애원하듯 테시오스를 바라보았다. 테시오스 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 마리. 저 고집쟁이 청년이 저리 말하면 나도 설득할 수 없 고, 협박했다가는 그 협박을 고스란히 내게 돌려줄 위인이지.........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입도 무겁고, 자기가 한 말은 죽더라도 지키는 청년이니." 그렇게 말하고는 테시오스는 목을 슥 그었다.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 고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렇다면 포틀러스, 상관치 않을 테니 제 눈에 뜨이지 않는 곳에 있 어줘요. 부탁드려요. 저는 부끄러운 것이 많은 여자랍니다." 그것만은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세르네긴은 방 안을 둘러보다가, 긴 커튼이 늘어져 있는 창가로 갔다. 날이 흐려서 오래 햇빛을 받아도 괜찮을 듯 했다. 그리고 그렇게 그가 커튼으로 자신의 몸을 가리 고 창문에 등을 붙이자, 부인- 마르타 롤탄 백작부인이 먼저 말을 꺼냈다. "네가 얼마나 잔인한 짓을 했는지, 그리고 내게 얼마나 충격을 줬는 지 알고는 있어?" 최대한 자제하고는 있었지만 목소리는 아주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당장에라도 벌떡 일어나 테시오스의 뺨을 갈겨 버릴 기세였다. "미안." "가증스럽군." 이제야 말로 뺨 갈기는 소리가 들려야 정상이었지만, 그저 나른한 한 숨소리만 들렸을 뿐이다. "하지만 마리, 당신이 손해 볼 일은 없을 거야." "손해? 그게 적당한 표현이라고 생각해? 너무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우선 진정해." "진정이라! 당신이라면, 옛 남자가 찾아와서 당신 아들 목숨이 아깝 다면 협조하라고 말하는데 제 정신이겠어?" "나한테 옛 남자가 있을 턱이 없잖아. 여자라면 모를까." "제발 진지해져, 테오. 실없게 굴지 말고!" 옷자락 끄는 소리가 들렸다. 마르타 롤탄 백작부인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세르네긴은 이제 본격적인 '개인적인 이야기'가 나올 거라 짐작했다. 옛 남자......듣고 있는 세르네긴을 의식해 완곡하게 표현 한 것뿐이다. 연인, 정부...... 적당한 표현은 더 많다. 의외인 건 사실이고, 그런 여자의 아들을 지하 감옥에 가두어 놓고 이런 짓을 벌이는 테시오스는 존경스러울 지경이다. "제발 그만둬 줘....... 부탁할게!" "마리, 당신은 아무런 죄도 없어. 죄라면 너무 점잖은 아들을 뒀다는 것 정도지. 그러니 걱정 마." "테오......제발. 그런 핑계가 있다 하더라도 죄는 죄이고, 나는 왕을 배반할 수 없어! 그렇다고 너를 죽게 놔둘 수도 없으니, 무엇을 하든 난 괴로워.....강요하지 말아줘. 날 괴롭히지 마." "어쩔 수 없어." "내가 네게 무슨 죄를 저질렀니. 그게 대체 무엇이기래 이렇게 날 괴 롭히는 거야." "죄 같은 건 없어. 그냥 일이 꼬인 것뿐이고, 나도 맘 편이 이 짓을 하는 건 아니니까 이해해 주라고." "테오, 너는 속에는 불꽃을 품고 있어도 겉으로는 끔찍할 정도로 냉 정해! 다정하게 웃으면서, 속으로는 상대를 어떻게 찢어 죽이고 말려 죽일까 생각하지.......지금도 마찬가지고." "내가 지금 그리 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내가 당신을 괴롭히고 싶어 안달나 있다고?" 신음소리가 들렸다. 듣기 힘들어하는 것이다.........그녀의 마음이 지금 어떨지 생각해 보려 했지만, 세르네긴으로서는 참으로 난해한 과제 라는 생각에 접어버렸다. 테시오스가 물었다. "그렇다면, 형을 사랑해?"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경악한 건지, 놀란 건지, 정곡을 찔린 건 지......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세르네긴은 그저 잠자코 있을 뿐 이었다. "내가 형을 사랑한다면, 그거야 말로 헛기침 나는 농담일 테지..... 게 다가 하나도 웃기지 않고. 하지만 마리, 당신은 형을 사랑해? 진심 으로, 솔직히 말해줘. 무엇을 말하든 믿을 테니." "그것이 내 진심인지 어떻게 믿을까." "열다섯에 죽어 버린 가엾은 딸아이의 이름을 걸고 답해준다면, 당신 이 무엇을 말하든 진실이겠고.....난 믿어야 할 테지. 당신의 딸인 동시에, 내 딸이기도 하니까." 마르타는 조용히 한숨을 내 쉬었다. 아니, 그것은 한숨이 아니라 탄 식이었다. 다시 아무 말도 없었다. 세르네긴은 창문에 기댄 채 밖을 내다보았 다. 흐린 햇살이 연두색 새싹의 연무가 뿌옇게 어린 이른 봄 숲 위로 흐르고 있었다. 울긋불긋한 봄꽃들이 그 안개 사이에 무리지어 있고, 그 사이로는 은빛 시냇물이 굽이굽이 흐른다....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나 작아서, 멀리 있는 세르네긴에게는 들 리지도 않았다. 다시 아무 말도 없었고,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울먹이는 목소리 로 부인이 무언가 말한다.....하지만 역시 무슨 말인지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서서, 세르네긴은 엉뚱하게도 아킨을 떠 올렸다. 로메 르드에서, 그 열일곱밖에 안되는 소년은 생판 모르는 슈마허를 찾 아와 협상을 벌였다. 어쩐지 그 모습이 지금의 테시오스와 겹쳐진다 . 빈털터리 왕자 주제에, 그것도 암롯사의 왕자이면서, 저 남자는 슈마허를 상대로 협상을 벌여 델 카타롯사의 정예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권한을 한시적으로나마 얻었다. 상식적으로라면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저 담대한 협상력 하나만으로 얻은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 부대는 이 근처, 곧 왕이 지나갈 북대로의 숲에 숨어 당장에라도 덮칠 준비를 하고 있다. 세르네긴은 역시나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적국에 감쪽같이 군대를 옮겨 놓은 것도 그렇고, 그들의 신뢰와 존경까지 무리 없이 얻어내는 것도 그러하다. 그들은 테시오스가 무엇을 명하든 믿고 돌진할 것이고, 테시오스는 그들의 용맹을 승리로 보답해 줄 것이다. 테시오스가 커튼을 열어젖힌 것은 한참이나 뒤였다. 어찌 되었느냐 묻지 않으며 세르네긴은 방 안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마르타 롤탄 백작부인은 의자에 앉아, 초점이 흐린 눈으로 방구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아한 자태를 잃지 않고는 있었지만, 손과 어깨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눈가도 축축해 보인다. 그녀는 세르네긴을 한번 올려다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체념과 절망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가세요, 둘 다." "고마워, 마리." "어서 꺼져버려. 꼴도 보기 싫어." 테시오스는 세르네긴의 팔을 잡고는 방을 나섰다. 세르네긴을 재촉하 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그리 하는 것이다. 입술을 꾹 물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어찌 되었습니까." 세르네긴이 물었지만, 테시오스는 롤탄 백작부인의 객실 문을 닫고 그 문에 이마를 기댔을 뿐이었다. "테시오스 님-" 잠시 테시오스의 눈에 누군가를 향한 분노가 불꽃처럼 치솟았다가 가 라앉았다. "달라진 건 없어." 그리고 이마를 떼고는 등을 돌렸다. "아무것도.....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무언가가 그의 눈가에서 반짝였다. 그는 그것을 애써 아무렇지도 않 게 훔치고는 말했다. "예정대로 한다, 세르네긴." "알겠습니다." **************************************************************** 작가잡설: 너 뭐 하냐, 세냐. -_-;; 그건 그렇고... 지난 번 잡담 덕에 달린 리플들을 읽은 아울은 상처받 았습니다! 아니, 제가 과연 이렇게 고생만 한 아키를 저리 빌빌거리게 하다가 끝내버리고, 유제니아는 휘안에게 시집보내고, 세냐를 슈마허에게 시집.....패스, 여튼, 그럴 악독한 작가로 보였습니까? ...'네'라는 리플이 천개이상이면, 아울은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끝나 는 그날까지 연참을 하겠습니다--! 에잇!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4장 ************************************************************** [겨울성의 열쇠] 제253편 봄의 폭풍#2 *************************************************************** 아무리 낮과 밤이 이상한 곳이라 할지라도, 달 만큼은 바깥세상과 전 혀 다르지 않았다. 똑같이 부풀어 오르고 똑같이 이지러진다. 보름이 되자, 아킨은 숲으로 나가지 않고 궁의 정원 가운데에 앉아 달이 뜨기를 기다렸다. 지에나의 배려인지(단지 귀찮아서, 라는 이유가 더욱 그럴듯하지만) 그날은 평범하게 해가 뜨고 졌다. 땅거미가 깔리며 빛은 어둠에 젖어 사라졌고, 어두워지면 어두워질수록 사위는 더욱 고요해져만 간다. 아킨은 어둠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못을 둘러싼 낮은 벽에 등을 기대고는 기다렸다. 어찌될까, 예전과 똑같을까........아니면 다를까. 미쳐 날뛰지 않는다면 그것만도 다행이고, 정말 일이 너무나 잘 되었다면 아예 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터무니없는 기대이지만, 그 래도 아킨은 아주 어렸을 때 바래왔던 헛된 기대를 조금은 희망을 가지고 바라게 되었다. 그러나 가슴이 두근, 하고 크게 뛰자 아킨은 그 기대를 접었다. 그대 로네, 젠장. 다시 두근- 심장이 놀란 듯 펄떡 뛰어 올랐다. 피가 끓어오르듯 뜨거워지며, 이마와 목덜미에 땀이 맺혀갔다. 예전 기억이 난다. 아주 어렸을 때, 그 변화가 일어날 때 자켄이 옆 에 머물며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떠는 몸을 쓸어 주었다. 그리고 그가 옛 숲의 경구를 읊조리며 달래주면, 아킨은 조용히 바닥에 몸 을 붙이고는 변화가 끝나기를 기다릴 수 있었다. '지금 어디에 있지?' 당연히 어둠 숲에 있을 테지...... 그곳에서 기다려 주기로 했으니까. 잘 지낼까? 그러기를 바래야지............. 아킨은 온 몸이 욱신거리는 통증을 느끼면서도 웃었다.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았다......그러나 갑자기 치솟는 통증에 이를 악물어야 했다. "큿-!" 완전히 변해 미쳐 날뛸 때는 차라리 괜찮다. 아무 생각도 없으니 까........그러나 정말 참을 수 없고 두려운 것은 그 직전에 몸을 갈 가리 찢는 이 지독한 고통이었다. 짐승 몸에서 인간 몸으로 돌아올 때는 쉬운데, 인간 몸에서 짐승이 될 때는 온 몸이 다 찢어지는 것만 같다. 발톱이 솟을 때는 정말 속에서 그 단단한 것이 살을 찢고 나오는 듯 하다. 뼈를 잡아 뽑아 다시 맞추는 듯 지독한 고통에, 온 몸의 살도 찢어지는 것만 같다. 이가 솟을 때는 정말 턱이 같이 바스러지는 것만 같다. "흐억-!" 아킨은 신음을 토해내며 고개를 들었다. 눈 가득 달빛이 쏟아져 들어 왔다. 은빛의 달이, 언제나 냉정하게 그를 주시하며 그 차가운 빛을 쏘아 던지는 달이. 달은 높이 솟은 협곡 사이, 그 협곡의 틈으로 보이는 넓게 펼쳐져 푸 른빛을 퉁겨내는 천개의 호수 위에 떠 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높이 세워진 커다란 기둥의 윤곽위로 달빛이 젖어들고 있었다. 협곡의 틈을 따라 궁으로 이어지는 하얀 길도 빛을 뿜어낸다. 순간에 울부짖음이 터져 올랐다. 크르렁--! 온 궁과 계곡 깊은 곳으 로 그 커다란 울부짖음이 굽이굽이 흘러갔다. 네 발에 힘이 들어 가며, 신선하고 뜨거운 피가 용솟음쳤다. 모든 것이 터져나가는 것 같다. 몸을 일으켰다. 부풀어 오르는 털 위로 달빛이 미끄러지고, 점점 크게 확장되는 황금색 눈은 그보다 더욱 환하게 빛난다. 그리고 백지- 아킨은 그렇게 생각했다. 머릿속은 눈 보다, 달빛보다 하얗기만 했다. 미친 듯이 끓어오르던 광기도, 피를 찾아 사방을 훑어대던 갈망도 없다. 그냥, 눈과 달빛 으로 빚은 인형처럼 멍할 뿐이다. 아킨은 등지고 있는 못을 돌아 보았다. 그리고 여전히 멍한 채로 그 못의 잔잔한 수면을 내려다보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괴물의 몸일 텐데, 은빛 털과 발톱, 그리고 거대한 이와 시뻘건 잇몸을 드러내며 사납게 으르렁대는 괴물일텐데 수면이 비추어 내는 것은 아킨이었다. 은빛 머리카락과 금색 눈을 가진 소년이, 못의 난간을 짚고 그 수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킨은 가까이 보기 위해 고개를 숙여 그 수면으로 코끝을 가져갔다. 그러자 소년의 얼굴도 더욱 가까워져왔다. 그런데 마주보는 곳에서 베이나트의 그림자가 불쑥 솟아올랐다. 그는 아킨이 보는 것과 같 은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아킨이 고개를 들자 역시 고개를 들어 마주보았다. "괜찮구나." 그러나 그에 답하여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냥 알아보겠다는 듯 그릉 - 하고 울음소리를 냈을 뿐이다. 베이나트의 어깨에 지에나의 푸른 새가 앉혀져 있었다. 멀리서 보면 참 기묘한 광경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키 큰 마법사에, 커다란 늑대 한 마리에, 말하는 새까지 있으니 말이다. 베이나트가 고개를 돌려 협곡 쪽을 보았다. 달빛에 젖어드는 협곡 너 머로 천개의 호수와, 그 호수를 감싼 높은 산과 숲이 보였다. 베이 나트는 그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곳 중 하나에 지에나가 성배를 숨겨 놓았단다. 너라면 지금 그것 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을 거야." 그의 말에 따라 아킨은 그곳을 보았지만, 특별한 것은 눈에 뜨이지 않았다. 베이나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지금 당장 찾아내라는 말은 아니란다. 다음 보름이 오면 한 번 더 시도해 보려무나. 그리고 언젠가는 찾을 수 있을 테니, 서둘지는 말자. 천천히 해도 되는 일이니까." 그러나 아킨은 한번 시도는 해 볼 생각이었다. 그래서 정원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그 수백 개의 수면을 응시했다. 마법을 쓸 수는 있을까? 그리 생각하며 어둠이 고여 있는 곳을 바라보자, 그곳에서 검은 그림자가 제비처럼 빠르고 날카로이 솟구쳐 올라 호수들 쪽 으로 날아갔다. "이런!" 베이나트가 짧게 소리쳤다. 그런데 수면 위를 가로지르던 그림자가 부메랑처럼 둥글게 방향을 틀 더니 되돌아 왔다. 바람을 찢을 듯 빠르게 날아온 그것은 위로 솟 구쳤다가, 다시 내리박히듯 아킨 쪽으로 날아왔다. "-!" 아킨은 비켜섰다. 베이나트도 행여나 싶어서 소매를 걷으며 손을 들 었다. 그러나 그림자는 그들을 피해 곧장 못 안으로 내리 박혔다. 첨벙--! 바위라도 던진 듯, 물이 온통 넘쳐 밖으로 쏟아졌다. 얼 음처럼 차가운 물이 발을 적셨다. 그대로 얼어붙을 듯 물은 계속 차가워져갔다. "지엔, 뭐하려는 거야!" 베이나트가 외쳤다. 푸른 새의 눈동자가 빛나며, 빛이 물위로 어리며 흔들렸다. 새- 즉, 지에나가 외쳤다. "내가 하는 게 아니야! 저 그림자가 하는 거지." 그리고 지에나가 나타났다. 그녀의 푸른 옷자락이 펄럭이며 수면을 휙 쓸었다. 그러나 그녀가 손쓰기도 전에, 물이 시커멓게 물들기 시작했다. 연푸른 달빛이 까만 먹물에 젖는 듯 사라지며 아킨 쪽으 로 그 어둠이 돌진해 왔다. 베이나트가 손을 휘둘렀다. 세찬 바람 이 일며, 그 어둠이 돌진하는 물이 칼로 베인 듯 갈라졌다. 방향이 막힌 물이 위로 솟구쳐 올라, 살아 있는 뱀처럼 휘감겨 올라갔다 . 베이나트의 손이 수평으로 휙 그어졌다. 그러자, 그 물길이 반으로 뚝 잘려 아래로 와르르 쏟아졌다. 갑자기 뭐가 터지는 듯한 엄청난 소리가 쿠릉-하고 들렸다. 못 쪽에 서 들리는 것이다. 아킨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곳을 돌아보았다. 못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젓개로 젓는 듯, 빠르게 돌 고 있었다. 어지러웠다. 현기증이 일어나, 그대로 발의 힘이 풀리며 바닥으로 풀썩 쓰러졌다. 혼란했다. 어질어질한 눈에, 소용돌이치는 물이 더욱 어지럽게 보였 다. 그리고 그것이 미친 듯이 빨라지는 순간에, 그 안쪽에서 차갑고 검은 것이 확 치솟아 아킨을 덮쳤다. "아키!" 베이나트가 외쳤다. 지에나의 손이 아킨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천막 안이 보였다. 등불이 환하게 타오르며 지도와 검을 비추고 있었다. 그 옆에는 핏빛 포도주가 담긴 포도주가 놓여 있었고, 그 위로도 빛이 흔들린다. 그러다 바람이 불면, 그림자가 한꺼번에 솟구치며 흔들리다 줄어들 고 가라앉는다. 잔 쪽으로 완전 무장한 갑주에 덮인 손이 다가오더 니, 그 잔을 들었다. 그러자 그 잔 앞에 놓여 있는 십 수개의 잔 위로도 같은 손이 뻗어나가 각자의 잔을 움켜잡았다. 시야가 넓지 않아서 많은 것을 볼 수는 없었다. 마치 작은 새가 되어 이리 저리 날아다니며 보는 듯 어지럽기만 했다. 머리가 깨어질 것만 같다. 가장 먼저 잔을 쥐었던 손이 위로 올라갔다. 그 손을 따라 다른 잔들 이 따라 오르며, 울림이 큰 목소리로 일제히 외쳤다. -승리를! 순간에 머리가 쿡 찔린 것만 같았다. 욕지기가 확 치솟아 오르며 다시 현기증이 일었다. 그리고 그 소용돌 이 속에 뒤섞이는 듯 어지러운 중에, 첫 번째 잔을 쥔 남자가 그것을 입술 가까이 가져갔다. 은빛 머리카락위로 빛이 부서진다. 차가운 초록색 눈동자가 주변을 훑는다. 갑주에 덮인 넓은 어깨가 몸을 일으킨다. 그가 바라보는 곳에 장미와 해룡의 깃발이 펄럭였다. 아버지? -기습한다. 달려 나가, 어둠 속에 숨어 우리 목을 노리는 가엾은 들 개들의 심장에 암롯사의 창을 박아라. 아버지다운 목소리였다. 반드시 승리한다, 아니 승리 이외에 무엇이 더 있단 말인가- 그리고 천막이 걷히며, 하얀 구름이 흐르는 하늘이 드러났다. 보름달이었다, 진한 보름달- 오늘 일어나는 일이다, 아니 바로 지금! 어떻게 된 일인지 생각해 보 려 했지만, 삐그덕 거리는 머릿속을 억지로 움직이려 하자 순간 아 찔해지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작가잡설: 바쁜 일이 대강 끝나고 나니...뭔가 허탈하네요. -_-;; 이제 좀 놀아보자 하다가도, 아니야, 일 해야 하는 거 아닌가...하는 생각이 문득 들고, 일 하려고 하다 보면 '그 동안 신나게 했는데 또 하면 내 컨디 션에 문제가 생길 거야.' 하는 생각도 들고. -_-;; 동생이 저더러 '편집증 환자. -_-' 하던데......90%의 과장은 있을 지라도 아예 뜬금없는 소리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_-;;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4장 *************************************************************** [겨울성의 열쇠] 제254편 봄의 폭풍#3 **************************************************************** 어디선가 피비린내가 풍겨왔고, 아킨은 다시 가물가물 어둠을 더듬으 며 정신을 차리려 했다. 그러나 열병을 앓는 듯 어지럽고 머리가 무거워 도무지 제대로 뭘 인식할 수가 없었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 르겠다. 꿈 치고는 지나치게 생생하고, 현실이라기에는 아무런 감각 도 느껴지지 않는다. 언뜻 언뜻 함성소리가 웅웅 머리를 울리며 들려왔다. 거칠게 비명을 지르는 소리도 들려오고, 병장기들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온다. 비린내가 역겨울 정도로 진하게 풍겨 올라왔다. 어디서 뭐가 번쩍이는 듯싶어 돌아보니, 그건 하얀 깃발이 달빛에 반사된 것이었다. 암롯사의 깃발이다. 순간, 그 위로 하얀 빛이 번 쩍이더니 벼락처럼 그 깃발을 갈랐다. 기수가 검을 뽑아드는 것이 어둠 속에서 보였다. 하얀 빛이 그 기수의 가슴을 퍽 꿰뚫었다. 피 가 왈칵 솟구친다. 다시 어지러워졌다. 머리가 휭휭 돌 듯 주변이 엄청난 속도로 휭휭 돌았다. 토해버릴 것만 같다. 피를 쏟으며 누군가가 쓰러지고, 목이 뎅겅 잘리며 위로 솟구쳐 오른 다. 그리고 다시 그 흰빛이 번쩍였다. 벼락 치듯 내리 꽂히는 차가운 빛- 바로 앞에 있던 남자의 목이 꿰뚫렸다. 피가 뿜어 오르며, 그 목을 꿰뚫고 창끝이 튀어 나왔다. 그리고 창은 털어내듯 남자의 시 체를 던져 버리고는, 세차게 허공을 찢으며 돌았다. 흰 빛이 다시 번쩍였다. 저것이었다, 저 창이다- 퍼덕이는 날개처럼, 눈 깜빡이듯 빠르게 움 직이는 그건- 그런데 창을 휘두르는 남자는 갑옷도 입고 있지 않았다. 새카만 옷 에, 얼굴 역시 두건으로 가리고 눈만 내 놓은 채 창을 비껴들었다가 무시무시한 힘과 속도로 적을 향해 창을 휘둘렀다. 찌르고, 후려 치고- 피가 튀었다. 뼈가 우드득 바스러지고, 비명이 터져 오른다. 그리고 그 검은 기사는 다른 한명을 후려치고는 등을 돌렸다. 어 깨가 주춤 떨리는 것이 보인다. 그가 바라보는 곳, 달빛 환하게 비추는 그곳에 흰 갑옷의 남자가 말 에 타고 있었다. 원래는 은처럼 하얗기만 했을 그 갑옷에는 핏방울이 튀어 있었고, 그 의 검도 피에 젖어 있었다. 가슴에 새겨진 장미와 해룡 문장이 달 빛에 검게 드러났다. 빛나는 갑옷의 가슴위에서, 그것은 화인처럼 시커멓게 보인다. 흰 갑옷의 기사는 투구를 벗어 던졌다. 은빛 머 리카락이 달빛에 쏟아졌다. 사이러스였다. -혼자서 암롯사의 기사를 전멸 시킬 셈이냐. 아버지다운 목소리였다. 전쟁에서도, 저리 냉정하고 오만한 것은 정 말 아버지답다. 그러자 상대 검은 기사가 머리의 두건을 벗어던졌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빠르고 단호한 동작이었다. 짧은 검은머리가 흩어졌다. 날카로운 금녹색 눈동자가 달빛에 드러나 며, 기이한 빛으로 반짝였다. 분명 냉정한 표정이었으나, 흐릿한 열 기만은 감출 수 없었다. 무엇에 들뜬 것인지....전장 자체에, 아니면 적에? 모를 일이다. -세르네긴 포틀러스 입니다, 폐하. 사이러스가 웃었다. 그것 역시 지독히도 사이러스 다운 표정이었다. 그 칼이 허공을 베어 올리며 올라와 세르네긴의 이마를 향했다. 세르네긴 역시 창을 고쳐 잡았다. -에크롯사의 용기사가 왜 이곳에 있는 거지? -대가를 받기 위해 왔습니다. 저는 분명 당사자에게 요구하였으나, 그 당사자는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니 제 힘으로 받아가는 수밖에 없지요. 사이러스는 그가 원하는 대가가 무엇에 대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미소가 더욱 차가워지는 것을 보니, 분명 알고 있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즐기고 있었다. 진작 왔어야지! 하고 외치듯. 달빛, 어둠도 빛도 아닌 그 푸릇하고 냉혹하며 기이한 빛이 머리카락 과 이마에 쏟아지며 오싹한 모습을 드러내게 했다. 검이 허공을 가 른다. 챙캉-! 하얀 빛이 번쩍였다. 사이러스의 검과 세르네긴의 창 이 부딪혔다. 창이 허리를 노리며 휘감겨 오자, 사이러스의 방패가 그 검을 막았다. 쩌컹--! 천둥 같은 소리다. 사이러스의 몸이 주춤 옆으로 물러나고, 방패가 움푹 패여 나갔다. 그제야 사이러스의 눈빛이 변했다. 흔들린 것이 아니라, 그 역시 세르네긴과 같은 열기에 들뜨고 있었다. 세르네긴이 창을 돌렸다가 세차게 휘둘렀다. 사이러스가 검으로 창을 막고는, 빠르게 찔러 넣었다. 세르네긴의 창이 돌아와 검을 막았다. 챙캉, 검이 튀어났다. 창이 방향을 틀더니, 오른쪽 허리의 허공을 후려치며 내리꽂혀왔다. 그엉-- 공기가 같이 쪼개지는 듯 하다. 사이러스가 허리를 틀어 그 힘을 방패로 막았다. 챙캉--! 움푹 팼던 방패가 한 번 더 울리며, 우득- 소리가 어디선가 들렸다. 사 이러스의 얼굴이 변했다. 방패를 쥔 팔에 이상이 온 것이다. 사이 러스는 망설임 없이 방패를 내 던지고는 검만을 잡았다. 세르네긴의 눈이 빛났다. -죽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세르네긴이 창을 휘둘렀다. 다시 흰 빛이 크게 번쩍였다. -죽이는 것조차 망설여질 정도로 증오하니까--! 세르네긴의 창이 내리꽂혀왔다. 사이러스가 목을 틀어 그 공격을 피 했다. 순간에 세르네긴의 창이 방향을 틀어, 마치 구부러지는 듯 휘감겨 사이러스를 내리쳤다. 흰 빛이 다시 번쩍이며 사이러스의 눈 이 커졌다. 검을 들어 그것을 막는 순간에, 검이 벼락에 맞은 듯 깨어졌다. 모든 것을 직감하면서도 사이러스의 눈빛은 열기에 차 있었다. 그다 운 열기와 오만함, 지금 앞에 닥친 것이 패배라 할지도 받아들이는 그 차가운 오만함! 거대한 바위가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신의 조각 같은, 그 위대한 오 만함으로 차 있는 남자가 쓰러지려 하고 있었다. 암롯사의 장미와 해룡이 찢기려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사이러스의 눈빛은 들뜬 듯한 열기에 차 있었다. 오만함에 이글거리고, 당당함으로 직시한다. 너무나 사이러스답게. 흰 빛이 마지막으로 번쩍였다. 피가 튄다. 현기증이 인다. 몸의 상태 와는 상관없이, 그 흰 빛에 정통으로 맞은 충격에 아찔해진다. 맙소사. 맙소사, 아버지--! "!" 휘안토스는 잠에서 깨어났다. 아니, 들러붙는 것을 떼어내어 간신히 벗어난 거라 말하는 편이 나으리라. 밖에서 비가 쏟아지고, 번개가 번쩍이며 방 안으로 푸릇한 빛이 확 번져들어 도깨비장난처럼 진 한 음영이 솟아나왔다가는 사라진다. 휘안토스는 가슴을 움켜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둥이 쿠르릉- 울 렸다. 그리고 그 울림과 함께, 심장이 비명이라도 지르듯 떨린다. 쿵 쿵 뛰어 올랐다. 카펫 덮인 바닥을 밟는 휘안토스는 쓰러지듯 무릎 을 꿇었다. 숨소리가 계속 거칠었다. 심장은 펄떡 펄떡 뛰어오른다. 온 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아냐-! 휘안토스는 가슴을 움켜쥐며 토해내듯 외쳤지만, 목이 막힌 듯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무언가가 등과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것만 같다. 집어삼키려고 등 뒤에까지 와 있는 듯 하다. 다시 쿠르르르릉- 천둥이 울렸다. 빗줄기가 와르르 쏟아져, 창문에서 는 폭포처럼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휘안토스는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 비틀거리면서도, 그러 면서도 일어나 침대 기둥에 등을 기댔다. 그제야 휘안토스는 자신이 떨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온 몸을 떨고 있었다. 문득 거울을 보니, 그 안에 믿을 수 없는 얼굴의 자신이 서 있었다. 휘안토스는 얼굴로 손을 가져가, 그대로 꾹 짓눌렀다. 그대로 잡아 뜯어 버리 고 싶을 지경이다. 꿈이야, 이건- 휘안토스는 허탈하게 웃었다. 정말 꿈이라 믿고 싶은데, 이것이 꿈이 아니란 것을 아는 자신은 더 싫었다. 가정 하나만 하면, 다른 것은 참 쉽게도 나오는 결론. 그리고 그 결론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며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눈빛, 그 서늘한 금녹색 눈동자- 마치 휘안을 노려보듯 사이러스를 바라보던 그 눈 동자는 너무도 선명하다. 휘안토스는 문을 박차고 나갔다. 호위병들이 그를 불렀지만, 상관치 않으며 외쳤다. "따라 오지 마!" 가슴 안에 불덩어리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를 말려 죽일 듯 뜨거운 불덩어리가! 빗줄기 소리는 온 땅을 후벼 팔 듯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봄의 폭 풍, 채 심이 박히지도 못한 여린 새싹과 빛깔 옅은 꽃봉오리를 후 려치고 뽑고 쓸어버릴 그런 폭풍이었다. **************************************************************** 작가잡설: 저는 결백하지 않습니다. 아키는 끝날 때까지 저리 빌빌대 기만 할 뿐이고, 휘안은 유즈에게 시집가고, 슈마허는 세냐의 낭군 님이 됩니다......................... (현실도피중) p.s 배신자............... (***님, ****님, ***님, ***양!)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4장 **************************************************************** [겨울성의 열쇠] 제255편 봄의 폭풍#4 ***************************************************************** 잠이 오지 않아 계속 뒤척거리던 유제니아는, 침대에 앉아 창밖에 휘 몰아치는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푸릇한 빛이 확 터지며 방 깊은 곳까지 환하게 밝혔다가는 사라진다. 사납게 부는 바람 소리에, 후두두둑 - 빗줄기 소리도 요란하다. 봄 폭풍이다. 아마도 내일 아침 정원에는 겨우 피어났던 꽃봉오리들 중 약한 것들이 진흙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짓밟혀 있을 테지. 진창에 흰 꽃잎들이 뒹굴 거야. 그런데 천둥이 쿠릉 울리는 순간에 등 뒤에서 찬바람이 휙 불어왔다. 목덜미에 닿아오는 그 바람은 정말 오싹했다. "누구...." 유제니아는 누가 왔나 싶어 뒤돌아보았다. 아니, 돌아보고 싶었다. 그 러나 돌아서 들어온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어깨가 붙잡혀 침대에 짓눌렸다. 놀라 비명을 지르려다가, 그대로 숨 막힌 듯 숨 을 토해내야 했다. 이글거리는 눈동자와, 거친 숨소리와 마주쳤다. 길고 서늘한 머리카락이 이마와 볼을 스치며 쏟아졌다. "휘안토스.....?" 유제니아는 그렇게 멍하니 물어보고 말았다. 휘안토스였다. 그런데 평소와는 너무나 달랐다. 언제나 보이던 그 냉 정하고 차분한 모습이 아니라, 흐트러지고 흔들리고 타오르고 있 었다. 그러나 그것이 더욱 두렵게 다가왔다. 몸이 떨리지도 않았다. 그냥 얼어붙은 듯 꿈쩍도 할 수 없을 뿐이다. 손놓으라는 말조차 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상대가 있는 곳에 무방비 상태로 있었는지 깨달았다. 마음만 먹는 다면 얼마든지, 내키는 대로 짓밟고도 아무 일도 아니 라는 듯 탈탈 털고 일어날 그런 사람이 바로 옆에 있었던 것이다. 고개를 돌리려 하자 그가 그 턱을 잡아 자신을 보게 했다. ".......왜.......온 거에요?" 간신히 말한 것이다. 혹시 세냐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아니 면 그가 무슨 일이라도 한 건가..... 그것이 없는 힘이나마 보여주게 한 것이다. 차라리 그냥 기절해 버리면 더 좋으련만- 순간 얇은 잠옷이 북 찢겨나갔다. 으르렁거리는 듯한 호흡이 목덜미 를 덮치고, 단단한 몸이 그녀를 짓눌렀다. 그리고 비명을 지를 틈도, 울부짖을 틈도, 저항할 틈도 없었다. 행여나 이런 일이 생기면 반드시 어찌 해야지, 하고 다짐하고 다짐했던 것도 아무 소용없게 되었다. 난폭하고 강한 힘과, 망설임 없는 잔인함 앞에서는 하잘 것 없었다. 정말 순식간에 그녀는 그의 손아귀에 붙잡혀 있었고, 짓눌려 눈만 크게 뜬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휘안토스의 젖은 손이 목덜미를 더듬으며 무언가를 찾았다. 드디어 그 손이 목에 걸린 반지에 닿자, 그는 그것을 움켜쥐고는 잡아 뜯 었다. 금줄에 목이 쓸리며 뜨끔했다. 그 안으로 땀이 스며들어 쓰 라려왔다. 그리고 펄펄 끓는 듯 거친 숨소리에 뒤섞여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아니, 미칠 수만 있으면 좋겠 다. 그가 터뜨리는 뜨거운 숨에 같이 녹아버릴 것만 같다. "......그가 복수한다고 했던가....?" 그 말에 유제니아는 움찔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듣고 싶었지 만, 그의 손길이 그녀의 귓불을 스치자 몸을 더 꽉 움츠려야 했다. "하지만 복수해서는 안 되는 상대에게 복수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 다." 그 말에, 유제니아는 이제 곧 어떤 일이 닥칠 거라 너무나 잘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결코 피할 수도 없다는 것도. 너무나 잔인하지만, 너무나 현실적이었다. 세찬 비바람 소리가 들린 다. 천둥번개 치는 하늘, 폭풍우치며 으르렁대는 하늘- 그것이 뒤 죽박죽 뒤섞였다. 누군가를 불렀던 것 같은데, 천둥소리에 묻혀 유 제니아 자신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정신 드나?" 아킨은 잠시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하얀 천 장 구석구석 발그스레한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러나 눈썹 끝에 닿는 아침 햇살도 따가울 정도였다. 아킨은 손을 펼쳐 보았다. 인간 의 손이었다. 아킨은 몸을 뒤척이다가 간신히 일어났다. 머리에 납덩이라도 가득 들어 덜컹대는 것 같다. 온 몸이 욱신대다가 끊어질 것만 같다. 베이나트는 침대 옆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직도 그의 어깨에 는 지에나의 푸른 새가 앉아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줄 수 있겠니?" "아버지....께 일이 생겼습니다." 아킨은 머리가 왕왕대는 것을 느끼며 그렇게 답했다. 그 자신이 말하 고 있는 것임에도, 정말 그렇게 말하고 있는 지조차 모를 정도였다. 예전에는 날이 새어 원래의 몸으로 돌아오면 언제나 풋사과를 베 어 무는 듯 상쾌하기만 했다. 그런데 지금은 밤새도록 술이라도 마신 듯 굉장하다. 푸른 새가 말했다. "지난번에 준 약." 아킨은 가슴을 뒤지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 은 완전한 알몸이었다. 베이나트가 옷 속에서 붉은 액체가 담긴 작은 병을 꺼내어 건네주었다. "지에나 것만은 못할 테지만, 안 먹는 것보다 나을 거다." 아킨은 그것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그러나 거의 차도가 없자, 그 한 병을 다 털어 넣었다. 베이나트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너무 하는 거 아니냐. 그렇게 많이 안 먹어도 된다고." "어쨌건 정신 차리는 게 중요해서요. 그런데......무슨 일이 있었습니 까?" "별 일 없었다. 검은 그림자가 날뛰다가 너를 덮쳤고, 너는 졸도했고, 졸도한 네가 변신하기를 기다려 여기까지 끌고 온 게지." ".....옷.....은요?" "아키야, 너는 사내놈들 끼리 안 따져도 되는 것까지 무척 따지더 라........그냥 끌어다가 여기다 눕혀 놓는 것만도 힘든데 옷까지 찾 아서 곱게 입혀주리?" "그래도 지에나 님은 여자 분이지 않습니까." "걱정 말거라. 지에나에게 새카맣게 어린 녀석 알몸 훔쳐보면서 좋아 하는 취미 따위는 없으니까." 아킨은 베이나트를 한방 갈겨 버리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어쨌건 묻는 거에나 답해다오. 무슨 일인 거냐?" "그러니까......." 아킨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그러나 방금 전보다 머리가 훨씬 맑아진 것도 사실이었다. "카람파의 노예들은 아시죠?" "설마, 너 아직 정신 못 차렸냐?" "그냥 확인하는 것뿐이지, 베이나트 당신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닙니 다. 카람파의 노예들이 알려 왔습니다. 아버지께 일이 생겼고, 그 일이 아버지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또 다른 주인인 자에게 급히 알린 겁니다." 베이나트의 눈썹이 치솟아 올랐다. "너 한테만?" "물론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그들이 인정한 후계자인 휘안토스에게 만 알리려 했을 테지만, 제가 그들 중 하나를 가지고 있기에 제게도 전해진 거죠. 그래서 그리 난폭해 진 겁니다." "무슨 말하는 지 잘 알겠구나. 그래서 네 아버지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지?" "아무래도......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포로가 되신 것 같습니다. 델 카 타롯사 쪽.....이겠지요, 아마도. 그러나 돌아가신 건 절대 아닙니다. 제 몸이 그대로이니까요." 워낙에 순식간에 지나가서 잘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세르네긴 이 사이러스를 공격하고 사이러스가 그에 맞서다가 마지막 공격을 받은 것 까지는 대강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머릿속이 먹물처럼 까맣 게 되었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그 뒤로 무언가 다른 꿈을 꾼 것도 같은데, 그것은 기분이 아주 나쁘다는 것 정도밖에는 기억나 지 않았다. "왕이 포로가 되었다면, 암롯사로서는 달가운 상황이 아니겠구나." "아마도 휘안에게 항복이나 몸값에 대한 협상이 들어갈 것입니다. 휘 안의 입장으로서는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서 둘 다 받아들여야 할 겁니다. 휘안은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았습니다.........혼자서 아버지 의 빈자리 뒤에 밀려드는 혼란을 감당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참 담담하게 말하는 구나, 너........그런데 혹시 구하러 갈 생각이냐?" "제가 왜요?" ".........." 아킨을 바라보는 베이나트의 표정을 해석하자면, '참으로 존경스러운 집안이다!' 였다. 그의 어깨에 앉은 푸른 새의 눈 역시 대강 비슷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베이나트 자신이 사이러스 왕에게 가진 감정이 악의의 바닥 중에 바닥에 위치하기에, 그렇게 크게 가엾게 여기지는 않았다. "네 형을 도울 생각은?" "미쳤습니까." "그렇다고 델 카타롯사를 도울 생각 역시 없겠지?"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네 결론은?" "알아서 하게 내 버려 둘 생각입니다. 또, 제 도움 같은 것은 바라지 도 않을 테고 기대하지는 더더욱 않을 겁니다. 그리고 저 역시 원 하지도 않는 사람들을 위해 수고해 줄 생각은, 특히나 제 아버지와 형을 위해 수고해 줄 생각은 더더욱 없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최 선은 제 손으로 제 아버지와 형의 가슴에 칼을 찌르지 않는 것뿐이 고, 그건 제 인생을 제 손으로 망칠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지금 일은 저하고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베이나트도 지에나도 이제 더 이상 그 문제로 머리 쓸 일 없을 거라 판단했다. (정상적인 집안에 정상적인 왕자였다면 당장에 이 눈의 궁전을 박차고 나가 형을 도와 아버지를 구할 거라 했을 테고, 도와 줄 용의도 있으며, 그리 하지 않는 다면 엉덩이라도 걷어찼을 것이다.) 그런데 아킨이 말했다. "단-" "단?" "딱 한사람 신경 써야 하는 사람이 암롯사에 있습니다." "누구를 말하는 거냐?" "루첼과 케올레스 님입니다." 그 이름중 하나를 기억하고 있는 베이나트가 눈을 깜빡였다. 지에나 (새)의 부리가 그게 누구냐고 묻는 듯 그를 콕콕 찍자, 베이나트는 그 부리를 손끝으로 집었다. "케올레스 님은 당연하고, 그란셔스 역시 아직도 암롯사에 있고, 아마 도 둘 다 악튤런의 벼락이 명중할 확률 이 가장 높은 곳에 있을 겁 니다.......암롯사가 위험해진다면 그들도 위험해 집니다. 그러니 잠시 나가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한 사람은 제 할아버지 같은 분이고, 다른 사람은 제 친구이자 같은 스승 밑에서 배운 동문이기도 합니다." 베이나트는 지에나(새)를 보았고, 지에나(새)는 슬쩍 그 눈길을 피하 며 말했다. "잠시 나가는 건 허락해 주지. 하지만 돌아오는 건 잊지 말아라. 되도 록 빠른 시일 내에." "반드시 그리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지에나가 고개를 위로 쳐들었다, "아아, 그래. 아주 좋은 방법이 있었군. 빠르고 확실하게 일을 끝낼 수 있는 방법이." 갑자기 베이나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거절하거라, 아키야."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쨌건 거절하라니까--!" 지에나는 베이나트의 얼굴에 날개를 얹어 뒤로 슥 밀어버리고는 말했 다. "현존하는 최고의 아이템이야. 절대 후회 없을 걸." "바람 넣지 마아! 그 아이템인지 폭탄인지 하는 녀석은, 적이건 아군 이건 공평하게 휩쓸어 바다에 처박을 놈이잖아--! 차라리 네가 가, 지엔!" "귀찮아." "그 게으른 버릇 좀 고쳐라. 젠장 할, 팔로커스가 너한테 물든 거라니 까." "내가 그놈한테 물든 거야." "말이나 좀 되는 소리를 해! 그놈은 뭐든 너한테 배우는 것으로 유명 했잖아!" 아킨은 둘 다 무시해 버리고 싶어졌다. **************************************************************** 작가잡설: 베이나트가 건네준 것은 컨디션~~ 아니면 지에나는 마나포션 베이나트는 힐링포션.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5장 ************************************************************** [겨울성의 열쇠] 제55장 바다 거품, 하얀 소용돌이 제256편 바다 거품, 하얀 소용돌이#1 *************************************************************** 켈브리안은 이제 검은 베일만 쓰면 완벽한 수녀가 될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이리 말하면 그녀를 아는 모든 이들이 자비의 티피안느를 부르며 신음을 삼킨다 할지라도, 어쨌건 생활방식은 완벽한 수녀 의 그것이다(그녀의 기준에서는). 하루 종일 마주보는 얼굴은 어머니와 동생, 그리고 그의 '아내'로 끝 이다. 식사는 무슨 침묵회에 나오기라도 한 듯 한마디도 하지 않는 몸서리쳐지는 가운데 했고, 이러다 보니 결국에는 입맛이 딱 떨 어져서 새 모이 비슷하게 먹게 되었다. 방 밖에 나가는 것은 아침과 오후 산책 시간 정도, 그리고 그나마도 등골 따갑게 감시하는 시녀 들 틈바구니. 그들 틈에 있으면 전신무장한 휴로페 수도사들 사이에 끼어 있는 기분이다. 예전부터 이랬다면 이해라도 하겠지만, 어머니는 일주일 전에 갑작스 레 압박의 수위를 확 높여 버렸다. 그냥 저냥 대강 포기하면 버틸 수 있던 수준에서, 완전히 숨쉴 틈도 없이 압박하는 수준이 되어 버 린 것이다. 그리고 그 상태로 일주일이 되자, 이제는 숨 막힐 듯한 답답함과 대체 왜 이러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최고치에 다다라 있었 다(좀 더 오래간다면 펑 터져 버릴지도). '아아, 어머니. 도망 안 쳐요.......' 하는 말이 하루에도 수십 번 머릿속을 현기증 나게 떠돌았지만 아무 말도 못했다. 어머니는 만나주지도 않았고, 만나러 가면 한 시간 전만 해도 펄펄 뛰던 사람이 갑자기 앓아누워 인사불성이 되곤 했다 . 그러나 도망쳐 봤자 갈 곳도 없고, 갈 만한 곳은 지나치게 멀다. 그 상황에서 괜한 짓 할 정도로 켈브리안은 어리지는 못했다. "누나, 이건 뭐죠?" 같이 차를 마시고 있던 그녀의 동생이자 로메르드의 '왕'인 베르티노 가 무언가를 불쑥 내밀며 물었다. 켈브리안은 찻잔을 떨어뜨릴 뻔 했다. 동생의 작은 손에는 예전에 아 킨이 보낸 그 풍뎅이가 쥐어져 있었다. 맙소사, 베르티노가 너무 갑자기 찾아오는 바람에 미처 숨기지 못한 것이다. 다행히 아킨은 첫 날 이후로는 연락하지 않았으니 동생의 손에서 버둥대는 모습은 지나치게 크지만 그럭저럭 평범한 풍뎅이로 보일 뿐이었다. 안도한 켈브리안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지난번에 산책길에서 잡았어. 예쁘지 않니?" "정말 크네요. 이렇게 생긴 건 정말 처음 봐요." 그러며 베르티노는 버둥대는 풍뎅이를 이리 저리 굴리며 살펴보았다. 너무나 천진한 아이의 눈빛이라, 켈브리안은 덜컥했다('천진한' 아 이들이 벌레나 짐승들에게 어떤 짓을 하는지 켈브리안은 너무도 잘 안다). 켈브리안은 슬쩍 손을 내밀었다. 베르티노는 정말 실망한 듯 애처롭 게 켈브리안을 바라보았지만, 아무리 동생이라도 줄 수 없는 건 줄 수 없었다. 결국 베르티노는 잔뜩 실망해서는 그 풍뎅이를 켈브 리안의 손에 얹어 놓았다. 켈브리안은 원래 그것을 넣어두던 작은 병에 집어넣었다. 베르티노가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에 또 보여주시겠어요?" "그럴게." "그리고 저기, 풍뎅이를 키우는 방법을 가르쳐 주세요. 제가 잡으면 언제나 금방 죽어 버리거든요." 저건 살아 있는 풍뎅이가 아닌데.......하는 생각에 한숨이 나왔지만, 켈브리안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베노, 저건 좀 특별한 거라서 다른 풍뎅이와는 다르게 산단다. 저런 식으로 키우면, 다른 풍뎅이는 금방 죽어 버려." "그렇다면 저기.......며칠만 좀....빌려....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잘 돌 볼게요." 철렁했다. 켈브리안은 땀이라도 닦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저기 베노, 나는 저것을 정말 좋아하고 소중히 여기고 있거든. 베노를 실망시키는 건 미안하지만, 그래도 누나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가져가지는 말아주렴.....하루라도 다른 방에서 지내게 된다면 누나는 정말 슬플 거야.." 그리고 눈까지 반짝이며 순진한 베노를 바라보았다. 이리 되면 베르 티노는 금방 넘어온다(몸도 약하고 어린 동생이지만, 다 큰 누나 앞에서는 마치 기사라도 된 양 '누님은 제가 지키겠습니다!' 라고 말한다). 베르티노는 얼굴이 붉어지더니 우물쭈물 말했다. "저, 저를....못 믿으시는 건가요? 그러면 정말 슬퍼요..." 베르티노는 정말 잔뜩 실망한 눈치였다. 이제 당황하는 쪽은 켈브리 안이 되어 버렸다. 그저 실망해서 알겠어요, 할 줄 알았는데 이리도 처량하게 말하다니. 이 녀석이 엉뚱한 기술을 익혀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결국 켈브리안은 어깨에서 힘을 빼고는 말했다. "알았어, 단 하루만이야." 당장에 베르티노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 얼굴을 보니 켈브리안도 기 분이 좋아지기는 했다. "나중에 가지러 오렴. 돌보는 법은 그 때 가르쳐 줄게." 베르티노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어머니 때문에 풀 죽어 지 내는 동생이 이렇게 기뻐하니, 켈브리안은 베르티노와 이것저것 이 야기를 나누며 더 즐거이 지내고 싶어졌다. 그런데 응접실 밖에서 시녀가 외쳤다. "폐하, 대비전하께서 오셨습니다." 당장에 베르티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평소에도 늘 창백해지기는 했 지만, 이번에는 정말 겁에 질린 듯 한 기색이라 켈브리안은 동생이 뭔가 숨기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베노?" "누나, 어머니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 거절해 주세요." "무슨 말이니?" "어쨌든! 거절해 주세요! 누나가 다른 곳으로 가는 건 싫어요!" 뭔가 불안하다. 어디로 간다니, 저건 또 갑자기 무슨 소리지? 그 때 문이 열렸다. 어차피 켈브리안이 허락하든 말든 브리올테 대비는 왔다, 하고 통보 한번만 하고 대뜸 들어온다. 늘 있는 일이지만 늘 불쾌한 건 어쩔 수 없다. 켈브리안은 도저히 반기는 기색을 연기할 수 없는 자신에게 꽤나 실망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어머니를 맞이했다. "안녕하셨나요." 브리올테 대비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창백한 얼굴로 앉아 고개를 돌리고 있는 아들을 보았다. "여기 있었구나, 베노. 그리 찾아도 없더니." 그런데 베르티노는 볼을 잔뜩 부풀린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 인사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하는 게 좋겠구나....... 베 노도 왕이기 전에 내 아들이자 켈리의 동생 아니겠니." "무슨 말씀이시죠?" 켈브리안이 묻자, 브리올테 대비는 시종이 끌어다주는 의자에 앉고는 빙그레 웃었다. 시종이 잽싸게 응접실을 나갔다. 시중들던 시녀들도 모조리 나가고, 남은 것은 남보다 더 삭막한 '가족'인 세 사람이었다 . 그렇게 셋만 남게 되자, 브리올테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기뻐하렴, 델 카타롯사의 칼리토 대공왕이 네게 청혼을 했단다." 켈브리안은 순간 아찔했다. 머리끝에 발끝까지, 차고 오싹한 것이 쏴 아 쏟아지는 것만 같다. "청혼....이라니요?" "말 그대로란다. 그 젊은 왕이 너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다고, 정식으 로 청혼한 거야." 베르티노의 얼굴이 시뻘개지고, 불끈 쥔 주먹이 떨리고 있었다. 켈브 리안은 그것을 한번 보고는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말 도 안돼요. 지금 한참 전쟁 중일 텐데, 대체 무슨 틈이 있어서 제 게 청혼을........." "아아, 전쟁은 곧 끝날 거야. 그것도 델 카타롯사의 대승으로 말이 지." 그리 말하는 브리올테 대비의 눈은 확신과 기쁨으로 반짝이고 있었 다. 그리고 이런 판단을 하는 자신에 대한 자신감과 만족감에, 정말 주체를 못하고 있다. 그러나 켈브리안은 기가 막히다는 반응 밖에 는 보일 수 없었다. 솔직하고 노골적으로 '미쳤어요?' 하고 외치고 싶을 지경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사이러스를 상대로, 누가 이긴단 말 인가. 그러나 켈브리안은 예의를 보이기 위해 힘겹게 웃으며 간 신히 말했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아직 전쟁은....." 그러자 브리올테는 예상했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일주일 전에 소식이 왔단다. 친정을 나갔던 사이러스 대공왕이 의문 의 병사들에게 습격을 당했고, 그들의 포로가 되어 실종되었다고 말이다. 휘안토스 왕자가 꽤 쓸만한 아이라는 건 누구나 인정한다만 ,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혼란을 수습하기 힘들겠지." "말....말도 안 돼요." 차라리 해가 달에게 집어삼켜졌다는 말을 듣는 편이 덜 놀라울 지경 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사이러스 대공왕이? 기습에, 패하고, 포 로까지 되어서 실종되다니. "늘 부풀어 오르는 듯 하는 달도 언젠가는 다 차서 기우는 법이란다, 아가야. 이제 사이러스가 지고 칼리토 대공왕이 떠오르는 것뿐이고, 나는 그 영광이 너와 함께 하기를 바란단다." "어떻게 된 거죠? 정확히 말씀해 주세요." 브리올테 대비는 턱을 살살 쓸었다. 이제 뼈만 남은 턱과 손에, 켈브 리안은 소름이 끼쳤다. 게다가 그녀는 지금 딸이 자신에게 매달리는 상황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예전처럼 명석하지는 못하구나, 가엾은 켈리. 하긴, 워낙에 안에만 살다 보니 그리 된 거겠지.........이해해 줘야겠지, 아무렴, 이해해야지. 정확히 말해주마. 지난주에 사이러스 대공왕은 북대로를 따라 친 정길에 나섰단다. 그 때 기습을 당했고, 암롯사 군의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왕이 실종되고 말았지. 그리고.......예전의 네 약혼자 였던 쉐플런이, 그 머리가 잘려나간 암롯사 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 두었다고 하는 구나. 정말 굉장한 남자지........물론 그런 남자를 아 래에 두는 왕은 더욱 굉장한 사람일 테지만 말이야." 그제야 켈브리안은 왜 감금당했는지 알 것 같았다. 행여나 슈마허가 그녀를 빼 돌릴까 해서 그런 것이다. 그리고 칼리토 대공왕으로부터 확신할 수 있는 청혼이 오기를 기다린 것이고....... 그러나 켈브리안은 정말 기절이라도 할 것만 같았다. 온 몸의 피가 식으며 뻣뻣해지는 것 같다. 칼리토의 청혼도, 슈마허의 승리도, 그것이 그녀의 운명을 결정짓고 있다는 것도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나셀의 광룡, 델 카타롯사와 툴칸의 공포 사이러스가 사라졌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확고부동한 절대 진리가 무너지는 듯 두렵게 느 껴졌다. 무언가가 쏟아져 내리고, 그 빈자리에 거센 물살이 휩쓸려 들어오는 것만 같다.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 만 같은데, 그리고 켈브리안은 그 안에서 익사해 버릴 것만 같은데 지금 앞에 있는 어 머니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켈브리안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마음 속 깊이 누군가의 이 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아아, 아키........! **************************************************************** 작가잡설: 사이러스...........는 잠시 치워둡시다. -_- p.s 저 여자 맞습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5장 ************************************************************** [겨울성의 열쇠] 제257편 바다 거품, 하얀 소용돌이#2 *************************************************************** 휘안토스는 악몽을 꾸었던 것은 아마도 열네 살 때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다음부터는 절망하기 보다는 이해하려 했다. 원망하기 보다는 납 득하려 했다. 어리광 따위는, 누군가에게 내 대신 해 달라고 매달 리거나 왜 그런 일을 내게 강요하느냐고 울먹이는 것 따위는 아무 소용도 없다. 아니, 오히려 스스로의 가치만 깎아내린다. 하지 마, 해선 안 돼, 아무도 그런 것 받아주지 않아........의지하지 마... 그렇 게 스스로에게 말하며 살아왔다. 포기 따위는 없고, 포기하고 돌아 서는 순간에 오는 것은 기다리고 있던 칼이 그 목을 겨누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휘안토스는 흔들리는 모습도, 놀라는 모습도, 걱정하는 모습 도 보이지 않았다. 카틀로트 경이 아버지의 실종을 알려 와도, 전 령이 카톤 케이 백작의 델판 평원에서의 대패를 보고해도, 슈마허가 잠시 뒤면 카톤 성을 점령하여 북대로로 내려올 거점을 마련했다 고 해도 휘안토스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가신과 영주들은 휘안토스를 믿고 따르기 보다는, 어서 델 카 타롯사의 칼리토 대공왕이 몸값협상이나 항복협상을 제의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오로지 사이러스가 돌아오기만을 바라고 있을 뿐 이었다. 사이러스라는 '상식'에 중독 된 그들은 일단 사이러스만 돌아 오면 얼마든지 재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군사를 모아 북진 하기만 하면, 지금의 위기는 몇 배로 되돌려 갚을 수 있을 거라 생 각하고 있다. 그 일에는 가장 먼저, 그리고 아마도 꽤 오랫동안 깨지 못할 패전 기 록을 남길 카톤 케이 백작이 가장 적극적이었다. 오늘 회의 내내 휘안토스는 그의 눈 안에 담긴 두려움을 어렵잖게 알아볼 수 있었다 . 젊은 시절부터 언제나 아버지에게 충실했던 자였다. 아마도 사 이러스의 명령이라면 혼자서 델 카타롯사의 창병들 속으로 돌진하라 해도 '작전'이라 생각할 위인이다. 그러나, 그런 만큼 사이러스가 실종된 상태에서 이만 오천의 병사를 끌고 슈마허가 이끄는 델 카타롯사 군과 맞서기에는 최악의 인물이었다. 메뚜기 떼에 뜯어 먹힌 듯 간신히 남은 삼백을 끌고 하바 성에 도착하여, 참패의 소식을 듣고 그를 기다리고 있는 휘안토스에게 와서는 '폐하께서 무사히 돌아오신 후'에 무엇이든 생각 하자 줄기차게 주장하는 중이다. 케올레스라도 바로 옆에 있었으면- 휘안토스는 그가 병 때문에 빨리 출발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속으로 삼켜야 했다. 연락은 빠르게 주고받고 있으나, 바로 옆에 있는 것 과는 비교할 수 없다. 바로 어제도 그에게 수도의 상황에 대한 편지를 보냈다. -슈마허가 내려오든, 칼리토 대공왕이 내려오든....... 그들은 한번 크 게 승리한 이상 거침없이 남진해 올 것이고, 암롯사 전체를 정복하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칼리토 대공왕은 몸값협상은 하지 않을 겁니다. 아마도 어이없을 정도로 터무니없는 액수를 제시하거나, 암롯사 절반쯤에 해당되는 영토를 요구할 겁니다. ....... 칼리토 대공왕이라면 몰라도, 칼라하스 공주라면 분명 암롯사와 아 버지와의 관계가 단순한 왕과 그가 다스리는 나라만이 아니라는 것 을 알고 있을 테니 말입니다... 지금의 암롯사는 아버지이고, 아버지는 암롯사 입니다. 암롯사의 모 든 영주들과 가신들은, 당장 싸우기 보다는 오로지 아버지의 무사 귀환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사실대로 말하는 것뿐인데도, 휘안토스는 자신이 꽤나 비참하다는 생 각이 들었다. 케올레스는 아마도 오늘 밤에 서신을 보낼 것이다. 그의 성격대로라 면 당장에 출발할 지도 모르겠다. 약해보이지는 말되, 조언을 듣는 것은 아끼지 말고, 필요한 것을 잘 골라내야 하는 상황이다. 물론 휘안토스가 무능하거나 어리석은 후계자인 것은 아니다. 아니, 전 제국을 통틀어 휘안토스 이상 가는 후계자를 가진 왕은 없다. 그 러나 휘안토스가 왕의 자리를 대신해야 하는 시기는, 누구에게든 최악이라 할만했다. 수 십 년간 힘과 공포로 지배하고, 그리고 가 신들과 영주들이 그 지배방식을 납득하고 충성을 바칠 정도의 카리 스마를 가진 아버지가 뽑힌 듯 사라진 지금- 암롯사는 가장 크고 '유 일한' 기둥을 잃은 채 흔들리고 있을 뿐이다. 두려워하고 있다. 휘 안토스를 불안에 찬 눈동자로 바라보며, 제발 어서 휘안토스 대신 사이러스가 돌아오기만 바랄 뿐이다. 어떻게든 그들이 믿고 따르던 '예전'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그런데 지금 상황으로서는, 어떤 방법을 동원하든 사이러스를 암롯사 로 돌아오게 할 수 없다. 델 카타롯사가 바보가 아닌 이상 용을 제 둥지로 돌려보낼 리 없고, 사이러스가 없는 이 멋진 기회를 돈이 나 영토나 요구하며 날려 보낼 리 없다. 철저히 짓밟을 것이다. 정말 철저히- 휘안토스는 쓴웃음이 나왔다. 예전에 아버지 사이러스가 랑기온 대공왕에게 했던 일을, 지금 그 아 들이 아들에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억눌렸다 튀어나가는 보 복의 가속까지 붙어, 정말 거세게 내리 박혀 올 것이다. 암롯사와 휘안토스를 박살내고, 가장 처참한 상태로 만든 뒤에 사이러스 앞에 놓을 것이다. 그리고 사이러스의 목숨은 아마도 그 때 빼앗을 것이 다. 그토록 두려워했던 나셀의 광룡 사이러스를 살려둘 리 없으니까..... 길고 짙은 붉은 색 망토를 휘날리며, 그가 아끼는 군마에 타고 후계 자인 휘안토스를 등지고 떠난 그는, 그 뒤를 따르는 긴 그림자 끄 트머리만 바라보는 그의 왕국을 이고 있었다. 젊은 - 아니 어린 휘안토스가 지금 당장 할 일은, 그 눈길을 돌리는 것이다. 이제 암롯 사의 왕은 휘안토스 프리엔- 사이러스 델이 아닌, 바로 휘안토스 프리엔이니까. 아버지가 아닌 바로 나니까...... 그러나 혼자 남겨져, 이 크고 어두운 침실의 의자에 앉아, 마주볼 사 람도 없는 지금 휘안토스는 자신이 아버지에 비해 얼마나 작았는지 철저히 깨달아야 했다. 아버지가 물러난 뒤에 어찌 해야 하는 지 언제나 생각하고 살아왔다. 빈틈없이 준비하고, 가신들과 암롯사 군에 신뢰를 받기 위해 노력 했다. 휘안토스는 암롯사의 미래였다. 빛나는 미래, 사이러스의 뒤를 이어 암롯사를 더욱 위대하게 만들 그런 빛나는 미래- 그러나 아버지가 '이렇게' 사라질 거라 생각했던 적은 단 한번도 없 었다. 이렇게 채 동이 뜨기도 전에 그가 사라져 버릴 거라고는, 단 한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바깥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들렸다. 철컥, 하고 호위들이 발을 딛는 소리도 들려온다. 휘안토스는 의자에 기댄 채로 말했다. "누가 온 거냐." "후궁의 아가씨입니다." 잘 모르는 시녀의 목소리였다. 휘안토스는 물론 그 후궁의 아가씨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누가 그리 부르기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어 쨌든 휘안토스가 데리고 온 소녀는 '후궁의 아가씨'로 불리고 있었다. "들여보내." 문이 열리고, 푸른 드레스 차림의 소녀가 들어왔다. 그녀의 등 뒤에 서 문이 조용히 닫혔다. 휘안토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를 돌 아보았다. 소녀는 문에 등을 바짝 대고는 어깨를 폈다. "왜 온 거지?" 소녀-유제니아는 쉽게 답하지 못한 채 손만 꽉 움켜쥐었다. 휘안토 스가 말했다. "설마 자진해서 내 품으로 들어올 생각이었던 건 아닐 테니, 어서 말 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유제니아는 빠르게 말했다. 잔뜩 준비해 놓았던 듯, 아니 정말 꽉 참 았던 것을 토해내듯 말한 것이기에 떨림은 없다. "귀가 열려 있다면 훤히 들었을 테지. 내 아버지가 패했고, 너도 잘 아는 슈마허 쉐플런이 아버지 없는 암롯사 군을 상대로 크게 승리 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사자처럼 남진하고 있고, 나는 그가 도착하 기 전에 어미 잃은 병아리 떼처럼 우왕좌왕하는 가신들과 영주들부 터 다스려야 할 판이지." 유제니아는 점점 새파랗게 질려갔다. "듣고 싶은 건 그게 아닐 테니, 어서 말 해." 유제니아는 간신히 말했다. "세르네긴이.......무슨 일을 한 거에요?" "......." 그 말에, 휘안토스는 다시 그날의 고약한 기분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분풀이라도 하듯 저 아이를 덮쳤던 그날의 기분으로..... 다시 저 아 이를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고 세르네긴에게 집어 던져 버리고 싶 어졌다. 그 잘난 복수를 하는 동안에 정작 저 아이는 어떤 일을 당 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또 그렇게 나온다면 얼마든지 - 아니 몇 배 는 더 참혹하게 줄 거라 제대로 가르쳐 주고 싶어졌다. 지금 그를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있는 모든 것이 세르네긴 덕에 일어 난 일이다. 이 질서를. 당연한 모든 것을, 그 창으로 찍어 부수어 버렸다. "말 했잖아. 내게 복수했다고." ".......대공왕 폐하의 실종과 상관있겠군요." 상관이 있는 정도가 아니지. 그가 직접 델 카타롯사 군의 선두에 서 서, 내 아버지와 맞섰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에게 패했고, 그의 포 로가 되었다. 나에 대한 복수지, 그래.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그의 아들이자 암롯사의 왕자인 나에 대한 복수. "설마.......인질이나 그런 건 아니겠죠?" "그런 짓은 안 한다. 그와 나 사이에는 거래 따위는 없어. 내가 응하 지 않을 테니까. 너는 그냥 그의 귀중품일 뿐이다.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깨지고 금가고, 그러나 언젠가는 돌아가기는 할 그런 귀중품." "알아요." 악당에게 붙잡힌 아가씨 흉내 내면서 스스로의 슬픔에 도취해 청승 떠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만, 저렇게 차분하게 말하니 좀 허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앞으로도 저한테 화풀이 하겠네요......세냐가 당신에게 한 방씩 먹일 때마다." "그렇겠지..... 어차피 세르네긴과 나는 '사적인' 관계일 뿐이야. 그렇 게 '사적'으로 날뛰고 있으니, 나 역시 '사적'으로 보답해 주는 것 이고....." 유제니아는 그를 외면했다. "갈게요." "할 말은 다 한 건가?" "알 건 대강 알았어요. 적어도, 당신이 언제 덮치는 지 정도는 확실히 알았으니까." "지금은 아닐 까?" 유제니아의 어깨가 한번 크게 들썩였다. "세르네긴은 내 아버지를 포로로 잡았다. 어디 계시는 지, 내가 할 수 있는 최후의 최후까지 동원했지만 알 수 없었다. 카람파의 노예들 까지 찾지 못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그의 드래곤이 무언가 한 것 같다. 그리고 아버지가 없는 지금, 나는 조금만 실수해도 암롯사 의 수도를 델 카타롯사 군이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는 것을 지켜봐야 할 판이지...... 어쩌면, 제국 5연합이 제국 4연합이 될 지도 모르고." "......." "그것이 세르네긴의 복수이고, 지금 세르네긴은 한 방 먹인 정도가 아니라....그 후로 주욱 나를 괴롭히고 있는 거다. 그러니 네게 화풀이 할 이유는 넘치도록 많은 거다." "겨우.......겨우 분풀이잖아요." 드디어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알아. 그리고 고작 너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지는 않아. 하룻밤만 위 로해주면, 그걸로 네 역할은 끝이다."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아요." "사람들이 왜 술을 마실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데." 유제니아의 눈에 환멸이 차올랐다. 그 눈빛은 왠지 기분 나빴다. "물론 나도 인정한다. 이번에는 그의 승리다, 유제니아. 너를 통해서 라도 위로받아야 할 정도로 철저한 그의 승리. 하지만 나는 반드시 이길 거야. 겨우 여기서 무너지기 위해 그 길을 걸어온 건 아니니까." 유제니아는 뒤로 주춤 물러났다가, 곧바로 등을 돌려 문 쪽으로 돌아 섰다. 그 모습에, 갑자기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솟구쳐 올랐다. 머 리카락이 날리며 그 가늘고 긴 목덜미가 보이며 그를 외면하는 순간, 그리고 그 등이 그를 향하는 순간 이 소녀를 움켜쥐고 싶어졌다. 새장 문을 열고 포르르 날아가 숲 속으로 사라지게 놔두고 싶 지 않았다. 날개는 부러뜨리고 다리는 묶고 목을 졸라 버리고 싶어진다. 휘안토스는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겁에 질린 눈동자가 그를 향하는 순간에, 그는 그대로 소녀를 끌어안으며 머리카락 속에 얼굴을 묻 었다. 체취가 물씬 풍겨온다. 겁에 질려 떨리는 얇은 몸이 그 안에 있었다. "놔.....!" 울부짖어도, 쉬운 건 쉬운 것이다. 어렵지 않을 것이다. 힘없는 몸을 짓누르기만 하면 된다. 그 순간만 지나면 소녀는 언제나 포기해 버리고는 그의 손에 몸을 맡겨 버렸다. 벌써 몇 번이나 쉽게도 가졌으니, 지금이라고 어려울 것 없다..... 그런데 지난밤 새벽에 겁에 질려 있던 모습이, 그 눈동자 가득하던 눈물과 분노가, 그리고 손바닥에 닿던 거친 심장의 두근거림이 갑 자기 생각난다. 창백한 빛이 스며들어와 방이 어슴푸레하게 떠올 랐었고, 그 차가운 빛 속에 소녀의 모습이 점점 더 뚜렷하게 드러났었 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건 지친 듯 멍하고, 슬픈 듯 젖은 눈이었다. 지금 안고는 싶었지만, 그런 눈빛은 싫었다. 벗어나려고 발버둥치고, 필사적으로 밀어내다가, 결국에는 포기하고 몸을 줘 버린 소녀가 모든 것이 끝난 뒤에 그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면 오히려 자신이 더럽혀 지고 모욕당하는 것만 같다. 휘안토스는 팔을 내렸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 유제니아는 어깨를 감싸 쥐고는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러다가 벽에 등이 닿자 벽을 밀기라도 하듯 바짝 붙였다. "돌아가라." 그러나 온 몸이 굳은 유제니아는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왜...... 하고 입술 달싹이는 듯 보인다. 휘안토스는 상황이 한심해졌다. "나중에 보자." 잠시 안도하는 듯 했던 유제니아의 눈이 어두워졌다. 무슨 말인 지 알아 들은 것이다. 잠시 눈 가에 눈물이 고였고, 그녀는 눈물을 훔 치고는 방을 나섰다. 이상한 기분이다. 가질 건 다 가졌는데, 아직 무언가 아주 중요한 것이 모자란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채워지기를 갈망하고 있지만, 무엇으로 어떻게 채워야 할지는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세르네긴에 대한 분노에 뒤섞여, 그를 더욱 목마르게 하고 있었다. *************************************************************** 작가잡설: 그래, 너 잘났다 휘안.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5장 ************************************************************** [겨울성의 열쇠] 제258편 바다 거품, 하얀 소용돌이#3 *************************************************************** 루첼이 새벽(정확히 여섯 시 경)에 케올레스의 방을 찾아왔을 때, 그 노마법사는 한 손에는 검은 종이를 쥐고 다른 손으로는 턱을 괴고 힘없이 앉아 있었다. 처음 케올레스를 처음 봤을 때 루첼은 그토록 늙은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생각했다. 그러나 안락의자에 앉아 두툼한 적갈색 가죽 담요를 허리까지 끌어올린 그를 보며 그 생각을 고쳐야 했다. 지금의 그, 바짝 마른 손을 부들부들 떨며 흐릿한 눈동자로 벽난로를 응시하 는 그는 아마도 루첼이 아는 노인 중에 가장 늙은 모습을 가진 자가 될 것이다. 병에 지치고, 거듭 날아오는 충격적인 소식에 더욱 지 쳐서, 이제는 가뭄에 말라 죽어가는 고목처럼 처량하게 앉아 있었 다. 예전에는 눈만이라도 예리했는데 지금은 그저 먼지 낀 거울처 럼 흐릿할 뿐이었다. 활기찼던 사람이 풀썩 늙어 버리는 건 정말 순식간이다. "준비를 해 주게나, 그란셔스 군." 루첼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이 방에서 나가시는 것도 무리입니다. 그러니 산 파로이까지 가시는 건......." "준비하라고 했어-!" 순간 온 방이 쩌릉 울린 듯하다. "케올레스 님." "지금 당장 가야하네-! 휘안토스 님 혼자.....쿨럭! 그 힘든 일을 하게 놔 둘 수는 없네....쿨럭, 쿨럭--!" 케올레스가 기침을 쏟아냈다. 목소리 역시 갈라질 대로 갈라져, 거의 악으로 바람소리를 내고 있다. 루첼은 제발 누워 쉬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저렇게 온 힘을 다 긁어모아 필사적으로 말하는 노인을 무엇으로 말릴 것인가..... 지금 산 파로이로 가는 것은 늙은이의 어리 석은 고집이 아니라, 말 그대로 '삶의 마지막 이유' 그 자체였다. 피토하도록 처절하기에 막을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산 파로이까지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아니, 자네는 이곳에 남아 있게....... 나를 수행할 사람은 따로 뽑겠 어." 케올레스는 그리 힘겹게 말하고는 숨을 쌕쌕 몰아쉬었다. 그 손에 쥐 어져 있던 검은 종이가 낙엽처럼 바닥에 떨어졌다. 루첼은 그것을 집어 들어 책상위에 뒤집어 놓았다. 케올레스가 다시 기침을 토해냈다 . 루첼은 그의 흰 수염에 튄 붉은 핏방울을 발견하고는 물수건을 찾았다. 그러자 케올레스가 손을 저어 말렸다. "그만 두게.......어서 채비나 해 주게나. 한 시가 급하네." "당장 출발하실 생각이십니까?" "당연하지.......쿨럭! 한 시라도 지체할 수 없네.......위험해, 모든 것 이......" 루첼도 상황이 어떠한 지, 어찌 될 것인지 짐작하고 있었다. 아니, 확 신에 가깝다. 그러나 이 늙고 병든 케올레스가 산 파로이로 돌아간다 해서 무엇이 잘라질 지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사이러스 의 총신이자 충신, 측근중의 측근, 그리고 그 손발이나 다름없는 마법사였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바이지만 지금의 그는 몸 가누기 조차 힘들다. 그러나 외국인인 루첼에게는 지금의 케올레스를 말릴 그 어떤 방법도 없었다. 되도록 빨리 준비하여, 가장 믿을만한 마법 사를 골라 붙여 산 파로이로 보내는 것만이 지금 루첼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준비 하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따로 분부 하실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래, 할.....말이 있네....할 말.......하아......가까이 와 주게나....." "말씀하십시오." 루첼은 그의 말이 길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에게 가까이 다가 갔다. 핏방울은 여전히 흰 수염 위에 선명하게 튀어 있었고 눈은 더욱 흐려져 있다. 루첼은 긴 수염 위에 얹혀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손을 잡았다. 주름진 손은 바깥에 오래 놔 둔 돌조각처럼 미끈하 고 차가웠다. 케올레스가 흐릿하게 웃었다. "자네는....노인 돌보는 법을 알고 있군." "경험이 좀 많거든요." 자주 베크만 알베스티를 찾아가 그 말상대를 했었다. 고집 세고 괴팍 한 노인이었지만 루첼에게는 아주 잘 해주었다. 루첼이 그를 진심 으로 좋아했기에, 그 노인 역시 루첼을 진심으로 아낀 것이다. 조금 은 고된 어린 시절을 보낸 루첼이었지만, 그래도 진심어린 애정을 주는 이들에게 충실했다. 제임에게도, 첸에게도, 실비와 지오바니에 게도, 쥰에게도. 그리고 베크만 알베스티에게도,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언제나 그들을 위해 충실하게, 진실하게 노력했다. 그런 루첼을 베크만 알베스티는 안아주지도 미소지어주지도 다정하게 쓸어주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루첼은 그의 애정과 신뢰가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알고 있기에 그에게 감사하고, 그를 사랑하며 노 력했다. 누군가로부터 받는 신뢰와 애정은 너무도 귀한 것이다. 작 은 것이라 할지라도, 최선을 다해 간직하고 보답해야 한다. "아킨토스 님이라도 계셨다면 좋았으련만......." 갑작스런 케올레스의 말에 루첼은 깨어나듯 고개를 들었다. 그 죽어 가는 노인의 모습에, 예전의 베크만 알베스티의 모습이 겹쳐진다. 루첼은 그 기시감이 무엇에 기인하는지 알기에, 도저히 그 느낌자락 을 잡으며 그리워할 수 없었다. 그것은 불길함과 아주 비슷한 감 정이었다. "로메르드에서......그분과 친하게 지냈었나?" "그럭저럭 지냈습니다." "그 때......그곳의 그 분은 어땠나.....?" "간단하게 말하기는 곤란합니다. 제가 그분과 같이 지낸 건 고작 1년 정도입니다. 그나마 좀 제대로 알고 지낸 건 반년도 안 되고요. 하 지만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언제나 노력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노력......?" "네. 제가 보기에는 그랬습니다." 케올레스가 웃었다. "많이....변하셨나 보군." "예전의 그는 모릅니다." 케올레스는 숨을 깊이 몰아쉬었다. 방금 전보다 훨씬 더 안정되어 있 었다. "정말 가엾은 분이었지. 언제나 겁먹고 계셨어.......벗어나려고, 도망치 려고,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인정받고 싶어 하고, 사랑받기를 바라고, 그 사랑과 함께 따스한 손길과 포옹이 오기를 바랬지. 그러나...... 겁이 나서 앞으로 나오지도 못하던 분이었네......쿨럭! 가엾게도......." 루첼은 어떻게 해서라도 케올레스를 말리고 주치의인 안젤라를 부르 는 편이 낳겠다 싶었다. 그러나 케올레스는 그런 루첼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하지만......강해지셨군." "자라는 겁니다. 누구나 그렇듯." "자라지 못하는 아이도 있어. 그리고 이런 아이는, 자기가 아이라는 것조차 모르지." 처음의 아킨은 불안정하고 초조해하던 아이였다. 손을 뻗고 싶다가 도, 그의 다른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이게 될까 두려워하여 움츠린다. 그랬기에 루첼이 아킨의 비밀에 대해 첸에게 물었던 날 그렇게 주먹을 날렸던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만난 아킨은, 두 살이나 더 먹으며 훌쩍 커버린 아킨 은 더 이상 그런 소년이 아니었다. 저주도, 형에 대한 질투와 증오도,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도, 그 모든 어두운 그림자를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있기에, 그를 가두고 있던 성문을 활짝 열고 나가고 있었다. 무엇이 기다리는 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스스로의 두 발로 걸 어가며 헤쳐 나가는 것을 택하여, 자신의 열쇠를 찾아 닫힌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비록 앞에 굳게 닫힌 문이 있고, 높고 두터운 벽이 있을 지라도..... 언젠가는 열쇠를 찾아 그 문을 열어젖힐 것이다. 한번 발을 딛고 일어난 사람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 법이다. 바깥에 안식이 아닌 또 한번의 벽과 문과 고난이 있을 지라도, 그래도 또 한번 노력한다. "그란셔스 군, 나는......언제나.......언제나 그 두 분이.....서로를 도우며 살기를 바랐네......." "그리 될 겁니다." 루첼은 눈길을 다른 쪽으로 돌리며 그렇게 답했다. 자기도 믿지 않 는, 아니 절대 그리 되지 않으리라 확신하는 답을 하고 있었으니. 예전에 알베스티에게 '쥰은 좋은 녀석입니다.' 했던 그 때가 떠오른다. 속으로는 미쳐가면서도,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었지. 지금도, 그 둘이 다시 만나는 즉시 서로를 향해 칼을 뽑을 거라는 것을 알아도 그리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쿨럭! 어찌하여 그렇게 어긋나는 걸까.......서로 도운다 면.....쿨럭! 암롯사는 가장 위대한 두 명의 왕을......가지게......" "왕의 자리는 하나뿐입니다." 케올레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 두 분은......두 분이지만 한분이네. 서로의 등을 지켜줄......쿨럭! 그래서 단 한분......." 다시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루첼은 담요를 그의 가슴까지 끌어 올려 주며 말했다. "잠시 쉬십시오. 제가 알아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부탁하네.....쿨럭!" 루첼은 빙그레 웃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 케올레스의 흐릿한 눈을 보며, 앞으로 무엇이 벌어지려는 지 대강 예상했다. 그것은 아주 먼 예전 알베스티가 보여주었던 눈, 마지막 힘을 끌어 올리는 그 눈이 말하는 것은 '체념'이었다. **************************************************************** 작가잡설: 겨울키는 아마도, 저를 믿었던 분들께서는 그 배신감에 치를 떨 것이며, 안 믿었던 분들 역시 '그럴라면 뭐하러 그렇게 고생 시켰어!' 라고 외칠 겁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엔딩이 될 것입니다! p.s 물론 아직 멀었습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5장 *************************************************************** [겨울성의 열쇠] 제259편 바다 거품, 하얀 소용돌이#4 **************************************************************** 바르젤 요새의 현재 사령관은 알바스 경이라는 사람이었다. 나이 마흔 정도의 꽤나 점잖은 사람으로, 케올레스와는 가까운 친척 사이였다. 루첼은 우선 그에게 말할 생각으로 케올레스의 집무실을 나섰다. 새벽 다섯 시, 하늘은 어둠이 빠져나가며 검푸르게 변해 있었다. 절 반만 남은 달은 이미 지고 없고, 아직 밝은 별들이 검푸른 하늘에서 반짝이고 있을 뿐이었다. 북의 델 카타롯사의 바다를 바라보는 망 루 끝에, 파수를 보는 병사들의 창이 까맣게 보였다. 루첼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창문을 통해 그 북쪽을 바라보았다. 북쪽 먼 하 늘은 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 어두웠다. 점점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니, 오늘 오전부터는 천둥번개라도 칠 듯도 하다. 그러나 그렇게 오래 서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해가 동쪽으로 달려오는 시각, 공기는 오 싹할 정도로 차기만 하다. 루첼은 볼을 스치는 싸늘한 바람을 느끼 며 발걸음을 뗐다. 어느덧 동쪽 하늘이 하얗게 타오르기 시작하고, 바람은 좀 더 차갑고 거세어졌다. 루첼은 안경을 밀어 올리고는, 다시 검푸르게 물결치는 바다를 보았 다. 먹구름은 이제 거의 하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먹구름 위를 가르며 하얀 번개가 멀리서 번쩍거리고, 우르릉-- 천둥소리가 낮게 으르렁거리듯 들려온다. 암롯사의 깃발들이 넓게 펼쳐지며 퍼덕댄다. 갑자기 담배 생각이 났지만, 담배갑을 침실에 놓고 왔기에 입맛 다시며 참는 수밖에 없다. 다시 타닥- 깃발 펄럭이는 소리 가 들려왔다. 루첼은 세 번째로 바다를 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에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이런, 맙소사! 하필 이럴 때에! 방금 전까지 파수를 보던 병사가 외 쳤다. "적이다--!" 그 외침이 새벽과 여명의 적막에 잠든 요새를 울리며 메아리쳤다. 루첼은 더 급히 달렸다. 그가 달리는 방향은 북쪽이었다. 그의 눈앞 으로, 크고 검은 새가 날개를 펼치듯 쏟아져 들어오는 먹구름이 보 였다. 순간, 하얀 벼락이 칼날처럼 바다에 내리박혔다. 우르릉, 우릉- - ! 천둥소리가 큰 짐승이 터뜨리는 으르렁거림처럼 들려온다. "케올레스 님--!" 순간에 온 세상이 깜깜해졌다. 루첼은 넘어져 구를 뻔한 것을 간신히 면하며, 계단을 뛰어넘고 복도를 달려 다시 케올레스의 집무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힘껏 문을 젖히며 외쳤다. "케올레스 님! 지금......" 루첼은 문고리를 놓고는 방 안쪽으로 달려갔다. 케올레스가 창문 앞 에 무릎을 꿇고 커튼을 움켜 잡은 채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케올레스 님!" 루첼은 케올레스의 몸을 당겼다. 마르고 가냘픈 노인의 몸은 버드나 무 가지처럼 가볍게 끌려왔다. "정신 차리세요, 케올레스 님!" "하필 이럴 때! 하필이면.......오, 에칼라스 여!" 루첼은 괜찮을 겁니다, 라는 바보 같은 소리는 하지 않았다. 대신 그 를 부축하며 말했다. "모시겠습니다." "그래, 어서......어서 같이 가주게.....! 어서-! 어서 알바스 경을 만나 서....쿨럭!" 피가 확 터지며 바닥에 튀었다. 숨 넘어 갈 듯 무서운 기침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루첼의 팔과 가슴에도 그 피가 튀었다. 그리고 케올 레스는 피를 한웅큼 토해내고는, 이를 악물더니 몸을 일으켰다. 숨 은 계속 쌕쌕 내 쉬고 있었지만, 그 눈만은 굶주린 늑대처럼 빛나 고 있었다. "가세.......어서!" 순간 소름이 끼쳤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죽어가던 노인이, 이제 몸 을 꼿꼿이 피고 눈을 빛내고 있는 것이다. 몸이 나아진 것이 아니다. 오로지 의지력 하나만으로, 마지막 남은 모든 힘을 긁어모아 버티 는 것이다. 그 때 쿠릉-- 옆에서 드래곤이 발이라도 찍어 넣은 듯 온 요새가 울렸다. 케올레스가 이를 뿌득 물더니 문 쪽으로 달려갔다. 루첼은 급히 그의 팔을 붙잡아 부축하며, 문을 열고 복도를 달리기 시 작했다. 쿵, 쿵, 쿵-- 다시 그 육중한 발자국 소리 같은 것이 들려온 다. 요새 안은 캄캄했고, 뚫린 창으로 계속 빛이 번쩍 거렸다. "잠시 멈춰주게......" 루첼은 발을 멈추었으나 불안했다. 금방 무엇이라도 날아올 듯 했으 니. 케올레스가 창쪽을 보았다. 루첼은 그의 생각을 알아채고는 그를 부축하여 창가로 갔다. 커다란 바다가 어둠 속에 물결치고 있었다. 북쪽의 수평선에, 하얀 빛이 수없는 별들이 내린 듯 반짝거리며 빛을 쏘아내고 있었다. 긴 창처럼 박히는 은빛 빛줄기에 바다가 하얗게 반짝였다. 하늘은 으르렁대고, 그 위에서 다시 칼날 같은 벼락이 번쩍였다. 그리고 꽈르르릉! 바로 위에서 바위와 바위를 부딪치는 듯 엄청난 천둥소리 가 들려왔다. 그러나 공기는 차갑고 건조했고, 비가 쏟아질 것 같 지는 않았다. 바람은 계속 루첼의 얼굴 쪽으로 쏟아지고 있었고, 수평선을 밝히는 하얀 빛들은 빠르게 요새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둥, 둥, 둥-- 북 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맞추어 노 젓는 소리와, 물 살 헤치는 소리도 들려온다. 그들의 하얀 돛들이 빛 속에 드러나고, 펄럭이는 삼각 깃발들이 하얀 새무리처럼 떠 올라왔다. 온 바르젤 요새의 포구가 올라갔다. 마법사들이 망루와 흉벽으로 나 가고, 포병들이 횃불을 들고 사정거리로 들어올 시 즉시 심지에 불을 붙일 준비를 했다. 꽈드드드- 천둥소리가 계속 들린다. 하얀 벼락 이 다시 확 번쩍였고, 온 세상이 정말 하얗게 번뜩였다가 어둠 속 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그 순간에, 루첼은 구름 과 바다에 은청색 빛을 띠며 드러났 다가 사라지는 마법진을 보았다. "맙소사..." 루첼은 손에 힘을 주었다. "무슨......무슨 일인가!" "엎드리세요!" 루첼은 케올레스를 안쪽으로 세게 밀며 그의 몸을 감쌌다. 다시 하늘이 하얗게 번쩍였다. 그리고 콰아앙-! 요새의 한쪽에 하얀 섬광이 내리꽂혔다. 산사태라도 난 듯 와그르르 돌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젠장.......! 그러나 숨 돌릴 틈도 없이 다시 하늘이 하얗게 번쩍였다. 온 요새, 그리고 루첼의 얼굴 위로도 그 하얀 빛이 번뜩였다가는 사라진다. 루첼은 눈을 꾹 감았다. 쿠르릉--! 요새가 부르르 떨었다. 쓰러지기라도 할 듯 으르렁댔다. 그리고 마침 내, 또 한번 우르릉 붕괴하기 시작했다. 먼지가 피어오르고, 병사들은 비명을 지른다. 피하라고 외치는 장교들의 외침이 들려왔지만, 무너지는 성에 휩쓸려 추락하는 가엾은 병사들의 처절한 울부짖음만 이 허공을 찢었다. 루첼이 있는 곳 까지 돌조각이 튀었고,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라왔다. 돌에 깔리며 살이 짓뭉개지고 뼈 으스러 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케올레스가 몸을 일으키려 했다. 루첼은 아직 위험하다 외치며 그를 붙잡으려다가, 결국 그보다 더 빨리 일어나 그의 팔을 잡아 부축 했다. 눈 뜨고 보는 요새는 더욱 처참했다. 방금 전까지 있던 망루는 온데 간데없고, 먼지만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들이 있던 곳에도 하얀 먼지와 자갈들이 쏟아져 있었다. 바람이 거칠게 그 위를 휩쓸 고 있었다. 케올레스가 이를 악물고는 루첼을 당겼다. 루첼은 그를 부축하며 몸 을 당겼다. 더 있다가는 위험하다. 무엇이든 해야 했다. 적어도, 도 망치기라도 해야 했다. "어떻게....되어 가고 있는지 알겠나, 그란셔스 군?" 무섭도록 냉정하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방금 전까지 기침을 토해내며 비틀거리던 노인은 온데 간데없다. 루첼은 빠르게 답했다. "저 쪽, 델 카타롯사 군에 괴물 같은 마법사가 있습니다. 마법으로 직 접 요새를 공격하고 있고, 유감스럽게도......케올레스 님이 완성해 놓은 보호마법은 모두 깨어졌습니다." 케올레스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경악과 절망이 그 눈 안에 차 있었 지만, 체념도 두려움도 없었다.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하고 있을 가능성은?" "이건 혼자서 하는 겁니다. 모든 마법이 똑같고, 일정하고, 정확합니 다. 혼자서 하지 않는 한, 이정도 정확도로 내리꽂지 못합니다." 다시 빛이 번쩍였다. 루첼은 벽에 등을 붙이고는 케올레스를 당겼다. 그러나 케올레스는 고개를 돌려 바다를 보았다. 루첼도 그를 붙잡 으려다가 같은 곳을 보게 되었다. 까만 먹구름 위에서 바다위로 하얀 빛이 내리 꽂히더니, 그대로 바다 를 가르며 밀려들어왔다. 쿠르르릉-- 천둥소리가 이어서 들려왔다. 그리고 그대로 그 빛기둥은 요새를 받치는 절벽을 들이받았다. 빛 이 터졌다. 하얀 빛이 구석구석 스며들어 모든 어둠을 압사 시켰고, 그대로 온 요새가 쿠르릉 울부짖었다. 꽈릉-- 성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서울 정도로 가까웠다.....그리고 드디어 루첼이 등을 대고 있는 벽 한쪽이 흔들리며 앞으로 쏟아졌다. 흙과 자갈들 이 먼지와 뒤섞여 와르르 쏟아져왔다. 루첼은 제발 안경은 무사하 기를 바라며 고개를 숙였고, 팔에 힘을 주며 케올레스의 몸을 끌어 안았다. 등에 돌이 퍽 퍽 부딪혔다. 아찔할 정도로 큰 충격이었다. "젠장..." 조금 잠잠해지자, 루첼은 안경의 먼지를 닦아내고는 숨을 돌렸다. 케올레스가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대체....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하는 건가!" "......온 세상을 통틀어 단 한사람 밖에 없습니다.......!" 다시 하얀 빛이 번쩍였다. 루첼은 이를 갈아붙이고는 외쳤다. "프로텐- !" 순간에, 루첼과 케올레스를 둘러싸며 연분홍색 막이 번쩍였다. 꽈앙 -! 바로 옆으로 흰 빛이 내리꽂혔다. 천정이 와르르 쏟아지고, 루첼 발 디디고 있는 복도 바닥이 꺼진 듯 무너졌다. 깨진 벽돌과 흙이 루첼과 케올레스를 덮쳤지만, 모두 보호막에 미끄러졌다. 잠잠해 지자 루첼은 보호막을 거두었다. 앞의 벽이 완전히 무너져, 먹구름 까맣게 낀 하늘만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쿠루릉 대는 구름이 번개에 하얗게 드러났다가는 사라진다. 루첼은 뒤돌아 가려고 돌아보았지만, 그 쪽도 자욱한 먼지안개에 뒤덮여 보이지도 않았다. 뛰어 내릴까, 하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득했지만 바람만 잘 움직이면 편하게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아래로 내려가야 할 것 같습니다." 케올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려가게." "같이 내려가셔야죠." 케올레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부터 난 쓸모없을 거네.......그란셔스 군." "케올레스 님!" 케올레스는 길게 한숨을 내 쉬고는 벽에 등을 기댔다. "내가.....어떻게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는가.....할 수 있는 데까지 다 한 것이.....여기까지네. 난 알아.......여기가 끝이겠군." 먼지 자욱하게 낀 턱수염은 이제 피투성이였다. 숨소리도 거의 넘어 갈 듯 거칠기만 했다. 그리고 방금 전의 매섭게 빛나던 눈빛도 흐 려지고, 꼿꼿하던 몸도 힘이 빠져나가 있었다. 불길처럼 뿜어 올랐 던 생명력이, 이제는 마지막 남은 모든 것을 다 태워버리고 가느다 란 불씨만이 남아 있었다. 루첼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저 제 스승 님의 명성 덕에 여기까지 온 것뿐입니다. 같이 가 주세요! 아니, 지금 저는 당신을 버리고 가야 할지 업고라도 가야 할지, 이것조차 스스 로 결정할 수 없는 몸입니다!" "아무리 그런 자네라도 죽어가는 늙은이 보다 많은 것을 할 수 있겠 지........자네는 젊고, 아마도 강해질 테니까......." 다시 고개를 젓고 싶었지만, 케올레스가 그의 손을 잡았기에 아무 것 도 하지 않았다. 케올레스는 숨을 몰아쉬며, 그러나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부탁하네......바르젤을 지켜!" 그러나 그렇게 말하던 케올레스의 눈이 갑자기 요새의 외벽 흉벽에 멈추었다. 반쯤 함몰되어 어둠 속에 묻혀 있었지만 횃불에 어슴푸 레한 윤곽이 드러나 있었다. 케올레스가 루첼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무슨......" 그리고 루첼도 같은 것을 보았다. "!" 흉벽 위에 시커먼 그림자가 서 있었다. 정말, 어둠을 끊어온 듯 새카 맣기만 했다. 다시 하얀 빛이 번쩍이며, 멀찍한 곳의 망루를 박살 냈다. 콰앙--! 그 빛이 터지는 순간에, 그 그림자는 더욱 새카맣게 드러났다. 그리 고 검은 날개를 펼치듯, 그 그림자위에서 옷자락이 펄럭였다. 솟구 치는 팔에 걸친 은팔찌가 반짝였다. 거센 바닷바람에, 은빛 머리카락 이 거품처럼 쏟아지며 흩어졌다. 다시 하얀 빛이 번쩍였다. 그리고 그것이 무서운 속도로 바다를 가르 고 그 그림자를 향해 내리꽂혔다. "아키--!" 루첼이 자기도 모르게 외쳤다. ******************************************************************* 작가잡설: 계속 질문이 들어와서 오늘 정확하게 밝힙니다. 겨울키는 출판 계획 없습니다.;;; 올 초에 진행되던 출판사와 꼬인 뒤에, 그 뒤로 올해 무슨 마가 끼었는지 계속, 끝없이, 닥치는 대로 꼬이더군요;;; 그래서 그 덕에 지금은 출판 계획 없습니다. ;; 에, 뭐.........저라고 기분 좋을 리는 없지만, 10월에 아파서 골골 대고 난 뒤에는 '뭐, 우찌 되겠지~~~' 하고 살고 있습니다. p.s 그러니 ㅍ모 출판사랑 저랑은 아--무 상관 없습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5장 *************************************************************** [겨울성의 열쇠] 제260편 바다 거품, 하얀 소용돌이#5 **************************************************************** 아킨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가 누 구의 것이라 알아도 당장 고개를 돌릴 수는 없었다. 순간에, 마치 창을 내리꽂듯 하얀 섬광이 츠캉 내리박혀왔다. "프로텐........!" 아킨을 중심으로 하얀 장막이 파문처럼 펼쳐졌다. 콰아아앙--! 엄청난 빛이 터지며, 사방이 하얗게 밝혀졌다. 바다위로도 빛이 폭포 처럼 쏟아지고, 반사된 섬광이 바다에 내리박히며 바닷물이 높이 뿜어져 올랐다. 포말이 아킨 쪽으로 비처럼 쏟아졌다. 옷과 얼굴이 바닷물에 흠뻑 젖어 버렸다. 아킨은 얼굴을 적신 바닷물을 닦아 내고는 북쪽을 보았다. 하늘에는 먹구름이 물 흐르듯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바다는 바르젤 요새의 성벽과 절벽에 으르렁대며 부딪혔고, 아킨이 말을 탄 채 서 있는 성벽까지 파도가 치솟아 올랐다. 방금 전에 보아두었던, 함대 의 기함을 중심으로 푸릇한 마법 진이 확 떠올랐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역시 악튤런 파노제다....! 아킨은 말의 고삐를 당겼다. 말은 딛고 있는 성벽을 박차며 바다 위 로 뛰어내렸다. 하늘은, 여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컴컴했다. 간혹 찢어진 먹구름 사이로 뻘건 하늘이 보이기도 했으나 이내 소용돌이치는 구름에 먹혀 사라져 버린다. 바닷물은 성벽에 부닥쳐 오며 높이 솟구쳐 오르고 , 차가운 포말이 산산이 흩어졌다. 벼락은 하늘을 쪼개고, 바다위 로 내리꽂히고, 그러며 사방을 잔혹하도록 환하게 밝힌다. 그리고 이내 밀리듯 들려오는 천둥소리에 겁먹은 세상이 전율한다. 아킨은 벼랑 언저리에 도착하자, 절벽을 디디며 말에서 내려왔다. 습하고 차가운 바닷바람이 얼굴에 바싹 와 닿았다. 북쪽에서 휘몰아 쳐 오는 바람은, 사납고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절벽에 우르릉 부 딪힌다. 바다는 암초와 바위들 사이에서 하얗게 소용돌이친다. 솟구 쳐 바위를 집어삼키고, 출렁이고 꿈틀대던 물러나면 그 검은 바위 들 위로 거품이 줄줄 쏟아져 내렸다. 아킨은 방금 전에 바다 곳곳에 새겨 놓은 마법진의 핵들을 그 절벽에 등을 붙인 채 확인해 나갔다. 북쪽 바다 깊은 곳에 하나, 동과 서에 하나 씩. 다시 쓸려나갈 듯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옷자락은 펄 럭이고, 머리카락도 따갑게 얼굴을 쳐 눈을 감고 있어야 했다. "에아, 이프-" 아킨은 입술을 달싹였다. 찬 바람에 목구멍 안까지 시릴 지경이다. 곧 바람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이 차분히 내려오고, 옷자 락도 잠잠해진다. 이제 잠시나마 차분하게 앞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아킨은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걷어내고는 팔을 들었다. 팔찌의 글자 가 한꺼번에 불을 지른 듯 화륵 빛나며 주변의 어두운 바위를 등불 처럼 밝혔다. 그에 따라, 어둡게 물결치는 바다 속에서 희끄무레한 빛이 스며 나왔다. 동과 서에서도, 은은한 빛이 주변을 비추며 마 치 검은 천이 바라지듯 어둠을 지우며 나타났다. 팔찌의 빛은 더욱 환해지고, 그 안에서 나타나는 푸릇한 글자들은 그 환한 빛에 검어 보일 지경이었다. "지, 카이크-!" 다시 하얀 빛- 전격이 솟구쳐 올랐다. 하늘과 바다에, 푸릇한 마법진 이 눈을 떴다 감았듯 나타난다. 그 빛이 마치 기둥처럼 바다를 가 르며 아킨을 향해 내리꽂혀왔다. 순간이었다. 빛이 아킨을 향해 내리꽂히는 순간, 온 사방이 눈부신 빛에 내리 덮 이며 어둠이 찢겨나가는 순간, 바다 속에서 엄청난 힘이 솟구쳐 올 랐다. 바닷물이 치솟았다가, 사방에 폭포처럼 쏟아졌다. 쿠르르릉-- 폭풍우라도 치는 듯 파도가 으르렁댔다. 북과 동, 서에 심어 놓은 마법의 중심점들이 한꺼번에 빛을 발한다. "이, 비흐-" 거대한 벽이 치솟는 듯 했다. 어둠과 어둠을 가르며, 하얀 소용돌이와 거품이 휘몰아치는 바닷물과 함께 쿠르릉 치솟아 올랐다. 그리고 그것은 돌진해 오는 하얀 섬광의 무더기 속으로 내리박혔다. 대지가 떨었다. 바다는 창 맞은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쿠르렁 치솟으 며 하얀 거품을 토해냈다. 해일이 되어 높이 솟구친 파도가, 북쪽의 해안가를 집어삼키고 델 카타롯사 함대가 켜 놓은 불빛을 덮쳤다. 하늘과 땅에 다시 푸릇한 마법진이 떠올랐으나, 그 일부가 함몰되 어 으스러져 있었다. 아킨은 다시 말고삐를 잡고는 성 위로 뛰어 올랐다. 등 뒤에서 산사 태라도 난 듯한 쿠르릉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에 실린 차가운 포말이 축축하게 목덜미와 손목을 적셨다. "케올레스 님, 루첼-!" 드디어 성 위로 올라가자 아킨이 외쳤다. 얼굴을 마주치자마자 루첼 이 당장에 고함을 내 질렀다. "어떻게 된 거야, 너--!" 아킨은 손을 내 젓고는, 말에서 뛰어 내려 쓰러져 있는 케올레스에게 달려갔다. 루첼도, 케올레스도 온통 먼지투성이였다. 아킨은 우선 숨을 몰아쉬는 케올레스의 목덜미에 손을 가져가고, 이마에도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몸을 살펴 다친 곳이 없다는 것도 확인했다. "다행입니다, 케올레스 님." 아킨은 그리 말하고는 흐릿하게 웃어보였다. 케올레스가 마른 손으로 아킨의 옷자락을 꽉 움켜잡으며 뭐라 속삭였다. 필사적으로 말하는 것이었으나, 쿠르릉대는 파도와 바람소리에 묻혀 거의 들리지 않았다. 루첼은 듣지 못했지만 아킨은 들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제 힘으로 악튤런을 막고 바르젤을 지키는 건 어려운 일입니 다.......악튤런 파노제는 막을 수 있어도, 함대를 막을 수는 없고...... 함대를 막을 수는 있어도 악튤런 파노제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주름 속에 묻힌 케올레스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아킨은 그의 손을 잡고 그 위에 손을 얹었다. 노인의 손은 차가웠지만, 소년의 손은 뜨겁게 그 손을 녹여주고 있었다. "그래도 어쨌건 해 보겠습니다. 지킬 수 있을지 없을 지는 확신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케올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눈가의 미소를 보며, 아킨은 제발 자신은 절망이나 체념 같은 것을 보이고 있지 않기를 바랬다. 케올레스의 눈은 기쁨과 희망에, 그래서 벅차오르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그리고 그 눈빛에 아킨은 지금 암롯사가 어떤 상황인지, 이 바르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킨도 알고 있었다. 이 케올레스에게 아버지 사이러스가 어떤 의미 인지, 그 아들인 아킨과 휘안토스가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암롯사 왕가에 무엇을 바라고 기대하며 살아 왔는지..... 그리고 또한 아킨을 '암롯사 왕가의 아이'로 사랑해 주었던 노인이다. 병약하고 가엾은 손자 보듯이 돌보아 주고 신경 써 주었고, 처음 마법의 자질을 확인했을 때 누구보다 기뻐해주었다. 아킨이 메리엔 을 제하고 누군가를 기쁘게 했던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그 때 루 첼이 손을 들었다. "어이, 저기." 아킨은 급히 돌아보았고, 검은 하늘과 바다에 마법진이 나타난 것을 발견했다. 방금 전 어그러졌던 것은 금방 고쳐져, 오히려 더욱 선 명해져 있었다. "괴물 같은 녀석이군, 정말." 루첼이 불평하듯 말했다. 그리고 아킨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지금 몸이 예전과는 비할 바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할지 라도, 익숙하지 않은 지금 당장 제대로 사용하기는 어렵다. 아무리 전설의 보도를 얻었다 할지라도, 제대로 쓰지 못한다면 단검을 쓰 는 상대에게도 당하기 십상이니. 아킨은 품안에 손을 집어넣어 지에나가 주었던 것을 찾았다. 베이나 트는 절대 쓰지 말라고 했지만, 어쨌건 지금 당장 정면 대결로는 이기기 어렵다. 아니,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악튤런의 성격을 고려하 면 '위험하다.' 어차피 아킨은 자존심 챙기느라 정면으로 머리 부딪 히는 바보는 아니었다. 특히나 지금은 토너먼트에 나온 것도 아니니, 비겁하다느니 정정당당이니 따지는 것 자체가 삽질이다(어차피 그 쪽에서 '개자식!' 하고 떠들어 봤자 여기까지 들릴 리도 없고). 아킨은 손안에 차가운 보석이 잡히자, 그대로 힘껏 집어 던졌다. 붉 은 보석이 어두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고, 저 먼 곳에서 하얀 빛이 하얗게 번쩍이는 순간에 붉은 보석 안에도 붉은 빛이 터졌다. "루첼, 케올레스 님을 모시고 어디로든 피해." "피하라니......그런데 저건 대체 뭐야?" "묻고 답할 틈 없다." 순간 허공에서 불길이 기둥처럼 솟구쳤다. 아킨은 늦었다는 것을 깨달으며(아니면 지에나가 장담한 시간보다 훨 씬 짧았던가.)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멀리 내다 볼 필요도 없었다. 아킨이 방금 전에 말을 타고 넘어왔던 성벽위에 불길이 화 악 치솟아 올랐다. 어두운 성벽과 바다위로 불길이 뿜어내는 붉은 빛이 번지며 일렁거렸다. 루첼이 일어나려 하자, 아킨은 손을 저어 막고는 몸을 일으켰다. 성벽 위에, 적갈색 로브를 휘날리는 호리호리한 남자가 서 있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카락은 불꽃같은 색이었고, 그 귀 언저리에 흔들리는 귀걸이는 정말 햇살 조각인 듯 찬란하게 빛났다. 그가 아킨 을 돌아보았다. 금빛 눈동자가 희열에 타오르고 있었고, 위로 치솟은 입 꼬리는 금방이라도 천둥 같은 웃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자주 봤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낯설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지금 모습만큼은 처음 보는 듯 하다는 건 인정해야 했다. 뭔가, 아주 무서운 분위기였다. 매일 매일 나무늘보 비슷하게 늘어져 바닥과 일체화 되던 모습만 봐 왔던 아킨은, 잠시 괜히 불렀다는 생각을 해야 했다. 그가 으르렁거리듯 물었다. "뭐 하러 귀찮은 사람 오라 가라 하는 거냐." "큰일은 아니고, 어려운 일도 아니니...... 어쨌건 부탁 좀 드리려고 합 니다." "보답으로 뭐 해 줄 건데?" 아킨은 자신을 가리켰다. "저는 곧 당신의 동료가 될 몸입니다. 그 정도 호의를 베풀어 주셨으 면 하는데요." 당장에 남자- 팔로커스가 이를 드러냈다. "내가 왜 너 같은 녀석이랑 덤으로 오는 그 개애애 자식을 동료로 받 아 들여야 하는 거야! 난 허락한 적 없어! 그 빌어먹을 니왈르도 자식--! 그 망할 자식, 개자식! 똥강아지 같은 놈--! 그 자식 온다 고 반겨야 하는 이유가 뭔데!" 마지막 근처의 말은 어딘지 아킨도 불쾌하게 만드는 욕이었다. "......지에나 님께서도 말씀하셨잖습니까. 호의를 베풀어 주라고!" 아킨은 팔로커스가 베이나트의 말은 무시해도 지에나만은 엄한 할머 니 만난 손자처럼 무서워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이 나오자, 팔로커스의 얼굴은 역시나 심드렁해졌다. "빌어먹을, 하면 될 것 아니냐! 하면! 뭐, 몸 한번 흔들고 나면 다 끝 나겠지! 어차피 이번에는 느닷없이 내 뒤통수 후려갈길 지이도 비 키도 없으니까." 다시 검은 하늘과 바다에 푸릇한 마법진이 떠올랐다. 팔로커스는 그 것을 올려다보더니 파하- 하고 웃었다. "하는 짓 참 귀엽구나. 너무 깜찍해서 발로 밟고 물어뜯고 찢어발긴 다음 한방 쳐 주고 싶어." 하얀 섬광이 팔로커스를 향해 내리꽂혀 왔다. 팔로커스는 팔을 앞으 로 뻗었다. 특별한 주문도, 힘이 모이는 듯한 느낌도 없었지만 그의 앞에 붉은 동심원이 팟팟 그려졌다. 섬광이 콰앙 내리박혔지만, 순식간에 빨려가듯 팔로커스가 펼친 보호막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섬광이 마지막 한 조각마저 삼켜지자, 팔로커스는 웃으며 소매를 걷어붙였다. "죽여주는 불꽃놀이를 보여주지! 이 백년만의 잔치를 보여주마! 자아, 이제 다들 춤추고 미치고 날뛰다가 바다 속에 처박혀 버려-!" 방금 전 까지는 하기 싫다고 버럭 버럭 핏대 세웠으면서, 일단 시작 하자 본인이 더 신나게 발광하며 날뛰려고 하고 있다. 눈도 생전 처음 야한 상상을 실현해 볼 기회를 맞은 사춘기 소년처럼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소맷자락이 펄럭이며, 그 주변에 불꽃이 치륵 치륵 솟아올랐다. 그리고 온 성벽에 마치 발자국을 찍어 넣듯 불덩 어리가 솟아올랐다. 마치 축제날 횃불을 달아 놓듯, 온 성벽에 불 기둥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바다위로 그 붉은 빛이 퍼지며 빛기둥처 럼 솟구쳐 올랐다. 세상은 금방 낮처럼 환해졌다. 아킨은 루첼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 때다. 어서 케올레스 님 모시고 가라." "저 미친놈은 대체 뭐야--?!" "신경 쓰지 마. 돌아버린 지 천년은 된 마법사니까." 루첼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러나 아킨은 차마 저 미친 마법사가 그 옛날 쿼크 대제의 일곱 기사들과 상대했던 팔로커스라 말할 수는 없었다. 그리 말했다가는, 상황은 당장에 용사가 필요한 마왕강림 사태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말릴 생각 하지 말고, 뒤통수만 가격해. 우리가 예전에 목 뒤에 마 법핵을 하나 박아 놨으니, 그것만 잘 맞추면 당장에 기절할 거야. -행여나 죽을까봐 걱정할 필요는 없다. 팔로커스가 얼마나 진절머리 나는 놈인지만 생각하며, 정성껏, 공들여, 힘주어 갈기 거라. 그리고 그러다 죽이면 잘 기억해 뒀다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려무나. 그 둘이 왜 그렇게 심드렁하게 말 했는지 처절하게 이해가 가는 아킨 이었다. 미치면 대책 없다, 저 남자는. 성벽에서 불타오르던 불꽃은 화살을 쏘듯 바다를 가르며 북쪽으로 날아 갔다. 쾅, 쾅, 쾅--! 함대에서 불길이 치솟으며, 바다위로 피를 뿌리듯 붉은 빛이 퍼졌다. -그리고 분명히 경고해 두는데, 아키야. '미친놈'이라는 단어와 함께 연상되는 모든 상상은 부질없다. 그는 네 모든 상상을 초월할 테니까. 북쪽의 절벽, 아가사의 이빨에 불꽃이 내리꽂혔다. 피처럼 불길이 쿨렁 터지더니, 그대로 꽈르르 무너져 내렸다. 아킨에게 저건 아무 상관없는데, 어쩌고 생각할 여유 같은 것은 없었다. 델 카타롯사 함대 한쪽에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그리고 다른 불꽃이 허공을 가르며 멀리 나가더니, 아주 먼 곳에서 불길이 다시 콰앙 치솟아 올랐다. 아마도 저곳에 카론 요새가 있었던 것 같은데...... 아킨은 아주 예전에 칼라하스 공주에게 '청혼'하러 갔던 그 때를 떠올리며, 그 작지 만 단단했던 요새의 최후를 애도해야 했다. 콰릉, 콰릉, 콰릉-- ! 불길이 차례로 일었다. 그리고 기함 쪽에서, 다시 하얀 섬광이 솟구쳐 팔로커스를 향해 내리꽂혀 왔다. 그러나 그 빛줄기는 팔로커스에게 가까워오자 마치 흩어지듯 줄어들더니, 팔로커스 앞에 왔을 때는 실오라기처럼 가느다란 흔적만 남아 있었다. 팔로커스의 눈길이 그 쪽으로 향하고, 입술도 슬쩍 치솟아 올랐다. -단, 아키....... 이런 말하기는 미안하지만 팔로커스와 악튤런이 서로 맞 대결 하게 해서는 안 된다. 왜냐고? 아마 '국가 대재난' 사태에 돌입하게 될 게다. 그런 사태는 200년 전의 그 처절한 사건 외에는 겪고 싶지 않다고! 베이나트의 강력한 외침을 머릿속에 떠 올리며, 아킨은 델 카타롯사의 함대를 살펴보았다. 그곳은 이제 어둠 속에서 불로 된 벽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그 불길 사이사이로 배에서 뛰어내린 병사들이 허우적거리는 것이 보였다. 아킨은 하늘을 보았다. 검기만 하던 하늘이 갈라지며, 상처에서 피가 스며 나오든 붉은 아침노을이 드문드문 보였다. 먼 곳의 윤곽도 어슴푸레하게 드러나고 있다. 아킨은 지금이 바로 '뒤통수를 가격할 때' 라고 판단했다. -기절하는 즉시 내가 데려갈 테니, 걱정 말고 후려쳐. 아킨이 떠나기 직전에 지에나도 그리 충고해 주었다. 생각해 보면, 지에나 는 이상한 말도 참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기괴한 버릇이 있다. (아킨의 경우 얄밉게 말하는 버릇이 있고) 그리고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건데, '본인이 직접 한다는', 본인을 제하고는 모든 이들에게 편한 방법을 당연하다는 듯 하지 않는 그녀 역시, 팔로커스와 거의 비슷할 정도로 무책임하고 게으르 다는 것이다. (시골 경로당에서 꼬박 꼬박 조는 노인네들보다 더한 인간들 이다.) 그 때 무엇을 생각했는지 팔로커스가 성벽에서 뛰어 내렸다. 아무래도 직 접 델 카타롯사의 함대로 달려가 차근차근 세심하게 박살낼 생각인 듯 했다. 아킨은 흑마의 등에 타고는 성벽에서 뛰어 내렸다. 바람이 세차게 볼과 어 깨를 감쌌다. 말은 거친 바다의 수면에 닿자, 그대로 그 수면을 밟으며 달 렸다. 발아래에 괴물처럼 거대한 물이 출렁이고 있었다. 거대한 입이 무엇 이든 집어삼킬 듯이- 불길이 가까워져 오며, 검은 바다는 이제 붉게 물들고 있었다. 아킨은 말을 멈추어 세우고는 정면을 보았다. 그곳에 거대한 기함이 있었다. 분명 멀었 지만, 그 기함의 뱃머리에 서서 아킨을 노려보는 청년을 발견하고 그가 누 구인지 알아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뭐냐, 이게--!" 들렸다. 어떻게 이 거센 파도소리를 뚫고 들려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 쨌건 그 소리는 고요한 침묵을 뚫고 들리는 듯 뚜렷했다. 아킨은 말머리 를 돌렸다. 말이 허공으로 머리끝을 그으며, 마법사 팔로커스를 찾았다. 그리고 그렇게 아킨은 악튤런을 등졌다. "아킨토스, 네 짓이냐--!" 매서운 눈초리가 내리박히는 것이 느껴졌으나, 아킨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가정하고 짐작하고 확신할 지는, 아킨이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팔로커스의 불길이 내 던지는 빛이 피처럼 붉게 바다를 적신다. 그리고 아킨은 정말 순식간에 모든 싸움이 끝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 작가잡설: 그들의 실체, 쯤? -_-;; 크리스마스 특집입니다. ^^ 즐거운 성탄 되시길!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5장 ************************************************************** [겨울성의 열쇠] 제261편 바다 거품, 하얀 소용돌이#6 *************************************************************** 로메르드 대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전하는 말을 하나하나 들으며 휘안 토스가 표할 수 있는 감정은 경멸뿐이었다. "전쟁은 이제 시작이오." 회의장에 모인 암롯사 영주들과, 행정관을 비롯한 가신들의 눈초리 역시 싸늘했다. 그리고 정말 서릿발처럼 차가운 휘안토스의 눈빛과, 그보다 더욱 차가운 표정에 침묵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이 무엇 을 말하든 휘안토스보다 차갑고 날카롭지는 않을 것이고, 그들은 눈 빛과 분위기만으로 그들의 왕에게 힘을 싣고 있었다. 그 분위기에, 로메르드의 대사는 점점 오그라들어 사라져 버리거나 그대로 잡아 뜯겨 먹힐 것만 같은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본국의 대비의 결정에, 그것이 얼마나 로메르드에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지금 당장의 그에게는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만 만들어 주고 있다는 데 이를 악물 수 밖에 없었다. 이 암롯사의 얼음 같은 왕 자가 칼을 뽑아 목을 쑤셔도 이상할 것 없는 상황이었다. "미안하지만, 델 카타롯사와 암롯사 중 어디가 로메르드와 가까운 지 는, 귀국의 여왕 아닌 여왕께서도 잘 아시리라 보오. 또, 유감스럽 게도 암롯사의 해군은 아직 건재하오." 대사는 나 역시 그렇게 말해보았다고 답하고 싶었다. 그러나 브리올 테 대비는 코웃음 치며 '내 판단이 옳아. 나중에 가서 보라고. 모두 내 현명한 판단을 칭송할 테니.' 솔직히 말하자면, 로메르드에는 바보만 남았나- 하는 생각밖에는 들 지 않았다. 그녀의 결정은 암롯사의 심기를 철저하게 거슬리게 하는 것이다.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고, 다른 나라도 아닌 암 롯사는 그런 종류의 배반에 철저히 무자비하다. 뿐만 아니라 '여왕 아닌 여왕'이라는 말에는, 지금 로메르드의 상황에 대한 경멸이 충분하고도 남도록 담겨 있었다. "귀국의 공주가 어디로 시집가든 상관치 않아. 하지만 바로 지금, 이 암롯사를 대 놓고 능멸하며 델 카타롯사와 혼인으로 동맹을 맺는 것은 달갑지 않소." "대비 전하와 국왕폐하, 그리고 공주전하께서도 칼리토 대공왕 폐하 께 호감이 있으셨습니다. 갑자기 나온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참으로 대단한 사랑의 승리로군. 암롯사를 적국으로 돌리 고, 에크롯사가 경계태세로 들어가게 하며, 카를롯사마저 눈을 돌 리게 만드는 그런 대단한 사랑의 승리." 대사는 괜히 말했다 싶었다. 대비가 가르쳐 준 말인데, 안 하느니만 못했고 싸늘한 눈초리들은 이제 더욱 혹독한 경멸로 바뀌어 있었다. 영리한 사람을 바보취급하면, 돌아오는 것은 몇 배의 바보취급 밖 에 없는 건 당연한 일이니. "그리 말한다면 귀국의 여왕께서는 암롯사가 아무리 반대한다 하더라 도 전혀 상관치 않으시겠군." 단 한 가지가 있기는 했다. 브리올테는 도도하게 말했었다. '분명 암 롯사의 왕자역시 우리 공주에게 청혼할 거요. 그리 되면, 일은 다 끝났다고 봐야지.' 그 말이 나오는 순간에 대사는 대비에 대한 모든 기대를 접었고, 절 망을 거듭 확인하는 일만 남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없다. "귀국의 여왕께 전하시오." 대사는 머리를 숙였다. 바닥은 그가 흘린 땀으로 얼룩져 있었다. "공주의 혼담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그 혼사가 축복 속에 성사되기를 바란다고." "가, 감사합니다." "그러나 일전에 드렸던 모든 도움을 잊어준 것에는, 분노를 표할 수 밖에 없다고." 대사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이것은 그가 전혀 모르는 말이었다. 주 변의 암롯사 귀족들의 눈치를 살펴보았지만, 그들 역시 모르는 이 야기인 듯 했다. "귀국은 모를 듯한데, 암롯사에는 배신자의 선물을 빼앗는 풍습이 있 소. 그리고.....귀국의 여왕이 나를 배신했으니, 나 역시 그 선물을 빼앗겠소." 무슨 말이냐고 묻고 싶은 것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랐지만 간신히 참았다. 암롯사의 '왕'인 휘안토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의 회의는 여기서 끝내겠소. 그리고 내 말은 분명히, 단 한자도 빠뜨리거나 고치지 말고 전하도록 하시오. 내 말은 이것으로 끝이며, 이 이상 그 어떤 협상도 타협도 요구도 없을 것이오!" 그 한마디 한마디에, 대사는 소름이 오싹 오싹 끼쳐왔다. 말 그대로, 한마디 할 때마다 칼침 박히는 기분이다. 휘안토스는 서탑의 방에 오자 웃음을 터뜨렸다. 기가 막혀서였다. 이렇게 노골적인, 그래서 한심할 정도로 어리석은 무시를 당할 줄은 정말 몰랐다. 아무리 사이러스가 포로가 되었다 하지만, 칼리토 대 공왕과 그 측근들을 제하고는 그 누구도 휘안토스를 무시하지 않았다. 아니, 이리도 능멸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겨 우 소반도의 여왕 행세나 하는 대비에게 이런 꼴을 당하다니. 물론 휘안토스 역시 그녀가 지속적인 신뢰로 그의 도움을 보답할 거 라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언젠가는 최악의 상황에서, 가장 지저 분하고 어리석은 배신을 할 거라고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만일 을 대비해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해 두었고, 지금 그 방법을 쓰 기만 하면 대비는 끝장이다. 로메르드의 상황에 대해서는 정기적으 로 보고받고 있었고, 로메르드에 심어 놓은 대사나 첩자들은 휘안 토스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알 정도로 영리했고, 원하는 것보다 더욱 훌륭하게 보답해 줄 수 있는 자들이었다. 또한 브리올테는 그런 것을 전혀 모를 정도로 충분히 바보였다. "최악이군, 브리올테." 휘안토스는 그렇게 경멸조로 속삭였다. 예전에, 그 사냥터의 성에 갇혀 있던 그녀를 구해주었을 때부터 그리 높이 평가해 본 적은 없다. 그보다 더 나아질 거라 기대하거나 염 려했던 적 역시 없다. 복귀한 그녀는 정말 철저하게 휘안토스가 원하 는 방향으로만 일을 처리해갔고, 그러면서 스스로를 덫의 무더기에 가두었다. 손짓 한번만 잘못하면 그 덫에 철컥 걸려 사냥꾼에게 죽을 그런 덫의 무더기에. 어리석은 황금 사슴, 휘안토스는 웃음과 함께 그렇게 말했다. 그렇다, 정말 너무나 어리석은 황금 사슴이다. 사냥꾼의 덫 안에 있는 줄도 모르고, 도도하게 목을 쳐들고 다리를 뻗고는 물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나 감상하는 그런 어리석은 사슴. 휘안토스는 꺼진 벽난로로 시선을 돌렸다. 잿더미가 그 안에 쌓여 있 었다. 휘안토스는 그것을 지켜보며 속삭였다. "탈로스." 순간 방 안은 다시 컴컴해졌다. 휘안토스는 그를 찾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그의 느낌만은 선명하게 온 몸을 내리 덮치고 있었다. "마지막 부탁을 들어 주십시오." 아무런 답변도 없었지만, 휘안토스는 그가 잘 듣고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로메르드와 암롯사의 상황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 지는 알고 있을까? 그러나 모를 가능성이 더 높았다. 왕비가 필요도 없는데 그 오라비에게 말 할 리 없으니까. 필요하면 친절하지만, 필 요 없으면 냉담한 여자다. 최근 2년 간 모든 일이 그리도 술술 풀렸 는데, 탈로스와 연락을 주고받을 리 없다. "간단합니다........ 앞으로 반년 간, 지금 당신이 계신 곳에서 절대 나 오지 마십시오." 어둠이 커지는 것 같았다. 놀라움과 의아함에, 그 그림자가 크게 출 렁이는 듯 하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절대 나오지 마시고.........그저 반년 간 그 안에 계십시오." 방 안에서 어둠이 사라졌다. 에크롯사의 남자인 탈로스는 분명 휘안 토스와의 약속을 잘 지켜줄 것이며, 그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조차 못할 것이다. 그러며 휘안토스는 생각했다. 탈로스에 대한 두 가지 보답이 한꺼번에 이루어지고 있다고.... 지금 의 이 일과, 일전에 아킨의 일을 탈로스가 망친 것에 대한 보답이 왔다. 예상한 대로, 기대한 대로, 한 치도 어긋나지 않으면서. 어리석고 오만한 자는 끝까지 어리석다. 스스로를 바닥에 던져 자신 의 속안을 들여다 볼 정도로 용기 있는 자는 드문 법이고, 자기애에 절은 자에게는 더더욱 힘든 법이다. 그리고 브리올테는 약간의 가능성도 없는 여자였고, 그 예상대로 한 것뿐이며, 그랬기에 지금 휘안토스의 보답을 받는 것이다. 탈로스 역시 마찬가지. 그는 그 무엇도 자신을 해할 수 없고, 그 무 엇도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는데 방해가 될 거라 생각지 않기에 방 비하지 않는다. 지나친 능력이 그의 시야를 좁게 만든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일이 되는 것이다. 당연하게, 예상된 대로, 인과의 틀에 맞물려. **************************************************************** 작가잡설: 날이 좋군요.......후훗. 오늘도 건필의 하루! p.s 놀러가느라 오타가 좀 많았군요;;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6장 ************************************************************** [겨울성의 열쇠] 제56장 황혼과 여명 제262편 황혼과 여명#1 ************************************************************** 잠에서 깬 것은 한참이나 전이다. 등은 푹신하고 이마는 따뜻하다. 공기에 떠도는 온기는 분명 편안했지만, 갇히고 밀폐되어 있는 듯 답답하다. 휘청 휘청 떠도는 먼지들이 햇살에 반짝이다가는 아래로 가라앉아 가는 그런 모습을 한없이 바라보는 듯 말이다. 생각해 보려했다. 어째서 여기에 있게 된 것인가. 머리가 깨어질 듯 아팠지만, 무거운 짐을 지고 산을 오르듯 힘겹게 생각을 더듬어 나 갔다. 저녁 즈음에 카제트 경이 근처 협곡에 적군이 숨어있다고 보고했다. 뻔하다고 생각했고, 그 뻔한 생각을 한 적군을 비웃었다. 기습하려고 숨어 있는 것이다. 국경에서 그리 먼 곳도 아니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분명 시도는 할 거라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 척후를 보내어 잘 훑어보고 있는 중이었다. 생각했던 것이 온 것이 고, 생각해 두었던 일을 하면 된다. 그러니 사이러스가 그들을 기 습하기로 결정한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예상대로, 당연한 대로, 언제나 그렇듯이 되었다. 기습을 하고, 암롯 사 군은 혼전 끝에 델 카타롯사 군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주춤 주춤 물러나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기습을 당하자 겁에 질린 개들처럼 꼬리를 감추고 어깨를 낮추고는 뒤로 주춤 주춤 물러나려 하고 있다. 어둠, 흩어지는 창백한 달빛, 그 위로 솟구치는 검은 피들- 피비린내 에, 봄의 축축한 흙냄새가 뒤섞였다. 그리고 사이러스는 암롯사 군속으로 파고드는 검은 옷의 기사를 발견 했다. 고고하게 나는 검은 새처럼, 그는 그 혼전 속에서도 차분한 눈으로 달빛과 어둠을 꿰뚫어 보며 창을 휘둘러 기사와 병사들을 치워나갔다. 거의 찌르지도 않았다. 후려치고, 뒤축으로 치고, 그리 고 다시 돌려 쳐내는 것만으로도 그를 막는 기사들은 쉽게도 쓰러졌다. 그를 보며, 사이러스는 그가 암롯사 왕인 자신을 원한다는 것을 알아 챘다. 수없이 상대를 쓰러뜨리면서도, 마치 어떠냐는 듯이 사이러 스를 바라보았으니. 개인적 원한이다, 사이러스는 그리 생각했다. 죽 인 사람이 워낙에 많으니, 그 중에 누구의 원한과 이어져 있는지는 알 수 없고 관심도 없다. 검은 옷의 기사가 창을 당기고는 사이러스를 바라보았다. 이제 아무 도 막을 수 없고, 막으려 하는 것을 허락할 생각도 없어진 사이러 스는 마주 검을 뽑았다. 그러자 남자가 얼굴을 가린 복면을 벗었다. 알고 있는 얼굴이다. 예전에 아들을 상대로 패배를 안겨 주었던, 바 로 그 에크롯사의 무명기사였다. 대결 직전에 그가 무슨 말을 했 지만, 중요하지도 않고 기억나지도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의 창뿐이다. 매가 날카롭게 사냥감을 찍어내듯, 드래곤이 발톱을 휘두르듯, 그 창은 사이러스를 향해 강하게 내리 찍혔다. 받고 치고, 챙- 챙 - 후려치고 때리고 베어내고 찔러 들어오고. 휘몰아치는 그 속, 열기와 비슷한 무엇에 시달리며 사이러스는 투명 한 달빛을 보았다. 숲과 벌판과 피 안개 토해내는 전쟁터 위로 폭 포처럼 쏟아지는 그 청아하고 맑은 빛, 그 빛 속에 두 팔을 벌려 그 의 목을 끌어안는 여인을 보았다. 고작 3년 동안 그의 아내였고, 고 작 2년 동안 그를 사랑했지만, 눈보라 치는 벼랑 끝에서 잔혹한 영 원으로 화해 사이러스를 지배해 버린 그 여인을. 또 생각했다.... 저 주스런 사랑. 저주스런 아내, 그리고 더욱 저주스런 그녀의 원망 을 담은 분신.......아들 아킨토스를. 아버지를 두려워하면서도, 그 러면서도 증오하고, 그러면서도 끝없이 분노하는 지 칠 줄 모르는 아들을. 눈가로 따가운 햇살이 스며들고, 누군가가 열어젖힌 창문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차갑고 투명한 아침 공기가 가볍게 이마와 목덜미를 쓸고는 지나간다. 사르륵- 커튼을 걷고 묶는 소리가 들려왔다. 햇살은 더욱 환하게 쏟 아지자, 사이러스는 눈을 떠야 할 듯 하다 생각했다. 방 안에 들어온 여인은 사이러스가 깨어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런 상황에 서 계속 자는 척 한다는 건 왠지 우스꽝스럽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몸은 좀 어떤가요?" 그 부드러운 물음에, 사이러스는 무거운 눈꺼풀을 열었다. 그러나 답 은 하지 않았다. 눈을 뜨는 순간에 등이 욱신거려 왔으니. 머리도 돌덩이라도 달고 있는 듯 무겁다. 게다가 아직 잠에 덜 깬 듯 어지러 운 꿈이 아직도 눈앞을 떠돌고 있었다. 그래, 다시 아내가 보인다. 봄빛이 차오르던 날, 산과 들판은 연두 빛 안개에 휩싸이고 푸르고 노란 봄꽃들이 차분히 여문 꽃봉오리를 이고 있는 그런 날의 아내가. 처음 만난 그날, 어디 처음 나들이 나온 시골 소녀 같은 옷차림으로 다리가 부러진 그를 안쓰럽게 내려다 보던 그 시절의 모습으로 말이다. 보석은커녕, 땋은 머리를 묶은 낡은 리본이 그녀가 가진 장신구의 전부였다. 아버지나 남자 형제 외의 남자들 앞에 서 본적도 없는 듯, 교태 없이 순진하게 그 해 서른둘이던 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차가 있어요. 빌린 것인 데다가, 낡고 좁기는 하지만......도시까지 태워다 드릴게요.' '난 돈이 없는데.' 그저 산책이나 하며 놀기 위해 빠져나온 것이라, 돈이라고는 거의 없 었다. 게다가 다리가 부러지고, 진흙투성이에, 옷은 여기 저기 찢어져 있으니 '내가 암롯사 왕이오.' 라고 하면 당장에 의사(다친 것과는 상관없는 분야를 전공하는)를 부를 상황이라, 그냥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돈은 괜찮아요. 다치셨잖아요.' '낯선 남자에게 지나치게 호의를 베푸는 건 좋지 않아. 내가 나쁜 놈 이면 어쩌려고 그러시오.' '그냥 믿을게요. 그리고 말씀대로 나쁜 분이라 해도.....어쩔 수 없어 요. 혹시 나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다치신 분을 놓고 가는 건, 제가 너무 싫으니까요.' 그렇게 순수하게 웃는 그녀를 보며, 사이러스는 문득 이 소녀가 그가 선물한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그의 앞에 서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가장 값진 보석으로 그 목과 자그마한 귀를 장식해 주고 싶었다. 그 머리에 아직 누구에게도 주지 않았던 대공비의 관을 씌워주고, 그 입술에 입 맞춰 주며 속삭여 주고 싶었다. 그대가 내 아내라고, 그대가 왕자와 공주의 어머니이자 왕의 아내가 될 것이라고. 그렇 게 사이럿느는 깊은 계곡에 홀로 피어 은은한 향기와 아름다움을 숨 기고 있는 난초를 만난 듯, 처음으로 가슴이 두근거렸고 조심스레 갈망했다. "아침 드시겠어요?" 사이러스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그 목소리는 너무도 잘 알고, 그 랬기에 화가 치밀게 하는 목소리이기도 했다. "그냥....물이나 한잔 주었으면 좋겠군." 옆에서 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물 따르는 소리가 이어지 고, 그 물을 한 모금 마시는 소리도 들린다. 그리고 그녀는 잔을 내밀었다. 사이러스는 그 잔을 단번에 비우고는 그녀에게 다시 건 네주었다. 여자가 물었다. "기분 어떠신가요?" "아내 생각을 했지." 여자는 가볍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산 파로이의 모든 남자들의 가 슴을 설레게 했던 날들이 있었다. 그녀는 도시의 여신이었고, 왕관 없는 여왕이었다. 그리고 그 때의 사이러스는 젊고 혈기 왕성하고 두려움 모르던 난폭자였고, 유일한 왕이었다. "당신도 기억하고 있겠지." "너무나 잘 기억하죠. 제가 그녀를 데리고 왔으니........" 마르타는 간혹 말하고는 했다. 청혼을 하고 수락 받은 날, 그는 마르 타에게 루실리아를 데리고 궁으로 와 달라고 부탁했다. 마르타는 호기심을 보이며 그의 청을 들어주었고, 가벼운 질투어린 말을 날리 며 그를 축하해 주었다. '드디어 아름다운 인어 하나가 심해의 바닥에 있는 얼음 심장을 꺼내 었군요. 축하해요. 걷어 채인 여자로서는 상당히 억울하긴 하지만, 그래도 그 아가씨에게 좋은 남편이 되어주세요.' 그 때의 마르타도 아름다웠다. 빛나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고는 붉 은 입술로 살짝 미소 짓는 그 모습을 보면, 왠지 남편인 젊은 롤탄 백작에게 화가 날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 속에 어린 질투 와 아쉬움에 나름대로 만족했다. 이런 일에 그녀가 기뻐하기만 한다 면, 그것도 참 언짢고 아쉬울 것 같았으니. '그녀가 뭐라 말했는지 알아요? '그 분은 여기서 일하시나요? 어머나, 그렇다면 왕을 모시는 지체 높은 분이었나 보군요.' 맙소사, 사이 러스. 그 순진한 아이를 그렇게 놀리시다니, 너무 심술궂군요. 당신 이 왕좌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기절하지 않으면 다행이에요.' 그녀는 너무나 젊고 활기찼으며 자신만만했다. 현명하고 강하며, 그 러면서도 부드럽고 친절했다. 완벽했다. 정말 가장 훌륭하고 귀한 것으로 빚어 놓은, 위대한 석상 같은 여인이다. 그랬기에 사이러스는 마르타와 결혼하지는 않았다. 원하는 모든 것을 소유하는 그였지만, 마르타에게 사이러스가 원하는 것은 '소유'와는 전혀 다른 감정이었기에 아내로 맞이하지 않았다. 가지지 않으면 영원히 가질 수 있는 여자였다, 그녀는. 그러나 루실리아는 아내로,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손끝과 발끝의 모 든 피까지, 그의 품안에 담고 싶었다. 그의 침대에서 눈뜨고, 그의 옆에서 식사하고, 그의 성안을 거닐다가 그의 침실로 돌아오는, 그 런 아내로서. 그의 옆에 서서, 그의 아이들을 키워줄 그런 아내로서- '당신은 결코 떠날 수 없소, 루실리아--! 당신의 손에 암롯사 왕가 의 결혼반지가 끼워지고, 당신의 머리에 대공비의 관이 씌워진 순간, 당신에게 당신이 원해서 떠날 권리 같은 건 사라졌어! 당신은 내 아내고, 내 여자고, 내 아들들의 어머니야!' 그랬기에 그녀가 거부했을 때, 그것이 저주에 걸린 아들과 그 저주의 책임자인 사이러스 때문이었을 때, 아무것도 용납할 수 없었다. 그 녀가 늪의 성에서 파괴되어 가도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 외에는 아무런 방법이 없다는 것을 분명 알기에, 그렇다고 그녀를 놓아줄 수도 없기에. 그의 손안에 없다면 '존재하지 말아야한다'. 그것이 루실리아의 의미 였고, 그 외에는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나 때로는, 가끔은, 아주 가끔은 서탑의 방에 앉아 생각하곤 한 다. 과연 나루에, 그 숲의 왕이 건 저주의 실체는 무엇일까. 내 아들이 괴물이 된다는 것? 하지만 화가 나기는 해도 심장이 찢어질 정도로 괴로운 건 아니었다. 외면하면 끝나는 문제. 아내 루실리아가 그 아이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화가 나기는 하지만, 자책까지는 들지 않았으니. 아내를 잃은 것? 그것 역시 아닌 것 같 다. 사이러스는 슬프기는 했지만 무너지지는 않았고, 버티어 냈다. 모든 선택에는 이유가 있었고, 이유가 있기에 납득했고, 납득했 기에 무너지지도 않은 것이다. 행여나 숲의 왕이 내 건 저주가 실 패한 건 아닌가, 하고 생각했지만 그 매서운 눈빛을 생각하면 그것 역시 아닌 것 같다. 실패했다면 가만히 있을 자가 아니다. 마르타가 창문을 닫았다. 오싹할 정도로 추워지기 시작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방 안도 방금 전의 답답함이 한결 벗겨져, 훨씬 상쾌하고 가벼워져 있었다. 창을 닫은 마르타는 사이러스에게 돌아와, 그의 이마를 짚고 안색을 살펴보았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사이러스가 물었다. "테시오스가 찾아왔었나." "그래요." "당신에게 무엇을 부탁했지?" "일이 끝날 때까지 당신을 여기 머물게 해 달라고 하더군요. 그걸로 끝이었어요." "보답은?" "내 아들의 생명이요." 사이러스는 더 이상 그녀에게 화를 내지 않기로 했다. 하긴, 애비 닮 아 멍청한 녀석이지.......그 롤탄 백작. 마음만 먹는 다면 그 토끼 새끼 같은 것을 누군들 못 잡겠나. "나는 어느 정도 다쳤지?" "갈비뼈, 대퇴골, 어깨..... 다 나으려면 두 어 달은 걸릴 거에요." "목숨에 지장 없을 정도만 부러뜨려 놨군. 자, 그럼 이렇게 산 채로 어떤 고문을 할까?" "테오가 약속했어요.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고." "그 약속을 믿나?" "믿어요." 순진하고 어리석은 판단은 아니리라. 마르타는 나이도 많았고, 많은 만큼 착실하게 현명해 진 여자다. 그녀가 이리 생각했다면, 충분히 믿을만한 근거가 있어서 일 테지. "그렇다면 할 일이라고는 먹고 자고 노는 것뿐이겠군." "곁에 있어 드릴게요." "테오와는 언제부터 알고 지낸 건가."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마르타는 그를 등지고 있었지만, 그 어깨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토해내듯 답한 것은 한참이나 뒤였다. "압셀론에 있을 때에요..... 열 두 살이었죠, 그 때의 그는." "하긴, 그 때 그 녀석을 싫어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지. 귀엽고, 활달 하고, 재치 있고 재미있고......엄격하기로 이름 높았던 어머니마저도 그 녀석 응석 들어주느라 하루를 보낼 지경이었으니........" 정말 그랬다. 도망치기 직전까지, 테시오스는 왕궁에서 가장 사랑받는 아기 고양이 같은 소년이었다. 제 멋대로에, 변덕스럽고, 언제나 말썽, 그러나 아무도 그를 미워하지 않았다. 그 쾌활한 매력에 모두 매료되어, 그가 어디에서 무슨 짓을 하고 나타나든 사랑해주었다. 사이러스 역시 그런 막내 동생이 싫지는 않았다. 늘 음습하게 눈을 빛내며 목에 칼을 꽂아 넣을 궁리만 하던 카시오스에 비하면, 어린 테시오스는 귀엽기만 했다. "언젠가 그런 테시오스 녀석이 내게 부탁했던 적이 있었지." 마르타가 고개를 돌렸다. 사이러스를 향하는 그녀의 눈 안에는 슬픔이 담겨 있었다. 이야기 자체를 듣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녀도 잘 알고 있고, 너무나 잘 알기에 다른 누군가가 후벼 파듯 돌이키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사이러스는 무관심하게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알고 있나, 마르타? 당신 상복에서 검은 물이 빠져나가 바래지던 그 때, 그 녀석이 나를 찾아와 부탁하더군. 당신과 결혼하게 해 달라고." 마르타의 눈이 커졌다. "그렇게 간절하게 부탁하던 테오는 처음 보았지. 낙천적인 만큼, 원하 는 것은 언제나 자기 힘으로 얻으려 하던 그런 녀석이 부탁하는 건 정말 처음이었어. 당시의 녀석은 정말 큰 빛을 움켜쥐려는, 그 빛이 오는 것도 기적이지만 가지게 된다면 세상 누구보다 행복하게 될 거라 알기 에.....바로 그런 희망에 부풀어 있기에, 그 희망을 가지기 위해 무엇 이든 하려 하던 상태였지. 그러니 내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 는 것 역시 할 수 있었지. 상상이 되나? 그 여우같은 녀석이 말이야. 자존심 하나는 어머니 닮았던 그 녀석이 말이야." 마르타가 떨고 있었다. 놀라움과 원망, 그리고 분노에 찬 눈빛이 되 어 있었다. 그러나 사이러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전히 무관심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서 나는 녀석에게 제안했지. 결혼하는 건 물론 허락하마. 단, 언제 너와 네 아내가 대만찬에 초대 될지는 모르겠다. 누구를 먼저 내리 찍을 지는, 그날 동전 던지기로 정해도 상관없겠지. 어차피 차례 차례 죽을 테니까.... 그러나 그녀와 결혼하지 않는 다면, 나는 네게 아름답고 젊으며 결혼한 적도 없는 여자를 아내로 주겠다. 너는 나름 대로 잘 살 것이고, 그녀역시 그녀의 영지로 돌아가 조용히 살 수 있 겠지." "사이러스.....!" "그리고 녀석은 후자를 택했지. 아아, 그래.... 당신에게는 아무 말 도 하지 않은 것 같더군. 녀석이 약혼하자마자 그렇게 훌쩍 영지도 돌아가 그 가엾은 딸을 보살피며 십여 년을 보낸 것을 보니." 마르타의 얼굴은 이제 젖어 있었다. 쉼 없이 솟아나온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려 드레스 앞섬을 적셨다. 오열을 참기 위해 입술을 꾹 누르고 있었지만, 눈 안에 가득한 분노와 원망은 초처럼 타올라 눈 물과 함께 뜨겁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잔인한.....분이군요, 당신은." "나를 배반한 건 당신이야." ".....네, 그렇게 카시오스를 몰아 결국 반란을 일으키게 했지요! 칼을 거두고 물러나 도망칠 곳을 만들어 주지 않은 건 당신이니까! 몰아 놓은 사냥감에 화살을 쏘듯, 그렇게 죽였어요.........! 당신 의 어머니를 그렇게 만든 것 역시 당신이죠. 살아남은 아들을 위해 그 무엇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으니까! 루실리아를 죽게 한 것도 당신....... 죽지 않는 한 벗어나지 못하게 한 건 당신이니까--!" "선택은 끝났고, 결과는 내 눈앞에 있는 것 단 하나뿐이지. 그들은 그 선택에 따른 합당한 보답을 받은 것뿐이야." "당신을 좋아했어요." "하지만 내 여자는 아니었지." "그리고 다른 누군가의 여자가 되지도 못하게 하는 군요.........! 잔인한 사람. 손 안에 있는 그 무엇도 보살펴 주지 않으면서, 그러 면서 조금만 금을 넘어서려 하면 산산조각 내는 군요." "금 밖으로 나가는 건 아무 가치도 없어." "그래서 차라리 망가지는 게 나은 건가요? 그렇게 불행의 진탕에 처 박아 놓고는, 산산이 부서지는 게 낫다 이건가요? 우리가 슬픈 게 그다지도 좋은 가요, 사이러스.....? 좋은 거냐고요!" "당신들이 떠나면 내가 불쾌해." 마르타는 입술을 꾹 짓눌렀다. "그리고 나는 불쾌한 건 딱 질색이라고." ******************************************************************* 작가잡설: 사이러스의 신조는 솔로천국 커플지옥. -_- 형님이 홀아비인데 동생놈이 커플이 되는 건 용납 못 하겠다는, 이 빛나는 솔로부대 연대장 급 정신! 장하다, 사이러스! p.s 주말에 마비노기 하느라.................. 마린돌 서버에서 달걀장수 트란비타를 찾으세요. -_-;;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6장 **************************************************************** [겨울성의 열쇠] 제263편 황혼과 여명#2 ***************************************************************** 해 저물녘이 되자, 바다와 하늘은 불 지른 듯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 다. 굵직한 구름들 끄트머리는 금빛으로 빛나고, 하늘은 선홍색으로 아름 답다. 붉게 이지러지는 저녁 해는 길고 붉은 핏빛 빛줄기를 바다위로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타오르는 저녁 하늘을 향해, 루첼이 피우는 담배 연기가 허공에 자욱하게 어렸다. 아킨은 손을 휘휘 저었지만, 바람이 아킨을 향해 정면으로 불고 있어 아무 소용도 없었 다. 아킨은 마법이라도 쓸까, 하고 생각했지만 귀찮아서 관두기로 했다. 지금은 꼼짝하기 싫다. 온 몸이 정말 끊어지는 듯 아팠고, 관절마다 욱신거렸다. 푹신한 침대에 오리털 가득한 이불을 덮고 곯아떨어지고 싶었지만, 그렇게 편하게 지낼 상황이 아니라 불편한 대로 있어야 했다. "후우-" 루첼이 파이프를 내리며 다시 연기를 자욱하게 내 뿜었다. 얼굴이 지 금 피우고 있는 게 나프 남부 산 대마초인 듯 반쯤 풀어져 있었다. 그 역시 박진감 넘치는 하루를 보냈기에, 얼굴 근육마저도 수습을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게 둘 다 축 늘어진 채로 한참을 앉아 있었다. 갈매기 울음소리 와 파도소리만이 그 둘의 피로한 침묵을 흔들어 놓을 뿐이다. 철썩... 차르르..... 끼루루. "너, 대체 뭐하다가 온 거냐?" 한참 만에 루첼이 그렇게 물었고, 그것은 루첼이 한 시간 만에 한 일 중 가장 '고된' 일이었다. 아킨은 죽기 직전의 백조가 토해낼 법한 목소리로 힘겹게 말했다. "저.....어기." 그리고 어딘가를 가리키기는 했는데, 루첼 눈의 초점이 반쯤 풀려 있 었기에 어디인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어쨌건 저기는 저기니, 루 첼은 더 이상의 탐구는 포기하기로 했다. ".....그럼, 네가 패대기친 그 미친놈은 뭐냐?" ".......팔......" "팔? .....어이, 아키?" "......." 아킨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루첼이 슬쩍 보니 병든 병아 리처럼 꾸벅 꾸벅 졸고 있었다. "얌마." 루첼은 아킨을 흔들어 보았지만, 흔드는 대로 이리 저리 죽은 나무처 럼 기우뚱 하다가 결국 풀썩 쓰러졌다. 루첼은 한숨과 담배 연기를 동시에 내 쉬며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어느 덧 붉은 노을이 세상을 온통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바다는 출 렁이고, 그 위로 등이 발그레하게 물든 갈매기들이 유유히 유영한다. 바람은 서늘했지만 차지는 않았고, 햇살 역시 아직 부드럽다. 그러 나 그들이 내려다보는 요새는 반쯤 함몰 되어있었고, 아직도 그 주 변을 병사들이 부지런히 오고가며 돌과 부상병들을 나르는 중이었다. 더 먼 곳에는 부서진 배의 파편들이 떠돌며, 해수면이 출렁일 때마다 젖은 나무판 위로 햇살이 번쩍이고는 했다. 진 것은 아니지 만, 그렇다고 이겼다고 뻐기기도 곤란한 상황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또 델 카타롯사에서 내려온다면, 이 바르젤을 내팽개쳐 두고 도망 치는 것밖에는 수가 없다. 그러나 그나마 버틴 것, 그것도 악튤런 파노제라는 '정신없는' 괴수 녀석이 설치는 델 카타롯사를 상대로 버 틴 것만도 기적에 가깝고, 그 일을 해낸 것이 다름 아닌 아킨이라 는 데는 정말 놀랍다(이상한 사람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이 놈, 대체 어디서 뭐 하다가 온 거냐......" 루첼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아킨을 내려다보았다. 아킨은 정말 애처럼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자는 모습 처음 보는 건 아니지만(로멜에 다닐 때 아킨은 거의 매일 루첼보다 일찍 잠들고 늦게 일어났다) 저렇게 편하게 잠든 모습은 처음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가 자주 악 몽을 꾸고 가위에 눌린다는 것을, 옆에서 봐 온 루첼은 잘 알고 있 었다. 그러나 지금, 자기 방 침대 위에서도 끙끙대던 녀석이, 딱 딱한 돌바닥에 거친 바닷바람 불어오는 성벽 위인데도 편안하게 잠들 어 있다. 대체 어디 있다가 온 걸까..... 뽀송뽀송 뽀얀 것을 보면 고생한 것 같 지는 않고, 또 차림새가 가볍고 깨끗한 것을 보면 멀리 있었던 것 같지도 않은데. 그 때 누군가가 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루첼은 아킨을 깨우지 않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나, 성벽위로 요새의 총사령관인 알바스 경이 나타났다. 큰 키에 눈썹이 짙은 그가 석양빛 속에 나 타나니, 정말 험악해 보였다. "왕자님은 어디 계십니까?" 루첼은 바닥을 가리켜 보였다. 알바스 경은 아킨이 잠들어 있는 모습 을 보자 가볍게 미소를 보이고는 무릎을 꿇었다. "왕자님, 일어나십시오." 그 모습에, 루첼은 로멜에 있을 때 걷어차고 머리카락 잡아당기고 버 럭 버럭 고함지르고 심지어 이불까지 휙휙 걷어내며 아킨을 깨웠던 지라 조금 뜨끔했다. "왕자님--" 아킨이 눈을 움찔하더니, 잠시 저녁 햇살이 눈이 부신 듯 눈살을 찌 푸렸다가 다시 질끈 감았다. "아아....알바스 경......이런!" 아킨은 정말 튀어 오르듯 벌떡 일어났다. 석양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깜빡 잠이 들어서........." 민망하기도 할 것이다. 축 늘어져 콜콜 자는 모습을 메리엔도 룸메이 트도 아닌, 가신에게 들켰으니 말이다. "케올레스 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잠시 아킨의 얼굴이 굳었다. "괜찮으십니까?" "아닙니다. 지금 왕자님을 찾으시니, 어서 내려가십시오." 그리 말하는 알바스의 얼굴은 어두웠다. 심각한 것이다. 정말 서둘러 야겠다는 생각에, 아킨은 가볍게 성벽을 달려 요새 안에 있는 사령 관의 집무실로 향했다. 요새 안은 벌써 어둠이 내려 어두웠다. 부상병들의 피비린내가 물씬 풍겨왔고, 신음소리는 귀가 밝은 아킨에게 괴로울 정도로 잘 들려 왔다. 아킨과 마주친 병사나 기사들은 모두 굳은 듯 우뚝 서서 어떻 게 해야 할지 몰라 우두커니 있었다. 그들은 아킨이 실종되었고, 그 때문에 이번 전쟁이 일어났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이 왕자가 갑자기 나타나 요새를 도와준 것이다. 그들에게 아킨은 구원자인 동시에 경계해야 할 정체불명의 존재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아슬아슬한 경계선에서, 그들은 신분 낮은 자들이 의례히 그 러하듯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눈치만 살피고 있는 것이다. 곧 아킨은 집무실 앞에 도착했다. 문을 지키는 경비병들이 뒤로 물러 나며 무릎을 꿇었다. 아킨은 대강 문을 두드리고는 양해를 구하지도, 누군가 문을 열어 주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직접 문을 열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케올레스 님-" 서쪽을 바라보는 방이라, 커튼을 쳐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방안은 아 직 환했고 피를 쏟아 넣은 듯 붉게 물들어 있었다. 침대는 문 오른편에 놓여 있었다. 케올레스는 그 위에 몸도 일으키지 못한 채 흐릿한 눈동자만을 움직여 아킨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옆을 지키던 의사에게 말했다. "자네는.... 나가 주게나." "알겠습니다." 여의사는 순순히 물러났다. 의사가 병자의 부탁을 순순히 들어주어 자리를 비켜 주는 것은 단 한 경우밖에 없다. 곧 문이 닫혔다. 붉고 길게, 그리고 강렬히 내리쬐나 차가운 저녁햇 살이 방안을 파고들고 있었다. 멀리서는 파도소리가, 그리고 그 파도 소리 너머로 갈매기가 끼루룩 울고는 지나간다. 아킨은 침대로 가까이 다가가 케올레스를 내려다보았다.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아킨토스 님." 케올레스의 목소리는 편안했다. 스러져 가는 마지막 불꽃이 작지만 너무나 맑고 아름답듯, 그 목소리역시 너무나 뚜렷하기에 가슴 저 린다. 이제 곧 꺼져 잿빛 모래 속에 스며들어 사라질 것이기에. 그리 고 무엇으로든 되살릴 수 없을 것이기에. "별로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 말하며 아킨은 그의 주름진 이마에 키스하고 그의 손을 꽉 잡았 다. 노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아닙니다..... 왕자님은, 왕자님께 아무것도 못해드렸던 이 무능한 늙 은이의 마지막을 너무도 행복하게 해 주셨습니다........ 아킨 님께서 오지 않으셨다면, 이 늙은이는 이 바르젤이 델 카타롯사의 손에 떨어지는 것을 보며 눈을 감아야 했을 겁니다.......하지만......지금 저는 이 편안한 침대 위에서.......이렇게 평화로운 석양을 보며 잠들려 하고 있습니다." "케올레스 님...." "언제나......안타까웠습니다.... 아킨 님이 영영.....암롯사를 떠나 버릴 까....... 영영.......볼 수 없게 되어 버릴까...... 하지만...... 훌륭하게 자라 돌아와 주셨군요." 돌아온 게 아닙니다, 아킨은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다. 그리 고 아킨을 사랑해 주었던 한 줌 밖에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인 이 노인에게 아킨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말로 답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거짓임을 알게 되어 슬퍼하는 건 싫다. 무엇으로든 거짓이 드러나지 않도록 꼭꼭 감싸두고 싶었다. 아킨의 손위로 노인의 손이 얹혔다. 차갑고 앙상하고 미약했다. "돌아가셔서......휘안토스 님을 도와주십시오...... 그 분은 외로운 분, 힘들어도 아무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는......그렇게 아킨 님만큼 이나 어린 분이랍니다......." 가슴이 찢겨져 나가는 것 같았고, 무언가가 울컥 솟구쳐 올라 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도 아킨은 미소를 지었다. 울부짖으며 자리를 박 차고 나가고 싶은 분노 속에서도, 그래도 아킨은 웃으며 케올레스를 보고 있었다. "원망도 많으셨을 테고........또 많이 힘드셨다는 것도 압니다......하지 만 아킨 님, 그분은....그 가엾은 분은 너무 어린 나이에..... 비전하의 죽음과 아킨 님의 저주, 폐하의 기대까지 짊어지고 외롭고 힘들게 지내오셨습니다..... " 아킨의 손이 떨렸다. 그러자 노인의 눈이 흐려졌다. "힘들 거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노력해 주십시오........ 이 늙은이의 마지막 부탁입니다...... 휘안토스 님이 위대한 왕이 되기를........이 암롯사를 지킬 수 있기를........ 도와주셔야만 합니다......" "형은......잘 해 나갈 것입니다. 강하잖아요." 케올레스는 고개를 저었다. "강한 분이라도..... 아무리 강하시더라도 버틸 수 있는 한계가 있는 법입니다.... 벌써.....델 카타롯사와 로메르드가 접촉하고 있습니다...... 그 나라의 어리석은 대비는.....공주를 칼리토와 결혼시켜 동맹을 맺으려합니다..... 정말 그 두 나라가 손을 잡는 다면......휘안토스 님 의 입지는 더욱 좁아집니다..... 아킨 님께서 도와주시지 않는 다면.... .. 휘안토스님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부디-" "케올레스 님-" 제발 그만하고 몸을 추슬러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듣고 싶지 않았 다. 휘안토스를 부탁한다는 말을, 그를 도와 달라는 말을, 그를 위 대하게 만들어 달라는 말은. 당연한 말이었지만 아킨만은 납득할 수 없는 말이기에. 그러나 알고 있었다. 사이러스가 이 노인에게 전부였다는 것을, 그의 위대함을 완성하는 것만이 이 노인의 생에 유일하게 의미 있는 일 이며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 일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그 뒤를 잇는 휘안토스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그리.......하겠습니다, 케올레스 님. 최선을 다해......." 케올레스의 눈이 흐릿하게나마 빛났다. 아킨은 케올레스의 앙상한 손 에 입 맞추었다. 축언을 속삭이고, 기도문을 읊조렸다. 무엇 때문인지 모를 눈물이 흘러 그 마른 손위로 툭툭 떨어졌다. 온 몸이 떨려오며, 컴컴한 것이 온 몸을 꽉 조이는 듯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지에나의 수경이 비추어주던 미래, 햇 살 속에 빛나던 휘안토스와 왕가의 반지가 끼워진 그의 손이 향하는 곳에 있던 작고 예쁜 손과, 그 손가락에 끼워진 또 다른 반지가 눈물처럼 눈을 흐리게 했다. 안다, 누구의 손인지..... 그리고 보았다. 누군가의 얼굴을- 그것만은 찬 얼음을 집어삼킨 듯 싸늘하게 가슴에 박혀 있었다. 바늘 처럼 날카롭게 쿡쿡 박혀오고, 녹슨 칼처럼 고통스럽게 찢어 놓는다. 그러나 다가오려는 어둠이 너무나 두려워서, 도저히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런 거짓말을 해서라도 막고 싶었다. 거부하고 싶었다. 기 적처럼 빛이 오기를, 어둠이 감은 듯 사라져 버리기를, 그래서 아 무렇지도 않게 웃어 버릴 수 있기를- "아킨 님, 오래 오래 사셔서, 그 만큼 행복해 지십시오." 석양빛이 그렇게 말하는 케올레스의 이마를 물들였다. 흐릿해져 가는 눈은 오히려 더 붉고 선명하게 물들어 가고 있었으며, 석양은 고된 하루와, 오랜 시간과, 영원의 기억이 흘리는 피눈물처럼 케올레스 를 적셔 들어갔다. 이제 어둠이 다가오고 있었다.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차갑고 소리 없 는 어둠이 바로 한발 앞에 있었다. 젖은 볼 위로 차가운 손길이 스 쳐지나가고, 아킨의 흐린 눈앞에서 케올레스의 눈 안의 마지막 빛이 사라졌다. 아킨의 눈물이 그의 이마에 떨어졌다. "왜.......제가 사랑했던 사람들은 그들까지 사랑하는 겁니까......." 루첼이 왔을 때, 방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구름은 이제 금덩어리처럼 빛나며 마지막 햇살을 머금고 있고, 서쪽 수평선만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건만, 바다와 절벽과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와 성으로는 어둠이 스 며들어 까맣다. 아킨은 케올레스 옆에 앉아, 그의 마른 손을 잡고 있었다. 볼도 어깨도 어둠에 젖어 있었지만 아킨의 은빛 머리카락에만은 햇살이 남아 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키-" 그제야 루첼은 아킨의 턱밑에 맺힌 눈물을 발견했다. 떨리는 입술과, 피토할 듯 흔들리는 눈동자를 찾을 수 있었다. 루첼은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열어젖혔다. 온화했으나 이제는 어둠과 함께 싸늘하게 식어가 는 저녁바람이 소슬히 불어왔다. "돌아가셨다." 아킨이 말했을 때, 루첼은 서쪽으로 빨려 들어가는 빛줄기를 보고 있 었다. 루첼은 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해한다, 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아주 예전 로멜의 작은 기숙사 방 안에서 달빛을 바라보던 아킨의 눈 물에 침묵했듯,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루첼이 할 수 있는 일이라 고는, 그리하여 그 때와 달라진 것이라고는, 그 역시 슬프다는 것이 다. 이해할 수도, 나눌 수도 없었지만, 이제는 아킨이 슬퍼할 때 같 이 슬퍼해 줄 수는 있었다. 루첼이 다가가 그 어깨를 잡았을 때, 드디어 아킨은 무너져 흐느낌을 터뜨렸다. ***************************************************************** 작가잡설: 강아지 아키. -_-;; 만화책 보던 동생이 말했답니다. 동생-언니야, 나는 정말 만화 주인공 처럼 살고 싶어. 'ㅁ'! 아울-김혜린 만화? .....만화가 김혜린 님과 소설가 조정래 님을 무척 좋아합니다. 김혜린 님의 그것이 아픔이라면, 조정래 님은 절망이라 말할 수 있겠군요. 김혜린 님의 그것이 찬 서리내린 외로운 아침같다면, 조정래 님은 피흐르는 강물같은 느낌이랄까요. p.s 그리고 두 분 다 주인공들 고생시키는 분야의 지존들. p.s2 2003년 지나기 전에 두 편 더 올라갑니다. ^^;;;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6장 **************************************************************** [겨울성의 열쇠] 제264편 황혼과 여명#3 ***************************************************************** 켈브리안은 어머니의 시녀들이 가져다 놓은 드레스를 보며 한숨을 푸 욱 내 쉬었다. 아버지가 한숨쉬는 버릇 따위는 들여서는 안 된다고 늘 말해왔지만, 지금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벌써 4월이 되어간다는 것이 안타까 웠고, 그 4월이 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기에 서글펐다. 하얀 드레스 를 입고 예쁜 들꽃으로 만든 화관을 쓰고, 얼굴은 가면으로 가리고 어딘가로 달려가고 싶다. 그리고 들뜬 사람들이 춤추고 노래하는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는 소년을 만나러 가고 싶다. 그 역시 그녀 를 발견하고 반가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의 손을 잡아끌고는 짓궂게 웃으며 그를 놀리고는 사람들에 뒤섞여 아무 생각 없이 춤을 추고 싶다. 열일곱 난 외로운 왕자는 고된 공주의 손을 잡으며 미 소를 지어줄 것이다. 놀랐어요, 하고 속삭이고는 웃음을 터뜨리기도 할 테지. 잘 지내셨나요? 저야 뭐 늘 그렇죠....... 다시 만나서 기뻐요. 열두 살 때는 어땠더라.... 그 때는 겁먹은 아기 고양이처럼 경계심 많은 아이였다. 커다란 금색 눈동자로 잔뜩 경계하듯 바라보다가, 켈브리안이 손을 내밀면 오히려 뒤로 세 걸음은 물러나 버리던 겁 많 은 아이. 어딘지 예전의 그녀와 닮아 있기도 했다. 티폴라의 손에 모진 일을 당하며 울고 떨기만 하던 가엾은 소반도의 공주와, 남쪽 무서운 나라에서 온 왕자는 분명 비슷한 데가 있었다. 동질감이 아닌 '슬픔' 때문에 다가갔다. 그녀 말고 그런 아이가 또 있 다는 것이 너무나 슬펐으니..... 지켜보고 싶었고, 같이 있고 싶었고, 그리고 아마도 오랫동안 같이 지내고 싶었다. "잘 지내니......?" 그리 묻고는 켈브리안은 서글프게 웃었다. 아아, 또 컸을까? 예전에는 정말 놀랄 정도로 훌쩍 커서는 놀랬고, 그 다음 만났을 때는 너무 커버려서 슬프게 했으니, 이제는 어떻게 해 줄까. 하지만 아키, 내 앞에서 그 귀여운 아가씨 이야기 하면 서 환하게 웃지는 말아줘. 네가 한 일중에 가장 잔인한 짓이었어, 그 건. 두 번이나 내 앞에서 훌쩍 사라져 버린 것보다 더 잔인한 일 이었으니까....... 그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공주전하, 준비하셔야 합니다." 발라 부인의 목소리다. 저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진절머리 난다. 아 주 예전에는 이모처럼 좋아했는데, 한번 싫어지기 시작하니 걷잡을 수도 바꿀 수도 없었다. 싫어하다가 좋아하는 것은 어려운데, 좋 아하다가 싫어하게 되는 것은 너무도 쉽고 빠르다. 어머니의 시녀였던 발라 부인은, 이제 켈브리안이 칼리토와 결혼하기 전까지 그녀의 시녀가 되어 있을 것이다. 아니, 시녀가 아니라 밀착 감시꾼이다. 켈브리안은 나른히 한숨을 내 쉬고는 말했다. "들어오세요." 발라 부인과 시녀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켈브리안은 그들이 하는 대 로 내버려 두었다. 옷을 갈아 입히고, 머리를 땋고 올리고 꾸미고, 그 위에 핀을 박고 파란 사파이어가 주렁주렁 달린 귀걸이와 목 걸이가 채워지자, 켈브리안이 물었다. "보석이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게다가 다 처음 보는 것들뿐 이고....." "칼리토 대공왕께서 보내신 거랍니다. 툴칸에서 가지고 온 사파이어 로 만든 거라고 하더군요." 켈브리안은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 건 내게 직접 줘야 예의 아냐? 그런데 어머니께 건네다니, 정말 사람을 뭐로 취급하는 거람....... 이거야 말로 주고받는 물건 취급이다. 단장을 마치자 발라 부인은 만족 가득한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정말 잘 어울리세요. 오늘 대사가 본다면, 직접 청혼하지 못하는 것 을 슬퍼할 겁니다." 켈브리안은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며 그 칭찬에 정말 기뻐하는 듯 활짝 웃었다. 많이 익숙해졌구나, 켈브리안- 그리 자신에게 속삭 였다. 예전에는 쏘아보거나 무표정하게 입술을 꾹 다물었을 텐데, 이제는 발라 부인마저 속을 정도로 활짝 웃다니 말이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왕비가 되실 거에요." "고마워요, 발라 부인. 이 모든 것이 어머니 덕이지요." 발라 부인이 우쭐해지는지 얼굴까지 붉히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켈브리안은 여전히 웃으며 생각했다. 결혼식 날 도망쳐 버릴까? 그 날이 되면 어머니도 긴장이 풀어지셨을 테니, 도망칠 기회가 생길 지도 모르겠다.... 물론 웨딩드레스 입기 직전에 도망쳐야겠지. 어마 어마한 면사포에, 무시무시한 레이스와 주름이 달린 드레스를 입고는 열 걸음 뛰다가 걸려 넘어질 테니까..... 제대로 도망치면, 아마도 혼담은 영영 들어오지 않을 테지. 온 나라 에 소문이 퍼질 거야..... 천하의 망나니 공주님, 결혼 직전에 도망 치다니 대체 누가 신부로 데려가겠어. "준비 되었으니 나가지요." "아직 좀 일러요, 공주 전하." "중간에 베노에게 들를 생각이에요. 같이 연회장으로 나가고 싶은 데.....아, 발라 부인도 같이 가 주시겠어요?" "물론입니다." 당신이 나를 혼자 보내 줄 리 없지, 켈브리안은 이 여자의 따귀를 두 어 번 갈기거나 주먹으로 코라도 한방 쳐 주면 어떨까 상상해 보 았다. 그러나 그러자니 불쌍해진다. 이 여자도 어머니 브리올테의 명령에 따르는 것뿐이고, 그것에 꽤나 자부심을 느끼고 있을 테니 말이다. "가죠." 켈브리안은 드레스 자락을 당기고는, 제발 쌀쌀맞게 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그리 말했다. 다행히 발라 부인은 순순히 그녀의 뒤를 따 랐다. "정말 아름다우세요." 베르티노가 얼굴까지 붉히며 하는 말에, 켈브리안은 웃음을 터뜨렸 다. 정말 아름답다니. 오늘 가면 무도회에 이 드레스와 비슷한 옷을 입은 아가씨들이 잔뜩 있는 것을 보면 뭐라 할까? 그러나 켈브리안 은 왕의 상기된 볼에 키스해 주고는 말했다. "고맙습니다, 폐하. 폐하도 오늘 정말 근사하신데요." 베르티노의 얼굴은 더욱 새빨개졌다. 켈브리안이 말했다. "오늘은 폐하와 비전하와 함께 연회장에 들고 싶은데.... 허락해 주시 겠지요?" "물론이에요, 누님!" 베르티노는 아이처럼(실제로 아이지만) 활짝 웃으며 외쳤다. 그러나 그 얼굴을 보니 좀 미안해지기도 했다. 사실, 선수 치지 않으면 어 머니가 델 카타롯사의 대사와 함께 연회장에 들어오게 할 테고, 그 느끼한 남자와는 절대 오래 있고 싶지 않았기에 이런 수를 쓰는 것이다. 그런데 이리 순수하게 기뻐하니 미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제가 만찬장 까지 에스코트 해 드릴게요." "아니, 괜찮아요.....비전하께서 계신데." 베르티노는 이내 풀이 죽으며 손을 꼼지락 거렸다. 그러나 켈브리안 은 그 불쌍한 소녀의 슬픈 눈동자를 또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 소 녀는 켈브리안만 보면 동경과 부러움에 찬 눈동자가 되어서는, 이내 풀이 죽어 버린다. 분명 베르티노가 그녀를 에스코트 하고 싶다면 '나 같은 게 뭘...' 하고 생각하는 듯 슬픈 강아지 같은 눈이 되어 서는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건 전혀 달갑지 않다. 켈브리안은 주변을 슥 둘러보고는, 호위 기사 네 명의 눈동자가 빛나 는 것을 발견했다. 이리 되면 호위기사 중 하나가 그녀의 옆에 서는 영광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들 얼굴들이 시뻘개져서는, 천장을 보거나 바닥을 보거나 은근한 눈빛을 보내거나 강렬한 눈빛 을 보냈다. 베르티노가 금세 토라졌다. "마그누스 경, 오늘 제 에스코트를 해 주시겠나요?" 바닥을 보던, 그 중에 가장 젊은(켈브리안 보다 어렸다) 기사가 고개 를 번쩍 들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어서, 켈브리안이 귀여워 웃음을 터뜨리고 싶을 정도였다. "영광입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천둥처럼 소리를 질렀다가, 선배들이 부러움 약 간 분노 약간 질투 대부분에 섞인 눈초리로 자신을 보는 것을 발견 하고는 이내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러나 입이 귀밑까지 찢어져 있 는 것을 보니, 아마도 오늘 밤 선배들에게 맞아 죽어도 좋다고 생각 하고 있는 듯 했다. 그가 '저는 부족합니다. 대신 누구누구와 함께 드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하는 미덕을 보일 리 없다는 것을 아는 선배들은(누구나 그럴 테지만), 다음에 이런 기회가 오면 저놈부 터 쫓아내리라 다짐했다. **************************************************************** 작가잡설: 아키가 악튤런에게 딸리는 이유는...... 첫째는 자질과 열정;;;;;; 의 차이이고, 둘째는...... 잊지 맙시다. 악티는 아키 보다 자그만치 네살이나 많습니다. (다들 동갑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는;;) 마지막에 어찌 될 건지 힌트가 나간 뒤에, 많은 분들이 예측해 주셨 는데 안타깝게도 아직 정답자는 없습니다. ^_^ 천리플 운동은........ 세 연재게시판에 걸린 리플을 다 합치면 어거지로 800정도는 됩니다. 아직 200! 이나 남았기에 여유~~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6장 *************************************************************** [겨울성의 열쇠] 제265편 황혼과 여명#4 **************************************************************** 루피니아 축제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오고 청혼을 위해 델 카타롯사의 대사까지 왔기 때문에 연회가 열리는 것이다. 루피니아 축제 전에 나라를 떠나야 할 대사를 위해, 브리올테 대비는 루피니아 축제에나 하는 가면무도회를 열었다. 그 모든 것이 대사가 도착하기 훨씬 전 부터 준비되기 시작해서, 대사가 도착하여 하루 쉰 그 다음날에 열 리게 되었다. 악사들이 불려오고, 초청된 귀족들은 오늘 얼마나 멋 진 일이 일어날까 기대하며 황혼이 퍼드러질 무렵 하나 둘 궁으로 모였다. 날이 저물고 하늘이 까맣게 물들자, 드디어 연회가 시작되었 다. 시간이 되자 사람들은 호화로운 가면을 쓰고 음악에 맞추어 무도회 장으로 나왔다. 무도회의 행사는 가면무도회에서 늘 하는 그런 일이었다. 오늘 연회 를 주최한 호스트만이 가면을 쓰지 않고, 누군가를 찾게 한다. 약 혼이나 청혼을 앞둔 신부나 신랑이 주가 되는 경우가 많고, 때에 따라서는 그날 생일인 호스트의 아들딸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주인공을 찾는 사람에게는 상금이나 선물이 주어지고, 그 상대와 키스 와 첫 춤을 나눌 기회를 얻게 된다. 주인공이 여자이면 여자들은 까르르 웃으며 연회장을 오고가며 남자를 지목하여 춤을 춘다. 남자 인 경우는 그 반대다. 그리고 그 모든 여자와 모든 남자들 중에 주인공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어려운 일은 물론 아니다. 가면이란 물건으로 얼굴 전체를 가린다 할지라도, 아는 사람들끼리는 옷차림, 몸매나 몸가짐만으로도 상대를 단박에 알아볼 수 있는 법이다. 브리올테 대비를 제한 모든 이들이 가면을 썼다. 찾는 사람은 당연히 켈브리안 공주. 여자들은 각자 똑같은 푸른 색 베일을 쓰고는, 일 부러 어둡게 한 조명 사이를 누볐다. 공주를 전혀 모르는 남자들은 금발의 늘씬한 여자를 찾으려 했고, 저 사람이다 싶으면 달려가 그 녀와 춤을 추고는 가면을 벗겼다. 그러나 사실 그날 대부분의 여자 들이 금발 가발을 쓰고 왔고, 공고된 사항에 맞추어 푸른빛으로 최 대한 화사하게 차려 입고 왔다. 아무리 소문난 켈브리안 공주라 할 지라도, 그렇게 비슷비슷하게 차린 여자들 사이에서 찾는 건 어렵다. 어차피 대사는 공주가 자신이 왕을 대신하여 선물한 귀걸이와 목걸이를 하고 나올 거라는 것을 알기에 어려움이 없을 테지만- 그 리고 당연하게도 대사가 공주와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춤을 출 수 있게 될 것이다. 대사 - 카트모어 경은 눈을 부라리며 사파이어 목걸이를 한 여자를 찾았다. 사파이어 목걸이는 많았으나, 그 중에 자신이 가지고 온 물건은 금방 찾을 수 있을 듯 했다. 그런데 한 시간 정도 지난 후에, 카트모어 경은 일이 이상하다는 것 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무리 뒤지고 훑고 살펴보아도, 비슷한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혼잡할 정도로 많은 것도 아닌데, 카트모 어 경은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대사의 가면을 아는 브리올테 대 비가 그에게 슬쩍 다가와 말했다. "대사, 어서 찾으세요. 11시에 가면이 벗겨진답니다." "네, 전하." 카트모어 경은 더욱 초조해 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눈에 뜨이는 표식 을 해 놓고도 찾지 못한다면 망신이었고, 다름 아닌 국혼의 첫 발 표가 있는 순간에 그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는 건 용납 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11시에 맞추어 가면이 벗겨지는 순간 전혀 다른 사 람을 데리고 있다면 이건 망신이다. 대사가 그렇게 초조해 하는 동안, 바보가 아닌 켈브리안은 벌써 그 목걸이와 귀걸이를 떼어 정원에 숨겨 놓고 돌아오는 중이었다. 망신? 당하라지. 어차피 어머님이 벌인 쇼에 장단맞춰줄 생각은 없다. 느끼한 대사가 씨익 웃으며 '저희 국왕폐하를 대신하여 공주님께 정식으로 청혼합니다.' 어쩌고 하는 가운데 방긋 웃어줄 생각 역시 없다. "제가 찾았네요, 공주님." 막 연회장으로 들어오려던 켈브리안은 정말 놀라 비명을 지를 뻔 했 다. 그러나 그 상대가 누구인지 알게 되자, 곧바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걸 어쩌나. 들켜 버렸군요." 그녀의 옷자락을 잡고 있는 것은 열 살 된 소년의 자그마한 손이었 다. 켈브리안은 소년의 손을 잡고 주변을 슥 둘러보고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 모두 공주 찾기에 골몰할 뿐 그들에게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슬그머니 정원으로 빠져나갔다. 그 리고 주변에 아무도 없자, 그제야 가면을 벋고는 말했다. "어떻게 빠져나온 거니?" "워낙에 번잡하잖아요. 어머니는 제가 어디 있는지 신경 쓰지도 않고 요." 왕이 사라졌는데 모르고 있을 정도라면, 지금 브리올테가 얼마나 흥 분하고 있을지 안 봐도 뻔하다. 켈브리안은 베르티노가 보고 있지 않다면 실컷 히죽대고 싶을 지경이었다. "해 우물 쪽으로 가요, 누나. 저는 그곳이 제일 좋아요." "물론, 폐하." 켈브리안은 동생의 손을 잡고 그곳으로 갔다. 그렇게 둘 만의 밤은 멋졌다. 달이 은은하게 빛을 퍼뜨리고, 별빛 역 시 아롱지듯 맑고 깨끗하다. 바람은 따사롭고, 번잡함이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밤의 조용함과 아름다움 역시 몸을 감싸듯, 팔을 벌려 안 아 당기듯 다가온다. 베르티노는 답답한 가면을 벗었다. 켈브리안 과 많이 닮은 그 얼굴은, 병약한 몸 때문에 창백했지만 정겹고 사 랑스러웠다. "싫죠, 이런 일들?" "좋을 리가 있겠니." 베르티노는 어색하게 웃었다. 켈브리안은 잔디에 아무렇지도 않게 털 썩 앉으며, 환한 빛이 터져 나오는 연회장을 바라보았다. 베르티노가 그 옆에 앉으며 말했다. "정말 결혼....하실 건가요?" "아니. 날 잡아서 도망칠 생각이야." "저도 누나가 먼 곳으로 가시는 건 싫어요. 아니, 그것보다.....좋아하 지도 않는 사람과 결혼하는 게 너무 싫어요." "좋아하는 사람하고만 결혼할 수는 없어, 베노. 베노는 왕이고, 나는 왕의 누나거든." "알아요......" 베르티노가 울적하게 말했다. 그런 동생의 모습에서, 켈브리안은 그 의 '왕비'가 된 가엾은 소녀를 다시 떠 올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뭐하고 있을까.... 아마도 연회장 구석에서 바들바들 떨면서 겁먹은 눈동자를 굴리고 있을 테지. 어디서 그렇게 가엽고 작은 꽃 같은 소녀를 구해왔는지 모를 일이고, 그런 소녀를 그리 모진 곳에 놔 두어야 한다는 것에 화가 난다. "누나도 좋아....하는 분 있죠? 누군지 알아요." "누구를 생각하고 있는 건데?" "만난....적 있잖아요. 아주 예전에...... 그..... 형 말이에요. 머리카락은 하얗고.......얼굴은 예쁜데 눈은 좀 무섭고." 그리고는 베르티노는 자기 눈을 크게 떠 보이며 가리켰다. 켈브리안 은 웃음이 나왔다. 예쁘다, 라. 그 때 막 열일곱 살 된 아킨은 아직 애티가 가시지 않아서 그런 말이 정말 어울리기는 했다. 하지만 벌 써 열아홉이 되어 있을 텐데, 아직도 그런 말이 어울릴 지는 장담 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 형이라면 누님을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강할 것 같았거든요." "그러면 뭐하니. 결정적인 때에는 언제나 어리버리한 걸." 그러니, 내 앞에서 그런 멍청한 말이나 하는 거겠지. 선배, 행복하세요. 도와드릴 일이 있으면 무엇이든 최선을 다하겠어 요. 바보 멍청이.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눈치도 없고. 그 때 연회장의 모든 불이 휙 꺼졌다. 다시 불이 켜지면, 모두 가면 을 벗을 테지. 켈브리안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다들 소란을 떨 면서 공주님, 공주님! 해 댈 테지. 어머니는 아마도 제일 시끄럽게 화 낼 테고..... 피곤하다, 정말. 자그만 것 하나도, 자그만 순간 하나도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으니. "가자, 베노." "안 가셔도 되요." 켈브리안은 그것을 그저 베르티노가 투정부리는 것이라고만 생각했 다. 그래서 다정하게 그의 손을 잡았다. "가야지. 왕이 없으면 어떻게 하니?" "전 갈 거에요. 하지만 누나는 안 가도 되요." "무슨.....말이니." "이대로 떠나세요." 켈브리안은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동생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당황했다가, 그 어설픈 말들 사이에 무엇이 숨어있는 지 차츰 깨닫게 되자 정말 걷잡을 수 없었다. 설마 그런 뜻이랴 싶 다가도, 정말 그런 뜻이면 대체 이 어리고 약한 동생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는지 감이 잡히지도 않았다. "베노, 지금...." "이대로 도망치세요. 대사가 온다는 연락이 왔을 때부터 준비해 왔어 요." 켈브리안은 할 말을 잃었다. "저도 알아요....지난번에 누님께서 가지고 계시던 그게 무엇인지. 그 분....지금 어딘가에 계신 거잖아요. 그럼 찾으면 되요." "베노, 설마, 지금 당장 도망가라는 건.......아니겠지." "아뇨, 당장 가세요. 제가 준비 해 두었어요. 누님은.....이대로 나가시 기만 하면 되는 거에요. 그러니 지금 당장 가세요." 이제 켈브리안은 하나하나 세세하게 알아갈 수 있었다. 맙소사- 켈 브리안은 베르티노의 작은 목을 끌어안았다. 연약한 소년의 몸이 떨리자, 켈브리안은 잃어버린 아이를 찾은 듯 더욱 꽉 끌어안았다. 소년의 젖은 볼이 가슴 안으로 파고들어왔다. "베노- 나는 작은 베노를 놓고 어디에도 안 가." "하지만 궁으로 돌아가시면 그곳으로 시집가셔야 하잖아요." "싫다고 하면 되." "어머니는....들어주시지 않을 거에요." "아니, 저 연회장에서 사람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말하겠어. 나는 델 카타롯사의 칼리토 대공왕과 결혼하지 않을 거라고. 아무리 어 머니라도,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다 아시지는 못할 테지. 그리고 그 먼 나라의 왕 역시 공개적으로 거절당한 혼담을 계속 추진하지는 못할 거야. 자존심 높은 사람이니까." 거짓말이다, 켈브리안은 그렇게 속으로 자신에게 속삭였다. 이 여리 고 약한 동생이 얼마나 고민하여 이 일을 했을지 짐작된다. 하지만 과연 이 사실을 어머니가 모르실까? 아니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내버려 두었을 것이다. 베르티노는 어머니를 무서워하기만 할 뿐이지만, 켈브리안은 브리올테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 때 연회장 쪽에서 검은 갑옷에 붉은 깃을 단 가면을 쓴 기사가 달 려왔다. 붉은 깃을 보니 왕비의 호위기사라, 켈브리안은 나른히 한 숨을 내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르티노도 그런 누나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일어났다. 기사가 등진 연회장의 불은 아직 꺼져있었다. 기사는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비전하께서 폐하와 전하를 모시고 오라 하십니다." "나중에 간다 전하라." 베르티노는 기죽지 않으려고 일부러 허리를 꼿꼿이 피며 제법 힘차게 말했다. "중대한 발표가 있을 거라 하십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전하와 폐하 가 꼭 계셔야 한다고 하십니다." "나중에 갈 거야!" 베르티노는 버럭 고함을 지르고는 켈브리안의 옷자락을 꽉 움켜잡았 다. 기사가 머리를 더 깊이 조아렸다. 켈브리안은 그런 베르티노의 머리를 쓸어주며 기사에게 말했다. "금방 갈 테니, 잠시 둘만 있게 해 주시겠어요?" "하지만...." "경, 지금 경의 앞에서 명을 내리는 것은 이 로메르드의 국왕폐하이 십니다. 국왕폐하의 명보다 대비전하의 명이 우선한다는 건 이해하기 어렵군요." 그리고 켈브리안은 연회장을 보았다. 아직도 컴컴하다...... 켈브리안 은 조용히 한숨을 내 쉬고는 눈을 감았다. "둘 만 있게 해 주세요. 이건 공주로서의 명령이고, 제게는 명령할 권 리도 이걸 어기는 자에게 벌을 내릴 권리도 있어요." 결국 붉은 깃털의 기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켈브리안은 눈을 뜨고 는 연회장 쪽을 보았다. 아직도 컴컴했다..... 덜컥 덜컥 거리는 소 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이를 갈고 뼈를 부러뜨리는 듯한 소리가 - 언젠가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아주 예전에, 아주 예전- 그 때 무슨 일이 있었더라....... 그리고 켈브리안은 기사의 손이 허리춤의 칼자루를 향하는 것을 발견 했다. **************************************************************** 작가잡설: 궁금하시면 내년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_^!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6장 *************************************************************** [겨울성의 열쇠] 제266편 황혼과 여명#5 *************************************************************** 불이 오랫동안 켜지지 않자, 브리올테 대비는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 했다. 어서 불이 켜져서 켈브리안과 칼리토 대공왕과의 약혼을 알려야 하는 데, 그리고 사람들의 축하와 찬사를 들어야 하는데 대체 왜 불이 켜지지 않는 거지. 어서 켜져, 어서 켜져서 또 한번 이 모든 일의 중심이 나라는 것을, 가장 영리한 사람이 나라는 것을 확인시켜주어 야 한다고. 브리올테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려면 한참이나 남았고, 달빛은 홀 깊숙이 들어오지 않아 창가에 있는 사람들만 푸 릇하게 보일 뿐이다. 그들은 지금 웅성거리고 있다. 대비와 비슷한 이유로 술렁이는 것이 다. 뒤로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진다. 브리올테는 그녀에게 무언가 목적이 있어서 온 것이라 알아챘다. 행여나 카트모어 대사인 가 해서 그녀는 돌아섰다. "카트모어 대사이가요?" 큼- 하고 웃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브리올테는 오싹 소름이 끼쳤다. 그 웃는 버릇이 왠지 누군가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브리올테는 어이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맙소사, 아직 죽지는 않았다 뿐이지 '그'는 더 이상 아무런 힘도 없는걸. 뿐만 아니라 여기에 나타날 리가 없잖아. 그래, 날이 어두 우면 무슨 소리든 비슷하고 무섭게 들리는 법이지. 브리올테는 등 골이 오싹오싹해지는 것을 간신히 억누르며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어디로든 멀리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 전 익숙한 웃음 을 흘린 남자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어깨를 누군가가 잡았다. 어둠을 더듬다가 얼결 에 잡은 것이 아니다. 정확하게 브리올테를 노리고 붙잡은 것이다. "대비 전하?" 오른쪽인가, 조금 멀리서 누군가가 그리 물었다. 브리올테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생각을 고쳤다. 그래서 어깨를 꼿꼿이 피고는 말했다. "맞아. 그런데 누구지?" 순간 뭐가 희번뜩 번쩍였다. 차갑고 단단한 것이 배를 파고 푹 들어 왔다. 고통을 느끼는 것은 놀라움 뒤였다. 욱신 욱신거리다가, 곧 불을 지른 듯 엄청난 고통이 되었다. 다시 푹- 이번에는 등으로 그 차가운 것이 파고들어왔다. 다시 푹- 이번에는 목덜미. 푹- 이번 에는 가슴- 피가 솟구쳐 입을 타고 쏟아졌다. 눈이 흐릿해지고 뜨 거운 피에 젖어드는 드레스는 점점 무겁게 느껴진다. 마치 쇳덩이를 입고 있는 듯.... 등으로 서너 개의 칼이 푹푹 꽂혔다. 이제 고통스럽지도 않다. 목 아 래로는 나무토막을 달고 있는 듯 아무 감각도 없었고, 무겁기만 할 뿐이다.... 브리올테는 털썩 주저앉았다. 상처의 고통이 한꺼번에 치솟으며 소용 돌이처럼 몸을 뒤 흔든다. 쿨럭, 쿨럭- 몸이 경련을 일으키며 피를 토해냈다. 온 몸의 피가 흘러 드레스 자락을 모두 적시고도 바닥으 로 흘러갔다. 점점 추워지기 시작했다. 와들와들 떨린다. 그 속에서 그녀는 정신없이 아들을 찾기 시작했다. 아아, 내 아들....내 아들 베르티노는 어디 갔지? 어머니가 이렇게 추운데,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어서 와..... 어서 와서 내 손을 잡고 나를 어디로든 옮겨줘! 켈리, 켈리는...... 이 못된 아이는 또 어디 간 거야. 이럴 때 가장 먼 저 달려와서 내 옆에 있어 주어야 하는 거 아냐? 어서 달려와, 어서 달려와 켈리--! 어서.... 브리올테는 입을 벌렸다. 그러나 피에 젖은 입술은 이제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리고 순간, 사방이 눈부시게 환해졌다. 드디어 조명담 당인 마법사가 정신을 차린 건가? 브리올테는 만족했다. 아아, 그래. 그래야지. 내가 계획한 대로, 내가 명령한 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야지..... 암 그래야 하고말고. 브리올테는 명령을 내리기 위해 손을 들려 했다. 들었다고 생각했다. 벌떡 일어나 모두에게 명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그녀의 명을 들으려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흐릿한 눈에는 무엇이든 흐릿할 뿐이고, 입술은 납덩이처럼 무거워 꿈쩍도 하지 않는다. 사방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궁을 폐쇄하라-!" 익숙한, 어디서 들어본 듯한 목소리가 터진다. "왕과 공주를 잡아와라! 왕비는 이 안에 있다-! 어서!" 아비규환이었다. "모두 잡아! 도망치는 놈들은 찔러 버려!" "왕은 죽여라! 그러나 공주는 살려 둬! 분명히 말 해 둔다! 공주는 살려야 한다!" 브리올테는 무언가 생각해 보려 했다. 그리고 힘주어 눈의 초점을 맞 추었을 때, 그녀는 사람들이 천둥처럼 울부짖으며 밖으로 쏟아져 나가는 것을 보았다. 경악에 찬 발라 부인이 눈물을 쏟아내며 그녀 쪽으로 기어오는 것이 보인다. 그러나 어디선가 날아온 창이 그녀 의 몸을 꿰뚫었다. 날카롭게 비명을 지르며 그녀는 바닥에 꽂혀버렸 다. 그녀의 몸에 퍼져 나오는 피가 거대한 웅덩이가 되어 바닥을 적셨다. 도망치는 사람들이 그녀의 시체를 밟고 나갔다. 시체가 짓밟히며 흔들린다. 다시 한번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울 컥 울컥 치미는 것은 분노와 억울함이었다. "공주와 왕이 사라졌습니다! 도망쳤습니다, 그레코 공작님!" 그제야 브리올테의 흐릿한 눈에, 이제는 반쯤 감겨가는 그 눈에 바짝 마르고 머리가 하얗게 센 기괴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이 마주치자, 남자가 히죽 웃었다. 브리올테는 그의 이름을 외쳐 부르고 싶었지만, 차갑게 굳은 입술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켈브리안은 정신없이 달렸다. 그녀만이 아는 길을 빠지고 달려 어둠 속으로 달아났다. 어린 베르티 노 역시 그녀의 손에 잡혀 달리고 있었다. 약하고 작았으나, 필사 적인 상황이라 그로서는 거의 초인적인 능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아이의 몸이었다. 켈브리안의 다급한 마음과 는 달리, 소년의 몸은 느리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파랗게 질려가 기 시작해서, 더 힘내어 달리다가는 쓰러져 졸도해 버릴 것만 같다. 동생을 들고 뛸 힘이 없는 자신에 화가 날 지경이었다. 어디로 가야 할까, 궁 안에 계속 있을 수는 없는데, 대체 어디로. 우 선은 이 차림으로 어디로 도망가는 건 불가능하다. 가다가 눈에 뜨 여- 그러나 당장에 궁 밖으로 나가지 않는 다면 사로잡힐 것이다. "누, 누나....허억-- 대체 어떻게...." 켈브리안은 멈추었다. 베르티노는 주저앉으며 숨을 몰아쉬다가, 아예 쓰러져 버렸다. "여기서 멈추면 안 돼! 베노--! 달려야 해." "어떻게....된...." "아직은 나도 몰라. 하지만........." "아뇨....상처....! 상처요!" 켈브리안은 그제야 방금 전에 칼이 스친 팔의 상처를 기억해 냈다. 다쳤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화끈거리며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있었던 건 아니다. 남자가 단검을 뽑는 순간, 켈 브리안은 온 몸으로 그의 몸을 밀어젖혀 버렸다. 팔은 그 때 다쳤다. 피가 튀어도 켈브리안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남자의 정강이를 걷어차고, 팔목을 물었다.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단검을 떨어뜨리자, 급히 그것을 집어 그의 가슴을 푹 찌르고는 도망친 것이 다. 그리고 그 때 궁 쪽에서 불이 켜지며 갑자기 비명과 울부짖 음이 터졌다. 켈브리안은 무언가 변고가, 그것도 브리올테 대비와 베르티노를 노린 변고가 일어난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방금 전의 그 남자가, 공주가 달려들자 머뭇거린 것도 기억해 냈다. 다치게 할 생각조차 없었던 것이다. "우선 궁에서 도망쳐야 해........그리고 어디로든 안전한 곳에 숨어 있 어야 해." "......어, 어머니는요.....? 아렛사도......아렛사도 아직 그곳에 있는데." 켈브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만약 그녀가 예상하는 대로라면, 브리올 테 대비가 살아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어린 왕비는 어찌될지 모 른다. 제발 그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자비심이 있어서 그 힘없는 아이 를 내버려 두기를 바랄 수밖에. "베노, 돌아갔다가는 둘 다 죽게 된다고. 지금 갈 수 없어." 베르티노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켈브리안은 같이 엉엉 울고 싶어 졌지만, 입술을 꾹 물며 참았다. 그녀마저 무너지면 말 그대로 끝 장이다. 차라리 아예 멍청하면 좋으련만, 정말 번뜩이도록 강하고 영리하지 못한 자신에게 화까지 치밀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문득 생 각난 것이 있었다. 그래, 그렇지.... 그녀는 베르티노의 팔을 잡으며 급히 물었다. "방금 전에 나더러 어딘가로 떠나라고 했었지, 베노. 분명 누군가와 이야기 해 두었었다고 했고...." 베르티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누님." "어디서 만날지 정해 두었었니?" "네! 동문으로 빠져나가, 성 나반 운하로 나가서...." 켈브리안은 더 듣지 않았다. 당장 그 쪽을 돌아보며 베르티노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그 사람을 만나러 가자! 그래.....물론 믿을 만 한 사람이겠지?" "네. 그러니까.......라키 경이 그랬는데, 예전에 그 형이랑 누님을 도와 주었던 사람이랬어요! 이름이.....그란......" 켈브리안은 갑자기 어두웠던 세상이 환하게 밝아오는 기분이었다. 세 상은 그녀에게 모든 상황을 한번에 끝낼 능력은 주지 않았지만, 적 어도 당장에 빠져나갈 수 있는 행운 한 조각은 준 것이다. "혹시, 루첼 그란셔스?" "아뇨. 제........네, 제임 그란셔스! 맞아요, 그 이름이에요. 제임 그란 셔스!" 켈브리안은 안도했다. 그리고 지금이라면, 그도 궁 안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 중요한 것은 어떻게든 빠져나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서 그 사람을 찾아가자! 서둘러야 해, 곧 궁이 폐쇄될 거야!" 베르티노는 마지막 힘을 다 해 벌떡 일어났다. **************************************************************** 작가잡설: 늦은 이유는? ............역시 마비노기;;; .......새해 첫날부터 4시간을;;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6장 *************************************************************** [겨울성의 열쇠] 제267편 황혼과 여명#6 **************************************************************** 보고가 온 것은 자정을 넘긴 후였다. 오늘이 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휘안토스는 잠들지 않고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에게 전해진 것은 성공했다는 당연한 답이었다. 휘안토스에게 성공소식을 알리게 되어, 오랜만에 좋은 소식을 전 했다고 생각한 세루비아나는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왕자 를 기대에 찬 눈으로 보았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휘안토스는 무 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렇게 당연한 말을 하는데, 대체 무슨 보답을 바라냐는 듯한 눈빛이다. "브리올테 대비는?" "연회장에서 죽였다고 합니다." "다행이군. 제대로 복수 한다 뭐한다 하면서 시간 끌까 했는데....... 그 사람도 한번 고생하고 나더니 정신 차렸군." 세루비아나는 지금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잠시 생각해야 했다. 정말 훌륭하신 판단이었습니다, 하고 늘어놓으면 휘안토스는 냉랭한 반 응만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다른 말을 하자니, 당장에 생 각나는 말은 하나도 없었다. "공주와 왕은?"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휘안토스는 나른히 한숨을 내 쉬었다. 혀를 차지 않는 것만도 꽤나 자비롭다 생각될만한 태도였다. "놓쳤나 보군." "하지만.....그런 말은 없었는데요." "없으면 못한 거다. 뻔하잖나." 세루비아나는 볼이 화끈해졌다. 바보 같은 말을 해 버렸잖아! 자꾸 이런 식이면 지금 바르젤 요새에 있는 그 빨간 머리 녀석에게 밀릴 지도 모르겠다. 초조해졌다. 그 애송이는 지금 바르젤을 지켜내는 데 성공했는데, 지금 자신은 로메르드로부터 전해오는 소식이나 전 하고 있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그 그레코 대공인지 뭔지 하는 사람을 직접 돕는 것이 몇 배는 나았을 텐데- 그 미친 사람처 럼 눈만 활활 타던 사람이 영 못 미더워서 다른 사람을 추천한 것 이 너무나 후회되기 시작했다. "바르젤에서는 다른 연락 없나?" 세루비아나는 속이 화끈 타올랐다. 다시 초조해진다. 그 뺀질뺀질한 마법사 놈이 또 공이라도 세워서, 케올레스 뒤를 이을 자신을 밀 어낼 거라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지경이다. "세루비아나 경- 바르젤에서는 다른 연락 없었느냐고 물었는데." "죄송합니다. 델 카타롯사 쪽에서 더 이상의 도발은 없다는 보고가 왔습니다." "케올레스는?" 세루비아나는 입술을 꾹 물었다. 빌어먹을 노인네, 하필 지금 죽어서 그 애송이 놈만 좋게 만들어 놓은 거야. "장례는.......내일 조촐하게 치루어 질 거라 합니다. 근처의 신전에 묻 히고 싶다 하셨고, 전쟁이 끝나서 여유가 생긴다면 본가로 이장해 달라 하셨다 합니다. 사령관은 그리 할 거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장례가 끝나는 대로 그대는 바르젤로 가야 하겠군." 세루비아나는 갑자기 주변이 환해지는 것만 같았다. 드디어 원하던 명령이 나왔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루첼 그란셔스에게 연락해서, 역시나 대기하라고 해. 내가 그리로 갈 거라고, 언질만 해 주길 바란다." 세루비아나는 행여나 뭘 잘못 들었나 했다. "무슨....말씀이신지요." "조만간 델 카타롯사 군이 남하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군대가 이 나셀까지 내려와 설쳐대게 할 수는 없으니, 나는 바르젤에서 그들과 함께 맞설 것이다. 전쟁이 있을 곳에 전쟁에 필요한 마법사가 있어 야 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세루비아나는 자신이 기대했던 모든 미래를 그 붉은 머리 애송이에게 빼앗긴 것을 깨달았다. 세루비아나는 어린 왕을 설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휘안토스 님, 지 금 외국인 마법사. 그것도 그리 젊은 마법사를 중용하시겠다는 말 입니까? "나가 봐." 그 건조한 말에, 세루비아나는 자신이 더 이상 머물 수 없게 되었다 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 무엇이든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은 기분이 었다. 바르젤 요새의 망루와 탑마다 검은 깃발이 걸렸다. 성 안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 중 하나가 사망했다는 표식이며, 앞으로 하루 동안 성을 침범하는 것도 나가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 다는 뜻이기도 했다. 성 의 병사들과 기사들은 간소하게나마 머리에 검은 리본을 맸다. 죽 은 이를 위한 송가가 요새 전체를 파도소리와 함께 휘감아 돌았고, 무너진 성벽위에는 횃불이 이글대며 바다와 성벽을 비추었다. 전시인 데다가 이른 봄이라 꽃은 없다. 케올레스가 묻힐 신전에서야 들 꽃으로라도 어렵게 화관을 만들고 있을 테지만, 당장에 장례가 치러 질 바르젤의 작은 신당에서는 차가운 돌과 거칠고 검은 무명천 밖에 없었다. 케올레스는 절차에 따른 장례는 사양했다. 오늘 전사한 사람들과 똑같이 요새 안의 신전에서 그 장례가 치러지기를 바랐다. 그러나 한 가지는 다른 사람들과 다를 수밖에 없었다. 관이 마련된 사람은 케올레스 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바닥에 누워, 그 자신 의 망토로 간신히 얼굴을 가렸을 뿐이었다. 케올레스의 관 양 옆에는 세 갈래로 갈라진 촛대가 세워지고 초가 올 라갔다. 관은 암롯사의 용과 장미가 수놓아진 천으로 덮였고, 그 위에는 향로가 세워졌다. 내일 있을 장례의 준비가 끝날 때까지, 아킨은 사원을 지켰다. 알바 스 경이 쉬라 말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어느덧 사람들이 물러나고, 달빛 비추는 사원은 작은 소리에도 금 갈듯 고요해졌다. 사람들이 읊조리던 송가소리도 잠결에 흩어져 버린다. 아킨은 케올레스의 관 옆에 앉아 기둥에 등을 기댄 채 아무도 듣지 않을 송가를 작게 읊조렸다. 파도소리가 들려온다. 시체를 먹으러 오는 인어들이 으스스한 노래를 부르며 첨벙 첨벙 수면을 치는 소리 도 들려온다. 그런 조용하고 나지막한 소리 속에서, 갑자기 바람이 찢어지는 듯한 거센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엔 멀찍이서 들려왔지만, 꿰뚫고 달려 오듯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킨은 어둠 속에서 노랗게 흔들리 는 촛불들을 바라보았다. 그 수많은 불들은, 처음에는 위로 꼿꼿이 선 채 간혹 앞뒤로 흔들리곤 하다가 마침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쓸리듯 허리를 숙였다. 문득 시선을 들어보니 기둥들 사이로 출렁이는 바다가 보이고, 그 수 면이 쓸어내듯 한편으로 차라라 쓸리더니 은빛 섬광 같은 것이 휙 스치고 지나갔다. 파도가 치솟아 암벽을 철썩 때렸다. 하얀 포말이 산산이 부서져 반짝였다. 머리카락 쏟아지듯, 바위들 아래로 하얀 거품이 바다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달보다 차가운 은빛으로, 마치 은을 녹인 물을 한꺼번에 쏟아 내듯, 은빛 머리카락과 같은 색 드레스와, 옅은 갈색 피부를 가진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 주변으로 부연 장막 같은 것이 일어났다. 주변이 순식간에 침묵했다. 파도소리도 사라지고, 아직 깨어있는 사람들의 기척마저 꺼진 듯 사라져 버린다. "오랜만이군, 아킨토스." 그녀- 휠테스가 부드럽게 그의 이름을 부르고는 다가왔다. 은빛 머 리카락이 차가운 빛을 흘리며 바닥을 쓸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그러자 휠테스가 손을 저었다. "세르네긴과의 일은 아냐. 긴장 풀어." 아킨은 뜨끔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언제나 언짢아진다. 정말 좋은 사람이고, 정말 훌륭한 기사인데, 대체 왜 이렇게 꼬인 걸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다른 일이 있을 거라 생각되지는 않는데요?" "아아, 예전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충분히 가능해. 나는 우리의 수장이신 펠톤 님의 명으로 여기에 온 거니까." 여신이 강림했다, 비슷하게 들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너무 아득하 고 어처구니없게 생각되어서, 아킨은 정말 이상하게 되물어버리고 말았다. "네?" "너도 알지 않니. 우리들의 수장, 골든 드래곤이자 열두 수호자중 한 분이신 펠톤 님. 나는 그분의 명으로, 그리고 에크롯사의 수호룡 중 하나로써 이곳에 온 거야." "혹시......죠세피나 여왕과 관련된 일입니까?" 휠테스는 만족스러운 눈빛을 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가 빨라서 좋군.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 때문인 지도 알겠니?" "눈치와는 상관없는 문제 같은데요." 휠테스는 잠시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러더니, 나른한 어조로 말했다. "아킨토스, 나는 인간들의 정치니 관계니 하는 문제는 잘 몰라. 그러 니 무엇이 중요한 지 감 잡기 어려운 게 사실이지. 우선, 펠톤 님이 말씀하신 것은 성배였고, 죠세피나 여왕이 말한 것은 로메르드의 켈브리안 공주였어." 아킨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 무슨 말을 하는 지 대강 알 것 같다. "그 물건이 델 카타롯사의 칼리토 왕이나 그의 마법사인 악튤런 파노 제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또, 저 말고 그것을 지킬 분들은 많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은 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 로 강한 분들이기도 하고요." "펠톤 님이 걱정하는 건 그런 사사로운 게 아니야." "그렇다면 뭡니까?" "바로 너." 아킨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맙소사, 제가요? 인간이 아니라서 모르시나 본데, 저는 황가 핏줄이 조금도 섞이지 않았습니다. 그걸 무시하고서라도 성배의 주인으로써 황위를 요구할 수는 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제게는 황위를 제대 로 유지할 힘은 없습니다. 힘껏 해 본다면 어찌 될지 모르겠지만, 그 복잡하고 어려운 일을 감수하고서라도 황제가 될 생각은 없어요." "인간들은 대체로 원한다고 들었는데." "취향 나름이지요. 그리고 그런 일은 제 취향은 아닙니다." 휠테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펠톤 님께는 그렇게 전하도록 하지...... 그리고 이제 죠세피나 여왕의 말을 전할 차례로군. 하지만.....이건 인간들 일이라, 나로서는 뭐가 중요한지 금방 감 잡기는 어려워. 네가 알아들을 만한 말을 골라내도록 해 봐......" 아킨은 그녀가 전령으로는 최악으로 불성실하고 부적절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전하는 사람에게나 전달 받는 사람에게나).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로메르드의 공주가 위험해 질 것 같다고 하던데." 이번에도 이상하게 되물어 버리고 말았다. "네?" **************************************************************** 작가잡설: 기분이 왜 이렇게 축 처져 있는 건지 모르겠군요. -_-;;; 비실비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7장 ***************************************************************** [겨울성의 열쇠] 제57장 거꾸로 흐르는 급류 제268편 거꾸로 흐르는 급류#1 ***************************************************************** 첸은 언제 뭐가 터질지 모르던 티폴라 여왕 시대도 이것보다 덜 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쨌건 당시에는, 그래도 '뒷골목 기준'으로는 나름대로 멀쩡한 일들만 있었으니 말이다. "네 놈 조카는 이상한 나라 왕자를 데리고 오더니, 네 놈은 왕에 세 트로 공주까지 데리고 오냐....악!" 첸이 으르렁 비슷하게 쏟아내는 말에(그리고 마지막은 뿌드득 북북으 로 장식해주고), 제임은 억양 없고 무관심한 투로 답했다. "여긴 내 가게다. 싫으면 네 놈이 나가." "나도 투자 했어!" "갚아준다." 첸은 당장에 멱살 붙들고 악악대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바로 옆에서 '국왕폐하'께서 주무시고 계시기에(그 왕의 행색이 좀 난처하다 할 지라도) 발걸음 소리 내기도 송구스러운 상황이라 일단은 입을 다 물어야 했다. 게다가 그 옆에는 '공주전하'께서 '나도 미안한 거 알 고 있단 말이다!' 라는 듯한 서늘한 눈빛을 보내며 앉아 있다. 첸을 결국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말했다. "나가서 이야기하자." "의뢰인 앞에서 자리를 뜨는 건 규칙위반이야." "의뢰? 그래, 얼마 준다고 하디?" "금으로 천." 첸은 입을 딱 벌렸다. 그 돈이라면, 전 골목의 가게를 다 사고도 남 다 못해 호화 유람선 끌고 다니며 평생을 놀고먹어도 될 액수다. 그 액수가 심장을 팍팍 조이고 기도를 꽉꽉 막는 것만 같았기에, 첸 은 크흠- 큼큼 헛기침을 하고는 제임에게 슬쩍 말했다. "그래서........저 임금님이랑 공주님 숨겨 주기만 하면 되는 거냐?" "아뇨, 나가야 해요. 최대한 빨리." 켈브리안 공주였다. 그리고 그 말에 첸도 제임도 입을 꾹 물고는 그녀 쪽으로 시선을 돌 려야 했다. 급히 궁에서 도망 온데다가, 당장에 구해 갈아 입혀 놓은 옷이 루첼 이 소년시절에 입던 옷이라 모습 자체는 엉망이긴 했지만, 그래도 제국에서도 유명할 정도로 미인인 켈브리안 공주였다. 콧대 높고 성 질 더러운 슈마허마저도 그 수모를 당하면서도 그녀 옆을 떠나지 않 으려 했고, 수많은 로메르드의 귀족들이 그녀에게 걷어차이는 영광 이라도 한번 누려보고자 했었다. 그런 공주가 앞에 있으니, 첸은 괜히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대강 눈치 챈 제임이 '주책-' 하고 노려보았지만 별 수 없었다. 첸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현실적이고 개인적인 성격인 첸이었지만, 눈부신 미녀 앞에서는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병신, 바보, 그냥 돈이나 챙기자, 내 빼는 게 더 좋을 지도 몰라, 등등의 말들이 떠오르기는 했 지만 저 어여쁜 아가씨가 눈물 글썽이며 '정말 고마워요, 첸 경' 어 쩌고 하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제가 영광입니다, 공주님!' 하고 발 앞에 쓰러질 수 있을 듯한 기분이었다. 제임이 옆구리를 푹 쑤셨을 때야 첸은 간신히 제 정신이 되었다. 아는지 모르는지 켈브리안은 조용히 눈을 내리깔며 차분하게 말했다. "그레코 공작이 오랫동안 수도를 장악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 아요....... 우선은 수도에서 탈출해서, 어떻게든........." "카치니 경 정도를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겁니다, 공주님." 켈브리안이 놀란 눈으로 제임을 바라보았다. 제임은 공주 앞의 의자 에 털썩 앉았다. "아시겠지만, 우리는 여기 저기 소식들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저 어린 임금님이 즉위한 후에는 내내 갇혀 살 았던 공주님 보다는 우리가 잘 알 거요." 켈브리안은 잠시 잠든 베르티노의 얼굴을 내려다보고는 한숨을 내 쉬 었다. 다시 한번 그녀 자신이 경험 부족한 사람이란 것을 통감해야 했다. 아무리 강한 척해도, 결국 그녀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그리고 슈마 허와 아킨의 보호 아래에서 살았던 것이나 다름없다. 지금도 베르 티노가 마련해 놓았던 작은 행운을 잡고 여기까지 도망쳐 온 것에 불과하다. 만약 이 제임이 아킨과도, 그리고 그 아킨의 친구인 루첼 과도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었다면 이렇게까지 그녀를 도와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도와달라는 공주를 왕궁을 장악한 숙 부에게 넘겼을 지도 모른다. 한심하다.... 여기 저기 의지나 해야 하는 처지라니. "험한 사내들 틈에 있는 건 고역일 테니, 수도를 탈출해서 카치니 섬 으로 가는 것 까지는 도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거기서부터는 공 주가 알아서 해야 합니다....... 우리는 뒷골목 건달들이고, 높은 분들 은 높은 분들이니까.... 그리고 금액은 그것만 지불해 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켈브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뭐, 각자 제 할 일 하는 것뿐이니....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돈이나 제대로 주시면 송구스러울 노릇이지." 켈브리안은 빙그레 웃었다. 그 미소에 제임은 다 늦은 나이임에도 불 구하고 괜히 헛기침이 나왔다. 켈브리안이 말했다. "여쭤볼 것이 있는데.......알고 계신대로 답해주세요." "존댓말 할 것 없습니다. 원, 내가 다 송구스럽군." "아니에요, 저와 베노의 은인이신데요." "어쨌건 말 해 보십시오.....그건 공짜로 답해드리리다." "제 숙부님은 대체 어디에 숨어 계셨던 거죠?" "암롯사 대공왕의 보호아래 숨어 있었소. 아마도, 남 나셀의 어느 섬 이었을 가능성이 높지." 켈브리안은 다시 한숨을 내 쉬었다. 이제 상황이 대강 짐작된다. 암롯사는 그레코 대공을 살려 놓는 다면 언젠가는 분명 쓸 일이 생길 거라 짐작했을 것이다. 아니, 조금이 라도 생각이 있는 왕이라면 누구나 생각했을 것이다. 브리올테 대비 는 지나치게 자신만만하고 변덕스럽다. 분명 언젠가는 실정을 할 것이고, 배신도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실정을 이용할 카드로 그레 코 대공은 정말 적임이다. 베르티노는 약하고, 켈브리안은 무력하니, 남는 것은 그레코 대공뿐인 것이다. 그래, 슈마허가 말했었다. 암롯사를 상대로 협상을 벌이거나 저울질 을 하는 것이야 말로 위험한 짓이라고. 맞는 말이었다. 브리올테가 암롯사와 델 카타롯사를 저울질 하여 델 카타롯사에 무게를 주는 순간에, 암롯사는 더 이상의 협상을 거부 하고 브리올테를 '제거'해 버린 것이다. 어머니는 언제나 자신이 자신의 힘으로 그 자리에 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모두 위에 군림하며, 모두가 그녀를 숭배하고 칭찬해 주기 만을 바랬다. 그녀의 모든 판단이 옳다고, 현명하다고, 위대하다고 외쳐주기만을 바랬다. 그녀가 하는 일은 무엇이든, 그 누구도 생각 하지 못하는 영리한 그녀만이 내릴 수 있는 판단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녀야 말로 암롯사에 철저하게 이용당해왔었고, 그런 그녀가 지나치게 '버릇없어'지자 암롯사는 가차 없이 그녀를 버리고 다른 카드로 바꾼 것이다. 애당초 이럴 생각으로 암롯사의 휘안토스는 그레코 대공에 의해 유폐 된 어머니를 찾아 구해준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어찌 할 거라 다 생각해 두며 그레코 대공을 빼돌리고 도와주고 이렇게 다시 로메 르드의 실세를 바꾸려고 하는 것이다. "저도 어리석었군요." "공주님은 힘도 없었잖습니까." 켈브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자책하는 건 어머니의 일 때문만 이 아니었다. 그녀 역시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휘안토스가 그저 아킨 하나만을 제거하기 위해, 탈로스를 이용하기 위해 어머니를 구해주었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랬기에 암롯사가 어떤 식으로 나올 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생각이 짧았을까. 한 나라의 왕좌를 갈아 치우는 게임을 하면서, 하나밖에 딸 수 없는 카드를 내 놓았다고 생각해 버리다니. "언제쯤 준비되나요?" "뭐.......아, 이르면 내일. 늦어도 이번 주 안으로." "빨라야 해요..... 휘안토스가 그레코 대공을 여기로 보내 놓고 가만히 있을 리 없으니까." 로메르드에서 암롯사 까지는, 서두른다면 고작 사나흘 정도 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로메르드의 해군이 얼마나 형편없는 지 켈브 리안은 잘 알고 있었다. 암롯사에서 상어 같은 전함 열 척만 보내도 장악할 수 있는 것이 현재의 롬파르다. 얼마 안 되는 전력마저도 내전에 쏟아부어버렸고, 그것을 추슬러 어떻게라도 버티거나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슈마허는 쫓아내 버렸다. 말 그대로, 이제 아무것도 없다. 발 빠르고 냉혹한 암롯사의 손에 뒤흔들리고, 이제 느리나 집요한 에 크롯사에 도움을 요청한다면-로메르드에 신경 쓰는 에크롯사라면 분명 이 사태를 알고 있을 테니 그녀가 도움 청하기만을 기다리고 있 을 지라도- 또 그들을 끌어 들이게 된다. 에크롯사가 나서면 베 넬리아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켈브리안은 생각하면 할수록 상황이 점점 더 절망적으로 실체를 드러 내는 것에, 그보다 더 빠르게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알고 있었다. 그래, 너무 잘 알고는 있었다. 다만 손쓸 수도 없는데 상황이 나빠지는 것이 진절머리 났기에, 아예 외면해 버렸던 것이다. 어쩔 수 없다고 한숨만 내 쉬었을 뿐이고, 절망을 앞세워 할 일을 회피해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제 무르익어 활개를 치며 켈브리안을 절망에 내 던져 버린 것이다. "잠시만.....잠시만 저희 둘만 있게 해 주시겠어요?" 켈브리안의 표정이 시시각각 어둠에 젖어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 던 첸과 제임은 둘 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을 나갔다. 켈브리안은 그제야 무너지는 자신을 느끼며,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의 옷자락을 베르티노가 살며시 잡았다. "일어났니?" 켈브리안은 애써 웃으며 동생에게 말했다. 베르티노는 고개를 저었 다. "한참 전에 깨어났어요......죄송해요." "아니, 베노는 나보다 열배는 훌륭해. 바보 누나는 얌전히 시집갈 궁 리만 하고 있었는데, 베노는 이렇게 좋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해서 이렇게 도망칠 수 있게 해 주었잖니? 모두 베노 덕이야." 베르티노의 얼굴이 붉어졌다. 뜻밖의 칭찬인 데다가, 자신이 도움이 되었다는 것 자체에 자기가 놀라고 있는 것이다. 그 때, 어디선가 마차 달리는 소리와 말 모는 소리가 들려왔다. 켈브리안은 잠시 고개 를 들고 그 쪽을 보았다가,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다시 베르티노를 보았다. 그러자 베르티노는 눈길을 떨어뜨리더니 작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어머니는........" ".....장례는 궁에 돌아가면 치르자꾸나." 그리고 차마 그레코 대공이 어머니의 시신에 어떤 짓을 했는지 말 할 수는 없었다. 성벽위에 어머니의 목이 걸려있다는 것도, 어머니의 몸이 짐승우리를 구르고 있다는 말도, 차마 할 수 없었다. 도망치지 못했다면 베르티노와 켈브리안 역시 그리 되었을 거라고, 아무리 어린 베르티노라도 알 수 있을 테니. 하룻밤 만에 이렇게 되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제만 해도 그 렇게 당당하고 오만하던 어머니가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 "우선은 수도에서 어떻게 빠져나갈까, 이것만 생각하자." "오늘....은 얼마나 지나갔나요?" "곧 해가 저물 거야." 지하골방에 내내 있었지만, 제임이 식사를 가지고 오는 것으로 시간 을 재고 있었다. 또, 방금 그 첸이란 남자가 온 것으로 지금이 술집 문을 여는 저녁경이라고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 밖에서 문을 쿵쿵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켈브리안이 막 일 어나려는데 문이 벌컥 열리면서 제임이 나타났다. "무슨 일이지요?" "배가 준비된 것 같답니다. 우선, 공주님만 나와 주셨으면 좋겠는데." 켈브리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베르티노 의 손을 꼭 잡았다 놓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어리고 겁먹은 눈동자가 그녀를 향하다가, 무엇 때문인지 슬프게 내려갔다. **************************************************************** 작가잡설: 정답자 한분이 나타났군요! 맞습니다, 겨울키는 그렇게 됩 니다! 축하 드립니다~~ 연참은.....마비노기라는 강적 덕에 잠시 보류;;;;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7장 ***************************************************************** [겨울성의 열쇠] 제269편 거꾸로 흐르는 급류#2 ****************************************************************** "뭐라고요?" 켈브리안은 제임의 제안에, 대체 어떻게 그런 말을 꺼낼 수 있는지 기가 막혔다. "베노는 이제 열 살이에요. 그런 어린 아이를 두고 저 혼자 도망치라 는 말인가요?" 제임은 첸을 슬쩍 보았다. 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피를 토하는 심 정으로 악역을 감수하기로 했다. "지금 항구에 사람들이 좍 깔렸더군요. 젊은 아가씨와 어린 소년 일 행은 모조리 잡혀갈 상황이라고요." "차라리 베노만을 탈출시켜 주세요." "혼자 가라는 말이 아니에요, 공주님. 우리도 임금님 몸 가지고 장난 칠 정도로 간 큰 놈들이 아니라니까." "하지만 방금 전에 분명 나 혼자 당신과 같이 가야 한다고 했잖아 요." "말 좀 끝까지 들어보시라니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공주님은 나와 함께 도망치고 임금님은 제임과 함께 도망치라는 말이야." 그제야 켈브리안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얌전히 들을 테니, 자세히 말해주겠어요?" "지금 둘이 함께 도망치다가 함께 잡히면 임금님 공주님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끝장이라고요. 그러니까 최대한 안전하게 일을 하자, 이 말이라고요." 켈브리안은 다시 한숨이 나오고 말았다. 지금 앞에 도와주는 사람들 앉혀 놓고 계속 한숨만 푹푹 내 쉬는 건 정말 미안한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엉엉 울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필요한 일이라지만, 어린 베노를 손에서 놓고 떠난 다는 것 자체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지금 이 사람들을 곤 란하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알겠어요, 그렇게 하겠어요.............단, 조건이 있어요." "말만 하세요." "둘 다 성공한다면, 그리고 저와 베노가 무사히 만난다면 그날로 말 씀드렸던 돈의 두 배를 드리겠어요." 제임과 첸의 얼굴이 굳었다. 그들의 과거 경험을 비추어 보면, 돈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처음에는 안전했던 일도 이상하게 어려워지곤 했었다. 그런 그들의 눈치를 벌써 알아챘지만 켈브리안은 모르는 척 했다. 어 려워요? 하고 물어, 그녀도 같이 절망하고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지금은 그녀 혼자다. 어깨를 피고, 허리에 힘을 주고 는 어려울 것 없다는 듯한 태도로 굴어야 한다. "배는 언제 준비되죠?" "지금 나가면 되는데." "좋아요, 제가 먼저 가도록 하죠. 그리고 제임 그란셔스 씨, 제 동생 을 부탁드려요." 어차피 따로 가야 한다면, 켈브리안은 좀 더 위험한 길은 자신이 가 기로 했다. 만약 그녀가 들킨다면 적어도 베르티노는 좀 덜 위험하게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베르티노가 들키게 된다면, 스스 로 얼굴을 드러낼 생각이었다. 아무도 켈브리안이 어린 왕을 혼자 보낼 리 없다 생각할 테고, 베르티노보다는 켈브리안의 얼굴이 훨씬 널리 알려져 있으니 어쩌면 그 틈에 베르티노만은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 가도록 하죠.......하지만 작별인사는 하지 않겠어요. 제임 그란셔스 씨, 동생에게 저 대신 잘 말해주세요." 제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그리고 그 옆의 첸 역시 켈브리안 의 생각을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 다시 얼굴을 본다면 그녀는 결코 떠날 수 없다. 단 이틀 동안 봐왔을 뿐이지만, 그녀가 얼마 나 동생을 아끼고 있는 지 아는 데는 충분했다. 마음이 약해져서 발이 무거워지는 것은 그녀도, 제임이나 첸도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첸은 계엄령 덕에 텅텅 비어버린 술집 구석에 앉아 있던 여자에게 손 짓을 했다. 여자는 준비하고 있던 망토를 집어 켈브리안에게 던져 주었다. 켈브리안은 얼결에 그 술 냄새와 담배냄새에 찌든 망토를 받 아 들었다. 여자는 그런 공주를 향해 비웃음 비슷한 표정을 보이고 는 자신을 소개했다. "에나라고 해요. 저 얼간이 첸이랑 제가 공주님을 모실 겁니다." "부탁드리겠어요." 켈브리안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더러운 망토로 어깨를 둘렀다. 그 모 습에, 에나라는 여자는 이번에는 꽤나 유쾌해 보이는 웃음을 보였다. "공주님은 예전의 그 왕자님 보다 더 마음에 드는 군요.... 그 꼬마 왕자는 정말 엄청나게 깔끔 떨었거든. 자, 그렇다면 어서 가요. 오늘 뜬 달이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기도 전에 근사한 곳에 보내 드릴 테니." 그리고 그녀는 날쌔게 문을 열고는 벌써 까만 어둠이 가득 찬 밖으로 켈브리안을 안내했다. 에나의 진갈색 망토와 공주의 녹색 망토가 사라지는 데는 금방이었 다. 그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자, 제임은 가게 문을 닫고는 안으로 들어왔다. 계엄이 내린 것은 어제 저녁이었다. 그레코 대공은 정말 번개처럼 궁 안으로 들어와, 대비를 암살하고 궁을 장악했다. 그러나 제임은 그 늙은 대공이 궁 밖까지는 장악하지 못했다는 것을 안다. 늘 그랬듯, 왕과 공주가 없는 지금 대공은 그 어떤 로메르드의 귀족도 설득 시킬 수 없다. 암롯사가 가지고 노는 거야- 제임은 속으로 그렇게 씁쓰레 하게 중얼거리며 돌아섰다. 윗대가리들이 얼간이인 나라에서 살면, 이래서 진절머리 난다. 외국으로는 온갖 악명을 쌓은 사이러스도, 제 나라 간수는 철저하게 잘 했다. 역시나 비슷한 악명을 가지고 있는 베넬리아 통령부도 마 찬가지. 겁쟁이 왕이라고 욕먹는 헤로롯사 역시, 자기 나라 국민들만 은 전쟁이 뭔지도 모르고 편하게 잘 살도록 해 준다. 그런데 이놈의 로메르드는 왜 올라가는 놈들 마다 이 모양들인 건지 - 차라리 내가 왕이 되어 버릴까, 적어도 여태 왕을 해 먹었던 놈들 보다는 잘 할 것 같은데- 그렇게 허무한 생각을 떠 올리며 제임 은 지하실로 내려갔다. 어린 왕은 제임이 들어오자마자 허리를 죽 피며 제법 의젓하게 보이 려고 했다. 그러나 병약하고 어린 소년의 그런 모습은 오히려 안쓰 러웠다. 루첼은 저 만할 때 저러지 않았는데.......아니지. 너무 어른 흉내 내고 다녀서 속 뒤집어 놓기만 했지. 꼬마 임금님이 물었다. "누님은 어디 계시지?" 제 딴에는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이렇게 나오는 것일 테지만, 제임은 외려 그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다. "먼저 떠나셨습니다, 폐하." 역시나, 베르티노 왕의 안색은 단번에 창백해졌다. "사정은 나면서 말씀드릴 테니, 우선은 저와 함께 가셔야겠습니다." "지금 말해주세요." "말하자면 깁니다만, 괜찮습니까?" 베르티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잠시 설명하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 그리 생각하며 제임은 일이 어찌 된 것인지 간략하게 설명했다. 어린 아이라, '켈브리안 공주가 그리 하라 했다.' 라는 말을 쉽게 믿었다. 또, 예전에 어느 키 큰 여기사(이름이 라키 경이었던가?) 와 함께 여기까지 와서 제임을 만난 일도 있고 해서 제임이 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믿기도 했다. "그렇다면 어서 가야겠군요. 어서 가요. 지체할 시간 없잖아요." 베르티노는 금방 재촉하기 시작했다. 제임은 침대 맡에 놓인 망토를 들어 베르티노의 어깨를 감싸 주고는, 그 어깨를 토닥였다. 왕인 베르티노에게 평민 이상 올라가 본 적도 없는 제임이 그리 하는 것 은 무엄하고도 발칙한 짓이었지만, 베르티노는 오히려 얼굴을 살짝 붉혔다. "감사해요, 마법사." "뭘요.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 걸- 자, 이제 갑시다, 임금님." 제임이 베르티노에게 가지는 감정은, 왕에 대한 순박한 국민의 감정 이라기보다는 아버지가 어린 아들에게 가질 법한 감정일 뿐이었다. 어린 꼬마가 어떻게든 누나를 돕고 싶어서 애쓰고, 또 지금 최대 한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그러면서도 제임을 믿는 것이 기분 좋았다. 제임은 마치 아버지가 아들의 손을 잡듯이 왕의 손을 잡고는 가게 문 을 열었다. 계엄이 내려진 도시는 술 마시러 돌아다니는 사람 하나 없어 싸늘할 정도로 조용했다. 제임은 우선 입술 근처에 손가락을 가져갔고, 베르티노는 입을 꾹 물고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임은 별빛과 달빛에 젖어들기 시작하는 어두운 골목으로 나왔다. 어린 왕도 그의 손을 잡고 따르는데, 갑자기 파다닥-- 닥닥- 하고 무언가 작은 것이 날개를 치는 소리가 귀에 닿을 듯 가까이 들렸다. 놀란 베르티노는 품안을 뒤적거렸다. 그러나 문제의 범인을 찾 기도 전에, 까맣고 재빠른 것이 그의 품안에서 빠져나와 하늘로 솟 구쳐 올랐다. "저게 뭡니까!" 당황한 베르티노가 말했다. "혀, 형이.......형이 준거에요! 지난번에 보여 드린 거..........그, 그러니 까아....." 제임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졌다. 아킨은 손을 뻗었다. 어둠 속에서 푸릇한 윤기를 내던 풍뎅이가 날개를 접고 손끝에 내려 왔고 순간에 팟- 하는 짧은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조각난 재가 날리듯 그 어두운 조각이 잠시나마 새카맣게 날리다가 이내 사라졌다. 어둠 속에서 스며 나온 말의 머리끝이 아킨의 등에 닿았다. 아 킨은 그 고삐를 휘어잡고는 등에 올라탔다. 곧, 어두운 거리로 횃 불의 빛들이 휘청거리며 나타났다. 말발굽 소리에, 사람들 달리는 소 리에, 여러 사람 붙잡고 시비 걸고 묻고 험악스레 화를 내다가 한대 얻어맞는 소리도 들린다. ".....서두르자." 말이 머리를 돌리고는 아킨이 생각했던 방향으로 나는 듯 달리기 시 작했다. 말발굽 소리도 없다. 오로지 그림자 스치는 듯 오싹한 바 람소리뿐. 얼마 되지도 않아 익숙한 거리들이 나왔다. 모두 문을 닫고 창의 덧 문까지 꼭꼭 잠가 놓은 데다가 그 틈으로 빛 한줄기 스며 나오지 않았다. 모두가 한꺼번에 강철이나 돌덩어리로 변해버린 듯한 도시 의 밤이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그 어둠을 헤집으며 누군가를 찾 는 남자들의 불빛은 경망스런 반딧불처럼 신산스럽게 날아다닌다. 상황이 다급해 질수록, 심장은 얼어붙지만 흐르는 피만은 뜨겁다. **************************************************************** 작가잡설: .....................쇼타는 취미 없음. (냉담) 세상에 쉬운거 별로 없습니다. 특히 돈 버는 문제라든가, 타인과의 관계라든가 말입니다.... 쉽다고 착각하거나, 쉽다고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죠.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7장 ************************************************************** [겨울성의 열쇠] 제270편 거꾸로 흐르는 급류#3 *************************************************************** 제임은 잠시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해야 했다. 이대로 손 붙잡고 계 속 뛸까, 아니면 기다릴까.......아아, 모르겠다. 갈팡질팡하고 헷갈려 미치겠는데, 뭐 하나 확실하게 고르라고 으르렁 컹컹 윽박질러대 는 상황은 정말 질색이다! 꼬마 임금님의 송구스러운 방문을 받고, 꼬맹이 녀석이 내 놓는 물건 을 살펴 본 뒤에 제임은 단번에 그것이 예전의 얄미운 왕자님 물건 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러나 불안했다. 그 왕자 놈 만 나타나면 일 이 터진다, 이건 아예 징크스를 넘어 자연법칙이 되어 버리는 것 같 다. 일을 찾아다니는 건지, 아니면 정말 나타나면 일이 생기는 건지 모를 일이지만, 어쨌건- 제임이 그 때 생각한 것은 그저 그 왕자가 켈브리안 공주를 데리러 오는 건가- 뿐이었다. 그리고 임금님이 원하는 것은 공주가 엉뚱한 곳으로부터 정식 청혼을 받기 전에 도망치는 것이었고. 그러나 정 작 공주를 데리러 나왔던 그에게 임금님이 달려와서 일이 터졌으니 도와달라고 하지를 않나, 어떤 일인가 했더니 다음날로 대비의 목 이 성벽위에 걸리지를 않나.... 모두 제임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들이었는지라, 그는 그저 '제발 그 이상만 터지지 마라(물론 그것도 그의 상상 밖이다)' 하고 한숨쉬는 것 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 왕자가 드디어 이 도시에 들어왔다는 증거가 있는 지금, 그 예감이 더욱 박진감 넘치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저기, 혹시.....혹시 그 형이 온 거야?" 꼬마 임금님이다. 그리고 이제 여유가 생기니 말이 절반으로 푹 줄어 든다. 내 조카였으면 한 주먹 감이다, 제인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답은 부드럽게 했다. "맞습니다.......가만!" 제임은 귀를 기울였다. 아니, 귀가 아니다. 그것은 그의 '감각', 마법 사로서의 감각 그 자체로 주변의 미묘한 변화를 알아채는 것이다. 진부하지만, '어둠이 다가온다.' 라는 느낌이다. 뒤에서 살기를 가진 누군가가 칼을 들고 슬며시 다가올 때의 그 오싹한 느낌, 거대한 짐승이 발걸음을 죽이고 어깨를 낮춘 채 소리 없이 올 때의 느낌, 그것이 주변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뭐가 오려나, 제임은 온 몸이 곤두섰다. 정말, 솜털 하나까지 모조리 움찔 움찔 하는 기분은 어렸을 때 이후로 처음이다. 그러나 그 때, 제임과 베르티노 앞으로 환한 빛이 쏟아졌다. 겁먹은 베르티노가 제임의 옷자락을 움켜잡았다. "젠장!" 제임은 머뭇거린 자신의 멍청함을 후회했다. 사방에 빛이 떠올라 번쩍이고 있었다. 그림자 하나 남기지 않고, 밤 의 어둠이 모조리 증발해 버린 것만 같다. 눈이 부셔서, 뭐가 나타 났는지 알아내는 것....아니 눈뜨고 있는 것만도 고역이었다. 그러나 저벅- 하고 철로 된 부츠로 바닥을 차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대 로 머리를 후려 맞았다. 머리가 터지며 뜨끈한 피가 흘러나왔다. 그의 턱이 강철 부츠 끝에 강타 당하며, 그대로 그는 나동그라졌다. "아저씨-!" 베르티노가 달려와 그의 팔을 붙잡으려 했지만, 움직이기도 전에 그 작고 얇은 팔이 누군가에 우악스레 붙들렸다. 내 동댕이쳐지지는 않았지만, 베르티노는 차라리 그 편이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마르고 차가운 손이 턱을 움켜쥐더니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으...." 시체를 꺼내다 앞에 들이대도 이보다는 덜 무서울 것만 같았다. 그건 적어도 움직이지는 않을 테고, 활활 타는 눈을 희번득 거리지도 않을 테니까. "많이 컸구나, 조카야." 베르티노는 울음을 터뜨리지도 못했다. 그저 이가 딱딱거릴 정도로 벌벌 떨 뿐이었고, 주저앉지 못하는 건 그 단단한 팔에 잡혀 있기 때문이었다. 무섭도록 변해버린 그레코 숙부였다. 얼굴은 바짝 말라 광대뼈에 척 붙어 있었고, 머리카락은 하얗게 세어 있다. 입술을 창백하고 얇게 말라있고, 씨익 웃는 이도 송곳처럼 날카로워 일그러진 괴물 같아 보인다. "자아, 착한 조카야........너는 됐고, 네 누나는 어디 있냐?" 베르티노는 입을 꽉 물었다. 그러자 턱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가 며, 턱이 그대로 박살날 것만 같았다. "네 누나는 어디 갔냐고 물었다! 너를 놓고 어디로 도망칠 리가 없 어! 어서 나오라고 해!" 베르티노는 온갖 생각이 났다. 제발 누나가 이곳으로 오지 말기를 바 라면서도, 누나가 구해주기를 바랬다. 누나만은 살기를 바라면서도, 누나가 살려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결국에는 울음을 터뜨렸다. "병신자식인 건 여전하군! 하긴, 그 미친 여편네가 키웠으니 병신인 건 당연하지.......!" 억울했지만, 부정할 수도 없어서 더 화가 났다. 뒤에서 제임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행여나 기대를 했지만, 곧 빡-- 하는 뼈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베르티노는 눈을 꽉 감았다. "그 계집애가 있어야 해! 그 계집애가 당장에 필요하다고---! 어디 갔어-!" "그리고, 저하고 결혼이라도 하시게요?" 그레코는 당장에 베르티노를 내동댕이쳤다. 어리고 작은 몸은 제임 쪽으로 나가떨어졌고, 제임의 손이 그런 베르티노를 붙들었다. "아저씨...!" 베르티노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부르자, 제임은 피투성이가 된 얼굴 을 끄덕였다. 베르티노는 그에게 바짝 붙고는, 비겁한 자신을 원망 하며 환한 골목을 보았다. 그곳에 켈브리안 공주가 있었다. 켈브리안은 아랫입술을 꾹 문채 정 말 기분 나쁜 불량배라도 본 듯한 눈초리로 숙부를 노려보았다. "자, 여기 제가 있어요. 왜 찾으신 거죠?" 그리고 그녀는 두 팔을 벌려 보였다. 금빛 머리카락은 빛에 반짝였지 만, 얼굴은 그늘이 져 있었다. 무언가가 끝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알면서도 감수하고 돌아온 자의 비애가 그 얼굴에 서려 있었다. 베 르티노는 정말 크게 울어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그의 등 뒤에 있는 제임이 속삭였다. "이봐, 임금님- 찔러버려." "....네?" 제임은 엎드려 있었다. 누가 본다면 꼼짝없이 기절한 듯 보였다. "저 미치광이 숙부자식을 찔러 버리라고......칼은 내 허리에 있어. 뽑 는 즉시 달려가 찔러야 해.....!" "하, 하지만....." "임금님......당신의 바보 누나가 다시 달려왔어......그리고 그 바보 누 님을 구할 수 있는 건 임금님뿐이야." "숙부님을 죽이란.....말씀이세요?" 베르티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환한 빛 속에, 무장한 병사들이 수십 명은 되어 보였다. 그들 모두 무시무시하게 거대해 보였고, 팔뚝 한번만 휘둘러도 쉽게 베르티노를 죽일 수 있을 듯 했다. 눈이 마 주쳐도 그들은 히죽 웃어 보일 뿐이다. "봤지? 지금 아무도 임금님한테는 신경 안 쓰고 있어.....하지만 기회 는 한번 뿐이야." 베르티노는 여전히 떨고 있을 뿐이었다. "임금님 빼고는.....그 누구도 저 미치광이를 죽일 수 없어. 죽여서도 안 되고.....임금님뿐이라고!" 베르티노는 켈브리안을 보았다. 켈브리안이 베르티노와 눈이 마주치 자 웃어 보였다. 언제나 저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어머니 앞에서도, 사람들 앞 에서도, 어떤 일이 있어도 그녀는 베르티노 옆에 있어주었고 지켜 주었고 희생했다..... "칼....어딨어요?" "허리." 베르티노는 그 곳을 보았다. 칼자루가 허리춤에서 빛나고 있었고, 그 것을 보는 순간에 베르티노는 기이한 희열을 느꼈다. 할 수 있어, 해야 해, 하기만 하면 되! 베르티노는 단번에 그 검을 뽑았다. 가장 가까이 있던 병사-(제임을 두들겨 팼던)가 돌아보았지만 꼬마가 뭘 하겠나 싶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베르티노는 바닥을 박차고 그대로 그레코 공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그대로 단 검을 휘둘렀다. 베르티노를 저지하려던 병사가, 갑자기 벌떡 일어난 제임에게 걷어 채이며 나가떨어졌다. 베르티노는 더 깊이 검을 찔 러 넣었다. 칼을 무거웠는데, 진흙 속에 박아 넣듯 너무나 쉽게 쑥 들어갔다. "베노!" 켈브리안이 비명 지르듯 동생을 불렀다. "이 자식이--!" 베르티노는 그대로 호되게 맞아 나가 떨어졌다. 스캉, 칼이 뽑혀져 나가는 소리가 오싹하게 들려왔다. 너무 아파 눈을 꽉 감고 있으면 서도, 베르티노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입힌 상처가 그리 크지는 않다 는 것을 깨달았다. 다 틀렸다, 하는 생각이 든다. 왜 이렇게 두 손 이 약하고 작은 건지, 왜 이렇게 멍청하고 느려 터진 건지....! 그 때 누군가의 손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정말 빠르고 강한 손이었 다......그리고 그대로 움켜잡아 제임 쪽으로 팍 밀었다. 제임이 어린 왕의 어깨를 잡아끌어 안았다. "잘했어, 임금님!" 그 짧은 칭찬에, 갑자기 굳었던 몸이 확 풀리는 것만 같았다. 몸을 꽉 조이던 그 어둠 컴컴한 힘이, 두려움이, 씻겨 내려가는 것만 같다. 베르티노는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순간에, 츠캉- 짧지만 강하게 검 부딪히는 소리가 깨진 듯 터졌다. 빛 속에, 더욱 번쩍거리는 두개의 검이 베르티노의 눈앞에 맞물려 있었다. 하나는 장검이었고, 베 르티노 쪽으로 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장검을 막고 있는 것은 짧은 단검이었고, 흰 팔찌가 찰랑이는 손에 쥐어져 있었다. "픽스, 파, 스에--" 짧고 길고 힘주고 약하게, 세 마디의 말이 터졌다. 그리고 온 세상을 압박하듯 하얗기만 하던 빛이 찢어지듯 사라졌다. 갑자기 빛이 꺼 지자, 주변은 눈을 감은 듯 까맣게 변했다. 누군가가 빛을 터뜨렸다. 병사들 중에 마법사가 끼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빛이 터지며 어둠이 물러나자 바닥에 드리워졌던 어둠이 갑자 기 꿈틀 움직인 것만 같았다. 바닥에서 쿠릉-- 하고 멀찍한 천둥 소리 같은 것이 들리자, 말들이 주춤 주춤 물러나기 시작했다. 제임 이 베르티노를 안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무슨 짓이냐, 꼬마--!" 그레코 공이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상대는 검을 막고 빠지고는 그 를 걷어찼다. 이미 베르티노에게 상처를 입은 뒤였다. 깊지는 않았 지만, 통증은 통증이다. 그레코 공은 얼굴을 구기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공작님-!" 공작을 따라왔던 추격대가 모조리 검을 뽑았다. 마법사 인 듯 보이는 자도 로브의 소맷자락을 걷었다. 그러나 상대는 머리의 후드를 벗었다. 드러난 얼굴에, 그 중 몇이 신 음을 삼키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러자 아킨은 허리를 피고는, 검을 눕혀 그들을 향하게 했다. 아무 말 없는 대치상태가 흘렀다.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망설임 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순간이었다. 차컁, 하며 바닥의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칼날 같은 것이 솟구쳐 올 랐다. 아킨은 뒤로 물러났다. 그 검은 섬광조각들이 추격대의 검을 휘감았다. 차캉, 차캉-- 창, 창, 창--! 작은 짐승 비명 같은 것 이 연달아 터지며, 그 검들이 남김없이 산산조각 났다. 히익- 신 음소리들이 터졌다. 비명은 들리지 조차 않았고, 그것은 경악에 압 박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아킨은 곧바로 그레코 공작의 허리를 걷어찼다. 피가 울컥 솟구치며 바닥에 후두둑 떨어지고, 공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킨은 단검을 그의 목에 갖다 대고는 모두를 향해 명했다. "암롯사의 아킨토스 프리엔, 나라의 이름을 가문의 이름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자로서, 암롯사의 국적을 가진 모두에게 명한다. 어떤 명 령을 듣고 왔든, 지금부터는 내가 너희들에게 명령한다." 로브를 입은 자가 앞으로 나섰다. "우리는 오로지 휘안토스 님의 명령만을 듣습니다." "나 역시 그대들 왕의 아들이다." "우리는 왕자님의 명령을 듣는 것이 아니라, 왕 될 분의 명령을 듣는 것입니다." 제임이 나서려 했지만, 아킨은 눈빛으로 그를 저지시키고는 그레코 공작의 목에 칼을 바짝 들이댔다. 마법사가 주춤했다. 평범한 얼굴의 남자였지만, 눈빛만은 고집스러운 푸른빛이다. "형이 뭐라 명했는가?" "그레코 공작님을 돕고 지킬 것." 아킨이 흐릿하게 웃었다. 그 안에는 씁쓸한 조소와, 가벼운 분노가 어려 있었다. 조소는 이 남자에게는 아무 책임도 없다는 것이며, 분노는 결과 그 자체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 역시 옛 약속을 지켜야 해." 그리고 아킨은 그레코 공작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마법사가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손을 휘저었다. 아킨의 등 뒤에서 시뻘건 불길이 솟구쳤다.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주의만 끌려는 것이었다. 아킨은 그 쪽을 돌아보았고, 그 때 마법사가 외쳤다. "어서 공작을 구해라-!" 아킨은 공작의 뒤통수를 후려 갈겼다. 공작이 신음을 캑 뱉으며 기절 해 버렸다. "아키-!" 켈브리안 공주가 외쳤다. 아킨이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 뒤로도 추 격대의 남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뒤요, 선배!" 켈브리안 공주가 뒤돌아섰다. 검은 이미 모두 박살났기에, 남자는 두 손으로 공주를 잡으려 하고 있었다. 켈브리안은 주저 없이 남자의 사타구니를 걷어찼다. 그러나 그것을 보는 사이에, 아킨의 멱살을 마법사가 움켜잡았다. 그리고 그 허리에서, 방금 전에 뽑아 두지 않았기에 부서지지 않은 단검이 뽑혀 나왔다. "그리고....왕자님, 명령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남자의 눈은 냉정했다. 차갑고 단단한 돌처럼. "왕자님께서 나타나신다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어떤 상황이 되더 라도 죽여 버리라고." ****************************************************************** 작가잡설: ..................여기서 '다음 이 시간에' 해 버리고 싶어 지는 아울. -_-;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7장 **************************************************************** [겨울성의 열쇠] 제271편 거꾸로 흐르는 급류#4 ***************************************************************** 단검 날이 푸릇하게 빛나더니, 그 날을 따라 빛 무리가 어렸다. 그리 고 그대로 단검이 내리꽂혀왔다. 치밀어 오르는 건, 심장을 뚫고 지나가는 그 뜨거운 창 같은 감정은 분노였다. 으스러뜨려 버리고 싶다. 박살내 버리고 싶다. 단검은 목덜미를 스쳤다. 검이 빗나가자, 마법사는 다시 휘둘러 찌르 려 했다. 그리고 동시에 나직한 주문을 외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리스테-" 짧은 주문과 함께, 아킨 주변으로 바람이 스쳤다. 얼음 속에 박았다 꺼낸 칼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바람이었다. 손 한번 잘못 넣으면 단번에 살이 뜯겨져 나갈 거칠고 매정한 바람. 더 크고 뜨거운 분노가 일었다. 팔목이 뜨끈해지는 가 싶더니, 온 바 닥이 쩌릉 울릴 정도의 으르렁거림이 터져 나왔다. 크르렁--! 바닥이 울리고, 벽들이 떨렸다. 주변 건물들의 창에 금이 쩍쩍 가더 니 챙그랑 챙그랑 깨어졌다. 놀란 마법사가 움찔 뒤로 물러났다. 겁먹은 그 눈동자를 보자, 아킨 은 정말 그를 갈가리 찢어 삼켜 버리고 싶어졌다. 피비린내를 맡고 싶어지고, 뼈 부러지고 살점 튀는 소리를 듣고 싶어지고, 비명과 울부짖음을 듣고 싶어진다. 입 안에, 타인의 피가 흥건히 고이고 그대로 벌컥 벌컥 들이마시고 싶어진다. 마법사는 손을 뻗고는 허공에서 비틀었다. "파윈-" 그레코 대공이 다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더 이상 하지 못하고 있었 다. 불덩어리가 그 가슴에서 치솟아, 아킨의 정면으로 내리꽂혔다. 아킨은 주문을 외우지 않았다. 그저 이를 갈아붙이며 그 불꽃을 똑바 로 노려보았을 뿐이다. 그 불꽃이 갑자기 조인 듯 오그라들더니,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마법사는 다시 마법을 시전하려 했지만, 그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지며 당황과 두려움에 굳어버렸다. 그 손안 에는 불꽃은커녕 마나 한점 흐르고 있지 않았다. 더 이상 아무것도 쓸 수 없는 것이다. 마법사는 어쩔 수 없이 단검을 치켜세웠다. 그 러나 그 순간에, 마법사의 팔이 퍽 박살나며 그의 몸도 바닥에 메다 꽂혔다. 피가 사방에 후두둑 쏟아졌다. 뼈와 살점이 퍽퍽 떨어진다. 그리고 돌풍이라도 분 듯 벽이 무너지고, 바닥에 금이 갔다. 온 세상 이 으르렁대는 듯한 엄청난 소리와 함께, 먼지와 돌덩어리가 사방 에서 피어오르고 놀란 추격대의 비명이 터졌다. "아악!" 어린 소년이 비명을 터뜨렸다. "진정해요!" 제임이 그를 달랬다. 그러나 모두 그래도, 그 중심의 아킨은 심장이 불덩어리라도 되는 것 만 같았다. 도무지 주체할 수도 억 누를 수도 없었다. 피가 뜨겁게, 뜨겁게 솟구쳐 올랐다. 분노로 온 몸이 다 타버리는 것만 같다. 마법사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뒤로 주춤 주춤 물러났다. 엄청난 괴 물이라도 본 듯한 두려움이 그의 모든 것을 꽉 조이고 있었다. 죽여 버리고 싶었다.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그 분노를 토해내 버리고 싶었다. 저 마법사도, 예전에 그에게 칼을 겨누었던 마르실리오도, 그 뒤에서 차가운 눈동자를 빛내는 휘안토스도! 그 갈망이 점점 타는 듯이 아킨을 바짝 바짝 말려갔다. 그러나 그 때 두 팔이 그의 등을 감싸 안았다. 그 팔이 아킨의 가슴 을 꽉 조이고, 그러며 따뜻한 얼굴로 등에 기대왔다. "아키, 그만해- 제발! 지금 너....무섭단 말이야!" 갑자기 찬 얼음이 목덜미에 닿은 듯한 오싹함이 몸 안으로 확 퍼졌 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열기에 들떴던 머리도 식고, 흥분에 달 아오른 호흡도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선......배." "그래, 나야. 이제 됐으니 진정해....제발!" "저...." 아킨은 멍하니 중얼거리다가, 그러다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팔찌의 글자가 화륵 떠올랐다가는 사라졌다. 그러나 방금 전의 흥 분은 '기억'이 되어 분명하게 남아 있었고, 그것이 어떤 식으로 어떻 게 불러 일으켜졌는지도 분명하게 기억난다.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다. 겁먹은 베르티노는 제임의 품에 안겨 벌벌 떨고 있었고, 제임마저도 놀라서 아킨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닥은 지진이라도 나서 대지가 뒤틀린 듯 깨어져 있고, 건물의 벽들에도 위험스레 금이 가 있었다. 그리고 유일하게 단 하나, 방금 전에 그 에게 당한 마법사만은 아직도 공포에 퍼렇게 질려 부들부들 떨고 있 었다. 방금 전의 침착함도 눈 녹은 듯 사라지고, 남은 것은 눈물까 지 맺힌 채 이를 달달 떠는 초라한 남자뿐이다. "어떻게.....된 거죠?" "어떻게 된 것도 없어, 아키." 그리고 켈브리안은 아킨을 돌려 세우고는 그 두 뺨에 손을 얹었다. 땀에 흠뻑 젖어있자, 그녀는 맙소사- 한숨을 내 쉬고는 다시 아킨을 끌어안았다. "와 줘서 고마워." 그녀가 그렇게 해 주어도, 아킨의 심장은 아직 두근거리고 있었다. 이상한 두려움이 온 몸을 싸늘하게 식히고 있었다.........무엇이 어 떻게 된 것인지 모르면 좋으련만, 너무도 잘 알기에 아킨은 두려워지 기 시작했다. 그러나 부드러운 손이 아킨의 볼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허름한 옷으 로도 가릴 수 없는 그녀의 체취가 그제야 차가운 밤바람에 실려 온다....... 아킨은 그제야 그녀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눈물 가득한 연푸른 색 눈동자, 헝클어진 금발 머리카락, 그리고 슬픔과 기쁨을 띤 미소가 한꺼번에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아킨의 머리를 당겨 그 이마에 키스했다. 촉촉이 젖은 입술이었건만, 불덩어리보다 뜨거웠다. 그리고 그 입술을 떼고 아킨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이제는 기쁨과 반 가움에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와....줘서 고마워... 정말 너무 고마워...." "약속했잖아요. 선배의......." 그러나 아킨은 더 말하지 못했다. 켈브리안의 그를 끌어안으며 크게 흐느낌을 터뜨렸으니. 아킨 역시 그녀의 어깨를 안았다. 예전에는 이마가 어깨에 닿을 듯 했지만, 이제는 가슴에 닿았다. "앞장 서 줘야겠다." 아킨은 아직도 벌벌 떠는 마법사의 팔목을, 망토에서 찢어낸 천으로 꽉 조이며 말했다. 터진 팔목에서는 피가 콸콸 쏟아지고 있었고, 뼛조각도 흉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출혈 때문에 퍼렇게 질린 마법사 는 고개도 끄덕이지 못했다. 그러자 제임이 와서는 손목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가는 뗐다. 그러자 피가 멎고, 살점도 오그라들어 흉하 게 되었다. 통증도 멎는 듯 마법사의 흐리멍덩한 눈도 점점 초점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아킨은 마법사를 일으켜 세웠다. 마법사가 후들거리는 다리를 주체하 지 못하자, 제임이 그 등을 툭툭 치고는 말했다. "그 다리 제대로 안 피면 네놈 머리를 같은 방식으로 조져주겠다." 마법사의 허리가 확 펴졌지만, 이번에는 아예 뻣뻣해져 버렸다. 아킨 은 제임의 방식이 마음에 들기는 했지만, 비효율 적이기는 매 한가 지라는 부정적이라는 생각도 지울 수 없었다. 아킨은 여전히 겁에 질 린 마법사에게 물었다. "마법사, 암롯사에서 몇 명 정도 온 거지?" "이, 이백....명 정도입니다." "여기로 같이 온 인원은?" "오, 오 십 명 정도.......이, 입니다..." "그렇다면 방금 전에 있던 병사들 모두 암롯사 인이란 말인가?" 그러자, 제임이 뒤에서 말했다. "용병이오. 여기저기 돈 주고 긁어모아 왔을 테니, 아마 미련 없이 도 망쳐 저기 항만 노조나 용병 길드 쪽으로 숨어 버렸을 겁니다.... 실패했다는 건 알 테니까, 그리고 실패한 용병들은 부지런히 짐 챙겨 서 도망쳐야지. 돈은 안 나올 테고, 목숨은 위험해 질 테니." "어떻게 아시는 거죠, 그란셔스 씨?" "아아, 요전에 암롯사 쪽 용병 길드에서 사람을 구한다고 소식이 왔 었소. 나는 그저 그 쪽 전쟁 때문인가 했는데.... 아니었군." 아킨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휘안토스는 불만 지를 생각으로 용병들 이백 명 정도 붙여 서 보내 준 것 뿐이군요...... 선배, 괜찮을 것 같으니 궁으로 돌아 가요." 켈브리안은 주저앉아 있는 베르티노를 보살피고 있었다. "지금?" 아킨은 마법사의 등을 퍽 쳤다. "이 마법사만 휘안토스가 직접 보낸 겁니다. 아마도, 이 사람만 끌고 가면 궁을 장악하고 있는 용병들은 곧 우리 편이 되거나 뒤돌아 도 망칠 겁니다." 켈브리안은 마법사를 한번 쏘아보고는 제임과 이제 돌아온 첸을 번갈 아 돌아보며 말했다. "숙부는 여러분들에게 맡길게요. 잘 감시해주시면, 빠른 시일 내에 수도 경비대를 보내겠어요." 첸과 제임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둘 다 얼굴을 구기는 것이, 이 귀찮 고 위험한 일에서 빨리 해방되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보상은 제 최선을 다해 해 드리겠어요. 두 분께는 정말 무엇으로든 갚을 수 없는 큰 도움을 받았으니까요." "뭐, 귀족이라도 되게 해 줄 거요?" 켈브리안은 베르티노를 보았다. 베르티노가 고개를 끄덕이자, 켈브리 안은 그 두 사람에게 말했다. "어려운 처지의 왕을 돕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어요. 비록 하 룻밤이었지만, 그 위험을 무릅쓰고 도와주셨는데, 고작 귀족작위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거에요. 정말 고마웠어요..... 그리고 첸 씨, 제 가 돌아가자고 고집피울 때 돌아가게 해 주시고, 또 저를 도우러 같이 와 주시기까지 해서 정말 무엇으로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첸의 얼굴이 붉어졌다. "뭐, 제대로 도운 것도 없는 데." "아뇨, 그것만으로도 감사드려요. 그러니 왕이 아닌 공주로서 당신에 게 보답으로 무엇을 해 드려야 할지 말씀해 주세요." 첸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긴장한 듯 목소리를 낮추어 슬쩍 말 했다. "그 보답은.....저기, 하나로만 해 주면 되겠는 데요." "말씀하세요." 첸은 볼을 쿡쿡 찔러 보였다. "입술은 바라지도 않으니, 여기." 제임이 이 주책아, 라는 눈빛을 험악하게 보냈다. 그러나 첸은 '이 때 받아 보지 언제 받아 보겠냐!' 하는 눈빛으로 상큼하게 마주 봐 주 고는 켈브리안 쪽으로 볼을 내밀었다. 켈브리안은 그 볼에 키스해주 고 이마에도 키스해 주었다. "당신은 그 어떤 기사보다 용맹한 분이었어요." '당신'이라는 호칭에, 첸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고 입은 정말 귀에 척 걸릴 지경이었다. 그제야 제임도 '나도 부탁해 볼 걸.' 하는 표정이 되었다. 켈브리안은 아킨에게 다가갔다. 마법사의 목에 주박을 걸어 놓은 아 킨은, 그녀가 오자 슬쩍 건넸다. "내숭." 켈브리안은 그의 허리를 콱 꼬집었다. **************************************************************** 작가잡설: TV에 삐이 삐이 우는 새끼 곤냥이가 나왔어요. 아아, 쎄니 도 그러던 시절이 있었는데.... (물론 지금은 우량포동묘가 되어버린 자룡군도. -_-;;;) 예스에서 책 주문하려고 그 동안 모아놨던 카트를 보니........... 18만원이 넘어가더군요. -_-;; 이것 저것 좀 빼고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선이다! 하고 정리하고 나니 12만2천원............. ....................젠장;;; 그래도 서점 가서 사는 것 보다는 나아요. 서점 가면 정말 충동구매의 절정! 절대 생각한 것만 산다, 산다, 산다, 하고 갔다가 나중에 나올 때 보면 두권은 다섯권이 되고 다섯권은 열권이 되고;; 으윽! 어제도 서점 구경갔다가 저도 모르게 책을 집어 들고 계산 대로 향하려는 저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_-;;; 그것도 자그만치 만 오천원 짜리를!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8장 *************************************************************** [겨울성의 열쇠] 제58장 왕의 새벽 제272편 왕의 새벽#1 **************************************************************** 켈브리안이 기억하는 가장 처참했던 궁은 엔리케 4세가 승하하고 어 머니와 베르티노가 감금된 직후, 간신히 돌아왔을 때의 궁이었다. 그러나 켈브리안은 그래도 그 때가 지금보다 몇 배는 더 나았다고 생 각하고 있었다. 기억은 언제나 참담한 현실의 절망과 함께 더 빛나게 보이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당시의 궁은 소중한 사람은 사라졌지 만 모습만은 그대로였다. 손에 힘을 주고 어깨를 피기만 하면, 어떻 게든 견딜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조금만 더 노력하면 예전 모습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켈브리안은 아킨의 팔에 기대고 있지 않았다면, 옆에 베르티노만 없었다면, 그대로 쓰러져버릴 것만 같았다.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그래도 이만한 것이 정말 다행이야.' 하고 말했건만, 가슴이 쓰려오고 눈물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왕실 호위대 대 장이 그런 공주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자신의 무능을 자책해도, 켈 브리안에게는 아무런 위로도 되지 않았다. 그의 책임이 아니란 것은, 켈브리안 자신이 가장 잘 알았고 최선을 다한 그에게 화풀이가 아 닌 포상을 내려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으니. 켈브리안과 베르티노가 급히 탈출한 직후, 궁은 당연하게도 전쟁터가 되어 버렸다. 불이 켜지고, 연회장 안의 사람들이 발견한 것은 검은 가면들 아래에 숨어 있던 침입자들이자 살인자들이었다. 브리올테는 난도질 되어 쓰러져 있었고, 근 2년의 모든 원한을 담아 그녀를 죽인 남자는 피 묻은 검을 든 채 외쳤다. 궁을 장악하라, 공주와 왕을 찾아--! 그리고 그대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미친 듯이 탈출하기 위 해 밖으로 달리고, 달려온 호위기사들은 그들에 휩쓸려 주체할 수 없게 되었다. 호위대 대장은 대비가 살해된 것을 발견하자, 곧바로 그의 수하들을 불러 모아 공주와 왕을 보호하기 위해 궁을 뒤졌다. 그 와중에 그레코 공작이 데리고 온 용병들은 중앙 본궁을 장악 해 버렸다. 호위대는 곧바로 그 본궁을 포위하고, 이틀간 궁을 사이 에 놓은 전쟁이 일어났다. 궁이 엉망이 되어버린 것은 당연한 일이 었다. 정원은 곰이 날뛴 듯 황야가 되어 버렸고, 깨끗하게 빛나든 바닥과 기둥은 흙과 피로 얼룩졌다. 일이 순순히 풀리지 않자, 대 비의 시신은 혈압이 오른 그레코 대공의 명에 의해 모욕당했다. 그 머리는 궁 밖으로 내던져 지고, 몸은 짐승 우리에 내동댕이쳐졌다. 아마도 그는 그가 돌아오기만 한다면 모두가 환영할 거라 생각했 을 지도 모른다. 대비의 독재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그가 나타나면 모두 두 팔을 위로 번쩍 쳐들며 만세를 부를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모한 침입과 섣부른 살인의 결과는 별로 달가운 것이 아니 었다. 예전에 그랬듯, 이번에도 그는 공주와 왕을 놓쳤고 그들이 없는 이상 그레코 공을 믿고 따르고 힘을 실어줄 이는 그 누구도 없었다. 그래서 그레코 대공은 다시 모험을 감행하기로 했다. 궁을 지킬 병사 들을 남겨 놓고, 가장 날렵한 이들과 마법사를 골라 궁을 탈출하여 왕과 공주를 찾기로 한 것이다. 마법사가 끼어 있는 이상, 그 반대 인 호위대를 상대로 궁을 빠져나가는 건 의외로 쉬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레코 대공은 더 이상 반격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마지막 기회는 사라졌고, 그는 완벽하게 실패했다. 이제 그레코 대공과 브 리올테 대비라는 옛 그림자가 사라진 궁은, 그 만큼의 희생을 치르 고 난도질 되고 피폐해 진 채 남게 되었다. "죄송합니다, 공주님." 켈브리안은 고개를 젓고는 호위대 대장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수고해 주셨어요. 그리고 모든 기사분들도, 포기하지 않고 저와 베르 티노를 믿고 기다려 주신데 감사드립니다......." 대장은 그녀의 손등에 키스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런 그에게, 켈브 리안은 힘없이 말했다. "어머님의 시신은 수습하셨나요?" "네." "뵙고 싶군요......." 켈브리안은 그녀의 시신이 어떤 상태인지 뻔히 알고 있었지만, 피하 고 싶지는 않았다. 호위대 대장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켈브리안은 다시 고개를 저어야 했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그래도 뵈어야 해요." "알겠습니다......하지만 전하,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셔야 합니다." "각오하고 있어요." 켈브리안은 아킨의 손을 잡고는, 호위대 대장이 안내하는 곳으로 향 했다. 베르티노 역시,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그 둘과 함께 했다. 왕실의 사원으로 향하는 내내, 여기저기 피얼룩과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켈브리안은 고개를 돌리며 아킨의 팔에 기댔다. 그런 공주의 모습에, 호위대 대장은 묘한 눈길로 아킨을 바라보았다. 경계와 기대, 믿음과 불신이 뒤섞인 복잡한 눈빛이었다. 어린 왕 베르티노가 그런 기사와 아킨을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마침내 사원에 도착하자, 대장은 횃불을 찾으려 했다. 아킨이 빛을 띄워주자, 대장은 잠깐 움찔했지만 곧 말없이 앞장섰다. 그리고 그는 사원 옆의 철문을 열고 지하의 안치소로 내려갔다. 좁고 긴 계단 을 지나, 라레스나와 그녀의 종들이 새겨지고 송가들이 적힌 벽을 지나고 큰 기둥을 지나자 둥근 홀이 나왔다. 그리고 그 곳에는 돌 로 된 침대들이 여러 개 놓여 있고, 그 중앙에 있는 침대에 흰 천 에 덮인 시신이 누워 있었다. 언제 나타났는지 모르게, 안치소의 구멍 같은 통로 안에서 검은 옷을 입은 라레스나의 사제가 나왔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신의 머리맡에 섰고, 켈브리안은 베르티노를 데리고 그 앞에 섰다. 사제가 시신의 얼굴을 덮은 천을 치웠다. 순간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에, 켈브리안은 신음을 삼켰다. 베르티노 가 새파랗게 질리며 휘청 흔들렸다. 아킨이 그 소년을 부축했고, 아킨에게도 그 시신이 보였다. 맙소사- 아킨은 눈을 감아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망연히 어머니의 시신을 바 라보는 켈브리안의 눈빛에 도저히 그리 할 수 없었다. 켈브리안은 붉은 칼자국이 선명하게 나고 뇌수가 비어져 나온 이마에 키스했다. 라레스나의 축언을 외우고, 잘 가세요- 나직이 속삭이고는 다시 흰 천을 들어 대비의 이마를 덮었다. 베르티노가 부들부들 떨며 울 음을 터뜨렸다. 켈브리안은 그 동생의 이마를 쓸어주고는, 입 맞추 고 꼭 끌어안아 주었다. "사랑스런 베노, 이제 가자꾸나......." "엄마가....엄마가....." 이제 베르티노는 그저 겁에 잘린 아이일 뿐이었다. 켈브리안은 그 동 생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 "이제 끝났어, 베노... 이제......올라가야 지. 올라가서, 어머니의 장례 를 치르고.......그리고 이제는 강해져야해. 이젠 아무도 베노의 일을 대신해 주지 않을 테니까." 베르티노는 눈을 문질러 눈물을 닦아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켈브리 안은 팔을 풀고는 그런 베르티노의 손을 잡아끌었다. "아키, 부탁할 것이 있는데.......들어 주겠어?" "네." "네가 얼마나 머물러 줄지는 모르겠어. 하지만.....적어도 오늘 밤만은 내 곁에 있어줘." 아킨은 그녀가 얼마나 지쳐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 활달하고 쾌활하 던, 빛나는 황금 같던 소녀는 이제 갑자기 나이를 먹어 버렸다. 이제 고작 스물 하나였건만, 그녀는 예전 이레크트라가 보이던 그 외롭 게 지쳐가는 눈빛으로 아킨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킨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잠깐.....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요?" "단 둘이?" "네." 켈브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직 울먹이는 베르티노를 시녀 에게 맡기고는 아킨과 함께 사원이 본당으로 올라갔다. 호위는 돌 아가고, 사제는 다시 검은 통로로 사라졌다. 시녀는 베르티노를 안고 는 본궁으로 향했다. 적막한 사원의 본당에는 다행히 수십 개의 촛불이 켜져 있었다. 누군 가가 가고, 가버린 이를 전송하는 장례식이 거행되면 사원에는 이런 촛불이 켜진다. 촛불이 일렁대며 곳곳에 빛과 그림자를 드리웠다. "네 형 대신 사과하는 거라면.....하지 마. 어머님의 오판에, 내 무능이 겹쳐서 일어난 최악의 결과니까...... 네 형은 암롯사의 왕으로서 자기 나라에 유리하도록 할 일을 한 것뿐이야." "그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형의 의도를 아니까, 그래서 이렇게 말 씀드리려는 거예요." 켈브리안은 돌 의자의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차가운 그 돌에 볼을 댄 채, 켈브리안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생각을 말 해 줄래? 나는......지금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어. 미안 -" "방금 전에 말씀 드렸습니다.... 형은 그저 이곳에 불을 지른 것뿐이 라고. 그리고 누군가가 달려오기만 기다리는 것뿐이에요." 켈브리안의 눈이 커졌다. 그제야 그녀도 그 뜻을 알아챈 것이다. "설마....델 카타롯사?" 아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형은 그레코 공작이 오래 오래 궁을 장악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을 겁니다.... 그저 궁을 위기에 빠뜨리고, 엉망인 로메르드를 더 엉망 으로 만드는 것으로 충분할 거라 생각한 거죠. 그리고 그레코는.... 조 금 일찍 끌려 내려오기는 했지만, 충분히 엉망으로 만들기는 했어요." "그리고.... 델 카타롯사는 나를 도와주기 위해 군대를 보내겠지." "네." 그러나 켈브리안은 쓰게 웃었다. "그리고 나를 여왕으로 내세우던가. 베르티노를 허수아비 왕으로 내 세우던가 해서, 로메르드를 델 카타롯사의 수중에 넣겠지. 그는 나와 약혼하려 했고, 약혼녀를 위해 군대를 파견하는 것은 참으로 합 당하고 당연한 일이니까...... 그리고 그 나라가 힘을 되찾을 때까지 도와주는 것 역시 도리고...." 켈브리안은 아킨을 똑바로 보았다. 눈동자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암롯가가 대체 뭐가 이익인 거지? 오히려 앞뒤로 적이 생 기는 것뿐인데!" "로메르드 군은 형편없어요." 켈브리아의 얼굴에 그늘이 번졌다. "칼리토는 아마도 그나마 적은 군사로도 로메르드를 장악할 수 있는 사람을 보낼 겁니다. 원한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좋겠지요.... 그러면 생각되는 사람은 단 하나 뿐이지요." "설마 쉐플런?" 아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토 대공왕이...... 형이 생각하는 것만큼만 영리하다면, 분명 쉐플 런을 보낼 겁니다. 군은 아마도 1-2천정도. 절대 그 선을 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암롯사는?" "쉐플런이 없는 대공왕의 군대를 상대하겠지요." "델 카타롯사의 칼리토가 휘안토스 뜻대로 움직여 줄까?" "모릅니다. 하지만.... 예전에 만나본 그라면, 충분히 그렇게 하고도 남을 위인입니다. 그는 암롯사를 증오하고, 그 증오에는 자존심과 원한이 얽혀 있어요..... 그러니, 쉐플런 없이 휘안토스와 맞서는 것 을 거부할 리 없습니다." "실컷 이용하는 구나." "그래도 로메르드는 지킬 수 있을 겁니다." 켈브리안의 눈빛에 약간 생기가 돌았다. "쉐플런은 어쨌든 선배 편이 되어줄 테니까요." "난 그에게 빚진 게 너무 많아." "갚기 위해서는.... 우선 선배가 제대로 서야 하잖아요. 그 다음에 어 떻게 해 줄까 생각하면 될 겁니다...." "너도 도와주겠니?" 아킨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그제야 켈브리안의 얼굴도 편해졌다. "너한테도 빚진 게 너무 많아. 게다가.......나 때문에 그렇게 고생하게 했고." "제가 약했던 겁니다...... 그리고 원망하지는 않아요. 그 덕에 많은 사 람들을 만났으니까요." "어떤 일인 지 궁금하네..... 하지만 아키, 이번에는.....오래 오래 같이 있어줘. 나 혼자서는 너무 힘들 것 같아." 어차피 베르티노는 어리다. 그리고 대비가 했던 일을, 이제는 켈브리 안이 몇 년간 해야 할 것이다. 아킨도 이미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아킨은 말없이 그녀의 지쳐 늘어진 손을 꼭 잡았다 놓았다. 그리 고 그것만으로, 아킨이 켈브리안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말하기에 충분했다. "이제는 행복하셔야 해요." "왜 내가 행복하기를 그렇게 바라는 거지?" "그래야 저도 좋으니까요." "뭐, 남자로서 바라는 건 없니?" 정말 짓궂은 말이라 생각하며 아킨은 웃음을 터뜨렸다. "기대도 안 해요. 선배는 예전부터 정말 굉장한 사람이라서, 저 정도 는 눈에도 안 찰 것 같았거든요." "자기비하야." "아뇨, 정말이에요. 선배는....정말 굉장히 아름답고, 쾌활하고, 자신감 넘치고...... 정말 매력적이죠. 누구라도 선배를 사랑할 거에요.... 그 리고 그런 선배니까, 저 같은 꼬맹이는 남자 축에 들어가지도 못할 테죠. 언젠가는 정말 굉장한 남자가 나타나 선배와 결혼할 것 같았어요. 그리고.....웃지 마세요. 선배가 졸업하고 떠난 다음에, 선배 가 전혀 모르는 남자와 결혼할 거라고 생각 하니 괜히 속상해져서 이불 뒤집어쓰고 운적도 있어요. 늦게 태어난 게 그렇게 억울한 적도 없었 으니까요." 켈브리안은 정말 이래서는 안 된다고는 생각했지만, 그 꼴을 생각하니 아킨의 등을 퍽퍽 치며 웃어젖히고 싶었다. 아킨이 얼굴을 붉혔다. 괜히 말했다 싶기도 하고, 이래서 또 꼬맹이 취급 받을 거라 생각하기 도 하는 것이다. 켈브리안이 말했다. "기사 리노와 물의 요정 이야기 아니?" "....네? 아, 대강 알아요." 갑자기 이상한 이야기가 불쑥 나오자, 아킨은 약간 긴장했다. "그 때 리노는 물의 요정의 심장을 꺼내면 그녀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 지.... 고민해야 했어. 그에게 우정과 믿음을 베풀어 주는 물의 요정이 지만, 그 심장을 꺼내면 뜨거운 마음을 얻어 그를 사랑하게 되지. 하지만 딱 한 순간, 그 한순간을 놓치면 물요정은 영원히 남이 되어 버리 지.... 예전보다 못한 관계가 되어 버리는 거야... 어렸을 때, 그 이야기 를 아버지가 해 주셨을 때 정말 가슴 졸였었어. 과연 리노는 그저 그녀를 옆에서 영원히 지켜보는 것을 택할까, 아니면 모험을 감행할까. 그리고 모험을 감행한다면, 그는 사랑을 얻을까 완전히 잃어버릴까." "행복하게 끝나지 않나요?" "듣는 사람이 그걸 원하니까.... 하지만 나중에 알게 된 건데, 북쪽에서 는 정 반대로 이야기가 전해지더라고. 리노는 실패하고, 요정은 영원의 바 다로 흘러가 버리지...... 하여간, 그곳 사람들은 정말 음침한데다가 심술 꾼들이라니까.... 하지만, 나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해. 그냥 콱 말해버릴까, 아니면 그냥 이 상태....... 건너오지도 건너가지도 않은 채 멀찌감치 쳐다보며 웃을 수 있는 게 나을까.... 너라면 어쩌겠니?" "저는 말하겠어요....... 정작 그 상황이 되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지금의 저는 이렇게 말씀 드릴 수밖에 없군요. 말 하겠어요." "영영 헤어지게 될 지도 모르는데?" "적어도, 아무것도 모르는 그 사람이 내 앞에서 웃으며 사랑하는 사람을 소개하는 일은 없을 테죠." "정말?" "네." "........너를 사랑해." ******************************************************************** 작가잡설: 후우- 배알이.................. 배알이!!!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8장 ************************************************************* [겨울성의 열쇠] 제273편 왕의 새벽#2 *************************************************************** 칼리토 대공왕으로부터 처음 그 명을 들었을 때, 슈마허는 정말 속으 로 '기뻐했다.' 만약 그런 명을 내리지 않았다면 그냥 짐 싸들고 나갈 용의도 있었기에, 왕이 직접 그런 명을 내리니 항의는커녕 당장에 출발하겠다고 허리까지 숙이며 감사했다. 빠르고 신속하게, 그러 나 암롯사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해야 했기에 슈마허는 명령을 받는 즉시 함대를 정비하고 천 명 정도의 군대를 받아 카티온의 외항 을 출발했다. "맙소사, 어떻게 그렇게 중요한 결정을 나 몰래 할 수 있는 거죠?" 그러나 칼라하스 공주는, 악튤런으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놀 라고 실망스럽고 서운하고, 심지어 배반감까지 느꼈다. 그녀가 몸이 안 좋아져서 잠시 요양을 위해 프론사 호수로 갔던 사이, 오빠인 왕은 로메르드의 대사로부터 급보가 전해지자마자 잠시 생각도 하 지 않고 슈마허를 보내버린 것이다. "공주도 같은 생각을 할 거라, 폐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악튤런은 그렇게 말하곤, 파랗게 질려가는 칼라하스의 얼굴을 살폈 다. "쉐플런은 동의하던가요?"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곧장 출발했습니다." "역시 그렇겠지요......당연해요. 하지만 이렇게 빨리 출발하다니- 좀 더 생각해 볼 수도 있었잖아요...." 그리고 그녀의 손이 무언가를 찾듯이 움직였다. 악튤런은 손을 내밀 려다가, 마하의 손이 다가와 그런 그녀의 손을 잡자 슬쩍 안으로 당겨야 했다. 칼라하스는 그제야 진정이 된 듯 마하의 손을 더 꽉 잡았다. "아시다시피 로메르드의 일은 한시를 다투는 일이었습니다. 대비가 살해당하고, 왕과 공주가 탈출했습니다.... 그들을 도와야 했습니다. 어쨌든 공주는 폐하와의 혼담이 진행되고 있고, 그들과의 동맹은 중요한 일입니다...." "알아요. 하지만....... 바로 어제 공주와 왕이 궁으로 귀환했다는 소식 이 전해졌잖아요. 슈마허가 갈 필요가 없어요..... 돌아와야 해요. 아직 돌아오기에 늦은 것도 아니니까....." "폐하께서는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 지금 암롯사에서 치고 올라온다면요!" "사이러스 대공왕은 우리 손에 있습니다." "암롯사가 그런 것들 따지는 위인들인가요? 그리고 사이러스 대공왕 이 자기 때문에 아들이 암롯사에 처박혀 있는 것을 환영할 위인인 가요? 아뇨, 절대 아니에요." "폐하는 그렇게 약하신 분이 아닙니다. 암롯사에서 당장에 십만이 올 라온다 할지라도 막아낼 수 있습니다." 칼라하스는 고개를 저었다. 칼리토 대공왕을 의심하는 것도 과소평가하는 것도 아니지만, 현실과 염원은 어느 정도 차이가 나는 법이다. 칼라하스는 슈마허 쉐플런 없이도 칼리토가 암롯사를 이길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지난번에 직접 그와 함께 나간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건 알고 있었고, 직접 보고 듣고 올 수 없는 그녀지만 보고만으로도 칼리토가 얼마나 슈마 허에게 의지하고 있는 지 짐작될 수 있었다. "쉐플런은.... 그냥 용병대장이 아니에요. 아시잖아요..... 소년시절부터 오라버님은 그에게 너무 많이 의지하고 있고, 그를 너무 믿고 있었 어요......" "예전에는 그러셨을 테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그 때는 어리셔서 그 분의 도움을 전적으로 받아야 했던 것뿐이고, 지금은- 어쨌든 지 금은 강한 분이에요." 칼라하스는 지금도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관두었다. 벌써 일이 끝난 지금,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칼리토 대공왕을 믿는 것뿐이니까.... 게 다가 사이러스 대공왕이 없는 암롯사를 상대로이니, 괜찮을 지도 모른다. "제가 폐하 곁에 있습니다." 그렇게 부드럽게 말하는 악튤런에게, 칼라하스는 미소를 보였다. 얼 마나 편안해 보였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악튤런의 굳었던 얼굴은 풀어졌다. "혼자 있게 해 주시겠어요?" 그리고 그 혼자, 에는 마하만이 예외가 된다는 것을 아는 악튤런의 얼굴은 굳어버렸다. 그녀가 마하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려 하니 비켜달라는 말이고, 악튤런은 그 상황을 정말 싫어했다. 언제나 자 신보다 마하가 신뢰받는 것을, 늘 못마땅하게 생각해 왔으니 말이다. "부탁드리겠어요..... 지금은 혼자 있고 싶어요." 악튤런은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가 멀 리 가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아는 칼라하스는, 이야기가 끝나는 대로 그와 다시 만나서 위로하고 식사라도 같이 하는 게 좋을 거라 생 각했다. 좋은 사람이고, 고마운 사람이며, 그녀의 편이란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조금도 서운하게 하고 싶지 않다..... "너는 알고 있었어?" "제가 반대할 거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기에, 공주님과 제게 전해지 는 모든 소식을 차단했던 겁니다." "모르고 있었구나." "예상조차 못하고 있었습니다.... 암롯사에서 꽤나 빨리 움직였군요." "휘안토스가 원하는 건 무엇일까?" "쉐플런의 부재. 로메르드의 혼란, 그리고 폐하의 지나친 자신감- 이 정도 일겁니다. 암롯사에서 치고 올라오던가, 폐하께서 먼저 내려 가시던가... 둘 중의 하나일 겁니다." "아직 악튤런이 있어. 그는 결코 오라버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 고......" "브리올테 대비는 탈로스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살해당했습니다. 때 에 따라서는, 세상을 절반으로 쪼갤 마법사 보다는 바로 곁의 칼이 더 빠르고 확실한 법입니다." "악튤런을 믿지 못하는 거니?" "그건 절대 아닙니다. 그는 정말 강한 마법사이며, 폐하에게 바치는 충성과 사랑은 진심입니다. 그를 믿지 못한다면, 제 오른팔을 믿지 못한다는 말이나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만약 그가 움직일 수 없다면, 아무리 그가 폐하를 지키고자 하려해 도 꼼짝 못하는 상황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가까운 칼이 폐하를 향하는 상황입니다-" ".......일단은 믿는 수밖에 없지 않니?" "그것이 불안합니다.... 폐하께서는 공주님께서 반대하실 거라고 뻔히 알면서도 이 일을 감행했고, 알게 되신 지금 극구 반대하신다 할지 라도 받아들이지 않으실 겁니다. 하지만..... 저는 이 일이 암롯사 쪽에서 의도한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니, 분명 의 도한 일일 겁니다." "악튤런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도?" "바보가 아닌 이상 당연히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휘안토스 왕자 에게는, 아직 움직이지 않지만 분명 움직일 아군이 있습니다." "베넬리아-" "맞습니다. 그들은 암롯사 만큼이나 가깝게 로메르드를 두고 있습니 다. 그 로메르드에, 폐하의 야심이 뻔히 보이는 쉐플런이 다가온다면 그들은 당연하게도 암롯사를 지원할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군 대 자체를 파견하지 않고도 델 카타롯사를 압박할 수단이 있습니다........." "그들의 마스터." "그리고 안타깝게도, 악튤런 파노제 님은 결코 그녀를 이길 수 없습 니다." 칼라하스는 다시 한숨을 내 쉬었다. 그런 그녀의 어깨에 마하가 손을 얹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아예 승산이 없는 건 아닙니다. 단 하나의 변수로 도 전쟁의 흐름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비록 그가 베넬리아 최고 마스터의 지원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가 우리의 폐하보다 뛰어나다 할지라도....." "뭐지...?" "슈마허 쉐플런은 떠났지만, 세르네긴 포틀러스는 폐하 곁에 남아 있 습니다..... 그리고 그는 반드시 휘안토스를 죽일 겁니다." 그런데 마하는 문득 떠오르는 불길한 생각에, 갑자기 불안해졌다. 과 연 휘안토스가 그에 대한 대책을 세워 놓지 않았을까? 그녀가 아는 휘안토스는 절대 실수하지도, 사소한 변수하나도 넘겨버 리지 않는 소년이었다. **************************************************************** 작가잡설: 밀린 가스비랑 전기세 내고 나니 12만 3천원... ....................책은 당분간 바이바이.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8장 **************************************************************** [겨울성의 열쇠] 제274편 왕의 새벽#3 **************************************************************** 휘안토스는 햇살에 반지를 비추어 보았다. 얇은 금줄에 걸린 반지가 흔들릴 때마다 그 위로 햇빛이 쉴 새 없이 부서져 반짝이고, 사파 이어 속으로도 빨려 들어가며 투명한 속살을 깨끗하게 비추어준다. 휘안토스는 목걸이를 당겨 목에 걸었다. 차가운 반지는 목을 스치 고 가슴을 따라 스륵 내려갔다. 이제 가 볼 시간이 되었다...... 그리 생각하며, 휘안토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자마자 시종과 호위 마르실리오가 따라붙었지만, 휘 안토스는 마르실리오마저 물렸다. "하지만 위험합니다." "괜찮아. 그 정도 위험도 못 넘길 정도의 운이라면, 앞으로의 운도 볼 장 다 본 거겠지." "운은 함부로 시험하시는 게 아닙니다." "그럼 따라와." 휘안토스는 그리 너그러이 말하고는 앞장섰다. 햇살은 성 곳곳을 비추고 있었다. 이제 자그마하게 새싹들이 난 가지 들 사이로, 연분홍색 꽃봉오리가 비집고 나온 나무들 사이로, 작게 흐르는 운하와 힘차게 솟아오르는 분수대 위로도, 환해지고 따스해 진 햇살은 온화한 어머니처럼 그 모든 것을 감싸며 빛과 따스함을 뿌리고 있었다. 휘안토스는 곧 성의 동쪽 회랑에 도착했다. 누군가가 그 회랑의 복도 에 서 있다가 휘안토스가 오자 안으로 사라졌다. 그녀를 감시하는 시녀로부터 들은 대로였다- 아침마다 늘 그곳으로 가더군요.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어요.... 별 달리 하는 것도 없는데, 그냥 여기 저기 돌아다니다가 돌아와서는 방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죠. 휘안토스는 성 안으로 들어가, 복도를 뛰듯이 걷고 계단을 성큼 성큼 올라갔다. 그리고 성의 탑에 있는, 그녀가 머무는 방문을 열어젖혔다. 둥근 방 안은 컴컴했다. 그 탑의 방은 가을방이라 불리는, 성 안에서 가장 어두운 곳 중 하나였다. 햇빛이라고 해야 저녁에 조금 드는 정도였는데, 그나마도 두터운 커튼으로 창문을 덮어 아예 빛이 들 어오지 않게 해 두었다. 휘안토스는 문을 닫았다. 닫히는 문 너머로 마르실리오가 걱정 어린 눈빛을 보내긴 했지만, 그가 상관할 영역 을 넘어갔다 판단한 듯 들어오지 않았다. 방안은 정말 컴컴해져 버렸다. 은실로 수놓은 침대의 천개에서 흐릿한 빛이 스며 나오긴 했지만 주 변을 밝히기에는 부족했다. 게다가 죽은 듯 조용하기만 하다. 갑자기 램프에 빛이 확 켜졌다. 너무 눈부셔서 휘안토스는 잠시 눈을 감 고 고개를 돌려야 했다. "지금 걷어차면 꽤 볼만 하겠군요." 그 싸늘한 말에, 휘안토스는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이 시간엔 대체 뭐 때문에 온 거죠?" "네가 도망칠 궁리하고 있다는 걸 알고 온 거다." 유제니아가 턱을 꾹 물고는 그런 휘안토스를 바라보았다. 기대했던 표정은 아니지만, 칼로 쳐낸 듯 선명한 빛과 그림자 속에서 그 표 정은 나무 조각처럼 딱딱해 보였다. "나중에는 도망치든 말든 상관없지만, 아직은 안 돼. 너는 '지금' 이곳 에 있어야 해." "....." "잠시 성을 비울 예정이다. 그 동안 네 감시는 잘 하라고 명해 둘 테 고, 뭐라 어떻게 말하든 탑 밖으로 내보내지도 말라고 할 생각이다." "어디로 가는 건데요?" "나를 증명하기 위해 가야 한다. 죽어서 올 지도 모르고, 살아서 올 지도 모르지. 하지만....어쨌건 나는 살기 위해, 이기기 위해 가고, 그 모든 목적을 달성하고 돌아오기를 바란다....." "전쟁 때문에 가는 것이겠군요." 그렇게 툭 쏘아붙이고는 유제니아는 뒤로 물러났다. 그리 밝지 않은 램프였다. 물러나자, 그녀의 얼굴에서 보이는 부분이라고는 긴 머 리카락과 그 사이에서 빛나는 푸른 눈뿐이었다. 기묘한 분위기였다. 이제 고작 열여섯- 아니 열일곱이 되었을 지도 모르는- 소녀일 뿐인데 분위기만은 '여인'의 것이다. "잘 다녀와요. 기다리고 있어 줄 리는 없지만." 그리고 유제니아는 램프를 훅 불어 껐다. 의도한 거다- 휘안토스는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빛을 환하게 밝혀서 꼼짝 못 하게 하고, 이번에는 갑자기 불이 확 꺼지는 바람에 까만 어둠 속 에 갇혀 버렸다. "네 오빠- 아니, 네 약혼자와 만나게 될 거다." 흠칫 놀라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멀리 가려고 하는 것이 다...... 하지만 그 소리에 이제 휘안토스는 그녀가 어디에 있는 지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나하고는 상관없어요." 이건 또 의외다. 유제니아의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또 났다. 이건 옷 자락을 꽉 움켜쥐어서 나는 소리다. "내가 괴로워하든 슬퍼하든, 당신하고는 아무 상관없잖아요. 물건처럼 가지고 놀고 부수고..... 그리고 가축 사육하든 입히고 먹이고. 겨우 그것밖에 안 되는데, 대체 왜 이렇게 찾아와서 구태여 더 괴롭히 려 하는 거죠? 그러니 더 이상 신경 쓰지도 말고, 확인하러 오지도 말아요! 적어도, 당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괴로울 테니 까! 그러니 뭘 하든 당신 마음대로 해요. 세냐와 싸워요, 죽이든 살리든 죽던 살아서 돌아오던 마음대로 해요! 내가 뭘 하든, 뭐라 말 하든 아무 상관도 안할 테니까--!" 휘안토스는 정말 언짢아졌다. 속이 확확 타는 것만 같다. 결국, 휘안 토스는 달려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몸이 흠칫 떨리더니, 숨소리가 쌕쌕 거칠어졌다. 몸을 뒤틀어 금방 빠져나갔지만, 숨소리가 너무 거칠어져서 이제 어둠 속에 숨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져 버렸 다. 휘안토스는 다시 그녀를 잡아끌었다. 어둠 속에서 흑- 신음 이 터진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유제니아의 떨림이 멈추었다. "네 생각 같은 건 아무 상관도 없을 테지." 숨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렇게 어둠 속으로 빨 려 들어가듯 숨어들고 있었다. "네가 나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증오하든, 사랑하든 간에 아무 상관 없다. 예전에도 그랬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아마도 꽤나 오랫 동안 네 마음 같은 건 아무 상관없을 거야. 그렇게 네 선택과는 상 관없이, 지금 이 성에 있는 너는 내 것이다. 그리고 너와 나 사이에서 는, 내가 원하니까, 내가 안고 싶으니까, 단지 그것만이 중요할 뿐 그 안에 네 의지와 네 마음이 끼어들어갈 여지는 없어." "......" "분명히 알아둬. 이 새장 안에서 어떻게 파닥대고 울어대든 상관없지 만, 새장의 주인은 나다. 잡힌 네 날개를 꺾든 다리를 부러뜨리든, 죽이든, 평생 내 여자로 삼든 내 마음이다...... 네 반항도, 네 분노도, 네 증오도, 그 앞에서는 아무 소용없는 거야." 지금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방안은 너무 어둡고, 숨죽인 그녀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고, 그저 어둠 속에서 잠깐 반 짝이는 눈동자가 있기는 했으나 이내 사라진다. 한숨소리가 귓가에 서 들려왔다. 컴컴해서 그녀의 눈빛도, 눈물도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무엇을 해도 이 어둠 속에서는 보이지 않으니 조금이라도 덜 불쾌할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잠시 뒤 휘안토스는 방을 나갔다. 밝은 햇살 쏟아지는 복도로 나가, 기다리고 있던 마르실리오를 돌아보고는 손짓했다. "가자." "모두 기다리고 있습니다." "알아. 그러니 어서 가자." 유제니아는 어둠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 고, 그렇다고 그가 없어졌다고 안도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갈피를 잡을 수 없기에, 그래서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기에, 그냥 그러고 있는 것뿐이다. 그래,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니, 해서는 안 된다. 성급하게 움직이다가 간신히 잡은 기회를 다 태워먹어 버리는 실수를 해서는 안돼..... 방안을 꼭꼭 덮어놓은 커튼 틈으로 노란 햇살이 스며들어왔다. 마치 달아오르는 듯 커튼 끝자락이 샛노랗게 빛나고 있었다. 저녁이다. 이 방에 햇살이 조금이나마 드는 시각- 지쳐서 잠이 온다. 그러나 침대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곳에 누우면 또 악몽을 꾸어버릴 것 만 같다..... 언제나 생각나는 건 환한 방, 불빛이 눈이 아프도록 쏟 아지는 그날- 그리고 지난 폭풍우 치는 날부터 계속된 악몽. 죽을 때까지 미워할 거야, 유제니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러나 그 래봤자 아무 소용도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컴 컴한 밤, 그가 찾아와 소리 없이 덮칠 때 수 십 번씩 저주를 퍼부어 대도 그 순간만큼은 아무 소용없었다. 그의 말이 맞다. 어떤 감정을 품든, 그는 아무 상관도 하지 않고 상관할 필요도 없다. 그가 유제니아에게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고, 원하는 것은 얼 마든지 힘으로 빼앗을 수 있는 것이다. 어느새 커튼에서 빛살이 미끄러지듯 사라진다. 온화해진 봄의 밤을 오고가는 새 소리가 들려오고, 그 소리에 귀 기울이며 유제니아는 까무룩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악몽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좋은 일이 생길 거라 속삭여주는 희망 찬 꿈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컴컴한 곳에 앉아 있었고,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어느 새 주변이 찬찬히 밝아왔다. 새벽이 오듯, 어슴푸레하게 빛이 비껴들어오며 별 없는 하늘의 어둠이 서서히 바래어져갔다. 스산한 바람에 나뭇잎들이 하늘하늘 움직였다. 어디선가 물줄기 소리도 들려온다. 새가 푸드덕 날아다니며 재재 울어대는 소리도 들려온다. 세상이 갑자기 살아나가는 것 같았다. 눈을 뜨고 기지개를 피며 부산스럽고 유쾌하게 움직이며, 쾌활하게 떠들어 댈 것만 같다. 그런데 유제니아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서 있었다. 이런 아침이면 늘 제일 먼저 깨어나 가족을 깨우고, 어머니가 일어나 면 아침준비를 거들었다. 그 다음에 세르네긴이 일어나 장작을 보 고는, 언제나 듬뿍 쟁여 놓는 주제에 또 밖으로 나갔다. 유제니아는 그런 그를 따라갔다. 소년시절의 세르네긴은, 동네의 거친 소년들 과는 달리 언제나 상냥했다. 주변을 참새 나는 듯 뛰어다니는 유제 니아가 쏟아내는 온갖 허황된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며 미소 지 었다. 장작을 다 패면, 유제니아는 그 중 가장 작은 것 하나를 들 고는 대단하게 도와주는 것처럼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보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세르네긴은 그 스무 배는 되는 양을 들고는 안으로 들어와, 어머니가 피워놓은 벽난로 옆에 쌓아 놓았다. 그렉이 일 어나는 건 그 때다. '아아, 오늘은 내가 할 생각이었단 말이다!' 하고 불평하고는 어머니에게 키스하고 유제니아를 안아주고 쏘아보는 세르네긴의 어깨를 퍽 쳤다...... 그곳으로 달려가고 싶은데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나, 너무 끔찍하고 무서운 꿈을 꿨어! 하며 그들의 품에 안기고 싶은데- 정작 유제니 아의 손을 빠져나가 흩어지며 산산이 부서져 사라져 버리는 건 그 소중한 시간들이다. 이제 하늘은 파랗기만 했다. 너무나 밝고 화창한, 눈부시게 깨끗하고 아름다운 하늘이다. 그러나 그렇게 눈 시리게 아름다운 것을 바라 보아도, 그저 굳은 듯 꿈쩍도 할 수 없다........ 그냥 눈물이 나왔다. 흐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웅크린 채, 그냥 조용 히 볼이 젖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눈물을 흘렸다. 눈물을 닦고 싶은데 손마저도 움직이지 않는다...... -유즈. 그런데 누군가가 그녀를 부른다. 유제니아는 흐린 눈을 꼭 감았다 뜨 며 눈물을 떨구어냈다. 그림자가 다가왔다. 눈물을 닦아주고, 따뜻하게 볼을 감싸주고는 다 가와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댔다. 이제 유제니아는 고개를 들 수 있었다. 햇살 속에 빛나는 건, 부드럽 고 차분하게 그녀를 내려다보는 건........ 유제니아는 두 팔을 들었다. 그리고 그를 끌어안으며, 그 따뜻한 품 안에 얼굴을 묻었다. 이래선 안 된다는 것을 알아도,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제발 와 줘...... 제발! 차라리 죽고 싶어, 그가 미워서 정말 죽고 싶다 고--! 나팔소리가 찢는 듯 주변을 울렸다. 유제니아는 놀라서 벌떡 일어났 다. 그리고 허둥지둥 창문으로 달려가 커튼을 열어젖혔다. 새벽이었다. 나무와 성과 도시, 바다 모든 것이 청회색 차가운 빛에 젖어 있었다. 창가라 싸늘한 외풍이 스며들어와 볼을 식혔다. 그리고 유제니아는 저 먼 언덕위에 꽂힌 깃발들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언덕이 굽어보는 바다위의 함대들이 출항준비를 위해 돛을 켜는 것을 보았고, 귓가로 둥, 둥, 둥- 북이 울리는 것도 들었다. 사방에는 온통 횃불이 가득했고, 그 빛이 세상을 불태울 듯 이글거리며 선 착장과 언덕과 바다 위를 부유하듯 오고갔다. -나를 증명하기 위해 가야 한다. 죽어서 올 지도 모르고, 살아서 올 지도 모르지. 하지만....어쨌건 나는 살기 위해 가고 이기기 위해 가고, 그 모든 목적을 달성하고 돌아오기를 바란다. 그 목소리가 스치듯 떠오른다. 그리고 예감을 믿지 않는 유제니아였지만, 이번에는 마치 종교의 계시 같은 확신이 들었다. 그는 이길 거야. 반드시 이길 거야-! ********************************************************************* 작가잡설: 아예 나 허접이야, 하고 대 놓고 허접 떠는 것 보다, 속내는 허접이면서 정작 본인은 굉장한 것 하는 마냥 떠들어 대는 인간들이 더 짜증나는군요. 자기애란, 너무 없어도 난처하지만 지나치면 민폐입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8장 ***************************************************************** [겨울성의 열쇠] 제275편 왕의 새벽#4 ***************************************************************** 루첼이 '대기'라는 마지막 명령을 받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방 안에서 가장 가벼워 보이는 것을 뒤집어 엎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펜 꽂이였기에, 알버스 경외의 다른 기사들은 그저 '뭐 찾나?' 라 는 눈길로 루첼을 지긋이 바라볼 뿐이었다. "그란셔스 군. 델 카타롯사는 어디까지 왔나?" 열 걸음 정도(물론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면)라고 빈정대고 싶은 것을 간신이 참으며, 루첼은 아주 정중하게 말했다. "같은 속도로 이동한다면 오늘 밤에라도 바르젤에 도착할 것입니다." 날치처럼 빠르지요, 젠장. 이라고도 말할 생각이었는데 그건 생략이 다. 그리고 그는 제발 누구 하나라도 바르젤을 포기하고 후퇴하자, 라고 멀쩡한 의견을 내놓기를 간절히 바랬건만- 알버스 경을 비 롯하여 다른 장교들은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나라에 대한 충 성과 부모님에 대한 효도(즉, 목숨부지)를 택해야 할 경우가 생기 면 반드시 후자를 택하라-를 미덕으로 알고 살아왔던 루첼에게, 이런 장교들의 태도는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게다가 지금 이 상황에 서 루첼이 '저기, 지금 요새 사정이 매우 안 좋으므로 후퇴하여 왕자님의 원군과 합류하는 것이 좋습니다.' 라고 말했다가는, 조용히 끌려 나가 절벽 아래로 내던져 질 것이 뻔하기에 직접 말 할 수도 없었다. 어차피 루첼은 외국인이고, 그것도 베넬리아 인으로 알려 져 있다. 케올레스가 그를 후임으로 삼고 아킨이 각별하게 부탁하지 않았다면 배타적인 것으로 이름 높은 암롯사 군에 끼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케올레스 사후 루첼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마 법사답게 여기 저기 시찰을 하고 꼼꼼하게 보고하는 것뿐이었다. "그렇다면 모두 왕자님께서 도착하실 때까지 바르젤을 지키도록- 그 란셔스 군, 자네도 최선을 다해주게." "알겠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내리꽂히기에, 루첼은 불만과 불평과 불길함과 불안을 주섬주섬 챙긴 후에 빙긋 웃어 보였다. 누가 봐도 '제가 요새를 사 수하겠습니다!'로 보일 것이다. (속마음으로야 '도망치자고 바보들아!!' 이지만 말이다) "아킨토스 님께서 돌아오신다는 이야기는 없었나?" 루첼에 대한 불신을 표하는 방법 치고는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 지만(암롯사 인들은 정말 돌려 말하는 방법을 전혀 모른다.) 루첼은 역시나 표정관리를 잘 하며 고개를 저었다(이것은 소반도 인의 특징이다). "아직 입니다. 하지만 보고는 계속 드리고 있으니, 안심하셔도 됩니 다. 이 요새가 위험하다면 반드시 뛰어오실 겁니다." 뭐, 아킨이 로메르드에서 보낸 답장이야 '바보, 위험하면 그냥 도망치 면 되잖아. 남의 나라 전쟁에 목숨 걸지 마.' 였지만(정말 암롯사 왕자가 맞나?) 그렇게 말했다간 역시나 저 절벽의 높이를 가늠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 모두 각자의 위치로 가게. 왕자님이 오실 때 델 카타롯사의 깃발 이 이 요새의 탑에 날리는 꼴을 보일 수는 없잖은가." 모두 네- 하고 짧게 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첼은 속으로는 '현실은 현실이고-' 어쩌고 중얼거리며 그들과 함께 일어났다. 루첼이 할 일은 성의 북쪽 끄트머리로 가서 그 수평선을 살피는 것이 었다. 전쟁에서의 마법사란, 강하면 강한 대로 약하면 또 약한 대로 엄청난 변수가 되는 존재이다. 그리고 왕의 마법사나, 군단의 마 법사들이 한번 정해지면 거의 변하지 않는 것은 그 마법사의 능력과 버릇과 심지어 성격까지 모두 계산하여 작전을 짜기 때문이다. 케올레스는 마법사의 능력 자체는 크지 못해도, 그 전술 전략에 포함 되어 호흡을 맞추는 면에 있어서는 거의 최강이었다. 전쟁에서의 마법사는 펑펑 쏴댄다고 다가 아니다. 힘이 달리는 곳이 어딘지 정확하게 판단하여 돕고, 후방을 엄호해 주며, 기습을 막아주어야 한 다. 괜히 성급하거나 방향감각 엉망인 마법사들은 아군이 습격할 곳 에 미리 화염을 쏘아대 아군까지 피해를 주기도 하고, 이미 뒤엉킨 뒤에 같은 짓을 하여 아군까지 같이 구워 버릴 수도 있다. 그랬 기에 애당초 군과 호흡을 맞추지 못하는 마법사는 신에 필적할 정 도로 강할 지라도 차라리 없느니만 못한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지난번의 그 이상한 마법사야 말로, 전쟁에 써먹기에는 최악 의 마법사였다). 루첼은 북쪽 성벽에 올라서며, 대체 스승인 롤레인은 어떻게 그 모든 함대를 다 쓸어버릴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루첼은 끝없고 넒은 수평선과, 거대하게 물결치는 바다의 덩어리를 보는 순간에 아찔 해지기만 할 뿐이다. 아래쪽에서는 함성과 기합소리가 들려왔다. 어둠 속에서 환한 횃불들 만이 타오르며 주변을 밝히고 있을 뿐이다. 컴컴한 가운데 켜진 그 횃불은, 마치 거대한 고목 옆에 붙은 반딧불들처럼 보였다. 그리 고 그 불빛들 사이로, 창과 칼과 방패, 투구와 갑옷들이 번쩍였다. 루첼은 나른히 한숨을 내 쉬고는 수평선 너머를 보았다. 저 먼 곳 은 별들만이 하얗게 반짝일 뿐이다. 달은 이미 저문 지 오래, 그저 해가 떠오르기만을 기다리는 밤은 까맣고 무겁기만 할 뿐이다. 바람이 불어왔다. 습하고 무거운 바람이다.... 그리고 저 수평선 쪽에 서부터 별들이 어둠에 하나하나 삼켜지기 시작했다. 예전과 똑같다. 그 때 실패했으면 작전 좀 바꿔 보는 게 어떠냐, 바 보 악튤런. 루첼은 속으로 사숙을 욕하며, 흉벽 가까이 다가갔다. 바람은 더 거세어지고 있었다. 탑 위에 꽂힌 깃발이 몸을 부풀리더니, 마침내 남쪽을 향해 좌악 펼쳐졌다. 망치로 치는 듯한 명령 소 리가 터졌다. 그러자 루첼을 제한 모든 병사가 알아듣고는 몸을 착 붙이고는 창과 칼, 그리고 방패를 일시에 부딪치며 함성을 질렀다. "전투 준비-!" 수평선 끝에서 자그마한 불빛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 불빛이 하나 가 더 떠오르고, 그 옆으로 또 하나 더 오르고, 계속 떠오르기 시 작하며 바르젤을 향해 몰려오기 시작했다. 불길을 주둥이 끝에 인 물고기 떼처럼 그 무수한 배들이 쏟아지듯 몰려오고 있었다. 여든 세 척. 루첼은 사흘 전에 이미 확인해 둔 숫자를 속으로 확인하며 수 면과 하늘, 그리고 주변을 잘 살펴보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모를 테 지만, 루첼은 그 함대의 진형위로 펼쳐진 마법진을 마나의 흐름으로 알아 볼 수 있었다. 역시나 악튤런의 것이다. 롤레인의 마법이 초인적으로 정교하다면, 악튤런의 것은 초인적으로 '무식하다.' 즉, 롤레인의 것이 훌륭한 권법가의 그것이라면, 악튤런은 선천적으로 주먹 하나는 잘 타고난 싸움꾼의 그것이다. 어느 쪽이 든 무시할 수는 없다. 악튤런이 롤레인을 이긴다면 기적이지만, 롤레인도 운 나쁘면 악튤런의 주먹 한방에 맞을 수 있다. '저런 놈이 나랑 동갑이냐-!' 생각하니 괜히 화도 난다. 참으로 발칙하게 대하긴 했지만, 어쨌건 동갑의 나이에 그는 대마법 사 컬린의 제자이며 델 카타롯사의 마스터 중 하나이며, 지금 이 전쟁의 승패를 좌지우지 하는 특급 마법사이다. 베넬리아가 쭈뼛 곤두서고, 그가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전쟁의 방식 자체를 바꾼다. 즉, 억울하지만 천재는 천재인 것이다. 루첼은 정말 기분이 언짢아졌다. 자신이 그토록 노력해서 쌓아 놓은 것들이, 어찌 이리도 하찮아 보이는 건지. 실컷 무릎 높이로 쌓아 놓고 보니, 저 앞에는 태산보다 더 높이 쌓아 놓은 놈이 있는 것이다.... '싸우는 법만 잘 알면 승산은 얼마든지 있어.' 롤레인이 그렇게 충고해 주었다. 당시의 루첼은 정말 '그걸 진심으로 믿나요?' 하고 얼굴을 구겼지만, 그녀의 말을 믿고 싶기도 했었다. 그러나 루첼이 그래, 나도 그 잘나고 위대하고 재수 없는 천재 놈이 못하는 걸 할 수 있을 지도 몰라! 하고 생각한다는 것을 뻔히 아 는 롤레인은 또 충고해 주었다. '그가 못하는 것을 생각하지 말고, 네가 할 수 있는 것만 생각해. 그 가 못하는 걸 네가 할 수 있을 가능성은 매우 낮고, 있다 하더라도 결정적인 기회가 될 가능성은 더욱 낮지. 하지만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제대로 써먹으며 승기를 잡을 가능성은 그보다 몇 배는 높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 내가 할 수 있는 일- 루첼은 마법진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마법진의 속성이 무엇인지, 그 순간 번쩍 깨달았다. 그것은 천둥소환의 진, 즉 함대의 진형 자체를 따라 그려 놓은 마법 진이기는 했지만 함대를 보호하기 위한 마법진은 결코 아니었다. 저것은 완벽한 공격, 제대로 실행된다면 이 바르젤 요새와 뒤따라 올 원군까지 싹 쓸어 내쳐버릴 어마어마한 일격을 위한 진이었다. "바보 아냐, 저 녀석." 즉, 공격에만 모든 힘을 싣고 방어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이 암롯 사 쪽의 공격은 '대놓고' 무시하고 있는 마법진이었다. 제대로 강한 마법사가 함대 일부에 일격을 가하면 마법은 무너진다. 아킨이 바르젤에 없다는 것을, 그리고 산 파로이에서 오는 함대에도 쓸만한 마법사가 없다는 것을 저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아는 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킨을 생각했다면 저런 위험 부담을 감수하지는 않을 테고, 그러니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 중 요한 것이다. 뭐, 이렇게 쓸 줄은 몰랐지만- 루첼은 중얼거리며 손을 뻗었다. "즈비, 익스- 브" 순간에, 요새 양 옆에서 마법진이 확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코그, 사, 즈브, 스르--" 그리고 바다위로, 불기둥이 솟구쳐 올라 델 카타롯사 함대의 양 옆을 향해 내리꽂혔다. 예기치 못한 공격인지라, 전함은 그대로 불길에 사로잡혀 버리며 불 타올랐다. 바르젤 요새에서 함성이 터졌다. 그러나 루첼은 이번 공격이, 소환의 진을 부스러뜨렸을 뿐 이라는 것 을 알고 있었다. 저것을 회복시키는 데, 악튤런이라면 한 시간도 안 걸릴 것이다. 억울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환호성에도 좀 미안해하고). 쿠릉-! 어디서 드래곤이 이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루첼은 드디 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함대에서 하얀 섬광이 번쩍 하더니 루첼을 향해 똑바로 내리꽂혀왔다. "프로텐-!" 루첼은 다시 손을 그었다. 순간에, 방금 전에 마법진이 나타났던 곳 에서 또 다른 마법진이 나타나며 바다를 촤라락 긁으며 뿌연 보호 막이 생겨났다. 츠캉--! 온 바다와 요새가 떨릴 정도로 굉음이 터지고, 바닷물이 산처럼 높이 솟구쳤다. 튕겨져 나간 섬광이 해안 가에 내리박히며 모래와 물이 치솟아 올랐다. 다시 섬광이 치륵 치륵 내리꽂혀왔다. 루첼은 다시 몇 번이나 보호마 법을 시전 했고, 그 때마다 바위절벽이라도 무너질 듯한 굉음이 터 졌다. "젠장! 아예 쥐를 잡아라, 쥐를!" 루첼은 이를 갈며 자세를 바로 잡았다. 그리고 불붙은 함대가 진형에 서 떨어져 나가고, 그 자리에 또다른 전함으로 대체 되는 것을 발 견했다. 맙소사- 빠르기도 하다! 부서진 마법진이 다시 복구되기 시작했다. 루첼이 원 마법진을 파괴했으니 그 위력은 약해졌을 테지 만,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안심이 안 되었다. 큰 도끼든 작은 도끼 든 위험하긴 매 한가지니까. 그러나 그 덕에 루첼에게 쏟아지던 전격도 잠시 없어졌다. 흉 벽 위 로 장교 하나가 달려 올라왔다. "마법사 님, 조금만 더 버텨 주십시오!" 이 얼간아, 지금 내가 더 버틸 상황으로 보이냐! 하는 외침이 목구멍 까지 치솟아 올라왔지만 루첼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위에서 내던져 지고 싶지는 않았다). "언제까지 버티면 됩니까? 방금 전에는 제가 기습한 것이라 어찌 저 찌 되었지만, 다음 것은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아마도, 악튤런 파노제가 엄청난 것으로 준비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건 염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도와주실 분이 도착하실 거랍니다." "도와주실 분....." 순간 어둠 속에서 섬광이 칼날처럼 치솟아 올랐다. 루첼은 병사를 뒤 로 밀어젖히고는, 두 팔을 앞으로 뻗었다. 섬광이 채찍처럼 루첼이 있는 성벽을 내리쳤다. 콰아아아앙--! 방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굉음이 터졌다. 루첼은 뒤로 밀려났 고, 루첼 앞의 성벽은 터지듯이 깨어져나갔다. 돌조각이 안으로 와 르르 쏟아지고 날려서 루첼의 이마와 어깨를 퍽퍽 쳤다. 뜨끈한 피 가 스며 나와 이마를 적시고 흘러내렸다. 루첼은 피를 훔치고는 앞 을 보았다. 바로 정면으로 보이는, 함대의 기함에서 하얀 섬광이 달아오르듯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섬광을 따라, 주변의 마법진의 빛이 점 점 더 뚜렷해지고 마나의 흐름도 빨라지고 있었다. "빌어먹을, 도와주실 분이 누군지는 몰라도 당장 날아오지 않으면 모 두 끝장이에요! 어서 오라고 하란 말입니다--!" 마나의 흐름은 이제 빛으로 된 선으로, 보통사람 눈에도 보일 지경으 로 하얗게 작렬하고 있었다. 마법진은 이제 허공에 은필로 그린 듯 선명해져 있었다. 바람은 점점 거세어지고, 바다는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하얀 거품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암벽에 마구 부딪혀 댔 고, 바위 전체에 하얀 주름이 한꺼번에 확 그려졌다. 습한 공기는 이제 숨 막힐 듯 무거워져 있다! 루첼은 어떻게든 온 힘을 그러모아 방책을 연구하려 했다. 그러나 그 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방금 전의 공격으로 소환진의 위력을 줄이는 것 정도뿐이었다. 게다가 그나마도 얼마나 줄였는지 모르겠다. 마법진이 더욱 하얗게 타올랐다. 기함의 섬광은 점점 더 커지고............. 그 때 함대 아래에서 함성이 터졌다. 루첼은 뒤돌아섰고, 등지고 있던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하얀 빛들을 보았다. 그 함대의 무수한 배들 위로 암롯사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으며, 바람의 바람을 역류하기 위해 모든 돛들은 접혀 있었으나 그 고물 끄트머리는 상어이빨보다 날카롭게 앞으로 향하고 있었다. 왕자가 이끄는 원군이 도착한 것이다. 그러나 루첼은 만세를 부를 수 없었다. 지금 상황이라면, 바르젤 요새와 암롯사 함대가 같이 터져 나갈 판이니. 병사가 루첼의 어깨를 감싸 쥐더 니 아래를 가리켜 보였다. 눈이 그리 좋지 않은 루첼은 그 배가 지나가 는 것만 간신히 볼 수 있었을 뿐..... 전함이지만 그리 큰 전함은 아니다. 왕자가 탄 기함은 아닌데... 그리고 루첼은 선두에 서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아무리 눈이 어두워도, 아니 안경을 벗고 있어도 그녀가 누구인 지 알아볼 수 있었다. ******************************************************************* 작가잡설: 결국 책은 3개월 할부...................... 만세!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8장 *************************************************************** [겨울성의 열쇠] 제276편 왕의 새벽#5 *************************************************************** 롤레인은 비정상적으로 거세어진 밤바람이 꽤나 싸늘하다고 생각했 다. 정말, 바다 수면을 한꺼번에 쓸어내는 듯 거세며 특히나 수면 위에는 흰 물보라까지 부옇게 일어날 지경이었다. 롤레인은 그 수 평선을 가늠한 뒤에 그녀 옆에 있는 암롯사의 마법사에게 말했다. "여기서 분명 말해두는데, 나는 델 카타롯사 군을 모조리 쓸어 주기 위해 온 건 아니야." 그리고 롤레인은 회색 로브자락을 걷었다. 마법사 청년이 당황했다. 절벽을 타는 바람소리가 육식동물의 으르렁거림처럼 거세어서, 마 법사는 힘껏 외쳐야 했다. "하지만 분명 저희를 돕기 위해 오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공화국식 어법과 제국식 어법은 꽤나 틀린가 보군. 내가 약속한 도 움은 내 제자가 '위험하지 않게 될 때' 까지고, 그 한도는 악튤런 파노제를 막는 것으로 끝난다고. 이런 말도 있잖아. 공화국 사람이 랑 거래할 때는 점심 약속 식사 스프 종류까지 정해 놓는 게 좋다고." "하지만 베넬리아 통령부에서 분명 그리 말했단 말입니다. 도와준다 고!" "이봐,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때 원하는 도움을 모조리 다 얻으려 하 지 말라고. 어차피 도움이란 주고 싶은 사람 마음인 법 아니겠어? 어쨌든 도와주는 건 도와주는 거니 그만 덤비라고." 마법사는 입을 딱 벌렸다. 아마도, 롤레인이 통령부와의 협의 끝에 암롯사 군을 돕기로 결정하고 암롯사에 오자 이제 전쟁 다 끝났다고 착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쨌건 롤레인은 왕년에 베넬리아 내전 을 끝낸 전적이 있으니 말이다. "불쌍해서 가르쳐 주는 건데, 나에게는 암롯사에 무언가를 베풀고 싶 은 동정심이나 명예심은커녕, 최고 꼭대기에 있는 두 사람을 만나는 즉시 조져 버리고 싶을 정도의 애정밖에는 없다고. 더 기대하지 말고, 명예 어쩌고 하지도 마. 어차피 난 외국인이고, 낭만주의자 도 아니고, 공화국 사람이라 왕의 감사 훈장과 키스에는 별로 관심 없으니까. 게다가 그쪽 나라 홀아비 왕은 내 취향도 아니더군." 이제 마법사의 얼굴은 새파래져버렸다. 롤레인은 그런 암롯사의 마법 사를 등지고, 찬 바람을 맞는 안경을 밀어 올렸다. 바다는 검고, 하 늘은 더욱 검었다. 그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곳에서, 함대에서 뿜어 져 오르는 빛이 새하얗게 작렬한다. 롤레인은 그 배 위에 얹혀진 마법진을 가늠했다. 넓이와 크기와 힘, 그 중심까지. "여전히 단순하구나, 악티." 롤레인은, 탈로스가 그러했듯 악튤런을 별로 좋아하지는 못했다(하 긴, 셋 중에 서로를 조금이라도 좋아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다들 원수처럼 으르렁댔을 뿐이지). 그러나 둘 다, 적어도 어린 악튤런을 인격적으로는 무시해도 마법사로서는 어린아이 취급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금방 금방 배우지요. 그것도, 다른 아이들의 힘이 주먹이 라면 저 녀석은 철근을 한 만개 쯤 매단 울트라 주먹이 될 정도의 힘으로 완성시켜요. 하지만 낭패가 있는데, 그건 주먹으로 싸울 생각 이 없는 상대와 만날 때에요. 물론 탈로스도 정석대로 싸우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악튤런과 탈로 스의 분명한 차이는, 악튤런은 땅을 보며 싸운다면 탈로스는 하늘 에서 보고 싸운다는 것이다. 즉, 둘의 '시야'는 말 그대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렇다고 악튤런을 무시하는 건 아니다. 그가 대단한 자 질을 가지고 있고, 지금 대륙에서 가장 강한 마법사 중 하나라는 것도 사실이니까. 문제는, 지금 악튤런이 지나치게 설치고 있다는 것 이고, 지나치게 설치다 보면 베넬리아가 언짢아 진다는 것이다. 베넬리아 통령부는 지금 어떻게든 이 나셀 해에 세력을 넓히려 발 악을 하고 있고, 그 수단으로 롤레인을 이용하고자 하고 있으며, 그것을 위해 루첼을 이곳으로 보냈다. 그리고 이곳에서 루첼이 다 치면 롤레인은 매우 언짢을 것이다(그것은 휘안토스를 돕는 떨떠름 함보다 무게가 더 나간다). 참으로 복잡한 핑계들이라 생각하며, 롤레인은 드디어 악튤런의 마법 진을 가늠하는 모든 작업을 끝냈다. 그리고 롤레인은 주문을 외우 지는 않았다. 마법사가 롤레인이 대체 무엇을 말하려나 귀를 쫑긋 세웠지만, 그가 들은 말은 "끝."이라는 지나치게 간단한 말 한마디 였다. 순간에, 북쪽 하늘에 빛이 솟구쳐 올랐다. 완전히 완성된 악튤런의 마법진이 완전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번쩍이는 빛에 하늘에서 소 용돌이치는 구름들이 번뜩이자, 거대한 뱀이 똬리를 트는 듯 했다. 마법사가 보기에는 정말 숨 막힐 정도로 엄청난 힘의 폭풍이었다. "어, 어떻게 해 보십시오! 저러다가는 암롯사 함대와 바르젤이 동시 에 날아가겠습니다!" "끝났는데." "끝장 난 건 저도 알겠습니다! 무엇을 하란...." 그 때 롤레인과 그 마법사가 탄 배가 닿은 바다에서 콰작- 하고 얇 은 얼음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마법사가 바다를 흘끔 보자, 갑자기 마치 거미줄을 뿜어 올린 듯 미세하고 하얀 선들이 쏟아지듯 바다위로 펼쳐지기 시작했다. "세 시간." "네?" "단 세 시간 동안 악튤런의 모든 마법은 정지한다. 그 사이에 알아서 해. 그렇게 도와줘도 바보처럼 바다 위에서 우왕좌왕 하면, 작살이 나든 말든 루첼만 데리고 도망쳐 버릴 테다." 기함에 서서 휘안토스는 북쪽의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차갑고 거센 밤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늘 위로는 악 튤런이 만들어 낸 벼락보다 하얀 섬광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어, 정말 온 사방은 낮처럼 환하다. 검고 거친 수면위로도 쉴새없이 빛 이 부서진다. "모두 단단히 준비해라." 휘안토스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에, 암롯사 함대 양쪽 끝에서 마법진 이 빛났다. 그리고 츠캉- 하며 거대하고 얇은 것이 깨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눈앞의 수평선을 불태우고 있던 하얀 빛이 지 워지기 시작했다. 마치 얇게 열린 입구가 닫히듯, 검은 흑판위에 그 려진 은필의 선이 지워지듯 지워지고 있었다. 델 카타롯사의 기함에서 작렬하던 하얀 빛이 움켜잡힌 듯 이지러지고 있었다. 방금 전만 해도 사방으로 섬광을 뿜어 올릴 듯 했던 그 거 대한 마법진이, 말 그대로 녹듯이 지운 듯이 쓸리듯이 사라지고 힘 을 잃어가고 있다. 마르실리오가 긴장한 듯 이를 악물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마법사의 손 자인 지라, 그에게도 대강의 감각 정도는 있었다. 지금 앞에서 벌 어지고 있는 일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속도를 높이라고 해라. 그대로 진격 한다." 전쟁의 희열도, 이길 거라는 자신감도, 그렇다고 두려움과 공포도 그 눈과 목소리 안에는 없었다. 오로지 할 일을 한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세루비아나." "네." "루첼 그란셔스에게 전하도록. 최선을 다해 우편을 집중 공격하라고. 그 누구도 암롯사의 해안에 기어 올라오지 못하도록." "알겠습니다." "그리고 어서 속도를 높여라. 이곳의 전쟁은 곧 끝날 거다." 이물에 서 있는 병사 쪽으로 마르실리오가 달려갔고, 그가 명령을 전 하자 병사는 붉은 깃발로 신호를 올렸다. 주변에 들리는 북소리가 점점 더 빨라지며, 노 젓는 속도와 바닷물 치는 소리도 더욱 거세어졌다. 전함들이 바닷물을 밀어젖히며 빛나는 수평선을 향해 나아갔다. 함대 끄트머리와 측면에 켜진 등불이 바다위에 빛을 뿌렸다. 튀어 오른 물거품이 그 불빛에 빛나며 다시 바다위로 쏟아진다. 그리고 휘안 토스의 기함이 바르젤을 스쳐지나갔다. 바르젤 아래에 닻을 내린 작 은 전함이 수평선을 바라보며 있었고, 그 끝에 있는 회색 로브의 마 법사가 손을 들어보였다. 잘 가라는 인사였다. 왕도, 귀족도 없는 나라에서 온 마스터였건만 휘안토스는 그 순간에 그녀가 그 어떤 왕보다 강해 보였다. 그 앞에 있는 그녀는, 진정 따르는 자를 지배할 권리와 반하는 자를 억눌러 복종시킬 수 있는 힘 을 가진 듯 보였다. 그리고 인사를 받게 되자, 그녀가 더 이상은 그를 만나러 오지도 않을 것이며 도와주지도 않을 거라 확신하게 되었다. 휘안토스는 고개를 들어, 머리위에서 펄럭이는 깃발을 올려다보았다. 암롯사의 해룡과 장미의 깃발이 어둠 속에서 횃불의 빛을 듬뿍 담아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마주보는 수평선, 멀찍한 그곳에는 델 카타롯사의 그리핀이 펄럭이고 있었다. 그것은 하얀 빛에 더욱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저 기함에 델 카타롯사의 칼리토 대공왕이 있다. 십수 년 간 복수의 칼을 정성을 다해 갈아오던, 그리고 지금 악튤런 파노제라는 최고의 원군을 얻어 날아오르려는 그리핀의 왕이. 검푸른 머리카락에, 분노로 이글거리던 눈동자에, 언젠가는 보답을 받아 내리라 믿어 의심치 않던 청년이- 그리하여 결국에는 델 카 타롯사의 왕이 되어, 그의 아버지 사이러스를 포로로 잡아 유폐시 키는데 성공하고 마침내 암롯사 마저 정복하려 하고 있으며, 언젠가 는 황제로 등극할 것을 꿈꾸는 젊고 무모한 남자가. "하지만 장미 가시에 찔리리라." 휘안토스는 옛 시구를 읊조렸다. "간다-!" 그리고 휘안토스는 검을 세워들었다. 기수가 깃발을 펄럭였고, 잠시 속도를 늦추었던 전함이 앞으로 쏟아져나갔다. 그리고 델 카타롯사의 우편으로, 유성 우 같은 불길이 내리꽂혔다. 콰앙-! 전함이 나뭇잎처럼 흔들리며 불이 확 붙었다. 바람이 잠잠해 지는 가 싶더니, 곧 그 방향이 바뀌었다. 함대 우편의 불길이 왼쪽- 본대를 향해 흐르기 시작했다. 힘껏 부풀린 돛에 금방 불이 붙으 며 타올랐다. 횃대와 돛대에 불은 금방 옮겨 붙었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불길이 어둠을 가르며 함대에 내리꽂혔다. 콰앙-! 바다위로 금가루를 뿌린 듯 빛이 확 터져 올랐다. 그리고 그 전함 역 시 으스러지며 불타올랐다. "왼편으로 꺾어라!" 휘안토스의 기함은 멈추어 있었다. 암롯사의 함대가 델 카타롯사의 함대와 뒤 엉키기 시작했다. 갈고리가 솟구쳐 상대 전함의 갑판을 긁고는 난간에 걸리자 팽팽하게 당겨졌다. 배와 배가 부딪히며 노가 으스러지고, 그 위에 탄 병사들이 뛰어넘어와 뒤엉켰다. 칼 부딪 히는 소리와 비명과 신음이 파도소리에 뒤엉켰다. 이글이글 타오르 는 소리가 짐승 울부짖는 소리처럼 들려왔다. 빠르게 진행되는 해전 때문에 화살을 쏘아보지도 못한 궁수들이 상대편 배를 향해 남아도 는 석궁을 쏟아 넣었다. 배들이 선체에 고슴도치처럼 화살을 맞았 다. 휘안토스에게도 화살이 날아와 박혔다. "그대로 나간다." 당황한 마르실리오에게 휘안토스는 그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다시 허 공을 가르며 불길이 내리꽂혀왔다. 해안가 쪽의 전함들은 이제 불로 된 산처럼 불타오르고 있었고, 델 카타롯사 함대는 그 쪽으로 밀리 고 있었다. 바다 위는 깨진 나뭇조각들과 시체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 다. 버둥거리는 부상자들의 비명이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전함 한척이 다가오고 있었다. 돛대도 쓰러지고 갑판은 거의 완파되어 버린 전함으로, 그 위에는 병사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조타수는 아무 거리낌 없이 배의 방향을 틀었다. 그런데 그 전함은 해류를 따라 흐르지 않고 똑바로 휘안토스를 향해 다가왔다. "이대로 충돌하겠군......세루비아나.-" "네." 세루비나아는 곧바로 두 팔을 뻗었다. 전함에 불길이 쾅 치솟아 올랐 다. 불길과 충격에 밀려 그 전함은 밀려났다. 그러나 그 배에서 검은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마르실리오가 검을 뽑아들었고, 세루비아나 의 눈이 긴장으로 굳었다. 주변 호위기사 들의 검들이 모조리 뽑혀 나와 앞을 향하고, 병사들의 창과 석궁끄트머리도 그를 향했다. 그러나 짧은 섬광이 일었다고 생각되는 순간에, 호위기사들의 검들이 수확이라도 되는 듯 좌악 걷히더니 그대로 내동댕이쳐졌다. 마르실 리오의 검도 튕겨 나가 갑판에 꽂혔다. 세루비나아는 단단한 철봉 같 은 것에 얻어맞고는 나가떨어졌다. 그 중에 휘안토스만이 멀쩡했다. 그리고 모두 당황하고 놀라 있었건 만, 휘안토스 만은 차가운 눈빛이었다. "드디어 나타났군." 휘안토스는 검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그 검 끝에, 창을 비껴들고 있 는 청년이 있었다. 마르실리오만이 그를 알아보고는 신음을 삼켰다. "포틀러스!" **************************************************************** 작가잡설: 연참 시작! ...........일까요?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8장 ****************************************************************** [겨울성의 열쇠] 제277편 왕의 새벽#6 ******************************************************************* 세르네긴은 무표정하게 창을 치켜들었다. 휘안토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기사들이 허겁지겁 검을 챙겨 들 었지만, 그들의 모든 검들이 반으로 잘려 있었다.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다들 신음을 삼켰다. 단번에 압박 같은 두려움이 그들을 짓눌렀다. 창 한번 휘둘러 모두를 그렇게 제압한 것이다. 세르네긴이 말했다. "이건 보답입니다." 휘안토스는 웃었다. "대단하군...... 한 나라의 왕과 왕자에게 직접 보답을 얻어 가다니 말 이다." "직접 받지 않으면 안 되는 보답이니까요." 콰앙-! 다시 불길이 솟구쳤다. 츠캉, 드디어 델 카타롯사 쪽에서 반격이 이 루어지기 시작했다. 하얀 전격이 어둠에 찬 허공을 찢으며 성벽을 향해 쏟아져갔다. 그러나 그것은 이내 보호막에 맞아 나가떨어졌다. 방금 전에 성 주변에 만들어지던 보호막과는 질이 틀린, 진정으로 방패처럼 단단한 보호막이었다. 누가 만들고 있는 것인지 뻔하다. "제 복수는 전쟁의 승패와는 상관없습니다. 어디가 이기든, 저는 당신 만 죽이면 됩니다." "나는 암롯사의 왕이다." "그 아이에게 상처 입힌 자는 휘안토스 일 뿐, 암롯사의 왕이든 왕자 이든 황제이든! 그가 휘안토스 라는 것만이 중요할 뿐입니다." 그리고 세르네긴의 창이 거세게 날아왔다. 휘안토스는 세르네긴의 창을 검으로 막고는 옆으로 흘렸다. 창대가 검날 위를 미끄러지며 방향을 틀었고, 곧바로 그 허리를 타넘어 다시 휘안토스를 찔러 들어갔다. 공기가 찢어지는 듯 거센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휘안토스는 그 창끝을 피하고는 그 허리를 베어 들어갔 다. 창이 다시 방향을 틀어 돌려지고는, 그 검을 퉁겨냈다. 순간 에 세르네긴의 번득이는 눈과 마주쳤다. 휘안토스는 기이한 희열을 느꼈다. 그 역시 속에서 끓어오르고 있었 다. 단 한번의 패배와, 그 뒤에 이어지는 끝없는 모멸- 그 패배로 세르네긴은 휘안토스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해 경멸할 권리라도 얻은 듯, 그렇게 끝없이 모멸을 보내왔다. 드디어 기회가 온 것이다. 그가 직접 으르렁거리며 달려드는 바로 이 기회가! 정면으로 부수어 버릴 기회가. 휘안토스는 검으로 창을 걷어 쳐 내고는 뒤로 물러났다. 창이 다시 몰아쳐 들어오자, 휘안토스는 그것을 피하고는 바닥을 짚고 그 드 러난 등을 찔러 들어갔다. 창이 어깨를 넘어 와 그 검을 막아냈고, 다시 빠르게 몸을 돌리며 단검을 뽑았다. 그것은 예상 못했던 것이기에, 휘안토스는 급히 피했지만 가슴이 깊이 베어져 나가고 말았다. 피가 튀었다. 마르실리오가 달려오며 검을 들었으나, 휘안토스는 손 을 들어 만류했다. 그리고 세르네긴의 어깨를 향해 검을 박아 넣 었다. 역시나 세르네긴은 물속 고기처럼 피하더니, 창을 돌려 그 창대로 그를 후려치려 했다. 휘안토스는 통증은 잊었다. 검을 세워 그것을 막아 내고는, 그대로 검을 앞으로 미끄러뜨렸다. 츠칵- 세르네긴의 목이 길게 베어져 나갔다. 피가 흘러 바닥을 툭툭 적셨다. 휘안토스보다 더 심한 상 처였다. 그러나 세르네긴은 마치 남의 몸이라는 듯 개의치 않고 창 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으나, 눈빛은 오히려 방 금 전보다 더욱 뜨겁다. 휘안토스는 그의 창을 내리쳤다. 검과 창 이 맞물리며 서로의 얼굴이 바짝 닿았다. 힘과 힘으로 서로를 밀 어젖힐 뿐이다. 휘안토스가 말했다. "누구를 위한 복수냐. 그녀를 위해, 아니면 너를 위한 것인가." "나를 위한 것입니다! 당신을 용서치 못하는 건 나니까-!" 휘안토스는 검을 거두어 당겼다. 세르네긴도 창을 거두었다가, 다시 몰아쳐왔다. 다시 챙- 검과 창이 부딪혔다. 그러나 휘안토스는 검을 한번 세게 밀어젖히고는, 그대로 거두어 당겼다가 빠르게 찔러 넣었다. 세르네긴은 피했지만, 가슴대신 팔이 꽂혀버렸다. 휘안토스는 검을 뽑지 않았다. 세르네긴이 이를 악물어 고통을 참아내며, 오른 손의 창을 버리고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막 그를 찌르려는 찰나, 그의 눈이 멎었다. 그가 무엇을 발견했는지 잘 아는 휘안토스는 웃어보였다. 세르네긴의 턱이 떨렸다. 그 눈은 정확히, 휘안토스의 목에 걸린 반지를 향하고 있었다. "무슨....짓을 한 겁니까." 그 나마 남아 있던 이성도 사라진 것이다. 당장에라도 욕을 퍼부어 대며 주먹을 갈길 듯, 예의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이 또 기 이하게 유쾌했다. 끝까지 욕 한마디 안하고 정결하게 굴 것 같은 남자가, 드디어 무너져 나고 있다.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을 뺏는 방법은 몇 가지 없지." "죽인.....겁니까?" "아니." 세르네긴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분노에, 완전히 제 정신을 잃어가 고 있었다. 눈빛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뜨거워지고, 흔들리고, 더 뜨거워지다 쏟아지듯 무너진다..... "또......." "이제는 완전히 내 여자다. 네가 되찾아 간다 할지라도, 그녀는 아마 도 영원히 내 여자로 낙인찍혀 있을 거다." 휘안토스는 검에 힘을 주었다. 그를 바라보는 세르네긴의 눈에 눈물 이 맺혔다. 가득 담긴 감정은, 그것은 슬픔 때문이었다. 절망과 안타까움과, 어린 신부가 또 어떤 일을 당했을지 너무나 분명 한 지금 상황에 대한 슬픔에, 그의 눈이 젖어 들어갔다. "당신은......" "경멸하려면 경멸해!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해 두지! 네 놈이 그 럴 때마다, 나 역시 그 잘난 경멸에 대한 보답으로 똑같은 모욕을 할 뿐이다. 모욕에는 모욕만이 답이니까--!" "그 아이는 아무런 죄도 없습니다." "네가 죄인이다." 다시 턱에 경련이 일어났다. 눈가도 부르르 떨리며, 눈물이 볼을 타 고 흘러내렸다.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가치 없고 필요 없다. 용서하지 말든, 분노하든 증오하든 마음대로 해. 나는 다만 내가 원하는 보답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가져가면 된다." 그리고 휘안토스는 검을 뽑아, 그 팔을 내리쳤다. 차악--! 피가 바닥에 튀었다. 잘려진 팔이 나무토막처럼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세르네긴은 무표정 하게 잘린 팔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직 그의 눈에는 공포는 없 었다. 마치 남의 몸을 보듯- 피가 흥건하게 바닥을 적셨다. 휘안토스 는 뜨거운 감정이 울컥 치솟아 올랐다.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좀 더 무너지란 말이다, 좀 더 무너져 바닥이 라도 지저분하게 뒹굴어 버리라고! 부서지고, 부서지고, 쏟아지고 쏟아져서, 가장 깊은 곳의 여린 속살까지 다 내보이고 난도질 되어 버리라고! 아직은 아냐, 아직은-- 아직은 남았어! 아직 너는 완 전히 비참하게 내 동댕이쳐지지는 않았어--! 휘안토스는 다시 반대편 팔 쪽으로 검을 들었다. 세르네긴의 눈이 그 를 향했고, 그 순간에 하얀 눈보라 같은 것이 그 둘 사이를 가로막 으며 뿜어져 올랐다. 순간 휘안토스는 분노에 찬 초록색 눈동자를 본 것 같았다. 매섭게 저주를 퍼붓는, 그 천둥 같은 외침을 들었다. 은빛 머리카락이 휘 감기듯 주변을 감싸고돌며, 눈부시게 빛났다. 휘안토스의 검은 허공 에 얼어붙은 듯 멈추어 꿈쩍도 하지 못했다. 다른 이들은 눈도 제 대로 못 뜨고 있었다. 그리고 그 환상은 정말 순식간에 사라졌다. 한순간의 지독한 환각이 온 세상을 뒤흔들었다 사라졌고, 휘안토스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는 것을 허공에서 쿠르르릉 터지는 불기둥 소 리에 깨달았다. 휘안토스는 얼굴에 튄 피를 닦았다. "괜찮으십니까-!" 마르실리오가 외쳤다. 그제야 휘안토스는 바닥에 고인 핏자국을 발견 했다. 모두 겁에 질린 눈동자로 그 핏자국 쪽을 보고 있었고, 세르 네긴은커녕 잘려진 팔뚝조차 보이지 않았다. 휘안토스는 피를 닦아낸 검을 당겨 꽂아 넣었다. 날카로운 검이 칼자 루를 타고 미끄러지며, 철컹 맞물렸다. 실버 드래곤인가. "모두 제 위치로 돌아가라. 검을 잃은 자는 새로 받도록-! 이제부터 진짜 전쟁이다!" 갑판 위로 보인다. 불꽃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시뻘건 바다, 달마저 저물어 하얀 별만이 반짝이며 희끄무레한 얼룩 같은 연기에 휘감겨 오르는 하늘이- "모두 카티온 외항으로 그대로 진격하라. 이대로 카티온까지 진격하 여 델 카타롯사 성벽을 지키는 그리핀의 목을 따라-! 내일 새벽을 보는 왕은 나, 휘안토스 단 한 명이 될 것이다--!" **************************************************************** 작가잡설: 여기저기서 피토하며 쓰러지는 소리가...................;;;;;;;;;;;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9장 ***************************************************************** [겨울성의 열쇠] 제59장 별이 지는 아침 제278편 별이 지는 아침#1 ****************************************************************** "되도록이면 너 말고 공주님이 마중 나왔으면 좋겠는데." 그리 심드렁하게 불평하는 슈마허에게, 아킨은 주먹을 갈기는 대신 빙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 "선배님께서 여기까지만 오시고 돌아가 달라고 하십니다." 슈마허의 입술 끝이 치솟았다. ".....진심으로 그렇게 말해?" "당연히 진심이며, 아주 이성적으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정 오 시고 싶으시다면, 이곳에 델 카타롯사 군을 놓고 혼자 오라고 하시 는데요." "거기까지 헤엄쳐서 가라는 거냐." "저는 1인용 보트를 타고 온 게 아닙니다." 그리고 아킨은 그가 타고 온 배를 가리켰다. 티폴라 여왕이 꽤나 아 끼던 것으로, 축제날 롬파르의 운하를 화려하게 누비던 물건이었다. 굉장히 아름다운 배였지만, 슈마허는 그 배가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바보냐. 그거 타고 가다가 저 갑판위에서 너한테 암살이라도 당하라 고?" "저를 못 믿으시는 겁니까?" "당연하지." "그렇다면 별 수 없군요. 안녕히 가십시오." 슈마허는 정말 돌아서는 아킨의 옷 덜미를 잡았다. "켈브리안 공주부터 당장 데리고 오란 말이다. 아니면 들여보내 주기 라도 하거나-!" "선배는 오지 않을 것이고, 뒤에서 바글대는 델 카타롯사 군을 지금 빈산이나 다름없는 로메르드로 들여보내는 것은 '점령해 주십시오.' 라는 말이나 다름없습니다. 선배로써는 난처한 일인데요." 그리고 아킨은 손을 들어 슈마허가 타고 있는 기함 뒤의, 근 20여척 에 달하는 갤리 전함들을 가리켜 보였다. 객관적으로 본다면 엄청난 규모는 아니지만, 지금의 로메르드에는 충분히 '대군'이었다. 슈 마허는 비굴해 지기로 했다. "어이 꼬마, 나를 못 믿니?" "당신은 믿는데, 당신 빼고는 아무도 못 믿습니다." 이제는 좀 터프해 지기로 했다. "그럼 여기까지 와서 이 많은 군사에게 그냥 허탕이오, 하고 소리치 고는 돌려보내란 말이냐. 우리는 로메르드의 켈브리안 공주와 베르 티노 왕을 돕기 위해 그 먼 길을 왔다고." "하지만 돌아가셔야 할 일도 생겼지 않습니까. 좀 더 합리적으로 생 각해 본다면, 여기서 노닥거리는 것 보다는 한 명도 빠뜨리지 않고 급히 돌아가시는 게 합당한데요." "갑자기 헛소리를 시작하는 이유가 뭐지?" "네?" 아킨은 슈마허가 진심으로 모르는 눈치이자, '그 소식'이 그에게 전해 지지 않던가 아직 전해주지 못 했던가 둘 중 하나라 쉽게 결론 내 렸다. "델 카타롯사 군이 어제 새벽에 암롯사 군에 패했습니다. 그리고 암 롯사 군은 바로 카티온으로 진격할 예정이라는 군요." "뭐?" "사실입니다. 델 카타롯사의 패배는 베넬리아와 로메르드로 즉각 전 해졌고, 아마도 전 제국과 바다의 나라들을 통틀어 이 두 나라가 가장 먼저 들었을 겁니다." 슈마허는 누군가에게 물어보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아킨이 기 함에 타는 즉시 주변의 모든 사람을 물려달라고 부탁했기에 그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슈마허는 결국 아킨에게 모든 것을 물어봐 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자세히 말 해 봐라. 내가 떠날 때까지만 해도 아무 문제도 없었는 데." "적어도 칼리토 대공왕이 남하하여 암롯사를 침공할 거라는 건 알고 계셨겠지요?" "물론이다." "칼리토 대공왕은 남하했고, 제 형 휘안토스는 북진했습니다. 그리고 뱃길이 하나뿐이라 서로 마주쳤고, 싸웠으며, 제 형이 이겼습니다." "그러니까, 대체 어떻게 이긴 거냔 말이다!" "그것까지는 그곳에 없어서 모릅니다. 혹시, 암롯사 군을 유리한 전장 으로 유도하기 위해 칼리토 대공왕이 일부러 도망친 것이라 추측하 셨다면 그건 폐기해 버리십시오. 그런 성공여부도 불투명한 작전을 위해 함대 절반을 내동댕이치는 바보는 없을 테니까요." 그제야 슈마허는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아킨은 말을 굉장히 엉 망으로(즉, 무책임하게) 하고는 있었지만, 내용 자체는 충격적으로 중요한 일이었다(그러나 저 어법은 언제나 얄밉다). 알아볼 것이 많기는 했지만, 적어도 칼리토 대공왕이 패했다는 것 하 나만은 분명했다. 아킨은 '아주 빨리'안 것이니, 슈마허에게라면 적 어도 내일 정오 이전에는 패전소식이 도착할 것이다. 칼리토 대공왕 이 제정신이라면 당연히 그 사실을 알림과 동시에 회군하라 할 테고. "엿 같군, 정말! 그래, 그녀도 알고 있나?" "제게 온 소식이 아니라, 로메르드의 왕인 베르티노 전하께 온 소식 입니다. 형은 델 카타롯사 군을 패퇴시킨 동시에, 로메르드와 델 카타롯사 사이에 그 어떤 접촉도 없기를 바라기에 그리 전한 것입니다. 약한 로메르드로서는 눈치 보면서 몸 사릴 수밖에 없고요. 하지 만 선배께서는 그 곳의 일이 델 카타롯사의 패배로 끝나면, 그리고 따로 가기로 정하신 곳이 없다면 와 주셨으면 좋겠다고 하시는 군요." "예의상 하는 말인가?"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지금 선배님께는 믿을 사람이 별로 없 고, 그럼에도 외국인인 당신을 부르고 싶다는 건 그만큼 믿고 계신 다는 뜻이니까요." "아하, 이제야 내 가치를 제대로 인정한다는 거군." "예전부터 인정은 하고 계셨습니다. 치근덕대지만 않았다면, 제대로- 또는 꽤 높이 평가해 주셨을 겁니다." "잘난 체 하지 마. 네놈보다는 여자들한테 인기 좋았으니까." "지금 우리는 켈브리안 선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 그분 외의 다른 여자분들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분들께 인기 좋은 것과, 선배님이 당신을 좋아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라고 생 각하는 데요." 슈마허는 아킨과 '여자문제'로 더 이야기하다가는 이른 나이에 고혈 압을 얻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건- 정오까지 여기 있어보겠다. 칼리토 대공왕으로부터 어떤 명 령이 도착할지 모르니까." "로메르드로 진격하라는 명령은 오지 않을 테니, 그냥 이곳에서 기다 리시는 편이 좋을 듯 한데요." "알고 있어. 게다가 로메르드는 가만히 있을 테지만, 델 카타롯사의 사정은 시시각각 빠르게 변할 테니 그 편이 낫지." "그런데 별로 당황하지도 않으시군요. 저는 놀라서 펄쩍 뛰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아킨이 의외라는 듯한 눈빛이자, 슈마허는 얼굴을 콱 찌푸렸다. "내가 밤낮 켈브리안에게 치근덕대는 것만 봐서 나를 과소평가하는 것 같은데, 왕이 졌다고 호들갑 떨다가 일 망칠 정도로 바보는 아 니란 말이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실감은 잘 안 나지만." "얄밉게 좀 말하지 마!" 제일 자주 듣는 핀잔 중 하나라, 아킨은 신경 쓰지도 않았다. 슈마허 는 푸르르 한숨을 내 쉬고는 머리카락을 휘저었다. "하지만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군. 칼리토 대공왕이 암롯사에게 당 한 걸 생각하면 불쌍할 지경인데, 사이러스 대공왕을 붙들고 이제 복수에 성공했다 안심하니 휘안토스에게 패하다니." "어차피 세상에는 동정심 같은 건 없습니다. 누가 제일 불쌍한가, 따 위는 신경 쓰지도 않아요." "어린놈이 벌써 빈정대면 어쩌려고 그래. 이만큼 고생하고 있으니 언 젠가는 이마안큼 보답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게 어린 놈 본능 아냐?" "언제나 잃은 건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고, 잃은 것만 생각하다 보면 얻을 것도 잃게 되더군요. 그러니 동정심은 없다는 겁니다. 누구나 잃다가 얻고, 얻다가 잃게 됩니다. 운명이라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지만, 적어도 잃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른 것을 얻을 자격 같은 건 없더군요." "어린놈이 늙은 티내기는." "좀 독특하게 살고 있으니까요." "어린놈이 어린 티내면 쥐어박아 버리고 싶지만, 어린놈이 늙은 티내 면 어른으로서는 얄밉다. 가끔 귀여움 좀 떨어 봐. 믿을만한 어른 들은, 의외로 그런 모습에 기뻐하니깐 말이다. 그래도 내가 이 녀석 을 잘 보호하고 있구나, 잘 키우고 있구나, 앞으로도 더 많이 도 와주겠다- 뭐, 이렇게 생각한단 말이다." "다 컸습니다." "고작 열여덟이지." "열아홉입니다." "그래도 스물도 안 되었잖아." "늙어서 좋겠습니다." "........" 상황은 심각한데, 왠지 웃음이 피식 피식 나온다. 암롯사의 왕자와 자신의 용병대장중 하나가 시시덕대고 있다는 것은, 델 카타롯사의 칼리토 대공왕이 본다면 편두통으로 쓰러질만한 광경이긴 했지만 그래도 슈마허는 즐겁기는 했다. 사실, 이 꼬마 녀석이 예전부터 재미있는 녀석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일단은 델 카타롯사로부터 연락이 올 때까지 시간이 있으니까, 잠시 로메르드에 들른다. 어차피 그게 내 일이고, 도움이 필요한지 아닌지 여부를 판단하면서 잠시 로메르드에 발붙이고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그리고 그녀가 어떤지 보고 싶고, 또 너에게 당부할 것 도 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따로 당부하는 건 대체 뭡니까?" "들어 보면 알아. 그리고 그건 네가 켈브리안 공주와 어쩌고 있었느 냐에 따라 내용이 확확 틀려지니, 지금 말해줄 수도 없다." 아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가 배 쪽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 들자, 유람선이 저절로 방향을 틀고는 전함 쪽으로 다가왔다. 거의 바짝 닿을 듯 가까워지자, 아킨은 난간을 밟고는 배 위로 뛰어 올랐다. 꽤나 놀라운 실력이라 슈마허는 솔직하게 놀라움을 표했다. 아킨이 말했다. "말씀하시고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아킨은 배의 난간에 걸터앉았다. 그 여유 넘치는 모습 에, 슈마허는 기가 찼다. 저 꼬마 녀석이 예전보다 몇 배로 재미있 어진 것 같다. **************************************************************** 작가잡설: 가엾은 세냐아아!! (어떤 의미에서?) 동생이 '내사랑 싸가지'를 보고 오더니 하는 말, '감독은 모가지!'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9장 **************************************************************** [겨울성의 열쇠] 제279편 별이 지는 아침#2 ***************************************************************** "어서 와요, 슈마허." 켈브리안은 먼 곳에 있던 오빠가 돌아온 듯 환한 얼굴로 슈마허를 반 겼다. 너무나 오랜만에 보는 화사하고 밝은 얼굴이기에, 슈마허는 자기도 모르게 팔을 벌리고 말았다. 그러나 켈브리안은 그것 까지 는 허락하지 않았다. "팔 내려요." "맙소사, 너무하는 거 아니오? 몇 달 만에 만난 약혼자에게, 이런 괄 시라니." "파혼한 약혼자에게 무슨." 켈브리안은 그의 볼에 키스하고는 한 걸음 물러났다. 봄 햇살 속에서 빛나는 금발의 그녀는, 슈마허에게 정말 너무나 아름 다워 보였다. 검은 옷차림에, 그저 땋아 내리기만 한 머리카락을 검은 리본으로 묶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무사히 있다 는 것 하나만으로도 기쁘다. "어머니 일은 정말 안 됐소." "네........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살아 있을 때는 온갖 괄시를 퍼부어 대던 브리올테 대비였지만, 정작 가버리고 나니 '그래도 나한테 잘해 준 적이 없지는 않았지.' 하고 용서하게 되어 버린다. 물론 누구나 그렇다. 그 사람이 세상에 더 이 상 영향을 미칠 수 없게 되면, 그만큼 너그러워지게 된다. 산자의 여유랄까. "힘들 때 옆에 없어서 미안하오." "아키가 와 줬어요. 그리고 아키에게는 정말 큰 신세를 졌지요.....또, 전혀 의외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기도 했고요." "누군지 물어본다면 이야기가 정말 길어지겠군." "급하지만 않으시다면 천천히 해드릴 텐데, 정오 전에 돌아가야 한다 면서요? 오래 잡지는 못하니까, 그냥....... 좋은 이야기만 하다 가 세요." "좋은 일이 없었는데 좋은 이야기가 나오겠소. 오는 내내 티격태격 하긴 했지만, 어쨌건 그 꼬마 왕자님에게 정말 감사해야겠군. 다시 한번 말하는데,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오." "이제 꼬마가 아니에요. 내년이면 스무 살이고, 그러면 정말 어른인걸 요." "그리고...... 그 꼬마가 남자나이가 되면 결혼할 생각이오?" 켈브리안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나한테 미안하게 생각할 것 없소. 말 했지. 다른 남자라면 몰라도, 그 왕자 녀석이라면 다 괜찮다고." "대체... 왜 그만은 용서할 수 있는 거죠?" 슈마허는 '그'라는 말에 가슴 깊은 곳이 쓰려왔다. 무언가가 엄청나게 변해버렸고, 그것은 슈마허의 손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많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그였지만, 정작 원하는 것은 마음대 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모시던 레이디를 시집보내는 무력한 소년 기사마냥 가슴 아프다. "당신이 좋아하니까. 그리고 당신은,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과는 아무 리 어려운 일들이 있어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 이니까- 그러니까 그 꼬마 왕자만은 용서할 수 있는 거요." 켈브리안의 눈이 젖어 들어갔다. "고마워요." "뭘. 다른 모든 여자를 다 꼬실 수 있건만, 정작 사랑하는 여자의 마 음은 놓치는 건 내 능력 탓이지. 뭐랄까, 제대로 해 보려고 하면 언제나 꽝이랄까." "그 면에 있어서는 저도 마찬가지네요."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켈브리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저, 고백해 봤어요." 슈마허의 눈 안에 고이는 어두움을 켈브리안은 놓칠 수 없었다. 속내 가 들켰다는 것을 알게 된 슈마허는 큼큼 헛기침을 하고는 애써 감 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그래서.........뭐, 보아하니 서로 통했나 보군."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죠?" "보시오. 저 꼬마 왕자가 당신을 대신해서 나를 마중 나오고, 당신을 대신해서 나를 데리고 와서는, 할 테면 해 보라지 하는 식으로 당 신과 나를 단 둘이 있게 해 주었지 않소. 마치 옛 남자 정리하라고 하는 듯. 이거 누가 봐도 예비 신랑의 행태인데?" 켈브리안은 조용히 웃었다. 볼도 발그레하게 물들어서, 슈마허는 그 녀를 보며 웃고는 있었지만 속마음은 어디 술집이라도 가서 술 퍼 마시거나 말랑한 것 있으면 다 때려 부수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악, 젠장! 하면서 말이다. "사실 아무 답도 못 들었어요." "아니, 왜?" "고백 하고 나니... 일곱 살 때 아버지 엉덩이를 가지고 농담했을 때 이후로 그렇게 썰렁한 건 정말 처음이었어요. 얼굴이 딱 굳어서는, 꼼짝도 않고, 말도 않고! 그렇게 각자 한곳만 노려보며 두 시간을 앉아 있었다니까요." 슈마허는 기분이 좋아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자, 자신에게 꽤나 실 망했다. "그리고 간신히 헤어져서, 다음날 아침에 만나려고 기다리는데......." "기다리는데?" "세상에나 아침 먹고 체했지 뭐예요. 어제 하루 종일 복통으로 누워 있었단 말이에요!" 슈마허는 더 기분이 좋아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어, 역시나 자신에 게 실망해야 했다. 웃으면 안 되는데, 하고는 생각하는데 입 꼬리가 자꾸 올라가는 건 정말 어쩔 수 없었다. "그, 그래서......끝이오?" "물론 아니죠. 어제 델 카타롯사의 소식이 전해졌고, 거의 동시에 당 신이 나셀을 건너 소반도로 온다는 소식도 듣게 되었지요. 그래서 복통에 지쳐 쓰러져 잠든 아키를 두들겨 깨워서 부탁한 거에요. 아키 는 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배나 빌려 주세요....어쩌고 하더니 당신을 마중 나간 거지요." 그리고 켈브리안은 슈마허를 바라보며 슬쩍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요?" "푸-" "푸? 답이 뭐가 그따위에요?" "그렇다면 푸, 하하하하~~ 하고 비웃어 줄까? 그것 보다는 낫잖소." 켈브리안의 눈 꼬리가 올라갔다. "됐네요! 하지만, 적어도 제가 어떤 존재라는 건 분명히 알았어요." "뭐요?" "루피니아와 대략 비슷한 관계죠." "좋군." "미안하지만, 여신을 경애하고 숭배하는 사람은 많아도 그녀와 결혼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어요. 그리고 그 극히 드문 사람들은 인세로부터 격리수용 되어 있고요. 다 신전 아니면 병원 에 있을 테니까." "결론이 뭐요? 채였다는 건가?" "모르겠어요...... 정말 채인 건지, 아니면 놀라고 당황해서 허둥대는 건지. 하지만.....예전에 그가 체해서 몸져누웠던 게 딱 한번 있었 어요...... 압셀론의 졸업 무도회 때, 제 파트너로 아키를 지목했었는데.. 그날도 복통으로 누워 버렸지요. 무도회는 꽝 나 버렸고, 나는 그 녀석 간호하면서 하루를 다 보내버렸지요. 하루 종일 제일 많이 한 말이 죄송해요, 죄송해요, 였단 말이에요." "즉, 열두 살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는 거요? 이런....그 런 남자는 그냥 차 버려. 다 늙어서 애 하나 더 키울 일 있소?" "귀여운 애라면, 열이라도 키울 수 있지요." "갑자기 애가 되어 버리고 싶군." 켈브리안은 슈마허의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가고는 몇 번 툭툭 쳤다. "자, 이제 그만 놀려요. 아키는 아직 자기가 컸다는 걸 모르는 것뿐이 에요. 자신의 위치가 별 볼일 없다는 것만 끝없이 생각하다 보니까, 나아지는 것만 생각하지 자기가 어디까지 올라왔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거에요. 그런 아이니 정작 어른 대접을 해 주면 '맙소사, 저 는 정말 모자라는 놈이에요!' 하고 놀라 버리는 거죠." "그리고 급체인가?" "괜히 얘기했군요. 언제까지 가지고 놀까 몰라........ 정말 최악의 심술 쟁이에요." 슈마허는 팔을 깍지 껴 머리에 대고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직 희망이 아예 없는 건 아니군. 어쨌건, 그 왕자가 당신 버리고 달아나면, 그 때는 정말 내게 와 주시오. 바보짓만 하는 바보 기사는, 아름다운 공주님의 키스 한번에 모든 노고를 잊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잘 되거든, 정말 행복해 지시오. 나는 좀 더 잘해줄 수 있었는데 말이야, 하고 날밤 까는 일은 종종 있을 테지만 그래도 엉뚱한 남자 품에서 울고 있는 것 보다는 천배는 나을 거요." "고마워요, 슈마허. 당신 같은 사람과 알게 되어, 정말 기뻐요." 아니지, 아니야. 슈마허는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루어져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면, 그로서 슈마허의 희망은 완전히 끝나버리는 것이다. 차라리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남자와 정략결혼을 한다면, 그러면 적어도 그녀에게 자신이 필요하 기는 할 텐데. 속 좁다, 정말. 서른다섯이나 먹어서, 열아홉 살짜리 꼬맹이를 이렇게 치사하게 질투하다니.... 하지만 세르네긴은 유제니아와 결혼할 테고, 아킨 녀석은 이 켈브리 안 공주와 결혼한다면, 혼기 놓치고 궁상떠는 노총각 슈마허만이 남게 된다. 그리고 그 생각을 하자, 슈마허는 자신의 속 좁음을 탓 하면서도 눈물나게 억울해 지기 시작했다. 내가 뭐가 부족해서 이 나이 되도록 독신이란 말인가!! "그런데 아키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 있었지." "브리깃의 홀에서 기다리라고 했으니 같이 가요. 아, 단 둘이 해야 하 는 말인가요?" "아....별 말 아니었소. 그냥 당신을 잘 부탁한다는 말인데- 뭐, 따로 말할 필요는 없겠네." 그리고 그렇게 말하며, 잘 하는 건지 확신하기 어려웠다. 그가 할 말 은 테시오스가 반드시 전해 달라 당부한 말이었건만, 정말 그 말을 해서 아킨이 긍정적인 답을 한다면 상황은 당장에 꼬여버리게 된다. 델 카타롯사가 이기던 지던 상관은 없지만, 이 상황에서 아키가 암롯 사의 왕이 된다면-(방법은 도저히 떠오르지 않지만, 어쨌건 테시 오스의 호언장담대로 성공하기나 한다면), 켈브리안과의 결혼은 물 건너가는 것이다. 암롯사의 숨겨진 왕자와 로메르드 공주와의 결 혼은 누구나 축복해 줄 수 있지만, 암롯사 왕과 로메르드의 유일한 공주이자 왕위 계승서열 1위인 공주와의 결혼은 에크롯사와 베넬리 아, 더불어 모든 제국의 경계를 부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해서 이 공주가 다른 사람 손 붙잡고 가는 것 돕는 다고 생각하니, 정말 굉장히 한심했다. 아아, 백번 복창해라, 난 바보! 하고. **************************************************************** 작가잡설: 300회 넘어가겠다;;; 엊그제 괴수고양이동의 모 님 댁에 다녀 왔습니다. 그곳에도 짜이라는 귀여운 샴이 한마리 있었는데, 죙일 주물럭 주물 럭 대고 오는 길에 동생과 열띤 토론을 벌였습니다. 동생-역시 자룡이가 세상에서 제일 이뿐 썀이야. -_-! 눈도 크고 귀도 크고 코도 크고 발도 더 도톰하고! 아울-땅콩알이 없잖아. -_- (짜이는 '남자'였습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9장 *************************************************************** [겨울성의 열쇠] 제280편 별이 지는 아침#3 **************************************************************** 승전 소식이 전해진 암롯사 대궁전은 아침 일찍부터 시끄러워졌고, 그 안에는 분명 환호와 기쁨이 담겨 있었다. 성 곳곳에 은빛 깃발이 걸려 햇살에 반짝였고, 놋쇠 물에 넣어 놓은 듯 우중충하기만 하 던 분위기가 봄 햇살에 녹듯이 환하게 변해 버렸다. 기사들은 어깨 를 들썩이며 기뻐하고, 젊은 시녀와 시종들 역시 잔뜩 들떠서는 만 날 때마다 뭐가 그리 좋은지 큰 소리로 떠들어댄다. 역시나 이겼네. 유제니아는 울적해졌다. '승리는 옳은 사람이 아니라, 옳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웃어 주는 법이다.' 라고 아버지가 말씀하시곤 했지만, 이 경우는 대체 뭔지 모르겠다. 옳든 옳지 않던, 그리고 그가 꽤나 잘난 왕자님이고 이 암롯사에 대한 책임도 막중한 사람이던 말던, 어쨌건 그는 유 제니아에게 있어서는 죽일 놈, 이상의 가치는 없었다. 예전처럼 엉망 진창이 되지 않은 것은 순전히 이 악물고 있는 덕일 뿐이다. 세르 네긴이나 아킨 옆이라면 얼마든지 무너질 수 있건만, 적어도 휘안 토스 앞에서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망가지는 모습은 더 이상 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더 망가질 곳도 없이 비참한 꼴은 충분하 고도 남을 정도로 보였으니까. 유제니아가 그렇게 생각하며 봄볕 내리쬐는 정원을 보고 있는데, 시 녀가 노크와 함께 들어와 식사를 가지고 왔다. 들어가도 되는지 마 는지 묻지도 않았다. 어차피 방 안에는 유제니아 하나뿐이고, 그녀 가 하는 일이라고는 자수와 독서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이 웃는 얼 굴이 귀여운 통통한 시녀가 워낙에 정확한 시간에 식사를 가지고 오는 지라, 유제니아는 이제는 그 시간만 되면 적당히 준비하고 앉아 있고는 했다. 시녀가 활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식사하세요." "감사합니다." 시녀는 테이블 위에 식사를 차리고는 자수틀 안에 있는 것을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소문대로 어느 양가댁 규수이신가 보네요. 정말 훌륭하세요." 한번 남자 셋 데리고 살아 보세요, 당연히 하게 되지- 하는 말이 목 구멍까지 나오기는 했지만 유제니아는 방긋 웃었다. "그런데 왜 그런 소문이 났나요?" "언제나 얌전하게 자수를 놓으신다거나 책을 읽으신다거나 하는데다 가, 모두에게 친절하시잖아요. 게다가 휘안토스 님께서 정말 정중 하게 대하시지요. 저희들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답니다." 정중하게- 그래, 참 정중하기는 하다. 사람들 보는 앞에서만.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들 앞에서는 한없이 정중하게 대하지만, 밤이 오고 불이 꺼졌을 때 말없이 덮쳐왔었다. 묻지도, 망설이지도 않고, 눕히고 짓누르고는 거칠고 난폭하게 가져 버렸다. 싫다고 울부짖어 도 한번 신경 쓰지도 않았다. 망할 자식- 그리고 새벽이 되면 거 들떠보지도 않고 나가 버린다. 간식으로 나온 사과를 한입 베어 물 고 버리듯이.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나이 열여섯에 누군가의 여자가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고, 그 남자 가 왕자일 거라고는 더더욱 생각도 못했고, '그런 방식'이 될 거라 고는 더더욱 생각지 못했다. "식사 안 하세요?" "아, 네." 입맛이 삭 달아나 버렸다. 유제니아는 스프를 떠먹고, 빵을 조금씩 뜯어 먹으며 생각했다. 이대로 있으면 그가 놔줄까? 자, 이제 또 돌아가서 세르네긴과 함께 울기나 하라고, 하며 보내주는 건가? 하지만 유제니아는 그가 절대 그러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예전에는 분명 그럴 거 라 생각했기에 보내줄 테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 보내봤자, 원한 을 자유로이 풀어주는 것뿐이라는 것을 잘 알 것이다. 유제니아는 빵 조각을 입에 밀어 넣었다. 예전에 뉴마르냐에서 먹던 거친 빵과는 완전히 다른, 입안에서 녹아 들 듯 부드러운 빵이었지만 지금의 유제니아에게는 목구멍에 넘기는 것조차 힘들 정도였다. 문득 손목 을 보니, 예전보다 훨씬 말라 있었다. "저.......전쟁이 어떻게 됐죠?" 결국 유제니아는 무언가 이야기라도 꺼내보고 싶어 그렇게 시녀에게 물었다. 시녀는 유제니아의 잔에 물을 따라주고는 말했다. "이겼어요." "어떻게요?" "휘안토스 님께서 델 카타의 왕을 패퇴시키고, 지금 카티온으로 진격 하시고 계신다 하세요. 조만간 사이러스 폐하께서 하셨던 일을 또 이루실 거에요. 정말 훌륭한 부자지간이지 않나요? 저희 나라의 임 금님과 왕자님이시라는 게 너무나 자랑스러워요." 그렇다면, 카티온을 포위하려나? 그러면 조금 오래 있다가 오겠네? 포위하고 항복받아내고...... 다 깔끔하게 처리하고 오면 적어도 두어 달은 궁을 비우겠다. 아하, 좋네. 그 동안 얌전한 척 하고 있으면 빈틈은 분명히 생길 것이고, 그 틈에 빠져나가자고. 아니, 마음만 먹는 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도망칠 수 있어....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자 친절한 시녀에게 미안해졌다. 유제니아가 도 망쳐 버린다면 이 여자를 가만히 놔둘까? 정말 모진 일을 당할 지도 모르고, 아무 일도 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 쫓겨나기는 할 것이다. 어쨌건 그녀의 할 일은 유제니아를 보살피고 감시하는 것이 고, 유제니아가 사라지면 그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고......아가씨, 아가씨에게 전하라는 이야기도 있었어요. 약혼자 분께서 잘 계시는 것을 확인했으니, 안심하고 있으라시더군요." 유제니아는 어색하게 웃었다. 맥박이 갑자기 빨라지기 시작했다. 방 금 전에 입안에 넣었던 모든 것을 게워내고 싶을 정도로 속이 꽉 막힌 듯 답답해진다. "아가씨?" "아, 아뇨. 다....다른 말은 없었어요?" "그 분께 아가씨 안부를 전했다고 하셨어요." 그리 말하고는 시녀는 부드럽게 웃었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휘안토스가 세르네긴에게 무슨 말을 했을 지, 유제니아는 듣지 않아도 잘 알 수 있었다. 순간, 유제니아는 시녀의 환하게 웃는 얼굴에 소름이 오싹 끼쳤다. 유제니아의 안색이 새파랄 텐데도, 그녀는 마치 유제니아가 아무렇 지도 않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덜덜 떨고 있어 그릇과 스푼이 달그락대고 있는데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다. 너무나 이상하다. "저, 저기...... 지금은 입맛이 별로 없어요. 가져 가 주시겠어요?" "그러지요." 그녀는 친절하게 말하고는 그릇을 치웠다. 그리고 그 시녀가 그릇을 다 치울 때까지 유제니아는 토해버리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으며 오늘 밤이라도 당장에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단 하루도 더 참을 수 없었다. 바로 옆에 휘안토스가 있는 듯이 두렵고 오싹하고, 동시에 끔찍했다. 슈마허의 일정은, 결국 하루를 넘겨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까지 이어져 정오를 넘기고 점심식사 까지 한 후에, 결국에는 등을 떠밀며 으르렁대는 아킨에게 끌려 타고 왔던 배에 다시 타야 했다. 롬파르의 선착장에서 켈브리안은 웃으며 슈마허를 배웅했고, 슈마허 는 지금 당장 배에서 뛰어내려 그곳까지 헤엄쳐 가고 싶다는 욕망을 간신히 억누르며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야 했다. 선착장은 금방 멀어졌고, 검은 옷의 켈브리안 공주도 까만 점처럼 작 아지더니 굽이치는 강 너머로 사라졌다. 어느덧 배가 체놀비에 이 르자, 슈마허는 관광이라도 온 듯 갑판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배의 난간에 앉아 바람과 해류를 조정하며 배를 몰던 아킨은 그런 그의 모습에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암살이다 뭐다 하시던 분이, 굉장히 편하게 구시는 군요." "점심을 너무 많이 먹어서......아, 졸리는 군. 우리 그냥 여기서 한숨 자고 떠나는 게 어때?" "어제 베르티노 왕을 만나 뵈었잖습니까. 하룻밤 자고 가는 것도 굉 장히 언짢아 하셨는데, 그렇게 지체한다면 보기 안 좋아요." 어린 왕은 슈마허를 아주 싫어하고 있었다. 소년의 기억 속에 슈마허 쉐플런은 누나와 결혼하려고 어머니 브리올테를 돕고, 또 켈브리안과 억지로 약혼한 '나쁜 아저씨'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베르티노가 저 녁 식사 내내 어떻게든 아킨 편을 들어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에, 아 킨은 어색하게 웃기만 해야 했고 슈마허는 대놓고 비웃으려다가 켈브리안에게 꼬집히고 말았다. 그러나 처남삼고 싶은 꼬마에게 감점 이 되다 못해 극한의 마이너스 점수까지 받아 버린 건, 참으로 서 러운 일 이었다(게다가 옆에는 최고점수에 가산점까지 받은 녀석이 있고). "공주랑 결혼할 거냐?" 그러나 아킨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슈마 허는 몸을 돌려 눕히고는 목소리를 높였다. "어이- 공주랑 결혼할 거냐고." "제 일입니다." "들을 권리는 있다고 보는데." "말할 의무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말은." "저와 선배사이의 일입니다. 억측도 하지 마시고, 기대도 하지 마십시 오." "기대는 안한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를 좋아하기는 하는 거냐?" "좋아합니다." "얼마나?" "제 어머니보다도........물론 제대로 사랑했다면요." 슈마허는 벌떡 일어날 뻔 했다. "어렸을 때 기대조차 해 본 적 없었습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나를 좋아해 줄 거라고는, 그리고 좋아할 수 있을 거라고는. 그 분이 해준 일은, 소소한 것 하나라도 제겐 소중한 추억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저는 언제나 그 분이 행복하기를 바랬습니다. 열두 살 때 헤어진 후에도, 그리고 다시 만나기 힘들 거라고 생각하던 그 때에도, 연 락 할 방도조차 몰라도..... 그래도 어딘가에서 행복하기를, 저를 기억해 주기를, 그리고 그분께 제가 조금은 의미 있는 존재이기를 바 랬습니다. 좋아하니까요, 너무나....." "그렇다면 왜 확실하게 답 안 해준 거냐?" 아킨은 해류를 더 빠르게 했다. 돛대는 터질 듯 부풀어 오르고, 누워 있는 슈마허의 머리카락까지 날렸다. "어이-" "모르겠습니다.......정말 모르겠어요. 무엇이 좋은 건지,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켈브리안 선배를 실망시키지 않고, 불행하게 하지도 않고, 진실로 대하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저는 언제나 그 분께 아무것도 해 드릴 수 없다고 생각했고, 그랬기에 그 분이 이렇게 내민 손앞 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겁니다." "겁나는 거냐?" "그렇다고 봐야지요." 슈마허는 괜히 씁쓸해져서, 그저 화제를 돌리고 싶은 심정에서 자기 도 모르게 말했다. "설마, 다른 여자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런데 아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조금 젖히고 하 늘과 바다를 가늠하며 앉아 있을 뿐이었다. 아무 말도 없었고, 슈마허는 자신이 아주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 다.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설마, 정말 있는 거냐?" "다 왔습니다." "있냐고 물었어." "다 왔....." 슈마허의 검이 아킨의 목에 와 닿았다. 아킨은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 게 눈을 들어 슈마허를 똑바로 볼 뿐이었다. "있는 거냐고 물었다." 금빛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진정으로 미안해하는 눈빛이었고, 그 눈빛에 슈마허는 힘이 쭉 빠져 나가 버렸다. 그리고 아킨은 입을 열려 했지만, 그러다가 갑자기 그의 눈이 커지며 하늘을 향했다. 슈마허도 그 쪽을 보았고, 햇살이 순식간에 꺼지며 거대한 그림자가 배를 덮었다. 거센 바람이 바다 를 쓸고, 배가 넘어질 듯 크게 기우뚱했다. 아킨은 급히 배를 바로 잡으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꽉 잡아요!" 아킨은 그렇게 외치고는 난간을 움켜잡았다. 파도가 치솟으며 배의 갑판위로 쏟아졌고, 슈마허는 흠뻑 젖어버렸다. 젠장, 슈마허는 험 악하게 외치고는 하늘을 보았다. 거대한 그림자가 날개를 뻗치고 그 들 위에 떠 있었다. 슈마허가 외쳤다. "휠테스!" **************************************************************** 작가잡설: 이 상황에서 제일 불쌍한 삽질은 누구의 삽질일까요~~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9장 ************************************************************** [겨울성의 열쇠] 제281편 별이 지는 아침#4 *************************************************************** 휠테스는 하늘위에 떠 있다가 서서히 해면위로 내려왔다. 파도가 또 한번 배를 뒤집을 듯 높이 솟구쳐 갑판으로 쏟아지는 바람 에 슈마허는 다시 흠뻑 젖어 버렸고, 아킨은 간신히 바닷물을 피하 기는 했지만 금방이라도 바다로 쓸려 내려갈 듯 위태위태했다. "빌어먹을, 그 할망구 위에 세냐 너 타고 있으면 당장 내려와--!" 슈마허가 천둥보다 크게 외쳤다. 그러자, 휠테스의 목 위에서 검고 날렵한 그림자가 뛰어 내려와 젖은 갑판 위에 착지했다. 세르네긴 이었다. 그가 내리자 휠테스 역시 본체를 거두고는 갑판 쪽으로 내려왔다. 그 녀의 은빛 머리카락이 젖은 갑판을 쓰는 순간에, 축축했던 갑판은 방금 창고에서 꺼낸 듯 말랐다. 그녀는 먼저 내려온 세르네긴에게 다가가 그 팔에 손을 얹었다. 세르네긴의 팔은 어깨 조금 아래 부분이 붕대에 단단히 감겨 목에 매 어져 있었다. 휠테스가 손을 얹은 부분은 정확히 그곳이었다. 그 부상에 슈마허가 놀라 물었다. "세르네긴, 너 어떻게 된 거냐." "델 카타롯사 칼리토 대공왕의 명으로 왔습니다.... 즉시 회군하여 카 티온으로 돌아 오라십니다." "예상하고 있었다. 이유도 잘 알아. 이 왕자님에게 잔뜩 들었으니까." 그리고 슈마허는 아킨을 가리켜 보았다. "하지만, 그것 보다는 팔은 어떻게 된 거냐?" "그저께 전쟁에서 다쳤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 큰 상 처는 아니니까요." 슈마허는 한눈에 그 상처가 그리 가소로운 상처가 아니라는 것을 알 아챘다. 세르네긴은 고개를 숙이며 조용조용 말하고는 있었지만, 눈가는 거뭇하고 안색은 햇살 아래에 있음에도 창백하다. 게다가 휠테스는 세르네긴의 상처에서 눈 한번 떼지 않고 있었다. 그 차가 운 여자의 눈 안에 잔뜩 들어있는 걱정을, 슈마허는 어렵잖게 찾아 낼 수 있었다. "어떻게 된 거냐." "대수롭지 않은 겁니다. 며칠 쉬면 낫습니다. 그 보다는....." "솔직하게 말해!" "정말 별 거 아닙니다." 그 때 아킨이 성큼 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휠테스가 말리기도 전에, 세르네긴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순간 세르네긴의 얼굴이 무섭도록 창백해졌다. "별 거 아닌 건 아니군요." 그 말에 세르네긴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휠테스는 물론, 슈마허조차 그렇게 칼날처럼 차갑고 매서운 세르네긴의 눈빛은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세르네긴은 그대로 쓰러졌다. "세르네긴!" 휠테스가 그를 부축했지만, 이미 기절해 버린 뒤였다. "이봐, 할망구. 어떻게 된 거야. 당신은 알고 있겠지?" 휠테스가 싸늘하게 슈마허를 노려보고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가소롭지 않은 상처인 건 사실이야, '중늙은이'. 잘렸으니까." "당신 보다는 젊어, 할망구." "무엇이든 수명 기준이야. 너는 인간 중에 중늙은이지만 나는 드래곤 중에서는 '소녀'에 해당된다고. 그리고 너, 내가 방금 전에 잘렸다고 말 한 거 듣기는 했어?" "당연히 들....뭐?" 슈마허는 급히 세르네긴의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이 창백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붙어는 있는 것처럼 보였다. 슈마허가 별로 안 믿 어진다는 눈길을 보내며 그것을 가리키자, 휠테스가 한심하다는 눈 빛으로 쏘아보고는 말했다. "내가 치료하기는 했지만, 아직 멀었어. 적어도 한 달간 꼼짝 않고 있 어야 하는데 온 거라고--!" "대체 누구 짓이야? 그냥 전쟁 통에 휩쓸려서 그리 된 거라고는 도저 히 믿을 수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라면 몰라도 세냐에게는 절대 불 가능하다고." 휠테스는 아킨을 가리켰다. "저 꼬마의 빌어먹을 형." "그........" 그러나 아킨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휠테스가 사납게 말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만들 해! 지금 세르네긴은 환자야! 나한테 무슨 일 이냐고 다그치는 것 보다 눕혀 놓는 게 우선이잖아!" 결국 배는 멈추어 버렸다. 휠테스는 세르네긴을 부축하여 갑판 아래로 내려갔고, 할망구니 중늙 은이니 티격태격 하던 휠테스와 슈마허는 서로 쏘아보기만 할 뿐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해가 수평선에 걸리고, 바다와 하늘이 온통 벌겋게 타오르다가 마침 내 검푸른 수평선 근처에만 실오라기 같은 빛줄기 한 움큼만 남길 무렵, 드디어 세르네긴 옆에 찰싹 붙어 있던 휠테스가 올라왔다. "깨어났습니까?" 그러자 휠테스는 예전과는 달리 꽤나 쌀쌀맞게 말했다. "세르네긴이 너한테 할 말이 있다는 데." "나도 같이 가지." 슈마허가 끼어들자 휠테스는 그를 서릿발처럼 노려보고는 말했다. "같이 갔다가는 당장에 바다에 집어 던져 버릴 거야." 슈마허는 그녀의 날씬한 팔목을 비웃듯 보고는 이를 드러냈다. "던져 보시지?" "이런 모습이라도 내 힘은 본체와 맞먹어. 즉, 지금 이 두 손으로도 네 두개골과 뇌수를 주물러 줄 수 있다는 말이야. 해 볼 거야?" 그리고 그녀는 손톱이 뾰족한 손을 내밀어 보였다. 슈마허는 태평한 척 그 손을 흘끔 보고는 고개를 돌렸지만, 침을 꿀꺽 삼키는 것 까 지는 감추지 못했다. 아킨이 그런 둘에게 말했다. "저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그리고... 말씀 드려야 할 일이라면 돌아와 서 해 드리겠습니다." "세르네긴이 네 팔 달라고 할 일은 없을 테니 걱정은 안 해. 그리고 나를 빼는 건 정말 나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일이라 그러는 걸 테니, 말할 필요까지는 없다. 하지만 네가 판단하기에 정말 큰일이거든 내게 말해." "알겠습니다." 아킨은 그리 답하고는 갑판 아래로 내려갔다. 여왕의 유람선으로 이용되던 배였다. 켈브리안이 그 배로 슈마허를 마중 보낸 것은 그만큼 슈마허에 대한 예우를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배였기에, 갑판 아래는 궁전 하나를 들어내 온 듯 호화롭고 또 아늑했다. 침대는 없었지만, 늘어지게 쉴 수 있는 툴칸 식 긴 의 자와 방석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세르네긴은 그 중 긴 의자 위에 누워 있었다. 그는 한 손을 이마에 얹고, 다친 팔은 가슴 위에 얹 은 채 아킨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킨은 그의 눈이 처음 그를 보았 을 때보다 더 건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르셨습니까." "인사는 생략하겠습니다. 이런 모습으로 뵙는 것은 양해 바랍니다." "괜찮습니다." 아킨은 그의 머리맡에 앉았다. 세르네긴은 그가 앉자 고개를 돌려 천 장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외면하는 것이다. "괜찮은 배군요. 전혀 흔들리지도 않고." "그리 하도록 '했습니다'. 휠테스 님께서 꽤 까다롭게 구셨으니까요." 세르네긴이 피식 웃었다. "세르네긴, 형을 대신해 사죄드리겠습니다." "사과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 형과의 정식 대결을 하여 제가 진 것 이고, 진 보답으로 이리 된 것뿐입니다. 무기를 쥔다면, 남을 찌르고 베고 쏘아 맞출 수 있는 만큼 자신 역시 그리 될 거라 늘 생각하 고 살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렇게 큰 부상을 입고도 휠테스 님 덕 에 잠시만 기다리면 예전 같은 몸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데 감사합니다." 그리고 세르네긴이 주먹을 꽉 움켜잡았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아킨은 기다렸지만, 그 짧은 시간은 지나치게 길고 무겁게 느껴졌다. 세르네긴이 조용하지만 분노어린 목소리로 말한 것은 잠시 뒤였다. "그가.... 다시 유제니아를 데리고 갔습니다." 몸의 피가 멈춘 듯 했다. 확 얼어붙어 버린다. 아찔하다. 아킨은 정말 기가 막혀서 한숨이 터지고 말았다. 언젠가는 휘안토스가 또 유제니아를 찾아 갈 거라는 건 짐작하고 있 었지만, 이 정도로 빨리 일이 터지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데리고 갔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유제니 아를 데리고 갔다는 '사실' 단 하나 뿐입니다. 그 가엾은 아이가 또 그 잔학한 손에 떨어졌습니다. 어떤 일을 당했을 지는 상상도 하 기 싫습니다. 끔찍합니다." 그리고 세르네긴은 팔목으로 눈을 가렸다. 턱에 가벼운 경련이 일어 났다. "제가 어떤 기분일 지, 이해해 달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당신도 비슷한 기분일 거라 생각합니다." "유제니아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겁니까?" "그건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이라면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제발 그 아이를 구해 주십시오. 지금 당장에라도 구해 주십시오. 단 하루도 그 끔찍한 곳에 남겨 놓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 제 몸은 움직이기조차 버겁고, 또 그 아이가 어디에 있는 지조차 모릅니다. 그러니 부탁드리는 겁니다. 아니, 당신이 해야 합니다...... 당신의 의무입니다." 갑자기 화가 치미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겠는 데, 이 세르네긴이 그리 직접 말하니 옹졸하지만 화가 났다. 차라리 다른 말로 부탁했더라면 더 나았을 것을. "'의무'라 말한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정작 말하니 아킨은 자신이 꽤나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따위 질문이라니. "그는 당신의 형입니다......" "당신이, 형의 죄는 형의 죄일 뿐이라 말하지 않았습니까." "대신 갚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당신은 유제니아가 특별하지 않습니 까? 그리고, 그 특별한 존재가 당신 형에게 망가지는 것을 놔두시 려는 겁니까. 놔두고 싶다면 마음대로 하십시오. 제 피는 말라가겠지만, 그래도 몸이 회복되고 그 아이가 어디 있는지 알아낸다면 찾으러 갈 것입니다. 당신에게 부탁하는 것은, 그 사이의 시간동안이라도 그 아이를 상처 입히고 싶지 않기 때문이고, 조금이라도 지체하다 가 일이 돌이킬 수 없게 될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당 장 찾아 주십시오. 그리고 돌려보내 주십시오." "예전에 그랬듯 말입니까." 세르네긴이 손을 치웠다. 그 눈빛은 더욱 건조했고, 그랬기에 아킨은 그의 생각을 조금도 눈치 챌 수 없었다. 갑자기 막막해졌다. 어둠 속에서 예리한 칼 하나가 튀어나와 목 줄기에 닿은 듯한 느낌이다. "예전이란 언제를 말하는 겁니까. 처음입니까, 아니면 그 다음입니 까." "둘 다입니다." "제가 당신에게 심한 말을 했던 건 사실이지만, 후회하지도 않고 당 연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 아이가 제게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십 니까. 그 아이가 두 살 때부터 저는 그 아이와 함께 살았고, 제 소중 한 어머니는 그 아이를 제게 부탁하셨습니다. 제 인생에 있어 처음 부터 정해진 것이 있다면, 무엇으로든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의무 가 있다면, 그건 그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한 말이었습니다. 당신이 어떤 운명을 누구에게 몰고 오든, 심지어 그 것이 저 자신을 향한 것이라 할지라도 상관없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 아이는 안 되었습니다. 그 아이는 무력하고 어린 소녀고, 당신이 몰고 오는 운명을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 쉽게 망가져 버 릴 그런 아이였어요.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그것이 비록 당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이 될 지라도, 그래도 위험한 운명에 휘말리는 것을 막고 싶었단 말입니다." 세르네긴은 통증 때문인지 숨을 조용히 몰아쉬고는, 한숨쉬듯 말했 다. "아킨토스 님, 그 아이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제가 행복하기 위해서 그 아이가 필요하고, 그 아이가 제 안에서 행복해야 저는 더욱 행복해 질 것입니다. 그 누구도 아닌, 저를 위해 유제니아를 사랑하고, 그랬기에 그 아이를 소중하게 지키고 싶었던 겁니다." "한대 쳐버리고 싶어지는 군요." "당신 역시 마찬가지 아닙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라는 말은 위 선일 뿐입니다. 결국 그 아이를 필요로 하는 건 자기 자신이고, 그 아이가 그런 당신의 마음과 같기를 바라는 것 뿐 아닙니까." "하지만 지금 당신의 말은 결국에는 저더러 알아서 납득하고 희생하 라는 말, 이상도 이하도 아니잖습니까." "그렇습니다." 아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진실을 말해도, 그렇게 해서 어떤 사람으로 보이든 상관없습 니까." "진실은 제게 그 자체의 의미 이상의 상처는 남기지 않습니다. 납득 하니까, 그리고 납득한 다음의 일만을 생각하니까. 저 자신의 이기도, 추함도, 오로지 납득할 뿐이기에 두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피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아킨토스, 당신에게도 똑같이 진실만을 말할 뿐입니다." "잔인하군요." "상처 입기 싫어서 진실을 외면하는 자에게는, 아무런 보답도 없습니 다. 외면한 진실은 칼이 되어 등을 찌를 뿐입니다. 그리고..... 아킨 토스 님, 저는 당신에게 제 진심을 말했습니다. 추할 지라도, 당신에 게 외면당하고 경멸당할 지라도......." 아킨이 순간에 생각한 것은 어둠 숲의 나루에였다. 저리 조용한 눈으로, 배려도 망설임도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진실을 말하는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수정처럼 정결하지만, 정결하기에 정결하지 못한 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상처 입히는 자였고, 그 상처를 왜 받아들이지 못하냐고 차분히 바라보는 자다. 그러나 아킨은 그에게 말하고 싶었 다. 세르네긴, 모든 이가 당신처럼 상처에 단단한 건 아닙니다. 상처 를 당연히 받아들이고, 당연히 짊어지고, 그럼에도 버틸 수 있을 정도로 강한 건 아닙니다. "제가 그녀를 데리고 간다면 어쩌시겠습니까. 당신이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데리고 간다면, 그리고 그곳에서 영원히 같이 살겠다면. 돌려보내 주지 않겠다면." "그것은 그 아이가 선택할 바입니다. 하지만.... 저는 언제나 그 아이가 안전하고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그 아이가 제 옆에 있는 편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기에 이리 부탁드리는 겁니다. 그 아이가 돌아온 그날부터 어떤 지옥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아십니까...... 밤새도록, 정말 날이 샐 때까지 그 아이는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그리고 손을 잡아줘도, 안아줘도, 악몽에 시달리며 언제나 제 이름을 부르더군요...... 밤새도록, 와줘, 어디 있어......무서워! 그렇게 울부짖으며 끝없이 제 이름만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 때 그 순간에 저는 그 아이의 옆에 없었습니다. 안전하겠지, 잘 지내겠지, 그저 그리 생각하고.... 그 아이가 정말 저를 간절히 부르던 순간에, 그 끔찍한 일을 당하던 순간에 가장 필요했던 때에 제가 없었던 겁니다. 그런 일을 당하도록 만든 게 저 자신인데도, 그런데도........" 아킨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잠시 멈추어 서 있었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기에, 아킨은 무언가 말 했을 때는 말한 뒤에야 자신이 무엇을 말했는지 알았을 정도였다.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저는." "......" "저는.... 처음부터, 아니 당신과 만나기 전부터 당신을 동경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만난 뒤에는,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동경했습니다. 당신 의 가장 소중한 그녀가 내 곁에 있을 때, 그녀를 진심으로 원했습니다. 그저 당신의 소중한 존재라는 이유조차 넘어서, 그녀라는 이유 하나만 으로.... 그렇게 제게 그녀는 처음부터 빛줄기 같았습니다." 아킨은 세르네긴을 보지 않았다. 보면 또 무언가 미련이 남아 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 모든 것의 방향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군요." 가끔 주저앉아 버리고 싶은 순간이 있었다. 진실이 거대한 산처럼 바로 앞에 있는 순간이. 그것은 태초부터 뿌리박혀 있는 것이기에, 무엇으로든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아킨은 문을 열고 나갔다. 갑자기 무섭도록 쏟아지는 쓸쓸함에, 가슴 한 덩이가 들어내진 듯 춥기만 했다. ****************************************************************** 작가잡설: 빅토리아 시대 복식만 따로 나온 화집이나 사진집 없을까요... -_-;;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9장 **************************************************************** [겨울성의 열쇠] 제282편 별이 지는 아침#5 **************************************************************** 밤이 새까맣게 다가왔고, 모두가 잠들자 거대한 암롯사 성도 마침내 고요해졌다. 느릿느릿 도망칠 준비를 시작했던 유제니아는, 옷을 다 갈아입자 행 여나 잊은 것은 없나 다시 잘 점검하고는 침대위에 앉았다. 언제 시작할까, 망설여지기는 했지만 결심한 이상 빨리 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유제니아는 침대 옆에 늘어진 끈을 힘껏 잡아 당겼다. 정말 엄청나게 힘껏 잡아당긴 것이기에, 방울 소리가 유제니아의 방 까지 들렸다. 유제니아는 자기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 끈을 놓고는 데이기라도 한 듯 손을 가슴 안으로 당겼다. 가슴이 두근두근 거리 기 시작했다. 당장에라도 그만둬 버리고 싶다. 하지만 가만히 기다 릴 수만도 없었다. 그가 돌아오면 어떤 신세가 될지 뻔한데,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유제니아는 두 손을 꽉 맞잡았다. 제발 엄마, 나 잘하도록 해 주세요- 제발. 다시는 그런 일당하고 싶 지 않아요... 지금만으로도 충분해요. 아니, 지금만으로도 모든 악몽을 한꺼번에 다 꾸어 버린 것 같아요. 밖에서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시작해야 한다는 생 각에, 유제니아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방문을 잠군 자물쇠 여는 소 리가 들린다. 유제니아는 살그머니 문 쪽으로 가서 섰다. 문고리가 삐걱 당겨지며 문이 열리며, 곧 시녀의 동그란 얼굴이 나타났다. 그녀는 유제니아의 차림새를 보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그 옷...." 유제니아는 망설이지 않고 그녀의 목덜미를 세게 내리쳤다. 시녀가 윽, 하고 신음을 삼키며 풀썩 쓰러졌다. 유제니아는 주변을 둘러보아 아무도 없자 시녀를 안으로 끌어다 놓았다. 그러나 유제니아보다 두 배는 되는 몸집이라, 고작 몇 발자국 옮겨 놓은 다음 헉헉대며 놓아야 했다. 어쨌든 그렇게 힘겹게 안 쪽으로 들여 놓은 후에, 유제니아는 얼른 밖으로 나가 문을 잘 닫고는 어두운 복도를 그림자 처럼 조용히 걸어갔다. 어느 쪽으로 해서 나가야 하는지 잘 알아 두었다. 경비병이 언제 순 찰을 도는 지도 잘 외워 두었고, 지금은 아니다. 어두운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가고, 경비병의 횃불을 피해 유제니아는 간신히 안뜰 로 들어섰다. 그리고 혹시나 시녀나 시종들이 밀회를 즐기러 오지 는 않은 지 살폈지만, 날이 싸늘해서 그런지 오늘은 아무도 없었다. 유제니아는 망토를 추스르고는, 무릎까지 오는 치마를 당겼다. 짧은 치마라든가 바지가 있으면 좋을 테지만 있는 옷이라고는 치렁치렁한 옷들뿐이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은 틈틈이 몰래 개조해 놓은 것이다. 발목에 찰랑 거려 불편했지만, 이 이상 편한 옷을 바란다는 건 무리다. 마침내 유제니아는 성의 정원수들 사이로 난 벽돌 길을 지나, 숲의 왼편을 감싼 왕의 숲으로 들어섰다. 이 숲을 넘으면 도시로 들어갈 수 있다. 도시로 들어가서, 어떻게든 에크롯사 쪽으로 가는 배를 구하자... 에크롯사로만 가면 다 잘 되는 거야, 그러면 반드시 세 르네긴을 만날 수 있을 거야. 유제니아는 쉴 새 없이 자신에게 속삭이며 달렸다. 그리고 숲 한가운 데로 들어서자, 나무 둥치에 기대며 조용히 한숨을 내 쉬었다. 밤 이라 꽤 쌀쌀했다. 어느 새 오슬오슬 떨리기 시작한다.... "아가씨." 유제니아는 흠칫 놀랐다. 갑자기 어둠 속에서 불이 확 켜지더니 방금 전에 때려눕히고 온 시녀의 얼굴이 등불아래 나타났다. 유제니아는 뒤로 주춤 물러나려했지만, 독수리 발톱에 채이듯 시녀의 손아귀 에 잡혔다. "놔요!" "돌아가세요." "난 못 가요--! 절대 못 가!" 순간 시녀가 손을 놓더니, 갑자기 유제니아의 뺨을 호되게 후려쳤다. 그리고 팔을 돌리고는 반대편 뺨을 더 세게 후려쳤다. 세찬 소리가 어두운 숲을 울리고는 사라졌다. 입술이 터지며 욱신거려왔다. 게다가 이렇게 맞아 본 건 정말 태어나 서 처음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조차 유제니아에게 손 댄 적은 없다. 그러나 놀랄 새도 없이, 다시 뺨을 얻어맞았다. 철썩-! 머리에 번 쩍 불이라도 켜진 것 같았다. "돌아가세요. 아가씨에게 더 이상 손을 휘두르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못 가요." 그러자, 그녀가 다시 유제니아의 멱살을 잡았다. 유제니아는 그녀의 정강이를 걷어찼지만, 시녀는 신음을 흡- 삼키고는 손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손바닥이 아니라 주먹이었다. 그 주먹이 명치를 퍽 걷어 쳤다. "쿨럭-!" 시녀는 멱살을 잡았던 손을 놓았다. 유제니아는 무너지듯 주저앉아 계속 기침을 토해냈다. 숨이 컥컥 막히는 것만 같았다. 화가 나고 아파서 눈물까지 흘러나왔다. "제가 더 잘 해드리겠어요. 그리고..... 뭐가 그렇게 싫으세요. 왕자님 은 아가씨를 좋아하고 있고, 아가씨는 왕자님을 좀 더 좋아하기만 하면 되는데...... 아내로 삼지는 않을 테지만, 왕의 애인이 되면 왕 비 못지않게 살 수 있어요." "거짓말....." "아뇨, 제게 분명하게 말씀하셨어요. 당신의 여자라고, 그러니 어디로 도 도망치지 않게 잘 지키라고." 유제니아는 뼛속까지 시려왔다. 한때는 이 시녀가 착하고 다정한 여 자라 생각했건만, 결단코 아니었다. 그녀야 말로 휘안토스에게 단 단히 명령받은, 시녀 중에 가장 마귀 같은 여자일 뿐이었다. 유제 니아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난 싫어요, 난 정말 싫다고! 어떻게 그런 짓을 한 남자와........" 시녀가 혀를 찼다. "늙은 왕도 아니고, 그렇게나 젊고 아름다운 분인데 뭐가 그렇게 싫 나요. 처음에 너무 갑작스러워서 놀랐나본데, 조금만 더 참으시면 아가씨도 왕자님을 정말 좋아하게 되실 거에요." 머리에 열기 한줄기가 뻗쳐 오는 것만 같다. 좋아 질 리가 없잖아! 소름이 끼친다고! 무섭고 끔찍해서 돌아 버릴 것 같다고! 그러나 시녀는 더욱 다정하게 말했다. "게다가 왕자님은 젊고 혈기 왕성한 분이고 아가씨도 어리니, 벌써 아이가 생겼을 지도 모르잖아요. 만약 지금 돌아가서 아이가 생겼 다는 것을 알아 봐요. 그 때가서 다시 돌아와 울며 애걸해도 아무 소용없답니다. 얌전히 계시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다 잘 되는 거에요. 서자라도, 왕의 아들이라면 충분히 훌륭히 키울 수 있으니까요." "......" 기가 막혔다. 지금 이 미친 여자가 뭐라고 하는 거야? 그런데 그녀가 유제니아의 팔을 잡았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팔이, 그녀가 잡아당 기자 장작개비처럼 힘없이 딸려왔다. "싫....싫어요." "좋은 거라니까요." "싫다니까-! 당신이 뭔데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내가 싫어, 내가 끔 찍해!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나는 갈 거에요. 다시는 그런 일 당하지 않아--!" 시녀가 다시 손을 들었다. 그리고 그 때, 어둠 속에서 그르르릉- 낮 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까만 그림자 속에서 붉은 빛이 확 켜졌다. 시녀가 흠칫 놀라서 뒤돌아보았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유제니아는 시녀의 무릎을 호되게 걷어찼다. 정말 힘껏 걷어찼기에, 시녀는 신 음을 흘리며 유제니아를 잡은 손을 놓았다. 유제니아는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시녀가 유제니아의 머리채를 잡아 내동댕이쳤다. 바닥을 구르며 머리를 부딪쳤고, 어깨를 돌에 찧어 욱신거렸다. 그녀가 다시 나동그라진 유제니아의 멱살을 잡으려 했다. "고집 피우지 말고....." 유제니아는 튀듯이 일어나 뒤로 물러났다. 시녀가 다시 잡으려 하자, 몸을 움츠리며 피했다. 시녀가 손을 들었고, 그 때 누군가의 목소 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멈춰." 남자 목소리였다. 엄청난 분노가 담겨 있었고, 그 분노는 살의까지 담고 있었다. 시녀가 주춤 해서는 뒤로 물러났다. 절대 그럴 리 없 다는 듯한 표정이기는 했지만, 눈에는 행여나 하는 불안이 가득했다. 그리고 갑자기 휙- 하니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나더니, 뼈 으스러 지는 듯 빡- ! 소리가 났다. 시녀가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고, 그녀는 그대로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그제야 유제니아는 목덜미가 차가운 얼음에 닿은 듯 선뜩한 것을 느 꼈다. 또, 그 부분에 어떤 마법이 걸려 있었는지도 깨달았다. 유제 니아는 급히 돌아보았다. 아킨이었다. 새하얗게 질린 채, 어둠 속에서 넘어갈 듯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리고 튀듯이 뛰어 나가 꿈틀대는 시녀를 짓밟 으려 했지만, 유제니아가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으며 만류했다. 시녀 가 불쌍해서가 아니라, 그를 살인자로 만들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 대로 놔뒀다가는 정말 저 여자가 살덩어리가 되도록 두들겨 팰 테니까. "아키, 하지 마-!" 순간 그가 멈추었다. 숨소리는 여전히 거칠었지만, 떨림은 간신히 잦 아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크게 한숨을 토해내고는, 무릎을 털썩 꿇었다. 금빛 눈동자가 흔들리며 그녀를 살폈고, 두 손이 올라와 유제니아의 부어 오른 뺨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터진 입술을 더듬다 가, 결국에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맙소사- 어떻게 이런 짓을 한 거야. 어떻게....." "괜....찮아. 금방 나아. 정말 금방 낫는 다니까." 아킨은 그녀를 더 꽉 끌어안았다. 아킨의 머리카락에서 바다 내음이 물씬 풍겨왔다. 예전에 그랬듯, 이번에도 그는 바다를 건너 온 것 이다. "우선....도망가자. 어디로든 여기서 멀리." **************************************************************** 작가 잡설: 가장 중요한 것 간과하면 안 되지요~~ 정말 정말 정말! 중요한 사실이었는 데 말입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59장 *************************************************************** [겨울성의 열쇠] 제283편 별이 지는 아침#6 **************************************************************** 아킨이 그녀의 팔을 잡아 당겼다. 그리고 숲 속으로 난 길을 달려, 더 깊이 더 깊이 들어갔다. 마침내 물소리가 들려왔다. 어둠 속에서, 냇물은 깨끗한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 귓가에 닿을 듯 소리가 가까워지자, 하얗게 물살을 일으키며 거세게 흐르는 시냇물이 나왔다. 아킨은 그제야 손을 놓았다. 그리고 차가운 물에 손을 적셔 유제니아 의 얼굴에 뭍은 피와 흙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부서진 물건을 다루는 듯한 그 섬세하고 조심스런 동작에, 유제니아 는 그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한탄하듯 아킨이 말했다. "어째서... 이번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던 걸까." "아키가 같이 느꼈으면 내가 죽고 싶었을 거야." "좀 더 일찍 올 수 있었어." "다 끝난 거야....그리고 끝난 일이 되어야지." 그렇게 유제니아는 아킨을 위로했다. 아킨은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 고는 천천히 쓸어 내렸다. 어느덧 거칠었던 그의 심장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한다. 호흡도 안정을 찾아갔고, 떨림은 이미 예전에 멎었다. 유제니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온 몸이 욱신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방금 전의 공포는 씻 은 듯 사라지고 없다. 그리고 어느 새 지금 밤 몇 시나 되었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도망 나온 것이 열시쯤이었으니, 지금은 자 정 쯤 되려나... 그러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생각보다 밤이 깊지는 않았다. 유제니아는 고개를 내렸다. 이제 어디로 갈 거야, 하고 물어 보려했 지만 아킨의 눈이 바로 앞에 있었다. 어깨도 가슴도 닿을 듯 가까이 있었고, 숨을 조금만 깊이 내 쉬어도 볼에 뜨겁게 닿을 정도였다. 얼굴에 피가 확 몰렸다.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떨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꽉 끌어안고 품 안에 묻히고 싶었다. 당장 더 멀리 더 멀리 도 망쳐야 한다고는 생각하는데, 이대로 계속 있고 싶기도 했다. 아킨이 말했다. "......같이 가자." "당연히 같이 가야지." "아니, 그런 말이 아니야. 아무도 올 수 없는 곳으로, 누구도 네게 손 댈 수 없는 곳으로 가자. 그리고 내 옆에 있어줘." 가슴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심장 소리가 귀에 들릴 지경이었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대로 아킨을 끌어안고, 그 가슴에 얼 굴을 묻고 울음을 터뜨려 버리고 싶었다. "가자." 아킨이 그렇게 말하고는 가볍게 손을 저었다. 어둠 속에서 작은 으르렁거림이 들려오더니, 두개의 붉은 색 점이 나 타났다. 유제니아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에 겁내지 않았다. 아킨이 손을 뻗자, 그의 손에 말고삐가 얹히며 어둠 속에서 검은 말이 나타났다. 붉은 점은 말의 두 눈동자였다. 아킨은 손을 내밀었다. 유제니아는 그 위에 손을 얹으려다가, 다시 주먹을 쥐어 당겼다. "왜 그러지?" 유제니아는 아무것도 없는 빈손을 들었다. 그 손가락은 어둠 속에서 뽀얗게 빛나고 있을 뿐이었지만, 아킨은 그 손에 반짝이는 반지를 본 것만 같았다. 아킨은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리고 내밀었던 그 손으로 유제 니아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매만져 주고는 내렸다. 눈길이 잠깐 아킨을 향하기는 했지만 이내 떨궈졌다. 요정처럼 날아와 그의 잠을 깨우고, 홀린 듯 숲을 떠나고 싶게 만들 며 생명을 불어 넣어 주었던 소녀가 바로 지금 이 앞의 유제니아 였다. 동경으로 시작되었을 지라도, 그래도 그의 것이 되어 그의 손에서 빛나기를, 그렇게 가장 소중한 존재가 되어 그를 바라봐 주 기를 원했었다. 지금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손을 잡고 다그치면 와 줄 지도 모 른다.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저 먼 북쪽으로 데리고 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지내면, 어쩌면 그렇게 그녀를 얻게 될 지도 모른다.... 어쩌면. 행복 하고 싶었다, 소중해 지고 싶었다, 그 누군가에게. 추위와 죽음 에 대한 두려움에 떨며, 아킨은 세르네긴을 보며 그 행복을 간절히 바랬다.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기를,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기를, 자신만의 자리가 있기를. "유즈, 너한테 나는 뭐지? 너를 사랑했는데, 네가 소중했는데, 네가 내게 그토록 큰 좌절을 주기도 했는데, 너에게 나는 뭐지?" "좋아해." 따스한 말이었지만 뜨겁지는 못한 한 마디였고, 이제 아킨은 앞에 문 하나가 닫히는 것을 느꼈다. "숲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늘 생각했어. 잊을 수 없을 거라고, 그리 고 아키에게 언제나 특별해 지고 싶다고...... 굉장하게 생각하지 않 아도 좋아... 그냥, 그냥 조금만 특별하게 생각해 주면 좋았어. 아키에 게 아무 의미가 없는 건 싫었어........잊혀지는 것도, 사라지는 것도....." "......." 그리고 유제니아는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하지만 미안해......" 파고드는 유제니아를 그 역시 안으며, 아킨은 조용히 한숨을 내 쉬었 다. 다시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어졌다. 그러나 그리 하지 않았고, 그저 자신의 기억만을 더듬어갈 뿐이었다. 휘안토스가 세르네긴의 창끝 앞에서 좌절 했듯, 아킨은 그의 추억 앞 에서 등 돌릴 수밖에 없었고, 지에나의 수경이 비추어주었던 세르 네긴의 그 눈빛도 잊을 수 없었다. 또한, 아킨 자신이 그녀 곁에 가까이 있는 것은 오로지 그가 없는 순 간일 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가 그렇게 사라진다면 오히려 영원히 아킨과 유제니아 사이에 머물 것이라는 것을 이제는 분명히 알 것 같았다. 이것이 진실이다. 그 무서운 밤에 그녀가 찾은 것은 세르네긴이고, 그 날이 지난 뒤에 내내 손을 잡고 싶어 했던 것도 세르네긴이다. 바로 옆에 있어도, 그 빈틈을 비집고 들어가 잠시 한 모금 갈증을 식혀도, 그럼에도 이것 이 진실이기에 인정해야 했다. 그러나 그리 생각해도 눈앞의 유제니아는 투명하기만 했다. 어둠 끝 을 비집고 스며 나오는 새벽의 빛처럼. "그래도 약속해 줘. 잊지 않아 주겠다고." 유제니아가 아킨의 볼에 입 맞추었다. 짧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따뜻한 입술이 떠나자 유제니아는 조용히 말했다. "잊지 않을 테니, 반드시 다시 와 줘." 아킨은 말고삐를 당겨 유제니아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리고 그녀를 말에 태우고, 그 말의 귓가에 뭐라 속삭였다. 말이 푸륵- 크게 울 고는 유제니아를 태운 채 말머리를 틀었다. "아키, 나 혼자 가는 거야?" "나는 할 일이 있어." 아킨은 그렇게 말하고는 웃어 보였다. 조금은 서글퍼 보이는 그 웃음 이, 유제니아는 아주 길고 긴 작별 인사처럼 느껴졌다. "자, 이제 가. 별이 지고 아침이 오기 전에." "어디로 가려고 그러는 건데?" "나는 휘안과 만나야 해. 그게 지금 내가 할 일이야." 아킨은 유제니아의 손을 잡았다가는 놓았다. 유제니아의 눈에 눈물이 고였고, 그 안에는 걱정과 슬픔이 일렁거리 고 있었다. 마치 별이 지듯, 그리고 달이 이지러지듯- 그렇게 흔들 렸다. "대체 뭘 하려고?" 아킨은 왼쪽 턱을 가리켰다. "이쪽 어금니도 뽑아 주러." 아킨은 그리 말하고는, 손에 잡은 고삐도 놓았다. 그러나 아킨은 그 녀를 배웅하지는 않았다. 나무 둥치에 등을 기대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때까지 참고 참았다가 밤의 고요만이 몸을 휩쓸고 밀 려들어오자 조용히 한숨을 내 쉬었다. 이제 유제니아가 돌아가 그의 목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린다면.... 세르네긴은 다시는 그녀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세르네 긴이 떠나지 않으면, 그녀 옆에 남겨졌던 아킨의 자리는 없어지는 것이다. 아킨의 자리는 그의 자리가 비어 있을 때만 생기는 것이기에, 그가 영원히 그 자리에 있게 된다면 아킨은 영원히 배회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하지만 분명 이리 될 거라 알고 왔다. 이제 별이 지고 새벽이 오고 있었다. 캄캄했던 밤의 어둠이 밀려나 며, 동쪽 하늘 너머가 하얗게 밝아왔다. 싸늘하지만 맑은 새벽바람을 맞으며, 그러며 아킨은 아침을 기다렸다. 추운 새벽이었고, 쓸쓸한 새벽이었다. 그러나 곧 햇살이 비추어 들 것이다. 화사하고 아름다운 햇살이, 여명의 수줍은 붉은 빛을 거두 어들이고 온 세상 깊숙이 스며들 것이다. 싸늘한 새벽은 사라지고, 빛나는 아침이 올 것이다. 켈브리안은 날이 기울고 어둠이 깔릴수록 불안해져만 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그리고 아킨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면 언제나 켈브리안으로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기에 불안하기만 했다. 행여나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 일이 휘안토스와 관 련된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계속 들어 불안하기만 했다. 터무니 없는 비약 같기도 한데, 늘 그런 비약이 현실이 되어 왔으니 비웃을 수만도 없었다. 아킨이 돌아왔는지 계속 시녀와 시종들에게 물어보고, 시종장을 들들 볶아대며 켈브리안은 그를 기다렸다. 그렇게 저녁도 먹지 못하고 기다리던 그녀는, 방에 돌아와서도 테라스에 기대 앉아 멀리 보이는 운하와 어둠에 파릇하게 젖은 도시와 숲을 바라보며 초조하게 앉 아 있었다. 불 밝힌 배들 중에 아킨의 배가 올지 오지 않을 지. 그 렇게 기다리며, 드디어 해뜰 무렵이 되었다. 테라스 주변의 수풀이 술 렁였고, 커튼이 붕 떠올랐다. 봄바람 치고는 좀 거세다고 생각하며, 그러나 불안한 마음에 조금 상쾌하기는 하다고 생각하며 켈브리 안은 깜빡 들었던 잠에서 깨어났다. 그 때 그녀의 어깨에 누군가의 손길이 닿았다. 켈브리안은 놀라서 그 손을 세게 뿌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저에요." 아킨이 그녀 앞에 서 있었다. 나갈 때 푸른 끈으로 묶고 있던 머리카락이 풀어 헤쳐져 바람에 나부 끼고 있었다. 켈브리안은 그 머리카락을 묶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마땅한 것도 없고 그런 말을 하자니 굉장히 우습게 생각되 어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디서 뭐하다가 온 거니?" "비밀이에요. 안다면 기절해 버릴 테니까." "할머니 배는?" "오는 길에 맡기고 왔어요. 중간에 버리고 오지는 않았으니 걱정 마 세요." "버리고 와도 돼. 그 배는 정말 이상하고 괴상한 이야기를 잔뜩 끌고 다니던 물건이거든." "그런 배를 잘도 빌려주셨군요." "너는 그 배에 따라다니는 악령도 때려눕힐 것 같으니까 안심했지..... 그래, 슈마허는 잘 갔니?" "네. 아마도...." 아킨은 난간에 기댔다.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 위 로 별빛이 흐르고 있었다. 켈브리안은 어딘지 허전해졌고, 그 눈빛에 같이 서글퍼졌다. "정말 어디를 다녀 온 거니?" "뭔가.....조금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왔어요. 조금 멀리.....죄송해요, 말 씀 안 드리고 가서.... 하지만 좀 급한 일이어서, 그래서 별 수 없었 어요." "돌아왔으니까 괜찮아." 그렇게 말하고는 켈브리안은 아킨 옆에 앉았다. 여명 직전이라 바람 은 싸늘하기만 했다. 켈브리안은 쇼올을 당기며 어깨를 움츠렸고, 그런 그녀의 어깨를 아킨이 감싸 안아 당겼다. 켈브리안은 그의 동작 과 눈빛에서, 그녀가 모르는 곳에서 그가 잃어버리고 온 상실을 느꼈 다. 그는 외로워 보였고, 그만큼 텅 비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를 슬프게 했다. "아주 예전에.... 압셀론에서, 제게 왜 그렇게 친절하게 해 주셨죠?" "그냥 네가 마음에 들었으니까." "왜죠?" "그런 건 이유 없어. 그냥, 그 순간에 네가 마음에 들었어. 놓치고 싶 지도 않았고, 외면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래서 네 볼에 키스해도 네가 할퀴지 않을 정도로는 사랑받고 싶었어." 아킨이 피식 웃었다. "엄마 없는 고양이 주워온 것도 아니고, 너무 하시는 군요." "너는 정말 그랬거든. 손만 뻗었다 하면 당장에 캬앙, 하고 사납게 내 지르고는 할퀼 것 같았다니까." "선배는 무슨 표범 같았는데요." "응? 그건 무슨 말이니." "도도하고 우아하게 바위위에 앉아서는, 사람들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 그런 표범이요. 근사해서 사람들이 다가가면 자리에서 일어나 숲 속으로 들어가 버리거나 이를 드러내며 당장 꺼져버려! 하죠. 그 때 선배는 굉장히 무섭고 예뻤고, 그래서 그런 선배가 제게 와 주셨을 때는 정말......" "정말?" "기분 좋아서 밤에 잠도 못 잤어요." 켈브리안은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아킨이 그런 그녀를 보며 말했다. "잠시....어딘가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죄송해요." "어떤 일인지는 말하지 말아줘. 큰일이어도, 작은 일이어도 화가 나 버릴 것 같으니까." 켈브리안은 눈물을 감추고 싶었지만 도저히 감출 수 없었다. 갑자기 확 치솟아 볼을 타고 흘러내려 버렸고, 고개도 돌리지 못했기에 너무도 쉽게 눈에 뜨여버렸다. 아킨이 그녀의 목덜미에 이마를 기대왔다. 몇 번이나 안은 적은 있지만, 이렇게 가까운 한숨을 느껴 본 것은 정말 처음이었다. 그렇게 기대어 아킨이 말했다. "행복하세요." "........힘들 거야." "아뇨, 행복하셔야 해요. 선배가 그리 되지 못한다면.... 어디서든 가슴 아플 거예요. 부탁 드려요......아니, 약속해 줘요. 어떤 일이 생긴다 할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반드시 행복해 지실 거라고." 켈브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나는....정말 난 모르겠어! 하지만 가지 않으면 안 되니." "지금은 안 돼요." "아키- 나는 네가 필요해. 네가 있어야 해. 다른 누구도 너를 대신할 수 없어." "저는 언제나 선배에게 불행만 몰고 왔어요." "아키, 아키 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진다 해도 내가 정말 슬픈 건 아키가 외로운 거고, 더 슬픈 건 내가 옆에 있는 데도 그리 외로운 거고, 정말 참을 수 없이 슬픈 건 네가 내 옆에 없는 거야....... 그러니 아키, 내 곁에 있어줘......"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주 오랫동안 정지해 있던 것이 다시 흐르는 느낌이, 아주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것이 두터운 껍질을 뚫고 나온 듯한 느낌이 든다. 만년설 아래에 숨어 있던, 단 한번의 온기가 손끝을 스치고 단 한번의 심장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아킨은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 그리고 젖은 볼을 닦아주고, 그곳에 입 맞추었다. 스치듯 짧고 안타까운 접촉이었지만, 그 하나만으로도 켈브리안의 눈물은 멈추었다. 그리고 아킨은 그녀의 볼에 손을 얹었다. 그 손끝은 따뜻했다. 너무나 따뜻해서, 너무나 눈물나게 따뜻해서, 서늘하게 식었던 모든 것을 따사롭게 녹여주고 감싸 안아 주고 있었다. 봄볕처럼 영혼 구석구석을 내리덮고 있었고, 그 안에 오랫동안 안겨 있고 싶었다. "사랑해 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저를 기억해 주고 그리워 해 줘서, 그토록 오랫동안 그리 해 주셔서, 그것이 진심이라서 너무 고마워요. 필요하다고 해 주셔서, 그 말 한마디만으로도 너무 고마워요.... 그리고 제가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셔서 고마워요." 켈브리안은 어쩌면 잔인한 말이 오고 갈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 불안함 속에서도 아킨의 눈빛만은 안도하고 싶을 정도로 부드러 웠다. 아킨의 두 손이 그녀의 볼을 떠났다. 그러나 눈길만은 그녀 를 담으며, 그러며 말했다. "그리고.......이곳에 다시 설 수 있는 운명이 온다면, 진정 그리 될 수 있다면 약속드릴게요. 그 때는 제가 당신을 행복하게 해 드리겠어요.......켈브리안." 재회를 약속했건만, 그랬기에 마지막 같은 순간이었다. 다음과 영원을 함께 약속하는 자는 지금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니까. 그래도 켈브리안은 믿고 싶었다. 정말, 너무나 간절히 믿고 싶었다. 돌아 와 줄 거라고, 다시 이리 말해 줄 거라고. 다시 눈이 흐려진다. 아킨의 두 팔이 그런 그녀를 끌어안았고, 그것만 으로도 지금은 충분했다. 언젠가는 더욱 더 따뜻해 질 것이기에, 그리고 그 때가 오면 아킨은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이기에. 이 옅은 빛이 깔리는 여명이 지나고 새벽이 밀려들어와 마침내 아침의 햇살이 터지는 순간이 오면, 그 때에야 말로 영원이 될 것이다. **************************************************************** 작가잡설: 그런 겁니다........... 하하핫! 그런 겁니다!!! 아하하하핫! 캔디가 테리랑 되더이까! 그렇습니다! 먼저 찜한 놈이 임자인 법입니다! 아무리 많은 색이 꼬인다 할지라도, 중간에 다른 짝 만나 지지리 궁상떤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먼저 찜한 놈 곁으로 돌아오는 것이 섭리입니다! 그것은 대 자연의 진리, 순정신과 커플성자가 정한 오묘한 법칙인 것입니다! 아키의 그녀는 유즈지만 마님은 켈브입니다~ 그럼, 아키와 켈브가 축복하는 즐거운 설날 되세요. ^_^ p.s 자꾸 오해가 있어서 그러는데요........ 아키를 먼저 찜한 것이 켈브란 말입니다. --;; 중간에 유즈 덕에 삽질좀 하기는 했지만....... 어쨌건 먼저 찜한 켈브의 품으로;;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60장 **************************************************************** [겨울성의 열쇠] 제60장 세상의 끝 제284편 세상의 끝#1 ***************************************************************** "형 아들이 이겼어." "해가 뜨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이지." 그렇게 말하는 사이러스에게 테시오스는 웃어 보였다. 멋쩍은 웃음도, 실망한 듯 힘없는 웃음도 아닌, 정말 형과 기쁨을 나 누는 환한 웃음이었다. 사이러스는 그렇게 웃는 동생이 자신과 닮 았다는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어머니 이레크트라와 가장 많 이 닮은 것은 사이러스, 반대로 아버지와 가장 닮은 것은 이 테시 오스였지만 두 사람의 핏줄이 뒤엉킨 지점은 놀랄 정도로 흡사했다. 언뜻 보고 지나가면, 누구라도 형제라 생각할 만큼 닮아 있는 것이다. "그래, 내가 없는 사이에 휘안토스가 델 카타에게 패할 거라 생각한 건가." "물론 아니지. 사실 형 아들이 이기든 지든 상관없었어.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형 아들이 패할 것 같지도 않았고." "그렇다면 대체 왜 나를 포로로 잡은 거냐." "글쎄." 그리고 테시오스는 슬쩍 눈길을 돌려 벽난로를 바라보았다. 어제 저 녁에 피워둔 불이, 아직 빠알간 불씨를 남겨 놓은 채 살아 있었다. "아킨토스가 그리 되고, 형수마저도 돌아가신 후에 형에게 걸린 저주 의 본질이 무얼까 생각해 본 적이 있어." "그래서 생각해 냈나?" "아니. 아킨토스가 보름마다 미쳐도 형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멱살을 잡아 쇠사슬을 채웠지. 말 그대로 미친 개 다루듯. 형수가 떠난다 했을 때, 역시나 철장 안에 가두고 그녀가 미쳐 자살하도로 고 놔두었지. 형이 조금도 변하지 않으니, 나는 과연 그 저주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니면 혹시 실패한 건 아닌지 궁금해지기 시작했어." "답은?" "글쎄, 내가 알아낸 것이 정답인지 아닌지는 몰라. 어쩌면, 마도론도 한방에 날려 버릴 형을 상대로 한 저주였으니 실패한 것인지도 모 르고. 뭐, 지금 상황으로는 누구나 후자라 믿겠지." "그래서 네가 직접 복수하기로 한 거냐." 테시오스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복수 하려면 해 봐라. 무엇이든 맞서 주지." "지금 이렇게 갇혀 있는데도?" "어차피 나는 이번 전쟁이 끝나면 왕위에서 물러날 생각이었다. 좀 더 일찍 휘안토스가 왕이 된다 해도 나쁠 건 없고, 또 오히려 이번 일을 해결하면서 가신과 영주들에게 신임을 얻게 된다면 더할 나 위 없지. 나를 죽이려면 죽이고, 좀 더 감옥다운 곳에 가두려면 가 둬 봐라. 그러나 내가 조금이라도 비참해 하는 걸 보고 싶어 한다면, 네가 만족할 만한 반응은 영원히 얻을 수 없을 거다." "형은 정말 대단해. 어떤 상황이 닥쳐도, 주먹으로 단번에 후려치지. 휙- 퍽. 윽- 승리, 사이러스." "하나도 안 웃기다." "형 얼굴 주름은 인상 쓰는 대로 졌으니까, 지금 웃는 다면 얼굴 가 죽이라도 찢어질 걸. 웃으면 더 무서울 거야. 화난 얼굴의 좀 더 무서운 변주로 보일 테니까.......오, 절대 실망 안 해." 역시 사이러스는 웃지 않았다. 테시오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 볼게. 그리고 새로운 소식이 오면 전해주러 오지." "되도록 빨리 가지고 오면 좋겠군." "물론 아주 빠를 거야. 형의 잘난 아들이 카티온 외항을 점령했고, 곧 제도로 대회의를 신청할 테니까. 조만간 전쟁은 끝날 거라고." "그리고 너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겠군." 테시오스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두고 보라고. 형의 상상을 초월한, 아주 멋진 일이 벌어질 테니까 말 이야." "무엇이든 기다려 주지." "오래 살아, 형." 갑작스런 말에 사이러스는 눈길을 들었다. 테시오스는 문 앞에 서서 문고리를 잡고는 사이러스를 보고 있었다. "아주 오래 살아, 형. 어머니가 형을 증오한 만큼, 카시오스 형이 못 산 만큼, 내가 떠돈 만큼, 아킨토스가 참담한 어린 시절을 보낸 만큼, 아주아주 오래 살아." "테시오스, 미안하지만 나는 저주도 축복도 은총도 숙명도 믿지 않는 다. 일이 잘되면 내가 잘해서이고, 일이 안되면 내가 못해서일 뿐 이다. 네가 무슨 말을 하든 내게는 아무 소용도 없어." "나도 알아. 하지만 형, 나는 암롯사가 용맹하고 늠름한 왕의 기억도, 위대한 독재자의 기억도, 아름다운 소녀와 전설 같은 사랑을 한 젊은 왕의 기억도, 모두 지워 버리고 그저 초라하게 쭈그러드는 늙은 이만을 기억하게 할 수 있어. 그리고 형이 나이프도 제대로 못 쥐는 늙고 마른 자신의 손을 보고, 추하게 주름진 자신의 얼굴을 보며 오래 오래 살기를 바래.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추레한 늙은이로 고 목보다 오래 살기를 바래. 그리고 아무리 그렇게 되어도, 형은 절대 자살하지 않겠지. 그러기에는, 형은 너무 자존심 강하니까." "그 누구도 나를 그리 만들 수 없다." "그러니까 상상도 못한 일이 벌어질 거라고 한 거야." 그래도 사이러스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고, 테시오스는 휘파람을 한 번 불고는 문을 닫고 나갔다. 이제 벽난로의 불씨가 모두 꺼져, 탁한 빛깔의 잿더미만 가득 쌓여 있었다. "결국 휘안토스가 대회의를 신청했구나." 칼라하스 공주는 보고 있던 책 사이에 책갈피를 끼워 넣고는 한숨을 내 쉬었다. 책을 덮자 촛불이 오른편으로 거세게 누웠다가는 일어 났고 마하의 그림자도 한번 크게 휘청거렸다. "악튤런은?" "폐하를 돕고 있을 뿐입니다." 칼라하스는 더 묻지는 않았다. 바르젤에서 악튤런은 롤레인에게 제압당했다. 물론 롤레인은 공격하 지는 않았다. 단지, 어떤 마법을 쓰든 모조리 제압하여 못 쓰게 묶어 놓았을 뿐이다. 애당초 악튤런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고 있던 델 카타 해군은 쉽게도 무너졌고, 카티온 외항을 거쳐 카티온까지 후퇴해야 했다. 휘안토스는 다행히 카티온 외항에서 진격을 멈추 고 기다리고 있었다. "롤레인은 돌아갔을 거야." "어째서 그리 생각하시는 지요." "베넬리아는 두 나라 중 하나가 '이기는 것'을 바라지 않아. 적당히 뒤엉켜서 싸우다가, 둘 다 지쳐서 적당히 끝내주기를 바랄 뿐이지. 그들은 양 나라의 해군이 약화되기를 원할 뿐, 암롯사가 특별히 좋아서 돕는 건 아니잖아.... 그러니 롤레인은 더 이상 휘안토스를 돕 지는 않을 거야. 아니, 어쩌면 이번에는 델 카타롯사가 이기기를 바라는 건지도 모르지.... 그들은 뱀 같은 자들이야. 용과 그리핀이 뒤엉켜 싸우다가, 피투성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으면 그들 의 굴에서 슬그머니 나와 모든 것을 먹어치워 버리지. 늘 그랬어." "그렇겠지요." "그래서 휘안토스는 대회의를 제의한 거야. 여기서 이 전쟁을 끝내고, 오라버님의 사과와 배상금을 받아낸 후 사이러스 대공왕과 암롯사로 돌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폐하께서는 대회의의 뜻을 받아들이실 생각이신 듯 합니다." "가엾은......" 칼라하스는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두 손에 얼굴을 묻 었다. 마하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주었다. "가엾은 오라버님, 얼마나 가슴 아프실까. 몇 년을 기다리고 준비해 오셨는데, 결국 이렇게 끝나려 하다니." "그래도 많은 것을 잃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행히도 폐하께서는 무사 하시니까요." "그거야 말로 다행이지. 만약 오라버님이 돌아가시거나 포로가 되셨 다면, 그 때야 말로 델 카타롯사도 나도 끝장이야." 그리고 그것에 칼라하스는 진심으로 악튤런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돌 아온 악튤런은, 그녀를 카티온보다 안전한 바그랏으로 피신시키면서 지친 얼굴로 몇 번이나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에게 괜찮다고 말하 면 더 자존심 상해 한다는 것을 알기에, 칼라하스는 그저 '그래도 우리에게는 다음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하고만 말했을 뿐이다. 좀 더 신중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 까, 아니 우리에게 조금만 더 행 운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 까, 간신히 사이러스 대공왕을 포로로 잡았는데... 손아귀에 쥔 그를 이대로 내보내 준다고 생각하니, 칼라하스는 정말 엉엉 울어 젖히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만 주무십시오, 공주님." 마하의 부드러운 제안에, 칼라하스는 창밖을 보았다. 창 밖에는 벌써 까만 어둠이 내려앉고 별이 빛나고 있었다. 그 빛이 너무나 반짝여서 칼라하스는 서글퍼졌다. 저 별처럼 오빠가 빛나기를 바랬는데, 오빠의 앞날에 언제나 영광만이 있기를 바랬는데, 오빠만이 내 전 부였는데. "전하, 폐하께서는 젊습니다. 젊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기회는 충분합 니다. 세상은 변하는 법이니까, 그 변화 속에 폐하를 위한 순간 역시 포함될 것입니다." "노력한다면." 마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노력한다면." 칼라하스는 눈을 반짝이고는 마하의 품에 안겼다. 마하는 어깨를 토 닥여 주고는,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에 밖에서 갑자기 빛이 번쩍하더니 낮처럼 환해졌다. 칼라하스가 놀라 고개를 돌렸고, 마하는 힘을 꽉 주며 도끼를 뽑아 들었다. 밖은 훤했고, 그것은 정원수가 불타고 있기 때문이었다. 건조한 봄이 라, 불은 아귀처럼 삽시간에 온 정원을 덮쳤다. 건물로 옮겨 붙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맙소사!"마하는 커튼을 칼라하스를 앉히고는, 주변을 뒤져 봄꽃을 꽂 아 놓은 꽃병의 꽃을 뽑아 버렸다. 그리고 커튼을 찢어 그 천 조각에 물을 적시고는 칼라하스에게 내밀었다. "혹시 모르니 가지고 계십시오. 제가 말씀드리면, 그 즉시 입을 막으 셔야 합니다." "알았어." 마하는 그녀를 다시 안아 들고는 문을 벌컥 열었다. 복도의 오른쪽 끝에서 벌건 불빛이 번지고 있었다. 연기가 쿨렁 쿨렁 들어와 매캐한 냄새가 풍겨왔다. "얼굴을 덮으세요. 눈도 감으시고, 되도록 호흡을 적게 하십시오." "마, 마하는!" "괜찮습니다." 칼라하스는 마하가 하라는 대로 했다. 그 때 복도 끝에서 성을 지키 던 병사들이 달려왔다. "공주님, 침입자입니다--!" 마하가 대신 외쳤다. "모두 성 밖으로 나가십시오!" 병사들과 성의 호위책임자인 청년이 모두 검을 뽑았다. 그리고 각 자 마하의 앞뒤를 나누어 맡고는, 연기를 헤치며 성의 복도를 달렸다. 마하는 자질구레하게 묻지 않았다. 오로지 앞으로 돌진할 뿐이었다. 좁은 계단을 달리자, 그 계단 마다 연기가 가득 차 있었다. 칼라하 스가 쿨럭 쿨럭 기침을 토해냈고, 병사들 모두 눈이 맵고 숨이 막혀 주춤했다. "모두 지체하지 마십시오! 빨리 가십시오!" 그리고 마하는 계단을 성큼 성큼 내려가 성의 홀로 내려섰다. 성의 홀, 절반이 불타고 있었다. 떨어진 커튼과 카펫위로도 불길이 번져 있었다. 그리고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마하는 칼라하스 공주를 경비대의 대장에게 맡기고는 문을 밀었다. 그러나 문에 못이라도 박힌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된 겁니까!" "누가 문을 막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마하는 도끼로 문을 세게 내리찍었다. 꽈앙-! 온 성이 울렸 지만,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른 길로 갑시다! 이곳은 벌써 불길이....." "다른 곳으로 갔다간, 그곳을 지키고 있을 침입자들에게 꿰일 겁니 다! 여기를 뚫어야 합니다." "무슨.." 마하는 더 이상 답하지 않고 다시 문을 내리쳤다. 문이 덜커덩거리 고, 잠시 바깥 틈이 보였다. 마하는 다시 힘껏 내리쳤다. 그러자 드 디어 문에 금이 갔고, 찬바람이 스며들어왔다. 마하는 이번이 마지 막이기를 빌며 모든 힘을 그러모아 내리쳤다. 꽈아앙-! 드디어 문 이 으적 부서졌다. 멍하니 있던 병사들도 각자 문을 밀어대고 발로 차기 시작했다. 문이 부서지며 신선한 바람이 확 휩쓸려 들어왔다. 마하는 온 몸으로 그 문을 밀어젖혔다. 문짝이 완전히 부서졌다. 찬 바람이 온 얼굴을 휩쓸고, 신선한 공기 를 맡은 불길이 굶주린 듯 그들을 따라 번져왔다. "어서 밖으로!" 마하는 공주를 다시 받고는 밖으로 병사들을 내보내고, 자신도 밖으 로 나왔다. 그리고 돌아보니, 성은 완전히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그들이 빠져나온 문도 금방 불길에 덮여 타오르고 있었다. "어서 도망치십시오. 최대한 소리를 죽이고." 칼라하스가 마하의 품안으로 파고들어왔다. 그녀는 여기 저기 그을려 서 엉망진창이었고, 그건 마하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하는 그런 그 녀의 어깨를 꽉 안으며, 성 뒤편을 살폈다. 그곳에 횃불이 여러 개 타오르고 있었고,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들 모두 석궁을 장전하고 안에서 누군가가 뛰어나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게다가, 마하와 함께 있던 병사들 외에 다른 병사들과 시종과 시녀들이 그곳으로 도망쳤다가 벌써 석궁에 맞아 나가떨어져 있었다. 마하는 들키지 않기 위해 숨죽여 성 뒤의 숲 속으로 뛰어갔다. 다른 병사들과 대장 역시 소리를 죽이고 성을 둘러싼 어두운 숲 속으로 뛰어들었다. **************************************************************** 작가잡설: 간만에 등장한 칼라하스 공주님...... 설 연휴 기념 연참! 입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60장 ***************************************************************** [겨울성의 열쇠] 제285편 세상의 끝#2 ****************************************************************** 다행히 숲 안은 어둡고 조용했다. 뒤쪽에서 성이 타오르는 소리만 들 려올 뿐이다. "어떻게 된 거지?" 숲으로 들어와서야 칼라하스가 소곤거렸다. "공주님을 노린 겁니다." 칼라하스가 이를 뿌득 무는 소리가 들렸다. "사이러스 대공왕과 바꾸기 위해서일 테죠. 인질 대 인질이라면, 협상 의 여지가 없으니까." 그 때 성 쪽에서 말울음 소리와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험 악한 욕설이 터졌다. 공주가 성 안에 없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불빛이 성 주변을 돌더니, 마침내 숲 쪽을 향했다. 칼라하스는 몸 을 움츠렸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답답했다. 마하가 도끼를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마하-" "잠시만 바알 대장에게 몸을 맡기십시오. 제가 뒤를 맡겠습니다." "안 돼!" "잠시면 됩니다. 바알 경, 어서 와서 공주님을 업어 주십시오." 대장은 나는 듯 달려왔다. 마하는 그의 등에 공주를 업혀 주고는, 자 신은 도망치는 병사들 맨 끝에 섰다. "활을 쏘지는 않을 테니 모두 걱정 말고 달리십시오." 마하는 그렇게 말하고는 도끼의 방향을 틀었다. "저기다!" 드디어 누군가가 외쳤다. 와아- 하는 함성 소리가 들리더니, 횃불들 이 숲 속으로 쓸려오듯 밀려들어왔다. 말 달리는 소리도 들려온다. "활을 내려라! 숲을 밝히고, 공주를 찾아라!" 빌어먹을 남부 억양, 마하는 진절머리 난다고 생각하며 도끼를 휘둘 렀다. 도끼에 잘려나간 나무가 쓰러지며 델 카타롯사 일행이 도망친 길을 막았다. 말발굽 소리가 들리다가, 그대로 나무둥치에 걸려 쓰러지고 말았다. 크으- 히힝-! 횃불들이 달려와 숲을 훤히 밝혔다. 그리고 쓰러진 말과 기사, 쓰러진 나무둥치를 발견하고는 그 장애물을 뛰어 넘었다. 마하는 그 나무 둥치를 뛰어 넘으려는 병사의 목을 날려 버렸다. 다른 병사가 검을 휘둘러 마하를 내리쳤지만, 마하는 그 팔목을 베어버리고 다시 누군가의 머리를 내리찍어 쪼개 버렸다. 몸이 날 랜 병사 하나가 둥치를 뛰어넘어 마하의 등을 공격했다. 마하는 도끼를 휘둘러 그의 허리를 동강내어 버리고는, 다시 덤벼드는 기사 의 가슴을 찍어 넣었다. 츠캉, 하며 다른 병사들보다 훨씬 더 긴 검을 뽑아드는 소리가 들렸다. 마하는 숨을 한번 훅 들이 마시고는 그녀를 향해 날아오는 검을 후려쳤다. 검이 튕겨나가자, 마하는 바람처럼 빠르게 도끼를 돌려 잡고는 기사의 목을 날려 버렸다. 어 둠 속에서 묵직한 것이 퉁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 옆으로 횃불이 날아왔다. 뜨거운 불이 얼굴로 확 다가왔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마하다--!" 횃불들이 더 어마어마하게 몰려왔다. 활시위 당기는 소리가 들려오 고, 어둠 속에서 석궁이 장전되는 소리도 들려왔다. 횃불들 속에서 창과 검을 든 병사들이 보인다. 그들이 창을 들고 마하를 노렸다. 마하는 피에 젖은 도끼날로 그들을 겨누었다. 병사들은 정말 빠르게 숲 안에 진을 만들었다. 석궁과 활을 가진 궁 수들이 앞으로 나서 마하를 빙 둘러싸고는 그녀를 겨누었고, 그 뒤 에는 창을 든 병사들이 그녀를 노리고 있었다. 그 뒤에는 말을 탄 기사들이 검을 뽑아들고 있었다. 대략 수 십 명은 되어 보였고, 활 든 자만 열명이 넘었다. 그리고 대장인 듯 보이는 자가 말을 몰아 앞으로 나섰다. 꽤나 젊은 남자였다. 아마도 공을 세우고 싶어서 이 번 일에 자원했을 것이다. 그는 그녀의 이름을 물어 확인하지도 않았 다. 뽑아 든 검을 치켜 올리더니, 그대로 아래로 내리 그었다. 순간 활시위가 놓아졌다. 화살이 핑핑 쏟아졌다. 석궁의 방아쇠가 당 겨지고, 창병들의 창이 날아왔다. 별 수 없었다. 마하는 눈을 감고, 도끼를 힘주어 잡았다. 끝장이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조용했다. 금방 창과 화살이 온 몸에 퍽퍽 박힐 줄 알았던 마하는, 한참이 지나 도 아무 일도 없자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신 음을 흘렸다. 화살과 창들이, 모두 허공에 박힌 듯 멈추어 있었다. "으헉-" 마하는 누가 들었으면 죽도로 창피할만한, 정말 꼴사나운 비명 비슷 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시간이 정지한 듯, 정말 활이고 창이고 그 대로 똑바로 허공에 박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암롯사 군을 보니 그들은 입을 딱 벌리고는 있었지만 눈은 깜빡거리고 있었다. 놀라 굳어버리기는 했지만, 시간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마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단단한 것이 목을 타 넘어 가는 순 간에, 화살과 창이 장작개비처럼 후두둑 떨어졌다. 암롯사 군이 화 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겁먹은 애들처럼 술렁이고 있었다. 마하는 뒤로 한발자국 슬쩍 물러났다. 그러자, 이번에는 땅이 잠에서 깬 듯 쿠르르르 울리더니 마하와 암롯사 군 사이에서 불길이 확 치 솟아 올랐다. 암롯사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그런 데 그 때 서늘한 손이 마하의 허리띠를 잡아 당겼다. 마하는 놀라 서 도끼를 휘둘러 버리고 말았고, 그 사람은 급히 손을 놓고는 나는 듯 물러났다. "마하-!" 그 목소리에 마하는 휘두른 속도와 비슷하게 도끼를 당겨야 했다. 어 둠 속에서 눈이 반짝이다가 사라졌다. 그제야 불빛 속에 빛나는 은빛 머리카락이 언뜻 보인 듯도 하다. 마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대로 숲의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숨이 헉헉 들이찼지만, 정말 초인적으로 힘껏 달렸다. 마침내 숲의 끝에 다다르자, 그녀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일행을 만 날 수 있었다. "마하-!" 칼라하스가 눈물까지 보이며 마하에게 두 팔을 벌렸다. 마하는 그녀 를 번쩍 안아 들어 팔에 앉혔다. 칼라하스는 정말 아이처럼 엉엉 울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역시나 눈이 흠뻑 젖은 바알 경이 말했다.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칸느 경- 정말 어떻게 되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서둘러야 합니다. 저 밖에 있는 적군은 장애물을 치우게 되 거나, 멀지만 돌아서 숲을 건너게 되는 즉시 우리를 쫓을 겁니다. 시간이 얼마 없어요." "알고 있습니다." 바알 경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병사들을 모았다. 마하가 달리기 시작 했고, 그 뒤로 병사들이 뒤를 엄호하며 달렸다. 그리고 마하는 칼 라하스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말했다. "그분께서 도와주셨습니다." 칼라하스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안도의 한숨과 웃음이 그녀의 입 술에서 흘러나왔다. 휘안토스는 빈손으로 돌아온- 그리고 데리고 간 기사와 병사들의 숫 자까지 절반으로 줄여서 온- 카톤 케이 백작의 아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도 내지 않았고, 수고했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돌아가서 쉬도록 해라." "정말 죄송합니다--!" "어차피 끝난 일이다. 그 성에 마법사가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한 내 실수이기도 하니, 네 책임만은 아니다." 그제야 청년 기사의 얼굴에 조금 미소가 번졌다. 휘안토스는 경멸이 치솟아 올라왔다. 한심하다, 정말. "이제 아버지 곁으로 돌아가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푹 쉬도록 해라." 무슨 말인 지 금방 깨달은 기사의 얼굴이 다시 창백해졌다. "왕자님!" "그리고 편지를 줄 테니, 카톤 케이 백작에게 전해주도록. 나중에 카 톤 케이 백작에게 직접 물어 볼 테니, 반드시 전해라." "하,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하겠습니다." "공주는 분명 카티온으로 돌아갔을 테고, 자네에게 카티온 성벽을 넘 어 공주를 납치 해올 정도의 재주가 있다면 차라리 내 아버지를 구 해오라고 하겠다. 이제 끝난 일, 더 이상 문제 삼지 말고 돌아가도 록 해." 청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휘안토스는 옆의 마르실리오에게 손짓을 보냈다. 명령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마르실리오는 청년의 팔을 잡 아끌어 밖으로 내 보냈다. 바깥에서 잠시 실랑이가 있었지만, 결국 조용해 졌다. 마르실리오는 금방 돌아왔다. "다른 말은 안 하던가?" "실컷 나불대긴 했지만, 어쨌든 알아들었을 테니 이대로 카톤 케이 백작에게 돌아갈 겁니다. 아들을 어떻게 다룰 지는 아버지인 백작 소관일 테지요." 휘안토스는 피식 웃었다. 그 성질 급한 백작은, 분명 아들을 반쯤 죽 여 놓을 것이다. "그래도 당연히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일도 제대로 못하다니..... 하 지만 그곳에 마법사가 없다는 건 분명히 확인하지 않았나?" "확인했었습니다." "그 사이에 온 건가?" "어쩌면 계획이 샜을 지도 모릅니다." "빨리 이 델 카타롯사를 뜨고 싶게 만드는 가정이군. 첩자는, 내편이 아닌 이상 정말 질색이니까." 휘안토스가 머물고 있는 곳은 카티온 외항의 요새였다. 내륙 깊숙이 들어가지 않고, 그 요새까지만 점령한 후에 진을 치고 기다리는 중 이었다. 함대는 강을 틀어막고 있었고, 이 항구 도시는 숨죽인 채 제 발 적군이 물러나기만 바랄 뿐 항전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항구를 방어하는 모든 함대가 전파되어 바다 밑에 가라앉아 있으니까, 다 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바깥에서 누군가가 급히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기다리고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숨찬 외침이 들렸다. "왕자님, 아키...... 하아, 아킨토스 님께서 오셨습니다-!" 문이 벌컥 열리며, 순간에 불이 번쩍 했다. **************************************************************** 작가잡설: 아키에게는 기사도 있고 왕자도 있고 용사님도 있답니 다................ (기사는 누구?) 설 연휴 잘 보내시고 계시나요?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60장 **************************************************************** [겨울성의 열쇠] 제286편 세상의 끝#3 **************************************************************** 돌 부서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휘안토스는 나가떨어졌다. 마르실리오 가 달려왔지만, 아킨은 그의 턱마저 후려쳐 날려 버리고는 문을 닫아 버렸다. 마르실리오과 쾅쾅 문을 두드려 댔지만 그것도 아킨은 무시했다. "무슨 짓 한 거야, 휘안." "무슨 말이냐." 휘안토스가 터진 입술의 피를 닦아내며 그리 답하자, 이번에는 아킨 의 발길질이 날아왔다. 잠시 뒤, 휘안토스는 이제 머리가 깨지지는 않았는지 걱정해야 했다. "유즈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물은 거야!" "몇 번 더 가졌어." 아킨이 다시 주먹을 들자, 휘안토스는 검을 뽑았다. 그리고 단번에 침 꽂듯 그의 턱 끝을 겨누며 말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킨은 주먹을 내렸고, 휘안토스는 몸을 일으키면서도 검을 흐트러 뜨리지 않았다. 뒤로 물러나자, 검 역시 따라왔다. "그만 까불어라. 두 번은 안 봐준다." "이번엔 대체 이유가 뭐야-!" "다른 이유 필요 없어. 가지고 싶으니 가진 것뿐이다." "하지 말라고 했어." "무시한다." "약속 했잖아." "너도 어겼어." 아킨은 목을 젖혔지만, 검은 더 집요하게 목을 따라왔다. 주문을 외 우는 것이 빠를 지, 목이 찔리는 것이 빠를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이제 내 여자야." "유즈가 형을 좋아 할리 없는데도?" "그 아이의 의견이나 감정은 상관없다. 내가 원하는 것으로 충분하고, 가질 수 있으면 가지면 되는 거다. 그 이상은 신경 쓸 필요도, 이 유도 없어. 아니, 그것 외에 대체 뭐가 중요하지?" 머리가 뜨끈해지며, 다시 주먹을 날릴 뻔 했다. 그러나 칼날이 목덜 미를 스쳤고, 따끔하면서 피가 조금 스며 나왔다. "오랜 만에 만나서 여자 문제 따위로 한심하게 싸우지는 말자. 지금 중요한 일은 그것만이 아니니까." 아킨은 기가 막혔다. "언제나 형 마음 대로군. 우리가 지난번에 어떻게 헤어졌는지 벌써 잊었어?" "아버지가 포로가 되신 건 알고 있겠지?" "상관없는 일이야." "네 아버지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언제 나를 아들 취급 하셨지?" "인정하든 말든, 너는 암롯사의 왕자이고 암롯사 왕의 아들이야. 그러 니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다 할지라도 네가 할 일은 해라. 아버 지를 구해." 아킨이 휘안토스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휘안토스는 냉랭한 눈빛으로 바라보기만 할 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목덜미를 누른 검에도 점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형은 나를 죽이려 했잖아." "살았으면 된 거 아냐. 어쨌건 중요한 건 결과고. 그리고 그렇게 살았 으니, 살아 있는 만큼 네 할일을 해." 아킨은 다시 기가 막혔다. 누가 누굴 죽이려고 했는데, 그래도 살았으니 그 일 잊고 시키는 일이나 해라? "거절하겠어. 형이 알아서 해." "그렇다면 여기서 네가 할 일은 죽어주는 것뿐이야. 쓸모없으니까." 아킨은 다시 휘안토스의 검이 목을 스치는 것을 느꼈다. 속에서 뜨거 운 것이 확 치솟아 오르고, 눈시울이 달아올랐다.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으면 죽이는 건가?" "당연한 거지." "겁쟁이야, 형은." 휘안토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극하지 마라." "자극이 아니야. 지배하지 못하면 모두 적이라 생각하지. 납득하지 못 하면 모두 없애 버리려고 해. 겁나니까,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고 지배하지 못하는 모든 것이 두려우니까...! 형은 어머니와 똑같아. 오로지 형이 세우고 다스리는 세계, 그 하나만을 인정하고 이해하려 할 뿐이지 다른 것은 절대 용납하려고도 이해하려 하지 도 않아--! 어머니와 형이 다른 건, 단 하나 어머니는 스스로를 파괴해 버렸지만 형은 형을 제한 모든 것을 파괴한다는 거야." "자극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아키, 나는 우리 둘 다 같이 공 존할 수 있는 방법을 이미 가르쳐 줬어." "형 밑에 있는 거? 떠나지도 말고, 다른 곳을 보지도 말고, 오로지 형 - 휘안토스라는 형 하나만 지켜보고 사는 것?"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리고 네가 몇 번이나 거부해도, 나는 몇 번이 나 같은 말을 해 왔다." "우리 사이가 어떤 지는 형이 가장 잘 알아." 아킨은 검이 목을 베어냄에도 휘안토스 가까이 다가갔다. "한번 허물을 벗어난 벌레가, 다시 그 허물을 뒤집어쓰고 작아질 수 있을까? 고치를 찢고 나온 성충이 다시 그 안으로 들어가 벌레가 될 수 있을까? 절대 불가능해. 절대로! 나와 형의 관계 역시 마찬 가지야! 이미 끝난 문제야! 그리고 형은 그런 나를 지배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도 현명하지도 너그럽지도 못하고, 나는 그런 형의 지배를 받아들일 정도로 형을 사랑하지도 않아!" 휘안토스가 입술을 꾹 짓눌렀다. 차가운 눈 안에 열기 같은 것이 스 며 나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형은 내가 두려운 거야. 형이 어찌할 수 없으니까! 압셀론 을 떠나 베넬리아로, 그리고 그곳마저 떠나 로메르드로 갔던 내가 돌아왔을 때 나는 분명 떠난다고 했고, 그때부터 형은 나를 두려 워했어. 지배할 수 없게 되어 간다는 것을 알게 되니까 없애 버리려 고 했지. 그 꼴로 만들어 가두었지! 그리고 유제니아를 그렇게 만들고, 그 공교로운 악연으로 나를 지배할 수 있게 되니 그 때는 안심 했겠지. 하지만 내가 다시 벗어나려 했을 때, 그리고 이제야 말로 결코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 때 형은 정말 '두 려움'을 보였어." "입 닥쳐." "기만하지 말자고. 우리 둘은 절대 같은 곳에서 공존할 수 없어." "그래서, 나를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아킨이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형이 두렵지 않아. 나는 형을 지배할 수 있으니까." "까불지 마." "헛소리인지 아닌지는 알아서 생각해. 나는 분명 방법을 알고 있고, 지금 당장이라도 쓸 수 있으니까." 유리에 금가는 듯 파칭- 소리가 났다. 검이 동강 나며, 그 나머지 절 반이 바닥에 챙그랑 떨어졌다. 아킨은 검을 짚었던 손을 내렸다. 휘안토스의 검은 깨끗하게 잘려 나가 있었다. "유즈는 내가 데리고 갔어. 그리고 맹세하건데, 이제부터는 아무리 형 이 원해도, 가지고 싶어도, 손끝 한번 대지 못하게 될 거야." "아킨토스.....!" "이름 부르지 마. 역겨우니까." "그래, 좋아 네가 아는 방법이란 게 대체 뭐지?" "가르쳐 주면 방해 해 보게? 미안하지만 형은 절대 못해. 경계의 숲 을 넘고, 알르간드 여왕의 허락을 받는다 할지라도, 형은 결코 할 수 없어-!" 그리고 아킨은 돌아섰다. 휘안토스는 그를 잡지 않았고, 잡을 수도 없었다. 문이 열리고 닫혔다. 마르실리오가 뭐라 말하는 소리가 들리기는 했 지만 아킨은 대꾸하지도 않았다. 휘안토스는 입술 안쪽을 꾹 짓누르고는 의자에 앉았다. 방금 전, 목 구멍까지 치솟았던 열기는 아직도 남아 있었고 온 몸이 그 열기에 반응하여 떨리고 있었다. 왕관을 도둑맞아도 이 기분보다는 나을 듯 했다. 아킨이 한바탕 쏟아 붓고 간 수 많은 말 보다, 그 사실 하나만이 더 중요하게 뇌리에 박혀 있었다. 데리고 갔다고? 그리고 그녀가 어디로 갔을 지는 뻔하다. 예전에 그랬듯, 이번에도 그랬겠지.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자 휘안토스는 다시 화가 치밀었다. 여자로서 최악의 대접만 해 주었지만, 그런 만큼 그녀가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기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그저 슬퍼하며 증오하며 하루하루 시들 어 가기만 할지라도, 그래도 그의 곁에서 그리 되어야 한다. 휘안토스는 이마를 꾹 짓눌렀다. 땀에 젖어 미끈거리고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정말 그녀가 미친 듯이 보고 싶었다. 다시 한번- 아니 몇 번이라도 그의 것이라고 확인하고 싶었다. **************************************************************** 작가잡설: ......롤링 다큐를 봤답니다. --;; 무서운 아줌마더군요;;;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60장 *************************************************************** [겨울성의 열쇠] 제287편 세상의 끝#4 **************************************************************** 칼라하스 공주가 카티온의 대궁전에 도착한 것은 자정을 훨씬 넘긴 시각이었다. 그녀는 그녀만큼이나 지쳐 있는 마하의 품에 안겨, 칼 리토 대공왕과 만났다. 칼리토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훑어보고는, 떨리는 손으로 그 볼을 어 루만졌다. 재투성이라 왕의 깨끗한 손도 금방 지저분해지고 말았다. 공주가 어떻게 된 일인지 차근차근 말하자, 그 손은 처음에는 떨 리다가 나중에는 허공을 후려쳤다. "이 개자식이-!" 칼리토는 분개하고 울부짖었다. 검을 뽑아 커튼을 잘라 버리고, 테이 블을 쓸어 꽃병을 내동댕이쳤다. 칼라하스 공주는 두 손을 맞잡아 허벅지 위에 얹고는 그런 오빠의 모 습에서 시선을 돌렸다. 마침내 잠잠해졌을 때, 방 안은 완전히 엉 망진창이었다. 칼리토는 숨을 씩씩 몰아쉬며,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마하를 노려보았다. "리스가 이 꼴이 되도록 넌 뭐 한거냐!" 칼라하스는 칼리토가 워낙에 지쳐 있어 이리 비이성적인 말을 하는 거라 이해하기로 했다. 그래서 들썩이는 칼리토의 어깨에 손을 얹 으며 말했다. "그녀가 없었으면 저는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어요. 저는.... 정말 평생 에 걸쳐 감사해도 모자랄 지경이에요." "칸느는 네 호위고, 너를 무사히 지키는 건 당연한 의무야!" "제가 어디를 다쳤죠? 생채기하나 없이 여기까지 왔어요. 그녀는 자 신의 임무를 누구보다 훌륭하게 해 주었어요." 칼라하스는 아무리 오빠가 서둘러도 깨끗이 씻고 그와 만날 걸 그랬 다는 생각을 했다. 카티온 외항의 점령으로, 지금 칼리토는 반쯤 정신 나간 상태였다. 그가 가장 부지런히 한 일은 신을 원망하는 일이었고, 그 다음 부 지런하게 한 일은 조그만 일에도 초조하게 반응하는 일이었다. 그런 오빠의 모습을 이렇게 다시 확인하게 되자, 칼라하스는 눈물이 나왔 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실망하는 건, 그것도 사랑 외의 이유로 실 망하는 건 가슴 아픈 일이니까. 마하가 주변을 둘러보는데, 잠자코 그들을 보고 있던 악튤런이 앞으 로 나서 깨끗한 손수건을 꺼냈다. 칼라하스가 그 수건을 받으려 했 지만, 악튤런은 고개를 젓고는 직접 그녀의 얼굴을 닦기 시작했다. 수건은 금방 시커멓게 변했다. "곧 몸부터 씻고 오겠어요." "그리 하십시오. 그래도 다친 곳이 없으셔서 다행입니다." 칼라하스는 다시 한번 마하를 따스하게 보았다. 그런 공주의 표정에, 악튤런의 얼굴은 오히려 흐려졌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곳에 가 계시라고 했는데... 오히려 그렇게 홀로 계시는 것이 더 위험한 일이었군요." "아니에요. 휘안토스가 명예를 모르는 짓을 한 것뿐이에요.... 저도 그 에 동의했었잖아요. 자꾸 그러시면, 저도 도저히 편해지지 않아요. 저를 지키다 죽어간 사람들에게, 저 역시 책임이 있는 거니까." 악튤런은 그녀의 볼을 쓸어 올렸다. 왕이 있는 곳에서, 그 동생인 공 주에게 그렇게 친밀하게 행동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짓이기는 했지만 칼리토는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 악튤런은 공주 의 이마에 입 맞추고는 말했다. "어서 옷을 갈아입고 오십시오." 칼라하스는 그 말이, 앞으로 어떤 논의가 벌어져도 그녀를 포함하여 의논할 것이라는 뜻임을 알아챘다. 참으로 오랜만에 칼리토와 악튤 런이 그녀를 받아들이려 하는 것이다. 칼라하스는 환하게 웃고는 마하의 목을 끌어안았다. 마하와 칼라하스가 나가자, 칼리토는 음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할 생각인 거지?" "제가 암롯사를 파멸시키겠습니다. 그리고 휘안토스, 그는 결코 용서 하지 않겠습니다. 살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당장 죽이러 갈 건가?" 악튤런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간단하게 죽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니, 간단하게 죽지 못하 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 말도 오고가지 않았다. 촛대와 램프의 환한 불이 방안을 고즈넉이 밝힐 뿐, 그저 밖에서 간 혹 들리는 바람소리만이 모든 것일 뿐이었다. 잠시 지나자, 칼라하 스가 마하와 함께 돌아왔다. 그녀는 방금 옆방에서 자다가 단장하고 나온 듯 깨끗하고 편안해 보였다. 그녀가 무사하다는 것을 이번에 야 말로 제대로 확인하게 되자, 칼리토의 얼굴은 대번에 환해졌다. 마하는 그녀를 의자에 앉혔다. 칼라하스는 자세를 잡고는 오빠와 고 종 사촌 오빠를 돌아보았고, 그들의 얼굴이 밝자 만족했다. 칼리토가 말했다. "악튤런이 할 말이 있다는 구나. 아주 중요한 말이란다." 칼라하스의 시선이 악튤런을 향하자, 악튤런은 오히려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휘안토스가 대회의를 소집했습니다." "들었어요." "그리고 그 회의에서, 그는 휴전과 포로인 사이러스 대공왕을 요구할 것입니다. 델 카타롯사는 물론이요, 에크, 카로, 헤로르까지 모두 그의 제안에 동의할 것이고, 우리는 아마도 배상금과 치욕스런 조 건하에 전쟁을 마치게 될 것입니다." "....예상....했었어요." 그러나 목소리가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악튤런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전쟁을 이리 만든 데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공주님. 제 능력이 부 족했습니다." 칼라하스는 그 떨리는 목소리가 안쓰러웠다. 그가 롤레인과의 대전에 서 얼마나 참담한 결과를 거두었는지, 그 누구라도 알고 있었다. 그가 충격을 받은 것은 델 카타롯사의 패배가 아니라, 그렇게나 자신 이 우위라 믿어 의심치 않던 롤레인에게 너무도 가볍게 제압당한 것이었다. "아직 악튤런에게 기회는 많아요......" "하지만 중요한 것인 오늘 이렇게 패하여 공주님 앞에 서 있는 것입 니다." "지금의 악튤런을 믿고 있든, 미래의 악튤런도 믿어요. 더 자책하지 말아요. 제가 슬퍼지니까." 그리고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아무 말도 없다. 그저, 이렇게 서 로를 위로하고 어깨를 보듬어 주며 다음을 바라보는 수밖에는 없다. "하지만 공주님, 이대로 패배를 인정하기에는 사이러스도, 휘안토스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칼라하스는 조금 불길해졌다. 다른 방법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지만, 있다고 해도 불안한 건 사실이었다. 오히려 몇 배로 보답을 받을지 모르는 일이었고, 지금도 버거운데 그 때에는 도저히 감당하지 못하게 될 것만 같았다. "다른....생각해 두신 거라도 있나요?" "물론 있습니다. 그리고 제 모든 것을 걸고라도, 그 일만은 성공시키 도록 하겠습니다." 칼라하스는 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벌떡 일어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간절히 바랬다. "그리고..... 제가 희생되더라도, 휘안토스와 사이러스는 제 손으로 파 멸시키겠습니다." "암살....이라도 하겠다는 건가요?" 악튤런은 고개를 저었다. "암살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못할 때에나 할 것입니다." "말 해 줘요. 뭘 생각하시는 건가요." 악튤런은 자신을 향해 뻗고 있는 칼라하스의 손을 두 손으로 잡았다. 그 손은 따스했지만, 분명 떨리고 있었다. "성배를 찾아오겠습니다. 그리고 대회의에 맞추어, 그 성배를 우리들 의 왕과 함께 제도로 귀환시키겠습니다. 대회의의 그 누구라도, 성 배가 진실 된 성배라는 것이 증명된다면 우리의 왕을 황제로 인정해 야 합니다." 칼라하스는 아찔해졌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악튤런의 손 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다. "설마, 알르간드로 가실 생각인가요? 지금 당장?" "지난번처럼 바로 알르간드로 가지는 않을 겁니다. 제가 알아서 하겠 습니다. 또, 폐하와도 충분히 논의했습니다." 칼라하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불확실해요, 너무나! 게다가 당신이 없는 사이에 암롯사 쪽에 서 당신의 부재를 알아챈다면, 당장에 카티온을 점령할 겁니다. 지 금은 안 돼요, 지금은!" "지금이야 말로 가장 적당한 시기입니다, 공주님. 그리고 저는 반드시 성공시키겠습니다." 칼라하스는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그가 이렇게 불타는 눈으로 말하면, 그 누구도 그를 말릴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 작가잡설: 악티....의 순정이랄까. --;;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61장 **************************************************************** [겨울성의 열쇠] 제61장 다시 부르는 옛 노래 제288편 다시 부르는 옛 노래#1 ***************************************************************** 아킨은 거의 이 주일 만에 알르간드의 숲으로 돌아왔다. 긴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소년처럼. 눈 궁전의 입구에서 그를 맞이한 베이나트는, 아킨이 상당히 지쳐 있 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마르거나 창백해진 것이 아니었다. 눈에는 홍수 뒤의 폐허 같은 황량 함이 담겨 있었고, 그 위로는 갈망이 서녘에서 부는 바람마냥 허허 로이 떠돌고 있었다. 베이나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소년 이 쉴 수 있도록 해 주었고, 소년은 그런 베이나트의 배려에 마음 을 맡긴 채 며칠을 보냈다. 그렇게 일주일이 가고, 보름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을 때 아킨은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며칠이나 지났죠?" "이제는 바깥과 같다. 네가 보낸 만큼 지났고, 그것은 아마도 일주일 정도 될 거다." 아킨은 웃었다.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다 말하면 끝도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세상은 쉽 게 좋아지지는 않는 다는 거예요." "어린놈이 벌써 그렇게 회의적으로 주절대면 어쩌려고 그러냐. 뭐가 닥쳐도 나는 이긴다, 하는 혈기 방장한 자세로 살아야지." "누구누구랑 비슷한 말을 하네요." "그건 네 녀석이 누가 봐도 비슷하기 때문일 게다." 아킨이 다시 키득 웃었다. 고개를 숙이고 삼키듯 웃는 그 모습만은, 조금 나아 보였다. "어렸을 때는, 세상 모두가 나를 집어 삼키려는 것만 같았어요. 나는 너무나 자그마했고, 세상은 저를 집어삼키고도 태평하게 굴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하기만 했죠. 그래서 어른이 되고 힘이 세지면 무엇이 든 다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그 때가 되면 나를 밟은 모두에 게 똑같이 해 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그럴 생각이냐?" "아뇨. 하지만... 적어도, 교수님이 말한 대로 강해지고는 싶었어요. 그 때 의미는 몰랐지만, 어쨌건 어렴풋이나마 당신이나 롤레인 교 수님, 또는 탈로스님 비슷하게 되어야 한다고는 생각했죠. 그리고 세르네긴도 동경했죠. 제가 아는 사람 중에, 유일하게 휘안과 마주 볼 수 있는 사람인 듯 했으니까.... 하지만 당신과 지에나, 팔로커스는 지상 그 누구보다 강하고 그 누구보다 외로워요. 모든 마법사들의 왕 같은 스승님과 탈로스님은, 단 하나 채워지지 못한 갈망 때문 에 괴로워하죠. 자기 자신에게조차 엄격하고 강한 세르네긴은, 그렇 기에 소중한 단 하나가 자신의 일 때문에 혹독한 일을 당하자 모든 것을 희생하더군요.....자신이든 남이든...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순간에 아킨은 켈브리안이 생각났다. 그녀야 말로 제일 강한 사람이 아닐까. 잠긴 듯 사라진 듯 보이지만 폭풍이 물러나면 가장 먼저 햇살에 빛을 퉁겨내며 나타나는 바위처럼...... "힘을 얻게 되면.....뭐, 지금도 약한 편은 절대 아니지만 어쨌건 빛이 강해지는 만큼 제 그림자도 강해질 것 같아요." "네 그림자가 뭔데 그러느냐." "제 다른 모습. 뭐, 성질 고약한 악령같은 존재라고 하는 편이 낫겠네 요." "지배했다고 하지 않았니?" 아킨은 고개를 저었다. "저한테 크게 한방 맞고 잠든 것뿐이더라고요.... 그는 내 안에 아직 살아 있고, 저는 분명히 느낄 수 있어요. 잠시 숨죽이고는, 제 분노가 자신을 불러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아킨이 두 손을 펼쳐보였다. 두 개의 팔찌가 흔들렸다. "베이, 저는 분명 강해지고 싶어요. 그 누구의 지배도 받고 싶지 않 고, 그 누구에게도 제가 원하는 것을 빼앗기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지배받을 때와 빼앗길 때의 분노도 커져 갈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분노는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것만 같아요..... 그래요, 그 니왈르도가 그랬던 것처럼." "....." "저는 그에 대해 전혀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많은 것을 빼앗겼다 가 찾아왔고, 그 힘으로 많은 이들의 것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했던 자일 겁니다. 당신들의 것이었던 성배의 힘 역시 마찬가지. 그는 그것을 얻어 자기 것으로 했고, 그 힘이 영원히 자기 것이라 생 각했기에 내 놓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너는 그 힘을 얻으면 지배자가 될 거냐." "될 수 있겠지요......이 세계의 두 번째 황제가 될 지도 모르고, 팔로 커스 님을 능가하는 마왕이 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쨌건 이 세상 그 누구도 가지지 못했던 가장 위대한 힘을 얻게 된다는 것만 은 사실이죠. 인간으로서는 말입니다." "가능성은 언제나 욕망을 부르지. 너라고 다를 거라 생각하지는 않는 다. 아니, 할 수 있는데 하지 마라는 것 자체가 참으로 가혹한 일 이란 건 나도 잘 안단다. 팔로커스가 그랬고, 나 역시 어쩔 수 없는 욕망에 시달렸고, 지에나도 그 욕망을 이 눈의 왕국에 퍼부어 대 고 있지. 니왈르도 역시 마찬가지.... 그래, 그는 어쩌면 큰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할 수 있으니 했던 것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키- 무엇이 되든 상관없지만, 나를 실망시키지는 말아다오." "죄송합니다." 아킨은 한 번 더 말했다. "정말 죄송해요, 베이나트." 악튤런은 예전과는 달리 너무도 쉽게 은둔자의 탑에 이르게 되자, 행 여나 무언가 속임수라든가 덫이라든가 하는 것이 없는지 의심해 봐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주변을 탐색해 보아도 딱히 위험한 것은 없었다. 숲은 숲일 뿐이었고, 땅은 땅이고, 탑 역시 그저 평범한 탑 처럼 보인다. 예전에는 탐색에 탐색을 거듭하고, 간신히 마법 진 을 파악하여 이 은둔자의 탑에 이른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숲에서 똑바로 들어오니 바로 이 탑이 나타난 것이다. 악튤런은 탑 주변을 둘러보았다. 연두 빛 잡초가 잔뜩 나 있었고, 뽀 얗고 작은 꽃 무리가 여기저기 무리지어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사 이에, 어렴풋이나마 오솔길이 남아 있어 그 길을 따라가니 곧 탑의 현관에 도착했다. 현관문도 활짝 열려 있었다. 악튤런은 그 안으 로 성큼 들어갔다. 이번에야 말로 무슨 일이 생길 거라 생각했는데, 정작 안으로 들어가니 여전히 아무 일도 없었다. 굵은 기둥이 천 장을 받치고 있는 홀에, 기괴한 조각상들이 그 기둥마다 웅크리고 앉아 있을 뿐이다. 그 기둥들이나 조각상에는 아무런 마법도 걸려 있 지 않았다. 그리고 그 기둥들 너머에서 붉은 램프 빛이 스며 나오 고 있었고, 그곳에는 둥근 계단이 있었다. 악튤런은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고는 그 계단을 올라갔다. 그저 저 벅 저벅- 발소리만이 홀을 울리다 사라질 뿐이다. 그렇게 2층에 다다르자, 곧 홀과 문이 보인다. 악튤런은 이제는 아예 아무런 경계 도 하지 않고 그 문을 활짝 열었다. 오래된 서재에서 나는 매캐한 냄새가 확 풍겨왔다. 열린 창문에서는 은은한 햇빛이 스며들고 있었고, 그 사이에 오래된 먼지들이 떠돌고 있다. 악튤런이 걸어갈 때마다 햇살이 어깨를 더듬듯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서재의 끝에 다다르자 바닥에 있는 수경이 나타났 다. 둥근 그 물위로, 양 옆의 창에서 쏟아지는 햇살이 스며들어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천장 위에는 그 물에서 반사된 빛이 같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런데 수경 옆에 두루마리 세 개가 반듯이 놓여 져 있었다. "그걸 가지고 가라." 악튤런은 순식간에 경계를 하며 고개를 들었다. 서재 구석에 놓인 의 자에, 탈로스가 앉아 있었다. 그의 손끝은 수경 옆의 두루마리를 향하고 있었다. "가지고 가라. 성배에 관한한 모든 것이 - 물론 내가 아는 것에 한하 여- 다 적혀 있으니까." 악튤런은 두루마리를 집어 들고 끈을 푸르고 그 안의 내용을 살짝 확 인했다. 그리고 탈로스의 말이 모두 진실임을 확인했다. "갑자기 미치기라도 한 거야? 오라고 대뜸 연락하고, 여기까지 달려 왔더니 오랫동안 꽁꽁 안고 절대 보여주지 않던 것을 옜다 가져가 라- 하고 던져주다니." "달라고 떼쓰는 놈에게 줬더니, 말도 많군. 싫으면 관 둬. 너 말고 달 라는 사람은 많으니까... 그리고 하멜버그와 뉴마르냐는 별로 멀지도 않잖아." "그래도 하루나 걸려! 그리고 나는 그 이유를 분명히 알고 싶은 거 야. 이렇게 뭔가를 준다면, 내게 원하는 게 있을 거 아냐." "넌 그냥 북쪽으로 가서 성배를 찾기만 하면 돼. 더 바라는 거 없다. 그것만도 버거울 테니까." 악튤런의 눈썹이 치솟아 올랐다. "이용당할 수는 없어." "설마하니 너만 이용할 정도로 네가 대단해 보이든? 암롯사의 왕자 도, 에크롯사의 여왕도, 베넬리아의 롤레인도 같은 것을 받았다." "암롯사의 왕자라면, 아킨토스를 말하는 건가 휘안토스를 말하는 건 가." "아킨토스의 경우는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으니 주는 것 자체가 바보 짓이지." 악튤런은 얼굴빛이 확 변했다. "더 잘 안다는 건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야. 그 꼬마는 지금 당장에라도 성배를 가질 수 있을 정도 로 잘 알고, 가깝기도 하고, 그럴 만한 힘까지 갖추고 있는데다가, 방해자마저도 없지. 게다가 나는 내 혈육의 목숨을 녀석에게 빚졌고, 그런 만큼 결코 방해해서는 안 돼. 이러니 그 녀석은 너보다 몇 배는 더 유리해." 악튤런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 당장에라도 뛰쳐나가 알르간드 로 달려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초조해졌다. "내가 보낸 건 휘안토스다. 그리고 그 휘안토스는, 아마도 대회의에서 이 사실을 알릴 거다. 뱀처럼 차가운 그 녀석은 어차피 성배를 인간 힘으로 얻을 수 있다는 것 자체에 회의적일 테니, 그것을 만 천하 에 공개하여 네 놈을 막으려 할 테지." "대체 뭘 꾸미는 거야!" "하다 보면 알게 될 테지." 탈로스는 그리 말하고는 히죽 웃었다. 그 못생긴 얼굴이 더 못생겨 보인다고 생각하며, 악튤런은 고개를 돌렸다. "한 가지 안심해도 될 일이 있다면, 그 휘안토스 왕자는 내 여동생을 죽였다. 그러니, 이 일은 어쨌건 휘안토스 왕자에게 유리한 일은 아니겠지."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나는 충분히 가르쳐 줬어." "젠장, 뭘 가르쳐 줬다는 거야!" "롤레인에게 실컷 얻어맞더니, 머리까지 나빠진 건가?" "닥쳐--!" 다시 탈로스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롤레인은 결코 너 따위에게 지지 않아. 그리고 그 당연한 사실을, 너 혼자만 몰랐을 뿐이지." "준비가 안 돼서 진 것뿐이야." "악튤런, 네놈은 그래서 롤레인에게 진 거고, 앞으로도 계속 질 거 야." "헛소리 하지 마!" "너는 나도 못 이겨." 악튤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다, 라고 우기기에는 둘의 차 이는 너무 컸다. "너는 부정하고 싶겠지만, 우리 셋 다 자질은 비슷해. 다른 점은 그 자질을 어떻게 끌어내어 어떻게 쓰느냐일 뿐이고, 그 단 한 가지가 우리 셋의 모든 것을 결정했지. 그리고 나와 롤레인의 경우, 그 랬기에 서로가 서로의 불행이었다." "나는 당신들과 틀려." "물론 틀리겠지. 우리와 같은 불행이자 행운을 너는 얻지 못했으니까. 너는 몰라, 나와 가장 비슷한 존재를 바고 옆에 놓고 살아야 하는 게 무엇인지. 우리는 누구보다 서로를 인정하지만, 누구보다 서로를 미워하고 무시하려 하지. 형제보다 가깝게 닮았지만, 원수보다 혐오하지. 그렇게 우리는 서로가 있기에 괴로웠고, 서로에게 인정받기 위해 각자의 길을 미친 듯이 달리고 달려갔지....... 그런 롤레인이 네게 진다면, 유감스럽게도 내 자존심이 상해." 악튤런이 달려가 탈로스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나는 당신들처럼 그런 좁디좁은 우물에 처박혀서 살지는 않아--!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야. 더 분명하고, 더 가치 있는 거야!" 그러자 탈로스는 악튤런의 가슴을 쿡 찔렀다. "그렇다면 지금 가서 증명 해 보라고." 히죽 웃는 탈로스의 얼굴은 정말 악마 같았다. "이것이 네 숙명이라 믿는 다면, 그렇게 해 보란 말이다--! 숙명은 증명하는 자만이 자기 것이라 외칠 수 있는 법이니까." **************************************************************** 작가잡설: 거, 참.......;;;;;;;;;;;;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61장 *************************************************************** [겨울성의 열쇠] 제289편 다시 부르는 옛 노래#2 **************************************************************** 황제의 즉위 후로는 처음 소집된 대회의는, 델 카타롯사와 암롯사의 전쟁으로 소집된 것 인만큼 각 나라의 왕족들은 자석에 철이 붙듯 즉각 모였다. 델 카타롯사에서는 칼라하스가 아닌 랑그레아 공주가 도착했고, 암롯 사에서는 직계 왕족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으므로 휘안토스가 직접 와야 했다. 회의는 헤로롯사가 가장 늦게 도착하자마자 열렸고, 그 중 가장 먼저 발언권을 얻은 랑그레아 공주가 주장한 것은 대회 의를 연기하는 것이었다. 랑그레아 공주가 말한 연기 사유는 영 시원찮았다. 그저 칼리토 대공 왕이 병석에 있고, 여러 델 카타롯사 가신과 영주들이 대회의를 반 대하고 있고.... 등등. 휘안토스는 구차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거 짓말이라 하더라도, 좀 쓸만한 것을 궁리해 오지 그랬나. 랑그레아 공주는 말을 마치고는 자리에 앉았다. 분위기는 침묵으로 꽉 경직되어 있었고, 다들 단단하고 차가운 눈빛 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그 중에 에크롯사의 피올 공주가 발언권을 얻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뒤에 있 는 비서관에게 무언가 가지고 오라 명하였고, 그 키 작은 늙은이는 그녀에게 봉인된 서신을 내 놓았다. 피올 공주는 그것을 모두에게 흔들어 보이고는 말했다. "사흘 전에, 제 언니이시자 에크롯사의 여왕이신 죠세피나 여왕님께 마스터 탈로스 고르노바 님이 보내신 것입니다." 휘안토스는 호기심이 일었다. 로메르드 왕가의 일 때문인가? 설마, 그럴 리가. 지금 꺼낼 일도 아니고, 제국 내의 일도 아니거니와, 증 거도 없는데. "랑그레아 공주, 지금 귀국의 마스터 악튤런 파노제는 어디 계시나 요." 랑그레아 공주의 얼굴이 눈에 뜨이게 창백해졌다. "본국에 계십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뉴마르냐의 국경 수비대에서 여왕께 보고가 들어 왔습니다. 그곳의 책임 마법사인 칼쿠바 스파로체가 의문의 일행을 발견하여 그들에게 의례히 있는 검문을 받을 것을 요구했으나, 오히려 공격을 받았다더군요. 칼쿠바는 이 사실을 에크 찬다에 보 고했으며, 그 일행의 마법사의 인상착의에 대해 상세히 보고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본국에 계신다는 댁의 마스터와 지나치게 흡사하더군요." "오해입니다." "오해라면, 지금 당장 댁의 마스터와 제 앞에서 연락을 취하여 오게 하십시오." "그는 지금 왕을 보좌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오라고 하는 것은, 지 나친 내정 간섭 입니다." "지금 우리 모두는 델 카타롯사가 '일으킨 전쟁' 때문에 온 것입니다. 성배의 규약에 의해, 제국의 평화를 어지럽힌 나라에 관한한 모든 나라가 발언권을 가집니다." 말이 발언권이지, 실제로는 '얌전히 우리 말 안 들으면 재미없다.'라 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녀는 다시 손을 들었다. 비서관이 이번에는 두루마리를 건네주었고, 그녀는 그것을 모두에게 좌악 펼쳐 보였다. "뿐만 아니라, 저희 마스터께서는 귀국의 마스터가 찾는 것이 무엇인 지 상세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왕께 마스터는 진실만을 말해야 하니, 이것이 거짓일 리는 없을 테지요." 랑그레아 공주의 얼굴은 이제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놀라움에 그녀 의 온 몸이 떨리고 있었다. 그런 공주를, 젊은 피올 공주는 차갑게 웃으며 바라보았다. 의장의 지위에 있는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며 말했다. "상세히 말해 주시오. 대체 델 카타롯사에서 어떤 연유로 그 먼 북쪽 까지 마스터를 보냈는지." 피올 공주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금발 머리에 차가운 푸른 눈동자의 미녀인 그녀는, 더 없이 자신만만해 보였다. "델 카타롯사는 지금 성배를 찾고 있습니다. 알르간드의 천개의 눈으 로, 그 귀중한 보물을 건져 오라고 귀국의 마스터를 보낸 것이지요." 카를롯사의 반 왕자가 손을 들었다. 발언권을 얻게 되자, 그가 앉은 그대로 물었다. "뾰족한 방법이라도 알아낸 것이오, 아니면 급한 나머지 많은 탐색자 이자 실종자의 하나를 자청하고자 그리 한 것이란 말이오." "마스터가 확신하시 건데, 악튤런 파노제는 지금 그 누구보다 가까이 성배에 닿아 있다 하셨습니다. 행운과 노력이 따라준다면, 그리고 끝까지 그 갈망이 처음 불탔듯 끝까지 불탄다면 얻을 수도 있다고 하셨고, 그리 된다면 어떤 결과가 오는 지는 모두가 가장 잘 알 거 라 하셨습니다." 휘안토스는 정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번지는 불길을 등지고 있는 듯한, 그런 기분이었다. 그러는 중에도 피올 공주는 쏘아붙이듯 랑그레아 공주에게 말했다. "자, 이제 말해주세요, 랑그레아 공주. 어떤 연유로 성배를 찾는 것입 니까. 일전의 불상사에 대한 사죄의 뜻입니까, 아니면 지금의 불상 사에 대한 사죄의 뜻입니까." "피올 공주-! 지금 아무런 증거도 없지 않나요." "증거는 있습니다." 휘안토스였다. 발언권도 얻지 않고, 목소리도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막 격앙되 려는 두 공주 사이에, 그 말은 스며들 듯 들어와서는 둘 모두를 얼 어붙게 했다. 바위가 쩍 갈라지듯, 그 둘의 대화도 끊어졌다. 카를로사의 반 왕자가 수염을 꼬며 휘안토스를 주시했다. 헤로롯사의 랜든 공도 입을 일자로 문 채 휘안토스를 바라보았다. 베로크 황제는 초조해 하면서도 기대하는 눈초리였다. 발언권을 구태여 얻을 필요 도 없었다. 모두가 휘안토스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고, 기대하고 있었다. "피올 공주의 말이 맞습니다. 델 카타롯사는 현재 성배를 탐색하기 시작했고, 마스터 탈로스의 말 대로 악튤런 파노제는 그 성배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스터 탈로스에게 들은 말이 아니라, 제가 직접 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랑그레아 공주는 이제 정말 시체라 불러도 별로 억울할 수 없는 안색 이었다. 정말 하얗게 질려서는, 손이 부들부들 떨리다가 맞잡힌다. "제 수하의 마법사에게 그를 추격하라는 명령을 내려 두었습니다. 그 는 젊지만 아주 유능한 마법사이고, 성공적으로 악튤런 파노제를 추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어제, 그는 추격을 잠시 중단하고 제게 마지막 보고를 올렸습니다. 악튤런 파노제와 그의 일행이 뉴마르냐에 당도했으며, 알르간드 쪽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단지 그것만으로 그것을 확신하시는 겁니까." 휘안토스를 보는 랑그레아의 눈이 분노로 타오르고 있었다. 피올 공 주까지는 괜찮을지 몰라도, 휘안토스에게 그런 사실을 확인받는 것은 비참한 노릇이다. "물론 확신한다 말씀드린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 나라와 저 의 안전을 위해 악튤런 파노제를 감시할 수밖에 없으며, 비록 그가 알르간드로 넘어간다 할지라도 그 감시를 중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배를 찾는 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그것으 로 암롯사에 해를 입힐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할 뿐이며, 아무리 낮은 가능성이라도 간과할 수만은 없는 것이 지금의 제 입장입니다." 랑그레아 공주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했고, 그 침묵이 모두가 지금 의 사실을 긍정하게 했다. 피올 공주가 승리에 찬 미소를 보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휘안토스가 말했다. "폐하, 지금 암롯사 공국의 국왕 대리인이자 왕자로서, 또한 그 대표 로서 대회의에 제의하는 바입니다. 랑그레아 공주를 규약에 따라 감금하고, 델 카타롯사의 탐색을 저지해 주십시오." "성배는 제국의 상징입니다-!" 랑그레아 공주가 휘안토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휘안토스는 그 늙은 공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모두 자기 나라의 안위만 생각하지 말고 제국 자체를 보십시오. 성 배가 사라진 후에, 우리가 하는 일들은 그저 선조의 유산의 부스러 기를 나누는 것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성배가 돌아온다면, 우리에게 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지라니요? 그저 우리가, 델 카타롯사의 손으로 하는 것이 싫으신 겁니까? 아니면, 자국 외의 나라가 성배를 찾는 것이 싫으신 것입니까! 그렇게 안 일하게 안주하려고만 한다면,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아요." "어찌하여 델 카타롯사를 위해 달라져야만 합니까." 휘안토스는 경멸어린 눈빛을 보냈다. "지금 델 카타롯사는 제 아버지를 유폐했고, 제 나라를 침략했습니다. 정말 선조의 영광을 되살리기 위해 성배를 찾고자 하신다면, 애당초 그것에만 전념하시지 그러셨습니까. 저의 나라에 씻을 수 없는 치욕과 상처를 안겨 주고, 그 죄과를 덮기 위해 그런 이유를 대신다 면 그것이야 말로 선조의 영광을 더럽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휘안토스는 베로크 황제에게 말했다. "지금 정해 주십시오, 폐하." 랑그레아는 제발 기적이라도 일어나 달라는 간절함을 담아 황제를 보 았지만, 그 순간에 오히려 휘안토스가 베르크와 미리 말을 나누었 다는 사실만 깨달았다. 황제의 눈은 무관심했고, 애당초 랑그레아 공주의 그 어떤 말도 들을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다시 피올 공주를 보아야 했다. 피올 공주의 눈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녀도 휘안토스와, 황제와 같은 말을 나눈 것이다. 공주는 행 여나 해서 반 왕자와 랜든 대공을 보았으나, 결론은 마찬가지였다. 랑그레아 공주는 애당초 이 회의 자체가 그녀와 그녀의 나라 델 카타에 절망적이었다는 것을 너무나 늦게 깨달았다. "공주를 푸른 바위 탑에 감금할 것을 대회의의 뜻으로 받아 들여도 되겠소?" "동의합니다." "역시 동의합니다." "같은 의견입니다." 휘안토스는 답할 필요도 없었다. 세 표 이상이 나오면, 왕족이 아니 라 황족도 감금할 수 있는 것이 대회의다. "그리고 악튤런 파노제의 탐색을 중지 시키는 것 역시, 대회의의 뜻 으로 받아 들여도 되겠소?" 같은 수의 찬성이 나왔다. 랑그레아는 이 농담 같은 상황이, 너무나 치욕스러워 받아들이기는커 녕 일어나는 것도 인정할 수 없었다. 움직이는 순간에 인정하게 되어 버릴 것만 같아서, 어리석은 아이 같은 고집만 남는다. "하나 더, 성배의 탐색을 중지 시키는 것은 암롯사의 왕자 휘안토스 에게 일임할 것이오. 뉴마르냐는 알르간드와 맞닿은 곳이자, 에크 롯사의 영지이기도 하니 에크롯사에서는 최선을 다해 휘안토스 왕자 가 보낸 이들을 돕기 바라오." "알겠습니다." 피올 공주가 고개를 숙였다. 랑그레아 공주는 입술을 꾹 눌렀지만, 눈물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부들부들 떠는 랑그레아 공주에게, 랜든 대공이 그녀에게만 들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공주, 빼앗을 수 없는 자가 귀한 물건을 가지고 있게 할 수는 없는 일이오." "비겁자들입니다, 당신들은-"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시오. 사자를 위대하는 이유 하나만으로 제 마당까지 들어오게 하는 자가 있소, 용이 아름답다는 이유 하나만 으로 내 양과 소들을 다스리게 하는 자가 있소? 마찬가지오. 선조의 영광이 빛나고 탐난다 하나, 그 영광의 창이 우리의 배부터 꿰뚫 을 것이라면 그 누구도 용납할 수 없는 법이오." "랜든 대공......!" "델 카타롯사의 욕심이 과했소. 옛 꿈은 그저 옛 꿈일 뿐. 그 누구도 옛 망령을 제 눈앞으로 부르지 않는 법이란 말이오. 비록 성자의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오." 황제가 대회의의 끝을 알렸다. 문이 열리고, 서기관은 펜을 놓았다. 각 나라의 비서관들이 왕들의 대리자들 옆으로 와 그들에게 망토를 건네고 앞으로의 일정을 말하기 시작했다. 오로지 랑그레아 공 주만이, 봄빛 가득한 정원의 죽은 나무마냥 창백하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황제의 명에 따라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에게 랑그레아가 체포되었고, 어제 이 회의실에 랑그레아 공주만을 제하고 모였던 대공국의 대표 들은 서로에게 희미한 미소를 보냈다. 그들 모두 만족하고 있었고, 그들의 왕국과 영지를 뒤흔들 성배가 다시 천개의 눈에 '전설'로 남아 있게 된 것에 더욱 만족했다. 황제가 나가자, 휘안토스는 그들에게 인사를 하고는 가장 먼저 회의 실을 나갔다. **************************************************************** 작가잡설: 쎄니가 제대로 발정이 왔습니다! 아아아악!!! 애옹~~~ 애옹~~~ 애옹~~~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61장 *************************************************************** [겨울성의 열쇠] 제290편 다시 부르는 옛 노래#3 **************************************************************** 봄 햇살은 따사로이 황궁의 정원을 내리쬐고 있었다. 정원은 봄꽃으 로 가득 찼고, 얼어붙었던 분수와 시내, 운하도 모두 녹아 햇살을 퉁겨낸다. 막 마르실리오에게 무언가 말하려는데, 피올 공주가 뒤 따라오며 말했다. "오늘 정말 감사드립니다, 휘안토스 왕자." "우리나라를 위한 길입니다. 오히려 제 쪽에서 협력에 감사드려야지 요." 피올 공주가 눈웃음을 쳤다. "오늘 아무 일 없으시다면, 저희 에크롯사의 궁으로 초대하고 싶습니 다. 아니, 암롯사의 대표단 모두를 초대하고 싶군요. 제 수행기사들 모두 왕자와 그 일행을 환영할 것입니다." "아직은 안 됩니다. 암롯사는 전쟁 중이고, 일이 끝나는 대로 서둘러 돌아가야 합니다. 아버지가 돌아오실 때까지 저는 정말 쉴 틈도 없 습니다." 왜 그런지 피올 공주는 알고 있었다. 암롯사에는 휘안토스를 제하면 직계 왕족이 없다. 사이러스와 피붙이처럼 가까웠던 케올레스마저 최근 바르젤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도와줄 사람조차 없이 휘안토스 혼자 모든 일을 다 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에크롯사의 궁 앞까지는 바래다 드릴 테니. 그 정도로 봐 주 십시오." 피올 공주의 얼굴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휘안토스보다 일곱 살이 나 많은 공주이긴 했지만, 그래도 어리고 잘생긴 왕자의 청은 그녀를 기쁘게 했다. 그렇게 휘안토스는 그녀를 정원까지 바래다주고는, 곧바로 암롯사의 궁으로 향했다. 피올 공주가 궁 안으로 돌아가자 마르실리오가 물었다. "뉴마르냐에 있는 그란셔스에게는 뭐라 하실 예정입니까." "곧 알르간드로 넘어가라고 해야겠지. 어쨌든 그의 의무는 악튤런 파 노제를 저지하는 것이니까." "그에게는 무리입니다." "어차피 벌써 자기 스승에게 연락했을 것이다. 롤레인이 어찌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모른 척 하지는 않을 거야. 특히나 악튤런까지 연관되어 있는데." "앞으로의 일정은 어떻게 되십니까." "나는 곧바로 산 파로이로 돌아간다. 악튤런 파노제가 저지된다면, 랑 그레아 공주가 감금된 델 카타롯사 쪽에서는 전쟁을 중지하고 항복할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는 지금 어떤 발언권도 없고, 고립을 감수 하겠다면 헤르롯사와 카를롯사부터 들고 일어날 것이다....... 고립된 나라는, 말 그대로 침략해도 상관없는 나라. 두 나라가 그 기회를 날로 버릴 리 없지." 각 공국이 대회의의 결정에 복종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일단 대회의 에서 결정된 것을 거절한다면 고립되어 버리고, 고립은 곧 공식적 으로 '무엇이든 빼앗아도 된다.' 라고 선언하는 것에 다름없다. 사 이러스가 카티온을 포위하고도 돌아와야 했던 것이 그 때문이었고, 그는 대회의의 결정에 따라 델 카타롯사의 황위계승권을 말소시키 고 왕비를 폐위시키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그 때 마르실리오가 아- 하고 놀란 듯 중얼 거렸다. 그가 웬만해서 는 놀라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휘안토스도 대체 무슨 일인가 해서 그 시선을 따라갔다. 분수가 있었다. 햇살을 온통 하얗게 퉁겨내는 분수와, 그 분수 옆의 청동상에서도 물줄기가 쏟아진다. 그리고 그 사이에 푸른 옷의 소 녀가 서 있었다. 휘안토스는 그녀를 알아보았다. "먼저 돌아가라, 마르실리오." 마르실리오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휘안토스가 툭 치자 오히려 깜짝 놀랐다. "돌아가라고 했어." 마르실리오는 고개를 숙이고는 명령에 따라 정원을 빠져나갔다. 지금 일이 왕자의 '가장 사적인' 일이라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마르실 리오가 사라지자, 소녀는 휘안토스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도망 치거나 얼어붙을 줄 알았던 휘안토스는, 그런 소녀의 태도가 이상하 게 마음에 들었다. 소녀가 머리를 휘감고 있던 우윳빛 베일을 걷었 고, 햇살에 드러난 소녀의 머리카락을 보자 휘안토스는 적잖이 놀 랐다. 소녀의 까만 머리카락은 목덜미에서 짧게 깎여 있었다. 소중 히 여기는 물건 구석이 깨어진 것을 발견한 듯한 기분이었다. 정확 히 말하자면 '서운한' 기분이다. "휠테스 님이 피올 공주님과 함께 있어요." 유제니아가 그렇게 말하자, 휘안토스는 그녀가 더 설명해 주지 않아 도 대강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궁금하지는 않았다. 중 요한 것은, 그의 손을 빠져나간 이 소녀가 다시 이렇게 앞에 나타난 것이다. 유제니아는 겁에 질리지도, 증오에 타고 있지도 않았다. 그녀의 푸른 눈 안에 있는 것은 은근한 차가움, 겨울 냉기가 남은 봄의 샘 깊은 곳 같은 그런 차가움이었다. 아기 사슴 같던 예전과는 달리, 머리 가 짧아진 정도인데 예전과는 너무도 틀려 보인다. 그러나 그 차이 는 오히려 약간 어긋난 빈틈을 메워버리는 듯해서 나쁘지만은 않았 다. 유제니아는 잠시 베일을 만지작거리더니 작게 말했다. "아이 생겼어요." 휘안토스는 정말 태어나서 처음으로 얼어붙었다. 유제니아는 휘안토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른히 한숨을 내 쉬었다. "거짓말이에요." "응?" "어쩌나 보려고요. 생각보다는 재미없네요." 방금 전 보다 더 얼어붙는 것만 같다. 어느 쪽이 진실일까. 잠시 생각하던 휘안토스는 정말 생기기라도 했 으면 아예 찾아오지도 않거나, 사실은 없다고 거짓말 하지도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돌아와라." "끔찍해요." "무엇이든, 익숙해지면 되는 문제야." "왜 익숙해져야 하는 건데요?" "너는 내 여자니까." "누구 마음대로." "그런 건 내가 결정한다. 너는 내 거야." 유제니아의 턱이 가볍게 떨렸다. "마음먹기 마련이다. 피할 수 없다면 받아들이면 되는 문제고, 싫다면 길들여지면 되는 문제다." "싫어요. 그리고 만약에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가 정말 온다면, 그것이야 말로 나 자신도 속이는 거짓말이 될 걸요. 나는 당신을 결코 사랑할 수 없고, 그렇게 말한다면 그건 포기했기 때문일 테니까. 당신은 내게 너무 끔찍한 짓을 저질렀어요." "누가 너더러 사랑하라고 했나. 나도 별로 바라지 않고, 그렇게 속 보 이는 거짓말을 한다면 오히려 실망할 거다. 하지만 증오하려면, 내 바로 옆에서 그런 눈빛을 보내. 언제라도 그런 눈과 마주칠 수 있도록. 복수하려거든 내 품안에 있어라. 그만큼 내 심장에 칼을 꽂 기도 쉬워질 테니까." 유제니아의 푸른 눈이 얼어붙었다. 어깨도 움찔 흔들린다. 그리고 한 참만에야, 유제니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용서....해 보겠어요." 휘안토스는 웃음을 터뜨릴 뻔 했다. "날 용서해? 차라리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 같군. 똑 같이 믿을 수 없지만, 적어도 그리 비굴해 보이지는 않으니까..... 멍청한 소리 하지 마. 그런다고 증오가 사라지나? 분노가 사라지나? 아니면, 뭐 하나 달라지는 게 있나? 착한 척 하면서, 모든 죄인을 용서한다는 그런 거야 말로 어리석은 짓이다."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에요. 나를 위해서, 그리고 내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서지." "그렇다면 뭐가 달라지는 건데?" "당신을 미워하는 한, 나는 당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더군요. 그리고 내가 벗어나지 못하면 세냐도 벗어날 수 없고.... 그래서 당신을 용 서해 보기로 하겠어요." "기만이야." "노력한다고 했어요." "지금 또 너를 데리고 갈 수 있고, 다시 내 여자로 만들 수 있고, 방 금 전에 네가 한 농담을 진담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어. 그리고 그렇게 되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를 보는 유제니아의 눈은 다시 차가워져 있었다. 두 손은 베일을 꽉 쥔 채 떨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어깨에는 마지막 힘이 간신히 들어가 있었다. 휘안토스는 그런 그녀를 끌어안았다. 유제니아가 숨을 멈출 듯 놀랐 다. 몸이 바싹 닿고, 그의 숨결이 목덜미에 닿자 서서히 떨리기 시 작했다. "몸은 나를 기억하는 군." "놔요..." "벗어나려면 벗어나 봐라. 하지만... 나 역시 놔주지 않는다. 영혼, 마 음, 사랑.....그런 낯간지러운 말들, 내게 아무 소용도 없고, 중요하 지도 않고, 믿지도 않으니까. 그저 네 몸, 손에 잡히는 네 몸이 내 옆 에 있으면 그걸로 끝이다. 나는 더 이상 바라지도 않고, 바랄 필요 도 없어." 유제니아는 그를 밀쳤다. 베일이 날려 바닥에 떨어졌지만, 그녀는 개 의치 않았다. 베일은 바람에 하늘 하늘 물결치다가 날개처럼 유유히 날아간다. 휘안토스는 벗어나려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어 당겼다. "그런데 뭘 못한다는 거지? 꺾으면 꺾는 대로 꺾일 네가, 대체 내게 뭘 어쩌겠다는 거야!" "용서해요." "잊겠다는 건가?" "잊지는 못해요. 영원히 잊을 수도 없고, 잊을 생각도 없어요. 하지 만, 이제 당신에게 얽매이지는 않아요. 당신을 향한 미움과, 당신을 향한 증오와, 당신을 향한 복수심에 얽매이지 않겠어요....! 그래서 당신 때문에 불행해질 일도, 당신이 없어져서 행복할 일도 없을 거에요. 당신이 나를 어떻게 농락하든, 그것은 이제 나를 변하게 할 수 없을 테니까. 그게 제가 당신에게 주는 용서에요! 나는 결국 에는 '당신과 상관없이' 행복해 질 테니까!" "넌 못해. 그건 아예 바보이거나, 강철보다 강해야 간신히 가능한 일 이니까.....네 오라비도 불가능한 일이었고, 그도 결국에는 내 손에 팔을 잃었다. 그런데 네가 하겠다고? 아니, 절대 못해." "왜 그렇게 부정하는 거죠?" 유제니아가 말했다. "불가능하든 말든, 하던 하지 않던 그건 내 자유에요. 되든 안 되든, 그건 내가 책임지면 되는 문제에요. 당신이 부정할 필요도, 그렇게 구태여 장담할 필요도 없어요. 당신과는 상관없고, 당신이 어찌 하 든 어떻게 되든 역시나 상관없으니까!" 이제 휘안토스는 왜 아버지가 어머니를 감금했는지 알 것 같았다. 사 랑하지는 않아도, 적어도 증오와 두려움으로라도 그에게 얽매여 있 기를 바란 것이다. 무관심과 외면이야 말로, 아버지처럼 자존심 강한 사람에게는 결코 참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휘안토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건, 모욕이다. 유제니아가 손을 당겼다. 주변에 그녀를 지켜줄 사람은 없었다. 예전 에 그랬듯, 이번에도 또 얼마든지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휘안토스를 보는 유제니아의 눈은 차가웠다. 정말 그리 한다면, 이번의 그녀 는 '경멸'을 보낼 것이다. 확신할 수 있었다. 거듭, 거듭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싫다. 그가 어찌 할 수 없는 결과가 나오는 건, 이건 너무도 싫 다. 이런 극심한 모욕감이라니. -나는 형이 두렵지 않아. 나는 형을 지배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그 말이 생각나 버렸다. 유제니아의 눈빛을 보는 순간 에, 비슷한 눈으로 그를 보던 동생이 생각나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짧은 찰나에, 갑자기 번개 치듯 번득 생각난다.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어둠 속의 불꽃처럼 짧게 짧게 드 러났던 그 모든 것들이 처음부터 '같은 것'이었다는 것을 그는 깨 달았다. 이 소녀를 데리고 온 곳은 뉴마르냐, 알르간드의 바로 아래. 아킨이 이 소녀를 찾아왔던 것도 알르간드에서 뉴마르냐다. 뿐만 아니라. 아킨은 일전에 로메르드에서도 나타났었다. 휘안토스에게 가르쳐 준 것을, 아킨에게 가르쳐 주지 못할 리도 없다. -나는 형을 지배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아무 것도 모른다면 그런 말이 나올 리 없다. 순간 유제니아가 휘안토스의 팔을 뿌리쳤다. 속 안의, 베일에 덮이고 어둠에 가려졌던 것이 빛이 쏟아지며 드러난 것 같았다. 잠시 멍하게 흩어졌던 정신이 돌아왔다. 유제니아가 돌아서려 했지만, 그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네가 살아 있는 한 어디로든 도망쳐 봐라. 용서하든, 사랑하든, 미 워하든, 증오하든! 그래, 그건 네 자유야. 하지만-" "...." "하지만 나는 결코 패배하지도, 굴복하지도, 지배되지도 않아. 누구 도 나를 이길 수 없어. 그리고 너 역시 나를 떠나게 놔두지는 않을 것 이다. 반드시, 그리고 그 다음은 영원히 너는 내 안에 있게 될 거야." 그리고 휘안토스는 손을 놓았다. 유제니아는 도망치지 않고 그런 휘안 토스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놀란 눈이었지만, 겁먹은 눈은 아니 었다. 울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기뻐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나는 반드시 돌아온다. 그리고 반드시 너를 가질 거야.... 이번에는 도망칠 구석조차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바람이 불어왔다. 숲 깊은 곳으로 스며들고, 물살을 흐트러뜨리고는 사라졌다. 구름 그림자가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형을 지배할 수 있으니까. 휘안토스는 다시 머리가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일전에 아킨이 찾아 왔을 때의 기분이 떠오르며, 그 열기가 그를 지배해버렸다. 그렇게 놔 둘 것 같아? 그 더러운 기분은 한번으로 족해. 너는 내게서 그 무엇도 빼앗아 갈 수 없어. 내 영역에 들어오는 것 역시, 결코 허락 할 수 없어. 네가 신의 기적을 일으킨다 할 지라도! ***************************************************************** 작가잡설: 저 앞 단락에서 자르려다가, 이박 삼일 동안 홈페이지 터질 것 같아서 관 뒀습니다........-_-;;;;;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61장 **************************************************************** [겨울성의 열쇠] 제291편 다시 부르는 옛 노래#4 ***************************************************************** 어둠이 골짜기마다 고여 갔다. 하늘이 어두워지면 어두워질수록 하얗 던 달은 점점 더 뽀얗고 눈부신 빛을 뿜어 올리고, 그 달빛은 산자 락과 아직 눈 덮인 하얀 봉우리, 무수히 고여 있는 호수와 그 호수 언저리에 아무런 규칙도 통일성도 없이 솟은 기둥과 바위 위를 적셨다. 바람한점 없었다. 오래 전에 닫힌 동굴 속처럼, 그렇게 정지한 채 하 늘에 박힌 달만이 커다랗게 뜬 눈동자처럼 지상을 굽어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아킨은 자신의 마음 속 역시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아킨은 지에나의 수경을 둘러싼 난간에 등을 기대고는 잠시 숨을 골랐다. 깊이 들이쉬고 내 쉬자, 그 소리는 이 고요한 달빛의 심연 속에 너무나 크게 들렸다. "웬 궁상이냐?" 너무나 고요한 가운데 들려온 목소리였지만, 그 말은 마치 판판한 물 처럼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아킨은 난간에 기댄 채로 목소리가 들린 곳을 돌아보았고, 그곳에는 베이나트가 서 있었다. 단단하게 굳은 그 검은 눈동자와 마주치자, 아킨은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들켰네요." "늙으면 눈치가 빨라지는 법이지." 아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영원히 일어나기만 하면 좋을 거라 생각하며, 그렇게 무겁게 몸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형이 저를 찾아 올 겁니다." "여기까지?" 베이나트가 땅을 가리키자, 아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이유를 물어 봐도 되는 거냐?" "형은 저를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제가 손댈 수 없는 영 역으로 간다는 것은 더 큰 두려움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놔두지 않을 걸요, 절대." "그렇다면, 설마 성배에 대해 다 말한 거니?" 아킨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말 했다면 오지 않았을 테지만, 말하지 않았기에 그는 옵 니다. 모르는 것만큼 두려운 것도 없으니까요." 베이나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래서.......설마 죽일 생각이냐?" "아닙니다. 제게 누군가에게 죽음을 내릴 권리는 없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형이 제게 한 일은 용서하기 어렵군요. 또, 이번에야 말로 확실하게 해 놓지 않으면, 또 그런 일을 당할 것만 같아요. 그건 정말 싫습니다." "무엇을 확실하게 하고 싶다는 건데?" "적어도, 다시는 내게서 무엇을 빼앗을 수 없게 해 주어야죠. 다시는 빼앗기지도, 짓밟히지도 않겠어요.... 하지만 베이, 성배의 힘을 거 기다 쓰고 싶지는 않아요. 일이 끝날 때까지 늦춰 주셨으면 해요." "어째서?" "힘이 커 진다면, 아직 형에 대한 질투가 남아 있는 지금 더 위험해 질 것 같아서요. 아시다시피, 저는 니왈르도를 완전히 지배한 것은 아닙니다. 제가 제 감정에 휘둘려 통제를 잃게 된다면, 그 때에는 또 니왈르도가 기회를 얻게 될 겁니다. 또 싸우게 된다면, 그 때에 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베이나트는 한숨을 내 쉬었다. "너란 녀석은-" "네, 저는 겁쟁이 입니다. 정말 어쩔 수 없어요." "아니, 롤레인과 너무 닮은 녀석이다.... 그래, 그래서 그 까다로운 녀 석이 너를 첫 번째 제자로 받아 들였나 보구나. 자신과 너무도 닮 았으니까." "스승님은 정말 강한 분이잖습니까." "강해지려 하니까, 강해져 가는 것이다. 언제나 자기가 나약하다 생각 하고 흔들릴 거라 생각하니 강해지려 하고, 그렇기에 자신에게 가 혹할 정도로 엄격하다. 너무도 자존심이 강하기에, 흔들리는 자신, 욕망하는 자신, 나약해 지려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다......그리고 너 역시 그렇구나, 너 자신에게 너무 가혹해." 그리고 이제 아킨을 보는 베이나트의 눈은 따뜻했다. 가련해 하면서, 그러면서도 애정에 차 있는 눈이었다. 아킨은 조금 편해졌다. 미안 해하면서도, 그러면서도 이렇게 한 없이 베풀어 주는 베이나트가 고마웠다. 그는 넉넉한 사람이다, 너무나 넉넉해서 남에게 너무나 쉽게 듬뿍 듬뿍 내 주는 것이다. "네 형과 무엇을 하고 싶은 거냐." 그런데 그 때, 저 멀리 숲에서 하얀 새떼 같은 것이 일제히 솟구쳐 올랐다. 날개가 달빛에 반짝이고, 그들이 날개 치는 소리가 부우우 웅-- 벌 떼 몰려드는 소리처럼 거세게 들려온다. "침입자가-" "아니다, 침입자가 아니야. 저건 누군가가 왔다는 것, 하지만 그들이 적인지 손님인지 판단할 수 없다는 뜻이다." "제가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그리고 아킨은 달리며 그의 검은 말을 불렀다. 말은 아킨의 그림자에 서 솟구쳐 올랐고, 아키은 그 고삐를 잡고 땅을 박차며 안장 위로 나는 듯 올라갔다. 말은 호수들의 수면을 두 어 번 차고는 단번에 숲으로 파고들어갔다. 하얀 새떼가 아킨의 주변으로 쏟아지듯 날아왔다. 나뭇가지, 나무 둥치 사이사이마다 그들이 가득 차서 날개를 퍼덕거렸고, 그 거 센 소리에 귀가 멀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킨이 숲 안으로 깊이 들어오자, 날아드는 방향을 바꾸었다. 이제 그들은 오른 쪽으 로 날개를 치며 쏟아지기 시작했고, 아킨은 그들의 머리가 향하는 곳 으로 말 머리를 틀었다. 그리고 잠시 뒤, 아킨은 숲의 공터의 은색 나무 그루터기 위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아킨 을 보자마자 활을 내리고는 손을 들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의 진녹 색 옷이 눈에 들어오고, 은빛 달빛 쏟아지는 속에도 검게 보이는 피부가 이어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자, 양 쪽으로 뻗은 엘프의 귀도 보인다. 아킨은 곧장 말에서 내려서는 그에게 달려갔다. "자크--!" 그는 곧장 아킨에게 달려와 아킨을 얼싸 안았다. "아키!" 아킨 역시 활짝 웃으며 그의 허리를 안았다. 그렇게 아킨의 태도가 '낯선 자'에 대해 우호적이자, 아킨 주변을 날 던 새들이 일제히 안개처럼 흐려지더니 사라져 버렸다. 푸드덕대는 소리로 가득 찼던 주변은 금세 조용해졌다. "방금 전에는 정말 귀가 머는 줄 알았지 뭐야." 그리고 아킨을 보고는 그 볼을 잡아당겼다. "건강해서 다행이구나. 걱정했는데.... 그리고 좀 크기까지 했는걸." "형은 그대로고." "엘프가 여섯 달 만에 변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 아킨이 말했다. "어서 와. 베이도 좋아할 거야." "그 분은 잘 지내시나 보구나." "자기 집인데 잘 못 지내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라고. 어서 와." 아킨은 자켄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런데 어쩐 일이야? 그냥 안부 인사 하러 온 거야?" "이것저것 겸사겸사 해서 온 거다. 나루에 님의 전갈에, 내가 확인한 이상한 일에.... 좀 여러 가지 있었거든." 나루에라는 이름이 나오자 아킨은 기분이 확 나빠졌다. 자켄이 아킨의 머리를 쓸어주며 말했다. "기분 좋지 않은 건 알지만, 어쨌건 내 증조할머님이시고, 나를 사랑 해 주시는 분이다." "알아.....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잖아. 어쨌건, 어서 베이에게 가자. 멀지 않은 곳에 계시니까." 자켄의 눈이 기대감에 반짝였다. 그리고 오랜 만에 그런 형을 보게 되자, 아킨은 다시 그를 안고 싶어졌다. 방금 전의 기분 같은 것은 단번에 녹아들어 버리고, 그저 기쁘기만 했다. "자크-! 맙소사, 네가 여기까지 웬 일이냐." 베이나트는 역시나 반색을 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고, 그리 먼 길도 아니었습니다. 여전하셔서 다행 입니다." "나루에는 잘 지내겠지?" "네, 잘 지내십니다. 다만..... 여러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좋지 않은 일이냐?" "좋지 않다기보다는 중요한 일이라 말씀드리는 편이 낫겠군요. 펠톤 님께서 어머니께 전갈을 보내셨고, 어머니는 저에게 그 전갈을 전 하라 하셨습니다." 아킨은 알아듣기 어려웠다. 자켄은 쉽게 말하고 있었지만, 쉬운 일도 가벼운 일도 아니었으니까. "인간들이 성배를 탐색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처럼 그저 소수의 무 능력한 사람들만이 간다면 아무 일도 없을 테지만, 이번에는 아니라 하십니다. 저는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그분들께서 그 정도로 우려하신다면 분명 큰 일일 거라고 생각됩니다." "다른 이야기 들은 건 없니?" "들은 것이라기보다는 보고 온 것입니다. 이곳으로 오는 길에 이 숲 을 향하는 인간 마법사 일행을 발견했습니다." 베이나트의 얼굴이 눈에 뜨이게 어두워졌다. 그는 한숨을 내 쉬고는 이마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맙소사-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기도 했다. "어떻게 된 거냐." "어머니께서는 누군가가, 아주 중대한 비밀을 모두에게 '공개'했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누군가에 대해서는, 칼롭 님께서 가장 잘 알고 계실 거라고도 하셨습니다." "공개한 자는 당연히 탐색에 나서지 않았을 테고?"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숲으로 향하는 것은 다른 마법사이며, 펠톤 님께서는 다시는 마법사들이 드래곤들을 공격하거나 지배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그 인간 일행을 보고 왔니?" 자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답했다. "그렇습니다." "아는 얼굴이더냐." "아닙니다. 푸른빛 머리카락에 청동색 눈동자, 그리고 약간 거뭇한 피 부.......대강 이 정도만 확인했습니다만, 어쨌건 아는 얼굴은 아니었 습니다." 베이나트는 결국 탄식을 토해냈다. **************************************************************** 작가잡설: 잘못은 자기들이 해 놓고, 피해자인 제가 화내면 왜 그렇 게 '심하게' 화내느냐고 서럽게 말하니..... 참으로 낭패스럽군요. 아아, 짜증나!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62장 **************************************************************** [겨울성의 열쇠] 제62장 달의 잔, 궤적의 끝 제292편 달의 잔, 궤적의 끝#1 ***************************************************************** 악튤런은 초조함에 지쳐가는 것을 느껴갔다. 제도로부터 전해진 소식 은 점 점 더 절망적으로 변해가기만 하고, 어서 빨리 이 탐색을 끝 내고 돌아가기를 원하게 했다. 뿐만 아니라 반드시 성공 시켜야한다 는 중압감에, 터져 죽어 버릴 것만 같았다. 왜 시작했는지, 어째서 이다지도 원하는 건지, 어떻게 하기로 했는지 는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가고 있는 길은 끝 간 데 없이 눈으로 덮인 벌판이고, 그 위에는 누군가가 지나간 발자취 하나 없고 지표 로 삼을 것 없이 그저 끝없이 펼쳐져 있을 뿐이다. 어깨는 무겁고, 발은 지쳐있다. 다잡자, 다잡자- 그러며 악튤런은 휘안토스의 포로 가 될 뻔 했던 칼라하스 공주를 생각했다. 절망에 지쳐 무너지기 직전인 그의 형이자 왕을 생각하고, 그에게 수 십 번 다짐시키던 어머니를 생각했으며, 은인 켈라스 왕녀를 생각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지치고 외로운 지금은 허기에 지친 사람의 시 야처럼 흐릿할 뿐이었다. "이제부터는 나 혼자 가겠다." 악튤런이 그렇게 말하자, 장작불을 가지고 왔던 기사의 종자와, 조수 격으로 따라왔던 두 마법사 모두 우뚝 굳었다. "따라 오는 건 상관없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공식적으로는 너희들의 임무는 끝난 거야. 기다리든, 따라오던, 델 카타롯사로 돌아가던, 너희들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없어." 불길이 치솟아, 모두의 얼굴에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가는 걷어가듯 되돌아갔다. 밤바람이 싸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음 칼날처럼 싸늘하고 날카로워, 옷 틈으로 파고들어 속살을 후벼 파는 듯 하다. 악튤런은 그들이 등진, 비탈진 언덕 아래로 펼쳐지는 깊고 넓은 숲을 바라보았다. 남쪽은 벌써 봄이건만, 그 숲은 간신히 자그마한 싹이 돋은 정도였 다. 땅바닥은 아직도 단단하며,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와 마루에는 눈의 부옇게 남아 있었다. "내일 아침이면 나는 없을 것이다. 알르간드의 숲으로 떠날 것이고, 내가 그 많은 탐색자 중의 하나가 되어 사라진다면 지금이 마지막이 될 거다. 그렇게 되면, 나대신 왕과 공주님께 전해다오. 죄송하다 고 말이다." 젠장, 이런 기분이라니. 쓰디썼다. 울컥 울컥 치솟는 날카로운 분노에, 속이 다 헤 짚인다. 자 신감 없이 무언가를 하는 건 정말 처음이다. 언제나 반드시 할 거 라고만 생각했지,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불가능을 생각하지는 않는다. 모두가 고개를 저어도, 그만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으로 나아 갔고 성공시켰다. 그런데 지금 이게 뭔가. 패잔병들 뒤에 남은 패장 마냥, 이렇게 처량 하게 말하는 꼬락서니라니. 그 때 어두운 숲 속에서 말방울 소리가 딸랑 딸랑 났다. 기사들이 칼 자루에 손을 얹고, 젊은 두 마법사들은 마법을 시전하기 위해 지팡 이들을 들었다. "그만 둬. 지금, 내 앞에서 나를 지키겠다고 그 짓들을 하는 거냐." 그 말에 두 마법사가 머쓱한 듯 몸을 움츠렸다. 맞는 말이었다. 그들 은 악튤런을 '보좌'하는 것일 뿐, 아무런 할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없는 몸이었다. 그들의 힘을 다 합쳐 봐야, 악튤런의 가벼운 몸풀 기만도 못하다. 말방울 소리가 멈추었다가, 다시 딸랑 딸랑 울리며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악튤런은 가볍게 손가락을 움직여 환한 빛 구슬을 만들어 띄웠다. 빛 은 똑바로 숲 속으로 날아갔고, 그곳을 낮처럼 환하게 구석구석 밝 혔다. 오솔길을 말과 함께 걸어오던 갈색 망토의 호리호리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눈부신 듯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악튤런 쪽을 보더니, 악튤런의 얼굴을 확인하자 후드를 걷었다. 안경이 불 빛에 번쩍였다. 뒤로 묶은 붉은 머리카락도 보인다. 모두의 번득이는 시선이 도끼처럼 자신을 향하자, 남자는 들고 있는 두루마리를 좌 악 풀어 보였다. "악튤런 파노제 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누구 볼일이냐." "제 스승님 볼일 입니다. 그리고 이건, 스승님께서 만들어 주신 겁니 다. 여차하면 좌악 찢으라고 하시더군요." 악튤런은 그 두루마리 위에서 은빛으로 빛나는 글자들이 도형과 함께 가득 그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남자-루첼 그란셔스가 그의 스승의 말대로 시행하면, 사방이 루첼만 제하고는 운석이라도 떨어진 듯 박살날 거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쓸 생각이 안 들게 만들어 주신다면, 안 쓰겠습니다...........사, 숙, 님." 악튤런의 입술 끝이 치솟았다. 새삼 저 루첼의 스승이 한 일이 생각나고, 악튤런이 감수해야 했던 그 지독한 모멸감이 타오르듯 떠오른다. 된다면 저 루첼에게라도 화풀이 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악튤런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와라." 루첼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그 두루마리를 다시 말아 품 안에 집어넣 었다. 그리고 오솔길을 걸어 와, 모닥불 까지 다가왔다. 악튤런은 빛을 거두어 들였다. 순식간에 어둠이 깔리며, 오로지 이글대는 모 닥불의 불만이 주변에 그림자를 성큼 드리웠다가 지우기 시작한다. "롤레인이 뭐라고 하던가." "말리지는 않겠다, 마음대로 해라. 세상 끝까지 가서 맨 땅에 머리 박 고 좀 식히면, 철 들 거라 기대는 안하지만 적어도 '불가능한 일'이 라는 것 정도는 깨닫게 될 거다. 그것만도 인생의 큰 수확이 될 테니, 그 때가서 바닥에 엎어져서 울며 시간 낭비 하지 말고 재깍 돌 아 오거라. 반겨주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안부 편지 한 번 정도는 보내마." 악튤런은 점점 기가 막혀갔고, 예전의 롤레인의 성격과 말버릇도 하 나하나 기억나며 더욱 더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대로 전하는 거냐." "아닙니다. 몇 가지 '매우 심한' 표현은 제 나름대로 고쳤습니다. 그리 고 중간 중간에 섞인 민망한 호칭 역시 생략했고요." "그리고 내 답도 받아 오라고 하더냐." "네. 그대로 전해 드릴 테니, 말씀하세요." 악튤런은 롤레인의 전언보다 더욱 화려한 것을 생각해 보려 했지만, 그저 '잘난 체 하지 마!' 가 고작이었다. 그렇게 전하라 했다가는 루첼부터 성실하게 비웃을 것 같았기에, 차마 말하지는 못했다. 푸후 - 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니 주변이 부옇게 된다. "탈로스가 롤레인에게도 성배에 관한 것을 전했다고 들었어." "그리고 저도 봤습니다. 저에게야 워낙에 생소한 일이라 제대로 이해 하지도 못했지만요." "그래, 롤레인은 성배를 찾을 생각이 없다던가? 아니면, 너에게 대신 시키는 건가." "자꾸 헷갈리시는 것 같은데, 제 스승님은 공화국 출신이고 저 역시 로메르드 출신입니다. 당신들처럼 어렸을 때부터 성배에 대한 환상과 야망을 구축하라 교육받은 적도 없고, 우리에게는 그냥 이웃나라 건국담에 나오는 특이한 컵 정도의 의미밖에는 없습니다." "그건...." "아아, 에칼라스의 성배 어쩌고 하시면 실망할 겁니다. 성격은 비슷하 지만 전혀 다른 물건이라는 것은 벌써 듣고 받고 왔으니까요." "그렇다면 어떤 물건이란 건 알고 있겠군." "네. 하지만.....그걸 손에 넣는 것은, 지금의 저에게는 대략 몸 안에 언제 터질지 알 수 없는 무시무시한 포탄을 품고 다니는 것과 비슷한 일이기에 욕심은 없습니다." "정말인가?" "물론이죠. 저는 제 주제를 아주 잘 알고 있으니까." 루첼은 꽤나 여유 만만했다. 악튤런은 또 롤레인이 생각나, 뭐라도 한방 쳐 버리고 싶어졌다. "기가 막히는 군, 너도 롤레인도. 방해할 생각도 도와줄 생각도 없다 면 꺼지기나 해!" "아뇨. 하나 더 남았는데요." "지껄여 봐!" "아무리 스승님이 마음씨 좋은 분이라지만, 제 집 마당을 엉망진창으 로 만들고 금고 털어가려고 쳐들어오는 제자를 반길 수는 없을 거다. 각오 단단히 해 두던가, 이쯤해서 그만두거나 하거라. 엉덩이 걷 어 채여 쫓겨나기 전에." "그건 스승님이 양해해 주셔야 하는 문제야." "그 점은.....저는 잘 모르는 일이니 넘어가도록 하지요. 하지만, 어쨌 건 이것으로 스승님께서 전하라는 모든 말은 끝났습니다. 무사히 일을 마치고 돌아오실 수 있기를 비이일.....어 드리지요." "빌어 준다는 말이 뭐가 그렇게 힘들어!" "그냥 혀가 꼬인 것뿐입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반도인이고, 그 짧게 끊는 발음은 조금 힘들어요." 악튤런은 정말 이 건방진 녀석을 한방 쳐 버리고 싶어졌다. 나이만 동갑이지, 지위의 차이는 까마득한데 이 자식이 제 스승의 위세만 믿고 까부는 것이다! 새삼 이 녀석 앞에서 그렇게 처참하게 롤레인에 게 깨진 것이 억울해졌다. 하필 그 스승에게, 그것도 이 루첼의 눈앞에서 박살 난 것이니 무시당하는 것이다. 다시 성배를 향한 열 망이 치솟아 올랐다. 그 힘만 손에 넣으면 너부터 작살 낼 테다, 롤레 인--! 하면서 말이다(상당히 아이 같은 치기이긴 하지만). "그럼, 드릴 말씀은 다 드렸으니 저는 돌아가겠습니다." "어디로?" "제가 데리고 온 암롯사 군 쪽으로 가야죠. 오늘까지야, 휘안토스가 없어서 제 멋대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지만 내일 중으로 왕자놈이 도착하면 제 마음대로 못해요." 악튤런은 갑자기 흥미가 일었다. "그 놈이 왜 여기까지 오는 거지?" "그야 저는 모릅니다. 어쨌건 올라오겠다 했고, 저는 대기 중일 뿐입 니다. 습격하시겠다면 하십시오. 저는 최선을 다해 막을 것이고, 결 과가 어찌되든 제 능력 밖이면 어쩔 수 없기에 도망칠 겁니다." "미쳤냐, 너?" "아시다시피 저는 암롯사 인이 아닙니다. 그리고 휘안토스가 사라져 서, 그 덕에 제 친구가 왕이 된다면 더 좋은 일이지요." 너 미워서도 안한다,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라왔다가 내려 갔다. 루첼이 손을 들었다. "그럼 저는 이제 정말 물러납니다. 행여나 습격하실 생각이시라면, 방 금 전에 보여드렸던 스크롤을 생각해 주시길 바래요." "나는 같은 계보에 속하는 마법사의 뒤통수를 갈길 정도로 안하무인 은 아냐." "아, 그것 참 놀라운 발견이군요." "당장 꺼져버려---!!!!" 그리고 그 한심한 다툼 덕택에, 악튤런은 방금 전의 부담감 같은 것 은 깡그리 잊을 수는 있었다. **************************************************************** 작가잡설: .................역시나 최강 사제지간;;; 다른 의미에서 롤레인과 꼭-- 닮은 루첼 군이었습니다. -_-;;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62장 ****************************************************************** [겨울성의 열쇠] 제293편 달의 잔, 궤적의 끝#2 ******************************************************************* 아킨은 오래 생각하지도 않고 말했다. "제가 막겠습니다. 어차피 몇 번 맞서기도 했고, 이 일에 제가 책임이 아예 없다고 할 수도 없으니까요." "책임 어쩌고 하면 내가 제일 찔린다는 건 알고는 있냐?" "물론 아무 말 없이 맡기셨으면 실망했을 겁니다." 그 말에 베이나트는 얼굴을 구겨 보였지만, 그리 크게 화내는 것은 아니었다(그러기에는 그는 너무 양심적이었다). "지켜보고 있겠다. 여차하면 내가 가 볼 테니, 안심해라." "지에나 님은 뭐 하고 계십니까?" "아아, 그 여자는 지금 자기 방에 처박혀 있어. 그럴 때는 건드려 봤 자 희망적인 답이나 절망적인 답이나, 아무 것도 못 건지니 내버려 두는 게 좋아. 길 때는 한 백년 간 그러고 있으니까 말이야." 아킨은 피식 웃었다. "하여간, 저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이해를 못 하겠어요." "기분 나빠하지는 않으마. 맞는 말이니까." 그리고 베이나트는 아킨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다음부터는 이렇게 귀여워 해 주지는 않으마. 어쨌건 네놈은 예전보 다는 훌쩍 커버린 것 같으니까 말이다." "자크에게는 잘 말해 주세요." "말 안 해도 그럴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만큼 너도 무사히 돌아와 야 한단다. 녀석이 일어나서 쏘아보며 원망하는 사태가 벌어지면, 나도 참 난처 하잖느냐."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아킨은 작별 인사를 하고는 숲으로 향했다. 베이나트는 숲 언저리까지는 배웅해 줄까, 하다가 그냥 눈 궁전에 머 물기로 했다. 협곡 사이로 보이는 천개의 눈 위를, 아킨의 검은 말이 가로질러 나 는 듯 달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 그 뽀얀 머리카락만이 한줄기 유 성처럼 빛난다. 베이나트는 팔짱을 끼고는 그런 아킨을 바라보다, 아킨이 숲 속으로 사라지자 그제야 시선을 못 쪽으로 옮겼다. 수면은 아무것도 비추고 있지 않았고, 오로지 검게 고인 물만이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지켜보던 수경 위로, 지에나의 모 습이 나타났다. 베이나트는 고개를 들어, 고요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오랜 친구를 바라보았다. "여어, 일어났나." 베이나트는 자신의 얼굴이 꽤나 우울할 거라고 생각했다. 지에나가 다가왔다. "꼬마가 뭐라 말했는지는 알아." "알고 있었나?"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야. 알잖아.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는 건, 순 전히 우리가 이 세계에 아무런 적이 없기 때문이며 우리 나름의 방 식으로 '인간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란 걸." "팔로커스는 아니잖아." "아니, 팔로커스가 그리 된 건, 말 그대로 '미쳐서' 였을 뿐이야. 그에 게는 세상이 어떻게 되든 아무것도 아니었고, 그랬기에 그리 얼빠질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짓들을 저지를 수 있었던 거야." 베이나트는 웃었지만, 이 웃음 역시 심연에 빠진 듯 우울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에나의 눈동자는 여전히 무심하게 그를 바라볼 뿐이다. "가끔 생각해. 우리가 과연 죽을 수 있을까?" "모르지. 하지만 이제 아예 불가능하지만은 않잖아." "아니, 내 말 뜻은 네가 생각하는 그게 아니야. 그토록 많은 죽음을 보고,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죽음까지 보아버린 우리가, 이런 우 리가 과연 작은 인간으로 돌아가 죽을 수 있을까? 바로 그것을 묻는 것이지." "지금의 우리들은 이 힘과 거대한 생명을 버틸 수 있나? 너는 네 모 든 것을 멎게 하여 버티어 내고 있고, 팔로커서는 주기적으로 모두 태워버리면서 버티어 가고, 나는......나는 모든 것을 버려가며 버티 어 가고 있어. 그래, 이건 사는 게 아니라 '버티는 것'이라고. 지이, 우리는 돌아가야 해." "하지만......칼리반스, 정작 죽음을 가장 두려워하는 건 우리가 아닐 까. 이 거대한 힘과 위대한 지혜들을 버리는 것에, 가장 두려워하는 건 우리가 아닐까." "아니, 우리는 원해." "천년도 더 지났어. 그리고.....그렇게 지내오며, 우리가 아무것도 '변 하지 않았다면' 그것이야 말로 이상한 일이지. 칼리반스, 우리는 변 해가고, 변해왔고, 변해 버렸어. 우리는 너무 많이 왔기에 결코 돌아 갈 수 없어..... 그저, 그저...... 누군가 사랑하고 그리워했던 사람들 을 그리며, 그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그것 때문에 돌아가는 것 이라 스스로를 위로했을 뿐이지." 베이나트는 모욕당한 것만 같은 불쾌함에 화가 치솟아 올랐다. "그렇다면 네가 원하는 건 대체 뭐야, 지에나. 돌아가고 싶은 것도, 죽어야 하는 것도 아니라면, 대체 왜 아키를 여기까지 끌어 들이고, 그에게 그토록 많은 것을 가르쳐 준 거지?" "이유는 없어. 그저 그것이 순리이기 때문이야." "순리?" "그래, 순리. 우리는 많은 힘과 운명을 쥐고 있고, 지상의 그 누구보 다 위대하지. 하지만 그런 만큼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짊어지고 끌고 있고, 그렇기에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할 수는 없어. 그저..... 순리대로 갈 뿐이지. 냇물의 흐름은 바꿀 수 있지만, 거대한 강의 흐 름은 바꾸기는 어렵고, 바다의 물결은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어. 그리고 우리는 바다야, 냇물이 넘치고 강이 넘쳐서 휘몰아치는 그런 바다. 흐르는 건 우리의 의지가 아니고, 우리의 자유도 아니야. 그저 순리일 뿐이지......그리고 적어도 확실한 것은, 나는 거부 하고 싶지는 않다는 거야." 숲 언저리에 도착하자마자 아킨은 말에서 내렸다. 숲 안으로 들어서 자, 오솔길 하나 없이 빼곡히 나무들이 들어찬 숲이 품을 벌리고 아킨을 안았다. 언제나 얼어붙은 듯 멈추어, 겨울인지 여름인지 가을인지 봄인지 아 무 의미도 없는 곳이다. 나무들 하나하나, 마치 은 기둥을 세운 듯 빛나고 있었다. 구불구불한 가지들은 여기저기 휘감겨 얽혀 있고, 드문드문 돋아난 이파리들이 아킨이 지나갈 때마다 손짓하듯 흔들렸 다. 바닥마다 부옇게 자라난 꽃 무리들이 역시나 입김 같은 꽃가 루를 뿜어 올렸다. 아킨은 침입자가 들어 왔을 텐데도 숲이 조용한 것이 이상하게 느껴 졌다. 정말, 마치 사냥 직전의 고양이처럼 숨죽이고 있는 것만 같다. 그리고 그것이 더 오싹하게 느껴진다. 그것이 펄쩍 뛰어올라 덥석 물어 버리면, 저 하얀 곳 위에 온통 피가 튀고 살점이 내팽개쳐질 것만 같다. 아킨은 발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달빛이 스며들어, 숲은 점점 창백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더 이상한 기분이다. 너무 이상한 기분- 아킨은 귀를 기울였다. 저 멀리서, 정적뿐인 숲 속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아킨은 그 쪽으로 달려갔다. 나무뿌리를 밟고, 안개 같은 꽃 무리들을 헤치고, 그러면서 달려갔다. 아킨의 발소리는 그가 빨리 달리고 있어 당연 히 커야 함에도, 마치 숲이 소리를 빨아들이기라도 하는 듯 아무 소 리도 나지 않았다. 솜뭉치들을 밟아 가는 것만 같다. 그런데, 그렇게 달리는 중에 갑자기 저 쪽의 발자국 소리가 멎었다. 아킨 역시 발을 멈추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분명 숲 안에 도사 리고 있던 마물들 중 하나라도 기지개를 피고 침입자에게 달려들어 야 하는데도 너무도 조용하기만 하다. 마치 숲이 이 침입자를 수긍 하고 손님으로 받아들이기라도 하는 듯 말이다. 아킨은 다시 움직여 발자국이 멎은 쪽으로 갔다. 그리고 나무들이 없 는 빈 공터에 다다르자 그곳에 있는 로브의 청년과 마주치게 되었다. 둘 다, 마주치는 순간에 놀랐지만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지난번 에 비하면 바보 같다 생각될 정도로 조용한 마주침이었다. 악튤런은 마법을 쓸 그 어떤 동작도 하지 않았고, 그 혈기에 찬 눈동자만으 로 아킨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또 네가 나온 거냐." 너무나 조용한 가운데라, 아주 크게 들렸다. "그렇습니다." "스승께서 전하라고 한 말은 없나." "없습니다. 예전에 그랬듯, 당신을 막는 것 밖에는 제가 할 일은 없습 니다." "설득하지는 않겠다." "다행이군요." "그렇다고 강요하지도 않겠어." "예전과는 조금 달라지셨군요." 악튤런이 웃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때와는 비할 바 없이 절박하다." "압니다." "무시하든, 경멸하든, 비웃든, 그 어떤 방식으로 나를 비난해도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 갈망을, 그 누구에게도 이해시키지 않 는다. 지금 내가 할 일은 성배를 얻고, 내가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 는 사람들을 지키는 것이니까." 그 말에, 아킨은 예전과는 전혀 다르게 바로 앞의 악튤런이 정말 '두 렵게' 느껴졌다. 몇 번이나 부딪히고, 몇 번이나 서로를 공격하며, 아무런 결론도 내 지 못하고 상황 때문에 돌아서야 했던 상대. 분명 아킨에게는 사숙에 해당되는 사람이고, 탈로스와 롤레인과 동기간이었으나, 아킨은 사 실 단 한번도 악튤런을 그들과 같은 급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아킨은 마법에 있어서 누군가를 꼭 이겨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본 적 자체가 없었다. 마법은 아킨에게 있어 수단이었을 뿐, 전부는 아니었으니까. 그랬기에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의 악튤런은 적어도 아킨의 스승과, 그 스승의 적과 '비 슷하게'는 보였다. 채울 수 없는 갈망을 가진 탈로스와, 역시나 채울 수 없는 엄격함을 가진 롤레인과, 끝없이 앞으로 솟구치려는 악튤런은 다르지만 분명 너무나 비슷했다. 단 하나, 그들이 평생 만족시킬 수 없는 단 하나 의 컴컴하고, 끝없고, 그러나 채워지기를 갈망하는 마음속의 빈 자 리가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너무도 닮아 있었다. "한번은 경고하겠다. 비켜라." ".....죄송합니다." 악튤런은 손을 들었다. 아킨은 막듯이 손바닥을 보이고는 말했다. "마법을 쓰면 위험합니다." "그럼, 너하고 주먹다짐이라도 할까? 젠장, 마법이라면 몰라도 너하고 주먹다짐 하면 결과는 너무 뻔하잖아-!" "너무 위험해 진다니까요! 온 숲이....." 그러나 악튤런의 가슴 앞에서 빛이 확 터지더니, 아킨을 향해 하얀 빛줄기가 내리꽂혀왔다. 아킨은 피했고, 그 섬광은 나무들을 부러뜨리며 천개의 눈 쪽으로 쏘 아져 나갔다. 빛은 숲을 밝히고, 호수 위를 유성처럼 스쳐지나가 허공으로 솟구쳐 사라졌다. 그 빛이 감은 듯 사라지자,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그렇다, 정적! 처음부터 무언가 이상하기는 했다. 숲 자체는 아킨이 악튤런 쪽으로 오는 내내 지나치게 고요했다. 마치 '쉬는 듯' 말이다. 게다가 지금은 숲 전체의 흐름은 분명 '적대적'인 것은 아니다. 숲은 침입자에 민감하고, 특히나 '마법'에 대해서는 경기를 일으키듯 반응한다. 예 전에 악튤런이 나타났을 때의 반응이 가장 정상적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전혀 아니다. "어떻게...." "아직도 모르겠나." 악튤런의 손에서 다시 섬광이 지잉-- 타올랐다. 숲은 여전히 차분했다. "예전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수많은 무지한 탐색자들이 했던 것과 똑 같은 짓을 하고 똑같이 실패한 것뿐이야. 하지만 지금의 나는 틀려." 아킨은 뒤에 싸늘한 것이 내리꽂히는 것만 같았다. 놀라움에, 그리고 대체 왜 방금 전에 탈로스와 롤레인에게 그를 겹쳐 보았는지 알 것 같았다. 똑같이 하나씩 결핍되고, 그들 모두 똑같이 '강하기' 때 문이었다. "지금 숲의 마법은 정지했다. 내가 이 안에서 어떤 마법을 쓰든 간에, 가장 용맹한 경비자도 나를 습격하지 않아." 아킨은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악튤런이 웃었다. "이제 얍삽한 수는 통하지 않을 거다." **************************************************************** 작가잡설: 드디어 악티가 아킨의 '꼼수'를 차단했습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62장 **************************************************************** [겨울성의 열쇠] 제294편 달의 잔, 궤적의 끝#3 ***************************************************************** 숲 쪽에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게 되자, 베이나트는 처음에는 눈만 크게 뜨고 있다가 결국에는 일어났다. 숲이 술렁거리고 있었다. 지에나가 성배를 가지고 와 저 숲을 창조 했을 때 이래로 단 한번도 저런 적이 없었다. 베이나트가 한숨을 내 쉬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지에나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네 탓이야." "맙소사, 내 탓이라니!" "네가 네 제자에게 저 숲의 비밀을 알려 주었잖아. 나도 숲의 마법을 푸는 방법을 알아낸 사람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지만....네 제자들은 해 내었군." "저 정도로 가르쳐 주지는 않았어!" "네 기대 이상이었던 거지." 베이나트의 눈이 얼어붙었다. 지에나는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고 는, 수경 위에 손을 얹었다. 흔들리던 수경이 멎고, 검은 물도 안에서 달이 떠오르기라도 하는 듯 옅어지기 시작했다. 베이나트는 주변이 다시 변화하는 것을 느꼈다. 바람에 이리 저리 흔들리던 천개의 눈, 그 수없는 수면이 멎고, 모 두 정지하여 눈을 크게 뜨기라도 하는 듯 하늘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베이나트는 지에나의 뜻이 무엇인 지 깨달았다. "너...!" 지에나는 소매 자락 안에서 낡은 양피지 조각을 꺼냈다. 예전에 아킨 이 탈로스의 탑에서 가지고 나온 것이다. 베이나트는 급히 그녀의 손목을 잡았지만, 지에나는 그 손을 싸늘히 바라보고는 그 눈빛만큼 이나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밖에는 시간이 없어." "내일이면 보름이고, 아키의 몸 상태가 어떻게 되는 지를 기억 못하 면 너는 바보 멍청이야! 아니, 아키가 괜찮아도 용납할 수 없어. 이건 위험해! 뿐만 아니라, 내 빌어먹을 제자 놈 까지 저기 와 있잖아. 만약......." "지금 해야 해." 베이나트는 망연자실했다. "버틸 수 있는 일이 있고 없는 일이 있는 법이야. 지금 해야 한다 하 더라도 미뤄줘. 지금의 아키는 버티기 힘들어!" 그러나 지에나의 두 손이 모두 양피지의 끄트머리를 잡았다. 베이나 트의 손에 힘이 들어갔고, 지에나는 결국에는 멈추어야 했다. "시험의 순간은 준비되는 순간에 오는 게 아니라, 그를 제한 모든 이 가 필요로 할 때 오는 거야. 보일 수도 보이지 않을 수도, 느릴 수도 빠를 수도 있지만, 그래도 버티어 내야 하는 게 인간이야." "가혹해지지 마! 아키는 이제 스무 살도 안 된 아이야!" "세상 모든 사랑스런 아이들을 지켜 줄 수는 없고, 그 아이들이 언제 까지나 아이들인 것도 아니야, 칼리반스." 그 말이 베이나트의 옛 기억을 후벼 팠다. 창백한 눈에 진갈색 눈을 가진 싸늘한 여자아이. 독을 품듯 그를 증오하던, 그 여자아이. 베 이나트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넘어가자. 내가 아키를 데리고 오고, 악티를 돌려보내고, 그 리고 숲을 복구 시켜주겠어. 맹세해." "칼리반스, 저 소년은 니왈르도를 오래 버티어 낼 수 없어." 순간에 베이나트의 손에서 힘이 풀려나갔다. "무슨 말이야?" "지난번에 네 제자의 탑에 갔을 때, 그 탈로스는 광기와 무지의 깊은 늪 속에 잠겨 있던 니왈르도를 깨웠어. 지금의 니왈르도는 자신이 무엇인 지 분명 알고 있고, 자신을 억누르는 아킨이 조금만 흔들려 도 금방이라도 솟구쳐 올라 저 아이를 지배해 버릴 거야. 게다가 지난번의 보름은 버티어 냈을지 몰라도 이번 보름까지 버티어 낼 거 라는 보장조차 없지." "......너....." 베이나트는 손을 놓았다. 지에나가 힘주어 말했다. "그러니 바로 지금, 지금이 가혹하더라도 버티어 내야 해." "만약에.....거꾸로 된다면, 이번에야 말로 아키가 지배된다면 어찌 되 는 거야." "죽여야지." 그리고 지에나는 양피지를 찢었다. 동시에, 마치 온 세상이 깨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꽈르르르--! 호수의, 그 수없는 수면이 흔들렸다. 호수를 둘러싼 산과 숲에서, 한 숨 같은 뿌연 빛 무리가 뿜어져 오르며 사방에 고였다. 그리고 불 규칙하게만 보이던, 호수들 위의 기둥들 중 몇 개의 표면 위에서 글자가 떠오르며 뚜렷하고 하얗게 빛났다. 지에나는 양피지를 날려 버리고는 두 손을 들었다. 양피지 위에 그려 졌던 것과 똑같은 그림이, 은빛의 선으로 그려져 허공에 떠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글자들이 같은 빛이 되어 지글 지글 타오른다. 지에나는 두 팔을 벌렸고, 그 은빛 그림은 호수 쪽을 향해 누우며 번 개처럼 커졌다. 이백년 전에, 쿼크 대제의 사후 성배를 가지고 이 알르간드로 왔을 때 베이나트와 지에나는 성배를 이 천 개의 호수 아래에 봉인했다. 그들이 말했던 대로 정말 호수 아래에 던져 넣은 것이 아니었다. 호수 위에 정교한 마법으로 진을 짜고, 그 진으로 만들어 놓은 공 간 안에 성배를 넣었다. 그리고 그 진을 닫으며, 동시에 그것을 여 는 열쇠를 만들었다. 베이나트는 그것을 자신의 탑 안에 보관했다. 탈로스와의 불화가 극에 달하게 되자, 그는 스스로의 몸으로 열쇠를 숨겼다. 만약에 그가 봉인되거나 유폐된다면, 그 열쇠역시 나타나 지 않도록. 그랬기에 베이나트가 스스로 자신의 유폐를 풀고 지 상에 나타났을 때, 그것 역시 나타난 것이다. 바로 아킨의 앞, 그들의 얄궂은 운명과 엉킨 소년의 앞에. 베이나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망연히 한숨을 토해내고 는, 그가 해야 할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찬란한 마법진은, 이제 상 처처럼 선명하게 푸릇한 허공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것을 최초로 만들었을 때만큼이나 선명하게. "하나.......언제나 궁금했던 것이 있어. 어째서 그 때, 나더러 하고 싶 은 대로 하라고 했었지? 그렇게 파국으로 끝날 것을 알았으면서도." "무엇이 행복이고, 무엇이 가장 옳은 길일까. 아무도 그것을 몰라. 그 리고 제대로 결정할 수 있는 자 역시 어디에도 없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다음 일을 어떻게 할지 생각하는 것뿐이야." "우린 친구잖아." "그 누구보다 가깝고, 그 누구보다 서로를 이해하고, 그 누구보다 서 로를 믿는 친구.......그리고 네게 소중한 것은 내게도 소중해......그 러니 그 때의 나는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었어. 하지 말라 충고하 면 너는 내 충고를 무시했을 테니까." 베이나트는 웃었다. ".......지이, 지금의 나 역시 지금 네 선택을 믿겠어." 그리고 그는 두 팔을 벌리며 주문을 외웠다. "동과 서의 왕이여, 북과 남의 여왕이여, 원하는 것은 달이 지배하는 숲과 겨울을 닫고 여는 자의 손에 쥐어진 열쇠. 모든 것은 내 의지에 따라, 믿음에 따라, 그러나 복종하나니, 파괴이자 부활의 왕이여, 탄생이자 죽음의 여왕이여, 숲의 왕과 호수의 여왕이여-" 지에나가 받았다. "해와 달과 바람과 물과 불의 잔으로 대지의 제단 위에 뿌리노니-" 저 멀리서, 그에 답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답 하소서, 따사로운 불꽃으로 보듬고 맑은 물로 적시나 불꽃과 폭 풍과 허무로서 세상을 삼키는, 세계의 자비 없고 의지 없고 무정하여 모두에게 똑같이 잔혹한 왕이여-!" 천개의 눈들, 그 무수한 눈동자들이 하늘을 바라보는 가운데에서 빛 이 터졌다. 그리고 그 아래로 빛이 뻗어나가고, 다시 양 옆으로 뻗 어나가고, 그러며 사방에서 빛의 선이 서로 서로 맞물리며 대지를 밝혀갔다. 지에나의 손을 떠난 마법진은 이제 거대하게 펼쳐져, 그 위를 덮었 다. 사람 키만큼 떠서, 그 호수와 대지위의 진을 굽어보며 빛나고 있었다. 수면위로는 빛이 퍼지고, 바위와 산자락 도 눈부신 빛에 내리덮였다. 보름에서 한점 모자란 달빛이 창백하게 그 위를 비추고 있었다. **************************************************************** 작가잡설: 자람님, 마비노기에서 뵙게 되어 무척 반가왔습니다. ^^ 마비노기 만돌린 서버에 계시는 분들, 꽃분홍색 블라우스를 입고 양털 깎는 트리비타 양을 보시면 인사 해 주세요. ^^ p.s .......누락된 부분이 있어서 덧 붙입니다. --;;;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62장 **************************************************************** [겨울성의 열쇠] 제295편 달의 잔, 궤적의 끝#4 ***************************************************************** "뭐야--!" 악튤런이 공격하는 것도 잠시 잊은 채 외쳤다. 아킨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둘이 어떻게 해야 하는 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호수 쪽에서 쏟아지는 기적 같은 광경에 정신을 놓고 있을 뿐이었다. 갑작스레 온 숲이 몸을 떨었다. 잠에서 깨어나는 듯 으르렁대며, 사 방에서 나뭇가지들과 뿌리들이 움직이는 우지끈 소리가 들려왔다. 숲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뭇잎들이 서로 스치며 우수수 소리를 냈고, 지진이라도 난 듯 딛고 있는 바닥이 떨린다. 그리고 나무들이 스스로 움직였다. 악튤런도, 아킨도 이만 악 물고 숲의 변화를 지켜보았다. 숲의 나무들이 하나하나 사라지기 시작했다. 마치 그림을 지우는 듯, 은빛 나무는 점점 투명해지다가 사라지고 완전히 지워져 버렸다. 그 아래에 깔린 이끼와 풀들도 같이 사라져갔다. 드러나는 것은 오로 지 돌과 흙으로 된 황무지 일 뿐이다. 그리고 마침내, 거대한 천개 의 눈이 맨 몸으로 펼쳐졌다. 그 위로는 마법 진이 빛나고 있고, 허공에도 또 다른 진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아킨은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그는 분명 그 진을 기억하고 있었고, 느낄 수 있었다. 딱 한번이었지만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고, 그랬기에 수 백 번을 본 것보다 더욱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기적처럼 펼쳐지던, 구원을 향해 달려가는 순간에 하늘 위로 솟구치던 이 광경을 분명 보았었다. 탈로스의 탑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그의 손을 피해, 무너진 벽을 넘어 허공에 몸을 던졌을 때 그 눈앞에 펼쳐지던 하늘을 향해 쏟아 지던 그 눈부신 빛의 궤적! 광활하게 펼쳐진 검은 장막 위로, 무수한 빛과 숫자와 글자의 찬란한 번득임이 펼쳐졌다. 빛나는 날개 같은 것이 하얗게, 하얗게 펼쳐져 갔었다. 이제 알 것 같았다. 그것은 그 위에 펼쳐져 있던, 베이나트-컬린을 가두었던 그 유폐의 진이 깨어지는 순간에 나타나는 것이었던 것 이다. 그리고 지금은, 또 다른 것을 봉인했다가 그 유폐를 거두어들이는 것 이다. 아킨은 저곳에 무엇이 봉인되어 있는지 알고 있었다. 무엇이 풀려나 려 하는 지도 알고 있었다. 또, 그것이 누구의 일인 지도 알고 있 었다. 성배다. 지에나와 베이나트가, 성배의 봉인을 풀고 그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제 숲은 아킨 바로 옆까지 지워지고 있었다. 광활한 호수는 더욱 더 넓고 무수하게 펼쳐지며, 그 눈을 떠가고 있었다. 그 위로도 빛 들이 담겨갔다. 그리고 가장 중앙, 가장 눈부시게 빛나는 그곳에서 여러 장의 날개 같은 것이 솟구쳐 부채처럼 펼쳐져갔다. "악튤런 님, 시간을 아주 잘 맞추어 온 것 같군요." 악튤런은 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 청동색 눈을 크게 뜬 채 눈부신 광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 다. 그러다가 아킨과 같은 것을 깨달아 가는 듯 그의 눈이 빛나기 시작한다. "유폐의 진, 아주 예전에 탈로스의 탑에서도 보았다." 악튤런은 앞으로 나갔다. 그 머리카락이 빛을 담아 빛난다. 아킨은 그의 옷깃을 움켜잡았다. "놔라!" 아킨은 손을 놓고는 악튤런의 목 언저리에 검을 댔다. "더 이상은 안 됩니다. 돌아가십시오." "나는 저게 필요해. 힘이 모자라면 채우면 되고, 자격이 안 된다면 되 게 만들면 끝나는 문제야-! 숙명도, 핏줄도, 힘도, 그 무엇도 지금의 나를 막을 수는 없어." "지금 제 할일은 당신을 돌려보내는 겁니다. 당신이 얼마나 원하든 간에 상관없습니다. 돌아가십시오." 악튤런은 뒤로 물러나, 수인을 맺었다. 주문은 없었다. 수인 몇 번이 맺히는 순간에, 하얀 섬광이 치솟으며 아킨의 어깨를 후려쳤다. 너 무나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라, 아킨은 어깨를 움켜쥐며 뒤로 물러나 야 했다. 피가 흰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쓰라리다. "너 따위가 막을 수는 없다." 아킨은 검을 집어 던졌다. 악튤런이 다시 주문 없이 수인만을 맺었 다. 그러자, 악튤런을 중심으로 다섯 개의 문자가 나타났다. 성문자였다. 아킨으로서는 단 한번도 써 본 적이 없는, 방법만 간신히 알고 있는 마법의 최상위 문자. 순간에 그 둥근 원안의 글자들 사이로 빛이 솟구쳐 맞물리더니, 엄청 난 전격이 거친 실타래처럼 치솟았다. 지잉-- 귀가 멀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것들이, 바닥을 후려치고 사방에 가득 차, 아킨을 향해 쏟아져 들어왔다. 예전과도, 그 후의 바르젤에서의 만남에서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전격에 닿은 바닥이 까맣게 타들어갔다. 힘의 흐름에 휘말려 그 까만 재가 부옇게 날렸다. "프로텐--" 그러나 아킨 앞에 보호막이 생기는 순간에, 악튤런의 전격이 그 보호 막을 후려쳤다. 츠캉--! 아킨은 팔을 뻗었지만, 보호막은 박살나고 아직도 거대하게 살아 숨쉬는 전격은 사나운 뱀의 몸부림처럼 날뛰 며 아킨을 후려쳤다. 이마가 찢어졌다. 어깨와 가슴도 찢어지고, 오른팔이 부러졌다. 흰 바 닥에 이제는 피가 고이기 시작했다. "쿨럭!" 우드득 뼈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아킨은 꿈쩍 도 할 수 없는 오른팔은 포기하고 왼손을 들어 보았다. 상황은 마 찬가지로 처참했다. 여기 저기 찢어져, 손 등과 손목에는 뼈가 보일 지경이었다. "비켜라. 이번에도 비키지 않으면, 말 그대로 그냥 살덩어리로 만들어 주겠다." 아킨은 숨을 몰아쉬며, 보호막에 반사된 전격이 후려친 바위를 보았 다. 바위는 말 그대로 '타' 없어져 있었다. 아킨은 일어났다. 거친 호흡에,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한다. 출혈이 심해 눈앞이 어지럽다. "나는 성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어떤 시험이 기다리고 있든, 내 힘 으로 헤쳐 나가겠어." "존경스럽군요. 그렇게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는 것이." 피투성이가 된 입술이 쓰리다. 피가 스며든 오른쪽 눈은 뜨고 있기도 버겁다. 그래도 아킨은 웃었다. "그건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네게는 꿈이 없나. 소망도 없나? 무엇이든 바치고 싶은 소중한 존재 는! 그런 게 있다면, 누구라도 이렇게 될 수 있어." 아킨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없습니다. 저는 그저 제 앞에 일어나는 일들을 막는 것 밖 에는 못하고, 그것마저도 힘드니까." 그리고 아킨은 휘몰아치는, 지에나와 베이나트와 팔로커스가 불러낸 거대한 빛과, 그것이 만들어 낸 더욱 거대한 힘의 쏟아짐을 보았다. 고통스러운 중에도 무엇을 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이제 곧 나타날 성배를 움켜쥐어야 한다. 어찌해야 하는 지 그들이 모두 가르쳐 주었으며, 몇 번이나 거듭 거듭 마음과 머릿속에 새긴 것이다. 아킨이 이곳에 온 것도, 이곳에 머물며 그들이 전해주는 모든 것을 고분 고분 받은 것도, 저 성배를 쥐기 위해서였다. 두려 움의 그림자가 어깨 언저리에 머물고 있었지만, 지금 해야만 하는 일은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여태까지 그를 믿어 왔던 그들을 배신하게 된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더라도, 아직은 약하더 라도, 그래도 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봄과, 여름과, 가을의 왕이여- 그러나 비어 있는 겨울의 왕좌-" 아킨은 왼 팔을 뻗었다. 그를 등진 채 펼쳐지는 흰 날개들은, 이제 하늘과 땅 끝까지 닿을 듯 했다. 아킨과 악튤런 쪽으로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악튤런이 신음을 흘렸다. 사방은 빛으로 내리 덮여버렸고, 갑자기 얼음보다 차가운 것이 아킨 의 손바닥에 닿았다. 아직 보이지는 않지만, 그 감각만은 손바닥에 닿고 스며들어 생생하다. 눈이 아플 정도의 빛 속에서도, 그 느낌 은 너무나 차고 생생하다. 너무나- 아킨은 그것을 움켜잡았다. 그 차가움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팔을 타고 흘러 들어와 심장을 내리 찍었다. 온 빛이 내리꽂혀왔다. 그 빛은 더욱 더 차가웠고, 내리 꽂힐 때마다 피가 얼어갔다. 그리고 몸 안에 바늘을 품고 있는 듯 지 독하게 고통스러웠다. 아킨은 가슴을 움켜쥐려 했지만 손바닥 안에 온통 바늘이 꽂힌 듯 고 통스러워 꿈쩍도 할 수 없었다. 눈은 뽑힐 듯 아프고, 귀속에서 천 둥이라도 치는 듯 엄청난 이명이 들려왔다. 머리는 터질 것만 같고, 심장을 얼어붙어 돌덩어리가 가슴을 계속 쿵쿵 치는 듯 하다.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듯 하고, 모든 것을 들을 수 있는 듯 하고, 미 래와 과거와 현재의 모든 것이 그의 기억 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혼란과, 그 혼란이 쏟아지면 누구나 드는 두려움에 온 영혼이 울부짖 으려 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작은 먼지와 모래와 물방울 하나마저도 너무나 거대하게 느껴진다. 엄청난 격류. 그리고 그에 휩쓸려, 아킨처럼 작고 약한 것은 단번에 휩쓸려 버릴 듯하다. "하윽-!" 아킨은 신음을 토해내며 하늘을 보았다. 별들이 보였다. 별들의 하나하나까지 모조리 다 볼 수 있을 듯 했으 며, 구름의 흐름까지 꿰뚫어 볼 수 있을 듯 했다. 달의 얼룩 하나 까지 볼 수 있을 것 같고, 대지 저 아래에 숨은 지상의 심장까지 움 켜 쥘 수 있을 듯 하다. 몸의 하나하나, 정말 피 한 방울 신경 한줄 머리카락 한 올까지 뒤집 히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바위조차 부술 듯한 힘이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숨을 쉬고 눈을 뜨려 하고 있었다. 아킨은 분명 그것을 느낄 수 있었고, 이 고통의 끝에 그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 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세상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와, 생명까지 만들어 낼 수 있는 권능이 주어지 리라는 것을. 그러나 그 쏟아지는 힘의 격류가, 우주가 한꺼번에 몸 안으로 쏟아지 는 듯한 그 격류가, 아킨에게는 분명 버거운 것이었다. 두려웠다. 너무나 두렵다. 산사태가 내리 덮쳐 오는 듯, 하늘이 무너지는 듯, 발 바로 아래에 하얗게 끓어오르는 폭풍우 치는 바다를 두고 있는 듯, 아킨은 엄청난 힘 앞에 무력했다. -거 봐, 너는 못 한다고 했잖아. 아킨은 흠칫 놀랐다. 다시,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능해, 약해, 그러니 그 거대한 힘을 네 것으로 할 수 없어. 칼리 반스는 브라키니언의 최고 마법사였고, 지에나와 팔로커스 역시 마 찬가지--! 하지만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조차도 다스리지 못 하는데, 그 힘을 대체 어떻게 쓰려고! "그만 해-!" 큭큭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굴에 차가운 손바닥이 와 닿고 목덜미 에 그 소름끼치는 머리카락이 닿아왔다. 지옥 속에 빠져드는 것만 같았다. 그저 앞으로 나아가기만 해왔고, 지금보다 나아지는 것만 생각해 왔다. 하지만, 이 엄청난 재앙 앞에서는 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너는 못해! "닥치라고--!" 드디어 으르렁거림이 터졌다. 팔이 타오르는 듯 하고, 이와 눈이 뽑힐 듯 고통스럽다. 관절이 빠져 나가는 것 같고, 근육이 부풀어 오르며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몸을 엄습해 온다. 아킨은 숨을 몰아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이 빛나고 있었다. 한 점 모자란 달, 아직 완벽한 곡선을 그리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찬란하게 빛나는 달! 크르렁--! 울부짖음이 터진다. 온 협곡과 대지와 호수위로, 그 울음소리가 천둥 처럼 울려 퍼졌다. ***************************************************************** 작가잡설: 절단! .........................역시나 글은 들어와서 정리해야 한다는 훌륭 한 교훈을 얻었습니다;;; 빼 먹은 거 몇가지 추가 되었습니다. ;;;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62장 *************************************************************** [겨울성의 열쇠] 제296편 달의 잔, 궤적의 끝#5 **************************************************************** 그 울음소리가 들리는 순간에, 악튤런은 눈부신 빛에 압박되는 그 상 태에서 정신을 차렸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던 것인지 생각해 보려 했다. 그래, 이 호수위에 짜여져 있던 유폐의 진이 풀리며 열렸다. 그 순간에, 안에 갇혀 있던 모든 빛이 풀려나듯 빛이 솟구쳐오고 쏟아져와 아킨과 악튤런을 덮은 것이다. "비쟈트-" 악튤런이 외치는 순간에, 그를 중심으로 빛이 씻기듯 걷히기 시작했 다. 빛이 사라지며 맨 바닥이 드러났다. 방금 전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두툼한 털가죽처럼 가득했던 풀들이 모두 사라지고 황무지 같 은 잿빛 바닥이 드러났다. 악튤런은 수없이 가정과 추측을 되풀이 하고 그 중에 가장 적합한 것 을 골라 보려고 했다. 이곳은 천개의 호수고, 성배가 묻혀 있는 곳 이다. 그러니 방금 전 유폐의 진 안에 숨겨져 있던 것은 당연히 성배. 어떻게 해야 할까. 앞으로 가야 할까, 아니면 다른 방법이 있는 걸 까. 생각해 보려 했지만, 탈로스가 가르쳐 준 것에는 숲의 마법을 풀고 천개의 호수에 이르러, 자신의 탑에 걸린 유폐의 마법과 똑 같은 방법으로 숨겨져 있는 성배를 찾아내는 것 까지였을 뿐이다. 그 다음은 직접 하지 않는 한 모르는 일인 것이다. 곧 빛이 모두 걷혔다. 여전히 낮처럼 환했지만, 방금 전처럼 눈이 아 릴 정도로는 아니었다. 맨 바닥은 회색빛을 드러내고, 주변의 거뭇한 바위도 보였다. 그리고 고개를 든 악튤런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킨이 있었다. 바닥에는 방금 전 악튜런의 공격에 찢겨진 상처에서 흐르는 피에 젖어 있었고, 그는 그 상처를 감싸 쥐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러나 너덜거리던 상처의 살점이 점점 오그라들고 있었다. 지워져버리듯. 부들부들 떨리는 아킨의 손위로는 힘줄이 솟구치고 있었고, 금방이라 도 터져나갈 듯 했다. 으르렁대는 이 사이로는 거대한 송곳니가 솟아 나오다가 줄어들고, 그러다 다시 솟아 나왔다. 고통에 부릅뜬 눈 동자에는 핏발이 서 있고, 날카로운 동공은 더욱 날카로워 바늘처럼 변해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악튤런은 도무지 알 수 없었고, 알 수 없 기에 두려웠다. 공포 앞에서는, 숭고한 목적도 위대한 목표도 가슴 깊은 곳의 사랑도 아무 소용없었다. 어려움 앞에서는 이를 악물면 되고, 고통 앞에서는 어깨에 힘을 주면 될 테지만, 상식을 물어뜯 어 내동댕이치는 공포 앞에서는 아무 소용없었다. 공포 앞에서, 인간은 얼어붙어 혼자이다. 악튤런은 도망쳐 버리고만 싶었다. 어디로든 도망쳐서, 이 괴물의 눈 밖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순간 그 눈이 악튤런을 향했다. 핏발이 선 그 눈 안에 있는 것이라고 는 고통과 분노뿐이었다. 크르렁--! 그것이 울부짖으며, 다시 온 계곡이 울린다. 소름 끼치는 울음 소리 였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얼어붙게 하는, 그 소름끼치는 울음. 눈이 마주치자, 그 숨소리가 더욱 거칠어졌다. 그러나 그 순간에 악튤런 은 머릿속이 뚫린 듯 비어버렸다. 공포가 씻겨져 내려가고, 늘 그의 속 안에 예비 되어 있던 갈망이 쏟아진다. "성배 때문이냐." 혹시나 하며 그렇게 물었고, 그러며 악튤런은 아킨을 바라보았다. 그 러나 아킨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헐떡대는 것뿐이고, 그 어깨너머로 달이 보인다. 보름달이라고 생 각했고, 그랬기에 그의 추론은 금방 끝났다. "그 저주 때문이로군." 크으- 신음이 흐른다. 그러며, 아킨의 그 기묘한 눈동자의 동공이 확 축소되었다. 악튤런은 성문자를 그렸다. 손끝이 스칠 때마다, 흐릿하게 빛나는 둥 근 원과 문자가 나타나 허공에 떠 올랐다. 그 사이 사이에 가느다란 실 같은 선이 이어지며, 글자와 글자를 잇자 빛은 더욱 강해졌다. 원한다, 원하면 얻는 다. 그것이 그의 무기였고, 식량이었으며, 피와 살이었다. 지금 그를 방해하는 저 녀석이 제대로 변신하기 전에 치워 버리고, 지금 모습을 드러냈을 성배를 가지면 되는 것이다. 마법진이 완성되자 더 강한 전격이 콰르릉 쏟아졌다. 주변을 덮은 흰 빛보다 더욱 눈부시고, 폭풍보다 더욱 사납게 으르렁대는 전격의 실타래가 쏟아져 아킨을 덮쳤다. 순간 핏발 선 눈동자가 더욱 벌겋게 타올랐다. 이가 드러나자, 그 송 곳니는 사자보다 더 날카롭고 사나워 보인다. 그리고 전격이 아킨 에게 닿기도 전에 빠르게 얇아지기 시작하더니, 스며들 듯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아킨의 눈동자가 점점 더 이글거리기 시작했고, 숨 들썩이는 빈도도 점점 높아져갔다. 찢어질 듯 꿈틀거리는 손끝으로 긴 손톱이 비어져 나온다. 은빛 머리카락 사이의 눈은, 이제 핏 방울처럼 시뻘겋다. 악튤런은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쿵쾅거리는 소리가, 귀에까 지 들리고 있었다. "무슨 짓이냐......!" 사실, 아킨은 아제대로 보지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있었다. 몸 안의 신경이 모두 바늘로 변해 버린 것만 같았고, 세상 모든 소리 가 귀 안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세상은 뒤집혔다 바로잡히고, 바 로잡혔다가 다시 거꾸로 서는 것만 같다. 수천 키로 멀리서 속삭이 는 소리도 들리는 듯 하고, 바닥의 모래 하나를 이루는 입자마저도 볼 수 있을 듯 했다. 차라리 방금 전의, 그 넝마처럼 찢겨 나갔을 때가 나았다. 이건 정말, 악몽 속에 있는 것만 같다. 폭풍에 맨 몸으로 휘말린 것만 같다. -너는 못 버틴다. 다시, 가슴 속의 니왈르도가 속삭여왔다. 팔찌가 뜨거워진다. 토해 버 릴 것만 같았다. 아니, 지금 몸 안에 있는 이 힘의 흐름을 모두 쏟 아내 버릴 수만 있다면! 악튤런이 움직인다. 그 옷자락 부스럭대는 소리가 천둥이 내리 찍히 는 소리보다 거대했다. 숨소리는 폭풍소리보다 더 거세게 들린다. "아악--!" 그러나 그 비명이 마치 으르렁거림처럼 들린다. 자신의 외침이었건 만, 그 소리는 산사태라도 난 듯 어마어마하게 들린다. 악튤런이 뒤로 주춤 물러났다. 아킨은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고, 그의 이마에 맺힌 땀 한 방울까지 볼 수 있었다. 눈동자를 얼어붙게 하는 공포와, 그 본질까지 모조리 꿰뚫어 볼 수 있을 듯 했다. 그리고 순간에, 악튤런의 몸의 흐름이 바뀌었다. 그 주변의 마나가 흐르는 것이, 마치 색을 입힌 듯 뚜렷하게 보인다. 그 흐름이 더욱 뚜렷해지며, 원과 성문자를 그렸다. 그 주변의 마 나는 마치 백열하듯 하얗게 보인다. 아킨은 그 백열의 틈을 눈으로 볼 수 있었다. 그 흐름을, 너무나 뚜 렷하고 정확하게 볼 수 있었다. 악튤런이 손이 그 흐름의 중심에 얹혔다. 이내 전격이 폭포처럼 쏘아져 나왔지만, 아킨의 눈에는 역 류하는 물을 헤치고 오는 듯이 느릿하고 약해보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아킨 주변의 힘이 어그러지며 그 전격을 흐트러뜨렸다. 마침내 그 전격은 실오라기처럼 가늘어져서는 눈처럼 흩어지고, 그것 을 보는 악튤런의 눈도 같이 얼어붙어 갔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냐고 물었어! 답 하란 말이다!" 그가 외치는 소리가, 귀 속에서 외치는 듯 어마어마하게 들려왔다. 아킨은 귀를 틀어막고 싶었지만, 통증 때문에 꿈쩍할 수 도 없기에 이만 악물었다. 방금 전에 그 차가운 느낌이 몸 안으로 스며든 후에 계속 이런 식이 다. 몸의 모든 감각이, 여태까지 아킨이 가지고 있으며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갑자기 초월해 버렸다. -버거우면 내게 맡기라고. 나는 이 모든 힘을, 너보다 훨씬 더 쉽게 얻었으니까. "닥치라고 했어--!" 다시 토할 것만 같았다. 악튤런의 눈동자가 바로 코앞에 있는 듯 엄 청나게 크게 보이더니, 그 외침은 아득한 곳에서 들려왔다. 뒤죽박 죽이었다, 너무나 뒤죽박죽. 회오리 속에 있는 듯- 공격해야 한다. 그가 나를 죽이려 하고 있다. 아킨은 마나를 끌어 올렸다. 그러나 가벼운 부름에, 마나는 엄청나게 끌려왔다. 지금 한껏 예민해져 있는 아킨이 보아도 그것의 양은 파 도처럼 엄청났다. 또, 악튤런 역시 같은 것을 느낀 듯 그의 눈도 커져갔다. 턱이 경련이 일어난다. 무엇을 해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주변이 싸늘해지며, 하얀 눈송이 같은 것이 날리기 시작했다. 무언가가 주변에 어릿어릿 어리는 것 같더니, 순식간에 거대해져서 으르렁 울부짖으며 악튤 런 쪽으로 쏟아졌다. 바닥이 깨어졌다. 돌이 날리고, 광풍이 치솟으며 그 주변을 뒤엎었다. 악튤런이 손을 뻗었지만, 결국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가렸다. 보호막이 그의 앞을 덮었으나, 그 위로 하얀 눈보라 가 쏟아지더니 결국에는 망치에 맞은 듯 펑 터졌다. 악튤런은 이를 악물었다 떼고는 외쳤다. "비, 위고-!" 순간에 바람이 우윳빛 칼날처럼 솟구쳐 눈보라 속으로 파고들었다. 아킨은 마나의 흐름을 정확하게 볼 수 있었고, 그 마법의 힘이 아 킨이 만들어 놓은 눈보라의 마법 속으로 파고드는 것을 보았다. 아킨 은 그저 그리 생각했을 뿐이지만, 그 힘은 그 순간에 눈보라에 집 어삼켜졌다. 힘을 빨아들인 눈보라는 더욱 거세지며 주변을 휩쓸었다. 악튤런의 옷깃이 베어져 나가고, 볼에서 피가 튀었다. 당장에라도 그 를 갈기갈기 찢어 버릴 듯한 엄청난 힘이 그의 주변에서 몸부림 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은 크게 뜬 채로 아킨을 바 라보고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하고 있는 눈이었지만, 동시 에 언제나 확인하고 싶었던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된 희열역시 있었다. 당신 머뭇거리다가는 죽어 버릴 거야. 아킨은 숨을 몰아쉬며 그렇게 생각했다. 죽어 버릴 거라고. 당신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이 힘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어. 그러나 그 때, 악튤런의 뒤에서 갈색 그림자가 달려왔다. 멀찌감치 있었지만, 아킨은 그 갈색 그림자가 후드를 뒤로 젖히는 것을 정확히 볼 수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안경이 차갑게 빛나고, 그 너머의 푸른 눈동자가 반짝인다. 그는 망설임 없이 옷자락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양피지 조각이었 고, 그 조각에는 엄청난 마나가 잘 짜인 공예품처럼 담겨 있었다. 그는 그것을 위로 띄우고는 그 마나의 핵에 손을 짚고는 떼었다. 츠캉--! 양피지가 찢겨지고, 그 안에서 거대한 빛의 원이 솟구쳐 나와 악튤런 을 감쌌다. 악튤런이 분노 어린 눈으로 외치려 했지만, 그 힘에 휘 말리자 결국에는 소매로 얼굴을 덮으며 고개를 숙였다. 순간에 그의 몸이 지워지듯 사라졌다. 아킨은 이제 힘은 퍼부어 대는 것을 멈추 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악튤런을 감싼 마나가 누구의 성격을 담고 있 는지, 또 그것이 누구의 손에 의해 구현되고 있는 지 너무나 잘 알 았으니. 그러나 멈출 수가 없었다. 어떻게 멈추어야 하는 지, 도저 히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때, 뒤에서 쿵쿵쿵-- 엄청난 소리가 들려왔다. 그저 급히 달려오는 소리였지만, 민감할 대로 민감해져 있었기에 거인이 발을 찍으며 달려오기라도 하는 듯 엄청나게 들리는 것이다. 그 소리만으로도 아킨을 으스러뜨려 버릴 것만 같아, 아킨은 뒤돌아 서 그대로 주먹을 날렸다. 공기 헤치는 소리만도, 천둥이라도 치는 듯 크게 들려왔다. 그러자 달려온 상대가 주먹을 피하고는 아킨을 끌어안았다. "아키.....!" 녹색 눈동자가 보인다. 그 너머의 신록이 보이고, 더 먼 곳의 어둠 숲도 본 듯 했다. 검은 머리에 녹색 눈을 가진 여자 엘프가 주춤 멈추어 뒤를 돌아보더니, 그 눈이 커졌다. 그녀의 귀걸이가 쩔렁이고, 그 이마의 장식도 흐트러진다. 비명 같은 외침이 터졌지만 들리 지는 않는다. 그리고 검고 곧은 머리에, 아름다운 은청색 눈을 가진 낯선 엘프 여 인이 보인다. 서릿발 같은 눈빛을 가지고 있는 여인이다. 평소라면 그 늘씬한 몸으로 온 숲을 누비고 다니며 그 눈빛보다 더욱 차가 운 칼날을 휘둘렀을 전사였건만, 지금의 그녀는 갑작스런 일에 놀란 듯 입술을 살짝 벌리고 있다. "...윽!" 아킨은 무릎을 꿇으며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그를 안았던 자켄이 아 킨을 놓고는 그 어깨를 잡았다. "정신 차려! 괜찮은 거니?" ".....!" 바로 가까이에서 들리는 것이건만, 너무나 멀리서 들리는 듯 했다. 바로 앞에는 흰 땅이 있어야 하는데, 마치 허공을 짚는 듯 아무것도 없었다. 아킨은 바닥을 짚었다. 단단하고 차가운 땅이 손바닥에 닿았지만, 보이는 것은 허공일 뿐이었다. 그리고 달빛 퍼지는 대지가 보였다. 어둡고 두터운 숲이 술렁대고 있 고, 그 숲 사이에는 아름다운 성이 서 있어 바다를 굽어보고 있었다. 그 푸른 지붕이 달빛에 빛난다. 성을 덮은 하얀 벽들 역시 진주처 럼 아름답다. 처음 보는 성이었으나, 달을 등진 그 성은 나이 지긋 하나 우아하고 자비로운 귀부인처럼 아름다웠다. 높이 나는 새처럼 아킨은 그 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성, 어느 방 창문에서 퍼져 나오는 불빛을 보았다. 그 불빛 퍼지는 창문가에는 키 크고 낯익은 이가 있었다. 그는 차가운 눈동자로 바다 속처럼 푸릇한 숲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창문에 기댄 한쪽 손목은 이마에 닿아 있고, 다른 손은 허리에 얹혀 무언가에 도전하는 듯 보인다. 아버지, 암롯사의 왕 사이러스였다. 언제나 두려워하기만 했던 아버지였고, 그랬기에 만날 때마다 더욱 더 눈을 크게 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제대로 보려 하지 않았고, 들으려 하지 않았고, 그렇게 아킨은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기에 두려웠다. 그리고 두려웠기에, 그 무엇으로도 이해할 수조차 없었던 아버지였다. 그래, 그는 성이었던 것이다. 변화하지 않고, 오로지 오만하게 모든 풍파를 버티어 내고는 그를 파멸시키려는 모든 자들을 거꾸러뜨리는 그런 성채. 사이러스가 한숨과 함께 창가에서 몸을 뗀다. 불빛이 꺼 지고, 그의 눈길역시 어둠에 잠겼다. 이제 시선은 바람처럼 빠르게 날아가고 있었다. 숲과 대지를 넘어, 바다와 강을 건너, 구름 덮인 넘고 청아하게 맑은 하늘도 넘어, 북으로 북으로- 바다를 헤치는 자, 대지를 달리는 자, 숲의 품안에 안긴 자, 무리지어 돌과 흙으로 건물을 올리고 그 안에서 뒤엉켜 사는 자들, 그들 모두의 터를 넘고, 사막 일족의 빛나는 눈동자가 깜빡이는 사구들을 넘고, 인어들이 헤엄치는 심연을 헤치고, 엘프들이 지키는 숲을 뛰어넘어, 마침내 드래곤들이 잠든 계곡을 건너- 두터운 잎들이 작아지고 얇아 지고 마침내 바늘처럼 날카로운 침엽수의 울창하고 오래된 밀림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회색의 대지, 어둠이 고이고 전설이 잠든 벌판을 지나고, 갇힌 자들이 울부짖는 성채들 사이를 지나. 마침내, 아킨은 똑바로 북으로 향하여 달리는 하얀 말과 그 뒤를 따 르는 기사들의 무리를 보았다. 검붉은 망토가 달빛에 출렁이고, 그의 허리에 찬 검이 차갑게 반짝인다. 검은 머리카락이 세차게 흐트러진다. 그리고 이제 아킨은 그의 눈으로 보고, 그의 귀로 듣고, 그의 숨으로 심장을 뛰게 하고 있었다. 그의 생각 속을 헤치고, 귀중한 것들을 숨겨 놓은 보석함의 뚜껑을 열어젖히듯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아킨은 그였고 그는 아킨이었다. 그가 느끼는 것은 아킨이었고, 아킨이 느끼는 것은 그였다. 그런 그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는 놀란 듯 허공을 바라보았다. 땀에 젖은 목덜미를 스치는 차가운 바람마저 생생하다. 휘안토스가 말을 멈추자, 다른 기사들 역시 일제히 말머리를 멈추어 세웠다. 그들이 묻는 소리는 생생했고, 바로 아킨 자신이 듣는 듯 했다. 휘안토스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더니,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하늘 위의 달이 무엇인 지 확인해 보고, 보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자 고개를 젓고는 다시 박차를 가했다. 말이 북의 대지를 박차며, 다시 북쪽 끝의 지평선을 향해 달려갔다. 아킨은 바람처럼 그의 몸을 놓았다. 두 팔 사이로 휘안토스가 빠져나 가 북으로 사라져갔다. 아킨은 두 손을 움켜잡았다. 대지가 사라지고, 아킨이 딛고 있는 바닥과 마주보는 허공도 검게 변해갔다. 그리고 그의 볼을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손이 감쌌다. **************************************************************** 작가잡설: 투드가 되기는 이리도 힘든 것이었습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62장 *************************************************************** [겨울성의 열쇠] 제297편 달의 잔, 궤적의 끝#6 **************************************************************** 따뜻한 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바로 앞에 누군가 있는 듯 하 고, 그 온기가 직접 닿아오는 데도 그의 실체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 온기만이, 그 따사로움 만이, 부드러운 입맞춤보다 더욱 더 편안하게 느껴질 뿐이다. 이제, 아킨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여자를 보고 있었다. 크게 예쁜 얼 굴은 아니지만, 그 독특한 인상 때문에 다시는 잊지 못할 듯 했다. 무릎까지 닿을 듯한 길고 검은 머리카락에, 진갈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얇아 보이는 하얀 피부는 처음이었다. 물고기처 럼, 차라리 투명해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여자의 눈은 날카로웠고 , 아킨을 바라보는 눈동자는 더 없이 싸늘했다. 그녀가 고개를 돌 린다. 검고 얇은 머리카락이 흩어졌다. 마른 편이라 어깨는 얇고 팔 다리는 가늘었지만, 그 뒷모습만은 차고 단단해 보인다. -당신을 용서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칼리반스.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 역시, 그 모습만큼이나 싸늘하기 만 했다. -돌아가요. 그리고 당신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건 사실이고, 돌아오기 를 바라는 것도 사실이에요.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이라 할지라도 당신을 용서할 수는 없어요. 이마를 짚은 손이 잠시 떠나는 가 싶더니, 다시 다가와 미풍처럼 가 볍게 스치고 지나갔다. 아킨은 그대로 모든 시간이 멎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고통이 차츰 가라앉기 시작하고, 환각 역시 점차 가라앉아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은 현실이 보이지 않았다. 사방은 아직 무언극의 무대 같은 그 런 기이한 고요에 가라앉아 있었다. 숨이 점점 가라앉아 갔다. 심장의 고동도 이제 차분해지고, 통증은 거의 씻은 듯 사라지기 시작한다.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맑고 귀여운 여자아이 웃음소리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킨은 그 앞에 자그마한 소녀를 보고 있게 되 었다. 나이는 열 두엇 정도 되 보이는, 까만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 어 어딘지 방금 전의 그 여자를 연상시키는 외모였으나 얼굴도 동그 랗고 검은 눈은 큼지막해서 훨씬 더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인다. 그 소녀의 복장도 독특했다. 치마는 아주 짧았고, 머리카락은 귀 옆에 서 짧게 깎여 있었다. -아빠는 꼭 돌아오실 거에요. 그리 말하고는 소녀는 다시 웃었다. -최고의 파티를 준비할 테니, 꼭 돌아오셔야 해요. 아빠가 주인공인 데 오시지 않으면 곤란하잖아요. 소녀가 어깨를 으쓱한다. -언니도 아빠를 용서해야 할 거에요. 그 일만 성공한다면 아빠는 언 니의 생명의 은인이 되는 거잖아요? 그러면 우리 다시 넷이서 살 아요. 다시는 싸우지 않고. 아킨은 갑자기 눈물이 치솟아 올랐다. 저 소녀가 지금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아킨은 알고 있었고, 누구의 추억과 그리움의 결정체 인 지 알 것 같았으니. 예전, 어느 날 밤 저 궁전의 연못가에서 베 이나트가 말했었다. 그의 추억, 그의 그리움, 그의 심장을........눈물 에 반짝이는 눈과 젖은 목소리로 말했었다. 아킨은 이제 이 추억의 주인인 베이나트가 왜 유제니아를 처음부터 귀여워했는지 알 것 같았다. 어째서 옛 아내의 모습이 유제니아와 닮아 보였는지도 알 것 같았다. 소녀의 모습에, 소녀의 어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아킨 조차 느낄 수 있는 그 소중함 가득한 감정, 천년이 흐르고 만년이 흘러도, 결코 잊혀지지 않는 그 소중함. 소녀는 뒤돌아섰다. 짧은 단발머리가 찰랑이며, 그 귀여운 웃음소리가 오랫동안 들리는 것만 같았다...... 이제 아킨은 다시 한번 왜 여기까지 왔던 것인지, 그리고 무엇을 해 야 하는 지 기억해 내야 했다. 하려하면 할 수 있는 일이 될 거라 생각했기에, 그랬기에 왔다. 목적은 형에 대한 복수도, 아버지를 누를 자가 되어 그들 모두를 지 배하는 것도, 엄청난 힘을 얻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을 돕기로 했 었고, 저주가 이끈 모든 운명을 움켜 쥐기로 했다. 그리고 그런 목적 이 아니었기에, 그들은 아킨을 믿어 여기까지 데리고 온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 할 일부터 제대로 못한다면 대체 무엇이.. ... 이들과 한 약속, 그리고 그 누구도 아닌 베이나트와 한 약속 이다. 그를 이끌어 주고, 그에게 그토록 많은 비밀을 나누어 주며 그를 믿어 준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은 진정 최초의 믿음이었다. 롤레인과 자켄의 그것이 보답 바라지 않는 사랑이고, 켈브리안과 루 첼의 그것은 주고받는 화사한 애정이듯, 베이나트는 처음으로 아킨의 힘을 믿어 준 사람이었다. 진정 처음으로 아킨이라는 인간을 '인정' 해 준 사람이었다. 휘안토스의 동생이 아니고, 사이러스의 아들이 아 닌, 그들에게서 벗어나 최초로 손을 뻗었을 때 신뢰해 준 사람. 그 신뢰에 보답하는 것은 '의미'를 얻는 일이다. 소녀의 모습이 마침내 사라졌다. 그리고 그녀가 있던 빈 자리는 사라 지고, 아킨은 이제 다섯 개의 제단 중앙에 무릎 꿇고 있었다. 모든 제단이 비어 있었지만, 아킨과 마주하는 제단에만은 낡은 잔이 놓여 있었다. 아킨은 손을 뻗어 그 잔을 움켜잡았다. 깊은 잔 안에 은빛 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 갈라진 틈에서, 달의 빛 같은 깨끗한 빛이 스며 나와 아킨의 손을 적셨다. 아킨은 눈을 감고 그 잔을 이마에 댔다. 잔의 깨끗하고 차가운 느낌이 이마에 닿자, 모든 것이 명확해 지기 시작했다. 천년도 전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듯, 그것은 자연 스럽게 아킨 속으로 스며들어와, 얼어붙었던 피를 녹이고 심장을 다 시 뛰게 하고는 부드럽게 속삭였다. 고통을 누그러뜨리고, 주체할 수 없이 폭주하던 홍수 같은 타인의 영상과 기억을 가라앉혀갔다. 그 모든 것이, 이제 아킨의 손 안에 들어온 것이다. 그의 손안에서, 그의 의지대로 움직이게 된 것이다. 불과 몇 분 만에, 그 전과는 비할 바 없이 거대해진 듯한 그의 힘에의해, 그의 손 안에 쥐어져 있는 것이다. -넌 못해. 그 목소리는 이제 힘을 잃고 있었다. 기대했던 대로 일이 풀리지 않 는 자의 목소리에 담긴 분노와 질투가 그 안에 담겨 있었고, 곧장 응축되어 증오로 변해갈 듯 하다. "이제 그만 하십시오. 당신을 지배하는 것은 바로 저이고, 더 이상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못 해! "해야 합니다....당신은 죽었지만, 나는 살아 있으니까." 피가 가라앉았다. 고통은 멎고, 귓가에 웅웅대던 니왈르도의 악 받친 외침도 사라진다. 귀는 여전히 크게 열려 있고, 시선은 여전히 멀 리까지 닿지만, 그렇게 완전히 새로 태어난 것만 같았지만, 그래도 아킨은 여전히 아킨 자신이었다. 손 안의 성배의 감각이 사라져갔지만, 아킨은 그것이 어디로 가든 어 디에서든 불러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아킨은 이마에 손을 얹고 있는 베이나트를 마주볼 수 있었다. "당신들은......대체 어떻게 버티어 내셨습니까." "너처럼 했지." 그러나 그 목소리는 젖어 있었고, 전혀 기뻐하지 않고 있었다. **************************************************************** 작가잡설: 아키는 투드가 되었습니다! 두둥!!!!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63장 ***************************************************************** [겨울성의 열쇠] 제63장 마지막 주인 제298편 마지막 주인#1 ****************************************************************** "무슨 짓을 한 거냐." "목숨을 구해 드리는 짓을 했습니다." 루첼이 다 떨어진 소맷자락을 털며 그리 답하자, 악튤런은 이를 부드 득 갈았다. "너더러 구해달라고 한 적 없어--!" "저 역시 사숙님 목숨이 어찌되든 상관없지만, 그래도 스승님의 명령 이라 별 수 없었습니다." "뭐?" "어제 다 전하지는 않았는데, 스승님께서는 방금 전의 그 스크롤 하 나를 더 맡기시며 '분명 사고 칠게 분명하지만, 그래도 사제인 지라 목숨이 오락가락 하는 게 뻔한 데도 모르는 척 할 수 없어서 돕는 거다.' 라고 말씀 하셨지요." 악튤런은 기가 막혔다. 아니, 지금 루첼이 한 일은 누가 봐도 기가 막힌 일임에 분명했다. 전날에 롤레인의 전갈을 참으로 불량하게 전한 루첼은, 지금은 악튤런과 아킨의 싸움에 끼어들어 악튤런을 끌 고 오는 길 이었다. 루첼이 한 일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들고 왔던 스크롤을 찢어, 아킨의 공격을 잠깐 막고 동시에 공간을 뛰어 넘은 것이었다. 그리고 공간을 넘는 마법이 끝나고 간신히 정신을 차린 악튤런은 전날에 루첼과 만나고 헤어졌던 그곳에 있게 되었다. 그 장소에 도착하자 악튤런은 어제 루첼이 그냥 몸만 왔다 간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루첼은 그와 만난 직후에, 악튤런이 위험해질 경우 구해서 돌아올 모든 준비를 다 해 놓은 것이다. 그렇게 정말 안 전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악튤런은 몸 여기저기에서 난 상처에서 통증들이 콱콱 치솟아 오르며 동시에 분노 역시 치밀어 올랐다. "그란셔스, 지금 너는 내가 평생 증오할 만한 죄를 저지른 거다." "되도록 스승님께 화풀이 하시죠. 저는 스승님 하라는 대로 한 죄밖 에 없으니." 그러며 루첼은 스크롤 조각을 흔들었다. 그 양피지 조각에는 아직도 마법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대체 왜 방해를 하는 거지?" "제가 보기에는 '구해 드린' 것 같은데요." "방해다! 지금.......빌어먹을, 성배가 내 눈앞에 있었어! 그런데 네가 그걸 방해한 거란 말이야!" "목숨보다 중요한 건가요?" "당연하지!" "괜히 구했다는 생각은, 당신과 여기 도착하는 순간부터 하고 있었지 만 그렇게 직접 확인시켜 주지는 마세요." 루첼은 양피지 조각을 던져버렸다. "그리고 저는 '한 번' 구해 드릴 수 있을 만큼만 준비해 왔으니, 또 들어가서 위험해 지시면 그 때는 정말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마음 대로 하세요." 악튤런은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아침 햇살에 나무들과 바위들은 발 그레하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싸늘한 바람이 볼을 스치고, 순간에 오싹해지며 악튤런은 자신이 방금 전에 꽤나 심각한 상황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잠시 고민해야 했다. 루첼이 그의 목숨을 구했다는 것을 인정하 고 돌아가자니 그건 죽기보다 싫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또 들어가 자니, 말 그대로 아득했다. "내일 다시 들어가지." 그러며 악튤런은 바닥에 털썩 앉았다. 루첼이 의미모를 한숨을 내 쉬 었다. "그런데 너, 내내 나를 따라 온 거냐?" "그런 셈이죠. 그리고 지금 당장 암롯사 일행이 있는 곳으로 나는 듯 달려가야 왕자님 맞이하는데 지장이 없겠네요....저 갑니다." 악튤런은 갑자기 화가 울컥 치솟아 올랐다. 여기까지 온 이유 자체가 바로 그 휘안토스 때문인데, 또 이곳에 그 가 올 거라고 생각하니 화가 팍팍 치밀어 오르는 것이다. 쳇- 악 튤런은 다시 내뱉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런 악튤런의 모습에, 루첼 은 나이는 동갑이고 정신연령은 아득하게 어리며 상황 파악력은 루 첼의 유아기와 매우 흡사한 그를 사숙으로 모셔야 하는 자신이 한 없이 가엾어졌다. "그런데 대체 왜 롤레인이 나를 구하라고 한 거지? 전쟁 내내 나를 괴롭혔으면서 말이야!" "스승님은 베넬리아의 마스터이고, 베넬리아는 특별히 암롯사 편은 아닙니다. 그 싸움에서 델 카타롯사가 이기면 베넬리아가 난처해지 기에 도운 것일 뿐이죠. 그리고 내내 괴롭힘 당한 것은 본인 실력 부족이지 스승님 잘못은 아닌 듯 한데요." "더 긁었다가는, 당장에 곤죽으로 만들어 버린다." "탈로스 님처럼 마법사 명부에 공적으로 기록되고 싶으십니까?" "어쨌든 말하기나 해! 왜 롤레인이 나를 구하라고 한 거냔 말이다." "그대로 전할까요?" "당연하지!" "'그 녀석이 다섯 살만 더 먹었어도 나는 녀석의 악의를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녀석은 고작 스물 셋이고, 지금 하는 일은 그가 인류 해악에 관한 무한한 야망을 가지고 있어서 하는 일이 라기보다는 그저 철이 없어서 설치는 것뿐이라 판단된다. 그러니, 그 녀석이 너무 설치다가 그 집 주인에게 지나치게 엄한 경고를 받 게 되거든 구해 오거라.'" 악튤런은 입을 딱 벌렸다(그리고 그대로 전하라고 말한 것 역시 후회 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구한 거라, 이 말이냐." "제 정신으로 하신 말이고, 제 정신으로 하신 말씀에 관한한 충실히 이행해야 하는 건 제자인 제 의무입니다." "쓸데없는 짓을 했다. 나는 몇 번이나 내 왕을 실망시켰고, 지금 빈손 으로 돌아간다면 어마어마하게 실망하실 거야." "실수를 만회할 기회는 앞으로 얼마든지 올 겁니다. 너무 젊은 나이 에 너무 높은 곳에 계셔서 모르는 듯한데, 기회는 실패한 자신이라도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 더 많이 오는 법입니다." "늙은이 티내지 마! 너, 나랑 동갑이잖아." "아, 그것 참 놀라운 발견이군요. 저는 한 열 살은 어린 줄 알았는데 요." "닥쳐! 너...." 루첼은 그의 말을 끊었다. "어쨌건 오늘은 저와 스승님 덕에 사셨고, 내일 다시 숲으로 돌아가 시든 지금 델 카타롯사로 내려가시던 그건 사숙님 소관입니다. 아 셨죠?" "고--오맙군!" 그러나 그렇게 고함을 내 지르면서도 악튤런은 그리 불쾌하지는 않았 다. 아니,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내심 안도하고 있었고, 안도하는 만큼 여유 부리며 성질부리는 것이었다. "지금 돌아가지는 않아. ......하지만 어쨌건 오늘 일은 고맙다." "네?" 대뜸 툭 던지듯 하는 말이었건만, 루첼은 적잖이 놀랐다. 구해주어도, 감사 인사를 기대하기는커녕 방금 전처럼 악악대면서 한방 치지나 않으면 다행이라 생각했던 것이다(그래서 루첼은 혹시 잘못 들고 온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마저 해야 했다.). 악튤런은 찢어진 망토를 벗어 던졌다. 온 몸이 상처투성이였고, 피도 만만치 않았다. 루첼은 상처까지 치료해 주라는 말은 없었던 것 같 다고 생각하기 시작했고, 악튤런은 아파 죽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때 숲 사이로 난 오솔길 끝에서 말과 기사들이 나타났 다. 깃발은 없었지만, 그 일행의 선두의 진한 붉은색 망토와 붉은 모자는 선명했다. 암롯사 라는 것은 누구나 알아볼 수 있었다. 악 튤런이 긴장했다. 루첼 역시 거의 하루 동안 아무리 스승의 명이라 지만 적의 마법사를 돕는 짓을 하고 있었기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고, 그 선두에 누가 있는 지 뻔히 알기에 더욱 더 긴장해야 했다. 제 길, 오늘 오후에나 도착한다고 하더니 일찍도 왔다. "둘 다 이곳에 있었군." 선두는 역시나 휘안토스였다. 그리고 무표정하게 주변을 둘러보더니, 악튤런이 일행 없이 혼자 있는 것을 확인했다. "웬 일로 여기에 있는 건가, 마스터 악튤런." 너무나 덤덤하게 묻는 지라 불쾌해진 악튤런의 입술 끝이 치솟았다. "당신이 알 바 아닙니다, 휘안토스 왕자." 휘안토스는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악튤런 앞에서 멈출 줄 알았지만, 그는 악튤런은 무시하고 앞으로 더 나아가 숲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지는 오솔길 앞에 섰다. 근방은 평범한 이른 봄의 숲이었지만, 저 하얀 오솔길이 사라지는 부근부터는 경계의 숲이 펼쳐진다. 휘 안토스가 보는 곳을 같이 돌아본 루첼은 새삼 그 깊은 곳까지 그렇 게 다녀온 자신이 대단하게 여겨졌다(물론 스승의 도움이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휘안토스는 고개를 들어 숲을 조금 더 깊이 가늠하고자 했지만 잘 되 지 않자 돌아섰다. 순간에, 루첼에게 그의 눈은 돌조각처럼 싸늘해 보였다. "루첼 그란셔스, 어제 저녁에 사라졌다고 들었다." "모두에게 말 하고 떠났습니다." "델 카타의 마스터와 사이좋게 지내기 위해 떠났다고는 말 안하던 데." "스승님 일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 임무에는 충실했습니다." "충실했다는 증거는 있나?" "그렇지 않다는 증거 역시 없습니다." 휘안토스는 이제는 악튤런을 보았다. 악튤런은 턱까지 들고 그런 휘 안토스를 마주 보았다. 휘안토스를 수행해 온 기사들의 눈빛이 험 악해 졌지만 악튤런은 개의치 않았다. "다시 묻겠어, 마스터 악튤런. 이 숲에 볼일이 있어서 온 것인가, 아 니면 볼일을 마치고 오는 길인가." "미안하지만, 볼일은 다 안 끝났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악튤런의 눈빛에 싸늘한 것이 번득이다가는 사라졌다. 루첼은 그 빛을 놓치지 않았지만, 휘안토스는 숲을 보고 있어 발견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다시 악튤런 쪽을 보았을 때에는, 그 빛 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운이 좋았군, 악튤런. 저 단순한 녀석이라 면 눈만 제대로 마주쳐도 그 속셈이 훤히 드러날 텐데. "볼 일은 무엇이었나." "성배의 탐색." 루첼이 쏘아보자, 악튤런은 그 눈길을 피하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휘안토스가 말했다. "탐색은 별로 성공적이지 못하거나, 아직 성공하지는 못한 듯 하군. 빈손인 걸 보니." "다른 사람이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성배를 빼앗거나, 새로운 주인을 황제로 섬기거나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하지요." 너 바보지? 루첼은 속에서 파도처럼 솟구쳐 비처럼 쏟아지는 그 말을 주체할 수 없었다. 사숙만 아니면 뒤통수 갈기고 엉덩이 걷어찬 다 음에, '지금 누구 죽이려고 작정 했냐!' 하고 윽박질러 버리고만 싶 었다(롤레인이라면 분명 그리 했을 것이다.....그리고 덧붙여 말했을 테 지. '너부터 죽어라.'). "자세한 것은 묻지 않겠다. 당신이 말하는 건 내가 아는 사람인가?" "아아, 아마도 세상에서 제일 잘 아는 사람일 겁니다." 다시 악튤런의 눈에 싸늘한 빛이 번득였고, 이번에는 휘안토스도 발 견했다. 휘안토스의 눈은 더 차가워졌다. 그것은 분노와 비슷한 무 엇이었다. 악튤런은 이어 말했다. "휘안토스 왕자, 내 사형인 마스터 탈로스 고르노바가 제국의 몇몇 왕실과 황실에 무언가를 보고했다는 건 나도 들어서 압니다. 제 본 국으로부터 전해졌으니까. 하지만 마스터 탈로스는 나에게 특별히 무언가를 전해 주었지요. 왕자의 동생이 성배와 꽤나 가까우며, 마 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사실 말이오." 그것은 루첼도 처음 듣는 일이었다. 아까 아킨의 상태가 이상했던 건 사실이었지만, 아킨 옆에 자켄과 베 이나트가 있기에 루첼은 망설임 없이 악튤런만 챙겨서 숲을 나온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자세한 사정은 몰라도, 지금 악튤런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며 어떤 의도로 이루어지는 지는 잘 알 수 있었다. 루첼은 침묵하기로 했다. "사실인가." "거짓이라 믿어도 나는 상관없습니다." 휘안토스가 가볍게 웃었다. "나는 성배 따위는 어찌되든 상관없다. 어차피 그런 낡은 물건 하나 가 세상의 모든 이들을 납득시킬 거라고 믿는 건 세상이 만만한 녀 석이나 열 살도 안 된 골목대장 수준의 발상이지. 내가 묻는 것은 저 숲 너머에 내 동생이 있다는 것뿐이고, 내게 중요한 것 역시 그것뿐이다." 모멸감에 악튤런의 턱이 꽉 맞물렸다. 휘안토스는 이번에는 루첼에게 물었다. "맞나?" "맞습니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에 휘안토스는 장갑의 끝을 당기고는, 말 쪽으로 달려가 그 위에 탔다. "숲으로 가겠다." "위험합니다!" 루첼은 자기도 모르게 외치고 말았다. 그 숲에 다시 들어가는 짓은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으니. 그런데 휘안토스가 루첼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도 수행해라." 순간에 루첼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지금 숲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떤 의미인 지, 그는 너무도 잘 알았다. 새벽에 숲을 오고 간 것은 순전히 롤레인의 도움 덕이었다. 그러나 그녀 가 준 모든 스크롤은 일회용이었다. 롤레인은 새벽에 단 한번 오고 갈 정도만 준비해 주었고, 그 이상은 필요 없었다. "예전에 분명 말했었다. 나를 위해 죽으라고. 그 말은 그 어떤 위험한 일이라 할지라도 나를 위해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고, 지금역시 바로 그런 경우다. 수행해라." "왕자님을 지키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오기 전에 본국에 연락해 두었다. 또, 아버님이 돌아오실 때를 대비 해서 몇 가지 준비 해둔 것도 있지. 너 혼자 돌아가거나, 우리 둘 다 돌아 가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면 본국의 네 아내와 아들도 별로 안전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네 아내와 아들이 소중하다면 없는 능력은 만들어서 라도 최선을 다해 나를 지켜라." 루첼이 이를 악물었다. 휘안토스는 망설임 없이 숲 속으로 뛰어들었다. 기 사들 역시 그 뒤를 따랐고, 루첼은 그 중 한명이 건네주는 여분의 말의 고삐를 받아들어야 했다. 그런데 뒤에서 악튤런이 말했다. "어이, 같이 가 주지." "적국의 마스터를 왕자의 수행에 넣는 바보가 어디 있습니까." "마스터의 맹세는 들어 본 적도 없지, 너? 각 마스터는 비록 외국이라 할 지라도 왕과 직계 후계자는 손대지 못하도록 되어 있어. 또 위험해 진다면 타국의 왕과 왕자라 할지라도 구해야 한다." "그렇다면 예전의 그건 뭡니까? 아키는 당신에게 신나게 터졌는데." "아킨토스는 후계자가 아니고, 나는 녀석을 죽일 생각도 없었어.... 그리 고 빌어먹을, 나도 그 녀석에게 방금 전에 신나게 터졌으니 공평하다고 봐!" "그런 누구나 생각하는 상식도 아시다니, 이번에야 말로 정말 놀라운 발견이군요. 내가 맞는 한대는 상대방을 향한 백대에 맞먹는 가치를 가진다, 가 당신의 상식인 줄 알았는데요." 악튤런이 루첼의 허리를 푹 쑤셨다. 루첼은 신음을 삼키며 말에 탔다. 악튤런 역시 그의 등에 탔고, 두 사람(그것도 성인 남자)이 타자 말이 신음을 토해냈다. "되도록이면 걸어오시죠." "네가 내려." 루첼은 그냥 턱을 날려 버리고 혼자 타고 갈까 생각했다. *********************************************************************** 작가잡설: ...............새로운 커플이.....(망상은 뭉게뭉게)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63장 ************************************************************** [겨울성의 열쇠] 제299편 마지막 주인#2 *************************************************************** 아침 햇살이 천개의 수면과 계곡 사이로 퍼졌다. 몸이 아직도 욱신거렸고, 머리도 어지럽다. 그러나 한번에 백 살은 먹어 버린 듯한 기분이었고, 동시에 그 넓은 호수와 계곡이 너무나 작아져 주먹에라도 쥘 수 있을 듯했다. 아킨은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햇살에 불그스레하게 물든 손 은 예전과 똑같았고, 두 팔에 흔들리는 팔찌역시 같다. "괜찮은 거니?" 그 부드러운 목소리에 아킨은 눈을 들었다. 황금빛 하늘을 등지고 자켄이 있었다. 옆으로 비껴드는 햇살에, 그 얼굴의 음영은 신비스러울 정도로 환하고 진했다. 아킨이 아무 말도 없자, 자켄은 그 앞에 무릎을 꿇고는 아킨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어렸을 때, 아킨은 그와 함께 자주 이런 식으로 앉아 있고는 했었 다. 그때 그 순간이 아킨에게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고, 그것은 그도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괜찮아." "베이나트 님께 들었다. 네 몸.....대체 뭐가 달라진 거니?" "드래곤을 만난 적이 있어. 그녀의 눈빛을 보면 정말 이상했지. 강한 사람은 많이 보았지만, 그렇게 '초월한' 듯한 눈을 본 적은 없었으 니까. 내게 소중하고 중요한 순간순간이, 그녀에게는 정말 아무 것 도 아닌.....정말 먼지 한 톨 같은 것이라 생각하니 부러우면서도 슬프 고, 내가 무엇을 하든 그녀에게는 가치 없을 거라 생각하니 참담하 기까지 했고, 그러면서도 지독히도 낯설었지. 어둠 숲의 나루에 님 역시 마찬가지였고...... 형은 엘프라 그것이 무엇인지 금방 알 거야. 나 역시 그런 게 되어 버린 거야." 자켄의 눈이 커졌다. 어떤 일이라는 것을 그는 금방 깨달았지만, 대 체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성배는 그 자체가 세계이자 우주. 어쩌면 신의 힘 그 자체인지도 모 르지. 그 힘이 에칼라스를 신으로 각성시키고, 베이나트와 지에나, 팔로커스에게 신에 필적하는 힘과 영생을 주었지. 그리고 내게는......." "네게는?" "아직은 몰라. 다만..... 지금 이 세상은, 당장에 움켜 쥘 수 있을 정도 로 작아 보여......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그 정도뿐이지." 아킨은 지에나의 힘과 베이나트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었다. 팔로커스가 얼마나 전설적인 파괴력을 발휘했었는지도 알고 있다. 또한, 아킨은 지금 그 힘을 어떻게 쓰는 지도 알고 있었다. 아킨은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는 베이나트를 돌아보았다. 그는 지친 여행자처럼 앉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검은 눈동자 는 쓸쓸해 보였다. 아킨은 그가 성배를 움켜쥐어 받아들인 직후 그가 전혀 기뻐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베이." "지에나가..." "네?" "지에나가 언젠가 너를 믿을 수 있냐고 말 한 적이 있었지." "믿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래, 너를 믿는다. 또, 네가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 지도 알고 있고, 그 노력이 얼마나 많은 결실을 맺어 왔는지도 안다. 너는 너 자신 에게 불안해하는 만큼이나, 너 자신에게는 꽤 엄격한 녀석이었 으니까..........때로는 그냥 억지 부리고 화내면서 덤벼들었으면 좋았 을 정도로 말이야." "지난번에도 비슷하게 말씀하셨죠." "그리고 네가 오거스트와 비슷하다는 말도 했고....... 하지만 아키야, 나는 롤레인에게 절대 이 성배를 얻으려 하지 말라고 했고, 알려 하지도 말라고 했다. 나는 구차하게도, 롤레인의 동정심에 호소했단다. 나를 불쌍하게 여긴 다면, 제발 그 일에 손대지 말라고..... 롤레 인은 그리 해 주었고, 나는 그것에 지금도 감사한다. 또, 탈로스가 분 명 할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을 알아도....... 탈로스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버렸지. 그에게는 아직도 미안하지. 악튤런 역시 뛰어났지만, 그 아이에게 무엇이든 다 줄 수는 있어도 성배만은 빼앗아 버렸 다. 그리고 너 역시....... 미안하다. 지에나가 그렇게 사고치지만 않았으면, 아마도 나는 너를 여기서 쫓아내거나 네가 늙어 죽을 때 까지 안 가르쳐 줬을 거야." "믿지 않아서요?" "아니. 나는 탈로스의 고지식함과 무욕을, 롤레인의 엄격함을, 악튤런 의 재능을 믿고, 네가 정말 노력하는 아이라는 것을 믿는다. 하 지만...... 그건 믿음과는 전혀 다른 문제였어." 그리고 베이나트는 힘없이 웃었다. "비밀 하나 더 말하자면, 지에나와 팔로커스가 달의 잔을 맡을 사람 으로 지목했던 것은 니왈르도만이 아니었다. 그 아이.... 그러니까, 그.....아이 역시 포함되어 있었어. 마법사는 아니었지만, 그 아이 가 가진 다른 능력은 그 달의 잔을 맡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내 가 거부했다. 차라리 니왈르도 앞에서 길 수는 있어도, 그 아이에게 그 일을 맡길 수는 없다고 했지....." 베이나트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래, 믿음과는 전혀 다른 문제였지. 현명한 것과도 전혀 다른 문제 였더구나.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에칼라스에게는 쉽게 맡길 수 있는 것을,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절대 맡길 수 없었던 거야 . 아니, 할 수만 있다면 지에나도, 팔로커스도..... 의회가 그들을 지목하지만 않았다면 나는 그들에게 하지 말라고 했을 거야. 능력 이 없다고 우겨서라도 못하게 했을 거란다..... " 베이나트가 한숨을 내 쉬었다. 아니, 차라리 오열에 가까웠다. "너를 처음 받아 들였을 때 나는 이것이 운명이라고 믿었다. 니왈르 도가 이 세계로 소환되어 와 너의 저주의 원천이 된 것도, 그리고 너와 내가 그렇게 만난 것도, 네가 그렇게나 필사적이지만 강한 것 도 모두 운명이라 생각했고, 이번에야 말로 나는 예전의 실수를 만 회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고통 받는 나와, 내 친구들을 구원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는 점점 더 후회하고만 있었다. 실행의 순간이 점점 더 늦추어 지기를 바라고, 네가 돌아와 조금 더 뒤로 이 일을 미루자고 했을 때 차라 리 기뻤다. 하루라도 더 미룰 핑계가 생겼으니까......." "베이-" "미안하구나, 아키야. 하지만...... 나는, 바보 같은 나는 지금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무서운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곳에서, 아무 것도 모르면서 살았으면 한단다. 그들에게 의무라는 이유로 무언가 를 짊어주고 싶지 않아. 그리고 그 짐이 나에게도 악몽 같은 것이었 다면 더더욱......" 아킨은 팔목을 햇살에 비추어 보았다. 이제 햇살은 투명해지고 있었 다. 아침의 싸늘함이 점점 더 온화하게 녹아들고 있다. "당신에게는.....무엇이 괴로웠나요. 그리 오랜 시간을 살아간다는 것 이?" "너무나 많은 것을 안다는 것이..... 곧 알게 될 테지만, 그것을 네 몸 안에 가지고 있는 이상 감당하기 괴로울 정도로 많은 것을 느끼게 되고 알게 될 것이다. 상대방의 마음을 속속들이 알게 되면, 기쁘 기보다는 차라리 두렵지. 지에나는 마음을 닫아 버렸고, 팔로커스는 미쳐버렸다. 알잖니....." 아킨은 팔목을 내렸다. 팔찌가 달랑이며 손목을 스쳐지나갔다. "그렇다면 어둠 숲으로 가서-" "응?" "저주를 풀어 달라고 하겠어요. 그분이 예전에 약속했지 않습니까..... 언제라도 찾아가면, 언제라도 풀어 주겠다고." 베이나트가 고개를 들었다. 아킨은 그 검은 눈을 보며 웃고는, 팔찌 를 흔들어 보였다. "이것은 상대의 육신을 속박하고, 이 안에 깃든 영혼이 그 몸을 움직 이게 한다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것을 그 역으로 이용해서, 이 안에 깃든 영혼이 가진 힘을 제 스스로의 의지로 쓸 수 있게 만들 수 있습니다. 보름이 되어, 니왈르도의 육신이 나타날 때는 원래의 방법대로 그를 지배할 수 있고요." 다음, 아킨은 허공에 예전에 본 유폐의 진을 그려보였다. 마법의 진 이라, 손이 움직이자 흐릿하게나마 그림이 그려졌다. "이것으로 그 엄청난 힘을 가진 성배가 감추어 질 수 있었고, 당신도 유폐되었지요. 작은 공간에, 그것이 실체를 가진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그 엄청난 힘들을 모두 가둘 수 있었지요. 그렇다면, 저주 가 풀렸을 때 해방될 니왈르도의 육신을..... 그것을 이용해 이 안에 깃들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 유폐의 진은 만질 수 있는 육 신을 가둘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고, 이것은 실체가 없는 것을 가 둘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진으로 니왈르도를 이 안에 가 두고, 그 의지역시 이 안에 가두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제 몸이 아닌, 이 안에 모든 것이 다 담겨지게 되는 거지요." "그렇다면 성배의 힘은....." "성배의 힘을 받아들인 자는, 제가 아니라 니왈르도의 몸 입니다." "응?" "성배는 다른 세계의 물건이에요. 그리고 저는 이 세계에 속한 사람 이고, 니왈르도는 아닙니다. 결국 성배의 힘이 택한 것은 제가 아 니라 니왈르도고, 제가 그에 대한 지배력이 있기에 그의 힘을 쓸 수 있는 겁니다." 아킨이 팔목을 들어 보였다. "저주가 풀린다면, 성배의 힘 역시 고스란히 니왈르도와 함께 빠져 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제가 말씀 드린 것은, 그 모든 것을 이 안에 깃들도록 하는 겁니다." "네가 힘을 쓸 수 없게 되잖니." "제 몸 안에 없고 제 몸으로 직접 쓸 수만 없을 뿐, 그 힘 자체는 얼 마든지 쓸 수는 있습니다. 그것은 이 물건을 가지고 있는 저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할 수 있겠니?" "노력하겠습니다." "아쉽지는 않을까." "저는 분명 약속드렸습니다. 이것은 당신들의 것이고, 당신들을 위해 쓰겠다고. 그러니 당신들을 위해 결정하는 것 역시 당연한 겁 니다......제 일에는 쓰지 않겠어요. 그리고 되도록 당신들이 안심할 수 있는 방법으로 쓰는 것이 좋겠지요." 베이나트는 나른히 한숨을 내 쉬었다. 그러나 방금 전처럼 눈빛이 어 둡지는 않았다. 잠시 뒤 옷 속을 뒤지더니, 은빛 귀걸이 한 쌍을 꺼내어 아킨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은봉인이다. 니왈르도에 대한 네 지배력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 다만, 당분간은 이것을 하고 있어라." 오랜만에 보는 물건이었다. 예전에 이것을 처음 받아들었을 때는 그 토록 필사적이었는데, 이제는 담담하다. 마치 옷을 걸치듯,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런 것을 받는 기분이다. 그 은봉인을 예전의 자리에 채우고 고개를 들었을 때 아킨은 누군가 가 그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아주 가까운 누군가가. 아킨은 새삼 자신의 감각이 엄청나게 확장되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껴 야 했다. 예전에는 보름에 아주 가까워도 어렴풋이 느끼는 정도였는 데, 지금은 눈앞에 있는 듯 느껴지니. "왜 그러는 거지, 아키?" 아킨은 손을 들어 흐릿한 숲을 가리켜보였다. "휘안이.... 오고 있습니다." 자켄이 그쪽을 보았다. 베이나트 역시 그의 시선이 닿지 않는 숲을 보았다. "그와 만나서 대체 무엇을 할 생각이니, 아키." "그에게 말했던 대로, 저는 그를 지배할 겁니다. 그 두려움 앞에 그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그의 소관이지만." 그렇게 말하고는 아킨은 잔잔한 정원의 못을 바라보았다. 그 안은 아 직 검었지만, 아킨은 보고 싶은 것을 그것을 통해 불러내지 않아도 휘안토스에 대해 훤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킨은 눈을 감았다. 처음 성배와 접촉했을 그러했듯, 눈을 감자 다 른 눈을 뜬 듯이 완전히 새로운 것이 보였다. 이른 봄의 숲이 보인다. 진한 붉은 색 망토를 입고 숲 안으로 말을 모는 기사들과, 그런 그들을 뒤따르며 망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루첼도 보였다. 시선이 앞을 향하자, 좁은 오솔길이 굽이굽이 흐르 는 숲이 보였다...... 아킨은 일어났다. 자켄이 불안한 눈으로 그를 보았지만 아킨은 고개 를 저었다. "가 볼게." "계속 간다." 휘안토스는 잠시 스쳐지나갔던, 누군가가 그를 샅샅이 지켜보는 듯한 오싹한 느낌을 애써 지우며 잠시 멈추었던 말을 다시 몰았다. 그러자 기사들 모두 다시 그를 따르기 시작했다. 제국 내에서 가장 현실적인 사람들의 고장은 단연 롯사나 반도의 암 롯사였다. 마법도, 드래곤의 축복도 아닌 말 그대로 자국의 기사들과 함께 '인 간만의 힘'으로 커크 대제를 도운 테루비셔스의 후손인 만큼, 그들은 지독히 현실적이었다. 황제를 존경해서도, 위대한 이상에 감복해서 도 아니었다. 반도 아래에 도사리는 툴칸을 막기 위해 통일된 힘의 필요성을 느낀 테루비셔스가 쿼크 대제에 협조한 것뿐이다. 그런 이들에게, 경계의 숲에 얽힌 끝없는 전설은 별로 현실성을 가지지 못한다. 그 숲에서 가장 먼 남쪽 끝에 있기도 하기에 그 존재가 ' 현실감'을 가지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휘안토스의 명령 하나에 다시 숲 속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신경 쓰는 것은 단 하나 남부에 비해 지나치게 춥다는 것 정도였다. 그리고 그 중에 휘안토스는 서두르지도, 재촉하지도 않으며 그의 기사들을 이끌어 숲 깊은 곳을 통과해 나갔다. 마침내 해가 기울 무렵에 '평범한' 숲이 끝나갔다. 숲 끄트머리, 아직 앙상한 가지 속으로 햇살이 깊고 길게 스며들어갔다. 그림자는 길어지고, 숲은 노랗게 물들어 갔다. "밤에는 돌아다니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들이 경계, '이상한 숲'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나름대로 노력했던 루첼이 그렇게 말하자 휘안토스도 쉽게 수긍했다. 그는 무모하지 않았고, 성급하지도 않았다. 그보다 조금이라도 더 잘 아는 사람의 충고를 고집 으로 무시하지 않을 정도로 현명했다. "해가 저무는 즉시 멈추고 쉰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휘안토스의 눈은 북을 향하고 있었다. 루첼은 그가 행동과는 달리 '초조해' 한다는 것을 눈치 챘다. 햇살이 좀 더 길어지다가, 불그스레하고 노랗던 빛 웅덩이들이 차츰 창 백해졌다. 해가 저문 것이다. 휘안토스가 가장 먼저 말에서 내렸다. 기사들 모두 말에서 내려, 각 나무 둥치에 말들을 묶고 야영 준비를 시작했다. 휘안토스는 하늘을 보았지만, 그저 조금 뚫린 구멍 같은 하늘로는 황금빛 하늘만이 우물처럼 보일 뿐 이었다. 휘안토스는 망토를 여미고는 루첼에게 물었다. "오늘 어떤 달이 뜨지?" "그건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보름은 가까울 겁니다." 휘안토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무 둥치에 앉았다. 그를 지켜보던 악튤 런이 고개를 휙 돌리고는 숲 안쪽으로 가더니, 일행과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루첼은 경계의 숲이 아직 조금 남은 것을 어림하고는, 종자 하나가 모아 장작을 쌓아 놓은 더미에 불을 붙였다. 마법의 불이라, 그 불은 아주 환하고 따뜻하게 주변을 밝혔다. 휘안토스는 다시 북쪽을 바라보았지만 그곳의 숲은 이제 어둠에 완전히 물들어 시커먼 동굴처럼 변해 있었다. 어둠이 깔리며 공기도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기사들의 숨소리를 따라 성에가 뿌옇게 어리다가는 사라진다. 루첼은 주변을 돌아다니며 둥글게 원을 치고는 여기 저기 몇 자 적어 놓았다. 그러자 그 원안에 있는 기사들은 차츰 온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성에 가 옅어지더니 마침내 아예 없어지고, 그들이 있는 곳은 난로가 피워 진 방보다 따스해졌다. 그들은 루첼에게 감사하고 몸을 눕히고 편히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모닥불을 피워둘 필요는 없었지만, 만일을 대비해 루첼은 그 불이 아침까지 활활 타도록 조치해 두었다. 이제 일행이 있는 공터는 모두 잠들자 착한 아이의 방처럼 고요해졌다. 그러나 그렇게 모두가 잠들어도 휘안토스는 잠들지 못했다. 불침번 서는 기사는 왕자가 일어나 있자 잘 보이려는 의도가 훤히 보이는 안부를 건 네고는 돌아갔다. 휘안토스는 오늘 자신이 잠들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오늘은 보름이다, 만월이 빛을 퍼뜨리는 그 보름의 날인 것이다. 차라리 루첼 에게 잠들게 해 달라 청할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저, 떠오르는 달에 푸릇하게 밝아오는 하늘을 바라보며 앉아 있기만 했다. 춥지 않은 데 오싹오싹하다. 문득 어머니의 품이 그리워진다. 아버지까지 그리울 지경이다.... 감상적이군, 휘안토스는 스스로를 그렇게 비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역시나 잠들지 않고 있던 루첼에게 갔다. "그란셔스." 그가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던 루첼은, 이름이 불리자 눈을 뜨고 몸을 일 으켰다. "부탁 하실 거라도 있습니까." "지금 나와 경계의 숲으로 가자." 루첼은 경악했다. "낮에 가십시오. 보통 숲이라도 밤이 되면 위험합니다." "위험해 지면 네가 나를 지켜라." "제정신이십니까! 위험을 자청하시고, 수하까지 위험으로 끌고 들어가라는 건 대체 누구 가르침입니까." "다른 수하였다면 나는 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지금 나는 바로 너, 죽음을 약속한 너에게 명령하는 거다." "거부한다면?" "네 아내와 아들." 루첼은 속으로 욕을 퍼부어 대며 일어났다. "왜 그렇게 위험한 곳을 못 들어가서 안달입니까. 또, 다른 누구도 아닌 아키의 일에 그다지도 신경 쓰는 겁니까." "네가 알 거 없어." 휘안토스는 그리 말하고는 앞장섰다. 루첼은 가볍게 욕을 내 뱉고는 그의 뒤를 따랐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휘안토스 자신도 왜 이렇게 끌리듯 경계의 숲, 가장 위험한 땅으로 자청해서 들어가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주체할 수 없는 강렬한 본능 같은 것이 오라고, 오라고, 당장 오라고 그에게 명령하고 있었다. 마침내 휘안토스는 경계의 숲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금방 구분이 갔다. 거뭇하게 죽어있던 회색 흙바닥이 대리석 가루인 듯 하얗게 변해가고, 컴컴했던 숲이 달로 빚은 듯 빛나기 시작했으니. 소나무의 검 녹색 이파리들도 은빛으로 변했고, 바닥의 이끼들마저도 눈 덮인 듯 하얗기만 했다. 루첼은 어제와 분명히 달라진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 아주 많이 달라졌다. 어제만 해도, 루첼은 수 십 마리는 되는 이상한 마물들과 마주쳤고, 그 때마다 싸우는 대신 짧은 공간 이동으로 앞으로 나갔다. 마나 소비가 극심하기는 했지 만, 롤레인이 무언가와 마주치면 절대 싸우지 말고 도망치라 했었으니 별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 것도 없다. 울창하던 숲의 나무들은 절반 이상 줄어 있어, 건너편이 훤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곳곳에 빈터가 보이고, 그곳은 그저 맨 땅일 뿐이다. 그러나 적어도 어제 새벽처럼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은 아니었다. 그렇다. 숲은 어제 한번 사라졌고, 지금 다시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오늘 밤 '단 하루'라면, 루첼은 안전할 것이다. 휘안토스가 말을 멈추더니 찬탄어린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무엇인가 해 서 루첼도 하늘을 보았고, 그는 휘안토스와는 달리 탄성을 질렀다. 푸른 하늘이 아니었다. 검은 하늘도 아니었다. 하늘에서, 눈부신 빛의 장막이 흐르고 있었다. 자주 빛, 푸른빛, 황금빛, 노란 빛, 붉은 빛.... 수많은 색으로 된 물결이, 눈부시게 펼쳐지고 있었다. 그 너머로 별들이 수놓인 듯 반짝거리고, 구름은 같은 빛을 머금고 보석처럼 빛난다. 다시는 잊지 못할 것 같았다. 너무나 눈물나게 아름다워서, 너무나 눈부셔서, 루 첼은 잠시 자신이 어디에 있는 지조차 잊어야 했다. 휘안토스가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루첼 역시 내렸다가, 숲이 또 달라진 것을 발견했다. 나무들이 훨씬 더 많이 늘어나 있었고, 공터는 그만큼 줄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어디로 향하고 있는 지 잘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불확실했다. 아니, 돌아가는 방향이나 제대로 잡을 수 있을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휘안토스는 말고삐를 루첼에게 집어던졌다. 루첼은 정말 얼결에 그것을 잡았다. "이제부터 걸어간다." "일이 있다면 되도록 빨리 해야 합니다. 숲이....점점 빨리 되살아나고 있습니 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밀물 때 개펄에 어정거리다가 휩쓸리는 조개 잡이 신세 가 될 겁니다." 그러나 그 말에 휘안토스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하얀 바닥을 밟고 눈부신 빛의 소용돌이가 쏟아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앞으로 가기 시작했다. 루첼은 말의 고삐를 잘 잡고 그를 따라가려 했다. 그런데 휘안토스가 숲 속으로 사라졌다. 루첼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무들의 배치가 확실히 달라지고 있었고, 바로 옆에 있는 나무들조차 바뀌고 있었다. "맙소사...!" 루첼은 자기도 모르게 말 고삐를 당기며 앞으로 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나무가 휙하니 나타나 루첼을 가로 막았다. 루첼은 뒤돌아섰고, 그와 휘안토스가 지나온 길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엄청난 곳에 들어와 버린 것이다. 드디어 늦은 잠에서 깨어나, 그가 잠들었던 틈에 들어온 침입자들을 쏘아보는 그런 무서운 숲에. ************************************************************************** 작가잡설: 루첼, 역시 그대는 제2의 라닌~ 개 고생~~~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63장 ************************************************************** [겨울성의 열쇠] 제300편 마지막 주인#3 *************************************************************** 휘안토스가 숲에 들어온 것을 알게 되자, 아킨은 숲을 헤치며 더욱 깊이 들어갔다. 온 몸의 감각이 예민해지며, 바로 그가 휘안토스인 듯 그의 시야로 보고 그의 귀로 듣고 그의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지에나가 지난 밤에 악튤런이 파괴했던 숲의 마법을 되돌리고 있다 는 것 역시 깨달았다. 나무들이 되살아나고, 그 나무들안에 깃든 마법역시 꿈에서 깨어나듯 되살아나고 있었다. 지에나의 하인들이 잠시의 휴식을 마치고 다시 숲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아킨은 눈을 크게 떴고, 그런 그의 눈은 다시 휘안토스가 바라보는 것을 보고 있었다. 휘안토스역시 숲이 변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으나 전혀 개의치 않고 있었다. 앞으로 앞으로, 목마른 자가 우물을 찾듯이 가고 있 었다. 와, 오라고! 아킨은 마음속으로 외쳤다. 더 깊이 들어와. 휘안토스가 놀라는 것이 느껴진다. 경악하고 전율하지만 겉으로는 아무것도 내비치지 않으며 앞으로 나 가려 하는 것이 느껴진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숲은 오래된 뼈처럼 하얗기만 하다. 여기저 기서 바스락 바스락 소리가 들리더니, 회색 나무 둥치와 은빛 잎들 사이에서 빨간 눈을 반짝거리는 것들이 기어 나왔다. 가장 낮으나 가장 예민한 것들 부터 깨어난 것이다. 그들은 휘안토스를 보자마 자 이를 드러냈다. 아니, 이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꺼내어 놓는 것만 같았다. 머리들은 자그마했는데, 이들은 사자이보다 더 컸으니. 휘안토스는 검을 뽑아 그 머리를 잘라 버렸다. 그러자 똑같이 생긴 것들이 기어 나와 휘안토스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휘안토스는 또 하나를 갈라 버렸다. 목과 몸은 돌멩이처럼 툭툭 떨어져 바닥 을 굴렀다. 다시 또 다른 것이 공격해 왔다. 휘안토스는 그것의 몸 도 갈라 버렸다. 부우우우우우-- 거대한 벌 떼가 몰려드는 듯한 소리가 들리며, 숲 곳곳에 숨어 있던 그 작지만 사납고 흉악해 보 이는 것들이 기어 나와 휘안토스에게 몰려들었다. 캬앙- 크헝--! 쇠와 쇠를 맞물리는 듯 기분 나쁜 비명이 터졌다. 그러나 휘안토스는 단 한번도 당황하지 않고, 그 모든 것을 베어버렸다. 팔이 뻐근할 정도로 베고, 찌르고, 걷어찼다. 처음 보는 것들이지만, 마치 아주 익숙한 것들을 다루는 듯 그렇게. 어깨를 물렸고, 창처럼 뾰족한 것이 허리를 꿰뚫었다. 손등이 베어져 나가고, 허벅지와 가슴에서 피가 튀었다. 사방에 꽥꽥대는 비명과 위협하는 듯 쌔액 쌔액거리는 소리에 귀가 멀 것만 같았다. 핏방울처럼 붉은 눈이 번쩍 이는가 싶더니, 어깨가 화끈하며 피가 확 솟구쳐 올랐다. 휘안토스 는 칼을 휘둘러 그것의 머리를 꿰뚫어 버리고는, 칼을 뽑아 등을 찌르려는 것을 베어버렸다. 그리고 목덜미를 물려고 달려드는 것의 목을 잘라 버리고, 가슴 쪽으로 달려드는 것을 위 아래로 그어 반 동강이 내어 버렸다. 검은 피가 쏟아지며 역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검에 잘라진 모든 것들이 검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팔을 물어뜯으려는 것을 잘라 내자, 그제야 휘안토스는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동시에, 아킨 역시 같은 것을 볼 수 있었다. 검은 그림자가 구름처럼 몰려와 주변에 가득했다. 사방에 붉은 눈 푸 른 눈이 빽빽하게 차서는 번쩍이고 있었고, 육중한 것이 움직이는 소리가 그 어둠 속에서 음산하게 들려왔다. 휘안토스는 그들을 향해 검을 들었다. 무엇이 나오든 상관없었고, 무엇이더라도 그를 막을 수는 없었다. 피투성이였고, 허리와 가슴은 살점이 깊이 드러날 정 도로 상처를 입었지만, 그는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발걸 음을 뗄 때마다 피가 얼룩졌지만 한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눈앞은 원래 흰빛인지 눈이 흐려져서 흰 빛인지 모를 정도로 뿌옇다. 저러다 죽겠어, 아킨은 그리 생각하며 숲을 달래기 시작했다. 잠시 기다려.....내 명령을 들어. 지난밤에는 할 수 없었지만, 지금 아킨은 숲을 다스릴 수 있었다. 베 이나트가 숲을 움직일 수 있듯이, 팔로커스가 아무렇지도 않게 숲을 파괴해도 그 누구도 그를 해하지 않듯이, 아킨 역시 속삭이며 그들 을 제어할 수 있을 듯 했다. "그만해." 순간에 그것들은 멈칫 멈추었다. 숲을 지키는 나무들이 고요해지며 아킨에게 복종하기 시작했다. 그 나무와 함께 깃든 하인들 역시 아 킨의 말에 복종하여 하나하나 사라지기 시작했다. 눈동자가 꺼지고 숨소리가 사라졌다. 맨 뒤에 있는 거대한 그림자가 스며들 듯 사라지고, 가까이 있는 작은 그림자들도 땅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어 두웠던 숲 깊은 곳이 차츰 밝아지기 시작하며, 그 하얀 나무둥치들 이 하나하나 다시 드러나기 시작했다. 사방은 지독하게 고요해졌고, 들리는 것은 휘안토스의 거친 숨소리뿐이었다. 와- 아킨은 다시 말했다. 휘안토스는 몸을 끌어 아직 보이지 않는 아킨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 했다. 그렇게 걷고 걷다가, 휘안토스는 마침내 나무가 둥글게 둘러싼 공터에 도착했다. 드디어 아킨 역시 그를 직접 볼 수 있게 되었다. 마주치는 순간에 휘 안토스의 시야가 획 꺼지며, 아킨은 아킨 자신으로 완벽하게 돌아 왔다. "오랜만이네." 아킨의 말에 휘안토스가 웃었다. 언제나 차가운 인형같기만 하던 그 미소가, 지금은 어딘가 비틀려 있었다. 아주 잠깐 씩 서로를 느낀 적은 있었다. 보름이 가까워질수록, 둘은 서로에 대해 같은 사람이 되어가는 듯 민감하게 느껴갔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생생한 꿈과 환상 같은 것일 뿐이었다. 꿈은 꿈이고 환상은 환상이기에, 현실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그저 다 음날 아침의 언짢음 만을 남길 뿐이다. 그러나 지금은 악몽이 현실이 된 것이다. 손에 잡히고 볼에 닿는 그 런 단단한 몸을 가지고 현실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휘안토스가 말했다. "나는 마법에 대해 잘 모른다. 하지만, 오는 길에 마스터 악튤런이 성 배에 대해 말하더군......그래, 성배란 물건이 대체 뭐길래 온 제국이 이렇게 뒤집어 지는 걸까?" 아킨은 휘안토스의 발아래에 피가 얼룩지는 것을 보았다. 휘안토스가 내뿜는 숨이 하얗게 얼어붙어 주변에 어리고 있었고, 그런 그의 입 술은 창백했다. "우주가 갈라져 담긴 물건..... 아니, 설명하려면 복잡해. 하지만 그것 은 어쨌건 받아들일 수 있는 자에게 힘을 주지. 그리고 바닥의 바 닥에 가라앉았던 본능도 스스로 쓸 수 있게 만들어 주더군. 예를 들 면 형과 나 사이의 교감 같은 것도." "이제는 네 것이 된 거냐." 그리고 그렇게 말하며 바라보는 휘안토스의 눈동자에서 아킨은 여태 자신이 알고 느끼던 형과 전혀 다른 자를 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무엇이 다른 가 살펴보다가, 금방 그 차이를 알게 되었다. "네가 나를 오게 한 거냐." "내가 형에게 명령했지. 오라고. 앞에 어떤 끔찍한 것이 있든, 심지어 죽음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아도 오게 했어. 지금의 나는 방금 전처럼 형을 내 뜻에 따라 움직이게도 할 수 있고, 그러면서도 그것 이 내 의지가 아닌 형의 의지인 듯 행동하게 할 수도 있어." 휘안토스가 느끼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찬물이 빠져나가는 듯한, 그 런 공포가 아킨에게도 느껴졌고, 그런 자신을 향한 그의 분노 역시 느껴진다. 아킨이 말했다. "불쾌해 할 거 없어." "내 목과 팔과 발에 줄이 감겨 네 손안에 쥐어져 있는데 겨우 불쾌한 정도로 끝날 거라고 생각해?" "두려워?" "설마. 하지만 정말 싫은 건 사실이다." 아킨은 두 손을 들어 보였다. "형을 해칠 일은 없을 거야." "네가? 과연 네가 그럴 수 있겠어? 내가 너를 몇 번이나 죽이려 했는 데도?" "형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것이 있을 수도 있고, 형이 당연하다고 믿 는 것과 다른 것이 있을 수 있어. 그런 건 그냥 받아 들여. 나는 형을 해칠 생각 같은 건 없어." "너는 바로 뒤에 칼을 들고 있는 자를 두고도, 그러고도 그 사람이 그럴 생각이 없다는 말 한마디에 믿고 돌아설 수 있나." "믿으라고 말한다면." "너와 나 사이에는 그 어떤 신용도 없어. 만들 생각도 없고. 우리가 서로 공존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은 바로 너다.......그리고 지배할 수 없으면 죽이는 것이 나의 법칙이고, 암롯사의 법칙이야." "그리고 상대 역시, 지배당하지 않으려면 죽여야겠지. 설마, 내가 그 러기를 바라는 거야, 휘안?" 아킨은 휘안토스를 바라보았다. 세상이 작아진 듯 느껴지듯, 지금의 휘안토스 역시 예전과는 전혀 다 르게 느껴진다. 지나치게 환한 빛 속에서는 오히려 잘 보이지 않는, 그런 작은 흠들을 한꺼번에 확인하게 되는 듯한 그런 느낌이다. 아킨은 휘안토스에게 다가갔다. 피비린내가 훨씬 더 진하게 풍겨왔다. "하지만 나는 형이 죽는 건 바라지 않아. 형이 가진 그 무엇도 바라 지 않고, 그 안에는 형의 목숨도 포함돼. 내게는 아무런 가치도 없어.....나는 암롯사를 원하지 않고, 형이 받는 사랑과 믿음 역시 바라지 않아. 그건 형의 것이지 나의 것이 아니고, 형이 이미 가졌 으니 내가 가질 수도 없어. 내게도 내게 소중한 것들이 있고, 그건 형에게 전혀 소중하지 않지. 나는 그것들로 충분해." "그럼 네가 지금 바라는 건 대체 뭐지? 대체 무엇 때문에 사는 거 냐." "형이 가질 수 없는 것들. 형이 볼 수 없는 것들, 형이 느낄 수 없는 것들, 그것이 내가 원하는 세계 안에 있어. 이건 형과 다르게 살고 싶어서도, 형에게서 도망치고 싶어서도 아니야. 형이 내 모든 것 이 아니라는 것이 달라졌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거야." 휘안토스의 검이 뽑혀져 나갔다. 아킨이 눈을 찌푸렸다. "휘안-" "네가 내게 원하는 것은 뭐지? 진짜 원하는 것은 뭐냐." "형을 통제할 수 있는 거지.... 내 소중한 사람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내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가지 못하도록, 내 운명과 내 시간들을 헤 집어 좋지 못하도록." "그리고 그녀도 내 것으로 할 수 없게 되겠구나. 안 그래? 너도 원하 니까." '그녀'라는 말이 아킨은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 안에 담긴 갈망이 분 명 느껴진다. 그것이 아킨에게는 너무나 이상하게, 휘안토스의 안에 있기에는 지나치게 뜨겁다는 생각에 너무나 이상하게 느껴졌다. 휘안토스가 다가왔다. "그리고..... 그것 자체도 네 의지로, 네 뜻대로, 이 내가 원하는 것을 네가 원하는 대로 바꾸겠다는 거냐. 그래, 네가 나를 지배하게 되는 순간에, 나는 영원히 그녀를 가지지 못하게 되겠구나." 순간, 짧은 찰나에 그 검이 희게 번득이더니 아킨의 가슴을 푹 꿰뚫 었다. "!" 뚝, 뚜둑-- 핏방울이 하얀 바닥 위에 튀었다. 그리고 더욱 더 거세게 뚝뚝 떨어 지며 마침내 흥건히 고이기 시작하더니 아래로 흘러내려갔다. 비탈을 따라, 굴곡을 따라, 그 곡선은 구불구불 불규칙하게 고이고 흐르 고 스며들어 사라졌다. "내 속속들이 알고 있으면서, 이건 예상하지 못했나." "생각하고 한 게 아니잖아." 휘안토스의 손목이 뒤틀렸고, 상처가 벌어지며 피는 더 거세게 쏟아 졌다. 지독하게 아팠다. "나를 통제할 수 있다고? 그래, 이제부터는 내가 원하는 것마저도 네 가 정해주겠다는 거냐!" "정말 두려운 거로군." "내가 왜!" "언제나.......형은, 아버지가 만들어 준 유리 같은 세상에서 살고 싶어 했지.... 깨어지지 않도록, 더럽혀지지 않도록, 그렇게.........그것이 흔들리니 무서운 거지.......안 그래?" "나는 그렇게 어리지 않아." "아니.....아버지는....언제나.......형을 그렇게 키웠고.....형은 언제나 그 안에서, 그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만 살았어........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 그러기 위해 해야 할 것, 그러기 위해 파괴해야 하는 것..... 언제나....언제나 그것만 생각했지....." "......나는 어머니가 아니야." "하지만......닮았어.......너무나." 휘안토스는 검을 더 깊이 찔러 넣었다. 신음이 터지고, 아킨의 피는 이제 휘안토스의 발목까지 적셨다. 그런데, 그렇게 찔러 넣으면서도 휘안토스는 오히려 자신이 죽어가는 듯한 소름끼치는 공포를 느꼈다. 그 피가 자신의 피 같고, 흐려지는 숨소리가 자신의 숨소리 같았고, 그러면서 오히려 자신의 몸이 무거워 지는 것만 같았다. 당장에 검을 뽑아야 한다는 압박과 공포가 몸을 엄습해왔다. 마치 자신의 가슴 에 박힌 검을 뽑듯이, 그리하여 그의 목덜미를 움켜쥐려는 이 죽음 의 공포를 떨쳐내야 하는 듯이. 악령같은 것이 차갑게 끈적거리는 손바닥으로 휘안토스의 팔을 움켜잡으며, 그러며 당장에 검을 뽑으 라고 그러지 않으면 네가 죽는 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끔찍했다. 무섭다. "이제....알 것 같아.... 형은......어린 아이야. 영원히 어린 아이 ..... 천사처럼 순수하고...... 가엾은-" "....." "가엾은 형......." 휘안토스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느껴졌다. 복잡하고 복잡한 것, 그것 은 슬픔도, 분노도, 증오도, 그 무엇도 아닌 것이었다. "사라져 버려....! 당장." 그 무거운 짐, 어깨를 내리 누르는 어둡고 묵직한 것을 떨쳐 버리기 위해 휘안토스는 그렇게 말했다. 아킨은 그의 공포를 속속들이 느낄 수 있었다. 검어, 너무나 검다- 그 느낌 이 아킨의 머릿속마저도 지배하고 있었다. 그 떨림과 경악이 모조리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망령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야지. 너는 그저 나의 악몽일 뿐이다. 깨어나면, 그렇게 내가 내 세계로 돌아가면 나는 또 내가 하는 대로, 내가 살아 왔던 대로 살 것이다. 네가 무어라 비난하든, 무어라 비웃든, 그리고 어떻게 동정하든.... 그건 그냥 꿈일 뿐이야. 그리고 깨어나면, 어제와 똑같은 세 상이 펼쳐질 뿐이지." "무엇이......꿈일까......" "너. 네가 바로 악몽이자, 악령이다. 해가 뜨면 사라질 그런 검고 어두운 것." 아킨은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큭- 웃었다. "하지만.....악몽과 악령은.......달의 아들이지." 툭. 아주 작은 것이 떨어졌다. 그리고 바닥으로 굴러, 피 웅덩이 속으로 빠졌다. 휘안토스는 손에 힘을 주며 검을 뽑아냈다. 피가 붉고 붉게 쏟아졌다. "말 했지. 나는 형을 지배할 수 있다고.... 이런 내게 형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그저 내 앞에 복종하는 것 밖에는." "용납하지 않는다." "상관없어. 그것을 정하는 건 나니까."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온 몸의 피가 뜨겁게 휘몰아치며,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라 터지는 듯한 느낌. 그러나 그것은 예전 같은 고통이 아닌, 억눌렸던 것을 토해내는 듯한 희열이었다. ********************************************************************* 작가잡설: ................... 후우.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63장 ***************************************************************** [겨울성의 열쇠] 제301편 마지막 주인#4 ***************************************************************** 휘안토스는 이를 악물고 검을 당겼다. 동생의 '다른 모습'을 본 것은 십년도 더 전의 일이었다. 돌감옥의 육 중한 쇠사슬에 묶여 울부짖어 대는 그 은빛 괴물 덩어리를 본 것은. 아이에게 그것은 지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두려운 괴물이었다. 만월의 빛에 젖어, 육중한 쇠사슬을 질질 끌며 낡은 옷자락을 펄럭이는 두 렵지만 달콤한 꿈 같은 것이었다. 활활 타는 금빛 눈동자에,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 달려들어서는 쇠사슬에 걸려 내동댕이쳐지고, 그러 며 다시 으르렁거린다. 포효하고, 그 포효에 온 돌감옥이 울리고, 달빛이 사르르 떤다. 그러나 휘안토스는 도망치지 않았다. 감옥 틈새로 지켜보았다. 그 괴 물이 킁킁대다가 어린 아이의 냄새를 맡고는 이를 확 드러내도, 갈 망과 탐욕과 분노에 차 포효해도, 그래도 휘안토스는 감옥에 눈을 바 짝 들이대고는 그 모습을 보았다. 두렵지 않았다. 저것은 동생이고, 내가 다스릴 수 있는 강한 괴물이 다. 그리고 나는 더 강하다. 다스릴 수 있어, 나의 것이야. 내 동생이고, 내 종이고, 나의 검이야. 그러니 두려워 할 필요가 없어. 이제, 휘안토스는 그 때보다 몇 배로 더 거대해진 늑대를 보았다. 변신과 함께 상처는 말끔히 사라져 그 털에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파르란 달빛에 빛나고, 그 빛이 스며든 어둠에 잠겨서, 그러며 그 거 대한 괴물은 휘안토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빛은 차분했다. 광기도, 분노도, 탐욕도 없이, 신처럼 차 분하고 무관심하게 휘안토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휘안토스는 검을 들었다. 광휘가 그 검신을 타고 흘렀다. "피하지 않겠어." 늑대가 이를 드러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누가 악몽이 되어 끝날지 정해야 하니까........! 네 가 나를 지배할 수 있다고? 한번 지금 당장 해 보라고!" 늑대의 귀가 누웠다. 콧잔등이 일그러지며, 으르르릉-- 적대감 어린 소리가 흘러나왔다. "네가 나를 지배하면, 네가 가장 먼저 무엇을 할지 알아." 그들이 같은 것을 본 그날부터, 휘안토스는 서로가 같은 것을 원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자신도 제대로 모를 정도로, 그 은밀한 것은 소리 없이 영혼을 파고들어와 자리를 잡아 버렸다. '필요'는 언제나 가장 공식적인, 스스로를 안도케 하기 위한 핑계였을 뿐이다. 모든 것은, 그 만월이 둘을 미치게 하는 순간에 나타난 밤의 유혹으 로 시작되어 버렸다. 그것이 모든 것을 예전과는 다르게 돌려놓았고,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게 했다. 그녀, 달빛과 어둠을 헤치고 그녀가 나타난 순간에 모든 것은 달라져 버렸다. 어둠 속에 그 푸른 눈동자가 나타난 순간부터 휘안토스는 보름을 찾 기 시작했다. 아킨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를 보고, 그녀를 느끼고, 그녀를 얻기 위해 그 먼 에크롯사로 갔다. 범했던 이유조차, 그저 가지고 싶어서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의 승자였지만, 빼앗을 때마다 잃는 것은 휘안토스였 고, 패하는 것도 휘안토스였고, 남겨지는 것은 언제나 그였을 뿐이다.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그것이다. 매일 밤 안아도, 그녀는 그의 것은 아니었다. 겁먹고 움츠리고 울음을 삼키는 그녀를 짓밟고 가졌지만, 유제니아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 안에 있을 때조차, 심장이 느껴질 정도로 꽉 끌어안고 있을 때조차. 그리고 새벽 푸른빛이 퍼질 때 눈을 뜨면 휘안토스는 철저하게 혼자였다. 철저하게 외롭고 고독했다. 움켜쥐려 하면 할수록 부서지 고, 짓밟으면 밟을수록 흐릿해져 버리고, 마침내 아무것도 남지 않 게 되어 버려서, 그는 언제나 혼자가 되어 외롭게 남아 있었다. 그랬기에 언제나 생각하는 것은, 그녀를 잃어도 상관없을 듯한 이유 뿐이다. 마음대로 하라는 듯 무관심하게 고개를 돌려도, 가슴 속에는 갈망이 자리를 틀어잡고 앉아 더 달라고 더 채워 넣으라고 울부짖 고 있었다. 가지고 싶었다. 너무나 가지고 싶었다. 그런데, 아무리 발버둥쳐도 가지지 못했다. 도망치면 낚아채고, 다시 도망친 그녀를 낚아챘건만 그녀는 이제는 증오에서마저도 도망쳐 버렸다. 아직 한줌도 가지지 못했다. 그런데 그런 내게서, 아직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내게서, 그 이유마저 도 영원히 빼앗아 가겠다는 거냐, 아키. "아무 것도 허락할 수 없어, 아키." 늑대의 눈은 오히려 차분히 가라앉았고, 너무나 냉정해 진다. 휘안토 스의 목숨도, 그에 대한 승리도, 아무것도 갈망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지금의 그는 휘안토스에 대한 그 어떤 공격의사도 없어 보였다. 기다리던 휘안토스는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의 '도전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휘안토스 자신이었다. 도전하는 자는, 원하는 것이 있기에 도전하는 것이다. 도전 받는 자는 무언 가를 가지고 있기에 도전받으며 먼저 공격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지금, 이 동생은 휘안토스 위에서, 휘안토스를 넘어서, 휘안토스보다 강 한 위치에서 그를 보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 차분한 눈을 똑바로 보 며, 자신이 깨닫게 된 그 진실을 그가 모두 알고 있다는 것 역시 깨달았다. 지독한 기분이었다. 나는 너를 몰라. 네가 무엇을 생각하는 지, 네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지, 네가 무엇을 원하는 지 아무것도 몰라. 그런데 너는, 그런데 너는....나를 샅샅이 훑어보고 있구나. 그러니 앞에 있는 아킨을 죽이지 않는 한, 그러지 않는 한 끝이다. 납 득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 안심하고 잠들 수 있다. 또한, 가슴 속의 이 갈망 역시 그 누구도 들여다 보거나 손대 게 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 어떤 이유에서든 양보할 수 없는 것이니까. 달이 그들을 지켜보았다. 숲이 고개를 숙이고 그들을 감싸고 있었다. 검이 치위지지 않자, 이 거대한 늑대는 짐승이 늘 그러하듯 이를 드러내며 휘안토스를 협박했다. 잇몸이 달빛에 검게 드러난다. 송곳니 가 검보다 더 하얗게 번뜩였고, 그 금빛 눈동자에서는 안광이 튀어 올랐다. 일어선 잔등 털 속으로 달빛이 스며들어 칼날처럼 보인다. 두터운 어깨와 튼튼한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 힘줄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릉- 그것이 다시 으르렁거렸다. 숨이 터지며, 아직 차가운 밤공기 탓에 부 옇게 성에가 어렸다. 휘안토스는 검을 찔러 넣었다. 늑대는 몸을 비틀었고, 그 빠른 짐승의 움직임에 검날이 빗나갔다. 검이 허공을 찌르자, 휘안토스는 발을 당기고 허리를 틀며 검을 베어 넣었다. 그러자 늑대가 검을 물었다. 휘안토스는 뽑으려 해 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늑대가 머리 를 휘두르자, 그대로 검이 휘안토스의 손을 떠나 바닥에 내동댕이쳐 졌다. 검은 멀리 나가 떨어졌고, 휘안토스는 맨 몸으로 거대한 짐 승과 맞서야 했다. 휘안토스는 어깨를 숙였다. 그 짧은 순간에, 늑대가 몸을 퉁겼다. 휘 안토스는 반대 방향으로 몸을 날려, 바닥을 박차고 뛰어 그의 검을 다시 움켜잡았다. 그르렁--! 온 숲이 떨리게 늑대가 울부짖었다. 휘안토스의 손에 다시 검이 들리자, 그것은 바닥을 차고는 달려들었다. 입이 벌어진다. 거 대한 이가 번득이고, 컴컴한 목구멍이 드러난다. "--!" 휘안토스는 힘껏 그 목을 찔렀다. 가죽이 뚫리고, 부드러운 살이 검을 빨아들였다. 그리고 그 검 끝이 늑대의 반대편 목을 뚫고 나왔다. 휘안토스는 힘을 주었다. 엄청난 저항이 검에 밀려들었지만, 힘껏 밖으로 그 목을 베어냈다. 늑대의 몸이 무거워지며 휘안토스 쪽으로 쏟아졌다. 엄청난 피가 쏟아졌다. 피비린내가 물씬 풍겨 올라오고, 거친 숨소리는 더욱 뜨겁게 휘안토스를 덮쳤다. 그리고 그 이가 휘안토스의 어깨를 으스러뜨릴 듯 물었다. 어깨뼈가 으스러지고, 갈비뼈가 부러지고, 폐와 살이 뚫렸다. 피가 뿜어져 오르고, 순간에 세상이 뒤집힌 듯한 고통이 쏟아져 들어와 몸을 갈가리 찢어 놓았다. 모든 것이 끝난 듯한 허탈감이 밀려들어오며, 몸은 무거워졌다. 그러 나, 그럼에도 휘안토스는 검을 놓지 않았다. 힘주어 당겼고, 마침내 검은 모든 압박을 헤치고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어깨를 꽉 물 고 있던 늑대의 턱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피가 솟구쳐 달을 가렸다. 뜨거운 피비린내가 풍겨온다. 턱과 가슴에도 피가 튀어 흘렀다. 눈앞의, 산이 쌓인 듯 하얗고 거대한 늑대의 꺼져가는 듯한 금빛 눈 이 휘안토스를 향하고 있었다. 허억-허억- 거친 숨소리는 점점 더 희미해져만 간다. 휘안토스는 흐린 눈으로 검을 들었다. 어깨는 무거웠고, 팔은 묵직했 지만, 검은 물밑 바닥까지 가라앉을 듯 무거웠지만, 그래도 검을 들 었다. 순간에, 늑대의 흐린 눈 위로 어둡게 흔들리는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휘안토스는 검을 내리찍었다. 우드득- 검은 뼈를 뚫고 바닥까지 내리 꽂혔다. 휘안토스는 바닥에 검을 꽂아 넣으며 피에 젖어 미끈거리는 손을 내 렸다. 달빛에 피는 검어 보였다. 지독한 피비린내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끝난 건가..... 휘안토스는 고개를 들었고, 그 순간에 소름끼치도록 두 려운 거울을 보았다. 그와 똑같은 얼굴에, 똑같은 머리카락에, 똑같은 눈동자를 가진 거울 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분노에 찬, 그러나 슬픔에도 찬, 그 눈동자가 휘안토스를 향하고 있었 다. 검은 머리에 보랏빛 눈동자마저 같았다. 순간에 휘안토스는 공포를 느꼈다. 그림자가 발목을 잡고, 거울 속에 서 두 팔이 튀어나와 그의 목을 조르는 듯한 그런 거대한 공포를 느꼈다. 휘안토스는 검을 놓고 단검을 뽑으려 했다. 단검을 찾지 못하자, 그는 그 거울의 목을 움켜잡았다. 머리가 아찔아찔 하며 그의 머릿속에 날카로운 기억의 파편들이 영혼 을 베어낸다. 보라색 눈동자가 커졌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공포가 아닌 분노였다. "뭐지, 넌?" 순간, 머리가 깨어지는 듯 했다. 기절한 듯 앞이 컴컴해지는 가 싶더 니, 눈앞이 감았다 뜨듯이 확 변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것은, 그 끔찍한 거울의 상이 아닌 흰 머리카락의 어머니였다. 눈물범벅이 된 그녀가 그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몸부림 쳐도 꿈쩍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마른 두 손이 목을 점 점 더 단단히 조이고 숨이 컥컥 막혀갔다.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니 같이 죽자. 은화처럼 빛나는 만월이 눈앞을 스쳐지나간다. 방금 전에 생생하게 그의 목을 조이던 어머니가 사라지며, 다시 눈앞에 그와 똑같은 얼 굴이 그의 손에 움켜잡혀 있었다. 그는 휘안토스의 손을 치우려 안 간힘을 쓰다가, 손을 뻗어 방금 전에 늑대의 목을 찔러 넣었던 검을 뽑았다. 날이 달빛에 반짝이며, 얼음처럼 차가운 검이 그의 가슴을 꿰뚫었다. 다시, 어머니가 속삭이곤 하던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너무 도 생생하게. -가엾은 아가. 상대의 목을 꽉 조였던 손이 풀려나갔다. -가엾은 아가. 휘안토스는 무릎을 꿇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 아름다운 달, 이 피비린내 자욱한 대지를 굽어보는 달은 가득 부풀어 올라, 은빛 얼 룩진 얼굴을 환하게 들이밀고 있었다. 외로워졌다. 세상에, 눈 뜨고 숨쉬는 것이 오로지 그밖에 없는 듯 외 로워졌다. 파란 새벽에, 등 뒤로 그녀의 숨소리와 흐느낌을 들으며 눈을 떴을 때만큼이나 외로워진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더니, 그 아름다 운 세상이 흐려졌다. 그리고 볼을 타고 그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누군가의 품에 안겨 무너지고 싶었다. 그 사람이 두 팔을 벌려 안아 주기를 어머니가 그랬듯 그리 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 휘안토스는 오열을 터뜨렸다. 어깨의 타는 듯한 고통 따위는 잊었다. 몸이 무거워 지는 것도 상관 치 않았다. 몸을 흠뻑 적신 피가 누구의 피 인지도 생각하지 않았다. 한없이 샘솟아 그를 적시는 피가 누구의 것인들 무슨 상관일까. 그저 지금, 이 바다 위를 떠도는 조각배 위에 탄 듯한 외로움 속에서, 이 무섭도록 몸을 내리누르는 고독 속에서 그녀-유제니아가 보고 싶었다. 말 해 주고 싶었다. 부드럽게 속삭이고, 소중하게 안아 주고 싶었다.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하지 못했고, 정말 해야 했던 말이기에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바로 지금, 모든 것의 그의 손을 떠나려 하는 순간 에 속삭이고 싶었다. 간절히, 너무나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웃어줘. 환하게, 환하게 웃어줘. 나를 위해 웃어줘. 세상이 어두워진다. 차갑고, 어두운, 그렇게 돌덩어리 같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것이 너무나 슬퍼서 눈물이 나온다. 이해할 수 없기에 화가 났고, 영원히 이해할 수 없게 되리라는 것을 알기에 절망한다. 또한 그녀가 웃 는 얼굴 역시 영원히 볼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뼈저리게 알기에, 그 슬픔에 절망한다. "휘안..." 아무런 답도 없었다. 침묵. 얼어붙은 듯한 침묵뿐이다. "휘안......!"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아킨은 피에 젖은 손을 당겼다. 무엇을 했는지 생각해 보려 했다. 잘 생각나지 않는다. 심장은 뽑히고 머릿속은 텅 비어 버렸다. 방금 전에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온 그 무 수한 영상이, 주체할 수 없는 뜨겁고 아픈 감정들이 아직도 아킨의 영혼 을 흔들어 대고 있었다. 아킨은 뒤로 주춤 물러났다. 순간에 발이 바닥에 흥건히 고인 피에 젖었다. 고개를 드는 순간에, 그의 눈앞으로 검은 머리카락이 늘어졌다. 아킨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세상은 이상했고, 너무나 이상했다. 너무나 조용하고 너무나 어두웠고 너무나 좁았다. 그리고 저주가 풀렸다. 어째서..... 어째서! 그의 앞에 쓰러져 있는 소년이 보인다. 피에 젖은 창백한 얼굴에, 멎어 버린 눈과 입술을 가진 소년이. 그의 시간은 방금 전 그의 심장이 꿰 뚫릴 때 멎어 버렸다. 그의 모든 것은 방금 전에 송두리째 끊어져 버린 것이다. 순간에 아킨은 피를 토할 뻔 했다. 욱-- 뜨거운 것을 삼키는 듯이, 그 렇게 오열을 삼켰다. 어지러울 정도의 피비린내, 그리고 태어나서 처 음 느끼는 엄청난 추위가 몸을 조인다. 맙소사- 아킨은 지독하게 좁고 답답한 세상에 갇혀 낯선 몸을, 힘겹게 잡아끌 듯이 일으켜 팔찌를 뽑았다. 그리고 낮은 숨소리를 내 쉬는, 아직은 완전히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고 조금만 더 내버려 둔다면 아예 몸을 회복할 것이 뻔한 은빛 늑대를 발견했다. 니왈르도였다. 분명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살아 있었다. 흐렸던 눈에 빛이 돌아 오며, 마치 웃는 듯이 아킨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르릉--숨소리가 들려왔다. 날카로운 이가 돋은 입 근처에서 부연 성에가 어리기 시작했다. '되살아나고' 있었다. "죽였군." 그 뚜렷한 목소리에 머리가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네 어미를 죽였듯, 네 형도 죽였구나." 아킨은 베이나트와 지에나, 그리고 팔로커스가 영생자라는 사실을 깨달 았다. 그리고 아킨이 성배의 힘을 받아 들여 이 니왈르도 역시 마찬가지 라는 사실도 거듭 깨달았다. 성배를 받아들인 몸이, 아킨의 '진정한 몸' 이 아닌 이 니왈르도 였다는 것도 거듭, 거듭 깨달았다. 어차피 성배는 이계의 물건. 그 세계의 신체이거나, 신의 화신이 아닌 이상 아무런 축복도 베풀어 주지 않는 것이다. 그랬기에, 그 성배를 받아들인 것은 니왈르도 자신. 지배자의 족쇄가 되어준 팔찌에 의해 그의 의지가 지배당하고 있었을 뿐, 그 힘을 쓰는 것 자체는 니왈르도였다. 그리고 거의 죽은 채로 이 곳으로 소환되어 아킨의 몸속에 머물던 그는, 이제 차츰 성배의 힘으로 완전한 생명을 되찾으려 하는 것이다. 저주가 깨어진 바로 지금. 아킨은 무릎을 꿇으며 탄식을 토해냈다. 뜨거운 것이 목구멍에 걸려 온 몸으로 파고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흐려지는 눈으로, 그를 비웃 듯 바라보는 니왈르도를 바라보았다. 턱이 떨렸다. 왈칵 쏟아낼 것만 같은 뜨거운 것이 눈시울에 가득하다. "역시나, 위대한 힘은 네게 아무 것도 가져다주지 못했어." 목소리가 점점 더 뚜렷하게 들려온다. 아킨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끓어오르는 한숨을 토해내며, 무너지고 싶기만 한 절망의 짐을 느끼며 말했다. "하지만 해야 할 일만은 언제나 제 앞에 있군요." 아킨은 그 팔찌를 바닥에 얹고 유폐의 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쓰러지는 것은 나중에, 힘겹더라도, 괴롭더라도, 지금 해야 할 일은 그저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손이 쓰라리고, 익숙하지 않은 몸이 힘을 이끌어 내며 타는 것만 같다. 속에서 피보다 뜨거운 것이 계속 솟구치려 했지만 아킨은 눌러 담았다. 아직은 아니야......! 그 외침만을 토해내며, 방울져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내지도 못하고, 그러며 나중에! 조금 뒤에를 외치며 아킨은 유폐의 진을 완성시켜 나갔다. 피를 토해낼 것만 같은 그 순간에 아킨은 혼자였고, 외로웠고, 두려웠고, 그래서 슬펐다. 그와 마주친 휘안토스의 눈에 얼어붙은 듯한 공포가 어렸다. 그 순간에, 아킨은 동정심을 느꼈다. 처음으로 형이, 방안에 평생을 살아온 아이처럼 어리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머니를 동정했듯이, 그러며 슬퍼하고 미워했듯이. 이제 그 형을 그리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 휘영청 뜬 만월이 스쳐지나갔었다. 어머니의 두 눈동자, 그 공포에 찬 보랏빛 눈동자가 겹쳐진다. 그리고 그녀의 두 손이 어린 아킨의 목을 조르던 순간, 같이 죽자- 속삭이던 그 순간이. 눈앞에 있는 것은 휘안토스가 아닌 어머니였다. 어머니, 바로 그 어머니가 똑같은 눈으로 똑같이 목을 조르고 있었다. 똑같은 만월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고, 아킨은 똑같이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손에 닿는 검을 뽑아 들었다. 휘둘러, 그 가슴에 꽂아 넣었다. 뜨거운 피가 얼굴을 적셨다. 피보다 뜨거운 눈물이 이마에 떨어졌다. 억눌린 울부짖음이 그의 앞에서 터졌다. 그의 기억들이 쏟아져 들어왔고, 그의 고통이 가슴을 후벼 팠고, 그 모든 것이 아킨 자신의 고통이 되어 쏟아졌다. 아킨은 마지막 원을 그렸다.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볼을 타고 흐르고, 턱에 맺히며,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형...." 이제 왜 그토록 그를 미워하면서도, 결코 죽이려 하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아킨이었고, 아킨은 그였다. 그렇게 그들은 형제였다. 미워하고 미워해도, 그래도 형제였다. 베이나트는 숲을 지켜보고 있었다. 숲 속에서 거대한 눈보라 같은 것이 치솟아 올랐다. 그것은 몸부림치며 으르렁대고 울부짖다가 다시 숲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베이나트는 가려 했지만, 그런 그의 어깨를 지에나가 잡았다.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저었다. "그의 일이야." 베이나트는 뿌리치지 못했다. 그저 두 손을 얼굴에 묻으며, 조용히 탄식하고 흐느꼈을 뿐이다. 지에나의 나른한 한숨도 젖어 있었다. 루첼은 위험한 숲을 계속 달려갔다. 벌써 몇 번이나 그를 가로 막는 이상한 것들을 치우고 치워나갔고, 차츰 차츰 그 빈도가 잦아지고 있다는 것도, 점점 강해진 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루첼은 방금 전 거대한 울부짖음이 터진 그곳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이나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고, 비탈에 미끄러지면서도 그는 계속 달렸다. 심술궂은 숲은 그를 계속 방해했고, 어디선가 튀어나온 괴물이 그의 옷자락에 들러붙어 물어뜯자 루첼은 옷을 찢어 그것을 내팽개쳤다. 구석에 나가떨어지자, 그것은 캥- 하고 울고는 기어서 도망쳐 버렸다. 마침내 컴컴하던 하늘이 푸릇하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어둠이 지워 지고 높은 나뭇가지에 진주 빛 햇살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나무들이 움츠러들었다. 웅성거리는 듯 하던 기이한 소리가 햇살에 녹아들 듯 사라지며, 신비로움과 기괴함 대신 평화로움과 아늑함이 깔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루첼은 햇살이 퍼지는 것보다 더욱 빨리 달렸다. 그리고 그렇게 달리다가 아직 어둠이 깔린 창백한 숲 어딘가에서 멈추었다. 기묘한 광경이 보였다. 창백한 어둠이 고여 있는 숲 속에서, 하얗게 빛나는 무언가가 누워 있었다. 그것의 목덜미는 피에 흠뻑 젖어 있었고, 숨소리도 들려오지 않고 그 하얀 배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죽었나? 루첼은 머뭇거리다가 앞으로 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 때 햇빛이 비껴들었다. 금빛 햇살이 가지가지마다 비추며 가느 다란 그림자들이 그 늑대의 몸 위로 드리워졌다. 늑대의 몸 주변 으로 하얀 원 같은 것이 떠올랐다. 그것은 마치 테처럼 그 위를 둘러치며 찬란하게 작렬하다가, 그 위로 문자와 원과 기이한 도형들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늑대의 몸이 흐려져 갔다. 안개처럼 뿌옇게 변해가더니, 마침내 몸을 일으키듯 떠올랐다. 그리고 마치 고개를 들듯, 그 뿌연 덩어리의 끄트머리는 하늘을 향했다. 그를 둘러싼 빛의 원에서 붉은 글자들이 떠올 라 그 덩어리를 감싸더니 달아오르듯 점점 더 선명해져갔다. 조금 지나자 붉은 글자들이 흰 덩어리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그 덩어리가 천천히 돌다가 점점 흐려지기 시작하고, 붉은 글자 들은 작디작은 별 조각처럼 작아져 주변을 떠돌았다. 루첼은 앞으로 나아갔다. 이 지독한 기이함 속에서, 그의 발자국 소리는 너무나 평범해서 너무나 어울리지 않았다. 붉은 빛 덩어리들은 반딧불처럼 허공을 유영하다가 바닥으로 내려 앉았다. 그리고 그곳에 놓여진, 하얀 은팔찌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팔찌 위에는 붉은 글자가 적혀 있다가, 그 빛 조각들이 스며들자 한번 반짝이고는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그 근방에는 선명한 핏자국이 튀어 있었다. 그 앞에는 자루와 날이 피에 흠뻑 젖은 검이 꽂혀 있었고, 그곳에 피가 웅덩이처럼 깊게 고여 있었다. 루첼은 고개를 들었다. 피 웅덩이 앞, 그리고 그 중앙에 꽂힌 검 옆에 검은 옷의 소년이 서 있었다. 허리까지 닿는 검은 머리카락이 금빛 아침 햇살에 빛나고, 숲 깊은 곳을 바라보는 보랏빛 눈동자 역시 슬프도록 투명해 보인다. 목덜미 는 피에 젖어 있었고, 어깨에 심한 부상을 당한 듯 반쯤 축 처져 있다. 그의 발치에는 피가 고여 있었으나, 소년의 피는 아닌 듯 했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방금 전에 루첼이 보고 있던-지금은 그의 발치에 있는-팔찌와 똑같은 것이 들려 있었다. 그가 그 팔찌를 손목에 끼워 넣고는, 다른 것을 찾으려다가 루첼과 마주쳤다. "어떻게....." 루첼은 자신의 목소리가 이다지도 어색하게 들리는 것은 정말 처음 이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가 흐르는 순간에 이 기이한 꿈에서 깨어 나는 것만 같았다. 얇은 얼음이 깨어지듯, 서리가 바스러지듯, 그렇게. "어떻게......된 거냐." 눈물이 소년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루첼은 드디어 가장 놀라운 사실, 이 기괴한 숲이 일으킨 가장 놀라운 기적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의 숨소리가 점점 더 거칠어지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아키.....!" ***************************************************************** 작가잡설: 후우. 이번 챕터는 길고도 짧군요. .............그러나 뭐가 빠진 것 같더라니;; 덧붙여 말합니다. 휘안 죽었습니다. 아키랑 휘안 퓨전 상태 절대 아닙 니다;; p.s Euigene 님 감샤 감샤;; p.s2 ............정신없는 하루;;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64장 **************************************************************** [겨울성의 열쇠] 제64장 서쪽에서 부는 바람 제302편 서쪽에서 부는 바람#1 **************************************************************** 알르간드의 넓은 숲 위로 아침 햇살이 비추어들었다. 아직 어둠이 덜 녹은 시각이 늘 그러하듯, 세상은 투명하고 차갑기만 하다. 루첼이 악튤런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숲을 중간쯤 지나서였다. 아직 경계의 숲을 벗어나지도 못했건만, 악튤런은 언제 출발했는지 벌써 그곳까지 들어 온 것이다. 루첼이 휘안토스 없이 혼자이자, 악튤런 은 주변을 휘휘 둘러보고는 슬쩍 물었다. "그 녀석은 어디다 잃어 버렸어?" "정말 죄송하지만, 잘 찾아냈습니다." 역시나 악튤런의 얼굴에 노골적이 실망의 기색이 어린다. "그렇다면 왜 혼자 오는 거냐, 너?" "볼 일이 아직 끝나셨기에, 제가 먼저 온 거죠." 그 답에 악튤런이 아마도 평소에 루첼이 악튤런에게 보냄직한 눈빛을 보냈다. "너, 그걸 나더러 믿으란 말이냐. 나더러?" "그건 그렇고 여기까지는 왜 오신 겁니까?" 단순한 악튤런은 냉큼 걸려들어 주었다. "네 실력으로는, 아마도 가는 길에 주저앉아 있을 듯해서 이리 도와 주러 왔지." 루첼은 이제 본연의 눈빛을 보낼 수 있었다. 그는 한껏 한심하다는 기색을 담아 지긋이 악튤런을 보았지만, 악튤런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이렇게 빨리 은혜 갚으실 필요는 없는데요." "이런 빚은 빨리 갚을수록 좋으니까. 그건 그렇고, 정말 휘안토스는 어디 간 거지? 혹시, 어디다 잃어버려서 지금 도망치고 있는 거 아냐?" "나중에 확인해 보시죠. 그리고 잔뜩 기대하시는 데 죄송하지만, 아닙 니다." "도망치는 길이면 솔직히 말 해. 네 마누라랑 아들이랑 같이 델 카타 로 오면 내가 후하게 대접해 주지." 루첼은 잠시 악튤런을 바라보았는데, 이번에는 아마도 '정말 기특해 미치겠습니다.'비슷한 눈빛이었을 것이다. "설마, 스승님의 도움을 기대해서는 아닐 듯 한데요." "내가 미쳤냐! 그저 내 나라를 위해 도움 뒤는 일이라면 개인 적인 감정은 접고 이리 말하는 거다! 나라고 네가 좋아서 이런 말을 하는 줄 알아?" "죄송하지만, 저는 군번이 한--없이 아래라 다른 나라에서 제대로 일하려면 십년은 있어야 합니다. 공부를 제대로 마치면 그 때가서 생각해 보지요." "뭐가 그렇게 오래 걸려? 아하, 역시나 머리가 나빠서 그런 건가." 루첼은 말을 말기로 했다. 저 말에 대꾸하면, 루첼은 당장에 유아기 로 정신등급 퇴행이다. "이만 돌아가시죠. 그리고 정 저를 못 믿으시겠다면, 여기서 같이 기 다리던가요." "같이? 아하, 좋아. 녀석이 안 돌아오면 같이 델 카타로 가도록 하 지." 저 말을 해석하면 악튤런은 정말 빠른 시일 내에 알르간드를 떠날 생 각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한 석 달 열흘 자체 숙식 해결하며 성배탐색하실 줄 알았는 데 의외로군요." "...........좀 더 힘을 키운 뒤에 다시 해 볼 생각이다." "네?" 루첼은 정말, 너무나 놀라서, 입까지 딱 벌렸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악 튤런의 입에서 '나중에'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혹시....겁나서 돌아가기로 한 건 아닙니까?" 악튤런이 루첼을 쏘아 보았지만, 아니란 말이다! 하고 윽박질러 대지 는 않았다. 대신 그는 악튤런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조용 한(물론 비교대상은 여태까지의 악튤런이다) 목소리로 말했다. "휘안토스 녀석이 이 숲으로 들어간 직후에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리 고 혹시나 네 놈이 여기서 고꾸라져서 내게 빚을 지우는 사태가 벌 어질까 해서 잠깐 들른 거고." "역시-" 루첼은 한 숨을 내 쉬었다. 전날에 악튤런이 어떻게 휘안토스를 부추겼는지는, 옆에서 보고 있었 기에 잘 안다. 악튤런은 분명 아킨에 대한 이야기를 일부러 흘린 것이다. 아킨이 숲에 있다면, 그것도 성배를 가지고 있다면, 휘안토스 는 분명 숲 속으로 들어갈 것이라 생각하고. 그러나 그 점이 루첼 은 이상했다. 평소의 휘안토스였다면 그런 도발에 절대 넘어가지 않았을 텐데, 그는 악튤런의 말이 끝나자마자 알르간드로 향했다. 그런데 악튤런이 그의 허리를 푹 쑤셨다. "그 '역시' 뒤에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 거냐?" "겁나서 그러신 것 같다고요." "그래, 겁났다! 그래서 어쩔 거야! 너도 한번 그 앞에 서 봐라. 너는 아마 졸도라도 해 버릴 테니까--!"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어쨌건 사숙님이 그런 난처한 감정 을 표하시는 데는 놀랄 수 밖에 없네요." "닥쳐!" 루첼은 다시 오솔길을 걷기 시작했다. 악튤런이 다시 그를 따라오며 물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냐?" "경계의 숲은 벗어난 뒤에 휘안토스 님을 기다릴 생각이었습니다. 그 리고 휘안토스 왕자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떠나시든, 지금 떠나시든, 아니면 성배탐색을 위해 남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런데 그 휘안토스 녀석, 대체 어떻게 무사한 거지? 마법사도 아닌 녀석이, 고작 검 하나만으로 그 마물들을 모조리 처리했단 말이냐?" ".....글쎄요. 그건 돌아오시면 물어 보십시오." 루첼은 자신의 눈빛이, 방금 전에 실없는 말을 주고받을 때와 다르지 않기를 바랬다. 다행히 악튤런은 그런 루첼의 눈은 건성으로 보아 버렸다. 발이 무겁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들리는 소리가 이다지도 뭉툭하고 작은 것도 처음이었고, 먼 곳이 제 대로 보이지 않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완전히 새로 태 어나서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은 '답답하다'라는 것이었다. 어깨가 욱신거리고, 목도 따끔거렸다. 새벽공기는 지나치게 찼고, 간밤의 출 혈 덕에 상처는 남아 있지 않아도 으슬으슬 춥다. 아직도 몸에 남아 있는 피비린내는 역하다. 그래도 아킨은 계속 걸어 나갔다. 맨 발에 닿는 바닥은 부드러웠지만 발은 납덩이라도 단 듯 뻐근하게 아프다. 많은 질문들이 오고가고, 그보다 훨씬 적은 답들이 흐릿하게 떠오르다가는 사라진다. 그리 고 그의 마음속은 투명하다, 하얗다. 우유 탄 물처럼, 눈보라 치는 먼 들판처럼, 그렇게. 얼마 걷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어쩌면 영원히 그렇게 혼자서 걷고만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길의 끝은 있기에 어느덧 베이 나트가 기다리는 곳에 도착했다. 너른 지에나의 신비로운 정원은 눈 그친 아침, 하늘은 푸르고 발그레 한 햇살이 눈 위를 비추는 듯 그런 풍광으로 빛나고 있었다. 한없이 쏟아지던 그 눈보라 그친 날 아침, 하늘은 날카롭도록 푸르고 대지 는 눈부시도록 빛나건만, 공기는 더없이 찬 그런 아침 말이다. 소년은 하늘을 뚜렷하게 비추는 거대한 수경 앞에 섰다. 깎아낸 듯 정지한 그곳에 '낯선' 소년이 서 있었다. 머리카락은 검었 고 눈은 보랏빛이다. 어깨와 목덜미에는 어제 그의 형이 죽음과 함께 쏟아낸 피가 검게 굳어 있었다. 가장 두려운, 가장 끔찍한 괴물이 되어 버린 것만 같다. 그를 따라 움직이는, 장난 지독하고 고약한 요정이 저 앞에 있는 듯 하다. 다시 세상이 흐려지며, 수경 위로 한 방울 눈물이 떨어져 긴 파문을 일으켰다. 그 수면의 눈동자가 비추는 세상이 한꺼번에 흔들렸다. 그리고 다시 눈물이 떨어지며 파문이 겹치고 얼크러져 수면은 몸을 떨며 전율하듯 흔들린다. 발소리가 났다. 소년은 돌아보지도, 부르지도 않았다. 응석 같은 건 부리지 않기로 했는데, 그런데 지금 소년은 '위로'를 바라고 있었다. 세상에 그 혼자만이 남겨져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그의 머리 를 쓸어주고 어깨를 안아주는 누군가가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곧 싱그러운 여름의 숲이 뿜어내는 듯한, 그 푸릇한 내음이 등을 감 싸 안으며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알아.....볼 수 있겠어?" 아무 말도 없었지만, 부드러운 손길만으로도 그가 자신을 알아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손길이 목덜미의 피에 닿았다. 멈칫 하던 그 손은 행여나 해서 아킨의 어깨를 더듬었다. 그러나 아무런 상처 도 없자, 그제야 안심한 듯이 내려갔다. "어떻게 된 거니?" "죽었어, 그가." 다시 수경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내가 죽였어." 그를 위해 울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가 사라지면, 이렇게 갑자기 큰 산 하나가 사라진 듯한 공 허함과 두려움에 떨 고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세상 절반이 정말 컴컴해 져 버린 듯한 이런 슬픔을 느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슬퍼서, 그저 너무나 슬퍼서, 그저 그가 사라졌다는 사실 하나 만이 슬퍼서, 더 이상 그가 아무것도 못하고 할 수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 너무나 슬퍼서, 그래서 눈물이 흐른다. 그를 얼마나 증오했든 간에, 그를 얼마나 질투했든 간에, 그와 얼굴 마주하는 일이 다시는 없기를 얼마나 바랐던 간에, 지금은 그저 그가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 그의 모든 시간이 멎고 그의 모든 움직임이 멎으며, 송두리째 사라져 버렸다는 그 사실 하나만이 너 무나 슬펐다. **************************************************************** 작가잡설: 휘안의 몸....일 리가 없지요;; 당시의 휘안은 거의 넝, 마에 가까울 정도로 다쳤답니다;;; 으읍!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64장 *************************************************************** [겨울성의 열쇠] 제303편 서쪽에서 부는 바람#2 **************************************************************** 아킨은 베이나트와 지에나 앞에 두개의 팔찌를 내려놓았다. 그들은 그들답게 아킨의 모습을 보고 놀라지도 않았고, 그저 차분하게 물 었을 뿐이다. "어떻게 된 것인지, 우리에게 상세히 설명해 줄 수 있겠니?" "상세히 설명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저 역시 자세히 알지는 못하고, 그저 겪었던 일만을 말씀드린다면 그건 너무나도 간단합니다." "그것이라도 말해 주거라..... 네 몸은 대체 어떻게 된 거냐." 아킨은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피 얼룩이 배어 있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를 바라며, 아 킨은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정오의 잔인한 햇살이 그 위로 내리쬐고 있었다. "저주가 풀렸습니다." 아킨은 숨을 크게 내 쉬었다. "머리카락 색과 눈 색이 변한 것은 그 때문이고요. 이게 원래 제 모 습입니다. 저주가 없었다면, 아마도 이 모습으로 태어났을 테지요." "어떻게 풀린 거지?" "저주가 끝났으니까요." 아킨은 고개를 떨구었다. 아직도 피비린내가 물씬 풍겨오는 것만 같 다. 그의 울부짖음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고, 동시에 그것이 너무나 먼 옛날 일 같이 느껴졌다. 너무나 많은 것이 한꺼번에 변했기 때문이다. "저는 저주가 무엇에 걸려 있는지, 끝나는 순간까지 몰랐습니다. 아 니, 끝난 그 직후에조차도 몰랐습니다......." 보름의 달빛이 그를 변신시켰고, 그는 그 상태로 휘안토스와 싸웠다. 뒤엉킨 채로, 찌르고 베고 물어뜯었다. 그러나 그렇게 싸우며, 아킨은 휘안토스가 무서운 속도로 무너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휘안토스의 머릿속은 엉망이었고, 그 엉망진창인 상태가 아킨에게 생생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발버둥치듯이 절규하고 있었다. 동시에, 아킨 역시 그에 휘말려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보름이 가까워지면 정말 가깝게 서로를 느껴왔지만, 그렇게 마치 한 사람인 듯 느끼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검이 아킨의 목을 꿰뚫었고, 아킨 의 이는 그의 어깨를 꿰뚫었다. 그 순간에도 휘안토스의 영혼이 내 지르는 절규는 텅 빈 계곡을 울리는 울부짖음처럼 그의 머릿속을 휘 젓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휘안토스의 검이 아킨의 목을 베어버 렸다.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피가 솟구쳐 오르고, 몸은 나동그라졌 다. 상처에서 솟아나오는 피가 온 몸의 털을 적셨다. 순간에 휘안 토스의 검이 목을 꿰뚫었고, 갑자기 컴컴한 어둠이 두 눈을 내리덮었다. 그리고 추워졌다. 온 몸이 무섭도록 추워지며, 와들와들 떨려오기 시작했다. 통증이 사 라진 것은 그 때였다. 꿈에서 깨듯이 그 지독한 통증이 씻기듯 사 라지고, 동시에 눈을 떴다. 흐려진 금빛 눈동자가 보였다. 그 눈동자는 은빛 털에 둘러 싸여 있 었고, 흐릿하게나마 아킨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아킨은 앞에 있는 것이 거대한 은빛 늑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바닥에 누 워 있었다. 아킨은 땅을 짚고 일어났다. 손바닥에 닿는 땅바닥은 얼음처럼 차기 만 했다. 그리고 휘안토스와 마주쳤다. 휘안토스는 엉망이었다. 늘 인형처럼 차갑고, 얼어붙은 듯 오만하던 그가, 그렇게 엉망으로 보이는 것은 정말 처음이었다. 다시, 방금 전에 머릿속으로 몰아쳐 들어오던 그의 절규가 생각났다. 그 피를 토하는 듯한 절규가. 그가 갑자기 은빛 늑대의 머리에 꽂아 넣었던 검을 뽑으려 했다. 그 러나 제대로 쥐지도 못하고, 이번에는 단검을 찾았다. 그것마저도 찾지 못하자 그는 그대로 아킨의 목을 움켜잡았다. 내동댕이쳐졌다. 차가운 바닥이 등을 후려쳐지며, 동시에 목이 조여 왔다. 그 때 두 눈 가득 만월이 보였다. 먼 옛날의 끔찍한 기억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그를 찾아왔을 때, 그의 목을 조이고 짓누르는 그 순간의 기억이. 발버둥쳤다. 죽고 싶지 않았고, 그의 팔을 떼어 내려 하다가 손에 칼 자루가 잡혔다. 그것을 뽑아, 그대로 어머니의 가슴을 내리찍었다. 피가 흘렀다. 뜨겁고도 뜨거운 피가 뚝뚝 떨어지고, 그의 목을 조이 던 손의 힘도 풀렸다. 흐릿한 숨소리가 귓가에 들려오자, 그제야 정 신이 들었다. 그의 손에는 칼자루가 쥐어져 있었고, 온 몸은 피투성이였다. 눈앞에 는 점점 흐려지는 보랏빛 눈동자가 있었다. 뭐라 말하려 했다. 부 르려 했다. 그리고 아킨은 그의 눈물을, 절망에 찬 두 눈동자를 보았다. 완전히 무너져 버린 그의 형을, 그의 반신을, 그의 형제를 보았다. "처음...이었습니다. 정말 처음이었어요.... 그와 제가 형제라는 것을 느낀 것은, 그가 저의 일부이듯 저 역시 그의 일부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것은 사랑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가 죽어서.....슬픈 거냐." 아킨은 흐릿하게 웃었다. "당신이 늘 말하고는 하던 그 분......에 대한 감정과 비슷하겠지요. 미 워한 것은 사실이지만,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슬프군요." 잠자코 있던 지에나가 말을 꺼냈다. "......니왈르도가 죽어서 네 저주가 풀린 걸까?"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아니에요. 그는 당신들이 그러하듯, 그가 속하지 않은 세계에서는 죽을 수 없는 몸이 되어 있습니다. 저주가 끝날 때 그는 분명 살아 있었고, 심지어 성배의 힘으로 몸을 회복시키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어떻게 했지?" 아킨은 그들 사이에 놓인 팔찌를 짚어보였다. "이 안에 가두었습니다." 햇살은 조금씩 길어지기 시작하며, 아킨은 같이 지쳐갔다. 그리고 팔 찌를 짚고 있는 손끝의 느낌이 예전 같지 않았다. 어깨가 욱신거리는 것도 여전하다. 정말 그의 팔이 끊어진 듯이 아프다. "네 형은?" 옆에 앉아 있는 자켄이 잠시 아킨을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형의 시신은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미워하 던 형이라지만, 그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인다는 건.... 심지어 자크나 베이 당신에게 보이는 것마저도 끔찍했으니까요." 베이나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는 입술을 꾹 짓누르며, 속에서 소용돌이 치는 것을 꾹 참고 있는 듯 보였다. 그렇게 모든 이야기가 끝나자, 지에나는 팔찌를 집어 들어 잘 살펴보더니 아킨에게 돌려주었다. "이건 네가 가지고 있어." "제 물건이 아닙니다." "어제까지는 아니었지만, 오늘부터는 네 물건이야. 네가 만들어 내, 네가 이 안에 위험한 힘을 담아 놓았다. 그러니 네 것이란다..... 그 리고 너 나름의 희생까지 치렀으니, 오히려 우리가 가질 수 없게 되 어 버렸어." 아킨은 그 차가운 것이 다시 팔목으로 돌아오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 팔찌가 터지며 그의 모든 것을 압박해 버릴 것만 같았다. 주체할 수 없는 엄청난 힘이 몰아쳐 올 것만 같았다. 그러자 지에나가 말했다. "나중에 손봐주겠어." 흰 햇살이 지에나의 목덜미에 머물렀지만, 그 군청색 눈은 물속보다 차가워 보였다. 그녀가 물었다. "마법을 쓸 수는 있는 거니?" 아킨은 팔찌를 다시 뽑은 뒤에 마나를 모았다. 희뿌연 힘의 흐름이 손끝에 어리더니, 곧 천천히 빙글 빙글 돌기 시작했다. 곧, 그 흐름의 중간 중간에 작고 빛나는 것이 떠돌았다. 베이나트의 눈에 안도가 어리고, 지에나의 눈도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그렇다면 그의 힘을 쓸 수는 있겠니?" 아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쓸 수 있습니다." "그것 역시 보여 다오." 아킨은 팔찌를 다시 끼운 후에 마나를 모았다. 팔찌위로 글자가 떠오 르며, 그 주변에 역시나 뽀얀 빛 무리가 어렸다. 별 차이는 없었다. "베이도, 지에나도 쓰실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너도 안전해 졌다. 니왈르도가 네 몸 안에 없는 이상, 이제 네가 그의 지배를 받게 될 위험은 없다...... 그리고 내가 어제 말한 그 위험 역시 훨씬 줄었지." 아킨은 잠시 멍하니 베이나트를 바라보았다. 베이나트는 고개를 가로 젓고는, 몸을 일으켜 아킨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머리에 두 손을 얹고는 부드럽게 말했다. "수고했다, 아키. 이제.....푹 쉬어라. 정말 수고했어."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 말이 나올 줄 알았던 듯 베이나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저 어리고 가엾은 아이를 보는 듯, 아주 예전에 아킨을 보곤 하던 그 눈빛으로 보았을 뿐이다. "어쩔 수 없습니다. 제가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을.......비록 제 본의 는 아니었을 지라도, 그래도 책임을 져야 합니다." 아킨은 그리고는 다시 팔찌를 내밀었다. "그래서 이것을 돌려 드리고 싶은 겁니다. 베이, 당신 덕에 얻은 것이 니.... 이제 그대로 돌려 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꼭 소원을 이룰 수 있기를 빕니다." "아키야-" "돌아가신다면, 그 전에라도 말씀해 주세요. 작별 인사 정도는 할 수 있도록." "아니, 아니다. 지에나가 그리 말했다고 부담 가질 필요는 없단다. 조 금만 더 가지고 있어라. 우리가 돌려받아야 할 때 돌려받을 테고, 그 전에는 네가 가지고 있어야 할 것 같구나. 영원히 너에게 떠맡겨 놓지는 않을 테니, 그리 사양하지 말거라." "과한 물건입니다. 또, 지금 제가 해야 할 일은...... 이런 물건이 같이 있으면 오히려 위험한 일입니다. 저 자신에게도, 그리고 제 주변 사람에게도." "나는 너를 믿는다. 네가 여태 보여주었던 모든 것이 너를 믿게 하고 있으니 이번에도 믿는 거란다......이제는 그래야 할 것 같구나. 가야 할 곳이 있다면 가려무나. 그리고 기억하고 있어라...... 이곳에 네 집이고, 네 새로운 고향이라는 것을. 그러니 낯선 곳을 헤매어도, 이곳을 그리워 해다오." 아킨은 두 팔을 벌렸다. 그저 그렇게 하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베이 나트는 그런 아킨을 끌어안았다. 넓은 그의 품은 따뜻했다. "곧 다시 만나게 될 게고, 아마도 자주 자주 만나게 될 게다. 네가 노 력한 만큼, 나 역시 믿음으로 보답한다.......인간이란 야박해서, 보 답해 주는 사람과는 계속 만나게 되는 법이니까." "감사합니다.....정말.....감사합니다." 다시 울컥 눈물이 치솟아 올랐다. 그저 고마워서,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눈물이 나왔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를 기억하고 찾아주고 웃어주는 사 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뻤다. "너를 사랑한다, 아키." 작별 인사가 끝나자 지에나는 눈 궁전과 천개의 눈 위로 어둠을 뿌렸 다. 밝았던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더니 마침내 밤이 되었고, 사방에 어둠 이 내려앉으며 컴컴해졌다. 아킨은 그녀가 어떤 도움을 베풀어 주 는지 알았다. 그는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그리고 손을 뻗는 순간에, 어둠 속에서 검고 거대한 말이 튀어나와 아킨과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아킨은 땅을 박차며 말 위로 올라갔다. 검은 말이 땅을 차고는 허공 으로 뛰어 올랐다. 그리고 호수의 수면을 스치고, 갈라진 땅을 차고, 바위와 기둥을 넘어 마침내 경계의 숲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도 어둠이 깔려 있었다. 아킨은 숲을 헤치고 가로질러 인간의 세계가 시작되는, 비틀린 세상이 끝나고 현실의 경계가 시작되는 그곳으로 향했다. 어느 샌가 어두운 숲 사이로 빛이 비껴들기 시작한다. 동굴이 끝나 듯, 검고 어두운 세상은 차츰 빛 속에 녹아들어 가고 있었다. 아킨은 말에서 내렸다. 말은 어둠 속으로 도망치듯 사라지고, 아킨은 그 햇살 쏟아지는 곳으로 뛰어들었다. 이제 기울어져 노랗고 긴 햇살이 퍼붓듯 몸을 휩쓸었고, 이른 봄의 차가운 바람이 볼을 스친다. 그렇게 눈부신 빛의 세상. 여기 저기 잘린 나무 그루터기가 있었다. 작게 움튼 새싹과 봄눈 끄트머리가 반짝였다. 그리고 그 곳의 그루터기 중 하나에, 약속했던 대로 그의 친구가 앉아 있었다. 이곳에서 기다리기로 했던 친구는, 그 약속을 지켜 꽤나 오랜 시간동안 아킨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루첼 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을 들었다. "여어- 다 끝난 거냐." "가자, 루첼." 루첼은 턱으로 오른쪽을 슬쩍 가리켰다. 그곳에는 나무 둥치에 기대 고 쿨쿨 자고 있는 악튤런이 있었다. 아킨은 잠시 그냥 버리고 갈까, 하고 생각도 해 보았지만-쌓인 원한이 지나치게 많다- 어쨌건 사숙은 사숙이라 깨우기로 했다. "악튤런 님-" "아, 음.....어라?" 악튤런은 눈을 반짝 떴다가, 아킨과 마주치자 얼굴을 확 구겼다. "정말 말짱하군요, 휘안토스 왕자." 자기도 모르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고 물어 볼 뻔 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순간에 볼 옆을 스치는 검은 머리카락을 보았다. "돌아갈 예정입니다. 계속 여기 있고 싶으시다면 굳이 말리지는 않겠 습니다." 그러나 악튤런이 갑자기 눈을 찌푸렸다. 그리고 정말 이상한 물건이 라도 보는 듯 아킨의 아래 위를 샅샅이 훑어보고는, 갑자기 웃음을 파핫- 터뜨렸다. "이거, 어떻게 된 거냐. 경계의 숲에서 뒤바뀌기라도 한 거야?" "무엇을 말입니까." 악튤런이 아킨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아킨은 그대로 끌려 왔고, 악튤런은 히죽 웃고는 말했다. "넌 휘안 자식이 아니야. 그 자식은 나한테 존댓말 같은 건 절대 안 쓰거든. 대 놓고 재수 없게 구는 건 휘안토스고, 꼬박 꼬박 존 대하면서 긁어댈 건 다 긁어대는 건 아킨토스 쪽이지." 루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악튤런은 그런 루첼을 흘끔 보고는, 다시 아킨에게 말했다. "어떻게 된 거냐. 솔직히 말하자고." "아마도 무엇을 예상하는지 모르겠지만, 사숙께서 정상인 비슷하게 생각하실 수 있다면.......그 예상은 맞습니다." "그럼 너 아킨토스가 맞는 거냐? 어라, 그렇다면 혹시 몸이 바뀐 거냐?" "바뀐 건 없습니다. 저주가 풀리며, 이렇게 원래 제 몸으로 돌아온 겁니다." 악튤런의 눈이 커졌다. "와, 근사한데? 암롯사 왕가의 굉장한 비밀을 알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비밀을 지켜 주시는 편이 델 카타롯사에 유리합니다." "근거 대 봐." 악튤런은 꽤나 오만하게 턱을 들었다. "저는 공식적으로, 누구나 인정하는, 암롯사의 둘째 왕자입니다. 그리고 제 계승권은 제 저주가 풀리게 되는 즉시 복권됩니다. 그러니 비밀을 지키시든 말든 아무 상관없고, 제 아버지가 이미 동생을 죽인 전력이 있으니 제가 제 형을 세상에서 사라지게 한 것에 대해서 문제 삼을 사람은 없습니다. 비난이야 받을 테지만, 언젠가는 다들 잊을 테죠. 뿐만 아니라, 아버지께 다른 선택이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아무리 아끼던 아들을 없앤 아들이라지만, 제가 없으면 남는 것은 더욱 위험한 숙부님뿐입니다. 이러나저러나, 제게는 손해 볼 일은 없습니다." 말이 점점 복잡해지자 악튤런은 점점 듣기 싫어하는 얼굴이 되었다. 아킨은 두 손을 벌려 보였다. "제 말은, 지금 악튤런 님께서 무엇을 어떻게 하시든 상관없다는 말입니다. 지금 당장 저를 죽이지 않는 한 말입니다." "죽일 수 있는데?" "마스터는 열쇠에 걸고 각 나라의 직계 후계자에게는 손대지 않 겠다 맹세하지 않습니까. 지금의 저는 직계후계자입니다." 아킨의 승리였다. 악튤런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고, 궁리해 보았 지만 역시나 찾을 수 없었다. "그건 그렇고 성배는 어떻게 된 거야? 가지고 있어?" 아킨은 고개를 저었다. "성배는 더 이상 제 것이 아닙니다. 원 주인께 돌려 드렸습니다." 악튤런의 얼굴이, 아까워 미치겠다는 표정이 되었다. 루첼 마저도 뭐라 물어 보려다가 입을 다물었을 정도였다. "미쳤냐, 너!" "사숙 님 입장에서는 그 편이 낫지 않습니까? 적국의 손에 들어가 느니, 차라리 남의 손에 들어가는 편이 낫잖아요." "빌어먹을, 너한테서는 뺏을 자신이 있지만 다른 놈이 누구냐에 따라 또 고민해야 하니까 그렇지! 대체 어느 놈한테 준 거야?" "......사숙님의 스승'놈' 입니다만." 루첼이 옆에서 크윽, 하고 웃음을 삼켰다. 악튤런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어쨌건, 저는 더 이상 그 성배의 힘을 쓸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탐색이 이루어진다 할지라도, 베이나트 님과 그분의 친구 되시는 지에나 님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기에 그 누구라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작은 사숙님은 물론이요, 큰 사숙님도, 제 스승이신 롤레인 님도. 그러니 마스터 악튤런, 적어도 그 점에서만은 안심하시고 돌아가십시오." 물론 모조리 거짓말이지만, 아킨은 악튤런을 속이는 데 있어 약간의 가책도 없었다. 그리고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전혀 솔직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지금부터 넌 뭘 어쩔 건데?" "제 책임을 다 할 뿐입니다. 어쨌건, 제 형이 했던 일을 마저 하기는 해야 하니까요." "그렇다면 결국 여기서 헤어지면 곧바로 적이 된다는 뜻이로군. 좋아, 일단 헤어지지.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하게 해 두겠어. 나는 결코 성배를 포기하지 않고, 지금 내 왕과 공주에게 돌아가면 다음번에는 반드시 암 롯사를 이겨 복수 할 거라고." "사숙님, 제 형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제게 복수한 다면 그건 정말 제가 억울할 일이고요. 또한, 제 아버지는 곧 모든 것을 잃게 되실 겁니다.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가장 증오하는 아들에게요. 그러니 역시 복수할 필요는 없게 될 것이고, 그런 아버지의 목숨을 빼앗으신다면 오히려 은총이 될 겁니다." "무슨 말이냐, 그건." "두고 보시면 알게 되실 겁니다." 악튤런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뭐냐고 묻고는 싶은데, 자존심 때문에 차마 입을 열지는 못하고 있었다. 아킨이 말했다. "어쨌든, 제 아버지 사이러스 대공왕에 대한 복수로 전쟁을 일으키셨 다면, 그리고 그 때문에 여기까지 오셨다면, 그건 성공하셨습니다. 비록 당신의 손으로는 아니지만, 그 결과만은 여기 이 자리에 확실하게 있으니까요." "나는 그것만을 원하는 게 아니다. 내가 성배를 원했던 이유는 전혀 다른 거야." "황제라도 되고 싶으셨던 겁니까?" "만들고 싶다." "이루시기를 빕니다." 아킨은 그렇게 말하고는 숲 바깥쪽으로 돌아섰다. 악튤런은 그의 뒷모습 을 한참이나 바라보았지만, 아킨은 다시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루첼이 그의 옆으로 다가가다가 잠시 악튤런을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입 모양 으로 보아하니, '다음에 보자.' 어쩌고 하고 있었다. 얄미운 녀석, 악 튤런은 그렇게 투덜거리고는 털털 털고 일어났다. "이루기를 빈다고?" 얄밉게 오목조목 따져대며 '이건 이래서 곤란하군요.' 말하는 것 보 다는 나았지만, 그 말이 왠지 하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한 여유로 보여 기분은 더 나쁘다. 하여간,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들만 골라서 제자로 들였다, 이 빌어먹을 롤레인은. ****************************************************************** 작가잡설: .................. 루첼이 아키를 단번에 알아본 것은 역시나 라부라부 포스. -_-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64장 ******************************************************************* [겨울성의 열쇠] 제304회 서쪽에서 부는 바람#3 ******************************************************************* 루첼과 함께 암롯사 일행이 있는 곳으로 가며, 아킨은 넌지시 말했 다. "조금만 더 같이 있어줘. 그리고 다 끝나면 베넬리아로 돌아가." "그래도 괜찮겠어?" "그래.... 그 동안 나 때문에 실컷 고생했는데. 또 붙잡고 있기는 미안 해." "때에 따라서는 그냥 뻔뻔하게 매달려 보라고 했잖아. 휘안토스의 부 탁이라면 사절이지만, 네 부탁이라면 얼마든 지 들어줄 수 있다고." "내가 필요하면 부를게. 그리고 그 때는, 너도 스승님 도움을 받지 않 아도 될 만큼 충분히 쓸만해 져 있을 테지." "모욕이다, 너." "스승님에 대한 찬사야." 그 말에 루첼이 뭐라 말대답 하면 그것이야 말로 스승에 대한 모독이 다. 조금 걷자, 루첼은 곧 암롯사 일행이 있는 공터에 도착했다. 절반은 없어져 있었는데, 아마도 휘안토스를 찾기 위해서 자리를 비운 듯 했다. 그들은 아킨을 보자 당장에 무릎을 꿇었다. 그 중에 마르실 리오가 달려왔다. "무사하셨군요, 휘안토스 님! 돌아오지 않으셔서, 걱정이 많았습니 다." "떠날 준비를 해라. 지금 당장 들를 곳이 있으니까." "어디입니까?" "지명은 정확히 모르지만, 어디인 지는 잘 안다. 게다가 암롯사 안이 니, 어려움은 없을 거다." "하지만 곧 대회의가 있을 겁니다. 암롯사 까지 갔다가 제도로 가면 늦습니다." "어차피 대회의는 각 나라의 대표가 다 모이지 않는 한 열리지 않는 다. 내가 없으면 열리지 않으니, 늦는 다는 건 아예 불가능한 상황 이지." 마르실리오는 적잖이 당황했지만, '휘안토스'가 쓸데없는 명령은 내리 지 않는 다는 것을 알기에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그는 곧 암롯사의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고, 기사들은 고분고분 그 명 에 따라 준비했다. 루첼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것은 행여나 말실수라도 할까 해서였다. 아킨은 그런 루첼의 배려가 고마웠다. 준비가 끝나자, 아킨은 곧 말을 출발시켰다. 늘 타고 다니던 것에 비 하면 한없이 느리고 발도 무거웠지만, 그래도 기사들과 함께 가는 길이기에 별 수 없었다. 먼저 훌쩍 떠나서 그들을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혼자서 할 수는 없는 일이기에 그들과 함께 가야 했다. 아킨은 선두에 서서 그들을 이끌었다. 어차피 아버지 사이러스에 대 한 말 없는 복종에 익숙한 자들이라 아킨의 명에도 말없이 따랐다. 말에 익숙하지 못한 루첼은 계속 뒤쳐졌지만, 그래도 꿋꿋이 뒤따 라 왔다. 그리고 아킨은 그들을 남으로 남으로 이끌었다. 사흘의 밤낮이 바뀌었고, 흐린 날이 지나고 맑은 날이 지나갔다. 거 친 소나무 전나무 가득한 숲이 사라지고, 곧바로 자작나무 참나무 우거진 중남부의 숲이 나타났다. 간신히 움튼 새싹에 연두색 안개가 무리무리 지은, 아직은 절반 이상이 회색인 산들이 지나가고 이제 완연한 유록색으로 물든 숲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노란색 하얀색 작은 꽃들이 무리지어 피어나고, 오래 전에 녹은 물줄기는 터진 심 장에서 솟구치는 피처럼 힘차게 계곡과 평원을 굽이굽이 흘러갔다. 햇살은 녹아드는 듯 따사로워지고, 바람 역시 서풍으로 바뀌어갔다. 그리고 그렇게 달려, 아킨은 기사들을 끌고 제국을 지나 암롯사 의 국경에 도달하여 어디론가로 향했다. 말없이 명령하는 아킨에게 말없이 복종하던 기사들은, 아킨이 암롯사 내의 롤탄 백작령으로 향 하는 것에 적잖이 당황했다. 그곳이 누구의 영지인지 누구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킨은 그들에게 설명하지 않으며, 그들을 계속 이끌고 영 내로 들어갔다. 왕의 깃발을 본 영지의 기사들이 주인 에게 달려갔고, 그들이 주인의 명을 가지고 오기도 전에 아킨은 롤 탄 백작성으로 향했다. 아무리 왕과 왕자라도, 영지의 주인에게 허 락도 받지 않고 기사들을 끌고 들어오는 것은 침입에 다름 아니다. 당황한 마르실리오가 물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도착하면 안다." 아킨은 말 머리를 틀어 백작의 성을 향하게 했다. 그렇게 가는 중에 그 누구도 나오지 않았다. 맞이하러 오는 사람도, 막으러 오는 사람도, 겁먹은 듯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암롯사의 기 사들이 지나가는 것을 지켜볼 뿐이었다. 평화로운 시골 생활에 익숙한 영지사람들이, 성으로 향하는 길을 달 리는 기사들을 불안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어린 아이들이 눈망울을 크게 빛내며 어미 아비에게 물었지만, 그들 역시 이유를 몰라 고개 를 저을 뿐이다. 행여나 그들이 모시는 아름다운 귀부인이 무슨 죄 라도 저질렀나 싶어서, 그들은 모두 불안해하며 영지의 귀부인을 위해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성에 도착하자, 경비병들은 이미 명령을 받았는지 아무것도 묻지 않 고 길을 내 주었다. 아킨은 성의 외벽을 통과해, 정원을 가로질렀다. 정원은 '아킨이 기억하는 대로' 아름다웠다. 마침내 성의 문에 이르자, 성문이 열리며 그 문과 똑바로 이어지는 홀이 나타났다. 아킨은 말에서 내려 곧장 그 홀로 들어섰다. 홀을 향하는 계단에서 검은 베일을 쓴 귀부인이 내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당황하고 있지는 않았고, 겁먹지도 않았다. 이미 다 각오한 일이라는 듯 아킨을 맞이했다. "안녕하십니까." 아름다운 귀부인이었다. 아킨은 그녀가 롤탄 백작 부인이라고, 오는 길에 들었을 뿐이라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 해도 무방했다. 그러나 전혀 모름에도 아킨은 자신이 그녀를 '기억'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 그녀의 성격, 그녀의 웃음이 어떤 지, 아버지 사이러스에게 어 떤 존재인 지도 알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은 그저 본능 같은 것, 냄새를 맡고 눈으로 보고 손끝으로 느끼듯 그렇게 자연스럽게 느껴 지는 것이었다. 롤탄 백작 부인은 떨리는 손을 꼭 움켜잡고는 애써 차분하게 말했다. "알고 오셨다면 들어 와서......만나 뵈세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부인께 해 될 일은 없을 겁니 다." "무엇으로 믿나요? 저는 당신의 아버지를 배신했는데." "상관없으니까요." 아킨의 말에, 롤탄 백작 부인이 흠칫 놀라 그를 보았다. 그리고 그녀 는 무언가, 그녀가 기억하는 휘안토스와 지금의 아킨이 다르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저 그가 힘든 전쟁을 치르는 중에 성격이 달라져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을 뿐이다. 아킨은 그녀가 안내 해 주지 않아도, 하인이 달려와도 거절하고는 마 치 아주 예전부터 잘 아는 곳인 양 어렵잖게 복도를 지나고 계단을 올라 마지막 목적지를 향했다. 그가 원하는 곳은 정원을 내려다보 는 창이 있는 방이었고, 어디 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 아, 아킨은 원하는 곳에 도착했다. 평범한 문이 그 앞을 지키고 있 었다. 롤탄 백작가의 상징인 백마와 장미화관이 그려져 있고, 그 아래에 문고리가 늘어져 있었다. 아킨은 두 손으로 문을 밀었다. 활짝 펼쳐지는 문 앞에, 눈부시게 쏟 아지는 햇살과, 그 앞에 선 아버지가 있었다. 장대한 체구도, 쏟아 지듯 곧고 윤나는 빛나는 머리카락도, 그 차가운 초록색 눈도 그대로 인 아버지가.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냐." 사이러스가 말했다. 아킨은 아무 답도 하지 않고, 문을 닫았다. 쿵-그리고 침묵. 얼음처럼 차갑고 단단한 침묵이었다. 잠시 아킨을 바라보던 사이러스의 눈이 흔들렸다. 그리고 점점 더 커지더니, 짧게 신음을 흘렸다. "누구냐, 너는." "당신의 아들입니다." "너는 휘안토스가 아니다." "당신의 아들은 휘안토스 단 한 명뿐인가 보군요. 예전에도, 지금도, 그리고.....아마도 앞으로도." "진지하게 묻고 있으니, 솔직하게 답해라. 너는 누구지?" "당신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킨은 그에게 다가갔다. 사이러스의 눈이 점점 커지다가, 마 침내 멎었다. "아킨....토스냐?" "맞습니다." ".....어떻게 된 거냐, 그 몸은." "저주가 풀렸습니다. 완전히..... 다시는 그 괴물로 변하지 않을 겁니 다." "어떻게 저주가 풀린 거냐. 그 여자가 풀어 준 거냐?" "아닙니다. 저주는 끝났고, 그것은 그 목적을 완전히 실행했기에 가능 한 일이었습니다." "목적이라니? 하아,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그 복수가 끝났다니! 그 여자가 포기라도 한 건가." "아닙니다. 복수는 이루어 졌고, 그녀가 이겼습니다." "대체 어떻게 이긴 거란 말이냐." 잠시 놀란 사이러스는 이제 완전히 돌아와 있었다. 여전히 그 냉혹하 고 엄격한 모습 그대로, 무자비하게 아킨을 다루던 그대로.... 그는 언제나 변하지 않는다. "휘안토스는 죽었습니다." 사이러스의 눈이 다시 커졌다. 방금 전까지의 여유가 모두 얼어붙어 버린다. 아킨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마도 휘안토스와, 그리고 먼 옛날 젊은 시절의 어머니와 똑같을 듯한 모습으로, 그러나 차갑 고 단단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무슨...." "우리는 둘 다 공포 속에 서로의 목을 조르고 가슴을 찔렀습니다. 어 쩔 수 없었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말 그대로, 그 순간 에는 제 정신들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제가 살아남고 휘안토스는 죽었습니다." 사이러스는 얼어붙은 그대로 아킨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흔들림도 없었고, 무너지는 것도 없었고, 눈물 한 방울 없었다. 그 리고 얼마나 지났을 까, 마치 얼음에 금이 가듯 사이러스가 말했다. "그게.....나를 향한 복수였던 거냐. 내 아들을 죽이는 것이? 아내를 죽이고, 이제 아들을 죽이고? 그렇게, 내 가족을 죽이는 것?" "나루에의 아버지에 대한 복수는,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차례차례 죽이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저주는 휘안토스가 죽기도 전에 풀렸 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뭐가 또 남은 거냐." "저주는..... 휘안토스가 제 앞에서 완전히 무너지는 순간에 풀리더군 요. 아버지가 그토록 공들여 완성했던, 어머니의 분신이자 당신의 모든 것인 휘안토스가 남김없이 무너지는 순간에요. 휘안토스야 말로 아버지가 남은 모든 것을 바쳐 만들어 낸 존재였습니다. 그런 그가 사라지자, 아버지에게 남은 것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어졌지 요. 사랑하는 어머니는 떠나셨고, 휘안토스는 죽었고, 암롯사 역시 더 이상 아버지의 땅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제 아버지는 남편도, 아 버지도, 왕도 아닌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 방황하 게 되실 겁니다." 사이러스의 눈에 불이 확 일었다. 아킨은 담담하게 그런 아버지의 눈 을 바라볼 뿐이었다. 두렵지 않았다, 이제는. "아버지가 모든 것을 물려주기 위해 그토록 정성을 다해 '만들어 놓 은' 후계자는 이제 죽었습니다. 아버지의 모든 것이었던 암롯사, 그 리고 그 암롯사를 이끌 가장 훌륭한 존재였던 휘안토스가 죽었으니, 이제 모든 것이 아버지의 손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는 어머니도, 저도 아무 소용없었습니다. 휘안토스를 택한 이유도 따 로 있었습니다..... 아버지께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것은 아버지가 암롯사의 왕이라는 것, 단 하나 뿐이었던 겁니다." 아킨은 두 손을 펼쳐 보였다. 햇살이 그 끝에서 부서졌다. "나루에의 복수는 그것이었습니다. 아버지에게서 암롯사를 빼앗아, 아 버지가 전혀 원하지 않는 누군가의 손에 '영원히' 들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보게 하는 것. 그랬기에 휘안토스가 저를 영원히 이기지 못하는 몸이 되자 저주는 풀렸던 겁니다. 또한, 그랬기에 그분은 자 크를 아버지의 후계자로 삼는 다면 저주를 풀어 준다고 하셨던 것입 니다. 그 선택 하나만으로도 아버지께 가장 소중한 존재는 사랑하는 아내와 사랑하는 아들들이 되는 것이고, 그 저주는 존재할 이유 조차 사라지게 되는 거니까요......" "......." "왜 제게 저주가 걸렸을까, 오는 내내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유는 너 무도 간단했습니다. 나루에 님은, 아버지가 가장 증오할 대상이자 누구보다 아버지를 증오할 대상, 모든 불행과 모든 불운을 떠넘길 마지막 증오의 대상이자 최후의 최후에는 결국 그의 모든 것을 가지게 될 그런 대상을 만든 것입니다." 사이러스의 눈이 어두워졌다. 이제 그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그리고 이 현실이 그에게 어떤 의미가 되는 지 분명히 깨달아 가고 있었다. 사이러스는 한숨을 내 쉬었다. 이마를 짚고, 맺힌 식은땀을 닦아내고, 그러다가 땀에 젖은 손으로 눈과 이마를 가렸다. "네 형을 그렇게 미워했느냐." "그래도 단 한번도 형이 죽기를 바랬던 적은 없습니다." 사이러스가 웃었다. "그리 증오한다면서 죽기는 바라지 않는다? 맙소사, 그 말이 가능하 다고 보느냐." "어머니는 형을 사랑했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구나. 나만큼이나 너를 증오했던 네 어미를 위해, 네 형이 죽지 않기를 바란다고?" "증오했지만, 그래도 사랑받기를 원했습니다." "어째서?" "증오했지만, 그래도 사랑했으니까요." 사이러스의 웃음이 더욱 비틀렸다. "그렇다면 네가 이렇게 능멸하는 나도 사랑한단 말이냐." "이제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용서하며 동정합니다. 가엾은 나의 아버지." 사이러스는 아들이 가장 잔인한 복수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속삭이는 말은 차디찼고, 그럼에도 '진심'이었기에 지독한 복수였다. 또한, 사이러스는 자신이 이 십여 년 전에 저질렀던 죄악 이, 냉혹하고 잔인하게 그 죄과를 거두어 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그 무엇으로도 되갚을 수도 되돌릴 수도 없게 되었다는 것 역시 깨달았다. 나와 보니 테시오스 왕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킨과 눈이 마주치자 테시오스는 잠시 아킨을 물끄러미 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아키로구나." "딱 알아보시는 군요. 분위기라도 틀린 겁니까?" 테시오스는 자신의 눈을 가리켰다. "아니, 쌍둥이라도 틀린 부분이 한두 군데 있지. 눈 색이 너는 더 진 하구나. 정말 진해." "이렇게 될 줄 알고 이 일을 꾸미신 겁니까?" 테시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각 자의 성격을 생각해 본다면, 당연히 그리 될 줄 알았지. 하지만 네 저주까지 같이 풀릴 줄은 몰랐구나." "저주의 마지막 고리가 휘안토스에게 걸려 있었으니까요." "네가 죽였느냐." "그렇습니다." 테시오스는 나른히 한숨을 내 쉬었다. 어린 조카의 죽음에, 그 역시 착잡해 하는 것이다. "....그래, 나 역시 그리 될 줄 알았으니까.......하지만 안타깝구 나. 가엾어." "이유를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그런 녀석은 납득하지 못하는 것들이 갑자기 쏟아져 버리면, 그 모든 것을 없애려 하다가 스스로 무너져 버리지. 네 어머니가 그러했듯 말 이다. 그리고..... 그리 되면 아마도 너부터 죽이려 할 거라 생각했고, 네가 고분고분 죽어줄 정도로 착한 아이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어머니- 아킨은 자신이 쓰게 웃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독하게 쓰다, 정말. "예전에.....휘안토스를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내가 저렇게 변한다면, 그와 똑같이 변한다면 어머니도, 아버지도, 휘안토스도 나를 사랑해 줄까....하고 말입니다. 하지만....이리 된 지금, 저를 사랑해 줄 그 들은 그 어디에도 없군요." ****************************************************************** 작가잡설: 다들 아키를 향한 러브포스가 강해요~ 단번에들 알아봅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64장 *************************************************************** [겨울성의 열쇠] 제305편 서쪽에서 부는 바람#4 **************************************************************** 롤레인은 탈로스의 탑을 둘러싼 숲을 걸어가며, 그녀를 방해하는 것 이 아무것도 없자 무엇이 어긋났는지 깨달았다. 숲은 예전처럼 온갖 방향으로 어그러져 침입자를 쫓아내는 것이 아니 라, 롤레인이 똑바로 그 심장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길을 터주고 있었다. 구불구불한 숲 속 오솔길이 끝없이 숲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고, 곳곳에 이끼 끼고 무너진 표석의 흔적이 있었다. 롤레인은 계속 걸어 나갔고, 마침내 거대한 바위가 있는 숲의 공터에 도달했다. 그 바위는 무너지고 깨어져, 그저 돌무더기가 되어 있었다. 무너진 틈바구니에, 언제 날아왔을지 모를 싹이 터 비죽이 튀어나와 있었다. 롤레인은 잠시 그것을 바라보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햇살은 계속 끝없이 롤레인을 따라 비추었다. 그리고 어느 샌가 방향이 점점 틀어지고 그림자의 방향도 바뀌어 가며 햇살에 따라 그림자들이 길게 늘어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롤레인은 낡은 탑에 도착했다. 스승이 멀쩡할 때 자주 들르던 곳이었고, 스승이 사라진 후한 번을 제하고는 찾아가지 '않았다'. 햇살이 비껴들며, 굴곡진 표면에 긴 그림자들이 늘어져 있었다. 길 고 노란 햇살이 스며들어, 탑의 서쪽 끄트머리는 금으로 된 선처럼 빛나고 있었다. 낡고 거칠어진 표면위로 구불구불 엉킨 덩굴이 늦은 저녁 바람에 흔들리며, 그 얽히고설킨 그림자도 흔들린다. 그렇게 잠시 탑을 지켜보던 롤레인은, 잡초 우거진 뜰을 지나 현관을 거 쳐 탑 안으로 들어갔다. 스승의 괴상한 취향 덕에 이상한 조상들이 불규칙하게 들어선 홀이 나타난다. 롤레인은 기둥을 지나, 오랜 추억이 어두운 곳마다 숨어 있는 그 홀을 헤치고 계단으로 올라섰다. 탑에 걸린 오랜 마법 덕에 계단은 늘 쓸고 닦은 듯 깨끗했다. 롤레인은 찬찬히 그 돌벽을 쓸어 올리며 서재로 향했다. 가장 자주, 또 오래 있곤 하던 서재였다. 그곳에서 롤레인과 탈로스는 서로를 미워하며 서로를 키워갔고, 그 미움을 풀기 위해서이거나 미움 자체 를 위해서 위로 위로 올라가기만 했다.... 이제 롤레인은 서재 문 앞에 섰다. 언제나 아침마다 밀어젖히던 서재의 문을, 이제 누군가의 저녁을 위 해 열고 있었다. 어두운 서재가 나타났다. 커튼은 모두 닫혀 있고, 램프 단 하나만이 켜져 그 동굴 속같은 어둠을 힘겹게 밝히고 있을 뿐이다. 롤레인은 문에서 똑바로 이어지는 그 빛을 향해 나아갔다. 빛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그 램프 옆에 놓인 작은 침대 위에 이제 시들고 늙 어가는 그녀의 동기- 탈로스가 있었다. 그의 연푸른 눈이 롤레인이 다가오자 희번뜩 움직였다. 롤레인은 발을 멈추고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앉을 곳이 없자 그저 서 있기로 했다. "무슨 짓을 하고 다닌거냐, 오거스트." "너를 방해하는 짓." 롤레인은 담담하게 말하고는 탈로스의 눈길이 향하는 얇은 수경을 바 라보았다. 수경의 물은 이제 거의 바닥나 있었고, 그 아래의 마법 진이 맨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악튤런에게 왜 그런 것을 가르쳐 줘서 스승님을 난처하게 한 거지?" "언제나 스승님, 스승님이로군. 이번에는 솔직히 말하라고, 롤레인. 그냥 나를 이기고 싶어서, 그저 나를 훼방 놓고 싶어서 그리 한 거 라고!" "맞아." 롤레인은 순순히 답했다. 탈로스가 신음을 삼켰다. "맞아, 너를 훼방 놓기 위해 온갖 수를 다 썼지. 네가 미워서, 그리고 네가 다시 그 성배에 접근하는 것을 용서할 수 없어서, 또 네가 그 것을 얻기라도 한다면 나 역시 질투에 미쳐 버릴 것 같아서, 그래서 아예 방해해 버렸어." "네 제자들만 고생하더군." "직접 나설 수는 없었어. 하지만 나는 충분히 준비 해 주었고, 루첼은 충분히 눈치도 있고 요령이 좋은 녀석이라 훌륭하게 훼방 놓아 주 었지. 하지만 너 역시 마찬가지야, 탈로스. 너 역시 악튤런을 통해 성배를 얻으려 했잖아." 그러며 롤레인은 수경 바닥의 마법진을 가리켰다. 탈로스가 큭큭 웃 었다. "그건 완벽하게 실패했지만 휘안토스를 죽이는 데는 성공했어. 그 녀 석은 내가 만든 덫으로 잘도 기어 들어갔지. 그 잘난 자존심, 그 잘난 잔혹함이 그를 파멸 시킨 거야! 그것만은 내가 이긴 거라고." 탈로스가 더 요란하게 웃었다. 킬킬 웃는 그의 얼굴 위로, 램프불은 선명한 빛과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저 눈만이 어둠 속 고양이처럼 희번뜩 희번뜩 깜빡인다. 롤레인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는 고개 를 돌렸다. 오랜 은신처인 서재, 그리고 이 서재의 식구들인 낡은 책들은 먼지와 함께 오후의 낮잠을 자듯 쌓여 있었다. 그렇게 주 변을 둘러 본 롤레인은 다시 탈로스를 보았다. 탈로스의 얼굴은 이 제 시들대로 시들었다. 푹 썩어 찌그러지듯, 그의 볼은 움푹 패여 있고 머리카락 역시 몇 가닥 남지 않았다. "그리고 악튤런을 너무 무시하지 말라고. 이번에는 내게 이용당하기 만 했다지만, 그래도 녀석은 만만하지는 않아. 네가 내 뒤를 쫓았듯, 악튤런은 너의 뒤를 쫓을 거야. 그에게 붙잡히지 않기 위해, 너는 겁먹은 토끼처럼 달려야 할 거다." "알아." 탈로스가 다시 어깨를 들척이며 웃었다. 큭큭--키득키득. 룰레인은 그런 탈로스의 하나하나를 묵묵히 지켜보았다. 늘 그렇듯 차갑고 엄격한 눈으로. "알고 있으니까 괜찮아." "잘난 척은." 그리고 탈로스는 숨을 깊이깊이 들이 마쉬었다. 그러나 끊어질 듯 이 어질 듯 불안하기만 했고, 롤레인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성문자 때문이겠지?" 탈로스는 숨만 쌕쌕 몰아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성문자의 마 법은 그만큼 생명을 잠식한다. 그 많은 마법의 결론은, 이렇게 탈 로스의 수명을 절반으로 줄여 놓는 것이었다. 스승을 유폐시킨 후 그 는 더욱 자신을 혹사시켰고 그 결과가 지금 오는 것이다. "사과하거나 용서하지는 않겠어." "나 역시 마찬가지다, 롤레인....... 후회는 하지 않아..... 그리고 내게 10년의 생이 더 주어진다 할 지라도, 나는 똑같이 할 거다." "어차피 용서란 스스로를 위한 것이니까." "맞아..... 그리고 후회하기에는, 우리는 너무도 많은 것을 바쳤지. 또 한, 괴로우면서도 행복했다.....삶은 그 덕에 뜨거웠고, 그랬기에 죽고 죽이려 하면서도 물러났지. 너의 삶의 목적이 나였듯, 나의 삶의 목적 역시 너였으니까." ".....화해하는 건 불가능하고." "그 누구를 위해서도 불가능하지. 내가 원하지 않아. 그것이 나의 즐 거움이자 너의 즐거움이었는데, 괴롭기에 그토록 달콤했는데, 대체 무엇으로 화해하겠나." "그래서 서로를 인정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겠지." "그래." 롤레인은 웃었다. 흐릿했지만, 그 안에는 그녀만의 만족이 담겨 있었 다. 탈로스는 자신도 같은 표정이리라 알고 있었다. "죽음을 지켜줄 필요는 없다, 롤레인. 나는 늘 그랬듯, 최후까지 나 혼자일 거다. 그리고 몇 년 뒤에, 아주 오랜 시간이 뒤에 시간 나면 찾아와라. 그 때에는 내 뼈가 너를 맞이할 테니." "그리 되면 이게 우리의 마지막이 되려나." "살아서는 마지막이지." "잘 가." "너 역시 잘 살아. 되도록 오래 오래, 정말 오래 오래 살아라...... 그 귀여운 제자 놈들이 꼬부랑 할머니를 만나러 올 때까지, 지팡이를 휘두르고 돋보기안경을 씰룩이면서도 잘 살아서 그 녀석들에게 꼬장 부리라고..." "그리 하겠어....." "그래, 그리 해..... 너는 네 모든 것을 누리고 살아. 그 잘난 자존심은 좀 접고. 그리 잘난 척 해 봐야, 아무도 안 돌봐준다고. 약한 척, 힘든 척 좀 해야 다들 자기가 무언가 해 줄 수 있을 줄 알고 돌 아오지." "그리 하겠어." "네가 참 잘도 그리 하겠다. 아마도, 죽기 전까지 뻣뻣하게 자존심 세 우다 죽을 녀석이." 롤레인은 웃었고, 웃으며 돌아섰다. 그러나 돌아서는 순간에 어쩔 수 없이 눈물이 나왔다. 흠뻑 흐르지는 않았지만, 눈시울에 뜨겁게 고여 얼어붙었던 무언가를 녹이고 있었다. 오랜 벽, 너무나 오래된 벽, 그러나 무너지지 않는 벽- 그 벽 앞에서 롤레인은 돌아서고 있는 것이다. 무너지지도, 열리지도 않았고, 영원히 그럴 그 벽 앞에서. 롤레인은 탑을 나섰다. 이제 긴 오후의 햇살이 쏟아지고, 푸르렀던 하늘은 정말 새파랗게 잠 겨서 저 먼 서편의 하늘은 벌써 발그스레하게 불타고 있었다. 겨울 숲 위로 봄의 햇볕이 내리쪼이면, 숲의 나무들은 긴 겨울을 잊 고 새로운 한해를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봄이 기울고 여름이 되어도 깨어나지 않는 나무가 있다. 분명 전해에는 울창하게 우거지고 불타는 단풍잎을 떨구어 냈건만, 봄이 되어도 깨어나지 않는 나무가. 모든 나무가 봄을 맞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대지가 녹고, 햇살이 따사로워지고, 나무에는 봄물이 차 오르건만, 그렇게 작고 예쁜 시 냇물들이 흐르고 싹이 움트고 꽃이 피건만, 지난 가을만을 기억하고 사라지는 나무가 있다. 아니, 어쩌면 기억이 잘못 된 것인지도 모른 다. 그 나무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고 신경 쓰지도 않았던 것일 지도 모른다. 그 나무가 최후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소슬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다음 해의 봄이 아무 의미가 없을 거라 는 걸 알아도, 사람들은 아무도 그저 그가 예전처럼 그럴 거라고만 생각하고는 무관심하게 덮어 버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겨울에 죽은 나무는 봄이 되어야 알 수 있는 법이고, 사람들 은 봄이 기울 때까지 그 나무가 사라진 것을 모른다. 켈브리안은 테라스에 앉아 봄볕 가득 드는 정원을 바라보며 오늘이 얼마나 지났나를 생각했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짧게 느껴지지도 않 는 시간들이었다. 궁에서는 아직 피비린내가 완전히 씻겨 내려가지는 않았고, 처리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그럼에도 켈브리안은 하루하루 소식을 기다렸다. 제국으로부터는 아무런 소식도 전해지지 않았지만, 적어 도 델 카타롯사로부터 더 이상의 혼담은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날도 아늑해져서 창문도 활짝 열어 놓은 어느 날 켈브리안은 커튼에 매달려 있는 풍뎅이를 발견했다. 그것은 마치 장식처럼 꿈쩍도 하지 않고 매달려 있었고, 켈브리안이 다가오자 날개를 파다닥 거릴 뿐 도망치지 않았다. 켈브리안은 그 것을 떼어 손 등에 얹어 놓았다. 참으로 오랜 만에 찾아온 따스한 안도가 그녀의 어깨에 머물고 있었고, 그런 그녀의 눈에는 투명한 눈 물이 맺혀 있었다. **************************************************************** 작가잡설: 어떻게 보면 아키 쪽이 오히려 행운아같다는 생각도 듭니 다. 둘 다,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굴레에 갇혀 있기는 했지만, 좌절의 순간에, 도태의 순간에, 아키 쪽은 언제나 발전과 진보를 요구하 는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 휘안은 정 반대로 가만히 있기를, 늘 해 오던 대로 해오기를 요구하는 사람들만이 있었죠. 아킨이 필사적이었듯, 사실 휘안도 필사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몇 분 알고 대부분 예상하셨듯이, 겨울성의 열쇠는 내일이나 내일 모레 완전히 끝납니다. ^^ p.s 오타 수정;;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65장 **************************************************************** [겨울성의 열쇠] 제65장 궤적의 시작 제306편 궤적의 시작#1 ***************************************************************** 봄이 끝나고 여름이 시작되고, 그러며 가을 문턱에 접어들었다. 늘 그렇듯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관심과 무관심과 열광과 실망과 절망과 희망 속에서, 하루해가 저물고 달이 뜨고 별이 빛나고, 그 러다 동편 하늘이 밝아 오며 새로운 날이 새로이 시작된다. 시작하는 것은 느렸지만 마무리하기는 바쁜 한해였다. 봄의 전쟁은 암롯사와 델 카타롯사의 휴전으로 끝났고, 로메르드의 반정은 왕의 복권과 섭정의 교체로 끝났으며, 대회의는 늘 그렇듯 각 나라의 대표가 돌아가자 아무 의미도 없어졌다. 황제는 다시 놀 고먹고 늙어가는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새로운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악명과 위명을 동시에 떨치던 암롯사 의 왕 사이러스는 돌아왔으나 칩거해 버렸다. 그는 예전의 그의 어 머니가 그러했듯 갇힌 사자처럼 우리 안에서 늙어가게 되었고, 사 람들은 위대했던 그의 과거를 아직은 잘 기억하고 있기에 그를 동정했 다. 그의 젊고 아름다운 아들은 왕이 될 예정이었으나 아버지를 돌 보지는 않았다. 아니, 물질 적인 것은 별로 아쉬울 것 없이 대했으 나 그 뿐이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무관심했고, 아버지는 아들을 외면하려 했다. 그들 관계는 차갑고 예의바른 무관심으로 단단하게 정 립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무관심한 아들은, 애당초 아버지 따위는 없었다는 듯 혼자서 모든 것을 처리해 나갔고 사람들은 단 한 달 만에 예전의 왕의 존재를 잊어버리기 시작했다. 기이한 일이기도 했 다. 남의 손에서 남의 손으로 왕위가 넘어가도, 이 정도로 무관심하 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아들이, 그것도 십 몇 년 간이나 착실하게 후계자로 키운 아들이 물려받았는데도 분위기가 이런 것 은 정말 기이한 일인 것이다. 새로운 왕이 될 젊은 왕자는, 델 카타롯사와의 일이 충분한 배상금과 함께 마무리 되자 황제에게 사신을 보냈다. 황제는 지난 도움에 감 사하며 그에게 '임명장'을 그날로 전해 주었고, 황제의 금필로 서명 된 찬란한 문서는 며칠 뒤에 암롯사에 전달되었다. 왕자는 곧바로 대관식을 준비시켰다. 사람들은 일이 예정대로 차분히 진행된다고 생각했지만, 철저하게 배제된 선왕을 흘끔거리며 고개를 갸우뚱 하기는 했다. 대관식이 이주일 앞으로 다가오자, 왕은 각 나라로 서신을 보냈다. 예의바른 인사로 시작되는 서신을 받은 각 나라의 왕들은 그 친족들을 앞세운 축하 사절을 보내기 시작했다. 에크롯사에도 암롯사의 왕자가 보낸 서신은 도착했다. 그러나 암롯사 의 왕자는 다른 나라와는 다른 한 줄을 덧붙여 보냈다. 에크롯사의 여왕은 그 마지막 줄에 대해 고민해야 했지만, 그 한 줄과 관련된 사람과 암롯사 왕자와의 악연을 잘 알기에 당사자의 의견을 전적 으로 존중하기로 작정했다. 그는 여왕으로부터 그 말을 전해 듣게 되자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여왕이 다른 사람을 머리에 떠 올릴 무렵 그는 고개를 더 깊이 숙이며 답했다. "다녀오겠습니다, 폐하." "싫다면 가지 않아도 좋아, 포틀러스 경." "아닙니다. 가야 합니다. 그와 저의 악연은 지독하지만, 그래도 피하 지는 않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폐하." 여왕은 그를 측은해 하면서도, 새로 즉위하는 왕을 언짢게 하게 하지 않게 되어 안심하기는 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소반도 로메르드의 일을 신경 쓰는데 전력을 다 하기로 했다. 자택으로 돌아온 세르네긴을 가장 먼저 반긴 것은 유제니아였다. 간 신히 목덜미를 넘기는 머리카락을 뒤로 묶고 열일곱이 되어 버린 소녀, 어린 나이에 지나치게 혹독한 일을 당해 갑자기 어른이 되어 버린 듯한 소녀는 그래도 미소와 애정을 잃지 않고 그를 반겼다. 세르네긴은 그녀의 볼에 키스하고는 물었다. "슈마허 님은 어디 가셨니." "안에서 논데요." 그렇게 말하고는, 유제니아는 그녀의 뒤에서 노려보는 슈마허를 가리 켰다. 슈마허는 너 잘났다, 잘났어 어쩌고 하고 말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 다. 유제니아는 그에게 달려가 "맨 날 빈둥거리니까, 그렇죠."하고 속삭이고는 슈마허가 쥐어박기도 전에 냉큼 사라져 버렸다. "저 녀석도 나를 백수라고 놀리네." "이제 그만 돌아오십시오. 벌써 한달 째 아닙니까." "뭐, 벌어 놓은 돈도 많은데 한 1년 노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이 봐 세냐, 이래 뵈도 난 서른일곱이라고. 좀 쉰다고 뭐라 할 사람 없어." "늙었다고 보기는 곤란한 연세 아닙니까?" "웬 일이냐, 네가. 밤낮 나이 먹었다고 구박이더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켈브리안 공주 일이라면 패스다." "그게 아닙니다. 여왕폐하께, 암롯사에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축하 사절을 보내는데, 저도 같이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슈마허의 얼굴이 단번에 어두워졌다. 그의 눈길은, 그러지 말아야 한 다는 것을 알면서도 유제니아가 사라진 방향을 쫓고 있었다. 그 이 유를 너무도 잘 아는 세르네긴의 눈도 어두워졌다. "갈 생각입니다." "미쳤냐! 그 자식이 유즈에게 어떤 짓을 했는데! 저 어린 것을, 그 자 식은 창녀 굴리듯 굴렸다고! 네가 그곳으로 가면, 유즈에게 또 무슨 짓을 할지 누가 아냐." ".....같이 갈 겁니다. 어디에 가든, 저는 유즈 옆을 지켜 줄 겁니다. 그가.....비록 결코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을 지라도 말입니다." "안 돼, 내가 허락 못한다. 그런 일을 당한 곳으로 유즈를 데리고 간 다고? 맙소사! 너 이번에는 제대로 미쳤냐?" "아닙니다, 슈마허 님. 이번에는 제대로 지킬 테고, 그 휘안토스에게 똑똑히 보여줄 겁니다. 그녀를 지켜줄 사람은 이제 저 하나밖에 없 지만, 그래도 둘 일 때보다 더 힘들 거라고." 슈마허의 눈이 다시 흐려졌다. "너무 확신하지는 말라고, 세르네긴." "......확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벌써 반년 째 돌아오지 않고 소식 도 없고, 그를 찾으러 갔던 휘안토스는 저리 멀쩡히 돌아왔습니다. 또, 이제는 뻔뻔하게 저를 부르려 하고 있습니다. 결론은 단 하 나밖에는 없습니다..... 그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게 된 겁니다." 잦아드는 그의 목소리 속에서, 슈마허는 분명 죄책감을 느낄 수 있었 다. 결국 슈마허는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아 주었다. 베넬리아로 돌아온 루첼은 바빠서 돌아버린다는 말을 오는 즉시 절절 히 깨달아 버렸다. 고작 몇 개월 떠나 있었던 것뿐인데, 롤레인은 때는 이 때라는 듯이 연구과제들을 쏟아 부어댔다. 관련 서적을 찾기 위해 베넬리아 도 서관을 샅샅이 뒤져도 결과가 울적하자, 루첼은 대체 누가 그런 미 친 짓을 했느냐고 물었고, 롤레인은 '성공한다면 네가 최초다.' 라 는 무시무시한 말을 했다. 어차피 스승에게 상식수준의 무언가를 기대해 본 적도 없던 루첼이지 만, 그 초월의 범위가 너무나 아득하며 피해막심하자 당장에 짐 싸 들고 로메르드로 가고 싶어졌다. 그러나 그렇다고 정말 그리 하자니 뒷감당 역시 아득했기에, 비일어어머어그으을 어쩌고 하며 스승이 알아듣지 못하게 시도 때도 없이 욕을 퍼부어 대면서 분주함의 늪 으로 빠져 드는 것 박에는 별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가을이 넘어 서는 즈음에, 루첼이 일에 거의 파묻혀서 시름시름 앓아 가고 있을 때, 실비가 악몽 같은 커피를 들고 와서는 서재의 책상에 놓았다. 루첼은 먹물처럼 시커먼 커피를 슬쩍 보고는, 어떻게 마시는 척 해야 그녀가 속아 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바, 바빠요?" 당연히 바빴지만 루첼은 늘 그렇듯 실비가 듣기 좋을 말을 했다. "아니. 별로 안 바빠." 누구라도 안 믿을 당연한 사실이었건만, 세상의 단 하나 실비만은 그 말을 믿었다. "저, 저기 그럼......마, 말 할게 있는데에에에......" 그리고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우물쭈물 허둥지둥 이다. 루첼은 여전 히 웃는 얼굴로 그녀의 말을 기다렸고, 그런 루첼을 흘끔 보고는 실비는 얼굴이 더욱 새빨개진 채 간신히 말했다. "저, 저기...저.........으이...시이...인 했어요." "???" 저기- 이후로는 루첼로서는 외계어 비슷하게 들릴 뿐이다. 루첼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으시?" "으....이.....임....스이이인요...." 그리고 이제 알아들었지요? 하고 배꼼 쳐다본다. 루첼로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는데, 그것은 정말 못 알아들어서였 다. 한 번 더 말하라고 하면 '아아아아앙!' 하고 도망쳐 버릴 듯해서, 이쯤에서 알아들은 척 해야 하는데 좋아해야 할 일인지 슬퍼해야 할 일인지 전혀 몰라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실비의 얼굴이 점점 울상이 되어 가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어이, 임신 했다잖아. 그런데 남편 되는 놈이 그렇게 뚱하니 있으면 어쩌냐." 루첼은 정말 고꾸라져 버릴 뻔 했다. "언제부터 거기 계셨습니까---!" 등 뒤의 책상 아래에서 롤레인이 기어 나오고 있었다. "어제 저녁부터. 피곤해서 그냥 여기서 잠들어 버렸지." "그런 곳에서 주무시지 말라고 몇 번을 말씀 드렸습니까. 맙소사, 스 승님도 이제 마흔이 되시는데 몸 관리를 그렇게 하시면 곤란하잖 아요." 그녀는 책상을 더듬어 안경을 찾아 쓰고는, 루첼과 실비를 번갈아 본 후에 말했다. "너, 내가 무슨 말 했는지 알아듣기는 들었냐?" "그건 당연히 알아들었습니다. 실비가 임.............네? 임신?" 루첼은 설마하니 해서 실비를 돌아보았고, 실비는 맹렬히 고개를 끄 덕였다. 롤레인이 안경을 쓱 밀어 올리고는 말했다. "뭘 그렇게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날 리가 없는 데요, 라는 식으로 보 고 있어? 그러고도 임신이 안 되면 둘 중 하나가 심각하게 문제 있는 거라고, 루첼." 루첼은 이번에는 롤레인을 바라보았다. 롤레인이 천장을 가리키며 말 했다. "미안하지만 너희들 침실이 바로 요기 위야. 밤새고 있으면, 밤새도록 들리더라. 참, 아버지도 부러워하시더군. '그란셔스 군은 젊어서 그 런지 정력도 좋군.' 하고 말이야." 루첼과 실비의 얼굴이 동시에 시뻘개졌다. 잠시 뒤, 너무해요, 어쩌고 하는 병아리 흐느낌 비슷한 소리가 도망치는 실비를 따라 아득한 복도를 굽이 굽이치며 들려온다. 그러나 실비뿐만 아니라 루첼마저 도 "와아아아!" 하고 환호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롤레인이 말했다. "어쨌든 축하한다. 이제 애가 둘이네?" 그리고 롤레인은 돌이 되어 버린 루첼의 어깨를 팡팡 쳐 주었다. 루 첼은 진심으로 짐 싸들고 로메르드로 돌아가 버리고 싶어졌다. 첸과 제임이 이토록 그리워지는 순간이 오리라고는, 정말 그도 몰랐다. **************************************************************** 작가잡설: 아마도 한 10년 쯤 뒤에는, 루첼의 제자가 비슷한 짓을 하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군요.................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65장 ***************************************************************** [겨울성의 열쇠] 제307편 궤적의 시작#2 ****************************************************************** 각 나라에서 보낸 사절이 하나 둘 도착하기 시작했다. 아킨은 그들이 올 때마다 직접 그들을 맞이했고, 사절들은 새로 즉위 할 암롯사의 왕을 잘 살피고는 예의바르게, 때로는 가식적으로, 때 로는 진심으로 웃으며 축복해 주었다. 그리고 대공국은 새롭고 젊은 주인에게, 반은 신뢰를 나머지 반은 불안을 담은 눈길을 보냈다. 그가 예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많은 이들이 눈치 챘지만, 그럼에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해 말하지는 않았다. 간혹 입 가벼운 이가 그런 말 을 하면 아킨은 웃을 뿐이었다. "경계의 숲에서 절반을 놓고 왔으니까요." 그저, 그렇게 답하면 사람들은 그 말이 농담이라 생각하고는 웃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할 때마다 아킨은 그 절반을 놓고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그의 그림자 안에 살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은, 아직도 당장에 닥쳐 올 듯 생생하기만 했다. 아킨은 그 순간이 영원히 그의 등 뒤에 바짝 붙어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 거울 속에서, 그를 비추는 깊은 샘 속에서, 때로는 그림자 속에서, 때로는 눈 감은 어둠 속에서, 아킨은 언제라도 그와 마주할 수 있었다. 그럴 때면 아킨은 그를 외면하지 않았다. 가슴 속에 치솟는 감정이 무엇이든 거부하지 않고 마주보았다. 가둘 필요도, 거부할 필요도, 외면할 필요도 없었다. 그 모든 것은 지금의 아킨이 가지고 있는 것이고,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랬기에 그 그림 자는 아킨의 본질을 먹지는 못했다. 그저 주변을 배회하며 아킨이 무슨 일을 했는지 끝없이 상기시켜 줄 뿐이다. 에크롯사의 사절이 도착한 날, 아킨은 축하 사절의 대표인 피올 공주 와 그 수행기사들을 맞이했다. 피올 공주의 에크롯사 와는 지난 일로 도움을 주고받았기에, 분위기는 꽤나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아킨 은 그 수행기사들 중에 서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는 기사를 어렵 잖게 골라 낼 수 있었다. 아킨은 그를 마주 보지 않았다. 일부러 피 하며, 다른 사람들과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외면하고 있어도 아킨은 그 날카로운 눈초리를 느낄 수 있었다. 그 증오의 깊이가 어느 정도 인지, 너무나 잘 알 것 같다. 에크롯사의 사절이 돌아가자, 아킨은 말을 준비시켜 왕의 숲으로 향 했다. 누구를 찾으려는 건 아니었다. 자켄은 언제라도 들릴 테지만, 지금은 어둠 숲에 머물고 있다. 온다면 분명 연락을 할 것이고, 연락하지 않아도 그가 가까이 오면 아킨은 느낄 수 있었다. 가을 숲으로 햇살이 비껴들고, 노랗게 물든 보석 같은 숲은 눈부시도 록 찬란했다. 숲 사이를 굽이 굽이 흐르는 냇물 위로 햇살이 부서져, 주변 바위와 나무 둥치에 아름다운 물 얼룩을 그렸다. 아킨은 숲 속의 산책로로 말을 몰며 생각했다. 늪의 성으로 가, 그곳에 머물 고 있는 메리엔을 찾아갈까..... 그녀는 처음부터 아킨을 알아보았다. 검은 머리에 보랏빛 눈이었건만, 처음에는 흠칫 놀랐다가는 결국 에는 알아보고 그를 안았다. "맙소사, 아킨토스 님." 목소리는 기쁨에 차서 떨리고 있었건만, 아킨은 그 기쁨에 오히려 슬 퍼졌다. 생각나 버린다. 그토록 사랑받기를 바랬고, 그토록 이 모습이 되어 모든 이들이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기를 바랬다. 그 러나 지금, 이 모습이 되어도 그를 돌아봐 줄 사람은 없다. 그토록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던 모든 이들은 떠나고 떠나보내고 외면 하고 있다. 결국 아킨은 늪의 성에 가지는 않기로 했다. 메리엔에게 달래 달라고 매달릴 수 없는 일이다. 휘안토스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으니, 그의 죄 역시 대신하는 것이 아킨의 의무였다. 세르네긴은 그를 미워할 것이고, 유제니아는 당연히 그를 두려워할 것이다. 아아, 그래. 가끔 꿈을 꾼다. 천둥치고 벼락내리는 날, 세상이 무시무 시하게 울부짖으며 몸을 뒤흔들었다. 손에 잡혀 발버둥치는 소녀, 비명이 울리고, 울음이 터지고, 저주와 흐느낌이 터진다. 잠에서 깨어나면 아킨은 두 손을 보고, 텅 빈 옆자리를 보며 또 한번 그의 그림자를 겹쳐보았다. 그리고 그 그림자의 검고 텅 빈 속내를 마주하게 되고, 결코 채워질 날 없는 공허를 발견한다. 자신 역시 그 상처에 아직도 피 흘리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면 외로워진다. 다정하고 그리운 사람들을 생각하게 되고, 그중 누군가는 계속 옆에 머물러 주기를 바라게 된다. 손을 잡아주고, 입맞춰주며 내가 있으니까 괜찮다고 속삭여 줄 사람이 있기를 바란다. 아킨은 어느새 사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늘어난 묘비는 없었지만, 묻 힌 사람은 하나 더 늘었다. 돌아온 아킨은 그곳에 휘안토스를 직접 묻었다. 그가 직접 알르간드 의 땅에서 화장한 형의 조각을 아킨은 자신의 손으로 젖은 땅을 파고 묻고 기도했다. 묘비를 세워 줄 수 없었기에, 어머니의 무덤 옆에 묻고 그 땅에 입 맞추며 그를 위한 장례, 아킨 혼자만이 집전하는 장례를 치러 주었다. 아킨의 무덤이 어디인지 아무도 모르게 되듯 그 역시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그래도 아킨 만은 이 곳을 찾아 그를 바라볼 것이다. 휘안토스가 이 곳에 있듯, 자신의 일부 역시 그곳에 있다는 것을 잘 알기에. 아킨은 어머니의 묘비에 꽃을 놓고, 그 옆자리에도 꽃을 놓았다. 오 는 길에 꺾어온 화사한 가을 꽃은 선연한 햇살에 빛나며 바람에 흔들렸다. 아킨은 묘비에 입 맞추고, 그 옆의 흙 위에 손바닥을 대고 는 일어났다. 둘 다, 살아생전에 그랬듯 무덤역시 차갑기만 하다. 그리고 아킨은 묘지 입구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과 만나게 되었 다. 키가 크고 체구가 장대한 그는 아킨을 지켜보고 있다가 아킨이 돌아 보자 두 팔을 벌렸다. 아킨은 말없이 달려가 그를 안았다. 울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서러운 슬픔- 외로움을 위안받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헤어질 때 그랬듯, 그는 여전히 따뜻했다. "잘 지내고 있냐." "크게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엄청나게 좋은 것도 아닙니다. 그냥 그래요." "아직 스물도 안 된 녀석이, 천살 먹은 노인네 앞에서 무슨 말을 하 는 거냐. 늘 즐겁기를 바래라." 그렇게 말하곤 베이나트는 빙그레 웃었다. "나머지 두 분 다 잘 지내십니까?" "천년 동안 지내왔듯, 지금 역시 마찬가지지." 아킨은 팔을 흔들어 보였다. "이건 언제 찾아가실 겁니까?" "성질도 급하긴. 이백년 전에 우리가 한 농담을 끝내고 난 후에나 할 생각이다. 어쨌건, 그 농담은 우리의 분노가 부른 실수였으니까." 아킨은 그가 생각보다 훨씬 나중에 떠난다는 것을 알게 되자 괜스레 안심이 되었다. 힘 자체에 대한 것 보다는, 그들이 떠난다는 것이 더 서운했으니 말이다. "저기, 좀 더 머물다 가시겠나요? 사흘 뒤면.....저는 좀 중요하고 바 쁜 사람이 됩니다." 베이나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축하해 줘야 하는 거냐." "축하할 일이 되도록 노력할 생각입니다.......어찌 되었든, 제가 형을 죽인 이상 제가 맡아야 합니다." "믿으마." 그 말이 아킨은 고마웠고 기뻤다. "아, 참....지이가 너에게 전하라는 말이 있었다." "말씀하십시오." "지난번에 네가 수경을 통해 본 것 말이다, 그것에 대한 것이란 다.......이렇게 말하더구나. '보이는 것이 진실의 모든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무슨....말씀이십니까?" "말 그대로란다.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 아니란다. 반짝이는 그 순간, 그 뒤편에 네가 보지 못한 많은 것들이 있다는 뜻이야" "그 분은 여전히 심술궂군요. 도무지 알아듣게 말씀해 주시질 않아 요." "나야 천년 넘게 겪은 심술이니 새삼스럽지도 않아. 하지만 지에나가 덧붙이기를, 나와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그 말뜻을 알게 될 거라고 하더구나." 그러나 지금의 아킨은 그 말뜻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베이나트 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어쨌건 그 조금 중요하고 바쁜 사람이 될 때까지는 이 근처에 있겠 다. 끝까지 지켜 봐 주고, 네 미래가 빛나기를 우리의 신에게 빌어 주마." "지금으로도 충분합니다." "충분하다면 서운하단다. 더 이상 해 줄 일이 없다는 것처럼 들리니 까." 아킨은 웃었다. 말만으로도 기쁘고, 그것은 베이나트가 언제나 진심 으로 말한다는 것을 알기에 기쁜 것이다. 베이나트와 헤어져, 아킨은 늪의 성에 들르지 않고 바로 궁으로 향했 다. 햇살은 점점 더 노랗게 익어가기 시작했고, 바람도 제법 쌀쌀 하다. 그리고 성으로 난 오솔길로 접어들어, 마침내 숲을 벗어나 궁 에 들어섰다. 숲 언저리를 지키는 경비병들이 아킨을 맞이했다. 아 킨은 말에서 내려, 달려 나온 시종 하나의 손에 말을 맡기고는 성 으로 들어왔다. 가을에 무르익은 궁의 정원은, 온통 붉고 노랗고 화사하다. 그 사이 사이를 흐르는 작은 운하들은 하늘을 파랗게 담고, 진한 얼룩인 듯 그들이 비추는 단풍에 물든 나무들을 담고 있다. 그리고 누군가가 달려 나오고 있었다. 푸른 옷자락에, 에크롯사 여인이라면 누구나 쓰는 얇고 투명한 베일 이 날개처럼 펄럭였다. 검은 머리카락은 성큼 잘려나가 있었건만, 아킨은 그녀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유제니아였다. 유제니아는 멀찍이서 걸음을 멈추더니, 결심한 듯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바로 앞에 서게 되자, 창백해지고 떨리는 어깨를 다스리며 아킨을 마주보았다. 이런 눈빛은 처음이었다. 이리도 서늘한 눈빛의 유제니아를 보는 것 은. 아킨은 다시 한번, 몇 번이나 꾸었던 악몽을 생각할 수밖에 없 었다. 어둠 속에서 흔들리던 공포에 찬 눈동자 역시 기억나지 않으래 야 않을 수 없었다. 그랬기에, 아킨은 가슴 한쪽이 젖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상처에 소금을 뿌리듯, 그 부분이 욱신거리기 시작한다. "아키는.....어떻게 되었지요?" 목소리는 떨렸지만, 눈빛은 여전히 서늘했다. 나야- 아킨은 그리 속삭여 주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의 그로써는 무엇이 옳은 지 결정할 수가 없었기에, 그는 그저 침묵하는 것을 택했다. 유제니아는 기다렸지만, 아킨이 아무 말도 없자 무언가를 짐작한 듯 눈이 흐려졌다. 그녀의 눈길이 아래로 떨구어졌다.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주륵 흘러내리고, 그 눈 가득 슬픔이 차오른다. 아킨은 그녀의 마지막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할게, 기억할게, 기 억할게..... 그리고 그 말을 하는 순간에 그녀의 선택 역시 정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아킨 역시 그 때 모든 것을 선택했다. 아니, 그녀를 구하러 가기 전에, 세르네긴의 마지막 말을 들은 직후에 아 킨은 선택을 마쳤다. 추억은 추억이고, 추억으로 간직되는 것은 그저 벽장 속의 소중한 상 자와 액자 안이다. 간혹 꺼내어 보며 미소 짓고 눈물지을 테지만, 그럼에도 그 추억은 그저 추억일 뿐. 유제니아는 베일을 움켜잡았다. 툭, 하고 머리를 고정했던 핀이 떨어 졌다. 베일이 바람에 휘날려 떨어졌고, 힘이 빠진 그녀의 손을 떠 나버린다. 아킨은 베일을 집어 들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그녀의 눈 에 그림자가 번지더니 뒤로 움찔 물러났다. 아킨은 베일을 두 손으로 잡고 그녀의 머리를 감싸 주었다. 베일이 은으로 짠 바람처럼 흘러 유제니아의 까만 머리와 하얀 목덜미와 푸른 소매를 감쌌다. 유제니아의 눈이 커졌다. 그러나 아킨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 맞 추어 주지도 않았고, 안아주지도 않았고, 잘 지냈니- 인사도 건네지 않았다. 그의 손끝에서 베일은 떠났다. 추억이 잠기었듯, 그 추억 의 아픔위에도 치유의 붕대가 덮였다. 그리고 그 달콤함 역시 사라 져 간다. 아킨은 그녀를 지나쳐 걸어갔다. 햇살은 더욱 눈부시고, 하늘은 너무 나 높다. "아키." 아킨은 고개를 돌렸다. 유제니아는 베일을 두 손으로 쥐고 그를 바라 보고 있었고, 그 눈에 이제는 놀라움과 기쁨이 담겨있었다. 아킨은 빙그레 웃었다. 진심으로 기뻐하고, 진심으로 행복해 하는 미 소이리라. 유제니아가 입술 위에 떨리는 손을 얹었다. 그리고 햇살에, 그녀의 손에 끼워진 반지가 반짝였다.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 아니란다. 반짝이는 그 순간, 그 뒤편에 네가 보지 못한 많은 것들이 있으니까. 아킨은 그 말이 무엇인지 드디어 깨달았다. 또한, 조금만 시간이 지나 그녀가 웃음을 찾았을 때, 세르네긴 마저 도 이 비밀을 알게 되는 어느 날에, 그녀와 함께 이 궁의 정원을 내려다보며 웃을 수 있을 거라는 것도 깨달았다. 그녀를 부드럽게 바라볼 것이라는 것을, 그녀 역시 기쁘게 그를 마주하며 반가워 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아킨도 추억의 문, 가슴 한쪽의 그 문을 완전히 닫고 열쇠로 잠 갔다. 어두운 숲에서 시작되어,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상처와 달콤 함이 거듭 밀려들어갔던 그 추억의 문을. 그리고 오늘 저녁, 저 먼 바다 건너에서 그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에게 마지막 편지를 쓸 것이다. 이제 그가 행복하게 해 줄 사람을 위해, 닫혀 있던 이 심장의 문을 열어줄 유일한 사람을 위해, 따사로운 대지위에 싹을 틔우고 가장 향기롭고 눈부신 꽃을 피워줄, 그런 귀한 씨앗처럼 소중한 사람을 위해 마지막 편지를 쓸 것이다. 그 편지가 도착하고, 그녀가 두 팔을 벌려 주면, 아킨은 오랫동안 미루어 왔던 약속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편지를 보낼 필 요도 없이, 둘은 영원히 서로의 곁에 있게 될 것이다. 그는 그녀를 지켜줄 것이고, 그녀는 그의 외로운 가슴을 안아줄 것이다. 켈브리안- 그리고 그 편지는 그렇게 시작될 것이다. ******************************************************************* 작가잡설: 에필 하나 남았습니다. 거 봐요. 나 믿지 말라고 했잖아요. 왜 다들 '해피엔딩이 아니다!' 라고 믿어서 이렇게 배신을 당하세요. 훗- 겨울키는 이렇게 해피 엔딩이었던 것입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최종장 *************************************************************** [겨울성의 열쇠] 최종장 - 에필로그 *************************************************************** 어느 해 황제가 즉위했지만, 그 황제의 즉위에 신경 쓰는 사람은 별 반 없었다. 황제는 몇 백년간 그러하듯 황궁의 주인이자, 황도의 중심에 있는 옥좌를 채우는 것 이상의 의미도 힘도 없었으니 말이다. 사람들은 오히려 대공국 사이에 일어난 몇 가지 일들에만 주목했고, 그 일들은 꽤 재미도 있고 흥미도 돌고 영향력도 크기에 많이도 회 자되었다. 델 카타롯사에서는 반란이 일어났고, 왕은 그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한 해를 허비하고 숙청을 위해 그 다음 해를 허비했다. 그러나 그 덕에 공국 대부분의 영지는 왕의 것이 되었고, 왕은 그곳을 누군가에 게 하사하는 대신 그 가신들을 보내어 다스리게 했다. 왕국 안에서 는 내내 피가 튀었고, 왕의 발아래에서는 늘 피가 고여 있었다. 얼마 뒤에 왕은 결혼했지만, 왕비와의 사이는 극악이었다. 간신히 후 계자는 생겼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사람들은 간혹 수군대고는 한다. 델 카타롯사의 왕비는 지금 왕좌 옆에 있는 여자가 아니라 왕 의 여동생이라고. 반란 덕에 골치 좀 아팠던 것은 암롯사도 마찬가지였다. 델 카타롯사 와의 다른 점은, 델 카타롯사는 참으로 자주적인 반란이었지만 암 롯사의 경우에는 에크롯사 쪽의 사주였다는 것이다. 왕은 반란을 진압하자, 내통죄를 덧씌워 카톤 케이 백작을 처리했다. 테시오스 왕자에게 혐의가 잔뜩 가기는 했지만, 왕은 그에 관한한 무죄를 선언 했다. 에크롯사와 암롯사는, 오히려 예전의 델 카타롯사와 암롯사 사이만큼이나 불편해졌다. 편안하고 안락하고 게으르게 살던 황제가 느닷없이 승하한 것은 그가 즉위한 지 십년 쯤 지난 뒤였다. 죽음의 원인에 대한 추측은 분분 했지만, 아무도 그것이 정답이라 확신할 수는 없었다. 황제와 가장 가까웠던 이들은 황제의 일가의 누군가가 그 범인이라 말하고는 했지만, 그들은 그들이 아는 사람들이 모일 때나 그런 이야기를 할 뿐 다른 경우에는 아예 겁을 먹은 듯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어쨌건 황제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황위를 건네줄 일가친척역시 없었 다. 황손은 끝없이 줄어, 그 즈음에는 아예 없어졌기 때문이다. 황 제의 장례식은 준비되었지만, 그 다음의 즉위식은 도저히 준비될 수 없었다. 대회의는 소집되었으나, 그 대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도착 하는 대표는 없었다. 각 나라마다, 대체 누구를 황제로 지목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에크롯사, 암롯사, 델 카타롯사, 카를롯사의 사이가 다들 틀어져 있었기에 합의를 하는 것도 힘들었다. 그러나 천년만년 국장을 미룰 수도 없는 노릇이라, 각 나라는 대회의의 참석을 미룬 채 장례식에 참석하기로 했다. 제도로 가는 길목의 어느 여관에 세 여행자가 찾아온 것은 그렇게 어 수선한 국장의 전날이었다. 그들은 보통 여행자들처럼 평범한 차림새였으나, 여관 주인은 퍼부어 대는 빗줄기를 뚫고 여관을 찾은 그 얼굴과 분위기에 잠시 놀랐다. 많은 여행자들을 보아온 주인이었으나, 그들처럼 젊지만 많은 풍상 을 거친 듯 깊고 깊은 눈을 가진 자를 본 적은 없었다. 한 남자는 아주 키가 컸고, 검은 눈에 갈색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부드러운 눈은, 어떤 모진 자도 품어줄 듯 온화했다. 다른 남자는, 붉고 긴 머리카락에 짙은 피부를 가지고 있었고 볼과 이마에 야만족의 그것 같은 문신이 잔뜩 그러져 있었다. 아주 젊고 아름다웠지만, 그 초록색 눈은 지나치게 복잡하고 불안해 보였다. 유일한 여자는 검은 곱슬머리카락에 군청색 눈을 가지고 있었고, 그 셋 중에 가장 기이한 인상을 풍겼다. 그녀의 눈은 어두웠다. 말 그 대로, 차디찬 어둠을 품고 있는 눈동자다.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고 무엇에도 부서지지 않을, 그런 지독한 차가움. 여관주인이 그 세 여행자를 살피는데, 그 중에 가장 부드럽고 키 큰 그 남자가 말했다. "하루만 머물 거요." 그리고는 주인에게 선불로 방값을 지불하고 음식을 시켰다. 이 사람 도 먹고 마시기는 하는가 보다, 그게 참 신기하게 느껴지는 것을 더 신기해하면서 주인은 음식을 가져왔다. "사제들이신가 보군요. 차림새나 분위기나, 어딘지 그렇습니다." 역시나 키 큰 남자가 말했다. 여자는 무엇을 물어도 아무것도 답하지 않을 듯 했고, 다른 남자는 무엇을 물어도 한방 칠 것 같은 기세였 기에 주인은 그들에게 뭘 들을 생각은 아예 포기했다. "어떤 의미에서 그렇습니까?" "왠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 보이거든요." 남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네, 그렇습니다. 이 세상 사람은 아니지요......." 하인이 스튜를 내 오고, 하녀는 빵과 물을 가지고 왔다. 주인의 아내 는 술을 가지고 와, 그들의 잔에 따랐다. "그런데 국장 때문에 오신 겁니까?" "네, 그런 셈입니다." "이번에 제도로 모이는 사람들은 참 독특하군요. 손님들이나, 또 각 나라들이나." "그건 또 무슨 소리입니까." "델 카타롯사에서는 그 나라 마스터 악튤런이, 암롯사에서는 왕이 직 접 온다고 하더군요. 거, 참....그 왕이야 예전부터 그러했지만 지금도 파격적이에요. 모험을 즐긴다고나 할까." 주인의 말에, 남자가 여자를 슬쩍 보았다. 여자의 군청색 눈이 가볍 게 움직였고 그 안에 잠시나마 흥미가 일었다. 남자는 다른 젊은 남자를 보았다. 그러자 젊은 남자도 허리를 앞으로 숙이고는 이야기 에 흥미를 보이고 있었다. "예전에는 또 무엇을 했습니까." "별 일 다 했지요. 숙부가 반란에 연루되었다고 그리도 소문이 돌아 도 눈 하나 깜짝 안하고, 결혼할 때에는 드래곤들을 거느린 에크롯 사로부터 온갖 협박을 받아도 역시나 눈 하나 깜짝 안하고.... 뿐만 아니죠. 저라면 말입니다, 아무리 제 마누라가 변변찮아도 그 마 누라 옛날 약혼자를 수하로 받아들이는 일은 절대 안할 겁니다." 키 큰 남자가 빙그레 웃었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을 겁니다. 자기 매력을 과신하던가, 아니면 상 대의 매력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던가." "맙소사, 다른 누구도 아니라 소문난 아내인데, 만약 그런 여자가 제 아내라면 꼭꼭 숨겨 놓고 남에게 보여주지도 않을 겁니다. 그런데 그 왕은, 세상에나 그 바람기로 소문난 사람을 마누라 옆에 붙여 논 거라니까요. 뿐만 아니라, 이제는 그 옛날 약혼자와 마누라만 남 겨 놓고 제도로 오는 겁니다요." "둘째 아이를 가진 아내라면, 예전 약혼자에게 맡겨 놓는 게 좋겠지 요. 행여나 무슨 일이 일어날까 눈에 불을 키고 지켜줄 테니." "어라, 아시는 군요." "누구보다 잘 알지요. 하지만..... 녀석의 처사가 좀 심한 건 사실이군 요. 그 약혼자인지 뭔지 하는 슈마허는 속으로는 욕을 파도처럼 퍼 부어 대도, 겉으로는 하하 웃으며 보살펴야 할 테니까요." 녀석- 이라는 호칭에 주인은 좀 놀라기는 했지만, 어차피 그 왕이 이 옆에 있는 것도 아니니 그냥 웃어 넘겼다. "그나저나, 국장 때는 무엇을 집전하십니까? 아무래도 작은 미사를 보러 가는 것 같지는 않은데." "오래 전에 한 농담을 청산하러 갑니다." 이상한 말이라 생각하며 주인은 고개를 갸우뚱 했다. 그런데 여자가 고개를 들더니 말했다. "오고 있어." 붉은 머리카락의 남자가 문 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키 큰 남자 역 시 말없이 고개를 들었고, 분위기가 묘해진 것을 알아챈 주인은 행 여나 뭐가 오나 싶어서 귀를 기울였다. 순간에,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어 닥쳐 작은 여관을 덮쳤다. 덧붙이 거세게 들척이고, 나무들이 휘잉 구부러지며 쏴아아아아아 몸을 떨 었다. 빗줄기가 흔들리며 창문을 후려쳤다. 기괴한 울부짖음이 빗소 리 바람소리를 찢으며 터졌다. "대, 대체 이게 뭡니까. 드래곤이라도 내려앉은 겁니까?" 남자는 입술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갑자기 주변이 잠잠해졌다. 빗 줄기 소리만 뚜두둑 들릴 뿐이다. 처마 아래로 늘어진 복도를 누군가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을 때, 주 인은 주저앉을 뻔 했다. 문이 열렸다. 새로운 손님의 옷에서 물방울이 주르륵 떨어져 나무 바 닥에 물 얼룩을 흥건하게 만들었다. 새로 온 손님은 남자였다. 검붉은 망토를 입고 있었고, 비를 헤치고 왔을 텐데도 그리 흠뻑 젖어 있지는 않았다. 게다가 망토는 덧 댄 금박이라든가 고급스런 윤기가 흐르는 것을 보니, 귀족들이나 입는 최고급품이었다. 그가 후드를 젖혔다. 남자의 팔목에 달린 팔찌가 여관 안의 램프에 반짝였다. "늦지는 않았겠죠." 남자는 그리 말하고는 웃었다. [겨울성의 열쇠] - 끝 **************************************************************** 작가잡설: 끝났습니다. ^_^ 이제 좀 다른 식으로 말해야 겠군요! 일단은 끝났습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후기 - 겨울성의 열쇠, 연재를 마칩니다. 작가 후기 길건 작건 간에 글을 끝내는 건, 힘들게 키운 녀석 하나를 밖으로 내 보내고 손을 흔들고 문을 닫는 것과 같다. 그리고 조금은 엉망인 방과, 나른한 몸과, 갑자기 허전해진 가슴이 이 자리에 남아 있다. 내 안에서 날뛰어 댈 때는 어떻게든 내보내려고 발악하는데, 정작 그것이 뛰쳐나가 버리면 한없이 허전해 지는 것이다. 어느 날 새벽이었다. 이제 막 어둠이 걷히는 그 때에, 거리는 텅텅 비어 있었고 깨어있는 사람은 나 하나 뿐인 듯 했다. 멀리서 버스 오고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날이 밝아왔다. 아주 환하게. 겨울에는, 그렇게 무언가가 끝나갈 때면 누구나 혼자가 된다. 끝나가는 것에 서글퍼 하며, 앞으로 시작될 새로운 것을 두려워한다. 그냥 익숙한 것 속에 오래 오래 있고 싶기도 하지만, 그럴 수 없기에 새로운 봄을 준비해야 한다. 시간은 가고, 사람은 변해 버리는 법이니까. 단풍이 찬바람에 떨어져 버리고, 남은 것은 앙상한 가지들과 둥치 하 나. 익숙했던 것을 마무리 짓고 찬 바람에 날려 보내면, 그러면 모두 혼자가 되어 버린다. 해는 짧고 바람은 차다. 그리고 어느 샌가 해 가 길어지는 것을 알게 되면, 드디어 새로운 것을 준비하며 시작해 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나 역시, 오랫동안 몸담았던 곳을 등지고, 그 동안 내가 생활 하던 방식을 놓고, 낯설고 새로운 그 해의 봄을 향해 가야 했다. 어떻게 지낼지는 모른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역시 모른다. 그 저 작년 겨울을 버티어 낸 힘이 그 해 봄부터 내 안에 쌓인 힘이라 는 것을 알기에, 올해의 봄은 올해의 겨울을 버티어 낼 힘을 위해 시작되는 것이다. 한해를 장식하는 것은 무성한 잎들이지만, 버티어 내는 것은 외로운 나무둥치 하나이다. 이것으로 겨울성의 열쇠는 끝납니다. 그동안 읽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훈수만 놓던 동생 지영이에게, 언제나 고마운 영진이와, 레디 옹과, 큐티 아수라 양에게, 커그의 작가분들에게, 그리고 홈페이지와 커 그와 유조아를 찾아 주시며 끝까지 읽어주신 독자 분들께 정말 감 사드립니다. ^^ 그리고 그 모든 분들께, 끝까지 즐거운 여행이셨기를 바랍니다. 그렇 다면 더 바랄 것이 없어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